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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오래된 사진 x크로노스 + 료x후부키


강의는 지루했다. 들어본 적은 없지만 다 아는 내용이었다. 이 론뿐만이 아니라 실전을 위주로 교육하는 아카데미의 방침상 어 느 정도 실전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료에게 맞추어진 ‘어느 정도’가 조금 까다롭기는 했지만. 하지만 강의 중간에 몇 번이나 나갈까 생각한 건 지루하기 짝 이 없는 강의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오늘도 다른 때와 마찬가지 로 과장스레 목에 건 넥브로치를 콩콩 당기는 교수, 크로노스 데 메디치 때문이었다. 천재인 사람이 아니면 아카데미에 입학할 자 격이 없다고 대놓고 이야기하는 차별적인 시선은 실력이 뛰어난 료에게 아주 정성스러운 호의로 다가왔다. 오늘만 해도 일부러 눈 에 띄지 않는 맨 뒷자리를 골라 앉았는데도. 마루후지 료군, 대답해 보라는 거라네. 마루후지 료 학생, 답을 당당히 이야기하는 게 좋다는 거라네-? 역시 마루후지 료. 이 정 도의 천재가 아니라면 듀얼을 다 포기하는 게 좋다는 이 말씀! 고 작 두 시간 되는 강의 시간 내내 료는 제 이름이 그에게서 몇 번 6


불렸는지 도대체 셀 수가 없었다. 눈에 띄는 것 자체야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크로노스 의 교수 앞에서는 곤란하다. 아주 차별적인 시선은 그 교실에 다 른 사람이 아예 없는 것마냥 료에게 칭찬을 퍼부어댔다. 이 정도 면 호의인지 악의인지 모를 정도다. 그나마 료가 정말로 실력이 있는 사람이었던데다가 하필이면 악명이 자자한 그 크로노스의 칭찬이었기 때문에 시기하는 시선은 없었지만. 료는 그냥 뻔한 질 문에 뻔한 답을 내어놓고 있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물론 그것도, 강의실을 빠져나오기 전까지만이었다.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 등-장!” 다 같이 박수로 환영해주시기 바랍니다, 유후! 가볍게 웃는 소 리와 함께 주변에서 박수 소리가 울렸다. 료는 자리에 멈추어 선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큰 사건이라도 있는 것처럼 강의실 정문 에서부터 학생들이 주르륵 늘어서 마구 환호하고 있었다. 아니겠 거니 하고 생각해봐도 틀림없다. 분명히 그들의 시선은 막 정문을 빠져나온 료에게 딱 머물러 있었다. 료는 게다가, 그 목소리가 아주 익숙한 사람의 목소리라는 것도 알아챘다. “오빠, 그거 언제 가지고 간 거야!” 아스카가 한쪽에서 깡충깡충 뛰고 있었다. 늘씬한 그녀의 키로 도 손이 닿지 않는 건, 그가 사다리도 없는 높은 단상 위에 홀로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옆에서는 료도 익히 알고 있는 쥬다이와 동생 쇼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조금 신경이 쓰이기도 했지만, 일단 그보다 먼저 봐야 할 사람이 있다. 7


후부키는 아래의 아스카를 향해 슬쩍 웃어주고는 손에 든 확성 기를 치켜올렸다. 그래, 이런 소동을 벌일 만한 사람은 후부키 밖 에 없었다. 요란한 데다가 퍼포먼스를 좋아하며, 거기에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까지 끝내주는 한 사람. 료는 후부키를 노려보았다. 후부키는 그의 시선과 마주하자마자 손을 치키며 살짝 눈을 감아 윙크해주었다. 윙크고 나발이고 이 눈에 띄는 소동 가운데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이미 그에 대한 경고를 후부키가 해놓기라도 했는지 그의 앞뒤는 모여든 학생들 로 차단된 후였다. 료는 모여든 사람을 해치고 후부키에게로 걸어갔다. 얼마 되지 않는 길인데 길고 긴 것처럼 힘들기만 했다. 하지만 열심히 향하는 걸음이 소용도 없게. 후부키는 료가 닿지 않는 곳에서 여유롭고 유쾌한 어조로 손을 들어 올렸다. 누가 울 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에서 요란한 배경음이 보조적으로 울렸다. “모두의 천재, 카이저 료의! 아주 깜찍하고 귀여운 5살 사진을 공개합니다, 짜자잔! 다들 박수로 환영해주시기 바랍니다!” “안돼! 형님한테 저 혼나요, 진짜! 나, 난 끝났어…….” “오오, 박수!” “쥬다이 형님! 거기서 같이 박수를 치면 어떻-…. 아, 난 이 제……. 삶에 여한이 없어.” “쇼, 쇼군. 포기하지 마! 오빠가 벌인 일은 어떻게든 내가 수습 해 볼 테니까! 후부키! 당장 안 내려와!” “거기에 더해서, 더 깜찍하고 귀엽고 아름다운 우리 아스카도! 8


같이 소개합니다!” “아니다, 내려오지 말고! 후부키, 거기서 그냥 죽어버려!” 평소라면, 그러니까 적어도 아스카만 있었더라면 료는 이게 무 슨 대소동인지 고개만 젓고 갈 길이나 마저 옮겼을 거다. 후부키 가 온갖 요란을 떠는 건 한두 번 보아온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은. 료는 고개를 들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허공이었던 곳이다. 후부키가 서 있는 곳보다 조금 높은 곳에 아 아주 커다랗고 넓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아주 어릴 때, 작은 동 생을 데려다가 거의 끌고 다니다시피 했던 적이 있다. 머릿수건을 메고 앞치마를 두르고 긴 옷자락이 질질 끌리는 데다가 하기 싫 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던 탓에 눈가에 눈물까지 핑 고여 있는 -…. 철컥, 료는 팔을 들었다. 그의 듀얼 디스크가 넓게 펼쳐졌다. “후부키, 승부다. 여기서 널 죽이… 아니, 승부를 내자.” 그 옆에 아스카도 걸려 있었지만, 지금 료에게 중요한 건 남의 얼굴이 아니었다. 어디서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료는 후부키를 노 려보았다. 그가 그럴 걸 예상했던 건지 후부키는 빙글빙글 웃으면 서 단상의 난간에 훌쩍 걸터앉았다. 사람을 약이라도 올리는 것 같아서 료는 이까지 갈았다. 심지어 후부키는 이럴 때만 철저하게 도, 단상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고 사다리고 죄다 싹 치워놓았다. “이것 봐, 료! 너 진짜 귀여웠구나! 카이저라는 별명에 하나도 안 어울려!” “형님, 죄송해요……. 제, 제 의지가 …아니, 으흑. 으흑…….” 9


“와, 쇼. 저기 작은 게 너지?” “후부키! 료 사진은 그렇다 치고 내 사진 당장 안 내려?” 쇼는 울고, 아스카는 화를 내고, 쥬다이는 박수나 치고 있고, 거 기에 아무리 친한 친구라지만 료는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 후부 키에게 소중한 카드를 몇 장이나 집어 던지기까지 했다. 후부키가 그걸 전부 하나하나 피해냈기 때문에 더 짜증이 올랐다. 따악 한 장만 맞아줬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텐죠인님, 힘내세요! 이게 무슨 놀이 같은 건 줄 아는지, 밑에 모여든 주로 여학생들은 삼삼오오 손을 휘두르며 후부키를 응원 하고 있었다. 그 소란에 아카데미 안에 있던 학생들도 하나하나 얼굴을 내밀었다. 서로 밀고 밀치고 집어 던지고 응원하는 아우성 이 교정 한가운데를 뒤엎었다. 아카데미 역사에 큼지막한 글자로 기록될 만한 난장판이었다. “…머리가.” 료는 머리를 꾹 눌러 잡았다. 전부 어제 일 때문이었다. 후부키를 잡으려고 료는 단상 밑에 섰다. 아마도 사진을 가지고 있던 주역인 쇼를 바라봐주는 것만으로 소년은 풀이 죽어서 어디 선가 줄사다리를 날라왔다. 그와 친하게 지내던 쥬다이와 나란히 가져오는 뒤로 레드의 기숙사장이 펄펄 화를 내며 달려오고 있었 다. 혼나는 건 둘의 몫으로 남겨두고 료는 후부키가 바닥으로 내려 오기 전에 줄사다리를 위로 던져 올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단상 까지 올라간 료는 듀얼 디스크를 후부키에게 겨누었다. 아무 곳에 10


서나 듀얼을 하는 건 교칙으로 금지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때는 료도 제대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후부키, 가만두지 않겠어. 머릿 속에 그 생각 하나만이 가득 차 있을 뿐. 후부키는 료에게 씨익 웃었다. 료를 피해서 밑으로 훌쩍 뛰어내 렸지만 그는 후부키를 바로 쫓지 못했다. 아까 후부키에게 던진 카드가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하나씩 주워오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이 후부키가 도망가는 길 내내 한 장씩 떨어져 있었다. 그렇 다고 소중한 덱을 버릴 수는 없었기에 료는 이를 갈면서 카드를 주웠다. 후부키는 있는 힘껏 달리고, 당연히 료도 있는 힘껏 쫓아갔다. 그 뒤에서 기숙사장의 화를 피하기 위해서 쇼와 쥬다이가 같이 달렸다. 화가 난 아스카가 제 얼굴이 인쇄된 현수막을 뜯어 들고 후부키를 같이 쫓고 있었다. 후부키의 팬클럽 어쩌고도 같이 쫓아 왔고, 그 소란을 말리기 위한 교수들도 달렸으며……. 료가 후부키를 잡아 정말로 주먹을 날리기 직전에 진정되었다. 기숙사장과 교수 한 명에게 팔이 잡혀서 료는 제지당했다. 질질 끌려가면서도 후부키는 료에게 손을 흔드는 걸 잊지 않았다. 료는 제 주먹이 조금 더 빠르지 않은 사실을 한탄했다. 그 후로도 사실 은근슬쩍 기회를 엿보기는 했지만, 낮의 소동을 정리하는 데 꽤 많은 노력을 들여야 했던 교수진들은 후부키도 료도 단단히 지키 고 있었다. 료는 결국 다음을 기약하고 잠자리에 누웠다. 베개를 끌어안고도 제대로 잠이 오지 않아 이를 박박 갈았던 건 별개의 일이다. 덕분에 잠을 설쳤다. 자려고 하면 생각나서 일어나 주먹을 쥐 11


고, 또 누우면 생각나서 진정하려고 창문을 열다 보니 어느새 바 깥이 환하게 밝아 있었다. 어깨를 펴서 일단 등교는 했지만, 그래도 졸린 건 졸린 거다. 잠을 자지 않다 보니 머리도 아팠다. 료는 같은 강의실에서 어제와 비슷한 자리를 차지하고 제일 먼 저 손을 이마에 짚었다. 그나마 오늘 실기가 있는 날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어제 카드를 쥐었다 하면서 난장판을 피우는 데 본의 아니게 동참해버렸기 때문에 덱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다. 오늘 돌아가면 덱 정리를 하고 잠을 조금 일찍 자자. 머릿속으로 할 일 을 생각하면서 료는 아무렇게나 펜을 꺼내어 탁자에 놓았다. 날이 밝은 것만 보고 일어났기 때문에 강의실에 조금 일찍 와 버렸다. 자리는 뒷자리였지만, 강의실에 사람은 없었다- 단 한 명 만 제외하고. 수업 시간에 도무지 맞춰 들어오지 않기로 유명한 크로노스 교 수가 무슨 일로 단상 위에 먼저 서 있었다. 어제와 오늘 시간표가 똑같다는 걸 떠올리고 료는 그로서는 드물게 한숨을 쉬었다. 크로 노스의 강의는 다른 의미로 두통을 더해주었다. 오늘은 뭔가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할 수 있을 기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카이저-군.” 크로노스는 예의 그 우-아한 목소리로 료를 불렀다. 무시하고 싶은 심정이 태반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교수였다. 료는 대답 대신 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크로노스를 바라보았다. “어제 일 말인-거네.” 12


일찍 나와서, 료에게만 따로 이야기할 거라고는. 역시 료가 짐 작했던 대로 어제 일이었다. 료는 크로노스가 뭐라고 탓을 하기 전에 먼저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시작한 사람이 따로 있다고 해 도 그걸 같이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 건 그의 탓도 있었 다. “…어제 일은 주의가 부족했습니다.” “아니, 카이저-군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고있-다네.” …크로노스는 차별주의로도 유명했다. 역시 성적이 좋은 학생에 게 너그러운 그를 보면서 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이야기로 한마디 하려는 게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일인지 짐작도 가지 않 았다. 어제의 일, 그 일을 빼면 수업 태도밖에 없었다. 속으로 어 떤 생각을 하든 겉으로야 충실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 트집을 잡 을 건 조금도 없다고 료가 생각하고 있을 때. 큼큼, 크로노스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어제 아무래도 소란스러웠던 거네. 의도치 않게 그래서 카이저 -군의 사진을 봤는데…….” 료는 고개를 다시 푹 떨어뜨렸다. 나름 추억이라고 소중히 간직 하고 있을 쇼에게 한 마디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후부키에게는 한 마디 해봤자 어차피 소용도 없을 걸 알았고. 고개를 숙이고 료는 크로노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수업에 대 한 질문과는 다르게 이런 경우에는 어떤 식으로 무슨 대답을 해 야 할지 감이 잡히지도 않았다. 어쨌건 나름 죄송하다는 말을 반 복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봤는데, 그다음에 크로노스는 영 말이 없었다. 13


한참 동안 그러고 있으려니 아무리 상대가 크로노스라도 궁금 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료는 고개를 슬쩍 들었다. “정말, 정말……. 생각도 못 했던 귀여움이지 않-” 크로노스는 볼을 빨갛게 붉힌 채로 손가락을 비비 꼬고 있었다. 차마 그 뒤에 올 문장을 다 들을 수는 없어서, 료는 크로노스의 말을 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말을 하면서, “오늘 수업. 조퇴하겠습니다…….” 후부키, 듀얼 문제가 아니라 정말 죽여버리겠어. 료는 주먹을 꽉 쥐며 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다. Í

14

END


위한 가이드 x아스카


“형님, 이거 완전-” 쇼는 료의 앞에서 우물쭈물거렸다. 아무리 보아도 하고 싶어 보 이는 말이 있어 보이는 소년 때문에 료는 화면에서 고개를 돌렸 다. 마우스를 너무 오래 잡고 있다 보니 팔이 다 아파왔다. 듀얼 말고 다른 일에 열중해 본 건 오랜만이었다. 어깨를 콩콩 두드리 면서 료는 동생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를 무서워하고 어려워하기 만 하던 쇼도 이제 자기가 할 말 정도는 찾아서 할 수 있을 정도 로 컸다. 그래 봤자 료의 눈에는 고작 한 뼘 정도밖에 안 되어 보 였지만. 대답은 없었지만 쇼는 가족답게 료가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 는 걸 알았다. 집중하고 있던 대상에서 시선을 떼고 돌아보았다는 것 자체가 쇼에 대한 료의 호의였다. 쇼는 다시 한 번 모니터를 슬쩍 훔쳐보았다. 료는 마우스에서도 손을 아주 떼었다. “무슨 일이지?” “형님, 제가 형님의 일에 막 참견하려는 건 아닌데요.” 18


쇼는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표정으로 다시 머뭇거렸다. 한참의 망설임 끝에 쇼는 그 모니터를 가리켰다. 최근에 유행하는 게임이 맞기는 맞았는지 쇼 또한 그걸 꽤나 한참 전에 시작한 모양이었 다. 동생과 듀얼 말고 하는 일이 겹치는 건 오랜만이었다. 시작한 지 며칠밖에 안 되었지만 료는 이미 레벨을 꽤나 올렸다. 한 번 일에 집중하면 흐트러지지 않는 정신이 게임에서까지 발휘된 까 닭이었다. 쇼는 료의 캐릭터 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나의 일에 정신이 팔리면 깜박 잊고 거기에 열중하는 것도 소년은 료 와 같았다. “저기, 형님. 그거 완전히 망캐네요.” “…응?” 직업은 힐러, 스킬트리는 전사, 장비는 탱커. 쇼는 료의 옆에서 마우스를 잡고 하나하나 캐릭터의 잘못된 점을 집어주었다. 원하는 방향으로 캐릭터를 육성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즐기 기 위한 게임의 본질에 오히려 그편이 잘 맞았다. 하지만 그게 료 가 지내는 방식에 맞아 드는 건 아니었다. 고작 게임이라는 말, 고 작 카드라는 말, 고작 승부라는 말. 뭐든지 앞에 고작이라는 하찮 은 단어가 붙는 건 료가 가장 싫어하는 방식이었다. 쇼는 누구보 다 료의 성격을 잘 알았다. 게임이라고는 해도 료는 벌써 사흘 내 내 모니터 앞에 붙어 앉아 있었다. 자는 시간과 먹는 시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마우스를 움직여 캐릭터를 키우는 그는 아무리 보아도 재미로 게임을 하는 사람과는 멀게 보였다. 게임에서 목적 을 이루려면 캐릭터의 육성에 전문적이어야 한다. 자기 멋대로 스 19


킬과 레벨을 올리는 게 아니라 선택한 직업에 맞추어서 스테이터 스를 올려야 남들이 이야기하는 ‘좋은 캐릭터’가 된다. 특히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플레이가 중심인 온라인 게임이라면 더욱 말할 여지도 없다. 그런 면에서 료의 캐릭터는 처참한 육성 상태였다. 쇼는 딸각이 는 마우스 소리 너머로 적을 공격하는데도 도무지 나오지 않는 데미지 수치를 보았다. 쥬다이와 만죠메 둘 중 누가 먼저 시작했을까. 서로 경쟁이 붙 어서 밤을 새워가며 하는 게임을 말리다가 얼결에 쇼도 그 전투 에 참전했다. 졸린 눈을 비비는 쥬다이가 다그치는 옆에서는 당연 히 쥬다이 형님의 편이 되어야죠, 고개를 끄덕이다가. 화가 잔뜩 오른 만죠메가 그의 멱살을 잡고 탈탈 털었을 때는 만죠메의 옆 에서 돕겠다고 이야기했다. 그 게임은 두 개의 대항 세력으로 나 누어져 서로를 적대하는 이야기 줄기를 가지고 있었다. 아직 누구 의 편을 들지 결정하지 못했으면서도 쇼는 일단 마우스를 잡았다. 이럴 시간에 둘 다 듀얼 연습이나 하는 게 나을 텐데. 그건 쇼의 유언 같은 말이 되었다. 게임에 한 번 재미를 들리면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쇼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쥬다이와 만죠메처럼 밤을 새 우는 걸로도 모자라 쇼는 온갖 웹을 돌아다니면서 일일이 정보까 지 모으기 시작했다. 온라인 게임을 막 시작한 사람이라면 모르지 만 몇 번 해본 경험이 있다면 항상 어딘가에는 직업에 맞는 공략 이 있다는 걸 알았다. 처음부터 그런 정보를 와장창 긁어모아 쇼 는 가장 빠른 육성 단계를 밟고 지나갔다. 그렇게 딱 일주일이 흐 20


르자, 먼저 게임을 시작했던 쥬다이와 만죠메의 레벨을 훌쩍 뛰어 넘어버렸다. 쇼가 요새 푹 빠진 행복한 고민은 쥬다이와 만죠메 둘 중 누구 를 선택할까 하는 고민이었다. 둘이 합쳐서 덤벼도 쇼가 단단히 무장한 장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돈이 아무리 많아 대단한 무기를 살 수 있다고 해도 정작 캐릭터가 그 무기를 들 수 없다 면 무용지물이었다. 만죠메는 몇 번이고 덤볐다가 패배하고 우울 하게 고개를 숙였고 쥬다이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없다면서 파 이팅을 외치고 다시 마우스를 잡았다. 쇼는 이제 그들보다 한참 앞선 위치에 서서 후후 웃음을 흘리고만 있으면 되었다. 여유를 찾은 지 며칠. 그동안 방에 틀어박혀서 컴퓨터만 붙잡고 있는데도 료가 뭐라고 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싶었다. 신 경을 쓰는 사람이 없다는 점에 기쁘기도 했으면서 그 정도의 관 심조차 보여주지 않는 료 덕분에 우울해지기도 했다. 신경을 아예 안 쓰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런 게 아니 었다. 쇼가 방에 박혀서 캐릭터의 레벨을 올리고 있는 사이에 료 도 마찬가지로 바깥에서 마우스를 잡고 있었다. 이러니까, 정말 형 제 같네요. 그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쇼는 고개를 저었다. 료는 쇼의 지적에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스킬 트리니 뭐니 하 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래도 아직 시작한 지 사흘밖에 되지 않 은 그로서는 말이 어려웠다. 최소한의 잠만 자고 퀘스트를 반복해 가면서 레벨을 올려놓았지만, 생각보다 쉽게 강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료는 할 수 있는 한 힘을 냈다. 같은 걸 반복해서 하는 건 지루하지도 않았다. 온라인 게임이라는 건 처음 해보는 종류였기 21


