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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 검정 2013. 8. 30.

고등학교

한철호 | 강승호 | 권나리 | 김기승 | 김인기 | 박지숙 | 임선일 | 조왕호


교과서 물려주기 기록표 연도

학년

교과서 사용자 번호

상태 표기 예시 : 매우 좋음, 좋음, 보통, 나쁨

이름

상태


인간

은 지나간 일들을 기억하고 미래의 꿈을 그리면서 현재를 살아간다. 인간이 살았던 경험 가운데 많은 부분은 잊혀지

지만 오래도록 기억되어 전승되는 것이 있다. 저절로 기억되는 경험도 있지만 잊지 말자고 생각하는 경험도 있다. 여러 사람과 함께 한 경험, 그리고 후손에게 남기고 싶은 기억들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남 게 된다. 인간은 경험에 대한 기억을 함께 지님으로써 현재 서로가 하나 임을 확인하면서 미래의 꿈도 공유하는 것이다. 한국사는 현재의 한국 사람들이 함께 기억해야 할 선조들의 경험들 로 기록된다. 그 경험은 후손들도 함께 기억하기를 바라는 경험이다. 한 국사는 현재의 우리들이 과거의 선조들뿐만 아니라 후손들과 대화하는 과정이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 다양한 경험을 접하는 가운데 우 리들의 인식 지평은 확대된다. 역사는 누가 어떤 사실을 선택하여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 내용 이 달라진다. 역사 교육은 교과서에 수록된 사실의 기억으로만 이루어 지지 않으며, 교수자와 학생 사이의 열린 대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비판 적이고 창조적인 지적 활동이다. 교과서는 교육 주체들 사이의 대화에 소재를 제공함으로써 창조적 의사소통의 길잡이 구실을 한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의 꿈을 꾸며 현재를 살아가 는 개인들이다. 학생들 개개인이 자기 개인의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사 발전의 주체임을 자각할 때 한국사 교육은 생명력을 갖게 된다.


이 교과서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첫째, 학습 동기를 유발하기 위해 주제를 시작하기에 앞서 관련 자료를 제시하 고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문제의식을 가지도록 하였다. 또 다양한 탐구를 통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자기 주도 학습이 가능 하도록 하였다. 둘째, 본문 기술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나열 방식을 지양하고 주제의 내용과 성 격의 핵심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다양한 형식을 활용하여 구성하였다. 셋째,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역사 수업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를 위 해 학생들이 관심과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사실과 자료를 중요한 대상으로 선정 하였다. 나아가 다양한 관점에서의 해석 가능성을 열어 놓아 학생들의 창조적인 생각이 나올 수 있도록 고려하였다. 이 교과서를 통해 한국사 교육 현장에서 교수자와 학생 사이에 창조적인 열린 대화가 활성화되고, 나아가 학생들의 이해력, 판단력, 역사적 상상력과 올바른 역 사인식이 배양되기를 바란다. 지은이 씀


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1. 동트는 우리 역사

10

깊이 있는 한국사 이야기 - 한민족(韓民族)의 조상은 누구일까?

2. 삼국의 성립과 정치 발전

22

깊이 있는 한국사 이야기 - 삼국의 통치 체제는 어떠하였을까?

3. 남북국의 정치 발전 4. 경제 활동과 사회 모습 5. 폭넓은 대외 교류와 문화의 발전

32 38 46

생생한 현장 취재 - 일본에서 만난 한국 고대 문화의 숨결

II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1. 고려의 성립과 정치 발전

62

깊이 있는 한국사 이야기 - 고려의 지배층은 어떻게 변화하였을까?

2. 경제 정책과 경제 활동 3. 신분 제도와 생활 모습

78 84

깊이 있는 한국사 이야기 - 기록으로 보는 고려 시대 여성의 지위

4. 다양한 사상과 귀족 문화의 발달

90

생생한 현장 취재 -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 이해하기

III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1. 조선의 건국과 통치 체제의 정비 2. 양 난과 조선 후기의 정치

106 116

깊이 있는 한국사 이야기 - 조선의 세자, 베이징에서 서양인과 만나다

3. 경제 정책과 경제 생활의 변화

128

와글와글 역사 논쟁 - 조선 후기에 나타난 자본주의의 싹

4. 신분 질서와 생활 모습의 변화 5. 양반 문화의 발달과 문화의 새 경향

142 150


IV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1.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적 접근과 조선의 대응

170

깊이 있는 한국사 이야기 - 조선의 바다, 낯선 배들이 몰려오다

2. 문호 개방과 근대적 개혁의 추진

178

깊이 있는 한국사 이야기 - 동아시아 3국의 개항 / 격동의 개화기를 살았던 다양한 삶의 궤적들

3. 구국 운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의 전개 4. 일제의 침략과 국권 수호 운동의 전개

192 206

와글와글 역사 논쟁 - 의병 운동과 애국 계몽 운동

5. 개항 이후의 경제와 사회・문화의 변화

V

220

일제의 강점과 민족 운동의 전개 1. 일제의 강점과 수탈

238

깊이 있는 한국사 이야기 - 일제 강점기의 경제 개발 어떻게 볼 것인가?

2.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254

깊이 있는 한국사 이야기 - 이회영과 형제들의‘노블레스 오블리주’

3. 나라 안에서 전개된 민족 운동

264

생생한 현장 취재 - 서울에 있는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찾아서

4. 사회・문화의 변화

278

깊이 있는 한국사 이야기 - 다가오는 근대, 그 양달과 응달

5. 무장 독립 전쟁의 전개와 건국 준비 활동

VI

286

대한민국의 발전과 현대 세계의 변화 1.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6・25 전쟁

306

깊이 있는 한국사 이야기 - 베트남과 독일 사례를 바탕으로 민족의 통일 방안 모색

2. 자유 민주주의의 시련과 발전

322

깊이 있는 한국사 이야기 - 우리 헌법이 걸어온 길

3. 고도성장과 사회・문화의 변화

338

와글와글 역사 논쟁 -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산업화

4. 북한의 변화와 평화 통일을 위한 노력

350

깊이 있는 한국사 이야기 - 사진과 그래프로 보는 남북 교류

5. 세계와 대한민국

356

깊이 있는 한국사 이야기 -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우리 땅이다 / 세계 속의 한국인, 한국 속의 세계인


ÉîÉìÂãØ âŒåìœ

1

동트는 우리 역사

그 뒤를 이은 장수왕은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중국의 남북조와 동시에 교류 하고, 북방 유목 민족과도 폭넓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적극적인 남진 정책 을 실시하여 평양으로 천도하고(427), 백제를 밀어내고 한강 유역을 장악하였다 (475).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진출은 광개토 대왕릉비와 충주 고구려비에 잘 나타나

선사 문화의 발전

있다. 이러한 대외 팽창을 통해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구석기인의 만능 도구 주먹도끼! 인간의 손에 들린 이 돌덩이가

대단원명의 흐름을 나타 내는 사진으로 학습 동기 를 유발하고, 학습 목표로 공부의 방향을 쉽게 파악 하도록 하였습니다

현대 문명의 산물인 휴대 전화로 바뀌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을까? 인류는 거대한 자연 앞에 비록 나약한 존재였지만 도구를 사 용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고 나아가 문명을 창조하였다. 그러기까지 수백 만 년이 흘렀다. 인류가 문명을 이루고 삶을 문자로 기록한 역사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불과 5, 6천 년 전에 시작되었다. 그 이전의 장구한 세월은 문자 기록이 없는 선사 시대로, 당시 인류의 삶은 유물과 유적을 통해 유추할 수밖에 없다. 선사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백제, 중흥을 도모하다

백제는 5세기에 고구려의 팽창으로 위기를 맞았다. 이에 신라와 나・제 동맹을 맺어 맞섰지만(433), 결국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밀려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웅진 으로 천도하였다(475). 이후 대외 활동이 위축된 채 내부 혼란을 겪다가 6세기 무 렵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은 나・제 동맹을 강화하고 중국 남조와 국교를 재개하였다. 그 뒤를 이은

백제의 수도 이전

무령왕은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 통제권을 강화하였다. 돌을 깨뜨려 도구를 만들다

성왕은 대외 진출에 유리한 사비로 천도하고, 부여 계승 의식을 내세우며 국호

인류는 나무나 동물의 뼈, 또는 돌을 다듬어 만든 석기를 도구로 이

를 남부여로 선포하였다. 아울러 ✽중앙과 지방 통치 조직을 재정비하고, 불교를

용하였다. 석기는 제작 방법에 따라 뗀석기와 간석기로 구분하는데,

적극 장려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정세가 불안한 틈을 타 신라와 협공하여 한강

구석기 시대에는 뗀석기를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주먹도끼, 찍개 등과

하류를 되찾았으나, 곧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성왕의 체제 정비

중앙 관청을 22부로 확대 정비 하고 수도를 5부, 지방을 5방으 로 정비하였다.

같이 하나의 도구를 여러 용도로 사용했으나, 점차 자르개, 밀개, 찌르 개 등 쓰임새가 정해진 도구를 사용하였다. 발굴된 유적・유물을 조사 한 결과, 우리나라의 구석기 시대는 약 70만 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천하의 중심은 고구려

여겨진다. 동아시아 지형은 약 1만 년 전쯤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무리 지어 살며 채집과 사냥을 하다

구석기인은 도구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불을 이용하고 언어를 구사하였다. 불을 이용하면서 추위와 맹수의 위협을 이겨 내고,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 었다. 언어를 사용하여 무리의 협동력을 높이고, 서로 떨어져 생활하는 무리 간 에 문화를 공유하고 경험을 전할 수 있었다. 구석기인은 추위와 비바람을 피해 주로 동굴이나 막집, 바위 그늘에 살았다. 채 집과 사냥을 하면서 무리 지어 살았으며, 더 나은 생활 환경을 찾아 오랜 세월에 걸

한편, 구석기 시대 말부터 기온이 오르고 자연환경이 변화하였다. 사람들은 먹 슴베찌르개(경남 밀양, 충북 단 양 출토) 슴베란 칼, 낫 등 자루 속에 박히는 부분을 말한다.

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해지고 백성은 풍족해졌으며, 오곡이 풍 성하게 익었다.

- 광개토 대왕릉비 비문 -

•고려대왕 상왕공과 신라 매금은 세세토록 형제같이 지내기 를 원하며 서로 수천(守天: 하늘을 지킴)하기 위해 동으로 (왔다).

- 충주 고구려비 비문 -

고구려인은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으로 여겼다. 광개토 대왕릉비에는 강 한 국력에 바탕을 둔 고구려인의 자부심이 보인다. 충주 고구려비에는 신

쳐 끊임없이 이동하였다.

åƘÉìÂãØ íìœâÃÛ

•왕의 은택은 하늘에 미쳤고 위엄은 사해에 떨쳤다. 나쁜 무

잇감을 따라 이동하거나 환경에 적응하면서 도구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슴베찌르개와 같이 나무나 뼈에 꽂아 쓰는 이음 도구를 제작했으며, 작고 빠른 짐

라의 왕을‘동이(동쪽 오랑캐) 매금(마립간)’ 이라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신라의 왕과 신하를 고구려로 불러들여 관리의 옷을 나누어 준 사실도 기 록되어 있다. 이는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고구려가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과시하였음을 보여 준다.

충주 고구려비(충북 충주)

광개토 대왕릉비(중국 지린 성)

승을 잡기 위해 활을 발명하였다.

10

중단원을 주제별로 소단 원으로 나누어 역사적 사 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 습니다.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2. 삼국의 성립과 정치 발전

27

[åÆåò ãôÈÄŒ] 사진, 사료 등을 통한 소단원 도입으로 주제에 대해 이해하고 역사에 대한 흥 미를 가질 수 있도록 구성하였습니다.

[íìÂÄÆœâì áîœÄú] 학습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양한 자료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ÉîÉìÂãØ ÜìÜÆÖŒ 대단원에서 배운 개념을 확인하고, 창의적인 활동 을 유도하는 수행 평가를 구성하였습니다.

만민 공동회를 열어 자주 국권 운동을 전개하다

민족의 이름으로 응징한 항일 의거 활동

1896

아관 파천 독립 협회 창립

고종은 환궁 후 대한 제국의 수립을 선포했지만, 러시아는 군사 교관, 재정 고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대한 반대 투쟁이 다양하게 전개되었

1897

고종, 경운궁 환궁 대한 제국 수립

문을 파견하는 등 통제를 강화하면서 여러 가지 이권을 요구하였다. 독립 협회는

다. 조약 파기를 주장하는 반대 상소가 잇따랐으며, 늑약의 부당성을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면서 재정・군사・인사권을 자주적으로 행사해 자주독립을

규탄하는 언론 활동도 활발하였다. 민영환, 조병세 등은 울분을 참지

1898

독립 협회 해산

지켜야 한다는‘구국 운동 상소문’ 을 올리고 본격적인 정치 활동에 나섰다.

못하고 자결하였다.

1899

대한국 국제 반포

그리하여 최초의 근대적 민중 집회인 만민 공동회(1898. 3.)를 열어 러시아의 내정 간섭과 이권 요구를 규탄하는 자주 국권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을사늑약에 적극 협조한 매국노와 일본 침략자를 직접 응징 한 의사들의 행동도 잇따랐다. 나철, 오기호 등은 을사오적을 처단하 기 위해‘자신회’ 라는 5적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미국의 샌프란시스

관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헌의 6조를 건의하다

헌의 6조(일부)

민중의 정치 참여 의식이 높아지자 독립 협회는 내정 개혁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민이 합심하여 황제권

코에서는 장인환과 전명운이 일제의 한국 침략이 정당하다고 선전하

자신회(自新會)

는 외교 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1908).

에 관심을 돌려 자유 민권 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쳤다. 정부

연해주에서 의병을 이끌고 활약하던 안중근은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2.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해당 부처의

에 법률과 재판에 의한 신체의 자유권과 재산권 보호, 언

하얼빈에서 처단하였다(1909). 그는 최후 진술에서‘대한의군의 참모 중장으로서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함께 날인하여 시행할 것.

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요구하였다. 나아가 국

독립 전쟁의 일환으로 이토를 죽였기 때문에 형사범이 아니라 전쟁 포로로 대우

민 참정권 운동도 전개하여 국민의 뜻을 국정에 적극 반영하

해 줄 것’ 을 당당하게 주장하였다. 이재명은 매국노를 처단하는 것이 국권 수호의

고자 하였다.

지름길이라 여기고, 이완용을 칼로 찔러 을사오적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을 공고히 할 것.

3.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담하여 맡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4. 중대한 범죄는 공판하고 피고의 인권을 존중��� 것.

전국 곳곳에 설치된 지회를 중심으로 국권, 민권 운동이

이처럼 목숨을 내건 의거 활동은 매국노들과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확대되는 가운데, 독립 협회는 개혁 지향적인 정부 대신들과

독립 투쟁을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나아가 우리의 주권 수호 의지와 한국

학생, 시민이 함께 참석한 관민 공동회(1898. 10.)를 개최하

침략에 대한 일제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5. 칙임관은 정부에 그 뜻을 물어 과반수가 동의하면 임명할 것. -“주존본안 제`3`책”-

이재명

였다. 여기서 관민이 협력하여 국정을 운영하자는 헌의 6조 가 결의되어 황제의 재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동양과 세계의 진정한 평화를 외친 안중근의“동양 평화론” 일왕이 러・일 전쟁을 선전 포고하는 글에“동양 평화와 대한 독립을 공고히 한다.”

만민 공동회 당시 종로는 대한의 아고라

라고 하였다. …… 슬프다! 가장 가깝고 가장 친하며 어질고 약한 한국을 억압하여 조 약을 맺고 강점하였다. 지금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침략의 손길을 뻗어 오고 있는데,

1898년 무렵 서울 인구는 약 17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만민

이 재앙을 동양이 일치단결해서 막아 내는 것이 가장 중요함은 어린아이도 다 아는

공동회에는 보통 1`~`2만 명이 모일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만

일이다. 무슨 까닭으로 일본은 이러한 당연한 형세를 무시하고 같은 동양의 이웃

민 공동회는 종로에 연단을 만들고 신분과 나이의 구별 없이 어

나라를 약탈하고 친구의 정을 끊어, 서양 세력이 애쓰지 않고 이득을 얻게

린이조차 연단에 올라 연설을 하는 등‘한국의 직접 민주주의’또

하려 한단 말인가.

는‘대중의 정치적 의사 표현’ 의 원형이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동양 평화론” (1910. 2.) 약지가 잘린 손바닥인

만민 공동회가 열리면 밥장사는 장국밥을 수백 그릇 날라 “동양 평화론” 은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서 사형을 앞두고 집필한 글이다. 안중근은 이 글에서 이토

왔고, 어떤 부자는 집 판 돈 500원을 모두 기부했으며, 거지조

안중근

차 닷 푼의 기부금을 내놓는 등 참여자들 사이에는 일종의 운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유를 밝히고, 진정한 동양 평화는 한ㆍ중ㆍ일 삼국이 독립 국가로 대등하게 상호 협력할 때 가능하다고 주장

명 공동체 의식이 형성되었다. 서대문, 자하문 밖은 물론 과천

하였다. 그런데 일본은 한국의 주권을 부정하고 침략하였기 때문에 동양 평화를 해치는 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동양 평화론” 의 핵심은 한국을 침략한 일본의 잘못을 깨닫게 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인종주의의 관점에서 서양 세력의

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나무꾼들이 기부한 장작은 밤하늘을 훤

침략을 막아 내기 위해 무조건 동양이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국가 간의 평등과 상호 협력으로 국제 평화를 이

하게 비추었고, 사람들이 산처럼 모여 밤을 지새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를‘장작 집회’ 라고도 불렀다.

202

대한의 아고라였던 당시의 종로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룩하자는 그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분쟁을 극복하는 보편적 원리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4. 일제의 침략과 국권 수호 운동의 전개

215

[âìÄó âõœãÃÖõ] [ãôœâì âõœ ãŒÂÜÆÈ] 중요한 사건과 역사적 인물을 주제로 학습할 수 있게 구성하 였습니다.

[âìÖü ãŒÍÄŒ] 본문의 내용을 보충하는 사료를 통해 다양하게 학습하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제시하였습니다.


땅속부터 바다까지 잠식하는 일본 자본주의

소외된 농촌을 살리려는 노력

일제는 민족 자본의 결집과 성장을 억제하고 효율적인 식민지

도시와 농어촌 간의 소득과 문화 격차가 커지자 박정희 정부는 새마

경제 수탈을 위한 여러 법령을 제정하고, 한국인의 산업 활동을 제

을 운동을 추진하였다(1970). 새마을 운동은 농촌 환경 개선을 시작으

한하였다. 먼저 회사령(1910)을 공포하여 기업을 세울 때 총독의

로 농촌 소득 증대 사업으로 발전했고, 점차 도시와 직장으로 확대되

허가를 맡게 했고, 허가 조건을 어길 때는 총독이 기업을 해산할

면서‘근면・자조・협동’ 을 강조하는 국민정신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수 있게 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 민족에게는 일본 기업의 이익을

그러나 유신 체제 유지에 이용되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였다.

위협하지 않는 소규모의 제조업과 매매업 등만 허용하였다.

한편, 민간 차원의 농민 운동도 활발해졌다. 그 첫 단추를 꿴 것이 3 함평 농협이 고구마 수매 약속을 지키지 않자, 농

또한, 어업령・광업령・은행령 등의 법령을 제정하여 경제 활

년에 걸쳐 전개된 함평 고구마 피해 보상 투쟁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

동을 허가제로 전환하고, 인삼・담배・소금 등에 대해 전매제를

로 농민들은 전국적 농민 단체를 구성하여 농민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

실시함으로써 민족 자본의 성장 가능성을 차단하였다. 대규모의

하였다.

민들이 항의하여 피해 보상을 받았다`(1976`~`78).

임야 조사 사업(1917~1935)도 실시하여 방대한 지역의 임야를 국 시장 개방과 위기에 처한 농촌 현실

유림으로 편입하였다.

간선 철도망과 주요 항만 서울을 중심으로 한 X자 형태 의 간선 철도망은 남으로 한국을 일본 경제권에 편입하였고, 북으로 대륙 침략을 위한 발판 역할을 담당하였다.

철도, 도로, 항만 등의 기간 시설도 새로이 건설되고 정비되었

1990년대 이후 농촌은 쌀 시장 개방과 자유 무역 협정(FTA)의 타결

다. 이는 한국에서 생산되는 식량・자원의 일본 반출과 일본 상품

로 값싼 외국 농산물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였다. 이에 대응하

의 한국 판매를 편리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여 농민들은 농산물 시장 개방 반대 운동, 농산물 제값 받기 운동 등을 펼쳤다. 정부도 영농의 기계화 및 시설 개선을 위해 각종 지원 정책을 펴고 있지만 크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도시와 농촌 간의 소득 격차와 농가 부채 문제는 여전하며, 농촌 인

1910년대 일제의 경제 침탈

구의 감소와 고령화도 심각한 농촌 문제로 남아 있다.

1 토지 조사령(1912) 제1조

도시 근로자와 농가 소득 추이

2 회사령(1910)

토지의 조사 및 측량은 본령에 의한다.

제1조

회사의 설립은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4조 토지의 소유자는 조선 총독이 정하는 기간 내에 주

제5조 회사가 본령이나 본령에 의거하여 발하는 명령과

소, 씨명, 명칭 및 소유지의 소재, 지목, 자번호, 사

허가 조건에 위반하거나 또는 공공 질서와 선량한

표, 등급, 지적, 결수를 임시 토지 조사 국장에게

풍속에 반하는 행위를 할 때, 조선 총독은 회사의

신고해야 한다.

해산을 명할 수 있다.

소설“괭이부리말 아이들” 에 나타난 도시화 괭이부리말은 인천에서도 가장 오래된 빈민 지역이다. 지금 괭이부리말이 있는 자리 는 원래 땅보다 갯벌이 더 많은 바닷가였다. 그 바닷가에‘고양이 섬’ 이라는 작은 섬이 있었다. 호랑이까지 살 만큼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던 고양이 섬은 바다가 메워지면서 흔적도 없어졌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그 곳은 소나무 숲 대신 공장 굴뚝과 판잣집들

➊ 일제가 [자료 1, 2]의 정책을 실시한 목적을 설명해 보자.

3 일본의 경제 독점 현황

만 빼곡히 들어찬 공장 지대가 되었다. 그리고 고양이 섬 때문에 생긴‘괭이부리말’ 이라

➋ [자료 3]과 같은 결과를 초래한 일제의 경제 정책 내용을 지적 해 보자.

는 이름만 남게 되었다. ……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올라온 이농민들은 돈도 없고 마땅한 기술도 없어 괭이부리말 같 은 빈민 지역에 둥지를 틀었다. …… 집 지을 땅이 없으면 시궁창 위에도 다락집을 짓고, 기

소설의 배경이 된 재개발 지역

찻길 바로 옆에도 집을 지었다. 그리고 한 뼘이라도 방을 더 늘리려고 길은 사람들이 겨우 다닐 만큼만 내었다. 그래서 괭이부리말 골목은 거미줄처럼가늘게엉킨실골목이되었다. …… 괭이부리말도 점점 도로를 낸다, 주거 환경을 개선한다 하면서 기찻길 옆의 판잣집들이 철거되었다. 시궁창이 복개되면서 시궁창 옆 의 판잣집들도 사라졌다. …… 괭이부리말이 부자가 되어서 변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이제 도시 전체가 찰 대로 다 차 버려 사람들이 빈민

민족별 공업 회사 불입 자본액(왼쪽)과 광산 생산액(오른쪽)

굴이라고 가기를 꺼리던 괭이부리말 근처까지 아파트를 짓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 된 것이다.

244

Ⅴ. 일제의 강점과 민족 운동의 전개

- 김중미,“괭이부리말 아이들”-

3. 고도성장과 사회・문화의 변화

345

[êìÚÄÆ íúÈÉõ˜] 본문의 내용과 관련된 자료를 활용하여 역사적 사실의 의미를 탐구하고 토론하 며, 역사 의식을 높일 수 있도록 구성하였습니다.

[ãì! ÄÃÖó˝ÄÆÇì] 역사 속에 숨어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소개하였습니다.

글을 읽고 아래 빈칸 안에 자신의 의견을 달아 보자.

일본에서 만난

조선 후기에 나타난 자본주의의 싹

일제 강점기의 경제 개발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 고대 문화의 숨결 일본의 나라(奈良) 현 아스카 촌 일대는 아스카 문화의 중심지였다. 아스카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기까지 삼국

일제 강점기에는 철도와 도로, 항만 등 사회 간접 자본의 확충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930년대에

제안

는 일본의 대기업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투자하면서 중화학 공업과 광업 등이 성장했고, 대규모의 공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의 싹이 있었다고 할 수 있나요?”

과 가야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공이 컸다. 도래인(渡來人)이라고 표현되는 이들은 일본에 정착하며 다양한 문화를 전파하였다. 일본 속에 살아 숨 쉬는 우리 고대 문화의 흔적은 어떤 것이 있을까?

궁금이님이 올린 글입니다

장이 많이 들어섰다. 인구도 크게 늘고, 국민 총생산이 증가했으며, 경제 성장률도 세계 평균보다 높 았다. 이와 같은 개발과 성장이 당시 한국인에게 어떠한 의미였을까?

우리나라 금동 미륵보살 반가

조선 후기에 나타난 경제적 변화를‘자본주의’ 적 특성이 나타났다고 평가하던데 이해가 잘 되지 않네요. 생산력이 좀 증가하고 부유한 농민이 일부 등장했다는 것을‘자본주의’ 라고 설명

왼쪽 그래프를 보면, 1920년대 중반 이후 생활이 매우

할 수 있나요? 서양의 자본주의와는 규모와 성격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 제가

궁핍한 한국인의 수가 급속히 증가하여, 1933년에는 전체

호류 사 금당 벽화 호류 사는 쇼토쿠 태자가 건립한 사찰로, 백제

사유상(왼쪽, 국립중앙박물관)과

장인이 건축에 많이 참여하였다. 고구려 승려 담징이 그렸다고 전하는

일본 고류 사 목조 미륵보살 반가

호류 사 금당 벽화는 1949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의 그림은 복원된

사유상(오른쪽) 반가부좌 자세로

것이다.

명상에 잠긴 미륵보살을 조각한

잘 몰라서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의견을 듣고 싶네요. 제 생각이 잘못된 것일까요?

인구 중 30`%를 넘어섰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자본과 기

상이다. 두 불상은 재료만 다를 뿐 형태가 쌍둥이처럼 닮았다.

술의 투입으로 개발과 성장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대다수 한국인의 생활은 오히려 더욱 어려워진 것이다. 특 히 중・일 전쟁 이후 일제가 전쟁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가혹하게 수탈했기 때문에 대다수 한국인의 삶은 더욱 피 세민・궁민의 증가 상황 세민은 생활이 가난하여 겨우 연명하는 사 람이고, 궁민은 너무 가난해서 긴급 구제가 필요한 사람이다.

누리꾼 댓글

역사사랑 상공업을 천시하고 농본주의를 표방하던 조선 사회에 생산력 증대, 상품 화폐 경제 발달, 부농 등장

같은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일이죠. 그 이전 시대와는 분명히 다른 발전적인 흐름이

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라 자본주의적 특성이라고 설명하기에 무리가 없어요.

인구 성장률보다 더 높게 국민 총생산이 증가했는데도

궁금이 그렇게 따지면 경제 활성화나 상업 자본의 성장은 이전에도 나타나지 않았나요? 통일

신라 장보고나 고려 시대 무역항 벽란도 같은 경우 …… 이것도 자본주의인가요?

한국인의 삶이 갈수록 피폐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조선 총독부 소유의 공업 자산을 제외하고 도 일본인이 소유한 공업 자산 규모가 90`%가 넘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한국인에 의한 경제 발전을

딴지걸 자본주의적인 것이든 아니든 그게 뭐가 중요한가요? 그냥 조선 후기에 경제 분야에서

억압했으므로 개발은 한국인의 손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일제의 투자와 개발은 한국의 자원과

발전적 변화가 나타났다고 하면 되는 거 아닌지 ….

식량, 노동력 등을 효율적으로 수탈하려는 목적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인의 절반밖에 되 지 않았던 한국인 노동자의 임금, 수확량의 50`%가 넘는 한국 농민의 고율 소작료 부담, 산미 증식

역사사랑 궁금이님. 일단 단순한 경제 성장에 그치지 않고 경제 운영 원리와 구조가 변화되었다는 점을 강조

하고 싶네요.

계획 이후 더욱 줄어든 국내의 쌀 소비량 등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

딴지걸님에게는 그런 주장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조선 후기에 나타난 경제 운영 원리의 변화에 관

작할 수 있다. 일제의 식민지 경제 체제는 한국 민중의 고통과 희

칠지도(일본 나라

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현 이소노카미 신궁)

딴지걸 그렇지만 억지로 끼워 맞추는 건 문제죠!

어 일본에 전한 것으

4세기 백제에서 만들 로 두 나라의 긴밀한

생을 담보로 일본 자본주의의 성장을 도모하는 수탈

역사사랑 역사는 만들어 가고 다듬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필요한 것을 찾아내고 증명해 내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관계를 보여 준다.

는 것을 억지로 끼워 맞춘다고 폄하하면 안 되죠. 딴지걸 우리 역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뚜렷한 증거나 논리가 없지 않나요? 납득이 안 고구려 수산리 고분 벽화(위,

돼요, 납득이.

남포 강서)와 일본 다카마쓰 고분 벽화(아래, 일본 나라 현) 벽화 제작 기법을 비롯하여 그림 속 저 고리와 색동 주름치마 등 여인들 ��� 옷차림이 비슷하다.

1

그래프와 같이 세민과 궁민과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한 일제의 대표적인 식민지 수탈 정책 두 가지를 써 보자.

2

식민지 조선의 국민 총생산이 증가하였음에도 한국인의 생활이 갈수록 피폐해진 이유를 토론해 보자.

1. 일제의 강점과 수탈

1 251

3. 경제 정책과 경제 생활의 변화

141

48

가야 토기(왼쪽)와 일본의 스에키(오른쪽) 스에키란 흑청색을 띤 일본의 단단 한 토기를 말한다. 가야 토기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의 문화 교류를 보여 주는 사례로 이 외에 어떤 것이 있는지 조사해 보자.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ÄŒ¸ãŒ ㌈ÇàíìÂÄÆœâì ãŒãïÄŒ] 심화・보충 학습

[ãúÄÃÈãúÄÃÈ ãôœâì ÇõÂåî˜] 역사적 사건에 대해

[âî˜âî˜íì íôÂåì˜ éøåî] 단원 내용과 관련된

에 알맞은 주제를 골라 깊이 있으면서도 흥

토론하여 사고력을 키울 수 있게 구성하였

유적지나 문화재를 직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미롭게 다루었습니다.

습니다.

있도록 구성하였습니다.


신석기 시대 움집(복원)

고인돌(강화 부근리)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고구려 무용총 접객도 (중국 지린 성)

오녀산성 (중국 랴오닝 성)


익산 미륵사지 석탑(전북 익산)

첨성대(경북 경주)

백제 금동 대향로 (국립부여박물관)

1. 동트는 우리 역사 2. 삼국의 성립과 정치 발전 3. 남북국의 정치 발전 4. 경제 활동과 사회 모습 5. 폭넓은 대외 교류와 문화의 발전

우리 민족의 기원을 파악하며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의 특징과 생활 모습을 살펴보고, 고조선 이후 에 등장한 여러 나라의 모습을 비교할 수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의 발전 과정을 통해 고대 국가의 특성을 설명하고, 삼국 간의 항쟁을 거쳐 통일을 이루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통일 후 신라가 마련한 여러 제도와 정치의 발전을 살펴보고, 발해의 정치 체제와 발전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삼국과 남북국 시대의 경제 정책과 신분에 따른 경제 생활을 알아보고, 대외 교류 및 사회 발전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삼국과 남북국 시대에 불교, 유교, 도교 등 여러 사상과 다양한 분야의 문화가 발전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불국사(경북 경주)


1

동트는 우리 역사

선사 문화의 발전 구석기인의 만능 도구 주먹도끼! 인간의 손에 들린 이 돌덩이가 현대 문명의 산물인 휴대 전화로 바뀌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을까? 인류는 거대한 자연 앞에 비록 나약한 존재였지만 도구를 사 용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고 나아가 문명을 창조하였다. 그러기까지 수백 만 년이 흘렀다. 인류가 문명을 이루고 삶을 문자로 기록한 역사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불과 5, 6천 년 전에 시작되었다. 그 이전의 장구한 세월은 문자 기록이 없는 선사 시대로, 당시 인류의 삶은 유물과 유적을 통해 유추할 수밖에 없다. 선사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돌을 깨뜨려 도구를 만들다

인류는 나무나 동물의 뼈, 또는 돌을 다듬어 만든 석기를 도구로 이 용하였다. 석기는 제작 방법에 따라 뗀석기와 간석기로 구분하는데, 구석기 시대에는 뗀석기를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주먹도끼, 찍개 등과 같이 하나의 도구를 여러 용도로 사용했으나, 점차 자르개, 밀개, 찌르 개 등 쓰임새가 정해진 도구를 사용하였다. 발굴된 유적・유물을 조사 한 결과, 우리나라의 구석기 시대는 약 70만 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동아시아 지형은 약 1만 년 전쯤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무리 지어 살며 채집과 사냥을 하다

구석기인은 도구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불을 이용하고 언어를 구사하였다. 불을 이용하면서 추위와 맹수의 위협을 이겨 내고,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 었다. 언어를 사용하여 무리의 협동력을 높이고, 서로 떨어져 생활하는 무리 간 에 문화를 공유하고 경험을 전할 수 있었다. 구석기인은 추위와 비바람을 피해 주로 동굴이나 막집, 바위 그늘에 살았다. 채 집과 사냥을 하면서 무리 지어 살았으며, 더 나은 생활 환경을 찾아 오랜 세월에 걸 쳐 끊임없이 이동하였다. 한편, 구석기 시대 말부터 기온이 오르고 자연환경이 변화하였다. 사람들은 먹 슴베찌르개(경남 밀양, 충북 단 양 출토) 슴베란 칼, 낫 등의 자루 속에 박히는 부분을 말한다.

잇감을 따라 이동하거나 환경에 적응하면서 도구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슴베찌르개와 같이 나무나 뼈에 꽂아 쓰는 이음 도구를 제작했으며, 작고 빠른 짐 승을 잡기 위해 활을 발명하였다.

10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간석기를 만들고 토기를 굽다

기원전 8000년 무렵 자연환경과 기후 조건이 오늘날과 거의 비슷하게 변하고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신석기인은 돌을 갈아 다양한 모양의 간석기를 만들 었고 흙을 빚어 토기를 구웠다. 간석기는 뗀석기보다 더욱 정교했을 뿐만 아니라 손상된 부분을 손질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토기는 식량을 저장하거나 음식을 조 리하는 데 유용하였다.

가락바퀴(충북 청원 출토)

한반도 일대에서는 돌도끼, 돌화살촉 등 간석기와 더불어 이른 민무늬 토기, 덧 무늬 토기, 눌러찍기무늬 토기, 빗살무늬 토기 등 다양한 토기가 발견되고 있다. 또한, 뼈바늘을 비롯하여 실을 뽑는 도구인 가락바퀴도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이 옷을 만들어 입었음을 알 수 있다.

농사를 짓고 정착 생활을 하다

간석기(경북 울진, 강원

신석기 시대에는 인류가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여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는 단계

양양 출토)

에 이르렀다(신석기 혁명). 신석기 시대 초기에는 여전히 채집, 사냥, 물고기잡이 를 주로 했으나, 점차 농경과 목축이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우리나 라의 일부 신석기 유적에서 발견되는 탄화된 조, 피, 수수 등은 농경 생활이 이루 어졌음을 보여 준다. 농경과 함께 정착 생활이 시작되고 인구가 늘어났다. 한반도 일대에 살았던 신 석기인은 주로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었으며, 부족 사회를 형 성해 갔다. 부족 사회는 혈연에 바탕을 둔 씨족들 간에 족외혼을 통해 이루어졌으 며, 구성원이 함께 생산하고 함께 나누는 평등한 공동체였다.

빗살무늬 토기(서울 암사동 출토)

신석기 시대 움집을 복원한 모습(서울 암사동)과 신석기 시대의 밭 흔적(강원 고성 문암리)

1. 동트는 우리 역사

11


신앙과 예술이 싹트다

선사 시대의 인류는 원시적인 신앙과 예술 활동을 통해 자연이 주 는 두려움을 극복하려 했으며, 안전하고 풍요로운 삶을 꿈꾸었다. 구석기인은 사냥의 성공이나 다산을 기원하는 예술품을 남겼는 데, 공주 석장리와 단양 수양개에서 고래와 물고기 등을 새긴 조각 물고기모양을새긴예술품(단양수양개출토, 구석기시대)

이 발견되었다. 신석기 시대에는 종교나 예술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신석기 인은 농경과 밀접한 태양, 물 등의 자연물이나 자연 현상에 정령이 있다고 믿어 이를 숭배했고(애니미즘), 특정 동식물을 부족의 수호 신으로 섬겼으며(토테미즘), 무당과 그 주술을 믿었다(샤머니즘).

얼굴 모양 토제품(울진 죽변 출토, 신석기 시대)

조개껍데기 가면(부산 동 삼동 출토, 신석기 시대)

또한,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영혼과 조상을 숭배하였다. 이와 더불어 조개껍데기 가면이나 얼굴 모양 의 토제품 등과 같은 원시적인 예술품도 만들었다.

랴오닝 지역에 꽃핀 선사 문화 중국 황허 강 중류 지역에서 발굴된 신석기 시대 양사오 문화는 황허 문명의 원 류로 여겨진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이후 만리장성 밖 중국 동북 지역에서 수준 높은 선사 유물이 대거 발견되어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역사적으로‘동이(東 夷)’ 의 땅이었던 이 지역의 신석기 문화가 황허 강 지역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앞 서거나 비슷하였기 때문이다. 이들 문화 중 하나인 훙산 문화가 크게 꽃을 피웠던 시기는 기원전 3500~300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뉴허량(牛河梁)의 훙산 문화 유적지에서는 대규모의 돌무지무덤과 제단 이 발견되고 세련된 옥기들이 대량 출토되었는데, 황허 강 지역의 중국 문화와는 구별되는 성격을 지녔다.

훙산 문화 영역

이 일대의 선사 문화는 청동기 시대까지 이어지며, 한반도 지역에서 많이 보이는 신석기 시대의 빗 살무늬 토기나 청동기 시대의 돌무지무덤, 고인돌, 비파형 동검, 청동 거울 등도 대량으로 발굴되었다. 이는 만주, 한반도 일대가 오랜 기간 동안 문화적으로 많은 관련을 가지고 발전해 왔음을 보여 준다.

뉴허량 유적에서 출토된 여신상(얼굴 부분)

12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뉴허량 유적의 옥 귀고리와 빗살무늬 토기

전남 여수의 옥 귀고리와 강원 고성의 빗살무늬 토기


청동기의 사용과 국가의 출현 2008년 어느 날, 경북 청도 신당리 농토 밑에서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청동기 시대의 무덤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뼈는 모두 삭아 없어졌지만, 관 속에 있던 돌화살촉과 돌검은 무덤 주인의 치열했던 생전 모습을 보여 준다. 특히 돌화살촉은 머리 맡에서 부러진 채 발견되었는데, 이는 무덤 주인이 전투 중 머리에 화살을 맞고 사망했음을 암시한다. 이 전사는 왜 목숨을 걸고 위험한 전투에 나서야만 했을까? 그가 살았던 청동기 시대에 대해 알아보자. 청도 신당리 고인돌 발굴 당시의 모습과 돌검

청동기 문화가 확산되다

기원전 3000년경 큰 강 유역에서 이른바 세계 4대 문명이 출현하였다. 이들 큰 강 유역에서는 청동기가 사용되었고, ✽관개 농업이 발달하였으며 계급의 분화 가 이루어졌다. 또한, 도시 국가가 출현하고 문자를 사용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관개 농업

경작지에 인공적으로 물 관리 시설을 만들어 이용하는 농업 방식이다.

청동기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기원전 2000년에서 1500년 무렵에는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도 청동기 문화가 시작되었다. 비파형 동검은 이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대표적인 청동기이다. 이 무렵 일부 지역에서 벼농사가 시작되는 등 농경이 더욱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간석기와 토기도 더욱 다양해져 반달 돌칼, 민무늬 토기 등이 만들어졌다. 농경이 발달함에 따라 잉여 생산물이 발생하면서 토지와 생산물에 대한 사유 개념이 나타나 빈부의 차이가 생기고 계급이 분화되었다. 정복 활동이 활발해지

반달 돌칼(국립중앙박물관)

면서 점차 계급 분화가 뚜렷해지고, 막강한 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지배자인 군장 이 등장하였다. 거대한 고인돌은 당시 지배층이 누렸던 권력과 부의 크기를 반영 한 것으로 이해된다. 군장은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며 권위를 세웠고, 천손 사상을 내세워 주 변 부족들을 통합하였다. 이에 사회 규모는 더욱 커졌고 국가도 출현하였다. 고조선은 이 시기에 출현한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 였다. 탁자식 고인돌(중국 랴오닝 성)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민무늬 토기(경기 하남 출토)

대표적인 무덤 양식이다.

1. 동트는 우리 역사

13


철기가 보급되다

기원전 5세기경부터 한반도와 만주 등지에서 철기가 사용되었다. 철기 의 보급으로 청동기는 주로 의식용 도구로 사용되었다. 철제 농기구와 무 기의 보급으로 농업 생산력이 크게 향상되어 경제 기반이 확대되었고, 정 복 전쟁도 활발해졌다. 이에 따라 교역이 확대되고, 부족 사회의 통합도 촉진되었다.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는 부여, 고구 비파형 동검(중국 랴

세형 동검(충남 아

오닝 성 출토) 만주, 한반 산 출토) 주로 청천 도에 걸쳐 발견되고 있다. 강 이남에서 발견되어 이는 이 지역이 청동기 시 한국식 동검이라고도 대에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한다.

려, 삼한 등 여러 나라가 등장하였다. 한편, 철기와 함께 출토되는 명도전, 반량전 등을 통해 당시 중국과 활 발하게 교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경남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나온 붓은 당시 한자도 사용했음을 보여 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청동기 문화

보여준다.

는 한반도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비파형 동검은 세형 동검으로, 거친무늬 거울은 잔무늬 거울로 변하였다. 청동 제품을 만드는 틀인 거푸 집도 전국 여러 유적에서 발굴되고 있다.

청동기, 철기 시대의 예술

청동기, 철기 시대의 예술은 종교나 정치적 요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당시 제사장이나 군장이 사용하던 청동으로 된 거울, 방울, 검 등은 그들의 권위를 과 독무덤(경남 창원 출토) 독무 덤은 신석기 시대부터 만들어졌으 며, 널무덤과 함께 철기 시대의 대 표적인 무덤 양식이다.

시하는 의식용 도구였다. 아울러 당시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껴묻거리는 사후 세 계에 대한 믿음을 보여 준다. 이 시기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망과 기원을 담아 바위그림을 남겼다. 울주 대곡 리 반구대 바위그림에는 야생 동물, 가축, 고래 등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사냥과 물고기잡이의 성공과 풍요를 기원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전해 준 다. 고령 장기리 바위그림에는 각종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중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곳은 태양을 숭배하며 농업의 풍요를 비는 제 사 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령 장기리 바위그림 울주 대곡리 반구대 바위그림(탁본) 새끼를 등에 업은 고래, 물을 뿜 는 고래 등 그 생태까지 정확히 묘사되어 있다.

14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한민족(韓民族)의 조상은 누구일까? 오늘날 한국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민족의 조상은 누구일까? 이들을 찾아 시간을 거슬러 여행 한다면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 사는 사람을 만나게 될까? 1972년 평남 덕천 승리산 동굴에서 후기 구석기 시대 사람의 아래턱뼈가 발견되었다. 이 뼈의 주인공(승리산 사람)은 한민족의 조상일까? 구석기 시대에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한민족의 조상일까? 구석기 시대의 이른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현생 인류가 아니기 때문에 직접 조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구석기 시대의 가장 늦은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한민족의 직접 조 상일까?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이들이 한민족 의 조상이라는 결정적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이들 중에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고 기온 상승에 따른 환 경 변화에 적응하여 살아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발굴된 사람의 머리털이나 턱뼈, 머리뼈 등을 조사한 결과, 현재 한국

승리산인의 얼굴 복원 모형과 아래턱뼈(평남 덕천 출토) 후기 구석기 시대 사람으로 호모 사 피엔스 사피엔스에 해당한다.

인과 체질상 큰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 만 이들이 한민족의 조상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증거와 연구가 필요하다. 우리 민족 형성의 기초를 이룬 사람들은? 부여는 …… 그 도장에 예왕지인(濊王之印: 예왕의 인장)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 나라에는 오래된 성이 있는데, 이름을 예성(濊城)이라 고 한다. 본래 예맥의 지역인데, 부여가 그 가운데 왕으로 있었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는 전기에 덧 무늬 토기, 그 이후 빗살무늬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며 농경 생활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발견된 인골과 옥기(부 산 가덕도 출토) 약 48기의 인골과 옥제품 6점, 흑요석제 500여 점,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을 영위하는 주민이 널리 정착하여 살았다. 이들이 한민족 형성의 기초를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후로 수천 년이 흐르면서 이 지역에는 비파형 동검, 고인돌 등으로 대표되는 청동기 문화가 등 장하였다. 이 문화의 주인공이 중국의 고대 문헌에 등장하는 예(濊), 맥(貊), 한(韓) 등의 종족이다. 이들 종족이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삼한 등 여러 나라를 세웠고, 오늘날 한민족의 주류를 이룬 것 으로 보인다.

1

신석기 시대 이래로 만주, 한반도 일대의 주민은 오랫동안 같은 문화권을 이루며 생활하였다. 이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발굴되는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의 유물・유적은 어떤 것이 있는지 조사해 보자.

1. 동트는 우리 역사

15


고조선의 성립과 발전

미송리식 토기 (평북 의주 출토)

비파형 동검(황해신천출토)

고인돌(강화 부근리)

입은 하늘로 넓게 벌어지고 둥근 몸통에 앙증맞은 손잡이가 달린 미 송리식 토기, 부드러운 곡선이 돋보이는 비파형 동검, 돌을 괴어 만 든 거대한 고인돌. 독특한 개성을 지닌 이 유물들이 만나는 곳은 바로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터 잡고 살던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지역이다. 이 터에 서 일어난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 고조선은 어떻게 발전하였을까?

고조선,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하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

단군의 건국에 관한 기록은“삼 국유사” ,“제왕운기” ,“동국여지 승람”등 여러 문헌에 실려 있다.

“삼국유사” 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기원전 2333). 단군왕 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로 단군은 제사장, 왕검은 정치적 지배자를 뜻한다. 단군 신화에는 환웅 부족과 곰 토템 부족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 건국 과정과 지배 계 급의 출현, 농경 사회의 모습 등이 반영되어 있다. 이는 고조선이 청동기 문화와 농경 문화를 바탕으로 성립되었음을 보여 준다. 단군이 이끄는 집단은 천손 사상을 앞세워 주변의 군장 사회를 정복하거나 연 맹을 맺으면서 점차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 과정에서‘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 라는 홍익인간 이념을 내세우며 새로운 사회 질서를 형성해 갔다. 고조선은 랴오닝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주변 지역을 통합하면서 한반 도 북부 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비파형 동검이나 고인돌의 분포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고조선은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철기 문화를 수용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이 에 따라 기원전 3세기에는 부왕, 준왕과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

✽전국(戰國) 7웅

중국이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다투던 전국 시대(기원전 403~

했으며, 상(相), 대부(大夫), 장군(將軍) 등의 관직도 두었다. 또한, 중국의 ✽전국 7웅 중 하나인 연(燕)과 대적할 만큼 강성하였다.

기원전 221)에 패권을 다투던 진, 초, 연, 제, 한, 위, 조 일곱 나 라를 말한다.

위만, 고조선의 권력을 잡다

전국 시대 이후 진・한 교체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혼란이 계속되자, 이를 피해 고조선으로 넘어오는 유이민이 늘어났다.

16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기원전 2세기에 위만이 무리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에 들어오자, 준왕은 이들을 받아들여 서쪽 변경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이주민 세력을 통솔하 면서 세력을 키운 ✽위만은 수도인 왕검성을 공격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

✽위만

위만은 왕이 된 뒤에도 나라 이

이 되었다(기원전 194).

름을 그대로 조선이라 했고, 그

위만 조선은 발달한 철기 문화를 적극 수용하여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해 갔다. 또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여 영토를 넓혔고, 중국의 한(漢)과 남방의 진(辰) 사이에서 중계 무역으로 이익을 얻었다. 고조선의 경제・군사적 발 전에 불안을 느낀 한 무제는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침공하였다. 고조선은 1년여

의 정권에는 토착민 출신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자가 많았다. 이러한 점에서 위만의 조선은 단군의 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안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지배층의 내분으로 멸망하였다(기원전 108). 그 후 한 이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해 지배하자 급격한 사회 변동이 일어났다. 한 군현의 억압과 수탈에 맞서 토착민의 저항도 이어졌다. 8조법 (고조선에는) 백성에게 금하는 법 8조가 있다.

고조선 사회의 이모저모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

고조선에는 사회의 기본 질서를 유지하는 8조법이 있었다.

힌 자는 곡식으로 갚는다.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중국의“한서” 에는 그중 생명, 신체, 재산에 관한 3조항과 더불

삼는다. 이를 용서받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마다

어 여자들이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는 등의 내용이 기록되

50만 전을 내야 한다. 비록 용서를 받아 보통 백

어 있다. 이는 고조선 사회가 개인의 생명과 노동력, 사유 재산

성이 되어도 풍속에 역시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 여 결혼을 하고자 하여도 짝을 구할 수 없다. ……

을 중시하였으며, 형벌과 노비가 존재한 계급 사회였음을 보여

여자들은 모두 정숙하여 음란하고 편벽된 짓을 하

준다. 또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가족 제도가 성립했음을 짐작하

지 않았다.

게 한다. 한편, 한 군현이 설치된 이후 토착민의 저항이 거세지 면서 8조에 불과하던 법은 60여 조로 늘어났다.

-“한서”-

밑줄 친 부분을 참고하여 당시의 사회 모습을 알아보자.

고조선을 멸망시켰는데도 한의 장수들은 왜 처벌받았을까? 기원전 108년, 한은 그동안 눈엣가시로 여겼던 고조선을 마침내 멸망시켰다. 그런데 고조선 공격에 나섰던 한의 장수들은 저잣거리에서 처형된 후 시신이 버려지거나 평민으로 강등되는 등 오히려 처벌을 받았다. 이는 장수들이 공을 다투어 계책이 어긋나는 바람에 많은 군사를 잃었기 때 문이다. 한은 5만여 명의 육군과 7천여 명의 수군을 보내어 고조선을 공격하였는데, 험한 지세를 이용한 고조선의 작전에 말려 크게 패하였다. 예상 외로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한은 고조선의 지배층을 회유, 매수하였다. 고조선 내부에서도 긴 전쟁에 불안을 느껴 화친을 주장하는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우거왕을 살해하고 한에 투항하였다. 그 후에도 고조선은 계속 항전했으나 내부에서 분열 이 일어나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었다. 이처럼 고조선의 멸망은 한의 군사적 성공보다는 지배층의 분열 등 내부 문제가 더 큰 영향을 미

한의 기마병상(중국 셴양박물관)

친 측면이 있다. 한은 승리하기는 했지만 큰 대가를 치러야만 하였다. 고조선은 중국의 막강한 통일 제국이었던 한의 침략에 맞서 1년 넘게 저항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국력을 지닌 국가였다.

1. 동트는 우리 역사

17


여러 나라의 성립과 발전 •(부여) 흰 옷을 즐겨 입어,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 을 신는다. •(고구려) 부여의 별종(別種)이라 하는데, 말이나 풍속 따위는 부여와 많이 같지만 기질이나 옷차림이 다르다. •(옥저) 말은 고구려와 대체로 같지만 경우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예) 노인들은 예로부터 스스로 일컫기를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고 하였다. •(한) 해마다 5월이면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떼를 지어 노래 와 춤을 즐기고 술을 마시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

중국인의 눈에 비친 여러 나라의 특징이다. 철기 문화가 발전하면서 만주와 한반도 곳곳에서 여러 나라가 성장해 갔다. 그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여러 나라의 성장

연맹 왕국으로 성장한 부여

부여는 쑹화 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농경과 목축을 주로 하고, 말・주옥・모피를 수출하며 경제적으로 비교적 풍요로웠다. 1세기 초에는 왕호를 사용했으며,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 등 발전된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부여에는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이들 가(加)는 별도로 사출도(四出道)를 다스렸는데, 큰 곳은 수천 가(家)였고 작은 곳은 수백 가(家)였다. 가들은 왕을 선출하기도 하고 흉년이 들면 왕에게 그 책임을 묻기도 하였다. 왕이 나온 대표 부족의 세력은 매우 강해 서 궁궐, 창고, 감옥 등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왕이 죽으면 많은 껴묻거리와 함께 사람들을 순장하기도 하였다. 부여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다. 이는 하늘을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으로 추수 감사제와 같은 성격을 띠었으나, 12월에 개최된 점으로 볼 때 수렵 사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때 노래와 춤을 즐 겼으며 죄수를 풀어 주기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제

부여의 법 형벌은 엄하고 각박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사

천 의식을 치렀고, 소를 죽여 그 굽으로 점을 치기도 하였다. 한

형에 처하고, 집안 사람은 노비로 삼는다. 도둑질

편, 부여의 법으로는 고조선의 법과 비슷한 4조목이 전해지고

을 하면 물건의 12배를 변상하게 하였다.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모두 죽였다. 투기는 더

있다.

욱 증오해서 죽인 후 시체를 나라의 남산 위에 버

부여는 3세기 말 선비족의 침입으로 세력이 위축되었고, 5세

려서 썩게 한다. 친정집에서 시체를 가져가려면

기 말에 결국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비록 연맹 왕국 단계에서

소나 말을 바쳐야 한다.

멸망하였지만 부여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우리 역사에서 -“삼국지”위서 동이전 -

부여 법과 고조선 8조법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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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고조선 다음으로 출현한 국가이며, 고구려나 백제의 건국 세력 은 부여의 후예임을 자처하였다.


활발히 정복 활동을 펼친 고구려

“삼국사기” 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에서 남쪽으로 고구려와 부여에 대한

내려온 주몽이 건국하였다(기원전 37). 고구려가 처음 자리 잡 은 곳은 압록강의 지류인 훈장 강 유역의 졸본(환런) 지방이었

중국의 상반된 기록 •(고구려)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은

다. 이 일대는 산악 지대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넉

없다. 좋은 전지(田地)가 없어 부지런히 농사를

넉하지 못하였다.

지어도 식량이 넉넉하지 못하다. 사람들의 성품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면서 평야 지대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압록강 가의 국내성

이 흉악하고 급해서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부여) 사람들 체격이 매우 크고 성품이 강직 용 맹하며 근엄하고 후덕해 다른 나라를 노략질하

으로 수도를 옮기고, 5부 연맹을 토대로 발전하였다. 그 후 주변

지 않는다.

의 작은 나라들을 적극적으로 아우르고 한 군현을 공략하는 등

-“삼국지”위서 동이전 -

중국이 두 나라에 대해 상반된 기록을 남긴 이 유는 무엇일까?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였다. 고구려도 부여와 마찬가지로 왕 아래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

들이 있었다. 이들은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리를 거느렸다. 그리고 중대한 범죄 자가 있으면 제가(諸加)들이 회의를 열어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노비로 삼았다. 풍 속으로는 서옥제가 있었는데, 남자가 혼인을 한 뒤 일정 기간 처가에서 살다가 가 족을 데리고 남자 집으로 돌아가는 혼인 형태였다. 또 건국 시조인 주몽과 그 어머 니인 유화부인을 조상신으로 섬겼으며, 10월에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치렀다.

오녀산성(중국 랴오닝 성)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졸본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산의 높이는 해발 820m에 이른다. 산성은 3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였으며, 험준한 산길로만 접근이 가능하다.

연맹 왕국이란 무엇일까? 연맹 왕국이란 족장(군장)이 다스리는 여러 소국이 하나의 맹 주국을 중심으로 연맹체를 구성하고 연맹의 대표(왕)를 선출하 는 형태의 국가 발전 단계를 일컫는다. 연맹 왕국은 군사, 외교 등 대외적 활동은 왕을 중심으로 공동 대응했으나, 각 족장 세력들이 자기 부족에 대해 독자적인 지배

권을 행사하였다. 이 때문에 왕이라고 하더라도 연맹 내의 다른 부족에 대하여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부여, 고구려는 연맹 왕 국으로 발전했지만, 동예, 옥저, 삼한의 소국들은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야에 흡수되었다.

1. 동트는 우리 역사

19


연맹 왕국으로 성장하지 못한 옥저와 동예

옥저와 동예는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 토지가 비옥하고 어물, 소금 등 해산물이 풍부하여 경제 생활이 윤택하였 다. 그러나 변방에 치우쳐 있어 선진 문화를 수용하는 데 늦었으며, 일찍 부터 고구려의 압력을 받다가 훗날 흡수되었다. 왕은 없었으며 읍락마다 읍군, 삼로라고 불리는 군장이 있었다. 옥저와 동예는 대체로 언어와 습속이 고구려와 비슷했으나, 각자 독특 한 풍속을 지니고 있었다. 옥저의 혼인 풍속으로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또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가매장하였다가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 공동 무덤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는 매장 풍습이 있었다. 아울러 목곽 입구에 철(凸)자형 집터와 여(呂)자형 집터(강원 강

는 죽은 자의 양식으로 쌀을 담은 항아리를 매달아 놓기도 하였다.

릉) 동예의 생활 흔적이다.

동예는 명주와 삼베를 짜는 방직 기술이 발달했으며, 특산물로 단궁이 ✽과하마, 반어피

과하마는 말을 타고 과일나무 아래를 지날 수 있다는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키가 작은 말을 뜻한다. 반어피는 바다표범 가죽 을 가리킨다.

라는 활과 ✽과하마, ✽반어피 등이 유명하였다. 씨족 사회의 전통이 남아 있어 족 외혼을 엄격하게 지켰으며, 다른 부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했을 때에는 책화라 고 하여 노비나 소, 말로 배상하게 하였다. 또한, 산천을 중시하여 산과 내마다 구 분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해마다 10월에는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 었다.

여러 나라의 혼인 풍속 그 나라(옥저)의 혼인 풍속은 여자 나이 10살이 되기 전에 혼인을 약

혼인은 말로 미리 정하고 여자 집에서 본채 뒤편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그 집을 서옥이라고 부른다.

속하는 것이다. 신랑 집에서는 여

…… (신랑은) 자식을 낳아서 장성

자를 맞이하여 성장하면 길러 아

하면 아내를 데리고 신랑 집

내로 삼는다. 여자가 어른이 되면

으로 돌아간다.

친정으로 되돌려 보낸다. 친정에서는

-“삼국지”위서 동이전, 고구려 -

돈을 요구하는데, 신랑 집에서 돈을 지불한 뒤 다시 신랑 집으로 돌아온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옥저 -

옥저의 민며느리제와 고구려의 서옥제에 대한 기록이다. 두 혼인 풍속은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같다. 즉 노동력이 귀했던 시절, 혼인으로 인해 신부 집안에 발생하는 노동력 손실을 신랑 측에서 어느 정도 보상해 주었던 것이다. 한편, 부여와 고구려에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의 아내(형수)와 결혼하는 형사취수제가 있었다. 이는 가족 구성원을 보호하고 재 산이나 인력이 다른 집안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려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형사취수제는 사회가 발전하면서 점차 사라졌다. 고 대의 혼인 풍속들은 얼핏 불합리해 보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사회・경제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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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백제, 신라, 가야 성장의 토대가 된 삼한

고조선 남쪽에는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진(辰)이 성장하고 있었다. 고조선 사 회의 변동에 따라 많은 유이민이 남하했고, 이들이 가진 철기 문화와 토착 문화가 결합하면서 사회 발전이 촉진되었다. 그 결과 마한, 진한, 변한이 등장하였다. ✽

삼한 중에서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으며, 마한의 소국 중 하나인 목지국의 지

배자가 마한왕 또는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를 주도하였다. 그 밖에 세력 크 기에 따라 신지, 읍차 등 정치적 지배자가 있었다. 이와 별도로 삼한에는 제사장

✽삼한의 위치와 규모

마한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방에서 발전했으며,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다. 진한은 대 구,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변한 은 낙동강 하류의 김해, 창원 지 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각각 12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었다.

인 천군과 신성 지역인 소도가 있었다. 천군은 농경과 종교에 대한 의례를 주관하 였다. 한편, 소도에는 정치적 지배자의 권력이 미치지 못했으므로 죄인이 도망해 숨더라도 잡아갈 수 없었다. 이러한 천군과 소도의 존재를 통해 삼한이 제정 분리 사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한은 철기 문화에 기반을 둔 농경 사회였다.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였고 벼농 사도 발달하였다. 해마다 씨를 뿌리고 난 뒤인 5월 수릿날과 가을걷이를 마치는 10 월에는 계절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제천 행사 때에는 온 나라 사 람이 모여 술과 음식을 마련하고 춤과 노래를 즐겼다. 한편, 변한 지역에는 철이 많 이 생산되어 화폐처럼 쓰였고 낙랑군과 왜 등에 수출하였다. 철기 문화가 발달하면서 삼한 사회도 변화하였다. 마한은 한강 유역에서 일어 난 백제에 통합되었고, 변한 지역에서는 구야국이, 진한 지역에서는 사로국이 성 장하였다. 솟대(강원 강릉) 장대를 세우고 그 위에 새의 형상을 올려 놓았다. 고대 사회에서 새는 하늘과 사람을 이어 주는 존재로 여겨졌다. 삼한의 소도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삼한 사회의 변화 1 고조선 유이민의 남하

2 천군과 소도

•조선 후(侯) 준(준왕)이 분수를 모르고 왕을 칭하다가 연에서 망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國邑)에 각각 한 사람씩

명한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기자, 그 측근 신하와 궁

을 세워서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

인들을 거느리고 달아나 한(韓) 땅에 들어가 스스로 한왕이라고

를 천군이라고 부른다. 또 여러 나라에는 각기 별읍

불렀다.

(別邑)이 있으니 그것을 소도라고 한다. 큰 나무를 세

•일찍이 우거(고조선 마지막 왕)가 아직 격파되기 전에 조선상

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도망

(朝鮮相)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하여 그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누구든 돌려보내지 아

진국(辰國)으로 갔다. 그때 백성 중 그를 따라가 산 사람이 2천

니하였다.

여 호나 되었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

-“삼국지”위서 동이전 -

➊ [자료 1]에 나타난 고조선의 정치적 변동이 한강 이남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추론해 보자. ➋ [자료 2]를 통해 알 수 있는 삼한 사회의 성격을 설명해 보자.

1. 동트는 우리 역사

21


2

삼국의 성립과 정치 발전

삼국과 가야의 성장 소국들이 모여 연맹체를 이루고, 나아가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도표이 다. 연맹 왕국 단계까지는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던 족장들이 고대 국가의 단계에서는 왕권에 복속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고조선 건국 이후 이러한 발전 과정을 거쳐 고대 국가로 성장한 나라는 고구려, 백제, 신 라뿐이었다. 부여와 가야는 5, 6세기까지 존

소국

속하였지만 고대 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채, 연맹 왕국 단계에서 각각 고구려와 백제, 신 라에 흡수되었다. 고대 국가의 특징은 무엇이 연맹 왕국

고대 국가

며, 삼국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는지 알아보자.

국가의 발전 과정

삼국, 고대 국가로 성장하다

삼국은 초기부터 주변 소국을 활발히 정복하면서 영역을 넓혔고, 이를 주도한 국왕의 권력도 점차 강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연맹 왕국 단계에서 벗어나 중앙 집 권적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다. 고대 국가에서는 왕위 세습권이 확립되고, 족장 세력은 왕권에 복속되어 중앙 의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 관제가 정비되고 관리의 복색과 관등이 제정되었다. 아울러 확대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지방 조직도 정비 되었다. 나아가 삼국은 율령을 제정하여 관습법 중심으로 운영되던 국가 통치 체제를 고구려의 계단식 돌무지무덤 (위, 중국 지린 성)과 백제의 석촌 동 돌무지무덤(아래, 서울 송파) 두 무덤 양식이 비슷한 것은 백제

성문화하였다. 부족별로 서로 달랐던 토착 신앙 대신 불교를 국가 종교로 수용하 여 국왕 중심의 지배 이념을 확립하고, 사회의 통합을 도모하였다. 삼국 중 가장 먼저 고대 국가로 발전한 나라는 고구려이며, 백제와 신라가 그 뒤를 이었다.

건국 세력이 고구려계 유이민과 관련 있음을 뒷받침한다.

고구려, 앞서서 고대 국가로 성장하다

건국 초부터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했던 고구려는 1세기경 태조왕 때 이르러 한 단계 높은 국가 발전을 이루었다. 태조왕 때에는 요동 지방으로 진출을 도모했 ✽5부의 변화

순노부, 소노부, 관노부, 절노 부, 계루부의 5부가 행정적 성 격을 지닌 동부, 서부, 남부, 북 부, 중부의 5부로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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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부전고원을 넘어 옥저를 복속하여 경제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에 왕권이 크게 강화되어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게 되었다. 2세기 후반 고국천왕 때에는 체제 개혁을 추진하여 부족적인 전통의

5부를

행정적인 5부로 개편했고, 왕위 계승도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꾸었다.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고구려는 3세기에 위(魏)의 침입으로 한때 큰 위기를 맞았으나 이를 극복했고, 4세기 초 미천왕 때에는 중국이 ✽5호 16국으로 나뉘어 혼란한 틈을 타 대외 팽창 을 시도하였다. 이때에 낙랑을 공격하여 중국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고, 대동강 유 역을 확보하여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5호 16국 시대

4세기 초~5세기 중엽 다섯 북 방 민족이 중국의 북부를 차지 하고 흥망을 거듭했던 시대이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는 전연(선비족)과 백제의 연이은 공격으로 고국원왕이 전 사하는 등 큰 위기에 처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소수림왕은 전진과 수교하여 대외 관계를 안정시키고, 불교를 수용하여 국가적 일체감을 높였다. 아울러 태학 을 설립하고 율령을 반포하여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백제,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일어나다

“삼국사기” 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주몽의 아들 온조가 하 남 위례성에서 건국하였다(기원전 18). 이는 고구려 계통의 유이 민 세력과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하여 백제를 세웠음을 의미한다. 마한의 여러 소국 중 하나로 출발한 백제는 농경과 교 통에 유리한 한강 유역을 발판으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3세기 고이왕은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한 군현과 항쟁하였다. 또한, 6좌평의 관제를 마련하고 관리의 복색을 제정하는 등 지 배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4세기 후반 근초고왕은 남으로 마한을 통합하고, 북으로 고구 려의 평양을 공격하여 중국-백제-가야-왜를 연결하는 해상 교역

백제의 발전(4세기) 4세기 백제의 요서 진출에 대한 내용은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다.

