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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프롤로그

‥7

1. 달갑지 않은 조우

‥12

2. 관능의 셰헤라자데

‥23

3. 블루 블러드

‥37

4. 지휘자와 콘서트마스터의 불편한 구도

‥50

5. 유혹의 파드되

‥61

6. 터닝 포인트

‥73

7. 셰헤라자데의 유혹

‥90

8. 셰헤라자데의 유혹(2)

‥104

9. 카푸치노 한 잔의 부가가치

‥117

10. 고지식한 예술인의 심각한 오류

‥132

11. 양날의 검

‥148

12. 양날의 검(2)

‥158

13. 행운이 필요 없는 남자와 행운을 믿지 않는 여자

‥168

14. 10년 만의 앙상블

‥183

15. 종연 후의 기로

‥196

16. 기억의 잔해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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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시나브로 - Step by step

‥228

18. 동거인으로서의 첫날

‥241

19. 정통성을 고수하는 것과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

‥251

20. 과거의 잔류(殘留)

‥268

21. 완벽주의자의 일탈

‥279

22. 각성(覺醒)

‥297

23. 누설된 과거의 편린

‥313

24. 고해(告解)

‥338

25. 해방의 찬가(讚歌)

‥358

26. 일상으로의 회귀(回歸)

‥391

27. 새로운 인연, 그리고 재회

‥404

28. 덫

‥437

29. 비상(飛上) - 피날레

‥462

외전 - 취야(醉夜)