때문에 며칠이 지났어도 아직 겪어보지 못한 콘텐츠가 훨씬 더 많았다. 이제껏 하지 않았던 온라인 게임에 손을 대서 이 정도까 지 레벨을 올린 것도 집중할 수 있는 료였기에 할 수 있을 정도 로 대단한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게임이라는 건 듀얼과 마찬가지로 나름의 전략을 필요로 한다. 어울리는 무기에 어울리 는 스킬. 힐러가 아무리 공격력이 높아도 전사를 직업으로 선택한 캐릭터에 비하면 약해 빠지기 마련이다. 좋은 검을 들어도 회복력 을 올려주는 데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고. 그런 면에서 료의 캐릭터는 힐러를 직업으로 하면서 스킬은 전사군류만 찍고, 무기 는 초보 탱커들이 두르고 다니는 상점 아이템을 쥔 전형적인 ‘망 캐’였다. 재미야 있을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파티 플레 이를 하는 데는 쥐꼬리만큼도 제 역할을 해낼 수 없다는 뜻이었 다. 쇼도 오랜만에 기껏 시간을 들여 열중하고 있는 게임이다 보니 말이 많아졌다. 이제까지 수집한 정보도 많은 데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그 마루후지 료에게 정보를 알려줄 수 있다니 신이 났다. 소 년은 어느새 자신의 말이 더 많고 빨라진 걸 눈치채고서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형님이 화라도 났을까 눈치를 보았지만, 료는 자리 에 가만히 앉은 채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캐릭터를 지우고 다시 만드는 방법이 있기는 있었지만 이제까지 해 온 시간이 아까웠다. 쇼는 의자를 끌어다가 료의 옆에 앉았다. “그래도 형님, 이대로라면- 별다른 캐릭터가 되지 못할 거에요. 친한 사람들이랑만 할 거면 별로 문제가 안 될 수도 있지만.” 하지만 쇼는 자기가 말을 하면서도 료가 그렇게 하지 않을 걸 22


알았다. 료는 도전과 대결에 있는 대로 달려드는 사람이었다. 성 장하기 위해서라면 이게 고작해야 마우스 몇 번 클릭하면 끝이 나는 게임이라고 해도 쉽게 넘기지 않을 사람이었다. 앞으로 직업 상 길에 맞추어서 새롭게 나아갈 수는 있겠지만, 이미 올라버린 레벨은 돌이킬 수 없었다. 처음이야 다 비슷한 초보자들뿐이었기 에 태가 나지 않았지만, 레벨이 높아질수록 그런 종류의 차이는 벌어지는 법이다. 처음에야 그럭저럭 돈을 들이면 메울 수 있다고 는 하지만 레벨이 높아지면 초반에 잘못 눌렀던 하나의 스테이터 스가 아쉬워졌다. 삭제하고 다시 하는 게 나을 거라고 하는 쇼의 조언은 진심이 었다.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이 게임 자체에서는 삭제밖에 없다 는 걸 새겨듣고 료는 마우스를 쥐었다.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료 를 보면서 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형님. 도대체 이 게임은 왜 갑자기 시작한 거예요?” 유행이라고는 해도 료가 그런 유행을 일일이 따라갈 사람은 아 니었다. 그래픽이 좋고 게임이 재미있다고 게임이 시작되기 전부 터 입소문을 탔던 탓에 지금은 한창 너도나도 그 게임을 하지 않 는 사람이 없었다. 료야 당연히 그런 걸 물어봐도 처음 듣는다며 고개를 저을 사람이었다. 료는 쇼가 자신의 캐릭터를 삭제하는 과 정을 보면서 툭 대답했다. “아스카가 하거든.” “…에엑.” 달기가 그녀의 아름다움으로 주왕을 홀렸다는 이야기는 유명하 다. 초선에게 사로잡힌 여포가 그녀를 끝까지 잊지 못하고 죽었다 23


는 것 또한 모두가 알고 있다. 한 명의 아름다움이 길이길이 전해 내려와 후세까지 전부 다 알고 있을 정도면 그때 빠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료는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아스카가 자기 파티에 힐러가 없대. 쇼는 힐러의 힐 자도 관심 없어 할 것 같지 않던 료가 왜 그 게임을 시작했는지 그제야 알았다. 삭제하려고 누르던 버튼이 당황스러움에 쭉 미끄 러졌다. 홈페이지의 맨 처음으로 돌아간 걸 보면서 료는 이제 끝 났냐고 쇼에게 물어보았다. 쇼는 황급히 처음으로 돌아가 같은 과 정을 반복해야만 했다. 당황한 건 당황한 거고 게임은 또 게임이다. 쇼는 조금 떨리는 눈가를 슥슥 문지르면서 료가 캐릭터를 새로 만드는 과정을 처음 부터 지켜보았다. 이번에도 그는 망설임 없는 동작으로 캐릭터를 선택했고 여전히 망설임 하나 없는 동작으로 다른 직업은 거들떠 보지 않고 힐러를 눌렀다. 응, 힐러도. …좋은 것 같아. 쇼는 애써 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료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아스카가 무슨 직 업을 했을지 정도는 알 것 같았다. 어쨌건 쇼는, 료가 새로 잡은 캐릭터가 이번에는 잘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뭐, 연애사업도 포함 해서. 여러 가지 의미로. 료가 아스카와 이야기한 건 무려 이주일 만이었다. 그 전 한 주 일 동안 아스카는 게임에 빠져 캐릭터를 키운다 파티를 만든다 하면서 료가 부르는 모든 목소리마다 바쁘다는 대답을 들려주었 다. 나머지 한 주일 동안, 료는 아스카가 무의식적으로 털어놓았던 힐러가 없다는 불만을 새겨듣고서 밤을 새워가며 캐릭터를 성장 24


시켰다. 다행이라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게임이라는 걸까. 밤을 새우고 정해진 스킬 트리를 타고 레벨에 맞추어진 필드를 도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고레벨의 무리에는 합류할 수 있었다. 장비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나서 료는 주먹을 꽉 쥐었다. 카이저 료는 처음부터 강한 모습이어야만 했다. 성장하는 시기가 있다고 는 해도, 그걸 아스카의 눈앞에 보일 수는 없었다. 도와주는 사람까지 있으니 금방이었다. 이 정도면 아스카를 넘 겠지, 넘지는 못해도 비슷하기는 할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료는 오랜만에 아스카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적정선을 아는지 아스카 는 게임을 오래 한 사람답지 않게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오랜 만에 얼굴을 보았다고 씨익 웃어주는 아스카에게 료는 그냥 지나 가는 것처럼 게임의 이야기를 꺼냈다. 결코 그녀 때문에 그 게임 을 시작한 걸로 보이기는 싫었다. “어, 그 게임 말이야? 나 그만뒀어.” 료는 눈을 깜박였다. 며칠 내내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게임 에만 시간을 쏟아서 그런지 헛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료는 조 금 거뭇해진 눈가를 비볐다. 원체 밝은 인상이 아니라서 그런지 아스카에게는 평소와 다름없는 료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일주일씩이나 하다니, 나치고는 오래 했지.” “무슨, 파티 어쩌고 만든다지 않았어?” “며칠 하니까 질리더라. 역시 나에게는 듀얼이 더 잘 맞아.” 그런 의미로 우리 오랜만에 같이 듀얼 안 할래? 아스카는 생긋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덱을 꺼냈다. 언제나 차고 있는 듀얼 디스크 25


가 반응에 맞추어 가동을 시작했다. 료는 잠깐 고개를 치켜 하늘 을 올려보았다. 며칠 내내 어두운 방 안에서 모니터만 뚫어지게 보고 있으니 눈뿐만이 아니라 목이니 손목이니 여러 군데가 아파 왔다. 하지만 그런 일에 하나하나 내색하면 카이저가 아니다. 그 나마 덱을 가져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료는 평소의 그처럼 아 스카의 앞에 듀얼 디스크를 찬 팔을 쭉 뻗었다. “듀얼!” “나의 턴, 드로우!” 카드를 한 장 드로우하면서, 료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캐릭터 그냥 삭제해야지. 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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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Dear friend x에드


“프로의 세계는 냉정한 법.” “흠.” “크게 신경 쓰지 마. 료도 그편을 더 좋아할 거야.”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였다. 아니, 여섯 번째일 수도 있지. 첫 번째는 이해했고 두 번째는 이해하려고 노력을 해봤다. 그다음부 터는 아스카는 이해고 뭐고 하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에드 피닉스가 아스카를 찾아와 같은 질문을 한 게, 벌써 한 손에 꼽을 정도는 넘어섰다는 이야기다. 프로니 세계니 뭐니. 에드가 제일 처음 찾아간 사람은 아스카보다 후부키였다. 아무래도 당당 히 버티고 있는 아가씨보다 일방적이긴 해도 료와 친하게 보이는 후부키에게 심리적 거리가 더 가까웠던 면이 있었다. 후부키는 에 드가 그의 앞에 서서 물어보자마자 손을 들어 올렸다. 빈손을 앞 에 두고 황급히 빙빙 저으면서 그는 관심 없다는 듯 굴었다. 원래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거잖아. 지극히 옳은 말이었지 만, 그냥 슬쩍 보기에도 온갖 일에 끼어들고 다니는 후부키가 하 30


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아무튼 거절하는 사람에게 계속 질문할 정도로 에드에게 여유가 없지는 않아서 그는 어쨌건 대답 을 해 준 후부키에게 적당한 인사를 하고서 돌아섰다. 그래서 에드가 찾을 수 있는 건 아스카밖에 없었다. 겉보기에도 냉정 침착이 적혀 있는 사람인 마루후지 료는 그 차가운 인상만 큼이나 정말로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묻고 물 어서 간신히 받아낸 대답이 조금 전에 들렀다 온 후부키라면 말 을 다한 셈이다. 에드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때 조건을 하나 붙 였다. 후부키를 빼고, 절대로, 제외하고. 족족 나오던 대답은 고작 한 사람만을 제외했을 뿐인데도 조금 늦어졌다. 몇 사람을 지나치 고서야 에드가 얻은 대답은 텐죠인 아스카였다. 심지어 그 대답을 해 준 학생조차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미심쩍어했다. 동생이 있다 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애초에 이런 질문을 했을 때 제일 먼저 나 오는 게 동생의 이름이 아닌 이상 보지 않아도 어떤 관계로 지내 고 있을지 뻔했다. 에드는 텐죠인 아스카를 한참 찾아다녔고, 그가 먼저 발견하기 전에 소녀의 걸음이 성큼성큼 다가섰다. “날 찾았다며? 무슨 볼 일이야?” 먼저 접근해온 아스카를 보면서 에드는 머리를 꾹 눌렀다. 사람 한 명에 대해 질문을 하는 일이 이렇게나 힘이 들다니. 물론 다른 사람에게 시도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냥, 보통, 평범 한, 료와 친하지 않은 학생들은 료에 대한 질문을 받자마자 복잡 한 표정을 했다. 카이저 료 말이지? 잘 모르겠어. 헬카이저에 관 해서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아. 한때 같은 학년이었지만, 딱히 교류 는 없었어. 친하지 ���아서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듀얼은 잘해. 천 31


재니 엘리트니 하니까 그런 녀석들에게 물어보는 게 낫지 않을까? 몰라, 모르겠어, 잘 모르겠어, 알고 싶지 않아. 대답은 전부 같았 다. “도대체 카이저는 어떤 사람이지?” 그래서 에드가 쭉 가지고 있던 의문은 아스카에게 어쩔 수 없 이 멈추었다. 에드는 아스카를 바라보면서 바로 질문했다. 마루후 지 료가 어떤 사람이냐고. 아스카는 대답을 해 주기 전에 먼저 에 드에게 물었다.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내가 그를- 이긴 적이 있으니까.” “동정이라도 하는 거야?” “그렇지는 않아. 그만한 실력의 듀얼리스트에게 동정은 비웃음 보다 못한 법이니까.” 마루후지 료는 자존심이 강한 듀얼리스트였다. 그 앞에 비록 엉 망으로 무릎을 꿇었다고는 해도 에드는 보는 순간 그 고고함과 턱까지 차 있는 오만할 정도의 자존심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에 게 딱 알맞은 상대다, 료를 그런 식으로 여겼다. 격이 맞는 상대를 이기는 게 즐거움이다. 처음부터 바닥을 기는 실력을 상대해도 보 람이 느껴질 리 없다. 그래서 에드는 료와의 듀얼을 잊지 못했다. 진정한 듀얼리스트라면 시간이 갈 때마다 눈에 띄게 성장하는 법 이다. 이번에 이긴 게 그냥 에드 피닉스일 뿐. 다음번에 겨룰 기 회가 있기를 꽤나 즐겁게 기다렸다. 진정한 듀얼리스트는 성장한다, 다만 료라는 사람은-. 에드 피닉스는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소문을 다시 들었다. 그의 32


황제라고 칭해지던 당당한 모습 앞에는 한 글자가 더 붙어 있었 다. 헬카이저 료. 자하 세계의 듀얼에서 는 그 이름을 얻고 돌아 왔다. 헬카이저라는 이름이 카이저보다 더 유명하게 된 걸 보아서 는 퇴보했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듀얼 스타일이 완벽 하게 바뀌었다는 점에서 훌륭한 성장이라고 감탄하기도 애매했다. 에드는 헬카이저의 듀얼을 관중석 화면으로 턱을 괴고 감상했다. 그가 대전했던 때와 같은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확연 하게 스타일이 바뀌어 있었다. 그나마 간신히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던 사용하는 몬스터 때문이었다. 아예 눈빛조차 바뀌어 있는 걸 보고 에드는 중간에 경기장을 슬쩍 떠났다. 더 볼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승패는 정해져 있었다. 헬카이저의 승리. 라디오 중계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에드는 아카데미로 향했다. 그의 듀얼은 오직 승리만 노리는 방향으로 바 뀌어 버렸다. 료와의 승부는 정당했다. 제 실력을 다해서 상대해 준 건 잘못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평범한 실력자에게는 관심 없었다. 료는 에드가 관심을 깊게 두는 얼마 되지 않은 듀얼리스 트였다. 아스카는 고개를 흥 치켰다. 찾아오는 에드에게 이미 그녀는 대 답을 했다. 같은 대답을 몇 번씩이나. 그래도 계속 에드가 그녀를 찾아오는 건 그 답변에 썩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네 잘못도 아니고 료의 잘못도 아니야.” “그렇게 사람이 바뀌었는데 그 말을 믿으라고?”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 -물론, 내 말도 통 믿으려 들지 않는 걸 봐서 뻔하겠지.” 33


그럴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료를 직접 찾아가서 물어봐. 멱살이 라도 잡고 대답을 얻어내던지. 내게서 들었던 것과 별다른 답은 들려오지 않을 거야. 아스카는 결국 에드에게 짜증을 냈다. 참아 보려고 해도 그녀의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았다. 프로의 세계가 냉정하고, 듀얼에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 었다. 하지만 아스카는 일면식이라고는 없었던 에드보다 몇 번이 나 보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료와 훨씬 더 친밀했다.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친한 사람의 편을 들기 마련이다. 거기에 심 지어 그 일면식 없던 사람이 짜증 날 정도로 찾아와 대는 일에야 비호감만이 겹치고 겹친다. 아스카는 자리에서 발을 쾅 굴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에 드는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더이상 찾아와도 소용없어. 나는 널 만나지 않을 테니까.” “…제길.” “한 가지 더 이야기해주자면, 료는 친구도 별로 없어. 고생 꽤 나 해야 할 걸?” 일부러 그렇게 이야기해준 건 아스카도 에드가 얄미웠기 때문 이었다. 에드는 드물게 욕설을 뱉으며 머리를 짚었다. 후부키, 아 스카. 설마설마했는데 그녀의 말을 들어서는 친구라고 해봤자 그 게 끝인 듯했다. 게다가 에드는 그토록 아스카를 찾아오면서도 료 와 단 한 번 왕래하는 모습도 못 보았다. 딱 보아도 친구가 많을 성격은 아닌 것 같았지만, 이렇게 직접 귀로 듣고 보니 그토록 억 울한 소리가 없었다. 에드는 돌아섰다. 아스카를 찾아오는 건 이 번이 정말 마지막이었다. 단호한 그녀의 표정을 보면 정말 정말 34


더 이상 해보았자 소용이 없을 뿐이었다. 헬카이저 료는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기로 소문이 자자한 듀얼 리스트였다. 카이저일 때도 그랬지만, 헬카이저의 별명을 얻고 나 서부터 그는 기자들의 인터뷰에도 절대 응하지 않았다. 주어진 경 기만 끝내고 긴 코트를 가다듬으며 홱 돌아서 버리는 모습. 그 오 만함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여전히 그에게는 황제라는 별명 이 맞았다. 만날 방도를 궁리하는 건 에드의 몫이다. 에드는 걸으 면서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다. 그런 식으로 머리를 쓰는 건 달갑 지 않다. 걸어가는 에드의 등으로 잠시 멈춘 아스카의 시선이 박혔다. [네 일은 좀 네 선에서 끝내.] 오랜만에 아스카의 연락이 왔다. 그녀가 연락을 취한 건 료가 헬카이저의 이름을 달고 나타났을 때였다. 전화 너머에서 후부키 와 함께 안절부절못하면서 통화음만 신경 쓰다가, 남매는 료의 목 소리도 성격도 그대로란 사실에 간신히 한숨을 쉬었다.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살다보면 사람은 바뀐다. 가치관도 모습도 조금씩. 후 부키도 아스카도 헬카이저 료가 그 변화하는 과정 중 한 길목이 라는 걸 간신히 알아챘다. 모습이 어떻게 변하든 그들은 친구였다. 그랬기에 결국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오래간만에 듣는 료의 목소리였다. 아카데미의 수업 을 듣다 보면 료의 시합도 가끔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아스카는 료가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화를 냈다. 료는 에드가 그녀를 찾아왔다는 사실도 그에 관해서 묻고 다녔다는 사실도 지금 와서 35


처음 들었다. “내 일?” [에드 피닉스라는 프로 듀얼리스트, 네게 아-주 관심이 많은 것 같아.] “에드 피닉스라.” 언제나 그랬듯 안부를 묻는 전화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료는 아스타의 새된 목소리에 드물게 대답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녀는 한참 에드 피닉스라는 사람에 대해 불평했다. 물론 료도 그 이름 을 잊을 수 없었다. 그에게 쓰디쓴 패배의 맛을 알려준 사람이었 다. 모든 걸 아무렇지 않게 잊고 넘어간다고 해도 그 일만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릎을 처음 꿇었을 때는 절망만이 앞을 사로잡았다. 고개를 숙 인 일에 대한 치욕과 수치, 거기에 부끄러움까지. 이제까지 앞으로 내세우던 자만심이 꺾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보다 작은 에드였 지만, 그 순간의 료에게 그보다 큰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 심정 은 잠깐이었다. 고고하다는 말은 무엇에도 꺾이지 않는다는 말과 같았다. 그의 듀얼은 꺾였지만, 마루후지 료는 아직 꺾인 게 아니 다.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는 한 그는 영원이었다. 황제의 이름을 다시 찾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일을 시점으로 등에 쌓아온 무수한 패배는 그에게 지금과는 다른 세계 를 열어주었다. 조금 낯설었지만 료는 승리를 위해 기꺼이 그 세 계에 발을 들이밀었다. 승리할 때마다 맛보는 기쁨은 달콤했다. 동시에 바닥에 무릎 꿇은 패자를 보면서 료는 에드라는 이름을 생각했다. 새로운 듀얼이 그에게 딱 모습을 맞추어갈 쯤에 료는 36


에드 피닉스라는 이름도 잊어버렸다. 그는 꽤 많이 패배했고, 에드 는 그냥 자신을 쓰러뜨린 많은 사람 중 하나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와의 결전 또한 지금 료의 손가락과 덱 사이사이에 경험이 되 어 녹아 있었다. 아스카가 그 이름을 꺼내기 전까지, 에드 피닉스라는 이름은 귀 에 좀체 들려오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내게 찾아왔다가는-] 아스카는 뒷말을 잇지 않았다. 하지만 료는 잔뜩 벼르고 있을 그녀의 얼굴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대답은 없었지만 그녀는 멋대로 전화를 끊었다. 료는 한동안 빈 전화를 내려보았다. 어지 간해서는 그럭저럭 넘어가는 그녀가 이렇게 전화까지 직접 할 정 도면, 얼마나 시달렸는지 보지 않아도 알았다. 료는 행동이 빨랐다. 항상 생각을 먼저 하기는 했지만, 이왕 확 신한 생각에 행동을 늦추지는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코트를 집어 들었다. 인터뷰란 인터뷰는 전부 거절한다는 소문은 유명했 기 때문에 승리를 이어가는 프로 듀얼리스트치고 집은 한산했다. 커다랗다 못해 조금 비어 보이는 집에서 료는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헬카이저의 상징과 다름없게 된 검은색 코트가 바람 에 펄럭였다. 에드 피닉스는 인기가 많은 듀얼리스트였다. 작은 몸에서 솟아 나오는 폭발적인 듀얼. 정의를 상징하는 것 같은 카드와 승리의 운명을 당당히 외치는 목소리.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엄 대신 에 누구든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로 스스로를 둘렀다. 37


