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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러뷰 또는 사랑해 같은 세 음절 문장이고 뜻도 같지만 소통 방식은 하늘과 땅이다. 알러뷰는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한다. 그렇다면 사랑해는 누가 누굴 사랑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사랑이 깨질 수도 있다.

<연인>,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1930


인텔리겐치아 2679호, 2015년 7월 13일 발행

윤태일이 쓴 ≪사랑과 소통≫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이 제시한 고맥락 대 저맥락의 소통 방식 차이는 사랑의 밀어 를 속삭일 때에도 적용된다. 그래서 사랑을 고백하는 영어 “I love you”와 우리말의 “사랑 해”는 문화적 차이가 있다. - ‘고맥락 대 저맥락 소통’, ≪사랑과 소통≫, 49쪽.


맥락이 뭔가? 소통이 이루어지는 상황이나 환경이다. 홀 은 맥락의 역할에 따라 소통 방식이 다르다 고 보았다. 고맥락 소통이란? 맥락이 중요하다. 맥락을 서로 공유하기 때 문에 메시지에 정보가 적어도 이해가 쉽다. 동질 사회에서 가능하며 암시, 상징 기호를 많이 사용한다. 맥락 공유 소통의 사례는? 사랑을 고백하는 우리말 표현은 “사랑해!” 다. 주어와 목적어가 없다. 그래도 맥락으로 사랑이 충분히 전달된다.


저맥락 소통은 뭔가? 맥락이 공유되지 않는다. 메시지에 정보를 많이 담아 분명하게 직접 뜻을 전한다. 이질 사회에서 가능하며 데이터나 수사법을 자주 쓴다. 어떤 것인가? “I love you”다. “사랑해”와 같이 세 음절이지 만 주어, 목적어, 동사가 다 있다. 많은 정보 를 담는다. 사랑 소통이 이렇게 다른 이유가 뭔가? 문화권의 차이 때문이다. 그것을 이해해야 사랑을 전할 수 있다.


소통에 대한 문화 차이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 인가? 동질 문화에서는 고맥락 소통이 가능하지만 이질 문화에서는 저맥락 소통이 불가피하 다. 동양은 이심전심처럼 고맥락 소통 방식 을 좋아했고 수사학이 발전한 서양은 저맥 락 소통 방식이 익숙하다. 개인의 차이는 어느 정도인가? 성별, 연령, 개인 성향에 따라 소통 방식이 다를 수 있다. 대개 여성과 노인이 고맥락 소 통 방식을 많이 사용한다.


문화권과 개인의 차이를 모두 이해해야 소통 이 가능한가? 차이의 이해는 상대방의 방식을 존중한다 는 뜻이다.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는 것이 아 니라 상대의 방식에 자신이 먼저 맞추는 것 이다. 차이를 이해하면 사랑이 달라지나? 달라진다. 이해하면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 지고 성숙한 사랑으로 나아간다. 차이를 무 시하면 오해가 쌓여 소통이 되지 않고 결국 사랑은 깨진다. 사랑을 깨지 않으려면?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강조했던 이야


기를 기억하라. 사랑의 기술도 배우고 익혀 야 한다. 사랑의 기술에서 핵심은 소통능력 함양이다. 사랑의 소통능력을 높이는 방법은? 이 책이 소개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여러 이 론과 기법을 배우고 현실에 적용하도록 훈 련해라. ≪사랑과 소통≫은 어떤 책인가? 사랑의 본질은 소통에 있음을 강조하고 사 랑을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사랑의 소통 구조에 따라 사랑 커뮤니케이 션의 주체, 메시지, 수용자를 다루었다.


사랑과 소통은 어떻게 당신의 연구 테마가 되 었나? 사람과 사람 사이 소통을 통해 신명을 북돋는 신명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이 많다. 사랑과 소통도 크게 보면 신명 커뮤니케이션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윤태일이다. 한림대학교 광고홍보학과 교 수다.


알러뷰 또는 사랑해 같은 세 음절 문장이고 뜻도 같지만 소통 방식은 하늘과 땅이다. 알러뷰는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한다. 그렇다면 사랑해는 누가 누굴 사랑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사랑이 깨질 수도 있다.

