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

■ 왕도 제 1 권 -차례━━━━━━━━━━━━━━━━━━━━━━━━━━━━━━━━━━━ - 차 례 서막(序幕) 제 1 장 유성(流星)의 장(章) 제 2 장 무너지는 제왕성(帝王城) 제 3 장 탄생과 종말의 장(章) 제 4 장 낙양입성(洛陽入城) 제 5 장 뜻밖의 정사(情事) 제 6 장 한밤의 초혼객(招魂客) 제 7 장 십절공자(十絶公子) 제 8 장 난세무림(亂世武林) 제 9 장 영악한 소녀 소설(小雪) ■ 왕도 서막(序幕) ━━━━━━━━━━━━━━━━━━━━━━━━━━━━━━━━━━━ ①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름대로의 욕망(慾望)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크 고 작은 욕망들.... 만일 그 욕망이 없다면 인간의 발전은 훨씬 늦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욕망이 문제될 것은 없지 않은가? 아니다. 욕망도 욕망 나름이다. 게다가 그칠 줄 모르고 만 족할 줄 모르는 끝없는 탐욕으로 인해 어떤 인간들은 스스로를 망치는 줄도 모르고 지옥으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림인(武林人)들은 어떠한가? 일반인들과 다른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그들은 어떤 욕망을 품고 있을까? 아마도... 수많은 무림인들이 공통으로 품고 있는 욕망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뉘라서 천하제일인이 되고 싶지 않겠는가? 그들은 검날 위에 목숨을 걸고 사는 자들이다. 피비린내 나는 삶 속에서 때로는 명예를 위해, 또는 의 리를 위해, 또는 복수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던지는 그들에게 공통적인 욕망이 있다면, 바로 이것 이 아닐까! -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영세제일(永世第一)의 고수(高手)가 되리라......!


어쩌면 바로 그 찬란한 명예를 위해 수천 년의 무림혈사(武林血史)가 쓰여졌는지도 모르리라. 그렇다면 과연 역대무림에서 몇 명이나 천하제일인의 보좌에 올랐을까? 전 무림인들이 그토록 숙원하 던 무적인의 자리에 오른 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무림왕(武林王) 남궁후(南宮侯). 감히 누가 함부로 그의 이름을 입 밖에 올리겠는가? 남궁후는 고금을 통털어 가장 강한 무인으로 인구에 회자(膾炙)되어 온다. 그는 무림의 신(神)이요, 제 왕(帝王)으로 군림해왔다. 그런 그는 자신의 명성에 걸맞게 불멸의 단체를 세웠으니. <제왕천(帝王天)> 바로 하늘 아래 가장 위대하다는 무림의 집대성을 이룩했었다. 제왕천이야말로 무림개사 이래로 가장 강하며, 완벽한 힘의 상징이 되어 무림의 하늘로 군림해 왔다. - 제왕천에 속한 자라면 설사 마굿간 하인일지라도 능히 강호(江湖)의 일급무사로 손색이 없을 정도 로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 이런 풍문이 떠돌 정도였으므로 제왕천의 위력이란 어떨지는 가히 거론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제왕천은 힘과 패(覇)의 상징이요, 절대권력의 상징이었다. 정(正)과 사(邪)는 물론이고 녹림(綠林)과 변황세력(邊荒勢力)까지도 제왕천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 을 수 없었다. 제왕번(帝王幡)이 현신하면 하늘 아래 어느 문파를 막론하고 대문을 활짝 열어 맞아들여야 했으며 장 문지존(掌門至尊)이나 전대의 고인들까지도 제왕인(帝王印)의 명을 기꺼이 받들 정도였다. 무림왕 남궁후, 그는 제왕천을 세운 창시자요, 곧 무림인의 제왕이었다. 소년무인들은 검을 생명처럼 여기며 미래를 위해 피땀을 흘리며 무공을 연마한다. 그들에게는 밤과 낮이 없다. 오로지 지상 최고의 고수(高手)가 되기 위해 불철주야 사문의 비학을 연 마하는 것이 그들의 꿈이요, 목표일 것이다. 그들이 청년이 되었을 때, 그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야망의 빛으로 이글거린다. 그러나 그들은 곧 거대 한 벽에 부딪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목표로 하는 무림의 하늘에는 이미 제왕천이란 눈부신 태양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 나는 무림왕(武林王)을 꺾을 수 없다. 그러려면 차라리 내 검을 꺾는 것이 것이다. 그가 있는 한 내가 오를 하늘은 없다!

빠를

쓰라린 통한과 절망이 그들을 휘청거리게 해왔다. 제왕천이 무너지지 않는 한, 무림왕이 죽지 않는 한 그 어디에서도 야망을 펼 곳은 없는 것이다. 푸르른 창공을 누비고 싶은 새에게 날아오를 하늘이 없다는 것보다 더한 절망이 어디 있으랴! 제왕천! 과연 그 존재는 영원불멸이란 말인가? ② 오늘날의 제왕천과 무림왕(武林王)이 탄생하기까지에는 신화가 있었다. 무림왕 남궁후에게는 다섯 명의 사부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백 년 전 석권했던 천하제일의 기인들이었다.

무림을

천치옹(天痴翁). 음양환사(陰陽幻邪). 검왕(劍王). 벽력뇌신제(霹靂雷神帝). 불사불생인(不死不生人). 무림은 그들 오 인을 일컬어 우내오천(宇內五天)이라 불렀다. 그만큼 각 방면에서 그들의 힘은 지고무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각자가 걷는 길이 틀렸다. 정과 사, 혹은 정사지간(正邪之間)에 이르기까지... 당시 그들은 물과 기름처럼 합쳐질 수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이 거짓말처럼 손을 잡았다. 그들은 단 한명의 절대자(絶對者)를 탄생시키기 위 해 개인의 야심과 행도를 꺾고 뭉친 것이다. 그 절대자가 바로 오늘날의 무림왕 남궁후였다. 그러나 남궁후는 그들을 사부라 부르지 않았다. 우내오천도 남궁후를 제자로 생각지 않았다. 왜냐하면 남궁후는 그들의 제자가 아닌, 고금무림을 통한 영원한 제일인자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뜻대로 공동으로 키운 무기명 제자인 남궁후는 무림의 제왕이 되었다. 그들에게 무공을 익히고 출도한 지 불과 십 년만에 그는 무림왕이 되었으며 사상초강의 제왕천(帝王天)을 연 것이다.


그런데 어찌 알았으랴? 소문에 의하면 남궁후가 자신의 다섯 스승을 시해했다고 전해진다. 그 풍문을 확인할 길은 없었다. 다 만 일각에서 그런 소문이 은밀히 퍼졌을 뿐, 모든 것은 제왕천 신화의 일부에 파묻혀 버렸다. 두번째 신화는 다음과 같았다. - 무림왕 남궁후의 손바닥에는 왕(王)자의 손금이 새겨져 있다. - 그 손금은 남궁후 스스로가 칼로 파서 새긴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남궁후는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만들려 했단 말인가? 인간이 정해진 운명을 따르지 않고 신의 법칙을 위배해가면서까지 운명을 만들다니...! 가히 경악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세번째 신화. 그것은 무림이 오늘날과 같이 형성되기도 전, 아득히 오래 전의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 무림에는 세 개의 하늘이 있어 각기 삼도(三道)를 이루리라. 마도천(魔道天), 패도천(覇道天), 왕도 천(王道天)이 그것이다. 언젠가 삼도천(三道天)이 동시대에 나타나리라! 그때가 되면 천하는 피에 젖고 무림은 대혈륜(大血輪)에 짓밟히리라! 가히 놀라운 예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대하와 같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공공연히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오면서 오늘 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세인들은 제왕천이 탄생했을 때 바로 그 전설을 떠올렸다. "제왕천은... 과연 마(魔)인가, 패(覇)인가, 아니면 왕(王)인가?" 그 의문은 오랫동안 무림을 동요케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의문에 대답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있다 면 그것은 오직 세월.... 세월만이 정확한 대답을 해줄 수 있으리라 믿을 뿐이었다. ③ 하남성(河南城) 복우산(伏牛山) 제인봉(帝人奉) 기슭. 이곳에는 사방 백여 리에 걸쳐 산봉을 둘러싼 채 천하를 굽어보며 거대한 성채가 자리하고 있다. <제왕천(帝王天)>


제왕천은 오늘도 변함없이 무림천하를 군림하며 제왕번(帝王幡)을 바람에 휘 날리고 있다. 마치 제왕천의 힘이 영세무적이라 위시하는 듯....

성루(城樓)에

높이

꽂힌

■ 왕도 1 권 제 1 장 유성(流星)의 장(章) ━━━━━━━━━━━━━━━━━━━━━━━━━━━━━━━━━━━ ① 검(劍)은 만병(萬兵)의 으뜸이다. 밤 늦은 시각. 방원 오십여 장(丈)에 달하는 지하석부(地下石府) 속에서 홀로 앉아 검을 닦는 자가 있었다. 스스슥... 삭....... 새하얀 명주천은 서슬이 푸르다 못해 투명한 검신을 닦고 있다. 검을 닦는 자의 시선에는 한 올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무심(無心), 그 자체였다. 검은 폭이 두 치, 길이가 넉 자가 넘는 장검(長劍)으로 손잡이에는 용신의 조각이 되어 있었다. 손잡 이는 종류를 알 수 없는 짐승의 뿔로 만들어진 듯 했는데 끝에는 용두(龍頭)가 역시 정교하게 장식되 어 있었는데 한 쌍의 용안(龍眼)에서는 각각 푸르고 붉은 빛이 발산되고 있었다. 스슷......! 검이 곧추 세워졌다. 그러자 검의 예기(銳氣)가 천공을 뚫을 듯 뻗어나갔다. "......." 검을 잡고 있는 인물은 일신에 금포를 걸친 육순(六旬) 가량의 노인이었다. 노인의 넓은 이마는 마치 대해(大海)를 보는 듯했고, 두 귀는 기이할 정도로 커 양뺨 아래까지 늘어져 있다. 또한 자색을 띠고 있는 눈썹은 봉황의 깃털인 양 웅후하게 관자놀이까지 뻗쳐 있었다. 우뚝한 콧날은 천하를 오시하는 듯했으며, 굳게 다물려진 입술은 마치 석화(石花)를 보는 듯 오만했 다. 그러나 가장 특이한 것은 그의 두 눈이었다. 노인의 눈은 무심 그 자체여서 아무런 빛도, 의중(意中)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눈 속에는 삼 라만상(森羅萬象)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하여 마주 대하는 이로 하여금 한없이 초라함을 느끼게 만들 었다. 츠츠......! 검극에서는 희뿌연 검기가 뻗어나와 오 장여 높이의 천장에 닿았다. 이어 환상적인 고리 형태를 이루 더니 사방을 온통 검기로 꽉 차게 만들었다. "으음......!"


노인은 신음을 흘렸다. "이 제왕검(帝王劍)을 잡은 지도 어언 오십 년......!" 노인의 음성은 중후했다. "그동안 중원은 물론 대막(大漠), 천축(天竺), 서장(西藏), 남만(南蠻), 동해(東海), 장백(長白) 등... 가 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노인의 눈빛이 문득 유현한 빛을 띠었다. "제왕검에는 비록 팔천의 피가 묻어있으나 그로 인해 백만(百萬)이 무릎을 꿇었다." 검끝이 황촉에 반사되어 더욱 눈부신 검광을 쏘아내고 있었다. "허허...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제왕검을 물려줄 후손이 없으니... 노부가 석양처럼 지고 나면 이 제왕검도 주인을 잃고 사라지고 말 것이 아닌가?" 우웅! 검이 운다. 검기는 용트림 하듯이 몸부림치며 석부를 꽉 채운다. 노인의 이마에서 환상같은 기(氣)가 유출되더니 그의 머리에 신비로운 테를 씌웠다. 놀랍게도 그것은 전설에서 말하는 등봉조극(騰峯造極)의 무학경지를 나타내는 현상이 아닌가? 그러나 더욱 놀라운 일은 바로 그 직후 일어났다. 투명하기만 하던 검신(劍身)에 서서히 글자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 패(覇) ... 처음에는 흐렸던 것이 차츰 선명하게 무늬를 지으며 나타났다. 패(覇)! 노인의 무심하기만 하던 눈에서 회한이 떠올랐다. 그는 검신에 나타난 글자를 바라보며 장탄식했다. "아...! 왕도(王道)를 이루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건만 고작 패도(覇道)에 머물렀단 말인가?" 전설에 의하면 제왕검은 천 년 전, 신장(神匠) 귀수옹(鬼手翁)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는 자신 의 영혼을 담아 제왕검에 왕도와 패도, 두 글귀를 새겨넣었다고 했다. 이후 그는 언젠가 제왕검의 주 인이 나타난다면 주인의 격에 따라 글자가 현신하리라는 예언을 남긴 것으로 유명했다. "결국... 나는 패도천(覇道天)에 머물 수밖에 없단 말인가?" 노인은 힘없이 검을 내렸다. 스스스......! 검기와 서기가 동시에 사라졌다. 노인도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검을 검집에 꽂고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언젠가... 이 검의 반대쪽에 왕도의 문형이 나타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가 곧 나의 후손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노인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제왕검을 들고 한쪽 석벽으로 걸어갔다. 탁! 노인은 검가에 제왕검을 걸었다. 그가 있는 지하석부의 사면 벽은 거의 서가(書架)로 메워져 있었다. 만약 세인이 그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보면 입을 벌리고 말 것이다. 꽂혀있는 수만 권에 달하는 책들은 모두 하나같이 무공비급(武功秘 )들이었던 것이다. 쿠르르릉...! 굉음과 함께 석벽이 갈라지며 통로가 나타났다. 금포노인은 그곳으로 사라졌다. 쿵! 석문이 닫혔다.

그곳에

② 밤은 천지를 암흑으로 감싸며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잠들게 한다. 그러나 복우산(伏牛山)의 한 산봉만 은 예외였다. 불야성(不夜城)! 당금 천하무림을 굽어보는 제왕천(帝王天)을 이루고 있는 이 대성채만은 밤이 되어도 불이 꺼지지 않 았다. 제왕성의 성채는 사방 백여 리에 달할 정도로 방대했다. 제왕천에 있는 고루거각(古樓巨閣)은 수효를 셀 수도 없을 정도였으며 크고 작은 성문(城門)만 해도 이십여 개에 달할 정도였다. 내성(內城)의 거대한 연무장(練武場). 지금 그곳에는 근 천여 명에 달하는 청년들이 밤을 잊은 채 무공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은 검을 놓은 채 넋을 잃고 야천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와아... 멋있다!"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는 청년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쏴아아......! 보라! 무수한 유성군(流星群)이 폭포수처럼 지상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잠시 잠깐이 아니었다. 청년들이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오래도록 유성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천기(天機)의 대기변(大奇變)이 일어나고 있었다. "우...! 이런 광경은 난생 처음일세!" "정말 멋지군......!" 청년들의 탄성은 더욱 높아져 갔다. 그들은 모두 백삼(白衫) 무복을 입고 있었으며 대부분 비슷한 나이 또래들이었다. 그들은 천하 각처에 서 선발되어 제왕천에 입문(入門)한 자들로, 오직 제왕천주의 눈에 들기 위해


밤낮으로 무공연마에 몸 을 던지고 있었다. 한편, 청년들뿐 아니라 제왕천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밤하늘의 장관에 넋을 잃은 채 시선을 붙잡아 매 고 있었다. "오오......! 대체 이게 무슨 현상이란 말인가!" 한 사람. 제인봉(帝人奉) 정상에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철탑(鐵塔) 위에서 천하를 굽어보듯 살고 있는 이 시대 최고의 거인도 같은 시각 시선을 밤하늘의 유성우를 향해 홀린 듯 고정시키고 있었다. 무림인들은 그가 기거하는 철탑을 제왕각(帝王閣)이라 부른다. 제왕각의 가장 높은 곳, 구층의 창문이 활짝 열려 있고 그곳에 금포노인이 유성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귀밑까지 처진 큰 귀와 자색의 눈썹을 가진 노인, 무림왕 남궁후는 만면에 경악의 빛을 띤 채 중얼거 리고 있었다. "오오...! 어쩌면... 전설에 말하는 은하대유성제(銀河大流星祭)가 도래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드디 어... 때가 왔단 말인가?" 은하대유성제(銀河大流星祭)! 그것은 오래 전부터 무림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었다. - 마도천(魔道天), 패도천(覇道天), 왕도천(王道天)이 은하계(銀河界)의 대유성군 (大流星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리라!

도래할

시기가

되면

남궁후는 자미를 부르르 떨며 부르짖었다. "마침내... 그때가 도래했단 말인가?" 문득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노부의 염원은... 끝장이란 말인가? 왕도를 이뤄 보겠다는 꿈은 헛된 것이었단 말인가?" 바로 이때였다. 어딘가에서 흥분에 들뜬 듯한 음성이 그의 귓전에 들려왔다. "주... 주공! 드디어... 영모(靈母)께서 태기(胎氣)를 보이셨습니다!" "그... 그게 정말인가! 의혼(醫魂)?" 남궁후는 환희하며 부르짖었다. "그렇습니다. 진맥해 본 결과 태기가 틀림없었습니다." "오오......!" 남궁후는 그 순간 천하를 얻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와아아......!" 멀리서 청년들의 함성이 아스라이 들려왔다. 남궁후는 주체할 수 없는 격동으로 몸을 떨며 말했다. "보이느냐? 저 유성군들이? 들리는가? 저 함성이?"


어디에선가 의혼의 흥분한 음성이 들렸다. "그... 그렇군요! 은하대유성제! 그렇다면 영모께서 잉태할 아기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남궁후의 안색이 갑자기 싸늘하게 변했다. "쉬잇... 조용히 못하겠느냐! 너는 십오 명의 아이가 사산(死産)된 것을 잊었단 말이냐?"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남궁후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전음으로 말했다. (노부가 후손을 얻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누구보다 네가 잘 알지 않느냐? 후손을 얻으려 마음에 도 없는 칠처팔첩(七妻八妾)을 두었다는 사실을......?) 그렇다. 제왕천주에게 십오 명이나 되는 부인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것도 하 나같이 절세미인들이었다. 항간에서는 그가 이렇게 많은 미인 아내를 거둔 것을 두고 호색하다느니 말들이 많았으나 아무도 감히 드러내놓고 비난하는 자는 없었다. "흐흐... 노부는 내자들이 잉태할 때마다 미친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백 일도 채 되지 않아 그녀들 은 모두 사산하고 말았다. 게다가 그 이후로 그녀들은 모두 불능이 되고 말았지." 한 점의 감정도 없이 뱉은 말이었으나 그 속에는 뼈에 사무친 한(恨)이 사무쳐 있는 듯했다.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으나 곧 깨닫게 되었지. 제왕천에 극도로 교활하고 잔랄한 첩자가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내자들에게 독을 먹여 사산시켰다는 사실까지도...." "......!" "후후... 놈들은 무섭도록 치밀한 수법으로 독을 썼으며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숨어 있다. 흐흐.... 그것은 노부조차도 본 천(天)의 정확한 인원과 조직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방대해졌기에... 발각되지 않고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의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파스슷! 제왕천주가 잡고 있던 철난간이 가루가 되어 흘러내렸다. 그 점으로 미루어 그가 얼마나 이를 갈며 격분하고 있는지 알만한 일이었다. "놈들은 노부의 대를 끊음으로써... 제왕천이 자연붕괴되기를 꾀하고 있지. 후후후... 허나 어림없는 일 이다. 이번만큼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화령(花靈)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귀신도 모를 것이다. 그 렇지 않느냐? 의혼?" 의혼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습니다. 영모가 계신 곳은 오직... 주공과 속하밖에 모르는 일이옵니다." 남궁후는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렇다. 이번에는 기필코 후사를 이으리라. 특히 이번 아이는 어쩌면...


왕재일지도 모른다. 전설의 은하대유성제와 동시에 태기를 보인 것이 그 징조가 아니겠느냐?" "무... 물론... 속하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남궁후는 문득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핫핫핫핫핫......!" "......?" 남궁후는 웃음을 뚝 그치더니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이번을 위해 노부는 천하 각처에서 희귀한 영약기초들을 모아 두었다. 너는 그것들을 화령에게 복용 시켜라. 그 영약의 힘이 태아에게 가게 되면... 어찌 불세기재(不世奇才)가 태어나지 않을소냐?" "......." 남궁후는 가슴을 폈다. "가라! 가서 화령을 호위해라. 매일 영약을 복용시켜야 한다. 화령의 음식은 모두 네가 주관해라. 절대 놈들에게 눈치채게 해서는 안된다!" "알겠습니다, 주공." "잠깐!" "......?" "무치(無痴)는 어떤가?" "변함없습니다." 의혼은 의아한 듯 대답했다. "허허, 불쌍한 놈. 하긴 녀석이 바보길래 안심하고 화령을 맡겨 두었지. 화령이 무사히 출산하기만 하 면 노부는 놈에게 진짜 아내를 붙여줄 셈이다." "......." "가거라, 앞으로 삼 일에 한번씩 보고하라." "예!" "......." 조용했다. 더 이상 하늘에서는 유성우가 쏟아져 내리지 않았다. 연무장에서 청년들의 함성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밤하늘을 바라보는 남궁후의 눈은 태양보다도 더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③ 주방은 제왕천에서 가장 후미진 곳이다. 그러나 이곳 주방은 자금성의 십만금군(十萬禁軍)의 음식을 장만하는 일만큼이나 그 규모가 방대했다. 그로 인해 주방에서 일하는 하인이나 하녀들의 수는 무척이나 많았다. 수옥(水玉). 그녀는 밤이나 낮이나 지저분한 앞치마를 두른 채 주방 일을 보는 평범한 여인이다. 더구나 그녀는 힘든 일에 시달려서인지 안색이 누렇게 떠있기까지 해 좀처럼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그녀는 모든 면에서 평범했다. 다만 요리 중에서 용봉청린탕(龍鳳淸鱗湯)을 잘 만든다는 것 정도가 그 녀를 아는 사람이 기억하는 전부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그녀의 모습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녀가 몸이 아프려니 했을 뿐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확인한 결과 그녀는 주방 뒤쪽에 있는 하인배들이 사는 방사에 틀어박 힌 채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주방 일을 보지 못하고 그때부터 늘 침상에 누워 있기만 했다. 그런 그녀의 곁에는 한 사나이가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안다. 그는 헤 벌어진 입에 떴는지 감았는지 모를 정도로 축 늘어진 눈까풀을 지니고 있는 바보 하인이었다. 무치(無痴). 그것이 그의 이름이다. 무치는 태어날 때부터 바보천치였다. 무치가 수옥의 침상을 지키고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수옥과 무치는 오래 전부터 부부사이로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하인들은 수옥이 몸져 눕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한 달이 흐르고, 다시 또 두 달이 흐르자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수옥은 임신을 했던 것이다. 수옥이 임신한 것으로 밝혀지자 주방의 하녀와 하인들은 모두 희한하다는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 킥킥... 무치도 방사(房事)를 치룰 줄 아나보지? - 호호... 꼴에 사내구실을 다 하다니....... - 컬컬... 그래도 끔찍이 마누라를 위하지 않는가? 어쨌든 수옥이 두문불출한 지 수개월이 흐르자, 차츰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수옥이나 무치 모두 주방에서 일하는 수백명에 달하는 하인들 중에서 별반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곳. 누군가 밀실에 앉아 있는 모습이 두텁게 쳐진 휘장 저쪽으로 은은히 보인다. 바닥에는 한 인영이 엎드려 있었다. "크크크...! 아직 성공하지 못했단 말이냐?" 휘장 속에서 울려나오는 음성은 마치 지옥의 유부(幽府)에서 흘러나오는 듯 음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인영의 이마에서는 쉴새없이 식은땀을 흘러내렸다. "고... 곧... 성공할 것입니다." "크크... 너의 독술도 이제는 쓸모가 없어졌단 말이냐? 열다섯 번 동안 실수 한번 없더니 이젠 한계가 드러났단 말이냐?"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식골소혼부시산(蝕骨消魂腐屍散)을 쓰면 틀림없이 태아는 핏물로 녹은 채 사산될 것입니다." 놀라운 말이다. 지금 이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는 대체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겠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네 눈알을 파내고, 손목을 자르고, 다리를 잘라 개 밥으로 주겠다!" "으흑... 며... 명심하겠습니다." "마천(魔天)이 열렸다. 대종사(大宗師)께서는 모든 준비를 끝내셨다. 남은 것은... 때가 오기를 기다리 는 일 뿐이다. 그 전에 먼저 네 일을 성사시켜야 한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음모의 검은 회오리 바람이 휘장을 흔들었다. 출렁이는 휘장 속에 앉아있던 인물은 어느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④ 제왕각(帝王閣). 검은 철탑(鐵塔)의 형상을 하고 있는 누각은 제인봉 정상을 감싸고 있는 검은 구름을 뚫고 높이 솟아 있다. 휘이잉! 바람에 따라 묵운(墨雲)이 음산하게 소용돌이친다. 음산한 밤이다. 마치 무슨 일이 벌어질 듯한 밤.... 번쩍...! 우르릉... 쾅! 갑자기 시퍼런 뇌편(雷鞭)이 천지를 가른 후 엄청난 뇌성벽력이 울렸다. 그 순간 섬전의 빛을 받아 구 층 철탑의 한 철실(鐵室)이 드러났다. 그곳은 바로 제왕천주 남궁후가 머무르는 곳이었다. "......." 남궁후는 방 한가운데 뒷짐지고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이 잠시 푸르게 물들었다. 그는 열린 창문을 통 해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까풀이 경련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노부의 자미천황성(紫眉天荒星)이... 소멸하다니...!" 남궁후의 음성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 천중(天中)에 먹구름이 소용 돌이치고 있었다. 그 사이로 자광을 빛내던 성좌(星座)가 방금 급격히 빛을 잃으며 사라지고 있었다. "그럼... 노부의 운이 다했단 말인가?" 어디선가 의혼(醫魂)의 음성이 들려왔다. "주공, 의혼입니다."


남궁후의 두 눈에서 섬망이 번쩍 뻗어나왔다. "그래! 화령에게 이상이 없느냐?" "......." 의혼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남궁후는 눈썹을 푸르르 떨었다. "이상이... 있단 말이냐?" "없... 습니다. 다행히도." 남궁후의 얼굴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문득 밤하늘에 섬전이 작렬했다. 번쩍......! "으핫핫핫핫... 백일! 백일이 남았다! 이제 백일 후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꽈르르릉... 꽝! 섬전에 이어 울린 벽력성이 온통 천지를 진동했으나 남궁후의 앙천광소만은 뒤덮지 못했다. 같은 시각. 낡고 허름한 방사의 침상 위에는 배가 동산처럼 부른 한 여인이 누워있었다. "......." 누렇게 부황뜬 얼굴과 남루한 하녀복을 입은 만삭의 임부는 바로 주방 하녀 수옥이었다. 지금 그녀의 곁에는 삼십대로 보이는 거한(巨漢) 한 명이 무릎 꿇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감았는 지 떴는지 모를 멍청하게 풀린 눈, 헤벌어진 입.... 도무지 그의 표정에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 는지 알아낼 길이 없었다. 그는 바로 바보 무치였다. 수옥과 부부관계로 알려져 있는 사내, 지금 그는 초점없는 눈으로 만삭이 된 수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였다. 꿈틀......! 문득 수옥의 동산만한 배가 꿈틀거렸다. "으음...! 아가야... 발로 자꾸 차지 마라. 애미가 아프단다." 수옥은 배를 두 손으로 감싸며 중얼거렸다. 용모와 달리 몹시 맑은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통스 러운 듯 아미를 찡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 속에는 은은한 기쁨의 빛이 어려있었다. "주모......." 처음으로 무치가 입을 열었다.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세상에 자신의 아내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도 있단 말인가? 수옥은 고개 돌려 그를 바라보더니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바보 낭군... 약(藥) 들 시간이에요." "......!" 순간 무치는 몸을 떨었다. 이때였다. 스슷......! 유령처럼 방 안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전신을 백포(白袍)로 휘감고 있었으며 얼굴 역시 흰 복면


으로 감싸고 있었다. 백포인의 손에는 약탕기가 들려 있었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백포인은 억양이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약을 드실 시간입니다, 주모." 놀랍게도 그도 역시 일개 주방의 하녀 수옥을 주모란 호칭으로 불렀다. 수옥은 힘겹게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벌써 구 개월째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약을 먹였어요. 대체 언제까지 먹어야 하지요?" 백포복면인은 허리를 숙였다. "공자를 출산하실 때까지입니다." "휴... 알았어요. 주세요." 수옥은 한숨 쉬며 탕기를 받아들었다. 그녀는 단숨에 약을 들이켰다. 그 순간이었다. "......!" 복면인의 눈빛이 기이하게 흔들렸다. 어찌 보면 기쁜 듯도 했고, 어찌 보면 슬픈 듯도 한 복잡미묘한 표정이었다. 수옥은 탕기를 내려놓더니 문득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이번 것은 맛이 조금... 이상하군요." "......!" 그 말에 복면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번 것은 특별히 제조한 것으로... 태아에게 몹시 중요한 것입니다. 주모." "호호... 그런가요?" 수옥은 맑게 웃으며 도로 침상에 몸을 눕혔다. "그럼... 이만 물러 가겠습니다." 스슷......! 복면인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유령처럼 방 안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직후, 수옥은 문득 눈물 을 흘렸다. "아아... 그 분의 아이를 잉태하고서도 이렇게 숨어 있어야 하다니......." 무치는 여전히 바닥만 내려보며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하긴... 열다섯 번이나 악독한 자들의 독계(毒計)에 당했으니... 그 분의 고통도 이해해야지." 수옥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물을 훔쳤다. 그녀는 아직도 바보 같은 모습으로 무릎꿇고 앉아있는 무 치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무치, 네가 불쌍하구나. 나 때문에 꼭두각시 남편이 되어야 하다니......." "......." 그러나 무치는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바닥만 내려보고 있었다. ■ 왕도 1 권 제 2 장 무너지는 제왕성(帝王城) ━━━━━━━━━━━━━━━━━━━━━━━━━━━━━━━━━━━ ①


쏴아아...! 때아닌 겨울비가 쏟아져 내렸다. 겨울비는 무림의 하늘이라는 제왕천을 무자비하게 난자했다. 칠흑같은 밤. 차가운 겨울비는 천 년을 가도 반석처럼 흔들리지 않을 듯한 제왕천의 성벽을 세차게 두드려댔다. 사박... 사박......! 문득 빗소리와는 사뭇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인영들이 이동하는 소리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검은 그림자들이 제왕천의 성벽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번쩍! 콰콰쾅! 암천이 부서지며 시퍼런 뇌화(雷火)가 폭죽처럼 비산했다. 그 바람에 제왕천의 사방 성벽이 환하게 밝혀졌다. 동시에 검은 구름떼처럼 성벽을 뒤덮은 흑영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놀라운 일이었다. 흑영들은 가히 수만 명을 헤아릴 정도로 많았다. 그들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뒤집어 쓰고 있었는데 한결같이 무서운 살기(殺氣)를 흘리고 있었다. 아주 잠깐 동안이었으나 섬광으로 인해 드러난 광경이 고요한 제왕천을 뒤흔들고 말았다. "앗! 침입자다!" "빨리... 제왕고(帝王鼓)를 울려라!" 제왕천의 성루에서 다급한 외침이 울렸다. 그러나 상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제왕고를 울 려 침입자를 경고하려던 무사들은 겨울비 내리는 오늘 밤이 최후의 밤이 될 줄은 꿈에도 알지 못한 것이다. 슉! 파파팟......! 검광과 도광이 칠흑같은 어둠 곳곳을 가른 후 경악과 불신에 찬 비명이 여기저기서 울렸다. "크윽! 네... 네가... 왜?" "큭! 장노삼(張老三)... 이럴 수가......?" 성벽을 지키는 자들의 눈이 한껏 부릅떠지고 있었다. "크악! 너... 네가... 첩자......?" 성벽을 수비하던 무사들 중 절반 가량이 오 장여 높이의 성벽으로부터 피를 뿌리며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차마 자신의 가슴에 검을 박고, 머리통을 날려버린 자들이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동료였던 자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성벽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 왜......? 허공을 향해 부릅떠진 그들의 눈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둥......!


문득 둔중한 고(鼓) 소리가 폭우를 누를 듯 들렸다. 그 소리는 한 고각(鼓閣)에서 들렸다. 그곳에는 제왕고가 설치되어 있었다. 제왕고는 제왕천에 위험이 닥친 것을 알리는 경고였다. 고각을 지키는 자는 제왕칠십이각(帝王七十二閣)의 각주인 만형혈장(萬形血掌) 형비(刑飛)란 자였다. 그는 사방에서 들려온 처절한 비명을 듣고 제왕천에 위험이 닥쳤음을 느끼고 고를 울린 것이었다. 둥......! 형비는 다시 제왕고를 두드렸다. '어떤 놈들이 감히 제왕천을... 어쨌든 변고가 일어난 게 틀림없다...!' 형비는 가슴이 무섭게 뛰는 것을 느끼며 세번째 고를 치기 위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때였다. 슉! 문득 등 뒤로 예리한 파공성이 들렸다. 그것은 분명 칼바람 소리였다. '헉...! 누가?' 형비는 아찔한 느낌이었다. 손만 내리며 제왕고는 한 번을 더 울릴 것이다. 먼저번의 고소리는 어쩌면 빗소리와 뇌성벽력 소리로 인해 잘 들리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제왕성에 위기가 닥쳤음을 알리려면 그는 직분상 고를 쳐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등 뒤의 암습으로 인해 그의 목은 어깨를 떠나 땅에 떨어질 것이다. 지극히 짧 은 순간이었지만 그에게는 마치 일평생보다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마침내 그는 결정을 내렸다. 둥......! 형비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제왕고를 쳤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분수같은 선혈이 제왕고를 시뻘겋게 적셨다. 그와 동시에 형비의 머리통이 허공 에 떠올랐다가 바닥에 떼구르르, 굴러갔다. "ᄏᄏ! 어리석은 놈.... 내가 할 일을 네가 대신해 주었구나." 바닥에 뒹구는 머리통을 발로 밟아 수박처럼 으깨는 자가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제왕고를 지키는 서 열 이위의 인물인 천섬도(天閃刀) 만충(萬忠)이었다. 그는 언제나 형비와 나란히 제왕고를 지켜온 자 였다. 부욱! 피묻은 도가 제왕고를 찢어버렸다. 번쩍! 우르릉... 콰쾅! 섬전벽력이 밤하늘을 발기발기 찢었다. ②


둥......! 어디선가 둔중한 고(鼓) 소리가 폭우를 뚫고 울려퍼졌다. 콰콰쾅! 그러나 고소리는 이내 벽력성에 묻혀 사라졌다. 천형당(天刑堂). 이곳은 제왕천에서 생과 사를 장악하고 있는 곳이었다. 제왕천의 율법은 엄격하기로 이름 높다. 아무리 사소한 죄를 범해도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어 있었다. 천형당은 제왕천의 내오외삼당(內五外三堂) 중의 하나로 엄격한 율법을 시행하는 부서니 만큼 제왕천 인물들은 물론 중원 무림에서도 공포의 존재로 인식되어 있었다. 상하인을 막론하고 일단 천형당에 들어서면 그것으로 그의 무림인으로서의 생명은 끝이다. 오직 냉혹 과 비정만이 천형당의 율법(律法)이기 때문이었다. "아아악...! 제... 제발... 차라리 죽여 다오......!" 쇠와 쇠가 긁히는 듯한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것은 인간이 내지를 수 있는 가장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비명이었다. 천형당의 내당(內堂). 그곳은 중죄인들을 다스리는 곳으로, 바닥은 물론이고 벽과 천장에 이르기까지 온통 말라붙은 핏자국 으로 뒤덮여 있었다. 벽에는 쇠고랑, 작두, 망치, 톱날, 각종 도(刀), 차륜(車輪) 등.... 고문과 혹형을 가하는데 필요한 온갖 도구들이 즐비하게 걸려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공포심을 자아내고 있었다. 지금 그곳에는 한 명의 중년인이 오연히 서 있었다. 그는 일신에 흑색의 장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안 색이 시체처럼 창백하여 섬뜩한 느낌이 들게 했다. 그는 수중에 날카로운 침이 돋아나 있는 구절철흑편(九切鐵黑鞭)을 든 채 바닥을 내려보고 있었다. "흐흐흐......!" 그의 얄핏한 입술로부터 잔혹무비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온통 피를 뒤집어 쓴 듯한 두 인물이 뒹굴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 참혹한 모습이라 차마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파앗! 구절철흑편이 허공을 갈랐다. 짜아악! 편과 살이 마주치는 살벌한 음향이 터져나왔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두 개의 살덩어리는 데굴데굴 굴렀다. 자세히 보면 그들은 두 명의 중노(中老)였 는데 워낙 심한 고초를 겪어 평소의 용모를 알아 볼 길이 없었다. 중년인은 그들을 내려보며 냉혹하게 말했다.


"크크크...! 너희들이 본 것, 들은 것을 잊어라. 알겠느냐?" "처... 천형당주... 막위림(莫韋林)... 네가... 본 천(天)을 배신하다니......." 쫘악! "크아악......! 피떡이 된 인물들 중 한 명이 애써 입을 벌렸으나 구절철흑편은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다. 입을 열던 자의 등에 떨어진 채찍이 그의 살점을 한 주먹이나 뜯어가버린 것이다. 천형당주 막위림은 두 중노를 비웃었다. "크크... 무슨 헛소리냐? 너희들이야말로 의전당(義典堂), 숭무당(嵩武堂)의 당주 신분으로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제왕천을 어수선하게 하지 않았느냐? 그 죄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몰랐더란 말이냐?" 놀라운 일이다. 의전당과 숭무당이라면 제왕천의 내오당(內五堂) 중의 두 곳이 아닌가! 서열로 친다면 천형당과 동격 으로 당주인 그들은 천형당주 막위림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들이었다. "크윽... 분명... 본천 내에는 암약하고 있는 외부의 첩자가 있다. 오래 전부터 그 사실을 탐지하고... 진상 조사를 하려했는데... 네놈이 어째서......?" 그들은 죽을 힘을 다해 말을 이었다. "흐윽... 임의로 우리를 감금하고 사형(私刑)을 가하다니... 네놈은 천주의 응징이 두렵지 않느냐?" 의전당주와 숭무당주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충혈된 눈을 찢어져라 부릅뜨며 항변했다. "크크... 금시초문인데? 본천에 첩자가 암약한다니, 대체 무슨 증거라도 있느냐?" 막위림은 그들을 조롱하는 표정을 지었다. 문득 그의 우수가 호선을 그었다. 파앗! 짜작! "크- 윽!" 피(血)와 육(肉)이 난분분했다. 이때였다. 다시 한 번 고(鼓)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왔다. 둥...! 순간 생사단혼마판(生死斷魂魔判) 막위림의 안색이 변했다. "크크... 드디어 때가 됐다. 너희들은 이제 죽어줘야 겠다!" 그는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쌍장을 빙글 돌리며 뻗었다. 퍽! 의전당, 숭무당의 당주들은 그대로 두개골이 바스러져 비명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황천으로 가고 말 았다. 제왕천의 일개 형당당주가 임의로 당주급 인물을 둘씩이나 살해한 것이다. 과연 이럴 수도 있단 말인가? 쏴아아아......! 하늘도 진노했는지 마치 구멍이라도 뚫린 양 장대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천도전(天刀殿). 도는 강인함과 패도적인 데 그 특징이 있다. 일반적으로 검(劍)을 만병지왕이라 일컫지만 웅후함에 있


어서는 도가 한 수 위에 있다. 천도전은 오직 도만을 연구하는 곳이었다. 이곳에는 제왕천주 다음 가는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실력자인 제왕천의 부천주(副天主)가 있었다. 천왕도(天王刀) 독우성(獨宇星). 그는 현재 나이 백이십이 넘었으나 아직도 구주팔황(九州八荒)을 진동시키는 무명을 지니고 있다. 독우성은 힘과 패(覇)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는 인물이었다. 더구나 그는 제왕천주 남궁후의 제이부 인의 조부라는 신분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천도전의 중추세력은 십팔도마존(十八刀魔尊)이었다. 그들은 중원에서 도를 가장 잘 쓰는 십팔 인이기 도 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천도전에는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 넓은 정청 한가운데는 태사의가 놓여져 있었다. 태사의에는 흡사 관우를 연상시키는 듯 기골이 장대한 한 명의 노인이 앉아있었다. 굵은 붓으로 그은 듯한 검미와 그 아래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한 쌍의 기다란 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중압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천왕도 독우성이 아니면 누가 이런 기도를 지니고 있겠는가? 그는 지난 날 패도(覇刀)라 불리우는 천왕도 하나로 대중원을 휩쓸며 환우십대고수( 宇十大高手)의 서 열에 든 위인이었다. 오늘 밤, 독우성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을 느꼈다. 둥...! 멀리서 미약한 고 소리가 울렸다. "응?" 그는 흠칫했다. 갑자기 정청 안의 공기에 파문이 번진 것이다. "그대들은......?" 독우성의 안색이 변했다. 어느새 정청 안에 십팔 인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의 허리춤에는 하나같이 도 가 걸려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천도전의 중심인물들인 십팔도마존(十八刀魔尊)이었다. 번쩍! 콰콰쾅! 하늘에서는 연신 벽력이 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정청 안은 푸른 섬광으로 가득찼다. 십팔도마존 중 수존(首尊)이 입을 열었다. "야심한 밤이지만 전주님께 보여드릴 것이 있어 급히 찾아왔소이다." "......?" 독우성은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사전에 아무 연락도 없이 찾아오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는 등골에 서늘한 기운이 스치는 것을 느끼며 십팔도마존을 바라보았다. "훗훗... 우리들은 삼 년이란 기간에 걸쳐서 구천뇌옥십팔도진(九泉牢獄十八刀陳)을


연성했소이다. 최 근에야 그것을 완성했소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먼저 전주님께 보여드리고자 이렇게...." 콰콰쾅! 다시 벽력음이 터졌다. 독우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서서히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켰다. "도진을 완성했다고? 그렇다 해도 하필 이 밤에 찾아와 보인다니...?" 수존은 으시시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 밤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말이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수존은 허리춤에서 도를 뽑았다. 츠츠츳......! 도기가 서리서리 살벌한 기운을 뿜으며 춤추었다. 쩌엉! 츠리리릿--! 십팔도마존이 일제히 뒤따라 도를 발출한 것이다. 그로 인해 정청안은 일시에 숨막히는 살기로 뒤덮 였다. 독우성은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고 있었다. "그대들은 혹 제왕고 소리를 못 들었는가?" 독우성의 질문은 엉뚱한 것이었다. 폭우와 벽력으로 인해 고 소리는 아주 미약하게 들려 독우성은 확 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둥...! 어디선가 다시 희미한 고 소리가 울렸다. 독우성의 안색이 변했다. 그가 막 입을 여는 순간, "전주. 우리들의 도진을 보아 주시오!" 파츠츠츳! 십팔도마존의 손에서 열여덟 자루의 도가 벼락치듯 뻗으며 독우성에게 날아갔다. "헉! 이게 무슨 짓이냐......!" 차앙! 카카캉......! 그러나 천왕도는 천왕도였다. 그는 창졸지간에 급격을 당했으나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신형을 어지 럽게 날리며 십팔도마존의 폭풍같은 공세를 피한 그는 벽에 걸린 천왕도를 잡아챘다. 그러나 십팔도마존은 이미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륜(輪)!" 콰아아아아아! 십팔도마존은 원진을 형성하여 독우성을 포위한 채 풍차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면팔방으 로부터 무시무시한 도세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위력은 가히 엄청난 것이었다. 독우성은 전신이 으스러질 듯한 압력을 느끼며 안색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십팔도마존...! 지나치지 않은가?" 그는 아직도 십팔도마존이 자신들의 도진을 시험하는 줄 알고 있는 듯했다. 위이잉! 그의 천왕도가 가공할 도세를 뿌리며 압력을 갈라갔다. 파츠츠츳......!


도강(刀 )이 뻗어나가며 사방으로 밀려드는 압력을 갈랐다. 그로인해 정청 안은 터질 듯한 회오리가 파동쳤다. 일대 십팔의 싸움! 처음부터 숫적으로나 힘으로나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그러나 독우성은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수하들인 십팔도마존이 자신들끼리 익힌 도진을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 다. "핫핫핫... 약해! 더 강하게 펼쳐보게!"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폭(爆)!" 수존이 냉갈을 터뜨렸다. 콰르르르......! 십팔도가 일진광풍을 일으키며 독우성을 향해 일제히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도를 휘둘러 공 격하는 것이 아니라 일제히 던진 것이다. 콰콰콰쾅! 불꽃이 난무했다. "헉......!" 실로 상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열여덟 자루의 도가 일제히 허공에서 폭발해버린 것이다. 이렇게까지 되자 독우성은 안색이 잿빛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미 때는 늦었다. 그의 눈에서 분광이 치솟았다. "천왕(天王)... 구천(九天)... 홍(紅)!" 마침내 독우성의 입에서 폭갈이 터져나왔다. 이어 그의 몸은 시뻘건 도광에 휩싸였다. 마침내 생애 최 고의 도법을 펼친 것이다. 더 이상 머뭇거리다간 십팔도마존이 던진 도의 파편에 온몸이 갈기갈기 찢 어질 지경이었던 것이다. 콰르르릉......! 폭발된 도편의 위력은 너무나 강했다. 수천, 수만 개의 파편이 독우성의 몸에 우박처럼 박혔다. 그가 뒤늦게 최후의 절학을 펼쳤으나 십팔 인의 전 공력을 실은 도편을 막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크아... 아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의 실내를 갈랐다. 환우십대고수이자 무림사상 도의 제일인자라는 독우성도 인간이었다. 그의 몸에는 수많은 도의 파편 들이 관통하고 말았다. "끄윽... 이럴 수가... 너희들이 배신을......?" 쿠-- 웅! 그것으로 끝이었다. 일세의 패웅(覇雄) 천왕도 독우성은 거꾸러지고 말았다. 그의 몸에는 수천 개의


도편이 박힌 채, 도로 성명한 그가 도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 십팔도마존은 목석처럼 선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수수......! 문득 그들의 옷자락이 갈기갈기 찢겨진 채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술에 취한 듯이 비틀거렸다. "으으...! 무서운... 도법이었다. 한 순간만 파천살우폭멸도(破天殺雨爆滅刀)를 늦추었어도... 우리가 당 할 뻔했다......!" 수존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몸을 떨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문득 그는 발을 구르며 외쳤다. "마천(魔天)이 열렸다! 혈세하라!" 순간 십팔도마존은 어디론가 쾌속하게 신형을 날렸다. 무상전(武相殿). 제왕천에는 일각삼전오당십단삼십육기칠십이루(一閣三殿五堂十壇三十六旗七十二樓)가 있다. 그 중 무상전은 천도전(天刀殿), 문상전(文相殿)과 함께 삼전에 속한다. 무상전에는 팔대무상(八大武 相)이 있었으며, 문상전은 팔대문상(八大文相)이 관장하고 있다. 무상전의 대전에는 등촉이 환히 켜져 있었다. 팔대무상은 원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둥...! 이때 은은한 고 소리가 울렸다. 팔대무상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제왕고가 울리다니...?" 그들은 언뜻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제왕고는 적의 내습이 있거나 제왕천주의 친명에 의해서만 울리 도록 되어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심상치 않소.... 더구나 방금 전 문상전에서 이곳을 방문하겠다는 전갈이 왔으니... 혹 천주의 특별한 명이 떨어진게 아닌가 싶소." 이때였다. "팔대문상님들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팔대무상의 시선이 일제히 문 쪽으로 쏠렸다. 문이 열리며 중년의 나이로 보이는 여덟 명의 문사차림 의 인물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특별히 제왕천주가 초빙한 학식이 높은 문사들이었다. "......?" 팔대무상은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표정에는 의혹이 잔뜩 어려 있었다. 이 야밤에 팔대문상 전 원이 찾아오다니....


팔대문상은 일단 문 앞에서 정중히 포권한 후 다가왔다. 그들의 손에는 각각 하나씩의 봉서(封書)가 쥐어져 있었다. 그들은 탁자 앞으로 다가와 봉서를 내밀었 다. "펼쳐 보십시오, 천주의 친서외다." 수석문사가 정중히 말했다. 둥...! 다시 고 소리가 은은히 울렸다. 이번에는 좀더 확실하게 들렸다. "이 소리는...?" 무상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수석문사는 표정 하나 변치 않은 채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서 뜯어 보시오. 천주의 밀지가 있을 것이오." 그제서야 팔대무상은 두 손으로 봉서를 받은 후 뜯기 시작했다. 그들 개개인에게 하나씩 전달된 봉서 였다. 마음 속으로 왜 각자에게 따로 전달하라는 명을 내렸을까 의문을 가지면서도 그들은 경건한 마 음으로 봉서를 뜯었다. 봉서 안에서 나온 것은 한 장의 종이였다. 그 속에는 단 한 글자가 쓰여져 있었다. <사(死)> "이... 이것은?" "대체 이게... 무슨 뜻이오?" 팔대무상은 아연실색하여 부르짖었다. 팔대문상의 얼굴에 사악한 기운이 충만해졌다. "흐흐흐... 쓰여져 있는 그대로다. 너희들은 죽는다. 제왕천의 멸망과 함께!" 수석문상의 말은 마치 지옥의 유부에서 들려오듯 음독하기 이를데 없었다. "뭐... 뭣이?" "네... 네놈들은 누구냐?" 팔대무상은 벌떡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헉! 독(毒)......!" 그들은 참담하게 부르짖으며 휘청거렸다. 그들이 들고 있는 종이에는 극독이 묻혀져 있었던 것이다. "크크크...! 죽어랏!" 갑자기 팔대문상이 일제히 장력을 날렸다. 실로 통천경악할 일이었다. 닭 잡을 힘 하나 없는 것으로 알려졌던 문상들이 갑자기 무시무시한 장력을 날린 것이다. 우우우웅! 실로 가공할 위력의 장력이 폭풍처럼 쇄도해 왔다. 그러나 팔대무상은 이미 힘을 쓸 수 없었다. 독에 의해 체내의 공력이 한 점도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그저 멀뚱멀뚱 눈을 뜬 채 장력이 자신 의 머리와 가슴을 으깨는 것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퍼퍼퍼퍽......!


"크아악... 부... 분하다......!" "크아악!" 그들은 봉서에 쓰여진 대로 죽어갔다. 무상전의 탁자는 단두대로 화한 듯 흥건한 핏물로 젖어 버리고 말았다. "핫핫핫... 때가 왔다!" "크하하하......!" 무공이라는 무자도 모른다던 팔대문상이 돌연 무귀(武鬼)로 화한 듯 신형을 날려 밖으로 날아갔다. 번쩍! 꽈르르릉! 섬전이 작렬하고 뒤이어 벽력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 왕도 1 권 제 3 장 탄생과 종말의 장(章) ━━━━━━━━━━━━━━━━━━━━━━━━━━━━━━━━━━━ ① "흐으윽... 아아......!" 제왕천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 그곳에서 여인의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다. 번쩍! 섬광이 주방 뒷채의 한 작은 방을 시퍼렇게 밝혔다. "흐으윽...!" 주방 하녀 수옥은 동산만한 배를 움켜쥔 채 침상에서 뒹굴고 있었다. 바야흐로 한 생명을 출산하기 위한 막바지 진통이 시작된 것이다. 한편, 밖에서는 온통 충천하는 화광과 함께 처절한 비명이 들리고 있었다. "크아아악...!" 난공불락이던 제왕천은 내부의 변절과 외부(外部)의 공격을 동시에 받아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콰지지직......! 하늘을 가른 뇌전이 거목을 두 동강으로 만들고 있었다. "흐으윽...!" 침침한 방 안. "......!" 두 사람이 초조하게 임산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백포의 중년인과 바보 무치였다. 무치는 멍한 눈으로 임부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 백포인의 눈빛은 복잡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힘을 내시오... 주모(主母)!" 백포인은 입술을 물며 부추겼다. "아윽......!" 임부는 손톱이 빠져라 베개를 쥐어뜯으며 힘을 썼다. 콰콰쾅......!


다시 뇌음이 작렬했고 무엇인가 무너지는 소리가 밖으로부터 들려왔다. 이때였다. "아악......!" 수옥의 입에서 쥐어짜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앙!" 새 생명의 울음소리가 힘차게 울려퍼졌다. 그러나 그 순간 제왕천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으니... 실로 교묘한 운명이었다. 임부의 두 다리 사이에서 막 핏덩이가 왈칵 쏟아져 나온 것이다. "오오... 드디어......!" 백포인은 전신을 떨며 핏덩이를 안아 들었다. 그 순간 무치의 멍청해 보이던 얼굴도 격동으로 흔들렸 다. "크흐흐흐! 이... 이럴 수가!" 쉬아앙! 피가 튀고 살점이 난무하는 속을 움직이는 자미노인이 있다. 그는 지금 생과 사의 경계선을 달리고 있었다. 바로 제왕천주 남궁후였다. 지금 그는 온통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었고, 오른팔은 어깻죽지로부터 떨어져 나가 뼈와 살점이 뒤엉 켜 있었다. 뿐만 아니라 등과 가슴, 배에도 뼈가 드러날 정도의 중상을 입고 있었다. 당금 무림에 과연 누가 있어 무림왕 남궁후에게 그토록 심한 중상을 입힐 수 있단 말인가? "남궁후는 중상을 입었다! 죽여라......!" "두려워 하지 마라! 놈은 종이호랑이다!" "크크ᄏ! 놈은 일 각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쐐액! 파츠츠츳......! 줄잡아 오백 명이 넘는 복면인들이 제왕천주를 협공하고 있었다. "크으윽! 감히... 나 남궁후를 암공하다니......!" 남궁후는 하나뿐인 왼손으로 바다를 가를 듯한 장력을 뿌리고 있었다. 꽈르르릉......! "으아악!" 어느새 그의 일장 앞에는 십여 명의 인물이 피떡이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과연 고금제일인자(古今第 一人者)다운 위용이었다. 온몸에 중상을 입었으나 수많은 고수들도 그를 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반 시진 전. 남궁후는 은은히 울리는 제왕고 소리를 듣고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일이?"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대경했다. 창문이 온통 화광에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급히 창문을 열어젖 혔다. "으음! 감히 어떤 놈들이 제왕천을 습격했단 말이냐?" 남궁후는 분성을 터뜨렸다. "검혼(劍魂)! 어디 있느냐?"


스스......!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가닥 흑영(黑影)이 방바닥에 불쑥 출현했다. 그는 마치 몸 전체가 하나의 검으 로 이루어진 듯한 인물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어찌된 일이냐?" 남궁후는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흑영은 무감정하게 말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본천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조금 시끄럽게 할 뿐입니다." "그... 래?" 남궁후는 눈썹을 한 차례 찌푸리더니 이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종종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좀 시끄러운 것 같군." 검혼의 눈이 일순 섬망을 발했다. "천주,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 검혼은 의아해 하는 남궁후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허리춤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슉! 별안간 번개같은 검광이 직선으로 뻗었다. "헉......!" 검이 남궁후의 왼쪽 어깨를 스쳤다. 가느다란 혈선(血線)이 호선을 그리며 뿌려졌다. 남궁후는 수십 년간 검혼을 그림자처럼 대동했었다. 때문에 그는 검혼이 자신을 기습할 줄을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네놈이 감히......!" 남궁후의 입에서 노갈이 터졌다. 이때였다. "크아악......!" 도광과 편영(鞭影)이 허공을 뒤덮더니 피보라가 뿜어졌다. 그 속에서 검혼은 머리부터 가랑이까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 남궁후는 자미를 흠칫했다. 피비린내가 자욱한 가운데 검혼의 시신은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스스......! 두 가닥 그림자가 나타났다. "천주님! 무사하십니까?" 두 그림자는 황급히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한 사람은 청삼의 중년인으로 도를 바닥에 박고 있었으며, 또 한 사람은 오른손을 채찍으로 감고 있 는 묵의인이었다. 남궁후는 침중하게 물었다. "이유를 아느냐? 검혼이 노부를 암습하다니......." 청삼인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송구스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모두가... 이 도혼(刀魂)의 불찰이옵니다." 그는 도를 서슴없이 자신의 목으로 가져갔다. "목숨으로 사죄를......." 도혼은 자신의 목을 그었다. 순간 그의 목에서 벌건 선혈이 뿜어졌다.


"미쳤느냐? 도혼!" 남궁후의 우수가 찰라적으로 뻗었다. 그때였다. 묵의인의 손목에 감겨있던 채찍이 영사처럼 움직이더 니 남궁후의 좌수를 감는 것이 아닌가! "윽!" 남궁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의 오른손은 도혼의 칼을 잡고 있었으며, 왼손은 채찍에 감겨 있었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 진 일이었다. 스스......! 이때 어디선가 흐릿한 환영이 남궁후의 등 뒤에 나타났다. "환혼(幻魂)!" 남궁후는 비통하게 소리쳤다. 쾅! "크윽......!" 남궁후의 등에 가공할 일장이 격중되었다. 그는 입으로 피화살을 뿜어내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파앗! 돌연 천정에서 한 가닥 섬광이 뻗어나왔다. 순간 남궁후의 오른팔이 어깨죽지로부터 잘려 나가며 선 혈이 폭포수처럼 뻗어나왔다. "크으... 너희들이......?" 제왕천주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휘청거렸다. 이때였다. 휘휙... 휙......! 방 안에 다시 인영이 분분히 나타났다. 그들은 천장과 벽은 물론 바닥과 침상 아래에서 속속 나타났 다. 이어 일제히 남궁후를 협공했다. "크으... 흑!" 남궁후는 창졸지간의 협공에 격중당한 채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는 이미 전신이 시뻘겋게 젖어 있었다. 그러나 남궁후는 역시 남궁후였다. 그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를 포위한 인영들은 그 눈빛만으로도 기 가 질리는 것을 느꼈다. 방 안의 인영은 모두 십일 인이었다. "제왕십이혼(帝王十二魂)... 너희들이 감히 배신을...?" 남궁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뇌까렸다. 이때였다. 삘리릴리... 릴! 어디선가 마(魔)의 기운이 깃든 야릇한 소음(簫音)이 울려퍼졌다. "우... 우리가 할 일은 끝났다. 가자!" 도혼이 먼저 외치며 신형을 날렸다. 휘익...! 휙! 뒤이어 나머지 열 명도 창문을 뚫고 일제히 날아갔다.


"왜? 무엇 때문에...?" 남궁후는 망연자실한 채 중얼거렸다. 그의 전신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나오고 있었다. "강하기 때문이오.... 천주가 너무 강한 것이 탈이었소." 멀리서 도혼의 음성이 들려왔다. "강한 것이... 탈이었다고?" 남궁후는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내 그의 눈은 전광 같은 빛을 뿌렸다. "흐흐흐흐...! 너희들이 이렇게 한다고 해서 이 남궁후가 무너질 줄 아느냐? 크하하핫! 그렇게 생각했 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휘익! 남궁후의 신형이 창문을 뚫고 날아갔다. 그것은 결코 중상을 입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보 는 이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할 만큼의 당당한 모습이었다. 꽈르르르릉......! 대폭발이 일어났다. 구층의 제왕각이 송두리째 화염기둥을 일으키며 폭발해 버린 것이다. ② 위잉......! 화륜(火輪). 시뻘건 불덩이가 남궁후의 왼손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화륜벽력참(火輪霹靂斬)이다.... 피해라!" 오백여 명의 복면인들은 공포에 찬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크하핫핫...! 소용없다!" 남궁후는 노호(怒號)를 내뿜었다. 쾅... 콰르르릉! "크아아악!" 화륜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방원 십여 장을 휩쓸었다. 화륜에 닿거나 스친 자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 며 숯덩이가 되어 나뒹굴었다. 그러나 남궁후도 인간이었다. 그는 기력이 쇠한 듯 안색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놈은 탈진했다. 기회를 놓치지 마라!" 파츠츠츳! 복면인들은 동료들의 죽음을 보고도 불나비처럼 달려 들었다. 남궁후는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천공을 응시했다. "하늘이여! 과연 이 남궁후를 버리려 하시오?" 꽈르릉... 콰앙! 남궁후는 혼신을 다해 일장을 내뻗었다. 그러자 다시 방원 십여장이 초토화 되었다. 그러나 복면인들 의 수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어디서 나타났는지 더욱 더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아미타불... 그는 지쳤소. 공격합시다!" "크크ᄏ... 녹림(綠林)의 숙원을 풀 때다!" 곳곳에서 함성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함성은 하나같이 남궁후의 편이 아니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절규했다. "크하하핫...! 전중원이 몰려왔단 말이냐? 이 남궁후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아미타불... 남궁시주의 잘못은 없소. 있다면 시주가 너무 강하다는 것이오." "크하핫... 강한 것이 죄라고......?" 위잉......! 다시 십여 개의 화륜이 날아갔다. "크아악......!" 수십 명의 복면인들이 또 다시 불덩이가 되었다. 남궁후는 어느새 살인광(殺人狂)으로 변해 있었다. 꽈르르릉! 촤아아아......! 뇌성벽력을 동반한 폭우가 대지를 통렬히 두드린다. "오오... 아들이다!" 백포인은 핏덩이를 확인한 순간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방금 태어난 아기의 고간에는 사내아이의 상 징이 달려있었다. "아... 아들이라고요......?" 임부, 수옥은 기진한 가운데서도 힘겹게 고개를 들며 물었다. 백포인은 복면 사이로 두 눈을 차갑게 빛냈다. "그렇소." 그의 음성이 돌연 싸늘해졌다. "......?" 수옥은 흠칫했다. 그의 달라진 음성이 심상치 않게 여겨진 것이다. "아이는 틀림없이 용자(龍子)일 것이오. 그러나 수고가 헛되었소이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수옥은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백포인은 음산하게 웃었다. "훗훗... 왜냐하면 이 아이는 빛을 보자마자 죽어야 하기 때문이오." "뭐라고요?" 수옥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의 두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부릅떠졌다. 백포인은 싸늘한 음소를 지으며 핏덩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거라! 너는 운이 없는 아이... 큭!" 돌연 백포인의 등을 뚫고 섬세한 칼날이 심장을 관통하여 가슴 앞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크으... 네... 네가......?" 백포인은 온통 회의에 찬 눈을 굴렸다. 그의 등 뒤에 바짝 붙어있는 인영이 있었다. 무치였다. 방금 그의 등에 칼을 꽂은 자는 바보로 알려져 있던 무치였던 것이다. 굳게 다물려 있던 무 치의 입이 열렸다.


"이제야 꼬리를 잡았다. 그동안 교묘하게 독수(毒手)를 써 천주의 후예를 사산시켰던 흉수가 의혼(醫 魂), 너였다니...." 백포인, 즉 의혼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부릅떠졌다. "너... 너는......?" "천주께서 안배한 비중비(秘中秘) 삼호(三號)라면 억울하지 않겠느냐?" "그... 그럴 수가......?" "애당초 천주께서는 오래전부터 첩자가 암약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런데 그것이 네놈이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의혼은 문득 자신의 손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무치가 어린 아이를 받아든 것이다. "용케 머리를 썼다만... 그래봐야 제왕천은 이미... 끝... 났다." 의혼은 서서히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더구나......." 그는 말을 다 맺지 못하고 푹 고꾸라졌다. "주모님!" 무치가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임부, 즉 제왕천주의 제십육 부인인 화수옥이 입과 코로 검은 피를 쏟으며 쓰러진 것이었다. "독...!" 무치는 치를 떨며 부르짖었다. 그는 솟구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 듯 발길질을 했다. 퍽! 그의 발길질에 의혼의 머리통은 잘 익은 수박덩이처럼 뭉개지고 말았다. "죽는 길에도 주모님을 동행하다니... 더러운 놈!" 무치는 어린아이를 안은 채 장탄식했다. 그러나 감회에 젖어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았다. 제왕천은 온통 불천지였다.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게다가 하필 오늘같은 날 소천주께서 태어나시다니......." 무치의 표정없는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소천주... 오늘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셔야 합니다. 반드시... 반드시 훗날... 전무림에 제왕천의 부활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무치는 어린아이를 안아들고 화광이 충천하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그가 채 일곱 걸음을 옮기 지도 못했을 때였다. "후후... 무치, 너의 연극은 정말 완벽했다." "......!" 무치는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우뚝 멈추고 말았다. 그의 눈은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그의 시선이 박힌 곳에는 화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곳에 한 인물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화광


이 반사되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가 일신에 백색의 유삼(儒衫)을 걸치고 있다는 것만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를 본 순간 무치는 너무나 놀라 하마터면 품안의 아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다... 당신은......!" 무치의 두 눈은 여러 가지 감정으로 뒤엉키고 있었다. 그것은 경악과 회의, 그리고 공포의 눈빛이었 다. 유삼인은 착 가라앉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이를 다오." "그... 그것은......." 무치는 공포에 질려 몸을 부르르 떨었다. "허허... 참 좋은 밤이군. 비가 오고 불놀이가 한창이라......." 유삼인은 한가한 듯 중얼거렸다. 무치는 서서히 뒷걸음질쳤다. 유삼인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무치, 너의 충성심은 잘 안다. 하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어떻게 되는 줄 알겠지?" "당신이 설마......." "후후... 자, 아이를 다오. 그 아이는 애당초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안... 안 되오!" 무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유삼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슈욱! 과연 인간의 신체가 이렇게 될 수도 있단 말인가? 믿을 수 없게도 유삼인의 팔은 근 삼 장(三丈)의 거리로 늘어났던 것이다. "으흑......!" 무치는 피하려 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흰 손 하나가 그의 면상 앞까지 이 르렀다. "무치, 잘가라. 너의 충성심은 길이 잊지 않으마." 퍽! "으아아아악......!" 허연 뇌수가 터져 올랐다. 무치의 면상이 두개골과 함께 박살난 것이다. 무치는 서서히 앞으로 고꾸라 졌다. 그러나 품안의 아기만은 꼭 끌어안은 채 놓지 않고 있었다. "후후후... 아예 너희 둘을 다 불고기로 만들어 주마." 휘잉! 유삼인이 우수를 저었다. 그러자 무치의 몸은 허공으로 곤두박질치며 아기와 함께 화염 속으로 떨어 졌다. 바로 그때였다. "우우우우......!" 어디선가 분노에 찬 장소성이 울려퍼졌다. 그것은 마치 노룡(怒龍)의 포효와도 같았다. "......!"


유삼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팟......! 그는 삽시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찰나의 순간이 지났다. 휘익! 한 혈영(血影)이 유삼인이 섰던 자리에 나타났다. 바로 제왕천주인 무림왕 남궁후였다. 그의 모습은 처참하다 못해 끔찍했다. 전신에서 온통 피를 뚝뚝 흘리는 흡혈악귀와 같은 형상이었다. "으음......!" 그는 신음을 흘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으앙......!" 돌연 화염 속에서 어린아이의 자지러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스슷......! 남궁후는 화염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크으으윽!" 그의 비통한 울부짖음이 들렸다. 남궁후는 충천하는 화광 속에서 어린아이를 찾아 안았다. 그는 주체 할 수 없는 분노와 격정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오오...! 이 무슨 운명이더냐? 제왕천의 멸망과 함께 비로소 노부의 친자가 태어나다니......!" 이때였다. "으으... 처... 천주!" 화염 속에서 무치의 음성이 들렸다. "무치!" 남궁후는 급히 그를 불 속에서 끌어냈다. 그러나 무치는 이미 송장이나 다름 없었다. 뇌수가 터졌을 뿐만 아니라 전신의 반이 불에 타 버린 것이다. "끄... 윽... 흉수는... 자... 자(慈)... 큭!" 그는 한 가닥의 남은 진기로 무엇인가를 말하려 했으나 끝을 이을 수 없었다. 남궁후는 너무나 격분 한 나머지 하늘을 우러러 포효를 터뜨렸다. "우우우... 우!" 그의 전신 팔만사천모공에서 화기가 뿜어져 나왔다. "크하하하핫! 무림이여! 오늘의 이 빚은 천 배 만 배로 갚으리라! 제왕천의 일인혈을 무림의 천인혈(千 人血)로... 크하하하핫!" 슈욱! 그의 몸이 한 덩이 불꽃이 된 채 날아올랐다. 그 순간 사방에서 흑영이 어지럽게 난무했다. "아앗! 피해라......!" "전설의 지옥화강멸멸공(地獄火 滅滅功)이다!" 흑영들의 두 눈이 경악으로 인해 부릅떠졌다. 남궁후는 이미 불덩이로 화해 있었다. 그는 수백의 무리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츠르르르릇!


"크아아악!" 단말마의 비명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느새 화광은 수천 개의 화륜(火輪)이 되어 사방으로 비산하 고 있었다. 수백 명이 숯덩이가 되어 날아갔다. 무림사 이래 어찌 이토록 잔혹하고 엄청난 대살륙이 있었던가? "크하하핫... 반드시 다시 오리라.... 다시 오는 날... 제왕천은 지금의 열 배... 아니 백 배 더 강하게 군림할 것이다.... 크하하하핫... 무림이여! 반드시 피의 복수를 하고 말리라." 남궁후는 마지막 저주를 남기고 하나의 불꽃이 되어 시야에서 아득히 사라져 갔다. "우우! 믿을 수 없다.... 죽음의 대법 지옥화강멸멸공을 전개하고도 달아날 수 있다니.....!" "과연... 무림... 왕 답다!" 수백 명의 복면인들이 폭우가 세차게 쏟아지는 천공을 우러러보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한편, 제왕천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 유삼을 입은 한 명의 복면인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화염에 싸여있는 제왕천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가 살아 도망가다니... 과연 초인이다.... 하지만 그 상태로는 대라신선이라 해도 이각을 넘기지 못 하고 죽을 것이다." 유삼인의 눈에서 음독한 안광이 흘러나왔다. "흐흐흣... 더구나 그의 후사를 끊었으니... 더이상 제왕천은 재기하기 못할 것이다." 그의 음성은 득의에 차 있었다. "흐흐... 이제... 마천(魔天)이 열리기 시작했다." 꽈르르릉......! 섬전이 제왕천을 강타했다. "거목이 쓰러졌으니 이제 남은 것은... 흣흣... 잡목 뿐이다. 그들을 제거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크하 하하핫......!" 유삼인의 일진광소가 뇌성에 파묻혔다. 꽈르르릉...! ③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변치 않는 것. 장안(長安)에는 봄이 와서 초목이 무성타. 시세에 비감해져 꽃을 보아도 눈물 흘리고 이별이 한스러워 새 소리에도 가슴이 아프다. 전쟁이 석 달째 끄니 집에서 오는 편지가 천만금같이 귀하구나. 흰 머리털은 긁으면 자꾸자꾸 빠져서 이제는 비녀도 꽂지 못할 형편이노라.


한 명의 노인이 있었다. 그의 얼굴은 약간 상기된 듯 붉은빛을 띠고 있어 백발의 수염이 더없이 희게 보였다. 노인은 허리가 구부정해 지팡이에 간신히 전신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는 언뜻 보기에도 팔순이 넘어 보이는 촌로(村 老)였다. 노인은 두보(杜甫)의 시를 흥얼흥얼 읊으며 나타났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사방 백여 리에 달하는 거대한 성채로 지금은 불에 타 폐허가 되버린 곳이었다. 하남성 복우산 제인봉 기슭. 바로 삼 일 전만 해도 무림천하가 떠받들던 거목이자, 무림의 하늘이었던 제왕천이 있던 곳이었다. 웅대한 성보는 남김없이 허물어져 잔해를 드러내고 있었으며, 몸종이 즐비했던 누각(樓閣)과 대전(大 殿)은 아예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누가 있어 이 폐허의 성터가 무림천하의 하늘이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촌로는 지팡이를 짚으며 제왕천의 무너진 성보를 넘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쯧쯧... 아쉽군, 아까워... 이토록 큰 성이 불에 타 재가 되다니......." 노인은 혀를 끌끌 찼다. 제왕천이 멸망한 이후로도 사흘동안 폭우는 쉬지 않고 계속 내렸다. 그로 인해 산기슭이 패이고 여기 저기 계류가 형성되었다. 그야말로 지형 자체가 변한 느낌이었다. "허......!" 노인은 탄식을 터뜨렸다. 제왕천의 잔해를 둘러보던 중 불에 타숯덩이가 된 시체더미를 본 것이었다.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명예와 영화가 한낱 뜬구름인 것을.... 무엇 때문에 이토록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노... 쯧쯧......." 노인은 지팡이로 땅을 쿡쿡 찍고는 시체더미를 지나쳤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시체는 많아졌다. 노인의 눈썹이 더욱 찌푸러졌다. "끌끌... 아까운 목숨과 젊음을 무엇을 위해 바쳤노? 명예...? 영화...? 쯧쯧... 아니야, 그런 것이 아니 고 말고......." 노인은 어슬렁거리며 점점 더 안으로 들어갔다. 곳곳에 널려 있는 시신들은 하늘이 원망스러운 듯 눈을 부릅뜨고 있는가 하면, 머리와 몸뚱이는 물론 팔 다리까지 떨어진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누구라도 이 광경을 보았다면 인생에 대한 환멸을 느끼리라. "끌끌... 어리석다. 후(侯), 그대가 이룬 것이 바로 이런 것을 위해서였는가?" 노인은 옆구리에 약초가 담겨 있는 마대자루를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초캐는 늙은이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말투나 기풍으로 보아 결코 범상한 인물같지는 않았다. 그는 한 채의 허름한 방사를 돌아가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제왕천의 주방터였다. 그곳에도 온통 불탄 시체투성이였다. 노인은 다시 혀를 찼다. "쯧쯧...! 이곳은 온통 죽음의 냄새밖에 나지 않는군. 사성(死城)이야... 사성......." 노인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제왕천에는 이미 살아 숨쉬는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노인은 무너진 방사를 돌다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서 생기(生氣)가......?" 노인은 흠칫했다. 노인의 깊숙한 눈에서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빛이 일어났다. 노인은 재빨리 몸을 움 직여 지팡이로 무너진 기둥들을 치웠다. 우지직......! 놀라운 일이었다. 지팡이가 닿자마자 거대한 기둥의 잔재들이 가루로 부서지며 저절로 치워지는 것이 아닌가! 노인은 여전히 담담한 안색으로 구덩이를 파헤쳤다. 그러나 꽤 서두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는 긴 장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 노인의 백미가 부르르 떨렸다. 구덩이 속에 불에 새까맣게 그을린 시체 한 구가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닌가? 시체의 체격으로 미루어 여인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숨소리가 들린다.' 노인은 눈을 빛냈다. 그 순간 노인의 눈에는 혜광(慧光)이 어렸다. 그는 슬쩍 소매를 저었다. 둥실......! 시체가 보이지 않는 무형의 흡인력에 의해 허공으로 떠올랐다. "엇!" 노인은 경악성을 발했다. 그의 눈은 시체를 치운 구덩이 속에 못박혀 있었다. 보라! 그곳에 한 어린 아이가 발가벗은 채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오...! 어찌 이런 일이......." 노인은 격동으로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엄청난 화변(火變)에도 불구하고 구덩이 속에 어린아이가 있다는 것은 실로 기사(奇事)중의 기사가 아 닐 수 없었다. 노인은 언제 허리를 굽혔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구덩이 속에서 아이를 꺼냈다. 아이의 몸에는 피가 묻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막 태어난 갓난아이 같았다. "오오...! 살아 있다!" 아이의 맥을 짚어본 노인은 감동하여 부르짖었다. 문득 노인의 눈이 빛났다. 아이는 왼손에 무엇인가를 꼬옥 움켜쥐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옥패(玉牌)에 연결되어 있는 끈이었 다.


"......?" 노인은 옥패를 살펴 보았다. 그것은 평생을 돌아다녀도 구경조차할 수 없다는 만년한옥(萬年寒玉)으로 된 옥패였다. '그렇군. 만년한옥 덕택에 이 아기가 열기를 견딜 수 있었군.' 옥패의 전면에는 아홉 마리의 용(龍)이 비천하는 조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노인은 옥패를 뒤로 돌려 보았다. "오오... 그렇다면 이 아이가......!" 노인은 탄성을 부르짖었다. <제왕구룡패(帝王九龍牌)> 옥패의 뒷면에는 그런 글이 힘차게 음각되어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제왕구룡패라면 제왕천주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신물(信物)이었다. 따라서 남 궁후의 친인이 아니면 간직할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그렇다면 이 아이가 바로... 남궁후의 자식이란 말인가? 오오......!" 노인은 넋을 잃었다. 본래 남궁후의 십육부인인 화수옥은 쌍둥이를 잉태했었다. 화수옥은 임신 기간 내내 희세의 영약과 독약을 함께 복용했었다. 그로 인해 영약과 독약이 상충작용을 일으켜 아이가 유산되지 않았다. 또한 쌍둥이의 맥(脈)이 워낙 불규칙해져 의술의 달인이라는 의혼조차도 그녀가 쌍둥이를 가졌다는 사 실을 알지 못했다. 화수옥은 첫번째 아이가 태어난 후 분명히 죽었었다. 그런데 뱃속에 든 또 다른 아이가 스스로 죽은 어미의 몸을 뚫고 나와 화수옥이 지니고 있던 제왕구룡패를 움켜쥐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기구한 운 명을 안고 태어난 것이다. 노인은 아이의 손에서 제왕구룡패를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음......?" 아이는 한사코 패의 끈을 쥐고 놓지를 않는 것이 아닌가? 노인은 잠시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내 아이의 맥문을 가볍게 누르고 손을 폈다. 비로소 아 이의 손바닥이 힘없이 열렸다. "오오... 왕의 수상(手相)이 나타나다니......!" 노인은 경악에 몸을 부르르 떨며 부르짖었다. 아이의 손금! <왕(王)> 기이하게도 아이의 손바닥에는 왕자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노인의 눈썹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실로 기이하도다! 어찌하여 손바닥에 이토록 선명한 글자가 새겨져 있단 말인가?" 아이의 손금은 분명 왕자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것은 손금이 아니라 화상(火傷)을 입어 새겨진 것이었다. 묘하게도 제왕구룡패가 불이 달아오르면서 전면에 새겨진 왕자가 화상으로 아 이의 손바닥에 새겨진 것이었다. 노인은 한동안 넋을 잃다가 아이의 얼굴을 소매로 닦았다. 그러자 눈보다 더 흰 아이의 얼굴이 드러 났다. 그 순간 아이가 눈을 반짝떴다. 그야말로 별빛보다 맑은 눈동자가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오오...!" 노인은 탄성을 발했다. 방긋 웃는 아이가 그는 갑자기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동시에 가슴이 뜨겁게 격 동하는 듯했다. 노인은 아이를 힘있게 안으며 중얼거렸다. "아이야, 너야말로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났구나. 장차 네가 어떤 길을 걷게 될지... 노부는 걱정이 태산 같기만 하구나." 노인은 아이를 안고 몸을 돌렸다. "네 손금은... 어쩌면 우연인지도 모르나 네 애비가 평생을 이룩하려 해도 달성하지 못했던 왕도천(王 道天)의 운명을 거머쥐려는 것처럼 보이니... 허허! 이 무슨 얄궂은 일이란 말이냐?" 노인은 어깨를 흔들었다. "가자, 이것도 인연이라면 내 남은 여생을 바쳐 너의 길을 도와주마...." 스읏! 노인의 신형이 홀연히 사라졌다. 그의 신법은 가히 무림에서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광고절금한 것 이었다. ■ 왕도 1 권 제 4 장 낙양입성(洛陽入城) ━━━━━━━━━━━━━━━━━━━━━━━━━━━━━━━━━━━ ① 두두두두두......! 팔두마차(八頭馬車). 잡털 한 올 섞이지 않은 설백마(雪白馬) 여덟 필이 이끄는 대형마차가 황진을 자욱이 휘날리며 낙양 (洛陽)으로 향하는 관도를 달리고 있었다. 때는 봄, 낙양 연변에는 수양버들이 춤을 추고 있었고 들판에는 신록의 물결이 번지고 있었다. 팔두마차는 보는 이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질 정도로 화려했다. 우선 여덟 필의 설백마만 해도 능히 한 마리 당 황금 천 냥은 호가할 정도의 희귀한 보마(寶馬)였으며, 지붕은 황금으로


장식되어 춘광을 받아 번쩍거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주(四柱)마다 살아있는 용이 꿈틀대는 듯한 조각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황족이라도 잠시 나들이를 나온 것일까? 마차는 대지를 뒤흔드는 엄청난 말발굽소리를 내며 낙양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 행인들은 마차의 화려함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은 막연히 추측하고 있었다. - 저 마차에는 틀림없이 황족이 타고 있을 걸세. - 맙소사! 마차의 가격만 해도 아마 일개 성은 능히 살 수 있을 걸세. 두두두두......! 팔두마차는 행인들의 호기심과 동경의 시선을 받으며 낙양성으로 입성했다. 낙양은 누대의 황조가 영고성쇠(榮枯盛衰)를 거듭하는 동안 여러 차례 수도로 내려오면서 성시(盛市) 로 번창해 왔다. 낙양에는 실로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개중에는 왕후장 상(王侯將相)의 후예도 있었고, 공자대부(公子大夫)나 대문장가(大文章家)도 즐비했다. 또한 거부에서 부터 하다못해 시정잡배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인간들이 섞여 있기도 했다. 번화가의 대로에는 청석(靑石)이 반듯하게 깔려 있었다. 또한 대로 주변에는 엄청난 규모의 대저택과 부호의 장원들이 처마를 맛대고 있었다. 그러나 꼭 이렇게 화려한 곳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고루거각(高樓巨閣)이 줄을 잇고 있는 중심가와는 대조적으로 변두리에는 더럽고 습기차며, 어둡기 그지없는 빈민가가 게딱지처럼 붙어 있기도 했다. 그야말로 밝음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대도시였다. 뿐만 아니라 낙양은 환락의 도시이기도 했다. 수없이 많은 주루(酒樓)와 객잔(客棧)을 비롯하여 도박 장과 홍루(紅樓), 청루(靑樓) 등이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두두두두......! 북문을 통해 팔두마차 한 대가 들어섰다. 마부석에는 두 명의 남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남자는 중년인으로 턱과 코밑에 멋진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수염은 마치 구부러진 용의 형태로 보는 이로 하여금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할 정도였다. 또한 그는 철탑을 연상케 할 정도로 강인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일신에는 비단으로 된 금의화복을 입고 있어 누가 보더라도 일개 마부로 보이지가 않았다. 한편 그의 옆에 앉아있는 여인은 더욱 그러했다. 삼십대 전후로 보이는 절색의


미부(美婦)로, 화려한 취의에 피풍을 두르고 얼굴에는 작은 갓을 썼는데 요염하기가 그지없었다. 특히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몸매가 의복을 뚫고 나올 듯했으며 허리는 녹옥의 요대로 졸라매어 더 욱 요염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두 남녀는 북문을 통과하자 마차의 속도를 줄였다. 곧 마차는 낙양에서도 가장 번화한 중문통(中門通) 으로 들어섰다. "아직 멀었소? 천통(天通)?" 문득 햇살처럼 청랑한 소년의 음성이 마차 안으로부터 흘러나왔다. "다 왔습니다. 공자님!" 천통이라 불리운 중년거한이 공손히 대답했다. 그의 곁에 앉아 있던 미부가 마차 안쪽으로 고개를 돌 리며 달콤한 음성으로 물었다. "대설산(大雪山)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꼬박 보름이 걸렸는데... 피곤하지 않으세요?" 놀라운 말이었다. 대설산이면 중원의 끝이 아닌가? 그런데 이곳까지 보름밖에 안 걸리다니 실로 믿어 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마차를 모는 여덟 필의 말을 보면 아는 사람은 고개를 끄덕일만 했다. 그 만큼 말은 명마 중의 명마들이었던 것이다. 마차 안에서 예의 소년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조금도 불편한 줄 모르겠소. 천랑(天娘), 그대들의 보살핌 덕분이오." 천랑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금 후면 도착하옵니다. 그곳에서 여독을 푼 후 천천히 낙양을 구경하시도록 하세요." 소년은 미안한 듯이 말했다. "그대들이 이렇게까지 수고할 필요는 없었는데......." 천통이 황송한 듯 말했다.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이십니까? 이 정도는 저희 부부가 천옹(天翁)께 입은 은혜를 생각하면 만분지 일 의 수고도 아닙니다." "하하... 그렇다고 날 황제 모시듯 할 것까진 없지 않소?" 소년의 말에 천통은 눈빛을 번쩍이며 말했다. "천옹께서 보살펴 주시지 않았다면 오늘의 황금장(黃金莊)은 물론 우리 부부도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 다. 부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소년은 명랑한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하하! 황금장은 중원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금력을 지니고 있지 않소? 그것은 금적태산 규염공 (金積泰山泗髥公)의 탁월한 이재 능력과 천선미랑(天仙美娘)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오? 비록 조부님의 가호가 있었다지만 결국은 그대들의 능력이 뛰어난 탓이었소." 만일, 누군가 그 말을 들었다면 자신의 귀를 의심했을 것이다.


금적태산(金積泰山) 규염공(泗髥公)과 천선미랑(天仙美娘). 그들은 오래 전부터 천하쌍금(天下雙金)으로 불리울 만큼 부호였다. 소문에 의하면 그들 부부가 소유 한 황금이 전 중원의 절반이 넘는다고 할 정도였다. 그들은 낙양에 황금장을 지니고 있었다. 황금장은 대륙제일의 신용을 자랑하는 전장으로, 이곳에서 발 행되는 은표(銀 )는 천하 어느 곳에서도 안심하고 통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부부가 일개 마부가 되어 대설산으로부터 한 소년을 직접 모셔오다니.... 실로 기사(奇事) 가 아닐 수 없었다. 잠시 후에 팔두마차는 낙양 중심가에 있는 한 채의 거대한 장원 앞에 멈췄다. 거대한 석사자상이 양 옆으로 서 있고 문루(門樓)까지 계단이 높이 이어진 곳이었다. <황금장(黃金莊)> 문루에 달려있는 편액은 전체가 황금으로 된 듯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낙양성은 물론 중원의 그 어떤 자도 황금장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낙양 경제의 절반 이상이 황금장과 연관되어 있고, 천하의 상권도 황금장과 관련이 없는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금장의 두 부부가 무림인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들은 무림활동보다 는 사업에 더 주력해 왔기 때문이었다. "다 왔습니다. 공자!" 규염공이 마차에서 뛰어내리며 말했다. 천선미랑도 사뿐히 마부석에서 내린 후 공손히 마차 문 앞에 시립했다. 황금장의 계단 아래에는 경비무사들이 십여 명이나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장주부부가 마차 앞에 공 손히 시립하는 것을 보고 눈알이 휘둥그레졌다. "장주님께서... 어찌 몸소......." 우두머리인 듯한 중년무사가 앞으로 달려오며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입을 열다가 그만 찔끔하여 물러서고 말았다. 규염공이 번쩍이는 시선으로 손을 저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너무 과한 예는 거두십시오." 낭랑한 음성과 함께 마차 안에서 한 명의 미소년이 내렸다. 그는 눈부시게 흰 백의를 입고 있었는데 마치 구름을 밟는 듯 유유한 걸음걸이로 마차에서 내려섰다. "......!" 중년무사는 소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소년의 모습이 너무도 특이했기 때문이었 다.


소년은 이른바 계집애처럼 예쁘장한 미소년은 아니었다. 아니, 도리어 약간 각진 얼굴은 다소 투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소년에게서는 묘한 매력이 흐르고 있었다. 우선 눈썹은 관자놀이까지 길게 뻗쳐 있었다. 더구나 기이하게도 은은한 자색(紫色)을 띠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잘룩한 허리, 강인한 어깨에서는 든든함이 느껴졌다. 게다가 팔과 다리가 유난히 길었다. '일개 소년에게서 위압감이 느껴지다니...!' 중년무사는 그만 기가 죽는 것을 금치 못했다. 자미(紫眉)를 지닌 소년이 단지 그를 슬쩍 보았을 뿐인 데도 불구하고 그는 소년이 뭔가 틀리다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비록 십육칠 세 정도밖에 안되어 보였으나 소년에게서는 은연중 사람들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풍긴 것 이었다. "호호, 공자, 어서 안으로 드세요." 천선미랑이 소년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소년은 눈썹을 꿈틀하며 높이 솟아있는 계단 위의 문루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감탄의 표정이 스 쳤다. "아! 정말 굉장하군요, 천랑." 그 말에 규염공과 천선미랑의 얼굴에 부끄러움이 떠올랐다. "부끄러울 뿐입니다. 공자." 중년무사는 그저 입을 벌릴 뿐이었다. 일개 소년에게 대하는 장주 부부의 공손함이 도무지 상상이 가 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어떤 신분이기에 장주님 부부께서 저토록 공경한단 말인가?' 한편, 주위에는 구경꾼들이 몰려와 있었다. 처음 그들은 화려한 팔두마차에 홀려 모여들었으나 차츰 이 기이한 소년에게 눈길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들 역시 소년의 특이한 용모와 신분에 대해 궁금함을 금치 못한 것이었다. "......!" 구경꾼들 가운에 누더기를 입고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거지 소년이 있었다. 그는 동그란 눈을 크게 뜬 채 자미소년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그는 코웃음치며 중얼거렸다. "흥! 겉모습은 제법 그럴 듯하군. 하긴 부모 잘 만나 행세하는 놈치고 변변한 놈 없지." 그는 입술만 달싹거렸으므로 아무도 그의 말을 들은 사람이 없었다. 그는 계단 위로 올라가는 자미소 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쑥 내밀었다. "후후... 두고 보자. 낙양에 머무르는 한 날 피해갈 순 없을 걸?" 거지소년은 그렇게 빈정거렸다. 그는 군중들 사이를 헤집고 금세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내청(內廳). 황금장의 후면에 있는 그곳은 평소 황금장주 부부가 사용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이 곳에서 지내며 사업을 돌보고 생활을 한다. 만일 사람들이 이곳을 본다면 모두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원제일의 전장인 황금장의 집무실이라면 그 화려함과 웅장함이 극치에 이를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내청은 규모가 극히 작았을 뿐더러 집기가 장식들도 더없이 검박했던 것 이다. 내청 한가운데는 평범한 나무 탁자와 의자가 있었다. 그곳에 규염공 부부와 자미소년이 앉아 있었다. 자미소년은 생소한 듯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이곳을 보니 두 분께서 어떻게 대부호가 되었는지 짐작이 가는군요." 그 말에 규염공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허허, 과분하신 말씀이오." "아닙니다. 실상 소생은 처음 두 분을 만났을 때 사실 선입견을 가졌었습니다." "공자, 어떤 선입견인데요?" 천선미랑이 궁금한 듯이 물었다. "팔두마차를 봤을 때였습니다. 그렇게 화려한 마차는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분이 사치와 허 영을 즐기는 분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후후...." 소년은 싱긋 웃었다. 소년이 웃자 천선미랑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미혹(迷惑)한 표 정이었다. "실상 저 남궁궁(南宮穹)은 지금까지 무애곡(無涯谷) 밖으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상물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자미소년 남궁궁은 담담히 웃으며 다시 한 번 내청을 둘러 보았다. "하지만 하나를 보면 몇 가지를 알 수 있지요. 이런 검박한 곳에 사시는 분들이라면 황금장의 오늘이 있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궁궁의 말에 규염공 부부는 한결같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의 말대로 무애곡 밖으로 한 번도 나 가보지 못했다면 그야말로 쑥맥 중의 쑥맥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조금도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것은 이곳으로 오는 보름여 동안에도 누누히 느낄 수 있었다. 남궁궁은 나이답지 않게 모든 면이 원숙했을 뿐더러 은연중 두 부부의 가슴에 보이지 않는 영향력마저 끼친 것이었다. 규염공은 너털웃음치며 말했다. "허허! 공자의 안목이 워낙 날카로워 우리 부부는 내내 감탄하고 있소이다. 참, 그런데 한 가지 궁금 한 것이 있소이다."


"무엇입니까?" "공자는 줄곧 왼손을 주먹쥐고 계시는데 한 번도 펼치는 것을 보지 못했소이다. 무슨 특별한 까닭이라 도 있는지?" "아! 그건...." 남궁궁은 왼쪽 주먹을 약간 들어 보였다. 그의 얼굴에 신비한 표정이 스쳤다. "기실 저도 이 주먹 속에 어떤 비밀이 들어있는지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인가요? 공자님?" 천선미랑이 버들눈썹을 치켜 세우며 물었다. 그녀는 도저히 소년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하, 어릴 적부터 주먹을 쥐고 있었습니다. 조부님의 특별한 당부가 계셨기에 아직까지 펴보지 못했 습니다." "어찌 그럴 수가...?" 규염공 부부는 눈을 크게 떴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말이 아닌가! 어릴 적부터 한 번도 주먹을 펴보 지 않았다니....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말이었다. "천첩의 좁은 소견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아요. 공자님께서는 그럼 궁금하지도 않으셨단 말인가요?" 남궁궁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찌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수백 번도 넘게 몰래 주먹을 펴보려 했지요. 하지만 결국 그렇게 하 지 못했습니다." "......!" 규염공 부부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말은 비록 담담하게 했으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야말로 철저히 자신을 억제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로 초인적인 의지력이 없이는 참을 수 없는 일 이었다. 남궁궁은 두 사람의 안색이 굳어져 있는 것을 보고 화제를 돌리려는 듯 약간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중원이 이토록 광활하고 아름다운 땅인지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오는 동안 내내 넋을 잃었으니까요." "......." 규염공과 천선미랑은 비로소 안색을 풀었다. 비록 사람을 사로잡는 신비한 면이 있기는 했으나 그럴 때 남궁궁의 얼굴에는 소년다운 천진함이 떠오르고 있었다. "사시사철 만년설(萬年雪)로 뒤덮인 대설산에 비한다면 중원은 마치 천상별원을 보는 듯했습니다. 특 히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것이 저에게는 몹시 이상하게 느껴졌지요." 남궁궁은 불현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화노(華老)가 다소 원망스럽긴 합니다." "......?"


"만약 그가 두 분께 연락하지 않았다면 마음껏 중원의 풍물들을 감상하며 자유롭게 올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규염공은 미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우리 부부가 자청한 일이었소이다." 남궁궁은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정색을 하며 말했다.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이번에 제가 중원에 온 것은 경험을 쌓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헤쳐 나가 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두 분이 지나치게 절 감싼다면......." 천선미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만해요. 공자께서는 평소 성품이 소탈하고 자유분방하시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천첩 은...." 그녀는 규염공을 슬쩍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오는 도중 상의했어요. 공자께서 다양한 경험을 쌓으려면 아무래도 자유롭게 활동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남궁궁은 그제서야 활짝 웃었다. "그렇습니다. 천랑이 제 마음을 알아주는군요." 천선미랑은 아미를 곱게 접었다. "그런데... 천첩은 은근히 걱정되는 점이 있답니다." "......?" 남궁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천선미랑은 문득 요염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공자께서 이토록 뛰어나시니 가는 곳마다 소녀들이 줄줄이 따를 텐데 말이에요...." 남궁궁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쓴웃음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만 두시오. 천랑, 저는 결코 여인에게 관심을 두지는...." 천선미랑은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챘다. "호호호! 공자는 관심이 없어도 여인들은 그렇지 않을 걸요? 천첩만 해도......." 그 말에 규염공은 버럭 외쳤다. "뭐라고? 당신이 그럼...?" 그는 고리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천선미랑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만약 천첩의 나이가 조금만 더 어렸다면 결코 당신 같은 털보를 택하진 않았을 거예요." 남궁궁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는 그만 목까지 시뻘개지고 말았다. 규염공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핫...! 하긴 나도 공자께 반할 정도이니 무리가 아닐 거요." "이거... 왜들 이러십니까?" 남궁궁은 그들의 얼굴을 바로 보지도 못한 채 손을 내저었다. "하하하하......!" "호호......!" 실내에 폭소가 터졌다. 무거웠던 방안의 분위기도 한바탕의 폭소로 인해 한결 가벼워지고 있었다.


"참, 공자께선 그만 쉬셔야지요." 천선미랑이 웃음을 그치며 몸을 일으켰다. 남궁궁은 기다렸다는 듯 성급히 따라 일어났다. 그는 한시 라도 빨리 이 어색한 처지를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중원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슴이 몹시 설레고 있었다. ② 내 이름은 남궁궁(南宮穹)....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세상을 알게 되기까지 오직 만년설로 뒤덮인 대설산(大雪山) 무애곡에서만 자라났다. 할아버지께서는 늘 내게 말씀하셨지. 왕도(王道). 왕도를 이룩해야 한다고. 왕도가 과연 무엇이기에...? 나 남궁궁의 운명은 왕도를 위해 살도록 정해졌단 말인가? 오늘날까지 매일 내 키만큼의 책을 읽어야 했으며 무애곡의 만빙담(萬氷潭)과 지극열화소(地極熱火沼) 에서 지난 십칠 년 동안 수 천 번이나 피부가 벗겨지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웃음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언제나 웃음을 머금어야만 했지.... 그 모든 것이 왕도를 이루기 위한 수업이라고 했다. 왕도.... 왕도가 무엇이길래? "......." 밤은 삼경을 넘어 사경으로 가고 있었으나 남궁궁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대설 산 무애곡을 떠나 낯선 중원땅에 왔으므로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남궁궁은 왼손을 올려 본다. 그의 왼손은 주먹이 쥐어져 있었다. - 절대로... 때가 되기 전에 주먹을 펴서는 안된다! 남궁궁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나 자신조차도 이 주먹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면 세상 사람들이 믿을 수 있을까?' 그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쓰다듬으며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어릴 적부터 이것 때문에 숱한 갈등을 느꼈었지. 그것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저 가볍게 손만 펴면 비밀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사실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주먹을 펼쳐보지 못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철없던 어린아이 적에는 왼손이 항상 붕대에 감겨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할아버지는 직접 붕대를 풀어 주면서 당부했었다. 때가 되기 전에는 절대 주먹을 펼쳐 서는 안된다고. 그는 왜 그래야 하느냐고 물었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었다. - 허허! 네 스스로 알게 될 날이 있을 거다. 할애비는 널 믿는다. 네가 약속을 깨지 않으리라는 것을. 남궁궁의 갈등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하루에도 수십 번이나 주먹을 내려보며 펼쳐보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다. 게다가 왼손을 못쓰니 갑갑하기 그지없기도 했다.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그는 삼 년이 지나서야 간신히 충동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때부터 왼손 주먹은 그의 의식 속에 자연스럽게 존재하게 되었다. - 네가 주먹을 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모든 사람들이 네게 고개 숙일 것이다. 지금 까지 무림에서 왕도를 이룬 사람은 없었다. 네가 주먹을 펴는 날, 왕도의 세상이 열릴 것이다. 남궁궁의 얼굴에 문득 추억의 빛이 떠올랐다. "후후... 지금쯤 소군(素君)은 무얼하고 있을까? 백원(白猿)과 놀고 있을까?" 남궁궁의 뇌리에 사시사철 눈에 뒤덮힌 대설산과 무애곡의 정경이 떠올랐다. 소군은 그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순결무구한 소녀였다. 그녀는 남궁궁이 고통에 잠겨 있으면 언제 나 그를 위로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곤 했었다. 또한 그녀와 함께 남궁궁의 친구가 되어 준 것은 흰 털을 지닌 원숭이 백원이었다. 소군과 백원. 그들과 함께 지냈던 즐거웠던 날들의 기억이 남궁궁의 뇌리에 주마등처럼 스치고 있었 다.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해도 함께 대설산을 뛰어다녔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낯선 중원땅에 홀로 떨 어져 있는 것이었다. 남궁궁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는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하늘은 어두웠으나 낙양의 중심가쪽 하늘이 불야성을 이룬 듯 휘황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대도시답게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아 하늘마저 환하게 비추는 것이었다. 문득 남궁궁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중원.... 생각보다 넓은 곳이다. 이곳에서 내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단 말인가?' 남궁궁의 눈에서 강렬한 신광이 뿜어져나왔다. 평소의 그의 눈빛은 천진할 정도로 맑기만 했다. 어찌보면 어린아이처럼 지순해 보이기도 했다. 보통 무예를 익히게 되면 안광이 강렬해지게 된다. 그런데 태어나면서부터 각종


절학을 익힌 그의 눈 빛이 이토록 맑은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세 살때 벌모세수하여 생사현관(生死玄關)이 타통되었다. 뿐만 아니라 각종 기약영초(奇藥靈草) 를 복용하여 내공이 극고했다. 따라서 신광이 안으로 깊숙이 갈무리되어 평소 때는 마치 무공을 익히 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한동안 밝게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던 남궁궁의 입가에 서서히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한 가지 결심을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일 년간 폐관하실 것이다. 그 사이에 중원의 풍물과 경험을 쌓으라고 하셨지. 하지만 천통과 천랑은 날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들은 내 행동에 사사건건 신경을 쓸게 틀림없다.' 남궁궁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할아버지께서는 비록 강호에 모습을 드러낼 때가 아니라고 하셨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때란 기다 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남궁궁의 눈빛이 점점 강렬하게 빛났다. 그는 오른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오늘 밤, 이곳을 떠나자!' 남궁궁은 몸을 돌렸다. 잠시 후 그는 종이 위에 무엇인가를 간단히 적었다. 그는 종이를 탁자 위에 놓 은 후 주위를 둘러 보았다. 방안에는 그가 생활하기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모든 생활용품이 구비되어 있었다. 옷장에는 십여 벌의 옷이, 책장에는 구하기 힘든 서적들이, 심지어는 비파와 적(笛) 따위의 악기까지 벽에 걸려 있었 다. 남궁궁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혼자 강호에 뛰어들기로 한 이상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는 게 낫다.' 마침내 그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않기로 했다. 일단 결심을 굳히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미안하오. 천통, 천랑." 남궁궁은 낮게 중얼거리더니 창문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한 줄기 연기처럼 창문을 빠져 나갔다. 잠시 후 그는 황금장의 담장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한 소년 기인의 초출강호(初出江湖)가 시작된 것이다. ③


아침이다. 힘차게 솟아오른 일륜(日輪)이 낙양성에 참신한 여명을 뿌리고 있었다. 남보다 한 발 앞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은 결코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다. 새벽녘의 달콤한 잠을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인생이란 결코 달콤한 것만은 아니다. 낙양의 새벽. 대도시에는 부지런한 사람이 꽤나 많았다. 대로에는 물건을 가득 실은 수레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 으며 온갖 부류의 인간들이 무엇이 그리 급한지 종종걸음치고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상인들로 보였으나 개중에는 여행자 차림을 한 사람도, 또는 책보따리를 낀 문사 차림의 사람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그런데 그 중에서 느릿하게 걷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새벽의 여명을 받으며 유난히 여유로운 발걸음 으로 대로를 걸으며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는 소년, 그는 바로 남궁궁이었다. 그는 일신에 백삼을 입고 있었으며 얼굴에는 치기가 남아 있었으나 훤칠한 체격으로 인해 헌앙한 기 도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사뭇 신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과연... 낙양이로구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실 그는 황금장을 몰래 나온 후 바로 낙양을 떠나려 했다. 낙양에 있는 한 규염공 부부의 눈길을 벗어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왕에 낙양에 온 이상 풍물 구경이나 하고 떠나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래서 새벽거리를 이리저리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그의 눈에는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십칠 년 동안 그는 사람이라곤 볼 수 없는 대설산에만 파묻혀 있었으므로 이렇 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만으로도 사뭇 흥미로운 일이었다. '대체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어디로 바삐 가고 있는 걸까?' 시간이 흐를수록 거리는 점점 더 혼잡해 졌다. 남궁궁은 사람들사이에 어깨를 부딪히며 발길 가는 대 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비로소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는 성현의 말을 실감하고 있었다. '몰래 빠져나오기를 정말 잘했어.' 그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걸었다. 그의 발걸음은 마치 구름을 밟듯 가볍기만 했다. 이때였다. 맞은편으로부터 꾀죄죄한 차림의 거지소년이 인파를 헤치며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옷차림 은 비록 지저분했지만 자세히 보면 제법 오관(五官)이 수려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거지소년은 몹시 바쁜 듯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다가왔다. 그러나 이때 남궁궁은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한 대의 마차로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쌍두마차로 좀처럼 보기 드문 두 마리의 한혈마(汗血馬)가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차의 장식도 최고급이어서 한눈에도 보통 사람은 탈 엄두를 내지 못할 것 같았다. 마차는 행인이 많은 탓인지 천천히 가고 있었다. 남궁궁은 마차가 바로 옆을 지날 때 코끝에 기이한 향기를 느꼈다. '흠, 지체 높은 가문의 소저가 타고 있나 보군.' "아...!" 이때 마차 안으로부터 한 가닥 탄성이 흘러 나왔다. 그것은 여인의 음성이었다. 남궁궁은 흠칫했으나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았다. 날이 완전히 밝았으므로 자신이 없어진 것을 안 규염 공 부부가 찾으러 나올까봐 은근히 염려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쿵! "아이쿠......!" 갑자기 누군가 그의 가슴에 세게 부딪치며 비명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남궁궁은 급히 눈길을 돌렸 다. 그의 몸에 부딪친 후 나가떨어진 것은 다름아닌 거지소년이었다. 소년은 몹시 아픈 듯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런, 소형제. 다치지 않았나?" 그는 소년을 향해 손을 뻗어 부축하려 했다. 그러나 거지소년은 콧방귀를 날리며 그의 손을 뿌리치는 것이 아닌가? "흥! 눈알이 비뚤어 졌나? 앞 좀 보고 다니라구!" 소년은 톡 쏘아부치고는 옷을 툭툭 털고 일어서더니 그를 지나쳐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남궁궁 은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러나 곧 그는 자신의 몸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황급히 품속에 손을 집어 넣은 그는 멍해지고 말았다. 당연히 있어야 할 전낭(錢囊)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어이가 없군! 소매치기를 당할 줄이야...!'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거지소년이 그와 고의로 부딪치며 귀신도 모르게 전낭을 훔쳐갔다는 것을. 남궁궁은 고약한 마음이 들었으나 곧 생각을 바꾸고 있었다. '이거야말로 좋은 경험이로군. 아무리 산을 쪼개고 바다를 가를 무학을 지니고 있다한들 무슨 소용인 가? 백주대낮에 은자 주머니를 털어가는 것도 까맣게 몰랐으니....' 남궁궁의 생각은 확실히 범인과 달랐다. 그는 소매치기한 거지소년을 원망하기보다는 자신에게 경종 을 울려준 것에 도리어 감사하고 있었다. 이같은 성품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순후한 성품과 대범한 생각, 넓은 포용력이 없이는 불 가능한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로부터 왕도를 이루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아왔으므로 확실 히 남궁궁의 사고는 범인을 초월하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후후! 귀여운 꼬마놈. 하지만 다음에 만나면 당하는 것은 네가 될 것이다.' 그의 앞에 낙양성의 남문(南門)이 보이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천통이 쫓아오기 전에 낙양을 벗어나자. 일단 이곳을 벗어나면 그도 쉽게 찾아올 수 없을 것이다.' 남문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썹이 성큼 치켜 올라가고 있었다. 바로 얼마전 보았던 두 마리의 한혈마가 이끄는 쌍두마차가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부석에는 초립을 깊숙이 눌러쓴 왜소한 체구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남궁궁은 다시 걸으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겠지. 저 마차가 꼭 내 뒤를 따라온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지.' 그는 신경을 끄기로 하고 남문을 통과해 낙양성 밖으로 빠져 나갔다. 한편, 쌍두마차도 그의 뒤를 이어 남문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마차 안으로부터 여인의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분이야.... 틀림없어.... 내 눈이 잘못 되지 않은 한... 그분이 틀림없어." 흥분에 가늘게 떨려 나오는 여인의 음성에는 왠지 회한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러자 마차를 몰던 초 립을 쓴 자가 맞장구쳤다. "아가씨, 틀림없어요. 저도 똑똑히 봤는 걸요?" 놀랍게도 초립인의 음성은 앳띤 소녀의 음성이었다. "아아! 일 년만에 그 분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다니... 이게 꿈은 아니겠지......?" "그럼요, 아가씨. 꿈이 아니에요. 어서 쫓아가요." 마부소녀는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나 적당히 속도를 조절하여 남궁궁의 뒤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가고 있었다.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남궁궁은 오늘 처음으로 혼자 세상에 나온 셈이었다. 그런데 그를 일 년만에 본 여인이 있다니?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④ 한 쌍의 아름다운 눈. 그 눈은 남궁궁이 낙양을 떠날 때부터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따라 붙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남궁궁도 그것을 느꼈다. 그는 줄곧 누군가 자신을 쫓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눈길이 정확히 누구의 것이라고는 알아내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그 눈에 악의(惡意)가 없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어쨌든 남궁궁의 가슴 속에는 의문이 구름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대체 누가 나를 미행한단 말인가?'


