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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蒼天神影 제 1 권 白風魔宮 지은이: 사마달 ‥ 차 례 ‥ 하얀 바람의 章 제 1 장 奸臣의 아들 제 2 장 금황혈시 제 3 장 不請客 제 4 장 惡魔의 子息 제 5 장 江湖出師表 제 6 장 恐怖의 血禁魔令 제 7 장 怪盜와 少女 제 8 장 千年의 秘史 제 9 장 史上最强의 武功

하얀 바람의 章 1 땅거미가 짙어가던 사월(四月)의 그 어느 날…… 그들은 백색(白色)의 옷을 입고 우리들 앞에 나타났다. 그들이 왜 하얀 옷을 입었는지, 왜 그토록 백색(白色)을 광적으로 좋아했는지 그 이유는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들은 백색의 모습으로 그렇게 우리들 앞에 왔던 것이다. 그들은 백색의 바람을 휘날리며 대륙(大陸)의 동(東)과 서(西)를 횡단했다. 무림은 그들이 일으킨 하얀 바람으로 가득 뒤덮혔고, 남은 것은 백색의 그림자 뿐이었다. 그들은 하얀 바람의 묵시(默示)로 그렇게 무림을 통일(統一)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세웠다. 그 또한 온통 백색이었다. 세인(世人)들은 그들을 일컬어 이렇게 불렀다. -백색(白色)의 인간(人間)들. 그리고 그들의 터전을 이렇게 칭하였다. -백풍(白風)의 마궁(魔宮). 그들은 무림을 통일했으되 지배(支配)하지도 다스리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들이 통일해 놓은 거대한 땅덩어리를 내려다 보며 그렇게 만족해했다. 그들의 위대하고 장엄했던 백색의 투혼(鬪魂)을 영원히 기리려는 듯이…… 그리고 그렇게 덧없이 세월은 흘러갔다. 남궁창새(南宮創塞). 이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백풍의 마궁을 이끌어가는 지상최강(地上最强)의 거인(巨人)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에 대해 얼마를 알겠는가? 백색을 너무나도 좋아하고 유독 많은 것을 가졌기에 고독(孤獨) 또한 클 수밖에 없었던 이 거인의 마음을…… 2 그 어느날…… 백풍의 마궁이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하나 그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중원(中原)의 하늘과 땅은 하얀 바람으로부터 벗어나 원래의 맑음과 정기를 되찾고 있었다. 항간(巷間)에는 백풍마궁의 인물들이 하루 아침에 영문도 모르게 죽어 갔다느니, 스스로 이 땅에서 물러 갔다느니…… 억설이 분분했다. 어쨌든 그들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도 모르게 소리없이 이 땅에서 사라져 버렸다. 과거 그들이 나타났던 사월(四月)의 그 어느 날처럼…… 그들은 또 다시 땅거미가 짙어가던 사월의 그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무림사(武林史)에 있었던 가장 신비로운 사건(事件) 중의 하나였으며, 아직도 풀리지 않은 채 수수께끼처럼 남아 있는 미궁(迷宮)의 서막(序幕)이었다. 제 1 장 奸臣의 아들 1 왜 그 모든 지탄을 나 혼자서 받으며 괴로워 해야 한단 말인가? 나에겐 죄(罪)가 없다. 굳이 있다면 그것은 아버님에게 물려받은 가혹한 형벌(刑罰)이거늘…… 그래, 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흔들리고 있다. 모든 걸 잊기 위해 미친 듯이 술을 마신 뒤 손가락질 받는 내 영혼을 시퍼런 강물 속에 내던져도 보았지만, 강물은 지탄받은 내 육신마저도 거두어가지 않았다. 모두가 외면해 버린 지금 이제는 지쳐 버렸다. 저 손가락질 지탄 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 뿐이다. 적당한 속죄…… 사람들은 그것마저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왜 내가 이 가혹한 짐을 짊어져야만 하는가? 원망스럽다. 내 곁에 있는 모든 것이 원망스럽다. 하늘은 검고 땅은 백귀(百鬼)로 가득한 이 시간 저 까마득한 봉우리에 홀로 서서 통곡으로 목이 터져라 외쳐보고 싶다. -나는 죄가 없다! 나에게는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할 아무런 죄가 없다. 아무런 죄가…… 몇 번의 자살이 실패로 돌아간 지금도 죽어야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2 전시(殿試)가 끝난 지 반나절이 지났건만 웬일인지 아직까지 급제에 대한 발표를 하지 않고 있었다. 웅성웅성…… 방(榜) 앞에 모인 선비들은 등과(登科)와 낙방(落榜)의 희비 속에서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이상하군. 왜 이렇게 고시(告示:발표)가 늦어진다지?" "그러게 말이야. 예년 같으면 벌써 고시를 했을 텐데 말이야……" 초조함에 바싹 찌들은 음성들이 웅성거림 속에 들려왔다. "이럴 리가 없는데…… 혹시 무슨 야로가 있는 거 아냐?" "야로라니?" "……!" "분명히 무슨 꿍꿍이가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고시가 이렇게 늦어질 리가 없지 않은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 이번에는 인재가 많아 시간이 좀 더뎌진 거겠지." "인재는 무슨 놈의 인재? 세상은 이미 간신들의 판인 걸……" 그때, "고시한다!" 여기저기서 외침이 터졌다.


관복(官服)으로 위엄스럽게 차려입은 기다란 수염의 관부(官夫)가 방문(榜文)에 막 고시를 하고 있었다. 장원(壯元): 용천음(龍天吟). 방안(榜眼): 차시형(車施衡). 탐화(探花): 관백(寬栢). …… 대과급제를 확인하는 순간 여기저기서 울분에 찬 음성이 터져나왔다. "장원에 용천음이라고? 말도 안된다!" "농간이다! 저건 필시 농간이 분명하다." "이 사람,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나?" "죽으면 그만이야. 이 놈의 세상……! 실력 있는 놈은 떨어지고 쥐뿔도 모르는 간신의 아들이 버젓이 장원이라니……!" "육시랄! 내가 낙방해서 하는 말이 아니야. 이놈의 세상 더러워서 그래, 더러워서!" 수많은 선비가 가래침을 뱉으며 고시장을 떠났다. 한데 언제부터인지 저 만큼 뒤켠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한 소년(少年)이 있었다. 일신에는 청렴해 보이는 백의(白衣)를 입었으며 유생건(儒生巾)으로 머리를 동여맨 약관의 소년이었다. 그런데 소년의 용모, 그것은 도무지 인간의 그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준수했다. 마치 절세(絶世)의 미녀(美女)가 그러하듯 소년의 용모는 광휘를 몰고올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선(線)이 뚜렷한 굵은 눈썹은 신선(神仙)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귀밑까지 뻗었고 정교하게 빚은 듯한 입술이며 콧날은 섬세할 정도로 눈부셨다. 하나 소년의 두 눈은 짙은 우수와 갈등, 그리고 번민으로 그늘져 있었다.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이 보이는 문약한 소년서생, 그는 무척이나 오랜 시간 동안 뒤켠에 선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문득 소년의 입가에 지극히 쓴 잔소가 피어 올랐다. "쿡쿡…… 용천음, 네가 장원이라고……?" 그 잔소는 더욱 짙어져만 갔고, 소년의 음성 또한 비릿해지고 있었다. "웃기는 일이군. 정말 웃기는 일이야……" 이때 서너 명의 선비가 소년의 곁을 스쳐 지나가면서 싯누런 가래 침을 칵 뱉아냈다. "카악! 퉤! 제기랄…… 온통 간신들 세상이야." "용비후(龍費宇), 그 놈이 죽일 놈이야. 천하의 간신에다 세상을 자기 손에 넣고 주무르려고 하니……!" "이번 대과도 뻔한 것 아닌가? 용비후, 그 놈이 농간을 부려 자기 아들인 용천음을 장원급제시켰을 게야……" "퉤! 더러운 세상!" 백의소년, 그는 왠지 모르게 자기 옆을 지나치는 선비들을 피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까닭없는 서글픔이 가슴 속에서 일어났다. 그는 왜 선비들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야 했는가? (용천음, 간신의 아들……) 소년은 처연한 미소를 머금으며 방(榜)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이번 한 번 뿐만은 아니었지.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은 것은……) 소년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어디가서 목이나 축여야겠군." 그는 몸을 돌려 저 만큼 멀어져 갔다. 쓸쓸히 걸어가는 소년의 등 뒤로 한 점 석양(夕陽)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3 백의소년은 객잔에 든 뒤에 한 병의 술을 주문했다. 사람의 눈을 피하듯 구석진 자리에 앉은 소년은 예의 우수에 젖은 눈으로 창 밖을 내려다보곤 했다. 그는 무척 조용한 행동으로 한 잔의 술을 비웠다. 그리고 또 한 잔의 술을 가득 따라놓고는 품 속에 손을 넣어 무 엇인가를 꺼내 꼬옥 쥐었다. 그것은 붉은 색의 조그만 단약(丹藥)이었다. 