<연인>,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1930


사랑과 소통 윤태일 지음 휴먼 커뮤니케이션 2015년 5월 20일 사륙판(128*188) 무선 제본, 154쪽 9,800원


작품 속으로

사랑과 소통


사랑의 소통, 사랑의 기술

예로부터 사랑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말도 없을 것이 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公無渡河)”라며 사랑의 안 타까움을 노래했던 고조선 시대 백수광부(白首狂夫)의 아 내부터, “믿음과 사랑과 소망 중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던 성경의 고린도전서 13장, 그리고 “사랑은 교통사고”라고 했 던 터키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무크(Orhan Pamuk)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이야 기했다.

“사랑하지 말자!” 그런데 대부분이 사랑을 찬미하며 힘써 사랑할 것을 권할 때 철학자 도올 김용옥은 오히려 사랑하지 말자는 도발적

인 주장을 했다. 그는 󰡔󰡔사랑하지 말자󰡕󰡕(2012)는 제목의 책 에서 우리말의 사랑과 한자어 애(愛)와 영어의 러브(Love) 는 원래 그 뜻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우리말의 사랑이란 말 은 원래 사람과 어원이 같은 말로서, 사람이 사람을 생각한 다는 정도의 의미로 쓰였다. 오늘날의 사랑과 비슷한 뜻의


말은 ‘괸다’라는 동사인데 이것도 대체로 ‘생각하다’, ‘사모 하다’, ‘그리워하다’, ‘보고 싶어 하다’는 정도의 뜻이었다. 그래서 남녀가 서로 보고 싶은데 만나지 못해서 그리워하 는 병을 상사병(相思病)이라고 표현하며 상애병(相愛病) 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한자어의 애(愛)도 오늘날과 같이 사랑한다는 뜻이 아 니고 원래 아끼고 절약하고 귀하게 여기고 보호한다는 뜻 이었다. 따라서 애민(愛民)이라고 하면 백성을 내 몸처럼 아낀다는 뜻이다. 현대 영어의 러브라는 말은 고대 그리 스어의 에로스(eros), 아가페(agape), 필리아(philia)라는 여러 말을 다 포괄하는 말이다. 따라서 영어의 러브라는 말은 성애(性愛)에서 이타적인 사랑, 진리에 대한 사랑까 지 그 범위가 무차별적으로 확대된 말이다. 이처럼 우리말의 사랑이란 말은 영어의 러브와 본래 다 른 뜻이었다. 그런데 최근 우리말의 사랑이 영어의 러브 처럼 그 외연이 확대되면서 인간의 모든 가치 있는 행위와 감정까지를 포괄하는 말이 되었다는 것이 김용옥의 주장 이다. 사실 성적인 의미가 강한 남녀 간의 사랑과 인류에 대한 사랑, 진리에 대한 사랑은 그 의미상 편차가 적지 않 음에도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포섭해 사 용하고 있다. 심지어는 전혀 보지도 못한 생면부지의 사


람을 전화로 처음 만나자마자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 고 말할 정도로 사랑이라는 말이 남발되고 있다. 김용옥에 따르면 사랑이란 말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정 서를 대변하는 말이 아니다. ‘영어의 러브라고 하는 매우 천박한 용어의 번역어일 뿐’(김용옥, 2012, 290쪽)이다. 사랑이란 말 자체는 기독교와 더불어 한국 문화에 유입된 매우 이질적인 개념이다. 사랑이라고 하는 매우 이질적이 고 서구적인 개념이 한국인의 전통적인 감정 구조와 충돌 을 일으키고 있고, 우리말의 개념 지도를 왜곡하고 있다고 김용옥은 주장했다. 그는 사랑은 본래 생식을 위한 양성 간 의 성적인 교류, 즉 코이투스(coitus)라는 성교의 과정에 개 입되는 감정이라고 보았다. 양성 생식을 위한 성적인 이끌 림, 그리고 그 결과 일어나는 내 몸의 화학작용(chemistry) 이 사랑의 출발이고 핵심이다. 따라서 사랑에 대한 과도한 예찬은 범성욕주의(pan-sexualism)로 귀결된다고 보았다. 그는 진리에 대한 사랑, 인류에 대한 사랑처럼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되던 모든 일체의 행위는 인간의 일반 도덕 범주 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랑이란 말의 외연을 축소시켜 오직 내 몸 ‘꼴림’의 화학 작용 현상에 국한하거나, 남녀 간의 성적 이끌림 혹은 ‘성적 꼴림’에 개입되는 감정에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


