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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0. Middle of nowhere

‥7

1화. Mr. Enigma

‥21

2화. Time to leave

‥61

3화. Dreamer

‥106

4화. A little closer

‥145

5화. Slow to learn

‥185

6화. Apple of my Eye

‥227

7화. End of the moonlight

‥267

8화. love me, like piano

‥297

9화. Someday somewhere

‥344

10화. Every Teardrop Is a Waterfall

‥388

11화. Wish you stand by

‥428

Epilogue 1. Never Looking Back

‥471

Epilogue 2. Sweet siesta

‥476

작가 후기

‥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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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Middle of nowhere

세상의 어떤 일이든 처음 한 번의 시도가 어려운 법이다. 어렵게 첫걸음을 뗀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 다음 걸음을 내딛고, 처음 엄마 품을 떠나 또래에 섞인 아이는 다음 날에도 아무렇지 않게 유치원 버스에 오르게 된다. 그렇듯 무엇이든 처음 한 번을 해치우고 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 버린다. 그것이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한 아이에게 고함을 지르는 일이라 거나, 숙제를 잊은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뺨을 후려치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철썩. 다 큰 딸의 얼굴이 붓도록 때리는 것도. “고개 들어.” 음침한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이번엔 반대편으로 손이 날아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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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두터운 손바닥이 정확히 뺨을 후려쳤고, 그 충격으로 기우뚱한 몸은 차가운 서재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만하세요, 여보! 유민아, 뭐하니? 어서 잘못했다고 빌어!” 어머니의 목소리는 걱정보다 공포에 질려 있었다. “대체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이것들이 하나같이 저 모양 저 꼴이야!” “한창 그럴 나이잖아요. 공부하느라 지쳐서 잠깐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어디서 건방지게 애비한테 눈 똑바로 뜨고 대들어? 네가 그렇 게 편한 인생 살 수 있는 게 누구 덕인데! 배가 부르니 그딴 망상 이나 하는 거지. 한 번만 더 저년 입에서 같은 소리 나오면 당신이 고 저년이고 당장 내쫓을 줄 알아!” “아,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화 푸세요. 유민아, 어서 죄송하다고 해. 어서!” 비릿한 피 냄새에 속이 울렁거렸다. 코를 맞지 않아도 코피가 날 수 있다는 건 열 살 때 이미 겪어 봐서 안다. 처음으로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던 날. 한참 꿈을 먹으며 응석을 부릴 나이에 그녀 는 부모의 억압 앞에서 꿈을 꺾는 게 얼마나 간단한 일인지도 알 았다. 익숙하다 해서 폭력에서 오는 고통이 작게 느껴지진 않는단 것도. “알았어요.” 유민은 짧게 대답했다. 열여덟 살의 자존심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물론 죄송하다 는 말도 하지 않았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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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 건방진……!” 그런 유민의 태도에 더 화가 치민 남자는 책상에 놓여 있던 서 류뭉치를 집어 던졌다. 촤르륵, 소리와 함께 하얀 종이들이 그녀의 주변에 흩어졌다. “여보, 여보! 제가 잘 타이를 테니까 이제 제발…….” “당신도 똑같아!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 “악!” 간신히 그의 옷자락 끝을 붙잡으며 울먹이던 어머니에게 남자가 손을 치켜 올렸다. 어머니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곤 몸을 움츠 렸다. 어느 시점에서 주먹이 날아올지 철저히 잘 아는 사람의 움 직임이다. 그러나 남자는 저를 빤히 바라보는 유민의 눈초리에 멈 칫했다. 그제야 다 큰 딸 앞에서 어머니를 때리는 짓은 체면을 구 기는 일이라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이 쓸모없는 것들!” 남자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제 야 어머니는 급히 티슈 통을 집어 들고 왔다. 유민은 말없이 그녀 의 손에서 티슈를 뺏어 들었다. “유민아, 네 아버지 말씀 들어. 응?” 순간 유민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으려다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라니. 그 남자는 아버지란 이름으로 가족의 최상위에 군 림하는 자. 그에게 가족이란 건 이름뿐, 최소한의 애정조차 없었 다. “아버지 말씀이 틀린 건 아니야. 사실 사진이야 언제든 취미로 할 수 있는 거잖아. 아니, 네가 굳이 미국에 있는 대학까지 가야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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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이유가 있니? 그리고 너 혼자 외국 가서 생활하는 건 나도 반 대야.” 유민은 묵묵히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빨갛게 물든 티슈를 뭉쳤 다. “원하는 공부 시켜 줄게. 음악이건 미술이건. 하지만 집에 있도 록 해. 아버진 널 걱정해서 보낼 생각이 없으신 거야. 다 널 걱정 해서 하는 말이잖아. 잘되라고, 나중을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 이 게 다 유리 그 계집애 때문에…….” “…….” “하지만 알잖니. 아버지 원래는 자상한 분이야. 요즘 회사 일도 복잡하고…… 아무래도 큰일 하시는 분이니까 스트레스가 이만저 만이 아닐 거야. 옛날엔 아버지도…….” 현기증이 일었다. 그것이 비릿한 피 냄새 탓인지, 끝도 없이 이 어지는 어머니의 궤변 탓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녀는 회피하듯 눈을 감으며 내뱉었다. “알았다구요.” 어차피 이젠 다 틀렸다는 거.