모두 일곱 알, 소년은 손바닥을 펴 그것을 내려다보며 허전하게 웃었다. (어렵게 구했어……) 그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일곱 알의 단약을 입 안으로 털어넣었다. (한 알만 먹어도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는 극독(極毒) 사환단(死幻丹)…… 일곱 알이면 충분할 거야.) 소년은 따라 놓은 술잔을 집어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무엇인가 목구멍에 걸리는 듯 싶다가 이내 술과 함께 내장 속으로 흘러들어가 버렸다. (됐어…… 이걸로 결국 성공한거야.) 소년은 어느 한 순간 전신의 힘이 모조리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무력함을 느꼈다. 와르르르…… 그는 힘없이 탁자에 쓰러졌다. 술병과 술잔이 굴러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졌다. 순간, "자살이다!" "뭐…… 뭐야?" 객잔은 삽시간에 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손님들은 금시 소년의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 이런 빌어먹을! 뒈질 데가 없어서 하필이면 우리집에 와서 자살을 해?" 나이 지긋한 장궤는 두 귀에서 연기를 뿜어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였다. "가만…… 이분 공자는 용승상(龍丞相)의 아들인 용천음 아냐?" "뭐라구?" 장궤는 중년인(中年人)의 말을 듣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하듯 펄쩍 뛰어올랐다. "어디…… 어디……" 그는 황당한 마음에 소년의 얼굴을 들어 확인하고는 다시 한 차례 기겁하고 말았다. "저…… 정말 용공자다!" 오오! 백의소년 그가 진정 천하의 간신이라고 일컬어지는 승상 용비후의 아들인 용천음이었단 말인가? 한데 그는 왜 자살을 시도했는가? 방금 장원급제까지 했거늘…… (큰일이다! 이놈이 죽는 것은 내 알 바 아니지만 여기에서 죽는 날이면 나는 끝장이다.) 장궤는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느냐? 빨리…… 빨리 승상께 알려라! 빨리……!" 장궤의 안색은 용천음보다 훨씬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4 승상부(丞相府). 일명 재상부(宰相府)라고도 불리우는 이곳은 자금성(紫禁城) 동남방 십 리 밖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웅대함과 화려함은 당대제일(當代第一)이었으며 끝에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


홍장(紅墻)의 담장과,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아 있는 고루거각(高樓巨閣)들은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할 정도였다. 승상 용비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절정의 권세(權勢)와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최대의 부귀와 영화를 움켜 쥐었다는 이 시대 최고의 권력자. 한데 그런 그가 오늘 무척 진노해 있었다. 5 용비후는 이제서야 막 눈을 뜬 용천음을 바라보며 가느다란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 힘없이 침상에 누운 용천음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또 살아난 모양이군……" 그렇다. 그는 또 한 번 살아난 것이다. 아니 또 한 번 실패한 것이다. "더럽게도 끈질기군. 나라는 놈의 목숨은……" "……!" 한 알만 먹어도 즉사한다는 사환단을 무려 일곱 알이나 먹었지만 용천음은 죽지 않았다. 전갈을 받은 용비후가 명의(名醫)를 데리고 부랴부랴 객잔으로 달려갔고, 또 극적으로 살려내 이곳으로 데려오기까지…… 그것은 숨막히는 시간들이었다. 가까스로 숨결이 돌아온 용천음을 보며 명의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공자님의 운명입니다. 운명이 그로 하여금 죽지 못하도록 붙잡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믿어야 하는가? 운명이 그를 죽지 못하도록 붙잡아 둔다는 그 말을…… …… 용천음은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을 참으며 입술을 악물었다. 그 입술 사이로 희미한 조소가 머금어진 것도 그때였다. "살아난다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은 몰랐군요. 저에게 있어 산다는 것은 죽음보다도 못하니까요." 일순 용비후의 가느다란 팔자수염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이…… 이놈이!" 철썩----! 용비후는 억센 손으로 용천음의 따귀를 후려쳤다. 입술이 터지며 피가 튀었다. "괘씸한 놈! 감히 애비의 얼굴에 먹칠을 하다니……" 용천음은 아버지의 격노한 얼굴을 외면이라도 하듯이 두 눈을 감아 버렸다. (후후훗…… 그럴 테지요. 나라는 놈의 죽음은 뒤켠에 두고 우선 당신의 체면부터 생각할 테지요. 당신은 늘 그래왔으니까요……) 용비후의 안면근육이 무섭게 실룩거렸다. "이 불효막심한 놈! 이 애비는 네놈을 이십 세 안으로 제독(提督)까지 만들 생각이었거늘 네놈은 감히 이 따위짓이나 하고 돌아다녀?" 이십 세 안으로 제독을 만든다? 실로 엄청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용천음은 하나 가득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것은 저를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아버님을 위해서입니까?" 용비후는 흠칫했다. 하나 그는 이내 대답했다. "양쪽 모두 다다." 용천음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한동안 쓰디쓴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부친의 얼굴을 직시했다. "세상은 정말 웃기더군요." "……" "이번 과거에 백지를 냈는데도 떡하니 장원급제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백지를 냈다고……?) 용비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도대체 이 무슨 배짱이란 말인가? 과거에 응시해 놓고 단 한 글자도 쓰지 않고 깨끗한 백지를 냈다니…… "그런 정도의 과거라면…… 하하하…… 팔불출(八不出)인 전서방에게도 말해서 한 번 응시해 보라고 귀뜸할 생각입니다." "이, 이놈이 그래도……" 처---- 얼---- 썩----! 용비후는 고개가 휙 돌아갈 정도로 무섭게 따귀를 후려쳤다. 그때였다. 문(門)이 급하게 열리며 단아한 청포를 걸친 한노인이 급히 뛰어들어 또 다시 손을 치켜든 용비후의 손을 잡으며 황망히 말했다. "승상, 이러시면 안됩니다. 참으십시오." 이 노인, 허연 수염이 가슴팍까지 늘어져 있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에 두 눈은 유난히도 투명한 광망을 띠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칠십여 세 정도의 이 노인이 바로 용천음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노학사(老學士) 감철생(甘鐵生)이었다. "이 괘씸한 놈! 내 눈 앞에서 썩 사라져! 꼴도 보기싫다. 이 집에서 나가버려!" 말과 함께 용비후는 밖으로 걸어나갔다. 부친의 진노한 음성을 들으며 용천음은 입가에 묻은 선혈을 천천히 닦고 있었다. (아버님, 당신은 나에게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는 분입니다. 소리칠 이유도 없고요. 당신이 받아야 할 지탄을 제가 나누어 가진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 벅차니까요.) 참으려 했건만 까닭없는 눈물이 눈시울을 적신다. (나가지요. 나가라면 나가 주지요.) 용천음의 강퍅한 얼굴 위로 한 줄기 먹장미소가 흐르듯 지나갔다. 이때 감철생이 다가왔다. "공자, 좀 어떠시오?" 언제 보아도 다정한 분이었다. 어쩌면 감철생이라는 사람이 부친의 그것보다 자신에게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용천음은 씁쓸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감철생은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탄식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 "밖에서 다 들었소. 아무리 부친에 대한 울분이 쌓였다 해도 백지를 내서 아버님을 곤란하게 만드는 방법은 옳지 않은 것이오." "……"


