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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더슨은 센티넬이었다, …아마도. 세상에 주어지는 재능이 항상 명명백백히 드러날 정도로 경쾌한 겻만 있지는 않았다. 앤더슨은 그런 면에서 ‘아마도’라는 말이 붙어 야 할 정도로 엉망진창인 재능이었다. 재능이 아예 없는 사람들보다 는 나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글쎄. 앤더슨은 그런 이야 기가 나오면 항상 고개를 흔들어 부정하고는 했다. 세상에는 그냥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 게 좋을 정도로 어중간한 재능도 있었다. 그 건 장본인이 아니라면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아마도라는 건 애매모호한 말이다. 그건 거의 판별할 수 없다는 말과 동일했다. 재능이 아예 없다. 그 ‘아예’ 보다 아주 조금만 더 위 인 단어. 애매한 재능의 앤더슨이 센티넬 판정을 받은 건 성인이 지 난 지 한참이 되고 난 가을이었다. 청소년기는 사람이 빠르게 자라나는 시기이다. 운동 능력, 공부 능력, 그 밖의 지식 능력이나 센티넬과 가이드의 특수한 체질 모두 그 시기에 가장 화려하게 빛을 발했다. 앤더슨은 그냥 평범했다. 운 동도 그럭저럭. 공부도 그럭저럭. 그나마 외우는 종목이라면 자신


있었지만, 날고 긴다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역시 그럭저럭 수준에 불과했다. 축구를 하기 위해서 몰려가면 열 경기 중 한 골 정도는 넣었고 농구 경기를 하기 위해 골대 앞에 서면 3점 슛까지는 성공 하지 못해도 2점 슛까지는 해냈다. 아슬아슬하게 선 위에 서도 닿지 않는 손을 보면서 앤더슨은 저보다 키가 큰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그의 뒤에 선 사람들도 있다는 건 조금 나중에야 깨달았다. 원래 그 시기는 뒤를 돌아보기보다 조금이라도 앞에 닿으려고 발돋움하는 때다. 뒤를 돌아보는 이는 간혹 있었지만 그들은 그냥 특별한 사람 이었다. ‘특별한’. 앤더슨은 평범했다. 그 날 전까지는. 센티넬의 능력은 아직까지 연구가 끝나지 않았다. 힘이 더 강해진 다는 연구 결과도 있고 초감각이 발달한다는 결과도 있다. 그나마 수백 가지 사례에서 공통적인 건 보통 사람보다 운동 신경이 뛰어 나고 지적 능력이 발달한다는 부분이었다. 여기에서의 보통 사람이 란 센티넬도 가이드도 아닌 사람의 평균을 이야기했다. 천재라는 단어가 사장된 지는 오래되었다. 수만 명 중에 하나씩 드러나는 특별한 재능. 그냥 천재로 불리던 아이들을 모아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처음에 연구는 별다른 진전도 없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쓸데없는 연구에 예산을 들이기만 한다고 비웃었다. 그 비웃음이 가신 건 일명 천재라고 불렸던 뛰어난 능력 의 아이들이 하나씩 이성을 잃어가면서부터였다. 성장기에 들어서고 마음과 몸 모두가 부쩍 자라날 쯤에. 3번의 명찰을 받은 아이는 손톱을 세워서 바닥을 긁었다. 아이의


능력은 외국어였다. 모국어인 영어뿐만이 아니라 저 먼 동양의 중국 어까지 해서 그는 성인이 되기 전에 13개 나라의 국어를 완벽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 말을 전부 그럭저럭 해낼 수 있는 것만으로 도 뛰어나다는 수식어가 붙었겠지만, 심지어 그는 정치와 경제 동향 전반에 대해 그 모든 외국어로 전부 대화할 수 있었다. 겉핥기식의 분석이라고 해도 성인조차 되지 않은 아이에게는 무리한 일이겠지 만, 놀랍게도 아이와 이야기한 전문가들조차 혀를 내밀 정도로 소년 은 모든 지식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열세 개 나라의 말로 대단하다 는 찬사를 끌어낸 그는 머리에 든 지식답지 않게 말이 많지 않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목에서부터 으르렁거리는 울림이 들렸다. 사람의 목소리같이 느껴 지지 않았다. 동물도 아니면서 동물이 된 것처럼 몸을 움츠리고 주 변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오늘은 능력을 최종적으로 확인할 시험이 있는 날이었기에 그에 맞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발광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사납게 변하는 아이를 보고서 걱정한 나머지 문을 열었다. 커다란 개가 달려드는 것처럼 아이는 그 사람을 덮쳤다. 사 람에게는 동물처럼 날카로운 손톱도 이빨도 없었기에 그나마 다행 이었다. 발버둥 치는 건 온 힘을 다해서였지만 아직 성인이 되지 않 은 소년은 어른 몇 명이 달려들자 얼마 가지 않아 제압되었다. 아무도 원인을 알지 못했다. 소년은 펜을 잡는 대신에 감옥의 두 꺼운 창살을 잡았다. 나무로 된 방은 몇 번이나 몸을 문에 부딪쳐 깨 버린 까닭에 어쩔 수 없이 바꾸었다. 언어의 전문가 대신에 수 명의 의사가 투입되었다. 잔뜩 흥분한 사람처럼 맥은 빠르고 진정제 를 깊게 놓아도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팔과 다리를 줄로 칭칭 감 아두고 나서야 간신히 자리에 붙들어 둘 수 있었다.


천재라고 불리는 소년들의 발작이 일어난 건 한 번뿐만이 아니었 다. 그나마 언어에 재능이 있는 인도어 스타일의 소년이었기에 그럭 저럭 막을 수 있었던 것뿐이다.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축구에 천재라 고 칭송받던 소년이 목을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매사 흥분해서 몸을 뒤틀던 전의 사람과는 다르게 그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바닥 을 뒹굴었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는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던 소녀가 여기저기 돋아나는 뼈를 붙들고 악을 썼다. 관절 사이사이에 자라나는 뼈는 아무리 레이저로 깎고 또 깎아도 계속 자라났다. 진 통제를 무자비하게 쑤셔 넣어도 해결되지 않는 고통에 어쩔 수 없 이 깊게 잠재우는 수밖에 없었다. 미쳤다는 단어가 온건하게 들릴 정도로 그녀는 아픔에 펄쩍펄쩍 뛰었다. 뼈가 자라나는 희귀한 병은 이미 존재하지만, 피를 뽑아 검사기에 집어넣어도 그 질병과 같은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냥 보이는 모습만 같은 다른 원인의 현 상일 뿐이었다. 소녀의 명찰에 적힌 수는 17이었다. 각각 증세도 다르고 원인도 알 수 없었지만 소년 소녀들은 똑같 이 괴로워했다. 순식간에 대중매체로 퍼진 현상에 정부는 더욱 빨리 해결하려고 골머리를 썼다. 각자 한 분야를 책임지고 있다시피 한 엄청난 천재들이었기 때문에 국민의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하다. 전 국의 내로라하는 의료진이 전부 모여들었다. 수십 가지의 검사를 하 고 수백 가지의 진단을 맞추어 본 결과 그 많은 의료진은 입을 하 나로 모았다. 처음 보는 증상입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시작하는 발작은 무시무시한 공포가 되어 전국 을 뒤덮었다. 국내뿐만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몇몇 보 고되었다. 그나마 공통된 점이라고 하면, 똑같이 천재라는 수식어를


받고 있다는 정도였을까. 모든 천재가 발작하는 건 아니었지만 사람 들은 이제 천재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천재와 보통 사람을 나누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다. 대부분 사람 은 그리고 자기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드러나지는 않았 지만 분명 어딘가 특별한 재능이 있을 거라고 자신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방구석에 박혀 두려움에 떨었다. 자신과 별 연이 없다고 생 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또 그러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자진해서 찾아오는 사람들 덕분에 연구는 조금 더 빨라졌다. 이름이 없는 곳에는 항상 특별한 두려움이 얹힌다. 연쇄살인범의 기사가 뜨면 그 살인범에게 별명을 지어주는 것과 같았다. 우스꽝스 러운 별명이든 두려운 별명이든, 일단 제대로 된 이름을 한 자 얻고 나면 그 공포도 단순히 입술 사이의 이야깃거리로 바뀐다. 해결 방 법은 둘째 치고, 그래서 정부는 그 위에 이름을 먼저 붙였다. 센티넬. 뛰어난 능력을 보이면서 사회 주변의 가이드라인이 되어 주던 그들이었기 때문에 입을 모아 센티넬이라는 말을 붙였다. 그 말에는 언젠가 원인을 알아내서 돌아와 다시 원래처럼 그 분야에 뛰어난 성적을 보이게 되길 바라는 바람이 담겨 있었다. 공식 성명 에서 한 번 발표 되자마자 사람들은 너나 할 것도 없이 센티넬이라 는 이름을 입에 올렸다. 뛰어난 분야가 있던 사람들도 전부 다 그 명칭에 묻혀 버렸다. 아무런 광증이 발휘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그 렇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슬금슬금 피했다. 그렇지 않아도 사회 에 두드러지게 솟아있던 사람들이었는데, 금방 사이가 소원해졌다. 그래도 모든 현상은 원인이 있다. 센티넬의 발작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발견한 건 우연이었지만, 어찌 보면 필연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잠도 자지 않고 알아내기 위해서 노력했으니까.