서 정신적 사랑을 뜻하는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란 ‘뜨거운 얼음’처럼 형용모순이고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남 녀 간의 ‘성적 꼴림’이 사랑의 핵심이기 때문에 부부 사이에 는 더 이상 사랑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적 꼴림’이 더 이상 부부 사이를 지탱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 이다. 현대 한국의 위대한 사상가로 평가받는 다석(多夕) 유 영모(柳永模) 선생은 52세 되던 해에 일일일식(一日一食) 과 더불어 해혼(解婚)을 선언했는데 이것이 자연스러운 태도라고 보았다. 해혼이란 이혼(離婚)과 다른 차원에서 혼인 관계를 해체한다는 것으로, 다석 선생은 해혼 이후 부인과 금욕을 실천하며 남은 평생을 다정한 친구처럼 해 로했다. 이러한 사례를 들면서 김용옥은 부부는 사랑할 필요 없고, 사람들에게 사랑하지 말 것을 권한다. 그의 주장이 다소 과격한 측면은 있다. 하지만 사랑이 란 말의 외연을 너무 광범위하게 확대해서 자식에 대한 부 모님의 사랑, 조국에 대한 사랑,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까 지를 청춘 남녀 간의 사랑과 동일한 말로 뭉뚱그려 사용하 지 말고 이들을 서로 구분해서 사용하자는 그의 주장은 새 겨들을 만하다.


인간의 실존 조건과 사랑 김용옥이 사랑에 대해 좀 더 협소한 정의를 내릴 것을 주 장하는 데 반해,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사랑에 대해 좀 더 확대된 정의를 내리고, 인간에 대한 실존적 이해를 바탕으로 사랑을 논한다. 프롬은 그 유명한 󰡔󰡔사랑의 기술󰡕󰡕 (1956/2009)에서 사랑의 이론은 인간론이어야 하고 인간 실존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롬 에 따르면 원초적 합일 상태에서 겪은 분리 경험이 인간의 실존적인 조건이다. 개인사적으로 보면 인간은 원래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엄마와 절대적인 일체감 속에서 하나였 다. 하지만 태아와 유아 상태를 벗어나면서 엄마와의 일 체감에서 벗어나 점차 엄마와 분리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인류사적으로 보면, 인간은 원래 자연 혹은 신과 하나 된 일체였으나 점차 문명이 발달하면서 이들로부터 분리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성경의 에덴동산 이야기나 그리 스신화의 양성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이를 잘 나타낸다. 그리스신화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남성과 여성이 한 몸에 있는 양성구유체였는데 신에게 자꾸 도전하자 신이 인간 의 몸을 남자와 여자로 분리했다. 그때부터 인간은 자신 의 나머지 반쪽을 찾느라 정신이 팔려서 더 이상 신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했다.


엄마 및 자연과 원초적 합일 상태에서 분리되는 경험을 하게 됨에 따라 인간은 불안감과 고독을 느끼고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고 독과 불안이라는 감옥을 벗어나고 싶은 것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절실한 욕구다. 인류 문화의 역사는 인간이 원초적 합일 상태에서 분리 경험을 통해 느끼는 불안과 고 독을 벗어나 다시 서로 합일을 이루려는 노력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분리를 극복하고 합일을 이루려는 시도들은 다양한 형 태로 나타난다. 우선 원시적 제의에서 황홀경을 추구하거 나, 개인적으로는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에 빠지거나 성적 도취에 탐닉하는 것처럼 도취적 합일을 추구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둘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즘·파시즘에 빠지거나 대중문화에 열광하는 것처럼 집단과 일치하려 는 시도다. 셋째는 창조적 활동을 통해 분리 경험을 극복 하려는 시도이지만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의 소 외 때문에 이러한 시도 또한 성공하기 어렵다. 이러한 시 도로는 진정한 합일을 이룰 수 없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을 통해서만 진정한 융합과 합일에 이룰 수 있다. 그 래서 사랑이 없으면 인간성은 하루도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이 프롬의 주장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융합과 합일에 도달하는 사랑이 진 정한 사랑이고 성숙한 사랑이라면 이에 미치지 못하는 사 랑은 사이비 사랑 혹은 미숙한 사랑이다. 이를 통해서는 공 서적 합일에 이를 뿐이다. 공서적 합일을 보여 주는 생물학 적 형태는 엄마와 태아의 관계다. 이들은 분리 경험을 겪지 않은 상태에서 둘이면서 하나인 관계다. 그들은 함께 살고 서로를 필요로 한다. 정신적으로 공서적 합일 상태는 신체 적으로는 독립된 듯 보이지만 심리적으로는 동일한 애착 관계를 갖는다.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는 복종 혹은 피 학성 음란증(masochism)이고 능동적 형태는 지배 혹은 가 학성 음란증(sadism)이다.