유민은 손에 잡히는 대로 코트 하나만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물론 갈 곳은 없다. 고급스러운 주택이 즐비한 동네는 연말의 들 뜸 따위와는 상관없다는 듯 고고하다. 몇 년째 살아왔음에도 도무 지 정감이 가지 않는 길목을 무심히 걸었다.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불편함이 가득해 땅만 보며 걷다 보니 공원이었다. 벌써 12월도 중순이고 연말과 방학을 앞둔 때였다. 마지막 겨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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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휩쓸고 간 공원의 풍경은 젖은 낙엽과 바짝 마른 잔디로 황 량하기 그지없었다. 유민은 마른 나뭇잎이 무성히 쌓인 벤치로 터 덜터덜 걸어가 앉았다. “하아…….” 화끈거리던 뺨에 차디찬 바람이 닿자 이젠 다른 고통이 밀려들 었다. 휑한 목둘레와 덜 잠긴 단추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의 냉기 에 그녀는 점점 움츠러들고 있었다. 아마도 이 추위가 집을 뛰쳐 나오게 되는 순간 맞닥뜨리게 될 사회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이대로 아무 준비 없이 혹독한 추위 속으로 뛰어드는 것. 아버 지의 그늘 아래 있는 것. 어느 쪽이 더 견디기 쉬울까. “뭐 이래. 쉬운 게 없잖아.” 기막힌 현실에 헛웃음이 난다. 물론 손 놓고 구경만 한 건 아니 었다. 멋모르고 꾸었던 꿈이 산산조각 난 이후로도 그녀는 끊임없 이 자신이 할 일을 찾아왔고,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나름 치 밀하게 준비를 해 왔다. 단지 그 계획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덜 미를 잡히며 어그러졌을 뿐. ‘뉴욕에 있는…… 학교라구요?’ [네. 물론 유민이 성적으로는 충분히 가고도 남는 곳이에요. 사 실 학교 입장에서는 유민이 같은 아이가 아이비리그 같은 곳을 노 려 준다면 더 바랄 게 없긴 하지만 본인이 SVA로 가길 원하 니…….] ‘네? SVA라면……?’ [아, 모르셨어요? School of Visual Arts라고 디자인, 영상예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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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쪽 학교인데…….] 느닷없이 걸려 온 담임의 전화에 어머니는 기함했다. [물론 그쪽이 맘에 안 드시면 제가 알아본 학교 중엔 예비 유학 생 체험 프로그램도 있고 하니까…….] 진학을 위해 부모님과 상담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제 2학년인 그녀에겐 아직 이른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그녀의 어머니에게 상담을 빙자해 굳이 전화를 걸어온 것에는 분명 다른 속셈이 묻어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3학년에도 내가 맡을 아이, 쉽게 만나기 힘든 우수한 조 건의 아이니 웬만하면 더 나은 대학을, 아니면 국내의 손꼽히는 명문대학을 권해 보자. 미리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 빤한 속이 들여다보여 웃음이 났다. “진짜 믿을 사람 하나 없네.” 등받이에 기댄 유민이 눈을 감았다. 사진기 하나를 든 채 세계 이곳저곳을 자유로이 누빌 날을 꿈꿨다. 한 장의 사진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아니, 갈망한 건 그 이미지가 주는 자유로움 그 자체였을 것이 다. 뭐든 좋았다. 담임의 말대로 아이비리그라도 상관없을지 모른 다. 어떤 방식으로든 도망칠 수만 있다면. 하지만 담임은 몰랐을 것이다. 애초에 꿈을 꿀 수 없는 사람도 있다는 걸. 숨이 턱턱 막히는 집안의 건조한 공기에서, 그 지독한 남자에게서 도망칠 수 없었다는 걸. 그 악의 없는 욕심에 한 줄기 희망마저 말라붙었다는 걸……. 목이 메어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을 때였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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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럭. —헥헥헥……. 