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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미즈 키요코는 소문난 미인이었다. 그녀가 학업뿐만이 아니라 여러모로, 특히 미모 쪽으로 뛰어나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왔다. 배구부의 매니저라는 소문만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심지어 여자 배구부에 슬쩍 고개를 내밀면서 시미즈를 찾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이쪽이 아니라고 정중하 게 타일러 거절했지만, 그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 한 무리쯤 몰려오니 아무리 유이라도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다음부터는 문이 빼꼼 열리고 여 자부원이 아닌 사람이 머리를 내밀 때마다 아주 친절하게 배구공을 치켜들고 강스파이크를 날려주었다. 매번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부원들 또한 마찬 가지였기 때문에 주장의 결정을 짝짝 손을 마주쳐 응원하기만 했다. 한 번만 더 멋대로 들어오면 더 혼이 날 줄 알아. 허리에 손을 척 얹고 엄포를 놓은 사실이 널리널리 퍼졌는지, 그 일을 기점으로 여자 배구부실에 멋대로 발을 들이밀던 남자들의 걸음은 뚝 끊어졌다. 그제야 그들은 조금 마음 편히 연습할 수 있었다. 한창 연습에 땀을 빼고서 시원한 물을 머리끝부터 덮어쓰고서. 유이는 구 석에서 한 장의 명함을 발견했다. 얇은 재질의 홍보용 명함이었다. 부원 모 집 때 사용했던 건지 시간이 지난 만큼 끄트머리가 하얗게 닳아 있었다. 구 석에는 눈을 찌푸려 보아야 알아볼 정도로 아주 가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관심 있는 사람은 매니저 시미즈 키요코에게 연락해주세요. 그렇게 적혀 있 으면서도 휴대 전화 번호는 알아보지 못하게 뭉개져 있었다. 일부러 부원실


을 직접 찾아오도록 노린 사실일 거라는 짐작이 유이의 머릿속을 탁 스쳤 다. 소문만 있는데도 난데없는 곳까지 사람이 끓는데, 정말 그녀의 번호가 떡하니 공개되어 있으면 얼마나 쓸데없는 연락이 빗발칠 치는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괜찮은 결정이라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도대체 얼마나 미인이기에 그러는 거지?” 유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배구부로 달려와 제일 먼 저 부실을 치워놓았다. 끝날 때는 가장 늦게까지 남아서 부족한 부분에 힘 을 쏟았다. 가끔 어지럽혀진 물건이 잘 남아있나 점검해보기도 했다. 남들이 보면 이름도 먹히지 않을 여자 배구부의 주장이라고 코웃음을 칠 수도 있겠 지만 유이는 그 하나하나가 절실했다. 언젠가는 조금 더 높이 날 수 있어. 남자 배구부의 활약을 보면서 주먹을 꽉 그러쥔 지가 여러 번, 이제는 부원 들도 그녀의 뜻에 어느 정도 동조해주었다. 애초부터 배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금방 떨어져 나갈 정도로 혹독 한 일정이었다. 남자 배구부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시미즈의 이름은 매번 배구라는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입에 한 번씩 올라왔다. 그 배구부에 아주 예쁜 여자 매니저가 있다며? 같은 여자라고 해 도 당연히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연습 시간을 쪼개어 일부러 방문하기에 는 이제껏 여자 배구부에 함부로 들어온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만도 같았고, 그렇다고 연습 시간이 끝나고 가기에는 이미 별이 총총 떠 있는 한 밤중이었다. 체육관 주변을 지나가다 보면 남아서 연습이라도 하는지 간간 이 기합 소리가 들려오고는 했지만, 어쨌건 그중에 시미즈는 없었다. 남자 매니저라면 몰라도 여자 매니저가 그 시간까지 남아 있기는 위험하기는 했 다. 시미즈 키요코가 그녀가 듣던 대로 예쁘다면 추근덕대는 남자들도 한 가득일 테고. 그날도 유이는 가방을 둘러매고 달이 뜬 저녁이 되어서야 학교를 나섰다. 남자 배구부에 비하면 가뜩이나 부족한 게 여자 배구부였다. 차이를 메울 수 있는 건 언제나 그렇듯이 노력과 연습밖에 없었다. 주장인 이상 어깨에 책임감을 더 맡은 채로 그녀는 늦게까지 작전을 짜다가 집까지 돌아가고는


