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u on Google+

천검록(天劒錄) 제목: 천검록 제 1 권 이상한 흥정 (전 3 권) 지은이: 사마달 - 차 례 제 1 장 제 2 장 제 3 장 제 4 장 제 5 장 제 6 장 제 7 장 제 8 장 제 9 장 제 10 장 제 11 장 제 12 장

이상한 선택(選擇) 뜻밖의 파산(破産) 옥대인(玉大人)의 내력 책자의 비밀(秘密) 피할 수 없는 운명 괴노승(怪老僧)의 정체 이상한 만남 무인(武人)의 길을 걷다 구사일생(九死一生) 시작되는 이변(異變) 드러나는 비사(秘事) 이상한 흥정

제 1 장 이상한 선택(選擇) * * * 환상(幻想)과 신비(神秘). 그렇다. 그것들은 환상이요, 또 신비였다. 그리고 또한 전율(戰慄)이었으며 공포(恐怖)였다. 신비에의 전율과 환상에의 공포. 아는가? 그대들이 숨쉬고 살아가는 이 땅, 저 하늘이 열 개의 환상과 아홉 개의 신비로 메워져 있다는 것을. 어떤 지자(知者)는 이를 일컬어 신비구천(神秘九天)이자 환상십지(幻想十地)라 했다. * * * 밤하늘. 그 거대한 암흑 속에 아홉 개의 신비로운 성좌(星座)가 차례로 떠올랐다.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가슴에 무서운 전율(戰慄)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신비(神秘)의 아홉 하늘을 상징하는 구대 성좌(星座)였다. 보라! 그 첫 번째의 성좌를. 그것은 바로 황금빛의 미광(微光)을 은은히 발산하고 있는 이른 바 황금(黃金)의 성좌가 아닌가? 그 성좌는 바로 신비구천의 첫 번째인 황금비원(黃金秘苑)을 상징하는 성좌였다. <황금비원(黃金秘苑).> 그러나 세인들은 황금비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인간들이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이렇게 알려져 있을 뿐이다. -황금비원은 세상의 모든 부귀(富貴) 속에서 존재하고 세상의 모든 부귀(富貴)를 지배한다. 그것이 사람들이 알고 있는 황금비원의 전부다.


두 번째 성좌는 극단(極端)의 마기(魔氣)를 함유한 푸른빛 성운(星雲)에 둘러싸인 목(木)의 마성(魔星)이다. 그 마성이 상징하는 것은 청목마림이다. <청목마림(靑木魔林).> 세상의 모든 나무(木)와 숲(林), 그리고 그 그늘과 그늘 속에서 존재하여 점차 음지(陰地)의 마기(魔氣)를 온 세상에 확산시키고 있는 목령마인(木靈魔人)들. 그렇다. 마성은 바로 청목마림의 성좌다. 세 번째는 시리도록 희디흰 백채(白彩)를 내뿜는 수(水)의 영성(靈星)이다. 이른 바 백수지성좌(白水之星座)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것은 물(水)의 하늘을 상징한다. <백수대하(白水大河).> 세상의 모든 물(水), 즉 바다(海)를 제외한 대륙 안의 모든 물(水)을 지배하는 수신(水神)의 성좌가 바로 백수지성좌인 것이다. 네 번째는 타오르는 듯한 적성(赤星)이다. 그것은 적화(赤火)의 성좌였다. <적화대천(赤火大天).> 말하자면 불(火)의 제왕(帝王)인 성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불에 관한한 그들은 이미 신(神)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는 불은 중원대륙 전체를 단숨에 녹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어두운 보라빛(紫)의 성좌다. 이른 바 토(土)의 영성(靈星)이라고도 불리우는 그 성좌는 흙(土)과 피(血)의 혼합물을 상징 한다. <자토혈궁(紫土血宮).> 흙은 그들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피도 그들의 것이다. 따라서 흙과 피가 있는 곳에 그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즉 혈토(血土)에 파묻힌 만악(萬惡)의 사령(邪靈)들이 바로 그들의 정체라고 전설은 이야기하고 있다. 여섯 번째는 절망적인 검은 빛 유명(幽冥)의 성좌다. <구유명왕부(九幽冥王府).> 이는 이미 죽어 갔고 지금도 죽어 가고 있는 세상의 모든 사자(死者)들의 안식처를 상징하는 성좌다. 이름하여 사자지천(死者之天)을 상징한다. 일곱 번째는 화려하고 현란한 오색(五色)의 채성(彩星)이다. 그것은 환희(歡喜)와 쾌락(快樂)을 상징하는 성좌로서 환희밀천(歡喜密天)의 별이라고도 불리운다. <환희밀천(歡喜密天).> 그 설명은 한 마디로 족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쾌락과 음사(淫事)가 지천으로 깔려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여덟 번째는 끝없는 깊이(深)와 넓음(廣)을 암시하는 벽색(碧色)의 거성(巨星)이다. <해왕천(海王天).> 그렇다. 그 벽색의 거성은 바로 바다의 제왕이자 바다의 하늘을 상징하는 성좌다. 마지막 아홉 번째. 그 성좌는 도대체 무엇이라고 규정 지을 수 없는 빛을 뿜어내고 있다. 마치 무수한 신비가 얽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불가사의를 형성하고 있는 듯한 빛. 그렇다. 그것이 바로 신비(神秘)의 결정체(結晶體)가 아니던가? 세인들은 결코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하늘(天)의 두뇌(頭腦)처럼 말이다. 해서 사람들은 그 성좌가 상징하는 것이 천뇌서원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천뇌서원(天腦書院).> 대체 그 말의 뜻이 무엇일까?


* * * 하늘에 신비구천이 존재하듯 언제부턴가 땅에는 환상십지가 환상처럼 존재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그대는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대가 딛고 그대가 또한 둘러보는 저 십방(十方)의 대지 위에는 열 개의 환상(幻想)이 꿈결처럼 존재하여 처절한 공포(恐怖)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정동방(正東方). 거기에는 악념(惡念)에 깃든 마찰(魔刹)이 하나 있다. <악승사(惡僧寺).> 중(僧)들을 조심하라. 자비의 두터운 껍질로 사악(邪惡)을 위장한 그들이 외우는 염불은 어쩌면 그대의 목숨을 앗아가는 장송곡이 될지도 모른다. 동남방(東南方). 하늘에게서도 버림받은 천형(天刑)의 땅 하나가 그곳에 있다. 한(恨)과 비애(悲哀)만이 가득차 있는 곳. <천형마도(天刑魔島).> 불구자를 경계하라. 외팔이, 외다리, 장님, 벙어리, 앉은뱅이, 백치 등 천형(天刑)의 땅에서 온 그들은 몸만이 아니라 마음 또한 불구자들이므로. 정남방(正南方). 그곳은 광란(狂亂)의 땅. <황천광혈갱(荒天狂血坑).> 이미 미쳤거나 미쳐가는 자를 조심하라. 미친 자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대의 심장을 노리면서 깔깔 대며 좋아할지도 모르는 일이므로. 서남방(西南方). 아이들의 왕국(王國). 즉 악마의 씨로 뿌려져 악마의 젖을 먹고 자라난 악마의 자식들이 거기에 있다. <마동루(魔童樓).> 어린 아이를 주의하라. 특히 햇살같은 웃음을 머금고 있는 아이라면 더욱 더 말이다. 그 찬란하고 신선한 웃음에 매료되는 순간 그대의 혼백은 이미 구천을 넘나들고 있으리라. 정서방(正西方). 소리(音)의 환상, 즉 영음(靈音)의 골짜기가 존재하는 곳. <영음마곡(靈音魔谷).> 그 이름을 말하지 마라. 그들을 생각하지도 마라. 그들은 육신도 영혼도 없는, 단지 소리(音) 뿐인 인간이므로. 또한 저주(咀呪)의 소리이니……. 그대가 언제 어디서 무슨 말을 하건, 그것을 똑같이 되읊어 오는 저주의 소리가 평생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서북방(西北方). 거칠고 황폐한 서북의 땅. 그곳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의 영역이다. 가진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 피(血)가 있을 뿐이다. <궁가혈막(窮家血幕).>


거지들을 눈여겨 보라. 개방 제자가 아닌 거지라면 더욱 더 유심히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적선은 금물이다. 무심코 던져 주는 은자 한 닢이 오히려 그대의 미간을 꿰뚫을 가공할 살인암기(殺人暗器)가 될지도 모르므로. 정북방(正北方). 그곳은 옥인(玉人)의 땅이다. 아니, 독인(毒人)의 땅이라고 해야 옳으리라. <옥인야(玉人野).> 그곳엔 옥으로 깎아 빚은 듯 유달리 피부가 희고 아름다운 사내들이 있다. 그들을 보면 일단 눈을 감아라. 그리고 도망쳐라. 그들은 독(毒)의 제왕이요, 독(毒)의 성신(聖身)이니 말이다. 그들 곁에서 그들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순간 그대는 이미 한줌 핏물로 녹아 버리고 말리라. 북동방(北東方).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서식처가 거기에 있다. <반야산(半也山).> 모습은 인간이되 피(血)는 뱀의 피(蛇血). 얼굴은 인간이되 몸은 거원(巨猿)의 털복숭이 몸. 몸은 인간이되 얼굴은 야수(野獸)의 맹안(猛顔). 거짓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괴물들이 있는 곳이 바로 반야산이다. 지중(地中). 땅 속이니 물론 태양이 없다. 태양이 없으니 물론 어둡다. 어두운 세계는 바로 밤(夜)! <야황동(夜皇洞).> 밤의 인간들을 조심하라. 도둑놈을 경계하고, 사기꾼들을 또 주의하라. 물건이 아닌 그대의 목숨을 훔쳐갈지 모르므로. 정중(正中). 더욱더 화려한 환상(幻想), 조화(造化)의 대지가 세상 속 우리들 곁에 존재한다. <조화대성(造化大城).> 무엇이 그곳에 있는지는 모른다. 왜 그러한 이름이 붙었는지도 모른다. 전능(全能)의 조화인(造化人)들이 있다는 건지, 아니면 이 땅 위의 모든 조화(造化)가 한꺼번에 펼쳐져 있다는 건지 말이다. 신비구천(神秘九天)과 환상십지(幻想十地)! 모두 열 아홉 개인 전율(戰慄)과 공포(恐怖)의 세계. 그러나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단언할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다. 그것들은 이름 그대로 환상이요, 신비일 뿐이었다. 자신들의 세상과는 거리가 먼, 아니 아예 차원이 다른 먼 세계의 전설처럼 사람들은 아스라이 귓전으로 흘려듣고 있었다. 불현 듯 현실은 혹 아닐까 의심해 보고 전율과 공포에 휩싸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시일 뿐이었다. * * * 짙은 어둠 속이었다. 그러나 음울하지는 않았다.


무언가 신비(神秘)스런 영적(靈的) 기운 같은 것이 한 가득 함유되어 있는 듯한 암흑(暗黑)이기 때문이었다. "……!" 그 어두운 공간(空間)의 일각을 베어내며 오인(五人)이 소리없이 들어섰다. 한 명의 중년문사(中年文士)와 한 명의 청수한 노인(老人), 그리고 청년(靑年)과 노부인(老婦人), 마지막으로 충격적이도록 아름다운 한 명의 불구소녀(不俱少女)였다. 그들은 신비한 어둠 속의 어느 한 곳을 주시하며 반원형(半圓形)의 대열로 멈춰 섰다. "……!" 몹시 희미한, 인화(燐火)와도 흡사한 한 무더기 광채가 그들의 시선 끝에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전혀 실체(實體)를 확인할 수 없는 희미한 빛이었다. 어느 순간, 문득 그 광채가 미묘한 흔들림을 보였다. 흔들림과 동시에 흡사 어린 아이의 음성과도 같은 맑고 천진스런 말소리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천하의 모든 인간(人間)들을 분석해 보았습니다." 기이했다. 어린 아이와도 같은 이 음성은 묘하게 인간의 심령(心靈)을 제압하는 일종의 마력(魔力) 같은 기운이 함유되어 있었다. 또한 그것은 비파현(琵琶絃)의 한없는 떨림처럼 실로 신비한 여운을 남기는 것이었다. "……." 어둠 속의 오 인은 표정도 대꾸도 없이 그저 어둠의 일부분처럼 신형을 세운 채 그 음성을 듣고 있었다. 기이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 중에서…… 일단 여자(女子)는 제외했습니다. 그리고 십 오 세 이하와 이십 오 세 이상의 남자도 대상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난세(亂世)의 영웅(英雄)이 꼭 남자여야 된다는 법은 없지만…… 우리가 내세우려는 난세지웅(亂世之雄)은 가능한한 젊고 준수한 사내일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께서도 익히 알고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 오 인의 남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한 광채로부터 울려오는 환상(幻想)의 동음(童音)은 잠시 사이를 두고 더욱 신비로운 여운을 동반하며 들려왔다. "십 오 세에서 이십 오 세 사이의 사내…… 그렇게 좁혀진 대상을 철저히 분석해 본 결과…… 우리는 마침내 네 명을 가려 낼 수 있었습니다. 천하를 통틀어 사인(四人)이니 결코 많은 숫자는 아닙니다. 허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일인(一人) 뿐…… 그 중에서 다시 최후(最後)의 일인(一人)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 "여러분을 급히 소집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그 선택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구비한 자료만으로는 도저히 그들 사 인의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수십 번을 거듭 분석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파르르……. 음성이 멎는 순간 어둠 저편의 신비한 광채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평가는 너무 객관적인 것이다. 우리의 너무도 철저한 객관적 평가는 인간들이 흔히 지닌 미묘한 심리적(心理的) 특성(特性)을 놓치기 쉽다. 그것은 아주 중대한 오류(誤謬)일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 "……!"


"그래서 우리는…… 최후의 일 인을 위한 마지막 선택을 여러분에게 맡기기로 했습니다. 여러분의 인간다운 감정을 지닌 다섯 개의 생각이 하나로 일치되었을 때…… 우리가 내세우고자 하는 난세의 영웅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 찰나, 긴장 때문인지 어둠에 휩싸인 허공의 기류가 팽팽히 당겨졌다. "다행스럽게도…… 그들 사 인은 여러분들이 한 번씩은 보았던 인물들입니다. 여러분이 그들 중 누구에게서 가장 강한 인상을 받았느냐에 따라 선택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 각자가 소유한 인간적 매력(魅力)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신비한 광채가 약간 확산되었다. 아니, 확산되었다기 보다는 중앙에 공백(空白)을 형성하며 사방으로 벌어졌다는 표현이 옳았다. "그들에 대한 자료는 여기 적혀 있습니다." 휘리릿! 순간, 광채의 공백 부분으로부터 한 장의 종이가 둥실 솟구쳐 올랐다. 이어 그것은 흡사 하나의 생명을 가진 물체처럼 스물스물 어둠을 헤치고 날아오더니 오 인의 남녀 앞에서 수직으로 세워졌다. 괴이한 음성이 이어졌다. "이제 한 사람을 선택하십시오. 결과를 소리내어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우리가 읽고 일치 여부만을 가려 내겠습니다." "……!" 다섯 쌍의 안광(眼光)이 파란 섬광을 폭사하며 허공에 세워진 종이를 비추기 시작했다.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성명(姓名)…… 하후강(夏侯强). 별호(別號)…… 천품군자(天品君子). 출신(出身)…… 마라혈교(魔羅血敎). 생년월일(生年月日)…… 정덕이십사년(正德二十四年) 구월(九月) 오일(五日). 당년 이십이세(二十二歲). 무공수위(武功首位)…… 초특급(超特級). 취미특기(趣味特技)…… 전무(全無). 기타 특기사항(特記事項)…… 마라혈교 출신으로서 천품군자라는 명성을 얻은 걸로 보아 몹시 특이한 존재임. 성명(姓名)…… 사운악(史雲岳). 별호(別號)…… 백향공자(百香公子). 출신(出身)…… 전 한림대학사(翰林大學士) 사가량(史家兩)의 장자(長子). 생년월일(生年月日)…��� 정덕이십팔년(正德二十八年) 이월(二月) 구일(九日) 생(生). 당년 십팔세(十八歲). 무공수위(武功首位)…… 전무(全無). 취미특기(趣味特技)…… 기관토목(機關土木), 기문진학(奇門陣學), 천문지리(天文地理), 성복역학(星卜易學) 등, 잡학(雜學)에 달통. 기타 특기사항(特記事項)…… 별무(別無). 성명(姓名)…… 백천(白天). 별호(別號)…… 무영비도(無影秘刀). 출신(出身)…… 흑번(黑幡). 생년월일(生年月日)…… 정덕이십육년(正德二十六年) 삼월(三月) 육일(六日) 생(生). 당년 이십세(二十歲). 무공수위(武功首位)…… 초특급(超特級).


취미특기(趣味特技)…… 살인(殺人). 기타 특기사항(特記事項)…… 전문살수(傳門殺手)로서 역사상 최초로 흑번구십구관(黑幡九十九關)을 완수(完修)한 인물. 성명(姓名)…… 화천명(華天明). 별호(別號)…… 무(無). 출신(出身)…… 고아(孤兒). 직업(職業)…… 상인(商人). 생년월일(生年月日)…… 정덕이십팔년(正德二十八年) 시월(十月) 칠일(七日) 생(生). 당년 십팔세(十八歲). 취미특기(趣味特技)…… 주행(酒行), 엽색(獵色), 도박(賭博), 요리(料理), 음률(音律), 가무(歌舞), 서화(書畵), 공예(工藝) 외 잡다(雜多). 무공수위(武功首位)…… 전무(全無). 기타 특기사항(特記事項)…… 상계(商界)에 뛰어든 지 불과 이년(二年) 만에 강남제일(江南第一)의 거상(巨商)으로 떠오른 상술(商術)과 용병(用兵)의 귀재(鬼才).> "……!" 오 인의 시선이 하나 둘 거두어졌다. 그러자 신비광(神秘光) 속에서 울려 나오는 환상의 목소리는 긴장된 침묵을 깨뜨리며 이렇게 얘기했다. "됐습니다. 우리로서는 매우 의외(意外)의 결과이긴 하지만…… 선택은 일치되었습니다." * * * 중(僧)이 우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물론 중이라고 해서 눈물이 없으라는 법은 없다. 허나 대성통곡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천하가 떠내려 갈 듯이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중이라면 틀림없이 미친 것이라 보아도 하자는 없으리라. 그것도 너무나 기뻐서 울고 있다면 말이다. "아이고…… 으허허헝……! 아…… 아…… 미타불!" 거대한 중원천하가 아스라이 내려다 보이는 천목산(天目山) 광태봉(光太峯) 정상이었다. 발 아래 자욱이 깔린 운무(雲霧)를 딛고 얼어붙은 고봉의 잔설(殘雪) 위에서 그 괴이무쌍한 노승(老僧)은 아예 마구 뒹굴고 있었다. "에고…… 아이고오오! 아미…… 허헝…… 타불! 허허헝!" 하는 행동 만큼이나 해괴한 용모였다. 노승은 오척단구(五尺短軀) 였다. 거기다가 엄청 말라 있었다. 천하제일의 칼솜씨를 지닌 백정이라 해도 살 한점 저며낼 수 없을 것 같은 깡마른 몸집이었는데 두상(頭相)은 엄청나게 컸다. 그리고 두상이 큰 만큼 눈, 코, 입, 귀 오관(五官) 모두가 보통 사람의 배 이상으로 우람했다. 그러나 더욱 특이한 것은 그의 눈썹이었다. 자그마치 반 자는 넉히 될만큼 길고 무성하여 아예 머리칼처럼 제멋대로 휘날리는 것이었다. "아이…… 고오! 네 이놈, 중원(中原)아! 네놈은 참말로 운도 좋다! 으흐흐흐흑! 이놈아, 생각좀 해 봐라! 얼마나 자비로우신 부처님이시냐? 아이고…… 아미타불!" 한 손으로는 잔설(殘雪)에 뒤덮인 땅을 치고, 또 한 손으로는 아득히 펼쳐진 중원대륙을 손가락질하며 괴승(怪僧)은 통곡하고 또 통곡했다. "에이구…… 부처님! 허구한 날 쌈질만 하는 저놈이 무에 그리 불쌍해서 구성(求星)까지 보내 주셨습니까? 아이고오…… 그것도 네 놈씩이나, 아미타불!" 확실히 미친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보통 심각한 증세가 아니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아니야! 고만 울자!" 괴노승은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더니 느닷없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 하마 같은 소코 놈에게 선수를 뺏겼다간 부처님께서 대노하신다!" 그리고는 있는대로 퉁방울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어 그 거대한 두상을 두 주먹으로 마구 두드리며 불맞은 송아지 마냥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이었다. "아미타불! 한 놈을 뽑아야 되는데…… 아이고, 부처님! 어떤 놈이 좋겠습니까? 예? 제 마음대로 뽑아도 됩니까?" 그야말로 횡설수설이었다. "알았습니다. 그럼, 그 사람 죽이기를 취미로 삼는 놈부터 일단 빼놓고…… 아미타불!" 팟! 불호성이 끝나는 순간 돌연 그의 십지(十指)가 지면을 향해 동시에 뻗었다. 츠츠츳! 회오리처럼 눈가루(雪粉)가 피어 올랐다. 그러자 놀랍게도 잔설이 걷혀진 지면 깊숙이 세 개의 글자가 단숨에 새겨지는 것이 아닌가? <문(文).> <상(商).> <무(武).> 헌데 괴승의 다음 행동은 더욱 해괴했다. 가운데 새겨진 상(商) 자 부분에 머리를 처박고 물구나무를 서더니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앞으로 쓰러지면 그 책벌레 놈이고…… 뒤로 쓰러지면 거짓말을 못하는 그 기특한 멍청이다. 그리고 내일 아침까지 쓰러지지 않는다면 그 말 잘하고 잘생긴 장사꾼 놈이 뽑히는 거다. 아미타불…… 이 얼마나 공평한 방법인가?" 말은 그랬지만 그건 분명 공평한 방법이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보아도 이 대두괴승(大頭怪僧)은 지금처럼 거꾸로 서 있는 것이 훨씬 더 안정감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었다. "……." 어쨌거나 그런 자세로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 괴승의 안색은 그지없이 엄숙했다. 아스라이 펼쳐진 중원대륙을 가뿐하게 머리에 이고 경건하도록 엄숙한 안색으로 괴승은 건들건들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제 2 장 뜻밖의 파산(破産) * * * "이미 누차에 거쳐 강조한 바와 같이…… 그들의 필요성은 절대적입니다!" 화려거대(華麗巨大)한 대청(大廳)이었다. 십 수 명이 둘러 앉은 타원형의 녹향목(綠香木) 원탁 사이에서 홀로 일어선 채 열변을 토해내는 한 사람이 있었다. "금릉이우(金陵二友) 중 한 명만 얻어도 천하를 도모할 수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특히, 본맹(本盟)의 입장으로선 그 같은 능력을 소유한 인물을 더 더욱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삼십 오륙 세 정도의 중년수사(中年秀士)였다. 일신에 걸친 연남빛 장삼과 왼손으로 가볍게 걸머쥔 진홍색 옥골섭선(玉骨攝扇) 등 단지 차림새로만 보아도 상당히 세련된 기품의 소유자임이 분명했다. 허나 호리호리한 그의 전신에서 간간히 내뻗치는 막강의 예기(銳氣)는 결코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본맹(本盟)이 그들을 얻는다면 속하는 감히 자신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삼년(三年) 안에 천하의 패권(覇權)을 본맹으로 가져 오겠다고……!"


"잠깐, 총사(總師)!" 좌석 한쪽에서 누군가 내뱉듯 일갈했다. "말씀이 너무 과하신 것이 아니오? 본인이 알기로 그들 둘은 이제 이십 세도 채우지 못한 애송이에 불과하오. 게다가 하나는 닭잡을 힘도 없는 서생(書生)에…… 또 하나 역시 전혀 무공이라고는 없는 장사치로 알고 있소. 도대체 그런 애송이들이 본맹에다 무엇을 해 줄 수 있단 말이오?" "물론 그들에게 무공은 없소이다. 그러나……." 중년신사는 낮게 웃었다. 미세하나마 경멸의 기운이 묻어 나오는 웃음이었다. "후후…… 무공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든다면 그것만큼 우둔한 일도 없소. 우리 시대의 무림(武林)은 절대 무공만으로 살아 남을 수 없소! 이것은 철칙이외다." "……!" "다시 한 번 말씀드리건대…… 현재 본맹의 조직은 너무 비대(肥大)해져 있소이다. 세력 확장에만 너무 과다한 힘을 소모한 결과, 분명히 세력과 조직은 천하제일을 견주어도 손색이 없으나…… 극단적으로 말해 허울좋은 껍데기에 불과하오. 중앙의 명령이 하부조직(下部組織)까지 전달되지 않은 이른바 조직관리의 불능상태(不能想態)에 접어 들었소." 중년수사의 음성은 그리 크지도 강렬하지도 않았다. 허나 낮고 부드럽기까지한 그 음성은 어딘지 모르게 가히 비수와도 같은 막대한 예기(銳氣)를 함유하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 특출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 조직을 관리하지 않는다면…… 본맹의 불능상태는 갈 수록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것이오. 이것은 어떠한 외부의 적보다도 더욱 무서운 내부지적(內部之敵)이외다." "총사께서 계시질 않소이까? 총사께서 조직정비에 힘을 기울이신다면……." 원탁의 말석(末席)에서 누군가 아부하듯 말했다. 허나 그 말은 채 이어지지도 않았다. "본인의 능력으론 부족하오. 본인 혼자 본맹의 거대한 조직을 관리하기에는 이미 누누이 말씀드렸거니와…… 역부족(力不足)이오. 그래서 그들이 필요한 것이오. 필요하다면…… 본인의 총사(總師) 자리를 그들에게 내놓을 용의도 있소이다." "……!" 순간 좌중에 상당한 소요가 일어났다. 그러나 중년수사는 좌중의 소요에는 아랑곳 없이 깊고 예리한 시선을 정면의 상좌(上座)로 옮겼다. "맹주(盟主)께선 이제 결정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속하가 뜻하는 바를 맹주께선 이미 충분히 헤아렸을 줄로 사료됩니다!" 중년수사는 단호한 음성으로 말한 후 시선을 상좌(上座)로 돌렸다. 그곳에는 녹색 바탕에 핏빛 줄무늬가 수놓인 웅장한 태사의(太獅椅)가 놓여져 있었다. 태사의에는 왜소한 체구의 중년인 하나가 파묻히듯 몸을 싣고 있었다. 일신에 걸친 의복도 그저 평범한 마의(麻衣)였다. 그러나 보라! 그 왜소한 체구에선 능히 천하라도 감당할 듯한, 가히 산악과도 같은 기도가 서리서리 뿜어져 나오고 있지 않은가? "좋소."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총사의 뜻대로 하시오. 단, 두 명을 다 받아들일 수는 없소." "기강 때문입니까?" "그렇소. 너무 파격적인 인사(人事)는 기강과 위계질서에 문제를 일으키기 쉽소. 아쉽겠지만 한 사람은 포기하시오." "알겠습니다. 사실 두 명을 다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선택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선택에……?" "예. 속하로서도 도저히 그들의 우열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일단 조직능력(組織能力)만을 보더라도 그야말로 백중지세로 보입니다." 별달리 표정이 없던 중년수사의 안색에 미세하나마 난처한 빛이 감돌았다. "굳이…… 차이를 따진다면, 선천적 능력(先天的能力)의 차이라 할 수 있을는지……." "흠…… 자세히 말씀해 보시오." "전자(前者)는 타고난 능력입니다. 구태여 조직에 힘을 쓰지 않더라도 부하들이 자진해서 따라와 주는…… 말하자면 인간적 매력(魅力)과도 상통합니다. 실상, 그가 불과 이년(二年)의 세월로 강남상계(江南商界)에서 그만한 기반을 이룬 배경에는 그러한 천부의 조직력이 가장 크게 작용했습니다. 그를 일컬어 용병(用兵)의 달인(達人)이라 부르는 것도 거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조금 숨을 돌리고 중년수사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자에 비해 후자(後者)는 철저하게 계산된 능력입니다. 냉철하고 치밀하게 계산하여 조직을 관리하는…… 그러니까, 한눈에 조직 전체를 총괄하여 보는 뛰어난 통찰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능력입니다. 그의 냉철함과 치밀함, 그리고 통찰력은 이미 조정중신(朝庭重臣)들 사이에도 정평이 나 있습니다. 허나…… 그는 또 기관토목 등의 잡학을 유난히 좋아해서, 고지식한 조정중신들로선 그 때문에 기용을 꺼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본래 소인(小人)은 자신의 역량 밖의 것은 보지 못하는 법이야." 태사의의 마의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런 비교로 본다면 본맹이 필요로 하는 인물은 후자(後者)에 가깝겠군." "……!" 중년수사의 눈가에 엷은 아쉬움의 빛이 스쳤다. 그것을 스쳐보며 마의 노인은 문득 호탕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하지만 본좌는 오히려 전자(前者)가 더 마음에 들어. 누구나 그렇게 반해 버리는 놈이라면 본맹의 인화(人和)에도 문제가 없을 테고…… 더구나 본좌는 요즘 후계자의 필요성을 몹시 절실히 느끼고 있으니까 말이오." * * * 차다. 아니, 찬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신의 혈관(血管)까지 모조리 동결되어 버릴 듯한 어마어마한 냉기(冷氣)였다. 그렇다고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었다. 단 한점의 미동도 없이 정지되어 있는 기류(氣流)는 그야말로 천지지간(天地之間) 최고의 냉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헌데 그 속에 뜻밖에도 하나의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全裸)의 여인이었다. 그렇다. 이 지옥(地獄)의 빙정(氷精)과도 같은 빙굴(氷窟)에서 이 여인은 대담한 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사실 여인이라기 보다는 소녀(少女)라고 해야 옳았다. 그러나 이 소녀의 아름다움에 대해선 얘기하지 말기로 하자. 훗날 분명히 또다시 등장할 것이니 그때 이야기 하기로 하자. 조물주 최대의 심혈로 이루어졌을 이 얼굴, 이 나신(裸身)의 극치미와 빙설(氷雪)의 정령(精靈)이 환생하여 탄생했을 이 차가운 아름다움에 대해선 도저히 지금 이야기할 자신이 없으므로. 정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찬미어(讚美語)를 수집해 놓은 다음이라면 혹시 모를까?


심지어는 지금 그녀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이 음성의 아름다움과 차가움에 대해서도 전혀 묘사할 자신이 없는 것이었다. "난……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무엇 때문에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해야 되는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녀의 주위에는 네 명의 여인(女人)이 나란히 신형을 세우고 있었다. 두 명의 노파와 두 명의 중년부인(中年婦人)이었다. 하나같이 몸서리 쳐지도록 차가운 여자들이었다. "하지만 하셔야 합니다. 소궁주(少宮主)께선 빙하지존(氷河之尊)의 전설을 재현하실 몸…… 아무리 사소하고 쓸데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과정에 들어 있다면 거치셔야 합니다." "우습구나. 남자의 관문(關門)이라니…… 우습지 않느냐?" 우습다고 말하는 전라소녀(全裸少女)의 얼굴에는 전혀 웃음기라곤 없었다. "그 따위 벌레 같은 사내들을 보고 무슨 빙심(氷心)의 흔들림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하지만, 소궁주! 조사(祖師)의 유훈에는 빙하지존에 이르는 최대의 난관(難關)으로 이성지관(異性之關)을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것이오니…… 거부하지 않으심이 온당한 걸로 아옵니다." "말도 안돼. 과정대로라면, 백 명(百名)의 사내들과 차례로 한 방에서 지내면서 전혀 흔들림이 없어야 된다는데…… 그런 시간 낭비는 정말 미련한 짓이다!" "소궁주! 그 말씀은 조사님에 대한 범례(犯禮)가 됩니다." 두 노파와 두 중년부인의 안색이 핏기를 잃었다. 실상, 잃을래야 잃을 핏기도 없는 얼굴들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인간같지도 않게 차고 아름다운 전라소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표정이 없었다. "좋아." 잠시 침묵한 그녀는 그렇게 서두를 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성지관을 거치긴 하겠다. 하지만 방법이 달라. 백 명은 싫다. 그런 시간 낭비는 내가 용납할 수 없으니…… 천하에서 가장 매력 있다는 사내 한 명으로 대신하겠다." "한 명?" "천하에서 가장 매력 있다는 사내…… 그래 봐야 벌레 중에서 조금 나을 테지만, 그대들이 그런 사내 한 명을 구해 와라. 빠를 수록 좋다. 어서 이 관문 같지도 않은 관문을 끝내고 싶으니까 말이야." 이어 전라소녀는 이제까지 보다도 더욱 가공할 냉기를 뿜어냈다. "나도 최대한으로 양보 했으니 이제 더 이상의 항명은 용서하지 않겠다. 어서 가라." "……!" "……!" 하는 수 없었다. 네 여자는 곧 신음이라도 흘려낼 기색으로 서로 마주 보더니 결국 고집을 꺾었다. "존…… 명(尊命)!" "존명(尊命)!" 그리하여 한 사람이 선택되었다. 그리고 환상과 신비가 휘몰아치는 오늘의 천하에서 전혀 엉뚱한 각도로부터 대파란(大波瀾)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시작했다. * * * 화천명(華天明). 그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먼저 그의 매혹적인 눈빛을 이야기 한다. 그의 시선이 얼마나 사람을 사로잡는가를 말이다. 그 다음은 풍부한 감수성이 느껴지는 그의 입술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유창한 달변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뿐만이 아니다. 짓궂을 정도로 날카로운, 그러면서도 결코 듣는 이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 깊은 인간미(人間美)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그의 해학(諧謔)과 풍자(諷刺)는 또 어떤가? 그렇다. 친구들이 그를 얼마나 좋아하고 그가 친구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리고 금릉(金陵)의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자랑스러워 하는지에 대해 사람들은 침을 튀겨가며 역설한다. 그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십칠세(十七歲)라는 어린 나이를 분명히 전제한 후에 그가 이년(二年) 만에 이루어 놓은 천화대번(天華大藩)의 신화(神話)를 말이다. 그가 산하업체(傘下業體) 마흔 다섯 개를 거느린 천화대번(天華大藩)의 총수(總帥)라는 직함을 얻기까지의 그 험난했던 과정과 눈부신 활약은 정녕 사람들의 중요한 이야기거리자 자랑거리다. 마지막으로 그에 대한 자랑거리가 하나 더 있다. 어쩌면 그것은 경악거리라고 해도 좋은 이야기다. 헌데도 그 개인이 지닌 사유재산은 오직 묵적색 피리(笛) 하나 뿐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말할 때는 말하는 자신조차 또 한 번 놀랍다는 투로 말한다. -그는 거상(巨商)이지 결코 거부(巨富)가 아니라네. 천화대번의 그 막대한 재상 중에 그 개인의 소유로 된 것은 그의 분신과도 같은 피리 하나 뿐이지. 심지어…… 그는 집도 없다네. 천화대번의 산하업체 중 하나인 천화대루(天華大樓)의 후원을 잠시 빌려 쓰고 있을 뿐이야. 놀랍지 않은가? 헌데 바로 오늘, 하나의 엄청난 소문이 청천벽력(靑天霹靂)처럼 금릉성을 강타했다. 아니, 그것은 남칠성(南七省) 전역을 강타했다고 해야 옳았다. 소문의 내용은 이랬다. -천화대번(天華大藩)이 파산(破産) 직전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처음 누구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 나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또 그것이 사실인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정확한 근거는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으나, 어쨌든 그 소문으로 인해 금릉성은 발칵 뒤집어졌다. 허나 사람들의 놀람은 잠시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 소문에 대한 믿음을 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소문 따위를 믿기에는 천화대번을 믿는 마음 속의 비중이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컸던 것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욱 큰 이유는 천화대번의 총수(總帥) 화천명(華天明)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신뢰가 가히 절대적이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아니, 반신반의(半信半疑)조차 하지 않았다고 해야 옳았다. 그러나 정녕 알 수 없는 것이 하늘의 뜻 아닌가? * * * 추적…… 추적…… 쏴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세우(細雨)였다. 빗발은 가늘었다. 뿌우연 수증기로 천지간을 온통 휘감으며 황홀하게 흩뿌려지는 가을 한복판의 안개비로 인해 적막에 싸인 세상은 고요하기만 했다. 천년고도(千年古都) 금릉성의 영화(榮華)도 조용히 빗속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후두둑…… 쏴아아아……! 간혹 바람이 비껴불 때마다 퇴색해 가던 나뭇잎에 빗줄기가 부딪치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파산(破産)이군." 빗 속의 금릉성을 바라보며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믿을 수 없도록 담담한 목소리였다. 창틀에 부딪히는 빗방울이 제법 차갑게 튀어올랐다. 허나, 그는 오히려 그것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결코 우람하진 않으면서도 더없이 강인해 보이는 그의 어깨가 촉촉히 빗물에 젖어가고 있었다. 훤칠한 신형이었다. 조금 마른 듯한 몸매에 약간은 창백한 피부를 지닌 청년이었다. "……." 창 밖을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은 청명하게 개인 가을 하늘처럼 한없이 깊고 서늘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지적(知的)인 깊이와 보는 이를 단숨에 사로잡는 매혹의 우수를 함께 담고 있기도 했다. 게다가 넓고 정갈한 이마와 진한 검미(劍眉), 곧고 섬세한 콧날, 그리고 전아(典雅)한 기품이 어린 입술 등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비록 고아(孤兒)로서 자수성가한 인물이긴 하나 결코 천하게는 태어나지 않은 출신(出身)의 비범함을 말해 주는 외모를 지닌 소년. 그는 바로 화천명(華天明)이었다. 그렇다. 당대의 소년 거상(少年巨商)이고 금릉의 자랑이자 이 땅의 상인(商人)들에게 살아 있는 신화라고까지 불리우는 천화대번의 총수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헌데 그는 조금 전 분명히 이렇게 중얼거렸었다. -파산(破産)이군. 그렇다면 천화대번이 정말로 파산을 했다는 말이 아닌가? 바로 그때였다. "참 쉽게도 말씀하시는군요. 파산이란 말을 그렇게 담담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천하를 통틀어도 당신 혼자밖에 없을 거예요." 나무라는 투였으나 무척이나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한 소녀였다. "……!" 기막히다는 눈빛으로 화천명의 등을 응시하고 있는 절세미소녀(絶世美少女)의 눈은 유난히 크고 맑았다. 또한 여자답지 않게 강렬하기도 했다. 일신에 짙은 자의(紫衣)를 걸친 소녀의 피부는 파리하도록 창백했다. 헌데, 바로 그런 모습이 소녀에게 실로 강한 인상을 형성하고 있었다. "후후……." 화천명은 문득 웃으며 돌아섰다. "아니지. 나 외에도 한 사람이 더 있어. 저 무혼(無魂)이란 녀석은 아예 표정조차 없지 않느냐?" 그렇다. 그곳에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탁자를 마주 한 채 석상(石像)처럼 미동없이 앉아 있는 한 청년(靑年)이었다. 나이는 화천명과 비슷한 십 팔구 세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허나 풍기는 기질과 분위기는 화천명과 판이하게 다른 인물이었다. 차가웠다. 살아 있는 인간다운 표정이라고는 얼굴 구석구석 어디에도 전혀 없는 그야말로 절대의 무감정(無感情)을 청년은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곧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해도 눈썹 한올 까닥하지 않을 것 같은 가히 완벽한 무심(無心)이었다. 게다가 그는 음성까지 정떨어지게 차가왔다.