로를 확보하였다. 또한, 백제는 동진과 국교를 맺었으며 요서에 진출하고 규슈와 교류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이 무렵 왕권은 더욱 강 화되어 부자 상속의 왕위 계승이 확립되었고, 침류왕 때에는 불교가 공인되었다.

고대 국가 성립 시기의 특징 1 고구려 태조왕의 정복 활동

2 백제 고이왕의 관등제 정비

동옥저를 정벌하여 그 땅을 취하고 성읍을 만들

내신 좌평을 두어 왕명 출납을, 내두 좌평은 물자와 창고를, 내

며 국경을 개척하였는데, 동으로는 창해(동해)에 이

법 좌평은 예법과 의식을, 위사 좌평은 숙위 병사를, 조정 좌평은

르고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렀다. …… 왕이 군사를

형벌과 송사를, 병관 좌평은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각각 맡게 하

일으켜 요동 서안평을 습격하고, 대방령을 죽이고

였다. …… 왕이 영(令)을 내려 6품 이상은 자줏빛 옷을 입고 은꽃

낙랑 태수의 처자를 잡아 왔다.

으로 관을 장식하고, 11품 이상은 붉은 옷을, 16품 이상은 푸른 옷 -“삼국사기”-

을 입게 하였다.

-“삼국사기”-

➊ [자료 1, 2]를 참고하여 고대 국가 성립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습을 말해 보자.

2. 삼국의 성립과 정치 발전

23


신라, 김씨의 왕위 세습권이 확립되다

신라는 진한의 소국 중 하나였던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다.“삼국사기” 에 따르 면,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하였다(기원전 57). 초기의 신라는 ✽박・석・김의 세 성씨 중에서 이사금을 선출하였다. 4세기 후반 내물왕은 밖으로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여 낙동강 동 쪽의 진한 지역을 장악하고, 안으로 왕권을 크게 강화하여 김씨의 왕위 세습권을 확립하였다. 나아가 왕의 칭호를 이사금에서 대수 장(大首長)을 뜻하는 마립간으로 바꾸었다. 이때 가야, 왜의 연합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자,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도움을 받아 이를 물 호우명 그릇(국립중앙박물관) 경주의 호우총에서 발굴된 것으로 밑바닥에‘광개토지호태왕(廣開土地好太

리쳤다. 이로 인해 신라는 한동안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다.

王)’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보여 준다.

연맹 왕국 단계에 머무른 가야

낙동강 하류의 변한 지역은 철기 문화와 농경이 발전하였다. 이를 토대로 성장 ✽박・석・김의 세 성씨

박혁거세 집단, 석탈해 집단, 김 알지 집단을 말한다.

한 소국들은 3세기경 김해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 왕국을 이루었다(전기 가 야 연맹). 가야는 풍부하게 생산되는 철과 해상 교통에 유리한 점을 이용하여 낙 랑군과 왜를 연결하는 중계 무역을 하면서 수준 높은 철기 문화를 발전시켰다. 전기 가야 연맹은 5세기 무렵 신라를 지원해 온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쇠퇴 했고, 5세기 후반 이후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형성되었다. 내륙 지역에 있었던 대가야는 고구려군으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았으며 풍부한 철산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대가야는 중국, 왜와 교역하며 삼국이 경쟁하 는 틈을 타서 세력을 넓히기도 하였다.

덩이쇠(경남 함안 출토) 불에 녹여 각종 무기와 농기구를 생산 할 수 있었고 화폐로 사용되기도

그러나 가야는 소국들의 독립성이 강해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채, 백제와 신라의 팽창 압력에 시달리다가 결국 신라에게 흡수되었다.

하였다.

말갖춤(경북 고령 출토)

말 머리 가리개 (부산 복천동 출토)

삼지창(부산 복천동 출토) 가야 연맹의 중심 세력 변화

가야의 유적에서는 철로 만든 말 머리 가리개, 철제 갑옷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가야의 철기 문화가 높은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24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철제 갑옷과 투구 (경남 김해 출토)


삼국의 통치 체제는 어떠하였을까? 삼국은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로 성장하면서 왕을 중심으로 일원적 통치 체제를 갖추고, 정복한 영 토를 행정 구역으로 편입하여 다스렸다. 삼국의 통치 체제와 그 특징에 대해 알아보자. 중앙 관제와 관등제가 정비되다 삼국 시대에는 족장 세력이 중앙 관리로 전환되면서 관제와 관등제가 정비되 고, 각 부의 부족적 성격은 행정적 성격으로 바뀌었다. 고구려는 4세기 무렵 대대 로 이하 10여 관등을 두었고, 백제는 3세기 때 이미 6좌평제와 16관등제의 기본 틀 을 갖추었다. 신라는 필요에 따라 행정 기구를 설치해 나갔으며, 6세기에 이르러 17관등제를 정비하고 귀족 세력의 대표로 상대등을 두었다. 한편, 관등제에는 족 장 세력들이 중앙 집권 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특권을 보장하려는 의도

관등제

가 반영되어 있었다. 귀족 회의 제도가 발달하다 왕권이 강화되었지만 귀족의 영향력도 여전하였다. 고구 려에는 제가 회의, 백제에는 정사암 회의, 신라에는 화백 회 의가 있어, 귀족들이 모여 대표를 선출하고 국가의 중요 정 책을 결정하였다. 특히 신라의 화백 회의는 만장일치제로 귀 족의 단결을 강조하였다. 귀족 회의의 존재는 삼국의 정치가 국왕 중심의 귀족 정치였음을 보여 준다. 군사적 성격을 띤 지방 행정 조직 삼국은 정복한 지역을 세력 크기에 따라 행정 구역을 정 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지배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최상급 지

국왕은 귀족 회의의 대표 선출에 간섭할 수 없었 다. 고구려에서는 대대로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귀족 들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도 국왕은 궁궐 문을 닫아걸 뿐 개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국가

수도

지방

특수 행정

고구려

5부

5부

3경

방 행정 단위인 부, 방, 주 아래 성이나 군까지는 지방관이 파견되었지만, 말단

백제

5부

5방

22담로

행정 단위인 촌은 지방관 대신 토착 세력인 촌주가 행정과 실무 처리를 담당하

신라

6부

5주

2소경

였다.

삼국의 행정 구역

한편, 지방 행정 조직은 군사적 성격이 강하여 각 지방관은 군대의 지휘관 역할 도 겸하였다. 이는 삼국의 주민 통치가 군사적 지배의 성격이 강했음을 의미한다.

1

귀족 회의의 기능을 참고하여 삼국 정치의 특징을 설명해 보자.

2

삼국의 지방 행정 조직이 군사적 성격을 띠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2. 삼국의 성립과 정치 발전

25


삼국의 교류와 경쟁 한강의 주인이 시기별로 바뀌었음을 보여 주는 흔 고구려의 군사 시설인 아차산 4보루(복원, 5세기)

적이다. 한강 유역은 농사가 잘 되어 인구가 많았고, 교통에 유리 했으며 군사적 요충지였다.

아차산성

이에 삼국은 오랫동안 한강을 두

풍납토성

고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기도 했던

석촌동 고분군

삼국 간의 경쟁은 어떻게 전개되었

남한산성

을까?

신라 진흥왕이 세운

백제가 초기에 쌓은 몽촌토성

북한산 순수비(6세기)

(3세기 말~4세기 초)

삼국의 경쟁이 치열해지다

삼국은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쳤다. 4세기 후반 주 변 소국에 대한 정복과 통합이 마무리되고 삼국의 영역이 서로 맞닿게 되면서 본 ✽남북조 시대

5세기 초 ~ 6세기 말 중국이 한

격적인 항쟁이 전개되었다. 이때 중국은 5호 16국 시대에서 ✽남북조 시대에 이르

족의 남조와 북방 민족의 북조

는 분열기였다. 삼국은 중국의 분열과 혼란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국력을 더욱 발

로 나뉘어 대립하던 시대이다.

전시켰다. 삼국 간의 항쟁에서 먼저 주도권을 잡은 국가는 한강 유역에서 출발한 백제였 다. 그러나 5세기에 고구려의 국력이 크게 팽창하고, 6세기에는 신라가 비약적으 로 발전하였다. 삼국은 필요에 따라 동맹을 맺기도 하면서 경 쟁하였다. 고구려,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쥐다

고구려는 4세기에 전연과 백제의 침입으로 국가적 위기를 맞이했으나 소수림왕의 개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이후 광개 토 대왕 때에는 정복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광개토 대왕은 남으로 백제를 압박하고 신라를 도와 왜군 을 물리쳤다. 나아가 백제・왜와 연결된 가야를 공격한 뒤 한 반도 남부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또한, 거란과 후연 등을 격파 함으로써 요동과 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처럼 동아시아에서 지배권을 확대한 광개토 대왕은 독자 적 연호인‘영락(永樂)’ 을 사용하여 고구려의 높은 위상을 드 고구려의 발전(5세기)

26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러냈다.


그 뒤를 이은 장수왕은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중국의 남북조와 동시에 교류 하고, 북방 유목 민족과도 폭넓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적극적인 남진 정책 을 실시하여 평양으로 천도하고(427), 백제를 밀어내고 한강 유역을 장악하였다 (475).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진출은 광개토 대왕릉비와 충주 고구려비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대외 팽창을 통해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백제, 중흥을 도모하다

백제는 5세기에 고구려의 팽창으로 위기를 맞았다. 이에 신라와 나・제 동맹을 맺어 맞섰지만(433), 결국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밀려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웅진 으로 천도하였다(475). 이후 대외 활동이 위축된 채 내부 혼란을 겪다가 6세기 무 렵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은 나・제 동맹을 강화하고 중국 남조와 국교를 재개하였다. 그 뒤를 이은

백제의 수도 이전

무령왕은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 통제를 강화하였다. 성왕은 대외 진출에 유리한 사비로 천도하고, 부여 계승 의식을 내세우며 국호 를 남부여로 선포하였다. 아울러 ✽중앙과 지방 통치 조직을 재정비하고, 불교를 적극 장려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정세가 불안한 틈을 타 신라와 협공하여 한강

✽성왕의 체제 정비

중앙 관청을 22부로 확대 정비 하고 수도를 5부, 지방을 5방으 로 정비하였다.

하류를 되찾았으나, 곧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천하의 중심은 고구려 •왕의 은택은 하늘에 미쳤고 위엄은 사해에 떨쳤다. 나쁜 무 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해지고 백성은 풍족해졌으며, 오곡이 풍 성하게 익었다.

- 광개토 대왕릉비 비문 -

•고려대왕 상왕공과 신라 매금은 세세토록 형제같이 지내기 를 원하며 서로 수천(守天: 하늘을 지킴)하기 위해 동으로 (왔다).

- 충주 고구려비 비문 -

고구려인은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으로 여겼다. 광개토 대왕릉비에는 강 한 국력에 바탕을 둔 고구려인의 자부심이 보인다. 충주 고구려비에는 신 라의 왕을‘동이(동쪽 오랑캐) 매금(마립간)’ 이라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신 라의 왕과 신하를 고구려로 불러들여 관리의 옷을 나누어 준 사실도 기록 되어 있다. 이는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고구려가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과시하였음을 보여 준다.

충주 고구려비(충북 충주)

광개토 대왕릉비(중국 지린 성)

2. 삼국의 성립과 정치 발전

27


신라, 한강의 마지막 주인이 되다

한동안 고구려의 간섭을 받던 신라는 나・제 동맹을 통해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하였고, 6세기 들어 중앙 집권 국가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지 증왕 때에는 농업 발전을 위해 우경과 수리 사업을 장려하였다. 또한, 국호를‘신 라’ , 왕호를‘왕’ 으로 바꾸었고, 전국의 주, 군, 현을 정비하였다. 법흥왕 때에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불교를 공인하고 율령을 반포하였다. 아울러 병부 및 상대등 제도를 새로 설치하는 등 정치 조직을 강화했으며,‘건원’ 신라의 왕호 변천

이라는 자주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한편, 진흥왕 때에는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 직으로 개편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신라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면서 동시에 영토를 확장하였다. 지증왕 때 이사부를 앞세워 우산국(울릉도 일대)을 복속시켰으 며, 법흥왕 때에는 금관가야를 흡수하였다. 이후 진흥왕 때에는 한강을 차지하였을 뿐 아니라 대가야를 정복하고, 북으로는 함 경도 지방까지 영토를 넓혔다. 단양 신라 적성비와 4개의 순수 비는 진흥왕의 영토 확장을 잘 보여 준다. 신라는 가야를 흡수하여 고급 제철 기술과 철산지를 확보했 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훗날 신라의 삼국 통일에 밑거름이 되었다.

신라의 발전(6세기) 단양 신라 적성비(충북 단양) 진흥왕이 한강 중상류 지역인 적성을 차지한 후 세운 비석이다.

동지에서 적으로, 나・제 동맹이 깨어지다 554년 가을, 관산성(충북 옥천)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포함한

를 두고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였다. 일단 성왕은 자신의 딸을

백제군 약 3만 명이 신라군에 궤멸되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진흥왕에게 시집보내는 한편, 신라군에 한강 유역에서 철수할

120여 년간 지속되었던 나・제 동맹은 깨어지고, 신라와 백제는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이를 묵살하자, 성왕은 신라 공

돌이킬 수 없는 적이 되었다. 두 나라가 관산성에서 격전을 벌인

격을 결정하고 태자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배경은 무엇일까?

백제군은 신라의 주요 거점인 관산성을 공격하고 유리한 고

백제의 중흥을 도모했던 성왕은 신라와 힘을 합쳐 한강 유

지를 차지하였다. 이에 성왕은 태자를 격려하기 위해 직접 관산

역을 고구려로부터 탈환하였다(551). 그러나 신라는 돌연 한

성에 가다가 신라의 복병에게 살해당하였다. 여세를 몰아 신라

강 하류 지역을 기습하여 차지하고, 그곳에 새로 주를 설치하

군은 백제군을 크게 물리치고 한강 유역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

였다(553). 이에 백제 내부에서는 신라를 공격할 것인지 여부

였다.

28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삼국 간의 항쟁과 신라의 삼국 통일 신라는 임금이 인자한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신하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 기며,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아버지와 형처럼 섬기고 있으니 나라는 비록 작지만 도모할 수 없었습니다.

-“삼국사기”-

당의 장수 소정방도 신라의 저력을 느낀 것일까? 백제를 멸망시킨 후 왜 신라마 저 공격하지 않았느냐는 당 고종의 질문에 소정방은 위와 같이 대답하였다. 동 맹국임에도 불구하고 당은 호시탐탐 신라까지 넘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당군까지 몰아낼 수 있었던 저력은 무엇일까?

동아시아 국제 정세가 변화하다

6세기 말,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수가 통일하고, 그 뒤를 이어 당 이 등장하면서 동아시아 정세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수와 당은 동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고구려를 제압하고자 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돌궐과 연합하여 수・당의 압력에 강경하게 맞섰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을 받아 어 려움에 처하자 수・당과 손잡고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였 다. 그 결과 6세기 말~7세기 동아시아에는 돌궐, 고구려, 백제, 왜 에 이르는 남북 진영과 신라, 수・당의 동서 진영이 형성되어 서로 6세기 말~7세기 동아시아 국제 정세

대립하였다.

고구려, 수・당을 물리치다

수가 고구려를 침략하려는 야욕을 보이자, 고구려는 전략적 요충지인 요서 지 방을 선제 공격하여 이를 견제하였다. 이에 수 문제는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별 성 과 없이 물러났고, 그 뒤에 양제가 약 113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략하였다. 고구려는 을지문덕의 유도 작전으로 수의 대군을 살수에서 크게 물리쳤다(살수대 첩, 612). 수는 무리한 고구려 원정으로 국력을 소모하여 곧 멸망하였다. 수에 이어 중국의 주인이 된 당은 처음에는 고구려에 우호적이었으나, 당 태종 이 즉위하면서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다. 이에 고구려는 요동에 천리장성을 쌓아 침략에 대비했고, 당시 집권자였던

연개소문도 당에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당

태종은 직접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해 왔지만, 고구려는 이를 안시성에서 물리쳤다(안시성 싸움, 645). 수・당을 물리친 고구려는 결과적으로 백제, 신라까 지도 중국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인해 국

✽연개소문

천리장성 공사를 감독하면서 요 동의 군사력을 장악한 뒤 정변 을 일으켜 대막리지에 올랐다. 당은 연개소문의 정변을 고구려 침공의 구실로 삼았다.

력이 크게 소모되었다. 2. 삼국의 성립과 정치 발전

29


나・당 연합군,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다 고구려 지배층의 분열

고구려와 수・당이 대결하는 동안 백제의 맹렬한 공격으로

고구려의 지위 높은 신하 연정토가 열두 개 성 763호, 인구 3,543명을 데리고 와서 투항하므로

어려움에 처한 신라는 당과 동맹을 맺고자 하였다. 고구려 침략

정토 및 수종관 24인에게 의복, 식량, 주택을 주

에 실패한 당도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친 후 한반도

어 서울과 성읍에 안주시켰다.

를 차지하려는 전략을 세움으로써 나・당 동맹이 이루어졌다.

-“삼국사기”-

연개소문이 죽은 뒤 아들들의 권력 다툼이 벌 어졌고, 그의 아우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였다.

나・당 연합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는 지배층의 분열로 나・당 연합군의 기습에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였다. 계백 의 5천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였다(660). 나・당 연합군은 뒤이어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고구 려는 이를 잘 막아 냈다. 그러나 고구려는 연이은 전쟁으로 국력을 많이 소모했을 뿐만 아니라 연개소문이 사망한 후 지배층 내부에서 권력 다툼이 일어났다. 나・당 연합군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평양성을 함락하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668).

백제・고구려의 부흥 운동이 이어지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각지에서 유민이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백제 부흥 군은 한때 주류성, 임존성 등 200여 성을 차지하며 세력을 떨쳤으나, 지도층의 분열이 일어나 나・당 연합군에게 진압되었다. 당시에 왜는 백제 부흥군을 지원 하기 위해 군사를 보내기도 했으나, 백강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물러났다.

백강에서 동아시아 국제전이 벌어지다 (나・당 연합군이)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모여서 동시에 주류성으 로 가다가 백강 어귀에서 왜국 군사를 만나 네 번 싸워서 다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찌르고 바닷물 이 붉어졌다.

-“삼국사기”-

백제는 비록 나・당 연합군의 기습에 미처 대비하지 못하여 무너졌지만 유민 들은 곳곳에서 부흥 운동��� 일으켰다. 왕족 복신과 승려 도침은 왜에 가 있던 왕 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때 백제의 오랜 동맹국이었던 왜는 백제 부흥군을 돕기 위해 27,000여 명의 대군을 보냈 다. 백제・왜 연합군은 백강 어귀에서 나・당 연합군과 격전을 벌였다. 백제 부 흥의 운명을 건 이 전투에서 백제・왜 연합군은 나・당 연합군에 크게 패하였 다. 부여풍도 보검 한 자루만 남긴 채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백강 전투는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당시 긴박했던 국제 정세의 흐름을 잘 보 여 준다.

30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백강 전투(663) 장소로 전해지고 있는 현재의 금 강 하구 지역이다.


한편, 고구려 유민도 한성(황해 재령)과 오골성을 거점 으로 당에게 저항했으나, 지도층의 내분으로 실패하였 다. 요동에서는 당 세력에 복속되지 않은 여러 성에서 항 전을 이어 나갔다. 이에 당은 보장왕을 보내 고구려 유민 을 회유하려 했지만, 요동 지역에서 고구려의 부흥 운동 은 계속되었다.

신라, 당군을 몰아내고 삼국을 통일하다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던 당은 백제의 옛 땅과 신라에 각각 웅진도독부와 계림도독부를 두었고, 고 구려 멸망 후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당의 이러한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던 신라는 왜와 외 교 관계 회복을 꾀하는 한편, 백제 및 고구려 유민과 힘 을 합쳐 당에 대항하였다. 결국 매소성과 기벌포에서 결 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당군을 몰아내고 삼국 통일을 완

삼국 통일 과정과 부흥 운동

수하였다(676). 신라의 삼국 통일은 대동강 이남 지역을 확보하는 데 그쳤고, 당 세력을 끌어들 였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당을 무력으로 물리친 사실은 삼국 통일의 자주적인 성격을 보여 준다. 아울러 오랜 전쟁을 끝냄으로써 평화를 정착시키고, 삼국의 문 화를 융합하여 민족 문화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신라의 삼국 통일에 대한 평가 1 긍정적 평가

2 부정적 평가

신라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서 북쪽은 정벌을 당하고,

다른 종족을 끌어들여 같은 종족을 멸망시키는 것은 도적

서쪽은 침략을 당하여 잠시도 편안한 해가 없었다. ……

을 불러들여 형제를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

선왕(김춘추)께서 백성의 참혹한 죽음을 불쌍히 여겨 임

민족 전체로 보면 민족적 역량과 영토의 축소를 가져왔으며,

금의 귀중한 몸을 잊으시고, 바다를 건너 당에 가서 황제

외세와 결탁한 반민족적인 것이며, 사대주의적 나쁜 요소를

를 보고 친히 군사를 청하였다. 그 본의는 두 나라를 평정

심었다.

-“독사신론”-

하여 영구히 전쟁을 없애고, 여러 해 동안 깊이 맺혔던 원 수를 갚고 백성의 죽게 된 목숨을 보전코자 함이다. -“삼국사기”-

➊ 문무왕과 신채호가 각각 어떤 입장에서 신라의 삼국 통일을 평가 했는지 살펴보고, 자신의 의견을 말해 보자.

2. 삼국의 성립과 정치 발전

31


3

남북국의 정치 발전

통일 신라의 발전

전쟁에서 산 자와 죽은 자에게 모두 상을 내리고, 내외의 관직과 작위를 골 고루 나눠 주었고,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 백성을 인수(仁壽)의 터전에 살게 하였다. 세금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덜어 주니 집집마다 넉넉하게 되어 민생이 안정되고 국내에 근심이 없어졌다.

-“삼국사기”-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문무왕이 죽기 전 삶을 돌아보며 남긴 말이다. 이러한 업적을 지키기 위해 문무왕은“죽은 뒤 나라를 지키는 동해의 큰 용 이 되고 싶다.” 라고 하였다. 문무왕 해중릉은 왕의 뜻을 받들어 조성한 것으로 알려 져 있다. 문무왕은 살아서는 백성을 위해 태평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고, 죽어서는

대왕암(문무왕 해중릉, 경북 경주)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한 것이다. 통일 이후 신라는 어떻게 발전하였을까?

✽무열왕계직계후손의왕위계승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 약 126 년간 무열왕과 그 직계 후손들 이 왕위를 계승하였다.“삼국사 기” 의 기준에 따라 이 기간을 신 라 중대(中代)라 하여 그 이전(상 대), 이후(하대)와 구분하였다.

무열왕계 직계 후손이 왕위를 계승하다

무열왕은 김유신의 지원을 받아 진골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 가 시작한 통일 전쟁은 그의 아들인 문무왕 때에 삼국 통일로 결실을 맺었다. 통 일 후 신라는 영토가 넓어지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귀족의 경제적 기반이 크게 확 대되었고,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리던 백성의 생활도 안정을 되찾았다. 한편, 통일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왕권이 크게 강화되었으며, 이는 8세기 후반까지 무열왕계 직계 후손이 왕위를 계승하는 기틀이 되었다. 문무왕의 뒤를

✽김흠돌의 난

신문왕의 장인인 김흠돌이 귀족 들과 반역을 도모했던 사건이다.

이은 신문왕은 즉위 직후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고 왕권에 도전하는 진골 귀족을 대거 숙청하였다. 또한, 늘어난 영토와 백성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중앙 집 권적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로써 진골 귀족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되었다. 왕권의 전제화를 위한 통치 체제 개편

중앙 정치 기구는 왕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기밀 사무를 관장하면서 왕명을 수행하는 집사부의 역할이 중시되었으며, 관리의 비 리를 감찰하는 사정부도 설치되었다. 이에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 의 권한은 약화되고,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태종 무열왕릉비의 이수와 귀부(경북 경주) 태종

또 국학을 설립하여 유학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왕에게 충성하는 인재를

무열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신(비석

양성하고자 하였다. 경제 면에서는 관리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

의 몸체)은 없어지고 비석의 머릿돌(이수)과 거북 모양 의 받침돌(귀부)만 남아 있다.

32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을 폐지하여 귀족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왕권이 전제화되고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면서 그동안 소외되었던 6두품 세 력의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이들은 뛰어난 학문 실력을 바탕으로 왕의 정치적 조

✽녹읍과 관료전

녹읍은 국가에서 관료 귀족에게 지급한 일정 지역의 토지로, 조 세 수취와 거주민의 노동력 징

언자 역할을 하거나 중앙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한편,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옛 지배층에게도 각자의 지위에 걸맞게 골품을

발이 가능하였다. 반면, 관료전 은 조세 수취만 가능하였다.

부여하여 신라의 지배 체제 안에 편입시키고, 제한적으로나마 관직 참여도 인정 하여 국가적 단결을 도모하였다.

넓어진 영토를 재정비하다

신라는 늘어난 영토를 9주 5소경 체제로 편성하여 중앙 집권을 강화하였다. 주 밑에는 군과 현을 두어 지방관을 파견했고, 말단 행정 구역인 촌은 토착 세력인 촌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다. 이 와 함께 외사정을 파견하여 지방관을 감찰했고, 상수리 제도를 통 해 지방 세력을 통제하였다. 상수리 제도는 지방 세력가나 그 자제 를 일정 기간 수도에 와서 거주하게 한 제도이다. 군사, 행정의 중요한 곳에는 특별 행정 구역인 5소경을 설치하고 옛 고구려와 백제 출신 귀족을 옮겨 살게 하였다. 이는 수도가 동남 쪽에 치우쳐 있는 점을 보완하며 지방 세력을 감시하려는 의도였다. 5소경은 각 지방이 균형 있게 발전할 수 있는 거점 역할도 하였다. 군사 조직은 9서당 10정으로 재정비하였다. 중앙군인 9서당은 신라인 외에도 피정복민까지 포함하였다. 지방군인 10정은 각 주마 다 1정씩 배치했는데, 북쪽 국경 지대인 한주에는 2정을 두었다.

9주 5소경

삼한이 한 집안을 이루다 대왕을 도와 조그마한 공을 이루어 삼 한을 한 집으로 만들었으며, 백성은 두 마 음이 없게 되었습니다[三韓爲一家, 百姓 無二心]. 비록 아직 태평한 세상에 이르 지는 못했으나, 조금 편안한 상태가 되었 습니다.

삼국은 오랫동안 대립하고 다투었지만 혈연, 언어, 문화 등에서 일정한 동질 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더욱이 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는 과정에서 삼국인 들은 서로 힘을 합치면서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이 싹텄다. 이에 신라는 고구 려와 백제의 유민을 적극적으로 포용하여 국가적 단결을 이룩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옛 지배층을 골품제 체제에 편입시켜 제한적이지 만 관직 참여를 인정하였다. 일반 백성도 한 국가의 백성으로 융합하기 위해 지방 행정 구역을 9주로 정비하면서 신라, 백제, 고구려의 옛 땅에 각각 3주씩

-“삼국사기” , 김유신 열전 -

설치하였다. 그리고 중앙군인 9서당을 편성할 때 신라인뿐만 아니라 고구려 계, 백제계, 말갈계까지 포함시켰다.

3. 남북국의 정치 발전

33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다

무열왕계 직계 후손의 전제 왕권 체제에서 신라는 한동안 안정과 번영을 누렸 다. 그러나 8세기 말 무열왕계의 권력 독점에 불만을 품은 진골 귀족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무열왕계의 전제 왕권은 무너지고, 이후 신라는 155년 동안 20 명의 왕이 교체될 정도로 왕위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로써 왕권은 약화되었고,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의 힘은 다시 강해졌 해인사 묘길상탑지(경남 합천 출토) 신라 말의 모습을“악(惡) 중의 악이 없는 곳이 없고 굶어 죽 은 시체와 전사한 해골이 들판에 별처럼 흩어져 있다.” 라고 기록하

다. 귀족은 대농장을 차지하고 사병을 기르며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다. 귀족의 가혹한 수취를 견디지 못한 농민은 노비나 초적으로 몰락했고, 마침내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고 있다.

골품제의 모순 속에서 새 시대의 기운이 싹트다

진골 귀족의 왕위 쟁탈전 속에서 중앙 정부의 힘이 약화되자 지방 ✽호족이 성

✽호족의 출신 성분

호족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중앙 귀

장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근거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기르며 백성을 실질적으로

족, 무역에 종사하면서 재력과

다스렸다.

무력을 축적한 해상 세력, 지방 의 군사 요충지에서 성장한 군

당에 유학했던 일부 6두품 출신 학자는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개인의 능력보다

진 세력, 지방의 토착 세력인 촌

혈통이 중시되는 골품제의 모순을 비판하며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주 출신 등으로 구분된다.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反)신라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사상 면에서는 중앙 귀족과 연결된 교종 불교의 권위를 부정하는 선종 불교가 크게 일어났고, 풍수지리설도 유행하였다. 이들 사상은 중앙 정부의 권위를 약화 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가운데 호족은 6두품 출신 유학자나 선종 승려와 손잡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하였다. 견훤은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세웠고(900), 궁예는 송악에서 후 고구려를 세웠다(901).

신라 말의 시대 상황 1 가난 때문에 노비가 된 백성

2 농민 봉기

효녀 지은(知恩)은 ……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홀로 어머니를

진성 여왕 3년(889) 나라 안의 여러 주・군에서

봉양하였다. 나이 32세가 되도록 시집가지 않고 아침과 저녁으로

공부(貢賦: 공물과 세금)를 바치지 않으니 창고가 비

문안드리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봉양할 것이 없으면 때로는 품을

어 버리고 나라의 쓰임이 궁핍해졌다. 왕이 사신을

팔고 때로는 돌아다니며 구걸하여 먹을 것을 얻어 드렸다. (그러

보내어 독촉하자, 이로 말미암아 곳곳에서 도적이

한) 날이 오래되자 가난함을 이기지 못하여 부잣집에 가서 몸을

벌떼처럼 일어났다.

-“삼국사기”-

팔아 종이 되기로 하고 쌀 10여 섬을 얻었다. 온종일 그 집에서 일 을 하고 저녁이면 밥을 지어 돌아와서 봉양하였다.

➊ [자료 1, 2]를 참고하여 신라 말 시대 상황의 특징을 설명 -“삼국사기”-

34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해 보자.


발해의 성립과 발전 732년 9월 5일, 당나라 천혜의 요새이자 수군의 거점인 등주성에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발해 군대가 번개처럼 등주성을 기습했기 때문이다. 등주 자사까지 전사했다는 소식에 몹시 당황한 당 조정은 신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신 라군 10만여 명이 발해를 공격했지만 폭설과 추위로 대부분 얼어 죽고 물러났다. 등주성은 예전에 수와 당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마다 수군을 출격시켰던 곳이다. 그런데 오히려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에 역공을 당한 것이다. 당시 동북아 최강국이었던 당을 대담하게 원정했던 발해! 그 건국과 발전 과정을 알아보자. 등주성(중국 산둥 성) 수・당 시대 최대 무역 항구였다.

고구려의 부흥 운동, 발해 건국으로 결실을 맺다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유민 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안동 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겼다. 신라는 대동강 이북으로 진출하기 보다는 내부 안정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 유민 은 요동을 중심으로 부흥 운동을 끊임없이 일으켰다. 때마침 당 의 강압적인 지배에 맞서 거란인이 봉기하자, 이를 틈타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동쪽으

주변국의 발해 인식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別種)이다. 고구 려가 멸망하자 대조영은 무리를 이끌고 요동 지 역으로 이주하였다.

-“구당서”-

•고구려의 남은 자손들이 동류를 끌어모아 북으 로 태백산 아래에 발을 붙이고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로 탈출하였다. 대조영은 당의 추격군을 천문령에서 물리치고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하였다(698). 발해의 건국은 고구려의 멸망 이후 30년 만에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가 만주를 무대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발해는 8세기 초 일본에“우리는 고구 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라는 내용이 담긴 국서를 보냈 고, 다른 국가들도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인정하였다.

동모산(중국 지린 성)

대조영(서울대학교박물관)

3. 남북국의 정치 발전

35


‘해동성국’ 이라 불린 발해

발해는 건국 초부터 당과 대결하며 고구려 옛 땅을 회복하는 데 주력하였다. 발해의 성장에 불안을 느��� 당은 흑수 말갈과 신라를 이용하여 발해를 견제하였다. 이에 무왕은 당의 등주를 선제 공격하고 요서 지방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 나아가 돌궐, 일본과 친교를 강화 하여 당, 신라에 맞서면서 동북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이루었다. 문왕은 당과 친선 관계를 맺고 문물을 수용했으며 신라와도 사신 을 교환하였다. 또 3성 6부의 중앙 관제와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 여 국왕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추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발해는 9세기 초 선왕 대에 전성기를 맞이하 였다. 이때 말갈 세력을 대부분 복속시켰을 뿐 아니라 요동, 연해주 까지 진출하고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맞대었다. 5경 15부 62주 의 지방 행정 체제도 확립되어 통치 구조가 안정되었고, 대외 무역도 더욱 활발하 게 전개되었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성은 매우 번성했으며 그 규모가 당의 장안성 에 못지 않았다. 이에 주변국들은 발해를‘해동성국’ 이라고 불렀다. 발해의 영역

한편, 발해는 초기부터 인안, 대흥, 건흥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는 왕권의 강대함을 과시하면서 당과 대등하다는 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나는 황제로소이다!” 공주는 대흥(大興) 56년(792) 여름 6월 9일에 사망하였는데, 당시 나이는 36세였다. 이에 시호를 정 효 공주라고 하였다. …… 황상(皇上)은 조회마저 금하고 비통해 하시며 침식을 잊고 노래와 춤추는 것도 중지하였다. 정효 공주는 문왕의 넷째 딸이다. 젊은 나이에 남편과 어린 딸을 잃고 외롭게 살다 죽었는데, 그 묘지석 에는 문왕의 슬픔이 절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묘지석의 글귀 중 발해의 연호인‘대흥’ 과 문왕을‘황 상(皇上)’ 으로 표현한 점이 눈에 띈다.

정효 공주 묘지석

황상이라는 칭호는 문왕의 둘째 딸 정혜 공주의 묘지석에도 새겨져 있

(중국 지린 성)

다. 이 밖에도 중국 지린 성 용두산의 발해 고분군에서는 각각 효의 황후, 순목 황후의 이름이 새겨진 묘지석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발해는 황제와 황후를 칭하고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여 황제국임을 당당히 드러내었다. 이러한 사실은 발해가 자국의 지방 정권이었 다고 하는 중국의 주장이 허구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용머리상(중국 헤이룽장 성) 상경성 궁궐 터에서 출토되었으며 발해의 씩씩한 기상이 엿보인다.

36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광활한 나라를 어떻게 다스렸나

발해는 중앙 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갖추고 나라를 다스렸다. 중앙의 정치 조직은 당의 3성 6부제를 수용했으나, 그 명칭과 운영 방식에는 독자성이 있었다. 행정을 담당하는 정당성에 권력이 집중되었고 그 장 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정당성은 6부를 둘로 나누어 관할 했는데, 6부의 명칭에는 유교 이념이 반영되어 있다. 최고 교육 기관으 로 주자감을 두어 유교를 교육했으며, 당에 유학생을 보내기도 하였다. 지방 행정은 5경 15부 62주 체제로 정비하였다. 전략적 요충지에 5 경을 설치하고, 15부 62주와 그 아래의 현에 지방관을 파견했으며, 말

발해의 중앙 정치 기구

단 촌락은 촌장이 관리하게 하였다. 군사 조직은 중앙에 10위를 두고, 각지에 군대를 배치하여 지방관이 지휘하게 하였다.

발해 유민, 고려에 통합되다

10세기 초 신라는 후삼국으로 분열되었고, 당은 지방 세력 및 농민의 반란으로 국력이 쇠퇴하여 결국 멸망하였다. 이 틈을 타서 일어난 거란은 중국 대륙의 정복을 꾀하며 발해 를 먼저 공격하였다. 당시 귀족의 내분을 겪던 발해는 거란의 침 입을 미처 막아 내지 못하고 멸망하였다(926). 그러나 발해 유민 은 후발해, 정안국, 대발해국 등을 세우며 약 200여 년간 부흥 운 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한편, 발해 왕자 대광현은 수많은 유민 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하였다.

발해 상경 용천부 유적(중국 헤이룽장 성)

유득공의“발해고”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이 통일 신라와 발해를‘남

부여씨와 고씨가 망한 다음에 김씨의 신라가 남에 있고 대 씨의 발해가 북에 있으니 이것이 남북국이다. 여기에는 마땅 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할 터인데 고려가 편찬하지 않은 것은

북국’ 이라고 일컬은 이유는 무엇일까? 발해의 주도 세력 이 고구려계 유민이고, 그 영역이 고구려의 땅이므로 발 해 역사를 민족사에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잘못이다. 저 대씨는 어떤 사람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신라와 발해는 삼국이 있었던 바로 그 터전에서 남북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땅은 어떤 땅인가. 바로 고구려의 땅이

으로 나뉘어 발전하였다. 통일 신라는 대동강 이남에서

다. …… 김씨와 대씨가 망한 다음 왕씨가 통합하여 차지하고

민족 문화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발해는 고구려의 뒤를

는 고려라고 하였다. …… 고려가 마침내 약소국이 된 것은

이어 만주를 지배하였다. 따라서‘남북국’ 이라는 말 속에

발해의 땅을 되찾지 못했기 때문이니, 이후 탄식할 수 있겠

는 통일 신라와 발해의 역사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려

는가.

는 인식이 깔려 있다.

-“발해고”-

3. 남북국의 정치 발전

37


4

경제 활동과 사회 모습

삼국의 경제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요, 먹는 것은 백성에게 하늘이나 다름없이 귀중한 것이다. 모든 주와 군에서는 제방을 수리 하고 전야(田野)를 널리 개척하라.

-“삼국사기”-

농업에 대한 임금의 깊은 관심이 담겨 있는 글이다. 백성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임금의 가 장 중요한 책무였다. 이에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등 민생 안 정을 위한 다양한 노력이 전개되었다. 삼국의 경제 활동은 어 삼국 시대의 철제 농기구 왼쪽부터 농경지의 터를 고르는 농기구(경북 경

떻게 전개되었을까?

주 출토), 보습(서울 구의동 유적 출토), 쇠삽날(몽촌토성 출토)이다.

귀족 중심의 경제 생활

삼국이 고대 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나라 안의 모든 땅은 왕의 땅’ 이라는 왕토 사상이 형성되었다. 왕은 이를 명분으로 백성으로부터 조세를 거두거나 자신 과 국가를 위해 일하는 관리(귀족)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개 인이 소유한 토지가 존재하였다. 귀족은 공로나 관직 복무의 대가로 식읍, 녹읍 등을 지급받아 해당 지역의 토지

가야의 초가집 모양 토기(호암 미술관)

와 농민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아울러 많은 사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경 제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다.

✽우경

농민은 약간의 자기 땅을 경작하거나 귀족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면서 국가와

소를 부려 논밭을 가는 것이다. 노동력이 절감되고, 땅을 깊이

귀족에게 조세로 곡물과 포를 납부했으며, 특산물과 노동력도 바쳐야 하였다. 또

갈 수 있어서 지력이 빨리 회복

한, 농민은 대체로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귀족의 고리대나 자연 재해에 희생되

되었다.

어 노비나 도적으로 몰락하기도 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나라에서는 흉년이 들면 곡식을 나누어 주거나 빌려 주었다. 농업에 소홀한 관리를 처벌하다

농업은 경제 활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삼국 시대의

가을 7월에 사신 열 사람을 파견하 여, 주주(州主)나 군주(郡主)로서 공 무에 근실하지 못하여 농토를 많이 묵히는 자를 몰래 살펴 벼슬을 낮추 거나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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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제 농기구 보급과 우경 실시

-“삼국사기”-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농업 생산력은 전반적으로 낮은 편이었다. 이에 삼국은 농업 생산력을 높 이기 위한 여러 시책을 실시하여 민생 안정을 도모하였다. 철제 농기구를 널리 보급하고 ✽우경을 장려했으며, 황무지를 개척하고 보・저수지 등 수리 시설을 확충하였다.


떠도는 백성을 모아 농사를 짓도록 하였고, 농업을 소홀히 다루 는 관리를 문책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거름 주는 법(시비법)은 그 리 발달하지 못하여 한 해 농사를 마치고 나면 대부분의 농토는 일 정 기간 묵혀 두어야 했다.

상공업과 대외 무역

삼국은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적 경제 체제였으나 수공업과 상업 도 점차 성장하였다. 국가는 수공업 생산을 담당하는 관청을 두고 장인을 소속시켜 국가나 왕실에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였다. 수도에 는 시장이 개설되었으며, 지방 특산물을 매매하는 행상도 있었다. 신라는 6세기 초 지증왕 때 경주에 동시를 열었다. 왕실과 귀족의 필요에 따라 국제 무역도 이루어졌다. 교역은 주 로 공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가 갖추

삼국의 경제 활동

어진 4세기 이후에 크게 발달하였다. 고구려는 주로 중국의 남북조, 북방 유목 민족 등과 교역했으며, 백제는 중국의 남조 및 왜와 교역하였다. 특히 백제는 중국, 가야, 왜를 연결하는 서남해 교역로를 장악하여 활발한 해상 활동을 벌였다. 신라는 초기에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중국과 교류했으나,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에는 직접 교류하였다. 삼국은 주로 금, 은, 인 삼, 직물 등을 수출하고 비단, 서적, 도자기 등을 수입하였다.

식읍, 녹읍은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이었죠.

지급 규모는 식읍이 훨씬 더 넓었어요.

왕족∙공신

금관가야의 왕족인 김구해는 신라에 항복한 뒤 금관군(김해) 전체를 식읍으로 받기도 하였습니다.

식읍과 녹읍은 어떤 토지인가?

관리

금관군

식읍, 녹읍을 차지한 귀족은 그곳에 거주하 는 백성에게서 조세를 징수할 수 있었고 ……

그 토지에 딸린 백성의 노동력까지도 징발 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있었죠.

이러한 모습은 토지의 생산성이 낮았던 고 대 사회에서 노동력이 주요 수취 대상이었 음을 잘 보여 줍니다. 또 일시키게?

4. 경제 활동과 사회 모습

39


남북국의 경제 신라 여인들이 무척이나 탐냈을 것 같은 화려한 머리빗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잡히는 거북의 등껍질에 금과 옥을 달아 한껏 멋을 부렸다. 그 옆은 중앙아시아의 소그드 상인이 쓰던 은화로 발해 의 옛 성에서 발견되었다. 이처럼 멀고 먼 지역의 재화가 신라와 발해 까지 들어온 배경은 무엇일까? 활발히 대외 교류를 펼쳤던 남북국의 경제에 대해 알아보자. 신라의 장식용 머리빗(호암미술관)

소그드 은화`(러시아 노브고르데옙카 출토)

통일 신라,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하다 신라의 번영

통일 후 왕실과 귀족은 훨씬 풍족한 경제 기반을 갖게 되었다. 왕실은

신라 전성기의 경주에는 총 17만 8,936 호(戶)가 있었고, …… 35개의 *금입택이 있었다. …… 헌강왕 때는 도성 안에 초가 집이 하나도 없었고, 밥을 짓는 데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숯을 썼다.

소유지를 늘리고 국가 수입의 일부를 가졌다. 귀족은 식읍, 녹읍 외에도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와 노비를 가지고 막대한 부를 누렸다. 신문왕은 전제 왕권을 강화하면서 조세만을 징수할 수 있는 관료전 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했으며, 성덕왕은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

*금입택: 금을 입힌 저택

-“삼국유사”-

다. 이는 귀족이 백성을 사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막고 국가가 백성을 직접 지배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8세기 후반 귀족들의 반발로 녹읍 이 부활되었다.

민정 문서를 바탕으로 조세를 거두다

통일 후 신라는 늘어난 생산 자원과 노동력을 더욱 철저하게 편제하여 관리하였 다. 8세기에 작성된 민정 문서에 따르면, 각 촌락의 인구, 토지의 종류와 면적, 소 와 말의 수, 수목의 종류와 수 등을 조사하여 3년마다 다시 기록하였다. 인구는 남녀를 연령에 따라 각각 6등급으로 구분하여 변동 사항을 자세히 기록 하였으며, 호(戶)는 9등급으로 나누었다. 민정 문서에 호구를 자세히 기록한 것은 국가가 노동력 수취를 중시하였음을 보여 준다. 농민은 국가에 조세, 공물, 역을 부담하였다. 조 세는 수확량의 10분의 1정도로, 통일 이전보다는 부담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남의 토지를 경작할 때에는 수확량의 반 이상을 주인에게 납부하였다. 공물은 촌락 단위로 특산물을 납부했으며, 역은 군역을 비롯하여 각종 부역이 있었다. 향, 부곡에 민정 문서 서원경(청주) 부근 4개 촌락에 대한 문서로 당시 촌락의 경제 상황과 조세 제도 운영을 잘 보여 주는 자료이다. 1933년 일본 도다이 사 쇼소인에서 발견 되었으며, 신라 장적이라고도 한다.

40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사는 사람은 일반 농민보다 더 많은 공물을 부담 하였다.


활발한 대외 무역을 전개하다

통일 후 신라는 국가 재정이 넉넉해지고 농업 생산력도 높아졌다. 인구가 늘고 상품 수요도 증가하여 경주에 서시와 남시가 추가로 설치되고, 지방 여러 도시에 시장이 열렸다. 당, 일본과 무역도 활발해져서 공무역과 사무역이 성행하였다. 경주에서 가까운 국제 무역항인 울산에는 이슬람 상인도 왕래하였다. 신라는 주로 견직물과 고운 청동제 십이지 저울추(경북 경

베, 금・은 세공품을 수출하고 비단・서적, 귀족의 사치품 등을 수입하였다.

주) 시장에서 사용된 것으로 여

신라인이 자주 드나들던 당의 산둥 반도와 양쯔 강 하류에 신라인의 거주지인 신

겨진다.

라방과 신라촌이 형성되었고, 신라소, 신라원, 신라관 등도 들어섰다. 9세기 전반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해상 무역권을 장악하였다.

✽적고적(赤袴賊)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이란 뜻 이다.

신라 말, 농장은 확대되고 농민은 궁핍해지다 귀족의 경제 생활

8세기 후반 녹읍이 부활되고 무열왕계 전제 왕권이 무너지면서, 귀족은 왕권의 통제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경제 기반을 크게 확대해 갔다. 국가와 농민의 토지를 차지하여 대규모 농장을 소유하고 수

재상의 집에는 녹(祿)이 끊이지 않았다. 노 비가 3천 명이나 되고 갑옷 입은 병사와 소, 말, 돼지도 그와 비슷하였다. 가축은 바다 가

많은 농민을 예속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귀족은 호화로운 생활을

운데 있는 섬에 풀어놓고 기르다가, 필요할

누렸지만 국가 재정은 갈수록 궁핍해졌다.

때에는 활을 쏘아 잡아먹는다. 곡식을 남에게

농민은 귀족에게 토지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고갈된 재정을 확충하려는 강압적 조세 수탈에도 시달렸다. 이에 많은 농민이 노

빌려 주고 이자를 받아 늘리는데, 기간 안에 갚지 못하면 노비로 삼아 일을 시켰다. -“신당서”-

비로 전락하거��� 떠돌아다니며 걸식으로 연명하였다. 그리고 적 고적, 초적 등이 되어 전국 곳곳에서 봉기하였다.

신라 말의 경제적 모순을 간단히 지적해 보자.

동방의 이상향으로 묘사되었던 신라 신라를 방문한 여행자는 누구나 정착해 다시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곳은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개나 원숭이의 목줄도 금으 로 만든다.

- 중세 이슬람 학자 알 이드리시,“지리학 총서” (1154) -

다소 과장되었지만 신라에 대한 호감이 듬뿍 묻어난다. 다른 이슬람 문헌에서도 신라 의 깨끗한 자연환경과 풍요로움을 찬탄한 경우가 많다.‘병에 걸린 사람도 신라에 가면 곧 완치된다.’ 라는기록이있을정도였다. 이슬람문헌에신라에관한기록이등장하게된까닭 은무엇일까? 신라는 통일 전에 이미 서역과 교류하고 있었다. 통일 후 번영을 누리던 8~9세기 무렵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 장

에는 비단길과 바닷길을 통한 교역이 더욱 늘어났다. 이에 페르시아산 에메랄드인 슬슬, 인

엄구(국립대구박물관) 페르시아

도・동남아시아산 원목인 자단과 침향, 각종 향료 등 이색적인 물품이 신라에 들어왔다. 이 때드나든이슬람상인의입소문을통해신라가동방의이상향으로전해지게 되었다.

양식의 유리 제품이 들어 있다. 서역인의 얼굴을 한 무인상 (경주 원성왕릉)

4. 경제 활동과 사회 모습

41


발해의 경제

발해는 건국 초부터 영토를 넓혀 가며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에 조세, 공물, 역 의 수취 제도가 정비되고 농업, 목축, 수렵 등 여 러 분야가 발전하였다. 농업은 주로 밭작물을 재배했으나 일부 지역에 서는 벼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철제 농기구가 두 루 이용되었고 우경도 시행되었다. 또한, 집집마 다 가축을 많이 길렀는데, 특히 말은 주요 수출품 이었다. 수렵도 활발하여 모피, 녹용, 사향 등을 높은 가격에 수출하였다. 이 밖에 금속 공예, 직물, 도자기 등 수공업도 상당한 수준이었으며, 수도인 상경 용천부와 교통

통일 신라와 발해의 대외 무역로

의 중심지에서 상업이 번성하였다. 발해는 주변국은 물론 서역과도 활발히 교역하였 다. 당에는 발해관이 있어 발해 사신이 머물거나 무역 업무를 처리했으며, 일본과는 한 번에 수백 명이 오가며 교류하였다. 신라와는 대립과 교류를 반복했지만,‘신라도’ 라는 상설 교

금으로 된 꽃무늬 장식과 허리띠 장식(중국 지린 성) 구름 모양 자배기(중국 헤이룽장 성)

통로를 두어 교류하였다.

발해의 명마, 고구려 유민을 태우고 달리다 귀하게 여기는 것에는 태백산의 토끼, 남해부의 곤포(다시마), 책성부의 된장, 부여부의 사슴, 막힐부의 돼지, 솔 빈부의 말, 현주의 포(베), 옥주의 면(누에솜), 용주의 주(명주), 위성의 철, 노성의 쌀, 미타호의 붕어가 있고, 과일 에는 환도의 오얏, 낙유의 배가 있다.

-“신당서”-

발해의 여러 특산품 중 단연 으뜸은‘솔빈의 말’ 이었다. 솔빈부는 오늘날 러시아의 체르냐치노 일대로,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어 튼튼한 말이 잘 자랐다. 솔빈의 말은 바닷길을 통해 당으로 수출 되었다. 말은 철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전략 물자인데, 발해가 당에 말을 수출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에는 매년 발해의 말을 1만 마리 이상 사들였던‘큰손’ 이 있었다. 바로 산둥 반도 일대에 독자 적인 세력을 떨치던 고구려 유민 이정기였다. 그는 당의 군인이었지만 안녹산의 난을 기회로 삼아 독립 왕국을 세웠다. 고구려계 유민이 결집한 이정기의 나라는 그의 손자 대까지 약 55년간 유지 발해 청동 기마 인물상 (러시아 우수리스크 출토)

42

되었다. 발해의 문왕은 이정기에게 말을 팔면서 비단을 값싸게 수입하는 한편, 당을 압박하는 일석 이조의 효과를 거두었다. 이렇듯 무역은 발해의 또 다른 힘이었다.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삼국과 남북국의 사회 어느 귀족의 응접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고구려 고분 벽 화의 일부이다. 주인은 단정히 두 손을 모은 채 손님의 이야기 에 귀를 기울이고 있고, 무릎을 꿇고 상을 차리는 하인의 손길은 분주 하기만 하다. 벽화 속 하인의 모습이 주인이나 손님보다 유난히 작은 것은 그 신 분의 차이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벽화 속 인물마저 신분에 따 라 묘사했던 당시의 사회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고구려 무용총 접객도(중국 지린 성)

귀족 중심의 신분제 사회가 형성되다

부여, 초기 고구려, 삼한에는 ✽호민, 하호, 노비가 있었다. 부여, 초기 고구려의 가, 대가 등 권력자들은 호민을 통해 읍락을 지배하며 독자적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삼국이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왕권에 복속해 중앙 귀

✽호민(豪民), 하호(下戶)

호민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계층 이며, 하호는 농업에 종사하는 대다수의 평민이었다.

족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크게 지배층인 귀족, 피지배층인 평민과 천민 등으로 구분되는 엄격한 신분 제도가 마련되었다. 신분은 대대로 세습되었으며, 개인의 사 회적 지위는 능력보다 혈통, 즉 그가 속한 친족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결정되었다. 고구려는 왕족 고씨와 5부 출신의 귀족이, 백제는 왕족 ✽부여씨와 8성의 귀족 이 최고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신라는 왕족인 김씨와 박씨, 석씨 등이 최고 지배 층을 이루었는데, 이들이 중심이 되어 지방 족장 세력을 통합, 편제하는 과정에서 독특한 신분 제도인 골품제가 마련되었다. 왕족은 성골, 진골이 되었으며, 족장은

✽부여씨

백제는 자신들의 뿌리를 고구려 와 마찬가지로 부여라고 여겼다. 이에 왕실의 성을 부여씨로 삼 고 성왕 때 국호를 남부여로 바 꾸기도 하였다.

세력 크기에 따라 6~1두품으로 편성되었다. 평민은 대부분 농민으로 자유민이었으나, 조세와 특산물을 납부하고 수시로 노동력을 징발당하는 등 생활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빚을 갚지 못 해 노비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삼국은 가난한 농민을 구제하기 위한 정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진대법이 그 대표 사례이다. 천민의 대다수인 노비는 왕실과 관청, 귀족에게 예속되어 갖은 노역에 종사하였다. 주로 전쟁 포로, 죄인, 귀족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한 사람들 이 노비가 되었다.

골품과 관등표 골품은 개인의 신분뿐만 아니라 친족의 등급을 나타내는 것으로, 개인의 정치・사회 적 활동 범위를 결정하였음은 물론, 집과 수레의 크기나 복색 등 일상생활까지 규제하였다. 진골은 승진 에 제한이 없어 최고 관등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6두품은 6관등(아찬)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다. 관직 진 출이 4두품으로 제한되면서 3~1두품은 점차 평민으로 간주되었다.

4. 경제 활동과 사회 모습

43


엄격한 법으로 사회를 이끌다

삼국은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법을 제정하여 사회를 운영했고,이 는 율령에 반영되었다. 고구려는 반역자를 화형에 처한 뒤 다시 목을 베었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적에게 항복하거나 패전한 자도 사형에 처했으며, 도둑질 한 자는 12배로 배상하게 하였다. 백제도 반역자나 전쟁터에서 물러난 군사 및 살인자는 목을 베었고, 도둑질한 자는 귀양 보내고 2배를 물게 하였다. 뇌물을 받거나 횡령한 관리는 3배를 배상하 게 하고 종신토록 금고형에 처하였다. 또 혼인한 부인이 간통하면 천민으로 신분 을 낮추고 남편 집의 종으로 삼았다. 이는 가부장적인 사회의 모습을 보여 준다. 신라의 법은 고구려, 백제의 법과 비슷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풍속으로 보는 삼국 사회

삼국의 동질성 •(신라와 중국의) 언어는 백제

삼국은 혈연, 언어, 문화적으로 동질성을 많이 보였지만, 각자 독특한 사

인의 통역을 거친 뒤에야 통하

회 풍속도 있었다. 척박한 환경에서 정복 활동을 통해 성장한 고구려는 풍속

였다. •백제의 언어와 복장은 대략 고

이 질박하고 사회 기풍은 씩씩하였다. 혼인 풍속도 매우 간소하여 남녀가 자 유롭게 교제해 결혼했고, 신랑 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다른 예물은

구려와 같았다. -“양서”-

없었다. 한편, 남녀가 혼인하면 곧 수의를 준비했던 풍습은 죽음을 늘 염두 에 둘 만큼 전투가 일상적이었던 현실을 반영한다. 백제는 언어, 풍속, 의복이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일찍부터 중국과 활발하 게 교류하여 지배층은 중국의 고전과 사서를 즐겨 읽고 한문에 능숙하였다. 고구려, 백제에 비해 발전이 늦었던 신라는 초기의 전통을 오래 유지하였 다. 만장일치제가 특징인 화백 회의는 여러 부족의 대표가 함께 사회를 이끌

신라, 고구려, 백제 사신(왕회도, 타이완국립고궁박물관) 삼국 사신

던 전통이 반영된 것이다. 이는 귀족의 단결을 굳게 하고 국왕과 귀족 사이의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하였다. 원시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기원한 화랑도

들의 의복이 비슷하다.

는 진흥왕 때 국가적 조직으로 정비되면서 신라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화랑도는 어떤 조직이었나? 화랑도는 귀족 자제 중에서 선발된 화랑이 다양한 신분을 포함한 낭도를 이끄는 조직이었다. 화랑과 낭도는 원광의 세속 5계를 받들며 생활했고, 명산대천을 유람하 며 심신을 수련하였다.“삼국사기” 에는‘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화랑에서 선발되었고 뛰어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에서 나왔다.’ 라고 하였다. 이처럼 화랑 도는 인재를 찾아 등용하는 기능을 하였다. 한편, 화랑과 낭도는 강한 의리로 맺어져 있었는데, 이는 계층 간 대립과 갈등을 완 화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44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세속 5계

•충으로써 임금을 섬긴다. •효로써 부모를 섬긴다. •믿음으로써 벗을 사귄다. •전쟁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는다. •살생을 가려서 한다.


통일 후 신라 사회는 어떻게 변하였을까?

신라는 삼국 통일 후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과 영토를 흡수하여 하나의 국가로 융합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대외 교류가 더욱 활발 해지면서 신라인의 활동 범위는 넓어졌고, 신라에 정착하는 외국인 도 있었다.

진골에서 6두품으로 (대사의) 법호(法號)는 무염으로 달마대사 의 10대 법손(法孫)이 된다. 속성(俗姓)은 김 씨로 태종 무열왕의 8대손이다. …… 아버지

골품제의 기본 틀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만, 성골은 없어졌고 3~1두품은 거의 평민으로 간주되었다. 진골 가문이 6두품으로 신

는 범청으로 골품이 진골에서 한 등급 떨어져 서 득난(得難: 6두품)이 되었다. - 최치원, 보령 성주사 낭혜화상탑비 -

분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신라 말에는 호족이 성장하고, 농민 봉기가 전국에서 일어나는 등 사회 변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 세력을 구축한 호족과 유교 정치사상을 내세운 6두품 학자 들이 연결되면서 골품제에 바탕을 둔 신라 사회는 해체되어 갔다.

발해 사회의 이모저모

발해 주민은 고구려계와 말갈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배층은 왕족 대씨와 귀족 고씨 등 고구려계 사람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지만 말갈 계도 있었다. 발해의 법률과 풍속은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상층 사회를 중심으로 당의 문화가 널리 수용되었지만, 하층 촌락민에게는 고구려나 말갈 사 회의 전통적인 생활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다. 발해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사회 기풍이 씩씩했으며 활쏘기, 말타 기, 격구 등을 즐겼다. 여성은 지위가 비교적 높은 편이었으며,‘여 사’ 라는 여성 교사의 개인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정효 공주 무덤의 벽화(중국 지린 성) 악공, 무사, 시종 등이 그려져 있어 발해인의 옷차림과 생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위풍당당 발해 여성 부인은 모두 사납고 투기하였 다. …… 거란, 여진 등 여러 나 라에는 …… 양인이 모두 작은 부인이나 시중드는 계집종을 거 느렸으나 오직 발해만이 이와 같 은 것이 없었다. - 홍호,“송막기문”-

“발해인 셋이면 호랑이도 잡는다.” 라는 말을 들을 만큼 용맹한 발해인도 부인에게는 꼼짝 못했던 걸까? 남송 시대의 문헌인“송막기문” 에 따르면, 발해 여성은 여러 명이 의 자매를 맺어 번갈아 서로 남편들을 감시했고, 남편이 첩을 들이려 하면 다 같이 이를 꾸 짖었다고 한다. 부인의 등쌀 때문에 발해 남자는 첩을 두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밖에 나 가서도 한눈을 팔 수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한 듯, 발해에는 일부일처제가 일찍부터 확립되었고 무덤은 부부 합장묘가 많다고 한다. 또한, 발해의 전설 중에는 부인이 장군이 되어 거란을 무찌르고 남 편을 구해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는 발해 여성의 위풍당당한 면모를 잘 보여 준다.

4. 경제 활동과 사회 모습

45


5

폭넓은 대외 교류와 문화의 발전

고대의 활발한 문화 교류

완함(비파)

거문고

피리

배소

1993년 겨울, 부여의 능산리 절터 부근에서 발견된 백제 금동 대향로! 고대 문화의 정수를 보여 주 는 걸작이다. 날아오르는 봉황과 용 사이로 산봉우리가 물결치듯 솟아 있고, 신선과 다섯 악사, 다양 한 동물이 새겨져 있다. 다섯 악사가 흥겹게 연주하는 완함・피리・배소는 서역에서, 거문고는 고구려에서, 북은 동남아시아에서 들어온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백제 금동 대향로 속에 여러 갈래의 문화가 녹아든 배 경은 무엇일까?

백제 금동 대향로(국립부여박물관)

폭넓은 교류 속에 개성 있는 문화를 이루다

삼국은 중국과 ✽서역의 여러 나라와 교류하며 문화를 발전시켰다. 한자를 사

✽서역

중국인이 중국 서쪽 지역을 통 틀어 이르던 말이다. 넓게는 서

용하며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고, 유교・불교・도교 등 다양한 학문

아시아, 중앙아시아, 인도를 비

과 종교를 수용하였다.

롯해 유럽 동부와 아프리카 북 부까지 아우른다.

고구려는 북중국이나 북방 민족 등 주변국과 교류 또는 대결하며 성장하였다. 그 과정에서 외래 문물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강건함과 패기 넘치는 문화를 이 루었다. 백제는 주로 남중국과 교류하며 선진 문물을 수용했고, 중국과 가야・ 왜를 연결하는 서남해 교역을 주도하였다. 이에 문화의 수입과 전달에 큰 역할 을 하면서 세련되고 우아한 귀족 문화를 꽃피웠다.

백제 장인이 세운 신라의 탑 왕이 군신에게 의논했는데, 신하들이“백제에 서 공장(工匠)을 청한 연후에야 가능할 것입니다.” 라고 하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청하였

신라는 초기에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중국 문물을 수용했으 나,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 중국과 직접 교류하였다. 문화는 옛 전통이 오래 남아 있어 소박하면서도 조화미를 갖추었다.

다. 공장 아비지(阿非知)가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한편, 삼국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언어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활

석재를 경영하였다.

발히 문화 교류를 하였다. -“삼국유사”-

신라는 선덕 여왕 때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 하면서 백제의 기술자를 초청하였다. 이는 두 나라 가 대립하던 중에도 꾸준히 교류했음을 보여 준다.

통일 후 신라는 삼국의 문화를 종합하여 민족 문화의 기틀을 마련했고, 당・인도・이슬람 문화도 받아들여 문화에 세련미를 더하였다. 또한, 불국토의 이상을 추구하며 통일과 균형의 미가 돋보이는 예술을 완성하였다.

46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신라 말에는 선종이 유행하고 지방 문화의 역량이 높아지면서 다양한 문화 경 향이 나타났다. 발해는 고구려 문화를 바탕으로 당 문화를 수용했는데, 사회 저변 에는 소박한 말갈 문화도 남아 있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문화

삼국과 가야는 일찍부터 많은 사람이 일본에 건너가 선진 문화를 전파하여, 고 대 국가의 성립과 ✽아스카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스카 문화와 하쿠호 문화

일본과 정치적으로 가장 밀접했던 백제는 오경박사, 의박사, 역박사 등을 파견 하여 유교와 의학, 천문, 역법 등을 전해 주었다. 또한, 불교와 함께 불상 조각, 건 축 등을 전파하여 일본 고대 문화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구려는 불교,

6세기 말`~`7세기 일본의 수도 가 아스카에 있던 시대의 문화 로, 전기를 아스카 문화, 후기를 하쿠호 문화로 구분한다. 불교를 중심으로 발달한 것이 특징이다.

회화 등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해 주었다. 승려 담징은 종이, 먹 등의 제조 기술과 5경을 전하였고, 승려 혜자는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신라는 조선술과 축 ‘한인의 연못’ 이라는 이름이 제술을 전해 주었다. 축제술 전파를 계기로 일본에 ✽ 생기기도 하였다. 가야는 일본의 철기 문화 발달에 기여했고, 가야 토기는 일본 스에키에 영향을 주었다.

✽한인의 연못

신라 기술로 축조된 저수지를 말한다.

남북국의 문화도 일본에 전해졌다. 신라의 유교와 불교문화는

하쿠호 문화

발달에 영향을 끼쳤고, 발해의 음악도 일본에서 연주되었다.

경주에서 출토된 서역의 유리 제품(국립중앙박물관)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아브

과 경주 계림로 보검(국립경

궁전 벽화 조우관을 쓴 인물이 고구려 사신으

주박물관) 유리구슬 속에

로 짐작된다.

서역인의 얼굴도 보인다.

5. 폭넓은 대외 교류와 문화의 발전

47


일본에서 만난

한국 고대 문화의 숨결 일본의 나라(奈良) 현 아스카 촌 일대는 아스카 문화의 중심지였다. 아스카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기까지 삼국 과 가야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공이 컸다. 도래인(渡來人)이라고 표현되는 이들은 일본에 정착하며 다양한 문화를 전파하였다. 일본 속에 살아 숨 쉬는 우리 고대 문화의 흔적은 어떤 것이 있을까? 우리나라 금동 미륵보살 반가

호류 사 금당 벽화 호류 사는 쇼토쿠 태자가 건립한 사찰로, 백제

사유상(왼쪽, 국립중앙박물관)과

장인이 건축에 많이 참여하였다. 고구려 승려 담징이 그렸다고 전하는

일본 고류 사 목조 미륵보살 반가

호류 사 금당 벽화는 1949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의 그림은 복원된

사유상(오른쪽) 반가부좌 자세로

것이다.

명상에 잠긴 미륵보살을 조각한 상이다. 두 불상은 재료만 다를 뿐 형태가 쌍둥이처럼 닮았다.

칠지도(일본 나라 현 이소노카미 신궁) 4세기 백제에서 만들 어 일본에 전한 것으 로 두 나라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 준다.

고구려 수산리 고분 벽화(위, 남포 강서)와 일본 다카마쓰 고분 벽화(아래, 일본 나라 현) 벽화 제작 기법을 비롯하여 그림 속 저 고리와 색동 주름치마 등 여인들 의 옷차림이 비슷하다.