했다. 집이라고 해서 더 노는 건 아니었고, 온갖 영상을 보면서 전술을 해석 하다 침대에 눕고는 했다. 그래도 노력한 만큼 실력이 조금씩 올랐다. 주장 으로서의 기쁨은 팀 전체의 실력이 눈에 띄게 변해간다는 것이었다. 하루하 루 올라가는 팀워크를 보면서 유이는 뿌듯하게 웃었다. 오늘도 괜찮은 하루 였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학교를 나갈 수 있던 건 그녀에게 짐이 아니라 행 복이었다. “이제 돌아가?” “어라?” 갑작스럽게 말을 거는 목소리에 유이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남학 생 목소리였다면 항상 비슷한 시간까지 남아 있는 남자 배구부원이라고 생 각했겠지만, 그녀는 틀림없이 고운 여학생의 목소리를 들었다. 한순간 눈에 보이지 않아서 유이는 제가 유령의 목소리라도 들은 건가 바르르 떨었다.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시선을 마주한 어둠 속에, 희미한 달빛을 등지고 여 자 한 명이 서 있었다. 교복에 카디건까지 차려입은 단정한 매무새였다. 안 경도 머리카락도 검어서 어둠에 묻혔기에 잠시 그 모습이 가렸을 뿐이었다. 하얀 피부는 꼭 달빛 같았다. 그러니까 그녀는 밤을 몸에 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걸 넘어서 그녀가 통째로 밤이라도 된 것 같았다. 차라리 처음처럼 못 알아보고 있던 게 좋았을 수도 있었다. 그녀의 모습 을, 얼굴을 제대로 인식하자마 유이는 멍하니 자리에 굳어 버렸다.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보다 더한 찬사는 필요하지 않았다. 어디 영화에서나 나올 법 한 미소녀, 거기에 분위기까지 그녀의 눈빛에 한 몫을 더했다. 코끝에 얹힌 안경 위에 달빛이 희끄무레하게 비쳤다. 이름을 묻지 않아도 유이는 단번에 그녀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학교에서 가장 소문난 미인, 누구나 뒤를 쫓게 된다는 냉철한 미성의 소유자. 시미즈 키요코, 한 번쯤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소문의 그녀가 바로 코앞에 서 있었다. “지금 들어가는 거야? 늦게 가네.” “아, 으- 응. 아무래도 연습을 하다 보니까.” 넋을 빼고 시미즈를 보느라 그녀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시 한 번 물어보는 목소리에 유이는 헐레벌떡 대답했다. 제가 대답해 놓 고도 확실히 서두르는 목소리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시미즈는 표정 하나 변 하지 않고 머리카락을 넘겼다. 좋은 날씨라고 해도 아무래도 밤이다 보니 바람이 조금 불었다. 긴 머리카락은 보이는 것보다 더 가늘가늘 하늘하늘한 지 고작 가볍게 부는 바람에도 휙휙 날렸다. 어둠이 어둠을 쓸어가는 것만 같아서 유이는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시선으로 쫓았다. “열심이구나. 우리 부원들을 보는 것 같아.” 시미즈는 유이에게 살짝 눈을 접어 웃었다. 그냥 눈꼬리가 아주 살짝, 몇 밀리미터정도 접힌 것뿐인데도. 단지 그것만으로도 주변에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았다. 유이는 저도 모르게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녀에게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유이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대부분 무표정일 때가 많고 말도 그리 많이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매니저 일을 소홀하게 하고 있다 는 건 아니었다. 다른 학교의 정보는 물론 같은 학교 안 여자 배구부의 정 보도 전부 모았다. 훈련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라면 얼마든지 보탠다. 게 다가 매니저 역할인 그녀와 다르게 있는 힘껏 제 발로 뛰고 손을 올리는 여 자들의 배구부인 만큼 그녀의 흥미를 사로잡기도 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하 는 유이의 얼굴은 시미즈의 기억 속에도 쏙 들어왔다. 항상 먼저 자리를 뜨 고는 했지만 오랜만에 부실에 남아 마지막 정리를 봐 주었다. 날씨가 좋다 는 핑계로 조금 늦게 들어가던 날이었다.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성 큼성큼 걸어 나온 유이를 발견하자마자 알아보았다. 이름이야 들어보았지만 실제로 얼굴을 보고 만난 적은 없었다. 각자 자기 일로 바쁜 중에 같은 학 교라도 이름 한 번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는 많았다. 기지개를 힘껏 켜는 모 습에서 그녀가 한 노력이 보이는 것만 같아 시미즈는 자신도 모르게 유이에 게 말을 걸었다. “주장이니까 그만큼 힘이 들겠지?” “아, 아니- 그렇게 힘이 드는 건 아니고. 그냥, 다른 녀석들이 열심히 하 는 걸 보면 나까지 기운이 나는걸.”