금릉(金陵)은 지금은 남경으로 불리지만 명초(明初)에는 수도(首都)였다. 따라서 아직도 곳곳에 화려했 던 황도로서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오늘날 금릉은 강남에서도 유명한 풍류도시로 색향인 항주(抗州)와 쌍벽을 이루는 곳이 되었다. 그래 서 이곳에는 기루가 즐비하고 주점, 도박장 등이 성업을 이루고 있었다. 천일야화루(千日夜花樓). 대하소영루(大河素影樓). 금릉의 수많은 기루 중에서도 이 두 곳이 가장 유명했다. 천일야화루는 개업한 지 이백 년이 넘는 곳으로 금릉 사람이라면 한두 번은 가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대하소영루는 생긴 지 십여 년밖에 안된 곳으로 그야말로 신생 기루라고 할 수 있었다. 기이한 것은 대하소영루가 생긴 직후부터 천일야화루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이 백 년간 금릉제일의 기루로 명성을 날려왔던 천일야화루가 경영이 악화되면서 점점 더 빛을 잃어간 것이었다. 그러나 천일야화루에서 단 하나만은 여전히 그 명성이 가시지 않고 있었으니.... 천일야화(千日夜花) 무영랑(無影娘). 바로 그 이름이었다. 천일야화란 대대로 천일야화루 수석기녀를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당대의 천일야화는 무영랑이란 기녀 였는데 비록 대하소영루에 밀려 나날이 기루가 퇴락해지고는 있었으나 그녀의 타고난 아름다움과 명 성은 여전한 것이었다. 오늘날 천일야화루가 간신이 명맥이나마 유지하고 있는 것도 그녀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강남은 완연한 봄이다. 오월로 접어들면서부터 산은 신록(新綠)으로 물들고, 대지를 스치는 훈풍은 만물의 성장을 재촉하고 있었다. 봄바람에 옷자락을 날리며 금릉성으로 들어서는 소년이 있었다. 그는 잿빛의 옷을 입고 있었다. 아니 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본래는 백삼(白衫)이었다. 그런데 뽀얀 먼지가 묻고 여독의 때가 묻어 잿빛 으로 보인 것이었다. 소년의 얼굴은 길고 각진 얼굴이었다. 결코 미소년은 아니었다. 그러나 양쪽 관자놀이까지 뻗친 눈썹 이 은은한 자색을 띠고 있어 강한 인상을 풍겼다. 그는 다름아닌 남궁궁이었다.


그는 화려한 금릉의 시가지로 들어서면서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곳은 낙양과는 또 다른 모습이구나. 과연 중원은 넓고도 넓은 곳이야, 가는 곳마다 풍물이 이리도 다르다니.' 그는 마냥 신기한 표정으로 번화한 성시를 둘러 보았다. 이때였다. 문득 그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동시에 입가에 신비한 미소가 어리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그의 눈은 전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파를 헤치며 잰걸음으로 바쁘게 다가오고 있는 한 거지소년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 낙양에서 그의 전낭을 슬쩍 빼내간 그 소년이었다. 남궁궁의 뇌리 속으로 재미있는 생각 한 가지가 떠올랐다. '후후... 어디 혼 좀 나봐라.' 그는 일부러 거지소년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는 거지소년을 향해 급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쿵! "아이쿠!" 거지소년은 남궁궁의 어깨와 부딪히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렁넘어졌다. 남궁궁은 황급히 그를 부축하며 사과했다. "죄송하게 됐소.... 형씨!"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 했는가! 그는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거지소년의 허리춤에서 무엇인가를 빼어냈다. 그러 나 거지소년은 몹시 급한 일이 있는 듯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돌아섰다. "퉤에......!" 거지소년은 재수 없다는 듯 침을 한 번 뱉더니 급히 사라졌다. 남궁궁은 하마터면 대소를 터뜨릴 뻔했다. 그는 품 속에 묵직한 가죽주머니 하나를 만지며 치기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다시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얼마쯤 가자 화려한 주루가 하나 나타났다. <화빈루(華賓樓)> 금빛의 편액에 쓰여진 이름은 주루만큼이나 화려해 보였다. "배 고픈 참에 마침 잘 됐군." 남궁궁은 서슴없이 화빈루로 올라갔다. "어서 옵쇼!" 점소이가 그를 향해 큰 소리로 외치다가 그만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남궁궁의 옷차림이 꾀죄죄한 것 을 보고 잔뜩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사실 화빈루는 금릉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급 주루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곳을 이용하는 손 님들은 대개가 부자이거나 명문가의 귀인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저, 손님. 이곳은...." 점소이는 거절하기 위해 궁리하며 남궁궁의 아래위를 훑어 보았다. 그러나 그는 움찔했다. 남궁궁은 비록 옷차림은 초라했으나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점소이 생활 십 년이 넘으면 구렁이 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는 곧 남궁궁이 입은 백삼이 비록 때가 타있기는 했지만 최고급 비단으로 된 것을 발견했다. 뿐만 아니라 눈치가 도사인 그는 남궁궁의 눈빛이 조금도 위축된 것이 없이 당당한 것을 느꼈다. 그는 재빨리 생각을 바꾸고 넙죽 절을 하며 말했다. "공자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는 남궁궁을 안내하여 이층으로 올라갔다. 남궁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점소이는 그에게 창가에 면한 좋은 자리를 내주었다. 물론 남궁궁은 점원이 이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생각했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는 자리에 앉은 후 침을 삼키고 있었다. '후후... 오랜만에 포식을 해볼까? 하긴 그간 빈털털이라 변변한 음식 한번 못먹었지.' "공자님, 무얼 드릴깝쇼?" "음. 이곳에서 잘하는 요리가 무엇인가?" "헤헤! 화빈루의 요리는 무엇이건 최상급이 아니면 안 만듭니다요. 그건 금릉 사람이면 모두가 아는 사실입죠. 우선 오리고기 볶음에 연한 소고기 육회, 갈매기살로 만든 무침에 버섯과 소채, 소면을 감 칠맛나게 데친...." 점소이의 설명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남궁궁은 중원 음식에 대해 잘 몰랐으므로 설명을 들어봐야 맛이 어떤지 알 리가 만무였다. 그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잘하는 요리 한 가지씩을 모두 갖다주게." "네엣?" 점소이는 입을 딱 벌렸다. "전부... 말입니까?" "그래, 전부." 점소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주문대로라면 최소한 열 사람이 달려 들어도 다 먹지 못할 분량이 었던 것이다. 그는 놀라서 되물었다. "그 많은 걸 모두... 혼자 드실 겁니까?" "껄껄...! 소제, 형님을 위해 그렇게 많은 요리를 시켜주다니 정말 고맙네." 느닷없이 걸쭉한 음성이 들려왔다. 남궁궁과 점소이는 고개를 돌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들의 옆에는 거구의 중년인이 서 있었다. 그는


보통 사람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있는 듯한 키에 남산만하게 불룩 튀어나온 아랫배를 한손으로 두드 리며 입맛을 쩍쩍 다시고 있었다. 어찌나 살이 쩠는지 그의 아랫배는 축 처져 있었으며 양뺨도 늘어질 대로 늘어져 있어 마치 미륵처럼 보였다. 게다가 두 눈은 살속에 파묻혀 그저 가느다란 선만 보일 뿐이었다. 점소이는 그만 한숨을 쉬었다. "휴우.... 어쩐지. 아... 알겠습니다요! 곧 바쳐 올리겠습니다." 그는 부리나케 주방으로 달려갔다. 남궁궁은 느닷없는 중년인의 출현에 어이가 없었으나 그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어이! 동생, 이 형님이 배가 고프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쿵! 비대한 체격의 중년인은 남궁궁의 허락도 받지 않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의자는 금방이라 도 부서질 듯 비명을 질렀다. 남궁궁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야 형님의 체격을 보니 하루에 열 끼니는 먹어야 할 것 같아서 시켰지요." "오오......!" 중년인은 감탄을 발하며 남궁궁의 손을 덥석 움켜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허공을 휘젓고 말 았다. 공교롭게도 남궁궁이 손가락으로 창 밖을 가리켰기 때문이었다. "후후! 저기 형님과 대조적인 사람이 오고 있습니다." "......?" 중년인은 그의 손가락을 따라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다 그만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⑤ 과연 창문을 통해 주루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흑의인이 보였다. 그는 어찌나 말랐는지 마치 대나무를 연상케 했다. 바람만 불어도 날려갈 듯 비쩍 마른 체격에 걸친 옷은 헐렁하여 마치 장대에 옷을 걸어놓은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한마디로 피골이 상접한다는 말이 딱 맞아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흑의인의 모습이 곧 보이지 않게 되 었다. 주루로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루의 이층으로 흑의인이 올라섰다. 흑의인은 퀭하니 패인 눈으로 주루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뚱보중년인을 발견하고는 두 눈에 번뜩 광채를 발했다. 그는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움푹 패인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뚱보를 발견 하고는 역시 허락도 받지 않고 뚱보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이쿠! 또 밥맛 떨어지게 생겼군. 도무지 시체 냄새 때문에 골치가 아파서......!" 뚱보 중년인은 코를 감싸쥐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흑의인의 입에서 냉랭한 음성이 떨어졌다. "난 네놈만 보면 언제나 구역질이 난다. 대체 뭘 먹었기에 뱃속에 똥이 가득 들었느냐?"


"뭐, 뭐라고!" 삐걱! 뚱보가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다시 의자가 부러질 듯 비명을 질렀다. 남궁궁은 그들 두 괴인의 출현 에 흥미를 느끼며 내심 중얼거렸다. '알고보니 이들은 서로 아는 사이였구나.' 그는 그들이 자신의 자리에 앉은 것을 탓하지 않았다. 왠지 그 두 괴인에게 호감이 갔던 것이다. 뚱보는 잔뜩 흥분한 음성으로 떠들고 있었다. "아우! 자네가 판단을 해 주게. 우리 두 사람 중 누가 더 보기 좋은가를......?" "어휴...! 정말 그렇게 좀 해주게. 젊은 동생." 흑의인도 질세라 남궁궁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궁궁은 한동안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낭랑하게 말했다. "두 분은 그야말로 막상막하입니다. 한 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보기좋게 살이 쪘으며, 한 분은 더없이 이상적으로 말랐으니까요." 그야말로 괴변 중의 괴변이 아닐 수 없는 답변이었다. "푸훗......!" 문득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억지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궁궁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좌측 자리에 일남일녀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자색의 문사의를 입은 서생이었는데 등을 돌리고 있어 용모를 알 길이 없었다. 반면 그의 맞 은편에 앉아있는 홍의소녀의 모습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입을 가리고 웃다가 남궁궁이 쳐다 보자 급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귀여운 소녀구나!' 남궁궁은 자신도 모르게 내심 그렇게 중얼거렸다. 한편 두 괴인은 여전히 서로를 헐뜯고 있었다. "야이, 돼지 같은 놈아! 네놈을 보면 난 생의 환멸을 느낄 지경이다!" "흥! 네놈을 보면 어떤 생각이 나는지 아느냐? 어서 관(棺)을 짜두어야 겠다는 생각이 난단 말이다!" "뭐라고? 뱃속에 똥만 찬 돼지 같은 놈이...." "흥! 말라깽이야! 시체 같은 낯짝을 들고 활보하는 걸 보면 너도 어지간히 강심장이다! 나 같으면 벌 써 관 속에 드러누워버렸을 거다!" "에이! 이 똥돼지야! 더 이상 지껄이면 아가리에 똥통을 부어 버리겠다!" "뭐? 이 작대기 같은 놈이! 입김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아 손을 쓰지 못했더니 이젠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는구나!" 두 괴인의 말다툼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남궁궁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두 분, 요리가 오고 있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싸움이 뚝 그쳤다. 뚱보는 입을 헤벌리고 넋을 잃은 표정이었다. 주문한 요리는 그 양이 엄청났다. 대여섯 명의 점원들이 수십 개의 접시를 연신 날라오고 있었다. 잠시 후 탁자에는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요리가 가득차게 되었다. 남궁궁으로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야말로 진수성찬, 탁자 다리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뚱보의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졌다. "고맙네, 고마워! 동생... 헤헤헤......!" 말을 마치기가 바빴다. 우적우적... 쩝쩝......! 도대체 그처럼 식성 좋은 사람이 또 있을까? 뚱보는 왼손에는 구운 오리고기를 들고, 오른손에는 볶은 쇠고기 접시를 통째로 든 채 번갈아가며 입 으로 쑤셔넣고 있었다. 그야말로 굶주린 귀신이라도 씌운 양 그는 양손을 번개처럼 놀리며 입으로 쑤 셔넣기에 정신이 없었다. '맙소사!' 남궁궁은 그만 넋이 빠져 음식을 먹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벌컥벌컥......! 뚱보는 음식을 먹는 한편 술병을 통째로 들어 입안에 들이붓고 있었다. 그의 처진 양 뺨은 음식물이 들어갈 때마다 불룩해 졌지만 금시 꿀꺽 삼키고는 다시 새로운 음식물이 쑤셔넣어지곤 했다. 마치 아귀(餓鬼)를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 남궁궁은 아직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는데 이미 탁자 위의 접시는 절반 이상이 비어가고 있었다. 반면 흑의인의 모습은 지극히 대조적이었다. 그는 소채와 소면 접시만을 앞에 당겨두고 있었는데 겨 우 두 젓가락 드는 둥 마는 둥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표정으로 음식을 들고 있었다. 마치 죽지 못해 먹는 양, 잔뜩 울 상을 지은 채 젓가락으로 한 점씩 입에 대었다가 도로 내려놓곤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두 사람의 식사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달랐다. 남궁궁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그만 고 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식사하기 시작했다. 만일 더 기다리다간 뚱보 중년인이 접시를 완전히 청소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불과 일 다경도 지나지 않아 탁자 위의 음식은 완전히 동이 나버리고 말았다. "끄으윽! 오랜만에 간식을 먹었군." 뚱보는 트림을 하며 말했다. '뭐라고? 열 사람이 먹어도 남을 요리를 혼자 다 먹어치우고 간식을 먹었다고?'


남궁궁은 내심 비명을 지르며 흑의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흑의인은 소채와 소면을 거의 그대로 남 긴 채 젓가락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는 힐끗 뚱보를 바라보며 비웃음어린 어투로 말했다. "임태보(任太甫)! 그만큼 처먹었으니 소화를 시켜야지!" 뚱보, 즉 임태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혁련지(赫連枝)! 이젠 적당히 배도 찼으니 네놈의 뼈다귀를 부러뜨려야 겠다." 임태보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말라깽이 혁련지도 질세라 탁자를 두드리며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이마를 맞댄 채 서로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어이! 동생, 자네가 공평하게 참관인이 되어줄 수 있겠나?" 문득 임태보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참관인이요?" 남궁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컬컬... 이 시체 같은 놈이 어르신을 형님으로 모신다고 맹세해 놓고는 번번이 약속을 어긴단 말일세. 그러니 이번에는 자네가 증인이 되어주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 빌어먹을 돼지야! 너야말로 약속을 골백 번도 더 어겼지 않느냐?" 그들은 당장에라도 싸울 것 같은 기세였다. 그렇게 되면 객점의 탁자와 의자가 나뒹굴고 난장판이 될 게 뻔했다. "두 분 고정하십시오. 오늘은 소제가 공정히 지켜볼테니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의 제안에 두 괴인은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더니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들은 나란히 계단으로 걸어갔다. 남궁궁은 미소 지으며 그들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그는 계산대 앞에 서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는 묵직했다. 필시 그는 그 속에 많은 은자가 들 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산이었다. "......!" 가죽 주머니 속에는 한 푼의 은자도 들어있지 않았다. 대신 몇 가지 기이한 물건이 들어있을 뿐이었 다. 그 속에는 동(銅)으로 된 면구(面具) 하나와 동패(銅牌) 하나, 그리고 붉은 색의 봉서(封書) 한 통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이거 낭패로구나!' 남궁궁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바로 그때 두 괴인의 안색이 홱 변했다. 그들은 경악에 찬 눈으로 주머 니에서 나온 물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자, 모두 은자 스무 냥입니다요." 계산대의 중년인은 예감이 이상한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재촉했다.


"그게...." 남궁궁은 어쩔 줄 몰라 더듬거렸다. 자칫하면 개망신을 당할 처지였다. "계산은 여기 있어요!" 문득 꾀꼬리 같은 소녀의 음성과 함께 은자 한 덩이가 계산대 위에 떨어졌다. "......?" 남궁궁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한 명의 자의서생이 섭선으로 얼굴을 가린 채 서 있었는데 바로 옆에 홍의소녀가 흰 이를 드러내며 귀엽게 웃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남궁 공자님?" 홍의소녀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남궁궁은 어리둥절했다. "날 아시오?" 홍의소녀는 입을 삐죽였다. "흥! 정말 모른 척 하긴가요?" "......!" 실로 황당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남궁궁은 맹세코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생각 에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도무지 홍의소녀를 본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사이 임태보와 혁련지는 주루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자의서생과 홍의소녀도 그들의 뒤를 따 라 나가고 있었다. 다만 남궁궁만 그 자리에 선 채 기억을 살려내려 애쓸 뿐이었다. "오늘밤 삼경 회하(淮河)의 자봉기(紫鳳旗)가 꽂힌 배로 오세요. 아씨께서 기다리셔요." 홍의소녀는 걸어가다 고개를 돌리며 그에게 말했다. "......?" 남궁궁은 더욱 멍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곧 급히 앞으로 달려갔다. 주루 밖에서 임태보와 혁련지가 다 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싸우더라도 장소를 옮겨서 싸워야 합니다." 그는 두 괴인의 등을 밀다시피하며 주루를 등지고 나섰다. 임태보와 혁련지는 그에게 떠밀려 가면서 도 여전히 쉬지 않고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욕설 퍼붓기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 삼 인은 인파를 헤치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뒤를 미행하는 인영이 있었다.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교묘하게 인파 사이로 몸을 숨기고 있어 정체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남궁궁은 두 괴인과 함께 인적이 드문 곳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느덧 어스름 해가 기울고 있었다. ■ 왕도 1 권 제 5 장 뜻밖의 정사(情事) ━━━━━━━━━━━━━━━━━━━━━━━━━━━━━━━━━━━ ①


남쪽으로부터 훈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삼 인이 당도한 곳은 금릉 외곽으로,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이 위태로워 보이는 한 채의 사당(祠堂) 이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흔적만 남아있는 사당 문을 통과해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나 있는 마당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 당도하자 임태보와 혁련지는 서로를 노려보며 마주보고 섰다. 한 사람은 살이 쪘다면 너무 찐 인물이었고, 또 한 사람은 말라도 너무 말라 정상이라고 볼 수가 없 었다.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남궁궁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는 몹시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저들은 오래 전부터 서로 으르렁 댄 사이 같다. 이번의 싸움도 그 연장인 것 같다.' 두 괴인은 삼 장의 거리를 두고 서서히 공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우우웅......! 문득 임태보의 옷자락이 고무풍선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이내 그의 몸은 배나 더 뚱뚱해졌다. 쓰... 쓰쓰......! 그의 맞은편에서도 괴이한 음향이 일어났다. 그것은 혁련지의 몸에서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는 소리였 다. 그의 흑삼은 흡인력에 의해 장대같이 마른 몸에 찰싹 달라붙고 있었다. 휘류류류륭...! 쓰이이이잉......! 두 사람을 중심으로 기묘한 회오리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임태보는 회오리를 사방으로 발산하고 있 었고. 혁련지는 반대로 그것을 흡수하고 있었다. 혁련지의 몸은 마치 고목처럼 보였다. 전신의 피부조차도 고목처럼 갈색으로 변해 버렸다. 반면 임태 보는 피부가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채 담황색을 띠었다. 남궁궁의 눈썹이 꿈틀했다. '저것은... 전설로만 전해지던 고목신공(枯木神功)과 항마금포삼(降魔金布衫)이 아닌가? 외문기공(外門 奇功)의 최절정이라는 두 가지 절기가 두 사람에 의해 재현되다니!'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외문기공은 꽤 오래 전부터 무림인들에게 외면되어 왔다. 그 이유는 외문기공은 특수한 체질을 지닌 자만이 익힐 수 있을 뿐더러, 극히 까다로운 수련방법으로 평생 동안을 쉬지 않고 연마해야 그 실효 를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외문기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순양지기(純陽之氣)가 필요했으므로 평생 여인을 접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무림인들은 외문기공보다는 숙성이 빠른 내가기공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 였다. 남궁궁은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저 두 사람은 비록 괴물이긴 하지만 외문기공을 절정으로 익혔으니 그 점에 있어서는


존중할만 하구 나.' 그는 두 괴인을 새삼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때 혁련지가 칼칼한 음성으로 외쳤다. "임태보 이 뚱보 놈아! 그만 졌다고 시인하고 날 형님으로 모시는게 어떠냐? 클클...! 내 고목신공은 이미 십 성에 달했단 말이다. 네놈의 똥으로 가득찬 뱃가죽쯤은 단숨에 뚫어버릴 것이다!" 그야말로 험구(險口)였다. 그러나 임태보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헤헤헷...! 혁련지! 네놈이야말로 항복하는 게 어떠냐? 노부의 항마금포삼을 펼치면 네놈은 십 리 밖 에 날아가 땅속에 처박혀 버릴 것이다." 혁련지는 비웃음을 흘리며 장작개비같이 비쩍 마른 손을 서서히 뻗었다. "네놈은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멍텅구리구나. 더 말이 필요없다!" 위잉! 혁련지의 깡마른 우수가 회오리를 일으키며 뻗어 나왔다. 그러자 임태보의 뚱뚱한 몸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신형은 풍차처럼 혁련지 의 몸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반면 혁련지의 행동은 의외로 느렸다. 그는 한가운데 선 채 고목처 럼 바닥에 뿌리라도 내린 듯이 꼼짝 않고 있었다. "헤헤헷... 헤헤헤헷......!" 임태보의 웃음소리가 사방팔방으로 울려 퍼졌다. 남궁궁은 그의 무공을 살폈다. 그는 점점 더 경이로운 심정이었다. '분광약영(分光躍影)의 신법에다 회음환허소(廻音幻虛笑)까지...! 도저히 뚱뚱한 몸에서 나온 절기라고 는 믿어지지가 않는구나.' 그러나 혁련지도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뿌리를 내린 듯 서 있다가 갑자기 무릎도 굽히지 않 은 채 위로 솟구쳤다. "킬킬킬... 뚱보! 넌 끝장이다!" 쐐애액...! 허공에 뜬 혁련지의 몸이 수평으로 눕는 듯하더니 무수한 장영(掌影)을 뻗어냈다. 그러자 주위는 그의 장영으로 인해 온통 컴컴해지고 말았다. "켈켈...! 멋진 환환유성우(幻幻流星雨) 장법이다! 노부도 보답해주마!" 우웅......! 임태보는 풍차처럼 회전하던 신형을 멈추고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러자 무형의 강기가 그의 몸을 휘감았다. 콰콰쾅......! 혁련지의 장력과 임태보의 강기가 격돌하는 순간 뇌성벽력 같은 폭음이 터졌다. "케엑! 이럴 수가......." "흐흑! 이런......."


숨 넘어가는 듯한 두 마디의 비명이 들렸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쿵...! 털썩......! 마치 집채가 내려앉는 듯한 엄청난 굉음과 함께 요란한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자욱한 먼지 사이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혁련지는 십 장이나 허공으로 곤두박질치다가 커다란 나무를 들이받고는 나무와 함께 지면으로 떨어졌으며, 임태보는 장력을 가슴에 얻어맞고는 뒤로 십여 보나 물러나다가 벌렁 자빠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입과 코로 선혈을 흘리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심한 중상을 입은 듯했다. 그러나 그들은 조 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클큭... 뚱보야! 맛이 어떠냐?" "켈켈...! 네놈이야말로... 꼴이 말이 아니구나! 이번에야말로 노부를 형님으로... 우욱!" 두 사람은지지 않으려는 듯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외쳐대고 있었다. 혁련지는 갈빗대가 부러진 듯 옆구리가 불끈 솟아 있었고 임태보는 가슴에 뚜렷한 갈색 장인(掌印)이 찍혀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서로에게 승복하지 못하고 악을 쓰는 것이었다. "잠깐만, 두 분!" 보다 못한 남궁궁이 미끄러지듯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그는 두 사람을 향해 빙그레 웃으 며 입을 열었다. "두 분의 승부는 무승부입니다." 그러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저으며 반발했다. "흥! 무슨 소리!" "킬킬...! 아직 더 싸울 힘이 있다구......!" 두 괴인은 다시 맞붙으려 했다. 남궁궁은 그들을 가로막으며 짐짓 엄숙하게 말했다. "두 분이 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열을 가려서 서열을 정하고자 함이 아니십니까?" 임태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하지만 두 분의 실력은 백중지세입니다. 소제가 생각하기로 십 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혁련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지. 하지만 오늘은......." "두 분은 앞으로도 영원히 백중지세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앞으로 한 번만 더 싸우게 되면 두 분은 나란히 황천으로 갈 것입니다." "......!" 임태보와 혁련지는 움찔했다. "어째서 그렇게 단정하느냐?" "노부는 믿지 못한다!" 남궁궁은 그들의 항변을 일축했다.


"두 분의 지금 실력은 백중입니다. 왜냐하면 고목신공과 항마금포삼이 똑같이 십 성의 수준에 이르렀 기 때문입니다." 두 괴인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남궁궁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십 년 후면 두 분은 똑같이 십이 성 수준에 오를 것입니다. 그때 다시 격돌하게 된다면......." 그는 바닥에서 돌멩이 두 개를 집어들고는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두 분은 이렇게 될 것이오!" 딱! 그가 손을 마주치자 돌멩이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 임태보와 혁련지는 안색이 급변했다. "두 분은 무엇 때문에 남들이 힘들어 기피하는 고목신공과 항마금포삼이란 외문기공을 택하셨습니까? 설마 서로 부딪쳐 양패구상하기 위함은 아니겠지요? 두 분 사이에 무슨 불공대천의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남궁궁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두 괴인은 그의 말을 들으며 얼굴을 꿈틀거렸다. 사실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들은 젊은 날 우연히 상봉하여 기예(技藝)를 겨룬 적이 있었다. 그것은 사십 년 전 막북(漠北)에서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 서로의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당시 그들은 젊고 패기만만했으므로 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들은 서로 간에 맹세를 하게 되었다. - 저 놈을 꺾기 전에는 결코 강호에 나가 무명(武名)을 얻지 않겠다! 그날 이후 그들은 십 년에 한 번씩 만나 기량을 겨루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번번이 무승부였다. 결국 그들은 지난 수십 년간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 외문기공을 익히는 일에 몸을 바쳤던 것이다. 지금 남궁궁의 말을 듣는 순간 그들은 갑자기 지난 사십 년 동안의 생애가 허망하게 느껴지고 말았 다. 남궁궁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설사 두 분 중 한 분이 이기게 된다고 해도 그때는 이미 인생의 황혼에 서 있게 됩니다. 물론 그때는 짙은 후회만 남게 되겠지요. 자, 그래도 계속 싸우시겠습니까?" "......!" 임태보와 혁련지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회의가 감돌고


있었다. 남궁궁은 고 삐를 당겼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두 분의 실력이라면 강호에서 최고의 영예를 구가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 분의 오랜 다툼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두 괴인의 얼굴에 호기심이 어렸다. "그게 무엇인가?" 두 사람은 똑같이 물었다. 남궁궁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옛말에 난형난제(難兄難弟)라고 했습니다. 두 분은 형과 아우를 가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호기심에 찬 두 눈을 번뜩였다. "두 분은 서로를 형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그건 안돼!" 두 사람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시에 부르짖었다. 남궁궁은 움찔 놀랐다. 반발이 예상외로 컸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서로를 노제(老第)라고 부르십시오!" "......!" 두 괴인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 모습은 서로의 의중을 탐색하려 는 것 같았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으헤헤헤헷......!" "킬킬킬킬......!" 그들은 서로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 남궁궁은 그들의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궁금했다. 그는 두 사람을 유심히 살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그들은 상대를 향해 동시에 손을 뻗었던 것이다. "아니......!" 남궁궁은 놀라움에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는 두 사람이 또 다시 살수를 뻗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내 그의 눈썹은 반달형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들은 서로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손을 잡았던 것이 다. 임태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헤헤헷... 노제! 알겠나? 이제부터 자네를 노제라 부르겠네." "컬컬...! 임태보, 노부 역시 자넬 노제라 부르겠네." 혁련지도 만면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남궁궁은 그제서야 싱긋 웃으며 나섰다. "하하... 두 분의 화해를 축하합니다." 이때 임태보와 혁련지가 갑자기 홱 돌아서며 남궁궁을 향해 동시에 물었다. "자네는 누군가?" 남궁궁은 느닷없는 질문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침착하게 말했다.


"소제는 남궁궁이란 사람입니다." 임태보는 침을 퉤 뱉으며 말했다. "남궁궁! 이름은 좋군. 그러나 자네에게 실망했어." 혁련지도 한마디 거들었다. "자네의 신분을 몰랐다면 친구로 삼을 수도 있었는데... 아깝군, 아까워!" "......?" 남궁궁은 그들의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때 임태보는 혁련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어떨까? 노제! 한바탕 했더니 배가 고픈걸! 기분도 풀겸 술이나 들자구!" 혁련지는 그를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냈다. "킬킬...! 먹는 것밖에 모르는 동생! 그러나 좋아. 오늘은 아우를 얻은 날이니 기쁘게 내가 한 잔 사 지!" 휘익! 휙! 그들은 금세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신형을 날렸다. 그것은 방금까지 생명을 내걸고 싸웠던 적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다정한 모습이었다. 남궁궁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성질이 급하긴 해도... 재미 있는 사람들이구나." 이때였다. 돌연 그의 귓전을 파고드는 음침한 음성이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다루기 까다롭다는 천지쌍괴(天地雙怪) 두 노괴물을 세 치 혓바닥으로 떡주무르듯 주 무르다니 정말 놀랍군!" 남궁궁은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사방에 속속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궁수들로 손에 손에 활시위 를 당긴 채 그를 향해 겨누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간간이 검은 철통(鐵筒)을 겨누고 있는 흑의복면인 들도 눈에 띄었다. 그들의 눈빛은 한결같이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들개와도 같은 눈빛이었다. 남궁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많이도 왔군. 무명인에 불과한 날 이렇게 대접하는 자도 또 있었나?" 그는 위급한 상황임에도 여유만만한 모습이었다. 그러자 한 가닥 싸늘한 음성이 그의 말을 받았다. "후후... 물론이다. 너는 그만한 자격이 충분하지. 하지만 오늘밤은 이곳에 네 무덤이 생길 것이다. 설 사 대라신선이 나타난다 해도 널 구해주진 못할테니까." 남궁궁은 몸을 빙글 돌렸다. 사당 안으로부터 한 명의 흑의복면인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복면의 두 개 구멍으로부터 독사같 은 눈빛을 흘리고 있었다. 눈빛만 보아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남궁궁은 두 손을 들어보이며 물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이오?"


"후후... 그걸 몰라서 묻느냐?" "그렇소." "그럼 말해주지. 바로 품속의 물건 때문이다." "이것... 말이오?" 남궁궁은 어리둥절했으나 곧 떠오르는 것이 있어 품속에서 가죽주머니를 꺼내보았다. "알았으면 됐다. 이제 목을 바칠 각오만 하면 된다." 흑의복면인의 음성은 비릿한 살기로 충만했다. "이것은 본래......." 남궁궁은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설사 자초지종을 얘기한다 해도 이 자는 믿어줄 것 같지가 않다.' 그는 재빨리 염두를 굴렸다. 그 순간 그의 뇌리 속에서 대설산 무애곡에 은거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 급할수록 차분히 대처해라. 상황이 불리하면 시간을 끌어라. 열 번만 생각하면 기지(機智)가 나올 것이다. 일 년 동안 너는 되도록 많이 돌아다니며 모든 것을 보고 듣도록 해라. 그것이 바로 네가 할 일이다. 남궁궁은 마음이 점점 안정되어감을 느끼며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 모든 것은 하나로 귀일(歸一)한다. 명심해라. 너는 평생 동안 오직 한 가지 길을 추구해야 한다. 왕 도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남보다 더욱 인내하고 노력에 노력을 거 듭해야만 비로소 왕도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남궁궁의 눈이 어둠을 가르며 밝게 빛났다. 그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러나 피할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공술이나 호신무공 따위는 하등의 필요가 없었다. 단련된 궁수가 격사하는 강궁과 검은 철통으로부터 뿜어져 나올지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암기의 공격을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 다. 자칫 어설프게 움직였다가는 온몸이 고슴도치가 될 것이 뻔했다. 흑의복면인들의 눈에서는 무서운 예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그로 미루어 그들은 하나같이 고강한 무공 을 지니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남궁궁은 강호초출에 불과한 자신에게 이렇듯 괴이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러 나 한편으로는 흥미가 일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바로 내가 바라던 일인지도 모른다.' 남궁궁은 시선을 움직였다.


'이것은 내가 해결해야 할 첫번째 과제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그렇다면... 활 로는 단 하나!' 생각이 끝난 순간 그는 몸을 빙글 돌렸다.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

② 무림인들은 무엇보다도 명예를 중히 여긴다. 그들은 명예를 얻기위해 살아가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 생명을 던지기도 한다. 최근 무림에 한 명의 혜성과도 같은 존재가 나타났다. 십절공자(十絶公子)! 세인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세인들은 그의 진명(眞名)은 물론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 다. 다만 알려진 것이 있다면 그가 무림제일의 미남자라는 것 뿐이었다. 십절공자는 온갖 잡기(雜技)에 능한 인물이었다. 무공과 학문은 물론 바둑이나 장기, 심지어는 기악 (伎樂)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급속도로 강호에 알려지게 된 것은 정작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것은 그가 지녔다는 십절(十絶)의 절예 중 으뜸인 풍류절(風流絶) 때문이었다. 타고난 용모와 세 치 혓바닥이 일으키는 달콤한 화술로 가는 곳마다 수많은 미녀들이 앞다투어 그에게 매달렸던 것이다. 아무리 오만하고 절개가 굳은 미녀들도 그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십 절공자는 뭍 여인들의 우상이요, 환상의 연인이었던 것이다. 신주사화(神州四花). 강호의 젊은이들치고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주사화는 절세의 미 모와 재지를 지닌 네 명의 미인을 일컫는 말이었다. 강호의 젊은이들은 꿈속에서라도 그녀들을 한 번 보기를 갈망했으며, 신주사화의 한 명과 혼인하는 것이 소원일 정도였다. 그런데.... 신주사화 중 삼화(三花)에게 변이 닥쳤다. 한 명은 미쳐버렸으며, 한 명은 스스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한 명은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어 버리고 만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알고보면 그 모든 것이 바로 십절공자 때문이었다. 신주사화 중 세 미 녀가 십절공자에게 반해 버렸던 것이다. 신주사화 중 한 명이 무사한 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의 거


소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만일 그녀가 십절공자를 만났더라면 그 결과가 어찌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십절공자는 한 장소에 절대로 열흘 이상을 머무르는 법이 없었다. 또한 그는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 라도 금방 싫증을 냈다. 때문에 숱한 여인이 그에게 버림 받았고, 그로 인해 미치거나 자살하는 여인 도 부지기수였다. 결국 그의 탐화행(探花行)은 무림의 공분(公憤)을 불러 일으켰다. 십절공자는 무림의 공적으로 선포되 어 쫓기는 몸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여인들은 결코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세상의 많은 여인들이 단 한 번이라도 그를 만나고 싶어했다. 그의 다정한 눈빛과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을 한 번이라도 접해보는 것이 내심의 은밀한 소 원이었다. 그러나.... 십절공자는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다. 마치 바다에 빠진 돌멩이처럼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강호에 무성한 소문만을 남긴 채.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다. 초생달은 먹구름에 가려져 그나마 희미한 빛마저도 차단하여 대지는 온통 검게만 보인다. 이따금 부 는 봄밤의 훈풍이 부드럽게 벌판의 갈대들을 흔들고 있었다. 스스스...! 갈대가 흔들릴 때마다 가벼운 소리가 들렸다. 먹구름 속에서 초생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자 대지에 뿌연 빛이 비쳤다. 갈대는 아직 완전히 자라지 않아 그리 키가 크지 않았다. 그런데 갈대의 여기저기에 선혈이 묻어 있 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갈대밭 안쪽으로 갈대가 일정한 방향으로 쓰러져 있는 것을 볼 수있었 다. "놈은 이쪽으로 갔다!" 어디선가 거친 외침이 들렸다. 휙휙휙! 이어 수십 개의 인영이 갈대밭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쓰러진 갈대와 갈대에 묻어있는 핏자국을 확인하더니 무섭게 빠른 신법으로 갈대밭으로 질주해 들어갔다. 얼마나 들어갔을까? 갈대밭이 끝나고 자갈밭이 나타났다. 쏴아..... 은은한 물결소리가 들렸다. 인영들은 모두 신형을 멈추었다. 그들의 앞에는 강물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금릉의 남쪽을 흐르고 있는 회하(淮河)였다.


회하는 풍류가 넘치는 강이었다. 사시사철 회하의 강상에는 유람선이 떠 있었으며, 주악소리와 미희들 의 가무(歌舞) 소리가 그치지 않는 곳이었다. 비록 어두운 밤이었으나 멀리 회하의 강상에는 몇 척의 유람선이 떠 있는 것이 보였다. 깜박깜박......! 유람선의 선실에서 은은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밤이 이슥해서인지 가무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회수의 물결 소리만이 춘야의 운치를 들려줄 뿐이었다. "핏자국이 강물에서 끊겼소!" 자갈밭을 살피던 흑의복면인들 중 누군가 외쳤다. 휙휙!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강변에 떨어졌다. 그들의 눈길은 일제히 바닥에 향했다. 과연 갈대밭에서 이어 진 핏자국이 회하의 물곁에서 끊겨 있었다. "교활한 놈!" "철령(鐵令) 십호를 방패 삼을 줄이야...!" 흑의복면인들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들 중 한 명이 음침하게 말했다. "흐흐... 하지만 강궁에 격중당했으니... 놈이 살아날 확률은 희박할 것이오." 그러자 누군가의 반박이 뒤따랐다. "단정하긴 이르다! 설사 강궁이 철령십호를 꿰뚫고 지옥천독망(地獄天毒芒)이 놈을 고슴도치로 만들었 다 해도 여기까지 달아난 걸로 미루어......." 그의 말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예의 음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류 쪽을 찾아 보자!" 그의 말이 떨어진 순간, 수십 개의 인영이 놀라운 속도로 하류 쪽으로 날아갔다. 그들이 사라진 강변은 죽음 같은 적막에 싸였다. 들리는 것이라곤 강가의 자갈을 간간이 찰싹이는 물 결소리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휙! 갈대숲으로부터 한 가닥 인영이 쏘아져 나와 강변에 떨어졌다. 그는 흑의복면인이었다. 음침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 가능성은 두 가지 뿐이다. 놈은 죽어 물에 떠내려 갔거나 회하를 건너 도망친 것이다. 어쨌든 시체라도 찾아야 한다." 슷! 그는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끝까지 남아 마지막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었 다. 그가 사라진 직후, 강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회하의 물결이 출렁거리더니 누군가의 머리가 불쑥 튀어 나왔다. 그는 곧 강변으로 기어나왔다.


쿵......! 그는 어깨에 메고 있던 시체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놀랍게도 그는 남궁궁이었다. 그는 얼굴에 흐르는 물을 손으로 훔치고는 싱긋 웃었다. "정말 지독한 자들이군. 인질로 잡힌 동료의 생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쏘아댈 줄이야, 하마터면 당할 뻔했다." 그렇다. 남궁궁은 사당에서 기지를 발휘했다. 그는 몸을 빙글 동린 순간 전력을 다해 우두머리라고 생각한 복 면인을 기습하여 제압했다. 그를 방패삼아 그곳을 탈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계책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복면인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강궁과 암기를 무 자비하게 쏘아댄 것이었다. 비록 인질을 방패 삼긴 했지만 그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식은 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남궁궁은 허리를 굽혀 복면인의 얼굴에서 복면을 벗겨냈다. "......!"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복면인의 얼굴이 푸르뎅뎅하게 썩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음, 지독하군!" 지옥천독망에 극독이 발려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고약한 냄새와 함께 복면인의 시체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는 한 줌의 혈수만 남은 채 복면인은 완전히 녹아버리고 말았다. 남궁궁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정말 놀랍군. 대체 이들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동료임에도 아랑곳없이 이런 지독한 독암기를 날린단 말인가?" 남궁궁은 나뭇가지로 복면인의 의복을 뒤져 보았다. 잠시 후 그는 하나의 철면구(鐵面具)를 발견했다. "......!" 순간 그의 뇌리 속에 스쳐가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낸 뒤 철면구를 감싼 후 품속에 갈무리했다. '이 자들의 지위체계는 점조직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 동료애라곤 한 점도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오래 전부터 깊이 뿌리내린 비밀단체일 가능성이 높다.' 남궁궁은 어둠 속에서 눈빛을 빛냈다. 비록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용모였으나 그의 지혜는 범인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경지를 지니고 있는 듯했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돌리더니 회하의 강상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삼경이 넘어가는구나." 그는 밤하늘을 한 번 응시하고는 몸을 돌렸다.


"일단 이 일에 휘말린 이상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후후, 그렇지 않아도 심심하던 차였는데 잘 된 일이지." 그는 어깨를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흡사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때였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갈대숲으로부터 두 가닥 인영이 그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 하나는 크고 또 하나는 왜소한 인영이었다. 쏴아......! 회하는 여전히 일정한 유속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방금 전 벌어진 일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유유히, 긴 세월을 그러했듯이 잔잔한 물살을 일으키며 흘러가고 있었다. ③ 범선(帆船). 회하의 강심에 떠 있는 그 배는 뱃머리가 봉황(鳳凰)의 장식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상당히 큰 규모였 다. 특히 주위의 유선들이 돛을 내린 채 잠들어 있었으나 유독 이 범선만이 대낮처럼 화려한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 범선이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맞은편 강변에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다름 아닌 남궁궁이었 다. 남궁궁은 강변에서 백 장(百丈) 정도 떨어진 곳에 떠 있는 범선을 바라보았다. 범선의 돛에 밤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깃발이 있었다. "바로 저 배로군." 남궁궁이 이곳에 온 것은 주루에서 대신 계산을 치뤄준 후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하고 사라진 자의서 생과 홍의소녀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게 아는 척 했지만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일부러 그런 것 같지는 않았는데 정말 이상한 일이다.' '혹시......?' 그는 지금까지 줄곧 자신을 따라다니고 있었던 한 쌍의 눈을 떠올렸다. 그 눈은 별처럼 아름다웠으나 은연중 원망을 담고 있는 듯했다.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그는 신형을 날렸다. 범선까지는 무려 백 장여, 한 번에 그곳까지 날아간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 정도 의 경신술을 사용할 수 있는 자는 전무림을 통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그의 신형은 강상에 낮게 뜬 채 날아갔다. 발끝이 물에 닿을락말락할 정도였다. 파파파팟...!


그가 스쳐가는 수면에서 살이 갈라졌다. 알고보니 그는 발에 두 개의 널빤지를 대고 있었다. 널빤지의 부력을 이용하여 내공을 이용해 수면 위를 미끄러져 가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정순한 내력과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하는 절묘한 경신술이 없이는 불 가능한 일이었다. 잠시 후, 남궁궁은 일학충천(一鶴沖天)의 신법으로 신형을 솟구친 후 가볍게 범선의 갑판 위에 착지했 다. 조금의 소리도 나지 않았고 신형 또한 극히 안정되어 있었다. "......." 남궁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짝짝짝......! 문득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남궁궁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선실의 문이 열리며 한 명의 홍의소녀 가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었다. "역시 공자님의 절기는 으뜸이에요!" 남궁궁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에 홍의소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남궁궁은 가볍게 포권하며 물었다. "낭자, 소생을 부른 이유는......." 홍의소녀는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한 가닥 의혹이 떠올랐다. 그러나 곧 애교있게 허리를 비틀며 말했다. "아이... 저번처럼 천비를 홍앵(紅櫻)이라고 불러 주세요." '저번처럼 이라니? 언제 내가 그렇게 부른 적이 있단 말인가?' 남궁궁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는 재빨리 표정을 여유있게 바꾸며 말했다. "홍앵낭자......." "아이, 그냥 홍앵이라니까요." 남궁궁은 씨익 웃었다. "알겠소, 홍앵." 홍앵은 그제서야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서 들어 가세요. 아씨께서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계세요." "......." 남궁궁은 필시 이 일에 곡절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일단 아무말 없이 선실 안으로 따 라 들어갔다. 선실 안은 마치 황녀(皇女)의 거처인 양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바닥에는 천축산 양탄자가 곱게 깔려져 있었고 탁자와 의자는 침향목으로 만들어진 일등품이었다. 또한 천장에는 홍옥(紅玉)이 장식되어 있는 궁등(宮燈)이 환히 빛나고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사방 벽에는 명공의 진품인 듯한 산수화(山水畵)가 여러 장 걸려 있었다. 선실 한가운데 자의문사(紫依文士)가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침향목 탁자에는 간단


한 주반이 차려져 있었다. 남궁궁은 선실에 들어서자마자 미간을 가볍게 찡그렸다. 선실 안에는 여인 특유의 체향이 풍겼던 것이다. 이때였다. "호호... 그럼 두 분 재미 많이 보세요." 홍앵은 들뜬 음성으로 종알거린 후 재빨리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남궁궁은 잠시 서 있다가 입을 열었 다. "앉아도 되겠소?" "......." 자의문사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남궁궁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한 후 의자에 앉았다. 자의문사는 여전히 등만을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남궁궁은 그가 남장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몸매가 유난히 섬세할 뿐더러 가까이 대하자 더욱 여인의 체향이 진하게 느껴진 것이었다. 그는 헛기침을 한 후 물었다. "소생은 낭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무슨 일로 부르셨소?" "정말... 그렇게 몰인정하신가요? 흑......!" 자의문사녀는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남궁궁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아니, 그게 무슨......." "흐흑흑...!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요? 소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당신을 만나기 위해 중원 십 팔만 리를 헤매었는데.... 흑흑! 정말 너무해요......!" 남궁궁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낭자가 사람을 잘못......." 그는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여인이 몸을 돌렸던 것이다. "아! 당신은......." 남궁궁은 탄성을 터뜨렸다. 여인을 본 순간 그는 비로소 그녀가 자신을 줄곧 따라다녔던 그 눈길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여인은 실로 절세미인이었다. 피부는 백옥처럼 희고 투명해 보였으며 눈물이 고인 눈동자는 마치 호 수처럼 맑았다. 오관은 신의 솜씨로 깎은 듯 섬세하여 남자라면 누구나 한눈에 반해버릴 지경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니...!' 남궁궁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이제야 절 알아보셨나요?" 여인은 원망스러운 듯 곱게 눈을 흘겼다. 남궁궁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낭자였구려, 난 누군가 했는데...." 여인은 꽃잎같은 입술을 잘근 물며 말했다. "당신에게 이 자봉성녀(紫鳳聖女) 천화영(天花瑛)이 그토록 보잘 것 없는 존재였는지 묻고 싶어요." 놀라운 일이다. 자봉성녀 천화영이라면 바로 신주사화 중 한 명이 아닌가?


당금 무림인이라면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녀는 절륜한 미색은 물론이요, 빼어난 재능 과 출신에 이르기까지 강호 청년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왔었다. 그녀는 수백 년간 무림의 이대비역(二大秘域)으로 알려진 무산(巫山) 신녀궁(神女宮)의 소궁주였다. 신녀궁은 대대로 여인들만으로 내려오는 신비의 문파였다. 그런데 얼마 전 소궁주 천화영이 연인을 찾겠다고 사라지자 발칵 뒤집혀졌다. 천화영이 신녀궁을 떠난 것은 바로 그녀의 연인 십절공자를 찾기위함이었다. 그 사실은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남궁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낙양성을 떠난 이후 줄곧 누군가 따르는 줄은 알았으나 그것이 낭자인 줄은 몰랐소이다." 천화영은 원망스러운 듯 말했다. "낙양성에서 공자를 만났을 때, 정말 숨이 멎을 정도로 놀랐어요. 중원 방방곡곡을 찾아 헤매도 못 찾 았었는데 그렇게 우연히 만날 줄이야......." 남궁궁은 흠칫했다. "그럼 그때 향차(香車) 속에 있던......." "그래요. 소녀는 마차에 타고 있었어요." 천화영의 얼굴에는 어느덧 원망이 사라지고 환희의 빛이 빛나고 있었다. 본래 절색인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자 남궁궁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소생을......?" 천화영의 눈이 샐쭉해졌다. "흥! 정말 끝까지 발뺌하시긴가요?" "글쎄 난 도무지......." "흥! 어느새 다른 여인을 사귀었나 보군요......!" 천화영의 눈에 다시 눈물이 글썽해 졌다. 금방 웃었다가 울었다하는 그녀의 모습에 남궁궁은 도무지 영문을 알 길이 없었다. "공자께서 천하의 바람둥이인 줄은 알았으나 정말 이렇게까지 냉정할 줄은 몰랐어요. 흑!" 마침내 천화영은 어깨를 들먹이며 오열을 터뜨렸다. 남궁궁은 한동안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 는 사이 그는 깨달을 수가 있었다. '분명 이 낭자는 사람을 잘못 본 것이다.' 남궁궁은 가볍게 기침했다. "천소저, 소생은......." 문득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천화영이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더니 맑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좋아요. 소녀도 더 이상 매달리지 않겠어요."


"소저......." "하지만 오늘 밤은 특별한 밤이에요. 소녀와 공자가 이별을 하는 밤이거든요. 소녀도 자존심이 있는데 더 이상 공자를 귀찮게 하지 않겠어요." 그녀의 얼굴에는 처연한 미소가 흘렀다. "......." 남궁궁은 정말이지 가슴이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세상에 정말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별주 한잔쯤은 나눌 수 있겠지요?" 남궁궁은 쓴웃음을 지었다. "금방 만나고 다시 이별이라니......." 천화영은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공자님이 바라시던 바였잖아요?" "그건......." "그럼, 허락하신 걸로 알겠어요." 남궁궁은 쓴웃음을 지었다. 문득 천선미랑이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공자께서 이토록 뛰어나시니 가는 곳마다 소녀들이 줄줄이 따를 텐데 말이에요....' '후후... 천랑, 그 반대요. 지금 이 여인만 해도 만나자마자 날 쫓아내려 하지 않소?' 남궁궁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자, 저에게도 한 잔 주세요." 천화영은 그의 잔에 호박빛이 나는 술을 따르고는 술주전자를 건네 주었다. '에라, 모르겠다.' 남궁궁은 술주전자를 받은 후 능청스럽게 말했다. "절세가인을 만나 가슴에 설레였는데 만나자마자 이별하게 되어 섭섭하외다." 천화영의 잔에도 미주(美酒)가 가득찼다. 술을 마시기도 전이었는데 그녀의 뺨은 어느새 홍조가 어리 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은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남궁궁은 급히 눈길을 떨구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면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 선을 피한 채 잔을 들어올렸다. "소저의 전도가 양양하시기를!" "공자께서도 좋은 배필을 만나시기를!" 두 사람은 서로의 행운을 빌며 축배를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진정한 축배가 될 수 있을지는 아 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궁궁은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유난히 달콤하고 향기가 짙은 술이었다. 천화영은 그가 술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신 것을 본 후에야 가늘게 한숨을 쉬며 자신의 잔을 비웠다. 그녀의 눈에는 이슬방울이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남궁궁은 그것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왔다. '정말 이 소저는 날 닮은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했었나 보구나.' 그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짧은 만남의 끝이 온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잠깐만, 공자님." "......?"


남궁궁은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천화영은 품속에서 청옥소를 꺼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술기운 탓인지 도화빛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오늘같은 날 마지막으로 절 위해 별리곡(別離曲) 한 곡쯤 불러 주실 수는 없을까요?" 남궁궁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그녀의 아름다움에 도취되는 기분이었다. 그는 자신 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음률을 좋아했었다. 특히 대설산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때면 그는 늘 소를 불곤 했었 으므로 그 방면에는 어느 정도 조예가 있었다. 그는 천화영에게서 소를 건네받았다. 그 순간 뇌리 속에서 옛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가 소를 불고 있 노라면 소군(素君)이 다가와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 음률을 들어주던 아름다운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 치고 있었다. 삘리리... 릴......! 이윽고 소음이 흐느적거리듯 울리기 시작했다. ④ 봄밤은 깊어가는데 그대와 나 아득한 유원의 꿈을 꾸며 낙원(樂園)을 거닐었지. 이 밤이 다하면 헤어질 것은 분명하여 이리도 안타까운 심정에 촛농처럼 눈물만 흘리네. 이제 가면 언제 올 줄 모르니, 봄밤의 향기로운 기억을 담기 위해 그대의 눈을 보네. 그대의 눈 속에 내 모습 새겨지고 내 눈 속에 그대의 교영(嬌影) 새겨져, 구슬 아로새긴 요대 위에서 별을 헤아리며 미래의 행복을 속삭이던 과거일랑 기억 속에 담아 가져가세요. 봄밤이 아름다운 이 밤에....... 소음은 점점 더 애절하게 흘러나왔다. 말없이 흘러내리는 회하(淮河)의 물살도 감명을 받은 듯 뱃전에 부딪쳐 이별이 아쉬운 듯 찰랑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소음의 선율이 가늘어 지더니 종내에는 끊어졌다. "정랑(情郞)......!" 천화영의 음성은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 남궁궁은 흠칫했다. 천화영의 얼굴이 타는 듯 붉게 달아올라 있었을 뿐 아니라 초롱초롱하던 눈동자 마저 온통 붉게 충혈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남궁궁은 비로소 이상함을 느꼈다. 아닌게 아니라 자신의 몸에도 이상이 왔다. 그는


얼굴이 화끈거리 며 온몸의 혈관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단전 어림에 뜨거운 기운이 불쑥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정랑... 안아줘요......." 천화영은 그에게 스르르 기대며 속삭였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어서......." 사르륵......! 갑자기 천화영은 스스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이미 그녀는 자존심 따위는 잊어버린 것 같았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갈구하는 애욕에 빠진 여인일 뿐이었다. "소저......!" 남궁궁은 크게 놀라 부르짖었다. 그러나 천화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의 몸에서 문사 의가 흘러내렸다. 남궁궁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속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빙기옥골(氷肌玉骨)이란 그녀를 두고 하는 말이었던가! 문사의가 바닥으로 흘러내리자 그녀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고 말았다. 만지기만 해 도 묻어날 듯한 부드럽고 고운 나신이 고스란히 남궁궁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눈썹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누르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젖가슴, 한 줌밖에 안되는 가느다란 허리와 그 아래로 급격하게 원을 그리며 풍성해지는 둔부가 이제껏 한 번도 여체를 본 적이 없는 남궁궁의 피를 끓게 했다. "흐흑... 이럴 수밖에... 없었어요......." {{}}천화영은 그에게 몸을 던지며 흐느꼈다. "......!" 남궁궁은 뜨거운 호흡을 삼켰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맹렬한 욕정의 불꽃이 그의 혈관을 부풀게 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이성은 본능에 의해 억압되고 말았다. "절... 가지세요. 이렇게 해서라도 당신을 얻고자 하는 절 용서하세요......." 천화영은 그의 목을 뱀처럼 휘감으며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향기롭고 뜨거운 입김이 닿은 순간 남궁 궁은 마침내 이성을 잃고 말았다. "흐으윽, 어서요! 만춘화합비방(萬春和合秘方)을 쓴 이상 음양교합을 하지 않으면 우린 둘 다 죽고 말 아요......." 천화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듯 벌떡 몸을 일으키며 두 손으로 남궁궁의 머리를 끌어 안았다. '......!' 남궁궁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얼굴은 풍만한 천화영의 젖가슴에 묻혀 있었다.


그는 눈을 부릅 떴다. 머리가 빙글 돌며 온몸이 구름 위로 뜨는 듯했다. 그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움직였다. 그는 천화영의 허리를 더듬어 안았다. 비단결보다 매끄러운 살결 이 감지되자 그는 온몸에 불이 확 붙는 듯했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매끄러운 등을 쓰다듬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동그란 둔부를 어루만졌다. "아아!" 천화영은 고개를 뒤로 젓히며 신음을 발했다. 남궁궁은 몸을 일으켰다. 천화영은 그의 손에 몸을 의지 한 채 한껏 뒤로 몸을 젓혔다. 그러자 폭포수처럼 긴 머리칼이 등 뒤로 쏟아져 내렸다. "음!" 남궁궁의 입에서도 신음이 터져 나왔다. 활처럼 휘어진 여체가 그의 눈 아래 있었다. 두 개의 유방은 손가락만 대도 터질 듯 팽팽하게 일어서 있었고, 유지같이 희고 매끄러운 아랫배와 그 아래 난생 처 음으로 보는 여인의 비지에는 부드러운 방초(芳草)가 뒤덮여 있었다. 모든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흐윽... 안아줘요......." 천화영은 뜨거운 숨을 토하며 온몸을 비틀었다.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자가 있다면 성인(聖人)이 거나 고자에 다름아닐 것이다. 남궁궁도 뜨거운 피가 흐르는 남자였다. 마침내 그의 자제력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헉!" 오직 본능이 그의 뇌를 지배하고 말았다. 그는 강하게 여체를 끌어 안았다. 그는 여체를 안은 채 바닥 으로 쓰러졌다. 한 덩이가된 남과 여는 양탄자가 깔린 선실 바닥을 몇 차례 뒹굴었다. 그 사이 남궁궁 의 옷도 하나씩 벗겨져 나갔다. 선실 밖에서는 기분좋은 밤바람이 불고 있었다. 후끈한 열기가 포함된 듯한 바람이었다. 어느새 한 쌍의 젊은 육체는 태초 그대로의 모습이 되어 양탄자 위를 구르기 시작했다. "하아......!" 천화영은 가쁜 숨을 토하며 남궁궁의 몸을 뱀처럼 휘어 감았다. 창문을 통해 한 줄기 바람이 흘러 들어왔으나 선실 안의 뜨거운 열풍(熱風)에 놀란 듯 도로 달아나는 듯했다. 남궁궁은 천화영의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입술은 참을 수 없는 갈증을 해소하려는 듯 정신 없이 그녀의 가슴을 누볐다.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이 오아시스를 발견한들 그러할까? 그는 안타깝게


그녀의 가슴을 부비며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순후한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먹이에 굶주린 한 마리의 늑대가 되어 있었다. "악!" 천화영은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가슴에 통증이 온 것이었다. 남궁궁이 힘껏 그녀의 가슴을 물어뜯은 것이었다. 그러나 통증은 잠시 뿐, 그녀는 온몸의 혈관이 터질 듯한 쾌감에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그녀는 더욱 적극적으로 남궁궁의 머리를 끌어 안았다. 강호 청년들의 선망을 한몸에 받던 신주사화 의 한 명이었던 그녀가 이젠 한낱 욕망에 몸부림치는 색녀(色女)로 변하고 말았다. 그녀의 대리석처럼 쭉 뻗은 다리가 남궁궁의 허리를 뱀처럼 휘감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남궁궁은 그 녀의 성문을 열기 위해 혼신의 힘을 토해내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절절 끓는 청춘의 욕망을 힘차게 밀어 넣고 말았다. "......!" 비명도 신음도 없었다. 그러나 한순간 천화영의 눈이 크게 떠졌고, 입술이 한껏 벌어지고 있었다. 그 녀의 온몸이 경직되었다. 그러나 남궁궁이 그녀의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 움직이자 그녀의 동공이 더 욱 확대됨과 동시에 사지가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아!" 궁등은 양탄자 위에서 벌어지는 두 사람의 정사를 비추고 있었다. 드디어 하나의 육체로 합일된 남녀 가 쾌락을 향해 비등해 갔다. 봄밤은 깊어만 가는데... 두 사람의 행위는 그칠 줄을 모르고 있었다. ■ 왕도 1 권 제 6 장 한밤의 초혼객(招魂客) ━━━━━━━━━━━━━━━━━━━━━━━━━━━━━━━━━━━ ① 선실 안의 열기는 점점 더 고조되고 있었다. "앗......!" 문득 선실 밖에서 짤막한 비명이 들려왔다. 그것은 홍앵의 비명이었다. 그러나 선실 안의 남녀는 한창 서로에 열중하고 있어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니......?" 문득 또 다른 음성이 들렸다. 그것은 영롱한 여인의 음성이었다. 그 음성에는 경악이 담겨 있었다. 선실 밖, 창문을 통해 누군가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안은 밝고 밖은 어두워 용모는 보이지 않았으 나 맑은 눈동자로 미루어 여인임을 알 수 있었다. 여인의 눈동자는 처음에는 경악했다가 이내 경멸의


빛을 띄었다. 눈동자는 이내 시선을 돌리더니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옷가지로 향했다. 그것은 남궁궁이 벗어던진 옷이었다. 옷 사이로 남궁궁의 소지품이 보였다. 그 중에서 불룩해 보이는 가죽 주머니가 보였다. 여인의 눈동자 가 반짝 빛을 발했다. 스슥......! 창문을 통해 투명해 보이는 실같은 것이 날아오더니 가죽주머니를 휘감았다. 이어 기척도 없이 가죽 주머니를 끌어 당겼다. "흥!" 여인은 경멸에 찬 코웃음을 날리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바로 그 순간, 한 덩어리가 된 채 뒹굴던 두 남녀의 몸이 부르르 경련하더니 절정의 고비를 넘기는 듯했다. 잠시 후 한숨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각각 떨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땀으로 흥건히 젖은 몸으로 기진한 듯 늘어져 있던 남궁궁의 몸이 움직였다. "엇?" 남궁궁은 정신을 차린 듯 당황성을 발하며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다가 그만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그의 바로 옆에 실 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천화영이 사지를 늘어뜨린 채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남궁궁은 아찔함을 금치 못했다. 그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전신을 떨다가 황급히 일어나 옷을 걸쳤다. 잠시 후 그는 천화영을 돌아다 보았다. 천화영은 워낙 격렬한 정사(情事)를 치른 탓인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그녀의 나신은 반짝거리고 있 었다. 흥건하게 흘린 땀방울이 궁등에 비친 것이었다. 아름다웠다. 방금 전까지 희대의 색녀처럼 그의 몸에서 몸부림치던 그녀의 육체는 여전히 아름다워 남궁궁은 다시 금 욕망이 고개를 쳐들 정도였다. 이때 그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천화영의 백옥처럼 뽀얀 허벅지에 점점이 묻어 있는 혈흔 (血痕)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남궁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그것은 곧 처녀의 순결을 상징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남궁궁은 비틀거렸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이렇게 엄청난 일을 저지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바로 그 술 속에......!'


그녀가 따라준 호박빛의 술속에는 일종의 미약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남궁궁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러다 안색이 변했다. 품 속이 허전한 것이었 다. 급히 품 속을 더듬은 그는 가죽 주머니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아까 누군가의 코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혹시?' 천화영과 정사를 벌이던 중에 들린 코웃음소리. 당시 그는 환청을 들은 줄 알았었다. 아니, 설사 똑똑 히 들었다 해도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아! 이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으니!' 그는 한숨을 쉬며 바닥에 떨어진 천화영의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그는 고개를 돌린 채 그녀의 몸에 옷을 덮어 주었다.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잠시 후 그는 선실 밖으로 나왔다. 시간이 꽤 흘러 사경이 지난 듯했다. 인근의 유선에 켜져 있던 불빛도 모두 꺼져 있었다. 그저 들리는 것이라고는 회하의 물이 조용히 흘러가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흠칫 놀랐다. 홍앵이 한쪽 벽에 기대서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홍앵낭자......!" 남궁궁은 그녀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그러나 이내 그녀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홍앵은 혈도를 짚여 있었던 것이다. 그는 급히 사방을 둘러 보았다. 목선은 회하의 중심부에 떠 있었으므로 배가 없이 그곳을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안력을 돋구었다. 그러자 백 장 밖으로 한 척의 소선(小船)이 빠른 속도로 달아나는 것이 보였 다. '저것이다!' 남궁궁은 문득 가슴 속에 알 수 없는 분노가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신형을 날리려다가 무슨 생 각을 했는지 갑판 바닥에 중지를 가볍게 그었다. 파파팟......! 갑판에 지력(指力)으로 글씨가 새겨졌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책임을 회피하진 않겠소. 언제고 다시 만나는 날 용서를 빌겠소. - 궁(穹)> 휙! 남궁궁의 신형이 강을 향해 날아갔다. 놀라운 신법이었다. 그는 마치 한 마리의 야조(夜鳥)인 양 강물 위를 쾌속하게 날아갔다. ②


그그긍......! 관이 땅바닥에 끌리는 듯한 음향이 울렸다. 사경이 넘은 야심한 밤에 관이 끌리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과히 기분좋은 일이 아니었다. 남궁궁은 가죽 주머니를 탈취해간 자를 쫓다가 이 기이한 행렬을 목도하게 되었다. 둥...! 둥둥......! 야밤의 정적을 흔드는 초혼고(招魂鼓) 소리는 듣는 이의 심장을 오그라 붙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남궁궁은 어둠 속에서 눈빛을 빛냈다. 아홉 명의 초혼객들은 곡상봉을 짚은 채 무겁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 아홉 개의 관이 끈으로 연결된 채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이 어찌 섬뜩한 광경이 아니겠는가? 종종 타지에서 죽은 자를 고향까지 운구(運柩)해 가는 일이 더러있다. 초혼객은 그런 일을 맡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대개 밤에만 운구를 하며 낮에는 인적없는 산 속에서 잠을 자는 것 으로 알려져 있었다. 둥둥... 둥......! 밤의 정막을 뒤흔드는 초혼고 소리는 유부(幽府)의 혼령을 일깨워 저승길을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남궁궁은 그들의 행렬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저 자들은 단순한 초혼객이 아니다. 걸음걸이의 은중함과 안으로 깊숙이 갈무리된 눈빛은 저들이 무 림인... 그것도 고수급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과연 초혼객들은 범상치가 않았다. 그들은 초혼고에 맞추어 걸음을 마치 시체처럼 뻣뻣하게 옮기고 있었다. 기이한 점은 그 뿐이 아니었다. 그들이 끌고 있는 관은 얼핏 보면 목관 같았으나 실은 철관이 었다. '어쨌든 따라가 보자.' 남궁궁은 이 괴이한 행렬을 뒤쫓기 시작했다. 관의 행렬은 한동안 묵묵히 이어졌다. 얼마나 갔을까? 선두에 선 자가 탁성으로 말했다. "저 사당에서 잠시 쉬어가세." 초혼객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들의 앞 이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 낡은 사당이 보였다. 그것은 일견하 기에 관우묘인 듯했다. 초혼객들은 관을 질질 끌며 관우묘로 향했다. 그들이 관우묘 안으로 들어간 후, 남궁궁은 소리없이 신형을 날려 관우묘의 지붕에 내려서고 있었다. 그는 기왓장이 깨지고 잡초가 무성한 지붕 위에 엎드렸다. 다행히 지붕이 갈라져 묘당 안의 정경을 쉽게 엿볼 수가 있었다. 초혼객들은 철관을 한쪽에 나란히 놓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휴식을 취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남궁궁은 그들의 자세를 보고 운기조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보았다. 다만 그들 중 한 명만은 운기조식을 취하지 않은 채 호법(護法)을 서고 있었다. 그는 비쩍 마른 중년 인으로 눈빛이 음흉하고 피부가 검푸른 빛을 띄고 있어 음흉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 자는 긴장된 자세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나머지 여덟 명의 초혼객은 운공삼매에 들어갔는지 가벼운 숨소리만 들릴 뿐, 모두 조용했다. "흐흐......!" 문득 호법을 서던 중년인이 음탕한 웃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바닥에 놓인 철관 중의 하나 를 향해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흐흐... 어차피 실혼인(失魂人)이 될 테니 그 전에 이 범용(范用)이 맛 좀 본다 해도 억울할 건 없을 것이다." 중년인은 철관의 뚜껑으로 손을 가져갔다. 끼끼긱...! 뚜껑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남궁궁은 그 광경을 낱낱이 보고 있었다. 그러나 중년인은 그가 보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 었다. 남궁궁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대체 시체에게 무슨 장난을 치려고......?' 관뚜껑이 열리자 그의 눈에 관 속에 누워있는 소녀가 들어왔다. 뜻밖에도 아름다운 소녀였다. 반듯한 이마 아래 자리한 눈썹은 가는 붓으로 그린 듯 미려했고, 콧날은 마늘쪽처럼 곧았다. 소녀는 살아 있을 때는 고귀한 신분이었는 듯, 호사스런 취의(翠衣)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 동도 않고 누워있을 뿐이었다. "흐흐... 고것 참 정말 미끈하게 생겼구나." 중년인은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남궁궁은 중년인이 무슨 짓을 할지 궁금했다. 그는 안력을 돋구었다. 그러나 그만 놀라고 말았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취의소녀가 숨을 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녀의 가슴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중년인의 눈빛이 음탕하게 변했다. 그는 취의소녀의 가슴 속으로 손을 불쑥 집어넣었다. "흐흐... 과연 야들야들하구나......." 중년인은 치솟는 욕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했다. 마침내 그는 급히 취의소녀의 옷을 풀어헤쳤다. 잠 시 후 봉긋한 젖가슴이 옷 사이로 드러났다. 실로 백옥으로 빚은 듯 뽀얗고 아름다운 가슴이었다. 소녀의 가슴은 사내의 손길을 한 번도 허락하지 않은 듯 순결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순결은 여지 없이 사내의 손에 뭉개지고 말았다. 중년인이 우악스럽게 젖가슴을 움켜쥔 것이었다. "흐흐......." 중년인은 음소를 흘리며 소녀의 젖가슴을 주무르다가 손가락으로 앵두알처럼 작은 유두를 비틀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지 소녀의 하체를 향해 손을 밀어 넣었다. '파렴치한 놈......!' 남궁궁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흐흐... 더는 못참겠다!" 중년인은 벌떡 일어서더니 자신의 아랫도리를 훌렁 벗어 던졌다. 그러자 흉측한 하반신이 드러났다. 그는 가쁜 숨을 쉬며 관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큭!" 갑자기 그의 입에서 목청이 갈라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천장으로부터 찰라적으로 은빛이 뻗 었을 뿐이었다. 그 결과는 끔찍한 것이었다. 중년인의 뒤통수 옥침혈(玉枕穴)에 바늘구멍 같은 미세한 구멍이 뚫린 것이다. 그는 소녀를 겁간하려 는 순간에 즉사하고 만 것이었다. 한편 남궁궁은 기분이 착잡했다. '난생 처음으로 은사탄지공(銀絲彈指功)으로 살인을 했구나.' 은사탄지공! 그것은 수백 년 전 명성을 날렸던 강호의 일대기인인 지마(指魔) 필가효(畢加梟)의 독문절기로 내공이 최소한 일백 년 수위에 오른 자만이 시전할 수 있는 무서운 지공이었다. '할 수 없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스슷......! 남궁궁은 교묘히 묘당 안으로 들어 갔다. 그는 취의소녀를 덮친 채 자빠진 중년인의 시체를 안고 연 기같이 묘당 밖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묘당 안으로 흑의괴인이 들어왔다. 놀랍게도 그는 방금 전 죽은 범용이란 이름의 중년인이었 다. "......." 중년인은 취의소녀에게로 다가가더니 흩어진 옷을 대충 여며주었다. 이때였다. 한 가닥 음침한 소리가 묘당 안의 정적을 갈랐다. "구제(九弟)! 설마 그 계집을 건드린 건 아니겠지?" "......!" 범용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 보았다. 오순 가량 되어 보이는 괴인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쭉 찢어진 눈매에 매부리코의 인물이었다. 그는 운공을 마친 듯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 아니오. 그저......." 범용은 얼른 관뚜껑을 덮고 얼버무렸다. 이때 괴인들이 차례로 운공에서 깨어났다.


그들 중 누군가가 음탕하게 웃었다. "클클...! 아홉째의 아랫도리가 근질거린 모양이군......!" "헤헷... 하지만 참아! 잠시 후면 실컷 재미를 보게 될텐데 뭘 그리 서둘러?" 범용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때 미간에 흑점이 난 한 괴인이 음산하게 말했다. "아홉째, 쓸데 없는 짓 하지 마라. 그 계집들은 회주께서 단주(檀主)에게 특별히 지시를 내려 천마금 혼녀(天魔禁魂女)로 만들기 위해 순음지정을 가진 계집들만 특별히 거둔 것이다. 네가 만약 건드리면 우리 낭산구마(狼山九魔)는 그것으로 끝장이다." 범용의 얼굴은 흙빛이 되고 말았다. "나... 난 그저......." 괴인들은 모두 음소를 흘렸다. "자, 가자! 시간이 다 되어간다. 날이 밝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 낭산구마의 우두머리인 듯한 대마(大魔)가 몸을 일으켰다. 둥둥...! 그그긍......! 다시 묘한 행렬이 시작되었다. 낭산구마의 우두머리가 앞장 서 초혼고를 두드리고, 뒤이어 여덟 명의 괴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범용은 맨 뒤에서 관을 끌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기민하게 움직였다. '이들은 사이한 집단임이 틀림없다.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소녀들을 호송해 가는 것이다. 천마금혼녀 란 사법(邪法)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범용은 가슴 속에 의문과 더불어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바로 남궁궁이었다. '화노(華老)에게 배운 역변환용술(易變幻容術)을 이렇게 유용하게 써먹을 줄은 몰랐구나.' 남궁궁은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 사건에 강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강호란 변화막측할 뿐더러 이해할 수 없는 괴사가 쉴 새 없이 벌어진다더니 과연 이걸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그는 강호정세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들은 것이라고는 화노에게서 들은 칠십 년 전의 얘기 뿐이었다. 그러므로 부딪치는 일마다 그에게는 새롭고 기이하기만 했다. 둥...! 둥둥......! 초혼고는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행렬 또한 규칙적으로 이동했다. 남궁궁은 문득 기이함을 느꼈다. '이 방향은......?' 관의 행렬은 의당 산중으로 향해야 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금릉으로 향하는 관도를 가고 있는 것이 었다. '머지 않아 동이 틀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들은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고 그렇게 되면 비밀을 유지하


기가 불가능할 텐데.......' 그러나 계속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문득 그의 눈빛이 빛났다. 머지 않은 곳에서 말 울음소리와 함 께 마차 바퀴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남궁궁은 비로소 이해할 수가 있었다. 과연 얼마쯤 가자 관도상에 아홉 대의 마차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어서 마차에 실어라!" 대마의 명에 낭산구마는 신속하게 철관을 마차에 싣고는 올라탔다. 남궁궁은 마차 안에 채소를 비롯 한 여러 가지 식량들이 실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모두 주방에서 쓰는 재료들이었다. 그는 의아한 마음으로 말을 살펴 보았다. 말 안장에 문장(紋章)이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대하소영루(大河素影樓)> 남궁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마차가 금릉의 이대기루 중 하나인 대하소영루의 것이란 말인가?' 그러나 더 이상 놀라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가자!" 대마의 음침한 음성이 들렸다. 그러자 마차가 한 대씩 출발하기 시작했다. 덜컹! 덜컹......! 마차는 금릉으로 향했다. 얼마 쯤 가니 새벽인데도 행인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홉 대의 마차를 보고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대하소영루는 항상 풍류객들로 초만원을 이루는 곳이다. 때문에 그곳에서 소비하는 술과 음식의 양은 엄청났다. 그들은 그 많은 양의 술과 음식을 충당하기 위해 늘 새벽에 마차를 통해 물건을 조달했다. 따라서 마차가 이상하게 보일 까닭이 없었다. 마차의 대열은 아무 의심도 받지 않고 금릉성의 남문을 통과했다. ③ 대하소영루의 규모는 실로 방대했다. 비록 생긴 지 십 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이미 이백 년 전부터 뿌 리내린 천일야화루를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대하소영루의 내원(內院), 외원(外院), 중원(中院)의 규모 와 화려함은 황궁에 버금갈 정도였다. 외원은 일반 풍류객들을 받는 곳으로 이곳에 소속된 기녀들의 수는 근 일천을 넘는다는 소문이 나돌 고 있었다. 중원에는 일급 기녀만 백여 명으로, 하나같이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절세미인들이었다. 따라서 중원 에서 하룻밤을 즐기려면 웬만한 부호도 손이 떨릴 정도의 황금을 뿌릴 각오를 해야 했다. 내원. 이곳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아직까지 내원에 든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 로 내원에 소속된 기녀가 몇명인지, 그녀들의 미색이 어떠한지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짐작컨데 내원의 기녀들이야말로 경국지색(傾國之色)일 것이라는 은밀한 소문만이 나돌 뿐이었 다. 금릉 최고의 기루 대하소영루는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다. 뿐만아니라 밤이 새도록 곳곳에서는 흥 겨운 주악소리와 기녀들의 교성이 그치지 않았다. 아홉 대의 마차가 대하소영루의 후문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대하소영루에서 일하는 하인 및 물품을 조달하는 사람들만 드나드는 곳이었다. 남궁궁은 마지막 마차에 타고 있었다. 마차는 후문을 통과하자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후원 쪽으로 갔 다. 기루에서 일하는 하인들 모두 저마다의 일만 할 뿐, 마차를 유의해 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덜컹! 마차는 후원을 가로질러 하나의 중문(中門)을 넘어갔다. 이어 커다란 인공연못 앞에서 멈추었다. "내려라!" 대마의 명이 떨어지자 낭산구마는 일제히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휙! 휙......! 그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십여 명의 회의인들이 떨어져 내렸다. 대마는 그들을 보자 얼른 포권했다. "물건은 무사히 호송해 왔소이다. 지금 인계하겠소이다." 회의인들 가운데 한 명의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육십여 세쯤 되어 보였는데 얼굴에는 핏기 한 점 없어, 마치 시체같은 느낌을 주었다. "수고했다. 직접 확인하겠다." 그는 대마에게 하대했다. 그러나 대마는 추호의 불만도 없는 표정이었다. "뚜껑을 열어라." 노인이 명을 내리자 회의인들은 각각 철관 앞으로 다가가더니 뚜껑을 열었다. 관 속에는 한 구씩의 시체들이 누워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 시체들이 하나같이 십육칠 세밖에 안되어 보이는 꽃처럼 아름 다운 소녀들이라는 사실이었다. "......."


노인은 소녀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소녀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그녀는 범용이 건드리려 했던 취의를 입은 소녀로, 상의가 젖혀져 눈부시게 뽀얀 젖가슴이 반쯤 드러나 있었다. 노인의 눈이 으스스하게 빛났다. "누가 건드렸나?" 그의 음성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음산했다. 대마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 쩔쩔맸다. "아... 아닙니다. 절대로......." "만일 이상이 있다면 너희들은 제 명에 못살게 될 것이다." 노인은 대마에게 살기띤 음성으로 못박은 후 몸을 돌렸다. "예예...!" 대마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어 고개를 홱 돌리더니 범용, 즉 남궁궁을 무섭게 쏘아 보았다. 남궁궁은 고개를 푹 떨구어 그의 시선을 피했다. "운송하도록." 노인이 명령하자 회의인들은 일제히 관뚜껑을 닫고는 철관을 어깨에 둘러멨다. 그들은 연못을 향해 걸어갔다. "......?" 낭산구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연못은 백여 장이 넘었고, 무척이나 깊은 듯 검푸른 빛을 발하 고 있었다. 연못 한가운데는 인공가산이 섬처럼 축조되어 있었다. 그곳까지 가려면 필시 배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눈씻고 보아도 배는 없었다. '설마 물 속으로 걸어가기라도 한단 말인가?' 낭산구마는 침을 꿀꺽 삼키며 회의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마침내 연못의 수면에 발을 딛었다. '아니?' 낭산구마는 눈을 크게 떴다. 회의인들은 연못의 수면 위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발은 한 치 가량밖에 물에 잠기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수면을 걸어 인공섬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 다. 대마는 처음에는 경악했으나 곧 깨달았다. 연못 속에는 보이지 않는 수중대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 다. "너희들은 이만 백락전(百樂殿)으로 가 쉬도록." 노인은 대마에게 한마디를 던지고는 회의인들의 뒤를 따라 연못위를 걸어갔다. "고... 고맙습니다." 대마는 그를 향해 꾸벅 절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희열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뿐만 아 니라 나머지 팔마도 희색이 만면이었다. 이미 날은 완전히 밝아 있었다. 따가운 아침 햇살이 대하소영루의 후원을 비추고 있었다. 한편, 남궁궁은 낭산팔마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는 후원을 둘러보며 기이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날이 밝았는데도 이곳에는 인기척이 없구나.' 실제로 후원에는 사방으로 많은 방사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가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가 없 었다. 그는 의문이 일었으나 물어볼 수도 없는 입장이므로 그저 팔마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중문 두 곳을 지난 그들은 한 채의 화려한 대전 앞에 당도했다. 대전의 처마 밑에는 금빛의 편액이 걸려 있었다. <백락전(百樂殿)> 문득 대마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홉째." "옛......?" 남궁궁은 흠칫했다. "흐흐, 이제 네 소원을 풀게 됐다." "그... 그렇군요." 남궁궁은 대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대충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 옆에서 누군 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킬킬...! 백락원에는 계집들이 구름처럼 많으니 아홉째는 아까 못다푼 회포를 실컷 풀게 됐군." "흐흐흣......!" 낭산팔마는 일제히 괴소를 터뜨렸다. 이어 그들은 눈빛을 번들거리며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호호홋......!" "꺄아!" 그들이 대전 안으로 들어선 순간 사방에서 요사스런 여인들의 웃음과 환호성이 울려왔다. 낭산구마는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십여 명의 여인들이 우르르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이십이 넘지 않은 미녀 들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낭산구마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든 것은 그녀들의 옷차림이었다. 속살이 훤히 내비치는 잠자리 날개같은 망사옷 차림이었던 것이다. 터질 듯이 풍만한 젖가슴은 물론, 두 다리 사이의 무성한 삼림까지도 은은히 비쳐 보이는 그야말로 노골적인 차림이었다. "호호호......!" 여인들은 둔부를 살랑살랑 흔들며 다가왔다. 그러자 젖가슴이 아래 위로 흔들리며 야릇한 향기가 코 끝을 물씬 자극했다. "흐응. 연락받고 달려 나왔어요. 나리님들." "호호! 어서 와요, 천첩들은 나리들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답니다."


"흐흐흐... 귀여운 것!" "킬킬킬......!" 낭산구마는 각자 여인들을 한 명씩 택해 번쩍 안아들었다. 한편 남궁궁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의 앞 에는 이제 겨우 십육칠 세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서 있었다. 그녀는 다른 여인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이때 대마의 품에 안겨있던 요염한 여인이 깔깔거리며 말했다. "호호! 그 계집애는 오늘 처음 들어왔어요. 나리께서는 횡재를 한 거라구요." 그 말에 대마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런 제길! 아홉째는 운이 좋았구나!" 그러나 남궁궁은 내심 한숨을 쉬고 있었다. '휴우... 골치 아프게 됐군. 이런 일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그러나 어찌하랴! 마굴(魔窟)에 들어온 이상 마두답게 행동하지 않으면 정체가 탄로날 수밖에 없지 않 은가? 그는 만면에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었다. "흐흐! 이리 오너라, 귀여운 것." 남궁궁은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소녀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아!" 소녀는 가냘픈 비명을 발했다. 남궁궁은 손끝에 뭉클한 촉감을 느끼며 멈칫했으나 내친 김에 그녀를 강하게 끌어 안았다. 한편 낭산팔마는 각기 한 여인씩을 꿰어 차고 대전 안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남궁궁은 소녀의 귓전 에 대고 말했다. "네 방이 어디냐?" "네......." 소녀는 모기소리만한 음성을 발했다. 그녀는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거의 투명한 망사의를 입고 있는 탓에 그녀가 걸을 때마다 동그란 둔부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어 뒤에서 걷고 있는 남궁궁은 도무지 시 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남궁궁은 미약에 중독되어 천화영을 범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여인이라곤 몰랐다. 그래서 그는 온통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나는 범용이다.' 남궁궁은 소녀의 둔부를 쏘아보며 그녀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④ 백락전에는 정확히 백개의 방이 있었다. 백 가지의 환락(歡樂)를 제공하는 곳이란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었다. 남궁궁은 그 중 하나의 방으로 소녀를 따라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선 순간 진한 지분냄새가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방안을 둘러 보 았다. 바닥에는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었으며 한쪽에는 은은하게 안이 비쳐보이는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 다. 아마도 그곳은 침실인 듯했다. "......!" 남궁궁은 문득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금치 못했다. 사방의 벽에 온통 춘화도(春畵圖)가 그려져 있었 다. 그것도 보통 춘화가 아니었다. 한결같이 남녀의 방사에 관한 체위들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었다. 남궁궁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온갖 기기묘묘한 남녀들의 자세는 보기만 해도 가슴이 쿵쾅거리고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었다. 그는 급히 시선을 거두며 내심 중얼거렸다. '정말... 음탕한 곳이군.' 남궁궁은 의혹을 금치 못했다. 지금 그가 들어온 곳은 금릉제일의 기루인 대하소영루였다. 다시 말해 일개 기루인 것이다. 그러나 기루라고 보기에는 어딘가 괴이한 면이 있었다. "저......." 소녀가 쭈삣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는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불안한 듯 가슴을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옷을... 벗을까요?" 비록 수줍어 하기는 했으나 대담한 말이었다. 남궁궁은 난감했다. 본래 낭산구마 중 막내인 범용은 호 색한으로 유명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어물쩡거리다간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었다. 그의 머리가 바쁘게 굴러갔다. 마침내 그는 결심했다. 그는 휘장을 젓히고 들어가 침상에 걸터 앉으며 음탕한 표정으로 말했다. "흐흐...!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남궁궁의 연기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그의 음탕한 눈빛과 웃음소리는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 였다. 소녀의 눈에 체념의 빛이 어렸다. 그녀는 떨리는 손길로 하나밖에 없는 나삼을 어깨 아래로 내렸다. 사르르르륵......! 매끄러운 어깨 아래로 나삼이 흘러내리자 그녀의 알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 남궁궁은 그녀의 나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리 마음을 다부지게 먹으려 해도 어쩔 수 없 이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소녀의 나신이야말로 너무나 아름다웠던 것이다. 설사 부처라 해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동요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방 벽에는 온갖 해괴무 쌍한 자세의 춘화도가 그려져 있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소녀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는 나신으로


서 있는데야 어찌 회(?)가 동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소녀의 몸은 솟을 곳은 적당히 솟아나 있고, 들어갈 곳은 절묘하게 들어가 있어 어느 한 부분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 소녀는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그녀는 한손으로는 젖가슴을, 한손으로는 하복부를 살짝 가렸다. 그러 나 그런 그녀의 모습은 더욱더 유혹적으로 비쳐질 뿐이었다. "으음......." 남궁궁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나리께서는... 제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소녀는 겁먹은 표정으로 물어왔다. 남궁궁은 문득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이 소녀는 어딘가 다른 것 같다. 다른 여인들에 비해 음탕한 면모가 조금도 엿보이지 않는 것이. 그 렇다면.......' 그는 음소를 흘리며 말했다. "흐흐! 그야 겪어봐야 알지. 이리 와 봐라." 소녀는 멈칫하더니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작은 젖가슴이 아래 위로 흔들렸다. 그녀가 앞에 서자 남 궁궁은 눈 둘 곳을 몰라 잠시 눈썹을 떨었다. 그때였다. 소녀는 입술을 잘근 물더니 그의 무릎 위로 오르는 것이 아닌가? '......!' 남궁궁은 아찔해지고 말았다. 향기로운 소녀의 나신이 무릎에 올라타니 혼백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그 러나 한편으로는 분노가 치밀었다. '철저히 노리개감으로 훈련받았구나.' 그의 눈 앞에는 소녀의 젖가슴이 있었다. 아직 완전히 영글지 않은 연분홍빛 유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남궁궁은 한시라도 빨리 이 난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범용이었다. "흐흐... 꽤 쓸만하구나." 그는 음탕한 눈빛으로 소녀를 쓸어 보았다. 젖가슴은 비록 작았으나 팽팽한 느낌을 주었으며, 허리는 한 줌밖에 안될 정도로 가늘었다. 그 아래 둔부는 급격히 퍼져 있었고, 다리는 대리석처럼 곧게 뻗어 있었다. 소녀는 그의 목을 껴안으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절... 가져주세요." 남궁궁은 내심 탄식하며 한손으로 그녀의 등과 둔부를 쓰다듬었다. 손끝에 묻어날 듯 고운 촉감이었 다. "흐흐, 이름이 뭐냐?"


"화화(花花)... 랍니다."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흐흐! 본명을 물었다. 계집애야." "그건......." 소녀의 몸에 잔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궁궁은 짐짓 코웃음쳤다. "흥! 밝힐 수 없단 말이냐?" "그... 그게 아니오라......."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소녀는 오직... 나으리를 즐겁게 해드리는 노예일 뿐... 다른 것은 일체 밝히면 안된다는 엄명을......." "흥! 날 무시하는 거냐?" 소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 그러면 소녀는 죽습니다. 나리...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제발 그것만은......." 남궁궁의 뇌리에서 한 가지 영감이 떠올랐다. "흥! 이 나리께서는 각별한 취미를 지니고 있다. 네 과거를 알아야 더한 즐거움을 느낀단 말이다. 내 게만 말해라,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을테니." "흐윽, 제발......." 소녀는 마침내 눈물을 쏟았다. 커다란 눈에 맺혔던 눈물이 고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남궁궁은 마음 이 약해졌으나 여기서 그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마음을 독하게 먹기로 했다. 그는 소녀의 작은 젖가슴을 덥석 움켜 쥐었다. "악!" 소녀는 비명을 질렀다. "끝내 말하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널 쓸모없는 계집이라고 소문내겠다." "아아! 나리... 그것만은...." 남궁궁은 그녀의 태도에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백락원의 여자들이 근본적으로 남자를 즐겁게 해야 한다는 율법에 구속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쓸모가 없다는 소문이 돌면 그녀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지도 몰랐다. "흥! 그럼 어서 이실직고해라." 마침내 소녀는 체념한 듯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대답했다. "소녀는... 위지연옥(尉遲燕玉)이에요." "위지? 훨씬 좋군. 그래, 출신은?" 남궁궁은 더욱 집요하게 물었다. "그... 그건......." 위지연옥은 안색이 창백해 졌다. "흐흐! 정말 말로는 안될 계집이로구나. 좋다, 그럼 내게도 생각이 있다." 남궁궁은 그녀를 뿌리치려 했다. 그러자 위지연옥은 그의 목에 매달리며 애원했다. "나리.... 그걸 발설하면 소녀는 처벌을 받게 되옵니다......." "흥! 비밀을 지키면 될 것 아니냐? 좋다, 그럼 한 가지 약속을 해주마. 네가 출신을 말한다면 네 몸을


건드리지 않겠다." "......!" 위지연옥의 몸이 굳어졌다. 그녀의 눈에는 경이의 빛이 떠올랐다. 남궁궁은 아차 싶어 급히 덧붙였다. "달리 생각하지 마라. 오늘은 이 나리께서 몸이 좋지 않단 말이다. 하지만 안심해라. 밖에서는 즐겁게 놀았다고 말해 줄테니." 남궁궁은 모험을 걸었다. 만일 그의 행동에 위지연옥이 의심을 품고 상부에 보고한다면 그는 정체가 탄로날 우려가 짙었다. "......." 위지연옥은 눈물 고인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한참 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리를 믿고 말씀 드리겠어요."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본래 소녀의 집은 강남 무창(武昌)에 있는 수운장(水運莊)이랍니다. 부친께서는 양자강을 오가는 범선 여러 척을 운영하는 선주(船主)로 함자는 위지장현이랍니다......." 수운장(水運莊). 그곳은 강남에서는 꽤 알려진 곳이었다. 수운장주 위지장현은 백척이 넘는 범선을 운영하는 부호였으 며 무공 또한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수운장은 강남 일대의 수로를 장악하고 있는 동정칠십이채(洞庭七十二寨)와 그들의 혈맹인 대수룡방 (大水龍 )에 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영역을 지니고 있었다. 그만큼 위지장현의 무공이나 인망, 영향력 은 무창 일대에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날 밤, 위지장현이 금지옥엽처럼 사랑하는 딸 위지연옥은 일단의 괴인들에 의해 납치당하 고 말았다. 사연인즉 괴집단이 천마금혼녀로 만들기 위해 납치한 것이었다. 그러나 납치 도중에 그녀는 뛰어난 미모로 인해 겁탈당해 순결을 잃고 말았다. 천마금혼녀가 되려면 순음지정이 파괴되지 않아야 하므로 그녀는 자격을 잃고 만 것이었다. 그후 그 녀는 대하소영루에 배치되고 말았다. 대하소영루는 그녀를 백락전의 색노(色奴)로 삼아 버렸다. 물론 그 전에 남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방중술(房中術)에 관한 훈련을 혹독하게 받아야 했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백락전에 배치되어 첫 손 님을 받게 된 것이었다. "......."


남궁궁은 위지연옥의 기구한 사연을 모두 들은 후 내심 분노를 금치 못했다. "흑흑...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나리." 위지연옥은 오열을 터뜨리며 남궁궁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남궁궁은 자신도 모르게 동정심이 일어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 내가 한번 힘써 보겠다. 되도록 널 집으로 갈 수 있도록 말이다." 순간 위지연옥의 몸이 굳어졌다. 그녀는 불현듯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라 있었다. 남궁궁은 흠칫했다. 비로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것이었다. "당신은... 누구죠?" "무슨 소리냐? 이 나리는 범용이다." 남궁궁은 차갑게 냉소했다. 그러나 그의 연극은 통하지 않았다. "당신은... 가짜예요!" 위지연옥은 안색이 파랗게 질린 채 외쳤다. 그때였다. "......!" 그녀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남궁궁이 그녀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덮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빠져 나가려고 발버둥쳤다. 그러나 남궁궁은 그녀를 침상 위로 쓰러뜨린 후 올라 탔다. "떠들지마라. 더 이상 입을 놀리면 죽여 버리겠다!" 그는 살기 띤 음성으로 협박했다. 그러나 밑에 깔린 위지연옥의 표정은 확신에 차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당신은 가짜예요! 절대... 진짜일 리가 없어요." "흐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소녀가 아는 한... 이곳에 당신같은 정인군자는 존재하지 않아요." 위지연옥은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있게 말했다. "내가 정인군자라고?" 남궁궁은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마침내 그는 음성을 바꾸며 말했다. "더이상 속일 수가 없구려, 낭자." 그의 음성이 지금까지의 음침한 느낌과 달리 낭랑하게 변해 있었다. 그러자 위지연옥은 눈을 동그랗 게 치떴다. "안심하시오. 결코 낭자를 해하지 않을테니. 아니, 낭자를 이곳에서 구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소." 위지연옥은 그의 얼굴을 빤히 올려보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믿죠? 그럼... 저에게 당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세요." 남궁궁은 흠칫했다.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소?" "보여 주셔야 믿겠어요." 위지연옥의 완강한 태도에 남궁궁은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좋소."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양뺨을 잡고 문지르자 피부의 근육이 멋대로 틀어지며 전혀 다른 얼굴로 변화했다. 뿐만 아니라 피부색마저 희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 마침내 남궁궁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위지연옥은 믿어지지 않는 듯 눈을 크게 뜬 채 그의 얼 굴을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올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도무지 마술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사람의 얼굴이 떡주무르듯이 변할 수 있단 말인 가? "이젠 됐소? 날 믿으시오. 우연히 이곳에 잠입하게 되었소. 내가 파악한 것은 이곳이 사악한 집단이라 는 것이오. 최선을 다해 낭자를 이곳에서 빠져나가도록 해 보겠소." 위지연옥은 정신을 차린 듯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해요." "불가능 하다니?" 남궁궁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위지연옥은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 전에 절... 취해 주세요." "......!" 남궁궁은 흠칫 놀랐다. 실로 뜻밖의 요구였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위지연옥의 표정이 샐쭉해 졌다. "싫은가요? 제 몸이 더러워서인가요?" "아니오. 그게 아니라......." 남궁궁은 더듬거렸다. 그는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갑작스런 위지연옥의 요구는 그로 하여금 혼란 을 불러 일으켰다. "그럼 무엇 때문이죠?" "난 다만 꼭 필요가......." 위지연옥의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렇군요.... 당신은 절 더러운 여자로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절 취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요." 남궁궁은 문득 엄숙하게 말했다. "낭자, 절대 그렇지 않소. 낭자는 타의에 의해 납치되었으니 아무런 죄가 없소. 내 어찌 낭자를 더럽 게 여긴단 말이오? 하지만 내겐 시간이 없소. 오래 있을수록 정체가 탄로날 위험이 크기 때문이오. 그 전에 이곳에 납치된 여인들을 구해줘야 하지 않겠소?" 위지연옥은 문득 희미하게 웃었다. "제가 주제넘게 욕심을 부렸어요. 전... 공자님을 완전히 믿기 위해 그랬어요. 미안해요. 공자님은 정 말 정인군자이시군요...."


남궁궁은 가슴이 뭉클해지고 말았다. 처연하게 말하는 위지연옥에게서 그는 연민지정이 솟아났다. 그 러다 문득 자신이 아직까지 그녀의 몸에 올라타고 있는 것을 느끼고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아아! 좋아요, 나리! 흐응!" 갑자기 위지연옥이 그의 목을 껴안으며 교성을 질렀다. 남궁궁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방문 앞에서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부끄럽구나! 아직도 멀었다. 이렇게 신중하지 못해서야.......' 남궁궁은 자신의 경솔함을 뉘우쳤다. 그가 자신을 나무라는 사이 위지연옥은 그의 머리를 손으로 끌 어 당겼다. 그 바람에 그는 그녀의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부드럽고 탄력 넘치는 젖가슴이었 다. "아응! 좀더......." 위지연옥은 그의 머리를 강하게 껴안은 채 신음을 크게 내질렀다. 뿐만 아니라 매끄러운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휘감아 왔다. 그녀의 행동은 연극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적극적이었다. 남궁궁은 가슴 한구석이 찡한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불행한 소녀 위지연옥의 허리를 부드 럽게 껴안아 주었다. '어쩌면 이 소녀는 정말로 진정한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구나....' 발자국소리가 멀어져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지연옥은 그의 몸을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 더욱 적 극적으로 그에게 매달린 채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남궁궁은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차마 그녀를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는 부드러 운 그녀의 젖가슴을 입술로 애무했다. "아......." 위지연옥은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그녀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있었다. 남궁궁은 그녀의 눈 가장자 리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탄식하며 그녀의 눈에 입술을 맞추어 주었다. 위지연옥은 고양이 같은 신음을 발하며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불쌍한 여인....' 남궁궁은 마음이 약해졌다. 그는 문득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과연 내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이 소녀를 거부한단 말인가?' 위지연옥.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운장의 금지옥엽이요, 부친 슬하에서 장중보옥(掌中寶玉)처럼 사랑을 받아온 소 녀였다. 비록 불의에 납치되어 백락전의 색노가 되긴 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순결한 것이었다. 남궁궁은 마침내 결심했다. '그대가 날 원하다면.'