평소에는 아무리 해도 발견할 수 없던 원인은 혼자가 아니라 다 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야 나타났다. 그것도 모든 사람이 아니라 어 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막 의사 면허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우수한 성적 때문에 반강제로 차출되어 밤을 새우고 있었다. 가장 젊고 어린 탓에 체력 이 그만큼 되어 준다는 이유를 받아 밤을 새워서 센티넬을 감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감시하는 센티넬은 어제 막 발작한 여자였다. 센티넬의 발작 방식 중 가장 흔한 광증이었다. 난폭하게 변해서 주 변 사람을 닥치는 대로 끌어들이는, 가장 많이 피해를 보는 방식이 기도 했다. 아직 치료 방법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약물로 재워두 는 걸로 보내고 있었다. 이제까지 광증을 발현한 사람들 중 나아진 사람은 없었다. 아직 죽 은 사람도 없기는 했지만, 갈수록 조금씩 심해지고 있는 걸로 봐서 그 끝도 얼마 가지 않아 찾아오리라고 입을 모아 예상했다. 약의 효과는 밤중에 떨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많은 약을 맞고 있 기에 미리 주입해두는 건 몸에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잠시라도 놓 아두면 큰 소란이 일어났고. 가끔씩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해가며 단 단한 감옥도 빠져나가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맞추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약의 효과가 다 떨어질 때까 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의 한가운데까지 며칠 내내 밤 시간만 보내다 보니 저절로 잠이 쏟아졌고, 앉아서 팔짱을 낀 채로 그는 꾸 벅꾸벅 졸았다. 퍼뜩 잠을 깬 건 원래 약을 주사해야 할 시간이 몇 시간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감옥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형상을 보고서 그는 화들짝 자리에 서 일어났다. 황급히 약을 주사하기 위해 허겁지겁 주사기를 들다가,


방 안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그녀가 굉장히 얌전히 앉아 있다는 사 실을 알아차렸다. 약의 효과가 떨어지기 무섭게 몸을 뒤틀며 발광해 야 할 사람이었다. 아주 옅은 불만을 켜 놓아 복도는 어두웠지만, 그쪽을 내다보고 있는 그녀와 확실히 눈이 마주쳤다. 혹시, 어쩌면, 설마. 그토록 기다리던 해결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주사기와 약물을 조심스럽게 놓아두 는 그를 보면서 그녀는 오히려 제가 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몸을 움츠렸다. “여기, 가 어딘가요?” 감옥이라는 걸 몰라서 묻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왜 감 옥에 들어와 있는지를 조금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 로 차디찬 바닥을 쓸면서 그녀는 간절한 시선을 그에게 치켜들었다. “몸이 아프고, 떨리고……. 내, 내보내 주세요…….” 아직 자랄 날이 더 많이 남은 아가씨는 그의 앞에 엎드려서 싹싹 빌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자신이 잘못했다고. 알림음 을 울려서 다른 의사들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면서 남자는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납치당한 줄로만 알았다. 그동안 부렸던 광증도 달포씩이나 지나버린 날짜도 머리에서 까맣게 사라 져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분명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마지막 기억은 확실히 광증이 일어나기 바로 전 의 일이었다. 이렇게 안정된 증세는 처음 보이는 것이었다. 새벽인데도 놀라서 사람들은 달려왔다. 그녀는 순식간에 구경거리가 되어 어쩔 줄 모르 면서 몸을 움츠렸다. 이제까지 천재라고 불리면서 받아왔던 많은 시 선 때문인가, 움츠리는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울지는 않았다. 대신


에 그녀는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을 보면서 한 번 더 말을 걸었다. 제발 내보내 주세요. 광증이나 발작이 도진 후의 센티넬 중에서 이 제껏 제대로 말을 걸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녀의 부탁대로 창살 안에서 꺼내 허겁지겁 병실로 데려갔다. 밤 을 새우던 의사는 대신에 푹 잘 수 있는 약간의 시간을 받았다. 하 지만 아함 하품을 하면서 방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이었다. 어느 정 도 거리가 떨어지자마자 얌전하게 있던 그녀는 갑작스레 몸을 뒤틀 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귓가에서 비명이 들리는데 어느 의사가 그냥 들어갈 수 있으랴. 남자는 하던 하품을 멈추고 황급히 그녀에게 달 라붙었다. 이미 수 명의 의사가 함께 있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가 가까이 달려오자마자 그녀는 진정되었다. 조금 전까지 날뛰 느라 학학 가쁜 숨을 간신히 가누면서도 그녀는 잘못된 걸 조금도 알지 못했다. 호전된 증세에 뒤로 물러섰다가 도지는 광증에 앞으로 나섰다가. 그걸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의료진은 알아차렸다. 이상 하게도 그 남자가 함께 있으면 그녀의 상태가 호전된다는 사실이었 다. 그가 옆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와중에도 그녀는 이상하다는 얼굴 로 고개만 갸웃거렸다. 피를 약간 뽑아서 수많은 검사를 했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증세 가 심해질까 봐 자리를 떠나지 못한 남자는 어쩔 수 없이 그 자리 에서 선잠을 잤다. 둘이 짜고 연기하는 것이라고 하기에 그와 그녀 는 일면식도 없었고 아무리 보아도 연기로는 낼 수 없는 반응이었 다. 이제까지 소용이 없었던 검사를 하나씩 차례로 다시 하느라 시 간은 금방 흘렀다. 다시 시행된 검사 결과는 놀라웠다. 조금도 이상이 없던 피에서


과한 호르몬이 검출되었다. 기존 몸에 존재했던 것과는 다른 종류였 지만, 세균과 병균 대신 호르몬에 가까운 화학식의 이상이었다. 혹 시 몰라서 마찬가지로 피를 뽑아 검사했던 남자의 피에서도 마찬가 지로 호르몬의 이상이 검출되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만 검출 되는 호르몬이었다. 다시 한 번 서로의 거리를 벌려서 시도해 보았을 때, 일정 이상으 로 떨어지면 센티넬의 광증이 시작된다는 것과 간신히 검출되던 호 르몬도 싹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센티넬 측만이 아 니라 남자 쪽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도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해 하며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우연히 발견된 그 사실은 엄청난 진전을 가져왔다. 의료진들은 얼 마간의 연구 끝에 일명 ‘센티넬’들은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야 진 정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단순히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미쳐있 던 상황을 깡그리 잊고 원래대로 돌아갔다. 남자는 덕분에 이리저리 불려 다녔다. 증상이 첫 번째로 발현되었던 소년의 옆에는 조금 오 래 있어야 했다. 좀체 호전되지 않는 몸을 안쓰럽게 여겼던 그는 저 도 모르게 소년의 두 손을 꽉 잡아 쥐었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접촉 이 가까울수록 더 빠르게 진정된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았다. 세상에는 센티넬이라는 종류의 인간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그 들을 진정시키는 역할이 또 따로 존재했다. 그 특정한 사람들과 만났 을 때 센티넬들은 비로소 원래로 돌아가 천재라고 불렸던 자신들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시작했다. 광증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 는 꽤나 오랜 기간을 같이 있어야 했고, 그 이후에도 너무 오래 떨어 져 있으면 다시 증세가 재발생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센티넬의 능 력은 그냥 포기하기에 아까운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진정시켜주는 역할의 사람을 새로 찾기 시작했다. 센티넬과 달라서 겉으로 보이는 특별한 능력은 없었지만, 그 센티 넬들을 진정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능력이 되어 주었다. 주변에 언제라도 정신이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 마나 두려운 일인지. 그 두려움을 막고 안전망으로 인도해준다고 하 여 그들은 가이드라는 명칭을 얻었다. 센티넬과 함께 할 때 그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가이드. 일명 가이드는 센티넬과 함께 있을 때만 알아볼 수 있었기에 찾 는 작업은 더디었다. 같은 가이드끼리도 알아볼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사용하기에는 가이드의 수가 너무 적었다. 그동안 간신히 찾 아낸 소수가 현재 센티넬 전부를 책임지면서 사람들은 반드시 한 명의 센티넬에게 한 명의 가이드가 필요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건 현재와 같이 급한 상황에만 적용할 수 있었다. 각자의 능력도 다르고 생활 반경도 다른 사람들을 언제까지 단체로 한 묶 음으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정부의 온 인력이 모여 가이드를 찾 기 시작했다. 센티넬들을 여럿씩 대동하고 다니면서 일부러 그들이 발작이 날 때까지 내버려두었다. 센티넬들의 인권에 어울리지 않았 지만, 그들도 발작한 다른 센티넬을 보고서 안색을 창백하게 굳혔다. 기억에는 없지만 자신들도 저 꼴로 미쳐버린다는 생각만 해도 앞이 캄캄했다. 그들은 거의 반강제적으로 정부가 그들의 자유를 일부 침 해할 수 있게 하는 동의서에 서명을 했다. 적어도 한 명의 센티넬에 한 명의 가이드가 붙을 수 있게 될 때까지 그나마 그 조건 하나에 목을 매고 이리저리 불려 다녔다. 한 가지 생각하지 못한 건, 그들이 찾아내는 가이드뿐만이 아니라 센티넬 또한 조금씩 늘었다는 점이다. 겉으로는 능력이 보이지 않아