‥489

Con Amore 2부 preview

‥517

아파쇼나타 Appassionata - 열정적으로

‥519

본문 중에서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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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안에서“ ”는 영어, [ ]는 프랑스어, < >는 독일어, { }는 한국어 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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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악기 탓은 적당히 하고, 차라리 그 시간에 실력 상승을 꾀하라구.” 영국 악센트가 섞인 단정한 음성이 커티스 음악학교(Curtis Institute of Music)의 리사이틀 홀 안에 잔향을 남기며 울려 퍼졌다. 16세 소년이 내뱉은 신랄한 조소에 마스터 클래스를 참관하고 있던 오십여 명의 청강 생들이 동시에 숨을 죽였다. 총 465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널찍한 홀 안에 고요한 정적이 가라앉은 가운데, 또르르— 하고 연필이 스테이 지 위를 나뒹구는 마찰음이 뒤따른다. 마스터 클래스의 지도 교수로서 초빙된 러시아계 미국인, 엘레나 교수가 충격을 받은 나머지 지휘봉처럼 들고 있던 연필을 떨어뜨린 탓이었다. 커티스 음악학교(Curtis Institute of Music). 1924년에 설립된 미국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영재 전문 양성 학교 는, 총 학생 수 170명 안팎의 소수 정예를 고수하는 만큼 미국 최고 수준의 음악가들을 배출하는 곳이다. 재학생 전원에게 전액 장학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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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생활비까지 지원한다는 파격적인 조건은, 3%라는 이례적인 입 학 경쟁률을 불러왔다. 그리고 어린 십 대들에게 학사 학위를 수여하 는 제도가 불러온 사회적 논란은, 천재들의 집합소라는 절대적 프리미 엄으로 인해 간단히 불식되었다. 다만, 성인의 것을 우습게 상회하는 탁월한 실력과 걸출한 재능 덕 분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찬사가, 영재 학생들로 하여금 음악인으로서 의 겸양을 잊게 하는 불균형을 초래했다. 하늘처럼 높은 프라이드는 학생들 간의 끊임없는 마찰로 이어져, 이들 사이에 공과 사의 경계를 외면한 대립이 종종 발생하곤 한 것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이 팀워크가 필수인 실내악 연주 과정 중에 벌어지는 학생들 간의 신경전이었다. 이는 때로는 실내악 팀의 해체라는 최악의 사태 까지 야기할 정도로 치열한 것이어서, 교수들은 항상 이 부분에 관해 골머리를 앓곤 했다. 그리고 개교 80주년을 맞아 객원교수로서 초빙된 엘레나의 경우 역 시 예외는 아니었기에, 실내악 멤버 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자 존심 대결을 눈앞에 조우하며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고만 것이었다. 그 것도 하필이면 자신이 코칭하는 공개 마스터 클래스의 현장에서 수석 영재들의 살벌한 기 싸움이 재현되고 있는 것에, 엘레나는 경직된 입 매에 억지 미소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 신이여. 제발, 이 모든 것이 꿈이길. 언제나 그렇듯 사건의 발단은 사소한 것이었다. 커티스 음악학교에서 공개 마스터 클래스를 지도하는 초빙 교수의 자격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당일, 엘레나의 기대감과 흥분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게다가, 커티스에 재학 중인 동시에 천 재 피아니스트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유진 킴(Eug 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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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과, 커티스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지나 유(Gina Yu)의 듀엣이 라니. 이 얼마나 환상적인 콤비인가. 그러나 자신이 지도할 듀오 실내악 팀의 두 멤버가 교내의 모든 이 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앙숙 관계라는 사실을, 초청 교수에 불과한 엘레나는 상상조차 못 했던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50명 남짓한 청강 생들의 참관이, 마스터 클래스의 견학보다도 견원지간의 앙숙들이 선 보일 작태를 구경하기 위함이라는 사실 또한 꿈에도 모르고 있던 그 녀였다. “지나 양, 이 패시지에서 피치카토*의 볼륨이 다소 약하니 다시 한 번 시도해 보세요.” 현악과의 수석답게 유려한 기교를 지닌 바이올리니스트, 지나 유라 고 불린 동양계 여학생은 특이하게도 비교적 쉬운 테크닉인 피치카토 부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를 이해 못 한 엘레나의 끈 질긴 권유에 여학생이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 번 바이올린 의 현을 손가락으로 퉁긴다. 몇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좀체 나오지 않는 음량에 엘레나가 고 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테크닉 자체는 완벽한데 악기통이 반응하지 않는 듯한 묘한 부조화가 의아했던 탓이다. “이 악기로는 안 돼요.” 결국 여학생이 자조 섞인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활로 소리를 낼 때는 활의 압력을 이용해 어느 정도 인위적인 조 작이 가능하지만, 손가락으로 뜯을 때는 한계가 있거든요.” 자칫하면 악기를 핑계로 한 변명으로 들릴 수 있는 발언이었지만, 이례적으로 반응이 느린 악기에 호기심이 동한 엘레나는 지나를 향해 *피치카토(Pizzicato) — 현을 손가락으로 뜯는 테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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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다가섰다. “네 악기를 좀 봐도 되겠니?” 지나가 묵묵히 내미는 바이올린을 받아 든 엘레나의 입에서 짧은 경탄이 터져 나왔다. 악기의 라벨과 나무의 퀄리티까지 유심히 살펴 본 바이올린은 시가 5천 달러를 넘지 못할 싸구려 중국제 악기였던 것이다. 이런 악기로 그토록 유려한 연주를 할 수 있었다니, 역시 커티스가 내로라하는 수재답군. 동양계 음악도라면, 아파트 한 채 값에 달하는 악기들을 연주하는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만을 봐 온 탓에 눈앞의 여학생이 켜고 있던 저 품질 악기의 한계를 고려 못 한 엘레나였다. 자신의 경솔함을 뒤늦게 알아차린 엘레나가 곤혹스러운 한숨을 삼키며 바이올린을 지나의 손 에 되돌렸다. “으음, 그래. 이 악기로 피치카토의 사운드 볼륨을 끌어내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르겠구나.” 약간 자존심이 상한 듯한 표정으로 지나가 묵묵히 악기를 받아 들 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피아노의 최고 명품으로 간주되는 스타인웨이 앞 에 앉아 있던 유지나의 듀오 파트너, 천재 피아니스트로서 일컬어지 는 소년의 오만무도(傲慢無道)한 목소리가 홀 안의 공기를 가른 것 은. “악기 탓은 적당히 하고, 차라리 그 시간에 실력 상승을 꾀하라구.” 9살 때 음악계 정식 데뷔 이후, 천재 피아니스트로서 세계적인 명 성을 쌓아 온 소년의 오만한 발언에 홀 내에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초청 교수 엘레나의 손에서 추락한 연필이 스테이지 위를 구르고,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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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청강생이‘올 게 왔구나’ 라는 표정으로 귀추를 주목시키고 있는 가운데, 지나 유만이 단정한 입매에 조소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홀 안을 채우는 고요한 정적을 깬 동갑내기 바이올리니스 트의 발언 역시, 유진 킴 못지않은 신랄함을 선보였던 것이다. “너야말로 기계처럼 기교만으로 피아노를 뚱땅거리는 주제에, 본 인의 실력 상승이나 신경 써. 그 비싼 스타인웨이가 아깝다구, 미스터 신디사이저*.” 그 날 두 사람의 일상의 다툼에 사전경고 없이 노출되었던 초빙 교 수 엘레나는 눈물을 머금고 마스터 클래스를 중도에 파한 일화를 남 겼다고 한다.