"미안하다, 천명(天明). 나도 걱정은 하고 있다. 다만 걱정되는 표정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몰라서 이러고 있을 뿐이다." 분명히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조에는 하나도 미안한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못 고치는 것이 천성(天性)이라고 했던가? 화천명은 쓸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가르쳐 주지. 걱정되는 표정은 바로 이렇게 짓는 것이다." 화천명은 진짜로 걱정된다는 표정을 떠올렸다. "걱정된다, 정말. 네 병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말이다." "병……?" "안면근육마비증(顔面筋肉痲痺症) 말이다. 요즘 네 증세는 대단히 심각해서……." 돌연, 화천명의 말은 중도에서 끊어졌다. 자의소녀(紫衣少女)의 매서운 교갈 때문이었다. "그만 둬요!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잖아요!" 소녀는 어지간히 급하고 날카로운 성격을 지닌 모양이었다. 매섭게 아미를 치킨 채 두 사람을 쏘아 보는 눈빛은 그대로 독기오른 산고양이의 기세였다. "날 쏘아 보진 마라. 난 농담하지 않았다." 무혼이 말했다. 그러자 화천명도 정색했다. "나도 농담하지 않았다. 무혼의 병은 사실 우리의 파산만큼이나 심각한 얘기란 말이다. 그리고 네 병 역시……!" "제가 무슨 병이 있어요?" "묘독증(猫毒症)이란 거다. 걸핏하면 먹이를 뺏긴 고양이처럼 발톱을 세우는 그 병 말이다." 화천명의 어조는 그지없이 심각했다. 자의소녀는 더 이상 아미를 치켜들고 있을 힘을 상실해 버렸다. "참…… 나." 그녀는 혀를 차며 화를 참는 건지 웃음을 참는 것이 분간 못할 표정으로 화천명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망하기를 기다리고나 있던 사람처럼……." 문득 화천명은 빙그레 웃었다. 이어 이제까지의 장난기 어려 있던 태도와는 다른 깊고 서늘한 매혹의 시선으로 자의소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연아(燕兒), 사실 너도 정상은 아니다." "제가 왜요?" "넌 여자다." "그래요. 여자예요." "여자니까…… 지금쯤 울고불고 법석을 피웠어야 정상이란 얘기지. 설사 까무라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 자의소녀는 잠시 말없이 화천명을 바라 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강렬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자 화천명에 대한 강한 신뢰의 빛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저 묘연아(苗燕兒)는 말이예요……." 그녀는 말문을 열었다. "대가(大哥)곁에 있는 한 울지 않아요. 왜냐하면…… 대가는 곧 저의 희망이기 때문이에요. 대가 곁에 있으면 아무리 심각한 위기가 닥쳐와도 헤쳐갈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라구요!" 시선 만큼이나 강한 어조였다. 이때,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 무혼의 입도 열렸다.


"나도 그렇다." 그의 석교상 같던 얼굴에 조금이나마 감정이 떠오른 것도 바로 이때였다. 그것은 바로 화천명에 대한 신뢰의 감정이었다. 자의소녀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맹목적이라 해도 좋을 가히 절대의 믿음이었다. -묘연아(苗燕兒), -석무혼(石無魂). 바로 그들의 이름이었다. 한데 묶어 천화쌍보(天華雙寶)라고도 칭해지는 이들 두 남녀는 화천명의 왼팔과 오른팔로서 천화대번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는 두 수뇌였다. 그들을 일컬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만약 천화쌍보가 없었더라면, 그들의 화천명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바탕으로 행해지는 그 무서운 행동력(行動力)이 없었더라면 천화대번의 신화도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 그렇다. 남에게 신뢰를 받는다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그만큼 무거운 부담이기도 했다. "……!" 화천명은 서서히 창 밖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빗줄기가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다. 무거운 잿빛 하늘 아래 금릉성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누워 있었다. 뿌연 비안개 너머 흐려진 군옥산(君玉山)의 자태 또한 암울했다. "……." 그때였다. 더욱 거세져 가는 빗줄기 사이로 문득 지난 날의 영상이 아스라이 겹쳐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어쩌면 화천명의 마음이 약해진 때문인지도 몰랐다. '벌써…… 오년(五年)이 지났군.' 그는 내심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화천명의 뇌리로 오 년 전에 있었던 하나의 일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 * * 고아(孤兒)라는 현실은 슬픈 것이다. 우선 배가 고파서 그렇다. 하지만 배고픔보다도 더욱 슬픈 것이 있다. 어머니가 있는 다른 아이들의 환한 웃음, 그 눈부신 행복에 대한 질투심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 질투심을 망연히 되씹고 있는 고아들의 서러운 눈길이 더욱 슬픈 것인지도 모른다. 오 년 전, 화천명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 소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少女)의 큰 눈에는 전혀 슬픔이 없었다. 소녀는 다만 노려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때가 절어 새카만 얼굴과는 극히 대조적으로 유난히 강하게 빛나는 눈으로 말이다. 화천명은 그 눈이 마음에 들었다. "먹어." 화천명은 그 소녀를 향해 아껴두었던 떡 한 조각을 내밀었다. 한 조각이라곤 하지만 그것은 그가 가진 전부였다. 더구나 그는 꼬박 하루를 굶고 있었다. 헌데 소녀의 대꾸는 매서웠다. "난 거지가 아니야!" 화천명은 웃었다.


"그래, 넌 거지가 아니야. 나는 거지에겐 내 것을 주지 않아. 친구에게는 무엇이든 다 주지만……." "친…… 구?" "그래 친구! 지금부터 넌 내 친구야." "난…… 네 이름도 모르는데?" 소녀의 눈에서 매서운 눈빛이 가셨다. 화천명은 말을 이었다. "모르는 건 이제부터 알면 돼. 천명(天明), 내 이름은 천명이야. 성은 화(華)씨, 나이는 열 세 살이고…… 너는?" "연아…… 묘연아(苗燕兒)야, 나이는 열 두 살." "좋아, 그럼 내가 오빠로구나." "친구라면서……?" "의남매(義男妹)도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거야. 나이가 같으면 그냥 친구지만, 넌 나보다 한 살이 적으니까…… 하여튼 어서 받아. 오빠가 주는 거니까 배고프지 않더라도 받아 먹어." "좋아." 소녀는 시원스레 대답하며 떡을 받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다시 그것을 반쪽으로 나누어 화천명을 향해 불쑥 내밀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자, 남매는 뭐든지 나눠 먹는 거야. 너, 아니 오빠는…… 오빠니까 더 큰 거!" 그것은 바로 화천명이 묘연아를 처음 만났을 때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후후…… 대단한 고집이었다. 난 괜찮으니 아무리 혼자 먹으라 해도 끝내 말을 듣지 않았지. 결국은 집어 던져 버리는 바람에 둘 다 굶게 되었지만 말이야.' 화천명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어쨌든 지난 날은 아무리 어려웠던 시절도 그리운 법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몸서리쳐지는 기억도 있었다. 석무혼(石無魂)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던 날이 바로 그랬다. * * * "글쎄, 죽으려고 환장한 놈이 아니면 그럴 수가 있느냔 말이야!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내 엉덩이를 걷��� 차? 길가다 날벼락을 맞아도 분수가 있지! 원 세상에! 살살 다뤄선 안돼! 뼈를 분질러 놓아야 제 정신을 차릴 놈이야!" 못생기고 천박했으나 일신의 치장만은 눈이 핑핑 돌 정도로 화려한 한 명의 중년부인이었다. 그녀의 엉덩이를 다짜고짜 이유도 없이 걷어찬 모양인지 한 소년이 매를 맞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무자비한 폭행(暴行)이었다. 뼈를 분지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여 버리려고 작정한 듯한 십 수 명의 장한들의 몰매는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로 인해 치가 떨릴 정도였다. 허나 소년은 신음성 한 점 없이, 아니 표정조차 없이 그 무자비한 매를 묵묵히 견디고 있었다. 그것도 두 눈을 똑바로 뜬 채로 말이다. 화천명이 거기에 뛰어든 것은 못마땅한 일을 도저히 못 참아내는 그 성격 탓이었다. 하지만 그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상대는 이미 흉폭해질 대로 흉폭해진 십 수 명의 장한들이 아닌가? 화천명마저 여지없이 그들의 흉성(兇性)의 제물이 될 때였다. 다시 묘연아가 달려들었다. 그녀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 날카로운 식도 하나를 미친 듯이 휘두르며 울부짖었던 것이다. 그 기세가 얼마나 표독스러웠는가는 구태여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장한들이 질려서 달아나 버릴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일이 끝날 수는 없었다.


엉덩이를 걷어채인 중년부인의 신분이 하필이면 그곳 장사성(長沙城) 제일의 호족(豪族)이자, 거부(巨富)인 황녹산(黃綠山)의 정실(正室)이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다시 끌려간 그들은 사흘 밤낮 동안 매를 맞고 쓰레기처럼 산 속에 버려졌다. 이슬의 차가운 감촉에 의해 화천명이 가까스로 정신이 들었을 때 어두운 하늘에선 새벽별이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 화천명은 이렇게 물었다. "이봐, 뭣 때문에 엉덩이를 걷어찼지?" 화천명은 혼절해 버릴 듯 엄습해 오는 전신의 통증보다도 그것이 더욱 궁금했다. 소년 석무혼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너무 화려해서." 간단한 한 마디였으나 화천명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화려해서? 하하하! 좋아. 충분히 이유가 된다. 이유가 없었다면 널 혼내 줄 참이었는데 다행이다." "……!" 석무혼은 누운 채 고개를 돌려 화천명을 노려보았다. 헌데 눈길이 마주치자 갑자기 웃음이 치밀어 온 것은 대체 왜였을까? 서로의 퉁퉁 부은 얼굴 때문이었을까? 화천명은 킬킬대고 웃었다. 찰나지간 석무혼의 얼굴에도 이지러진 웃음이 스쳐갔다. 그때, 묘연아는 어두운 허공을 노려보며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난 부자가 될 테야." * * * "대가!" 묘연아의 외침에 의해 화천명은 과거의 영상에서 깨어났다. "이제 말씀 좀 해 보세요. 설마 진짜로 끝장이란 얘기는 아니겠지요?" "……." 화천명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는 묘연아를 주시하며 아름다운 입술을 열었다. "연아…… 아무래도 넌 울어야 되겠다." "예?" "나로서도 이번엔 방법이 없어. 희망이 절벽이다." 화천명의 수려한 윤곽에 쓸쓸한 고소(苦笑)가 스쳐갔다. "……!" 묘연아의 얼굴이 섬칫 굳어졌다. 석무혼의 깡마른 신형에도 희미한 경련이 흘렀다. 그렇다. 화천명은 어느 때 어떠한 위기가 닥쳐와도 결코 절망이란 말을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헌데 지금은 달랐다. 그의 입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절망이라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천화대번의 급작스런 파산의 배경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완벽한 음모(陰謀)에 걸려 들었다. 단 한 군데도 활로(活路)가 없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모를까……." "……!" 묘연아와 석무혼은 아연히 서로 마주 보았다. 문득 석무혼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천명, 옥대인(玉大人)에게 도움을 요청할 순 없을까?" "그래요. 옥대인! 그 분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활로가 트일 거예요." 허나 화천명은 틀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순간 묘연아의 표정이 매서워졌다. "흥! 그 계집애 때문이죠? 그 계집애 때문에 옥대인께 더 이상 폐를 끼치기 싫으신 거죠?" "바보 같으니!" 화천명은 낮게 일갈했다. 천부의 위엄이랄까? 묘연아가 찔끔하여 입을 다물 만큼 가히 압도적인 기운이 그의 전신에서 발산했다. 허나 그것은 잠시 뿐이었다. 화천명은 이내 평소의 표표한 태도로 되돌아가며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아직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옥대인이 어떤 사람이냐? 무서울 정도로 영민한 눈과 귀를 천하에 깔아두고 있는 사람이 아니냐? 그렇다면 우리의 절망적인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을 리는 결코 없다." "……!" "헌데도 지금까지 우리에게 아무런 문의도, 기별도 없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다른 때 같으면 이미 수십 번 이상 상황결과를 묻고 있을 분이 말이다." "설…… 마……?" 묘연아의 안색이 핏기를 잃었다. 화천명은 약간 메마른 웃음을 흘리더니 이렇게 말을 이었다. "철저한 무관심은 바로 포기라는 말과 상통한다. 그리고……." 그의 어조가 강해졌다. "너희들이 또 하나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이번 음모는 상당 시일 전부터 철저하게 계획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옥대인의 영민한 눈과 귀는 오늘 이전에 충분히 그 사실을 알 수도 있었으리라는 점이다!" "그럼……!" "단언하진 말자. 아직은 추측 뿐이니까. 다만 한 가지…… 옥대인의 도움을 바랄 수 있다는 건 단언해도 좋다." 화천명은 이어 비와 어둠이 겹쳐지기 시작하는 창 밖으로 시선을 옮기며 독백처럼 말했다. "어쨌거나…… 옥대인을 찾아가 보긴 하겠다. 그 동안 돌봐 준 은혜에 대한 사례도 해야 될 테니까……." 제 3 장 옥대인(玉大人)의 내력 * * * 돈(錢). 천하에서 가장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 다시 말해 금력(金力)! 실질적인 금력을 행사할 수 있는 천하제일인은 과연 누구인가? 누군가 그렇게 묻는다면 보통 사람들은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자신없는 어조로 북경(北京)의 이병상(李丙相)이나 악양(岳陽)의 금천중(金天中), 그리고 장사(長沙)의 황녹산(黃綠山)을 꼽아 볼 뿐이다. 그러나 이병상이나 금천중, 황녹산 등에게 과연 맞느냐고 되물어 본다면 그들은 씁쓸한 어조로 이렇게 단언할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어찌 감히……. -금릉(金陵)의 옥대인(玉大人)에게 비하면 우리 따윈 부호도 아니오! 대체 옥대인(玉大人)이라는 자는 누구인가? 세상에 떠도는 소문을 모아 재구성해 보면 대충 옥대인의 정체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 본명(本名)…… 미상(未詳),


연령(年齡)…… 오십대(五十代)로 추정, 출신(出身)…… 불명(不明), 직업(職業)…… 대금업자(代金業者), 지하금융계(地下金融界)의 제왕(帝王).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이상이 전부다. 간단히 말해 천하의 상계(商界)를 막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신비인(神秘人)이 있다면 바로 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이년전(二年前). 십 육 세의 한 소년(少年)이 배짱좋게 그 희대의 금력가(金力家)인 옥대인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황금(黃金) 십만냥(十萬兩)만 빌려 주시오. 상환 기간은 일년(一年), 이자(利子)는 연백할(年百割), 담보는 소생 화천명의 인물됨. "……." 옥대인은 한참이나 뚫어지게 소년을 바라보고 있다가 아무 말 없이 황금(黃金) 백만냥(百萬兩)을 꺼내어 내밀었다. 소년도 아무 말 없이 황금을 챙겨들고 일어섰다. 소년이 나간 후 하인(下人) 하나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옥대인에게 물었다. "얘기한 금액은 십만 냥이온데…… 어째서 백만 냥이나 내주셨습니까?" 옥대인은 희미하게 웃더니 이렇게 답하였다. "담보가 훌륭해. 훌륭한 담보는 훌륭한 만큼의 대우를 해 주는 것이 대금업(代金業)의 법도(法度)다. 게다가 이자가 연백할(年百割)이 아니냐? 십만 냥보다는 백만 냥을 빌려 주는 것이 훨씬 이익이 크지." * * * 밤이 깊어가는 시각이었다. 줄기차게 이어지던 가을비도 서서히 그쳐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제 하룻만에 일어났습니다. 하룻만에도 완벽하게 파산할 수 있다는 교훈을 소생은 이번 일로 확실하게 얻은 셈입니다." 화천명은 이 년 전과는 전혀 다른 용건으로 신비의 대금업자 옥대인(玉大人)과 마주앉아 있었다. 투박하리만큼 검소한 치장의 한칸 거실 안이었다. 탁자를 마주한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옥대인의 풍모는 흔히들 연상키 쉬운 고리대금업자의 전형과는 완연히 거리가 멀었다. 우선 청수했다. 머리칼도 흰털 한올 섞이지 않은 윤기있는 흑발(黑髮)이었으며, 가지런히 빗어 상투를 틀어올린 모습은 오관의 청수한 윤곽과 더불어 가히 대학자(大學者)의 풍모를 방불케 했다. 다만 감정의 변화가 거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어서 사람들의 접근을 쉽게 허용치 않을 인상으로 보였다. 허나 그것도 화천명에게만은 예외였다. 지금처럼 웃음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비록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피식 흘려보내는 웃음이긴 하지만. "꽤나 비싸게 얻은 교훈이었군, 그래." "후후후…… 사실 조금 비싸긴 했습니다. 제 개인 재산이 피리 하나 뿐이라는 소문을 명실상부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으니까요." 화천명은 태연하게 웃었다. "어쨌든…… 그 간의 세부경과를 제가 말씀드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만 대인께서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실 테니……." "아니, 자네 입으로 듣고 싶네."


옥대인은 고개를 저었다. "들은 이야기하고는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고…… 노부는 보다 확실히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네." "필요가……?" "음…… 그래야 노부의 돈을 빌려간 놈들에게 자네가 얻은 교훈을 확실히 일러 줄 것이 아닌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혹시라도 변제능력이 전무해지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라고 말일세." 화천명은 기가 찼다. 능숙한 고리대금업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지 않은가? "대, 대단하십니다. 어쩐지 날로 사업이 번창하시더라니……." "왜, 불만인가?" "전혀 아닙니다. 단지…… 남의 일에도 조금이나마 슬픈 빛을 보여 주시는 것이 보다 인간적이 아닐까 해서 드려본 말이었습니다." "당사자가 조금도 슬픈 빛이 없는데 내가 왜 슬퍼해? 노부는 손해보는 짓은 하지 않네." 딴은 그렇다. 당사자인 화천명이 이토록 태연하니 남의 동정을 바랄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물론 바라지도 않지만 말이다. 옥대인은 재촉했다. "어서 자네가 얻은 교훈이나 얘기하게. 노부는 자네도 알다시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몸이라네." 그래서 눈을 뜨지 않는 것일까? 옥대인은 아직까지도 그대로 눈을 감은 채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는 사람을 관찰할 때가 아니면 여간해서 눈을 뜨지 않는 버릇을 지니고 있었다. 그 버릇을 일컬어 남을 병자(病者)로 만들기 좋아하는(?) 화천명은 암흑애호성(暗黑愛好性) 가시기피증(可示忌避症)이라 이름해 놓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눈을 뜨셔야 할 겁니다, 옥대인 어른!' 화천명은 빙긋이 웃더니 이어 정색한 어조로 말했다. "저 역시 대인 못지 않게 바쁜 몸입니다. 그리고 대인께서도 익히 아시다시피 소생에게는 워낙 뛰어난 선견지능력(先見之能力)이 있어, 대인의 요청이 계실 줄 미리 짐작하와 이렇게 사건의 개요를 적어 왔사오니…… 부디 그 밝으신 혜안(慧眼)으로 읽어보시기 바라오이다." 턱! 두루마리 하나가 탁자 위에 펼쳐졌다. 헌데 옥대인은 눈꺼풀도 움직이지 않았다. "읽어 주게." "싫습니다." 화천명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쉬운 분이 읽으셔야지요. 저도 손해보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 결국 옥대인은 눈을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옥대인의 눈은 정녕 깊었다. 정말이지 한 쌍의 벽해(碧海)처럼 깊으면서도 유현(幽玄)한 눈빛이었다. 화천명은 말문을 열었다. "그 좋은 눈을 왜 썩히십니까? 아깝게……." "썩히다니? 아낄 뿐이야. 볼 가치가 없는 것은 보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네." 옥대인은 무감동하게 말하며 펼쳐놓은 두루마리로 시선을 가져갔다.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은 이러했다. <십 개 전장(錢場)…… 구월(九月) 사일(四日) 자시(子時)를 기해 전금(全金) 도난(盜難). 열 곳의 사고가 동시에 일어난 것과 수법의 정밀성, 계획성으로 보아 범행목적(犯行目的)은 돈보다는 본 천화대번의 파산을 노린 것으로 사료됨.


오 개 마장(馬場)…… 동일(同日) 인시(寅時)를 기해 삼천(三千)여 마리의 건마(建馬)가 한꺼번에 병마(病馬)로 화함. 그 중 몇 마리의 대소변에서 독극물(毒極物) 검출, 회복가능성은 전무(全無). 칠 개 포목상(布木商)…… 동일(同日) 묘시(卯時)를 기해 삼백만필(三百萬疋)의 비단(錦)이 모조리 폐포(捿布)로 화함. 조사 결과 쥐떼의 습격으로 밝혀짐. 최소한 십만 마리 이상으로 추정됨. 팔 개 도박장(賭博場)…… 동일(同日) 오시(午時)부터 술시(戌時) 사이, 이십사명(二十四名)의 고수(高手)가 여덟 곳에 차례로 입장(入場)하여 전승(全勝)을 기록하고 돌아감. 그 결과 팔 개 도박장의 팔대금고(八大金庫)가 완전히 빔. 그들 이십 사 인은 결코 속임수를 사용하지 않았음. 합법적(合法的)이면서도 교묘하게 본장(本場)의 도수(屠手)들을 유도, 승부(勝負)를 거절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그들의 그 신속한 승부와 철수는 가히 눈부신 것이 었다고 현장의 관계자들이 증언. 육 개 기루(妓樓)…… 동일(同日) 신시(申時), 본전(本廛)에서 구입한 물건 중 가짜가 있었다는 주요 고객들의 신고가 빗발침. 확인 결과 사실로 판명됨. 뿐만 아니라 세 곳의 재고물품 전부가 가짜로 바꿔치기 되어 있음이 직후 밝혀짐. 기판매품(基版賣品) 중에서도 가짜가 상당수에 달함. 가짜는 전문가의 안력으로도 쉽게 분간되지 않을 만큼 진품(眞品)과 거의 흡사함. 고객들의 신고가 거의 같은 시간에 빗발친 것으로 보아 누군가 알려준 자가 있으리라 추정됨. 본전의 신용(信用)은 급격히 하락, 회복불능으로 단정됨.> "이상…… 무사한 곳은 여섯 개의 객점(客店) 뿐입니다. 허나 그것도 가짜 고서화(古書畵)와 골동품을 변상해 주고 나면 여지없이 거덜나고 맙니다." 화천명의 어조는 그래도 태연했다. 다만 조금 전까지의 장난끼가 사라지고 없을 뿐이었다. 옥대인은 어느 새 다시 눈을 감고 있었다.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군, 그래." "있을 수 있으니까…… 제가 말한 것 아닙니까?" "결정적인가?" "���. 다른 곳은 금전문제가 대부분이니 어떻게 복구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물론 그것도 이 년 전처럼 무턱대고 아무나 찾아가서 화천명의 이름을 담보로 잡혀야 합니다만……." 화천명은 비로소 조금이나마 심각한 기색을 드러냈다. "문제는 신용(信用)입니다. 아시다시피 천화대번의 주력업체(主力業體)는 세 곳의 고품전(古品廛)인데 이번 사건으로 완전히 불신(不信)을 받고 있습니다. 게다가…… 십개전장의 불신사태도 심각합니다. 이미 발행한 전표(錢票)의 지불능력이 상실됐으니 말입니다." "흠……." 옥대인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득 물었다. "이제 어쩔 셈인가?" 화천명은 이렇게 대답했다. "앞으로의 계획 같은 건 아직 세울 때가 아니라고 봤습니다." "그럼…… 자네가 키우는 고아(孤兒)들은? 삼백 육십 명이나 되는 걸로 알고 있네만." 고아(孤兒)들. 그렇다. 화천명은 삼백 육십 명의 고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천화대번의 존재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 잠시 대답이 없는 화천명의 눈가에 엷은 우수(憂愁)가 들어찼다. 그것은 실로 아름다운 그늘이었다. 허나, 이내 화천명은 본래의 쾌활한 성정(性情)을 내보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아이들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미 모두들 웬만큼 컸고…… 이제는 스스로 자립(自立)할 때도 됐으니까……." "다행이군. 사실 돌봐 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야." 문득 말을 마치고 침묵하던 옥대인이 서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웬일인가? 갑자기 눈을 뜨는 건. 헌데 좀처럼 감정이 나타나지 않던 그 눈에 조금 기이하다는 빛이 일렁인 것도 바로 그 때였다. "자넨…… 흉수(兇手)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군. 분노의 빛도, 의문스런 기색도 없어. 궁금하지 않은가? 자네를 파산으로 이끈 원흉이 누구인지……?" 화천명은 빙그레 웃었다. "물론 궁금합니다. 당연히 분노도 품고 있고…… 허나," "허나?" "지금은 궁금해 하고 분노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하지 않습니다. 이번 사건을 종합해 보건데…… 흉수는 철저한 계획 아래 본 천하대번을 노리고 일을 실행 했습니다. 아니 천하대번 자체를 노렸다기 보다는…… 저 화천명 개인을 노렸다고 보는 편이 타당합니다." "……!" "그렇다면 흉수는 조만간 제 발로 내 앞에 나타날 겁니다. 구태여 힘들여 찾아내지 않더라도 제 스스로 나타납니다. 그때!" 화천명은 강하게 말을 끊었다. 이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 보여 주지요. 이 화천명이 누구인가를. 최소한 남이 의도한 바대로 쉽게 움직여 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보여 줘야 천화대번의 형제들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화천명은 서서히 웃음을 거두었다. "어쩌면 복수(復讐)가 행해질지도 모릅니다. 화천명의 복수…… 만약 그것이 행해진다면……." "아마 쉽게 감당할 수 있을 성질의 것이 아니겠지." 옥대인이 대신 말했다. 진심인 듯 그의 어조는 보기 드물게 무거웠다. 화천명은 다시 미소지었다. "아마 그럴 겁니다." "……!" 옥대인은 묵직한 침묵을 보이며 그 깊고 유현한 시선으로 얼마 동안 화천명울 주시했다. 거기에선 미세한 불꽃처럼 감탄이 번뜩이고 있었다. '역시 대단한 놈이다. 정신없이 뛰어다니거나 아니면 절망하고 있어야 할 때, 이 녀석은 앉아서 사태를 파악해 내고 있다. 그것도 정확히!' 옥대인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회생불능이란 걸 알자 미련없이 포기하는 결단력도 놀랍고, 쾌활한 웃음 속에 번뜩이는 장부의 기개도 장하다. 과연 난세가 필요로 하는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릇이 너무 커 염려이긴 하나……!' 그때였다. 문득 화천명은 똑바로 옥대인을 정시했다. "대인, 한 가지 묻겠습니다." 그의 어조와 태도는 보기 드물게 진지했다. "……?" 막 눈을 감으려던 옥대인은 무의식 중에 다시 번쩍 뜨고 말았다. 당당하되 추호도 예의를 잃지 않는 태도로 화천명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 사건에서 대인께선 어떤 역할이셨습니까?" "……!"


뜻밖의 질문이었을까? 순간 옥대인의 미간이 꿈틀했다. "……." 그는 잠시간 대꾸없이 화천명을 응시했다. 두 개의 시선이 소리없이 부딪혔다. 옥대인의 시선이 유현(幽玄)하다면 화천명의 시선은 시리도록 서늘했다. 그런 가운데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의 시선이 둘 다 추측불허로 깊다는 것이었다. 허나 포용력 면에서는 오히려 나이 어린 화천명이 앞서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화천명에게는 관대함이 있었다. 결코 상대를 핍박하지 않는 관대함 말이다. 그렇다. 인간의 크기라고도 말할 수 있는 그것은 상대로 하여금 문득 한없이 왜소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만드는 것이다. '역시 그릇이 너무 커…… 선택에 잘못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알 수 없는 말을 내심 흘려내던 노대인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노부의 역할은 방관자였을 뿐이네." 찰나지간 화천명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다행이군요." 이어 화천명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행히 그간 베풀어 주신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이후, 대인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할진 모르겠으나…… 지금까지의 우정(友情)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던 걸로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뵈올 기회가 있기를." 정중한 포권을 끝으로 화천명은 표표히 신형을 돌렸다. 그러자 옥대인의 입이 열렸다. "노부가 왜 방관만 하고 있었는지 묻지 않나?"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아니 못해 주겠네." 어지간히 싱거운 노인이었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천명은 아예 묻지도 않았던 터였다. '결국 한 번은 당하는군!' 화천명은 고소(苦笑)하며 성큼 걸음을 떼어 놓았다. 헌데 그의 신형이 막 문 앞에 도달했을 때였다. 옥대인의 입에서 실로 엉뚱한 소리가 튀어 나왔다. "화대협(華大俠)!" '화대협?' 화천명은 방 안에 누가 또 있나 싶어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화씨 성을 가진 사람은 분명히 자신 뿐이었다. 그때였다. "자네는 장차 그렇게 불리우게 될 걸세." 옥대인은 눈을 감은 채 잠꼬대처럼 말하고 있었다. "당부하거니와 이제 장사는 그만 두시게. 자네를 진실로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인가를 생각해 보게. 일개 상인으로 있기에는 자네의 인물됨이 아깝다고 천하가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말일세." * * * 화원(花園)이었다. 만화(滿花) 만발한 가운데 은싸라기 같은 달빛이 한가득 흐르고 있어 화원은 한결 그 운치를 더했다. 그런 화원의 가운데 한 명의 백의소녀(白衣少女)가 있었다.


대략 십 칠 세 가량 되었을까? 얼음으로 빚은 듯 희디흰 옥부(玉膚)하며…… 굳이 하나하나 열거할 필요도 없이 오관(五官)의 아름다움이 극히 눈부시게 잘 조화된 얼굴이었다. 이 얼굴에서 느껴지는 것은 이를 데 없이 고결하고 이지적(理智的)인 기품이었다. 헌데 불구인가? 소녀는 그냥 서 있는 게 아니라 한 대의 사륜거(四輪車)에 섬약한 교구(嬌軀)를 실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얼굴에서 단 한올의 그늘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마도 타고난 천성이 청명(靑明)한 탓이 아닐까 싶었다. "……." 그런 소녀 앞에 화천명이 약간 멋적은 듯한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 뒤엉킨 시선과 시선 속에서 야릇한 침묵이 흐르길 얼마만이었을까? 문득 백의소녀의 화편(花片) 같은 입술 새로 탄식조의 음성이 새어나왔다. "역시…… 그냥 돌아 가시는군요." 화천명은 다시 걸음을 떼어 그녀에게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소?" "찾아 주시길 않으니 길목이라도 지킬 수밖에요." "……." 화천명은 씁쓸한 웃음을 떠올리며 그녀의 뒤로 돌아가더니 천천히 사륜거를 밀기 시작했다. 스르륵…… 스륵……. 잠시 망설이는가 싶던 백의소녀의 입술이 다시 나풀거렸다. "왜 요즘엔 절 피하시는지요? 화천명은 다시금 고소를 떠올렸다. "피한 것이 아니라 바빴을 뿐이오." "그럼 오늘도 역시……." "바쁜 길이오." 백의소녀는 그 말에 반달 같은 아미를 살픗 찡그렸다. "잠시 제 방에 들려 주실 틈도 없이 바쁘시단 말인가요?" "지금 가고 있지 않소?" 이어 화천명은 짐짓 어리둥절한 눈으로 급히 사방을 휘둘러 보았다. "가만 있자…… 그럼 이 길이 유심헌(幽心軒)으로 이어진 길이 아니었던가?" 유심헌(幽心軒)은 바로 백의소녀의 처소를 일컬는 것이었다. 화천명의 유들유들한 넉살에 그녀는 그만 풋하고 웃고 말았다. "순 엉터리 같은 사람!" 참으로 보기 좋았다. 달빛 아래 반짝 드러난 박속처럼 희고 가지런한 소녀의 치아가 말이다. 옥유향(玉幽香)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녀는 바로 옥대인의 손녀였다. 그렇다. 천생불구로 태어난 그녀는 옥대인만큼이나 많은 신비(神秘)를 간직하고 있는 소녀였다. 그 신비가 어떠한 것인지 굳이 이 자리에서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 * * 유심헌(幽心軒). 그곳은 연못 한복판에 그림처럼 우아하게 솟아 있는 정갈한 소축(小築)이었다. "……!"


그 소축으로 이어진 가교(佳橋)에 올라설 때쯤이면 화천명은 어김없이 기이한 느낌에 휩싸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우나 화천명은 바로 이런 것이 살기(殺氣)라고 이름붙여진 느낌일 것이라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살기는 유심헌의 주위를 언제나 안개처럼 감싸고 있었다. "파산직전이라시던데……." 거부(巨富)의 손녀가 사는 곳답게 극히 화려하고 우아하게 꾸며진 거실 안이었다. 화천명은 의자를 끌어당겨 사륜거와 마주보고 앉으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됐소." "잘 됐군요." 화천명의 눈이 커졌다. "잘…… 돼?" 백의소녀 옥유향은 그윽한 웃음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잘됐어요." "……?" 화천명은 어이없다는 듯 멀뚱하게 그녀를 바라보더니 곧 안색을 진지하게 가다듬었다. "흠…… 언제부터요?" "무슨……?" "언제부터 남의 불행을 축하하고 즐거워 하는 취미를 갖게 되었냐 말이오." "……?" 옥유향은 아름다운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자못 심각하게 말을 받았다. "제게 그런 취미는 없는데요. 남의 행운을 즐거워 하는 취미라면 혹 모를까?" "그럼 내가 파산하게 된 것이 행운이란 말이오?" 옥유향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자신있게 잘라 말했다. "확실히 행운이죠. 상인의 굴레를 미련없이 벗어던질 수 있는 절대의 호기(好機)! 일순 그녀를 바라보는 화천명의 눈에 한 줄기 이채가 피어올랐다. "흠…… 그럼 그대도 나를 화대협이라 부를 셈이시오?" 옥유향은 대답 대신 그의 얼굴만 그윽히 정시하더니 말을 이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당신은 도무지 상인의 역할이나 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이예요. 당신은 보다 큰 일을 하실 분이예요. 더욱이 하늘은 이미 그에 상당하는 대업(大業)을 맡기기 위해 그만한 기량까지 당신에게 부여했어요. 그럼에도 그것을 거부했을 땐……." "날벼락이라도 어느 날 갑자기 내 머리 위에 내리꽂을지 모른다는 말이오?" "글쎄요. 어쩌면 그보다 더 큰 불행이 찾아올지도 모르죠." "……!" 화천명은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다가 피식 실소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좌우지간 하나 분명한 건…… 당신들 조손은 참으로 나를 잘 봐 주고 있다는 점이오." "정확하게 보고 있다는 말이 옳을 거예요." 이어 옥유향은 사륜거를 움직여 한쪽 서탁(書卓)으로 가더니 서랍에서 한 통의 두루마리를 꺼냈다. "자, 보세요." 그녀는 화천명을 향해 두루마리를 쫙 펼쳐 보였다. 그것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순백의 설봉(雪奉)을 우뚝 딛고, 한 자루 장검(長劍)을 옆구리에 비껴찬 채 백의무복(白衣武服)을 표표히 휘날리며 땅은 아예 안중에도 없다는 듯 하늘을 늠연히 우러르는 헌걸찬 기우(氣宇)의 미장부가 그려진 그림이었다.