같은 특질자만이 찾을 수 있는 가이드와는 다르게 센티넬은 항상 자라는 시기쯤이 되면 광증이나 발작을 일으키고는 했다. 게다가 눈 에 띄게 뛰어나다는 구분적 특성까지 함께 있었다. 주변에서 의심 가는 사람을 신고하는 주민도 많았다. 그래서 여전히 가이드와 센티 넬은 수가 맞지 않았다. 당신은 센티넬입니다. 그래서 앤더슨은, 양복을 입은 사람이 제 앞에 서 딱딱한 목소리 로 말했을 때 믿지 못했다. 혼자 다니는 센티넬은 터부시되었다. 가 이드와 함께 있는 센티넬은 그나마 능력을 제어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뛰어난 부분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지만, 가이드가 없 는 센티넬은 센티넬 스스로도 언제 광증이 도질지 알 수 없었다. 본 인도 그러한데 주변 사람들이 피하는 건 당연했다. 발작 비슷한 거 라도 일어나면 직접 기관을 찾아가 센티넬인지 판정을 받는 게 사 람들의 습관처럼 되었다. 앤더슨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그런 발작 증세를 겪어본 적이 없 었다. 술을 마시면 개가 된다는 말이 있고는 하지만, 앤더슨은 심지 어 술버릇도 그의 존재감처럼 얌전한 편이었다. 술을 몇 잔 기울이 기가 무섭게 의자에 축 늘어져 요란스레 코를 골고는 했다. 나름 그 것도 주변에 미치는 피해라면 피해였다. 어디 크게 아픈 곳도 없었 고 가끔 철에 안 맞는 감기만 걸렸다. 그렇다고 잘하는 게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머리도 그 저 그랬고 운동 능력도 그저 그랬다. 그나마 자리에 앉아서 꾸벅꾸 벅 조는 건 자신 있었다. 학창 시절의 연장이나 다름없었다. 처음 회사에 사무직으로 들어가고 나서 엉망진창인 타이핑 속력 덕분에 엄청나게 혼쭐이 났다. 쫓겨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타자 연습만


해댄 탓에 조금은 나아졌다. 종일 앉아서 자판만 두드리는 직장이야 그럭저럭이다. “센티넬? 내가?” 센티넬과 가이드는 전국적으로 하는 캠페인 때문에 빨리 알려졌 다. 대처방법에 구분하는 방법까지. 벽보도 붙어 있고 텔레비전에 공익광고 비슷한 걸로도 방영되었다.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이거니와 정보를 제공하는 뉴스까지. 정부에서 공문을 내려 대비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성교육 시간처럼 의무화된 센티넬 과 가이드 교육 시간에 앤더슨은 하품을 하면서 졸기만 했다. 대부 분의 아이가 그랬다. 유명한 특성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보통 사람 과는 인연이 없는 일이었다. 그들 중에 센티넬이 있을 확률보다 그 들이 어딘가에서 발작한 센티넬을 만나 한 대 얻어맞을 가능성이 더 큰 이야기였다. 그래서 앤더슨은 그의 앞에 선 사람이 무슨 짓궂은 장난이라도 치는 줄 알았다. 어디 벌칙 게임에 걸려 동영상 촬영이라도 한다든 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벌이는 몰래카메라라든가. 들을 가치도 없다면서 앤더슨은 피식 웃었다. 그가 정말 센티넬이었더라면, 일만 큼이나 월급도 지루하기 짝이 없는 회사에 그대로 다니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터부시되는 만큼 동시에 그들의 능력은 인정받았다. 원한다면 돈이야 많이 벌 수 있었다. 앤더슨은 일부러 큼지막하게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 의 뒤편에서 건장한 체격의 남자 둘이 앞사람과 똑같은 양복을 입 고 서 있었다. 거 봐, 무슨 프로그램 같은 거지. 앤더슨은 어깨를 으 쓱였다. “뭐, 반응이 재미있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래도 달가운 장난과 달갑지 않은 장난이 있다. 이런 종류는 별 로 달갑지 않은 장난이었다. 앤더슨은 손을 들어 뒤의 사람 둘을 하 나씩 가리켰다. 딱 보아도 한 패거리다. 인상만 본다면 검은 양복에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어디의 조폭 저리가라였지만, 인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당당한 앤더슨의 태도 때문인지, 그들은 몸 을 움찔대며 자리에 떡하니 멈추어 섰다. 두 양복 사나이 사이에 체구가 자그마한 여자가 한 명 끼어 있었 다. 그녀는 앤더슨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저 사람이 맞아요. 난 느낄 수 있다니까요!” “그렇게 어리게 보이지 않는데……. 확실합니까?” “확실하다니까요! 이제까지 내가 찾은 센티넬이 몇 명인데! 제가 타고난 능력은 예민한 감각이라고요! 다른 건 몰라도 알아보는 일만 큼은 지지 않아!” 여자는 발작처럼 소리 질렀다. 정말 예민한 성격이었다. 그녀의 신경질을 들으면서 남자들은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앤더슨 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팔에 한 명 씩. 당황해하는 사이에 몸을 피할 수 있던 마지막 기회가 사라져버 렸다. 그를 부여잡은 사람들은 일단 앤더슨보다 키도 크고 체구가 건장했다. 앤더슨은 팔을 슬쩍 당겼다. 꽉 잡은 힘에서 도무지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그제야 앤더슨은 지금 상황이 장난 같은 게 아니 라는 걸 깨달았다. 이건 실제 상황이었다. 빠져나가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앤더슨은 있는 힘껏 발버둥 쳤 다. 그렇게 운동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괴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 그에 비해 앤더슨의 두 팔을 잡고 있는 사람들은


괴력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였다. 체구도 크고 건장했지만, 그 의 팔을 꽉 움켜쥔 힘은 아무리 그 체구라도 나올 수 없을 만큼 거 대했다. 아무리 밀어도 밀리지 않는 산과 같았다. 발로 차고 팔로 밀고 몸으로 부딪쳐도 움직이지 않는 둘을 느끼고서야 앤더슨은 그 둘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다. 특별한 사람, 일명 센티넬. “뭐 하는 거야! 이거 놔!” “센티넬인 이상, 기관에서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죠.” “몸에 해로운 검사는 아닙니다.” “지금 니들이 나한테 해롭다고! 사람을 억지로 잡아가는 게 정부 가 하는 일이야?” 힘으로는 당해낼 수 없으니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었다. 앤더슨 은 주변에 사람들이 많은 걸 노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걷기 만 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앞장서서 나서는 사람이 그중 한 명쯤은 있을 법도 했지만. 앤더슨의 앞을 맨 처음 가로막은 남자 는 소란을 피워 미안하다며 정중히 고개를 굽혔다. 센티넬과 가이드 에 관한 일이라는 설명 한 줄이면 되었다. 사람들은 수군거리면서 앤더슨을 피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의 영역이 아닌, 다른 영역에 관한 일이다. 센티넬과는 조금도 연이 없는 앤더슨으로는 당 연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바둥거리던 다리도 금방 잡혔다. 그냥 끌고 가기에는 반항이 거셌 다고 느낀 건지, 한 명은 앤더슨의 팔을 한 명은 앤더슨의 다리를 잡았다. 번쩍 들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앤더슨은 차에 실렸다. 꼼짝 않게 하기 위해 들것에 꽁꽁 묶인 꼴은 참담했다. 더 이상 해 봤자 의미 없는 발버둥이라는 걸 알고 앤더슨은 구속복 줄이 그를 조일 때야 얌전해졌다.