하지만 그런 이미지와는 다르게, 사람들이 에드 피닉스에 대해 평가하는 이야기 중 결코 빠지지 않는 이야기는 그의 천재성에 관한 것이었다. 애초부터 듀얼을 하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처럼, 그 가 사용하는 데스티니 히어로의 덱처럼 그는 듀얼 리그에서 항상 관중의 시선을 끌었다. 정중하고 날카로운 듀얼은 아니었지만 정 해진 순서를 착착 밟아나가는 것 같은 스타일은 보는 사람의 호 감을 자아냈다. 그와 상대하는 듀얼리스트들의 이야기는 달랐다. 그의 앞에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마치 시간은 운명처럼 흘러가 자신의 패배를 예고한다. 보는 사람들에게 환호성을 받는 것과 다르게 에드의 앞 에 선 상대는 한 턴 한 턴 다가오는 운명과 싸워야만 했다. 한 번 서서 호되게 당한 사람일수록 에드 피닉스의 이름을 들으면 이를 갈았다. 어지간히 실력이 있는 듀얼리스트가 아니고서야 두 번은 겨루려고 들지 않았다. 매칭 상대를 고르는 일이 곤란할 수도 있었지만, 프로의 명함을 단 듀얼리스트는 많았다. 그중 대부분이 견디지 못해 나가떨어지 더라도, 자신의 주제를 알기 전까지는 아등바등 악을 쓰고는 했다. 열기가 바짝 오른 상대를 잡아 에드의 앞에 세워놓으면 된다. 상 대가 마음에 안 들어도 일단 프로의 일이 다 그렇듯, 에드 피닉스 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당당한 모습으로 듀얼 디스크를 들 었다. 사실 결과야 정해져 있는 일이라고 해도 열띤 듀얼에 사람 들은 나란히 호감을 보냈다. 그날도 에드의 상대는 신경 쓸 만한 명성이 없었다. 그나마 에 드가 상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전부 일정이 있어서 맞추지 38


못했다. 그냥 프로 한 명을 놀게 내버려둘 수 없고, 막 명함을 단 애송이 하나가 그의 앞에 섰다. 어디 아카데미에서 이름 한 번 떨쳤을 실력이라고는 하지만 에 드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상대하기에 어 렵지 않았다. 몇 턴이면 끝낼 수 있는 듀얼을 일부러 질질 끌었다. 할 일이 없기도 했고 지루하기도 했고. 일부러 스스로에 제약을 둔 셈이다. 에드의 속은 모른 채 상대는 혼자서 고군분투했다. 포 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이야 칭찬해줄 만했지만, 그런 걸로 이길 수 있다면 세상에 천재라는 말은 필요 없었다. 에드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승리했고, 관중들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자마자 요란한 박수를 받았다. 필수로 채워야 하는 경기의 수가 있었다. 최근, 에드는 아카데 미까지 걸음을 하느라 일부러 모든 경기를 미루었다. 원래 그에게 꽤 맞는 대전 상대가 있기는 했지만, 일정을 미룬 탓에 다른 사람 과 듀얼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료에게 신경을 썼지만 결 국 에드가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기껏해야 료에게 친한 친구 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밖에 없다는 쓸데없는 사실뿐. 에 드가 알고 싶은 건 그런 시시한 사실로는 알 수 없는 거였다. 텐죠인 아스카가 노려보는 시선은 꽤 매서웠다. 듀얼 실력이야 둘째 치고, 에드가 아스카에게 다시 들릴 생각을 접은 것도 호통 이라도 치듯 단호한 그녀의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드라는 이름에도 아랑곳 않고 훌쩍 뛰어 도망가 버린 후부키의 웃는 얼 굴이나. 딱 카이저의 성격에 어울리는 친구들이었다. 지금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로 치러야 하는 경기는 앞으 39


로 세 개가 남았다. 대전 상대의 이름이 들은 적도 없는 사람들이 라는 걸 보자마자 에드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삼 일 연속으로 이 재미없는 일을 해야 한다. 듀얼은 재미있었지만, 항상 그런 건 아 니었다. 료를 찾아가는 일도 세 경기가 다 끝난 다음에야 할 수 있었다. 삼 일, 아니면 사 일. 그것도 아니면 일정을 당겨도 되겠 지. 하루에 한 경기씩을 할까, 아니면 아예 몰아서 간단히 끝내버 릴까. 에드는 경기장을 나오면서 고민했다. 승리에 대한 기쁨은 너무 작아서 머릿속에서 싸악 사라져버린 후였다. 나와서야 에드는 그가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 다. 이런 간단한 경기에는 기자도 모여들지 않아야만 했지만, 그런 것치고 바깥은 소란스러웠다. 일정을 조정할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었기 때문에 에드는 귀로 먼저 그 소란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들었을 때 누가 와 있는지, 검은 코트 자락을 보면 명백 했다. 예상하지 못한 사람의 등장에 에드마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기자들 사이에 둘러싸여서도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을 지킨 채로. 그 소란 가운데 헬카이저 료는 당당히 서 있었다. 들이대는 마이 크와 녹음기는 전부 무시하고, 료는 에드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저벅저벅 큰 걸음을 옮겼다. 찰칵찰칵 두 명의 만남에 플래시가 터졌다. 료가 진 듀얼 이후 그들은 아직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 다. 이 소란을 보고 있자면 내일 듀얼 일간지에 대문짝만하게 실 릴 앞면 기사는 뻔했다. 헬카이저 료, 리벤지를 어쩌고저쩌고. “에드 피닉스.” “…카이저. 아니, 헬���이저라고 해야 하나?” 습관적으로 별명을 담았다가 에드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약간 40


의 고민이 담긴 목소리에도 오히려 료는 상관없다는 것처럼 가만 히 내려보기만 했다. 에드는 결국 료라는 이름을 입에 담고 그를 올려보았다. 료는 그래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스카에게 찾아갔었다고 들었는데.” “뭐어, 이야기했나. 내가 어지간히 귀찮았나 보네, 그 여자도.” “궁금한 게 뭐지?” 에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조용해졌다 싶더니 모든 사 람이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별거 아닌 걸 물어보더라 도 해도 어떤 식으로 바뀌어 나올지 에드도 조금 걱정되기는 했 다. 료는 신경 쓸 것 같지 않았지만, 에드는 그런 쓸데없는 소문에 조금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게다가 가뜩이나 눈에 차는 듀얼리스 트가 없던 참이었다. 이때 나타난 헬카이저는 반갑게까지 보이기 도 했다. 반가운 건 반가운 거고, 함부로 이야기를 걸기에는 아직 도 그때의 싸움이 눈앞에 생생했다. 그에게야 승리였지만 눈앞에 선 상대에게는 패배를 알리는 종이나 다름없기도 해서 에드는 그 답지 않고 조금 조심히 물었다. “장소를 옮기지.” “이 주변은 다 이런 식일 텐데.” “내 전용 헬기가 있어.” 그냥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하던 료도 나름 합리적인 에드 의 제안에 걸음을 따라 옮겼다. 돈이 어지간히 많지 않으면 하기 힘든 제안인 데다가. 확실히 그만큼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장소도 없었다. 헬기가 세워져 있는 곳까지 기자들은 따라붙 었고, 에드가 료를 밀어 넣고 문을 닫았을 때야 비로소 요란함이 41


멈추었다. “너는 왜 내게 신경을 쓰는 거지?” 헬기가 이륙하고 료는 에드에게 물었다. 에드는 표정을 구겼다, 단정한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면서 료는 드물게 고개를 갸웃거 렸다. “네 변화만큼 갑작스러운 건 보지도 못했어. 그 직전에 널 이겼 던 사람이 나니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지. 그 당연한 일에 왜 라는 물음이라니.” “프로 듀얼리스트의 세계에서는 승패가 갈리지. 나는 그때 네게 졌다. 승자는 너였고 패자는 나였을 뿐. 왜 패자에게 그리 신경을 쓰는 건지 알 수 없는데.” “단순한 패자가 아니잖아, 헬카이저는-” 에드는 말을 잇다가 머리를 헤집었다. 바깥에서는 보일 수 없는 모습이기도 했다. 단정하고 예의 바른 이미지에는 자신이 있었지 만, 바늘로 찔러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서늘함 앞에서 는 달랐다. 상대가 반응이 없을수록 말을 거는 사람이 무안해지기 마련이었다. 에드도 딱히 예의는 아니었다. 그때의 일을 나름 조 심스럽게 말했지만, 료는 별거 아닌 것처럼 말을 던졌다. 그는 정 말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에드 피닉스가 패자에게까지 신경을 쓰는 다정한 성격이라고 는 듣지 못했지.” “네 듀얼 스타일은 변했어. 나와의 듀얼 이후에.” “네가 날 바꾼 게 아니다. 패배가 나를 바꾼 것이지. 네가 아니 더라도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겠지.” 42


도착까지는 멀지 않았다. 헬기가 멈추자마자 료는 에드가 잡을 것도 없이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가 돌아본 건 딱 한 번뿐이었 다. 날이 선 목소리로 료는 에드에게 엄포를 놓았다. “동정이라면 신경 쓰지 마라.” “동정이 아니라면 어쩔 거지?” “동정이 아니더라도-.” 딱딱한 목소리. 명백한 불쾌감이 어려있는 대답에 에드는 침묵 을 지켰다. “-마찬가지다. 내게 신경 쓰지 마.” 그걸로 용건은 아예 끝이 났다는 것처럼 료는 걸어서 금방 사 라졌다. 헬기에서 뛰어내린 에드는 료의 집에 꽤나 멀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하니까, 정말 신경을 안 쓸 생각이 었다. “…정말 친구 없을 것 같은 성격이네.” 문득 아스카가 뾰족하게 했던 말이 생각나 버렸다. 따르릉전화가 울렸다. 료는 머리를 짚었다. 그가 최근에 가장 후회하 는 일은 발신자 표시 서비스를 신청하지 않았다는 거다. 기자들에 게는 일절 번호를 알려주지 않았고, 듀얼의 일정은 료가 항상 먼 저 연락해서 받아냈다. 집에 전화를 걸 사람이라고 해봤자 후부키 와 아스카, 후지와라와 쇼 정도였기에 무조건 받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언론에도 알려주지 않은 번호였지만 에드 피닉스의 이름은 달 43


랐다. 어디서 알아냈는지 모르지만 전화가 왔다. 에드가 세 경기 를 하루만에 몰아 했다는 건 알았다. 그래도 료와는 상관없는 일 이었다- 에드가 그 일로 전화를 하기 전에. 아스카나 후부키의 연 락이라고 생각해서 별 생각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가. 료는 건너에 서 느껴지는 에드의 목소리에 침묵했다. 나 오늘 듀얼 다 끝냈어. 친밀하기는커녕 오래 알지도 않은 사이다. 몇 번 보지도 않았다. 화면에서 본 것과 합해도 얼마 없을 정도였다. 신경 쓰지 말라고 한 걸 무시하는 것처럼 에드 피닉스는 그에게 아주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상대야 별거 있나. 시시하지. 정중하게 비웃던 화면의 모습과는 다르게 에드는 전화 너머에서 대놓고 불만을 토해냈다. 최근에 상 대하는 듀얼리스트는 전부 다 이런 보잘것없는 녀석들뿐이라면서. 료가 전화를 끊지 않은 건 에드의 말을 더 듣고 싶어서가 아니었 다. 당황하고 어이없어서, 료는 생전 처음으로 그런 기분을 느꼈 다. 그가 멍하니 수화기를 들고 있는 사이에 에드는 제 할 말을 아 무렇게나 했다. 너랑 다시 듀얼하고 싶다. 네 새로운 스타일도 분 명 멋지겠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에드는 먼저 전화를 끊었다. 료 는 빈 수화음만 울리는 전화를 한참 노려보았다. 료가 듀얼에서 승리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전화가 울렸다. 역시 후부키는 소식이 빠르다고 생각한 건 섣부른 추측이었다. 료는 승 리를 축하하는 에드의 목소리에 확실히 전화를 끊었다. 얼마 지나 지 않아 전화벨 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료는 받지 않았다. 다음 날 그는 집 앞까지 찾아온 후부키와 아스카의 성화를 들으며 하늘만 44


보았다. 왜 전화를 안 받았냐고 마구 채근하는 건 하루종일 그를 고달프게 했다. 사람에게는 자존심이라는 게 있는 법이고, 그래서 료는 둘 사이에 어설프게 낑겨서도 에드 피닉스 때문이라는 이야 기는 한마디도 못했다. 사실 둘이 그렇게 걱정했던 모습도 머리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걱정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음날 걸려온 전화는 어쩔 수 없이 받았고, 에드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요란하게 끊었다. 듀얼을 막 끝내고 돌아온 게 지금이다. 승리라고 해도 머리가 냉정하게 비었다. 그 직후에 후부키의 전화를 받는 건 딱히 좋아 하지 않았지만, 료는 지금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다른 사람이 아 닌 후부키의 것이길 간절하게 빌었다. 후부키, 제발 후부키. 료는 그렇게 간절하게 친구를 불러본 적이 없었다. 한 번이라도 연락을 받지 않으면 손에 손을 잡고 찾아오는 게 그였기 때문에 어쨌건 후부키의 전화를 놓치면 안[헬카이저, 승리 축하해.] “…젠장, 에드 피닉스.” 간절히 빌어도 소용이 없었다. 료는 전화에서 에드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끊었다. 끊자마자 무섭게 울리는 전화를 들고 요란하게 소리쳤다. “닥쳐!”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한 거야, 료?] 아스카의 목소리였다. 심지어 후부키까지 같이 있는지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지금 우리 아스카쨩에게- 우아악, 아스카에게 한 대 얻어맞기라도 했는지 후부키의 비명이 꽥 울렸다. 료는 꼼짝 45


못 하고 수화기를 잡은 채로 아스카와 후부키의 잔소리를 들었다. 날이 정말 맑았다. [요새 너, 굉장히 예민해져 있는 것 같아.] 아스카는 예리했다. 사실 료는 얼마 전 연락이 온 후지와라에게 도 그와 비슷한 충고를 들었다. 아스카보다 직접적으로 이야기하 지는 않았지만, 후지와라는 그에 대한 걱정으로 연락을 끝냈다. 아 스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후지와라보다 조금 더 직접적이었다. 이번에는 수업 때문에 그의 듀얼을 미처 보지 못했다고 하면서도 아스카와 후부키는 료에 대한 걱정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도 료는 한동안 전화를 노려보았다. 아스카의 말도 후부키의 말도 후지와라의 말도 맞았다. 그는 요 새 그답지 않게 날을 바짝 세우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신경이 쓰인다는 기분을 아주 절절히 체감하고 있었다. 상대야 당연히 말 할 것도 없이 에드 피닉스였다. 전화번호를 슬쩍 바꾸어 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연락이 없던 건 고작해야 하루 이틀뿐. 에 드는 금방 그의 번호를 알아내고 연락했다. 바꾼 전화번호를 사방 팔방 알리느라 피곤하던 료에게 그보다 짜증 나는 일은 없었다. 에드는 심지어 소용없는 일이라면서 비웃기까지 했다. 료가 전화 기를 집어 던지지 않은 건 온 인내심을 동원한 아슬아슬한 결과 였다. 료는 심지어 에드에게서 생일 축하 전화까지 받았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에드가 상대에게 그렇게 신경을 쓴다는 이 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료는 처음에 그가 자신의 패배 를 놀리려는 행동인 줄로만 알았다. 에드 피닉스, 에드 피닉스. 다 른 사람에게 통 관심이 없던 그가 가장 많이 알게 된 사람의 이 46


름이었다. 짜증을 삭이기 위해서 이것저것 알아보았고, 결국 아무 런 답도 나오지 않았다. 에드가 왜 그러는지. 전화선을 끊어버릴 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왠지 그러면 에드에게 다시 한 번 더 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지 못했다. 그처럼 료의 머리 를 채운 이름은 이제까지 또 없었다. 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 간에도 덱을 고르다 갑작스레 생각난 에드의 이름에 분을 냈다. 얄미운 웃음이 머릿속을 쳤다. 아스카와 후부키조차 걱정할 정도다. 더 이상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충동적인 생각이었지만, 항상 하듯이 료는 생각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마침 오늘은 에드의 경기가 있는 날 이었다. 다른 사람의 경기야 어찌 되든 상관없는 료였지만, 에드의 일정은 이제 손에 꿰듯 알고 있었다. “에드 피닉스!” 경기를 막 끝내고 나온 에드는 나오자마자 멱살이 잡혔다. 누군 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주변에서 더 당황해 떼어놓았다. 고작 한 순간일 뿐이었지만 키 차이 때문에 목이 조금 막혔다. 에드는 고 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콜록거렸다. 간신히 빨개진 얼굴을 진정하 고 고개를 들자 이를 박박 갈고 있는 료의 모습이 보였다. 두 명 에 의해 한 팔이 나란히 잡혀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지만, 그를 향한 눈길은 매섭기만 했다. 에드는 이번의 듀얼에도 승리했다. 승리에 대한 축하 인사가 멱 살부터 틀어잡는 거라니 과격하다고 생각하면서 에드는 처음으로 그의 경기에 와 준 료에게 환한 웃음을 보냈다. 료의 입장에서는 47


물론, 약 올리는 걸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씨익씨익 분이 오른 숨을 내쉬다가 료는 주변에의 요란한 소리 에 간신히 진정했다.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 확실히 자신답지 않은 일이다. 그를 잡고 있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료는 에드 피닉 스를 척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한 번만 더 그딴 쓸데없는 전화를 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쓸데없는 전화?” “별 내용도 없으면서, 사람 신경 쓰이게!” 에드가 그에게 했던 전화처럼 료는 딱 자신의 할 말만을 하고 돌아섰다. 길게 날리는 검은 코트 자락을 보면서 에드는 턱에 손 을 얹었다. “그러니까, 그 헬카이저가. 내가 신경 쓰인다고?” 금방 감추어버린 모습이었지만, 이제까지 무너진 적 없던 얼굴 에 담고 있던 극명한 감정. 그 확연한 감정은 헬카이저라는 별명 과 어울리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료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가는 료의 뒷모습을 보다가 에드는 뺨을 긁적였다. 그냥, 좀 친해져 보자고 한 거였는데. 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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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x쥬다이


“잠깐, 거기서 멈춰.” 료는 고개를 들었다. 나무 위에 아스라한 그림자가 졌다. 딱 좋 게 걸음을 멈춘 료의 발치에는 물웅덩이가 찰랑찰랑 고여 있었다. 오늘 새벽까지만 해도 철철 쏟아지던 비의 흔적이 여기에 남아 있었다. 낮에야 구름이 가시고 해가 말갛게 들었다지만, 어제만 해도 앞 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져 내렸다. 그 정도로 거세게 내렸던 물의 흔적이 다 가시기에는 아직 햇볕이 부족했다. “거긴 꽤 깊어. 실수로 발을 디뎠다간 쫄딱 젖어버리고 말걸.” 마침 그 정도 되는 웅덩이는 뛰어넘어서 건너갈 생각이었기에 료는 멈칫했다. 아슬아슬하게 도약력의 끝에 다른 참이라서 끄트 머리 정도는 밟겠지만, 일단 보기에 얕아 보였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료는 건너갈 생각을 머리에서 지우고 목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보았다. 나무 위였다. 그 시선을 맞받기라도 한 것처럼 나무 위에서 누군가가 뛰어내 52


렸다. 가볍기 짝이 없는 움직임이었지만 아직 물기가 다 마르지 않은 땅 때문에 축축한 진흙이 겹치는 소리가 울렸다. 엄청 높은 곳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뛰어내린 만큼의 무게가 있는데도 소리만 들릴 뿐 그의 주변에는 흙더미 하나 튀지 않았 다. 유우키 쥬다이. 그를 아는 사람 중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고까지 할 정도로 성격이 좋았지만 이제 그것도 예전 일이다. 한 번 사라 졌다 돌아온 이후로 쥬다이는 사람들 눈에 예전처럼 자주 채이지 않았다. 아카데미에서 일어나는 소란의 끝에는 항상 쥬다이가 있 다시피 했었지만, 요즘의 그는 소란이란 소란은 전부 피하고 싶은 것처럼 굴었다. 어디에 있나 물어보면 어깨를 으쓱이며 모른다는 말만이 돌아 왔다. 가끔 수업에 빠지고, 수업에 참석하더라도 한마디 대꾸도 없 이 조용하고. 앞으로 나서는 일도 없고 교수의 말을 가로채는 자 신감도 없다. 쥬다이는 마치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싶은 사람처 럼 행동했다. 료가 쥬다이를 마주한 건 그래서 정말 오랜만이었다. 쥬다이에 대한 그의 마지막 기억은 당돌하다고 할 정도로 순수한 자신감이 넘쳐 흐르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료는 그렇다고 무턱대고 소년을 잡아 반가운 척 인사하지는 않았다. 첫인상이야 좋게 보기는 했지 만, 흔쾌히 인사를 건넬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굳이 인사를 하게 된다면 쥬다이가 신이 나 목소리를 높이며 먼저 건넬 때뿐이었다. 쥬다이는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먼저 인사하지 ��� 았다.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는 분위기는 정적이었다. 꼭 세상이 53


