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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록(天劒錄) 제목: 천검록 제 3 권 영겁회귀(永劫回歸) (전 3 권) 지은이: 사마달 - 차 례 제 23 장 제 24 장 제 25 장 제 26 장 제 27 장 제 28 장 제 29 장 제 30 장 제 31 장 제 32 장 제 33 장

무형인간(無形人間)들 드러나는 음모(陰謀) 청조각(淸嘲閣)의 내력 사랑의 방법(方法) 재회(再會) 다시 중원(中原)으로 준동(蠢動)하는 신비십천 드러나는 비밀(秘密) 시작되는 싸움 감도는 전운(戰雲) 또 다른 전설의 시작

제 23 장 무형인간(無形人間)들 * * * 쐐애액! 맨 먼저 허공을 가른 것은 천조시군 막풍의 한 쌍 철조(鐵爪)였다. 바로 귀혈철조(鬼血鐵爪)였다. 그것은 천조시군 막풍의 성명기병으로 가히 태풍도 휘잡아 찍어 버릴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 사위는 죽음 같은 침묵의 연속이었다.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화천명에게로 집중된 채 숨소리조차 죽이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오직 들리는 것은 귀혈철조가 바람을 찢으며 꽂혀드는 진저리 쳐질 듯한 음향 뿐이었다. 허나 화천명은 자신의 몸으로 짓쳐드는 한쌍의 철조를 똑바로 노려보며 미동조차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카카앙! 엄청난 쇳소리와 함께 화천명의 전신이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허나 그것 뿐 더 이상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이럴 수가?" 철조를 거두며 천조시군 막풍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신음성을 흘려냈다. "이건 말도 안된다. 본군의 철조는 금강불괴지신이라 해도 견디어 낼 수가 없거늘……!" 허나, 그가 어찌 알 것인가? 화천명의 몸은 금강불괴라 해도 어디 보통의 금강불괴인가? 만사귀의 임해의 말대로 천하에 화천명의 몸을 상하게 할 수 있는 물질은 존재하지 않았다. 허나 외부에 손상을 입지 않았다 하여 내부마저도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 천조시군 막풍의 쌍조에 실린 엄청난 경력(勁力)을 맨몸으로 받아낸 화천명은 내부의 기혈(氣血)이 마구 뒤집힐 듯 들끓어 오름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내색을 하지 않고 암중에 급히 기혈을 억제시켰다.


광승 천곡의 역주천대라한령심법(逆周天大羅寒靈心法)의 특별한 효능 중의 하나가 최단 시간 내에 운기조식으로 요상을 치유시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천조시군 막풍의 공격이 끝나고 다음 사람의 공격이 시작될 때까지의 잠깐의 공백을 활용하여 화천명은 신속히 내부 기혈을 원상으로 회복시켰다. '그래도 견딜만 하군!' 화천명은 내심 고소를 지었다. '천하의 독행칠대고수를 가신(家臣)으로 얻는데 이 정도 고생도 없어서야 말이 안되지.' 결과는 어쨌든 이렇게 되었으나 사실 처음에 화천명으로서는 모험을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금강의 힘(金剛之力)보다는 잠재된 초능(超能)을 믿어보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멋지게 적중한 것이었다. 천조시군 막풍의 철조가 신체에 격중되는 순간, 격중되는 부위로 전신의 공력(功力)과 잠재된 항력(抗力)이 집결되어 철조의 힘을 막아내고 퉁겨내 버렸던 것이다. 즉, 화천명의 육체는 의식하지 않아도 몸 스스로가 위험에 대한 반응(反應)을 일으켰던 것이다. "……!" 두 번째로 화천명 앞에 버티고 나선 인물은 벽력철제 황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에 주렁주렁 걸치고 있던 일곱 가지의 중병(重兵)들을 모두 내려놓고 어떤 걸 사용할까 고민고민 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한 번이라 했으니 일곱 가지 중병으로 다 한 번씩 때려 보면 안되겠느냐?" 하지만 그 따위 손해보는 짓을 허락할 화천명이 아니었다. 그는 할 수 없다는 듯 투덜거리며 일천근(一千斤) 거부(巨斧)를 골라잡고는 화천명 앞으로 나섰다. "푸하핫…… 조심해라, 이놈. 노부의 부(斧)는 저 귀신같이 생긴 놈의 쇳조각과는 아예 차원부터가 다르단 말이다!" 큰소리를 치며 달려 들었으나 역시 결과는 천조시군 막풍 때와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화천명의 몸은 그 육중한 공세에도 불구하고 고작 한 차례 흔들거리기만 했을 뿐이니까. "이…… 이건 말이 안된다!" 벽력철제 황신은 퉁방울 같은 눈으로 도끼를 내팽개치며 물러나야 했다. 이어 설산동자 자천조는 쌍극(雙戰)을 들고 나섰다가 하후강의 제지를 받았다. "쌍극으로 펼치는 일초(一招)도 일초는 일초가 아니냐? 일초니까 한 대다!" 이를 악물고 실랑이를 벌인 끝에 그는 간신히 화천명의 양해를 얻어 쌍극일초(雙戰一招)를 펼치게 되었다. 허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어 혈개 궁추는 술병을 쳐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결국 애궂은 술병만 박살이 났을 뿐이었다. 따라서 그는 물질적 재산(?)의 피해를 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천망조수 감천은 낚싯대와 그물을 이용하여 화천명을 낚아(?) 보려고 했으나 화천명의 몸은 도무지 요지부동이었다. "빌어먹을! 나도 재산상의 피해를 볼 수는 없다." 결국 그는 욕설을 내뱉고는 낚싯대와 그물을 회수하고는 주저앉아 버렸다. 이어 대육도천 마백의 차례였다. 허나 그는 교자에서 내려 화천명의 면전에 까지 도착하는데 근 이각(二刻)이라는 시간을 허비했다. 그러자 지루함을 못 참은 관중(?)들의 항의와 야유가 빗발쳤다. "이거 신경질나서 못해 먹겠다. 너희들이 해라." 결국 그는 두 제자인 벽의소녀들에게 일임했으나 벽의소녀들은 화천명에게 다가오더니 모기라도 잡듯 가슴을 토닥거리고는 물러가 버렸다.


"한심한 년들!" * * * 음양고독 천우림의 주장은 이러했다. "나는 음양인(陰陽人)이다. 다시 말해 남녀 두 사람이나 다를 바 없으니 두 대를 쳐야 된다!" 하후강과 옥신각신 고집대결을 피운 끝에 역시 화천명의 양해를 얻어 두 대를 때려본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허나 두 대나 한 대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곧 막심한 후회성을 늘어놓고 말았다. "으흐! 난 두 대 맞을 일이 끔찍하구나." 헌데 그들과의 이 기묘한 싸움에서 화천명은 몹시 기이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독행칠대고수들이 사용하는 일초(一招)들은 하나같이 가공했다. 그리고 각자 자신이 지닌 최강의 절학(絶學)들이었다. 그러나 웬 까닭에선지 그들은 전력(全力)을 다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특히 속도면에서 그런 기이한 느낌은 현저히 나타났다. 그것은 마치 전수(傳授)라도 해 주는 듯한 동작이기 때문이었다. '흠! 무슨 의도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당신들 사정이다.' 화천명 자신은 사정을 봐 주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화천명의 차례가 되었다. "……!" 독행칠대고수의 눈빛들이 순간 기이하게 빛났다. "흐흐! 쓸만한 도(刀)를 지녔구나." "탐난다. 솔직이……." 화천명은 빙긋 웃었다. "어느 분부터 맞아 보겠소?" 독행칠대고수는 잠시 우물쭈물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우렁우렁한 음성을 발하며 앞으로 나서는 인물은 벽력철제 황신이었다. "에이, 좋다! 이왕에 노부가 맨 먼저 시작했으니 노부가 받아 보마. 염려 말고 펼쳐 보기나 해라." "그럼……" 화천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중의 절정도를 쳐들어 올렸다. "천뢰(天雷)!" 순간 웅후한 일갈과 함께 화천명의 절정도가 묵광(墨光)을 뻗었다. 쐐애애액! 수직일도(垂直一刀)로 허공을 가르는 그것은 바로 천벽절도의 일식 천뢰행공(天雷行功)이었다. 그 순간 화천명은 생각했다. 이 기묘한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기선(機先)을 제압하는 것이라고. 따라서 쵠뢰행공을 사용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피하지 않겠다는 상대에게 변화무쌍한 절학 따위는 사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또한 독행칠대고수쯤 되는 자들을 굴복시킬 무학은 그것 뿐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살상(殺傷)을 위한 목적이 아니었던 까닭에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었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벽력철제 황신은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우웃!" 찰나였다. "저…… 저건!" "아니?"


독행칠대고수의 입에서도 일제히 놀람의 일성들이 튀어나왔다. 그 순간 화천명의 절정도는 이미 벽력철제 황신의 정수리 한 치 위에 이르러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기세는 흡사 천뢰(天雷)가 내리꽂히는 듯했다. 벽력철제 황신은 도저히 받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 판단이 내려지는 순간, 그의 신형은 지면을 뒹굴다시피 하여 화천명의 일도(一刀)를 가까스로 피해내고 있었다. 콰직! 그가 서 있던 지면이 무참하게 쪼개져 버린 것과 하후강의 엄숙한 일성이 터져나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실격!" 이어 천조시군 막풍, 설산동자 자천조 등이 화천명과 마주 서 보았으나 결과는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실격!" "실격이오!" 혈개 궁추는 이렇게 내뱉으며 아예 일어 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젠 더 이상 재산상의 피해를 보지 않겠다. 그러다가 옷이라도 찢어지면 어떡하란 말이냐?" 대육도천 마백은 벽의소녀들을 둘러보았다. "얘들아, 너희들이 나가 보지 않겠느냐? 오늘따라 이 사부의 몸이 좀 시원치 않다." 벽의소녀들은 질겁을 했다. "어머머! 저희가 미쳤나요?" 이렇게 되자 하후강이 다시 한 번 엄숙하게 외쳤다. "기권은 또한 실격으로 간주하겠소." 혈개 궁추와 대육도천 마백은 차라리 잘 되었다는 표정으로 소성을 흘렸다. "흘흘!" "흐흐흐!" 이어 음양고독 천우림과 천망조수 감천은 예의 죽음에 대한 찬반론을 늘어 놓으며 역시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또 한 번 세상 오래 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말년에 저렇게 그럴 듯한 녀석을 만나게 되다니!" "역시 일찍 죽었어야 했다. 저런 아이를 노부의 후계자로 삼았어야 하는 건데……!" 순간 하후강의 음성이 야공을 울렸다. "두 분 또한 실격이오!" "이상 일곱 분은 모두 실격이오." 하후강은 다시 엄숙하게 외쳤다. "따라서 사전 약속에 의해 이제부터 일곱 분의 생사결정권(生死決定權)은 화천명이 소유하게 되었음을 선포하는 바이오." 이어 그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만의 하나 거부하거나 불복하는 사태가 있을 시, 이는 무림의 명망있는 노선배로서 할 일이 아님은 물론 신의(信義)를 배반하는 행위인 바, 본 하후강은 입회인의 입장을 분명히 하여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첨언(添言)해 두는 바이오." 짝짝짝! 말이 끝나자 백선아는 생긋 웃으며 박수를 쳤다. "으음!" "우라질!" 독행칠대고수는 모두 다 땅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아 버렸다.


맥 풀리고 낭패한 것도 모자라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로서 한 가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은 관중(觀衆)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에 그들이 나타나면서 워낙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던 까닭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중인들은 모두 멀찌기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때 하후강이 화천명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는 이제 생사결정권을 사용하도록 하게." "음!" 화천명은 짐짓 느릿느릿 독행칠대고수들을 둘러 보았다. "죽일까…… 살릴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중얼거림에 독행칠대고수의 가슴 속은 끓어오르는 기혈로 뒤집혀 버릴 지경이었다. 미치고 환장한다는 표현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젠장!" "제기랄!" 화천명의 시선은 이때 마지막으로 대육도천 마백의 살찐 얼굴에 머물렀다. 대육도천 마백은 뒤에 시립하고 있는 쌍둥이 벽의소녀에게 말했다. "애들아, 사부가 죽더라도 슬퍼허거나 용기를 잃어서는 안된다." 벽의소녀들은 즉시 대답했다. "예. 그럴 생각이예요, 사부님." "저희들은 안심하시고 부디 잘……." 하다가 이건 실언(失言)이라고 생각되었는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부디 잘 돌아가시라 이 말을 하려고 했었을까? 벽의소녀들은 정말 내심이 그러한 모양이었다. 사부의 죽음이 거론되어짐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오히려 더 생기있고 반짝이는 눈망울로 화천명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때 그녀들의 모습이 백선아에게는 영 기분 나쁘게 보였던 듯, "흥! 저렇게 배은망덕한 계집애들을 뭐하러 제자로 삼고 무예는 가르쳐 줬담." "……!" 쌍둥이 벽의소녀들의 아미가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대육도천 마백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노부가 제자로 삼고 싶어서 삼았겠느냐? 거동이 하도 불편하여 하는 수 없이……."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사 한 줄기 음성이 나직이 들려왔다. "노부가…… 제자로 삼고 싶어서…… 삼았겠…… 느냐…… 거동이…… 하 불편하여…… 하는 수 없이……." 이럴 수가? 그 음성은 대육도천 마백의 그것과 완전히 똑같은 목소리였고, 말의 내용 또한 똑같지 않은가? "……!" 순간 대육도천 마백의 얼굴에서 살이 파르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이어 살 속에 파묻힌 실눈이 퉁방울처럼 휩떠졌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목소리가 동굴 속에서 되울려 나오는 것과도 같았다. "……!" 같은 순간 나머지 육대고수들의 얼굴과 눈빛이 무섭게 긴장의 빛을 발했다.


주위의 공기가 급격하게 동결(凍結) 되었다. 화천명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이럴 수가! 음성이 어디서 들리는지 조차 알 수 없지 않은가?' 한 순간 대육도천 마백의 입에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것은…… 여…… 영음(靈音)이다!" 그와 동시에 괴음성은 그 말을 따라 하고 있었다. "이것은…… 여…… 영음이다……" 순간 대육도천 마백이 비대한 몸집을 벌떡 일으켰다. 일어났다 싶은 순간, 그의 신형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으리만큼 엄청난 속도로 야천(夜天)을 꿰뚫어 갔다. "사부님, 같이 가요!" 쌍둥이 벽의소녀 역시 외치며 교자를 멘 채 몸을 날렸다. 슈아아아! 그때 벽력철제는 긴장의 와중 속에서도 감탄성을 발했다. "우와! 저 비곗덩이 마가(馬哥)놈이 저렇게 빠를 수도 있구나!" 그 순간이었다. "우와…… 저 비곗덩이 마가놈이 저렇게……" 벽력철제 황신의 음성 또한 괴음성에 의해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가? 벽력철제 황신은 질겁했다. "억! 나, 나한테도 붙었다." "억! 나, 나한테도 붙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찰나 벽력철제 황신의 몸이 질풍처럼 천공을 뚫으며 날았다. 슈아아…… 앙! 음성이 들려오는 방향을 감지해낸 것일까? 그가 사라진 뒤 궁인들은 모두 슬금슬금 일어났다. 하나같이 입을 꾸욱 다문 채 절대 입을 열지 않겠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때였다. 문득 화천명의 입에서 신음 같은 일성이 뱉아졌다. "영…… 영음마곡(靈音魔谷)!" * * * -영음마곡(靈音魔谷)! 이는 환상십지 가운데 정서(正西)에 있다는 영음(靈音)의 골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닌���? 그렇다. -그 이름을 말하지 마라. 그들을 생각하지도 마라. 그들은 육신도 영혼도 없는 단지 소리(音) 뿐인 인간…… 또한 저주의 소리이니…… 그대가 언제 어디서 무슨 말을 하건 그것을 똑같이 따라 하는 저주의 소리가 평생을 따라 다니리니……. 오오! 바로 그 공포스런 이름의 등장이라는 말인가? 헌데 이상하게도 화천명의 말을 따라 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그러자 나머지 오대고수들의 안색에 희미한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설산동자 자천조가 문득 중얼거렸다. "두 놈 뿐인가 본데……?" 순간이었다. "두 놈 뿐인가 본데……." 역시 똑같이 따라 하는 괴음성이 들려오지 않는가? "……!" 설산동자 자천조의 몸이 펄쩍 튀어올랐다. 다음 순간 튀어오른 동작 그대로 설산동자 자천조는 야공을 치뚫으며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때 천조시군 막풍과 천망조수 감천, 혈개 궁추, 음양고독 천우림 등 사인(四人)은 서로 급히 눈짓을 교환했다. "……!" "……!" 이어 그들은 가만히 자세를 낮추는가 싶더니, 한순간 부챗살이 퍼지듯 사방(四方)으로 갈라지며 동서남북으로 폭사해 들었다. 파파팟! 그와 동시에 화천명의 귓전으로 한 자락 음성이 꽂혀들었다. "자네가 있어 잠시 자리를 떠나니 두 사람을 부탁하네. 그리고 어서 이 자리를 피하게." 그것은 혈개 궁추의 음성이었다. 휘잉…… 휘이잉……! 야풍(夜風) 한 줄기가 음성과 함께 밀려 들었다. * * * "……!" 혈개 궁추가 사라지면서 발한 음성을 듣는 순간 화천명은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 그것은 분명히 백선아와 마의중년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헌데 백선아의 말에 의하면 그들 독행칠대고수는 근 십오년(十五年) 간이나 백선아 등을 쫓아다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오히려 그들 두 사람을 부탁한다니? 퍼뜩 화천명의 뇌리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그들은 그 동안 쫓아다닌 것이 아니라 보호를 한 것이 아닐까?'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그럴 듯한 생각이었다. 그렇다. 실상 독행칠대고수가 아무리 과거에 마의중년인에게 혼이 난 적이 있다 하나 지금까지 두려워 하고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무공이 폐쇄되었다는 정도를 그들 같은 절대고수들이 못 알아 본다는 것은 더욱 더 말이 안되는 일이라 해야 옳았다. '보호였다면 말은 되는데…… 그렇다면!' 화천명의 눈빛이 일순 기광을 발했다. 그것은 뭔가 사건의 실마리가 잡혀 들었다는 의미였다. 이때였다. 하후강이 화천명을 돌아다 보며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 겨우 말을 따라 한다 해서 저렇게 두려워 하고 도망까지 간단 말인가?" 화천명이 미미하게 검미를 좁히며 대답했다. "영음마인(靈音魔人)들일세. 환상십지 중에서도 가장 무섭다는……." "나는 뭐가 무서운 줄 모르겠네."


하후강은 역시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이때 백선아가 불쑥 나서며 말했다. "대숙에게 들었는데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대요. 영음마인이 한 번 붙게 되면 몸서리 몸서리치다가 영원히 떼어 놓을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미쳐 버리고 만대요." "떼어 놓을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기는 있지." 화천명의 말이었다. "영음마인들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달리면 된다." 백선아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대숙의 말로는 그들보다 빠른 경공술은 없다고 하셨어요." "글쎄…… 아주 없지야 않겠지." 화천명은 이렇게 말하면서 내심 생각을 굴렸다. '독행칠대고수가 바로 그 방법을 사용했으니까 두고 볼 일이지.' 헌데 모를 일은 백선아의 대숙이라는 인물의 정체였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는 환상십지의 실체(實體)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하지 않은가? 갈 수록 더욱 신비해지는 느낌이었다. 그가 천벽비부나 제왕비동 중의 하나를 우연히 얻었다 해도 환상십지에 대해 알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급선무가 바로 이 사람의 치료다!' 화천명은 마의중년인을 다시 한 차례 건너다 본 하후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넨 어디로 가던 길인가?" 그 물음에 하후강은 흠칫 고민스런 표정을 지었다. 밝히기 곤란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허나, 그는 곧 대답했다. "천지회(天志會)에 가는 길이었네." "천지회?" 화천명은 좀 의외였다. 하후강의 성격으로 보아 분명 사실일 것이다. "천지회에는 왜?" "……!' 하후강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또 상당히 고민이 되는 모양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버님의 명(命)일세. 가서 문후(文后) 옥유향을 만나라는……." "……!" 하후강의 아버님이라면 마령천존(魔靈天尊) 하후승이 아닌가? 헌데 천지회와 마라천교는 정마(正魔)의 숙적지간(宿敵之間)이었다. 그랬기에 화천명은 심상치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더군다나 그가 만나려는 사람이 옥유향이라는 말에 더욱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파격적으로 일약 문후(文后)의 직위에 오른 소녀 옥유향과 마라천교의 만남이라고?' 허나 화천명은 곧 하후강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게. 천지회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지." "천지회에서?" "나도 천지회에 갈 일이 있네. 조만간 갈 테니 기다리고 있게." 화천명은 그렇게 말하며 백선아의 손목을 잡았다. "선아, 가자." 이어 그는 하후강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나서 그대로 지면을 박차며 솟구쳐 올랐다.


휘익! 화천명은 빛줄기처럼 야천을 꿰뚫으며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져 갔다. "……!" 하후강은 아쉬운 듯 화천명이 사라져 간 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퍼뜩 작별인사를 안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듯 큰소리로 외쳤다. "잘 가게!" * * * 소호(巢湖). 잔잔한 호면(湖面)에 겨울 달빛이 파리하게 깔려들고 있었다. 휘잉……. 문득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자 달빛은 물고기처럼 파득거리며 부서졌다. 그 시각 잔잔한 수면 위를 그림처럼 미끄러져 가는 한 척의 편주(片舟)가 있었다. 편주 위에는 두 사람이 달빛에 젖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일남일녀(一男一女)였다. "어디로 가는 거죠?" 입을 여는 것은 소녀(少女)였다. 허름한 흑의(黑衣)를 걸쳤고 얼굴 또한 천진해 보이나 바라보면 볼수록 알 수 없는 기이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십 사오 세 가량의 소녀. 그녀는 바로 백선아였다. 그녀와 마주 앉아 있는 사람은 물론 화천명이었다. "동정호로 간다." 화천명은 소호의 수면으로 눈길을 둔 채 대답했다. "동정호엔 왜? "네 대숙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안전한 곳이 필요하다. 이 근방은 상당히 위험해." "……!" "그곳엔 친구가 있지. 최소한 마음놓고 치료할 수 있는 편의는 제공해 줄 것이다." 그렇다. 화천명은 지금 녹수구곡맹(綠水九曲盟)으로 향해 가는 길이었다. 마의중년인을 치료할 수 있는 안전한 곳으로 그는 제일 먼저 그곳을 떠올렸다. 뿐만 아니라 녹수구곡맹의 인물들 중 환혈(煥血)에 적합한 대상자를 선택할 수도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 중대한 이유는 바로 구곡대제와의 약속(約束)이 생각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소문이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 적당한 시기에 돌아오겠소이다. 그 적당한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 화천명의 시선은 계속 수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천명의 그러한 모습을 백선아는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헌데 어느 순간이었다. "앗!" 백선아의 입에서 돌연 뾰족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갑자기 배가 기우뚱하는 충격에 화천명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음?" 그가 가볍게 놀란 사이에 편주가 느닷없이 한쪽으로 거칠게 휩쓸려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소, 소용돌이예요!"


그렇다. 쿠쿠쿠쿠……! 느닷없이 호심으로부터 괴이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소용돌이의 엄청난 힘(力)에 편주는 걷잡을 수 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배가 휘청거리며 물보라가 무섭게 튀어올랐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화천명의 눈빛이 번쩍 불꽃을 뿜었다. '이건 인공(人工)으로 일으켜지는 소용돌이가 틀림없다!' 찰나지간 화천명의 뇌리를 꿰뚫는 하나의 이름이 있었다. '그렇다면…… 백수대하(白水大河)!' -백수대하(白水大河)! 신비구천의 하나이자 바다를 제외한 대륙 안의 모든 물(水)을 지배한다는 수신(水神)의 하늘(天). 그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화천명은 그대로 뱃전을 박차고 솟아 올랐다. 추아앗! 솟아 올랐다 싶은 순간 그의 신형은 허공을 선회하며 소용돌이와 편주 중간으로 내려섰다. 쿠쾅! 이어 그는 편주를 향해 냅다 일장(一掌)을 쳐내면서 소용돌이 속으로 내려꽂히듯 뚫고 들어갔다. 슈팡! 소용돌이는 화천명의 몸을 흡사 괴수의 아가리처럼 삼켜버렸다. "아앗!" 백선아의 외침을 싣고 편주는 화천명이 쳐낸 장력의 힘에 의해 붕 떠올라 십 장(丈) 이상을 날아가 떨어졌다. 철퍼덩! 뱃난간을 죽어라 붙들고 있던 백선아는 배가 수면에 떨어지는 진동에 꽉 감았던 눈을 떴다. 편주는 이미 소용돌이의 세력권을 벗어나 있었고, 배 자체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보이지 않는 것은 화천명의 모습 뿐이었다. "난 몰라!" 그녀는 울상이 되어 소용돌이쪽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 * * 콰콰콰! 소용돌이 속으로 뛰쳐들었던 화천명은 물 속에 들어서자마자 엄청난 흡인력(吸引力)과 수압(水壓)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그가 만일 금강불괴지신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온몸이 가루로 분쇄(粉碎)돼 버리고 말았을 터였다. 순간 화천명은 생각했다. '억지로 버티기 보다는 물의 힘대로 맡겨둠이 낫다!' 휘류류류! 다음 순간 화천명의 신형은 마치 풍차처럼 회전하며 정신없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수중(水中)은 지독한 암흑이었다. 밤(夜)이기도 하거니와 그것은 어찌 보면 인공(人工)으로 형성된 어둠인 듯했다. 화천명의 안력으로도 간신히 일 장(丈) 앞밖에 꿰뚫어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헌데 거의 수저(水底)까지 이르렀다고 느껴졌을 때였다. 갑자기 시야가 환히 트여졌다. "……!" 순간 화천명은 볼 수 있었다. 수저 부근에서 흡사 꼬리를 쫓는 수어(水魚)처럼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고 있는 세 개의 흰


물체(物體)가 있는 것이 아닌가? 화천명을 삼킨 그 갑작스런 소용돌이의 원천(源泉)이 바로 그들이 일으키고 있는 맹렬한 회전에 있었다는 사실과 그 물체들은 바로 사람(人)이라는 사실은 거의 한 순간에 파악되었다. 그때였다. 화천명이 급속히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본 그들은 즉시 회전을 멈춤과 동시에 그대로 물살을 가르며 화천명에게 폭사해 들었다. 슈아아앗! 그 속도는 가히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빨랐다. 여기가 물속(水中)이라는 것을 잊어 버릴 만큼 엄청난 속도로 그들 삼 인(三人)은 쇄도해 들면서 동시에 가공할 암경(暗勁)을 뻗어내고 있었다. 쿠콰콰! 찰나였다. 떨어져 내리던 상태에서 화천명은 그대로 쌍장(雙掌)을 내뻗어 공세를 맞받아쳤다. 콰쾅! 화천명과 삼인(三人)은 마주 퉁겨지며 갈라져 나갔다. 그 순간 화천명은 그들 삼 인의 모습을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 그들은 하나같이 눈(目)만을 제외한 전신에 완전히 밀착되는 비늘옷(魚衣)을 입고 있었다. 용모 따위는 물론 아예 알아볼 수 없었다. 비늘을 번뜩이며 물 속을 자유자재로 유영하는 그들의 모습은 그대로 수어(水魚)라 해도 좋았다. '역시 백수대하였다!' 순간 화천명은 자신의 예상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때, 그들 삼 인은 또 다시 무섭게 공세를 폭출해 들었다. "……!" 화천명은 급히 신형을 꺾으며 그들을 향해 일수삼권(一手三拳)을 연속적으로 뻗어냈다. 쿠쿠쿵! 수중의 무서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초식이 거듭될 수록 화천명은 급격히 밀리기 시작했다. 화천명은 수중에서 본신의 공력을 절반도 채 발휘할 수 없었다. 반면 백수대하의 인물들은 물 속에서야말로 더 가공할 힘을 발휘했다. 뿐만 아니라 화천명은 자신의 최고절학인 천벽절도 일식(一式)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수중에서는 뇌정(雷霆)의 기운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 화천명은 입술을 굳게 악물었다. 다음 순간, 그는 밀려닥치는 암경을 가까스로 젖히며 대접인신공(大接引神功)을 다시 펼쳐 물결을 박찼다. 추아아아! "잡아라!" 삼 인의 신형이 무서운 속도로 따라붙었다. 츄팟! 찰나 화천명은 수면을 뚫고 그대로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러자 삼 인의 신형도 역시 그를 쫓으며 수면 밖으로 퉁겨져 올랐다. 그 순간이었다. 버언쩍!


화천명의 절정도가 천뢰(天雷)와도 같은 묵섬(墨閃)을 수평으로 토해내는 것이 아닌가? 단 일도(一刀)였다. "크악!" "아아아악!" 이어 세 마디의 비명이 터졌다. "……!" 백선아는 물 속으로부터 거의 동시라고 할 수 있는 간격으로 네 줄기의 빛살이 솟구쳤을 때 흠칫 놀라 몸을 푸르르 떨었다. 그 순간 흡사 천뢰(天雷)처럼 내리 꽂히는 무서운 묵광(墨光)을 보았다. 뒤이어 비명소리가 처절하게 터지고 야천에 피보라가 안개처럼 뿜어지는 광경 또한 보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헌데 어느 순간이었을까? 돌연 그녀의 어깨 위에 부드러운 손의 감촉이 와닿는 것이 아닌가? "……!" 그녀의 고개가 흠칫 돌려졌다. 그녀의 시야에 어느 새 화천명이 조용히 서 있었다. "죽지……." "않았다." 화천명은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허나 웃음과는 달리 조금 경직된 음성으로 그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수로(水路)는 아무래도 위험이 많다. 길을 좀 바꿔야 되겠어." 제 24 장 드러나는 음모(陰謀) * * * 화천명과 백선아는 수로(水路)를 버리고 산길로 접어 들었다. 밤(夜)은 이미 자정(子正)을 넘어 깊을대로 깊어 있었다. 검은 하늘을 향해 팔을 뻗어올린 아름드리 거목(巨木)들이 빽빽하게 솟아 있는 길이었다. 푸르스름한 달빛은 청무(靑霧)처럼 숲 속에 널려 있었다. 휘잉…… 스스스스……. 야풍(夜風)에 풀잎과 나뭇잎들이 울어댔다. 어디선가 귀곡성(鬼哭聲)이라도 들려올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였다. 화천명은 마의중년인을 업고 있었다. 백선아는 바싹 화천명의 곁에 다가붙어 걸었다. "무서워요." "괜찮다. 설마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서 그러느냐?" 화천명은 백선아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귀신이 설마 나타난다 해도 걱정할 건 없겠지. 그녀석들도 네 천요섭정안(天妖攝精眼)에는 겁을 집어먹고 물러갈 거다." "피이!" 백선아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어허이…… 어이고오…… 으흐흑흑!" 어디선가 난데없는 호곡성(呼哭聲)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처절한 통한(痛恨)이 핏물처럼 배어 있는 호곡성은 그렇지 않아도 으스스한 판국에 더욱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였다.


"저……." 백선아는 황급히 화천명의 팔을 끌어 안았다. "가만 있어 봐라." 화천명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신중하게 전면을 주시했다. '평범한 호곡성이 아니다. 저 소리에는 지독한 사기(邪氣)와 피(血)를 부르는 듯한 요악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 그렇다. 처음에는 단지 통한의 울부짖음처럼 들리던 그 호곡성엔 악기(惡氣)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기(魔氣)라고도 할 수 있는 불쾌하면서도 섬뜩섬뜩한 기운이었다. 흡사 유부(幽府)에서 흘러나오는 악령(惡靈)의 소리 같았다. 심장을 짓누를 듯한 무서운 기운은 점점 강렬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호곡성 또한 차츰 가까와지고 있었다. "어흐흐흐…… 흐흐흑…… 으흐흐……." "……!" 백선아의 몸이 부르르 떨었다. 화천명은 정광(精光)이 일렁이는 눈으로 전면을 노려보았다. '이러한 사기는 이미 몇 번 경험한 바가 있다. 또 그들 중의 한 부류가 나타났단 말인가?' 이때 백선아가 화천명의 팔을 잡으며 외쳤다. "저…… 저것!" "보고 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시커먼 물체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커먼 물체들은 뜻밖에도 십여 명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발 밑까지 끌리는 암회색(暗恢色) 장포를 입고 있었다. 아니 장포라기 보다는 아예 천을 뒤집어 씌워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에 가려 머리를 제외한 신체의 다른 부분들은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얼굴 모습은 또 어떤가? 피부는 횟가루를 칠해 놓은 듯 희면서도 푸르죽죽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없었다. 그 얼굴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코나 입, 귀 등이 아예 달려 있지도 않은 것이었다. 이른 바 무면(無面), 즉 형체가 없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단지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해골의 그것처럼 시커멓게 뚫려 있는 두 눈두덩 뿐이었다. 그곳으로부터 귀화(鬼火)처럼 시퍼렇게 뻗어나오는 사이(邪異)한 빛은 골수라도 꿰뚫어 버릴 듯 예리하면서도 음사했다. "우흐흐흐…… 우우우……!" 입도 없는 얼굴에서 혼백을 휘잡아 찢을 듯히 흘러나오는 호곡성은 이들의 괴이(怪異)한 모습과 함께 진정 유부(幽府)의 최명차사(催命差使)들이 현신한 듯한 음악(陰惡)한 분위기를 연출해 내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어깨 위에 시꺼먼 관(棺)들을 둘러메고 있었다. 관의 수효는 모두 다섯 개였다. 삐이걱…… 삐거…… 억……! 바람이 불 때마다 관에서는 소름끼치는 마찰음이 사위를 섬뜩함으로 휘감고 있었다. "……!" 그들의 기괴한 행동을 노려 보고 있던 화천명은 일순 그 자리에 마의중년인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선아, 한쪽에 대숙과 함께 숨어 있거라. 싸움이 끝날 때까지 절대로 나와서는 안된다."