*신디사이저(Synthesizer) — 저장된 음원으로 자체 연주가 가능한 전자 키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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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달갑지 않은 조우

3월 초, 스프링 브레이크 시즌 이후의 대학 캠퍼스는 몇 주간 짧은 휴식의 잔여 흥분으로 으레 들떠 있기 마련이다. 다만 현재, 뉴욕의 링컨 센터에 위치한 세계적 수준의 음악 교육을 가르치는 음악 발전소,‘줄리어드 음악학교(Juilliard School)’ 의로 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여타 대학가와는 다소 색다른 종류의 흥분 이었다. 매년 봄마다 줄리어드의 음악학교 로비의 공공 게시판을 차지하는 ‘줄리어드 대학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오디션 공고문’앞에는 오디션 날짜를 확인하기 위해 몰린 학생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5월에 있을 줄리어드 정기공연의 프로그램에 협연 독주자로서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기회는, 학생 누구라도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석사 1학년에 재학 중인 유지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그녀는 학 생들의 인파에 파묻혀 협연 오디션 게시판 공고를 주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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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와 같이 공고문을 확인하던 바이올린과의 동기 카렌이 들뜬 목소 리로 말을 걸어왔다. “4월이라면 한 달 후잖아. 지나, 너는 당연히 오디션 참가하는 거 지?” “당연하지.” “곡목은 결정했어?” “ ‘멘델스존 바이올린 콘체르토’ 로 정했어. 깔끔하게. 그 정도면 협연 때도 부담 없을 테고.” 공고문의 내용을 대충 훑은 지나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전교 탑 바이올리니스 트의 도도한 반응에 카렌이 어깨를 움츠렸다. 과연 현악과 수석다운 대답이라니까. 연주 실황 때의 부담 요소까지 미리 계산한 지나의 답변에는, 오디 션 합격에 대한 자신감과 여유가 흐르고 있었다. 솔리스트로서의 두 각은 물론,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콘서트마스터로 자리매김한 유지나 의 오디션 합격에 의심을 두는 이는 아마도 전무할 것이다. 단, 현악 과의 만년 차석인 그 누군가를 제외하고는. “발레리와 똑같은 곡명이네.” “뭐?” 반갑지 않은 이름이 거론된 것에, 도자기처럼 매끈한 지나의 미간 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여자, 분명히‘생상 콘체르토 3번’ 으로 오디션 준비하고 있지 않 았어?” “글쎄. 봄방학 동안에 마음이 바뀐 걸까나.” 카렌의 불분명한 대답에 로비를 가로지르는 지나의 발걸음이 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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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졌다. 발레리 존스. 같은 학년에 재학 중인 현악과의 만년 차석. 언제나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유지나 본인에 반해 혼자서 라이벌 관계를 자처하는 발레리는, 지나와의 경쟁 구도를 만들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 보일 정도의 집착을 보였다. 이에 지나는 발레리를 경쟁 심만으로 경쟁 구도가 가능하다고 믿는 착각병의 소유자라며 코웃음 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겨울 학기 때 발레리가 지나의 전공교수인 신 시아 청의 문하로 들어온 것을 기점으로, 발레리를 향한 지나의 비웃 음은 이에서 한층 심화된 경멸에 가까운 것으로 변질되었다. 음악대학에서 전공교수와 학생의 관계는 선생과 학생 간의 학구적 교류,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 교수들은 자신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는 실력파 학생을 선별하는 데 치중했고, 학생들은 시간 강사 자리라도 얻어 보려는 마음에 정치적 파워가 있는 교수 아래 줄서기 를 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처럼 이해타산이 뒤섞인 와중에, 학장을 비롯한 교수들이 파를 가르거나 학교 행정에 관련된 권위에만 집착하는 등, 정치적인 요소가 팽배한 것이 현 음악학교의 실정이었 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레리가 지나와 같은 교수를 사사하기를 바란다 는 것은, 지나를 최강 라이벌로 여기는 발레리 측에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었다. 더불어, 지나와 같은 곡명으로 오디션을 치른다는 것은, 지나에게 있어서 정면 도전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그러니까, 주제에 나와 똑같은 곡으로 오디션을 보겠다 이거지.” 로비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중얼거리는 지나의 입가에 조소가 흘 렀다. 일순 냉랭해진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카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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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층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지나. 