"……!" 화천명은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왠지 피가 뜨거워 지는 것을 느꼈다. 허나 그는 곧 관심 밖의 그림을 보는 듯 지나가는 듯한 어투의 한마디를 뱉아냈다. "누군지 멋지게 생겼구려." 옥유향은 그런 그를 빤히 주시하며 야릇한 미소를 피워올렸다. "화천명이라는 사람이 그린 건데…… 아마 이 그림 속의 인물도 바로 그 화천명일 걸요?" "화…… 천명?" 화천명은 한 차례 고개를 갸웃하더니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어디서 많이 듯던 이름이군. 헌데 누구요? 혹시 그대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요?" "앞으로도 좋아할 사람이예요." "지금은……?" "생각 중이예요." "흠!" 화천명은 몹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헌데, 그 화천명이란 작자는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소?" 옥유향은 천천히 두루마리를 말아가며 애매모호한 기색을 떠올렸다. "글쎄요……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좋아할 거요." "예?" 너무 느닷없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옥유향은 깜짝 놀란 눈으로 화천명을 쳐다보았다. 화천명은 자못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시오. 그대 같은 여인을 어느 사낸들 싫어하겠소? 아마 모르긴 해도…… 그는 단지 표현만 안 하고 있을 뿐일 거요. 아니면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있거나 말이오." "적절한 때라 하심은……?" "뭐 그런 거 있지 않소? 예를 들자면 아직 정(情)을 줘선 안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든가…… 아마 대충 비슷할 것이오." "……!" 옥유향의 눈빛이 야릇하게 빛났다.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난들 어찌 알겠소?" "예?" "내가 그 사람의 머리속을 들어갔다 나온 것도 아닌데 어찌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냐 이 말이오. 다만……." "다만……?" "이렇게 추측할 수는 있소." "어떻게 말인가요?" "……." 화천명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옥유향의 얼굴만 빤히 주시하다가 이윽고 느릿느릿 입을 떼었다. "그대에게선 왠지 너무도 많은 비밀의 냄새가 풍기고 있다…… 화천명이란 그 작자, 혹시 그런 걸 꺼리고 있는 게 아니겠소?" "……!" 옥유향의 눈빛이 찰나간 기이한 빛을 뿌렸다. 화천명은 씨익 웃었다.


"신경쓰지 마시오. 추측이 그렇다 뿐이니까." "……!" "가야겠소. 조만간 다시 찾아오리다." 화천명은 볼 일을 마쳤다는 듯 벌떡 일어나 미련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 사륜거 깊숙이 몸을 파묻으며 한참 동안 문을 주시하던 옥유향은 문득 신비스런 미소를 베���물며 나직한 중얼거림을 흘려냈다. "모르시군요. 모름지기 비밀이란…… 간직한 사람이 더 괴로운 거예요." 옥유향은 천천히 사륜거를 돌렸다. 순간 한쪽 벽에 무심코 시선을 주다 말고 그녀의 아미가 꿈틀 움직였다. 마치 벽면의 일부가 떨어져 나오듯 유령처럼 나타나는 한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오오! 도대체 저 모습을 천계(天界)의 선인(仙人) 같다고 해야 하나, 지옥의 아수라(阿修羅) 같다고 해야 하나? 회의청년(灰衣靑年)이었다. 하지만 청년의 얼굴 반면은 온통 흉측한 화상(火傷)으로 인해 제멋대로 이그러졌는가 하면, 나머지 반면은 그대로 옥(玉)의 조각을 보듯 놀랄만큼 수려준미 했다. 허나, 그 인상을 전체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공포와 잔혹감이었다. 옥유향은 아미를 찡그린 채 곤혹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죠? 여긴 사형(師兄)이 올 수 없는 곳인데 말이에요." 옥유향에게서 사형이라고 불리운 회의청년은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와야 할 일이 생겼소." "무슨……?" "유전(遺典)이 분실되었소." 순간 옥유향의 얼굴에 격렬한 놀람의 빛이 솟아났다. "유…… 유전이 분실되었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청년의 음성이 이어졌다. "분실이라기 보다는 도난(盜難)이라 해야 맞겠지." "도난!" 옥유향은 망연히 되뇌이다 말고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회수는 가능한가요?" "지금 쫓고 있소. 쌍사(雙師)가 나섰으니 아마 놓치진 않을 거요." "쌍사가……?" 그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그제야 옥유향의 얼굴에 희미하나마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진작에 파기해 버렸어야 될 물건인데…… 바보같이 그런 것을 무엇 때문에 남겼는지……." 그녀는 아미를 찌푸리며 중얼거리더니 다시 회의청년의 얼굴에 시선을 꽂았다. "안 되겠어요. 사형도 가세요. 그리고 유전은 회수하는 즉시 그 자리에서 파기해 버리세요." 회의청년은 흠칫했다. "그러다 태모(太母)께서 아시면……?" "제가 책임지겠어요." "……!" 회의청년은 무엇인가 잠시 생각한 끝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대인(大人)께는 사매가 잘 말씀드리도록 하시오."


스윽! 말을 끝내자마자 그의 신형은 스며들 듯 벽 속으로 사라졌다. 때를 같이 해서 옥유향을 태운 사륜거도 갑자기 바삐 굴러가기 시작했다. 제 4 장 책자의 비밀(秘密) * * * "천화대번이야 천하에 비한다면 뭐 그리 대수로운 것이겠소?" "물론 설형 입장으로는 대수롭지 않겠지만 소제에겐 이 년에 거친 피와 땀을 모조리 쏟아낸 것이오. 게다가 이젠 천화대번의 수천 식솔이 오직 소제 한 사람에게 목을 걸고 있는 판국에 어찌 대수롭지 않다 할 수 있겠소?" "흠…… 결국 천화대번이 없어지지 않는 한 화형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다는 말이 되는데……." "후후…… 천화대번이 없어질 리가 있겠소?" "순 악담이시군. 허나 만약 그렇다손 치더라도 하루 아침에 망하지 않는 한 소제는 어떤 위기도 극복해 낼 자신이 있소." "하하핫! 역시 화형다운 말이오. 헌데, 만약 하루 아침에 망해 버린다면 어쩌시겠소?" "그야…… 그저 쓴웃음이나 짓고 있을 밖에……." "만약에 말이오. 이건 어디까지나 만약의 경우인데…… 정말 그렇게 된다면 쓴웃음이나 짓는 것보단 본인과 손을 잡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오. 천하라는 큰 먹이가 있으니까 말이오. 어떻소?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본인에게 와 주시겠소?" "글쎄요…… 설형보다 높은 자리를 준다면 일단 고려는 해 보지요. 하하하!" '그 말이 화근이었다.' 화천명은 굳은 표정으로 내심 중얼거렸다. 그렇다. 지금 그는 금릉의 시가지를 거닐며 몇 달 전에 있었던 혈정수사 설문비와의 만남을 떠올리고 있었다. 물론 그 당시 혈정수사 설문비의 말은 술자리의 농담에 불과했을지도 몰랐다. 허나, 훗날 화천명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져 그런 농담을 생각해 낼 수도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 날 이후 까맣게 잊고 있던 화천명으로선 그야말로 기가 차고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화천명은 어느 새 이런 단정까지 내리고 있었다. "어쩐지…… 하긴 녹수구곡맹(綠水九曲盟)이 아니고선 그런 기막힌 재주를 부릴 수 없지." 말인 즉 전후상황을 분석한 결과 천화대번의 갑작스런 파산은 바로 그 녹수구곡맹의 소행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녹수구곡맹(綠水九曲盟). 이는 천하 백만녹림도(百萬綠林道)의 규합된 세력이었다. 이른바 녹림맹(綠林盟)으로서 맹주(盟主)는 녹림 사상 최강의 고수로 평가되는 당대의 거인(巨人) 구곡대제(九曲大帝)라는 인물이었다. 사상초유(史上初有)의 녹림일총조직(綠林一總組織)인 만큼 그 방대한 조직은 천하제일의 대방(大 )이라는 개방( )마저 압도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 실력은 사도최강(邪道最强)의 천사련(天邪聯)과 정파동맹인 천지회(天志會)와도 당당히 맞겨룰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녹수구곡맹의 세력권 안에서는 해가 지지 않는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니 그 세력의 강대함이 어느 정도인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헌데 최근의 녹수구곡맹은 너무도 그 조직이 방대하다 보니 관리상의 심각한 난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자체붕괴라는 위험성까지 내포된 것이었다. 헌데 엎친 데 덮친다는 격으로 맹내(盟內) 거두(巨頭)들 사이에는 벌써부터 녹수혈제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무서운 암투(暗鬪)가 전개되고 있다는 소문마저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의 필요성은 실로 절대적이었다. 때마침 떠오른 사람이 바로 천화대번의 총수 화천명이라면 아귀는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녹수구곡맹의 총사(總師)이자 녹림제일뇌(綠林第一腦)라 불리워지는 혈정수사 설문비는 벌써부터 화천명의 용병(用兵)과 눈부신 통솔력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곤란한 사람이다.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엉뚱한 짓을 저지르다니…….' 화천명은 떫은 감이라도 한입 베어 문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아예 흉수를 녹수구곡맹, 아니 혈정수사 설문비로 단정을 내려 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화천명의 안색이 문득 미묘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말이오. 설문비 당신은 한 가지를 모르고 있소. 진짜 중요한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를 말이오." 무엇을 말함인가? "아시겠소? 나 화천명…… 이 몸은 절대 무림에 뛰어들 수가 없는 몸이라는 걸 말이오." 불현 듯 화천명의 얼굴 전체로 한줄기 씁쓸한 고소가 번져나왔다. "별다른 이유는 없소. 다만…… 비록 다섯 살 어린아이의 맹세이긴 하나 내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며, 내 어머니 앞에서 입술을 깨문 첫 번째 맹세가 바로 그것이었을 뿐이니까 말이오." 그랬나? 그렇다면 화천명은 다른 사람이 알고 있듯 천애고아가 아니라는 말이 아닌가? 무림에 뛰어들지 않을 것을 임종하는 어머니 앞에서 생애 최초의 맹세로 삼을 정도라면 화천명 그 자신의 출신 내력 또한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말도 되지 않는가? 이때였다. 저벅…… 저벅……! 화천명의 발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북쪽을 향해 옮겨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습관이었다. 자신의 뿌리를 생각할 때마다, 아니 어린 날의 맹세를 떠올릴 때마다 약속처럼 행동으로 옮겨지는 발걸음이었다. 북쪽, 금릉땅의 경계를 이루는 그곳에는 하나의 대하(大河)가 있다. 바로 청류하(淸流河)였다. 화천명의 발걸음은 청류하의 연변을 에워싼 만장단애(萬丈斷崖)로 향했다. 험하고 거대한 만장단애. 그렇다. 그것은 그의 잠재의식 속 가장 깊은 곳에 가장 큰 비중으로 자리잡고 있는 떨칠 수 없는 그리움의 장소였다. 그곳에서 그는 어머니와 이런 대화를 주고 받았던 것이다. -명(明)아, 약속해 주겠니? -뭘? -무림…… 네가 커서 무림이란 곳을 알게 되더라도 결코 발을 들여 놓지 않겠다고……. -……. -천벽의 영광…… 아니 가문(家門)의 영광 따윈 너에게 아무런 행복도 주지 않아. 거기에 집착하면 너 뿐만 아니라 네 주변의 사람까지 결국 불행하게 될 거야. -…….


-명아, 약속해 주렴. 엄마의 마지막 부탁을…… 무림인은 절대 되지 않겠다고 말이야. 이 엄마가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게 말이야. * * * "하지만 어머니…… 가문의 영광 따위가 비록 아무런 행복을 주진 않을지언정…… 거기에 장부의 일생을 걸어 볼만한 가치는 있는 거랍니다." 청류하(淸流河)가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였다. 자욱한 달빛 속에 화천명의 신형이 표표롭게 우뚝 서 있었다. 발 밑에서 굽이쳐 흐르는 청류하 건너편에는 어둠 속에 묻혀 있는 험준단애가 아득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세상은 더없이 고요했다. 정말이지 사방에서 부서지는 달빛을 보고 있노라면 더없이 회상에 잠기기 좋은 때였다. 그러나 화천명의 회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우울한 감정 같은 것에 오래 젖어 있기에는 그의 쾌활한 성격이 도저히 용납하지 않는 것이었다. "후후…… 됐습니다. 어머님, 장부의 일생을 걸만한 가치지사(價値之事)가 어디 가문에 대한 것 뿐이겠습니까? 부지기수로 많지요. 걱정마십시오. 사실 천벽의 영광 같은 것은 이미 잊은 지 오래이니까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화천명은 씨익 웃고 말았다. 사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죽음직전의 어머니에게서 애원받은 마지막 당부를 지키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계모(繼母)라면 혹시 모를까?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 이야기되는 천벽(天壁)의 영광(榮光)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 화천명은 웃는 얼굴 그대로 완만하게 신형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츄아악! 돌연 잔잔한 청류하의 수면을 가르며 물기둥 하나가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아니었다. 그것은 물기둥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물기둥인가 싶었던 그것은 달빛 아래 완연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 화천명이 움찔 놀라는 그 사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던 그 인영(人影)은 어느 새 절벽 위에 내려서고 있었다. 실로 귀신도 탄복하고 말 경이(警異)의 극상승신법(極上乘身法)으로 말이다. 헌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휘청! 그 놀라운 신법을 구사했던 장본인답지 않게 인영은 지면에 내려서기 무섭게 금새라도 고꾸라질 듯 크게 휘청거리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때였다. "……!" 화천명과 그 인영과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듯 정통으로 딱 맞부딪쳤다. 순간, 그 인영은 화천명보다도 더욱 놀란 듯 신형을 바로 잡음과 동시에 퉁겨지듯 일 장여를 물러섰다. 눈부시게 빠른 반응이었다. 뿐만 아니라 분명히 소스라치게 놀란 기색이 완연했으면서도 그의 입에선 일체의 소리도 없었다. "……!"


그는 신형을 세우자마자 칼 끝 같은 눈빛을 번뜩이며 화천명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화천명은 어안이 벙벙했다. 설명을 하자니 길어졌지만 지금까지의 일련의 사태는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시작되고 완결되었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느닷없이 이 밤중에 물 속에서 사람이 솟구쳐 나온 것도 뜻밖이거니와 나타나자마자 당장이라도 죽일 듯한 저 눈빛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정신없군!' 허나 화천명의 놀람은 곧 사라졌다. 여느 사람 같으면 혼비백산하고도 남을 일이었으나 체질적으로 타고난 담대한 천성은 아마 오랫동안 놀라는 것까지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입 밖으로 곧 전혀 준비하지도 않았던 일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안녕하시오?" "……!" "조금 춥긴 하지만 수영하기에는 그런대로 운치있는 밤이구려." "……!" 칼끝처럼 번뜩이던 상대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뚱단지 같은 화천명의 말에 조금 헷갈린 듯한 기색이었다. 젖은 채 흘러내리는 머리칼 때문에 확실한 용모는 보기 어려우나 그는 스무 살 안팎의 청년이 분명했다. 아마 상당한 중상을 입고 있는 듯했다. 걸레조각처럼 너덜너덜 찢겨진 흑의에선 피와 물이 범벅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화천명은 그의 그런 모습을 쑥 훑어 보더니 자못 걱정스럽다는 듯 입을 떼었다. "혹시…… 고기떼의 습격이라도 받은 게 아니오? 듣자 하니 청류하의 물고기들은 사납다던데……." 그때였다. 화천명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흑의청년의 눈빛이 문득 기광(奇光)을 번뜩 뿜어냈다. "그대 혹시…… 이름이 화천명……?" "……!" 이번에는 화천명이 헛갈리는 기색이었다. "내 이름이 그렇게 유명했던가?" 그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반면 흑의청년은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 적이 있다. 그대가 금릉거리를 지나가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대에게 인사를 하더군." "……!" 순간 화천명은 눈썹을 찌푸렸다. 알고 있는 건 좋았다. 사실 그는 유명한 사람이니까. 헌데 그 유명한 사람한테 대뜸 반말을 지껄이는 건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혀가 짧아서 그런 건 분명히 아니렷다?' 자연 가는 말도 고울 리가 만무했다. "나를 알고 있다니 마침 잘됐군. 우리 친구 해 버리지 뭐. 헌데 넌 이름이 뭐냐?" 허나 이 순간 흑의청년은 대답 대신 섬전(閃電) 같은 눈빛으로 사방을 날카롭게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 간이었을까? "……!" 문득 그의 눈에 어떤 결단(決斷)의 빛이 번뜩 스쳐 지났다. '됐어! 아직 여유가 있다!'


이어 그는 파리한 미소를 떠올리며 화천명에게 힐끗 시선을 던졌다. "나 말인가? 이름은 묵비혼(墨秘魂). 친구해 버리자는 그대의 말에 전폭적으로 동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러면서 그는 화천명의 코앞까지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 화천명의 시선이 기이하게 빛났다. '이 친구 마음에 드는데……?' 그렇다. 묵비혼이란 이름의 이 상대는 확실히 화천명의 마음에 들만한 요소를 다분히 갖추고 있었다. 전폭적으로 동의를 하는 거창한 말투도 그렇거니와, 우선 상식적인 인물이 아닌, 조금 해괴한 인물이라는 그 하나만 해도 일단 마음에 들만한 요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화천명은 문득 이제까지의 장난기를 버리고 진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봐, 친구가 되는 것도 좋지만 우선 자네의 상처부터 치료해야 되지 않겠나?" 흑의청년 묵비혼은 씨익 웃으며 말문을 이었다. "이건 치료가 될 상처가 아니야. 그보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 주겠나?" "부탁?" "길게 얘기할 시간이 없네. 이걸 잠시만 받아 주게." 묵비혼은 품에서 하나의 목함(木函)을 꺼내더니 다짜고짜 화천명의 손에다 덥석 쥐어 주었다. 그리고는 다급히 말을 이어갔다. "천하의 안위가 걸린 일이네. 다른 건 묻지 말고 삼일(三日)만 자네가 보관하고 있게. 만약 삼 일이 지나도 내가 찾으러 가지 않으면 천지회(天志會)의 출천대협(出天大俠) 탁몽(卓夢)어른께 전해 주게. 그리고 이 일은 절대 비밀리에 행해져야 하네." "출천대협 탁몽……." "당금 천하에서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지. 이것이 그 분께만 전해진다면 나는 그런대로 안심하고 죽을 수 있네." "죽어?" 화천명은 눈을 크게 뜨고 그와 목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그러니까…… 삼 일 안에 자네가 이것을 찾으러 오지 않으면 자네는 이미 죽은 걸로 봐야 한단 말인가?" "후후…… 눈치 한 번 빨라 좋군." 이어 묵비혼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이런 곳에서 자네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네." 화천명은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정시하며 입을 열었다. "자넨…… 나를 믿는가?" "첩자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묵비혼은 간단히 잘라 말했다. '첩자?' 화천명이 내심 의아해 하고 있을 때였다. 묵비혼은 씨익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허나…… 세상에서 말하기를 화천명은 믿어도 된다…… 믿어서 손해 볼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들 말하더군. 그러니 난들 별 수 있겠나? 그냥 믿을 수……!" 말을 잇다 말고 돌연 묵비혼의 안색이 흠칫 일변했다. 그는 주위를 한 차례 날카롭게 쓸어본 뒤 긴박한 어조로 말했다. "어서 그것을 품 속에 넣게. 놈들이 벌써 가까이까지 접근해 왔네." "……!"


화천명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는 다시금 묵비혼의 얼굴을 뚫어지게 정시하더니 군말없이 목함을 품 속에 넣었다. 그것은 곧 묵비혼의 부탁에 대한 승낙의 의미였다. 묵비혼은 흰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고맙네. 그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말을 끝내기 무섭게 그는 그대로 지면을 박차고 솟구쳐 올랐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쐐애액! 느닷없이 허공의 한 곳에서 한 줄기 뇌전(雷電) 같은 경기(勁氣)가 쏘아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비단 너무도 돌발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미리 알고 있었다 해도 도무지 피할 수 없을만큼 무서운 속도로 묵비혼의 가슴에 작렬했다. 퍽! "우욱!" 둔중한 파육지음(破肉之音)과 비명이 동시에 울려퍼지는 순간 용수철처럼 튱겨져 지면에 나동그라지는 묵비혼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또 한사람의 모습이 장내에 드러났다. 정말이지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아 올랐는지 모를 정도로 신비스럽게 말이다. 회의인(灰衣人)이었다. 그는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묵비혼의 바로 앞에 우뚝 신형을 세우고 있었다. 오오! 이 사람, 옥(玉)을 다듬은 듯한 극미(極美)의 얼굴과 지옥아수라의 흉측한 얼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이 사람은 바로 옥유향의 처소에 나타났던 그 회의청년이 아닌가? 묵비혼은 땅을 짚고 간신히 상체를 일으키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너…… 너는……?" "내가 누군지 알 필요는 없겠지. 넌 죽어 주기만 하면 되니까." 회의청년은 극히 무심한 음성으로 묵비혼의 말을 끊은 뒤 성큼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단지 그랬을 뿐이건만 피를 말릴 듯한 살기(殺氣)가 폭풍처럼 일어나며 주변의 공기를 압도했다. "……!" 긴장하여 사태를 지켜보던 화천명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었으나 입술은 얼어붙은 듯 떨어질 줄을 몰랐다. 심지어는 손가락 하나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의식할 수 있었다. 겁나서가 아니었다. 회의청년이 전신으로 뿜어내는 살기가 그토록 가공했기 때문이었다. 이때였다. "……!" 회의청년의 우수(右手)가 천천히 치켜 올려지는 것이 화천명의 시선 속에 들어왔다. 그리고 한 마디가 이어졌다. "가라!" 도저히 죽음을 내리는 사람의 그것답지 않게 나직한 음성과 더불어 회의청년의 우수가 형용할 수 없는 속도로 공간을 갈랐다. 슈우욱! 순간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 있었던 것일까? 파파팟!


묵비혼의 신형이 형용할 수 없는 속도로 한 차례 빙글 뒤집히는가 싶더니 어느 샌가 그의 우수에서 열 줄기 지력이 화살처럼 폭파되어 나왔다. '앗!' 회의청년이 멈칫하며 옆으로 슬쩍 미끄러지는 사이였다. 파라랏! 묵비혼은 마치 두더쥐처럼 지면을 뚫고 지중(地中)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가히 눈부신 반응이었다. 묵비혼은 기가 막힌 은신(隱身)의 비술(秘術)을 한꺼번에 보여 주었던 것이다. "제법이군." 회의청년은 냉소를 터뜨리며 지면을 발로 거세게 내리찍었다. 와르르르……! 순간, 주위 십여 장 내의 지면이 흡사 지진을 만난 듯 무섭게 진동하더니 어느 곳에선가 한소리 답답한 신음이 터져나왔다. "우욱!" 뒤 이어 땅거죽을 뒤집으며 묵비혼의 신형이 번쩍 솟구쳐 올랐다. 아니었다. 퍼억! 솟구쳐 올랐다 싶은 순간, 어느 샌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회의청년의 우수가 칼끝처럼 묵비혼의 등을 헤집고 있는 것이 아닌가? "크윽!" 촤아앗! 짧은 비명성이 터지는 순간 붉은 핏물이 분수처럼 허공에서 난무했다. 이어 묵비혼은 오륙 장 앞에 짚단처럼 나동그라졌다. 등뼈가 훤히 들여다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였다. 그로 보아 더 이상 거동불가(去動不可)의 엄중한 상태가 분명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파라락! 묵비혼은 나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튕겨올라 계속 도주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는 채 십여 장도 도망갈 수가 없었다. 스슷! 마치 그쪽 길을 지키고 있었다는 듯 불쑥 솟아나는 두 개의 괴영들 때문이었다. "……!" 묵비혼이 그들을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늦은 후였다. 휴우우웅! 그 두 사람이 쳐낸 강맹무비한 장력이 지척까지 쇄도해 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피할 엄두조차 낼 겨를이 없었다. 꽈꽝! "으아악!" 처절한 단말마와 함께 묵비혼은 실 끊어진 연처럼 날려가 절벽의 한 귀퉁이에 처참하게 내동댕이쳐졌다. 헌데,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보라! 이제는 패대기쳐진 개구리처럼 사지를 축 늘어뜨리고 있어야 할 묵비혼이 또 다시 벌떡 일어서더니 냅다 절벽 아래로 신형을 던지고 있지 않은가?


"저……!" "앗!" 동시에 두 괴영은 고스란히 의표를 찔린 듯 급히 서로의 시선을 찾았다. 허나 다음 순간, 팟! 파아앗! 뭉쳐 있던 안개가 흩어지듯 두 괴영은 감쪽같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회의청년은 미동도 없이 묵비혼이 떨어져 내린 절벽에 시선을 주고 있더니 문득 나직한 중얼거림을 흘려냈다. "기막힌 놈이군. 허나…… 너는 절대 오늘을 넘기지 못한다."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야천(夜天)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그대는 왜 쫓지 않았는가?" 불쑥 등 뒤로 와닿은 음성이 있었다. "……." 순간 회의청년의 시선이 힐끗 어깨너머를 향했다. 화천명이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회의청년은 희디흰 미소를 떠올리며 느릿하게 돌아섰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그 자를 쫓지 않은 것은 그대에게 볼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 "내게……?" 화천명이 반문했을 때였다. 회의청년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화천명은 그 손을 힐끗 쳐다보더니 되물었다. "내가 그대에게 빚진 것이 있었던가?" "시간을 끌 모양이군." 회의청년은 귀찮은 듯 한 마디 내뱉고 내밀은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일체의 기척이나 소리도 없었다. 단지 화천명은 가슴 한 부분으로 극히 미미한 충격을 느꼈을 뿐이었다. '무슨……?' 화천명이 의아해 하며 막 무슨 말인가를 하려 할 때였다. 회의청년이 먼저 입을 떼었다. "그대가 아닌 다른 놈이었다면 이미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을 것이다. 우리를 보았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죽을 이유는 충분하니까 말이야." "……!" "후후…… 그렇게 바보 같은 얼굴을 할 필요는 없어. 자, 그럼 다음에 또……." 말이 끝났다 싶을 때 그의 모습은 이미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 화천명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 회의청년이 손을 내민 것은 손금이나 자랑하려고 그랬을 리는 만무했다. 즉, 그것은 무엇인가 요구하기 위한 동작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화천명이 건네받은 목함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끝까지 받아 가지 않고 도중에서 포기할 건 뭐란 말인가? 바로 그때였다.


"……!" 화천명은 가슴으로 느꼈던 미미한 충격을 떠올리며 급히 품 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보니 충격을 느꼈던 가슴부위와 목함이 들어 있는 위치가 공교롭게 딱 일치되는 것이 아닌가? 허나, 꺼내든 목함은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아니,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기는 했다. 푸스스……. 그것은 소리였다. 마치 어떤 가루가 휩쓸리는 듯한 기이한 소리가 목함 속에서 울려나고 있었다. "……?" 화천명은 급히 목함의 뚜껑을 열었다. 목함 속에는 얼토당토 않게 싯누런 가루만 잔뜩 들어 있지 않는가? 금가루도 은가루도 아닌 그것은 분명 종이가루였다. 그것을 일견하는 순간 화천명은 이 가루가 원래는 한 권의 책자였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이럴 수가!' 화천명은 퍼뜩 한 가지 영감(靈感)을 떠올리며 아연경악했다. 바로 아까 회의청년이 장난처럼 휘저은 일련의 손동작이었다. 그는 즉시 책자가 느닷없이 가루로 변한 것은 바로 그 손동작의 결과라는 것을 깨달았다. "……!" 화천명은 기막히다는 눈빛으로 한동안 목함 속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그는 무슨 의도에서인지 조심스럽게 목함의 뚜껑을 닫아 다시 품속에 갈무리했다. 이어 그는 손바닥을 툭툭 털며 두 눈 가득 기이한 빛을 떠올렸다. "좋아! 파기가 가능했다면 재생(再生)도 가능하다는 말이지." 말과 함께 화천명은 무서운 추격전이 전개되고 있을 청류하의 수면을 힐끗 쳐다보며 야릇한 미소를 베어물었다. "조심해라. 그대 같은 자를 보면 불현 듯 무예(武藝)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니까 말야."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화천명은 느릿느릿 고개를 가로저으며 또 한 마디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더 이상 절실히 생각하게 만들지 마라.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도대체 화천명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어쨌거나 밤은 그저 무심하여 일체의 말이 없었다. 제 5 장 피할 수 없는 운명 * * * 없었다. 석무혼도, 묘연아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탁자 위에는 이런 내용의 쪽지 하나만 달랑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대가 없어 친구들을 먼저 데려간다.> "……!" 화천명은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화까지 치밀었다. 이건 말도 안되는 짓이었다. 정말이지 이 무슨 얼토당토 않는 말이란 말인가? "으음!" 끝내 화천명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성이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천화대번의 파산을 목전에 두고도 눈 하나 깜박 않던 그가 아니던가? 그런 그의 표정이 이렇게 굳어질 정도라면 문제는 진짜 심각한 것이었다. "무림(武林)…… 진정 폭력이면 모든 일이 해결된다고 믿는 곳이란 말인가? 그런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의 입장은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는 독선의 세계가 무림이란 말인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화천명의 짙은 검미가 거꾸로 치솟았다. "정말이다. 더 이상 나를 자극하지 마라." 그리고 천정을 우러르는 화천명의 눈이 전에 볼 수 없었던 정광(精光)으로 번뜩거렸다. "이런 식으로 자꾸 나를 건드리면 정말로 무림에 나서게 될지도 모른다. 그대들의 그 오만과 독선을 깨끗이 뜯어 고쳐 주기 위해서 말이야!" 그때였다. 느닷없이 그 말을 받아 울려퍼지는 음성이 있었다. "제발 그래 주시오." "……!" 화천명의 고개가 힐끗 돌아갔다. 막 문을 열고 한 사람이 들어서고 있었다. 연남빛 유삼(儒衫)에 오른손에는 뽀얀 광택이 흐르는 백옥빛 섭선(攝扇)을 든 전형적인 문사풍의 중년이었다. 비수처럼 날카로운 눈매만 아니라면 말이다. "과연…… 당신이었군." 그렇다. 혈정수사 설문비. 바로 녹림제일뇌(綠林第一腦)로 불리우는 당대의 재사(才士)였다. 화천명의 추측은 옳았던 것이다. "……!"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듯 기묘한 대치상태가 있은 뒤 설문비가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먼저 입을 떼었다. "명색이 손님인데 자리도 권하지 않소이까?" 화천명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청하지 않아도 오셨으니 구태여 권하지 않아도 앉을 것이라 생각하오만……." "……!" 설문비는 멋적은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탁자 앞에 앉았다. 이어 그는 약간 곤혹스러운 눈빛으로 화천명을 주시했다. "화형, 아마 우리 외에도 화형을 필요로 하는 자가 또 있는 모양이오." 순간 화천명의 안색이 가볍게 일변했다. "그럼 무혼과 연아는……?" "그렇소. 본인은 그들의 털 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소." "……!" "생각해 보시오. 화형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본인이오. 만약 그 두 사람을 건드렸다간 화형의 도움을 얻기는 커녕 십중팔구 원수간이 될 것을 뻔히 알면서 어찌 그런 일을 저지르겠소?" "……!" 화천명의 수려한 검미가 잔뜩 찌푸러졌다. 설문비의 말은 매우 그럴 듯하고 설득력이 있어 도무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같지는 않았다. "그럼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나로서도 도무지 알 수가 없소. 조금 전 이 근처를 세밀히 살폈으나 흔적 한점 찾아내지 못했소." "으음!" 화천명은 무겁게 신음했다. 설문비는 잠시 침묵하더니 넌즈시 입을 떼었다. "화형, 과거의 약속은 아직 유효한 거요?" "……."


화천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똑바로 주시하며 설문비는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만약 유효하다고 인정한다면…… 본인은 책임지고 그 두 사람을 찾아 주겠소. 아울러 화형만 원한다면 놈들의 징계까지 책임지겠소." 화천명이 무뚝뚝한 어조로 그의 말을 끊었다. "나는 내 일을 남에게 맡기지 않소. 그리고……."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설문비를 지그시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약속 운운 하시는데…… 나는 그런 약속은 지킬 수가 없소. 왜냐하면 파산의 원흉이 바로 당신이니까." "……!" "정말이오. 만약 당신이 아니었다면…… 아니 당신과 그런 쓸데 없는 농담만 주고받지 않았다면…… 녹수구곡맹도 이���부터 쑥밭이 될 각오를 하고 있어야 되었을 것이오." "……!" "알겠소? 당신은 이 화천명의 복수가 행해지지 않는 것만도 생애최대의 행운으로 생각해야된단 말이오." "……!" 설문비는 별다른 표정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하여 화천명의 입술이 꼭 다물어졌을 때 비로소 그는 희미한 미소와 더불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물론…… 쉽게 승낙을 얻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소." 그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허나 나는 자신이 있소. 화형은 결국 승낙을 하게 될 것이오." 그는 화천명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자신에 찬 어조로 한 마디 덧붙였다. "화천명…… 어떤 위협이나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는 인물이지만…… 지성에 감동하는 인물이라고 본인은 알고 있으니까 말이오." "……!" "다시 오겠소, 화형." 설문비는 한 차례 싱긋 웃어 보인 뒤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 화천명은 한동안 문을 바라보다가 문득 헛웃음을 흘려냈다. "이거야 원……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많아서야 어디…… 쩝!"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무혼과 연아를 납치해 간 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화천명은 곤혹스럽게 중얼거리다 말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실내를 빠져나갔다. 아직도 밤은 끝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 * * 금릉에는 명소(名所)가 많다. 두루 가볼만한 장소가 수도 없이 많은 곳이다. 그러나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사람들이 가장 먼저 손꼽는 명소는 단 한 군데밖에 없었다. <회운산장(回雲山莊).> 회운산장은 일명 백유림(百柳林)이라고도 불리우는 곳이었다. 헌데 이곳이 으뜸의 명소로 손꼽히는 것은 특출나게 볼만한 구경거리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직 한 사람 때문이었다. 회운선생(回雲先生) 사가량(史家兩). 왕대 최고의 석학(碩學)이라 불리우는 전(前) 한림대학사(翰林大學士) 회운선생(回雲先生)


사가량(史家兩)이 바로 회운산장의 장주(莊主)라는 것이 으뜸의 명소로 꼽히는 이유의 전부였다. 하기야 자금성(紫禁城)의 문지기만 역임(?) 해도 목에 힘을 주고 다니는 세상에 한림대학사라면 그게 어디 보통 신분인가? 아무리 은퇴를 했다곤 하나 그 정도 관록이면 회운산장을 금릉제일의 명소로 올려놓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런 회운선생(回雲先生) 사가량에겐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사운악(史雲岳)이고 별호는 백향공자(百香公子)였다. 사운악은 부친의 명성에 걸맞게 진작부터 천재(天才)니 불세출의 귀재(鬼才)니 하는 빛나는 칭호를 꼬리처럼 달고 다니는 당년 십 팔 세의 준수한 청년이었다. 그는 두루 통달하지 않은 학문(學文)이 없고, 두루 능통하지 않은 잡학(雜學)이 없었다. 이미 이년전(二年前)인 십 육 세의 나이로 당당히 대과(大科)에 장원(莊元)을 차지했다는 사실 또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일인지 아직가지 보직 하나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 또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백향공자 사운악과 화천명을 한데 묶어 금릉이우(金陵二友)라 불렀다. 비록 사귄 지는 이 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죽마지우 이상으로 절친한 두 사람인 것을 잘 아는 때문이었다. * * * 군왕산(君王山). 금릉의 영산(靈山)으로 불리우는 이곳 기슭을 가면 한 채의 장원이 백여 그루의 유림(柳林)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크지 않은 아담한 규모에서 왠지 은자적(隱者的)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장원이었다. 바로 회운산장(回雲山莊)이었다. 한 정실. "아함……!" 하품 소리가 길게 울려나오는가 싶더니 그것은 이내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리는 음성으로 뒤바뀌었다. "이 괴물 같은 친구야. 아무리 내가 보고 싶어도 그렇지. 꼭 이 야밤에 찾아와 단잠을 깨울 건 뭐냔 말이다." 청년은 잠옷차림으로 마지못한 듯 침상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범연치 않은 귀풍(貴風)을 장식처럼 휘두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얼굴 또한 귀족의 혈통(血統)을 수대(數代)에 거쳐 갈고 다듬은 듯 이를 데 없이 준미수려 했다. 바로 사운악(史雲岳)이었다. 침상 앞에는 화천명이 의자를 끌어다가 턱하니 앉아 있었다. 화천명이 입을 열었다. "야밤이 아니라 새벽이다. 네가 보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니고……." 사운악은 연신 하품을 하고 한 차례 기지개를 길게 켜더니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보고 싶어 온 게 아니라고? 뭐냐 그럼?" "의리없는 녀석같으니…… 명색이 친구라는 녀석이 그래 내가 파산직전에 처해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코끝 한 번 들이밀지 않다니…… 그럴 수도 있는 거냐?" 사운악은 눈을 비비다 말고 그를 빤히 주시했다. "설마…… 그걸 따지자고 온 건 아닐 테지?" "따지러 왔다." "허!" 사운악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손을 휘휘 저었다.