그는 옷을 벗었다. 위지연옥은 깜짝 놀란 듯 눈을 떴다. "공자님......?" "아무 말 마시오. 소저." 남궁궁은 부드럽게 말하곤 그녀의 가는 허리를 안았다. 마침내 그는 위지연옥의 아름다운 나신을 애 무하기 시작했다. "아......." {{}}위지연옥은 입술을 벌리며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방금 전의 가식에 찬 신음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사 랑을 느끼고 희열을 느끼는 여인의 본능이 포함된 신음이었다. 방안에 열기가 피어 올랐다. 남궁궁은 위지연옥의 육체를 정성껏 애무했다. 그의 입술이, 손이, 입김 이 스칠 때마다 여체는 경련했고, 뜨겁게 달아 올랐으며, 간간이 퍼뜩퍼뜩 튀어 오르곤 했다. "공자... 님......." 절정에 올랐을 때 위지연옥은 온몸을 경직시키며 희열에 찬 중얼거림을 발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넘치고 있었다. ■ 왕도 1 권 제 7 장 십절공자(十絶公子) ━━━━━━━━━━━━━━━━━━━━━━━━━━━━━━━━━━━ ① 밤은 다시 찾아왔다. 스스슷......! 야음을 타고 인공연못을 향해 연기처럼 날아가는 인영이 있었다. 방원 백 장여의 연못 한가운데는 섬이 있었다. 연못가에서 섬까지는 삼십 장이 넘는 거리였다. 팟! 놀랍게도 인영은 연못을 뛰어 넘었다. 그의 신형은 십 장 가량 날아가다 연못에 떨어지는 듯했으나 수면을 제비처럼 스친 후 다시 떠올랐다. 두 차례 수면을 박찬 그는 마침내 섬에 가볍게 떨어져 내렸 다. "......!" 섬에 내려선 인영은 신중히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는 바로 남궁궁이었다. 그는 위지연옥으로부터 대하소영루의 비밀을 아는 대로 들었다. 그 결과 이곳 인공섬에 모종의 비밀 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오늘밤 탐지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스스.... 남궁궁의 모습이 흐려지더니 사라졌다. 그는 절정의 은형술(隱形術)을 발휘하여 섬 주위를 한 바퀴 돌 았다. 잠시 후 그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어찌된 셈인지 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딘가 비밀장소로 통하는 입구가 있을 법 한데도 발견할 수 가 없었다. '입구가 있기는 있을텐데....' 이때였다. 휙... 휙휙......! 문득 허공을 가르는 파공성이 울려왔다 그는 급히 숲 속에 몸을 은닉한 후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 았다. 연못 위를 스치듯이 날아오고 있는 세 개의 인영이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섬에 도착했다. 그들은 백의에 백건(白巾)을 두르고 있어 용모를 알 수가 없었다. '흠, 슬슬 일이 풀리기 시작하는구나.' 남궁궁은 청력을 돋구었다. 그러자 백건인 중 한 명의 음성이 똑똑히 귀에 들어왔다. "이곳은 본회의 만색단(萬色壇)에 속하는 곳이다. 이번 임무는 천마환혼대법(天魔還魂大法)과 천마금혼 녀, 만색비녀(萬色妃女)의 진행상황을 알아보는 것이다." "......." 나머지 두 명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우리 무상삼마(無常三魔)는 영주의 신분으로 온 만큼 총단의 위엄을 보여야 한다. 알았느냐?" "알겠소이다. 대형!" 두 백건인은 음침하게 대답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무상삼마는 근 오십 년 전부터 강호를 누볐던 거마들이었다. 그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마인들로 소위 신주백마(神州百魔)의 반열에 드는 절정의 마도 인물들이었다. 신주백마는 마도의 최정예 인물들로, 지난 백 년 이래 가장 강한 마도의 고수 백 명을 일컫는 것으로 그들은 하나같이 포악하고 악랄한 위인들이었다. 또한 자존심이 강해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만일 그들이 뭉쳤다면 과 거 제왕천이 무림에 군림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돌았었다. 그만큼 그들은 개개인의 무공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무상삼마는 신주백마 중 중간급에 불과했으나 역시 대단한 무공을 소유한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이 본회 운운하고 있으니 가히 놀랍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상삼마가 이곳에 나타나다니......!' 남궁궁은 경이를 금치 못했다. 그는 과거 화노로부터 그들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다만 당시 화노 가 활동했을 때에는 무상삼마는 막 두각을 나타내고 있을 때여서 지금과 같은 성세는 아니었을 뿐이 었다.


"들어가자!" 무상삼마의 우두머리인 대마의 음성이 들렸다. 남궁궁은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대체 어디로 들어 가자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때 무상삼마는 하나의 커다란 바위 앞에 섰다. 바위는 겉으로 보아 조금도 이상한 점이 없었다. 대 마는 바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그긍......! 어디를 어떻게 건드렸는지 굉음과 함께 바위가 갈라지며 그곳에 단단한 철문이 나타났다. "마화(魔花)가 피었다. 그럼 마천(魔天)은 언제 열리느냐?" 철문 안으로부터 한 가닥 음침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자 대마가 침중하게 답했다. "복수의 검이 천지를 가르고 혈하(血河)가 산천을 물들일 때다!" "들어 오시오!" 음침한 음성과 함께 철문이 열렸다. 무상삼마는 즉시 안으로 들어갔다. 쿵! 그들이 들어가자 입구는 본래대로 환원되었다. 평범한 바위로 화해버린 것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남궁궁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렇게 위장했으니 발견할 수 없을 수밖에.' 남궁궁은 대략 반 식경 가량을 기다렸다. 이후 그는 한 장의 천을 꺼내 얼굴을 가린 후 바위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바위를 면밀히 살펴 보았다. 자세히 보니 바위의 오른쪽 귀퉁이가 약간 솟아나 있었다. 그곳은 여러 사람의 손길이 닿은 듯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곳이로군.' 그는 돌출된 부분을 잡고 힘껏 눌러 보았다. 그그긍......! 굉음과 함께 바위가 갈라졌다. "마화가 피었다. 그럼 마천은 언제 열리느냐?" 예의 음침한 음성이 들려왔다. 남궁궁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답했다. "복수의 검이 천지를 가르고 혈하가 산천을 물들일 때다!" "들어 오시오!" 철문이 열리는 순간 남궁궁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선 직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입구가 닫혔 다. "......."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하로 통하는 돌계단이 뻗어 있었다. 그러나 방금 전 암호를 물었던 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계단을 밟고 아래로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가니 제법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의 사방에는 여 덟 개의 문이 팔괘의 방위마다 설치되어 있었다.


'어느 문으로 가야 할까?' 그는 난감해 졌다. 이때 팔괘 방위의 문 중 가운데 문이 소리없이 열리더니 한 명의 오색 옷을 입은 동자가 걸어 나왔다. 동자는 계집애처럼 귀엽게 생겼으나 두 눈알이 쉴새없이 돌아가는 것으로 미루어 성정이 바르지 않아 보였다. 그는 남궁궁의 앞에 이르러 공손히 포권했다. "어디서 오셨는지요?" 남궁궁은 짐짓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총단." "......!" 소동은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남궁궁은 소동이 의심할 틈도 주지 않고 물었다. "방금 무상삼마가 왔을 것이다." 소동의 눈알이 좌우로 굴러갔다. "급히 전달할 말이 있어 왔다. 어서 단주께 안내해라." 소동의 입가에 교활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즉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따라 오십시오." 소동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팔괘의 문 중 우측에서 세번째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남궁궁은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인공으로 다듬은 듯한 반듯한 지하통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남궁궁은 동자의 뒤를 따르며 마음을 강 하게 먹었다. 일단 마굴로 들어온 이상 보보(步步)마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 다. 한참을 통로를 따라 걸어가자 밝은 빛을 발하는 아담한 석실이 나타났다. 석실의 안쪽에는 붉은 휘장 이 쳐져 있었고, 바닥에는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기이한 것은 석실 한가운데 무쇠로 만든 듯 한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있다는 것이었다. 소동은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잠시 앉아 계십시오. 곧 단주께 연락 드리겠습니다." "알겠다." 남궁궁은 대답한 후 의자에 앉지 않았다. 그러자 소동은 짐짓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앉으십시오. 규정이 그렇다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규정이라고?' 남궁궁은 의아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철의자에 앉았다. 앉는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으나 별 탈은 없는 듯했다. 소동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짓더니 휘장 속 으로 사라졌다. '기이하군. 이곳의 분위기는 어쩐지 살벌한 것 같다.' 남궁궁이 이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철컥! 쩡!


"엇!" 그는 대경실색했다. 갑자기 철의자에서 쇠고리가 튀어나와 그의 팔목과 발목을 단단히 채워버린 것이 아닌가? '당했다!' 남궁궁의 전신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때였다. "헷헷헷...! 뭐라고? 총단에서 왔다고? 그렇게 허술한 수작에 넘어갈 줄 알았느냐?" 영악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휘장이 젓혀지며 오색 옷의 소동이 걸어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온통 교활 한 웃음이 흐르고 있었다. 남궁궁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느냐?" 소동은 경멸하듯 말했다. "본회는 비밀을 가장 중시한다. 따라서 자신은 물론 타인의 명호를 입에 올리는 법이 없다. 네놈이 무 상삼마의 명호를 말한 것이 실수였다. 헤헤! 실은 나도 무상삼마가 누군지 모른... 악!" 얄밉게 빈정거리던 소동의 입이 딱 벌어지며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는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그의 뒤통수에는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 남궁궁은 이 갑작스런 광경에 가슴이 뛰었다. "호호호홋......! 휘장 안쪽으로부터 온통 혼백을 앗아갈 듯 요염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명호를 발설하면 안된다는 것은 하인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을 잊 은 것이 죄다." 남궁궁은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정말 지독한 집단이구나. 말 한 번 잘못했다고 서슴없이 수하를 죽이다니......!' 휘장 안에서 다시 간드러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호호...! 신비객 나으리, 이제 그만 정체를 드러내시지요." 남궁궁은 차라리 담담한 심정이 되었다. 그의 손발을 채운 족쇠는 단단하기 그지없는 만년오철로 된 것이었다. 더구나 교묘하게 그의 혈맥을 누르고 있어 공력을 한 올도 끌어모을 수가 없었다. 그는 체념한 듯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물었다. "귀하들의 음독함에 정녕 탄복했소. 대체 정체가 무엇이오?" "호호... 예까지 무사히 잠입한 걸로 미루어 담이 클 뿐 아니라 무공도 제법 쓸만하다고 봤는데... 과 연 내 눈이 틀리지는 않았을 거야. 그런데 질문의 순서가 바뀌었단 생각이 들지 않나요?" "......." "호호! 말하기 싫은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입을 열게 해주죠." 펄럭!


휘장이 날렸다. 순간 남궁궁은 한 가닥 미풍이 자신의 얼굴을 향해 쏘아오는 것을 느꼈다. 찌익......! 미풍이 스친 순간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이 찢겨져 나가며 그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 휘장 안에서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묘하게 색정을 자극하는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호호호...! 절세 미남자는 아니지만 자세히 보니 상당히 매력있는 분이셨군요?" 남궁궁은 자색이 감도는 눈썹을 성큼 치켜올리며 반문했다. "심금을 뒤흔드는 그대의 목소리로 미루어 그대야말로 절세미인일 것 같구려?" "호호호! 농담도 할 줄 아는 걸 보니 풍류도 잘 알겠군요?" 기묘한 대화였다. 갈수록 휘장 속의 여인은 노골적인 유혹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남궁궁은 그만 가 슴이 뜨끔했다. '맙소사, 설마 이 여인도?' 그는 최근 들어 예기치 않은 여난(女難)에 휩쓸린 바 있었다. 천화영이 그러했고, 백락원의 위지연옥 이 그러했다. 두 번의 정사는 모두 그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여인이라면 오금이 저릴 지경이 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남궁궁은 연이은 괴사를 만난 탓으로 강호생활에 대해 나름대로의 방식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는 짐 짓 유들유들한 음성으로 말했다. "후후! 어찌 알았소? 과연 본 공자에게는 풍류벽이 있소이다. 그대의 음성으로 미루어 아름다움이 짚 이는 것 같소. 미인을 감상할 기회를 주겠소?" "호호... 역시 보통 인물이 아니군요. 도리어 미남계로 날 유혹하려 하다니, 어디 그럼 미남계에 한 번 걸려볼까요?" 자르륵......! 휘장이 걷혔다. 한 명의 미부가 허리를 간들거리며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십 칠팔 세쯤 되었는데 머리는 궁장으로 틀어 올렸고 터질 듯이 풍만한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낸 듯 몸에 찰싹 달라 붙는 옷 을 입고 있었다. 가슴은 옷을 뚫고 나올 듯 팽팽했으며 허리는 잘록했다. 둔부는 갑작스럽게 굵어져 걸음을 옮길 때마 다 좌우로 요란하게 흔들렸다. 실로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몸매였다. 용모 또한 몸매에 걸맞게 아름다웠다. 특히 붉은 입술가에 찍혀있는 작은 점은 더욱 뇌쇄적인 매력을 자아내고 있었다. 남궁궁은 미부를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타고난 우물(尤物)이로다.'


미부는 마치 춤을 추는 듯한 걸음으로 남궁궁에게 접근하더니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사랑스러운 공자님, 어때요? 이 몸이 꽤 쓸만한가요?" 남궁궁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오? 당신은 본 공자가 만나본 미녀들 중에서도 최상의 미녀요." "호호호호홋!" 미부는 혼백을 앗아갈 듯한 교소를 터뜨렸다. 웃을 때마다 가슴이 출렁거렸고, 허리가 앞뒤로 흔들렸 다. 문득 그녀는 웃음을 뚝 그치며 물었다. "공자는 누구죠?" 남궁궁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열 가지 재주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풍류절을 첫번째로 꼽는 사람." 그 말은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무심코 한 대답에 대한 반응은 너무도 뜻밖의 결과를 낳았다. "십절공자!" 미부는 경악성을 발했다. 남궁궁은 흠칫했다. '십절공자?' "당신이... 정말 십절공자란 말인가요?" 미부의 눈동자가 쉴새없이 움직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얼굴에는 야릇한 흥분의 물결이 번졌다. 남궁궁은 그저 신비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꾸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와서 부인할 수도 시인할 수도 없는 입장인 것이었다. 미부는 만면에 활짝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미부는 혀를 내밀어 살짝 입술을 축인 후 요염한 눈으로 남궁궁의 얼굴을 한동안 들여다 보았다. 그 녀의 얼굴에 서서히 감탄이 떠올랐다. "호호! 처음 볼땐 평범한 얼굴인가 했는데 당신은 보면 볼수록 여인의 마음을 끄는 면이 있군요. 풍문 에 의하면 십절공자는 반안이나 송옥을 능가하는 절세미남자라던데 과장되었군요. 하지만 평범한 얼 굴이 더욱 더 매력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어요. 역시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에요." 미부의 눈에 염기(艶氣)가 흘렀다. "흐응, 이렇게 평범한 얼굴로 신주사화 중 삼화를 홀린 걸 보면 당신에게는 남다른 비결이 있을 거예 요. 그렇지 않은가요?" "......." 남궁궁은 더욱 난처해지고 말았다. 본의 아니게 남의 명호를 차용한 격이 된 것이다. 그의 성격상 마 음에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는 염두를 굴렸다. '십절공자가 누군지 모르나... 미안하오. 잠시 그대의 이름을 빌려야겠소.'


② 미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녀의 뺨은 도화빛으로 화했으며 눈에는 찰랑찰랑 춘정(春 情)이 넘치고 있었다. "호호호! 이런 행운이 내게 올 줄이야. 온 천하 여인들의 정인인 십절공자가 내 앞에 나타날 줄은 정 말 몰랐어." 이때였다.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이 아닌 듯했다. 미부는 안색이 싹 변하더니 바닥 의 한 부분을 발끝으로 눌렀다.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남궁궁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철의자와 함께 바닥으로 쑥 들어가버린 것 이었다. 그 위를 바닥이 다시 메워버렸다. 석실 안으로 삼 인이 들어섰다. 그들은 백의에 백건을 두른 무상삼마였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동자의 시체를 보자 두 눈에 괴광을 번뜩였다. "단주, 무슨 일이 있었소?" 미부는 태연히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니에요. 함부로 기밀을 발설했기에 회칙에 의해 처단했을 뿐이에요." "그렇소......?" 무상삼마 중 우두머리인 대마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는 무엇인가 미심쩍은 듯했으나 그렇다고 추궁 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이번에 우리가 온 것은 회주의 명을 받들어서요. 그동안 지시받은 일들의 진척 사항이 어떤지 점검하 러 왔소." "호호... 회주님의 명은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어요. 다만...." 대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미부는 다소 켕기는 표정이었다. "천마환혼대법이 예상보다 늦어질 뿐이에요." "이유는?" 백건 사이로 보이는 대마의 눈빛이 날카로운 광채를 뿜었다. "천마환혼녀로 내정된 계집을 최근에야 수중에 넣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너무 걱정마세요. 곧 대법 의 시행에 들어갈테니까요." 미부의 얼굴에는 자신만만한 기색이 역력했다. "흐흐... 빈틈없이 시행해야 하오. 만에 하나라도 실수하는 날이면 어떤 결과가 올지 단주가 더 잘 알 리라 믿소." "......!" 미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눈에 언뜻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그럼 우리는 잠시 둘러보고 가겠소." 무상삼마는 몸을 돌려 오던 곳으로 걸어 나갔다.


한편, 남궁궁이 떨어진 곳은 침침한 지하뇌옥이었다. 바닥에 닿는 순간 손목과 발목을 채웠던 쇠고리가 풀려 행동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본 그는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사방 일 장 정도밖에 안되는 좁은 철창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철창은 굵기가 계란 만했으며, 흑철색으로 빛나는 것으로 미루어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오금석으로 만든 것이었다. 따라서 힘으로 휘거나 부러뜨리기는 불가능했다. 철창 밖은 통로였으며 맞은편에도 똑같은 모양의 철옥이 있었다. 그는 맞은편 철옥을 살펴보다가 흠 칫했다. "......!" 그곳에 한 여인이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가 놀란 것은 여인의 뛰어난 미모 때문이었다. 여인은 순백의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삼단같은 머리칼은 자르르 윤기가 흘렀는데 허리춤까지 내려와 있었다. 미려한 몸매만 보아도 그녀가 경국지색의 미인임을 알 수 있었다. "......." 여인은 몽롱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수같이 맑은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마치 넋이 빠 져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남궁궁은 의혹을 금치 못했다. '정말 대단한 미인이구나. 그런데 표정을 보아하니 마치 백치와 같구나.' 그는 미녀를 향해 말했다. "소저, 내 말이 들리오?" "......." 그러나 백의미녀는 듣지 못한 듯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소저!" 남궁궁은 음성을 약간 높였다. 그래도 백의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남궁궁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토록 아름다운 미인이 백치일 리가 없다. 어쩌면 약물이나 모종의 사법(邪法)에 금제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남궁궁은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청명심어(淸明心語)를 시전하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청명심어. 그것은 도가의 일문인 전진교(全眞敎)에서 내려오는 일종의 정통심법 중의 하나로 혀가 아닌 마음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신비한 공부였다. 이 청명심어는 미혹(迷惑)에 빠진 사람이나 중병으로 기식이 엄엄한 상태의 사람에게 의사전달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도문에서도 오래 전에 실전된 비법이었다.


"소저!" 멍하니 허공에 시선을 묶어두고 있던 백의녀는 마음을 울리는 소리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초점없는 눈동자가 움직이더니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소저, 내 말이 들리면 고개를 끄덕이시오." 백의녀는 멍한 표정인 채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생은 남궁궁이란 사람이오. 소저의 방명은 어찌 되시오?" 미녀는 더듬더듬 입을 떼었다. "천(千)... 일(日)... 야화(夜花)... 무영랑(無影娘)......." 남궁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소저가 바로 천일야화루의 일급... 그곳에서 왔단 말이오?" 백의녀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궁은 정색을 하며 다시 물었다. "소저는 무슨 일로 잡혀왔소?" 무영랑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떠올랐다. "천마... 환혼녀......." 남궁궁은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이 여인을 이용하여 천마환혼대법을 시행하려 했구나!' 천마환혼대법(天魔還魂大法)은 마교(魔敎)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악독하기 그지없는 대법이다. 그것은 음성(陰性)이 유난히 강한 순결한 처녀를 대상으로 시행하는 것으로, 백팔 종의 독초를 연단한 환혼단 (還魂丹)을 복용시킨 후 마교비전의 주문을 외워 완성하는 무서운 대법이었다. 대법이 완성되면 비로소 천마환혼녀가 탄생하게 된다. 이후 천마환혼녀는 금강불괴(金剛不怪)가 되어 도검불침(刀劍不侵)은 물론이고 만독불침지신이 된다. 또한 오직 대법을 시행한 자의 명만 따르는 꼭 두각시가 되는 것이다. 천마환혼녀의 무서움은 평소의 백 배 이상의 가공스런 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었다. 무림사상 천마환혼녀가 탄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대법을 시전할 만한 적절한 대상을 찾기 가 어려운데다 백팔 종의 독초 또한 하나같이 희귀한 것들이며, 주문을 거는데 동원되는 마교의 고수 들의 내공이 최소 백 년은 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남궁궁은 간담이 써늘해짐을 금치 못했다. '오래 전 사라진 마교의 대법을 시행하고자 하는 자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마교의 후신? 아니다. 마교 는 이미 오백 년 전 절멸되지 않았던가?' 그는 무상삼마가 본 회(會)라고 한 말을 떠올렸다. 그로 미루어볼 때 정통 마교의 후예들이 아님은 분 명했다. 남궁궁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럴수록 머리 속이 복잡하게 엉키는 것 같았다. 그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손을 쓰지 않으면 무영랑은 천마환혼녀가 된다. 그 전에 이 여인의 정신을 돌려 놓아야 한다.' 그는 천마환혼대법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다행히도 무영랑의 상태는 총 구 단계 중에서 일 단계 인 구천실혼경(九天失魂境)에 와 있는 것 같았다. '태허부동심결(太虛不動心訣)을 걸어둔다면......!' 남궁궁은 즉시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잠시 후 그의 머리 위로 은은한 기류가 형성되었다. 그것은 비록 완벽한 환(環)의 형태는 아니었으나 은은한 원을 그리며 머리 위를 떠돌았다. 그는 청명심어를 전개했다. "소저, 내 말을 새겨 들으시오. 소저의 이름은 무영랑이오.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그 사실을 잊어서 는 안되오. 결코...." "무영랑......." 그녀의 입술이 달싹이더니 그의 말을 따라 뇌었다. "소저는 금릉의 천일야화루 출신이오." "천일야화루......." 남궁궁은 전 내력을 동원하여 그녀의 뇌리에 의식을 심어주고 있었다. "소생은 남궁궁이오. 소저와는 각별한 사이니 이 또한 잊어서는 아니되오." "남궁궁... 남궁궁......." "앞으로 소저는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지금 말한 것은 잊어서는 안되오. 명심하시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소." 남궁궁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태허부동심결이 효과를 보이고 있으므로 그는 조 금도 힘이 든 줄 몰랐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무영랑은 남궁궁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졸음이 서서히 몰려들고 있는 듯 했다. 눈까풀이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남궁궁도 차츰 탈진되어 갔다. 짧은 순간에 내력이 거의 탕진되고 있었다. 마침내 무영랑은 스르르 철 창에 기대더니 잠이 들고 말았다. 남궁궁은 내력을 거두고 가부좌를 틀었다. 손상된 내력을 보충하기 위해 그는 곧바로 운공에 들어갔다. 그의 이마 위에는 다시 은은한 서기가 어리고 있었다. ③ "호호호.... 십절공자, 이제야 정신이 드시나요?" "......?" 남궁궁은 꿈 속에서 그 음성을 들었다. 차츰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아늑한 분위기의 실내에 와 있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곳은 침실이었다. 주변에 분홍빛 휘장이 감싸고 있었으며 궁등이 부드러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가 갇혀있던 지하뇌옥과는 천지차이인 곳이었다. 그는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자 자신이 의자에 앉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침상을 향해 앉아 있었 다. 맞은편 침상에 미부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녀는 바로 만색단주로 속살이 훤히 비치는 망사의만 걸친 채 요염한 눈으로 남궁궁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호, 기분이 어떤가요?" 만색단주의 음성은 가히 뇌쇄적이었다. "그리 나쁘진 않소." 남궁궁은 담담히 말했다. 그는 곤혹스럽기 그지없었으나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만색단주의 옷차림이 너무나 현란했다. 터질 듯이 영근 젖가슴이 고스란히 비쳐보였던 것이다. 본래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그로서는 그저 보기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공자는 몽연향(夢煙香)에 중독됐어요. 따라서 내공을 쓰지 못해요. 호호! 천하의 십절공자도 이젠 한 가지 재주밖에는 쓰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어요." 남궁궁은 흠칫하며 반문했다. "한 가지라면?" "호호... 색절(色絶) 말이에요." 남궁궁은 내심 아! 하고 탄성을 발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그거 정말 가슴 아픈 일이로군. 하지만 그 한 가지 절기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그 말에 만색단주는 허리를 묘하게 비틀며 말했다. "호호, 과연 여유 넘치는 말씀이시군요." 그녀는 도발적인 눈으로 남궁궁을 주시하며 물었다. "그런데 이곳엔 왜 들어온 거죠?" "호기심 때문이오." "호호! 호기심이라.... 그래 지금 기분은 어떤가요?" "호기심이 풀리긴커녕 더하는구려." 만색단주는 슬쩍 치마를 당겼다. 그러자 눈부신 허벅지가 노출되었다. 그녀는 노출된 다리를 들어 올 리더니 손으로 쓰다듬었다. "이 몸에 대해선가요? 아니면 본회에 대해선가요?" 남궁궁은 눈을 가늘게 하며 말했다. "둘 다요." "욕심장이!" 미부는 눈웃음쳤다. 문득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콧등을 가리키며 물었다.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아나요?" "모르오." "호호... 혹시 만색교(萬色敎)란 이름을 들어 보셨나요?"


남궁궁은 그만 가슴이 철렁했다. 만색교(萬色敎)! 그들은 삼백 년 전 묘강에서 문호를 연 단체로 무림에서 가장 음악한 것으로 알려진 여인들만의 문파 였다. 그들은 음양술(陰陽術)에 있어서 천하제일이었다. 삼백 년의 역사를 통해 갖가지 방중비기가 전 승되고 있었으며 온갖 해괴한 채양보음술이 발달되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만색교는 음양비술을 이용하여 무림을 온통 혼란에 빠뜨린 적이 있었다. 당시의 만색교주는 천화부인(千花婦人)이었다. 그녀는 타고난 미모와 가공할 색공으로 중원무림의 젊 은 고수들을 닥치는 데로 유린하며 혼란을 일으켰다. 만일 한 기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전무림은 그 녀의 치마폭 아래 무릎꿇을 판국이었다. 그 기인이 바로 우내오천(宇內五天)의 한 명인 음양환사(陰陽幻邪)였다. 천화부인은 음양환사에게 패 한 후 봉교(封敎)를 선언하고 묘강으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만색단주는 자신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몸은 바로 만색교의 십이대 교주인 만화선자(萬花仙子) 요화령(姚花玲)이에요." "만화선자......." 남궁궁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만화선자 요화령은 고혹적인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이 몸의 신분을 알려주는 이유가 뭔지 아나요?" "......?" 신이 아닌 이상 어찌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 보겠는가? "호호, 당신을 본회에 끌어들이기 위해서예요. 물론 당신이 원하다면요." 그녀는 고혹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본회에 입회하기만 하면 이 몸은 물론... 만색교의 여인들은 모두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답니다." 남궁궁은 짐짓 구미가 당긴다는 듯이 말했다. "후후! 괜찮은 조건이오. 그런데 당신이 속한 단체는 어떤 곳이오?" 요화령은 혀를 살짝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그 모습은 가히 사내의 혼백을 뺄 정도로 음탕해 보였다. "전륜회(轉輪會)." "전륜회...?" 남궁궁은 가슴이 섬뜩했다. 왠지 명칭에서부터 불길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본교는 전륜회의 팔단 중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죠. 회중에서는 만색단(萬色壇)이라 불러요." 남궁궁은 마음이 침중해졌다. '만색교가 고작 팔단 중 한 자리를 차지할 뿐이라니... 대체 전륜회의 힘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전륜회주는 누구요?" 요화령은 고개를 저었다. "본회에 가입해야만 말해줄 수 있어요. 다만......."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회주님이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인이라는 거예요." "......!" "당금 무림은 물론이고 고금 이래로 가장 뛰어난 분이에요. 따라서 그 분의 휘하에 드는 것만으로 곧 일인지하만인지상이 될 수 있어요." 남궁궁은 빙긋 웃었다. "단주는 내가 전륜회에 가입하기를 원하오?" "그래요." "진심이오?" "물론이에요." 남궁궁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렸다. 요화령의 안색이 묘해졌다. 남궁궁이 미소짓는 순간 가슴 이 울렁거렸던 것이다. 그녀는 문득 몸을 일으키더니 다가왔다. 그녀는 남궁궁의 무릎에 걸터 앉더니 매끄러운 팔로 그의 목을 껴안았다. 남궁궁은 부드럽고 뭉클한 여체를 전신에 느낄 수 있었다. 코를 찌르는 육향과 탄력 넘치는 여체의 감촉.... 그는 정신이 혼란했 으나 극도의 인내로 내색하지 않고 있었다. 요화령은 한손을 남궁궁의 가슴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의 나긋한 손이 가슴의 살을 쓰다듬기 시작 했다. 그것은 실로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남궁궁은 눈을 반쯤 감으며 중얼거렸다. "당신과 만색교도를 모두 얻는 것은 마음에 드는 일이지만......." "그럼 무엇이 문제죠?" 남궁궁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일인지하만인지상이란 말이 마음에 들지 않소." 실로 광오한 말이었다. 지금 현재의 그의 처지로 볼 때 도저히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다. "호호호호...!" 요화령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교소를 터뜨렸다. 동시에 그녀는 손을 더욱 깊숙이 밀어 넣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호흡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흐응! 당신은 정말 욕심이 많군요?" 남궁궁은 문득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러자 요화령은 그의 무릎에 완전히 올라타게 되었다. 그는 여인 의 귓전에 입김을 불어 넣었다. "보여 주시오. 내게." 그녀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옷을... 벗으라는 건가요?" "아니오." "......?" 요화령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륜회가 얼마나 강한가를 말이오. 진정한 강자라면 굴복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림도 없소." "호호! 그 말 진정인가요?"


요화령은 몸을 묘하게 비틀었다. 한편으로 그녀는 다소 실망하는 눈치였다. 남궁궁이 자신의 몸을 보 겠다고 한 줄 알았던 것이었다. 남궁궁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일구이언하는 사람이 아니오." "흐응. 좋아요. 그럼 먼저 그대의 실력부터 보여 줘요." 요화령은 남궁궁의 목을 휘감았다. 터질 듯한 젖가슴이 남궁궁의 몸을 짓눌렀다. "그 전에 먼저 전륜회의 힘을 보고 싶소." 남궁궁은 손을 내려 요화령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요화궁은 몸을 꿈틀거리며 잠시 그의 몸 에 비벼대다가 마지 못한 듯 일어섰다. "정 그렇다면.... 회규에는 어긋나는 일이지만......." 그녀는 벽쪽으로 걸어가더니 어느 한 곳을 눌렀다. 그그긍! 돌이 마찰하는 음향이 울리더니 벽면이 갈라졌다. 그곳에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따라와요." 남궁궁은 요화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따랐다. 얼마 쯤 내려갔을까? 약초 냄새가 코를 찔렀 다. 두 사람은 지하대전에 당도했다. 요화령은 그를 한 칸의 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에 들어선 순간 남궁궁 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흔아홉 개의 관(棺)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던 것이다. 관은 모두 뚜껑이 열려 있었다. 관 속에는 검푸른 색의 액체가 있었는데 그 속에 한 명씩의 소녀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잠겨 있었다. 약초 냄새는 바로 그곳에서 풍기고 있었다. 남궁궁은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이 소녀들은 마의 대법에 걸려 있구나. 머지 않아 가공할 마녀들이 될 것이다.' 그는 관 속에 누워있는 소녀들 중에 낭산구마가 데려온 취의를 입었던 소녀도 있는 것을 확인했다. "호호... 이 아이들은 천마금혼녀(天魔禁魂女)들이에요. 이제 백일만 지나면 대법이 완성되죠." "완성되면 어떻게 되는 것이오?" 요화령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천하무적이 되는 거죠. 이 아이들은 실혼인(失魂人)이 되어 희노애락을 느끼지 못하게 돼요. 오직 시 술자의 명령만을 따르게 되며 그 무공은 당금의 일파지존들도 감히 감당하지 못할 정도에요." "......!" 남궁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호호! 벌써 놀라면 안되요. 이 정도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니까요." 그녀는 남궁궁을 다른 석부로 안내했다. 이번에는 넓은 지하광장으로 광장 한복판에는 너비가 백 장 이 넘는 연못이 있었다. 연못에는 뽀얀 김이 솟아나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물은


도화빛을 띠고 있었 다. "......!" 남궁궁의 눈이 커졌다. 연못 속에는 수백 명이 넘는 나녀들이 목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들의 몸매 는 실로 대단했다. 천 명에 하나 고르고 고른다 해도 그처럼 풍만한 여인들을 고르기는 힘들 것 같았 다. 여인들은 갖가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물 속에 누워있는 여인이 있는가 하면 온갖 기기묘묘한 자세 들을 취하고 있었다. 남궁궁은 곧 깨달았다. 그녀들은 목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괴이한 진식(陣式)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만색비녀(萬色妃女)들이에요. 저 아이들이 연공하고 있는 것은 혼천환미진(混魂幻迷陳)이에요." "혼천환미진?" 남궁궁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혼천환미진은 본교의 비전대법으로 아무리 부처님 같은 자라도 일단 진식에 걸려들면 꼼짝없이 색의 노예가 되고 말아요." 남궁궁은 가슴에 찬 바람이 부는 것을 느꼈다. 요화령은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입을 놀 렸다. "저 연못은 도화연혼탕(桃花煉獄湯)이라 불러요. 삼 년동안 몸을 담그게 되면 저 아이들의 몸에 미혼 향과 같은 효능이 배지요. 그 냄새를 맡으면 아무리 정인군자라도 이성을 잃고 말죠." 남궁궁은 눈썹을 치켜 세우며 물었다. "흠! 만색비녀를 키우는 목적은 무엇이오?" "호호! 그야 쓸모가 무궁무진하죠. 차츰 알게 될 거예요. 하지만 지금 본 것은 본회의 일부에 지나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해요." "대체 전륜회는 얼마나 많은 조직을 갖고 있소?" "이곳에서 본 것보다 백 배가 넘을 걸요?" 남궁궁은 안색이 굳어지고 말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가공할 일이다. 대체 회주가 누구기에 이토록 무서운 세력을 형성했단 말인가?' 요화령의 간들어진 교소가 그의 상념을 깼다. "호호... 어때요? 이제 본회의 힘이 영세불멸이라는 것을 인정하나요?" 남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대단하구려." "당신이 본회에 가입하면 틀림없이 팔단주(八壇主)에 버금가는 직분을 얻게 될 거예요." "과연 그럴 수 있겠소?"


"호호호! 이 몸이 보장하죠." 남궁궁은 슬며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궁금한 게 있소. 그대가 날 끌어들이려는 이유가 무엇이오?" 요화령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들어가서 얘기해요." 그녀는 남궁궁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④ 궁등이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는 아늑한 침실. 남궁궁과 요화령은 침상 위에 나란히 걸터 앉아 있었다. 요화령은 상체를 기대며 속삭이듯 말하고 있 었다. "당신을 끌어 들이려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어요." "후후, 그게 뭐요?" "첫째는 당신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에요." "영광이구려." "호호! 당신은 이 몸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남궁궁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 "천박한 탕부쯤으로 생각하겠죠?" "그럴 리가 있소?" "호홋! 속일 필요 없어요. 당신의 눈이 그걸 말해주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의 생각은 틀렸어요." 요화령은 손가락으로 남궁궁의 목을 쓰다듬으며 달콤하게 말했다. "이래뵈도 이 몸이 순백지신(純白之身)이라면 믿겠어요?" "......!" 남궁궁은 흠칫했다. 그는 요화령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색기가 철철 넘치고 있었다. 그는 시선 을 내려 그녀의 가슴을 바라 보았다. 망사의가 약간 벌어져 훤히 노출된 젖가슴은 손가락을 살짝 갖 다대기만 해도 터져버릴 듯이 팽팽했다. '처녀라고? 당신이? 그럴 리가.' 이때 요화령이 왼쪽 팔뚝을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게 바로 증거예요." "수궁사(守宮砂)......!" 남궁궁이 침음을 토했다. 분명 그녀의 팔뚝에는 선명한 빛깔의 수궁사가 찍혀 있었다. 수궁사란 인면 지주(人面蜘蛛)란 특수한 거미에게 물린 흔적을 말하는 것으로, 여인이 순결을 잃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 요녀가 처녀였다니......!' 남궁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요화령의 음성이 문득 낮아졌다. "당신을 끌어들이려는 또다른 이유는 바로 이 몸을 위해서이기도 해요."


"당신을 위해서라고?" 남궁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요화령의 표정은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 지금까지의 요염방탕한 모습 은 간데없고 일문의 문주다운 엄숙함마저 어리고 있었다. "본회에는 모두 팔단이 있어요. 그 중 수석단인 마심단(魔心壇)의 단주인 마심서생(魔心書生) 단옥기 (丹玉奇)란 자가 오래 전부터 절... 핍박해 왔어요." 요화령의 안색은 어둡기만 했다. 남궁궁은 비로소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알겠소. 당신은 그 자에게 마음이 없지만 힘이 모자란단 말이구려. 그래서 그 자를 막아줄 방패가 필 요한 것이고." 요화령은 요염한 웃음을 지었다. "호호... 당신은 정말 눈치가 빠르군요." "내가 그 자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녀는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확신할 수 있어요." "어떻게?" "호호... 이 요화령의 눈은 못 속여요. 당신은 머리를 감춘 신룡(神龍)이에요." 남궁궁은 가슴이 뜨끔했다. 그는 일부러 눈을 반쯤 내리감은 채 물었다. "단옥기란 자를 외면하고 날 택한 이유는 무엇이오?" "그건 당신이 동족이기 때문이에요." "......?" "단옥기는 서역인(西域人)이에요." 남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화령은 그의 품에서 슬며시 몸을 떼며 물었다. "어때요? 저와 합작하지 않겠어요?" "합작?" 그의 눈에서 예리한 안광이 뻗어 나왔다. "잘하면... 당신은 부회주(副會主)가 될 수도 있어요." 남궁궁은 흠칫했다. 뜻밖의 말이었다. "회주는 본회 내에서 부회주를 뽑는다고 말했어요. 지금으로선 단옥기가 유력하지만 당신이 나선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어요." "음." "잘 생각해 보세요. 잘만 하면 잠시 동안 일인지하에 머물 뿐 결국은 영원한 일인자가 될 수도..." 그녀는 말을 다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남궁궁은 넌즈시 물었다. "요낭자의 뜻은......?" 그는 칭호를 바꾸었다. 요화령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아무리 강한 자라도 늙으면 죽게 마련이에요." "그럼 머지 않아 회주란 자는......." "쉿." 요화령은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눌렀다. 남궁궁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빙긋 웃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만 하군."


"그럼......." 요화령은 몸을 일으켰다. "하루의 여유를 주겠어요." 그녀는 둔부를 야릇하게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단 쓸데 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에요. 당신의 내공은 폐쇄되었을 뿐 아니라 이곳에서 한 걸음만 잘못 움직여도 고혼이 될 테니까요." 그 말을 남긴 후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 남궁궁은 요화령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 그저 희대의 탕녀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달랐던 것이다. 그것은 실로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요화령이 사라진 지 한 식경이 지났다. "......!" 침상에 누워있던 남궁궁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요낭자, 미안하지만 당신의 협상 제의는 수락할 수가 없소.' 남궁궁은 진기를 한 바퀴 돌렸다. 그러자 전신이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무궁무진한 힘이 솟구쳤다. 그 는 신형을 날렸다. ■ 왕도 1 권 제 8 장 난세무림(亂世武林) ━━━━━━━━━━━━━━━━━━━━━━━━━━━━━━━━━━━ ① 휙! 석실에 인영이 나타났다. 아흔아홉 개의 관이 놓여있는 석실에 나타나는 인영은 다름아닌 남궁궁이었다. 사실 그는 벌써부터 공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약영초를 복용하여 웬만한 독이나 미혼향 따위는 쉽게 해독할 수 있는 체질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요화령은 그가 내공을 잃었다 생각하고 감시를 소홀히 했다. 남궁궁은 그녀가 떠난 후 공력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휴식을 취하다 마침내 행동을 개시한 것이었다. "......." 남궁궁은 아흔아홉 개의 관을 바라보았다. 검푸른 약수에 잠겨있는 소녀들의 나신은 푸른 빛을 발하 고 있었다. '더이상 사악한 대법이 진행되면 안된다.' 남궁궁은 엄숙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치켜 들었다. '이 소녀들이 마녀가 되면 무림은 상상할 수도 없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의 손바닥이 주홍빛으로 변하더니 장심으로부터 담황색 기류가 흘러나왔다. 그는 빙글 원을 그리며


쌍장을 뻗었다. 우우웅! 괴이한 음향과 함께 장심으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발출되었다. 열기에 격중된 관들이 진동했다. 다음 순간, 치치치치칙......! 관 속에 담겨있던 약수가 검푸른 김을 내며 증발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석부 안은 온통 증기로 가 득 차고 말았다. 잠시 후, 관 속의 약수는 한 방울도 남지 않고 증발하여 바닥을 드러내게 되었다. "음...." 남궁궁은 비로소 손을 거두었다. 그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졌다. 상당한 진기를 소모한 탓이었다. 관 속의 미소녀들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러나 차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푸른색으로 물들었 던 피부가 차츰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남궁궁은 안면에 희색을 띠었다. '성공이다.' 남궁궁은 신형을 날렸다. 지하광장의 연못. 그곳에는 여전히 나녀들이 혼천환미진을 연공하고 있었다. 휙휙! 한 줄기 백영이 그녀들 사이를 누볐다. 백영이 지나간 자리에는 나녀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잔혈(殘 穴)을 짚인 것이었다. 백영은 바로 남궁궁이었다. '미안하오, 하지만 그대들은 이제 무공을 상실한 평범한 여인이 될 것이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 면 무림은 피로 물들게 되오.' 남궁궁의 손가락 끝에서는 연속 실같은 기류가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은사탄지(銀絲彈指)의 절기 였다. "웬 놈이냐!" 갑자기 냉갈과 함께 장내로 십여 명의 인영들이 뛰어 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회의를 입은 자들이었 다. 바로 낭산구마로부터 철관을 인계받았던 자들이었다. "멈추지 못하겠느냐!" 우두머리인 노인이 냉갈을 터뜨렸다. 그의 안색은 온통 경악과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하하하...! 이미 늦었소. 하늘을 거스르는 행위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는 걸 모르오?" 남궁궁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리며 은사탄지를 날렸다. 그러자 다섯 명의 회의인들이 이마에 구멍이 뚫리며 날아갔다.


"이... 이럴 수가!" 회의노인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이때 요란한 경종소리가 울리더니 사방의 석벽이 열리며 수십 명 의 흑의인들이 달려 나왔다. "저놈을 쳐죽여라!" 회의노인은 살기 띤 음성으로 외쳤다. 콰콰쾅......! 흑의인들은 연못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남궁궁은 태연했다. 그는 나녀들을 거의 모두 쓰러뜨린 후 침 착하게 흑의인들을 둘러 보았다. 그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오늘은 살계를 크게 열어야 겠구나. 일 인의 악인을 죽임으로써 백 인의 선을 구할 수 있다면 하늘도 묵인하실 것이다.' 그의 신형이 바람개비처럼 회전했다. "팔황무비(八荒無比)!" 휘류류류륭! 남궁궁의 전신에서 무수한 장영(掌影)이 발출되더니 사방으로 날아갔다. "크아아악!" 흑의인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가공할 장력이 그들의 오장육부를 분쇄했고, 여파만으로 도 수십 명의 흑의인들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마침내 회의노인이 뛰어 들었다. 그는 쌍장을 무시무시하게 휘둘렀다. 우우웅! 가공할 경력이 남궁궁에게 밀려갔다. 그러나 남궁궁은 침착하게 장력을 뻗어 막았다. 펑! 굉음과 함께 연못의 물이 휘말려 올라갔다. 회의노인은 신음을 발하며 뒤로 세 걸음 밀려나갔다. "죽일 놈!" 회의노인은 고함과 함께 다시 덤벼 들었다. 그는 죽고사는 것을 도외시한 듯 수비는 무시하고 공격일 변도로 나왔다. 이렇게 되자 남궁궁은 간담이 써늘해졌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도 그럴 것이, 희의노인은 이곳의 수비책임을 맡고 있는 자였다. 남궁궁이 대법을 파괴했으므로 그 는 문책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가 살아날 희망은 오직 남궁궁을 죽이는 것 뿐이었다. 위이잉! 무서운 장력이 날아왔다. 남궁궁은 살기를 느끼며 장력을 받아쳤다. 꽝! 굉음이 울렸다. 남궁궁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회의노인은 왁! 하는 비명과 함께 입과 코로 피분수를 뿜어내며 뒤로 일장여나 붕 떠 날아갔다. 그는 바닥에 처박혀 뇌수가 박살나며 즉사하고 말 았다. 참혹한 광경에 남궁궁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때,


"놈을 죽여라!" 휙휙휙! 흑의인들의 수는 점점 불어나기만 했다. 각 통로로부터 꾸역꾸역 밀려나오는 흑의인들의 숫자는 근 이백 명이 넘었다. 남궁궁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이대로 가다간 진기가 고갈되어 죽을 것이다.' 마침 좌측의 통로가 비어있는 것이 눈이 띄자 그는 즉시 신형을 날렸다. "막는 자는 죽는다!" 그가 신형을 날리자 수십 명이 앞을 가로막았다. 남궁궁은 바닥에 떨어진 장검을 움켜쥔 후 가로막는 자들을 향해 휘둘렀다. 파츠츠츠츳! 검광이 춤추며 가공할 검기가 뻗어 나갔다. 흑의인들은 눈부신 검광 속에 팔다리가 끊기며 날아갔다. 남궁궁은 오른손으로는 검을, 왼손으로는 장력을 날리며 길을 열었다. "크아악!" 참혹한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는 어느덧 전신이 선혈로 물들고 말았다. 죽여도 죽여도 흑의 인들의 수효는 줄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통로 안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자 다시 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었다. 그들은 백의백건인들이었다. "흐흐흐... 웬놈이 감히 이곳에서 설치느냐?" '무상삼마(無常三魔)!' 남궁궁은 내심 부르짖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며 차갑게 외쳤다. "길을 막지 마시오. 막으려면 목부터 내놓아야 할 것이오." 무상삼마 중 대마의 입에서 가소롭다는 듯한 조소가 흘러 나왔다. "어린 놈이 간덩이가 크구나. 감히 누구 앞에서 헛소리냐?" 남궁궁은 침중하게 말했다. "좋소, 그럼 무상삼마의 무학을 견식해야 겠구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좌장을 뻗었다. 그의 좌장으로부터 한꺼번에 세 가닥 강력이 뻗어나갔다. 꽈꽝! 엄청난 폭음이 통로를 흔들었다. 남궁궁은 뒤로 주르륵 밀려나가며 눈을 부릅떴다. 큰 충격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이때 무상삼마는 더욱 놀란 표정이었다. 그들은 똑같이 뒤로 다섯 걸음이나 밀려 나가 있었다. "으... 네 놈은 대체...?" 남궁궁은 틈을 주지 않고 재차 덮쳐갔다. "천황파지(天荒破地)!" "크크... 어림 없다!" 무상삼마가 좌우로 갈라지며 그를 공격했다. 그 바람에 남궁궁의 공격은 허공을 쳤다. 그러나 이때 그 의 신형이 흔들하는가 싶더니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으로 분리되었다. 무상삼마의


눈이 믿을 수 없 다는 듯이 커졌다. "표화공공수(飇花空空手)!" 낭랑한 외침과 함께, "허억!" 무상삼마는 쓰러질 듯 비틀거리고 있었다. 수십 쌍의 장력이 펼쳐진 바람에 그들은 허둥지둥하여 중 심을 잃고 만 것이었다. 이때 남궁궁은 그들을 지나쳐 통로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속았다!" 무상삼마는 땅을 굴렀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그들이 정신 차리고 쫓아가려 했을 때 남궁궁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남궁궁은 미로처럼 복잡한 통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는 벌써 십여 차례나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물리 쳤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지치는 것을 느꼈다. '으음! 이곳은 미로와 같구나. 벌써 같은 곳을 다섯 번이나 지나쳤다. 대체 출구가 어디란 말인가?' "호호호호...! 십절공자! 당신이 감히 날 우롱했군요?" 문득 요사스러운 교소와 함께 코끝에 향풍이 느껴졌다. 터질 듯이 무르익은 몸매를 지닌 미부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만화선자......!" 남궁궁은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만화선자 요화령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놀랍군요, 어떻게 금제를 풀었죠?" 남궁궁은 담담히 말했다. "하오문의 수법으로 날 묶어둘 수는 없소. 선자, 한 가지만 얘기하겠소." "호호, 무엇이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악에서 손을 씻으시오." 요화령의 눈이 반짝 빛났다. "호! 조건은요?" "조건이라니.... 선자를 위해서요." 요화령의 얼굴에 요염한 미소가 어렸다. "날 위해서라면 한 가지밖에 없어요. 호호! 당신이 날 정실로 삼아준다면 한 번 고려해 보겠어요." "그... 그건......." 남궁궁은 얼굴이 붉어지며 더듬거렸다. 요화령의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뿜어졌다. "깔깔! 역시 마음에 없군요? 그렇다면 우린 같은 쪽에 설 수 없어요." "선자...." "닥쳐요!" 요화령은 냉갈을 발하며 장력을 날렸다. 작은 손바닥이 마치 꽃잎처럼 허공을 뒤덮었다. 남궁궁은 어


쩔 수 없이 우수를 뻗어 그녀의 공격을 받았다. 콰쾅! 굉음과 함께 그는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그러나 요화령은 뒤로 다섯 걸음이나 밀려나며 석벽에 쿵, 하고 부딪쳤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입가에 실낱같은 피가 주르륵 흘 러내렸다. "선자!" 남궁궁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사실 그는 체내의 공력을 절반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그녀를 해할 의도 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요화령은 형식적으로 그를 공격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그녀 는 중상을 입고만 것이었다. "선자, 왜...?" 남궁궁은 그녀를 급히 부축하며 물었다. 요화령은 그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생각보다 강하군요. 이 요화령이 사람을 잘 보긴 잘봤어요...." "선자...." "시간이 없어요. 더 이상 지체하면... 빠져나가기가 불가능해져요." 그녀는 석벽을 향해 중지를 튕겼다. 그러자 우측의 석벽이 갈라지며 통로가 생겼다. "가세요.... 이쪽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다섯 번, 좌측으로 한 번 돌면 출구가 나와요." "......!" 남궁궁은 당혹스러웠다. "선자가 이러는 이유는...?" 요화령의 입가에 쓴 미소가 어렸다. "어차피... 이곳에 남으면 몸을 더럽히고 노예가 될게 뻔해요. 하지만... 고육지계(苦肉之計)로 중상을 입었으니... 최소한 의혹은 피할 수 있을 거예요. 당신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남궁궁은 급히 물었다. "무엇이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들어 드리겠소." "훗날... 절 꼭 구해 주셔야 해요." 남궁궁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오!" 요화령은 그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휘익! 통로 저편에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요화령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빨리... 날 치세요!" 남궁궁은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상을 입은 여인에게 다시 일격을 가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빨리.... 이건 절 위해서예요." 요화령은 다급히 말했다. 남궁궁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가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악!"


요화령은 피를 울컥 토하며 혼절하고 말았다. 남궁궁은 안쓰러운 눈으로 그녀를 일별한 후 신형을 날 렸다. 얼마쯤 달렸을까? 막다른 곳이 나타났다. 그는 벽면을 어루만져 보았다. 그곳은 거칠은 암벽이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암벽에 양손을 대고 힘을 주었다. 그그긍! 하는 소리와 함께 암벽이 밀려나가고 시원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 그는 밖으로 나왔다. 그곳은 인공섬의 뒤켠인 듯했다. 마침내 무사히 빠져나온 것이다. 그는 연못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들어올 때와 달리 진기가 많이 소진되었으므로 그는 도중에 두 번이나 더 수면 으로 떨어질 듯하다가 간신히 연못을 뛰어 넘을 수 있었다. 이제 탈출하는 것만 남았다. 담장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담장만 뛰어넘으면 대하소영루를 빠져나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약속대로 위지연옥을 구해야 한다.' 그는 백락전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 백락전에 당도한 그는 흠칫했다. 한창 홍등이 밝혀져 있어야할 백락전이 쥐죽은 듯이 적막했던 것이 다. 그는 위지연옥이 있는 방을 향해 몸을 날렸다. 기이하게도 도중에 아무도 가로막는 자가 없었다. 남궁궁은 급히 방안으로 들어서며 외쳤다. "위지낭자!"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문득 비릿한 피냄새가 코끝에 풍겼다. "이럴 수가......!" 침상으로 다가간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침상 위! 위지연옥이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이승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라의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복부에는 한 자루의 검이 박힌 채 침상과 연 결되어 있었다. 실로 참혹한 주검으로 그를 맞이한 것이었다. '으으... 이토록 악랄한 짓을 벌이다니......!' 남궁궁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불행한 소녀 위지연옥. 그녀는 그토록 그리워한 자유를 얻지 못한 채 참혹하게 죽고 만 것이었다. 남궁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신을 죽인 악인들을... 반드시 내 손으로 처단하고 말겠소!' 남궁궁이 치를 떨 때, 갑자기 사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불!' 그는 흠칫 놀랐다. 사방이 온통 화광(火光)이 충천하고 있었다. 창문도, 그가 지나온


통로로 온통 환하 게 빛나고 있었다. 남궁궁은 급히 위지연옥의 시신을 안아든 채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잠시 후 그는 백락원을 빠져나왔 다. "아니?" 그는 아연하고 말았다. 불은 백락원에만 붙은 것이 아니었다. 대하소영루 전체가 온통 화염에 휩싸이 고 만 것이었다. 화르르르릉! 때마침 불어오는 밤바람으로 인해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누각과 아름다운 방사, 건물들이 삽시에 불덩이로 변하고 있었다. 남궁궁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간악한 자들! 정체가 탄로나니 흔적을 지우기 위해 불을 질렀구나!' 사방으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몰려오고 있었다. 더 이상 우물거리다간 불고기가 될 판국이었다. 그는 화염을 뚫고 신형을 날렸다. ② 가을은 풍요의 계절이다. 여름 내내 흘린 농부들의 땀이 값진 결실을 맺는 시기인 것이다. 들판에 무 르익는 곡식과 온갖 과실들, 형형색색으로 물들어가는 단풍은 인간으로 하여금 여유로움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무림은 가을에 접어 들면서 사상 유례없는 혼란에 휘말리고 있었다. 휘이이잉......! 갑자기 불어닥친 혈풍이 무림계를 온통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다. 전륜회(轉輪會)! 무림계에 불어닥친 첫번째 혈풍은 바로 그들에 의한 회오리였다. 무림의 곳곳에는 전륜회의 깃발이 꽂히기 시작했다. 그들의 깃발에는 붉은 색의 수레바퀴가 수놓아져 있었다. 이른바 피의 수레바퀴가 무림을 짓밟기 시작한 것이다. 하북(河北) 막가새(莫家塞), 하남(河南) 도림장(刀林莊), 강북(江北) 십팔세가(十八勢家), 강남(江南) 천 문회(天門會), 사천(四川) 철마부(鐵馬府) 멸망, 절강(浙江) 팔형문(八形門)....... 놀랍게도 지난 수 개월 사이에 수많은 방파들이 멸문당했다. 그것은 모두 전륜회가 행한 피의 족적들이었다. 그들이 쓸고 간 자리에는 생존자는 물론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존재하지 못했다. 한 가지 괴이한 것은 전륜회에 의해 멸망한 문파들이 과거 제왕천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제왕천이 무너진 후 각자 독립하여 무림의 신흥세력으로서 입지를 굳혀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쌓아놓은 공든 탑은 전륜회가 일으킨 피의 선풍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무림인들은 이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림의 일각에서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 전륜회에 당한 자들은 대부분 과거 제왕천의 배신자들이다! 따라서 전륜회는 제왕천(帝王天)의 후신 임이 틀림없다! - 제왕천이 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전륜회의 이름으로 배신자들을 처단한 후, 무림을 초토화시킬 것 이다! 실로 가공할 소문이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가히 무림의 기반을 송두리째 뿌리 뽑을 만한 일이었다. 지난 날 무의 하늘 이었던 제왕천이 다시 일어선다면 무림에서 그들을 막을 수 있는 단체는 전무했다. 이 소문은 정사를 막론한 전 무림을 온통 긴장과 전율로 몰아넣고 있었다. 구중천(九重天)! 전륜회에 이어 갑자기 등장한 그들은 가뜩이나 혼란에 빠진 무림을 더욱 공포로 몰아 넣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무림왕부(武林王府)로 호칭했다. 구중천의 인물들은 모든 것이 비밀에 싸여 있었다. 그들은 각각 금은동철목(金銀銅鐵木), 다섯 가지 종류의 면구를 얼굴에 착용하여 진면목은 물론 출신성분조차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그들의 무공은 하나같이 가공지경이었다. 그들 중 동면인(銅面人)의 무공만 해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고강했다. 동면인들은 당금무림의 대들보라는 구파일방을 비롯하여 남북무림의 명문세가에 홀 연히 나타나 시비를 걸었다. 그 결과, 동면인들은 각파의 장문인들을 불과 백 초 이내에 꺾어버리는 대파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전륜회와 구중천의 출현만으로 무림은 그 존폐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다시 변황사 패(邊荒四覇)가 준동함으로써 무림은 가히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몰리고 말았다. 북해(北海) 동해(東海) 남해(南海) 묘강(猫疆)

혈문(血門). 잔밀도(殘密島). 유황성(硫黃城). 만독문(萬毒門).


이들 네 단체는 지난 수백 년간에 걸쳐 중원진출의 야욕을 품어왔었다. 그들은 중원의 변황을 정복한 후 단결된 힘으로 중원무림의 진출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변황사패는 무림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마침내 중원을 향한 야심의 눈을 번뜩이기 시작 한 것이다. 전륜회와 구중천, 변황사패의 준동! 이 세 방향의 마풍(魔風)에 무림의 하늘은 온통 잿빛으로 화하고 말았다. 아니,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 다. 언제, 어느 때 피바람이 몰아칠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결코 무심치 않았던가! 무림이 벼랑끝으로 몰리자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기치를 내걸고 하나의 거대한 세력이 태동되었으 니.... 풍운맹(風雲盟) 출범이 그것이었다. 풍운맹은 무림의 전통적인 정도문파인 구파일방과 풍운팔대세가(風雲八大勢家)로 불리는 여덟 개 명문 의 동맹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무림의 혼란과 혈풍을 저지하기 위해 비밀리에 회합하여 전격적인 동맹을 결의한 것이다. 풍운맹주의 자리에는 지난 백 년 동안 최고의 인의대협(仁義大俠)으로 불리우는 인물이 만장일치로 선 출되었다. 자비천문선생(慈悲天文先生) 궁천무(宮天舞), 바로 그였다. 지난날 무림왕 남궁후와 쌍벽을 이루었던 대기인 궁천무가 풍운맹주의 자리에 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 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는 과거 남궁후의 지기(知己)였으며, 지나치게 패도적이었던 남궁후에게 간언(諫言)과 충고를 했던 유일무이한 사람이었다. 당시 제왕천이 무림을 독패하면서도 어느 정도 중립적 위치에 머무를 수 있 었던 것도 궁천무가 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었다. 궁천무는 무학은 물론 학문과 기예(技藝)에도 만능이었다. 또한 천문지리(天文地理)와 기관토목진학에 도 달통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가 풍운맹의 맹주가 되자 무림인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으며, 어둠 속에서 광명을 본 양 한숨을 쉬게 되었다. 짧은 시간에 풍운맹은 명실공히 중원무림의 연맹으로 발전했다. 풍운맹에 소속된 정도무림의 연합은 비로소 잃었던 사기를 되찾고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암담하기만한 무림의 난국이 타결되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난세는 영웅을 부른다던가?


암담한 무림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한 명의 신진기협(新進奇俠)이 있었으니.... 십절공자(十絶公子)! 그는 불과 일 년 반 전에 출현했다. 십절공자가 이름을 떨친 것은 그가 희대의 풍류객이었기 때문이 었다. 그가 나타남으로써 숱한 미녀들이 눈물로 옷깃을 적시었던 것이다. 그러나 십절공자는 풍류 방면을 제외한다면 불의를 용납지 않는 협의의 길을 걸었다. 그는 신비한 무 학으로 가는 곳마다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숱한 양민을 울렸던 대막(大漠)의 낭심단(狼心團)을 비롯하여 남만의 백묘토(白苗土), 사천(四川)의 백 골문(白骨門)을 단신으로 쳐들어가 격파함으로써 그의 무명은 무림을 흔들게 되었다. 다만 그는 철저히 신비에 싸인 존재였다. 그 누구도 십절공자의 정체를 아는 자가 없었다. 작금에 이 르기까지 그의 정확한 나이는 물론 출신성분에 대해 알려진 것은 전무했다.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의 행도로 미루어 철저히 백도(白道)의 편이라는 사실뿐이었다. 결국 세인들은 그를 무림일비(武林一秘)라 칭하게 되었다. ③ 휘이잉......! 추풍(秋風)이 스산하게 대지를 스친다. 양자강(陽子江)의 상류는 며칠 전 내렸던 비로 흙탕의 폭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북 쪽으로 올라가면 그 유명한 무협(巫峽)이 나온다. "......." 강안의 가파른 지형을 타고 하나의 고영(孤影)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는 일신에 백색의 유삼을 입고 있었다. 각진 얼굴, 양쪽 관자놀이까지 뻗친 자색의 눈썹.... 특이한 분위기의 청년이었다. 그는 벼랑 위에 서 서 발밑을 소용돌이치며 흘러내리는 급류를 굽어보고 있었다. 남궁궁이었다. 그는 전륜회의 만색단을 떠난 후, 줄곧 강호를 유랑해왔다. 급류를 내려보는 그의 얼굴은 과거에 비해 훨씬 성숙해진 느낌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씁쓸한 웃음이 어리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십절공자의 행세를 한 셈이다. 어찌된 셈인지 가는 곳마다 날 십절공자라 칭하니 이젠 부인해도 소용없게 됐다.' 그렇다. 만색단을 떠난 후, 지난 수개월 동안 그는 많은 활동을 했다. 적어도 그것은 협행(俠行)이라 부를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무림인들은 그를 십절공자로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부인하기도 했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으므로 이젠 묵인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십절공자, 당신의 행세를 일부러 한 것은 아니오. 더구나 당신의 명성에 누가 될만한 일은 하지 않았 으니 언젠가 만나게 되면 그때 사과 드리겠소.' 실로 기묘한 일이었다. 이제는 남궁궁 자신도 십절공자란 칭호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길 이 들고 만 것이다. 한편 그는 남들이 십절공자로 알아주는 것이 편한 점도 있었다. 그것은 무애곡의 할아버지가 절대로 신분을 노출시키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남궁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지금까지 그는 꽤 많은 강호의 여인들을 만났다. 그런데 그때 마다 곤란한 지경을 당했던 것이다. '십절공자, 어찌하여 당신에게 그리도 많은 여인들이 맹목적으로 사랑을 바치려 하는지 모르겠소.' 남궁궁은 쓴 웃음을 지었다. '천랑의 말이 맞았어. 비록 남의 명호를 빌리긴 했으나 어쨌든 여난(女難)은 여난인 셈이니.......' 그는 몸을 돌렸다. '할아버지와 약속한 기일이 다 되가니 이제 그만 황금장으로 돌아가야겠다. 후후, 천통과 천랑이 날 보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군.' 어느덧 무애곡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었다. 그동안 그는 목적대로 강호경험을 충실히 한 셈이었다. 아니, 상상 이상으로 충분한 경험을 쌓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치기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그에게서는 원숙한 청년의 기상이 흐르고 있었다. 그동 안의 경험이 그를 성장케 한 것이었다. '가자.' 휙! 남궁궁은 신형을 날렸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더 어둡기 전에 유숙할 곳을 찾아야 할텐데.......' 그는 강호유랑을 하는 동안 심심찮게 종종 야숙(野宿)을 하곤 했다. 그러나 오늘만은 그렇게 하고 싶 지가 않았다. 가을이 깊어 대지에 이슬이 내려있기 때문이다. 남궁궁은 주위를 살피며 경공에 속도를 더했다. 그러나 좀처럼 민가가 나오지 않았다. 하기야 그는 지 금 길을 잘못 든 듯 숲 한가운데 들어와 있었다. 얼마쯤 갔을까? "크아악!" 문득 어디선가 참혹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 남궁궁은 신형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비명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날아갔다. 숲 한가운데 초옥이 한 칸 있었다. 그것은 흔히 산중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화전을 가꾸거나 사냥을 하는 사람이 살만한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초옥에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초옥의 앞마당에는 십여 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모두 청삼을 입고 있는 청년무사들이었 다. 시체가 널려있는 마당 한가운데 삼 인의 인물이 등을 맞댄 채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패색이 완연해 보였다. 삼 인을 포위하고 있는 인물들은 열 명의 혈의인들로 가혹한 살수를 연신 펼쳐 삼 인을 몰아부치고 있었다. 약간 떨어진 곳에는 한 명의 역시 핏빛 장포를 걸친 노인이 팔짱을 낀 채 관전하고 있었다. 삼 인의 인물 중 한 명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들과 똑같은 청삼을 입고 있는 삼십대 가량의 청년이 었다. 그는 장검을 비껴든 채 비장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미 전신에 수십 군데의 검상을 입어 목숨 이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그의 옆에는 백발의 초부(樵夫)가 역시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쓴 채 지팡이로 간신히 몸을 의지하고 있 었다. 청삼청년과 백발초부는 한 명의 소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눈망울이 유난히도 초롱초롱한 소녀로 일신 에는 검박한 마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녀의 옷에는 한 방울의 핏자국도 묻어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유일하게 상처를 입지 않은 것 같았다. 차창! 위잉! 혈의인들의 공격은 악랄무비했다. 그들의 검은 세 사람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몰아쳤다. 청삼청년과 백발초부는 힘겹게 그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문득 청년의 입에서 냉갈이 터져나왔다. "네 놈들은 본인이 풍운맹 청삼대(靑衫隊)의 영반임을 모르느냐? 죽음이 두렵지 않단 말이냐?" 그러나 혈의인들은 코웃음치며 더욱 기세를 올릴 뿐이었다. 카캉! 검과 검이 부딪치자 불똥이 퉁겼다. 한편, 혈의노인은 음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크크... 풍운맹 따위가 무슨 말라 비틀어진 개뼈다귀냐? 본 혈문(血門)은 너희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 는다!" 그 말에 청년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혈문이라고...? 윽!"


청년은 비명을 질렀다. 혈의인 중 한 명의 검이 그의 왼팔을 절단해 버린 것이었다. "으으......!" 청년의 왼팔은 어깨죽지까지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청년은 고통보다는 놀라움이 훨씬 큰 듯 경악성 을 부르짖고 있었다. "그럼... 네 놈들은 변황사패 중 북해 혈문에서 왔단 말이냐?" "흐흐! 그렇다." 혈의노인의 음침한 말에 청삼청년이 비틀거리며 중얼거렸다. "네 놈들이 어찌......." "흐흐... 본문은 풍운맹의 동정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다. 물론 청삼대가 이곳에 온 이유도 잘 알고 있다." 그의 어조에는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그... 그럴 리가......!" 청삼청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흐흐, 네 놈은 이곳에 은거하고 있는 초은약왕(草隱藥王) 모용황(慕容黃)을 풍운맹으로 데려가 묘강 만독문(萬毒門)에 대처하려는 것이 아니냐?" 청년의 안색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걸 어떻게...?" 혈의노인은 더 말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번쩍 들었다. "죽여라." 쐐애액! 십여 자루의 장검이 일제히 청년에게 떨어졌다. "으아아아악!" 단말마의 비명이 터졌다. 열 자루의 장검은 눈 깜짝할 사이에 청년을 난자해 버렸다. "으으... 이... 잔인한 놈들!" 백발의 초부, 즉 초은약왕 모용황은 그 광경에 대로하고 말았다. 그는 혈의인들을 향해 수중의 지팡이를 위맹하게 휘둘렀다. 위이잉! 그러나 그것은 그의 마지막 몸부림에 불과했다. "흐흐! 늙은이, 이제 너는 살 만큼 살았다." 차차차차창! 혈의인들의 장검과 모용황의 지팡이가 부딪쳤다. "허억......!" 이미 기력을 다한 모용황이 혈의인들의 공격을 받아낼 리가 만무였다. 그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그 의 지팡이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으며 열 자루의 장검은 그의 전신을 꿰뚫고 말았다. 혈의노인은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잘 가라, 늙은이." 혈의인들은 일제히 그의 몸에서 장검을 빼냈다. 촤아아.......! 모용황의 전신에서 십여 줄기의 핏줄기가 폭포수처럼 뿜어졌다. 실로 끔찍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쿠웅! 무림을 떠나 한적한 산중에 초옥을 짓고 노년을 보내던 초은약왕 모용황은 허무하게 쓰러졌다. 그의 눈은 아직 생의 미련이 남았는지, 또는 너무나 억울해서인지 채 감겨지지 못한 채였다. "아악! 할아버지!" 마의소녀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엎어졌다. 그녀는 이미 숨이 끊어진 모용황의 시신을 껴안으며 울부짖었다. "할아버지... 으흑흑흑......!" 혈의노인은 비정했다. 그는 소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외쳤다. "풀은 뿌리째 뽑아야 이듬해 살아나지 못하는 법이다. 죽여라." 쐐애액! 열 자루의 장검은 일제히 소녀의 등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멈춰라!" 문득 분노에 찬 낭랑한 외침이 야음을 흔들었다. ④ 차차차창......!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불꽃이 일어났다. 뒤이어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언제 나타났던 것일까? 장내에는 백삼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반면 다섯 명의 혈의인들이 피를 뿜으 며 거꾸러지고 있었다. 불시에 나타난 청년에 의해 그들은 장검이 부러져나가며 스스로의 심장을 찔 러버린 것이었다. "네 놈은... 누구냐?" 혈의노인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백삼청년은 바로 남궁궁이었다. 그는 비명소리를 듣고 전력으로 달려왔으나 한 발 늦고만 것이었다. 장내의 정경만으로도 그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몸을 돌려 혈의노 인을 바라보며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연약한 소녀를... 그것도 패거리로 죽이려 하다니... 너희들은 강호 도의도 모른단 말이냐?" "......!" 혈의노인은 흠칫했다. 그는 남궁궁이 단 일합에 수하 다섯 명을 해치운 것을 보고 간담이 써늘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 수하들은 숫적으로 훨씬 우세했다. "크크... 웬 애송이 놈이 감히 혈문의 일에 참견하려 드느냐?" 혈의노인은 혈문을 들먹이면 상대가 겁먹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보기좋게 빗나가고 말았 다.


"북해 혈문 말이냐? 하하하핫......!" 남궁궁은 문득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 혈의노인은 어리둥절했다.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릴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남궁궁은 웃음을 뚝 그치며 준엄한 어조로 꾸짖었다. "변황인이라면 변황에서 살 것이지, 어찌하여 중원으로 와 더러운 냄새를 피우는 것이냐?" "뭐... 뭐라고?" 혈의노인은 그만 코와 귀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노하고 말았다. "이... 이... 찢어죽일 놈! 뭣들 하느냐? 쳐라!" 그의 명에 다섯 명의 혈의인들이 남궁궁을 향해 덮쳐 들었다. "흥!" 남궁궁은 코웃음치며 혈의인들의 사이로 파고 들었다. 북해 혈문의 무공은 본래 변화무쌍함과 음독함 이 그 특징이었다. 그러나 남궁궁은 여유만만하게 그들 사이를 누비며 십여 초를 피해내고 있었다. 실로 신비무쌍한 신법이었다. 혈의인들은 아무리 날카로운 공격을 해도 그의 소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자 그만 분기가 탱천하고 말았다. "뒈져라!" 마침내 그들은 이성을 잃은 채 마구 검을 휘둘렀다. 검도(劍道)에서 냉정을 잃는다는 것은 절대 금기 에 속한다. 분노로 인해 정심이 흐트러지자 그들의 검법에는 무수한 허점이 드러났다. 남궁궁은 그들 사이를 유유하게 누비며 조소를 흘렸다. "하하! 역시 변황의 검법은 무질서하기 그지없군. 그 정도 실력으로 중원에 진출하려 했단 말이냐? 이 공자님이 너희들의 안목을 넓혀주마." 남궁궁은 손바닥을 뒤집었다. 그러자 땅에 떨어져 있던 장검이 마치 끈이라도 달린 듯 그의 수중으로 딸려왔다. 일단 검을 잡자 그의 모습은 산악처럼 늠연해졌다. "검리도천파!" 그의 입에서 낭랑한 외침이 떨어진 순간,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네 명의 혈의인들이 피를 뿜으며 날아갔다. 나머지 한 명은 자신의 장검으로 복 부를 찌른 채 거꾸러지고 있었다. '으으... 중원에 저런 고수가 있었다니?' 혈의노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간담이 써늘했으나 곧 내공을 끌어올리며 앞으로 나섰다. "애송이놈! 제법이구나, 대체 네 놈은 누구냐?" 남궁궁은 고개를 저었다. "너는 알 자격이 없다."


혈의노인의 안면이 푸르르 경련했다.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었다. "이... 대가리에 피도 안마른 놈이...." 혈의노인은 분노가 지나쳐 피가 머리로 솟구칠 정도였다. 반면 남궁궁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동안의 강호경험은 그를 변하게 만들었다. 이미 그는 고도의 심리전을 사용하고 있었다. 내가 고수간의 대결에 있어 이성을 잃는다는 것은 패배를 자초하는 일이다. 혈의노인은 자신도 모르 게 남궁궁의 격장지계에 휘말려들고 있었다. 쩡! 귀청을 찢는 금속성과 함께 혈의노인은 소매 속에서 두 개의 핏빛륜(輪)을 꺼냈다. 한 쌍의 혈륜은 둥 근 원반의 형태로, 가장자리에 날카로운 이빨이 돋아나 있었다. "뒈져라!" 위이이잉! 한 쌍의 혈륜이 휘전하며 날아왔다. 혈륜을 동시에 날린 것이었다. 남궁궁은 여유있는 자세로 장검을 휘둘렀다. 카캉......! 불꽃과 함께 혈륜이 뒤로 퉁겨져 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허초(虛招)에 불과했다. 퉁겨나가는가 했던 혈륜은 더욱 빠른 속도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위이이... 잉! 남궁궁은 이 뜻밖에 상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혈의노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갈을 발했다. "혈황참(血荒斬)!" 슈우우웅! 혈륜 사이로 장력을 뻗자 무시무시한 경력이 밀려 들었다. 남궁궁은 좌우로 날아드는 혈륜을 먼저 쳐 냈다. 불꽃이 우박처럼 쏟아지며 혈륜이 산산조각 나 날아갔다. "크크... 네놈은 끝장이다!" 혈의노인의 장력이 남궁궁의 심장을 쳤다. 실로 천 근의 거암을 박살낼 위력이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 으랴! "환(幻)!" 남궁궁은 낭랑하게 중얼거리며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대여섯 개로 분리되는 것이 아 닌가? "억?" 혈의노인은 순식간에 목표를 잃고 비틀거렸다. 따라서 그의 장력은 하릴없이 허공을 치고 말았다. 그 때였다. 등에 만 근의 충격이 가해지는 것이 아닌가? "으악!" 혈의노인은 입으로 선혈을 토하며 그만 붕 떠 날아가고 말았다. 그는 사오 장 밖의 숲속에 떨어지고


말았다. "......." 남궁궁의 분신들은 비로소 하나의 육신으로 합쳐졌다. 그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주위 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무림이 어지럽다지만 변황의 문파들까지 설치다니...." 그의 눈은 자연스럽게 마의소녀에게로 떨어졌다. 그녀는 초은약왕의 시신을 끌어 안은 채 혼절해 있 었다. 그는 소녀를 안아 들었다. 의식을 잃은 소녀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아름다운 소녀군.'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내심 중얼거렸다. 비록 소박한 마의를 입고 있었으나 소녀의 꾸밈없는 아름다움 은 그의 마음을 은연중 흔들었다. 소녀는 마치 난초와도 같은 순결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다. '충격으로 심맥이 막혀 버렸군.' 소녀의 완맥을 짚어 본 그는 별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을 알고 한숨을 쉬었다. 주변을 둘러본 그는 눈 살을 찌푸렸다. 초옥의 마당에는 온통 시신이 뒹굴 뿐더러 역한 피비린내가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악인이라 해도 이 상태로 둘 수는 없지.' 그는 소녀를 내려놓고 마당 한구석에 두 개의 구덩이를 팠다. 그 중 하나에 초은약왕과 청삼인들의 시신을 합장했다. 이어 나머지 구덩이에 북해 혈문의 인물들을 한꺼번에 던져 넣었다. 그는 혈의노인을 묻어주기 위해 숲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 그런데 의당 있어야 할 혈의노인이 사라지고 없었다. 분명 그의 장력을 정통으로 얻어 맞았으므로 즉 사했거나 그렇지 않다해도 최소한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 남궁궁의 시선이 번쩍 빛났다. 한 그루 나무 둥치에 피로 흘겨쓴 글씨를 발견한 것이었다. <혈문은 동도의 피 한 방울을 중원인 일천혈(一千血)로 갚아 준다!> 아무런 서명도 없이 급히 휘갈겨 쓴 것이었다. 남궁궁은 신음을 흘렸다. '음, 내가 경솔했다. 그 자는 예상밖으로 무공이 강했구나. 장력을 맞고도 달아날 수 있다니....' 남궁궁은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 왕도 1 권 제 9 장 영악한 소녀 소설(小雪) ━━━━━━━━━━━━━━━━━━━━━━━━━━━━━━━━━━━


① 낙양으로 향하는 관도(官道)에는 백설이 휘날리고 있었다. 남궁궁은 눈을 맞으며 걷고 있었다. 이따금 흰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 보는 그의 얼 굴에는 추억이 떠오르곤 했다. "첫눈이구나. 눈을 보니 대설산이 더욱 그리워지는구나." 그의 얼굴에는 짙은 감회가 어렸다. '지난 일 년은 내게 너무도 많은 일이 있었다. 후후... 무애곡에 돌아가면 그동안 겪은 일들을 할아버 지와 화노(華老), 소군(素君)에게 모두 얘기해 줘야지.' 그것은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특히 소군이 무릎에 턱을 고인 채 그의 얘기를 넋을 잃고 듣는 장면은 보지 않아도 선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지금 그는 낙양의 황금장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도중에 초은약왕 모용황의 손녀인 모용운리를 만나는 바람에 일정이 꽤 지체되었다. 남궁궁은 초옥을 바로 떠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모용황이 생전에 연단 중이던 단약을 모용운리가 대 신 완성하도록 곁에서 지켜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한 달여란 시간을 더 소비할 수밖에 없었다. 연단이 막바지 고비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장 소를 옮길 수가 없었고, 혈문의 인물들이 언제 다시 돌아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용운리는 총명했다. 그녀는 이미 모용황의 의술을 십분 이어받고 있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모용황이 연단하고 있던 신단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구전속명단(九轉速命丹). 그것은 모용황이 필생의 심혈을 기울인 영단이었다. 이름이 말하듯 아홉 번 죽을 고비에 처한다 해도 구전속명단을 복용하면 기사회생하는 효험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 알만 복용해도 능히 십여 년의 내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신비한 약력을 발휘하는 신단 중의 신단이었다. 그 효능으로 말하면 전설의 신단인 소림사의 대환단(大還丹)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모용운리는 모두 삼십 개의 구전속명단을 연단해냈다. 그녀는 남궁궁에게 그 중 열 개를 선사했다. 남 궁궁은 극구사양했으나 그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남궁궁은 할 수 없이 받아 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남궁궁은 그 한 달 동안 모용운리로부터 약왕의 비전 의술을 틈틈이 배웠다. 뿐만 아니라 돈황 에서 얻었다는 독경을 부분적으로나마 익혔다. 그로 인해 남궁궁은 의술과 독에 관해 눈을 뜰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모용운리의 정성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 달 후, 두 사람은 초옥에 불을 놓은 후 그곳을 떠났다. 모용운리는 무창(武昌)에 있는 풍운맹(風雲 盟)의 총단으로 떠나기로 했다. 남궁궁은 그녀를 호북성(湖北省) 접경까지 바래다 주었다. 모용운리는 그와 헤어지면서 눈물을 흘렸다. - 궁오빠.... 훗날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 모용운리는 그와의 이별이 못내 아쉬운 듯 달리는 마차의 문을 열고 몇 번이고 뒤를 돌아 보았다. 실 상 초옥에서 함께 한 시간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남궁궁에게 흠뻑 빠져 있었다. 실상 남궁궁은 그녀에게 첫 남자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소녀의 방심이 흔들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후후... 천통과 천랑이 보면 깜짝 놀라겠지?' 남궁궁은 상념을 끝내고 빙긋이 웃었다. 그는 일 년 전 황금장의 마차를 타고 낙양에 입성할 때를 떠올렸다. 또한 몰래 황금장에서 떠나던 기 억도 났다. 그 날 이후로 천통과 천랑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줄곧 떠나지 않고 있었다. ② 낙양은 흥청거렸다. 원단(元旦)이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한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들떠 있 었다. 특히나 낙양과 같은 대도는 더했다. 남궁궁은 마침내 낙양 남문을 통해 입성했다. '후후... 조금도 변한 것이 없군.' 그는 번잡한 인파 사이를 누비며 감회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또 만나다니......!' 그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인파를 헤치며 바쁘게 걸어가고 있는 한 명의 거지소년을 발견한 것이었다. 남궁궁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다. 그는 한눈에 소년을 알아보았다. 소년은 비록 몰골이 꾀죄죄했지만 이목구비가 청명하여 쉽게 잊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그와는 기이한 악연(?)마저 있으니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후후, 우연치고는 정말 교묘하군.' 그는 미소를 지으며 거지소년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거지소년은 몹시 바쁜 듯 앞만 보며 종종걸음 치고 있어 그가 따르는 것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음...?'


한참 후 남궁궁은 의혹을 느꼈다. 거지소년이 가고 있는 방향은 황금장 쪽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는 그를 계속 따라가 보기로 했다. 얼마쯤 가니 과연 웅대한 황금장의 모습이 들어왔다. 거지소년은 황금장의 대문으로 당당히 걸어갔다. 그는 대문 앞을 지키는 호위무사와 몇 마디를 주고 받더니 대문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남궁궁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정말 이상하군. 어떻게 황금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황금장은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특히나 일개 거지소년이 출입 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그는 호기심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는 황금장의 담장을 끼고 돌아갔다. 그는 주위를 살핀 후 지나는 사람이 없자 곧바로 담장을 뛰어 넘어갔다. 황금장을 떠날 때도 담을 넘 었는데 이제 일 년만에 돌아온 그는 다시 월담을 하게 된 셈이었다. 황금장 안으로 들어서자, 후원을 가로 지르는 거지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은형술(隱形術) 을 발휘하여 후원의 나무 뒤로 소년의 뒤를 미행했다. 잠시 후, 거지소년은 황금장주의 거처로 들어갔다. '......?' 갈수록 이해가 안되는 일이었다. 남궁궁은 신형을 날려 처마 밑에 거꾸로 매달렸다. 마침 창문이 반쯤 열려 있어 방안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방안에는 규염공 부부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거지소년이 들어선 순간 그들은 황급히 일어서더니 공손히 예를 취하는 것이 아닌가? 거지소년도 마주 포권하고 있었다. 남궁궁은 어리둥절하고 말았다. '저 소년이 대체 누구기에?' "두 분께서는 안녕하셨나요?" 거지소년은 예를 나눈 후 입을 열었다. 놀랍게도 그의 음성은 마치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 청 아한 소녀의 음성이었다. "어서 오시오. 소설(小雪) 낭자." 규염공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광경에 남궁궁은 하마 터면 앗!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럼... 여자였단 말인가?' 거지소년, 아니 소설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별 일 없으시지요?" 천선미랑이 요염하게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에요. 노종(老宗)께서도 평안하신가요?" 소설은 의자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하세요." "허허! 그간 낙양을 둘러보신 느낌이 어떠신지요?" 규염공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소설은 희색이 만연해져서 대답했다. "소문대로 두 분의 의기(義氣)는 하늘을 찌르더군요. 정말 감탄했어요. 맹주님은 물론 사부님께서도 필히 감탄하실 거예요." 규염공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별 말씀을.... 그야 무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가 아니겠소?" 그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낭자, 사흘만 이곳에 머물러 주시오. 그 안에 필요한 것을 마련하겠소이다." 소설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사흘이 아니라 한 달이라도 좋아요." 그들은 한동안 환담을 나무며 유자차를 마셨다. "한데... 공자는 만나보셨나요?" 천선미랑의 조심스런 질문에 소설은 갑자기 안색이 싹 변했다. 이어 그녀는 코웃음치며 말했다. "흥! 만나봤지요." 천선미랑은 안색을 활짝 폈다. "어떤가요? 정말 그 분이야말로 절세기......." "흥!" 거지소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 "천하의 바람둥이!" 그 말에 규염공과 천선미랑은 마주 보더니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핫......!" "호호호홋......!" 그러나 소설은 여전히 역겹다는 기색이었다. 한편, 남궁궁은 그들이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문득 그는 안색이 변해 부르짖었다. '그렇구나! 자봉선녀 천화영과 그 일이 있었을 때... 누군가의 코웃음소리가 들렸었지. 이제 생각하니 저 소녀였구나! 어쩐지 귀에 익었다 했더니....' 남궁궁은 그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말았다. '그렇다면 저 소녀가 그때 그 일을 목격했겠구나!' 남궁궁은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천화영과의 일은 그가 강호경험이 미숙했기에 어쩔 수 없이 당한 것 이었다. 그 일은 지금까지도 생각만 해도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한편 그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 다. '그럼 저 소녀는 벌써부터 날 알고 있었단 말인가?' 이때였다. 소설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천선미랑도 함께 일어나더니 소설과 함께 밖으로 걸어나갔 다. 그들이 나간 직후, 남궁궁은 창문을 통해 방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혼자 남아있던 규염공은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 만면에 희색을 띠며 부르짖었다. "공자!" 남궁궁은 빙그레 웃었다. "천통, 그간 심려를 끼쳐 미안하오이다." 규염공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 그만 껄껄 웃었다. "공자께서 밤중에 몰래 도망칠 줄이야 꿈에도 몰랐소이다." 남궁궁은 얼굴을 붉혔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소. 어쨌든 이렇게 돌아왔으니 용서해 주시오." 규염공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허... 그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신 것 만으로도 다행입니다." 남궁궁은 눈을 가늘게 하며 물었다. "그런데 방금 전 그 소녀는 누구요?" 규염공은 너털웃음을 발했다. "헛헛헛! 그것이 궁금하신 모양이군요. 아마도 그녀는 당금무림에서 공자님 다음으로 배분이 높을 것 입니다." "......?" 남궁궁의 의혹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공자께서는 혹시 개방( )의 살아있는 귀신으로 불려지는 역천마개(逆天魔 )란 분에 대해 들어보신 적 이 있으신지요?" "......!" 남궁궁의 안색이 변했다. "당금 개방의 방주보다도 배분이 세 배나 높다는... 악을 원수같이 미워하여 흑도인들에게는 염라대왕 으로 알려진 그 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소설 낭자는 바로 그 분의 제자입니다." "아......!" 남궁궁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역천마개는 이백 세에 달하는 그의 할아버지보다 불과 반 배분이 낮은 당금 무림의 고인이었던 것이 다. "그런데......?" 남궁궁은 다시 무엇인가를 물으려 했다. 규염공은 그의 의중을 눈치챈 듯 먼저 입을 열었다. "소설 낭자는 노개종의 명으로 풍운맹을 돕고 있습니다. 이번에 온 것은......." 그는 한 통의 서찰을 들어 보였다. "풍운맹의 총단을 건축하는데 자금을 대달라는 맹주의 서찰을 갖고 온 것입니다." 남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규염공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풍운맹은 명실상부한 중원무림의 기둥입니다. 현재의 맹주부는 비좁아 용담호혈로는 적당치 않다는 중론입니다. 따라서 이번에 새로 건립하게 되는 맹주부는 미래의 중원무림을 상징하는 대역사가 될


것입니다." 규염공의 얼굴에는 긍지가 어렸다. 남궁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천통께서 그런 대역사에 참가하신다면 무림인들의 추앙을 받을 것입니다." 규염공은 머리를 긁적였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남궁궁은 규염공에 대해 새삼 존경심이 느껴졌다. 그는 담담히 말했다. "내일 대설산으로 떠나겠소이다." 규염공은 서운한 빛을 띠었다. "더 머무르시지 않고?" "하루라도 빨리 할아버님을 뵙고 싶습니다." 남궁궁의 뇌리에는 이미 대설산의 설경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번 강호주유에서 얻은 것이 많았습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란 말을 절감했습니다." 남궁궁은 이어 자신이 그간 겪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물론 천화영에 대한 얘기는 의도적으로 빼놓을 수밖에 없었다. 규염공은 연신 탄성을 발하며 그의 무용담을 경청해 주었다. 이윽고 남궁궁의 얘기가 끝나자, "허허! 정말 짧은 일 년 사이에 엄청난 일을 겪으셨소이다." 규염공은 혀를 내둘렀다. 이어 그는 남궁궁이 겪은 일들에 대해 일일이 보충설명을 해주었다. 그것은 남궁궁의 판단을 돕기 위 해서였다. 남궁궁은 진지하게 그의 얘기를 들으며 경험을 곰씹었다. 어느덧 창밖이 어둠으로 물들고 있었다. ③ 황금장의 후원. 온통 백색천지(白色天地)였다. 전각의 지붕과 화원의 화목마다 백설이 소담하게 쌓여 있었다. 시간은 이미 사경(四更)을 넘어서고 있었다. "......." 남궁궁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후원으로 걸어나와 밤의 설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내일 아 침 대설산으로 떠날 생각을 하니 왠지 가슴이 설레었던 것이다.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무애곡에서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소군은 지금쯤 곤히 잠들어 있겠지......?" 이때였다. "흥!" 문득 냉랭한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남궁궁은 흠칫 놀라며 몸을 돌렸다. 한 그루 나무 아래 왜소한 인영이 기대선 채 잔뜩 못마땅 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 남궁궁은 탄성을 발했다. 그는 다름아닌 소설이었던 것이다.


소설은 냉랭한 어조로 비꼬았다. "소군은 또 누구요? 물론 바람둥이 곁을 스쳐간 넋빠진 계집애 중의 하나겠지만......." 남궁궁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사람 모욕하지 말아라." 그러나 소설은 거침이 없었다. "흥! 당신같은 색마에게 예의를 존중할 필요가 있을까?" "무슨 근거로 날 색마로 모는 거지?" 남궁궁의 음성도 자연 퉁명스러워졌다. 소설은 노골적으로 경멸을 드러내며 비꼬았다. "흥! 누가 보는 줄도 모르고 선실에서 추태를 벌이던 꼴이라고는......." 남궁궁은 그만 얼굴이 시뻘개지고 말았다. 그는 황급히 변명했다. "그건... 피치 못할 사정이......." "후훗... 색마의 변명은 들으나 마나요! 그저 더러운 수작에 걸려든 계집애들만 불쌍할 따름이지." 남궁궁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고 말았다. 자연히 그의 언성은 높아지고 말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흥! 꼴에 수치심은 있는 모양이지?" 소설은 계속해서 약을 올렸다. 남궁궁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변했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는 얼굴에 유들유들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후후...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지. 남의 좋은 일에 끼어들어 실컷 구경하고 즐긴 건 누구지? 게다가 남 의 물건까지 훔쳐간 도둑은 또 누군데 그러는 거냐?" 소설은 펄쩍 뛰었다. "뭐라고? 도둑? 당치도 않아! 그건 본래부터 내 물건인데 어째서 훔쳤다는 거야!" 남궁궁은 입가에 조소를 흘렸다. "후후... 그렇다면 낙양에서 슬쩍 해간 내 주머니도 자네 것이었나?" 그는 소설이 남장소녀라는 사실을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었다. 소설은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그건... 건방진 당신을 골리려고......." "하하핫...! 이제 보니 도둑도 변명은 하는군." 남궁궁은 짜릿한 희열을 느끼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나 놀림을 당한 소설은 치욕과 분노로 전신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치사한 작자! 내 손맛이 매운 것을 원망마라!" 쐐액! 소설은 전광석화같이 신형을 날리더니 연속 칠팔 장을 쳐냈다. "허... 엇!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말이 맞긴 맞구나." 남궁궁은 기묘한 보법으로 그녀의 공격을 피하며 계속해서 약을 올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녀의 신속비쾌한 공격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단한데... 이 정도면 일류고수를 뺨 치겠는걸?' "흥! 내 오늘 널 무릎 꿇리지 못하면 성을 갈겠다."


쐐쌔액! 소설은 연속 무시무시하게 권장지(拳掌指)를 전개했다. "하하! 제법이시군!" 남궁궁은 신법을 이용하여 그녀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소설은 그런 그의 대응에 더욱 분 노하고 있었다.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남궁궁을 공격했다. 그 여세에 꽃나무가 산산조각이 나며 날아갔다. 그녀의 공격은 점점 살기를 띠고 있었다. "후후... 그 정도로 무릎을 꿇릴 수 있다고? 정말 철없는 꼬마로군." 소설은 얼굴이 빨개진 채 외쳤다. "십 초 안에 널 제압 못하면......." "못하면?" 남궁궁은 유들유들하게 물었다. "네 놈 뜻대로 해라!" 소설은 후에 있을 일은 생각도 못한 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외쳤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그 말 한 마디로 인해 곧 엄청난 치욕을 당하게 될 줄을. "하하핫... 좋다. 일구이언하진 않겠지?" 남궁궁은 갑자기 신법을 변화시켰다. 그는 이형환위(移形幻位)을 구사한데 이어 다시 분광약영(分光躍 影)을 전개했다. 그러자 그의 모습은 뿌옇게 흐려지고 말았다. "차앗......!" 소녀는 냉갈을 발하며 쌍장과 두 발을 동시에 어지럽게 날렸다. 그녀의 손과 발은 마치 풍차처럼 급 전하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독수리같이 내려꽂히기도 했다. 실로 눈부시게 빠르고 독랄한 수법이었 다. 그러나 남궁궁은 여전히 여유만만했다. "하핫...! 벌써 육 초가 지났다. 이제 사 초 남았다." "흥!" 소녀는 두 주먹을 연속으로 쳐냈다. 꽈꽝! 남궁궁은 폭음과 함께 뒤로 쭈욱 미끌어졌다. 소녀의 눈은 살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그러나 남궁궁은 다시 신형을 가다듬으며 웃음을 지었다. "삼 초 남았다." "쓰러져라! 색마!" 파츠츠츠츠......! 갑자기 소녀의 손이 투명하게 변하더니 일시에 삼십육 장을 펼쳐냈다. "헛!" 남궁궁은 깜짝 놀라 철판교(鐵板橋)의 신법으로 몸을 뒤로 벌렁 젖히며 사 장 가량을 날아갔다. 그러 나 소설의 공격은 집요했다. "받아랏!"


소녀는 엎드린 채 그를 따르며 품 속에서 소검을 꺼내 신속악랄하게 휘둘렀다. 남궁궁은 소검이 심장 을 찔러오자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이때였다. 푹...! 그녀의 소검은 남궁궁의 심장에 그대로 꽂혔다. 소설은 오만한 표정으로 손을 툭툭! 털었다. 그러 나.... "하하하! 꼬마, 이제 일 초가 남았다." 그녀의 등 뒤에서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분명 남궁궁의 음성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소설은 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수가......!" 자세히 보니 그녀의 소검은 한 개의 나무등걸에 박혀 있었다. 소설의 눈빛이 일순 악독하게 빛났다. 다시 그녀의 안색이 싹 변했다. 갑자기 그녀는 양팔을 축 늘어뜨리며 풀 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졌어요." 남궁궁은 껄껄 웃었다. "체념이 빨라서 좋... 헉!" 남궁궁의 눈이 경악으로 치떠졌다. 그가 소설에게 다가가는 순간 그녀의 소검이 전광석화처럼 그의 가슴을 찔렀던 것이다. "이럴 수... 가!" 남궁궁은 더듬거리며 비틀거렸다. 소설은 깔깔 웃었다. "건방진 색마! 맛이 어떠냐?" "그... 그렇다고... 날 죽일... 수가......." 남궁궁은 서서히 주저앉았다. 그는 소녀의 악랄함에 치가 떨린다는 표정이었다. "너같이 여인을 울리는 색마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 네가 비록 장주 부부의 공경을 받는다지만 이 소설은... 아악!"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핫핫...! 꼬마야, 네가 졌다. 그 벌로 옷을 홀랑 벗긴 후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겠다. 물론 불만은 없겠지?" 남궁궁은 쓰러지는 척 하면서 그녀의 바지를 확 잡아 당겼다. 그 바람에 그녀의 허리띠가 끊어지며 바지가 벗겨지고 말았다. 소설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핫핫핫......!" 남궁궁은 그녀의 발목을 거꾸로 잡고 벌떡 일어났다. 소설은 손을 쓸 사이도 없이 그의 손에 대롱대 롱 매달리게 되었다.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어... 어떻게......?"


"핫핫! 이거 말인가?" 남궁궁은 품 속에서 나무토막 한 개를 꺼내 보였다. 소검은 정확히 그곳에 꽂혀 있었다. "더러운 놈!" 소녀는 분한 듯 이를 갈았다. "하하! 이제 내 차례다. 약속대로 내 마음대로 널 처리하겠다." 소설은 흰자위를 사납게 번뜩였다. "어... 어떻게 할 셈이냐?" "말하지 않았느냐? 널 홀랑 벗긴 뒤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겠다." 소설의 얼굴은 공포와 수치심으로 인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 그건 안된다!" 남궁궁은 빙긋 웃었다. "왜 안된다는 거냐?" "그... 그것만은 제발......." "후후... 약속은 약속이다. 난 꼭 해야겠다." 남궁궁은 짐짓 음탕한 미소를 흘리며 그녀의 바지를 확 끌어내렸다. "아악!" 소설은 반쯤 내려와 있던 바지가 벗겨지자 까무라칠 듯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 다. 그녀의 뽀얀 다리가 고스란히 노출되고 만 것이다. "호오! 계집애같이 피부가 희군. 이 엉덩이는 어떻고?" 남궁궁은 고의만 입은 그녀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철썩! 때렸다. "악! 흑흑... 제발, 제발......!" 마침내 그토록 영악하고 야멸찼던 소설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안되지, 홀랑 벗겨서 매달아야 해." 남궁궁은 그녀의 고의춤에 손을 대었다. "아악!" 그녀는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혼절하고 말았다. 남궁궁은 그녀가 축 늘어지자 혀를 찼다. "쯧쯧!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그는 소설의 바지를 올려준 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장난은 이쯤이면 충분했다. "후후, 이젠 버릇 좀 고쳐야지, 아가씨." 그는 소설을 등지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어느새 먼동이 트는지 동편 하늘이 부옇게 밝아지고 있었다. 남궁궁은 중얼거렸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군." 그는 여전히 혼절해 있는 소설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마음 약한 아가씨가 앙탈을 부렸군." 남궁궁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순간 그는 흠칫했다. 소설의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었던 것이다. 남궁궁은 고개를 흔들며 그녀를 안아 들었다. 이어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심했나 보군." 남궁궁은 고소를 지으며 소설을 자신의 침대에 눕혀 주었다.


"소설 낭자, 당분간 못 볼 것이오. 다음에 만났을 때는 좀더 얌전해져 있기 바라오." 그는 담담히 중얼거린 후 밖으로 걸어나갔다. 스르르......! 그가 사라지자 소설의 눈이 반짝 떠졌다. 아름답고 총기 어린 눈이었다. 그녀는 멍하니 문쪽을 바라보 았다. 그런 그녀의 표정은 반쯤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믿을 수 없어. 이 소설이... 잘못 본 거야......." 다음날 아침. 규염공 부부는 남궁궁을 위해 마차를 마련해 놓았다. 그러나 남궁궁은 사양하고 홀로 길을 떠났다. 낙양을 벗어나 북행하는 그의 뇌리에는 벌써부터 대설산 무애곡의 아름다운 정경이 떠오르고 있었다. 찬란하게 떠오른 낙양의 햇살은 관도와 인근의 산에 내린 백설에 반사되어 더욱 눈부신 빛을 뿌리고 있었다. - 다음 권에 계속 ■ 왕도 제 2 권 -차례━━━━━━━━━━━━━━━━━━━━━━━━━━━━━━━━━━━ - 차 례 제 10 장 제 11 장 제 12 장 제 13 장 제 14 장 제 15 장 제 16 장 제 17 장

무애곡(無涯谷)의 참사(慘事) 네 개의 하늘이 빚어낸 또 하나의 하늘 흑천풍(黑天風)의 부활 죽음의 향기(香氣) 천일만리향(千日萬里香) 풍운제일령주(風雲第一令主) 천중각(天中閣)의 관문(關門) 뜻밖의 반륜(反輪)

■ 왕도 2 권 제 10 장 무애곡(無涯谷)의 참사(慘事) ━━━━━━━━━━━━━━━━━━━━━━━━━━━━━━━━━━━ ① 휘이잉......! 설풍(雪風)이 천지를 온통 휘감는다. 희뿌연 설풍에 휘감긴 대설산(大雪山)은 신비하면서도 웅장함을 자랑한다. 끝없이 연이어진 봉우리마 다 만년빙설(萬年氷雪)을 이고 있는 모습은 가히 선계(仙界)를 방불케 한다.