“그쪽이 잘못 안 게 확실하니까.” 좁은 차 안에서 세 명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았다. 노려보는 건 아 니고, 그냥 혹시라도 도망칠 여지를 차단하기 위해서였지만 앤더슨 에게는 바늘방석이 따로 없었다. 그런 덩치로 가만히 보느니 차라리 다른 말이라도 해 주었으면 좋겠지만. 소송이고 고소고 각오하는 게 좋을 거라는 엄포에도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척 보아서 그런 류의 협박을 많이 들어본 게 틀림없었다. 이도 저도 소용없다는 걸 안 앤더슨은 천장이나 바라보았다. 꽁꽁 묶인 몸으로 고개를 돌리기 도 슬슬 버거웠던 참이다.


가이드의 수는 센티넬에 비해 적었다. 정부에서 그렇게 인력을 동 원해 찾아댔는데도 아직 그랬다. 선천적으로 가이드가 더 적게 태어 나는지, 아니면 특성상 찾기가 힘들어서 찾지 못한 건지는 연구가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가이드 한 명은 보통 센티넬 대여섯을 한꺼 번에 책임지고는 했다. 센티넬을 제어할 수 있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삶은 딱 히 여유롭거나 평탄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달프다는 단어에 잘 들어 맞는 생활이었다. 비슷한 생활공간을 고려한 센티넬과 가이드 묶음 으로 짜 주기는 했지만, 집단 공동체도 아니고 각자 삶이 있고 일이 있다. 모두가 같은 걸음 같은 장소 같은 시간을 따르는 건 아니었다. 가이드 또한 자기 생활이 있는 건 마찬가지다. 오히려 센티넬보다 그들이 더 일상적이었다. 센티넬은 대부분 한구석이 눈에 띄게 뛰어 난 부분이 있었지만, 가이드는 센티넬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 말고 는 이만저만이었다. 물론 이도 저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보다 이해력 이 빠르고 머리가 좋았다. 아마도 그건 날뛰는 센티넬을 제어하기 위해 일종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인 걸로 추정되었


다. 모든 센티넬의 능력이 똑같지는 않듯이 가이드 또한 모든 사람 의 능력이 똑같지는 않았다. 한꺼번에 여럿의 센티넬도 문제없는 가 이드가 있었으며, 한 번에 한 명밖에 통제할 수 없는 가이드도 있었 다. 어떻게 그들을 통제하는지는 밝히지 못했지만, 폭주하는 센티넬 처럼 가이드 또한 그 부분이 본능의 영역에 있었다. 함께 가만히 두 는 것만으로도 얌전해졌지만, 가이드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조금 더 결과가 바뀌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상황판단이 좋아야 했다. 가이드라는 특질을 가지고 태어나면서 재빠른 판단 능 력 또한 함께 얻게 된 것이라고 추측했다. 여러 센티넬의 제어권이 그들에게 쏠려 있다는 건 능력이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지만, 가이드는 그 능력만큼 불행해졌다. 혹시 센티넬 을 조작해 다른 방향으로 사용하지 않을까 싶어 그들에게는 항상 보이지 않는 곳에 감시 요원이 따라붙었다. 가이드라고 판명이 났기 는 해도 그 전까지는 보통 사람이었을 뿐이라, 훈련을 받은 요원을 따돌리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부분 일상에 보이지 않게 스 며들어 해는 없었다만, 혹시 수상쩍은 기척이라도 있으면 걸어 나와 심문부터 당하는 생활은 당연 커다란 스트레스였다. 게다가 센티넬 또한 근원 중 하나였다. 날뛰기 직전에 황급히 달 려가야 했고, 여럿이 있으면 당연히 이곳저곳 돌아가면서 상황을 파 악해야 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앞으로 그게 그들의 일상생활이 될 거였다. 보수는 많이 받았지만 세상에는 돈 말고 다른 행복도 당 연히 있는 법이다. 가이드 또한 자신 말고 다른 가이드를 알아볼 수 있었지만, 대부분 센티넬을 제어하는 데 바빠서 그런 임무까지 떠맡 지는 못했다. 광증을 보일 때만 제외하고 일상생활을 멀쩡히 할 수 있는 센티넬과 비교하면 여유가 한참 부족한 셈이다. 센티넬과 가이


드의 존재가 처음 밝혀진 후 시간이 상당히 흘렀지만, 여전히 가이 드의 수는 센티넬에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현재 등록된 가이드 라면 전부 과로 때문에 병원 신세를 져 본 일이 있을 정도다. 가이드가 하나 있었고, 이름은 셜록이었다. 셜록 홈즈. 그는 수많은 가이드 중에서도 단연 특별한 존재였다. 가이드 주변에 센티넬이 있으면 광증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가이드들은 정부에서 직접 찾아올 때까지 자신이 가이드인 걸 모르 는 게 대부분이었다. 함께 있을 때가 아니면 혈액 검사로도 호르몬 이상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알기도 어려웠다. 센티넬에게 희���하게 끌리는 동물적 본능이 있다고는 하지만, 본능 자체를 남과 비교해 볼 수도 없는 일이라 전부 그러려니 하고 제 인생을 살았다. 그런 사람이 대부분인 가이드 사이에서 셜록은 유일하게 기관을 먼 저 찾아왔다. “어디로 가면 되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곳은 출입금지 구역이다.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어.” “하, 내가 언제 일반인이라고 했지? 말 전에 판단부터 내리려면, 더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 살아야 할 거야. 그렇게 멍청한 머리로 세 상을 사니까 편한가? 편하겠지. 고민이라고는 없을 테니까. 힘만 쓰 는 생활에 나 같으면 의미가 없다고 느낄 만도 한데- 아, 그랬지. 그럴만한 머리가 없었지. 미안하군, 괜히 나쁜 두뇌만을 상기시켜 주어서. 물론 내 충고가 아니었다면- 자네는 평생 자네 머리와 돌덩 이를 구분도 못 하고 살았겠지만.” 다짜고짜 폭언이 쏟아졌다. 남자는 평소처럼 가까이 접근하는 사 람에 형식적인 경고를 해주었을 따름이다. 호기심에 접근하는 사람


들이 워낙 많아 목소리가 조금 딱딱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그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었다. 빠르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남자는 잠시 말을 잃었다. 뭐라고 대꾸해야 하나 답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심 지어 그 말에 화를 내야 한다는 사실조차 머리에서 잊혔다. “어디로 가면 되지?” 그는 다시 물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같은 물음은 아니었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말려 올라간 문장 꼬리에는 비웃음이 가득 머물러 있었다. 처음이야 어이가 없어서 반응하지 못했지만, 두 번째는 아 니었다.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앞을 지 키는 건 인내심이 필요 없는 직업이었다. 센티넬도 아니고 가이드도 아닌 남자는 그냥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일반인이다. 바깥에서야 다 수 중 하나에 속한다지만 이곳에서 일할 때만큼 그는 소수자의 위 치였다. 평소에 사람들에게 터부시되는 만큼 센티넬들은 성격이 그 리 좋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 짜증을 뭐라고 해도 대꾸할 수 없는 남자에게 쏟아내는 사람도 많았다. 그들이야 소중한 자원이 나 마찬가지였기에 건들지는 못했지만 가까이 접근하는 일반인에게 는 아니다. 과할 정도의 반응을 보여도 그 일을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남자는 당연히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화를 냈다. 들어오는 사람을 막을 수 있게 문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경광봉이 주어졌다. 불을 켜고 휘두르는 단순 위협용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건 보이는 것보다 꽤 튼튼했다. 가끔 일이 나쁘게 돌아갈 때가 있다. 미처 능력을 다 파악하지 못 한 센티넬들이 말썽을 일으키는 경우였다. 아무리 잘 막아도 특기가 힘 쪽에 있는 센티넬들이면 안에서 말리는 걸 뚫고 바깥으로 탈출 하기도 한다.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경우를 지키고 있는 만큼


