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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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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백치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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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알아서 찾아오는 인연

…52

3장. 더 이상은 사절이다

…96

4장. 성장 그리고 변화

…122

5장. 당사자와는 상관없이 일은 진행된다

…157

6장. 원치 않은 만남

…167

7장. 첫 만남 그리고 계약

…214

8장. 준비, 미묘한 변화

…250

9장. 축제

…308

10장. 연회

…346

11장.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379

12장. 율리어스 황제

…422

13장. 적응은 빠르고 판단은 정확하게

…432

14장. 작당모의

…482

15장. 국혼 그리고 즉위식

…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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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초등학교 3학년. 그러니까 10살 때 아이큐 테스트 후 세계 순위권 에 당당하게 드는 강호그룹에 입양되어 후계자가 되었다. 보통 후계 자를 양성하려면 사내아이를 입양해야 했지만 열댓 명의 아이들 중 에서 행운인지 불행인지 내가 선택됐다. 물론, 지금이야 그 빌어먹을 이유를 알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 고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된 현실로 인해 꿈에 부풀었었다. 비서라 는 사람과 같이 고급 차를 타고 서울로 갈 때까지만 해도 마냥 행복 할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 행복이 깨진 건 강호그룹 회장님, 내게 양할아버지가 되는 그 사람을 만나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결코 나를 사랑 할 눈빛이 아니었다. 아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고 해야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어린 내가 소름이 돋을 만큼 검은색 눈동자에서는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결코 가족으로 받아들인 어린 여자아이에게 보 낼 눈빛이 아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사람은 절대 내게 애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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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사람이 아니라고. 그래서 기대는 버렸다. 미련도 깔끔하게 버리고, 애정도 갈구하지 않았고 그저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버티기 로 했었다. 고아로 돌아가 눈치 보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공부조 차 할 수 없는 것보다는 이게 백배는 더 나았으니까.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싶으면 그곳 을 떠날 생각이었다. 한마디로 야무진 꿈이었지만. 지금에야 돌이켜 보면 그저 허무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하루아침에 대박 인생이 펼쳐 진 것 같아 나름대로 좋았다. 아무리 삭막해도 고아보다는 좋은 환경이지 않은가. 두렵다고 놓 치는 것보다는 기회가 왔을 때 어떻게든 기회를 잡는 게 우선이었기 에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물론 마다한다고 놓아줄 인간들도 아니지 만. 어쨌든, 나는 3개월간의 철저한 교육을 거쳐 강호그룹 진짜 후계 자인 회장의 친손녀를 대신해 그녀의 대용품으로 초등학교에 들어 갔다. 멍청하게 사진을 보고서도 눈치를 못 챘다니. 생각할수록 멍 청했다. 왜 내가 선택됐는지 깨달았어야 했는데. 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세 사람이 있다고 하던가. 한국 사람에게서 도 보기 힘든 순수하게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새하얀 피부는 눈 매와 입술, 귀 모양만 다를 뿐 판박이라 할 정도로 나와 그녀는 닮아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단지 그녀가 죽어 그녀와 닮은 나를 입양했 다고만 생각했지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 지 못했다. 멍청하기는 했지만 그때 당시에는 다른 생각을 할 정신이 없을 정 도로 바뀐 환경에 적응하기에도 빠듯했으니까. 공부는 항상 일등을 놓쳐서는 안 되고 집에 돌아오고도 후계자로서 다양한 지식과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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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련한다는 목적으로 검술과 체술을 모두 익혀야 했다. 