대설산은 인간의 발길을 거부할 정도로 험준했다. 곳곳에 솟아 있는 빙벽은 칼로 쪼갠 듯이 매끄러웠 고, 날카롭게 솟아오른 빙봉은 새조차도 앉기 힘들 정도다. 또한 빙봉 사이에는 깊이를 측정할 수 없 이 아득한 계곡이 갈라져 있곤 했다. 가히 인간세계의 끝인 듯.... 휙! 인영이 대설산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무애곡은 여전하겠지?" 허공으로부터 낭랑한 음성이 울렸다. 인영은 자욱한 눈보라를 뚫고 한 빙봉을 향해 솟구치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남궁궁이었다. 잠시 후, 그는 만년설로 뒤덮여 있는 봉우리에 떨어졌다. 그는 감회에 찬 시선으로 자욱한 운해 속에 펼쳐져 있는 연봉(連峰)을 둘러보았다. 대자연 앞에 서니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우우우우......!" 남궁궁은 일진 장소를 터뜨리며 신형을 날렸다. 놀랍게도 봉우리 아래의 절벽으로 뛰어내린 것이었다. 그는 매처럼 자욱한 설무 속을 빙글빙글 돌며 떨어져 내렸다. 잠시 후 그는 바닥에 떨어졌다. "어찌된 거지? 백원(白猿)이 마중 나오지 않다니...." 남궁궁은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그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신형을 날렸다. 계곡은 처음에는 비좁았으나 안으로 들어가자 확 넓어지 며 거대한 분지가 나타났다. 분지는 온통 빙천설지였으나 사방으로 송목이 울창하게 자라 있었다. 일 년만에 돌아온 무애곡이었다. 그러나 기쁨보다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었다. 다정했던 분위기는 어디 로 가고 죽음과도 같은 괴괴한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던 것이다. 몇 채의 석옥(石屋)이 송림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석옥 앞에 당도한 남궁궁은 그만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충격을 느끼며 굳어 버렸다. 석옥 앞마당은 온통 난장판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큰 싸움이 벌어진 듯 여기저기 땅이 파이고 화원의 나무들도 쓰러져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선혈이 흥건하게 떨어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남궁궁이 경악한 것은 마당 한가운데 널브러져 있는 한 마리의 은빛 성성이 때문이었다. 성성 이는 머리가 박살난 채 뻗어 있었던 것이다. "백원...!"


남궁궁은 신형을 날려 성성이를 끌어안았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한동안 넋을 잃고 있던 그는 갑자기 안색이 창백해졌다. '백원의 무공은 무림의 일류 고수를 능가할 정도다. 그런데도 당했다면....' "할아버지!" 그는 다급히 외치며 석옥 안으로 뛰어들었다. 석옥 안에는 몇 칸의 방이 있었다. 그 중에서 한 방으로 뛰어든 남궁궁은 다시 넋을 잃고 말았다. 방 안에는 서가(書架)와 돌침상이 깔끔하게 자리하고 있었으며 석탁과 돌의자 등이 단촐하게 놓여 있었 다. 그런데 방 안에는 한 점의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석탁 위에는 오래 전부터 사람의 손 길이 닿지 않은 듯 먼지가 덮여 있었다. "이럴 수가......!" 남궁궁은 믿을 수 없는 듯 중얼거렸다. 그는 몸을 돌리며 부르짖었다. "화노(華老)!" 그는 다른 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방 안에는 먼지가 쌓여 있을 뿐, 아무도 없 었다. "그럼 소군도......?" 남궁궁은 밖으로 달려 나갔다. 중앙의 석옥 곁에 또 한 채의 석옥이 있었다.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석 옥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여인의 처소인 듯 아늑한 분위기였다. 남궁궁은 침실로 들어갔다. 산양(山羊)의 털이 푹신하게 깔려 있는 바닥을 지나 침상으로 향했다. 그 는 떨리는 손으로 휘장을 걷어 보았다. "......!" 남궁궁의 눈이 부릅떠졌다. 침상은 마구 흐트러져 있었으며 여인의 것으로 보이는 속옷이 찢겨진 채 널려 있는 것이 아닌가! 남궁궁은 보지 않아도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의 뇌리에는 소군의 처 참한 모습이 떠올랐다. 비명을 지르며 흉한에 능욕 당하는 소군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으으으!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남궁궁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비틀거렸다. 그는 침상 위에 흩어져 있는 속옷 쪼가리를 움켜쥐며 괴로워했다. 그 얼마나 고대했던가? 소군과 상 봉하는 순간을 수없이 떠올리며 그때마다 가슴 뿌듯해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일 년만에 돌아온 그를 반긴 것은 백원의 죽음과 그리운 사람들의 실종이었다. 더구나 소군의 침실 상황으로 볼 때 그녀는 누군가에게 겁탈 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소군! 소군...! 어디 있느냐!"


남궁궁은 미칠 것만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서서히 이성을 회복했다.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는 침착하게 사태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갑자기 그는 신형을 날렸다. ② 빙동(氷洞). 석옥의 뒤쪽은 깎아지른 빙벽이 병풍처럼 둘러 있었다. 남궁궁은 빙벽 아래 당도했다. 그는 바닥을 박 차고 솟구쳐 올랐다. 대략 삼십여 장쯤 오르자 빙벽 중간에 뻥 뚫린 동혈이 나타났다. 그는 동혈로 들어갔다. 그곳은 그의 할아버지인 천치옹(天痴翁)이 연공실(練功室)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물론 남궁궁도 이곳 에서 내공을 연마했었다. 동혈은 천연의 모습에 인공을 가해 다듬은 것이었다. 남궁궁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안으 로 들어갔다. "화노...!" 잠시 후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떨며 부르짖었다. 동굴 중간에 누군가 벽에 기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한눈에 그가 화노라는 것을 알았다. 머리칼은 눈처럼 희었고, 일신에는 화복을 걸친 평범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는 벽에 기대 선 채 눈 을 뜨고 있었다. 노인의 눈에는 온통 경악과 회의가 서려 있었다. "화노!" 남궁궁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화노는 죽어 있었다. 그가 핏덩이일 때부터 지금까 지 친자식 이상으로 보살펴 주었던 화노였다. "으으......." 남궁궁은 거듭되는 충격으로 인해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차츰 냉정을 찾기 시작했 다. 먼저 화노의 시체를 살펴보았다. 그의 앞가슴에는 장인(掌印)이 찍혀 있었다. 옷을 들추자 화노의 가 슴에 우윳빛의 손바닥 흔적이 남아 있었다. 화노는 무방비 상태에서 심장에 장력을 맞고 죽은 듯했다. 더욱이 그의 표정으로 미루어 상대가 암습 할 줄은 상상도 못한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추리일 뿐이었다. 화노의 정확한 사인(死因)은 오직 그만이 알 것이다. 남궁궁은 다시 동혈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쯤 가자 고드름 같은 빙주(氷柱)들이 천장으로부터 내려와 신비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칫 하면 빙주에 부딪쳐 다칠 정도로 빽빽하게 빙주가 매달려 있었다. 남궁궁은 눈을 감고도 이곳의 지리를 그릴 정도라 신속하게 빙주의 숲을 빠져 나갔다. 잠시 후 거대한 동굴광장이 나타났다. 실로 신비스런 풍경이었다. 광장의 천장은 무려 백여 장 높이였 으며, 천장으로부터 거대한 종유석이 갖가지 모습으로 뻗어내려 와 있었다. 더욱 신비한 것은 광장 한복판에 있는 빙담이었다. 그곳으로부터 빙무(氷霧)가 피어올라 주변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 남궁궁은 콧등이 시큰함을 느꼈다. 과거 그는 빙담에 몸을 담근 채 한기를 이기는 수련을 하곤 했었 다. 과거의 기억들이 속속 떠올라 감회가 짙어진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부글부글......! 빙담이 있는 곳에서 반대쪽에는 누런 유황연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곳은 빙담과 정반대로 뜨거운 열기를 뿜는 유황담이 끓고 있었다.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같은 장소에 극한과 극열의 두 가지 연못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은 전대미문 의 일이었다. 남궁궁은 태어난 지 일 년 후부터 빙담과 유황담에 번갈아 몸을 담근 채 가혹한 수련을 해야 했다. 그로 인해 그의 내공은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고강해질 수 있었다. 그는 광장을 가로질러 안쪽으로 뻗어 있는 통로로 들어섰다. 얼마쯤 가자 인공으로 다듬어진 석부가 나타났다. 석부로 들어선 순간 온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석전 한복판에는 거대한 솥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솥 주위에 네 명의 노인이 솥을 향해 양 손을 뻗 은 채 빙 둘러앉아 있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남궁궁은 격동 어린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너무나 반가워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그는 네 명의 노 인 중 일신에 마의를 입은 학발동안(鶴髮童顔)의 노인에게 다가갔다. 눈처럼 흰 백발이 허리춤까지 내 려와 있었으나 기이하게도 얼굴은 동자처럼 해맑은 모습이었다. "할아버지...! 무사하셨군요." 남궁궁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어 다른 세 명의 노인들을 바라보았다. 학발동안의 노인 옆에는 보통 사람의 두 배가 넘는 거구의 흑삼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은 안색의 대춧빛이었는데 눈은 장비의 그것처럼 부릅뜬 고리눈이었다. 흑삼노인의 옆에는 남녀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모습의 노인이 정좌하고 있었다. 일신에는 홍의를 입었는데 피부는 백옥처럼 희고, 앞으로 내민 손도 미녀의 섬섬옥수처럼 곱기만 했다. 얼굴 또


한 어찌 보면 남자 같고, 어찌 보면 여자 같아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마지막 노인은 근엄해 보였다. 그는 금포를 입었으며 무릎 위에는 한 자루의 검을 올려두고 있었다. 매부리코에 날카로운 눈, 관우처럼 길게 기른 턱수염이 만인을 압도하는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그들 네 명의 노인들은 솥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앉은 채 양손을 뻗은 자세였다. 남궁궁은 한동안 기다렸다. 노인들은 한창 중요한 고비에 와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남궁궁은 점차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마의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가슴이 철렁해졌다. "설마...!" 남궁궁은 벌떡 일어섰다. 마의노인은 물론 다른 세 노인은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호흡은 완전히 정지되어 있었다. "이럴 수가...!" 남궁궁은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알고 보니 네 노인은 이미 숨진 것이었다.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 것 은 그들의 내공력이 초상승에 접어들어 죽은 후에도 영원히 신체가 썩지 않는 금강불괴지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으아아아......!" 남궁궁의 입에서 비통에 찬 부르짖음이 흘러나왔다. 일 년만에 돌아온 무애곡! 그를 맞이한 것은 죽음이었다. 백원의 죽음, 화노의 죽음, 사부이자 할아버지인 천치옹과 세 노인들의 죽음.... 게다가 소군이 겁탈당한 채 실종되고 말았다.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은 일이었다. 마침내 남궁궁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왁! 하는 외마디 비명 과 함께 피를 토하며 혼절하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남궁궁은 정신을 되찾았다. 그의 안색은 백랍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이를 악 물었다. '이럴 때가 아니다. 할아버지의 사인을 밝히고 복수해야 한다!' 그는 심호흡을 하여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는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시 후 그는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솥을 중심으로 앉아 있는 네 분의 방위가 이상하다. 뭔가 빈 듯한 느낌이다.' 네 사람이 앉는다면 당연히 사상(四象)의 방위를 이루어야 했다. 그러나 사인이 앉은 방위는 각기 목 (木), 금(金), 화(火), 토(土)의 방위로 수(水)에 해당하는 방위가 비어 있었다. 남궁궁은 수 방위의 자리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의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역시 돌로 된 바닥에는 은은히 누군가 앉아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남궁궁은 놀라 부르짖었다. "여기 앉았던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그것은 실로 중대한 발견이었다. 남궁궁은 다시 사인의 노인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가 어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남궁궁은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는 다시 사 인의 주위를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한 가지 의문이 일어났다. '대체 할아버지와 이 분들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셨던 것일까?' 남궁궁의 머리는 차츰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 분들의 손바닥이 하나같이 솥을 향해 뻗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삼매진화(三昧眞火)로 솥 속에 들어 있는 무엇인가를 녹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솥 속을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강렬한 약냄새가 풍겼다. 그의 뇌리에 번뜩 떠오 르는 것이 있었다. -궁아야, 이 할아비에게 일 년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 동안 강호에 나가 경험을 쌓도록 해라. 네가 돌아오는 날 할아비는 널 위해 선물을 하나 준비할 것이다. 남궁궁은 갑자기 머리가 환해짐을 느꼈다. '할아버지는 지난 십수 년 동안 온갖 기약영초(奇藥靈草)들을 채집해 오셨다. 그렇다면....' 그는 사인의 노인들을 바라보았다. '이 분들은 한 가지 단약을 연단하기 위해 체내의 삼매진화로 솥을 달구신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단 약이 완성되는 순간 누군가 배신하고 이 분들을 암습한 후 단약을 훔쳐간 것이다.' 남궁궁은 수 방위에 남아 있는 흔적을 노려보았다. '이곳에 앉아 있던 자가 범인일 것이다.' 그는 천치옹을 바라보았다. 천치옹은 오래 전 무림에서 단맥된 것으로 알려진 전진문(全眞門)의 문주로 전설의 도문인 전진의 비 학과 절기를 한몸에 지닌 인물이었다. '......?' 천치옹은 마치 남궁궁을 향해 미소를 짓는 듯한 온화한 표정이었다. 물론 나머지 삼 인의 표정도 하 나같이 흐뭇해 보였다. 그 모습에는 마치 숭고한 희생을 감내하는 자의 흡족한 의기가 어려 있는 것 도 같았다. 남궁궁은 죽음 앞에서 이렇게 여유로운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의아하기만 했다.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다. 아무리 급습을 당했다지만 이 분들이 어찌 이 자세


그대로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이 분들은 죽기 직전 무엇인가를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는 우선 시선을 돌려 사 인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손바닥은 거정에 바짝 밀착되어 있었다. 그러나 눈으로만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남궁궁은 한동안 망설이다가 마의노인을 향해 삼 배를 올렸다. "할아버지, 유체에 손대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그는 조심스럽게 마의노인의 유체에 손을 대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스스스스...! "앗!" 남궁궁은 대경실색했다. 그의 손이 마의노인의 시체에 닿자마자 시신이 가루가 되어 흘러내렸던 것이 다. 그는 자신의 경솔함에 대해 발등을 찍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전화위복이 될 줄 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이럴 수가......!" 시신의 가루 속에서 은은한 광채가 발산되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것은 주황색 빛깔을 띤 한 알의 보주에서 뿜어나오고 있었다. "원정내단(元精內丹)......!" 그는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원정내단은 최소 이백 년 이상의 내력을 지닌 자가 일종의 연단법 을 취하게 되면 체내에 형성되는 것으로 누군가 원정내단을 취하게 되면 그가 지닌 내력을 고스란히 이어받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원정내단을 연단하게 되면 유체를 보존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었다. 만일 천치옹이 원정내단을 연단하지 않았다면 그의 공력으로 보아 능히 금강불괴지신이 되어 유체를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손자를 위해 원정내단을 남긴 것이었다. "할아버지......!" 남궁궁의 천치옹이 필시 자신을 위해 원정내단을 남겨 두었다고 생각되자 격동을 금치 못했다. 그는 천치옹의 재가 된 시신 속에서 원정내단을 주어 품속에 갈무리했다. - 궁아야, 널 위해 그 동안 준비해 왔던 선물을 할아비의 원정내단을 취해 부디 뜻을 이루기 바란다.

빼앗기고 말았구나. 대신에 이

남궁궁의 귓전에서 그런 유시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는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할아버지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아울러 할아버지를 이렇게 만든 자를 찾아 기필코 복수하고야 말겠습 니다.' 그는 무릎 꿇고 천치옹의 시신 가루를 손으로 모았다. 유체를 거두기 위함이었다.


그러던 차 그의 눈 이 번쩍 빛났다. 바닥에 깨알같이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는 같은 글이 남겨져 있었다.

것을 발견한 것이다. 거기에는 다음과

<하늘의 가호가 있다면 궁아가 이 글을 읽을 수 있으리라.......> 글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할아버지......." 남궁궁은 눈물을 삼키며 글씨를 읽어보았다. <노부 천치옹은 우내오천(宇內五天) 중에 일원으로 석년에 우리들은 힘을 합쳐 무림을 혼란에서 구제 해 낼 한 사람의 재목을 키우기로 합의했다.> 남궁궁은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할아버지께서 우내오천의 한 분이셨다니.......' 그는 강호를 주유하며 우내오천에 대해 귀가 따갑게 들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그들 중 일원이라니, 실로 뜻밖이었다. <무림에는 오래 전부터 삼도(三道)의 설(說)이 전해져 왔다. 왕도, 패도, 마도가 그것이니 언제고 삼도 가 도래하면 무림은 극도의 혼란에 처하리라는 것이 현자의 예언이었다. 우리 오천은 그날을 대비하 기 위해 한 절세기재를 발견하여 공동으로 그에게 무림의 운명을 맡기게 되었다. 그가 바로 제왕천을 세운 바 있는 무림왕(武林王) 남궁후(南宮侯)였다.> 남궁궁은 왠지 가슴이 심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무림왕 남궁후.... 남궁후라고?' 그는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성이 같다는 이유 이상으로 없는 격동을 주 었던 것이다.

그의 가슴에 알 수

<......우리들은 실패했다. 남궁후는 비록 천고의 기재이기는 했으나 우리들이 바라는 왕도(王道)의 재 목은 되지 못했다. 그는 차츰 패도(覇道)로 기울어 갔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다만 평소 패 도를 선호했던 벽력뇌신제(霹歷雷神帝)만은 무림을 평정하는 데는 왕도보다 패도가 낫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남궁후가 세운 제왕천은 무림을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남궁궁은 점차 글 내용에 빠져 들어갔다. 천치옹이 남긴 밝히는 중대한 것이 었다.

글이야말로 무림비사를

<문제는 제왕천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남궁후는 오직 무력(武力)으로 무림을 다스 리려 했기에 덕(德)를 쌓는 일에 실패했다. 따라서 차츰 정사무림(正邪武林)이 제왕천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다. 지나치게 강한 것은 언제고 균열이 가듯.......> 남궁궁은 한숨을 쉬었다. 천치옹의 글에는 심오한 인생의 진리가 들어 있었다. 강한 것은 부러진다는 진리를 설파하는 듯했다. <우려는 사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제왕천의 앞날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급기야 무림에 이상기류가 감도는 것을 느끼고 제황천에 위기가 도래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노부가 그곳으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불행한 일이 벌어진 뒤였다.......> 남궁궁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은 것을 느꼈다. '불행한 일이라면?' 그는 급히 다음 글을 읽어 내려갔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제왕천이 초토화된 채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내를 이루고 있었다. 놀라운 것 은 제왕천을 붕괴시킨 흉수였다. 그들은 정과 사를 망라한 정사무림연맹이었던 것이다. 결국 무림을 평정하려던 남궁후는 그의 지나친 패도로 인해 파멸에 빠지고 만 셈이다.> 남궁궁의 가슴이 서늘해짐을 금치 못했다. '정사무림연맹이 제왕천을 무너뜨렸다고? 남궁후란 분이 패도란 이유만으로? 절대 악인이 아닌 데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남궁궁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가

<노부는 지옥도로 화한 제왕천에서 기적과도 같은 일을 만났다. 잿더미 속에서 한 여인의 시신을 발 견했는데 그 여인의 품에서 아직 살아 숨쉬고 있는 어린아이를 구출하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남궁궁은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혹시......!' 그는 급히 다음 글을 읽었다.


<그 아이는 손에 옥패(玉牌) 하나를 쥐고 있었다. 그 옥패는 죽은 여인의 몸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이 를 본 순간 노부는 바로 남궁후의 친자(親子)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남궁궁은 충격을 받으며 비틀거렸다. '남궁후의... 친자라고?' <아이는 불에 달아오른 옥패를 움켜쥔 바람에 손바닥에 옥패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노부는 아이의 손바닥에 새겨진 문양을 본 순간 아이의 운명을 절감하게 되었다.> 남궁궁은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 왼손을 한 번도 펼쳐본 적이 없었다. <결국 노부는 그 아이를 데려오게 되었다. 이후 아이를 손자로 삼았으며 이름을 남궁궁이라 지어주었 다.> "아.....!" 남궁궁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까지 안개에 가려져 있었던 그의 신세가 확연히 밝혀진 것이다. '무림왕 남궁후가 부친이었다니......!' 남궁궁은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후 노부는 궁아를 위해 여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노부는 우내오천을 다시 소집했다. 우리들은 궁아를 통해 왕도를 이룩하는 것이 마지막 소명이라는 데 합의하게 되었다. 심사숙고한 끝에 우리는 천단신약(天丹神藥)를 연단하기로 결정했다. 천단신약은 팔만사천 종의 기약영초를 이백 년 이상의 내 공을 지닌 고수 오 인이 체내의 순수한 삼매진화로 태워 연단하는 것으로.......> ③ 우내오천은 천빙동에 솥을 걸고 연단에 들어갔다. 팔만사천 종의 영초를 솥에 넣고 삼매진화로 연단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천단신약을 만드는 것은 하 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완성을 위해 소비되는 기간만 일 년 이상이 걸림은 물 론이고 오 인의 개세고수들의 내공력을 바쳐야만 했다. 남궁궁은 그 동안 강호에 나가 경험을 쌓게 했다. 그가 돌아오는 시점에 연단이 완성되게 되어 있었 다. 그런데 어찌 알았으랴! 연단이 완성되는 순간 우내오천 중 한 명이 배신할 줄이야! 연단은 지극히 위험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오 인의 내력은 오행(五行)의 흐름에


따라 하나의 힘으로 작용해야 한다. 만일 한 명이라도 그 흐름을 고의로 역행시키면 나머지 사 인은 피를 토하고 즉사하 거나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불사불생인(不死不生人). 그는 벌써부터 변심(變心)한 인물이었다. 그는 연단이 완성되는 결정적인 순간에 사 인을 암습하고 솥 속에서 천단신약을 탈취해 가 버린 것이다. 그는 사 인이 죽었으리라 확신하고 석부를 유유히 떠나 버렸다. 그러나 그도 미처 모르는 사실이 있었으니! 사 인은 죽기 직전 마지막 생명력을 모아 한 가지 비장의 안배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진력을 체내에 원정내단(元精內丹)으로 결집한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숨이 넘어 가기 직전 그들은 바닥에 자신들의 절기(絶技)를 새겨두었다. 남궁궁이 돌아와 자신들의 주검을 보고 그들의 안배를 이어받도록 조치한 것이었다. "아아......!" 바닥의 글을 모두 읽은 남궁궁은 장탄식을 불어냈다. 그의 눈에서는 뿌연 안개가 서렸다. '그 동안 이런 일이 일어났다니.......' 그는 시선을 돌려 노인들을 둘러보았다. 한동안 그는 석상처럼 그 자리에 굳어졌다. 잠시 후 그는 바 닥에 엎드렸다. "제자 남궁궁... 맹세하옵니다. 네 분의 유지를 받들어 왕도를 이루겠습니다. 아울러 하늘끝, 땅끝까지 라도 찾아가 배신자 불사불생인을 찾아 복수하고야 말겠습니다." 남궁궁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집념의 불꽃이 흘러나왔다. "제자 아둔하여 왕도가 무엇인지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 유지 를 받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울러 이 땅의 마의 세력을 제거하여 무림의 평화를 이룩하겠습니다." 남궁궁은 천치옹을 시작으로 사 인의 노인들에게 일일이 구배(九拜)를 올렸다. 그것은 사도지례(師徒 之禮)였다. 예를 끝낸 그는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눈썹이 부르르 떨렸다. '때가 왔다. 이제 더 이상 감출 것이 없다.' 그는 왼손을 펴기 시작했다. 아직 한 번도 펼쳐본 적이 없던 손바닥이다. 그는 결심했다. 손바닥을 펼 쳐 그 속에 어떤 운명이 새겨져 있는지를 똑똑히 보기로. 남궁궁의 가슴이 무섭게 진동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말발굽 소리보다 더 크게 울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주먹을 폈다. "......!" 남궁궁은 부릅뜬 눈으로 손바닥을 뚫어져라 보았다. 손바닥!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왕(王)> 놀라운 일이었다. 너무도 선명하게 새겨진 한 글자! 그것은 왕(王)자였다. "왕.... 이런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니......!" 실로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 왕도 2 권 제 11 장 네 개의 하늘이 빚어낸 또 하나의 하늘 ━━━━━━━━━━━━━━━━━━━━━━━━━━━━━━━━━━━ ① 음양환사(陰陽幻邪). 우내오천 중의 한 명인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기도 했다. 음양(陰陽)이란 말이 의미하듯이 그는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음양지간(陰陽之間)의 인물이었다. 그는 낮에는 남자로 행동하다가 밤이 되면 여인으로 변하는 불행한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로 인해 음양환사는 태어나면서부터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저주받은 신체를 비관하며 하늘을 원망해 왔다. - 우하하... 병신! -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라니, 정말 괴상한 놈이야! - 으헤헤... 이봐, 바지를 내려 봐. 계집인지 사내놈인지 좀 보자구! 음양환사의 일생은 한 마디로 모멸 속에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불운한 생에 도 빛이 찾아들었다. 어느 날 생각지도 않았던 기연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음양환사가 십오 세가 되던 해, 그는 사람들의 조롱을 피해 한적한 숲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숲 속을 이리저리 헤매다 다람쥐를 발견했다. 무료함을 달랠 겸 다람쥐의 뒤를 쫓던 그는 다람쥐가 한 고목나무에 뚫린 구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다람쥐를 잡기 위해 손을 구멍 안으로 깊숙이 집어넣었다. 손끝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꺼내 보 니 그것은 하나의 목갑이었다. 의아한 그는 목갑을 열어보았다. 목갑 속에는 한 권의 책자가 들어 있 었다. 그 책자는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그것은 오백 년전에 사라졌던 한


문파의 비전비급으로 천마천요비전(天魔天妖秘傳)이란 무공비급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음양환사는 학문에 조예가 있어 천마천요비전을 해독할 수 있었다. 그는 천마천요비전이 사악 하기 이를 데 없는 무공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갈등했다. 천성이 착했던 그는 사공을 익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뇌리에 자신을 비웃고 조롱하던 사람들의 얼굴이 자꾸만 스쳐갔다. 마침내 그는 결심했다. 자신을 비웃고 능멸하던 세상을 향해 복수하기 위해서는 힘! 힘을 키워야 한다 고. 그날부터 천마천요비전을 익히기 시작했다. 자질이 뛰어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을 익힐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그는 음양마유공(陰陽魔幽功)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사람의 정신을 완 벽하게 두 개로 분리시킬 수 있는 신공이었다. 만일 그가 정상인이었다면 음양마유공을 완벽하게 익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천성적으로 음과 양 의 양성을 지니고 태어났으므로 마음과 몸을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는 음양마유공을 자연스럽게 체득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더욱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점차 그의 심성(心性)이 변하기 시작했다. 본래 선량했던 그는 음양마유공을 익히면서 자신도 모르게 사악한 마음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음양마유공을 속성(速成)으로 익히기 위해서는 낮에는 남자로, 밤에서 여자로 환신하여 정사(情事)를 치름으로써 순양지기와 순음지기를 흡수하는 대법을 시행해야 했다. 처음 그는 절대로 그 방법을 쓰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성욕(性慾)이 강해지면서 차츰 남녀를 음양마유공의 희생자로 만들게 되었다. 그로 인해 무림에서는 희대의 음마(淫魔)가 탄생하게 되었다. 강호는 민심이 흉흉해지고, 곳곳에서 희 생자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음양환사의 무공은 점점 더 강해지게 되었다. 마침내 음양환사란 이름은 강호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게 되었다. 무림에서는 그를 공적(公敵)으로 선포하게 되었다. 그를 죽이기 위해 수많은 정사고수들이 천하를 이 잡듯이 뒤지게 되었다. 아무리 음양환사의 능력이 뛰어나다지만 천하인들을 상대로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무림인들에 게 쫓겨 은둔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악행만 자행한 것은 아니었다. 강호를 횡행하는 와중에 만색교(萬色敎)를 창건하여 무림 을 어지럽히고 있던 희대의 색녀 만색부인(萬色婦人)을 제압한 적도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천치옹과 만나게 되었다. 당시 무림에서 천치옹은 절대고수로


군림하고 있었다. 음양환사는 천치옹을 만난 순간 호승심이 일었다. 비록 전무림의 공적이 되어 쫓기는 몸이었으나 그 는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고 싶었다. 급기야 두 사람은 일대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경천동지할 천합(千合)의 싸움! 결과는 전진(全眞)의 기인인 천치옹의 승리로 끝났다. 천치옹은 그에게 당장 음행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음양환사는 순순히 그 말을 따랐다. 이후 그는 초인적인 인내로 다시는 음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 음양마유공(陰陽魔幽功). - 팔륜대금수(八輪大禁手). 음양환사는 자신이 앉아 있던 바닥에 두 가지 비학을 남겼다. 음양마유공은 일종의 분심술(分心術)로 이를 시전하면 마음을 둘로 나눌 수 있어 동시에 두 가지 생각 을 할 수 있었으며, 양 손으로 두 가지의 절기를 함께 시전할 수가 있었다. 팔륜대금수(八輪大禁手)는 천하에서 오직 음양환사만이 펼칠 수 있는 무공이었다. 이 무공은 음양마유 공을 익힌 자만이 펼칠 수 있는 절기로 양 손으로 팔륜법(八輪法)을 동시에 시전할 수 있는 절학이었 다. 팔륜법은 다음과 같았다. 상대방의 공격을 반탄지기로 퉁겨내는 탄륜(彈輪), 상대방의 공격을 해소시키는 화륜(和輪), 상대방의 공력을 이화접목의 수법으로 엉뚱한 곳으로 옮기는 이륜(移輪), 상대의 힘을 분산시키는 분륜(分輪), 상대의 힘을 유도하여 합치는 합륜(合輪), 상대방의 공력을 흡수하는 흡륜(吸輪), 상대방의 공력을 떨 쳐내는 진륜(振輪), 상대의 공력을 모아들였다 한순간에 터뜨리는 폭륜(爆輪). 그야말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절학이었다. 남궁궁은 음양환사가 바닥에 남긴 구결을 머리 속에 담으며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사부(二師父)의 절학은 실로 괴이무쌍하구나. 하나같이 상상도 못한 기학들이다.' 그는 일단 음양환사의 비공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음양마유공은 바로 실전을 행할 수 없는 신공이므 로 심법구결을 중심으로 익혀야 했다. 시간을 쉴새없이 흘러갔다. 그 동안 남궁궁은 온 정신을 기울여 음양환사가 남긴 무학을 익혔다. 어느 정도 그의 무학을 체득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그는 다음 무학을 살펴보았다. 벽력뇌신제(霹靂雷神帝). 그는 본시 장군부(將軍府)의 서자로 태어났다. 서자란 평생을 그늘에 살아야 하므로 결국 그는 장군부


를 뛰쳐나와 강호에 투신하게 되었다. 그는 타고난 신력(神力)과 무인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의 성격으로 인해 강호의 세파에 시 달리면서도 하루가 다르게 강인해져 갔다. 그는 주로 힘을 바탕으로 하는 도법(刀法)과 장법(掌法)에 몰두하게 되었다. 관가에서 출세에 뜻을 잃 은 그는 무공광인이 되어 강호를 주유하면서 숱한 도법과 장법을 연구했다. 결국 만년에 이르러 무학의 초야에 은거하여 새로운 무학의 경지를 탐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인적 이 닿지 않는 뇌봉산(雷峯山) 정상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도를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그 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휘우우웅......! 스산한 바람이 산야를 쓸어갔고 달은 먹구름에 가려 빛을 잃고 있었다. 문득 천지를 갈라치는 듯한 뇌성벽력이 떨어졌다. 하늘을 반으로 쪼갤 듯한 거대한 섬전이 도에 내려꽂혔다. 벽력뇌신제는 고스란히 벼락을 맞고 말았 다. 만일 범인(凡人)이었다면 그 즉시 숯덩이가 되어 즉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예상치 못했던 엄청난 기연(奇緣)이 찾아왔다. 벼락을 맞은 순간 심득(心得)를 깨우 치게 된 것이었다. 벽력뇌강심법(霹靂雷 心法). 파천뇌정도법(破天雷霆刀法). 이 두 가지 가공할 무공을 한순간에 깨우친 것이었다. 그로 인해 그는 당당히 우내오천의 일 인이 되 었다. 그가 깨달은 무학은 가히 고금미증유의 패도지학(覇道之學)으로 전해 내려오게 되었다. 벽력뇌강심법은 우주가 빚어내는 뇌전(雷電)을 이용하여 내공을 연마하는 특이한 공부였으며 파천뇌정 도법은 벽력의 기운을 도에 실어 뿜어내는 최강의 도법이었다. 파천섬뢰(破天閃雷). 천폭파뢰(天爆破雷). 구천뇌정만리홍(九天雷霆萬里紅). 등의 삼초식으로 이루어진 파천뇌정도법으로 그는 무림사상 도의 일인자라는 칭호를 듣게 되었다. 검왕(劍王). 그는 검도 사상 최강의 인물로 역시 우내오천의 일원이었다. - 검왕의 앞에서는 검을 논하지 마라. 그것은 마치 대해(大海) 앞에서 항아리의 물을 기울여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무림인들은 한결같이 검왕의 검법을 천하제일검으로 손꼽았다. 그러나 아무도 검왕의 내력에 대해 아는 자가 없었다. 다만 풍문으로 그가 황족(皇族)이라는 설이 나 돌 뿐이었다. 사실 그는 황족 출신이었다.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황궁이 싫어 스스로 한 자루 고검(古劍)을 벗삼아 강호를 유랑한 기인이었다. 그는 황궁무고(皇宮武庫)에서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검경(劍經)을 취득했다. 따라서 강호에 나 왔을 때 이미 검에 관한 한 적수를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검법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심혈을 기울여 자신만의 검법을 창 안해 냈다. - 검법에 왕도(王道)는 없다. 몸과 마음이 일체가 될 때 천, 지, 인을 합일하면 그것이 곧 천검(天劍) 이요, 정검(正劍)이 된다. 그는 초식이란 진정한 검도를 방해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검법을 독파한 그는 단순한 것이 복 잡한 것을 능가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 강한 것은 부러지나 부드러운 것은 휘어질 뿐이다. 검왕이 바닥에 남긴 검법의 구결(口訣)은 실로 오묘한 것으로 형식에 얽매여 있는 검법이 아니었다. 제왕검류(帝王檢流). 그런 이름이 붙어 있는 검결은 전삼식 후삼식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전삼식은 수비 위주의 검법이었 고, 후삼식은 공격 일변도였다. 검왕의 제왕검류를 익히는 데는 기수식(起手式)이 가장 중요했다. 검왕은 완벽한 발검술(拔劍術)이야 말로 완벽한 검도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남궁궁은 우내삼천의 무학이 개개인마다 개성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검왕의 제왕검류 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따라서 그는 주로 제왕검류를 익히는 데 몰두했다.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갔다. 그 동안 남궁궁은 천빙동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정갈하던 백의는 걸레가 되다시피 했으며 머리카락은 온통 봉두난발이 되고 말았다. 그러 나 그는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② 전진기환천보(全眞奇幻天譜). 공문진경(空門眞經). 그것은 천치옹이 남긴 무학이었다. 남궁궁은 그 두 권의 비급을 천치옹이 기거하던 처소의 침상 아래서 발견했다. 그는 이미 음양환사, 벽력뇌신제, 검왕의 무학을 익혔으므로 마지막으로 천치옹의 무학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는 지난 십육 년 동안 천치옹으로부터 무학을 전수받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기초무 학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밖에도 화노로부터 무학을 이어받기도 했다. 사실 그가 강호를 주유하면서 시전했던 무학은 그에게서 전수받은 것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무 림에서 이름을 떨칠 수 있었으니 그만큼 화노의 무학은 대단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흑도대종사(黑道大宗師) 화불군(華不君). 그것이 화노의 정체였다. 그는 본시 사악하고 흉폭한 인물로 과거 흑도인들을 규합하여 흑천풍(黑天風)이란 단체를 결성하여 무 림을 어지럽힌 바 있었다. 그의 횡포가 극에 이르자 천치옹은 그를 만나 악행을 중지하라고 명했다. 물론 화불군이 그 말을 들 을 리가 없었다. 결국 두 사람 은 사투를 벌이게 되었고, 그 싸움에서 패배한 화불군은 천치옹에게 굴 복하게 되었다. 처음 화노는 단순히 힘에 굴복했을 뿐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천치옹의 인품에 진정으로 감복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치옹은 핏덩이인 남궁궁을 무애곡으로 데리고 오자 화노는 마치 친손자처럼 보살 피게 된 것이었다. 그는 남궁궁을 사랑한 나머지 그에게 자신의 전무예를 전수해 주기도 했다. 남궁궁은 먼저 전진기환천보를 익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과거 배교(拜敎)에서 내려온 사술(邪術)과 흡 사했으나 근본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전진의 기환술은 괴이하기 그지없었다. 돌, 물, 나무, 흙, 바람, 눈, 비 따위의 자연을 이용한 은형술 (隱形術)에서 천기조차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기학이었다. 용모와 음성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변환술(變幻術). 각종 사술(邪術)과 마의 대법을 전문적으로 파괴하는 파사기환술(破邪奇幻術). 사람의 마음을 제압하는 제심술(制心術). 짐승을 부릴 수 있는 만금제종술(萬禽制從術). 한 시진 내에 천리를 달릴 수 있는 무풍천승비(無風千乘飛)....... 가히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듯싶은 기학이 망라되어 있었다.


'전진의 기환술은 정말 흥미로운 공부로구나.' 남궁궁은 기환술에 대해 큰 흥미를 느꼈다. 만일 보통 사람이 이를 연마한다면 사승 없이는 불가능했 을 것이다. 그만큼 기오했던것이다. 그러나 남궁궁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스스로 익힐 수 있었다. 그것은 이미 삼 인의 기인들의 무학을 익혔기 때문에 그의 오성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공문진경(空門眞經)은 공문이 남긴 최후의 비경이었다. 공문절학은 소림불공(少林佛功)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소림불공이 외력에 주력한다면 공문불 공은 내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 틀렸다. 남궁궁은 밤낮을 잊은 채 공문절학에 심취해 들어갔다. 내공편(內功篇). 신법편(身法篇). 장공편(掌功篇). 공문진경은 세 편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내공편에는 공문심법(空門心法) 팔대심공(八大心功)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창허무궁심법(蒼虛無穹心法). 탕마무해심법(蕩魔霧解心法). 광륜전심공(廣輪轉心法). 대비신공(大悲神功). 대승불력기(大乘佛力氣). 건천소화신공(乾川銷火神功). 가람신공(伽藍神功). 다라만다니심공(多羅蔓茶尼心功). 팔대심공은 하나하나마다 효용가치가 무궁무진했다. 어떤 면에서는 소림의 불공을 능가할 정도였다. 신법편에 기재되어 세 가지 중에서 첫째는 천무영(天舞影)이란 신법이었다. 그것은 시전하게 되면 수 많은 환영이 나타나 상대의 시야를 흐르게 한다. 무림에 알려진 전설적인 신법 이형환위(異形幻位)보 다 월등한 신법이었다. 또한 연대백팔좌(蓮坮百八座)란 신법도 수록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극성에 달하도록 연마하면 백팔 개 의 좌상이 나타나게 되는 신비한 신법이었다. 세 번째 신법은 허무보(虛無步)였다. 취팔선(醉八仙)과 유사한 이 보법은 시전하게 되면 상대가 신형 을 종잡을 수 없게 되는 신비한 보법이었다. 남궁궁은 신들린 듯이 신법을 연마했다. 지금까지 그가 익힌 무학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들이라 익히


면 익힐수록 묘미를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장공편을 펼쳤을 때,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장공편이야말로 공문절학의 총화였던 것이다. 공문의 장법은 부드럽고 끈질긴 것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무형 중에 발산되는 압력은 여타의 패도적 인 장공을 능가했다. 가히 태산을 무너뜨릴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무형심인(無形心印)은 소리와 파동이 전혀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일반적인 무형장과 다른 점이 있다 면 상대방의 육체에 뚜렷한 장인이 남는다는 것이었다. 오행장(五行掌)은 수, 금, 목, 화, 토의 다섯 가지 기류를 마음대로 실을 수 있으며 십성 이상의 성취 를 이루게 되면 오행지기(五行之氣)를 한꺼번에 발출시킬 수도 있었다. 회풍금륜장(廻風金輪掌)을 익히면 장심(掌心)으로부터 금빛의 광륜(光輪)이 발출되어 마치 륜처럼 자유 자재로 회전하며 날아간다. 따라서 상대는 방향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일단 적중되면 그것으로 끝장 이었다. 장공편에는 한 가지 권법도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 그것은 천강권(天 拳)이었다. 한꺼번에 삼백육심오 권을 연속 발출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남궁궁은 장공편을 훑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천강권은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에는 적당한 권법이다. 잘 연마하면 크게 유용할 것이다.' 장공편이 가장 두터웠다. 세 가지 장공과 한 가지 권법 외에도 여러 가지 공문절학이 망라되어 있었 다. 특이한 것은 무상공공력(無常空空力)이란 무공이었다. 그것은 부드럽고 끈질긴 기운을 지니고 있어 상 대방의 진력을 일단 끌어들였다가 되돌려 치는 신비한 타법이었다. 더욱 기이한 것은 상대방의 공력 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위력이 더해진다는 것이었다. 일자허공참(一字虛空斬). 그것은 단 일수(一手)에 만균뇌정의 힘을 내지르는 것으로 평소 공력의 세 배까지 한꺼번에 격발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약점이 있었으니 연속 두 번을 펼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만 시전해야 한다는 각주가 붙어 있었다.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무학들이다. 공문의 비학이 이토록 뛰어날 줄이야......!' 남궁궁은 새삼 경건한 느낌이 들었다. "할아버지, 그리고 사부님들! 보잘 것 없는 궁아를 위해 남긴 이 은덕을 어찌 갚아야 합니까? 이 순간 부터 궁아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제가 입은 은혜는 뼈에 새겨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아울러 흉수를


찾아 복수하는 일과 여러분의 뜻을 받들어 무림을 위해 몸을 바칠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이렇게 중얼거리는 남궁궁의 눈에서는 무쇠라도 녹일 듯한 뜨거운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③ 휘이잉... 위잉......! 살을 에는 듯한 한풍이 대설산을 휩쓴다. 빙천봉의 정상에는 한 인물이 정좌하고 있었다. 그는 대설산의 빙봉들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앉아 있 었다. 얼굴은 봉두난발에 뒤덮였으며 입고 있는 옷은 누더기나 다름없었다. 그야말로 거지 중의 상거지와 같은 모습이었다. 매서운 한풍이 빙천봉을 스쳐갔다. 그 바람에 봉두난발에 가려져 있던 그의 얼굴이 잠깐 드러났다. 그는 눈을 떴다. 순간 태양보다 강렬한 안광이 번쩍 빛났다. 그는 다름 아닌 남궁궁이었다. 그는 우내사천의 무공을 모두 익혔다. 또한 그들이 남긴 원정내단을 복용하였으므로 가히 불가사의한 내공력을 지니고 있었다. 우르르릉......!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며 은은한 뇌음(雷音)이 울렸다. 그러나 남궁궁은 일점의 동요도 없이 정좌하고 있었다. 이때였다. 번쩍! 콰르르릉......! 뇌성과 함께 한 가닥 뇌전(雷電)은 남궁궁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놀라운 일이었다. 만일 일반 사람이 벼락을 맞는다면 그 자리에서 숯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궁궁 은 아무렇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벽력뇌신제의 벽력뇌강심법으로 뇌정지기를 흡수한 것이었다. 섬전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그것은 모두 남궁궁의 정수리에 떨어졌으며 그때마다 남궁궁의 몸은 시퍼 런 광채에 감싸였다가 정상으로 돌아오곤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스스스......! 문득 그의 몸이 정좌한 채로 위로 상승했다. 아아! 경이적인 일이었다. 그것은 전설의 부공삼매(浮空 三昧)의 현상으로 내공이 신화경에 이른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현상이었다. 번쩍......! 다시 시퍼런 뇌전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남궁궁은 대자연과 완전히 합일된 듯했다. "하하하핫......!" 문득 남궁궁은 일장대소를 터뜨렸다. 그의 웃음은 대설산을 뒤흔들어 수많은 산사태를


일으켰다. 천지 가 붕괴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만년설을 이고 있는 수많은 봉우리들이 산사태로 무너져 내렸다. 가히 경악할 일이었다. "드디어... 뇌천개정(雷天開頂)을 이루었다!" 굉음 속에서도 또렷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뇌천개정. 그것은 벽력의 힘을 받아들여 체내로 흡수하는 벽력뇌강심법(霹靂雷 心法)이 최고의 단계에 이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 "......." 남궁궁은 산사태로 인해 무너져 내린 빙천봉 정상에 우뚝 내려섰다. 비록 옷차림은 엉망이었으나 그 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도는 천신(天神)의 그것을 보는 듯했다. 그의 입가에서 담담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드디어 사부님들의 절학을 모두 습득했다. 지난 일 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홀연히 장소를 울부짖었다. "우우우우우......!" 쉬앙......! 문득 남궁궁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는 일학충천의 기세로 허공 백장을 삽시에 치솟더니 눈 깜박할 사 이에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가 사라진 방향은 중원 쪽이었다. ④ 와룡둔(臥龍屯). 무창성(武昌城) 교외에 위치하고 있는 그곳은 이름 그대로 용이 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와룡둔은 본시 인적이 뜸한 곳이었다. 이따금 보이는 것은 나무꾼이나 사냥꾼들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풍경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 이곳에 대역사가 진행된 것이다. 인적이 드문 와룡둔에는 한 단체가 보금자리 를 튼 것이다. 풍운맹(風雲盟). 와룡둔 일대의 백만 평을 차지한 풍운맹은 담장의 길이만도 근 백여 리에 달할 정도로 방대한 규모로 축조되었다. 이런 거대한 건축물이 불과 일 년 남짓한 기간에 완성되었다는 것은 가히 불가사의한 일 이었다.


만일 공사를 일반인들이 진행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이하게 공사에 참여한 것은 무림인 들이었다. 수만 명의 무림인들이 직접 공사에 참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엄청난 역사를 창출하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자금이 필요했다. 풍운맹은 그 자금을 천하제일부호인 황금장(黃金莊)의 장주부부인 금적태산규염공 곽충(郭忠)과 천선미랑 교염화(嬌艶花)로부터 도움을 받 았다. 또한 풍운맹의 건축물은 귀장(鬼匠)으로 불리는 만박귀부(萬博鬼夫)가 직접 설계했다. 그는 필생의 심 혈을 기울여 토목지학(吐木之學)과 기문둔갑(奇門遁甲)의 기관학을 총동원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풍운맹은 당금 정도무림의 총본영이 되어 와룡둔에 우뚝 서게 되었다. 풍운맹 총단이 완공되던 날은 전 무림 축제일이 되었다. 무림의 태산북두인 구파일방을 위시하여 대 강남북의 일천제파들이 모두 참가하여 총단의 완공을 축하했다.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초대 풍운맹의 맹주는 무림에 인망을 쌓아온 자비천문선생(慈悲天 文先生) 궁천무(宮天武)가 추대되었다. 궁천무는 풍운팔대세가(風雲八大世家) 중 천하제일지가(天下第一智家)인 천문세가(天門世家)의 가주이 자 팔대세가의 영도자 격인 인물이었으므로 자연 팔대세가가 모두 풍운맹에 가맹한 것이다. 무림 각파의 장문인들은 직접 연판장에 서명함으로써 풍운맹주의 명을 따르기로 맹세했다. 이로써 궁 천무는 명실상부한 무림제일인이 된 셈이었다. 철산(鐵山)은 와룡둔을 마주보고 있는 봉우리다. 아직 춘색(春色)은 완연치 않았으나 철산 정상에 쌓였던 눈은 태반이 녹아 있었다.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철산에서는 풍운맹의 웅대한 건축물을 일목요연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스스스......! 아직은 쌀쌀하기만 한 춘풍이 철산 정상을 스치고 지나갔다. "......." 언제부터인가 그곳에 우뚝 서 있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물처럼 고요한 시선으로 마주 보이는 와룡둔 의 거대한 성채(城砦)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는 바람에 표표히 백의를 휘날리는 그의 모습은 임풍옥수(臨風玉樹)처럼 수려했다. 그는 몹시 특이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다소 각진 얼굴에 양쪽 관자놀이까지 쭉 뻗은 눈썹은 기이 하게도 자색을 띠고 있었다. 헌칠한 키에 잘룩한 허리, 팔다리가 유난히 길었는데 한손에는 화골선(化 骨仙)을 가볍게 쥐고 있었다. 백의청년은 풍운맹의 바라보며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흘렸다.


"후후... 정도무림의 희망이라고? 하지만 머지않아 그 주인이 바뀌게 될 것이다. 풍운맹은 곧 나 남궁 중양(南宮重陽)의 손에 떨어지게 되어 있지. 그것은 무림일통(武林一統)의 전주곡이 될 것이다." 이 무슨 소린가? 풍운맹이 자신의 손에 떨어지다니? 더욱 기이한 것은 그가 남궁궁과 착각할 정도로 닮았다는 사실이었다. 만일 남궁궁을 본 사람이 있다 면 틀림없이 그로 오인할 정도였다. "후후... 이제 구중천(九重天)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가 되었다. 단, 패(覇)를 이룰 것이다. 아버님은 내게 왕도(王道)를 바라지만... 나 남궁중양은 패도가 더 마음에 든다." 구중천(九重天)! 전륜회와 더불어 무림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단체가 아닌가? 그렇다면 남궁중양은 구중천의 인물이었 단 말인가? 신비청년 남궁중양은 품 속에서 금색면구(金色面具)를 꺼내더니 얼굴에 썼다. 금면구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빛이 무섭게 빛났다. "그건 그렇고... 날 사칭하고 다니는 놈을 찾아야겠다. 십절공자(十絶公子)란 외호를 멋대로 차용하며 명성을 어지럽히다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지." 갈수록 놀라운 말뿐이다. 십절공자라면 본의 아니게 남궁궁이 강호에 나왔을 때 그 이름을 빌려 활동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남궁중양이란 자가 바로 진짜 십절공자였던 것이다. "이제부터 패업의 행보는 시작된 셈이다. 하하하하핫......!" 십절공자 남궁중양은 대소를 터뜨리며 어깨를 흔들었다. 스스....... 그의 신형이 흔들 하는가 싶더니 안개처럼 흐려졌다. 그야말로 마술처럼 그는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다만 그 자리에는 그의 웃음 소리만이 메아리가 되어 울릴 뿐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또 하나의 인영이 유령처럼 솟아났다. "구중천, 드디어 꼬리를 드러냈구나. 내 예상보다는 빨랐다. 후훗, 하지만 그래봐야 내 손바닥 안이 다." 나타난 인영은 문사의를 입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등을 지고 있어 용모를 알 수 없었으나 풍채나 음성으로 미루어 중년인으로보였다. "패업을 이루겠다고? 어림없는 소리! 마천(魔天)이 그 동안 준비해 온 것을 안다면 감히 그런 말을 하 지는 못할 것이다." 중년문사는 득의에 찬 웃음을 흘렸다.


"크ᄏ, 아무도 모른다. 뱀이 용이 되고, 용이 뱀으로 화신한다는 것을......." 그의 음성이 허공 중에 흩어졌다. 잠시 후 그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가히 남궁중양에 버금가는 불가사 의한 신법이었다. 그런데.......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중년문사가 사라지자마자 그 자리에 또 하나의 인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는 대략 이십여 세 정도 되어 보이는 인물로, 일신에 흑삼을 걸치고 있었다. 그의 피부는 흑삼과 극 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백지장처럼 창백했던 것이다. "영매(靈魅)." 흑삼청년은 얼음장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자 바로 뒤에서 두 가닥 흑영이 마치 땅 속에서 솟아난 듯이 나타났다. 역시 흑삼을 입은 두 명 의 소녀였다. 그녀들은 생김새가 쌍둥이처럼 닮았다. 창백한 피부와 푸른 눈, 오똑한 콧날로 미루어 그녀들이 이국 인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두 소녀는 흑삼청년의 발 아래 엎드렸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 두 소녀는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흑삼청년은 음침하게 말했다. "마라문(魔羅門)의 뜻이 중원에서 이루어질 것 같으냐?" 소녀들은 추호도 망설임없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확신하옵니다!" "어째서지?" "소종사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내 뜻?" "그렇사옵니다." 청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선처럼 그어졌다. "내 뜻은 마도에 있다. 마라문 역시 마도를 지향한다. 무림에는 오래 전부터 삼도(三道)의 전설이 내 려왔지. 그 중 어느 쪽이 유아독존(唯我獨尊)할지 아직은 모른다." "......." 소녀들이 망연한 표정으로 흑삼청년을 바라보았다. "후후! 하지만 마라문의 천 년 숙원이 이룩될 시점이 왔다. 때는 무르익었다. 난 준비를 끝냈다. 남은 것은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 뿐이다."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옵니다." 쌍둥이 소녀들은 다시 동시에 대답했다. 그녀들의 푸른 눈은 지금껏 한시도 흑삼청년으로부터 떨어지 지 않았다. 그녀들은 흑삼청년에게 지극한 연모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흑삼청년은 풍운맹의 성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곳은 본문이 자리잡기에 더없이 적합한 곳이다. 천 년의 대업을 시작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곳이 다." 그는 눈을 가늘게 했다. 가느다란 눈에서 섬광과도 같은 빛이 찰나적으로 흘러나왔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원칙이 중요하다. 방심은 금물, 계획에서 한 치도 벗어나선 안 된다. 알겠느냐?" 쌍둥이 소녀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사옵니다!" "가자." 스슷......! 괴청년의 모습이 흐려졌다. 그와 동시에 두 쌍둥이 소녀의 모습도 씻은 듯이 자취를 감추었다. 휘이잉! 바람이 거세졌다. 비록 봄기운을 품고 있기는 했으나 아직은 싸늘한 바람이었다. ■ 왕도 2 권 제 12 장 흑천풍(黑天風)의 부활 ━━━━━━━━━━━━━━━━━━━━━━━━━━━━━━━━━━━ ① 관도(官道). 황혼빛을 받은 호북대로는 왠지 섬뜩한 느낌을 준다. 우두두두두......! 갑자기 마차바퀴 소리가 급촉하게 울려왔다.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온 마차는 네 필의 말이 몰고 있었다. 어찌나 빠르게 달렸는지 말의 입에서는 거품이 잔뜩 일고 있었다. 히히히힝......! 말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구슬픈 비명을 토해냈다. 아니나 다를까?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듯 갑자 기 요란하게 흔들리더니만 두 마리의 말이 앞발굽을 꺾으며 주저앉고 말았다. 그 바람에 마차는 관도 에서 약간 벗어난 길옆 숲속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아악......!" 마차 안에서 구슬픈 소녀의 비명이 들렸다. 이때였다. 휙! 휙......! 대여섯 줄기의 인영이 날아오더니 쓰러진 마차를 순식간에 포위해 버렸다. 그들은 대부분 청삼을 입 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젊은 청년들이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풍운(風雲)이란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강호에 조금이라도 견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바로 풍운팔대세가의 표식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아볼 것이다. 풍운팔대세가는 풍운맹의 중추역할을 하는 세력이다. 그들이 풍운맹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정파의


전통적인 문파인 구파일방을 능가할 정도였다. 수뇌인 듯한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유독 금의를 입고 있었는데 이십칠팔 세 정도의 나이에 눈 자위가 푸르스름하여 어딘가 모르게 음침한 분위기를 풍겼다. "흑천풍(黑天風)의 잔도들! 너희들이 달아날 길은 없다. 이만 기어나오는 게 어떠냐?" 흑천풍이라면 수십 년 전 강호에 혈풍을 일으켰던 흑도의 단체였다. 지난날 흑도대종사로 군림했던 화불군이 규합한 단체였다. 끼익! 부서진 마차의 문이 열리며 일남일녀가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흑의를 입은 미소녀와 건장한 체격의 황삼대한이었다. 황삼대한은 사순 정도로 한눈에 보기에도 위맹해 보였다. 더구나 손에는 붉은 빛이 도는 도끼(血斧)를 쥐고 있어 보기만 해도 으스스한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그는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으며 안색 도 탈진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중상을 입은 듯 마차에서 나올 때 흑의 미소녀에게 부축받고 있었다. 흑의 미소녀는 흑백이 분명한 눈동자와 오똑한 콧날, 긴머리를 하나로 묶어 허리까지 늘어뜨린 모습 으로 무척이나 야무지게 보였다. "흐흐... 혈부왕(血斧王) 단옥(丹玉)! 이 하늘 아래 더 이상 달아날 곳은 없다." 금의청년은 조롱하듯 말했다. 황삼인은 그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검공자(劍公子) 철비양(鐵飛陽)! 네 어찌 이토록 비열하단 말이냐? 그러고도 네놈이 정도의 횃불이라 는 풍운맹의 팔공자란 말이냐? 철비양은 코웃음쳤다. "비열하다고? 무슨 헛소릴 하는 거냐?" 혈부왕 단옥은 핏빛 도끼를 움켜쥐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크크... 대종사께서 실종되신 후로 지난날의 성세를 회복하진 못했으나 그래도 흑천풍의 기개는 죽지 않았다. 더구나 네놈 같은 더러운 개에게 모욕받을 순 없다!" 철비양은 만면에 경멸의 빛을 띠며 욕설을 퍼부었다. "후훗... 흑천풍이 별거냐? 고작해야 흑도의 쓰레기들이 아니더냐! 그런데 감히 겁도 없이 풍운맹을 염 탐하다니, 스스로 지옥을 찾는 짓이 아니고 무엇이냐?" 이때였다. "이봐요!" 문득 따사로운 봄 햇살처럼 해맑은 음성이 울렸다. 그것은 바로 흑의 미소녀에게 나온 것이었다. "......!" 철비양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그는 새삼 흑의 미소녀를 훑어보더니 음침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빛


은 아주 노골적이었다. 흑의 미소녀의 몸매를 낱낱이 감상하며 불순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흑의 미소녀는 야무지게 그를 마주보며 물었다. "철공자, 흑천풍이 당신들을 염탐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라도 있나요?" 단옥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버럭 외쳤다. "아가씨, 증거는 무슨 증거요? 저 놈은 아가씨의 미모를 탐하여 일부러 흉계를 꾸미고 있지 않소?" "닥쳐!" 철비양은 단옥을 향해 호통쳤다. 그는 다시 시선을 미소녀에게 향하더니 입가에 묘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 그건 그대 흑란화(黑蘭花) 구연령(丘燕令) 낭자 본인이 더 잘 알 텐데? 지금이라도 그대의 품을 뒤져보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이... 더러운 놈!" 쌔액! 거대한 핏빛 도끼가 철비양의 면상을 향해 쪼개갔다. 혈부왕 단옥이 더 참지 못하고 일격을 가한 것 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탈진한 상태였으므로 위력은 보잘것이 없었다. "훗훗... 그 따위 녹슨 도끼로는 장작도 패지 못할걸?" 번쩍! 철비양은 음소와 함께 그의 허리춤에서 백광이 뻗어나갔다. "크윽!" 그야말로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단옥의 왼팔이 어깻죽지로부터 깨끗이 절단되어 버린 것이다. "앗!" 흑란화 구연령은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안색은 백랍처럼 창백해지고 말았다. "후훗... 다시 함부로 입을 놀리면 그땐 네놈의 목이 사라질 것이다." "크으... 네놈이......." 단옥은 분노와 수치로 전신을 부들부들 경련했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는 이제 도끼를 들고 있을 힘조 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때였다. 구연령이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갑자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탄식하며 말했다. "철소협, 정말 제 품을 뒤져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를 놓아 줄 건가요?" 철비양은 입가에 간사한 미소를 띠었다. "헤헤... 물론이오. 풍운팔대세가는 결코 무고한 자를 괴롭히지 않소." "비... 비열한 놈!" 단옥은 열화같이 분노하며 남은 한 팔로 도끼를 휘둘렀다. 그러나 아무런 위협도 될 수 없는 헛된 동 작일 뿐이었다. 철비양은 상대하기도 귀찮은 듯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그의 뒤에 있던 청삼청년들이 앞


으로 나서며 검을 뽑았다. "미친 놈!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멈추세요! 소녀가 당신들의 뜻을 따르겠어요!" 구연령이 다급히 외쳤다. "핫핫...! 진작 그럴 일이지!" 철비양은 짐짓 호탕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청삼청년들은 즉각 뒤로 물러났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구연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물론 혐의가 없다면 놓아줄 것이오." 구연령은 수치심으로 인해 얼굴을 붉히면서도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그럼... 뒤져 보세요." "크으윽... 어찌 이런 일이......!" 단옥은 분노가 지나친 나머지 그만 왁! 하고 핏덩이를 토해낸 후 벌렁 쓰러졌다. 본래 성품이 불 같은 위인이라 화기가 치밀어 혼절해 버리고 만 것이다. 구연령은 진주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중얼거렸다. "단아저씨...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대종사님께서 사라진 후 흑천풍은 유명무실해졌어요. 그 분이 없 는 한 수모를 당할 수밖에는 없는 걸요." 철비양이 구연령에게로 다가오며 짐짓 점잖은 음성으로 말했다. "구낭자, 본 공자는 이런 곳에서 낭자의 자존심을 다치게 할 생각은 없소. 저쪽으로 갑시다." 그는 음탕한 시선으로 구연령의 아래위를 훑어보고는 길옆의 숲쪽을 가리켰다. 구연령은 그만 고개를 푹 떨구었다. 상황이 이 지경이니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리 오시오." 철비양은 앞장서 숲으로 걸어갔다. 구연령은 고개를 떨군 채 마치 도살장에라도 끌려가는 기분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다섯 명의 청삼청년들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히죽 웃고 있었다. 그들은 물론 철비양의 수작을 잘 알 고 있었다. 남의 이목을 피할수 있는 숲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보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숲 속으로 들어간 직후였다. 스스......! 혼절해 있던 혈부왕 단옥의 몸이 서서히 땅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아니......?" 마침 한 청삼청년들은 그것을 발견하고 입을 딱 벌렸다. 실로 해괴한 일이 아닌가? 그는 손가락으로 단옥을 가리키며 뭐라 말을 하려 했으나 너무나 놀란 나머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저... 저... 저......." "왜 그래? 정삼(鄭三)?"


동료 청년이 돌아보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막 지면으로 사라지는 단옥의 모습을 그도 보았던 것이 다. "이게 대체......?" 단옥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비로소 남은 세 청년도 고개를 돌려 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 을 지었다. "놈이 사라졌어!"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지?" 그들은 얼굴을 마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놈이 무슨 사술을 썼기에......?" 그들은 주위로 흩어져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들은 단옥이 필시 눈속임을 썼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필시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주위를 이 잡듯이 살피기 시작했다. ② 숲속에 들어간 철비양은 한 그루 소나무 아래 구연령을 기대서게 했다. "이곳이 적당한 것 같구려, 낭자." "......." 구연령은 수치심으로 인해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져 있었다. 그녀는 감히 철비양의 얼굴을 마주볼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너무나 노골적인 음심이었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철비양은 음탕한 시선으로 그녀의 봉곳이 솟아오른 가슴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후... 내 이러고 싶진 않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낭자가 너그럽게 양해하시오." 그는 서슴없이 구연령의 가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 그녀는 수치감에 못 이겨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철비양은 손을 그녀의 가슴 속으로 불쑥 집어 넣었다. 순간 구연령은 경련을 일으켰다. 거친 사내의 손이 여인의 소중한 가슴으로 들어오니 그 충격이야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너무나 수치스러운 나머지 그녀의 눈꼬리에는 눈물방울이 맺히고 말았다. 철비양의 그녀의 품을 더듬 는 척하면서 덥석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후후... 이제 보니 낭자는 대단히 풍만하구려." 철비양은 손은 그녀의 옷자락을 헤치고 속살을 더듬었다. 그는 탄력 넘치는 그녀의 젖가슴을 마구 주 물러댔다. 그것도 부족한지 아예 그녀의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미안하오. 증거를 찾기 위한 것이니 좀 참으시구려, 흐흐......." 구연령의 옷자락은 활짝 벌어지고 말았다. 눈부시게 뽀얀 속살이 드러나고 잠시 후에는 소담스런 젖


가슴이 노출되고 말았다. "흐윽... 전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구연령은 마침내 눈물을 흘렸다. 그가 한 가닥 양심이라도 있다면, 증거를 찾지 못하게 되면 놓아줄 것이란 실낱 같은 희망을 바랄 뿐이었다. 이제 그녀의 상체는 거의 벌거벗은 상태였다. 철비양은 그녀의 가슴을 실컷 주무른 후 이번에는 그녀 의 아랫배로 손길을 내렸다. "후후... 더 깊은 곳에 숨겨 두었소?" 그의 손은 구연령의 하체로 파고들었다. 매끄러운 아랫배를 지나 마침내 여인의 깊숙한 비소를 향해 더듬어 내려갔다. 구연령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죽었으면 죽었지 더 이상의 모욕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이 경련을 일으키며 뒤로 돌아갔다. 그녀는 한 자루의 비수를 꺼내 거머쥐었다. 여차하면 철비양을 찌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가 최후의 선을 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희망은 물거품 같은 것이었다. "후후......!" 철비양은 음소를 흘리며 마침내 그녀의 깊숙한 계곡 속으로 손을 불쑥 들이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구연령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냉갈을 토했다. "더러운 놈! 죽어라!" 그녀는 비수로 철비양의 등을 찔렀다. "흥!" 철비양은 실로 교활한 작자였다. 사실 그는 벌써부터 그녀의 행동을 알고 있었다. 빙글 몸을 돌린 그 는 맥문을 틀어잡고 비수를 빼앗았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빼앗은 비수를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찌익......! 비수는 구연령의 옷을 일직선으로 갈라 버렸다. 그 바람에 그녀의 젖가슴은 물론 아랫배까지 환히 드 러나고 말았다. "흐흑......!" 구연령은 끓어오르는 수치심과 분노를 참지 못해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후후... 구낭자! 날 너무 얕보았던 것 같소. 그 정도의 암습에 당할 내가 아니오." 철비양은 비수를 까딱거리며 비아냥거렸다. "후훗... 암습을 가하는 걸 보니 적도라는 게 확인되었소." 그는 비수로 구연령의 목을 겨누었다. 날카로운 비수는 그녀의 목줄기에 닿아 약간만 밀어도 가냘픈 목에 구멍을 낼 정도가 되었다. "아아......!" 구연령은 몸을 바르르 떨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곧 소나무 둥치에 부딪치고 말았다. 철비양은 비수


를 아래로 내렸다. 목을 타고 내려간 비수는 그녀의 젖가슴을 그어내렸다. 가느다란 선이 그어지며 피 가 한 방울 맺혔다. 피부를 아주 얕게 벤 것이었다. "흑!" 구연령은 눈을 감아 버렸다. 이제 꼼짝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상대의 더러운 눈이 자신의 젖가슴 과 그 아래 은밀한 곳을 낱낱이 훑어보고 있음을 느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것은 스스로 몸을 내밀어 자결하는 것뿐이었다. 철비양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후훗, 모든 것을 실토하고 얌전히 본 공자의 품에 든다면 내 모든 것을 용서할 수도 있다." "으으... 나... 나쁜 놈!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구연령은 온 힘을 다해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것은 도리어 사내의 욕정만 더 자극할 뿐이었다. "후후... 흑란화, 목숨은 하나뿐이다. 이대로 죽는다면 네 아름다운 몸뚱이는 썩어 늑대밥이 될 뿐이 다. 인생이 별거냐? 본 공자와 즐거움을 나누면 네 신변을 보장하마. 그럼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철비양은 비수를 더욱 아래로 내렸다. 비수는 그녀의 앙증맞은 배꼽어림을 슬슬 문지르고 있었다. 구 연령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더... 더 이상 허튼 짓하면... 자결하겠다!" "호오! 그건 안 되지." 철비양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혈도를 재빨리 찍어 버렸다. "흐윽......!" 구연령은 맥이 빠짐을 느끼며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후후... 땅에 묻히기엔 아까운 몸이거든." 철비양은 마지막 남은 천을 부욱 찢어냈다. 이제 구연령은 거의 반라가 되고 말았다. 그녀의 모든 것 이 고스란히 노출되고 말았다. 철비양은 그녀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은 여인의 구석구석을 무차별로 유린해 나갔다. 구 연령은 죽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혈도가 찍힌 터라 꼼짝도 할 수가 없어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 었다. 그때였다. 철비양이 거칠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고개가 뒤로 젖혀졌던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 그녀가 기대고 있는 소나무 위! 나뭇가지에 두 다리를 걸친 채 거꾸로 매달려 있는 한 인영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백의를 입고 있는 청년이었다.


얼굴이 약간 각진 순후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청년은 그녀와 눈길이 마주친 순간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을 접한 순간 구연령은 자신의 처지조차 잊고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청년의 웃음은 기이하게도 그녀의 마음을 한순간에 사로잡은 것이었다. 한편 철비양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제 그는 타오르는 욕정을 참는 데 한계에 이르렀다. 마침내 서둘러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 구연령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나무에 매달린 청년이 손을 아래로 뻗은 것이었다. 그는 기척도 없이 철 비양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그러나 철비양은 조금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서둘러 옷을 벗고 그녀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이 파렴치한 놈이 죽는 걸 바라오?) 백의청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구연령에게 전음으로 말했다. 구연령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동시에 그녀는 철비양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 그녀는 전율했다. 철비양의 목이 저만치 굴러가고 있었다. 목을 잃은 그의 몸은 아직도 그녀를 껴안고 있었다. 그의 손은 미처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지 못한 듯 여전히 그녀를 더듬어 대고 있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자군. 죽어서도 음욕을 버리지 못하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청년의 손바닥이 철비양의 몸을 쳐 날려 버렸다. 철비양은 삼 장 가량이나 붕 떠 날아가 숲속에 처박혀 버렸다. 백의청년은 빙글 회전하더니 바닥에 내려섰다. 거의 동시에 구연령은 몸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청년은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채 철비양에게서 취한 검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의 낭랑한 중얼거림 이 들렸다. "이렇게 좋은 검을 가지고 있다니... 실로 검이 부끄러운 일이로군." 구연령은 도무지 경황이 없었다. 따라서 몸을 가릴 생각도 잊고 더듬거리며 물었다. "다... 당신은 누구시길래......?" 청년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치기 어린 어조로 물었다. "옷은 잘 여미셨소?" "어맛!" 구연령은 그제서야 깜짝 놀라 찢어진 옷을 급히 여몄다. 청년은 비로소 몸을 돌리며 정중히 포권했다. "소생은 남궁궁이란 사람이오."


남궁궁. 바로 그였다. 그는 대설산을 떠나 다시 중원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중원에 들어오자마자 우연 히 구연령의 위기를 발견하고 그녀를 구해주게 된 것이었다. 남궁궁은 수중의 검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말 몰랐소. 정도로 알려진 풍운맹의 팔공자 중에 이렇게 비열한 자가 있을 줄이야." "......." 구연령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남궁궁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대체 이 분은 어떤 분이시길래......?' 그녀의 가슴은 지금 마구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남궁궁은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게다가 강호에서 흑천풍이 아직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지 오늘에야 알았소이다." 구연령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흑천풍을... 아시나요?" "물론이오." "어떻게......?" 구연령은 의혹에 가득 찬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앞에 있는 청년의 모든 것이 신비롭게 만 보였다. 남궁궁은 그녀를 바라보며 반문했다. "낭자는 화불군이란 분을 아시오?" 구연령의 눈이 한껏 커졌다. "그 분은... 본 흑천풍의 대종사예요." 남궁궁은 담담히 말했다. "그와 잘 아는 사이요." 구연령은 격동으로 인해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저... 정말인가요?" 남궁궁은 품 속에서 하나의 검은 흑패를 꺼내 보였다. "흑천패(黑天牌)!" 구연령은 놀라 부르짖으며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남궁궁은 그녀를 내려보며 낭랑하게 말했다. "그는 내게 흑천풍을 돌봐 달라는 당부를 했소이다." 남궁궁은 언젠가 화노가 자신에게 흑천패를 넘겨주면서 한 말을 떠올렸다. - 공자, 훗날 강호에 나가시면 이 패를 지니고 흑천풍에 들러 주십시오. 지금쯤 그들은 내가 떠난 후 로 성세를 잃고 있을 것입니다. 공자께서 노노 대신 그들을 거두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구연령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물었다. "공자께서는 대종사님과 어떤 관계이신지요?" 남궁궁은 잠깐 생각했다. '화노의 체면도 있으니 그와 주종지간이라 말할 수는 없구나.'


"그와는 막역한 친교가 있소이다." "네... 엣?" 구연령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눈앞에 서 있는 청년이 칠십 년전에 사라진 흑도의 전설인 화불군 과 막역한 친교를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감히 캐물을 용기도 나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구연령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화불군의 소식을 들은 것만으로도 감동하고 있었다. 남궁궁은 흑천패를 거두며 부드럽게 말했다. "일어나시오, 낭자." 구연령은 공손히 몸을 일으켰다. "흑천풍은 어떻소?" 남궁궁의 질문에 그녀는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비록... 대종사께서 계실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지만... 지금도 대별산(大別山)의 총단에는... 일천의 형제들이 대종사님께서 재림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궁궁은 내심 감동을 금치 못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구나. 칠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화노를 기다리는 수하들이 있다니.......' 그는 의미있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구낭자는 흑천풍에서 어떤 직위에 있소?" "그건......." 구연령은 얼굴을 붉혔다. "송구스럽게도 보잘것없는 소녀가 맡은 것은 분에 넘치는 군사(軍師)랍니다." 남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총단에서 나온 이유는?" "그건... 각처에 흩어진 흑천풍의 친구들을 모으기 위해서예요."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당금무림의 정세 때문이에요. 날이 갈수록 무림은 혼란이 심해지고 있어요. 더구나......." 그녀는 갑자기 음성을 낮추며 전음으로 설명했다. 남궁궁은 묵묵히 그녀의 전음을 들었다. 잠시 후 놀 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사실이오?" "틀림없어요. 제 눈으로 똑똑히 본 걸요." 구연령은 입술을 깨물며 숙연히 말했다. 남궁궁은 눈을 반쯤 내리감고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구연령 은 초조한 표정으로 그의 눈치만을 살폈다. 남궁궁은 번쩍 눈을 뜨며 물었다. "지금 흑천풍의 영도자는 누구요?" 구연령은 엄숙히 대답했다. "대종사님의 오른팔이셨던 환우겁천도( 宇劫天刀) 우문환도(宇文幻陶)란 분이 흑천풍을 이끌고 계세 요."


남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연락할 수 있소?" "흑천풍의 독문의 연락방법이 있어요." "그럼 됐소." 남궁궁은 문득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낭자는 날 믿을 수 있겠소?" "......?" 구연령은 흑백이 분명한 눈알을 사르르 굴렸다. 이어 그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있어요." 남궁궁은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의 손을 뿌리치거나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도리어 남궁궁의 넓은 품 에 안긴 순간 그녀는 알 수 없는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이 분이.......' 남궁궁의 손이 그녀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옷은 거의 걸레처럼 찢겨져 있어 그가 안으로 손을 들이밀자 처녀의 젖가슴이 그대로 만져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방금 전 철비양이 그녀의 가슴을 더듬었을 때는 죽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러웠는데 남궁궁의 손길이 닿자 전혀 다른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얼굴을 홍시처럼 붉힌 채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아니, 내심으로는 그가 좀더 애무해 주었으면 하는 기대감마저 들고 있었다. "잠시만 참으시오. 곧 재미있는 일을 시작할 셈이오." 그녀의 귓전에 훈풍과도 같은 입김이 부어졌다. '아.......'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의미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상하게도 몸이 뜨거워지며 나른한 기분 이 든 것이었다. 그것은 한 번도 남자를 접해 보지 못한 그녀에게는 처음 찾아온 경험이었다. 그녀는 남궁궁의 넓은 품에 안기자 마치 천하를 얻은 듯 든든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한편, 다섯 명의 청삼무사들은 철비양이 숲으로 들어간 지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자 서서히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혈부왕 단옥이 신비하게 사라져 버린 사건으로 인해 더욱 초조감이 더했다. "들어가 보자!" 그들 중 비교적 나이가 많아 보이는 청년이 말하자 나머지 청년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들은 철비양과 구연령이 사라졌던 숲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들이 막 숲속에 들어선 순간 저만치 앞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로 검공자 철비양이었던 것이다. 그는 옆구리에 옷을 걸치나마나한 구연령을


껴안은 모습이었 다. "후후! 이 계집은 내게 모든 걸 실토하고 굴복했다. 이제 돌아가자." 청년들은 멈칫했다. 그들은 구연령의 모습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했으나 방금 전 일어난 일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철비양은 그들의 표정이 어정쩡한 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네, 단옥 그 놈이......." 철비양은 눈썹을 성큼 치켜올렸다. "놈이 어쨌단 말이냐?" 우두머리 청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놈이 갑자기 증발했습니다." "뭐? 증발?" "갑자기 땅 속으로... 꺼져 버렸습니다." "뭣이?" 철비양은 눈썹을 곤두세웠다. 청년들은 큰 죄를 지은 듯이 고개를 숙이며 좀전에 일어났던 상황을 자 세히 얘기했다. "음...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이냐?" 철비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년은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마도 사술을 쓰는 자가 구해 간 듯합니다." "......." 철비양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좋아, 놈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 계집을 잡았으니 일단 돌아가자." 청년들은 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우... 날벼락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어쨌든 다행이다.' 그들이 한숨 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본래 철비양은 성격이 괴팍하고 모든 것을 제멋대로 하는 자였다. 청삼무사들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철비양이 자신들의 실책을 용서하 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 겁먹었던 것이다. "이 계집은 본 공자에게 굴복했다. 따라서 앞으로는 날 모시게 될 것이니 너희들도 그리 알아라. 알겠 느냐?" 다섯 청년은 모두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청년들은 풍운팔대세가 중 검공자 철비양이 속해 있는 화북(華北)검문세가(劍門世家)의 검문오영(劍門 五英)이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철비양의 수족처럼 생활해 왔었다. "자, 어서 이만 돌아가자." 철비양은 신형을 날렸다. 검문오영도 즉시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가는 방향은 풍운맹 쪽이었다.


③ 장강(長江)은 중원의 젖줄이다. 중원의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장강의 물결은 가파른 무산삼협을 지나 호북평원(湖北平原)에 이르면서 유유한 흐름으로 변하게 된다. 지금 그 장강의 흐름을 따라 배 한 척이 미끄러지듯이 떠가고 있다. 배의 갑판에는 청삼을 입은 오 인의 청년검수가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은 바로 검문오영이었다. 배는 적벽(赤壁)을 지나 무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육로 대신 수로를 택했던 것이다. 선실 안. 일남일녀가 마주앉아 있었다. 그들은 바로 검공자 철비양과 흑란화 구연령이었다. 흑란화 구연령은 깨 끗한 흑의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이제 얼마 후면 풍운맹에 당도할 것이오." 철비양의 말에 구연령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녀는 멍하니 한 가지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당분간 철비양이란 놈으로 행세할 생각이오. 그 자의 신분으로 풍운맹으로 들어가 그곳의 실정을 파 악해 볼 셈이오. 낭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철비양. 기실 그는 남궁궁이 변장한 것이었다. "향후 무림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 분명하오." 구연령도 정색을 하며 말했다. "틀림없어요. 제 눈으로 똑똑히 본 걸요. 만박귀부(萬博鬼夫) 도천수(陶天水)의 장원이 불타고 그의 식 솔 오십여 명이 몰살되었어요. 뿐만 아니라 소녀는 도천수가 납치되는 것을 직접 보았어요." 남궁궁은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정말 그를 납치한 자들이 풍운맹의 인물이었단 말이오?" "틀림없어요. 그들의 대화를 들었으니까요." 남궁궁은 눈썹을 찌푸리며 내심 염두를 굴렸다. '도천수는 풍운맹을 축조하는 데 참여한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그보다 풍운맹 총단의 설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말 풍운맹 쪽에서 그를 납치했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것은 풍운맹의 기관매복에 대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어찌 대인군자로 통하는 풍운맹주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남궁궁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문득 숲속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렸다. '풍운맹의 팔공자 중 한 명인 철비양의 품행이 이토록 음악한 것으로 보아 어쩌면... 풍운맹은 양의


탈로 위장한 늑대들의 소굴일지도 모르겠구나.' 남궁궁은 우연히 구연령의 위기를 발견했다. 혈부왕 단옥을 구출한 것도 바로 그였다. 그는 전진의 기 환술로 검문오영의 눈을 속이고 그를 구한 것이었다. 연후 그는 기환술의 묘기 중 하나인 변용술을 이용하여 용모를 철비양과 똑같이 위장한 후 검문오영 을 대동하고 풍운맹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 행동의 이면에는 목적이 있었다. 비록 구연령이 풍운맹이 위선자 집단이라 말한 것도 있었으나 그 보다 중요한 것은 당금 강호의 형세를 파악하는데 풍운맹이 가장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 다. 남궁궁은 배를 통해 여행하는 동안 구연령으로부터 그 동안의 강호정세를 들을 수 있었다. 특히 그는 풍운맹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풍운팔대세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구연령의 말에 의하면 풍운팔대세가는 제왕천이 붕괴된 이후 갑자기 두각을 나타냈다고 했다. 천문세가(天文世家), 낙성세가(落星世家), 천도세가(天刀世家), 검문세가(劍門世家), 환문세가(幻門世 家), 신권세가(神拳世家), 당문세가(唐門世家), 사해세가(四海世家) 등으로 이루어진 팔대세가는 비록 각각 다른 지방에서 자리잡고 있었으나 오래 전부터 상호간에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특별한 결속력 때문에 정도의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는 구파일방마저 은연중 누르고 있 었다. 풍운맹의 주축이 구파일방이 아닌 팔대세가가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풍운팔대세가의 여덟 명 소가주(少家主)들은 풍운맹 내에서 팔공자(八公子)라고 불리웠다. 검공자 철 비양도 검문세가의 후계자로 팔공자의 일원이었다. 구연령은 그밖에도 남궁궁이 알아야 할 사항들을 세세히 설명해 주었다. 남궁궁은 모든 것을 머리에 담아 두었다. 그 모든 것이 향후 그에게 큰 도움이 되는 정보들이었기 때 문이다. 문득 구연령은 얼굴을 붉히더니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공자님, 풍운맹으로 들어가기 전에 미리 정해 둘 것이 있어요." "무엇이오?" 구연령은 더욱 얼굴을 붉혔다. 남궁궁은 영문을 몰라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말해 보시오. 강호경험에 대해서는 낭자가 한 수 위이니 새겨듣겠소이다." 구연령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음성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소녀는... 검공자 철비양에게 수모를 겪은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 사실은 분명 검문오영의 입으로부 터 소문이 퍼질 거예요." "음, 그래서......?"


"철비양의 소행으로 미루어 그는 평소 여색을 밝히는 위인이 분명해요. 그러니......." 그녀는 말을 이으려다 말고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남궁궁은 비로소 그녀의 말뜻을 대충 눈치챘다. 구연령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병법에도 이르기를 남을 속이려면 먼저 자신을 속여야 한다고 했어요. 소녀가 주제넘게 말씀 드린다 면 공자님께서는 철비양으로 행세하시려면 그 자와 똑같이 행동하셔야 합니다." "음." 남궁궁은 신음을 흘렸다. "철비양이라면 저를 풍운맹으로 데려가 어떤 대접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해요. 필시... 소녀를 첩 으로 삼던가 아니면 시종으로 두어 자신의 처소에 둘 게 틀림없어요." 남궁궁의 안색이 변했다. "낭자의 뜻은......?" "기왕 그 자로 변신한 바에야 완벽한 것이 좋아요." 남궁궁은 그녀의 깊은 심사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낭자의 지혜는 실로 놀랍구려. 역시 흑천풍의 군사답소." 구연령은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꼭 그렇게 햐셔야만 해요. 아울러 말씀드리면... 소녀의 보잘 것없는 체면 따위는 생각하실 필요가 없 어요." 남궁궁은 깊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낭자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앞으로 낭자와 나는 시종간으로 합시다." 구연령은 약간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녀는 내심 그가 자신을 첩으로 삼아주기를 원했는지도 몰랐다. 이때 선실 밖에서 검문오영의 음성이 들려왔다. "준비하십시오. 풍운맹에 다 왔습니다!" 남궁궁과 구연령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④ 무림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자유롭게 풍운맹을 드나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풍운맹의 외성(外城)에 한해서였다. 정작 풍운맹의 중심부인 내성(內城)은 철저히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내성은 심지어는 풍운맹에 소 속된 인물들조차도 특별히 허가된 자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풍운맹은 수많은 인원이 가맹되어 있는 만큼 그 조직도 엄격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크게 분류한다면 일각오원팔전십장(一閣五院八殿十莊)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천중각(天中閣). 그곳은 맹주인 자비천문선생 궁천무가 거처하는 풍운맹의 심장부였다. 오원(五院)은 풍운맹을 관활하는 다섯 개의 기관을 말하는 것으로 풍운맹의 내부 일을 맡고 있었다.


팔전(八殿)은 풍운맹의 중추세력인 풍운팔대세가가 관장하는 곳으로 그곳에는 팔공자를 위시하여 팔대 세가의 요인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십장(十莊)은 구파일방의 인물들이 머무는 곳으로 주로 각파의 장로급 고인들과 파견된 정예고수들이 생활하는 곳이었다. 그밖에도 풍운맹에는 숱한 전각(殿閣)과 방사(房舍)를 비롯하여 여러 개의 연무장(練武莊)과 가산(假 山) 등이 축조되어 있었다. 팔전 중의 하나인 검전(劍殿). 검문세가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사경을 넘긴 늦은 시간이었지만 검전의 한 내실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방 안에는 두 남녀가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검공자로 변신한 남궁궁과 흑란화 구연령이었다. 남궁궁은 차의 향을 음미하며 중얼거렸다. "일단 무사히 들어오는 데는 성공한 것 같소." 구연령은 불안한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소문은 들었지만... 풍운맹이 이토록 거대할 줄은 몰랐어요." 남궁궁은 빙긋 웃었다. "이 정도 규모라면 능히 백년대계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오." 문득 그는 치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구연령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낭자의 말대로 이곳에 있는 하녀들을 모두 물리쳤으니 이제부터는......." 구연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소녀가 하녀의 일을 대행해야겠지요." 남궁궁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소?" 구연령의 얼굴은 이미 엄숙하게 변해 있었다. "먼저 말씀 드렸듯이 적을 속이기 이전에 먼저 나 자신을 속여야 한다고 했어요. 소녀가 일단 공자님 의 시녀가 된 이상 시녀의 역을 완벽하게 해내는 것이 바로 대계를 이루는 첫걸음이 아니겠어요?" 황촉빛을 받고 있는 구연령의 얼굴에는 지혜로움이 가득 어려 있었다. 남궁궁은 그녀의 깊은 심지와 의지에 은근히 감탄했다. '비록 어린 소녀이기는 하나 흑천풍의 군사가 되고도 남을 그릇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연령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밤이 늦었어요, 공자님. 목욕을 하셔야지요." "......?" 남궁궁은 어리둥절했다. 구연령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말했다. "이미 목욕물을 데워 놓도록 지시했어요." "......!" "소녀가 의당 해야 할 일인 걸요."


남궁궁은 그만 쓴웃음을 지었다. "좋소." "소비에겐 하대를 하셔야 합니다."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낭자...." 구연령의 결심은 단호했다. "연령이라 불러주세요." "연령......." 남궁궁은 그녀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내실로 들어갔다. 욕실은 내실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남궁궁은 욕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행동은 어색하기만 했다. 그러나 구연령은 아무 거리낌도 없이 그를 따라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구연령은 그의 곁에 서서 말했다. "소비가 옷을 벗겨 드리겠어요." "아니... 그건......." 남궁궁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공연히 해본 소리예요. 호호......!" 문득 구연령은 아침 햇살과도 같은 미소를 띠며 문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이때였다. "연령, 등 좀 밀어다오!" 남궁궁이 느닷없이 큰소리로 말했다. "......!" 구연령은 흠칫하며 돌아섰다. 남궁궁은 그녀를 향해 급히 전음으로 말했다. (누가 오고 있소.) 구연령은 입술을 꼭 깨물더니 그에게로 다가왔다. "네... 소비가 밀어드리겠어요." 남궁궁은 그녀의 임기응변에 새삼 감탄했다. 그녀는 서슴없이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남궁궁은 흠칫했으나 그녀가 하는 대로 놔둘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그는 알몸이 되고 말았다. 그녀 앞에서 알몸이 된 것이 쑥스럽기 그지없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첨벙......! 그는 쑥스러움을 가릴 겸 욕조 속으로 급히 들어갔다. 그것도 일부러 요란하게 물소리를 내었다. 욕실 안은 자욱한 김으로 인해 시야가 어른거렸다. 그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 욕조에 앉아 있는 남궁궁은 등에 부드럽고 나긋한 손길이 닿는 것을 느꼈다. 구연령이 그의 등을 밀 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손이 조금씩 떨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처녀의 몸으로 난생 처음 사나이의 벌거벗은 몸을 민다는 것은 아무리 대담하


다고 해도 결코 태연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그녀는 익숙하게 그의 몸을 밀어나 갔다. 남궁궁은 그녀의 그런 행동에 다시 한 번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 소녀의 심지는 굳세기 그지없구나. 보통 여인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일 텐데.' 그러나 그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구연령이 그에 대해서 야릇한 연정을 품고 있다는 사 실이었다. 만일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아무리 필요에 의한 일이라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몸을 돌리세요, 공자님." 구연령의 말에 남궁궁은 내심 비명을 질렀다. '아이쿠! 낭자, 그만해도 되지 않소?' 그러나 그 말은 목구멍 속에서만 맴돌았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 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소심(小心)함은 영웅이 할 일이 아니다.' 그는 짐짓 음흉한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구석구석 잘 씻어라, 연령." 구연령은 공손히 대답했다. "네, 공자님." 남궁궁은 돌아 앉았다. 비록 수증기가 꽉 찬 욕실 안이긴 했으나 워낙 가까이 마주하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구연령의 눈썹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눈앞에 남궁궁의 나신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대평원처럼 넓 은 사나이의 우람한 가슴팍과 탄탄한 근육들은 그녀의 가슴을 마구 두근거리게 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문질렀다. 손바닥이 바위처럼 단단한 남궁궁의 가슴에 닿았을 때 그녀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러나 이를 악물며 문질러댔다. 한편, 더욱 고역인 것은 남궁궁이었다. 솜처럼 나긋나긋한 소녀의 손바닥이 온몸을 문질러 대니 건장 한 남자로서 아무 생각이 없을 수가 없었다. 구연령의 손바닥이 움직일 때마다 그는 욕망을 자제하느 라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다 됐어요, 공자님. 여기 옷이 있어요." 아득한 시간이 지난 듯했다. 구연령의 음성이 들린 순간 남궁궁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제법이구나. 흐흐, 수고했다." 구연령은 고개를 떨군 채 그의 옷을 입혀 주었다. 잠시 후 그가 옷을 여미며 내실로 나오자 객청으로부터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철형께서 이번에 미인을 데려오셨다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구경왔소이다." 객청으로 나가자 두 명의 청년이 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십대로 기품이 넘치는


모습들이었다. 좌측에 있는 청년은 자삼을 입고 있었는데 제법 준수한 용모였다. 검미는 예리하게 뻗어 있었고 깊게 파인 두 눈은 여인이라면 누구나 매력을 느낄 만한 모습이었다. 다만 콧날은 날카롭고 입술 역시 얄 팍한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의 우측에는 황삼을 입은 장대한 체격의 청년이 서 있었다. 그의 눈썹은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더 짙고 굵었으며 부리부리한 눈동자에서는 위맹한 빛이 뻗어나오고 있었다. 사각형의 얼굴형에 덥수룩한 턱수염은 그의 용맹함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게다가 그의 손은 솥뚜껑만 큼이나 커서 은연중 기가 질리게 할 정도였다. "하하하... 철형! 오랜만이오." 두 청년은 남궁궁을 향해 대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곧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남궁궁의 뒤쪽으로 향했 다. 그들의 얼굴에는 경이의 빛이 동시에 떠올랐다. 흑란화 구연령의 미모에 놀란 듯했다. 남궁궁은 그들을 보는 순간 느끼는 것이 있었다. '자삼청년은 몸이 유연하고 기민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경공(輕功)을 특기로 삼는 환문세가(幻門世家) 의 소가주 자의환룡(紫衣幻龍) 영호궁옥(令狐宮玉)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황삼청년을 바라보았다. '저 자는 체격이 크고 특히 손마디가 발달한 것으로 미루어 권법의 명가인 신권세가(神拳世家)의 소가 주 소항우(小項羽) 남대천(南大天)일 것이다.' 남궁궁은 풍운맹으로 오기 전에 이미 구연령으로부터 팔공자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들었다. 그래서 그들을 보는 즉시 신분을 짐작 할 수가 있었다. 그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핫핫... 영호형, 남형! 정말 오랜만이오. 한데 이 늦은 밤에 정말 미인을 보고자 왕림했단 말이오?" 자의환룡 영호궁옥은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답했다. "후후... 정말 소문대로 기막힌 미인을 얻으셨소이다.그려." 소항우 남대천의 서글서글한 눈빛도 구연령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정말... 이토록 아름다운 소저는 처음이오." 남궁궁은 내심 중얼거렸다. '영호궁옥은 심기가 깊은 것 같고... 남대천은 우직하여 단순한 데가 있군.' 그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하하! 이거 미안하외다. 연령은 이미 내 시비가 되었으니 말이오." 남대천의 우직한 얼굴에는 아깝다는 빛이 역력했다. 그러나 영호궁옥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낭랑하 게 말했다. "하하! 철형은 복도 많소이다. 미인을 얻은 것을 축하하오." 그는 상대방의 기분을 잘 맞추는 재주가 있는 듯했다. 그러나 남대천은 자신의


마음을 감출 줄 몰랐 다. "쳇! 철형은 너무 하셨소이다. 저런 미인을 시비로 부리다니......." 남궁궁은 짐짓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하하! 그게 뭐 대수요? 연령은 몰락한 흑천풍의 일원이오. 두 분은 혹 흑란화란 별호를 들은 적이 없 소?" "흑란화...!" 두 청년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그들은 눈을 크게 뜨고 한동안 구연령을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남 궁궁은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왜들 그리 놀라시오?" 영호궁옥은 한동안 멍한 표정이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뒤에서 다소곳이 시립하고 있는 구연령에게 물었다. "낭자가 정녕 흑란화 구연령이시오?" "네... 그렇습니다." 구연령은 얌전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남대천은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쳤다. "맙소사! 중주(中州)의 흑백쌍란화(黑白雙蘭花) 중 흑란화가 일개 시녀가 되다니......." 남궁궁은 그녀에 대해 별달리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의아할 뿐이었다. '중주의 흑백쌍란화......?' 이때였다. 남궁궁의 귓전에 구연령의 전음이 가늘게 들려왔다. (공자님, 제 얼굴에 금칠하는 건 아니지만 강호상에서 알려진 바를 말씀드릴게요. 흑백쌍란화는 무림 이대재녀(武林二大才女)로 통하고 있어요. 저와 백란화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우연히 별호에 연관이 있어 그렇게 불리우고 있답니다. 먼저 백란화는 여인들만의 문파인 백화궁(百花宮)의 제일화(第一花) 예요.) (백화궁이란 어떤 단체요?) 남궁궁은 입술을 열지 않고 복화전음술로 물었다. (백화궁은 신비한 문파로 알려져 있어요. 오래 전부터 성녀궁(聖女宮)과 함께 신비이역(神秘二域)이라 부르죠. 그곳에는 백 명의 여인들이 꽃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어요. 항간의 소문으로는.......) 구연령은 일단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흑백쌍란화를 모두 얻는 자가 진정한 영웅이며, 천하를 얻을 능력이 있는 자라고들 하지요. 그러나 그다지 신경 쓸 말은 아니에요.) 남궁궁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음... 구낭자가 이 정도로 대단한 인물일 줄은 몰랐구나. 다만 아쉬운 것은 구낭자의 무학이 보잘것없 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마음 속으로 한 가지 결심을 내렸다. 한편 두 사람이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자 영호궁옥은 질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백란화만 있으면 철형은 천하를 얻겠구려. 실로 경하할 일이오." 구연령은 눈썹을 상큼 치켜올리며 남궁궁에게 재빨리 전음을 전했다. (머지않아 백란화도 차지하겠다고 말씀하세요, 공자님.) "......?" 남궁궁은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직까지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아 그렇게 교만한 연기를 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구연령은 틈을 주지 않았다. (공자님은 검공자 철비양이에요. 평소의 그라면 그런 말을 하고도 남아요.) 남궁궁에게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더 이상 망설이면 의심을 살게 뻔했다. 그는 갑자기 오만한 표정 으로 말했다. "하하! 머잖아 백란화도 시녀로 삼을 생각이오." 그 말인즉 자신이 진정한 영웅이며 머지않아 천하를 얻으리라는 말이 아닌가? 영혹궁옥의 눈에 시기의 빛이 드러났다. "후후... 정말 철형의 야심은 대단하구려. 그 말을 인심유룡(仁心遊龍) 궁자기(宮子奇) 형이 듣는다면 결코 곱게만 보지는 않을 것 같소이다." 남궁궁은 문득 안색을 굳혔다. "궁자기는 궁자기요. 나 철비양이 어찌 그의 눈치를 본단 말이오!" 남대천의 우직한 얼굴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정말 철형은 진정한 영웅이오!" 영호궁옥도 눈치를 보더니 한몫 거들었다. "만일 철형이 궁형 앞에서도 그런 말을 할 용기가 있다면 나 영호궁옥은 철형의 편에 서겠소." 구연령이 은밀히 전음을 보냈다. (공자님, 궁자기는 천문세가의 소가주이자 풍운맹주의 손자예요. 그는 은연중 팔공자의 영수로 자처하 고 있어요. 평소 그에게 불만을 품은 자도 있으니 이 기회에 그와 경쟁하는 것도 좋은 일일 것같아 요.) 남궁궁은 짐짓 어조를 낮추며 말했다. "만일 두 분이 동조만 한다면......." "......?" 영호궁옥과 남대천은 침을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궁자기가 독주하는 것을 막을 자신이 있소. 내게는 팔대세가가 일방적으로 한 사람에게 굴복해 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오." 남궁궁은 이 기회에 그들의 마음을 확실히 잡으려 했다. 그런데 이때 느닷없이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 려왔다. "핫핫핫......! 팔대세가는 모두가 형제들이네. 한데 그 무슨 섭섭한 말인가? 철소제가 밖에서 돌아오더


니 매우 당당해졌군, 그래." 한 청년이 내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연남빛 유삼을 입은 삼십 세 가량의 청년이었다. 그런데 그 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도는 은연중 중인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⑤ 머리에 하얀 문사건을 썼고, 왼손에는 금필(金筆)을 가볍게 쥔 모습은 영락없는 문사(文士)였으나 그 에게서는 능히 일대종사와 같은 기도가 풍기고 있었다. 객청으로 들어서는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로 삼 인의 청년들이 줄줄이 따르고 있었다. "아... 궁대형(宮大兄)!" "궁형......!" 영호궁옥과 남대천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그만큼 궁자기의 위세는 대단했던 것이 다. 남궁궁도 서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때, 그의 귓가로 구연령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저들은 궁자기와 그를 추종하는 삼공자인 듯해요. 뒤따르는 자는 우측으로부터 천도세가(天刀世家)의 신도무적(神刀無敵) 팽조위(彭造韋), 당문세가(唐門世家)의 천수독룡(千手毒龍) 당무(唐武), 사해세가 (四海世家)의 사해익룡(四海翼龍) 수검악(水劍嶽)이 틀림없을 거예요.) 남궁궁은 그 이름들을 차례로 머리에 새겨넣었다. 그는 궁자기에게 포권지례를 갖추었다. "궁형이 왕림하실 줄은 몰랐소이다. 이 밤중에 웬일로?" 인심유룡 궁자기는 대꾸도 없이 의자에 앉으며 구연령에게 눈길을 돌렸다. 순간 그의 눈빛이 야릇하 게 빛났다. "철소제가 흑란화를 얻었다기에 확인하러 왔네." 남궁궁은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연령을 궁형께 소개하겠소이다." 구연령은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곧 궁자기에게 큰절을 올렸다. "......." 궁자기의 눈빛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문득 그는 고개를 돌려 남궁궁을 노려보았다. 순간적으로 압도하는 눈빛이었다. "철소제가 흑란화를 시비로 거두었다는 것이 사실인가?" "사실이외다." 남궁궁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궁자기는 검미를 꿈틀했다. "철소제는 이 궁자기가 흑백쌍란화를 좌우쌍비(左右雙妃)로 삼겠다고 한 말을 잊었는가?" 그의 한 마디에 실내의 공기는 싸늘하게 식었다. 영호궁옥과 남대천은 불안한 표정으로 남궁궁을 바


라보았다. 그러나 남궁궁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 말을 잊을 리가 있소이까? 하지만 흑란화를 시비로 삼은 것은 그녀가 원한 일이외다." 궁자기는 타는 듯한 시선을 구연령에게로 돌렸다. "흑란화, 사실이오?" 구연령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사실이옵니다." "......!" 궁자기의 안색이 몇 차례나 변했다. 잠시 후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핫핫핫......! 정말 감탄했네. 철소제에게 이렇듯 영웅의 기도가 있을 줄이야." 그는 남궁궁에게로 우수를 뻗었다. "축하하네!" 휙! 그는 손바닥으로 남궁궁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러나 거기에는 엄청난 내가수법이 포함되어 있었다. 남궁궁은 그의 손이 어깨에 떨어진 순간 내장이 진동하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그러나 어깨를 으쓱하 며 웃어넘겼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궁형." 궁자기는 또다시 그의 오른쪽 어깨에 손바닥을 얹었다. 남궁궁은 이번에는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었 다. 그는 음양환사의 팔륜대금수(八輪大禁手) 중 흡륜결(吸輪訣)을 운용하여 궁자기의 중수법을빨아들 였다. "음!" 궁자기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갑자기 자신의 진력이 상대방에게 흡수되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의 안색이 침통하게 변했다. 그러나 내색을 한다면 자신의 위신이 떨어질 것은 뻔한 일이었 다. 그는 재빨리 손을 거두며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철소제가 밖에서 좋은 일을 만난 모양이군. 어쨌든 축하하네." 궁자기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자, 밤이 깊었으니 이만 돌아가겠네. 그만 푹 쉬게." 그는 인사를 끝으로 실내를 빠져 나갔다. 그를 따라왔던 세 청년도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에는 은근히 살기가 어리고 있었다. 그들이 사라진 직후, 남대천은 얼굴에 온통 기쁨을 담았다. "정말 철형의 호기는 대단하오!" 그러나 심기가 깊은 영호궁옥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살폈다. 그의 눈이 불현듯 크게 떠졌다. "철형! 저걸 보시오!" 그는 객청의 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다. "......!"