“이쪽의 주장도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너희들은 꽤 닮아 있네.” “그, 그으- 열심히 한다는 거지?” “칭찬에 서툴러서 미안해.” 시미즈는 조금 곤란해하며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렸다. 유이가 괜찮다고 대답하지 못한 건 잔뜩 당황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손짓 하나하나마 다 왠지 자리에서 폴짝 뛰고 싶은 기분을 참아내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 다. 결국 시미즈는 말을 더 하지 않고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역시 이이 만큼 살짝 눈꼬리가 접히는 미소였다. 무표정한 얼굴이 살짝 만들어내는 웃 음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웠다. 유이가 또 그 얼굴에 홀려서 모든 행동을 따악 멈추었을 때. 시미즈는 몸을 돌려 척척 걸어가 버렸다. 뒷모습까지도 단정하기 짝이 없는 아가씨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유이는 정신을 차렸다. 다른 생각을 할 정신이었다. 아, 잠깐만. 지금 그 시미즈가 나한테 말을 먼저 건 거야? 다른 생각이라고 해 봤자 결국 시미즈에 관한 생각이었지만. 시미즈 키요코가 모습을 아주 감추 어 버렸을 때 유이는 미처 그런 생각을 했다.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표정은 인형처럼 예뻤다. 하얗고 고운 피부, 밤처럼 까만 머리카락-. 그녀에 게 말을 걸던 목소리는 꿈에서나 간신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유이는 저도 모르게 뺨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운동도 하지 않았는데 체 육관을 몇 바퀴 내내 뛰어다닌 것만 같이 얼굴이 새빨개졌다. 자리에서 폴 짝폴짝 뛰며 찬바람을 더 쐬고 그걸로도 모자라 유이는 얼굴에 한참 손부채 질을 했다. 붉은 얼굴이 가라앉기는커녕, 시미즈를 만났다는 사실만이 머리 에 확고하게 박혀 버렸다. 결국 유이는 자리에 쪼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폭 파묻었다. 손에 들고 있던 저지를 어깨에 두르다 못해 머리까지 푹 뒤집어썼다. 어떻게 해, 어떻 게 해. 스스로도 어쩔 줄 몰라서 같은 말만 계속 반복했다. 유이는 빨간 얼 굴이 가라앉을 때까지 자리에서 쭉 쪼그려 앉아서 시간을 보내다가 자리에 서 벌떡 일어났다. 늦은 시간이라 인기척은 없었지만, 혹시 다른 눈에라도 띌까 봐 있는 힘껏 다리로 땅을 박찼다. 고마워, 내 다리야. 순식간에 옆을


휙휙 스쳐 가는 가로등의 그림자에 유이는 몇 번이나 자신의 몸뚱이에 감사 인사를 했다. 다른 생각이 전부 훨훨 날아 머리에서 빠져나가는 중에도 한 가지는 사 라지지 않았다. 유이는 익숙한 길을 마구 달려 집까지 향하면서 입술을 꼭 물었다. 나 시미즈한테 반했나 봐. 첫눈에 반한다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 녀는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고 다정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날은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 “…안녕.” “유이 선배? 무슨 일이에요? 눈이 완전-” “어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다크 서클 좀 봐!” 유이는 모자로 얼굴을 푹 가리고 등교했다. 수업 시간 내내는 그걸로 버 텼지만, 그래도 연습할 때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모자를 쓰고 스파이크를 칠 수도 없었고, 챙으로 가린 그늘 아래에서 토스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유이는 모자를 벗어 주섬주섬 가방에 챙겨 넣었다. 모자를 벗자마자 그녀를 기다리던 부원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의 얼굴은 처참했다. 아침에 그나마 비적비적 몸을 일으켜 씻기야 했지만, 잠을 설친 건 아무 리 뽀득뽀득 씻는다고 해도 없어지지 않았다. 거울을 보고 모자를 챙긴 게 그나마 그녀의 마지막 정신이었다. 옆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한 팔에 한 명씩 매달려 물어왔지만, 유이가 제대로 대답해 줄 수는 없었다. 뭐라고 대 답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어젯밤에 달빛에 서 있는 시미즈 씨가 너 무 예뻐서 한눈에 반해버린 것 같아.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아무리 부여잡 아도 제정신인 이상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 조금 만 더 기다리면 제정신이 아니게 바뀌어 버릴 것만 같아서 유이는 불안해졌 다. 연습으로 머리를 텅 비게 하려는 작전은 좋았지만, 그만 텅 빈 머리로 생각도 못 한 말을 꺼내게 되면 곤란해졌다. 그 곤란이 얼굴에까지 서린 탓인지, 부원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선배, 힘들면 들어가서 쉬어요.”