그에게 붙어 머무른 듯했다. 쥬다이에게 지금 붙어 다니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모를 정도로 소문에 어둡지는 않아서 료는 소년이 짓고 있는 싸늘할 정도의 무표정이 궁금하지는 않았다. 사람이 한 번 변하기 위해서는 굉장 히 대단한 일을 필요로 한다. 이제까지 쌓아온 게 전부 바뀌기까 지는 충격적일 정도의 일이 있어야 했다. 료는 누구보다 그 사실 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굳어버린 표정에는 많은 연유가 있겠지만. 료는 고작해야 그와 몇 마디밖에 이야기를 붙여보지 않았다. 마음 을 털어놓는다는 건 듣는 상대도 그 무게를 같이 짊어질 각오가 있어야 했다. 료는 자신도 아닌 타인의 험난한 고생 따위는 조금 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아카데미의 수업시간이다. 료는 쥬다이가 수업을 빼먹었 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수업에 가야 한다느니 참견은 할 생각이 없었다. 아카데미의 수업은 료도 마찬가지로 지루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하물며 듀얼로 몇 번이나 세상을 구할 정도 라는 칭호가 붙어버린 사람이라면 하품만 하는 등 시시하기 짝이 없을 게 틀림없다. “빠진 사람을 본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그래도 그게 쓸데없는 참견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수업 을 들으러 가고 말고가 본인의 재량에 달려 있는 거라고 해도, 그 게 남의 행동에 일일이 참견할 당위는 주지 않았다. 료는 심지어 세상을 구하고 말고 하는 부분도 개인의 선택으로 넘겨버렸다. 자 세히는 모르지만 아마 자신이라면 그와 같은 선택을 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54


그 길은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후부키가 료에게 자 랑스레 추천해 준 길이기도 했다. 후부키의 추천이야 믿을 만하다 고 여기지 않았지만 못 이기는 척 한 번 걸어봤을 때 료는 나름 만족했다. 숲길은 후부키가 장담했던 것처럼 조용하기 짝이 없었 다. 원래부터 소란한 장소를 즐기지 않는 료의 입장에서 더할 나 위 없는 길이었다. 어제만 해도 비가 오는 중에 그 길을 가로질렀다. “그야, 난 비가 내리는 걸 봤으니까?” “봤다고?” “어제부터, 쭉. 비가 쌓여 웅덩이를 만드는 걸 봤어. 얼마나 깊 은지도 알고. 그리고 네가 걸어가는 것도 봤어.” 쥬다이는 료와 마찬가지로 인적이 없다는 이유로 그 길을 몇 번 걸었다. 이제까지는 우연히 료와 시간이 겹치지 않았던 것뿐이 다. 마찬가지로 후부키가 알려준 길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료 는 속으로 후부키에게 불만을 토해냈다. 몇 명에게나 아닌 척하면 서 알려주고 다녔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다음부터 이 길을 쓰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료는 쥬다이가 뛰어내린 나무를 보았다. 물을 흠뻑 머금어 잎뿐만이 아니라 줄기까지 폭삭 젖은 나무는 아래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가지 끝만이 유일하게 말라 있었다. 비 가 오기 전부터 쥬다이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였다. 아무도 없는 길이 아니었다. 하루 전에도 쥬다이는 그 길을 지나가는 료를 내 려보았다. 료가 우산을 쓰고 천천히 길을 걸어가는 걸 보았다. 아무도 없 다더니. 그때 료에게 아는 척하지는 않았지만 쥬다이는 속으로 그 55


길을 알려준 후부키에게 불만을 표했다. 료가 막 한 생각과 비슷 하게도. 쥬다이가 그 길을 이용하는 건 아주 가끔 뿐이었다. 어제는 드 물게 비가 내려서 더 조용해진 거리를 느끼고자 일부러 나무 위 에 자리를 잡았다. 숲길은 그늘이 졌고 비가 오니 포장이 되지 않 은 길은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게다가 그 숲을 거쳐 가는 건 단지 조금 더 조용하기만 할 뿐 빨리 도착하는 지름길도 아니었다. 비 까지 내리는데 일부러 그 길을 통해 지나간 사람은 단 한 명, 료 밖에 없었다. 어제도 오늘도. 비가 내리는 걸 구경한다는 이유로 쥬다이는 아 카데미의 수업에 참석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왜 오지 않느냐고 물 어봐 줄 사람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가 울리지 않았다. 어차피 울리지 않을 전화에 희망을 완전히 놓고 쥬다이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숲을 구경했다. 계속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더라도 비가 오는 날은 맑은 날 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툭툭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을 때마다 이파리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예상하지 못하는 만 큼 흔들렸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조금씩 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매일매일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그 날 하루가 온 통 기대되었던 때가 있다. 오늘 점심 메뉴는 뭘까, 오늘 만날 사람 은 뭘까, 오늘 할 듀얼은 뭘까. 가슴을 뛰게 하는 설렘은 이제 없 었다. 소년이라는 이름과 함께 하늘 높은 곳까지 날아가 버렸다. 유일하게 새로운 기분을 느끼는 건 이처럼 날씨가 좋지 않을 때 뿐이었다. 56


아직까지 풀잎에 고여 있는 빗물이 떨어졌다. 또 제멋대로 흔들 리는 이파리에 쥬다이는 시선을 뺏겼다. 조금 전까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던 기분이 들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료는 갑작스레 말을 뚝 멈추고 멍하니 눈만 깜박이는 쥬다이를 보았다. 소년의 얼굴이 아주 잠깐 다른 빛을 가진 것도 같았다. 예를 들어- 평범한 색이던 눈동자가 잠깐 보석을 닮은 빛깔로 바 뀌었다던가. 료는 순간 색이 다른 쥬다이의 눈동자에 시선을 빼앗 겼다. 그것도 아주 잠시뿐, 눈을 깜박이자마자 잘못 본 것처럼 원 래의 빛깔로 돌아가 버렸다. 그제야 료는 한 가지 더 이상한 걸 알아차렸다. 부자연스럽다 못해 아예 이질적이기까지 한 감각. 풀잎조차 축축이 젖어 마르지 않은 새. 쥬다이는 물방울이 아직 뚝뚝 떨어지는 숲 사이에서 혼자 보송보송 마른 옷차림으로 서 있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계속 나무 위에서 떠나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 있어야 했다. 그에게서는 물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소년에게는 조금 이상한 소문이 따라붙었다. 최강의 듀얼리스트 라던가 세계를 몇 번 구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좋았지만, 쥬다이 와 그리 친하지 않은 사람끼리 모여서 말할 때는 꼭 그런 좋은 이야기만 늘어놓는 게 아니었다. 유우키 쥬다이와 같이 있으면, 불행해진대. 요새 부쩍 공중에 하는 혼잣말이 는 만죠메와 얼마 전부터 고 개를 툭 떨어뜨리고 다니는 쇼만 보더라도 쥬다이의 옆에서 어정 거리던 대표적인 얼굴이었다. 요란한 목소리에다 굽히지 않는 씩 씩한 성격으로 많이 이어졌던 호의는 어느 순간부터 비난하는 눈 57


초리로 싸악 바뀌었다. 료도 쇼가 쥬다이를 잘 따르던 걸 알고 있었다. 그 한동안이라 는 일이 없었던 것처럼 쇼는 쥬다이의 이름을 조금도 꺼내지 않 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료는 문득 쥬다이에게로 팔 을 뻗었다. “아, 사람. 있었잖아.” 료의 손끝이 닿자마자 쥬다이는 퍼득 놀라 자리에서 한발 물러 났다. 잊고 있었던 걸 막 기억해 낸 사람 같았다. 그제야 이질적 이던 분위기가 한 번 가셨다. 대신 쥬다이는 다가가지 말라고 한 웅덩이에 발이 풍덩 빠졌다. 료는 물속에 빠진 다리가 조금도 젖 지 않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쥬다이는 허둥지둥하다가 금방 웅덩이 밖으로 달려 나왔지만, 이미 그래도 늦었다. 적어도 무릎께까지는 젖어 있어야 할 바지는 물 한 방울 닿지 않은 새것 처럼 멀쩡했다. 쥬다이는 료를 한 번 보고 제 다리를 내려 본 다 음에 땅이 꺼질 것처럼 한숨을 푹 쉬었다. “알아, 내가 기분 나쁜 사람이라는 거.” “…그럴지도.” “난 여기에 사람이 없는 줄로만 알았어. 네가 주로 다니는 곳이 었다면, 당연히 오지 않았을 거야.” 하나씩 하나씩 인간다움이 사라져 가는 몸에 쥬다이는 절망했 다. 하나씩 하나씩 돌아가는 친구들의 고개를 보면서 가슴을 쥐었 다. 그나마 가끔씩 그 감정이 뭔지 잊어버린다는 게 그나마 다행 이었다. 사람이 없는 곳을 골라 골라 쥬다이는 결국 이 길에 머물 렀다. 사실 그만의 것인 줄 알았던 숲길도 어제부터 료에게 빼앗 58


겨버린 후였다. 료는- 크게 놀라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냥 대답만 몇 번 해주고 그걸로 끝이었다. 이제까지 제대로 된 대화라는 걸 얼 마 해보지 못한 상대기도 했다. 쥬다이는 알아서 몇 걸음 뒤로 물 러났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래. 네 생각이 맞아. 내 말은 내가 인간이-” “이 웅덩이를 돌아가라는 말인가.” 료는 자리에서 얼마 고민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 쥬다이가 풍덩 빠졌던 웅덩이를 비잉 돌았다. 진흙 때문에 가장자리를 아슬아슬 밟는 다리가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것 같았지만. 료는 결국 건너편에 섰다. 웅덩이를 사이에 끼고 쥬다이에게 몸 을 돌렸다. 쥬다이는 자리에서 당황해하면서 서 있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사람은 료가 처음이었다. “몸으로 직접 보여주기까지 하다니, 놀라운 실천 정신이야. 덕 분에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게 되었는데.” “저기, 기분 안 나빠? 괜찮아?” “글쎄.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는 않아. 네가 날 듀얼로 이 기면, 그때 다시 제대로 생각해보지.” 료는 황급히 텀벙텀벙 웅덩이를 건너오는 쥬다이에게 등을 돌 렸다. 휙 작별 인사처럼 날리는 손짓을 차마 잡지 못하고 쥬다이 는 조금 전까지 료가 서 있던 자리에 멀거니 서 있었다. 통째로 물을 가로질렀지만 역시 그의 옷은 조금도 젖지 않았다. 뭔가 말 을 하려고 움찔거리던 입꼬리가 멈추었다. 쥬다이는 말 대신에. 59


돌아보지 않아도 왠지 료는 알 것만 같았다. 뒤에서 환하게 웃 는 소년의 얼굴은, 그가 처음 보았던 인상과 비슷한 모습일 거라 고. 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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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비극 x후부키


료는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후부키는 어느 정도 그러리라 고 짐작하고 있었다. 제시간을 항상 맞추는 료였기 때문에 이렇게 나 늦어버린다면 나오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 다. 마루후지 료는 연락도 없이 나오지 않을 사람이 아니었으니 틀림없이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거겠지. 그래도 후부키는 료를 걱정하지 않았다. 예전에도 지금에도, 료는 다른 사람의 걱정 따위 는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후부키는 광장을 천천히 걸었다. 어차피 료의 집까지 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골목길이라든가 가게 사이를 지나치면 엇갈릴 수는 있었겠지만, 료가 그런 귀찮은 일로 돌아오지는 않을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거리가 그렇게 멀지도 않았다. 이십 분, 료가 늦은 만큼의 시간을 걸어서 후부키는 료의 집 앞 에 섰다. 문을 두드리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지만 딱히 인기척은 없었다. “…이번에도 너는 그렇구나.” 64


후부키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살짝 손을 가져다 댄 문고 리는 잠겨있지도 않았다. 문단속을 하지 않는다고 나무라고 싶은 이유도 없었다. 원래부터 사교성이 좋거나 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 문에 료와 교류하는 사람은 아카데미 시절부터 알고 있던 친구 몇밖에 없었다. 쥬다이는 훌쩍 사라졌고. 나머지는. 후부키는 몇 번이나 아스카와 함께 료의 집에 찾아왔다. 아스카 는 드물게도 자리에 무릎을 꿇고 두 눈을 틀어막았다. 그녀답지 않은 흐느낌이 입술 사이에서 새어 나왔다. 후부키, 난 더 이상 못 보겠어. 그냥, 그냥 돌아가고 싶어. 그래도 몇 번씩이나 버티어 준 게 장하다고 생각하면서 후부키는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연락 을 받고 허겁지겁 들어선 후지와라가 아스카를 부축하고 걸어가 는 뒷모습을 보면서 후부키는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래서 료에게는 그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후부키는 울지도 웃 지도 않았다. 안타까워하지도 동정을 표하지도 않았다. 원래부터 그건 그의 스타일과 거리가 멀기도 했다. 오늘도 또, 사실 몇 번이나 후부키는 료와 강제로 약속을 잡았 다. 한쪽이 동의하지 않은 약속은 일방적인 강요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전화해도 받지 않아서 쪽지로 적어서 창문 안으로 휙 던 져 넣기도 했다. 문을 두드리고 멱살을 끌어 잡은 후에 그 앞에 대놓고 이야기하기도 했고. 이번의 약속은 아예 보란 듯이 문 안 쪽에 커다랗게 매직으로 적어놓았다. 봤는지 안 봤는지는 모르고 거기에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몰랐다. 안 나올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하는 말을 몇 번씩이나 반복하면서 후부키는 문을 열었다. 65


문을 열자마자 코끝으로 강한 피 냄새가 스쳤다. 후부키는 코를 틀어막았다. 실례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적도 예전에 있기는 했다. 지금은 그런 작은 행동 몇 개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고 있었다. “료, 안녕, 좋은 아침.” 아침은 훨씬 지났다. 약속은 점심시간이 기준이기도 했다. 하지 만 후부키는 그래도 료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후부키의 목 소리가 없다면 그 집에 정말로 아침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 문이었다. 어차피 집 안은 커튼으로 온통 가려져서 어둡기 짝이 없었다.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집에는 불조차 켜져 있지 않았다. 료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후부키의 목소리에 반 응했다기보다는 그냥 아무도 없던 조용한 곳에 다른 목소리가 들 렸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취한 행동이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바닥을 기었다. 더듬더듬 바닥을 짚어가면서 멀뚱히 앉아 있기만 하던 몸이 천천히 소리가 울리는 방향으로 기었다. 팔을 바닥에 톡 짚고 힘을 주어서 몸을 앞으로 끌어당긴 다. 다리를 전혀 쓰지 않기 때문에 다가오는 속도는 느렸다. 후부 키는 그에게 잠깐 시선을 주면서 문을 걸어 잠갔다. 다시 방 안은 온통 어두운 색깔로 물이 들었다. 커튼을 잡아매고 어두운 방 안 에 빛이 들게 하는 건 후부키가 료를 위해 자진해서 맡은 유일한 역할이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도 피 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고작 몇 분을 환 기하는 것으로 사라지기에 이미 그 지독한 냄새는 집안 깊숙이 배어 있었다. 팔로 애써 끌어오던 몸은 잠깐 멈추었다가. 한참 후 66


에야 다시 움직였다. 꿈틀거린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았다. 후부키는 소파에 걸터앉았다. 오랫동안 청소하지 않아서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가죽 커버를 전부 걷어서 버리는 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진 득진득 피가 붙은 건 아무리 빨아도 가시지 않았다. 플라스틱 소 재로 바꾸어 버린 후에는 그런 걱정도 덜었다. “료!” 후부키는 창을 두드렸다. 듀얼 스터디움에 마련된 특별석이었 다. 료 때문에 받을 수 있던 특별석은 두 듀얼리스트 사이에 벌어 지는 싸움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선명하게 관찰할 수 있는 자리 였다. 솔리드 비전이 미치지 않는 곳에 전면 유리를 두르고 앞을 훤하게 틔워놓아서 어느 방향으로 바라보든 시원스럽게 구경할 수 있었다. 안에서 어떤 소리를 내든 바깥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방음도 완벽하고, 듀얼리스트들이 하는 목소리 하나하나 들릴 정 도로 스피커 또한 선명했다. 돈을 지불하는 것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말 그대로 특별한 자리였다. 하지만 그때만큼 후부키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게 원망 스러웠다. 아무리 유리창을 두드리고 두드려도 료는 그쪽을 한 번 도 돌아보지 않았다. 후부키는 유리창에 비친 제 표정이 세상에서 가장 절망스러우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료를 간절히 부르다 못해 유리창에 붙어서 후부키는 있는 힘껏 악을 썼다. “료! 제발 여기 좀 돌아봐! 료, 제발 내 말 좀 들어달라고!” “오빠, 그만해! 그만하라고!” 67


돈을 주어도 구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이니만큼 원래라면 사람 이 가득 차 있어야 했다. 하지만 료의 듀얼 때에는 달랐다. 아무 도 그들의 듀얼을 가까이에서 구경하고 싶지 않아 했다. 후부키가 그 자리를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건 어차피 텅텅 비어서 표가 남 아돌았기 때문이었다. 후부키가 자리에 앉아서 구경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창을 너 무 두드려서 손이 아려왔다. 매끈한 창에 손자국이 두드린 만큼 박혔다. 아마도 수십 개 정도. 조금 늦게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아 스카가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래도 특별석이라고 방을 지키는 보디가드들은 있었다. 그들 사이를 미끈하게 피해 안으로 들어와 아스카는 후부키를 뒤에서 힘껏 끌어안았다. 뒤늦게 달려온 보디 가드들이 아스카의 팔을 한쪽씩 잡아서 밖으로 끌어냈다. “후부키! 그만하란 말이야!” “하지만 아스카, 료가! 료가-”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건장한 체격의 남자 둘을 한꺼번에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속절없이 붙잡혀 방 밖으로 끌려가면서도 그녀는 후부키에게서 시선을 떼어내지 않았다. 아스카도 걱정되고 료도 걱정되고. 후부키의 시선은 한동안 머물 곳을 찾지 못하고 그녀와 그 사이를 왕복했다. 결국 그는 창문에 미끄러지듯 몸을 기대었다. 흘러내리는 정신 을 간신히 잡았다. “료가 저런 얼굴을 하고 있잖아…….” 헬 카이저의 듀얼은 참혹하다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잘 어울렸 다. 무패 신화까지는 아니더라도 9할 이상의 승률을 거두고 있는 68


성적은 최강 듀얼리스트라는 말을 붙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네 성 적이라면 프로 리그에서도 얼마든지 통할 거야. 아카데미에 있을 때 료와 이야기하며 장난스럽게 했던 말을 되돌리고 싶었다. 승승 장구로 이겨나가는 료의 모습을 보고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기도 했다. 완벽한 사람은 좌절 또한 심하게 겪는다. 거세게 몰아치는 태풍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료는 한 번 꿇은 무릎을 다시 제대로 짓치지 못했다. 정직하고 날카로웠던 듀 얼이 상대를 아작아작 짓이기는 것으로 바뀐 건 눈 깜짝할 사이 였다. 헬 카이저라는 이름을 단 채로 료는 자신의 덱을 쥐었다. 후부키는 료의 듀얼을 보면서 그게 정말 진짜 료의 덱인지도 의 심했었다. 몬스터를 꺼내놓고 상대의 라이프가 0이 될 때까지 한꺼번에 몰아치는 맹공격. 카운터도 없고 시시한 함정도 만들지 않는다. 다이렉트 어택을 허용하는 마법 카드와 레벨이 높은 몬스터의 조 합은 뚫기 쉽지 않았다. 헬 카이저의 듀얼은 그렇게 눈 깜짝할 사 이면 끝났다. 그가 바뀌었던 시간만큼 빠르게. 잔혹하고 끔찍하게, 거기에 반전의 묘미는커녕 상대에게 내리는 자비조차 없었기 때 문에 헬 카이저의 이름은 금방 퍼졌다. 관중이야 많았지만 특별석에는 사람이 없었다. 잔인하게 휘몰아 치는 공격과 말로 내리는 인신 공양 같은 목소리를 가까이서 듣 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헬 카이저의 듀얼마다 관중석은 자 리가 비지 않을 정도로 꽉꽉 들어찼지만 특별석은 항상 눈에 띌 정도로 텅텅 비어 있었다. 프로레슬링 같은 이야기였다. 멀리에서 69


야 피가 튀고 요란하게 날리는 주먹에 환호하지만, 피가 줄줄 흘 러 망가진 얼굴을 눈앞에 들이밀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는 것과 비슷했다. 아무도 가까이에서 현실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프로 듀얼리스트, 헬 카이저라는 황제가 하는 경기로서 멀리에서 구경거리로 삼고 싶던 것뿐이다. 후부키는 멍하니 고개를 기대었다. 손이 아릿아릿 저렸다. 뒤늦 게 내려본 손은 유리창을 하도 치다 못해 새끼손가락이 달랑달랑 뒤틀려 있었다. 아프다는 느낌보다는 그냥 뭔가가 꽉 묶여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예를 들면 료의 싸늘한 표정 같은 거. 후부키는 결국 료의 듀얼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이 듀얼이 료의 승리로 끝날 건 자명했다. 밖에서 발끝을 톡톡 차면서 기다리고 있던 아 스카가 황급히 그를 잡았다. 부러져 뒤틀린 손가락을 보면서 그녀 는 자신이 더 아픈 얼굴을 했다. “별로, 아프지는 않아.” “응, 그래 보여.” 후부키는 별로 믿을 만하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 손에 힘이 하 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아스카 또한 그런 후부키를 보면서 동의하 지 않는 얼굴로 동의하는 목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품에서 작은 구급상자를 꺼내어 손가락을 묶어 주었다. 그제야 아픔이 한꺼번에 밀려와 후부키는 오만상을 찌푸 렸다. [오늘도 사정이 있나요?] 70