백선아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저…… 저들은 누구죠?" "구유명왕부(九幽冥王府), 죽어 귀신이 되지 못한 흉인들이다." * * * -구유명왕부(九幽冥王府)! 신비구천 중의 검은 빛 유명(幽冥)의 성좌로 상징되는 사자(死者)의 하늘. "……!" 백선아가 흠칫 몸을 떨며 물러섰다. 이때 무면(無面)의 괴인들은 다가오던 발길을 천천히 멈추었다. 그와 함께 호곡성 역시 뚝 멎었다. 덜컹…… 덜컹……! 이어 그들은 다섯 개의 흑관(黑棺)을 지면에 내려놓으며 양쪽으로 쫘악 갈라섰다. 괴인은 모두 십인(十人)이었다. 화천명이 그들을 바라보며 문득 입술을 떼었다. "돌아갈 유부(幽府)를 못 찾아 밤길을 헤매는 떠돌이 귀신친구들인가?" 허나 괴인들 중에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하긴 열려고 해도 열 입이 없었다. 대신 관 속으로부터 흡사 음습한 죽음의 늪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듯한 괴소성이 들려왔다. "으흐흐흐! 어린 것…… 생명을 보존하고 싶거든 그 병든 자와 계집아이를 놔두고 달아나거라." 그 말에 화천명은 피식 실소했다. "요즘 귀신들은 사람을 웃기는 법도 배운 모양이군." 중얼거리며 그는 괴인들 쪽을 향해 천천히 한 걸음을 떼어 놓았다. 이 순간 화천명의 뇌리 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이 떠오르고 있었다. '숫자로나 내뿜는 사기(邪氣)의 정도로 보아 이제까지 만난 무리들 중에 제일 난적(亂賊)이다! 특히 저 관 속에 들어 있는 자들…… 그렇다면 방법은 속전속결(速戰速決) 뿐!' 그때 관 속의 괴음성이 다시 발해지고 있었다. "말로는 안 들을 녀석 같군. 유명십사(幽冥十死)……." 유명십사라는 말이 흘러나오자마자 관의 좌우에 늘어서 있던 열 명의 괴인들의 눈두덩이에서는 귀광(鬼光)이 더욱 몸서리쳐지게 뻗어났다. "데려 오너라." 스으으으…… 스스스……. 그 순간 괴인들의 신형이 일제히 빳빳이 선 상태로 다섯 자(尺) 가량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모습은 흡사 생령(生靈)이 없는 꼭둑각시를 조종하는 듯했다. 슈욱! 떠올랐다 싶은 순간, 그들의 신형은 일제히 화천명을 향해 그대로 쇄도해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유부로 돌아가고 싶다면 돌려 보내 주지." 나직한 일성과 함께 화천명의 우수가 어깨 쪽으로 움직였다. 추파파파팟! 찰나지간 그의 손에서는 이미 엄청난 묵광(墨光)이 괴인들을 향해 토해지고 있었다. 고금제일의 쾌도(快刀)인 광령섬예(光靈閃銳)가 펼쳐진 것이었다. 카카카캉! 불똥이 튀며 괴인들의 몸뚱이는 거세게 퉁겨져 허공으로 휘날았다. 화천명은 순간 경악했다. '철골강시(鐵骨疆屍)! 도검(刀劍)이 통하지 않는 마물(魔物)들이다!'


슈팟! 찰나 화천명의 신형이 다섯 개의 묵관 쪽으로 날았다. '방법은 조종하는 자를 제거하는 것 뿐!' 생각보다도 그의 행동은 훨씬 빨랐다. 번쩍! 그의 절정도는 이미 천뢰행공(天雷行空)의 일식(一式)으로 관들을 찍어 버리고 있었다. 쐐애액…… 콰직! 다섯 개 묵관 중 두 개가 박살이 나 버리며 처절무비의 비명이 터졌다. "크악!" "아아아악!" 허나 비명이 터진 것보다도 먼저 나머지 세 개의 관에서는 세 줄기 인영이 솟구치고 있었다. 추파팟! "해치워라, 유명십사!" 세 줄기 인영은 화천명에게 쇄도해 드는 대신 이렇게 외치며 백선아와 마의중년인이 있는 방향으로 빛줄기처럼 날았다. "엇?" 슈슉! 화천명이 흠칫하는 사이 조금 전에 퉁겨져 나갔던 십 인의 강시들이 화천명에게 한꺼번에 짓쳐들었다. '이런!' 화천명은 다급했다. 관에서 치솟았던 세 인영은 어느 새 백선아와 마의중년인이 있는 거목 쪽에 당도하고 있었다. "악!" 백선아가 질겁하여 부르짖었다.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휘류류류류! 느닷없이 하늘에서 막(幕)과도 같은 검은 빛무더기가 휘덮이는 것이 아닌가? "아앗!" 순간 백선아의 아련한 외침성과 함께 그녀와 마의중년인의 몸뚱이가 검은 빛무더기에 휩싸여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웬 놈이냐?" 세 인영은 먹이를 놓친 맹수처럼 부드득 이빨을 갈아붙였다. 그때였다. "허허허헛헛! 야밤에 달빛 아래서 그물질 하는 흥취도 그럴 듯하군." 허름한 어부(漁夫)의 차림새로 낚싯대와 그물(網)을 들고 있는 그는 바로 독행칠대고수 중 천망조수 감천이었다. 이때였다. 스스슷! 세 인영은 지면에 내려서며 천망조수 감천을 휩쓸어 보았다. "네 놈은……?" 하나같이 죽음의 빛깔과도 같은 흑포(黑抱)를 걸친 자들이었다. 얼굴에도 검은 복면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복면 사이로 칼날보다도 섬뜩한 유광(幽光)을 뿜어내고 있는 그들에게서는 체취처럼 진득하게 느껴지는 가공할 죽음(死)의 냄새가 풍겨났다. 허나 천망조수 감천은 그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화천명이 싸우고 있는 쪽을 향해 외쳤다.


"허허헛! 어떠냐? 여기는 노부가 맡을 테니 두 사람을 데리고 떠나는 것이!" 이어 그는 시선으로 자신이 나왔던 숲쪽을 가리켰다. 십 인의 강시괴인들과 싸우고 있던 화천명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짐작대로군. 저들 칠독은 암중에 선아와 그 대숙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판단된 이상 사양하고 말 필요가 없었다. "그럼 부탁하겠소." 말을 뱉음과 동시에 또 다시 그의 절정도가 십 인의 강시들을 향해 날았다. 번쩍…… 쌔액! 카카캉! "끅!" "끄으!." 화천명의 천뢰행공 일식에 강시들 중 둘은 괴상한 비명과 함께 뒤로 넘어갔고, 여덟은 회오리에 퉁겨지듯 거세게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찰나지간 화천명의 신형은 천망조수 감천이 가리킨 숲 속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막아라!" 삼 인의 흑의복면인들이 치솟았다. "허헛! 안되지." 허나 그 순간 소성을 뿌리며 천망조수 감천의 우수가 번뜩였다. 동시에 그물이 허공을 뒤덮었다. 취리리리릿! "이 쳐죽일!" 행로를 차단당한 흑의복면인들은 신형을 반대로 꺾어 감천에게 폭사해 들었다. "으허허헛…… 오랜만에 싸움다운 싸움 좀 해 볼까?" 천망조수 감천은 몹시 기쁘다는 듯 거세게 그물을 휘두르며 그들의 공세에 마주쳐 갔다. 그때 화천명은 이미 백선아와 마의중년인을 양 옆구리에 끼고 허공을 꿰뚫고 있었다. 파아아아! "……!" 화천명은 몸을 날리며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천망조수 감천과 세 흑의복면인은 무섭게 부딪치고 있었고, 퉁겨졌던 여덟 명의 강시들도 그쪽으로 합류해 드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고생 좀 하겠군. 허나 명색이 독행칠대고수, 별 일은 없을 것이다." * * * 숲(林). 그것은 실로 이상한 숲이었다. 기이하게도 동체마저 푸른 색깔을 띤 나무(靑木)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이상해요." 백선아가 흠칫하며 가까이 다가들었다. 화천명은 몸을 날리다가 잠시 그녀와 마의중년인을 내려놓고 쉬고 있던 참이었다. "음!" 화천명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차츰 이상한 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 기이한 숲으로부터 뻗어나는 기괴하고도 사이(邪異)로운 느낌 때문이었다. '분명히 근처 백 장 방원 내에 사람(人)은 없다. 헌데 이 느낌은……?' 그렇다. 누군가가 잠복해 있다면 화천명의 초능적인 감각이 놓칠 까닭이 없는 것이었다.


'푸른 나무 숲…… 청목(靑木)…… 음?' 그렇게 생각하던 화천명은 문득 한 가지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청목(靑木)! 그렇다면 신비의 하늘(天)…… 청색의 목성(木星)으로 상징되는 목(木)의 하늘이 있다니!' 일순 화천명의 입에서 나직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청목마림(靑木魔林)!" 바로 그때였다. 스스스스……. 돌연 숲의 푸른 나무들에서 기이한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 그것은 나무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무 자체가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움직인다고 보였던 것은 나무 전체로부터 푸르스름한 운무(雲霧)가 흘러나오는 까닭이었다. 상상해 보라! 숲 전체에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들의 흡사 푸른 연기(煙氣)를 토해내듯 운무를 흘려내고 있는 광경을 말이다. 그 광경은 말 그대로 환상지경(幻想之境)이었다. 그리고 푸른 운무가 빠져 나오면서 나무의 빛깔은 원래의 거무죽죽한 빛을 되찾고 있었다. 스스스스……. 숲을 가득 채우던 푸른 운무는 어느 순간 흩어졌던 물이 모이듯 몇 개의 덩어리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어 그것들은 어떤 형태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바로 사람(人)의 형체였다. "……!" 족히 이십여 명은 되어 보였다. 헌데 사람의 형체를 이루어 가던 그들은 얼굴의 윤곽이 채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 결집행위(結集行爲)를 뚝 정지했다. 따라서 용모 따위는 물론 알아볼 수 없었다. 흡사 푸른 운무를 전신에 한 겹 두르고 있는 사람을 보는 듯했다. 스스으으으……. 이어 그들은 환영(幻影)이 허공을 흐르듯 화천명의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이들이 바로 목령마인(木靈魔人)이라는 것들인가?' 화천명이 내심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스릇! 그들 중 두 명의 인영이 화천명을 향해 그림자처럼 날아 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화천명의 뒤에 있는 백선아와 마의중년인을 향해 날아 들었다는 것이 옳았다. "어림없는 수작!" 추파퍅! 찰나 화천명의 도가 묵섬(墨閃)을 그었다. 허나 다음 순간 화천명은 실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분명히 절정도는 그들의 허리부분을 양단했다. 허나 순간 목령마인들의 몸뚱이는 상하(上下)로 갈라지더니 다시 합쳐져 버리는 게 아닌가? 마치 갈라졌던 물줄기가 그대로 이어져 버리듯이 말이다. '이런!' 화천명은 내심 낭패성을 내뱉으며 재차 도세를 떨쳐냈다. 허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목령마인들은 일시 주춤했을 뿐 그대로 덮쳐드는 것이었다. 정녕 놀라운 일이었다.


도대체 죽일 수가 없는 육체가 존재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말이다. 허나 바로 그 순간 화천명의 뇌리에는 한 가지 영감(靈感)이 번뜩 스쳐갔다. '오행지설(五行之設)에…… 목(木)을 누르는 것은 불(火)이라고 했다!' 영감이 스치는 순간 화천명의 좌수(左手)는 어느 새 덮쳐드는 이인(二人)을 향해 일장을 뻗어내고 있었다. 쿠콰! 바로 외문중학십이종 중의 열화(熱火)의 극(極)인 태양신화천강(太陽神話天 )이었다. 찰나 용암이 터지듯한 무지막지한 열강(熱 )이 목령마인들을 휘덮었다. "크으아아!" "크아!" 화르르르릇! 처참한 비명과 함께 불꽃 덩어리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촤촤촤촤촤! 흡사 빛살들이 퍼부어져 내리듯 나머지 이십여 목령마인들이 한꺼번에 사방을 푸른 빛으로 휘덮으며 날아들었다. 자신들의 약점이 노출된 바에는 아예 속전속결로 끝내 버리겠다는 심산 때문인 듯했다. "……!" 화천명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쿠콰아! 그는 좌수로 연이어 태양신화천강을 쳐내고 우수로 백선아를 낚아챔과 동시에 오른발로는 마의중년인의 몸뚱이를 냅다 걷어 찼다. 그 일련의 동작은 완전히 찰나간에 이루어졌다. 콰쾅! "끄아!" "케에엑!" 팟! 또 다시 두 명의 목령마인이 불꽃덩이가 되어 날아가는 찰나 화천명의 신형은 목령마인들의 공세권을 꺼지듯 벗어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벗어나면서 우수(右手)는 허공을 날아가는 마의중년인의 신형을 낚아채고 있었다. 가히 눈부신 반응과 현란할 정도의 쾌속한 동작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르르르! 화천명이 내려선 땅바닥이 갑자기 지진을 만난 듯 엄청난 진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웃!" 화천명은 두 사람을 잡은 채 뒹굴 듯 몸을 피했다. 찰나였다. 콰지직! 땅거죽이 터져 나가면서 뭔가 시뻘건 물체 하나가 솟구쳐 나왔다. 그것은 뜻밖에도 시뻘건 털로 뒤덮인, 족히 사람 손의 다섯 배 정도는 될 것 같은 거수(巨手)였다. 허나 상황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콰드드드득…… 꽈득! 땅이 갈라지고 숲의 나무둥치들이 뿌리째 뽑혀 나가면서 거대한 혈탑(血塔)이 솟구쳐 나오듯 시뻘건 형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와 함께 울려 퍼지는 우뢰와도 같은 괴소성이 터졌다. "크쿠쿠쿠!" 그것은 놀랍게도 전신이 시뻘건 털로 뒤덮인 거인(巨人)이었다. 키는 무려 십오척(十五尺)에 달한 거인은 인간이라기 보다는 원류(源流)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뜻밖에도 그것은 하나가 아니었다. 콰드드득…… 콰드득! 연이어 땅거죽을 뜯으며 솟구치는 괴인들의 수효는 일견에도 십 사오 명이 넘었다. "크카카카카카! "키키키……." 울부짖는 괴성 또한 도저히 인간의 그것이라고는 여길 수 없었다. 그렇다. 반인반수(半人半獸)의 괴물들. 화천명은 이미 이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반야산(半也山)이다!' -반야산(半也山)! 이는 또 하나의 환상십지(幻想十地)의 출현이 아닌가? "……!" 화천명의 입술이 깨물어졌다. 앞에는 청목마림이 있었고 뒤로는 반야산이 있었다. 정말이지 말 그대로 진퇴유곡(進退維谷)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 그들은 서서히 다가들고 있었다. 허나 화천명은 이 순간 알 수 없는 전류가 전율처럼 전신의 혈관을 치뚫고 달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투지(鬪志)였다. "좋아!" 화천명은 입가를 묘하게 일그러뜨리며 절정도를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백선아의 혼혈(混血)을 찍어 마의중년인의 옆에다 눕힌 뒤 그는 자세를 고쳐잡았다. "통쾌하게 한 번 싸우는 것도 무인(武人)으로선 기쁜 일이니까." 그때였다. "우핫핫핫! 멋진 말이다. 무인에겐 자고로 싸우는 일보다 통쾌한 것은 없지." "두말 하면 잔소리다."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몇 줄기 인영이 전권(戰圈)으로 날아들었다. 사인(四人). 그들은 바로 독행칠대고수 중의 네 사람이 아닌가? 벽력철제 황신, 설산동자 자천조, 천조시군 막풍, 혈개 궁추. 그들의 등장으로 갑자기 사위에는 터질 듯한 전운이 무섭게 팽배되었다. "……!" 화천명은 빙긋 웃으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 지겨운 목소리들은 떨쳐 버렸소?" 벽력철제가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 따위 귀신종자들에게 헤맬 것 같았으면 아예 독행칠대고수라 불릴 자격도 없다."


설산동자 자천조가 짐짓 의연하게 외쳤다. "자, 이젠 이족 귀신종자들을 치워 볼까?" 그때였다. "아미타불……" 돌연 어디선가 느닷없이 한 소리 불호성이 바람결에 실려들었다. 헌데 그 불호성 속에 지독히도 음사(陰邪)한 악기(惡氣)가 물씬 묻어 있는 것이 아닌가? "……!" 설산동자 자천조가 흠칫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바람에라도 실려온 듯 어느 새 이십여 명의 승려(僧侶)들이 나타나 있었다. 기괴하게도 그들이 걸친 승포는 짙은 암회색(暗灰色)이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얼굴엔 하나같이 부드럽고 인자한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허나 그 부드러운 미소가 더욱 사악(邪惡)하게 느껴지는 것은 웬일인가? 아마도 그들의 음기(陰氣)가 서린 요악한 눈빛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악승사(惡僧寺)!" 순간 설산동자 자천조가 씹어내듯 내뱉았다. * * * -악승사(惡僧寺)! 그렇다. 여러분은 이런 경고문을 기억할 것이다. 중(僧)들을 조심하라. 자비의 두꺼운 껍질로 사악(邪惡)을 위장한……. 그들이 외우는 염불이 어쩌면 그대의 목숨을 앗아가는 장송곡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그때였다. "킬킬킬킬…… 웬 미친 귀신들이 이런 곳에 모여 있느냐?" "우히히히…… 맛있겠다!" 괴이한 웃음소리가 숲 속을 흔들며 여기저기서 솟아나는 검은 그림자들이 있었다. 괴영(怪影)들은 족히 삼십여 명은 넘을 듯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시커먼 누더기들을 뒤집어 쓴 몰골이었다. 뿐만 아니라 상의(上衣)와 하의(下衣)를 바꿔입은 자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웃통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고, 거꾸로 걸어오는 자들도 있었다. "히히히히!" "클클…… 킬킬……!" 뭐가 그렇게 좋은 일이 있는지 괴소성을 연신 발하며 다가오는 괴인들의 눈동자(眼)가 광인(狂人)처럼 하나같이 풀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했을 때 설산동자 자천조의 입에서는 또 한 마디 음성이 뱉아지고 있었다. "황천광혈갱(荒天狂血坑)까지!" -황천광혈갱(荒天狂血坑)! 이는 환상십지 중의 하나인 미친 인간(狂人)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 설산동자 자천조 등이 일순 긴장하고 있는 사이였다. "후후후…… 아예 모조리 몰려 들었군 그래." 나직한 소성과 함께 허공에서 날아내리는 한 인영이 있었다. 촌녀(村女) 차림의 노부인이었다. 그는 바로 독행칠대고수 중의 음양고독 천우림이었다. 설산동자 자천조가 그를 돌아보며 괴이하게 웃었다.


"그 사이에 우리가 저 둘을 빼돌릴까 봐 따라왔느냐?" 그는 턱끝으로 백선아와 마의중년인을 가리켰다. "후후…… 그보다는 네놈들이 귀신에게 잡혀 먹을까 봐 염려돼 구해 주려고 왔다." 음양고독 천우림이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휘익! 뭔가 희끄무레한 물체가 우당탕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이쿠! 본좌의 비만증은 날로 심해져 이젠 경공을 펼치는 것조차 힘드는구나." 불만스럽게 내뱉는 인물은 바로 대육도천 마백이었다. 그때였다. "사부님!" 휘릿! 외침소리와 함께 떨어져 내리는 두 섬세한 인영들이 또 있었다. 어깨에 침상만한 교자를 메고 있는 그 인영들은 말할 것도 없이 대육도천 마백의 제자 쌍둥이 소녀들이었다. "사부님, 옥체가 무양하신지요?" "놔라, 다친 곳은 없다." 그러더니 대육도천 마백은 사위를 거슴츠레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흐흐흐흠…… 오늘따라 웬 귀신종자들이 이렇게 많이 나타났을까?" "허허헛! 그러기에 우리는 좀더 일찍 죽었어야 했던 것이지." 그 말에 허공 한켠에서 대답하는 음성이 있었다. 음성이 들린다 싶자 화천명이 서 있는 곁으로 한 줄기 인영이 날아내렸다. 휘익! "수고하셨소. 강시들을 물리치고 오느라고." 화천명은 빙긋 웃으며 내려서 인영을 돌아보았다. 나타난 사람은 바로 천망조수 감천이었다. 일순 벽력철제 황신이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외쳤다. "하하핫! 이렇게 되면 모두 다 모인 셈인가? 그렇다면 한판 신나게 싸워볼만 하군!" "좋아. 한 바탕 통쾌하게 싸워 보자." 설산동자 자천조가 즉각 동의하며 쌍극(雙戟)을 뽑아들었다. "좋다." "후후! 오랜만에 몸 좀 풀어 볼까?" 독행칠대고수는 제각기 병기를 움켜잡으며 칠방(七方)으로 갈라섰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하나같이 희열의 빛이었다. 당연했다. 싸움이라면 신부터 나는 그들이었으므로. "자, 시작합시다!" 화천명도 절정도를 쥐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 * * 쿠콰콰콰쾅! 그것은 한 마디로 엄청난 대격돌(大激突)이었다. 베어도 베어지지 않는 청목마림의 푸른 무영(霧影)들은 화기(火氣)만을 교묘히 피하며 덮쳐 들었다. 그리고 반야산의 반인반수 괴인들은 그 무지막지한 거력(巨力)으로 아름드리 거목들을 아예 뿌리째 뽑아 휘두르고 있었다. 악승사의 마승(魔僧)들은 기괴막측한 불공(佛功)을 퍼부었으며 황천광혈갱의 광인들은 혼백을 뒤집을 듯한 광소(狂笑)를 터뜨렸다.


허나 상대는 화천명과 독행칠대고수들이 아닌가? 그들의 개세적(蓋世的)인 무위(武威)에 의해 전국(戰局)은 거의 팽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독행칠대고수가 보여 주는 진정한 무위는 경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평생을 오직 무공과 싸움으로만 이어온 그들의 모습은 말 그대로 역전(歷戰)의 실전달인(實戰達人)들이었다. 정말이지 싸움의 신(神)들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였다. 콰르르…… 번쩍…… 쿠콰쾅! 싸움은 거의 세 시진을 내리 이어지고 있었다. 헌데 한 순간이었다. 후리리리! 혈개 궁추가 싸움을 계속하면서 화천명 쪽으로 바짝 접근해 왔다. 그와 함께 화천명의 귓속으로 그의 전음성(傳音聲)이 날아들었다. "자네에게 한 가지 밝혀 두고 싶은 이야기가 있네." "……?" "우리만이 알고 있는 무서운 이야기…… 누구에게든 밝혀둬야 했으나 아직껏 적임자를 만나지 못했었네." "……!" 화천명은 기가 찼다. 쿠쾅! 달려드는 황천광혈갱 광인 중 한 명에게 일장을 뻗어내며 신경질적으로 마주 전음을 보냈다. "무슨 이야긴지 몰라도 그걸 꼭 지금 이럴 때 밝혀야 한다는 건 뭐요?" 혈개 궁추는 급히 대답했다. "지금 상황이 매우 위험하네. 저들만으로도 국면은 팽팽한 상태네. 만일 저들 쪽에서 또 가세(加勢)하는 자들이 나타난다면 살아서 떠난다고 장담키 어렵지 않은가?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네." 이어 그는 또 화천명이 뭐라 할 것이 두려웠던지 얼른 말을 이었다. "자네 정도의 고수가 내 말에 조금 신경을 빼앗긴다 해서 그리 집중이 흐려지진 않을 걸세. 그리고 자넨 아무리 봐도 요절(夭折)할 상은 아니거든. 자네는 지금 아니라 더한 위험 속에서도 능히 살아나리라 믿네." 화천명은 피식 웃었다. "들어나 봅시다." "음!" 혈개 궁추는 잠깐 침음하더니 신중하면서도 빠른 어조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우리 칠독(七獨)……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았고 누구의 간섭도 받은 바 없이 마음내키는대로 천하를 종횡하면서 살아왔네. 허나 단 한 사람만은 감복한 분이 있었네. 바로 우사(憂士) 천운선생(天運先生)이네." 그렇게 시작된 비사(秘事)는 실로 놀라운 사실을 밝혀 주고 있었다. -우사 천운선생. 그는 호(號)가 천운(天運)이며, 본래의 이름은 백무빈(白武彬)이었다. 당시 녹림천하가 녹수구곡맹에 의해 일통되고, 천하의 사인(邪人)들이 집결하여 천사련(天邪聯)을 탄생시켰으며 마도(魔道)의 웅주(雄主) 마령천존에 의해 마라혈교가 세위지자, 그는 난세(亂世)가 그들에 의해 펼쳐질 것을 우려하여 정도무림을 규합, 천지회를 탄생시켰다. 그런 우사 천운선생에게는 한 명의 아들이 있었다. -무결서생(無缺書生) 백련(白鍊). 그는 오십 년 전, 당시의 부친의 뛰어남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는 기재(奇才)였다.


그런 우사 천운선생은 두 명의 제자를 두었다. -환곡(幻谷) 문인옥(聞人玉), -천수나타(天手那陀) 당한천(唐寒天). 천수나타 당한천은 기명제자였다. 직전제자는 현재 환곡선생(幻谷先生)이라 불리우며 천지회의 문상(文相)으로 있는 문인옥이었다. 그리고 그가 바로 이 비사(秘事)의 주역이었다. 우사 천운선생이 은퇴하고 더불어 실종되었을 때, 그러니까 바로 십오년(十五年) 전의 어느 날 독행칠대고수는 각기 한 통의 서찰(書札)을 받았다. 어떻게 자신들의 종적을 찾았는지, 누가 갖다 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은 우사 천운선생으로부터 보내진 서찰이었다. 내용을 지극히 간단했다. -모월(某月) 모일(某日) 모시(某時)에 모처로 와서 천수나타 당한천을 도와 주게. 그때까지만 해도 독행칠대고수는 서로 만나는 일도 드물었고 친분도 없었다. 헌데 바로 그 서신에 적힌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만난 이후 지금까지 동거동락(同居同樂)을 해오게 되었다. 독행칠대고수들이 그 장소에 갔을 때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결서생 백련과 그의 부인이 함께 시신으로 화해 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곁에는 다섯 살 가량의 쌍둥이 사내아이와 갓난 계집아이 하나가 울고 있었다. 근처에서는 치열한 격투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천수나타 당한천과 구인(九人)의 복면인들의 혈투였다. 헌데 놀라운 것은 그들 구 인이 모두 지난 날 환우구마존의 마공(魔功)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본래가 무공광(武功狂)들인 독행칠대고수였기에 구마절학(九魔絶學)의 형태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천수나타 당한천 역시 구마절학을 잘 알고 있는 듯 유효적절하게 상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천수나타 당한천은 천벽비부(天壁秘府)의 기연을 얻은 바 있었다. 우사 천운선생의 엄명에 의해 그러한 사실을 입 밖에 낸 적도 없었고 사용했던 적도 없었지만 말이다. 천수나타 당한천과 구 인 복면인의 치열한 격전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미 당한천은 극심한 중상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세 아이들을 보호하면서 싸우느라 극도로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로 인해 구마절학의 파해공(破解功)으로 간신히 버티고는 있었으나 한 잔 물로 집에 난 불을 끌 수는 없었다. 그는 거의 생사지경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만인 독행칠대고수가 때맞춰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을 터였다. 결국 싸움에 끼어든 독행칠대고수들은 애초부터 이기려는 생각은 없었다. 기회를 엿봐서 당한천과 세 아이들을 데리고 도주하려는 심산이었다. 헌데, 그들이 싸우고 있는 사이에 또 한 명의 신비복면인이 어디선가 나타났다. 나타나자마자 그는 쌍둥이 두 사내 아이를 양 옆구리에 끼고 그대로 몸을 날렸다. 구 인의 복면인 중 하나가 가공할 축융마공(祝融魔功)을 뻗은 것은 그때였다. 그 엄청난 열화기공(熱火奇功)에 격중한 신비인은 순간 한 아이를 놓치고 그대로 달아났다. 놓친 아이는 얼굴에 화상(火傷)을 입은 채 떨어지면서 죽은 모양이었다. 그 기회를 틈타 독행칠대고수와 당한천은 갓난 계집아이를 데리고 몸을 날려 도주했다. 그리고 숨고 숨어다니는 삶으로 지금까지 십 오 년을 이어온 것이었다. 결국 독행칠대고수는 은밀히 당한천 주위를 맴돌며 그들을 보호해 왔던 것이다. "……?"


여기까지 들은 화천명이 이상하다는 듯 불쑥 물었다. "진짜로 중요한 것을 빼놓았소. 그 사건과 환곡선생이 어떤 관련이 있단 말이오?" 혈개 궁추가 대답했다. "그 일련의 사건들이 바로 환곡…… 그 자의 역륜(逆倫)이었네. 자기의 사부를 감금시켜 놓고 얻을 것을 다 얻어낸 다음 시해(弑害)한 것이네." "역시…… 그랬었군." "짐작키에 천운선생은 감금된 상태에서 ���대한 시일을 늦추다가 도저히 살아날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미리 죽을 날짜를 잡은 것이 분명하네." * * * 즉, 혈개 궁추의 말은 이런 의미가 아니겠는가? 제자에게 배신당하고 감금된 우사 천운선생이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은 아들 백무련과 그 가족들이었다. 그는 어떤 시기를 잡아 당한천으로 하여금 그들을 구해 내도록 했다. 허나 당한천만으로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 독행칠대고수에게 밀지(密旨)를 띄워 그를 돕도록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 시기까지 최대한으로 시일을 끌었던 것이고. "허나 모를 것은 우리에게 서신을 전한 인물이네. 어쩌면 쌍둥이 아이 중 하나를 데려간 그 흑의복면인과 동일인이 아닐까 하네만……." 쌍둥이 아이. 하나는 얼굴에 화상을 입은 채 죽은 듯했고, 또 하나는 의문의 흑의복면인이 데려갔다는 그 아이 또한 어떤 중대한 변수(變數)가 되는 것은 분명했다. "……!" 화천명의 눈빛은 무섭게 가라앉았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화공자!" 느닷없이 들려온 뾰족한 여인의 음성이 화천명의 상념을 깨뜨렸다. 그는 흠칫 고개를 돌렸다. 슈아아아아! 그 순간 야공으로부터 십여 줄기의 인영들이 빛줄기처럼 날아들고 있었다. "아니?" 화천명의 눈살이 잠깐 좁혀졌다. '도옥진!' 그렇다. 맨 선두에서 날아오는 흑의인영은 바로 도옥진이었다. 휘리리릿! 지난 날 화천명이 빙하사후에 의해 납치됨으로 인해 헤어졌던 그녀와 함께 날아오는 인영들은 한 명의 노니(老尼)와 아홉 명의 중년여승(中年女僧)이었다. 그녀들은 나타나기가 무섭게 그대로 전권으로 짓쳐들며 청목마림 등의 마인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특이한 것은 그녀들 모두가 하나같이 좌수지검(左手之劍)이라는 사실이었다. 파라라랏! 그들은 화천명조차 감탄할만큼 놀라운 검학(劍學)을 구사하는 절정고수들이었다. "우선 저 귀신들을 없애 버리고 자세한 얘기를 나누기로 해요." 도옥진은 화천명에게 한눈을 찡긋 해보인 뒤 그대로 전권에 합세했다. "좋소." 화천명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다시 절정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번쩍! 싸움은 계속되엇다. 허나 팽팽했던 국면은 도옥진 등의 절정고수들의 개입으로 인해 급격히 균형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마인들은 하나 둘씩 처절한 최후를 맞고 있었다. 마침내 마인(魔人)들의 전멸로 싸움이 매듭지어지면서 물씬한 피비린내 속에서 모든 것이 끝났을 때는 어느 새 새벽이었다. 뿌옇게 동천(東天)이 밝아오고 있었다. 제 25 장 청조각(淸嘲閣)의 내력 * * * -백년(百年) 간이나 패배를 지연시켰다는 것은 아무런 자랑도 될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결과(結果). 그렇다. 끝내 우리는 멸망했다. 그리고…… 모두가 다 죽었다. 다만 십인(十人)만이 살아 남았을 뿐이었다. 십인(十人). 그 중에서도 오인(五人)은 단지 영혼만이 살아 남았을 뿐이었다. 영혼(靈魂)의 재생(再生). 육체를 죽이고 대신 심령(心靈)의 능력(能力)을 더욱 증대시킨 불가사의한 재생(再生). 그것은 위대한 재생이었다. 본가의 부활이 그들로부터 다시 시작되었으며, 천마(天魔)의 위대함이 그들에게서 또 한 번 재현(再現)된 것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천마오령(天魔五靈), 그들은 생전(生前)에도 본가의 두뇌(頭腦) 역할을 담당하던 사람들이었다. 결과는 자명했다. 본래 초인적인 두뇌를 소유했던 그들이 육체를 포기하자 더욱 엄청난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오인(五人) 개개인 각자가 아닌, 오 인이 완벽하게 하나(一)가 된, 그래서 더욱 가공할 능력을 발휘하는 하나의 두뇌로 합일(合一)된 것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오천뇌(五天腦)라 이름했다. -오천뇌(五天腦)! 그러나 오천뇌의 탄생은 엄밀히 말하자면 재생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신생(新生). 전혀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린아이와도 같은 음성(音聲)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 태어난 상태에서 더 이상의 성장(成長)도 노화(老化)도 하지 않았다. 늙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죽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육체가 없는 영혼만의 생명(生命)이기 때문이다. 오천뇌(五天腦)는 그 불가사의한 능력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완전한 믿음이었다. 그리고 기쁨이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일임하였다. 천벽제왕(天壁帝王)을 쓰러뜨릴 힘(力)과…… 천마제일가의 새로운 신화(神話)와…… 설욕의 준비를…….