1 48

가야 토기(왼쪽)와 일본의 스에키(오른쪽) 스에키란 흑청색을 띤 일본의 단단 한 토기를 말한다. 가야 토기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의 문화 교류를 보여 주는 사례로 이 외에 어떤 것이 있는지 조사해 보자.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불교와 도교, 풍수지리설의 발달 (자장율사가) 신라에 돌아오고자 종남산의 원향선사에게 하 직 인사를 하니, 선사가“내가 관심(觀心)으로 그대의 나라를 보 매, 황룡사에 9층의 탑을 세우면 해동의 여러 나라가 모두 그대 의 나라에 항복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자장이 이 말을 듣고 (신라에) 돌아와 나라에 알렸다.

- 황룡사 9층 목탑 찰주본기 -

황룡사 터에서 발견된 기록에 따라 계산해 보면 황룡사 9층 목탑의 높이는 무려 80m에 이른다. 윗글에 나타나듯이 신라는 이웃 나라를 복속시키려는 염원을 담아 이처럼 거대한 불탑을 세웠다. 이는 삼국 시대 불교가 나라의 태평과 번영을 기원하고, 백성의 마 음을 한데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준다. 삼 국과 남북국의 불교는 어떻게 발전했을까?

황룡사 터(경북 경주)와 황룡사 9층 목탑(복원 모형) 황룡사 터에서 발굴된 목탑의 치미(왼쪽)는 높이가 1.8m에 이른다.

왕실이 앞장서서 불교를 받아들이다

삼국은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 였다. 왕권을 중심으로 국가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 부족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 는 토착 신앙보다 수준 높은 고등 종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백제는 4세 기 후반에 불교를 수용했고, 신라는 토착 귀족 세력의 반발로 인해 6세기 법흥왕

✽업설(業說)

전생에 지은 행위의 결과를 현

때 이르러 비로소 공인하였다.

세에서 받는다는 주장이다. 왕이

불교는 왕실이 앞장서서 수용했으며, 귀족 사회로 확대되었다. 왕은 왕즉불(왕 이 곧 부처) 사상을 내세워 왕권을 강화하였다. 특히 신라 왕들은 불교식 왕명을

나 귀족은 전생에 선한 공덕을 많이 쌓아 현세에 귀하게 태어 났다고 해석되기도 하였다.

짓고 왕실을 석가모니 집안의 환생으로 여겼다. 귀족들도 ✽업설을 자신들에게 유 리하게 해석하여 귀족 중심의 신분 질서를 정당화하였다. 미륵 신앙도 널리 수용되었다. 이는 미륵불이 나타나 중생을 구 제하고 이상적인 불국토를 건설한다는 내용으로, 백제의 미륵사 창건이나 신라의 화랑도에 영향을 주었다.

왕이 곧 부처다 진평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백정(白淨)이 고 진흥왕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다. ……

삼국은 대규모 사찰을 짓고 국가의 복을

왕비는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 왕은

비는 법회를 자주 개최하였다. 한편, 불교

태어날 때부터 기이한 용모였고, 신체가 장대하

와 함께 중국과 서역에서 음악, 미술, 공

고 뜻이 깊고 굳세었으며, 지혜가 밝아서 사리에

예, 건축 등 다양한 문화가 전래되어 고대 문화가 더욱 풍성해졌다.

통달하였다.

-“삼국사기”-

진평왕과 왕비를 석가모니 부처의 부모 이름 인‘백정’ 과‘마야부인’ 으로 칭하였다. 신라는 법 흥왕에서 진덕 여왕에 이르기까지 불교식 왕명

이차돈 순교비(국립경주박물관) 법흥왕 때 불교를 공인

을 지었다.

하는 계기가 되었던 이차돈의 순교 모습이 새겨져 있다.

5. 폭넓은 대외 교류와 문화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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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 불교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다

통일 신라의 불교는 고구려, 백제뿐만 아니라 당, 인도의 불교까지 받아들여 사 상의 깊이를 더했고, 지배층 중심에서 벗어나 대중에게 널리 확산되었다. 원효는 모든 진리는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 사상을 불교의 핵심으로 여겼다. 이를 바탕으로 화쟁 사상을 주장하여 종파 간 논쟁을 조화롭게 승화시키려고 하였 다. 또한, 중생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며, 불교의 교리를 쉬 운 노래로 만들어 부르며 백성에게 ✽아미타 신앙을 적극 전파하였다.

✽아미타 신앙

아미타 신앙은 내세에 아미타불 이 관장하는 서방 정토에 왕생 하기를 바라는 신앙이다.

의상은 당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와 신라 화엄종을 열었으며 부석사 등 많 은 절을 세웠다. 의상의 화엄 사상은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내용으로,‘하나가 모든 것이요, 모든 것이 하나다.’ 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는 화합과 통일을 추구하는 당시 시대상이 반영된 것이다. 또한, 의상은 관세음 보살을 믿어 현세의 고난을 구제받고자 하는 관음 신앙을 전파하였다. 한편, 불교 공부를 위해 많은 승려가 당은 물론 인도까지 왕래하였다. 혜초는 인도와 서역을 순례한 뒤 여러 나라의 풍물을 기록한“왕오천축국전” 을 남겼다.

신라 말, 선종이 대두하다

선종은 교리와 계율을 중시하는 교종과 달리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 려는 불교이다. 통일 무렵에 전래되었으나 화엄종 등 교종의 위세에 눌려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신라 말부터 크게 유행하였다. 선종은 교종의 사상 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개인적 정신 세계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는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던 호족의 취향에 부합하였다. 호 쌍봉사 철감선사탑(전남 화순) 신라 말 선종의 영향으로 승려의 사리를 봉안하는 승탑과 승려의 일 대기를 새긴 탑비가 유행하였다.

족의 후원 속에서 각 지방에 9산 선문을 비롯한 선종 사원이 들어섰다. 선종은 지 방 문화의 발달에 영향을 끼쳤고, 도당 유학생들의 반신라적 움직임과 결부되어 고 려 왕조 개창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원효와 의상, 다른 길을 걸어 같은 곳에 이르다 원효와 의상은 비록 신분도 나이도 달랐지만 젊은 시절부터

비였던 지통과 빈민 출신인 진정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또한, 국

우정을 나누며 함께 당 유학길에 올랐다. 원효는 모든 것이 마음

왕에게 지원받는 대신 백성의 도움으로 교단을 유지했고, 교단

먹기에 달렸다는 깨달음을 얻고 당 유학을 포기하였다. 그는 모

과 백성 사이를 좀 더

든 중생이 평등하게 불성을 지녔다고 생각해 노래하고 춤추며

가깝게 하려고 애썼다.

백성에게 불교 신앙을 퍼뜨렸다. 자유분방한 행동 탓에 교단에서

이처럼 원효와 의상

소외되었으나, 왕성한 저술 활동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정립하고

은 다른 길을 걸었으나,

실천하였다.

결국 같은 목표를 지향

의상은 당에서 10년 만에 귀국하였다. 화엄 사상을 공부하면 서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평등하다고 깨달은 그는 노

50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했고 불교 대중화에 큰 업적을 남겼다.


발해의 불교

발해의 불교는 고구려 불교의 전통을 계승했고,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널리 성행하였다. 문왕은 스스로를 불교의 이상적인 성왕으로 일컫기도 하였다. 수도였던 상경, 중경, 동경 일대에서 웅장한 절터와 불상들이 발굴되었는데, 사 원 건축에 사용된 와당이나 불상 등에는 고구려 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관음보살 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불상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관음 신앙 등 여러 불 교 신앙이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교와 풍수지리설이 유행하다

이불병좌상(중국 지린 성) 두 부처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다.

불로장생과 신선이 되기를 추구하는 도교는 삼국에 전래되어 귀족 사회를 중심 으로 유행했으며, 예술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백제 산수무늬 벽돌이나 백제 금 동 대향로, 고구려 고분의 사신도 등에는 도교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7세기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귀족과 연결된 불교 세력을

풍류도, 우리 고유의 현묘한 도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

억누르기 위해 도교를 장려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라 이른다. …… 그 내용은 3교를 포함해 인간을

신라 말에는 귀족의 향락과 사치 생활에 대한 반발로 은둔적

교화하는 것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

인 사상 경향이 생겨, 도교와 노장사상이 널리 퍼졌다. 또한, 선

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며, 인위적으로 일

종 승려 도선이 들여온 풍수지리설도 유행하였다. 풍수지리설

을 만들지 않고 자연의 말 없는 가르침을 실천하 는 것은 노자의 근본 사상이고, 악행을 하지 않고

은 산이나 물, 땅의 모양을 살펴 도읍, 주거지, 묘지 등을 정하

선행을 실천하는 것은 석가모니의 교화와 같다.

는 이론이다. 이는 예언적인 도참사상과 결합하여 자연환경이

- 최치원,“난랑비서문”-

국가와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는 믿음으로 확대되었다. 호

풍류도란 유교・불교・도교의 정신을 모두 포

족은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수도인 금성(경주)의 운수가 다했

함한 우리 고유의 사상으로, 신라의 화랑들이 이 를 받들어 수행하였다.

다고 주장하며 세력을 키워 나갔다.

무령왕릉 지석(국립공주박물관) 토지 백제 산수무늬 벽돌(국립중앙박

신에게 값을 치르고 무덤 터를 산다는 계

물관)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약서(매지권)가 새겨져 있다. 이는 도교 사

마음이 담겨 있다.

상의 영향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강서대묘의 현무도(남포 강서) 도교에서는 청룡(동), 백호(서), 주작 (남), 현무(북)를 방위신으로 여긴다.

5. 폭넓은 대외 교류와 문화의 발전

51


유교의 수용과 학문의 발달 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서하고 기록한다. 하늘 앞에 맹서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 충 도(忠道)를 지켜 과실이 없기를 맹서한다. 만약에 맹서를 저버리면 하늘의 큰 벌을 받을 것을 맹서한 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도, 행할 것을 맹서한다. 또 따로 (3년 전인) 신미년 7 월 22일에 맹서하였다. 시경・상서・예기・춘추좌전 등을 차례로 3년에 습득할 것을 맹서하였다. - 임신서기석 -

단단한 돌에 새겨 넣은 두 신라 젊은이의 굳센 다짐이 1,400년을 뛰어넘어 전해진다. 이들은 나라에 충성을 바치며 여러 가지 유교 경전을 열심히 익히자고 맹세하였다. 삼국과 남북국에서 유교가 어떻 게 발달했는지 알아보자.

임신서기석(국립경주박물관)

삼국, 유교를 수용하고 역사서를 편찬하다

삼국 시대에는 중국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한학이 널리 보급되고 유교를 비롯 한 다양한 사상과 학문이 들어왔다. 삼국은 한학과 유교 교육을 장려하여 학식 있 고 충성스러운 인재를 양성하려 하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 수도에 태학을 세워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쳤 다. 지방의 경당에서는 청소년들이 한학과 무술을 익혔다. 백제는 오경박사와 의 박사, 역박사를 두고 유교 경전과 의학, 천문, 역법 등을 가르쳤다. 신라에서도 청 소년들이 유교 경전을 공부했다는 사실이 임신서기석에 나타나 있다. 다만 삼국 시대의 유학은 학문적으로 깊이 있게 연구된 것은 아니고 충・효・신 등 도덕 규 범을 장려하는 정도였다. 학문이 발달하고 국가 체제가 안정되면서 역사서의 편찬도 활발해졌다. 고구려 는 영양왕 때 이문진이 이전의“유기” 를 간추려“신집”5권을 편찬하였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 고흥이“서기” 를, 신라는 진흥왕 때 거칠부가“국사” 를 각각 편찬하 였다. 이러한 역사서의 편찬에는 국력을 과시하고 왕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독서삼품과

통일 신라, 유학의 수준이 높아지다

처음으로 독서삼품을 정하여 벼슬을 하게 되었는데,“춘추좌씨전” ,“예기” ,“문선” 을읽 어서 그 뜻을 능통히 알고 겸하여“논어” 와

통일 신라 때 이르러 유학과 한문학의 수준은 한층 높아졌다. 신 문왕은 국학을 설립했고, 경덕왕은 국학을 태학으로 바꾼 후 박사

“효경” 에 밝은 자를 상(上)으로 하고“곡례” ,

와 조교를 두어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원성왕은 독서삼품과를 마

“논어” ,“효경” 을 읽은 자를 중(中)으로 하고

련하여 유교 경전의 이해 수준을 시험함으로써 관리를 채용하고자

“곡례” 와“효경” 을 읽은 자를 하(下)로 하였다.

하였다. 이 제도는 골품제 때문에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유

-“삼국사기”-

52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학을 보급하는 데 기여하였다.


유학자 중에는 6두품 출신이 많았다. 6두품은 골품제의 한계 속에서도 뛰어난 ✽도당(渡唐) 유학생

학문 실력을 바탕으로 국왕에게 정치적 조언을 하고 실무를 담당하였다. 통일 신

당에 건너가 공부한 유학생으로

라 초기에 활약했던 강수는 외교 문서 작성에 능했고, 설총은 이두를 체계적으로

6두품 출신 유학자가 대부분이

정리했을 뿐 아니라‘화왕계’ 를 지어 유교적인 도덕 정치를 강조하였다.

었다. 숙위학생이라고도 한다.

진골 출신인 김대문은“화랑세기” ,“고승전” ,“한산기”등을 저술하여 신라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신라 말에는

도당 유학생이 크게 증가했고, 그중에는

✽빈공과

빈공과에 급제하는

빈공과는 당에서 외국인을 대상

경우도 많았다. 6두품 출신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실력보다 골품을 중시하

으로 실시한 과거 시험으로, 합 격자의 상당수가 신라인이었다.

는 신라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였다. 최치원은 당에서 귀국하여 개혁안 10여 조를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6두품 지식인은 점차 반신라적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다듬이 소리 발해의 유학과 한문학

서리 기운 가득한 하늘에 달빛 비치니 은하수

발해에서도 유학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충・인・의・

도 밝은데 / 나그네 돌아갈 일 생각하니 감회가

지・예・신이라는 유교 덕목을 6부의 명칭으로 삼은 점에서 잘

새롭네 / 홀로 앉아 지새는 긴긴 밤 근심에 젖어

드러난다. 발해는 주자감을 설립하여 유교 경전을 가르쳤고 당

마음 아픈데 / 홀연히 이웃집 아낙네 다듬이질 소리 들리누나 / …… 나라 떠나와서 아무 소식

에도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발해의 유학생은 빈공과에서 신라

듣지 못하더니 / 이제 타향에서 고향 소식 듣는

유학생과 경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또한, 한문학의 수준도 높았

듯하구나 ……

는데, 세련된 문장으로 된 정혜 공주・정효 공주 묘지문이나 양

- 양태사 -

양태사가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국과 아 내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시다.

태사의 시를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도당 유학생, 닫힌 신라 사회를 두드리다 가을바람에 괴롭게 읊조리나니 / 세상에 날 알아주는 이 적구나. 창밖에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 / 등불 앞 마음은 만 리(萬里) 밖을 내닫네 - 최치원,‘가을밤 빗속에서(秋夜雨中)’-

짧은 시 속에 지식인의 고뇌와 쓸쓸함이 가득 담겨 있다. 최치원이 왜 이런 우수 어린 시를 썼 을까? 그는 불과 18세에 빈공과에 급제하고 당에서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천재였다. 그러나 정 작 고국에서는 골품제의 벽 앞에 좌절한 채 외직을 전전하였다. 최치원을 비롯해 이미 넓은 세상 을 경험한 6두품 출신의 도당 유학생들은 신라 사회의 모순을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이들은 닫 힌 신라 사회를 변화시키려 했으나 뜻을 이루기 어려웠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최치원은 가야산에 은거하며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의 문집으로“계원필 경” 이 전하고 있다. 한편, 최치원과 더불어‘나말 3최’ 로 유명한 최승우는 당에서 귀국하자마자 후백제의 신하가 되었고, 최언위는 고려 왕건의 신하가 되었다. 이밖에도 많은 6두품 지식인들이 호족과 손잡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였다.

최치원(857~?)

5. 폭넓은 대외 교류와 문화의 발전

53


과학 기술과 예술의 발달 신종이 완성되니 형상은 산이 솟은 듯하고, 소리는 용의 음성 같아 위로 는 하늘 꼭대기까지 꿰뚫고 아래로는 땅속까지 통하였다. 보는 자는 기이 하다고 칭송하고 소리를 들은 자는 복을 받았다.

- 성덕 대왕 신종 명문 -

무려 33년 만에 완성된 성덕 대왕 신종! 그윽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 는 부처의 마음이 실린 듯하고, 두 손 모은 비천상은 중생의 마음이 담 겨 있는 듯하다. 긴 여운이 남는 그 오묘한 소리는 오늘날 과학 기술로도 재현 하기 어렵다고 한다. 성덕 대왕 신종은 신라인들의 종교적 열정과 과학 기술이 빚어낸 예술의 결정체이다. 고대의 과학 기술과 예술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성덕 대왕 신종과 비천상(국립경주박물관)

별을 보고 하늘의 뜻을 읽다 •4월 그믐 정묘에 일식이 있었다.

과학 기술의 발달

삼국은 천체와 천문 현상이 농경이나 왕의 정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

•5월에 다섯 행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다고 여겨 이를 관측하였다.“삼국사기” 에 실린 일식, 월식, 혜성 출현,

토성)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일자가 왕

기상 이변 등에 대한 많은 관측 기록은 매우 정확한 것으로 밝혀졌다.

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이것은 임금

고구려의 고분 벽화 속 별자리도 정확한 관측을 바탕으로 그려졌다.

의 덕이요, 나라의 복입니다.” 라고 속여 서 고하였다.

-“삼국사기”-

* 일자(日者): 천문 관측뿐만 아니라 점성까지 맡아보던 관원이다.

천문학의 발달과 함께 역법과 수학 지식도 축적되었다. 역법은 농사 를 짓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수학 지식은 고분이나 탑 등의 건축에 널리 활용되었다. 이 밖에 금속 기술도 발달하여 단단한 철제 농기구 나 무기, 섬세한 금속 공예품도 많이 제작되었다. 성덕 대왕 신종은 금 속 주조 기술의 수준 높은 경지를 보여 준다. 통일 신라에서는 불교문화가 융성하면서 불경을 인쇄할 수 있는 목 판 인쇄술과 제지술이 발달하였다. 불국사 3층 석탑에서 발견된 무구 정광대다라니경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다. 그 종이는 지금까지 보관될 만큼 품질이 뛰어나다. 신라의 종이는 희 고 질겨서 당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첨성대(경북 경주) 신라 선덕 여왕 때 세운 천문 대이다.

54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무구정광대다라니경(불교중앙박물관) 8세기에 제작되었으며, 너비가 8cm, 길이는 620cm에 이 른다.


고대 문화의 보물 창고, 고분

고대에는 현세의 신분과 지위가 죽은 뒤에도 이어진다는 내세관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에 지배층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크고 화려한 무덤을 만들었다. 삼국과 남북국 시대에 남겨진 다양한 형태의 고분 에는 당시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의식 세계가 반영되어 있다. 고구려는 초기에 주로 돌무지무덤을 만들었으나 점차 굴식 돌방무 덤으로 바뀌었다. 굴식 돌방무덤의 천장과 벽에는 벽화를 그려 넣기도 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생활 모습을, 후기에는 사신도를 많이 그렸다. 백제는 한성 시기에 계단식 돌무지무덤을 만들었다. 이는 고구려의

강서대묘의 모줄임천장(남포 강서) 모줄임천장 구 조는 고구려의 독특한 무덤 양식이다.

무덤 양식과 비슷한 것으로, 백제를 건국한 세력이 고구려와 관련 있다는 건국 신 화의 내용을 뒷받침해 준다. 웅진 시기에는 굴식 돌방무덤 또는 벽돌무덤을 만들 었다.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는데, 무령왕릉이 대표적이다. 사비 시 기에는 규모는 작지만 세련된 굴식 돌방무덤을 주로 만들었다. 신라는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을 많이 만들다가, 삼국 통일 무렵에는 굴식 돌 방무덤도 만들었다. 통일 후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이 유행했고, 무덤의 규모 도 점차 작아졌다. 그리고 무덤에 둘레돌을 두르고 그 위에 12지 신상을 조각하는 양식이 나타났다. 이러한 묘제는 고려, 조선의 왕릉에까지 계승되었다. 발해의 무덤은 다양한 형태가 있다. 그중 정혜 공주 묘는 굴식 돌방무덤에 모줄 임천장 구조로 고구려 양식이 두드러진다. 정효 공주 묘는 벽화가 그려진 벽돌무

정혜 공주 묘에서 발견된 돌사

덤으로 당과 고구려의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발해는 무덤 위에 탑을 만들기도 하

자상(중국 지린 성)

였다.

다양한 무덤 양식 굴식 돌방무덤

벽돌무덤

돌무지덧널무덤 널

이음길

앞돌방

돌무지

나무덧널 널방 껴묻거리 상자 널방

돌로 널길과 널방을 짜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든 무덤으로, 널방의 벽과 천장에 벽 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고구려 굴식 돌방무덤 에는 모줄임천장 구조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널길 널방을 벽돌로 쌓은 백제 무덤으로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

나무로 덧널을 짜고 그 위에 돌을 쌓은 뒤 흙으로 봉분을 쌓는 무덤이다. 구조상 도굴 이 어려워 껴묻거리가 많이 남아 있다. 벽화 는 그릴 수 없다.

5. 폭넓은 대외 교류와 문화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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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탑, 기술과 예술의 만남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가 발달하면서 궁궐, 성곽 등이 정비되었다. 장 수왕이 평양에 세운 안학궁은 우리나라 역대 궁궐 중 가장 큰 규모였다. 통일 신라 때 완성된 안압지(경주 동궁과 월지)는 연못과 인공 섬, 건물 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어 신라의 뛰어난 조경술을 보여 준다. 발해 의 상경성은 외성을 쌓고 남북으로 뻗은 주작대로를 내었는데, 당의 장 안성과 구조가 비슷하다. 한편, 상경성 내 궁궐터에서는 고구려 문화를 계승한 온돌이 발견되었다. 불교가 수용되면서 사찰이 많이 건립되었다. 신라의 황룡사와 백제의

온돌(연해주 크라스키노 유적) 발해의 도성 및 백성의 거주지에서 발견되는 난방 시설이다. 그 형 태는 고구려와 같다.

미륵사는 삼국 시대의 대표적인 사찰로, 그 규모가 매우 웅장하였다. 통

일 신라의 불국사와 석굴암은 불국토의 이상이 반영되어 있다. 불국사는 불경의 내용에 따라 여러 부처가 다스리는 세상이 영역별로 구현되어 있고, 석굴암은 지 상의 세계를 상징하는 네모난 전실과 하늘의 세계를 상징하는 둥근 주실로 구성 되어 있다. ✽탑의 의미

원래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기

사찰과 함께 예배와 수행의 대상으로 ✽탑도 많이 세워졌다. 삼국 시대에는 처

위해 만든 것으로, 불상이나 불

음에 목탑이 주로 만들어졌으나 점차 석탑으로 바뀌었다. 통일 신라 때에는 이중

경이 봉안되기도 하였다.

기단 위에 3층으로 쌓는 석탑 양식이 나타났다. 통일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은 이상적인 비례를 통해 조화와 균형미를 보여 준다. 신라 말에는 석탑의 형태가 다양해졌고, 선종의 영향으로 승탑과 탑비도 많 이 건립되었다. 이 시기 승탑은 대개 팔각 원당형으로 세련된 멋을 지니고 있다. 한 편, 발해의 탑은 대부분 벽돌로 쌓은 전탑으로 무덤 위에 세우는 경우도 많았다.

상륜부

탑신부 ●

탑신

● ●

익산 미륵사지 석탑(백제) 목탑 양식의 흔적 이 남아 있다.

56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옥개석

상층 기단 하층 기단

기단부

경주 불국사 3층 석탑(통일 신라) 이 시기 탑의 전형으로 이후 탑의 모범이 되었다.

영광탑(발해) 현재 온전히 남아 있는 유일한 발해의 탑이다.


다양한 개성을 지닌 불상

삼국 시대 초기 불상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점차 삼국의 개성이 반영 되었다. 또한, 미륵 신앙의 영향으로 미륵보살 반가사유상도 많이 제작되었다. 통일 신라 때에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아울러 당 뿐만 아니라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사실적인 표현 양식도 수용되어 균형미와 함께 인체의 아름다움을 갖춘 불상이 만들어졌다. 석굴암의 불상들은 신라 중대 조형 예술의 최고 경지를 보여 준다. 그러나 신라 하대에는 투박하고 개성 있는 불상이 제작되었다. 고구려의 금동 연가7년명 여래

발해에서도 매우 다양한 불상이 제작되었다. 그중 상경이나 동경의 절터에서는

입상(국립중앙박물관) 북조 불상

관음상을 비롯하여 석가모니불과 다보불을 나란히 조각한 이불병좌상이 많이 발

의 영향을 받았으며, 직선적이고 강렬한 고구려의 개성이 잘 드러

견되었다.

나 있다.

글씨, 그림, 음악 속에 담긴 멋과 흥

삼국과 남북국에서 한자가 두루 쓰임에 따라 서예가 발달하였다. 통일 신라의 김생이 대표적인 명필가이다. 그림으로는 다양한 고분 벽화와 천마 도가 전해 오며, 화가로 통일 신라의 솔거가 유명하였다. 백성은 삶의 애환이나 소망을 노래로 표현했는데, 백제의 정읍사가 대표 적이다. 신라에서는 향가가 유행하여 9세기 후반에“삼대목” 이라는 ���가집 이 편찬되었으나 지금은 전해 오지 않는다. 한편, 고구려의 왕산악은 중국 의 칠현금을 거문고로 개량했고, 가야의 우륵은 가야금 12곡을 지었다.

천마도(국립중앙박물관) 자작나무 껍질을 겹쳐서 만든 말다래에 그린 것이다.

부처의 미소는 어디로?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띤 채 두 손 을 활짝 펼친 부처! 마치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고 소원을 들어줄 것 같 은 모습이다.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삼국 시대에는 이렇게 친근감 있는 불 상이 많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통일 신라 시기로 접어들면 서 불상은 미소가 점차 사라졌고, 높은 좌대에 앉아 근엄하게 중생을 내려다보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 삼존상 (백제)

경주 석굴암 본존불상(신라 중대)

철원 도피안사 철조 비로자나 불 좌상(신라 하대)

는 모습이 되었다. 이는 신라인들이 불국토의 이상을 완벽한 예술로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라 하대에 호족 세력이 성장하 고, 선종이 유행하면서 개성 있는 불상이 많이 제작되었다. 규모가 큰 철불과 석불도 많이 조성되었는데, 이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호족의 의도가 담긴 것으로 여겨진다.

5. 폭넓은 대외 교류와 문화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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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선사 문화의 발달과 국가의 출현 구석기 시대 •뗀석기 사용 •사냥, 채집 경제

신석기 시대 • ① , 토기 사용 •농경 시작(정착 생활)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

사유 재산 발생, 정복 활동, 계 급 사회, 국가 출현 → 최초의 국가인 ② 성장

•정복 활동 심화 • ③ 문화를 기반으로 여러 나라 성장 →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마한・진한・변한)

연맹 왕국과 고대 국가의 성장 연맹 왕국

고대 국가

•족장(군장)이 다스리는 여러 소국이 맹주국을 중심으로 연맹 체 구성, 대표(왕) 선출 •군사・외교 등 대외 활동은 연맹이 공동 대응, 각 부족의 일은 자치권 행사

•왕권 강화,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 마련 •족장은 중앙의 귀족으로 편입 •관제와 ④ 정비 • ⑤ 반포, 불교 수용, 영토 확대 •고대 국가 단계로 성장 - 고구려, 백제, 신라

고대 국가의 발전

58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창의

인성

자료집 만들기 다양한 자료를 찾아 고대 문화 교류의 내용을 설명하는 ppt를 제작한 뒤 발표해 보자.

1. 4~5명이 모둠을 구성하여 역할을 분담한다. •사진 자료 찾기, 문서 자료 찾기, ppt 편집하기, 발표하기

2. 시기와 나라, 문화 분야를 고려하여 주제를 결정한다. •고분에 나타난 문화 교류의 흔적 •불상으로 본 문화 교류 •우리 문화 속 서역인의 얼굴

3. 토론을 거친 후 자료를 정리하고, 모둠별로 ppt를 제작한다. 4. 제작한 ppt를 발표한다.

무령왕릉 내부 복원 모습

중국 남조의 벽돌무덤 양식을 이용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관은 일본에서 자라는 금 송으로 만들어졌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동 신발(왼쪽)과 일본 에다후나 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 신발(오른쪽) 오수전 고대 중국의 화폐로, 무령왕이 서거하던 해에 주조되어 백제로 전해졌다.

➊ 인도 마투라 박물관의 굽타 양 식 불상 ➋ 경주 감산사 석조 아미타여래 입상 ➌ 경주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 진 석조 아미타여래 좌상과 석 조 미륵보살 입상은 인도 굽타 양식의 영향을 받아 옷주름과 신체 굴곡이 섬세하게 표현되 었다.

대단원 마무리

59


태조 왕건상 (평양 조선중앙역사박물관)

미륵하생경변상도(일본 신노인)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척경입비도 (고려대학교박물관)

공민왕과 노국 대장 공주 (서울 공민왕 사당)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 좌상

청자 칠보 투각 향로

(경북 영주)

(국립중앙박물관)

삼국사기(경주 옥산서원)

1. 고려의 성립과 정치 발전 2. 경제 정책과 경제 활동 3. 신분 제도와 생활 모습 4. 다양한 사상과 귀족 문화의 발달

후삼국의 통일과 통치 체제의 변화 모습을 파악하고, 고려가 이민족의 침입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영토를 확장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전시과를 중심으로 한 토지 제도와 수취 체제를 파악하고, 다양한 산업의 발달을 토대로 여러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 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신분 제도의 구조와 특징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가족 및 혼인 제도, 여성의 지위 등 다양한 생활 모습을 연관 지 어 말할 수 있다. 유교, 불교, 도교 등 다양한 사상의 역할과 그 의미를 이해하고, 과학 기술과 귀족 문화가 융성했음을 보여 주는 사례 를 제시할 수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경남 합천)


1

고려의 성립과 정치 발전

고려의 건국과 국가 기틀의 확립 맞잡은 두 손, 온화한 미소, 마치 자애로운 부처처럼 보이는 이 인물상은 놀랍게도 태조 왕건상(像)이다. 황제만이 착용한다는 통천관을 쓰고 정면을 지긋이 응시하는 모습에서 민족을 재통일한 군 주의 당당함이 배어 나온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할 수 있었던 원 동력은 무엇이었으며, 이를 토대로 고려가 어떻게 발전하였는지 살펴 보자. 태조 왕건상(평양 조선중앙역사박물관)과 현릉(개성)

왕건, 고려를 건국하다

10세기에 들어서면서 동아시아 지역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당이

918

고려 건국

919

송악 천도

926

발해 멸망

어나는 등 사회가 혼란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견훤과 궁예는 각각 후백제와 후고

935

신라 항복

구려를 건국하여 세력을 다투었다.

936

후백제 멸망, 후삼국 통일

멸망한 뒤 등장한 5대 10국이 힘을 겨루었고, 북방에서는 거란이 성장하여 요를 세우고 중국과 발해를 압박하였다. 신라에서는 호족이 성장하고 농민 봉기가 일

이와 같은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여 새로운 사회 건설의 방향을 제시한 인물 은 왕건이었다. 왕건은 해상 무역으로 성장한 호족으로, 궁예의 부하가 되어 후백 제의 나주를 점령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우며 점차 주변의 신망을 얻었다. 궁예가 살아 있는 미륵불을 자처하며 무리하게 나라를 이끌어 가자, 이에 반발한 신하들 이 마침내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내 세워 국호를 고려로 하고, 송악으로 천도하였다.

민족을 재통일하다

태조 왕건은 호족 세력을 적극 통합하는 한편, 중국 5대의 여러 나라와 교류하면서 후백제와 경쟁하였다. 또한, 신라를 자주 침공 한 후백제와 달리 신라에 우호적으로 대하였다. 이에 신라의 민심 은 고려로 기울었고, 마침내 경순왕이 항복하여 전쟁을 치르지 않 고 신라를 흡수하였다. 그 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을 피해 견훤 이 귀순해 오자, 내분이 일어난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후삼국을 통 10세기 초 동아시아 정세

62

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일하였다.


한편, 발해가 거란에 멸망한 뒤, 왕자 대광현이 고구려계를 포함한 많

발해 유민의 수용

은 유민을 이끌고 고려에 망명해 오자, 태조는 이들을 우대하여 받아들였 다. 이로써 고려는 후삼국을 비롯하여 발해의 고구려계 유민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완성하였다.

발해국 세자 대광현이 무리 수만 명을 데리고 와서 귀화하였다. 그에 게‘왕계(王繼)’ 라는 성명을 주어 왕 실 족보에 등록하고 …… 자기 조상 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 세력을 통합하다

-“고려사”-

태조는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과정에서 안으로는 민생 안정과 호족 통 합을 중시하고 밖으로는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취민유도를 내세워 백 성의 조세 부담을 가볍게 해 주고, 흑창을 설치하여 빈민 구제에 힘썼다. 또한, 불

✽취민유도

백성에게 조세를 거둘 때 일정한

교를 숭상하고 연등회와 팔관회 등의 전통을 중시하였다.

법도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호족에게는 자신을 낮추면서 우대하였고, 정략 결혼이나 성(姓)을 하사하는 등 포용 정책을 펼쳤다. 또한, 그들의 지위에 맞게 관직과 토지를 내리거나 자기 지 역에 대한 지배권을 부분적으로 인정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호족을 견제하고 지 방 통치를 보완하기 위해 ✽기인 제도와 ✽사심관 제도를 활용하였다.

✽기인 제도

지방 호족의 자제를 볼모로 삼 아 수도에 두고 출신지의 일에 대하여 자문하게 한 제도이다. ✽사심관 제도

태조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로 평양을 서경으로 삼아 중시하면

중앙의 고위 관직으로 올라온

서 북진 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리고 북진 정책의 걸림돌이자 발해를 멸망시

지방 세력을 출신 지역의 사심

킨 거란을 적대시하였다. 그 결과 청천강까지 영토를 넓힐 수 있었다.

도록 한 제도이다.

관으로 임명하여 지방을 통제하

훈요 10조(일부) 제1조 우리 국가의 왕업은 반드시 모든 부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사원을

훈요 10조는 태조가 말년에 후손에게 내린 가르침으로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짓고 주지를 파견하여 불도를 닦게 하되, 후세에 간신이 승려들의 청

바라는 태조의 사상과 정책 방향이 담

탁을 받아 각 사원을 서로 다투어 빼앗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겨 있다.

제2조 사원은 모두 도선의 의견에 의하여 국내 산천의 좋고 나쁜 것을 가려

먼저 불교를 숭상하면서도 타락하지

서 창건한 것이다. 신라 말에 사원들을 야단스럽게 세워서 지덕을 훼

않도록 경계했으며(제1조), 풍수지리설

손하였고, 나라가 멸망하였으니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

을 중시하였다(제2, 5조). 유교 정치 사

제4조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중국의 문물과 예악을 본받았으나 지역이 다르

상의 입장에서 덕치와 애민을 강조하는

고 인성이 다르니 굳이 맞출 필요는 없다. 거란은 짐승의 나라이므로

내용도 담고 있다(제7조). 제4, 5조는 거란 배격, 북진 정책과

그들의 의관 제도를 아예 따르지 말라. 제5조 나는 삼한 산천 신령의 도움을 받아 왕업을 이루었다. 서경은 수덕(水 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니 만대 왕업의 땅이다. 1년 에 100일 이상 머물러 왕실의 안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관련이 있다. 서경을 중시하라는 제5조 에서는 왕실의 독자적 세력 기반을 구 축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훈요 10조에는 이 밖에도 연등회,

제7조 임금이 백성의 신망을 얻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백성에게 일을 시 키되 시기를 가리고, 부역을 가볍게 하며 조세를 적게 해야 할 것이다.

팔관회를 중시하라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고려사”-

1. 고려의 성립과 정치 발전

63


광종, 호족을 억압하고 왕권을 강화하다 노비안검법

태조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외척의 다툼이 일어나 한동안

광종 7년(956)에 노비를 조사해서 옳고 그름을 분명히 밝히도록 명령하였다. 이 때문에 주인을 배반하는 노비들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으므로, 주인을 업신여기는 풍속이 크게 유행하였다. 사람 들이 다 수치스럽게 여기고 원망하였다. 왕비도 간절히 말렸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려사”-

왕권이 불안정하였다. 이에 광종은 호족 세력을 강력히 억압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먼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를 양인으 로 해방하였다. 이로써 공신과 호족의 경제・군사적 기반이 크게 약화된 반면, 조세를 부담하는 양인의 수가 늘어나 국가 재정이 확충되었다. 또한, 과거제를 실시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춘 신진

세력을 등용했으며, 관리의 공복을 제정하여 관리의 기강을 확립하였다.

성종, 유교 정치 사상을 적극 내세우다

광종의 강력한 왕권 강화책으로 호족의 힘이 약화되고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 되었다. 이러한 기틀 위에서 성종 때에는 신라 6두품 출신의 유학자가 정치에 많 이 참여하면서 유교 정치가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유교 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통치 체제 를 정비하였다. 2성 6부의 중앙 관제를 마련하고, 12목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중 앙 집권화의 기초를 세웠다. 또한, 국자감을 설치하고 지방에 경학박사를 파견하 여 유학 교육을 장려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고려는 문치주의의 전통이 수립되었고 신라의 골품제 사 회보다 개인의 능력이 중시되는 좀 더 개방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었다.

최승로의 시무 28조 ➊ 자료의 조항에 해당하는 의미가 무엇인

시무 28조(일부) 제7조

국왕이 백성을 다스림은 집집마다 가서 돌보고 날마다 이를 보는 것은 아 닙니다. 그런 까닭으로 수령을 보내어 가서 백성의 이익되는 일과 손해되 는 일을 살피게 하는 것입니다. 청컨대 외관(外官)을 두십시오.

지 빈칸을 채워 보자. 조항 제7조

제13조 우리나라에서는 봄에는 연등회를, 겨울에는 팔관회를 베풀어 사람을 많

이 동원하여 힘든 일을 시키니, 이를 줄여서 백성이 힘을 펴게 하십시오. 제19조 공신의 등급에 따라 그 자손을 등용하여 업신여김을 받고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제20조 불교는 몸을 닦는 근본이며 유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니, 몸을 닦는

것은 내생을 위한 것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곧 오늘의 할 일입니다. 오늘은 극히 가깝고 내생은 지극히 먼 것이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 을 구하는 일이 그릇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64

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고려사절요”-

제13조

제19조

제20조

의미 지방관 파견을 통한 중앙 집권 화 추구


통치 체제의 정비 하늘로 날아오를 듯 머리를 치켜 든 용의 모습은 강건한 고려인의 기상 을 보는 듯하다. 용은 본래 황제를 수호하는 존재이다. 고려 궁궐에 용 머리상을 만든 것은 고려인이 스스로를 황제의 나라로 자부하고 있었음을 보 여 준다. 태조 때의‘천수’ , 광종 때의‘광덕’ ,‘준풍’등 연호를 사용한 것도 이 러한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황제의 나라에 걸맞게 정비되어 간 고려 통치 체제의 모습을 살펴보자. 고려 수창궁의 용머리상(개성)

귀족 중심의 통치 체제를 마련하다

고려는 건국 초기에 주로 태봉과 신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통치 조직을 운영하였다. 이후 국가 체제가 안정되면서 당의 3성 6부와 송의 제도를 참고하여 실정에 맞게 통치 체제를 갖추어 갔다. 중앙 통치 조직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2성 6부 체제였다. 중서 문하성은 최고의 중앙 관서로서 국정을 총괄했고, 상서���은 6부를 관리하며 정책의 집행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6부는 사실상 중서문 하성이 지휘하였다. 중서문하성과 함께 통치 조직의 핵심인 중추 원은 군사 기밀과 왕명 출납을 담당하였다. 이 밖에 화폐와 곡식의 출납 회계를 담당한 삼사, 감찰 기구인 어사대가 존재하였다.

고려의 중앙 통치 기구 

어사대는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함께 대간이라 불렸다. 대간은 왕의 잘못을 논 하는 간쟁, 잘못된 왕명을 시행하지 않고 되돌려 보내는 봉박, 관리 임명과 법령 개 폐에 동의하는 서경 등의 권리를 행사하며 정치권력의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하였다. 한편, 고려의 독자적인 기구로 국방 문제를 담당하는

도병마사와 대내적인

법률, 제도 등을 제정하는 식목도감이 있었다. 두 기구는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고관인 재신과 추밀의 합의제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회의 기구의 존재는 문벌 귀 족이 국정을 주도하던 고려 귀족 정치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중서문하성의 낭사

중서문하성은 2품 이상의 고위 관리로 구성되는 재부와 3품 이 하의 관리로 구성되는 낭사로 구분되어 있었다. ✽도병마사의 변화

국방 문제를 담당하는 임시 기 구였던 도병마사는 원 간섭기에 는 도평의사사(도당)로 개편되면 서 구성원이 확대되었고, 국정 전반의 중요 사항을 결정하는 최고 정무 기구로 발전하였다.

고려의 궁궐 터, 만월대(개성) 태조가 궁궐을 창건한 이후 1361 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될 때 까지 고려 왕의 주된 거처였다.

1. 고려의 성립과 정치 발전

65


지방 행정 제도를 정비하다

건국 초에는 호족 세력이 강하여 효율적인 지방 통치가 어려웠다. 성종 때 처음으로 12목에 지방관을 파견했고, 이후 점차 중앙 집권 체 제가 강화되면서 5도 양계를 골격으로 한 지방 제도가 마련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방의 호족은 향리로 전환되었다. 5도는 일반 행정 구역으로, 안찰사가 파견되어 도내를 순찰하였 다. 도 아래에는 주・부・군・현과 특수 행정 구역인 향・부곡・소 등이 있었다. 각 지역에는 지방관(수령)이 파견되었지만, 실제로는 수령이 파견되는 주현보다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 더 많았다. 양계는 군사 행정 구역으로 병마사가 파견되었고, 국방상 요충지에는 진이 설치되었다. 한편, 속현과 향・부곡・소는 주현의 수령을 통해 중앙 정부의 지 배를 받았다. 각 군현에는 향리 조직이 마련되었는데, 향리는 조세, 공물의 징수와 요역 징발 등 행정 실무를 담당하면서 그 업무를 세습 하였다.

군사 제도를 개편하다

군사 제도는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구분되었다. 중앙군은 국왕의 친위 부대인 2

고려의 지방 행정 구역 서경 은 태조, 동경은 성종, 남경은 문종

군과 수도와 국경을 방어하는 6위로 구성되었다. 이들 중앙군은 직업 군인으로서

때 설치되었다.

복무에 대한 대가로 군인전을 지급받았으며, 그 역을 자손에게 세습하였다. 또 전 공을 세워 무신으로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다. 지방군은 5도의 일반 군현에 주둔하는 주현군과 양계 지역에서 북방 민족의 침 입에 대비해 국경을 지키는 주진군으로 구성되었다. 지방군은 16세 이상 60세 미 만의 양인 장정으로 편성되었다.

고려의 향리 고려 시대 군현은 모두 500여 곳이었다. 그중에서 수령이 파

그렇지만 수령은 짧은 기간 동안 넓은 지역을 다스려야 했고,

견되어 직접 다스린 군현은 불과 110여 곳이며, 나머지 400여

농업 장려, 세금 징수, 재판 등 업무가 많았기 때문에 각종 행정

곳의 속현은 수령의 통제를 받는 향리가 실질적인 행정을 담당

업무를 담당하는 향리의 도움이 절실하였다. 특히 지방관이 파견

하였다.

되지 않는 속현에서는 향리가 사실상 수령의 역할을 맡았다.

향리는 신라 말 호족에서 기원하였다. 초기에는 독자적인 행정

그러나 고려 말에는 속현이 점차 줄어들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조직을 갖춘 지방의 세력가였으나, 성종 이후 지방 행정 제도가

속현을 없애고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면서, 향리는 수령을

정비되면서 종래의 독자성을 잃고 중앙 집권 체제에 포섭되어 그

보좌하는 아전으로 그 지위가 크게 낮아졌다.

힘이 많이 약화되었다.

66

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다

유교가 정치 이념으로 강조되면서 유학 교육이 중시되었다. 이 에 따라 개경에 국립 대학인 국자감(국학)이 설치되고, 각 주마다 향교가 설립되어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였다. 국자감에서는 유학 교육 이외에도 율・서・산학 등 기술 교육도 실시되었다. 유학 교육을 담당한 국자학, 태학, 사문학은 각각 3품, 5품, 7품 이상 관리의 자제가 입학했고, 율・서・산학에는 양민 이 상의 자제면 입학할 수 있었다. 관리 등용 제도

과거와 음서로 관리를 선발하다

교육을 통해 양성된 인재는 주로 과거와 음서를 통해 관리로 등 용되었다. 과거 시험은 문관을 선발하는 제술과와 명경과, 기술관 을 뽑는 잡과가 있었다. 무과는 거의 실시되지 않았다. 한편, 승과 도 실시되어 합격한 승려에게는 승계를 부여하였다. 과거 응시는 법적으로 양인이면 가능하였으나 실제로 제술과와 명경과는 귀족이나 향리 자제가 응시했고, 잡과 에는 일반 백성도 지원하였다. 과거제의 실시는 신라의 골품제와 달리 학문 능력이 중시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공신이나 5품 이상 고위 관리의 자손은 과거 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음서의 특혜가 주어 졌다. 이를 통해 관료의 지위가 세습될 수 있었는데, 이는

장양수 홍패(과거 급제 문서) 홍패는 과거 급제자에게 주는 일종의 합격 증서로, 붉은색을 띤 용지로 만들었다.

고려의 관료 체제가 귀족적 특성을 지녔음을 보여 준다.

5품 이상 관리는 특별한 신분만 될 수 있었을까? 신라에서는 골품제로 인해 6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제6관등(아찬)까지만 승 진할 수 있었다. 제5관등(대아찬) 이상의 관직은 모두 진골이 차지하였다. 고려에서는 5 품 이상의 관리에게 상속이 가능한 공음전이 지급되었고, 그 자손도 음서로 관직에 진 출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이러한 특권을 지닌 고려의 5품 이상 관리는 신라의 진골 처럼 특별한 신분이었을까? 고려에서는 5품 이상의 관리에 오를 수 있는 신분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9품 관직 에 나아가는 것은 어려웠지만, 일단 임명된 후에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서 5품 이상의 관리로 승진할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그래서 지방의 향리나 직업 군인도 5품 이상의 관 직에 오를 수 있었다.

1. 고려의 성립과 정치 발전

67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과 동요 이자겸은 스스로 국공이 되어 왕태자와 대등한 대우를 받았다. 자신의 생일을 왕과 같 이 인수절이라고 부르고 …… 사방에서 바치는 음식 선물이 넘치게 들어오니 썩어서 버 리는 고기가 항상 수만 근이었다.

-“고려사”-

왕태자와 대등한 대우를 받고 자신의 딸들을 거듭 왕에게 시집보낼 수 있을 만큼 권력이 강했던 사람, 창고에서 수만 근의 고기가 썩고 있을 정도로 부유했던 사람, 그가 바로 대 표적인 문벌 귀족 이자겸이다. 남부러울 것 없이 강한 권력과 부를 소유한 그는 왜 난을 일으켰 을까? 또 그의 반란 이후 고려 사회는 어떻게 변화해 갔을까?

이자겸 가문과 왕실의 혼인 관계

문벌 귀족 사회가 성립하다

중앙 집권 체제가 정비되면서 호족과 신라 6두품 출신의 유학자들이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이들 중 일부가 여러 대에 걸쳐 고위 관리를 배출했는데, 이들을 ✽문벌 귀족이라고 한다. 문벌 귀족은 과거와 음서를 통해 관직을 독점하

✽문벌 귀족

경원 이씨(이자겸), 파평 윤씨 (윤관), 해주 최씨(최충), 경주 김

고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고위 관리가 되어 정치를 주도하였다. 또한, 과전과

씨(김부식) 등이 대표적인 가문

공음전을 받아 경제적 혜택을 누렸으며 권력을 이용하여 많은 토지를 차지하였

이다.

다. 이들은 서로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어 결속을 강화했는데, 특히 왕실과의 혼 인을 중시하였다. 문벌 귀족 사회는 한동안 안정기를 누렸으나, 12세기에 이르러 점차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문벌 귀족이 권력을 독점하고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면서 이를 둘러싼 귀족 사회 내부의 분열이 일어났다. 과거를 통해 중앙에 진출한 지방 출신의 신진 관리들은 문벌 귀족의 권력 독점에 반감을 가졌다. 그중 일부는 왕의 측근 세력이 되어 문벌 귀족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자겸의 난 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일어났다. 문벌 귀족의 호화로운 생활 김돈중 등이 절의 북쪽 산에 그 인근의 백

성을 모아서 소나무와 잣나무, 삼나무, 전나무 등과 기이한 꽃과 이채로운 풀을 심고 단을 쌓 아 임금의 방을 꾸몄는데, 아름다운 색채로 장 식하고 괴석을 사용해 섬돌을 만들었다. 어느

이자겸이 난을 일으키다

이자겸이 딸들을 예종과 인종에게 거듭 시집보내면서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휘두르자, 일부 신진 관리들은 왕과 함께 그

날 왕이 이곳에 행차하니 김돈중 등이 절의 서

를 몰아내려고 하였다. 이에 이자겸은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쪽 누대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휘장, 장막과

부하인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1126).

그릇이 사치스럽고 음식이 진기하여 왕이 재 상, 근신과 더불어 매우 흡족하게 즐겼다. -“고려사”-

하지만 이자겸은 인종에게 포섭된 척준경에 의해 제 거되었고, 척준경도 탄핵으로 쫓겨나면서 난은 진압되었 다. 이자겸의 난을 계기로 문벌 귀족 사회의 분열은 더

금을 입힌 병(국립중앙박물관)

68

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욱 심화되었다.


묘청, 서경 천도 운동을 추진하다

금과 군신 관계를 맺고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타면서, 왕의 권위 는 실추되고 민심도 크게 동요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인종 은 승려 묘청과 문신 정지상 등 서경 세력을 이용하여 개혁 정치를 추진 하였다. 묘청 등 서경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앞세워 서경 천도를 적극 추진하였 다. 보수적인 문벌 귀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서경에서 자주적인 혁신 정 치를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면 금이 굴복하 고 주변의 나라들이 조공을 바칠 것이라며,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나라의 묘청의 세력 범위

연호를 정하는‘칭제 건원(稱帝建元)’ 과‘금국 정벌’ 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경 문벌 귀족의 반대로 서경 천도가 불가능 해지자, 묘청 등은 국호를‘대위’ , 연호를‘천개’ 로 정하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

고 반란을 일으켰다(1135). 이들은 서북 지방의 대부분을

서경 전투는 곧 낭・불 양가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

점령하는 등 한때 위세를 떨치기도 했지만, 김부식이 이

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

끄는 관군에게 1년 만에 진압되었다.

이니, 묘청이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 였던 것이다. 이 전쟁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개경의 문벌 귀족과 서경 출

리하였으므로 조선 역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인 유교

신 관료 사이의 대립, 보수적 유교 사상과 풍수지리설의

사상에 정복되었으니, 이 전쟁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 대사

대립 등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 신채호,“조선사 연구초”-

서경 천도 운동은 수습되었지만,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

일제 강점기에 신채호는 민족정신을 강조하는 측면에

은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무신 정변이 일어나면서 문벌

서 김부식과 대립시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평가하였다.

귀족 사회는 몰락하게 되었다.

서경 천도 운동을 둘러싼 대립 1 묘청의 서경 천도 주장

2 김부식의 주장

제가 보건대 서경 임원역의 땅은 풍수지리를 하는 사람

금년 여름 서경 대화궁에 30여 군데나 벼락이 떨어졌습

들이 말하는 아주 좋은 땅입니다. 만약 이곳에 궁궐을 짓고

니다. 서경이 만약 좋은 땅이라면 하늘이 이렇게 하였을 리

옮겨 앉으시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또한, 금이 선

없습니다. 또 서경은 아직 추수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물을 바치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요, 주변의 36나라가 모두

거둥하시면 농작물을 짓밟을 것입니다. 이는 백성을 사랑

머리를 조아릴 것입니다.

하고 물건을 아끼는 뜻과 어긋납니다. -“고려사”-

-“고려사”-

➊ [자료 1, 2]를 참고하여 묘청과 김부식의 사상적 차이점을 비교해 보자. ➋ [자료 1, 2]를 토대로 두 인물이 주장한 대외 정책의 차이점을 추론해 보자.

1. 고려의 성립과 정치 발전

69


송, 거란, 여진과의 관계 소손녕: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 땅인데 쳐들어와 차지하 였다. 서 희: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였다.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그대 나라의 동경도 다 우리 땅이다.

-“고려사”-

거란의 침입에 맞서 고구려 계승 의식을 내세운 서희의 당당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고려 전기 국제 정세는 농경 민족인 고려와 송이 거란・여진 등 북방 민족과 대결하던 형국이었다.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해 고려는 송과의 유대 관계를 강화하면서 군사적으로 맞 서거나 외교적인 노력 등으로 극복하고자 하였다. 고려 전기의 대외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었 는지 알아보자.

10`~`12세기의 대외 관계

북진 정책 추진과 송과의 교류

993

서희의 외교 담판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거란을 견제하면서 고구려 계승 의식을 내세운 북진

1019

강감찬의 귀주 대첩

정책을 추진하였다. 북진 정책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나타

1107

윤관의 여진 정벌

났다. 이를 위해 태조는 평양을 서경으로 삼아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삼고 청 천강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후에도 북진 정책은 역대 왕들에게 계승되면서 고려의 대외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10세기 후반 송(宋)이 건국되어 5대 10국을 통일하자, 고려는 적극적으로 친교 하면서 중국의 발달된 문물을 수용하였다. 송도 만리장성 이남까지 진출해 온 거 란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와 긴밀하게 우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었다.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다

거란은 송을 공격하기에 앞서 고려와 관계 개선을 시도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였다. 고려는 서희의 담판으로 송과 관계를 끊 기로 약속하고, 그 대가로 강동 6주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송과 친선 관계를 계속 유지하자, 거란이 다시 침입하였다. 이 때 개경이 함락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던 고려가 신하의 예를 갖춘다는 조건을 제 시하자, 거란은 이를 받아들이고 물러갔다. 이후 거란은 현종의 입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고려가 이를 거절하자 다시 침입하였다. 거란군은 개경 근처까지 진출했지 만 고려군의 저항에 부딪혔다.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은 귀주에서 퇴각하는 거란군을 크게 물리쳤다. 그 결과 고려・송・요 사이에 세 력 균형이 이루어졌다. 이후 고려는 천리장성을 쌓고 개경 수비를 튼 강동 6주

70

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튼히 하는 등 국방력을 강화하여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별무반

동북 9성을 개척하다

고려는 두만강 지역의 여진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면서도 그들 의 도발에는 강력히 대처하였다. 12세기 초 여진이 부족을 통일 하고 국경을 침범하였다. 이에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을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매번 기병 에게 패하자 만든 특수군. 기병 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려 군인 항마군으로 편성되었다.

정벌한 뒤 동북 지방에 9개의 성을 쌓았다. 그러나 수비가 어렵 고 여진이 조공을 약속하며 9성의 반환을 요청하자 1년 만에 돌려주었다. 세력이 강성해진 여진은 금(金)을 세워 요를 멸망시켰다. 이후 금은 송을 남쪽으로 밀어내고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다. 이에 대부분의 신하가 반대했으나, 당시 집권자였던 이자겸은 전 쟁을 피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금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금과의 무력 충돌은 피할 수 있었지만 북진 정책은 큰 타격을 입었다. 척경입비도(고려대학교박물관) 윤관 이 동북 9성을 쌓은 뒤, 고려의 국경임을 알려 주는 비석을 세우는 장면을 조선 후 기에 그린 것이다.

고려 지배층의 대외 인식 1 거란에 대한 강경한 태도 10월에 거란 사신이 낙타 50필을 가지고 왔다. 태조가“거란은 일찍이 발해와 동맹 을 맺고 있다가 갑자기 의심을 품어 약속을 배신하고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이처럼 도리가 없는 나라와는 친선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국교를 단절 하고 그 사신 30명은 섬으로 귀양을 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아래에 매어 두 었더니 모두가 굶어 죽었다.

-“고려사”-

2 금에 대한 사대주의적 태도 인종 4년 대부분 신하들은 사대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자겸과 척준 경이“옛날의 금은 소국으로 거란과 우리를 섬겼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갑자기 강성 해져 거란과 송을 멸망시키고, 정치적 기반을 굳건히 함과 동시에 군사력을 강화하였 습니다. 또 우리와 영토가 맞닿아 있으므로 정세가 사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 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법도입니다.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 어 예를 닦는 것이 옳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고려사”-

➊ [자료 1]에서 태조가 거란에 강경한 태도를 보인 이유를 당시 국가 정책과 관련지어 설명해 보자. ➋ [자료 2]를 읽고 이자겸과 척준경이 금에 사대를 주장한 이유를 추론해 보자.

1. 고려의 성립과 정치 발전

71


무신의 집권과 대몽 항전 대장군 이소응은 무인이지만 얼굴이 수척하고 힘도 약하였는데, 다른 장수와 수 박희를 하여 이기지 못하고 달아났다. 문신 한뢰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며 이소응의 뺨을 후려갈기자 섬돌 아래로 떨어졌다. 이때 왕과 모든 신하들이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고 …….

-“고려사”-

뺨을 맞았다는 수치심과 함께 분노하고 있을 무신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결국 무 신은 이러한 수모와 계속된 차별 대우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켰다. 무신 정변 이후 고려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무신,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겪으면서도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에 ✽중방

무신 회의 기구에서 무신 정변

대한 개혁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국왕도 젊은 문신들과 함께 향락에 빠져

이후 최고의 권력 기구가 되

실정을 거듭하였다. 무신은 승진 등 여러 가지 차별을 받았고, 하급 군인도 군인

었다.

전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채 빈번히 잡역에 동원되어 불만이 많았다. 더욱이 일 부 젊은 문신이 무신을 모욕하면서 그들의 불만은 쌓여갔다. 결국 정중부, 이의방 등의 무신이 정변을 일으켜 많은 문신을 죽이고 왕을 교체하였다(1170). 무신의 집권에 반발하여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과 서경유수 조위총 등이 난을 일으켰지만 모두 진압되었다. 무신은 ✽중방을 중심으로 국정을 주도하면서 토지 와 노비, 사병을 늘려 세력을 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신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나 최고 권력자가 여러 차례 교체되었다.

60여 년 동안 이어진 최씨 무신 정권

무신 정권은 최충헌이 권력을 잡으면서 안정되었다. 최충헌은 집권 초기 사회 개혁안을 제시했으나, 오히려 많은 토지와 노비를 차지하고 사병을 양성하여 정 권 유지에만 집중하였다. 최고 권력 기구로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국정을 장악했고, 사병 기관으로 도방 을 확대하여 군사적 기반을 강화하였다. 도방은 삼별초와 더불어 최씨 정권을 유 지하는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그의 뒤를 이은 최우는 교정도감 이외에 자신의 집에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권 을 장악하였다. 정국이 안정된 후에는 문학적 소양과 행정 실무 능력을 두루 갖춘 문신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최씨 정권은 자신들의 정권 유지에만 집착한 나머지 무신 정권의 지배 기구

72

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사회 개혁에 소홀하여 민심을 잃었다.


농민・천민이 봉기하다

무신 정변으로 문벌 귀족 사회가 무너지고 신분제가 크게 흔들 렸다. 하층민 중에 권력층이 된 자들도 많아서, 이의민과 같이 노 비 출신이면서 최고 권력을 잡은 자까지 나타났다. 그렇지만 농민 과 천민 등 하층민의 삶은 문벌 귀족이 지배하던 시기보다 전혀 나 아지지 않았다. 무신은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농민 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빼앗고 노비를 늘여갔다. 지배 체제가 무너 지면서 지방관들도 가혹한 수탈을 일삼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 민・천민은 대규모의 봉기를 일으켜 새로운 세상을 향한 변혁 의 지를 드러내었다. 서북 지방에서는 조위총의 난이 진압된 이후에도 농민의 봉기가 계속 이어졌다. 공주 명학소에서는 망이와 망소이가 봉기하였다. 정부는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켜 무마한 뒤, 결국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전주에서는 관노비와 군인이 합세하여 봉기했고, 경 상도 일대에서는 김사미와 효심의 봉기가 크게 세력을 떨쳤다. 봉

무신 집권기에 일어난 봉기

기를 일으킨 하층민은 지방관의 수탈에 대한 시정을 요구했고, 신 라의 부흥을 내세우며 왕조 질서를 부정하기도 하였다. 최충헌의 집권 이후 강력한 억압과 회유 정책으로 봉기는 다소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최충헌의 사노비였던 만적이 노비를 모아 봉기를 계획하다가 발각된 사건 이 일어났다. 만적의 봉기는 차별적 신분 질서를 극복하려는 신분 해방 운동의 성 격을 띠고 있었다.

농민과 천민의 봉기 1 망이・망소이의 봉기

2 만적의 난

명종 때 명학소(鳴鶴所)의 망이(亡伊)가 그

최충헌의 노비 만적 등 6명이 북산으로 나무하러 가서 노비들을 모아

무리를 모아 공주를 공격하여 함락하자, 정부

놓고“우리나라에서는 무신의 난 이래 고관대작이 천민에서 많이 나왔

는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키고

다. 왕후장상(王候將相)의 씨가 따로 있는가! 시기만 잘 만나면 될 수 있

관리를 파견하여 농민군을 무마하였다. 그 후

는 것이다. 우리만 어찌 뼈 빠지게 일하겠는가! …… 최충헌과 주인들을

에 망이의 무리가 항복하였으나 얼마 후 다시

죽이고 노비 문서를 불태워 이 땅의 천민을 없애면 우리도 왕후장상이

반항하자 이 현을 폐지하였다.

될 수 있다.” 라고 말하였다.

-“고려사”-

-“고려사”-

➊ [자료 1, 2]와 같은 하층민의 봉기가 일어나게 된 배경을 본문에서 찾아 간단히 답해 보자. ➋ [자료 1, 2]를 참고하여 하층민의 봉기가 지닌 성격을 말해 보자.

1. 고려의 성립과 정치 발전

73


몽골의 침입에 맞서다

13세기 초 부족을 통일하고 세력이 강성해진 몽골은 거란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고려와 처음 접촉한 뒤,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였다. 이후 고려에 방문했던 몽골 사 ✽삼별초

신이 귀국 도중 살해되자, 이를 구실 삼아 대군을 보내 고려를 침략하였다(1231).

최우가 집권하면서 설치한 야별 초라는 군대에서 분리된 좌별

준비가 부족했던 최씨 정권은 서둘러 강화를 맺은 뒤,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몽

초, 우별초와 몽골에 포로로 잡

골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혀갔다가 탈출해 온 병사들로 조직된 신의군을 합친 군대를

그 후로도 몽골은 고려에 여러 차례 침략했는데, 이에 맞서 노비, 부곡민 등 하 층 민중도 적극 항전하였다. 처인성에서는 김윤후가 부곡민을 이끌고 몽골 장수

말한다.

살리타를 사살하였다. 충주성에서는 노비가 주축이 된 군대가 몽골군을 물리쳤으 며, 관악산의 초적들이 대몽 항전에 나서기도 하였다. 몽골의 침입으로 황룡사 9층 목탑과 초조대장경이 불에 타는 등 큰 피해를 입 었다. 국토가 황폐해졌으며 백성은 큰 고통을 겪어야 만 하였다. 그럼에도 최씨 무신 정권은 백성을 보호 하지 않은 채 수탈을 일삼았다. 큰 피해가 이어지는 가운데 정부 내에도 몽골과 강화하려는 세력이 점차 득세했고, 마침내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전쟁이 끝 이 났다. 고려 정부가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 자, 대몽 항전에 적극적이었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 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이어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 진도가 함락되자 삼별초는 근거지를 다시 제주도로 옮기고 고려와 몽골 연합군에 맞서 끝까지 항전하였다.

를 옮기면서 3년 동안 저항하였으나 몽골군과 정부 연 합군에게 진압되었다. 삼별초의 장기 항전은 몽골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민중의 지지 속에서 이루어졌다.

대몽 항쟁의 두 얼굴 최씨 정권의 강화도 생활

74

충주성 전투

최이(최우)가 왕족과 고관들을 불러 자기 집에서 잔

처음 충주 부사 우종주가 매번 문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판관

치를 열었는데, 비단으로 산더미같이 장막을 만들고

유홍익과 틈이 있었는데, 몽골병이 장차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가운데 그네를 매었다. …… 악공 1,350여 명이 모두

성 지킬 일을 의논하였다. 그런데 의견 차이가 있어 우종주는 양반

호화롭게 단장하고 뜰에서 연주하니 거문고와 북, 피

별초(別抄)를 거느리고, 유홍익은 노비군과 잡류 별초를 거느리고

리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악공에게 각각 은 3근

서로 시기하였다. 몽골병이 오자, 우종주와 유홍익은 양반 별초 등

씩 주고 기녀, 광대에게도 각각 비단을 주니 그 비용

과 함께 성을 버리고 다 도주하고, 오직 노군과 잡류 별초만이 힘을

이 엄청났다.

합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고려사절요”-

-“고려사”-


원의 간섭과 공민왕의 반원 개혁 정치 공민왕과 노국 대장 공주

국경을 넘어선 사랑의 주인공 공민왕과 노국 대장 공 주! 다정하게 마주 앉아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은 애틋

(서울 공민왕 사당)

하기만 하다. 생전에 못다 한 사랑 죽어서라도 누리려는 듯, 나란히 자리한 현정릉은 노국 대장 공주가 먼저 사망한 후 공민왕이 직접 지휘하여 축조했다고 한다. 이 두 무덤 안에는 서로의 영혼이 오고 갈 수 있는 작은 통로가 나 있다. 노국 대장 공주와 결혼하여 원 황제의 부마 (사위)가 되어야만 했던 공민왕, 그의 반원 개혁 정치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공민왕릉과 노국 대장 공주의 능인 현정릉(개성)이다.

원의 내정 간섭을 받다

몽골과 강화를 맺은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어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했지만 자주성에 큰 손상을 입었다. 왕실의 호칭이 부마국의 지위에 맞춰 낮아졌고, 관청 의 명칭도 원보다 낮은 표현으로 바뀌었다. 원은 다루가치라는 관리를 두어 고려의 내정에 간섭했으며, 금・은・인삼・매 등의 특산물과 고려의 처녀까지도 공물로 요구하였다. 또한, ✽고려의 영토를 빼 앗아 화주에 쌍성총관부, 서경에 동녕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그 주

✽고려의 영토 회복

동녕부와 탐라총관부는 충렬왕 때 되찾았으나, 쌍성총관부는 공 민왕이 무력으로 되찾을 때까지

변을 지배하였다. 한편, 삼별초의 대몽 항전을 진압한 후 고려와 몽골 연합군은 일본 원정에도 나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섰다. 두 차례에 걸친 원정은 태풍으로 실패했고, 엄청난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여 야 했던 고려는 큰 손실을 입었다. 일본 원정을 위해 설치되었던 정동행성은 이후

✽도평의사사

에도 계속 개경에 남아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고려 후기 최고 행정 기구로 도

고려가 원의 간섭을 받았던 약 80년간 양국 사이에는 활발한 인적 교류와 함께 경제・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몽골의 풍속(몽골풍)이 고려에 유행

당으로도 불렸다. 무신의 난 이 후 도병마사의 기능이 확대되면 서 명칭이 바뀌었다.

