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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코 동굴벽화

라스코 동굴벽화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 고대 수렵사회에서는 동물사냥이 생존과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 그래서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려서 실제로 창을 던지거나 사냥하는 훈련을 함으로 동물들이 자신들의 힘에 굴복 하기를, 다시 말해 성공적인 사냥이 되도록 기원했다 . 이는 그저 낙서나 유희를 위한 미술이 아닌 생활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


이집트의 미라

오늘날 이집트 문화 하면 처음으로 생각나는 것은 바로 ‘미이라’일 것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 은 귀신을 두려워 하다 못해 미이라 까지도 음침하고 공포스러운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데 , 과연 미라란 무엇이고 , 왜 만들어 졌을까? 사실 미라는 이집트의 고유한 내세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 고대 이집트인들은 카(KA)라는 영적인 물질이 인체안에 깃들여져 있다고 믿었고 , 사람이 죽어서 그 시신이 썩게 되면 ‘카’ 가 안식을 얻을 수 없다고 여겼다 . 따라서 이집트인들은 시신에 방부처리를 하는 것이 그들 의 내세의 평안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해 오늘날 까지 내려오는 미라를 만들게 되었다 . 비단 인간 뿐 아니라 고양이 , 개, 악어, 새, 양, 소 등 동물들 까지도 미라화 한 것을 볼 수 있 다.

+ 미라를 만드는 과정 미라를 만드는데는 보통 이상의 주의가 기울여졌다 . 그러한 과정을 살펴보자 . 미라 제작 과정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BC 5 세기 중반 이집 트를 방문한 뒤 그의 저서 ‘역사’제 2 권에 기술한 내용으로, 이는 현대의 과학적 검증을 거 쳐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확인되었다 . 시신의 미라 처리는 나일강 서안에서 행해졌는데 , 이 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해가 지는 방향인 서쪽을 죽음과 연관시켜 생각했기 때문이다 . 나일강 서안으로 옮겨진 시신은 나일강의 물로 씻겨졌으며 , 이는 죽은 자의 영혼의 부활과 영생을 의미했다 . 정결해진 시신에는 방부 처리의 일종으로 향유 또는 향료가 발라졌다 . 방부 처리 가 끝난 시신에서 뇌를 제거하고 , 심장을 제외한 간, 허파, 위, 장을 분리해낸다 . 분리된 장 기는 소다수 등에 의해 각기 방부처리 되어나 건조된 뒤 아마포에 싸여 각각 작은 관에 담아 용기에 보관된다. 파라오 제 18 왕조 이후는 호루스의 네 아들을 상징하는 사람 , 자칼, 매, 원숭이 형상으로 뚜껑이 장식된 4 개의 용기가 장기 보관에 사용되었다 . 장기를 꺼낸 시신 안에는 나트론으로 알려진 자연산 방부염을 헝겊에 싸 채워 넣고 , 작은 구멍을 뚫어 사체에 서 나오는 체액이 밖으로 빠져나오도록 했다. 또한 완전한 탈수를 위해서 사체 외부에는 소 다수를 발랐다. 이러한 방부처리 과정은 약 70 일 가량 소요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방부처리가 끝나고 완전히 건조된 미라를 나일 강물에 씻어내어 각종 향신료를 바 른 뒤, 오 늘날 발굴되는 것과 같은 형태로 아마포 붕대를 감는다. 약 20 겹을 붕대로 감으면 미라는 거의 생전의 몸집으로 커지며, 붕대의 맨 끝에 죽은 자의 이름을 쓰고 시기에 따라 얼굴 부 분에 마스크를 씌우기도 하며, 전신에 송진을 입힌 붕대를 다시 한번 감아야 작업이 끝난다. 이렇게 완성된 미라는 인체모양, 직육면체 등 다양한 모양의 관에 안치됐다. 관의 외면은 죽 은 사람의 영생을 기원하는 기도문과 주술 등으로 화려하게 꾸며졌다. 미라와 모든 부장품이 무덤에 도착하면 사제는 마지막으로 개구의식(開口儀式 )을 거행했는데, 이 의식으로 눈·코·


입·수족 등의 기능이 되살아나서 죽은 자가 다시 말하고 다시 먹을 수 있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라 [Mummy] (두산백과)

위 내용에서 살펴본 것처럼 1.

시신을 나일강 서안으로 옮겨 물로 씻는다 .