이번 봄방학 개학 후에 지휘과에 새로 들어온 학생에 관한 소문 들었니?” 또 시작이군. 때마침 소리 없이 열리는 로비 엘리베이터의 문을 곁눈질하며, 지 나는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가십이나 구설수에 있어서 타 의 추종을 불허하는 카렌의 수다는 언제나 두통을 동반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유진 킴이라고, 한동안 천재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리다가 3년 전에 잠적한…….” “뭐?! ……아웃!!!” 뭔가 단단한 것에 머리 한쪽을 부딪힌 지나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것을 곁눈으로만 확인한 채 걸 어 들어가려 한 것이 화근이었다. 자신이 부딪힌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단단한 가슴이 마치 견고한 벽처럼 눈앞에 자리 잡고 있었 다. “실례.” 낮게 울리는 감미로운 음성에 시선을 들자, 진한 푸른색의 눈동자 가 높은 각도에서 자신을 내려 보고 있다. 키가 크구나, 라고 감탄한 것도 잠깐, 정교하게 세공된 조각 같은 남자의 얼굴이 왠지 낯이 익 은 것에 눈살을 찌푸리고 만 지나였다. 이에 반응하듯, 옆으로 한 발 짝 물러선 남자의 깊은 눈매에도 짙은 불쾌감이 번져 나가고 있었 다. “승강기에 오르기 전, 문 옆으로 물러서 있는 매너를 배울 나이는 지났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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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저 오만한 말투는. 영국 악센트가 섞인 남자의 매력적인 저음과 함께 카렌의 숨죽인 탄성이 지나의 귀를 파고들었다. “맙소사. 그야, 유진 킴.” 이미 알아. 저 모난 성격을 보라구. 작게 속삭여 오는 카렌에게 지 나가 심중으로 대답했다. 커티스에서의 졸업 후, 8년간 한층 견고해진 외모 덕에 그를 첫눈 에 알아보지 못한 것은 자신의 불찰이었다. 다만, 상대의 고약한 성격 이 8년 전의 동창을 인식하는 수단의 첫째 조건이 되어서야, 이는 꽤 나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상대의 신원을 인지하는 순간, 지나의 응답은 초 단위로 튀어나왔다. “주변을 살피지도 않고 먼저 튀어나온 건 그쪽이야.” “아직도 억지 부리는 건 여전하군.” “남이사.” 얼떨떨한 표정의 카렌이 두 남녀의 짧은 공방을 지켜보고 있는 가 운데, 상대할 가치조차도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둔 남자가 두 여자를 지나쳐 로비의 라운지를 향해 걸어갔다. 캐주얼하게 걸친 얇은 블랙 니트로도 가려지지 않는 완벽한 근육의 조합을 지닌 장신은, 운동과 는 거리가 먼 음악도들이 넘쳐나는 음악학교의 로비에서 단연 돋보였 다. “맙소사, 저런 미남자가 우리 학교에 재학 중이라니.” 남자의 매력적인 뒤태를 감상하며 카렌이 중얼거렸다. “동양계 혼혈이라면서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운 블루 아이즈를 갖 고 태어날 수 있는 거지?” “잘못 섞인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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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의 머릿속에는 빨리 연습실에 가서 연습을 해야 한다는 생각 만이 가득했다. 저 잘난 유진 킴 덕분에 엘리베이터를 놓쳤잖아. 지나 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눌러 댔다. “지나, 그건 실례야. 우성 인자만 갖고 태어난 듯한 남자한테 그런 무례한 말을 하다니.” “사실을 말했을 뿐인걸. 쿼터도 아닌, 해프 코리안 믹스가 푸른 눈 동자라니. 돌연변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어. 그리고 말해 두지만, 푸 른 눈은 열성 인자에 속해.” “오, 지나. 제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는 걸 알잖아.” 마치 믹스견을 감정하는 듯한 지나의 말투에 카렌이 과장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카렌. 저 남자가 아까 어떤 식으로 나한테 말을 걸었는지 제대로 듣기는 한 거야? 그 고약한 어조를 보라구.” “하지만, 지나. 그건 네가 갑자기 그 사람 앞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잖아. 유진 킴도 놀랐을걸.” “지금 그 말, 진심이 아니길 바라겠어.” 뛰어들기는 누가. 앞을 보지 않은 채 한 걸음 옮겼을 뿐인데. 세 살 연하인 카렌의 철없음을 이해하지만, 대놓고 알지도 못하는 남자 편을 든다면 이쪽은 심사가 뒤틀릴 수밖에 없다. 지나가 불쾌함 이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자 카렌이 머쓱한 표정과 함께 시선을 피 했다. 지나는 여전히 카렌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불만이 가득 찬 어조로 단언했다. “누가 먼저 잘못하고를 떠나서 유진 킴이야말로 그렇게 비꼬면서 말할 필요는 없었다구.” “뭐, 그건 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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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동조한다는 듯 시큰둥하기 짝이 없는 카렌의 목소리 에 지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국 외모와 목소리가 받쳐 주면 고약 한 말투조차 순화시켜 버리는 필터가 카렌의 청각기에 달려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 한심한 청각 기능을 지닌 주제에 자신이 바이올리니 스트라고 떠벌리고 다니겠지, 이 여자는. 