초등학생이 감당하기에는 한마디로 살인적인 스케줄이었지만 단 한 번도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없었다. 아니, 불평을 해서는 안 되기 에 죽을 각오로 덤벼든 것이다. 그렇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까지. 완벽을 기하는 회장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졸업을 하고도 일 년간 경영, 경제학 박사 학위까지 따고 낙하산이니 뭐니 개소리까지 감내 해 가면서 강호그룹 젊은 이사 자리에 앉아 후계자로서 절차를 밟아 갔다. 그렇게 또다시 7년. 여자라고 무시하던 이들이 모두 나를 후계자 로서 당당하게 인정했을 때 회장님이 쓰러지며 일은 틀어졌다. 아 니, 이미 예정되어 있던 일이라고 해야겠지만 생각할수록 황당하고 그보다 더 씁쓸하다. 임종을 앞두고 회장이 한 유언은 친손녀에게 모든 것을 넘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나와 닮은 얼굴을 한 친손녀가 나타났다. 누군 먹고 사느라고 바빠 연애는커녕 친구조 차 못 사귀었는데 그녀는 번듯한 약혼자까지 데리고 왔다. 그때 나를 보면서 오만하게 비웃는 꼴이라니. 확 그냥 한 대 패 주 고 오는 건데. 그때는 그럴 정신도 없었거니와 그녀를 보며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부드럽게 미소 짓던 회장의 얼굴이 잊을 수가 없을 정도로 충격이었다. 내게는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는 얼굴이었으니까. 솔직히 이 사 자리까지 맡기기에 내심 기대도 했었다. 사람의 심리라는 게 그 렇지 않은가. 아무리 매정한 사람이라 하나 말 한 번 거스르지 않고 열심히 하면 키운 정이 있어서라도 언젠가는 보답을 받으리라 기대 를 품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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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비참하게도 내게 돌아온 건 고등학교 졸업 후 선물로 받았 던 작은 오피스텔이 전부였다. 평소 적이 많았던 회장은 손녀를 보 호하기 위해 외국에서 공부시키며 성인이 된 후에는 뉴욕지사를 맡 겨 실력을 키워 온 것이다. 그러면서 틈틈이 가서 만났고. 그러는 동안 나는 그녀를 대신해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몇 번의 납치를 경험하기도 했다. 물론, 그 외에도 자잘한 습격은 말할 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그녀를 대신할 소모품으로 나를 데려온 것이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또 다른 머리 좋은 아이를 데려와 성형을 시켜 서라도 친손녀로 위장했을 테다.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고 버림받은 고아는 차고 넘치니까.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내가 끝까지 살아남자 회장도 난감했을 것이다. 그 래서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했을 테고. 솔직히 내가 있어 봐야 그녀 에게는 위협만 됐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고는 뭐 회장이 원하는 대로 죽었다. 유언을 듣고 허탈한 마 음으로 오피스텔로 돌아가 양주를 마신 게 화근이었다. 빌어먹을 영 감탱이가 술에 독을 탔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미 뒤처리 까지 계획을 세워 둔 것이다. 젠장, 빌어먹을 영감탱이. 죽이려면 깔끔하게 죽일 것이지 치사하게 독이 뭐야, 독이. 보나 마나 내가 죽고 난 후 후계자에서 밀려나 자살한 거라고 몰아가겠 지. 그 외에도 유서와 정황증거들까지 잔뜩 만들어 놨을 테고. 철두 철미한 인간이 그 정도도 안 해 놨을까. 유일한 핏줄인 자기 손녀 외에는 인간 취급도 안 하는 인간인데. 뭐 어찌 됐든 인생 한번 바꿔서 살아 보겠다고 뼈 빠지게 노력한 결과 멍청하게 뒤통수만 맞고 그렇게 33세의 나이로 허무하게 죽 었다. 스케줄에 치여 흔한 친구 하나 사귀어 보지 못하고, 좋아하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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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도 제대로 그려 보지 못한 채 남정네 손 한 번 잡아 보지 못한 모 태솔로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럼 깔끔하게 인생 끝난 거 아닌가?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거참, 황당하군.” 자고 일어나자 신세계라더니. 죽었던 내가 왜 살아 있으며 거울 속에 있는 저 여자는 누구야? 설마, 그게 독이 아니라 정신이나 시 력에 문제를 일으키는 약이었나? 아니라면 거울에 비치는 저 소녀 는 누구란 말인지. 나와 닮기는 했지만 내가 이렇게 예쁘고 어릴 리가 없다. 게다가 살짝만 만져도 자국이 생길 것 같은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붉고 도 톰한 입술.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아시아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완벽한 검은색이다. 