묘한 소리에 놀란 유민이 눈을 뜨고 옆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멍멍! 컹! “꺄악—!” 커다란 황금빛 물결이 그녀의 얼굴로 뛰어들었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다짜고짜 덤벼든 녀석은 멋대로 그녀에게 몸을 비벼 댔다. 북슬 북슬, 햇살이 녹아 있는 듯한 황금색 털. 이상하게 웃고 있는 것처 럼 보이는 저 입.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골든리트리버다. 그것도 쓸 데없이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죄송합니다, 그 녀석 좀 잡아 주세요.” 어디선가 들려온 말에 유민은 황급히 녀석을 붙잡았다. 그사이 에도 정신없이 제게 몸을 비비던 녀석은 뭐가 그리 좋은지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며 핥기까지 했다. “아, 야, 아닛! 하지 마! 잠깐 가만히 좀…….”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야, 고구마. 빨리 내려와.” 서둘러 다가온 남자가 개의 목줄을 쥐고 목덜미를 토닥거렸다. 하지만 이상하게 신이 난 녀석은 그녀의 몸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 며 도무지 움직일 마음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남자는 처음 개를 잡아 달라며 말을 건네 왔을 때도 느꼈지만, 묘하게 느긋한 태도 였다. 그녀의 코트 자락은 금세 녀석의 흙 발자국과 황금색 털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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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태연함에 울컥한 유민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키가 훤칠하게 큰 남자였다. 허리 조금 아래를 덮는 피코트와 그 밑으로 보이는 긴 다리가 꽤 돋보이는. 그런데 차콜색의 커다란 목도리로 얼굴의 절반을 가려 놓은 꼴이 어지간히 추위를 타는구나 싶었다. 그런 수 상한 꼴을 한 주제에 가볍게 눈웃음을 치는 눈매가 꽤 예쁜……. ‘뭘 그리 자세히 보고 있는데!’ 흠칫한 유민이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미안해요, 옷까지 다 망친 거 같은데…….” “괜찮아요. 어차피 드라이 맡길 거라서.” “정말 미안합니다. 제가 세탁비 드릴게요.” 끈을 고쳐 쥔 남자가 주섬주섬 옷자락을 뒤지자 유민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이런 일로 돈을 받거나 엮이고 싶진 않았다. “아니, 그건 됐어요. 저…… 그런데 설마 고구마라는 게 얘 이 름이에요?” “네. 맛있게 생겼죠?” “네?” “농담이에요. 그냥 색깔이 고구마 같아서 고구마예요. 구운 호 박고구마색이잖아요.” “…….”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배가 고프긴 해요. 식욕 당기는 색이 라.” 마지막 저 말은 분명 진심이다. 차분하고 느릿한 말투랑 농담은 도무지 어울리지가 않았다. 그래서 섣불리 웃을 수가 없었다. 그 떨떠름한 얼굴을 봤는지 남자는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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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얘가 원래 이런 녀석은 아니에요. 나름 신사적인 놈인데…….” 아니, 충분히 그런 녀석으로 보여요. 그의 카멜색 코트와 어두운 색상의 바지 여기저기에 정확히 쾅 쾅 찍혀 있는 발자국이 어떤 의미인지 그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별로…… 설득력이 없나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제 몸을 내려다보던 그가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제야 잊고 있었다는 듯이 머플러를 조금 풀어 내렸다. 유민은 그 과정을 유심히 바라봤다. 왠지 생각했던 대로의 이미지였다. 선이 고운 턱 라인과 뚜렷하게 호선을 그리는 입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 꽤 젊은 남자였다. 