2.

향유 또는 향료를 바름으로 방부처리를 한다.

3.

뇌, 허파, 간을 비롯한 장기를 제거하는데 , 이때 심장은 그대로 둔다. Why? 죽은 자가 저승에서 심판받을 때 심장의 무게를 달아본다고 믿었기 때문.

4.

나트론(방부염)을 채워 넣은 뒤 구멍을 뚫어 체액을 빼내고 소다수를 바른다.

5.

70 일간의 방부처리가 끝난 뒤 미라를 다시 나일강물에 씻고 , 향신료를 바른다.

6.

고운 아마포 천으로 시신을 감싼 뒤 마스크나 관으로 시신을 덮는다.

수십일 이상의 기간동안 전문 사제들이 동원되어 미라를 제작했으며 , 이렇게 제작된 미라는 각종 부장품들과 함께 피라미드 또는 지하 무덤에 안치되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우리가 이집트에 관련해 알고 있는 유명한 것은 바로 피라미드 이다. 사람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0~5000 년 전에 이처럼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란다. 오죽하면 고대에 외계인이 나타나 피라미드를 건축했다는 이야기도 있겠는가 . 그런데 사실 피라미드는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과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역할도 한다. 모두 잘 아는 바와 같이 피라미드는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이다. 파라오는 태양신 라의 아들 로 여겨졌으며 사람이 아닌 신으로서 숭배받았다. 따라서 파라오의 죽음은 소멸이 아닌 하늘 로의 귀환으로 생각되었다. 이는 피라미드의 계단식 구조에도 드러나는데 , 피라미드는 하늘 로의 계단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파라오의 안식처가 되었다 .

위의 사진은 이집트 최고 (古)의 피라미드인 조세르 왕의 피라미드이다 . 사진에서 드러나듯 이 초기의 피라미드는 분명한 계단식 구조를 보였다. 이는 앞서 말한 ‘하늘로의 계단’의 신빙 성을 높여준다. 이처럼 고대 이집트인의 주술적 내세 신앙은 그들의 건 축물에 분명히 드러난다는 사실을 확 인 할 수 있다.


이집트 미술의 3 가지 특징 1.

정면성의 원칙

누누히 말하는 것이지만 이집트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세가 아닌 사후세 계의 평온하 고 영원한 삶이었다. 따라서 인체를 표현 할 때 생동감보다는 평형을 이루는 부동성을 중시했다 . 즉 좌우의 대칭이 중요히 표현되었다 .


BC1920-1880 목조에 채색 위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인물은 좌우로 대칭을 이루며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이는 이집트 작품에서 드러나는 정면성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2.

사실화의 원칙

이집트 미술에서 드러나는 또다른 특징은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신체를 왜곡하거나 변형하는 양상은 찾아 볼 수 없으며 시대가 변화해도 유사한 형태를 취하 고 있다. 즉 이는 미술 표현이 확고하고 엄격한 규범의 통제아래 있었음을 보여주며 이를 지키고 계승 하는 장인조직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


위의 작품처럼 세 인물(또는 신)이 일렬로 서 있는 구조의 조각은 시대에 걸쳐 계승되어 왔 으며, 또한 대상의 묘사에 있어 과도한 변형이나 왜곡이 없었다는 모습은 사실성의 원리를 드러낸다 .

3.

종합성의 원리

이집트 미술의 또 다른 원리는 종합성의 원리이다. 이는 대상의 완전한 모습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둠으로써 드러난다. 이를테면 하나의 시점보다는 여러각도에서 대상을 파악하는데 , 눈과 몸통은 정면을 향하지만 얼굴과 팔다리는 측면으로 보이는 기형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이러한 표현은 최대한 인물의 특징을 살리고 신체의 모든 부위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 눈에 보이는대로의 묘사보다는 대상을 완전하게 표현하는것이 중요하였습니다.


위의 그림을 보라. 인물의 눈과 몸은 정면, 팔 다리는 측면을 향해 있다. 사실 이러한 표현은 미술적으로 비정상적이다 . 그러나 고대 이집트의 예술가들은 정교한 묘사와 규범을 지키기 위해 이를 감수했다. 그 뿐 아니라 이집트 작품 그 어디에서도 작가의 서명이나 표식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고대 이집트에서 예술가의 목적이 창조가 아닌 작업의 도구로 인식되어 왔음을 보여준 다.