했으며, 원의 지배층 사이에 고려의 풍습(고려양)이 전해지기도 하였다.

권문세족이 권력을 독점하다

권문세족

원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되면서 권문세족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하

공민왕이 어느 날 행성으로 가 황

였다. 이들은 고려 전기부터 이어져 온 가문도 있었지만, 원의 세력을 배

제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하였다. *기

경으로 등장한 경우가 많아서 친원적 성향이 강하였다. 권문세족은 주로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했고, ✽도평의사사를 장악하

철이 임금과 말을 나란히 하며 이야 기하려고 하자, 왕이 호위 군사를 시 켜 앞뒤로 갈라놓고 곁에 오지 못하

여 국정을 좌우하였다. 아울러 대농장을 차지하고 농민을 핍박하여 노비

게 하였다.

로 삼는 등 사회 모순을 심화시켰다. 이를 개혁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기철: 여동생이 공녀로 원에 끌려갔다가

원의 압력과 권문세족의 반발로 좌절되었다.

-“고려사”-

황후(기황후)가 되면서 큰 권력을 잡았다.

1. 고려의 성립과 정치 발전

75


공민왕, 반원 개혁 정치를 실시하다

14세기 중엽, 한족의 반란으로 원이 점차 쇠퇴하였다. 이를 틈타 공민왕은 적극적인 반원 정책과 함께 개혁 정치를 추진하였다. 먼저 기철 등 친원 세력을 숙청하고,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던 정 동행성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공격하여 철 령 이북의 영토를 회복하였다. 왕실 호칭과 관제도 원래대로 회복 했으며 변발 등 몽골풍을 금지하였다. 안으로는 권문세족을 억압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을 추 진하였다. 정방을 폐지해 국왕이 인사권을 장악했고, 교육・과거제 공민왕 때 수복한 영토

를 정비하여 신진

사대부를 적극 등용하였다. 아울러 승려 신돈

을 등용하고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사대부

그러나

사(士, 학자)와 대부(大夫, 관료)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개혁이 꾸준히 추진되기 어려웠고, 신진

가 합쳐진 말로, 학문적 소양을

사대부도 권문세족에 맞설 만큼 성장하지 못하였다. 결국 권문세족의 반발로 신

갖춘 관료층을 일컫는다.

돈이 제거되고 공민왕마저 시해되면서 개혁은 실패하였다.

✽홍건적

신진 사대부와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하다

원에 저항한 한족의 농민 반란 세력으로, 원의 군대에 쫓긴

공민왕의 반원 개혁 정치는 실패했지만 신진 사대부가 크게 성장하는 밑거름이

무리가 고려에 두 차례 침입하

되었다. 신진 사대부는 신분상 지방 향리의 자제가 많았고, 경제적으로는 중소 지

였다.

주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과거를 통해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하여 권문세족을 비판하고, 성리학을 받아들여 고려 말의 사회 모순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또한, 원을 배척하고 대륙의 신흥 국가인 명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한편, 14세기 후반 홍건적과 왜구가 침략하였다. 특히 왜구의 침략이 잦은 해 안 지역의 피해가 컸다. 이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최영과 이성계 등 신흥 무인 세력이 백성의 신망을 얻었다. 마침내 고려 말 사회 모순의 개혁에 적극적이었던 정도전, 남은 등 일부 신진 사대부들은 신흥 무인 세력인 이성계와 손잡고 역성 혁명을 통해 조선을 건국하였다(1392).

전민변정도감 신돈은 왕에게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할 것을 청원하고,“…… 근 래에 기강이 파괴되어 …… 공전과 사전을 권세가들이 강탈하였 다. …… 스스로 토지를 반환하는 자는 과거를 묻지 않는다.” 라고 공포하였다. 권세가들이 강점했던 전민(田民)을 그 주인에게 반환 하였으므로 온나라가 모두 기뻐하였다.

76

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고려사”-

‘전민’ 은 토지와 백성(노비),‘변정’ 은 분별하여 정리한다는 뜻이며,‘도감’ 은 임시 관청이다. 전민변정도감은 권문세족의 불법적인 농장을 없 애고, 빼앗은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을 양민으로 해방시키는 등 개혁 정치를 추구하였다.


고려의 지배층은 어떻게 변화하였을까? 진골 귀족이 최고 지배층이었던 신라와 달리 고려의 지배층은 정치적 변동에 따라 여러 차례 교체 되었다. 고려 초에는 유교가 정치 이념으로 강조되고, 과거제가 실시되면서 문치주의가 대두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의 지배층은 스스로 성주, 장군을 칭하던 호족에서 문벌 귀족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문신 우위의 세상에서 차별받던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으며, 원의 간섭기에는 권문세 족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고려 말에는 권문세족의 횡포를 비판하며 신진 사대부 가 성장하였다. 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웠건만, 세상은 더 이상 날 장군이라 부르지 않네.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려면 자 식들에게는 글공부를 시켜야만

풍요롭고 화려한 이 생활 마

한다네.

음껏 누린다네. 아들은 음서로 벼슬에 나갔으니, 이제는 작은 딸이 왕후로 간택되어야 할 텐데 …….

문관의 관을 쓴 자는 서리라 할지라도 모조리 죽여라! 이젠 우리 세상이다. 세력을 키우려면 넓은 땅을 차지하고 사병도 길러 야만 해. 몽골어를 잘해서 몽골 친구를 많이 둔 덕분에 재상의 자리에 올랐네. 저기 높은 산부터 여기 이 강까지 모두 내 땅이라네.

향리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를

오늘 도평의사사 회의의 안건

통해 벼슬에 나왔네. 우리를 이끌

이 무엇이었지?

어 주시던 폐하(공민왕)는 시해되 셨지만, 그 개혁의 뜻을 계속 이 어가야지. 성리학의 이념을 구현 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네.

1

자료를 참고하여 지배층 변화의 계기가 된 사건인 (가), (라)를 채워 보자. (가)

(나) 무신 정변

(다) 원의 간섭

(라)

1. 고려의 성립과 정치 발전

77


2

경제 정책과 경제 활동

토지 제도와 수취 체제의 정비

태조께서 명령하셨다.“…… (몰락한 사람에게) 조세를 면제해 주고 농업을 권장해야 집집마다 풍요롭고 사람들이 풍족하게 될 것이다. 백성에게 3년 동안 조세와 역을 면제해 주고, 유랑하는 자 는 농토로 돌아가게 하며, 곧 대사면을 행하여 휴식하게 하라.”

-“고려사절요”-

백성을 사랑하는 태조의 마음이 느껴지는 글이다.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은 이러한 정신을 바 탕으로 이루어졌다. 신라 말 지배층의 대토지 사유와 과중한 농민 수탈을 극복하여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일은 새 왕조의 중요한 과제였다. 고려의 토지 제도와 수취 체제는 어떻게 정비되었을까?

왕건(개성 만월대)

전시과 체제가 마련되다

호족 세력이 여전히 남아 있던 건국 초기에는 체계적인 토지 제도를 갖추기 어 려웠다. 다만, 후삼국 통일 이후 태조는 공신들에게 역분전을 지급하였다. 중앙 집권 체제가 안정되어 가면서 이에 맞춰 전시과 체제가 마련되었다. 전시 과는 관리나 직역 담당자에게

전지와 시지를 나누어 주고,

수조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한 제도였다. 처음에는 인품과 공복 등을 기준으로 지급되었으나, 통치 체제의 기틀이 갖추어진 10세기 말에는 관직의 높낮이에 따라 18등급으로 구분해 지급하도록 개정되었다. 그 후 나누어 줄 수 있는 토지가 점차 부족해지자, 현직 전시과의 성립과 변천

관리에게만 지급하도록 다시 고쳤다. 전시과 체제는 12세기 이후 이자겸 등 문벌 귀족의 대토지 집적으로 제대로 운 영되지 못하다가, 무신 집권자들이 다투어 대토지를 차지하면서 붕괴되었다.

✽전지(田地)와 시지(柴地)

전지는 경작지이고, 시지는 땔감 을 얻을 수 있는 땅이다.

전시과와 민전

전시과 체제에서 문무 관리에게는 관직의 높낮이에 따라 과전이 지급되었다. 이는 관직 복무의 대가로 지급된 것이기 때문에 관리가 죽거나 관직에서 물러나

✽수조권(收租權)

토지에서 조세를 거둘 수 있는

면 반납해야 하였다. 5품 이상의 관리에게는 자손에게 세습할 수 있는 공음전이

권리이다.

지급되었다. 과전과 공음전은 귀족의 지위를 유지하는 경제적 기반이었다. 6품 이하 하급 관리의 자제로 관직에 오르지 못한 자에게는 한인전이 지급되었 는데, 이는 관인 신분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한, 중앙의 군인에게 군인 전, 하급 관리와 군인의 유가족에게 구분전이 지급되었다. 군인전은 군역의 세습 에 따라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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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전시과의 토지 이외에도 귀족이나 농민의 사유지인 민전이 광범위하게 존재하 였다. 민전은 소유권이 보장된 토지로 매매, 상속, 증여, 임대가 가능했지만, 국가 가 수조권을 지니는 ✽공전이었다. 국가는 민전에서 세금을 거두어 국가 재정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무신 정변으로 전시과 체제가 완전히 무너지면서 지배층이 농민의 민전을 빼앗아 대토지를 차지하는 현상이 많아졌고, 이에 따라 국가 재정

✽공전과 사전

전시과 체제에서는 수조권이 국 가에 있으면 공전, 개인에게 있 으면 사전이었다. 그러므로 민전 을 비롯해 왕실, 관청의 소유지

도 궁핍해졌다.

는 공전이지만, 관리에게 수조권 을 나눠 준 전시과는 사전이다.

수취 체제를 정비하다

신라 말의 문란해진 수취 체제를 정비하는 것은 민생 안정과 국가 재정의 확충 을 위해 가장 시급한 일 중의 하나였다. 이에 고려는 양안(토지 대장)과 호적을 작 성하여 이를 기준으로 백성에게 조세와 공물, 역을 부과하였다. 조세는 토지를 논과 밭으로 구분한 뒤, 비옥도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수확 량의 10분의 1을 부과하였다. 지방에서 거두어들인 조세는 큰 강이나 바닷가에 위치한 조창에 모은 뒤, 조운을 통해 개경으로 운반하였다. 지방의 토산물을 거두는 공물은 호(戶) 단위로 부과했는데, 농민에게 는 조세보다 더 큰 부담이었다.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 발하는 역은 군대에 동원하는 군역과 토목 공사 등에 동원하는 요역으로 나누어 16세에서 60세 미만 남자 (정남)에게 부과하였다. 이 밖에도 상인에게 거두는 상세와 어민에게 거두는 어염세 등이 있었다. 고려 시대 조운선 복원 모형(나주시청)

전시과와 민전 1 공음전

2 민전

문종 3년 5월에 공음 전시법을 제정하였는바, 1품은 문

관리를 보내 민전을 점검하고 조세와 부역을 고르게 정

하시랑 평장사 이상에게 전지 25결과 시지 15결을 주며, 2

하여 예전의 방식을 따르려고 하니, 첫째는 나라의 비용을

품은 참지정사 이상에게 전지 22결과 시지 12결을 주고,

위한 것이요, 둘째는 관리의 녹봉(월급)을 넉넉히 주고자

…… 이것을 자손에게 전해 내려가게 하였다.

함이요, 셋째는 민생을 풍족하게 하려는 것이다. -“고려사”-

-“고려사”-

➊ [자료 1]에 제시된 토지의 특징을 말하고, 이를 지급하게 된 의도를 설명해 보자. ➋ [자료 2]를 참고하여 민전의 성격을 설명해 보자.

2. 경제 정책과 경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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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산업의 발달 화폐를 (전면적으로) 쓰는 정책을 중단하려 한다. 차와 술, 음식, 쌀 같은 물품을 파는 점 포들이 장사하는 데에는 예전처럼 화폐를 사용하고, 그 밖에 백성이 사사로이 물건을 사고 팔 때는 토산물을 임의로 쓰도록 하라.

-“고려사”-

백성의 대부분인 농민은 자급자족 생활을 했기 때문에 화폐를 그다지 사용할 필요가 없었 다. 그럼에도 고려 시대에 여러 종류의 화폐가 주조된 것은 수공업과 상업이 꾸준히 발전 하였음을 의미한다.

삼한통보와

고려의 산업은 어떻게 발달하였을까?

해동통보(대전 화폐박물관)

농업 기술이 발달하다 개간을 장려하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고, 국가 재정을 안정적으

황폐해진 경작지를 개간하여 경작하는 자는 사전이면 첫 해에는 수확의 전부를 가지며, 2년째부터 경작지의 주인과 수확

로 확보하기 위해 농업을 중시하는 정책을 폈다. 개간과 간척 사업을 장려하여 경작지를 확대해 나갔으며, 개간지에는 일정 기간 세금을 면

량을 반씩 나눈다. 공전의 경우에는 3년

제해 주었다. 농번기에는 잡역 동원을 금지하여 농사에 지장을 주지

까지 수확의 전부를 가지며, 4년째부터

않도록 했고, 재해를 당한 농민은 세금을 감면해 주었다.

법에 따라 세금을 바친다.

농업 기술도 점차 발전했으며, 소규모의 저수지가 늘어났다. 소를 -“고려사”-

이용한 깊이갈이가 일반화되고, 시비법도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휴경 지가 줄어들면서 생산력이 더욱 향상되었다. 밭농사에서는 2년 3작의

✽공장(工匠)

관청의 수공업장에 소속되어

돌려짓기가 점차 보급되었다. 고려 말에는 남부 일부 지방에 모내기법이 보급되

필요한 기술과 노동력을 제공하

기 시작하였다. 또 중국의 농서인“농상집요” 가 소개되고, 목화 재배가 시작되는

던 기술자이다.

등 농업에서 새로운 발전이 이루어졌다.

다양한 수공업이 발달하다

수공업은 주로 관청 수공업과 소(所) 수공업을 중심으로 발전하였 다. 관청 수공업은 ✽공장을 중앙이나 지방의 관청에 소속시켜 왕실이 나 관청의 물품, 무기 등을 생산하는 방식이었다. 전국 곳곳에 존재했 던 소에서는 금, 은, 종이, 먹 등을 생산하여 공물로 납부하였다. 후기에는 사원 수공업과 민간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사원에서는 품 질이 우수한 베, 모시 등의 직물과 술, 소금, 기와 등을 생산하였다. 민 간 수공업은 주로 농민의 가내 수공업이었는데, 삼베, 모시, 명주 등의 고려 시대 최대 철산지인 다인철소 유물과 유적 (충북 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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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직물을 생산하여 직접 사용하거나 공물로 납부하였다. 또 놋그릇이나 도자기 등 다양한 물품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국가와 백성 모두 상업에 힘쓰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상업도 적극 육성하였다. 개경에 시전을 지 어 상인에게 빌려 주고, 귀족의 도시 생활에 필요한 물품이나 관수 품을 팔게 하였다. 이들의 상행위를 감독하기 위해 경시서를 설치하 였다. 개경과 서경, 동경(경주) 등 대도시에는 서적, 약, 술, 차 등을 파는 관영 상점을 설치했고, 도시 거주민이 일용품을 구매할 수 있 는 비정기 시장이 열리기도 하였다. 지방에는 시장이 열려 농민, 수공업자가 물품을 교역했고, 행상 도 들어와 활동하였다. 사원도 곡물이나 수공업품을 판매하며 상업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후기에는 상업이 더욱 발달하여 시전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조운 로를 따라 곡물과 생선, 도자기, 소금 등의 교역이 이루어졌으며, 행 상의 활동도 더욱 활발해졌다. 육상 교역이 늘면서 여관인 원(院)이 발달하여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상업 발달에 힘입어 부를 축적해 관리가 되는 상인, 수공업자도 생겨났다. 한편, 정부는 재정

고려 시대의 산업

확대를 위해 소금의 전매제를 실시하였다.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여러 가지

✽화폐

화폐가 주조되었으나 널

리 유통되지는 못하였다. 일반적인 거래는 주로 곡식이나 삼베를 사용하였다.

성종 때 철전인 건원중보를 시 작으로 삼한통보, 해동통보, 해 동중보 등이 주조되었으며, 고가 의 활구(은병)도 만들어졌다.

고려 시대의 사원 경제 어떤 비구니가 공주에게 흰 모시를 바쳤는데, 가늘기가 매미의 날개같이 얇았고 꽃무늬도 수놓아져 있었다. 공주가 시장의 상인들에게 보이니 이전에도 보지 못하 던 물품이라고 말하였다. 비구니에게 누가 만들었냐고 물어보자,“제가 데리고 있 는 여종이 만들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공주가 그 여종을 달라고 요구하자 비 구니는 하는 수 없이 공주에게 바쳤다.

-“고려사”-

비구니가 공주에게 자신의 노비가 짠 모시를 바친 내용이다. 이처럼 사원에서는 매우 우수한 품질의 수공업품이 생산되기도 하였다. 사원은 국가로부터 사원전과 노비를 지급받았고, 귀족 의 지원도 많았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여 다양한 수공업 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사원에서 생산된 수공업품의 품질이 향상되자 수요도 증가하였다. 특히 베, 모시와 술, 기와, 유리 등의 분야가 뛰어나 왕실과 귀족의 사치품으로 많이 애용되었다. 그러나 종교적 권위를 이 용하여 농민에게 강제로 물건을 판매하는 문제점도 있었다.

통도사 장생표(경남 양산) 통도 사 소유지와 수조지를 민간인 소유 지와 구분하기 위해 세운 표지이다.

2. 경제 정책과 경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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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나라와의 교류 북송 시대의 그림‘청명상하도’ 의 일부이 다. 이 그림은 중국 사람들이‘국보 1호’ 로 여길 만큼 뛰어난 가치를 지녔다고 한다. 고려 상인 으로 보이는 사람이 여러 명의 일꾼을 거느리고 어 디론가 향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송과 고려의 문 물 교류가 매우 활발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고려는 송뿐만 아니라 거란, 여진, 일본 심지어 아라비아 상인과도 폭넓게 교역하였다. 여러 나라 와 활발하게 전개된 고려의 대외 교류에 대해 알 청명상하도(일부, 베이징고궁박물관)

아보자.

송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다

고려는 선진 문물을 수입하기 위해 송과의 교류에 주력하였다. 사신과 상인이 자주 왕래하며 교역했고, 유학생과 유학승도 많았다. 무역은 공무역이 주를 이루었지만 사무역도 있었다. 신라 때부터 이어져 온 사 무역은 건국 초에는 활발했으나 국가의 통제로 점차 쇠퇴하였다. 사무역의 형태도 상인이 사신과 동행하여 교역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아갔다. 무역로는 북방에 거 란, 여진이 있었던 까닭에 주로 바닷길이 이용되었다. 이에 따라 개경에서 가까운 예성강 어귀의 벽란도가 무역항으로 번창하였다. 송에서는 주로 서적, 약재 또는 지배층의 사치품 등을 수 입했고, 금・은과 인삼, 종이, 먹 등을 수출하였다. 금・은의 유출과 사치품의 수입은 고려에 경제적 부담이 되었다. 거란・여진・일본과의 교류

거란・여진과의 무역은 송에 비해 활발하지 못하였다. 거 란과의 교역은 공무역이 주를 이루었으며, 거란이 더욱 적극 적이었다. 여진과의 무역은 사신이 와서 고려에 공물을 바치 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고려는 이를 통해 북방을 안정시 키려 하였다. 거란과 여진은 은, 말, 모피 등을 가져와 곡식이 나 농기구 등으로 바꾸어 갔다. 일본과의 무역은 일본 상인이 왕에게 토산물을 바치면 왕 이 답례품을 하사하는 형태였는데, 고려가 무역에 제한을 두 기도 하였다. 주로 수은과 유황 등이 들어오고 인삼, 곡식, 서 고려의 대외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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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적 등이 수출되었다.


한편, 팔관회가 열릴 때면 송의 상인은 물론 여진, 일본 등의 상인이 방문하여 왕에게 각종 물품을 바쳤다. 왕은 이들에게 답례품을 하사하고 무역을 허가하였 다. 이때 아라비아의 상인도 송을 거쳐 고려에 방문하였다. 교류는 몇 차례에 불과 했으나, 한 번에 100여 명의 상인이 올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 이들은 고려에서는 볼 수 없었던 향료, 상아, 공작 등 진귀한 물건을 바쳤다.

고려 후기, 원과 활발히 교류하다

원 간섭기에 고려는 원을 통해 세계 시장과 연결되면서 대외 교역이 더욱 활발 해졌다. 그러나 금・은 등의 물품이 유출되고 공녀와 노비 등 많은 사람이 끌려가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공무역은 고려에서 예물을 보내고 원이 답례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양국 사이에 혼인 관계가 성립되면서 왕과 사신의 왕래가 빈번해지자 교역 고려 속의 몽골인

량이 늘어났다. 사무역은 공무역보다 규모가 더 컸으며, 왕이나 사신 의 수행원을 통하거나 상인이 육로로 요동을 거쳐 대도(베이징)를 왕

그 시조는 인후(印侯)인데 …… 그는 몽 골 사람으로 원 이름은 후라타이(忽刺쟈)

래하며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려의 물자 유출, 특히 은의 유출은 경제

라고 하였다. 충렬왕 1년(1275) 충렬왕의

에 심각한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비(妃)이며 원의 황녀인 제국 공주를 시종

한편,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몽골 제국의 성립으로 동서 교류가 활발 해지면서 색목인이라 불린 서역의 외국인들도 고려에 들어왔다. 이들

하여 고려에 와서 귀화하였다. 그는 충선 왕 1년(1309) 평양군(平陽君)으로 봉해지 고 자의도첨의사사가 되었다. -“고려사”-

중 일부는 고려에 귀화하여 벼슬을 하거나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세계 속의 고려, 고려 속의 세계 이슬람교를 믿는 서역인으로 여겨지는 회회아비가 고려 땅에서 쌍화(만

쌍화점에 쌍화를 사러 가니

두)를 팔며 여인의 손목까지 쥐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쥐여이다.

해상 무역으로 성장한 왕건이 세운 고려는 상당히 개방적인 나라였다.

이 소문이 가게 밖으로 나거들랑

멀리 아라비아 상인까지 벽란도에 드나들었는데, 그들에 의해 서방 세계에

조그만 새끼 광대 네가 한 말로 알리라. -‘쌍화점’-

‘코리아(Corea)’ 라는 이름이 알려졌다. 몽골이 세계 제국을 건설한 이후에는 동서 교역로를 따라 더 많은 외국인이 고려를 방문하였다.

고려 왕실에 시집 온 몽골의 공주를 비롯하여 공무나 장사를 목적으로 온 몽골인, 서 역인이 고려에 정착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회회아비도 고려 에서 만두 가게를 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서역과 몽골의 풍속도 고려의 일상생활에 파고들었다. 전통 혼례 때 신 부가 머리에 쓰는 족두리, 오늘날 우리의 술로 자리 잡은 소주도 이 무렵 전래 되었고,‘마마’ ,‘수라’ 라는 왕실 용어도 몽골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편, 고려식 옷과 음식도 고려양(高麗樣)이라 하여 당시 몽골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족두리

무역선이 새겨진 청동 거울 (국립중앙박물관)

2. 경제 정책과 경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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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분 제도와 생활 모습

4개로 구분된 신분 제도

우리나라는 태조 이래로 귀천을 물론하고 마음대로 옷을 입어서 관직이 비록 높더라도 집이 가난하면 공복을 갖추지 못하고, 비록 관직이 없어도 집이 부유하면 화려한 비단을 사용하였습니다. …… 원하건대 백관으로 하여금 조회에서는 …… 제대로 된 공복을 갖추 어 입도록 하고 …… 서인(庶人)은 무늬 있는 고운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하고 거친 명주로 된 옷만 입을 수 있게 하소서.

-“고려사”-

관리와 벼슬하지 않는 사람 간에 복식의 차이를 두자는 최승로의 상소이다. 신분별 복색이 분명했던 골품제가 무너지고 이를 대신할 신분 제도가 아직 확립되지 못한 문제를 바로 잡 자는 것이다. 이후 지배 체제가 안정되면서 고려의 신분 제도는 어떻게 정비되었을까?

강민첨상(국립중앙박물관) 고려 시대 관리들이 쓰던 옆 부분이 길고 윗 부분이 평평한 관모를 쓰고 있다.

정치・경제적 특권을 누린 최고 지배층, 귀족

고려의 사회 신분은 귀족, 중류층, 양민, 천민으로 구성되었다. 지배층인 귀족 과 중류층은 국가의 운영이나 행정 실무 등을 담당했고, 피지배층인 양민과 천민 은 생산 활동에 종사하면서 국가나 지배층을 위해 봉사하였다. 귀족은 왕족과 여러 대에 걸쳐 고위 관직에 오른 문벌 귀족 가 문으로, 개경에 거주하면서 많은 특권을 누렸다. 과거, 음서를 통 해 고위 관직을 독점했으며, 국가로부터 공음전과 과전, 녹봉 등 을 받았다. 또한, 조상으로부터 토지와 노비를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권력을 이용해 농민의 토지를 빼앗거나 헐값에 사들여 부 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문벌 귀족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또한,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었으며, 특히 왕실과의 혼인을 열망하였다. 귀족층의 변화는 무신 정변을 계기로 일어났다. 종래의 문벌 귀 족이 약화되면서 무신이 권력을 잡았다. 이후 무신 정권이 붕괴되 아집도대련(일부, 삼성미술관 리움) 고려의 귀족들이 정원에 모여 시를 짓고 그림도 감상하는 모습으로, 귀족의 취미 생활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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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관복 유물(안동 삼태사 묘 소장) 고려 관리가 쓰던 가죽신, 복두, 허리띠이다.

면서 등장한 귀족은 권문세족이 었다.


중류층, 지배층의 말단에 자리 잡다

중류층은 고려의 통치 체제가 정비되면서 새롭게 등장한 중간 계층으로 주로 지배 기구의 말단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다. 즉 중앙 관청의 실무를 담당하는 서리 인 잡류, 궁중 실무를 담당하는 남반, 하급 장교, 지방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향 리 등이 있었다. 이들은 지배층에 속했지만 귀족과 달리 높은 관직으로 진출하기 는 어려웠다. 그렇지만 직역에 대한 대가로 국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았으며, 신 분을 자손에게 세습하였다. 향리는 호장과 부호장을 비롯한 여러 단계의 직위로 구분되었다. 호족 출신인 상층 향리는 지방의 실질적인 지배층으로 과거를 통해 중앙 관리가 되기도 했는 데, 특히 무신 집권기 이후 활발히 중앙에 진출하였다. 고려 시대 신분 구조

생산 활동을 담당한 양민

양민은 일반 주・부・군・현에 거주하며 농업과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서 대다수는 ✽백정이라고 불리는 농민이었다. 백정 농민은 자신의 민전이나 남의 토지를 경작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국가에 조세・공물・역을 부담하는 대신, 법적으로 과거 응시에 제한이 없었다.

✽백정(白丁)

고려에서는‘나라에 특정한 직 역을 가지지 않은 일반 백성’ 을 의미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천민

향・부곡・소의 주민은 신분상 양민이었으나 백정 농민에 비해 차별을 받았다.

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더 많은 세금을 납부하고 국자감 입학과 과거 응시가 불가능했으며, 거주 이전에 도 제한을 받았다. 향・부곡의 주민은 주로 농업에 종사했고, 소의 주민은 수공업 에 종사하였다.

농민의 고된 삶

의종이 신하들과 함께 중미정 남쪽 연못에 배를 띄 우고 취하도록 마시며 마음껏 놀았다. …… 중미정을 처음 지을 때 일하러 나오는 백성은 음식을 스스로 준 비해 와야 하였다. 한 일꾼이 매우 가난하여 음식을 준비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의 밥을 나누어 먹었다. 하루는 그의 아내가 음식을 가지고 와서 남편에게 “친한 사람들과 함께 드세요.” 라고 말하였다. 남편이 “집이 가난한데 어떻게 장만하였소? ……” 라고 하니, 아내는“…… 제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사왔소.” 라 고 하였다. 남편은 목이 메어 먹지 못하고 이를 본 다 른 사람들도 함께 슬퍼하였다.

미륵하생경변상도(일부, 일본 신노인)

위 그림은 농민이 농작물을 수확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농민은 농사를 지으며 국가에 조세와 공물, 역을 부담하였다. 더욱이 사료의 밑줄 친 내용처럼 국가의 고된 노역에 동원될 때조

-“고려사”-

차도 음식을 스스로 장만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3. 신분 제도와 생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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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억압 속에서 살아야 했던 천민

천민의 대다수는 노비였다. 노비는 재산으로 간주되어 매매, 상속, 증여가 가능하였다. 부모 중 한 명이 노비이면 그 자녀도 노비가 되었 으며, 소유권은 어머니쪽 소유주에게 귀속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노비는 크게 국가 기관이 소유한 공노비와 개인이나 사원이 소유한 사노비로 구분되었다. 공노비에는 관청의 잡역에 종사하면서 급료를 받는 입역 노비와 토지를 경작하며 얻은 수입 중 일정한 액수를 납부해 송광사 노비 문서(전남 순천 송광사) 수선사(송광 사)에 노비를 바친다는 내용이 있으며, 고려 시대의 노 비 제도를 엿볼 수 있다.

야 하는 외거 노비가 있었다. 공노비는 재산을 가지고 독립된 가정을 꾸릴 수 있어서 사노비보다 비교적 나은 처지에 있었다. 사노비는 주인집에 살면서 잡일을 하는 솔거 노비와 주인과 따로

✽신공(身貢)

살면서

관청이나 주인에게 직접 노동력

신공을 바쳐야 하는 외거 노비로 나누어졌다. 외거 노비는

을 제공하지 않았던 외거 노비

재산을 소유하고 가정을 이룰 수 있어서 백정 농민과 비슷한 생활을

가 국가와 주인에게 매년 바치

하였다.

는 몸값이다.

신분 상승의 가능성 현으로 승격하다

고려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지만 제한적이나마 신분 상승의 가능

(김윤후는) 원래 백현원의 승려였으나, 적군이 침입하자 인근 처인부곡의 처인

성이 열려 있었다. 지방의 향리가 과거에 급제하여 고위 관리가 될 수

성으로 몸을 피하여 백성을 지휘하였다.

있었고, 군인은 전쟁에서 공을 세워 무관으로 출세할 수 있었다. 외거

전투를 벌여 적장 살리타를 사살하였다.

노비도 재산을 모아 주인에게 바치고 양민으로 해방될 수 있었다. 이

이로써 적군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러한 모습은 고려 사회가 신라 골품제 사회에 비하여 좀 더 개방적이

철군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을 포상하여 섭랑장이라는 무반의 직책을 주고 처인

었음을 보여 준다. 한편, 향・부곡・소는 고려 후기 하층민의 신분 해방 운동과 대몽

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하였다. -“고려사”-

항전에 힘입어 일반 군현으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신분을 극복한 사람들 향리 출신인 내가 과거에 합격하다니. 드디어 중앙 관직에 진 출하게 되었어.

일반 군졸인 내가 적장의 목을 베었으니, 나도 무관으로 승진하게 되었네.

몽골군의 침입을 격퇴했으니 우리 마을도 일반 군현으로 승격될 수 있을 거야.

주인에게 이 돈을 바치고 노비 문서를 없애달라고해야지.

처인부곡

���리가 중앙의 관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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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군인이 무관으로

향・부곡・소가 일반 군현으로

외거 노비가 백정으로


고려인의 생활 모습 순비(順妃) 허씨는 공암현 사람으로 중찬 허공의 딸이다. 일찍이 평양공 왕현에게 시집가서 3남 4녀를 낳았으나, 그가 죽자 충선왕이 부인으로 맞이 하였다. 허씨가 왕비로 즉위하자 순비로 책봉하였다.

-“고려사”-

한 여인이 왕실에 시집갔는데, 남편이 죽자 왕이 그녀를 왕비로 맞았다는 내용이다. 왕과 재혼할 수 있을 정도로 고려 시대 여성은 재혼에 별다른 제약이 없었다. 이처럼 고려인의 삶은 지금 우리의 상상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고려인들의 여러 가지 생활 모습을 살펴보자.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사회 시책

국가의 안정을 위해서는 조세를 부담하는 농민의 생활 안정이 필수 적이었다. 이에 국가에서는 여러 가지 제도와 시책을 실시하여 농민을 보호하였다.

의창 서해도 안찰사가 왕에게“황주와 봉주 는 작년에 홍수가 나서 논과 밭이 떠내려

의창은 평상시에 곡식을 마련해 두었다가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는 제

가고 묻혔기 때문에, 지방 주민이 굶주리

도였는데, 봄에 양식이나 종자 등을 빌려 주고 가을에 갚게 하였다. 개경

고 궁핍한 생활을 하니 의창을 열어서 그

과 서경, 12목에 설치된 상평창은 풍년에 곡가가 떨어지면 곡물을 사들이

곡식으로 구제해 주어야 합니다.” 라고 보 고하였다. 왕이 이에 동의하였다.

고, 흉년에 곡가가 올라가면 싸게 내다 팔아 물가를 조절하였다. 의료 기

-“고려사”-

관으로는 개경에 환자 치료와 빈민 구제를 담당하는 동・서 대비원과 백 성에게 의약품을 제공하는 혜민국 등이 있었다. 또한, 기금을 마련한 뒤 그 이자로 빈 민을 구제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제위보도 설치되었다. 한편, 귀족, 사원 등에 의해 고리대가 성행하면서 빚을 갚지 못하여 몰락하는 농민이 생겨났다. 이에 고리대의 피해를 막기 위해 이자율을 법으로 정하고, 이자 가 빌린 액수와 같게 되면 그 이상을 받지 못하도록 하였다. 관습법을 중심으로 사회를 운영하다

법률은 주로 관습법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중국의 당률을 참고하여 형법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나, 일상생활과 관계되는 것은 대부분 전통적 관습법에 따랐 다. 지방관은 사법권을 지니고 있어서 중요 사건 이외에는 스스로 처결하였다. ✽

형벌에는 태・장・도・유・사의 5종이 시행되었으며, 반역죄나 불효죄는 중죄

로 다스렸다. 사형의 경우 판결의 공정성을 위해 3심제가 운영되었다. 상장제례의 의례는 대개 토착 신앙과 결합된 불교나 도교의 의식에 따랐다. 유 교적 규범을 시행하려는 정부의 노력이 있었지만 효과가 거의 없었다.

✽고려 형벌의 종류

•태`: 볼기를 치는 매질 •장`: 곤장형 •도`: 징역형 •유`: 유배형 •사`: 교수형과 참수형

명절로는 정월 초하루, 삼짇날(음력 3월 3일), 단오, 유두, 추석 등이 있었다. 단오 때에는 격구, 그네, 씨름 등을 즐겼다. 3. 신분 제도와 생활 모습

87


농민 공동체 조직, 향도(香徒)

향도는 불교 신앙에 바탕을 둔 농민 공동체 조직으로, 고려 전 시기에 걸쳐 군 현이나 촌락을 단위로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초기에는 ✽매향 활동을 하면서 불

✽매향 활동

불교 미륵 신앙의 한 형태. 향나

상, 범종, 석탑, 사찰 등을 만들 때 대규모의 노동력과 비용을 제공하였다. 이는

무를 바닷가에 묻으며, 이를 매

향도가 불교 신앙 활동을 통해 지역 사회의 통합을 이루는 역할도 했음을 보여

개로 소원을 비는 사람과 후에 출현할 미륵이 연결되기를 기원

준다.

하였다.

후기에 향도는 불교 신앙 활동에서 점차 다른 영역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 갔다. 마을의 공동 노역과 혼례, 상장례, 민속 신앙과 연결된 마을 제사 등을 담당함으 로써 공동체 생활을 주도하는 농민 조직으로 변모되어 갔다.

가족 제도의 모습

고려 시대의 가족 구성은 대체로 부부와 자녀로 이루어진 소가족이 중심을 이 루었으나, 부모를 봉양하거나 능력이 없는 친척과 같이 사는 대가족도 있었다. 혼 인은 남자 20세 전후, 여자 18세 전후로 하였으며,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이었다. 고려 초에 왕실에서는 친족 간의 혼인이 성행하였다. 중기 이후 금지령이 여러 차

사천 매향비(경남 사천) 1387 년 향나무를 묻고 세운 것으로 내

례 내려졌으나 그 풍습이 사라지지 않았다.

세의 행운과 국태민안(國泰民安)

부모의 재산은 아들과 딸의 구분 없이 고르게 상속되었다. 이에 따라 자녀 간에

을 기원하였다.

구분 없이 부모를 봉양했으며, 아들이 없는 경우에도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이 부 모의 제사를 지냈다.

여성의 지위는 어떠하였을까?

고려 시대 여성의 지위는 다른 시대보다 상대적으로 높았다. 여성이 호주(戶主) 가 될 수 있었고, 호적에도 아들과 딸을 구분하지 않고 나이에 따라 기록되었다. 사위가 처가의 호적에 오르거나 처가살이하는 경우가 많았고, 음서의 혜택이 사 위나 외손자에게도 적용되었다. 부부 간에도 여성의 재산에 대한 권리는 보호되었다. 예를 들어 결

여성의 지위

혼할 때 여성이 데려온 노비에 대한 소유권은 여전히 부인에게 귀속

고려의 옛 풍습에 혼인 예법은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자손을 낳으면 외가에서

되었다. 부인이 재혼을 하게 되면 그 노비를 데리고 갔으며, 후손이

자라므로, 외친(外親)의 은혜가 무거웠다.

없는 경우에는 다시 친정으로 귀속되었다. 여성의 재가도 특별한 제

이에 외조부모와 처부모의 장례 시에는

한이 없어 비교적 자유로웠으며, 재가한 여성의 자손이라도 별다른

모두 30일 동안 휴가를 주었다. -“태종실록”-

차별을 받지 않았다. 고려의 여성은 사회 활동에는 제한이 있었지만, 가정생활이나 경제 운영 등 일상생활에서는 남성과 거의 대등한 위치에 있었다.

88

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기록으로 보는 고려 시대 여성의 지위 첩을 두는 것을 허용하자는 박유의 주장

일부다처제를 주장하다 된서리를 맞은 박유 박유가“청컨대 신하와 관료들에게 첩을 두게 하되 품위에 따라

은 원래 원에 보내는 공녀를 줄이고자 하는

그 수를 줄여 보통 사람에 이르러서는 1처 1첩을 둘 수 있도록 하십

의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시오. 또한, 여러 첩에게서 낳은 아들들도 역시 본처가 낳은 아들

여성들은 이를 일부다처제 실시로 받아들

들처럼 벼슬을 할 수 있게 하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하였다. 부녀

여 크게 반발하였다. 결국 일부다처제는 여

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원망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때

성들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 이야

마침 연등회에 박유가 왕의 행차를 호위했는데, 어떤 노파가 박유

기는 고려 여성의 지위가 높았음을 간접적

를 손가락질하면서“첩을 두자고 요청한 자가 바로 저 빌어먹을 놈

으로 보여 준다.

의 늙은이다!” 라고 하였더니, 듣는 사람들이 서로 손가락질을 하였 다. 당시 재상들 가운데에는 부인을 무서워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 에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다.

1 재산 분배

-“고려사”-

2 여주 이씨 호적

어머니가 재산을 분배할 때 나익 희에게 따로 노비 40명을 물려주려 고 하였다. 나익희는“제가 6남매의

호주: 낙랑군 부인 최씨(60세)

일남 윤배(32세)

이남 윤성(28세)

삼남 윤방(24세)

사남 혜근(19세)

외아들이라 해서 사소한 것을 더 차 지하여 여러 자녀들로 하여금 화목 하게 살게 하려 한 어머니의 거룩한

3 밀양 박씨 호적

뜻을 어찌 더럽히겠습니까?” 라고 하며 사양하였다. 그러자 어머니가 그 말을 옳게 여기고 따랐다.

호주`: 박송(61세) 부인`: 소사(58세)

장녀 소사(37세) 남편 황문(40세)

장남 박성(30세) 부인 가질구지(?세)

이남 구질달(29세) 부인 원지(24세)

[자료 1]은 외아들이 어머니와 협의하여 여자 형제들과 똑같이 재산을 분배하려는 모습을 보여 준다. [자료 2]는 장성한 아들이 3명이 있지만 그 어머니 최씨가 호주로 기록되어 있다. 2008년 호주제가 폐지되었지만, 그 전까지는 남편이 죽으면 호주는 큰아들에게 계승되었다. [자료 3]은 호적에 아들, 딸 구별 없이 나이순으로 기록했으며, 장녀 소사의 남편, 즉 사위가 처갓집 의 호적에 이름이 오른 것을 알 수 있다.

1

위 자료를 토대로 고려 시대 여성의 지위를 설명해 보자.

3. 신분 제도와 생활 모습

89


4

다양한사상과귀족문화의발달

유학의 발달과 역사서의 편찬

국가를 맡은 자는 항상 근심이 없는 때를 경계해야 하고, 유교 경전과 역사 서적을 널리 읽어 옛일을 거울삼아 오늘을 경계해야 한다.

- 훈요 10조,“고려사”-

태조가 후대 왕들에게 항상 유교 경전과 역사 서적을 읽고 이 를 본받아 바른 정치를 하도록 권하는 내용이다. 이처럼 고려 는 건국 초부터 유교 정치 이념을 수용하여 나라의 기틀을 세워 나갔 다. 바른 정치를 위해 강조된 유교 사상은 어떻게 발전하였을까?

성균관 대성전(개성)

유교 정치 이념을 내세우다

고려 시대에 개인의 삶과 사회 질서를 이끌어 가는 중추 역할을 한 것은 불교였 다. 그러나 정치 면에서는 유교 이념이 강조되었고, 이에 따라 유학 교육이 확대 되고 유교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건국 과정에서 신라 6두품 출신 유학자들의 도움을 받은 태조는 유교의 민본 사 상에 따라 취민유도를 강조했으며, 유학 진흥을 위해 서경에 학교를 세 최승로의 주장

웠다. 광종은 과거제를 실시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리를 등용하였

예악・사서의 가르침과 군신・부자의 도리는 마땅히 중국을 본받아 나쁜 풍속 은 고쳐야 되겠지만, 그 밖의 거마・의복 제도는 그 지방의 풍속대로 하여 사치함 과 검소함을 알맞게 할 것이며, 일부러 중 국의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성종은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내세워 국자감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 교를 설립하였다. 국자감은 유학 교육과 함께 율학, 서학, 산학 등 기술 교육도 담당하였다. 고려 초기 대표적인 유학자는 최승로였다. 그의 유교 사상은 새로 운 국가 건설과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 시무 28조,“고려사절요”-

특성을 지녔다.

유학이 보수화하다

고려 중기에 문벌 귀족 사회가 자리 잡으면서 유교는 사회 개혁보다 지배 체제 의 안정을 추구하는 보수적인 성격으로 바뀌어 갔다. 해동공자로 칭송받은 최충 은 고려의 유학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는데, 중앙 집권적 귀족 정치를 강조함으로써 문벌 귀족 사회의 안정을 추구하였다. 인종 때 활약한 김부식은 이 자겸의 난과 금의 사대 압력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보수적이면서 현실 안정을 추 구하는 경향을 보였다.

90

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한편, 최충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9재 학당을 설립하여 제자를 양성하였 다. 이를 계기로 사학 12도가 등장하여 크게 발전했는데, 사학에서 교육받 은 학생이 과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국자감의 관학 교육이 위축되었다. 이에 관학 진흥책이 추진되어 예종 때 국자감에 7재로 나뉜 전문 강좌를 두 어 관학의 내실화를 꾀했으며, 양현고라는 장학 재단을 설치하였다. 무신 정권기에는 문벌 귀족이 약화되면서 유학 교육도 크게 위축되었다.

성리학을 받아들이다

원 간섭기에는 성리학이 도입되어 사상계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성리 학은 종래 자구의 해석에 힘쓰던 한・당의 훈고학과는 달리 인간의 심성과 우주의 원리 문제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신유학이었다.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인물은 충렬왕 때 안향이었다. 그가 들여온 성리학은 심성 수양을 중요시하는 실천적인 면이 강하였다. 이제현은 원의

안향(소수박물관)

학자와 폭넓게 교류하며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이후 성리학은 이색을 비롯하여 정몽주, 정도전 등 신진 사대부에게 계승되었다. 고려 말 신진 사대부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불교의 폐단과 권문세족

안향의 성리학

의 횡포를 적극 비판하면서 사회 모순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성

성인의 도(道)는 현실에서 윤리를 실

리학의 형이상학적 측면보다 실천적 기능을 강조하고,“소학” 과“주자

천하는 것이다. 자식된 자는 효도하고,

가례” 를 보급하여 유교적 생활 관습을 정착시키고자 하였다.

신하된 자는 충성하며, 예의로 집안을 다 스리고, 신의로 벗을 사귀며, …… 그런

한편, 국학의 명칭은 성균관으로 바뀌었는데, 공민왕은 이를 순수한

데 불교는 어떠한가? 부모를 버리고 집

유교 교육 기관으로 확대, 개편하여 유교 교육을 더욱 강화하고 신진

을 나서서 윤리를 파괴하니 이는 오랑캐 무리이다.

사대부를 양성하였다.

-“회헌실기”-

고려 사회에 부는 사학 열풍

최충이 죽은 뒤 시호를 문헌(文憲)이라고 하였는데, 과거에 응시하는 자들이 모두 9재 학당에 소속되어 이를 모두 문헌공도라고 불렀다. …… 세간에서는 12사학 중에서 최충의 학도가 가장 성대하다고 하였다.

-“고려사”-

최충의 시호인 문헌은‘문(文)의 으뜸’ , 즉 최고의 학자라는 뜻이 담겨 있다. 따라서 그가 세운 9재 학당 에 많은 학생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학의 설립자들은 대개 과거를 주관하는‘지공거’출신이었다. 지공거(좌주)와 과거 합격자(문생)는 사 제 관계처럼 엮여서 세력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지공거는 퇴임 후에도 정계에 큰 영향력을 행 사하였다. 또한, 사학은 유교 경전(명경) 교육을 중시하는 국자감과 달리 과거에서 더 중시되는 제술 과목 을 필수로 운영하였다. 이로 인해 과거를 준비하는 귀족 자제들에게 사학이 더욱 인기를 끌게 되었다.

최충(강원 노동서원)

4. 다양한 사상과 귀족 문화의 발달

91


역사서를 편찬하다

유학의 발달과 함께 유교적 역사 서술 체계도 확립되어 많은 역사책이 편찬되 었다. 건국 초부터 왕조실록이 편찬되었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불타 버렸다. 이에 현종 때 태조부터 목종에 이르는 7대 실록을 다시 편찬했고, 그 후에도 고려 왕조 의 실록이 편찬되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중기에는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삼국사기” 를 편찬하였다.“삼국사기” 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서, 유교 적 합리주의 사관에 따라 ✽기전체 형식으로 서술되었다.

✽기전체 형식

역사 서술 방식의 하나로, 우리 나라와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무신 정변과 몽골의 침입을 겪으면서 자주 의식을 바탕으로 전통문화를 바르게

정사(正史)를 편찬할 때 사용하

이해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각훈이 지은“해동고승전” 은 우리나라 역대 고승의

였다. 본기(제왕), 세가(제후), 열 전(인물), 지(주제), 표(연표) 등

전기를 기록한 것으로, 현재 일부만 전해 온다. 이규보의‘동명왕편’ 은 동명왕의 업

으로 구성된다. 한편, 역사를 연

적을 칭송한 영웅 서사시로 고구려 계승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 후 단군을 우리

대 순서에 따라 기록하는 편년

민족의 시조로 내세운 일연의“삼국유사” 와 이승휴의“제왕운기” 가 저술되었다.

체도 있다.

한편, 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정통 의식과 대의명분을 강조한 성리학적 유교 사 관도 대두하였다. 이를 대표하는 이제현은“사략”등 여러 사서를 남겼으나, 대부 분은 전하지 않는다. 그의 역사학은 조선 시대에 영향을 주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대한 오해와 진실 삼국사기를 올리는 글

성상 폐하께서는“오늘날의 학자들이 중국의 경전과 역사에는 능통하나, 우리나라 역사는 잘 알지 못하니 걱정스러운 일이다. …… 중국 역사서에 삼국의 기록이 있으나 자세하지 않고, 예부터 전해 오던 고기(古記)의 내용은 빠진 내용이 많아 후대에 교훈을 주

삼국사기(경주 옥산 서원)

기 어렵다. 이에 후대에 남겨 줄 역사서를 만들어야겠다.” 라고 말 씀하셨습니다. 일흔이 넘어“삼국사기”편찬을 마친 김부식이 인종에게 바친

김부식

만, 삼국 고유의 기록을 존중하였다.

글이다. 김부식은 경주 출신의 문벌 귀족이자 유학자이다. 그는

이에 고구려 주몽이나 신라 박혁거세의 건국 신화도 실었다. 유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진압한 후, 유교 이념으로 지배 질서를

교적 가치관에 맞지 않는 사실이라 해도 있는 그대로 기록했고, 저

재정립하고 금과 온건한 대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자의 평을 구분하여 서술하였다. 또한, 고구려・백제・신라의 본

그의 성향 때문에“삼국사기” 는 사대주의 경향을 지닌 신라 중심

기를 똑같이 두었으며, 각 본기에서 해당 국가를‘우리나라’ 라고

의 역사서로 인식되기도 한다.

칭하였다. 본기는 기전체 사서에서 황제의 행적을 다룬 부분이다.

그런데 윗글에는 정작 우리 역사를 잘 알기 위해“삼국사기” 를

이처럼“삼국사기” 에는 삼국의 역사를 동등하게 다루고, 중국

편찬했다는 뜻이 나타나 있다. 김부식은‘괴력난신(怪力亂神: 초

의 역사와 대등하게 인식했던 흔적이 있다.“삼국사기” 가 사대적

자연적이고 신비한 것)은 서술하지 않는다.’ 라는 원칙을 따랐지

이며 신라 중심적이라는 평가는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92

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불교와 도교, 풍수지리설의 발달 짐의 지극한 관심은 연등과 팔관에 있다.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요. 팔관은 하늘의 신령과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 군신이 함께 즐기기로 하였으니 마땅히 조심하여 이대로 시행할 것이다.

- 훈요 10조,“고려사”-

연등회와 팔관회는 태조가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당부할 만큼 중 요한 국가 행사였다. 태조는 이를 통해 민심을 어루만지고 국가 의 단결을 도모하였다. 고려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불교와 여러 종교 의 발전 모습을 살펴보자.

팔관회 재현 모습(대구 밀레니엄 팔관회)

불교를 숭상하다

고려에서 유교가 정치 이념으로서 강조된 데 비해, 불교는 왕실, 귀족에서부터 일반 서민까지 모든 사회 계층이 믿는 국가 종교였다. 국가의 안녕과 개인의 행복 을 기원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를 통합하고 외세가 침입했을 때 국가를 지 키는 정신적 지주 역할도 하였다. 태조는 불교를 중시하면서 개경 주변에 여러 사찰을 세웠으며, 훈요 10조에서 연등회, 팔관회 등을 중시하라고 당부하였다. 광종은 승과를 실시하여 합격한 승려 에게 승계를 주어 지위를 보장하였다. 또 신망이 높은 승려를 국사와 왕사로 삼았 는데, 이로 인해 불교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다. 이 밖에도 사찰에는 많은 토지와 노 비가 지급되었으며, 승려는 면역의 혜택을 받았다. 이처럼 불교는 건국 초기부터 국가적 지원 아래 발전하면서 그 사상의 깊이를 더했고, 대장경 조판 등 대규모의 불사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의천, 불교 교단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

신라 말 선종이 대두하면서 불교는 크게 교종과 선종의 두 흐름으로 나뉘었다. 중앙 집권 체제가 정비되고 귀족 사회가 안정되면서 화엄종, 법상종 등 왕실과 귀

의천(국립현대미술관) 문종의 넷째 아들로, 승려가 된 후 송에 유학하여 불교를 연구하였다.

족의 지원을 받은 교종이 융성하였다. 이와 함께 불교가 외형적 발전과 형식에 얽 매이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종파적 분열이 나타났다. 문종의 왕자로서 승려가 된 의천은 교단 통합 운동을 벌였다. 그는 화엄종을 중 심으로 교종을 정리한 뒤, 해동 천태종을 창시하여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 ✽

하였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수행 방법으로는 교관겸수를 제시하였다. 이러 한 노력으로 교단에는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의천이 죽은 뒤 교단 은 다시 분열되었고, 외형적 발전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교관겸수(敎觀兼修)

교와 관을 같이 수행해야 한다 는 것. 교는 불교의 이론적인 교 리 체계로 교종이, 관은 실천적인 수행법으로 선종이 중시하였다.

4. 다양한 사상과 귀족 문화의 발달

93


신앙 결사 운동이 일어나다

불교가 외형적 발전에 치중하여 세속화하자, 이를 비판하고 불교 본연의 모습 을 찾으려는 신앙 결사 운동이 일어났다. 무신 정권도 자신들에게 반발하는 교종 사원을 탄압하면서 불교의 새로운 움직임을 지원하였다. 지눌은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독경과 참선, 노동에 고루 힘써야 한다는 개혁 운동을 벌여 송광사에서 수선사 결사를 조직하였다. 그는 ✽돈오점수를 주장 하면서 그 실천 수행 방법으로

정혜쌍수를 내세웠다. 그리하여 선종과 교종의

사상적 갈등을 극복하고,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포용하는 선・교 일치의 사상 체계를 정립하였다. 지눌을 계승한 혜심은 유・불 일치설을 주장하며 심성의 도 지눌(대구 동화사)

야를 강조했는데, 이는 성리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상적 토양이 되었다. 요세는 백성의 신앙적 욕구를 고려하여 강진 만덕사에서 백련결사를 결성하 고, 염불을 중심으로 수행에 정진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백련결사는 토호와 지

✽돈오점수(頓悟漸修)

마음이 곧 부처임을 단번에 깨

방민의 호응을 얻으며, 수선사와 함께 고려 후기 불교를 이끌었다.

우치되[돈오], 깨달은 후에도 꾸

그러나 고려 말 불교는 권문세족과 연결되어 다시 폐단을 드러냈다. 사원은 많

준히 수행[점수]해야 온전한 경

은 토지와 노비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고리대 등을 통해 백성을 괴롭혔다. 이

지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정혜쌍수(定慧雙修)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는 선정

로 말미암아 불교는 신진 사대부로부터 크게 비판받았다.

팔만대장경의 조판

(禪定)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

고려는 부처의 힘으로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을 간행하였다. 거

고 판단하여 일체의 분별 작용

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현종 때 조판을 시작하여 선종 때 완성된 초조대장경

을 없애는 지혜(智慧)를 함께 닦 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은 몽골의 침입으로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 인쇄본의 일부만 전한다. 이후 의천 은 고려와 송・요의 대장경에 대한 주석서를 모아 교장을 편찬하였다.

불교 통합 운동 1 의천의 불교 통합 운동

2 지눌의 정혜결사문

교리를 배우는 이는 마음을 버리고 외적인 것을 구

하루는 같이 공부하는 열 명의 사람과 약속하였다. 마땅히 명

하는 일이 많고, 참선하는 사람은 밖의 인연을 잊고

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같은 모임을 맺자. 항상 선

내적으로 밝히기를 좋아한다. 이는 다 편벽된 집착이

을 익히고 지혜를 고르는 데 힘쓰고, 예불하고 경전을 읽으며 힘

고 양극단에 치우친 것이다.

들여 일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각자 맡은 바 임무에 따라 경영한 -“대각국사문집”-

다.

➊ [자료 1]의 밑줄 친 양극단을 극복하기 위해 의천이 주장한 내용을 말해 보자. ➋ 지눌이 [자료 2]와 같은 주장을 하게 된 배경을 설명해 보자.

94

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권수정혜결사문”-


몽골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불에 타자, 부처의 힘으로 몽골을 물리치려는 염원에 따라 다시 대장경 제작에 착수하여 16년 만에 팔만대장경을 완성하였다.

도교와 풍수도참설이 널리 퍼지다

고려 시대의 도교는 불교와 더불어 나라의 안정과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국가 종교로서 역할을 했으며, 재앙을 물리 치고 복을 기원하는 신앙으로서 일반 백성에게도 널리 유행하

해인사 장경판전(경남 합천)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곳으로 조 선 초기에 만들어졌다.

였다. 이에 따라 국가 차원에서 도교 행사가 자주 열렸고, ✽초제가 성행하였다. 예종 때에는 도교 사원이 건립되기도 하였다. 도교는 불교적 요소와 도참사상, 민간 신 앙 등을 흡수하였으나 일관된 교리를 세워 발전하지 못하였다. 교단도 성립하지

✽초제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위해 하 늘에 제사를 지내는 도교 행사 이다.

못한 채 민간 신앙 형태로 유지되었다. 신라 말부터 유행한 풍수지리설은 미래의 길흉화복을 예측하는 도참사상과 결 합하여 고려 시대에도 크게 유행하였다. 특히 땅의 형세나 모양이 국가의 운명이 나 개인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이론은 정치 변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신라 말에는 송악이 장차 도읍이 될 명당이라는 송악 길지설이 대두하여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을 뒷받침하였다. 건국 초에 등장한 서경 길지설은 북진 정책 추진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으며,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에도 이용되었다. 중기 이 후에는 북진 정책이 점차 퇴조하면서 남경 길지설이 대두하였다. 이에 따라 한양 을 남경으로 승격하고 궁궐을 지어 왕이 머물기도 하였다.

풍수지리로 살펴본 개경 한 나라를 세울 때에는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명당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개경도 예외는 아니었다. 개경은 풍수지리상 바람을 가두는 형세를 지닌 명당이라고 한다. 개경 주변 은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라 일컫는 네 개의 산에 둘러싸여 있다. 이는 겨울철 바람을 막아 주어 생활에 편리했고, 외적의 침입을 막기에도 유리하였 다. 이와 더불어 개경 주변에는 예성강, 임진강 등의 하천이 있어 상업과 무역에 도 유리하였다.

광여도(규장각 한국학연구원)

4. 다양한 사상과 귀족 문화의 발달

95


과학 기술의 발달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을 설치하였다. 최무선은 원의 화약 제조 기술자 이원(李元) 과 한 마을에 살면서 그를 지극히 대우하여 화약 제조 기술을 어렵사리 알아낸 뒤, 많은 실 험을 거쳐 화포를 만들었다.

-“고려사”-

최무선은 온갖 정성을 기울여 마침내 원의 기술자로부터 화약 제조법을 알아냈다. 그가 만 들기 시작한 화약과 화포는 조선 시대로 이어지며 더욱 발전했고, 국가 위기 극복에 큰 도 움이 되었다. 과학 기술의 발달은 부국 안민(富國安民)에 꼭 필요한 요소이다. 고려 시 대에 과학 기술이 어떻게 발달했는지 알아보자. 고려 시대 총통 복원품

최무선(국립현대미술관)

세계 최초로 금속 활자를 발명하다

인쇄술은 고려를 대표하는 과학 기술 분야 중의 하나로, 목판 인쇄술과 활판 인 쇄술이 함께 발전하였다. 목판 인쇄는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 이 대표적이다. 팔만대장경은 글씨체가 아름답고 잘못된 글자나 빠진 글자가 없 금속 활자(국립중앙박물관, 개 성역사박물관) 남한에‘복’ 자와 북한에‘전’ 자가 각각 하나씩 남아 있는데, 고려의 금속 활자 기술을 증명하고 있다.

는 등 정확한 내용으로 완성도가 높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대장경으로 평가받 는다. 활판 인쇄는 목판 인쇄에 비해 다양한 인쇄물을 소량으로 발행하는 데 적합한 방법이다. 고려는 세계 최초로 금속 활자를 발명하여 활판 인쇄에 이용하였다. 13 세기 중엽에 인쇄된“상정고금예문” 은 서양의 금속 활자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 지만, 현재 전하지 않는다.“직지심체요절” 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 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금속 활자의 발 명은 청동 주조 기술이 발달하고, 활판 인쇄에 적합한 먹과 종이의 제조가 이루어 졌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의학의 발달

고려 시대에는 혜민국, 대비원, 제위보 등이 설치되어 왕족, 귀족뿐 만 아니라 양민, 천민도 의료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의료 업무를 담당하는 태의감에서 의학 교육을 실시하고, 의관을 선발하는 의과를 실시하여 의학 기술이 발전할 수 있었다. 중기에는 우리 실정에 맞는 독자적인 의학이 발전하고, 의서가 발간 향약구급방(일본 궁내청) 중국산 약재를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로 대체하기 위해 발행한 책 이다.

되는 등 학문적 체계가 성립되었다. 13세기에 편찬된“향약구급방” 은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의학 서적으로, 각종 질병에 대해 우리 풍 토에 맞는 처방과 약재 등이 소개되어 있어 그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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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천문과 역법의 발달

농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천문학과 ✽역법도 발전하였다. 천문 현상을 관측하 는 기관인 사천대(뒤에 서운관)가 설치되어 천체와 기상을 관찰하여 그 결과를 체 계적으로 기록하였다. 이는 당시 과학 기술이 크게 발달했던 이슬람 문명에 버금

✽역법(曆法)

천체의 주기적 현상을 기준으로 달, 날짜, 시간 등을 정하는 방법 이다.

갈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역법은 고려 초에는 신라 때 쓰던 당의 선명력을 ���용했고, 후기에는 원의 수시 력과 명의 대통력 등을 받아들였다. 아울러 천문 관측을 바탕으로 정확한 날짜와 시간 등을 계산하는 방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화약 무기를 만들고 조선술이 발달하다

고려 말 왜구가 자주 침입하자 이를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무 기 개발의 필요성이 대두하였다. 이에 최무선의 건의에 따라 화통도감 을 설치하여 화약과 화포를 제작하였다. 여기서 만들어진 20여 종의 화약 무기는 진포 싸움 등에서 왜구를 격퇴하는 데 큰 위력을 떨쳤다. 한편, 조선술도 발달하여 30m가 넘는 대형 범선과 1,000석의 곡물 을 실을 수 있는 대형 조운선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병선에도 화포를 설치해 왜구 격퇴에 활용하였다. 치성광불여래왕림도(미국 보스턴박물관) 북극성을 의미하는 ‘치성광불여래’위에 서양의 황도 12궁이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 동서양의 교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체계적으로 천문 현상을 기록하다 고려 왕조 475년간에 일식이 132회 있었고, 다섯 개의 행성이 다른 별 에 접근한 현상과 각종 별의 이상한 현상도 많았다. 이제 역사 기록에 나 타난 이러한 사료를 모아서‘천문지’ 를 만든다.

-“고려사”-

고려 시대에도 천재지변을 하늘의 뜻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를 알아내기 위한 천 문 관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고려사” 의‘천문지’ 에는 그러한 흔적이 잘 드러나 있다. 고려 시대에 일어난 일식, 월식, 무지개, 혜성, 별똥별 등 다양한 천문 현상뿐만 아니라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행성에 대한 내용도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이처럼 고려는 천제의 움직임과 천문 현상을 체계적으로 기록했으며, 그 과정에서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역법 계산법도 사 용하였다.

첨성대(개성) 고려 궁궐 터인 만월대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천문 관측 기구를 올려 놓았던 축대만 남아 있다.

4. 다양한 사상과 귀족 문화의 발달

97


귀족 문화의 발달 고려 시대 청자를 굽던 가마터의 모습이다. 이곳에서 장인의 피와 땀, 예술혼은 1000℃가 넘는 뜨거운 열 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고려청자로 탄생하였다. 이를 두고 당 시 중국인들은‘고려 비색 천하제일’ 이라 칭송하였다. 천하제일을 빚어낸 고려인의 예술혼이 당시 문화 예술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살펴보자.

청자 가마터(강진 청자박물관)와 청자 칠보 투각 향로(국립중앙박물관)

귀족 문화의 꽃, 청자와 공예

문벌 귀족 사회가 발달하면서 자기, 금속 공예, 나전 칠기 등 정교하고 세련된 귀족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었다. 자기는 신라의 전통 위에 송의 기술이 더해지면서 11세기에는 독자적인 경지 에 이른 순수 청자가 발달했으며, 12세기에는 고려의 독특한 기술인 상감법이 개 발되어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원 간섭기 이후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해안 청동 은입사 향완(국립중앙박 물관)

지방의 많은 가마가 폐쇄되면서 청자는 점차 퇴조하였다. 금속 공예는 불교 도구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특히 청동기 표면에 은으로 무 늬를 장식하는 은입사 기술이 발달하였다. 이 밖에도 옻칠한 바탕에 자개를 붙여 무늬를 표현하는 나전 칠기 공예도 성행하였다.

여러 갈래의 문학과 음악이 발달하다

고려 전기에는 향가가 여전히 불렸고, 한문학도 크게 발달하였다. 문벌 귀족 사이에는 당송의 한문학을 숭상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무신 정권기 이후에는 설화 문학과 수필 문학도 발달하였다. 대표적인 설화 문 고려 시대의 나전 칠기(일본 도 쿄국립박물관)

학으로는‘국순전’ ,‘국선생전’등이 있고, 수필 문학에는 이인로의“파한집” ,최 자의“보한집” , 이제현의“역옹패설”등이 있다. 신진 사대부 사이에서는 경기체 가가 유행했는데,‘한림별곡’ ,‘관동별곡’등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청산별곡’ , ‘쌍화점’등 서민의 정서를 담은 장가(속요)가 널리 유행하였다. 음악에는 아악과 향악이 있었다. 아악은 송에서 대성악을 수입하여 발전시킨 궁중 음악으로, 조선을 거쳐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다. 향악은 우리나라의 고 유 음악으로‘동동’ ,‘대동강’등이 있다.

98

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아름다운 붓놀림, 글씨와 그림

고려 전기에는 왕실과 귀족의 애호품으로 문인화와 산수화가 널리 그려졌으나 전하지 않는다. 다만, 고려 말 공민왕이 그린 천산대렵도가 전해 오는데, 이를 통 해 당시 화풍을 엿볼 수 있다. 아름답고 화려한 불화도 많이 그려졌다. 혜허가 그린 수월관음도가 대표적인 불화로 손꼽히는데, 현재 일본에 전해 오고 있다. 이 밖에도 부석사 조사당의 벽 에 그려진 사천왕상과 보살상 등이 있다. 한편, 글씨는 귀족의 교양으로 발달하였다. 왕희지체와 구양순체가 유행했는 데, 유신과 탄연, 최우 등이 명필로서 신라의 김생과 더불어‘신품 4현’ 으로 불리 었다. 후기에는 원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송설체가 들어와 크게 유행하였다.

거대하고 소박하게 제작된 불상

불상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초기에는 하남 하사창동 철 조 석가여래 좌상과 같은 대형 철불이 많이 제작되었다.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 살 입상이나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 입상처럼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지역적 특색을 나타낸 석불도 조성되었다. 이들은 큰 규모에 비해 조형미는 다소 떨어지 지만, 소박한 지방 문화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혜허의 수월관음도(일본 센소

한편, 신라 양식을 계승한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 좌상은 뛰어난 세련미를 지니

사) 물방울 모양의 독특한 광배 로‘물방울 관음’ 이라고도 한다.

