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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일문은 그녀의 누런 안색을 보자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과거 나로 인해 주화입마한 것이 원인이리라.' 그는 기분이 착잡해졌다. 그녀와는 은(恩)과 원(怨)이 묘하게 겹쳐 있는 것이다. 자신을 해하고자 한 일이나 백하련의 죽음을 떠올리면 여전히 혐오감이 일었으나 그녀로 인해 금정홍의 기연을 취할 수 있었던 사실만은 어떻게도 부인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본의 아니게 그녀에게 입힌 피해를 감안한다면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상념에 잠겨 있는 그의 귀로 한 가닥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시주께서 의원이오?" 절정사태였다. 진일문은 내심을 감추고 태연하게 응수했다. "그렇소이다. 여니께서는......?" "빈니는 절정(絶情)이라는 법명을 가지고 있소." 절정사태는 한동안 날카로운 시선으로 진일문을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영화, 너는 이 분을 어찌 알게 되었느냐?" 사영화는 늘상 사부에 대해서는 일말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음성이 다소 떨려 나왔다. "어떤 의원에게 소개를 받았어요. 신묘하기가 화타를 능가한다고 하도 칭찬을 하기에......." "그래?" 다행히 누구에게서 소개를 받았느냐는 질문은 없었다. 절정사태는 무덤덤하게 음성을 흘려 내고는 시선을 돌려 버렸다. "빈니가 안내할테니 그대들은 돌아가도록 하시오." 총관 황보인과 사운악의 두 제자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황보인이 대표로 나서서 그녀에게 포권을 했다. "그럼 사태께 맡기고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성낙수, 독고준 등과 더불어 화청을 빠져 나갔다. 독고준이 잠시 고개를 돌려 사영화를 바라 보았으나 사영화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도 못했다. 주검이 들어있는 관(棺). 밀전에는 옻칠을 한 마흔다섯 개의 관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러한 광경은 결코 유쾌한 것이 못되었다. 사방의 창문은 밀폐되어 있었고, 향로에서는 향이 무럭무럭 피어 올랐다. 관은 꽤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으며, 관 머리에 각기 하나씩의 위패가 놓여 있었다. "아버님......." 사영화는 하나의 관을 붙들고 소리 죽여 오열했다. 그것은 바로 부친인 사운악의 시신이 누워있는 관이었다. 생전의 그가 무남독녀인 그녀를 얼마나 총애했었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곁에 있던 사(査)부인도 조용히 눈시울을 붉혔다. 절정사태는 눈살을 찌푸렸으나 뭐라 탓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진일문을 향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이 곳에는 마흔다섯 구의 시체가 있소. 선생께서는 사인(死因)을 조사해 주셔야겠소." 그녀의 냉정함은 예전과 다름없이 진일문을 감탄(?)하게 했다. 그는 내심 고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 많은 분들이 전부 같은 병으로 타계하셨단 말씀이오이까?" 절정사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러나 정말로 병사(病死)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으로 죽은 것인지는 바로 선생이 알아내야 할 문제요." "흐음!" 진일문은 가벼운 탄식을 흘리며 하나의 관으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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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호가행 제5권 검궁인 저 42장 뇌정삼식(雷霆三式)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해 갔다. 꽤 많은 날짜가 지나고 있었다. "또 그... 고맙다는 말......." 주서혜의 음성이 격정을 띄었다. 그녀는 진일문이 떠날 때면 언제나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