그리스의 미술 미술 작품은 당대 사회의 사회관과 인간상을 보여준다 . 이러한 관점에서 이집트의 내세신앙 은 피라미드나 미라 같은 작품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그렇다면 그리스의 미술품들에는 어떠 한 사상관이 집약되어 있을까? 이를 탐구하는 것은 역사를 한층 깊이 고찰하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 그리스 신화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제우스, 헤라, 하데스, 아폴론, … 이러한 신들 의 이름은 우리에게 이미 친숙하다. 그러나 사실 신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 강력한 힘을 갖고, 인간과는 달리 불사의 존재인데다 가 미래를 알고 세상사의 일을 모조리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신에 대한 인식과는 달리 신화에 묘사된 그리스 신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인간보다 더 인간다 운 존재이다. 사랑하고, 질투하고, 복수하고, 싸우고, 경쟁하고… 때론 인간도 하지 않을 엽 기적인 행위를 하기도 한다 . 이러한 모습이 담긴 신화를 들은 그리스 인들은 신들에 관해 어 떠한 생각을 갖겠는가? 분명 친숙하고도 자유로운 분위기를 느낄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사 고관은 미술품에도 드러난다.


위의 작품들을 보라. 위압적이고 강력한 신의 모습이 아닌 인간의 형상을 한 신의 모습이다. 이뿐 아니라 비너스상을 보아도 신을 묘사하는데 있어 자유로운 분위기가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집트 미술과 그리스 미술의 차이는 이에서 비롯된다. 이집트는 신격화된 지배자가 존재했다 . 파라오는 태양신 아몬 라의 아들로 여겨지고 죽은 뒤 에는 신으로 추앙되었다 . 하지만 이에 반해 그리스는 민주정 공화정의 시초로 불리는 만큼 자유롭고 융통성 있는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이집트보다 그리스에서 정형화 되지 않은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작품들이 나오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이에 더해 지형적 특성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이집트는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사막으로 인해 폐쇄적인 지리적 특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는 넓고 풍요로운 지중해유역에 위치해 개방적인 지리적 특성을 보였다. 이는 곧바로 문화적 특성에 영향을 미쳐 그리스 미술 양식이 여러 문화 와의 교류를 통해 자유로움 을 보인반면 이집트 미술은 시대에 걸쳐서 정형화된 규범양식을 보유하게 되었다 .


이렇듯 그리스 미술은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신들과 자연적 , 지리적 특성들이 융합되어 중 세 르네상스운동까지 이어지게 되는 서양미술의 큰 흐름을 제공했다.


위의 사진은 간다라 미술양식을 보이는 불상이다. 간다라 미술은 헬레니즘 양식과 인도의 미 술표현 양식이 융합된 것인데, 기원전 320 년경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때 인더스강 유역 에 도달해 시작되었다 .


위는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이다. 파르테논 신전은 도리아식 양식을 본떠 만들어진 것으로 이 역시 그리스 문화의 개방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사용된다 .

로마의 미술과 역사 로마는 기원전 8 세기 경에 전설적인 왕으로 꼽히는 로물루스 왕에 의해 세워졌다 . 로물루스 와 레무스 형제는 군신 마르스의 아들들로 어릴 적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는 비범한 모습을 보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늑대 젖을 먹는 조각상 사실 로마인은 이탈리아 중부의 수많은 라틴계 부족 중 하나였다. 그 중 에서도 에트루리아 인의 한 뿌리로 생각되고 있다. 에트루리아인의 미술품


그러던 중 로마는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변화하게 되는데, 주위 부족들과의 치열한 전쟁과 통 합정책 실시의 덕분으로 기원전 3 세기 경에는 유력한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 그러나 곧이어 지중해의 패자였던 카르타고인과 3 차례에 걸친 대전쟁을 벌이고 끝내 승리를 거둔다. 그 이 후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지중해세계의 강자로 부상한다. 그와 동시에 로마인의 미 술세계도 꽃피운다 . 사실 로마의 문화는 많은 면에서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 정치, 문화부면에서 특히 그러한 데, 한때는 원로원의원으로 구성된 시찰단을 아테네에 보내 페리클레스 치하의 아테네 사회 를 관찰하고 로마에 전해주도록 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로마 미술은 그리스의 미술양식을 모방하고 재창조하면서 발전하게 된 다.