사랑은 능동적 힘이며 활동 공서적 합일이 아니라 진정한 융합과 합일에 이르는 성숙 한 사랑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사람과 합일 을 이루게 한다. 사랑은 능동적인 힘이다. 타인과 벽을 허 물고 하나가 되도록 하는 능력이고 활동이다. 따라서 사 랑은 활동이고 능력이다. 활동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 가 있다. 하나는 외부적 목적 달성을 위해 에너지를 사용 하는 것을 활동이라 보는 관점이고, 또 하나는 외부적 변 화와 상관없이 인간의 타고난 힘을 사용하는 것을 활동이


라 보는 견해다.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는 후 자의 관점에서 활동을 보았다. 그는 감정을 능동적 감정 인 행동과 수동적 감정인 격정으로 구분했다. 능동적인 감정은 자유롭고 자신이 자기 감정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수동적인 감정은 인간이 쫓기면서 자신도 모르는 동기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격정을 우리는 흔히 능동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 실은 격정이야말로 수동적인 감정이라고 스피노자는 보 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격정에 의해서 자신도 모르 게 휩쓸려 가기 때문이다. 사랑을 흔히 격정적인 감정으 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랑은 이러한 수동적인 격정이 아니 고 능동적인 활동이다. 흔히 ‘사랑에 빠진다(fall in love)’ 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하지만 사랑은 수동적으로 빠지 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참여하는(participate in) 것이 다. 사랑은 활동이며 능력이고,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 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고, 수동적으로 빠져드는 것이 아 니라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프롬에 따르면, 사랑은 성숙하고 생산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능력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가 장 소중한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자신의 기쁨, 관심, 이해, 지식, 유머, 슬픔 등 자기 속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드러내고 나누어 주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자 체가 지고한 기쁨이다. 생명을 줌으로써 다른 사람의 생 명에 무엇인가를 불러일으키고, 다른 사람의 생명에 불러 일으킨 것은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진실로 생명을 나누어 줄 때 다시 되돌아오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을 준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주는 자로 만들고 두 사람 모두 생명을 나누는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사랑은 서로 생명을 나누는 것이다. 사랑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리를 극복하고 융합과 합일에 이르 는 나눔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바로 여기에 사랑은 곧 커뮤 니케이션, 즉 소통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여기에서 커 뮤니케이션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두 가지 관점이 있다. 미국 커뮤니케이션 학자 제임스 케리(James Carey)의 견해에 따르면,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견해는 전달 관점 (transmission view)과 제의 관점(ritual view)으로 나눌 수 있다. 전달 관점은 커뮤니케이션을 송신자가 수신자에 게 정보를 전달해 설득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것 은 과정학파(process school)의 관점이고 주로 행정적, 기 능적 측면에서 커뮤니케이션을 보는 것이다. 거기에 반해 제의 관점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을 단순히 송신자가 수신 자에게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서 의미를 서로 나누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관점에 서는 공동체적인 제의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기호학파의 견해이고 사회구성주의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이다. 이러 한 관점에서 볼 때,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은 본래 ‘com’, 즉 ‘together’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과 커 뮤니티는 ‘모두 함께’라는 뜻이 있고 공동체적인 나눔을 강조한다(Carey, 1989). 커뮤니케이션을 나눔과 공유로 보는 제의 관점에서 보 면, 사랑이란 곧 커뮤니케이션이다. 사랑은 소통이고 소 통이야말로 타인과 합일을 이루는 것이라는 점에서 인간 에게 사랑은 실존적 조건이며 타인과의 소통이야말로 사 랑의 기본 토대다. 더구나 최근 커뮤니케이션 연구 분야에서도 이른바 정서 혁명(emotional revolution) 혹은 감응으로의 전환(affective turn)이 일어나면서 커뮤니케이션을 정서적 나눔으로 이 해하는 시각이 대두되고 있다(오창호, 2014). 그동안 커뮤 니케이션을 주로 정보의 전달과 설득으로 보는 실증주의 패러다임에서는 정서적 측면을 소홀히 했다. 비판적 패러 다임의 기호학 모형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을 전달이 아니 라 나눔과 공유로 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언어적 측 면에 주목해 의미를 강조하는 감이 있었다. 우리말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의사소통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인지적 측면을 강조하는 주지주의적 편향성을 드러낸다. 감응 커 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을 단순히 정보 전달이나 의미 공유로 보지 않는다. 전일적 존재로서 몸 과 몸이 만나면서 정서적 나눔을 통해 자신과 타자가 동시 에 변화하는 과정으로서 커뮤니케이션을 주목한다. 따라 서 사랑은 소통을 전제로 할 뿐 아니라 소통 자체도 타인 에 대한 사랑을 전제로 한다.