문득 카렌이 생각났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그런데 너와 유진 킴, 혹시 구면이니? 아까 서로 대하는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자연스러워 보여서 말이야.” “자연스러워 보인다니. 끔찍한 소리 하지 마.” 귀뿐만 아니라 눈까지 고장 난 건가. 지나는 카렌의 말에 진저리 를 치며 대답했다. 그녀의 가십 놀음에 동참할 만한 인내심은 이미 바닥 나 있는 상태였다. 뭔가 더 말을 하려는 카렌을 무시한 채 엘리 베이터에서 내린 지나는 배정 연습실을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 겼다. 연습실 안의 문을 걸어 잠그고, 악기 케이스를 피아노 의자 위에 올려놓는다. 검은색의 허름한 인조가죽 케이스를 열고, 값싼 중국제 악기를 꺼내는 지나의 얼굴에 옅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 악기 탓은 적당히 하고, 차라리 그 시간에 실력 향상을 꾀하라 구. 소년의 냉랭한 음성이 아직도 생생하게 귓전에서 울리는 듯하다. 당시에는 그의 감정이 절제된 스타일을 비꼰답시고‘미스터 신디사이 저’ 라며 기세 좋게 되받아쳤지만, 마스터 클래스 직후 화장실에서 숨 죽여 울며 수치심을 삭이던 그녀였다. 조잡한 마감칠 덕분에 오렌지 빛깔이 나는 악기를 왼쪽 어깨에 얹 으며 지나는 짧게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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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커티스 음악학교를 졸업한 이후 다시는 개인적으로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 믿었던 남자와 최악의 방식으로 조우해 버렸다. 9살 때 런던 필하모닉과의 협연으로 음악계에 데뷔한 영국 출신의 천재 피아니스트. 2년 후 차이코프스키 국제 청소년 콩쿠르의 최연소 우승자로 등극 한 이후로 우승한 국제 콩쿠르 내역은 셀 수가 없을 정도다. 러시아 태생의 예프게니 키신을 비롯한 니콜라이 루간스키 등, 천 재 피아니스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국 출신의 피아니스트 유진 킴은 침체기에 접어든 20세기 말 클래식 음악계에 돌풍을 몰고 왔다. 세계 유수의 언론이 앞다퉈 그를 소개했고, 클래식계의 불황도 그의 음반과 콘서트에는 맥을 추지 못했다. 그렇게 유명세를 타고 일 년에 70회에서 80회에 달하는 연주 일정 을 소화해 내던 15세의 소년은, 타계 전, 커티스에서 지도하던 러시 아 출신의 거장‘블라디미르 카자코프(Vladimir Kazakov)’ 를 사사 하기 위해 미국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학교에 입학을 하는 것으로 음악계에 또 다른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성인 연주가들을 앞지른 기교와 음악성으로 승승장구하던 그가‘신동형’연주가로서 머물지 않겠다며 더욱 심오한 연주의 탐구를 위해 카자코프를 찾은 것은, 음악인으로서의 겸양을 입증하는 사례라며 언론의 찬사를 받았 다. 유진 킴의 입학 후, 프로그램의 필수과정인 실내악 팀의 구성을 위 해 교수들은 유진 킴과 동급의 실력을 지닌 연주자를 찾기 위해 고심 했다. 결국 탁월한 기교와 음악성을 갖춘 지나 유만이 유진 킴의 파 트너로서 적합하다는 교수들의 판단하에, 그녀는 이 오만한 천재 피 아니스트와 실내악 듀오 팀을 결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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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리허설은 엉망이었다. 연주 스타일에 있어서 지나가 불이라면 유진은 얼음과도 같았다. 지나의 열정적인 감성에 기반한 아이디어는 냉철한 이성을 중요시 하는 유진에 의해 무참히 기각당하고는 했다. 그러한 유진에게 음악 이란 머리로만 계산해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며 반발한 지나였으니, 리허설이든 레슨이든 간에 제대로 성사될 리가 없었다. 이렇듯, 판이한 음악적 해석과 취향 때문에 둘의 리허설은 언제나 격한 논쟁으로 마감되었으니, 교내의 투 탑(two top) 연주가들은 그 들의 탁월한 연주 실력과 더불어 교내 제일가는 앙숙으로서 유명세를 떨치게 된 것이다. 커티스 입학을 기점으로 시작된 15세 동년배 피아니스트와 바이올 리니스트의 치열한 자존심 전쟁은, 3년 후 그들의 동시 조기 졸업과 함께 종결되었다. 실내악에 한해서는 보수적이면서도 완고한 마인드를 지닌 유진 킴 이었지만, 솔로이스트로서는 경이로운 테크닉과 냉철한 해석을 바탕 으로 완벽에 가까운 연주를 선보였다. 세계적 거장 블라디미르 카자 코프를 3년간 사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지극히 원숙해진 음악성과 함 께 컴백한 그를, 음악계는 두 팔을 벌리고 환영했다. 한국과 영국인 혼혈인 유진 킴의 흑발과 짙푸른 눈동자의 이질적 인 조합이 선사하는 매력적인 비주얼은 비디오형 연주가를 선호하는 21세기 클래식계의 요구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져 그의 유명세에 박차 를 가했다. 금욕적이면서도 기품 있는 외모와는 달리 유진 킴은 클래 식 연주가로서는 유일하게 셀레브리티의 가십지에 염문을 흩뿌리곤 했으나, 이미지보다는 실력이 우선시되는 클래식계에서는 이를 문제 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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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 아모레 최종