부드러운 훈계, 그렇다. 그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다. 용천음은 그것이 좋았다. "공자, 아버님을 이해하도록 노력하시오. 아마…… 이번 같은 경우라면 노필부(老匹夫)라 할지라도 크게 역정을 냈을 것이오." 용천음은 고개를 저었다. "어르신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아버님처럼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어르신께선 벌써 초야(草野) 깊숙한 곳에 묻혀 독경(讀經)이나 하고 계시겠지요." "……" 감철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담담한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던지듯 한 마디 했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이오?" "……?" 그저 스쳐 지나가는 듯한 말이었으나 깊은 함축성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문득 감철생은 입가의 미소를 거두며 차분하게 말했다. "공자는 자신이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하시오?" "……?" 용천음은 그 질문에 의아한 표정으로 감철생을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힘없이 대답했다. "간신의 아들일 뿐…… 그 이상의 가치도 그 이하의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잘못 보았소. 공자는……" "……?" 감철생은 허연 수염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노필부가 보기에 공자는 인물이오. 저 하늘과 이 땅을 모조리 담고도 그 공백이 남을 크나큰 그릇!" (크나큰 그릇……) 용천음은 순간적으로 감전과도 같은 충격이 몸을 때리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내가…… 큰 그릇이라고……?) 그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번졌다. "어르신이야말로 소생을 잘못 보셨군요." 감철생은 빙그레 웃었다. "지금은 모를 것이오. 그러나 먼 훗날 노필부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공자는 스스로 깨달을 것이오." "……!" 감철생은 문득 용천음을 똑바로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공자께선 아버님에게 감사해야 할 줄 알아야 하오." "……?" "만약 공자의 아버님이 청렴하고 대가 곧은 충신이었다면 공자는 그저 학문에만 몰두하는 그런 하찮은 학자(學者)로밖에 남지 않을 것이오." 용천음의 눈빛이 빛났다. (학자로밖에 남지 않다니…… 무슨 뜻인가?) -부친이 간신이기 때문에 용천음은 모든 것에 환멸을 느끼고 있고 조정이나 황궁 따위는 근처에도 가기 싫어한다. 때문에 벼슬은 더 더욱 싫어한다. (이러한 사실을 왜 아버님께 감사해야 한단 말인가?) 감철생은 두 눈을 반쯤 내리감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람이란 태어날 때부터 제각기 가야할 길(路)이 있는 것이오." (제각기 가야할 길? 그렇다면 내 길은 이런 것이 아니란 말인가?)


용천음은 오늘처럼 감철생이 신비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급히 말했다. "어르신, 그렇다면 제가 가야할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감철생은 문득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미소를 머금으며 하얗게 빛나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용천음을 응시했다. "공자는 이미 자신이 가야할 길을 가고 있소." (이미 가고 있다고? 내가 가야할 길을 가고 있다고……?) 머리가 터질 듯이 복잡해졌다. 감철생이 입을 열었다. "공자, 이 세상에서 가장 우매한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사람이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포기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소." "살아가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면 차라리 목숨을 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감철생은 빙그레 웃었다. "사람이란 말이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오." "……!" "운명은 바뀔 수도 있는 것이오. 사람들은 그것을 미리 모를 뿐……" 감철생은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한 차례 수염을 쓸어내렸다. "사람들은 말이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바꿔보려는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너무 빨리 인생을 포기해 버리거든……" "……!" 용천음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운명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노력은 해볼 수 있소. 공자께서도 한 번 해보도록 하시오." "……!" 감철생은 문득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그만 쉬도록 하시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에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면서 그는 스치듯 한 마디를 던졌다. "나 역시 글선생이 되고 싶어서 된 것은 아니라오." "……!" 밑도 끝도 없는 한 마디를 남긴 채 감철생은 휭하니 밖으로 사라 져 버렸다. -나 역시 글선생이 되고 싶어서 된 것은 아니라오. 그렇다면 감철생은 어떤 계기로 글선생을 택했단 말인가? 그렇게 따진다면 글선생 이전에는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 어떤 종류의 운명을…… 용천음은 감철생이 나간 방문을 바라보며 차가운 입술을 꽉 다물었다. (운명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 보라고……?) 6 밖에는 정오(正午)의 햇살이 떠오르고 있었다. "……" 감철생은 걸음을 멈춘 채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짙은 고뇌와 처참함에 물들어 있는 그의 얼굴은 정오의 햇살을 받아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괴로울 게야. 무척……" 감철생은 햇살에 눈이 부신 듯이 잠시 시선을 동쪽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이내 하늘을 쳐다 보았다. "말해줘야 하는데…… 말을 해야 하는데……" 무엇을, 누구에게 말해줘야 한단 말인가? "흠……" 감철생은 장탄식을 토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망동이었어. 공연히 그 앞에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 놓은 것 같아……" 감철생은 다시 한 차례 고개를 저으며 느릿하게 걸음을 떼어 놓았다. "언젠가는 말해야겠지만 지금은 시기가 아니야. 말할 시기가……" 노학사 감철생, 그는 정오의 햇살을 뒤로 하고 정원 저 멀리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제 2 장 금황혈시 1 황혼(黃昏)이 물드는 초저녁 무렵, 자금성(紫禁城) 동쪽에 자리한 야시장(夜市場)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껏 붐비고 있었다. 휘황한 등불 아래 사려는 사람과 팔려는 사람의 어우러짐은 인생의 참의미라고 보아도 좋았다. 떠들고, 소리치고…… 북적거리는 사이를 어깨를 스치며 지나치는 행인들의 얼굴에는 함지박 웃음이 피어 있다. 그 행인들 사이로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는 중년인(中年人)이 초조한 기색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등 뒤에는 한 자루 철검(鐵劍)이 메어져 있고, 얼음장 같은 표정에는 일점 감정도 없었으며 간혹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다 보는 모 습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감을 주고 있었다. 중년인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소매로 문지르며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리고는 한 곳을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그가 들어선 곳은 이당점(엿파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지금 서너 명의 아낙네와 젊은이 들이 여러 모양의 엿을 보며 고르고 있었다. 중년인은 빠르게 한쪽 구석으로 다가갔다. 문득 그는 무척 오랫동안 팔리지 않은 듯 싶은 굵고 짧은 뱀모양의 엿가락에 시선을 멈추었다. (저것이 적당하다!) 그리고는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았다. 주인이며 손님들은 누구도 이쪽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이에 중년인은 극히 빠르고 민첩한 행동으로 품 속에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꺼냈다. 한데 그 물건엔 말라붙은 피가 묻어 있는 것이 아닌가? 