사랑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 이유 사랑이 타인과 합일을 이루기 위한 소통이라면, 사랑을 잘 하기 위해서는 타인과 소통을 잘할 수 있도록 사랑을 배울

필요가 있다. 프롬의 책 󰡔󰡔사랑의 기술󰡕󰡕은 원래 제목이 Art

of Loving이다. 여기서 ‘art’라는 말은 보통 예술이라고 번 역하지만, 이 말은 원래 라틴어 ‘ars’에서 유래한 말이고 ‘ars’는 그리스어 ‘techne’를 번역한 말이다. 따라서 좁은 의미에서는 미술이지만 예술, 학술, 주술, 기술 등 여러 가 지 기예(技藝)를 포함하는 단어로 넓은 의미의 술(術)이 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랑은 과연 기술인가, 아니면 행운만 있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일 뿐인가? 프롬은 사랑은


배우고 익혀야 할 기술이라고 주장한다. 심리학자 존 A. 리(John A. Lee)도 사랑은 갓 태어난 신생아에게 자연스 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문화적 으로 학습되는 것이기 때문에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라 고 보았다(Lee, 1994). 사랑은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익히 게 되는 본능이 아니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노 력과 훈련이 요구되는 기술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제대 로 잘 살기 위해서는 삶의 기술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 과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사랑의 기술(art of loving)은 곧 삶의 기술(art of living)이다. 삶의 기술을 배워야 제대 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랑의 기술을 배워야 사랑도 잘할 수 있다. 그런데 흔히 사랑은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프 롬은 사랑을 배우고 익혀야 할 기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 고 받는 것이라고, 즉 능동적 활동이 아니고 수동적으로 그냥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굳이 배울 필요가 없 다고 생각한다. 둘째, 사랑은 능력이 아니라 단지 대상의 문제라고 생 각하기 때문이다. 정말 멋진 누군가를 만나면 한눈에 반 해서 사랑에 빠질 수 있는데, 문제는 사랑에 빠질 만한 사


람을 못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낭만적 사랑 이라는 관념에 기초한 생각이다. 이러한 관념에 기초해서 사랑은 능력이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을 굳이 배울 필요가 없다고 본다. 셋째,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을 ‘하고 있 는’ 지속적 상태에 대해 혼동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두 사 람이 서로에게 ‘미쳐 버리는’ 격앙된 합일의 경험을 사랑 의 전부라 생각하고 사랑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고 생각한 다. 그러나 그러한 격정적 합일의 경험을 계속 지속하기 는 어렵다. 그래서 프롬은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마는 활동이 나 사업은 찾아보기 어렵다”(Fromm, 1956/2009, 17쪽)고 말한다. 다른 활동이 실패하면 그 원인을 찾으려고 분석 하고 공부하려고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려면 실패의 원인을 가려내고 사랑의 기술을 배워 야 한다. 삶이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시인 오규원은 <사랑의 기 교>라는 시에서, 사랑이 이 시대의 멍청한 후렴이 되었고 그저 한갓 기교에 불과한 것이 되었지만 사랑이 기교 혹은 기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면서,


사랑의 기교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기술 이라며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이 시에서 라포르그는 로

마 시대에 이미 에리히 프롬보다 먼저 󰡔󰡔사랑의 기교󰡕󰡕라는 책을 쓴 사람이다.