그쪽은 항상 대비가 되어있지만, 그건 반대로 이야기하면 안에서 바 깥으로 나가는 일에는 취약하다는 거다. 설령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도 총이나 칼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효율성으로 따지면 가이드를 찾아 붙이고 관리해야 하는 제반 비용이 들어가더라도 일반인 수백 명보다 센티넬 하나가 더 높았다. 그들은 천재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다. 수천 명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인재들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의 인적자원. 아주 불가결한 상황이 아니라면 센티넬들에게 무기를 휘 두르는 건 금기시 되었다. 그랬기에 그들에게는 그 경광봉 하나만이 비상시에 몸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실수로 휘두르다가 벽을 내리치더라도 금하나 가지 않도록 튼튼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 었다. 남자는 그저 그걸 비상사태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협하 는 일에도 써먹었을 뿐이다.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경광봉을 빼 들었다. 전원을 켜지 않아 불이 들어오지 않은 경광봉은 어두침침한 색깔 때문에 더 위협적으 로 보였다. 휘두르기 직전까지 갔어도 셜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 았다. 오히려 그는 건방질 정도로 턱을 추켜올려 입꼬리를 끌어올렸 다. 정말 때릴 생각은 아니었다. 일반인이라도 그런 식으로 만들게 되면 문제가 커졌다. 성질을 딱히 참을 필요가 없는 직업인 데다 보 수도 좋아서 어딜 가도 이 이상은 구할 수 없었다. 그냥 남자는 조 금 과한 위협을 하고 싶었다. 몇 번 휘둘러주고- 그러다가 잘못 넘 어지면 다리라도 하나 부러지는 수가 있기도 하겠지만 그건 남자의 탓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그저 생각에서 멈추어야만 했다. “가이드는 어디로 가면 되지?” 셜록은 제 가슴에 턱 하니 손을 얹으며 자신을 가이드라고 밝혔


다. 딱 그의 머리를 가격하기 전의 경광봉이 허공에 멈추었다. 남자 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니까 자네가- 가이드라고?” “못 믿겠으면 확인해 보시던가.” 레스트레이드는 셜록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았다. 갑작스레 찾 아온 사람 때문에 금방 기관은 소란해졌다. 기관의 책임을 맡고 있 는 레스트레이드는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부족한 가이드의 숫자 에 꽤나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센티넬들의 폭주는 여기저기에서 일 어났고 불려 다니는 가이드들은 죽는소리를 했다. 가이드 하나당 여 럿을 배정해두는 것도 한두 번이지, 호르몬상으로 한 명의 가이드가 너무 많은 센티넬을 감당하는 건 불가능했다. 각자 할 수 있는 제어 의 수가 달랐고 그를 파악하면서 레스트레이드는 지친 하루를 보내 고는 했다. 보통 두세 명 정도는 감당할 수 있었고, 그중에 능력이 좋은 자는 열 명 가까이도 가능했다. 하지만 많은 수를 감당할 수 있다는 건 더 많이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다. 센티넬과 가이드라고 해도 서로 안면이 없는 사람들이다. 사람이 어느 정도의 이타심은 가지고 있지만, 자신들의 일상을 희생해 가면서 그걸 다 발휘하라면 듣는 사람은 적다. 돈으로 유혹하려고 해도 이미 가진 집안에 태어난 사람도 있고, 돈보다는 직업이 적성에 맞아 그런 생활을 보내고 있는 사람도 있 다. 막 자라는 학생 때 가장 찾기 쉬운 센티넬들과 다르게 가이드들 은 이미 제 입지와 심지를 다 굳힌 성인이 대부분이었다. 이제껏 살 아온 가치관을 가이드라는 단어 한 번에 바꾸는 건 쉽지 않다. 그들 을 설득하는 것도 상당히 고역이었다.


그 와중에 새로운 가이드가 나타났다는 건 고무적이었다. 며칠째 새 가이드를 찾는 일에 진전이 없어서 기존에 해 왔던 배치만 추가 로 점검하고 있는 판이었다. 센티넬도 가이드도 능력은 영원하지 않 았다. 한 번 나타난 능력이 성장하기도 했고 줄어들기도 했다. 그걸 파악하는 게 레스트레이드의 주된 역할이었다. 특히 가이드에 관해 서는. 능력이 성장한 가이드는 제어할 수 있는 센티넬의 수가 늘었 고, 그렇지 않아도 부족해서 허덕대는 판에 빠르게 배정이 이루어져 야만 했다. 레스트레이드는 황급히 집무실로 향했다. 다짜고짜 찾아온 가이드 를 맞이할 방이 없어 임시로 그의 집무실에 앉혀놨다는 이야기에 걸음을 옮겼다. 이 근방은 센티넬들과 함께 샅샅이 뒤져봤다고 생각 했는데, 아직 찾지 못한 가이드가 있을 줄은 레스트레이드도 몰랐다. 능력이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며 레스트레이드는 기쁜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덕분에 문제가 있다는 듯 침울해진 관리인의 표정을 미처 살피지 못했다. 레스트레이드는 셜록을 마주하고. 딱 오 분 만에 방안을 나서고 싶어졌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끝내주게 차이 나는 센티넬과 가이드 의 수가 머리에 떠오르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정말 집무실이고 뭐고 박차고 나가 서류에 코를 박기라도 했을 거다. 찾아온 사람답지 않 게 셜록은 꼭 레스트레이드의 상관이라도 되는 양 고압적인 자세로 앉아 있었다. 전혀 손님맞이와 거리가 멀다.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 라 몇 년을 알아왔던 사이처럼 허물없는 자세. 다리 하나를 꼬고 의 자에 비스듬히 기대어서, 심지어 그는 레스트레이드가 들어왔을 때 만 잠깐 고개를 돌린 후 금방 별 볼 일 없다는 시시한 표정으로 창 가에 시선을 고정했다.


자네가 가이드란 말이지. 그렇게 운을 떼면서 레스트레이드는 조 금 미묘한 얼굴로 셜록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몸만 맞은편이지, 셜록의 시선은 아예 다른 쪽을 향해 있었다. 이야기할 의지는커녕 왜 찾아왔는지도 도무지 알 수 없는 태도였 다. 레스트레이드는 옆에서 건네주는 서류 조각 하나를 받아들었다. 급하게 휘갈긴 글씨지만 셜록에 대해 몇 개 물어보았는지 간략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이름, 셜록 홈즈. 이름부터 시작해 나이, 사는 곳.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 만든 정보에는 그가 가이드라는 사실이 한 단어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레스트레이드가 몰랐 다는 것만으로도 이제 처음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다. “그게 아니라, 알아서 찾아왔는데요.” “알아서?” 고개를 주억대며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있을 때 난처한 표정의 목소리가 말했다. 셜록에게 들리지 않게 하려고 목소리를 잔뜩 낮추 었기는 하지만, 애초부터 같은 공간이다. 레스트레이드는 저도 모르 게 크게 반문했다. 이제까지 많은 센티넬과 가이드를 보았지만 직접 걸어온 가이드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아마 다 른 지점에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센티넬이야 가만히 두면 언젠가는 광증이 일어난다. 직접 찾아 나 서는 건 센티넬인지 스스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 다. 한 번 발작이 일어난 센티넬은 딱히 뭐라고 경고하지 않아도 알 아서 찾아왔다. 제 발로 찾아올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인 상황이었 다. 대부분 몸부림치는 센티넬들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팔과 다리 가 꽁꽁 묶인 채로 시설에 찾아왔다. 가이드를 붙여 진정시키고 상 황을 설명하면, 주변의 소중한 사람에게 폐가 되기 싫다는 이유로


순순히 동의서에 서명을 했다. 물질적 피해도 정신적 피해도. 거기 에 주변 사람들의 눈총까지 받아야 하는 게 센티넬의 몫이었다. 가이드는 사정이 달랐다. 센티넬과는 다르게 그들은 영원히 가이 드라는 게 밝혀지지 않는다고 해도 이상이 없었다. 찾아낸 가이드는 대부분이 스스로 가이드인 줄 모르기도 했고. 오히려 가이드라는 게 밝혀지는 순간부터 온갖 귀찮은 일에 휩쓸리기 마련이다. 원하지도 않는 감시에서부터 여기저기를 오가는 귀찮음까지. 스스로 깨달았다 고 해도 어지간한 각오로 찾아오기는 어렵다. 간혹 먼저 특질을 알 게 된 사람이 있더라도 모르는 척 아닌 척 일상생활을 하다가 끝내 붙잡히듯이 가고는 했다. 당연히 이상하다는 시선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상대에게 실례가 된다고 생각하고 시선을 거두었지만, 고개 한 번 돌리지 않 는 주제에 셜록이라는 가이드는 눈치가 굉장히 빨랐다. “직접, 제 발로, 뚜벅뚜벅 걸어서 찾아온 가이드가 이상합니까??” “크, 크흠. 그러니까.” 이상하기는 했지만, 귀중한 가이드에게 이상하다고 순순히 실토할 리 없었다. 레스트레이드는 엣헴엣헴 헛기침을 했다. 옆을 돌아보는 게 지금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셜록은 자신만만했다. 자신만만하다를 넘어서 건방지기까지 했다. 그는 가만히 모으고 있던 손을 떼어 턱을 괴었다. 확인해보고 싶으 면 얼마든지 받아주겠다면서 얼굴에 웃음이 머물렀다. 이제까지 전 례가 없던 일이라, 무턱대고 가이드라는 걸 믿을 수는 없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럼. 간단한 검사를 하지.” “사실 당신의 존재가 나한테는 실례지만.” “뭐?”