오오, 그러고 보니 중년인의 앞가슴의 옷은 은은히 선혈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 부상을 당했는가? 중년인은 뱀모양의 엿을 든 뒤에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엿의 중앙부근이 금새 벌어졌다. 중년인은 가지고 있던 피묻은 물건을 재빠르게 엿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또 다시 공력(功力)을 운용해 감쪽같이 엿을 원상태로 봉해 버렸다. 삼매진화(三昧眞火)였다. 그것으로 보아 중년인은 무림인(武林人)이었으며 상당히 뛰어난 무공(武功)을 지닌 고수(高手)인 것 같았다. (되었어. 일단 놈들을 따돌리고 내일 아침 다시 와서 찾아간다.) 놈들? 그렇다면 중년인은 누군가에 쫓기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뱀처럼 생긴 엿가락 안에 감춘 물건은 무엇이란 말인가? 중년인의 신중한 행동으로 보아 결코 예사로운 물건은 아닐 성싶었다. 중년인은 뱀엿을 한 차례 바라본 뒤에 이내 몸을 이동하여 엿을 고르는 시늉을 했다. 그러하던 잠시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 당점을 빠져 나와 빠른 걸음으로 야시장을 떠났다. 같은 시각,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선남선녀(善男善女)가 야시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소년은 다름 아닌 용천음이었고 소녀(少女)는 하늘에서 하강한 듯한 절세의 미모를 지닌 십 육칠 세 정도의 꽃다운 처녀였다. 신분이 몹시 고귀한 듯 화려한 궁장을 했으며 웃지않아도 움푹 패이는 볼우물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충동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윤곽이 뚜렷하며 봉(鳳)의 그것인 양 맑고 아름다운 쌍의 눈(眼), 살짝 벌릴 때마다 드러나는 백옥 같은 치아, 그리고 입술…… 그녀는 누구인가? 벽소희(碧素嬉). 대명(大明)의 정계(政界)에서 무시못할 권력을 쥐고 흔들며 과거 영상까지 지내다가 지금은 물러나 앉은 좌영대군(佐營大君) 벽현사(碧賢史)를 부친으로 두고, 당금 황제(皇帝)의 누이동생인 단혜군주(丹慧君主)를 모친으로 모신, 뭇사내의 흠모와 동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깜찍한 재녀(才女) 벽소희…… 중요한 것은 그녀가 죽자사자 용천음을 따른다는 것이었다. 벽소희는 누가 보든말든 용천음의 팔짱을 낀 채 그 맑은 눈으로 사방을 돌아보고 있었다. "오빠, 이번에 또 자살 소동을 벌였다면서?" 용천음은 조용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누가 그러더냐?" "누가 그러긴? 용 백부님께서 찾아와 우리 아버지한테 한참 동안 신세 타령을 하고 가셨는 걸." "……" 벽소희는 문득 눈을 흘겼다. "또 그럴 거야?" "글쎄……" "오빠가 죽으면 난 어떻게 하구? 청상과부 만들어도 좋다는 거야?" (청상과부? 이 아이가……) 용천음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벽소희는 더욱 바싹 팔짱을 끼었다. "아버지가 그러는데 조만간 오빠와 나를 짝지워 주신다는 거야. 백부님과는 벌써 약속이 되어 있는 것 같던데……" 용천음의 걸음이 순간적으로 멈추어졌다. (나와 소희를 맺어 준다고? 후훗…… 아버님의 계획이겠군? 좋겠지. 그렇게 되면 더욱 큰 권세를 휘두를 수 있을 테니까……) "오빠, 왜 반응이 없어? 나 하고 혼인하는 거 싫어?" "글쎄……" 벽소희는 용천음의 시큰둥한 말에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피! 허구한 날 글쎄야. 그 말 말고 딴 말은 없어?" "글쎄……" "또?" "……"


용천음은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은 누가 보아도 억지로 웃는 것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아볼 수가 있을 정도였다. "……!" 이때 용천음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자신을 본 사람들이 마치 더러운 물건을 대하기라도 하듯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피한다는 것이었다. 용천음은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 더러운 간신의 아들! 여긴 뭐하러 나타났어? 그들의 눈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설 땅은 아무 데도 없어……) 용천음은 긴 탄식을 불어내며 힘없이 웃고 말았다. 문득 사방을 둘러보던 벽소희가 급히 말했다. "오빠, 나 엿 사줘." 벽소희는 맑게 웃었다. "엿이란 것은 찰싹 달라붙는 거 아냐. 그러니까 오빠와 내가 함께 먹어서 찰싹 달라붙게 만들어야지. 도망하지 못하게……" "……!" 더 할말 있는가? 용천음은 내심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너무 순진한 건가?) "빨리!" 벽소희는 용천음의 팔을 잡아 끌었다. "어서 오십……" 반갑게 맞이하던 주인은 용천음을 발견하는 순간 인상이 굳어 버렸다. 또한 엿을 고르던 손님들 역시 용천음과 한 자리에 있는 것이 무슨 병이라도 옮는 듯 일제히 우르르 나가 버렸다. (빌어먹을! 한참 매상 올릴 시간에……) 속으로는 비윗장이 뒤틀렸으나 그렇다고 내색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인은 억지 웃음을 흘리며 허리를 굽신거렸다. "아이구! 아씨께서도 오셨구만요." "아부하지 말아요. 그렇다고 엿값 더 주는 거 아니니까." "……?" 말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은 주인의 얼굴이 휴지처럼 구겨졌다. 벽소희는 실내를 한 차례 둘러보았다. "먹을 만한 엿은 하나도 없군." 그러다가, 그녀는 한 구석에 있는 뱀모양의 엿을 발견하고는 사뿐 그곳으로 다가간다. "오빠, 이 엿 어때?" "징그러운 걸……" "그래도 난 이게 제일 마음에 드는데? 오빠, 우리 이거 사서 나누어 먹어." 주인은 기가 질린다는 듯이 벽소희의 얼굴과 그녀가 들고 있는 뱀 모양의 엿을 번갈아 바라 보았다. (무슨 여자가……) 뱀, 그것이 진짜든 가짜든간에 여자는 무조건 싫어한다. 하물며 먹는 것이거늘 어찌 여자가 뱀모양의 것을 고른단 말인가? 그것도 지체높은 아가씨가……


(소문대로 웃기는 여자로군.) 그저 아무 생각없이 고른 뱀모양의 엿…… 운명은 그곳에서도 다가오고 있었다. 2 야시장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적한 숲 속, 용천음과 벽소희는 널찍한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벽소희는 엿을 반으로 뚝 잘라 꼬리 부분을 용천음에게 내밀었다. "이건 오빠 몫이야." "……" 용천음은 빙그레 웃으며 반쪽의 엿을 받아쥐었다. 벽소희는 엿을 한 입 가득 베어 물고는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맛있다……" 용천음은 우두커니 엿가락을 든 채 벽소희의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한데 또 한 입을 베어 물던 벽소희, "아얏! 이게 뭐야?" 그녀는 무엇인가를 잘못 깨물은 듯 손으로 턱을 만지며 황급히 입 안의 것을 뱉아냈다. 순간, "어머! 이게 뭐지……?" 손바닥 위에 하나의 정교한 열쇠가 놓여 있었다. 금색(金色)을 띠고 있었으며 위의 둥그런 부분에는 마치 살아서 숨쉬는 듯한 한 마리 우아한 봉황(鳳凰)이 조각되어 있었다. 용천음은 열쇠를 보는 순간 흠칫했다. (저게 무엇일까? 그리고 어째서 엿 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일까?) 벽소희는 금빛 열쇠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뾰족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머! 여기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 용천음은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금황혈시(金凰血 ). 깨알같이 쓰여진 그 글은 몸통 부근에 새겨져 있었다. (금황혈시……!) 벽소희는 아무 의미없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혹시 행운을 가져다 주는 열쇠 아닐까?" 행운의 열쇠? 벽소희는 몹시 기분이 좋은 듯 금빛 열쇠를 용천음에게 내밀었다. "엿 속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행운을 가져다주는 열쇠가 분명한 것 같아. 이거 오빠한테 선물할게." "……!" 용천음은 그녀가 내민 금황혈시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 쥔 자신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흠칫 놀라고 말았다. (내가 왜 이것을……?)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마치 자신의 몸 속에 깃들어 있는 어떤 다른 영혼의 손이 그 열쇠를 받아쥔 듯한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용천음은 손에 쥔 금황혈시를 내려다 보았다. (그냥 이유없이 단순히 엿 속에 들어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이 열쇠에는 어떤 내막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는 손 끝으로 열쇠를 문질러 보았다. (결코 행운 따위를 운운하는 그런 하찮은 물건은 아닐 것이다. 