“네, 죄송합니다. 헬 카이저는 당분간 정식 매치에 참가하지 않 을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그의 절친한 친우인 당신이 하는 말이니 틀림없겠죠. 그럼, 예 상 복귀일은 언제…….] “한 달 정도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달, 씩이나 말입니까.] “프로의 공백기치고는 짧은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그야 물론 그런 건 맞지만, 아무래도 헬 카이저의 스타일과 휴 식은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저도 설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료의 의지는- 알잖아 요. 조금 말리기 어려운 사람이니까요.” [저희야말로 후부키씨가 대신 말을 전해주시니 다행입니다만. 그의 듀얼은 아무리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아서요.] “그 의견도 료에게 꼭 전하겠습니다.” [네, 언제나 그렇듯이 잘 부탁드립니다, 후부키씨.] 후부키는 전화를 끊었다. 그가 잡지 않으면 울릴 일이 없는 전 화였다. 상대 쪽 번호를 외우고 있는 건 원래부터 료가 아니라 후 부키였다. 나름 노력이라는 것도 해보았지만, 후부키는 결국 료를 놓지 못했다. 매니저 역할로나마 그를 따라다니게 된 건 조금이라 도 그 옆에 더 머물러 있어 주고 싶어서였다. 그는 료의 앞에 무릎을 꿇고서 설득했다. 예전의 듀얼이 마루후 지 료라는 이름이 정말 잘 어울린다고. 료는 후부키의 앞에 마주 앉아 시선을 맞추었다. 그렇게까지 해 주었기 때문에 후부키는 당 장이라도 그가 고개를 끄덕일까 봐 설레기도 했다. 71


나는 헬 카이저다. 후부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적어도 카드 를 손에 쥔 나는 그래.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든 뜻은 변함이 없었다. 후부키는 딱딱한 바닥 위에서 손을 말아 쥐 고서 흐느꼈다. 아스카가 몇 번 갈아준 붕대의 매듭은 아직 남아 있었다. 료는 일어나기 직전에, 거의 바닥에 눌어붙듯이 몸을 숙인 후부키의 뒷목에 입을 맞추어주었다. 그 입술이 싸늘하기 그지없 어서 후부키는 조금 더 울었다. 다음 날 후부키는 료보다 먼저 일어났다. 그가 덱을 어디에 두 는지 정도는 뻔히 알고 있었다. 그는 덱을 들어서 전부 상자 안에 쏟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료가 원래부터 일찍 일어나는 사람 이기도 했었고, 게다가 집안에 진동하는 기름 냄새 때문인지 료는 자리에서 일어나 졸린 눈을 비볐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후부키 를 돌아봤을 때, 그는 이미 손에 성냥 하나를 들고 있었다. “후, 부키?” 후부키는 고개를 돌렸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료와 시선이 마 주쳤다. 나무 상자는 불에 잘 타는 재질이었다. 바짝 마른 위에 기름까지 먹였으니 더할 나위 없다. 다른 곳에 불이 옮겨붙지 않 게 밑에는 금속 상자를 또 받쳐 놓았다. 후부키는 애써 웃었다. 입술 끝이 일그러지는 건 그 자신도 어 쩔 수 없었다. 일그러진 웃음으로 후부키는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잘 가, 헬 카이저.” “안- 안돼! 안 돼!” 료는 침대에서 허겁지겁 일어나 달려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성냥이 떨어진 후였다. 활활 타는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게 목숨만 72


큼 소중한 자신의 덱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료는 불이 붙은 쪽이 지만 어떻게든 구하려고 손을 들이댔다. 화상을 입을까 봐 후부키 는 료를 뒤에서 꼭 안고 끌어당겼다. 덱을 구하려는 힘보다 조금 부족해서 료는 두 손에 화상을 입었다. 있는 힘껏 치는 몸부림은 상자가 카드와 함께 남김없이 타버렸 을 때야 끝이 났다. 연기가 활활 타는 재 덩이를 앞에 놓고 료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그를 막느라 힘이 다해 있어서 후부키는 간신히 손을 놓고 바닥에 쓰러지듯 앉았다. “나는 내 료가 보고 싶어, 헬 카이저.” 후부키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료는 울긋불긋 엉망으로 단 손 을 얼굴에 얹고서 훌쩍훌쩍 울었다. 그가 그렇게 우는 건 처음 보 았지만, 후부키는 단 한 글자도 위로하지 않았다. 재의 아릿한 탄 내가 바깥으로 다 날아갈 때까지, 둘은 주저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 않았다. “그러니까 한 달, 한 달이면 할 수 있을 거야. 너도, 나도, 우리 같이.” 료의 부재를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그와 맞붙을 대전상대만 제외한다면. 애초에 료의 일정은 후부키가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사과하기만 하면 끝이었다. 료 는 물집이 잡힌 손으로 바닥을 다시 한 번 긁었다. 빠져나가려는 시도를 하긴 했는지 묶인 다리 근처에는 상처가 엉망으로 나 있 었다. “거 봐, 료. 또 이러지.” 후부키는 다정스레 몸을 숙여 그의 손을 잡았다. 화상으로 엉망 73


이 된 손을 매일 씻기고 치료했지만, 바닥을 긁어가며 하도 꿈틀 대는 통에 상처가 도무지 낫질 않았다. 후부키가 맨 처음 들어서 서 맡을 수 있는 건 항상 피 냄새였으며, 료에게서 가장 눈에 띄 는 부분은 피가 줄줄 흐르고 있는 두 손이었다. 두 눈을 헝겊으로 꽉 가리기까지 했으면서도 안심하지 못해서 후부키는 하루에 한 번씩은 그를 찾았다. 이미 리그에 나가지 못한 지 일주일이 지났 다. 앞으로 한 달의 시간이 남았다. “그때 가서 안 되면.” 부재가 조금 더 길어질 수 있다고 전화하면 되지. 후부키는 료 의 어깨에 다정스레 몸을 기대었다. 그는 어서 빨리 마루후지 료 의 듀얼이 보고 싶었다. 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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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훈장 x아스카


패자의 이름이 얼마나 빨리 잊히는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 은 모른다. 마루후지 료는 패배란 세상에서 가장 허망한 일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프로 리그에 나서기 전까지 황제라 불리며 상대를 하나하나 쓰러뜨려 나갔던 그는 결승 앞의 순간에서 마주 친 상대에게 패배했다. 아무리 아득바득 애를 써도 한 번 꺾인 운 은 돌이킬 수 없다. 스스로를 믿고 카드를 덱에서 뽑아내는 순간 마다 절망이 덮쳐왔다. 가장 유망한 듀얼리스트였던 그는 금방 이 름을 잃고 땅에 잠겨 들었다. 고작해야 그건 한 경기였다. 모든 순간을 승리로 덮은 사람의 패배 한 번은 또 다른 승리와 겹쳐진다면 잊힐 수 있다. 하지만 료는 앞에 서서 손 한 번 쓰지 못했던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 다. 이기기 위해서 애를 써도 이미 승부가 결정된 것처럼 판세 한 번 뒤집지 못했다. 그 후부터 료는 덱을 잡을 수 없었다. 황제를 꺾은 승부사로 이름을 날리는 상대를 보면서도 덱에 손을 가져다 대기가 무섭기까지 했다. 그를 향해 쏟아지는 수십 개의 스포트라 78


이트. 그 아래에서도 료는 단 한 번도 긴장해본 적이 없었다. 그 가 두려워하는 건 그를 막아섰던 상대가 아니라, 그가 맞이해야만 했던 패배 그 자체였다. 황제에 대한 관심은 빠르게 사그라졌다. 심지어 료는 그다음의 듀얼은 아직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패배를 계단처럼 딛고 오르는 순간 전보다 더 높은 곳에 이르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료는 쉽게 그 걸음을 뻗을 수 없었다. 그의 앞에는 오로지 가파른 계단 조각 만이 놓여 있었다. 잡고 힘을 줄 난간도 없고 방향이 그쪽이라고 알려주는 표지조차 없었다. 이제까지 자신감을 이정표 삼아 나아 가던 몸은 잠깐 방향을 잃고 자리에서 방황하는 것으로 금방 균 형을 잃었다. 그는 자리에 아슬아슬 서 있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여기서 떨어져도 아무도 찾지 않겠지. 공중에 휘둘러도 받침대 하나 잡히지 않는 손을 굳게 말아 쥐었다. 관심도 승부도 끊긴 프로 의 세계는 냉정하다 못해 차가웠다. 그는 눈을 꽉 감았다. 포기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아직까지 나아갈 용기도 나지 않았다. 바보 같다 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 줄줄이 이어지는 머릿속은 그치지 않았다. “료, 료.” 료는 고개를 번뜩 들었다. 바로 앞에 동그란 눈동자가 깜박였 다. 얼굴을 다 채우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커다란 눈은 금방이 라도 바닥을 툭 떨어져 구를 듯이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너, 또 다른 생각 했지. 뒷짐을 지고 사뭇 화를 내는 것처럼 그녀는 눈을 접었다. 살짝 접힌 시선이 한 발자국만큼 뒤로 물러나고 나서야 료는 그녀가 텐죠인 아스카라는 걸 알았다. 아주 어린 시절의, 소 79


녀 아스카. 텐죠인 후부키는 동생을 끔찍이도 아끼는 아이였다. 거기에다가 더불어 장난기까지 많기도 했다. 아직 어린 탓에 소녀는 장난과 진심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고, 그저 동생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매번 놀리는 후부키의 장난에 시도 때도 없이 으앙 울어 젖혔다. 울기 직전까지 최대한 당당하게 보이려고 그녀는 입술을 꼭 물고 서 그렁그렁거리는 시선으로 몇 번이나 감정을 참았고. 후부키는 다른 표정보다 그런 얼굴을 가장 귀여워했다. 싫어하는 걸 알���서 도 옆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놀려먹고는 하는 게 예뻐 죽겠다는 표현의 다른 방법이었다. 물론 아스카에게는 그리 걸맞지 않은 방 법이기도 했다. 료가 그들 남매를 처음 만난 건 해가 어스름 질 저녁 무렵이었 다. 평소에는 주변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지만, 걸어가던 그의 귀 로 엉엉 울어 젖히는 어린 목소리가 들린 건 우연이었다. 걸음을 그쪽으로 돌린 것도, 마찬가지로 우연이었고. 료는 골목 구석에서 쪼그려 주저앉은 채 훌쩍훌쩍 울고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그 위 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소녀보다 아슬아슬 클 법한 소년이었다. 그 는 소녀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우는 모습을 놀려대고 있었다. 그는 정의롭다거나 용감하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문득 고개를 든 눈물 젖은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할 정도의 감성 은 있었다. 료는 저도 모르게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들 사이 를 가로막았다. 그녀의 앞을 가리는 큰 그림자가 후부키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아스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옷자락을 뒤 에서 작은 손이 꼭 붙들어 왔다. 최대한 먼 곳을 잡아서 당겨지는 80


느낌을 제외하면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때 그들과 마찬 가지로 어렸던 료는 조금 더 용기가 생겼다. 앞으로 나설 수 있는 용기 같은 것.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뒤에 몸을 숨기는 소녀 는 분명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고 있었다. “뭐, 뭐야?” 지금 생각해본다면 그건 당황한 목소리였다. 평소처럼 어린 동 생과 실컷 놀아주고 있는데 갑자기 나선 사람이 그 앞을 가로막 는 상황. 후부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료와 아스카를 번갈아 쳐 다보았다. 영문도 모르고 한 걸음 나서려고 하는 그를 료는 막았 다. 두 걸음 째도 막고. 세 걸음 째도 역시 막았다. 그래도 멈추지 않은 몸을 보면서 료가 막 손을 들어 올릴 때였다. “우리 오빠 건드리지 마!” “-악!” 뒤에서 뭔가가 그를 있는 힘껏 떠밀었다. 료는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균형을 잡도록 도와준 건 우습게도 조금 전까지 그가 상 대하던 후부키였다. 후부키에게로 풀썩 쓰러져 료는 황당한 표정 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 작은 소녀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씩씩 숨을 내쉬고 있었다. 어린 눈으로 보더라도 그게 부끄러움이나 수줍음이 아니라는 건 알 정도였다. 머리끝까지 화가 올라서 아스카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조금 전 에는 가까이 붙어 있어서 두 팔로 밀어버렸다지만. “다음에는 한 대 때려줄 거야!” 허공에 빙 휘두르는 손은 작기는 했지만 대신 그만큼 빈말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료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 81


가 몇 번이나 긍정하는 걸 본 다음에야 아스카는 팔을 내렸다. 나 아, 무거워, 못 버티겠어. 그때까지 료를 잡아주고 있던 후부키는 흐물흐물 다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료는 후부키와 함께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바닥 위를 굴러 금방 흙먼 지가 되어버린 둘에게 소녀가 나란히 손을 뻗었다. 조금 전까지 울었다는 증거로 눈가에는 아직 씻기지 않은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앙금 하나 없는 것처럼 씩씩하게 굴었다. 정작 당사자가 그러고 있는데 료가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료는 먼지투성이 손을 탁탁 털고 후부키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런 동작 이 어색한지 후부키는 몇 번이나 갸웃거리면서 료의 빈손을 보았 다. 그런 부분에서는 아스카가 훨씬 더 어른스러웠다. 그녀는 눈 만 깜박대는 후부키의 손을 잡아채서 료의 손 위에 폭 얹어주었 다. 꽉 잡은 두 개의 손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이제 싸우면 안 돼! 하여간, 내가 없으면 안 된다니까!” 애초에 그 소란도 전부 아스카 때문이었지만 후부키와 료는 그 걸 잊은 것처럼 마주한 손을 쥐고 나란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장 서는 소녀의 뒤를 졸랑졸랑 따라 걸음을 옮겼다. 텐죠인 후부키, 그리고 텐죠인 아스카. 료는 그 남매를 그때 처음으로 만났다. 아 스카가 쉽지 않은 성격이라는 건 이미 그 첫 만남 때 알았다. 집 에 가서 웃옷을 벗어 거울에 비추어 보았을 때, 등에는 아스카의 손자국이 빨갛게 나 있었다. 어찌나 세게 밀쳤는지 그 손자국은 장장 일주일이 흐르는 동안 등에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료, 이 아스카가 이야기하고 있잖아!” “아,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82


“그래서 후부키가! 오빠가 어제 달팽이를 몰래 잡아왔는데!” 료는 문득 손을 내려보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손 도 아주 작아져 있었다. 꼭 눈앞의 조그마한 소녀처럼. 발을 탕탕 구르는 소녀의 기색이 제법 화가 난 것 같아서 료는 무심코 대답 을 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어렸을 적부터 항상 아스카를 이기지 못했다. 후부키와 그나마 마음이 맞았던 건 그녀를 이길 수 없다 는 공통의 사실 때문이었다. 아스카가 보이지 않는 날마다 머리를 맞대고 료는 나란히 궁리를 했다. 적어도 그녀를 정말 이길 수 없 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후부키와 함께 소년의 온 두뇌를 쥐어짠 함정을 설치하고 나무 뒤에 숨어 기다렸다. 꾸벅꾸벅 졸던 후부키는 먼저 가서 잔다고 심지어 그 장소를 료에게 맡기고 떠났다. 그 말 정도야 무시할 수 도 있었겠지만, 후부키는 그래도 약속에 따라 끈기 있게 몸을 감 추고 아스카를 기다렸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려면 항상 같은 길 목을 지나야 했고, 거기에 설치한 작은 실 함정은 미리 귀띔이라 도 듣지 않는다면 눈치채기가 정말 어려웠다. 아스카는 커다란 가방을 메고 졸레졸레 걸어왔다. 딱 그 부분을 지날 때 둘이 예상했던 것처럼 소녀는 발이 걸려서 나동그라졌다. 그녀의 몸 절반만 한 커다란 가방은 제대로 닫지 않았는지 넘어 지는 것과 동시에 물건이 온통 쏟아져 나왔다. 게다가 전날까지만 해도 비가 내렸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물웅덩이 안에 물건이 온 통 빠져버렸다.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던 터라 료는 입을 꼭 틀어 막았다. 옷도 머리도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아스카는 자리에 주저 앉았다. 발목에 걸리는 순간 얇은 실은 끊어져 버려 증거조차 남 83


지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둘러보아도 원인을 찾지 못하자, 아스카는 다음으로 제 무릎을 내려보았다. 바닥에 길게 쓸려 상처 가 남았다.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흉이라도 질 것 같이 피가 철 철 흘렀다. 그쯤이면 울 법도 했지만 아스카는 울지 않았다. 료는 입술을 꼭 물고 눈물을 참는 아스카를 보았다. 그녀는 훌쩍이는 소리를 눌러 참으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웅덩이에 빠져 있는 노트와 필통을 건져내고 물을 탈탈 털었다. 가방을 꾹 쥐어짠 후에 이미 엉망이 된 소지품들을 전부 챙겨 담았다. 소녀의 손가락은 조금 떨렸다. 장난이라지만 조금 심하기까지 했다. 끝까지 그녀는 우는 것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선택했다. 료는 아스카가 일어나서 비틀거렸을 때 견디지 못하고 나무 뒤에서 달려나갔다. 팔을 뻗어 진흙투성이가 된 원피스를 짜 주고 그녀의 손을 쥐어 부축해주었다. 료가 있을 거라는 사실은 생각도 못 했다는 것처럼 아스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는 눈가를 손으로 닦아주면서 료는 속삭였다. 아스카, 괜찮아. 내가 있어 줄게. 그제야 눈물을 꼭 참던 아스카는 으앙 울어 젖혔다. 후부키의 장난 에 훌쩍훌쩍 울던 소녀를 처음 발견한 날과 비슷했다. 절뚝절뚝 료의 부축을 받아 아스카는 집까지 돌아갔다. 낮잠을 자다가 깬 후부키는 아스카의 상처를 발견하고 펄펄 날뛰었다. 누 가 감히 우리 아스카에게 이런 짓을 했어! 당장에라도 달려가 멱 살을 잡고 주먹이라도 날릴 기세의 후부키는 아스카의 고운 손 앞에 픽 쓰러졌다. 아스카는 언젠가 료에게 휘둘렀던 팔을 들어 똑같은 자세로 후부키를 한 대 때렸다. 퍽, 하고 제법 아프게 들리 84


는 소리가 났고. 후부키는 배를 감싸고 몸을 웅크렸다. 으으,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엄살이 아니었다. 아스카는 허리에 손을 척 얹었 다. 누구라도 그 앞에 대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봐 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울음기는 싸악 가셔 있었다. 그녀의 눈물을 보는 건 허락된 몇 몇에만 아주 잠깐 주어지는 순간이었다. 료는 그녀가 자신을 홱 돌아보았을 때 조금 움찔했다. 아스카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고, 그 런 눈치로 봐서는 둘이 나란히 장난을 모의했다는 사실을 알아채 고 있는 것 같았다. 똑같이 한 대 맞을 것도 각오했다. 하지만 아스카는 료를 한 대 치는 대신에 손을 꽉 잡아주었다. “나도 언젠가 네가 했던 것처럼 너를 구해줄게.” 소녀가 짓는 미소는 아름다웠다. 료는 시선을 어디에도 두지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스카에게 잡힌 손이 빨갛게 달았다. “그 달팽이가 상추를 다 먹어치웠어. 어쩌지?” 아스카는 한숨을 포옥 쉬었다. 작은 몸에 어울리지 않는 묵직함 이었다. 학교에서 아스카에게 준 과제는 식물을 하나 키워오라는 것이 었고, 그녀는 그걸 상추로 정했다. 후부키가 데려온 달팽이가 상추 를 좋아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녀는 훌륭하게 자란 상추를 과제물 로 제출할 수 있었을 거다. 고작 하룻밤 자고 일어난 사이에 아스 카의 잘 자란 상추는 달팽이의 밥이 되어 장렬하게 산화했다. 초 록색으로 통통해진 달팽이를 보여주며 헤실헤실 웃는 후부키가 얄미워서 견딜 수가 없다면서 아스카는 입을 비죽였다. 어린 시절의 일이다. 이때의 일은 선명하지 않았다. 료는 그냥, 85


불만을 털어놓는 아스카가 예뻐서 견딜 수 없었다는 것밖에 기억 나지 않았다. 거기에 굳이 하나를 덧붙이자면, 조금 후에 후부키가 울고불고 기어 와서 아스카에게 싹싹 사과할 것이라는 것도. 그 표정이 너무 처절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그가 아스카에게 했던 말보다 기억에 더 잘 남았다. 그때야 무슨 일인지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알 것 같다. 아마 아스카가 사과하기 전까지는 얼굴도 안 보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했겠지. 과거의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았다. 료는 딱 일 년 전 아스카와 똑 같은 과제를 받았다. 료는 방울토마토를 키웠고 물론 먹지는 않았 다. 나름 잘 자라기도 해서 그냥 두었더니 열매도 잎도 무성하게 맺혔다. 적어도 그 후로도 몇 년간은 고개를 돌릴 때마다 창가에 선 방울토마토 화분이 그를 반겨주었던 걸 기억했다. 료는 아스카 에게 소곤소곤 물었다. “내 화분 대신 가져갈래?” “정말?” 아스카는 환하게 웃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료의 손을 꽉 붙잡았 다.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료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구해줘서 고 맙다는 감사 인사라는 걸 알았다. “약속했잖아.” 료는 퍼득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파란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가 또각또각 걸어왔다. 어렸을 때 즐겨 입던 옷과 꼭 같은 옷이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성숙한 한 명의 성인이 86