사랑의 기교 2 - 라포르그에게

사랑이 기교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나는 사랑이란 이 멍청한 명사에 기를 썼다. 그리고 이 동어 반복이 이 시대의 후렴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까지도 나는 이 멍청한 후렴에 매달렸다.

나뭇잎 나무에 매달리듯 당나귀 고삐에 매달리듯 매달린 건 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사랑도 꿈도.

그러나 즐거워하라.


이 동어 반복이 이 시대의 유행가라는 사실은 이 시대의 기교가 하나님임을 말하고, 이 시대의 아들딸이 아직도 인간임을 말한다. 이 시대에 가장 아름다운 기교, 나의 하나님인 기교여.

프롬에 따르면 사랑의 기술을 배우는 단계는 의술을 배 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론을 배우고 배운 이론을 현실에 서 실천하는 두 단계를 거쳐야 한다. 훌륭한 의사가 되기 위해서 인내심과 집중력을 가지고 우선 의학 이론을 습득 하고 습득한 이론을 능숙하게 적용할 수 있도록 훈련하고 연마해야 한다. 사랑의 기술도 마찬가지다. 우선 사랑의 이론을 습득한 후 현실에서 실천하기 위해 인내심을 가지 고 이론을 적용해 보고 연마해야 한다. 그런데 사랑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특히 중 요한 점은 그것이 정말 가치 있는 일임을 충분히 인식하는 것이다. 의학이나 공학 기술 등 실용적인 분야에 대한 이 론을 배우고 현실에서 실천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한다. 하지만 사랑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과 연 쓸모 있는 일인가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 이 적지 않을 것이다.


사랑의 기술이 공학 기술처럼 현실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무용지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장의 효용성은 없 을지 모르지만 우리 영혼을 살찌우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풍요롭게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기술 이야말로 ‘아무 쓸모없는 것이 오히려 큰 쓸모가 있다’는 장자(莊子)의 무용지대용(無用之大用)에 가장 부합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사랑의 기술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연애 못하는 남자, 연애 못하 는 여자를 뜻하는 유행어 ‘연못남’, ‘연못녀’가 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연못남’, ‘연못녀’는 나중에 사랑에 대한 관심이 없고 연애 세포가 말라 버리는 이른바 ‘초식남’과 ‘건어물녀’가 되기 쉽다. 그 결과 한국 사회의 결혼 연령이 점점 높아지고, 결혼하지 않고 사는 싱글족이 늘어나면서 출생률이 낮아지고 있다. 결혼 인구 비율과 출생률은 낮 아지는데 노인 인구 비중이 높아지면서 고령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다. 이제 ‘연못남’, ‘연못녀’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적 의제로까지 부상하는 형국이다. 물론 결혼 인구 및 출생률 저하는 장기화된 불황과 교 육비 상승 등으로 청년 세대에게 사회경제적 여유가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터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경제적으 로 열악한 상황에서도 사랑과 결혼 출산이 활발했던 과거


를 감안하면 오늘날의 사랑 상실이 꼭 경제적 이유 때문만 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개인의 행동 양식이 과거와 달라 진 점 때문일 수도 있다. 지금 20∼30대는 형제가 없는 외 둥이 세대로 다른 사람과 직접 소통하거나 깊은 관계를 맺 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 인터넷이나 모바일 등 새로운 통신 매체의 발달로 사람과 직접 부딪혀 전면적인 관계를 맺기보다는 혼자 놀기를 선호하는 사람 도 많아졌다. 가장 왕성하게 사랑해야 할 20대 초반 대학 생조차도 비싼 등록금과 이른바 ‘스펙 쌓기’에 바빠서 연 애할 시간적·경제적·정서적 여유가 없다는 하소연을 많이 한다. 일찍이 작가 최인훈은 젊은이가 해 볼 만한 두 가지는 혁명과 사랑이라고 했다. 이제 혁명의 시대는 갔으니, 청 춘의 빛나는 한때에 가장 해 볼 만한 일은 사랑이다. 사랑 이야말로 타인과 가장 순도 높은 관계 맺기이고 생명의 나 눔이라 했다. 타인과의 사랑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과 욕 구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법을 익힐 수 있으며, 타인을 깊 이 이해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사랑의 아픔을 통해서, 두렵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상처를 이겨 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따라서 사랑 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은 생활의 기술, 삶의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다.