고 있어 고려 불상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하남하사창동철조석가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 좌상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 입상

여래 좌상(국립중앙박물관)

4. 다양한 사상과 귀족 문화의 발달

99


배흘림기둥으로 멋을 낸 건축

고려 전기에는 궁궐과 사찰 등 많은 건축물이 지어졌다. 하지만 개경의 왕궁이나 흥왕사 등은 현재 그 터만 남아 있다. 개성의 궁궐 터인 만월대를 보면, 경사진 면에 축대를 높이 쌓고 계단식으로 건 물을 배치하여 외관이 웅장하게 보이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목조 건축물은 고려 후기에 축조되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 안동 봉정사 극락전을 비롯하여 영주 성불사 응진전(황해 사리원)의 다포 양식

부석사 무량수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등은 배흘림기둥에 주심포 양

식으로 축조되었다. 한편, 다포 양식의 건물도 세워졌는데, 사리원 성불사 응진전 이 대표적이다.

여러 가지 형태로 만들어진 석탑

고려 초기의 석탑은 5층탑, 7층탑, 다각 다층탑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는 데, 신라에 비해 안정감은 부족하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 준다. 대표적인 석탑 으로 개성 불일사 5층 석탑과 평창 월정사 8각 9층 석탑이 유명하다. 후기에 만들 어진 개성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조선 시대의 서울 원 각사지 10층 석탑에 영향을 주었다. 다양한 형태의 승탑과 탑비도 많이 제작되었다. 승탑은 팔각 원당형을 계승한 여주 고달사지 승탑과 사각형의 특이한 형태를 띠면서 조형미가 뛰어난 원주 법천 사 지광국사탑과 탑비 등이 대표적이다.

여주 고달사지 승탑(경기 여주)

개성 불일사 5층 석탑(개성)

평창 월정사8각9층석탑(강원평창)

개성 경천사지 10층 석탑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100

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 이해하기

사찰이나 궁궐 등을 방문하면 다양한 전통 건축물을 만나게 된다. 근엄하게 방문객을 내려 보는 것도 있고, 자연과 어우러져 조용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도 있다. 그런데 건축물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지붕 모양이나 기둥, 공포의 생김 새에서 서로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차이점을 알아보자.

부석사 무량수전(경북 영주)과 주심포 양식

창경궁 명정전(서울)과 다포 양식

공포 배치가 주심포인가 다포인가?

기둥은 배흘림기둥인가 민흘림기둥인가?

공포(㎗包)란 앞으로 내민 처마를 받치며 그 무게를 기둥과

기둥도 모양에 따라 배흘림기둥과 민흘림기둥으로 구분한

벽으로 전달시켜 주는 조립 부분을 말한다. 전통 건축은 공포의

다. 배흘림은 기둥의 가운데 부분을 불룩하게 하여 안정감 있

배치에 따라 크게 주심포 양식과 다포 양식으로 구분된다. 공포

게 보이도록 한 것이다. 기둥의 굵기를 일정하게 했을 경우

가 기둥 위에만 있으면 주심포,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으면

착시 효과로 기둥 가운데 부분이 오목하게 보인다고 한다. 민

다포이며 궁궐, 사찰 건축에서 다포 양식을 찾을 수 있다. 조선

흘림은 아래로 내려오면서 기둥을 약간 굵게 만드는 것을 말

후기에는 공포 대신 익공을 사용한 양식이 널리 유행하였다.

한다.

맞배지붕

팔작지붕

우진각지붕

4모지붕

지붕 형태는 어떠한가? 맞배지붕은 건물 양옆에는 지붕이 없이 앞뒤로만 마주 보고 있는 형태 부석사 무량수전(왼쪽)과 창경궁 명정전(오른쪽)의 단면도

이다. 팔작지붕은 건물 정면에서 볼 때 팔(八)자로 보이는 지붕이다. 우진

무량수전은 주심포 양식에 배흘림기둥이며, 명정전은 다포 양식

각지붕은 앞뒤와 양옆이 모두 지붕면으로 앞면은 사다리꼴, 양 옆은 세모

에 민흘림기둥이다.

꼴을 하고 있다. 모임지붕은 지붕 면(모서리)수에 따라 4모, 6모, 8모지붕 이 있다.

1

위 내용을 참고하여 주변에 있는 대표적인 전통 건축을 찾아 그 건축 양식을 알아보자. 4. 다양한 사상과 귀족 문화의 발달

101


정치・경제 체제와 사상 구분

정치 체제

경제 체제

고려 초기

고려 중기

무신 집권기

원 간섭기 이후

변화

호족 연합 정권 → 문벌 귀족 정치

중앙 조직

•2성 6부, 중추원, 삼사, 어사대 •도병마사, 식목도감: 귀족 정치 모습, 독자적 기구 •대간: 어사대 + 낭사 → 서경, 간쟁, 봉박

지방 조직

•5도(주・부・군・현) 양계(주・진) •주현보다 속현이 많음. 향리가 실제 행정 담당

•무신 권력 기구 등장 •중방(무신 최고 회의 기 •원의 간섭 → 관제 격하 •권문세족 권력 독점 → 구) 중심 ③ •최씨 정권: ② , •공민왕 개혁 정치 → 정방(인사권) 신진 사대부 대두 •도방, 삼별초: 사병적 성격

토지 제도

•역분전 → ① (시정 → 개정 → 경정) •과전, 공음전(세습) → 귀족의 경제 기반 •한인전, 구분전, 군인전

•전시과 체제 붕괴 •권문세족: 농장 확대 •무신: 농장 확대, 사병 •전민변정도감(신돈) 양성 •신진 사대부: 사전 개혁

유교

자주적, 주체적(최승로)

보수적, 정권 안정 추구

침체

성리학 수용

불교

•숭불 정책 → 연등회, 팔관회 중시 •교종과 선종 공존

의천(천태종): 교관겸수 → 교종 중심으로 선종 통합

지눌: 돈오점수, 정혜쌍수 → 선종 중심으로 교종 통합

불교 사원의 폐단: 대토 지 소유, 고리대 → 신진 사대부 배불론

사상

지배층의 변화와 대외 관계, 문화 활동

102

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창의

인성

가상 인터뷰하기 고려 시대에도 다양한 인물이 존재하였다. 서희, 강감찬 등 외침을 극복한 사람부터 무신의 집권에 저항한 노비 만적까지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다. 아래 예시의 인물 중 한 명을 택하여 가상으로 인터뷰해 보자.

1. 인터뷰할 인물을 선정한다. 2. 인터뷰 대상의 활동이나 업적을 조사한다. 3. 인터뷰 형식에 맞추어 글을 작성한다. ※ 유의점 •예시에 나타난 인물을 선정하되, 다른 인물도 선택할 수 있다. •활동이나 업적의 배경과 그 내용, 결과 및 영향 등을 시간 순서에 맞게 논리적으로 서술한다. •기자가 질문하고 인터뷰 대상이 답하는 형식을 갖추도록 한다.

인터뷰대상선정 서희  강감찬  이자겸  묘청  윤관  김부식  지눌  최충  최무선  만적

왕건의인터뷰 기 자: 후백제와의 전쟁으로 많은 농민이 경제적인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 있습니까? 왕 건: 취민유도의 정신에 입각하여 농민의 고통을 덜어 줄 것입니다. 기 자: 정확한 의미와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왕 건: 네. 취민유도란 백성에게 조세를 수취할 때에 일정한 법도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를 위해 지방의 호족이 마음대로 세금을 거두지 못하도록 하고, 조세는 수확량의 10분의 1만 거둘 계획입니다. 기 자: 백성에게 많은 도움이 되겠군요. 수많은 호족도 통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셨던데요. 왕 건: 네. 몇 가지만 말씀드리면, 먼저 유력한 호족 가문의 딸들과 혼인을 하여 유대 관계를 강화하

려고 합니다. 그리고 왕씨 성을 하사하여 같은 집안의 사람으 로 대할 것입니다. 기 자: 그러나 모든 호족과 혼인 관계를 맺거나 왕씨 성을 주

기는 어려워 보이는데요. 왕 건: 맞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정책뿐만 아니라 적절히 견

제하는 방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방 호족의 자제 들을 뽑아 개경에 인질로 머무르게 하거나 공신・고 관들을 자기 고향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호족을 통 제하려고 합니다. 기 자: 그렇군요. 국가 운영을 위한 민생 안정과 호족 통합

정책에 대해 잘 들었습니다.

대단원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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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근정전(서울 종로)

조선왕조실록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훈민정음(언해본, 서강대학교)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일본 류코쿠대학)


순백자(국립중앙박물관)

탕평비(성균관대학교)

도산 서원(경북 안동)

1. 조선의 건국과 통치 체제의 정비 2. 양 난과 조선 후기의 정치 3. 경제 정책과 경제 생활의 변화 4. 신분 질서와 생활 모습의 변화 5. 양반 문화의 발달과 문화의 새 경향

조선의 건국 과정과 유교적 민본 이념에 입각한 통치 체제의 정비 과정을 말할 수 있다. 왜란과 호란이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에 끼친 영향을 파악하고, 양 난 이후에 전개된 조선의 정치 변화 내용을 말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농업과 상공업의 발전 양상을 살펴보고, 근대 사회를 향한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음을 파악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신분제의 재편 과정을 알아보고, 양 난 이후에 나타난 신분 변동 ���용을 파악해 그 사례를 제시할 수 있다. 조선 전기 양반 문화와 조선 후기 서민 문화의 특징을 파악하고, 교조화된 성리학을 비판하며 등장한 새로운 사상과 학문의 경향을 말할 수 있다.

수원 화성(경기 수원)


1

조선의 건국과 통치 체제의 정비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변동과 조선의 건국

배극렴 등이 여러 신하와 함께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자, 태조는“예로부터 제왕은 천명 (天命)이 있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나는 실로 덕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 는가?” 라며 거절하였다. 신하들이 물러가지 않고 왕위에 오르기를 거듭 권고하니, 마침내 태 조가 마지못하여 …… 대전에 들어가 왕위에 오르는데, 어좌를 피하고 기둥 안에 서서 여러 신하의 축하 인사를 받았다.

-“태조실록”-

신하들의 거듭된 간청에 따라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모습이다. 이성계는 덕이 있는 자에 게 왕위를 물려준다는‘선양’ 의 모양새를 취하며,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을 건국하였다. 지방 출신의 무장이었던 이성계가 어떻게 새 왕조를 열 수 있었을까?

태조 어진(전북 전주 경기전)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정치 세력이 성장하다

14세기 후반 중국에서는 원의 국력이 쇠퇴하는 가운데 이민족의 지배에 반발 ✽홍건적

원 말기에 봉기한 한족 농민 반

한 한족의 저항이 잇따랐다. 이때 ✽홍건적을 이끈 주원장이 난징을 수도로 명을

란군으로, 머리에 붉은 두건을

세우면서 동아시아 세계는 명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일본에서는 중앙 권력의

둘러 홍건적이라고 불렸다.

통제가 약화되자, 왜구가 고려와 중국 해안을 노략질해 동아시아 세계의 큰 골칫 거리가 되었다. 고려에서는 권력을 독점한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농장을 확대했고, 이들과 손

1388

위화도 회군

1391

과전법 실시

잦은 침입도 커다란 문제였다. 이에 신진 사대부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권문세족

1392

조선 건국

의 횡포와 불교의 폐해를 비판하였다. 이들은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하는 과정에

1394

한양 천도

서 큰 공을 세워 백성의 신망이 두터웠던 최영, 이성계 등과 협력하면서 사회 모

잡은 불교 사원마저 농민 수탈에 나서 사회 모순을 심화시켰다. 홍건적과 왜구의

순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위화도 회군, 새 왕조 건설의 첫발을 내딛다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는 사회 모순의 개혁 방향을 둘러싸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최영과 갈등을 빚었다. 최영이 권문세족의 이익을 옹호하려는 것과 달 리, 이성계는 그들을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무렵 명은 원이 직접 지배했던 철령 이북의 땅을 직속령으로 삼겠다고 조선에 통고해 왔다. 이에 반발하여 최영은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요동 정벌에 반대한 이성계는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대를 되돌려 최영을 제 위화도

106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거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였다(위화도 회군).


전시과 체제에서 과전법 체제로

위화도 회군 이후 신진 사대부는 개혁을 둘러싸고 둘로 나뉘었다. 이색과 정몽 주 등 다수의 신진 사대부는 부패한 권문세족을 제거하고 대토지 소유를 시정하 는 데 동의했지만, 고려 왕조를 유지하려 하였다. 반면, 정도전과 조준 등 급진 개 ✽역성혁명

혁파는 사전을 혁파하고 ✽역성혁명을 통해 새 왕조를 세우려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성계와 조준,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는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해 신진 관리에게 재분배하는 과전법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권문세족은 몰 락했으며, 신진 관리의 경제 기반이 마련되고 국가 재정도 확충되었다. 이후 이

왕이 부덕해 민심을 잃으면, 덕 이 있는 다른 사람이 천명을 받 아 새로운 왕조를 세워도 좋다 는 유교 정치사상에서 나온 말 이다.

성계와 급진 개혁파는 역성혁명에 반대하던 정몽주 등을 제거하고, 조선을 건국 하였다.

조선으로 국호를 정하고 한양으로 천도하다

태조 이성계는 우리 민족이 처음 세운 나라인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아 국호를‘조선’ 으로 바꾸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한양은 나라의 중앙에 위치해 전국을 다스리기 쉽고, 한강을 끼 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며 물자가 풍부하였다. 또 주변이 산으 로 둘러싸여 있어 외적을 막는 데에도 유리하였다. 한양에는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과 종묘, 사직, 시전, 관아, 학교 등이 세워졌다. 주요 건물은 유교 이념에 따라 배치되고, 그 명칭도 유교 경전에서 따와 붙였다. 이로써 조선은 새로운 국가의 모습을 갖추어 갔다.

경복궁 근정전(서울 종로)

새 나라의 이름을 다시‘조선’ 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통일 신라 시대에 옛 고구려와 백제 지역의 주민은 스스로를‘고구려의 후예’ ,‘백제의 후예’ 라고 여기는 삼국 유민(遺民)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성립은 이를 배경으로 이루어 졌다. 고려 시대에도 삼국 유민 의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고구려 계승 의식과 신라 계승 의식이 대립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또 무신 집권기에 봉기한 최광수, 이연년, 김사미 등이 각각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부흥을 내세운 사실에서도 삼국 유민 의식이 여전히 존재했음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몽골의 침입과 원의 간섭에 저항하면서 우리 민족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후예이기 이전 에 다 같은 단군의 후예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삼국유사” 나“제왕운기” 에는 이러한 인식이 반영 되어 있다. 조선의 성립은 단군과 고조선을 우리 역사의 기원으로 삼는 인식 위에서 이루어졌다.

단군 영정(서울 종로 단군성전)

1. 조선의 건국과 통치 체제의 정비

107


통치 체제의 정비 임금의 자질에는 어리석은 자질도 있고 현명한 자질도 있으며, 강력한 자질도 있고 유약한 자질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으니, 재상은 임금의 좋은 점은 따르고 나쁜 점은 바로잡으며, 옳은 일은 받들고 옳지 않은 일은 막아서, 임금으로 하여금 가장 올바른 경지에 들게 해야 한다. - 정도전,“조선경국전”-

조선 건국을 주도한 정도전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 체제를 담아“조선경국전” 을 편찬하였다. 여기에서 정도전은 국왕의 자질이 한결같이 뛰어날 수 없으므로,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재상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정도전의 생각은 조선 정치에 어떻게 반영되었을까?

정도전 영정(경기 평택 문헌사)

왕권을 강화한 태종 ✽왕자의 난

태조의 왕자들 간에 왕위 계승

태조 때의 정치는 정도전과 조준 등 개국공신에 의해 주도되었다. 특히 정도전

을 둘러싸고 벌어진 싸움이다.

은 재상 중심의 정치를 강조하고,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하는 등 새로운 문

1차 왕자의 난은 이방원을 비롯

물제도를 정비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이방원(태종)을 비롯한 왕자들은 재상 중

한 왕자와 종친 세력이 정도전 과 세자를 제거한 것이고, 2차

심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등을 제거하고 정치적 실

왕자의 난은 실권을 장악한 이

권을 장악하였다.

방원에 대항해 이방간이 일으킨 것이다.

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의정부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6조 직계제를 채택하였다. 또 종친과 외척의 정치 참여를 제한했으 며, 사병을 없애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호패법을 실시하여 전국의 인구 동태를 파 악하고, 양전 사업을 단행해 국가의 경제 기반도 안정시켰다. 그 결과 태종 때에 는 국왕 중심의 정치가 이루어졌다. 유교 정치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다

세종은 태종이 마련한 강력한 왕권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교 정치의 이상을 호패(국립중앙박물관) 16세

이상의 모든 남자에게 발급하여 조세 징수와 군역 부과에 이용 하였다.

추구하였다. 집현전을 설치해 학문과 정책 연구를 담당하게 하고, ✽경연을 활성화 하였다. 정치 체제를 의정부 서사제로 바꾸고 훌륭한 재상을 등용해 정치를 맡기 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직접 주관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정치적 실권은 재상에게 다시 넘어갔

✽경연

왕과 신하가 모여 유교 경전과

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양 대군(세조)이 정변을 일으켜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권

역사를 공부하면서 학문과 정책

력을 장악하였다. 이후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다시 6조 직계제를

을 토론하던 제도이다. 현실 정

실시하고 종친을 등용했으며, 집현전과 경연을 폐지해 언론 활동을 제한하여 왕

치에 대한 왕과 신하들의 토론 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권을 강화하였다. 성종은 집현전을 계승한 홍문관을 설치하고 경연을 활성화하였다. 아울러 통치 방향을 제시한“경국대전” 을 완성해 반포함으로써 유교적 법치 국가의 토대를 마 련하고 통치 체제를 완성하였다.

108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통치 체제

조선은 유교 정치 이념에 따라 권력의 독점을 막으면서 왕권 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는 통치 체제를 추구하였다. 그 결과 의 정부와 6조 중심의 통치 체제가 마련되었다. 의정부는 재상들의 합의로 운영되는 최고 정무 기구였다. 6조는 국가의 주요 행정을 담당했는데, 그 아래에 여러 관청을 두고 업무를 나누어 맡게 해 행정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였다. 의정부와 6조의 고위 관리는 주요 정책 회의나 경연에 참여해 정책을 협의하였다. 이를 통해 각 관청의 업무를 조정하고 통합 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3사는 언론 담당 기구로서 그 기능이 크게 강화되었다. 관리

중앙 정치 기구

의 비리를 감찰하는 사헌부와 국왕의 정치를 비판하는 사간원은 간쟁・봉박・✽서 경권을 가졌으며, 홍문관은 경연을 주관하며 사헌부와 사간원의 역할을 지원하였 다. 3사의 언론 활동은 고위 관리나 국왕도 함부로 막을 수 없었다. 이는 권력의

✽서경권

5품 이하 관리를 임명할 때, 인 물의 경력과 신분 등을 조사하여 그 가부를 승인하는 권한이다.

독점과 부정을 방지하려는 조선 시대 정치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한편, 국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과 국가의 큰 죄인을 다스리는 의금부는 왕권 을 유지,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왕권과 신권이 조화 된 통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 밖에 수도의 행정을 담당하는 한성부, 역사서 의 편찬과 보관을 담당하는 춘추관,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 등이 있었다.

6조 직계제와 의정부 서사제 1 6조 직계제 의정부의 서사를 나누어 6조에 귀속시켰다. …… 의정부가 관장한 것은 사대 문서 와 중죄수의 심의뿐이었다.

-“태종실록”-

2 의정부 서사제 6조는 각기 모든 직무를 먼저 의정부에 품의하고, 의정부는 가부를 헤아린 뒤에 왕에게 아뢰어 (왕의) 전지를 받아 6조에 내려보내어 시행한다. 다만 이조・병조의 제수, 병조의 군사 업무, 형조의 사형수를 제외한 판결 등은 종래와 같이 각 조에서 직접 아뢰어 시행하고 곧바로 의정부에 보고한다.

-“세종실록”6조 직계제와 의정부 서사제

➊ [자료 1]의 제도를 실시한 목적을 당시 정치 상황과 연관 지어 설명해 보자. ➋ [자료 2]의 제도가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본문에서 찾아 써 보자.

1. 조선의 건국과 통치 체제의 정비

109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다

지방 행정 조직은 백성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중앙 집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에 부・목・군・현을 두었다. 또한, 면리제를 실시해 국가의 통치력이 일반 백성에까지 직접 미치게 하였다. 각 도에 파견된 관찰사는 도의 행정을 담당하며 관할 지역 수령 을 감찰하였다. 고려와 달리 모든 군현에 수령이 파견되었는데, 수령은 국왕의 대리인으로 행정・사법・군사권을 행사하였다. 반 면, 향리는 수령을 보좌하는 세습적인 아전으로 격하되었다. 한편, 지방의 유력한 사족으로 구성된 유향소는 수령을 보좌하 거나, 수령과 향리의 비리를 감시하였다. 정부는 서울에 경재소를 설치해 유향소와 정부 사이의 연락 기능을 맡겨 유향소를 중앙에 서 통제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은 향촌 자치를 부분적으로 허용하 면서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할 수 있었다.

조선의 지방 행정 구역

국방 강화를 위한 군사 제도의 정비

16세 이상 60세 미만의 모든 양인 남자는 군역의 의무를 져야 했다. 이에 따라 현역 군인인 정군이나 정군의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봉족)으로 편성되었다. 다만 현직 관리와 학생, 향리 등은 군역이 면제되었고, 종친과 고위 관리의 자제는 고 급 특수군에 편입되었다.

✽잡색군

지역 수비를 보완하기 위해 서

군사 조직은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뉘었다. 중앙군은 궁궐과 한성을 방어하는

리, 신량역천, 공・사노비 등이

5위로 편성되었다. 지방군은 육군과 수군으로 나뉘어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

소속되어 유사시에 대비한 일종 의 예비군이다.

의 지휘를 받았다. 이 밖에 일종의 예비군인 ✽잡색군이 있었다.

충청도는 왜 공청도가 되었을까? 충청도를 공청도로 고치고 감사∙병사∙수사와 충원 현감의 병부(兵符)를 다시 만들어 내려보내라. 인조 6년(1628) 허유 등이 일으킨 역모 사건을 처리하면서 정부가 내린 명령이다. 죄인들의 조사 와 처벌이 결정되는 가운데 역적들이 살던 곳의 수령은 파직되었고, 읍호(邑號)가 강등되어 충주목 이 충원현으로 바뀌면서 충청도도 공청도로 바뀐 것이다. 이처럼 충청도는 그 이름이 무려 16번이 나 바뀌어 공충도, 공청도, 공홍도 등 매우 다양하게 불렸다. 조선은 원래 각 도의 경계 안에 있는 고을 중 가장 큰 규모의 고을 이름을 따서 8도의 이름을 정 했다. 충청도의 경우 충주와 청주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그런데 반역과 같은 중대 범죄가 일어날 경우, 그 고을의 격이 강등되고 다른 고을이 그 역할을 대신하면서 도의 명칭도 바뀌었다. 이러한 읍호 강등은 강상의 윤리를 중시하는 유교 정치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110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인조실록”-


능력에 따라 관리를 선발하다

조선은 유교적 소양과 능력을 갖춘 관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선발해 관직에 등용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였 다. 과거 시험으로는 문과, 무과, 잡과가 실시되었는데, 고려와 달리 무과도 제도화되었다. 정기 시험인 식년시는 3년마다 실 시되었지만, 수시로 특별 시험이 행해졌다. ✽과거 응시는 천인 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제한이 없었지만, 경제적 여건이나 사회 과거제의 운영

적 처지로 일반 백성이 과거에 합격하기는 쉽지 않았다.

과거 외에 천거, 음서로도 관리를 선발하였다. 천거는 고위 관리가 추천한 인물 을 관직에 등용하는 것으로, 대개 기존 관리를 대상으로 실시하였다. 음서는 고려 에 비해 그 혜택을 받는 대상이 크게 줄었다. 음서 출신은 과거에 합격하지 않으 면 고위 관리로 승진하기 어려웠는데, 이는 조선이 고려에 비해 개인의 능력을 더

✽과거 응시

탐관오리의 아들, 재혼한 여성 의 아들과 손자, 서얼은 문과에 응시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나, 무과나 잡과에는 제한을 두지 않았다.

중시했음을 의미한다. ✽상피제

한편, 조선은 관리의 등용과 근무 평가, 승진, 좌천 등에 관한 인사 관리 제도를

부정을 막기 위해 가까운 친척

운영하였다. ✽상피제를 실시해 권력의 집중과 부정을 방지하고, 5품 이하 관리

과 같은 관서에 근무하지 않도

등용에는 서경을 거치도록 해 인사의 공정성을 확보하였다. 아울러 관리의 근무

록 하거나, 출신 지역의 지방관 으로 임명하지 않는 제도이다.

성적을 평가해 승진 또는 좌천의 자료로 삼기도 하였다.

통신, 교통 제도를 정비하다

조선은 중앙 집권 체제와 국방 강화를 위해 봉수제와 역참제, 조운 제 등 통신과 교통 제도를 정비하였다. 봉수제는 국경 지대의 군사적 위급 사태를 중앙에 신속히 알리기 위한 제도로, 한양의 목멱산(남산) 에 이르는 봉수로가 정비되고 봉수대도 설치되었다. 역참은 전국의 주요 도로에 500여 개가 설치되었다. 역참에는 역 마를 두고 관청의 공문 전달과 공물 수송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와 함 께 조운제를 운영해 각 지방에서 거둔 세금을 한양으로 운송하였다.

봉수대(서울 남산)

근무 성적이 나쁜 관리를 퇴출시키다 “경국대전” 에는 매년 두 차례, 6월 15일과 12월 15일에 상급

평가 결과는 즉시 인사에 반영되었다. 10번의

자가 자신이 감독하는 관리들을 평가한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규

평가 중에서 모두 상(上)을 받으면 특별히 품계를

정하고 있다. 관리가 규정된 출퇴근 시간을 지켰는지, 근무 일수

올려 주었지만, 중(中)을 두 번 받으면 녹봉이 지

를 충족하였는지, 맡은 업무를 잘 처리하였는지 등을 종합해 관

급되지 않는 무록관(無祿官)에 임명되었다. 세 번

리의 근무 성적을 상, 중, 하의 3단계로 구분하였다.

받으면 곧바로 파직되었다.

1. 조선의 건국과 통치 체제의 정비

111


사림 세력의 등장과 붕당의 출현 아, 이곳은 정암 조 선생(조광조)이 귀양살이를 하던 집이고 또 생을 마친 곳이다. 아, 지난 기묘년은 지금으로부터 149년이나 되는데, 학사(學士)・대부(大夫)는 그 학문을 사 모하고 백성은 그 혜택을 생각하되, 세월이 오랠수록 더욱 잊지 못하고 …… 이곳을 지나 는 사람마다 숙연히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아, 이는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겠는가. 그 타고난 떳떳한 마음에서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송자대전”-

글자 하나마다 공경심이 가득 담긴 이 글은 조광조의 유배지에 세워진 비문이다. 이 비 는 17세기 당시 지방관이 대학자인 송시열의 글을 받아 조광조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되새기고자 세운 것이다. 조광조가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이렇게 추앙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조광조 적려유허비(전남 화순)

사림,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떠오르다

15세기 중반 이후, 영남과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성리학에 투철한 지방 사족(사 림)이 성장하였다. 중소 지주적 경제 기반을 갖고 있던 이들은 도덕과 의리에 바 탕을 둔 왕도 정치를 강조했고, 향촌 자치를 주장하며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를 강화해 나갔다. 이 무렵 중앙 정치는 세조의 즉위 과정에서 공을 세운 훈구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을 뿐만 아니라, 권세를 이용해 막대한 토지를 차지하고 상업 활동에도 관여해 재산을 축적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각종 비리와 부정을 저질러 백성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림은 성종 때 김종직을 필두로 중앙 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주로 3사에서 언론과 예림 서원(경남 밀양) 김종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 사족의 유학 교육을 위하여 지었다.

학술을 담당하며,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하고 독주를 견제하 였다. 성종도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적극 중용했 기 때문에 훈구와 사림 세력은 한동안 세력 균형을 이루었다.

구분

원인

무오사화

김종직의‘조의

(1498)

제문’

갑자사화

폐비 윤씨 사건

(1504) 기묘사화

조광조의 개혁

(1519)

정치

을사사화

외척 간의 대립

(1545) 사화의 원인

112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사화를 극복하고 사림이 집권하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훈구 세력은 사림 세력을 공격했고, 연산군도 자신의 실정 을 비판하는 사림 세력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이에 두 차례의 사화가 일어나 사림은 큰 피해를 입었다. 폭압적인 정치를 펴던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이 새 왕으로 즉위하자(중종반 정, 1506), 공을 세운 훈구 세력이 또다시 권력을 독점하고 막대한 재산을 차지하 였다. 이에 중종은 훈구 세력을 견제하고자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을 등용하였다.


조광조는 사림의 여론을 앞세워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현량과를 실시하 여 많은 사림을 3사 언관직에 등용해 경연과 언론을 활성화하였다. 도교 행사를 주관하던 소격서를 폐지하고“소학” 을 널리 보급하여 유교 윤리를 확산하려 했으

✽현량과

학문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여 간단한 시험을 통해 등용하는 제도이다.

며,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키던 공납 제도의 개선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과대 평가 된 훈구 대신들의 공훈을 삭제하고 그들의 경제 기반을 축소하려고 하였다. 그러

✽붕당

나 공신들의 반발로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조광조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림 세

정치적 견해와 학문적 성향을

력이 처형되거나 중앙 정계에서 쫓겨났다.

같이하는 사림이 모여 만들었다.

사림은 명종 때에도 사화를 겪었지만,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향촌 사회에서 꾸준히 세력을 확대하였다. 그 결과 선조 때에는 다시 중앙 정계로 대거 진출해 정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붕당을 형성하다

사림은 명종 때 나타난 외척 정치의 잔재를 청산하는 문제를 둘러싸 고 서로 갈등을 빚었다. 여기에 인사권을 지닌 이조 전랑의 임명 문제 로 갈등이 더욱 격화되어, 마침내 동인과 서인의 ✽붕당이 등장하였다. 동인은 선조 때 중앙 정계에 진출해 외척 정치 청산을 강력히 요구했 던 신진 사림으로, 이황과 조식의 학문을 계승한 영남 지역의 사림이 중심을 이루었다. 서인은 명종 때부터 정치에 참여해 외척 정치 청산에 소극적인 기성 사림으로, 이이와 성혼의 학문을 계승한 경기와 충청 지 방의 사림이 대부분이었다.

사림의 계보 

이조 전랑을 둘러싼 사림의 대립 심의겸이 이조 참의로 있을 때 예전의 잘못 을 들어 김효원이 전랑이 되는 것에 반대했지 만, 뒤에 김효원은 전랑이 되었다. 그 후 어떤 사람이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을 전랑으로 천

심의겸과 김효원이 이조 전랑 자리를 두고 서로 다투고 있다. 도대체 이 조 전랑이 어떤 자리이기에, 사림이 둘로 나뉘게 되었을까? 이조 전랑이란 정5품 이조 정랑과 정6품 이조 좌랑을 함께 부르던 말이 다. 이조 전랑은 젊고 명망 있는 문신 중에서 임명되었는데, 이 자리를 거 치면 재상까지 순조롭게 승진할 수 있는 요직이었다. 품계는 그리 높은 편

거하자, 김효원이“이조의 관직이 외척의 물

은 아니었지만, 3품 이하 문관의 천거와 3사 청요직의 선발권, 후임 전랑

건인가? 심씨 집안에서 차지하려 한단 말이

의 추천권 등 여러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3사의 언론 활동을 은

냐?” 라고 반대하였다. …… 동인과 서인이라

연중에 주도하는 등 정치적 역할도 커서, 고위 관리도 길에서 이조 전랑을

는 말이 여기서 비롯되었으니, 김효원의 집이

만나면 말에서 내려 인사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동쪽 건천동에 있고 심의겸의 집은 서쪽 정동 에 있기 때문이었다.

-“연려실기술”-

결국 누가 이조 전랑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권력의 향배가 결정되었기 때 문에, 이 자리를 둘러싼 붕당 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1. 조선의 건국과 통치 체제의 정비

113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오직 어진 자만이 대(大)로서 소(小)를 섬길 수 있고, 오직 지혜로운 자만이 소(小)로서 대(大)를 섬길 수 있습니다. 대로서 소를 섬기는 자는 천하를 보전 할 수 있고, 소로서 대를 섬기는 자는 그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동해

-“맹자”황해

중국 전국 시대에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이웃 나라와 어떻게 외교 관계 를 맺어야 하는지 묻자 맹자가 대답한 말이다. 중국 고전에서 나온 외교 원칙이지만, 조선은 이를 응용해 사대교린을 외교의 기본으로 삼아 주변 국가와 친선 관계를 도모하였다. 조선이 주변 국가에 취한 사대교린의 구체적인 사례를 알아보자.

명과의 관계, 실리를 추구하다

건국 직후 태조와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추진하면서 명과 한때 불편한 관계가 유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이 제거되고 태종이 즉위한 이후에는 사대 외 교를 펼치며 친선 관계를 유지했고, 이를 통해 왕권 확립과 국가 안정을 도모하 였다. 조공과 책봉 체제를 통해 유지되는 사대 외교는 당시 명에 대한 동아시아 각국의 일반적인 외교 형식으로, 서로의 독립성 을 인정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조공은 사신 파견과 함께 이 루어진 경제적・문화적 교류로, 선진 문물을 수용하는 중요한 통로이자 일종의 공무역이었다. 책봉은 국왕의 지위를 국제적 으로 인정받는 형식적인 절차로, 정치적 안정을 이루는 데 도 움이 되었다. 송조천객귀국시장(일부, 국립중앙박물관) 남경 황성에서 명 관리가 조선 사신을 송별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이렇게 조선은 명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약 200년 동안 평화를 누렸고, 경제적・문화적으로 실리를 얻었다.

무역소 설치

4군 6진을 개척하다

경성・경원 지방에 야인의 출입을 금하지 아니

조선은 영토를 확보하고 국경 지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여

하면 혹은 떼 지어 몰려들 우려가 있고, 일절 끊고

진에 대해서는 회유책과 강경책을 함께 쓰는 교린 정책을 적극

금하면 야인이 소금과 쇠를 얻지 못하여서 혹은 변 경에 불상사가 생길까 합니다. 원하건대, 두 고을에

적으로 펼쳤다. 이를 위해 여진족의 귀순을 장려해 관직과 토

무역소를 설치하여 저들로 하여금 와서 물물 교역

지 등을 주어 우리 주민으로 동화시키는 데 힘썼고, 경성과 경

을 하게 하소서.

원에 무역소를 두어 국경 무역과 사절 왕래를 통한 교역을 허 -“태종실록”-

114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용하였다.


그러나 여진족이 국경 지방을 침입해 약탈하면 군대를 동 원해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세종 때에는 최윤덕과 김종서 가 4군 6진을 개척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 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또한, 새로 개척된 지역에 삼남 지방의 주민을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는 북방 개척과 국토 의 균형 발전을 추구하고 지역 방어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4군 6진

일본에 제한된 교역을 허용하다

조선은 일본에 대해서도 토벌과 회유의 양면 정책을 취하였다. 고려 말 이후 왜 ✽대마도 토벌

구의 침략이 그치지 않자, 세종 때에는 이종무가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토벌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 토벌은

하였다. 이후 왜구가 진정되고 일본이 평화적 교역을 간청해 오자, 부산포, 제포

고려 말부터 이어졌다. 고려 말 창왕 때에는 박위, 조선 태조 때

(창원), 염포(울산) 등 3포를 개방해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역을 허용하였다.

에는 김사형이 각각 토벌에 나

한편, 조선은 유구, 시암, 자와 등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와도 교류하였다. 이

섰다.

들은 각종 토산품을 조공 형식으로 조선에 가져왔고, 옷감이나 문방구 등을 답례품 으로 받아갔다. 이를 통해 조선의 선진 문물이 일본과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전 해졌다.

왜 조선은 많은 사절을 명에 파견했을까?

황제께서 후하게 대우하고,“너희 나라 사신의 행차 가 왕래하는 데 길이 멀어서 비용이 많이 드니, 지금부 터는 3년 만에 한 번 조회하라.” 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태조실록”-

명에 사신으로 갔던 남 재가 조선에 돌아와, 명 황 제가 3년에 한 번만 사절을 파견하라고 했다는 말을 전 하고 있다. 그런데 아래 그래프 를 보면, 조선은 매년 정기 사절 이외에도 여러 번 비정기 사절을 파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절 파견은 조공품도 바쳐야 하고 비용 도 많이 들었을 텐데, 왜 그랬을까? 실제로 명은 주변 국가가 사절을 자주 파견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대국으로서 사절을 후하게 대접하고 돌아갈 때 많은 답례품 도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조선은 명에 매년 세 차례의 사 절 파견을 요청해 두 나라가 갈등을 빚기도 했다. 결국에는 조선의 입장이 받아들여져 중종 때까지 매년 세 차례의 정기 사절이 파견 되고, 비정기 사절도 수시로 파견되었다.

비정기 사절의 파견 횟수

이러한 사실은 명에 대한 사절 파견이 경제적・문화적으로 조선에 이익이 더 많았음을 보여 준다. 1. 조선의 건국과 통치 체제 정비

115


2

양 난과 조선 후기의 정치

왜란과 호란의 극복

지금 신(臣)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 전선의 수가 비록 적으나 신이 죽지 않는 한 왜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충무공전서”-

일본군과 목숨을 건 전투(명량 대첩)를 앞두고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의 내용 으로, 장���의 드높은 기상과 불굴의 의지가 드러나 있다. 이러한 강인한 정신에 힘입어 조선은 왜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의 전쟁에 명까지 참전한 동아시아의 국제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은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에 어떠한 영향을 끼 쳤는지 알아보자. 이순신 영정(충남 아산 현충사)

왜군이 침략해 오다

16세기 들어 북쪽에서는 여진족이 자주 국경을 침범했고, 남쪽에서는 3포 왜란 과 을묘왜변 등 왜인의 소란이 자주 일어났다. 이에 조선은 국방 문제를 전담하는 비변사를 설치하고 사신을 보내 일본 정세를 파악하려 했지만, 적극적인 대책을 ✽방군수포

군대에서 복무해야 할 군인에게

마련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방군수포의 성행으로 국방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포를 받고 복무를 면제해 주던

반면,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을

것으로, 군사 지휘관에 의해 사

이루었다. 이후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고 자신의 대륙 진출 야욕을 달성

사로이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기 위해 조선을 침략하였다(임진왜란, 1592). 수군과 의병의 활약이 반격의 기회를 만들다

전쟁 대비가 미흡했던 관군이 왜군에 밀려 잇따라 패배하자, 선조는 명에 지원군을 요청하고 의주로 피란하였다. 그렇지만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후 왜의 수군 을 연이어 격퇴해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곡창 지대인 전 라도를 지키고, 황해를 통해 물자를 보급하려던 왜군의 침략을 좌절시켰다. 전국 각지에서는 농민들이 주축이 된 의병이 일어났다. 전직 관리, 유학자, 승려 등이 이끈 의병은 익숙한 지형과 그에 맞는 전술을 활용해 적은 병력으로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러 한 수군과 의병의 활약은 전쟁 초기 조선에 불리했던 전세를 뒤 동래부 순절도(변박, 육군박물관)

116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집을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수군과 의병이 활약하는 가운데 관군도 재정비되어 왜군을 공 격했고, 명의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왜군을 경상도 해안 지방까지 밀어냈다. 이에 왜군은 휴전을 제의했으나, 3년에 걸친 협상이 결 렬되자 다시 침입하였다(정유재란, 1597). 그러나 조・명 연합군이 직산(천안)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이순 신이 명량에서 왜의 수군을 대파하였다.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했고, 이순신의 노량 해전을 끝으로 7년간의 전란은 막을 내렸다(1598).

왜란은 동아시아 3국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었지만, 명이 지원군을 파병하 면서 동아시아의 국제전으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동아시아 3국은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전쟁터였던 조선은 인구가 크게 줄고 농토가 황폐해져 백성의

관군과 의병의 활동

생활이 피폐해졌다. 양안과 호적이 소실되어 국가 재정도 궁핍해 졌으며, 불국사와 사고가 불타고 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하였다. 명은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이를 틈타 여진 족이 후금을 세웠다. 세력이 커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꾼 다음, 명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지배 하였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정권이 무너지고 에도 막 부가 성립하였다. 또한, 전쟁 중 조선에서 약탈한 문화재와 잡아간 학자, 기술자를 통해 일본 문화 가 크게 발전하였다.

임진왜란 전후 인구 변화

임진왜란 전후 농경지 면적의 변화

여진족의 지원군 파견을 거부하다 명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요청에 따라 지원병을 파견했는데, 건주(建州)의 달자(�子: 누르하치가 이끄는 여진족)가 2만 명의 병력을 보내 왜적을 무찌르겠다고 청해 오자, 형군문(명 군 장수)이 허락하고자 했다. 그러자 양포정(명 사신)이“만일 달자에게 왜적을 정벌하도록 허락해 준다면 우리나라(명) 병 마의 다소와 조선 병력의 강약은 물론이요, 산천의 형세에 대 해서도 모두 세밀히 알게 될 것이니 결코 따르기가 어렵습니 다.” 라고 말하니, 형군문이 중지시켰다.

-“선조실록”-

이는 명을 침략하려는 일본을 조선에서 차단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명의 사신 양포정은 일본을 하루빨리 격퇴하기보다는 여 진족을 경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여진족의 지원 병 파견을 거부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하지만 여진족은 결국 명을 멸망시켰다. 조선과 명이 왜란에 집 중해 국력을 소비한 틈을 타서 그 세력을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 었다.

2. 양 난과 조선 후기의 정치

117


광해군, 중립 외교를 펴다

광해군은 왜란으로 피폐해진 국내 사정과 후금이 새롭게 성장하는 국제 질서의 변동 속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전후 복구 사업에 주력하여 양안과 호적을 새로 만들어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성곽과 무기를 수리해 국방 강화에 힘썼다. 또 백 성의 생활 안정을 위해 경기도에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대동법

각 가호마다 토산물을 징수하던 공납을 토지 결수에 따라 쌀・ 면포・삼베・동전 등으로 징수

대외적으로는 명이 쇠약해지고 후금이 강성해지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살피면 서 신중하게 중립 외교를 추진하여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한 제도이다.

호란이 발발하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명에 대한 의리를 주장하는 서인 등 일부 사림의 반발을 샀다. 결국 서인은 인목 대비를 폐위시키는 등 유교 윤리를 어겼다는 이유로 광해 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새 왕으로 추대하였다(인조반정, 1623). 정권을 잡은 서인이 친명 배금 정책을 펴자,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였다(정묘호 란, 1627). 정봉수와 이립 등이 의병을 일으켜 맞서 싸웠으나 조선은 후금을 막기 에 힘이 부족했고, 후금도 중국을 장악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쉽게 화의가 이 루어졌다. 그 후 세력이 더욱 강해진 후금은 조선에 군신 관계를 강요해 왔다. 조선에서는 국가의 안전을 위해 화친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오랑캐에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우세해 후금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이후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 삼전도비(서울 송파) 외세의 침략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치욕의 역사를 보여 준다.

로 바꾸고 조선을 침략하였다(병자호란, 1636).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전했지 만, 결국 조선은 청의 군신 관계 강요를 받아들여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

주화론과 척화론의 대립 1 최명길의 주화론

2 윤집의 척화론

화친을 맺어 국가를 보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의를 지켜

화의로 백성과 나라를 망치기가 …… 오늘날과 같이 심

망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신하가 절개를 지키

한 적이 없습니다. 중국(명)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곧 부모

는 데 쓰는 말입니다. ……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요, 오랑캐(청)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곧 부모의 원수입니

경망하게 큰소리를 쳐서 오랑캐들의 노여움을 도발, 마침

다. 신하된 자로서 부모의 원수와 형제가 되어서 부모를 저

내는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묘와 사직에 제사 지내지 못

버리겠습니까. …… 차라리 나라가 없어질지라도 의리는

하게 된다면 그 허물이 이보다 클 수 있겠습니까?

저버릴 수 없습니다.

-“지천집”-

➊ [자료 1, 2]의 주장을 간략히 정리해 보자. ➋ [자료 1, 2]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그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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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인조실록”-


양 난 이후의 대외 관계 왜란과 호란 이후 다시 동아시아에 평 화가 찾아오면서 조선의 연행사와 통 신사가 청과 일본을 향하고 있다. 연행사의 파견은 사대 관계에 따른 것이었지만, 통신사 의 파견은 일본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다. 에도 막부는 막부의 1년 조세 수입에 버금 가는 비용을 들여 가며 통신사를 성대히 맞 아들였다. 청과 일본에 파견된 연행사와 통 신사는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

북벌론에서 북학론으로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표면상 청과 사대 관계를 맺고 평화를 유지하 면서 경제적・문화적 교류를 이어 갔다. 하지만 오랑캐에게 당한 치욕 을 씻고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며 북벌 운동을 벌였다. 북벌 운동은 효종 때에 가장 왕성하게 전개되었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을 등용해 무기를 개량하고 군대를 양성하는 등 북벌을 준비하 였다.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도 병자호란 패전의 책임을 회피하고 정권

홍이포(인천 강화) 북벌 준비 과정에서 개발된 무기로, 위의 포는 영조 때 제작된 것이다.

을 유지하려는 목적에서 효종의 북벌을 지지하였다. 이 무렵 청은 국력이 크게 신장되고 서양의 문물까지 받아들여 문화가 크게 융 성하였다. 이에 18세기에 들어 실학자를 중심으로 청을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 라, 앞선 문물을 적극 수용해 국가 사회의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북학론이 제기 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북벌론은 점차 사라졌다.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다

함경도와 평안도에 거주하던 조선인 중에는 일찍부터 압록강 이나 두만강을 넘어 만주에서 사냥을 하거나 인삼을 채취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청이 자신들의 본거지였던 만주 일대를 출입 금지(봉금) 지역으로 정해 성역화하면서 조선과 분쟁이 일 어났다. 청은 백두산 일대의 경계를 명확히 하자고 제안해 왔다. 이에 조선과 청은 대표를 파견해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확 정해 정계비를 세웠다(1712).

백두산정계비문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 제의 뜻을 받들어 국경을 답사하면서 여기에 와서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이 되고, 동쪽은 토문이 되므 로 분수령 위 돌에 새겨 기록한다.

- 백두산정계비 -

2. 양 난과 조선 후기의 정치

119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다

왜란으로 조선은 일본과 외교 관계를 단절했으나, 새롭게 성립한 에도 막부는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조선에 국교 재개를 간 청하였다. 이에 조선은 기유약조를 맺고 부산포에 왜관을 설치해 제한된 범위 내 에서 무역을 허용하였다(1609). 그 후 막부의 실권자인 쇼군이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조선에 사절 파견을 요청해 왔다. 이에 조선은 19세기 초까지 12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통 신사는 외교 사절의 역할을 하였고, 선진 문물을 전파해 일본 문화 발전에도 기여 하였다.

안용복,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인식하고 있 었다.“세종실록지리지” 와“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조선의 영토라는 사실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 다. 그러나 일본 어민이 울릉도와 독도 지역을 자주 침범해 충돌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숙종 때 동래 어민 안용복은 울릉도에 침범한 일본 어민을 내쫓고, 일본까지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받고 돌아왔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정기적으로 울릉도 삼국접양지도(1785, 독도박물관) 18세기 후반 일본에서 그 려진 지도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와 같은 노란색으로 칠해

에 관리를 파견하여 살피도록 하는 수토 정책을 펼쳤다. 에도 막부도 일본 어민의 울릉도 도해 금지령을 내렸다.

져 있다.

통신사, 대마도(쓰시마)에서 축제로 부활하다 현대식 건물이 늘어서 있는 일본의 대마도에서 통신사 행렬이 재현 되었다. 대마도는 통신사가 파견될 때 일본 측의 실무를 담당했을 만큼 인연 이 깊은 곳이다. 일본을 방문하는 통신사를 위해 배로 부산까지 마중을 나왔고, 대마도에서 에도에 이르는 긴 여정 동안 통신사를 호위하며 안 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를 기념해 오늘날 이곳에서는 매년 8월의 첫 번째 주말에‘쓰시 마 아리랑 마쓰리(축제)’ 를 개최하여 당시 통 신사 행렬을 재현하고 있다. 이 밖에 도 일본의 여러 도시에는 통신사 쓰시마 아리랑 축제에서 재현된 통신사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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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의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의 세자, 베이징에서 서양인과 만나다 1644년 청이 명을 무너뜨린 그해, 베이징에서 소현 세자는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났 다. 두 사람의 만남은 서양과 직접 교류할 통로가 없던 조선 시대에 매우 특별한 사건 이었다. 당시 소현 세자는 8년 전 병자호란에서 패한 후 청에 인질로 잡혀 온 상태 였다. 외국에서 생활하게 된 소현 세자는 자신의 상황을 능동적으로 헤쳐 나갔다. 특히 외국의 우수한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고 생각하여, 청의 문물뿐 아니라 아담 샬을 통해 서양 문 물도 적극 수용하였다. 귀국할 때에는 아담 샬의 소개로 천주교 신자인 청의 환관과 궁녀를 데리 고 들어왔으며, 망원경・자명종・천구의 등 서양 물건을 가져왔다.

천리경과 자명종(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어제 귀하에게서 받은 천주상, 천구의, 천문서 및 기타 양학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으로 기쁘기 짝이 없어 깊이 감사드립니다. …… 이러한 것들은 본국에서는 완전히 암흑이라 해야 할 정도로 모르고 있는데, 지식의 빛이 될 것입니다. …… 제가 고국에 돌아가면 궁궐에서 사용할 뿐만 아니라 이것들을 출 판하여 학자들에게 보급할 계획입니다. 그리하면 사막과 같이 메마른 우리나라가 학문의 전당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은총을 입은 우리 백성은 서양에서 배운 과 학을 감사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 아담 샬의 회고록 중 소현 세자의 편지 -

서양 문물에 눈뜬 소현 세자는 조선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였다. 자신이 청에서 보고 느낀 것 을 인조에게 말하며 서양 책과 물건들을 보여 주었으나, 인조는 분노하여 세자에게 벼루를 내던졌다 고 한다. 이에 상심한 탓인지, 소현 세자는 귀국한 지 두 달여 만에 시름시름 앓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 다. 인조는 소현 세자의 장례식을 아주 간소하게 치른 뒤, 반청 의식이 강한 둘째 아들 봉림 대군(효 종)을 후계자로 정하였다. 왕위에 오른 봉림 대군은 북벌을 적극 추진했는데, 여기에는 오랑캐에게 당한 치욕을 씻어야 한다는 당시 지배층의 인식이 반영되어 있었다.

1

소현 세자가 서양 문물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 보자.

2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 중 누구의 태도가 더 적절했는지 토론해 보자.

2. 양 난과 조선 후기의 정치

121


붕당 ���치의 전개와 탕평책 입맛을 돋우는‘탕평채’한 그릇이 놓여 있다. 탕평채는 채를 썬 청포묵에 쇠고기, 미나리 등을 한데 담아 간장・참기름・식초로 버무린 후, 노란 지 단과 김, 고추를 잘게 썰어 고명으로 얹어 낸 음식이다. 영조 때 만들어진 이 궁중 요리는‘탕평책’ 의 실시와 관련이 깊다고 한다. 흰색 의 청포묵(서인)과 붉은색의 쇠고기(남인), 푸른색의 미나리(동인)와 검은색의 김 (북인) 등 서로 다른 맛과 향의 재료를 섞어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듯이, 각 붕당의 조화를 통해 정국을 안정되게 이끌어 가고자 했던 영조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영조가 탕평채처럼 각 붕당의 조화를 추구한 이유는 무엇일까?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다

왜란 이후 급격한 사회 변화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고 3 사의 언론 기능이 바뀌는 등 정치 구조에 변화가 나타났다. 비변사는 본래 왜구와 여진족에 대비해 군사 문제를 논의하는 임시 회의 기구 로 설치되었지만, 왜란을 겪으면서 구성원이 확대되고 국정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에 따라 왕권이 약화되고 의정부와 6조의 행정 체계도 유명무실 해졌다. ✽공론(公論)

붕당 내부에서 토론 과정을 거 쳐 형성된 여론을 말한다.

3사의 언론 기능도 각 붕당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면서 변질되었다. 3사는 ✽공 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 자기 붕당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상대 붕당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역할에 그쳤다. 또한, 이조와 병조의 전랑도 중하급 관리의 인사권과 자기 후임자 추천권을 이용해 자기 붕당의 세력을 확대하는 데 앞장섰 다. 이러한 3사의 언론 기능과 전랑권의 변질로 붕당 간의 대립은 더욱 격렬해 졌다.

붕당 정치의 두 얼굴

붕당 정치는 사림이 집권하면서 등장하였다. 정치는 기본적 으로 국왕이 주재했지만, 학연에 따라 모인 사림이 공론을 내세 워 국정을 주도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붕당 정치는 재야 사림의 의견까지 폭넓게 수렴할 수 있고, 붕당 상호 간에 붕당과 학연의 관계

비판과 견제가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붕당 정치는 늘어나는 사족이 제한된 관직과 경제적 이권을 놓고 벌이 는 권력 다툼의 성격도 있었다. 따라서 백성을 위한 올바른 정책의 시행이나 사회 모순의 적극적인 개혁보다는, 자기 붕당의 이익만을 앞세우고 권력을 독점하려는 폐단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122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붕당 정치의 전개

왜란이 일어나기 전,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을 때에는 동인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이후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 라섰는데, 이러한 붕당의 분화는 학연에 따른 정책과 이념의 차이 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광해군 때 집권한 북인은 서인과 남인을 배제한 채 권력을 독점 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선조의 적자인 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 비를 폐비시키는 등 정치적 무리수를 두었다. 이에 서인을 중심으 로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과 북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정권을 잡은 서인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왜란 이후 최고 정치 기구로 떠오른 비변사를 장악하고, 이를 통해 정치를 주도하였다. 또 훈련도감을 비롯해 후금과의 관계 악화 속에 새로 설치된 어영 청, 총융청, 수어청 등 중앙 군영의 병권을 장악하여 권력 유지를

붕당 정치의 전개와 변질

위한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서인 정권은 남인의 정치 참여를 허용하였다. 이로써 붕당 정치는 한동안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참여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현 종 때 효종과 효종비의 국장과 관련해 자의 대비의 상복 문제로 예송이 일어났다. 1차 예송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지만, 2차 예송에서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정치 주도권이 남인에게 넘어갔다. 이를 계기로 서인과 남인의 대립 은 점차 격화되어 갔다.

선왕의 장례 준비를 어떻게 할지 논의해 봅시다.

상복 문제를 둘러싼 서인과 남인의 대립, 예송

무엇보다 먼저 어머니이신 자의 대비의 상복 문제를 정해야 합니다.

예송은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해 심각한 선왕께서는 장남이 아니시니 1년만 상복을 입어 야 합니다. 서인

선왕께서는 왕위를 이으셨으니 장남과 다름이 없습니다. 마땅히 3년 상복을 입으셔야 합니다.

남인

예는 천하가 동일한 것입니다.“주자가례” 에 따라 1년만 입는 것이 옳습니다.

서인

왕과 신하는 그 구분이 엄격한 것입니다. 어찌 왕실 에서 사대부와 똑같은 예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정치적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신권 중심 정치를 지향한 서인 은 왕실도 사대부와 같이“주자가 례” 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왕권 강화를 추구한 남인은 왕실 의 예는 사대부의 예와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남인

2. 양 난과 조선 후기의 정치

123


붕당 정치의 변질 속에 탕평론이 대두하다

숙종 때에는 ✽환국이 되풀이되면서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집권했는데, 그때마

✽환국

정국을 주도하던 붕당과 견제하 는 붕당이 서로 교체되면서 정

다 상대방에 대한 탄압과 보복이 계속되었다. 공존의 원리가 무너지면서 공론이

국이 급격하게 바뀌는 현상을

당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이용되었으며, 특정 붕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이

말한다.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섰다. 한편, 붕당 간의 극심한 대립으로 왕권마저 위협받자 숙종은 탕평론을 제기하 였다. 탕평론은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해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시키 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평한 인사 관리를 내세운 숙종의 탕평책은 제대로 시행 되지 못했고, 오히려 편당적 인사로 환국의 빌미만 제공하였다.

영조, 탕평파를 육성하여 정국을 주도하다

영조는 탕평파를 적극 육성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 그리 고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노론과 소론 사이의 세력 균형을 조정해, 정쟁을 억제 하고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특히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 그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했고, 전랑의 권한도 약화시켰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영조는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의 군역 부담을 줄였으며, 형벌 제도를 개선해 가혹한 악형을 없앴다. 그리고 신문고를 부활해 백성의 억울 함을 풀어 주고자 하였다. 또한,“속대전” ,“속오례의” ,“동국문헌비고”등을 편찬 하여 시대의 변화에 맞게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하지만 영조 말년에는 탕평책 탕평비(성균관대학교) 영조가 탕 평의 의지를 알리기 위해 성균관 앞 에 세운 비이다.

의 후원 세력으로 중용되었던 외척 세력의 힘이 강해지는 문제점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붕당 정치의 변질과 탕평책 1 붕당 정치의 원인

2 탕평 교서

붕당은 싸움에서 생기고, 싸움은 이해관계에서 생긴다.

근래에 와서 인재 임용이 당목에 들어 있는 사람만으로

이해관계가 절실하면 붕당이 깊어지고, 이해관계가 오래될

이루어지니 …… 이러한 상태가 그치지 않는다면 조정에

수록 붕당이 견고해진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

벼슬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 이조는 탕평의 정

금 열 사람이 함께 굶주리고 있는데, 한 그릇 밥을 같이 먹

신을 수용토록 하라.

-“영조실록”-

게 되면 그 밥을 다 먹기도 전에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 조정의 붕당도 이와 다르지 않다. …… 과거를 자주 보

➊ [자료 1]에서 붕당 정치가 변질된 원인을 찾아 발표해 보자.

아 인재를 너무 많이 뽑았고, …… 이것이 이른바 관직은 적 은데 써야 할 사람은 많아서 모두 조처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이익,“곽우록”-

124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➋ [자료 2]를 토대로 영조가 추진한 탕평의 방법을 추론해 보자.


정조, 수원 화성에 꿈을 담다

정조는 외척 세력을 제거한 후, 노론・소론・남인을 고루 관직에 기용하는 탕

✽규장각

평책을 실시하였다. 또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규장각을 설치하

일종의 왕실 도서관 기능을 담

고 관리를 재교육하는 초계문신제를 실시했으며,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였

정치 기구로 육성하고자 비서실

당했으나, 정조는 이를 강력한 기능을 부여했고, 과거 시험과

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담아 화성을 건설하였다.

관리 교육까지 담당하게 하였다.

정조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여러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수령이 향약 을 직접 주관하게 함으로써,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를 억제하고 백성에 대한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농업 기술을 발전시키고 광산 개발을 장려했으 며, 통공 정책을 실시하여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어느 정도 보장하였다. 한편, 서얼 출신 학자를 규장각 검서관에 기용하고 공노비의 해방을 추진하는 등 서얼과 노비에 대한 차별 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나아가 문물제도의 정비 를 반영한“대전통편” ,“탁지지”등을 편찬하였다.

수원 화성(경기 수원) 군사적 방어 기능과 상업적 기능이 함께 고려되었 고, 동・서양의 축성술이 집약된 과학적・실용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1997년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탕평 정치의 의의와 한계

영・정조의 탕평 정치는 붕당 간의 정쟁을 완화하여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 다. 이를 바탕으로 영・정조는 일련의 개혁을 추진해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탕평책은 붕당 자체를 없앤 것이 아니라,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붕당 간의 정쟁을 조정한 미봉책에 불과하였다. 이 때문에 정조가 죽고 나이 어린 왕이 즉위해 왕권이 약해지자 붕당 간의 정치 균형이 깨졌고, 결국 몇몇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 정치가 나타나게 되었다.

규장각의 엘리트, 4검서 아! 저 서류(庶流)들도 나의 신하인데, 그들이 제자리를 얻지 못하고 포부도 펴지 못한다면, 이 또한 과인의 허물인 것이다.

-“정조실록”-

정조가 서얼에게 벼슬길을 넓혀 줄 수 있는 법을 만들도록 지시하며 한 말이다. 이에 따

富國安民 부 국안민

라 서얼의 벼슬길을 제한하는 규정이 완화되었고, 얼마 후 서얼 출신인 이덕무, 박제가, 유 득공, 서이수가 규장각 검서관으로 특별히 임명되었다. 검서관이 된 네 사람은 신분제에 얽매여 그동안 머릿속에만 담아 두었던 능력을 한껏 발휘하며 조선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4검서(四檢書)’ 라고 불렀다. 이들은 서얼이라는 한계를 딛고 일어나,‘부국 안민’ 을 위한 방책으로 중상주 의와 북학을 들고 나와 정조의 개혁을 뒷받침하였다.

2. 양 난과 조선 후기의 정치

125


세도 정치의 폐단과 농민 봉기 평서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관서 사람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라. …… 조정에 서는 관서를 버림이 분토(糞土)와 다름없다. 심지어 권세 있는 집의 노비들도 관서 사람을 보면 반드시‘평안도 놈’ 이라고 말한다. …… 지금, 임금이 나이가 어려 권세 있는 간신배가 그 세를 날로 떨치고, 김조순・박종경의 무리가 국가 권력을 갖고 노니,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

-“패림”-

왼쪽 그림은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순무영군이 정주성을 에워싸고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다. 평서대원수를 자처한 홍경래는 그를 따르는 무리와 함께 정주성에서 100일 넘게 버텼지만, 화약으로 성을 무너뜨리며 공격해 온 관군을 막아 내지는 못하였다. 19세기에 들어와 홍경래의 난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농민 봉기가 여러 차례 일어났다. 농민 봉기 가 자주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외척이 권력을 독점하다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왕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은 외척 세력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순조, 헌종, 철종으 로 이어진 3대 60여 년 동안, 왕의 외척인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몇 몇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고 전제 권력을 휘두르는 이른바 세도 정치가 전 개되었다. 세도 가문은 비변사의 요직을 독점하여 국정을 마음대로 주물렀으며,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영의 지휘권을 장악해 정권 유지의 토대로 삼았다. 세도 정치기 가문별 비변사 당상(고위 관직) 역 임자 수(순조`~`철종 연간)

그 결과 왕권은 크게 약화되고 지배 체제도 무너져 갔다. 국왕은 때때로 왕권을 행사해 정치적 변화를 추구하기도 했지만, 세도 가문의 위세로 말 미암아 왕권을 강화하지 못하였다.

삼정의 문란 속에 고통받는 농민

세도 정권은 정치적 견제 세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권력을 남용해 경제적 이권과 부를 챙기기에 바빴다. 정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져 과거 시험 부정이나 ✽삼정

국가의 주요 재정 수입원인 전 정(토지세), 군정(군포), 그리고 춘궁기에 곡식을 농민에게 빌려 주고 그 이자 수입으로 재정을 충당하던 환정(환곡)을 말한다.

관직 매매 등의 비리가 만연했고, 수령과 아전의 농민 수탈이 극심해지면서 ✽삼 정이 매우 문란해졌다. 한편, 양반의 증가와 농민의 토지 이탈로 세금이 잘 걷히지 않자, 정부는 고을 단위의 공동납제를 확대하였다. 그 결과 남아 있는 농민의 부담은 더욱 늘어났다. 탐관오리는 법에도 없는 세금을 만들거나, 무고한 백성을 잡아다 죄명을 씌워 재물 을 받고 풀어 주는 등 횡포를 부렸다. 정부가 암행어사를 파견했지만, 부패한 권력 구조 속에서 근본적인 해결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126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사회 불안이 고조되다

지배층의 비리와 수탈이 갈수록 확대되면서 농민뿐만 아 니라 부농층, 상인, 수공업자 등도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권세가와 결탁한 대상인의 독점적 횡포나 대지주의 토지 집 적, 빈번하게 발생한 자연재해와 질병 등으로 농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그 결과 전국 곳곳에 유민이 생겨났고, 재 물을 약탈하는 도적도 출현하였다. 이 무렵 이양선이라 불리는 서양 선박이 자주 나타나 해 안을 측량하고 통상을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백성의 위기 의식은 더욱 높아졌다.

농민의 저항이 시작되다

지배층의 수탈로 생활이 피폐해진 농민은 지배 체제의 모순에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벽서・소청과

항조・거세 등

소극적인 형태로 저항했으나, 점차 농민 봉기라는 적극적인 형태 로 사회 개혁을 요구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홍경래의 난과 임술

19세기 농민 봉기

농민 봉기이다. 홍경래의 난은 몰락 양반인 홍경래가 신흥 상공업 세력과 광산 노동자, 빈농 등 을 규합한 뒤, 평안도에 대한 지역 차별 정책과 지배층의 수탈에 항거하여 일으킨 봉기였다(1811). 이들은 청천강 이북 지역을 5개월 동안 장악하여 기세를 올리기도 했으나 관군에 진압되었다. 하지만 뒤에 일어난 농민 봉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62년에는 단성 농민 봉기와 진주 농민 봉기를 거치면서 농민 봉기가 전국으 로 확대되었다. 이 임술 농민 봉기에서 농민의 주된 요구는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

✽벽서・소청

벽서(괘서)는 억울한 일을 알리 기 위해 벽에 쓰거나 써 붙이는 것이고, 소청은 관청에 가서 호 소하는 것이다. ✽항조・거세

소작료를 깎거나 납세를 거부하 는 행동이다.

라는 것이었다. 정부는 암행어사를 파견하고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삼정의 문란 을 바로잡고자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임술 농민 봉기의 원인 ➊ [자료]에 나타난 농민의 요

공주부 농민의 요구 사항

구를 토대로 임술 농민 봉

1. 세미(稅米)는 항상 7량 5전으로 정하여 거둘 것. 2. 각종 군포를 농민에게만 편중되게 부담시키지 말고, 각 호마다 균등하게 부담시킬 것. 3. 환곡의 폐단을 없앨 것. 5. 아전과 장교의 침탈을 금지할 것.

기가 일어난 원인을 설명해 보자.

- 송근수,“용호한록”-

2. 양 난과 조선 후기의 정치

127


3

경제 정책과 경제 생활의 변화

토지 제도와 수취 체제의 정비

근년에 이르러 겸병이 더욱 심해져 간흉한 무리가 주군(州郡)에 걸쳐 토지를 차지하 고 산천을 경계로 삼아 그 땅을 조업전(祖業田)이라 부르며 서로 빼앗으니, 한 땅에 주 인이 대여섯 명이 넘고 1년에 세금을 여덟, 아홉 차례나 거두어 간다. …… 심지어 남이 대대로 심어 놓은 뽕나무와 집까지 모두 빼앗는다.

-“고려사”-

조선을 세우기 직전, 조준이 우왕에게 올린 상소이다. 권력을 가진 일부 권문세족이 힘 없는 농민의 농경지를 뺏어 농장을 경영하면서 나타난 고려 말의 경제적 모순을 잘 지 적하고 있다. 이러한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어떠한 토지 제도가 실시되었을까?

