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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영!' 그 양피지는 바로 허무영이 그에게로 보낸 서신이었다. 허무영은 본시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당대(唐代) 백낙천(白樂天)의 서체를 좋아한 나머지 주로 그 영향을 받고 있었다. 진일문은 반가움과 동시에 일말의 두려움을 느꼈다. 어떤 경로를 거쳐 주방에 잠입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음식 속에 통신문을 넣을 수 있다면 독을 푸는 일은 문제도 아닌 것이다. 결론적으로 허무영이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이가장의 전 고수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독살을 당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막상 서신의 내용을 대하자 섬뜩했던 기분은 일시에 사라지고 말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져 있었다. <진형(眞兄), 우선 형의 뜨거운 우의를 모른 체 하고 지금까지도 계속 똑같은 삶의 방식으로 머물러 있는 이 허모(虛某)를 욕해 주시오. 인생은 꼭 뜻대로 살아지는 것만은 아니더이다. 운명의 깊은 도랑이란 한 번 빠지면 벗어 나기가 좀체로 쉽지 않소. 이 허모에게 있어 광명천지라는 것은 단지 바라보이는 세계일 뿐, 그 곳에서 숱한 영웅호걸들과 진심을 나누며 마음껏 기량을 발휘하는 진형을 보면 그저 부러울 따름이오. 물론 언젠가는 다시 진형을 졸라 열 항 아리의 백로송엽주를 사 내라고 하겠지만 아직은 그 때가 아닌 것 같소. 일단은 진형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스스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중략(中略)...... 진형이 천마신궁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오. 하지만 이 허모의 입장에서는 답해 드릴 수가 없소이다. 그 대신 형의 우의에 보답하는 의미로 한 가지 길을 일러 드리겠소. 그 후의 일은 진형의 총명함과 기지, 그리고 운에 맡기는 바요.> 여기까지 읽은 진일문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불어냈다. '허형,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은 되지 못하고 고뇌만 안겨 주고 말았구려. 내가 형으로 인해 그러하듯 형 또한.......' 서신의 말미에는 이런 글이 씌여져 있었다. <속히 북경(北京)으로 가 보시오.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의 도독에게는 한 명의 여식이 있은즉, 그녀를 만나시오. 그녀의 이름은 반희빈(盤希賓).......> 서명이나 낙인 같은 것은 없었다. 이는 자신의 존재를 회의하는 허무영의 기질상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반면에 진일문은 서신을 다 읽고 나자 심중에서 여러 가지 의문들이 구름처럼 피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오군도독의 딸? 그녀를 만나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과연 그녀에게서 무엇을 얻으라는 것인지......?' 오군도독부라면 명조의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병부(兵部)를 뜻한다. 그리고 도독이란 명실공히 그 곳의 제일인자로써 누구든 아무 때고 접견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니다. 더구나 허무영이 만나라고 지시한 것은 도독이 아니라 규중심처에 꼭꼭 틀어 박혀 있을 그의 딸이다. 진일문은 난감하기 그지없었으나 곧 생각을 바꾸었다. 적어도 허무영이 그 글을 보낸 데에는 나름대로 깊은 뜻이 있으리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반희빈이라 했던가?' 그는 어느새 허무영의 말에 따르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이가장에는 때아닌 소동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구주동맹의 맹주인 진일문이 먹던 음식에서 극독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의 내공이 심후해 재빨리 독을 몰아냈으므로 별 탈은 없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이가장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주방에서 일하던 요리사들이 일제히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들은 환사(幻邪) 만생에게 불려가 출신지에서부터 이 곳에 온 내력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고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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