2014.3.31 11: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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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변수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 데뷔 후 15년 가까이 국제적 규모의 유명세를 떨치던 그가, 3년 전 갑작스럽게 잠적했다. 벨기에에서 3년 주기로 개최되는, 높은 권위와 명성을 자랑하는‘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Queen Elisabeth Competition)’ 의 우승을 거머쥔 후, 홀연히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상념을 좇는 지나의 입술 사이로 시름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난 3년간 종적이 묘연했던 유진 킴이, 잠적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피아니스트가 아닌 지휘학도로서. 그것도 자신이 재학 중인 학교에. 악연도 이런 악연이 있을 수가 없다. 지휘과의 특성상 지휘과 학도와 오케스트라의 리허설은 필수이기 에, 지휘 단상에 설 유진 킴과 콘서트마스터인 유지나와의 대면은 불 가피한 의무와도 같다. 커티스 전교에 위상을 떨치는 앙숙 관계였던 피아니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가, 8년 후 지휘자와 콘서트마스터로서 대치하게 되다니.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각자의 음악적 성장을 이루어 온 그들이 다. 성장한 음악인으로서의 재(再)대면이 초래할 온갖 후유증을 상상 해 버린 지나는 다시 한 번 탄식했다. “아, 싫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한국 속담이 사실이었어. 머리를 크게 한 번 흔든 지나는, 악기 조율을 시작했다. 일단, 내일 있을 전공교수와의 레슨을 위한 준비가 우선이다. 노처 녀 히스테리로 유명한 신시아 청에게 연습 부족으로 깨지는 것만은 사양이니까. 멘델스존 E 단조의 눈물 섞인 비애, 그리고 순수한 사랑의 느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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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 아모레 최종

2014.3.31 11: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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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며, 악기의 E현에 가볍게 활을 얹는다. 협주곡의 애절한 첫 소절이 시작되자, 조잡한 중국제의 것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고아한 음색이 방음 처리된 연습실 내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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