1391

과전법 실시

1466

직전법 실시

1470

관수관급제 실시

조선 시대 양안(토지박물관)

과전법에서 직전법으로

조선의 토지 제도는 과전법 체제로 운영되었다. 고려 말에 마련된 과전법은 경 기 지방의 토지에 한해 관리에게 등급에 따라 수조권을 지급하는 제도였다. 과전 은 받은 사람이 죽으면 국가에 반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그 일부가 ✽수 신전, ✽휼양전이란 이름으로 세습되었다. 세습되는 토지가 늘어나면서 새로 관직

✽수신전

과전을 받은 관리가 죽었을 때, 재혼하지 않은 부인에게 지급된 토지이다.

에 임명된 관리에게 줄 토지가 부족해지자, 세조는 직전법을 실시해 현직 관리에 게만 토지를 지급하였다. 처음에는 관리가 수확량을 조사해 농민에게 직접 수조권을 행사하였다. 그런데 수조권을 남용해 과다하게 거두는 일이 많아지자 농민의 불만이 커졌다. 이에 성

✽휼양전

종은 지방 관청이 수확량을 조사해 거둔 후, 관리에게 나누어 주는 관수관급제를

과전을 받은 관리 부부가 다 죽

시행하였다. 16세기 중엽에는 직전법마저 폐지되어 관리에게 수조권을 지급하는

고 자녀가 어릴 때, 그 자녀에게

제도가 없어지고 녹봉만을 지급하였다.

지급된 토지이다.

토지의 사적 소유와 지주제가 확대되다

국가가 지급한 수조권과는 별개로 양반 지주는 매매와 겸병, 개간 등의 방법을 통해 자신의 소유지를 늘려 나갔다. 이들은 소유지를 노비에게 직접 경작시켰고, 유랑민을 모아 자신의 노비처럼 만들어 경작시키기도 하였다. 규모가 큰 경우에 는 주변 농민에게 토지를 빌려 주어 경작시키고, 병작반수라 하여 수확량의 절반 을 거두었다. 토지의 사적 소유와 병작반수에 입각한 지주제는 직전법이 폐지되 자 더욱 확산되어 갔다.

128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수취 체제를 정비하다

국가 재정을 확충하기 위한 수취 체제는 전세, 공납, 역 등으로 정비 되었다. 전세는 과전법의 경우 1결당 30두를 거두었다. 세종 때에는 좀 더 체계적으로 전세를 걷기 위해 토지의 비옥도와 풍흉에 따라 차 등 징수하는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을 실시하였다. 이에 1결당 최대 20두에서 최하 4두를 내게 되어 농민의 부담이 줄어들었다. 공납은 각 지역의 토산물을 현물로 거두었다. 중앙 관청이 각 군현 에 종류와 수량을 할당하면, 군현에서 각 가호에 할당해 거두었다. 역은 16세 이상 60세 미만의 정남에게 부과되는 군역과 요역이 있 었다. 군역은 직접 군사로 동원하거나 그 비용을 거두었고, 요역은 각 종 토목 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징발하였다. 이 밖에도 염전, 광산, 산림, 어장, 상인, 수공업자 등으로부터 세금 을 거두었다. 이렇게 마련된 국가 재정은 군량미나 구휼미로 비축하거 나 각종 경비와 관리의 녹봉 등으로 지출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수취 제도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지주가 내야 할 전세를 작인에게 내도록 강요하는 경우가 많았고, 관청의 서리가 공물을 대신 내고 그 대가를 챙기는 방납이 나 타났다. 또 다른 사람을 사서 역을 대신하게 하는 대립, 포를 받고 군

조선 시대 조운로 조세는 강가나 바닷가의 조창 에 보관되었다가 뱃길을 통해 경창으로 운송되었다. 다만 국경이 가깝고 사신 왕래가 많은 평안도와 함경 도는 거둔 조세를 현지에서 군사비와 사신 접대비로 사용하였다.

역을 면제해 주는 방군수포도 성행하였다. 빈민 구제를 위한 환곡도 고리대 수단 으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수취 체제의 모순으로 농민의 부담은 크게 늘어났다. 결국 생활이 어려워진 농민이 토지에서 이탈하면서 각 지방에는 많은 유민이 발생하였다. 유민 중 일부는 도적이 되기도 했는데, 명종 때 황해도와 경기도 일 대에서 활동한 임꺽정이 대표적이다.

세종 대왕, 전국적인 여론 조사를 실시해 조세 제도를 개편하다 서울과 지방의 벼슬아치는 물론이고 일반 백성에게도 그 가부를 물어서 아뢰어라! 1430년 세종의 명에 따라 약 17만 명에게 여론을 물었다.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의 부담 을 덜어 주려 한 조세 제도가 관리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백성의 의견을 수렴하여 시행하려 한 것이다. 결과는 찬성이 반대보다 약 2만여 명 많았다. 그런데 세종 대왕은 반대가 예상보다 많다는 이유로 시행을 보류하고, 찬성과 반대 의견의 이유를 각각 분석하여 세법을 보완하였다. 그 결과 1444년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이 실시될 수 있었다. 이렇게 백성의 의견을 수렴해 더 나은 제도를 만들려고 했던 세종 대왕의 노력은 조선의 유교적 통치 이념과 애민 정신을 잘 보여 준다.

세종 대왕 동상(서울 종로)

3. 경제 정책과 경제 생활의 변화

129


조선 후기 수취 체제의 개편 선조 26년(1593) 10월, 국왕의 행차가 서울로 돌아왔으나 성안은 타다 남은 건물 잔해 와 시체로 가득하였다. 굶주림에 시달린 사람들은 인육을 먹기도 했고, 외방에는 곳곳에 서 도적들이 일어났다.

- 유성룡,“서애집”-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도성의 모습과 굶주림에 시달린 백성이 인육까지 먹어야 했던 비 참한 실상을 보여 주는 글이다. 7년에 걸친 전쟁은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경작지가 전쟁 전의 3분의 1 수준에 머물 정도로 농촌은 황폐화되었다. 토지에서 이탈한 농민 들이 도적 떼가 되어 양반 지배층과 정부에 항거하는 일도 빈번하였다. 이에 지배층은 수취 체제를 개편하여 농민의 조세 부담을 줄여 줌으로써 양반 지배 체제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 주요 내용과 한계를 살펴보자.

임진왜란 이후 토지의 감소

풍흉에 관계없이 전세를 징수하다

1608

경기도에 대동법 실시

1635

영정법 실시

다. 여기에 기근과 재난이 겹치면서 국가 재정은 고갈되고 농민 생활은 크게 궁핍

1708

전국에 대동법 확대

해졌다. 양반 지주가 농민의 어려움을 이용해 소유지를 확대해 나갔기 때문에, 경

1750

균역법 실시

작지를 잃고 몰락하는 농민은 더욱 늘어났다.

양 난으로 많은 농민이 전쟁 중 사망하거나 피난을 가면서 농경지가 황폐해졌

생활이 어려워진 농민은 벽서 사건을 일으켜 불만을 드러냈으며, 도적이 되어 지배층과 정부에 항거하였다. 이에 정부는 수취 체제를 개편하여 국가 재정을 확 충하고 농민의 조세 부담을 줄여 주려고 하였다. 세종 이후 실시된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은 복잡한 징수 절차 때문에 원칙대 ✽부가세

전세를 납부하는 과정에서 징수

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15세기 말부터 풍흉을 조사하지 않고 최저 세율에 따라

되는 각종 수수료, 운송비, 자연

1결당 4~6두를 징수하는 관행이 나타났다. 인조는 이러한 관행을 법제화하여 영

소모에 대한 보충비 등이 전세

정법을 실시하였다.

에 더해져 부과되었다.

영정법에 따라 전세는 풍흉에 관계없이 1결당 4~6두 정도를 거두었다. 이는 이전보다 전세율이 낮아진 것이었지만, 자기 토지가 없는 농민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여러 명목의 ✽부가세가 늘어났는데, 그 액수가 전세액보 다도 훨씬 많아 때로는 몇 배가 되기도 하였다. 여기에 지주가 져야 할 부담이 작 인에게 전가되면서 농민의 부담은 증가하였다. 대동법, 공납을 전세화하다

수취 체제의 개편은 방납의 폐단이 심각했던 공납에서도 이루어졌다. 방납이 확대될수록 농민의 부담은 더욱 늘어났고, 그 부담을 감당하지 못해 도망하는 농 민도 증가하였다. 이에 이이, 유성룡 등이 공물을 쌀로 거두자는 수미법을 주장했 대동법 시행 기념비(경기 평택)

130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지만, 제대로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공납의 개혁은 오랜 논의 끝에 시행된 대동법을 통해 본 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대동법은 공납을 전세화하여 가호 에 부과하던 토산물을 토지 결수에 따라 쌀・면포・삼 베・동전 등으로 징수한 제도이다. 이에 따라 토지가 없는 농민은 일단 과세 부담에서 벗 어났고, 토지를 가진 농민도 1결당 쌀 12두 정도의 대동세 만을 납부하게 되어 부담이 크게 줄어들었다. 반면, 많은 토지를 소유한 양반 지주의 부담은 크게 늘어났다. 이 때 문에 양반 지주의 반대가 심해 대동법이 경기도에 처음 실시된 이후, 전국에 확대 시행되는 데에는 100년이나 걸 렸다.

대동법의 영향

대동법은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일시적으로 농촌 경제를 안 정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그렇지만 별공과 진상 등 현물 징수가

대동세의 징수와 운송

여전히 남아 있었고, 운영 과정에서 대동세가 작인에게 전가되 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한편,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국가에 관수품을 조달하는 어용 상 인인 공인이 등장하였다. 공인은 시장에서 많은 물품을 구매해 상 품 수요를 증가시켰고, 농민도 토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아 대동세 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상품 화폐 경제가 발전하였다. 대동법의 실시

대동법 실시를 둘러싼 찬반 주장 1 대동법 실시 반대

2 대동법 실시 찬성

지방에서 온 사람이“백성이 모두 한꺼번에 납부하는 것

부자는 전결이 많으므로 내야 할 양도 많아 한꺼번에 준

을 고통스럽게 여긴다.” 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먼 지방

비하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부자는

은 경기와 달라 부자들이 가진 땅이 많습니다. 10결을 소유

수확이 많고 노동력이 많은데, 가난한 사람들도 여태껏 그

한 자는 10석을 내고 20결을 소유한 자는 20석을 내야 합

럭저럭 납부해 온 것을 왜 못 내겠습니까? - 조익,“포저집”-

니다. 이렇게 하면 땅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고통스럽게 여길 것은 당연합니다. …… 대가(大家)와 거족(巨族)이 불

➊ [자료 1]에서 대동법 실시에 반대하는 이유를 말해 보자.

편하게 여기며 원망을 한다면, 어려운 시기에 심히 걱정스 러운 일이라 할 것입니다.

-“인조실록”-

➋ [자료 1, 2]를 통해 대동법의 실시로 공납의 부과 기준과 징수 방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지적해 보자.

3. 경제 정책과 경제 생활의 변화

131


균역법, 군포 부담을 줄이다 기관마다 다른 군포 징수량

왜란 이후 5군영 체제가 성립되면서 그 경비를 마련하기 위

황해도 병영은 포를 2필씩 거두는데, 감영은 1필을 거둔다. 그래서 감영군은 서로 다투어 들

해 군역 대신 군포를 징수하였다. 농민 장정은 1년에 2필의 군

어오려고 하고, 병영군은 모두 싫어해 달아나려

포만 납부하면 되었지만, 군적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고 징수 기

한다.

관도 통일되지 않아 이중 삼중으로 부담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비변사등록”-

수령과 아전의 농간까지 겹쳐 실제 납부액은 휠씬 많았다. 신분 을 상승시켜 양반이 되거나 군포를 피해 도망치는 농민이 생겨나면서 남아 있는 ✽호포론

농민의 부담은 더욱 늘어났다.

군포를 호 단위로 부과해 양반 에게도 징수하려 한 제도이다.

이에 ✽호포론, ✽결포론 등 농민의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모색 되었지만, 군포 부담을 우려한 양반의 강력한 반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결국 정

✽결포론

부는 균역법을 실시하여 농민의 군포 부담을 1년에 1필로 줄여 주었다. 줄어든 군

토지 결수에 따라 군포를 부과 해 징수하려 한 제도이다.

포 수입은 토지 1결마다 2두씩 결작미를 거두고, 어염세와 선박세 등을 국가 재정 으로 돌려 보충하였다. 또 군역을 회피했던 일부 부유한 상민에게도 ✽선무군관이

✽선무군관

라는 명목으로 군포를 납부하게 하였다.

영조 때 토호(土豪), 부민(富民) 의 자제 중에서 선발한 무관직 으로, 유사시에 소집되어 군사를 지휘하게 하고 평상시에는 매년 군포 1필을 내도록 하였다.

균역법의 의의와 한계

균역법의 실시로 농민의 군포 부담은 일시적으로 가벼워졌다. 그러나 도망간 농민의 군포를 이웃이나 친척에게 징수하는 인징과 족징, 죽은 자나 어린아이에 게 군포를 징수하는 백골징포와 황구첨정 등의 폐단이 ���속되면서, 농민은 여전 히 무거운 군포 부담에 시달렸다. 여기에 지주가 부담할 결작이 작인에게 전가되 는 경우도 많아 농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신분 상승과 도망을 통해 군포 부담을 회피하는 경향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균 역법은 군역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였다.

균역법의 실시 배경 군역의 폐단

결포론을 실시할 수 없는 이유

현재 10여 만 호로써 50만 호가 져야 할 양역을 감당해야

구전(口錢: 군포 대신 성인에게 돈을 징수하는 것)은 한 집

합니다. 한 집안에 비록 남자가 4, 5명 있어도 모두 군역에서

안에서 거두는 것이니, 이를 거두면 주인과 노비의 구분이 문

벗어나지 못합니다. 군포를 마련할 길이 없어 마침내 죽거나

란해진다. 토지에는 이미 많은 세금이 매겨져 있어 더 부담시

도망을 가게 되고, 이러한 자의 몫을 채우기 위해 백골징포,

키기 어렵다. 호구를 기준으로 거두는 것이나 토지를 기준으

황구첨정의 폐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로 거두는 것은 모두 문제가 있다.

-“영조실록”-

위 자료를 읽고 균역법이 실시된 배경을 말해 보자.

132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영조실록”-


조선 전기의 경제 생활 매년 2월 국왕이 선농단으로 나아가 쌀과 기장, 소, 돼지를 놓고 큰 제사를 올린다. 그런 다음 국왕이 직접 전답을 가는 친경 (親耕)을 행한다. 의식이 끝나고 나면 가마솥에 쌀과 기장으로 밥을 하고, 소로 국을 끓여 구경꾼 가운데 60세 이상의 노인을 불 러 먹였는데, 설렁탕이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한국요리문화사”-

깍두기 하나만 있으면 국에 밥을 말아 한 끼 식사를 거뜬히 해치울 수 있는 설렁탕. 설렁탕은 국왕이 풍 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친경을 행했던 선농단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치에 바쁜 국왕이 흥인지문(동대문) 밖까지 행차해, 몸소 쟁기를 들고 밭을 갈며 백성과 함께 설렁탕을 끓여 먹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선농단(서울 동대문구)

중농 정책의 실시와 농업 기술의 발달

조선 시대의 농업은 국가 경제의 기본이 되는 산업으로서, 백성의 생 활 안정과 국가의 재정 운영에 토대가 되었다. 이에 정부는 중농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 경작지 확대와 농업 기술 발전에 노력하였다.

농본주의 정책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 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농사 는 입고 먹는 것의 근원이므로, 임금

먼저 개간을 장려해 개간지에는 일정 기간 면세 혜택을 주었고, 수리

이 정치에서 가장 먼저 힘써야 한다.

시설을 확충해 농민이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새

-“세종실록”-

로운 농업 기술을 개발하고 농기구를 개량해 농업 생산력을 늘리는 데 힘 썼다. 농민의 실제 경험을 종합해 우리 풍토에 맞는 농사법을 정리한“농 사직설”등의 농서를 간행, 보급하기도 하였다. 양반 지배층과 농민도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데 관심이 많았다. 향촌의 양반은 적극적으로 토지를 개간하고 간이 수리 시설을 확충했으며, 직접 농업 경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농민도 스스로 농업 기술을 개량하였다. 조선 초에는 조・보리・콩의 2년 3작이 널리 행해졌고, 남부 일부 지방 에 모내기가 확대 보급되어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해졌다. 시비법도 발달해 휴경하지 않고 매년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목화 재배 가 확대되어 의생활이 개선되고, 약초와 과수 재배도 늘어났다. 하지만 농민의 생활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자연재해로 흉년이 들면 큰 피해를 입었고, 세금 부담을 감당하지 못해 빚을 지고 몰락하는 경우 도 있었다. 또한, 양반 지주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을 경우 수확의 절반을

고려 말 조선 초의 토지 결수 건국 초부 터 계속된 개간과 양전으로 고려 말 50여 만 결에 불과했던 경지 면적이 세종 때에는

지대로 냈기 때문에 생활이 어려웠다.

160여 만 결로 증가하였다.

3. 경제 정책과 경제 생활의 변화

133


관영 수공업 체제가 정비되다

정부는 검약한 생활을 강조하는 유교적 경제관에 따라 상공업을 적절히 통제 하여 민생 안정을 도모하였다. ✽공장안

초기 수공업은 관영 수공업이 중심을 이루었는데, 장인을

국가가 필요한 물품을 생산할

공장안에 등록해

각 관청에 소속시키고, 물품을 제작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관청에 소속된 장인은

때 동원할 수 있는 장인을 등록

주로 의류, 활자, 화약, 무기, 문방구, 그릇 등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납

해 놓은 문서이다.

품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책임량을 초과한 생산품에 대해서는 세금을 내고 판매 할 수 있었고, 관청에 동원되는 기간 이외에는 개인적으로 물건을 만들어 팔 수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장인들이 관청에 동원되는 것을 기피하면서 관영 수 공업은 점차 쇠퇴하였다. 관영 수공업 이외에 주로 농기구나 양반의 사치품을 생산하여 판매하는 민영 수공업, 농가에서 자급자족 형태로 생활필수품을 만드는 가내 수공업도 있었다.

국가의 상업 활동 통제 속에 장시가 등장하다

조선 초기 상업 활동의 중심은 한양의 시전이었다. 시전은 종로 거리에 있었는 데, 정부가 점포를 지어 상인에게 대여하고 점포세와 상세를 거두었다. 시전 상인 은 왕실이나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는 대신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부여 받았다. 정부는 경시서를 두어 불법적인 상행위를 통제하였다. 지방에서는 15세기 후반부터 장시가 등장하였다. 장시는 농업 생산력이 발달함 에 따라 16세기 중엽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장시에서는 인근의 농민과 수공업자, 그 리고 보부상이 농산물과 수공업 제품, 수산물, 약재 등을 사고팔았다. 한편, 정부는 저화와 조선통보 등의 화폐를 만들어 보급했으나 널리 유통되지 못하였다. 농민은 여전히 쌀과 면포를 이용해 물품을 거래하였다.

등짐장수(권용정, 간송미술관)

전국 장시를 한 달에 세 번, 모두 같은 날에 서게 하소서! (장시가) 오늘은 이곳에 서고 내일은 이웃 고을에 서며, 다음 날에는 다른 고을에 서서 한 달 30일 동 안 장이 서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 규정을 마 련해 큰 고을은 두 곳에서, 작은 고을은 한 곳에서 한 달에 세 번 모두 같은 날 개시(開市)하는 외에는 일체 금지하여 민심을 진정시키소서.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시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나왔다. 정부는 장시를 금지했지 만, 농민과 수공업자는 필요한 물품을 교환할 수 있는 장시가 필요 하였다. 일부 지배층조차 흉년 극복에 도움이 된다며 장시 허용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시가 5일장으로 정착되어 가자, 전 국의 장날을 국가가 통제하자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이것은 상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증가를 억제해 상업의 발전을 막

-“선조실록”-

134

‘한 달에 세 번, 모두 같은 날에 장이 서게 하자.’ 라는 주장은 장

으려는 고육책이었지만, 장시는 계속 확산되었다.


조선 후기 농업과 광공업의 발달 어라디야 저라디야 상사로세 이 농사 어서 지어 / 나라님 봉양을 하고 보세 앞산은 점점 멀어지고 / 뒷산은 점점 가까온다 이 배미 저 배미 다 심었으니 / 장구 배미로 넘어가세 다 되었네 다 되었어 / 상사 소리가 다 되었네 - 진도 지산 농요 -

북소리 장단에 맞춰 흥겨운 상사 소리(모내기 노래)를 부르며 모내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이 논 저 논에 모를 다 심고, 장구처럼 생긴 논배미만 남았다. 양 난 이후 농민은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스스로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 력하였다. 모내기의 확대 보급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농민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조선 후기 경제 발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모내기(경직도 일부)

농업 생산력이 늘어나다

양 난 이후 정부가 황폐해진 농경지를 확충하기 위해 개간 사 업을 적극 장려한 결과, 경지 면적이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러나 개간 사업은 주로 많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양반 지주에 의해 이루어졌다. 농민은 농법을 개량하여 생산력을 증대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 하였다. 특히 가뭄을 우려한 정부의 금지령에도 모내기를 전국 적으로 확대해 나갔다. 모내기로 김매기하는 노동력은 크게 줄 어들었고 수확량은 배로 늘어났다. 게다가 벼와 보리의 이모작 도 가능해졌다.

18세기 말`~`19세기 초의 보의 개수

모내기의 보급과 더불어 수리 시설이 크게 늘어났고, 시비법 도 개선되었다. 농민은 작은 규모의 보를 쌓아 물을 확보했고, 퇴비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거름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농기구 개량도 이루어져 논농사에서도 소를 이용한 쟁기 사용이 널리 보 급되었다. 짧은 기간 내에 노동력을 집중해서 모내기를 마쳐야 했기 때문에, 두레나 품앗이 등의 공동 노동 방식도 더욱 확대되 었다. 밭농사에서는 견종법이 널리 확대되었다. 견종법은 밭에 이랑 을 만들고 보리・콩 등의 씨앗을 고랑에 뿌리는 방법인데, 두둑 에 심을 때보다 노동력은 적게 들고 수확량은 크게 늘어나는 효 과가 있었다.

논갈이(김홍도, 국립중앙박물관)

3. 경제 정책과 경제 생활의 변화

135


농업 경영 방법이 변화하다

모내기로 노동력을 덜게 된 농민은 경작지의 규모를 늘려 광작에 나섰다. 지주 는 대부분의 농지를 작인에게 빌려 주고 일부만을 직접 경영했지만, 광작이 가능 해지자 빌려 준 토지를 회수하고 노비나 머슴을 부려 직접 경영하는 경우가 늘어 났다. 광작의 유행으로 일부 농민은 부농층으로 성장했고, 지주도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농민은 경작지를 잃고 도시로 나가 영세 상인이 되거나 임노동자로 전락하였다. 그 결과 농민층의 계층 분화 현상이 나타났다. 또한, 자급자족적인 농업에서 벗어나 상업적 농업으로 발전하는 변화도 일어났 담배 썰기(김홍도, 국립중앙박 물관)

다. 도시 인구가 증가하고 상품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인삼, 면화, 담배, 채소 등의 상품 작물 재배가 확대되었다. 특히 쌀의 상품화가 활발했는데, 쌀의 수요가 늘면 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나타났다. 상품 작물은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었 기 때문에, 이를 통해 농민은 부농층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지대 납부 방식에 변화가 나타나다

양반 지주가 대부분의 농지를 지주제로 경영하고 있는 상황에서, 작인들은 자 신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지대 부담을 줄이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일 부 지방에서는 지대 납부 방식에 변화가 나타났다. 지대는 지주와 작인이 수확량을 절반씩 나누어 갖는 타조법이 일반적 이었지만, 일부 지방에서는 일정 액수의 지대를 정해 곡물이나 화폐로 납부하는 도조법이 등장하였다. 이로써 작인은 지주의 간섭 없이 자유로 운 영농을 추구할 수 있었고, 지주와 작인의 관계도 지배와 종속의 관계 에서 벗어나 계약적 관계로 전환되어 갔다. 타작도(김홍도, 국립중앙박물관)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농업 경영의 변화 1 모내기법의 효과

2 상품 작물의 재배

이앙(모내기)을 하는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김매기

농민이 밭에 심는 것은 곡물만이 아니다. 모시・오이・

의 노력을 더는 것이 첫째요, 두 땅의 힘으로 하나의 모를

배추・도라지 등의 농사도 잘 지으면 그 이익이 헤아릴 수

기르는 것이 둘째요, 좋지 않은 것은 솎아 내고 튼튼한 것

없이 크다. 도회지 주변의 파밭・마늘밭・배추밭・오이밭

을 고를 수 있는 것이 셋째이다.

에서는 10무(4두락)의 밭에서 수만 전(錢)의 수입을 올릴 - 서유구,“임원경제지”-

➊ [자료 1]의 모내기법이 확대 보급된 결과를 추론해 보자. ➋ [자료 2]와 같은 작물 재배가 유행하게 된 배경을 말해 보자.

136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수 있다.

- 정약용,“경세유표”-


민간 수공업이 발달하다

도시 인구가 급증하고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제품 수요가 크게 늘어

장인 등록제의 폐지

나 수공업 생산이 촉진되었다. 이에 국가에 장인세를 바치며 활동하는 수공업자가 증가함에 따라 관영 수공업은 쇠퇴하고 민간 수공업이 발 달하였다. 민간 수공업자가 만든 제품은 관영 수공업장에서 만든 제품에 비해 품질과 가격 면에서 경쟁력이 우수하였다. 이러한 추세 속에 18세기 말

사섬시, 전함사 등 여러 관청이 지금은 없어졌고, 내자시, 내섬시, 사도시 등 관청 은 소속 장인이 없어졌다. …… 장인들을 공조에 등록하던 규정은 점점 폐지되어 시행되지 않는다. -“대전통편”-

장인 등록제가 폐지되어 민간 수공업은 더욱 발전해 갔다. 자급자족 형태의 농촌 수공업도 점차 소득을 올리기 위해 상품으로 생산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철기, 유기, 옹기 등을 생산하는 점촌(店村)이 곳곳에 형성되었다. 민간 수공업자는 작업장과 자본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원료의 구입 과 제품의 판매에서 상업 자본의 지배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수공업 자는 공인이나 사상에게 물품의 주문과 함께 자금과 원료를 미리 받아 제품을 생산했는데, 이러한 방식을 선대제 수공업이라 한다. 하지만 18세기 후반 상품 화폐 경제가 더욱 발달하면서 스스로 물품을 생산하 고 판매하는 독립 수공업자가 나타나 부를 축적해 갔다.

광산 개발이 활기를 띠다

민영 수공업이 발달하자 그 원료인 광산물의 수요가 급증하여 광업

대장간(김홍도, 국립중앙박물관)

도 활성화되었다. 개인의 광산 개발을 금하던 정부도 17세기 이후에는 ✽덕대

개인에게 광산 채굴을 허용하고 세금을 받는 정책을 시행하여 광산 개

광산 주인과 계약을 맺고 광물

발이 촉진되었다. 특히 청과의 무역이 성행하여 그 결제 수단인 은의

을 채굴하는 광산 경영 전문가 를 말한다.

수요가 증대되자 은광 개발이 활발해졌다. 18세기 이후에는 상업 자본 이 유입되어 금광 개발도 활기를 띠었다. 한편, 광산을 개발하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몰래 광산

광산의 민영화 조정에서 은이 나는 곳에 은점 설치를

을 개발하는 이른바 잠채(潛採)도 성행하였다. 그러면서 살기 어려

허가해 주면, 돈 많은 장사꾼은 각자 재물

워진 농민이 광산으로 많이 몰려들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정부는

을 내어 일꾼을 모집할 것입니다. 땅이 없

이를 금하려는 조처를 취했지만, 광산 개발의 열기를 잠재울 수는

어 농사를 짓지 못하는 백성이 점민이 되

없었다. 광산은 주로 ✽덕대라는 광산 경영인이 상인 물주로부터 자본을 조 달받아 채굴업자인 혈주와 노동자를 고용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나타나고, 분업과 협업의 생산 방식 이 발달하였다.

어 그곳에 모여 살며, 은을 캐서 호조와 각 영, 고을에 세를 바치고 남는 대로 물 주에게 돌릴 것이니 공사 간에 유익한 일 입니다.

- 우정규,“경제야언”-

조선 후기에 은광 개발이 활기를 띠 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3. 경제 정책과 경제 생활의 변화

137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이현과 종루, 그리고 칠패는 도성의 3대 시장이라네. 온갖 수공업자가 다 모여 있고 사람들은 분주한데 수많은 화물이 값을 다투며 수레가 줄을 이었네. 봉성의 털모자, 연경의 비단실, 함경도의 마포와 한산의 모시 쌀, 콩, 기장, 조, 피, 보리 …… 소에 실은 나무를 사려고 고삐를 끌기도 하고 말 이빨을 보고 나이를 알려는 사람은 허리에 채찍을 꽂고 있으며 눈을 껌뻑이며 말 중개인을 부르는 사람도 있네. 설중향시(이형록, 국립중앙박물관)

- 박제가,‘한양성시전도가’-

위 시는 지방에서 온 수레가 줄지어 있고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는 한양의 시장을 노래하고 있 다. 이형록의 그림은 눈길도 마다 않고 짐을 가득 실은 말을 끌며 시골 장터로 향하는 모습이 다. 조선 후기에는 대도시는 물론, 시골에서도 물건을 파는 장사꾼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 었다. 이렇게 많은 상인이 도시와 지방을 돌며 장사할 수 있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종루, 칠패 , 배오개

공인과 사상, 상업 자본을 축적하다

종루는 종로 일대, 칠패는 남대 문 밖, 배오개는 동대문 부근을

양 난 이후에 도시 인구가 증가하는 가운데,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수공업

가리킨다.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상업도 크게 발전하였다. 여기에는 공인과 사상이 주도적

✽금난전권

인 역할을 하였다. 대동법의 실시로 등장한 공인은 국가에 관수품을 조달하는 과

난전을 금지할 수 있는 권리로, 난전이란 판매를 허가받지 않고 물건을 파는 행위나 가게를 말

정에서 수공업 생산을 촉진하고 장시를 활성화하는 등 유통 경제의 발달에 기여 하였다. 이들은 특정 물품에 대한 독점권을 확보하여 큰 부를 축적하였다.

한다.

사상도 점차 성장하여

종루, 칠패, 배오개(이현), 송파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시전의 상권을 잠식하였다. 시전 상인은 국역을 담당하는

통공 정책

대가로 ✽금난전권을 행사하며 사상을 억압했으나, 사상의 성장을 막

평시서로 하여금 30년 이내에 새로 설 립된 시전을 모두 없애고 형조와 한성부

을 수는 없었다. 결국 정부는 통공 정책을 실시하여 육의전을 제외한

로 하여금 육의전 이외에는 난전을 금할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하였다(1791). 이로써 상업 활동이 어느 정도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이를 어기는 자는

자유로워졌고, 사상은 더욱 번창하였다.

벌주도록 해야 한다.

-“비변사등록”-

지방에서는 송상(개성), 만상(의주), 내상(동래), 유상(평양) 등의 활약 이 두드러졌다. 이들은 점차 각지의 장시를 연결하는 유통망을 가지고

물화를 공급하면서 부를 축적해 갔다. 한강을 거점으로 운송업에 종사한 경강 상인 은 서남 해안을 오가며 서울에 쌀, 어물 등을 공급하면서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공인과 사상은 조선 후기의 상업 발달을 주도하면서 부를 축적했고, 이를 바탕 으로 독점적 도매 상인인 도고로 성장해 갔다. 도고의 등장은 조선 후기에 상업 자본이 축적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138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일부 장시가 상설 시장으로 발전하다

농업 생산력이 증대하고 유통 경제가 발달하면서 16세기에 비해 장시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일정한 날짜에 모여 물품을 사고팔았던 지방의 장시는 5일 만에 열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장시를 무대로 활동했던 대표적 상인은 보부상이었 다. 이들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해 준 행상으로, 순환하는 장날에 맞춰 장사를 하면서 각 장시를 하나의 유통망으로 연계시켰다. 아울러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 기 위해 보부상단이란 조합을 만들기도 하였다. 한편, 상품 교역량이 크게 늘자, 일부 장시는 상설 시장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18세기 말 송파장, 강경장, 원산장 등은 몇 개의 군현을 연결하는 상업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그 결과 이들 장시가 있던 광주, 은진, 덕원 등이 새로운 상업 도시로

행상(김홍도, 국립중앙박물관) 한강 포구에서 받은 새우젓이나 생물 생선을 팔러 다니는 행상의 활동 모습을 보여 준다.

발전하였다.

포구에서 상거래가 활성화되다

조선 시대에는 도로와 수레가 발달하지 못해 대부분의 물화가 수로 로 운송되었다. 이에 포구는 일찍부터 물화를 운송하는 기지 역할을 했으며, 유통 경제가 발달하면서 새로운 상업 중심지로 떠올랐다.

포구 상업 우리나라는 동, 서, 남의 3면이 모두 바 다이므로, 배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포구의 상거래는 수로를 이용한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장시

배에 물건을 싣고 오가면서 장사하는 장

보다 규모가 훨씬 커졌다. 배를 가지고 상업 활동을 하는 선상의 활약

사꾼은 반드시 강과 바다가 이어지는 곳

으로 전국 각지의 포구는 하나의 유통망으로 연결되어 갔다. 또한, 주 변 지역의 장시와 연계된 상품 유통의 거점 역할도 하였다. 한편, 포구와 규모가 큰 장시에서는 객주와 여각이 활동하였다. 이 들은 운송업, 숙박업, 금융업 등에 종사하면서 물품의 매매를 중개하

에서 이득을 얻는다. …… 충청도 은진의 강경포는 육지와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 바닷가 사람과 내륙 사람이 모두 여기에 서 서로 물건을 교역한다. - 이중환,“택리지”-

였다.

송파장을 통해 본 장시의 유통망 송파장을 중심으로 주변 장시의 장날과 상인의 이동로를 표시한 지 도이다. 장시는 하루에 왕래할 수 있는 거리에 들어서 있기 때문에 상인 들은 날마다 장시를 돌아다니며 상업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송파장의 경우 5일과 10일 등 한 달에 6차례 장이 서는 5일장이었지 만, 18세기 후반에는 관동 지방과 삼남 지방에서 올라 온 상품을 도성 과 연결시켜 주면서 상설 시장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송파장을 중심으 로 한양의 동남부 지역이 하나의 유통망을 형성하였다. 송파 중심의 장시 구역도

3. 경제 정책과 경제 생활의 변화

139


개시・후시 무역이 발달하다

국내 상업이 크게 발달하면서 대외 무역도 활기를 띠었다. 청 과는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국가가 공식 허용한 개시 무역이 이 루어졌지만, 교역 품목과 물량이 통제되었다. 이에 만족하지 못 한 상인은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후시 무역을 통해 교역량을 크 게 늘려 갔다. 주로 은・인삼・무명 등을 수출하고, 비단・약 재・문방구 등을 수입하였다. 일본과는 부산포에 설치한 왜관에서 개시 무역과 후시 무역이 이루어졌다. 이곳에서는 인삼, 쌀, 무명을 비롯해 청에서 수입한 물품이 수출되고, 은과 구리, 황, 후추 등이 수입되었다. 후시 무역이 확대되면서 무역에 관여했던 만상, 송상, 내상 등이 대상인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만상은 대청 무역을 통해, 송상은 청과 일본을 연결하는 중계 무역을 통해 각각 큰 부를 조선 후기 상업과 무역 활동

축적하였다.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되다

상공업의 발달과 더불어 세금과 지대를 화폐로 낼 수 있게 되자, 동전의 유통이 크게 늘어났다. 이에 누구나 상평통보를 이용해 물품을 사고팔 수 있었다. 하지만 지주나 대상인이 재산 축적과 고리대에 동전을 이용하면서 동전이 제대로 유통되 지 않아, 시중에 동전이 크게 부족해지는 전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어음, 환 등 신용 화폐를 이용한 대규모 상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는 당시 상업 자본이 축적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상평통보(국립중앙박물관)

자본을 축적한 도고 상인의 등장 (허생이)“내 조금 시험해 볼 일이 있어 그대에게 만 금(萬金)을 빌리러 왔소.” 라고 하였다. 변씨는“그 러시오.”하고 곧 만 금을 내주었다. …… (허생은) 대 추, 밤, 감, 배, 석류, 귤, 유자 등의 과실을 모두 두 배 값으로 사서 저장하였다. 허생이 과실을 몽땅 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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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의 소설 속 허생은 과거를 포기하고 돈 만 냥을 빌려 과 일을 매점매석해 큰돈을 번 인물이다. 조선 후기에는 실제로도 허 생과 같이 자본을 운용하여 부를 축적한 상업 자본가(도고)가 많이 나타났다. 대규모 상업 활동이 주로 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주도 아 래 이루어졌던 이전과 달리, 권력에서 소외된 허생과 같은 인물이 스스로 자본을 운용하여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 온 나라가 잔치나 제사를 치르지 못하게 되었다.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속에서 이루어진 상업 자본가의 활약은

그런 지 얼마 아니 되어서 두 배 값을 받은 장사꾼들

독립 수공업자의 성장, 덕대의 광산 경영 등과 더불어 조선 후기에

이 도리어 10배의 값을 치렀다.

자본주의가 싹트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근거로 이해된다.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 박지원,“허생전”-


글을 읽고 아래 빈칸 안에 자신의 의견을 달아 보자.

조선 후기에 나타난 자본주의의 싹

제안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의 싹이 있었다고 할 수 있나요?” 궁금이 님이 올린 글입니다.

조선 후기에 나타난 경제적 변화를‘자본주의’ 적 특성이 나타났다고 평가하던데 이해가 잘 되지 않네요. 생산력이 좀 증가하고 부유한 농민이 일부 등장했다는 것을‘자본주의’ 라고 설명 할 수 있나요? 서양의 자본주의와는 규모와 성격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 제가 잘 몰라서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의견을 듣고 싶네요. 제 생각이 잘못된 것일까요?

누리꾼 댓글

역사사랑 상공업을 천시하고 농본주의를 표방하던 조선 사회에 생산력 증대, 상품 화폐 경제 발달, 부농 등장

같은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일이죠. 그 이전 시대와는 분명히 다른 발전적인 흐름이 라 자본주의적 특성이라고 설명하기에 무리가 없어요. 궁금이 그렇게 따지면 경제 활성화나 상업 자본의 성장은 이전에도 나타나지 않았나요? 통일

신라 장보고나 고려 시대 무역항 벽란도 같은 경우 …… 이것도 자본주의인가요? 딴지걸 자본주의적인 것이든 아니든 그게 뭐가 중요한가요? 그냥 조선 후기에 경제 분야에서

발전적 변화가 나타났다고 하면 되는 거 아닌지 …….

역사사랑 궁금이 님. 일단 단순한 경제 성장에 그치지 않고 경제 운영 원리와 구조가 변화되었다는 점을 강조

하고 싶네요. 딴지걸 님에게는 그런 주장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조선 후기에 나타난 경제 운영 원리의 변화에 관 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딴지걸 그렇지만 억지로 끼워 맞추는 건 문제죠! 역사사랑 역사는 만들어 가고 다듬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필요한 것을 찾아내고 증명해 내

는 것을 억지로 끼워 맞춘다고 폄하하면 안 되죠. 딴지걸 우리 역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뚜렷한 증거나 논리가 없지 않나요? 납득이 안

돼요, 납득이.

3. 경제 정책과 경제 생활의 변화

141


4

신분 질서와 생활 모습의 변화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확립

하늘이 백성을 낳았는데 그 백성이 넷이다. 그중 가장 귀한 것이 선 비인데, 양반이라고 불리며 그 이익도 막대하다. 농사짓지 않고 장사 도 하지 않으며, 문사(文史)를 대강 섭렵하면 크게는 문과에 급제하고 적어도 진사가 된다.

- 박지원,“양반전”-

윗글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시대에 양반은 다양한 특권을 지녔다. 이는 길 가던 상민이 양반을 만나자,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 굽혀 인사하고 있는 모습에서도 잘 나타난다. 조선 시대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는 어떻게 운영되었을까?

노상알현도(김득신, 조선미술박물관)

양천제가 법제화되다

양인의 다양한 구성

조선은 조세와 국역을 담당하는 양인층을 늘려 국가 기반의 안

오늘날 양인이라는 자들의 등급은 하나가 아니다. 비록 공이 많고 벼슬을 많이 지낸 집

정을 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려 말 조선 초에는 많은 노비가 해

안 후손이 아니더라도 상하와 내외의 구별이

방되고, 양인의 지위도 향상되었다. 그리고 모든 사회 구성원을 자

있는 자가 있고, 상하・내외의 구별을 하지 않

유민인 양인과 비자유민인 천인으로 구분하는 양천제가 법제화되

아 대대로 상민이 되는 자가 있으며, 몸은 천 인이 아니나 천인과 다름이 없는 자도 있다. -“세종실록”-

었다. 양인은 조세와 국역의 의무를 져야 했지만, 과거에 응시하고 벼 슬을 하는 데 법적인 제한이 없었다. 천인은 각종 천역을 담당하고, 벼슬에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양인층 안에서 점차 분화가 일어났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구분하 는 반상제가 일반화되었고, 지배층은 다시 양반과 양반 관리를 보좌하는 중 인으로 나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의 신분 구조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네 신분층으로 구분되었다.

양반, 관리가 되기 위한 삶을 살다

양반은 본래 문반과 무반 관리를 아울러 부르던 명칭이었다. 그러나 시간 이 흐르면서 문・무반직을 갖고 있던 자는 물론 그 가족까지도 양반으로 부 르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문・무반직을 받은 자 만을 양반(사족)으로 인정하고, 향리와 서리 등 하급 지배 신분을 중인으로 조선의 신분 구조

142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격하시켜 지배층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막았다.


양반은 최고 지배층으로 자리 잡으면서 군역을 면제받고, 과거와 음서, 천거를 통해 고위 관직을 독점하는 등 여러 특권을 누렸다. 경제적으로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와 노비, 그리고 관리가 되어 국가로부터 받 은 과전과 녹봉을 바탕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다. 하지만 여러 대에 걸쳐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해 경제적으로 어려 움을 겪는 양반도 있었다. 이에 양반은 과거에 합격해 관직에 나가는 것 을 일생의 목표로 삼고, 유교 경전을 공���하거나 유학자의 소양을 닦는 데 힘썼다. 사인시음(강희언) 선비들이 시를 짓는 장면 을 묘사한 그림으로, 시를 짓는 것은 양반의 기본

중인, 양반과 상민 사이에 존재하다

소양이었다.

중인은 넓은 의미로는 양반과 상민의 중간 신분을 뜻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잡 과를 통해 선발된 역관, 의관 등 기술관을 가리킨다. 이들은 지배층이 사족 중심 의 상급 지배층과 기술관, 서리, ✽향리 등의 하급 지배층으로 양분되면서 점차 하

✽향리

지방에서 수령을 도와 각종 문

나의 신분을 이루었다.

서를 작성하고 수령의 재판 업

중인은 대대로 그 직역을 세습하고 같은 신분끼리 혼인하였다. 양반에게 차별을 받았지만, 전문 기술이나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상민보다 지위가 높았다.

무를 돕는 한편, 조세와 공물을 수납하고 역을 부과하는 일 등 을 담당하였다.

또 재산을 많이 모아 양반 못지않게 부유한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양반의 자녀 중 첩에게서 태어난 ✽서얼은 중인과 같은 신분적 처우를 받아 중

✽서얼

양반의 양인 첩에게서 태어난

서라고도 불렸다. 이들은 각자 지켜야 할 사회적 분수를 강조하는 유교적 명분론

‘서자’ 와 천민 첩에게서 태어난

이 보급되는 과정에서, 처・첩 사이의 구분이 엄격해져 재산 상속과 관직 진출에

‘얼자’ 를 함께 부르는 말이다.

심한 차별을 받았다. 문과 응시가 금지되었고, 간혹 무관직이나 기술관에 등용되 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외국어를 어떻게 공부하였을까? 세계화 시대를 맞이한 오늘날,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외국어를 익히는 데 많은 노력 을 쏟고 있다. 조선 시대 사람들도 지금처럼 외국어 공부에 매달렸을까? 조선 시대에도 외국어 공부에 매달렸던 사람들이 있었다. 역관의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역관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혹독하게 외국 어를 공부하였다. 이들은 아버지에게 직접 회화를 배우거나 오늘날처럼 회화 교재를 이용하기 도 했다.“노걸대언해” 와“첩해신어” 는 조선에서 사용하던 가장 대표적 인 회화 교재였다.“노걸대언해” 는 중국어를 한글로 해설한 것이 노걸대언해와 첩해신어(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고,“첩해신어” 는 일본어 학습을 위해 만든 교재이다. 이러한 교재 를 통해 역관은 외국어에 능통한 전문가의 자질을 갖출 수 있었다.

4. 신분 질서와 생활 모습의 변화

143


생산 활동에 종사한 상민

상민은 농민과 수공업자, 상인을 말한다. 이들은 평민, 양인으로도 불렸으며, 천민과 함께 피지배층을 이루었다. 상민의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농민은 자기 소 유의 토지나 양반의 토지를 경작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국가에 조세와 군역 등의 의무를 졌는데, 그 부담이 무거워 생활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이에 농업 기술을 개량하고 토지를 개간하는 등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생활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수공업자와 상인은 상민이었지만, 정부의 중농 정책에 따라 농민보다 낮은 대 우를 받았다. 수공업자는 관영 수공업이나 민영 수공업에 종사했고, 상인은 국가 ✽신량역천(身良役賤)

의 통제 아래 상업 활동을 하였다. 한편, 양인 중에는 ✽신량역천이라고 불리며 천

수군, 조례(관청의 잡역 담당),

역을 담당하는 계층도 있었다.

나장(형사 업무 담당), 일수(지 방 고을 잡역), 봉수군(봉수 업

상민은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갈 수 있었지만, 과거 준비에는 많은 시간과 비용

무), 역졸(역에 근무), 조졸(조운 업무) 등 힘든 일에 종사한 일곱

이 들기 때문에 실제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전쟁이나 반란을 진압하는

가지 부류로, 칠반천역이라고도

데 공을 세운 경우가 아니면 신분을 상승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한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 천민

천민은 최하층 신분으로 대다수가 노비였으며, 백정, 광대, 무당 등도 천민으로 간주되었다. 노비는 재산으로 취급되어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 되었다. 또 그 신분이 자손에게 세습되었는데,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녀도 노비가 되는 법이 일반적으로 시행되었다. 국가 관청에 속한 공노비는 일정 기간 관청에서 일하거나, 매년 정해진 액수의 신공을 바쳤다. 개인이 소유한 사노비는 주인과 함께 살면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솔거 노비와 독립된 생활을 하면서 신공을 바치는 외거 노비로 구분되었다. 특히 외거 노비는 재산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일반 농민과 비슷한 생활을 하였다.

자신이 노비임을 주장했던 여인 1586년 3월, 자신이 노비라고 주장하는 여성 다물사리와 그 여성을 양인이라고 주장하 는 양반 이지도 사이에 소송이 벌어졌다. 이 여성은 왜 스스로를 노비라고 주장했을까? 당시 양인 여성이 노비와 결혼하면, 그 자손은 노비가 되며 아버지의 주인이 소유권을 가 졌다. 이지도의 주장이 맞다면, 다물사리와 노비 윤필의 자손은 모두 자신의 소유가 된다. 하지만 노비끼리 결혼한 경우에는 어머니의 주인이 소유권을 갖기 때문에, 다물사리의 주 장대로라면 그 자손은 모두 그녀가 속한 성균관의 공노비가 된다. 사노비보다는 공노비가 비교적 나은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다물사리는 자신의 자손을 위해 스스로 노비라고 주장했지만, 판관은 다물사리를 양인이라고 판결하였다. 결국 다물 피고 - 다물사리

144

원고 - 이지도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사리의 자손은 모두 이지도의 사노비가 되었다.


조선 후기 신분제의 동요 정선 고을에 한 양반이 살고 있었다. 그는 어질고 글 읽기를 매우 좋아하였 다. …… 하지만 몹시 가난하여 환곡을 타 먹은 지 여러 해가 되어 천 섬의 빚 을 지게 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 때마침 그 동네에 부자가 이 소문을 듣 고 가족끼리 비밀 회의를 열어 말하였다.“이제 저 양반이 환곡을 갚을 길이 없 어서 곤란한 모양이니 그 양반 자리를 더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기회에 내가 양반 신분을 사서 가지는 것이 어떨까?”

- 박지원,“양반전”-

박지원의 소설에는 환곡을 받아야만 먹고살 수 있었던 가난한 양반의 모습 과 그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부유한 상민의 모습이 잘 대비되어 있다. 또한, 김홍도의 그림에서 양반으로 보이는 인물이 자리를 짜고 있고 그 아내는 물레를 돌려 실을 뽑고 있다. 이처럼 양반의 처지가 바뀌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자리 짜기(김홍도, 국립중앙박물관)

이름을 적는 곳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가 흔들리다

양 난 이후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로 부농층, 상업 자본가, 독립 수공업자 등 부를 축적한 새로운 계층이 나타났다. 반면, 많은 농민은 농토에서 밀려나 임노동자나 영세 상인으로 몰락하였다. 치열한 정쟁이 일당 전제화의 추세로 이어지면서 양반층도 분화되었다. 중앙의 정치권력을 차지하고 권세를 누리는 양반도 있었지만, 다수의 양반 은 벼슬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향촌 사회에서 위세를 유지하는 향반에 머물

공명첩(국사편찬위원회) 이름을 적는 곳이 비어 있는 관직 임명장이다. 조선 정부가 왜란 이 후 재정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급하였다.

거나, 일반 농민과 다를 바 없는 잔반으로 몰락하였다. 한편, 부유한 상민은 공명첩을 사거나, 족보를 구매 또는 위조하는 불법 적인 방법으로 양반 신분을 취득하였다. 양반이 되면 군포를 면제받고 지 배층의 수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상민의 수는 크게 줄어든 반면, 양반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이처럼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양반이 늘고, 부를 축적한 상민이 신분 상승을 추구하면서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는 크게 동요하였다.

중인층의 신분 상승 움직임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가 동요하는 가운데 서얼과 중인층은 신분 상승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서얼은 왜란 후 시행된

납속책과 공명첩을

이용해 관직에 나아갔다. 또한, 여러 차례의 집단 상소 운동을 벌여 홍문 관과 같은 청요직으로 진출하는 것을 허용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정조 때 유득공, 박제가, 이덕무 등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기용된 것은 이러한 노 력의 결실이었다.

직역별 호구 구성비(대구 지방)

✽납속책

국가의 재정 부족을 해결하거나 구호 사업을 위해 곡물을 바치 게 하고, 그 대가로 일정한 혜택 을 주던 정책으로, 조선 중기 이 후에 실시되었다.

4. 신분 질서와 생활 모습의 변화

145


기술직 중인도 19세기 중엽 관직 진출의 제한을 없애 달라는 대규모 소청 운동을 벌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축적된 경제력과 전문 지식을 토대로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향유했고, 서양 문물의 소개와 개화사상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노비 제도가 점차 해체되다 수계도권(유숙) 1853년 중인들이 시 문학 동인 모임인 시사를 개최하는

조선 후기에는 노비의 신분 상승 노력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노비는 군공과 납속을 통해 양인이 되

장면을 그린 풍속화이다.

기도 했지만, 신분적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정부는 신공을 줄여 노비의 도망을 막고, 도망간 노비를 찾아내려고도 하였으 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한편, 정부는 상민의 감소로 부족해진 군역 대상자를 늘리고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노비를 서서히 풀어 주는 정책을 폈다. 영조 때에는 아버지가 노비라도 어 머니가 양인이면 그 자녀가 양인이 되는 노비종모법을 확정해 노비의 신분 상승 기회를 넓혀 주었다. 18세기 후반, 공노비의 합법적인 신분 상승과 도망으로 정부는 신공을 거의 거둘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순조 때에는 중앙 관서에 소속되어 있던 6만여 명의 공노비를 해방시켰다. 그 결과 노비의 수가 크게 줄어들면서 노비 제도는 점차 해체되어 갔다.

신분 상승 운동 1 상민층의 신분 상승

2 노비종모법

근래 세상의 도리가 점점 썩어 가서 돈 있고 힘 있는 백

판부사 송시열이 아뢰었다.“이경억이 충청감사로 있을

성들이 군역을 피하고자, 간사한 아전, 임장(任掌: 호적을

때 상소하여 공・사노비가 양인 처를 맞이하여 낳은 자녀

담당하는 하급 임시직)과 한통속이 되어 뇌물을 쓰고 호적

는 한결같이 어미의 역을 따르도록 청했습니다. 이는 일찍

을 위조하여 유학(幼學)이라고 거짓으로 올리고 면역(免役)

이 이이가 주장한 것인데, 당시 조정에서 막아 시행하지

하거나, 다른 고을로 옮겨 가서 스스로 양반 행세를 한다.

못했습니다. 지금 양민이 날로 줄어드는 것은 이 법을 시

호적이 밝지 못하고 명분이 문란함이 지금보다 심한 적이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빨리 제도를 만들어 실시하소

없었다.

서.”

-“일성록”-

➊ [자료 1]의 현상이 확대되면서 나타난 사회 변화를 추론해 보자. ➋ [자료 2]의 제도를 실시하자고 주장한 의도를 말해 보자.

146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현종실록”-


사회 제도와 생활 모습의 변화 양반의 딸로 부모를 여의고 혼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어 나이가 차도록 시집을 가 지 못한 자에게는 정부가 혼수를 장만해 주도록 명하였다. …… 부모 형제가 있더라 도 가난하여 혼수를 마련할 수 없어 때를 놓친 자도 있으니, 부모 형제의 있고 없음 을 따지지 말고 그 집안의 높고 낮음과 빈곤 여부를 따져, 국고에서 쌀을 내주어 혼 수를 마련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청사초롱을 앞세우고 백마를 탄 신랑이 의젓한 모습으로 혼례를 치르기 위해 신부 집으로 가고 있다. 인륜의 대사인 혼례는 당사자 집안은 물론, 정부의 큰 관심사이 기도 하였다. 특히 정부는 혼기를 놓친 경우, 혼인 비용까지 지원할 정도로 관심을 기울였 신행(김홍도, 국립중앙박물관)

다. 백성의 생활 안정을 위해 정부가 실시한 정책에 대해 알아보자.

민생 안정을 위한 다양한 사회 제도

정부는 사회의 근간을 이루었던 농민의 생활 안정을 위해 다양한 사회 제도를 운영하였다. 재해를 당한 농민에게는 조세를 덜어 주었고, 환곡 제를 운영해 생활이 어려운 농민을 구휼하였다. 양반 지주도 자치적으로 구휼 기구인 사창을 설치해 곡식을 빌려 주어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고, 양반 중심의 향촌 질서를 유지하였다. 또한, 정부는 서민 환자의 치료를 위해 다양한 의료 시설을 설치하였다. 혜민서를 두어 서민의 질병을 치료하고 의녀를 교육했으며, 도성 인근에 설치된 동・서 활인서는 도성 부근 서민 환자의 치료와 함께 오갈 곳이 없 는 유랑자의 수용과 구휼을 담당하였다.

신풍루사미도 정조가 화성 행궁에 행차하 여 백성에게 구휼미를 나누어 주는 장면을 그린

합리적인 법률 제도를 운영하다

그림이다.

조선은 관습법을 중심으로 사회를 유지했던 고려와 달리, 법전에 근거한 합리 적인 법률 제도를 운영하였다. 형벌과 민사에 관한 사항은“경국대전” 의 규정에 따라 처리되었다. 형벌은 유교 윤리를 어긴 반역죄와 강상죄를 가장 무겁게 처벌하였다. 범인의 가족까지 함께 처벌하는 연좌제가 적용되었으며, 범죄가 발생한 고을의 호칭이 강 등되고 수령이 파면되기도 하였다. 토지와 노비의 소유권 분쟁은 문건에 의한 증 거를 기준으로 처리되었고, 상속 문제는 성리학 정착 이후 ✽종법이 적용되었다. 사법 기관은 행정 기관과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중앙에는 사헌부, 의금부, 형조, 도성의 치안을 담당하는 한성부, 노비 문제를 전담하는 장례원이 있었다. 지방에서는 각 도의 관찰사와 수령이 사법권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재판 결과에

✽종법

성리학적 가족 제도에 따라 부 계 중심, 장자 중심으로 재산 상 속이나 제사 계승 등을 규정한 것이다.

불만이 있을 경우, 다른 관청이나 상부 관청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4. 신분 질서와 생활 모습의 변화

147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

향촌 사회는 지방 양반(사족)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사족은 유향소를 중심으 로 수령을 보좌하고, ✽향회를 통해 결속을 다지면서 향촌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향회

향안(鄕案)에 이름이 올라 있는

16세기에는 사림의 정치적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각 지방에 서원이 세워지고

지방 양반들의 총회이다.

향약이 보급되었다. 서원은 지방 사족의 여론을 모으고 학문적 기반을 마련해 사 족의 권위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주민들이 지켜야 할 자치 규약인 향 약은 지방 사족의 주도로 운영되면서, 풍속 교화와 향촌 사회의 질서 유지에 기여 하였다. 그 결과 지방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 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향촌 사회에서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다

양 난 이후 양반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이와 함께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양반 이 늘어나면서, 향촌 사회에서 양반이 지녔던 권위가 점차 약화되었다. 이에 사족 은 서원과 ✽사우를 세우고 동족 마을을 형성하는 방법으로 친족 간의 결속을 강화

✽사우

조상이나 선현의 영정・신주를

하거나, 촌락 단위로 동약을 시행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모셔 두고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새로 성장한 부농층은 우세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사족이 장악하고 있던 향촌 사회의 지배권에 도전하였다. 이들은 수령과 결탁해 향회에 참여하고, ✽향임직에

✽향임직(鄕任職)

향청(유향소)에서 일을 보는 직 책이나 사람을 일컫는다. 이를

도 진출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부농층은 향촌 사회를 완

둘러싸고 사족(구향)과 부농층

전히 장악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고, 여전히 향촌 지배에 참여하지 못한

(신향)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

경우도 많았다.

였다.

사족의 힘이 약화되고 부농층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향촌 세력의 힘도 충분히 강해지지 못한 상황에서, 수령과 향리의 권한이 더욱 강해졌다. 이에 향회는 수령 을 견제하는 역할보다는 수령이 세금을 부과할 때 의견을 묻는 자문 기구로 전락 하였다. 이는 19세기 세도 정치 아래에서 수령과 향리의 농민 수탈이 극심해지는 배경이 되었다.

구향과 신향이 향촌 주도권을 두고 대결하다 영덕의 오래된 가문은 모두 남인이며, 이른바 신향(新鄕)은 모 두 서리와 품관의 자손으로 자칭 서인이라고 하는 자들이다. 근 래 신향이 향교를 주관하면서 구향(舊鄕)과 마찰을 빚었다. 주자 의 영정이 비에 손상되자 신향배들은 구향이 죄를 물을까 걱정

148

구향과 신향이 향촌 지배권을 행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향교를 두고 다투는 내용이다. 전통적인 구향이 사회・경제적으로 급성장한 신향의 도전을 받 았던 것이다. 이렇게 향촌 지배권을 둘러싸고 구향과 신향 사이에서 벌어진 다툼을 향전(鄕戰)이라고 한다.

하여, 남인에게 죄를 전가할 계획을 세우고는 주자와 송시열의

이를 통해 신향은 구향을 대신해 향촌 지배권을 장

초상을 숨기고,“남인이 송시열의 영정을 봉안하는 것을 꺼려

악하거나 구향과 타협해 향촌 지배에 참여하는 등 다

야음을 틈타 영정을 훔쳐 갔다.” 라고 하였다.

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승정원일기”-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가 강화되다

가족 제도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부계와 모계가 함께 중시되었다. 일 반적으로 재산은 자녀에게 고르게 상속되었고, 제사도 자녀들이 돌아

균분 상속 무릇 자손에게 유서나 훈계하는 글을

가며 지내거나 그 책임을 분담하였다.

남기는 것, 노비와 전택(田宅)을 나누는

그러나 17세기 이후 성리학적 생활 규범이 정착되면서 점차 부계 중

것은 모두 한집을 다스리는 것이다. ……

심의 가족 제도가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재산 상속과 제사는 장자를

어찌 아들과 딸을 구별하고 외손과 친손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딸과 다른 아들은 점차 재산 상속과 제사에 대 한 권리를 잃어 갔다. 또한, 부계를 중심으로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

을 구별하겠는가. 조부모・부모의 마음으 로 이를 보면 본래 내외의 구별도 없다. -“성종실록”-

는 의식이 확산되면서,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양자를 들이는 것이 일 반화되었다.

여성의 지위가 점차 낮아지다

혼인 형태는 일부일처제였으나, 첩을 들일 수 있어 실질적으로 일부일 처제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부인과 첩은 엄격하게 구분되었으며, 첩 의 자식인 서얼은 재산 상속과 제사 등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혼인을 하면 신랑이 상당 기간 신부 집에서 생활하였다. 그 러나 조선 후기에는 혼인을 마친 후 신부가 곧장 신랑 집으로 가서 생활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한, 고려와 달리 조선에서는 여성의 이혼과 재 혼이 금지되었고, 여성의 정절을 중시해서 정부가 열녀를 표창하는 제도 가 시행되었다. 이처럼 성리학적 윤리가 강조되면서 여성의 지위가 점차 낮아졌다.

장옷 입은 여인(신윤복,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시대 여성의 지위 1 여성의 재가 금지

2 재산 상속

세상의 도덕이 날로 나빠진 뒤로부터 여자의 덕이 정숙하

우리 집안은 일찍이 제사의 기본 방침을 정한 지 오래되

지 못하여 사족(士族)의 딸이 예의를 생각지 아니해서 혹은

었고 사위와 외손자가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을 정식으로

부모 때문에 절개를 잃고 혹은 자진해서 재가하니, 한갓 자

삼아 따르게 하였다. 정으로 본다면 아들과 딸은 차이가

기의 가풍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실로 성현의 가르침에 누를

없으나 딸은 부모 봉양과 제사가 없으니 어찌 재산을 아들

끼친다. …… 이제부터는 재가한 여자의 자손들은 관료가 되

과 똑같이 나눌 수 있겠는가? 딸은 삼분지 일만 주어도

지 못하게 하여 풍속을 바르게 하라.

되니 ……

-“성종실록”-

-“부안김씨우반고문서”-

➊ [자료 1]과 [자료 2]를 통해 조선 시대 여성의 지위를 말해 보자. ➋ [자료 2]와 같은 재산 상속이 나타나게 된 이유를 알아보자.

4. 신분 질서와 생활 모습의 변화

149


5

양반 문화의 발달과 문화의 새 경향

민족 문화의 융성

죄수들의 조서나 판결문을 이두 문자로 쓰면, 글을 모르는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 간혹 원통한 일을 당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훈민정음으로 그 글을 써서 읽고 직접 듣도 록 한다면, 비록 어리석은 백성이라 하더라도 쉽게 이해해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 이 없어질 것이다.

-“세종실록”-

훈민정음 창제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세종의 마음이 담겨 있다. 조선 초에는 애민 정신 에 바탕을 둔 부국 안민의 정책이 다양하게 시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훈민정음이 창제 되어 민족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조선 전기에 이루어진 민족 문화의 성과를 알아보자.

훈민정음(언해본, 서강대학교)

훈민정음 창제, 민족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훈민정음 창제는 조선 초에 이루어진 민족 문화의 최대 업적이었다. 훈민정음은 백성이 쉽게 익혀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정부는 훈민정음을 활용해 유교 윤리를 보급했고, 여러 분야의 서적도 훈민정음 으로 번역하거나 편찬하였다. 또한, 서리들이 훈민정음을 배워 행정 실무에 이용 하게 하고, 이들을 채용할 때 훈민정음 시험을 치르기도 하였다. 훈민정음 창제로 우리 민족은 고유 문자를 갖게 되었고, 문화 민족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었다.

부국 안민을 위해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다

조선 초에는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한 실용적인 학문이 발달하였다. 그 과정에서 중국과 서역의 과학 기술도 폭넓게 수용했으며, 이를 우리 실정에 맞 게 재구성하였다. 정부는 농업 진흥을 목적으로 농서를 간행해 새로운 농법을 보 급하고 여러 기구를 제작하였다. 세종 때에는 우리 풍토에 맞는 농 앙부일구(국립고궁박물관)

사법을 모아“농사직설” 을 간행하여 백성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였 다. 농업과 관련이 깊은 천체 현상을 관측하기 위해 혼의와 간의를 제작했으며,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앙부일구(해시계)와 자격루(물 시계)도 만들었다. 또한,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어 전국 각지 에서 강우량을 측정했고, 토지 측량 기구인 인지의와 규형을 만들

측우기(기상청)

150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어 토지 측량과 지도 제작에 이용하였다.


천문학은 태조 때 고구려 천문도를 바탕으로‘천상열차분야지도’ 를 만들고 이를 돌에 새겼으며, 세종 때 한양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정확 “칠정산” 을 편찬하였다. 하게 계산한 ✽ 의학에서는 우리 풍토에 알맞은 약재와 치료 방법을 개발・정리한“향 약집성방” 과 의학 백과사전인“의방유취” 가 간행되었다. 많은 서적이 편 찬되면서 금속 활자를 개량하는 등 인쇄술도 발달해 계미자, 갑인자 등 의 금속 활자가 만들어졌다. 무기 제조 기술은 고려 말에 처음 등장한 화포가 더욱 개량되었다. 신 기전을 잇따라 발사할 수 있는 화차와 거북선 등 신무기도 개발되어 국 방력 강화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기술을 천시하는 경향이 팽배해지면서 과학 기술은 점차 침체에 빠졌다.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국립고궁박물관)

윤리서와 의례서를 편찬하다

성리학이 통치 이념으로 정착되면서 유교 윤리를 보급하기 위해 윤리서와 의례 서가 편찬되었다. 세종 때에는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를 뽑아 그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을 덧붙인“삼강행실도” 가 간행되었다. 이 책은 백성이 읽 고 유교 윤리를 실천하도록 한글로도 번역되었다. 16세기에는 연장자와 연소자,

✽칠정산

천체의 위치를 계산하는 방법을 서술한 역법서로, 원의 수시력과 서역의 회회력을 참고로 편찬되 었다. ✽국조오례의

친구 사이의 윤리를 강조한“이륜행실도” 가 편찬되었다. “국조오례 성종 때에는 국가와 왕실의 각종 행사를 유교의 예법에 맞게 정한 ✽ 의” 가 편찬되었다. 이러한 윤리서와 의례서가 보급되면서 유교 윤리가 백성의 일 상생활 속에 자리 잡아 갔다.

제사 의식인 길례, 관례와 혼례 등의 가례, 사신 접대 의례인 빈 례, 군사 의식인 군례, 상례 의식 인 흉례의 다섯 가지 의례를 정 리한 책이다.