원래 내 머리색보다 더 진한 느낌? 그런 데다 머리카락이 허벅지 까지 내려온다. 문제는 아무리 봐도 이 몸이 내 몸인 것 같단 말이 지. 안 그러면 볼을 꼬집었는데 이렇게 아플 리가 없잖은가. 도무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정신은 33세 강한서인데 몸은 생전 처음 보는 소녀라. 게다가 방 의 구조나 가구가 마치 중세시대를 보는 듯하다. 설마 내가 중세시 대에 뚝 떨어진 건 아닐 테고 이게 말로만 듣던 판타지 빙의 뭐 그런 건가? 하지만 황당하기는 마찬가지 같은데. 현대인에게 판타지가 존재하는지를 묻는다면 백이면 백 허상이라 할 것이다. 먹고살기 바쁜 현실에 판타지라니. 신도 안 믿는 마당에 믿을 걸 믿으라고 해야지. 말도 안 되는 건 고사하고 고작해야 인간 의 두뇌에서 나온 공상을 글로써 표현하는 영화나 소설일 뿐이지 않 은가. 33년을 살아오면서 경영, 경제 관련 서적을 비롯해 위인전, 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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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추리 소설, 다큐, 동화까지 다양한 글을 읽었지만 흔한 로맨 스나 판타지 소설을 읽어 본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더불어 드라마조차도 좋아하지 않는다. 애초에 허무맹랑한 걸 믿는 성격도 아니고 그런 일에 허비할 만큼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다. 꽉 찬 스케줄에 새벽 5시면 기상해서 1시간 30분 동안 운동하고 샤워 후 신문 보면서 식사. 그러고는 곧 바로 회사로 출근해 서류에 파묻히거나 바이어를 만난다. 그렇게 하루 종일 일하다가 보통 7시에 퇴근하면 식사 후 다시 운 동, 샤워하고 뉴스 보면 그제야 잠자리에 든다. 그게 초등학교 3학 년 때부터 꾸준하게 해 온 일상으로, 정해진 틀에서 벗어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릴 때 가끔 납치당했을 때를 빼고는.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려 해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보통 죽으면 끝이 아닌가? 사후세계니 저승이니 해도 믿을 근거도 없고 그런 곳에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죽으면 끝일 줄 알았지. 그런데 허무하게 죽고 깨어났더니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상한 곳 에 온 걸로도 모자라 이상한 소녀가 됐다. 그리고 나는 지금 30분이 넘게 거울 앞에서 나름대로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이럴 줄 알았으 면 여직원들이 추천할 때 판타지 소설 같은 것도 읽어 볼 것을. 이게 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때문이다. 썩을. 그렇게 죽을 줄 알았 으면 한바탕 속 시원하게 퍼붓기나 해 볼 것을. 멍청하게 당하기만 했다는 생각에 빠득 이를 갈 때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려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 언제 일어나셨어요?” 일어나기야 아까 일어났다만 누구신지. 왠지 그리 물으면 바보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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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것 같아 상대를 품평하듯 재빨리 차림새를 스캔했다. 높임말을 사용한다는 건 일하는 고용인인가. 그럼 내 아랫사람이겠군. “방금.” “아, 그러…… 헉! 아, 아가씨 지금 말씀 하셨어요?” 뭐지? 입이 있으니 말을 하는 게 당연하건만 그게 그렇게 이상한 가? 뭘 저렇게 경악해? “아가씨! 지금 진짜 말씀하신 거죠?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죠?” “문제 있나?” “세, 세상에. 아, 아가씨가 말을!” 그러니까 그게 뭐 어쨌다고? 사람이 말하는 게 뭐가 이상하다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궁금증이나 풀자는 생각에 가까이 다가가자, 뭐냐? 왜 저렇게 떠는 거지? 좀 차가워 보이기는 해도 굉 장히 예쁜 얼굴이던데. 설마, 이 얼굴로 사람이라도 죽였나? “저기, 이봐.” “꺄악!” 아니, 저기 사정은 몰라도 해칠 생각은 없습니다만. 미처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눈을 하얗게 까뒤집고 기절하는 여자를 보며 할 말을 잃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좀 삭막해도 나쁜 사람은 아닌데. 거참, 이래서야 물어볼 수도 없고. 뭐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 에.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33세 강한서가 죽은 건 확 실하다. 살아 있다면 지금 이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 “배고파.” 이왕이면 밥은 주고 기절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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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백치공녀

