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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이군요......." 그녀의 음성은 웬지 몹시도 떨리고 있었다. 진일문의 미간이 슬며시 찌푸러 들었다. 역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인의 입술을 통해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알고 있었어요. 저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말에 진일문의 무거운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그건 맞소." 여인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직도 과거의 감정을... 가지고 계신가요?" "과거의 어떤 감정을 말하는 것이오?" "그건......!" 면사녀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제가 진대협께 범했던 무례를 뜻하는 거예요. 그 때는 제가 너무 철이 없어 세상을 몰랐던지라......." 진일문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것은 피차에 마찬가지였을 거요. 당시의 나를 떠올리면 때로 어이가 없어 쓴웃음이 나오기도 하니까." "여전히 저를... 미워 하시는군요." 진일문은 마침내 바둑판에서 손을 떼며 그녀를 정시했다. "그것과는 의미가 다르오. 전자에 어떤 일을 겪었건 그것은 과거지사에 불과하며 나는 그 모두를 잊은지 오래요." 면사녀는 할 말을 잊은 듯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면사 위쪽으로 보이는 그녀의 눈에는 고통의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눈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가슴을 베일 정도로 차갑고 아름답기만 했던 눈이 작금에 이르자 어느 정도는 인생을 이해하고 있는 듯 진중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그 동안 실로 많이 변했군. 하긴, 수많은 고초와 그에 따른 인내는 누구에게나 약이 되는 법이지.' 진일문이 내심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면사녀가 눈빛을 부드럽게 풀며 다시 말했다. "이 사영화는... 진대협께는 늘상 죄만 짓게 되는 것 같아요. 이전에 그랬듯 천사곡에서도 구명지은을 입었건만, 제대로 사의도 표하지 못했어요." "그 일도 역시 잊은지 오래요. 과히 괘념치 마시오." 면사녀는 바로 진일문이 가진 쓰린 과거의 일부, 즉 사영화(査瑛華)였다. 사대신가 가운데 황룡사가보의 무남독녀인 것이다. 그녀의 존재란 진일문에게 있어 여전히 연모와 오욕의 잔상을 동시에 떠올리게 만들었다. 물론 이렇다할 악감은 없었다. 그러나 뭐라 정의할 수 없으면서도 종내 착잡함에 이르도록 하는 그 감정을 진일문은 언제부터인가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으로 규정지어 버리고 있는 상태였다. 천사곡에서도 그는 그랬다. 초라한 수레에 영어되어 있던 사영화의 모습은 그에게 당시 상당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의 뇌리에서 늘상 화려하고 당당하게 기억되던 그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진일문이 그런 외양으로 인해 실망을 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사영화의 처참해져 있는 모습에서 오히려 보호본능에 가까운 연민지심(憐愍之心)을 느꼈고, 그 복잡한 감정으로부터 일탈하고자 그녀를 피했던 것도 실은 그 자신이었다. 하지만 진일문으로서도 일부러 찾아온 손님(?)조차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는 간략하게 용건을 물었다. "그래, 이 곳에는 어떤 일로 오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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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호가행 제5권 검궁인 저 42장 뇌정삼식(雷霆三式)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해 갔다. 꽤 많은 날짜가 지나고 있었다. "또 그... 고맙다는 말......." 주서혜의 음성이 격정을 띄었다. 그녀는 진일문이 떠날 때면 언제나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