느낌이지만…… 금황혈시에는 뭔가가 숨겨져 있는 듯한 예감이 든다.) 문득 그는 열쇠의 아래 부분에서 아직도 남아 있는 핏자국을 발견했다. (굳은 피(血)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바싹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왜 피가 묻어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금황혈시는 누가 일부러 엿 속에 집어 넣은 것이란 말인가?) 실로 정확한 판단이었다. 수많은 의구심이 안개처럼 일었다. 이때, 후두둑…… 후둑…… 돌연 몇 방울의 빗줄기가 떨어졌다. "어머! 비가 오려나 봐. 오빠, 우리 그만 돌아가." 벽소희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가리며 몸을 움츠렸다. 용천음은 금황혈시를 품 속에 갈무리하며 생각했다. (이상한 예감이 든다. 이 금황혈시로 하여금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만 같은……) 자기 자신이 보이지 않는 사건에 휘말려 들어갈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오빠, 빨리 가." "그러자." 용천음은 더 이상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벽소희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 하늘은 소나기라도 한바탕 퍼부울 듯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3 암자(庵子). 낡고 꼬부라진 그 암자는 자금성 북문(北門) 성벽 바로 밑에 자리잡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암자라 함은 깊은 산중이나 인적이 드문 곳에 있어야 제격이 아닌가? 한데 이렇게 조건을 깡그리 무시한 채 그 암자는 속세가 그리워 미치겠다는 듯이 자금성 북문 벽에 바싹 달라붙어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런 것도 암자라 해야 하는가! 적어도 명색이 스님이 수도한다는…… -이놈아! 쥐뿔도 모르면 아가리나 닥치고 있어라! 되도록 이름나고 물좋은 속세와 붙어 있어야 국물이라도 얻어먹지 깊은 산중 벼랑가에 아슬아슬 하게 매달려 있으면 누가 밥을 주냐, 죽을 주냐? 이 암자의 주지승이 입버릇처럼 떠드는 말이었다. 하기야 말이 좋아 주지지 그 암자엔 중이래야 그 혼자 뿐이었다. 공초스님. 선사(禪師)라고 불러주면 두 눈에 쌍심지를 켜며 욕설을 퍼붓고, 대사(大師)라고 부르면 돌아 앉아 상대도 해주지 않으며, 돌중이라고 불러줘야 커다란 입을 쩍 벌리며 기분좋아 껄껄 웃는 괴상한 땡초…… 그가 바로 공초(空樵)스님이었다. 4 용천음은 벽소희와 헤어진 뒤 집으로 가지 않고 암자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공초스님을 알게 된 것은 일 년(一年) 전의 일이었다.


승상부로 공초스님이 적선을 왔던 것이다. 그는 등 뒤에 커다란 항아리 하나를 메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술을 담는, 이를 테면 술항아리였던 것이다. 곡식은 적선하지 않고 술을 적선하는 괴이한 땡초. -스님이 어찌 술을 적선하십니까? 용천음이 이렇게 묻자 공초스님이 두 눈을 부라리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소시주, 모르면 아가리나 닥치고 있게. 누군 뭐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나? 아, 글쎄 부처님에게 술 한 방울 먹였더니 그 다음부터 곡식이고 쌀이고 다 필요없으니 술만 가져오라는 게야. 그리고는 홱 돌아 앉아 버렸는데 낸들 어쩔 수 있나?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부처님이 돌아 앉으면 만사 되는 일이 없다고? 더군다나 나는 불문에 몸담고 있는 처지고 보니…… 궤변도 이런 궤변이 있을 수 없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용천음은 번민하거나 울적할 때면 공초스님을 찾아가곤 했다. 그와 마주하고 있노라면 모든 번민이 말끔히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공초와 처음 만났을 때 때를 회상하며 용천음은 빙그레 웃었다. (무척 오래되었군. 그 분을 뵌 지도……) 용천음은 암자쪽을 힐끗 쳐다보고는 빠르게 걸음을 떼어놓았다. 암자 앞에서 걸음을 멈춘 용천음은 안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공초스……" 일순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안에서 벼락 같은 음성이 떨어졌다. "어떤 시러베잡종이냐?" "……?" 심사가 뒤틀리는 일이 있었던지, 첫 마디부터 욕설이다. "천음입니다." "용천음?" "그렇습니다" "들어와!" 용천음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공초스님은 다 낡아빠진 포단 위에 앉아 있었다. 살이 어찌나 쪘는지 동그란 공이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며 무엇이 불만스러운지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두 눈은 유난히 작고 반면에 코는 주먹만 했으며 그 끝은 빨간색 으로 찌들어 있다. 승포라고 해야 시원하게 구멍 뚫린 누더기라고 보아도 좋았고, 마치 팔찌처럼 두 손목과 양 발목에 염주를 차고 있었다. -왜 염주를 목에 걸지 않고 토막내서 발목과 팔목에 걸었냐고? 모르면 아가리나 닥치고 있어라.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고승, 나 공초스님의 마음을 뉘라서 헤아릴쏘냐! 염주로 손과 발을 묶어 내 스스로 고행의 덕(德)을 쌓고 있는 것이니라…… 공초스님은 발목과 손목의 염주를 이렇게 풀이했다. 하기야 하나로 목에 거는 것보다 네 개로 나누어 몸에 걸고 있으면 그만큼 더 고행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궤변이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맞는 말이라고 해야 좋을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공초스님은 힐끔 용천음을 쳐다보며 이죽거렸다. "네가 무슨 감상파라고 비를 맞고 다니냐?"


"……!" 용천음은 공초스님의 버릇을 잘 알고 있는 듯 전혀 개의치 않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가 앉자 마자 공초스님이 말했다. "너 마침 잘 왔다." "……?" "저 길 건너 장의사(葬儀社) 있지?" 용천음은 고개를 끄덕였다. "염씨 장의사 말입니까?" "그래. 너 행여 죽을 일 있거들랑 그 집에 가서 관(棺) 맞출 생각 아예 하지도 마라."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죽으라고 고사지내는 것도 아니고…… 공초스님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먹까지 불끈 쥐었다. "그놈 순 사기꾼이야. 놈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오동나무 관(棺) 있잖아? 그거 알고 보니 순전히 소나무였어. 그것도 질이 제일 나쁜……" "……" "너도 알잖냐? 그런 질 나쁜 관은 땅에 묻은 지 사흘도 안되 푹푹 썩는다는거……" 용천음이 빙그레 웃었다. "염씨가 술적선을 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공초스님은 정색을 했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원래 나쁜 놈이라구……" 용천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집에서 관을 맞추지 않겠습니다." 그제서야 공초스님은 함지박 웃음을 머금었다. "흐흐흐…… 역시 넌 이 위대한 공초의 하나밖에 없는 지우(知友)야." 용천음은 실내를 한 번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은 다른 때에 비해 대충 청소를 한 것 같군요." 공초스님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사실은…… 오늘 마누라가 온다고 해서……" (마누라?) 용천음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장가 들었다고……" 용천음은 고개를 저었다. "금시초문인데요……" 공초스님은 약간은 쑥쓰러운 듯 잔입맛을 몇 번 다셨다. "마누라와 헤어져 있은 지 꽤 오래됐지. 이번에 만나면 이십 년(二十年) 만이던가?" 그는 한쪽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한데 무슨 번민이 있는 모양이군. 나를 찾아온 것을 보니……" "아닙니다. 그저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렀을 뿐입니다." 공초스님은 고개를 저었다. "참아. 참는 게 도리인 게야." "……!" 용천음은 뼈 있는 듯한 공초스님의 말에 흠칫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때였다. "안에 공초스님 계십니까?"