"농담은 관두자. 네가 나를 모르지 않고 내가 너를 모르지 않는다. 만약 위로나 한답시고 내가 너를 찾아갔다간…… 장담하건대 내게 돌아오는 건 모자라는 놈이라는 욕밖에 없었을 것이다." 화천명은 피식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 안다. 네 녀석은 소문을 듣고 틀림없이 네 나름대로 조사를 해왔을 테지. 그리고…… 회복불능이라는 것도 알았을 테지!' 사운악이 말했다. "괜히 헛소리만 늘어 놓지 말고 어서 용건이나 말해라. 뭐냐?" "……." 화천명은 묵묵히 품 속에서 목함을 꺼내 뚜껑을 열고 사운악 앞으로 내밀었다. "……?" 일순 사운악의 눈에 기이한 빛이 일렁였다. "이건……?" "네게 부탁할 물건이다." "……!" 사운악은 눈썹을 찌푸리며 한참 동안 목함 속을 들여다 보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본래…… 책자였던 것 같은데……?" "맞았다." 사운악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화천명을 정시했다. "그럼 부탁이라는 게 바로……." "재생(再生)시켜다오. 본래대로……." "뭐라고?" 사운악은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 "이 친구…… 내가 무슨 조화옹(造化翁)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으나, 그의 눈빛에는 감출 수 없는 흥미로운 빛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치 장인(匠人)이 좋은 원철(原鐵)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본래의 책자 그대로 재생하라는 건 아니다. 다만 그 속의 내용, 다시 말해 글씨만 추려 주면 된다." "흐음!" 사운악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괜히 어려운 척 할 것 없다. 나는 언젠가 네가 한 자도 알아볼 수 없이 파손된 책자에서 어떤 약물을 사용하여 그 내용을 완벽하게 뽑아내는 걸 본 적이 있으니까……." 사운악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완 상황이 다르다. 당시 그 책자는 파손되긴 했으나 거의 흐뜨러지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건 아예 가루가 아니냐?" "그래서?" "한마디로 어렵다." "전혀……?" "설혹 글씨를 뽑아낸다 해도 절반 이상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순서까지 마구 흐트러져 있으니 내용을 알기란……." 화천명이 진지한 어조로 그의 말을 끊었다. "나는 네 머리를 믿는다." 그는 사운악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네 조직적인 두뇌면 뒤바꿔진 순서 정도는 충분히 바로 잡을 수 있다. 그리고 무릇 글에는 문맥(文脈)이라는 것이 있다. 문장의 대가인 네가 그것을 놓치진 않으리라 생각한다." "……!"


사운악은 몹시 난감한 표정으로 화천명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더니 어느 순간 입맛을 쩝쩝 다시고 말았다. "이거야 원…… 헌데 이것이 꼭 그래야만 될만큼 중요한 것이냐?"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인데 내 실수로 이 모양이 되고 말았다." "단지 그것 뿐이냐?" "……!" 화천명은 잠시 생각한 끝에 어디까지나 진지한 얼굴로 입을 떼었다. "느낌이다. 어쩌면 그것이 나와 매우 중대한 관련이 있을 것 같은……." "……!" 사운악은 화천명을 잘 알았다. 그가 아는 화천명은 천화대번의 파산 선고를 듣고도 이렇게 심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사운악은 목함 속의 가루와 화천명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뒤 무섭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해 보자." 비로소 화천명의 얼굴에 그 특유의 쾌활한 웃음이 피어 올랐다. "너는 진짜 내 친구다." "간사한 놈!" 그 순간 동천(東天)으로부터 뿌연 빛줄기가 움터오르고 있었다. * * * "하필 그가 관련되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헌데…… 파기는 완벽한가요?" "걱정마시오. 아예 가루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묵비혼이란 그 자는……?" "죽었소." "좋아요. 이로써 쓸데없는 후환거리 하나는 깨끗이 제거된 셈이예요." 조그만 소리조차 웅웅 진동하며 울려 퍼지는 한 칸의 실내였다.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은 곧 사방이 밀폐되었다는 증거였다. 대개 이런 유(類)의 방을 사람들은 밀실(密室)이라 불렀다. 그렇다. 그곳은 밀실이었다. 밀실 속에는 세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여전히 습관처럼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옥대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방금 대화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다름아닌 옥유향과 회의청년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끊어지자 옥대인이 눈을 감은 그대로 조용히 입을 떼었다. "탁몽(卓夢)의 제거에 관한 건(件)은 어찌 되었느냐?" 탁몽이라니? 그렇다면 천지회(天志會)의 출천대협 탁몽을 일컫는 것이란 말인가? 헌데 그를 제거하다니? 정말이지 대륙의 상계(商界)를 한손에 쥐고 흔드는 천하제일대부호(天下第一大富豪)의 입에서 그런 말이 거론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옥유향이 차분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늦어도 내일까지는 완결될 거예요." "방법은?" "암살(暗殺)." "암살?" 옥대인의 잠겼던 눈꺼풀이 스르르 말려 올라갔다.


그는 깊고 유현(幽玄)한 시선에 일말의 의구심을 담고 옥유향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가능할까?" 옥유향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어려워요. 하지만 그 방법밖에 없어요." 옥대인의 눈가에 가느다란 주름이 형성되었다. "어려울 텐데…… 천하의 그 누가 그를 암살할 수 있단 말이냐?" 옥유향의 음성이 이어졌다. "단신으론 힘들겠지만 집단의 힘이라면 충분해요. 이를 테면 살인집단 같은 거 말이예요." "청부(請負)를 넣었단 말이냐?" "예." "감히 그런 일을 맡을 곳이 있었을까?" 옥유향의 아름다운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스쳐 지났다. "오직 한 곳이 있지요. 바로 흑번(黑 )." "흑번?" 옥대인은 흠칫하는 기색을 보였다. 허나, 곧 그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채 한 마디 더 물었다. "흑번도 안 된다면?" 옥유향은 가만히 허공 한 곳을 응시하며 독백처럼 대답했다. "환상(幻想)이 있지요." 환상(幻想)이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그러나 밑도 끝도 없는 그 말을 옥대인은 충분히 알아 들은 듯했다. "……." 그는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암살의 성공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 순간 무한한 지혜가 깊이 간직된 옥유향의 시선이 천천히 회의청년을 향했다. "사형은 이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셔야죠?" "……." 회의청년은 힐끗 그녀를 스쳐보더니 아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서다가 그는 문득 뭔가가 생각난 듯 갑자기 희미한 긴장을 떠올렸다. "잊을 뻔했군." 옥유향의 시선이 다시 그를 향했다. "무엇을 말인가요?" "조금 전 이곳으로 오던 중 천곡(天哭)을 보았소." "천곡!" 놀란 것은 옥유향 뿐이 아니었다. 천곡이라는 이름이 말해지는 순간 옥대인의 눈이 드물게 번쩍 떠졌다. 이어 그 맑고 깊은 눈에 숨길 수 없는 놀람의 빛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가…… 아직 살아 있었던가요?" 옥유향의 물음에 회의청년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틀림없었소. 전에 그를 본 적은 없지만 오천뇌(五天腦)에서 들은 기억으로 보아 틀림없는 그였소." "놀라운 일이군요. 그는 이미 이백 세가 넘었을 텐데……." 옥대인의 묵직한 침성이 그 뒤를 이었다.


"흐음…… 오십여 년 전부터 종적이 묘연해 이미 죽었으리라 여겼거늘……." 옥유향의 의혹 어린 눈길이 그의 얼굴에 꽂혔다. "헌데 오십여 년 만에 다시 나타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글쎄다. 아무튼 천곡이 다시 나타난 데에는 필시……."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이었다. 돌연 옥유향의 섬연한 교구(嬌軀)가 급전(急電)을 맞은 듯 파르르 떨었다. "……!" 그것을 본 옥대인과 회의청년은 아연 긴장했다. 아마도 그녀의 몸에 느닷없이 일고 있는 이 진동의 의미를 잘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순간 옥유향의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오…… 오천뇌(五天腦)예요!" 옥유향의 입술 새로 신음하듯 간신히 내뱉아진 한 마디가 끝났을 때였다.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옥유향의 본래 음성과는 전혀 다른, 마치 어린아이의 목소리와 같은 환상의 동음(童音)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여러분께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 잠시 옥소저의 입을 빌렸습니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인가? 말하자면 지금 옥유향의 몸 속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스며들어 그녀의 입술을 빌리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말이다. 이 어찌 가능한 얘기인가? 그러나 분명히 옥유향의 입을 통해 이어져 나오는 동음으로 보아 이건 틀림없이 꿈도 환상도 아니었다. 동음이 이어졌다. "다름이 아니라…… 먼저의 선택에 관한 문제입니다. 조금 보류해야 될 문제가 발생한 것이지요." "……!" "……!" "우리는 이제껏 그를 단순히 고아라고만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에 대한 자료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매우 중대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동음은 조리정연하고 또렷한 어조로 계속 이어졌다. "그가 언제부터 고아였냐는 것…… 다시 말해 그의 부모가 누구며, 언제 죽었고, 왜 죽었냐는…… 그런 자료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 옥대인의 눈가에 순간적으로 짧은 경련이 일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기우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의 성(姓)이 화씨(華氏)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새삼스런 공포까지 느꼈습니다." "……!" "아시고 계실 테지만…… 우리의 천적(天敵)이 바로 화씨 가문이었습니다. 물론 거기까지 그를 연결하는 건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티끌만큼의 가능성도 우리는 배제하지 않아야 합니다." 화씨(華氏), 화씨 가문이라니, 대체 누구를 일컬음인가? 화천명? 오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이 환상처럼 울려나오는 동음은 그 언젠가도 화천명이란 이름을 한 차례 거론한 적이 있었으니까. 어쨌든 동음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의 출신을 보다 정확히 알아내십시오. 만약 출신에 하자가 있다면 선택은 반복됩니다. 그리고 선택이 반복되면 여러분은 그를 죽여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이것은 조건부 살인명령(殺人命令)입니다." 동음은 거기서 끝났다. "……!" 잠시 죽음 같은 정적이 실내에 자욱이 내려앉았다. * * * 방(房)이었다. 방은 기묘한 도구와 약병, 약재 등이 수도 없이 쌓여 있어 하나의 실험실을 연상케 했다. 두 방에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사운악과 화천명이었다. 사운악은 이것저것을 만지며 정신없이 바빠 보이는 반면에 그 옆의 화천명은 팔짱을 낀 채 극히 느긋한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묻고 있었다. "……!" 사운악, 약병을 쏟아 문지르고 불을 켰다 끄는 등 분주하게 움직이길 얼마 만이었을까? 문득 두 눈 가득 기광(奇光)을 떠올리며 한소리 짤막한 탄성이 사운악의 입술 밖으로 토해졌다. "됐다!" "……!" 화천명은 팔짱을 풀어 의자에서 등을 떼었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으나 이내 입을 꼭 다물었다. 사운악이 한 장의 화선지 위에 뭔가 써 내려가는 것을 본 때문이었다. 사운악이 쓴 글자는 다음과 같았다. <천마유전(天魔遺傳).> "천마유전이라…… 책자의 제목인 모양이군." "천마유전?" 화천명은 나직이 되뇌이다 말고 돌연 안색이 기이하게 급변했다. 어떤 충격이 불현 듯 뇌리를 스친 때문이었다. '천마! 천마란 말인가?' 그때였다. "지금 뽑아낼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나머지는 모두 작은 글씨라 아무래도 꽤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사운악의 말이었다. 허나 화천명은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일언반구도 없었다. 사운악은 그제서야 그의 안색이 기이해진 것을 발견하고 의아한 듯 물었다. "뭐냐? 그 얼굴은……?" 물으면서 그는 화천명의 이런 얼굴은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화천명은 무엇인가 한참 동안 심각하게 생각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얼마쯤의 시간이 걸릴 것 같으냐?" 사운악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 이삼 일 정도?" "최대한 단축하면?" "그래도 이틀 전엔 어렵다." "으음!"


화천명은 무거운 신음성을 발하며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왜 갈려고?" "이틀 후에 다시 오겠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지금 네가 하는 일을 아무도 모르게 해라." "……?" 사운악은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화천명은 씨익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별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다. 자고로 남의 비밀을 아는 자는 각별히 몸조심을 해야 만수무강에 지장이 없다는 옛 성현의 말이 생각나서 그러는 것이니까." 그 말에 사운악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옛 성현의 말이 아니라 화천명의 말씀이겠지. 아무튼 알았으니 걱정하지 마라." 화천명은 싱긋 웃어 보인 뒤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기다렸다는 듯 눈부신 아침 햇살이 그의 전신으로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 화천명은 새롭게 밝아오는 하늘을 잠시 주시하고 있더니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무림에 나서야 될 것 같다." 제 6 장 괴노승(怪老僧)의 정체 * * * "아이고오……!" 참으로 슬프고 애절하고, 비참한 그런 통곡성이 들려왔다. 회운산장과 꽤 떨어진 군왕산 기슭 산길 속이었다. 아침 햇살이 간발적으로 비추어 들고 있는 울창한 잡목림(雜木林) 사이에서 통곡성은 터져나오고 있었다. "……?" 화천명은 걸음을 멈추고 통곡이 터져나온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노승(老僧)이었다. 엉덩이를 철퍼덕 깔고 앉아 땅을 치며 통곡하는 한 노승의 모습이 보였다. 노승은 인간의 마를 수 있는 한계를 실증이라도 해 보이려는 듯 살점 하나 없이 바짝 말라 비틀어진 몸집을 지니고 있었다. 헌데 뜻밖에도 두상(頭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크고 우람했다. 얼마나 크고 우람한가 하면 저 깡마른 체구에 저런 두상을 어깨 위에 올려놓고도 여지껏 목뼈가 부러지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신기한 것은 또 있었다. 바로 눈썹이었다. 반 자는 족히 될 듯한 노승의 눈썹은 혹시 머리카락을 뽑아 눈 위에 심은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길고 무성했던 것이다. "아이…… 고오…… 아이고오!" 해괴한 생김새의 이 괴승은 군왕산이 떠나가라 통곡에 통곡을 거듭하고 있었다. "……!" 화천명은 기이한 눈빛으로 잠시 괴승을 살펴보다가 다시 걸음을 떼놓았다. 당신 우는 것하고 나하곤 아예 상관없다는 듯 무관심한 태도였다. 이때였다. "아이고…… 사람이 이토록 슬프게 울고 있는데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 놈이 있다니…… 아이고……!" 순간 화천명의 신형이 뚝 멎었다. 노승의 말을 듣고 멈추고 싶어서 멈춘 게 아니었다. 더 나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흡사 면전에 하나의 벽(壁)이 우뚝 가로 막아선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건……?' 화천명은 내심 아연했다. 허나, 그는 태연히 괴승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아주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대사께서는 어인 일로 이토록 슬프게 울고 계시는지요?" "상관하지 말게, 아이고오……." "상관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길에서 울고 계시면 고승으로서의 체모가 말씀이 아니지 않습니까?" 순간 괴승의 울음이 뚝 그쳤다. 그는 퉁방울 같은 눈으로 화천명을 힐끔 쳐다보더니 몹시 안됐다는 듯 끌끌 혀를 찼다. "쯧쯧…… 자네, 그것도 눈이라고 달고 다니나? 고승이라니…… 어딜 봐서 내가 고승인가, 저승(底僧)이라면 혹 모를까……." 딴은 그럴 듯했다. 채 오 척도 될 듯 말 듯한 괴승의 키라면 높음(高)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은 먼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화천명은 단 한마디 대화를 나누는 순간 이 괴승 역시 자신에게 어떤 목적을 품고 있음을 직감했다. '역시 무림인가?' 허나 그는 내색지 않고 짐짓 난처한 기색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저승(底僧)어른, 웬만하면 길이나 좀 터 주시지요. 저는 좀 바쁜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안돼! 아무리 바빠도 이보다 바쁜 일은 없다!" 돌연 괴승의 안색이 무섭게 굳어졌다. 화천명은 은근히 짜증스럽기도 했으나 일말의 호기심 또한 없지 않았다. "도대체 뭡니까? 그 바쁜 일이라는 것이……." "꼭 알고 싶나?" "글쎄 알려 주지 않으시려면 길이나 터주시든지……." "그렇다면 이걸 보게." 어디까지나 엄숙 진지한 얼굴로 괴승이 가리키는 것, 그것은 자신의 옆에 수북이 돋아 있는 풀이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괴승의 손 끝은 그 풀잎에 맺힌 한 방울의 아침 이슬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게 어쨌다는 것입니까?" 화천명이 묻자 괴승은 갑자기 울상이 되며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보게. 이 쬐그만 이슬 속으로 천하가 몽땅 빨려들어가 버리지 않았나?" "예?" 화천명은 기가 막혔다. 이슬이 천하를 몽땅 빨아들이다니…… 그것은 아무리 보고 또 봐도 그저 한 방울 이슬 뿐이었다. 이번에는 화천명이 몹시 측은하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 그렇게도 울 일이 없었습니까? 아무리 그렇다기로 거짓말까지 해가며 울 필요가 어디 있……?" "거짓말이라니!" 괴승은 느닷없이 냅다 호통을 쳐 화천명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큰 눈을 있는대로 부릅뜨며 사뭇 명령조로 말했다. "다시 보게, 어서!" "……!" 화천명의 눈에 순간 한 줄기 이채가 피어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 괴승의 눈은 실로 맑고 깨끗했다. 세상 모르는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눈빛이라도 아마


이보단 맑거나 깨끗하진 못할 듯 싶었다. '좌우지간 보라니 보는 수 밖에…….' 화천명은 괴승의 눈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이슬을 쳐다보았다. 그런다고 해서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백 번 천 번 보고 또 봐도 그건 어디까지나 아무 데서고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이슬 뿐이었다. "……?" 화천명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찰나지간 괴승의 혀 차는 소리가 그의 귓속으로 파고 들었다. "쯧쯧…… 확실히 자넨 눈이 나쁘군. 좋다, 그렇다면……." 말도 채 끝나기 전이었다. 돌연 화천명은 목덜미와 허리어림으로부터 뜨끔한 충격을 느꼈다. 그것은 필시 아혈(啞穴)과 마혈(麻穴)을 동시에 제압당할 때 느끼는 충격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부웅! 돌연 화천명의 신형이 뻣뻣하게 굳은 그대로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괴승의 바로 앞에까지 쭉 빨려가는 것이 아닌가? 뒤 이어 그의 몸은 자신의 의사와는 하등의 상관도 없이 이슬이 맺힌 그 풀잎 앞에 무릎을 꿇은 상태로 떨어져 내렸다. 괴승은 그런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소매춤에서 하나의 옥병을 꺼내들었다. 우유빛 액체가 가득 담겨진 옥병이었다. 괴승은 다시 부릅뜬 눈길을 화천명의 얼굴에 꽂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자네는 복이 터져도 이만저만 터진 게 아니다.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선 부득불 자네의 눈을 좋게 만들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야." 이어 괴승은 젓가락 같은 손가락으로 화천명의 눈꺼풀을 아래 위로 찢어질 듯 벌리더니만 냅다 옥병의 마개를 뽑아 그 속의 액체를 화천명의 눈 속으로 부어 버렸다. 액체는 단 한 방울의 흘림도 없이 순식간에 두 눈 속으로 스며들었다. '욱!' 그 순간 화천명은 극통(極通)을 느껴야 했다. 마치 벌겋게 달군 인두로 두 눈을 사정없이 지지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허나 그것은 잠시 뿐이었다. 이내 괴승의 두 장심이 양쪽 눈에 밀착되면서 거짓말처럼 말끔히 사라진 것이었다. 뒤이어 그의 귓가에 괴승의 말이 흘러들었다. "에구우…… 천령옥수액(天靈玉水液)이 얼마나 귀하고 중한 보물인지 우매한 중생들이 어찌 알꼬. 천년(千年)에 겨우 한 방울 생성되고…… 그렇게 해서 모인 열 방울, 다시 말해 십천령(十天靈)의 영기(靈氣)를 흡수하면 개미의 내장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는 천안(天眼)의 소유자가 된다는 것을…… 에구우…… 아깝다, 아까워!" 그때였다. "자, 봐라. 그 잘난 눈 크게 뜨고 똑바로 보란 말이다." 괴승은 손을 떼고 다시 이슬을 가리켰다. 사실 가리키고 자실 것도 없이 화천명의 시선은 이미 강제적으로 그 이슬에 고정되어 있었다. "……!" 화천명의 두 눈에 일순 기이한 광채가 번쩍 솟아났다. 천하(天下)! 그 한 방울 이슬 속에 담겨진 천하가 뚜렷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오오!' 그렇다. 본래 이슬이란 투명하고 둥근 하나의 거울과도 같은 것이어서 극대화된 안력으로 보자면 주변의 모든 풍경이 그 한 방울 이슬 속에 비추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주변의 모든 풍경은 곧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의미하니 천하(天下)라 말한다 해서 절대 무리는 아닌 것이었다. "이제야 보았는가? 물론 보았을 테지. 에구…… 순전히 나만 손해보았다. 아미타불……." "……!" 어쨌거나 고개를 돌릴래야 돌릴 수도 없는 화천명의 귓속으로 괴승의 음성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자네는 어떻게 해서 저 조그만 이슬이 천하를 모두 담을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아나?" 마혈을 찍어 놓았으니 대답은 기다릴 필요조차 없는 터였다. 괴승은 자기가 묻고 자기가 대답했다. "그것은 공(空)이기 때문이야.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또한 둥근, 다시 말해 우주와 똑같은 형태의 공(空)이기 때문이야. 그것은 또 무욕(無慾)이고, 무상(無想)이며, 무법(無法)의 의미인 동시에……." 괴승은 거기에서 갑자기 말을 뚝 끊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훌쩍거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에구…… 그만 두자. 우매한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 봐야 소 귀에 경읽기일 뿐이지." "……!" 그러나 소 귀에 경읽기가 아니었다. 화천명은 이 순간 괴승의 말을 통해 매우 깊은 현기(玄機)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었다. 허나, 그것은 분명 이제껏 느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세계(世界)로의 개안(開眼)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괴승은 이때 입을 다물고 묘한 눈초리로 화천명의 전신을 훑어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대충이더니, 두 번째는 눈이 커지면서 약간 느린 속도로 훑어 보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세 번째는 굼뱅이가 기어가는 듯 지루하리만큼 느려터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 돌연 그 큰 입이 따악 벌어지면서 한소리 경탄성이 튀어나왔다. "으와! 이제 보니 자네 기막힌 골격을 지녔구나!" 그는 마치 천고(千古)의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갑자기 눈을 번쩍번쩍 빛내며 대뜸 물어왔다. "이봐, 자네 혹시 무공을 배워 볼 생각없나?" 아혈을 짚혔기 때문에 대답이 있을 리 만무였다. 허나, 괴승은 마치 대답을 듣기라도 한 듯 안면 가득 희색을 드러내며 기쁨에 찬 음성을 토해냈다. "뭐? 있다고? 에이구우…… 이 중생, 참으로 욕심도 많구나. 천안(天眼)을 주었더니 뭐? 이젠 노납의 무공까지 몽땅 가져 가겠다고?" "……!" 화천명은 어이가 없었다. 아예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대꾸할래야 할 수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 가져 가라, 가져 가. 기왕에 준 것 통쾌하게 줘 버릴 테니까." 괴승은 큰 선심이라도 쓰는 듯 말하더니 화천명의 몸을 번쩍 들어 어깨에 걸머졌다. "정말이다. 기왕 주기로 한 것, 확실하게 줘 버릴 테다." 화천명의 의식은 거기에서 끊어졌다. 자신의 몸이 둥실 떠오른다 싶은 순간 몸의 어느 구석에선가 또 한 차례 뜨끔한 느낌이 전해왔던 것이다. * * * "……?"


화천명이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은 거꾸로 세워져 있는 세상이었다. 허나 세상이 거꾸로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을 알아내는 데는 별로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렇다. 그는 심산유곡(深山幽谷) 속에서 한 그루의 거대한 고목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바로 코 앞에는 괴승의 기묘한 얼굴이 있었다. 놀랍게도 괴승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상태로였다. "……!" 화천명은 아연해 무슨 말인가 하려 했다. 허나 그 순간 괴승의 쌍수가 기다렸다는 듯 양쪽 관자놀이를 번개같이 눌러오는 것이 아닌가? 찰나지간 화천명은 갑자기 이상한 현상을 느꼈다. '어찌된 일인가? 나는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모르겠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 그 순간 ���천명은 마치 희디흰 백지상태인 양 머리속이 텅텅 비워 버린 것을 느껴야 했다. 이른바 공(空)의 상태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헌데 그런 상태에서 괴승의 목소리가 각인(刻印)되듯 화천명의 머리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죽고 싶지 않거든 노납의 말을 잘 듣도록 해라. 무릇 이런 역립(逆立)의 자세로 오래 있게 되면 결국 두부충혈(頭部充血)로 죽게 된다. 죽지 않는 방법은 단 하나…… 노납의 말을 잘 듣는 것 뿐이다." 그것은 분명 울고 짜고 몸부림이나 치던 음성이 아니었다. 그 음성에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엄숙하고도 장중한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괴승의 음성이 이어졌다. "역주천대라한령심법(逆週天大羅閑靈心法), 이것은 불문최고(佛門最高)의 심공인 대라한령심법을 속성연공을 위해 역행시켜 놓은 것이다." "……!" "사실 천리(天理)를 거역하는 역천의 편법에다 위대한 불문정공을 사마좌도공화(邪魔左道功化)시킨 것이라 이를 전수하는 노납의 마음은 결코 편하다 할 수 없다. 허나 어떡하겠는가? 주어진 시간이 짧은 바에야 부처님의 무서운 징벌을 감수할지언정 해보는 수밖에……." "……!" "역행은 분명 속성의 첩경이긴 하나 길이 빠른만큼 다소의 위험성 또한 따르기 마련이다. 허나 노납의 도움과 인도가 있으니 그대는 아무 걱정 말고 이를 받아 들이도록 하라!" 마침내 구결(口訣)이 전수되기 시작했다. 화천명은 일점의 잡념도 없는 투명한 의식상태에서 차분히 받아 들이기 시작했다. 즉 귀로 듣는 게 아니라 전신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턴지 그의 눈은 저절로 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어느 순간에서 부터는 서서히 심신의 반응이 일기 시작했다. "……!" 구결을 읊어가던 괴승의 얼굴에 한 줄기 경탄지색이 떠 오른 것도 바로 그때였다. '과연……!' 구결은 상당히 길게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를 받아들이는 화천명의 신색은 그지없이 잔잔하고 고요했다. 어찌 보자니 입정에 이른 고승인 양 장엄하게까지 보이기도 했다. 마침내 한 시진 남짓한 끝에 구결이 끝났다. "됐네. 이로써 자네는 일 년 수련으로 십 년 공력을 얻는 십 배 이상의 속성효과와 수십 년 수업으로나 이룰 수 있는 고도의 심력(心力)을 단기간 내에 얻을 수 있을 것이네."


괴승은 약간 말투를 바꾼 상태에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허나 자넨 언젠가 이것을 정도순행(正道順行)의 본래 대라한령심법으로 바꾸어야만 하네. 만약 그를 어기고 역주천 그대로 대공(大功)을 이루고저 한다면 필시 주화입마에 빠지거나 무서운 마성(魔性)을 일으켜 광인(狂人)이 될 것이네." "……!" 화천명은 무아지경(無我之境) 상태에서 듣고 있었다. 이때였다. 여지껏 잘 나간다 싶더니만 괴승은 갑자기 또 울먹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에이구…… 사실 자네의 무학입문(武學入門)은 너무 늦었어." 이건 또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란 말인가? 어쨌거나 노괴성의 울먹거림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보아 하니 지금 자네에겐 무엇보다도 무학에 대한 이해가 우선 되어야 하거늘…… 그 끝없이 심오박대한 무학의 오의(奧意)를 어떻게 지금 간단히 자네에게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말이다." 괴승은 그 큰 머리통을 설레설레 저었다. "방법은 단 하나…… 수 많은 무학을 일단 자네에게 심어 주고 자네 스스로 깨닫기를 바랄 뿐이지." 그는 문득 땅이 꺼져라 장탄식을 불어냈다. "후유…… 어쩌겠나? 아깝지만 노납의 이백 년 심득(心得)이나마 전부 일러 주는 수 밖에…… 허나 노납이 일러 주는 건 단 한 번 뿐이네. 얼마나 기억하고 얼마나 이해하여 사용하는가는 오직 자네에게 달렸음을 명심하게." 이어 괴승은 지그시 눈을 감고 무엇인가 계속 읊어대기 시작했다. 이른바 이백 년 심득을 아낌없이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 * * 괴승의 유별나게 큰 입이 다물어진 것은 그로부터 꼬박 하루가 지나고도 밤이 꽤 깊어서였다. "……." 화천명은 여전히 눈을 지그시 감은 무아의 상태였다. 괴승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또 처량하게 훌쩍거렸다. "훌쩍…… 정말로 원통하네. 어째서 자네와 노납의 인연은 이로써 끝나야 한단 말인가?" 진짜 원통해서였을까? 괴승의 눈꼬리엔 한 방울의 눈물까지 찔끔 배어나오고 있었다. "에이구…… 원통하고 또 원통하네.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들어 세상을 보니 에구…… 세상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더란 말일세. 그래 벌떡 일어서 보니…… 훌쩍! 속세에 남겨진 인연의 끈이라곤 단지 한 가락 뿐이지 뭔가? 그나마 곧 끊어질 듯 가느다란……." 괴승은 잠시 말을 멈추고 콧물을 훌쩍였다. 그리곤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끈을 이어 택한 것이 바로 자네이네만…… 훗날 어떤 결과가 주어질지 이 둔한 머리로는 도무지 모르겠네. 어쩌면 부처님이나 아시고 계실는지…… 부탁하네. 뜻을 품게. 누가 뭐래도 자네는 무인(武人)의 숙명(宿命)을 타고난 사람이야. 그러니 자네를 상대로 노납은 평생 처음 도박을 해보는 것일세. 마지막으로 노납의 천한 미명(微名)을 속세에 남기니 자네는 이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를 바라네. 후후…… 노납은 생긴 그대로, 하는 짓 그대로 광승(狂僧)이라 불리운다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말이 끝났을 때에는 이미 산중 그 어느 구석에서도 괴승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교교한 산중월광(山中月光)만이 거꾸로 매달린 화천명의 몸 위로 잘게 부서져 내릴 뿐이었다. * * * 천곡(天哭). 혹자는 광승(狂僧)이라고 하고, 혹자는 치승(痴僧)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또 혹자는 성승(聖僧)이라고도 말한다. 어쨌거나 그것은 분명히 전설(傳說) 속의 이름이었다. 환상과 신비가 휘몰아치는 이 시대의 천하에 또 달리 떠도는 하나의 전설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는 전설이기도 했다. 어쨌든 천곡(天哭)에 대한 전설의 일화(逸話)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그를 가장 정확히 말해 주는 이야기는 아마 이런 것들이 아닐까 싶다. -그가 미친 것은 사실이오. 그가 천치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오. 하지만 천치와 천재는 백지 한 장 차이가 아니겠소? 당신은 광기(狂氣)를 지니지 않은 천재를 과연 본 적이 있소? -그렇소 그는 천재인 것이오. 그의 광기와 치기는 그 놀라운 천재성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되어 나오는 하나의 껍질인 것이오. -아시겠소? 불문(佛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취를 이룬 불문 최고의 성승(聖僧)이 바로 그란 말이오. 그렇다. 화천명에게 이백 년 심득의 무학을 전수해 주고 떠난 괴노승은 바로 불문 최고의 성승인 천곡이었던 것이다. 제 7 장 이상한 만남 * * * 쏴아아아…… 처얼썩! 물살이 하얗게 부서지는 청류하 연변의 한 단애 위였다. 무성한 갈대숲을 등 뒤로 두고 언제부터인지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표표히 휘날리는 옷자락은 보기에도 산뜻한 백의(白衣)였다. 등 뒤로는 같은 색의 피풍(避風)을 걸쳤고, 피풍 사이의 허리춤에는 묵청색 장도(長刀) 하나를 비스듬히 꿰어차고 있었다. 마흔 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떡 벌어진 장대한 체구에 산악 같은 기도(氣度)를 지닌 중후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휘이잉…… 휘잉……. 아직 채 날이 밝지 않은 어슴푸레한 새벽 무렵이라 얼굴을 스쳐지나는 바람은 제법 싸늘하고 강한 편이었다. "……." 백의중년인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나 움직임도 없이 그저 무심한 동편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허나 일견 무심한 듯한 그 안색의 이면에는 어딘지 모르게 미미하나마 초조한 기색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씩 천색(天色)을 힐끔힐끔 살필라치면 그러한 기색은 더욱 확연히 드러나곤 했다. 얼마나 더 그렇게 있었을까? "으음!" 문득 한소리 미세한 신음이 탄식하듯 새어나왔다. "벌써 하루가 지났다. 그렇다면 결국 실패했단 말인가, 묵비혼이……?" 묵비혼이라니? 그렇다면 백의중년인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거의 초죽음이 되다시피한 채 악착같이 도주길에 오른 첩자(諜者) 묵비혼이란 말인가? "……." 백의중년인은 무겁게 침잠된 시선을 들어 느릿하게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희뿌연 빛깔로 채색되어 가는 새벽 하늘이 한가득 시야에 잡혀 들어 왔다. "나 탁몽(卓夢)…… 선사(先師)의 유명(遺命)에 따라 중원에 들어온 지도 벌써 이십 년이 지났다!" 그렇다. 백의중년인은 바로 탁몽(卓夢)이었다.


"그 동안 출천대협(出天大俠)이라는 과분한 명성도 얻었고…… 정파동맹 천지회(天志會)에서의 위치도 그런대로 굳건히 다져 놓았다! 허나…… 선사의 후인(後人)은 아직껏 찾아내지 못했다. 아니, 그 혈통이 이어지고 있는지조차 확인하지 못했으니……!" 엷은 탄식이 자책의 염(念)을 담고 새어나왔다. "허나…… 근래에 들어서 천마(天魔)의 흔적이나마 발견했다는 것도 적지 않은 수확이라 할 수 있다!" 출천대협 탁몽의 두 눈에 불현 듯 신광(神光)이 솟아 올랐다. "천마…… 선사가문의 천적(天敵)…… 그 흔적의 진위 여부는 묵비혼이 쥐고 있다!" 탁몽은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묵비혼! 반드시 살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천마의 후예가 과연 이 시대에 존재하는지…… 신비구천(神秘九天)과 환상십지(幻想十地) 중 어디가 천마의 후예인지 밝혀낼 수 있다!" 신비구천(神秘九天)과 환상십지(幻想十地)! 실로 놀라운 말이 탁몽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 돌연 탁몽의 장대한 신형이 한 차례 섬세한 감응을 일으켰다. 바로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어 하늘을 향해 있던 탁몽의 시선이 극히 자연스럽게 정면으로 옮겨졌다. '뒤에 둘, 좌우에 각기 하나, 앞에 셋…… 도합 일곱이다!' 사실 그의 이런 단정은 좀 이상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앞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기 때문이었다. 헌데,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절벽 끝에 세 명이 붙어 있단 말이 아닌가? '내 이목을 속이고 이토록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자들이라면 고수(高手)도 보통 고수가 아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순간이었다. 슉! 희미하나마 매서운 파공성이 머리 위에서 일었다. '음? 하늘에도 하나가 있었던가?' 탁몽은 내심 흠칫했다. 허나 안색이 변한다거나 움직임 따위는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팍! 조그만 삼각기 하나가 안쪽 지면에 내리 꽂혔다. 죽음처럼 암울한 검은 빛깔의 삼각기였다. 스스스……. 동시에 흡사 공기가 뭉쳐 이루어지듯 일체의 소리도 없이 탁몽의 등 뒤로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깡마른 신형에 먹물 같은 흑의(黑衣)를 약간 헐렁하게 걸쳐 입은 인영이었다. 인영의 머리에는 같은 빛깔의 흑립(黑笠)이 씌워져 있었다. 용모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흑립 아래의 각진 턱에서 화강암처럼 강인한 기질을 엿볼 수 있었다. "……!" 탁몽은 그가 나타나는 순간 섬칫한 죽음의 기운을 전신으로 느꼈다. 허나 그는 여전히 일체의 동요도 없이 돌아보지도 않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제부터 줄곧 내 뒤를 따르던 자들이 그대들인가?" 순간 흑립인의 음성이 뒷 등에 와 닿았다. "출천대협 탁몽…… 탁몽대협이라 보았소. 맞소이까?" 색깔로 따지자면 순백색이라고나 할까? 그 음성에는 정말이지 티끌만큼의 감정도 배어 있지 않았다. 탁몽은 천천히 그를 향해 돌아섰다.