아마도 대학생쯤 되지 않았을까? “아무튼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 수상한 사람은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실례는 고구마가 했고, 수상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지금 섣불리 판단할 건 아닌 거 같아요.” “그, 그런가요?” “그보다 얘 좀 떼어 주시면 안 될까요?” “그게…… 저도 지금 노력 중이긴 한데……. 고구마, 제발 그만 하자.” 다시 멋쩍은 웃음을 짓던 그가 조심스럽게 줄을 당겼다. 섣불리 힘을 쓰지 않고 어떻게든 녀석의 흥분을 달래 보려 애를 쓰는 기 색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애완견 하나 이기지 못하는 남자인가. 마치 그 마음을 읽어 낸 듯 남자가 웃음을 터뜨 렸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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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이 보기엔 건강해 보여도 속은 엉망이거든요. 나이도 많고. 그래서 조금 존중해 주는 중이에요.” “…….” “평생 제대로 짖지도, 뛰지도 못해서 이젠 하고 싶은 대로 두고 싶은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정말 점잖은 녀 석인데…….” 애써 변명해 주는 남자의 마음이 통한 걸까. 그제야 벤치에서 뛰어내린 녀석은 다시 그의 다리에 몸을 문지르며 애정을 표시했 다. 제가 뭔 짓을 해도 사랑받는다는 걸 아는 것처럼. 왠지 그 순 간부터 그녀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뭔가 울컥 치미는 느낌이었다. 분명 나이가 있는 어른인데, 남자는 세상의 모든 빛을 투영하는 것처럼 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 해사한 얼굴. 누구에게든 언성 한 번 높이지 않았을 부드러운 목소리. 제 옷을 망치고, 말을 듣지 않 는 짐승의 사정까지 살피는 성품. “그보다 오늘 꽤 추운데, 계속 여기 앉아 계실 거예요?” 처음 보는 사람도 걱정할 수 있는 여유. 그 모든 게 그가 속한 환경을 보여 준다. 아무 걱정도, 고민도 없이 살아 독해질 필요가 없는 사람. 그렇기에 허술하게 곁을 내 주고도 누구도 경계하지 않는 사람. 아무 고민도 없이 인생 편하 게 사는 듯한 그 천진난만함이 싫었다. 극명히 대비되는 저 자신이 더 미워지니까. “먼저 가세요.” “저기, 혹시 괜찮으면 따뜻한 데 가서 차라도……. 아, 이건 절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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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작업 그런 게 아니라, 고구마가 옷 망친 것도 있고 하니까…….” “그냥 가시라고요.” 싸늘하게 내뱉은 말에 남자는 잠시 굳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 다. 유민은 꿋꿋하게 남자를 외면했다. 괜한 자격지심에 화풀이를 한 것임을 깨닫자 숨고만 싶었다. 그래서 남자가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땐 차라리 다행스러웠다. 이상하게 눈시울이 붉 어지려는 걸 보이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데……. —멍멍멍! 컹! 그새 익숙해진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셔요.” 그리고 눈앞에 선 남자가 뭔가를 내민다. 굳어 버린 그녀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그는 아무렇지 않 게 눈앞에서 뚜껑을 따더니 불쑥 내밀었다. 그제야 캔커피라는 걸 알았다. 얼결에 받아 든 순간 왠지 가슴이 일렁였다. 이제 당 연하다는 듯 벤치로 뛰어올라 끙끙거리며 코를 들이대는 고구마 녀석에게서, 그가 건넨 캔커피에서…… 녹작지근한 온기가 건너 온다. 대체 뭐지, 이 사람.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구마 녀석의 황금빛 털을 바라보고 있자 그가 조금 떨어진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남은 캔 하나를 땄다. “괜찮으면 그거 마실 동안만 같이 있어요. 고구마도 헤어지기 섭섭한가 봐요.” 지금의 기분을 뭐라 정의 내려야 할까. 