그렇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계획과 지시에 따라 단지 움직여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 * * "과연 그였습니다. 우리가 우려했던대로 그는 제법 강력한 힘(力)을 갖추고 나타났습니다. 천벽유지(天壁遺趾)에 나타났던 인물도 바로 그이리라 짐작됩니다." "……." 맑고 천진스러운 듯하면서도 묘하게도 인간의 심령(心靈)을 제압하는 일종의 마력(魔力) 같은 기운이 함유되어 있는 동음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미 천벽지력(天壁之力) 중의 하나를 얻은 것 같습니다. 또한 제왕지력(帝王之力)이 이어진 그 후예…… 그렇다면 결과는 자명합니다." "……." "그의 한몸으로 또 한 번의 쌍성합일(雙聖合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쌍성합일도 능히 제압할 수 있는 천마지학(天魔之學)을 마련해 두었습니다만……." "……." 신비로운 한 무더기 빛으로부터 그 환상적인 동음은 들려오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또 당한천(唐寒天)을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당한천의 숨을 완전히 끓어놓지 못한 것은 분명히 실수입니다. 칠독(七獨)의 보호가 있었고, 그 동안에는 우리의 힘이 완성되지 않았던 탓도 있으나 그것으로 실수가 묵과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파르르! 어둠 저편의 신비한 광채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다행한 것은 당한천의 회생(回生)이 불가능하다는 점이지만 만의 하나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찾아 내십시오. 그와 청조각 당한천 모두를……." "……." 동음이 끓기고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 외…… 여러분이 또 찾아야 될 인물이 세 명 있습니다. 출천대협 탁몽과 무영비도 백천……" -무영비도(無影秘刀) 백천(白天). 그렇다. 천하최강의 살수조직 흑번(黑幡) 소속의 초특급전문살수(超特急專門殺手)로 역사상 최초로 흑번구십구관(黑幡九十九關)을 통과했다는 그의 능력은 이미 이 시대 최고의 살수제일인(殺手第一人)이라는 칭호를 그에게 부여해 주고 있었다. 헌데 어찌하여 이 이름이 출천대협 탁몽과 함께 거론되고 있는 것인가? 동음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수차에 거쳐 말한 천축(天 ) 천밀마교(天密魔敎)의 비명(秘名) 요화(夭花)…… 특히 그녀는 절대 놓쳐서는 안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절대입니다. 그리고……." "……." 기묘한 동음은 끝없는 신비와 환상을 물고 계속 이어져 나갔다. 그리고 깊고 짙은 어둠 속에서 그것을 들고 있는 사람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바로 한 명의 중년문사(中年文士)와 한 명의 청수한 노인(老人), 한 명의 청년(靑年), 한 명의 노부인(老婦人), 그리고 충격적이도록 아름다운 한 명의 불구소녀(不具少女)였다. 중년문사(中年文士). 그는 중년이라기 보다는 노년(老年)에 가까운 나이였다. 오십여 세쯤 되었을까? 상당히 마른 몸집에 얼굴 또한 살점을 찾기 힘들만큼 깡마른 용모였다. 허나 무한한 지혜(智慧)와 냉혹한 이지(理智)로 빛나는 칼날과도 같은 두 눈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용모가 어떠했었는지조차 기억되지 않을 정도였다.


정말이지 무서우리만큼 강렬하고 예리한 눈빛을 지닌 인물이었다. 헌데 특히하게도 오른쪽 눈 아래에 콩알 정도 크기의 붉은 반점(斑點)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노인(老人)은 우선 청수했다. 머리칼도 흰털 한 올 섞이지 않은 윤기있는 흑발(黑髮)이었으며, 가지런히 빗어 상투를 틀어올린 모습은 오관의 청수한 윤곽과 더불어 가히 대학자(大學者)의 풍모를 방불케 했다. 또한 한 쌍의 벽해(壁海)처럼 깊고 유현(幽玄)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바로 옥대인(玉大人)이었다. 그리고 청년(靑年)은 암울한 회의(灰衣)를 걸치고 있었다. 헌데, 보라. 그의 얼굴 반면은 온통 흉측한 화상(火傷)으로 인해 제멋대로 일그러져 있었고, 나머지 반면은 그대로 옥(玉)의 조각을 보듯 놀랄만큼 수려준미하지 않은가? 그 인상을 전체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알 수 없는 공포와 잔혹의 분위기였다. 노부인(老婦人). 그녀의 얼굴을 온퉁 뒤덮고 있는 것은 헤아릴 수조차 없는 무수한 주름살들 뿐이었다. 나이도, 용모도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부인의 전신으로부터는 알 수 없는 위엄이 은은히 우러나오고 있었다. 소녀(少女). 대략 십 칠 세 정도로 보이는 백의소녀였다. 굳이 하나하나 열거할 필요도 없이 오관(五官)의 아름다움이 눈부시리만큼 조화된 절염의 미용(美容)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에서 느껴지는 것은 이를 데 없이 고결하고도 이지적(理智的)인 기품이었다. 헌데 소녀는 그냥 서 있는 게 아니라 한 대의 사륜거(四輪車)에 그 섬약한 교구(嬌軀)를 싣고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바로 옥유향(玉幽香)이었다. "……!" 이때 예의 그 동음은 그들을 향해 다시 이렇게 질문하고 있었다. "천품군자 하후강의 세뇌(洗腦)는 어찌 되었습니까?" 그때였다. "……!" 그 질문을 들은 그들의 입가에 돌연 조용하면서도 기이한 미소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 * 처얼썩! 쏴아아……! 남해(南海). 일 년 사시사철 잔잔한 파도가 끊이지 않는 망망대해(茫茫大海). 그 일망무제의 바다를 가다보면 어디부터인지 바람도 없는데 물살이 격렬해지는 곳이 있다. 그것은 북(北)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빙해류(氷海流)와 남방(南方)의 따뜻한 해류가 서로 부딪쳐 비껴가면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그 속에서는 생명체는 물론 한 조각 암초도 남아 남지 못했다. 대와해(大渦海)의 가공할 힘(力)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분쇄해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바다는 죽음의 소용돌이 바다, 즉 대와사해(大渦死海)라고 불리웠다. 그러나 사람들은 몰랐다. 그 엄청난 소용돌이의 바다 한복판 중심부에 한없는 고요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곳에


외로운 고도(孤島)가 하나 있다는 것을. 암도(岩島)였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이끼 낀 바위섬의 정상에는 하나의 암자가 고고히 세워져 있었다. 정면의 편액에는 세 개의 글씨가 수려하게 양각되어 있었다. <청조각(淸嘲閣).> 그렇다. 이곳은 바로 도옥진의 사문인 남해의 청조각이 아닌가? 죽음의 절해(絶海) 속이었다. 스스스슷! 이곳에 한 떼의 괴이한 행렬이 도착한 때는 수평선 끝에 일륜(日輪)이 침몰하는 황혼녘이었다. 여섯 명의 해괴한 행색의 백발노인(白髮老人)과 두 명의 묘령의 소녀(少女)가 멘 거대한 교자 위에 올라 탄 엄청나게 뚱뚱한 노인, 그리고 준수하게 생긴 청년 둘과 소녀였다. 그들은 바로 독행칠대고수(獨行七大高手)와 천수나타 당한천, 백선아, 그리고 화천명이었다. * * * 과거 오백 년 전. 천마제일가와의 대전(大戰) 당시 극적으로 이루어졌던 쌍성합일(雙聖合一)의 내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무림사 최대의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기실 그 속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하나 있었다. 당시 제왕성(帝王城) 백리세가(百里勢家)는 직계후손이 없었다. 백리경과 백리화라는 두 자매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중 장녀(長女)인 백리경은 당시 천벽부(天壁府) 화엄세가의 소가주(少家主) 화장청(華長淸)과 이미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만일 그 당시 천마제일가(天魔第一家)라는 가공할 적(敵)이 없었다면, 그리고 당시 양대가주(兩大家主)가 진정한 영웅(英雄)의 풍모로서 서로 양보하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 사이의 혼인은 이루어지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즉, 천벽지존(天壁至尊) 화천악과 천자검(天字劍) 백리천우는 당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파격적인 단안을 내렸던 것이다. 바로 쌍성세가(雙聖勢家)의 혼인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제왕성이 천벽부로 흡수되는 형태였다. 따라서 천자검 백리천우의 입장에서 본다면 엄청난 양보를 감행한 셈이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화장청과 백리경의 사랑 외에 진자 중요한 배경이 있었다. 그것은 제왕천검(帝王天劍)이 좌검(左劍), 천벽절도(天壁絶刀)가 우도(右刀)라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 제왕천검과 천벽절도를 조화시킨 좌검우도(左劍右刀), 이른바 천검절도(天劍絶刀)가 절대무적(絶對無敵)이라는 사실을 양가(兩家)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양대가주는 또한 환우구마존( 宇九魔尊)의 구대마공(九大魔功)을 한꺼번에 지니고 등장할 천마제일가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천검절도 뿐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양대가주가 내린 결정은 구마합일(九魔合一)을 쌍성합일(雙聖合一)로 제압한다는 것이엇다. 그리하여 백 년의 대혈투 끝에 양가는 마침내 천마제일가와의 대전을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쌍성합일의 파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여인이 하나 있었다. 바로 제왕성 백리세가의 차녀(次女) 백리화였다. 그녀 역시 남모르게 화장청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달리 자존심이 강하고 조금은 독선적인 성품을 지녔던 그녀는 한 번도 그러한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비극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백리화의 화장청에 대한 불타는 연정은 끝내 혼자만이 아는 비밀로 묻혀 버린 가운데 천마제일가에 대한 경계를 목적으로 이루어진 화장청과 백리경과의 혼인은 비밀리에 성립되었다. 그 직후 백리화는 제왕성을 떠나고 말았다. 부모도, 언니도, 사랑하는 당사자도 자신의 사랑을 알아 주지 않자 그녀는 사랑으로 멍든 아픔 가슴을 부여안고 홀로 세상을 떠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따라서 천마제일가와의 싸움도 그녀에겐 이미 남의 일이었다. 그렇게 세상과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정인을 원망하며 떠돌기 얼마 만이었을까? 백리화는 끝내 삭발을 하고 한많은 중원을 떠나 남해(南海)에 이르게 되었다. 헌데 운명(運命)은 가혹하게도 그녀에게 폭풍과 해일을 만나게 하였다. 그리하여 천신만고 끝에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던 그녀를 대와사해(大渦死海)의 한 가운데에 떠 있는 절애고도(絶厓孤島)에 이르게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고도에서 바로 제왕비동(帝王秘洞)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왕비동(帝王秘洞)! 그렇다. 그곳은 바로 가문(家門)의 선조인 검제(劍帝) 백리천이 영면한 곳이었다. 그리고 검제 백리천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깨달은 지고(至高)한 검학(劍學)을 그곳에 남겼다. 그때에 이르러서야 백리화는 가문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는 어떤 숙명 같은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 섬에 하나의 암자를 세웠다. 말하지 않는다고 끝내 사랑을 몰라 준 화장청을 조소한다는 뜻이었는지 그녀는 암자의 이름을 청조각(淸嘲閣)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어느 덧 중년(中年)의 나이가 지나자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불행한 여인들을 청조각으로 거두어 들였다. 바로 그렇게 하여 청조각은 하나의 사문(師門)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백리화가 세상을 등진 채 지내는 동안 중원에서는 쌍성세가(雙聖勢家)와 천마제일세가(天魔第一勢家)와의 백년전쟁(百年戰爭)이 끝나고도 몇 년이 더 지나 태평성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중원에 닥쳐온 평화가 잠정적인 것임과 동시에 언젠가는 천마제일세가의 재현(再現)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입적하기 직전 청조각에 두 가지의 유명을 남겼다. 그 첫째는 다음과 같았다. -천벽제왕부(天壁帝王府)가 존재하는 한, 청조각은 무림에 나가지 못한다. 그것은 천벽제왕부와 문명(門名)을 다투고 싶지 않은 그녀의 심정이 반영된 유시였다. 그리고 두 번째 유시는 이랬다. -천마제일세가는 결코 이대로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는 분명히 부활하리니 후인들은 그 행적과 동정을 한시도 게으름 없이 살펴야 하며…… 청조각의 제 일 대임(大任)이 천마제일가를 막는 일임을 명심하라. 그렇다. 그것은 백리화의 지닌 바 혜안(慧眼)이 탁월한 탓도 있으나, 타인의 입장에서 본 냉철한 시작이기도 하였다. 세월은 그 후로도 유수(流水)처럼 흘렀다. 그리고 당금에 이르러 마침내 천마제일가의 중원정복의 야욕은 또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현 청조각주(淸嘲閣主), 다시 말해 아홉 명의 중년여승(中年女僧)과 도옥진을 대동하고 나타나 그 미증유의 검학(劍學)을


선보였던 노니(老尼)의 법명(法名)은 보타신니(菩陀神尼)였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천마의 기미를 최초로 발견한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빈니는 아직까지도 많은 것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알아낸 것이라곤 단지 천지회(天志會)의 오염과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출천대협 탁몽, 그리고 신비구천 환상십지와 연관된 정도입니다." "……." 정갈한 선방(禪房)이었다. 은은한 선향(禪香)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보타신니는 조용히 말을 잇고 있었다. 그녀와 대좌하고 있는 사람들은 독행칠대고수와 화천명, 그리고 그의 옆으로 도옥진과 아홉 명의 중년여승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홉 명의 중년여승들은 바로 청조각을 이루고 있는 아홉 개 소암자(小庵子)의 구대암주(九大庵主)들이었다. 취죽암주(翠竹庵主) 혜진(慧盡), 백매암주(白梅庵主) 혜공(慧空), 수국암주(水菊庵主) 혜옥(慧玉), 청란암주(淸蘭庵主) 혜상(慧霜), 자운암주(紫雲庵主) 혜운(慧雲), 수선암주(水仙庵主) 혜월(慧月), 암인암주(暗人庵主) 혜벽(慧壁), 삭정암주(削精庵主) 혜당(慧黨), 오선암주(吾禪庵主) 혜천(慧天), 그녀들은 하나같이 세상에 한(恨)을 품고 불문(佛門)에 귀의한 불행한 여인들이었다. 백선아는 천수나타 당한천과 함께 다른 선방에 있는 듯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보타신니의 불심(佛心) 깊은 음성이 온화하게 울려퍼졌다. "단정할 수는 없으나…… 출천대협 탁몽은 화공자의 선조 중 누군가에게 절도지학(絶刀之學)을 이어 받았으리라고 빈니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리 위험을 알고 옥진을 보냈던 것입니다." "……." 화천명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생각도 보타신니와 일치했던 것이다. "헌데 탁몽은 이곳에 오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청조십삼매(淸嘲十三妹)까지 실종되었습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해 본니가 직접 중원으로 나섰다가 신비와 환상의 기운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 보타신니의 나직한 음성이 이어졌다. "이제 공자께서 하실 일은 제왕비동에 들어가셔서 천검지학(天劍之學)을 습득하시는 일입니다." 화천명이 말을 받았다. "그보다 먼저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는 우선 이렇게 서두를 꺼내고는 보타신니를 신비한 눈으로 응시했다. "헌데 신니께서는 계속 그렇게 깍듯이 존대하실 겁니까? 따지고 보면 청조각은 제 외가(外家)가 됩니다. 따라서 신니께서는 엄연히 외가의 존장(尊長)으로서……." 이때였다. 보타신니가 완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허리를 끊었다. "아닙니다. 외가(外家)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나…… 조사(祖師)께서는 분명히 위시를 내리셨습니다. 천벽제왕부는 어쨌거나 청조각의 종가(宗家)이니 만약 천마가 나타났을 시에는 청조각은 천벽제왕부의


봉공이나 가신의 일문(一門)으로 복종하라고 말입니다." "……!" "빈니는 가신일문(家臣一門)의 주인이지만 공자께선 종가의 주인(主人)이십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보타신니는 갑자기 의복을 여미고는 간결히 주종지례(主從之禮)를 올렸다. "이왕 말씀드린 차에 이제부터는 칭호를 바꾸겠습니다, 주공(主公)!" 말리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 화천명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꼼짝없이 보타신니의 배례를 받고 말았다. 말 그대로 혹떼려다 도리어 혹붙인 격이었다. 기색을 보아 하니 보타신니는 절대 양보하거나 번복할 기색이 아니었다. "쩝!" 화천명이 마치 떫은 감을 베어 문 사람처럼 떫떠름히 앉아 있는데 여지껏 두 사람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독행칠대고수가 이때다 싶었는지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었다. "말이야 맞는 말이지." "암, 옳고 말고!" "두 말 할 것도 없지. 당연한 말이란 곧 진리와 통한다는 말로써 자고로 진리를 거역하고는 천하의 누구라도 잘되는 법이 없는 게야." 다분히 장난기 어린 말투였으나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는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진실한 빛이 어려 있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독행칠대고수는 화천명의 신분내력을 알고부터는 존경까지는 몰라도 상당히 우러러 보고 있는 터였다. 아니, 그보다는 그들 모두는 그 이전부터 화천명의 매력에 홀딱 반해 있었다는 표현이 옳았다. 헌데 그때였다. "……!" 도옥진의 시종일관 담담했던 옥용이 잠시 흐트러졌다. 이때였다. 화천명이 다소 씁씁한 표정으로 보타신니를 바라보다 곧 진중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고맙소." 변해 버린 말투. 그것은 바로 청조각을 가신일문(家臣一門)으로 인정하고 받아 들인다는 의미였다. 보타신니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당연한 일입니다." 보다신니는 천천히 합장(合掌)을 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도옥진의 안색은 더욱 흐려졌다. 허나 그녀는 본래 성격이 여자답지 않게 강하고 쾌활한 터였다. 그녀는 뭔가 빠르게 염두를 굴리는 눈치더니 곧 체념의 빛을 스쳐 보이며 본래의 안색을 회복했다. 그렇다. 도옥진 같은 성격을 지닌 여인은 남들이 갖지 못한 장점을 지니지만 그런 반면 어떠한 일이든 대범하게 체념하는 단점도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또한 체념의 순간에 보통 여인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내밀한 아픔을 홀로 간직하는 단점도 있었다. 헌데 정말 모를 일은 독행칠대고수의 태도였다. "……!" 그들은 부럽다는 눈길로 화천명과 보타신니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화천명의 담담한 시선이 문득 그들을 향했다. "……!"


독행칠대고수는 왠지 흠칫하는 기색이더니 곧 기대에 찬 눈초리로 화천명을 마주 응시했다. 그러나 정작 화천명의 말은 엉뚱했다. "일곱 분의 생사결정권(生死決定權)은 아직도 제게 있습니까?" 독행칠대고수의 안색이 대번에 휴지조각처럼 구겨졌다. "빌어먹을!" "젠장할!" "노부들이 잠시 정신이 나갔지, 뭐 좋은 일이 있다고 그 따위 내기는 해 가지고……!" 화천명은 빙그레 웃었다. 웃으면서 그는 과거 상인(商人)의 습성이 발동한 듯 마치 흥정하듯히 입을 열었다. "생각 여하에 따라선 생사결정권을 반납할 수도 있는데……." 독행칠대고수의 표정이 이번에는 햇살처럼 밝아졌다. "……!" "……?"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기대와 흥분에 가득 찬 눈빛으로 화천명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윽고 화천명의 입술이 담담하게 열렸다. "어떻습니까? 입곱 분은 혹시 독행칠대고수라는 명호를 천벽칠대가신으로 바꾸실 의양은 없습니까?" 순간이었다. 독행칠대고수의 눈이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일제히 화등잔만 하게 부릅떠졌다. 너무나 엄청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 독행칠대고수는 침묵을 지키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눈치를 힐금힐금 살폈다. 그때였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그들은 돌연 해괴하기가 이를 데 없는 괴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흐흐으으으!" "후으후으……." 이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의 웃음일까? 표정 또한 도저히 종잡을 수 없게 변화시키던 독행칠대고수들의 입에서 한 마디씩 괴성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험, 험…… 많이 늙었지, 우리?" "누가 그러던데 늙은이는 집이 있어야 된다더라." "그래, 사실 그 동안 집없는 설움도 컸어.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래도 명색이 천벽이니 그늘 하나 만큼은 끝내 주게 시원할 거란 말이야!" "그러나 안돼! 그늘에서 놀 생각만 하면……." "옳은 말이다. 신니의 무공을 생각해 봐라!" "젠장! 다 늙어가지고 무공이랑 특기랑 모두 새로 익혀야 되겠군." "그래도…… 좋다!" "좋다. 그래!" 한 동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지껄이던 독행칠대고수의 노구가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으켜 세워졌다. 그로부터 펼쳐지는 일대진경이 또한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신(臣), 벽력철제 황신…… 주공께 올리는 초견례이오이다!" "난 그렇게 어려운 말은 모르고, 절 받으시오! 설산동자 자천조이오이다." "이놈아, 이럴 때는 그래도 격식이 있어야 되는 법이니라. 날 보라, 신 대육도천 마백, 중원무력(中原武歷) 일천팔십사년(一千八十四年) 이월(二月) 초닷새 술시(戌時)를 기해 주공의 은혜를


받자와, 주공의 품안에 일신을 묻게 되었는 바, 이 어찌 감격할 일이 아니오며, 이 어찌 눈물을 흘릴 일이 아니겠사오이까? 뿐이랴. 이 어찌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릴 일이 아니오며……." "우린 다했다!" "너 혼자 남았다!" 이렇게 해서 비록 난장판이었지만 어쨌든 독행칠대고수는 천벽칠대가신(天壁七大家臣)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 그 순간 화천명은 독행칠대고수 아니, 천벽칠대가신의 백미(白眉) 아래 감춰진 노안에 흐르는 충심(忠心)의 빛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호칭의 중복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 청조각은 봉공(捧公)이라 칭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헌데 그 순간 화천명은 내심 이런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차후 개인은 가신(家臣)이라 칭하고…… 문파는 봉공이라 칭한다. 가신과 봉공은 많을 수록 좋다. 목표는 글쎄…… 백대가신(百大家臣), 오십대봉공(五十大捧公)쯤이면 어떨까?' 물론 잠깐 동안의 망상이었다. 그러나 세상사란 늘 두고 보아야 아는 법이다. 그날 해시(亥時) 무렵에야 그들은 각기 처소로 돌아갔다. 그 동안 화천명은 무언가 길고 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듣던 중인들의 안색은 무섭게 굳어지고 있었다. 제 26 장 사랑의 방법(方法) * * * "……!" 제왕비동은 해저의 암반지대 속 천연동혈 속에 있었다. 즉, 그것은 일종의 석회동(石灰洞)이었다. 검제 백리천. 그는 과거 호쾌한 성격의 도성 화운산과는 달리 조용하고 고고한 성품으로, 영면의 장소까지 이토록 고적한 곳을 택한 것이었다. 저벅…… 저벅……. 화천명은 도옥진과 함께 제왕비동에 이르는 통로를 걷고 있었다. 사위에는 신비로운 종유석 군(群)이 어둠 속에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흠! 스무 번째 생일을 맞음과 동시에 비로소 출가란 말이오?" 먼저 입을 연 것은 화천명이었다. "그건 사연이 있어요. 조사께서 출가하신 때가 바로 이십 세의 생일이었다 해요." 화천명의 물음에 도옥진은 담담한 옥음으로 대답하더니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십 이전에 입문(入門)한 제자들은 그때 머리깎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 왔어요." "그랬었군." 화천명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응시하며 물었다. "그대는 얼마 남았소?" "이 년 남짓 남았어요. 어서 지나가 버리면 좋겠는데……." 도옥진은 혼잣말처럼 나직이 대답했다. "……!" 그러한 그녀를 응시하는 화천명의 시선이 언뜻 가라앉았다. 도옥진은 그의 시선을 의식적으로 피하며 짐짓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굳이 그때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아요, 출동(出洞)하면 사부님께 말씀드려야겠어요." "바로 깎겠다는 말이오?"


"예." 화천명은 그녀의 길고 탐스럽게 흘러내린 머릿채를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아깝군." 화천명은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향한 채 묵묵히 걸었다. 도옥진은 그러한 그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 보았다. 조각처럼 수려한 옆 얼굴을 훔쳐보는 순간 그녀는 문득 몰래 나직한 심호흡을 했다. 이어 그녀의 아름다운 두 눈에 짙은 우수의 빛이 빠르게 스쳐갔다. 허나 그녀는 곧 평소의 명랑한 안색을 회복했다. 이때였다. 묵묵히 걷던 화천명이 문득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청조각의 현재 인원은 얼마나 되오?" "정확히 백 사십 칠 명이예요. 그 중에는 사부님을 포함한 직계제자 열 네 명이 포함되어 있어요." "그대를 제외한 열 세 명이 바로 총조십삼매로군." "그래요. 본래 직계제자는 다섯 명 이내를 두는 것이 원칙이지만 천마의 부활을 아신 사부님께서 그 원칙을 깨셨지요." 도옥진은 두 눈에 영롱한 이채를 반짝이며 대답했다. 화천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말했다. "그녀들도 곧 머리를 깎아야겠군." "대사저와 아사저는 이미 날짜가 넘었어요 어서 돌아와야 할 텐데……." 도옥진은 아름다��� 옥용에 근심 어린 빛을 띄었다. 화천명은 다소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머리깎는 일이 뭐 그리 좋은 일이라고 헐레벌떡 달려오겠소?" "……!" 도옥진은 흠칫 화천명을 돌아다 보았다. 순간 그녀는 그의 말투에서 평소와는 다른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화천명은 지그시 전면 어둠 속을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이십 세라면 여인으로서 한창 꽃필 나이가 아닌가." 매우 나직한 음성이었으나 도옥진의 귀에는 분명히 들렸다. 순간 도옥진의 시원한 눈망울에 어떤 의문의 빛이 출렁였다. '다르게 보여!' 확실히 지금의 화천명은 평소의 모습과는 어딘가 달라보였다. 왠지 무겁게 느껴지는 안색이었다. 물론 평소에도 그의 행동은 가볍지 않았으나 무슨 일에든 대범한 여유를 잃지 않던 호쾌한 성품이 아니던가? 그것이 하도 눈부신 탓에 수십 번씩 심호흡을 해야 했던 자신이었다. '설마……!' 도옥진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고요한 정적 속의 동굴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행여 들킬까 다급해졌다. 그녀는 급히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럴 리는 없어!' 그때였다. "감정이라는 것은 말이오, 때로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안되는 때가 있는 법이오." 화천명의 입에서 느닷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순간 겨우 진정되던 도옥진의 가슴은 또다시 소리내어 뛰기 시작했다. "……!" 그녀는 두 다리에 힘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화천명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외적인 여건으로 어쩔 수 없이 억제해야 할 때는 더욱 그렇소." 화천명은 말을 마치자 입을 굳게 다문 채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허나 도옥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추어 서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두 눈에 물기가 어린 채 섬세한 교구를 가늘게 떨고 있었다. 화천명은 계속 걸음을 옮기며 나직이 물었다. "왜 오지 않소?" 그 말은 참으로 무정하게 들리는 것이었다. "……!" 도옥진은 입술을 살며시 깨물며 빠른 걸음으로 몸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그녀는 화천명을 앞질러 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화천명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 빠르게 어둠 속에 묻혀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그는 문득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감정은 속일 필요도, 억제할 필요도 없는 것, 오직 충실함이 좋지 않을까?" 마치 자신에게 들려 주는 둣 나직한 독백이었다. 이어 화천명은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더니 문득 피식 실소했다. "아무래도 화천명 너는…… 타고난 바람기가 많은 것 같구나." * * * 막다른 벽(壁)이었다. 벽은 마치 석문(石門)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벽의 상단에는 선명하게 음각된 네 개의 글자가 보였다. <제왕비동(帝王秘洞).> "……!" 도옥진은 얼어붙은 듯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화천명이 등 뒤에서 다가오자 말없이 기관으로 보이는 하단의 돌출부에 손을 가져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 손을 돌연 화천명이 힘있게 잡았다. "……!" 도옥진은 전류에 감전된 듯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그때 화천명의 담담한 음성이 그녀의 귓가에 꿈결처럼 울려퍼졌다. "우리는 함께 살결까지 맞댄 적이 있었지. 겨우 손이 맞닿은 것 정도로 이처럼 놀라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갑자기 튀어나온 하대의 어투였다. 원래 화천명은 친구라든지 하는 친근한 관계로 상대를 포용하고 싶을 때 반말을 해 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헌데 도옥진은 정반대로 해석한 듯했다. 도옥진은 순간 안색을 굳히며 지극히 사무적으로 말했다. "주공, 조사께서 잠드신 엄숙한 곳입니다!" "아니, 여기는 엄숙하지 않다." 화천명은 신비롭게 미소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 말은 맞는 것이었다. 그들은 분명 아직은 제왕비동 밖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화천명은 그녀의 섬세한 손을 놓고 어깨를 잡았다. 도옥진은 아름다운 얼굴이 도화빛으로 붉어진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난 그가 하자는대로 할 수밖에 없는 시종인 거야!'


그때 화천명이 부드러우나 완강한 힘으로 그녀를 자신에게 돌려세웠다. "이런 생각을 했다." "……?" "청조각이 꼭 불문(佛門)이어야만 될 필요가 있겠냐고 말이다." '청조각이 불문이 아니면 뭐 다른…… 아니?' 도옥진은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생각으로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한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며 화천명은 힘있게 말을 이었다. "또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청조각주를 그대 아닌 다른 사람이 하면 어떨까 하고……." "……!" 화천명은 잔뜩 겁에 질린 그녀의 눈동자를 깊숙이 응시했다. 그때였다. 도옥진은 그의 진지한 눈빛을 대하자 불안도 떨림도 모두 사라지고 한없이 가슴이 포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화천명은 어떤 열망이 깃든 음성을 나직이 흘려냈다. "옥진." "……!" 처음이었다. 그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직접 불리워진 것이 말이다. 허나 조금도 생소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이 다시 세차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옥진, 그대가 왜 이리 자신이 없어졌는지 아쉽다." '자신……?' "그대의 아름다움은 강한 그 무엇이 깃들어 있었어. 그래, 정말 눈부시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화천명의 부드러운 한 마디를 듣는 순간 도옥진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당신을 본 제 느낌이었어요!'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허나 그 말은 그녀의 입 속에서 맴돌았을 뿐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화천명의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그대는 또 나를 죽일까 말까 잠깐 고민하다가 곧 없던 것으로 하고 깨끗이 잊어 버리는 대범함도 보여 주었다." "……!" "나는 그런 그대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물론 지금도 그대를 좋아한다." "……!" "그대는 어떨까?" 그렇게 반문하는 화천명의 준수한 얼굴에 햇살처럼 눈부신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대는 말이야. 내가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힘없이 무너질 정도다." 그것은 정말이었다. 말과 함께 그녀를 잡은 팔에 조금 힘을 가하자 그녀는 맥없이 쓰러지듯 그의 품 속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흐윽!" 느닷없이 울음이 왜 나왔는지 모르지만 도옥진은 그의 가슴이 정말 넓고 포근하다고 느꼈다. 화천명은 힘주어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새하얀 턱을 부드럽게 들어올렸다. "……!" 물기에 젖은 채 영롱히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는 알 수 없는 연민과 자극을 불러 일으켰다.


화천명은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처녀특유의 수치심과 공포가 한꺼번에 발동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옥진은 셈세한 교구를 파르르 떨더니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안돼요!" 고요한 동굴의 정적 속에서 그 음성은 너무도 컸다. 소리친 그녀도, 화천명도 함께 섬칫 놀라고 말았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그녀의 외침성은 동굴의 특수한 메아리로 이어져 되울려 오고 있었다. 바로 이렇게 말이다. 안돼요…… 돼요…… 돼요……. 화천명은 순간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된다는데?" "어멋!" 그 직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독자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그로부터 무심한 시간의 흐름 속에 사흘이 지나갔다. 그 중의 얼마간을 두 사람은 제왕비동에 있었을까? 혹시 사흘 전부를 제왕비동 밖에서 꿈 같은 시각을 채워 버린 건 아닐까? 그건 제왕비동에 들어가 보지 않은 이상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 * * -오천뇌(五天腦)의 완전한 성숙이 이루어지기에는 상당한 세월이 소요되었다. 육체가 없는 영혼만의 생명으로 살아가는데 대한 적응의 기간이었다. 그 기간은 정확히 이십 년이었다. 이십년(二十年)……. 본가의 멸망 이후 이십 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오천뇌는 서서히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리가 왜 패배했느냐 하는 원인과 천벽제왕이 과연 완벽한가에 대한 의문을 먼저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철저한 분석이었다. 철저해야 했기 때문에 또다시 상당한 세월이 소요되었다. 우리는 기다렸다. 지루한 기다림이었으나 우리는 참아야 했다. 오천뇌가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해 준 말은 조급히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오천뇌는 드디어 결과를 얻어낸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결과를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우리는 물어볼 수도 없었다. 우리는 단지 그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처음부터 부여된 것은 그들에 대한 절대의 믿음과 행동 뿐이므로. 오천뇌는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어느 날……. 그들은 우리에게 실로 충격적인 하나의 예언을 들려 주었다. 예언(豫言)! 그것은 천벽제왕부의 몰락이었다. 오천뇌는 천벽제왕의 쇠진을 알고 있었다.