"내가 탁몽인 것은 맞는데…… 그대들은?" "……." 흑립인은 대답없이 턱끝만 약간 들어 검은 빛 삼각 깃발을 가리켰다. 탁몽은 예상대로라는 듯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흑번(黑幡)…… 그렇지. 나 탁몽 앞에 이렇듯 당당히 나타날 자들이라면 오직 흑번 뿐이지. 헌데……."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의아한 듯 물었다. "기억하기에 흑번과 나는 아무런 원한관계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흑번은 원한으로 살인(殺人)을 하지 않소." "흠…… 그럼 청부란 말인데……." 탁몽은 혼잣말처럼 되뇌인 뒤 다시 물었다. "쓸데없는 질문이 되겠지만…… 청부자를 가르쳐 줄 수 있겠나?" "……." 흑립인은 무심하게 고개를 저었다. 탁몽도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역시 쓸데없는 질문이었어." 그는 이어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누굴까? 이 탁몽의 목숨을 필요로 하는 인물이 말이야." 그때 의외에도 흑립인의 대답이 있었다. "당신 주변의 인물이오." 탁몽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내 주변의 인물?" 시종 담담했던 눈빛이 짧게 흔들렸다. 뜻하지 않았던 대답에 적이 놀랐기 때문이었다. 그때를 노렸음인가? 파앗! 돌연 흑립인의 신형이 섬광(閃光)이 무색할 속도로 폭사되었다. "……!" 탁몽이 흠칫 심기를 수습했을 때 흑립인의 검(劍)은 어느 새 지척까지 쇄도하고 있었다. 파파팟! 기다렸다는 듯 뒤쪽 갈대숲에서 두 줄기 쾌영(快影)이 솟아오른 것도 바로 그때였다. 솟아올랐다고 보이자 그들은 어느 새 탁몽의 좌우 옆구리를 짓쳐들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기합성이나 파공성 한점 없이 절벽 아래에서도 세 줄기 인영이 둥실 솟구쳐 올랐다. 그들 또한 촌각도 뒤질 수 없다는 듯 폭풍 같은 기세로 탁몽을 덮쳐들었다. 한 마디로 쾌(快)였다. 절대(絶對)의 빠름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정말이지 단 한올의 오차도 없는 시간배합과 상대의 예측을 철저하게 무너뜨리는 공습의 각도였다. 한 마디로 절묘했다. 그리고 완벽했다. 퇴로는 바늘구멍 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순간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스슷! 언제 어떻게 움직인 것일까? 탁몽의 장대한 신형이 한 차례 흔들렸다 싶었더니 어느 새 그는 전권 밖에서 신형을 가다듬고 있지 않은가?


파파파팍! 암습자들은 애꿎은 허공만 난자하고 땅 위로 내려섰다. 뿐만 아니라 분명히 육인(六人)인가 싶었는데 어느 새 여덟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바꿔 말하자면 어느 구석에선가 두 명이 느닷없이 튀어나와 암습에 합세했다는 결론이었다. '흠!' 탁몽의 눈에 순간적이나마 여린 감탄의 빛이 스쳐 지났다. 방금 보여준 그 한 수의 합공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만큼 강도높은 수업(修業)을 쌓았는지 짐작이 가능했던 것이다. 도합 팔 인(八人)은 앞서 대화를 나누었던 흑립인과 같은 복장이었다. 손에는 하나같이 뱀의 혓바닥처럼 폭이 좁고 긴 검(劍)을 비껴쥐고 있었다. 풍기는 기운 또한 일률적인 무심일색(無心一色)이었다. 그들은 최초의 공격이 무위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느닷없이 탁몽을 향해 돌아섰다. 탁몽은 그들을 차례로 쭈욱 훑어본 뒤 조용히 입을 떼었다. "미리 밝혀둔다. 내가 대협이란 칭호를 얻은 것은 결코 자비심이 남달리 많아서가 아니라는 것을." 어조는 그럴 수 없이 담담하였으나 몸에서 서서히 피어오르는 위엄에는 스쳐지나간 바람조차 숨을 죽일 지경이었다. "악(惡)을…… 다시 말해 눈에 거슬리는 것은 절대 두고 보지 못하고 징계는 철저히 해버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나 탁몽이다." 파라라라! 바람은 이미 멎었다. 그럼에도 팔 인의 옷자락이 찢어질 듯 나부끼는 것은 탁몽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무형의 기운이 이미 수만 근의 압력으로 사방의 공기를 압도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터였다. "물론…… 징계에 앞서 한 번쯤의 경고는 있을 수 있다. 상대가 진심으로 내 충고를 받아들일 때로 국한되는 경우이긴 하지만." 말과 함께 탁몽은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스스슷! 순간 팔 인은 신속하게 몸을 움직여 탁몽의 앞길을 애워쌌다. 탁몽은 계속 걸음을 떼어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비켜 서라." "우리의 직업이오." 한 흑립인의 대꾸를 들으며 탁몽은 가느다란 미소를 베어물었다. "직업이라…… 멋진 말이군. 비록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충고를 무시하는 말이라는 것을 잊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파파팟! 팔 인의 신형이 일제히 솟구쳐 올랐다. 뒤이어 허공을 난도질하며 일초팔검(一招八劍)의 쾌공(快攻)이 탁몽을 향해 날벼락처럼 쏟아졌다. 그것은 앞서 보여준 최초의 공세보다 더욱 쾌속하고 신랄하며 가공했다. "……!" 탁몽의 중후한 신색에 비로소 한 차례 살광(殺光)이 피어올랐다. "좋아!" 말은 단 한 마디 뿐이었다. 묵청빛 장도(長刀)가 뿌려내는 그 순간의 꿈결 같은 도광(刀光)은 더도 덜도 아닌 여덟 줄기였다. 도광이 피어올랐다가 사라진 순간은 극히 짧았다.


아니 어찌 보자니 도광(刀光) 따위는 아예 처음부터 일지도 않은 것 같았다. 철컥! 이어 묵청빛 장도가 도집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짧고 담담한 신음성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큭!" "헉!" 뒤이어 하나같이 가슴을 움켜잡은 채 본래의 자리로 내려서는 팔 인의 모습이 보였다. 이어 모든 움직임이 일체 정지되면서 질식할 듯한 정적이 사방을 압도했다. "……." 탁몽은 담담한 눈길로 그들을 둘러보더니 다시 걸음을 떼놓기 시작했다. 이때 문득, 팔 인 중 가장 먼저 나타났던 자의 입술 사이로 신음 같은 음성이 새어나왔다. "훌륭…… 했소. 과연 출천대협다운 한 수…… 허나…… 당신은 결코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이오." "……." "당신의 척살에…… 흑번은 문명(門名)을 걸었소. 이 근방 십여 리 내에 펼쳐진…… 흑번사상 초유의 필살대진(必殺大陣)…… 명심…… 흑번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 쿵! 말을 채 끝내지 못한 그의 몸이 바닥에 썩은 짚단처럼 무너지는 것을 선두로 나머지 칠 인 역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털썩! 나동그라지는 여덟 개의 몸뚱이 옆을 탁몽의 발걸음이 무심히 지나쳤다. 지나치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흑번이 나의 제거에 문명(門名)을 걸었다? 후후…… 그럼 나는 오늘 꼼짝없이 죽는 걸로 봐야겠군." 눈부신 아침 햇살이 그의 강인한 뒷등에서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 * * 스읏! 화천명은 깃털처럼 가볍게 지면으로 내려섰다. 이어 그는 어이없고 기가 찬 시선으로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거목(巨木)은 높았다. 얼마나 높은가 하면 그 끝이 가물가물해서 아예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세상에……!' 화천명은 저렇게 높은 곳에 장장 하루 이상을 매달렸다가 떨어졌어도 어디 한 군데 부러지기는커녕 이렇듯 멀쩡히 땅을 딛고 선 자신이 못내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어디 그 뿐인가? 전신 구석구석에선 일찍이 느껴본 적이 없는 활력(活力)이 샘솟듯 솟아나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머리 속은 이 계곡의 아침 공기인 양 그지없이 맑고 상쾌했다. 불과 하루 사이에 화천명은 완전히 딴 사람으로 탈바꿈한 듯한 느낌이었다. "……!" 하도 신기하고 어이가 없어 한참 동안 그대로 선 채 굳어졌던 화천명은 문득 씁쓸한 미소를 떠올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하루 사이에 나는 무공이 뭐라는 것을 알아 버렸군 그래." 그렇다. 지금 그 뇌리에는 각인되듯 생생히 기억된 무공구결들이 들어 있었다. 비록 지금 당장 그것들을 사용할 순 없으나 최소한 무공의 원리(原理) 정도는 확연히 이해하고 있는 화천명이었다. 그리고 단지 활력이라고만 느끼고 있으나 그것이 무학에서 말하는 내공(內功)일 것이라고 나름대로


추측을 내리고 있는 그였다. "대략 일천종(一千種)…… 아니 일천 종도 훨씬 넘는 것 같다." 화천명은 기가 막히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이 조그만 머리 속으로 그 엄청난 양이 들어가 있단 말이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몹시 대견스럽다는 듯한 표정이자 말투였다. 뒤이어 허공을 올려다 보는 그의 얼굴에는 왠지 기이한 미소가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실수하셨소, 저승(低僧)어른. 이 화천명…… 설사 무림에 나서게 되더라도 다른 무공은 일체 필요치 않은 사람이오. 그러니까 저승어른 당신은 말짱 헛고생만 하셨단 말이오. 후훗!" 괴소와 함께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내 가문의 절학(絶學)…… 비록 당신들에겐 잊혀진 것이겠지만 나는 그것을 찾아야 하오. 그리고 그것은…… 화씨 성(姓)을 가진 사람만의 뿌리칠 수 없는 숙명(宿命)이라오!" 베면 푸른 물기가 뚝뚝 떨어질 듯 파랗게 개인 창천(蒼天)에서 화천명이 시선을 거둔 것은 그로부터 꽤 지나서였다. "헌데 도대체 여기는……?" 화천명은 사방을 둘러 보았다. 보이느니 기암절벽에 울창한 수림(樹林) 뿐이었다. 길은 그 어디에도 나 있지 않았다. 허나 화천명은 곧 이 지형이 눈에 익음을 깨달았다. "이제 보니 군왕산 북쪽 기슭이었군." 최소한 금릉성 주위 백여 리 이내에는 손바닥 들여다 보듯 훤히 알고 있는 그였다. "회운산장과의 거리는 대략 삼십여 리. 길을 찾아 금릉으로 들어서자면 최소한 오십 리는 꼼짝없이 걸어야 할 판이군." 화천명은 혀를 끌끌 차더니 대충 방향을 잡아 휘적휘적 걸음을 떼놓기 시작했다. * * * "으음……." 가파른 계곡의 비탈길을 걷는 화천명의 귓전으로 이 신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해가 중천에 걸려 있는 정오 무렵이었다. 음색(音色)으로 보아 여인의 그것이 틀림없는 이 신음소리는 좌측의 수림 속에서 흘러나왔다. '이런 산중에 여인의 신음소리가?' 화천명은 잠시 생각하더니 곧 수림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늘까지 빽빽하게 메운 울창한 수림 속. 음습한 그늘이 드리워진 한 쪽에 한 여인이 쓰러져 있었다. 여인이 쓰러져 있는 주위의 수풀은 광란의 흔적처럼 마구 짓이겨져 있었다. "으음……." 삼단 같은 머리채를 어지럽게 풀어 헤친 채 온몸의 맥을 놓고 신음하는 이 여인은 기이하게도 먹빛 도포(道布) 차림이었다. "……." 화천명은 그녀의 옆구리에 걸린 한 자루 고색창연한 검(劍)을 힐끗 쳐다본 뒤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헌데 멀리서 볼 땐 몰랐는데 막상 가까이 다가가자 갑자기 화끈한 열기가 전신으로 끼쳐왔다. '음?' 화천명은 흠칫 놀라 우뚝 멈춰섰다. 놀란 눈으로 급히 주위를 둘러보자니 여인을 둘러싼 주변의 공기가 무섭게 들꿇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이 열기는 바로 여인의 몸에서 뿜어지는 게 분명했다. '어찌 인간의 몸에서 이토록 무서운 열기가……?'


화천명은 아연한 눈길로 새삼스레 여인을 살펴 보았다. 여인이라기 보다는 소녀(少女)에 가까운 십 칠 세 가랑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굳이 발갛게 달아오른 두 뺨이 아니더라도 이 얼굴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잘 조화된 오관(五官)의 아름다움도 그렇거니와, 유난히 길고 숱이 많은 속눈썹은 이 얼굴에 또 하나 특이한 매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이때 인기척을 느낀 듯 흑포소녀의 꽉 닫혀 있는 눈이 번쩍 떠졌다. "누…… 누구세요?" 쌍꺼풀의 선이 아름답게 형성되면서 흑요석처럼 서글서글한 눈망울이 드러났다. 화천명은 일단 대답했다. "지나가던 사람이오." "……!" 화천명은 묵묵히 한걸음 더 내디뎠다. 순간 흑포소녀의 핏기없는 얼굴에 흠칫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가…… 가까이 오지 말아요!" 화천명의 걸음이 뚝 멎었다. "아니, 저…… 잠깐만……!" "역시 그냥 가면 안되겠는 모양이구려." "당…… 당신…… 혹시 치한은 아니겠지요?" 실로 해괴한 물음이었다. 허나, 이 물음에는 어떤 절실함과 기대의 념(念)이 짙게 배어 있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소. 아직 치한으로 대접받을 만한 일을 한 기억은 없지만 말이오." 그때였다. 돌연 기괴한 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토록 가공할 열기를 발산하던 흑포소녀의 몸이 갑작스레 와르르 진동하는가 싶더니 뼈속까지 사정없이 얼려 버릴 듯한 극랭한 한기가 열기대신 확 뿜어나오는 게 아닌가? 따라서 주변의 공기가 급격히 싸늘해지고 있었다. 화천명의 전신에도 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무슨 이런 일이……?' 화천명은 얼떨떨한 눈으로 자신의 몸을 살펴보다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소녀에게 눈길을 옮겼다. "당신도 춥소?" "그…… 그래요. 그보다…… 저어……." "뭐요?" 흑포소녀는 새파래진 입술을 꼬옥 깨물고 잠시 머뭇머뭇 하더니 마침내 말을 이었다. "제…… 제 몸에…… 소……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 화천명은 더 들어 볼 것도 없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약속했소" "그, 그럼…… 조금만…… 안아 주세요." "……?" 화천명의 눈이 커졌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도 기가 찬 나머지 화천명은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 몸에 손대지 않기로 해놓고 어떻게 당신을 안을 수 있단 말이오?" "그…… 그게 아니라…… 어쨌든 안아 주세요. 손대도…… 좋, 좋아요." 화천명은 얼떨떨했으나 이내 깨닫는 게 있었다.


몸에 손대지 말라는 최초의 말은 엉뚱한 짓을 하지 말라는 뜻이 분명했다. '너무 추워서 이것저것 가릴 게 없는 모양이군!' 화천명은 피식 웃고는 느릿느릿 소녀 앞에 다가섰다. 흑포소녀는 몹시 다급하게 재촉했다. "어…… 어서…… 당신에게도 좋은 일이예요!" '하긴 여자를 안는 것이니 나쁠 턱은 없지!' 화천명은 그녀의 말을 대충 그런 뜻으로 해석해 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그 말에는 또다른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화천명은 모르고 있었다. "그럼…… 실례하겠소." 화천명은 그녀의 곁에 앉아 냅다 그녀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그때였다. '윽!' 화천명은 하마터면 그녀의 몸을 놓아 버릴 뻔했다. 얼음덩이도 그런 얼음덩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이때였다. "이…… 이렇게는 안되요. 전신을 완전히 밀착시켜야만 해요." "……!" 화천명은 기가 꽉 막혔다. 멀쩡하기만 하다면 이건 호박이 아예 넝쿨째 굴러 들어오는 거나 진배없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허나, 이게 어디 사람인가? 세상에 어느 미친 놈이 있어 이런 얼음덩이를 온몸으로 꽉 끌어안는단 말인가? 허나 화천명은 달랐다. '에라 모르겠다!' 화천명은 내친 길이라는 듯 옆으로 누우며 그녀의 몸을 으스러져라 끌어안았다. 이렇게 되자 더욱 엄청난 한기가 전해 오면서 급기야 화천명의 몸까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것 보시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좀 부비면 어떻겠소?" "그…… 그러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천명은 온 전신을 부벼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상상해 보라! 생전 처음 보는 남녀가 이 멀쩡한 대낮에 미친 듯이 끌어안고 온몸을 부벼대는 광경을 말이다. 물론 연인 사이라면 문제는 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것도 저것도 아닌 판국이니 도대체 우습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내가 이게 무슨 꼴인지 모르겠군.' 내심 어처구니 없어 하면서도 화천명은 그야말로 미친 듯이 소녀의 전신을 부벼댔다. 헌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얼음덩이 같던 소녀의 몸이 어느 순간 갑자기 불덩어리로 변해 버리지 않는가? 그 순간 어마어마한 열기(熱氣)가 왈칵 끼쳐왔다. "욱!" 화천명은 기겁하며 급히 소녀의 몸에서 손을 떼려 했다. 그때였다. "안되요!" 급박한 외침과 함께 소녀의 사지가 뱀처럼 화천명의 전신을 휘감아 버렸다. "뭐가 안된단 말이오? 이젠 다시 뜨거워졌지 않소?"


"그…… 그래도 안되요! 그렇지 않으면 전 죽고 말아요!" 무서운 힘으로 필사적으로 죄여오는 건 둘째였다. 떨어지면 죽는다는 데야 화천명도 별 도리가 없었다. '빌어먹을! 그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결국 화천명은 그 엄청난 열기에 고스란히 시달리기 시작했다. 미치고 환장할 일은 정작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 겨우 견딜만한 지경까지 이르면 또 다시 열기는 한기로 뒤바뀌는 것이 아닌가? 또 죽자고 버텼다 싶으면 망할 놈의 이 한기는 또 사정없이 열기로 뒤바뀌는 것이었다. 그러기를 몇 차례나 반복했을까? '빌어먹을…… 이젠 나도 어쩔 수 없어!' 어느 순간 화천명은 그만 기진맥진하여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 "……!" 차가운 금속성의 섬뜩한 감촉을 목부위로 느끼며 화천명은 번쩍 눈을 떴다. 금속성 감촉은 바로 검날이었다. 그리고 검의 주인은 바로 흑포소녀였다. 화천명의 목에 검을 겨눈 채 가만히 내려다 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선 아무런 고통의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뭐요, 이건?" 화천명은 그녀를 올려다 보다가 시선으로 검을 가리켰다. 흑포소녀는 별다른 표정없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검(劍)이예요." "글쎄 검은 검인데……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요?" 너무나 태연자약해서 일까? 흑포소녀의 눈빛이 일순 기이하게 빛났다. 미세하나마 감탄의 빛이 묻어 있는 눈빛이었다. "별다른 뜻은 없어요. 그저 깨어나기 전에 당신을 죽여 버릴까 해서요." "나를?" 화천명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곧 짚이는 게 있는 듯 의미심장한 침성을 흘렸다. "흐흠! 말하자면 당신의 순결을 더럽힌 죄라 이건가?" "그래요. 처녀의 순결은 접촉만으로도 더럽혀지는 거예요." "헌데 왜 아직 죽이지 않았소?" "……!" 흑포소녀는 잠시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문득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방법은 세 가지예요." "세 가지?" "당신이 죽거나, 아니면 제가 당신에게 시집을 가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까의 일을 우리 둘 다 깨끗이 잊어 버리거나……." "흠…… 거기에 또 하나 추가하면 어떻겠소?" "어떻게 말인가요?" "당신이 죽는 거." "……!" 흑포소녀의 안색이 흠칫 일변했다. 설마하니 그렇듯 뚱딴지 같은 말이 나오리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녀는 곧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건 안되요. 전 할 일이 있어 죽을 수 없는 몸이예요." 그건 분명 자신이 죽는 것은 눈꼽만큼도 고려해 볼 여지가 없다는 뜻의 뻔뻔스런(?) 말투였다.


"그럼 할 수 없군. 둘 다 깨끗이 잊어 버리는 수밖에……." 화천명의 말이 끝나자 흑포소녀는 의외에도 순순히 검을 거두어 들였다. 그리곤 이렇게 말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요. 깨끗이 잊어 버리는 그 방법이 가장 좋겠군요." 비단 명랑쾌활할 뿐 아니라 여자답지 않게 대범한 일면을 여실히 보여 주는 그녀였다. '흐흠……!' 화천명은 그대로 누운 채 팔베개를 하여 흥미 어린 눈길로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흑포소녀는 그런 그의 시선을 힐끗 마주치더니 이렇게 반문했다. "뭐죠? 그런 눈길은……?" 화천명은 씨익 웃었다. "그대를 꽤 매력있게 보고 있다는 눈길이오." "……!" 흑포소녀는 그를 빤히 마주보다가 문득 가느다란 웃음꽃을 피워올렸다. "알았어요." "뭐 말이오?" "사실 당신을 죽이지 못한 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거나 당신의 넉살좋은 말솜씨에 현혹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어요." "그럼 뭐였소?" "당신의 매력…… 그래요. 여인으로서 당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존재하기 어려울 거예요." 그렇다. 굳이 매혹적인 눈빛과 유창한 달변이 아니더라도 기실 화천명의 지닌 바 매력이 어디 한두 가지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흑포소녀의 사람보는 안목도 꽤 뛰어나다 할 수 있었다. 화천명은 피식 웃더니 넉살좋게 그 말을 받았다. "아마 그럴 거요. 사실 난 여인들에게 이상하리만큼 인기가 좋은 사람이니까 말이오." 그러면서 그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순간 화천명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침 나절 거목에서 내려섰을 때 느낀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활력이 전신에 충만함을 느꼈던 것이다. 화천명은 힐끗 흑포소녀를 올려다 보며 반문했다. "이것이었소? 내게도 좋은 일이란 것이?" 흑포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아셨군요. 하지만 아쉽군요. 만약 당신이 무림인이었다면 최소한 이십 년 상당의 공력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괜찮아요. 당신은 이제 거의 잔병이 없는 건강한 몸으로 평생을 지낼 수 있을 테니까요." "……!" 화천명의 눈이 연속해서 커졌다. 무병(無病)이니 이십 년 공력 운운하는 말을 들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흑포소녀의 말을 듣는 순간 또 다른 사실을 퍼뜩 머리 속에 떠올린 것이었다. "그럼…… 그대의 그 증세는 바로 자부금과(紫府禁果)로 인해……?" 이번에는 흑포소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죠?" "어느 책에선가 본 적이 있소. 달리 음양쌍령천과(陰陽雙靈天果)라고도 하며, 천 년(千年)에 한 번씩


열매를 맺는 실로 희귀한 개세지보(蓋世之寶)라고…… 허나 인체에 도움을 주는 그 영효만큼이나 아울러 독성(毒性) 또한 지니고 있어 잘못 복용시는 사망의 첩경도 될 수 있는 것이 자부금과라고 알고 있소." "……!" "독성은 바로 무서운 열한지독(熱寒之毒)이고…… 그 열한지독은 오직 이성(異性)의 체온으로만 중화(中化)시킬 수 있고…… 맞소?" 흑포소녀도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당신 이제 보니 견식도 매우 풍부하시군요?" "대충 그런 편이오." 흑포소녀는 어깨를 으쓱하는 화천명의 얼굴을 못내 감탄스런 눈길로 바라보더니, "사실 전 사명(師命)에 의해 어제 이곳에 왔어요." "헌데 우연히 자부금과를 발견하게 되었단 말이오?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아무 뒷생각 없이 먹었을 테고?" 흑포소녀는 화사한 웃음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아무튼 당신 덕분에 살아났고 공력도 꽤 증진된 것 같아요. 아마 이런 경우를 일컬어 기연(奇緣)이라고……." 화천명이 씁씁한 어조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자부금과의 열한지독은 단 한 번으로 중화되는 게 아니오." "그래요. 최소한 세 번은 그렇게 해야만 완전히 중화될 수 있어요." 화천명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기막힌 악연(惡緣)이군." "악연이라고요?" "생각해 보시오. 이젠 나에게까지 독성이 옮아와 있으니 부득불 다시 당신을 부둥켜 안아야……." 화천명은 문득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만 둡시다. 악연치고는 꽤 괜찮은 악연이니까 말이오." "……!" 흑포소녀는 흑요석 같은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그를 빤히 응시했다. "뭐요? 그런 눈길은……?" "……." "혹시 나를 꽤 매력있게 보고 있는 중 아니오?" "……." "그것도 아니면…… 혹시 나를 생애 다시 없는 최고의 반려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오?" "……." 소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빌어먹을!" 화천명은 제풀에 지쳤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똑바로 그녀를 마주보기 시작했다. "……."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는 듯한 상태에서 얼마나 지났을까? "풋!" "후훗" 문득 두 사람은 똑같이 웃어 버림으로써 이 어색한 침묵에서 간단히 벗어나 버렸다. 뒤이어 웃는 얼굴로 화천명이 입을 떼었다. "이름이나 알아둡시다. 내 이름은 화천명이라 하오." 흑포소녀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끝을 가리켰다.


"도옥진(桃玉眞)이예요. 남해(南海)에선 묵해당(墨海棠)이라고도 불러 주지요." "검은 해당화라……." 화천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오." "고마와요." 흑포소녀 도옥진은 눈부신 치아를 드러내며 생긋 웃어보였다. 그렇다. 도옥진이라는 이름의 이 소녀는 한 송이 해당화처럼 신선하고 그 격렬한 해풍(海風)의 시달림에도 의연히 견디는 강한 기질을 하나의 개성으로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타고난 쾌활한 성격과 어울려 실로 독특한 하나의 아름다움을 형성하고 있었다. "헌데…… 남해에서 왔다고 했소?" 화천명이 문득 물었다. "네, 한 사람을 찾아 그를 도우라는 사명(師命)을 받고……." 말을 하다 말고 돌연 도옥진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녀는 이어 긴장된 신색으로 주위를 빠르게 쓸어보았다. "갑자기 왜 그래……." 화천명은 참지 못하고 물었으나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느닷없이 손목을 잡혔다 싶더니만 그 울창한 수림을 어느 새 발 밑으로 보는데 무슨 말인들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슈우욱! 도옥진이 펼쳐보이는 한 수 신법(身法)은 인간의 한계를 훨씬 벗어난 것이었다. 제 8 장 무인(武人)의 길을 걷다 * * * 군왕산의 서쪽 기슭에 위치한 황폐한 벌판이었다. 누우렇게 말라붙은 잡초만이 무성한 벌판에 정오(正午)의 일광(日光)이 얼음가루처럼 차갑게 부서지고 있었다. 휘잉……! 일광을 쓸고 지나는 바람결 속엔 지독히도 역한 피비린내가 실려 있었다. 그렇다. 그것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벌판 여기저기에는 수십 구에 달하는 시신(屍身)들이 까마귀떼의 잔해처럼 널려져 있지 아니한가? 그리고 어느 한 곳에는 아직도 몇 사람이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 사람과 다섯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다름아닌 출천대협 탁몽이었다. 그와 마주 대치하고 있는 오인(五人)은 흑의장포를 걸친 죽립인(竹笠人)들이었다. 하나같이 산 사람 형상같지 않은 지독하게 냉혹한 모습들이었다. 헌데 그들 오 인의 전신은 완전히 피투성이로 화해 있었다. 한눈에도 몸을 지탱하고 서 있다는 사실이 불가사의하게 여겨질만큼 극도의 엄중한 중상(重傷)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허나 출천대협 탁몽의 경우는 더욱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의 몸에는 아예 대여섯 개의 부러진 검편(劍片)들이 화살처럼 박혀 있었다.그로 인해 그의 발 아래는 말 그대로 완전히 혈해였다. 밀납보다도 창백한 안색만으로도 그의 내상과 출혈이 어느 정도인가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변함없는 것은 여전히 냉엄한 안광을 뻗어내는 두 눈(眼)이었다. 어느 순간, 탁몽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흑번…… 이제 알겠다. 천하의 사람들이 너희들을 왜 두려워 하고 뱀(蛇)처럼 경원하는지……." 그 음성에 담겨 있는 것은 솔직하고도 지극한 경탄이었다. 그것은 또한 비록 다수(多數)였다고는 하나 자신을 이 정도의 위경에 몰아붙일 수 있었던 상대의 실력을 인정하는, 무인(武人)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흑의인 중에 하나가 메마른 목소리로 응수했다. "우리도 이제 알았소. 출천대협 탁몽…… 당신을 왜 실전제일인(實戰第一人)이라 부르며 정도무림(正道武林)이 배출해낸 가장 위대한 전사(戰士)라 일컫는지 말이오." 또다른 흑의인이 낮은 소성을 흘려냈다. "후후후…… 몸서리치게 알아버렸소. 당신에 의해 우리는 생애 최초로 공포라는 단어를 의식하고 있소." "……." "불과 반나절 동안 당신에게 당한 우리 수효는 도합 칠십이명(七十二名)…… 흑번 역사상 가장 참담한 피해요." "후후…… 알겠소? 우리는 지금 번주(幡主)를 원망하고 싶은 심정이오. 왜 이따위 청부를 맡았는가 하고 말이오." "허나……." 그들 오 인은 중얼거림과 함께 서서히 수중의 검(劍)을 치켜올렸다. "당신도 이제는 죽소. 천하제일인 탁몽…… 후후! 안녕히 가시오." 그들의 눈이 칼날처럼 빛났다. 그와 더불어 무서운 살기(殺氣)가 삼엄하게 뻗어나왔다. 휘이이잉! 바람이 일순 거세어졌다. "죽음이라……." 창백한 미소가 출천대협 탁몽의 입가에 가늘게 묻어났다. "좋아. 죽어 줘야겠군."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 지극히 담담한 목소리였다. 허나, 그 말은 사실이었다. 현재 그는 완전히 탈진해 있는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이미 절명(絶命)을 해도 골백번 했을 상처와 출혈을 흘리고 있었다. 일순 흑의인들의 눈빛이 다시 한 차례 번쩍 살광을 토했다. 순간 그 살기에 바람이 멎고 햇빛마저 얼어붙는 듯 싶었다. 츠츠츳! 오 인의 검(劍)이 발동하려는 직전이었다. 바로 그 찰나였다. "멈춰!" 쌔액! 한 소리 날카로운 교갈이 짓쳐듬과 동시에 두 가닥의 빛줄기가 허공을 가르며 쏘아져 왔다. 그것은 장내의 상공에 이르자 허공을 한 바퀴 선회하면서 바람처럼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일남 일녀(一男一女). 그들은 바로 화천명과 도옥진이었다. '음……?' 내려서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출천대협 탁몽의 두 눈에 미세한 감탄의 빛이 스쳐갔다. 도옥진이 부드러운 무형경력(無形勁力)으로 화천명을 감싸며 지면에 악착시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일개 소녀로서 대단한 공력이 아닌가?' 탁몽이 내심 놀라고 있을 때였다. 도옥진은 내려섬과 동시 출천대협 탁몽을 향해 사뿐히 예를 취했다. "후배 도옥진, 사명(師命)을 받들어 대협께 조그만 도움을 드리고자 왔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느닷없는 말이었다. 출천대협 탁몽의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헌데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소녀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우선 대협께 드리는 첫 예물로써 이 자들을 소녀가 처리하고 싶사오니 맡겨 주시기를." 이어 소녀는 경쾌하게 신형을 돌렸다. '허!' 출천대협 탁몽은 어이가 없었다. 그때 도옥진의 우수(右手)는 어느 새 검(劍)을 뽑아들고 있었다. 그리고는 뽑아든 검을 가슴 앞에 비스듬히 세웠다. 그것은 분명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간단한 동작이었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삼엄한 검기(劍氣)가 살얼음처럼 뻗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도저히 일개 소녀의 검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최고도의 수준을 보여 주고 있었다. "……!" 감탄지색을 떠올리며 그것을 보고 있던 출천대협 탁몽은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좋아. 잠시 쉬어도 되겠군." 그때였다. "누군가, 낭자는?" "감히 흑번의 일에 끼어들 셈인가?" 오 인의 말투는 상대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언제나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 경망하지 않다는 것은 바로 흑번의 수업의 정도를 말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도옥진은 일순 청아하게 웃었다. "호호! 끼어드는 게 아니야. 아예 전담해 버릴 작정이지." 웃음성과 함께 그녀의 신형은 지면을 차며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파아아! "일단 그대들의 살인검법과 정통검도가 어떻게 다른지 그것부터 보여 주겠다." 솟구쳐 오름과 동시 도옥진의 검기(劍氣)는 흑의인들을 휘덮어 들었다. 취리리리릿! 화려하면서도 폭발적인 검화(劍花)가 허공에 피어나기 시작했다. "……!" "……!" 순간 오 인의 흑번살수들은 감히 방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일제히 검을 치켜올리며 도옥진의 검세를 맞받아 쳤다. 카카카캉! 쇳소리와 불똥이 어지러이 튀었다. 그 속에 도옥진의 신형은 허공에서 선회를 일으키며 재차 검세를 토해내고 있었다. 파파파파…… 파아아…… 앗! 이에 흑의인들의 검이 다시 마주쳐왔다. 일순간에 그들 사이에는 거의 십여초(十餘招)의 공수가


교환되었다. 도옥진의 검세는 영민하며 교묘했고, 다변(多變)과 화려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장중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제대로 격식을 갖춘 정통검도(正統劍道)였다. 그것은 흑번살수들의 치명적 사혈만을 노리는 철저한 살인검법과는 완연한 대조를 느끼게 했다. 헌데, 놀랍게도 단숨에 그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출천대협 탁몽은 그것을 지켜보며 감탄지색을 떠올렸다. "……!" 도옥진의 검법이 더 없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흔히들 사람들은 저러한 정통의 검도를 겉치장이 화려할 뿐 실용성이 없다고들 하지." 그의 눈빛에는 상당한 흥미마저 떠올라 있었다. "허나 그것은 어느 경지에 이르기 전의 이야기일 뿐…… 경지에 이른 정통검도는 살인 따위를 목적으로 한 실용검법과 같이 논할 수도 없다. 아예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흥이 일어나면 그대로 드러내는 호쾌한 성격 때문인지 탁몽은 그 극심한 중상의 와중에도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하핫…… 저 어린 나이의 소녀가 그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이때였다. 불쑥 옆에 서 있던 화천명이 중얼거렸다. "���상하군. 저런 검법이라면 왼손으로 전개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 순간 출천대협 탁몽의 눈썹이 가볍게 꿈틀했다. 그는 그제야 비로소 화천명을 돌아 보았다. 도옥진의 강한 인상 때문에 처음엔 화천명을 눈여겨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시선이 화천명의 수려한 얼굴에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도옥진의 검세 쪽으로 향했다. 순간 숨길 수 없는 내심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맞다! 분명히 정통이긴 하나 길은 좌수지로(左手之路)다. 정통 좌수검! 좌수로 전개하면 지금 위력의 배(倍), 아니 배 이상의 위력이 있다!' 그는 화천명을 다시 돌아 보았다. '헌데…… 그것을 한눈에 알아본 저 친구는 누구란 말인가?' 화천명은 팔짱을 끼고 선 채 흥미로운 눈길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순 출천대협 탁몽의 두 눈이 깊숙이 이채를 발했다. '놀랍군. 타고난 듯 전신에 자연스럽게 흐르는 기품(氣品)과 천질(天質)…… 예사 소년이 아니다!' 그러나 감탄에 이어지는 것은 의혹의 빛이었다. '그러나 무공을 익힌 흔적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다. 헌데 그런 안력이 어디서……?' 그렇다. 화천명은 아직까지 무공을 익히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느껴진 바를 그대로 말했을 뿐인 것이었다. 지금 화천명의 무학(武學)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에 이르러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안목과 안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 수 없었다. 허나, 분명한 것은 출천대협 탁몽도 얼른 간파하지 못한 도옥진의 좌수검을 그는 단번에 알아냈다는 사실이었다. 이때였다. 취리리리…… 리릿! 다섯 송이의 현란한 검화(劍花)가 흑번살수 오인(五人)의 요혈에 작렬되면서 승부는 결정되었다. 그들은 신음도 없이 쓰러지고 있었다.