세종 때 과학 기술의 발전을 이끈 3인의 과학자 역사 속에 훌륭한 발자취를 남긴 과학 기술인을 소개하고 있는 과학 기술인 명예의 전당(http://www.kast.or.kr/HALL)에는 2012년 현재 조선 시대 인물 8명이 등재되어 있다. 이 가운데 세종 대왕을 비롯해 이천, 장영실, 이순지 등 4명은 모두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인물이다. 이천은 세계적 수준을 자랑하는 천문 기구를 제작하고, 금속 활자의 꽃으로 평가받는 갑인자 제작을 주도하였다. 이 밖에 화약 무기 개발, 악기 개량, 도량형 표준화 등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장영실은 노비 출신이라는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활약했던 대표적인 기계 기술자로, 측우기, 자격루, 앙부일구, 혼천의 등과 갑인자 제작에

이천

장영실

이순지

참여하였다. 이순지는 천문 역법 사업의 책임자로, 중국과 서역의 천문학을 연구 해 독자적인 역법서인“칠정산” 을 편찬하였다.

5. 양반 문화의 발달과 문화의 새 경향

151


국가적 차원에서 역사 편찬에 힘쓰다

조선은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명분을 내세우기 위해 건국 초부터 역사서를 편 찬하는 데 힘썼다. 정도전의“고려국사” 는 이러한 의도가 반영된 대표적 역사서 이다. 또 고려 왕조의 역사를 자주적으로 재정리한“고려사” 와“고려사절요” 가 편찬되었고,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정리한“동국통감” 이 간행되었다. 16세기에는 사림의 존화주의적 문화 의식이 반영된 역사서가 편찬 되었다. 박상은“동국사략” 에서 개국공신을 비판하고 역성혁명에 반 대한 사대부를 칭송하였다. 이이는“기자실기” 에 단군보다 기자를 중 시하는 역사 인식을 반영하였다. 한편, 조선은 한 왕대의 역사를 후세에 남겨 귀감으로 삼기 위해 실록

조선왕조실록(규장각 한국학연 구원) 태조에서 철종 때까지 25대

편찬을 중시하였다.“조선왕조실록” 은 태조 이후 조선 말까지 국가 차원에서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

지속적으로 편찬되었으며, 오늘날 세계 기록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다.

중앙 집권을 위해 지도와 지리지를 편찬하다

조선은 중앙 집권과 국방 강화에 활용하기 위해 지도와 지리 지를 편찬하였다. 15세기에는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세계 지도인‘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 북방에 대한 관심이 반영 되어 압록강 이북까지 상세히 기록한 전국 지도가 만들어졌다. 16세기에도 많은 지도가 제작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조선 방역지도’ 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일본 류코쿠대학)

지리지는 15세기에 편찬한“팔도지리지” 와“동국여지승람” , 이를 보충해 16세기에 발간한“신증동국여지승람” 이 있다. 이 책

들은 군현의 연혁, 지세, 인물, 풍속, 산물, 교통 등을 자세히 기록했는데, 이는 당 시 국토에 대한 인문 지리적 지식 수준이 높았음을 보여 준다.

서적 편찬의 목적 1 고려사 서문

2 동국여지승람 서문

태조께서는 고려의 왕조는 이미 폐허로 되었으나 그 역사

책을 펴서 그 일을 따져 보고 지도를 펼쳐 그 자취를

를 사라지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관(史官)들에게 고려

본다면, 태산(泰山)에 오르거나 황하(黃河)의 근원을 끝까

역사를 편찬케 하셨는데 …… 야사(野史)들의 각종 기록을 참

지 파고들 것 없이 8도의 지리가 마음과 눈에 환하여 문

고하고 관부의 옛 장서들을 들추어서 삼가 3년간 노력을 다

을 나가지 않고도 손바닥을 보듯이 분명히 알 것입니다.

하여 힘껏 고려 일대의 역사를 완성했습니다. …… 이것으로 역사의 밝은 거울을 후대 사람들에게 보이며 선악의 사실들 을 영원히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152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➊ [자료 1, 2]를 통해 두 서적의 편찬 목적을 말해 보자. ➋ [자료 1, 2]와 같은 목적으로 편찬된 서적을 조사해 보자.


민간에서는 여전히 불교가 유행하다

성리학이 국가의 주도 이념이 되면서 불교를 비롯한 다른 사상은 크게 위축되 었다. 건국 직후부터 불교 사원이 소유한 토지와 노비를 회수하는 정책이 지속적 으로 추진되었고, 도첩제의 실시로 승려의 수가 제한되었다. 세종 때에는 모든 종 파를 선종과 교종으로 통합하였다. 그러나 궁중과 민간에서는 여전히 불교가 신봉되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왕족의 명복을 비는 행사가 자주 시행되었다. 세조 때에는 원각사에 탑을 ���우고 간경도감을 설치해 불경을 간행하는 등 불교가 일시적으로 중흥의 기회를 맞기 도 하였다. 하지만 사림의 비판으로 불교의 사회적 위상은 크게 약화되었다.

도교와 민간 신앙

정부는 재정의 낭비를 막기 위해 도교 행사를 축소하고 사원을 정리하였다. 다 만 소격서를 설치하고,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전설이 깃든 마니산 참성 단에서 초제를 거행하였다. 풍수지리설과 도참사상은 한양 천도에 반영되었으며, 양반 사대부의 묘지 선정 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밖에 무격신앙, 산신 신앙, 삼신 신앙, 촌락제 등이 백성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서울 원각사지 10층 석탑(서울 종로 탑골 공원)

조선 시대 사람들의 단군 인식 조선의 단군은 동방에서 처음으로 천명을 받은 임금이고, 기자는 처음으로 교화 를 일으킨 임금입니다. 평양부로 하여금 때에 맞추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소서. -“태조실록”-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직후, 당시 예조 관리가 민족의 시조인 단군에게 제사를 지 내자고 주장한 말이다.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국가에서 기자와 동명왕에게만 제사를 지냈 는데, 여기에 단군을 포함하자는 것이다. 이는 조선을 세운 사대부들이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여기며, 중국에서 첫 나라를 세웠

단군 사당(평양)

던 요임금과 대등한 군주로 인식했음을 보여 준다. 이후 평양에서 단군에 제사를 지내는 제도가 만들어지고, 별도의 사당도 건립되었다. 또한, 강화 참성단에서 거행되던 초제도 줄곧 시행되었다. 단군에 대한 인식은 16세기 사림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 당시 사림은 유교 경전인“논어” 에 현인으로 등장하는 기자가 우리 민족에게 선진 문물을 가르쳤다는 전설을 받아들여, 단군보다는 기자를 민족의 시조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이러한 분위기에 비판적인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단군 조선 이 정통의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게 되었다.

강화 참성단(인천 강화)

5. 양반 문화의 발달과 문화의 새 경향

153


성리학의 발달

이황을 제사 지내는 도산 서원(경북 안동)

이이를 제사 지내는 자운 서원(경기 파주)

서원은 유교 교육과 함께 본받을 만한 유학자를 정해 제사를 올리는 기능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여러 서원에서 이름 있는 유학자들의 제사를 받들었다. 이황은 30여 곳, 이이는 20여 곳이 넘는 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렇게 많은 서원에서 두 인물의 제사를 받든 이유는 무엇일까?

성리학의 두 흐름

성리학은 고려 말 신진 사대부에 의해 수용되어 조선의 건국과 그 과 정에서 이루어진 사회 개혁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성리학 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신진 사대부는 두 세력으로 나뉘었다. 개혁의 논리를 내세우며 역성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권근 등은 관 학파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불교, 도교, 풍수 지리설, 민간 신앙 등을 포용해 고려 시대부터 누적되어 온 사회 문제의 “주례” 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중시하였다. 또 해결 방안을 강구했고, ✽ 신진 사대부의 분화

한, 왕조 교체 이후 문물제도를 정비하면서 왕권을 안정시키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는 데 앞장섰으며, 부국강병을 위해 과학 기술 등 실용적인

✽주례

주나라의 제도를 기록한 유교

학문을 중시하였다.

경전으로, 정도전은 조선의 통치

한편, 고려에 대한 충절을 내세워 새 왕조 건설에 참여하지 않았던 길재 등은

규범을 제시할 때 이를 모범으

향촌에 내려가 교육과 향촌 사회의 건설에 주력하였다. 길재의 학풍을 계승한 사

로 삼았다.

림은 도덕과 의리에 바탕을 둔 왕도 정치를 강조하였다. 이들은 성종 때 본격적으 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며 공신과 외척 세력의 횡포를 비판하였다. 또한, 향촌 자 치를 추구하여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사림은 성리학적 이념과 체제를 바탕으로 당시의 사회 모순을 극복하려고 노력 했으며, 불교와 도교 등 성리학 이외의 사상을 배척하였다. 아울러 인간의 심성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학문을 연구하면서 과학 기술 등 실용 학문을 천시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154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이기론을 중심으로 성리학이 발달하다

조선의 성리학은 인간의 심성을 성찰하는 ✽이기론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이

✽이기론

일반적으로‘이(理)’ 란 인간의

기론 연구에 선구적 역할을 한 인물은 서경덕과 이언적이었다.

심성을 포함한 모든 사물의 생

서경덕은 현상 세계를 떠난 진리는 존재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이’ 보다 실재적 인‘기’ 를 중심으로 세계를 설명하였다. 반면, 이언적은‘이’ 를 중심으로 도덕적

성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 이고,‘기(氣)’ 는‘이’ 의 원리가 현실로 구체화되는 데 필요한 현상적 요소로 이해된다. 어느

세계관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였다. 뒤를 이어 조선 성리학의 독자적 체계를 세운 인물은 이황과 이이였다. 이황은

것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주리론 과 주기론으로 구분된다.

“주자서절요” 와“성학십도”등을 저술하여, 주자의 학설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체 계화하였다. 인간 심성의 근원인‘이’ 를 강조한 이황의 사상은 김성일, 유성룡 등 에게 이어져 영남 학파가 형성되었으며, 일본 성리학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 이이는“동호문답” 과“성학집요” 를 저술하고,‘이’ 와‘기’ 를 통일적으로 이해하 면서 현실 세계를 구성하는‘기’ 를 중시하였다. 현실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이 강

✽이이의 개혁적 성향

이이는 대공수미법의 실시, 향약

한 그의 사상은 조헌과 김장생 등으로 이어져 기호 학파가 형성되었다.

의 전국적 확대 등 16세기 사회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예학의 발달

17세기에는 성리학의 학문적 연구가 심화되면서 성리학의 이론을 윤리 강령이 나 행동 규범으로 구체화한 예학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는 양 난 이후 흐트러진 사회 질서를 재정비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예학은 김장생에 의해 학문적 차원으로 발전하여 상장 제례의 의식을 바로잡 고 성리학적 가족 제도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형식만을 중 시했고, 예에 대한 붕당 간의 입장 차이가 정쟁의 구실이 되는 폐단도 나타났다.

성리학적 명분론 사림은 성리학적 명분론이 구현되는 조선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성리학적 명분 론이란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지아비와 지어미 등에게 각자 지켜야 할 사회적 분수 가 있으며, 이에 따른 의무와 규범을 충실히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것이 상 명하복(上命下服)의 종적 질서 속에서 조화를 이룰 때 세상이 안정된다고 여겼다. 이러한 논리에서 사림은 인격을 도야한 사족이 농민을 유교의 가르침대로 교화하 여 이끌어 가는 사회를 이상으로 삼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향약을 실시하였다. 또한, 성리학적 명분론에 따라 양반 중심의 신분제와 남성 및 장자 중심의 가부장적 가족 제 도 등이 강화되었다. 대외 관계에서는 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화이론적 세계관이 형성되었다. 오륜행실도의 충신도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5. 양반 문화의 발달과 문화의 새 경향

155


실학의 대두 오늘날에 부족한 것은 강론이 충분하지 못한 데 있지 않고, 오직 강론만 하고 시행 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 최근 호남의 선비 유형원은 바로 그것을 잘 강구하였 습니다. ……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그 고을의 수령에게 명하여 그 책(반계수록)을 가져다 바치게 하여 전하께서 볼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곧 전국에 나누어 반포해서 시행하게 하소서.

-“영조실록”-

자신의 거처에‘실사구시(實事求是)’네 글자를 붙여 놓았던 영조는 위 상소를 받 아들여 실학의 선구자인 유형원의“반계수록” 을 인쇄해 바치도록 명하였다.‘실 사구시’ 란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한다는 의미이다. 실제적인 것에서 올바른 것 을 구하려는 실학은 어떻게 발달하였을까?

성리학이 절대화되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은 양 난 이후에 흔들리던 지배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성 리학적 질서를 절대적 가치로 내세웠다. 이들은 성리학을 대성시킨 주자를 성인 으로 추앙하고 주자의 학설만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였다. 이에 다른 사상을 포용해 유교 경전의 재해석을 시도한 윤휴와 박세당을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또한, 17세기 이후 나타난 사회・경제적 변화를 외면하고, 성리학적 질서를 강 화해 변화의 움직임을 억압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성리학은 더 이상 현실 문제를 송시열(국립중앙박물관)

✽사문난적(斯文亂賊)

유교 교리를 어지럽히거나 어긋 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 키는 말이다.

해결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새로운 학문 경향의 대두, 양명학과 실학

성리학이 절대화되는 가운데, 일부 학자는 양명학을 연구하고 실학 사상을 내 세우는 등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전개하였다. 양명학은 성리학의 비현실성을 비판하면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실천성을 강조했으나, 성리학자에 의해 이단으로 배척되었다. 일부 소론 학자에 의해 명맥을 이어 오던 양명학은 18 세기 초 정제두가 본격적으로 연구하면서 강화 학파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구체 적인 현실 개혁의 방안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실학은 17, 18세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해결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새로운 학문 경향이자 사회 개혁론이었다. 사회・경제적 현실의 변화에 발맞춰 실학자는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 사회 체제 전반에 걸쳐 개혁을 단행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 경향은 이수광과 한백겸 등에

✽고증학

의해 제기되었다. 이후 실학은 비판적이며 실증적인 논리를 펴며 농업과 상공업

청을 통해 들어온 학문으로, 객

중심의 개혁론, 국학 연구 등으로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청에서 전해진 ✽고증

관적이고 실증적인 연구 방법을 강조하였다.

156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학과 서양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해 토지 개혁을 주장하다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의 실학자는 농민 생활의 안정을 가 장 우선시하였다. 이들은 토지 소유의 불균형으로 농민 생활이 어려워졌다고 판단하여 토지 제도의 개혁을 적극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수취 체제와 군사, 행정 조직 등 국가 제 도를 개혁하자고 역설하였다. 이들을 중농 학파 또는 경세치용 (經世致用) 학파라고 부른다.

반계 서당(전북 부안) 실학자 유형원이“반계수록” 을 쓰고

중농 학파의 선구적 역할을 한 유형원은“반계수록” 에서 균전

제자를 가르쳤던 곳이다.

론을 주장하였다. 균전론은 관리, 선비, 농민 등에게 차등을 두어 토지를 분배해 자 영농을 육성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자영농을 중심으로 군사와 교육 제도를 재정비 하고, 노비 세습제를 혁파하자고 주장하였다. 성호 학파를 형성할 정도로 많은 제자를 육성한 이익은 한전론을 주장하였다. 한전론은 매매를 금지한 영업전을 설정함으로써 최소한의 농민 생활을 보장하고, 그 밖의 토지는 매매를 허용해 점진적으로 토지 소유를 균등하게 하려는 것이었 다. 또한, 그는 노비 제도를 비판하면서, 당장 폐지할 수 없다면 노비 매매만이라 도 금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성호 이익(실학박물관)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은 여전론을 주장하였다. 여전론은 한 마을을 단위로 토지를 공동 소유하고 공동으로 경작하여, 노동량에 따라 그 수확량을 분배하는

✽정전제

전국의 토지를 국유화하여 정전

일종의 공동 농장 제도였다. 하지만 정약용은 이 구상을 당장 실현하기 어렵다고

(井田)을 편성한 후, 그중 9분의

와“경세유표” 에서 통치자는 백성을 보고, ✽정전제를 제시하였다. 또“목민심서”

1은 공전으로 만들어 조세를 충

위해 존재해야 하며, 권력은 본래 백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자는 토지 개혁론이다.

당하고, 나머지는 농민에게 분배

실학자들의 토지 개혁론 1 이익의 한전론

2 정약용의 여전론

국가는 마땅히 한 집의 생활에 맞추어

여(閭: 마을)에는 여장을 두고 1여의 농토를 여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재산을 계산해서 토지 몇 부(負)를 1호의

함께 다스리고 같이 농사짓게 하되, 내 땅 네 땅의 구별이 없고, 오직 여장

영업전(永業田)으로 하여, 당 제도처럼 한

의 명령에 따르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매양 하루 일을 하면 여장은 그들의

다. 땅이 많은 자는 빼앗아 줄이지 않고 미

노력을 장부에 매일 기록하여 두었다가, 추수할 때에 곡식의 수확을 전부

치지 못하는 자도 더 주지 않으며, 돈이 있

여장의 집으로 운반해 놓고, 그 곡물을 나누되 먼저 나라에 바치는 세금을

어 사고자 하는 자는 비록 천백 결이라도

떼어 놓고, 그 다음은 여장의 녹(봉급)을 주고, 그 나머지를 가지고 장부에

허락하여 주고, 땅이 많아서 팔고자 하는

기준하여 분배한다.

-“여유당전서”-

자는 다만 영업전 몇 부 이외에는 허락하 여 준다.

➊ [자료 1, 2]를 토대로 한전론과 여전론의 특징을 말해 보자. -“곽우록”-

➋ [자료 1, 2]를 참고하여 실학자들이 추구했던 개혁의 목표를 추론해 보자.

5. 양반 문화의 발달과 문화의 새 경향

157


상공업 진흥과 북학을 주장하다

유수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의 실학자는 도시 인구 증가와 상품 화폐 경 제의 발전 등 변화하는 현실에 주목하였다. 이들은 적극적인 상공업 진흥과 기술 혁신을 통해 부국 안민을 이루자고 주장하여 중상 학파 또는 이용후생(利用厚生) 학파라고 불린다. 청과 적극 교류하면서 선진 문물을 수용하려 했기 때문에 북학 파라고도 한다. 박지원(실학박물관)

유수원은“우서” 에서 상공업을 진흥하기 위해서는 상업을 천시하는 생각을 버 리고, 사농공상의 직업적 평등과 전문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홍대 용은 청을 왕래하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 혁신과 문벌 제도의 폐지를 강조 하면서, 성리학의 극복을 부국강병의 전제로 인식하였다. 북학 사상은 박지원에 이르러 한 단계 더 발전하였다. 박지원은

소비가 생산을 촉진한다

생산과 유통이 중요하다고 보고, 수레와 선박의 이용, 화폐 유통의

비유컨대, 재물은 대체로 우물과 같은 것 이다. 퍼내면 차고, 버려두면 말라 버린다. 그 러므로 비단옷을 입지 않아서 나라에 비단을 짜는 사람이 없게 되면 여공이 쇠퇴하고, 찌 그러진 그릇을 싫어하지 않고 기교를 숭상하 지 않아서 장인이 작업하는 일이 없게 되면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양반전” 과“호질”등의 한문 소설에서 놀고먹는 양반을 호되게 비판하였다. 박제가는 청에 다녀온 후“북학의” 를 저술하여 청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자고 주장하였다. 또한, 수레와 선박의 이용 확대 및 소비 촉 진을 통한 생산력의 증대를 역설했고, 무역선을 파견하여 청에서

기예(技藝)가 망하게 된다. - 박제가,“북학의”-

박제가가 소비를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행해지는 세계 무역에도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북학 파의 주장은 19세기 후반 개화사상으로 계승・발전되었다.

우리 것에 대한 관심, 국학 운동으로 일어나다

실학자는 민족의 전통과 현실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바탕으로 중국 중심 세계관 을 비판하고 국사, 국토 지리, 국어 등 국학을 적극 연구하였다. 안정복은“동사강목” 에서 중국 중심의 사관에서 벗어나 민족사의 독자적 정통성 을 내세웠다. 이종휘와 유득공은 각각“동사” 와“발해고” 를 지어 고구려사와 발해사 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이긍익은“연려실기술” 에서 실증적・객관적인 서술로 조선 시대의 정치와 문화를 정리했으며, 한치윤은“해동역사” 에서 고조선 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실증적으로 서술하였다. 산업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지리지와 지도도 편찬되었 다. 이중환의“택리지” 는 각 지방의 자연환경, 풍속, 인물 등을 자 세히 수록하였다. 정상기의‘동국지도’ 는 최초로 100리 척을 사용 하여 정확도를 높였으며, 김정호의‘대동여지도’ 는 산맥, 하천, 포 구, 도로망 등을 자세히 표시하고, 목판에 새겨 대량으로 제작하려 대동여지도(안성군 부분)

158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한 점이 특징이다.


한글에 대한 학문적 연구도 활발해졌다. 우리말 음운에 대한 신경준의“훈민정 음운해” 와 유희의“언문지” 가 저술되었고, 우리말 어휘를 수집한 많은 서적이 편 찬되었다.

새로운 과학 기술이 발달하다

조선 후기의 과학은 중국을 통해 서양 과학 기술이 수용되어 크 게 발전하였다. 청에서 사용되던 서양 역법인 시헌력이 도입되었 고, 세계 지도인‘곤여만국전도’ 가 전래되어 조선인의 세계관이 확 대되었다. 김석문, 홍대용 등은 지전설을 주장하여 중국 중심의 세 계관을 비판하는 근거를 제공하였다. 의학에서는 허준과 이제마 등 을 중심으로 자주적인 의학 연구가 이루어졌고, 서양 의학도 전해

홍대용이 만든 혼천의(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연구하기 위해 사용된 기구이다.

져 종두법이 실험되기도 하였다. 한편, 과학 기술의 중요성을 확신했던 정약용은 스 스로 많은 기계를 제작하여 현실에 적용하였다. 그는 서양의 기술 서적인“기기도설” 을 참고해 거중기를 만 들어 수원 화성을 축조하는 데 이용했고, 정조의 화성 행차를 위해 한강에 설치하는 배다리를 설계하였다. 이 밖에“농가집성” ,“산림경제”등 많은 농서가 저 술되어 농업 기술이 발달하였다.

곤여만국전도(경기 남양주 봉선사)

실학의 의의 대체 천자는 어찌하여 있게 되었는가? …… 다섯 가 (家)가 하나의 인(隣)이 되는데, 다섯 가의 추대를 받은 자 가 인장(隣長)이 될 것이며, 다섯 인이 일 리(一里)가 되는 데 다섯 인의 추대를 받은 자가 이장(里長)이 될 것이며, …… 여러 현 우두머리의 공동 추대를 받은

국가 사회 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혁해 백성의 의사가 정치에 반영되는 사회를 실현하자는 정약용의 글이다. 이 글에는 군 주는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군주의 권력은 본래 백성 으로부터 나왔으며, 군주라도 백성의 뜻에 어긋나면 바꿀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즉, 군주의 자의에 따른 하향적 정치 를 백성의 힘에 의한 상향적 정치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

자가 제후가 될 것이며, 제후의 공동 추대를

이는 오늘날의 민주주의 사회 모습과 매우 흡사해, 실학이 근

받은 자가 천자가 될 것이므로, 천자란 무릇

대 지향적인 국가와 사회를 건설하려 한 학문임을 보여 준다.

군중이 밀어서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무

그러나 대부분의 실학자는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 향촌에서

릇 군중이 밀어서 이룬 것이라면 또한

생활하거나 일생 동안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이들의 제

군중이 밀지 아니하면 천자가 될 수

안이 국가 정책에 적극 반영되지 못한 점은 실학이 지닌 한계

없는 것이다. - 정약용,‘탕론(湯論)’-

였다.

5. 양반 문화의 발달과 문화의 새 경향

159


새로운 사상의 등장 서양의 간특한 설이 언제부터 나왔으며 누구를 통해 전해진 것인지 모르겠 으나, 세상을 현혹시키고 백성을 속이며 윤리와 강상을 없애고 어지럽히는 것 이 어찌 진산(珍山)의 권상연, 윤지충보다 더한 자가 있겠습니까. 제사를 폐지 하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위패를 불태우고, 조문을 거절하는 것으로도 그치지 않고 그 부모의 시신을 내버렸으니, 그 죄악을 따져 보자면 어찌 하루라도 이 하늘과 땅 사이에 그대로 용납해 둘 수 있겠습니까.

-“정조실록”-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큰 사건이 일어나 나라 전 체가 떠들썩했다. 천주교 신자 윤지충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신주를 불 태우고 제사를 폐지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윤지충이 처형되고 관련자들이 처벌 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처럼 정부의 탄압 속에서 천주교의 교세가 확대되어 간 이유는 무엇일까?

새로운 시대를 예언하다

지배층의 수탈과 잦은 재난, 질병 속에서 농민들은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였다. 그러나 통치 이념인 성리학은 더 이상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 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말세의 도래나 왕조의 교체 등을 예언하는 움직임이 널리 퍼졌다. 대표적인 예언서인“정감록” 은 민중의 가혹한 삶을 구원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 어 줄‘진인(眞人)’ 의 출현을 예고하였다. 또 현세에서 얻지 못한 행복을 미륵 신 앙을 통해 해결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살아 있는 미륵불을 자처하며 고통과 불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 좌 상(전북 고창) 19세기에 이 불상 의 명치 부분에 있는 감실에서 비 결이 나오면 한양이 망한다는 이

안에 허덕이는 민중을 현혹하려는 무리도 나타났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꿈꾸는 민중의 변혁 의지를 담고 있는 비기나 미륵 신 앙은 19세기 사회 변혁 운동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야기가 널리 퍼졌다.

천주교, 서학에서 신앙으로 받아들이다

서학이란 이름으로 불린 천주교는 17세기경 베이징을 왕래하던 사신에 의해 서 양 문물의 하나로 소개되었다. 학문적 호기심에서 연구되던 서학은 18세기 후반 현실 개혁을 꿈꾸던 남인 계열의 일부 실학자에 의해 점차 신앙으로 받 아들여졌다. 이들은 천주교 서적을 읽고 스스로 신앙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천 주교는 모든 인간이 천주 앞에 평등하다는 사상과 내세의 영생을 약속 하는 교리를 앞세워, 현실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며 점차 천주교 초기의 미사

160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민간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천주교 신자가 제사를 거부하고 조상의 신주를 없애는 사건이 일어나자, 정부는 유교적 질서를 부정한다는 이유로 천주교를 박해하였다. 순조 때에는 권 력을 잡은 노론 강경파가 많은 천주교 신자를 처형하였다(신유박해, 1801). 또 한, ✽백서 사건 등을 계기로 천주교가 서양의 침략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확 산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천주교는 백성 사이에 활발하게 전파되어, 조선 교구가 설정되고 프랑스 선교사들이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였다.

✽백서 사건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천주교 신 자인 황사영이 청의 베이징 주 교에게 조선에 군대를 보내 도 와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보 내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동학, 보국안민을 내세우다

지배층의 수탈과 서양 세력의 침략적 접근으로 위기의식이 고 조되는 가운데, 경주의 몰락 양반인 최제우는 동학을 창시하였 다(1860). 동학은 서양 세력과 연결된 서학을 배격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학 내가 또한 동방에 태어나서 동방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이나 학은 동학이니라. 하물며 땅이 동과 서로 구분되어 있으니, 서쪽이

동학은‘사람이 곧 하늘(인내천)’ 이라는 사상을 내세워 인간 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강조했고,‘보국안민’ 을 앞세워 서양과 일

어찌 동쪽이 되고 동쪽이 어찌 서쪽이 될 수 있겠 는가? …… 우리 도는 이 땅에서 받았으니 이 땅 에서 먼저 펴 나가면 자연히 온 세계로 퍼져 나갈

본 세력의 침략을 배척하였다. 또‘지금 세상은 운이 다했고 새

것이니, 어찌 이것을 서학의 이름으로 말할 수 있

로운 세상이 열린다.’ 라는 후천 개벽 사상은 당시 농민의 사회 변

겠는가? -“동경대전”-

혁 운동에 혁명적 기운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동학의 교리는 지배층의 폭정에 시달리던 농민층의 폭 넓은 공감을 얻어 교세가 급속히 확장되었다. 이에 정부는 세상 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명을 씌워 최제우를 처형하고 동학을 탄압하였다.

천주교와 동학 1 제사에 대한 천주교의 입장

2 제사에 대한 동학의 입장

죽은 사람 앞에 술과 음식을 차려 놓는 것은 천주교에서

우습다! 저 사람은 저의 부모 죽은 후에 / 신(神)도 없다

금하는 바입니다. 살아 있을 동안에도 영혼은 술과 밥을 받

이름하고 제사조차 안 지내고, 오륜에 벗어나서 오로지 빨

아먹을 수 없거늘, 하물며 죽은 뒤에 영혼이 어떻게 하겠습

리 죽기만을 바라니 무슨 일인가. / 부모 없는 혼령 혼백,

니까? 먹고 마시는 것은 육신의 입에 공급하는 것이요, 도

저는 어찌 유독 있어 / 천국으로 올라가 무엇할 것인가. 어

리와 덕행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비록 지극한 효자라 할지

리석은 소리 말았어라.

-“용담유사”-

라도 맛 좋은 것이라 하여 부모가 잠들어 있는 앞에 차려 드릴 수 없는 것은 잠들었을 동안에는 먹고 마시는 때가 아

➊ [자료 1]을 통해 천주교가 탄압받은 이유를 말해 보자.

닌 까닭입니다. …… 사람의 자식이 되어 어찌 허위와 가식

➋ [자료 1, 2]를 토대로 천주교와 동학의 차이점을 설명해 보자.

의 예로써 돌아가신 부모님을 섬기겠습니까? -“상재상서”-

5. 양반 문화의 발달과 문화의 새 경향

161


다양한 문예 활동 양반: 나는 사대부의 자손인데. 선비: 아니, 나는 팔대부의 자손인데. 양반: 팔대부는 또 뭐야? 선비: 아니, 양반이란 게 팔대부도 몰라? 팔대부는 사대 부의 갑절이지 뭐. …… 양반: 첫째, 지식이 있어야지. 나는 사서삼경을 다 읽었네. 선비: 뭣이, 사서삼경? 나는 팔서육경도 읽었네. 양반: 도대체 팔서육경이 뭐냐? 초랭이: 나도아는육경, 그걸몰라? 팔만대장경, 중의바라경, 봉사안경……

- 안동 하회 별신굿 탈놀이 -

각자 다른 신분을 나타내는 탈을 쓴 광대들이 춤을 추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조금 모자란 듯한 선비가 자신의 지위와 지식을 뽐내는 양반을 조롱하고, 민중을 상징하는 초랭이까지 양반의 가식을 비꼬고 나섰다. 이러한 풍자가 백성 사이 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탈놀이 등 공연 예술이 활발해졌다. 공연 예술이 조선 후기에 등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양반 문화에서 서민 문화로

양반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자리 잡으면서 불교적 색채가 강했던 고 려의 귀족 문화는 쇠퇴하고 유교적인 양반 문화가 발달하였다. 이에 따 라 양반이 꿈꾸던 이상과 관심을 담은 문예 활동이 주류를 이루었다. 초기에는 지배층이 성리학 이외의 학문과 사상에 포용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비교적 다양한 경향의 양반 문화가 전개되었다. 16세기에는 사림이 중앙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선비적인 취향이나 가치관 휘호(강희언)

이 문화 전반에 걸쳐 확산되었다. 후기에는 서민의 경제력이 향상되고 서당 교육이 확대되면서 서민층 이 새로운 문화의 주체로 성장하였다. 이에 양반을 중심으로 유교 테두 리 안에서 이루어지던 문예 활동에서 벗어나, 중인과 서민층이 향유하 는 서민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역관이나 서리 등의 중인층과 부 를 축적한 상공업자, 부농층의 문예 활동이 활발하였다. 서민 문화에서는 서민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작품의 배경 도 현실 세계로 옮겨졌다. 또한, 인간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경향 이 강해졌고, 양반의 위선을 비판하거나 사회의 부정과 비리를 풍자하 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서민 문화는 우리 민족 문화가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 를 제공했으며, 민중의 의식 수준을 높이고 현실 사회의 모순에 대한 비

서당도(김홍도, 국립중앙박물관)

162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판 의식을 확산시키는 데도 기여하였다.


문학 활동과 공연 문화가 활발해지다

초기에는 새 왕조의 탄생과 민족의 자주 의식을 드러낸 악장과 한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용비어천가” 와“동 문선” 이다. 서거정이 지은“동문선” 은 역대 시문 중에서 뛰어난 것 만을 뽑아 모은 것으로, 우리글에 대한 자주 의식을 드러냈다.

우리글에 대한 자주 의식 우리나라의 문장이 살아 있는 듯 용솟음치 니 옛날 어떤 글에 못지않다. 이것은 바로 우 리의 글이다. 송・원의 글이 아니고 한・당의

16세기 이후에는 시조와 가사 문학이 활기를 띠었다. 시조에서는

글도 아니다. …… 삼국 시대부터 지금에 이

자연 속의 삶을 표현한 윤선도와 순수한 인간 본연의 감정을 표현

르기까지 시와 문장을 뽑았다. 이치에 맞고

한 황진이가 유명하며, 가사 문학에서는 정철의 작품이 뛰���났다. 후기에는 문학의 저변이 서민층까지 확대되면서 한글 소설과 사

깨끗하고 바른 글과 백성을 다스리고 가르치 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가려 종류대로 나눠 일백 삼십 권으로 정리하였다.

-“동문선”-

설시조 등이 유행하였다. 서얼에 대한 차별 철폐와 탐관오리 응징 을 주장한 허균의“홍길동전” 과 신분을 뛰어넘는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담 은“춘향전” 은 이 시기에 유행한 대표적인 한글 소설이다. 사설시조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서민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묘사하거나 익살스 럽게 풍자하였다. 또한, 중인과 서민층의 창작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일종의 문학 동호인 모임 인 시사가 많이 만들어졌다. 시사는 창작 활동을 하거나 역대 시인의 시를 모 아 시집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공연 형식으로 진행되는 판소리와 탈놀이도 큰 인기를 얻으며 서민들의 문화 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 한편, 한문학은 현실 사회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비판하였다. 박지원은“양 반전” 과“허생전”등을 통해 양반 사회의 허구성을 지적하며 자신의 실학 정신 을 표현한 한문 소설을 썼고, 정약용은 삼정의 문란을 폭로한 많은 한시를 남 겼다.

책읽는여인(윤덕희, 서울대학교박물관)

판소리와 탈놀이 소리꾼과 고수(북치는 사람)를 빙 둘러싸고 양반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판소리를 감상하고 있다. 창과 사설로 엮어 나가는 판 소리는 솔직한 표현으로 서민층은 물론 양반에게도 큰 인기를 끌 었다. 당시 12마당이 있었다고 전하는 판소리는‘춘향가’ 와‘심 청가’등 다섯 마당이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양반의 위선과 사회 모순을 풍자하는 탈놀이도 큰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시나 포구 등에서 공 연된 탈놀이는 서민 의식이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평양도십폭병풍에 그려진 판소리 모습(서울대학교박물관)

5. 양반 문화의 발달과 문화의 새 경향

163


분청사기에서 청화 백자까지

자기 공예는 고려 말부터 유행하던 분청사기가 조선 초에도 계속 제작되었다. 소박한 무늬와 자유로운 양식의 분청사기는 전국의 자기소에서 만들어져 궁중이 분청사기 (삼성미술관 리움)

나 관청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16세기 이후에는 선비의 취향과 잘 어울리는 백자 가 유행하였다. 후기에는 백자가 계속 유행하는 가운데 푸른색으로 그림을 그려 넣은 청화 백

순백자 (국립중앙박물관)

자가 만들어졌다. 청아한 한국적 정취를 잘 자아내는 청화 백자는 주로 제기와 문 방구 등 생활용품이 많았다. 이 밖에 쇠뿔을 쪼개어 무늬를 새긴 화각 공예와 자 개 공예 등도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유행하였다.

청화 백자 (국립고궁박물관)

다양한 건축물이 조성되다

조선 시대에는 시기에 따라 다양한 건축물이 세워졌다. 초기에는 궁궐과 관아, 성곽, 학교 건축이 중심을 이루었다. 건축물은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 신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크기와 장식에 제한을 두었다. 또한, 왕실의 비호를 받아 불교와 관련된 건축물이 세워졌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된 해인사 장경판전 과 대리석으로 만든 서울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대표적이다. 16세기에는 사림의 학문적, 정치적 근거지인 서원이 많이 세워졌다. 사찰의 가 람 배치 양식과 주택 양식이 실용적으로 결합된 서원 건축에는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한 선비들의 기품과 검소, 소박함이 잘 드러난다. 17세기에는 양반 지주와 부유한 상인의 지원으로 규모가 큰 사원 건축물이 지어 졌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과 보은 법주사 팔상전 등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사원 건 축물로, 외형은 다층이지만 내부는 하나로 통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18세기에는 정조가 당시 문화적 역량을 결집

숭례문(서울 중구)

보은 법주사 팔상전(충북 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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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해 수원 화성을 건립하였다.

수원 화성(경기 수원)


고사관수도(강희안, 국립중

몽유도원도(안견, 일본 덴리대학)

앙박물관)

시대정신을 담은 화풍이 유행하다

초기에는 지배층이 유교 이외의 사상에도 포용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도교나 노장사상의 분위기가 반영된 그림이 그려졌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관리 출신

묵죽도(이정, 국립중앙박물관)

인 강희안의‘고사관수도’ 와 전문 화원인 안견의‘몽유도원도’ 가 있다. 16세기에 는 이정의‘묵죽도’등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사군자를 그린 문인화가 유행하 였다. 후기에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지고 현실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그림과 글씨에서도 한국적 고유색을 표현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림에서는 정 선이 진경 산수화라는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하여‘인왕제색도’ 와‘금강전도’등 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김홍도와 신윤복은 사회・경제적 발전을 배경으로 당 시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 모습을 그린 풍속화로 유명하였다. 또한, 이름 없는 화가들이 그린 민화도 유행하였다. 민화는 예술성을 추구하기보다는 건강과 장수 등 소박한 소망과 기원을 표현하였다. 한편, 서예는 양반의 필수 교양으로 중시되었다. 전기에는 안평 대군과 한호 등 이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19세기에는 김정희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는 금석학 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여러 필법을 연구하여 독창적인 추사체를 창안하였다. 추사체(김정희, 간송미술관)

인왕제색도(정선, 삼성미술관 리움)

단오풍정(신윤복, 간송미술관)

까치와호랑이(삼성미술관리움)

5. 양반 문화의 발달과 문화의 새 경향

165


Ⅲ 구분 정치 체제

조선 전기

중앙 조직

의정부와 6조 중심

지방 조직

8도 - 부・목・군・현

사회 구조

의 기능 강화

•명: 사대 외교, 공무역 •여진: 교린 정책, 4군 6진 개척, 무역소 설치 •일본: 교린 정책, 대마도 정벌, 3포 개방

•왜란과 호란 발생 •청: 북벌 운동 → 북학론 대두, 개시・후시 무역 •일본: 통신사 파견

토지 제도

과전법 → 직전법 → 관수관급제 → 직전법 폐지

병작반수에 의한 지주제 확산

수취 체제

•전세: 전분6등법, 연분9등법 •전세: 영정법(토지 1결당 4~6두 정도) •공납: 가호를 기준으로 토산물 징수 → 방납의 •공납: ③ (토지를 기준으로 쌀, 면포, 동전 폐단 징수) •군역: 정남에게 부과 → 대립ㆍ방군수포 발생 •군역: 균역법(1년에 군포 1필 징수)

경제 생활

중농 정책・상공업 통제 →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 경제 체제

농업 생산력 증대, 민간 수공업・사상의 성장 → 상품 화폐 경제 발달

신분

•법제적으로 ① •실제로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

하층민의 신분 상승, 서얼과 중인의 신분 상승 운 동 → 양반 인구 증가로 지위 하락, 상민과 노비 인 구 감소

가족, 여성

자녀 균분 상속, 여성의 재혼 금지

장자 중심 상속, 여성의 정절 강조

성리학의 발달(이기론 중심), 불교와 도교 쇠퇴

성리학의 절대화, 양명학 발달(강화 학파 형성), 실 학 등장

대외 관계・무역

경제 체제

조선 후기

사상 문화 서적 편찬

•15세기:“고려사” ,“동국통감” ,“국조오례의” ,“삼 강행실도” “동사강목” ,“발해고” ,“택리지” •16세기:“동국사략” ,“기자실기” ,“이륜행실도”

조선의 대외 관계

⑥ ⑤

조선 후기의 정치 변화

166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창의

인성

문화유산 홍보 책자 만들기 유네스코에 등재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중 한 개를 선택하여, 문화유산 홍보 책자를 만들어 보자.

1. 유네스코에 등재된 다음 문화유산 중 한 개를 선택하여 자료를 수집한다. 세계 유산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석굴암・불국사, 창덕궁, 수원 화성,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 경주 역사 유적 지구, 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 조선 왕릉, 한국의 역사 마을 하회와 양동

인류의 무형 유산

종묘 제례 및 종묘 제례악, 판소리, 강릉 단오제, 강강술래, 남사당놀이, 영산재, 처용무,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 가곡, 대목장, 매사냥술, 줄타기, 택견, 한산모시짜기, 아리랑

세계의 기록 유산

조선왕조실록, 훈민정음, 직지심체요절, 승정원일기, 조선 왕조 의궤,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경판, 동의보감, 일성록, 5・18 민주화 운동 기록물, 난중일기, 새마을 운동 기록물

2.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홍보 책자를 작성한다. 3. 홍보 책자를 작성할 때에는 그 문화유산이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재된 이유를 서술한다.

, 종묘 으 동양의 파르테논 모신 유교 사당 왕비의 신주를

조 역대 왕과 주 종묘는 조선 왕 입니다. 종묘의 건축물 중의 하나 한 엄 장 고 되 제 로서, 가장 정 건축물 중 세계 어진 단일 목조 들 만 에 대 시 같은 잘 건물인 정전은 기 이래로 원형이 니다. 또한, 16세 됩 정 추 로 으 것 평가되어 세계 에서 가장 큰 라는 점이 높이 이 본 표 의 당 사 교 보존되어 있는 유 었습니다. 되 재 등 문화유산에

종묘 정전

례를 재현하고

묘제 요한 제사였던 종 멋, 종묘 제례 의 가장 크고 중 라 나 때 종묘의 또 다른 있습니다. 종 대 시 일요일에 조선 례악도 거행되고

는 종묘 제 5월 첫째 주 이상 , 무용을 포함하 종묘에서는 매년 이루고, 500년 하는 기악과 노래 주 연 때 릴 드 용 등이 조화를 무 사 제 례 의 께 함 과 악 와 음 이 있습니다. 이 높이 평가 의장물, 의례 있습니다. 이 점 과 제기, 악기와 문화라고 할 수 절차, 의례 음식 례 례 의 의 적 는 합 례 종 제 묘 래된 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 으로 선정되었습 되고 있어 현재 형 유산 걸작’ 무 계 세 거의 그대로 보존 ‘ 코 스 01년 유네 종묘 제례악도 20 되어 종묘 제례와

종묘 제례악

대단원 마무리

167


척화비(부산 가덕도)

영조 정순왕후 가례도감 (국립중앙박물관)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갑신정변의 주역들

사발통문


독립문 대한매일신보와 베델

후기 의병

1.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적 접근과 조선의 대응 2. 문호 개방과 근대적 개혁의 추진 3. 구국 운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의 전개 4. 일제의 침략과 국권 수호 운동의 전개 5. 개항 이후의 경제와 사회・문화의 변화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아시아 침략 과정을 알아보고, 열강의 침략적 접근 속에서 추진된 흥선 대원군의 대내외 정책 을 설명할 수 있다. 동아시아 3국의 문호 개방 과정과 개항 이후 조선의 개화 정책 및 이를 둘러싼 사상적 갈등을 알아보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동학 농민 운동의 성격과 갑오개혁의 근대적 개혁 내용을 이해하고, 독립 협회와 광무개혁에 나타난 근대 국민 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을 이해할 수 있다. 일제의 한국 강점 과정을 파악하고, 이에 맞선 애국 계몽 운동과 의병 운동 등의 국권 수호 운동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개항 이후 외세의 경제적 침탈과 이에 맞선 경제적 구국 운동을 알아보고, 당시 사회 모습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

서울에 가설된 전차(1903)


1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적 접근과 조선의 대응

서양 세력의 침략적 접근과 동아시아의 대응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아프리카 지도를 영국의 색으로 칠할 것을 인정하는 신이라고 생각한다. …… 가능하다면 나는 유성조차 삼켜 버리고 싶다. - 세실 로즈,“유언집” (1902) -

남아프리카 케이프 주 식민지 총독을 지낸 영국 정치가 세실 로즈가 아프리카의 남・ 북단을 두 발로 딛고 당당하게 서 있다.“유성조차 삼켜 버리고 싶다.” 라는 그의 말에 는 식민지 확장에 혈안이 된 서양 열강의 탐욕이 잘 드러난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 은 무력을 앞세워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렸다. 이처럼 19세기 후반~20세기 초, 서양 열강이 추진한 침략적인 대외 팽창 정책을 제국주의 라고 한다. 제국주의의 등장은 동아시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세실 로즈

제국주의가 대두하다 ✽독점 자본주의

소수의 거대한 기업이 시장과 사

서양 열강은 산업 혁명 이후 자본주의가 급성장하면서 19세기 후반에 막대한

회 전반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자본을 모은 대기업이 시장을 지배하는 ✽독점 자본주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

독점적 단계를 일컫는 말이다.

에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서 다른 지역을 식민지로 삼아 원료를 약탈하고 상품

✽사회 진화론

생물 진화론의‘적자생존’논리 가 인간 사회에 적용된 것이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것 은 자연의 법칙이라는 주장이다.

을 판매했으며, 잉여 자본을 투자하였다. 열강의 국민도 식민지 건설이 실업 등 을 해결하고 국가의 위신을 높여 주는 수단이라고 생각하여 침략 정책을 지지하 였다. 제국주의 열강은 우수한 백인이 미개한 지역에 문명을 전달해 주는 것은 당연 하다는 백인 우월주의와 ✽사회 진화론을 내세워 강대국의 약소국 지배를 합리화 하였다. 이와 같이 제국주의는 독점 자본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가 결합하면서 등장하였다. 서양 열강, 아시아로 진출하다

제국주의가 심화되면서 유럽 각국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무역을 장악하 고 식민지를 넓히고자 하였다. 제국주의 선두 국가였던 영국과 프랑스에 이어 19 세기 후반에는 국가적 통일을 이룬 독일과 이탈리아가 식민지 쟁탈에 나섰다. 이 들은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거쳐 동북아시아로 접근하였다. 뒤이어 미국도 일본 을 거쳐 아시아로 접근하였다. 이로써 동아시아는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되 제국주의의 특징

170

었다.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청, 전쟁에 패배하여 나라의 문을 열다

19세기 초 영국은 차와 비단의 수입으로 청과의 무역에 서 적자가 심해지자 인도산 아편을 청에 밀수출하였다. 이 로 인해 막대한 은이 유출되고 국민 건강이 악화되자, 청 정부는 아편 단속을 강화하였다. 이를 트집 잡아 영국은 제 1차 아편 전쟁(1840~1842)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영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고 난징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청은 홍콩을 영국에 넘겨 주고, 광저우를 비롯한 몇 개의 항구를 개항하였다. 난징 조약은 청이 최초로 서양 열강과 맺은 근대적 조약이었으나 불평

난징 조약 체결(1842)

등 조약이었다.

위기의 청, 반외세 개혁 운동을 펼치다

개항 후 무능한 청을 타도하고 개혁을 실시하자는 태평���국 운동(1851~1864) 이 일어났다. 이 틈을 타 영국과 프랑스가 개방 확대를 노리며 제2차 아편 전쟁 (1856~1860)을 일으켰다. 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톈진 조약과 ✽베이징 조약을 맺

✽베이징 조약(1860)

톈진을 추가로 개항하고 주룽

어 추가로 개항하였다. 이후 서양의 침략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반도를 영국에 할양하였다. 러시

청은 서양 열강의 군사력과 과학 기술의 우수성을 실감하고 중체서용의 원칙 아래 양무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통일성이 없었고, 기존 체제를 근

아는 청과 영국・프랑스 간의 강화를 알선한 대가로 연해주를 양도받았다.

본적으로 개혁하지 못했기 때문에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홍장, 서양 기술의 수용을 주장하다 서양의 기계는 농기구, 방직 기계, 인쇄 기계, 도자기 제조 장 비 등을 생산하여 백성의 일상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 다. 놀라운 것은 기계가 물과 불의 힘을 이용하여 노동력과 자 원을 절약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 이렇게 수십 년이 지 나면 중국의 부유한 농민과 상인들 사이에서는 이익을 추구해 서양식 기계 생산을 추진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 이홍장의 상소문 금릉 기기국 난징에 세운 군수 공장이다.

이홍장은 중국의 전통적 체제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선진 기술을 받아들인다는 중체서용 사상에 입각해 양무운동을 펼쳤다. 이에 여러 회사와 공장, 신식 학교를 세우며 개혁을 추진했지만, 자본 부족과 보수 세력의 반대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청・일 전쟁(1894~1895)의 잇따른 패배로 양무운동의 한계가 드러나자 낡은 제도를 개혁하려는 변법자강 운동이 전개되고, 열강의 침략과 크리스트교의 확산에 반발하여 의화단 운동도 일어났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1.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적 접근과 조선의 대응

171


일본, 불평등 조약 체제 속에서 메이지 유신을 추진하다

아편 전쟁에서 청이 패배한 사실은 일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을 강제로 개항시키기 위 해 함대를 이끌고 왔다. 도쿠가와 막부는 미국의 위협에 굴복해 개 항했고(1854), 이후 미국의 강요에 의해 치외 법권과 최혜국 대우를 인정하는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이와쿠라 사절단 가운데 전통 옷차림을 한 사람이 사절단의 대표인 이와쿠라 도모미이고, 오른쪽에서 두 번 째가 이토 히로부미이다.

개항을 반대하던 세력은 서양식 무기의 우월함을 확인하고 개항 을 인정하였다. 이들은 막부 체제를 타도하고 메이지 천황 중심의 신정부를 수립하였다(메이지 유신, 1868).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과 문명개화를 외치며 근대 국가를 건설하 기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신분 제도를 폐지했으며, 징병제를 채택 하고 국민 교육을 실시하였다. 또 근대화를 적극 추진하기 위해 이와 쿠라 사절단을 미국과 유럽에 파견하였다.

제국주의 길로 나선 일본

메이지 유신 후 일본은 조선에 새로운 국교 수립을 요청하는 국서 를 보냈지만, 조선은 국교 수립을 거부하였다. 이를 빌미로 일본 정 부 내에서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이 제기되었다. 이후 일본은 타 이완을 침략한 뒤,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또 유구를 강제로 합병 하였다. 제1회 제국 의회(1890)

한편, 상인, 지식인 등의 일부 세력이 자유 민권 운동을 벌이자, 일 본 정부는‘대일본 제국 헌법’ 을 제정하고 제국 의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국왕 중심의 정부 권력과 대외 팽창 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개화를 앞세워 침략을 정당화하다 문명에는 밖으로 드러나는 사물과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얻는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아시아

그 안에 담겨 있는 정신의 구별이 있

를 벗어나는 것’ 이다. 비록 일본이 이미 정신적으로는 아시아를 벗어났지

다. 밖으로 드러나는 문명은 취하기

만, 이웃의 두 나라(조선과 청국)는 개혁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이

가 쉽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문명은

나라들의 유교적 가르침은 모두 위선적이고 뻔뻔할 뿐이다. 중국과 일본의

찾아내기 어렵다. 나라의 문명화를

개혁이 실패한다면, 이들은 곧 세계열강에 나라를 빼앗길 것이다.

꾀하는 데 어려운 쪽을 먼저 하고 쉬

-“탈아론” (1885) -

운 쪽을 나중에 해야 한다. -“문명론의 개략” (1875) -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개화론을 주장해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했지만, 탈아론을 주장 하여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제공하였다.

172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조선의 바다, 낯선 배들이 몰려오다 경기도 남양 앞바다에 모습을 나타낸 콜로라도호(1871)

“서양 배 한 척이 조선 배 백 척을 이긴다!” 1792년 10월 영국 군함 프로비던스호가 조선 해안을 탐험・ 조사하던 중 부산에 머물렀을 때, 이 배에 올라가 모습을 둘러본 한 천주교 신자가 감탄했던 말이다. 여기에는 나무가 아니라 철로 만든 거대한 서양 배에 대한 두려움과 부러움이 동시에 담겨 있다. 조선 정부는 서양인들이 해안에 표류해 오면 관원을 보내 사정을 물어보 고 인도적 차원에서 식량이나 땔감을 넉넉히 지급하거나, 그들의 의향에 따라 중국을 통해 귀환시켜 주는 등 호의를 베풀었다. 하지만 이양선이 통상을 요구할 경우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이양선뿐만 아니라 서양인과 서양 물품도 조선인의 눈에 기이하게 비쳤다. 노란 머리칼, 푸른 눈, 칼등처럼 높은 코에 문신까지 새긴 서양 인을 보고 두려우면서도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러시아 배에 오른 조선 인은 처음으로 피아노 소리를 듣고 놀라 자빠졌다고 한다. 또한, 영어 ‘스카이’ 를‘스께(天)’ 로 표기하는 등 한자, 한글, 영어를 병기하면서 선원 이나 표류민과 의사를 소통하기 위해 애쓰기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인은 이양선의 출현에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꼈지만, 무턱대고 거부감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양선과 서양인에 대한 호기심은 점차 국제 정세 의 변화와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이해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조선 말기 이양선 출몰

이양선을 조사하러 가는 문정관  “최근 이양선이 출몰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해안 경비와 국경의 상황에 관계됩니 다. 이들의 동정을 살피는 일과 오가는 일을 직접 살펴보 고 보고하는 것은 참으로 소홀해서는 안 됩니다.” -“일성록” (1848) -

조선 화공이 그린 미국 선원의 모습(1855)

1

조선 연안에 이양선이 출몰한 이유를 설명해 보자.

2

조선인들은 이양선과 서양인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1.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적 접근과 조선의 대응

173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 “궁도령은 궁이나 지킬 것이지 굽실굽실 신발을 질질 끌며 무엇 때문에 재상 집에 나다니는가?”대원군 이 어느 날 세도 재상 김좌근을 만나러 집으로 찾아갔을 때, 마침 그의 집에 있던 호조 판서 심의면이 김 좌근에게 대원군을 조롱하며 한 말이다.

- 황현,“매천야록”-

흥선 대원군 이하응은 총명하고 행동이 비범하여 어려서부터 늘 세도 정치가들의 감시에 시 달렸다. 이를 피하고자 그는 시정의 무뢰배들과 어울려 놀았고, 때로는 곤궁함을 드러내며 세 도가들에게 금품을 구걸하여 조롱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철종이 승하하고 자신의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대원군이 되어 국정을 장악하였다(1863). 왕족에 대한 안동 김씨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기꺼이‘거렁뱅이 부랑자’ 가 되었던 흥선 대원군 이하응! 그가 빼어 든 개혁의 칼 날은 어디를 향하고 있었을까? 흥선 대원군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다

세도 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농민 봉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서양 세력의 침략적 접근으로 인한 위기의식이 높아지는 가운데 권력을 잡은 흥선 대원군은 과감한 개혁으로 위기를 타개하고자 하였다. 그는 우선 정치 기강을 바로잡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세도 정치를 펴던 안동 김씨 일족을 쫓아내고 당파, 지역,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 였다. 또한, 왕권을 제약하던 비변사를 사실상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 대전회통(국립고궁박물관)

을 부활시켜 정치와 군사 업무를 나누어 맡게 하였다.“대전회통” ,“육전조례”등 새로운 법전도 편찬하여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정치 기강을 바로잡고 중앙 집권 체제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왕실의 위엄을 높이려 한 경복궁 중건

흥선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임 당백전(국립중앙박물관) 실질 가치가 상평 통보의 5`~`6배밖에 안 되었으나 명목 가치는 100배나 되었다.

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그러나 공 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원납전이란 기부금을 강제로 거 두었다. 당백전이라는 고액 화폐도 발행했는데, 이로 인해 물가가 폭등하였다. 또 백성을 강제로 동원했고, 도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징수했으며, 양반들의 묘지림까지 베어냈다. 경복궁은 8년 만에 완 공되었지만(1872), 무리한 중건으로 양반뿐만 아니라 백성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흥선 대원군 때 중건한 경복궁

174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서원을 철폐하다

흥선 대원군은 전국 600여 개 서원 중 47개만 남기고 철폐하였 서원 철폐

다. 서원은 양반이 붕당을 결성하여 세력을 확대하는 근거지로 변 질되었고, 면세의 혜택도 누렸다. 지역 농민을 사실상 지배하면서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가혹하게 수탈하여 많은 원성을 받기도 하였다. 따라서 서원 철폐

용서하지 않겠다. 하물며 서원은 우리나라에

는 왕권 강화와 국가 재정의 확충, 민생 안정 등 다양한 효과를 거

서 존경받는 유학자를 제사하는 곳인데, 지금

둘 수 있는 개혁이었다. 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보수적 유생과의 대

은 도둑의 소굴이 되어 버렸으니 말할 것도

립으로 흥선 대원군은 큰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되었다.

없다.

- 박제형,“근세조선정감”-

수취 체제를 개혁하여 민생 안정에 노력하다

흥선 대원군은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전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서 양반과 토호들이 함부로 농민의 토지를 빼앗지 못하게 하고, 토지 대장에서 누락된 토지(은결)를 찾아내는 데 힘썼다. 또한, 군정의 폐단을 시 정하기 위해 많은 양반의 반대에도 호포제를 실시하여 상민 호포제 실시로 나타난 부담층의 변화(경상도 영천 지방)

에게만 거두던 군포를 양반에게도 징수하였다.

문제가 가장 많았던 환곡은 사창제를 실시하여 개혁하고자 하였다. 사창은 리 (里)를 단위로 설치되어, 그 마을 안에서 덕망과 경제적 여유를 갖춘 사람을 뽑아 운영을 맡겼다. 이는 지방관과 향리의 횡포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 1 경복궁 타령 에- 에헤이야 얼널널 거리고 방에 흥애로다.

2 호포제 실시 나라 제도로서 인정(人丁)에 대한 세를 신포라 했는데,

조선 팔도 좋다는 나무는 경복궁 짓느라 다 들어간다.

충신과 공신의 자손에게는 모두 신포가 면제되어 있었다.

도편수라는 놈의 거동 보소.

대원군은 이를 수정하고자 동포법(호포법)을 제정하였다.

먹통 메고 갈팡질팡한다.

조정 관리들이 반대하자“충신과 공신이 이룩한 사업도 종

에-나 떠난다고 통곡 말고

사와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지금 그 후손이 면세를 받기

나 다녀올 동안 네가 수절을 하여라. ……

때문에 일반 평민이 법에 정한 세금보다 무거운 부담을 지

남문 열고 바라 둥당 치니 계명산천에 달이 살짝 밝았네.

게 된다면 충신의 본뜻이 아닐 것이다.” 라며 단호히 그 법

경복궁 역사가 언제나 끝나 그리던 가족을 만나 볼까.

을 시행하였다.

- 박제형,“근세조선정감”-

➊ [자료 1]에 드러나 있는 당시 민중의 경복궁 중건에 대한 시각을 서술해 보자. ➋ [자료 1, 2]를 참고하여 흥선 대원군이 실시한 개혁 정책 중 양반 유생층과 농민층의 반발을 불러온 개혁을 각각 지적해 보자.

1.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적 접근과 조선의 대응

175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양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 는 일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흥선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에는 전의에 불타는 그의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사실 대원군은 처음 부터 서양 세력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의 아내와 딸, 며느리가 천주 교 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집권 초기에는 프랑스와 수교를 시도한 적도 있다. 그러했던 대원군이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강력하게 펼쳤던 이유는 무엇일까? 통상을 요구하는 서양 세력의 침략과 조선의 단호한 대응이 빚어낸 역사적 사건들을 살펴보고, 대원군의 대외 정책을 어떻게 평 가해야 할지 생각해 보자. 척화비(경남 함양)

1866

천주교 박해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나다 병인박해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60년 러시아가 청으로부터 연해주를 차지해 국경을 접하게 되자 조선의 위

1866

병인양요

기감은 높아졌다. 이에 흥선 대원군은 국내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

1868

오페르트 남연군 묘 도굴 미수 사건

와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려 했으나 교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

1871

신미양요

한 가운데 천주교를 금지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자,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를 탄압하여 수많은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 선교사들을 처형하였다(병인 박해). 이 무렵 대포로 무장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 대동강까지 들어와 통 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상선을 약탈하고 인명을 살상하였다. 이에 분노한 평 양 관민은 평안감사 박규수의 지휘 아래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 침몰시켰다(제 너럴 셔먼호 사건).

프랑스 침략군을 물리치다

프랑스는 병인박해를 구실로 군함을 보내 조선을 침 략하였다. 프랑스군은 강화도에 30일 동안 주둔하면서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였다. 이에 맞서 한성근 부대가 문수산성에서, 양헌수 부대는 삼랑성(정족산성)에서 프 랑스군을 물리쳤다. 결국 프���스군은 더 견디지 못하고 철수하였다(병인양요). 프랑스군은 물러가면서 주요 시설에 불을 지르고 강 화읍에 보관된 외규장각 도서 등 귀중한 문화재와 재물 영조 정순왕후 가례도감 의궤 반차도 중 일부(국립중앙박물관) 프랑스가

을 약탈하였다. 이 과정에서 5,000여 권의 귀중한 왕

약탈해 갔던 외규장각 도서 297권은 145년 만에 영구 임대 형식으로 돌려 받

실 도서가 불에 타버렸다.

았다.

176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남의 조상 무덤을 파헤치다니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두 차례나 조선에 들어와 통상 을 요구했으나 모두 거절당하였다. 그러자 미국인 자본 가와 프랑스 선교사의 지원을 받아 무장한 선원들을 데리 고 덕산군 관아를 습격하였다. 또한, 흥선 대원군의 아버 지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려 했으나 주민의 항거로 실패 하였다. 이 일로 조선에서 서양인에 대한 반감이 더욱 확 산되었고, 흥선 대원군도 서양 세력에 대해 더욱 강경한 태도를 갖게 되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전개

미국 함대를 물리치고 척화비를 세우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미국은 조선에 배상금 지불과 개항을 요 구했으나, 흥선 대원군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군함 5척과 1,200여 명 의 병력으로 강화도에 침공해 왔다. 미군이 초지진을 함락하고 광성보를 공격해 오자, 어재연 등이 이끄는 조선군 수비대는 격렬한 항전을 벌였지 만 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은 민심을 결속시키고 장기전에 대 비하면서 미군을 압박하였다. 결국 미군은 조선을 개항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고 판단해서 물러갔다(신미양요). 신미양요 이후 흥선 대원군은 서양과의 통상 수교를 거부하는 정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 그의 대외 정책은 국권 수호 를 위한 자주적 노력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개화를 지연시켜 외세 침탈을

초지진에 상륙하는 미국 해병대

가속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흥선 대원군의 대외 정책 평가 너희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흥선 대원군이 미군 측에 보낸 서한

너희 나라와 우리나라 사이에는 원래 왕래도 없었고, 은혜

지난번에 그대들의 선박이 포를 쏘아 대치하는 일이 있었

를 입거나 원수를 진 일도 없다. 이번 덕산 묘지에서 저지른

는데, 호의라고 운운하면서 이런 일을 일으키니 심히 개탄스

사건은 사람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무기를 빼

럽다. 조정에서는 귀국 함대와 관련한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

앗고 백성의 재물을 강탈하는 것도 사리로 볼 때 용납할 수

도록 엄히 명하였다. 그러나 귀국의 배들이 우리 영토로 침범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 신하와 백성은 있는 힘을 다하여 한마

해서 들어오니, 수비와 방어를 담당하고 있는 군민들이 어찌

음으로 네놈들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다짐할

좌시하고만 있겠는가? 따라서 지난번의 사건은 그대들이 자

뿐이다.

초한 일이다.

-“고종실록” (1868) -

-“고종실록” (1871) -

흥선 대원군이 서양 세력의 통상 수교 요구를 거부한 이유는 무엇일까?

1.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적 접근과 조선의 대응

177


2

문호 개방과 근대적 개혁의 추진

개항과 불평등 체제의 성립

우리 힘을 조선에서 행사하기 위해 이때를 좋은 기회로 삼아 금일 1~2 척의 군함을 소규모로 파견하는 것은 뒷날 혹은 대규모로 파견해야만 하 는 근심이 없기를 바라는 뜻으로 …… 삼가 이에 상신하니 빨리 영단을 내리시기를바랍니다. - 일본 외무성 관리의 군함 파견 건의서(1875. 4.) -

윗글에는 한두 척의 군함만을 파견하여 대규모 전쟁이나 침략의 효과 를 노리면서, 이를 통해 조선을 개항시키고자 하는 일본의 의도가 드 러나 있다. 이에 따라 일본은 1875년 8월 운요호를 강화도에 파견하여 운요 호 사건을 일으켰다. 그 결과 조선에는 어떤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을까?

침략하는 일본군 영종도를침략하는 침략하는일본군 일본군 영종도를 영종도를 침략하는 일본군

조선에서는 개화론이, 일본에서는‘정한론’ 이 대두되다 ✽통상 개화론

능동적으로 문호를 열고 통상하 자는 주장이다.

1873년 흥선 대원군이 권력에서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정치에 나서면서 대외 정책에 변화가 나타났다. 정부 내에서 열강의 군사적 침략을 피하고 서양과 교류 하여 그들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박규수・오경석 등의 ✽통상 개화론이 서 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조선과 새로운 외교 관계를 맺으려다가 실패하자, 무사 계 층의 불평을 해외로 돌리기 위해 조선을 무력으로 침공하자는‘정한론’ 이 일어났 다. 이 주장은 단행할 시기를 둘러싸고 반대에 부딪혀 당장 실현되지 않았다. 포함 외교에 의해 이루어진 개항

일본은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운요호 사건을 일 박규수(실학박물관)

으켰다. 운요호가 허락도 없이 강화도로 다가오자 강화 수비대 는 위협 포격을 가하였다. 일본은 이 과정에서 조선 수비대가

박규수의 자주적 개국론

일본 국기를 모독했다고 억지를 부리며, 군대를 영종도에 상륙

지금 우리는 …… 자주적으로 개국해야 합니 다. 일본과의 외교 교섭에서 우리나라가 주도권을 잡고 능동적으로 개국하지 않는다면 일본이 무력

시켜 살인과 약탈을 저질렀다. 그 후 대규모 군함과 병력을 보 내 조선에 문호 개방을 강요하였다.

으로 개항을 요구할 것이고, 그러면 조선은 굴복

결국 조선은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일본의 요구를 그대로

하게 되어 국가적으로 큰 위험에 부딪히게 될 것

수용하여, 조・일 수호 조규(강화도 조약, 1876)를 체결하게 되

입니다.

178

-“환재집”-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었다.