돌연, 지극히 조용하면서도 자애로운 여인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순간, "왔다." 공초스님이 뛸 듯이 기뻐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쏜살같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것도 맨발로…… (정말로 공초스님의 부인이 온 모양이로군.) 잠시 공초스님의 떠드는 소리가 들려온 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한데 이 무슨 웃지 못할 일이란 말인가? 공초스님과 함께 들어온 여인은 놀랍게도 여사태(女師太)였던 것이다. 희끗한 백발(白髮)이었으나 용모는 아직도 중년(中年)처럼 보이는 몹시 아름다운 여사태였는데 젊은 시절에는 그 아름다움이 사해만방에 떨쳤음직 했다. "……!" 용천음은 그저 입을 딱하니 벌린 채 공초스님과 여사태를 번갈아 응시할 뿐이었다. 너무 기가 막히면 말도 제대로 안 나온다고 했던가? 공초스님이 재빨리 여사태를 소개했다. "인사해라. 난정사태(蘭精師太)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 "이분이 진정…… 부인이란 말씀이십니까?" 난정사태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부인이라니……?" 공초스님이 난정사태를 응시하며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히……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가 잠자리만 같이 하지 않았지 부부 사이와 뭐 다를 게 있소? 하루 이틀 얼굴 본 것도 아닌데……" "고…… 공초도우…… 어찌…… 그…… 그런 망언을……" 얼마나 당황했던지 난정사태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며 안절부절을 금치 못했다. 공초스님은 신이 났는지 손짓과 발짓을 해가며 자아도취하기 시작했다. "과거…… 얼마나 많은 미인들이 사랑을 갈구하며 내 바지 가랑이를 잡아당겼소. 그러나 나에게는 오직 그대만이 있었기에 그 모든 것을 과감히 뿌리쳐 버리고 여기에 섰소." "고, 공초도우……" 천하의 여걸이라 일컬어지는 난정사태도 이쯤 되니 쥐구멍이라도 찾아야 할 형편이었다. 단 둘이 있다면 모를까 옆에 용천음까지 있지 않은가? 공초스님은 아예 반쯤 일어섰다. 그리고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외쳤다. "오오…… 현명한 중생들이여. 그대들은 입을 모아 말할 것이다.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고승과 불문이 낳은 최고의 여승 난정사태와의 그 아름다운 미담(美談)을……"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고승? 너무 망상에 잠겨 헛나왔을 게다. 이 시대의 가장 골칫거리 땡초와 가장 고고하며 덕망 높은 난정사태, 이래야 맞지 않을까? 이때 더 이상 놔두었다가는 어떤 사태가 발생할지 모를 것 같았는지 용천음이 끼어들었다. "노사태, 확실히 연유도 모르고 감히 노사태의 덕망을 흐린 점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난정사태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한데 난정사태가 비로소 용천음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순간 돌연 그녀의 안색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마치 어떤 충격을 받은 듯…… (왜 그럴까?) 용천음은 난정사태의 표정을 바라보며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문득 난정사태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한동안 허공으로 얼굴을 올렸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당대의 여기인답게 그녀의 안색은 어느새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더 용천음의 얼굴을 응시한 뒤에 나직이 입을 열었다. "혹시…… 소시주의 성(姓)이 남궁(南宮)이 아닌가요?" 용천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소생은 용천음이라고 합니다." (용…… 천음……) 이때 공초스님이 끼어들었다. "저놈이 바로 조정 제일의 간신배라는 용비후의 아들이라오. 아비와는 딴판이지. 그런 간신에게서 어찌 저런 착한 종자가 나왔는지 불가사의란 말이야. 불가사의……" 난정사태의 백미(白眉)가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용비후의 아들? 정녕…… 남궁씨가 아니란 말인가?) 그녀의 눈빛은 용천음의 얼굴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렇다면 저 똑같이 생긴 모습은 어떻게 풀이해야 한단 말인가? 똑같아…… 너무도 똑같아……) 대체 용천음의 모습이 누구와 똑같단 말인가? (그래…… 잘못 보았을지도 모르지. 세상에서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너무도 많으니까…… 하지만 그냥 지나치기에는 어딘가……) 문득 공초가 말했다. "한데 사태께서는 이번에 무슨 일로 모습을 나타냈는지……?" 난정사태는 흠칫 제정신으로 돌아오며 공초스님을 바라보았다. "한 가지 일 때문에 왔어요." "한 가지 일?" 난정사태는 그 일이 무엇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은 채 부드럽게 웃었다. "그 일이 끝나면 곧 돌아갈 거예요." 공초스님은 콧구멍을 후벼팠다. "흐흐…… 그 일이 뭔지는 모르지만 영원히 해결되지 않았으면 좋겠군." "……?" "그래야 우리가 오랫 동안 함께 있지." 난정사태는 다시 한 번 얼굴이 물들고 말았다. 이때 용천음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두 분 해후를 푸십시오. 소생은 이만 돌아갈까 합니다." 공초스님이 입이 찢어질 듯 반색을 했다. "그래, 그래…… 그렇지 않아도 너무 오래 있었어. 더 늦기 전에 빨리 가라." 마치 왜 지금까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느냐는 듯 원망하는 말투였다. 용천음은 두 사람에게 예를 한 뒤에 암자를 물러나왔다. 난정사태는 용천음이 나간 뒤에도 한동안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했다. (용비후의 아들이라고 했던가?)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잘못된 거야. 만약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어 있는거야……) 난정사태는 눈을 뜨며 연신 웃고 있는 공초스님에게 말했다. "공초도우, 그가 정말 용비후의 아들인가요?" "엥?" 공초스님은 느닷없는 그녀의 질문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나 질문을 던진 난정사태는 다시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비는 여전히 오고 있었다. 용천음은 암자를 나온 뒤 북문을 지나고 있었다. (왜 내 성(姓)이 남궁이냐고 물었을까?) 적당히 말랐던 옷이 다시 흠뻑 젖기 시작했다. (난정사태의 눈빛을 보니 마치 오래 전부터 나를 알고 있는 듯한 눈치던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용천음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지……" 그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고 그 일을 마음 속에서 접어두고 말았다. 동편 하늘 저 멀리 또 한 번의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다. 5 이당점의 주인 양삼(楊三)은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잔뜩 눈꼽 낀 눈을 부비적거리는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잠에서 덜 깬 듯한 기미가 역력했다. "빌어먹을! 