털썩! 쿵! 허나 그들은 검기에 점혈(點穴)되었을 뿐 죽은 것은 아니었다. 도옥진의 검은 어느 새 겁집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천천히 출천대협 탁몽에게로 다가왔다. "좀 오래 걸려 지루하시지나 않았는지요." 출천대협 탁몽의 창백한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물론 지루하진 않았네만…… 낭자는 대체 누군가?" 허나 그는 곧 고쳐 말했다. "아니, 이름은 조금 전 말했고…… 사명을 받들어 나를 도우러 왔다니, 낭자의 사문(師門)은?" "남해(南海) 청조각(淸照閣)입니다." "남해 청조각?" 금시초문이었다. 출천대협 탁몽이 모른다면 천하에서도 알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출천대협 탁몽은 미미하게 검미를 좁혔다. "그럼 낭자의 사부는?" 도옥진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제자된 도리로 감히 사부님의 존함을 입에 올릴 수 없는 점,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알려 주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헌데 도옥진은 이어 이렇게 말을 이었다. "사부님께선 제 도움을 탁대협께서 의아해 하시거든 이렇게 전하라 하셨습니다. 탁대협과 남해 청조각은 천마(天魔)라는 공동의 적을 쫓고 있는 동지라고……." "……!" 순간이었다. 출천대협 탁몽의 두 눈이 신광(神光)을 뿜어내며 안색까지 굳어졌다. "천마라 했는가?" 그가 거의 신음성과 같은 한 마디를 흘려냈을 때였다. "천마라고 했소?" 화천명의 입에서도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헌데 어찌된 일인가? 그의 얼굴 또한 출천대협 탁몽 만큼이나 굳어져 있지 않은가? "……?" 출천대협 탁몽과 도옥진의 시선이 함께 그에게로 꽂혀졌다. 그 순간 도옥진의 표정이 퍼뜩 달라졌다. "큰일이군요. 사부님께선 탁대협 이외에 다른 사람 앞에서는 천마란 말을 입에 올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출천대협 탁몽도 끄덕였다. "그렇지. 아무 앞에서나 입에 올릴 말은 아니야." 이때 화천명은 도옥진을 잠시 주시하다가, 이어 출천대협 탁몽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 출천대협 탁몽, 탁대협이십니까?" "……." 출천대협 탁몽은 잠시 조용히 화천명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만…… 자네는?" "화천명이라 합니다." 그 이름을 출천대협 탁몽은 알고 있지 못했다.


그는 도옥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헌데 자네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던가?" 도옥진은 대답했다. "만난 지 반나절 된 사이예요." 그녀는 왠지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눈빛에도 어떤 알 수 없는 갈등이 떠올라 있었다. "흠!" 출천대협 탁몽이 가볍게 미간을 좁힐 때였다. 화천명은 평소의 그답지 않은 진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정색하는 때의 그의 표정과 태도는 상대를 긴장하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있었다. 천하의 출천대협 탁몽도 예외는 아니었다. 출천대협 탁몽은 은연중 긴장되는 자신을 느끼고 내심 어처구니없어 하며 입을 떼었다. "뭔가?" "천마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 출천대협 탁몽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났다. * * * 천마(天魔)라는 이름이 다시 거론되면서 분위기는 또 한 차례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도옥진의 눈빛 또한 굳어졌다. 출천대협 탁몽은 반문했다. "자넨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는가?" "제가 먼저 물었습니다." 출천대협 탁몽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 대답을 듣고 난 후엔 자넨 죽게 될지도 모르네." 이때였다. "사실 그는 이미 죽었어야 했어요. 사부님께선 탁대협 이외의 인물이 천마란 말을 들었거든 그를 죽이라 하셨거든요." 도옥진은 화천명을 흘깃 바라보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출천대협 탁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어차피 천마란 말을 들었으니 더 안다해도 마찬가지……." 이어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천마란 천마제일가(天魔第一家)를 말하네." "……!" 일순 화천명의 얼굴엔 여린 격동이 스치고 지나갔다. "한 가지만 더 물읍시다. 그들의 부활(復活)입니까?" 출천대협 탁몽은 화천명을 기이한 눈빛으로 주시하면서 대답했다. "확인할 순 없지만 사실일 걸세." 그것은 곧 긍정(肯定)의 의미였다. "이젠 내가 묻겠네. 자넨 그들과 어떤 상관이 있는가?" "……." 화천명은 대답 대신 청천백일을 노려보듯 올려다 보고 있다가, 한 순간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피어올렸다. "그들이 다시 나타나 천하를 어지럽힌다면 단신(單身)으로라도 막아야 할 관계…… 그 정도로 해둡시다." "……!" "……!"


출천대협 탁몽과 도옥진의 눈빛은 순간 동시에 기광을 빛냈다. 도옥진은 아미를 좁히며 화천명을 주시했다. "그 말…… 믿을 수 있는 말일까요?" 출천대협 탁몽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내 입장에선…… 나를 도우러 왔다는 낭자의 말이나, 저 친구의 말이나 전적으로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지." 화천명도 입을 열었다. "나 역시 그렇소. 그들을 공동의 적으로 두고 있다는 두 분…… 나로서도 그 말을 다 허용할 수는 없소." 도옥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전…… 사실 천마가 뭔지도 잘 몰라요. 사부님의 말씀만 듣고 왔을 뿐이니까요." 일순 세 사람의 눈길이 이상스럽다는 듯한 빛을 발산하며 교차되었다. "묘하군." 먼저 입을 연 쪽은 출천대협 탁몽이었다. "묘하군요." "묘한 것 같아요." 화천명과 도옥진이 똑같이 뒤를 이었다. 정말 묘한 일이었다. 세 사람은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헌데도 이야기 상으로는 천마(天魔)라는 공동의 적(敵)을 두고 있는 동지(同志)의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서로가 서로에게 이상하리만큼 진한 호의(好意)와 친근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 순간 출천대협 탁몽은 호쾌하고 굵은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다. "이런 것은 어떨까? 그냥 무턱대고 서로를 한 번 믿어 보는 것은." 순간 도옥진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럼…… 저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지요? 전 좋아요." 그녀 역시 시원한 성격이었다. 그리고 호쾌함과 시원함에 있어선 화천명 또한 남못지 않았다. "좋습니다, 저도." 이어 화천명은 지그시 탁몽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 묵비혼(墨秘魂)을 통해 어느 정도 대협을 알고 있습니다." "묵비혼!" 출천대협 탁몽의 입에서 짤막한 놀람의 일성이 튀어나왔다. "그를 만났는가?" "대협께 전해달라는 물건도 맡았지요." "그건…… 아니, 그는 지금 어떻게 됐나?" 출천대협 탁몽은 묵비혼의 안부부터 물었다. 화천명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중상을 입고 쫓기는 것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뿐." "음!" 무거운 침음성을 흘려내던 출천대협 탁몽은 갑자기 안색을 일그러뜨렸다. 울컥! 이어 거의 검은 빛에 가까운 핏덩이를 토해냈다. 그 피색깔 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내상을 입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허나 그는 태연히 입가를 쓱 문질러 닦더니 이렇게 말했다. "조금 후에 얘기하세." 그리고는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운기조식으로 내상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도옥진은 빙긋 웃었다. "과연 탁몽대협이군요. 무조건 믿기로 하자시더니 우리에게 생명까지 맡겨 버렸어요." 그렇다. 타인(他人)을 옆에 두고 운기조식을 취한다는 것은 곧 생명을 맡기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 화천명은 지그시 출천대협 탁몽을 주시했다. 분명히 오늘 처음 보았으나 마치 오래 전부터 이미 알고 지냈던 것 같은 매우 친숙한 느낌이 불현 듯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어쩌면 화천명과 탁몽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숙명(宿命)의 끈 같은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화천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믿음에 대한 보답으로 우린 이 분을 지켜 줘야겠구려." 도옥진은 뜻밖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나 곧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무림의 용어로는 호법(護法)이라 하지요. 탁대협을 노리는 것은 흑번 외에도 또 많아요." 그녀는 미소를 거두고 미미한 긴장의 빛을 떠올린 눈으로 사위를 둘러보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이 기회를 노리고…… 천사련(天邪聯)과 마라혈교(魔羅血敎) 등에서도 이미 상당수 고수들이 움직이고 있다던데……." 그렇다. 흑번(黑幡)이 출천대협 탁몽을 노리고 있다는 소문은 이미 천하에 퍼진 지 오래였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 그들 눈에 가시처럼 생각하고 있던 천사련이나 마라혈교에서는 그를 제거할 절대의 호기(好機)라 판단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문득 도옥진은 화천명을 돌아보며 조금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호법을 행할만큼 무공이 당신에겐 없을 텐데요?" 허나,화천명의 대답은 이러했다. "지금부터 만들면 되오." 도옥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슨 소리예요? 무공이 무슨……?" "시간이 없소. 일일이 설명하기에는." 잘라 말하더니 화천명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낭자도 무조건 나를 한 번 믿어 보시오." 이어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었다. "……?" 도옥진은 도무지 화천명이라는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 '으음…… 몇 가지 사용할 수 있을 것 같군!' 그는 눈을 감은 채 그의 뇌리에 잠재되어 있는 일천여종(一千餘種)의 무공구결(武功口訣)을 떠올려 본 후 내심 중얼거렸다. 헌데 불가사의한 것은, 단지 구결만을 알고 있는 그가 몇 가지 사용할 수 있다고 방금 중얼거린 사실이 아니겠는가? 정확히 말해 그것은 무학의 상식을 완전히 위배하는 말이었다. 본래 무학이란 구결만으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 무공이란 구결의 운용에 앞서, 그것을 몸으로 체득(體得)하는 오랜 세월의 연공(練功)이 없고서 사용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뛰어난 오성(悟性)과 체질의 소유자가 빠른 시간에 체득하여 어느 정도는 사용할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을 일컬어 기재(奇才)라 칭하기도 했다. 허나 지금 화천명의 말은 그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 우리는 여기서 그의 말을 광언(狂言)이나 허언(虛言)으로 여기기 보다는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된 그의 무학에 대한 놀라운 천재성(天才性)을 찬탄과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 터였다. '문제는 공력(功力)…… 자부금과의 영효(靈效)가 얼마나 되는지 거기에 달렸다!' 그는 내심 그렇게 뇌까리며 얼마 전 도옥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당신이 무림인이었다면 이십년(二十年) 상당의 공력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그렇다 화천명의 내부에는 상당한 잠력(潛力)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단지 내공(內功)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결정(決定) 지어지지는 않았을 뿐이었다. "……." 화천명은 곧 체내의 잠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계속해서 화천명을 지켜보고 있던 도옥진의 입에서 문득 탄성이 터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운기조식이잖아!" 맞는 말이었다. 화천명은 지금 역주천대라한령심법(亦週天大羅 靈心法)을 운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헌데 도옥진은 조금 후 더욱 놀라운 광경을 목도해야만 했다. 휘류류류……. 돌연 화천명의 정수리로부터 희미한 백색 기류(氣流)가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도옥진은 기가 콱 막힐 지경이었다. "내…… 내공을 만들었어, 벌써!" 이때였다. 그 사이 운기조식을 마친 출천대협 탁몽이 눈을 뜨고 나직이 말했다. "내공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저것은 최소한 사십년(四十年) 상당의 수위에서 일어나는 백기(白氣) 현상이지." "사…… 십 년!" 그것은 아까 도옥진의 예상했던 바를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역주천대라한령심법의 놀라운 묘용(妙用)이 아니고 무엇이랴? 도옥진은 황당했다. "이 일도 무조건 믿어야 하나요?" "글쎄…… 불가사의하지만 믿는 수밖에……." 출천대협 탁몽의 안색은 상당시간의 운기조식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창백했다. 쉽사리 치유될 상처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헌데 이 순간이었다. "……!" 도옥진은 갑자기 움찔하며 스치듯 사위를 휩쓸어 보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누가 왔어요. 둘…… 아니 셋?"


그때 화천명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아니 네 명 같은데……." 그 순간이었다. "하하하하! 안녕하시오, 탁몽대협!" 느닷없이 정적을 깨면서 낭랑한 소성이 울러퍼지는 것이 아닌가? 휘휘휙! 뒤이어 몇 개의 인영이 섬광처럼 비쾌하게 장내로 떨어져 내렸다. 사 인(四人)이었다. 나타나는 그 신법(身法)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고수의 특성을 익히 보여 주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선두의 인물은 청년이었다. 청년은 눈처럼 흰 백의유삼을 걸치고 있었다. 뒷짐을 지지 않은 왼손에는 한 자루 섭선(攝扇)을 쥐고 있었다. 상당��� 준수한 모습인데 입술이 얇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허나 세련된 몸가짐과 신광이 갈무리된 눈빛은 그가 예사로운 고수가 아님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삼 인(三人)의 용모 또한 하나같이 특이했다. 좌측에는 비쩍 마른 체구에 흑의장포를 걸친 중년인이 서 있었다. 음독잔인해 보이는 인상에 녹색안광(綠色眼光)을 뻗어내는 두 눈이 섬뜩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중년인은 가슴과 허리에 마흔 여덟(四十八) 자루의 비수가 꽂힌 가죽띠를 두르고 있었다. 중앙에 서 있는 것은 혈발(血髮)의 노파였다. 붉은 눈썹 밑에서 빛나는 회색빛 동공(瞳孔)은 흡사 시체와도 같은 분위기를 연출해 내고 있었다. 노파가 오른손에 움켜쥐고 있는 것은 쇳소리 철그덕거리는 시꺼먼 철장(鐵杖)이었다. 우측에 서 있는 것은 대머리에 지독히 왜소한 체구의 마의노인(麻衣老人)이었다. 그에게서 풍겨나는 느낌은 지독한 사(邪)의 냄새였다. 마의노인은 등 뒤에 기형(奇形)의 쌍도(雙刀)를 교차시켜 메고 있었다. "……!" 일순 그들을 바라보던 출천대협 탁몽의 입에서는 나직한 중얼거림이 뱉아졌다. "천사공자(天邪公子) 사사옥(査士玉), 사인귀효(邪忍鬼梟) 풍사(風沙), 혈발마파(血髮魔婆) 우상춘(于霜春), 도사(刀邪) 막천강(莫天强)…… 천사련의 쥐새끼들이로군." 천사련(天邪聯)! 과연 그들의 등장이었다. 목적은 물론 탁몽의 제거가 틀림없을 터였다. 차차창! 그 순간 망설일 필요도 없다는 듯 대담하게 뽑아내는 도옥진의 검(劍)에서는 여자답지 않은 눈부신 패기가 화려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싸음이라…… 좋아! 한 번 해 보자구!' 운공을 마친 화천명은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일어섰다. 이때 시각은 정오를 한참 지난 미시(未時)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은 무인(武人)으로서의 화천명이 새로이 탄생되는 시각이기도 했다. 제 9 장 구사일생(九死一生) * * * "뭐라고?" 혈정수사 설문비의 입에서는 날카로운 일성이 튀어나왔다. 언제나 차갑고 심유하게 번뜩이던 그의 눈빛은 이 순간 경악과 불신을 담고 아연히 벌어졌다. "다시, 다시 얘기해 봐라. 그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하고 있다고?"


다급성을 터뜨리는 그의 앞에는 두 명의 인물이 시립해 있다. 백의(白衣)와 적의(赤衣). 쌍동이처럼 닮은 용모에 흡사 칼날(刀)을 보는 듯한 날카롭고 강인한 예기(銳氣)가 숨막힐 듯 뻗어나는 이인(二人)이었다. 바로 백랑적리(白狼赤狸)였다. 이러한 섬뜩한 이름으로 불리우는 이들은 바로 혈정수사 설문비의 좌우시위(左右侍衛)였다. 먼저 입을 연 인물은 좌측의 백랑(白狼)이었다. "싸우고 있습니다. 장소는 군왕산, 상대는 도사(刀邪) 막천강(莫天强)입니다." "이런 미친 놈들!" 혈정수사 설문비는 말도 안된다는 듯 욕설을 내뱉았다. "도사 막천강이라면 천사련(天邪聯) 안에서도 서열 이십 위 안에 드는 고수다. 그런 고수와 무공의 무(武)자도 모르는 그가 싸워?" 그 말에 우측의 적리(赤狸)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틀림없습니다. 그는 분명히 화천명이었습니다. 많이 접하지는 못했지만 실로 강하게 남아 있는 인상의 그는 틀림없이 화천명이었습니다." 백랑이 거들었다. "속하 역시……." 그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잘못 보았다면 이전의 그를 잘못 본 것일 겁니다. 무공을 갖추고 있던 그를……." "미친 소리!" 혈정수사 설문비는 말을 잘라 버렸다. "무공이라는 것이 감춘다고 감춰지는 물건이냐? 설사 감춰진다고 해도 그것 정도를 못 알아 볼 만큼 내 눈은 나쁘지 않다." "……!" "……!" 백랑과 적리는 일시 말문을 열지 못했다. 허나 야단을 맞는 것은 맞는 것이고 눈으로 분명히 목격한 사실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한 차례 마주 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런 추측밖에 나올 수 없게 만듭니다." "출천대협 탁몽과 화공자, 그리고 정체모를 그 소녀…… 그들 세 사람은 마치 동지(同志)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이전부터 서로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혈정수사 설문비는 이들 백랑적리가 허튼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으음!" 그의 안색에 일순 혼란이 스쳤다. 허나 그는 곧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좋다. 사실 여부는 확인해 보면 알 일이다. 그보다 천사련에서는 누구누구가 왔더냐?" 백랑적리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도사 막천강, 사인귀효 풍사, 혈발마파 우상춘, 그리고 천사공자 사사옥 입니다." "사사옥까지……?" 혈정수사 설문비의 검미가 가볍게 치켜져 올라갔다. 백랑적리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일대(一隊)에 불과한 걸로 짐작됩니다. 흑번이 출천대협 탁몽을 노린다는 소식을 입수하고…… 사실 천사련에서는 이미 며칠 전에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 "마라혈교(魔羅血敎)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어쩌면 지금쯤 도착했을지도 모릅니다."


"으음!" 혈정수사 설문비의 입에서 또다시 낮은 침음성이 새어나왔다. 그는 가늘게 눈을 뜬 채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는 피식 실소와도 같은 웃음을 입가에 짓더니 내뱉듯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들 말대로 그가 화공자임에 분명하다면…… 우린 천사련과 마라혈교를 동시에 상대해야 되겠구나." * * * 이미 서천(西天)은 황혼으로 덮여들고 있었다. 피보다 붉은 노을이 죽음의 유혹처럼 천지를 휘덮고 있는 황량한 벌판에서는 지금 숨막히도록 화려한 결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차창…… 파라라랏! 도옥진은 사인귀효 풍사와 혈발마파 우상춘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었다. 전세는 거의 막상막하였다. 그것은 가히 놀라운 일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사련에서도 서열 이십 위 안에 드는 고수 두 명을 거뜬히 상대하고 있는 그녀, 갈 수록 신비한 느낌을 풍기는 그녀의 진정한 신분은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화천명은 도사 막천강과 일대 접전(接戰)을 벌이고 있었다. 헌데, 지금의 그의 모습을 보라. 그야말로 일대고수(一代高手)의 위용이 아닌가? 그것은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전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진정 눈을 휘둥그레 뜬채 자신의 시력을 의심하였을 것이다. 화천명은 적수공권이었다. 참으로 괴이하고 신비막측한 절학(絶學)들이 그 적수공권에서 연속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허나 종류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위기에 닥쳤을 때 듣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무공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그것은 그의 타고난 무인(武人)으로서의 자질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쉽게 말해서 위기라는 감응(感應)이 전신에 일게 되면, 생각에 앞서 몸이 이미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절학을 뿜어내고 있다는 표현이 옳았다. 그러면서 그는 구결로만 알고 있었던 그것들을 몸으로 체득(體得)해 가고 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싸움과 연공을 동시에 하고 있는 상태라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그가 싸움에 임하고 있는 태도는 그지없이 진지했고, 또한 거의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 있었다. 반면, 도사 막천강은 싸울 수록 경악과 불신(不信)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놈이……?' 공력으로 말하자면 분명히 그가 위였다. 그것도 몇 단계 위라고 말해도 좋았다. 뿐만 아니라 초식의 숙련도로 말하더라도 화천명은 사실 서툰 상태였다. 때문에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래야 옳을 터였다. 허나 그것이 아니었다. 도사 막천강은 도무지 가볍게 처리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갈수록 힘겨운 느낌을 받고 있었다. '으으…… 이런 빌어먹을 경우가 있나!' 도사 막천강은 이빨을 갈아붙이며 더욱 맹렬하게 쌍도(雙刀)를 휩쓸어갔다. 슈파파파…… 파아아앗! 한편. "……!" 여전히 주저앉은 자세인 출천대협 탁몽 또한 화천명을 지켜보며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가 불가사의한 놈이다. 다른 건 다 젖혀 두고라도 저 절학들…… 모두 하나같이 소림무학을 변형시킨 것 아닌가? 그것도 위력이 배(倍)가 되도록 발전시킨!' 그렇다. 광승 천곡(天哭)은 본래 소림 출신이었다. 허나 그가 화천명에게 주입시킨 무학들은 소림무학(少林武學) 그대로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판이하게 변형시키고 발전시킨 것들이었다. 그것을 알아보는 출천대협 탁몽의 안목은 과연 놀라웠다. "……." 출천대협 탁몽은 잠시 시선을 돌려 한쪽에 서 있는 백의청년을 바라보았다. 백의청년. 그는 바로 천사공자(天邪公子) 사사옥(査士玉)이었다. 사사옥은 천사련의 지존 만사혈황(萬邪血皇) 독고천(獨孤天)의 직전제자로, 천사련의 후계자 물망에 오르고 있는 인물이다. 나이답지 않게 심기(心機)가 깊음은 물론이거니와 무공 또한 당대 후기지수 중에서 발군(拔群)이라 알려진 절대준재였다. "……!" 사사옥의 눈살은 잔뜩 찌푸러져 있었다. 뜻밖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화천명의 존재도, 도옥진의 존재도 그에게는 의외(意外)가 아닐 수 없었다. '으음…… 탁몽 혼자인 줄만 알았더니……!' 그는 극도로 창백한 안색으로 주저앉아 있는 출천대협 탁몽을 보면서도 감히 그에게 출수(出手)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전제일인 탁몽이라는 그 명성이 워낙 큰 중압감을 주기도 하거니와 출천대협 탁몽이 앉아있는 자세는 중상의 기미가 역력함에도 불구하고 감히 넘볼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혼자서 출수하기에는 사실 자신이 없는 사사옥이었다. 헌데 어느 순간이었다. "……!" 돌연 사사옥의 눈빛이 이채(異彩)를 발하면서 찌푸려 있던 눈살이 활짝 펴졌다. 벌판 저편. 시뻘겋게 타오르는 노을 속에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이 비쳐든 때문이었다. 그들은 일견 지극히 천천히 걸어오는 것 같았으나, 두어 차례 눈을 깜박이기도 전에 어느 새 환영처럼 장내에 이르러 있었다. 일노이소(一老二少)였다. 하나같이 노을 빛보다도 붉은 적의(赤衣)를 걸친 그들은 모두 붉은 검집의 장검(長劍)을 착용하고 있다. 앞에 선 것은 은발 노인(銀髮老人)이었다. 노인은 큰 키에 조금 마른 듯한 체격이었다. 그의 눈빛은 고요하면서도 은연중 놀라운 예기(銳氣)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우러나는 기도는 또한 어떠한가? 조용히 서 있는 자세만으로도 보는 이의 심장을 짓누를 듯한 위압감이 자연스럽게 뻗어나는 그의 기도는 가히 일대종사(一代宗師)의 그것이라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좌우에 일남일녀(一男一女)가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좌측에는 장대한 체격의 중년인이 서 있었다.


충직한 인상이었으나 푸른 불꽃처럼 빛나는 그의 안광(眼光)은 그가 어떤 무서운 수련과정을 거친 절대고수임을 대언(代言)해 주고 있었다. 우측의 미소녀(美少女)는 놀라우리만큼 빼어난 용모를 지녔으나 어딘지 모르게 음울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마치 퇴폐적인 아름다움(美)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그녀의 일체의 표정을 삭제해 버린 듯한 얼굴과 얼굴의 반면(半面)을 가린 채 길게 늘어뜨린 흑발(黑髮) 때문인 것 같았다. 이때였다. 은발노인은 걸음을 멈추고 전권(戰圈)을 둘러보더니 출천대협 탁몽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탁몽…… 오랜만이군." 음성 또한 눈빛 만큼이나 고요하면서도 은은한 위엄이 실려 있었다. "……!" 출천대협 탁몽의 안색 저변에 희미한 긴장감이 스쳐 지나갔다. 허나 그는 곧 태연히 응수했다. "오랜만이오, 여(如) 선배." 이때 사사옥이 불쑥 나서며 묘한 웃음성을 던져왔다. "하하! 탁대협, 드디어 당신의 최후를 오늘 보게 되겠구려."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우리만으론 별로 자신을 못했는데 혈우검마(血雨劍魔) 여적성 노선배까지 두 분 제자와 함께 이렇게 와주셨으니 말이오." 교활한 심기였다 그는 은연중에 합력(合力)을 제의하고 있는 것이었다. -혈우검마(血雨劍魔) 여적성(如赤星). 그는 마라혈교 서열 제삼위(第三位)의 고수였다. 나이는 이미 백 이십 세에 가까운 노마로서, 특히 검(劍)에 관한 한 그의 경지에 필적할 인물은 전무(全無)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여적성은 마도최강(魔道最强)의 검가(劍家)라 불리우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문득 혈우검마 여적성은 사사옥을 스쳐보며 내뱉았다. "어린 놈. 쓸데없는 심기 쓰지 마라. 너희는 너희대로, 본좌는 본좌대로 할 일 하면 되는 것이다." "여 노선배……!" "대신 순서는 지켜라. 알겠나? 탁몽과 본좌의 일전(一戰)이 먼저다." 혈우검마 여적성의 두 눈에서 냉전(冷電)과도 같은 안광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것은 상대의 심혼을 꿰뚫을 듯한 압도적인 눈빛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마도(魔道)에 몸담고 있기는 하되 검도일로에 평생을 바쳐온 일대검가(一代劍家)의 위용이기도 했다. "여 노선배, 좀 더 현명하게 생각하심이……." "귀찮군!" 혈우검마 여적성은 사사옥의 말을 잘라 버리며 두 제자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맡아라. 선 그 자리에서 한발이라도 움직이거든 혈우검마 문하(門下)의 무서움을 보여 주거라." 스읏! 순간 일남일녀는 소리없이 미끄러지며 사사옥의 앞을 막아섰다. 그와 함께 그들의 몸에서 뻗어나는 무서운 검기(劍氣)가 사위를 압도했다.


사사옥의 눈빛은 거세게 흔들렸다. '혈우검마의 두 제자인 마검혈수(魔劍血手) 적초(赤超)와 야혈향(夜血香), 교백란(嬌白蘭)…… 이 자들의 경지가 이미 검신합일(劍身合一)에 이르렀단 말인가?' 검신합일. 그렇다. 검을 뽑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토록 위압적인 검기를 뿜어낼 수 있는 것이 그 외에 달리 있겠는가? 그 순간 혈우검마 여적성은 천천히 출천대협 탁몽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중상 중인 그대에게 검을 겨누는 것만도 사실 내키지 않는 일이다. 교주(敎主)의 명이라 어쩔 수 없이 나섰는데…… 저 애송이가 감히 본좌에게 합력을 제의한다. 빌어먹을 일이 아니냐, 탁몽." 출천대협 탁몽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합공이 현명하긴 하지. 이 정도 상처가 나 탁몽의 위력을 감소시키진 못해." 슥! 그는 땅에 떨어진 장도를 쥐고 느릿하게 신형을 일으켰다. 혈우검마 여적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운 일이다. 거리낌없이 손을 쓰게 해 주는구나." "천하의 탁몽이 누구의 동정을 받았다면 지나가는 개도 웃을 일이니까." 출천대협 탁몽은 담담하게 말했다. 허나 그는 이 순간 한 줄기 결단(結斷)의 빛을 내심 스쳐내고 있었다. '겨우 회복된 진력이 일분(一分)…… 어쩔 수 없다! 용서하시오, 사부…… 유명(遺命)을 어기고 그것을 사용할 수밖에 없음을…….' 그것은 분명 뭔가 중대한 의미를 내포한 중얼거림이었다. * * * 휘잉……! 바람결이 조금 거세지기 시작했다. "……." 출천대협 탁몽과 혈우검마 여적성. 그들 두 사람은 서서히 어둠이 스미기 시작한 주변의 공기를 무섭게 긴장시키며 삼 장 간격을 두고 마주섰다. "……." 그들은 말이 없었다. 오직 숨막히는 침묵과 정적이 바람을 휘몰고 황량한 벌판을 짓누르며 지나갔다. 어느 사이엔가 화천명과 도옥진 등의 싸움은 그쳐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숨을 죽인 채 긴장된 신색으로 두 사람의 대치를 주시하고 있었다. 스읏! 한 순간 혈우검마 여적성의 장검이 느릿하게 허공을 베어들었다. 동시에 출천대협 탁몽의 장도도 하늘을 향해 치켜져 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스파파팟! 그들 두 사람의 신형은 동시에 빛살처럼 천공을 가르며 맞부딪쳤다. 섬(閃)의 교차! 순간이었다. 이 세상의 그것이라고는 도저히 여길 수 없는 충격적이면서도 감동적인 장면이 중인들의 시야에 연출된 것은. 찰나지간 천지간 모든 것을 압도하는 장렬하고도 통쾌한 기백(氣魄)이 누군가의 전신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번쩍! 최초의 그것은 하나의 도섬(刀閃)인가 싶었다. 허나 그렇게 채 느끼기도 전에 그것은 흡사 폭죽이 터지듯 수백, 수천 가닥으로 확산되었다. 번…… 쩍! 형용할 수조차 없었다. 수천 개의 뇌전(雷電)이 한꺼번에 작렬하는 듯 두 사람의 교차점으로부터 폭출되는 환상(幻想)과도 같은 빛(光)의 폭풍이 일었다. 그리고 굉음이 들려왔다. 과르르릉…… 꽈꽈꽝! 꽈꽝! 그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랴? 정말이지 하늘도 일시에 빛을 잃는 듯했다. 그것은 마치 마(魔)를 징계하는 하늘(天)의 분노와도 같았다. "……!" 그때, 그 광경을 바라보던 화천명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격동이 스쳐갔다. 기이한 전율과 격동 때문이었다. 아니, 그것은 아예 감동하고 있다는 표현이 옳았다. 그렇다. 화천명은 출천대협 탁몽이 전개한 그 도법(刀法)을 보는 순간 이유도 없이 격한 전율이 전신을 꿰뚫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그리고 실체 모를 감동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하지만 그 까닭이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이때 빛더미와 굉음은 일시에 사라지고 장내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들었다. "……." 출천대협 탁몽은 장도를 늘어뜨리고 조용히 서 있었다. 그리고 혈우검마 여적성은 십여 장 밖으로 튱겨나가 지면에 쓰러져 있었다. 가슴은 찢어져 피분수가 솟구쳤고 검(劍)은 아예 형체조차 없었다. "사부님!" 마검혈수 적초와 야혈향, 교백란의 신형이 한꺼번에 날았다. 허나 혈우검마 여적성은 그들의 부축을 거칠게 뿌리쳤다. "놓아라. 혼자 일어설 수 있다." 심장까지 내비칠 정도의 중상이었으나 그는 가슴을 움켜쥐며 혼자서 일어섰다. 그리고 출천대협 탁몽을 주시했다. "탁몽…… 과연 천하제일인이다. 훌륭했다." "……." 탁몽은 묵묵히 그 시선을 맞받았다. 그의 안색은 혈우검마 여적성보다도 오히려 더 창백했다. "훗날…… 다시 한 번 그대를 찾겠다." "……." 출천대협 탁몽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혈우검마 여적성은 그제야 두 제자의 부축을 받으며 그곳을 떠나갔다. 출천대협 탁몽은 남아 있는 사사옥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조용한 음성을 흘려냈다. "지금도 탁몽의 목을 얻고 싶은가?"


"……!" 굳어져 있던 사사옥은 순간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이미 출천대협 탁몽의 도법에 압도되어 전의(戰意)를 상실하고 있었다. "……!" 사사옥은 다른 삼 인을 불안한 눈빛으로 스쳐보다가 입을 열었다. "다음에 뵙겠소이다." 그 한마디를 신호로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뒷걸음질로 물러서더니 일제히 몸을 날려 사라져 갔다. * * * "욱!"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난 뒤 출천대협 탁몽은 시꺼먼 핏덩이를 토해내며 고목처럼 쓰러졌다. 쿵! 회복되지 않은 진기를 너무나 과도하게 운행한 탓이었다. "탁대협!" 도옥진은 황망히 외치며 몸을 날려 출천대협 탁몽에게 쇄도해 들었다. "……!" 화천명도 흠칫 놀라 곁으로 다가섰다. 쓰러진 출천대협 탁몽의 몸은 시신처럼 차갑고 뻣뻣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숨결도 거의 없었다. 죽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안돼!" 순간 도옥진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출천대협 탁몽의 전신에 십여 장(掌)을 뻗었다. 퍼퍼퍼퍽! 출천대협 탁몽의 신형이 꿈틀하는 찰나 도옥진은 그의 신형을 급히 일으켜 앉힌 다음, 등뒤의 명문혈(命門穴)에 장심을 밀착시켰다. 그녀의 동작은 실로 신속하면서도 익숙했다. "……!" 화천명은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호법을 부탁해요!" 도옥진은 빠르게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이어 본신내력으로 진기를 주입시키기 시작했다. "……!" 화천명은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살피며 침착하게 사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안위는 화천명의 손에 달려 있었다. 때문에 다른 생각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시간이 흘러갔다. 어둠이 덮인 벌판에는 푸르스름한 편월(片月)의 달빛이 바람결에 흘러 다니고 있었다. 다시올까 우려했던 사사옥 등은 다행히 오지 않았다. 헌데, 어느 순간이었다. "……!" 화천명은 문득 어떤 기이한 느낌에 검미를 찌푸렸다. 그것은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일종의 지독히 불쾌(不快)한 감각(感覺)이었다. 색깔로 표현하자면 암회청색(暗灰靑色)이라 할 수 있었다. 소리로 말한다면 악령(惡靈)에 씌웠다는 흉가(凶家)의 거미줄 덮인 대문이 끼이익 열리는 그런 소리였다. "……!" 화천명은 신경이 쭈빗 머리 속 어디론가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도옥진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상해요. 마기(魔氣) 같은 것이 느껴지는군요." 그녀는 손을 떼며 일어서고 있었다. 많은 진력을 소모한 듯 그녀의 안색은 파리했다. 출천대협 탁몽은 위험고비를 넘긴 듯 앉은 자세 그대로 자연적인 조식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화천명은 출천대협 탁몽을 한 차례 살펴보고 나서 물었다. "이런 것을 마기라고 하는 것이오?" 도옥진의 눈길이 그를 향했다. "당신도 느껴지나요?" "그렇소. 마기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 화천명이 느꼈던 그 지독히 불쾌한 감각은 틀림없는 마(魔)의 기운이었다. "……!" 화천명과 도옥진은 출천대협 탁몽을 은연중 호위하며 어둠에 묻힌 사위를 둘러 보았다. 어둠 속 어디에선가 그 섬뜩한 마의 기운은 점점 강렬해지고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이었을까. 그 마기가 터질 듯 근접해 왔다고 느꼈을 때였다. 어둠 속으로부터 들려온 것은 뜻밖에도 어린아이들의 목소리였다. "헤헤…… 여기라고 그런 것 같은데." "맞아, 여기라고 그랬어." 그 음성은 마기 따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실로 천진난만하면서도 해맑은 목소리였다. 이어 두 명의 어린아이들이 나타났다. 칠팔 세 가량으로 보인다. 각기 혈의(血衣)와 흑의(黑衣)를 입었는데, 용모는 흡사 인형처럼 깜찍하고 예뻤다. 정말이지 귀여움을 견디지 못해 덥석 끌어안아 주고 싶을 정도였다. "……?" 화천명과 도옥진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득 도옥진이 물었다. "누구지, 너희들은?" 아이들은 대답대신 크고 반짝반짝 빛나는 예쁜 눈으로 두 사람을 올려다 보았다. 그러다가 출천대협 탁몽을 발견하고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흘렀다. "헤헤…… 이 사람인가 보다." "그래, 확인해 보자." 아이 하나가 뒤쪽 어둠 속을 향해 외쳤다. "이리 끌고 와 봐." 그러자, 어둠 속에서 소녀(少女)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알았어." 대답과 함께 한 소녀가 걸어 나왔다. 역시 칠팔 세 가량에 몸에는 꼭 달라붙는 취의(翠衣)를 입고 있었다. 헌데 소녀의 용모가 이토록 예쁠 수도 있을까? 크고 빛나는 눈, 오똑한 콧날, 앙증맞은 꽃잎 입술, 눈부시도록 흰 살결과 양볼에 파이는 보조개 따위는 도대체 뭐라 형용할 수가 없었다. 분명 선계(仙界)의 옥녀(玉女)가 아니면 어둠의 정령(精靈)이 한데 모여 탄생시킨 밤꽃의 화신인 듯했다. 허나 놀라야 할 사실은 소녀의 이러한 형용불가의 용모에 있지 않았다.