또한 변황(邊荒)에 웅크린 거대한 움직임도 알고 있었다. 그 힘의 균형까지……. 그리하여 그들은 이렇게 예언한 것이다. -천벽제왕부는 또 다시 승리할 것이나, 그 이후 몰락의 길을 걸을 것이다. 오천뇌의 철저한 점은 항상 십할(十割)의 승산에서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조금치의 실패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일은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았다. 그 철저함이 우리에게 기다림을 지시했다. 끝없는 기다림을……. 천벽제왕부의 몰락 이후까지……. 우리가 그 동안 한 일은 천마지혈(天魔之血)의 전승과 유지였다. 다시 말해 번식의 의무 뿐이었다. 오천뇌가 원하는 적정 인원수가 채워질 때까지……. 천마지혈을 지닌 우리의 혈통으로만 그 수효를 채워야 하는 것이다. 그 일은 몇 십 년, 아니 몇 백 년이 걸릴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동안 오천뇌는 우리의 힘을 개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선조 환우구마존의 구대마공(九大魔功)의 허점을 완전히 보완, 재창조하는 작업이었다. 즉, 완벽한 구마절학(九魔絶學). 극단(極端)의 구대마공을 이룩하는 것이다. 그 옛날 우리의 선조 환우구마존이 천중(天中)의 구대마성(九大魔星)의 기운을 환우구대마공( 宇九大魔功)을 창안한 것처럼……. 구대마성의 이름을 빌어 아홉 개의 신비(神秘)를 계획했다. -황금비원(黃金秘院). -청목마림(靑木魔林). -백수대하(白水大河). -적화대천(赤火大天). -자토혈궁(紫土血宮). -구유명왕부(九幽冥王府). -환희밀천(歡喜密天). -천뇌서원(天腦書院). 이 모두를 통칭하여 신비구천(神秘九天)이라 했다. 그것은 실로 원대한 계획이었다. 만약,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천하는 수천 명의 환우구마존을 보게 될 것이다.

빌어

* * * 철썩…… 쏴아아! 묵청빛으로 파도치는 망망대해에 한 척의 거대한 철선(鐵船)이 항진하고 있었다. 온통 검은 빛으로 둘러싸인 철선은 대와사해 앞에서 천천히 항진을 멈추었다. 철선의 갑판 위에는 사십 구 인(四十九人)의 인물이 산악 같은 기도로 서 있었다. "……!" 바다빛 벽의(碧衣)를 입은 사십 구 인의 장엄한 위세, 그 보이지 않는 가공할 마기(魔氣)의 운집 속에 대해의 흐름마저 일시 멎는 듯했다. "……!" "……!" 사십 구 인은 묵묵히 대와사해 너머 고요히 잠겨있는 수평선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한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풍겨지는 기운은 오직 하나, 살의(殺意)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갈 수록 그들의 전신에서 풍겨나오는 마기(魔氣)는 해일이 일 듯 더욱 가공스러워졌다. 한 순간 누군가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청조각, 분명 저 안에 있다!" 사십 구 인의 맨 앞 선두에 서 있는 새하얀 백발의 노인이었다. 장내의 인물들도 모두 비슷한 연배의 노인들이었으나 그의 기도는 더욱 특출해 보였다. "바다의 제왕이라는 우리가 바다 안에 있는 청조각을 이제야 찾아냈다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 단숨에 쓸어 버림으로써 그 수치를 만회한다." 백발노인의 음성은 그지없이 고요했다. 고요한 그의 음성이 이어졌다. "너희들과 본좌 해왕천(海王天)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청조각이 비록 제왕천검(帝王天劍)의 정통(正統)을 이어받았다 하나……." 그렇다. 그들은 바로 신비구천(神秘九天) 가운데 여덟 번째인 해왕천이었다. "너희 해왕사십팔마(海王四十八魔)는 이미 천 년 전 조사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 백발노인의 삼엄한 한 마디는 놀라웠다. 이들의 천 년 전 조사라면 바로 환우구마존 중 해마(海魔) 숭보천위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헌데 그들 모두가 조사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니…… 그렇다면 사십 팔 인의 해마 숭보천위란 말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허나 백발노인의 입에서는 더욱 엄청난 말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뿐이냐? 나 해왕지존(海王至尊), 이미 조사를 능가한다고 자신하는 몸이다. 당연히 단숨에 쓸어 버려야 될 일이다!" 말을 끝낸 그의 두 눈에서 폭풍 같은 안광이 폭사되었다. 쏴아아…… 쏴아……! 그 순간 파도는 점점 더 거세어지고 있었다. 하늘은 암울한 잿빛 구름으로 뒤덮였다. 마치 한 바탕 폭풍우라도 몰아치려는 것처럼. 찰나지간 해왕지존의 입에서 벼락 같은 일갈이 터져 나왔다. "가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해왕사십팔마가 일제히 허공으로 신형을 날렸다. 쉬아앙! 연이어 해왕지존의 몸이 수증기처럼 가볍게 떠오르는 듯하더니 거센 파도를 박차고 해일처럼 바다 위를 질주해 갔다. 그것은 정녕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들은 마치 평지(平地) 위를 질주하는 것 같았다. * * * "드디어 오고 있습니다." 구대암주는 조용하고 침착한 가운데도 긴장한 신색으로 분부를 기다렸다. 보타신니는 나직하나 위엄있게 물었다. "틀림 없느냐?" "예." 부언이라고는 없는 간단한 대답이었으나 그것으로 상황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 보타신니의 고요하고 잔잔한 안색은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마치 일상사의 평범한 지시를 내리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절인(絶人), 수국(水菊), 오선(五禪), 천수나타 당대협과 백선아아가씨를 보호하거라. 수선(水仙)에서 몸가짐이 특히 진중한 아이를 골라 비동(秘洞)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전원 적을 막는다." "예!" 구대암주(九大庵主)는 동시에 입모아 대답하더니 조용하게 밖으로 나갔다. 참으로 한가로운 동작인 듯 보이나 기실은 빛살 같은 빠름이었다. "아미타불……." 보타신니는 지그시 눈을 감고 불호를 외우더니 일어섰다. 스윽! 그녀는 걸음을 옮겨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면서 그녀는 어느 새 문가에 걸려 있는 고색창연한 장검을 손에 들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리 해안에서 전광(電光)처럼 쏘아져오는 사십 팔 개의 벽색(碧色) 인영이 보였다. 허나 보타신니의 깊고 잔잔한 시선은 그들을 보지도 않았다. "……!"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 그곳에는 해변 위를 천천히 걸어 오고 있는 한 백의노인이 있었다. 바로 해왕지존이었다. 보타신니의 눈빛이 깊숙한 곳에서부터 일렁거렸다. * * * 제왕비동의 한 석실(石室). 이 순간 장내에는 기괴한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돌침상 위에 도옥진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裸身)으로 미동도 않고 누워 있었다. "……!" 화천명은 뚫어지게 그녀의 현란한 나신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부르르! 도옥진의 나신이 잔물결 치듯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보라! 그녀의 전신에는 실보다 더 가느다란 세침(細針)이 근 천여 개나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 그 순간 화천명의 얼굴에는 보기 드물게 긴장의 빛이 어려 있었다. 고요한 정적속에 잠시 시간이 흘려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 수록 도옥진의 나신에 이는 경련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이었다. 도옥진의 나신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진동했다. 거의 동시였다. 파파파팟! 화천명의 두 손이 믿을 수 없으리 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일천 개의 세침을 뽑아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천 개의 세침이 모두 뽑혀졌다. "……!" 화천명은 이마에 땀방울을 맺은 채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이어 그는 침상 위로 올라가 그녀의 명문혈(命門穴)에 장심(掌心)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공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이 각 정도 지났을 때였다. 문득 문이 열리며 하나의 인영이 조용히 나타났다. 매우 진중해서 우직해 보이기까지 하는 여승이었다. "……!"


그녀는 실내의 광경을 보는 순간 두 눈이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그래도 신음소리 하나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눈을 감고 불호를 마음 속으로 수 차례나 외웠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녀는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간은 다시 무심히 흘러갔다. 그로부터 다시 이 각 정도 지났을 때였다. "……!" 마침내 화천명은 도옥진의 명문혈에서 장심을 떼고 눈을 떴다. 그의 입가에 곧 눈부신 미소가 어렸다. "됐다." 그리고 그는 시선을 돌려 여승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 여승은 아직도 두 눈을 감은 채 합장해 있었다. 화천명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여승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오?" 여승은 눈을 뜨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적이 왔사옵니다." "적?" "예, 해왕천의 마인들이라 하옵는데……." 여승은 여전히 눈을 뜰 염두조차 내지 않고 대답했다. "……!" 순간 화천명은 두 눈에 뇌전 같은 광망을 뿜어내며 벌떡 일어섰다. "해왕천이라고 했소?" 그는 기가 차다는 듯 여승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내흔들었다. '그런 엄청난 위기를 저토록 태평하고 조용하게 말할 수 있다니…….' 허나 화천명은 곧 조용하게 물었다. "그대의 법명이 어떻게 되오?" "석설(石雪)이라 하옵니다." "석설…… 알겠소. 기억해 두겠소." 스스슷!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천명의 신형은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희미한 파공성을 들은 석설은 눈을 떴다. 어느 새 화천명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실내를 살피다가 도옥진의 나신을 보자 황망히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도옥진은 앉혀진 자세 그대로 운기조식 상태에 둘어가 있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스스스슷! 돌연 그녀의 정수리 부근에서 한 줄기 백색 기류가 서서히 피어 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 기류는 연이어 다섯 개의 기이한 고리(環)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최소한 삼 갑자의 공력이 그녀 몸 속에 잠재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렇다.


화천명은 그녀의 내공을 속성으로 배가시켜 주고 있었던 것이다. 만사귀의 임해로부터 받은 천의보권(天醫寶卷)에 그러한 한 가지 대법(大法)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화천명은 그것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대법은 본래 편격에 가까운 것이라 엄청난 위험이 따랐다. 따라서 잘못하면 시전자와 시전받는 자 모두가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화천명은 자신이 있었다. 남의 목숨으로 도박을 하는 그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제 27 장 재회(再會) * * * 가공했다. 천 년 전의 해마(海魔)에 필적한다는 말은 조금도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사십 팔 인(四十八人)의 해마 숭보천위, 해왕사십팔마(海王四十八魔)는 바로 그의 재현이었다. 그들의 기세는 말 그대로 대해(大海)와도 같았다. 한 입에 태산이라도 집어 삼킬 듯한 해일(海溢)처럼 몰아치는가 하면, 닥치는 모든 것을 박살낼 듯한 격랑(激浪)처럼 끊임없이 휩쓸어 왔다. 그런가 하면 어느 새, 마치 심해(深海)의 무궁한 신비(神秘)처럼 고요한 가운데 은밀한 변화가 그 뒤를 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사십 팔 인의 일신에서 한꺼번에 몰아쳐 오는 마기(魔氣)는 실로 폭발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그 마기(魔氣)에 스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가루로 박살날 듯 엄청났다. 수적으로 본다면 청조각 여승들의 수효는 해왕사십팔마의 세 배가 넘는 숫자였다. 그러나 애초에 이 싸움은 청조각으로선 역부족이었다. 비록 절학(絶學)의 차이는 없다 해도 그 연성도와 수위의 차이는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해왕사십팔마의 지닌 바 마학(魔學)은 이미 극단(極端)에 이르러 있었다. 그나마 청조각이 이제껏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화려한 제왕(帝王)의 검세(劍勢)였다. 거기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 이들은 독행칠대고수였다. 아니, 지금은 천벽칠대가신이 된 그들의 목숨을 내건 종횡무진의 활약 덕분이었다. 사실 순수한 공부(功夫)로만 따진다면 독행칠대고수는 해왕사십팔마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그들은 역시 역전(歷戰)의 능자(能者)들이 아닌가? 평생을 싸움터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온 그들의 실전능력(實戰能力)은 이 순간 눈부신 활약상을 보여 주었다. 자타가 공언(共言)하기를 싸움을 위해 태어났다던 그들의 명성은 정녕 빈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힘(力)의 차이는 언제나 시간이 말해 주는 법(法)이다. 시간이 좀더 흐르자 전세는 확연히 구분되었다. 처음에는 싸움에 익숙지 않아 다소 당황했던 해왕사십팔마들의 해성마력(海性魔力)은 갈수록 가공하고 폭발적인 양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사십 팔 개의 어마어마한 해일이 휩쓸어 오는 순간 그 결과가 어찌 되리라는 것은 구태여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보타신니는 해왕지존(海王之尊)과 대적하고 있었다. "……." "……." 두 사람의 사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요했다. 하나가 폭풍전야와도 같은 대해(大海)의 침묵을 지니고 있다면 다른 하나는 끊임없는 수양의 결과로 얻어진 한없는 고요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 숨막히는 고요를 먼저 깬 사람은 보타신니였다. "신성(神聖)한 불문(佛門)의 성역에서 살인을 자행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할 수 없다……?" 해왕지존의 패도적인 얼굴에 희미한 빛이 떠올랐다. 조소였다. "그대는 잘 모르고 있군. 용서라는 말은 오직 강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타신니는 추호의 흐트러짐이 없는 잔잔한 신색으로 되물었다. "그대는 스스로 강자라고 생각하는가?" 그녀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한없는 불심(佛心)이 배인 위엄있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과거…… 천 년 전에도 환우구마존 아홉 명이 신주쌍성(神州雙聖) 두 분을 당해내지 못했음을 모르는가?" 해왕지존의 냉소적인 미소가 짙어졌다. "천 년 전과 지금은 엄연히 다르지. 천 년 전의 해마폭일마공(海魔瀑溢魔功)은 이미 사라졌다. 대신 지금은 모든 허점이 철저히 제거된 완벽한 해마폭일마공이 존재할 뿐이다." 이때였다. 더 이상 말을 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고 느꼈는지 보타신니는 돌연 묵묵히 검을 뽑았다. 스르릉! 검집을 빠져 나온 검은 일순 예리한 광채를 사위로 흩뿌리며 보타신니의 손에 굳게 쥐어졌다. "……!" 두 사람 사이에는 삽시간에 팽팽한 진공상태가 형성되었다. 이 순간 두 사람의 사이에는 대기의 흐름조차 멈추어 버린 듯했다. 정말이지 사방에서 작렬하는 요란한 폭음과 굉음도 침범하지 못하고 있었다. "……!" 찰나 해왕지존의 전신에서 갑자기 잔잔한 마기(魔氣)가 피어오르더니 해풍(海風)에 밀려가듯 보타신니에게로 몰아쳐 가기 시작했다. 마기(魔氣)라고 하기엔 너무도 부드러운, 그러나 그래서 더욱 무서운 마기(魔氣)였다. "……!" 보타신니의 양미간이 깊게 찌푸러졌다. 이어 보검(寶劍)을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이 가해졌다. 바로 그때였다. "천검(天劍)의 위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참인데 용케도 때맞추어 잘 나타나 주었군." 돌연 어디선가 한 줄기 나직하고도 명쾌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바로 화천명의 음성이었다. 그렇다. 그는 허허로운 걸음걸이로 터벅터벅 장내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걸음은 믿을 수 없도록 쾌속했다. "전사결(前四訣)과 후삼식(後三式)이 있더군. 전결을 제왕사결(帝王四訣), 후식을 천검삼식(天劍三式)이라 한다던가?" 장내의 급박한 상황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느긋한 음성을 발하는 그의 등에는 전장(全長) 네 자 두 치의 절정도(絶精刀)가 비스듬히 메어져 있었다. 그리고 우수에는 석 자 입곱 치 가량의 창연한 백색고검(白色古劍)이 한 자루 들려 있었다. 검을 우수로 쥐고 있다는 것은 즉, 좌수검(左手劍)의 의미가 아닌가? 뿐만 아니라, 백색고검의 손잡이에는 이러한 글씨가 양각되어 있었다. <제왕혼(帝王魂).>


그렇다. 그것은 바로 제왕비동(帝王秘洞)에서 들고 나온 검제(劍帝) 백리천의 유품인 천검(天劍) 제왕혼이었다. 마침내 그는 절정도(絶精刀)와 제왕혼(帝王魂)을 모두 손에 넣은 것이었다. 장내에 도착한 화천명은 빙긋이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왕제일결(帝王第一訣)부터 차례로 보여 주지." 번쩍!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좌수(左手)에 의해 제왕혼이 찬란한 백광(白光)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검집을 빠져나왔다. * * * "제왕제일결(帝王第一訣)…… 천인합일(天人合一)!" 이어 웅혼한 일성이 터져나오는 순간 제왕혼(帝王魂)은 이미 그 웅휘찬란한 백광(白光)을 수직(垂直)으로 내리뻗고 있었다. 번쩍! "……!" 바로 그 순간 해왕지존은 보았다. 그 찬연한 백색광채 속에서 해왕사십팔마 중의 일인(一人)이 피보라를 뿜으며 날아가는 광경을 말이다. "으아아아악!" 비명보다도 먼저 화천명의 제 이성(第二聲)이 터뜨려지고 있었다. "제왕제이결 제천만리(帝天萬里)!" 추파파아아! "크아악!" "제왕제삼결…… 노룡풍운(怒龍風雲)!" "제왕제사결…… 상화군신(常和君臣)!" "아아악!" "으아아악!" 연이어 펼쳐지는 네 개의 검식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네 마디 비명성이 뒤를 이었다. 해왕사십팔마 중의 사 인은 전신이 난자된 채 수십 장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것은 정녕 제왕천검의 초현(初現)이 보여 주는 가공할 위력이었다. 다음 순간, 화천명은 제왕혼을 거두고 조용히 우뚝 서 있었다. 당당하면서도 아름다운 그 모습은 흡사 무신(無神)의 모습과도 같았다. "으음!" 해왕지존의 입술 사이로 납덩이처럼 무거운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어 침음성과 함께 그의 고개도 느릿느릿 끄덕여졌다. "훌륭…… 하다. 모르긴 해도 과거 검제 백리천이 펼쳤다 하더라고 이 정도는 아니었으리라." 그 음성에 실린 것은 지극한 경탄성이었다. 정말이지 그는 그 순간 수하들의 죽음마저도 일시 잊은 듯했다. 화천명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해마폭일마공이 완벽하게 보완된 이상으로 제왕천검 또한 완성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되지 않는가?" 그렇다. 검제 백리천의 최후심득(最後心得)으로 인해 한 차원(次元)의 경지를 넘어선 제왕천검은 이미 지난 날의 제왕천검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구마절학 중에서도 서열 팔위(八位)에 속하는 해마폭일마공 따위는 절정(絶頂)에 이른 제왕천검의 위력에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때였다. "후식(後式)인 천검삼식(天劍三式)은 제가 시험해 보지요." 한 마디 교성과 함께 한 줄기 흑영이 빛줄기처럼 날아들었다. 바로 도옥진이었다. 파아아! 날아드는 순간 그녀의 좌수에 있던 한 자루 보검(寶劍)이 싸늘한 검광을 발출해냈다. "천검제일식…… 화궁천심행(化窮天心行)!" 그때였다. "크아아악!" 촤아악! 독행칠대고수와 싸우고 있던 해왕사십팔마 중의 하나가 처절한 비명성을 토해내며 수직으로 양분되는 것이 아닌가? 뒤이어 시뻘건 피보라가 분수처럼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그렇다. 화천명에 비해 공력면에서 상당히 손색이 있는 그녀도 그들 중 하나를 이토록 간단히 제압했다는 것은 제왕사결 보다 한 단계 더 높고 깊은 것이 천검삼식(天劍三式)의 위력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화천명의 입에서 웃음이 발해졌다. "하하…… 훌륭해." 도옥진의 제 이성이 터진 것도 그때였다. "천검제이식…… 천중신비령(天中神秘靈)!" "크윽!" "첨검제삼식…… 분천멸전광(忿天滅電光)!" "크악!" 해왕사십팔마 가운데 이 인이 동시에 피보라와 함께 날아갔다. 헌데 제 삼식인 분천멸전광(忿天滅電光)은 천뢰행공과 매우 흡사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천뢰행공은 극도의 무거움(重)을 동반하고 있는데 비해 분천멸전광은 다소 가볍다는(輕) 점이었다. 그것은 본래 절도(絶刀)와 천검(天劍)의 각기 다른 특성 때문이었다. 즉, 천뢰행공은 뇌정(雷霆)의 기운이 강한 반면 분천멸전광은 전광(電光)의 기운이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위력을 제쳐두고 깊이(深度)와 품격(品格)에서 본다면 분천멸전광이 단연코 한수 위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사실 당연했다. 천뢰행공은 천벽절도의 제일식(第一式)인데 반해 분천멸전광은 제왕천검의 최후초식이 아닌가? 그때 화천명은 내심 중얼거렸다. '역시 공력이 부족하군.' 도옥진에 의해 펼쳐진 천검삼식의 위력을 바라본 그의 소감이었다. 헌데 바로 이때였다. 그야말로 놀라운 장면이 발생했다. 파아앗! 어디에선가 느닷없이 백색(白色)의 섬광 한 줄기가 날아든 것이었다. "……!" 화천명은 그것이 하나의 인영(人影)이라는 것을 한 순간��� 알아보았다. 허나 그 순간에 눈으로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장대(長大)한 신형 뿐이었다. 번…… 쩌적!


한 순간에 한 줄기 가공할 전광이 그 인영으로부터 토해져 나왔다. 그와 함께 흡사 허공을 양단(兩斷)해 버리듯 엄청난 천뇌지기(天雷之氣)가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쐐애애액! "크아아악!" "아악!" 찰나 해왕사십팔마 중 두 명이 한꺼번에 바닥에 나뒹굴어 버렸다. 바로 그 순간, 화천명의 입에서 경악 어린 신음이 튀어나왔다. "천뢰행공!"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천뢰행공(天雷行空)이었다. 하지만 경악과 놀라움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천뢰행공에 이어 연속적으로 터져나오는 가공할 빛(光)의 폭풍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렬위진(地裂威震)!" "벽세경동(壁世驚動)!" "신마양단(神魔兩斷)! 쿠쿠쿠쿵…… 콰르르…… 콰쾅! 대지(大地)가 찢겨져 지진이라도 일어나는가 했더니 천지가 한꺼번에 갈라지면서 신(神)과 마(魔)를 통째로 양단해 버리는 파천(破天)의 기백이 뒤를 이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천붕부복(天崩府伏)!" "혈정천하(血精天下)!" "멸절멸행(滅絶滅行)!" "죄악자멸(罪惡自滅)!" 쿠콰콰콰…… 콰콰쾅! 순간 하늘이 무너져 무릎을 꿇었다. 이어 온 천하가 피속에 잠기는가 싶더니 세상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릴 듯한 장엄무비한 기운(氣運)이 천지를 가득 메우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화천명은 내심 부르짖었다. '천벽절도! 그렇다! 절도전식(絶刀全式)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빛의 폭풍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유계폭천(幽界瀑天)!" "지옥대로(地獄大路)!" "풍운종식(風雲終息)!" 콰콰콰탕! 그 가공할 기세는 지중을 뚫고 유계(幽界)까지 파괴해 버릴 듯했다. 이어 지옥의 풍경과도 같은 처절한 행로(行路)가 전개되는가 싶더니 우주의 최후를 맞는 듯 천붕지멸(天崩地滅)의 대폭음이 만장을 뒤흔들었다. 고오오오……. 그리고는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사라지고 불가사의한 정적이 천지를 짓눌렀다. "……!" 그 찰나의 순간에 화천명의 감동은 더욱 심화(深化)되었고, '그렇다. 천검과 절도의 차이는 경(經)과 중(重), 온건과 과격, 품격과 기백…… 허나 나는 무겁고 과격하며 기백을 원천지력으로 삼은 절도가 더 좋다!' 의식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치밀어 오른 느낌이었을 뿐이었다. 바로 그 순간, 착각인 것처럼 정적에 휩싸였던 공간에 격렬한 장부지혼(丈夫之魂)을 실은 일성의


대갈이 작렬했다. "천(天)…… 벽(壁)…… 절(絶)…… 정(情)……!" 그 순간이었다. 화천명의 뇌리에 아주 어린 날 누구에게선가 들었던, 그래서 거의 기억 속에 잠재되어 있었던 가문(家門)의 한 가지 계훈(戒訓)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임전(臨戰)의 장부는 모든 정(情)을 끊는다! 오직 갖는 것은 투혼(鬪魂)과 기백! 천벽의 기백(氣魄) 뿐이다. * * * "……!" 찰나지간 화천명의 두 눈이 화려한 정광(精光)을 내뿜었다. 경악 속에서 그의 생각이 이어졌다. '절도의 위력은 시전자의 성품과 기백에 따라 천양지차로 달라진다! 화씨 성을 지니지 않은 사람으로서 이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출천대협 탁몽 뿐이다!' 파파팟! 순간 더욱 장렬하고 더욱 화려한 기백이 뿜어지는 일섬(一閃)이 작렬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끝났다. 고오오오……. 또 다시 정적에 휘덮이는 사위에는 어느 새 더운 피를 뿜어내는 스물 여섯(二十六)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장포를 늘어뜨리고 우뚝 서 있는 한 장대한 체격의 백의중년인(白衣中年人)에게로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 해왕사십팔마 중 살아남은 십 구 인과 독행칠대고수, 청조각의 여승들, 보타신니와 해왕지존, 도옥진, 그리고 화천명의 시선이 일제히 백의중년인에게 집중되었다. "……." 그러나 백의중년인은 그 모든 시선들을 무시하고 단 한 사람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바로 화천명이었다. 이어 중년인은 중후한 미소와 함께 인사처럼 천천히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그의 입이 떼어지며 발해지는 것은 전혀 의외의 말이었다. "잘 보았는가? 자네 가문의 천벽절정십삼행(天壁絶情十三行)을!" 그렇다. 백의중년인은 바로 출천대협 탁몽이었다. "……!" 찰나지간 화천명의 가슴은 뜨거운 핏줄기가 격동쳤다. 공교롭게도 그는 제왕천검을 처음 펼친 자리에서 그 천벽의 절도전식(絶刀全式)마저 보게 된 것이었다. 한 순간 화천명은 웃음을 띄우며 대답했다. "보긴 잘 보았습니다만…… 본래 반갑다는 인사부터 먼저 하는 것이 순서 아닙니까?" 출천대협 탁몽의 미소가 짙어졌다. "임전 중에 해후의 반가움을 어찌 나눌 수 있겠나?" 그러나 그 음성 속엔 지극한 반가움의 정(情)이 물씬하게 묻어 있었다. 이어 출천대협 탁몽은 시선을 돌렸다. 그와 함께 서서히 그의 장도(長刀)가 해왕십구마 쪽으로 향해졌다. "……!" 순간 해왕십구마는 무의식 중에 흠칫 뒤로 물러섰다.


출천대협 탁몽의 장도는 서서히 움직여 해왕지존을 겨누었다. 해왕지존의 입술 사이로 천근같은 침음성이 흘렀다. "으음!" 순간 그의 두 눈에 결단의 빛이 스쳐갔다. 찰나 해왕지존은 그대로 빛살처럼 신형을 솟구치며 외쳤다. "철수하라!" 그의 명(命)이 떨어짐과 동시, 해왕십구마는 일제히 지면을 박찼다. 팟팟파파아아! 그것은 분명 현명한 판단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들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것 뿐이었으므로 말이다. 허나 그들에게는 뜻하지 않은 사태가 퇴로(退路)를 막고 있었다. "아미타불!" "무량수불!" 돌연 슬프디 슬픈 불호성과 즐거움이 가득한 듯한 도호성이 동시에 하늘로부터 울려퍼졌다. 동시에 또 다른 음성이 이어졌다. "감히 본각에서 살생을 자행하고 무사히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휘리리릿! 칼날 같은 교갈과 함께 십 삼 인의 인영이 해왕지존과 해왕십구마의 앞을 부챗살처럼 막아서는 것이 아닌가? "웃!" 해왕지존의 눈썹이 꿈틀 치켜지는 순간이었다. 슈아아아아! 돌연 무서운 한기(寒氣)가 허공을 장악하며 극강의 빙하기류(氷河氣流)가 그들의 후미를 강타해 버렸다. 쿠콰쾅! 해왕지존과 해왕십구마는 그 충격에 퉁겨져 허공에서 몇 바퀴 신형을 빙글빙글 회전시키며 다시 지면에 내려서야 했다. 내려선 곳은 바로 본래의 자리였다. 그때 경천(驚天)의 파란을 몰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부터 십여 줄기의 인영들이 내려섰다. 도합 십팔인(十八人)이었다. 그것은 해왕지존 뿐만 아니라 화천명으로서도 전혀 뜻하지 않았던 사태였다. "아미타불…… 으흐흑…… 천하가 하도 어수선하여 휩쓸리다 보니 다시는 안 만나려고 했던 자네를 다시 만나고야 말았구나." 화천명을 바라보며 울음을 터뜨리는 괴노승(怪老僧)은 오척단구에 절구통만한 두상, 그리고 머리칼처럼 휘날리는 긴 눈썹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바로 광승 천곡(天哭)이었다. "무량수불…… 다시 만남은 해후, 해후는 반가움과 기쁨이거니…… 이럴 때 우는 사람은 알다가도 모르겠도다." 천곡의 옆에서 이렇게 말하는 노도인(老道人)은 그지없이 인자하고 자애롭게 생긴, 얼굴도 몸도 둥글둥글한 도인이었다. 입가에는 세상 일은 온통 즐거움 뿐이라는 듯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리고 등 뒤에는 폭이 넓고 긴 기형장검(奇形長劍)이 메어져 있었다. 화천명은 한눈에 그가 누구인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천도 마선!' 그렇다.


그는 바로 천도(天道) 마선(魔仙)이었다. 광승 천곡과 더불어 선도쌍선(禪道雙仙)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검학(劍學)에 관한 한 천벽제왕부의 제왕천검과도 견줄만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천재(天才)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옆으로 나란히 서 있는 십 삼 인의 여인들을 보는 순간 도옥진의 입에서 환성이 터졌다. "언니들!" 아! 그녀들은 바로 청조십삼매(淸嘲十三妹)가 아닌가? 옥인야의 독정마인들에게서 출천대협 탁몽을 구해 사라졌었던 그녀들이 마침내 돌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들의 반대쪽에는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들을 일별하는 순간 화천명의 입에서 반가움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왔구나. 설군! 무혼! 연아!" "공자!" "천명!" "대가!" 그들 세 사람의 입에서도 똑같이 반가움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렇다. 그들은 바로 임설군과 석무혼과 묘연아였다. 화천명은 이미 청조각의 인물을 천화대번(天華大藩)으로 보내 그들을 데려오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얘기는 끝났다. 해왕지존과 해왕십구마에게 남은 것은 오직 죽음(死) 밖에는 없었으므로 말이다. 제 28 장 다시 중원(中原)으로 * * * 남해의 고도에 이렇듯 당대의 기인거인(奇人巨人)들이 몰려들고 있을 즈음이었다. 중원(中原). 기사괴변(奇事怪變)이 끊이지 않는 중원의 하늘 아래선 또 하나의 느닷없는 경악의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로 거짓말 같은 돌연대변(突然大變)이었다. -천품군자(天品君子) 하후강이 제십일대(第十一代) 천지회주(天志會主)의 자리에 오르다! 이런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처음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천지회라면 천하의 구파일방(九派一幇)이 하나로 뭉친, 이른 바 위대한 천정지혼(天正之魂)이 아닌가? 당연히 마라혈교와 천지회는 물과 불의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화합은 커녕 잠시 휴전(休戰)만 한다 해도 세상이 발칵 뒤집힐 일이었다. 헌데 그 천지회의 회주(會主) 지위에 다른 사람도 아닌 마라혈교의 소교주(少敎主)가 올랐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당연히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허나 그 소문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소문에 뒤이어 태산(泰山) 관일봉(觀日峯)에서는 마령천존 하후승과 구파일방의 당대 장문지존(掌門至尊)들과의 전격적인 태두회동(太頭會同)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결의대언(訣意大言)을 선포하여 그 사실을 강력하게 뒷받침했던 것이다. 그 결의대언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정(正)과 마(魔)는 누천 년에 걸쳐 서로 처절한 투쟁만을 거듭해 왔다. 단지 생존방식과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 무수한 혈사(血事)를 일으켜 왔던 것이다. 그것은 편협이 어리석음을 잉태한 결과이자 독단이 과격을 낳은 결과였다.


이 어찌 돌이켜 볼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우리는 과거의 우(愚)는 과거의 우(愚)로 그치고, 오늘의 이 난세를 종식시키며, 화합(化合)의 장(章)으로 새로운 시대(時代)를 열기 위하여 서로의 편견과 아집을 버리니…… 마도소종사(魔道少宗師) 천품군자 하후강으로 하여금 정도맹주(正道盟主)의 위(位)에 오르게 하여 정(正)과 마(魔)의 융합의 대임을 맡게 하는 바이다. "……?" 사람들은 이 믿기지 않는 사실에 아연하고 혼란스러워 했으나 곧 천품군자 하후강의 인물됨을 떠올리고는 차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천품군자 하후강. 철골(鐵骨)의 군자(君子)이자 대장부(大丈夫)임과 동시에 마라혈교 최고의 골칫거리인 그는 마령천존 하후승의 최대 우환거리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자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런데 여담이긴 하지만 태두회동이 이루어졌던 그 날 회동을 마치고 내려오는 양측 수뇌들의 얼굴 표정이 각기 달랐다고 전해진다. 언제나 고지식하고 자애롭던 구파일방 장문인들의 표정은 매우 흡족해 보였는데 반해 마령천존 하후승은 뭔가 조금 골치아프고 다소 곤혹스런 기색이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리하여 대파란의 행로(行路)는 약간은 엉뚱한 방향으로 진로를 잡기 시작하고 있었다. * * * 출천대협 탁몽과 청조십삼매. 옥인야(玉人野)의 독정옥인(毒精玉人)들에게 쫓기던 그들을 생사위기에서 구한 사람은 광승(狂僧) 천곡(天哭)과 천도(天道) 마선(魔仙)이었다. 화천명과의 인연을 끝으로 모든 세연(世緣)을 끊고 열반과 해탈의 경(境)에 들려했던 광승 천곡은 천도 마선의 호된 호통을 듣고 하는 수 없이 다시 세상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열반이 무엇이고 해탈은 또 무엇이냐? 세상이 이토록 어지러운데 그대 혼자 고고하게 해탈인가 빌어먹을 인가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문(師門)의 사람으로 무엇보다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구제(救濟)의 행(行)이다. 그 당연한 도리를 행하지 않고서야 어찌 열반이 있고 해탈이 있단 말인가? 그때 천도 마선은 천하의 혼미로움을 알고 막 무림에 나오던 참이었다. 광승 천곡은 언제나 둥글둥글 웃음을 띄고 있던 지기(知己)의 얼굴이 생전 처음으로 무섭게 굳어진 것을 보고는 슬프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광승 천곡은 화천명을 다시 만난 자리에서 더욱 슬프디 슬픈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자네에게 모두 떠맡기고 좀 편해지려 했더니…… 워낙에 편해서는 안될 팔자인 모양이네. 어쨌든, 기왕에 자네에게 떠맡긴 것, 자네 시키는대로 할 테니 무엇이든 시켜 주게." 그 옆에서 천도 마선은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웃으며 또 이렇게 말했다. "천곡, 저 땡중에겐 출중한 특기가 둘 뿐인데, 첫째는 우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 고를 줄 안다는 것일세. 참으로 사람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고른단 말이야. 그리고 나도 시켜 주게. 천곡이 하는 일이라면 나도 다 할 줄 알거든." 그렇게 하여 화천명은 실로 엄청난 두 개의 힘(力)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화천명은 석무혼으로 인해 그 동안 숙제로 남겨져 있던 한 가지 미제마저도 깨끗이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석무혼은 화천명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나는 네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한다. 그리고…… 나도 강(强)해지고 싶다. 어릴 때 약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당한 설움을 나는 아직 잊지 않고 있다. 그러니 천수나타 당한천의 독혈(毒血)을 내게 주게나."