누가 먼저 말을 꺼냈는지 모르겠지만, 한 학년 아래의 아이였다. 척 봐도 그녀 혼자만의 의견이 아니라 모두의 의견을 취합한 것이었다. 주변의 부원 들은 그녀의 의견에 동조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유이는 문득 그들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할 뻔했다. 몸이 피로한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 었다. 이제까지 그녀가 운동으로 쌓아온 체력은 고작 그 정도에 굴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력은 다른 문제다. 지금 미치미야 유이의 머릿속은 온통 시미즈 키요코에 의해 점령당했다. 눈을 뜨던 감던 상관없이 시미즈의 모습 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모자를 꾸욱 눌러 쓰고 있던 수업 시간에도 그녀는 시미즈의 생각만 했다. 펼쳐 든 교과서의 문장이 온통 그녀의 이름처럼 보 이기까지 했다. 첫사랑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거기에 유이는 절절한 짝사랑 이 되었다는 것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누구에게 나 가리지 않고 인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 유이 하나쯤 합류해 보 았자 그녀에게는 티도 안 날 것이다. 그냥 귀찮은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났 다는 것뿐이겠지. “주장, 하루쯤은 주장이 없어도 괜찮아요!” “이제까지 주장이 짜둔 매뉴얼도 있고, 어제 하던 대로 연습할 테니까!” “무리하다가 병이라도 나면 우리가 더 곤란하다니까.” 유이의 고민을 알 리가 없었다. 부원들의 눈에는 그녀가 조금 아픈 것처 럼 보이는 것 같았다. 유이는 누군가 한 명이 꺼낸 비타민 음료를 받아 들 었다. 상황에 맞지 않지만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진 반창고 또한 후배 한 명이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이럴 때는 수분이 최고라면서 반쯤 마시던 것이 기는 해도 이온음료까지 받았다. 그리고 유이는 뭔가 변명을 더 하기도 전 에 단체로 손에 떠밀려 체육관 바깥까지 냅다 쫓겨났다. 오늘 하루는 집에 일찍 가서 푹 쉬고, 내일 즐거운 얼굴로 만나요. 뒤에 서 단체로 팔로 엑���자를 그리면서 부원들은 유이에게 운동 금지를 큰 목소 리로 외쳐댔다. 그런 일이 아니라고 해도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유이는 그들이 챙겨준 물건을 품에 안고서 활짝 웃었다. 유이가 혹시 들어올까 봐 그들은 손을 휙휙 젓고서 문을 보란 듯이 세게 닫았다. 혹시 싶어서 가까이


가 보았지만, 유이의 귀에는 체육관 문이 철컹 잠기는 요란한 소리만이 들 렸다. 시험 삼아 사알짝 밀어보았지만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배구는 팀으로 하는 스포츠다. 혼자서 아무리 날고 뛰어봤자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이왕 김 에 하루 푹 쉬자는 결론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날이 밝을 때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주장이라는 이름을 등에 지고서부터 이런 시간에 돌아갔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유이 는 벤치에 앉아 그녀가 받은 물품을 늘어놓았다. 저지 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전부 주머니에 쑤셔 넣고도 음료 몇 개가 남았다. 긴장해서 그런지 조금 덥기도 했다. 유이는 반쯤 남은 이온음료를 단번에 들이켰다. 역시 마 시다 만 거라 그런지 시원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비타민 음료 두 병을 번갈 아 보았다. 뽑아온 지 얼마 안 되었는지 병 표면에는 물기가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런 식의 마음 씀을 보고 있으니 금방 편안해졌다. 두근두근 정신없던 심장도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름만 다르고 맛은 비슷한 음료 중 뭘 먼저 먹을까 하는 건 정말 사소한 고민이었다. 배구를 빼고 그런 고민을 하 는 건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금방 그 고민에 마음을 뺏겨버렸다. 어 떤 걸 골라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고 잘못 골라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 지 않고. 이보다 더 마음 편한 고민은 없었다. “좋아, 이걸 먼저 마시자.” 유이는 음료수 하나를 집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가는 건 몸이 좋 지 않아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강변이라도 한 바퀴 달리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조금 덥기는 하지만 체육관 안처럼 실내가 아니라 탁 트여있는 바깥에서 땀을 흘리는 것도 오랜만인 셈이었다. 예전에는 제대로 뛰지 못해 서 공을 놓칠 때가 많았다.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 학교 가기 전과 집에 돌 아오기 전에 기다란 강변을 있는 힘껏 달렸다. 그때 헉헉 목구멍까지 올라 오는 숨을 참으면서 애를 쓰던 기억이 났다. “오늘은 일찍 가네?” “체육관에서 쫓겨났어.”