바로 그녀의 손(手)이 문제였다. 뭔가 커다란 흰 물체를 질질 끌고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백의(白衣)를 걸친 어른의 몸통이 아닌가? 다시 말해 미소녀는 한 손으로 자기보다 두 배나 큰 한 사람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다가오는 것이었다. "……?" 화천명과 도옥진이 아연해 하고 있을 때였다. 먼저 와 있던 아이들이 취의소녀를 향해 말했다. "물어 봐, 이 사람이 맞나……." "응." 취의소녀, 한 손으로 목덜미를, 한 손으로는 머리칼을 잡고 백의인의 얼굴을 쳐들어 올렸다. "맞아, 이 사람?" 그 순간 화천명과 도옥진은 아예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처, 천사공자!" 그렇다. 그는 바로 조금 전에 사라졌던 천사공자 사사옥이 아닌가? 정녕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허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천사공자 사사옥의 태도였다. 그의 눈빛과 표정은 완전히 공포(恐怖)에 젖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거의 심령(心靈)이 제압된 상태인 듯 취의 소녀의 물음에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까르르 웃었다. "틀림 없구나!" "겨우 찾았네." 마치 잃어 버렸던 장난감을 찾고서 좋아하는 듯한 천진스런 태도였다. 헌데 그때였다. 아이들을 주시하고 있던 도옥진은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경악이 실린 중얼거림을 흘려냈다. "환…… 환상(幻像)이에요!" 화천명은 검미를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소리요? 그럼 지금 이 광경이 현실이 아니라 환상……." "그, 그게 아니고……!" 고개를 황급히 젓는 도옥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화천명은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무서운 긴장과 숨길 수 없는 공포였다. "실제…… 저, 정말로 존재하고 있었군요. 그 환상들이……." 화천명은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세 아이들은 천천히 그들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천사공자 사사옥을 질질 끌고서 말이다. 아이들이 다가섬과 동시에 가슴으로 엄습해 드는 예의 섬뜩한 기운이 화천명을 에워쌌다. '마기의 근원지가 저 어린아이들이란 말인가?' 일순 화천명은 놀람보다 불쾌한 표정을 떠올리며 불쑥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어디서 왔지?" 세 아이 중 혈의소동(血衣少童)이 대꾸했다. "우리?" 혈의소동은 손가락으로 서남(西南)쪽의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서 왔어." "……?"


화천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혈의소동의 음성이 이어졌다. "몰라? 에이…… 당신은 머리가 나쁜가 봐. 서남이란 말이야. 서남엔 뭐가 있지?" 그때였다. 화천명대신 도옥진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한 마디가 뱉아졌다. "마동루(魔童樓)!" 혈의소동은 씨익 웃었다. * * * 오오! 당신들은 기억하는가? 이 땅 십방(十方)의 대지(大地) 위 어딘가에 열 개의 환상(幻想)의 땅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환상십지(幻想十地)! 그렇다. 말 그대로 환상처럼 떠도는 열 개의 공포(恐怖)! 그 중 하나가 아이들의 왕국(王國), 악마의 자식들이 꿈틀대고 있다는 마(魔)의 온상인 마동루(魔童樓)가 아닌가? 허나 화천명은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곧 언제인가 한 번 스쳐 들어 본 것 같다는 기억을 떠올렸다. '마동루라고?' 그때 흑의소동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알았으면 이제 비켜. 우린 당신들에겐 볼일이 없거든." "우린 저 사람만 죽이면 돼." 혈의소동이 출천대협 탁몽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귀엽고 예쁜 입술로부터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는 살인(殺人) 이야기였다. 헌데 그것은 괴이하게도 조금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 그 순간 화천명은 그는 심중(心中) 깊은 곳에서부터 섬뜩한 한기(寒氣)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마동(魔童)들은 일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키지 않을 모양인데 어떡할까?" "다 죽여 버릴까?" "아까 그 대머리 늙은이나 시뻘건 머리 노파만큼 세면 골치 아플 텐데." 그러다가 화천명과 도옥진을 흘깃 바라보고는 자기네들끼리 다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만큼 세진 않을 거야. 나이가 있잖아." "뭐 그만큼 세다 해도 관계없어. 그 늙은이도 몇 초 버티다가 이 애송이만 놔두고 도망가 버렸잖아." 화천명은 기가 찬 눈길로 아이들의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도사 막천강과 혈발마파가 이 아이들에게 패해 달아났단 말이 아닌가?' 화천명은 잠깐 출천대협 탁몽을 바라보았다. 출천대협 탁몽은 무아지경에 들어 있었다. 운기조식 중에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화천명의 귓전으로 도옥진의 긴장 어린 전음성(傳音聲)이 날아들었다. "조심하세요. 가장 무서운 상황이예요. 당신이 마동육육아(魔童六六兒)의 전설을 알고 있다면 좋겠는데……." 도옥진은 긴장 속에서도 거의 냉정함과 침착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 순간 화천명은 그녀의 말을 듣고 확실히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마동육육아(魔童六六兒). -마동루에는 육십육명(六十六名)의 악마(惡魔)의 유아(遺兒)들이 있으니, 그 하나의 힘만으로도 능히 산을 가르고 대해를 뒤엎는다! "……!" 화천명은 그때서야 이 아이들을 단지 아이들로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출천대협 탁몽의 장도(長刀)를 집어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저희들끼리 재잘대고 있던 세 마동은 느닷없이 몸을 솟구쳐 올렸다. 츠츳! 허나 솟구쳐 올랐다 보였을 때 그들의 신형은 이미 빛줄기처럼 출천대협 탁몽을 향해 폭사해 들고 있었다. 슈아아…… 아앗! "어딜!" 화천명은 짤막하게 일성을 발하며 장도(長刀)를 쳐올렸다. 슈슉! 카카캉! 도옥진의 검(劍)이 바람을 꿰뚫은 것도 완전한 동시였다. 도영과 검광이 교차되는 속에 엄청난 금속성이 튀고 불똥이 날았다. "욱!" "음!" 그 속에서 두 마디 답답한 신음성이 터져나왔다. 휘리리릭! 세 마동은 퉁겨져 허공을 핑글핑글 선회하고 있었다. "그, 금강불괴!" 도옥진은 경악의 신음성을 터뜨리며 연속적으로 뒷걸음질 치다가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녀의 안색은 믿을 수 없으리만큼 창백했다. 허나 화천명쪽은 더했다. 손아귀가 파열되어 도(刀)는 허공으로 튕겨져 치솟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신형은 근 십여 보나 밀려나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쿠쿵! 내부 기혈이 뒤틀려 요동치고 정신조차 일시 가눌 수 없을 정도였다. 마동들은 맨몸으로 화천명과 도옥진의 공세를 퉁겨내 버렸다는 말이 아닌가? 그때였다. 세 마동 중 혈의마동은 화천명이 놓친 도(刀)를 허공에서 낚아챔과 동시에 섬전처럼 하강하며 출천대협 탁몽을 향해 그대로 수직으로 일섬(一閃)을 찍어 내렸다. 쐐액! "안돼!" 도옥진은 찢어지는 절규와 함께 몸을 날렸다. 허나 이미 늦었다. 퍽! 도(刀)는 도대로 출천대협 탁몽의 좌측 어깨에 관통해 버렸다. 헌데, 놀라운 일이었다. 그 정도의 허공에서 내리찍는 힘이라면 그의 몸뚱이는 이미 양단되어 버렸어야 했다. 그러나 박히기만 했을 뿐 도는 더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때였다.


번쩍! 출천대협 탁몽의 두 눈이 느닷없이 뜨여졌다. 동시 그의 우수(右手)가 뻗더니 혈의마동의 목을 움켜쥐어 버렸다. 콰악! "큭!" 너무도 의외의 상황이라 혈의마동은 피할 생각조차 떠올릴 틈도 없이 그대로 당하고 말았다. 같은 순간 몸을 날렸던 도옥진은 취의소녀를 향해 최후진력을 다한 검격을 폭사해 내고 있었다. 추아아아아! 그녀의 검은 어느 새 좌수(左手)로 옮겨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제껏 그녀가 펼쳤던 검초와는 천양지차의 어마어마한 위력이 뿜어지는 일격이었다. 황홀무비의 검영(劍影)이 야천을 장악한다 싶은 순간이었다. 고오오오……! 천계(天界)에서 울려 나오는 것 같은 청아하고 신비로운 소성이 사위를 뒤덮었다. 그 순간 화천명은 주저앉은 채 쌍권(雙拳)을 쭉 내뻗고 있었다. "수미대라벽력천권(須彌大羅霹靂天拳)! 강(强)은 강(强)으로, 마(魔)는 패(覇)로 멸하노니!" 수미대라벽력천권. 그것은 광승 천곡에 의해 뇌리 속에 주입되었던 수천 종 무학 중 최극강의 격공권력(隔空拳力)이었다. 여기서 화천명의 타고난 무인(武人)의 자질은 또 한 번 유감없이 증명되었다. 위기라는 감응이 전상에 일자 생각보다도 앞서 그의 몸이 이미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절학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쿠콰콰…… 카카카카카캉! 귀청을 난자하는 연쇄적인 금속성과 함께 야공(夜空)에는 화려무비한 불꽃이 산비했다. "캬…… 캭!" 도옥진과 부딪친 취의소녀의 몸은 폭풍처럼 뒤흔들리며 지면으로 나뒹굴었다. 허나 도옥진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무서운 반탄력에 퉁겨져 나간 그녀의 신형은 아름드리 거목(巨木)에 부딪쳤다. 뿌지지직! 그 순간 거목은 둥치가 부러져 그녀와 함께 나동그라졌다. 콰콰쾅! "컥!" 화천명의 권력에 부딪친 흑의미동은 꺾어지듯 등이 활처럼 휘어진 채 십 장 밖으로 날아갔다. 화천명의 전신은 그와 동시에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더니 앞쪽으로 날아갔다. 쿠쾅! 그가 떨어져 처박힌 곳은 공교롭게도 도옥진의 바로 곁이었다. 그때였다. 출천대협 탁몽에게선 실로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화르르르릇! 그와 혈의마동의 전신은 새파란 불꽃에 휘감겨 있었다. 그의 완강한 손에 목을 움켜잡힌 혈의마동의 입에서는 심장을 토해내는 듯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크아아아아!" 치지지직…… 치직……! 이어 혈의마동은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돌연 몸뚱이가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출천대협 탁몽은 지금 삼매진화(三昧眞火)를 펼치고 있는 것이었다.


"크아아……." 비명이 잦아들면서 혈의마동의 몸뚱이는 순식간에 재로 화해 버리고 만다. 불꽃 역시 사그러 들었다. "마동의 숨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화기(火氣) 뿐이다." 이어 신음 같은 중얼거림이 출천대협 탁몽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헌데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욱…… 크윽!" 그는 검붉은 핏덩이를 연속적으로 토하더니 그대로 털썩 쓰러져 의식을 잃어버렸다. 이미 엄중한 내상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 운기조식을 멈춰야 했으며 게다가 무리하게 삼매진화를 펼쳐낸 탓이었다. 그로 인해 탁몽의 상세는 이제 완전히 회복불능인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이르러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으음!" 나뒹군 화천명과 도옥진은 피를 흘리며 일어서고 있었다. 핏두성이가 된 그들의 전신은 말할 것도 없이 엄중한 중상(重傷)이었다. 화천명과 도옥진은 떨리는 팔로 땅바닥을 짚으며 간신히 넘어진 거목둥치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이어 입가의 핏물을 닦아내면서 사위를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헉!" "앗?" 그들은 거의 동시에 짧은 경악성을 토했다. 보라! 조금 전에 날려갔던 흑의마동과 취의소녀가 다시 꿈틀꿈틀 일어서고 있지 않은가! 아니, 일어서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전신에서는 엄청난 마기(魔氣)가 무시무시하게 뻗어나고 있었다. "크으으! 혈정아(血精兒)가 죽었어." "캬아…… 죽여 버린다, 모조리!" 그들은 화천명과 도옥진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 도옥진의 얼굴 가득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 정말이지 이젠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었다. "끝…… 장이야……." 허나 화천명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포기하긴 이르지. 해볼 때까지 해보는 거요." 입술을 짓깨물면서 화천명은 창백한 안색으로 일어서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도옥진의 검(劍)이 쥐어져 있었다. 그렇다. 역주천대라한령심법의 또 다른 효용은 회복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는 데 있었다. "……!" 화천명은 검을 쥔 채 다가오는 두 마동을 향해 버티고 섰다. 그의 뒷모습을 올려다 보던 도옥진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입 안에서 이런 중얼거림을 삼키고 있었다. '강한 사내!' 두 마동은 삼 장 전면까지 이르고 있었다. 헌데 이 순간이었다. 슈아아앙! 돌연 흑의마동과 취의소녀를 향해 두 줄기 빛이 뇌전처럼 꽂혀드는 것이 아닌가?


카캉! "큭!" "칵!" 흑의마동과 취의소녀는 불시의 기습을 얻어맞고 대여섯 걸음을 물러섰다. 두 줄기의 빛은 바로 쌍도(雙刀)와 철장(鐵杖)이었다. 즉, 도사 막천강과 혈발마파 우상춘이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추파아아! 그들은 마동들에게 기습적인 일격을 가함과 동시, 반탄력에 퉁겨지는 힘을 빌어 천사공자 사사옥 앞으로 날아갔다. 이어, 도사 막천강은 재빨리 사사옥을 옆구리에 끼었다. 그리고 화천명과 도옥진을 향해 소리쳤다. "살고 싶거든 어서 도주해라! 저놈들보다 더 무서운 놈들이 온다!" 파아앗! 말을 뱉음과 동시에 그들은 섬광처럼 야공을 날아 사라져 갔다. 화천명과 도옥진은 정신이 없었다. '마동들 보다 더 무서운 놈들이라니?' 그 순간 흑의마동과 취의소녀는 연속된 타격으로 잠시 주춤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저주의 종자들! 가라!" 쌔애액! 어둠 속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한 소리 폭갈과 함께 두 개의 흑구(黑球)가 마동들에게로 폭사해 들었다. "엇!" "응?" 흑의마동과 취의소녀는 잠깐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가볍게 그것을 낚아챘다. 순간이었다. 꽈꽈꽈꽝! 두 개의 흑구는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터져 버렸다. 이어 가공할 불기둥이 허공 천상까지 치솟았다. "크아아!" "캬아아!" 화염과 연기 속에서 터져 나오는 마동들의 비명이 그들의 최후를 알리고 있었다. 제 10 장 시작되는 이변(異變) * * * 그때였다. 휘휘휙! 화천명과 도옥진의 전면에 두 줄기의 인영(人影)이 날아 내렸다. 백의와 적의를 걸친 두 사람은 쌍둥이처럼 닮은 용모에 강인한 예기(銳氣)를 전신에 칼날처럼 두르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내려섬과 동시 그들은 화천명을 향해 공손히 예를 취했다. "녹수구곡맹의 백랑(白狼), 적리(赤狸), 본맹 총사의 분부 받들어 화공자를 모시러 왔소이다." "……!" 화천명은 언젠가 그들을 본 적이 있었다. 바로 혈정수사 설문비의 좌우시위였던 백랑적리(白狼赤狸)이었다. 화르르르……. 이때 화염은 사그러졌다. 이어 두 마동들은 그대로 재가 되어 부스러져 내리고 있었다. "마정천화신탄(魔精天火神彈)! 무림 금기(禁忌) 중 하나인데……."


도옥진은 신음 같은 독백을 흘려냈다. 그러자 백랑, 적리는 힐끗 그녀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무림금기 아니라 뭐라 해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소." "천하를 통틀어 단 두 개를 우리가 가지고 있던 건데, 어쨌든 그대들은 운이 좋은 사람들이오." 그렇다. 원래 마정천화신탄(魔精天火神彈)은 절대 사용할 수도 없고, 사용해서도 안되는 가공할 위력의 절대화기(絶代火器)였다. 그 화성(火性)이 너무도 강력하고 잔혹하여, 언제부터인가 그것을 사용하는 자는 무림의 공적(公敵)으로 낙인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그 제작방법조차 실전(失傳)된 금병(禁兵)이었다. 헌데 녹수구곡맹의 백랑적리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우연치고는 참으로 의미깊은 사실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화천명과 출천대협 탁몽, 그리고 도옥진의 강한 운(運)을 은연중 시사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다. 이 상황에서 그것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마동들을 그토록 간단히 물리칠 수 있었겠는가? 백랑적리는 말을 이었다. "갑시다. 어서 총사께서 본맹의 고수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오고 계시니 가다 보면 곧 만날 것이오." "그 후엔 절대 안전하오." 화천명은 이때 출천대협 탁몽의 곁에 다가가 있었다. 출천대협 탁몽은 혈해 속에 쓰러진 채 의식이 불명한 상태였다. 숨결마저도 거의 끊어질 듯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위험하다!' 화천명은 한 눈에도 그의 생명이 위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 찰나 그의 눈빛에 어떤 결단의 의지가 스쳐갔다. '설문비에게는 신세를 지고 싶지 않지만……!' "갑시다." 화천명은 출천대협 탁몽의 신형을 일으켜 안아들었다. "제가 업겠소이다." 백랑이 나섰다. "고맙소." "후후…… 탁몽대협이외다. 업을 수 있다는 것만도 더없는 영광이외다!" 그것은 결코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백랑적리는 출천대협 탁몽에게 진심으로 존경의 자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화천명은 도옥진을 돌아보았다. "갈 수 있겠소?" 도옥진은 힘겹게 일어서서 진기를 다스려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안되겠어요. 잠시 조식을 취하지 않으면 지금 상태로 경공은……." "……!" 화천명의 눈빛에 조금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허나 그는 곧 빙긋 웃으며 등을 돌렸다. "업히시오." "예?" "어차피 낭자와 나는 이것저것 가릴 사이가 아니지 않소? 어서!" "……!" 도옥진의 표정이 일순 괴이하게 변했다.


'이것저것 가릴 사이가 아니라고……?' 허나 화천명의 성격이 명쾌한 만큼이나 그녀의 성격 또한 명쾌했다. "고마와요." 한 차례 화사한 웃음을 지어 보인 뒤, 곧 화천명의 등에 교구를 얹었다. 뭉클! 등으로 접해지는 여체의 감촉은 앞으로 안았을 때와는 또 다른 유별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화천명은 지금 그런 감촉 따위를 즐기고 있을 입장이 아니었다. 그는 도옥진을 업자마자 백랑적리를 향해 물었다. "어느 쪽이오?" "인도하겠소이다." 백랑적리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곧 신형을 날렸다. 파랏! '공력소모를 최소한 줄이면서 최대의 속도를 낼 수 있는 경공은……!' 이러한 생각이 번뜩 뇌리를 스치는 순간 화천명의 발은 지면을 박차고 있었다. 스읏! 그것은 일견 극히 부드럽고 완만한 동작같았다. 그러나 화천명의 발이 움직였다 싶은 순간 흡사 어둠의 야공으로 빨려들 듯 솟구쳐 어느 새 백랑적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백랑적리는 화천명의 신법을 바라보다가 일순 놀람의 일성을 발했다. "화공자! 그 신법은 소림(少林)의 금강부운표(金剛浮雲飄) 같은데……!" 화천명의 신법은 신체의 다른 부분은 거의 움직임이 없이 단지 발끝(足尾)으로만 구름을 밟듯 몸을 띄우고 있는 것이었다. 화천명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소림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금강부운표인 것은 맞소." "……!" 백랑적리는 참으로 신비하다는 눈길로 화천명을 응시했다. 화천명은 다시 물었다. "그보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소?" "본맹의 이목은 넓소이다." 백랑은 간단히 이렇게만 대답했다. 적리가 덧붙였다. "그러나 우리로서도 오늘밤 마동루가 등장하리라는 것은 전혀 뜻밖이었소이다." 그의 음성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깃들어 있었다. 이때였다. 화천명의 등 뒤에서 도옥진이 입을 열었다. "마동루 외에 환상십지 중 다른 곳의 종적은 못 보셨나요?" 백랑적리는 동시에 의혹 어린 반문을 던졌다. "못 보았소만…… 그건 왜?" "아니예요." 도옥진은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허나 화천명은 그녀의 물음 속에 내재된 의미를 알고 있었다. '마동들보다 더 무서운 자들이 왔다고 했다. 그럼 그것은……?' 도사 막천강의 말과 황급한 행동으로 보건대 단순히 겁을 주려는 얘기만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대체 마동들보다도 더 무서운 자들이 누구란 말인가?' 화천명이 내심 그런 의혹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조금 앞서 가던 백랑적리의 신형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 화천명도 뒤따라 멈춰섰다. 그가 우선 볼 수 있었던 것은 백랑적리의 얼굴에 느닷없이 떠올라 있는 무서운 긴장감이었다. "……?" 화천명의 눈길이 그들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이동되었다. 한 순간 그의 두 눈에는 놀람과 의혹이 한꺼번에 엉키며 떠올랐다. 그들의 전면. 편월(片月)의 파리한 달빛이 부서지는 벌판 한 곳에 백삼(白衫)과 흑삼(黑衫)을 걸친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은 한가롭게 술잔을 나누며 담소(談笑)를 즐기고 있다. 얼핏 보기에 그 모습은 마치 선계(仙界)의 두 옛 친구가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고 있는 듯 아름답고 정겨운 분위기였다. 허나 그것이 환상적인 아름다움으로 느껴진 이유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그 두 사람의 용모 또한 그러했다. 나이는 대충 이십여 세의 청년(靑年)들로 보였다. 헌데 달빛 아래 드러난 그들의 용모를 어떤 말로 형용해야 되는가? 한 마디로 표현해 하얀 배꽃(梨花)이라고나 할까? 그렇다. 그들이 여인(女人)이었다면 어쩌면 그런 표현이 적합할런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의 용모는 아름다우면서도 섬칫했다. 그런 느낌은 아마도 백옥(白玉)을 깎아 다듬어 놓은 듯한 너���도 흰 피부와 더불어 그들의 전신에서 풍겨나는 알 수 없는 사령(邪靈)적인 섬칫한 기운의 미묘한 대조(對照)에 기인한 것 같았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 극사(極邪)의 아름다움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 문득 그들은 고개를 돌리며 화천명 등을 향해 시선을 보내왔다. 그리고 청량한 웃음소리와 함께 말을 던졌다. "하하…… 달도 좋고 바람도 좋은 이 밤에 어디를 그렇게 바삐 가시오이까?" "오시오. 한 잔 술과 더불어 잠시 쉬어 가시구려." 순간 백랑이 긴장섞인 어조로 물었다. "누군가, 그대들은?" "하하…… 우리가 누구인들 어떻소? 당신들이 누구인들 또 어떻소? 만났으니 인연이요…… 인연이 맺어진 자리에 술잔을 더불어 나눔 또한 제격이 아니겠소?" "……?" 백랑적리의 눈살이 일순 좁혀졌다. "노닥거릴 시간 없다!" 찰나, 그는 한마디를 내뱉으며 그대로 몸을 날렸다. 허나 백랑적리는 몸을 날렸다 싶은 순간에 곧 신형을 멈춰야 했다. 보라! 청년들은 조금도 움직임이 없는 것 같았는데 어느 새 백랑적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지 않은가? 술잔을 기울이는 동작 또한 조금도 변함없었다. "이, 이럴……!" "……!" 백랑적리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 순간 백삼청년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니, 일으켰다 싶은 순간 어느 새 그는 백랑적리 앞에 다가서 있었다. 아니, 다가섰다 싶자 이미 적리의 손목을 잡아쥐고 있었다. 그 일련의 동작은 마치 환상과도 같았다. 적리는 머리 속에 어떤 의식을 떠올리기도 전에 이미 손목이 잡혀 버리고 만 것이었다. "이리 오시오. 사양도 지나치면 오만이 되는 법이라오." "……!" 순간이었다. 백랑의 입에서 부르짖음처럼 경악성이 터졌다. "적리, 그…… 그 손!" "……?" 적리는 흠칫했다. 같은 순간 자신의 손목에 스물스물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감촉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퍼뜩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 봤다. 그때였다. "으악!" 돌연 적리의 입에서 처절한 경악의 비명이 터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보라! 그의 손목이 어느 새 촛물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지 않은가? 투둑! 이어 급속도로 손목으로부터 팔 전체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순간 백랑의 입에서 절규 같은 일갈이 터졌다. "잘라 버려라, 빨리!" 백랑적리. 그들도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다. 추악! 적리는 섬광과 같은 반응으로 일수(一手)를 자신의 팔로 내리쳤다. 피가 뿜어져 나올 틈도 없이 옆에 있던 백랑이 견정혈(肩井穴)을 찍어 지혈(止血)을 시켰다. "하하하하하!" 순간 백삼청년의 입에서 낭랑한 대소가 터뜨려졌다. "보시오. 권주를 받지 않으니 공연히 팔만 하나 날렸지 않소?" 그때였다. 도옥진의 입에서 외침이 발해졌다. "옥인(玉人)! 그래요, 저들은 옥인야(玉人野)의 독정옥인(毒精玉人)들이에요!" 옥인야(玉人野)! 그것인가? 마동들 보다 더 무서운 자들이라는 환상십지(幻想十地)의 두 번째 공포가? "……!" 백랑적리는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도옥진의 입에서 옥인야라는 한 마디가 뱉아짐과 동시, 사위에는 갑자기 무서운 정적으로 덮여 들었다. 그것은 분명 공포 때문이었다. 백랑적리는 자신들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뒷걸음질쳐 물러나고 있었다. 화천명은 도옥진을 돌아보았다. "옥인야라 했소?"


"그래요. 열 개의 환상 중 북지(北地)의 공포…… 전설의 화신독정지체(化身毒精之體)를 완성한 독정옥인들!" 그때 백삼청년의 입가에는 사악하리만큼 아름다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계집! 꽤나 아는 것이 많구나. 그렇다. 위대한 옥인(玉人)의 땅…… 우리는 거기에서 왔다." 흑삼청년도 천천히 일어섰다. "허나 너희들에겐 볼일이 없다." 말하면서 시선은 백랑을 향했다. "내려 놓아라." 바로 출천대협 탁몽을 말하는 것이었다. "……!" 백랑은 이미 심각한 공포를 느끼고 주춤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때였다. 화천명은 도옥진을 내려놓으며 흑삼청년을 정시했다. 도옥진의 입에서 다급성이 발해졌다. "안돼요, 공자! 저들을 상대할 순……." "안되면? 그냥 보고만 있으라는 말인가?" 한 마디를 내뱉으며 성큼 발길을 떼어놓았다. 이어 화천명은 백랑의 앞을 우뚝 막아섰다. 그의 손에는 도옥진의 검(劍)이 들려져 있었다. 휘잉……. 때마침 불어온 한 줄기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표표히 휘날렸다. 흑삼청년의 눈에 의아하다는 빛이 스쳐갔다. "뭐냐, 넌? 우리와 싸워 보겠다는 뜻이냐?" 화천명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아니, 비키라는 뜻이다. 환자가 있어 갈길이 바쁘니까 말이야." "후후…… 그럼 환자가 죽어 버리면 바쁠 일도 없겠구나." 흑삼청년은 비릿한 소성을 흘렸다. 그와 함께 그의 신형이 환영처럼 미끄러지며 화천명쪽으로 다가섰다. 화천명의 눈빛이 일순 빛을 뿜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멈춰!" 파파파팟! 야공을 찢는 일성의 교갈이 짓쳐듬과 동시에 십여 줄기의 빛살들이 장내에 꽂히듯 날아들었다. "……?" 화천명과 흑삼청년의 동작이 일순 멈춰졌다. 장내로 날아든 것은 십삼인(十三人)의 인영이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용모의 미녀(美女)들이었다. 백(白), 남(藍), 자(紫), 청(靑), 홍(紅), 황(黃), 회(灰), 벽(碧), 적(赤), 갈(褐)……. 제각기 다른 색깔의 의상을 걸친 그녀들의 출현은 현란한 무지개가 내려선 것 같았다. 하나같이 월궁선녀(月宮仙女)처럼 아름답다는 것 외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검(劍)을 착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헌데 그녀들을 보는 순간 도옥진의 입에선 반색의 음성이 튀어나왔다. "언니들! 와 주셨군요!" 그러자 그녀들 중 가장 나이들어 보이는 백의 미녀(白衣美女)가 화사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심해라. 언니들이 왔다." 이어 그녀는 화천명을 향해 빠르게 전음(傳音)을 보내는 것이었다.


"저희들은 남해 청조각의 청조십삼매(靑照十三妹)예요. 탁몽대협은 저희가 맡을 테니 옥진을 부탁해요." 조용하면서도 기품있는 음색(音色)이었다. 헌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청조십삼매 중 청의녀(靑衣女)가 느닷없이 백랑의 양쪽 견정혈에 이장(二掌)을 뻗어냈다. 퍼펑! 워낙 졸지의 암격이라 백랑은 피할 생각조차 떠올릴 틈도 없었다. "윽!" 백랑은 비틀하며 양팔의 힘을 잃어버렸다. 업혔던 출천대협 탁몽의 신형이 떨어져 내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허나 떨어지는 그의 몸을 이번에는 홍의녀(紅衣女)가 받아 안고 그대로 허공으로 박차올랐다. 슈우욱! 청의녀가 백랑을 암습하고 홍의녀가 허공으로 치솟기까지는 완전히 찰나지간이었다. 정말이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전혀 의외의 사태였다. "이런!" "어딜!" 순간 백삼청년과 흑삼청년은 늦었으나 그대로 냅다 쌍장을 뻗었다. 콰르르르! 한꺼번에 네 가닥의 기류(氣流)가 진저리치며 홍의녀를 향해 휩쓸어 갔다. 그 기세의 가공함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었다. 기류의 여파가 미치는 지면(地面)은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었다. 허나 순간, 그에 대한 방어를 이미 준비해 두었던 듯 백의녀 등 십이인(十二人)의 검(劍)이 일제히 허공으로 뻗었다. 촤촤촤촤! 허공 만장을 일시에 휘덮는 현란무쌍한 검기(劍氣)의 폭풍이 두 독정옥인의 공세와 거세게 맞부딪쳤다. 쿠꽈꽈꽈꽈꽝! 찰나, 그 반탄(反彈)의 힘을 빌린 열 두 명의 여인들의 신형은 일시에 튱겨지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치솟았다 싶은 순간 삽시에 열 세 개의 점(點)으로 화해 사라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기막힌 도주였다. "……!" 화천명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그녀들의 신속하고도 눈부신 행동에 박수라도 쳐주고 싶을 정도였다. "……!" 백삼과 흑삼의 두 독정옥인의 얼굴엔 일순 낭패감이 스치는 듯 했으나 곧 낭랑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좋아! 멋지구나! 어디 얼마만큼이나 도망갈 수 있는지 보자!" 이어 그들은 화천명쪽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고 그대로 야천으로 신형을 솟구쳤다. 슈아아앙! * * * "낭자의 언니들이 추격을 벗어날 수 있을까?" 화천명은 가볍게 검미를 좁히며 도옥진을 돌아보았다. 도옥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 속엔 깊은 신뢰(信賴)가 깃들어 있었다. "쉽진 않겠지만 따돌릴 수 있을 거예요. 십이사저(十二師姐)가 다 오셨으니……." 이때 백랑적리는 자신들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화공자, 시각으로 보아 총사(總師)께서 곧 도착하실 것 같소이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소?" "좋소." 화천명은 두말없이 끄덕였다. 바라던 일이었다. 도옥진에게 운기조식할 시간을 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화천명은 도옥진을 향해 물었다. "낭자의 내상은 어떻소?" "가볍진 않아요." 도옥진은 항상 솔직했다. "하지만 청조신환(靑照神丸)을 복용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면 어느 정도 회복될 것 같군요." 그녀는 푸른 알약을 입안에 털어넣고 정좌한 뒤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이각여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문득 화천명의 검미가 미미하게 찌푸러졌다. '이건……!' 그의 안색이 갑자기 변화를 일으켰다. 같은 순간 도옥진 역시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와 함께 그들의 얼굴에 동시에 떠오르는 것은 낭패감이었다. "낭자도……?" "당신도……?" 똑같이 묻고 똑같이 끄덕였다. 그 순간 그들의 얼굴은 역시 똑같이 화끈한 홍조 (紅照)로 달아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홍조와 함께 이어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그렇다. 바로 자부금과(紫府禁果)의 열독(熱毒)이 또다시 발동하고 있음이 아닌가? 도옥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 마지막 발독(發毒)이예요." 마지막이기 때문이었을까? 발독은 일단 시작되었다 싶자 삽시에 온몸을 장악했다. 곧 앞서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고 무서운 열기(熱氣)와 고통(苦痛)이 전신 구석구석을 후벼 들었다. "으음!" 도옥진은 벌렁 누워 버렸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나는 열기로 주변의 공기가 들끓어 올랐다. "제길……!" 화천명은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들의 기미를 눈치채고 백랑이 흠칫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오, 화공자?" "으음!" 화천명은 정신이 혼미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대답할 수조차 없었다. 허나 이럴 때 화천명은 더욱 그다운 행동을 해버릴 수 있었다. "볼썽 사납더라도 이해하시오." 그러고는 그냥 도옥진을 덥석 무릎 위로 안아 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내상까지 겹친 도옥진은 아예 혼미상태 일보직전이었다. "……!"