또한 그리스 미술역시 로마와 합병되면서 쇠퇴기간 대신 로마의 압도적인 패권을 바탕으로 지중해 세계의 문화 형성에 기여를 하게 되었고 , 로마인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는 과정을 거 치게 된다. 사실 로마의 지배계급은 그리스 문화에 대한 동경의식이 무척 강했는데, 그리스 조각품을 저 택안에 들여놓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로마의 정치는 고대 국가 중에서 (어쩌면 현대국가 까지도) 아주 특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패배한 민족과의 동화였다 .


로마는 초창기에 주변 군소부족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는데, 이 대 패배한 민족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고 유력한 가문의 수장에게는 원로원 의석을 제공하는 등 문 호 개방 정책을 고수 했다. 이는 로마인 특유의 개방적, 현실주의적 특성을 반영한 것으로 이와 동시에 그들의 문화와 미술양식까지도 포함하게 된다 . 이러한 포용정책은 큰 효과를 발휘해 기원전 1-2 세기에 이 루어지는 고도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 공화정을 종식시키고 황제정의 기초를 놓은 정치가이자 장군이다. 한 때는 카이사르를 이상적인 공화체제를 전복시킨 사람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했으나 근대 에 들어서 새로운 로마 정치체제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설계한 ‘로마 유일의 천재’로 평가된 다. 그러나 그는 기원 44 년 3 월 15 일에 원로원의 공화정 고수파에 의해 암살되었으며, 그로부 터 13 년간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승리, 즉위하게 된다.


기원 1 년경 로마제국의 영토.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치세 기간이었다.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그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능수능란한 정치가로 평가받 는다.


카이사르가 암살되었을 때 그는 17 세에 불과한 소년이었는데, 카이사르의 유언장에는 그가 상속인으로 지명되어 있었다. 이는 그가 카이사르가 남긴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음을 뜻함과 동시에 자칭 타칭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생각되던 사람들과 혈투를 벌여야 함을 의미했다. 실제로 그는 암살자 집단은 물론 유력한 안토니우스와 혈전을 벌여야 했는데, 최후의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연합군 함대에 승리를 거둠으로 오랜 내전을 종식시켰 다. 그의 정치적 업적은 앞으로 300 년이 넘는 동안 지속될 로마 황제정의 기초를 닦아놓았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가지 영광스러운 칭호를 갖고 있었는데, 아우구스투스(신성한, 경배를 받을 만한 자), 프린켑스(제 일인자), 임페라토르(총사령관)등이 있었다. 이들 칭호는 그대로 그의 후계 자들에게로 계승되어 황제의 권위가 합법성을 인정받는데 기반이 되었다.

<로마의 예술품>

로마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건축물- 콜로세움. 콜로세움은 많은 영화의 배경으로 사용되었 는데, 특히 기독교인들을 잔인하게 박해한 장소로 인식되어 있다 . 하지만 실제로 콜로세움은 검투사들의 싸움터로 공공의 축제를 거행하는 행사장소였다.


그런데 이에서도 로마의 실용정신을 볼 수 있다 . 과도하게 화려한 장식보다는 힘을 잘 견디는 아치형 구조를 채택했으며, 한번에 50000 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하고도 실용성 있는 건축물 이었던 것이다.


제우스상 4 세기경 그리이스 작품의 카피(로마) 앞서 설명했듯이 로마시대의 많은 조각품들은 그리스시대의 작품을 많이 모방 또는 그대로 재현했다 .. 중기이후 로마의 조각은 나름대로의 독창성과 새로운 작업형태가 나오긴 하지만 여전히 그 작업의 근원은 그리스 조각 이었다 .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청동 기마상. 청동 기마상으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로마시대 작품 입니다. 사실 이외에도 수많은 기마상이 로마의 포룸에 있었지만 기원 4-5 세기경 기독교 공인에 이 은 우상파괴 운동에 희생되고 말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 역시 파괴될 뻔 했지만 이를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로 오인한 바람에 현재에까지 살아남게 되 었다. 이렇듯 일부의 광신적인 행동으로 인해 로마의 종교와는 관련 없는 고귀한 문화유산들 이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뒤에서 살펴보게 되겠지만 이는 로마제국이 보인 포용적이고 실용주의적 태도와는 정반대의 행동이 아니었나 싶다.