“그러게, 안색이 나빠 보여. 걱정되네.” “응, 걱정해줘서 고마-” 유이는 뻗었던 손을 그대로 멈추었다. 어느새 그녀의 앞에 시미즈가 머리 카락을 넘기면서 서 있었다. 갑작스레 따가운 햇볕이 가려졌다고 생각했는 데, 의자 앞에 드리운 키요코가 만든 그늘 때문이었다. 학교 수업이 전부 끝 난 이후라 주변에 빈 벤치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키요코는 딱 유이가 앉아있 는 벤치를 골라 그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명백히 그녀에게 용건이 있는 눈치였다. “시, 시, 시미즈?” “응, 시미즈 키요코. 혹시 내 이름 몰랐어?” “아, 아, 아,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아, 알고는 있었지만!” 알고는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우연히 만날 수 있던 건 어제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얼굴을 이틀 연속으로 보는 건 엄청난 타격이야, 그러니까 어 엄청 좋은 의미로. 그래도 그녀가 보는 앞에서 심장을 부여잡을 수는 없어 서 유이는 대신에 있는 힘껏 시선을 돌렸다. 시미즈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 게 되고서야 유이는 허겁지겁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손에 든 음료병을 떨어뜨릴 뻔한 걸 시미즈가 붙잡아 주었다. 허리를 숙이자마자 검 은 머리카락이 자르르 흘러내렸다. 유이는 손을 거들기는커녕 멍하니 시미 즈의 옆모습만을 바라보았다. 음료수병을 건네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시미즈를 뒤늦게 알아채고 유 이는 횡설수설했다. 그러니까 남자 배구부의 소문난 매니저. 뭘로 소문났는 데? 그러니까 엄청 예쁘고 머리도 좋다고. 여자 배구부에까지 그 소문이 들 리는 거야? 시미즈 키요코라고 하면 우리 배구부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아 니, 우리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 없으니까. 어쩌다 보니까 그녀의 추종자라도 된 것처럼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키요코가 딱히 크게 놀라 지도 않고 크게 피하지도 않고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깜박이며 맞장구도 쳐 주었기 때문에 유이는 점점 갈수록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 하게 됐다. 이것저것, 저것이것. 그녀는 시미즈에 대해서 들었던 소문을 전


부 늘어놓다 못 해서 그녀가 키요코를 보자마자 처음 생각했던 것까지 줄줄 말했다. 밤의 여신인 줄 알았다, 잠시 나타난 요정인 줄 알았다, 집에 가 보는 내 내 환상인 줄 알았다. 이제까지 많은 찬사를 들어왔던 키요코였지만 그렇게 까지 대놓고 추어올리는 데는 익숙하지 않았다. 환심을 사기 위해 그녀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은 많았지만, 아무런 욕심도 없이 순수하 게 이야기하는 건 유이가 처음이었다. 넉살 좋게 넘어가는 기술은 시미즈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에 반짝반짝 홀린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 는 유이에게 어떤 대답을 해 줘야 할지 고민했다. 한 마디 한 마디 그녀에게 건네던 시미즈가 침묵하고 나서야 유이는 황 급히 제 입을 꾹 틀어막았다. 이제까지 홀린 듯 그녀에게 건네던 칭찬이 뒤 늦게 머릿속을 강타했다. 도대체 시미즈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였을지 상상 할 수 없어서 머리가 팽팽 돌았다. 어지럼증이 얼굴까지 올라왔다. 유이는 비틀비틀 간신히 균형을 잡다가 벤치에 도로 주저앉았다. 귀까지 새빨개져 서 가실 줄을 몰랐다. 시미즈에게 대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는 민망함 도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말해도 시미즈 키요코라는 사람을 표현 할 수 없다는 감탄에서 비롯된 붉음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시미즈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래도 그거 칭찬이지? 고마워.” 그녀가 돌려준 건 어젯밤처럼 둥글게 휘어지는 웃음이었다. 활짝 웃는 건 잘 맞지 않아 어색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그녀는 고작 요만큼 올라간 입꼬 리만으로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표정을 만들었다. 유이는 음료수를 쥐 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나마 어제는 밤의 어둠이 유이를 숨겨주었 다지만, 환한 낮 높게 떠오른 해는 그녀의 표정을 숨겨줄 생각이 조금도 없 어 보였다. 시미즈는 입을 멍하니 벌리고 그대로 굳어버린 유이를 보고 쿡 쿡 웃었다. 손이 입매를 살짝 가렸다. 소리 내어 웃으면서도 시미즈는 자신 이 이렇게 웃을 수 있었던가 싶어 잠깐 의아하기까지 했다.