백랑적리는 일순 아연했으나 곧 눈길을 돌려 버렸다. 그들도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였던 것이다. 그랬기에 화천명과 도옥진의 기색을 보아 뭔가 상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했던 것이다. "……!" 화천명과 도옥진은 전신을 밀착한 상태로 한동안 상대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주변의 공기는 열기로 팽창되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 열기는 갑작스럽게 사그러지는가 싶더니 이내 엄청난 한기(寒氣)로 바뀌어 갔다. 그때였다. "으……." 쿵! 신음소리와 함께 화천명은 벌렁 뒤로 쓰러져 버렸다. 폭발적인 열독이 한독(寒毒)으로 급격히 바뀌는 그 충격에 드디어 혼절하고 만 것이었다. "……!" 백랑적리는 흠칫 놀라 화천명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바로 그때였다. "손대지 마라." 뒤쪽으로부터 한 줄기 괴음성이 흘러들었다. "……!" 백랑적리는 일순 부르르 떨었다. 목소리만으로도 심장을 얼려 버릴듯한 한기(寒氣)가 엄습해 들었던 것이다. 그 음성은 흡사 빙령(氷靈)의 동굴로부터 울려나오는 듯 지독히도 차갑고 음사했다. "누구……?" 백랑적리는 돌아서다가 또 한 번 흠칫 놀랐다. 뒷편에는 뜻밖에도 아무도 없었다. 사위는 그저 숨막힐 듯한 적막에 덮여 있을 뿐이 아닌가? 마치 조금 전에 들은 괴음성은 흡사 환청(幻聽)같이 느껴졌다. 백랑적리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 그들은 갑자기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혀 다시 한 번 날카로운 눈길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허나 바람소리 외에는 인간의 흔적이라고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백랑적리는 불현듯 어떤 공포에의 의식이 등줄기를 치달리는 것을 느꼈다. 헌데 다음 순간이었다. 그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기분을 느끼고 무의식 중에 화천명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가 아연 멍청해지고 말았다. 없었다. 화천명과 도옥진의 모습이 어느 사이엔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리고 없지 않은가? 참으로 귀신이 곡할 일이었다. "이럴…… 수가……?" "이게…… 도, 도대체 이런 일이……?" 백랑적리는 넋을 잃고 서로를 마주볼 수밖에 없었다. 제 11 장 드러나는 비사(秘事) * * * 바로 그 시각, 그곳으로부터 약 십여 리(里) 가량 떨어진 수림(樹林) 속에서 한 장발괴인(長髮怪人)이 털퍼덕 땅바닥에 주저앉아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에 뒤덮여 용모는 분간할 수 없었다. 단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손목과 발목에 괴이하게도 시커먼 쇠고랑이 채워져 있다는 사실과 이지(理智)가 제압된 듯한 흐리멍텅한 눈빛 뿐이었다. 장발괴인이 의식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술병에 담긴 술을 목젖을 통해 넘겨 보내야 한다는 생각 뿐인 듯했다. 그는 술병을 아예 입 안에 처박은 채 꿀꺽꿀꺽 통째로 들이키고 있었다. 그런 장발괴인의 옆에는 뜻밖에도 한 구의 시체(屍體)가 놓여 있었다. 파리한 달빛 아래서 쇠고랑을 찬 장발노인이 시체를 곁에 두고 술을 마시는 장면은 아무리 생각해도 섬칫했다. 바로 그때였다. 스으으……. 장발괴인의 앞에 흡사 유령과도 같이 두 줄기의 인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한 명의 노파와 한 명의 중년부인이었다. 그들은 다같이 백색장의(白色長衣)를 걸치고 있었다. 헌데 놀랍게도 그녀들의 출현과 동시 주변의 공기는 갑자기 빙점(氷點) 이하로 얼어붙는 것이 아닌가? 그런 그녀들의 전신에서는 몸서리 쳐질 듯한 한기(寒氣)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녀들의 모습은 흡사 얼음(氷)으로 만들어진 인간들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지경으로 차가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헌데 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었다. 바로 화천명과 도옥진이 그녀들의 품에 안겨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백랑적리를 얼어붙게 만들었던 극랭항 음성의 주인은 바로 그녀들이었다. "……." 화천명과 도옥진은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이때 그녀들은 화천명과 도옥진을 내려놓으며 ���발괴인을 향해 생긴 모습 만큼이나 차가운 음성을 발했다. "이 아이다. 되겠느냐?" 장발괴인은 그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술병만 들이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술이 다 바닥났는지 술병을 던져 버리고 흐리멍텅한 시선으로 화천명을 바라보았다. "……!" 그의 흐리멍텅한 눈에 극히 짧은 광채가 한 차례 스쳐갔다. 순간 장발괴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동안 화천명을 주시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어려워……." 순간 노파와 중년여인의 눈빛이 더욱 진저리칠 듯한 냉기를 뿜어냈다. "어렵더라도 해라. 네게 선택의 여지는 없어!" "네 딸을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이 정도도 못한 데서야 네 이름이 만사귀의(萬邪鬼醫) 임해(林海)일 턱이 없지 않느냐?" * * * 만사귀의 임해. 그렇다. 당금 무림에 두 사람의 의술(醫術)의 천재(天才)가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또한 그들 중 하나는 성의(聖醫)라 불리우고 하나는 귀의(鬼醫)라 불린다는 사실도 말이다. -천생성의(天生聖醫) 이철생(李鐵生),


-만사귀의(萬邪鬼醫) 임해(林海). 천생성의 이철생은 말 그대로 인술(仁術)의 의미를 아는 성의(聖醫)였다. 반면 만사귀의는 사실 의원이라 칭할 수도 없었다. 남을 치료해 준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무수한 살상(殺傷)을 자행하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멀쩡한 사람도 그의 손을 거치면 시체로 화하거나, 백치(白痴)가 되거나, 광인(狂人)이 되어 버리기가 예사였다. 허나, 아는 사람은 알았다. 일단 그가 마음을 먹었다 하면 죽은 사람 살려내는 것쯤은 대수로운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특히 집도역용(執刀易容)은 고금 이래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절기(絶技)였다. 집도역용이라 함은 칼(刀)을 사용하여 살을 베고 자르고 붙여 인간의 얼굴을 영구변용(永久變用) 시키는 기술을 말하는 것이다. 헌데, 정녕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약 십여 년 전에 의문의 실종을 당했다고 알려진 그가 이런 곳에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다니 말이다. 찰나지간 장발괴인인 만사귀의 임해는 힐끗 노파와 중년부인을 바라보며 말을 내뱉았다. "미친 년들…… 노부가 무슨 신(神)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어렵다, 이런 얼굴은." 그는 혼자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보통 얼굴이냐, 이것이? 귀인(貴人)의 혈통이 적어도 수백 년 갈고 다듬어져 탄생된 얼굴이다. 게다가 세파에 단련될 대로 단련되어 강인한 장부(丈夫)의 풍모가 은연중 배어 있다. 그러면서도 천부의 정명(正明)함을 간직하여 사(邪)에 물들지 않는 실로 독특한 얼굴이란 말이다." "……!" "……?" 노파와 중년여인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 허나, 만사귀의는 그녀들 쪽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물론 외적(外的)으로 똑같이 만들어 낼 수는 있다. 허나 그것은 이 아이의 개성과 기품, 특히 독특한 매력 따위는 깃들지 못한, 단지 빈껍데기에 불과해. 이 아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금방 가짜라는 사실을 눈치챌 것이다." 잠깐 기광을 빛내던 노파의 입술이 차갑게 열렸다. "살아 있는 얼굴을 만들라는 게 아니다, 만사귀의 시체의 얼굴이니 거기까지 신경 쓸 건 없어." 중년여인이 덧붙였다. "거기다 약간의 훼손만 가해 놓는다면 가짜임을 알아볼 사람은 없다." "……." 만사귀의는 그녀들의 말에 반박할 말이 없는 듯 잠시 침묵을 지켰다. 허나, 곧 입을 열었다. "문제는 또 있다. 골격과 체형…… 이 아이의 골격은 노부로서도 처음 보는 실로 뛰어난 것이다. 그것은 또 어떻게 재현하란 말이냐?" 노파는 실로 간단히 대꾸했다. "몸은 짓이겨 놓는다." "……!" 만사귀의는 그녀를 힐끗 올려다 보더니 묘한 소성을 흘려냈다. "흐흐…… 잔인에 대해서라면 노부도 일가견이 있다만…… 아무래도 너희들은 따르지 못하겠구나." 독설(毒舌)이었다. 허나, 이미 그것에는 익숙해 있는 듯 노파와 중년부인은 탓하지 않았다. "헌데…… 무엇 때문에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해야 하느냐?"


"이 아이가 필요하니까." "필요?" 만사귀의는 반문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흠…… 알겠다. 이놈이 필요해서 데려갈려니 너희들의 존재가 드러날까 겁이 난 게지. 그래서 이 아이를 죽은 걸로 해둘 작정이구나." 그는 연이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냥 실종이라면 누군가 추적할 인물이 있을 테니 말이다. 지겹게도 철저한 계집들! 만의 하나라도 흔적을 남기지 않겠다 이건가?" "그렇다." 노파가 말했다. "아직 본궁(本宮)의 존재를 천하가 알아선 안된다." 중년미부도 싸늘하게 외쳤다. "이제 입다물고 어서 시작하라. 시간이 없다." 만사귀의는 화천명을 다시 내려보며 입맛을 다셨다. "어디에 필요한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멋진 놈을 골랐다. 이런 얼굴이라면 노부도 한 번 만들어 보고 싶긴 하지." 이어 그는 쇠고랑에 묶인 손을 내밀었다. 중년여인은 머리속에서 가느다란 철침(鐵針)을 꺼내 쇠고랑은 풀어 주었다. 철컥! 두 손이 자유스러워지자 만사귀의는 옆에 있던 시체를 끌어다가 똑바로 눕혔다. 시체는 화천명과 체격이 비슷했고 얼굴 윤곽도 흡사했다. "불쌍한 놈이다. 조금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황천행이라니……." 말은 이렇게 했으나 만사귀의의 어조나 표정에는 조금도 불쌍하다는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흐릿하던 눈빛을 파아랗게 번뜩이며 안색을 그지없이 엄숙하게 경직시켰다. 만사귀의는 곧 품 속에서 철함(鐵函)을 꺼냈다. 그 속엔 소도(小刀)와 침(針), 기타 약재들이 들어 있었다. "……." 만사귀의는 그 중에서 한 가지 분말약을 시체의 얼굴에 골고루 발랐다. 이어 소도 하나를 집어들어 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스윽…… 슥……. 헌데, 기이한 일이었다. 분명히 살이 베어지는데도 불구하고 피(血)는 한 방울도 흘러 나오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분말약의 효력 때문일런지도 몰랐다. 만사귀의의 손놀림은 차츰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로 섬세하면서도 능숙한 손놀림이었다. * * * 시간이 흘렀다. 시체의 얼굴은 누더기처럼 기워져 있었다. 그 위로 또 약을 바르자 살갗은 급속도로 밀착되고 희미한 자국만이 남았다. "공력이 필요하다. 봉합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려면." "……." 중년여인은 말없이 만사귀의의 명문혈(命門穴)에 장심을 밀착시켰다. 만사귀의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잠시 운기를 취하고는 두 손을 내밀었다. 스으으!


그의 장심으로부터 희뿌연 기류가 퍼져 나왔다. 그는 장심을 시체의 얼굴에 대고 문질렀다.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그가 손을 떼었을 때는 가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나타나 있었다. 똑같았다. 시체는 어느 새 이목구비(耳目口鼻) 어디 한 군데도 흠잡을 곳이라곤 없는 완벽(完璧)하면서도 완전무결한, 또 하나의 화천명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만사귀의는 만족한 듯 낮게 웃었다. "흐흐…… 됐다. 너희들의 더러운 손 어서 떼거라. 소름 끼치니까." "……!" 노파와 중년여인은 시체의 모습과 화천명을 비교해 살피더니 얼음가루 같은 냉소를 피워 올리며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여인들은 화천명과 시체의 옷을 바꿔 입힌 뒤 시체의 몸뚱이를 골격과 체형을 알아볼 수 없으리만큼 짓뭉개 버렸다. 얼굴에도 상당한 상처를 입혔다. 그 정도면 제 아무리 안력이 뛰어난 자라 해도 진부(眞否)를 알아낼 수 없었다. 노파는 화천명을 안아들었다. 중년여인은 만사귀의의 쇠고랑을 다시 채웠다. 철크럭! "빌어먹을…… 또 자기 싫은 잠을 자야겠군." 팟!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중년여인의 일지(一指)가 퉁겨지고 만사귀의는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이어 중년여인은 만사귀의를 옆구리에 끼어 들었다. 그리고 그녀와 노파는 한 차례 주변을 살펴 본 뒤에 그대로 신형을 솟구쳤다. 슈우우! 그녀들이 사라져 가는 곳은 바로 북쪽하늘(北天)이었다. "……." 홀로 남아 쓰러져 있는 도옥진의 신형 위로 창백한 달빛만이 잘디잘게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 * * -금황마제(金皇魔帝) 단후비(端厚飛)! 그 이름을 기억할 때마다 세인들은 무려 일천년(一千年)이란 세월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전율(戰慄)과 공포(恐怖)을 잊지 못한다. 무림유사 이래 가히 공전절후(空前絶後)라 일컬어지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그 가공할 마명(魔名)과 함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던 겁세적(劫世的)인 마공(魔功)과, 잔혹성과, 몸서리치던 혈풍(血風)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나란히 불리워지던 여덟 명의 개세마존(蓋世魔尊)들의 이름도 세인들은 잊어 버리지 못한다. -목인마승(木印魔僧), -지옥마신(地獄魔神) 육후(陸吼), -천수혈모(天水血母) 백화련(白花蓮), -축융신마(祝融神魔) 헌원강(軒轅强), -낙락천후(樂樂天后) 모용월(慕蓉月), -해마(海魔) 숭보천위(崇甫天衛), -염왕(閻王) 적리사후(狄狸士后), -천마유자(天魔儒子) 천유옥(天幽玉).


이름하여 환우구마존( 宇九魔尊)! 그렇다. 그들 구 인(九人)이 존재했던 천 년 전의 무림은 한 마디로 공포지세(恐怖之世)였다. 그 하나만으로도 천하(天下)를 초토화시킬 가공할 거마(巨魔)들, 한 시대에 하나 날까말까 한 개세거마 구인(九人)이 한꺼번에 출현했던 그 시대의 무림은 천하가 마(魔)의 폭풍(暴風)에 휘덮여 버린 참으로 불행한 시대(時代)였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거효(巨梟)는 세불양립(世不兩立)이라는 역사의 철칙을 철저히 무시하고 구인동맹(九人同盟)까지 결성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로 인해 하늘에는 마(魔)의 태양이 뜨고, 땅에는 마의 혈수(血手)가 뒤덮였다. 천하는 그 공포와 전율 앞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환우구마존의 존재는 곧 절대(絶代)요, 그들의 말은 곧 율법(律法)이었다. 천하 어디에도 감히 그들을 거역하거나 맞서려는 망상(妄想)을 품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헌데 세인들은 어느 날, 이 암흑의 하늘에 마(魔)의 색깔이 아닌 새로운 태양(太陽)이 떠오르는 것을 보게 되었다. 빛(光)과 정(正)이라는 이름으로 떠오른 새로운 태양! 그것은 홀연히 나타나 공포의 환우구마존에 도전한 두 명의 절대영웅(絶代英雄)을 칭함이었다. -도성(刀聖) 화운산(華雲山)! -검제(劍帝) 백리천(百里天)! 천하는 어둠 속에서 환호했다. 세인들은 핏물 속에서 숨을 죽인 채 태양과 악마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신마불세대전(神魔不世大戰)! 후세의 사가(史家)들에 의해 이렇게 불리워지는 이 처절한 싸움은 숱한 명승부를 연출하면서 장장 오년(五年)이라는 세월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결과는 정(正)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신주쌍성(神州雙聖). 후에 도성 화운산과 검세 백리천은 그러한 영명(榮名)으로 숭앙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두 가문(家門)은 천하무림의 두 하늘(天)로 군림하게 되었다. -천벽부 화엄세가(天壁府華嚴世家), -제왕성 백리세가(帝王城百里世家). 이들을 통칭하여 쌍성세가(雙聖世家)라 이름하였다. 무림의 두 하늘인 쌍성세가! 허나 그 후,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들 두 가문 사이의 동지의식(同志意識)은 점점 빛을 잃어갔다. 동시에 그들 사이에는 차츰 반목(反目)이 싹트기 시작했다. 세불양립(世不兩立)이라고나 할까? 환우구마존에게는 통용되지 않았던 이 역사의 철칙이 어처구니없게도 이들 두 가문 사이에서는 적용된 것이었다. 쌍성세가의 반목적인 관계는 세월이 흐를 수록 심화(深化)를 거듭하더니, 드디어는 숙적(宿敵)의 관계로까지 이르고 말았다. 헌데, 그럴 즈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백년전(五百年前), 무림에는 또 하나의 신비가문이 등장했다. -천마제일가(天魔第一家)! 스스로를 이렇게 칭했던 그들은 놀랍게도 지난 날의 환우구마존의 마학(魔學)들을 모조리 이어받은 무리들이었다.


그들의 가공함을 설명해 무엇하랴? 그들이 천하에 드러낸 공포의 힘(力)은 오히려 오백 년 전 환우구마존의 그것을 몇 배 능가하는 것이었다. 결국 쌍성세가는 자신들의 개별적인 능력으로 천마제일가를 상대함이 역부족(力不足)임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극적인 쌍성세가의 동맹(同盟)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동맹의 이름은 바로 천벽제왕부였다. -천벽제왕부(天壁帝王府)! 천벽제왕부와 천마제일가의 전쟁(戰爭)은 장장 백년(百年)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른바 백년대전(百年大戰)이라 일컬어지는 그 싸움은 말 그대로 처절하고 끈질긴 숙명의 혈전이었다. 결과 역사는 다시 한 번 천벽제왕부를 승자(勝者)로 선택했다. 천마제일가는 멸망했다. 그러나 대(代)를 이어 유산(遺産)으로 물려지는 이 숙명의 싸움을 치뤄야 했던 천벽제왕부의 승리는 완전히 핏물 속에서 얻어진 상처 뿐인 영광이었다. 천벽제왕부의 힘은 꺾이고 무너졌다. 수없는 악전고투를 치뤄낸 노병(老兵)처럼 그들은 지쳤고 약해졌던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그들에 대한 무림의 경외(敬畏)는 변함이 없었다. 두 번씩이나 천하를 악마들의 손에서 구해낸 천벽제왕부는 여전히 천하무림의 하늘(天)이었다. 그리고 천마제일가와 백년대전이 끝난 지 백년 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삼백년전(三百年前) 천벽제왕부는 다시 또 한 차례의 겁풍(劫風)을 맞이해야 했다. 바로 변황(邊荒)의 침공(侵攻)이었다. 천축(天竺) 철밀마교(天密魔敎), 서장(西藏) 혈가강사(血茄疆寺), 묘강(苗疆) 천독림(天毒林), 대막(大漠) 흑혈사(黑血沙), 북해(北海) 빙녀궁(氷女宮), 이른바 변황오세(邊荒五勢)라 불리우던 그들이 사상초유의 대동맹(大同盟)을 결성하여 변황패천동맹(邊荒覇天同盟)이라는 이름으로 중원천하를 들이친 것이었다. 그로 인해 중원은 초토화되고 말았다. 변황의 이마(夷馬)는 대륙을 질타하고, 융도(戎刀)는 중원인들의 선혈로 젖어갔다. 그로 인해 중원에는 다시 천벽제왕부를 주측으로 한 중원대동맹(中原大同盟)이 탄생했다. 대전쟁(大戰爭)! 시체가 산을 이루고 핏물이 바다를 이룬다는 시산혈해(屍山血海)의 엄청난 피와 죽음의 제전(祭典)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무서운 대가를 치룬 끝에 가까스로 변황패천동맹은 퇴치되었다. 허나, 그것이 천벽제왕부에 가져다 준 결과는 너무나도 처참했다. 탈진(脫盡)! 천마제일가와의 백년대전으로 휘청거렸던 그들의 힘은 변황과의 싸움으로 인해 완전히 쇠진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벽제왕부라는 이름은 있으되, 사실상 그것은 거의 멸문(滅門)되다시피한 유명무실(有名無實)한 존재가 되고 만 것이었다. 천벽제왕부는 이제 이빨과 발톱을 잃어 버린 늙은 사자(獅子)와 다를 바 없었다. 허나, 그 이후에도 천하인의 천벽제왕부에 대한 존경은 끊이지 않았다.


어쨌거나 천하무림인의 영원한 성역(聖域)인 천벽제왕부는 천하인이 추앙하는 정신적 지주이자, 중원의 혼(魂)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흐른다. 세월의 흐름이 망각(忘却)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또 역사의 철칙이었다. 세인들은 차츰차츰 천벽제왕부라는 존재를 잊어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조부(祖父)의 대(代)에 가슴 속에 뜨겁게 기억되었던 천벽제왕부의 이야기는 손자의 대(代)에선 그만한 감동으로 받아 들여질 수 없었다. 대를 거듭할 수록 그 이름은 희미해졌고, 결국에는 천벽제왕부라는 존재가 무림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혀져 버리고 말았다. 세인들의 망각과 더불어 실제로 천벽제왕부는 완전히 몰락(沒落)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끝내는 그 종적조차 사라져 갔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백년전(百年前)의 일이었다. 세월은 다시 흘렀다. 그리고 이 시대의 무림에는 아홉 개의 신비(神秘)와 열 개의 환상(幻想)이 나타났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무서운 전율(戰慄)과 공포(恐怖)로써……. 제 12 장 이상한 흥정 * * * "이름은 화천명(華天明)…… 중원의 금릉에서 천화대번이라는 제법 거대한 상단(商團)을 구축했던 말하자면 거상(巨商)입니다." "이 사내의 어디에서 그렇게 여인을 사로잡는 매력이 나오는 것인지, 그것은 신(臣)들도 잘 모릅니다." "소궁주(小宮主)께서도 아시다시피…… 남자를 접한 경험이 거의 없는 신들로서는 이번의 선택을 세상의 평판에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들이 가장 먼저 간 곳이 바로 금릉이었고, 가장 먼저 들은 이름이 바로 이 사내를 처음 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됐다…… 바로 우리가 찾고 있던 사내……." "우스운 일이지만 신들도 이 사내에게 어떤 매력을 느꼈다는 얘기가 됩니다." "어쨌든 이성지관(異性之關)의 주인공으로서 아주 적합한 인물이라는 판단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소궁주의 완벽한 빙심(氷心)…… 부탁드립니다. 부디 최후일관(最後一關)을 돌파하셔서 본궁(本宮)의 위엄이 천하를 덮게 해 주십시오." * * * 길고 긴 꿈속이었다. 어머니의 파리한 윤곽이 선명히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명(明)아. 그래…… 어미의 좁은 소견이었다. 그들이 나타났다면 그들을 막는 것은 당연히 네가 할 일…… 어미의 말에 너무 집착하지 마라. ……평범한 안락은 평범한 사람들의 것…… 네게 평범한 삶을 바란 것은 다만 어미의 가냘픈 안간힘이었을 뿐…… 네 능력과 네 숙명이 이미 평범을 뛰어넘고 있다면…… 그래, 장하게 일어서 보거라. 천벽(天壁)의 영광을, 제왕(帝王)의 위엄을…… 장하게 떨쳐 보거라. 어머니와의 맹세를 깬 죄책감이 무의식 상태에서 그러한 어머니의 모습과 말을 끌어낸 것일까? 아니면 죄스러워 하는 그를 보고 저승의 어머니가 실제로 꿈속에 현신한 것일까? 어머니는 몇 번인가 그러한 말을 거듭 남기고 조용히 사라져 갔다. 그리고 화천명은 드디어 꿈의 여정(旅情)을 벗어나 서서히 깨어났다. "……!" 맨처음 강하게 망막을 자극한 것은 왠지 차가운 느낌을 주는 눈부신 빛이었다. 화천명은 깊숙이 눈살을 찌푸렸다. 빛에 익숙해 지려는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이어, 서서히 눈앞의 사물이 형체를 잡아갔다. '여기는……?' 그곳은 오싹하는 한기를 느낄 정도의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한 칸의 정실이었다. 정실은 아무런 장식도 되어 있지 않았다. 벽도, 천정도, 바닥도 온통 흰빛(白色) 일색이었다. 기물(器物)도 단지 침상 하나와 탁자 일식(一式) 뿐이었다. 자신이 지금 있는 곳은 바로 그 침상 위였다. "……?" 화천명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비로소 의혹이 치밀어 올랐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 찰나, 극심하던 자부열독(紫府熱毒)의 고통이 혼절 직전의 마지막 기억으로 떠올랐다. '도옥진……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딘지도 물론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단지 하나였다. 혼절해 있는 자신을 누군가가 이곳으로 옮겨 왔으리라는 짐작이었다. "……?" 화천명은 다시 한 차례 방의 구조를 살피며 침상에서 내려섰다. 의외로 몸의 상태는 상쾌했다. 아니, 상쾌한 정도가 아니라 혼절 전보다도 훨씬 더 충일하고 정심한 내력(內力)이 느껴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마지막 발독(發毒)을 거친 후 자부금과의 영효가 완전히 그의 몸에 배인 때문인지도 몰랐다. "흠…… 좋아." 무의식 중에 중얼거리던 화천명의 뇌리에 그 순간 여러 가지의 상념들이 연속적으로 떠올랐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얼굴은 출천대협 탁몽이었다. 그리고 불현 듯 그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불과 반 나절 동안의 만남이었지만 출천대협 탁몽이 그의 가슴 속에 자리한 비중은 실로 컸다. 장부와 장부 사이에서 형성되는 어떤 정(情)이라 할까? 비단 그 뿐이 아니라 친혈육보다도 더 밀접한 일종의 운명적(運命的)인 연관 같은 것을 화천명은 느끼고 있었다. '살아 있어야 됩니다, 탁대협…… 당신에겐 물어 볼 것도 많소이다!' 그의 눈빛이 지그시 빛났다. 물론 도옥진의 안위도 우려되기는 했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 있으니 그녀 역시 무사하리라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천화대번(天華大藩)이었다. 그리고 석무혼과 묘연아도 있었다. '무혼과 연아는 내가 필요해서 데려갔다 했으니 위험은 없을 것이다만…….' 천화대번의 일은 사실 조급했다. 다시 일으킬 생각은 없지만 일단 정리는 해야 했다. 수천 명에 달하는 천화대번의 식솔들의 생계를 자신이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생각하자 화천명은 화가 치밀었다. 정말이지 명문도 모른 채 여기에 갇혀 있을 때가 아니었다. "빌어먹을!" 쾅! 화천명은 중얼거리며 거칠게 방문을 열어 제쳤다.


순간, 문이 열림과 동시에 얼음이 와닿는 것 같은 지독히 차가운 한기(寒氣)가 얼굴로 밀려 들었다. 화천명은 의혹을 느꼈다. '아직 겨울(冬)은 멀었을 텐데……?' 이어 문 밖으로 나서는 순간 그 의혹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이건……!"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대한 백색 궁전(白色宮殿)이었다. 아리도록 눈부시게 시야를 자극하는 것은 온통 하얀 빛 뿐이었다. "……!" 이어 화천명의 시야에 압도하듯 웅장하고 신비롭게 늘어선 고루거각(高樓巨閣), 대궐장탑(大闕壯塔)의 자태들이 들어왔다. 자신이 지금 있는 곳은 별궁(別宮)으로 지어진 듯한 비교적 작은 규모의 한 소축(小築)이었다. 그리고 문 밖의 회랑(回廊) 아래 길다란 반월교(半月橋)가 이어져 있었다. 반월교 아래에는 희뿌연 서리(霜)가 환상적으로 피어오르고 있는 인공호수(人工湖水)가 있었다. 그리고 반월교의 끝, 다시 말해 인공호수 한복판에는 한 채의 정자(亭子)가 그린 듯 고고히 세워져 있었다. "도대체…… 이게……?" 화천명은 아연한 시선으로 사방을 둘러 보았다. 일순 더욱 충격적이고 놀라운 광경이 시야로 쏘아져 들어왔다. 빙산설봉(氷山雪峯), 운무(雲霧)인지 빙무(氷霧)인지 새하얀 기류에 휩싸인 채 실로 장엄하게 온 하늘을 휘감고 있는 빙산설봉의 웅자한 모습이었다. 정말이지 세외별지(世外別地)요, 천외비경(天外秘景)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렇다. 이 백색(白色)의 거대한 궁전은 수천리 이상을 장악했을 것 같은 빙화산맥(氷化山脈) 속의 한 유곡(幽谷)에 자리하고 있었다. 도무지 현실로 와닿지 않은 느낌이었다. "이럴 수가……!" 화천명은 놀람과 경탄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스치는 공기는 실로 차가웠다. 만일 무공이 없는 예전의 몸이었다면 한 걸음도 제대로 옮기지 못했을 것 같았다. 궁전 내에 인적은 보이지 않았다. 기이하게도 사방 전역이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으나 인간의 흔적은 전혀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화천명은 회랑을 지나 반월교(半月橋)로 접어들었다. 그때 화천명은 또다시 기이한 것을 발견했다. "……?" 정자 안이었다. 차가운 햇살에 눈부시게 반사되는 두 개의 투명한 물체가 있었다. 그것들은 뜻밖에도 관(棺)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바로 투명한 두 개의 수정관(水晶棺)이었던 것이다. "……?" 화천명은 조금 섬뜩한 느낌에 휩싸여 정자를 향해 빠르게 다가섰다. "아니……?" 돌연 그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이 새어나왔다. 이어 그의 안색이 무섭게 굳어졌다.


"무혼(無魂), 연아(燕兒)!" 그렇다. 수정관 속에 죽은 듯 미동없이 누워 있는 두 남녀(男女)는 바로 석무혼과 묘연아가 아닌가? 화천명은 더 놀라다 못해 어이가 없어져 버렸다. 기가 찼다. "죽지는 않았구나, 이 녀석들!" 어쨌든 반가왔다. 관 속의 석무혼과 묘연아는 죽은 듯 미동 없긴 했으나 미미하고 규칙적인 호흡의 기복이 가슴에 일어나고 있었다. 혼혈(昏穴)이나 수혈이 짚여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화천명은 곧 관의 뚜껑으로 손을 가져갔다. 바로 그때였다. "손대지 마라. 뚜껑이 열림과 동시 그들은 그대로 죽고 만다." 느닷없이 울려온 음성이 있었다. 소름이 오싹 돋을 만큼 차고 억양없는 음성이었다. "……?" 화천명의 손길이 뚝 멎었다. 순간 더욱 극랭한 한기(寒氣)가 한 순간 주변을 뒤덮었다. 화천명은 음성이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 그의 시선이 향하는 반월교 위에 네 사람이 서 있었다. 여인(女人)들이었다. * * * 네 여인(女人). 그들은 두 명의 노파와 두 명의 중년여인이었다. 여인들은 한결같이 일신에 백의 궁장(白衣宮裝)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흡사 얼음의 결정체로 만들어진 인간인 양 극랭한 한기(寒氣)가 체취처럼 전신에서 발산되고 있었다. '되게 추워 보이는 사람들이군!' 그녀들을 본 화천명의 첫 느낌이었다. 화천명은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누구요, 당신들은?" 묻다가 내친 김이라 싶었던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나를 여기에 데리고 왔소? 연아와 무혼을 이 속에 넣어 놓은 사람도 바로 당신들이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뭐요? 그리고 대체 여기는 어디요?" 한꺼번에 네 가지를 더 물어 버렸다. 하나씩 묻는 것이 귀찮고 번거롭게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헌데, 이 얼음조각 같은 여인들도 그 못지 않게 번거로운 것을 싫어 하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아무런 잔소리없이 간단간단히 대답을 시작했다. "노신은 설파(雪婆)라 한다." 설파(雪婆)는 여자답지 않게 장대한 체격이었다. 주름진 얼굴의 윤곽 또한 실로 강하고 뚜렷했다. 마치 치마를 걸친 사내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노신은 수모(水母)." 그녀는 설파와는 판이한 대조를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담한 체구에 젊었을 적엔 몹시 아름다웠으리라 짐작되는 미모(美貌)의 잔영이 얼굴 윤곽에 잔잔히 남아 있었다. "본녀는 빙부인(氷婦人)이다."


"본녀는 상낭자(霜娘子)라 불러라." 빙부인과 상낭자는 쌍둥이처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뿜어내는 냉기와 한파만 아니라면 중년의 농염(濃艶)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을 얼굴들이었다. 외견상으로 빙부인보다는 상낭자가 다소 어려 보였다. 설파가 말을 이었다. "우리 모두를 합하여서 빙하사후(氷河四后)라 알면 된다. 그리고 그대를 데려온 사람은 바로 우리들이다. 이 아이들을 여기 넣어 놓은 사람도 우리들이다." "그 이유는 그대에게 청할 것이 있어서이다. 그리고……." 설파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본궁(本宮)은 북해(北海) 빙녀궁(氷女宮)이다." 순간 흥미있게 듣고 있던 화천명의 눈빛에 경악이 차올랐다. "북해 빙녀궁!" "……?" 빙하사후는 조금 의외인 듯한 기색으로 화천명을 다시 보았다. "본궁을 아느냐?" "……!" 화천명의 안색은 기묘하게 굳어져 있었다. 왠지 모를 적의(敵意)와 거부감이 그 안색에서 미세하게 스며져 나왔다. 허나 곧 화천명은 단지 의문만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북해 빙녀궁은…… 삼백 년 전 중원침공 당시 멸문되었다던데?" 빙하사후의 입가에 서리가 풀풀 날리는 듯한 차가운 웃음이 감돌았다. "멸문되다시피 했지. 단지 우리만이 살아 남았을 뿐이니까……." 말한 사람은 설파였다. "당신들만이 살아 남아?" 되묻던 화천명은 다음 순간 웃어 버렸다. "웃기지 맙시다. 그 말은 바로 당신들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삼백 년 이상을 살아 왔다는 말이지 않소?" "우리는 너를 웃긴 적이 없다.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다." 수모(水母)가 말했다. "삼백 년이란 기간은 그리 긴 것이 아니다. 본궁에서는 단지 한 번의 수면기간(睡眠期間)에 불과할 뿐." "한 번의 수면기간이라고……?" 화천명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렇다면 이들은 삼백 년 동안 잠을 잤다는 얘기가 아닌가?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구태여 그런 거짓말을 할 리도 없었다. "좋소. 당신들이 삼백 년을 살았건 잠을 잤건 나와는 관계 없는 일." 화천명은 정자의 난간에 걸터 앉으며 눈짓으로 관 속의 석무혼과 묘연아를 가리켰다. "뚜껑을 염과 동시 그대로 죽는다 했는데, 그건 무슨 소리였소?" "그것도 믿든 말든 네 자유다만…… 그들은 오늘부터 백일간(百日間)의 잠에 들어갔다." "만약 백 일이 되기 전 뚜껑이 열리거나 관이 파손되면 그들은 그로부터 호흡이 정지된다." 도대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빙부인과 상낭자가 나누어 했다. "……!" 화천명은 어쨌든 일단 한 번 들어 보기로 했다. 그녀들의 말은 이어졌다. "허나, 백 일의 잠을 완전히 채우고 깨어나면 그들은 정확히 백 년(百年)의 공력(功力)을 지닌 절정내가고수(絶頂內家高手)로 화한다. 아울러 구성(九成)의 천빙금강지체(天氷金剛之體)를 이룬다."


"천빙금강지체라 함은 빙문(氷門) 최고의 외가(外家) 경지로써 도검불침(刀劍不侵), 수화불침(水火不侵)은 물론, 대성(大成)에 이르렀을 시에는 그 어느 것으로도 파괴되지 않는 절대의 완벽지신을 말한다." 이런 말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아니 그 보다 감정도 억양도 없이 그저 차고 무심하게 그 엄청난 말을 내뱉는 이 여인들의 심장은 대체 어떤 것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 화천명은 그냥 그녀들의 움직이는 입술만을 보고 있기로 작정했다. "알겠는가? 백 일 후 이들은 내외공부(內外功夫)를 겸비한, 그리고 그대의 지금 수준을 뛰어넘는 희대의 고수가 되는 것이다." "바로 본궁의 독문비전(獨門秘傳) 천빙화신대법(天氷化神大法)이 빚어내는 결과이다." 천빙화신대법(天氷化神大法)이라는 말을 할 때 전혀 감정이라고는 없던 그녀들의 안색에 극히 미세하나마 일종의 자긍심(自肯心)같은 것이 스치고 있었다. "천빙화신대법은 구백 구십 팔 종의 빙령지보(氷靈之寶)로 시술한다. 하나같이 희귀한 영물(靈物), 영초(靈草), 영약(靈藥)들이다." "그것들은 본궁에서도 단 한 번 시술할 분량만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이번에 사용했다." "……!" 화천명은 이제 도저히 그녀들의 움직이는 입술만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앉아 있던 난간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좋소, 다 좋소. 천빙화신대법도 좋고, 구백 구십 팔 종의 빙령지보도 좋고, 백 년 공력도 좋고, 구성(九成)의 천빙금강지체도 다 좋은데…… 그렇게 좋은 일을 이 녀석들에게 해 주는 이유는 대체 뭐요?" 빙하사후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대의 적극적인 도움을 바라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도움?" "우리는 그대의 인물됨에 대해서 많은 말을 들었다. 강요나 위협에는 절대 굴하지 않는 성격이라더군." "흠…… 그건 맞소." "그래서 우리는 최대한 우리의 성의를 보이기로 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천빙화신대법이다. 그리고 또 하나." "또 있소?" "있다." 말하는 수모의 눈가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비교적 한기(寒氣)가 덜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그대의 천화대번." "……!" "그것을 우리가 정리했다." "정리라면?" "그대가 형제라고 부르는 천화대번의 식구들에게 평생 놀고 먹을 수 있는 재산을 만들어 주었다. 도합 황금 오백만 냥의 분량이었다." "……!" 천하의 화천명도 그 말에는 입이 벌어졌다. 황금 오백만 냥이라니? 정말이지 이건 성의 정도가 아니었다. 허나, 수모의 말을 잇는 설파의 어조는 대수롭지 않다는 빛이 역력했다. "황금 따위는 본궁에 얼마든지 있다. 그대가 원한다면 더 전해 줄 수도 있다."


"아니 됐소. 충분하오." 화천명은 얼른 손을 저어 버렸다. 무슨 조건을 걸어 올지도 모르는 이 순간에 어떻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홀가분하기는 했다. 제대로 정리를 못한 천화대번의 우려가 마음 속에 상당한 비중으로 걸려 있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고맙소. 헌데……." 화천명은 이제 흥미가 치밀었다. 도대체 어떤 도움을 바라기에 이토록 엄청난 성의를 보이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어쨌든 빙하사후는 참으로 고지식하고 철저한 성격들이라고 짐작되었다. 그리고 실로 절실한 어떤 염원(念願)이 엿보이기도 했다. 허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 하나에 생의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어쩌면 감동적이라고 해도 좋을 절실한 분위기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화천명이 좋아하는 분위기였다. 이 살벌하도록 차가운 여인들의 가슴에는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더 뜨거운 한 염원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 화천명의 안색이 문득 굳어졌다. 상대가 진지할 때는 자신도 진지해질 줄 아는 그였다. 정색한 시선으로 그는 빙하사후를 바라보며 물었다. "도대체 내게 바라는 게 뭐요?" 2 권으로 이어집니다.


b6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