사랑의 소통 원리와 구조 그렇다면 사랑의 기술은 특히 어떤 기술인가? 사랑이 곧 분리된 두 존재 사이의 합일을 위한 나눔이고 소통이라고 한다면, 사랑의 기술은 나누고 소통하는 기술이다. 사랑을 일종의 활동·행위이고 능력이라고 한다면, 사랑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은 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사랑은 곧 소통이라는 관점에 서 사랑의 소통법, 즉 사랑의 커뮤니케이션 기법을 살펴보 려 한다. 특히 그동안 설득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다듬 어 온 여러 이론과 기법을 활용하려 한다. 심리학의 관점 에서 보면 설득이란 태도 변용이다. 사랑의 커뮤니케이션 은 일종의 태도 변용으로서 설득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단지 타인의 사랑을 수동적으로 받으려는 사람은 사랑 의 커뮤니케이션 행위를 적극적으로 수행하지 않는다. 사 랑의 커뮤니케이션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다. 능동적인 활동으로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자신의 사랑이 일방적인 짝사랑이 되지 않도록 자신의 사랑을 상대방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상대방의 사랑을 얻으려고


적극적으로 사랑의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하는 사람은 아 무래도 상대방으로부터 호감을 얻고 싶은 사람, 상대방으 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호의적 태도를 갖게 하려는 사람이 다. 따라서 자신에 대해 호의적 태도를 갖도록 태도 변용 을 유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설 득이다. 태도는 좁은 의미에서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정서적 측 면만을 말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그러한 정서적 요소뿐 아니라 인지적 요소와 행동적 요소까지를 포함하는 다차 원적인 개념이다. 또 태도 변용은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새 로운 태도를 형성하는 것, 기존 태도를 더욱 강화하는 것, 그리고 과거의 태도에서 새로운 태도로 바뀌는 것이다. 흔히 사랑을 누군가를 좋아하는 강렬하고 긍정적인 감정 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사랑은 정서적 요소뿐 아니라 인 지적 요소 및 행동적 요소까지 포괄한다는 점에서 태도라 고 볼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매력에 이끌려서 호감을 느끼게 되어 호의적 태도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의 커뮤니케이션은 커뮤니케이터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갖도록 하는, 일종의 설득 커뮤니케이션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사랑의 커뮤니케이션 구조에 의거해서 커뮤 니케이터 측면, 메시지 측면, 수용자 측면으로 나누어 살 펴보려 한다. 커뮤니케이션의 구조도 커뮤니케이션의 어떠한 관점 에 의거하느냐에 따라서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실증 주의 패러다임의 전달 관점에서 보면 커뮤니케이션의 구 조는 정보원(Source), 메시지(Message), 매체(Channel), 수용자(Receiver), 효과(Effect)로 구성된 SMCRE 모형으 로 정리된다. 거기에 비해서 제의 관점의 기호학적 모형 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을 약호(Encoding), 텍스트(Text), 해독(Decoding)으로 구조화한다. 그런데 이런 SMCRE 모형이나 약호·텍스트·해독의 기 호학적 모형에서 공통적인 요소는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하 는 주체인 커뮤니케이터, 커뮤니케이션의 내용물인 메시지,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행위의 객체인 수용자다. 따라서 두 모형을 통합해 볼 때 커뮤니케이션 구조는 커뮤니케이터(송 신자, 발신자), 메시지(텍스트, 콘텐츠), 수용자로 단순화할 수 있다. 이것을 사랑의 커뮤니케이션 구조에 적용해 볼 수 있다. 사랑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능동적으로 나누는 활동이라 할 때, 사랑의 커뮤니케이션은 사랑 커뮤