불평등한 조약, 조선 침략의 발판이 되다

강화도 조약은 우리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이지만, 일본에 전적으로 유리한 불평등한 조약이었 다. 이 조약에서 조선은 자주 국가라고 명시되었는데, 이 는 일본이 청의 간섭을 배제하여 침략을 쉽게 하려는 의 도였다. 또 부산 등 3개 항구의 개항과 일본 상인의 자유 로운 무역 활동 보장, 조선 연안에 대한 측량권, 영사 재 판권(치외 법권) 등도 포함되었다. 이처럼 조선의 주권을 침해한 강화도 조약에는 일본의 정치・경제・군사적 침

강화도 조약을 맺기 위해 회담하는 조선과 일본

략 의도가 담겨 있었다. 뒤이어 조・일 수호 조규 부록과 조・일 무역 규칙이 체결되었다. 이에 개항장 에서 일본 화폐의 유통이 허용되었고, 양곡의 무제한 유출이 가능해졌으며 일본 의 수출 상품에 대해서도 관세가 부여되지 않았다. 그 결과 조선은 일본의 경제 침략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조・일 수호 조규와 그 후속 조약의 내용과 성격 1 조・일 수호 조규(강화도 조약, 1876. 2.) 강화도 조약의 주요 내용

일본의 의도

제1관`: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제4관`: 조선 정부는 부산과 제`5관에서 제시하는 두 항구(뒤에 원산과 인천으로 결정)를 개방하고 일본 인이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통상할 수 있게 한다. 제7관`: 조선국 연해를 일본국의 항해자가 자유롭게 측량하도록 허가한다. 제9관`: 양국 국민은 각자 임의로 무역을 하며, 양국의 관리는 조금도 이에 간여하거나 금지 또는 제한 하지 못한다.

일본 상인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 보 장 목적

제10관`: 일본국 국민이 조선국이 지정한 각 항구에 머무르는 동안 죄를 범한 것이 조선국 국민에게 관 계되는 사건일 때는 모두 일본국 관원이 심판한다.

2 조・일 수호 조규 부록과 조・일 무역 규칙(1876. 6.) •일본국 국민은 본국에서 사용되는 화폐로 조선국 국민이 보유하 고 있는 물자와 마음대로 교환할 수 있다(수호 조규 부록 제``7`관). •조선국 항구에 머무르는 일본인은 쌀과 잡곡을 수출입할 수 있

➊ [자료 1]의 강화도 조약의 주요 내용을 읽고 오른쪽 빈칸 을 채워 보자.

➋ [자료 2]를 보고 조・일 수호 조규 부록과 조・일 무역 규칙이 조선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추론해 보자.

다(무역 규칙 제6조). •일본국 정부에 소속된 모든 선박은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무 역 규칙 제7조).

2. 문호 개방과 근대적 개혁의 추진

179


조선은 미국과 연합해야 한다 황준헌의“조선책략” (1880) 조선이라는 땅덩어리는 실로 아시아의 요충을 차지 하고 있어 그 형세가 반드시 다툼을 불러올 것이다.

개항 이전에도 박규수는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주장하였 다. 이러한 주장은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이 청의 외교관이 쓴

조선이 위태로우면 중동(中東)의 형세도 위급해진다.

“조선책략” 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 책

따라서 러시아가 강토를 공략하려 한다면 반드시 조

에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조선은 중국, 일본, 미국과

선이 첫 번째 대상이 될 것이다. …… 러시아를 막을 수 있는 조선의 책략은 무엇인가? 오직 중국과 친하

손잡아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유생들

며[親中] 일본과 맺고[結日] 미국과 연합[聯美]함으로

은 거세게 반발했지만, 정부 내에서는 미국과 외교 관계를

써 자강을 도모하는 길뿐이다.

맺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게 되었다.

서양 국가 중 최초로 미국과 근대적 외교 관계를 맺다

“조선책략” 이 들어올 무렵 미국은 조선에 진출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때 ✽거중 조정

양국 중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청은 러시아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과 미국의 수교를 적극 알선하였다. 조

핍박을 받을 경우 반드시 서로

선에서도 미국에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되면서 서양 국가 가운데 최초로 조・미

돕고 분쟁을 원만히 해결하도록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1882).

주선한다는 것이다. ✽최혜국 대우

한 나라가 제3국에 부여한 가장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은 강화도 조약과 달리 ✽거중 조정, 관세 부과 등의 조항 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치외 법권, ✽최혜국 대우 등이 포함된 불평등

유리한 조건을 조약 상대국에도

한 조약이었다. 이어 정부는 미국 공사가 서울에 부임한 답례로 미국에 보빙사를

부여하는 것이다.

파견하였다. 이후 조선은 영국, 독일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1883). 러시아는 청의 알선 없이 수교했고(1884), 프랑스와는 천주교 공인 문제로 조약 체결이 지연되었다(1886).

미국에 간 최초의 조선인, 보빙사(1883) ➊

❶ 보빙사 일행 앞쪽 왼쪽 부터 홍영식, 민영익, 서 광범이다.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유길준이다. ❷ 보빙사가 머물던 보스턴 벤덤 호텔에 게양된 태 극기

고종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자주독립을 지키는 데 미국이 힘이 되어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수교를 맺은 후 8명의 젊 은이들을 미국에 파견하였다. 그들이 바로 1883년 미국에 첫발을 내디딘 보빙사였다. 그들은 미국 대통령을 만나 고종의 신임장을 전달하였다. 이 신임장이 뉴욕 헤럴드 신문에 한글로 번역되어 게재됨으로써, 조선이 고유 문자를 가진 문화국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 려졌다. 그들의 임무는 미국의 여러 사회상과 제도를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천명하는 데 있었다.

180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동아시아 3국의 개항 중국, 일본, 조선 등 동아시아 3국은 아편 전쟁, 페리 내항, 운요호 사건 등 포함 외교에 의해 개항되었 으며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과정과 방법은 각국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중국의 개항 아편 전쟁 당시 영국 군함의 공격으로 청의 함대가 산산이 부서지고 있는 모습이다. 제국주의 열강은 청의 광대한 토지와 풍부한 생산물에 관심을 가지 고 접근해 왔다. 청은 서양을 변방의 오랑캐로 인식하고 통상을 거부했 으나, 아편 전쟁에서 참패한 뒤 문호를 개방하였다. 일본의 개항 수많은 미국 군함이 바다에서 위용을 과시하는 긴장감 속에 페리 제 독과 부하들이 요코하마에 상륙하는 모습이다. 일본은 청이 영국에 허무하게 무너진 데 큰 충격을 받았다. 따라서 일본은 미국이 함대를 몰고 오자 무력으로 대항하지 않고 별다른 저항 없이 개항하였다. 조선의 개항 측량을 가장해 개항의 빌미를 마련하기 위해 출동했던 일본 군함 운 요호의 모습이다. 조선은 청・일의 개항 소식을 접하고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강력하 게 펼쳤다. 그러나 일본의 무력 시위에 위기를 느끼고 일본과 서양은 다 르며 전통적 외교 관계를 회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개항하였다. 동아시아 3국이 맺은 불평등 조약의 주요 내용 청영국

•5개 항구를 개항해서 통상을 허용한다. •영국의 영사 재판권을 인정한다. •공행을 폐지하고 자유롭게 통상한다. •영국에 최혜국 대우를 부여한다.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 - 난징 조약(1842) - 후먼 추가 조약(1843) •미국 선박에 연료 및 식량을 공급한다.

•5개 항구를 개항하고 에도, 오사카의 시장을 개방한다. •일본의 관세를 상호 협의하여 결정한다. •미국의 영사 재판권을 인정한다. - 미・일 화친 조약(1854) - 미・일 수호 통상 조약(1858) -

일본 - •2개 항구의 개항과 영사의 주재를 인정한다. 미국 •미국에 최혜국 대우를 부여한다. •부산 이외에 2개 항구를 개방한다.

•일본 상품에 항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 조・일 무역 규칙(1876) •일본에 최혜국 대우를 부여한다. - 조・일 수호 조규(1876) - 조・일 통상 장정(1883) -

조선 - •일본인은 항구에서 자유롭게 왕래하며 통상한다. 일본 •일본의 영사 재판권을 인정한다.

1

자료를 보고 3국의 개항에 대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설명해 보자.

2

청과 일본이 외국과 맺은 조약에 공통으로 담긴 불평등한 내용을 찾아보고, 조선의 강화도 조약과 비교해 보자.

2. 문호 개방과 근대적 개혁의 추진

181


개화사상의 형성과 개화 정책의 추진 나의 아버지 오경석은 조선의 역관으로, 중국에 파견되는 사절을 따라 중국을 자주 왕래하였 다. …… 평상시 가장 친교가 있는 친구 중에 의관 유홍기란 분이 있었다. 그에게 아버지는 중국 에서 가져온“해국도지” 와“영환지략”같은 각종 서적을 주며 연구를 권하였다. 그 뒤 ��� 사람은 사상적 동지로서 결합해 조선의 정세가 풍전등화라 탄식하고 언젠가는 일대 혁신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상의하였다.

- 오세창의 회고 -

조선 후기에 역관은 각종 사절단의 통역으로 중국을 자주 왕래하면서 서양 문물에 접할 기회가 많았다. 역관 오경석 역시 박규수가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수행하는 등 여러 차례 방문했기 때 문에 세계 정세에 밝았다. 바람 앞의 등불 같던 나라를 위해‘일대 혁신’ 을 주장한 개화파의 사상은 어 오경석(우리나라 최초의 인물

떻게 형성・발전되었을까?

사진)

북학파의 사상을 이어받은 초기 개화사상가들

18세기 말 북학파 실학자들은 청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서양의 기술 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고 주장하였다. 또한, 부국 안민을 위해 상공 업을 진흥하고, 양반 중심의 사회 질서를 깨뜨려야 한다고 생각하였 다. 이와 같은 그들의 사상은 19세기 후반 박규수와 오경석, 유홍기 등 초기 개화사상가들에게 계승・발전되었다. 해국도지에 실린 지구 전도(국립중앙도서관)

초기 개화사상가들은“해국도지” ,“영환지략”등의 서적을 통해 서 양의 기술과 문물, 국제 정세 등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서양인의 침략에 맞서려면 자주적으로 문호를 열고 통상하면서 우수 한 기술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박규수의 사랑방은 개화의 산실

개화사상이 확산되고 개화파가 형성되다

양반 출신인 박규수의 주변에는 중인 오경석, 유홍기뿐만 아니라 개

“신사상은 박규수 집 사랑방에서 나왔

화에 뜻을 함께하는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 젊고 유능한 양반 자제

소. 김옥균과 홍영식, 서광범 그리고 박영

들이 모여들었다. 젊은 개화파 인사들은 정계에 진출해 자신의 뜻을

효 등이 재동의 박규수 사랑에 모였소.

펴고자 했고,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직접 접하면서 개화의 필요성을

……“연암집” 의 귀족을 공격하는 글에서 평등사상을 얻었소.”…… 이처럼 박영효 는 당시 신사상이라는 것이 바로 평등론, 민권론이었다고 말하였다. - 이광수의 박영효 면담,“동광” (1931) -

더욱 절감하였다. 개화사상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서양의 제도와 과학 기 술을 수용함으로써, 전통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근대 국가를 수립하 려는 혁신 사상이었다. 하지만 임오군란(1882) 이후 청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자, 개화 정책의 추진 방법과 청・일 양국에 대한 인식 등을 둘 러싸고 이견이 생겨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로 나뉘었다.

182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온건 개화파, 유교 질서를 유지하면서 개화를 추진하다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 온건 개화파는 청의 양무운동을 본받아 유교 질서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여 사회를 점진적으로 개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서양의 종교를 금지하고 유교 도덕과 정치 제도를 지켜나가면 서도 충분히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을 ✽동도서기론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우리의 전통적인 제도와 사상 [동도]을 지키면서 서양의 근대 적인 기술과 과학[서기]을 받아 들이자는 주장이다. = 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

이라고 한다. 또한, 온건 개화파는 청과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유지하여 열강의 침략으로부 터 조선의 독립을 보존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급진 개화파, 근대 국가 수립을 꿈꾸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 급진 개화파는 문명개화론을 표방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보기로 삼았다. 그리하여 서양의 과학 기술뿐만 아니라 그 바탕 이 되는 근대 사상과 제도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들은 민권 신장과 군주권 제한, 신분 제도 폐지, 상공업 진흥, 종교의 자유 등 을 실현하여 정치・사회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 해서는 청의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키는 것을 급선무로 여 겼다. 이러한 입장에서 급진 개화파는 스스로를 개화당, 독립당으로 일컬었다.

개화파의 형성과 발전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의 주장 1 온건 개화파의 사상

2 급진 개화파의 사상

•단지 부강하다고 해서 자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정교(政敎: 정치

오늘날의 급선무는 반드시 인재를 등

와 교화)를 닦고 우리의 백성과 나라를 보호하여 외국과의 관계에서 분쟁

용하며 국가 재정을 절약하고 사치를

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것이 실로 자강을 하는 데에 힘써야 할 일

억제하며, 문호를 개방하고 이웃국들과

입니다.

- 수신사 김홍집이 귀국 후 고종에게 한 말(1880) -

친선을 도모하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러

•서양 나라들과 수호를 맺는 것을 점점 사교(邪敎)에 물드는 것이라고 말한

나 나의 생각에는 실사구시하는 것이

다. …… 그러나 수호를 맺는 것은 수호를 맺는 것이고, 사교를 금하는 것은

제일이라고 여겨진다. …… 일본은 법

사교를 금하는 것이다. …… 서양의 종교는 사교이므로 마땅히 음탕한 음악

을 변경(변법)한 이후로 모든 것을 경장

이나 미색(美色)처럼 여겨서 멀리해야겠지만, 서양의 기계는 이로워서 진실

했다고 들었다.

로 백성의 생활을 편리하게 할 수 있다.

- 김옥균,‘치도약론’ (1883) -

- 임오군란 후 김윤식이 기초한 교서,“고종실록” (1882) -

➊ 본문과 자료를 바탕으로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의 주장을 비교해 보자.

2. 문호 개방과 근대적 개혁의 추진

183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개화 정책을 추진하다

강화도 조약 체결 직후 정부는 일본의 근대화된 모습과 국 제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제1차 수신사 김기수를 파견하였다. 이어 정부는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근대적 행정 기구인 통리 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1880). 이 기구는 실무를 담당하는 12 사를 두고, 개항 후 새롭게 대두한 외교・통상, 그리고 개화와 관련된 정책을 총괄하였다. 여기에는 개화파 인사가 대거 등 용되었다. 통리기무아문은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먼저 군사 제도

제1차 수신사 김기수의 행렬(1876)

를 바꾸었다. 종래의 5군영을 2영으로 개편하고, 신식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별기군을 창설하였다(1881). 별기군은 정부가 초빙한 일본인 교관 이 근대식 훈련을 지도하였다. 또한, 청에 영선사 김윤식을 파견하여 서양의 근대 식 무기 제조 기술과 군사 훈련법을 습득하게 하였다. 한편,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고 개화 정책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조사(朝士) 시찰단을 파견하였다(1881). 이들은 일본 정부 각 기관과 산업・군사 등 근대적 시설을 두루 살펴보고, 미국과의 수교에 관련된 정보를 수집해 보고서를 작성하 였다. 이는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데 뒷받침이 되었다.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별기군

조사 시찰단의 서로 다른 인식

고 종: 일본의 강약이 어떠하더냐?

고 종: 일본의 제도가 장대하고 정치가 부강하다고 하

박정양: 일본은 겉모습만 보면 자못 부강한 듯합니다.

는데 살펴보니 이와 같더냐?

…… 그러나 그 속을 살펴보면 실은 그렇지 않습

홍영식: 일본의 제도가 비록 장대하나 모두 모이고 쌓여

니다. 일단 서양과 통교한 이후로는 단지 교묘한

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군정도 강하다고 할

것만 좇을 줄 알고 재정이 고갈되는 것은 생각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밤낮을 가리지

지 않으므로 기계를 설치할 때마다 다른 나라들

않고 부지런히 마음과 힘을 하나로 모아 이룩한

에 진 부채가 매우 많습니다. …… 이런 사이에

것입니다. 일본이 노력한 바를 갖고 현재 이룩된

서양 사람들에게 간섭을 받아 감히 기운을 떨치

것을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지 못하고 한결같이 서양의 제도를 좇아 …… 절 차가 변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일본의 근대화 모습에 대해 박정양은 표면적인 부강함은 인정하되 그 폐단을 지적하는 데 역점을 두었고, 홍영식은 일본의 부강함을 높이 평가하며 우리도 노력해 이루어낼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 인식의 차이는 개화 정책의 추진 방법과 방향을 결정하는 데 중요 한 영향을 끼쳤다.

184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조사 시찰단의 보고서인 문견사건(聞見事件)

-“승정원일기” (1881) -


위정척사 운동과 임오군란 강화가 저들의 애걸에서 나왔다면 우리가 충분히 제압할 수 있지만, 우리가 약점이 있어서 서 두른다면 주도권이 저들에게 있으므로 저들이 오히려 우리를 제어할 것이니, 그런 강화를 믿을 수 없습니다. …… 저들이 비록 왜인이라고 하나 실은 양적(서양 오랑캐)입니다. 강화가 한번 이 루어지면 사학(邪學) 서적과 천주의 초상화가 교역하는 속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 안 가서 사학이 온 나라 안에 퍼지게 될 것입니다.

- 최익현,“면암집”-

1876년 1월 최익현은 도끼를 앞에 놓고 꿇어앉아 일본과의 조약 체결에 적극 반대하 는 상소를 올렸다. 자신의 상소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도끼로 자신을 죽여 달라는 단 호한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여기에서 최익현은 일본도 서양과 마찬가지로 오랑캐라는 점을 강조 하고 있다. 최익현의 목숨을 건 개항 반대로 상징되는 위정척사 운동의 전개 과정과 이 운동이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자.

보수적 유생층, 위정척사를 외치다

19세기 후반, 성리학을 신봉하던 보수적 유생들은 서양과 일본을 조선의 유교 문화를 무너뜨리려는 오랑캐로 인식하였다. 이에 유교 문화에 기반을 둔 조선의 전통 질서를 지키기 위해 천주교와 서양 문화, 그리고 서양 세력의 경제・군사적 침략을 물리쳐야 한다는 위정척사론을 내세웠다.

정(正) 정학(正學)

사학(邪學)

= 성리학

= 천주교

유교 문화

서양 문화

화(華) = 문명

그리하여 서양의 통상 수교 요구나 강화도 조약,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 등 개 항 전후 당면했던 여러 문제에 대해 강력하게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키려는 위 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사(邪)

이(夷) = 야만 (오랑캐)

유교 문화 조선의 전통

서양, 일본의

질서

침략

위정척사(衛正斥邪) 위정척사 란‘정(正)’ 을 지키고‘사(邪)’ 를물 리친다는 뜻이다.

통상도, 개항도, 개화도 반대하다

1860년대에 이항로와 기정진 등은 통상 반대론을 전개한 데 이어, 서양의 무력 침략에 맞서 싸우자는 척화 주전론(斥和主戰論)을 펼쳤다. 이러한 주장은 흥선 대 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뒷받침해 주었다. 1870년대 강화도 조약 체결을 전후하여 왜양 일체론(倭洋一體論)이 제기되면 서 개항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다. 최익현 등은 외세에 의한 문호 개방이 경제 파 탄과 자주권 손상을 가져올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1880년대에 개화 정책이 추진되고“조선책략” 이 유포되자, 영남 유생들은 격 력하게 반발하였다. 이만손을 중심으로 집단 상소인 만인소를 올려 정부의 개화 정책과 서양과의 수교에 반대했지만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위정척사 운동은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후 일본의 침략에 적극 저항하 는 항일 의병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1860년대 척화 주전론을 강력 하게 주장했던 이항로

2. 문호 개방과 근대적 개혁의 추진

185


위정척사 운동, 항일 의병으로 계승되다

위정척사 운동은 전제 군주제와 성리학적 지배 질서 수호를 내세워 개화 정책 을 추진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일본과 서양 세력의 침략성을 꿰뚫어 본 반외세・반침략의 자주적 민족 운동이었다. 위정척사의 정신은 항일 의병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임오군란, 구식 군인과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다

구식 군인과 민중도 개화 정책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일본으 로 쌀이 대량 유출되고, 흉년까지 겹치면서 쌀값이 폭등하자 일본 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더욱 커졌다. 한편,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비해 구식 군인에 대한 대우는 매 우 열악하였다. 심지어 집권층의 부패로 구식 군인에게 13개월 만 에 월급으로 지급한 쌀에는 겨와 모래가 섞여 있었다. 이에 분노 한 구식 군인은 마침내 임오군란을 일으켰다(1882). 임오군란 때 일본 공사관 습격 장면

위정척사 운동의 전개 과정과 특징 1 이항로의 척화 주전론(1860년대)

2 최익현의 개항 반대 상소(1870년대)

양이의 화가 금일에 이르러 홍수나 맹수의 해로움보다도 더 심합니다.

일단 강화를 맺고 나면 저 적들의 욕심은

전하께서는 …… 안으로 관리들로 하여금 사학의 무리를 잡아 베게 하시

물화를 교역하는 데 있습니다. …… 피와 살

고, 밖으로 장병들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정벌하게 하소서.

이 되어 백성의 목숨이 달려 있는 유한한 물

- 이항로,“화서집”-

화를 가지고 저들의 사치스럽고 기이하며 심 성을 좀먹고 풍속을 무너뜨리는 물화와 교역

과 개화 정책을 비판하는 영남 만인소(1880년대) 3 “조선책략”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와 유포한 황준헌의 사사로운 책자를 보노라면, 어느새 털끝이 일어서고 쓸개가 떨리며 울음이 북받치고 눈물이 흐릅니 다. 러시아는 본래 우리와 혐의가 없는 나라입니다. …… 러시아・미국・

을 한다면, 그 양은 틀림없이 1년에도 수만에 달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몇 년 지나지 않 아 땅과 집이 모두 황폐해져 다시 보존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나라 또한 망할 것입니다. - 최익현의 상소문,“면암집”-

일본은 같은 오랑캐입니다. 그들 사이에 누구는 후하게 대하고 누구는 박 하게 대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일성록”-

➊ [자료 1`~`3]을 보고 위정척사 운동의 전개 과정과 그 특징을 정리해 보자. 구분

1860년대

배경 특징

186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1870년대 강화도 조약

1880년대

1890년대 을미사변, 단발령


흥선 대원군이 재집권했으나 청에 납치당하다

구식 군인들은 흥선 대원군을 찾아가 지지를 요청했으며, 정부 고관들의 집 을 부수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다. 그 후 서울의 하층민이 가세하자 구식 군 인들은 왕궁을 습격하고 민씨 일파 등 고위 관리들을 처단하였다. 고종은 사태 를 수습하기 위해 흥선 대원군에게 정권을 맡겼다. 그러나 민씨 일파로부터 파 병을 요청받은 청은 일본의 개입을 막기 위해 신속히 군대를 출동시켜 군란을 진압하였다. 청은 군란의 책임을 물어 흥선 대원군을 자국으로 납치해 갔다. 이 렇게 청의 도움을 받아 민씨 정권이 다시 성립되었다. 조선의 내정과 외교 정책에 간섭하는

청의 내정 간섭이 시작되다

청을 풍자한 그림 청은 열강의 침략을 받

임오군란은 정부의 잘못된 정책과 일본의 침략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었다.

은 피해국인 동시에 다른 나라를 침략한 가해국이었다.

그렇지만 청과 일본은 이를 이용하여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일본은 대규모 군대를 파견해 군란의 책임을 물었다. 이에 굴복한 정부는 제 물포 조약을 체결해 사과 사절단 파견, 배상금 지불, 공사관 경비를 위한 군대 주둔 등 일본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청은 군란 진압 후에도 3,000여 명의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면서 마건상 과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파견하였다. 또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규정 한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을 강제로 체결해 청 상인이 내륙 시장까지 진 출할 수 있는 경제적 특권을 보장받았다. 이로써 청은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면서 경제적 침략을 본격화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1882) 이 수륙 무역 장정은 청이 속방을 우대하는 뜻에서 상정한 것이고, 각 대등 국가 간의 일체 동등한 혜택을 받는 예와는 다르다. …… 제1조 청의 상무위원을 서울에 파견하고 조선 대관을 톈진에 파견한다.

청의 북양 대신과 조선 국왕은 대등한 지위를 가진다. 제2조 조선의 개항장에서 청의 상무위원이 청 상인에 대한 재판권을 행

사한다.

이 장정은 무역에 관한 협정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조선이 청의 속방 임을 강조하고, 청의 치외 법권을 인정하였 다. 또한, 청 상인이 서울에서 상점을 개설 하고 내륙에서도 활동할 수 있도록 규정하 였다. 이는 외국 상인이 본격적으로 내륙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4조 베이징과 한성, 양화진에서 상점을 열어 무역을 허락하되, 양국 상

민의 내지 행상을 금한다. 다만 내지 행상이 필요할 경우 지방관의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 제7조 청 선박의 항로 개설권, 청 병선의 조선 연해 내왕권 및 조선 국방

담당권을 허용한다.

2. 문호 개방과 근대적 개혁의 추진

187


갑신정변 지금 천하대세는 나날이 변하고 있습니다. 나라 안의 상황은 날로 위급해지고 있으며, 청과 프랑스 사이에는 전쟁이 임박하였습니다. 청과 일본 역시 그러한 상황에 이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십여 년 전부터 서양 여러 나라의 동양 각국에 대한 정책이 갑자기 변하였습니다. 만약 옛 법도만을 굳 게 지킨다면 곧바로 위기가 닥쳐와 거의 망하게 될 것입니다.

- 정교,“대한계년사”-

윗글은 김옥균이 고종에게 국내외 정세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글이다. 그는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이 심해지고 서양의 정책이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개혁을 추진하지 않을 경우 나라가 망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역설하였다. 이로부터 며칠 후 마침내 김옥균 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는 무력을 동원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들은 왜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려고 하였을까?

김옥균

급진 개화파의 개화 정책이 가로막히다 서재필의 회고

임오군란 이후 개화파는 박문국을 설치해 신문을 발간하고

김옥균은 나라가 빈약한 원인이 일반 민중에게 기술 교육을 시행하지 않은 것과 상류 계급 인사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들의 무지와 몰지각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

청의 내정 간섭과 민씨 정권의 견제로 개화 정책은 제대로 추진

다. 그는“우리나라를 구하자면 민중을 교육시키

되지 못하였다. 그러자 김옥균은 개혁 자금을 얻기 위해 일본에

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라고 입버릇처럼 나 에게 말하였다.

서 차관을 제공받으려 했으나 일본 정부가 약속을 어겨 실패하

-‘회고갑신정변’-

였다. 그 결과 급진 개화파는 개혁의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더욱 위축되었다. 이때 베트남 문제로 청・프 전쟁이 일어나 서울에 주둔한 청군의 절반이 철수 하자, 급진 개화파는 이 기회를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들은 먼저 우 호적이었던 미국 공사에 협조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뒤, 자국의 세력 확대를 위 해 접근해 온 일본 공사의 지원을 받아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만에 막을 내리다

1884년 10월, 마침내 급진 개화파는 우정총국 낙성 축하연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켜 민씨 일파와 수구적 인사들을 살해하고, 개화당 정부를 수립하였다(갑신정변). 그들은 14개조 정강을 마련해 국가 체제의 개혁을 모색하였 다. 청과의 종속 관계를 청산하고 내각 제도를 수립하려 했으 며, 문벌을 폐지해 인민 평등권을 보장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청군이 출동하자 일본군이 약속을 어기고 곧바로 철수함으로써 정변은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이후 정변을 주도했던 급진 개 우정총국(서울 종로)

188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화파 인사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갑신정변의 의의와 한계

갑신정변은 근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일어난 우리나라 최초의 정치 개 혁 운동이었다. 청의 간섭을 물리치고 종속 관계를 청산해 국가의 자주 독립을 확고히 하려 했으며, 입헌 군주제 실시와 인민 평등권 확립을 통 해 근대적 정치・사회 체제를 구축하려 한 점에 큰 의미가 있다. 또한, 갑 오개혁, 독립 협회 활동, 애국 계몽 운동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근대화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갑신정변은 소수의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급진적인 방식으로 근대화를 추구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군사적 지원 약속에 지나 치게 의존했고, 농민의 염원이었던 토지 개혁 등에는 소홀하였다. 따라 서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 내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이다. 일본망명후에찍은사진이다.

갑신정변 이후 청의 내정 간섭은 더욱 심해졌다. 일본은 정변의 책임을 조선에 떠넘기며, 배상금 지불과 공사관 신축 비용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성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청과 일본은 톈진 조약을 체결해 조선에서 양국의 군대를 철 수하고, 앞으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 상대국에 미리 알리도록 규정하였다.

개혁 정강 14개조 분야

14개조 정강

개화당의 목표

1. 흥선 대원군을 빨리 귀국시키고 종래 청에 대해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권을 제정하여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정치

4. 내시부를 없애고 그중에서 우수한 인재를 등용한다. 7. 규장각(외척 세도 정치의 기반으로 변질)을 폐지한다.

국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기관을 폐지 하여 국왕의 권력 제한

13.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14. 의정부와 6조 외에 필요 없는 관청을 없앤다. 3.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재정을 넉넉히 한다. 6. 각 도의 환상(환곡)을 영구히 받지 않는다. 경제

환곡 제도 개선

9. 혜상공국을 혁파한다.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한다. 5. 탐관오리 중에서 그 죄가 심한 자는 처벌한다.

사회

군사

국가 기강 확립과 민생 안정

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10. 귀양살이하거나 옥에 갇혀 있는 자는 적당히 형을 감한다.

민심 수습

11. 4영을 1영으로 합하되,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설치한다.

군의 통솔권 확립

➊ 자료의 14개조 정강에 나타난 개화당의 목표는 무엇인지 빈칸을 채워 보자.

2. 문호 개방과 근대적 개혁의 추진

189


조선 중립화론이 대두하다

고종은 청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자 조・러 비밀 협약 을 추진하였다. 세계 곳곳에서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던 영국은 이를 빌미로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였다. 이처럼 조선을 둘러싸고 청과 일본, 영국과 러시아가 각축을 벌이는 상황에서 조선 주재 독일 부영사 부들러는 조선 중립화안을 정부에 건의하였다. 같은 해에 미국에서 돌아온 유길준도 중국을 중심으로 열강이 조선의 중립을 보장하여 독립을 보존해야 한다는“중립론” 을 집필했지 만, 정책에 반영되지는 않았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

열강의 각축 속에서 개화와 자주를 모색하다

갑신정변 후 고종과 집권층도 자주 독립과 왕권 신장을 위해 개 화 정책과 자주 외교를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한성주보를 발간했 고, 근대 학문과 외국어를 교육하는 육영 공원과 서양식으로 군사 를 훈련시키는 연무 공원 등을 설치하였다. 이 과정에서 외국인 고 문과 기술자가 초빙되었다. 또한, 자주 외교를 전개하기 위해 일본과 미국에 공사관을 개설 하였다. 특히 주미 공사관은 서양 국가에 설치된 최초의 상주 공사 관으로,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알리고 미국의 문물을 적극 수용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정부가 추진한 개화 정책과 반 초대 주미 공사 박정양 일행(1887) 앞줄 왼쪽부터 이 상재, 이완용, 공사 박정양, 이하영, 이채연이다.

청 정책은 민씨 정권의 부패와 청의 지나친 간섭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과 조선 중립화론 우리나라가 아시아의 중립국이 되는 것은 러시아를 막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며, 또 아시아의 여러 대국이 서로 균형을 이루는 정략도 될 것이다. …… 오직 중립 한 가지만이 진실로 우리나라를 지키는 방책이지만, 이를 우리가 먼 저 제창할 수 없으니 중국이 이를 맡아서 처리해 주도록 청하는 것이 좋을 것 이다.

- 유길준,“중립론”-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풍자화) ‘COREE(조선)’ 라는 물고기를 낚기 위해 청과 일본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가 기회를 노리고 있다.

190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격동의 개화기를 살았던 다양한 삶의 궤적들 개항 이후 대내외적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역사의 격동기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선택했던 삶은 각자의 상황과 입장에 따라 매우 다양하였다. 아래 좌표는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대비되는 다양한 행보를 나타낸 것이다.

민영익은 민비의 조카로

민영익(1860~1914)

김옥균은 명문 양반 출신으

18세에 벼슬길에 올라 개화파

로 22세 때 장원급제하여 출세

인사들과도 절친하게 지내면

를 보장받은 청년 정치가였다.

서 후원자 역할을 하였고, 보

그러나 박규수의 영향으로 개

빙사로도 활약하였다. 하지만

화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박

점차 개화파와 거리를 두었는

영효, 홍영식 등과 어울리며 개

데, 개화파의 의도대로 개혁이

화당을 형성하였다.“일본이

추진되면 자신의 세력이 약화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김옥균(1851~1894)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갑신정변

우리는 아시아의 프랑스가 되어야 한다.” 라고 다짐하면

때 급진 개화파의 제거 대상이 되었다. 이후 홍콩과 상

서 개혁을 외치며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정변 실패 후

하이에서 홍삼 전매권을 장악하고, 정부의 정책을 간접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0년 후 상하이에서 프랑스 유학

적으로 지원하였다.

최익현(1833~1906)

생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였다.

최익현은 이항로의 제자로

최시형은 1863년 최제우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하여 이조

이어 동학의 2대 교주가 되었

전랑까지 역임하였다. 경복궁

다. 그는 심한 탄압 속에서도

중건과 서원 철폐에 반대하는

동학의 교리와 조직을 정비하

상소를 올려 흥선 대원군이

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인내

하야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천을 내세워 인간의 존엄성과

일본과의 수교를 반대하며 민

평등을 강조했으며, 인위적으

씨 세력과도 대립하였다. 이

로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

최시형(1827~1898)

후 명성황후 살해 사건과 단발령에 강력히 저항했으

다는 무저항 사상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교조 신원 운

며,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의병을

동과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해 현실 개혁 의지를 보여

지휘하다 체포당하여 순국하였다.

1

주었지만, 결국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각 인물의 삶을 평가한 후 자신이 지지하는 한 인물을 택하여 그 이유를 발표해 보자.

2. 문호 개방과 근대적 개혁의 추진

191


3

구국 운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의 전개

청・일 전쟁과 동아시아의 변동 19세기 말 조선을 둘러싼 청, 일본, 러시아의 대립을 풍자한 그림이다. 어 깨에 총을 멘 일본 병사가 청국 병사의 변발을 잡아끌며 난폭하게 조선 땅을 침범하고 있다. 검은 안경을 쓴 조선 선비는 땅에 쓰러진 채 일본군의 군화 에 짓밟혀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이 광경을 강 건너에서 바라보는 러시아 병사는 제멋대로 으스대는 일본 병사 가 영 못마땅한 눈치다. 앞도 제대로 못 보는 조선 선비를 두고 세 나라의 군인은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것일까?

조선을 둘러싼 청・일의 각축 조선은 일본의‘이익선’ 이다 바야흐로 열강이 각축하는 시대에 국가의 독립 을 유지하려 한다면, 오로지 주권선(영토)을 지키

청은 베이징과 가까운 조선을 장악하여 제국주의 열강의 침 략으로부터 자국의 영토를 방어할‘동쪽 울타리’ 로 삼으려고 하

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반드시 나아가 이익

였다. 이에 임오군란, 갑신정변을 계기로 조선의 내정에 적극

선을 지키고 항상 요충지의 위치에 서 있어야 한

간섭하면서 경제 침략을 확대해 나갔다.

다. …… 우리나라 이익선의 초점은 실로 조선에 있다. ……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는 날은 곧 조

일본도 조선을 자국의‘이익선(利益線)’ 으로 여기면서 장차

선에서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는 때라는 점을 잊어

만주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려 하였다. 이에 조선에서 청의 영

서는 안 된다.

향력 확대를 견제하며 자국 세력을 확대할 기회를 노렸다. 이

- 야마가타 아리토모,“외교 정략론” (1890) -

무렵 반대파로부터 탄핵될 위기에 처한 이토 히로부미 내���은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을 빌미로 돌파구를 찾으려 하 였다. 조선에서 청・일 전쟁이 일어나다

조선 정부는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였다. 청이 군대 파견을 결정하고 톈진 조약에 의거해 일 본에 그 사실을 알려 주자, 일본도 이를 기회로 조선에서 영향 력 확대를 노리며 군대를 파견하였다. 조선 정부는 청・일 양국의 군사적 충돌을 우려해 두 나라에 철군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한 채 경복궁을 강 제로 점령하여 조선 정부를 장악하고, 청군을 기습하여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1894). 이 전쟁은 국제 사회의 예상과 달리 경복궁을 침범하는 일본군

192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일본,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다

청과 일본은 전후 처리를 위해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 였다. 그리하여 청은 조선에서 물러났고 일본에 랴오둥 반도 와 타이완 등을 할양했으며, 배상금 2억 냥을 지불하였다. 청은 일본에 지급할 배상금을 구하기 위해 영토와 이권을 담 보로 열강에게 차관을 얻었다. 그 결과 열강의 침략이 확대 되어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였다. 반면, 승리한 일본은 만주 침략에 유리한 고지를 확보했고,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1895)

엄청난 배상금으로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또한,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고 갑오개혁을 강요하는 등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중국 중심의 질서가 해체되다

청・일 전쟁을 계기로 오랫동안 이어져 왔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는 해체되었다. 청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반면, 일본은 중국에서 서양 열강과 같은 지위를 얻으며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청의 허약한 실체가 드러나면서 청을 분할하려는 열강의 경쟁이 가속화되었다. 한편, 청・일 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할양받자, 러시아는 프 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이를 저지시켰다(삼국 간섭, 1895). 이후 일본은 한 열강의 중국 침략 서양 열강이 중국이

반도와 만주를 두고 러시아와 대립하였다.

라는 파이를 어떻게 먹을지 논의하는 모습 이다.

전쟁 배상금에 맛든 일본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주변국을 침략하거나 배상금을 얻어 실속 을 챙겨 왔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을 계기로 조선에서도 배상금을 받아낸 적이 있었다. 청・일 전쟁 후 받은 배상금과 삼국 간섭으로 랴 오둥 반도를 청에 반환하고 받은 돈을 합하면, 무려 2억 3천만 냥이나 된다. 이는 당시 일본 정부 1년 예산의 4배였다. 전쟁 배상금 덕분에 돈 벼락을 맞은 일본은 금본위제를 실시했고, 야하타 제철소를 건설해 강 철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러・일 전쟁 후 일본은 전쟁 배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였 다. 이에 격분한 일본 국민은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던 날, 도쿄 히비 야 공원에서‘굴욕적인 강화 반대’ ,‘전쟁 계속’ 을 외치며 폭동을 일으

히비야 폭동(1905)

켰다(히비야 폭동). 이 폭동은 일본 정부가 계엄령을 내리고 군대를 동원해 겨우 진압했을 만큼 매우 격렬하였다. 당시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20만 명이 넘는 일본 젊은이가 희생되었는데도, 반전 시위 대신 히비야 폭동이 일어난 사실은 전쟁 배상금에 맛든 일 본 국민이 정부의 대외 팽창 정책을 열렬히 지지했음을 잘 보여 준다.

3. 구국 운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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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운동 우리가 의(義)를 들어 이에 이르렀음은 그 뜻이 결코 다른 데 있지 않다.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 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 적의 무리를 구축하고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 앞에 고통을 받는 민중, 수령과 방백 밑에 굴욕을 받는 아전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

전봉준 전봉준 전봉준 전봉준

김개남(추정) 김개남(추정) 김개남(추정) 김개남(추정)

손화중 손화중 손화중 손화중

이 깊은 자이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 동학 농민군 제1차 봉기 때의 격문(백산 격문, 1894. 3.) -

동학 농민 운동의 세 지도자

1894년 3월 25일 동학 농민군 수천여 명이 전라도 고부군의 백산(현 전북 부안)에 모여 전봉준을 대장, 김개남과 손화중을 총관 령으로 선출하고 위와 같은 격문을 발표하였다. 짧지만 힘 있는 이 백산 격문에는 탐관오리를 응징하고 외세를 몰아내려는 동학 농민군의 목표가 잘 드러나 있다. 동학 농민 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그 의의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지방관의 수탈과 외세의 침탈로 고통 받는 농민들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일파가 권력을 휘두르면서 정치 기강이 무너지고 매관매직이 성행하였다. 관직을 산 수령들이 가혹하게 농민을 수탈하면서 삼정이 다시 문란해졌고, 이에 저항하는 농민 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한편, 임오군란 이후 내륙 시장까지 진출한 청・일 상인에 의해 영국산 면직물 ✽포접제

등이 싼값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부업으로 면포를 짜서 팔던 농민들은 큰 타격을

동학의 모임 장소인 접소에 책 임자인 접주를 두고, 전국을 포 와 접으로 나누어 관리한 동학 의 교단 조직이다.

받았다. 또한, 일본 상인이 곡물을 대량으로 수입하여 곡물 가격이 폭등했고, 일 부 지역에서는 식량이 부족해져 방곡령이 내려질 정도로 피해가 심하였다. 그 결 과 농민 사이에서는 일본의 경제 침탈에 대한 반감이 갈수록 커졌다. 동학, 교조 신원 운동을 펼치다

동학은 1870년대 후반부터 2대 교주 최시형이 조직망인 ✽포접제를 정비하고 포교 활동을 활발히 펼치면서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그러자 정치 운동으로 발전한 교조 신원 운동 왜양을 물리치려는 창의가 어찌 큰 죄가 되어 체포하고 소탕하려고 합니까? 지방관의 병폐는

동학교도는 정부의 탄압으로 처형당한 교조 최제우의 누명을 벗겨 주고, 포교의 자유를 보장받으려는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

이미 심해져서 저 무고한 백성을 모두 도탄에 빠

다. 이 운동은 삼례 집회와 서울 복합 상소, 보은 집회(1893)로

지게 하니 목숨 귀하기는 다 같은데 어찌 이리 잔

이어지면서 종교적 요구를 넘어 점차 탐관오리 숙청, 외세 배척

인합니까? 또한, 왜양이 우리 임금을 위협함이 극

등을 내세우는 정치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에 달했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부끄럽게 여기는 사 람이 없으니, 임금이 욕되면 신하가 죽음으로 막

이러한 과정에서 동학은 지배층의 수탈과 외세의 경제 침탈

는다는 의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에 시달리던 농민의 불만을 수용하여 반봉건・반외세라는 주장

- 보은 집회 때 동학교도가 서울에서 파견된 어사에게

을 명확히 제시하였다. 또한, 농민을 조직화하여 대규모 농민

보낸 글 -

194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운동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고부 농민 봉기, 동학 농민 운동의 첫 깃발이 오르다

전라도 곡창 지대인 고부에서는 군수 조병갑의 비리와 학정이 매우 심하였다. 이에 전봉준 등은 사발통문을 돌려 동지를 모은 다음 농민을 이끌고 고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불법으로 거둔 곡식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억울하게 옥살이하던 사람들을 풀어 주었다. 또 원성이 높았던 만석보를 파괴해 버렸다. 놀란 정부는 군수를 새로 임명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용태는 정부가 사교로 금지한 동학의 교도들이 봉기에 참여했다며, 농민 봉기 관련자들을 동학교도로 몰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이에 농민의 분노가 다시 폭발하였다.

만석보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비석(전북 정읍) 조병갑은 이미 사용하던 보(洑)가 있는데도 농민을 강 제 동원해 만석보를 쌓고 많은 물세를 거두어 들였다.

반봉건의 기치를 높이 든 제1차 농민 운동

전봉준은 전라도에서 가장 큰 동학 교세를 이끌던 무장(전북 고창) 의 손화중과 함께 농민군을 조직해 대규모로 봉기하였다. 이어 농민군

농민군 4대 강령

의 4대 강령과‘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 의 내용이 담

1. 사람을 죽이거나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긴 백산 격문을 발표하였다.

2.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농민군에는 동학교도보다 일반 농민이 더 많이 참여하게 되면서 탐 관오리 제거, 조세 수탈 시정 등을 주장하였다. 농민군은 전주 감영에서 파견된 진압군을 황토현에서 물리쳤다. 이어 정부군을 남쪽으로 유인하 면서 정읍, 고창 등을 점령하였다. 4월 하순에는 황룡촌 전투(전남 장

편안케 하라. 3.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 를 깨끗이 한다. 4. 군대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없앤다. - 정교,“대한계년사”-

성)에서 정부군을 크게 격파한 후, 기세를 몰아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우리 손으로 탐관오리를 처단하자`!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남아 있겠나.” 라고 하며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더라. ……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梟首)할 것.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군수에게 아첨하여 인민을 못살게 구는 탐관오리를 응징할 것. •전주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나아갈 것.

고부 농민 봉기 발발 전에 작성된 사발통문 사발을 엎어 그린

사발통문에는 핍박받던 민중이 탐관오리의 학정과 부패에 적극적으로

원을 중심으로 주동자를 찾기 어렵도록 이름을 적었다. 이 중에

저항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또 단순한 봉기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서

는‘전봉준(全琫準)’ 의 이름도 들어 있다.

울까지 진격하여 정치적인 변혁을 도모하려는 계획까지 드러나 있다.

3. 구국 운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의 전개

195


집강소를 설치하여 개혁을 추진하다 폐정 개혁안 12개조

전주성 함락 소식에 놀란 정부는 청에 원병을 요청했

1. 동학교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모든 정사에 협력한다. 2. 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중히 징벌한다.

고, 이에 따라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였다. 또한, 조선

3. 횡포한 부호(富豪)를 엄중히 징벌한다.

의 상황을 주시하던 일본도 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를 규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정한 제물포 조약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해 일본군이 인

5. 노비 문서를 소각한다. 6.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은 없

천에 상륙하였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한 농민군은 정부와 정치를

앤다. 7. 젊어서 과부가 된 여성의 개가를 허용한다.

개혁할 것을 합의하는 전주 화약을 맺었다. 그 후 농민군

8. 무명잡세를 일체 거두지 않는다.

은 전라도 각 지역에 자치적 민정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

9. 관리 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왜와 통하는 자는 엄중히 징벌한다.

해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면서, 자신들이 내세운 폐정 개

11. 공채이든 사채이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한다.

혁안을 실천해 나갔다. 정부도 전주 화약을 체결한 후 교

12. 토지는 균등히 나누어 경작하게 한다.

정청을 설치해 개혁을 추진하면서 청과 일본에게 철군을

- 오지영,“동학사” (1940) -

요구하였다.

위 항목을 정치, 경제, 사회, 대외 관계 등으로 구분하 여 그 핵심 내용을 정리해 보자.

항일 구국 투쟁을 전개한 제2차 농민 운동

일본은 청을 물리치고 조선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 ✽남・북접

전라도의 동학 조직을 남접, 충청도 의 동학 조직을 북접이라 한다.

고자 조선 정부의 철병 요구를 거부하였다. 나아가 무력 으로 경복궁을 기습 점령해 조선 정부를 장악하고, 청・ 일 전쟁을 도발하였다. 이에 농민군은 반침략의 기치를 들고 봉기하였다. 2차 봉기 때에는 1차 때와는 달리 교주 최시형의 지시에 따라 동학교단 조직 전체가 동원되었다. 전봉준의 남접 부대와 손병희의 북접 부대는 논산에서 ✽남・북접 연합 부대를 형성한 후 서울을 향해 북상하였다. 이때 전라도와 충청 도 전역은 물론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에서도 농 민군이 봉기하였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 농민군의 주력 부대는 공주 우금치에서 우세한 화력으로 무장한 일본군 과 정부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지만 크게 패하였다. 이후 일본군과 정부군은 농민군을 토벌하면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였다. 농민군은 여러 지역에서 일본군과 정부군을 상대로 끈질긴 항전을 벌였으나 큰 희생을 입 었다. 결국 농민군 지도자인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이 체포됨으로써 동학 농민 운동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

동학 농민 봉기

196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게 되었다(1894. 12.).


동학 농민 운동의 의의와 영향

동학 농민 운동은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그렇지만 안으로 개혁 정치 를 통해 봉건 지배 질서를 타파하고, 밖으로 외세의 침략을 물리쳐 나라를 지키려 고 했던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농민 운동이었다. 이 운동에서 제기된 양반 중심의 사회 질서에 대한 개혁 요구는 갑오개혁에 반 영됨으로써 새로운 질서의 성립을 촉진하였다. 그러나 근대 국가를 건설할 수 있 는 정치 개혁안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이 의병에 가담함으로써 반침 략 항일 투쟁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향후 농민층은 활빈당 등의 무장 결사를 조직해 민족 운동에 적극 나섰고, 을사 늑약 이후에는 치열하게 항일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전봉준 생가 터에 있는 시비(전북 고창)

동학 농민 운동의 성격과 의의 전봉준 공초(발췌 요약) 심문자: 작년(1894) 3월 고부 등지에서 무슨 사연으로 민중을 크게 모았는가? 전봉준: 그때 고부 군수(조병갑)의 수탈이 심하여 의거하였다. 심문자: 흩어져 돌아간 후에는 무슨 일로 군대를 봉기하였느냐? 전봉준: 고부 민란 조사 책임자 이용태가 내려와 의거 참가자 대다수

가 일반 농민이었음에도 모두를 동학도로 통칭하고, 그 집을 불태우며 체포하고 살육을 행했기 때문에 다시 일어났다. 심문자: 전주 화약 이후 다시 군대를 일으킨 이유는 무엇이냐? 전봉준: 일본이 개화를 구실로 ���대를 동원하여 왕궁을 공격하고

임금을 놀라게 했으니, 충군애국의 마음으로 의병을 일 으켜 일본과 싸워 그 책임을 묻고자 함이다.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출두하는 전봉준 체포 과정에서 다리를 다쳤기 때문에 들것에 실려 가고 있다.

➊ 위 자료를 바탕으로 추론하여 다음 표의 빈칸을 완성해 보자. 전개

원인 심문 기록

일반화

성격

고부 농민 봉기 지배층의 횡포, 동학 탄압

1차 봉기 집강소 시기

전주 화약

정부와 폐정 개혁 합의

개혁 실천

2차 봉기

3. 구국 운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의 전개

197


갑오개혁 우리 정부는 왕명을 받들어 교정청을 설치하고 당상관 15명을 두어 먼저 폐정 몇 가지를 개혁 했는데, 모두 동학당이 사정을 하소연한 일이었다. 자주적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일본 인들의 요구와 끼어듦을 막고자 하였다.

- 김윤식,“속음청사”-

윗글에는 정부가 전주 화약을 맺은 이후 교정청을 설치해, 동학 농민군의 요구 가 반영된 자주적 개혁을 추진하고, 일본인의 간섭을 막고자 하는 상황이 나타 나 있다. 그러나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 전쟁을 도발하였다. 일본의 강요로 교정청을 없앤 이후 군국기무처가 만들어져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여기에는 총재 김홍집을 비롯하여 박정양, 유길준 등 개화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개혁의 군국기무처 회의 모습

추진 과정과 그 역사적 의의를 알아보자.

군국기무처가 개혁을 주도하다

일본의 강요로 정부는 김홍집을 총리대신으로 하는 내각을 수립하고, ✽군국기

✽군국기무처

국정 전 분야에 걸쳐 약 210건 의 안건을 의결, 실행한 초정부

무처를 설치해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때 민씨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흥선 대원군

적인 기구였다.

을 다시 앞세웠으나 실권은 주지 않았다. 개혁은 일본의 강요로 시작되었지만, 당시 일본은 청・일 전쟁 중이었기 때문 에 조선에 적극 간섭할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실제 개혁은 군국기무처의 주도로 갑신정변의 정강이나 동학 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자주적으로 폭넓 게 추진되었다. 국가 체제의 개편을 도모한 제1차 개혁

정치 면에서는 먼저 중국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 연호를 사용하였다. 궁내부를 따로 설치하여 왕실과 정부의 사무를 분리함으로써, 국왕의 전제권을 제한하고 의정부에 권한을 집중시켰다. 행정 기구는 변화된 현실에 맞 제1차 개혁 때의 개혁 법령(일부) 1. 이후국내외공사(公私) 문서에개국기원을사용한다. 2. 문벌과 양반・상민 등의 계급을 타파하여 귀천에 구애됨이 없이 인재를 뽑아 쓴다.

게 6조를 8아문으로 개편했으며, 과거제를 폐지하였다. 아 울러 경무청을 설치하여 경찰 제도를 실시하였다. 경제 면에서는 국가 재정을 일원화해 여러 기관에서 조세

4. 죄인 자신 이외 일체의 연좌율(緣坐律)을 폐지한다.

를 독자적으로 징수하는 폐단을 개혁하려 하였다. 또한, 은

6. 남자 20세, 여자 16세 이하의 조혼을 금지한다.

본위 화폐 제도를 채택했으며, 조세를 금납제로 정하고 도량

7. 과부의 재혼은 귀천을 막론하고 자유에 맡긴다. 8. 공사 노비법을 혁파하고 인신매매를 금지한다. 18. 퇴직 관리의 상업 활동은 자유 의사에 맡긴다. 20. 각 도의 각종 세금은 화폐로 내게 한다. 위 개혁안 중 갑신정변이나 동학 농민 운동에서 제시되었던 내용을 찾아보자.

198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형을 통일하였다. 사회 면에서는 양반과 상민의 신분적 차별을 폐지하고, 공 사 노비제를 혁파하였다. 또한, 조혼을 금지하고 과부의 재 가를 허용했으며, 고문과 연좌제도 폐지하는 등 이전의 좋지 못한 관습들을 타파하였다.


홍범 14조를 반포한 제`2`차 개혁

청・일 전쟁에서 승세를 잡은 일본은 조선에 대해 적 극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일본에

홍범 14조(일부) 1. 청에 의존하는 생각을 버리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2. 왕위 계승의 법칙과 종친・외척과의 구별을 명확히 한다.

망명했던 박영효를 앞세워 조선을 보호국화하기 위한 정

4.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를 나누어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6. 납세는 법으로 정하고 함부로 세금을 거두지 않는다.

그러나 박영효가 중심이 된 정부는 청에 대한 의존적

7. 조세의 징수와 경비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에서 관할한다. 9. 왕실과 관청의 1년 회계를 계획한다.

관계를 청산하고, 국정 개혁의 기본 강령이라 할 수 있는

10. 지방 제도를 개정하여 지방 관리의 직권을 제한한다.

홍범 14조를 반포하여 군국기무처의 개혁을 계승해 나가

11. 총명한 젊은이들을 파견하여 외국의 문물을 견습시킨다.

고자 했지만, 일본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12.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을 실시하여 군제의 근본을 확립

의정부를 내각으로 개편하고, 지방 제도를 8도에서 23 부로 바꾸었다. 지방관의 권한을 축소시켰으며, 재판소를

한다. 13. 민법, 형법을 제정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전한다. 14.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힌다. -“고종실록”-

설치해 사법권의 독립을 꾀하였다. 또한, 근대적 교육 제 도를 마련하여 한성 사범 학교 관제, 소학교 관제, 외국어 학교 관제 등을 발표하였다.

명성 황후, 일본에 살해당하다

갑오개혁이 진행되는 가운데 청・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시모노세키 조약(1895)이 체결되었다. 이를 통해 일본은 막대한 배상 금과 랴오둥 반도를 할양받았다. 그러자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의 랴오둥 반도 점령을 저지하였다(삼국 간섭).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종이 일본 세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친러 정책을 추진하자, 개혁을 주도하던 박영효는 실각하여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위기를 느낀 일본은 친러 정책을 주도했던 민비(명성 황 후)를 무참히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1895. 8. 20.).

명성 황후 국장 1897년 3월‘명성’ 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11월 21일 국장이 치뤄졌다. 명성 황후에 대 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리기도 하지만, 왕비의 신분으 로 궁궐 내에서 외세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한 역사적 비 운의 주인공이었다.

동학 농민 운동과 갑오・을미개혁의 전개

3. 구국 운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의 전개

199


국민의 거센 반발을 불러온 제`3`차 개혁(을미개혁)

을미사변 이후 유길준 등이 김홍집 내각에 적극 참여하면서 제3차 개혁(을미개 혁)이 추진되었다. 태양력과‘건양(建陽)’연호가 사용되었으며, 단발령이 단행되 었다. 또한, 종두법이 실시되고 각지에 소학교가 설립되었으며, 갑신정변으로 중 단되었던 우편 사무도 다시 실시되었다. 그러나 개혁이 급진적으로 추진되면서 개혁에 대한 민중의 거부감도 커졌다. 특히, 많은 유생은 단발령에 반발하면서 전국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러한 상 황 속에서 고종은 신변의 안전을 꾀하고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러시 김홍집

아 공사관으로 처소를 옮기는 아관 파천을 단행하였다(1896. 2.). 이로 인해 을미 개혁은 중단되었다.

갑오・을미개혁의 의의와 한계

갑오・을미개혁은 대외적으로 일본의 조선 침략 정책에 의해 강요된 측면도 있 지만, 조선의 개화 관료들에 의해 자주적으로 진행된 개혁이었다. 또한, 개화파의 개혁 의지와 동학 농민군의 사회 변혁 요구가 반영된 근대적 개혁이었다. 특히 역사상 처음으로 차별적 신분 제도를 폐지하고 평등 사회의 기틀을 마련 한 점과 왕권을 제한하고 내각 중심의 정치를 실시하여 전제 군주제를 극복하려 고 시도한 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개혁 주도 세력이 일본의 무력에 의 존했고 개혁에 대한 민중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으며, 국방력 강화나 상공업 진

유길준

흥과 같은 개혁에는 소홀했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갑오개혁! 자율이냐, 타율이냐? 지금 조선의 개혁은 행하지 않을 수가 없지만, 조선인 된 자에게는 세 가지 치욕(삼치)이 있다. 삼치란 스스로 개혁을 행하지 못해 귀국의 권 박(勸迫)을 받았으므로 본국 인민에 대해 부끄러운 것이 그 하나요, 세 계 만국에 대하여 부끄러운 것이 그 둘이요, 천하 후세에 대해 부끄러운 것이 그 셋이다. 지금 이 삼치를 무릅쓰고 세상에 나설 면목이 없으나, 오직 개혁을 잘

지 못하고 일본의 강제적인 권유와 압박( ‘권 박’ )에 따라하게 된 것은 조선 인민, 세계 만 국, 후세 역사 앞에 수치라고 고백하였다. 그 러나 그는 독립과 보국안민을 달성하면 자신 의 행위를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 였다.

이룸으로써 독립을 보존하고 남에게 굴욕을 당하지 않으면서 개화의 실

이를 볼 때 유길준 등 개화파는 갑오개혁

효를 거두어 보국안민하게 되면, 오히려 허물을 벗어날 수 있다. 만일

기간 중 일본의 후원 아래 개혁을 추진하고

다시 오래된 폐단을 그대로 행한다면, 장차 또 한 번의 권박을 초래해

있던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함과 동시에 치

국가가 앞으로 어떤 지경에 이를 지 알 수 없다.

욕을 빨리 씻고 개혁을 자율적으로 추진하기

- 유길준이 일본 방문 중 일본 외상을 만난 자리에서 한 말(1894. 10.) -

200

유길준은 갑오개혁을 자주적으로 추진하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위해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독립 협회와 만민 공동회 독립 협회는 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이 헐린 자리 앞에 독립 문을 세웠으며, 청 사신의 영접 장소인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조 하였다. 돌기둥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영은문 앞에 위풍당당하게 우뚝 서 있는 독립문은 대내외에 천명한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상징한다. 독립 협 회는 조선의 독립을 지키고 근대적 개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떠한 운동을 펼쳐 나갔을까?

준공 직후의 독립문

독립신문이 발간되고 독립 협회가 창립되다

아관 파천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졌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이 여전히 주둔 해 있었고, 서양 열강의 이권 침탈도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귀국하 여 중추원 고문이 된 서재필은 자주독립을 위한 국민 계몽 방안에 대해 모색하 였다. 서재필은 개혁적 관료 및 개화 지식인들과 함께 아관 파천으로 손상된 나라의 권위를 되찾고 대내외적으로 자주국임을 내세우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정부의 지 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발간하고(1896. 4.), 석 달 뒤 독립문을 건설한다는 명목으 로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 설립 초기 독립 협회는 관료와 지식인 중심의 조직이었다. 그러나 독립문 등을

서재필 미국 망명 중 서양의 민주주의를 직접 체험했던 서재필

만드는 데 보조금을 내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독립 협회는 전 국

은 귀국 후에 나라의 자주독립, 자

민적인 단체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보다 국민을 계몽하여 근대 의식

강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 을 일깨워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토론회를 열어 국민 계몽에 앞장서다

독립 협회는 기관지인‘대조선 독립 협회 회보’ 를 간행하고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의 주제는 신교육 진흥, 산업 개발, 민족 문화 발전, 미신 타파, 신문 보급 등 계몽적 성격을 띠거나, 열강의 이권 획득 반대, 의회 설립, 민권 신장, 개혁 내각 수립 등 당면한 현안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였다. 토론회는 수백 명의 방청인이 몰려들 정도로 커다란 호응을 얻어 민중을 계몽 하고 정치 의식을 높이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 결과 독립 협회는 점차 임원이나 관료 중심에서 벗어나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단체로 발전해 갔다. 3. 구국 운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의 전개

201


만민 공동회를 열어 자주 국권 운동을 전개하다

1896

아관 파천 독립 협회 창립

1897

고종, 경운궁 환궁 대한 제국 수립

문을 파견하는 등 통제를 강화하면서 여러 가지 이권을 요구하였다. 독립 협회는

1898

독립 협회 해산

지켜야 한다는‘구국 운동 상소문’ 을 올리고 본격적인 정치 활동에 나섰다.

1899

대한국 국제 반포

고종은 환궁 후 대한 제국의 수립을 선포했지만, 러시아는 군사 교관, 재정 고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면서 재정・군사・인사권을 자주적으로 행사해 자주독립을

그리하여 최초의 근대적 민중 집회인 만민 공동회(1898. 3.)를 열어 러시아의 내정 간섭과 이권 요구를 규탄하는 자주 국권 운동을 전개하였다.

관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헌의 6조를 건의하다

헌의 6조(일부)

민중의 정치 참여 의식이 높아지자 독립 협회는 내정 개혁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민이 합심하여 황제권 을 공고히 할 것.

에 관심을 돌려 자유 민권 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쳤다. 정부

2.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해당 부처의

에 법률과 재판에 의한 신체의 자유권과 재산권 보호, 언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함께 날인하여 시행할 것.

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요구하였다. 나아가 국

3.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담하여 맡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4. 중대한 범죄는 공판하고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민 참정권 운동도 전개하여 국민의 뜻을 국정에 적극 반영하 고자 하였다. 전국 곳곳에 설치된 지회를 중심으로 국권, 민권 운동이

5. 칙임관은 정부에 그 뜻을 물어 과반수가 동의하면 임명할 것.

확대되는 가운데, 독립 협회는 개혁 지향적인 정부 대신들과 -“주존본안 제`3`책”-

학생, 시민이 함께 참석한 관민 공동회(1898. 10.)를 개최하 였다. 여기서 관민이 협력하여 국정을 운영하자는 헌의 6조 가 결의되어 황제의 재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만민 공동회 당시 종로는 대한의 아고라 1898년 무렵 서울 인구는 약 17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만민 공동회에는 보통 1`~`2만 명이 모일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만 민 공동회는 종로에 연단을 만들고 신분과 나이의 구별 없이 어 린이조차 연단에 올라 연설을 하는 등‘한국의 직접 민주주의’또 는‘대중의 정치적 의사 표현’ 의 원형이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만민 공동회가 열리면 밥장사는 장국밥을 수백 그릇 날라 왔고, 어떤 부자는 집 판 돈 500원을 모두 기부했으며, 거지조 차 닷 푼의 기부금을 내놓는 등 참여자들 사이에는 일종의 운 명 공동체 의식이 형성되었다. 서대���, 자하문 밖은 물론 과천 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나무꾼들이 기부한 장작은 밤하늘을 훤 하게 비추었고, 사람들이 산처럼 모여 밤을 지새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를‘장작 집회’ 라고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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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대한의 아고라였던 당시의 종로


수구 세력의 방해로 개혁은 좌절되고

헌의 6조는 수구 세력의 방해로 고종의 마음이 변하면서 그 실현이 좌절되었 다. 그렇지만 독립 협회는 박정양 내각과 협상을 벌인 끝에 새로운 ✽중추원 관제 를 반포하게 하였다. 그 결과 중추원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의회와 같은 기능 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중추원 관제

중추원은 관선 25명, 민선 25명 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법률 및 칙령의 개정 및 폐지, 의정부가

독립 협회는 중추원을 통해 황제와 의정부의 권력 남용을 견제하며 개혁을 추 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수구 세력은 독립 협회가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고 모함

국왕에게 건의하는 사항, 국민의 헌의 사항 등을 심사・결정하는 권한을 가졌다.

하였다. 결국 고종은 보부상으로 구성된 황국 협회와 군대를 동원하여 독립 협회 를 탄압하고 해산령을 내렸으며, 만민 공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1898. 12.).

독립 협회 활동의 의의와 한계

독립 협회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주권을 수호하고 자유 민권을 신장

방향

목표

시킴으로써 자강 개혁을 이루고자 하였다. 또한, 민중 계몽을 통해 민중에 기초한

자주

국가의 자주 평등,

국권

국가 주권의 수호

사회 전반의 근대화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의 한계를 극복할

자유

인민의 자유와 평등,

수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민권

인민 주권의 확립

그러나 독립 협회의 외세 배척 운동은 주로 러시아를 대상으로 삼았고 그 밖의 열강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던 면이 있었다. 또한, 제국주의 열강과의

정치・경제・사회・ 자강

문화 등 제 분야에

개혁

걸친 변법자강(체제 개혁) 추진

교류를 강화하고 근대적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역점을 둔 나머지, 그들의 침략 의도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독립 협회의 활동 목표

독립 협회의 의의와 한계 1 독립 협회의 국민 참정권 주장

2 조선 정부가 행세만 잘하면 ……

육대주와 동등하여 만국과 나란히 하는 것은 폐하의 권

조선에서는 해・육군을 많이 길러 외국이 침범하는 것을

리이고, 폐하의 백성이 되어 폐하의 강토를 지키고, 그 정

막을 까닭도 없고, 다만 나라 안에 해・육군이 조금 있어

치를 거슬리고 법률을 어지러이하는 신하가 있어서 종사를

동학이나 의병 같은 지방의 도둑 떼나 평정시킬 만하면 넉

해롭게 하면 탄핵하여 성토하는 것은 저희들의 권리입니

넉하다. 만일, 어떤 나라가 조선을 침범하고자 하여도 조선

다. 어떤 자가 민권(民權)이 성하면 군권(君權)이 반드시 줄

정부가 세상에 행세만 잘했을 것 같으면, 조선을 다시 남의

것이라 말하니, 그 무식함이 이보다 심함이 있겠습니까? 만

나라 속국이 되게 가만둘 리가 없다. 그러므로 조선에서 외

일 오늘날 국민의 의논이 없으면, 정치・법률이 따라서 무

국과 싸움할 염려가 없는데, 만일 조선이 싸움이 되도록 일

너져 어떠한 화가 일어날지 모르니 ……

을 할 것 같으면 그때는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 윤치호 등의 상소문(1898) -

- 독립신문(1897) -

➊ [자료 1]에서 독립 협회의 핵심 주장은 무엇인지 말해 보자. ➋ [자료 2]를 참고하여 독립 협회의 한계가 무엇인지 토론해 보자.

3. 구국 운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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