고픈 배를 감싸 쥐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기절했던 여자가 벌떡 일어나자마자 나를 보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쳐나가려는 걸 재빨 리 뒷덜미를 잡아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더듬더듬 들은 사정은 대 충 이러했다. 이곳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데바 대륙의 크게는 세 개의 제국 중 가장 강대국에 속한 바이에르 제국이라 한다. 그리고 문제의 이 저택은 바이에르 제국의 세 개의 공작가 중 하나인 그란디아 공작가 였다. 여기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마법도 있고 황족이니 귀족이니 노예 까지 있는 신분계급이 판을 치는 세상이지만 어차피 죽은 마당에 되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비참한 노예보다는 공작가의 공녀라면 확실히 좋은 위치였다. 다만 문제라면. “백치 공녀란 말이지?” “예? 아,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네요.” 골치 아프군. 백치라니. 그것도 문제지만 내가 아니, 공녀의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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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그렇게 좋지만은 않은 게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별채로 본채와 는 동떨어진 곳이란다. 쉽게 말해 아버지인 공작한테 버림받은 상태 라는 말이다. 물론, 그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버림받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어머니인 공작부인이 약한 몸으로 공녀를 낳고 죽은 이후로 공작과 위의 두 오라버니는 공녀를 달가워하지 않았단다. 공 작부인을 죽게 했다 이거겠지. 별 시답잖은 소리는. 어쨌든, 공녀에게 살갑게 굴지도 않고 그럭 저럭 세 살 때까지 본채에서 살았지만 공녀의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걸 알고 미련 없이 유모를 딸려 별채로 보내 버렸다. 그 유모라는 게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고. 그런 후에 한 달에 한 번씩 와서 보고 가고는 했지만 그것도 12살 이후부터는 그 발길도 뚝 끊겨 버렸다고 한다. 현재 15살인 공녀는 지난 3년간 가족의 얼굴도 못 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과연 가족 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지.” “예?” “아니다. 그보다 이곳에 몇 명이나 있지?” “저하고 마리나, 주방에 있는 발론뿐입니다.” 고작 세 명이라고? 젠장. 귀족가 별채라면 제법 규모가 있을 텐데 고작 세 명을 붙여 놓다니. 빌어먹을 영감탱이나 공작이나 매정하긴 마찬가지군. “그런데 유모 이름은 뭐지?” “르네라고 불러 주세요.” 르네, 마리나, 발론. 세 사람이란 말이지. 그럼 얼굴부터 익혀야겠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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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두 사람부터 데려와. 본채에는 절대 가지 말고. 아, 그리고 올 때 먹을 것도 가져와.” “예, 잠시만 기다리세요.” 르네가 나가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대충 상 황정리나 해 보고 싶었는데 이놈의 방구석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 긴, 백치가 공부를 했을 리도 없으니 당연한가. 어째 앞날이 캄캄한 것이 필요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군. 그런데 생활비는 주겠지? 아무리 버린 자식이라도 설마하니 굶기 기야 할까. 뭐 백치라고 해도 혈색은 좋은 걸 보면 잘 먹긴 한 것 같 은데. 일단 그 문제는 르네가 오면 물어보고. 찾아 봐야 흔한 펜 하 나 보이지 않아 결국 포기하고 소파에 앉아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 기 시작했다. “15살의 공녀라.” 거기다 백치로 세 살 이후로는 이곳을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 다. 배운 것도 당연히 없었을 테고. 가만, 그러고 보니 생전 처음 듣 는 언어인데도 자연스럽게 르네와 대화가 됐잖아? 그럼 대화에는 문제가 없다는 말인데. 대화가 가능하다면 글도 읽을 수 있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편하 기는 하겠지만 일단 그 문제는 책을 구해 알아보도록 하고. 가만 보 아하니 일상적인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을 거 같지만 이대로 백치로 생활하다가는 평생 이곳에 갇혀 지낼 수도 있다. 솔직히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평균 삶보다 훨씬 짧은 인생이라 해도 10살 때부터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렸으니까 이제는 쉬고 싶은 마음도 들고. 