꼭두 새벽부터 누구야……" 몹시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린 그는 웃옷만을 걸친 채 비틀 걸음으로 문쪽으로 향했다. "뉘슈?" "……" 밖으로부터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누구냐니까?" 역시 대답이 없었다. "빌어먹을! 어떤 놈이 아침부터 장난질이야? 재수없게스리……" 양삼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순간, 그는 무엇을 보았는지 그 자리에서 장승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중년인, 마치 철(鐵)을 부어 만든 듯한 전신에서 싸늘한 냉기를 몰아치고 있는 한 중년인이 문 앞에 우뚝 버티고 선 채 얼음장 같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은가? 바로 어제 저녁 뱀 모양의 엿 속에 금황혈시를 넣고갔던 그 사람이었다. 양삼은 자신을 뚫어지게 쏘아보고 있는 중년인을 보는 순간 호흡이 턱 멎는 것을 느꼈다. "누…… 누구시오?" 중년인의 입술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엿을 사고자 왔다." "……?" 이렇게 꼭두새벽에 엿을 사러 오다니…… 양삼은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에 말했다. "드…… 들어 오시구려." 중년인은 영혼 잃은 사람 마냥 무심한 걸음걸이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자 양삼은 문을 닫으려 했다. 한데 그 순간, (저…… 저건……!) 무심코 중년인이 서 있던 문 앞의 땅바닥을 본 양삼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지고 말았다. (피(血)…… 피다!) 그렇다. 땅바닥엔 흥건하게 피가 고여 있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피는 스물스물 지면 속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양삼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숨통이 막혀 오는 듯한 질식감을 느끼며 황급히 고개를 돌려 중년인이 딛고 들어갔던 바닥을 응시했다. 중년인이 걸어간 자리에도 역시 시뻘건 선혈이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이…… 이거……) 양삼은 등골이 오싹했다. (어디에서 누군가와 치열하게 격전을 치르고 온 듯한데……?) 대관절 저 중년인은 누구며, 또 누구와 싸웠으며, 왜 이곳으로 왔단 말인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었으나 양삼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중년인은 어제 금황혈시를 놓아 두었던 뱀모양의 엿이 있던 한쪽 구석으로 거침없이 다가갔다. 한데, (없…… 다……!) 뱀모양의 엿이 감쪽같이 없어진 것을 안 중년인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이…… 이럴 수가…… 안돼! 그것이 어떤 물건인데……) 찰나 중년인이 고개를 돌리는가 싶자 그의 몸은 다가오고 있는 양삼을 향해 빛줄기처럼 쏘아져 갔다. 꽈악! 중년인의 손이 양삼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린 것은 실로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커…… 커억!) 졸지에 멱살을 잡히고 허공에 두 다리가 들려진 양삼은 사색으로 변한 채 전신을 와들와들 떨었다. "소, 손님…… 왜……" 중년인의 두 눈에서 시퍼런 백광이 뿜어져 나왔다. "말해라! 저기에 있던 뱀모양의 엿은 어디로 갔느냐?" "무…… 무슨……?" 중년인은 양삼의 몸을 더욱 높이 치켜 들었다. "대답해라. 죽기 싫으면……!" 양삼은 공포에 질린 음성으로 말했다. "뱀 모양의…… 엿이라면…… 혹시 용공자가 사간…… 엿을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용공자?) 중년인의 얼굴이 한 차례 씰룩거렸다. "용공자란 어떤 놈이냐?" "크으으…… 그분은 용승상님의 아들입니다…… 이름은 용천음……" (용승상이라면…… 용비후……!) 중년인의 눈에서 이채의 빛이 떠오른 것은 그 순간이었다. 동시에 그의 입술이 몇 차례 꿈틀거렸다. "용비후의 아들인…… 용천음……" 중얼거리면서 양삼의 멱살을 움켜쥔 그의 손에 서서히 힘줄이 돋아났고 허공에 떠 있는 양삼은 숨통이 조여오는 듯한 갑갑함으로 혀를 입 밖으로 내밀었다. "크으으…… 으으으……!" 그의 두 다리는 개구리의 그것인 양 퍼득퍼득 떨리고 있었다. 6 혈오(血烏). 붉은 까마귀 떼가 하늘을 뒤덮고 귀기스러운 백색의 운무(雲霧)가 가득 스물거리고 있는 암계(暗界)의 골짜기를 아는가? 가슴 저미는 공포가 있고 저주보다 더 끈끈한 악령(惡靈)의 그림자가 숨쉬고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혈오였다. 밤(夜)도 깊어가는 이 시각, 천둥과 번개, 그리고 장댓살 같은 폭우가 혈오를 뒤덮고 있었다. 콰르---- 르---- 르---- 릉----!


쏴아---- 아---- 아! 천둥과 번개, 엄청난 폭우가 퍼붓고 있는 가운데 하늘 가득 수많은 까마귀 떼가 울부짖고 있었다. 까아악---- 까---- 악----! 하늘은 광란하고 땅은 섬뜩한데 붉은 까마귀 떼가 폭우를 헤치며 울어대고 있는 이 시간, 불길하다. 꼭 무슨 일인가가 벌어질 것만 같은 스산한 예감이 든다. 한데 지금 이 순간 혈오의 깊숙한 지하를 뚫고 하늘 저 끝까지 쭉 뻗어 오른 한 줄기 피빛의 광채는 무엇인가? 그리고 마치 악마의 숨소리인 듯 간헐적으로 들려오고 있는 숨막히는 저 소리는 대체 무엇인가? 그렇다. 그 빛과 그 소리는 바로 혈오의 땅 속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바로 혈오의 계곡 아래 깊숙한 곳, 지하 수백 장 밑에서…… 지하 수백 장 아래, 그곳엔 화산(火山)이 폭발하고 용암이 흐르면서 형성된 거대한 용암 동굴이 있었다. 지옥의 검푸른 어둠이 사위를 뒤덮고 잔뜩 이끼낀 날카로운 바위만이 악마의 눈빛인 양 몸서리 쳐지도록 음사한 분위기로 동굴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숨통이 막히도록 고요한 그 적막 속에 하나의 물체가 놓여있다. 그것은 바로 전체가 시커먼 나무로 만들어진 목관(木棺)이었다. 동혈 전체는 물론이거니와 시커먼 관은 기이한 운무에 뒤덮인 채 그 자태를 황량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핏빛의 혈광채, 그것은 바로 목관에서부터 곧장 위로 뻗어나 있었고 딱 꼬집어서 표현할 수 없는 괴이한 소리 또한 관 속으로부터 새어나오고 있었다. "후우…… 후우우…… 후우……" 괴이한 소리가 새어나올 때마다 혈광채는 더욱 짙어지고 굳게 못질되어 있는 관뚜껑 또한 간헐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어느 한 순간, 끼이이익…… 못질된 관뚜껑이 섬뜩한 기음(奇音)을 내며 약간 위로 열리는 것이 아닌가? "후우우…… 후욱……" 괴이한 소리는 점차 고조되어 갔다. 끼기긱…… 끼긱…… 그에 따라 관뚜껑은 그 만큼 더 열려졌다. 그리고 그 열려진 관 속에서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사악한 귀성이 흘러나왔다. "크흐흐흐…… 나 유령관시(幽靈棺屍) 음후독(陰侯獨)은…… 마침내…… 이루었다." 끼기긱…… 끼익…… 관뚜껑은 이제 절반쯤 열렸으며 그 안으로부터 동공을 파열시킬 듯한 어마어마한 혈광채가 쏘아져 나오고 있었다. "크흐흐흐…… 단세혁(丹細赫), 네놈을 피해 살아온 지난 세월……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하지 않는다……" 단세혁이란 누구를 말하는건가?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괴음성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대독혼천귀공(大毒昏天歸功)…… 이제 관뚜껑이 완전히 열리는 순간 혼천의 마공(魔功)은 이루어진다……" 끼이이익----! 관뚜껑은 음산한 소리를 내며 빠른 속도로 열리고 있었다.