었다. “언젠가는 내가 너를 구해주기로.” 그래서, 정말로 너를 구해주러 왔어. 아스카는 그에게 손을 내 밀었다. 어느새 어린 료와 어린 아스카가 나란히 앉아 있던 화단 은 새하얀 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스카는 홀로 빛 속에 서 있었 다.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로 그 모습은 아름다웠다. 심지어 바 닥에 길게 비치는 그림자마저 눈을 아프게 찔렀다. “난 몇 번이나 자리에서 일어났어. 네 상황과는 다르지만, 그래 도 네가 옆에 있어 주었으니까. 보고 있는 사람이 있어 준다는 것 만으로도 난 얼마든지 다시 할 수 있었어.” 료는 아스카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이번에는 내가 옆에 있어 줄게, 료. 네가 일어설 수 있게.”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방향도 갈 곳도 몰라 어질어질 방황하던 몸이 저도 모르게 앞으로 한 걸음 걸었다. 아스카는 그에게 잘했다는 것처럼 활짝 웃었다. 몸도 목 소리도 자랐지만, 여전히 그녀는 어릴 적과 똑같이 아름다운 미소 를 가지고 있었다. 모르는 사이에 자리에 쓰러지듯이 잠이 들어버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마 료는 조금 울었다. 어릴 적 아스카가 그의 앞에 서 훌쩍훌쩍 울었듯이. 그래도 그 눈물이 멈추는 순간, 앞으로 훌 쩍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수십 번 수백 번의 패배를 딛고. Í

END 87


머리를 감쌀 때 x아스카 주의 | 오메가버스 AU


그를 잡아 달라붙는 손길은- 솔직히 이야기해서 달았다. 료는 인 상을 찌푸렸다. 코끝에 강한 향기가 스쳤다. 습관적으로 얼굴을 비 볐지만, 한 번 와서 머릿속에 깊게 눌러앉은 향기는 쉬이 가시지 않 았다. 료는 제 팔을 잡은 손을 내려보았다. 가늘고 하얗고 얇은 팔 이었지만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 팔이 가녀리다고 생각해본 적 이 없었다. 조금 흐릿한 시선을 간신히 붙잡아 깜박였을 때야, 료는 자신의 기억보다 그 팔이 여리고 연약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대부분 베타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 중 극히 드물게 알파의 성 질과 오메가의 성질이 섞여 있었다. 그 형질은 운이 좋다면 어릴 적에 발견할 수 있었다. 머리가 커서 알게 여 있었다. 남녀를 가 리지 않고 타고나는 되는 것보다 아직 얼마 먹지 않은 나이만큼 힘이 약했기 때문에 그편이 훨씬 유리했다. 알파와 오메가, 그나마 그럭저럭 말은 좋게 들렸지만. 그건 일종의 희소병과 같은 일이었 다. 전 인구에서 0.1%도 되지 않는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다른 형 질을 갖고 태어났다. 특별하다는 말은 항상 여겨지는 이야기만은 90


아니다. 료는 그 특별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알파와 오메가를 가려내는 과정은 아주 복잡했다. 태어나기 전 이나 막 태어났을 때 그걸 판별할 수 있는 기술은 없었다. 다들 성장기가 와 훌쩍 자라게 되었을 무렵에 그 성장의 하나가 되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알파든 오메가든 특유의 향기를 발 산했다. 평범한 사람, 베타에 속하는 일반 사람으로서는 그 향기가 발현해도 판단하지 못했다. 반드시 오메가나 알파 둘 중 하나만이 그걸 알아볼 수 있었다. 정부 기관에서 공식으로 마련해 준 감별 소에는 항상 사람들이 들끓었다. 드문 형질이라고 해도 평생 가도 보지 못할 정도로 희귀한 일은 아니었다. 그 많은 인구 중 일부, 사람들은 가��� 주변에서 알파와 오메가를 보면서 경각심을 가졌 다. 후천적으로 얻을 수 없이 선천적인 부분 중 하나지만, 다른 질 병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찾아낼 수는 없는 골치 아픈 형질. 몸이 조금 안 좋아지면 병원을 방문하고 별 이상이 없다고 하면 기관 에 요청해 형질이라도 발현되었나 검사받는 게 사람들에게는 일 상이었다. 언제라도 알파 혹은 오메가가 될 수 있다는 공포. 굳이 어릴 때 발현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드물지만 늙어 죽기 전의 노인도 발현했다는 기사가 나오고는 했다. 베타는 평생 그 공포를 가슴에 지고 살았다, 죽을 때까지. 특별 형질의 유일한 장점은 혹시 발현이라도 될까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된다는 부분뿐이었다. 알파와 오메가는 반드시 약을 먹어 야 했다. 특별 형질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은 아직까지 없었다. 그 저 발현을 억누를 수 있는 약뿐이었다. 사람의 기질이 전부 다른 것처럼 어떤 사람에게는 형질이 강하게 나타났다. 강하게 나타나 91


는 사람은 하루에 한 번, 조금 약한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 그중 에서도 드물게 가늘가늘 약한 사람은 한 달에 한 번 정도면 충분 했지만, 어쨌든 약은 그들과 떨어질 수 없었다. 약을 먹지 않으면 하얗게 이성을 잃게 된다. 베타들은 경멸을 섞어 특별 형질에만 존재하는 기간을 발정기라고 불렀다. 정식 명 칭은 알파-오메가호르몬폭주기간이었지만, 공식 석상을 제외하고 아무도 그 말을 쓰지 않았다. 심지어 그 기간을 맞이하는 특별 형 질의 사람들조차도. 특별하다는 건 가끔 좋은 이야기였지만, 이들 에게 있어 특별하다는 말은 굉장히 나쁜 일이었다. 발정기 때의 특별 형질은 본능에 이끌려 행동했다. 알파 호르몬을 강하게 가진 사람은 자신의 유전자를 과주입할 대상을 찾았고 오메가 호르몬 을 강하게 가진 사람은 타인의 유전자가 들어올 공간을 몸에 만 들었다. 동물들의 발정기와 비슷하게까지 보였다. 만물의 영장이 라고도 불리는 인간이 동물처럼 본능에 몸을 맡기는 기간은 보는 사람들의 경멸을 샀다. 어쩌다가 제때 약을 먹지 않아 발정기를 맞은 특별 형질이 있으면 이성을 찾은 후에도 더럽다는 꼬리표가 한동안 붙어 다녔다. 료에게 처음으로 특별 형질이 발현된 날은 카드를 시작하던 날과 동일했다. 막 듀얼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자마자 카드를 잡은 건 이상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정신력을 쏟아야 하는 작업이라 는 걸 조금 늦게 깨닫고 료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짚었다. 카드 위에 박힌 자잘한 글자를 몇 시간 내내 읽었기 때문인지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얼마 전에 걸렸던 감기가 아직 낫지 않았나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그는 그대로 자리에서 풀석 쓰러졌다. 92


열이 펄펄 끓는 소년은 심한 독감에라도 걸린 것처럼 보였다. 정말 그런 줄로만 알고 며칠 동안 자리에서 누워 지냈다. 특별하 다는 건 몇 없다는 것. 몇 없는 형질 발현 자체가 료에게 일어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열은 나아지지 않고 심해지기만 했다. 풀린 눈으로 달려드는 소년은 그나마 힘이 없었기 때문에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기관까지 질질 끌려가 꽁꽁 묶인 채로 검사를 받고. 료는 그가 알파라는 진단 결과를 받았다. 그것도 아주 강한 알파. 소년의 손에 들린 약은 한가득이었다. 하루에 한 알, 심지어 몇 달 후에 다시 받으러 들러야만 했다. 료는 커다란 알약을 꾸역꾸 역 물과 함께 삼켰다. 입에 댔던 약을 끊어본 적도 있었지만, 금방 얼굴뿐만이 아니라 온몸에 열이 올랐다. 희미한 정신을 놓지 않고 스스로 억제제를 복용한 건 그나마 소년의 정신력이 강했기 때문 이다. 십 년. 이제는 그 불공평함에 토로할 생각도 잃었다. 료는 여전히 어릴 적과 다름없이 약을 한가득 쌓아놓고 살았다. 일부로 먹지 않은 몇몇 날을 제외하고 료가 약을 복용하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른 사람이 알아서 좋을 일은 없었기 때문에 료는 약을 먹는 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숨기는 것만큼 당당하지 않은 일도 없다고 생각해서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지만, 사실상 네가 알파니 오메가니 하는 사실을 먼저 물어볼 정도로 무례한 사람은 없었다. 텐죠인 아스카는 부모를 제외하고 료가 알파라는 걸 처음 알게 된 사람이었다. 자기 전에 먹는 알약 한 알. 침실로 숨어드는 것 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할 일이 훨씬 많았다. 그날은 창문 을 열어놓고 외출한 사이에 강한 바람이 불었다. 폭우 직전에 몰 93


아치는 바람은 열린 창문으로도 책상 위의 물건을 온통 뒤집어 놓을 정도로 강했다. 다른 물건에 섞여 료의 약병은 바깥으로 데 굴데굴 굴러떨어졌다. 그 약을 주워서 가져다준 건 아스카였다. 다른 사람에게 사실이 알려지는 건 처음 겪는 일이라서 료는 드 물게 어떤 표정을 할지 찾지 못하고 멍하니 약병을 받아들었다. 특별 형질의 취급이 어떤지 충분히 보아 왔기 때문에 료는 그 대로 아스카가 비웃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다시는 그녀를 볼 일이 없을 테지만, 원래 세상 사람들의 인 식이 다 그랬다. 아스카는 료가 예상했던 것처럼 웃었다. 그럴 줄 알았지. 료가 그렇게 생각할 때, 아스카는 미처 료가 예상하지 못 했던 말을 했다. 네 그런 표정은 처음 보는 걸, 료. 눈을 깜박대는 료에게 가까이 가서 아스카는 그의 뺨을 잡아당겼다. 간혹 심한 베타 중에서는 당할지도 모른다는 혐오감으로 피하고 보기부터 하는 사람도 있었다. 료는 천천히 뺨에 댄 아스카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약을 먹으면 차이가 없잖아? 그런 건 상식이라고.” “그건- 그렇지.” 아스카는 오히려 료가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이상하다며 입을 비죽였다. “내가 그런 상식도 모를 줄 알아?” 지금 자신을 무시하는 거냐며 당돌하게 따박따박 이야기하는 아스카를 보면서 료는 약병을 창문 안으로 휙 던졌다. 안으로 플 라스틱병이 떨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아스카는 그 소리에 놀 랐는지 말을 멈추더니, 그의 창문 가까이 다가섰다. 팔을 뻗어 창 94


문을 꽉 닫아주면서 그녀는 웃었다. 예쁜 미소였다. 알파와 오메가라는 이름이 붙은 건 단순히 발정기 때의 차이뿐 만이 아니었다. 서로 짝을 맞추는 이름답게 그들은 서로에게 끌렸 다. 주변에 베타뿐인 발정기 때는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몸을 비 벼댔지만, 알파와 오메가가 끼어 있다면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반 드시 그들을 찾았다. 상대가 발정기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그 건 서로의 페로몬에 이끌리는 일종의 본능이었다. 천대받는 사람 들끼리 유대는 조금 더 강해졌다. 세간의 상식으로는 당연하게 알 파는 반드시 오메가와 한 쌍을 이루어야만 했다. 료는 당연히 그가 평생을 혼자서 살 거라고 생각했다, 아스카를 만나기 전까지만.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는 주의는 필요도 없었다. 아 스카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혹시나 모를 심정으로 다 음날 주변에 귀를 기울였지만, 어김없이 그를 변함없이 대해주는 사람밖에 없었다. 어쩌면, 어쩌면 료는 아스카가 자신의 마음을 받 아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알파도 오메가도 아니었지만 대신 그를 보고도 편견을 가지지 않았으니까. 그러면서도 그는 그 게 꽤 커다란 꿈이라는 걸 인정했다. 특별 형질인 사람이 특별 형 질이 아닌 사람과 맺어지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스카는 오메가였다. 료는 아스카 또한 특별 형질이라는 걸 처 음 알았다. 최근의 그녀는 일이 많다고 투덜거렸다. 입으로 불평을 늘어놓 으면서 막상 손이 멈추어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아스카는 땀을 95


뻘뻘 흘리면서 일을 했다. 눈가에 길게 낀 다크서클을 보면서 료 는 그녀를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먼저 다른 사람에게 도 움을 주겠다고 생각한 건 확실히 아스카가 처음이었다. 말을 꺼내 면 도와줄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했겠지만, 료는 더 이상 아스카의 피곤한 얼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가면서 그녀 의 얼굴에는 피곤이 더 짙게 쌓였다. 조금 갑작스럽지만 료는 문을 두드렸다. 그녀와 알게 된 지 시 간이 꽤 지났지만, 아스카는 여전히 처음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혼자서 살고 있었다. 그녀가 항상 그를 챙겨주듯이 역시 그녀를 챙겨주는 건 그밖에 없기도 했다. 몇 번 그녀의 집에 놀러 간 적은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미리 방문하겠다는 이야기가 없이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료는 처음 아스카가 답하지 않았을 때 집에 없는 줄로만 알았다. 이상 함을 느낀 건 조금 후였다. 문에서 돌아서려다가 료는 피부를 잘 게 조이는 것 같은 미세한 감각을 알아차렸다. 처음 느껴본 것이 었다면 뭔지도 모르고 돌아섰겠지만, 그 감각은 처음이 아니었다. 특별 형질의 심사를 받을 때 그 앞에 서 있던 알파 한 명과 오메 가 한 명. 료는 열이 들끓는 몸으로 오메가에게 달려들려다가 저 지당했었다. 본능만 남아 허우적대는 입으로 약을 삼키면서, 료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가 강한 알파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 감각은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까지 잊지 못할 정도로 강하게 남아 있었 다. 본능만이 남아 흐린 기억 속에서도 유일하게 잊지 못했던 그 간질간질한 감정. 료는 반사적으로 문을 벌컥 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문은 잠 96


겨 있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료는 그의 머리를 진하게 울리는 향기를 감지했다. 특별 형질만이 서로에게서 맡을 수 있는 향기였다. 와락 달려드는 몸을 반사적으로 끌어안았다. 일단 꼭 끌어안고 나자 팔에 따뜻한 온기가 엉겨 붙어왔다. 료는 그의 품에 얼굴을 마구 비비는 아스카를 보았다. “료, 료구나- 우리 료가 왔어…….” 아스카는 헤실헤실 웃었다. 평소의 단정하고 냉철한 그녀답지 않게 입꼬리가 샐샐 풀어진 웃음이었다. 그대로라면 자기도 마찬 가지로 정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 료는 그녀를 슬쩍 밀어내보 았다. 오메가가 그를 유혹해 온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견딜 수 있 을 거라고 장담할 정도로 강한 알파 성질이었지만, 료가 짐작하기 로 아스카 또한 평범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한순간 머리가 아찔해 질 정도, 한순간이 아니라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애를 썼지만 그래도 밀려나지 않아서 료는 어쩔 수 없이 그녀 를 꽉 끌어안고 걸음을 옮겼다. 한 사람이 품에 안긴 데다가, 거기 에 얌전히 안겨있는 것도 아니었다. 드러난 손과 목이 그녀의 숨 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스카는 자신의 온몸을 간절하게 그 위로 비비고 있었다. 엉겨 붙는 몸을 추스르면서 가다 보니 조금 더 버 거웠다. 그래도 료는 아스카의 방문을 열었다. 책상 위에서 구르고 있는 건 익숙한 약병이었다. 그의 것과 색 깔만 달랐지 용량 및 모양이 거의 같았다. 기관에서 내주는 표준 병 사이즈였다. 뚜껑은 열려 있었고- 안에는 약이 단 한 알도 들 어있지 않았다. 바쁘다고 입에 달고 살더니 그만 약을 다시 받아 97


올 기간도 놓친 모양이었다. 료는 손등으로 얼굴을 훔쳤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아스카는 료가 손을 뻗자마자 그걸 꽉 움켜잡았다. 자신의 뺨으 로 료의 온기를 잡아 옮기면서 아스카는 평소에는 보이지 않았던 풀어진 웃음을 얼굴 가득 올렸다. 눈꼬리, 입가, 거기에 열이 조금 올라 발갛게 달아오른 뺨까지. 손등에 와 닿는 아스카의 얼굴은 따뜻했다. 가끔씩 약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특히 매일 먹어야 하는 형질이 강한 사람일수록 그랬다. 추가 지급되는 약의 위험성보다 억제제를 섭취하지 못한 특별 형질에 대한 주의가 더 컸기 때문 에 장본인이 아니더라도 기관에서 빈 약병만 보이면 얼마든지 새 걸 받아올 수 있었다. 료도 당연히 그걸 알았다. 몇 번이나 방해하는 아스카의 사이로 팔을 뻗어 료는 빈 약병 을 움켜쥐었다. 빠져나갈지도 모르는 아스카를 위해서는 문을 바 깥에서 걸어 잠그는 편이 나았다. 혹시 바동거릴지도 모르는 그녀 를 위해 침대에 다치지 않게 묶어둔다든가. 생각만 해도 미안하기 는 했지만 집을 이대로 빠져나가게 두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아스카가 뿜는 향기는 짙고 농밀했다. 약병을 쥔 손에 힘을 더하 면서 료는 아스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고양이라도 된 것 처럼 그의 손에 기분 좋게 머리를 비벼댔다. 다행히 아스카의 집 에서 기관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조금 더 늑장을 부렸다가 는 그나마 남아 있는 그녀의 이성까지 완벽하게 돌아설 테고, 그 리된다면 정말로 곤란해졌다. 당장 그를 밀쳐 바닥에 쓰러뜨려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98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우리 료…….” “…아스카, 금방 갔다 올 테니까.” 료가 입을 떼기까지는 사실 제법 오래 걸렸다. 아스카는 그동안 그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제껏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 단순히 오래된 친구 관계로만 여겼다. 그는 그녀를 좋아했지만, 아스카는 그러지 않으리라고 간신히 스스로를 다잡아 가면서. 그 또한 이성이 희미해져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알고 있 었다. 완벽히 본능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벽히 이성을 찾고 있지도 않고. 그 아슬아슬한 경계의 순간에 사람은 저도 모 르게 본심을 뱉는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 고 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숨이 가빠왔다. 혹시 몰라서 그녀의 집에 오기 전 억제제를 챙겨 먹고 왔기에 그나마 지금껏 버틸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상황까지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료오, 많이- 많이 좋아해. 너를 사랑해. 그러니까 지금처럼 나 랑, 평-생을 같이 있자아-….”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씩 늘어졌다. 혀끝에서 단어가 부서졌다. 료는 잠깐 천장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일을 하고 있었는지 낮인데도 환하게 켜진 전등이 그를 내리쬐고 있었다. 앞의 것까지 는 잘 참았다만, 이건 정말로 모르겠다. 료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누구보다 그의 손길이 기껍다는 것처럼 아스 카는 몸을 맡겼다. 그의 이성은-. -그의 이성도, 아마 거기까지였다. Í

END 99


TO x아스카


친애하는 후부키에게. 후부키, 이것 좀 봐. 오빠가 원래 이메일을 잘 읽지 않는 건 알 지만, 이번만큼은 ���까지 읽어줬으면 좋겠어. 이왕이면 얼굴을 마 주 보고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렇게까지 말할 시간이 내게 없는 건 오빠도 알고 있잖아. 왜 전화를 하지 않냐고? 너 지금도 부재 중 전화 아예 확인 안 하는 거지? 난 이미 오빠에게 전화를 수십 번은 더 했었어! 그걸 받지 않은 건 너잖아. 아, 실수로 그만 확인 을 못 했네. 그렇게 중얼거릴 모습이 눈에 선하니까 변명할 생각 은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이번만큼은 꼭 읽어줘, 부탁이야. 이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료에 대한 이야기란 말이야. 내 약혼 자이자 오빠의 가장 친한 친구, 마루후지 료 말이야. 약혼- 아, 약혼에 대해서 이야기를 잠깐 할까. 내가 약혼반지를 받은 건 오빠에게도 자랑했으니까 들었을 거야.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벅차기 그지없네. 약혼이라는 거창한 건 사실 지금도 그렇 고 료에게서 기대할 수 있을 만한 일은 전혀 아니니까. 붉은 루비 102