다시 그런 삭막한 인생을 사느니 이곳에서 편하게 지 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뭐 외롭기야 하겠지만 어차피 혼자였지 않은가. 이제 와서 가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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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을 갈구할 것도 아니라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다. 문제는 과연 늙어 죽을 때까지 편하게 지낼 수 있느냐이다. 과연 공작이 버린 자 식을 위해 그렇게까지 책임을 지려고 할까? “아니겠지.” 또 공작이라면 귀족 중에서도 가장 높은 직위일 텐데 그것만으로 도 삶이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을 위해서라도 살 궁리를 해야 한다는 말인데. 정말이지 돌아 버리겠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이게 뭐냐고. 황당한 상황은 그렇다 치고 내가 아는 게 있어야 뭘 하지. 아무리 사람 사는 모습이야 거기서 거기라지만 현대 세계와 이곳은 다를 게 뻔하고 만약 중세시대를 기준으로 한다면 여자의 인권문제도 최악 을 염두에 둬야 한다. 과연 내 성질에 고스란히 당하고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먹고살 궁리를 해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러자면 최우선으로 이곳의 풍습이나 예절, 법부터 알아내는 게 우선이다. 또한 글을 읽 을 수 있는지도 알아야겠고. 또 몸도 단련해야 한다. 아무래도 이 얼굴은 위험할 것 같거든. 평 소 하던 대로 검술과 체술을 같이 단련하면 최소한 내 한 몸은 지키 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잡다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노크 소리 가 들리고 세 사람이 들어왔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르네와 20대 초반에 귀여운 인상의 마리 나, 푸근한 동네 아저씨 같은 발론. 이렇게 세 사람이 내 유일한 식 구란 말이지. 뭐 인상은 일단 합격인데. 탈색한 듯한 금발에 조금 어 두운 오렌지와 진한 녹색 머리카락이라니. 거참 다양하네. “아가씨, 식사부터 하시겠어요?” “응. 세 사람은 먹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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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 저희는 먹었습니다.” “그래? 그럼 다들 앉아서 기다려. 너무 그렇게들 놀라지 말고.” 백치가 하루아침에 멀쩡해졌으니 경악할 만도 하다. 이해 못 할 것도 없고 하얗게 질린 두 사람을 보니 르네처럼 기절이라도 할 것 같아 최대한 상냥하게 말한 후에 테이블 위에 차려진, 요리라고 불 러야 할지는 약간 의문이 드는 음식을 먹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약간 싱겁기는 해도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스 튜와 샐러드, 고기를 편육처럼 썰어 양념에 절여 놓은 게 전부지만 그릇을 깨끗이 비운 후에 만족스럽게 배를 쓰다듬으며 세 사람을 돌 아봤다. “르네에게 대충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한 번 말할 테니 내 말 잘 듣고 명심해라. 우선 내가 백치에서 깨어난 사실은 다 른 사람에게는 절대 비밀이다.” “하지만 아가씨, 공작님께는 말씀을 드려야죠?” 아니, 완벽하게 적응하고 살 궁리를 해 놓기 전에는 안 되지.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자칫 나를 이용하기라도 하면 골치만 아프다. 계 급이 사라진 현대에도 엄연히 특권층이 있고 그런 환경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이용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곳이라고 다를까. 뚜렷한 계급이 존재하는 이곳은 더 심 했으면 심하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버린 자식이니 어쩌면 당연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고. 그러니 섣불리 설칠 게 아니라 나 자신부터 건사할 수 있어야 한 다. 물론 그사이에 들통 나면 어쩔 수 없겠지만. 3년이나 방치했다 면 갑작스럽게 찾아오지는 않겠지.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버린 자식이 백치가 아니라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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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쯧, 말을 못 하는 걸 보니 공녀가 이 집안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알겠다. 하긴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라 상관없다. 사실 이게 더 편하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있고. 본채에는 누가 사는 거지?” “공작님하고 공작부인, 세 분 공자님과 작은 아가씨, 그리고 고용 인들과 기사분들이 계십니다.” “공작부인?” “아, 그게 그러니까 전 마님이 돌아가시고 일 년 후에 포엥마 후 작가 영애와 결혼하셔서 지금 공작부인으로 계세요.” 