“이런, 그만 본심이 나와 버렸네요.” 레스트레이드는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반박할 수 없었다. 의심쩍은 시선은 그가 먼저 보낸 참이었다. 게다가 얼핏 귀띔해 들은 바로는 바깥에서부터 하마터면 한 대 공격당할 뻔도 했다고 하고. 그는 따라온 관리인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가이드인 걸 측정하기 위해서는 원래 발작한 센티넬 한 명만 있으면 되지만. 모든 센티넬 들을 발작하지 않게 가이드와 엮어주는 게 기관의 존재의의다. 멀쩡 한 센티넬을 일부러 발작시킬 리 없다. 다행히 그것 말고도 구분법 은 있었다. 모든 센티넬과 모든 가이드는 함께 있을 때 선별적인 호 르몬을 분비한다. 채혈 검사를 진행할 도구가 카트에 밀려 돌돌 굴 러왔다. 셜록은 이제껏 얼굴에 지었던 비웃음과 다르게 아주 친절한 동작으로 코트를 벗고 옷을 걷어 팔을 내밀었다. 센티넬은 딱히 데 려올 필요가 없었다. 카트를 끌고 들어온 의료진이 바로 센티넬이었 기 때문이다. 복잡한 검사까지는 필요 없다. 특정 호르몬이 분비되는지만 확인 하면 가이드인지 센티넬인지 알 수 있었다. 피를 검사지 위에 한 방 울 톡 떨어뜨렸다. 간단한 구분을 위해 피 속 호르몬에 반응하도록 만들어진 검사지였다. 녹색으로 변하면 센티넬, 붉은색에 가까운 주 홍색으로 변하면 가이드. 색깔의 진하기로 능력의 정도를 알 수 있 다는 말도 있었지만, 사실 그건 불분명한 측면이 많았기 때문에 일 단 확실시되면 그에 관한 검사는 또 따로 치르고는 했다. 종이는 떨어뜨린 피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새빨갰다. 이상이 있 나 눈을 비벼보고 몇 장의 검사지를 더 사용했을 때야, 그들은 그게 피 때문이 아니라 호르몬 때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셜록은 그동안 검사지에 피를 몇 번씩이나 떨어뜨리는 그들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물이 든 검사지는 피로 축이기라도 한 것처럼 새빨간 색깔이었다. 가이드인 이상 능력의 검사는 필수적이었다. 레스트레이드는 최대 한 셜록에게 공손히 제안을 건넸다. 셜록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 피 그 거지 같은 계약서의 내용도 하게 되는 검사의 수순도, 가이드 라는 걸 밝히면 벌어질 모든 일을 알고서 자진하여 선택한 길이였 다. 설득이 필요 없을 정도로 확고한 모습을 보면서 레스트레이드는 검사를 서둘렀다. 가이드가 필요한 자리는 많았다. 셜록은 이미 많 은 걸 알고 있었기에 가이드의 역할이니 뭐니에 대해 설명할 필요 는 없었다. 정말인가 싶어 계약서를 건넸을 때, 셜록은 그 조항을 읽지도 않고 맨 끝장을 펼쳤다. 센티넬과 가이드의 관계에 대한 게 구구절절 적혀 있는 페이지였다. 셜록은 펜을 들어 그 위 문장에 줄을 하나 그었다. “내 조건은 이겁니���, 그러니까. 이걸 이렇게.” 조항 하나가 굵은 잉크의 선으로 인해 금방 지워졌다. 가운데에 줄을 쫘악 그어서 셜록은 아래위로 너덧 개의 조항을 한꺼번에 삭 제해 버렸다. 여전히 비뚤게 턱을 괸 채로, 셜록은 지워버린 조항의 여백 사이에 작게 글씨를 썼다. 한 단어가 적힐 때마다 목소리로 또 박또박 읽으면서.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이 그걸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굴었다. “다른 건 다 괜찮아. 감시하는 것도 좋고, 뭐- 쓸데없이 연락하는 것도 좋아. 어디 어디에 이바지하라든가 기타 등등 자잘한 건 이야 기하지 않겠어. 어차피 어디에 무슨 조항이 뭐라고 적혀있는지는 다 읽어보고 왔으니까. 게다가 이런 데서 하는 소리야 원체 뻔하지. 정 부에서 관리하는 시설에 얼마나 바라겠어?”


펜을 긁적이는 소리와 셜록의 목소리만이 조용하게 났다. 어울릴 것 같지 않던 그 둘은 제법 어울렸다. 레스트레이드는 셜록의 말에 온통 집중했다. 그의 말은 비아냥대는 기색이 섞여 있었지만, 농담 처럼 들리지 않았다. 빠른 목소리, 주의를 조금이라도 흐트러뜨리면 놓칠 것 같은 문장. 그래도 셜록에게는 사람의 주의를 온통 집중시 키는 힘이 있었다. 한참 문장을 써내려가다가 셜록은 펜을 탁 놓았다. “다만.” “다만?” “내가 관리할 센티넬은.” 셜록은 레스트레이드를 보았다. 레스트레이드는 그의 눈에서 이것 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다짐을 읽었다. 소중한 가이드였다. 게다가 검사지로만 미루어 능력을 짐작해본다 면, 이제껏 그가 보았던 어떤 가이드보다 뛰어날 게 틀림없었다. 확 실한 구분법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어느 정도 짐작하는 데는 도움을 주었다. 레스트레이드는 그 검사지가 완벽히 틀린 경우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다. 본 적이 없다고 아예 경우가 없는 건 아니겠지만, 지 금처럼 가이드가 일방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는 그리 가능성이 적 은 희망도 아니다. 레스트레이드는 셜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직접 정하는 거야.”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고작해야 연봉 협상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가이드들 이 가장 많이 요구해오는 부분이기도 했다. 서약서는 계약 전에 쓰 는 것이고, 여러 센티넬을 한꺼번에 책임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지 모르는 가이드가 대다수였다. 그냥 귀찮게만 여길 뿐. 귀찮은 일 을 할 거면 돈이라도 더 받아야겠다. 서약서의 계약 조항을 꼼꼼하 게 읽어본 사람들이 항상 마지막에 협상이라고 걸어오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돈으로 설득이 될 정도면 감사할 지경이다. 돈을 올려주는 대신에 최대한 능력을 이용하라는 게 정부에서 내려온 방침이기도 했고 레스트레이드의 지향점과도 잘 맞았다. 고민하는 척하면서 올 려주고 나면 가이드들은 일단 앞으로 찾아올 고생은 생각지도 못하 고 기뻐했다. 셜록이 건 조건은 당연히 그의 입장에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 다. 애초에 가이드를 같이 관리하는 것부터가 센티넬을 통제하기 위 해서였다. 강한 센티넬이면 그만큼 강한 통제력이 필요했다. 누구인 지 직접 정해서야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다. 레스트레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나머지 조건의 변경이라면 어느 정도 따라줄 수 있었지만, 셜록이 언급한 건 힘든 이야기였다. 다른 계약 조건은 살펴보지도 않고 마지막 장을 넘긴 걸로 보아 어디에 서 한 번쯤 읽어본 적이 있음이 틀림없다. 수없이 많은 센티넬과 가 이드를 만나 서명케 한 레스트레이드였지만, 그조차도 두꺼운 계약 서 어느 부분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외우지는 못했다. 비용에 관한 내용이라면 거의 모든 사람이 한 번씩 거론하는 판에 어디쯤에 있 는지 안다고는 하지만, 셜록은 분명 그 두껍고 많은 조항 중에서 자 신이 원하는 한 부분만 딱 짚어냈다. 다른 걸 제시해봐야 저런 태도 의 사람에게 먹힐 리 없다는 건 안다. 기관에 들어오기 전 레스트레 이드는 낮은 층의 정부 일을 도왔다. 가끔 아집이 아니라 스스로의 주장이 강한 사람에게서 저런 시선을 많이 보았다. 아무리 달콤한 미끼를 던져도 낚이지 않고 제 할 말만을 했고. 결국 그걸 들어주지