묘한 안도감과…… 반가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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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 그리고 민망함이 뒤섞여 입이 열리질 않았다. “그냥 앉아 있으면 돼요. 아, 이것도 먹어 봐요. 맛있어요.” 정말 이상한 사람. 아니, 이상한 건 그녀 자신인지도 모른다. 누 군지도 모를 남자에게 처음으로 옆자릴 내주고, 그가 건네는 과자 를 입에 대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오독. 짜지도 달지도 않은 담백한 치즈의 맛이 입안에 퍼졌다. “……맛있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순간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그렇죠? 이렇게 커피랑 먹으면 딱 좋아요. 원래는 아메리카노 랑 먹어야 제맛인데…… 뭐 아쉬운 대로 캔커피도 나쁘진 않은 거 같아요.” “아…….” “더 먹고 싶으면 여기.” 당황함을 감추지도 못한 채 멀뚱히 바라보는 그녀에게 남자가 뭔가를 내밀었다. 작은 봉투였다. 딱히 더 먹고 싶은 건 아니었지 만 왜인지 시선이 절로 그리로 향했다. 그리고 발견한 것은……. 헬로 퍼피. 애견용. 치즈맛. “애견……용?” 유민은 침착하려 애쓰며 물었다. “네. 그런데 이건…….” “악! 미쳤어!” 남자의 대답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비명을 지르며 일어선 유민 은 저도 모르게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렸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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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미쳤어요? 지금 제정신이세요? 어떻게 사람한테 이런 걸 먹여 요? 제가 개예요? 무슨 이딴 사람이 다 있어?” “저, 저기 잠깐만…… 이건 그게 아니라…….” 정강이를 붙든 채 쩔쩔매던 남자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까이 오지 마요! 내가 미쳐 진짜!” “잠깐, 잠깐만요!” 후다닥 돌아서려는 찰나, 남자는 잽싸게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그제야 제가 뭘 한 건지 깨달은 유민이 멈칫 놀라며 남자를 바라 봤다. 세상에, 아무리 기가 막히고 눈이 뒤집혔어도 그렇지. 처음 보는 사람을 발로 차다니. 대체 무슨 짓을 해 버린 거야! 하지만 남자는 화를 내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를 바라보며 싱 긋 웃어 보이더니 한 손으로 목에 걸고 있던 머플러를 스르륵 풀 어냈다. 그의 온기를 품은 머플러는 천천히 그녀의 야윈 목을 감 싸 왔다. 그의 손끝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스친 순간, 잠시 흠 칫하며 어깨를 움츠렸던 그녀는 혼란스러운 눈을 들어 그를 바라 봤다. “빌려 주는 거니까 다음에 만나면 꼭 줘요.” “…….” “나도 이 동네 사니까.” 대체 여기선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여전히 저를 향한 미소를 보고서도 그녀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 다. 도무지 이 남자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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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했어, 고구마.” 후다닥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던 남자가 그 자리에 쭈그려 앉으 며 개를 끌어안았다. 정신없이 부비고 쓰다듬으며 한동안 기쁨을 감추지 못하던 그는 잠시 후, 고구마의 머리통을 붙잡고 중얼거렸 다. “너도 매일 봤잖아. 가까이서 보니까 더 예쁘다. 그치?” 고구마는 말이 없었다. 젖은 콧등을 남자의 얼굴에 댄 채 끙끙 댈 뿐. “그래. 맞아, 그 사람. 네가 잘 봤어.” 하지만 남자는 대답이라도 들은 듯 아주 행복한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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