시미즈는 선물을 많이 받았다. 발렌타인 데이나 화이트데이 때, 크리스마 스나 기념일 근처를 따졌을 때 학교에서 가장 많은 선물 상자를 받아드는 건 단연코 그녀였다. 무슨무슨 날이라는 건 그녀를 동경하거나 좋아하는 사 람들이 만드는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이 라고 여겨지는 발렌타인 데이 때도 시미즈는 초콜릿을 다음 달까지 질릴 정 도로 남을 만큼 받았다. 같은 여자들이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녀들의 손 으로 전해달라고 싹싹 빌어 간신히 도착한 남자들의 것이 대부분이었다. 유이는 그녀에게 어떤 날이든 관계없이 선물을 바치는 남자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당장 그녀만 해도 벤치에 놓아둔 비타민 드링크를 두 손으로 들 어다 시미즈에게 바치고 있었다. 두 개나 선물 받아서 다행이야, 라는 생각 도 했고. 아직 뜯은 게 하나밖에 없어서 다행이야, 라는 생각도 했다. 선물 이야 많이 받아 익숙할 텐데도 시미즈는 고운 손길로 유이가 내민 선물을 받았다.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하나. 유이가 말을 잇지 못해 인상 을 팍 찌푸리고 있을 때 시미즈는 치마를 조심스레 잡고 벤치에 앉았다. 유 이의 옆자리였다. 무심코 인기척에 옆을 돌아보았다가 유이는 심장이 쿵 떨 어지는 줄로만 알았다. 너무 가깝잖아. 입 밖으로는 차마 낼 수 없이 입술만 뻐끔거렸다. 혹시 시미즈가 기분이라도 나빠할까 봐 들키지 않게 옆으로 몸 을 옮기려고 최대한 애를 썼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벤치의 맨 끝자리를 아 슬아슬하게 차지해버렸다. 유이는 시미즈가 음료 뚜껑을 뜯는 손가락을 침을 꿀꺽 삼키면서 바라보 았다. 그렇게 가느다란 손으로는 제대로 뜯지 못할 것처럼 보였지만, 말만 배구부의 매니저가 아니었다. 아작, 왠지 평범하게 뜯는 것보다 뭔가 더 부 서지는 소리가 났다. 시미즈는 아무렇지 않게 찌그러진 뚜껑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갑자기 말 걸어서 미안, 어제도 그렇고. 많이 놀란 표정이네.” “아니, 뭐어. 그런 건 아니고.” 놀랐다. 심장이 쾅 떨어질 정도로 놀랐다. 심장이 떨어지다 못해 흘러넘친 마음이 전부 다 그녀에게 흘러갈 정도로 깜짝 놀라 버렸다. 놀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녀에게 홀딱 반해서 그렇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어서 유이는 멋쩍은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시미즈는 잠깐 애매한 표정을 지었 다. 미안한 표정을 지으려던 것 같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얼굴은 찌푸리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름 이래저래 입꼬리를 움직여보던 시미즈는 유 이에게 금방 사과했다. 미안, 격한 감정 표현에는 서툴러서. 시미즈의 말이라 면 뭐든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유이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 널 눈여겨보고 있었어.” “날?” “배구부의 주장이잖아? 나도 배구부의 매니저니까.” 시미즈는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을 보고만 있는 건 꽤 목이 타 는 일이었다. 유이는 손에 쥔 음료수를 한 번에 들이켰다. 신맛이 났다. 목 이 더 탔다. 유이는 덩달아 침을 꿀꺽 삼켰다. 매니저라고 하는 건 장식이 아니었다. 그녀가 비록 너무 예뻐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기는 했지만 원래 매니저라는 건 말 그대로 선수들을 관리해 줘야 했다. 먼저 말을 하는 일이 많이 없기는 했지만 대신에 시미즈는 눈썰 미가 좋았다. 구석에 서서 경기장을 한 바퀴 훑어보면 오늘 특별히 컨디션 이 좋은 부원이 누군지 기분이 나쁜 부원이 누군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포지션을 지정하는 건 그녀가 하는 일이 아니었지만, 컨디션이 나빠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물 한 잔을 건네주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제대로 모르던 배구 용어를 익히고. 감독과 마주 앉아 경기 영상을 분석 하고. 그 와중에 그녀는 다른 배구부의 자료마저 수집했다. 굳이 배구부뿐만 이 아니라 운동부라면 전부 다 한 번씩 들여다보았다. 그녀에게 빠져서 자 료를 가져다준다는 사람은 수두룩했고, 그녀는 요령이 좋게도 그런 일을 거 절하지 않았다. 다른 학교 배구부의 전략을 빼 오는 건 불가능했지만 대신 다른 운동부가 컨디션 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시 미즈는 매니저 역할을 맡고 나서 제일 먼저 그 일을 했다. 여자 배구부의 존재는 그 와중에 알았다. 별다른 성적은 내지 못했기에 참고할 가치가 없 다고 그냥 넘겨버리기만 했다.