그리하여 당한천은 마침내 회생하게 되었다. 그 대가로 석무혼이 얻은 힘(力)은 독문(毒門) 최후최강(最後最强)의 전설로 전해지는 조화독신(造化毒身)의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의 현실화는 회생한 당한천이 맡았다. 이것은 실로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일 그 가능성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옥인야의 독정옥인들이 지닌 천독화신지체(天毒化神之體)를 제압할 수 있는 가장 중대한 변수(變數)가 탄생하기 때문이었다. 헌데 그 이전, 화���명이 당한천의 치료에 혼신의 힘을 기울일 때였다. 밖에서 두 개의 간략한 입문식(入門式)이 거행되었다. 간략하다고는 했으나 기실 그 주인공들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가슴 벅차고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묘연아가 천도 마선의 제자가 되고, 백선아가 광승 천곡의 문하(門下)로 입문하는 의식이었다. 그 자리에서 대육도천 마백을 제외한 독행칠대고수들은 실로 부럽다는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 어느 정도 일이 정리되었을 때였다. 화천명은 출천대협 탁몽으로부터 또 하나의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먼저 화천명과 탁몽과의 관계를 밝혀 보면 탁몽은 그의 사숙(師叔) 뻘이었다. 다시 말해 탁몽은 화천명의 조부(祖父) 화철정의 제자(弟子)였던 것이다. 화철정(華鐵情). 그는 화천명의 조부이자, 마침내 천벽절도를 스스로 체득해 낸 위대한 천벽인(天壁人)이었다. 천 년 전의 도성(刀聖) 화운산이 대자연과 자신과의 투쟁 속에서 십삼식(十三式)의 천벽절도를 창조해 낸 방법 그대로 화철정은 절도전식(絶刀全式)을 찾아냈던 것이다. 탁몽이 그와 만난 것은 장백산(長白山)에 있는 압수(押收)에서였다. 당시 탁몽은 장쾌한 압수의 격랑 속에서 뗏목을 나르던 소년목부(少年木夫)였다. 어린 시절부터 탁몽의 기백은 남달랐던지 첫눈에 화철정의 눈에 들었다. 그 당시 화철정은 천벽절도를 거의 완성해 가던 때였다. 그리고 자신의 천수(天壽)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안타까와 하던 때이기도 했다. 결국 탁몽과 그의 만남은 또 하나의 운명(運命)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화철정은 탁몽을 제자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천벽절도를 전수했다. 그리고 거의 임종직전에 이르러 화철정은 마침내 최후 일식까지 완성시켰다. 그것이 바로 천벽절정십삼행(天壁絶頂十三行)이었다. 실로 삼백여 년 만에 그 완전한 모습이 재현되었던 것이다. 이어 화철정은 임종시 탁몽에게 두 가지 유언를 남겼다. 천벽의 무예를 찾는 것과 천마의 종적을 찾는 것이 그 두 가지였다. 본래 타고난 성품이 정대(正大)한 그는 착실히 유시대로 실행했다. 그리하여 천벽의 후예는 근 이십여 년이 지난 오늘에야 찾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화천명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찍부터 천마의 종적을 감지하고 있었다. 실전제일인(實戰第一人)이라는 명성과 출천대협이라는 별호를 얻어 천지회에 들어간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천지회의 내부에서 천마의 기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화천명은 탁몽이 절도전식을 전수해 주겠다는 말에 빙긋 웃으며 고개를 흔드는 것이 아닌가? 이미 전수 받았다는 것이었다.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러나 분명 말이 되는 소리였다. 탁몽이 해왕사십팔마를 쓸어가던 광경을 목격한 것으로 터득해 버린 것이었다. "……?" 아연해 하는 탁몽의 얼굴을 바라보며 화천명은 이렇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천벽지혼(天壁之魂)은 기백(氣魄)입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이제 화천명에게 천검절도(天劍絶刀)의 완전한 모습이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라성 같은 당대의 기인거인(奇人巨人)들이 그의 곁에 모여들어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자청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천마를 상대할 힘의 결집이 거의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 * * 어느 덧 봄이 멀지 않았음인가? 흐름마저 멎은 듯 고요히 가라앉아 있는 침묵의 바다 위로 봄기운이 느껴지는 따사로운 햇살이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 하나의 암벽(巖壁) 위에서 눈부신 백의자락을 표표히 휘날리며 화천명은 우뚝 서 있었다. "……!" 뭔가 풀리지 않는 난제라도 있는지 그의 검미(劍眉)는 왠지 깊게 찌푸러져 있었다. 그의 좌수(左手)에는 제왕혼이 굳게 쥐어져 있었다. 또한 우수(右手)에는 절정도가 도갑에서 뽑힌 채 들려져 있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은 제왕혼의 순백의 검신(劍身)에 부딪혀 하얗게 반사해 나갔다. 그리고 묵정(默精)빛 절정도는 햇살을 흡수하여 더욱 더 진하게 광채를 뿌리고 있었다. 이른바 천검절도가 완벽한 모습으로 그의 양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었다. 헌데 웬일인지 그것을 바라보는 화천명의 눈살은 더욱 깊게 찌푸러지고 있었다. '부족하다. 확실히…… 천검과 절도의 조화는 과연 절대무적(絶代無敵)이라 해도 하자가 없을 정도로 가공할 위력이긴 하다. 허나 부족하다! 위력이 배가된 대신 치명적인 허(虛)가 하나 생겼다!' 치명적인 허(虛)! 절대(絶代)요, 무적(無敵)이라던 천검절도에 치명적인 허라니? 그의 생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제왕천검전후칠식(帝王天劍前後七式)과 천벽절정십삼행(天壁絶頂十三行)은 어떤 것이든 동시에 좌검우도로 펼칠 수 있는 상호조화의 특성이 근본적으로 있다. 허나…… 그 대신 서로가 서로에게 구애를 받는, 언제나 주(主)와 종(從)의 관계가 형성된다. 즉, 천검(天劍)이 주(主)가 되면, 절도(絶刀)가 종(從), 절도가 주가 되면 천검이 종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둘 다 주(主)가 되거나, 둘 다 종(從)이 되어 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뒤죽박죽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화천명의 생각은 달랐다. '그것은 이른바 자유로움의 상실이다. 철저히 주와 종의 관계로 맞물려 펼쳐진 천검절도는 절대의 위력이나 변화의 자유로움이 없다! 일단 펼쳐진 후에는 서로가 맞물려 있기 때문에 중도에서 거둘 수도 없고, 다른 식(式)으로 변화시킬 수도 없다. 그것이 바로 치명적인 허(虛)인 것이다. 물론 그 허를 안다 해도 그 위력 자체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허나…… 상대에게 문제가 있다. 내 상대는 이에 인간이 아니기 때문


이다.' 그렇다. 그의 상대는 확실히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어쨌든 그 약점의 보완은 천마(天魔)와의 승부에 앞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난제(難題)였다. 그야말로 모순(矛盾)이기 때문이었다. 서로의 조화도 주와 종의 관계를 교차하며 펼쳐지기 때문에 완벽하고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중도에서 거둘 수도, 다른 식(式)으로 변화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정녕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그리고 그 약점을 보완하지 못하는 한 화천명의 검미는 더욱 깊게 찌푸러질 수밖에 없었다. "……?" * * * "……?"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러간 것일까? 마치 깊디 깊은 수렁에 빠진 듯한 기분에 잠겨 있던 화천명은 문득 인기척을 느꼈다. 이제까지는 거의 무아(無我)의 상념에 잠겨 있었던 탓으로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화천명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 약 십여 장 남짓 떨어진 넓은 암반 위에 거대한 신형이 하나 웅크리고 있었다. 마치 둥근 형태의 가산(假山)이 놓여 있는 것 같은 거대한 인영이었다. '천도(天道) 마선(魔仙)!' 그렇다. 인영은 바로 천도 마선이었다. 화천명은 기이한 느낌이 들어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접근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도 마선은 웅크린 자세 그대로 무언가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화천명은 기척도 없이 그의 곁에 서서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훗!' 화천명의 단아한 입가에 피식 어이없는 실소가 스쳐 지나갔다. 천도 마선이 뜻밖에도 검(劍)을 뽑아들고 암석에 선을 찍찍 긋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만 일종의 낙서(落書)라고나 할까? 어린아이들이 아무 생각없이 쭈그려 앉아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그런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손가락 대신 검을 사용한다는 것과 땅바닥 대신 견고한 암석이라는 점이었다. 어쨌든 그 공력만은 실로 놀랄만큼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저 무심히 줄을 긋는 단순한 동작이련만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암석은 십여 치 깊이로 푹푹 파여지고 있었다. "……?" 화천명은 다소 어이없는 심정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심심하신 모양이군요." 온화한 어조로 화천명은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제야 마선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이때 눈이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웃을 때의 모습이라는 것을 화천명은 잘 알고 있었다.


아예 눈의 존재 여부마저도 애매모호해지는 그의 웃음은 마치 마음씨 좋고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는 명실공히 도가제일인자(道家第一人者)가 아니던가? 검(劍)에 관한한 거의 천왕천검에 필적하는 경지를 이루었다는 검의 달인(達人)이자 유사 이래 최고의 쾌검가(快劍家)로 불리는 대검수(大劍手)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렇다. 단지 빠르기로만 말한다면 제왕천검도 그의 검을 능가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화천명은 그를 대할 때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느낌을 받곤 했다. 마치 거대한 둥근 공처럼 보일만큼 비대한 몸집과 예기(銳氣)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저 둥글둥글한 얼굴 속 어디서 그토록 무서운 쾌(快)가 숨어 있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화천명은 암석 위에 전후좌우, 종횡무진으로 그어져 있는 낙서를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뭘하고 계셨습니까?" 마선의 얼굴에 그나마 잠깐 동안 나타났던 눈이 또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림을 그리고 있었지." "그림?" 화천명은 내심 기가 막혔는지 마선의 말을 되뇌었다. 이어 그는 약간 심드렁해진 어조로 재차 물었다. "그것을 그림이라고 명명해도 괜찮을까요?" 화천명의 어떻게 들으면 비꼬는 투의 말에 마선은 자신의 낙서를 내려다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 내 그림이 너무 어려운가?" 그러다 돌연 그는 마치 무엇을 잃어 버렸다가 되찾은 사람처럼 고개를 쳐들고는 물었다. "맞춰 보게. 무엇을 그렸는지." 화천명은 생각할 여지도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렸네. 분명히!" "안 그리셨는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느 틈엔지 화천명은 낙서를 자세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허나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그것은 틀림없는 낙서일 뿐이었다. 마선이 다시 물었다. "모르겠는가?" "글쎄요."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게. 가르쳐 줄 용의는 있으니……." 화천명은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그는 굳이 낙서가 무얼 뜻하는지에 대해선 알고 싶지 않았다. 허나 이때 마선의 둥근 얼굴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회심의 미소가 스쳐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산(山)을 그렸네." "산?" 화천명은 말도 안된다는 눈빛으로 낙서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헌데 그 순간 화천명의 얼굴에 가볍게 놀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 보라. 그러고 보니 낙서는 마치 산을 그린 듯하지 않은가? 전후좌우, 종횡무진으로 그어진 선은 우거진 나무와 숲(林)을 그린 것 같았고, 가끔 띄엄띄엄 이어진 사선과 곡선은 산의 능선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뿐만이 아니었다. 더 자세히 보자니 굽이치는 격류도 보이고 한없이 깊은 계곡도 보였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화천명의 두 눈에 숨길 수 없는 감탄지색이 흘렀다. "흠…… 맞습니다. 확실히 산이군요." 헌데 그때였다. 마선의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회심의 미소가 피어 올랐다. 그리고 그 미소는 곧 득의에 가득찬 미소로 바뀌었다. 그러더니 다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자넨 속았어." "……?" "산이 아니라 바다를 그렸네." "……!" 화천명의 고개가 암석으로 홱 돌아갔다. 그러자 이건 또 웬 조화란 말인가? 그 말을 듣고 보니 낙서는 졸지에 산에서 바다로 바뀌어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건 분명 굽이치는 창파(滄波)와 외로운 섬(孤島)과 해조(海鳥)떼가 날아가는 그림이 아닌가 말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구름(雲)에 묻혀 있는 수평선이 보이는가 싶더니 천지를 한입에 집어삼킬 듯 광란하는 해일(海溢)까지 일고 있었다. "……!" 찰나지간 화천명은 뭔가 한 줄기 섬광(閃光) 같은 것이 강하게 뇌리를 강타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 동시였다. 마선의 늘상 웃음기를 잃지 않던 얼굴이 갑자기 엄숙해졌다. "알겠는가? 바로 마음(心)일세." "마음!" 화천명은 신음처럼 중얼거리며 마선을 돌아보았다. 이때 마치 마선은 웅크린 거악(巨嶽)이 일어나듯 천천히 신형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투실투실한 얼굴에 떠오른 것은 웃음 대신 한 줄기 숙연한 염원(念願)의 빛이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자네가 고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네만…… 보고 있자니 문득 뭔가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유치한 그림을 그려 보았네." "……!" "사실…… 제네 말대로 저것은 단지 낙서일 뿐이네. 그림도 뭣도 아니네. 물론 산을 그린 것도 바다를 그린 것도 아니지." "……!" "헌데 자네는 왜 저것을 산으로 보고 바다로 보았을까?" "……!" 망연한 눈길로 낙서를 바라보는 화천명을 지그시 응시하는 마선의 얼굴에 파문이 번지듯 잔잔한 웃음이 피어 올랐다. "내 말을 듣고 마음이 동했기 때문이네. 마음 속에 산과 바다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네." "……!" "다시 말하자면 저 그림은 바로 형식(形式)이고, 보는 눈이 바로 마음이네. 형식은 언제나 고정되어 있는 것이지만 마음의 자유로움에 따라 언제든지 자유자재로 변할 수가 있는 것이네."


"……!" 순간 화천명은 마치 먹구름이 걷히고 찬란한 태양이 드러나듯 확연히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그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충격이었다. 마선의 음성이 이어졌다. "형식의 틀도 고정되어 있다고 보는 그 자체가 잘못인 것이지. 형식 역시 고정된 것처럼 보일 뿐…… 보는 마음에 따라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거든." 마선은 여기서 잠시 말을 끊었다. 화천명의 기광(奇光)이 일렁이는 시선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눈을 응시했다. 순간 마선의 눈이 또 다시 종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허헛! 유치한 장난이었네. 그저 자네를 가로막은 벽이 뚫리는 하나의 길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램일 뿐이었네." "……!" 막을 틈도 없었다. 마선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 비대한 체구를 돌리더니 뒤뚱거리며 멀어져 갔다. 그 뒷등을 마치 수천, 수만 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작열하는 듯한 화천명의 시선이 오랫동안 따라붙고 있었다. * * * "……!" 마치 화천명은 석상이라도 된 듯 오래도록 서 있었다. 잔잔한 해풍(海風)이 깊디 깊은 상념에 잠긴 그의 수려한 윤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다 문득, 아주 서서히 그의 깊은 동공 속에서 한 줄기 강렬한 광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시선이 향한 곳은 무한히 높고 거대한 하늘(天)이었다. "그래……." 알 수 없는 한 소리 중얼거림에 이어 화천명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절벽 끝에 이르러서야 화천명은 우뚝 걸음을 멈춰 세웠다. "……!" 순간 무섭도록 고요한 안광(眼光)과는 상반되게 그의 전신에선 마치 장엄한 한무리의 서광(瑞光)이 안개처럼 뿜어졌다. 이어 제왕혼과 절정도를 쥔 양손에 불끈 힘이 들어간다 싶은 순간 그의 신형은 창룡(蒼龍)이 되어 구름을 박차고 솟아오르듯 힘차게 도약했다. 슈파앗! 바로 그때였다. "……!" 멀리서 화천명을 지켜보고 있던 크고 작은 두 신형에 부르르 전율(戰慄)이 스쳤다. 그것은 한 줄기 위대한 감동 같은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경이(驚異)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전율이 가라앉은 후에 두 사람은 한없는 침묵으로 경이와 감동을 다시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슬프디 슬픈 불호성과 즐겁디 즐거운 한소리 도호성이 그 뒤를 이었다. "아미타불…… 노납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도다!" "무량수불…… 바로 이 분께서 길을 열어 주셨느니라!" 그것은 바로 광승 천곡과 천도 마선의 음성이었다. * * * 거대한 소용돌이 속의 고요. 그렇다. 휘몰아치는 혈난의 소용돌이 속에서의 작은 안식과 준비를 했던 남해 청조각은 이제 더욱 깊은 고요


속에 잠겨 들었다. 모두가 떠났기 때문이었다. 묘연아와 백선아는 광승 천곡, 천도 마선과 함께 떠나갔다. 그리고 석무혼은 천수나타 당한천과 함께 떠나갔다. 출천대협 탁몽은 홀로였고 독행칠대고수는 자기들끼리 짝을 이루어 청조각을 떠났다. 그리고 임설군은 보타신니 도옥진 등의 청조각 사람들과 함께 떠났다. 그리고 화천명은 모두의 행로를 지시한 후 가장 뒤늦게 중원을 향한 해풍(海風)에 몸을 실었다. 제 29 장 준동(蠢動)하는 신비십천 * * * -수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천벽제왕은 과연 몰락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어졌다. 그들은 이제 우리의 천적(天敵)이 아닌 것이다. 그들과 이제 다시는 싸울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아쉬움이기도 했지만 또한 안도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천벽(天壁)의 기백(氣魄)은 우리들 가슴 밑바닥에 제거되지 않는 두려움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없다. 신비구천에 이어 오천뇌가 계획한 것은 열 개의 환상(幻想)이었다. 환상십지(幻想十地). 십방(十方)의 대지로 상징되는 열 개의 환상과도 같은 공포(恐怖)를 만든다는 것이다. 공포가 무엇인지를 천하에 알려 준다는 것이다. 오천뇌는 그에 필요한 인원을 책정했다. 신비구천은 천마지혈(天魔之血)이 흐르는 오직 우리의 일가(一家)로 구성되었으나 환상십지는 외부인을 필요로 했다. 세상에 대한 한(恨)과 복수의 염원에 불타는 자들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오천뇌는 말했다. 한(恨)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고……. 치욕과 굴욕과 천대와 냉대 속에서 처절하게 형성된 한(恨)이야말로 그들이 원하는 공포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또한, 그러한 한인(恨人)들이야말로 악마(惡魔)에게도 몸을 판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악마였다. 우리는 그들을 샀다. 그리고 우리의 지시에 철저한 복종을 가르쳤다. 그것은 세뇌(洗腦)였다. 세뇌(洗腦), 이미 우리는 인간의 두뇌와 정신을 우리에게 알맞게 수정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알고 있었다. 오천뇌의 창조마공 중 한 가지인 천마집정대법(天魔集精大法)이 그것이다. 그것은 훗날 더욱 유용하게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천뇌가 책정한 인원을 완전히 채웠다. 많은 세월과 노력이 경주되었으나 보람있는 일이었다. 남은 것은 이제 오천뇌가 할 일 뿐이다. 수천 명의 한인(恨人), 그들을 제련하는 것이다.


* * * 대벽(大壁). 천하의 끝을 막아선 듯한 어마어마한 위용의 대벽이었다. 그렇다. 바로 제왕천벽(帝王天壁), 즉 천벽제왕부의 폐허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었다. 쏴쏴쏴! 대벽의 웅자 위로 엄청난 폭우(暴雨)가 퍼부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뇌전(雷電)이 울렸다. 번쩍! 콰르르르릉…… 쿠쾅! 칠흑 같은 어둠이 갈가리 찢겨지는 푸른 전광(電光) 속에 한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고요한 자세이나, 전신에서 은은히 우러나는 기도에 의해 거센 폭우마저도 비껴 나가는 그는 화천명이었다. "……." 진중하게 가라앉은 그의 시선은 제왕천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번쩍…… 콰르르! 번뜩이는 전광에 그의 얼굴이 파랗게 빛났다. 얼마 동안인가 그렇게 서 있던 화천명의 입술이 문득 열렸다. "천벽의 재건은…… 뒤로 미루어야겠습니다." 나직한 음성이었으나 결연한 어조였다. "천마(天魔)…… 그들과 최후의 일전(一戰)을 남겨두고 본가의 새로운 영광을 천하에 알릴 겁니다." 그렇다. 지금 화천명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그에게 주어진 과제의 전부(全部)를 집약한 말들이었다. "지금은 서전(序戰)에 불과할 뿐이니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그의 음성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적은 강합니다. 천년(千年) 천마지력(天魔之力)의 결정(結晶)…… 허나, 그래서 전 더욱 좋습니다." 그것은 투혼(鬪魂)이었다. 그리고 적이 강(强)함을 인식함에서 오히려 불꽃처럼 이글거리며 피어오르는 기백(氣魄)이기도 했다. "천벽지혼(天壁之魂)은 바로 기백…… 모자라는 힘은 기백으로 채웁니다." 문득 그의 입가에 자부(自負)의 미소가 피어 올랐다. "보시겠습니까?" 그 말이 뱉아지는 순간이었다. "……!" 제왕천벽을 응시하던 화천명의 두 눈에서 조용히 정광(精光)이 뿜어나기 시작했다. 뜨겁지도 예리하지도 않았으나 그것은 천하 그 무엇보다도 강렬한 빛이었다. 그와 함께 화천명의 전신에서는 무형(無形)의 기도가 서서히 뻗어나오고 있었다. 고요하면서도 흡사 해일(海溢)과도 같은 거대하고 웅휘로운 기백(氣魄)이었다. 일순 눈의 착각이었을까? 그 거대 웅휘한 기백에 눌려 폭우마저도 잠시 기세를 죽이더니 작렬하는 뇌전벽력마저도 몸을 움츠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기백 그대로 화천명은 몸을 돌렸다. 이어 그는 어둠과 전광 속에서 비쳐드는 천하(天下)를 주시했다. 바로 그때였다. 슈슈슛! 돌연 화천명의 신형이 폭우 속으로 솟아 올랐다. 그리고 뇌전을 타고 흐르듯 야공(夜空)을 꿰뚫었다. 슈아아앙!


* * * 대야산(大冶山). 호남성(湖南省) 동북단에 위치한 대야산은 험준절악하기로 유명했다. 때는 황혼(黃昏) 무렵이었다. 피처럼 붉은 석양의 노을이 대야산 전체를 휘덮고 있었다. 휘이잉…… 위이잉! 겨울의 막바지를 치달리는 바람은 여전히 칼끝처럼 매서운 한풍(寒風)이었다. 잡초와 나뭇잎들이 한풍에 못이겨 몸서리치게 울어대고 있었다. 이때였다. 스읏! 핏빛 노을에 젖은 잡초더미 속에서 하나의 검은 인영(黑影)이 일어섰다. 그 모습은 흡사 땅 속에서 그림자가 솟아나는 듯했다. 흑영의 모습은 기괴했다. 전신에 걸친 것은 도저히 옷이라고 봐 줄 수 없는 걸레조각 같은 누더기였다. 게다가 머리는 수세미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여기저기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피부에는 시커먼 때기름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정말이지 용모나 나이 따위는 도대체 땟물에 가려 알아볼 수도 없었다. 그런 흑영의 등에는 붉고 길다란 푸대 같은 것이 비스듬히 둘러메어져 있었다. 얼핏 보면 잠잘 곳이라도 찾는 걸인(乞人)만 같았다. 허나 설혹 걸인이라 하더라도 평범한 걸인은 아니라는 것을 누구라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조금 전에 보여준 한 수(手)의 몸놀림만으로도 그것은 틀림없었다. "……!" 더구나 시커먼 얼굴 속에서 문득문득 번뜩이는 시퍼런 안광(眼光)은 무림인 가운데에서도 이미 어느 수위를 넘어선 절정급 고수(高手)임을 말해 주었다. 그렇다면 개방( 幇)의 인물인가? 그렇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흑영의 전신으로부터 뿜어나오는 알 수 없는 사이(邪異)한 기운과 피(血)의 냄새 때문이었다. 문득 괴인의 입술이 느릿하게 떼어지며 소성이 흘러 나왔다. "흐흐흐…… 역시……." 음성 또한 지독히 비릿하면서도 섬뜩한 핏기운이 느껴졌다. 소성을 흘려내며 괴인은 일련의 이상한 동작들을 취하기 시작했다. 귀를 땅에 밀착시키고 소리를 듣는가 하면 흙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기도 하더니 이번에는 바람의 방향과 천색(天色)을 신중히 살펴보기도 했다. 이때였다. 슷! 또 한 줄기의 인영이 괴인의 전면에 그림자처럼 솟아났다. 혈포인(血袍人)이었다. 혈포인은 기이하게도 혈발(血髮)에 혈미(血眉)를 지니고 있었다. 얼굴빛은 밀납처럼 희었으나 전체적으로 사악(邪惡)함을 물씬 풍겨내는 용모였다. 또한 그의 눈빛과 전신에서 짓터질 듯 뻗어나는 사기(邪氣)와 피냄새는 흑영의 그것과 비교조차 되지 않으리만큼 섬뜩하고 강렬했다. 혈포인은 나타나자마자 괴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확인했느냐, 혈추(血追)?" 혈추라 불리운 괴인은 허리를 접으며 대답했다.


"틀림없습니다. 방향은 서남(西南)…… 적어도 이십 장(丈) 방원 내라고 판단됩니다." "음!" 혈포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입을 열었다. "이십 리 방원이라면 아직 대야산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번에는 결코 놓쳐서는 안된다." "……!" "혈막삼십육살(血幕三十六煞)을 넷으로 분류, 포위권을 좁혀라.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존명!" 괴인은 다시 허리를 접었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허리를 접은 자세 그대로 허공을 꿰뚫고 사라지고 있었다. 일순 혈포인은 핏물처럼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나직한 중얼거림을 흘려냈다. "어리석은 계집…… 감히 궁가혈막(窮家血幕)의 추적을 뿌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니……!" -궁가혈막(窮家血幕)! 그렇다. -거칠고 황폐한 서북(西北)의 땅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자들의 영역이 있다니…… 그들이 가진 것은 오직 하나, 피(血)……. 이런 전설을 기억하는 자는 알 것이다. 궁가혈막이 바로 환상십지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헌데, 어리석은 계집은 또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이때였다. 돌연 혈포인의 입에서 다시 짤막한 일성이 발해졌다. "거기 있는가?" 밑도, 끝도 없는 한 마디였다. 허나 그 순간 그 말에 대한 대답인 듯 땅 속으로부터 지독히 음사(陰邪)한 괴소성이 흘러나왔다. "흐흐흐흐흐흐…… 이미 기다리고 있다." 괴소성과 동시에 땅 주변에서 괴이한 광경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스스스스! 나무 밑, 바다 틈, 지면으로부터 스물스물 흘러 나오는 것은 뜻밖에도 핏물이 아닌가? 핏물은 흘러나오면서 어떤 형체(形體)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처음 그것은 사람의 손(手)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더니 차츰 팔로, 어깨로 이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인간의 상체(上體)를 이루어 갔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완전한 사람의 형체를 이루는 것이 아닌가? 모두 십인(十人)이었다. 헌데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들은 분명 사람의 형태이되 모습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혈인(血人)! 그렇다. 그것은 흡사 핏덩이를 그대로 뭉쳐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듯한 실로 끔찍한 모습들이었다. 정말이지 손을 갖다대면 피가 그대로 묻어날 것만 같았다. 뿐만 아니라 전신에서조차 핏물이 베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머리의 형태로 이루어진 부위에서는 하나같이 가공할 두 줄기의 혈광(血光)이 뿜어나고 있었다. 그 아래쪽 입(口)이라 생각되는 찢어진 부위에서는 피거품과 함께 끔찍한 소성이 흘러나왔다. "흐흐흐…… 우리 야황동(夜皇洞)을 부른 이유는 단지 그 계집아이 때문이냐?" -야황동(夜皇洞)! 이는 야기(夜氣)로 뭉쳐진 모든 어둠의 정령(精靈)과 지중(地中)의 사령(邪靈)들로 이루어진 악마의 집단이 아닌가? 이때 혈포인의 음성이 울렸다.