중인들의 안색이 변했다. 궁자기가 밟고 나간 바닥에는 세 치 깊이의 족인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영 호궁옥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것은 분명 궁자기가 철형에게 남기는 경고외다." 남궁궁은 담담하기만 했다. "개의치 않소." 그는 소매를 가볍게 휘저었다. 스슷......! 무형의 경력이 뻗어나와 궁자기가 남긴 족인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궁자기는 궁자기고, 나는 나요." 남궁궁은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에는 중인들을 압도할 만한 기상이 담겨져 있었다. 영호궁옥 과 남대천의 얼굴에는 경악과 감탄의 빛이 어렸다. "정말 대단하오!" 남궁궁은 그들을 향해 눈을 찡긋하며 은근히 말했다. "두 분만 동조하면 빠른 시일 안에 궁자기의 오만한 콧대를 꺽어보이겠소." 두 청년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더니 말했다. "철형이 앞장선다면... 나도 따르겠소." "이 남대천도 더 이상 궁자기의 오만함을 두고 보긴 싫소." 남궁궁은 두 사람을 향해 나지막이 물었다. "낙성세가는 어떻소?" "낙성환영(落星幻影) 낙무영(落無影) 말이시오?" 영호궁옥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렇소." "낙무영은 정말 신비한 자요. 아직도 마음을 보이지 않으니...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자도 궁자기를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오." 남궁궁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 팔공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굳게 결속되어 있는 것 같으나 실은 속셈이 각각 다르구나. 한데 어 떤 계기로 팔대세가가 뭉칠수 있었을까?' 그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여기에는 필시 보이지 않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엄청난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음모의 중심점은 틀림없이 풍운맹주에게 있을 것이다.' 남궁궁의 생각은 깊어졌다. 또한 풍운맹의 밤도 깊어만 가고 있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 보아야겠소이다." 영호궁옥과 남대천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남궁궁은 그들의 손을 굳게 잡았다. "두 분을 믿겠소이다." 그들은 몸을 돌려 문쪽으로 걸어갔다. 문득 남궁궁의 귓가에 영호궁옥의 전음성이 들렸다. (철형, 한 번만... 흑란화를 품게 해 주신다면 그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소.) 남궁궁은 흠칫했다. "하하! 흑란화 소저, 그럼 다시 뵙겠소."


영호궁옥은 구연령에게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모두 나가자 남궁궁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뇌리속은 마치 수백 가닥의 실타래가 한 데 뒤엉켜 있는 듯 어지럽기만 했다. '풍운맹....... 이곳은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가득한 곳이로구나. 정말 상상을 불허하는 곳이다.' ■ 왕도 2 권 제 13 장 죽음의 향기(香氣) ━━━━━━━━━━━━━━━━━━━━━━━━━━━━━━━━━━━ ① 시간은 쉬임없이 흘러갔다. 그 동안 남궁궁과 구연령은 늘 함께 붙어 있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두 사람의 관계를 주종 이상 으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경(四更). 사위는 모두 잠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침상 위에서 마주앉아 있었다. 구연령은 잠자리 날개같이 얇은 침의를 입고 있었는데 속살 이 고스란히 내비칠 정도로 야릇한 차림이었다. 남궁궁은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그는 전음술을 시전하고 있었다. (흑도대종사 화불군은 흑도의 무학을 총망라해 독문의 절기를 창안했소. 그것은 흑천경(黑天經)이란 비급에 기재되어 있소. 며칠 동안 낭자에게 전수한 것이 바로 그 무학들이오.) 남궁궁은 그 동안 밤마다 그녀에게 화노의 무학을 전수했다. 그는 남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항상 침 실에서 무학을 전수해 왔다. 그러므로 남들이 눈치챌 수가 없었다. (흑천경은 패도적이면서 흉성이 강하오. 때문에 여자가 익히기에는 맞지 않는 면이 있어 내가 조금 손 을 보았소.) 남궁궁은 슬쩍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탁자 위에 있던 두루마리 하나가 둥실 뜨더니 그의 손 안으 로 빨려들어갔다. (이것은 그 동안 틈틈이 적어둔 흑천경의 사본이오. 낭자는 이것을 지니고 있다가 대별산 흑천풍 총단 에 보내 제자들에게 익히도록 하시오.) 구연령의 얼굴에는 격동이 떠올랐다. (아아! 공자의 은혜에 뭐라 감사드려야 할지.......) 그녀의 눈에는 이슬방울이 반짝이고 있었다. (대종사님께서 실종되신 후로 흑도인들은 정파인들은 물론 마도인들에게까지 숱한 업신여김을 받아왔 어요. 그러나 이젠.......) 남궁궁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안심하시오. 다시는 그런 굴욕을 받게 하지 않을 것이오. 다만.......)


(......?) 구연령은 눈물 어린 시선을 반짝였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무척이나 귀여웠다. (흑도에도 율법이 있어야 하는 법, 흑천풍이 법도 있게만 따라준다면 나는 흑천풍을 무림에 우뚝 선 존재로 키워보겠소.) (공자님......!) 구연령은 격동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와락 남궁궁의 품에 몸을 던졌다. 남궁궁은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흠칫했다. 뭉클한 여체가 야릇한 느낌을 전해 주었다. (소녀는 이대로 영원히... 공자님의 시녀가 되어도 좋아요. 언제나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실로 대담한 고백이 아닐 수 없었다. 남궁궁은 그녀의 등을 토닥거리며 무엇인가를 말하려 했다. 그러 나 입을 다물었다. 구연령이 그의 품에서 고개를 쳐들었던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좋아요. 공자님은 이 흑란화에게는 태양과도 같으신 분이니까요.) 남궁궁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나도 언제까지나 그대와 함께 있고 싶소. 하지만 내게는 해야할 일이 너무도 많소.) (알고... 있어요.) (더구나 그 일은 너무도 위험한 일이오. 나 스스로도 장차의 일에 대해 장담할 수가 없소. 왜냐 면.......) 남궁궁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걸어야 할 길은 아직 무림에서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길, 왕도(王道)기 때문이오.) (......!) 구연령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랫동안 전설로 내려오던 삼도천(三道天)이 거론되다니....... 그녀는 한동안 멍하니 남궁궁을 바라보았다. 남궁궁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나는 가야만 하오. 그것은 날 키워주신 사부님들 과... 세상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오.) 구연령은 그의 얼굴을 계속 주시했다. 그녀의 마음에는 파랑이 일고 있었다. (그러므로 난 낭자에게 어떤 언질도 줄 수 없소. 중도에서 꺾일지도 모르고 어떤 불행한 일을 겪게 될 지도 모르기에.......) 구연령의 눈에 이슬이 어렸다. 그녀의 심장은 마구 고동치고 있었다. 설사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해도 그녀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를 모시고 싶은 것이 지금의 심정이었다. 문득 남궁궁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창밖으로 누군가 몸을 날리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 소리는 극히 미미하여 구연령은 눈치채 지 못했다. 그러나 남궁궁의 귀에는 마치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누구냐?"


남궁궁은 곧바로 신형을 날렸다. 그는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날아갔다. 눈 깜박할 사이에 지붕 위로 올 라선 그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적막하게 가라앉아 있는 어둠뿐이었다. '내가 지체한 시간은 고작 숨 한 번 몰아쉴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런 그 사이 달아나 버리다니....... 대 체 누가 이토록 빠른 경공을 소유하고 있단 말인가?' 남궁궁은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그는 한동안 지붕 위에서 있다가 다시 방 안으로 돌아갔다. 그가 사라진 직후다. 스슷......! 문득 한 가닥 인영이 맞은편 전각의 처마에서 솟구쳤다. 바로 그 순간 지붕 아래쪽에서 인영이 날아 올랐다. 그는 다름 아닌 남궁궁이었다. '후후... 걸렸다.' 그는 연기처럼 인영의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낙성전(落星殿). 팔전 중 낙성세가가 있는 곳이다. 낙성세가는 팔대세가 중 가장 신비한 단체로 후미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낙성세가의 가주는 낙성신군(落星神君) 낙위군(落韋君)이었다. 그는 사백 년 전에 명성을 날렸던 낙성 신마(落星神魔)의 전인으로 낙성세가를 세운 후 정도로 돌아선 인물이었다. 그 이후 낙성세가는 강호 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신비문파로 변신했다. 스슷...! 남궁궁은 낙성전의 처마 밑으로 숨어들었다. '뜻밖이군. 그 자가 낙성전으로 들어갈 줄이야.' 그는 주위를 샅샅이 둘러보았다. 잠시 후 그는 처마 밑에 있는 창문을 발견했다. 창문은 약간 열려져 있어 그런데로 안쪽을 들여다볼 수가 있었다. 그는 처마에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린 채 창문 안쪽을 살펴보았다. 그곳은 한 칸의 정실이었다. 막 한 남삼청년이 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여인을 방불케 할 정도로 준미했다. 게다가 깊숙한 눈에는 무궁한 지혜가 들어있는 듯했다. 남삼청년은 탁자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기이한 일이군. 며칠 사이에 한탄 뱀이 용으로 바뀌다니?" 그 말을 들은 순간 남궁궁은 가슴이 섬뜩했다. 청년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중얼거렸다. "이해가 안 되는군. 내가 아는 철비양이 아니다. 그 자에게 언제 그런 영웅의 기질이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 동안 철저히 자신을 감추고 있었단 말인가?"


청년은 눈빛을 번쩍 빛냈다. "반드시 뭔가 내막이 있다. 수 일 안에 반드시 밝혀내고야 말겠다." 청년은 몸을 일으키더니 내실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내실로부터 물소리가 들려왔다. 남궁궁은 내 심 중얼거렸다. '목욕을 하는 모양이군. 저 자는 지략이 비범하다는 낙성환영 낙무영이 틀림없겠구나.' 그는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마음을 바꾸고 창문을 살며시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② 남궁궁은 선공(先攻)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낙무영을 포섭하는 편이 낫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부딪치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런데 방 안에 들어선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방 안에 은은히 감돌고 있는 기이한 향기 때문이 었다. 그 향기는 어쩐지 여인의 규방(閨房)에서 나는 것 같았던 것이다. 그는 탁자로 다가갔다. 탁자 위에는 문방사우가 놓여 있었다. 그는 서슴없이 붓을 들어 종이 위에다 웅휘한 필체로 글씨를 썼다. <용은 비를 만나야 날아오르는 잠룡등천(潛龍騰天)하리라.>

법,

그대가

구름이

되어

준다면

남궁궁의 입가에는 담담한 미소가 어렸다. '이 자를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검공자의 영향력은 궁자기와 버금가게 될 것이다.' 이때 목욕을 다 끝냈는지 욕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궁궁은 재빨리 창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잠시 후 내실로부터 가벼운 발자국소리가 들리더니 낙성환 영 낙무영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낙무영은 커다란 천으로 몸을 가린 채 긴 머리를 풀어헤친 모습이었다. 그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방금 목욕을 마친 여인의 모습이었다. 비록 천으로 가리긴 했으나 앞가슴은 터질 듯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고, 우윳빛의 피부와 가느 다란 목, 쭉 뻗은 팔다리는 가히 절세미녀의 몸매였다. 낙무영은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러자 풍만한 가슴이 출렁거렸다. 창밖에서 그것을 본 남궁궁은 당혹을 금치 못했다. 이때 낙무영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탁자 위의 종이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급히 종이를 들어 읽어 보았다.


"이럴 수가... 나도 모른 사이에 다녀갔다니......!" 낙무영의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그러나 곧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그 자는 철비양이 아니었어. 내가 아는 철피양은 편협한 소인이었어. 결코 이런 웅후한 필체로 웅심을 남길 위인이 못 돼지." 낙무영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터질 듯한 젖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중얼거렸다. "그 자는 대체 누굴까? 게다가 흑란화를 곁에 두고 있으니... 그녀와는 어떤 사이일까?" 그의 얼굴에는 여인 특유의 은은한 질투심마저 떠올랐다. "어쨌든 그 자가 정말 용이라면 도리어 잘됐지 뭐야? 궁사형을 거절할 구실이 될 수 있으니. 호호 호......!" 낙무영은 문득 청아한 웃음을 터뜨리며 내실로 사라졌다. 남궁궁은 그녀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꿈을 꾼듯한 기분이었다. '뜻밖이구나. 낙무영이 여인이었을 줄이야.' 스슷! 한 가닥 백영이 어둠을 갈랐다. 그의 신법은 너무도 빨라 마치 한 줄기 바람이 스쳐가는 듯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 밤이 가기 전에 보다 많은 것을 알아내야겠다.' 그는 남궁궁이었다. 그가 풍운맹에 온 지도 어언 보름이 지나고 있었다. 그 동안에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수확은 팔공자 중 영호궁옥과 남대천을 심복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었 다. 그는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풍운맹의 방대한 조직에 대해서 몇 가지 기이한 현상을 파악하 게 되었다. 풍운맹을 이루는 성분은 실로 복잡미묘했다. 하부 조직원들은 정도인물과 사도인물이 혼재되어 있었 다. 그들은 물과 기름처럼 따로따로 놀았다. 또한 풍운맹의 주력이라는 팔대세가조차 겉으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듯했으나 내부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있었다. 구파일방에 속한 인물들은 대체로 중립적인 입장이었다. 아니, 그들은 다분히 냉소적이었다. 풍운맹의 주체가 팔대세가이다 보니 그들은 겉으로는 풍운맹에 협조하는 척하면서도 방관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반면 풍운맹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것은 팔전과 오원에 속한 인물들이었다. 오원의 원주들은 어느 문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일반무림인들이었다. 그런데 풍운맹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뜻밖 에도 컸다.


남궁궁은 처음 풍운맹이 무림의 거목(巨木)일 것이라 썩어가는 고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 상태라면 풍운맹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남궁궁은 십장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십장은 한 곳에 몰려 있었는데 구파일방에서 파견된 별다른 경비가 없는 듯했다. 대부분의 전각이 불이 꺼진 가운데 오직 한 곳만 불빛이 소림장(少林莊)이 었다. 소림장에는 소림사의 최고 항렬이라는 천자(天字)를 쓰고 비롯하여 여러 명의 고승들이 머물고 있었다.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인물들이 상주하는 곳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곳은

있는 천율선사(天律禪師)를

소림장의 객청 안. "......." 납덩이같이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객청 안에는 십 인의 인물들이 원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놀 랍게도 그들은 각파에서 파견된 십장의 최고인물들이었다. 무당파(武當派) 현우도장(玄羽道長). 청성파(靑城派) 청송우사(靑松羽士). 곤륜파(崑崙派) 백학일로(白鶴一路). 화산파(華山派) 매화일잔검(梅花一殘劍). 장백파(長白派) 현빙살노군(玄氷殺怒君). 태극문(太極門) 태극팔형객(太極八形客). 항산파(恒山派) 항산일군(恒山一君). 아미파( 嵋派) 오현대사(悟賢大師). 개방( ) 칠지취몽개(七指醉夢 ). 무림인이라면 이들의 쟁쟁한 명성을 모르는 사람을 결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자파의 명예를 걸고 풍 운맹에 파견된 고수들이었다. "아미타불.... 무림은 점점 암운이 짙어가고 있소이다."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소림의 천율선사였다. 중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율선사의 말에 동감이라는 표정들이었다. "전문(傳文)에 의하면 변황사패(邊荒四覇)가 이미 움직였다고 하오." "아...!" 여기저기서 무거운 탄식이 들렸다. 천율선사의 안색은 더욱 무거워졌다. "그들은 상호 연계하여 중원의 사방으로부터 진입해 오고 있소이다. 벌써 변방의 군소문파 수십 개가 그들에게 짓밟혔다는 소식이오." "으으음......." 누군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뿐이 아니오. 얼마간 뜸하던 전륜회(轉輪會)가 다시 혈겁을 일으키기 시작했소.


그 동안 전륜회의 활동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이 제왕천의 후신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한 듯하오." "......!" 중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생각하기도 싫은 과거사가 떠올랐던 것이다. 한동안 납덩이 같은 침묵이 장내를 짓눌렀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한참 후에야 개방의 칠지취몽개가 게슴츠레한 눈을 뜨며 물었다. "대사, 반드시 그렇다는 단정을 내릴 수 있소이까?" 천율선사는 지그시 눈을 내리감으며 말했다. "아미타불....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당년의 제왕천을 습격할 때......." 중인들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대사! 그 말씀은......." 곤륜의 백학일로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천율선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우리들은 당시 제왕천 습격에 가담했었소. 물론 그 자의 서찰 때문이기는 했지만......." 천율선사는 한숨을 길게 내쉰 후 말을 계속했다. "어쨌든 제왕천을 무너뜨리는 데 동조한 것은 사실이오. 또한 우리 말고도 많은 문파들이 그 일에 가 담했소. 그런데 우리들은 한 가지 중대한 우를 범했소이다. 그것은 당시 그 일을 획책했던 자의 정체 를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오." "......!" 좌중의 인물들은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빈승은 장문 사형과 함께 그 동안 그 일에 대해 은밀히 조사해 왔소이다. 그 결과......." 중인들의 얼굴에 일제히 긴장감이 떠올랐다. 그들의 눈은 한결같이 천율선사에게 쏠렸다. 그러나 천율 선사의 말은 그들을 실망시켰다. "용서하시오. 아직은 그것을 밝힐 단계가 못 되는 것 같소. 다만 전륜회가 제왕천의 화신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는 것만은 말씀드릴 수가 있소이다." "그럼... 무림왕 남궁후가 생존해 있단 말이오?" 청송우사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중인들은 초조한 표정으로 천율선사의 답변을 기다렸다. "아미타불.... 그렇소이다. 당시 그는 죽지 않았소이다." "어찌 그럴 수가......!" 중인들의 손에 땀이 고이고 있었다. 무림왕 남궁후는 천하제일고수였다. 만일 그가 복수의 칼을 뽑는 다면 무림은 온통 수라장이될 게 뻔했다. 천율선사는 문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일이 그리 단순하지가 않소이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커다란 음모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


중인들은 의혹을 금치 못했다. 천율선사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전륜회는 무서운 집단이오. 게다가 변황사패와 구중천의 준동 또한 무시할 수 없소이다." "구중천은... 아직 이렇다할 활동이 없지 않소?" 항산일군이 반문했다. 천율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소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가장 무서운 세력이 될지도 모르오." 중인들은 그저 아연할 뿐이었다. 그들은 천율선사가 많은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서 털어놓지 않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러분들은 구중천 소속의 동면인(銅面人)이 이 년 전 각파를 방문하여 비무를 청했던 일을 기억할 것이오." "으음!" 중인들은 신음을 발했다. 천율선사는 염주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당시 그들은 각파의 장문인들을 불과 백 초 안에 격파시켰소." 이때 태극팔형객이 반발했다. "하지만 그야... 모두 가짜들이 아니었소?" 놀라운 말이었다. 구중천의 동면인과 비무한 장문인들이 가짜였다니? 실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어찌 자파의 명예가 걸린 비무에 가짜 장문인들을 내세울 수 있단 말 인가? "아미타불.... 이십 년전 제왕천의 사건 이후 우리 구파일방은 비밀리에 주요제자들을 조사동에 입동시 켜 뼈를 깎는 무공수련을 시켜 왔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것은 언제 마각을 드러낼지 모를 신비인 물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소이다. 그러나......." "......." 중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천율선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소이다. 구중천의 동면인들을 상대한 것이 비록 가짜이긴 했으나 그들의 무공은 최소한 일류급들이었소." 천율선사는 침중한 눈빛으로 중인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동면인들은 고작 구중천의 금은동목철(金銀銅木鐵) 중에서 중간급 서열에 불과하지 않소? 그 것만으로도 구중천의 힘을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않겠소?" 천율선사의 말은 구구절절이 옳았다. 때문에 그 말에 반박할 이유가 없었다. 중인들의 안색은 어둡게 가라앉고 있었다. 천율선사는 그들의 얼굴을 둘러보더니 다시 침통하게 말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소이다." "그건... 또 무엇이오? 선사."


청송우사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러분들은 사성(死城)을 잊지 못할 것이오." "사성!" 중인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제왕천이 있던 곳이 아니오?" 아미의 오현대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소. 과거에는 천하무림에 군림하던 곳이었지만 그날 이후로는 폐허가 되었소. 당시 워낙 참혹한 비극이 벌어졌기에 억울하게 죽은 원귀가 나논다는 소문 때문에 사성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이오." "음... 뿐만 아니라 근처에 접근하던 자들이 행방불명되는 일도 빈번하게 있었지요." 항산일군의 말이었다. 천율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최근 사성에 출입하는 괴인영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오. 더구나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하나같이 얼굴에 면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오." "......!" 중인들의 경악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럴 수가! 그럼 구중천이 그곳에 거처를 두고 있단 말이오?" "미... 믿을 수가 없소!" 중인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을 내뱉었다. 천율선사는 불호를 외워 좌중을 진정시킨 후 말을 이었다. "아미타불....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이 높소이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구중천이 왜 하필이면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는지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외다." "......."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각파의 영수급 위인들은 모두 그 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구중천과 사성의 관련에 대해 짐작이 가지 않았다. 천율선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흐음... 어쩌면 변황사패와 전륜회, 구중천 등 현재 무림을 혼란케 하고 있는 그들 사이에 어떤 연관 이 있는지도 모르오." "예... 엣?" 무당의 현우도장은 눈을 크게 뜨며 부르짖었다. 다른 고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온통 어안이벙벙 한 표정들이었다. "물론 아직은 다만 짐작에 불과할 따름이오. 아미타불......!" 천율선사의 불호성은 중인들의 가슴을 쇠망치로 치는 듯한 타격을 주었다. "폐사에서는 은밀히 여러 가지 일들을 조사해 왔소이다. 그 동안 알아낸 사실들은 실로 충격적이었소 이다. 그러나 아직 밝힐 단계가 아니외다. 섣불리 발설하면 엄청난 혼란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 이오. 그러니 여러분께서는 널리 이해해 주시기 바라오."


천율선사는 눈을 가늘게 한 채 중인들을 하나하나 둘러본 후에 침중하게 말했다. "오늘 너무 많은 것을 말한 것 같소이다. 물론 이 자리에는 빈승과 여러분 외에 달리 외인이 없긴 하 지만... 분명 오늘 오간 말들은 밖으로 흘러나가게 될 것이오. 그렇게 되면 빈승은 죽음을 면하기 힘 들겠지요?" "......!" 중인들은 그의 심상치 않은 말에 일제히 안색이 변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내심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중에 첩자가 있다는 말이오?' 천율선사는 품 속에서 작은 목합을 꺼내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 동안 본사가 밝혀낸 음모의 전말이 이 속에 들어 있소. 혹시라도 빈승이 암산을 받아 죽게 된다면 여러분은 이것을 열어 보시오. 아미타불......." 천율선사는 불호를 외우며 눈을 감았다. 마치 다시는 입을 열지 않겠다는 듯이. "......!"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잠시 후 무당의 현우도장이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선사께서는 그 목합을 어디다 보관하실 셈이오?" 천율선사는 눈을 반개한 채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빈승이 품 속에 지니고 있을 것이오." "무량수불.... 그러다 탈취라도 당한다면?" 현우도장의 의문에 중인들도 동감인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나 천율선사는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물론 빈승에게 달린 복안이 있소이다. 비록 목숨을 건 방법이긴 하지만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오. 아미타불......." 그는 불호성을 발하며 눈을 감아 버렸다. "......?" 중인들은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천율선사는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중인들은 인사를 나눈 후 자신들의 처소로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 남궁궁은 처마 밑에서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는 천율선사에 대해 탄복하고 있었다. '비록 무림의 상황이 어렵긴 하나 소림의 정기는 아직도 면면히 살아 있는 것 같다. 특히 저 노승은 무엇인가를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 남궁궁은 구파일방의 고인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하여 많은 것을 느꼈다. 특히 과거 제왕천을 공격하 는 데 구파일방이 개입되었다는 사실과 또 다른 신비인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음모의 주동자는 그 신비인일 가능성이 짙다.' 그는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제왕천을 무너뜨리는 일에 정도무림의 기둥인


구파일방이 개입 되었다는 사실은 커다란 실망을 불러일으켰다. 한편으로는 신비인의 존재가 가슴에 걸리고 있었다. '그 자야말로 일대효웅일 것이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의 심기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궁궁은 다시 객청 안을 살펴보았다. 천율선사가 홀로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 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어쩌면 저 노선사는 신비인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소림의 장문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은 노선사가 굳이 스스로를 미끼로 살수를 기다린다는 점이다.' 남궁궁의 생각은 깊어만 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갑자기 머리가 환하게 밝아졌다. '그렇다! 소림에서는 신비인의 정체를 어느 정도 파악하기는 했으나 확신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 서 저 노승은 스스로를 미끼로 신비인의 마각을 드러내게 하려는 것이다.' 남궁궁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그렇다면.......' 그는 천율선사를 바라보았다. '노선사는 스스로 희생양이 되려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음모를 백일하에 밝히려 하는 것이다.' 남궁궁은 눈을 감고 명상에 빠진 듯한 천율선사를 바라보며 내심 감명을 느꼈다. 그는 계속 추리해 보았다. '만일 신비인이 선사를 죽인 후 비밀의 목합을 탈취해 가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선사 는 바보가 아니다. 그는 분명 복안이 있을 것이다.' 남궁궁은 생각을 굴려보았다. 천율선사가 과연 어떤 복안을 품고 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그러나 아 무리 생각해도 짐작이 가는 것이 없었다. 결국 그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열쇠는 목합에 있을 것이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덧 어둠이 스러지고 여명이 싹터 오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설마 오늘 중으로 독수가 뻗어오진 않을 테니.' 남궁궁은 신형을 날렸다. 그는 한 가닥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런데 그가 처마를 떠난 순간, 천율선사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그는 창문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단 말인가?' 실상 천율선사는 남궁궁이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


이었다. 천율선사는 다시 눈을 감고 불호를 외우기 시작했다. 그의 미간에는 잿빛 그늘이 덮이고 있었다. ③ 충격!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충격파가 풍운맹을 강타했다. - 천율선사(天律禪師)의 죽음! 그 소식은 새벽 안개가 채 걷히기도 전에 전해졌다. 그의 죽음을 발견한 사람은 무당의 현우도장이었다. 현우도장은 새벽공기를 맞으며 소림장으로 향했다. 평소 교분이 두터웠던 천율선사와 함께 차를 나누 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가 소림장에 당도했을 때, 천율선사는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그와 함께 탁자 위에 놓여 있어야 할 목합도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현우도장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불과 몇 시진 전만 해도 함께 앉아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는 급히 소림구대금강승(少林九大金剛僧)을 불렀다. 시신을 목도한 소림의 구대금강승들은 놀란 나머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누가 이곳에 다녀간 적이 있었소?" "없었습니다. 밤새 소림장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방 안에 한 사람도 출입한 적이 없었습니다." 구대금강승의 대답이었다. 사실이 그렇다면 가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도대체 어떤 자가 유령처럼 숨어들어 천율선사를 시 해하고 목합을 탈취해 갔단 말인가? 아무튼 이 소식을 접한 풍운맹은 크게 술렁였다. 풍운맹주는 여명이 채 트기도 전 소림장으로 달려왔다. 그는 현우도장으로부터 사건의 경위를 듣고는 침통한 표정이었다. 남궁궁은 소림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너무 방심했다. 설마 바로 마수가 뻗칠 줄은 몰랐다.' 그는 어젯밤 소림장을 떠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후회는 짧을수록 좋은 것이다. 그는 직접 나서서 사건의 현장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의 좌우에는 영호궁옥과 남대천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도 이번 사건에 대해 의혹을 금치 못하고 있 었다. 그러나 정작 천율선사가 스스로를 미끼로 음모자를 밝히려 했던 사실을 비롯하여 어젯밤 구파 일방의 장로들이 소림장의 객청에 회동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객청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각파의 장로들은 빠짐없이 모여 있었다. 남궁궁 일행이 들어서자 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인사를 나눌 경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궁궁은 객청 안을 둘러보았다. 객청 한가운데 천율선사의 시신이 목관에 안치되어 있었다. 서둘러 시신을 수습했으므로 아직 제기나 장례물품이 채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남궁궁은 소림장으로 오면서 내심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흉수가 구파일방의 장로들 가운데 한 명일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어젯밤의 일을 아 는 자는 그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장로들을 한 명 한 명 살펴보았다. 그러나 표정만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남궁궁은 관을 향해 다가갔다. '선사가 죽기 전 모종의 단서를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는 관 속의 시신을 살펴보았다. 천율선사는 생시의 모습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아무런 상처도 보 이지 않았다. 다만 미간(眉間)에 붉은 반달형의 흔적이 은은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마침 십전의 장로들도 시신을 조사하고 있었다. 개방의 칠지취몽개가 음! 하고 신음을 발하더니 중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사인을 알아냈소. 대사는 홍살분(紅煞粉)이란 무형무취의 독에 당했소이다!" 좌중의 인물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게 사실이오? 홍살분이라면... 변황사패의 하나인 만독문(萬毒門)의 독이 아니오?" 청송우사의 놀람에 찬 말이었다. 중인들은 모두 안색이 침중해졌다. 새롭게 밝혀진 사실은 장내에 무거운 분위기를 몰아오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무당의 현우도장이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그럼... 만독문의 인물들이 침투해 살해했단 말이오?" 시신을 살펴보고 있던 칠지취몽개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는 일이오." "......?"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그들이 나서지 않아도 누군가 그들의 독을 사용해 살해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오." "으음." "그럴 수도 있을 거요." 중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남궁궁은 염두를 굴리고 있었다. '선사를 독살한 것이 홍살분이라고? 그것은 손톱 밑에 독분을 끼워두었다가 은밀히 퉁겨내어 상대가 호흡하는 중에 자신도 모르게 중독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눈길을 돌려 장내의 인물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주로 구파일방의 장로들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장로들의 노출된 손톱을 일일이 살펴본 그는 그 중 여섯 명의 인물들은 혐의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들의 손톱은 모두 짧았다. 따라서 독분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다만 나머지 삼 인은 손을 소매 속에 감추고 있어 손톱을 살펴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현우도장과 화산파의 매화일잔검, 태극문의 태극팔형객 등 이었다. '필히 범인은 저들 중 하나일 것이다.' 남궁궁은 은밀히 삼 인을 향해 접근해 갔다. 그때였다. "여러분, 이것을 보시오!" 개방의 칠지취몽개가 흥분한 음성으로 외쳤다. 그는 관이 있는 곳을 떠나 천율선사가 앉아 있던 탁자 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탁자의 단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중인들은 일제히 탁자로 다가갔다. 칠지취몽개가 가리키고 있는 탁자 위. 그곳에는 안력을 돋우지 않으면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향(香)> 남궁궁도 어깨 너머로 그 글자를 보았다. '향(香)? 대체 무슨 뜻으로 남긴 것일까?'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이때 화산파의 매화일잔검이 팔짱을 푸는 것이 보였다. 그는 급히 그 자의 손톱을 살펴보았다. 매화일잔검의 손톱도 짧은 편이었다. '이 자도 아니다.' 남궁궁은 이번에는 태극팔형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태극팔형객은 아직도 소매 속에 손을 찔러넣고 있었다. '태극문의 인물들은 내가권장술에 능하다. 따라서 독분을 사용하기에 적합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곧 빗나가고 말았다. 곤륜의 백학일로가 탄식하며 태극팔형객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도우, 우리가 밤새 바둑을 두는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정말 상상도 못 했소." "허허... 그러게 말이오. 정말 허무하구려, 도장." 남궁궁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고개를 저었다. '저 두 사람이 밤새 바둑을 뒀다면 역시 범인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의 눈길은 무당의 현우도장에게 향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현우도장이야말로 가장 혐의가 짙은 인물이었다. 맨 처음 천율선사의 죽음을 확인 한 자가 그였기 때문이다. 소림의 구대금강승이 밤새 객청 주위를 지켰다고 했다. 그 동안 아무도 객청에 드나든 자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현우도장이 천율선사를 방문하는 척하면서 홍살분으로 암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남궁궁은 현우도장을 향해 걸어간 후 정중히 포권지례했다.


"도장, 안녕하십니까?" 현우도장은 흠칫했으나 이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누구신가 했더니 검공자이셨구려." 그는 고개를 약간 숙여 보였을 뿐, 소매에 찔러넣고 있는 손은 빼지 않았다. 남궁궁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생은 항상 무당의 검법을 앙모하고 있었소이다. 차제에 도장을 뵙게 되었으니 한 수 가르침을 받을 까 합니다. 후배를 위해 무당의 검학을 견식할 수 없는지요?" "......!" 현우도장의 안색이 변했다. 뿐만 아니라 중인들도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남궁궁, 즉 검공자 철비양의 행동은 이 자리와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천율선사가 죽은 마당에 그의 시신이 있는 객청에서 무학을 견식하겠다니.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억 지였다. 물론 남궁궁은 자신의 행동이 억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우도장이 소매에서 손을 빼내게 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서 따가운 눈총을 각오하 고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또한 평소의 철비양이 무례하고 교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런 행동을 취한 것 이기도 했다. 한편, 현우도장의 안색은 보기 싫게 변했다. 그는 철비양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중인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은 무 당에 대한 모독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강호경험이 풍부한 인물이었다. 이 자리에서 화를 낸다는 것은 도량이 좁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었다. 그는 두 손을 흔들며 도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허! 그 무슨 말씀이시오? 풍운맹이 결성된 지금 우리는 한 몸이나 다름없는 처지인데 무슨 무공의 인증이 필요하겠소? 더구나 이 자리는 선사께서 화를 당한 자리거늘... 정히 검공자께서 뜻이 있으시면 차후라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을 것이외다." 현우도장의 말은 실로 적절한 것이었다. 그는 무당의 장로로서 품위를 지켰을 뿐더러 후배에 대한 선배로서의 적절한 충고도 잊지 않은 것이 었다. 남궁궁은 그가 손을 저을 때 손톱을 주시했다. 그의 손톱은 짧았다. "하하하! 후배가 철이 없었습니다. 도장의 너그러운 용서를 바랍니다." 그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돌아섰다. 남궁궁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 버린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구파일방의 장 로들에게 혐의를 둘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잠시 후 그는 영호궁옥과 남대천을 대동한 채 소림장을 빠져 나왔다. 그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지 기만 했다. '그럼 대체 흉수는 누구란 말인가?' 의문에 잠겨있던 그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어쩌면... 독분을 사용한 후 손톱을 깎아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무당의 현우도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게 의심이 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증거가 없었다. 확실한 증거를 잡지 못한 이상 그를 몰아 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④ 다시 밤이 찾아들었다. 풍운맹 경내에는 밤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다. 유난히 짙은 밤안개로 인해 풍운맹은 분위기는 더욱 무 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천율선사가 독살당해 죽은 후로 풍운맹에는 살벌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특히 범인이 밝혀지지 않 았으므로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흉수는 아직 풍운맹 내에서 활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바로 곁에서 비웃음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좌불안석이었다. 그들은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공연히 많은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 어울려 있다 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으아아아악!" 돌연 밤안개를 흔들며 누군가의 단말마 비명소리가 들렸다. 비명이 흘러나온 것은 소림장과 바로 인접해 있는 무당장이었다. 무당장의 정실(淨室). 실로 끔찍한 정경이 벌어져 있었다. 정실 안은 온통 피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피는 포단 위에서 시작하여 마루바닥까지 흥건히 적시며 흘 러내리고 있었다. 포단 위, 현우도장이 머리가 으스러진 채 죽어 있었다. 휙! 정실 안으로 한가닥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바로 남궁궁이었다. 남궁궁은 포단 위에 쓰러져 있는 현우도장을 발견하고 발을 굴렀다. '아뿔싸! 한 발 늦었구나.' 그는 마침 무당장으로 오던 중이었다. 아무래도 현우도장에 대한 의심을 떨칠 수가 없어 단서를 잡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현우도장의 죽음을 목도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정실 한가운데에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비어 있었으나 하나는 아직 더운 김이 피어오르고 있 었다. 남궁궁은 빈 잔을 들어보았다. 순간 눈살이 찌푸려졌다. 찻잔에서 종류를 알 수 없는 은은한 향기가 풍겼던 것이다. 갑자기 머리 속에 떠오르는 영감이 있었다. 그는 찻잔을 품 속에 갈무리하고는 다시 한 번 정실 안을 둘러본 후 신형을 날렸다. 그가 사라진 직후, 휙휙! 정실 안으로 인영들이 어지럽게 날아들었다. 그들은 정실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경악성을 발했다. "앗...! 도장께서!" "무량수불....... 이럴 수가......!" 그들은 무당파의 도사들이었다. 참혹하게 죽어 있는 현우도장의 시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에는 공 포의 빛이 떠올랐다. 한편 남궁궁은 풍운맹의 후면을 향해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새벽안개는 여전히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잠시 후 그는 하나의 담장을 뛰어넘었다. 담장을 넘자 아담한 화원이 나타났다. 화원에는 기화요초들 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 그는 화원 한가운데 선 채 눈썹을 꿈틀거렸다. 화원에서는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꽃향기와는 달랐다. 기이하게도 약초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면 화원의 화초들 사이에 약초가 재배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궁궁은 고개를 끄 덕인 후 화원 건너편에 있는 별원을 향해 걸어갔다. 별원의 내실(內室). 방 안에는 약초 냄새가 짙게 풍겼다. 사방은 약장(藥醬)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선반에는 다양한 약재(藥材)가 얹혀져 있었다. "......." 한 여인이 약초를 배합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리옷만을 걸치고 있었다. 자리옷은 속이 은은히 비칠 정도로 얇아 그녀의 풍요로운 굴곡이 고스란히 비쳐 보였다. 여인은 눈은 심호처럼 깊었다. 그녀의 눈에는 무한한 지혜가 서려있는 듯했다. 또한


살포시 다물고 있 는 입술은 꽃잎을 겹쳐 놓은 듯 육감적이었다. 여인의 얼굴에는 다소 지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여인은 그녀는 섬섬옥수로 이마에 배인 땀을 닦아내며 배합한 약초를 분류했다. 이어 휘장이 드리워 져 있는 침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막 침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누... 누구예요?" 그녀는 경악성을 발하며 굳어졌다. 침실 안에는 불청객이 와 있었던 것이다. 침상 옆 의자에 누군가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던 것이다. "감히 누구기에 여인의 처소를......?" 그녀는 말하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불청객이 그녀를 향해 몸을 돌린 것이다. "오... 오빠......!" 여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불청객은 빙그레 웃었다. "운리(雲梨), 오랜만이구나." "우... 우오빠!" 여인. 그녀는 바로 초은약왕의 손녀 모용운리였다. 그녀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 다가 갑자기 새처럼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불청객 사내는 남궁궁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미 본래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모용운리는 남궁궁의 말대로 그와 헤어진 후 바로 풍운맹을 찾았다. 그 후로 풍운맹주의 명을 받아 약을 연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 남궁궁은 남대천으로부터 모용운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들은 바 있었으므로 바로 그녀를 찾아온 것이었다. "우오빠, 돌아와 주셨군요? 이게 꿈은 아니겠지요?" 모용운리는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남궁궁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운리, 그사이 많이 변했구나." "어떻게 변했는데요?" 그녀는 수줍은 듯 얼굴을 살며시 붉히며 반문했다. "안 보던 사이에 딴 사람이 된 것 같다. 과거보다 훨씬 성숙해 진것 같은데?" "정말이에요?" 모용운리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응석을 부렸다. "하하! 녀석, 그 버릇은 여전하구나." 남궁궁은 그녀의 등을 다독거려 주었다. "다 큰 처녀가 응석을 부리다니, 계속 이러면 엉덩이를 때려 주겠다." "흐응! 어디 마음대로 해봐요?" "정말?" 남궁궁은 손을 번쩍 들어 그녀의 둔부를 철썩 때렸다. '......!' 마치 물에 젖은 솜을 때리는 듯 야릇한 느낌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그는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 용운리는 지난날의 소녀가 아니었다. 실팍한 둔부의 느낌이 성숙한 여인의 그것이었다. 남궁궁은 잠시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이때 품에 안겨 있는 모용운리에게서 뭉클한 감촉이 전해졌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몸에 닿은 것이다. "오빠......." 모용운리는 그의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갑자기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달콤한 음성으로 불렀다. "음." 남궁궁은 그저 신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보고 싶었어요." 모용운리는 대담하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때 이후로 한시도 오빠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오빠는 저의 이런 마음을 모르실 거예요." 침실 안에는 황촉이 타고 있었다. 일렁이는 황촉빛 아래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실로 요염했다. 특히나 자리옷만 걸치고 있었으므로 그 녀의 성숙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남궁궁은 갑자기 어색해졌다. 그도 역시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다. 남녀가 단둘이 침실에 있다는 사실 이 그의 기분을 야릇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모용운리는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더욱 몸을 밀착시키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제게 따뜻하게 대해 준 사람은 오직 오빠뿐이었어요." 그녀는 눈시울을 붉혔다. 남궁궁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운리, 나도 네가 보고 싶었다." 그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사실 그 동안 모용운리에 대해 여러 차례 생각해 왔었다. 그도 고아가 아 닌가? 더구나 그를 친손자처럼 대해 주던 천치옹이 죽은 지금 그는 의지가지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 래서 초은약왕이 죽은 후 천애고아가 되어 버린 모용운리에 대해서 각별히 연민지정을 느끼고 있었 다. 특히 그녀와 영약을 만들면서 함께 했던 한 달여의 기간 동안 흠뻑 정이 들었다. 모용운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정말인가요?" "물론이지.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하겠느냐?" "아! 오빠!" 모용운리은 와락 그의 목을 껴안았다. "......!" 남궁궁은 흠칫했다. 그녀가 온몸을 실어오니 얇은 천 사이로 나긋나긋한 여인의 몸이 그대로 느껴진 것이었다. 그녀는 과거의 모용운리가 아니었다. 그가 변했듯이 그녀 역시 변해 있었다. 그녀는


성숙한 여인이었 고, 그도 역시 당당한 사내 대장부로 성장했다. 남녀가 껴안고 있으니 어찌 야릇한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엇?" 남궁궁은 놀람을 발했다. 갑자기 모용운리가 그를 밀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그는 벌렁 쓰러졌다. 마침 뒤에 침상이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침상 위로 쓰러졌다. 모용운리는 그의 가슴에 안긴 채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화사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숨을 쌔근거리며 남궁궁을 내려다 보았다. 남궁궁은 그녀의 눈동자에 어떤 갈망이 깃들어 있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욱이 품에 안긴 채 숨을 가쁘게 몰아쉴 때마다 그녀에게서는 처녀 특유의 체취가 풍기고 있었다. "저......." 모용운리는 얼굴을 붉힌 채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했다. 그러나 기어이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 리다 고개를 푹 떨구었다. 남궁궁은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안은 채 물었다. "방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 모용운리는 그 말에 용기를 얻은 듯 살며시 눈을 뜨며 말했다. "제가 오빠를... 사랑해도 될까요?" "......!" 남궁궁은 흠칫했다. 뭐라 대답한단 말인가? 만일 거절하면 모용운리는 크게 실망할 것이 분명했다. 그 는 그녀가 실망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모용운리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어 주었다. "운리, 이것이 내 대답이다." "아......!" 모용운리는 눈물이 글썽해졌다. 그녀는 남궁궁의 목을 껴안았다. 이렇게 되자 남궁궁은 충동이 일어났다. 성숙한 여인의 뭉클거리는 육체가 그의 몸을 누르고 있으니 절로 기분이 이상해진 것이다. 그는 자세를 바꾸었다. 그녀를 안은 채 몸을 돌리자 반대로 그가 모용운리의 몸을 타고 오른 셈이 되 었다. 그는 서서히 그녀에게 입술을 가져갔다. "......." 두 남녀의 입술이 맞닿았다. 짜릿한 느낌이 파도처럼 혈관을 치달리는 듯했다. 남궁궁은 그녀의 가느 다란 허리를 가볍게 안으며 깊은 입맞춤을 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으나 그들의 입맞춤은 달콤하고 뜨거웠다. "오빠... 이제 전... 오빠의 여자예요." 입술을 떼었는데도 모용운리는 여전히 꿈꾸는 것 같은 표정으로 잠꼬대하듯 중얼거렸다. 남궁궁은 그


런 그녀의 얼굴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모용운리와 그는 똑같은 고아였다. 천지간에 의지할 데 없는 남녀의 정서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이기에, 밤이 다해 가기 전에 뭔가 서로를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이 교류된 것 같 았다. 사르륵! 천 스치는 소리가 밤의 적막을 가볍게 흔들 뿐, 침실 안에는 서서히 열기가 피어올랐다. 이윽고 모용운리는 태초 그대로의 몸이 되었다. "......!" 남궁궁은 황홀한 듯 그녀의 나신을 내려다보았다.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모용운리의 나신은 아 름다웠다. 그는 취한 듯이 그녀의 나신을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아이, 부끄러워요......." {{}}모용운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그지없이 귀엽게 느껴졌다. 남궁궁은 자신의 옷도 벗어던졌다. 이윽고 두 남녀는 알몸이 된 채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게 되었다. "아아." 모용운리는 사나이의 탄탄한 근육이 닿자 알 수 없는 신음을 발하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남궁궁의 손이 그녀의 온몸을 부드럽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누가 가르쳐 주어서가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는 여인의 나신을 애무해 나갔다. 동그랗게 솟아오른 젖 가슴이 그의 손바닥에서 이리저리 밀려 나갔다. 그러나 차츰 단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입술로 그녀의 목덜미를, 동그란 어깨를, 수밀도처럼 익어가고 있는 가슴을 애무했다. 그때마다 모용운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을 가늘게 경련했다. 그러나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아니, 차츰 그녀도 적극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목을 껴안았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손바닥으로 남궁궁의 등을 쓰다듬던 손이 구부러지며 손톱을 박 기도 했다. 점차 방 안에는 뜨거운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마침내 남궁궁은 그녀의 성문을 열고 입성했다. "아......!" 모용운리는 비명에 가까운 탄성을 발했다. 태어난 이래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달콤한 기쁨이기도 했다. 그녀의 눈꼬리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알 수 없는 슬픔이 치밀어올랐다. 남궁궁은 그녀의 깊은 곳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그 느낌을 놓기 싫었다. 손으로


그의 머리칼을 어 루만지며 그녀는 사지를 벌려 그를 껴안았다. 마치 대지(大地)의 여인인 듯 사나이를 자신에게 가두어 두려는 것 같았다. 남궁궁은 그녀의 깊은 곳에서 평온을 느꼈다. 짜릿한 쾌감과 평화로운 느낌이 동시에 그를 휘감았다. 갑자기 그의 몸이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용운리는 입술을 벌렸다.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처녀의 몸이기에 아픔이 먼저 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몸은 해파리처럼 풀어지고 있었 다. 마침내 그녀는 전신이 나른해지면서 실핏줄까지 야릇한 쾌감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남궁궁이 몸이 움직일 때마다 그녀는 더욱 그를 세차게 껴안으며 놓지 않으려 했다. 얼마나 되었을까? 갑자기 그녀는 자신의 내부에서 화려한 폭발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아......." 그것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희열이었다. 비로소 여인이 되었다는 신호였으며 무한한 충족감 이기도 했다. 남궁궁은 몸을 경직시킨 채 얼굴을 그녀의 가슴에 깊이 묻고 있었다. 모용운리는 그의 머리를 부드럽 게 끌어안으며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감정에 휩싸였다. '사랑해요, 궁오빠.......' ■ 왕도 2 권 제 14 장 천일만리향(千日萬里香) ━━━━━━━━━━━━━━━━━━━━━━━━━━━━━━━━━━━ ① '운리, 정말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했구나.' 남궁궁은 침상에 비스듬히 누운 채 곁에 누워 있는 모용운리의 나신을 더듬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피부는 우윳빛이었다. 목은 학같이 가늘었으며, 그 아래로는 한 쌍의 봉우리가 팽팽하게 솟아 올라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부드럽게 뻗어내린 아랫배에는 군살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한가운데 움 푹 파여 있는 배꼽은 귀엽기 그지없었다. 그는 슬며시 손을 뻗어 그녀의 가슴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손바닥에 감촉되는 젖가슴은 묻어날 듯이 부드러웠다. 그는 가만히 손을 움켜쥐었다. 팽팽한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는 다시 손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비단결처럼 매끄러운 능선을 따라 내려간 손이 그녀의 배꼽에서 멈추었다. 한 번 맛본 재미는 좀처럼 손에 놓기 싫은 법인가?


그는 잠시 망설이다 손을 움직였다. 여인의 비밀스런 언덕에서 그의 손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부드 러운 방초(芳草)가 손에 감촉되었다. 그는 여인의 언덕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으음." 모용운리는 신음을 발하며 몸을 꿈틀거렸다. 그녀는 하반신을 오므리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이, 그만해요. 오빠." 그녀는 작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때렸다. 남궁궁은 흠칫했다. "깨어 있었군?" 모용운리는 짐짓 그를 흘겨보았다. "흐응. 아직 만족 못하셨나요?" 남궁궁은 히죽 웃었다. 그는 슬며시 그녀의 둔부를 쓰다듬으며 넉살좋게 말했다. "만족할 수가 있느냐?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고 싶은걸?" 모용운리는 그만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 그녀는 뭐라 말하려 했으나 포기하고 눈을 살포시 감아 버렸다. 남궁궁은 그녀의 둔부를 쓰다듬다가 더욱 아래로 손을 움직였다. 그때였다. "엇?" 그는 비명을 질렀다. 모용운리가 그의 옆구리를 꼬집었기 때문이다. "이런, 가만 두지 않겠다." 그는 어흥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모용운리는 비명을 지르며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어딜?" "어머멋!" 모용운리는 비명을 질렀다. 이불 속으로 뻗어온 억센 손이 그녀의 다리를 힘껏 잡아 당겼기 때문이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남궁궁의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리를 잡힌 채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남궁궁은 그녀의 다리를 잡아당긴 후 재빨리 올라탔다. "오빠, 제발 그만........" 모용운리는 애원했다. 남궁궁은 짓궂게 웃으며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으음."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남궁궁이 그녀의 가슴을 입술로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온몸 에 힘이 빠지는 걸 느끼며 사지를 늘어뜨리고 말았다. 집요하고 뜨거운 공략에 그녀는 저항을 포기한 채 그의 애무를 받아들였다. 그녀의 가슴에는 무한한 행복감이 번지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든든한 사나이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감을 안겨 줄 줄이야.


그녀의 눈꼬리로 다시금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건... 뭐죠?" 남궁궁이 내민 찻잔을 보고 모용운리는 어리둥절했다. "찻잔의 냄새를 맡아 봐라. 그 향기가 무엇인지 알겠느냐?" 찻잔은 현우도장이 살해되었던 정실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모용운리는 찻잔을 받아들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녀의 안색이 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이건 천일만리향(千日萬里香)이에요." "천일만리향?" "틀림없어요. 이 향은 일단 몸에 배게 되면 천 일 동안 사라지지 않는 특성이 있어요. 뿐만 아니 라......." "특수한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면 백 리 밖에서도 이 향을 맡을 수가 있어요." 남궁궁은 눈을 번뜩였다. "그럼 찻잔에 천일만리향이 남게 된 이유는?" "천일만리향이 몸에 밴 사람이 차를 마시면 이런 냄새가 남게 돼요. 그것도 꽤 오랫동안이오." 남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제야 알겠군. 천율선사가 죽기 전에 남긴 향(香)이란 글자의 의미를." "......?" 모용운리는 금침을 덮은 채 얼굴만 내밀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남궁궁은 의자에 앉아 명상에 잠겼다. '이제 알겠다. 천율선사는 목합 속에 천일만리향을 넣어 두었다. 그는 목합을 여는 자에게 천일만리향 이 배도록 안배해 둔 것이다. 그래서 범인을 색출하려 한 것이다.' 남궁궁의 두뇌는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흉수는 왜 현우도장을 죽였을까? 해답은 간단하다. 천율선사를 살해한 것이 그이기 때문이 다. 흉수는 그에게 목합을 전달받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다시 현우를 죽인 것이다.' 남궁궁은 결론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흉수는 천일만리향의 향기를 풍기는 자가 틀림 없을 것이다!' 남궁궁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운리, 이만 가봐야겠다." "어디로요? 아니,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모용운리는 그와 헤어지는 것이 몹시 아쉬운 듯 눈시울을 붉혔다. "걱정 마라, 나는 너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 모용운리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다니? 남궁궁은 신비한 미소를 지으며 말 했다. "지금은 내 말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조만간 알게 될 것이다. 그건 그렇고, 무슨


약을 만들고 있었느 냐?" 모용운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주로 내상약(內傷藥)과 여러 가지 독에 대비할 수 있는 해독약들이에요. 그리고 최근에는 만성독약에 대해 연구하고 있어요." 모용운리의 음성에는 힘이 없었다. 그녀는 남궁궁과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기운이 빠진 것이었다. "만성독약?" 남궁궁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그것은 사람의 정신을 금제시키는 만성독약이에요.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는 것을 만드는 중이에 요." 남궁궁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풍운맹주가 직접 부탁한 것이냐?" "네. 그 분은 그 일에 큰 비중을 두고 있어요. 장차 무림의 대세를 좌우할 일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남궁궁은 침음한 후 다시 물었다. "네가 보기에 풍운맹주는 어떻더냐?" 모용운리는 생긋 웃으며 자신있게 말했다. "그 분이야말로 대인이세요. 흉금이 넓고 자상하신 분이시죠." "음." 남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침상으로 다가가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맞춘 후 말했다. "조만간 다시 오마. 그때까지 잘 지내도록 해라." 모용운리는 만면에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설마 절 잊으시는 건 아니겠지요?" 남궁궁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염려 마라, 운리. 그럴 리가 있겠느냐?" "만일 절 버리신다면......." 남궁궁은 흠칫했다. "오빠는 벼락을 맞을 거예요!" "......!" 남궁궁은 안색이 변했다. 그녀의 음성이 일순 차갑게 느껴졌던 것이다. "전 오빠가 다른 여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볼 수 없어요." 남궁궁은 한숨을 쉬었다. "운리에게 그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군." 모용운리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하지만 절 버리지만 않으시면 오빠가 삼처사첩을 거느리신다 해도 탓하지 않겠어요." "하하하......!" 남궁궁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기척도 없이 창문을 통해 날아갔다. 그가 남긴 웃음소리가 여전히 방 안을 맴돌고 있었다. "......."


모용운리는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난 하룻밤 사이에 같은 기분이었 다.

일어난 마치 꿈만

② 풍운맹에는 서서히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그것은 팔전(八殿) 소속의 팔공자 가운데 일인자를 뽑기 위한 비무대회가 임박했기 때문이다. 팔전은 풍운맹 내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팔공자 가운데 일인자가 선출된다는 것은 풍운맹의 장차 구도에 상당한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었다. 다시 말해 차기 풍운맹주감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풍문을 뒷받침해 주기라도 하듯 풍운맹주는 이번 비무대회의 우승자에게 풍운제일령(風雲第一令) 을 내린다고 일찌감치 선언하고 있었다. 풍운제일령은 풍운맹의 영주(領主)에 해당하는 직위로 일인지하만 인지상의 위치나 다름없는 것이었 다. 팔공자는 무림의 후기지수들이었다. 따라서 팔공자 가운데서 풍운제일령주를 선출하는 데 반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봄날의 정취가 물씬 풍겨나는 사월 초나흘. 비무대회의 막이 올랐다. 비무장은 영웅탑(英雄塔)이 있는 곳이었다. 영웅탑은 풍운맹 경내에 조성된 한 인공가산에 위치하고 있었다. 영웅탑은 무림혼을 상징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풍운맹의 명물이기도 했다. 영웅탑이 있는 인공가산 주위는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비무대는 바로 그 연못 위에 임시로 목대 를 설치하여 마련되어 있었다. 정오(正午) 무렵. 둥둥둥! 북소리가 둔중하게 울림과 동시에 사방에서 우렁한 환호성이 울렸다. 연못가의 정자에는 풍운맹주 자비천문선생 궁천무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태사의에 앉은 채 천하를 포용할 듯한 너그러운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그의 좌측에는 오원의 원주들이 앉아 있었다. 또한 우측에는 팔대세가의 가주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들의 안색은 다소 경직되어 있었다. 인공호수 주변에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군웅들이 모여 있었다. 본래 남들의 비무를 관전하는 것 은 큰 관심거리였다. 그것은 상대의 절기를 견식한다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군웅들은 온


통 기대감으로 상기된 표정들이었다. 오늘의 비무대회 주인공 격인 팔공자는 임시로 설치된 차양 속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비무를 앞두고 있어서인지 사뭇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둥둥둥! 다시 북소리가 세 번 울렸다. 그러자 군웅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장내에는 긴장감이 더욱 고조되 었다. 풍운맹주 자비천문선생이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 사순 정도 되어 보였으며 청수한 용모에 문사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그의 나이가 팔순에 이르렀음을 모르는 자는 거의 없었다. 자비천문서생 궁천무는 수중에 금빛의 섭선을 가볍게 쥐고 있었다. 그는 섭선을 부치며 부드러운 눈 길로 군웅들을 둘러본 후 깊숙이 포권했다. "오늘의 비무대회에 참가해 주신 군웅제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의 음성은 나직했다. 그러나 군웅들의 귀에는 마치 곁에서 말하는 듯 뚜렷하게 울렸다. "오늘 비무의 승자에게는 풍운제일령을 내릴 것이외다. 또한 풍운영주는 이 사람이 그 동안 각파에서 가려서 뽑은 청년기재 천 명으로 이루어진 풍운천병대(風雲天兵隊)의 영반이 될 것이오." 군웅들은 엄숙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 그들도 풍운천병대에 대한 것은 이미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풍운영주가 그들의 영반이 된 다는 것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여러분들 중에는 어째서 풍운영주를 뽑는 자격을 팔공자에 국한시켰느냐는 의혹을 품고 있는 분도 계실 것이외다." 그는 부드러우면서도 엄중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당금 무림에는 수많은 영재들이 있소이다. 노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노부는 그 동 안 세 가지의 엄격한 기준을 마련했소이다." 궁천무는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 첫 번째 기준은 필히 백 년 이상의 내력을 지녀야 할 것이며, 둘째는 신분이 확실해야 한다는 것 이오. 마지막 세 번째 조건은... 반드시 중원인이어야 한다는 기준이었소이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와아!" 중인들은 함성과 갈채를 보냈다. 그가 말한 세 가지 조건 중에 마지막 조건에 절대적인 공감대를 느 꼈기 때문이다. 당금 무림의 위기는 변황사패의 중원 침공으로 인해 비롯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풍운영주가 중원인이


어야 한다는 말은 그들의 가슴에 일종의 호기를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궁천무는 장내를 둘러보며 담담히 말했다. "지금이라도 그 세 가지 조건에 부합되는 영걸이 있다면 누구라도 환영하겠소이다." "......."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군웅들은 고개를 돌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모두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누가 과연 백 년 이상의 내력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첫번째 조건에 부합될 영걸은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한편, 군웅들은 일 제히 차양 속에 앉아 있는 팔공자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렇다면 저들이 모두 백 년 이상의 내력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궁천무는 군웅들의 의혹에 대한 해답을 주었다. "자, 그럼 시작하겠소이다. 먼저 첫번째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를 입증해 보여야 할 것이오." "와... 아!" 군웅들은 일제히 함성을 발했다. 그들의 함성은 풍운맹을 온통 뒤흔드는 듯했다. 함성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궁천무는 힘찬 음성으로 설명했다. "백 년의 내공 수위를 입증하는 방법은 일만 근의 거석(巨石)을 들고 모래가 깔린 곳을 통과하는 것으 로 결정했소이다. 만일 모래에 발자국을 남기게 되면 실격되는 것이외다." "어찌 그런 일을......!" 군웅들은 탄성을 발했다. 가히 입을 벌릴 지경이었다. 맨몸으로도 모래를 밟으며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물며 일만 근의 거석을 들고 통과해야 한다니. 상상도 안 되는 일이었다. "......." 군웅들의 시선은 일제히 팔공자에게 향해졌다. 차양 앞에는 과연 폭이 삼 장에 십 장 정도 길이로 모래밭이 마련되어 있었다. 또한 그 앞에는 대충 보아도 만 근이 넘어 보이는 바위가 놓여 있었다. 궁천무는 묵직한 음성으로 시작을 알렸다. "자, 그럼 시작하시오." 둥!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북소리가 울리고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먼저 사해익룡(四海翼龍) 수검악 소협께서 나서시오!" 그 자는 금원주(金院主)인 마심제갈(魔心諸葛) 사마고(司馬高)였다. 오원은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의 오행을 딴 것으로 사마고는 수석원주였다. 사마고는 과거 마도 최고고수라는 신주구십구마(神州九十九魔) 중 서열 오 위에 속했던 인물이었으나 현재는 풍운맹주의 수하가 되어 있었다. 그 점만으로 볼 때도 풍운맹주 궁천무의 능력은 가히 우러러


볼 만한 것이었다. 사해익룡 수검악이 차양 속에서 걸어나왔다. 군웅들은 일제히 숨을 죽인 채 그의 행동에 신경을 모았다. "흡!" 수검악은 숨을 모아 쉰 후 쌍수를 뻗어 만 근의 거석을 들어 올렸다. "와아아......!" 군웅들은 환호성을 발했다. 수검악은 거석을 마치 두부판 들 듯 가볍게 들어올린 것이다. 그는 거석을 번쩍 든 채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후 모래밭을 향해 진입했다. "......!" 수검악이 첫 걸음을 뗀 순간 군웅들의 눈길은 일제히 모래밭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아무 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오! 엄청난 내력이군!" 군웅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사박, 사박! 수검악은 거석을 들고 십 장 길이의 모래밭을 모두 통과했다. 분명 발자국 소리가 들렸음에도 불구하 고 모래밭에는 족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쿵! 거석이 바닥에 떨어졌다. 수검악은 이마에 진득한 땀이 배었으나 소매로 쓱 문지르고는 군웅들을 향 해 공수했다. "통과요!" 마심제갈 사마고가 힘차게 외쳤다. 수검악은 돌아서 궁천무에게 포권하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다음은 천수독룡(千手毒龍) 당무 소협이오!" 휙! 당가의 소가주인 천수독룡 당무는 날렵하게 신형을 날려 거암 앞에 떨어졌다. 그는 잠시 거석을 내려 다보다가 역시 손을 뻗어 단숨에 들어올렸다. 그는 성큼성큼 모래밭을 걸어갔다. 역시 모래밭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와아......!" 군웅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함성을 질렀다. "통과요! 다음은 신권세가의 소항우(小項羽) 남대천 소협 차례요!" 사마고의 말과 함께 남대천이 세 번째로 나섰다. 그는 마치 짚단을 들어올리듯 가볍게 거석을 들어올렸다. 방금 전의 당무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들었 다. 그는 서서히 모래밭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속도가 무척 느렸다. 사실 그는 신력이 뛰어난 대신 유난히 경공(輕功)에는 취약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도 발자국 하나 안 남기고 무사히 모래밭을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뒤를 이어 자의환룡 영호궁옥과 신도무적(神刀無敵) 팽조위도 무사히 관문을


통과했다. 이번에는 검공자 철비양의 차례였다. 철비양은 물론 남궁궁이 변장한 화신이었다.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제 보니 팔공자의 무예는 만만한 것이 아니구나.' 사실 그는 팔공자가 첫번째 관문을 이렇게 쉽게 통과하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었다. "검공자 철비양 소협, 나오시오!" 사마고의 독촉에 그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거석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이미 생각한 바가 있었다. 현재 그의 내력으로는 거석을 들고 십 장여의 모래밭을 단숨에 통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자신의 실력을 모두 드러내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거석을 받쳐들고 잠시 심호흡했다. 이어 모래밭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그런 그의 동작에 두 사람의 시선이 따갑게 달라붙었다. 그것은 인심유룡 궁자기와 낙성환영 낙무영 의 눈길이었다. 잠시 후, 그는 힘겹게 모래밭을 통과했다. 역시 발자국은 남아 있지 않았다. 짝짝짝......! "와아! 대단하오!" 군웅들은 그가 힘겹게 통과한 데 대한 격려의 뜻으로 일제히 박수 갈채를 보냈다. 이번에는 인심유룡 궁자기의 차례였다. "궁소협, 나서시오!" 사마고의 외침이 떨어진 순간. "와아아아......!" 군웅들은 일제히 함성을 발했다. 지금까지의 함성보다 압도적인 지지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 함성이었 다. 사실 군웅들은 이번 팔공자의 비무대회에서 최종승자가 궁자기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비무는 일종의 요식행위일 뿐, 무공으로 보나 출신으로 보나 그가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것이다. 궁자기는 가볍게 거석을 한 손으로 들어올렸다. 이어 모래밭을 가볍게 걸어 통과했다. 그는 조금도 힘 들어 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산보하듯 유려한 보법으로 첫번째 관문을 통과했다. 그는 군웅들을 향해 당당한 자세로 포권한 뒤 자리로 돌아갔다. 그야말로 인중지룡과도 같은 모습이 었다. 팔공자 중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낙성환영 낙무영이었다. 군웅들은 한결같이 호기심을 느꼈다. 사실 팔공자 가운데 가장 신비한 인물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아 직까지 그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낙무영은 군웅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거암을 들어올렸다. 역시 가볍게 어깨 위로 들어올렸다. 그는 모래밭을 바라보았다.


그의 영준한 얼굴에 살포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모래밭을 향해 다른 후보들과 달리 그는 처음부터 경신술로 모래 밭을 날아갔다. 그의 발은 모래밭을 스치듯 지나갔다. 얼핏 보면 모래를 아예 밟지도 역시 발자국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와아......!" 군웅들은 함성을 발했다. 그가 보여준 것은 낙성세가(落星世家)의 가문은 본시 마도출 신이었다. 따라서 무공이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에 놀라운 경공술 은 군웅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되었다. "정말 대단하군!" "글쎄 말이야, 팔대세가에 속할 만하군." 군웅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연신 탄성을 발하고 있었다.

신형을 날렸다.

않은 것 같았다.

절기였다. 그의 보여준 낙무영의

③ 첫번째 관문을 통과한 팔공자는 본격적인 비무대회를 위해 대진 상대를 추첨해야 했다. 제비뽑기로 상대가 정해졌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인심유룡 궁자기 대 소항우 남대천. 낙성환영 낙무영 대 천수독룡 당무. 검공자 철비양 대 신도무적 팽조위. 자의환룡 영호궁옥 대 사해익룡 수검악. 이제 비무의 상대가 순서가 정해졌다. 남은 것은 풍운제일령주가 되기 위해 각자가 지닌 바 무예를 겨루는 일이었다. 군웅들의 시선은 일제히 비무대로 향해졌다. 사마고가 연못 위에 설치된 비무대로 신형을 날려 내려 선 것이다. 사마고는 군웅들에게 비무대회의 규칙을 설명했다. "이번 비무는 좀 특이한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오. 비무 장소는 바로 연못 위에 자라나 있는 연잎 위가 될 것이오." "아!" 군웅들은 일제히 탄성을 발했다. 그들은 모두 목대가 비무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잎 위에서 비무를 진행하기로 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어서요. 그것은 뛰어난 경공술과 안정된 내공을 기반으로 절학을 펼칠 수 있어야만 풍운제일령주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


군웅들 가운데 놀라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연못위를 바라보았다. 과연 연못의 수면 위 에는 연잎이 자라나 있었다. 군웅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연잎은 연약하지 그지없는 것이다. 그 위에서 무예를 펼치기는커 녕, 올라서는 순간 잎의 줄기가 부러지거나 찢겨져 나갈 것 같았다. 사마고는 무표정한 눈으로 군웅들의 반응을 살핀 후 탁성으로 말했다. "풍운제일령주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그래서 모든 면에서 실력이 인정되고 있는 팔공자에 국한시켰던 것이오." 군웅들은 내심 한숨을 쉬며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풍운팔대세가 출신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런 비무에 참가조차 하겠는가?' 둥! 북소리가 둔중하게 울려펴졌다. 사마고는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자, 그럼 첫번째 비무를 시작하겠소. 자의환룡 영호궁옥 소협과 사해익룡 수검악 소협은 나서시오." 휙! 휙! 사마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청년은 일제히 연못으로 날아왔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연잎 위 에 내려섰다. 출렁! 연잎이 금방이라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듯 흔들렸다. 그러나 두 사람은 어렵지 않게 신형을 안정시 켰다. 내공으로 체중을 가볍게 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마치 평지에 서 있는 듯 안정된 모습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투지가 떠 올라 있었다. 영호궁옥은 환문세가 출신으로 무림의 일절로 알려진 경공술에 관한 한 자신이 있었다. 반면 수검악 은 수공(水功) 방면에서 자신만만했다. 따라서 두 사람은 각각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듯했 다. 그들은 마주 선 채 포권했다. 겉으로 볼 때는 화기에 찬 모습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눈빛에는 은은 한 살기마저 떠오르고 있었다. 사실 수검악은 궁자기를 따르고 있었다. 반면 영호궁옥은 궁자기와 사이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 으므로 두 사람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 군웅들은 침을 삼켰다. 팽팽하게 대치한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두 청년이 언제 격돌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두 청년의 몸이 거의 동시에 움직이며 허공에서 교차했다.


퍼펑! 폭음과 함께 수면이 갈라지며 물기둥이 치솟았다. 드디어 본격적인 비무가 시작된 것이다. 영호궁옥은 허공으로 솟구친 후 대붕전시(大鵬轉翅)의 신법으로 빙글빙글 돌며 수검악을 공격했다. 과 연 경공의 가문답게 대단한 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군웅들은 그 광경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수검악도 만만만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발끝으로 수면을 박차며 어느새 뽑아 들었는지 분수 극(分水戟)을 떨치며 허공에서 떨어지는 영호궁옥을 공격했다. 휘리링! 영호궁옥은 절세의 신법을 이용해 그의 공세를 피해 옆으로 떨어지며 허리에 감고 있던 연검(軟劍)을 뽑아 휘둘렀다. 그의 검법은 현란하기 그지없어 마치 영활한 뱀이 개구리를 낚아채는 듯했다. 수검악 도 왼손으로 수천승룡(水天乘龍)의 장법을 전개해 맞받았다. 파팡! 가죽북이 터지는 듯한 요란한 폭음이 연신 울렸다. 그들은 눈 깜박할 사이에 수십 초를 주고받았다. 군웅들의 눈알은 어지럽게 돌아갔으나 승부는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두 사람의 무공은 막상막하였던 것이다. 영호궁옥은 환문 출신답게 시종일관 신형을 허공에 띄운 채 공격하고 있었으며 수검악은 연잎 위를 옮겨다니며 분수극으로 맞서고 있었다. "역시 팔공자답다!" 군웅들은 두 사람이 벌이는 묘기에 연신 탄성을 발했다. 한편 남궁궁은 가문의 한 가지 검법을 되새 기고 있었다. 삼 일 전, 검천신군(劍天神君) 철화룡(鐵華龍)이 비무를 참관하기 위해 풍운맹에 도착했던 것이다. 이번 비무는 풍운제일령을 뽑는 목적 외에도 팔공자의 서열을 정하는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풍운팔대세가의 가주들은 자신들의 후예들에게 각별히 신경쓰고 있었다. 검천신군은 자신의 아들(?)인 남궁궁에게 그 동안 전해 주지 않았던 검문세가의 지보인 검천경(劍天 經)을 특별히 내렸던 것이다. 남궁궁은 지난 사흘 동안 검천경을 훑어보았다. 그는 이미 검왕의 제왕검류(帝王劍流)를 익힌 몸이었으므로 검도가 최상승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따 라서 쉽게 검천경을 익힐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검천경을 익히는 동안 의외라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검천경 상의 풍운십삼세(風雲十三勢)가 실로 오묘한 검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무


한한 변화를 내포하고 있는 검초(劍招)들은 제왕검류와는 또 다른 위력을 잠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는 검공자 철비양으로 위장하고 있었으므로 지난 사흘간 풍운십삼세를 익히는 데 몰두했던 것이다. "와아!" 군웅들의 함성이 터졌다. 남궁궁은 연못 쪽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싸움이 끝나 있었다. 사해익룡 수검악은 연못에 빠져 있었다. 그는 목까지 잠긴 채 만면에 분노의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편 자의환룡 영호궁옥은 연잎 위에 서 있었는데 그의 가슴 앞 옷자락이 길게 갈라져 있었다. 군웅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누가 승리했는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때 북소리가 울렸다. 이어 사마고가 소리쳤다. "영호소협의 승리요!" "음?" "아니, 어떻게......?" 군웅들은 어리둥절했다. 언뜻 보이게 가슴 옷자락이 길게 베어져 나간 영호궁옥의 패배로 보였던 것 이다. 이때 연못에 빠져있던 수검악이 촤아! 하는 소리와 함께 솟구쳐 올라왔다. 그는 공중에서 한 바 퀴 돈 후 비무대 위에 올라섰다. 군웅들은 비로소 이유를 알게 되었다. 수검악의 상의가 걸레처럼 찢겨져 나간 채 허연 맨살이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드러난 그의 복부에는 뚜렷한 손바닥 자국이 찍혀 있었다. 이로써 승부는 명확히 가려진 것이다. 휙! 영호궁옥도 신형을 날려 비무대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낭랑히 웃음을 터뜨리며 포권했다. "하하하! 수형께서 양보한 덕분에 간신히 이겼소이다." "......." 수검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분노의 빛이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그는 발 로 바닥을 탕! 친 후 홱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두번째 비무가 속개되었다. 낙성환영 낙무영과 천수독룡 당무가 신형을 날려 연잎 위에 내려섰다. 당무는 입가에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소매를 홱 저었다. 슈슈슈슉! 소매로부터 번쩍거리는 수많은 빛살이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당문(唐門)이 자랑하는 암기술이었다.


당문세가는 수백 년간 독술및 암기술로 일맥을 이룬 문파였으므로 첫 공격부터 암기를 발사한 것이었 다. 군웅들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의 거리는 불과 일 장여,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는 것 같았 다. 팟! 낙무영이 연잎을 차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암기들은 그의 발바닥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실로 아슬아슬 하게 피한 것이었다. 당무는 코웃음쳤다. "흥! 이번에도 피할 수 있는지 보겠소." 그는 양 소매를 동시에 펄럭였다. 그러자 소매로부터 수백 개의 침(針)이 발출되었다. 허공에 뜬 채 침을 피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지면에서와는 달리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백 개의 침은 고스한히 낙무영의 몸을 고슴도치로 만들 듯했다. 군웅들은 모두 혀를 찼다. '쯧쯧! 승부가 빨리 나겠군.' 낙무영은 태연히 소매로부터 무엇인가를 꺼내더니 한 바퀴 원을 그렸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수백 개의 침이 그의 손 안으로 빨려들 듯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아니......?" 군웅들은 어리둥절했다. 낙무영의 손에는 여인들이나 사용함직한 작은 손거울이 쥐어져 있었다. 수백 개의 침은 손거울에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치잇! 자석경(磁石鏡)를 지니고 있었다니!" 당무의 안색에 낭패감이 떠올랐다. 그는 재차 양 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피피피핑! 연속 검은 빛이 쏘아져 나갔다. 이번에는 손가락 길이의 흑전(黑箭)이 쾌속하게 날아갔다. 그 흑전은 작은 기관에서 발사되는 것으로 바위도 꿰뚫는 위력이 있는 것이었다. 낙무영은 여전히 허공에 머물고 있었다. 경공술의 명문이라는 환문세가 출신의 영호궁옥보다도 훨씬 오랫동안 체공(滯空)한 것 같았다. 땅! 따당....... 청아한 금속음이 울렸다. 낙무영이 거울로 흑전을 모두 받아쳐낸 것이었다. "헉!" 당무는 다급성을 발하며 비틀거렸다. 흑전이 모두 그에게 되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허둥거리며 간신히 흑전을 피해냈다. 그 순간 머리 위에서 낭랑한 외침이 들렸다. "자, 이번에 소제의 공격을 받아보시오." 윙! 파공성이 머리 위에서 울렸다. 당무는 기겁하며 신형을 날려 다른 연잎으로 위치를 이동했다. 그가 막 연잎을 밟는


순간 뒤에서 웃 음소리가 들렸다. "하하, 이렇게 등을 보이다니 당형은 철갑이라도 입고 계신 모양입니다?" 펑! "윽!" 당무는 등 한복판에 통증을 느끼며 앞으로 날아갔다. 그는 일장가량 붕 떠 날아갔다. 첨벙, 하는 소리 와 함께 연못에 볼썽사납게 빠지고 말았다. "와아......!" 군웅들의 함성이 일어났다. 낙무영의 멋진 승리였던 것이다. 둥! 북소리가 울리고 사마고의 음성이 군웅들의 함성을 잠재웠다. "낙소협의 승리외다. 다음은 인심유룡 궁자기 소협 대 소항우 남대천 소협 차례요!" 군웅들이 조용해진 것은 궁자기가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실상 이번 비무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는 궁자기였다. 따라서 군웅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비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궁자기가 유연한 신법으로 먼저 연잎 위에 떨어졌다. 뒤이어 소항우 남대천도 연잎 위에 안착했다. 남대천은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궁자기를 노려보았다. 반면 궁자기는 느긋 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공격하겠소!" 남대천은 우렁차게 외치고 선공했다. 그는 자신의 무척이나 운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팔공자 중에서 가장 무공이 강한 궁자기와 첫번째 대결을 벌일 게 뭐냔 말이다. 그렇다고 기가 죽을 남대천은 아니었다. 그는 우직한 성품이었고, 일단은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윙! 윙! 주먹을 휘두르자 파공성이 울렸다. 그는 천패권(天覇拳)이란 가문의 권법을 구사했다. 그의 주먹은 소림의 백보신권(百步神拳)과 비유될 정도로 위력이 있었다. 궁자기는 여유 있는 신법으로 그저 상체만 이리저리 흔들어 천패권을 피해냈다. 남대천의 안색이 붉 어졌다. 그는 자신이 놀림을 당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력을 다해 공격했으면 상대도 맞장구는 쳐주 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상대방은 그를 어린아이 정도로밖에 취급하지 않는 듯했다. "합!" 남대천은 기합을 발하며 연속 세 번이나 주먹을 뻗었다. 궁자기는 소매를 가볍게 저었다. 남대천은 자신의 주먹이 마치 부드러운 천을 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힘을 받아야 위력이 나는 법이다. 그런데 상대를 가격해도 아무런 반탄력을 느낄 수 없다면 힘이 빠


지게 마련이었다. '빌어먹을!' 그는 내심 욕설을 퍼부으며 연속 칠팔권을 내질렀다. 이번에는 전력을 다한 터라 권풍의 위세가 회오 리를 일으키며 주변의 수면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파도를 칠 정도였다. "제법이네, 남아우." 궁자기는 여전히 느긋한 표정으로 말하며 쌍수를 교차하여 뻗어냈다. 촤아아아! 기이한 광경이 벌어졌다. 궁자기는 남대천을 향해 공격한 것이 아니라 수면을 친 것이다. 그 바람에 수면이 쫙 갈아지며 두 줄기 물줄기가 남대천을 향해 쏘아갔다. "헉!" 남대천은 생각지도 않았던 수공(水攻)에 당황했다. 아차 하다가는 물벼락을 맞을 것이요, 어설프게 피 했다가는 신법에 자신이 없는 그로서는 연못에 빠질 우려가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물줄기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정면으로 맞서기로 한 것이다. 펑! 뜻밖에도 고막을 울리는 폭음이 터졌다. 군웅들은 안색이 변했다. 물보라가 자욱히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남대천은 물보라에 감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으음!" 그 속에서 신음이 울렸다. 물보라가 걷힌 후, 남대천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군웅들이 어리둥절해 하 는 순간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물 속에 가라앉았던 남대천의 몸이 떠올랐다. 그의 안색은 종잇장처 럼 창백했다. "우웩......!" 남대천은 울컥 피를 토해냈다. 그러고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다시 물 속에 가라앉으려고 했다. 이때 누군가가 연못을 향해 날아왔다. 그는 스치듯 연못을 날며 남대천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와아아!" 군웅들은 일제히 함성을 발했다. 남대천을 구해 비무대로 돌아간자는 철비양이었던 것이다. 철비양, 즉 남궁궁은 남대천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의 가슴 옷자락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옷을 찢 어보니 옥당혈(玉堂穴)에 자색의 지흔(指痕) 세 개가 품자형으로 뚜렷이 찍혀 있었다. '음, 대단한 지공(指功)이구나. 손가락 세 개 만으로 남대천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이때 비무대 위로 궁자기가 내려섰다. 그는 힐끗 남궁궁을 쏘아보며 눈빛을 번뜩였다. 남궁궁은 손가락으로 남대천의 요혈 여섯 군데를 가볍게 찍었다. 순간 궁자기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웩!" 남대천은 시커먼 핏덩이를 토해내더니 전신을 부르르 떨다가 눈을 떴다. "내가... 어찌된 것이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궁궁을 올려다보았다. "남형이 졌소. 다행히 중상은 아니니 안심하시구려." 남궁궁이 담담히 말하자 비로소 상황을 깨달은 듯 남대천은 얼굴을 붉혔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서 더니 남궁궁에게 깊숙이 포권했다. "소생, 철형께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그는 고개 돌려 궁자기를 한 번 쏘아본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걸음걸이가 상당히 불안해 보였 다. 이렇게 되자 장내의 분위기는 미묘해졌다. 이번 비무는 무공을 비교하여 풍운제일령주를 선출하는 것 이 목적이었다. 따라서 살수(殺手)를 쓰지 않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남대천을 격상케 한 궁자기 의 수법은 지나친 감이 있었다. 또한 적기에 나서 남대천을 구해준 남궁궁, 즉 철비양은 군웅들의 눈 에 한층 당당하고 품위있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궁자기는 편협한 위인으로, 철비양은 대범 한 위인으로 비쳐지게 된 것이었다. 궁자기는 물론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군웅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만으로도 그런 분위기를 눈치채고 는 철비양이 아닌 남궁궁을 노려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궁소협의 승리요! 다음 차례는......." 장내의 분위기가 미묘해지자 사마고는 서둘러 네번째의 비무자 이름을 호명했다. ④ 남궁궁은 연잎 위에 가볍게 내려섰다. 맞은편에는 이미 천도세가 출신의 신도무적 팽조위가 도를 움켜쥔 채 우뚝 서 있었다. 검문세가와 천도세가. 팔대세가 중 이 두 세가는 유독 특별한 관계였다. 그것은 검문세가가 풍운십삼세로 검의 독보적인 위 치를 이룩한 반면 천도세가는 삼십일로풍뇌도법(三十一路風雷刀法)으로 도법의 일가를 이루었기 때문 이다. 따라서 두 세가는 은연중 서로를 의식하며 견제해 온 사이였다. 군웅들도 그 관계를 알고 있었으므로 두 청년의 비무에 은연중 흥분하고 있었다. 과연 어느 쪽이 더 강하느냐 하는 것에 마음 속으로 내기를 거는 자도 있었다. 남궁궁은 허리에 가느다른 연검(軟劍)을, 팽조위는 손에 두툼한 도를 움켜쥐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 마주치며 불꽃을 튀었다. 군웅들은 숨을 죽였다. 과연 누가 먼저 선공할 것


인가. 스릉! 팽조위의 도가 서서히 뽑혀졌다. 폭이 넓고 두툼한 도는 보통 사람은 제대로 들지도 못할 정도의 중 병(重兵)이었다. 그는 도집을 휙 던졌다. 도집은 비무대 위로 떨어졌다. 도를 뽑은 그는 투지에 불타는 눈으로 남궁궁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남궁궁은 여전히 검을 뽑지 않았 다. 팽조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가소로운 놈!' 그는 상대가 오만방자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더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파앗! 허공이 베어졌다. 군웅들은 가슴이 철렁했다. 육중한 도가 일직선으로 뻗은 순간 눈 앞의 대기가 양단된 듯한 느낌이 든 것이었다. 우르릉! 하는 뇌성이 울리는 듯했다. 남궁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눈앞으로 섬광(閃光)이 뻗어 오는 것을 보고 비로소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군웅들은 그의 동작을 모두 보았다. 남궁궁의 몸이 빙글 돌았다. 동시에 그에게서 백광(白光)이 번쩍 일어났다. 언제 검을 뽑았고, 언제 검을 전개했는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풍운십삼세는 쾌검(快劍)으로 일 가를 이루었다. 순식간에 십검이 전개되었다. 츠륵! 츠륵! 기이한 음향이 울렸다. 두 사람은 연잎의 위치를 서로 바꾸어 가며 격돌했다. 검과 도가 스치듯이 맞 닥뜨렸다. 종잇장같이 얇은 연검과 육중한 도가 마주치면 연검이 불리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수십 초 를 나누면서도 한 번도 직접 부딪치지 않았다. 그저 기이한 음향만이 군웅들의 가슴을 긁어댈 뿐이었 다. 두 사람의 신형은 점점 더 빨라졌다. 겉보기에 둔해 보이는 팽조위의 신법은 놀랄 정도로 민첩했고, 그들이 철비양이라 알고 있는 남궁궁의 신법은 깃털처럼 가벼워 보였다. "......!" 군웅들은 움켜쥔 손바닥에 축축이 땀이 잡히는 것을 느꼈다. 무림에서 가장 빠른 검법과 패도적인 도 법을 가진 두 가문이 벌이는 대결은 그만큼 흥미진진했던 것이다. 츠츠츳......! 차가운 검기와 위맹한 도기가 연못의 물을 파도치게 했다. 두 사람은 도광검영(刀光劍影)에 휩싸여 누 가 누구인지 구별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한편 남궁궁은 초수를 거듭할수록 풍운십삼세에 상당한 묘(妙)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그


는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되도록 시간을 길게 끌면서 풍운십삼세의 검법을 시험하고 싶었 던 것이다. 초식을 시전할 수록 검의 변화는 무궁무진하게 구현되었고,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그는 벌써 수십 번이나 팽조위의 허점을 발견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고 그의 목을 그을 수가 있었다. 반면 팽조위의 안색은 납덩이처럼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는 아무리 전력을 다해 풍뇌도법을 시전해도 상대를 베기는커녕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생기기 시 작했고, 신형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연못가의 차일 안에서 관전하던 검천신군은 몇 번이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로 앉곤 하고 있었다. 그 런 그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검천경 상의 풍운십삼세를 아들(?)이 완벽에 가깝게 시전하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어떨 때는 그 자신조차도 깨닫지 못한 오묘한 변화를 펼쳐내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녀석! 언제 저렇게 발전했단 말인가?' 그는 희색이 만면해졌다. "뇌우파천(雷雨破天)......!" 문득 고함이 울렸다. 팽조위가 도를 번쩍 들었다가 천지를 양단하듯 뻗어냈다. 파츠츠츠츳......! 수백 가닥의 도광이 마치 번개처럼 뻗어 나갔다. 남궁궁은 비무를 끝낼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물러나기는커녕 가볍게 연잎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갔다. 연검을 떨치자 검극(劍極)에서 세 송이의 검 화(劍花)가 피어났다. 연검에 진기를 주입하자 검극이 부르르 진동하더니 검화는 수십송이로 불어났다. "허억!" 팽조위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는 자신의 도법이 무력하게 상대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눈부신 검화가 마치 밤하늘의 유성인 양 쇄도해 오는 것이 아닌가? 막기도, 피하기도 불가능했다. 두 사람의 몸이 스치듯이 교차했다. "으......!" 신음과 함께 두 사람이 각각 반대쪽 연잎 위에 떨어졌다. 군웅들은 눈을 크게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 았다. 남궁궁은 어느새 연검을 허리춤에 회수하고 있었다. 그의 옷소매가 갈기갈기 찢겨 바람에 나풀거리고 있었다. 반면 팽조위는 안색이 무참하게 일그러진 채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그의 가슴으로 바람이 선들선


들 들어오고 있었다. 스스스! 잘게 잘린 천조각이 나뭇잎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의 가슴은 곧 벌건 속살을 드러내고 말았다. 가슴의 옷자락이 잘게 조각나 떨어져 내린 것이다. "와아......!" 군웅들은 일제히 함성이 터뜨렸다. 남궁궁은 군웅들을 향해 정중히 포권해 보인 후 가볍게 신형을 날려 비무대 위에 떨어졌다. 둥! 둥! 둥! 북소리가 세 번 울렸다. "검공자 철소협의 승리요! 이것으로 첫번째 비무가 끝났소이다. 두번째 비무까지 잠시 휴식을 갖도록 하겠소." 사마고가 비무대 위로 나와 선언하자 군웅들은 비로소 한숨을 쉬며 긴장을 풀었다. 그 동안 네 번의 비무를 지켜보느라 피곤을 느끼는 사람도 많았던 것이다. 이제 비무의 일회전이 끝 난 셈이다. 패자 사 인과 승자 사 인으로 명확하게 나누어진 것이다. 비무의 이회전은 다시 사 인의 승자가 두 조(組)로 나누어 비무하게 될 것이다. ⑤ 반 시진 후. 비무는 속개되었다. 시각은 신시(申時) 무렵. 이회전의 비무 대진표는 다음과 같이 나왔다. 궁자기 대(對) 자의환룡 영호궁옥. 철비양 대(對) 낙성환영 낙무영. "와아아......! 군웅들의 함성은 더욱 커졌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터라 체력이 완전히 회복된 탓이었다. 연못 위에는 궁자기와 영호궁옥이 마주보고 있었다. "......!" 영호궁옥의 안색은 다소 무거워 보였다. 반면 궁자기는 여유만만한 표정이었다. "하하! 영호소제가 먼저 시작하게." 궁자기는 짐짓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영호궁옥은 이맛살을 찌푸렸으나 곧 포권했다. "그럼 실례하겠소이다, 궁형." 휙! 그는 신형을 허공으로 뽑아올렸다. 물찬 제비처럼 솟구쳐 오른 그는 머리를 아래로, 다리를 위로 하여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듯 궁자기위로 떨어져 내렸다. 어느새 허리춤의 연검을 발검한 상태였다.


파파파팟......! 영호궁옥의 연검은 눈 깜빡할 사이에 십삼 초가 전개되었다. 군웅들은 눈이 부셨다. 검광이 번쩍거리 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영호궁옥의 검법이 진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검법은 같은 연검을 사용하는 남궁궁과 또 다른 면이 있었다. 남궁궁이 전개한 풍운십삼세는 쾌 검이었으나 영호궁옥의 검법은 변화무쌍한 것이 특징이었다. 한편 궁자기는 태연히 연잎 위에 선 채 검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쌍장을 나누어 뻗었다. 우웅! 웅후한 장력이 뻗었다. "엇!" 영호궁옥은 비명을 발했다. 그의 연검은 철벽을 만난 듯 퉁겨났던 것이다. 그는 당황하여 급히 맞은편 에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궁자기의 신형이 그를 향해 비호처럼 날아왔다. 일단 움직이니 태산이 움직 이듯 무겁게 느껴졌다. "아!" 영호궁옥은 신음을 발했다. 그는 수중의 연검으로 수비식을 전개했다. 눈부신 검광이 그의 몸을 감쌌 다. 그러나 궁자기는 개의치 않고 접근하며 손바닥을 뒤집었다 펴며 갈겼다. 펑! "헉!" 비명이 울렸다. 영호궁옥은 가슴을 둔중한 무기로 얻어맞은 듯한 통증을 느끼며 붕 떠올랐다. 군웅들은 가슴이 섬뜩했다. 영호궁옥의 무공은 일회전을 통과했으므로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 런데 이렇게 쉽게 패퇴하게 될 줄 몰랐던 것이다. 사실 궁자기는 남궁궁으로 인해 내심 초조감을 느끼고 있었다. 군웅들의 관심이 남궁궁에게 쏠리는 것을 보고 이번 비무는 최단시간에 끝내리라 결심한 바 있었다. 그래서 시작하자마자 인정사정없이 영호궁옥을 몰아친 것이었다. 한편 장력을 얻어맞고 날아간 영호궁옥은 연못에 빠지기 직전이었다. 그는 경황 중에도 수면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떨어질 자리에는 연잎이 없었다. 그대로 떨어지면 비무는 패배로 끝 나고 마는 것이다. 이때였다. 슉! 파공성과 함께 무엇인가 날아왔다. 그것은 한 장의 손수건이었다. 손수건은 마침 발 딛을 곳을 찾지 못해 허둥대는 영호궁옥의 발바닥으로 날아왔다. '......!'


영호궁옥은 짧은 순간 판단을 내렸다. 그는 손수건을 발로 밟으며 신형을 떠올렸다. 손수건은 한 장의 천조각에 불과했지만 발로 밟는 순간 마치 철판을 밟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경악을 금치 못하 며 신형을 날려 일 장 가량 떨어진 곳의 연잎 위에 무사히 내려섰다. "와아아!" 군웅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군웅들은 이런 신기에 가까운 경신술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손수건 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몰랐다. 그것은 영호궁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연잎 위에 내려선 후 수면을 바 라보았다. 수면 위에 손수건이 떨어져 있었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돌아서 궁자기를 향해 포권했다. "소생이 패배했소이다." 이어 신형을 날린 그는 수면을 스치듯 날며 손수건을 낚아챈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궁소협의 승리요!" 사마고의 외침이 장내에 쩌렁쩌렁 울렸다. "와아......!" 궁자기는 다리를 꼿꼿이 편 채 신형을 날려 비무대 위에 내려섰다. 그는 군웅들의 환호에 두 손을 맞 잡고 답례했다. 그러나 내심 의혹이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그 손수건을 어떤 자가 던졌을까? 천조각을 빳빳하게 할 정도라면 무공이 화경에 접어든 자인 데.......' 궁자기는 자리로 돌아가면서 손수건이 날아왔을 방향을 찾아 보았다. 그러나 그곳에 팔공자가 있었다. 그의 눈길은 팔공자를 한 명 한 명 훑어보다가 한 곳에서 멈추었다. 바로 남궁궁이었다. 남궁궁도 그를 마주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으나 궁자기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아니야, 철비양에게 그런 실력이 있을 리가 없어.' 그는 고개를 흔들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두번째 비무는 남궁궁과 낙무영의 차례였다. 두 사람은 마주보며 연잎 위에 대치했다. 남궁궁은 상대가 선공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낙 무영은 좀처럼 공격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닌가. 남궁궁은 은연중 가슴이 뜨끔했다. 그는 낙무영이 남장을 한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공 격할 생각은 하지 않고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하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서 공격하시오. 낙형."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때였다. 귓전에 모기소리처럼 가느다란 전음이 흘러 들어왔다.


(당신은 철비양이 아니오. 대체 누구요?) (......!) 남궁궁은 가슴이 철렁했다. 전음은 바로 낙무영이 보낸 것이었다. 그는 짐짓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녀를 바라보았다. 낙무영의 영준한(?) 얼굴에 한 가닥 비웃음이 흐르고 있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요?) 남궁궁도 전음으로 반문했다. 낙무영의 전음이 바로 들려왔다. (후후!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내 눈은 속일 수 없소. 왜인줄 아시오? 그건 세상 누구보다도 내가 철비양 이란 자의 인품을 잘 알기 때문이오.) 남궁궁은 흠칫했다. 낙무영의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흥!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을 곤란하게 하진 않겠소. 대신 한 가지 조건을 걸겠소. 만일 비무 에서 당신이 날 꺾고 궁자기마저 꺾어준다면 당신의 비밀을 지켜줄 뿐 아니라 당신을 도와 주겠소. 하지만 내게 패한다거나 궁자기를 꺾지 못하면 당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그즉시 폭로할 것이오.) 남궁궁은 곤혹스러웠다. 도대체 낙무영이 그런 말을 하는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이 자는 남장여자다. 그런데도 팔대세가에서는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어째서 사람들을 속인 것일까? 게다가 내게 이런 제의를 하는 이유는?' 남궁궁은 눈썹을 찌푸렸다. 한편 군웅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일각이 넘도록 공격하지 않고 서로 바라만 보고 있으니 이상한 생각이 든 것이었다. (어떻소? 제의를 수락하겠소? 수락한다면 고개만 끄덕이시오.) 낙무영의 전음이 들려왔다. '어차피 뽑은 칼이다. 이 여자가 그런 조건을 걸지 않았어도 궁자기에게 패배할 생각을 없었다. 무슨 속셈인지는 나중에 따져도 된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낙무영의 단아한 얼굴에 살포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스슷......! 그녀는 신형을 날렸다. 마치 꽃잎처럼 유연하게 허공을 날아왔다. "자, 조심하시오!" 그녀는 낭랑하게 외치며 열 손가락을 빳빳이 펼쳐 지력을 날렸다. 슈슈슈슉! 지력은 화살처럼 날카롭게 남궁궁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왔다. 남궁궁은 그녀의 공격이 의외로 강하다는 데 놀라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러자 가슴이 안으로 들 어가며 낙무영의 지풍은 스치듯이 지나가 버렸다. 낙무영은 바람처럼 날아와 재차 그를 공격했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은 비좁은 연잎 위에서 마주서게 되었다. 서로의 몸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파파팍! 낙무영의 손이 금나수법으로 남궁궁의 요혈을 낚아채 왔다. 남궁궁도 더 이상


기다리지는 않았다. 그 는 손가락을 구부리며 그녀의 맥문을 낚아채려 했다. "흥!" 코웃음소리와 함께 그녀는 팔꿈치를 꺾으며 다시 지풍을 날렸다. 남궁궁은 주먹으로 그녀의 팔목을 쳤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낙무영의 손이 떠오르고 지풍은 다시 빗나갔다. 그녀는 쓰러질 듯 휘청했다. 뒤 로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갑자기 발길질을 했다. 지척의 거리에서 두 다리가 번개처럼 교차하며 여덟 번이나 걷어찼다. "와아!" 군웅들은 그 광경에 갈채를 보냈다. 비좁은 연잎 위에서 벌이는 박투(搏鬪)야 말로 흥미진진하기 짝이 없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이십여 합을 주고받았다. "차앗!" 낙무영이 쌍장을 어지럽게 날렸다. 손바닥이 수십 개로 변화하며 온통 허공을 메웠다. 어느 방향으로 도 피할 길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공격이었다. 군웅들은 다시 환성을 발하며 손에 땀을 쥐었다. 과연 남궁궁이 어떤 방법으로 대처할지 이만저만 흥 미로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남궁궁의 몸이 뒤로 벌렁 쓰러졌다. 군웅들은 아! 하고 놀랐다. 그가 낙무영의 장력을 맞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철판교(鐵板橋)의 신법으로 발바닥은 연잎위에 붙인 채 몸만 뒤로 드러누운 것 이었다. 낙무영의 공격은 모두 허공을 치게 되었다. "후후! 그럴 줄 알았지." 낙무영은 예상했다는 듯이 조소를 날리며 허공을 쳐던 두 팔을 갑자기 갈고리처럼 구부리며 수직으로 찍어내렸다. 양 손이 칼날처럼 빳빳이 펼쳐진 채로 남궁궁의 허리와 옆구리를 쑤신 것이다. '끝났구나!' 군웅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낙무영의 공격을 피하거나 막을 방법이 떠 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남궁궁은 한쪽 발끝으로 균형을 유지한 채 몸전체를 빙글 돌렸다. 이렇게 되자 눈 깜박할 사이에 그 의 몸은 낙무영의 뒤로 돌아갔다. 슉! 그는 벌떡 일어섰다. 동시에 양 손을 수도로 세워 낙무영의 허리를 내려쳤다.


"하하! 멋진 수요!" 낙무영은 마치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허리를 비틀었다. 그녀의 몸이 허공으 로 붕 떠올랐다. 남궁궁의 수도가 허공을 친 순간 머리 위에서 일갈이 울렸다. "한매낙지(寒梅落池)!" 파파파팟......! 열 개의 창날이 떨어지는 듯했다. 허공에 뜬 채 낙무영이 십지를 날린 것이다. 이렇게 되자 남궁궁은 다른 연잎으로 피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머리에 열 개의 구멍이 뚫릴 판국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두 다리로 버티고 선 채 하늘을 향해 양 손을 뻗었다. 펑! 열 가닥의 지풍은 그의 장력과 부딪치며 무산되고 말았다. "앗!" 낙무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중심을 잃고 추락했다. 설마 상대가 피하지 않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남궁궁은 떨어지는 그녀의 몸을 손바닥으로 받쳤다. 뭉클! 그의 손이 어디에 닿았는지 이상한 촉감이 왔다. 하필이면 낙무영의 젖가슴 부위를 받친 것이었다. '이런.......' 그는 손바닥에 짚이는 뭉클한 감촉에 그만 정신이 흩어졌다. 그러나 손을 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중심이 무너진 낙무영을 받아내지 않으면 그녀는 연못에 풍덩 빠질 게 뻔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그는 손을 떼지 않은 채 그녀를 받아 안았다. "와아!" "멋진 솜씨요!" 함성과 박수갈채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낙무영은 황급히 남궁궁에게서 떨어지며 신형을 날려 다른 연잎 위에 내려섰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벌에라도 쏘인 듯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숙이며 패배를 자인했다. "내가... 졌소이다." 그녀는 곧장 신형을 날려 연못 밖으로 날아갔다. 남궁궁도 비무대 위로 날아 올랐다. 그는 군웅들에게 포권해 보인 후 자리로 돌아갔다. ■ 왕도 2 권 제 15 장 풍운제일령주(風雲第一令主) ━━━━━━━━━━━━━━━━━━━━━━━━━━━━━━━━━━━ ① (양아, 잘 해냈다. 그 동안 네 무공이 놀랄 정도로 발전했구나. 과연 내 뜻대로 풍운제이영주(風雲第二


令主)가 된 것이나 다름없구나.) 전음을 보내 온 것은 검천신군 철화룡이었다. 남궁궁은 의혹을 금치 못해 철화룡을 바라보았다. 철화룡은 지극히 만족스러운 듯 연신 고개를 끄덕 이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 뜻대로 제이영주라니?' 검천신군의 전음이 다시 들려왔다. (설마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 남궁궁은 묵묵히 철화룡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검천신군의 전음성에 초조함이 어렸다. (양아야, 딴 마음 먹으면 안 된다. 물론 그런다고 궁자기를 이길리도 없겠지만.... 설혹 그를 이긴다 해도 그것은 아비와 검문을 돕는 일이 아니라 해치는 일임을 명심해라. 풍운제일령주는 반드시 궁자 기가 되어야 한다.) 검천신군은 따가운 시선을 그에게 박았다. 남궁궁은 시선을 돌렸다. 그의 가슴에는 의혹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궁자기가 풍운제일령주가 되어야 한다니. 그렇다면 이번 비무는 그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단 말인 가?' 그는 태사의에 앉아 있는 풍운맹주를 바라보았다. 중원이 낳은 신협(神俠)이자 의를 중시하는 인의대협(仁義大俠)이요, 변황으로부터 중원무림을 지켜낼 유일한 인물로 칭송 받고 있는 이 시대의 거인이 아니던가. '저 사람은 무림인들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다. 하지만 어딘가 수상한 냄새가 난다.' 이때 풍운맹주 궁천무가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궁천무의 눈에서 전광 같은 빛 이 뻗어 나왔다. 남궁궁은 급히 시선을 돌렸으나 왠지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궁천무가 여전히 그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북소리가 울렸다. "와아......!" 군웅들의 함성이 장내를 진동시켰다. 북소리는 마지막 비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던 것이다. 궁자기가 먼저 신형을 날렸다. 스슷! 마치 허공을 밟는 듯 수평으로 날아간 그는 가볍게 연잎 위에 내려섰다. 남궁궁도 신형을 날렸다. 그 는 평범한 신법으로 궁자기의 맞은편에 내려섰다. 이때 궁천무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비무대 앞으로 걸어오더니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그대들에게 분명히 말해 두겠네. 이번 비무는 필히 정정당당하게 치러져야 하네.