않으면 아무런 협상도 할 수 없었다. 셜록은 그와 같은 시선을 했다. “왜 그렇게 바꾸고 싶은 거지?” “그게 더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재미?” 무슨, 놀러온 것도 아니고. 저도 모르게 레스트레이드는 그 말을 입에 담았다. 직접 걸어온 사람에게 매정한 말인가 싶어서 몸을 움 츠렸을 때. 셜록은 웃었다. 한쪽만 슬쩍 올라가는 비웃음이 아니었 다. 그는 꼬았던 다리를 가만히 내리고 두 손을 마주 짚었다. 자세를 바꾸고. 그를 바라보는 표정에서. 레스트레이드는 자신이 의도를 정확하게 짚었다는 걸 알았다.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나?” “어떤 감정 말이지?” “세상이 심심해.” 심심하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는 알았다. 간혹, 아주 간혹 주말 에 시간이 빌 때. 늘어지라 자고 일어나면 벌써 낮 시간이 가까워졌 다. 느지막한 식사를 챙겨서 먹고. 그날은 완전 쉬는 날이라 전화벨 도 울리지 않았다. 리모컨을 잡고 텔레비전을 틀면 매번 그 시간대 에 나올 법한 방송이 나왔다. 주부를 초청해서 선보이는 요리 프로 그램. 프로그램을 막 시작했을 때가 아니면 요리의 난이도는 올라간 다. 해 먹는 요리라고 해봤자 시리얼에 우유를 부은 것이나 토스트 위에 계란을 올리고 시럽으로 그림을 그리는 정도였다. 그런 사람들 에게 필요한 건 썰고 다지고 볶고 삶은 복잡한 과정이 아니었다. 주 말이라고 그래도 어정쩡한 시간이다. 그럭저럭 보면서 웃을만한 프 로그램은 저녁에야 나온다. 매일 같은 웃음 패턴, 변하지 않은 프로 그램 편성. 채널을 멋대로 삑삑 돌리고 나서야 레스트레이드는 소파


에 번쩍 누웠다. 항상 일에 파묻혀서 사느라 심심하다는 감정은 잠 시밖에 느끼지 못했다. 잠에 빠지기 바로 직전에. 하지만 고작 그런 권태기를 가지고 세상까지 거론해가면서 심심 하다고 할 이유는 없었다. 셜록 홈즈에게는 정말 세상 자체가 심심 하게 보였던 거다. “지루하고.” 매일매일 똑같은 사람, 똑같은 길. 그 위에 가만히 서 있어도 달 라지는 건 신문팔이 소년이 던지는 신문의 앞면 기사뿐이다. 백화점 의 화재사고, 귀금속 상점의 도난 사고, 가끔은 마피아끼리 벌이는 총격전까지. 세상은 매일매일 사건 속에 던져지고 있었지만, 정작 그 세상의 가운데에 서 있는 셜록은 평온하다는 감정 말고 다른 걸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 봐도 뻔히 예상할 수 있는 대답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셜록은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멍청 하다고 생각했다. 논리의 사고도 없이 연역 회로로 이어지기는커녕 대부분 머리에서 만들어 내자마자 말을 뱉었다. 고등 영역이라고 칭 해지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사고 회로가 저따위 것밖에 없다니 통탄 할 지경이었다. 셜록 홈즈는 사람들과의 대화에 금방 흥미를 잃었다. 그가 성인으로서 정체성을 채 갖추기도 전 알아버린 지루함이었다. 마이크로프트는 몇 번이나 셜록에게 당부했다. 다른 건 다 좋지만, 학업을 도중에 그만두게 되는 경우는 바라지 않는다고. 수많은 멍청 함 속에서 그나마 셜록의 심정을 이해해주는 유일한 사람은 마이크 로프트였다. 짜증은 나지만 어쨌건 그 ‘친애하는 형님’의 도움이 없 었더라면 셜록은 아마 중도에 뛰쳐나가 길이라도 방황했을 것이다. 성인이 되었지만 지루함은 더 심해졌다. 그럭저럭 또래들 사이에 서 비슷한 척이나마 해 주고 있던 건 청소년이라는 이름을 벗어던


지면서 개화했다. 교육 기관에서 쫓겨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나 이다. 셜록은 더 이상 제 생각을 숨기지도 않고 비꼬는 표정으로 돌 아오는 말을 모두 받아쳤다. 그는 금방 혼자가 되었다. 조용한 방에 서 손가락을 꼬아내고 셜록은 의자에 길게 기대었다. 멍청하게 한마 디를 보탤 바에야 아예 없는 편이 나았다. 어떤 단어도 존재하지 않는 고요한 시간. 그건 지루함이었다. 그의 형 마이크로프트는 정부의 고위직에 있었다. 드물게 그 자리 에 올라갈 때까지 센티넬로서의 발작이 일어나지 않은 사람이었다. 센티넬이라는 검사 결과를 받아들고 돌아왔을 때 셜록은 딱 마이크 로프트가 놀랐던 것만큼 놀랐다. 센티넬이라는 특질이 밝혀지기 전 에 올라간 직위인데다가 발작까지 일어나지 않아서 숨기기는 어렵 지 않았다. 마이크로프트는 그가 보통 사람인 것처럼 일을 처리했다. 그가 센티넬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셜록을 포함해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아주 소수의 사람밖에 없었다. 그걸 왜 숨기는 거냐고 셜록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센티넬들의 세계는 조금 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많았고, 평소에도 셜록과 마찬 가지로 심심해하던 마이크로프트라면 그 세계 안에 들어가 충분히 즐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마이크로프트는 그 날 손에 쥐고 온 두꺼운 서류뭉치를 셜록에게 던졌다. 반사적으로 셜록은 팔을 뻗어 하얀 종이 뭉치를 잡았다. 셜록이 첫 장을 넘겨보기도 전에 마이크 로프트는 비슷하게 굵은 두께의 서류를 다시 던졌다. 셜록은 그것까 지는 받지 못했다. 바닥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하얀 종이는 일정한 서식을 갖춘 문서 였다. 셜록은 마침 제일 위에 있어서 제일 처음 눈에 띈 문서의 제


목을 읽어갔다. 센티넬 관리 지침서. 문서의 맨 밑에는 정부 기관의 이름과 함께 서명이 적혀 있었다. 센티넬과 가이드는 정부의 시책 아래에 기관에서 관리되고 있었 다. 마이크로프트는 센티넬이었다. 그는 직위와 서약서상의 허점을 이용해 그 위에 서명을 하지 않은 유일한 센티넬이었다. 마이크로프 트가 센티넬로서 가진 능력은 머리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뿜어내는 민첩함에서 나왔다. 그의 면면을 본다면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재 능이었다. 사실 그는 그 능력이 총알을 피하는 일밖에 쓸모가 없다 고 생각했다. 마이크로프트는 그래서 일부러 그 사실을 숨기기로 결 정했다. 그곳까지 도달한 건 순전히 그의 능력이다. 복잡한 일을 몇 건씩 처리하고 한꺼번에 수십 가지의 업무를 돌보는 건 센티넬로서 의 능력이 아닌 어디까지나 마이크로프트의 능력 안에서였다. 센티 넬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사람들은 그도 그렇지 하며 멋대로 틀에 맞추어 평가했다. 세간의 틀에 신경 쓰지 않는 마이크로프트였 지만. “센티넬로 살아가는 건 지루하지.” “지루하다고? 재미있는 게 아니라?”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의 반문에 서류를 가리켰다. 146페이지. 조용 한 목소리에 셜록은 그 문서 더미를 뒤져 마이크로프트가 말한 페 이지를 집어 들었다. 그 장은 센티넬의 감시와 사용에 관한 조항이 적혀 있었다. 위로도 쭉 이어지는 것 같은 조항은 빽빽한 글씨로 하 위 조항까지 수십 개쯤 달고 있었다. 모든 삶이 정부에 의해 관리되 는 것. 자신이 직접 관리하는 일이라면 모를까 남에게 멋대로 딱지 가 붙어 관리당하게 되는 일은 사양이었다. 마이크로프트의 능력은 뛰어났고, 협상은 비밀스럽게 이루어졌다.