반지가 박혀 있던 작은 반지- 그거 그때 오빠가 골라줬었다며? 그때는 감탄하느라 차마 모르고 넘어갔는데. 나중에 료에게 물어 봤을 때 살짝 들었어. 하긴 료가 어떻게 내 취향을 딱 맞추어서 골라왔는지 궁금하기는 했었지. 물론 역시나 싶었구나 싶어서 한 숨도 쉬었어. 나는 료가 나를 그만큼 잘 관찰해주고 있다고 생각 했거든. 무심한 척하지만, 그냥 척하는 것에 불과한 거지. 실제로 는 사소한 일을 전부 알아채 줄 만큼 나를 사랑한다고-. 뭐, 사람 은 그만큼 쉽게 바뀔 수 있는 게 아니구나. 료는 여전히 내가 좋 아하는 걸 잘 몰라. 물론 거기에도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약혼했다는 사실에만 정신이 팔렸었다는 건 인정해. 그때 오빠 가 했던 말을 제대로 들었어야만 했어. 아직도 걱정하면서 해주던 말이 기억이 나네. 기뻐하는 건 좋지만, 같은 집에서 사는 건 조금 더 생각해보라고 했었던가? 그때는 오빠 말을 전부 무시했었어. 오빠도 알다시피 오빠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잖아, 다른 일에는 전 혀 그러지 않으면서 나에 대한 일 한정으로 말이야. 사실대로 이야기하자면 그게 너무 과도한 관심이라고 생각했어. 코트를 여며주면서 나에게 했던 말 기억해? 키스하기 전에는 이 를 꼭 닦으라고- 후부키, 정말정말 솔직히 이야기하는데. 그때 그 충고는 최악이었어. 누가 여동생에게 그렇게까지 신경을 쓴다고 그래? 나 덕분에 그날은 아무것도 못 했어. 료가 고개를 들 때마 다 한 번씩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만 봤단 말이야. 그리고 집에 돌 아와서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아, 후부키가 나를 보면 료와 키스했다고 생각할까? 물론 그때 너는 자고 있었지. 내가 들어오 는 소리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예 깊게 자고 있었어. 어떤 103


식으로 얼굴을 봐야하나 문밖에서 한참 고민하다가 들어왔는데 내 고민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졌지 뭐야! 정말 미쳤어, 그런 생 각을 하고 어떻게 제대로 잘 수가 있단 말이야. 거기에다가 코까 지 골면서! 물론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좋았지만. 다 음날 네가 먼저 나갔던 것도 좋았어. 나는 새벽 내내 제대로 자지 못했단 말이야. 아무리 남매라고 해도, 그런 일까지 일일이 말하는 건 부끄럽잖아. 그러니까 부끄럽다는 말이 조금 이상하게 보이네, 그러니까 사생활이라는 거지. 내 사생활! 그리고 지금 확실하게 이야기하는데, 나 그날 료랑 키스 안 했어. 오빠가 했던 이야기가 계속 생각나서 손도 못 잡았다고! 그 일로 나를 한 달 내내 놀려 대던 거 기억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면서도 놀림만 받고 있었 단 말이야, 나. 왜 반박 안 했냐고- 지금 정말 그런 표정 하고 있어? 그거 제 정신으로 하는 질문이 맞기는 해?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어. 나 키스 안 했으니까 그만 놀리라는 말 같은 거! 넌 나한 테 이야기했을 거라고? 그야 당연하지, 오빠는 평생 료와 키스할 일은 없을 테니까. 아무튼, 지금도 그 일을 틈만 나면 꺼내는 것에 질려버렸어. 그래서 이렇게 말해두는 거야. 아, 물론. 그렇다고 다 른 여자와 키스했던 일을 내게 답장으로 적어 보내지는 말아줘. 별로 안 궁금하니까. 그리고 오빠도 그런 부분에 관해서 관심을 조금 줄여 주었으면 좋겠어. 내가 료와 키스를 하든지, 손을 잡든 지. 기타 등등, 글로 적기 곤란한 일 같은 거. 그런 식으로 늘 이 야기하니까 내가 오빠 말을 안 들으려고 하는 거야. 어쩌다 한 가 지가 도움이 되더라도 열 가지 중 아홉 가지 정도는 별다른 영양 104


가가 없는 거니까. 열 번 찍어서 한 번 맞추는 확률이라니, 다른 의미로 대단해. 근데 지금 나, 그 열 가지가 필요하거든. 아, 새로 사귄 친구들과 잠깐 대화를 한 적이 있었어. 나처럼 오빠가 있는 건 한 명뿐이었지만, 대신 나머지는 동생이 있었거든. 여동생이 있는 사람도 있고 남동생이 있는 사람도 있었어. 오빠든 동생이든 상관은 없었어. 네가 내게 상관하는 부분의 따악 십 분 지 일만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입을 떡하니 벌렸단 말이 야. 세상에, 그건 말이 안 된대! 그래, 당연히 말이 안 되는 거야. 가족이라도 보통 그렇게 상관하지는 않는다고. 덕분에 어디 가서 말도 못하겠어. 솔직하게 하소연할 수 있는 사람은 료밖에 없는데 후부키 너도 알다시피 료는 내 말을 제대로 들어주기는 해도- 별 다른 반응은 하지 않잖아. 료라면 분명 해봤자 그렇게 말할걸. 후 부키니까 어쩔 수 없지. 후부키니까-어쩔-수-없지. 뭐, 오빠랑 료 가 친구인 이유를 그래서 알 것 같기는 해. 이왕 김에 정말 아주아주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내가 약혼을 받 아들이자마자 덥석 료의 집으로 간 것도 오빠 영향이 가장 커. 설 마 지금까지 몰랐다는 소리는 안 할 거야, 후부키. 내가 계속 왔다 갔다 하는 생활을 유지했다면 오빠는 내게 매일 아침 인사치레로 물었겠지. 잘 잤어, 하는 남매간의 고운 인사 대신에. 오늘은 료와 뭘 할 거야, 이런 거. 그리고 거기에다가 료에게 충고도 해줬을 거 야. 약혼반지를 골라준 일은 고마워. 항상 끼고 다니는 건데 내 마음에 쏙 들지 않으면 곤란하잖아. 하지만 매번 일상을 네게 참 견받는 건, 료랑 약혼했어도 셋이 지내던 생활과 변함이 없게 되 잖아. 내 취향인 물건을 골라주는 건 좋지만 료한테 꽃무늬 셔츠 105


를 입히는 건 못 견디겠어. 거기에다가 뻔히 늘어놓는 거짓말은 또 뭐야. 아스카가 분명 그건 좋아할 거야, 이런 식으로 포장까지 해 가면서.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네가 좋아하는 거겠지, 후부 키. 그런 우스꽝스러운 셔츠를 입혀놓고 뒤에서 몰래 사진 찍는 거 모를 줄 알아? 그리고 오빠는 그 사진을 나한테 보내는 데 쓰 잖아. 꼭 인쇄해서 편지에 같이 첨부해서. 우리 아스카가 좋아하 는 사람♡ 꽃다운 모습♡ 이런 촌스러운 문구가 도대체 뭐냐고. 그리고 그 사진, 내가 집에 방문했을 때 현수막에 인쇄하는 것도 좀 그만둬 줄래? 그거 엄청 쪽팔리거든. 편지에 첨부해 보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제발, 제-발. 혼자만 감상해 줘. 오빠가 하는 일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은 엄청 많지만, 그러려 면 이제까지 적은 분량을 열 번 정도 늘어놔도 모자랄 거야. 하지 만 다른 이야기만 너무 늘어놓는 건- 오빠가 읽다 말 테니까. 다 음번에 그 이야기는 다시 쓸게. 이번은 료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의논하고 싶어서. 료가 어제 나한테 청혼했어. 고개 돌리지 마, 눈 감지도 말고, 지금 잘못 읽은 게 아니니까 의심스러우면 다시 한 번 문장의 첫 부분으로 돌아가 주지 않을 래? 아, 그러지 않을 거니까 다시 한 번 더 적을게. 료가, 나에게, 청혼했어, 바로 어제. 24시간도 되지 않은 이야기라고, 그거. 놀랐 지? 놀랐어? 응, 나도 놀랐어. 엄청 놀랐다고! 난 평생 약혼반지만 낀 채로 료의 집에서 머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그 런 거 있잖아. 친구 이상 연인 미만, 그런 관계. 평생 딱 그런 거 리만 아슬아슬 유지하는 거 있잖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 106


이야기라고 생각했어. 오빠도 알다시피 료는, 그런 부분에서 많이 서투니까. 그런 거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하지만 아니었나 봐. 오빠도 몰랐지? 이번에 청혼하려고 내민 반지는 솔직히 내 취향이 아니거든. 오빠에게 한 마디도 안 물어 봤구나, 바보 같게도 그런 생각을 먼저 해버렸어. 루비 대신에 다 이아몬드가 박혀 있는데. 난 사진 말고 실제로는 다이아몬드를 처 음 봤어. 오빠가 아니라 다른 곳에 조언을 구하기라도 했는지 그 렇게 이상한 디자인은 아니었어, 그러니까. 료가 평소에 고를 것 같지 않은 디자인이기는 했단 말이야. 반지를 살 때 직원에게 물 어보기라도 했나 봐. 료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걸 별로 안 좋 아한다는 걸 생각하면 엄청 놀랄 정도야. 청혼 말이지. 으음, 그거. 솔직히 말할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건 두근거리는 일이지 뭐야. 낭만적인 이야기 있잖아, 무릎을 꿇고 나와 결혼해 주겠어? -하고 물어보는 그런 정석적인 거. 그런 것까지는 아니라도 가만 히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손을 잡고 속삭이거나- 아니아 니아니, 솔직히. 정-말 솔직히. 자고 일어나서 졸린 눈을 비빌 때 분위기라고는 전부 가져다 버린 채로 하는 말이라도 좋아. 식사하 다가 무뚝뚝하게 건네는 말이었어도 나는 이해했을 거야. 료잖아.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걸 바라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청혼할 사람이 있다면 료가 아니라 나였을 거라고 계속계속 생각했어. 내 가 료한테 청혼한다니- 지금 생각하니까 그것도 썩 나쁘지는 않 네. 료가 진짜 감동할지 모르겠다는 고민만 아니었다면 진작 청혼 했을지도 모르겠어. 107


그렇게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료가 나한테 내민 건 검은 리본으로 포장된 상자 하나였어. 내 가 그걸 푸니까 안에서 또 다른 상자가 나오고, 그 뚜껑을 여니까 더 작은 상자가 나오고. 료가 할 것 같지 않은 장난이었지. 오빠, 나는 최근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어. 약혼반지는 알다시피 나만 끼고 있는 게 아니잖아. 어쨌건 료도 그 반지를 나와 같이 나누어 끼고 있었다고. 텐죠인 아스카, 하고 안쪽에 각인된 금색 반지를 말이야. 며칠 전부터 료가 그 반지를 끼고 있지 않았어. 아무리 일이 급해도 같이 식사하는 일은 거르지 않아서 숟가락을 쥔 손 에 반지가 없다는 걸 금방 알았어. 반지를 끼고 있었다는 자국만 남아 있었다고. 료가 급하게 나가서 나는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직 감이라는 게 있잖아. 무슨 일이 생겼구나 하는 거. 잠깐 빼놓은 거겠거니 생각했는데, 며칠 내내 반지가 보이지 않았거든. 덕분에 나는 내 약혼반지를 마찬가지로 빼버려야 할까 내내 고민했다고. 료가 상자를 내밀었을 때 기분을 풀어주려는 뜻일 거로 생각했어. 그리고 그거야말로 료가 정말 안 하는 일이지. 그래서 반지를 잃 어버렸다고 생각했어. 같이 약속을 나눈 반지를 잃어버렸기 때문 에, 알다시피 잃어버리는 것도 료답지 않은 일이잖아. 마찬가지로 그답지 않은 일로 사과하는 건가 생각했었지. 그 상자 안에 또 상자가, 또 상자가, 계속계속 상자가 나오더라. 처음에는 꽤 큰 상자였는데 손바닥 안에 들어올 때까지 줄어들어 버렸어. 마지막으로 나온 건 리본이 없는 검은 상자였고. 내가 막 그 뚜껑을 열어젖히기 전에 료가 나한테 말했어. 마루후지 아스카 도 네게는 잘 어울려. 108


나는 처음에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어. 그도 그럴게 갑작스럽잖 아. 작은 상자를 열고서 그 안에 있는 반지 한 쌍을 보았을 때 모든 게 멈췄어. 나, 텐죠인 아스카의 세상이 전부 멈추어 버렸다고, 오빠. 오빠도 알잖아, 난 다른 사람도 아닌 아스카야. 그러니까, 작은 일에 놀라지 않아. 그게 정말 큰일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내가 반지를 떨어뜨리기 전에 료가 먼저 잡았어. 내가 놀랄 거 라는 걸 알고 있던 사람 같았다니까. 그리고 료가 그 작은 상자에 서 반지를 하나 꺼내서 내 손가락 위에 끼워주었는데, 나한테 거 부할 권리가 없다는 것처럼 굴었어. 보통 청혼하면 거기에 승낙하 는 과정이 따르잖아?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료는 그걸로 일이 전부 끝났다는 것처럼 반지를 끼워줬거든. 우리는 각인을 반지 안 쪽에 새겼었는데, 이번에는 반지 바깥에 글자가 적혀 있었지. 마루 후지 아스카라고. 저기, 오빠. 오빠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어. 그게 감동적이 라고 생각하는지, 너무 시시하다고 생각하는지. 난 평소에 오빠라 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으로 많은 걸 넘겼었거든. 이번만큼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어. 후부키 오빠라면 하는 생각이 소용없던 적은 처음이야. 난 내 손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단 말이야! 이렇 게 당당하지 못했던 적은 처음이야, 어쩌면 료가- 텐죠인 아스카 가 이런 사람이었다니, 하고 잘못 생각하지 않을까? 물론, 물론. 난 그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 오빠도 알다시피 우 리 셋은 오랜 시간 알아왔잖아. 그래도, 사람이라면 불안할 때가 있더라. 지금이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불안함을 느끼던 때야! 내가 다음 뭘 했는지 알아? 이걸, 오빠가 이걸 읽어봐야 해. 이 109


질문에 꼭 답을 해줘야 한다고. 이게 내가 말하는 가장 중요한 부 분이야! 나는 료가 나머지 반지 한쪽을 끼기 전에 그걸 빼앗았어. 상자째로 나머지 반지 하나를 뺏어다가 내 주머니에 쑤셔 넣고. 료, 답은 내일 줄게. 그렇게 이야기해 버렸어.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어, 어떻게 그 런 걸 생각했는지도, 어떻게 그 순간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도. 어쩌면 난 청혼에 답변한다는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 었는지도 모르겠어, 정말 나답지 않게. 료의 표정? 당연히 못 봤 지! 내가 무슨 정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잖아. 료의 표정을 살피기도 전에 난 돌아섰어. 내 방에 들어가서 문을 쾅 닫고-. 반지? 물론 살펴봤지. 떨리는 게 가시자마자 상자에서 꺼냈는데 그건 확실히 료의 사이즈였어. 거기에 겉에는 마루후지 료라고 적 혀있고. 오빠, 눈치챘어? 답은 내일 줄게- 그렇게 말했던 게 어제 이야 기야. 나는 오늘 내로 답을 줘야 한다고. 그리고 난 어떤 식으로 그에게 답해야 할지 전혀 생각을 못 하겠어. 사실 어제부터, 반지 가 뇌를 묶어버린 것만 같아.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어.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나는 오빠가 하는 장난을 크게 반기지는 않거든. 특히 료와 나 사이에 대한 거. 하지만 이번만큼은 오빠의 의견을 들어야겠어. 후부키는 이 아스카의 오빠잖아? 그렇지? 난 오빠가 괜찮은 의견을 내어줄 거라고 믿어. 한 가지를 결정할 수 없다면 수십 개를 보내줘. 나는 그중에서 고르기만 하면 되잖아? 그렇지? 이 청혼을 승낙할지를- 그 답은 후부키, 이미 네가 알고 있다고 생각해. 물론 나는 승낙할 거야. 다만 아직 멋진 방법을 110


고르지 못한 것뿐이야. 제일 먼저 생각해 본 건 케이크에 넣어서 건네주는 거였어. 포 크로 케이크를 한 입씩 떠먹여 주면서 그 끝에 반지가 걸리면어때, 달콤한 승낙이지?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야. 근데 그건 너무 촌스러운 것 같아. 엄청 구식이기도 하고. 그리고 예전에 얼핏 본 적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하다가 반지를 꿀꺽 삼켜버렸다는 경우 도 있더라고. 내가 꼼꼼한 성격은 아니잖아- 솔직히 말해서. 물론 오빠나 료에 비하면 꼼꼼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상대적 으로 하는 이야기라는 거야. 내가 케이크를 떠넣다가 잘못해서 반 지까지 넘겨주면 어떻게 하지? 료는 잘못해서 그걸 삼켜버리는 거야, 그는 그런 부분에서는 조금 둔하니까. 그런 식으로 뱃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경우를 생각하면 두 배는 끔찍해져. 그리고 두 번째로 생각한 건-. 사실 거기부터는 전혀 생각나지 않아. 생각이 났더라면 오빠에 게 이렇게 질질 끄는 편지를 쓰고 있지는 않겠지. 오빠, 나는 료한테 당당하게 보이고 싶어. 이제껏 그랬던 것처 럼. 청혼 하나에 수줍어하는 소녀일 수 있지만, 그런 점을 료가 좋 아할 수도 있지만. 후부키, 알다시피 나는 나잖아. 아스카는 아스 카라고. 당당해야만 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만 최대한 그렇 게 보이고 싶어. 정말 다른 사람도 아니라 평생 나라는 사람과 함 께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료에게 주고 싶어. 그에게 보여주고 싶어. 오빠, 오빠. 이걸 보면 꼭 답장 줘야 해. 료에게는 절대로 이야 기하지 말고. 내가 놀랐던 만큼 료를 놀라게 해주고 싶거든. 그런 사람이 바로 네가 선택한 아스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 시간이 111


급하면 전화해도 좋아, 나 전화기 앞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을 테 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꼭 답장은 줘. 항상 고마워, 후부키. 그리고 추신, 나는 료를 사랑해. 그도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마 찬가지로 나를 사랑하고. 나는 엄청 잘 지내고 있으니까- 항상 그 랬던 것처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난 이번 청혼이 정말 기뻐. 오빠의 사랑하는 동생, 마루후지 아스카가. “저기, 후부키?” “응, 아스카. 무슨 일이야?” “어, 어떻게 해…….” “무슨 큰일이라도 났어?” “응. 크, 큰일- 엄청, 엄청 큰일 났어. 진짜 큰일이란 말이야.” “뭔데? 네가 그렇게 표현할 정도면-” “나, 메일을 잘못 보냈어…….” “응?” “오빠한테 보내야 하는데, 수신인을 료로 적어버렸단 말이야!” 쪽팔려서 아주 죽어버릴 거야, 나 이제 료를 어떻게 보냐고. 이 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그냥 다 적었단 말이야! 아스카는 한참 동 안 수화기에 대고 울먹였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뿐 인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곤란해 하는 목소리를 모른 척할 수는 없다. 후부키는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줄도 모르면서 훌쩍이 는 소리가 그칠 때까지 수화기에서 귀를 떼어내지 않았다. 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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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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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 x아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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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료.” 아스카는 허리에 척 손을 올렸다. 아무리 뚫어져라 바라보고 발 을 쾅쾅 구르고 거기에 이름까지 소리쳐서 불러 보아도 공허하게 울리는 소리만이 되어서 자리에 빙빙 맴을 돌기만 했다. 덕분에 아스카는 더 화가 났다. “정말 이게 끝이야?” “별로, 생각 없어. 네가 바라는 거라 주문이야 했지만.” “그래서 나 혼자 먹으라는 거야?” “이것만 읽고 갈게.” “그 말도 벌써 몇 번째잖아!” 아스카는 신경질적인 여자가 아니었다. 차가운 머리, 따듯한 가 슴. 오히려 듀얼리스트의 모범이라고 얼마든지 칭할 수 있는 성격 에 가까웠다. 필요할 때는 이성적인 머리를 가다듬어 생각을 짜내 고 막상 승부에 임할 때는 이기고자 하는 승부욕을 불태우면서 열정적으로 임했다. 주변의 동경을 많이 사는 건 어떤 일에도 흔 116


들리는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성격 탓도 분명히 있었다. 다만 마루후지 료 앞에서만, 그녀는 조금 달랐다. 그와 이야기하다 보면 아스카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 신경질적인 사람처럼 되어버 렸다. 무심한 사람은 최악이다. 사람들은 자신 말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었다. 크게 주목을 끌고 싶은 게 아니라면 쓸데없는 관심은 달갑지 않기도 했다. 아 스카는 항상 이목을 끌었다. 예쁜 얼굴에 홀려 고개를 돌린 사람 들은 저마다 그 눈에 서린 당당함에 넋을 잃었다. 가까이 다가서 지도 못하고 멀리서 힐끗힐끗 고개만 기울일 정도의 관심은 한심 하면서도 한숨까지 났다.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건 사람 사이의 기 본이었다. 아무런 시선도 주지 않는다면 서로 간의 감정이 상할 일이 없었다. 다만 그게 사귀는 연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연인 사이에 무 심한 사람은 최악이다. 기념일을 일일이 챙겨주는 정성을 바라지 는 않았지만, 생일마저 홀딱 잊고 넘어가기를 바라는 건 또 아니 었다. 크리마스처럼 요란한 휴일에 빨간 선물 포장을 내밀어 달라 고 부탁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생일이 지나가기 직전에 생일 축 하한다는 말을 한마디 건네달라는 부탁은 크게 어렵지도 않았다. 료는 기본적으로 무심한 사람이었다. 아스카도 그래서 그에게 많 은 관심을 바라지는 않았다. 책상에 산을 이루고 쌓여 있는 책은 최근에 새로 나온 덱의 파 훼법을 연구한다며 머리를 쓴 흔적이다. 한 권씩 한 권씩 료가 책 을 잡아 읽어나가는 걸 제법 기분 좋게 바라보다가 아스카는 료 117