뭐야. 전 공작부인을 사랑해서 공녀를 배척했다더니 고작 일 년 만에 재혼을 했단 말이야? 그래 놓고 친자식까지 버리고? 재수 없는 인간들이네. “그럼 현 공작부인이 낳은 자식은?” “아가씨 밑으로 마르센 도련님이 올해 13살이고, 헤스티아 아가 씨가 12살입니다.” 중간에 낀 내가 15살에 위로 전 공작부인의 자식이자 공녀의 친 오라버니 둘이 더 있단 말이군. 그리고 자기들끼리 좋은 환경에서 잘 지내고 있고 공녀만 동떨어져 있는 상황이고. “저, 아가씨? 그러지 말고 공작님께 말씀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 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사교계 데뷔를 하셔야지요?” “사교계 데뷔?” “예. 보통 12살이면 사교계에 데뷔를 하세요. 올해 작은 아가씨도 공작가에서 연회를 열어 데뷔를 하기로 했고 아마 공작님이 아시면 아가씨를 위한 연회도 열어 주실 겁니다.” 글쎄. 과연 그럴까? 지금까지 버려 놓고 이제 와서 이것저것 살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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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챙겨 줄 인간들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럴 인간들이었으면 애초에 모자란 자식을 버리지도 않았겠지. 무엇보다 사교계라. 지긋지긋해 서 싫다. “그건 됐고. 공작가에서 매달 생활비는 주겠지?” “예. 식재료에 들어가는 것과 저희 월급을 빼고 아가씨 앞으로 금 화 10개씩 나옵니다.” “금화? 그게 어느 정도인데. 아니, 본채에 있는 작은 아가씨는 얼 마 정도 받아?” “그건…… 잘은 모르겠는데 금화 50개는 기본으로 가는 것 같습 니다. 그 외에도 부수로 많이 들어가는 것 같지만 잘은 모르겠습니 다.” 그러니까 내게는 금화 10개. 작은딸에게는 금화 50개에 자잘하게 필요한 보석이나 선물, 드레스 등을 준다는 말인가. 거참 대놓고 차 별대우하네. “그래서 내게 지금 금화가 있기는 해?” “예. 아가씨는 쓰시는 데가 없어서 지금껏 나온 금화는 모두 모아 놓고 있습니다.” 그건 잘됐다. 세 살 때부터 지금까지 모았다면 제법 될 거 아니 야? 가만, 여기도 달수가 일 년 열두 달인가? “여긴 일 년을 어떻게 구분하지? 계절은 어떻고?” “계절은 사계절로, 삼 개월씩 나눠 생명의 달, 빛의 달, 수확의 달, 안식의 달입니다. 그렇게 해서 열두 달이지요.” 그건 똑같네. 생명이니 빛이니 이런 건 엉뚱하지만. 그럼 일단 자 금은 제법 된다는 건데. 문제는 여기 물가가 어떻게 되는지 모른다 는 것이다. 설마 금화 하나로 제대로 된 물건도 못 사는 건 아니겠 지? 아무래도 그것도 알아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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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리에 책 좀 사와. 제국의 역사와 풍습, 예절, 습관, 법도, 지 리, 기본 상식, 물가나 시세를 알 수 있는 걸로 구해 오고 글을 쓸 수 있게 종이와 펜도 필요하다.” “저기, 글을 읽으실 수 있으세요?” 그야 모르니까 확인을 해 봐야지. 읽을 수 있으면 좋고 못 읽으면 또 한동안은 공부에 매달려야지 별수 있나. 지겨워라. “일단 확인하게 구해 와. 얼마 정도 주면 되는 거지?” “은화 두 개로도 충분히 사고도 남습니다, 아가씨.” 그렇군. 그런 걸 보면 지금 가진 금화로도 충분한 자금이 된다는 건데. 아무리 그래도 집을 사거나 장사를 하기는 적은 금액인 것 같 고 뭔가 돈벌이부터 찾아봐야겠다. 그러자면 일단 공부부터. “르네, 은화 있으면 꺼내 주고 마리나하고 발론이 같이 다녀와. 만약 본채 사람을 만나더라도 절대 비밀인 건 알지?” “예, 아가씨.” “비밀 지키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굳이 비장한 얼굴까지는 할 필요가 없는데.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간직한 듯 굳은 얼굴로 나가는 두 사람을 보고 피식 웃 었다. 르네도 그렇고 두 사람도 순박해 보이는 게 고용인들은 괜찮 은 것 같다. “저기, 아가씨. 진짜 우리 아가씨가 맞으세요?” 아니, 가짜 아가씨야. 하지만 앞으로는 진짜 아가씨가 될 생각이 거든. 이번 생에서만큼은 남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혼자 개척해 나가 려고 마음먹었으니까. 물론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리된 거 당당하게 부딪혀 볼 수밖에. “응. 맞아. 왜, 많이 이상해?” “아닙니다, 아가씨. 전 아가씨가 무사히 깨어나신 것만으로도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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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걸요. 그리고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멋지세요.” 뭔 소리야? 고작해야 15살 아가씨가 멋져 봤자 거기서 거기지. 뭘 그렇게 반짝반짝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건지. 여기서 몸까지 단련한 다고 하면 난리 날 것 같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마라, 부담스럽다. 그보다 가장 중요한 걸 안 물었네.” “중요한 거라뇨?” “내 이름. 뭐지?”