떨어진 문서를 발끝으로 모으고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이 들고 있 는 종이에 시선을 주었다. 아래에 흩어진 문서가 센티넬에 관한 이 야기였다면, 셜록이 받아쥔 건 가이드에 관한 이야기였다. 서약서의 수많은 조항과 그들을 관리하는 정부의 지침서. 쉽게 바깥으로 반출 될 만한 양식이 아니었다. 센티넬과 가이드들이 정부의 기관과 일종 의 계약을 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그 계약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전문은 공개되어 있지 않았다. 항상 그런 류의 조항이 그렇듯 비밀유지가 당연스레 붙어 있었고 그래서 당사자가 아니라 면 읽을 일이 없는 문서였다. 셜록은 흥미롭게 서류를 넘겼다. 셜록이 서류를 거의 다 읽을 때까지, 그 시간을 한참 기다렸다가. 마이크로프트는 그의 동생이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말했다. “네가 가이드인 것 같다.” “뭐?”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마이크로프트 때문에 셜록은 잠시 그가 다 른 말을 들었나 생각했다.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이 얼굴을 찌푸리고 올려보는 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센티넬이 발작을 일으키지 않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다. 청소년기 까지야 아직 능력이 제대로 발현되지도 않고 불안정하기 때문이라 고는 해도 성인이 된 후에도 그런 센티넬은 없다시피 했다. 마이크 로프트의 능력은 그 자신이 스스로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치고는 꽤 나 훌륭했다. 총알이 발사되는 소리를 듣자마자 발끝을 움직일 수 있는 민첩함. 그건 아무리 센티넬이라고 해도 천재가 아닌 아주 초 인에 가까운 능력이었다. 애초에 높은 직위를 차지해버린 까닭에 그 능력을 발휘할 까닭은 없었지만. 센티넬로서의 특질을 숨기려면 스


스로에 대해 누구보다 잘 파악할 수 있어야 했다. 마이크로프트가 비밀리에 한 검사만 해도 수십 가지였다. 그는 좋은 머리로 빠른 결론을 내렸다. 이제까지 형제가 모두 특 질을 타고난 경우는 없었지만, 원래부터 센티넬과 가이드 또한 세상 에 없었던 개념이다. 새로운 일을 받아들이는 걸 마이크로프트는 항 상 즐거워했다. 뛰어난 가이드는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센 티넬의 발작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가 시간을 함께 보냈던 건 대 부분 동생인 셜록뿐이었고. 셜록이 자는 새 혈액을 채취하는 건 어 렵지 않은 일이었다. 결과는 마이크로프트가 예상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이 가이드라는 걸 확신하자마자 서류를 챙겼다. 애초에 그가 다루는 문서 중 비밀스럽지 않은 게 없었기 때 문에 제지받지는 않았다. 가이드라는 걸 알았지만 추가적인 검사는 더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기록이 남기 십상이다. 센티넬에 비해 가이드의 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에 관한 통제는 조금 더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검사지를 한두 장 빼돌리는 정도야 문제없었지 만. 하지만 더 알아보지 않아도 마이크로프트는 확신했다. 그가 뛰 어난 센티넬이듯, 홈즈의 이름을 가진 동생 또한 가장 뛰어난 가이 드일거라고. 가이드이기 전에 그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존재를 숨기는 건 간단 했다. 하지만 마이크로프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뛰어난 머리 때 문에 마이크로프트 또한 학창 시절만큼 지루했던 적이 없었다. 선행 학습을 뛰어넘어 다른 책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아도 끝이 없는 지 루함은 메워지지 않았다. 정부에서 수많은 미지의 일을 떠맡고 나서 야 마이크로프트는 간신히 갈증을 채웠다. 셜록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의 동생은 그와 마찬가지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에 수십 번씩 허


덕였다. 어릴 때야 그가 어느 정도 책임을 져 주었다고는 해도 성인 이 된 이후까지 동생의 뒤처리 담당을 하는 건 질색인 일이다. 애초 에 마이크로프트는 그렇게 자상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다행히 정부의 일이 적성에 맞았다. 규격에 박힌 데다가 물 밑으로 전개되는 머리싸움은 매번 하면서도 꽤 재미있었다. 셜록은 그런 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일단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지루함을 호소했다. 공문과 글자, 회계와 수학. 답이 딱딱 정해 져 있는 일은 재미없다고 늘상 그렇게 말했던 동생이었기에 마이크 로프트는 그에게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주고자 했다. 센티넬의 삶과 가이드의 삶은 특수한 형질이라는 점에서만 비슷했고 나머지는 달 랐다. 셜록이 센티넬이 아니라는 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다른 사람의 통제 아래에서 생활해야 한다면, 그게 설령 자신의 목 숨이 달린 일이라도 셜록은 강하게 거부했을 터다. 가이드는 통제당 하는 역할이 아니라 통제하는 역할. 셜록에게 그만큼 딱 맞는 역할 은 없었다. 셜록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가이드에 관한 서류를 고작 한 번 만 들여다보고도 그랬다. 한 번으로 머릿속 저울은 쉽게 기울었다. 이대로 있다면 지루함에 눌려서 죽어버릴 참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웅하지는 않으마.” “어차피 너도 나라는 가이드가 필요한 것 아니었어?” “가이드가 필요하지만, 그게 꼭 너일 필요는 없지.” “센티넬인 걸 숨기고 싶다면-” “그건 내가 생각할 일이다, 셜록.”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의 의자를 차지하고 손을 흔들었다. 삐걱삐걱


흔들의자가 박자에 맞추어 흔들렸다. 적당한 각오와 적당한 결심과 또 거기에 더해지는 적당한 배려. 마이크로프트가 셜록에게 하는 배 려는 딱 그 정도였다. 그 이상은 셜록에게도 쓸모없었다. 그는 망설 이지 않고 가장 가까운 기관으로 향했다. 이미 서약서의 내용은 다 알아두었고, 심심한 일상을 바꾸기 위한 것도 충분히 생각해두었다. 되지 않는 경우의 일은 상상하지 않았다. 이제껏 셜록 홈즈가 손을 대어 되지 않았던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레스트레이드가 윗선의 허락을 받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참 설득해야 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전화 한 통만으로 레스트레이 드는 쉽게 조약 변경의 허락을 받았다. 셜록이 원하는 대로 센티넬 을 선택할 수 있고, 대신에 능력을 평가한 후 몇 명을 선택하는지는 기관에서 정해주는 방식이다. 셜록은 당연히 그런 식으로 될 줄 알 았다는 것처럼 놀라지 않았다. “펜.” 셜록은 레스트레이드에게 손을 뻗었다. 셜록의 앞에 있던 펜은 뚜 껑을 열어두었던 덕분에 끝 잉크가 말라 나오지 않았다. 레스트레이 드는 황급히 주머니에서 볼펜 한 자루를 꺼냈다. 셜록은 레스트레이 드의 조마조마한 심정은 모르는 것처럼 한동안 볼펜 뚜껑을 짤각이 면서 구경만 했다. 서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왠지 재촉하기에 는 달갑지 않았다. 침만 꿀꺽 삼킨 레스트레이드는 셜록의 손끝에서 핑핑 볼펜이 돌아갈 때도 침묵을 지켰다. 영원히 펜 끝이 닿을 것 같지 않았던 종이 위에, 빙글빙글 빈정대 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꽤나 유려한 서명이 쭉 그려졌다. 끝에 점을 하나 찍고. 셜록은 볼펜 끝을 눌러 심을 안으로 도로 넣었다. 레스


트레이드는 생각보다 정중한 손길로 건네주는 볼펜을 받아들었다. “당신, 정부 사람치고는 쓸 만하군. 마이크로프트와는 영 다른 종 류의 사람이야. 정부라는 단어가 붙은 것치고는 쥐꼬리만큼 낫군.” 피식 웃으며 한 이야기는 센티넬과도 가이드와도 상관없는 말이 었다. “마음에 둔 센티넬이라도 있나?” 레스트레이드도 당연히 다른 소리로 대답을 했다. 아무리 소중한 가이드라고 하지만, 서명을 한 이후에는 계약 완료다. 그에게 어디 까지나 휘둘리고 싶지는 않았다. “글쎄. 아직은. 누가 있나 돌아보도록 해볼까.” 꼭 쇼핑몰에 구경이라도 온 것처럼 흔쾌히 이야기하는 모습에 레 스트레이드는 눈을 찌푸렸다. 당연히 안내는 직접 해주겠지 하는 시 선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꼼짝 않고 있을 수는 없다. 레스트레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꼭 셜록의 말을 따르기라도 하는 것 같았지만, 그 스스로는 미처 눈치채지 못한 사실이었다.


앤셜 센티넬au samp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