의 옆에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료, 생일 축하한다고 말해줄래?” “생일 축하해, 아스카.” “오늘 말고, 내 생일에.” 책에 한창 집중하는 눈길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아스카는 나 긋나긋 목소리를 줄였다. 다시 물어볼 필요도 없이 료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분명 보았다. 그녀는 그 작은 동작만으로 만족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생일을 맞기 일주일 전의 이야기였다. 바뀌는 날짜를 하루하루 쳐다보았다. 그녀의 생일, 아침 일찍 일어 나 아스카는 기분 좋게 방안을 걸어 다녔다. 여전히 쌓여 있는 책 을 다 해치우지 못한 료는 새벽 늦게까지 독서를 하고 아침에 아 주 일찍 일어나 다시 책을 잡았다. 나름 일찍 일어났다고 생각했 는데도 료는 그녀보다 먼저 일어나 있었다. 아침이 지나고 점심이 지나고 거기에 저녁까지 지나고. 글자에 머리를 박느라 료는 식사 도 알아서 했다. 그냥 적당한 샌드위치를 주워 입안에 꾹꾹 밀어 넣는 것으로 끼니를 떼우는 걸 아스카는 딱히 말리지 않았다. 초 침이 몇 번이나 움직였다. 날짜가 바뀌었다. 열두 시까지 손가락 을 꼽아 기다렸는데도 불구하고 료는 그녀에게 아무런 말을 건네 지 않았다. 아스카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 다. 료는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은 했지만, 정말 이름 한 번 내어 잡지 않는 걸 보니 어이가 없기까지 했다. 아스카는 씩씩 화를 내면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넓은 침대 에는 베개가 두 개였다. 같이 하나의 이불을 나눠 덮으면서 아스 118


카와 료는 같은 침대를 썼다- 만. 같이 자리에 눕는 료의 체온을 느낀 지도 며칠이나 지났다. 당장에라도 문을 박차고 나가서 멱살 부터 잡고 싶은 충동을 꾹꾹 참고서 아스카는 눈을 감았다. 료가 책에 정신이 팔리는 일은 가끔 있었다. 마루후지 료는 원 래부터 승부에 집착이 강한 성격이었다. 얼핏 무심한 것처럼 보이 지만 몇 번 료와 승부를 내 보았던 아스카는 그가 냉철해 보이는 표정으로도 얼마만큼 승리에 집착하는지 알고 있었다. 승리는 집 착해서 물고 늘어진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시즌이 바뀌고 자잘한 규칙이 늘어날 때마다 료는 그가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집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아스카는 가끔 책상 위에 흩어져서 굴러 다니는 카드를 보았고, 또 가끔 식탁 위에 접시 대신을 차지하고 있는 덱 케이스도 보았다. 산 지 얼마 안 된 모니터에 시뮬레이션 이 켜져 돌아가고 있는 것도 보았고 의자에 길게 늘어져 잠들어 있는 료도 보았다. 담요를 끌어와서 그에게 덮어주었다. 낮게 신 음하면서 몸을 마는 귀여운 잠버릇을 보며 아스카는 피식 웃었다. 책상에 높게 쌓이는 책도 그 일환이었다. 간단한 검색어를 몇 개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정보는 많이 나왔지만, 출처가 명확한 지식 은 오로지 책에서만 얻을 수 있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읽으라고 밀어줘도 읽지 않으면서 료는 꼭 그럴 때만 책을 끌어안고 한 몸 이라도 된 것처럼 시간을 보냈다. 아스카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기다랗게 늘어지는 머리카락은 어깨에 부드럽게 스쳤다. 엉킨 곳 하나 없어 나름 자 랑스레 여기던 부분이었지만, 이럴 때만큼은 그런 감촉 하나도 짜 증스럽게만 느껴졌다. 아스카는 결국 이를 꽉 물면서 기다란 머리 119


카락을 잡아 묶었다. 높게 묶인 머리카락이 여전히 등을 한들한들 간질였다. 눈꼬리를 샐쭉 치키는 아스카에게 료는 조금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팔락, 조용한 와중에 책장이 한 장 넘어갔다. 그는 시선을 통째로 책 위에 박고 있었다. 아스카는 료가 책을 막 집어 들 때 방에 들어왔다. 표지를 넘기던 손가락은 쉼 없이 움직였고 지금 책은 이미 절반 가까이 넘어가 있었다. 그녀와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료는 책 위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생일도 까맣게 건너뛴 자신의 연인을 바라보면서 아스카는 며 칠을 더 기다렸다. 줄어들고는 있었지만 아직 산더미처럼 쌓여 있 는 책을 보면서 결국에는 발끈 화를 냈다. 료, 내 생일 기억은 해? 료는 시계를 한 번 쳐다보고 달력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것만으 로는 날짜가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다는 것처럼 결국 품에서 단말기도 꺼내어 뚫어져라 보았다. 아스카의 생일이 지났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는 것처럼 료는 잠깐 아, 입을 벌렸다. “생일 축하해, 아스카.” “이미 한참 지났거든!” 때가 엄청 늦어버린 인사에 아스카는 목소리를 높였다. 료는 그 인사 하나면 전부 끝이 나 버린 것처럼 아스카를 무시했다. 료의 손에서 책을 홱 뺏어 들고 나서야 아스카는 간신히 그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생일이 지난 건 이왕 지났으니 어쩔 수 없지만. 대 신에 오늘 저녁은 나가서 함께 먹자. 화가 난 것치고는 완곡한 요 구였다. 료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고-. -혹시나 했던 생각처럼 료는 나가자는 말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잔뜩 집중하고 있던 일 때문이었다. 방에서 머리를 빗다가 혹시나 120


싶어 거실로 나와보고, 아스카는 여전히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료 를 보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손에 잡힌 책을 던져버리고 싶은 마 음이 불쑥불쑥 치밀었지만. 좋아, 어디까지 하나 보자. 아스카는 료를 기다렸다. 한 시간, 두 시간. 아스카의 인내심은 이번에야말 로 딱 두 시간이 한계였고. 그녀가 료에게 가까이 걸어가자마자 료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정말 잊어버렸다는 것처럼 시간을 확인 하고 옅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 나가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잠깐만, 아스카. 책을 끌어안고 료는 막 손을 뻗으려는 아스카 를 말렸다. 단말기를 꺼내어 전화주문을 하는 료의 태연한 표정에 아스카는 할 말을 잃었다. 주문하는 사람이 얼마 없는지 음식은 금방 왔다. 료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했다. 따뜻하게 김이 오르는 스파게티를 식탁에 차려주기는 했지만, 딱 그것만 하 고 나서 료는 도로 의자에 등을 깊게 기대었다. 료의 몫까지 식기 를 꺼내어 식탁에 앉았던 아스카는 아예 그녀를 음식 앞에 홀로 버려둔 료의 무심함에 눈을 깜박였다. 이래서야 식욕도 돌지 않았 다. 그녀가 포크를 세게 내팽개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었다, 포장된 선물을 잔뜩 끌어안고 좋 아하는 성격도 아니었기에 거창한 이벤트는 필요가 없었다. 그냥 축하한다는 말 하나면, 제날짜에 맞춘 이야기 한마디면 다른 게 아무것도 필요가 없이 행복할 것만 같았다. 막 김이 오르는 스파 게티는 생일 축하한다는 것보다 아주 조금 더 선물다웠지만, 그녀 에게는 고작 문장의 한 글자보다 가치가 없었다. 아스카는 눈물이 많은 여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저 도 모르게 눈가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식탁에 아무렇게나 물기가 121


뚝뚝 떨어졌다. “이렇게 너와 함께 있는데도.” 돌아보지조차 않는 료에게 얼굴만 보이지 않으면 들키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벅차오르는 감정은 결국 그녀의 목소리 깊 숙하게 흔적을 남겼다. 히끅히끅 흐느끼는 목소리를 참지도 못하 면서 아스카는 식탁에 앉아 엉엉 울어 젖혔다. 울음소리가 방안을 울릴 때야 료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당황해서 깜박이는 그의 시 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아스카는 아예 식탁에 얼굴을 묻었다. “나 혼자 남은 기분은 싫다고…….” 좀처럼 약한 소리를 하지 않았던 아가씨의 입에서 약하다 못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료는 들고 있던 책을 그제야 바닥에 던져버렸다, 아스카가 낚아채기도 전에 자기 손으로 직접. 허겁지겁 그녀의 곁에 걸음을 딛고 나서야 료는 엉 엉 우는 그녀를 잡아 품에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그 온기에 아스 카는 이제까지의 아쉬움을 전부 담는 것처럼 한참을 더 울었다. 쏟아지는 비라도 맞은 것처럼 축축하게 젖은 얼굴을 보면서 료는 가까스로 이야기했다. “미안해, 아스카. 미안. 정말 미안.” 그 목소리가 마찬가지로 물에 잔뜩 젖어 있는 것만 같아서, 아 스카는 료를 탓하는 대신 그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더 주었다. Í

END


새로운 나 x아스카


“좋아, 오늘 아침.” 아스카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아침부터 날씨가 굉장히 좋았다. 밤사이에 쳐 놓았던 커튼을 밀었을 때 그 사이로 맑은 햇살이 밀 려 들어왔다. 산뜻한 아침의 볕에 몸을 적시면서 아스카���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를 얹었다. 어제는 날이 조금 흐렸다. 하늘을 살펴 보다가 일찍 잠이 들었던 기억이 아스라이 났다. 오늘은 날이 밝 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꼭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 분이라 아스카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맑은 날에 조금 맞지 않은 찬바람이 방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아스카는 오늘부터 료를 좋아하지 않기로 했다. 완전히 새로운 자신이 되었다고, 그래서 두 손을 있는 힘껏 쥐고 자신할 수 있었 다. 긴 머리카락을 평소와는 다르게 높게높게 올려 파란 리본으로 꽉 묶었다. 어깨까지 늘어뜨린 머리카락에 그의 시선이 한 번은 더 와 닿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제껏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 고 풀었었지만, 오늘부터 그건 전혀 소용없는 일이 되었다. 왜냐하 126


면 료를 좋아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높게 올려 묶은 머리카락이 목덜미에서 찰랑찰랑 스쳤다. 료, 좋아해. 료, 좋아해요. 료님, 받아주세요. 아스카는 자리에 서서 그 많은 광경을 바라보았다. 료는 외모만으로도 괜찮은 남자 인 게 아니라 능력으로도 출중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을 가까이 두지 않아 그 찬 성격이 얼마만큼의 벽을 치는지 사람들은 잘 몰 랐지만, 손끝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실력에 관한 이야기만 본다면 성격이야 어떠하더라도 문제없었다. 오히려 입을 다문 싸늘함이 동경이 되었다. 아스카는 손을 뒤로 숨겼다. 파란 리본으로 꽉 포장해놓은 작은 상자가 손끝에 걸렸다. 고급스러운 리본으로 섬세하게 포장해 놓 은 상자는 손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았다. 눈에 띄지 않게 품 안에 꼭 품고 아스카는 료를 찾아 종종 걸었다. 밸런타인데이같이 특별한 기념일에는 평소 친밀한 사람에게 선물을 건네줄 만한 핑 계가 절로 생긴다. 그 핑계에 얹혀서 아스카는 원 모양의 아기자 기한 초콜릿을 준비했다. 한입에 밀어 넣으면 그대로 쏙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모르는 척 슬쩍 건네주려고 생각했다가 그녀는 먼 거리에서 걸음을 뚝 멈추었다. 세상 아래에 새로운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것처럼 아스카가 하는 생각을 다른 사람들도 전부 했다. 저마다 품에 화려하고 커다란 상자를 끌어안은 소녀들이 료의 주 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아스카는 잠깐 몸을 돌려 손에 쥔 상자를 보았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당장에 누가 봐도 선물 상자인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아스카 는 리본을 쭉 당겨 풀어버렸다. 발걸음 한 번 옮길 틈이 없이 사 127


랑하는 소녀들로 빼곡하게 덮인 료를 바라보다가 아스카는 몸을 돌렸다. 걸어가는 도중 쓰레기통에 상자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 다. 그 안에서도 료는 아무런 표정도 하고 있지 않았다. 사랑하는 마음, 사랑하는 소녀. 그 모든 게 어떤 의미도 없다는 걸 아스카는 금방 알아차렸다. 재잘거리는 목소리 대신에 그 머릿속에는 고작 해야 카드 몇 장만이 늘어서 있겠지. 그러면서도 그녀는 손에 쥔 리본만큼은 버리지 못했다. 한동안 파란 리본은 서랍 안에 콕 박 혀 있었다. 아스카가 그 마음을 접겠다고 결심할 때까지. “잘 먹겠습니다.” 아스카는 척 두 손을 모았다. 후부키는 약속이 있다고 했던 말 처럼 아침 일찍부터 보이지 않았다. 혼자 남은 집안에서 식빵 위 에 계란을 듬뿍 얹어 부친 채로 설탕을 살살 뿌렸다. 양식에 걸맞 은 식단 내용은 그녀가 좋아하지 않는 종류였다, 다만 오늘부터 그녀는 새로운 자신을 맞기로 했기 때문에. 이왕이면 결심했던 마 음처럼 새로운 음식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빵은 입에서 착착 부서 졌다. 맑은 아침처럼 요리도 꽤나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머리를 묶는 용도의 리본은 아니었다. 아무리 힘을 주어 꽉 잡 아매도 높은 머리채는 자꾸만 흘러내렸다. 아스카는 세 번째로 손 을 들어 머리를 다시 묶었다. 찰랑찰랑 걸리는 머리카락은 사실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접시를 치우고 설탕 범벅인 손을 씻으 면서 아스카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하얀 얼굴에 머리를 높게 묶은, 어제의 그녀와는 다른 소녀 하나. 료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당당하게 서서 카드를 드로 우해 내는 기다란 손가락을 보고 있으면 당연스레 빠져들었다. 아 128


스카도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 중 하나였다. 경기장에서 날카 로운 시선으로 상대를 쏘아보고, 드로우. 낮게 깔리는 목소리와 함 께 소환되는 몬스터를 보면서 아스카는 좋아한다는 마음이 무엇 인지를 알아차렸다. 카드를 보고 전력 분석을 하고 있을 이제까지 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꼭 료만 들어왔다. 아스카는 한참 동안 료 를 보았다. 사실 듀얼 정도는 조금 못해도 상관없어, 처음으로 그 렇게 생각해 보았다. “자, 아스카.” 아스카는 손을 내려보았다. 깨끗하게 씻은 손이 보들보들 부드 러웠다. 카드 대신에 리본을 묶고 듀얼 디스크 대신에 초콜릿을 포장하던 손이었다. 얼굴에 가까이 대어 보았다. 더이상 달짝지근 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이제 괜찮아, 전부. 아스카는 몇 번이나 자신에게 속삭였다. 텐죠인 아스카는 원래 그런 달달한 냄새와 어 울리지 않는 소녀였다. “아침은 그럼- 듀얼로 시작해 볼까.” 아스카는 덱을 꼭 쥐었다. 한동안 잡지 않았던 카드의 감촉이 손바닥 위에 서렸다. 뭐니뭐니해도 역시 그녀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이런 모습이었다. 듀얼 디스크에 덱을 끼우고 당당하 게 허리를 치켜드는 모습. 아스카는 거울 앞에 섰다. 금방이라도 카드를 뽑아 대전을 신청해낼 것 같은 소녀의 모습이 있었다. 그 녀를 바라보는 건 이제 스쳐 지나가는 료의 시선이 아니라, 거울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신의 시선이었다. 오늘의 새로운 나. 아니, 이제까지가 사실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었고. 이제야 익숙 129


한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걸, 아스카는 덱을 손에 꼭 쥐면서 간신 히 알아차렸다. 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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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걷는 밤 x후부키


죽은 자들이 거슬러 오는 밤. 료는 손잡이를 돌렸다. 소리 하나 없이 열리는 문은 전적으로 료의 취향이었다. 신발을 벗고 방문에 몸을 들이밀었다가 료는 쓰러져 있는 후부키를 발견했다. 한 번 눈을 깜작이면서 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눈에 파랗게 후부키 의 모습이 서렸다. 가슴에 칼을 깊게 꽂고 피를 철철 흘리면서 바 닥에 길게 늘어져 있는 후부키가 붉게 스렸다. 붉은색으로 온통 덮인 바닥에서는 그 흔한 피 냄새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갔다 올게.” 그렇게 한 마디를 건넸다. 시간이 좀체 맞지 않아서 후부키는 욕실에 콕 틀어박혀 씻고 있는 중이었다. 한 번도 료보다 일찍 일 어나본 적이 없는 후부키였기 때문에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귀를 쫑긋 세워도 사르르 떨어지는 물 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렸다. 인사 를 못 들었을 거라 짐작했지만, 그리 중요한 과정이 아니었기 때 문에 료는 그러려니 했다. 다리를 들어 신발을 고쳐 신을 때야 샤워 소리가 딱 끊어졌다. 134


“료, 료. 얼굴은 보고 가야지.” 욕실 안에서 웅웅 울리는 후부키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러 듣고 넘기면서 료는 손잡이를 돌렸다. 네가 더 일찍 일어나. 그런 대답을 하고 문을 쾅 닫았다. 안에서 소리 지르는지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 다. 얼굴 못 보고 가도 괜찮은 거야? 이미 닫힌 문이라 들리지 않겠 지만 료는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괜찮아. 분명히 그렇 게 말을 했다. ‘괜찮아.’라고. 후부키는 듣지 못했겠지만. 하루를 걸러 본 얼굴은 창백하게 누워 있었다. 료는 꼭 제 숨이 그대로 멎어버린 것만 같았다. 가빠 오는 가슴을 느꼈을 때 조금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그의 숨이 대신 멈추면 후부키가 눈을 뜨고 일어나기라도 할까. 저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걸 아무렇 게나 팽개치고 맨손으로 코를 꼭 막았다. 이로 입술을 악 물고 신 음을 찾았다. 가빠 오는 가슴이 헐떡이며 공기를 찾았다. 머리가 어질어질 울리기 직전이 되어도 눈을 꼭 감은 후부키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후부키.” 덜덜 떨리는 시선에 애달픈 목소리가 후부키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평생 내어 본 적도 없는 감정이었다. 할로윈이니만큼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얌전히 기다리는 모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손에 놓친 열쇠고리가 옷자락에 치여 후부 키 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할로윈이니까 주황색 호박이라고 박박 우기던 녀석의 말처럼 료는 길가에 불빛을 내어놓고 파는 작은 가게에서 주황색 열쇠고리를 하나 샀다. 기념일 따위에는 관 심이 없었지만 후부키에게는 관심이 많았다. 날짜를 맞추어 가져 135


다주었을 때 환하게 웃어버리고는 했기 때문에 취향이 아니라 고 개를 저으면서도 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건드리는 그 순간 바로 사실이 되어 가슴 속에 스며들까 봐 누 워 있는 몸에 손 하나 올리지도 못한 채 료는 고개를 숙이고 흐 느꼈다. 물기 어린 시선 건너에 후부키의 손가락이 스쳤다. 조금 만 더 뻗으면 바닥을 굴러다니는 열쇠고리를 쥘 것만 같은. 이름을 속살거리는 순간 피범벅이던 손가락이 슬쩍 움직였다. 잘못 보았나 싶어 료가 고개를 퍼득 들었을 때는 붉은 손이 주황 색 열쇠고리를 꼭 움켜잡고 있었다. 꼭 감고 있던 눈을 슬쩍 깜박 이면서 후부키는 눈앞으로 가져간 열쇠고리를 보고 환하게 웃었 다. “우와, 선물이야?” 죽은 자들이 거슬러 오는 밤. 죽은 생명이 돌아오는 광경을 보 기라도 한 것처럼 료는 꾹 차오르는 숨을 간신히 참아냈다. 주섬 주섬 자리에서 일어난 몸이 난처하게 웃고 손끝에 묻은 붉은빛을 털어냈다. 날이 없는 단검이 가슴에서 툭 떨어졌다. 빛이 없는 장 난감 칼이었다. “에, 어. 그으, 장난이 심했어, 미안.” 물감 범벅인 손을 들고 후부키는 웃었다. 정신이 들면 분명 화 가 날 테지만, 지금 그 순간만큼은 눈앞에서 웃는 얼굴이 사랑스 럽기 그지 없어서 료는 두 팔을 벌려 후부키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래, 할로윈은 죽은 자들의 밤이었다. 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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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총공 웹재록

료는 할 수 있어 +별책부록 초판 발행 ┃ 2016년 11월 12일 지은이 ┃ R cover ┃ R ⓒ Copyright 2016. all rights reserved. 판매하지 않는 교류전 배포용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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