그러던 와중에 시미즈는 유이의 모습을 보았다. 늦은 시간 체육관 옆을 지나가다가. 아직 불이 켜져 있구나 싶어서 발뒤꿈치를 들어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시미즈는 그때 유이를 처음 보았다. 늦게까지 남아서 연습하는 건 그녀가 보고 있는 남자 배구부도 마찬가지 였다. 그녀는 매번 의욕에 불타 연습하겠다고 주장하는 몇 명을 남겨두고 먼저 일어섰다. 그 의욕만큼 갈수록 성적이 좋아졌기 때문에 나쁘지도 않았 다. 하지만 그녀의 일은 매니저의 일뿐만이 아니다. 배구부 매니저이기 전에 한 명의 학생이었다. 공부는 공부대로 열심히 해야 했고,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서면 저녁 늦게라도 한 번은 복습해보아야 했다. 먼저 일어서는 시미즈 의 성격을 알고 있기도 했고, 연습하기로 약속했던 시간도 전부 지났기 때 문에 억지로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아 있는 사람이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연습하는 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시미즈는 창문에 바짝 매달려 유이의 모습을 보았다. 점프력을 연습하는 지 그녀는 코트에 가까이 붙어 점프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녀가 수집 한 자료 중에는 미치미야 유이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여자배구부 주장, 그 냥 얼굴과 이름만 스윽 보고 넘어갔던 모습이었지만. 시미즈는 이마에 고인 땀방울에 시선을 빼앗겼다. 스파이크도 리시브도 주장인 이상 모두의 능력을 알아볼 수 있도록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했 다. 코트 위에서는 가장 잘하는 사람에게 맡길지언정, 그들이 어느 방향으로 잘하고 어느 방향으로 부족한지 집어서 알려줄 수 있어야 했다. 코치도 물 론 있기는 했지만, 성적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여자 배구부에 온전히 신경 을 집중해 줄 정도로 마음씨가 좋은 사람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려면 조금이라도 더 많이 해야 해.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으로 얼굴이 온통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유이는 그걸 팔로 슥 훔치고 다시 공을 들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시미즈는 어느새 제가 창틀을 있는 힘껏 잡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잠깐만 보고 가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것도 잊어버렸다. 별이 총총 오르고 그녀가 원래 돌아가던 시간에 비해 바람도 조금 차게 바뀌었다. 겉