암수를 쓰거나 비겁 한 수법으로 승리를 쟁취한다면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네." 과연 인의대협다운 훈시였다. 군웅들은 모두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피차간에 원한을 파생하면 안 되니 절기를 인증하되 상대에 대한 살심을 가져서는 아니 되네. 알겠는가?" 두 청년은 일제히 대답했다. "허허! 그럼 시작하게. 노부는 신진들의 솜씨를 눈여겨 보겠네." 궁천무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자리로 돌아가자 북소리가 한 번 둔중하게 울렸다. 그와 함께 장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 궁자기와 남궁궁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궁자기의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전음을 보내고 있었다. (후후! 철소제, 요즘 자네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더군. 더구나 결승까지 올라왔으니 이 기세로 풍운 제일령주가 될 꿈이라도 꾸고있는 건가?) 남궁궁은 담담히 웃으며 역시 전음으로 대답했다. (다만 정당한 방법으로 실력을 행사할 뿐이오. 누가 풍운제일령주가 될지는 비무의 결과가 말해 줄 것 이오.) 궁자기는 뜻밖인 듯 안색이 변했으나 곧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정말 자넨 많이 달라진 것 같군. 사람이 며칠 사이에 이렇게 변할 수 있다니 신기한 일이야.) 남궁궁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볼 뿐이었다. 궁자기의 눈에서 사나운 빛이 흘러나왔다. (건방진 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좋아, 네가 얼마나 헛된 꿈을 꾸고 있는가를 보여 주마.) 궁자기는 노골적으로 남궁궁을 모욕했다. 물론 전음으로 말했기에 군웅들은 알 리가 없었다. 궁자기는 갑자기 손바닥을 딱, 치며 호탕하게 말했다. "하하! 소제, 자네가 먼저 공격하게. 내 일초를 양보하겠네." 군웅들은 궁자기의 호방한 면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인심유룡답다......!" "후기제일인이란 칭호가 아깝지 않은 모습이구려!" 여기저기서 그에 대한 찬사가 쏟아져 나왔다. 남궁궁은 궁자기의 이중성에 내심 실소하면서 선뜻 포 권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소이다." 윙! 그는 가볍게 일장을 날렸다. 그것은 평범한 벽공장력이었다. "하하!" 궁자기는 낭랑한 웃음을 터뜨리며 가볍게 소매를 휘둘렀다. 벽공장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허공으로 훌훌 날아올랐다. 언제 뽑았는지 그의 성명무기인 금령통천필(金靈通天筆)을 들고 남궁궁을 공격했다. 파파파팟! 수백 개의 금화(金花)가 피어나는 듯했다. 금필은 허공에서 유유하게 춤을 추었다. 순식간에 방원 삼 장이 온통 금빛에 휩싸여 버렸다. 남궁궁은 온몸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궁자기의 무공은 분명 비범했다. 평범한 초식으로 상대하다가 는 낭패하기 십상이었다. 그는 검을 뽑아 풍운십삼세를 전개했다. 눈부신 검광과 금필에서 발출된 기운이 격돌했다. 카앙......! 고막을 울리는 따가운 음향과 함께 두 사람은 위치를 바꾸었다. 군웅들은 마치 두 마리의 용이 뒤엉 키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촤아아아! 연못의 물은 두 사람이 격돌할 때마다 파도를 일으켰으며, 물기둥이 수 장 높이로 치솟곤 했다. 두 사 람은 연잎 위를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현란한 격돌을 벌였다. 한편 남궁궁은 초수를 거듭할수록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칠성의 힘으로도 이 자를 꺾을 수 없다니!' 그러나 정작 경악한 것은 궁자기 쪽이었다. 그는 이미 십성 이상의 공력을 끌어올린 상태였다. 그런데 도 철비양(?)의 공격은 수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그는 회의에 찬 표정이었다. "천혼갑문(天混甲門)!" 파파파팍! 금령통천필이 수백 개의 환영을 일으키며 허공을 메웠다. 남궁궁은 필봉에서 찌르는 듯한 기운이 뿜 어져 나오는 것을 느끼며 검을 전개했다. "난세풍운(亂世風雲)!" 우웅! 검이 진동했다. 가공할 검명(劍鳴)과 함께 눈부신 검광이 궁자기를 뒤덮었다. "음!" 두 사람은 똑같이 신음을 발하며 격돌했다가 떨어졌다. 그러나 곧 바로 다시 격돌했다. "야천건곤참(夜天乾坤斬)!" "경동(驚動天下)!" 두 사람의 비무는 마치 용쟁호투를 방불케 했다. 용과 호랑이가 천하를 놓고 다투는 모습에 군웅들은 눈앞이 아찔해졌고, 초식이 시전될 때마다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숨조차 죽인 채 관전에 몰두했 다.


퍼펑!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이 붙었다 떨어졌다. 두 사람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져 있었다. 궁자기의 눈에는 무서운 살기가 뻗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남궁궁의 눈빛은 기이하게도 담백하기만 했다. 군웅들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 사람의 비무는 실로 의외였다. 군웅들은 모두 궁자기가 일방적으로 승리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은 엉뚱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전세는 팽팽할 뿐 아니라 도리어 남궁궁 쪽이 유리해 보이지 않는가! 한편 풍운맹주의 안색은 무섭게 굳어지고 있었다. 또한 검천신군의 안색도 볼만했다. 그는 안색이 붉 으락푸르락해지며 어쩔 줄을 몰라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그리 말했건만.......' 이때 다시 두 청년이 격돌했다. "혈천멸혼강(血天滅魂 )!" "천하절인(天下絶人)!" 번쩍! 눈부신 광채가 두 사람의 모습을 감싸 버렸다. 군웅들은 눈을 부릅떴다. 이번의 격돌은 심상치가 않았 다. 두 사람 다 최후의 절기를 떨쳐낸 것 같았다. 콰아아! 물기둥이 회오리와 함께 허공 높이 치솟았다.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휘말려 올라갔던 연못의 물이 소나기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 바람에 군웅들도 물벼락을 맞게 되었다. "......!" 군웅들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물벼락을 맞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그들의 눈길은 연못 한가운데 고정되어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남궁궁은 연잎 위에 뿌리라도 내린 듯이 우뚝 서 있었다. "너, 너는......." 맞은편 연잎 위에서 궁자기가 손을 뻗어 남궁궁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의 손끝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군웅들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본래 잡고 있어야 할 금령통천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병기는 무인의 생명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병기를 잃어버렸다면 결과는 명백하지 않은가? 남궁궁은 연검을 아래쪽으로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궁자기의 왼쪽 어깨가 붉게 물들었다. "아......!" 군웅들은 비로소 탄성을 발했다. 비무는 끝난 것이다. 예상을 깨고 남궁궁이 궁자기를 꺾은 것이었다. "이... 이럴 수는 없다. 네놈은 대체......." 풍덩!


궁자기의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그는 연못에 빠져 버렸다. 연못 물이 금세 붉게 물들어 갔다. 휙! 사마고가 연못으로 뛰어들더니 궁자기를 안고 비무대 위로 돌아갔다. 궁자기는 구출되고서도 의식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의당 비무의 승자에게 축하의 환호를 보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런데 군웅들 은 아무도 박수를 치거나 환호하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어색한 표정이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남궁궁은 검을 거두었다. 그는 군웅들의 반응이 차갑다는 것을 느끼고 내심 의혹을 금치 못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내가 이긴 것이 잘못한 일이란 말인가?' (정말 잘했소. 축하하오!) 문득 귓전에 누군가의 전음성이 흘러들어왔다. 남궁궁은 그것이 낙무영의 음성임을 알았다. 그는 고개 를 돌려 차일 쪽을 바라보았다. 영호궁옥과 남대천의 얼굴에 기쁨의 빛이 떠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도 억지로 기쁨을 참고 있는 듯했다. 남궁궁은 이번에는 검천신군을 바라보았다. 검천신군의 안색은 무참하게 구겨져 있었다. 눈빛이 마주 치자 검천신군은 눈을 분노를 금치 못하는 듯 눈을 부릅떴다. 이때였다. 풍운맹주가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키며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승리의 북을 울리지 않고 무엇들 하는 건가?" "아, 알겠습니다." 궁자기를 보살피고 있던 사마고는 황망히 일어서며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철비양 소협의 승리요!" 둥둥둥! 북소리가 뒤따랐다. 북은 계속 열여덟 차례나 울렸다. 군웅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긴장된 표정들이었 다. 풍운맹주는 비무대 앞으로 나오더니 군웅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로써 풍운제일령주가 선출되었소이다. 검문세가의 검공자는 앞으로 풍운맹의 후기지수들을 영도하 게 될 것이오." 군웅들의 시선은 일제히 남궁궁을 향해 집중되었다. 남궁궁은 아직도 연못 위에 서 있었다. 그는 군웅 들을 향해 정중히 예를 표한 후 신형을 날려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이리 오시게, 철소협." 풍운맹주는 자애로운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예! 맹주님."


남궁궁은 힘차게 대답하며 그의 앞으로 다가가 포권지례했다. 풍운맹주 궁천무는 만면에 부드러운 미 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축하하네. 자네의 무학이 이토록 높을 줄은 몰랐네. 이제 자네는 일천 명 풍운천병대의 영도자가 되 었네. 진심으로 자네의 무궁한 장도를 축하하네." 남궁궁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송구스럽습니다. 앞으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궁천무는 고개를 돌리더니 검천신군을 향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철노협은 훌륭한 후예를 두어 마음 든든하겠소이다?" 검천신군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황급히 일어서며 더듬거렸다. "이... 이건 뭐가 잘못된 겁니다. 어찌 감히 불민한 아들 놈이 그런 대임을?" "허허헛! 아니오. 영식의 기도를 보니 이제 노부는 물러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궁천무는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려냈다. "어, 어찌 그럴 수가? 아닙니다. 맹주, 이번 일은......." 검천신군은 손을 비벼대며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궁천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남궁궁을 향해 말했다. "자네는 내일 밤 천중각(天中閣)으로 와 주게. 그곳에서 정식으로 풍운제일령을 내리겠네. 노부는 자 네에게 달리 할 말도 많다네. 허허,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남궁궁은 고개를 숙이며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것으로 풍운맹에 한 발자국 들여놓은 셈이다. 기왕 내친 걸음이니 끝까지 가봐야겠다.'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었다. 연못가에는 횃불이 밝혀졌다. 비무는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팔공자의 서열을 정하기 위한 비무 가 남은 것이다. 비록 풍운제일령주가 결정되었으므로 김이 빠진 감은 있었지만 서열을 정하는 비무 는 양보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비무는 그로부터 두 시진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 결과, 풍운제이령에는 예상한 대로 궁자기가 결정되었다. 제삼령의 자리에는 낙무영이 영호궁옥을 꺾고 자리를 차지했다. 뒤이어 제사령에는 자의환영 영호궁옥이, 오령에는 무적신도 팽조위가, 육령에는 소항우 남대천이, 칠 령에는 천수독룡 당무, 그리고 마지막 자리인 팔령에는 사해일룡 수검악이 결정되었다. 이로써 팔공자의 서열이 완전히 정해지게 되었다. 비무대회가 끝난 연못가는 정적에 휩싸였다. 군웅들은 모두 흩어졌고, 비무대 위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제 얼마 후면 날이 밝을 것이다. 밝기


직전의 어둠은 칠흑같이 어둡다. 어쩌면 그것은 향후 무림의 암담함을 느끼게 하는 것 같았다. ② 검전(劍殿). 검천신군은 화를 참지 못하고 노성을 지르고 있었다. "이 놈! 이 아비가 그렇게 당부했건만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나 있느냐? 네놈이 풍운제일령 주가 되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남궁궁은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아버님, 어째서 소자를 나무라시는 겁니까? 소자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겁니까? 분명 정정당당한 비 무로 소자가 승리하지......." 검천신군은 호통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이 놈! 벌써 잊었단 말이냐?" 남궁궁은 의아했다. '잊다니? 뭘 말인가?' 검천신군은 여전히 분을 참을 수 없는 듯 전신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네놈이 한낱 호승심으로 저지른 일로 인해 이 아비와 사백여 명 식솔들이 비명횡사해도 좋단 말이 냐?" 남궁궁은 안색이 변했다. "아버님, 그게......." 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뭔가 사연이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네놈의 방약무비한 행동은 그의 노여움을 사기에 충분하다. 만일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검천신군은 말끝을 흐렸다. "아아! 그만 두자. 이미 벌어진 일이니......." 그는 한숨을 쉬며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사실은 네가 궁자기를 꺾었을 때 아비는 정말 기뻤다. 세상 어느 아비가 싫어하겠느냐? 하지만 아직 은 그럴 때가 아니다. 금제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남궁궁은 비로소 안개가 걷히는 것을 느꼈다. '역시 뭔가 있구나. 팔대세가가 풍운맹주에게 꼼짝하지 못하는 것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였다. "이 놈!" 검천신군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남궁궁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어서 바른 대로 말해 봐라!" "뭘... 말입니까?" "네놈의 무공이 갑자기 강해진 데는 이유가 있을 게 아니냐? 어디 무슨 기연을 만났는지 털어놓아라.


아비에게조차 속일 생각은 아니겠지?" 검천신군은 겉으로는 노여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실상 은근한 기대를 품고 있는 듯했다. "그 동안 계집질에만 열을 올리던 네놈이 기연을 얻지 않고서는 이렇게 강해질 리가 없지 않느냐?" "그건......." 남궁궁은 그의 애를 태우려는 듯 더듬거렸다. 검천신군은 더욱 닥달을 했다. "이 놈! 어서 이실직고하지 못하겠느냐?" 남궁궁은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은......." "그래, 어떤 기연을 만났느냐?" 검천신군은 침을 꿀꺽 삼키며 급히 물었다. "영약을 복용했습니다." "무슨 영약이냐?" 검천신군의 얼굴은 환해졌다. 남궁궁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공청석유(孔淸石乳)입니다." "공청석유!" 검천신군의 입이 딱 벌어졌다. "며... 몇 방울이나 먹었느냐?" 남궁궁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모두 열 방울입니다." "오오! 그래서 네 공력이 그렇게 강해졌구나. 그런데......." 검천신군의 얼굴에 탐욕의 빛이 어렸다. 남궁궁은 검연쩍은 듯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당시엔 미처 생각이 돌아가지 않아 그만 모두 마셔버렸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버님 께 드릴 몇 방울을 담아오는 건데." "그... 래?" 검천신군의 얼굴에 실망이 어렸다. 그러나 곧 대견한 듯 말했다. "아무튼 너는 가문의 미래를 짊어진 몸이다. 아비가 맹주께는 잘 말씀드리겠다. 하지만......." 그는 어깨를 펴며 말했다. "걱정마십시오, 아버님. 소자가 맹주의 눈밖에 나지 않도록 행동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검천신군은 신음을 흘렸다. "으음, 너는 모른다. 맹주와 우리 팔대세가는......." 남궁궁은 숨을 죽였다. 그의 입에서 드디어 비밀사안이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서로간에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도 인력으로는 도저히 끊을 수 없는. 그 사실은 팔가 의 비밀이자 무림 최대의 비밀이기도 하다." 남궁궁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 "대체 그 비밀이 무엇입니까? 소자가 알면 안 된단 말입니까?" 검천신군은 몸을 돌렸다. "가서 쉬거라. 아직은 밝힐 때가 못 된다." "아버님......!"


남궁궁이 아쉬운 듯 그를 불렀으나 검천신군은 냉담하기만 했다. "아비는 맹주를 만나야 한다. 그러니 어서 돌아가거라." 남궁궁은 할 수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처소로 돌아온 그의 가슴에는 많은 의문들이 꿈틀거렸다. '팔대세가와 풍운맹주 사이에 놓여 있는 관계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남궁궁은 창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머지않아 날이 밝을 것이다. 오늘 하루에 일어난 일은 실로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비무대회만 해도 의문스런 일이 하나둘이 아니 었다. 특히 낙무영이 그에게 전음으로 한 말에는 알 수 없는 비밀이 담겨져 있는 듯했다. '그녀는 내가 궁자기를 꺾으면 날 돕겠다고 했다. 대체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구나.' ③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너라." 방문이 열리며 구연령이 들어왔다. 그녀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공자님께서 풍운제일령주가 되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렇소." 남궁궁은 잠옷을 통해 보이는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요?" 구연령의 얼굴에는 염려의 기색이 가득했다. 남궁궁은 담담히 말했다. "기왕 호굴에 들어왔으니 몸을 사리기만 해서 얻을 게 뭐가 있겠소. 게다가 그럴 만한 이유가 하나 있 었소." "이유라니요?" 구연령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궁궁은 낙무영이 전음으로 내건 조건을 이야기해 주었다. 구연령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속셈이 뭘까요?" "글쎄, 조만간 드러낼 것이오." 구연령은 생긋 미소지었다. "공자님께서는 정말 대담하시군요. 이곳이 호굴이라는 것을 아시면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시니 말 이에요. 더구나 검공자의 대역을 하면서도 조금도 어색해 보이지가 않아요." "하하! 과찬이오, 낭자." 구연령은 그윽한 눈으로 남궁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공자님께서 하시는 일은 너무 위험한 일이에요. 팔대세가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답니다. 게다가 풍운맹은 용담호혈이나 다름없는 곳인데......." 남궁궁의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애초에 그런 걸 두려워했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오."


문득 그는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내가 우승을 했을 때 기뻐한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았소. 분명 정당한 비무로 풍운제일령주 가 되었는데 어째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구려." 구연령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그야 당연한 일이에요." "......?" "검공자 철비양은 행실이 좋지 않은 위인이에요. 음탕할뿐더러 성품도 오만방자하여 그를 좋아하는 사 람이 거의 없어요. 그런 자가 풍운제일령주가 되었으니 어찌 달갑게 받아들여지겠어요? 반면 인심유 룡 궁자기는 별호가 말하듯 상당한 인망을 얻고 있어요. 게다가 부친의 후광이 있으니 그가 풍운제일 령주가 되기를 바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에요." "으음. 그렇게 된 일이었군." 남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였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을 뚫고 무엇인가 방 안으로 날아들었다. 남궁궁은 손을 뻗어 물체를 낚아 챘다. 그것은 한 대의 화살이었다. 화살 꼬리에는 종이가 묶여 있었다. 그는 종이를 펼쳐 보았다. <승리를 축하하오. 지금 곧 낙성전으로 초대하겠소. 낙(落).> 간단한 글귀가 써져 있었다. 구연령은 궁금한 듯 물었다. "뭐라고 써 있나요?" "낙무영이 보낸 것이오. 지금 자신의 처소로 초대한다는구려." 구연령의 얼굴에 불안감이 떠올랐다. "무슨 일일까요? 그가 공자님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그를 미끼로 협박하려는 게 아닐까요?" "후후! 그렇지는 않을 거요. 아마 내게 무슨 제의를 하려 들 것이오." 남궁궁은 내심 생각에 잠겼다. '낙무영이 남장여인인 것은 그녀에게 밝힐 수 없는 비밀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 모종의 제의를 해올 것이 분명하다. 다만 그것이 무엇인지가 문제이긴 하지만. 일단 만나보면 알게 될 것이다.' 구연령은 명상에 빠져 있는 남궁궁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조심하셔야 해요. 공자님,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이곳에 머무르실 건가요?" 남궁궁은 담담히 말했다. "이곳은 무림의 중심부나 다름없는 곳이오. 때문에 가능한 오래 머무르며 많은 것을 알아야 하지 않겠


소. 그런 다음에......." 구연령은 그가 말끝을 흐리자 의아한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내게 다른 계획이 있소." "......?" 구연령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남궁궁은 그 계획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다. 그는 슬며시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할아버지... 아니 네 분 사부님의 복수와 그 분들의 염원을 위해서 내가 완성해야 할 길은 왕도를 이 룩하는 것이다. 그밖에도 할 일이 너무도 많다. 의문에 싸인 아버님의 생사에 관한 것도 그렇고 당금 무림을 덮고 있는 암운도 밝혀내야 할 것이다.' 그는 생각을 끝내고 몸을 일으켰다. "지금 가시게요?" 구연령은 불안한 듯 따라 일어서며 물었다. 남궁궁은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느낌이 들어 빙긋이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 마시오. 아무 일 없을 테니." ④ 새벽 동이 트기 직전. 남궁궁은 낙성전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얼마 전 가보았던 낙무영의 처소로 향했다.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창문을 통해 방 안 풍경이 들어왔다. 뜻밖에도 방 안에는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간소하긴 했으나 정갈하게 차려진 상 위의 음식에서는 김 이 오르고 있었다. 그것으로 미루어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호호, 뭘 망설이나요? 들어오시지 않고?" 문득 은방울 구르는 듯한 옥음이 들렸다. 그것은 낙무영의 본래 음성인 듯했다. 환우는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내실로 통하는 휘장이 걷혀지며 한 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 남궁궁은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야말로 흠잡을 곳이라곤 없는 완벽한 미녀였기 때문이다. 가느다란 눈썹은 아미월(蛾眉月)인 양 셈세하게 뻗어 있었으며,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거렸다. 피부는 또 어떤가? 마치 빙결처럼 투명해 보일 정도였다. 삼단 같은 머리칼은 반듯이 빗어내려 유연한 허리까지 찰랑거리며 흘러내렸으며 연홍빛 비단옷은 늘 씬하면서도 굴곡이 완연한 몸매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했다. 여인은 혼백마저 녹일 듯한 미소를 흘리며 웃었다. "호호!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죠? 제 이런 모습이 이상한가요?" 남궁궁은 황급히 말했다. "아, 아니오. 낭자가 너무나 아름답기에."


"호호! 그 말 진심이신가요?" 남궁궁은 히죽 웃었다. "난 허언할 줄 모르오." "깔깔! 말솜씨가 그럴 듯하군요? 철공자의 입은 그렇게 세련된 화법을 구사하지 못하죠." 남궁궁은 흠칫했으나 곧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본래 난 말주변이 없는 편이오. 하지만 낭자 같은 미녀를 만나면 항상 최선을 다하게 되오." 낙무영은 두 눈을 살짝 흘겼다. "호호! 정말 대단하군요." "과찬이시오." "제 말은 당신이 비록 다른 기질을 풍기긴 하지만 임기응변이 뛰어나 철비양의 흉내를 꽤 잘내고 있 다는 뜻이에요." 남궁궁은 정중히 포권해 보였다. "그렇게 봐주니 감사할 따름이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어요." "......?" 남궁궁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인, 즉 낙무영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오늘은 당신이 풍운제일령주가 된 것을 축하하는 날이니 제가 술을 따라 드리겠어요." 남궁궁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궁금하오. 그 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듣고 싶소이다." 낙무영은 별 같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것은 용과 뱀만큼의 차이에요." 남궁궁은 빙긋이 웃었다. "누가 용이고, 누가 뱀이오?" "호호! 그야 물론 철비양이 뱀이지요." "그거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니구려. 한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소. 대체 내가 가짜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소?" 낙무영은 술을 따르며 말했다. "철비양은 난봉꾼이에요. 여자 경험이 풍부하죠. 그래서 제가 아무리 철저히 위장했지만 그에게만은 들키고 말았어요." "아!" 남궁궁은 비로소 납득이 갔다. "그는 제가 여인이라는 것을 안 후로 틈만 나면 유혹하려 들었죠. 그러니 당신이 가짜라는 것을 금방 알 수밖에 없었지요." 남궁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려. 한데 날 초대한 이유는?" "방금 말씀 드리지 않았나요? 축하주를 드리고 싶다고요."


"단지 그뿐이란 말이오?" 남궁궁은 그녀를 직시했다. "우선 잔이나 받으세요." 낙무영은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좋소. 마침 술 생각이 나던 참이었소."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미녀와 단둘이 마주앉아 마시는 술이라면 한 잔이 아니라 백 잔이면 또 어떻겠는가? "호호! 우리의 앞날을 위해. 더불어 풍운제일령주의 장도를 위하여." 낙무영은 잔을 치켜 들었다. 남궁궁도 빠지지 않았다. "낭자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쨍! 술잔 부딪치는 맑은 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두 남녀는 눈빛을 교환하며 술을 들이켰다. 술은 향기가 좋았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향이라 해도 눈앞의 미녀가 풍기는 향기만은 못한 듯했다. 낙무영은 여러 잔의 술을 마셨다. 그녀의 얼굴은 잘 익은 석류처럼 발그레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양할 줄을 몰랐다. 양 뺨이 붉어지고 눈빛이 그윽해지자 한층 요염한 분위기를 풍겼다. "한 가지 물어도 되나요?" "물어보시오." "정말 제가 아름다운가요?" 그녀는 혀가 꼬부라지고 있었다. 남궁궁은 엉뚱한 질문에 놀랐으나 솔직히 시인했다. "아름답소." 낙무영은 잔을 비우며 눈꼬리를 야릇하게 치켜올렸다. "음... 그럼 흑란화와 비교하면 어떤가요?" 남궁궁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건... 굳이 비교하자면 야생화와 장미의 차이라 할 수 있소." "호호! 멋진 말이군요. 그런데 소협과 흑란화는 어떤 관계인가요?" "무슨 뜻이오?" 남궁궁은 입까지 가져갔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제 말은 두 분이 어느 정도 관계냐는 거예요." 남궁궁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흑란화는 다만 협력자일 뿐이오." "정말 그럴까요?" "물론이오." 낙무영은 눈웃음을 치며 물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흑란화는 당신을 무척 연모하는 것 같은데요?" 남궁궁은 그녀의 도발적인 눈빛을 슬며시 피하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소. 난 다만 그녀를 도와 흑천풍을 부흥시켜 주기로 약속했을 뿐이오." "흥, 그런 약속까지 했단 말이죠?" 낙무영의 콧소리가 높아졌다. "그런 다음에는요?"


그녀의 질문은 실로 집요했다. 아마도 물고 늘어지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건......." 남궁궁은 머뭇거렸다. 달리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낙무영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호호, 대체 소협의 진정한 야심은 무엇인가요? 전 그게 궁금해요." "......." 남궁궁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더 이상 말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때 낙무영은 술기운에 못 이 기는 듯 옆으로 비스듬히 자세를 바꾸었다. 그러자 앞섶이 약간 늘어지며 가슴의 계곡이 은은히 드러 났다. 그녀가 입고 있는 나삼은 본래 내실에서 입는 것이었으므로 속살이 이따금씩 보이곤 했다. "흐응, 이쯤 됐으니 저에게도 소협의 진면목을 보여줘야 하지 않나요?" 낙무영의 콧소리 섞인 말에 남궁궁은 안색을 굳혔다. "대체 낭자의 의도는 무엇이오?" "먼저 당신의 진면목을 보여 주세요." "좋소." 남궁궁은 흔쾌히 대답한 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볍게 문질렀다. 그가 손을 떼자 본래의 얼굴이 나타 났다. "이것이 내 진짜 모습이오." "......!" 낙무영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눈동자는 유난히 반짝였다. "이제 보니 당신은... 매력적인 분이군요." 남궁궁은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이렇게 노골적인 말을 할 줄이야. "과찬이오." 낙무영은 섬섬옥수로 턱을 받쳐든 채 빤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소협의 성함은 어찌 되시나요?" "남궁궁이라 하오." "남궁 소협이셨군요. 호탕한 외모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군요." 낙무영은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줄을 몰랐다. 남궁궁은 너무나 빤히 바라보는 바람에 얼굴이 화끈 거릴 정도였다. "이젠 낭자의 차례요." "좋아요, 먼저 제 본명은 낙화운(落花雲)이라고 해요." "역시 낭자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오." 남궁궁은 스스로 술을 따른 후 단숨에 비웠다. 그는 진중하게 재차 물었다. "왜 남장을 하셨소?" "제 스스로 원했기 때문이에요." "......?" 남궁궁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낙화운은 한숨을 가늘게 쉬며 말했다. "낙성세가에는 남자가 없어요. 그래서 전 어릴 적부터 남장을 하고 자랐어요. 어쩐지 그게 좋았고 아 버님께서도 굳이 반대하지 않으셨어요." 남궁궁은 그녀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음, 그럼 내가 철비양이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어째서 폭로하지 않았소?" 낙화운의 눈에 이상한 광채가 어렸다. "그건 소협께 한 가지 부탁을 할까 해서예요." "부탁이라니?" 낙화운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녀의 술기운이 올라 발그레한 얼굴에 야릇한 기운이 번졌다. 그녀는 꽃 잎 같은 입술을 달삭이며 말했다. "절 아내로 삼겠다고 풍운맹주에게 청원해 주세요." 남궁궁은 안색이 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낙화운은 갑자기 만면에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제가 소협께 궁자기를 꺾어달라고 말씀드린 것은 그와의 혼사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남궁궁은 뜻밖의 말에 눈썹을 꿈틀했다. 낙화운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본래 궁자기가 풍운제일령주가 되면 저와 혼사를 치른다는 약정이 아버님과 풍운맹주 사이에 내정돼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그와 혼례를 치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거든요." 남궁궁은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구려. 그는 당금 무림의 후기지수일뿐더러 세인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지 않소? 어째서 그를 싫어하는 것이오?" 문득 낙화운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흥! 인심유룡? 말도 안 되는 호칭이에요. 그 자는 실로 음흉하기 그지없는 위선자일 뿐이에요." 남궁궁은 그녀의 갑작스런 반응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겉으로는 인의대협으로 행세하지만 사실은 겉다르고 속다른 비열한 소인배에 불과해요." 남궁궁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런 자와는 죽으면 죽었지 혼인할 수 없어요.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었는데 이번에 그가 풍운제일령 주가 되면 바로 혼사를 치르기로 했던 것이에요." ⑤ 남궁궁은 한동안 침묵하다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쩔 셈이오?" 낙화운은 그윽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절 도와주세요. 백소협이 풍운제일령주가 되었으니 차제에 저에게 청혼을 하신다면 궁자기의 요구를 물리칠 수 있을 거예요." 남궁궁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나더러 연극을 하란 말이오?" "이건 형식에 불과한 거예요. 절 도와주세요." "혼인은 인륜지대사요. 아무리 형식에 불과하다지만 그 일로 인해 낭자의 명예는 크게


손상될 것이오. 그러니 신중히 생각......." 낙화운은 강하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저는 아무래도 좋아요. 그 자와의 혼례를 피하기만 하면 돼요." "하지만......." 낙화운의 안색이 싸늘하게 변했다. "흥! 거절하겠단 말인가요?" "난 다만......." "그렇다면 당신의 정체를 폭로해도 좋단 말이에요?" 남궁궁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결코 협박에 굴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낙화운은 그의 약점을 미끼 로 협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한 가지 묻고 싶은게 있소. 낭자는 날 믿을 수 있소?" "......?" 낙화운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나는 철비양으로 변장한 몸이오. 게다가 이곳에 들어온 것은 모종의 목적이 있어서요. 낭자는 무엇을 보고 날 믿는단 말이오?" 낙화운은 생긋 웃었다. "최소한 전 사람 보는 눈이 있어요. 제가 보기에 소협은 결코 악인이 아니에요. 전 확신할 수 있어요." 남궁궁은 히죽 웃었다. "후후, 그렇게 봐주니 고맙소." 낙화운의 얼굴에 기쁨의 빛이 어렸다. "그럼 승낙하는 건가요?" "대신 조건이 있소." "......?" "내 신분을 지켜줘야 하며 앞으로 내가 하는 일에도 협조해 줘야하오." "호호호호......!" 낙화운은 느닷없이 교소를 터뜨렸다. 남궁궁은 의아했으나 그녀가 웃음을 그치기를 기다렸다. 낙화운은 한참을 웃다가 웃음을 그치며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협은 정말 대담하시군요. 이런 상황에도 도리어 조건을 걸다니 말이에요." 남궁궁은 담담히 말했다. "단지 이해를 바랄 뿐이오." "좋아요. 대신 저도 조건이 하나 더 있어요." "......?" 낙화운은 그윽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부터 저에게 늘 다정하게 대해 주셔야 해요." 남궁궁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호호! 우린 남들이 보기에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로 보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필시 허점을 드러내 게 될 거예요." 여인의 입에서 나오기 힘든 말이었다.


비록 겉으로는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우고는 있었으나 그녀의 말투나 표정으로 미루어 볼 때 은연중 남궁궁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었다. 남궁궁도 젊은 피를 지닌 사내였다. 그는 눈앞의 미녀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니 싫을 리가 없었다. 그는 씩 웃었다. "낭자 같은 미녀와 다정하게 지내는 걸 마다할 바보가 있을지 모르겠구려." "호호호......!" 낙화운은 교소를 터뜨렸다. 궁등 아래 비치는 그녀의 모습은 실로 매력적이었다. 남자라면 그녀의 자 태에 반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같았다. 두 남녀는 상당히 취했다. 그 바람에 어색했던 사이도 스스럼없이 되어 갔다. "으음... 어지러워요." 문득 낙화운은 술잔을 떨어뜨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 남궁궁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로 쓰러져 누운 여인의 자태는 흐트러져 있었다. 실로 육감적 인 모습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를 번쩍 안고 내실로 향했다. 걸어가는 동안 낙화운의 체취 가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여인 특유의 체향과 술냄새가 묘한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남궁궁은 그녀를 침상에 눕혔다. 막 몸을 일으키려는데 무의식적인 듯 낙화운이 그의 목을 휘감았다. "으음." 그녀는 신음을 발하며 그의 목을 감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바람에 남궁궁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뭉클한 젖가슴의 감촉과 강렬한 육향이 전해졌다. 얇은 나삼 사이로 전해지는 그녀의 육체는 술기운 탓인지 뜨거운 느낌이었다. 남궁궁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반쯤 벌려진 붉은 입술이 그를 유혹하는 듯했다. 남궁궁은 갑자기 피가 빨리 흐르는 것을 느꼈다. 손만 뻗으면 그녀의 옷을 벗길 수 있었다. 마음만 먹 으면 그녀와 더불어 하룻밤의 짜릿한 운우(雲雨)를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낙화운의 손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낙화운은 답답한 듯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 바람에 앞섶이 열리며 뽀얀 젖가슴이 일부 드러 났다. "......!" 남궁궁은 눈을 크게 떴다. 눈부시게 흰 젖가슴의 일부가 그의 감정을 뒤흔들었다. 그도 상당히 취한 상태였다. 술이란 요물이라 평소와는 달리 감정의 흐름이 빨라지게 마련이었다. 그는 뚫어져라 낙화운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약간만 옷을 젓히면 금단의 과실을 딸 수 있을 것 같았 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안 돼.' 막 돌아서려는데 다시 낙화운이 가슴을 쥐어뜯었다. '......!' 남궁궁은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놀랍게도 낙화운의 젖가슴 한쪽이 옷 밖으로 비어져 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혈관이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참을 수 없는 유혹이 전신의 혈관을 팽팽하게 부풀어오르게 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며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은 낙화운의 가슴에 닿았다. 손가락이 닿는 순간 마치 전류가 흐르는 듯한 짜릿한 느낌이 전 달되었다. 남궁궁은 침을 삼켰다. 유혹을 물리치기에는 낙화운의 풍기는 매력이 너무도 컸다. 마침내 그는 그녀의 가는 목과 뺨을 어루 만지기 시작했다. 낙화운은 가벼운 콧소리를 내며 반듯이 누웠다. 그가 애무하기 편한 자세를 취한 것 이다. 남궁궁은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명분이 들어 서고 있었다. '결국 이 여인도 이것을 원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면 규방에 날 끌어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르륵. 사륵. 새벽 동이 트는지 창문이 부유스름해지고 있었다. 비단천 스치는 소리가 가슴을 설레게 했다. 낙화운 의 옷은 차례로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나삼 안에 간단한 고의만을 입고 있어 겉옷이 벗겨지자 곧바 로 눈부신 피부를 볼 수가 있었다. 남궁궁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더듬었다. 처녀의 가슴치고는 놀랄 정도로 풍만한 가슴이었다. 연분홍빛 유두가 그의 손길을 받자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는 듯했다. 그때였다. "......!" 남궁궁의 손이 멎었다. 그는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그 손은 오랫동안 주먹을 펴지 않았던 손이었 다. 다만 얼마 전에야 비로소 펼쳐본 바 있을 뿐이었다. 그는 손바닥을 펼쳐보았다. 손바닥 한가운데 뚜렷한 손금이 나타났다. 왕(王)자가 새겨져 있었다. 남궁궁의 눈썹이 부르르 떨렸다. '내가 이게 무슨 짓인가! 이 정도 유혹에 가볍게 동요하다니, 할아버지와 사부님들이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하시겠는가? 남궁궁아, 남궁궁아! 정신 차려라!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이냐!' 남궁궁은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며 손을 떼었다. 금침을 끌어다 낙화운의 드러난


나신을 덮어준 그는 빠른 걸음으로 내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막 사라졌을 때였다. 술에 취해 잠든 줄 알았던 낙화운의 눈이 반짝 떠졌다. 그녀는 금침 아래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놀랍게도 그것은 한 자루의 서슬이 퍼런 비수(匕首)였다. 그녀는 비수를 어루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그가 조금만 더 있었다면 널 그의 가슴에 꽂게 되었을 거야." 이게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그녀가 흐트러진 자세로 보인 것은 고의였단 말인가? 사실 낙화운은 일부러 남궁궁을 유혹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인격을 시험한 것이었다. 만일 그가 자 신을 진짜 범하려 한다면 금침 아래 숨겨 두었던 비수로 심장을 찌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손을 뗄 줄은 몰랐었다. 낙화운은 한숨을 쉬었다. 남궁궁이 정인군자라는 사실은 확인된 바였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그녀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녀는 차가운 비수로 자신의 젖가슴을 문질렀다. 그녀의 몸은 아직도 뜨거웠다. 그것은 위장이 아니 었다. 자신도 모르게 몸이 달아올랐던 것이다. 그녀는 비수를 침상 아래로 던져 버리며 중얼거렸다. "바보 같은 사람." ■ 왕도 2 권 제 16 장 천중각(天中閣)의 관문(關門) ━━━━━━━━━━━━━━━━━━━━━━━━━━━━━━━━━━━ ① 천중각(天中閣). 그곳은 풍운맹주인 자비천문선생 궁천무의 거처이자 무림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곳이다. 천중각에서 결정된 사안들은 무림의 정세를 좌우하게 된다. 따라서 천중각은 풍운맹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비무대회가 끝난 다음 날이었다. 삼경을 알리는 고소리가 울린 직후 천중각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남궁궁이었다. 궁천무의 명을 쫓아 천중각에 온 것이었다. '왜 하필 밤에 오라고 했을까?' 남궁궁은 십 층의 전각을 바라보았다. 풍운맹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천중각은 은연중 사람을 압도하 는 분위기였다. 천중각의 문은 동문(銅門)이었다. 그는 동문의 견고함과 육중함에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상한 것은 아무도 맞이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동안 기다린 그는 할 수없이 동문을 밀었다.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동문은 활짝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니 거대한 대전이었다. 남궁궁은 대전 안을 둘러보다 흠칫했다. 대전 안쪽에 이 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는데 그곳에 회의인 열명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모두 칠 척이 넘어 보였는데 괴이한 것은 한결같이 눈자위가 허연 것이 장님임을 알 수 있었 다. 그들은 계단 입구에 기러기 날개의 형상으로 바닥에 앉아 있었다. 남궁궁은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그들을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소생은 검공자 철비양이오. 맹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왔소이다." "......." 그러나 회의인들은 귀마저 먹었는지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남궁궁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이 길을 비켜주지 않는다면 머리를 뛰어넘는 수밖에 없었다. 남궁궁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풍운맹주는 오늘밤 날 이곳으로 오라고 했다. 그런데도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은 날 시험하려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의 입가에 한 가닥의 미소가 어렸다. '좋다. 그렇다면 시험에 응할 수밖에.' 그는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그럼, 실례하겠소이다." 남궁궁은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어갔다. 그러나 회의인들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심지 어 그들에서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가까이 갔을 때야 비로소 회의인들의 무릎에 도가 올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하시 라도 도를 뽑을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남궁궁은 기러기 진의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찌르는 듯한 살기가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회의인들이 도를 뽑아 내려칠 것 같은 위기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남궁궁은 태연히 걸어갔다. 이윽고 진의 한가운데에 들어섰다. 만일 회의인들이 합공한다면 결코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스슥! 회의인들의 손이 움직였다. 그들은 도의 손잡이를 잡았다. 팽팽한 살기가 고조되었다. 남궁궁은 긴장을 느꼈으나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하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그는 중앙의 두 회 의노인의 사이를 지나갔다. 그때였다. 회의인들의 손이 원위치로 돌아갔다. 도집을 잡았던 손을 뗀 것이었다. 남궁궁은 이 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두 개쯤 올랐을 때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보니 담력을 시험하는 것이었군.' 그는 궁천무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날 시험하고 있다. 좋다, 그렇다면.......'


그는 성큼성큼 이 층으로 올라섰다. 이 층도 일 층과 대동소이한 풍경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일 층보다 훨씬 어둡다는 것뿐이었다. 쿵! 쿵! 쿵! 문득 사방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창문이 일제히 떨어졌다. 그 바람에 대전 안은 칠흑 같은 어둠에 덮이고 말았다. 남궁궁은 흠칫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주위가 칠흑같이 캄캄해진 후였다. 그야말로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완전한 암흑이었다. '흥, 이번엔 또 어떤 관문일지 궁금하군.' 남궁궁은 계단이 있는 곳을 어림짐작으로 가늠하며 걸음을 옮겼다. 윙! 갑자기 예리한 파공성이 울렸다. '암기다!' 남궁궁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평소라면 아무리 어두워도 사물을 볼 수 있는 안력이 있었으나 어찌된 셈인지 지금은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연검을 뽑은 채 눈을 감았다. 차라리 눈을 감는 것이 유리할 것 같았다. '뒤다.' 그는 파공성으로 암기의 방향을 감지했다. 빙글 검을 뒤로 뻗었다. 쩡! "음!" 그는 신음을 발했다. 손바닥이 진동할 정도로 반탄력이 느껴졌다. 암기는 보통 암기가 아니었다. 일반 적으로 암기란 가볍게 제작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검끝에 감지된 느낌은 대단한 중병(重兵)이라는 것 을 느끼게 했다. '아마 비발이거나 철륜(鐵輪) 같은 암기일 것이다.' 위위잉! 이번에는 좌우에서 동시에 파공성이 울려왔다. 카앙... 캉......! 연검이 춤추듯 움직이고 어둠 속에서 불똥이 퉁겼다. 남궁궁은 불꽃이 퉁기는 순간 재빨리 주위를 살 펴보았다. 비로소 야안(夜眼)이 통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사방에는 은은한 검은 연기가 감돌고 있었던 것이다. 연기로 인해 시야가 완전히 차단된 것이었다. 슈슈슈슈슉! 이번에는 사방으로부터 무수한 암기가 날아왔다. 남궁궁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에게도 한계가 있었다. 칠흑 같은암흑 속에서 우박과 같은 암기공세를 막아낸 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중 한 개만 맞아도 치명상을 입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풍운만천(風雲滿天)!" 그는 풍운십삼세의 구명검식을 펼쳤다. 차차차창! 그의 검은 검광의 그물을 이루며 수백 개의 암기를 어지럽게 쳐냈다. 그러나 암기는 한 번에 날아오 는 것이 아니라 쉴새없이 날아왔다. 막아도 막아도 끝이 없었다. 이런 종류의 암기는 사람이 직접 날 리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기관장치에 의해 발사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암기의 숫자가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계속 날아올 것이다. "으음!" 남궁궁은 신음을 발했다. 이 상태라면 얼마 버틸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본신의 공력을 반 이상 감 추고 있는 상태였다. 만일 무공을 전부 드러낸다면 정체가 탄로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는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발로 바닥을 차고 신형을 날렸다. 계단이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막 바닥을 딛는 순간 발밑이 허전해졌다. "억!" 그가 밟은 바닥이 푹 꺼진 것이었다. 그는 아래로 추락했다. 그는 다급했다. '이대로 떨어지면 끝장이다.' 그는 재빨리 왼발로 오른쪽 발등을 찍으며 순간적으로 몸을 솟구쳤다. 일단 어느 정도 신형을 솟구친 후에는 장력을 뒤로 날리며 그 힘으로 앞으로 날아갔다. 그는 순식간에 계단을 날아 올라갔다. 계단 위에는 문이 있었다. 그는 문을 손바닥으로 쳤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 남궁궁은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문이 열리는 순간 강렬한 빛이 쏘아들어온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다가 갑자기 밝은 빛을 대하니 일시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눈을 뜬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올라온 삼 층은 실로 괴이한 풍경이었다. 사방의 벽은 물론 바닥과 천장에 이르기까지 온통 동 경(銅鏡)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로 인해 동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수십, 수백 개로 비추어지고 있었다. 남궁궁은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똑같은 자신의 분신들이 돌아다보는 광경은 가슴이 섬 뜩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어디서 비추는 것인지 눈부시게 밝은 빛이 반사되어 시선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 문득 그는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동경 속의 자신의 모습이 사라지면서 새로운 인영이 나타난 것이 다. 그 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흑의를 뒤집어쓴 채 검을 곧추세우고 있었다. "음." 남궁궁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발했다. 흑의인의 모습에서 무서운 살기가 느껴진 것이다. 흑의인이 곧추세운 검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베어 버릴 듯한 예기를 뿌리고 있었다. 번쩍! 검광이 일어났다. 수백 명의 흑의인이 그를 향해 검을 날렸다. 그야말로 섬광처럼 빨랐다. 남궁궁은 수백 개의 검이 일시에 자신을 찌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연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어느 것이 진검(眞劍)인지 가려내기가 불가능했다. 그는 어림짐작으로 수식을 취할 뿐이었다. 선뜻한 기운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옆구리 옷자락이 길게 갈라졌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크크크......!" 흑의인의 괴소가 사방에서 울렸다. 다시 수백 개의 검이 찔러 들어왔다. 슈... 슈숙! 흑의인의 검법은 오직 살인만을 위한 검식이었다. '이 자의 검은 모두가 허(虛)다. 실(實)은 오직 하나뿐이다.' 남궁궁은 눈을 감았다. 진검을 가려내기 위해서는 청력에 의지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 러나 검이 날아오는 파공성은 여전히 사방에서 들렸다. 실로 괴이한 일이었다. '이해할 수 없구나. 파공성도 사방에서 동시에 울리다니.' 난생 처음으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그는 동요하는 마음을 부동심(不 動心)으로 가라앉혔다. 검을 쥔 채 서서히 회전했다. 슈슈슉! 검기가 전신을 압박해 왔다. 남궁궁은 극도로 긴장하며 검의 예기를 찾았다. '이것이다!' 마침내 그는 배심혈(背心穴)로 파고드는 한 가닥 서늘한 검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천하절인(天下絶人)!" 그는 풍운십삼세의 마지막 초식을 전개했다. 번쩍! "크윽......!" 참담한 비명이 터졌다. 남궁궁은 눈을 떴다. 동경 속에 있는 수백명의 흑의인이 한 손으로 어깨를 감 싸며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성공이구나.' 그는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그그긍!


괴이한 음향과 함께 사방의 동경이 모두 사라졌다. 빙글 회전하며 평범한 벽면으로 돌아간 것이다. 비로소 사 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눈에 띄었다. 그는 연검을 거둔 후 계단을 올라갔다. '이번에 또 어떤 관문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군.' 계단 위의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뜻밖의 광경이 나타났다. 대전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바닥에 여러 개의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것은 장기판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무로 된 패가 곳곳에 놓여 있었다. 그는 이미 대전 안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말하 자면 거대한 장기판 속으로 들어간 셈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계단 바로 아래 초왕(楚王)이 있었다. '음. 무슨 의도로 장기판을 만들어 두었을까?' 그는 장기판의 형국을 살펴보았다. 한눈에 그가 열세에 놓여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장기의 말이 되어 초왕을 잡은 후 사 층을 통과하라는 뜻인것 같구나.'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는 사 층의 관문에 흥미를 느꼈다. 도검을 사용하여 관문을 통과하는 것보다 이런 방식이 더욱 재 미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장기판의 형세를 신중히 살펴 보았다. 그가 있는 위치는 지극히 불리해 보였다. 초(楚)의 차마상(車馬象)이 그를 모두 노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섯 개의 졸(卒)도 호시탐탐 그를 노리고 있었다. "음." 남궁궁은 신음을 흘렸다. 그는 빠져나갈 방도를 찾아야 했다. 아니, 장기판은 처음부터 불리하게 짜여 져 있어 수비만으로는 형세를 뒤집기가 불가능했다. 마침내 그는 수를 찾았다. 쿵! 문득 졸 하나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 남궁궁은 눈을 번쩍였다. 이제 보니 나무 패들은 정교한 기관장치에 의해 움직이도록 되어 있었다. 그 는 졸을 노려보았다. 그는 마(馬)다. 대각선으로 움직이면 당장 졸 하나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럴 수는 없었다. 상대의 마(馬)가 즉각 그를 잡게 되기 때문이었다. 남궁궁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잠시 후 그는 신형을 날렸다. 그가 내려선 곳은 좌측 귀퉁이 쪽이었다. 쿵! 이번에는 상(象)이 그의 길을 막았다. 상 역시 잡을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러나 상대방의 포(包)가 대기 하고 있었다. 남궁궁은 문득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이러고 보니 옛일이 생각나는군.' 그는 과거 무애곡에서 틈만 나면 천치옹과 장기를 두던 기억이 떠올랐다. 남궁궁은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띠며 손을 뻗었다. 아군의 상이 움직였다. 허공섭물로 상을 이동시킨 것이었다. 상은 상대의 졸을 취했다. 쿵! 그러자 즉각 상대방의 마가 상을 잡았다. 그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남궁궁은 위치를 이동했다. 적진으로 깊이 파고든 것이다. 적의 마가 그를 노리며 위치를 이동했다. 남궁궁은 아군의 차로 마를 잡았다. 그러자 다시 적의 차가 즉시 아군의 차를 잡았다. 쿵! 쿵! 장기판의 말들이 어지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갈수록 빨라졌다. 나중에는 휙휙! 어지럽 게 장기판의 선을 날아가고 있었다. 남궁궁은 속기에 강했다. 과거 천치옹과 대국할 때도 속기를 두어 종종 이기곤 했었다. 때문에 그는 상대방이 미처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숨가쁘게 말들을 이동시켰다. 어느새 남궁궁은 적진 깊숙이 파고들었다. 장기판의 형세는 처음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적아(敵我)가 온통 어지럽게 얽혀진 상태였다. 남궁 궁은 마침내 초왕 앞에 이르렀다. 그는 오성의 공력으로 장력을 날렸다. 딱! 초왕은 정확히 두 쪽이 나 버렸다. "하하하하!" 남궁궁은 대소를 터뜨리며 오 층으로 날아 올라갔다. 그가 계단을 뛰어 오른 직후, 어디선가 탄식이 들렸다. "아! 평생 한 번도 진 적이 없던 노부 불패기옹(不敗棋翁)이 패배할 줄이야......!" 불패기옹. 그는 평생 바둑과 장기로 이름을 떨친 기인이었다. 그의 이름을 아는 자는 드물었다. 그것은 이미 수 십 년 전에 강호에서 모습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이름처럼 그는 바둑과 장기의 승부에 있어서 한 번 도 패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의 불패기록이 깨져버린 것이다. ② 남궁궁은 오 층에 올라 대전 안으로 둘러보고 있었다. 이제 그는 어떤 상황이 닥쳐도 놀라지 않게 되었다. 쓰쓰쓰... 휘리릭......! 대전 안에는 괴이한 음향이 울리고 있었다. 바닥은 물론, 사면 벽과 천장에 무수한


벌레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기어다니는 독사, 전갈, 지네, 독개미는 물론이요, 날아다니는 독나방과 독문(毒蚊:독모기), 혈 승(血蠅:파리)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독충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음!' 남궁궁은 현기증을 느꼈다. 대전 안에는 독기(毒氣)가 가득 차 있었다. 어느새 그는 독기를 흡입한 것 이었다. '이번에는 독관이군.' 그는 호흡을 멈추고 품 속에서 황색 단약을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그것은 모용운리에게 얻은 구전 속명단(九傳速命丹)이었다. 본래 그는 태아 시절부터 어머니가 무수한 영약을 복용한 덕분에 선천적으로 독성에 대항하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대전 안에 가득 퍼져 있는 독기가 워낙 강했으므로 구전속명단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 었다. 구전속명단을 입에 물자 이내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독충들이 우글거 리는 대전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쉬익! 쉭쉭! 독충들이 달려들었다. 그는 발끝으로 독충들을 밀어내며 태연히 걸어갔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태연한 모습이었으나 그의 전신은 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구전속명단을 입에 물고도 호흡을 완전히 차 단했으며 날아드는 독충들을 내공으로 막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는 오 층의 관문을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육 층으로 올라섰다. 육 층의 문을 미는 순간. "......!"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육 층의 대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은 정말 상상밖이었던 것이었다. 넓은 대전 바닥에는 발등이 파묻힐 정도로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었으며 천장에는 주옥으로 장식된 궁등이 휘황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창문 쪽에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비단 휘장이 드 리워져 있었다. 대전 안에는 종류를 알 수 없는 그윽한 향기가 가득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선계의 상제(上帝)가 사는 대전에라도 들어선 듯한 느낌이었다. 남궁궁은 잠시 사방을 둘러보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호호호......!" 문득 심금을 뒤흔드는 여인의 교소가 울렸다. 실로 듣는 것 만으로도 색정이 유발될 정도로 고혹적인


음성이었다. 남궁궁은 걸음을 멈췄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여인의 교소를 듣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 다. '혹시?' 아니나 다를까? 그는 콧속으로 흘러드는 기향(奇香)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급히 호흡을 차단 시켰으나 가슴이 섬뜩했다. 벌써 은연중 숨이 가빠진 것이다. '이 향은... 전갈의 정액을 가루로 만들어 태운 환락연(歡樂煙)이로구나!' 남궁궁은 과거 모용운리와 지내는 동안 독과 미혼약에 관해 배운 바가 있었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대전 안을 감도는 환락연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이었다. '이번엔 색관(色關)이란 말인가?' 그는 마음을 다져먹었다. 사르륵! 천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돌린 그는 눈썹을 꿈틀했다. 대전 한쪽의 휘장이 젖혀지며 일단의 여인들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여덟 명으로 하나 같이 속살이 훤히 보이는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나삼 차림이었다. 게다가 모두가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들이었다. 여인들은 교족(嬌足)을 사뿐사뿐 놓으 며 그에게 다가왔다. "......." 남궁궁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피하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지는 것이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여인들을 쏘아보았다. 투명한 나삼 속으로 터질 듯이 풍만한 유방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흔들리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한 손으로 움켜쥘 수 있을 정도로 가느다란 허리를 좌우로 흔들때마다 둔부가 묘하게 흔들렸다. 늘씬 한 허벅지 안쪽으로는 은은히 숲이 우거진 여인의 비부(秘部)가 비쳐 보이곤 했다. '으음.' 남궁궁은 내심 신음을 발했다. 아무리 마음을 안정시키려 해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는 환락산을 어느 정도 들이마신 상태였다. 숨이 가빠지면서 피가 빠르게 흘렀다. 그는 눈에 힘을 주며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호호호! 공자님 왜 그리 쌀쌀한가요?" "흐응, 우리 즐겁게 함께 놀아요." 나삼의 미녀들은 허리를 흔들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야말로 색기가 뚝뚝 흐르는 모습이었다. "물러들가라!" 남궁궁은 냉엄하게 외쳤다. 그러나 여인들은 막무가내였다. "호호호......!"


"공자님, 그러지 말고 소녀들의 환락천선무(歡樂天仙舞)를 보아주세요." 문득 여인들은 교태로운 웃음을 흘리며 춤추기 시작했다. 휘르르르......! 가냘픈 몸을 빙글 돌리는 순간 나삼이 위로 올라가며 눈부시게 흰 하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허벅지 하며 보아서는 아니 될 여인의 은밀한 부위까지도 언뜻언뜻 드러나곤 했다. 남궁궁은 현기증을 느꼈다. "썩 사라지지 못하겠느냐? 이 요물들! 너희들이 아무리 그래도 헛일이다." 그는 대갈일성했다. "흐응! 아이......." 여인들은 콧소리가 섞인 신음을 발하며 그만두기는커녕 더욱 자극적인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춤은 보통 춤이 아니었다. 그것은 은연중 이성을 마비시키고 욕정을 유발케 하는 일종의 섭혼무(攝魂 舞)였다. 춤동작은 갈수록 진해졌다. 팔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맨살이 드러나는 것은 물론이요, 허리를 한껏 뒤 로 꺾을 때는 터질 듯이 부풀어오른 젖가슴이 금방이라도 비어져 나올 듯했다. 또한 이인일조로 남녀가 방사를 치르는 각종 자세를 연출하니 보기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남궁궁은 안색을 굳혔다. 그는 아무리 만류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우뚝 선 채 공력을 가다듬었다. 그는 공문의 비전심법인 창허무궁심법(創虛無窮心法)을 운공했다. 그러자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으며 여인들의 군무가 더 이상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게 되었다. 그는 때가 됐다고 느꼈다. "하하하하하!" 갑자기 그의 입에서 낭랑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아악!" 갑자기 맨 앞에서 춤추던 여인이 손으로 고막을 감싸쥐며 비명을 질렀다. 남궁궁의 웃음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자 여인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입과 코에서는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 었다. 잠시 후, 여인들은 모두 바닥에 드러누웠다. 남궁궁이 펼친 것은 불문의 사자후(獅子吼)와 같은 것으로 여인들의 마성을 한순간에 깨뜨려 버린 것 이었다. "......." 그는 냉랭한 시선으로 여인들을 둘러본 후 계단으로 올라갔다. 칠 층. 문을 열자 또 다른 풍경이 그를 맞이했다.


그는 다소 실망을 금치 못했다. 여섯 개의 관문을 거친 그는 비록 그때마다 힘겹게 통과하긴 했어도 다양한 경험을 한 셈이었다. 그는 육 관을 통과하고 칠 관에 이르러 과연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사뭇 궁금했다. '칠 관도 색관이란 말인가?' 대전은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사방에 붉은색의 휘장이 드리워져 있기 때문인 듯했다. 그런데 대전 한가운데 상아로 된 침상이 놓여 있었다. 그 침상은 황후(皇后)가 사용할 듯 호화스러웠 고 크기도 대단히 컸다. 놀라운 것은 침상 위에 누워 있는 미녀였다. 이십여 세 가량 되었을까? 반라(半裸)의 장발미녀였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긴 흑발이 전신을 휘감고 있는 미녀는 흑색의 비단 천으로 젖가슴과 하반신만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채 침상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우물(尤物). 인세에 드문 절세미녀를 이렇게 부른다. 그러나 실제 우물이란 칭호를 받을 만한 여인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그런데 침상 위의 장발미녀는 우물이란 말로도 표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녀의 피부는 슬쩍 손가락을 대기만 해도 묻어날 듯이 희고 고왔다. 게다가 기다란 장발은 눈부신 피부와 선명한 대조를 이룬 채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 남궁궁은 그만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장발미녀는 지금까지 그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종 류의 여인이었다. 여인의 눈. 커다란 눈은 기이하게도 벽록색을 띠고 있었다. 푸른 호수를 보는 듯한 눈은 그녀가 이국여인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중원의 여인들은 대부분 아담한 체격을 지니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장발미녀는 보통 여인보다 훨씬 키가 컸을뿐더러 몸매는 늘씬하면서도 굴곡이 완연했다. 우선 한 장의 검은 비단천으로 가볍게 가리고 있는 젖가슴만 해도 그렇다. 비단천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듯이 풍만했던 것이다. 허리는 이상할 정도로 가늘었으며 그 아래 엉덩이는 놀랄 만큼 발달되어 있었다. 쭉 뻗어내린 다리는 마치 대리석을 보는 듯 미끈했다. "호호! 과연 대단하군요? 심관(心關), 암관(暗關), 살관(殺關), 지관(智關), 독관(毒關), 환관(幻關)을 모 두 파해하고 색관까지 이르다니요."


미녀의 음성은 꿀보다 달콤한 느낌을 주었다. 다만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남궁궁은 가슴이 울렁거 리는 것을 느꼈다. '으음. 대단한 음공이다.' 그는 경각심을 느끼며 우내오천의 한 명인 음양환사가 남긴 음양마유공(陰陽魔幽功)을 일으켰다. 그러 자 그의 마음이 둘로 나누어졌다. 한쪽의 마음은 장발미녀가 발산하는 유혹에 기울어지더라도 반쪽의 마음은 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일종의 양심공(兩心功)을 전개한 것이다. 남궁궁의 눈에 이상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장발미녀를 바라보았다. "호호! 색관은 소녀를 이겨야만 통과할 수 있답니다. 공자께서는 한 번 시험해 보시겠어요?" 장발미녀는 누운 채 섬섬옥수를 들어 그를 불렀다. "......." 남궁궁은 홀린 듯이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의 눈은 미녀의 젖가슴에 고정된 채 활활 타오르고 있 었다. "어서 가까이... 와요." 남궁궁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침상가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음성은 일종의 주술(呪術)처럼 그의 한쪽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출렁......! 침상이 어찌나 푹신한지 앉자마자 파도처럼 흔들렸다. "공자는 얌전도 하시군요. 어머! 이 손은 여인보다 더 부드럽고 곱군요!" 장발미녀는 그의 왼손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 순간 남궁궁은 머리가 텅 비는 듯한 나른한 느낌이 들었다. "전 믿을 수가 없어요. 이 부드러운 손으로 풍운제일령주의 자리를 거머쥐었다니요." 장발미녀는 달콤한 음성으로 종알거리며 그의 왼손을 펼치려 했다. 남궁궁의 왼손은 습관처럼 주먹이 쥐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흠칫했다. 무의중에 경각심을 느낀 것이었다. "아이, 주먹 좀 펴 보세요. 네?" 장발미녀는 슬며시 남궁궁의 주먹을 끌어다 자신의 젖가슴으로 가져갔다. 젖가슴에 닿은 순간 남궁궁 은 뭉클한 감촉에 혼백이 달아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주먹쥔 손에 힘이 빠졌다. "어머?" 장발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남궁궁의 손바닥 한가운데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손금은 왕(王)자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말 신기하군요?" 장발미녀는 넋을 잃고 손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요정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남궁궁은 홀린 듯이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장발미녀는 그의 손을 놓아주고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어때요, 공자님. 제 머리결이 탐스럽지 않은가요?" 그녀는 남궁궁의 손을 끌어다 가슴 앞으로 흘러내린 자신의 머리칼을 만지게 했다. 남궁궁의 손이 떨 림을 보였다. 머리칼을 만진순간 마치 전류가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으응, 기분이 좋아요. 당신이 머리칼을 만져 주니." 장발미녀는 눈을 사르르 감으며 몸을 바로 눕혔다. 그녀의 흑발이 가슴에서 옆으로 흘러내렸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져나갈 듯한 가슴이 남궁궁의 눈앞에 더욱 다가들 듯했다. 그는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렸다. 흑발은 아랫배를 지난 미녀의 대리석같이 뽀얀 허벅지 사이로 숨어들고 있었다. 남궁궁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그는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은 부드러운 여인의 복부를 쓰다 듬더니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기름진 평원에 숨어 있는 옹달샘에 잠시 머물다가 머리카락이 숨어 버린 여인의 다리 사이로 손을 움 직인 순간. "으음." 여인은 달뜬 신음을 발하며 슬며시 허벅지를 벌렸다. 남궁궁은 이제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손은 서슴 없이 여인의 허벅지 사이로 들어갔다. 그의 손도 뜨거웠으나 여인의 몸은 더욱 뜨거웠다. "좋아요, 으음......." 여인은 허리를 비틀며 붉을 입술을 벌렸다. 남궁궁의 손은 매끄러운 허벅지를 쓰다듬다 뒤로 돌아가 동그란 둔부를 어루만졌다. "음......!" 이번에는 남궁궁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여인의 몸이 물고기처럼 파 드득 거렸다. 놀랄 정도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남궁궁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호흡은 풀무질을 하듯 거칠어 졌고 온몸에 열기가 후 끈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여인이 손을 뻗더니 목을 휘어감았다. 그저 가볍게 끌어당겼으나 남궁궁은 힘없이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넘어졌다. 그로 인해 두 사 람의 몸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밀착되게 되었다. 두 사람의 몸이 침상 위에서 한 바퀴 굴렀다. 미녀의 몸이 아래서 위로 올랐다가 다시 내려오는 순간 어찌된 셈인지 가슴을 가리고 있던 검은 비단천이 풀어졌다. 남궁궁의 코앞에 풍요로운 젖가슴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었다. 그는 눈자위를 경련하며 젖가슴을 바라 보다 얼굴을 묻었다. 얼굴이 완전히 파묻힐 정도로 풍만한 가슴이었다. 여인은 그의 머리를 세차게 껴 안았다.


남궁궁의 입술이 여인의 가슴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렴풋이 여인의 가슴이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꼈으며 두 개의 유실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이성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미친 듯이 여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여인은 달콤한 신음을 발하며 두 다리로 뱀처럼 그의 하반신을 휘감았다. 이제 남궁궁은 여인의 육체라는 감옥(獄)에 갇힌 셈이 되고 말았다. 그의 피는 펄펄 끓어올랐으며 온 몸은 이글거리는 화로 속에 떨어진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신없이 여인의 온몸을 애무했다. 어느 덧 그의 옷도 반쯤 벗겨지고 있었 다. 살과 살이 부딪치고 비벼지는 대뇌가 마비될 듯한 쾌감에 시간의 흐름조차 정지된 듯했다. 이때였다. 스르르! 문득 미녀의 흑발이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허공에 일어서더니 남궁궁의 허리를 휘감았다. 워낙 부드 러운 머리칼이라 남궁궁은 미처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목마른 자가 샘을 찾은 듯 여인의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미친 듯이 탐하고 있을 뿐이었 다. 장발미녀의 눈이 반짝 뜨여졌다. 그녀의 녹색의 눈에 기괴한 빛이 일어났다. 슬며시 그녀의 손이 베개 밑으로 파고들었다. 잠시 후 손가락 끝에 무엇인가가 잡혀 나왔다. 그것은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은 투명한 실이었다. 일명 천잠사(天蠶絲)가 불리는 특수한 실이었다. 남궁궁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의 가슴에서 아래쪽으로 얼굴을 이동하고 있었다. 여인은 입술이 벌 어졌다. "아아......!" 그녀는 사지를 꿈틀거리며 신음을 발했다. 그러면서도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천잠사를 조심스 럽게 남궁궁의 목에 감고 있었다. 마침내 남궁궁의 목은 천잠사에 의해 완전히 감겨 버렸다. "깔깔깔......!" 느닷없는 웃음소리와 함께 여인은 천잠사를 당겼다. "으윽!" 남궁궁은 비명을 발하며 눈을 부릅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실이 그의 목을 끊을 듯이 조이 고 있었다. "으으!" 남궁궁의 눈이 충혈된 채 툭 불거져 나왔다. "호호! 너도 별수 없는 사내 놈이었어." 장발미녀는 사지로 그의 몸을 휘감은 채 천잠사를 더욱 세차게 당겼다. 바로


그때였다. "후후! 요화(妖花), 그렇다면 너는 무엇이 다르지? 너야말로 한낱 사내를 홀리는 탕부에 지나지 않느 냐?" 어디선가 경멸에 찬 조소가 들렸다. "......!" 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음성이 들린 곳은 바로 침상 머리맡이었다. 그녀의 동공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이 열렸다. "아악......!" 마치 귀신이라도 본 양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침상 머리맡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사나이! 놀랍게도 그는 남궁궁이 아니던가? '그럼......?' 그녀는 황급히 천잠사로 목을 조르고 있던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악!" 그녀는 다시 비명을 질렀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방금까지 그녀를 애무하던 사내 는 어디로 가고, 지금 그녀가 천잠사로 조이고 있는 것은 베개가 아닌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남궁궁은 처음부터 음양마유공을 시전하여 마음을 둘로 나누고 있었다. 음양환사는 환술(幻術)에 능한 위인이었다. 그는 음양마유공 외에도 각종 환술을 창안한 인물이었다. 남궁궁은 그의 환술을 이 용해 장발미녀로 하여금 정사를 벌이고 있다는 착각을 들게 한 것이었다. "이... 이럴 수가......!" 장발미녀는 한순간에 전신이 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그녀는 말할 수 없는 수치감에 빠졌다. 그녀는 자신이 지극히 보잘 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며 그만 머리가 혼란해지고 말았다. "으음......." 그녀는 신음을 발하며 혼절하고 말았다. 남궁궁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그는 심신이 안정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발미녀의 고 혹적인 나신은 여전히 마음을 흔들었다. "정말 대단한 우물이야......." 그는 한숨을 쉰 후 금침을 끌어 장발미녀의 나신을 덮어 주었다. 잠시 후 그는 팔 층으로 향하는 계 단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③ "......!" 남궁궁은 팔 층 대전에 들어선 순간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끼며 온몸이 굳어졌다.


그가 당혹해하는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철문이 닫쳤다. 그는 안색을 굳히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전 안은 사면 벽이 모두 철벽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그는 벽면을 어루만져 보았다. 손이 닿는 순 간 마치 얼음장을 만진 듯이 싸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구 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다른 곳과 달리 협소한 편이었다. 그 계단 입구에 백의를 입은 괴노인이 앉 아 있는 것이 보였다. 괴노인은 서리가 덮인 듯이 하얗게 센 머리칼과 눈썹을 지니고 있었다. 얼굴은 마치 얼음조각을 보는 듯 무표정했으며 눈빛도 냉막하기만 했다. "꼬마야, 네가 이번에 풍운제일령주가 된 아이냐?" 괴노인의 입술 사이로 냉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남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당신은 누구요?" "나? 너는 빙마(氷魔)란 이름을 들어보았느냐?" "......!" 남궁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빙마는 신주구십구마 중 서열 칠 위에 해당하는 마두 중의 마두였다. 그는 중원 태생이 아니었다. 멀 리 북해(北海)에서 태어난 그는 사시사철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북해에서 빙백신공(氷魄神功)을 연마 했다. 그의 빙백신공은 한때 무림을 꽁꽁 얼어붙게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래 전 홀연히 강호에서 사라 진 후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남궁궁은 놀라움을 가라앉힌 후 물었다. "당신이 팔관의 관주(關主)요?" "그렇다, 꼬마야. 빙관(氷關)를 통과하려면 날 지나가야 한다. 나만 넘어가면 마지막 관문인 화관(火 關)에 도전할 수가 있지. 하지만 그전에 얼음조각이 돼 버릴 테니 마지막으로 기도나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궁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려. 하지만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하지 않겠소? 빙관을 통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오?" 빙마는 태연하기만 한 남궁궁의 모습에 당혹을 느낀 듯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그야 간단하지. 그저 노부의 삼 장을 받아내면 된다. 단 노부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면 안 된다." "......!" 남궁궁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빙마의 방법은 실로 억지에 가까운 것이었다. 빙마가 누구인가? 구십구 명의 마두들 중에서도 일곱번째 서열에 올라 있는 그의 장력을 저항없이 그


것도 세 차례나 받아내야 한다니. 그야말로 목을 늘어뜨리고 죽음을 맞이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요 구였다. "왜? 자신없느냐? 그럼 이 길로 내려가면 된다." 빙마는 흘흘 웃으며 조소를 흘렸다. 남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그럼 시작하시오." 빙마의 안색이 변했다. 설마하니 자신이 내세운 조건을 승낙할 줄은 몰랐다는 듯 눈마저 크게 뜨고 있었다. "제법 간이 큰 놈이구나. 좋다, 일 장에 널 얼음조각으로 만들어주마." 스스스! 빙마는 서서히 손을 뻗었다. 그의 장심에서 뿌연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남궁궁의 전신을 감쌌다. 잠시 후 남궁궁의 전신은 마치 무서리가 내린 듯 허옇게 뒤덮여 버렸다. 남궁궁은 온몸이 서리로 뒤덮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떠냐? 견딜 만하냐?" 남궁궁은 입술을 움직였다. "후후! 그런대로." 쩌적! 그가 입술을 움직이자 얼굴에 얇게 덮여 있던 얼음이 부서져 내렸다. 빙마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그러나 안색을 굳히며 이번에는 쌍장을 뻗었다. "좋다. 두번째 장을 받아보아라." 윙! 이번에는 가공할 음기가 파공성과 함께 발출되었다. 남궁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장력을 받았다. 그의 전신에 허연 김이 일어났다. 이어 그의 몸에는 한 뼘에 달하는 얼음이 덮이는 것이 아닌가?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는 얼음기둥 속에 갇힌 모습이 되고 말았다. "흐흐, 이제 네놈은......." 빙마는 득의양양한 웃음을 흘리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얼음 기둥 속에 갇혀 있는 남궁궁이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으으, 이런 괴물 같은 놈!" 그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휘류류륭! 그의 머리카락이 빳빳이 곤두섰다. 그는 전력을 다해 빙백신공을 전개했다. 대전 안은 삽시에 빙천설 지로 화한 듯 냉기가 감돌았고, 허연 빙백지기가 남궁궁의 전신을 뒤덮었다. 쩡... 쩡. 하는 기묘한 음향이 일어났다. 빙마는 남궁궁을 노려보았다. 남궁궁의 몸에는 무려 일 장 두께의 얼음이 뒤덮여 있었다. "흐흐! 이제 네놈은 끝장......."


그의 입이 다시 얼어붙었다. 그 두꺼운 얼음 속에서도 남궁궁은 씨익 웃음을 지어 보인 것이다. 그가 경악하는 순간. 펑! 하는 폭음과 함께 남궁궁을 가두고 있던 얼음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사방으로 날아갔다. "헉!" 빙마는 얼음조각을 얻어맞고는 뒤로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하하하! 양보해 줘서 고맙소이다." 남궁궁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구 층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훌훌 날아 올 라갔다. 구 층 입구는 철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역시 문은 약간 힘을 주자 저항없이 열렸다. "음!" 대전 안으로 들어선 순간 남궁궁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발했다. 빙마의 말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 었지만 대전 안에는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그것도 보통 열기가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타들어갈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대전 안을 감돌고 있었다. 그는 공력을 일으켜 피부를 보호했다. 그러자 뜨거운 느낌이 일시에 사라졌다. 그는 무애곡의 천빙동(天氷洞)에서 어릴 적부터 만빙담과 지극열화소(地極熱火沼)를 오가며 수련한 몸 이었다. 따라서 한열(寒熱)을 견디는 힘이 범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우내사천의 원정내단(元精內丹)을 복용한 후로는 수화불침지체가 되었으므로 웬만한 열기는 아 무런 문제도 안 되었다. 남궁궁은 호신강기를 일으킨 후 대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역시 뒤에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대전 한가운데. 그곳에는 거대한 솥이 놓여 있었는데 쇳물이 펄펄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괴이한 것은 쇳물이 끓 는 솥 안에 누군가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 남궁궁은 그를 바라보았다. 팔관을 거치는 동안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게 된 그는 괴인을 관찰했다. 괴인은 벌거벗고 있었다. 물론 옷이 지탱할 리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의 온몸에는 붉은 털이 부숭부숭 자라나 있었다. 머리칼도, 수염도, 눈썹까지도 온통 붉은색이었다. 괴인은 그와 눈길이 마주치자 껄껄거리며 말했다. "헛헛! 꼬마야, 노부는 화마(火魔)라고 한다. 이리 와 함께 목욕하지 않겠느냐?" 남궁궁은 흠칫했다. 화마라면 그의 독특한 극양신공(極陽神功)으로 인해 신주구십구마의 서열 육 위에 올라 있는 전대의


마두였다.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기라성 같은 분을 알현하게 되어 영광이오. 귀하가 화관의 관주겠구려?" 화르르륵! 솥에서 끓어오르는 쇳물이 부글거리며 화염을 토해냈다. 그 열기는 대전을 온통 녹일 듯했다. "껄껄! 물론이다. 이 화관의 규칙은 간단하다. 노부와 함께 솥에서 목욕을 할 수만 있다면 통과로 인 정받게 된다." 남궁궁은 침음했다. 어찌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 펄펄 끓는 쇳물 속에 들어가 목욕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들어가는 즉시 온몸이 녹아 버리고 말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남궁궁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마침 잘 되었소. 그렇지 않아도 목욕할 때가 되었는데 말이오." 그는 히죽 웃으며 서슴없이 솥 속으로 들어갔다. "......!" 화마는 눈을 부릅떴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남궁궁을 바라보았다. 남궁궁은 태연히 끓는 쇳물 속에 몸을 담궜다. 화르르륵! 그가 들어오자 쇳물이 넘치며 화염이 치솟았다. 그러나 이글거리는 화염 속에서도 남궁궁은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그는 목까지 담근 채 빙그레 웃고 있었다. "어... 정말 시원하군." 그는 정말 시원하다는 듯 눈마저 지그시 감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펄펄 끓는 쇳물로 손과 얼굴을 씻 는 것이 아닌가? "네... 네놈은......?" 화마는 아연실색했다. 사실 천하를 통틀어 쇳물로 목욕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밖에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새파란 청년이 그와 똑같은 능력을 보이고 있으니 눈을 의심할 수 밖 에 없었다. 이때였다. 치지직! 남궁궁의 머리 위에서 흰 김이 피어올랐다. 이어 자욱한 수증기가 주위를 뒤덮었다. 화마는 경악을 금 치 못했다. 펄펄 끓던 쇳물이 급격히 식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쯧쯧! 물이 식어 버렸소. 이래서야 어디 목욕인들 제대로 할 수 있겠소?" 남궁궁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솥 밖으로 몸을 솟구쳤다. "어억?" 문득 화마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화마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어느새 쇳물이 식어 굳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그의 몸은 무쇠 속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이럴 수가......!" 화마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고 말았다. "하하하! 목욕 잘 했소이다." 남궁궁은 호탕한 웃음을 남기며 계단 위로 성큼성큼 걸어 풍운맹주가 설치한 구관을 모두 통과한 것이다.

올라갔다. 마침내 그는

■ 왕도 2 권 제 17 장 뜻밖의 반륜(反輪) ━━━━━━━━━━━━━━━━━━━━━━━━━━━━━━━━━━━ ① 십 층에 오르자 지금까지와는 달리 평범해 보이는 목문(木門)이 나타났다. 남궁궁은 다소 의외란 느낌이 들었다. '황금문이라도 기다릴 줄 알았는데.' 목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몸을 바쳐 인의(仁義)를 이루노라!> 문에 새겨진 서체는 가히 용비봉무(龍飛鳳舞)의 미려한 서체였다. 그밖에 아무런 장식도 없는 평범한 문이었다. 남궁궁은 불현듯 경건해지는 것을 느꼈다. '몸을 바쳐 인의를 이룬다? 이것이 진심이라면 실로 존경할 만한 일이다.' 그는 잠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천중각의 최상층은 넓은 정실이었다. 위층으로 오를수록 면적이 좁아졌기 때문에 넓이도 적당했다. 정실의 바닥은 단풍나무가 정교하게 짜여져 있었고, 창문에는 담백한 색의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방 안의 집기 또한 송목으로 만든 검박한 것들이었다. 비록 화려하진 않았으나 은은한 기품이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정실 중앙에는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 유삼 차림의 중년문사가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남궁궁은 그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유삼문사야말로 자비천문선생 궁천무였던 것이다. "소생 철비양, 맹주님의 하교를 받고자 왔습니다." 궁천무는 빙그레 웃으며 그를 반겼다. "소협, 앉으시오." "......?" 남궁궁은 그의 정중한 음성에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궁천무는 부드러운 시선을 그를 바라보며 말했 다. "소협이 철비양이 아님은 이미 입증되었소. 그러니 의미없는 연극은 필요없을 것


같소이다." "......!" 남궁궁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허허! 철비양이라면 절대로 구대관문을 통과할 수 없었을 것이오. 더욱이 색관돌파는 불가능했을 것 이오." 남궁궁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반문했다. "정말 그렇게 단정하십니까?" "허허! 그밖에도 증거는 많소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은 아무리 완벽한 변장을 했다 해도 육친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이오." 남궁궁의 고개를 돌렸다. 내실로부터 한 사람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검천신군 철화룡 이었다. 검천신군의 표정은 어두워 보였다. 그는 궁천무에게 포권한 뒤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미 확인해 보았습니다. 자식 놈은 호북성의 한 관도 옆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 남궁궁은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궁천무은 현기 어린 눈으로 검천신군을 바라보며 물었다. "철노제의 심정은?" 검천신군의 얼굴에 괴로운 빛이 떠올랐다. "검문오영에게 들었습니다. 못난 자식 놈은 색에 눈이 어두워 음행을 범하다 죽었습니다. 애당초 자식 놈이 잘못한 일이니 어쩌겠습니까?" 검천신군의 눈에는 고통스런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남궁궁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자식을 잃은 아비의 심정이야 말해 뭣하겠소? 하지만 못난 자식놈이 자업자득(自業自得)의 결과로 죽 었으니 내 소협을 원망하진 않겠소이다." 남궁궁은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심히 불편하구나.' 궁천무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협, 철노제의 말이야말로 대인다운 태도외다. 철노제는 소협에게 원한을 갖지 않는다고 말하는구 려. 게다가 소협을 살펴본 결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성품이 광명정대(光明正大)할 뿐 아니라 무공 또한 절세적이니 우리는 새로운 인재를 발견한 기분이 오." "......." 남궁궁은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갑작스런 사태의 반전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 결과였던 것이다. "비록 소협의 내력은 알지 못하나 정인군자임에는 틀림없소이다. 게다가 높은 의기와


무공을 함께 지 니고 있으니 노부는 소협이 풍운제일령주로 본맹의 정예인 풍운천병대와 함께 무림을 이끌어 주기를 바라는 바이오." 남궁궁은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구나. 지금 이 사람은 넓은 흉금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봐도 이 사람이 위선자라고 는 믿어지지가 않는다. 내가 잘못 생각했단 말인가?' 궁천무의 흔쾌한 웃음이 들렸다. "허허헛! 소협도 당금 무림의 정세를 잘 아실 것이오. 변황사패의 무리들이 시시각각 무림을 위협하고 있소이다." 남궁궁은 비로소 고개를 들며 물었다. "맹주께서는 진정 소생에게 풍운천병대를 맡길 생각이십니까?" 궁천무는 너털웃음을 쳤다. "허허! 그야 물론이오. 노부는 소협을 믿소이다." "......." 남궁궁은 입을 다물었다. "부탁이오. 소협, 풍운제일령주가 되어 무림의 위난을 구해주시오." 궁천무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대 풍운맹주가 일개 청년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이렇게 되자 남궁궁은 더욱 혼란스럽기만 했다. '흑란화가 잘못 보았단 말인가? 만박귀부 도천수의 가족을 죽이고 납치해 간 자들은 풍운맹이 아닌 다른 자들이었단 말인가?' 사실 남궁궁이 풍운맹에 들어온 것은 풍운맹을 설계한 도천수의 행방을 알아내 음모를 밝히는 것이었 다. 그러나 그는 도천수의 그림자조차도 발견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풍운맹 내에 기관매복이 설치 된 흔적 또한 발견할 수가 없었다. "소협, 이것은 노부의 부탁이기 이전에 무림인으로서의 부탁이오." 궁천무의 묵직한 음성에 남궁궁은 마침내 마음이 움직이고 말았다. "좋습니다, 맹주님." 이어 그는 궁천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소생은 맹주님의 드높은 인품에 감복했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가식으로 대할 수가 없습니다." "......?" 궁천무는 물론 철화룡도 그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남궁궁은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가 쓱 문질렀 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변했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니......?" 궁천무는 그의 진면목을 본 순간 입을 벌리며 의혹의 탄성을 발했다. 그가 지나치게


놀라는 바람에 남궁궁은 도리어 의아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오. 아무것도......." 궁천무는 급히 신색을 회복하고는 부드럽게 물었다. "소협의 진면목이 너무도 준수하여 그렇소. 그럼 소협의 진명은 어찌 되시오?" "남궁궁이라 합니다." 궁천무의 안색이 다시 미미하게 변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하며물었다. "소협의 부친은 생존해 계시는지?" 그의 음성은 은연중 떨리고 있었다. 남궁궁도 그것을 느꼈으나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불행히도 소생은 부친의 생사를 알지 못합니다. 어릴 적부터 사부님의 손에서 자라왔을 뿐입니다." 궁천무의 얼굴에 기이한 빛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거 안 되었구려." 그는 혀를 차며 아쉬워했다. 잠시 후 그는 품 속에서 하나의 금색 삼각기를 꺼냈다. "자, 이것은 남궁소협의 것이니 받아주시오." 남궁궁은 깃발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풍운제일령주의 신물이오. 풍운제일령기라 하오." 남궁궁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내밀어 기를 받았다. 그것은 일 척밖에 안 되는 작은 기였는데 보 통 물건이 아닌 듯 깃대에는 보광이 빛났으며 기폭 또한 보통 천이 아닌 듯했다. '이 향(香)은......!' 깃발을 받는 순간 남궁궁은 가슴이 섬뜩했다. 콧속으로 은은한 향기가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음! 이럴 수가.'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얼른 깃발을 품 속에 갈무리했 다. 다행히도 궁천무는 그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이제 소협은 풍운맹의 절반을 거머쥔 것이나 다름없소이다." 궁천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했다. 남궁궁은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그저 감읍할 뿐입니다." 그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소생이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궁천무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엇이든지 말해 보시오. 노부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행하겠소." 남궁궁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낙화운 소저와의 혼사를 허락해 주시길 간청합니다." 궁천무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낙... 조카를 말이오?" 그는 매우 놀란 듯했다. 남궁궁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궁천무의 안색이 이상하게 변했다. 남궁궁은 그의 반응은 무시하고 재차 말했다. "그녀도 소생과 맺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궁천무는 한동안 눈빛이 변하더니 얼버무렸다. "그건... 노부가 윤허할 일이 아닌 것 같구려. 낙성신군에게 부탁해야 하지 않겠소?" 남궁궁은 빙긋 웃었다. "그렇다면 일단 맹주님께서는 윤허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궁천무의 얼굴에 어색한 표정이 떠올랐다. 남궁궁은 다시 포권했다. "그럼 소생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허허! 남궁소협을 얻게 되어 노부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외다." 풍운맹주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궁은 몸을 돌려 대전을 물러 나왔다. 그런데 그가 구 층으로 내려왔을 때, 풍경이 완전히 변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구 층 한가운데 있는 무쇠솥은 어디로 가고 깨끗한 대전으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화마의 모습도 사 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계단을 계속 내려왔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구대관문의 시설은 완전히 변해 있었던 것이다. 남궁궁은 천중각을 빠져나오면서 한숨을 쉬었다. '마치 한바탕 꿈이라도 꾼 것 같군.' 마침내 그는 밖으로 나왔다. 주위는 아직 한밤중이었다. '정말 뜻밖이다. 풍운제일령기에서 풍긴 향기는 분명 천일만리향이었다. 그렇다면 궁천무가 바로 살인 자가 아니겠는가? 사실이 그렇다면 정말 무서운 일이다.' 남궁궁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더욱이 천중각에는 만박귀부가 설치한 기관장치들이 가득하다. 이렇게 되면 궁천무가 음모의 주동자 임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인 셈이다. 아아! 실로 극악한 인간이 아닌가?' 남궁궁은 고개를 돌려 어둠 속에 우뚝 솟아 있는 천중각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흐르는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탑! 그것은 마치 악마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휴우... 세상은 믿을 것이 못 되는구나.' 그는 한숨을 내쉬며 신형을 날렸다. ② 북해 혈문, 동해 잔밀도, 남해 유황성, 묘강 만독문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변황사패로 불리는 그들은 지난 수백 년 동안 호시탐탐 중원 무림으로의 진출을 꾀해 왔다. 오랫동안 준비하고 있던 그들의 힘은 거세무비(巨勢無比), 그 자체였다. 사패는 중원의 사방으로 동시에 진출하 기 시작했고, 중원 무림인들은 그들을 막기 위해 총력을 다했으나 갑작스런 침입을 대항하기에는 역 부족이었다. 이에 풍운맹에서는 새로운 정예고수들을 파견했다. 풍운천병대(風雲天兵隊)가 그들이었다. 중원의 각 문파에서 고르고 고른 일천 명의 젊은 고수들로 이루어진 풍운천병대는


풍운제일령주인 남 궁궁이 이끌게 되었다. 또한 팔대세가 출신의 팔공자들이 그를 중심으로 뭉쳤다. 그들은 각기 네 방향으로 나뉘어 사패를 저 지하기 시작했다. 태행산(太行山). 산서(山西)에서 호북(湖北)으로 접어드는 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태행산은 수목이 울창하여 일단 안으로 들어서면 하늘을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계절은 여름으로 접어들어 폭염이 대지를 불사르고 있었다. 두두두두! 살인적인 더위를 헤치며 달려오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천여 명에 달하는 인마들이었는데 자욱한 황진을 일으키며 태행산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선두에는 핏빛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정체는 분명했다. 세인들이 혈문이라 부르 는 변황사패의 한 무리들이었다. 혈문의 정예고수들의 선두에는 핏빛 장포를 입은 여덟 명의 괴인들이 앞장서고 있었다. 팔대혈신(八大血神)이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지난 수 개월간 각 문파의 고수들을 도륙했다. 팔대혈신 개개인의 무공은 구파일방의 장문인 과 대등한 수준으로 알려져 있었다. 팔대혈신 뒤에는 삼십육 인이 거대한 교자를 떠메고 있었다. 교자위에는 역시 핏빛의 양탄자가 깔려 있었는데 그 위에 거대한 침상이 놓여 있었다. 놀라운 것은 침상 위에 누워 있는 거대한 괴인의 모습이었다. 그는 알몸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는데 머리칼은 물론 눈동자까지 붉은색이었다. 그는 비스듬히 누워 있었는데 열 명의 미녀들이 속살이 훤히 비쳐보이는 망사의만을 입은 채 팔다리 를 주무르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여인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들은 입술을 깨물며 원한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이도 모두가 틀렸다. 어떤 여인은 불과 십사오 세의 소녀들인가 하면, 어떤 여인은 삼십이 넘어 보 이기도 했다. 철썩! 괴인은 한 소녀의 둔부를 소리나게 때리며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핫! 너는 네 아비를 두 팔만 끊어내고 살려 준 대가로 종이 되지 않았느냐? 그러니 손해날 것은 없다." 괴인은 음흉한 미소를 흘리며 이번에는 다른 소녀의 망사의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는 소녀의 젖 가슴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며 괴소를 흘렸다. "흘흘! 너는 왜 눈물을 흘리느냐? 네 오라비도 내 덕에 목숨을 부지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이 만큼 의 대가는 치러야지. 이리 오너라." 괴인은 소녀의 머리채를 잡아 와락 끌어당겼다. "흐흑......!" 소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괴인의 가슴 위에 쓰러졌다. "핥아라, 핥아." "크으흑......!" 소녀는 피눈물을 뿌렸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내 털이 부숭숭한 괴인의 가슴을 혀로 핥기 시작했다. 그러나 괴인은 그것만으로는 욕망을 풀 수 없었는지 양 손을 각각 뻗어 다른 여 인들의 몸을 마구 주무르고 있었다. "크하하핫...! 본 혈우마제(血雨魔帝)는 곧 중원의 제왕이 될 것이니 너무 억울해하지 마라. 그때가 되 면 너희들도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될 것이다." 괴인. 그는 바로 혈문의 문주인 혈우마제였던 것이다. 행렬은 태행산 속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편, 태행산의 한 산봉우리에는 십여 명의 청년들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주 먹을 움켜쥔 채 분노에 몸을 떨고 있었다. "주... 죽일 놈들......!" 그들은 풍운천병대의 젊은 고수들이었다. 선두에는 백삼청년이 표표히 서 있었다. 그에게서는 은연중 위엄이 서려 있었다. 바로 남궁궁이었다. 비록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이었으나 그의 가슴은 뜨겁게 끓고 있었다. 그의 왼쪽에는 흑란화 구연령 이, 오른쪽에는 남장소녀 낙화운이 서 있었다. "영주! 저 놈들을 당장 쳐 죽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십여 명의 청년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간청했다. "......." 남궁궁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흑란화." "네." 구연령은 고개를 숙였다. "네 생각은 어떠냐?" 구연령의 눈에서 지혜로운 빛이 반짝였다. "오늘밤 저들은 이 부근에서 야숙할 거예요. 그 동안 승승장구했으므로 필시 경비를 소홀히 한 채 주 색의 향연을 벌일 것이 분명해요." 남궁궁은 침착하게 물었다. "그래서?"


"허를 찌르는 거예요. 오늘밤 기습을 하면 반드시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습니다." 남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전은?" 구연령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미 이백 명의 천병대를 다섯 방향으로 배치했어요. 오백 명이 넘는 북무림의 고수들도 일제히 동조 하기로 내정되어 있어요." 구연령은 확신에 찬 음성으로 덧붙였다. "이쪽은 오랫동안 참아 왔으므로 일단 공격명령이 떨어지면 그 힘은 가히 폭발적일 거예요." 남궁궁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갑게 말했다. "좋소. 오늘밤 혈문은 그 동안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오." 그는 아직도 무릎 꿇고 있는 청년들을 바라보았다.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청년들의 눈에서는 활활 투 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려 왔던 순간인가? 그들은 사패에 의해 사문을 잃었을뿐더러 부모형제와 사형매를 잃었다. 복수심이 그들의 가슴을 온통 후벼내고 있었다. 남궁궁은 냉엄하게 명을 내렸다. "모두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도록. 오늘밤 삼경에 행동을 개시한다. 알겠느냐?" "옛!" 청년들은 일제히 부르짖으며 휙! 신형을 날려 사방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먹이를 앞에 둔 굶주린 호랑이와도 같아 보였다. ④ 번쩍!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섬광이 스칠 때마다 비명이 꼬리를 이었다. 남궁궁은 검과 몸이 하나가 된 채 혈문의 고수들 사이를 날아가고 있었다. "케에엑!" 혈문의 인물들은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른 채 양단되어 쓰러졌다. 남궁궁의 무위는 가공지경이었다. 그는 강호에 나온 이래 이렇게 많은 살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독하게 마음먹었다. 혈문을 제거하리라 굳게 다짐한 것이다. 그는 중앙의 원형천막을 향해 날아갔다. 휙! 문득 천막 안으로부터 웃통을 벗은 괴인이 튀어나왔다. "이...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냐?" 괴인은 바로 혈우마제였다. 그는 사방이 온통 불바다로 화한 것을 보고는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대체 어떤 놈들이냐?" 이때였다.


"혈우마제, 함부로 무림을 유린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허공으로부터 한가닥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웬 놈이냐?" 혈우마제는 머리 위에서 날아드는 검기를 감지하고 허공을 향해 장력을 발출시켰다. 그는 자신의 무 공을 과신했다. 그러나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는 사실을 절감해야만 했다. 꽝! 폭음과 함께 그는 가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주르륵 뒤로 물러났다. "크으윽!" 고개를 숙여 보니 가슴에서 선혈이 치솟고 있었다. 상대의 검기를 막아내지 못한 것이었다. 그의 맞은편에 한 명의 백의청년이 떨어져 내렸다. 물론 남궁궁이었다. "혈우마제, 오늘이 너의 명년 제삿날이 될 것이다." 남궁궁의 차분한 말에 혈우마제는 눈썹을 부르르 떨었다. "네놈은... 누구냐?" "풍운제일령주." 남궁궁의 착 가라앉은 음성에 혈우마제는 눈을 부릅떴다. "풍... 풍운맹에서 왔단 말이냐?" "그렇다." "그... 그럴 리가?" 혈우마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알을 굴렸다. 그는 온통 회의에 찬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 러나 아무리 봐도 보이는 것은 온통 화염뿐이었다. 남궁궁은 담담히 말했다. "욕심을 부린 대가다. 변황에서 얌전히 있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늦었다." 혈우마제의 눈에 혈광이 일어났다. "애송이 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우우우... 웅! 문득 그의 장심으로부터 붉은 안개가 흘러나오더니 주위를 뒤덮었다. "흐흐! 혈혈마마강(血血魔魔 )이다!" 쿠쿠쿠쿵......! 혈무가 뭉클쿵클 흘러나오더니 여러 개의 덩어리가 되어 남궁궁을 향해 밀려갔다. "음!" 남궁궁은 엄청난 압력에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신음을 발했다. 그러나 신형을 굳히며 나직이 뇌까렸 다. "강한 것은 부드러움으로 상대하는 법, 제왕검류(帝王劍流)를 받아보겠느냐?" 그는 검을 전개했다. 스스스! 그의 검끝에서 환영과도 같은 검기(劍氣)가 사출되었다. 그것은 마치 거미줄처럼 토해져 나왔다. 가볍 게 검을 그어대자 무수히 많은 검기가 사출되어 혈우마제의 혈혈마마강과 충돌했다. 아무런 소음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혈우마제는 자신의 공격이 안개처럼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가슴이


철렁해지면서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천광홍(天光紅)!" 번쩍......! 남궁궁의 검에서 핏빛 검광이 뻗어 나와 혈우마제의 정수리를 향해 뻗어 나갔다. 그 빠름은 실로 번 개와도 같았다. "크아아아... 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혈우마제의 이마에 혈선이 그어졌다. 이어 그의 몸은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정확 히 두 쪽으로 쪼개지고 말았다. 쿠웅! 그의 두 동강이가 난 시신은 둔중한 소음과 함께 쓰러졌다. 북방무림에 피구름을 몰고 온 일대마두가 생의 종지부를 찍은 것이었다. "......." 남궁궁은 검을 늘어뜨린 채 묵묵히 서 있었다. 그의 발 아래에는 혈우마제의 시신이 쓰러져 있었다. 그는 핏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검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검왕(劍王) 사부님의 제왕검류가 이토록 무서운 위력이 있을 줄은 몰랐구나."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피냄새가 갑자기 역겹게 느껴진 것이다. 그는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무림인들은 왜 한 치도 양보하지 못한단 말인가? 어차피 인생은 덧없는 것을." "와아......!" 함성이 곳곳에서 울리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불바다가 된 계곡의 곳곳에서 풍운천병대의 청년들이 병기를 들어올리며 함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혈문의 인물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바닥에 누워 있었다. 남궁궁은 검을 허리에 꽂았다. 왠지 허무한 기분이었다. "으으음......." 문득 원형 천막 속으로부터 여인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그는 안색이 변했다. 음성이 귀에 익었 던 것이다. '이 음성은?' 그는 천막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아니?"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천막 안에는 그야말로 해괴한 장면이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열명이 넘는 여인들이 차마 눈 뜨고 못 볼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여인들은 발가벗은 채 몸을 비틀며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남궁궁을 놀라게 한 것은 침상 위에서 온몸을 비틀어대고 있는 낙화운의 모습이었 다.


"낙소저!" 남궁궁은 놀라 부르짖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순간 그는 이상한 향기를 맡았다. '미약......!' 비로소 그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재빨리 낙화운의 혈도를 제압한 후 자신의 겉옷을 벗어 그녀의 몸을 감쌌다. 휙! 그는 즉시 신형을 날렸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띄기 전에 낙화운의 중독을 해독하기 위해서였다. - 다음 권에 계속 ■ 왕도 제 3 권 -차례━━━━━━━━━━━━━━━━━━━━━━━━━━━━━━━━━━━ - 차 례 제 18 장 제 19 장 제 20 장 제 21 장 제 22 장 제 23 장 제 24 장 제 25 장 제 26 장 제 27 장

무림폭풍기(武林暴風期) 소림(少林)은 살아 있었다 야망(野望)과 사랑 음모(陰謀)의 소용돌이 거성(巨星)이 지다 천하를 구하는 법 음모와 책략 간웅(奸雄)의 최후 운명을 건 승부(勝負) 영웅은 달아나고, 달은 뜨고

■ 왕도 3 권 제 18 장 무림폭풍기(武林暴風期) ━━━━━━━━━━━━━━━━━━━━━━━━━━━━━━━━━━━ ① 태행산 기슭의 한 동굴. 달빛이 동굴 입구를 밝히고 있다. "아......!" 흑삼을 입은 한 여인이 동굴 입구에서 서성이며 안타까운 한숨을 쉬고 있었다. 달빛에 비친 여인의 얼굴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여인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흑란화 구연령이었다. 그녀는 가끔 동굴 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 그 분에게서 다시 한 걸음 멀어지게 되는구나.' 구연령은 고개 들어 달을 바라보았다. 봉황의 눈을 닮은 그녀의 눈에 습기가 어린 듯했다. "하아......."


동굴 안으로부터 이따금 흘러나오는 여인의 신음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것은 보지 않아도 능 히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구연령은 손으로 귀를 막으며 내심 부르짖고 있었다. '연령아, 연령아! 바보같이 왜 괴로워 하느냐? 공자님은 단지 낙소저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녀와 음양화합할 뿐인데... 어째서 속좁게 굴고 있느냐?' 구연령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하염없이 달을 바라보며 입술을 잘끈 물었다. 동굴 안에서는 남녀의 가쁜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귀를 막아도 그 소리는 구연령의 가슴을 천 갈래 만갈래로 찢어놓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자꾸만 그녀의 뇌리에는 남궁궁과 낙화운이 한 몸으로 엉켜있는 모 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차라리... 낙소저가 부럽구나.' 마침내 그녀는 신형을 날렸다. 더 이상 동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자신이 없다는 듯이. "흑흑! 제가 잘못 했어요." {{}}낙화운은 바닥에 엎드린 채 오열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는 남궁궁의 백삼이 덮여 있었다. 백 삼 아래로는 미끈한 다리가 드러나 있었다. "제가 경솔했어요. 그 자를 제거하려는 일념에 먼저 뛰어든 것이 이렇게 될 줄은. 흐흑......!" 남궁궁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낙화운을 구하는 방법은 한 가지 뿐 이었다. 그녀가 복용한 미약은 너무나 춘성(春性)이 강렬하여 달리 해독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어 쩔 수 없이 그녀와 몸을 나누게 된 것이었다. 낙화운은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얼마 전의 일들이 그녀의 뇌리에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추태를 부렸는지, 시간이 지나 서야 그녀는 깨달았다. 남궁궁의 품에서 몸부림치던 자신, 부끄러움도 모르고 기성을 발하던 자신의 모습이 그녀는 너무도 수치스러웠다. 더구나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이미 자신은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흑흑... 절 경박한 계집이라고 욕하시겠지요?" 낙화운은 눈물 젖은 얼굴을 들어 남궁궁을 바라보았다. 남궁궁은 등을 돌린 채 담담히 말했다. "이제 그만 하시오. 모두 지난 일이오." "그럼 절... 용서해 주시는 건가요?" 낙화운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며 남궁궁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남궁궁은 몸을 돌렸다. 그는 낙화운에게 다가가 가만히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운매(雲妹),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이제부터 우리는 남이 아니오." "아!" 낙화운은 탄성을 발하며 그의 품에 몸을 던졌다. 수치감에 어쩔 줄 모르던 그녀의 마음은 곧 기쁨과 감동으로 가득찼다. 남궁궁은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또다시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소. 이제 운매는 내 사람이니 내 말을 따 라야 할 것이오. 알겠소?" 남궁궁은 짐짓 엄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알... 겠어요. 가가." 낙화운은 남궁궁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그녀는 내심 벅찬 감격에 휩싸여 있었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남궁궁의 여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거짓말처럼 유순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내심 바라던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남궁궁은 그녀의 등을 다독거리며 말 했다. "이만 나갑시다. 흑란화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② 무림 전역에 걸쳐 혈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변황사패( 荒四覇)와 풍운맹(風雲盟)은 곳곳에서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풍운맹의 정예인 풍운천병대는 네 방향으로 나누어 변황사패와 맞섰다. 비록 청년고수들이기는 했지 만 그들은 당당히 사패와 격전을 벌여 나갔다. 낭보(朗報)가 무림에 전해졌다. 그것은 북무림을 초토화시키며 남하하던 북해 혈문이 풍운천병대에 의해 몰살됐다는 소식이었다. 풍운천병대는 풍운제일령주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지난 한 달여간 치밀한 전략으로 혈문을 몰살시킨 것이다. 혈문의 문주 혈우마제와 팔대혈신을 포함한 마두들은 마침내 태행산에서 전 멸하고 말았다. 이 소식은 무림인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 풍운제일령주야말로 무림의 구성(求星)이다! - 당금 무림에서 풍운제일령주를 따를 사람은 없을 것이오! 난파선(難破船)처럼 폭풍 속에 떠돌던 중원무림이 등대를 만나 방향을 잡았다고나 할까! 혈문을 붕괴시킨 풍운제일령주의 명성은 삽시에 무림에 퍼져나갔다. 무림인들의 사기가 충천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힘없이 사패에


유린되지는 않았다. 그들 은 투지를 불사르며 사패와 의연히 맞설 수 있게 되었다. 동해(東海) 잔밀도(殘密島)는 사패 중에서 두번째로 강한 단체였다. 그들은 절강(浙江)과 안휘(安彙)를 기점으로 강소성(江蘇省)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천 명에 불과했으나 한결같이 잔혹한 인물들로 무공 또한 극강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 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온통 시산혈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잔밀도의 움직임에 제동이 걸렸다. 풍운제이령주(風雲第二領主) 궁자기가 그들을 가로막은 것이다. 궁자기는 풍운제사령주, 오령주와 함 께 풍운천병대를 이끌고 잔밀도와의 격돌을 벌였다. 황산(黃山)의 대혈전. 가히 무림사에 남을 대전이 벌어졌다. 장장 열흘에 걸친 혈전으로 황산 곳곳에는 시체가 산을 이루었 고, 피가 강물을 이루어 흘러내렸다. 열흘간의 처절한 대전은 풍운맹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비록 풍운맹에서도 치유할 길 없는 상처를 입었으나 동해 잔밀도는 전체 인원 중 십분지 구를 잃은 채 도주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좋은 결과만 온 것은 아니었다. 풍운제육령주와 칠령주가 이끄는 풍운천병대와 일단의 무림인들은 묘강쪽에서 침공해온 만독문(萬毒 門)과 상대했다. 그 싸움에서 만독문은 가공할 독공으로 저지선을 무참히 무너뜨린 것이다. 만독문은 그 기세를 타고 운남을 지나 북상의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한편. 풍운맹의 오원 중 수원(水院)과 목원(木院), 그리고 풍운제팔령주가 정예고수들은 남해의 유황 성(流黃城)과 일전을 벌였다. 그 싸움은 지리멸렬(支離滅裂)하게 시일을 끌었다. 서로간에 일진일퇴의 거듭하고 있었다. 그 동안 양자간에 사상자가 속출하였으나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바로 그 즈음. 실로 상상도 못했던 이변이 일어났다.