"궁가혈막의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단지 완전을 기하자는 것…… 비록 계집 하나라 해도 그 비중은 막대한 것이다." "흐흐흐흐! 우리끼리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겠지. 길이나 안내해라." "서남(西南)이다." "알겠다. 흐흐흐흐흐……." 스으으읏! 소성이 울려퍼지는 순간 혈인들의 뭄뚱이는 다시 핏물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들은 지면으로 흡수되면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혈포인의 두 눈에서 일순 사광(邪光)이 번쩍 솟구쳤다. 다음 순간 신형 또한 환영이 흩어지듯 사라져 버렸다. * * * 휘이이잉……! 한풍이 휘몰아치는 어느 산곡(山谷)이었다. 휘리리릿! 바람을 전신에 맞으며 한 사람이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여인(女人)이었다. 아니, 아직은 소녀(少女)라는 표현이 옳았다. 십 칠팔 세나 되었을까? 가히 눈부신 미모(美貌)를 지닌 흑의소녀(黑衣少女)였다. 어디 한 군데고 흠잡을 곳이 없는 완벽한 이목구비와, 그것이 얼굴의 갸름한 윤곽과 어울려 이루어 내는 완벽한 조화는 가히 극치(極致)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단지, 입술 왼쪽 끝부분에 조그만 흉터 하나가 있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허나 다시 보면 그것이 오히려 그녀의 인상을 강렬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고, 또한 다시 보고 싶은 독특한 아름다움과 매력(魅力)을 형성하고 있었다. "……!" 헌데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떠올라 있는 것은 지극한 초조와 긴장의 빛이었다. 몸을 날리면서도 흘낏흘낏 돌아보는 모습은 분명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어느 순간 소녀는 거대한 바위 밑에 신형을 세웠다. "후우!" 흑의소녀는 숨을 몰아쉬며 사위를 한 차례 살피고는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 "지독한 것들이야. 도대체 따돌릴 방법이 없어!" 그녀는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나 요화(夭花)…… 그 자들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일백팔(百八) 가지로 신물을 바꿔 보기도 했고, 삼백육십(三百六十)가지의 계략을 써 보기도 했으나…… 이제 정말 신물이 난다!" 이때였다. "아니?" 돌연 흑의소녀 요화의 두 눈에서 정광이 빛을 발했다. 이어 그녀는 당혹의 빛을 떠올리며 전방을 노려보았다. 휘이잉…… 위이잉! 바람결에 실려 나타난 것처럼 구인(九人)의 인영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같이 누더기 같은 옷에 봉두난발, 시꺼먼 땟물이 흐르는 얼굴들이었다. "으음!" 요화의 입에서 신음성과도 같은 음성이 뱉아졌다. 이어 무의식 중에 사방을 휘둘러 보는 순간 그녀의 눈빛은 완전히 낭패로 물들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 방위(方位)로부터 똑같은 모습으로 궁가혈막의 인물들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각각 아홉 명씩 스물 일곱 명. 그리고 전방의 구 인까지 합친다면 삼십육인(三十六人)이었다. 바로 궁가혈막의 죽음의 추적대인 혈막삼십육살(血幕三十六煞)의 출현이었다. 그때였다. 스르르르! 요화가 위치하고 있는 전면 오 장(丈) 앞 지면이 갑자기 핏빛으로 물들어 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녀는 흠칫하며 벌떡 신형을 일으켰다. 그 순간이었다. 스으으……! 지면으로부터 먹구름이 번지듯 시뻘건 혈수(血水)가 번져오르기 시작하더니, 혈수로부터 사람의 손(手)들의 불쑥불쑥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눈 깜박할 사이에 전신의 형태를 이루며 핏물 속에서 솟아난 것은 열 명의 혈인(血人)들이었다. 바로 야황동의 괴인들이었다. "야황동까지!" 요화의 신음성이 다시 뱉아지는 순간이었다. 스슷! 그녀의 전면에는 어느 새 예의 혈포인(血袍人)이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혈포인은 나타나기 무섭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내놔라." "……!" 요화의 아랫입술이 짓깨물어졌다. 이미 싸움의 승산은 해보나 마나였다. 찰나지간 채념의 빛이 그녀의 얼굴 가득 떠올랐다. 다음 순간, 그녀는 도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며 냉랭하게 내뱉았다. "나도 네놈들 피해 다니기에 신물이 났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해라!" 포기였다. "후후훗!" 혈포인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지 않을까?" 한 줄기 나직한 음성이 바람결에 묻어 들었다. "……?" 요화의 고개가 흠칫 제껴졌다. 그 순간 요화는 보았다. 소리도, 흔적도 없이 그녀의 뒷편에 조용히 나타나 있는 한 명 흑의인(黑衣人)을. 흑의인은 머리엔 죽립(竹笠)을 깊숙이 눌러쓰고 있어 용모는 알아볼 수 없었다. 단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죽립 아래로 어렴풋이 드러난, 실로 강인해 보이는 턱선의 윤곽 뿐이었다. 흑의인은 허리에 한 자루 묵검(墨劍)을 비껴차고 있었다. 그런 흑의인의 전신에서는 뜻밖에도 짙은 죽음(死)의 냄새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사기(邪氣)나 마기(魔氣)와는 또 다른 의미의 전율이었다. "……!" 허나 요화는 흑의죽립인을 바라본 순간 웬일인지 자신을 도와 줄 사람같다고 느껴졌다. 흑의죽립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궁가혈막은 환상십지 중에서도 특히 추적술과 살인수(殺人手)가 뛰어난 자들이지. 그리고 야황동은


천하에 존재하는 환술(幻術)의 대부(代父), 허나 그대들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도 천하에는 있지." "……!" 혈포인의 눈빛이 기이한 광채를 뿌렸다.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군. 네놈은 누구냐?" 흑의죽립인은 간단히 대답했다. "무영비도(無影秘刀)라면 알겠나?" * * * -무영비도(無影秘刀) 백천(白天)! 그는 바로 살수조직 흑번(黑幡)의 초특급 전문살수이자 이 시대 최고의 살수제일인(殺手第一人)이라 호칭되는 자가 아닌가? 일순 혈포인의 고개가 느릿하게 끄덕여졌다. "흐음…… 바로 네 녀석이었군. 허나 너 정도의 실력으로 우리들과 맞선다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불러 들이는 짓일 뿐이다." 중얼거림을 흘려내며 혈표인은 가볍게 우수를 치켜 올렸다. 스스스슷! 순간 서서히 다가들던 혈막삼십육살의 신형이 비쾌하게 움직이며 무영비도 백천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무영비도 백천의 냉소가 흘러나온 것은 이 순간이었다. "후훗…… 글쎄, 살인검(殺人劍)이라면 당연히 너희들보다 내가 낫지." 그의 우수는 이미 허리의 검자루에 닿고 있었다. 헌데 그때였다. "클클클! 어떤 놈이 우리들 앞에서 살인(殺人)의 우열을 논하느냐?" 괴소성과 함께 허공으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네 줄기 인영이 있었다. 휘휘휙! 그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기괴했다. 흉측하고 음독사악(陰毒邪惡)해 보이는 용모도 용모려니와, 무엇보다 기괴한 점은 그들 모두가 불구자(不具者)라는 사실이었다. 바로 외팔이와 장님, 앉은뱅이, 외다리의 괴인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요화의 입에서는 다시 한 번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천형마도!" -천형마도(天形魔島)! 그렇다. 여러분은 이런 전설을 기억하는가? -이 땅 어딘가에 하늘에게마저 버림받은 천형(天炯)의 땅이 있도다. 그곳에 있는 자들은 불구자(不具者)이며 마음 또한 불구자이니……. 오직 살인(殺人)밖에 알지 못하는 인생의 불구자들. 그렇다. 환상십지 가운데 또 하나의 공포인 천형마도까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 무영비도 백천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뭔가를 각오한 듯 결연한 어조로 내뱉았다. "좋아. 어차피 만나야 할 것들이라면 일찍 만나 버리는 쪽도 나쁠 건 없을 것이다." 스릇! 그 순간 그의 허리춤으로부터 한 자루 묵검이 묵광(墨光)을 토해내며 빠져나왔다. 제 30 장 드러나는 비밀(秘密) * * *


天魔 最後의 計劃 제왕천벽을 떠난 화천명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바로 녹수구곡맹(錄水九曲盟)이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화천명은 내정(內定)된 후계자의 신분으로 나타나 녹수구곡맹을 그 자폭(自爆)의 위험으로부터 건져내고 수습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래야만 그들의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참으로 엉뚱한 의외의 사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녹수구곡맹, 그 철골호한(鐵骨豪漢)들의 거대한 집단은 화천명이 도착했을 때 이미 완전히 정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그가 할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고 녹천십수(綠天十 )의 원로들이 숙청된 것도 아니었다. 그 이유는 이러했다. -천인혈도(千刃血刀) 은현수(殷玄水), -혈사신군(血沙神君) 피사혁(皮査革), -구절신수(九絶神 ) 종자허(種子虛), -백독선(白毒扇) 시진(示眞), -앙천신후(仰天神侯) 철천옥(鐵天玉), -혈마뢰(血魔牢) 명우(明宇), -한천혈인(寒天血人) 후남회(厚南會), -백시광생(伯屍狂生) 강사인(江史人), -철수왜타(鐵手矮駝) 상추(常雛), -금비혈신(金臂血神) 성산수(成散守). 녹수구곡맹을 이끌어 가는 열 개의 기둥(柱)이자, 녹림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 불리우는 그들 녹천십수(綠天十 )의 진정한 인물됨을 아무도 몰랐다는 데서 판단착오가 발생했던 것이다. 일단 녹수구곡맹에 내정된 후계자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녹수십천이 보여준 일련의 행동들은 한 마디로 융통성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우직(愚直)의 표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소문이 퍼지자 우선 구곡대제에게 가서 소문의 진부를 확인해 보더니, 사실일 뿐만 아니라 아주 뛰어난 인물이라는 구곡대제의 회심 어린 대답을 얻어 듣고는 완전히 사람이 확 달라져 버렸다. 언제 내가 차대맹주(次代盟主)의 지위를 노리고 그 치열한 암투를 전개했었냐는 듯 그렇게 상호간에 협조가 잘 되기 시작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아연해진 것은 혈정수사 설문비와 사운악이었다. 그때, 구곡대제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 호탕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핫! 알았다. 딴에는 맹(盟)의 장래를 무척들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야!" 그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는 곧 녹천십수의 다음 말에 의해서 밝혀졌다. "맹주께서 내정해 두셨다는 후계자, 아주 뛰어난 인물이라니 이제 마음이 놓입니다." 그것은 바로 구곡대제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信賴)였고, 바꾸어 말하자면 구곡대제 외에는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었다. 결국 녹천십수의 내심은 이런 것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구곡대제가 없는 녹수구곡맹을 생각했을 때 맹의 장래가 심히 우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맹을 맡길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 십인(十人) 모두가 똑같은 생각이었다. 게다가, 사실 맹주라는 직위는 정말 골치아픈 것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자신들이 맡겠다고 결심한 것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들로선 엄청난 희생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모든 사실이 정확히 밝혀지자 사운악은 만 하루 동안을 헛웃음을 흘리고 다녀야만 했다. 그리고 혈정수사 설문비는 만 이틀 동안이나 그들 녹천십수를 쫓아다니면서 그 유명한 독설을


퍼부어댔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멍청한 어르신네들아! 당신들 머리는 아마 쇳덩어리로 만들어졌을 거요. 그것도 보통 쇠가 아니고 만년한철(萬年寒鐵)이 틀림없소. 그 희생정신 하나는 눈물겹지만 말이오!" 어쨌거나 그 후부터는 사운악의 독무대였다. 그는 눈부시리만큼 신속하게 녹수구곡맹의 조직정비에 착수했고, 치밀하고도 탁월한 천재적인 조직력으로 단숨에 맹을 정비해 놓았다. 그리고 녹천십수는 적극적으로 사운악에게 협조했다. 화천명이 녹수구곡맹에 당도한 것은 바로 그 즈음이었다. * * * 동정호(洞庭湖). 잔잔한 달빛이 부서지는 호면에 한 척의 소주(小舟)가 그림처럼 흐르고 있었다. 배에는 두 사람이 마주앉아 있었다. 바로 화천명과 사운악이었다. "하하핫!" 낭랑한 웃음소리가 달빛과 함께 호면에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천명, 너를 본 그들의 얼굴은…… 하하! 정말 볼만 했다!" 사운악은 낭소를 터뜨리며 괴이한 표정으로 흉내내는 것이었다. 눈망울이 점차 커지고 입이 쩌억 벌어지기 시작하더니 부르르 떨고 나서 그지없이 감동적인 표정을 말이다. "그만 둬라. 사실 난 조금 죄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하! 물론 죄스럽겠지, 하지만 말이다. 나는 네가 후계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나면 그들이 지을 표정이 또 어떤 것일지 긍금해 죽겠다." "노나 잘 저어라, 이 녀석아. 엉뚱한 곳에 대놓지나 말고." 그렇다. 지금 화천명은 녹수구곡맹을 떠나는 길이었다. 사운악은 그를 배웅나온 것이었다. 지금 그들 사이에 나눠지는 대화는 이런 우스개 이야기들이었다. 허나 그들 사이의 중요한 이야기들은 이미 녹수구곡맹에서 충분히 오고간 후였다. 잠시 후 그들이 탄 소주가 닿은 곳은 동정호의 한 호변(湖邊)이었다. 그곳은 바로 대야산(大冶山)의 어귀가 되는 지점이었다. "잘 가라." "잘 있거라." 이별은 간단했다. 화천명은 배에서 내려 몸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 돌연 화천명의 전신신경으로 무섭게 와닿는 한 줄기 느낌이 있었다. "흐음!" 나직한 일성을 흘리며 화천명은 사운악에게 말했다. "넌 어서 가라. 무서운 고수들이 싸우고 있다. 치열한 접전인데도 거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봐서 말이다." 그리고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휘익! 산 위로 사라져 가는 화천명을 바라보고 있던 사운악은 그대로 돌아갈까 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후훗…… 구경 중에는 싸움구경과 불구경이 제일 재미 있다고 했지?"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배 밖으로 걸어나왔다. "천명…… 저 녀석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좀 봐두고 싶단 말이야." 사운악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화천명의 뒤를 따라 어슬렁거리며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그가 고수들의 싸움구경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었다. 화천명을 믿는 구석도 있긴 하겠지만 어쨌든 꽤나 담이 큰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 지난 날 금릉에서 금릉이우(金陵二友)라 통칭되었던 화천명과 사운악은 또한 배짱과 대담함으로도 유명했었다. 사람들은 누가 더 담이 큰지 궁금한 나머지 내기를 걸고 두 사람에게 물으러 온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때 화천명은 피식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담이라면 당연히 나보다는 운악이오. 그 녀석은 세상만사 모르는 것이 없지만 오직 하나 죽음이 뭔지는 아예 깜깜하게 모르니 말이오." 물론 그때 사운악의 대답이 이러하기는 했었다. "빌어먹을! 왜 하필이면 그 따위 것을 묻소? 내가 다른 건 다 자신있지만 그것만은 천명에게 안되오. 나는 죽음이 뭔지를 아예 모르지만 그 녀석은 뻔히 죽을 줄 알면서도 갈 일이 있으면 갈 놈이오!" * * * 산곡(山谷). 화천명이 그곳에 당도했을 때 무서운 격전은 거의 끝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 요화는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무영비도 백천은 상당한 중상을 입은 상태로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그대로라면 몇 초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고 말 지경에 이른 상태였다. 말 그대로 생사지간(生死之間)의 위기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파라라락! 화천명의 신형이 격전장 안으로 날아든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순간 무영비도 백천에게 막 짓쳐들고 있던 혈막삼십육살 중 하나를 향해 그의 절정도가 꽂혀들었다. "천뢰행공!" 쐐애액! "크악!" 묵광(墨光)과 비명성은 동시에 터졌다. "……?" 이 의외의 사태에 마인들의 공세가 잠깐 멈칫하는 순간에 화천명은 무영비도 백천의 앞쪽에 내려서고 있었다. 그때 죽립이 벗겨져 나간 무영비도 백천의 얼굴에 화천명의 시선이 일순 머물렀다. "……?" 처음 본 얼굴인데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화천명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으나 곧 무영비도 백천을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좀 쉬시오." "……!" 무영비도 백천의 눈빛이 일순 기이하게 빛났다. 허나 그는 참으로 냉철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


지금 백천이 해야 할 일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치료해야 하는 일이었다. "고맙소" 간단히 사의를 표한 무영비도 백천은 한쪽으로 물러나 운기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였다, "너는 또 웬 놈이냐?" 혈포인이 화천명을 노려보며 내뱉았다. 화천명은 피식 웃었다. "풋! 최소한 너희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을 세상에서 살려두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란 것만 알면 된다. 그리고 바로 이것도!" 이것도라는 한 마디가 떨어지면서 화천명의 신형은 허공으로 치솟았다. "……?" 혈포인이 뭐라 입을 놀리기도 전이었다. 번쩍! 화천명의 절정도가 다시 뇌섬(雷閃)을 토해냈다. 그것은 천뢰행공에 이어지는 천벽절도(天壁絶刀)의 후식(後式)이었다. "으아아아악!" "크악!" 비명과 함께 마인 두 명이 한꺼번에 쓰러져 갔다. "그, 그건…… 천벽……." 누군가의 경악성이 들리는 순간 화천명의 절정도는 연이어 묵섬을 토해내고 있었다. "지렬위진(地裂威震)!" "벽세경동(壁世驚動)!" "신마양단(神魔兩斷)!" 천지를 한꺼번에 뒤덮는 웅휘찬연한 빛더미의 폭풍이 장내를 휩쓰는 순간 하늘이 쪼개지고 땅이 터져올랐다. "으아아아아!" "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피보라와 육괴(肉塊)들이 우박처럼 허공에 흩뿌려졌다. 그렇다. 화천명의 절정도는 그 엄청난 기세를 그칠 줄을 몰랐다. 궁가혈막과 야황동, 천형마도의 마도들 가운데 단 한 명의 목숨도 남지 않을 때까지 그의 절정도는 하늘을 가르고 땅을 뒤집어 엎었다. 사운악이 어슬렁 어슬렁 산곡에 당도한 것은 화천명의 신위(神威)가 막바지로 향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 그는 팔짱을 끼고 잠시 전황을 바라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흐흠! 이제 봤더니 정말 굉장한 녀석으로 변해 버렸군." 그리고는 싸움의 진행이나 결과 따위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슬슬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요화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잡혔다. 요화의 모습은 여기저기가 옷자락이 찢겨져나가 거의 반라(半裸)의 상태였다. 찰나지간 사운악의 시선이 묘하게 빛났다. 관심이 끌린 듯 그는 천천히 요화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옆에 앉아 그녀의 상세를 살펴보았다. "쯧쯧…… 엄청나게 상했군."


혀를 차며 중얼거리던 그는 문득 요화의 찢겨진 옷자락 사이로 삐죽이 내밀어져 있는 네모진 물체를 발견했다. 그것은 종잇장보다도 얇은 하나의 철판이었다. "……?" 사운악은 고개를 갸웃하며 꺼내 보았다. 철판에는 뭔가 굉장히 복잡한 도형(圖型)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고, 깨알보다도 작은 글씨들이 빽빽하게 첨부되어 있었다. "흠!" 사운악은 잠시 그것을 관심있게 살펴보았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어?" 사운악의 입에서 놀람의 일성이 튀어나왔다. 손에 들고 살펴 보고 있던 철판이 갑자기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게 도대체……?"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사운악은 자신의 등 뒤에 환영처럼 한 명 회의청년(灰衣靑年)이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문제의 철판을 회의청년이 품 속에 집어넣은 것도 보았다, 찰나 사운악은 순간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회의청년의 얼굴 반면은 지독한 화상(火傷)을 입은 듯 추괴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나머지 반면은 절륜무쌍한 수려한 용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사운악은 칼날로 자신의 눈을 후벼파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무섭도록 예리하고 강렬한 안광이었다. 그때였다. "싸움구경 하고 싶어서 끝내 따라왔느냐?" 옆쪽에서 난데없이 화천명의 음성이 들려왔다. "……!" 흘낏 고개를 돌린 사운악은 화천명보다는 싸움이 벌어졌던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 * * 싸움은 어느 새 끝나 있었다.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십여 구에 달하는 마인들의 참혹한 시신들만이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지독하군." 이때 화천명은 회의청년에게 시선을 던졌다. 회의청년도 화천명을 바라보았다. "……!"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허공에서 한 가닥 불꽃이 튀는 듯했다. 이 순간 두 사람의 뇌리를 동시에 사로잡는 기이한 느낌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천적(天敵)과 천적(天敵)이 마주친 감응(感應)같았다. 화천명은 내심 놀랐다. '무서운 놈이다!' 그러다 문득, 화천명은 회의청년의 진면목을 알아보았다. "그대는……!" 그렇다. 회의청년은 바로 지난 날 청류하(淸流河)에서 묵비혼으로 인해 만난 적이 있었던 그 인물이 아닌가?


바로 목함 속에 든 천마유전(天魔遺傳)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사라졌던 그 자였다. "오랜만이군." 회의청년은 참혹한 장내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강해졌구나." "그대 역시 더 강해진 것 같은데." 화천명의 말에 회의청년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문득 회의청년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별로 그대와 싸우고 싶지 않군." 화천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다." 이들 두 사람의 말은 진심이었다. 왠지는 모르지만 둘 사이의 격돌은 차후로 미루고 싶은 마음을 그들은 느꼈던 것이다. "가겠다." 화천명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회의청년은 돌아섰다. 아니, 돌아선다고 보이자 그의 신형은 이미 저만큼 멀어져 가고 있지 않은가? 화천명이 그의 뒤를 향해 한 마디를 던졌다. "이름 정도는 남기고 가도 좋을 텐데……?" 천류혼(天流魂)!" 그 말이 끝났을 때 회의청년의 모습은 더 이상 시야에 남아 있지 않았다. "……." 화천명은 묵묵히 사라지는 화의청년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의 마음 속에서 짧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으음…… 나로서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다. 후훗! 자신감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군!' 이때였다. 사운악의 투덜거리는 음성이 그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 자가 가져간 물건이 꽤 중요한 것인 것 같던데 왜 그냥 보낸 거냐? 화천명은 돌아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가 있지 않느냐?" "내가 있다니?" "그 물건 대신 말이다." "빌어먹을! 내가 물건이냐?" "네 머리가 물건이지." "……!" 사운악은 입을 다물고 영 입맛이 쓰다는 표정으로 화천명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넌 내 친구다. 내게 대해선 모르는 게 없으니 말이다." 화천명이 웃었다. "친구란 게 뭐냐? 지기지우(知己知友)…… 서로를 안다는 뜻이다." 이어 그는 진지한 음성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정말 다 기억하긴 했느냐?" 사운악은 잠시 궁리하는 기색이더니 대답했다. "워낙에 복잡해서 완전히 자신은 못하겠다만 웬만큼은 기억했다."


허나 화천명은 그가 이 정도로 말하는 것은 완전히 기억하고도 남았다는 말로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바로 그때였다. "사실인가? 기억했다는 것이……?" 그들의 뒤쪽에서 나직하고 무심(無心)한 한 줄기 음성이 들려왔다. 무영비도 백천이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여전히 창백한 얼굴이긴 했으나 한눈에도 웬만큼 회복된 상태란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일순 사운악의 눈살이 미미하게 찌푸러졌다. "……!" 그것은 상당히 기분 나쁘다는 표정이었다. 허나 화천명은 피식 웃었다. "운악, 너와 친구가 되고 싶은 모양이다. 처음부터 반말인 걸 보니." 그 말에 사운악은 눈살을 펴는 대신 심사숙고해 봐야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쩔까? 내 친구면 천명 네게도 친구가 될 텐데……." 화천명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난 관계하지 않겠다." 이때,무영비도 백천이 천천히 다가오며 다시 입을 떼였다. "사실인가 물었다. 중요한 일이다." 언제나 무심하고 고요했던 그의 눈빛이 그 순간만큼은 희미한 긴장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허나, "가만 있어 봐라. 난 친구가 될 것인지 아닌지부터 생각해 봐야겠다." 사운악은 고개를 갸웃하며 무영비도 백천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흠…… 생긴 건 우리만큼 잘 생겼군." 그렇다. 사실 무영비도 백천의 얼굴은 잘 생긴 얼굴이었다. 한 가지 너무나 무심하고 차갑다는 점만을 제외한다면 실로 나무랄 데가 없을 만큼 절륜한 용모였다. 헌데 이때였다. 화천명은 그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번뜩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천류혼의 반쪽 얼굴과 비슷하다!' 그렇다. 회의청년 천류혼의 화상을 입지 않은 반쪽 얼굴과 무영비도 백천의 용모는 거의 쌍둥이처럼 닮아 있지 않은가? 순간 화천명의 뇌리에 기이한 영감이 스쳐갔다. '혹시!' 이때였다. 사운악이 호쾌하게 말했다. "좋아, 결정했네. 나 사운악일세. 자넨?" 무영비도 백천은 간단히 대꾸했다. "백천." "백천이라……." 사운악은 그 이름을 한 번 되뇌어 보더니 빙긋 웃었다. "자네와 난 지금부터 친구다. 어떤가?" 일순 무영비도 백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치는 듯했다. 그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서야 화천명이 끼어들었다. "하하! 운악의 친구라면 내게도 친구가 되지."


"……!" 무영비도 백천은 잠시 화천명을 주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대가 천벽의 후예라는 화천명인가?" 화천명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무영비도 백천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 이어 그는 이러한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맙다." 고맙다는 말은 많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허나 화천명은 알 수 있었다. 무영비도 백천, 초특급 전문살수이자 이 시대의 살수제일인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그는 오직 비정(非情) 속에서만 이 나이까지 살아왔다. 그리고 헤아릴 수조차 없는 무수한 생사위기 속에서 살수수업을 거쳤다. 따라서 죽음(死)의 냄새를 숙명처럼 지니고 잔혹한 긴장의 연속만으로 그의 생애는 이어져 왔다. 그런 그가 친구를 가져본 적이 있을까? 아니, 분명 없을 터였다. 그랬기에 난생 처음 친구가 생긴 것에 대해서 고맙다고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이들 세 사람은 이렇게 해서 하나가 되었다. 그렇다. 청춘(靑春)이란 이래서 좋은 것이었다. 강호의 노물(老物)들이었다면,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내심을 숨기고,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 속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상대의 뒤통수를 칠 수 있을까, 그런 궁리에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화천명은 무영비도 백천을 향해 물었다. "헌데, 중요한 일이란 건 뭔가?" 사운악이 화천명의 물음에 덧붙이듯 말했다. "기억했다는 사실일세." "……?" 무영비도 백천은 불가사의하다는 기색으로 사운악을 바라보다가 조금 무거운 어조로 대답했다. "천마 최후의 계획이네." "……?" 화천명과 사운악은 동시에 흠칫 놀라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화천명이 다급히 물었다. "무슨 말인지 자세히 말해 보게." 무영비도 백천은 고개를 저었다. "확실한 것은 모르네. 나도 단지 그 말만 들었을 뿐이니까." 이어 그는 아직도 혼절해 있는 요화를 시선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여자…… 천축 천밀마교(天密魔敎)의 첩자인데 환곡(幻谷)의 처소에서 훔쳐 냈다더군." "환곡의 처소에서?" 화천명은 약간 놀라는 표정으로 요화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그녀를 알아보고 있었다. 바로 천벽유지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 혹의면사녀이기 때문이었다. 무영비도 백천이 대답했다. "훔쳐낼 때 시기가 좋았었지. 하후강의 세뇌(洗腦)에 열중하고 있었을 때였으니까." "하후강이 세뇌……?" 일순 화천명의 검미가 꿈틀 움직였다. 허나 그는 곧 조금 굳어진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천명은 충분히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하후강! 자네부터 구해내야 되겠군!' 그가 내심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아까부터 뭔가 곰곰히 생각하고 있던 사운악이 느닷없이 외쳤다. "알았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화천명은 즉시 화답했다. "고맙다. 뭐냐?" 그렇다. 사운악의 말은 천마 최후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아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화천명은 그것을 알아내 주어서 고맙다고 한 것이었다. "……?" 아직 친구가 된 지 얼마 안된 무영비도 백천은 다소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그들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다. 천축 천마밀교의 첩자인 요화가 훔쳐낸 천마 최후의 계획서에 적인 난해하고도 복잡한 도형을 잠깐 보고 해석해 낸 사운악의 머리는 정녕 뛰어난 것이었다. 뒤이어 실로 무서운 이야기가 사운악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몰살계획일 것이다. 조화밀도(造化密度)라 적혀 있었는데…… 수천 명의 인간과 수십만 종의 기관(機關)으로 이루어진, 말하자면 매복도(埋伏圖)였다. 장소는 어딘지 모르겠다. 지하(地下)라는 것과 어마어마하게 넓다는 것밖에는…… 그 넓이는 중원무림인 전부를 수용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혹시 중원무림인 전원을 그 안으로 끌어들여 깡그리 몰살시키려는 계획이 아닐까?" "……?" 화천명은 뭔가를 한참 고려하는 빛이더니 문득 이렇게 중얼거렸다. "좋아. 통쾌하게 끝낼 수 있겠군." 제 31 장 시작되는 싸움 * * * -신비도, 환상도 거의 모두가 완결되었다. 그것은 계획과 준비가 거의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은 것은 이제 계획대로의 실행 뿐이다. 그 실행을 주도할 삼인(三人)이 필요했다. 상술(商術)의 능인(能人) 하나와 모사(謀士) 하나. 언제 어디서든 오천뇌와 서로 심령(心靈)이 통할 수 있는 천부적으로 영력(靈力)이 강한 자. 오천뇌는 수천 명의 우리 일가(一家) 중에서 그들 셋을 가려냈다. 헌데, 한 가지 난제가 발생했다. 마침내 오천뇌가 이루어낸 천마군림마공(天魔君臨魔功). 구대마공의 완전한 합일(合一)로써 쌍성합일의 천검절도(天劍絶刀)를 꺾을 수 있는 유일한 그것을 익힐 적임자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천벽제왕부의 천벽절도가 시전자에 따라, 그 기백의 정도에 위력이 천양지차로 벌어지는 것처럼 천마군림마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천부적으로 극단(極端)의 마성(魔性)을 타고난 인물이 없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어쨌든 우리에게 없다면 외인(外人) 중에서 찾아야 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으나 우리는 찾아 나섰다. 그를 과연 우리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가 하는 판단은 오천뇌의 몫이었다.


그것은 실로 기묘한 일이었다. 세 남매(男妹), 쌍둥이 사내 아이와 갓난 계집 아이 하나. 동일한 피를 나눈 형제요, 남매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서로 판이할 수도 있는 것일까? 쌍둥이 사내 아이 중 하나는 바로 우리가 원하는 그 마성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무서운 살운(殺運)이 핏속에 흐르고 있었다. 또한 계집 아이는 전율의 요기(妖氣)가 그 내미(內眉)에 잠재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부친은 지금 이 시대의 명실상부한 최고의 정인(正人)이었다. 결국 숙명적으로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셋 모두를 얻을 수도 있었다. 허나 우리가 필요한 것은 그 중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그 하나를 취했다. 그리고 그를 본 오천뇌의 첫 마디는 이러했다. -됐습니다. * * * 낙수(落水). 고도(古都) 낙양(洛陽)의 외곽을 감싸며 흐르는 대하(大河)인 낙수는 유난히 물이 맑고 깨끗했다. 뿐만 아니라 특히 석양(夕陽)녁의 광경이 너무도 수려절륜(秀麗絶倫)하여 일명 낙조하(落照河)라고도 불리웠다. 그 낙수변을 따라 동남(東南)쪽으로 약 십여 리(里)를 가다 보면 하나의 성채(城砦)가 우뚝 자리해 있다. 별로 거대한 규모는 아니나 단청(丹靑)이며, 기와, 심지어 성벽을 쌓은 벽돌 하나 하나에도 장엄한 위풍이 절로 서려 있는 성채였다. 그렇다. 그곳은 바로 천지회(天志會)였다. 즉, 정도(正道) 최후의 보루인 천지회의 총단(總壇), 바로 그 성채였던 것이다. 그러나 천지회의 상주인원은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천지회 산하(傘下)의 문파들은 곧 천하 각처에 산재해 있는 정도명문거파(正道名門巨派)들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천지회의 총단에 거주하는 인원은 각 수뇌부 안사들과 수행고수(隨行高手)들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천하정도(天下正道)를 대표하는 명문(名門)의 최정예(最精銳) 고수들이었다. 천지회를 구성하는 조직은 이러했다. -일전십이부삼십육원칠십이각(一殿十二府三十六院七十二閣). 일전(一殿)은 당연히 회주(會主)를 비롯한 그 직계고수(直系高手)가 거처하는 곳이었다. 하여 그 전의 이름을 동심전(同心殿)이라고 했다. 다음 십이부(十二府)는 구파일방(九派一幇)의 정예급 고수들이 소속된 십부(十府)와 그 외 별동조직인 풍운부(風雲府)와 백야부(白野府)를 일컫는 말이었다. 풍운부에는 구파일방을 제외한 사대세가(四大世家)를 비롯한 명문출신(名門出身) 고수들이 소속되어 있는 반면, 백야부는 명문출신은 아니나 독력(獨力)으로 입신한 고수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출전대협 탁몽은 바로 그 백야부 소속이었다. 그리고 그는 백야부의 제이부주(第二府主)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 십이부 산하에는 다시 이원사각(二院四閣)이 속해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칭하여 삼십육원(三十六院) 칠십이부(七十二府)라 칭했다. 따라서 각원(各院), 각부(各府)에는 무수한 정도거파에서 선별된 정예고수들이 적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개개인의 능력은 강호의 절정고수(絶頂高手) 이상이었다.