옷도 걸치지 않은 몸이 싸늘하게 식어서야 시미즈는 문득 내일 제출할 과제 가 있었다는 걸 생각했다. 제대로 제출하지 않으면 성적에 큰 지장이 온다. 머리로는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까지 도 유이는 한 점 흐트러짐 없이 가쁜 숨을 뱉고 뱉으며 끊임없이 연습을 하 고 있었다. 유이, 고작 이름과 얼굴만 알던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그 광경을 본 순간부터 시미즈의 가슴속에는 그녀의 존재가 크게 남았다. 턱을 괴고 훈련하는 배구부원들을 보았다. 굳이 더 연습하라고 시키지 않 아도 의욕은 넘쳤다. 그녀가 돌아간 다음에도 있는 힘껏 공을 쥐는 손이 있 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제까지 알고만 있을 뿐 가슴으로는 느껴보지 못했 던 이야기였다. 코트를 넘어 바닥에 타앙- 공이 요란하게 부딪칠 때마다 시 미즈는 유이를 생각했다. 그렇게 열심히 연습하는 얼굴은 처음 봤어. 창문으 로 헤에 입을 벌리고 구경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배구에 정신이 팔려 단 한 번도 시미즈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때부터 가끔 시미즈는 여유가 있는 날에는 조금 늦게 돌아갔다. 어차피 부실에서 나가는 시간이야 언제나와 같았기 때문에 부원들은 아무것도 모르 고 손을 흔들어 인사해주었다. 몇 번이나 유이에게 말을 걸 기회를 노렸지 만, 그녀는 항상 늦은 시간까지 연습을 했다. 기다리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연습에 정신이 팔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시간이 후닥 갔다. 하 지만 시미즈는 결국 매번 시간에 졌다. 남자부원들이 나오기 전에, 왠지 몰 래 엿보고 있는 게 부끄럽다는 이유로. 시미즈는 아슬아슬한 끝에 빠져나갔 다. 쫑긋 세우고 있는 귀에서는 여전히 탕탕 체육관 안에서 공이 퉁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제는 유이가 조금 일찍 나왔다. 시미즈는 조금 늦게 반응했다. 이왕 마 주한 김에 큰마음을 먹고 말을 건네 보기도 했지만. 유이와 헤어지고 돌아 가면서 시미즈는 계속 고민했다. 첫 만남이 서툴렀을까, 많이 어색했을까. “아니, 그럴 리 없지! 나야 이렇게 미인인 시미즈 씨가 관심 가져 주는 것만으로도 기쁜걸!” “미인이라는 게 여자 배구부에도 통하나 봐.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라 배


구 이외에는 관심이 없을 줄만 알았어.” 음료수를 다 마시고서도 시미즈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빈 병을 몇 번 만지작거렸다. 대신 버려줄까 생각한 유이가 그녀에게 손을 뻗는 순 간에, 손가락 끝이 닿았다. “…아.” 흠칫 놀란 건 시미즈였다. 유이는 당황해서 뻗은 제 손을 거두지도 못하 고 그대로 시미즈를 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 말이야.” “으, 응.” 어색한 분위기를 어색한 목소리로 시미즈가 먼저 깼다. 그녀는 어색한 얼 굴로 유이를 바라보았다. “네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또 보면서.” “응.” “그만 너에게 반해버린 것 같아.” “응, …응?” “너를 좋아해, 미치미야 유이.” 예상하지 못한 그녀의 이야기에 유이는 눈을 크게 떴다. 잘못 들은 건 아 닐까, 분명 잘못 들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너무 달콤하고 사랑 스러운 말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은 식으로 이야기했 으면서도 시미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마를 톡톡 털면서 시미즈는 유이 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러웠지? 미안해.” 부끄러워라. 조금도 부끄럽게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유이는 그 시미 즈의 말이었기에 고개를 저도 모르게 끄덕였다. 유이가 그녀를 따라 덩달아 일어났을 때 그녀는 이미 유이에게 등을 보이고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역시 그 모습은 유이가 알고 있던 만큼 단정하고 고상하며 아름다운 모습이 었다. 살랑, 바람이 불었다. 곱게 빗은 머리카락이 날렸다. 살짝 드러난 목덜미


와 귓등이 새빨갛게 변해 있는 걸 보자마자 유이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마 구 정신없게 요란하게 뛰는 심장이 목 밖으로 넘어올 것만 같았다. 치, 치사해. 이건 반칙이야.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유이는 그사이에 저만큼 멀어진 시미즈를 따라잡기 위해 힘껏 달렸다. 시 미즈, 나는 널 좋아해. 나도 널 좋아해. 어서 빨리 그 마음을 그녀에게 직접 전해주기 위해서.

Í

END

HQ! : 배포본

페어플레이 날짜 ┃ 2016년 08월 14일 CP ┃ 유이x키요코 이 책은 HQ의 2차 창작으로 작품 및 등장인물과 어떤 현실적 관계가 없는 허구입니다. 이 글의 내용은 원작이 아니며 이 글에 사용된 설정은 2차 창작을 위한 변경 및 재해석을 거쳤음을 안내드립니다. 예쁜 표지를 그려주신 사쿠야님 감사드립니다. ⓒ Copyright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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