이끄는

공방을

- 구중천(九重天)의 출현! 지금까지 웅크리고만 있던 구중천이 갑자기 유황성의 배후를 친 것이다. 구중천을 이끄는 인물은 신비인이었다. 그는 금색 면구(面具)를 착용하고 있어 용모를 알 길이 없었 다. 그는 스스로를 소왕야(少王爺)라 칭했다. 소왕야는 은동철목(銀銅鐵木)의 면구를 쓴 수하 백 인만을 이끌고 이천 명이 넘는


유황성을 배후에서 공격했다. 수효만으로 친다면 이란타석 격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기울었다. 유황성의 이천여 마두들이 단 백 인의 구중천 고수들에게 몰살을 당한 것이다. 실로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신비에 감싸여 있던 구중천이 이토록 가공할 무위를 갖추고 있을 줄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유황성 을 섬멸한 구중천의 자칭 소왕야란 인물의 위력이 이토록 가공할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유황성을 무너뜨린 후, 소왕야는 다음과 같이 선언을 했다고 했다. - 중원은 이제 구중천의 장하(掌下)에 들 것이다. 아무도 구중천의 뜻을 막지 못하리라! 무림의 판도는 다시 중심을 잃고 흔들리게 되었다. 변황사패 중 삼패가 궤멸되긴 했으나 이제 구중천이란 또다른 위협적인 존재가 대두된 것이다. - 구중천의 뜻을 거역하는 자, 죽음이 따를 것이다! 구중천의 선전포고가 무림을 뒤흔들었다. 그런데 또 이번에는 전륜회 (轉輪會)가 등장한 것이다.

다시 새로운 폭풍이 일어났다.

- 전륜회는 배신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 전륜회는 이같이 선언하면서 지난 날 제왕천(帝王天)의 붕괴에 참여했던 자들을 하나 둘 참혹하게 살 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생사판(生死判) 막위림(莫韋林). 육지신룡(陸地神龍) 천구(天仇). 환영칠지수(幻影七指需) 역삼우(易三友). 동백구우(桐柏九友). 협천쌍노(峽川雙老). 음양생사괴(陰陽生死怪) 구양(仇陽). 이들은 모두 근간에 전륜회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이 놀라운 사실에 무림은 온통 공포에 떨게 되었다. - 전륜회는 당시 무너졌던 제왕천의 후예들이다. 그들은 제왕천의 인물과 문파들에 게 복수의 칼을 뽑았다!

습격에 참여했던


이같은 소문이 번지면서 무림은 암담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런 상황에서 희망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풍운맹의 존재였다. ③ 소림사(少林寺). 불문성지(佛門聖地)인 소림사의 역사는 곧 무림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숭산(嵩山) 소실봉(少室峯)에 있는 소림사는 변함없이 범종(梵鐘)소리와 그에 화답하는 듯한 법창을 울 리며 무량한 불력을 전파하고 있다. 궁궁궁......! 범종 소리가 저녁 예불의 시각을 알리고 있었다. 짙은 노을 속에서 한 가닥 백영이 소림의 담장을 넘어 들어갔다. 그는 표표한 신법으로 소림사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 방장실(方杖室). 당금 소림의 장문인 천법선사(天法禪師)가 기거하는 곳이었다. "......." 방장실에는 노승이 법문(法文)을 외우고 있었다. 대추빛 얼굴에 깡마른 체구를 지녔으나 그에게서는 기품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스스! 법당 안에 한 가닥 미풍이 불었다. 천법선사의 감겼던 눈이 서서히 떠졌다. "아미타불.... 소림은 불문의 성지요. 시주는 뉘시기에 함부로 들어온 것이오?" 천법선사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음성에는 중량감이 실려 있었다. 슥! 그의 눈 앞에 백삼청년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바로 남궁궁이었다. 그는 천법선사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대사, 용서하시오. 예의에 어긋난 줄은 아오나 화급한 일이 있어 무례를 범했소이다. 그러니 너그러 이 용서하시고 천법선사를 만나게 해주시기 바라오." 남궁궁은 노승을 바라보았다. 천법선사는 흰 눈썹을 꿈틀하며 말했다. "빈승이 바로 천법이오." 남궁궁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진짜 천법선사를 만나러 왔소이다." 천법선사는 무거운 불호성을 토했다. "아미타불.... 시주는 빈승의 말을 못 믿겠다는 말씀이오?" 남궁궁은 고개를 저으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다. "수미금강력(須彌金剛力)!" 합장을 하고 있던 천법선사는 벼락처럼 장력을 날렸다. 남궁궁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즉각 반응


했다. "화륜(和輪)!" 그는 환사팔륜대금수 중 화륜결을 시전했다. 그러자 천법이 발출한 수미금강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남궁궁의 식지가 가볍게 퉁겨졌다. 슉! 은빛의 가는 지력이 천법선사의 이마를 향해 쏘아졌다. 그것은 화노의 은사탄지공이었다. "흑!" 천법의 몸이 앉은 채로 돌처럼 굳어졌다. 그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남궁궁은 담담히 말했다. "대사, 난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소. 소림의 장문인과 원로들, 그리고 무승들이 모두 조사동에서 수 련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오." "시... 시주는 대체 누구시오?" 천법선사는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남궁궁은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소생은 남궁궁(南宮穹)이란 사람이오. 동시에......." 남궁궁은 품 속에서 삼각깃발을 꺼냈다. "풍운제일령주이기도 하오." "풍운제일령주!" 천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남궁궁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풍운제일령주의 신분으로 온 것이 아니오." "아미타불.... 이해할 수가 없구려. 풍운제일령주는 검공자 철비양 소협이 아니오? 그런데 어째 서......." 천법은 의혹을 감추지 못한 채 남궁궁을 쏘아 보았다. 남궁궁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검공자는 이미 죽었소이다." "앗!" 완전히 달라진 남궁궁의 얼굴을 본 천법은 경악성을 발했다. 그러나 곧 그의 얼굴에 곤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남궁궁의 진면목에서 정기로운 기운을 느낀 것이었다. 남궁궁은 천법의 혈도를 해혈해 주며 말을 이었다. "소생이 검공자 행세를 한 데는 피치 못할 이유가 있소이다. 아무튼 천법선사와 중대한 문제를 상의해 야 하니 그 분에게 인도해 주시기 바라오." 가짜 천법의 안색에 곤혹스러움이 서렸다. "당금 무림은 혼란의 극을 치닫고 있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림사가 움직이지 않는데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고 있소이다. 그러나 소생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소이다. 그래서 방장님을 뵈러 온 것이오." 남궁궁의 음성은 진지했다. 가짜 천법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아미타불. 알겠소이다. 시주의 뜻을 따르리다." "고맙소이다. 대사." 남궁궁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과연 소림은 소림이다. 이 자가 비록 가짜이긴 하지만 정기로움을 지니고 있는 걸 보면. 하지만 그렇 다고 해서 소림이 제왕천의 공격에 참여한 것은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가짜 천법은 선방의 한쪽 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한 폭의 달마도(達磨圖)가 걸려 있었다. 그는 달 마도 앞에서 합장하더니 두루마리를 걷어 올렸다. 그 속에 작은 벽장이 있었다. 벽장 문을 열자 둥근 고리가 나타났다. 가짜 천법은 고리를 잡고 좌우로 빙글빙글 돌리다가 잡아 당겼다. 그그긍! 선방 왼쪽 벽은 서가(書架)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서가가 통째로 회전하며 어두운 통로가 나타났다. 통로는 지하로 뚫려 있었는데 계단이 아래로 향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미타불. 시주는 빈승을 따라 오시오." 가짜 천불은 먼저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남궁궁은 지체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남궁궁은 으시시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계단 왼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크 게 떴다. 동(銅)을 입힌 신상(神像)들이 계단마다 우뚝 서 있지 않은가! 험상궂기 이를 데 없는 신상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 생생한 모습이었다. 남궁궁은 한없이 아래로 이어지고 있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느낌이 든 것이었다. 동상들은 계 단 하나마다 세워져 있었는데 그 형상이 똑같은 것이 없었다. 제각각 다양한 모습이었다. '음, 이제 보니 계단은 총 백팔 개다. 동상도 백팔 개.......' 그는 동상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섬뜩할 정도로 흉악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분노하고 슬 퍼하고 고민하는 표정들이 불가의 백팔번뇌(百八煩惱)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백팔계단과 백팔번뇌상이라.......'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내려가던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동상들을 바라 보았다. '소림사에는 비전으로 전해져 오는 진법이 있다. 소림 나한대진이 그것이다. 특히 백팔 명의 나한승이 펼치는 백팔나한대진의 위력은 무림개사 이래 패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 동상 들은......!' 그는 동상을 노려보았다. 번쩍이는 금동(金銅)으로 전신이 강철처럼 단단해 보이는 동상들은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이... 이제 보니 이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이로구나!' 그렇다. 동상은 사람의 몸에 얇은 동을 입힌 것이었다. 남궁궁은 동상들이 극히 미미하지만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 다 왔소이다. 시주." 가짜 천법이 마지막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천법선사께서는?" "바로 저곳을 통과하면 만나뵐 수 있소이다." 가짜 천법은 손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의 손을 따라가던 남궁궁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저것은......!' 오 장여 앞에 황금으로 된 문이 가로막혀 있었다. 그가 놀란 것은 그 문이 황금으로 이루어져서가 아 니었다. 황금문에는 실로 해괴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십 쌍의 남녀가 온갖 해괴한 자세로 얼키고 설켜 정사를 벌이고 있는 춘화도(春畵圖)가 조각되어 있 었다. 그것은 실로 눈뜨고 볼수 없을 정도로 음탕한 조각이었다. "아미타불, 이 문은 시주께서 직접 여셔야 합니다." 남궁궁은 가짜 천법을 바라보았다. 그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것은 조사동에 들기 위한 절차입니다." 남궁궁은 다시 고개를 돌려 황금문을 바라보았다. 황금문에는 남녀의 교합장면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 을 뿐, 문고리는 물론 이렇다할 장치가 보이지 않았다. 가짜 천법은 어느새 몸을 돌려 계단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럼 빈승은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미타불......." ④ 남궁궁은 황금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신성한 불문의 요람에, 그것도 역대 고승들의 유골이 안치된 조사동의 출입문에 이토록 황음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어렴풋이 느낄 수가 있었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불가에서는 욕망을 버리라고 설법하고 있다. 그렇다면 욕망 중에 서도 색(色)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욕망에 가깝다. 굳이 조사동에 이런 관문을 설치한 것은 바로 욕 망을 버릴 줄 아는 자만이 들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한 남궁궁은 머릿속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만악의 근원은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는데 있다. 따라서 이런 관문을 설치함으로써 시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남궁궁은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어 그는 황금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자 조각 속의 여인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환상이 일어났다. 벌거벗은 여인들이 황금문에서 나 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떤 여인은 터질 듯이 부푼 젖가슴을 흔들며 다가왔고, 어떤 여인들 은 아랫도리를 벌린 채 노골적으로 그를 유혹했다. "으음!" 남궁궁의 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일부러 음양마유공을 시전하지 않았다. 그것은 은연중 오기가 치밀었기 때문이다. 신공에 의지하 지 않고 순수한 정력(定力)만으로 자신의 의지를 시험하기로 한 것이었다. 남궁궁은 환상을 마다하지 않은 채 눈을 부릅뜨고 버텼다. 여인들이 하나 둘 황금문으로부터 나오더니 그의 앞에서 춤추듯이 몸을 흔들고 있었다. 문득 그의 호흡이 가빠졌다. 한 명의 여인이 온몸을 비틀며 애원하는 것이 아닌가? "흐응, 안아줘요, 어서요.... 온몸이 타버릴 것만 같아요. 어서 절 안아 주세요. 네에?" 애간장을 끊는 듯한 여인의 호소에 남궁궁은 그만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더구나 여인은 천하절색 의 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머리칼은 해초처럼 나신을 휘감고 있었고, 젖가슴은 만지기만 해도 터질 듯이 발달되어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백옥 같은 피부에 잘록한 허리, 커다란 둔부는 가히 폭발적인 유혹을 발산하고 있었다. 남궁궁의 눈은 여인의 아랫배에 꽂혔다. 여인의 기름진 아랫배에는 짙은 숲이 우거져 있었다. 그 숲이 춤추고 있었다. 여인의 깊은 계곡으로부터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남궁궁의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어서요, 공자님. 흐응." 여인은 젖가슴을 출렁이며 그에게 다가왔다. 좌우에도 수많은 여인들이 맴돌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으음!" 남궁궁은 신음을 흘렸다. 목석이 아닌 이상 감정이 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였다.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한 미녀가 눈에 띈 것이다. 그녀는 흑발이 치렁치렁 흘러내려 발치까지 내려오는 이국미녀였다. 그녀 를 본 적이 있었다. 바로 풍운맹 천중각에서 보았던 여인이었다. "호호! 여기서 다시 만나는군요. 흐응, 이번엔 꼭 절 안아주셔야해요. 네에?" 미녀는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감싸 안으며 허리를 비틀었다. 그러자 기다란 흑발이 춤추듯 휘날렸다. 머리카락은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고 사타구니 사이로 들어갔다. 참을 수 없도록 아찔한 광경이었다. 남궁궁은 온몸의 혈관이 터질 듯이 팽팽해 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미녀를 안으려 했다. 그러나 허공만 짚을 뿐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갈증을 느끼며 벌떡 일어나 춤추는 나녀들을 향해 다가갔다. 이제 그의 이성은 와해되고 있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어디로 가느냐?" 그는 엉덩이를 흔들며 달아나는 미녀들을 향해 안타깝게 손을 흔들었다. 그때였다. 그는 자신의 왼손 바닥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왕(王)> 손바닥에 선명한 상흔이 눈에 띄었다. 순간 남궁궁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들어 주위를 둘러 보았다. 스스스....... 거짓말처럼 환영이 사라졌다. 그를 감싸고 유혹하던 여인들은 어디로 가고, 텅 빈 공간 속에 홀로 서 있을 뿐이었다. 남궁궁은 멍한 눈으로 황금문을 바라보았다. 황금문에는 여전히 춘화도가 어지럽게 새겨져 있었다. 그 는 갑자기 역겨운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이까짓 유혹에 흔들렸다니.... 아직 한참 멀었구나!' 그는 쓰디쓴 패배감을 맛보아야 했다. 그때였다. 그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시선은 황금문에 꽂혀 있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고 있었다. 황금문의 중앙에 관 음보살상이 웃고 있지 않은가? 분명 그것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관음보살상은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펼치고 있었는데 한 개의 구슬을 받쳐들고 있었다. '저것이다.' 남궁궁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구슬을 눌렀다. 그그긍......! 마찰음과 함께 황금문이 서서히 회전하더니 통로가 나타났다. 남궁궁은 통로 안으로 들어서며 내심 자책의 한숨을 쉬었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그는 방금 전의 일을 떠올리면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만일 우연히 손바닥의 상흔을 보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 것인가? 조사동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뿐더러 일생의 오점을 남길 뻔하지 않았던가?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번에는 목문(木門)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건 또 무슨 관문일까?'


방금 전의 경험이 있었으므로 그는 신중하게 목문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목문은 아무 이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의외로 문은 쉽게 열렸다. "......!" 문이 열린 순간 그는 급히 눈을 감았다. 휘황찬란한 광채가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갑작 스런 광채였으므로 그는 한참 후에야 제대로 눈을 뜰 수 있었다. 그곳은 장방형의 광장이었는데 온갖 종류의 보화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한 알이면 십 년은 먹고 살 수 있는 값비싼 야명주를 비롯하여 호박(琥珀), 산호(珊瑚), 비취(翡翠), 금 강석(金剛石)을 비롯하여 순금 불상과 이름도 모를 온갖 보화들이 지천으로 쌓여 있었다. 남궁궁은 경이를 금치 못했다. 불문의 성지인 소림사 조사동에 이런 보화가 있을 줄은 천만뜻밖이었 다. 그러나 본래부터 그는 재물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보화를 일별한 후에 지나쳐 버렸다. 그런데 그가 광장을 반쯤 가로질렀을 때였다. 화르르르! 등 뒤에서 무엇인가가 타들어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본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많던 금은보화들이 연기를 뿜으며 모래처럼 스러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것은 보화가 있던 자리에 수십 구의 백골들이 나뒹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남궁궁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렇군. 이곳은 물욕관(物慾關)이었군. 저 백골들은 필시 보물에 욕심을 낸 자들의 것이리라.' 그는 안배되어 있는 관문의 무서움을 실감하면서 광장끝에 나 있는 통로를 향해 걸어갔다. 잠시 후, 그의 앞에 하나의 철문이 나타났다. '이번엔 어떤 관문일까?' 남궁궁은 철문을 유심히 바라보다 밀어 보았다. 육중해 보이던 철문은 소리도 없이 열렸다. 철문 안은 뜻밖에도 서고(書庫)였다. 사면의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서가에는 엄청난 양의 고서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 남궁궁은 기이함을 금치 못했다. 색관이나 물욕관을 겪은 그는 이번에도 기상천외한 관문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으나 예상을 벗어난 정경에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그는 서가를 둘러보며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실상 그는 금은보화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수많은 고서에는 관심이 기울고 있었다. '이 많은 고서들을 어떻게 구했을까?'


고서들은 서가에 빽빽하게 꽂혀 있었는데 사면 벽이 모두 서가로 이루어져 상당한 양이었다. 그는 서가를 둘러보다 가장 가까운 곳으로 다가갔다. 그는 좌측 첫번째 칸에 있는 서가에서 책 한 권 을 빼보았다. <소림비본달마진해(少林秘本達磨眞解)> 양피지로 된 두툼한 고서의 표지에는 그같은 표제가 적혀 있었다. "달마진해라니?" 남궁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책장을 넘기려 했다. 그러나 무슨 생각 을 했는지 펼치던 책장을 급히 덮어버렸다. '아니다. 이건 소림사에서 비전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어찌 주인의 허락도 없이 볼 수 있겠는가?' 그는 아쉬운 눈으로 달마진해를 바라보다 도로 꽂아 놓았다. 이어 서가를 지나면서 고서들을 살펴보 았다. 잠시 후. "이제 보니 이곳은 무학서고(武學書庫)였구나!"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가 들어온 곳은 일반적인 서고가 아니었다. 서가에 꽂혀있는 고서들은 하나같이 천하 각 문파들에 게 전래되고 있는 무학들을 수록한 비급들이었다. 개중에는 알만한 문파들의 무학비급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남궁궁이 들어 보지도 못한 무학비급들이기 도 했다. '정말 대단한 일이다. 이 정도 규모면 천하무림의 모든 무학비급이 망라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남궁궁은 아연한 표정으로 서가를 둘러 보았다. '만에 하나, 이곳에 무고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소림사는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을 것이다.' 남궁궁은 고소를 머금었다. 사실 그도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무고에서만은 탐심(貪心)을 느끼고 있었 다. 무림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학(武學)이다. 이곳은 천하의 모든 무학이 망라되어 있는 무고였다. 그러니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내것이 아닌데 어찌 마음대로 취하겠는가.' 남궁궁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문득 천장으로부터 내려와 있는 하나의 팻말을 발 견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달마무고(達磨武庫)에 들어온 자는 오직 한 권만을 취할 수 있다. 만일 과욕을 부린다면 심마(心魔)


에 빠지고 말리라.> 뜻밖의 내용에 남궁궁은 흠칫했다. '실로 의미심장한 경고로구나. 하지만 과연 누가 저 말을 믿겠는가?' 그는 서가마다 빽빽하게 꽂혀있는 비급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무학을 익힌 사람이라면 비급이 던지는 유혹은 대단한 것이었다. 더구나 이곳에 있는 비급들은 하나같이 개세무학을 담은 것들 이었 다. 그러나 수천 권이 넘는 무학비급 중에서 오직 한 권만을 취해야 한다니. 실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남궁궁은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저 경고는 삶의 진리와도 같은 것일지 모른다.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는 것이다. 설사 이곳의 모든 비급들을 다 차지할 수 있다고 해도 과연 일생 동안 몇 권이나 제대로 익힐 수 있겠는가? 어쩌 면 단 한 권의 비급이라도 완벽히 익히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 남궁궁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팻말에 적힌 경고대로 그는 한 권만을 취할 생 각이었다. 그러나 서가마다 빽빽한 비급들 중에서 어떤 것을 택해야 할지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서고에 있는 비급들은 하나같이 절세의 무공인지라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선뜻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는 서가를 지나며 비급들의 제목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제목만 가지고는 비급의 내용이 어떤 것인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네번째 서가를 살펴보다가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러다간 하루 종일 걸려도 고르지 못할 것이다.' 이때였다. 툭. 문득 발길에 채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대충 끈으로 묶어놓은 낡아빠진 고서더미였다. 서가에 정리되지도 못한 채 바닥에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것이었다. 남궁궁은 무심코 주저앉아 고서를 살펴 보았다. 비록 낡다 못해 벌레가 슬고 어떤 것은 책장이 떨어져 나가 있는 것도 있었으나 그 고서들도 모두가 비급들이었다. 고서를 살피던 중 무엇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한 장의 양피지였다. 양피지는 어찌나 오래됐는지 곰팡이가 슬어 있었고, 그나마 반쪽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 남궁궁은 왠지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끼며 양피지를 편편하게 펼쳐 보았다. 희미하지만 양피지에 기


이한 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안력을 집중하여 흐릿한 문양들을 살펴 보았다. '대체 무슨 문자(文字)인지 알 수가 없구나.' 남궁궁은 자신이 어느 정도 학문을 익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피지에 그려져 있는 문양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문자였다. 그는 호기심을 느꼈다. '어쨌든 이것은 무척 오래된 것이다. 만일 이 문자들이 무공을 말하는 것이라면 아직까지 중원에 전래 되지 않은 기괴한 무공이 아닐까?' 물론 그 생각은 그저 추측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남궁궁은 왠지 양피지에 마음이 끌렸다. 그는 양피지를 품 속에 갈무리했다. '어차피 다른 비급을 취한다고 해도 지금 익힐 시간은 없다. 이것이나 가지고 가야겠다.' 그는 서고의 안쪽으로 걸어갔다. 서가가 끝나는 곳에 하나의 문이 있었다. 그는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 왕도 3 권 제 19 장 소림(少林)은 살아 있었다 ━━━━━━━━━━━━━━━━━━━━━━━━━━━━━━━━━━━ ① 석전(石殿). 장엄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석전에는 향연이 자욱이 피어 오르고 있었고, 전면에는 거대한 불상이 단 위에 봉안되어 있었다. 불상 아래로는 서른두 개의 신위(神位)가 가지런히 모셔져 있었는데 신위마다 한 개씩의 납골 항아리가 놓 여 있었다. "......." 남궁궁은 눈썹을 꿈틀했다. 불상 아래 백 명이 넘는 승인(僧人)들이 연좌하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백색의 가사를 입은 백팔 명의 나한승들이었다. 그 앞에는 십팔 명의 중년 금강 승이 염주를 굴리고 있었고, 아홉 명의 황색 가사를 입은 늙은 중들이 다른 서열에 앉아 있었다. 불상의 바로 아래에는 한 명의 홍색가사를 입은 노승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의 사방에는 회색 가 사를 입은 나이를 추측하기 힘든 네 명의 고승이 호위하듯 앉아 있었다. 남궁궁은 내심 중얼거렸다. '이들은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도 내색하지 않는것은.......' 그는 석전의 엄숙한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숙연해 지는 것을 느꼈다. '이곳은 소림의 최대금역인 조사전이 틀림없겠구나.' 그는 눈썹이 잿빛인 홍색 가사의 노승을 바라보았다.


'저 자가 당금 소림의 장문인인 천법선사일 것이다.' 그는 홍색 가사를 입은 노승에게 걸어갔으나 백여 명이 넘는 중들은 아무도 그를 의식하지 않았다. 그가 홍의승에게 다가가자 그가 눈을 떴다. 그의 눈에서는 강한 안광이 빛처럼 뻗어 나왔다. "아미타불! 시주의 입전을 축하하오. 시주께서는 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조사전에 들어오신 것이오." 남궁궁은 정중히 포권했다. "소생, 남궁궁이라 하오이다. 장문대사를 뵈러 왔소이다." 그는 소림사를 존중하고 있었다. 비록 소림이 제왕천을 친 바 있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불문의 성지로 서의 존경심은 갖추고 있었다. "빈승이 바로 천법(天法)이외다. 시주께서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남궁궁은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런데 무형의 벽이 가로막고 있어 조금도 접근할 수가 없었 다. '음!' 그는 신음을 발했다. 이때 천법선사가 나직하게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네분 사숙님들께서는 힘을 거두어 주십시오. 시주와 얘기할 것이 있습니다." 천법선사의 말에 회색 가사를 입은 노승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궁은 그제서야 무형의 장벽이 사 라지는 것을 느꼈다. '놀랍구나. 이들 네 사람의 내공은 하나같이 이백 년 수위에 달하고 있는 것 같다. 대체 누구길 래......?' "시주, 앉으시구려." 천법선사는 자신의 앞을 가리켰다. "고맙소이다." 남궁궁은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 놀랐소이다. 소림이 정예고수들을 이런 곳에 숨겨 두었을 줄은 몰랐소이다." 천법선사의 얼굴에 미미하게 홍조가 떠올랐다. "나무라지 마십시오 마의 기운이 천장(千丈)인지라......." 남궁궁은 빙긋 웃었다. "소림은 진정 대단한 곳입니다. 여기 계신 아홉 분만 해도 풍운맹의 팔대령주를 능가하는 기도를 지니 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는 황색 가사를 입은 구 인의 중에 이어 뒤쪽을 바라보았다. "뿐만 아니라 십팔금강승께서도......." 천법선사는 무거운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이제 시주께서 오신 뜻을 말씀해 주십시오." 남궁궁은 비로소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대사께서는 천율(天律)을 아실 것이오."


"......!" 담담하기만 하던 천법선사의 눈에 파랑이 일어났다. "그리고 천일만리향(千一萬里香)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천법선사는 염주를 굴리며 말했다. "시주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오셨군요." "그렇소이다." "하면......?" "보다 더 확실한 것을 알기 위해 왔소이다." 남궁궁의 음성은 당당하기만 했다. 석전의 분위기는 장엄하여 자칫 주눅들게 했으나 그는 추호도 위 축된 모습이 아니었다. 천법선사는 한동안 그를 주시하다가 탄식했다. "조사전의 삼관(三關)을 통과하신 것으로 미루어 시주의 품성을 능히 알겠습니다. 하나 이 일은 무림 의 안위와 중대한 관련이 있는지라, 먼저 시주의 진정한 신분부터 밝혀주셔야 겠소이다." 남궁궁은 눈을 빛내며 반문했다. "그 전에는 아무 말씀도 아니 하시겠다는 뜻입니까?" "......." 천법선사는 말 대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궁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대사께서는 소생이 거짓을 말한다 해도 모르실 것이오.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소생 의 신조입니다. 소생은 길이 아니면 가지 않습니다." 그의 말은 당당하면서도 오만한 것이었다. 천법선사의 흰 눈썹이 꿈틀했다. "하오나......." 천법선사는 여전히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려 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예를 갖추는 그의 태도는 가히 소림의 장문인다운 모습이었다. 이렇게 되자 남궁궁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소생은 현재 풍운제일령주라는 신분을 지니고 있소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잠시 빌 린 것일 뿐입니다." 남궁궁은 타는 듯한 안광을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소생은 우내오천 중에서 사천의 맥을 이어받았습니다. 그것이 장문인께 밝혀드릴 전부입니다." "......!" 천법선사의 안색에 처음으로 경악이 떠올랐다. 뿐만 아니라 목상처럼 앉아만 있던 중들의 안색도 일 제히 동요를 일으켰다. 잠시 후 천법선사는 합장했다. "아미타불.... 그러셨군요. 몰라봤습니다. 아아! 그렇다면 이는 필시 부처님의 뜻일 것입니다." "......?" 남궁궁은 의아한 표정으로 천법선사를 바라보았다. "아미타불,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빈승은 시주의 뜻을 따르겠소이다." 천법선사의 말에 남궁궁은 담담히 말했다.


"절 믿어 주시니 감읍할 뿐입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차분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먼저 천율대사의 죽음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천법선사는 한동안 모호한 눈으로 남궁궁을 바라보았다. 이어 눈을 지그시 감으며 탄식을 토해냈다. "아아! 실로 무서운 일이오. 당금 무림에서 모든 이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인의대협이 그런 짓 을 할 줄이야......." 남궁궁은 가슴 속에 의혹이 치밀었으나 그가 말을 계속하기를 기다렸다. 천법선사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계속 이야기했다.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 그러니까 정사무림이 연합하여 제왕천을 공격할 때의 일이지요. 당시 그 일을 성사시켰던 것은 정사무림 중 어느 한쪽이 아니었소이다. 한 인물이 그 일을 주도하였지요. 그 자가 암중에 천하각파에 서찰을 띄워 제왕천의 독주를 막아야 한다고 설득했었소이다." "......." 남궁궁은 숨조차 쉬지 않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바야흐로 제왕천 붕괴의 전모가 밝혀지는 순간 이었다. "본사는 그 자의 말에 움직이기는 했지만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소이다. 결국 그 자의 보 이지 않는 계략에 의해 천하무림인들이 회동하였소. 제왕천을 치는 일에 가담하게 되었소이다." 남궁궁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단지 그 자가 보낸 서찰 하나 때문에... 제왕천을 공격했단 말이오?" 천법선사는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에는 자책의 빛이 어리고 있었다. "그 자는 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치밀한 계책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암중으로 제왕천에 첩자 를 심어 내분을 획책하였습니다. 그래서 난공불락이라던 제왕천이 하루밤 사이에 무너지게 된 것이 오." 남궁궁은 전신의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이 모두가... 제왕천이 너무도 강했기 때문이었소이다. 각대문파는 제왕천의 힘을 견제할 필요를 느꼈 습니다. 그런 와중에 정체불명의 인물이 무림인들의 마음을 파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그 자는 거사(擧 事)에 응하지 않는 문파는 무림의 공적(公敵)이 될 것이라는 협박수단까지 동원했소이다." 남궁궁은 끓어 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누른 채 천법선사의 말을 계속 들었다. "결국... 그 자의 뜻대로 제왕천은 멸망하였소이다. 그리고......." 천법선사는 염주알을 굴리며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날 이후로 무림은 평온해졌소이다. 그러나 빈승을 비롯한 구파일방의 동우(同友)들의 마음 속에는


불안감이 싹텄소이다. 그것은 제왕천을 무너뜨리는데 암약했던 신비인의 진정한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었소이다. 우리들은 그 자가 무서운 음모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소이다. 그래서 나름대 로 오늘날까지 그 자에 대한 대비를 은밀히 시행해 왔소이다." 남궁궁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소림을 비롯한 구파일방이 암중에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당 연한 일이었다. 그는 할 말이 많았으나 계속 침묵하기만 했다. 천법선사는 소림의 승려들을 둘러 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던 중 몇 년 전부터 전륜회란 단체가 출현했소이다. 그들은 강호에 출몰하자마다 지난 날 제왕천 을 공격한 인물과 문파들에게 복수하기 시작했소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제왕천을 배신했던 자들을 하나하나 죽이기 시작했소이다." 천법선사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천법선사는 극비리에 전륜회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사실 소림이 오랫동안 강호활동을 끊은 것은 당년의 신비인에 대한 의혹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름대 로 신비인에 대해 조사하던 중 전륜회가 나타나자 내사(內査)에 박차를 가했다. 우선 그는 전륜회에 의해 희생당한 자들의 공통점이 과거 제왕천을 배신한 인물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전륜회는 제왕천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전륜회의 회주가 누구냐에 대한 의문이 남게 되었다. 천법선사는 그 점에 대해 포괄적인 조사를 했다. 그는 수많은 가능성에 대해 조사한 결과 한 가지 무 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전륜회주가 궁천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자비천문선생 궁천무는 지난 이십 년 이래 꾸준히 강호활동을 했다. 그 결과 팔대세가를 연합했으며 변황사패의 침공을 명분으로 내세워 풍운맹이란 거대단체까지 구성했다. 만일 궁천무가 위선자라면 그가 구축한 힘은 가히 일시에 무림을 장악할 수 있는 거력이었다. 천법선사는 암중으로 궁천무에 대한 의심을 굳혔다. 그러나 그가 당년의 신비인이며 전륜회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려면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만 했다. 만일 무림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궁천무를 증거도 없이 몰아세운다면 역으로 소림이 무림의 공적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천법과 소림의 원로들은 이때문에 궁지에 몰렸다. 그때 해법을 제시한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천율


(天律)이었다. 천율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도박에 뛰어 들었다. 그는 목갑 속에 천일만리향(千日萬里香)을 넣은 뒤 흉수가 자신을 죽이도록 유도했다. 결국 그의 도박은 성공했다. 흉수는 목갑을 탈취해 갔으며 천일만리향의 향기가 그의 몸에 배인 것이 었다. 여기까지 들은 남궁궁은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서 어찌 되었소이까?" 천법선사는 무겁게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불행히도 빈승의 생각이 맞았소이다." "......!" ② 대전의 공기는 납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궁궁의 눈에서는 차가운 한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결국 궁천무가 모든 음모의 주모자였단 말인 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고 말았다. "빈승은 천율사제가 죽은 후, 천통(天通) 사제를 풍운맹에 파견했소이다. 천통은 속세인이었을 때 묘 강에서 독을 연구한 적이 있소이다. 천일만리향도 그가 제조한 것이었소이다." 남궁궁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풍운맹주에게서 천일만리향의 향기가 났단 말이오?" "그렇소이다. 뿐만 아니라 그 자가 무림의 평화를 빙자해 엄청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소 이다." 남궁궁의 안색이 차갑게 변했다. '역시......!' "풍운맹을 건립할 때 막대한 자금을 댄 것은 황금장(黃金莊)의 금적태산 규염공과 천선미랑 부부였소 이다." 남궁궁은 규염공 부부의 이름을 듣자 옛생각이 나 가슴이 뭉클해졌다. "또한 풍운맹을 설계한 자는 만박귀부 도천수였소. 한데 지금 그들은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소이다." 남궁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다면...?" "아미타불. 빈승은 그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소이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궁천무의 위선 을 밝혀줄 증인이기 때문이었소. 천신만고 끝에 그들의 행방을 알아내긴 했소이다. 그들은 풍운맹의 한 뇌옥에 갇혀 있소이다." "그럴 수가......!"


남궁궁은 주먹을 불끈 쥐며 노성을 발했다. "더구나 도천수의 장원을 조사하던 중 그의 서재에서 친필로 쓴 글을 발견했소이다. 그 내용은 풍운맹 주가 무림에 흑심을 품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소이다. 풍운맹의 공사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느낀 의혹을 적어 두었던 것이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가진 듯했소이다." "으음." "더욱 놀라운 것은 풍운맹주가 어쩌면 변황사패와도 모종의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내용이 적혀있는 것이었소." "그게 사실이라면......!" 남궁궁은 입술을 악물었다.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오." 천법은 고요한 눈으로 남궁궁을 한동안 주시하더니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시주께서 원하시면 도천수가 남긴 풍운맹의 밀도(密圖)를 드리겠소." 남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감사하오이다." 천법은 화제를 돌렸다. 그는 궁금한 듯 물었다. "시주께서는 무고에서 어떤 비급을 택하셨소?" 남궁궁은 어색한 표정으로 양피지를 꺼내보였다. "이것입니다." "......!" 천법선사의 안색이 변했다. 뿐만 아니라 사 인의 노승들도 놀란 듯 눈을 떴다. 남궁궁은 그들의 반응에 가볍게 헛기침하며 말했다. "음, 만일 귀중한 물건이라면 돌려 드리겠소이다. 원래 소림의 것이니 말입니다." 천법은 고개를 저었다. "아미타불, 시주께서 그것을 취하신 것은 부처님의 뜻입니다. 부디 거두어 주시구려." "......?" 남궁궁은 의혹을 금치 못했다. 그는 낡아빠진 양피지를 그저 호기심 때문에 취한 것이었는데 천법과 노승들의 반응이 의외로 큰 것에 기이함을 느꼈다. 이때 천법은 품 속에서 두 가지 물건을 내놓았다. 그것은 두루마리 하나와 금빛의 깃털이었다. "이것은 풍운맹의 내부구조를 그린 밀도외다. 그리고 이것은 시주께서 본사를 방문하신 기념으로 드리 겠소이다." 남궁궁은 밀도와 깃털을 받았다. 그는 깃털의 용도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아미타불, 그 깃털은 금시우(金翅羽)로 구파일방이 약속한 신물(信物)이외다. 훗날 긴요하게 쓰일 때 가 있을 것이외다." 남궁궁은 궁금했지만 천법이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자 고개를 끄덕이며 물건을 갈무리했다. "장문인......!"


문득 조사전 입구 쪽으로부터 한 가닥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쪽으로 향 했다. 가짜 천법이 당혹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 지우(地宇)?" 천법선사의 말에 남궁궁은 내심 중얼거렸다. '저 중의 법호가 지우였군.' 지우는 이마에 밴 땀을 훔치며 보고했다. "장문방장님, 지금... 산문(山門)을 부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었다. 천법선사의 흰 눈썹이 거꾸로 곤두섰다. "산문을 부수다니? 대체 그들이 누구길래 그런 무례를 범하려 든단 말이냐?" "그들은... 구중천(九重天)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은빛 면구를 쓴 자와 다섯 명의 동면인들입니다." "뭣이?" 천법선사는 부지중에 언성을 높였다. 뿐만 아니라 장내의 승려들도 모두 안색이 변했다. 남궁궁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장문방장님을 뵙겠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일각 내에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산문을 파하겠다 고......." 천법의 눈썹이 경련을 일으켰다. "아미타불.... 아직 때가 아니건만.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그는 네 명의 노승을 바라보며 공손히 물었다. "사숙, 어찌해야 옳겠습니까?" 노승들 중 한 명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외다. 백팔나한과 금강십팔불(金剛十八佛)이 완성되지 않았소이다." 천법은 탄식을 토했다. "아! 하지만 산문이 깨진다면... 역대 조사님들을 어찌 뵙는단 말입니까?" 남궁궁은 몸을 일으켜 천법을 향해 포권했다. "그 일은 소생이 맡겠소이다. 귀사에서 많은 것을 얻었으니 보답을 해야겠습니다." 천법선사의 안색이 밝아졌다. "아미타불, 시주께서 나서주신다면 더없이 고마운 일이외다. 현재로써는 본사가 나설 때가 아니라 난 감하던 참이었소이다." "그럼, 소생은 이만 가보겠소이다." 남궁궁은 정중히 포권한 뒤 돌아섰다. "지우! 시주를 안내하거라." "알겠습니다. 방장님." 남궁궁은 조사전을 빠져나갔다. 그는 지우대사의 뒤를 따르며 새삼 감개무량한 느낌이었다. '역시, 생각대로 소림은 정도무림의 횃불같은 존재였다. 이 사실을 확인한 것만 해도 이번 길은 큰 수 확을 얻은 셈이다.' ③


소림사의 산문 앞에 한 명의 은면인이 고요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동면구를 쓴 오 인의 인물들이 살기에 찬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들은 백여 명의 승려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백팔 명의 나한승들이 나한대진을 펼치고 있는 것이 었다. 그러나 나한대진은 이미 와해직전이었다. 벌써 삼십여 명의 승려들이 칠공(七孔)에 피를 쏟은 채 쓰러져 있는 것이다. "훗훗훗! 천법은 어찌 나타나지 않느냐? 소림의 중들이 모두 죽어도 좋단 말이냐?" 은면인은 으시시한 음성으로 외쳤다. 승려들은 한결같이 공포의 빛을 띠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자신 감을 잃고 있었다. "핫핫핫...! 누가 감히 불문의 성지를 어지럽히는 것이냐?" 문득 낭랑한 웃음과 함께 허공으로부터 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바로 남궁궁이었다. "......!" 은면인은 남궁궁을 보는 순간 크게 놀란 듯 온몸이 굳어졌다. 남궁궁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들 육 인을 둘러보며 차갑게 물었다. "그대들은 구중천에서 왔소?" 은면인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이상한 억양으로 대답했다. "그렇소." "무슨 일로 왔소?" "본천이 선포한 무림왕법(武林王法)에 의거하여 소림의 녹옥불령을 거두기 위해 왔소." 남궁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핫! 무림왕법? 그야말로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군?" 은면인은 음침하게 말했다.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시오. 무림왕법은 절대법이니 거역하는 자 무사치 못할 것이오." 남궁궁은 비웃음을 흘렸다. "후훗! 과연 그럴까?" "목숨은 하나뿐이오. 귀하는 소림과 대체 어떤 관계가 있기에 이 일에 끼여드는 것이오?" 남궁궁은 입가에 조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본인은 소림과 아무 관련이 없소. 하지만 옳지 못한 일을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오. 특히 그대들처 럼 안하무인격인 무리들을 보면 손이 근질근질해서 견딜 수가 없소." "뭣이?" 은면인의 눈에서 비수같은 빛이 뻗었다. "정말 어이가 없군. 대체 귀하는 목이 몇 개나 있다고 생각하시오?" 남궁궁은 느긋이 말했다. "내 목보다는 당신들의 목을 걱정하는 게 순서일 것 같소." 은면인은 싸늘하게 외쳤다.


"건방지다! 동구호, 동십호! 무엇하느냐? 본천의 무서움을 보여줘라!"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명의 동면인이 전광석화처럼 남궁궁을 공격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살수를 펼쳤다. 쐐애액! 동면인들의 검이 남궁궁의 좌우 허리를 노리고 뻗어왔다. "하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함부로 왕법 운운하다니, 너희들에게 천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마!" 우우웅......! 남궁궁은 손바닥을 활짝 펼쳐 원을 그리며 좌우로 갈라쳤다. 그의 장심에서 금빛 광륜(光輪)이 뻗어나 갔다. 천치옹의 공문절기인 회풍금륜장(廻風金輪掌)을 펼친 것이다. 삽시에 강기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며 세 사람의 모습이 검광과 장영에 휩싸였다. 쿠쿠쿵! 굉음이 일어났다. 동면인들은 휘청거리며 뒤로 밀려났으나 곧 검을 전개하며 다시 공격해 왔다. 남궁궁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면인들의 무공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천우륜(天宇輪)!" 휘리리링! 금빛 광륜이 대여섯 개로 늘어나며 마치 금빛의 톱니바퀴처럼 사방으로 날아갔다. "헉!" 동면인들은 대경실색했다. 카카캉! 그들은 검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광륜을 쳐냈다. 그 순간 검이 산산조각나버렸다. "끄아아악!" 비명과 함께 피보라가 일어났다. 박살난 검조각이 그들의 전신을 관통해버린 것이다. "아미타불......!" 소림의 승려들은 이 참혹한 광경에 합장불호를 외웠다. "흑... 이럴 수가!" 은면인은 충격을 받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곧 발악하듯 외쳤다. "십일호, 십이호, 십삼호! 놈을 죽여라!" 동시에 그는 자신도 검을 뽑아 신형을 날렸다. 쉬잉......! 사 인의 신형이 일제히 남궁궁을 합공했다. 남궁궁은 태연했다. 일대 사의 싸움이었으나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슬쩍 손을 뻗었다. 그러자 삼 장 가량 떨어져 있던 한 중의 손에서 계도(戒刀)가 빨려 들어왔다. 중이 놀랄 사이도 없이 계도는 그의 손으로 들어갔고, 곧이어 백색의 도광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너희들에게 세상이 얼마나 넓은가를 보여주마." 남궁궁의 차가운 음성과 함께, 파츠츠츳! 검풍뇌우(劍風雷雨)가 휘몰아쳤다. 가히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싸움이었다. 일대 사의 대결은 눈알이 돌아갈 정도로


숨가쁘게 전개되었 다. 구중천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절륜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으나 남궁궁은 조금도 밀리는 기색이 아 니었다. '우선 동면인들을 제거해야겠구나.' 그는 판단을 내리고 이륜결(移輪結)를 펼쳤다. 순간 세 명의 동면인들은 검이 엉뚱한 방향으로 끌려가 는 것을 느끼며 앗!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엄청난 반탄지기가 그들의 검을 퉁겨냈다. 따당! "윽!" 동면인들은 그만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검을 놓쳐버렸다. 만일 검을 놓지 않았다면 자 신들의 검에 의해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남궁궁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계도를 빙글 돌렸다. "파천섬뢰(破天閃雷)!" 번쩍...! 뇌전이 일어났다. "크아아악!"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꼬리를 물었다. 촤아아....... 허공으로부터 혈우가 쏟아져 내렸다. 삼 인의 동면인들이 비틀거리다 썩은 짚단처럼 픽픽 쓰러졌다. 그들의 머리통은 뒤늦게 바닥에 떨어져 굴러갔다. "......!" 남궁궁은 계도를 움켜쥔 채 움찔하는 표정이었다. 설마 파천섬뢰의 위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 이다. "이럴 수가......!" 은면인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넋을 잃은 듯 중얼거렸다. 그의 전신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남궁궁은 기분이 울적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잔인하게 죽일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는 탄식하며 은면인을 바라보았다. 은면인은 그를 노려보며 날카롭게 외쳤다. "남궁궁! 네가 악랄해지다니!" 남궁궁은 크게 놀랐다. "날... 안단 말이냐?" 그러나 은면인의 대답은 들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신형을 뽑아올리더니 달아나 버린 것이었다. "두고 보자...!" 눈 깜짝할 사이에 십여 장이나 날아간 은면인은 이를 갈며 한 마디를 남겼다. 남궁궁은 바닥을 굴렀 다.


"올 때는 마음대로 왔지만 갈 때는 마음대로 갈 수 없을 것이다!" 남궁궁은 은면인을 추격해 갔다. 장내는 온통 피바다였다. 중상을 입은 소림의 승려들과 은면인들의 참혹한 시신이 나뒹구는 산문 앞 풍경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아미타불. 소림이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조사님들을 뵈올 낯이 없구나......." 누군가의 입에서 장탄식이 터져 나왔다. ④ 소실봉에서 동쪽으로 이십여 리 떨어진 한 계곡. 남궁궁은 급히 신형을 멈추었다. 달아나던 은면인이 갑자기 돌아섰던 것이다. "앗!" 그는 경악성을 발했다. 은면인의 모습이 달라져 있었다. 은색의 면구를 벗어버렸던 것이다. 은면인은 여인, 그것도 대단한 미녀였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가 아는 여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자봉성녀 천화영! 바로 신주사대미화(神州四大美花)의 한 명인 천화영이었던 것이다. 무림에서 가장 신비한 곳인 무산(巫山) 성녀궁의 소궁주이자 과거 남궁궁과 불의의 정사를 치뤘던 천 화영이었던 것이다. 남궁궁은 너무나 놀라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천화영은 매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얼음가루가 풀풀 날리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왜 그리 놀라느냐? 이 사기꾼아!" 남궁궁은 눈을 크게 떴다. "사기꾼이라니... 대체 무슨 말이오?" 천화영은 더욱 흥분했다. "흥! 그래도 발뺌이냐? 감히 십절공자 흉내를 내며 날 속인 것을 벌써 잊었단 말이냐?" 남궁궁은 그만 가슴이 뜨끔해졌다. 그녀의 말은 명백한 사실이 아니던가? "그... 그건 부인하지 않겠소. 하지만 낭자에게도 책임이 있소이다. 당시 난 부인했었소. 그런데 낭자 가 일방적으로 날 십절공자로 단정해 버리지 않았소?" 천화영은 표독스럽게 외쳤다. "이 더러운 사기꾼 놈! 정말 뻔뻔하기 이를 데 없구나! 애당초부 터 인피면구를 뒤집어 쓴 것은 날 속일 생각이 아니었더냐?" 남궁궁은 어이가 없었다. "인피면구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난 면구를 쓴 적이 없소. 어찌 그런 모함을 하는 것이오?" 천화영은 품 속에서 소검을 뽑아 들었다. "너같은 더러운 놈은 죽어야 해!"


쐐액! 그녀는 소검과 하나가 되어 남궁궁을 덮쳤다. 혼신의 힘을 다한 듯 그녀의 공격은 날카롭기 그지없었 다. 남궁궁의 눈썹이 성큼 치켜 올라갔다. "진상을 알려면 똑똑히 알고 덤비시오." 파팟! 그는 가만히 서 있다 검지와 중지 사이로 소검을 끼워 막았다. "놔라! 이 악적!" 탕! 탕! 탕! 천화영은 주먹으로 남궁궁의 가슴을 쳤다. 남궁궁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흡륜결을 시전하여 그녀의 공력을 고스란히 흡수해 버렸다. 놀랍게도 그녀의 주먹은 남궁궁의 가슴에 박히더니 빼낼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흑...! 이 악적." 천화영은 욕설을 퍼붓다가 그만 축 늘어지고 말았다. 남궁궁이 그녀의 허리에 있는 연마혈을 짚어버 린 것이다. "낭자는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소." 남궁궁은 중심을 잃고 무너지는 그녀를 안으며 그렇게 말했다. "퉤에! 오해라고?" 천화영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남궁궁은 그만 화가 치밀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녀가 계속 상식밖으로 나오자 그도 은은히 부아가 치밀고 말았다. "정말 끝까지 분별없이 굴겠소?" 짝! 천화영의 뺨에서 불이 났다. "악!" 천화영은 비명을 지르며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멍하니 남궁궁을 바라보 았다. 난생 처음으로 따귀를 맞은 것이다. 감히, 어느 누가 그녀의 따귀를 치겠는가? 갑자기 그녀는 방성통곡을 터뜨렸다. "으흐흑... 어엉......!" "......." 남궁궁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갖다댔다. "자, 만져 보시오. 내 얼굴이 어째서 가짜란 말이오?" "......!" 천화영은 울음을 뚝 그쳤다. 그녀는 남궁궁의 진지한 태도에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조심스 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얼빠진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럴 수가? 정말... 진짜란 말인가요? 세상에 똑같이 생긴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요?" 그녀는 실성한 듯 계속 중얼거렸다. "정말... 당신은 본래 이런 얼굴이란 말인가요?" 남궁궁은 담담히 말했다. "맹세할 수 있소. 내 얼굴은 태어날 때 그대로요." "그, 그렇다면......?" 천화영의 안색이 홱 변했다. "호, 혹시?" 남궁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단 말인가요?" "......!" 남궁궁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쌍둥이라는 사실을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방금... 뭐라고 했소?" "아앗......!" 천화영은 비명을 질렀다. 남궁궁이 흥분한 나머지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던 것이다. "아, 미안하오." 남궁궁은 얼른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천화영은 그의 예의바른 태도에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그녀는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먼저 절 풀어 주세요." 혈도가 풀리자 그녀는 빤히 남궁궁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에요. 하늘 아래 이토록 닮은 사람은... 아마도 쌍둥이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에요." "나와 닮았다는 사람은 대체 어떤 인물이오?" 남궁궁은 왠지 가슴이 뛰고 있었다. "그 분은 남궁(南宮)... 아, 그러고 보니 성까지 같군요. 그 분의 이름은 중양(重陽)이에요." "남궁중양. 그는 어떤 사람이오?" 천화영은 대답 대신 눈을 반짝이며 반문했다. "당신에게는 정말 쌍둥이 형제가 없단 말인가요?" "없소. 아니... 잘 모르겠소." "......?" 천화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남궁궁은 다시 물었다. "그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소?" 천화영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무엇 때문이오?" "그보다... 당신은 절 어떻게 할 거예요?" 남궁궁은 흠칫했다. '어떻게 하다니?' 그는 과거 그녀와의 사이에 벌어졌던 일을 떠올렸다. 당시 그는 책임지겠다는 글을


남겨놓았었다. "그건... 낭자만 괜찮다면." "괜찮다면요?" 천화영은 초롱초롱한 시선으로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부부지간이 될 수도... 있지 않겠소?" "아......!" 천화영은 탄성을 발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방금 전의 도도하던 모습과는 딴판 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 자리를 옮겨요. 어디 가까운 객점이라도." 남궁궁은 흔쾌히 대답했다. "좋소." 어둠이 깔릴 무렵, 객점은 아늑한 분위기였다. 객점의 별채에는 한 쌍의 남녀가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 남궁궁과 천화영이었다. 천화영은 하늘거리는 자의로 갈아입고 있어 한결 청초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남궁궁은 무거운 표정이었다. "그게 사실이오?" "분명한 사실이에요. 이런 비밀을 알려드리는 이유는 당신을 믿기로 했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남궁궁은 넋나간 듯 중얼거렸다. "남궁중양.... 정말 그가 나와 쌍둥이 형제란 말인가?"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천화영의 말에 의하면 남궁중양은 구중천의 소왕야이며 금면구를 착용하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이었 다. 남궁궁은 번쩍 고개를 들며 물었다. "사성(死城)에 가면 정말 그를 만날 수 있단 말이오?" "물론이에요. 사성은 구중천의 본부니까요." 남궁궁의 눈에서 형형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더 묻겠소. 구중천은 지난 날의 제왕천과 어떤 관계가 있소?" 천화영의 안색이 창백해 졌다. 그녀는 애원하듯 말했다. "제발. 그 이상은 묻지 말아 주세요." 남궁궁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사성으로 가겠소." "그건 안돼요." 천화영은 급히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왜 안된다는 거요?" 천화영의 얼굴에 우려의 빛이 떠올랐다. "사성은 죽음의 성이에요. 그곳에 발을 들여놓는 자는 모두가 죽어요. 절대... 가면


안돼요." 그녀는 남궁궁의 소매를 잡고 애원했다. "부탁이에요. 제발 그곳에는 가지 마세요." 남궁궁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나는 결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소. 그보다는......." 남궁궁은 그녀를 정시하며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구중천에 들어가게 되었소?" 천화영은 얼굴을 붉혔다. "그건 당신 때문이에요." "나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천화영은 한숨을 길게 내쉰 후 털어놓았다. "당신이 떠난 후 저는 당신을 찾기 위해 강호를 유랑했어요. 그러다 십절공자 남궁중양을 만나게 되었 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그 분을 따르게 된 거예요." 남궁궁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당신은 이미 그와......." 그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차마 입밖으로 발설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에요! 이상한 생각 하지 마세요." 천화영은 황급히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다. "전 단지 그분 곁에 있고 싶었기에 구중천에 가입했을 뿐이에요. 그러다 구중천이 무림제패의 야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어요." 남궁궁은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어째서 늦었다는 것이오?" 천화영은 눈시울을 붉혔다. "저의 사문인 성녀궁이 구중천에 의해 무너졌기 때문이에요. 그로인해 사부님께서도 연금되고 말았어 요." "그런 일이 있었소?" 남궁궁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흑! 모두가 저때문이에요." 천화영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남궁궁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안으며 위로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앞으로 잘 될 것이오." 천화영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넓은 사내의 품이 그녀는 아늑하게 느껴졌다. 비로소 그녀는 마 음이 편안해졌다. 그녀는 남궁궁으로부터 자신이 우내사천(宇內四天)의 전인이라는 것과 풍운맹의 풍운제일령주의 신분 이라는 것까지 모두 들어 알게 되었다. 지금 그녀의 가슴에는 파문이 일고 있었다. 본래 그녀는 십절공자 남궁중양에게 마음이 쏠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넓고 뜨거운 가슴을 지닌 남궁궁의 여인이 되기로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화영, 당신은 먼저 사성으로 돌아가시오." 천화영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상공께서는?" 그녀는 호칭을 고쳤다. "나는 풍운맹에서 처리할 일이 있소." 남궁궁은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계획대로만 되면 앞으로의 일은 순조롭게 풀려나갈 것이오." 남궁궁은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안았다. 천화영은 달콤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가는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귓전에 사나이의 더운 입김이 느 껴졌다. 남궁궁은 그녀의 귓밥을 입술로 건드리며 속삭였다. "앞으로 당분간은 만날 수 없을 것이오. 영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천화영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뭘... 말인가요?" "이대로 헤어질 순 없지 않소?" "그럼 어떻게?" "하하! 적어도 오늘밤은 각별해야 하지 않겠소?" 남궁궁은 너털웃음치며 손을 뻗어 그녀의 둔부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어머, 음흉해요!" 천화영은 주먹으로 남궁궁의 가슴을 몇 차례 때렸다. 그러나 이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이미 남궁궁과 만리장성을 쌓은 몸이었다. 따라서 그의 제의(?)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 가 그가 자신을 아내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남궁궁의 입술이 그녀의 작은 입술을 덮었다. '아아!' 짜릿한 느낌에 그녀는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아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둔부를 쓰다듬던 사나이의 손이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녀는 구름 위에 둥실 뜬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남궁궁은 그녀를 안고 침상을 향해 걸어갔다. ■ 왕도 3 권 제 20 장 야망(野望)과 사랑 ━━━━━━━━━━━━━━━━━━━━━━━━━━━━━━━━━━━ ① 동백산(桐柏山). 금상첨화(錦上添花)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예로부터 동백산은 산세가 수려하여 천하의 명산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명산은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어 화려함을 더욱 뽐내고 있었다. 한 대의 화려한 마차가 동백산중의 구릉 위에 멈춰 있었다. 마차 주위에는 여섯 명의 금의인들이 황금수실을 단 보검을 찬 채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으며, 마차의 지붕에는 황궁(皇宮)을 상징하는 문장이 순금으로 새겨져 햇살 아래 반사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마차의 주인은 황족이 아니겠는가? 사실 귀가 밝은 사람이라면 이미 이 마차의 주인에 대한 풍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만큼 이 마차는 무성한 소문을 낳고 있었다. - 금라군주(金羅君主)가 몸소 부군을 찾기 위해 황궁을 떠났다! - 황제폐하도 금라군주가 스스로 부군을 택하는 것을 윤허하셨다고 한다. - 금라군주를 아내로 얻는 자는 대공(大公) 칭호를 받을 것이다! 이런 소문이 얼마 전부터 나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마차의 주인은 금라군주였다. 하늘 아래 누가 금라군주의 빼어난 미색(美色)과 하늘을 가르는 재지(才智)를 모르겠는가? 금라군주는 한마디로 자금성의 보배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황궁을 떠난 적이 없었 으나 강호인들은 그녀를 신주사대미화(神州四大美花)의 으뜸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녀가 탄 마차가 중원을 남행하는 동안 숱한 명문대가의 귀공자는 물론 무림의 청년고수들이 그녀의 뒤를 좇았다. 일단 금라군주의 눈에 들어 부군이 되기만 하면 대공이라는 엄청난 권력은 물론이고 막대한 재력까지 도 얻을 수 있었으므로 그들은 너나없이 마차의 주위를 싸고 돌았던 것이다. 마차에서 십여 장쯤 떨어진 언덕 위. 한 그루의 소나무가 기이한 형상으로 구부러져 있는 곳에 한 쌍의 남녀가 나란히 서 있었다. "......." 여인은 멍한 시선으로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상의 선녀인들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여인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수발은 정갈하게 틀어올려 궁장을 했으며, 품위와 기품이 느껴지는 화의는 그녀의 신분이 고귀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한 송이 부용화와 같은 여인, 그녀는 바로 금라군주였다. 금라군주는 만면에 연모를 가득 담은 채 흑삼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흑삼청년은 금라군주가 한눈에 반할 만했다. 체구는 그리 큰 편이 아니었으나 전체적으로 완벽한 균 형을 이룬 미끈한 체격과 흑삼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흰 피부, 오관이 뚜렷한 용모는 가히 세상 여 인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특히 붓으로 그은 듯한 검미 아래로 한 쌍의 옥안(玉眼)은 태양과 같은 빛을 토하고 있었으며 콧날은 조각처럼 미려했다. 더욱이 갸름한 얼굴과 단정한 입술은 여인을 방불케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흑삼청년은 시선을 구릉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만천하를 발 아래 두고자 하 는 제왕의 모습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의 양미간에 은은히 어려있는 한 가닥 사기(邪氣)였다. 그러나 금라군주는 그에게 흠뻑 빠져 있었으므로 그 점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중원을 모두 돌아보았지만 이 금라의 마음을 끄는 사람은 오직 이 사람 뿐이었어. 조각같은 외모와 천금처럼 무거운 마음가짐, 게다가 이 분이 지니고 있는 원대한 야망.......' 이때 좀처럼 떨어질 것 같지 않던 흑삼청년의 입술이 열렸다. "금라, 나 위불군(韋佛君)은 야심이 크오. 결코 일개 대공(大公)따위에 머물 수는 없소." 그의 음성은 낭랑하면서도 묵직했다. 금라군주는 황홀한 시선으로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아! 이 분은 너무 큰 사람이야. 하지만 난 이런 면이 더 좋은 걸.'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금라군주는 살며시 위불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소녀는 당신 앞에서만은 일개 평범한 여인일 뿐이에요. 무엇이든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폐하께 아 뢰어 이루어 지도록 하겠어요." 위불군의 눈에서 신광이 쏟아져 나왔다. "그 말을 믿어도 되겠소?" "이 금라가 언제 거짓을 말한 적이 있었나요?" 금라군주의 얼굴에 달콤한 미소가 번졌다. 위불군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그는 냉철한 표정으로 말했 다. "군주, 당신은 내가 품고 있는 야망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고 있을 것이오. 나는 대공 따위의 하찮은 권력은 필요없소. 내가 원하는 것은 중원천하에서 으뜸이 되는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의 힘이 필요하오." 금라군주는 살며시 고개를 들며 감미로운 미소를 흘렸다. "저는 오직 당신의 뜻을 따를 뿐이에요." 위불군은 오만한 표정으로 기소를 흘렸다. "후후! 보시오. 이 동백산의 군봉(群峯)들을. 마치 영웅들을 표상하는 것 같지 않소? 나는 그 중에서도 우뚝 솟은 거봉이 될 것이오." "당신은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요." 금라군주는 그의 넓은 가슴에 몸을 기댔다. 그들로부터 십여 장쯤 떨어진 곳. 바위 옆에 두 개의 흑영이 남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이었다. 놀랍게도 그녀들은 판에 박은 듯 똑같이 생겼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한 여인은 왼쪽 뺨에, 또 한 여인은 오른쪽 뺨에 검은 점이 찍혀있다는 것 뿐이었다. 왼쪽 뺨에 점이 있는 여인이 낮게 교소를 흘렸다. "호호, 드디어 소종사께서 성공하셨어." "그래, 과연 소종사께서 금라군주의 마음을 사로잡으신 것 같애. 호호! 중원을 장악하는 건 시간문제 야." "밀문(密門)에서도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하니 앞으로 재밌는 일이 벌어질 거야." 쌍둥이 흑의여인들은 마치 천하를 수중에 넣기라도 한 듯 들뜬 표정이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그녀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눈길이 있었다. 바위 옆에는 한 그루의 고목이 있었다. 고목의 가지 위에 누군가 우뚝 선 채 그녀들을 내려다보고 있 었다. 그는 다름 아닌 남궁궁이었다. 남궁궁은 풍운맹으로 돌아가던 중 우연히 그들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음, 소문만 무성하던 금라군주가 바로 저 여인이었군.' 그는 언덕 위에 서 있는 남녀를 바라보았다. '저 자는 올바른 자가 아닌 것 같다. 그의 야망이 어떤 것인지 몰라도 위험 인물임이 틀림없다.' 남궁궁은 쌍둥이 여인들을 살펴 보았다. 그녀들은 상당한 미색을 지니고 있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사 이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이들은 무서운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림은 물론 어쩌면 황실까지 위태롭게 할지도 모르 는.......' 남궁궁은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은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불안감이 짙어지고 있었다. '세상은 온통 욕망으로 가득 차 있으니, 티없이 맑은 하늘을 보기가 부끄러울 뿐이구나.' 남궁궁은 내심 탄식을 터뜨리고는 신형을 날렸다. ② 풍운맹. 만물이 잠든 밤이다. 스슷! 야음을 헤치며 한 가닥 인영이 날아 들었다. 인영의 움직임은 너무나 빨라 마치 연기처럼 보였다. 인영은 검전(劍殿)에서 빠져나와 풍운맹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남궁궁은 어제 정오경에 풍운맹에 도착했다. 그가 도착하자 풍운맹의 인물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북해 혈문을 궤멸시킨 일이 대해 찬사를 늘어 놓았다.


그러나 남궁궁은 그런 찬사를 받기 위해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풍운맹주가 꾸미고 있는 음모를 파헤치기 위해 돌아온 것이었다. 남궁궁은 도천수가 남긴 풍문맹의 밀도(密圖)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야음 속에서 풍운맹의 건축물들 을 살펴보고 있었다. '밀도 상에서 가장 은밀한 곳은 금마뇌옥(禁魔牢獄)이다. 그곳에 가면 진상을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 른다.' 남궁궁은 전진기환천보(全進奇幻千步)에 기재되어 있는 은형술(隱形術)을 시전하여 어디론가로 신형을 날렸다. 잠시 후. 그는 풍운맹의 후면에 당도했다. 그곳에는 아름답게 꾸며진 별원이 있었다. 별원 한가운데에 정교하게 조각된 열 개의 탑이 서 있었다. 탑신에는 달빛이 교교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이곳이 십상세(十象勢)를 이용한 출입구로구나.' 남궁궁은 좌측에서 세번째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탑을 향해 다가갔다. 그것은 높이가 삼 장쯤 되어 보이는 석탑이었다. 그는 탑신을 훑어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후후! 이 통로는 풍운맹주조차도 모르고 있는 암로(暗路)다. 만박귀부 도천수가 은밀히 이곳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그에게도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남궁궁은 탑신을 살펴보다 연잎 모양이 양각되어 있는 부분을 눌렀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꺼졌다. 그는 바로 아래로 떨어졌다. 광장(廣場). 질식할 것만 같은 무거운 분위기가 깔려 있었다. '으음, 지하에 이런 곳이 있다니.' 남궁궁은 광대한 지하광장 한가운데 선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탄복의 빛이 떠올 라 있었다. '완벽하구나. 만일 이곳으로 통하는 암로가 없었다면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광장은 실로 기묘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우선 광장의 벽면에는 여덟 개의 문이 팔괘(八卦)의 방위로 위치하고 있었으며, 바닥에는 오색의 돌이 어지럽게 깔려 있었다. 남궁궁은 그중 적색의 돌을 밟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이 돌 중에 하나만 잘못 밟아도 함정에 빠진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금은 구월 십일 해시(亥時)... 그렇다면 적, 청, 흑, 백, 황의 순이다.' 남궁궁은 순서대로 돌을 밟으며 팔괘문을 향해 걸어갔다.


잠시 후 그는 무사히 우측에서 세번째 문 앞에 다다랐다. '이곳이 금마뇌옥으로 향하는 문일 것이다.' 남궁궁은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스르르. 문은 의외로 쉽게 열렸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쉽게 열리는 문이 아니었다. 만일 그가 바닥의 돌을 한 개라도 잘못 밟았다면 문이 열리는 순간 죽음의 함정과 기관이 작동했을 것이다. 남궁궁은 신형을 날려 통로로 질주했다. 칠흑같은 통로. 첨벙.... 첨벙......! 걸을 때마다 물소리가 났다. 통로의 바닥에 물이 고여 있었던 것이다. 남궁궁은 일정한 속도로 걸어가 고 있었다. "으아악! 더러운 위선자! 차라리 날 죽여다오!" "크흐흑... 궁천무! 지옥까지라도 널 쫓아가 빚을 갚아 주겠다!" 문득 소름 끼치는 저주의 외침이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지옥에서 들려오는 듯 으스스 한 느낌을 주었다. '궁천무! 네놈의 간악함을 저주한다!' 쩌르릉! 누군가의 처절한 절규가 통로의 공기를 흔들었다. 남궁궁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걸음을 빨리 했다. 얼마쯤 가자 통로는 왼쪽으로 휘어졌다. '이제 이곳만 지나면 금마뇌옥이 나올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하나의 검은 철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철문을 노려 보았다. 밀도에 의하면 철문은 두께가 한 자가 넘는 오철로 되어 있어 천하의 어떤 보검으로도 자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철컹! 쇳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철문 한가운데 튀어나와 있는 귀면상의 입속에 설치되어 있는 고리를 좌로 일곱 번, 우로 다섯 번 돌리자 열린 것이다. 철문 안으로 들어서자 좌우로 뇌옥이 줄지어 연결되어 있었고, 한 가운데 통로가 나 있었다. 뇌옥은 오리알 굵기의 철창으로 막혀 있었다. 남궁궁은 뇌옥 안을 들여다 보다가 그만 전신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 지옥인들 이보다 더할 수가 있을까? 뇌옥 안의 정경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온몸이 썩어가는 죄수들이 그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어떤 이는 전신이 온통 피고름으로 화해 악취를


풍기고 있었는데 그 위를 구더기가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자는 하반신이 없는 자도 있었다. 잘려진 하반신에는 뼈와 살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밖에도 쇠사슬이 비파골을 관통한 채 벽에 연결되어 있어 죽기 전에는 빠져나갈 수가 없게 갇혀있 는 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크으으! 이 더러운 궁가놈아! 어서 날 풀어다오!" "크흐흐! 궁천무! 네놈의 뼈를 갈아마시고 말겠다...!" "지옥에 가서라도 네놈의 조상을 갈갈이 찢어 발기고 말겠다!" 뇌옥 안의 인물들은 발악을 하고 있었다. 남궁궁은 악취로 인해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안쪽으로 들어갔다. 깊숙이 들어갈수록 죄수들의 모습 은 더욱 더 참혹했다. 그런데, 절반쯤 들어갔을까? 이번에는 전혀 다른 소리가 그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아아... 좋아요, 하악." "으음... 헉...!" 남궁궁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소리는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남녀가 쾌락에 겨워 내는 신음성인 것이다. '뇌옥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다니?' 그는 의아한 심정에 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어갔다. 통로가 좌측으로 갈라진 지점이었다. 왼쪽 통로로부터 그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약간 망설 이다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일반 뇌옥과는 달랐다. 철창이 있기는 있었으되 문이 열려 있는 상태였고, 안쪽은 아늑한 별실을 연상케 하는 곳이었다. 바닥 에는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었으며 대부호의 거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남궁궁은 눈썹을 곤두세웠다. 뇌옥 안의 별실에 커다란 침상이 눈에 띄었다. 그 침상은 어찌나 큰지 열 명이 함께 누워도 자리가 남을 정도였다. 침상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경은 가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황음(荒淫)한 것이었다. 두 노인. 한 명은 전신이 온통 비곗살로 뭉쳐진 듯하여 공처럼 보이는 노인이었고, 또 한 명은 대조적으로 깡 말라 대나무처럼 가느다란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벌거벗은 채 누워 있었다. 놀라운 것은 전라의 여인들이 두 노인을 애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여 인들이 괴물과도 같은 두 노인에게 달라붙어 온갖 교태를 부리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흐으응, 나리." 남궁궁은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처음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 현실이었다. 여인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노인들에게 쾌락을 제공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들도 온몸을 뒤틀며 쾌락에 빠져있는 모습이었다. 깡마른 노인이 중얼거렸다. "제기랄, 이제 계집들과 이짓 하는 것에도 진력이 나는군." "크크, 흑혈괴(黑血怪). 조금만 참아라. 보름만 지나면 교대니까. 그동안 실컷 즐기기나 해라!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쁜 건 아니잖느냐?" "백혈괴(白血怪), 이 망할 놈아! 그 어린 놈이 시키는 대로 옥지기나 하고 있는 게 뭐가 좋단 말이냐?" 흑혈괴와 백혈괴! 가히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은 신주구십구마(神州九十九魔) 중 서열 구위와 십위에 들어있는 전대의 마두들이었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살인을 밥먹듯이 하며 무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그들이 한낱 옥지기 노릇을 하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전신이 살덩이로 뒤덮이다시피한 백혈괴는 한 여인의 투실투실한 둔부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낄낄, 흑혈괴! 즐길 수 있을 때 실컷 즐겨라. 이 정도 누리는 것이 어딘데 그러느냐?" 흑혈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보름만 참으면 되니 할 수 없지." 그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슬며시 여인의 허벅지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이때였다. "......!" 여인들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들은 영적(靈的)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흑백쌍 혈괴는 눈을 감은 채 쾌감을 즐기느라 미처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여인들의 눈에 살기가 떠올랐다. 그녀들은 더욱 진하게 쌍괴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두 여인은 쌍괴의 하반신으로 내려가며 자극적인 애무를 퍼부어댔다. "흐으......." 쌍괴는 이상야릇한 신음을 발했다. 온통 뼈가 녹아내리는 듯한 쾌감에 전율이 일어났다. 이번의 애무 는 가히 뇌쇄적인 것이었다. 문득 두 여인의 눈에서 시퍼런 광망이 뻗어 나왔다. 그것은 살기(殺氣)였다. 어느새 두 여인의 손은 노괴들의 하복부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흐흐......!" 쌍괴는 눈을 감은 채 신음을 흘렸다. 그것이 실수였다. "크아악!" "크악! 이 년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흑백쌍괴의 하복부로부터 분수같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놀라운 일이었다. 두 여인의 손에는 시뻘건 살덩이가 쥐어져 있었다. 순간적으로 쌍괴의 성징(性徵)을 뽑아낸 것이었다. 실로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미친 년!" "뒈져라!" 쌍괴는 노갈을 터뜨리며 여인들을 향해 장력을 날렸다. 퍽! 퍽! 마치 수박이 으깨지는 듯한 음향이 울렸다. 미처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두 여인은 머리가 으깨져 즉사하고 말았다. "크아아악!" 쌍괴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쌍장을 마구 휘둘렀다. 그 바람에 주위에 있던 여인들은 장력을 맞고 날아갔다. "헉!" 문득 쌍괴는 신음을 발하며 축 늘어졌다. 어디선가 지력이 날아와 사혈을 짚어버린 것이다. 방 안에 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바로 남궁궁이었다. 그의 안색은 어두웠다. '최심제종술(催心制從術)로 두 노괴를 처치하긴 했지만 당신들의 희생이 너무 크구료.' 그는 여인들의 참혹한 시신을 내려보며 묵도를 올렸다. 방금 전 그는 일종의 섭심술로 여인들을 조종 했던 것이다. "그대들의 죽음을 결코 헛되지 않게 하겠소." 그는 시선을 한쪽 벽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수백 개의 열쇠가 걸려 있었다. 남궁궁은 열쇠 꾸러미를 들고 신형을 날렸다. "크아아아... 차라리 죽여다오!" 뇌옥 사이 통로로 접어드는 순간 여기저기서 저주의 외침이 들려왔다. 시체가 썩어가는 듯한 악취 속에서 남궁궁은 뇌옥 안을 들여다 보았다. "이럴 수가......!" 실로 참혹무비했다. 뇌옥에 갇혀있는 자들은 단 한 명도 성한 자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눈에서는 시퍼런 광망이 흘러 나오고 있는 것이 이미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너무나 극심한 고통에 미쳐버린 것 이었다. "과연 누가 이 광경을 보고 인의대협 궁천무의 짓이라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③ 오리알 굵기의 철창으로 가로막혀져 있는 뇌옥 앞. 남궁궁은 안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뇌옥 안에는 한 명의 백발노인이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그는 오른쪽 다리가 절단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는 눈을 감은 채 차분히 정좌하고 있었다. 문득 노인이 눈을 뜨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궁천무가 보냈느냐? 다시 말하지만 나 도천수는 더 이상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다. 노부의 마음을 돌 리기 위해 왔다면 차라리 죽이는 게 나을 것이다." 남궁궁은 흠칫하며 물었다. "노인장께서 만박귀부 도천수요?" "네놈은 누구냐?" 도천수는 눈을 번쩍 떴다. 남궁궁은 철창을 잡고 말했다. "소생은 남궁궁이란 사람이오. 노인장을 만나러 왔소이다." "무엇 때문에......?" 도천수의 얼굴에 의혹이 빛이 어렸다. 남궁궁은 차분한 어조로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했다. "그랬었구료." 잠시 후 도천수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는 남궁궁의 아래위를 살펴보더니 물었다. "그래, 노부에게 진실을 알고 싶단 말인가?" "그렇소이다." "흥!" 도천수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남궁궁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천수는 눈을 부릅뜨며 호통쳤다. "네놈은 눈도 없단 말이냐, 이곳을 직접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이냐?" 남궁궁은 안색을 굳혔다. "그럼 궁천무는......." "그 더러운 위선자의 얘기는 꺼내지도 마라!" 도천수는 흥분하여 노성을 터뜨렸다. 남궁궁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정말 그가 노인장을 이렇게 만들었단 말이오?" "크흐흐!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이곳에 갇혀있는 자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 위선자가 한 짓이다." 남궁궁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곳에 갇혀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오?" "흐흐! 놈의 음모를 알고 있는 자들이지. 모두가 놈에게 방해가 되는 자들이다." 남궁궁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설마 했는데 모두가 사실이었군. 결국 무림은 그 자의 음모에 놀아나고 있단 말인가?" "크크! 놈은 악랄하기 그지없는 놈이다. 게다가 교활무비하여 증거조차 남기지 않았다. 노부도 깜빡 놈에게 속아넘어 갔으니까."


남궁궁은 분노가 끓는 것을 금치 못했다. 도천수는 여전히 음침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크크, 하지만 여기 있는 자들이 모두 증인들이지. 비록 모두 미치기는 했지만 말이다." 남궁궁은 가슴이 섬뜩했다. '누가 이들의 말을 믿겠는가? 궁천무가 부인해 버리면 그만일 게 아닌가?' 도천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듯 자조의 웃음을 흘렸다. "흐흐, 하긴 어느 누가 날 보고 도천수라고 믿겠느냐?" "......." 남궁궁은 마음이 무거워지고 말았다. 잠시 후 그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혹시 금적태산 규염공 부부를 못 보았소?" 도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 그들도 이곳에 있지. 매일 혹형을 당하고 있다네." 남궁궁은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대체... 뭣 때문에 그들이 고문을 당한단 말이오?" "흐흐! 모두가 재물 때문이지. 궁천무 그놈은 황금장을 몽땅 삼키기 위해 그들에게 황금고(黃金庫)의 위치를 캐묻고 있지. 그래서 천선미랑은......." 도천수는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어찌 되었단 말이오?" 도천수는 탄식을 흘렸다. "궁천무... 그놈은 인의의 탈을 쓴 늑대다. 놈은 잔악무도하기 그지없는 수법을 쓰고 있다. 놈은 매일 열 명의 사내들로 하여금 천선미랑을......." 그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버렸다. "그녀는 지금 어디 있소? 어서 말해 주시오!" 남궁궁은 너무나 분노한 나머지 창살을 잡고 흔들었다. 창살은 강철로 된 것이었으나 엿가락처럼 휘 어지고 있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가다 우측의 뇌옥......." 도천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궁궁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④ "......!" 남궁궁은 실성한 사람처럼 굳어져 있었다. 한 칸의 뇌옥. 철창 안의 풍경은 가히 참상에 다름 아니었다. 그곳에는 그토록 찾았던 규염공 부부가 있었다. 규염공은 탐스럽던 수염이 온데간데 없었으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알몸으로 천장으로부터 내려온 쇠사슬에 매달려 있었다. 그의 전신은 성한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온몸에 뱀이 기어가는 듯한 채찍자국이 선명했으며 여기저기 피부가 찢어져 입을 벌리고 있었고, 허연 뼈까지도 드러나 보였다.


손톱과 발톱도 빠져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나 더욱 비참한 것은 뇌옥 안쪽의 돌침상 쪽이었다. 그곳에 한 여인이 사지를 벌린 채 누워있었 다. 처음 남궁궁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는 전라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기진한 듯 사지를 벌린 채 누워 있었다. '천... 선미랑!' 남궁궁은 벼락을 맞은 듯 전신을 떨었다. 그녀는 바로 규염공의 아내였다. 천선미랑은 멍하니 눈을 뜨고 있었다. 그녀의 동공에는 빛이라곤 없었다. 혼백이 빠져나간 듯 백치같 은 표정으로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전신은 온통 멍투성이였으며, 머리칼은 반쯤 뽑혀져 나갔고, 하복부에서는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으으! 이런 천인공노할......!" 우지직! 남궁궁은 철창을 잡아 당겼다.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창을 통과한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천통(天通)! 천랑(天娘)!" 격동에 찬 외침에 쇠사슬에 매달려 있던 규염공이 힘겹게 눈을 떴다. "그대... 는......?" 그의 음성은 들릴 듯 말 듯했다. "나요, 남궁궁이오!" 남궁궁은 규염공의 손을 덥썩 잡았다. "오... 공자!" 규염공은 경련을 일으켰다. 남궁궁은 쇠사슬을 힘껏 잡아 당겼다. 투두둑! 쇠사슬은 썩은 새끼줄처럼 토막토막 끊겨져 나갔다. "천통, 대체 어찌 된 일이오?" 남궁궁은 규염공을 흔들며 물었다. 규염공은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 가장자리로 피눈물이 흘러내렸 다. "공자께서 드디어... 와 주셨구료. 이렇게 공자를 뵈니... 안심하고... 죽을 수가......." 그는 말을 잇기가 벅찬 듯 더듬거렸다. "정신차리시오! 죽기는 왜 죽는단 말이오?" 남궁궁은 급히 그의 배심혈에 장심을 붙이고 공력을 밀어넣었다. "공자, 소용... 없소. 이미... 심맥이 끊기고 오장육부가 이탈됐소. 허허...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은 오 직... 공자를 볼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덕분이었소." "천통!" 남궁궁은 격동을 금치 못해 부르짖었다. 이때였다. "고... 공자께서... 오셨나요......?"


뒤에서 미약한 음성이 들렸다. "천랑......!" 남궁궁은 얼른 규염공을 안고 천선미랑의 곁에 내려놓았다. "고... 공자가 맞군요." 천선미랑은 힘겹게 눈을 떴다. "그렇소, 나요... 남궁궁이오." 남궁궁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꼭 오실 줄 알았어요. 하지만 이런 모습으로 뵐 줄은......." 천선미랑의 누렇게 뜬 얼굴에 미미한 홍조가 떠올랐다. "용서치 않을 것이오! 궁천무, 그놈을......." 남궁궁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는 강호에 나온 이래 이처럼 분노를 느낀 적이 없었다. 천선미랑은 가느다란 미소를 띤 채 힘겹게 입을 열었다. "우... 우리 부부가 지금까지 산 것은... 천치옹(天痴翁)... 그 분의 구명지은을 갚아야 하기에... 흐 윽...! 이제 공자를 뵈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남궁궁은 급히 말했다. "안돼오! 그대들은 반드시 살아야 하오. 끝까지 살아 남아 궁천무의 최후를 봐야 하오!" 그러나 천선미랑은 그의 말에 대꾸할 기력이 쇠진한 듯했다. "여보!" 규염공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천선미랑을 안았다. 천선미랑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여보.... 우리 부부는 그동안 정말 행복했어요.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지요. 이제... 마지막 순간에 도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전 더 없이 기뻐요." "미랑.... 나 역시 그렇소." 규염공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 곁에서 지켜보던 남궁궁은 눈시울이 젖고 말았다. 그는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눈 앞의 두 부부를 바라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뺨이 젖고 있었다. 천선미랑은 문득 남궁궁을 바라보며 물었다. "공자.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여인들을... 만나셨나요?" 남궁궁은 흠칫했다. "천랑, 갑자기 그게 무슨......." 천선미랑의 얼굴에 장난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호호... 공자께서는 여난을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소첩이 전에 말씀드렸지요?" "천랑......." 남궁궁은 어이가 없었다. 죽어가는 마당에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하다니.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홍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회광반조의 현상인 것이다. 죽기 전에 단 한 번 명료한 정신상태가 돌아오는 순간인


것이다. 천선미랑은 그윽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공자,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남궁궁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시오." 천선미랑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공자께서는 부디 그녀들에게 잘해 주세요." "아... 알겠소이다." 남궁궁은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천선미랑은 시선을 규염공에게로 돌리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여보... 이제 그만... 떠날 때가 되었지요." 규염공은 한 가닥 남은 최후의 힘으로 그녀를 안고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렇소. 하나 그전에 공자에게......." 규염공의 음성은 이미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미해졌다. 남궁궁은 그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댔다. "공자... 이제껏 죽지 못한 이유는... 공자께 황금고(黃金庫)의 위치를 알려 드리기 위해서였소......." 남궁궁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따위 황금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규염공의 눈에는 결연한 빛이 어렸다. "그렇지 않소. 황금고가 악인의 손에 들어가면 더욱 큰 혼란을 초래하게 되오. 부디 공자께서 황금고 를 열어... 좋은 일에... 쓰셔야 하오. 그것이 우리 부부의 마지막 소원... 이오." 남궁궁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알겠소. 두 분의 뜻을 받아들이겠소." "황금고는......." 규염공의 음성은 점점 더 가늘어 졌다. 그 사이 천선미랑의 몸은 차츰 식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가에는 지극히 평화로운 미소가 떠 올라 있었다. "공자... 부디... 무운을......." 그것이 끝이었다. 말을 마친 규염공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 천선미랑을 껴안은 채 거의 동시에 저승으로 떠난 것이다. "천통......! 미랑!" 남궁궁은 절규했다. 그러나 이미 두 사람의 몸은 식어가고 있었다. 대라신선이 아닌 이상 그들을 살려 낼 방법은 없는 것이다. 남궁궁은 두 사람의 시신을 내려다 보며 넋을 잃고 뇌까렸다. "아아!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남궁궁의 눈에서 으스스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살기였다. 강호에 나온 이래, 그는 이처럼 살기 를 느낀 적이 없었다. "용서치 않으리라! 내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


그의 차가운 외침이 뇌옥의 통로를 흔들었다. ■ 왕도 3 권 제 21 장 음모(陰謀)의 소용돌이 ━━━━━━━━━━━━━━━━━━━━━━━━━━━━━━━━━━━ ① 낙성전(落星殿). 만월은 암운에 삼켜졌고, 칠흑같은 어둠이 풍운맹을 뒤덮었다. 한 가닥의 인영이 낙성전으로 날아들었다. 인영은 곧바로 낙성전의 내전으로 향했다. 내전은 아늑했다. 방 안의 분위기로 볼 때 여인의 규방인 듯했다. "아아!" 한 여인이 침상 위에 앉아 탄식을 토해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상에 걸터앉은 채 상념에 잠겨 있었다. 누군가? 그녀는? 낙화운이었다. 평소 남장을 하고 지냈던 그녀가 이제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태행산(太行山)에서 의 사건(?) 이후로 여인으로 새로 태어났다. 그래서 오랫동안의 남장을 버리고 여장 차림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낙화운의 눈에 뽀얀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궁(穹), 당신은 어째서 절 찾아주시지 않는 건가요? 아직도 날 용서하지 않으신단 말인가요?' 그녀는 문득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뇌리 속으로 과거의 부끄러운 장면이 떠올랐던 것이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황촉이 일렁였다. 낙화운은 안색이 변했다. "누구냐?" 날카롭게 외친 그녀가 몸을 돌린 순간. "아! 가가(哥哥)......!" 그녀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도 잠시 뿐, 그녀는 새처럼 날아 사나이의 품에 안겼다. 방 안에 나타난 사람은 바로 그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남궁궁이었던 것이다. "드디어... 찾아 주셨군요." 낙화운은 남궁궁의 넓은 품에 얼굴을 부비며 감격에 차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녀의 기쁨은 이내 사라 지고 말았다. 남궁궁이 그녀를 밀쳐 버렸던 것이다. "화운, 할 말이 있소." 남궁궁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 낙화운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살기를 느낀 것이다. 남궁궁은 막 금마뇌옥으로부터 나오는 길이었다. 규염공 부부의 처참한 죽음을 목도한 터라 그의 가 슴에는 분노가 끓고 있었다. "가가, 왜 그러세요? 무... 무서워요." 낙화운은 겁에 질려 뒷걸음질쳤다. "얘기해 주시오. 팔대세가가 풍운맹주는 어떤 관계요?" 남궁궁의 말투는 싸늘했다. 낙화운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관계라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솔직히 말해 주시오. 팔대세가는 풍운맹주를 그토록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그걸 알고 싶소." "가가, 갑자기... 그건 왜?"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낙화운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해졌다. 남궁궁은 그녀의 눈물을 보자 자신이 지 나치게 흥분했음을 느끼고 탄식했다. "아아, 미안하오. 내가 너무 흥분한 것 같소." 그는 낙화운을 가볍게 껴안았다. 낙화운은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과거의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남궁궁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낙화운이 오열을 가라앉히자 비로소 그는 음성을 가다듬 으며 말했다. "화운, 내 그대를 믿고 얘기하겠소." "......?" 낙화운은 여전히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궁천무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낙화운은 안색이 변했다. 그녀는 그가 풍운맹주를 존칭하지 않는 것에 놀란 표정이었다. "궁천무, 그 자는 겉으로는 대인대의한 척 하지만 실은 늑대의 탈을 쓴 이리에 불과한 작자요." "넷?" 그녀는 크게 놀라 신형을 휘청거렸다. 남궁궁은 침상에 걸터앉으며 방금 전 자신이 금마뇌옥에서 보 았던 광경들을 설명해 주었다. 낙화운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어, 어떻게 그런 일이......!" "화운, 분명한 사실이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이오. 만일 그대를 믿지 않았다면 결코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는 불타는 눈으로 낙화운을 응시했다. 낙화운은 한동안 넋이 나간 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아! 그럴 수가... 그럴 수가......."


그녀는 오열을 발했다. 남궁궁은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유감이지만 엄연한 사실이오. 궁천무는 분명 대효대간의 악인이오. 그리고 그의 음모에 가담한 팔대 세가 역시 마찬가지요. 무림을 피폐하게 한 죄를 면할 수 없을 것이오." "그...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낙화운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남궁궁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의 부친 또한 무림의 대적이 되지 않겠는가? 그녀는 처연한 눈으로 남궁궁을 바라보았다. 남궁궁은 탄식하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안심하시오. 화운의 처지를 잘 알고 있소. 그 점을 감안하도록 하겠소. 하지만 지금 시급한 것은 팔 대세가와 궁천무가 어느 정도 관계인지 알아내는 것이오." 낙화운은 그제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가의 뜻이니... 한번 알아보겠어요. 하지만 아버님만은......." 남궁궁은 부드럽게 말했다. "날 믿으시오, 화운." 낙화운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남궁궁은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는 무서운 안 광이 번쩍이고 있었다. ② 모용운리(暮溶雲梨). 그녀는 사내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녀의 옥용에는 행복의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가 행복감을 느끼는 사내, 남궁궁이 아니고 또 누구이겠는가? 모용운리는 남궁궁의 넓은 가슴으로 자꾸만 안겨들었다. "정말 꿈만 같아요. 오빠의 아기를 잉태하다니......." 아! 그녀가 남궁궁의 아이를 임신했단 말인가? 남궁궁은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의 눈에는 다정함이 서려 있었다. 그는 슬며시 손을 뻗어 여인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배는 확실히 아담한 동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그녀의 약간 불러보이는 배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운리, 정말 기쁘구나. 내 핏줄이 네 몸에서 자라고 있다니......." 남궁궁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뼈저린 외로움을 안고 자라났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핏줄이 생긴다는 것은 천하를 얻는 것이나 다름없는 벅찬 감동이었다. "운리, 오늘따라 네가 유난히 아름다워 보이는구나." "흐응, 그럼 전에는 그렇지 않았단 말인가요?" 모용운리는 허리를 비틀며 교태를 부렸다. 순간 남궁궁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는 묻어날 듯이 부드 러운 모용운리를 안았다. 모용운리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껏 사지를 벌려 사나이를 받아들였 다.


"아아...!" 그녀는 이미 사랑의 행위에 익숙해져 있었다. 남궁궁을 받아들인 그녀의 육체는 펄펄 끓어 올랐다. 남궁궁은 이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그녀와 하나가 된 채 운우 속에 모든 것을 던지고 있 었다. 모용운리는 백의를 입은 차분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수많은 약재들이 널려 있었 다. 남궁궁은 눈을 빛내며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두 가지 약을 만들었다고?" "네, 오빠." "무슨 약이지?" 모용운리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하나는 만성독약의 해약이고, 다른 한 가지는 또 다른 만성독약이에요." 남궁궁의 안색이 변했다. "궁천무가 너에게 약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말한 적이 있느냐?" 모용운리는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것은 말하지 않았어요. 다만 마인들을 막기 위해서라고만 했어요." 남궁궁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났다. "두 가지 약은 다 완성되었느냐?" "네." "그럼, 그에게 넘겨줬단 말이냐?" 그는 눈썹을 모았다. 모용운리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맹주님께서는 크게 칭찬하셨어요." 남궁궁은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해약은 어디에 쓰며 또 다른 만성독약은 무슨 용도로 만들어졌단 말인가?' 그는 아직 모용운리에게 궁천무에 관한 것을 얘기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정색을 하며 물었다. "네가 만든 만성독약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지?" "그건 무서운 독약이에요. 일단 중독되면 그때부터 보름마다 해약을 복용해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전신의 혈맥이 오그라드는 수축작용이 일어나게 되죠. 그러다 무서운 고통 속에 죽어가게 된답니다." 남궁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보름마다 복용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해약이 아니겠군?" "그런 셈이에요. 다만 독성을 일시적으로 억제시킬 뿐이에요." 남궁궁의 눈에서 강한 빛이 흘러나왔다. "진짜 해약은 없느냐?" 모용운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없어요. 맹주께서는 처음부터 해약은 만들 필요가 없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왜 그런 거죠? 오빠는 마 치......."


남궁궁의 코웃음쳤다. "흥! 과연 악랄하기 그지없는 놈이군!" "네?" 모용운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남궁궁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운리,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느냐?" 모용운리는 의혹의 눈을 반짝였으나 곧 배시시 미소지었다. "물론이에요. 오빠가 원하시는 거라며 무엇이든 하겠어요." 남궁궁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말했다. "운리, 네가 만들었다는 만성독약의 해약을 만들어 다오." 모용운 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디에 쓰시려는 건가요?" "세상의 모든 독약이란 어차피 음해한 것이다. 만일 해약이 없다면 언젠가 나쁜 뜻으로 사용되었을 때 대책이 없지 않느냐?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 사실은 맹주에게 절대로 알리면 안된다. 은밀히 해약을 만들어 다오." 남궁궁이 말이 워낙 진지했으므로 모용운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들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 를 끄덕였다. "오빠의 뜻이라면... 그렇게 하겠어요." "운리, 고맙구나." "고맙긴요, 오빠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할 거예요." 모용운리는 살며시 몸을 기대어 왔다. 남궁궁은 그녀를 가볍게 안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궁천무는 분명 또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다. 대체 무슨 음모일까?' 어느덧 창밖이 밝아오고 있었다. ③ 천중각의 최상층. 풍운맹주 궁천무가 태사의에 앉아 있었고, 그의 앞에는 남궁궁이 서 있었다. "그래, 정녕 단신으로 떠나겠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남궁궁은 담담히 대답했다. "다행히도 변황사패는 주춤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무림의 국면은 심상치가 않습니다." 궁천무는 그를 인자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소협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가?" "전륜회(戰輪會)와 구중천(九重天)의 동태가 우려됩니다." 궁천무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하면 어째서 혼자 가겠다는 것인가?" "자칫하면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를 범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움직이며 그들의 동태를 파


악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 가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 남궁궁은 고개를 흔들었다. "혼자가 아닙니다." "그럼?" "흑란화를 데리고 갈 생각입니다." 궁천무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침묵했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럼 먼저 어디로 갈 생각인가?" "사성(死城)입니다." 남궁궁은 고개를 들고 궁천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으음." 궁천무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는 내쳐 말했다. "현재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사성이야말로 구중천의 총단임이 틀림없습니다. 그곳에 가면 단서가 잡힐 것입니다. 소생은 그들이 제왕천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궁천무는 눈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으음, 그럼 전륜회의 내막에 대해서는? 알아낸 것이 있나?" 그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해 보였다. 남궁궁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맹주께서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궁천무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는 눈썹을 경련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오? 남궁소협?" 남궁궁은 정중히 포권했다. "맹주님께서는 바다보다 넓은 지혜를 지니셨으니 이미 전륜회의 정체를 파악하고 계실 것이라 생각했 습니다." 궁천무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는 헛기침을 했다. "험! 정말 부끄러운 일이네. 노부는 아직도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네." "정말 뜻밖이군요. 소생은 맹주님께서 이미 그들의 정체를 파악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다 면 전륜회야말로 무서운 단체 입니다. 맹주님의 눈을 속일 정도이니 말입니다." 남궁궁은 낭랑하게 말했다. 겉으로는 궁천무를 칭찬하는 듯한 말이었으나 기실은 그를 비웃은 것이었 다. 궁천무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눈썹을 쫑긋하며 남궁궁을 쏘아 보았다. '후후... 위선자! 전륜회가 너의 꼭두각시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언제까지 발뺌을 하는지 두고 보자.' 남궁궁은 이미 소림사에서 전륜회가 궁천무의 하수인 단체라는 사실을 알아낸 바 있었다. "그럼, 지금 떠나겠습니다." 남궁궁은 궁천무를 향해 포권지례했다. "허허! 내 더 막지 않겠네. 부디 소협, 아니 령주의 무운을 빌겠소." 남궁궁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돌아서는 순간 그의 가슴에는 격동이 일고 있었다. '사성에 가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 과거지사에 대해서도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른 다.' 내심 이렇게 뇌까리는 남궁궁의 머릿속에는 한 인물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과 똑같이 닮았 다는 십절공자 남궁중양이었다. ④ 이십 년 전, 그곳에는 중원무림을 좌지우지하는 거성(巨城)이 우뚝 솟아 있었다. 흑백양도의 무림인들 은 거성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으며 감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었다. 세인들은 그곳을 제왕천(帝王天)이라 불렀다. 그러나 제왕천이 멸망한 후, 제왕천이 있던 자리는 온통 죽음의 그림자만이 드리워졌다. 언제부턴가 인근에 접근하는 자는 상하인을 막론하고 싸늘한 주검이 되어 까마귀와 들개의 밥이 되었기 때문이 다. 그후, 세인들은 그곳을 사성(死城)이라 불렀다. 그리고 다시 몇 개 성상이 흘렀을까? 무림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하나의 소문이 퍼져 나갔다. 그것은 무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 는 구중천(九重天)의 본거지가 바로 사성이라는 것이었다. 밤.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적막에 잠겼다. 사성이 내려다 보이는 한 산봉우리. 일남일녀가 야풍을 맞으며 나란히 서 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남궁궁과 흑란화 구연령이었다. 남궁궁은 불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사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과거 제왕천이 자리했던 곳은 을씨년스런 잔해만을 남기고 있었다. 흑란화 구연령은 오랜 침묵이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공자님, 정말 사성으로 들어가실 건가요?" 남궁궁은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연령, 그대는 대별산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구연령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공자님 혼자 위험하지 않을까요?" 남궁궁은 고개를 저었다. "내 걱정은 마라. 사성에는 천화영이 있다. 내게 도움을 줄 것이다." 구연령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공자님 곁에는 늘 여인들이 떠나지 않는군요......." 남궁궁은 흠칫했다.


"연령, 그게 무슨 말이냐?" "그리고... 점점 이 흑란화에게서는 멀어만 지시는군요." 구연령의 흑진주 같은 눈망울에 이슬이 어렸다. 남궁궁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돌아서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연령, 그대는 지혜로운 여인이다. 한데 내 마음을 그리도 모른단 말인가?" "......?" 구연령은 그윽한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네 마음은 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언젠가는 그대의 마음을 받아들일 날이 있을 것이다." "공자님." 구연령은 눈물을 삼키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남궁궁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부드럽게 말 했다. "언젠가는 그대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대별산에서 흑천풍을 정비해 다오. 연후 소림사로 가야 한다. 그것이 그대나 날 돕는 길이다." 구연령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공자님의 말씀을 따르겠어요. 언젠가... 절 부르실 날이 있겠지요. 그때까지 기다리겠어요." 남궁궁은 멋적게 웃었다. "연령 그대의 지혜를 믿겠소." "바람둥이!" 갑자기 구연령은 뾰로통하게 외치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새처럼 날아갔다. 그녀의 모습이 어둠 속에 파묻혀가는 순간 멀리서 천리전성술이 울려왔다. (공자님 말씀대로 흑천풍을 이끌고 소림사로 가겠어요.) 남궁궁은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령은 지혜로운 여인이다. 이제까지 그녀의 책략 덕분에 큰 힘이 되었다. 이제 흑천풍이 소림에 합 류하게 되면 머지 않아 대계(大計)를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남궁궁은 시선을 사성으로 향했다. '한데 화영이 왜 아직 오지 않는 걸까?' 그때였다. 바람 소리와 함께 날씬한 인영이 그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오셨군요!" 반가움에 찬 교성이 울렸다. 그녀는 바로 자봉성녀 천화영이었다. 그녀는 약간 헐렁한 듯한 자색 장포 를 입은 채 만면에 기쁨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궁궁은 빙긋이 웃었다. "그렇소. 화영." 천화영은 새처럼 그의 품으로 뛰어 들었다. 남궁궁은 그녀를 안으며 토닥여 주었다. "그동안 더 아름다워진 것 같군." "흥! 바람둥이 같으니." "내가 바람둥이라고?"