니케이션을 수행하는 주체로서 커뮤니케이터, 커뮤니케이 터가 전달하는 사랑의 메시지, 그리고 사랑 커뮤니케이션 의 수용자로 구조화할 수 있다. 사랑의 커뮤니케이터는 상대방을 사랑하면서 상대방 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서 결국은 서로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매력에 이끌려 호감을 느끼고 호의적인 태도를 갖게 해서 결국에 는 서로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랑 커뮤니케이션의 주체다. 커뮤니케이션의 수용자는 커뮤니케이터가 사랑 을 얻고 싶어 하는 대상자로서 사랑의 파트너다. 사랑의 커뮤니케이터가 사랑의 파트너와 사랑을 나누고 싶어서 전달하는 사랑의 표현물이 바로 사랑 커뮤니케이션의 메 시지다. 여기서는 이러한 사랑의 커뮤니케이션 구조에 따라 커 뮤니케이터, 메시지, 수용자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 다. 사랑의 커뮤니케이터 측면에서는 사랑 커뮤니케이터 의 속성 및 호감 형성의 세 가지 차원, 호감의 원천으로서 신뢰성, 칭찬, 유대감, 친밀성, 그리고 유사성과 문화역설 에 대해 살펴본다. 사랑의 메시지 측면에서는 사랑의 메시지 처리 방식으 로 강화와 경시 전략, 일면적 메시지 대 양면적 메시지 작


성, 고맥락 대 저맥락 소통법, 기린의 언어 대 자칼의 언어 대화법, 그리고 비언어 소통의 여러 분야에 대해 살펴봄으 로써 사랑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사랑 커뮤니케이션의 수용자 측면에서는 사랑의 파트 너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상대방 의 사랑 유형을 이해하는 이론적인 틀로써 사랑의 다섯 가 지 언어와 사랑의 색채 이론에 대해서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사랑 커뮤니케이션의 목표는 성숙한 사랑 혹은 완전한 사랑을 나누기 위함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바람직한 사랑에 대해 학자마다 각기 다르게 제출한 견해 를 살펴본다. 과연 성숙한 사랑은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성숙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가를 모색해 본다. 커뮤니케이션 이해총서의 하나로 펴내는 이 책의 아이 디어는 학생들에게서 얻었다. 그동안 강의실에서 설득 커 뮤니케이션이나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의 이론과 전략을 설명하고, 학생들에게 배운 내용을 현실에 적용해 보라는 과제를 내주면 의외로 많은 학생이 남녀 간의 사랑에 적용 하는 사례를 제출한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의 여러 이론 을 사랑의 관계에 적용해 설명하면, 멍하니 듣던 학생들이 눈을 반짝거리며 강의에 몰입한다. 오늘날의 커뮤니케이 션 이론과 기법은 프로파간다가 난무하는 전쟁터와 물건


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혈안이 된 시장터에서, 20세기 내내 갈고 다듬어 온 예리한 칼이다. 짐승 잡는 데 쓰느라 날카롭게 벼려 온 칼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요리를 해 주기 위해 쓸 수 있는 것처럼, 시장에서 물건 팔고 선거에서 표 를 얻으려고 다듬어 온 커뮤니케이션 기법을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랑을 꽃피우는 데 활용할 수 있다는 발견은 내게 놀라운 즐거움이었다. 역사학자 아널드 J. 토인비(Arnold J. Toynbee)는 절제 와 극기, 자기희생처럼 고귀한 가치를 위해 설득 커뮤니케 이션의 기술을 사용하는 광고인은 중세의 성인 프란체스 코처럼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인이 노래 하듯, 사랑이 동어반복의 멍청한 후렴구가 되었지만 이 시 대의 가장 아름다운 기교인 사랑의 커뮤니케이션을 배우 고 익힌다면, 우리는 모두 행복한 프란체스코가 될 수 있 으리라 믿는다.


참고문헌 김용옥(2012). 󰡔󰡔사랑하지 말자󰡕󰡕. 통나무. 오창호(2014). 감응의 커뮤니케이션: 들뢰즈 가타리의 커뮤니케이션 사상을 중심으로. ≪커뮤니케이션 이론≫, 10권 1호, 117∼159. Carey, J. W.(1989). Communication as culture: Essays on media

and society. Boston, MA: Unwin Hyman. Fromm, E.(1956). The art of loving. HarperCollins Publishers. 황문수 옮김(2009).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Lee, J. A.(1994). 사랑의 유형. 고선주 · 이경희 · 조은숙 ·

최연실(편역). 󰡔󰡔사랑의 심리학󰡕󰡕(19∼65쪽). 도서출판 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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