<조각품> 조각은 그리스의 영향이 특히 뚜렷한데 BC 2 세기 후반에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한 이래 파 시테레스를 비롯한 많은 그리스의 조각가가 로마에 초대되어 이 곳에서 작품을 제작했다. 로마시대 초기의 걸작 중의 하나인 《로마의 웅변가》(루브르미술관 소장)는 아테네에서 이 주한 클레오메네스의 작품이다. 또한 로마의 평화를 확립한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의 조각, 예컨대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 구스투스》(바티칸미술관 소장), 《아라 파키스》(평화의 제단)의 부조(浮彫) 등은 그리스의 고전적 단정함과 로마의 사실성을 융합한 초기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사실 로마 조각의 경이적인 분야는 초상조각이다. 초상에서는 입상(立像)과 더불어 새로이 흉상·기마상·묘비상이 제작되었으나 , 이것들은 모두 가 단순한 용모의 모방이 아니라 개개 인물의 성격을 예리하게 추구했는데 이는 그리스 미술 에서는 보기 어려운 면이다 .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키케로, 카이사르의 흉상,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입상, 마르쿠스 아우 렐리우스의 기마상 등이 있다. 로마인들은 예술품을 제작할 때에도 실용적인 목적을 추구했다. 이를테면 거대한 개선문이 나 기념주를 세우고 그들이 전쟁에 승리한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한 부조로 장식했는데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 트라야누스 황제의 기념주(BC 113) 부조는 그 대표작입니다 .


디오니소스 황제의 석관


로마의 티투스 개선문

<회화> 로마시대의 회화는 79 년 베수비오화산의 폭발로 갑자기 파묻힌 2 개의 도시, 즉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유적에 거의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화산재 덕분에 보존이 가능했던 이지 역이외의 회화작품은 불행히도 찿아보기 힘든 편이다. 프레스코와 모자이크로 된 이러한 회화 양식은 분명히 헬레니즘시대의 회화를 반영하여 감


각적·신비적·일상적인 주제가 사실적인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침실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 막혀있는 벽에 마치 창이 있는 것 처럼 정교하게 그림을 그려서 입체감과 원근감을 함께 표 현 했다. 이러한 뛰어난 회화기법은 믿어지지 않지만 그리스도교 예술이 시작되며 급격히 퇴색해 아 예 잊혀지게 되는데, 이러한 화풍을 다시 접하려면 600 년 이상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지만 이러한 로마의 위대한 문화유산들은 오늘날에는 극히 일부분만이 전해 지고 있다. 그 이유를 한번 살펴보자 . 반달리즘이란 반달리즘이라는 개념을 살펴 보자. 이는 도시의 문화 예술이나 공공시설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반달은 사실 게르만족의 한 부족이름인데 , 5 세기 초 유럽의 민족 대이동 때 반달족이 지중해 연안에 서 로마 제국내의 문화 예술품을 파괴한 데서 유래했다. 이러한 행위는 로마제국 후기에 기독교 국교화가 이루어진 후 더욱 심화되었다. 우상 금지 칙령에 따라 광신적 인 신자들은 신상과는 관련없는 귀중한 문화유산들을 파괴하게 되었다. 앞서 말한 기마상이나 조각들을 파괴 한 것은 물론 무덤들을 도굴하는 등 비 이성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에 더해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파괴된 유적들을 살펴보면 현재 전해지고 잇는 작품들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위 사진은 로마의 휴일 이라는 유명 영화에도 등장한 소재이다. 진실의 입이라고 불려서 거짓을 말 하고 입부분에 손을 넣으면 잘린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런데 사실 이 조각은 로마시대에는 가축시장의 하수도 뚜껑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 오늘날 배수 구 뚜껑쯤으로 보면 될까. 과거에는 비천했던 도구라도 오늘날에는 그 얼마나 큰 가치와 의의를 전 해주는가. 이보다 수백배 수천배 귀중하고 보배로웠을 예술품들이 사라졌다는 것은 정말로 인류문화의 큰 손실로 여겨진다 .


이렇게 인류의 시작부터 이집트, 그리스, 로마의 미술문화와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는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주는가? 우선 귀중한 역사유적들을 보존 ,계승해야할 필요를 알려준다. 또한 생활상이나 인간관이 예술품에 드러나며 , 이를 통해 과거의 삶을 재조명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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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준 이북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그리고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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