초대회주(初代會主) 천운선생 백무번이 은퇴한 이후 천지회는 구파일방의 장문인(掌門人)들이 순번대로 회주의 대임을 맡아 왔다. 그러다가 당금에 이르러 천품군자 하후강이 정식으로 회주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점에서 실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천운선생이 은퇴한 이후 천지회의 모든 대소사(大小事)가 문상(文相)인 환곡(幻谷) 문인옥(聞人玉)에 의해 처리되어 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천지회의 모든 권한이 바로 그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환곡 문인옥. 그는 탁월한 수완과 하늘도 오시할 경세적인 지모(智謀)의 소유자였다. 그의 놀라운 점은 지닌 바 탁월한 수완과 매사에 바늘끝 만큼의 빈틈도 없는 철저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더욱 놀라운 점이 있었다. 그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부터 근 이십 년에 달하는 당금에 이르기까지 천지회의 힘을 더 이상 오를 수 없을 정도로까지 극대화시켰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 이십 년 동안 다른 사람들은 할 일이 없었다. 심지어는 회주마저도 결재인이나 찍어 주고 방문객들이나 접대하는 일 정도가 고작이었다. 결국 사용하지 않는 능력은 감퇴되는 법이 아니던가? 사람들은 차츰 생각하고 고민할 일이 없게 되자 안일함에 빠져들었다. 모든 고민은 환곡 문인옥에게 맡기면 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구파일방 등 정도(正道)의 무리들은 본래 불문(佛門)이나 도가(道家)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즉, 대다수가 계략이나 모사 따위와는 아예 관계가 먼 충후한 인물들이라는 얘기였다. 물론 소수에 한하여 뛰어난 지모의 소유자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환곡이 있는 한 그들의 지모는 쓸 일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는 아무도 환곡을 능가할 인물이 없었다. 그리하여 당금에 이르러 천지회는 시대의 변화라든가 최근의 정세 등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인물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것은 실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개중에는 비정한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강호의 경험마저도 전무(全無)한 채 나태와 안일함에 빠져 있는 인물도 적지 않았다. 어쨌든 당금의 천지회는 그 대외적인 힘 만큼은 유래없이 팽배해 있었으나, 내부에는 웬만한 충격에도 흔들리고 사분오열(四分五裂)될 나태함이 차츰 그 비중을 키워가고 있었던 것이다. * * * 황혼(黃昏) 무렵이었다. 그 시각 천지회는 열흘마다 맞이하는 연례적인 행사를 맞이하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그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행렬이었다. 보라! 휘황찬란한 금갑(金甲)으로 우람한 동체를 감싼 백여 필의 말(馬) 위에는 하나같이 금의(錦衣)에 하늘과 땅(天地)의 그림을 새겨 놓은 무사(武士)들이 위풍당당하게 올라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든 붉은 수실이 달린 금창(金槍)은 아예 하늘이라도 꿰뚫어 버릴 듯한 광채를 구름처럼 피워 올리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행렬의 최선두 기사(騎士)의 손에는 한 폭의 거대한 깃발이 흩날리는데 그 폭이 족히 이 장은 넘었다. 그 깃발의 한복판에는 금빛 바탕에 청수(靑繡)로 쓰인 새 글자가 찬란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바로 천지회(天志會)라는 글자였다. 그렇다. 이 행렬은 바로 천지회주를 호위하는 행렬이었다. 실로 장엄하고도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특히 행렬의 선두에 그 모든 위용을 한몸에 지니고 순백의 설총마(雪聰馬)에 위엄스럽게 앉아 있는 청년의 기도는 대단한 것이었다. 청년은 눈부시게 화려한 금포(錦袍)를 두르고 머리에는 아홉 개의 보주(寶珠)가 박힌 영웅관(英雄冠)을 쓰고 있었다. "……!" 뚜렷한 이목구비(耳目口鼻)에 두 눈에서 쉴 새 없이 뻗어 나오는 것은 무쇠라도 녹일 듯한 신광(神光)이었다. 일견하여 청년은 매우 충후하고 강직한 인상을 느끼게 했다. 그렇다. 이 청년이 바로 마도최강(魔道最强)의 세력 마라혈교의 돌연변이이자 이 시대에 돌연대변을 일으킨 장본인 천품군자 하후강이었다. 지금 그는 당당히 천지회주의 위(位)에 오른 시대의 풍운아(風雲兒)였다. 헌데 그때였다. "……!" 막 천지회의 성문(城門)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금빛 현판에 비친 눈빛이 일순 사이(邪異)하게 번뜩이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두두두두! 아무튼 하후강을 비롯한 백여 명의 행렬은 위풍스럽게 성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 * "……." 한 쌍의 눈(眼). 한없는 이지(理智)를 함유한 아름다운 눈이 오래 전부터 천품군자 하후강의 행렬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통 신비(神秘)와 비밀로 가려진 환상 같은 눈이었다. "……." 삼층 누각(樓閣)의 창가였다. 바로 동심전(同心殿) 내에 위치한 온유소축(溫柔小築)이었다. 정갈하게 꾸며진 실내(室內)의 한쪽 창가에 놓여진 사륜거(四輪車)에 고요한 자태로 올라앉는 여인(女人)이 있었다. 가녀린 몸매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경이적인 미모를 지닌 이 여인은 아미를 살짝 찡그린 채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약간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희디 흰 살결을 두르고 있는 여인은 그래서 더 희어 보이는 백의(白衣)를 입고 있었다. 바로 옥유향(玉幽香)이었다. "……." 옥유향 앞에는 오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중년문사(中年文士)가 조용히 서 있었다. 극히 청수한 얼굴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심유(深幽)하고 유현(幽玄)한 눈빛을 지닌 중년문사였다. 그의 얇은 입술이 어딘지 모르게 뛰어난 지모(智謀)의 소유자 임을 느끼게 했다. 특히 오른 쪽 눈 아래 붉은 물감으로 찍어 놓은 듯 선명한 홍점(紅點)은 섬뜩하리만큼 강렬했다. 그 중년문사는 바로 환곡 문인옥이었다. 앞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천지회의 실질적인 수뇌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 그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옥유향과 마찬가지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순간 그의 청수한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다음 순간 그의 유현한 시선이 옥유향의 아름다운 봉목에 머물렀다. "후후! 꼭둑각시치고는 꽤 대단한 위엄이로구나. 그렇지 않느냐?" "……." 옥유향은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침목을 지키다가 마지못해 하는 어조로 붉은 입술을 열었다. "위엄이야 타고 나는 것이니까요." 그녀의 음성은 별로 힘이 없게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살짝 찌푸러진 아미 아래 드러난 추수 같은 봉목엔 희미한 우울함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문인옥의 눈살이 미미하게 찌푸러졌다. "……?" 그는 조금 기이한 눈길로 옥유향을 주시하더니 다소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유향." 옥유향은 이번에도 잠시의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했다. "네." 문인옥은 창가로 성큼 다가서며 무겁게 말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다. 아직 몇 가지 미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것들만 해결되면 이제 더 이상 문제는 없다." "……." "최초의 계획대로 무혈(無血)로써 천하를 장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서히 환상과 신비와 정(正)과 마(魔)를 휘하에 둔 천마의 위용을 드러내고…… 후후훗…… 얼마의 세월이 흐르고 난 후 천하는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어느 새 자신들의 주인이 되어 있는 천마(天魔)의 존재를 말이다." "……." 옥유향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러나 문인옥은 심유한 눈 깊숙한 곳에 한 줄기 득의의 빛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순간 하후강의 장엄한 행렬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그러나 문인옥의 음성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후강은 그 계획에 있어서 천하인의 눈길을 모을 훌륭한 우상이다. 천하인들에게 무조건적인 믿음을 줄 수 있는 단 한 명…… 하후강의 말이라면 사람들은 보리가 논에서 난다고 해도 믿는다. 그 절대적인 신뢰도에 우리가 점차 강자(强者)로서의 면모를 더 치장해 준다면……?" 문인옥의 청수한 얼굴에 문득 기소가 떠올랐다. "후후…… 그때의 천하는 이미 하후강의 것이다. 그리고 하후강은 우리의 것이고." "……." "우리는 처음부터 화천명이 아니라 하후강을 선택했어야 했다." 그때였다.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던 옥유향의 붉은 입술이 처음으로 자의에 의해서 열렸다. "그가 천벽의 후예만 아니었다면 우리의 선택은 옳았어요." 조용했으나 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옥유향은 화향(花香)이 풀풀 날릴 것 같은 입술로 옥음을 이었다. "그와 하후강, 두 사람을 모두 아는 사람들에게 한 사람을 선택하라면 사람들은 백이면 백, 화천명을 택할 거예요." "……!"


이번에는 문인옥이 침묵을 지켰다. "그는 하후강처럼 거짓말을 전혀 못하지도 않고, 그처럼 충후하지도 않으며, 또한 그처럼 강직하지도 않지만…… 그에겐 묘하게 사람을 잡아끄는 불가사의한 매력(魅力)이 있어요." 웬일인지 옥유향의 음성은 조금은 우울해 지고 있었다. "……!" 문인옥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두 눈에 기광(奇光)이 일렁였다. 옥유향의 우울해진 옥음이 다시 흘렀다. "만약 그가 천벽의 후예가 아니었고, 우리가 그를 얻을 수만 있었더라면…… 우린 그에게 천지회주의 자리를 맡기거나 강자로서의 면모를 더해 주거나 하는 따위의 일엔 신경쓸 필요도 없었을 거예요." "……!" 문인옥의 눈에 어렸던 기광이 더욱 짙어졌다. 옥유향의 수려한 봉목이 문득 창 밖으로 향했다. "그는…… 혼자만의 힘으로도 충분히 천하지주(天下至主)가 될 수 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옥유향은 조용히 눈을 내리감았다. 순간 그녀의 유난히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 그것을 놓칠 리가 없는 문인옥의 눈빛에 일순 냉랭한 한기(寒氣)가 스쳤다. "유향, 넌 아직도 그를 좋아하고 있는 것 같구나." "……." 옥유향은 눈을 감은 채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문옥인은 창 밖으로 시선을 옮기며 싸늘한 음성을 발했다. "오천뇌는 철저하다. 너의 그 마음을 알면…… 네가 아무리 필요한 존재라 해도 제거를 지시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실행할 수밖에 없다." 문옥인의 눈가에 문득 한 줄기 음영(陰影)이 떠올랐다가는 이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옥유향의 영롱한 음성이 천천히 이어졌다. "오천뇌는 이미 알고 있어요." "……!" 문인옥의 시선이 흠칫 놀라는 기색을 담고 옥유향에게 향해졌다. 옥유향은 여전히 눈을 내리 깐 채 붉은 입술을 열었다. "오천뇌와 나는 영능(靈能)이 통해 있어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쯤은 아실 텐데요?" 문인옥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그래…… 그렇지." "헌데 왜 그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있는지 묻고 싶은가요?" "흠……." 문인옥은 또한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허나 가늘게 눈을 뜨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의혹에 찬 빛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옥유향의 봉목이 비로소 떠졌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건 오천뇌가 스스로 바라던 일이기 때문이에요." "바라던 일?" 문인옥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래요. 내가 그를 좋아해서 결국 그를 도와 주게 되는 것까지를……." "말도 안 되는 소리!" 문인옥은 정말 말도 안된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옥유향의 옥안(玉顔)에 한 줄기 처연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릴까요?"


"……!" 옥유향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옥음이 흘렀다. "그것은 오천뇌의 자신감이예요. 수백 년 동안 일을 계획하여 한 번의 실패도, 착오도 없이 정확하게 실행되었다는 것…… 그것이 그들에게 무서운 자신감을 가지게 했어요." "……!" "자신감 뿐만 아니라 득의(得意)까지 말이에요." 문인옥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득의(得意)? 말도 안돼! 그런 것이 오천뇌에게 있을 턱이 없어!" "있어요." 옥유향이 매몰차게 그의 말을 끊었다. 이어 그녀는 불신(不信)에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문인옥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옥음을 이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닌가요? 비록 천마환혼대법(天魔還魂大法)으로 육신을 버린 채 심령(心靈)만으로 살아 있다고는 하나 그들 역시 인간이예요.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있는 인간이란 말이에요." "으음!" 문인옥은 문득 신음 같은 일성을 발한 후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나는…… 오천뇌에게서 감정을 본 적이 없다." "후훗!" 옥유향은 신비하게 웃었다. 웃으면서 그는 옥음을 이었다. "없겠지요. 그들은 철저하게 감정을 억제할 줄 알며, 또 위장할 줄도 아니까……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옥유향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칼로 자른 듯 더욱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형성되어 온 자신감과 득의지념(得意之念)은 이제 더이상 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아니, 그들 스스로 억제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 옥유향은 문득 조소하는 듯한 눈길로 문인옥을 응시했다. "게다가 근자에는 자신들의 그 놀라운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까지 생겼지요. 그 무수한 일들을 이루어 내며 성취감의 매력도 알았고……." "으음!" "또 하나, 그들은 천마지혈(天魔之血)을 지닌 우리의 숙명인 피를 즐기는 습성까지 다시 되찾았어요. 그들 스스로 우리에게 내린 최초의 경고가 피를 즐기는 자는 결국 실패한다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그럼……?" 문인옥은 침중하게 굳어진 안색으로 부지중에 중얼거렸다. "그래요. 그들은 최후의 계획을 실행하고 싶은 거예요. 천마 최후의 계획을……." "……!" 문인옥의 안색이 무섭게 경직되었다. "그건…… 다른 계획이 모두 실패했을 때 최후의……." 문인옥의 말이 끊겼다. 옥유향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었다. "후후…… 오천뇌는 실패를 만들어 낼 거예요." "실패를 만들어……?" 문인옥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반문했다. 옥유향은 신비한 미소를 피어 올리며 여전히 비웃듯이 옥음을 뱉았다. "물론 극히 자연스럽게 말이에요."


"자연스럽게……?" 문인옥은 그녀의 말의 의미를 잘 알아들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옥유향의 아름다운 얼굴이 가볍게 굳어졌다. "그래요.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들려 주면서……." "……?" "그들이 가장 자신하고 자랑스러워 하는 계획…… 피를 즐길 수 있는 계획…… 이른 바 몰살(沒殺)이죠." "그건……." 문인옥의 어깨가 가늘게 경련했다. 이어 그 청수한 얼굴에 떠오른 것은 극도의 공포지색이었다. 그러길 얼마만이었을까? 문인옥은 돌연 납덩이처럼 안색을 굳히며 신음처럼 한 마디를 내뱉았다. "안돼!" 그러나 옥유향은 그지없이 가라앉은 차분한 표정이었다. 얼마나 고요한지 그녀의 그런 표정은 오히려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음성 또한 심장이 멎을 정도로 냉랭했다. "오천뇌가 하고자 하는 일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어요." "……!" 그것이 대화의 마지막이었다. 뒤이어 질식할 듯한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잔인하게 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침묵은 계속되고 있었다. 헌데, 그 침묵 속에서 옥유향은 문득 의미모를 광채를 고요한 봉목에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도 기회…… 그가 만분의 일이라도 승산을 가질 수 있는 싸움은…… 오히려 그 최후의 계획에 있다.' 정녕 이해못할 말이었다. 어쨌거나 그녀의 마음 속 독백은 계속되었다. '단…… 그에게도 기회를 줄 거야. 그것은 그를 한때나마 사랑했던 내 마음에 대한 의무야!' 그러다 문득 옥유향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환상처럼 흩날리는 삼단 같은 머릿결에선 뇌쇄적인 장향(藏香)이 흩어졌다. 이 순간 그녀는 어떤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의해 내심 절규하고 있었다. '아아! 아니야! 그것은 내 마음에 대한 의무가 결코 아니야! 그래…… 난 그를 사랑하니까…… 이건 그의 사랑에 대한 의무야!' * * * 금릉(金陵). 강남의 수도(首都)라 할 수 있는 이곳. 지난 날 천화대번(天華大藩)의 터전을 일으킴과 동시에 무수한 인연(因緣)의 얽힘이 시작되었던 이곳 금릉은 화천명에게 있어서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런 금릉에 화천명이 마침내 돌아온 것이었다. "다시 한 번 천화대번의 기적을 일으켜 보고자 여러분들을 다시 청했소이다." 화천명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 거대한 대실(大室)이었다. 화천명을 중심으로 둥그런 원탁(圓卓)에 몇 사람이 둘러앉아 있었다. 모두 칠 인(七人)이었다. 두 명의 노인과 네 명의 중년인, 그리고 중년미부(中年美婦) 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바로 지난 날 화천명의 휘하에서 천화대번을 이끌어 가던 수뇌진(首腦陣)들이었다. -금육대인(金育大人) 황자방(黃子房). 이 노인은 천화대번의 모든 전장(銓莊) 등 대금업(貸金業)을 관리했던 계리(計理)의 귀재(鬼才)였다.


-고룡노인(古龍老人). 그는 모든 고서화(古書畵)와 골동품(骨董品)을 관리했던 고품(古品)의 신안(神眼)이었다. -운농자(雲農子) 추견산(秋堅山). 추견산은 농수산물로 대표되는 천하의 식품업(食品業)을 관리했던 천부적인 재질을 지닌 상인(商人)이었다. -풍택자(風宅子) 남가명(南哥明). 바로 토목건축업을 관리했던 토목건축(土木建築)의 달인(達人)이었다. -금룡자(錦龍子) 선공인(宣公仁). 의류업(衣類業)을 관장했던 상술(商術)의 묘책(妙策). -귀호자(貴虎子) 막종(莫種). 이들 네 중년인은 이른 바 의(衣), 식(食), 주(住)의 모든 상권을 주름잡았던 대상(大商)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중년미부인인 화훼부인(花卉婦人). 그녀는 기루(妓樓), 주루(酒樓), 객점, 도박장들이 모든 숙식업과 접대업을 관리했던 상계의 여걸이었다. 화천명의 연락을 받은 그들은 그야말로 반가움에 겨워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왔다. 그 뿐인가? 총수(總帥)께서 언제든 돌아오실 줄 알았다며 모두 커다란 자루 하나씩을 메고 왔다. 그것은 바로 지난 날 빙천사후가 천화대번의 복구비용으로 그들에게 내주었던 황금 오백만 냥이었다. 그것을 다시 화천명에게 돌려 주며 화훼부인이 입을 열었다. "총수가 돌아오시지 않는 한 천화대번은 일으켜질 의욕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화대번의 옛 식구들에게 모두 분배해 주었는데…… 그들은 한 푼도 쓰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만 있었다는 겁니다." "……!" 화천명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말 않고 그것을 천화대번의 복구자금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본래의 계획은 북해 빙녀궁의 막대한 황금을 이용할 생각이었으나 그 생각을 바꾸고 말았다. 그때였다. 문득 칠 인을 대표하여 금육대인 황자방이 화천명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전처럼 그 정도 규모에 만족하실 것이라면 저희는 시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를 화천명이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지난 번의 규모와는 다르게 구상하고 있소. 또한 이번에는 꺾어야 할 상대가 있는…… 말하자면 천하의 상계(商界)를 놓고 벌이는 치열한 상전(商戰)이 될 것이오." "……?" 그 말에 칠 인의 눈빛이 긴장의 빛을 떠올렸다. "상대라 하시면……?" "중원상계의 막후를 조종하는 대부(代父)라면 알겠소?" 순간 그들의 안색은 더할 나위없이 경직되었다. "아니, 대인!" "그렇소. 다른 말로는 황금비원이라고도 하오." -황금비원(黃金秘苑)! 이는 황금빛 성좌로 상징되는 신비구천 가운데 황금의 하늘을 기리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 그것이 바로 옥대인이 장악하고 있는 전중원의 상계(商界)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허나 이들 칠 인은 황금비원이라는 말은 알고 있지 못했다. 단지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중원상계의 대부라고 일컬어지는 옥대인(玉大人)이라는 이름 뿐이었다.


그러나 옥대인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그들 모두를 무서운 침묵에 잠기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 이름의 의미는 그들에게 있어 거대한 하늘(天)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상인(商人)된 자로서 천하에 누가 감히 옥대인이라는 존재에 도전하겠다는 망상을 품을 것인가? "……!" 무서운 침묵이 온 실내를 짓눌러 들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칠 인은 이 순간 공감(共感)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서서히, 그러나 뜨겁게 솟구쳐 오르는 투쟁(鬪爭)의 본능과 욕망을. 그것은 화천명이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감정들은 화천명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信賴)의 감정과 가슴 속에서 한데 겹쳐져 투지(鬪志)로 승화되고 있었다. "좋습니다. 상대가 옥대인이라면…… 그리고 총수와 함께라면 싸우다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화천명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승부를 결정짓는 기간은…… 삼개월(三個月)로 잡았소." "삼 개월!" 칠 인은 그 기간의 급박함에 다시 한 번 긴장했다. 정말이지 삼 개월에 천하의 상권(商權)의 향방을 결정하겠다는 것은 광언(狂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광언으로 듣는 사람은 칠 인 가운데 한 명도 없었다. 그것은 바로 화천명의 말이기 때문이었다. 제 32 장 감도는 전운(戰雲) * * * 마령천존(魔靈天尊) 하후승(夏候昇). 그는 폭군적인 기질을 지닌 인물이었다. 난폭하고 불덩이처럼 급한 성격을 지닌 그는 구곡대제와는 정 반대로 수하들의 구타(毆打)를 취미로 삼고 있는 사람이었다. 허나 수하들은 끔직히 그를 존경해 마지 않았다. 천부적으로 지존(至尊)의 기질을 타고 났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난폭한 성격의 일면에는 호쾌한 무인(武人)의 기질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한 마디로 그는 거침없고 직선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뭐라고?" 마령천존은 벌떡 일어섰다. 시커먼 눈썹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이 자식들이……?" 우지직! 탁자 모서리가 움켜쥔 손아귀에서 종잇장처럼 뜯겨지며 가루가 되어 버렸다. 그는 불덩이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며 내뱉았다. "천마(天魔)만 마(魔)냐?" 그렇다. 그가 이끄는 마라혈교 또한 엄연한 마도(魔道)의 세력이 아닌가 말이다. 마령천존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싶었다. "빌어먹을! 좋다. 보여 준다. 천마 외에도 마도에 인물이 있다는 걸 말이다!" 씹어내듯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탁자 맞은편으로 눈길을 돌렸다.


탁자의 맞은편. 그곳에는 기품과, 수려함과, 위엄과 기백을 한눈에 보여 주는 듯한 한 명 백의청년(白衣靑年)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바로 화천명이었다. "……." 화천명은 시종 담담한 표정으로 마령천존의 태도를 지켜보고 있었다. 일순 마령천존은 화천명을 향해 부르짖듯이 말했다. "구해만 주시오! 내 그놈을 화공자의 힘이 되게 만들어 주겠소!" "……." 화천명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령천존 역시 한 차례 고개를 마주 끄덕인 뒤 갑자기 문 밖을 향해 폭갈을 질렀다. "마라십팔존(魔羅十八尊)! 거기 있느냐?" "예" 문 밖에서 합성(合聲)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 순간 마령천존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들! 예가 뭐냐, 예가!" "예……?" "계속 거기 있기만 할 거냐?" "그럼 어찌 해야 하온지……?" 마령천존이 화천명을 돌아보며 천근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니미럴! 화공자, 보다시피 이렇소. 내가 저런 놈들을 심복이라고 데리고 있으니…… 복장이 터져서 내 명에 못 살 거요!" 마령천존은 그러다가 다시 문 밖을 향해 냅다 폭갈을 질렀다. "아직 안 들어왔냐?" "들어 왔습니다!" 스스슷! 다급한 대답과 함께 방 안에는 어느 새 십팔인(十八人)의 인물이 나타나 있었다. 하나같이 전신에서 터질 듯 뿜어나는 놀라운 기도(氣度) 역시 마두들 다웠다. "흠…… 그래!" 마령천존은 끄덕였다. "거기다 머리만 잘 돌아가면 좀 좋겠느냐? 쯧쯧!" 마령천존은 혀를 끌끌 차고 나서 말을 이었다. "너희들에게 묻겠다. 내 아들이 누구냐?" 십 팔 인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마라혈교의 위대한 미래를 개척하실 소교주이십니다!" "흠…… 그런 내 아들에게 녀희들은 이제까지 무엇을 해 주었느냐?" "없다고 생각됩니다!" 마령천존의 눈살이 깊숙이 찌푸러졌다. "그래 가지고도 너희들이 본좌의 총애를 받는 심복이냐?" "죄송합니다!" "앞으로도 뭔가를 해 줄 생각이 없느냐?" "있습니다!" 기회라 싶었던지 마라십팔존의 음성이 커졌다. "무엇이든 말이냐?" "예."


"흠…… 그럼 너희들 공력을 그놈에게 빌려 줘라." "알겠습니다!" "혹시 돌려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괜찮습니다!" 도대체 일사천리(一瀉千里)도 이런 일사천리가 없었다. "……!" 그 진행되는 경과를 보고 있던 화천명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고, 상대해야 될 상대가 상대인만큼 그냥 참기로 했다. 게다가 저토록 기쁜 마음으로 바치겠다는 데야 자신이 나서 왈가왈부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뿐만 아니라, 타문(他門)의 일에 간섭하는 것은 무림의 금기(禁忌)이기도 했던 것이다. * * * 만사혈황(萬事血皇) 독고천(獨孤天). 이름만 거창할 뿐, 그는 소심하고 그릇이 작은 인물이었다.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말한다면 지나칠 정도의 세심함과 조심스러움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 소심한 성격으로 어떻게 천하사도(天下邪道)의 하늘인 천사련(天邪聯)을 이끌고 있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그런 조심스러움으로 어떻게 그토록 가공할 일신무공을 익혔는가 하는 것 또한 현 사도무림 최대의 이대불가사의(二大不可思議) 가운데 하나였다. 어쨌거나 그는 엄연한 사도의 대종주(大宗主)였다. 어쩌면 그 치밀함과 빈틈없는 완벽주의가 그의 오늘이 있게한 비장(秘藏)의 무기였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으음!" 지금 이 순간 만사혈황은 천품군자 하후강으로 인해 정마대동맹(正魔大同盟)이 이루어졌다는 소문을 듣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니 천사련은 완전히 고립된 느낌이었다. 불안하고 외로와 못 살 것 같던 그는 사흘 전 한 사람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방문객은 그에게 이런 내용의 명첩을 내밀었다. <천벽제왕부 제 사십팔대 가주 화천명(天壁帝王府 第 四十八代 家主 華天明).> "……!" 그 진부(眞否)를 가리기 전에 천벽제왕부의 사십팔대 가주라는 그 명첩(名帖)만으로도 만사혈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어 화천명과 만사혈황의 회담(會談)은 한없이 계속되었다. 화천명이 무슨 제의를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만사혈황은 이리 재보고 저리 재보고 그 성격이자 장기인 온갖 세밀함과, 조심스러움과, 치밀함과 완벽주의를 모조리 동원하여 시간을 끌고 끌었다. 훗날 화천명이 이 회담을 일컬어 이렇게 회고했을 정도였다. -그것은 역사상 가장 지루하고, 하마터면 포기해 버릴 뻔한 회담이었다. 결국 포기 일보직전에 대답이 있어 회담은 가까스로 성사되었다. * * * 대전(大殿), 웅장하면서도 엄숙함이 감돌고 있는 석조대전(石造大殿)이었다. 때문인지 내부는 상당히 어두운 편이었다. 그 대전의 전면에는 천정에서부터 바닥까지 붉은 휘장(揮帳)이 드리워져 있었다. 따라서 대전의 엄숙한


분위기는 바로 이러한 요소들의 배합으로 이루어진 듯했다. 그래서였을까? 대전은 엄숙함과 함께 어떤 무령(巫靈)적인 분위기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이곳은 바로 천축 천밀마교(天密魔敎)의 총단 내에 있는 종사전(宗師殿)이었다. "……." 대전 중앙에 놓인 황금빛 태사의에 한 노인(老人)이 몸을 묻고 있었다. 장대한 체구에 온몸에 휘감듯 걸친 황금빛 장포(長袍)가 노인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극도의 위엄으로 감싸고 있었다. 머리는 금발(金髮)이었다. 뿐만 아니라, 눈썹과 수염까지도 금빛을 띠고 있었다. 두 눈에서 뻗어나는 안광(眼光)은 일견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웬만한 사람은 그 앞에 자세를 바로 하지 못할만한 놀라운 위압감이 서러 있었다. -천밀대종사(天密大宗師) 살리천(薩利天). 그렇다. 그는 바로 천밀마교의 지존(至尊)이며, 천축무림의 하늘(天)로 불리우는 천밀대종사 살리천이었다. 정말이지 천축 오만 리 대지 위에 이보다 더 위대한 이름은 없었다. "……!" 지금 살리천 앞에는 한 흑의소녀(黑衣少女)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다. 흑의소녀는 뜻밖에도 요화(夭花)가 아닌가? "……." 정적과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대전의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래서…… 너는 그에게 도움을 주고 싶단 말이냐?" 살리천의 입술이 나직하게 떼어졌다. 음성 또한 감히 범접키 어려운 위엄을 싣고 있었다. 요화는 고개를 숙인 채, 그러나 또렷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예." 살리천의 눈빛이 허공으로 던져졌다. "허어! 이건 적(敵)을 알아오라 보내놨더니 적에게 반해서 왔구나!" 개탄하듯 중얼거리는 그의 말 속엔 웬지 모를 정(情)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그렇다. 천축 오만 리를 눈빛 하나로 떨게 할 수 있는 천밀대종사 살리천이 유일하게 혈육(血肉)이상의 정을 느끼는 존재가 바로 요화였다. 요화는 엎드린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 "적에게 반하진 않았습니다. 아직은 적도 아니고 우리 편도 아닌 그에게 반……." 끝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살리천의 호통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이것아! 천벽의 후예가 왜 우리 적이 아니냐? 삼백 년 전 바로 그들에게 우리가 비참한 패배를 맛보았다." 이에 대한 요화의 대답은 기어 들어가는 음성이 아니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 아니옵니까? 지금은 우리가 그와 손을 잡아야 할 때라고 사료되옵니다, 천마가 만약 이대로 중원을 장악하면 다음 차례는 거의 틀림없이 우리가 될 것인즉……." "알았다!" "……!" 살리천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요화는 찔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살리천은 한참 동안 그녀를 주시하더니 나직한 기성을 흘려냈다. "흐음…… 그가 그렇게 좋으냐?"


요화는 간단히 대답했다. "여인의 환심을 사는 법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런 놈일 수록 가짜가 많은 법이야." "그는 스스로 환심을 사겠다고 말했으니 아닐 겁니다." 이들의 대화는 이 시점에 이르자 흡사 부녀지간(父女之間)의 그것처럼 이끌어져 가고 있었다. "그의 부인이 될 자신은 있느냐?" "최소한 다섯 번째 부인 정도는 자신이 있사옵니다." 대답이 걸작이었다. "……!" 머리가 갑자기 아파왔던 것일까? 살리천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허탈하게 배뱉았다. "기껏 공들여 키워놨더니 뭐? 다섯째 부인 정도라고……?" 살리천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며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참으로 대단한 자신이다." 그러더니 지극히 짜증스럽다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거 혹시 다섯째 부인 정도도 피눈물 나는 노력을 경주해야 되는 것 아니냐?" "그런 예감이 드옵니다." "내가 제자 하난 잘 키워놨다. 가히 겸손의 극치로다!" 요화는 고개를 들 뻔했다. '겸손이 아닌데…….' 허나 그 말만은 속으로 중얼거려야 했다. 그 말까지 했다가는 무슨 치도곤을 당해야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살리천은 반개(半開)한 눈으로 요화를 또 한참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그를 도와 주고 싶으냐?" 요화는 즉시 대답했다. "약속을 해 버렸습니다." 살리천의 입가에 기묘한 웃음기가 묻어났다. "잘 했다. 여장부의 일언(一言)은 중천금에서 한 푼을 더한다지?" "……!" "소뢰음사(小雷音寺)로 가라." "예?" "천밀백팔중보(天密百八重寶)가 거기에 있다. 너 다 가져라." "……!" "그것이 너를 역사 이래 최강의 여류고수(女流高手)로 만들어 줄 것이다, 일백 팔 가지의 무거운(重) 힘은 최소한 신비구천 중 자토혈궁(紫土血宮) 하나는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 "그것으로 피눈물나는 노력을 경주해서 그의 다섯째 부인이 되어 봐라." "……!" 요화의 전신이 일순 거센 진동을 만난 듯 부르르 떨었다. -천밀백팔중보(天密百八重寶)! 이는 천밀마교의 지보(至寶)가 아닌가? 헌데 살리천은 그것을 물려 주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부님!' 허나 이때였다.


친밀대종사 살리천의 입에서 요화조차도 알아 들을 수 없을 만큼 낮고 희미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사실…… 본좌도 천벽제왕과는 다시 싸우고 싶지 않다. 천마와 싸울지언정……." * * * 밤(夜)이었다. 칠흑 같은 암흑(暗黑) 속에 그보다 더 짙은 검은 깃발이 하나 펄럭이고 있었다. 여기는 운중산(雲中山)의 심처였다. 그리고 깃발은 그 심처의 한 절봉(絶奉)에 꽂혀져 있었다. 그때였다. 구름에 가렸던 반월(半月)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자 깃발 아래의 광경이 창백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절봉 아래 위치한 구중계곡(九重溪谷)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계곡의 분지 위에 원형을 이루며 도열해 있는 약 백여 명 가량의 인물들이 차츰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月光)을 받아서였을까? 하나같이 파리한 안색에 그들의 전신에선 흡사 안개처럼 스물거리며 비정한 사기(死氣)가 스며져 나오고 있었다. 헌데, 그 비정함을 모두 합한 것 만큼이나 무서운 극단(極端)의 사기(死氣)를 뭉클뭉클 뿜어내는 노인(老人)이 있었다. 장대한 체구의 노인은 원형으로 도열한 백여 명의 인영들 한복판에 우뚝 서 있었다. 그런 노인의 얼굴에는 뜻밖에도 온통 흉측스런 검흔자상(劍痕刺傷)으로 뒤덮여 있지 않은가?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 흉터는 전혀 참혹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노인의 극히 강인(强靭)한 일면을 보여 주는 듯했다. "……." 노인의 앞에는 한 청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완전한 알몸으로 말이다. 청년의 얼굴은 실로 수려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것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무서운 탄력과 강인성이었다. 이렇듯 수려한 외모에 저토록 강인한 기질을 겸비한 청년은 바로 무영비도(無影秘刀) 백천(白天)이었다. 그렇다. 그의 정면에 서 있는 흑포노인(黑袍老人)은 바로 흑번(黑幡)의 주인인 흑번지주(黑幡之主)였다. 헌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이 순간 흑포노인의 형체도 없는 입술을 비집고 나직이 흘러나오고 있는 말은 너무나도 뜻밖이었다. "이제 노노(老奴)가 소주(小主)에게 베풀어 드릴 힘은 마지막 한 가지 남았습니다." "……." "선군(先君)께서 돌아가신 지 어언 십오년(十五年)…… 선군의 복수를 소주께 맡기기 위해 노노는 세상의 모든 방문좌학(傍門佐學)을 다 찾았고, 세상의 어떤 편격이학(偏格異學)도 모두 끌어 모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악마(惡魔)…… 따라서 일반의 정공(正功)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음성은 한없이 고요했으며 무심(無心)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원수를 향한 무서운 살의(殺意)가 활화산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 무영비도 백천은 시종일관 묵묵부답이었다. 정말이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냉막무심, 그 자체를 보여 주고 있었다. 흑번지주의 나직한 음성이 이어졌다.