마리나와 발론이 양팔에 잔뜩 들고 온 다양한 책과 필기도구를 받 아 들고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그날 저녁 늦게까지 다 읽어 본 결과 알게 된 점은 이곳을 판타지 세계로 분류하는 게 맞지만 발달 면에 서는 지구의 역사인 중세시대 초기와 비슷하다는 점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판타지와 중세의 세계관이 섞였다고나 할까. 건 축양식이나 사용하는 물품, 풍습 등이 비슷한 점이 많았고, 지구와 마찬가지로 각 관할 영지를 관리하는 귀족 아래 어부를 생업으로 하 는 선원이나 평민들로 이루어진 자영농, 노예인 농노가 있으며 쌀이 나 수수 등 곡물도 있는 것 같다. 또한 사계절이 뚜렷하고 3개월로 구분 지어 생명, 빛, 수확, 안식 의 달로 나뉘어져 있으며 매 계절이 바뀔 때마다 3일간 축제가 벌어 진다. 또 모양은 각각 달라도 시계와 같은 쓰임인 은빛 모래시계가 있으며 시간관념은 하루 12시간이다. 즉 지구의 두 시간이 이곳에서는 한 시간이라는 말이다. 또 황권 통치를 기반으로 황족, 귀족, 기사, 평민, 천민, 노예 계급이 있고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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