남궁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흥! 누가 모를 줄 알고요? 흑란화는 물론 낙화운 낭자까지도 건드렸잖아요?" 남궁궁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낙화운은 아직까지 낙무영으로 행세하고 있었다. 그런데 천화영이 어찌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몰랐다. "흥, 놀랄 필요 없어요. 풍운맹의 일은 구중천에서도 손바닥 들여다 보듯 알 수 있으니까요." "그랬었군." 남궁궁은 쓴 입맛을 다셨다. "대체 당신에게는 여자가 얼마나 되나요?" 천화영이 표독스럽게 말하자 남궁궁은 슬며시 그녀의 허리를 안으며 말했다. "지금 질투하는 건가?" "흐흥! 누가 질투를... 읍......!" 천화영은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남궁궁이 그녀의 작은 입술을 점해 버렸던 것이다. 입술이 닿는 순간 그녀는 전신에 맥이 쑥 빠지고 말았다. 그녀는 마음과 달리 자신도 모르게 남궁궁의 목을 껴안 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두 남녀의 입술이 떨어졌다. 천화영은 황홀한 눈빛으로 남궁궁을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형형하게 빛 나는 사나이의 눈동자는 그녀의 마음을 온통 빨아들이는 듯했다. "정말... 고단수로군요." "하하하!" 남궁궁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천화영의 자색장포를 들추었다. "어멋!" 천화영이 뾰족한 비명을 질렀다. 남궁궁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축골환용공을 시전하여 그녀의 자삼 속으로 숨어버린 것이었다. "흠흠, 따뜻하고 아늑하군." 그녀의 옷속에서 남궁궁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천화영의 얼굴은 잘 익은 석류처럼 붉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의 아랫배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 다. "그럼 지금 출발할까요?" "물론이오." 휙! 천화영은 신형을 날렸다. 그녀는 사성을 향해 쏘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품 속에는 축골공으로 몸을 줄 인 남궁궁이 숨어 있었으나 헐렁한 장포로 인해 겉으로 봐서는 조금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⑤ 사성은 제왕천의 폐허 아래 존재하고 있었다.


지상은 불타버린 잔해로 을씨년스럽기만 했으나 지하에는 거대한 석부가 구축되어 있었다. 그 규모는 가히 엄청난 것이었다. 사통팔달된 지하밀도를 따라 크고 작은 석실과 대전이 형성되어 있 었으며 거대한 지하광장도 있었다. 본래 이곳은 제왕천이 세워질 때부터 존재했던 곳이었으나 극비리에 축조되었으므로 아무도 모르는 곳이었다. 지하밀도를 따라 화골선(化骨扇)을 움켜쥔 한 명의 백의청년이 걷고 있었다. 그에게서는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기이한 매력이 풍겨나오고 있었다. 그가 통로를 지날 때마다 지나던 무사들이 모두 허리를 굽혔다. "소왕야(少王爺)를 뵈옵니다!" 백의청년, 그는 바로 구중천의 소왕야 남궁중양이었다. 그의 얼굴은 남궁궁과 판에 박은 듯이 닮아 있었다. 지금 그의 곁에는 자봉성녀 천화영이 따르고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지하광장에 당도했다. "타앗!" 차차창! 광장은 연무장(練武場)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지금 그곳에는 수백 명의 청년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무 공수련을 하고 있었다. 남궁중양은 유유히 광장을 지나갔다. "소왕야를 뵈옵니다!" 청년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추며 그에게 인사했다. 남궁중양은 화골선을 가볍게 젓는 것으로 인사를 받으며 천화영과 함께 북쪽으로 향하는 통로로 접어 들었다. 그곳은 조용했다. 철문이 나타날 때까지 한 사람도 발견할 수 없었다. 철문 앞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흑의노인이 그가 다가오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왕야, 어찌 또......?" 우측의 흑의노인이 의아한 듯 물었다. 천화영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또라니요?" 좌측의 노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호통쳤다. "건방지구나! 고작 은면사호(銀面四號) 주제에 누구에게 코웃음치는 거냐?" 이때 남궁중양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버님을 뵐 일이 있어 왔소. 문을 여시오." 그 말에 두 노인들은 의혹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았다. 잠시 후 좌측의 노인이 고개 를 저으며 말했다. "소왕야께서는 방금 전 노왕야(老王爺)를 뵙고 돌아가시지 않았소이까? 그런데 어찌하여 다시 오신 것 입니까?"


남궁중양은 섭선을 흔들며 말했다. "하루에 두 번 뵈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소? 미처 말씀 드리지 못한 것이 있어 다시 온 것이오. 그게 뭐가 이상하단 말이오?" 그의 음성은 약간 싸늘했다. 두 노인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다만......." "어서 문을 여시오." 남궁중양의 음성은 냉랭해졌다. "알겠습니다." 흑의노인들은 그제서야 뒤로 물러서며 철문의 고리를 잡아 당겼다. 그그긍! 철문은 마치 특수한 장치라도 되어 있는 듯 마찰음과 함께 빙글 돌아갔다. 남궁중양은 서슴없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천화영도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은면사호, 멈춰라." 흑의노인들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천화영은 움찔했다. 이때 남궁중양이 돌아섰다. 천화영은 애원 하는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 그러나 남궁중양의 말은 그녀를 실망시켰다. "밖에서 기다려라." 남궁중양은 무정한 한마디를 남기고 들어가 버렸다. 쿵! 철문이 굉음을 내며 닫혀버리자 천화영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야속한 분!' 남궁중양은 화려한 내전(內殿)에 들어서고 있었다. 내전의 벽은 온통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천장에는 보옥으로 치장된 공명등이 수십 개나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바닥에는 천축산 양탄자가 빈틈없이 깔려 있는가 하면 집기들은 하나같이 값비 싼 진품들이었다. 남궁중양은 내전을 빙 둘러보다가 대전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다른 곳과 달리 약간 높게 되어 있었는데 황궁에서나 볼수 있는 용상(龍床)이 놓여 있었다. '마치 황제의 거처 같군.' 대전 안쪽으로 통하는 월동문이 보였다. 그는 월동문을 통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역시 화 려하게 꾸며진 내실이 나타났다. 문 앞에는 두 명의 시녀들이 시립하고 있다 그가 나타나자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소왕야를 뵈옵니다!" "아버님을 만나뵈러 왔다." 남궁중양은 위엄어린 어조로 명했다. "명 받겠습니다." 시녀들은 고개를 숙이며 좌우로 길을 터주었다. 남궁중양은 섭선을 어루만지며 내실 안으로 들어섰다. 내실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가볍게 눈살을 찌 푸렸다. 어디선가 독한 약냄새가 풍겼던 것이다.


"......!" 방 안을 둘러보던 그의 눈길이 한곳에 멎었다. 순간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방 안쪽에 휘장이 처 져 있었다. 그 휘장 안에 침상이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침상 위에는 백발노인이 누워 있었다. 비록 휘장을 격하고 있었으나 그는 노인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노인은 비록 병색이 완연해 보였으나 과거의 웅후한 기상과 패기가 엿보이고 있었다. 마치 한 마리의 늙은 용과 같은 기도였다. 남궁중양이 충격을 받은 것은 직감적으로 그 노인이 바로 지난 날 제왕천의 천주였던 무림왕(武林王) 남궁후(白里侯)일지도 모른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저 분이 바로......!' 남궁중양은 격동으로 인해 전신에 힘이 빠지고 말았다. 이때 침상에 누워있던 노인이 인기척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은 주름살이 가득 잡혀 있었다. 그러나 분명 호방하고 대범한 기질이 엿보이는 얼굴이었다. 과연 지난 날 무림의 하늘로 군림했던 대영웅 남궁후가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기질을 갖고 있겠는가? 백발노인은 남궁중양을 발견하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 "중양. 무슨 일이냐? 방금 전에 다녀가지 않았느냐?" 남궁중양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노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남궁후는 흰눈썹을 치켜 올렸다. "무슨 일이 있느냐?" "아... 아버님......." 남궁중양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그는 완전히 깨달았다. 눈 앞의 노인이야말로 그의 친부(親父)였다. 그것은 혈족만이 느낄 수 있는 예감이었다. 한편 남궁후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남궁중양이 한 번도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적 이 없었다. 그는 뭔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아버님....! 소자를... 모르시겠습니까?" 남궁중양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남궁후는 마침내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눈을 부릅떴다. "너... 너는 중양이 아니구나!" 그도 알 수 없는 운명의 격동을 느낀 듯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대체 너는... 누구냐?" 남궁중양은 휘장을 젓히고 다가갔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 소자, 아버님의 아들 궁(穹)입니다!" 그렇다. 그는 바로 남궁궁이었다. 그는 천화영의 장포 속에 몸을 숨긴 채 이곳으로 잠입한 것이었다. 마침 남궁중양과 용모가 똑같았으 므로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그의 심장은 터질 듯이 박동하고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부친이 그의 눈 앞에 있었다. 그는 확 신할 수 있었다. 백발노인이야 말로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구, 궁이라니? 네가... 내 아들이란 말이냐?" 남궁후는 넋나간 듯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렇사옵니다! 소자... 아버님의 아들입니다. 비록 아버님께서는 소자의 존재를 모르고 계시나... 분명 한 아버님의 아들입니다." "뭐, 뭣이라고?" 남궁후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믿을 수 없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소자의 말씀을 들어 보시옵소서!" 남궁궁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고하기 시작했다. 제왕천이 멸망하던 날 불타버린 잔재 속에서 천치옹에 의해 구함을 받았던 일, 그에게 거두어진 후 무예를 수련했던 일, 그후 중원에 나왔다 돌아갔을 때 천치옹과 스승들이 누군가에 의해 의문의 피살 을 당했던 일.... 뿐만 아니라 그간 그가 겪었던 강호의 일들을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실로 파란만장한 이야기였다. 그의 이야기가 끝난 후. "오오! 정녕 네가... 내 아들이었단 말이냐?" 남궁후는 힘겹게 몸을 기울이며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은 나뭇가지처럼 말라 있었다. 그는 비쩍 마른 손으로 남궁궁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그의 손은 사시나무 떨 듯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노부도 모르는 사이... 또 다른 아들이 태어났다니, 이 어찌 운명의 장난이 아니란 말이냐?" 마침내 그의 노안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아버님!" 남궁궁은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란 외침을 발하며 남궁후의 가슴에 안겼다. - 아버님! 얼마나 불러보고 싶었던 이름인지 아십니까? 이제 곁을 떠나지 않겠 습니다!

소자, 다시는 아버님

실로 이십여 년만의 상봉이었다. 가혹한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한 번도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아니 서로의 존재조차 모른 채 떨어져 있었던 부자는 벅찬 감동에 사로잡혀 서로를 뜨겁게 부둥켜 안고 있 었다. ■ 왕도 3 권 제 23 장 천하를 구하는 법 ━━━━━━━━━━━━━━━━━━━━━━━━━━━━━━━━━━━ ①


자금성의 한 별원. 노을이 규방 안으로 밀려들고 있다. "호호! 오늘 밤 그 분께서 오신다." "벽하(碧霞)야, 청란(靑蘭)아!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 "꽃이 시들지 않게 물도 주고, 참! 목욕물에 향수는 뿌려 두었겠지?" 금라군주는 잔뜩 들떠 있었다. 그녀는 시녀들을 동원하여 부산을 떨고 있었다. 별원에 먼지 한 점 없 도록 대청소를 시킨 것은 물론, 방마다 화사한 꽃을 꽂아 두었다. 시녀들은 그녀의 명령에 그저 예! 예! 하며 이리저리 뛰어 다녀야 했다. "향옥아, 이제 목욕을 해야겠다." 금라군주는 시녀 향옥을 불렀다. 잠시 후 그녀는 부축을 받으며 욕실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백의미녀가 나타났다. 난화를 연상시키는 여인, 바로 백란화였다. 금라군주는 아미를 찡그렸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왔지?" 그녀는 쌀쌀하게 물었다. 백란화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군주, 너무 그러지 마세요. 소매가 온 것은 군주를 위해 특별한 향료를 드리기 위해서예요." "향료?" 금라군주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변한 백란화의 태도가 이상했다. 백란화는 소매 속에서 옥갑을 꺼내 보여주었다. "이건 백화궁 비방의 것으로 백 가지 꽃의 화즙(花汁)과 서른 여덟 가지의 진귀한 향료를 배합한 거예 요. 이 향료를 욕수에 타서 목욕하게 되면 피부가 옥처럼 빛날 뿐더러 은은한 향기가 배이게 된답니 다. 오늘 밤을 위해 소매가 군주언니께 드리려고 준비했답니다." 금라군주는 희색이 만면해졌다. "정말 날 위해 준비했단 말이냐?" "호호,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했잖아요? 특히 오늘 밤에는 군주언니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이 되어야 하잖아요?" 금라군주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 "호호! 백란화, 이제야 너도 날 이해하는구나." "군주언니, 제 방으로 가요." 백란화는 그녀의 손을 잡아 끌었다. 금라군주는 머뭇거렸다. "조금 있으면 그 분이 오실 텐데......." "걱정 마세요. 소매가 언니를 위해 특별히 신방을 꾸며 두었어요. 그 분에게도 이미 연락을 해두었으 니 신경 쓰실 필요가 없어요." 금라군주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분에게 연락했다고? 그럼 여기로 오시지 않는단 말이냐?"


"제 말을 못 믿는단 말인가요? 정말 섭섭하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저도 많이 생각했어요. 그러다 군주언니를 위하는 게 무엇인지를 깨달았어요. 그래서 나름대로 준비 했어요. 제가 잘못 했나요?" 금라군주는 활짝 웃었다. "알았어, 그럼 어서 가자꾸나." 밤이 이슥해졌다. 달빛은 자금성을 부드럽게 비치고 있다. 촤아아......! 금라군주는 정성껏 목욕을 하고 있었다. 대리석 욕조에는 비취빛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욕실 안에 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향기로운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금라군주는 욕조에 몸을 담근 채 팔다리를 씻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여인. 그녀의 나신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평생 험한 일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탓에 그녀의 피부는 빙결과도 같았다. 여인으로서는 완숙한 나이. 그녀의 육체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젖가슴은 손가락으로 누르면 팅! 하고 퉁겨낼 듯 탄력이 넘쳤다. 꽃잎을 얹어 놓은 듯한 유륜(乳輪) 위에는 앵두알같은 유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군살이라곤 한 점 도 없는 매끄러운 세류요, 여인의 신비를 품고 있는 하체는 욕수에 잠긴 채 이따금 수면 위로 살짝살 짝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드디어 그 분과 하나가 되는구나!" 금라군주는 도취된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가슴은 야릇한 기대감과 흥분으 로 인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살짝 유실을 건드렸다. "음."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짜릿한 쾌감이 전신으로 흐르는 것을 느끼며 살포 시 눈을 감았다. 별원. 금라군주의 규방은 온통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규방의 한쪽에 화사한 침상이 놓여 있었다. 침상 위에는 누군가 반듯이 누워 있었다. 머리카락을 해초처럼 풀어헤친 채 금침을 가슴까지 덮고 있는 여인, 백옥처럼 흰 피부와 고귀한 용모, 도취된 듯 몽롱한 눈동자.... 그녀는 분명 금라군주였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녀는 백란화의 욕실에서 목욕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하여 이곳에 누


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분께서 오실 때가 되었는데......." 금라군주는 가슴을 들먹이며 조바심 나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때였다. "하하! 금라, 오래 기다렸소?" 낭랑한 음성과 함께 방문이 열렸다.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에 대조적으로 흑삼을 차려입은 영준한 청 년이었다. "오셨군요!" 금라군주는 탄성을 발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금침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놀랍게도 그녀는 속 이 은은히 비쳐보이는 망사의를 입고 있었다. 얇은 망사의를 통해 풍만한 젖가슴이 보였다. 그녀의 젖가슴은 숨을 쉴 때마다 야릇하게 부풀어 오르 곤 했다. "아아, 어서 와요. 불군." 흑삼청년은 마라밀문의 소종사 위불군이었다. 그는 침상을 향해 다가갔다. 그의 눈에서는 마력적인 광 채가 흘러나왔다.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답군. 금라." 그는 침상가에 걸터앉았다. "고마워요, 불군." 금라군주는 콧소리를 발하며 그의 품에 안겼다. 위불군은 해초처럼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오늘밤 우린 한 몸이 될 것이오." 금라군주는 그의 품으로 더욱 파고 들었다. "불군, 꿈은 아니겠지요? 천녀 오늘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후후, 그건 나도 마찬가지요." 위불군은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얇은 망사의만 입은 그녀가 안겨들자 여체의 뭉클한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는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곧바로 그녀를 안은 채 침상으로 쓰러졌 다. "아." 금라군주는 한숨을 쉬었다. 위불군의 억센 육체가 그녀의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정말 아름답소, 금라." 위불군의 손은 서슴없이 망사의 속으로 들어왔다. 그는 곧 비단결처럼 매끄러운 여체를 만날 수 있었 다. 그는 손을 놀려 탄력이 넘치는 젖가슴을 움켜 잡았다. "아!" 금라군주는 탄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는 모습은 귀엽기 한량없었다. 위불군은 서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밤이면 그의 소유가 된다. 기왕이면 서서히,


완벽하게 그녀를 즐기고 싶었다. 그는 금라군주의 반응을 살피면서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은 젖가슴을 오랫동안 주무 르다 조금씩 아래로 움직였다. 비단처럼 매끄러운 아랫배를 원을 그리듯 애무하면서 차츰차츰 여인의 비지를 향해 공략하기 시작했 다. 같은 시각. "그이가 오실 때가 되었는데?" {{}}금라군주는 목욕을 끝낸 후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있었다. 그녀는 한 장의 천만을 두 르고 있었다. 가히 뇌쇄적인 육체였다. 우아하게 빠진 목선을 따라 봉긋한 가슴은 천을 뚫고 나올 듯한 탄력을 느끼게 했다. 피부는 장미빛 으로 물들어 있었고, 곧게 뻗어내린 다리는 마치 대리석처럼 매끈했다. 한 줌밖에 안될 정도로 가느다란 허리 아래로는 급격히 풍요의 곡선을 그린 둔부가 받쳐주고 있었다. 실로 사나이의 혼백을 앗아갈 정도로 아름다운 몸매였다. 금라군주는 거울을 보며 흩어져 있는 머리결을 손질하고 있었다. "아!" 문득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몸을 껴안은 것이다. 그녀는 눈을 살포 시 감으며 물었다. "불군... 당신인가요?" "나 말고 또 누가 있겠소? 금라." 부드럽고 낭랑한 음성. 듣기만 해도 가슴이 두 방망이질을 치고 달콤한 기분에 빠지게 만드는 음성. 금라군주는 그만 온몸이 녹아 내리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꼬았다. "오늘밤은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구려." 위불군은 속삭이며 등 뒤에서 손을 뻗어 그녀의 젖가슴을 슬며시 어루만졌다. "으응." 그녀는 콧소리를 발하며 손을 뒤로 뻗어 위불군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녀의 나신을 감싸고 있던 천이 소리없이 흘러내렸다. 신의 조각품과도 같은 나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음." 위불군은 신음을 흘리며 번쩍 그녀의 나신을 안아 들었다. 그는 침상을 향해 걸어가 그녀를 내려놓았 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그는 뜨거운 숨결을 금라군주의 하얀 목덜미에 부으며 감미롭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금라군주는 입술을 벌리며 가슴을 들먹거렸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그녀는


쾌감을 느끼며 사지 를 버둥거렸다. 온몸이 열탕에 빠진 듯 달아올랐으며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침내 그녀는 참지 못하고 위불군의 목을 껴안았다. 위불군은 가만 있지 않았다. 그는 터질 듯이 부풀어 있는 금라군주의 가슴을 입술로 더듬었다. 그의 입술이 스칠 때마다 금라군주는 온몸을 퍼득였다. 이제 위불군의 입술은 그녀의 희디 흰 배를 지나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흐윽." 금라군주는 거의 혼미지경이 된 채 온몸을 떨었다. 폭발할 것만 같은 쾌락에 그녀는 눈을 꼭 감은 채 미지의 두려움과 흥분으로 몰입되고 있었다. 마침 내 그녀는 사나이의 무거운 체중을 느꼈다. 위불군이 옷을 벗고 그녀의 나신 위로 몸을 실은 것이다. 그녀는 사지를 벌려 그를 끌어 안았다. "아아... 사랑해요!" 침실이 후끈 달아올랐다. 금라군주는 자신의 비밀스런 곳으로 뜨거운 기운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느 끼며 눈을 치떴다. 날카로운 통증! 그것은 그녀가 완전한 여인으로 들어서는 첫번째 관문이었다. ② 별원. 침실 안에는 열풍이 불고 있었다. 망사의는 어느새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알몸이 된 금라군주는 활처 럼 몸을 퉁기고 있었다. 그녀의 눈부시게 흰 나신 위로 위불군의 입술이 불꽃처럼 뜨거운 기운을 쏟 아붓고 있었다. 금라군주는 입술을 악물고 있었다. 그녀는 신음을 내지 않으려 했으나 그건 불가능했다. 이따금 그녀 의 입에서 기성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온몸이 번들거렸다. 위불군의 입술이 전신 곳곳을 빠짐없이 누비고 지나간 흔적이었다. 그녀는 아득한 심정이 되어 손으로 금침을 잡아 당겼다. 갑자기 다리가 벌어졌다. '아... 안돼!' 그녀는 본능적으로 다리를 오므리려 했다. 그러나 위불군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무릎으로 그녀의 다리 사이를 파고 들며 강한 힘으로 다리를 벌어지게 했다. '아아!' 금라군주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 위불군은 그녀의 다리가 힘없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흡족 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입성을 위해 자세를 잡았다. 쿵! 쿵! 쿵......!


갑자기 침실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위불군은 깜짝 놀랐다. 막 금라군주의 몸으로 들어가려던 그는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누... 누구냐?" 금라군주는 아미를 찌푸리며 외쳤다. 문 밖에서 앳되고 귀여운 소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홍하예요, 언니." "홍하라고?" 금라군주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도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홍하공주(紅霞公主)는 황제의 일곱 공주 중 막내였다. 그녀는 황실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었으며 금 라군주를 각별히 따르고 있었다. 금라군주는 당황한 음성으로 물었다. "홍하가... 무슨 일이냐?" "으응, 놀고 싶어 왔지 뭐, 어서 문 좀 열어줘요."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 기세였다. 금라군주는 난감한 표정으로 위불군을 바라보았다. 위불군의 얼굴은 그야말로 볼만했다. 그녀의 몸에 올라탄 채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낭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불군, 어쩌지요?" 금라군주는 슬며시 그의 근육질로 뭉쳐진 가슴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위불군의 눈살이 찌푸러졌다. 그 는 아쉬운 듯 금라군주의 나신을 내려 보았다. 마치 다 잡아놓은 먹이를 입 안에 넣었다가 뱉아야 하 는 꼴이 아닌가. 그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어쩔 수 없군. 다음 기회를 볼 수밖에." 위불군은 서둘러 옷을 입은 후 창문을 통해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직후. "흐흑!" 금라군주는 오열을 터뜨렸다. 그 순간 문이 열리며 누군가 급히 들어섰다.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천화영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금라군주, 즉 백란화의 어깨를 가만히 감 싸 안았다. "동생......." 이때였다. "백란화, 대체 무슨 일이야?" 앙증맞은 음성이 들려왔다. 천화영의 뒤를 이어 십이삼 세쯤 되어 보이는 귀엽게 생긴 궁장소녀가 들 어왔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어떻게 한 거야?" 그녀는 방 안에 백란화가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금라군주가 있는 것을 보고 어리


둥절했다. 사실 그녀는 백란화의 부탁을 받고 연극을 했던 것이다. "공주님, 저예요." 백란화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그러자 그녀의 본래 얼굴로 돌아왔다. "신기하네? 어떻게 얼굴이 바뀔 수 있지?" "그건,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백란화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비록 스스로 나선 것이긴 했으나 순결한 처녀로서 위불군에 게 당했던 것은 너무도 수치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꼭 내게 알려줘야 해?" "물론이에요, 공주님." "응, 그럼 이만 가볼게." 홍하공주는 랄라라 콧노래를 부르며 깡총거리며 밖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자신이 한 연극으로 백란화 가 위기를 넘겼다는 것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흐흑!" 백란화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동생......." 천화영은 그녀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같은 여인으로서 그녀의 슬픔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다. 금라군주는 발그레 상기된 얼굴로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 위불군은 그녀의 곁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금라군주가 알몸으로 팔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방금 전 치른 격렬한 정사로 인해 금라군주는 완전한 여인으로 탈바꿈했다. 위불군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금라군주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가책의 빛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음양마유공(陰陽魔幽功)의 방중술을 사용했다. 결국 본의 아니게 군주의 순결을 깨뜨리고 말았구나.'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과연 백란화의 말이 맞았다. 군주의 체내에 마기(魔氣)가 흐르고 있었다. 이제 마기를 깨끗이 제거했 으니 군주는 제 정신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는 한숨을 쉬었다. 어려운 일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군주에게 지금까지의 일들을 설명하는 일이었다. 과연 뭐라고 할 것 인가? 이유가 어찌되었든 군주는 그와 정사를 치르지 않았던가. '할 수 없지. 일단 부딪혀 볼 수밖에.' 그는 손가락으로 금라군주의 왼쪽 젖가슴 밑 유근혈을 눌렀다. "음." 금라군주는 신음을 발하며 몸을 떨었다. 그녀는 반짝 눈을 떴다.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자신이 웬 사나이의 가슴에 안겨 있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멋!"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그... 그대는 위불군! 감히...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은 물론 위불군도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 아닌가? 금라군주의 눈에 서려있는 몽롱했던 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떨어졌다. 위불군은 탄식을 토해내며 말했다. "군주, 소생은 위불군이 아니외다." "뭐, 뭐라고?" 금라군주는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위불군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변했다. 그는 바로 남궁궁이었다. 남궁궁은 침상에서 내려온 후 얼른 옷을 입었다. "용서하시오. 소생은 강호의 일개 무부로 남궁궁이라 하오이다." 그는 정중히 읍했다. "남궁... 한데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금라군주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하복부에 은은히 느껴지는 동통! 그것은 곧 순결이 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남궁궁은 더 이상 그녀의 알몸을 보기가 민망했다. 비록 그녀와 뜨거운 정사를 나누었으나 그것은 어 디까지나 그녀의 마성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금침으로 그녀의 몸을 덮어주었다. "군주께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소이다." 그는 곧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위불군이 의도적으로 그녀에게 접근했던 것에서, 그가 사술을 걸어 심령을 제압했던 것, 그리고 명조를 삼키기 위해 그녀를 이용하여 어떤 일을 했는지도 자세히 이야기했다. "아아! 어찌하여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금라군주는 안색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진 채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남궁궁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소생, 군주를 범한 죄... 어떤 벌을 내려도 달게 받겠소이다." 그의 말투는 엄숙했다. 실제로 그는 금라군주가 원한다면 모든 것을 감수할 생각이었다. "......." 금라군주는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마음 속은 혼란하기 그지없었다.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녀는 남궁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에게 순결을 빼앗겼으니 상실감이


이만저만이 아 니었다. 문득 그녀의 얼굴에 살기가 떠올랐다. "내 그대를 죽이고 말겠어요!" 그녀는 이를 갈며 말했다. 남궁궁은 고개를 숙였다. "군주의 마음이 그렇다면 뜻대로 하시오." 금라군주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벽에 걸려있는 패검을 뽑아 들었다. "고개를 들어요!" 남궁궁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군주의 마음이 풀릴 수만 있다면 죽음을 각오하겠소이다." "......!" 남궁궁의 부드러운 눈빛을 접한 순간 금라군주는 그만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그에게서는 아무런 악의도 엿볼 수가 없었다. 아니, 도리어 한없이 푸근하고 정감이 넘치는 것이 아닌가? '아.... 이 사람은 어찌하여 죽음을 받아 들이려 한단 말인가?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도리어 날 구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달게 죽음을 받겠다니.' 툭! 그녀의 손에서 힘이 빠지며 패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눈물을 떨구었다. "틀렸어요. 이 몸은... 그대를 죽일 수가 없어요." 남궁궁은 한숨을 쉬었다. 금라군주는 문득 입술을 깨물며 그를 바라보았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대는... 이 금라를 어떻게 할 건가요?" 남궁궁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하다니? 그 점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 이 몸은 그대의 것이 되고 말았어요.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하나... 당신이 거부하 면 평생을 홀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금라군주는 눈물을 떨구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남궁궁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금라군주는 천하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의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그의 눈에는 그저 가냘픈 한 여인으로만 보였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군주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기꺼이 군주를 모시겠소이다." 금라군주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남궁궁은 그녀 에게 다가갔다. "모든 게 하늘의 뜻인지도 모르겠소이다. 군주." "아!" 금라군주는 탄성을 발하며 그의 가슴에 몸을 던졌다. 남궁궁은 그녀의 매끄러운 등을 쓰다듬어 주었 다. 일국의 황녀.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사랑스러운 여인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③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았다.


변함없이 눈부신 태양이 온누리를 비추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경천동지할 사건이 세인들을 경악케 했다. 불과 하루 사이에 황궁에 엄청난 변란이 일어난 것이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병권(兵勸)을 장악하고 있던 금군통령을 비롯하여 구문제독부의 제독, 그리고 수 십 명에 이르는 장군(將軍)들이 갑작스럽게 체포된 것이었다. 그들은 병권을 박탈당했으며 모든 직위가 해제되었다. 뿐만 아니라 각 부처의 관직들도 완전히 개편 되었다. 그것은 실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놀라운 격변은 황명에 의해 새벽이 오기도 전에 이루어졌다. 북경의 백성들은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한결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깜깜하기만 했다. 황실에서도 거기에 대해서 일언반구의 말도 없었다. 어찌 알았겠는가? 이 사건이 없었다면 장차 황실의 대권이 음모자의 손에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소림사(少林寺). 천년무림의 태두인 소림사에 서서히 풍운이 일어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소림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실로 다양한 부류였다. 대부분은 평민 복장을 하고 있었으나 승려를 비롯하여 도사, 장사꾼, 심지어는 거지에 이르기까지 다 양한 부류들이었다. 때는 여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중원의 대기는 서서히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소림사의 한 대전. 대형 탁자를 가운데 두고 십수 명의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인물은 소림의 삼십삼대 장문인 천법선사(天法禪師)였다. 그의 양옆에는 회색승 포를 입은 네 명의 노승들이 앉아 있었다. 그밖에도 각각 다른 행장의 중년인, 또는 노인들이 빙 둘러 앉아 있었다. 형형한 눈빛을 하고 있는 그 들은 기실 쟁쟁한 위명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그들이야말로 당금 무림의 구파일방(九派一幇)을 이끌고 있는 장문인들이었던 것이다. 탁자의 한쪽에는 한 쌍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청년은 각진 얼굴에 영준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여인은 검은 옷을 입은 눈빛이 총명한 미녀였다. 그들은 다름 아닌 남궁궁과 흑란화 구연령이었다. "아미타불.... 이제 운명의 날은 점차 다가오고 있소이다. 우리 구파일방은 더 이상 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소이다." 천법선사는 중인들을 둘러보며 무겁게 말했다.


"......." 중인들은 침묵을 지키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천법선사의 말이 이어졌다. "남궁대협을 통해 모든 음모를 알게 되었소이다. 노납은 무림을 대표하여 먼저 남궁대협께 감사를 드 리는 바요." 천법선사는 몸을 일으켜 남궁궁을 향해 공손히 합장했다. 남궁궁은 황급히 일어나 답례하며 말했다. "소생은 오직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황송합니다." 그의 행동은 겸허했다. 중인들은 그의 태도에 감동을 받았다. 이미 그들은 남궁궁이 지난 날 제왕천주 였던 무림왕 남궁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구파일방은 그의 원수인 셈이었다. 그런데 그는 원수를 위해 무림의 음모를 밝혀내는 노 고를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남궁궁은 중인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소생 한마디 하겠습니다. 사실 당금 무림이 위기에 처한 것은 여러분께도 일말의 책임이 있습니다. 과거 궁천무의 계략에 넘어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말투에는 감정이 개입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담담히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구방일방의 장문인들은 가슴이 찔리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남궁궁은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과거는 이미 지나갔소이다. 해묵은 일을 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제는 여러분께서 무림에 진 빚을 갚아야 할 때입니다. 모쪼록 무림에서 마도를 물리치는데 나서주셨으면 합니다." "......!" 중인들의 얼굴에 부끄러움이 떠올랐다. 그들은 남궁궁의 대해와도 같은 아량에 커다란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남궁궁은 고개를 돌려 흑란화를 바라보았다. "구낭자께서 이미 대계를 세워놓았습니다. 그것은 이마제마(以魔制魔)와 만천과해(萬天過海), 두 가지 계입니다." "......?" 중인들은 내심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적을 잡으려면 먼저 적장을 베고, 뱀을 잡으려면 머리부터 제거하라 하였습니다." 남궁궁의 음성은 낭랑하게 대전을 울렸다. "궁천무는 그 동안 만천하의 이목을 속이고 대인군자로 행세해 왔습니다. 따라서 지금 그 자의 정체를 밝힌다면 무림은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그는 청산유수처럼 설명했다. "다시 말해 그 자의 정체를 폭로하게 되면 그 말을 믿는 자와 불신하는 자들이


논쟁을 벌이게 되고 분쟁마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자로 하여금 기회를 주게 됩니다." 천법선사는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그렇다면 시주의 뜻은......?" "소생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풍운맹의 힘을 우리쪽으로 끌어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적의 힘으로 적을 제거해야 합니다." "......?" 중인들은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는 듯 눈을 껌벅거리만 했다. "여러분들은 아직 나설 때가 아닙니다. 전력을 최대한 노출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소림을 중심으 로 전력을 정비하여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흑천풍(黑天風) 소속의 정예고수들도 합류하게 될 것입니 다." "그럼 시주께서는 어찌 하실 작정이오?" 천법은 궁금한 듯 남궁궁을 바라보았다. "소생은 풍운부로 가겠습니다. 그 동안은 흑란화 낭자가 이곳에 머무르면서 군사(軍師)의 임무를 수행 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흑란화 낭자의 지시에 따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협의 뜻을 따르겠소이다."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은 일제히 그렇게 말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만일 누군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자신의 눈을 의심했을 것이다. 어찌 구파일방 의 장문인들이 한 청년의 말에 이토록 굴종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무림사 이래 일찍이 볼 수 없 었던 일이었다. "그럼 소생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남궁궁은 좌중을 향해 포권한 후 성큼성큼 걸어 대전을 빠져 나갔다. 각파의 장문인들은 일제히 몸을 일으켜 그가 사라질 때까지 예를 표했다. ■ 왕도 3 권 제 24 장 음모와 책략 ━━━━━━━━━━━━━━━━━━━━━━━━━━━━━━━━━━━ ① 풍운맹에는 전운(戰雲)이 감돌고 있었다. 마라밀문이 풍운맹을 향해 마수를 뻗어오고 있었다. 게다가 군림천하를 선언한 구중천이 노골적으로 풍운맹을 무너뜨리겠다고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이제 풍운맹은 비상이 걸렸다.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낙성전(落星殿). 내전에 한 쌍의 남녀가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바로 남궁궁과 낙화운이었다. "가가의 말이 맞았어요. 놀랍게도 팔대세가는 제왕천을 무너뜨리는데 직접적으로 개입했어요." 낙화운은 크게 풀이 죽어 있었다. 그녀는 남궁궁이 제왕천주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면목이 서 지가 않았다. 남궁궁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팔대세가와 궁천무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아 보았소?" 낙화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실 팔대세가가 성명(成名)한 데에는 궁천무의 힘이 크게 작용했어요." 낙화운은 안색을 흐리며 설명했다. 풍운팔대세가(風雲八大勢家)는 본래 강호의 평범한 군소방파에 불과했었다. 그들은 비록 각 방면의 무 공에 일가를 이루긴 했지만 수백 년 동안 기반을 닦아왔던 명문인 구파일방의 세력에 비할 바가 못되 었다. 따라서 그들은 팔대세가가 무림의 중심세력이 되는 것을 염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구파일방의 그늘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럴 즈음 한 인물이 팔대세가의 가주들을 찾아왔다. 그가 바로 궁천무였다. 그는 팔대세가의 야심을 이용해 한 가지 음모를 획책했다. 그것은 팔대세가의 가주로 하여금 제왕천에 잠입하게 한 것이었다. 당시 궁천무는 제왕천주 남궁후의 유일한 지기(知己)였다. 따라서 제왕천에 대해서 손바닥 들여다 보 듯 훤히 알고 있었다. 남궁후는 무림사상 가장 패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무로써 해결해 왔다. 그래서 늘 문(文)에 대해 아쉬워했다. 그런 남궁후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궁천무는 그에게 한 가지 건의를 했다. 그것은 제왕천에 팔대무상(八大武相)은 있으나 문상(文相)이 없으니 팔대문상을 영입하자는 것이었다. 궁천무는 그의 제안을 쾌히 수락했다. 무림을 장악한 그로서는 평화시에는 칼보다는 붓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궁천무는 팔대세가 가주들을 설득했다. 그는 장차 팔대세가가 무림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유혹 했다. 결국 팔대세가의 가주들은 그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팔대문상은 바로 팔대세가의 가주들이 변신한 것이었다. 그들은 무공을 철저히 숨긴 채 제왕천의 문 상으로 화신했다. 이후 궁천무는 팔대문상을 중심으로 은밀히 제왕천에 내분을 일으켰다. 그 결과


제왕천의 세력 중에 서 절반 이상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즈음 무림에서는 야망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제왕천이라는 벽이 그들을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궁천무는 이 점을 이용하여 신비인을 가장하여 각대문파의 장문인들에게 제왕천을 제거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각대문파는 오랫동안 제왕천에 눌려 왔으므로 그의 설득에 하나둘 넘어갔다. 결국 경천동지할 음모는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만 해도 제왕천이 무너지리라는 생각은 아무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토록 견고하던 제왕성도 내반(內反)과 외침(外侵)으로 인해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제왕천이 와해된 후 팔대문상으로 신분을 속여왔던 팔대세가의 가주들은 마침내 무림에 자신들의 힘 을 과시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뜻을 이룬 셈이었다. "......." 낙화운의 긴 설명이 끝났다. 남궁궁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는 제왕천이 불바다가 되 어 무너져 내리는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한참 후 그는 침중하게 물었다. "그렇게 된 것이군. 한데 팔대세가는 왜 지금까지 궁천무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오?" "그것은......." 낙화운의 얼굴에 그늘이 덮였다. "당시 팔대문상은 궁천무의 음모에 동조한다는 뜻에서 모두 한 알의 단약(丹藥)을 복용했어요. 그런데 바로 그 단약이 만성독약이었어요." 남궁궁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 때문에 협박을 받아왔단 말이오?" "네. 그런데 얼마 전 궁천무가 해약을 주었어요." "그게 정말이오?" "네, 하지만 그것은 함정에 불과했어요. 지난 번보다 더욱 지독한 만성독약이었어요." 남궁궁은 크게 놀랐다. 그는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운리가 제조한 독약이 바로 그것이었구나.' 그는 모용운리가 궁천무의 명으로 독약을 제조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팔대세가의 가주들에게 사용된 것이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그밖에 다른 건 없었소?" "글쎄요......" 낙화운은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부친에 대해 죄 책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음, 이 모든 일들을 궁천무가 단독으로 행했는지를 알고 싶어서요."


낙화운의 안색이 변했다. "그건......." 남궁궁은 그녀가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얘기해 보시오. 무림의 안위가 달린 일이오." 낙화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한참 망설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언젠가 아버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궁맹주의 배후에 누군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남궁궁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가 누군지 말했소?" "그건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남궁궁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뇌리 속에는 복잡한 상념이 교차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몸을 일으켰다. "오늘 밤 당신의 부친을 만나 봐야겠소." "네?" 낙화운은 눈을 크게 떴다. 남궁궁은 신형을 날렸다. 낙화운이 뭐라 말하려 했으나 이미 창문을 열고 사라진 뒤였다. "아!" 낙화운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안타까운 심정을 누를 길이 없었다. 남궁궁은 모용운리의 처소에 들어섰다. "오셨군요, 가가." 남궁궁은 그녀가 안겨들자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운리, 이곳을 떠나야겠다." 모용운리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남궁궁은 그녀의 아랫배가 눈에 띄게 부른 것을 보고 사랑스런 느낌이 들었다. 그는 슬며시 그녀의 배를 어루만졌다. "어머." 모용운리는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수줍어 하는 여인의 모습은 백 번을 보아도 아름다운 법이다. 남궁 궁은 그녀의 뺨에 입술을 맞춘 후 다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해약은 어찌 되었느냐?" 모용운리는 미소 지으며 품 속에서 옥병 하나를 꺼냈다. "다행히 얼마 전 완성했어요." 남궁궁은 옥병을 받아 소매에 갈무리한 후 빙긋 웃었다. "수고했소. 이렇게 빨리 만들게 될 줄은 몰랐는데." 모용운리는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그런데 이곳을 떠나야 하나요?" 남궁궁은 그녀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건 운리와 우리의 아기를 위해서요." "......?" "머지 않아 풍운맹에는 큰 혼란이 벌어질 거요. 그러니 이곳을 떠나는 것이 안전하오.


우리의 아기를 이곳에서 낳을 수는 없지 않소?" "그렇군요." 모용운리의 얼굴이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남궁궁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소림사로 가시오. 그곳에 가면 흑란화가 있을 것이오. 당분간 그녀에게 의지하면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오." "그럼 가가께서는?" "난 이곳에서 할 일이 있소. 걱정 마시오. 아무 일도 없을테니." 모용운리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눈을 사르르 감았다. 남궁 궁은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순종적인 여인. 세상의 어떤 남자가 그런 여인을 좋아하지 않겠는가? ② 삼라만상이 잠든 밤. 한 노인이 낙성전의 내전에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서성거리고 있다. 가슴까지 늘어진 흰 수염과 훤 칠한 키, 청수한 얼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존경심이 일게 하는 인상이었다. 낙성신군(落星神君) 낙위군(落偉君). 바로 노인의 명호였다. 낙위군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초조한 표정으로 이따금 문을 바라보았다. 똑똑!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흠칫 놀라며 돌아섰다. "들어 오시구려." 문이 열리며 들어선 것은 남궁궁이었다. 그는 낙화운에게 미리 통보한 후 낙위군을 방문한 것이었다. "신군을 뵈오이다." 그는 정중히 포권했다. "령주께서 오셨구려. 한데 무슨 일인지?" 낙위군은 다소 불안한 듯했으나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이미 자신의 딸이 남궁궁과 깊은 관계 가 있다는 것을 안 터였기 때문이다. 남궁궁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 문득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신군, 똑똑히 보십시오. 소생의 얼굴을 보고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지 말이오." "......?" 낙위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남궁궁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이 서서히 시커 멓게 죽어갔다. "그, 그대는!" "후후, 어떤 사람을 닮은 것 같지 않소?" "그, 그럼?" 낙위군의 뇌리에는 한 거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쳤다. "제왕천주......!"


"다행이오. 아직도 선친을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오." 남궁궁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화살이 되어 낙위군의 가슴에 박혔다. "그, 그럼 자네는......!" 낙위군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듯했다. "소생은 그분의 아들 남궁궁이오." "으으!" 낙위군은 충격을 받은 듯 휘청거렸다. 그러나 곧 정신을 가다듬고 안색을 바로했다. "그럼... 노부를 만나고자 한 것은 복수하기 위해서인가?" 낙위군의 옷자락이 바람을 안은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여차하면 신공을 펼칠 듯한 기세였다. 남 궁궁은 담담히 말했다. "모든 것은 신군에게 달려 있소이다." "내게 달려 있다고?" 남궁궁은 신광을 번뜩이며 말했다. "소생은 신군을 비롯한 팔대세가의 가주들이 제왕천의 공격에 가담한 것을 알고 있소이다. 따지고 보 면 모두 부친의 원수인 셈이오. 하지만 생각을 돌리기로 했소이다. 제왕천을 궤멸시킨 원흉을 찾아내 기로 했소." 낙위군은 크게 놀란 듯했다. "원흉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남궁궁은 기소를 흘렸다. "후후, 신군. 이제 모든 것을 밝힐 때가 되었소. 궁천무가 천하의 위선자라는 것을 알고 있소이다. 이 제 가증스런 위선의 탈을 벗겨야 하오." "......!" 낙위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남궁궁은 그에게 다가가며 또박또박 말했다. "팔대세가는 지금까지 그 자의 손바닥 위에서 춤추었소. 하지만 이제야말로 무림을 위해 떨쳐 나올 때 가 되었소." 낙위군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곧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럴 순 없네. 절대로......." 남궁궁은 비웃음을 흘렸다. "후훗, 이것 때문이오?" 그는 소매 속에서 옥병을 꺼냈다. "그건, 무엇인가?" "소생은 이미 팔대세가의 가주들이 보름마다 한 번씩 궁천무에게 해약을 받지 않으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소이다." "그, 그걸 어떻게?" 남궁궁은 옥병을 들어 보였다. "신군, 이게 무엇인지 아시오?" 남궁궁은 정기어린 눈빛을 발하며 말했다. "여기 들어있는 환약들은 가주들의 체내에 들어있는 만성독을 말끔히 제거시킬 수


있소이다." "......!" 낙위군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짧은 동안에 안색이 수십 차례나 바뀌었다. "노, 노부는 믿을 수 없다!" 이때였다. "믿으셔야 되요! 아버님!" 갑자기 들이닥친 것은 낙화운이었다. "운아야!" 낙위군은 크게 놀랐다. 낙화운은 그의 소매에 매달리며 애원했다. "아버님! 남궁가가의 말씀은 사실이에요. 제발 믿으셔야 해요." "......!" "정말이에요. 가가를 믿으세요. 아니, 그보다도 아버님은 정말 마도들에게 중원무림을 넘겨주실 생각 인가요? 제발 이제는 바른 길로 돌아서셔야 해요." 그녀는 바닥에 엎드리며 애원했다. 낙위군의 안면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가슴이 진탕하고 있었다. '저것이 과연 해약이라면... 이번 기회에 모든 것을 돌이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남궁궁은 차갑게 말했다. "신군, 기회는 한 번 뿐이오. 이번에 정도로 돌아서지 않으면 낙성세가는 무림사에 영원히 오점을 남 기게 될 것이오." "정말... 해약이 틀림없단 말인가?" "하하! 소생은 허언을 하지 않는 사람이오." "으으음." 낙위군은 무거운 신음을 발했다. 남궁궁은 옥병에서 한 알의 청색 환약을 꺼내 던져주었다. "직접 시험해 보면 알 것이오." 낙위군은 환약을 받아들고 한동안 갈등어린 표정이었다. "자네를 믿어 보겠네." 마침내 결심을 굳힌 듯 그는 환약을 삼킨 후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낙위군은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남궁궁을 노려보았다. '서... 설마?' 낙화운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낙위군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남궁궁을 향해 다가가더니 덥썩 손을 잡았다. "체내의 독이 깨끗이 제거되었네." "아!" 낙화운은 탄성을 터뜨렸다. 남궁궁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소생을 믿었다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을 것이오." 낙위군은 면목이 없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소협의 말에 따르겠네.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하겠네." "궁천무의 배후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는지 말해 주시오." 낙위군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아! 부끄러운 일이네. 우리 팔대세가는 무림의 중죄인일세. 목숨이 아까와


궁천무를 따른 것도 그 렇지만 궁천무의 배후에 마라밀문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네." "마라밀문!" 남궁궁은 놀라 부르짖었다. "그, 그게 사실이오?" "사실이네. 궁천무는 마라밀문과 긴밀한 관련이 있네. 그 이상은 알 수 없지만 마라밀문이 중원무림에 진출한 것도 그와 모종의 약정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네." "으음, 그럴 수가." 남궁궁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궁천무는 정인군자로 무림에 알 려진 위인이었다. 그러나 명성만 가지고 무림을 장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처럼 큰 힘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마라밀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궁궁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신군께서 하실 일이 있소이다. 먼저 해독약을 중독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오." 낙위군의 눈에 정광이 뻗어나왔다. "알겠네. 그럼 다음에는?" 그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했다. "팔대세가의 가주들을 설득하여 궁천무를 고립시켜야 하오." 낙위군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남궁궁은 문득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천하인들을 속여온 궁천무지만 그도 무림을 위해 한 가지 도움이 되는 일은 한 셈이오." "무슨 말인가?" "풍운맹을 중심으로 무림의 힘을 모으지 않았습니까? 결국 그를 제거하게 되면 풍운맹의 힘으로 마라 밀문을 상대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낙위군은 아! 하고 탄성을 발했다. "하지만 그자에게도 추종자들이 있네. 그들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걸세." "팔대세가에서 그들을 맡아 주셔야 합니다." 낙위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최선을 다해 보겠네." "알겠습니다. 그럼 소생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후사는 신군께서 잘 처리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는 포권한 후 밖으로 걸어나갔다. "어버님, 소녀도 가보겠어요." 낙화운은 급히 남궁궁을 뒤쫓아 나갔다. ③ 철산(鐵山). 풍운맹의 웅대한 성채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 밤바람이 봉우리를 훑고 지나간다.


검은 장포를 바람에 날리며 한 인영이 서 있었다. 기이한 것은 인영의 모습이 흐릿하다는 것이었다. 마치 흐릿한 안개에 싸여있는 듯했다. 인영은 비록 흑색장포를 입고 있었으나 바람이 불 때마다 미려한 몸매가 드러나곤 했다. 인영은 얼굴 에 검은 면사를 드리우고 있어 용모를 알 길이 없었다. 인영은 오랫동안 풍운맹을 바라보다 고개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조각달이 희미하게 빛 을 발하고 있었다. "올 때가 됐는데......." 인영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실로 기이했다. 성별을 구별할 수 없는 음성이었다. "마야부인(魔爺夫人), 불초가 왔소이다." 어디선가 한 가닥 유현한 음성이 들려왔다. 인영, 즉 마야부인은 서서히 돌아섰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녀의 앞에는 유삼을 입은 중년인이 서 있었다. 선비처럼 고아하고 인자해보이는 청수한 중년인- 놀랍게도 그는 풍운맹주 궁천무였다. 마야부인의 면사가 가볍게 흔들렸다. "천무, 감히 약속을 어기다니. 그러고도 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마야부인의 음성에는 살기가 배어 있었다. 궁천무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부인, 명이란 하늘에 달린 것이거늘 어찌하여 함부로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구려." "호호호호홋!" 마야부인은 허리를 흔들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에는 가공할 마기가 서려있었다. 만일 공력이 약한 자라면 그 웃음 만으로도 기혈이 역류할 정도였다. "천무, 대담해졌구나? 삼십 년 전만 해도 마라밀문의 일개 군사(軍師)에 불과했던 네가 감히 반역을 꿈꾸니 말이다." 궁천무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부인, 과거는 흘러간 것이오. 더 이상 논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오." 마야부인은 허리를 움켜쥐고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이젠 자신이 생겼단 말이지?" 궁천무의 태도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바라 보았다. "부인! 자신을 돌아보시오. 배신한 것은 부인도 마찬가지 아니오? 부인이야말로......." "닥쳐라!" 마야부인의 입에서 냉갈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궁천무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후후, 마라밀문 대종사의 부인이 지난 날 우내오천 중 한 명인 불사불생인(不死不生人)이란 사실을 세인들이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외다." 불사불생인! 우내오천 중 유일한 생존자가 바로 마야부인이었다니, 가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야부인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궁천무! 착각하지 마라. 이 몸은 중원무림을 배신한 것이 아니다. 다만 부군의 뜻을 따랐을 뿐이다. 불사불생인이기에 앞서 마라밀문의 마야부인인데 어째서 배신을 했다는 거냐?" 그녀는 면사 사이로 얼음가루가 풀풀 날리는 음성으로 추궁했다. "하지만 너는 지난 날 제왕천을 무너뜨린 후 무림을 반분하기로 본문과 맹약하지 않았느냐? 남아일언 중천금이거늘, 너같이 신의없는 자가 어찌 대장부라고 할 수 있겠느냐?" 궁천무는 비웃음을 흘렸다. "맹약? 후훗, 그야말로 듣기 좋은 소리군. 과연 맹약을 맺은 동지에게 만성독약을 먹이는 것도 예의라 할 수 있을까?" 마야부인은 흠칫했으나 곧 싸늘하게 받아쳤다. "흥! 이제 알겠군. 너는 해독약을 구한 모양이구나. 그래서 감히 본문과 대적할 마음을 품은 게로구 나? 그렇지 않느냐? 꼬마야?" 당금 무림에서 궁천무에게 꼬마란 칭호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천무는 모욕을 느낀 듯 안색이 변했다. "마야부인!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것 같소이다." "호호호! 어리석은 꼬마, 정녕 죽기로 작정한 모양이구나." "그야 두고볼 일이오." 궁천무는 팔짱을 낀 채 뇌까렸다. "호호! 그렇다면 네 명이 얼마나 긴지 시험해 봐야겠다." 헐렁한 소매 속에서 하얀 손이 뻗어 나왔다. 마야부인이 손을 살짝 흔들자 사방으로부터 기척도 없이 십여 개의 인영이 솟아 올랐다. 그들은 궁천무를 가운데 두고 포위해 버렸다. "제왕십혼(帝王十魂)!" 궁천무는 안색이 변하며 뇌까렸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은 과거 제왕천주 남궁후의 그림자 같은 수하들로 제왕십이혼 중 죽은 의혼과 검혼을 제외한 십 인이었던 것이다. "꼬마야, 과연 네가 이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마야부인의 비웃음에 궁천무는 입가에 조소를 흘려냈다. "후후! 부인, 늙어 망녕이 난 모양이구려. 고작 이런 하수들이 날 어찌할 수 있다고 보시오?" 그는 손뼉을 딱딱 쳤다. 파파팟! 사방에서 땅거죽이 폭발하듯 터져나가며 수십 명의 인영들이 불쑥불쑥 솟아 올랐다. 그들은 한결같이 사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마야부인은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호호! 이제 보니 신주구십구마(神州九十九魔)들이었군. 난 또 누구라고." 그녀는 경멸에 찬 눈으로 궁천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많이도 끌어 모았군. 그래서 그토록 안하무인이 되었느냐?" 신주구십구마! 이름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마인들이었으나 마야부인의 눈에는 그들이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듯했 다. "뭣들 하느냐? 배반자를 처단해라." 마야부인의 입에서 살명이 떨어졌다. 그러자 제왕십혼은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신주구십구마도 가만 있지 않았다. 바야흐로 산정위에는 경천동지할 혈전이 전개되었다. "호호호! 아이야, 우리도 한번 놀아볼까?" 휘류류륭......! 마야부인의 장포가 펄럭였다. 그녀의 몸에서는 뿌연 안개가 일어났다. "하하하! 좋소, 부인." 궁천무도 웃음을 터뜨리며 쌍장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장력을 날렸다. 쾅! 폭음과 함께 두 사람 사이에서 땅이 움푹 패여졌다. 두 사람은 똑같이 두 걸음씩 물러났다. 겉으로는 백중지세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마야부인은 치욕을 느낀 듯했다. "이제 보니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하하! 이제 시작일 뿐이오, 부인." 궁천무는 우장을 빙글 돌리더니 일직선으로 뻗었다. 우우웅! 장심에서 소용돌이와 같은 강기가 뻗어나갔다. 강기는 회오리처럼 기류를 말아올리며 곧장 마야부인 의 가슴으로 뻗어나갔다. "흑!" 마야부인은 장력을 밀어냈으나 강기가 마치 톱니처럼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신음을 발했다. 가슴이 쪼개지는 듯한 통증이 왔다. 그녀는 연달아 세 걸음이나 밀려나갔다. "네놈이 천통파쇄강(天通破碎 )을 익혔다니... 천통무제의 무학을 얻었느냐?" 마야부인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크아악!" "끄악!"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리고 있었다. 철산 봉우리는 아수라지옥으로 화하고 있었다. 제왕십혼과 신주구 십구마의 싸움은 죽고 죽이는 혈전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체가 늘어갔다. 제왕십혼 중 편혼(片魂)이 거꾸러졌으며 구십구마 중에서도 대여섯 명이 황천으로 갔다. 마야부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진 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내 그녀는 최후의 비공을 사용하기로 했다. 스스!


검은 소매 속에서 하얀 손이 뻗어나왔다. 그녀는 춤추듯 쌍수를 흔들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소수 (素手)가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나풀거렸다. 휘리리리링! 마치 가을바람에 꽃잎이 휘날리듯, 수백 쌍의 손바닥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궁천무는 당혹한 표정이었다. 마야부인의 무공은 우내오천에 들 정도로 극고한 수준이었다. 과거라면 감히 그녀와 대적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는 삼십 년 전 기연(奇緣)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중원인으로 천축으로 여행하다 신강(新疆)의 한 동굴 속에서 좌화한 시신 한 구를 발견했다. 그 시신은 사백 년 전의 기인이었던 천통무제(天通武帝)였던 것이다. 천통무제는 죽기 직전 자신의 무 공을 기록한 비급을 남겨두었는데 궁천무는 그 비급을 얻게 되었다. 천통무제의 무공은 파괴적인 데 특징이 있었다. 그날부터 궁천무는 불철주야 무공을 연마했으나 겉으 로는 조금도 티를 내지 않았다. 그는 마음 속으로 원대한 야심을 품은 채 천축 마라밀문에 입문했다. 본래 문사 출신이었던 그는 마라밀문의 군사로 들어갔고 그때부터 마라밀문의 사주를 받고 중원무림 을 장악할 음모에 동참했다. '흐흐, 삼십 년만에 처음으로 내 실력을 보여주리라.' 파파파파파! 수백 개의 꽃잎과도 같은 장영이 날아왔다. 그는 흰꽃으로 뒤덮인 듯 보였다. "하하하하!" 궁천무는 낭랑한 웃음을 발하며 신형을 날렸다. 그의 몸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일 장, 이 장, 삼 장....... 오 장여까지 솟구친 그는 허공에 둥실 뜬 채 손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 끝에서 뇌전(雷電)이 작렬했 다. 번쩍! "캬아아악!" 섬뜩한 비명이 울렸다. 마야부인은 눈을 멀게 할 정도로 강한 섬광을 느낀 순간 정수리에 벼락이 떨어진 듯한 통증을 느꼈 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녀는 정신이 아득해지며 뒤로 날아갔다. 그때였다. "으하하하하! 어리석구나. 이곳에 너희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마." 허공에서 궁천무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혈전을 벌이는 신주구십구마가 갑자기 싸움을 멈추고 급히 뒤로 신형을 날렸다. 마야부인은 사오 장이나 밀려났다가 간신히 신형을 멈추었다. 그녀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신주구십구마가 일제히 물러나는 것을 본 그녀는 불길함을 느끼고 외쳤다. "함정이다! 모두 피해......." 그러나 그녀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꽈르르릉! 천번지복하는 듯한 폭음과 함께 산봉이 그대로 폭발하는 것이 아닌가? "크아아악......!" 엄청난 폭발이었다. 불꽃과 자욱한 연기, 흙과 돌덩이가 가공할 힘에 의해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 사 이에 제왕십혼의 골육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날아가버렸다. 후두두두둑! 흙과 돌덩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장내는 적막에 휩싸였다. 산정은 온통 뭉게지고 파헤쳐져 과거의 모습을 눈을 씻고 보아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휙! 인영이 솟아 올랐다. 그는 바로 궁천무였다. 그는 음침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법의 상책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라 했다. 마야부인, 당신은 날 너무 얕본 것이 실수였소." 궁천무는 입가에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조각달이 걸려 있었 다. "이제 대계를 펼칠 날이 머지 않았구나." 이렇게 중얼거린 궁천무는 어깨를 흔들었다. 그는 곧 하나의 점이 되어 산 아래로 사라져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으음......." 어디선가 고통스런 신음이 울렸다. 화약의 폭발로 인해 평지가 되다시피한 산정의 한 부분이 움직였다. 잠시 후 흙덩이가 움직이며 누군 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놀랍게도 마야부인이었다. 그녀는 전신이 만신창이가 된 채 일어섰다. "흐윽... 비열한 놈. 이런 수법을 쓸 줄이야. 하지만 이 몸이 왜 불사불생인(不死不生人)인 줄 아느냐? 그건... 영원히 죽지 않는 무공을 익혔기 때문이다." 마야부인은 이를 갈며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부인, 그대의 이름에는 불생인이란 말도 있음을 아시오?" 착 가라앉은 음성이 울렸다. "누구냐?" 마야부인은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뒤쪽에 금삼을 입은 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그를 본 순간 마야부인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알 수 없는 충격이 그녀의 마음을 뒤흔든 것이다.


④ 금삼청년은 남궁궁이었다. 그는 벌써부터 이곳에 와 있었으며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생은 남궁궁이오. 부인은 왜 그리 놀라는 것이오?" "......!" "혹시 언젠가 날 본 적이 있지 않소?" "모, 모른다. 널 본 적이 없다." 마야부인은 당황하여 급히 부인했다. 남궁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본 적이 있을 것이오. 부인께서 망령이 나지 않았다면 기억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럼 한 가지 만 묻겠소. 부인은 우내사천마저 모른다고 할 셈이오?" 마야부인, 즉 지난 날의 오내오천 중 한 명이었던 불사불생인은 뒷걸음질 쳤다. "무, 무얼 말하려는 거냐?" 남궁궁의 눈에서 한망이 뻗어나왔다. "불사불생인! 우내사천을 암산하고도 뻔뻔하게 발뺌을 하다니, 하늘이 부끄럽지도 않소?" "그, 그걸 어떻게?" 마야부인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는 폭발로 인해 날아가고 없었다. 그 녀는 겉보기에는 사십대의 중년미부로 보였다. 다만 선혈과 흙으로 더럽혀져 있어 기괴하게 보일 뿐 대단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남궁궁은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당신은 구원의 여지가 없소. 할아버지를 죽였으며 함께 연단하던 세 분마저 죽였소. 이 두 가지 과오 외에도 중원무림을 배신한 죄과는 더욱 더 큰 것이오." 남궁궁은 손가락을 들어 그녀를 가리켰다. "또 한 가지, 마라밀문은 마도(魔道)요. 전설의 삼도 중 마도를 택한 것은 당신의 가장 큰 실수였소." 남궁궁은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 무슨 뜻인지 몰라 의아해하던 그녀의 눈길이 남궁궁의 손바닥에 멎었다. 그녀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왕(王)......! 너는......?" 남궁궁은 손을 저었다. 한 자루의 도가 땅속에서 솟구쳐 올라 그의 손에 들어왔다. 그것은 제왕십혼 중 도혼이 사용하던 칼이었다. "이제 당신이 갈 곳은 오직 한 곳밖에 없소. 그곳은 지옥이오." 달빛을 받은 도가 번쩍 빛났다. 도를 전개하기도 전에 싸늘한 도기가 사방을 냉각시켰다. "흑, 내 말 좀 들어다오. 아이야......!" 문득 마야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피에 섞인 눈물. 피눈물이었다.


그녀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남궁궁은 그녀의 태도에 흠칫했다. "아아! 역시 사람의 뜻은 하늘을 넘지 못하는구나. 처음부터 잘못된 것은 결국 이렇게 비틀어지고 마 는 것을. 내 그걸 인정하지 않은 것이 오늘날 이렇게 되고 말았구나." 남궁궁은 그녀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이오?" "아이야, 이제 더 살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내 말 좀 들어보겠느냐?" 남궁궁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야부인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말해 보시오." 마야부인은 울컥 피를 한 모금 토해냈다. 남궁궁은 비로소 그녀가 정말로 체념했음을 알았다. 토해낸 피 속에는 토막난 내장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마야부인은 한동안 생각을 가다듬는 듯하더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본래 나는 누군가를 절실히 사랑했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지. 결국 홧김에 나는 마 도를 세우겠노라 선언한 마라밀문의 대종사를 택하게 되었다." "......."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천치옹이었다." 남궁궁은 뜻밖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곧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어찌... 그분을 암산했단 말이오?" 마야부인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는... 모른다. 사랑을 잃은 여인의 한이 어떤 것인지를.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분에 대한 사랑은 여전했었다. 그러나 증오도 그만큼 자라나고 있었단다." 남궁궁은 그녀의 말을 이해할 듯도 했으나 여전히 가증스런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부질없는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옛날로 돌 아가고 싶구나." '옛날이라니?' 남궁궁은 내심 중얼거렸다. "마야부인이 아닌 평범한 한 여인으로 말이다." 마야부인은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한숨 속에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회한 이 가득 깃들어 있는 듯했다. "얘야, 늦었지만 마지막으로 너에게 도움이 될 일을 하고 싶구나." 남궁궁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야부인의 얼굴에는 그늘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남궁궁은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시오" "어쩌면 이 몸이 간직하고 있던 비밀로 인해... 수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마야부인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결심이 어렸다.


"먼저 첫번째 비밀을 말해주마. 현재 마라밀문의 대종사에 관한 얘기다. 그 자는... 가짜란다." "......!" 남궁궁은 크게 놀랐다. 마야부인의 말은 계속되었다. "부끄럽구나. 이런 말을 하기가.... 이 몸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천축으로 갔을 때 처음 만난 분이 바로 마라밀문의 대종사였단다. 본래 그분은 온건한 성품으로 중원무림과 마찰을 일으키는 것을 원치 않았었다." 남궁궁은 처음 듣는 말에 흥미를 느끼며 귀를 기울였다. 마야부인은 숨을 고른 후 계속 이야기했다. "그에게는 야심만만한 사제가 있었다. 사형과 달리 그는 중원무림에 진출하여 천하를 장악할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결국 지금의 마라밀문의 대종사는 바로 그가 위장한 것이란다." 마야부인의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마라밀문은 천축제일의 문파였다. 오랜 역사를 지닌 마라밀문은 언제부터인가 두 갈래로 의견이 나뉘고 있었다. 한쪽은 온건한 무리들 이었으나 한쪽은 중원무림에 진출하여 마도천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마라밀문을 선동하는 주도자는 가비융찰포(伽非戎刹布)로 대종사 가비철목진(伽非鐵木眞)의 사제 였다. 그는 온건한 성품의 사형을 늘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마야부인은 처음 가비철목진과 눈이 맞아 그의 아내가 되었으나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천치옹 과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한으로 가슴 속에 증오심이 커져가고 있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했던가? 마야부인은 야망의 화신인 가비융찰포와 불륜을 나누게 되었다. 끈질기게 유혹한 가비율찰포와 정을 통하고 만 것이었다. 결국 간남간녀인 두 사람은 무서운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그것은 가비철목진을 제거하고 마라밀문의 힘을 모아 중원무림을 정복하자는 것이었다. 마야부인은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녀는 은밀히 독을 써 가비철목진을 암산하는데 성공했다. 가 비철목진은 극독에 중독되어 신지를 잃고 백치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 마라밀문의 주도권은 가비융찰포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으음. 그런 일이......." 남궁궁은 신음을 흘렸다. 너무도 추악한 비사였다. 마야부인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흐흑, 죽음을 앞두고서야 지난 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으니... 인간이란 어리석기 그지없는 존재구 나."


그녀는 자조적인 오열을 흘렸다. 남궁궁은 탄식하며 말했다. "아, 고개만 돌리면 피안이라고 하지 않소? 부인께서 모든 것을 뉘우치니 소생 더 이상 과거를 묻지 않겠소이다." 남궁궁은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본래 그는 할아버지인 천치옹을 죽인 그녀에게 통렬한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야부인이 과거를 참회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만 맥이 빠지고 말았다. "고맙구나. 얘야. 하지만 이 몸이 스스로를 용납할 수가 없단다." 마야부인은 품 속에서 옥갑을 꺼냈다. "마지막으로 이걸 너에게 주겠다. 이건 가비철목진의 독을 해독시키는 약이다. 부디... 그를 회복시켜 마라밀문의 혈겁을 막아내기를 바란다." 말을 마친 순간. 마야부인의 입에서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남궁궁은 깜짝 놀랐다. "부인! 무슨 짓이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마야부인의 고개가 꺾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심맥을 끊어버린 것이다. "가비철목진... 그 분이 있는 곳은......." 그녀의 입술이 달삭였다. 마지막 음성은 극히 희미하여 잘 들리지 않았다. 남궁궁은 급히 귀를 그녀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는 간신히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이... 내 품 속에 한 장의 봉서가... 그걸 그 아이에게 전해주기를......." 그녀의 음성이 끊겼다. 일대마녀로 무림을 누란의 위기에 몰아넣었던 여인. 그녀는 마침내 파란만장한 생애의 종지부를 찍고만 것이다. "......." 남궁궁은 멍하니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눈을 뜨고 있었다. 마치 세상에 남겨둔 한을 미처 해 소하지 못한 듯. 그는 탄식하며 그녀의 눈을 감겨 주었다. ■ 왕도 3 권 제 25 장 간웅(奸雄)의 최후 ━━━━━━━━━━━━━━━━━━━━━━━━━━━━━━━━━━━ ① 누군가 말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크악! 왜......?" "으아악!" 참혹한 비명이 어둠을 뒤흔든다. 어둠을 가르고 휘둘러 지는 검! 칙칙한 검광이 생명을 끊는다. 하나 둘이 아니다. 곳곳에서 벌어진 암격(暗擊)으로 쓰러져가는 자들은 자신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황천으로 갔다. 목을 잃은 동체가 흐느적거리며 쓰러졌으며, 어떤 자는 등에서 칼을 맞고, 어떤 자는 심야에 누군가의 방문을 받고 껄껄 웃다가 심장에 박히는 검을 바라보며 어이없어 했다. 어둠의 척살자(刺殺者)! 그들은 수십 명이 넘었다. 풍운맹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천중각. 꽝! 폭음과 함께 천중각의 일층 문이 부서졌다. "누구냐?" 일층을 지키고 있던 맹목십마도(盲目十魔刀)는 깜짝 놀라 외쳤다. 대전 안으로 누군가 우르르 달려 들 어왔다. "대체 무슨 일이냐? 감히 연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맹목십마도의 우두머리인 대마가 냉갈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의 말은 살아서 남긴 최후의 말이 되고 말았다. 퍽! "크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대마의 머리통이 수박처럼 으스러지고 말았다. 대전 안으로 뛰어든 것은 팔대세 가 중 칠대세가의 가주들이었다. 그들 중 신권세가의 가주 천왕권(天王拳) 남웅(南雄)의 주먹이 그의 머리를 부순 것이다. 천왕권 남웅이 실성을 했단 말인가! 맹목십마도는 풍운맹주의 신복(臣僕)이 아니던가. "죽여라!" 쐐애액...! 검광과 도기가 대전을 메웠다. 이어지는 것은 참혹한 단말마의 비명이었다. "으아악!" "크악! 대체 왜......?" 맹목십마도는 도 한 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도 못한 채 시신이 되어 나뒹굴고 말았다. "이층으로 갑시다!" 앞장 서며 외친 것은 낙성신군 낙위군이었다. 그는 이층 계단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천중각의 칠층. 그곳은 일명 색관(色關)이라 불리는 곳이다. 그곳에는 희대의 우물인 장발의 이국미녀(異國美女)가 상주하고 있었다. 과거 남궁궁을 제외하고는 그 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만큼 뇌쇄적인 마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육층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상아침상에서는 한창 낯 뜨거운 정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하악."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두 남녀가 엉킨 채 격렬한 정사를 벌이고 있었다. 놀랍게도 남자는 풍운 제이령주인 인심유룡 궁자기였다. 그는 흑발이 허리까지 내려온 장발미녀의 젖가슴을 탐욕스럽게 주무르며 괴소를 흘리고 있었다. "흐흐! 언제 봐도 기막히게 잘 빠진 계집이다. 너는." 장발미녀는 대리석같이 미끈한 다리로 궁자기의 허리를 뱀처럼 휘감은 채 콧소리를 냈다. "흐응, 당신네 부자는 정말 짐승이에요. 어찌 번갈아 가며 날 취할 수 있는 거죠?" 장발미녀는 허리를 들어 올리며 연방 신음을 발했다. 궁자기는 온 몸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며 더욱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다. "허억, 그게 어쨌단 말이냐? 쾌락을 마다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냐? 아버님만 즐길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헉, 흑묘랑(黑苗娘)... 넌 요물이다." 그야말로 인면수심(人面獸心)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말로 미루어 볼 때 궁자기와 그의 부친인 궁천무는 흑묘랑과 동시에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분 명했다. "흑!" 흑묘랑은 온몸을 활처럼 휘며 손톱으로 궁자기의 등을 할퀴었다. 궁자기는 통증을 느꼈으나 그것도 쾌감을 더욱 증대시킨 듯 전신을 부르르 떨어댔다. 그때였다. 그들이 천인공로한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침상 위. 그러니까 천장위에서 인영이 움직였다. 천장에는 커다란 궁등이 매달려 있었다. 그 궁등 뒤에 금삼청년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바로 남궁궁이었다. 벌써부터 천중각에 잠입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두 사람의 추악한 행위를 지켜보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 '정말 짐승같은 놈이로구나.' 마음 속에서 살기가 일어났다. 그는 침상을 노려보며 손을 뻗었다. 그의 왼손이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의 왼손이 서서히 늘어나는 것이 아닌가! 무려 일 장여나 늘어난 손바닥이 한창 쾌락의 절정에 올라있는 궁자기의 뒷통수에 닿을 듯했다. 흑묘랑은 전신을 경련했다. 절정이 다가온 것이다. 온몸이 불덩이 같았다. 마지막 쾌락의 비등점으로 오르며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 그녀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어렸다. 허공에 누군가의 손바닥이 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헛것을 보았나 싶었다. <왕(王)>


손바닥 한가운데 새겨진 왕자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학!" 흑묘랑은 비명을 질렀다. 궁자기는 동작을 멈추며 물었다. "왜 그러느냐?" 흑묘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단지 궁등 아래 매달려 자신을 내려보고 있는 한 청년을 멍 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흑묘랑은 그만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말았다. 말할 수 없는 수치감 때문이었다. 이때였다. 허공에 떠 있던 손바닥이 궁자기의 머리를 눌렀다. "으아아악!" 궁자기의 입이 쩍 벌어지며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손바닥이 가볍게 뒷통수를 친 순간 즉사해 버린 것이다. 쿵! 궁자기는 마치 썩은 나무토막처럼 흑묘랑의 몸 위에서 굴러떨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 흑묘랑은 넋잃은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남궁궁은 바닥에 깃털처럼 가볍게 떨어져 내렸다. "왜 소리치지 않았소?"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흑묘랑은 고개를 푹 떨군 채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그녀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이 추악하게 느껴져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남궁궁은 그녀의 심정을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고맙소이다. 낭자는 앞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오. 부디 개과천선하기 바라오." 그는 신형을 날려 사라져 버렸다. 흑묘랑의 뇌리에는 그가 한 말이 경종처럼 여운이 되어 맴돌고 있었다. "내가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고?"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부르짖었다. "안돼......!" 다음 순간 그녀는 무서운 속도로 맞은편 벽을 향해 날아갔다. 퍽! 참혹한 일이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머리를 벽에 부딪쳐 자진해 버리고 말았다. 한순간에 자신의 추악 했던 인생의 과오를 느낀 것일까? 어찌하여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려 하지 않고 자진을 택했는지....... 빙마(氷魔)는 천중각의 팔층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대전 한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온통 살얼음이 깔려 있었다. 문득 빙마의 인색이 구겨졌다. 그는 부르르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왜 이렇게 춥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빙공을 익힌 몸이므로 어떤 경우에도 추위를 느낀 적이 없었다. 아니, 차라리 얼음 구덩이 속에서 사는 것이 더욱 편안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난생 처음으로 추위를 느끼고 있었다. 휘류류......! 주위에 뿌연 서리와 함께 한풍이 감돌았다. 빙마의 안색은 점점 창백하게 질려갔다. '으음.' 그는 입술을 악물었다. 문득 그는 눈을 부릅떴다. 쩡... 쩡.... 무슨 소리인가? 그의 주변에서 청아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뿌옇게 서려있는 서리와 같은 기운이 결빙(結氷)되어가 고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현상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급기야 그의 주위는 온통 얼음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가히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잠시 후 그는 얼음 속에 갇힌 몸이 되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빙마는 몸을 움직여 보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단단한 얼음이 그의 전신을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든 것 이다. 그는 공포를 느꼈다. 호흡도 불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심장의 박동마저 서서히 느려지고 있었 다. '......?' 그는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 얼음 저쪽에 하나의 인영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금삼을 입고 있는 청년이었다. 그는 신비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그것이 끝이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쏟아지는 잠을 참지 못하고 빙마는 눈을 감고 말았다. 동사(凍死)하고 만 것이다. 금삼청년은 힐끗 그를 바라본 후 구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남궁궁이었다. 남궁궁이 구층에 올랐을 때. 대전 안은 온통 화기(火氣)로 가득차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대전 안에 들어서는 순간 의삼은 물론 머리칼이 재가 버렸을 것이다. 구층을 지키고 있는 자는 신주구십구마의 서열 육위에 올라있는 화마(火魔)였다. 남궁궁은 대전 한가운데 앉아있는 화마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헉!" 화마는 대경하며 벌떡 일어섰다. 치지지칙......! 갑자기 전신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의 머리에서 불꽃이 확 피어올랐다. 화마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불덩이가 되버린 것이 아닌가? 놀라 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쓰쓰쓰.......


대전 한가운데서 시뻘건 열기를 내뿜고 있던 거대한 무쇠솥이 쇳물이 되어 녹아내리는 것이 아닌가? "크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화마의 전신이 불덩이가 된 채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그것도 잠깐, 그는 곧 시커먼 재가 되어 쓰러지 고 말았다. 남궁궁은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화마.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불의 세상으로 돌려보냈으니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할 것이오." 남궁궁은 두 눈에 신광을 흘리며 천중각의 최상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한 걸음씩 올라갔다. ② 천중각 상층부. "......." 풍운맹주 궁천무는 여느 때처럼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의 모습은 긴장되어 있었다. 사실이었다. 궁천무는 까닭모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으음. 왜이리 마음이 불안한지 모르겠군.' 그는 눈을 반개하며 의자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그는 잠시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기척도 들려오지 않자 안색이 변하며 다시 팔걸이를 눌렀다. 여러 차례 팔걸이의 한 부분을 눌렀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 궁천무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는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무정(無情)! 비혼(飛魂)! 어디 있느냐? 왜 명을 받지 않느냐?" 웅... 웅! 그의 외침은 메아리가 되어 대전을 울렸다. 그러나 역시 화답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때였다. 쿵!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며, "이 자들을 불렀소?" 데구르르! 누군가의 낭랑한 음성과 함께 무엇인가 둥근 물체가 궁천무 앞으로 굴러왔다. 발 아래 굴러와 멈춘 물체를 본 순간 궁천무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것은 그가 찾던 무정과 비혼의 머리통이었던 것이다. 눈을 부릅뜬 채 목이 잘려 발 아래 뒹굴고 있 는 것이다. 무정과 비혼은 궁천무의 양대호법으로 그림자처럼 그의 주변을 떠나지 않는


자들이었다. 궁천무는 가 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 자네는 풍운제일령주?" 남궁궁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소. 또한 제왕천주의 아들이기도 하오." "뭐, 뭣이?" 궁천무는 쇠뭉치로 한 방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남궁궁의 눈에서는 정광이 흘러나왔다. "궁천무! 천하를 기만하고 중원무림을 배신한 위선자가 아니더나? 이제 가면을 벗을 때가 오지 않았을 까?" "무, 무슨 소리냐?" 궁천무는 안색이 퍼렇게 질리며 부르짖었다. "발뺌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제 당신은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남궁궁은 앞으로 한 걸음 나가갔다. 그때 뒤쪽에서 기척도 없이 여러 명의 인물들이 나타났다. 그들을 본 순간 궁천무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그들은 바로 팔대세가의 가주들이었던 것이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아이야, 혹시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니냐?" 그는 평정을 회복하며 비웃음을 흘렸다. 팔대세가의 가주들은 점점 더 남궁궁의 등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후후, 아이야 지옥으로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인데 그럼 자비를 베풀어 도와주마, 여봐라! 저 놈을 지옥으로 보내주거라!" 그러나... 아무도 그의 명에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아니, 팔대세가의 가주들은 남궁궁을 지나치더니 도리어 그를 포위하는 것이 아닌가? 궁천무는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안색이 홱 변했다. 이때 낙성신군 낙위군이 냉랭한 코웃 음을 발했다. "흥! 궁가야, 이제 가증스런 음모는 막을 내렸다." 궁천무는 눈을 부릅떴다. "뭣이? 네놈들이 감히... 반역하겠단 말이냐?" 이번에는 사해신군이 비웃음을 흘렸다. "후후! 궁천무. 아마도 알량한 독약을 아직도 믿고 있는 모양인데, 안됐지만 너의 그 독약은 무용지물 이 됐다. 우리들은 모두 독성을 해독시켰다." "......!" 궁천무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남궁궁은 팔짱을 껸 채 준엄하게 말했다. "궁천무, 그래도 당신은 무림계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쌓아왔다. 마지막 가는 길에 추한 꼴을 보이지 않는 것이 네가 택할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궁천무는 모든 것이 글렀다는 것을 느낀 듯 입술을 씰룩이며 뒤쪽 벽을 향해 뒷걸음질쳤다. "그렇군. 교활한 놈. 이제보니 호랑이새끼를 키운 꼴이 됐구나. 하지만 득의하기에는 이르다." 그는 홱 벽으로 돌아서더니 벽면의 한 부분을 눌렀다. "......?" 그의 안색이 참담해졌다.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하! 그걸 믿었소? 하지만 아무 소용없다. 만박귀부 도천수가 이미 기관을 파괴시켜 놓았지." 남궁궁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궁천무는 안색이 몇 차례나 변하더니 마침내 체 념한 듯 벽에 걸린 장검을 꺼내 들었다. "좋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할 수 없구나. 하지만 네놈은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다. 노부가 세상에 서 가장 믿는 것은 부하들도 기관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남궁궁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검이다." 남궁궁은 하하! 웃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작 그랬어야 했소. 무인이라면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자신의 뜻을 세워야 하는 것이오. 음모나 간 계는 어느 때고 바닥을 드러내는 법이오." 남궁궁은 가주들을 둘러보며 위엄있게 말했다. "이분들이 오늘의 증인이 되어줄 것이오. 소생은 천하무림을 대신하여 당신을 징계하겠소." 그는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궁천무는 검을 잡은 채 남궁궁의 아래 위를 훑어 보았다. 그의 입에서 비웃음을 흘러나왔다. "후후... 그 모습은 마치 과거의 남궁후를 보는 듯하구나. 너도 역시 애비와 같은 전철을 밟을 테지 만." 남궁궁의 눈에서 분노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응보를 받을 것이다." "후후... 과연 그럴까?" 슉! 가히 섬전의 빠르기라고나 할까? 궁천무의 검은 엄청난 속도로 검광을 뿜었다. 그 광경에 가주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음!" 남궁궁은 옆구리가 화끈해짐을 느꼈다. 궁천무의 갑작스런 일격에 선수를 빼앗긴 것이다. 남궁궁은 허리춤에서 제왕검을 뽑았다. 웅웅웅......! 검명은 천중각을 뒤흔드는 듯했고 예리하게 뻗어나오는 검광은 피를 원하고 있었다. 챙채챙.... 가가각.......!


허공에서 맞부딪힌 검과 검이 사선으로 얽혔다. 그러나 가주들은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들이 본 것이 있다면 눈부신 광채가 엉킨 채 춤을 추고 있는 모습뿐이었다. 사삭... 가가각......! 그저 이따금씩 무엇인가 긁히는 듯한 미세한 음향만이 일어나고 있었다. 가공할 쾌검(快劍)을 전개하는 궁천무와 검도의 패류지학인 제왕검류(帝王劍流)의 절학.... 그것은 가 히 검신(劍神)들의 대결이었다. 가가각......! 다시 한 차례 마찰음과 함께 가주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억...!" 그들은 급급히 뒤로 물러섰다. 가공할 검기에 의해 옷자락이 가루가 되어 떨어졌기 때문이다. 휘류류류......! 대전의 기물들은 검기의 영향으로 거미줄처럼 금이 가 버렸고, 벽과 천장도 서서히 깎여 들어가고 있 었다. 가주들은 자욱하게 휘날리는 돌가루로 인해 희미하게만 보이는 두 사람의 대결을 보기 위해 안력을 한껏 모았다. 그때였다. 번쩍......! 눈을 멀게 할 것만 같은 강렬한 빛이 작렬했다. "크으윽!" "음!" 각각 다른 두 가닥의 비명이 울렸다. 이어 찾아든 것은 거짓말 같은 정적이었다. 가주들을 장내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아무 이상도 없어 보였다. 가주들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남궁궁은 검을 늘어뜨린 채 눈을 반개(半開)하고 있었다. 반 면 궁천무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상단으로 치켜들고 있었다. "......?" 중인들은 도무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두 사람 중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한결 같은 것은 궁천무가 쓰러지기를 바라는 심정일 뿐이었다. 똑. 남궁궁의 검끝에서 선혈이 한 방울 떨어졌다. 쿠웅! 둔중한 소리와 함께 궁천무의 몸이 고목처럼 쓰러졌다. 촤아악......! 그의 몸이 분리되며 피보라가 솟구쳐 올랐다. 정수리에서 가랑이까지 정확히 양단된 것이었다. "......!"


중인들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천하무림인들을 우롱하고 강호에 혈겁을 일으켰던 대간웅 궁천무! 결 국 그는 생의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남궁대협......!" 풍운팔대세가의 가주들은 일제히 남궁궁의 이름을 불렀다. 남궁궁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비 하나는 넘은 것... 같소이다. 소생은 잠시 쉬어야 겠소이다." 말을 마치는 순간 그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③ 혈사평(血砂坪). 섬서성(陝西省) 혈암산(血岩山) 아래로 펼쳐진 평원. 이곳이 혈사평이라 불리는 이유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붉은 모래가 끝없이 깔려있기 때문이었다. 차차창! "크아아악!" "크하하핫! 중원은 이제 우리 것이다! 놈들을 쓸어 버려라!" 이 무슨 소리인가? 혈사평을 가득 메운 자들! 그들은 지금 공전절후의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정확히 두 패로 나뉘어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으하하하! 감히 중원무림을 노리다니? 구중천(九重天)이 있는 한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핫핫핫! 마도의 잡배들아! 혈사평은 너희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혈사평을 피로 물들이며 격돌하고 있는 자들은 남궁중양이 이끄는 구중천과 천축에 온 마라밀문의 고 수들이었다. 그들은 중원무림의 패권을 놓고 최후의 대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흔들릴 대혈전이었다. 비명이 하늘을 찌르고 피투성이가 된 시신이 바닥을 굴렀 다. 혈전은 하루종일 계속되었다. 노을이 물들고 밤이 되었을 때도 멈추지 않았으며, 그 밤이 지나 눈부신 태양이 혈사평을 비출 때까 지도 혈전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바닥에 쓰러진 시신만이 늘어났을 뿐, 싸움은 그 도를 더해 갈 뿐이었다. 끄아아악......! 창공 위에 한 마리의 거대한 새가 나타났다. 부리와 날개가 금빛인 그 새는 전설에 나오는 금천대붕 (金天大鵬)이란 것이었다. 날개의 길이만 해도 십 장에 달하는 희대의 영물(靈物)인 금천대붕은 하루에 일만 리를 날아갈 수 있 었다.


휘이이잉! 금천대붕이 날개짓을 한 번 하면 웬만한 나무쯤은 뿌리째 뽑혀나 갈 정도로 엄청난 바람이 인다. 빙글빙글! 금천대붕은 혈사평 위를 몇 차례 선회했다. "으음! 정말 끔찍한 일이로구나." 금천대붕의 등쪽에서 한 가닥 탄식이 울렸다. 일남일녀가 대붕의 등에 몸을 싣고 있었다. 마치 한 쌍의 선인(仙人)같은 남녀, 그들은 남궁궁과 백란 화였다. 남궁궁은 혈사평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희생이 너무 크군. 이대로 두면 모두 전멸하고 말 것이오." 백란화는 고개를 저었다. "안돼요, 공자님. 서천축(西天竺)까지 가려면 시간을 아껴야 해요." 남궁궁은 한숨을 쉬었다. "알고 있소. 백화궁의 금천대붕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는데 만도 열흘은 걸렸을 것이오. 하지만 천축 에 다녀올 때까지 형님이 버틸지 모르겠소." 백란화는 혈사평을 내려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지금 공자께서 개입하신다 해도 저 싸움을 막을 수는 없어요. 최선책은 한시라도 빨리 마라밀문의 진 짜 대종사 가비철목진을 모셔오는 거예요." 남궁궁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낭자의 말이 맞소이다." 꾸아아악! 금천대붕은 고막을 찢을 듯한 괴성과 함께 힘차게 날개를 저었다. 잠시 후 대붕은 하나의 점이 되어 서쪽 하늘로 사라져갔다. ④ 서천축(西天竺). 중원에서 수만 리 떨어진 곳. 이곳은 중원과 모든 것이 틀렸다. 언어나 풍습은 물론, 인종까지도 달랐다. 그 중에서도 판이하게 다 른 것은 종교였다. 천축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교들, 그들은 대부분이 이교나 사교이기도 했다. 회교(回敎), 백백교(白白敎), 암흑마교(暗黑魔敎), 음양제신교(陰陽制神敎), 황교(黃敎), 홍교(紅敎), 남 근교(男根敎), 여신교(女神敎) 등.... 온갖 해괴한 종교가 민간들에게 퍼져 있었다. 서천축의 한 오지(奧地).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땅거죽이 거북등처럼 갈라져 있는 곳.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무지라 찾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바닥은 먼지가 풀썩거리고 내리쪼이


는 태양은 대지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그런데.... 한 바위산 기슭에 수많은 사람들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기괴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어디 론가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정말 이곳에서 가비철목진을 찾을 수 있을까요?" 행렬 속에서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그것은 한어(漢語)였다. 자세히 보면 행렬 가운데 일남일녀가 있 었다. 다름 아닌 남궁궁과 백란화였다. "물론이오, 마야부인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소." 남궁궁은 무겁게 대답했다. 백란화는 그를 향해 미소지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 마세요. 그 분이 계시다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예요. 그럼 공자님의 형님도 구할 수 있 어요." 남궁궁은 생명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바위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럴까? 하지만 벌써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가 살아 있을지......." 백란화는 부드럽게 말했다. "가비철목진은 천축사상 최고의 기인이에요. 분명 살아 있을 거예요." 그녀는 남궁궁을 안심시키려는 듯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행렬을 따라 한 식경 가량 걷자 시야가 탁 트이며 숲이 나타났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무지에 숲이라니,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행렬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숲 속으로 한 마장 정도 들어가자 길이 넓어지며 넓은 초원이 나타났다. "......!" 남궁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초원 한가운데 거대한 신전(神殿)이 나타난 것이다. 신전은 방대한 규 모로 첨탑(尖塔)의 건물 양식을 한 수십 채의 이국적인 건물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행렬은 기이한 주문을 외우며 신전을 향해 들어갔다. 남궁궁과 백란화도 그들 사이에 끼여 신전 안으 로 들어갔다. 신전은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바닥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천장을 받들고 있는 거대한 기둥들은 온통 황금으로 입혀져 휘황찬란했다. "어머!" 주위를 둘러보던 백란화가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왜 그러시오?" 남궁궁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공자님, 저쪽을 보세요!" 백란화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우수를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남궁궁은 그녀의 손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음!" 남궁궁은 신음을 발했다. 그는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백란화가 가리킨 곳은 신전의


한쪽 벽이었다. 그곳엔 벽화가 새겨져 있었다. 가히 얼굴을 붉히지 않고는 볼 수가 없는 광경이 부조되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알몸의 남녀들이 뒤엉 켜 정사를 벌이고 있는 음탕한 조각이었다. '저런 것을 조각해 놓다니, 가히 놀랍구나.' 남궁궁은 눈살을 찌푸리며 백란화의 손을 잡아 끌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소.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백란화는 순순히 그에게 이끌려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풍경은 점입가경 이었다. 신전 안의 사방 벽은 물론이려니와, 천장과 기둥에도 조각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더욱 노 골적인 장면들을 묘사하고 있었다. 남녀의 정사가 상상을 극할 정도로 기기묘묘한 자세로 표현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감히 조각들을 볼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그들은 고개를 돌리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갔을까? 긴 회랑을 지나서 하나의 광장에 들어서게 되었다. 두 사람은 경이로운 표정으로 광장을 바라보았다. 광장 안에는 천여 명에 달하는 천축인들이 운집하 고 있었다. 그들은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고 있었다. 어떤 자들은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엎드려 있었으며, 어떤 자들은 손바닥을 허공으로 펼친 채 눈 을 감고 뭐라고 외치고 있었고, 어떤 자들은 쉴 사이 없이 절을 하고 있기도 했다. 그들이 외우는 주문으로 광장 안은 온통 웅웅거리고 있었다. "뭐하는 거지요?" "아마도 저들의 신에게 드리는 의식인가 보오." 두 사람은 기둥 옆에 기댄 채 광장을 둘러보았다. 이때였다. 삐리리릭...! 짤랑짤랑! 두 사람은 악기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광장 전면의 대 위에 수십 명의 악사들이 이상하게 생 긴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저들의 위쪽을 보세요." 백란화의 말에 고개를 들어본 남궁궁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악사들의 위쪽은 이층 구조로 되어 있 었는데 그곳에는 신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신단 바로 아래쪽에서 일단의 무희(舞姬)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 춤이지 실 로 묘한 행위였다. 여인들은 음악에 맞춰 야릇하게 몸을 비틀어대며 걸치나마나한 천조각을 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무희들은 알몸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부드러운 비단천이 나신위에 휘감겨 있을 뿐이었는데 춤을 출 때마다 천을 풀어내곤 하여 그때마다 여인의 은밀한 부위가 그대로 드러나곤 했다.


'음!' 남궁궁은 내심 신음을 발했다. 여인들의 춤을 지켜보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던 것이다. 그는 과거 소 림의 조사동에서 색관을 통과 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정력(定力)이 강한 데도 불구하고 여인들에게서 자극을 느낀 것이었다. '요물들이로구나!' 남궁궁은 시선을 신단 쪽으로 옮겼다. 마침 백란화도 똑같이 신단을 살펴보고 있었는데 무엇을 보았 는지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신단의 한가운데. 거대한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자세히 보면 기둥이 아니라 남근(男根)이었다. 워낙 거대하여 기둥으로 보였을 뿐이었다. 남근의 모양이 어찌나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지 실핏줄까지도 그대로 보일 정도였 다. 남근 뒤쪽에는 높이가 십여 장에 달하는 마왕두상(魔王頭像)이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정말 괴이한 곳이군.' 남궁궁은 거대한 마왕두상이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가슴이 섬뜩했다. 그는 다시 신단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단 위에 기이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남근상 주위에 언제 나타났는지 열 명의 장한들이 빙 둘러서 있었다. 우람한 체격의 장한들은 아무것 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그들은 기둥처럼 생긴 남근상을 올려보고 있었는데 몽롱한 표정이었다. 그들의 가랑이 사이에 남자의 상징이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실로 괴이한 정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신단 아래서 춤추던 무희들이 올라왔다. 그녀들은 다가오면서 몸에 두르고 있던 비단천을 모두 벗어 던졌다. 터질 듯이 풍만한 젖가슴이 걸을 때마다 아래 위로 출렁거렸으며, 가느다란 허리가 좌우 로 흔들리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색감을 불러 일으켰다. 무희들은 장한들 앞에 무릎을 꿇더니 마치 경배하듯 장한들을 우러러 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장 한들의 상징을 향해 두 손을 받들어 경배하고 있었다. "......!" 남궁궁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백란화를 돌아다 보았다. 백란화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심한 내적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녀의 눈은 마치 고정된 듯 신단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 다. 다만 그녀의 눈까풀이 쉴 새 없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궁궁은 한숨을 쉬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희들이 장한들의 발등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녀들은 도취된듯 장한들의 발에 입을 맞추고 다리 를 끌어 안았다. 남궁궁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저들은 일종의 사술(邪術)에 걸려 있는 것 같구나. 어찌 이렇게 음탕한 것을 종교라고 할 수 있단 말 인가?' 이때, 옆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들렸다. 백란화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남궁궁은 그녀의 눈빛이 몽롱해진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진정하시오, 백낭자!" 그가 어깨를 치자 백란화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이때였다. 둥! 둥! 둥......! 북소리가 울렸다. 고음은 일곱 번 연속 울렸다. 그러자 장한들은 여인들을 번쩍 들어 올렸다. 여인들의 허리와 둔부를 받쳐들자 여인들은 팔다리를 큰 대자로 벌렸다. 장한들은 여인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계단을 통하여 마왕두상의 입속으로 하나둘 걸어 들어갔다. 악사들의 음악소리는 더욱 크게 울렸다. 동시에 광장을 메우고 있던 신도들의 주문과 기도는 절정에 달한 듯 그야말로 광란의 장면을 연출했다. 어떤 자들은 입에 거품을 문 채 뒤로 넘어갔으며, 어떤 자들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으며, 어떤 자들 은 통곡을 터뜨리고 있었다. '모두 미쳤군.' 남궁궁은 어이가 없어 혀를 찼다. 이때 백란화가 그의 소매를 잡아 당기며 말했다. "공자님, 이곳을 빠져 나가요. 제발... 더는 못견디겠어요." 남궁궁은 그녀를 슬며시 안으며 말했다. "낭자, 이곳에 온 목적을 아직 달성하지 못했소. 우리는 밀문의 대종사 가비철목진을 찾아야 하오. 너 무 걱정마시오. 내가 있지 않소?" 백란화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저는... 자신이 없어요. 설마 이런 곳일 줄은......." 남궁궁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저곳이 수상하오. 가봐야겠소." 백란화는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곳은 장한과 무희들이 들어간 마 왕두상의 입이었다. 남궁궁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낭자는 여기 있으시오. 나 혼자 살펴보고 오겠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신형을 날려 마왕두상을 향해 날아갔다. ⑤


마왕두상의 입속은 뜻밖에도 정교하게 건축된 건물 속이었다. 남궁궁은 건물의 회랑을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었다. 얼마쯤 갔을까? 넓은 대전이 나타났다. 천장에는 거대한 궁등이 매달려 있었는데 야명주가 촘촘히 박혀있어 눈부신 빛을 뿌리고 있었다. 남궁궁은 대전 안에 들어서는 순간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말았다. 대전 바닥에 열 쌍의 남녀들이 한 데 뒤엉켜 정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짐승만도 못한 자들이구나!' 그는 혐오감을 느꼈다. 대전 안에는 향연(香煙)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대전 한가운데 있는 청동향로에서 흘러나오는 것으 로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미혼향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는 호흡을 차단했다. 그러나 한 모금의 향연이 콧속으로 흘러들어간 듯했다. 갑자기 단전이 뜨거워 지며 호흡이 가빠지는 것 같았다. 그는 대전 바닥에 뒤엉켜있는 남녀들을 바라보았다. 한창 숨가쁜 신음소리를 내며 정사를 벌이고 있 는 것을 보며 그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는 호흡을 조절하여 방금 들이쉰 미혼향을 뱉아내 버렸다. 비로소 머리가 맑아지자 빠른 걸음으로 대전을 지나쳐 버렸다. 대전 안쪽으로 복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복도 좌우에는 여러 칸의 방이 있었다. 방마다 괴이한 신상 (神像)들이 모셔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교도들이 수행하는 곳인 듯했다. 복도 끝. 마왕상이 그려져 있는 나무문 앞에 이르자 여인의 교성이 들렸다. '음.' 남궁궁은 보지 않아도 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가비철목진을 찾고야 말겠다.' 문은 손을 대자 의외로 쉽게 열렸다. 문 안은 내전이었는데 바닥에는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여인의 교성은 내전 안쪽으로부터 흘 러나오고 있었다. 그곳에는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내실로 연결되는 것 같았다. 그는 휘장 가까이 접근했다. 그의 짐작이 맞았다. '......!' 내실 안에는 거대한 침상이 있었다. 그 침상 위에 남녀가 누워 있었다. 삼십대로 보이는 요부가 라마승인 듯한 중년인의 몸에 찰싹 달라붙은 채 교태를 부리고 있었다. 그녀 는 가히 터져나갈 듯한 풍만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역시 벌거벗은 라마승의 몸을 애무하며 신음소리를 내 고 있었다. "대종사, 어서 절기(絶技)를 가르쳐 줘요. 흐응......!" 남궁궁은 요부가 한어를 한다는데 약간 놀랐다. 그러나 그녀가 설사 중원여인이라 해도 분노를 금치 못했다. 라마승은 가비철목진임이 분명했다. 그녀 는 가비철목진을 유혹하여 그의 절기를 빼내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찾았구나. 저 라마승이 바로 가비철목진.' 가비철목진은 팔 척이 넘는 거구에 벽안을 지니고 있었다. 전신에는 털이 뒤덮여 있었으며, 이마에는 주름살이 왕(王)자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침상에 반듯이 누워 있었는데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는 뿌옇게 흐리기만 했다. 정상적인 정신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흐응... 대종사, 어서 오행불불수(五行不佛手)를 보여 주세요. 네?" 요부는 가비철목진의 다리를 쓰다듬으며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자 가비철목진은 기계와 같은 동작으로 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우우웅......! 기이한 음향과 함께 그의 손바닥이 붉은 색으로 변했다. 그는 허공에 다섯 개의 원을 그렸다. 그때마 다 손바닥은 홍황청백흑의 순으로 변했다. "호호! 정말 멋있어요. 그럼 이번엔 구결(口訣)을 일러줘요." 요부는 그의 아랫배로 손을 가져가며 콧소리로 말했다. 가비철목진은 고저장단이 없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음양유생(陰陽有生)... 태극일원지기(太極一元之氣), 오원무극(五元無極)......." 그의 입에서 더듬더듬 구결이 흘러나왔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남궁궁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저 요부는 자신의 육체를 미끼로 가비철목진의 무학을 모두 빼내고 있구나. 아마도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면 죽일 것이다.' 남궁궁은 살기를 느꼈다. '저런 계집은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 그는 손가락을 퉁겼다. 윙! 파공성과 함께 실같은 지력이 뻗어나갔다. 요부는 막 가비철목진의 배 위로 올라타려는 순간 파공성을 들었다. "누구냐? 악!" 뒤돌아보는 순간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마에 구멍이 뻥 뚫리며 피화살이 솟구쳤다. 그녀는 무엇 이 어찌되는 것인지도 모른 채 뒤로 벌렁 넘어갔다. 단 일지에 황천으로 가고 만 것이다. 남궁궁은 침상으로 걸어갔다. 가비철목진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천장만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그


의 옆에는 요부가 눈을 크게 뜬 채 널브러져 있었다. 남궁궁은 탄식하며 말했다. "아아! 당신은 마라밀문 대종사가 아니오? 어찌 이런 꼴을 하고 있는 것이오?" 그의 말에 가비철목진은 심적 충격을 받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아직... 조금의 정신은 남아 있구나.' 그는 품 속에서 옥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옥갑 속에는 한 알의 용안만한 붉은 색 단약이 들어 있 었다. "대종사, 당신의 정신을 일깨워주는 약이오. 부디 이걸 복용하고 정신을 찾기 바라오." 그는 가비철목진의 아혈을 점하고 재빨리 단약을 입 속에 밀어넣었다. 단약은 그의 입 안에 들어간 순간 스르르 녹아 버렸다. 남궁궁이 손가락으로 목젖을 자극하자 끄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단약 녹은 액체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 남궁궁은 가비철목진을 살펴보았다. 그에게서는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마음이 초조해 졌다. '빨리 깨어나야 할텐데.... 중원으로 가려면 적어도 사흘은 걸릴 것이다. 그동안 형님이 무사할 수 있 을지.......' ⑥ 대전 안. 삼 인이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남궁궁과 백란화, 긴 혼몽에서 깨어난 마라밀문의 대종사 가비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