"노노가 찾은 것은 물론 무공 따위가 아닙니다. 사악(邪惡)은 사악(邪惡)으로 상대하는 극단의 사법(邪法)…… 소주의 몸을 사악(邪惡)의 덩어리로 만드는 씻지 못할 죄(罪)를 범하는 것입니다." "……." "만악사령지체(萬惡邪靈之體)…… 그것은 분명히 천마를 능가하는 힘입니다." "……." * * *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히 밝혀두고 넘어가야 될 일이 있다. 흑번(黑幡), 그것은 본래 천운선생 백무번이 천지회의 결성 당시 비밀리에 구성해 두었던 살수조직(殺手組織)이었다. 원래 정파(正派)의 온건함은 때로는 실로 큰 힘이 되기도 하나 급변하는 난세 속에서는 항상 피동적이 될 수밖에 없는 취약점이 있었다. 천운선생은 그 보완의 해결책으로 극비(極秘)의 살수조직을 생각한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흑번이었다. 정도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천지회의 회주인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실로 과감하고 무서운 결단이었다. 그러나 천운선생은 끝내 놀라운 지모와 치밀함으로 천하의 그 누구도 모르는 가운데 오직 자신 혼자만이 아는 비밀로 흑번을 유지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무영비도 백천. 그는 바로 천운선생 백무번의 친손자였다. 다시 말해 백천은 백선아의 쌍둥이 오빠 중 하나였던 것이다. 제 33 장 또 다른 전설의 시작 * * * 상계(商界)의 불꽃 튀는 격전과 무림의 숨죽인 움직임 속에도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갔다. 그리고 서서히 감도는 무서운 전운(戰雲)과 함께 무림에선 입에서 입으로 천마(天魔)의 부활이 알려져 갔다. 전율의 아홉 개 신비(神秘)와 공포(恐怖)의 의미로 존재하던 열 개 환상(幻想)이 바로 천마의 부활이라는 것도 알려져 갔다. 그러나 천마의 진정한 신비와 환상의 힘을 몸소 체득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충격을 느끼기는 했으나 한없이 몸을 떨 정도로 실감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차라리 다행한 일이었다. 만일 온 천하가 내일 당장 죽음의 종말(終末)이라도 닥칠 것 같은 공포에 휩쓸린다면 더욱 무서운 결과가 발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공포는 정신의 파란을 일으키고 정신의 파란은 추스릴 수 없는 공포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른 바 대공황(大恐荒)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집단적인 공포상태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사태가 일어나게 된다면 천하는 천마를 상대하기에 앞서 그 수습에 먼저 나서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어쨌든 대공황(大恐荒)은 천하의 종말을 불러 일으키는 최초의 단계라고도 할 수 있었다. * * * 깊고 짙은 어둠 속이었다. 신비한 영능(靈能)이 유계(幽界)의 심장부처럼 한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환상의 동음(同音)이 메아리를 만들며 울려퍼지고 있었다. "상계(商界)에는 무력(武力)이 개입할 수 없습니다. 무력의 개입 자체가 상권(商權)을 포기한다는 의미(意味)이기 때문입니다. 방법은 오직 하나…… 상술로 격돌해야 합니다. 힘은 분명히 우리가


우위에 있습니다. 옥대인은 황금지성(黃金之性)을 타고 난 사람…… 충분히 이길 수 있으리라 봅니다. 또 옥대인에게 일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 "왜 결국 그들을 제거하지 못했습니까? 끝내…… 한 명도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화천명…… 그 자는 이미 극단에 올라 오직 천류혼만이 상대할 수 있다 해도…… 다른 자들은 충분히 제거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미 늦은 감이 있습니다." "……." "최초의 계획은 이미 파탄이 일어났습니다. 모두가 우리의 실체를 안 그들의 제거에 실패한 데 원인이 있습니다." "……." "끝내 이런 식이라면 우리는 단안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사태가 악화되어…… 더욱 큰 그들의 힘의 결집이 이루어지기 전에 말입니다. 아셨습니까? 최후의 계획을 생각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 * * * 그럴 즈음이었다. 천지회의 수뇌부 십인(十人), 다시 말해 구파일방(九派一幇)의 당대 장문지존(掌門至尊)들은 누군가에게 호된 호통을 당하고 있었다. 당금 천하에서 그들에게 호통을 칠 수 있는 사람은 단 두 명 뿐이었다. 바로 광승 천곡과 천도 마선이었다. 그렇다. 지금 구파일방의 장문지존들에게 호통을 치는 것은 천곡과 마선이었다. 그들의 호통 중에 이 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부끄러워서 머리를 들고 하늘을 볼 수가 없다! 너희 같은 어리석고 우둔한 후손을 둔 죄로 우리는 내일 당장 죽어 버릴 것이다." "……!" "말년에 너희들 보다는 수천 배 똑똑한 여제자(女弟子)를 하나씩 두었으니…… 그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다 물려 주고 죽어 버릴 것이다. 만약 외인(外人)에게 물려 주었다 해서 불만이라도 품는 놈이 있다면 저승에서라도 당장 쫓아내려 올 것이니 그리 알아라!" * * * 야음(夜陰)에 덮인 천지회는 거의 텅 비다시피한 썰렁함만이 감돌고 있었다. 얼마 전 구파일방을 비롯한 정도명문(正道名門) 출신들로 구성된 십일부(十一府)의 인물들 전원이 한꺼번에 자파로 철수해 버린 때문이었다. 당대 천지회주인 천품군자 하후강은 뻔히 그 광경을 목격하면서도 막지 못했다. 이유는 그에 대한 아무런 지시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헌데 무엇을 어찌해야 될지 몰라 혼란스럽게 서 있는 그의 주위로 이 순간 수십 명의 인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 선두는 바로 출전대협 탁몽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인물들은 출전대협 탁몽을 우상처럼 존경하고 따르는 백야부(白野府)의 고수들이었다. 백야부(白野府). 그들은 천지회의 십이부(十二府)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지막 일부(一府)였다. * * *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연속되는 충격에 진동하던 당대천하에 또 한 가지 엄청난 충격이 작렬했다.


충격을 던진 소문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천지회(天志會)의 해산(解散)! 이유는 몰랐다. 아니,천지회를 해산하자고 누가 먼저 주장했는지조차 몰랐다. 그저 해산되었을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소문에 의하면 당금의 천지회주 천품군자 하후강은 해���이 결정되기 이전부터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천지회의 해산 이후 문상 환곡 문인옥과 문후 옥유향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어쨌거나 그것은 세상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버린 참으로 돌연한 해산이었다. 헌데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세인들은 진짜 경악에 경악을 거듭하지 못할 믿기지 않는 사실을 목격하게 되었다. 천지회의 현판이 바뀌어 걸려졌던 것이다. <중원대동맹(中原大同盟).> 그렇다. 천지회라는 현판이 사라지고 느닷없이 중원대동맹이라는 현판이 다시 내걸린 것이었다. 그리고 텅 비어 있던 그곳으로 하나 둘 입성(入城)하기 시작하는 당대의 거물(巨物)들의 확인하는 순간, 세인들은 경악이 지나쳐 아예 넋을 일어 버렸다. 그 거물들을 하나하나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마령천존 하후승, 구곡대제 운천궁, 만사혈황 독고천, 출천대협 탁몽, 독행칠대고수. 거기에 천지회를 해산시키고 떠났던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뒤이어 도착했다. 뿐만 아니라, 이름모를 한 자애로운 기품의 노니가 또 뒤를 잇더니, 이미 십 오 년 전에 죽은 알려졌던 천수나타 당한천의 모습까지 보이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이 시대 최고의 살수(殺手)라 불리우는 무영비도 백천의 살벌한 모습도 있었다. 뿐인가? 진짜 무서운 고수들이 되어 있는 석무혼, 묘연아, 백선아, 그리고 빙하지존 임설군과 도옥진, 기형(奇形)의 철갑(鐵甲) 가마를 타고 온 사운악과 천축에서 다시 온 요화(夭花)도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중원대동맹이었다. "……?" 세인들은 충격에서 조금씩 벗어나면서 짙은 의혹에 잠기기 시작했다. 의문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누구인가? -이 불가사의한 동맹을 느닷없이 이루어낸 인물은? -다시 말해 그 맹주(盟主)는 누구인가?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곧이어 밝혀졌던 것이다. -화천명! -오오! 천벽제왕부의 제사십팔대 가주라는구려! 그렇다. 드디어 힘의 결집은 이루어졌다. 천마로서는 마침내 결단을 내려야 될 때가 온 것이었다.

모습이

얼굴을

것으로

그리고


* * * 밀실(密室). 사방이 온통 만년묵오강(萬年墨烏剛)으로 밀폐되어 있는 밀실이었다.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장엄하고 강렬한 초능(超能)의 기운이었다. 그것은 한 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화천명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 그의 전면에는 마주 보는 자세로 천품군자 하후강이 앉아 있었다. 지금 하후강은 무엇엔가 강한 힘에 억눌려 눈을 부릅뜨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눈 속에 어려 있는 것은 무서운 갈등과 고통의 회오리였다. "……!" 화천명의 양장(兩掌)은 그의 관자놀이에 완전히 밀착되어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그다지 힘이 들어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실 그것은 무서운 힘으로 하후강의 뇌리를 압박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화천명의 두 눈은 또 다른 성질의 힘을 강렬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신(精神)의 힘이었다. 이른 바 천벽지혼을 상징하는 기백과 미증유의 초능을 발휘하는 그의 육체가 극사극마(極邪極魔)의 힘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화천명은 지금 하후강의 뇌리를 침범한 마기(魔氣)를 몰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양 손과 두 눈에서 쏟아지는 양대지기(兩大之氣)는 하후강의 동공을 통해 해일처럼 뇌리로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 강도가 더해감에 따라 하후강의 두 눈에서 회오리치는 갈등과 고통도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아아아아악!' 소리없는 그 처절한 비명 속에서 시간은 한없이 흘러갔다. 헌데 어느 순간일까? 마치 뇌전(雷電)에 격중된 사람처럼 하후강의 전신이 후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번쩍…… 파파팟! 그와 함께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 하후강의 두 눈에서 고통과 갈등으로 범벅이 된 사악(邪惡)한 광채가 줄기줄기 뻗어나왔다. 동시에 화천명의 두 눈에서도 태양(太陽)과도 같은 정광(精光)이 하후강의 동공을 파열시킬 듯 폭사되었다. 번쩍! 그것으로 끝이었다. 쿵! 하후강의 몸은 거대한 충격으로 인해 서서히 뒤로 넘어졌다. 그대로 혼절하고 만 것이었다. "휴우!" 그제야 화천명은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상당히 탈진한 기색이었다. 그로서는 정말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허나 이 순간 화천명의 탄식 너머에는 어떤 성취감이 담담히 감돌고 있었다. 그렇다. 천마의 하수인으로 세뇌되었던 하후강을 화천명은 드디어 본래의 면목으로 되돌려 놓았던 것이다. "……!" 화천명은 한 차례 호흡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그는 밖을 향해 담담히 입을


열었다. "됐소. 교주(敎主)는 아들을 찾았소이다." 순간이었다. 화천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철로 이루어진 문(門)이 박살날 듯 열리며 마령천존 하후승이 무서운 기세로 뛰어 들어왔다. "고, 고맙소이다, 맹주(盟主)!" 그런 마령천존의 뒤에는 하후강에게 공력(功力)을 빌려 주고 다시는 회수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마라십팔존(魔羅十八尊)이 유령처럼 따르고 있었다. * * * 상계(商界)의 승부를 결정짓는 삼 개월. 내일이 그 마지막 날이었다. 허나 내일의 결과는 이미 오늘 드러나 있었다. "끝났다!" 옥대인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늑한 정실(靜室)이었다. 옥유향은 사륜거에 섬약한 몸을 묻은 채 냉정(冷情)한 눈길로 허공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었다. 흘러 나오는 음성 또한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어조였다. "당연한 결과예요." 옥대인은 눈을 감은 채로 메마른 웃음을 흘려냈다. "당연하진 않았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던 건 그 쪽이었다. 단지 내게는 사람이 따르지 않았을 뿐……." 저미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옥대인은 독백하듯 말을 이었다. "녀석은 정말 두려울 정도로 기이한 힘을 가지고 있다. 접하는 사람 사람마다 모두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기이한 힘을…… 그것이 의도적이라면 하등 두려울 게 없으나……." 옥유향은 여전히 냉정한 음성으로 그의 말허리를 끊었다. "그건 이미 천하인들이 다 아는 얘기예요. 그는 벌써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구요." 옥유향은 이어 냉정하던 시선 깊은 곳에 한 무리 희미한 불꽃을 스쳐 보내며 말했다. "천벽제왕부의 재건이 시작되었어요." "……!" 순간 옥대인의 감겼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심유한 눈 깊숙한 곳에는 숨길 수 없는 전율이 스쳐가고 있었다. "흐음!" 이어 그는 부지불식간에 깊은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옥유향의 무섭게 가라앉은 옥음이 어떤 파탄의 예시를 안고 실내의 전율 어린 정적 속으로 스며들었다. "오천뇌가 바라던 때가 온 거예요. 최후의 계획인지…… 피(血)의 광란제(狂亂祭)인지는 모르지만요." * * * 그렇다. 패허로 화해 있던 천벽제왕부의 재건이 시작되고 있었다. 황금비원(黃金秘苑)으로 상징되는 옥대인의 천하대상(天下大商)과의 상전(商戰)을 파죽지세로 밀고 나가 거의 승리가 결정지어질 무렵 화천명은 드디어 가문(家門)의 재건을 시작했던 것이다. 여러분은 기억하는가?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을. -최후의 일전(一戰)을 남겨두고 분가의 새로운 영광을 천하에 알릴 것이다!


그렇다. 그는 이제 남은 것은 최후의 일전 뿐이라고 단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천마 최후의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 또한 그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운악에게서 천마 최후의 계획을 듣고 난 화천명은 또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좋아. 통쾌하게 끝낼 수 있겠군. 그러나 진짜 무서운 이야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 * * -제왕천벽(帝王天壁). 천벽의 장엄함과 제왕의 위풍을 보여 주며 땅 끝을 막아선 대벽(大壁)의 위용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대중원의 혼(魂)이자, 영원한 무림의 성역(聖域)으로 숭앙되리라던 천벽제왕부의 천년 잔영(殘影)만이 폐허로 남아 대벽을 휘감고 지나는 바람소리만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석양(夕陽)의 붉은 노을이 제왕천벽의 웅자를 물들이는 시각이었다. 중앙대전(中央大殿)을 세우기 위한 기초공사가 거의 마무리지어지고 있었다. 기초공사는 우선 터전을 닦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중앙대전이 세워질 십 장(丈) 방원의 땅을 삼 장(丈) 정도의 깊이로 넓고 깊게 파는 작업이었다. 쿵…… 쿵……! 땅을 쉴 새 없이 파내려 가고, 파내어진 흙은 가마니에 담아 밧줄로 끌어 올려졌다. "열심히들 하라구!" 밧줄을 잡아 당기며 인부 하나가 땅 속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끝나면 술항아리라도 통째로 안겨 줄 건가? "암! 술항아리 뿐인가? 아예 술독에 빠져죽게 해 줄 테니까. 하하하!" "하하하하!" 헌데 인부들의 웃음소리가 터뜨려지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르르르릉! 갑자기 지면 전체가 지진을 만난 듯 거세게 진동을 일으켰다. 쩌저저…… 쩌적! 동시에 파 내려가던 땅 속 바닥이 느닷없이 갈라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아앗 이, 이게……?" "헉!" 인부들의 경악성이 채 마무리 지어지기도 전이었다. 쿠콰콰콰! 지반이 통째로 허물어지면서 땅 속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수십 명의 인부들이 한꺼번에 파묻혀 버리고 있었다. "으아악" "아아아아악!" 우르르르…… 쿠콰쾅! 땅 위에 있던 인부들은 경악하여 부르짖었다. "저, 저런!" "이럴 수가!" 헌데 순식간에 수십 명의 인부들을 삼켜버린 지면은 어느 새 거짓말처럼 진동을 그치고 정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 저게……?"


"으으으!" 인부들은 하나같이 사색이 된 채 매몰(埋沒)된 지반 쪽을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였다. 휘리링……! 바람이 비좁은 계곡을 빠져 나가는 듯한 기음(奇音)과 함께 매몰된 지반으로부터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운 오색기류(五色氣流)들이 느린 속도로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허억!" "윽!" 순간 인부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신음을 터뜨리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뜻밖의 광경이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도 그 오색기류로부터 뿜어 나오는 가공할 요기(妖氣)에 숨이 막혀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헌데 진정 경악해야 할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스스스스……. 오색의 요사스런 기류는 차츰 운무가 걷히듯 투명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그 속에서 사람의 형체들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여인(女人)들이었다. 아니, 요녀(妖女)들이라 해야 옳았다. 일견 수십 명은 될 듯 요녀들은 하나같이 말 그대로 절염절미(絶艶絶美)의 기가 막힌 미녀들이었다. 허나 그 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정작 놀랄만한 사실은 그녀들이 걸치고 있는 옷에 있었다. 여인들이 입고 있는 옷은 거의 투명할 정도로 나신(裸身)의 굴곡과 형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오색현란한 나삼(裸衫)이었던 것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여인들은 나타남과 동시에 기이한 춤을 펼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나삼을 걸쳤으되 몸을 뻗고 휘돌 때마다 거의 속살이 드러나 보이는 그 춤은 나신의 춤보다도 더 현란하고 관능적이며, 자극적이었다. 순간 엄청난 요기(妖氣)와 색기(色氣)가 사위를 휘감아들었다. "……!" "……!" 인부들은 넋을 잃었다. 그 충격적인 광경에 이미 혼백이 달아나 버린 듯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벌어진 입가에서는 침이 질질 흘러 나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풀려가는 그들의 동공(瞳孔)엔 욕정(欲情)의 음사한 광채만이 차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요녀들은 더욱 현란해지는 색무(色舞)와 함께 서서히 다가들고 있었다. * * * 대폭풍(大暴風)! 천벽제왕부에서 발생한 괴변(怪變)의 소문은 폭풍처럼 천하를 강타했다. 축조작업을 하고 있던 인부들이 어느 날 갑자기 모조리 실종되었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인부들의 의복으로 보이는 삼백 육십 구의 해골만이 뒹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마의 거혈(巨穴)과도 같은 거대한 동혈(洞穴) 하나가 중앙석전이 세워져 있던 자리에 뻥 뚫려져 있었다 했다. 헌데 그 괴사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生存者)가 단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미쳐 있었다. 완전히 풀려 버린 동공에는 오직 공포만 뒤덮여 있었다. 그는 이빨을 부딪치면서 한없이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녀들…… 환희밀천(歡喜密天)에서 왔다고…… 쾌락이 무엇인지, 환희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겠다고…… 정말…… 가르쳐 주었…… 그, 그것이 환희였고…… 쾌락이었…… 난 중도에 그만 두게 됐지만…… 다른 사람들은 쭈글쭈글 말라붙고…… 가루로 날리고…… 뼈만 남아서……." "그녀들…… 나를 동혈 속으로 데려가서…… 난 보았…… 거기 조화대성(造化大城)…… 믿을 수 없는…… 으아아아!" * * * "설마…… 본가의 땅 밑에 있었을 줄은……!" 화천명은 무섭게 본노하고 있었다. 중원대동맹 내의 대의청(大議廳)이었다. 중인들은 모두 원탁(圓卓)에 둘러앉아 있었고, 화천명은 홀로 창가에 서 있었다. 뒷짐을 진 손에 희미한 경련이 일어날 만큼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 그에 압도되어 청내의 분위기는 극도의 중압감에 짓눌려 있었다. 한 마디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화천명의 침잠된 낮은 음성만이 그 중압감을 더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우리의 지혈(地穴)을 차지하고 앉아 숨통을 누르고 있었단 말이지?" 일에 좀처럼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 화천명이나, 일단 분노했을 시에는 이토록 무서운 중압감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자신 외의 주변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서서히 자신의 분노를 억누르기 시작했다. 헌데 이때였다. 데구르르르! 밖에서 갑자기 희미한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실내가 워낙 조용했기 때문에 그 소리는 상당히 크게 들려왔다. "……?" 중인들의 뇌리에 이상한 느낌이 스쳤을 때였다. 대의청의 문이 열리며 나타나는 것은 사륜거(四輪車)에 조용히 앉아 있는 한 백의소녀였다. 그녀는 바로 옥유향(玉幽香)었다. "……?" 참으로 신비한 출현이 아닐 수가 없었다. 사륜거에 탄 불구의 몸으로 어떻게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기척도 없이 나타났단 말인가? "……?" 나타났다는 것 자체부터 신비해서인지 군웅들은 일제히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한 채 잠시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때, 옥유향의 입이 먼저 열렸다. "오천뇌의 지시를 받고 왔습니다." "……!" 중인들의 안색이 일제히 굳어졌다. 이제 오���뇌(五天腦)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 화천명은 창가에서 몸을 돌린 채 지그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옥유향은 그런 화천명에게 눈길을 보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오천뇌 스스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다 하니 잠시 기다려 주십시요." 그렇다.


그녀와 오천뇌는 서로 영능(靈能)이 통해 있다고 했다. 따라서 그녀의 입을 빌어 대신 말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군웅들은 그것을 모르는 까닭에 의혹의 눈빛으로 옥유향을 주시했다. 그 순간이었다. 옥유향의 입술을 타고 그녀의 음성 대신 신비로운 비파현의 떨림과도 같은 동음(童音)이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오천뇌의 음성이었다. "기다려 왔던 순간입니다." "……!" 일시 대의청에는 숨막힐 듯한 정적과 긴장감이 휩쓸어 들었다. 그 속에서 옥유향의 입술은 움직이고 있었다. "본 오천뇌(五天腦)는 여러분들을 조화대성(造化大城)으로 초대(招待)합니다." 그렇다. 그것은 결전(決戰)에의 초대임과 동시에 죽음(死)에의 초대였다. 또한 종전(終戰)과 대종말(大終末)에의 초대이기도 했다. * * * 초대 하루 전날이었다. 화천명은 마음을 추스리며 내심 중얼거렸다. '그래……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었다. 너희들의 묵인(默認)과 유도(誘導)하에 이 날을 만들어낸 것처럼 나 역시 모르는 척 이 날을 만들어 왔다. 통쾌하게 끝내자꾸나! 허나, 너희들이 원하는 피(血)의 축제는 결코 아니다. 너희들은 기껏 열 방울의 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알겠느냐? 열 방울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도 아깝다! 모두가 내 친구들의 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능하다면 그것도 주지 않을 생각이다! 명심해라!' 그렇다. 그것은 정말 경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군웅들은, 아니 군웅들이란 표현은 너무 약하니까 이 시대를 주름잡고 있는 당대의 거물(巨物)들은 태연히 손을 맞잡고 일어서는 열 명의 청춘(靑春)들을 경이롭고 기가 차고 어이도 없어 아연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열 명의 이름들은 이러했다. 화천명, 사운악, 무영비도 백천, 천품군자 하후강, 석무혼, 도옥진, 임설군, 묘연아, 백선아, 요화. 하나같이 빛나는 청춘이요, 꽃다운 방년(芳年)인 그들이 방금 무어라 했는 줄 아는가? 화천명의 말은 이랬다. "이렇게 우리 열 명만 가겠소. 힘든 일은 본래 젊은이가 해야 되는 법이니까 말이오. 더욱이 여러분들은 당대무림의 질서와 조화를 유지하는 핵심 중 핵심이며 또한 정신적인 지주(支柱)들이오. 우리가 다녀올 때까지 부리를 더욱 튼튼히 해두시고, 시대(時代)를 넘겨줄 준비를 착실히 해 두신다면


매우 고맙겠소." 게다가 그는 다른 구인(九人)의 의향은 묻지도 않았었다. 헌데 그들 구 인은 마치 그럴 줄을 미리 알았다는 듯 씨익 웃고, 빙그레 웃고, 화사하게 웃고, 황홀하게 웃더니 이렇게 이구동성으로 입을 여는 것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정말이지 유람이나 가는 듯 신나는 어조였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마령천존 하후승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공력(功力)을 좀 뺏어줬더니 저 놈…… 아예 겁을 상실해 버렸구나." 그러나 만사혈황 독고천은 그 소심하고 조심스런 눈을 빛내며 은근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리고 구곡대제 운천궁은 어이가 없는지 웃어 버렸다. "허허…… 이거야 뒷전으로 물러난 늙은이 꼴이로군." 독행칠대고수는 따라갈 수는 없고, 안 가자니 미치겠고, 잔뜩 불만스럽게 앉아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었다. "아미타불……." 순간 보타신니는 잔잔한 합장불호를 외었다. 그제야 구파일방 중 불문(佛門)과 도가(道家)의 장문인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다투어 불호와 도호를 읊조렸다. "아미타불!" "무량수불!" 그리고 풍모가 서로 비슷해서인지 이미 오래 전에 의기상통한 출천대협 탁몽과 천수나타 당한천은 곧바로 서로 마주보고 한 차례 빙긋이 웃더니 똑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때아니게 한가로운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일전에 흑번(黑幡)이 자네를 노린 일 말일세." "그건 왜?" "어쩔 수 없었다더군. 청부자가 바로 천마(天魔)임도 알았고, 자네가 그들의 종적을 찾고 있다는 것도 대충 알았지만, 놈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선 맡을 수밖에 없었다네. 놈들은 그때 이미 흑번을 예의 주시하고 있기도 했고……." "흠…… 짐작은 했네. 백천의 신분을 알고 나서 말이네." "그 녀석이 대신 사죄의 말을 전해 달래서 한 말일세." "미안한 거야 내가 더하지. 그것을 모르고 모두 죽여 버렸으니……." "죽어도 괜찮은 자들만 보냈다네. 자네가 미안할 것은 없지." * * * 십인(十人). 훗날 천벽십우(天壁十友)라 이름되어 전설(傳說)로, 신화(神話)로 영원히 남게 되는 그들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그들을 막지 않았다. 무모한 짓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모두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벌떼처럼 우르르 몰려가 봐야 무의미한 유혈(流血)만이 증가될 뿐이라는 것을. 또한 그들은 승산(勝算)을 보고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이 시대 최강(最强)의 십인(十人)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화천명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천품군자 하후강. 무림역사 이래 그보다 더 공력(功力)이 강한 인물은 없었다.


그의 공력은 화천명을 능가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웬만한 산 하나쯤 통째로 뽑아 버릴 수 있을지도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무영비도 백천. 그의 몸은 이미 사악(邪惡)의 화신(化身)이었다. 이제부터 그의 몸에서 발휘될 사악한 능력(能力)은 천벽십우(天壁十友)의 전설 중에서 가장 무서운 전설로 남을 것이 틀림없었다. 석무혼. 그가 십 인 중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바로 조화독신(造化毒身)의 완성(完成)을 뜻하는 것이었다. 조화대성(造化大城) 안에서 인출되는 그의 독(毒)의 조화(造化)를 막아낼 마두가 천하에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임설군. 거론할 필요도 없었다. 화천명 때문에 빙심이 깨어졌을 뿐, 그녀는 이미 전설의 빙하지존(氷河至尊)이 아니던가? 그리고 묘연아와 백선아. 그녀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여자 선도쌍벽(禪道雙壁)이었다. 다시 말해 광승 천곡과 천도 마선의 본신진원(本身眞元)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도옥진. 그녀는 요즈음 남해검후(南海劍后)라 불리웠다. 화천명의 도움을 받아 그 동안 눈부신 진보를 보인 그녀는 오히려 천 년 전의 검제 백리천을 능가하는 경지를 이루었던 것이다. 요화, 천축의 일인구원군(一人救援軍)인 그녀가 준비한 천밀백팔중보(天密百八重寶)의 힘을 뭐라 형용할 것인가? 훗날 전설을 듣고 사람들이 말했다. 무슨 여자가 그렇게 무거웠느냐고 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운악, 사실 이렇게 무모한 조화대성으로의 십인입성(十人入城)은 그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조화밀도(造化密圖)! 바로 조화대성의 모든 것이 그의 머릿 속에 있기 때문이었다. 즉, 화천명이 잡은 승산의 구할(九割)이 바로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그가 손수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다는 철제가마. 그 이름도 거창하던 만상천혼전능비가(萬象天魂全能飛駕) 속에 얼마나 대단한 조화가 들어 있는지는 보지 않은 사람들은 믿지 않으려 했다. 사실 사운악은 그것을 타고 천품군자 하후강과 무영비도 백천에게 이대일(二對一)로 싸워보자고 도전한 적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고지식한 하후강이 물건과는 싸우지 않는다고 거절했고 무영비도 백천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가공할 능력들이 있어서인지 유람이나 가는 것처럼 한가롭게 출발한 십 인의 한가로움은 조화대성의 입구(入口) 앞에서 비로소 사라졌다. 바로 천벽제왕부의 중앙석전이 세워져 있던 지반에 생겨난 그 거대한 동혈(洞穴) 앞이었다. "……!" 악마의 성역과도 같은 그 거대한 암흑(暗黑)을 주시하며 그들은 비로소 전신에 긴장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때부터가 바로 전설(傳說)과 신화(神話)의 시작이었다. 천벽십우(天壁十友)의 전설과 신화 말이다.


* * * 천벽십우(天壁十友). "……!" 끝없는 암흑의 공간을 지나 그들이 내려선 곳에는 정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암흑은 머리 위 십 장(十丈)여 위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 아래부터는 신비로운 영능(靈能)과, 아득한 환상적인 기운과, 그리고 호흡에까지 압박을 주는 무서운 마기(魔氣)가 함유된 회색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회색의 의미는 바로 어둠과 빛의 조화를 의미했다. 또한 죽음과 삶의 중간지대이자 절망(絶望)을 의미하기도 했다. "……!" 천벽십우는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결코 살아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망이 무겁게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 그때 그들은 보았다. 화천명의 담담하면서도 쾌청한 웃음을. "……!"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회색의 절망이 그로부터 한순간에 밀려갔다. 뒤이어 구우(九友)의 얼굴에도 웃음이 감돌았다. "그래! 그가 있는 거야!" 행동계획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세워져 있었다. 그들은 침착하게 걸음을 옮겼다. 조화대성은 끝없는 넓이였다. 이 끝없는 넓이 속에 사십팔만종(四十八萬種)의 기관(機關)과 삼천육백명(三千六百名)의 인간매복(人間埋伏)이 있었다. 인간매복은 바로 신비구천과 환상십지의 전부를 의미했다. 즉, 신비구천의 전원과 환상십지의 전원이 이 속 어딘가에 숨어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벽십우는 두려움 없이 걸음을 옮겨갔다. 어디서 무엇이 나올지를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 * * 그리고 마침내 싸움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혈전(血戰)이나 사투(死鬪)라는 말로 이 싸움을 형용할 수 있을까? 아니, 이 싸움을 구태여 말로 형용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없었다. 다만 그 싸움이 장장 일개월(一個月)을 계속했다는 것과, 끝내 그들은 승리를 이끌어 냈다는 것, 그리고 훗날 십인지혈(十人之血)로 이름된 열 방울의 피의 의미와, 단 십 인(十人)의 힘으로 아홉 개 신비와 열 개의 환상, 그리고 하나같이 절대의 의미를 지닌 사십 팔만 종의 기관을 상대해 낸 그 위대했던 능력과 투혼(鬪魂)만큼은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그 능력과 투혼을 화려하게 배가시킨 천벽(天壁)의 기백(氣魄)과 아울러……. 그러나 그것으로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진정으로 무서운 적(敵)이 남아 있었다. 이 무서운 이야기를 결국 시작하게 만든……. * * * 그것은 하나의 사원(寺院)이었다. 전체가 잿빛의 암석으로 이루어진 사원의 규모는 별로 크지 않았다. 그러나 천마(天魔)가 폭풍을 휘몰고 승천(昇天)하는 듯한 형양(形樣)이 사방 전역에 음각(陰刻)되어 있었다.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느낌과는 차원(次元)이 다른 신비한 영능(靈能)이 안개처럼 스며져 나오고 있었다. "천뇌서원(天腦書院)이다!" 화천명은 지그시 사원을 주시하며 자신있게 말하듯 말했다. "……!" 구우(九友)는 그의 뒤에서 나란히 서서 사원을 향해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사원의 이름은 천뇌서원이었다. 신비구천의 마지막으로 이름이 올라 있으나 실제는 환상과 신비, 그 모든 것을 만들어 내고 주도한 이른 바 천마(天魔)의 본체(本體), 바로 오천뇌(五天腦)가 있는 곳이었다. 용서할 수 없는 그 사악(邪惡)한 다섯 개의 영혼(靈魂)이 말이다. 저벅…… 저벅……. 화천명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구우(九友) 중 누구도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묵계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천마의 상대는 바로 천벽이 아니던가? "……!" 천뇌서원 앞에는 다섯 구의 시체가 나란히 놓여져 있었다. 그것은 자결(自決)한 모습이었다. 옥대인과 문인옥, 옥유향, 천류혼, 그리고 이름모를 한 노파의 시체였다. "……." 화천명의 시선은 오래도록 옥유향의 파리한 모습에서 머물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시선이 노파에게로 옮겨갔다. 미미한 의혹이 스쳤다. 허나 곧 그는 알 수 있었다. 천마유전(天魔遺傳)은 바로 이 노파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을. 노파가 어떻게 그리 오래 살 수 있었는가는 오천뇌의 신비한 영능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 화천명의 시선이 천류혼에게 옮겨졌다. 수려한 반면과 추악한 반면이 실로 기괴한 부조화를 이루는 그의 얼굴은 부친에게서 이어받은 정대한 피와 천부적으로 타고난 마성(魔性)이 어울린 숙명의 부조화와도 같았다. 화천명은 시선을 들었다. "……." 천뇌서원의 문은 열려 있었다. 깊고 짙은 어둠과 한 무리 신비로운 빛의 결집체가 어둠 저 멀리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득 한 줄기 음성이 화천명의 고막 속으로 흘러들었다. 어린아이처럼 맑고 투명하면서도 비파현(琵琶弦)의 한없는 떨림처럼 신비로움을 형성하는 음성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과연…… 천벽의 후예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완벽하다고 자신했던 이 조화대성의 모든 것을 멋지게 깨뜨려 버렸으니까요……." 음성은 어둠 속의 빛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과 우리의 싸움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새로이 시작할 것입니다. 저들 오인(五人)이 왜 자결했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그들의 마음 속에서 충동질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완벽하다고 믿는 또 다른 사람들을 모아 다시 시작할 겁니다. 당신과의 싸움은 그때부터 다시 시작되겠지요." 저벅……. 화천명은 비로소 걸음을 떼었다. 그는 걸음을 옮겨 천뇌서원의 문 안으로 들어섰다. 음성이 보다 확실히 들렸다. "우리를 죽이기 위해 오는 것입니까? 쓸데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당신이 지닌 그 천벽의 기백도, 위대한 천검절도(天劍絶刀)도 우리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아까 당신이 싸우는 모습에서 그야말로 완벽해진 천검절도를 새로이 보았습니다만…… 그래서 천마군림신공을 부여한 천류혼도 미련없이 죽였습니다만…… 그보다 더 완벽해진 천검절도라 해도 우리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 화천명은 완전히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오천뇌의 음성은 자신있게 울리고 있었다. "우리는 전혀 육체 따위를 가지지 않은 영혼(靈魂) 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영혼을 죽일 수도 있습니까?" 찰나 ���천명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감돌았다. 이어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어둠에 흡수되듯 그의 훤칠한 신형이 묻혀져 갔다. 오천뇌의 음성이 다시 울렸다. "과연 죽지 않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면 좋습니다. 오십시오." 그러나 화천명은 그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어둠 속의 허공에 문득 떠오른 옥유향의 영상을 보고 있었다. 얼마 전 아무도 모르게 자신을 찾아왔던 그녀의 그 파리한 영상을 말이다. 그때 그녀는 화천명을 향해 이렇게 얘기를 했었다. -오천뇌를 죽일 수 있는 방법…… 아니, 죽인다기 보다는 소멸시킨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군요. 그것은 바로 당신의 소멸과 함께 이루어 지는 것이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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