한데 그때였다. 쐐---- 애---- 애---- 액----! 돌연 하나의 물체가 공간을 가르며 날아와 열리고 있는 관뚜껑의 한복판에 깊숙이 꽂히는 것이 아닌가? "허억!" 관 안에서 경악의 외침이 새어나왔다. 관뚜껑에 박힌 물체, 그것은 한 개의 불진이었다. 불진은 깊숙이 박힌 채 관뚜껑을 무형(無形)의 기(氣)로써 찍어누르고 있었다. 관뚜껑이 열리지 못하도록…… "누구냐? 누가 감히 나의 연공을 방해하느냐?" "바로 나다, 음후독!" 한 소리 맑은 음성에 이어 동혈에 하나의 인영이 소리없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놀랍게도 난정사태가 아닌가? "난정사태…… 네년이 감히……" 난정사태는 싸늘한 눈빛으로 목관을 응시했다. "음후독, 너는 절대로 나의 이목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크흐흐흐…… 끈질긴 년…… 이곳까지 용케 찾아왔다만 이미 늦었어. 나는 이미 혼천의 마공이라 일컬어지는 대독혼천귀공을 완성단계에까지 이루었어." 난정사태의 입가에 조소가 머금었다. "관뚜껑이 열려 대기(大氣)의 기류와 합해지지 않는 한 대독혼천귀공은 완성되지 않는다." "가소롭구나! 이 따위 불진 하나로 관뚜껑이 열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해볼 것이다. 끝까지……" "콰하하하하하핫……" 유령관시 음후독의 경천동지할 광소가 관을 들썩이며 터져나왔다. "난정사태! 네가 비록 백풍마궁의 출신이라지만 너의 힘만으로 날 어쩌진 못해!" 난정사태는 관에서 뻗치는 엄청난 힘을 느꼈다. 그 힘은 자신의 몸을 뒤로 밀고 있었다. 하나 난정사태는 당황하지 않고 전신의 내공을 끌어올리며 그 힘에 대항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입을 열어 말문을 꺼냈다. "내가 여기에 온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너의 연공을 막기 위함이고 둘째는 백풍마궁을 무너뜨린 주모자 단세혁의 정체를 알기 위함이다!" "……!" "음후독, 단세혁의 진정한 정체는 무엇이냐? 내가 지난 세월동안 천하를 온통 뒤집었으나 단세혁이라는 자는 없었어!" "흐흐흐…… 나 역시 단세혁이라는 이름밖에는 모른다. 그는 철저히 자신의 얼굴을 숨기고 있었으니까!" 난정사태의 입술이 악물려졌다. "그동안 그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단세혁 그자를 도와 백풍마궁을 멸망시키는 데 앞장 섰던 자들을 찾아 그들의 입을 통해 단세혁의 정체를 알고자 했다! 하나 실패했지. 자면신소(紫面神簫) 악군영(岳君英), 환사마유(幻邪魔幽) 궁혈비(弓血飛) 그들 역시 단세혁의 진정한 정체는 모르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단세혁 을 피해 은거(隱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유령관시 음후독의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자면신소 등은 어찌 되었느냐?" "모두 죽었다." "설마…… 단세혁이……?"


"바로 그렇다." 목관에서 뻗는 혈광이 짙어지면서 사악한 기운이 극도로 뻗어나왔다. "크크크…… 단세혁…… 내 일찍이 그렇게 교활하고 치밀한 놈은 보지못했다. 놈은 우리를 이용해 백풍마궁을 무너뜨린 뒤 우리를 한 사람씩 제거하여 입을 막고있다. 자면신소와 환사마유도 놈이 두려워 은거하던 중에 당한게 분명하다. 내가 대독혼천귀공을 연마한 이유도 놈을 상대하고자 함에서였다." 목관 안에서 들려오는 음후독의 음성은 상상못할 분노를 담고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슈우우욱----! 돌연 관뚜껑이 무서운 속도로 열리는 것이 아닌가? "윽!" 찰나 난정사태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오른손을 합장하듯이 가슴 앞으로 세웠다. 순간 관뚜껑에 박힌 불진에서 한 차례 빛이 번쩍이는가 싶자 무서운 힘으로 관뚜껑을 내리누르는 것이었다. "이…… 이 년이……!" 유령관시 음후독의 다급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콰우우우----! 음향과 함께 엄청난 기류가 관 안에서 치솟아 찍어누르는 관뚜껑을 위로 밀어 올렸다. (뚜껑이 열리면 끝장이다!) 난정사태는 어금니를 악물며 일학충천(一鶴衝天)으로 허공으로 떠오르며 머리는 아래로 다리는 위로 한 채 무시무시한 장력(掌力)을 열리는 관뚜껑을 향해 격출했다. 퍼어어엉----! 쇠북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동굴 가득했던 운무가 사방으로 밀려나갔다. 동시에 시커먼 목관이 한 자 깊숙이 땅 속으로 파고들었다. 찰나, 쉬이---- 익! 갑자기 목관으로부터 다섯 줄기의 묵광(墨光)이 쏘아져 나오며 허공에 떠 있는 난정사태의 가슴으로 짓쳐 들어갔다. (흑철마지(黑鐵魔指)!) 난정사태는 흠칫 놀라며 오른쪽 발 끝으로 왼쪽의 발 등을 살짝 찍으며 유성처럼 옆으로 날아갔다. 때를 같이 하여, "미리혈수(彌離血手)----!" 난정사태의 두 손이 핏빛으로 변하는가 싶자 관을 향해 그대로 쏘아갔다. 순간 희미하게 열려진 관 양쪽 사이로 불에 탄 듯한 두 개의 앙상한 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시체가 썩는 듯한 역한 냄새를 동반한 두 줄기 빛의 강기( 氣)를 쏘아냈다. 꽈아아---- 앙----! 쿠르르---- 르---- 릉! 천지가 개벽하는 굉음과 함께 동굴 전체가 무너질 듯 뒤흔들렸다. 그리고 피(血)가 동굴 가득 뿌려졌다. 제 3 장 不 請 客 1 밤(夜)이 깊었건만 용천음은 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몸을 몇 번 뒤척이다가 갑갑하다는 듯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은싸라기처럼 달빛이 뿌려지고 있었다. 용천음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올려다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저 운명처럼 야공(夜空)에 나타나 밝은 여명이 움터올 무렵이면 휭하니 사라져 버려야 하는 운명, 그는 저 달이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용천음은 밤 정원을 조용히 걸었다. 한데 그는 문득 어디선가 두런두런 말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감지했다. (감어르신의 방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그렇다. 지극히 미약한 대화 소리는 노학사 감철생의 방에서부터 새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이 밤중에 찾아온 것일까? 감어르신이 이곳에 계신 동안 그 분을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기이한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방에는 불도 밝히지 않은 채였다. 왜 불을 끄고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일까? 용천음은 자신도 모르게 호기심에 이끌려 창가 바로 밑에까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자신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소." 감철생의 음성이었다. 용천음은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다고? 그렇다면 감어르신께서 무엇을 감추고 있었단 말인가?) 감철생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대의 말은 잘 알아 들었소. 그러니 가서 전하시오. 내 모든 것을 걸고 반드시 그를 죽여 주겠다고……!" (주, 죽여 주겠다고……?) 용천음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그가 아는 감철생은 절대 누구를 죽인다는 말을 할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닭 한 마리 죽일 수 없고 어쩌다 죽은 나비라도 볼라치면 혀 끝을 차며 삶의 무상함을 논하던 그런 분이 아니었던가? 한데 그런 그의 입에서 사람을 죽인다는 말이 나오다니…… (지금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누구일까? 그리고 말을 전하라고 했는데 대체 누구한테 전하라는 것일까?) 이때, "그럼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전하겠어요." 문득 아리따운 여자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여자……?) 뜻밖의 사실에 용천음은 흠칫 놀라고 있을 때였다. 한 사람이 일어나는 기척이 들려왔다. 용천음은 황급히 창가 밑에서 물러나 어두컴컴한 정원의 꽃 사이로 급히 몸을 숨겼다. 직후, 감철생의 방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나왔다. 찰나, (아……!) 용천음은 달빛 아래 얼핏 드러난 여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하고 말았다. 일신에 자의(紫衣)를 걸친 여인이었다. 삼단결 같은 머리카락을 둔부 아래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한 자루 보검(寶劍)을 등 뒤에 비스듬히 메고 있는 그 여인의 모습은 월광 아래 놀랍도록 신비로와 보였다. (멋있다……)


용천음은 무척 부러운 눈으로 여인을 훔쳐보았다. 왠지 자신도 한 번쯤 장검을 등 뒤에 메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것이다. 용천음은 그녀의 살결이 백옥같이 투명하고 깨끗하다는 것도 느꼈다. 찰싹 달라붙은 경장 사이로 완연하게 드러난 굴곡, 풍만한 둔부의 곡선과 터질 듯이 부풀어 있는 가슴의 윤곽은 사내의 마음을 설레이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특히 정교하면서도 선정적인 입술은 매혹적이었고 서글서글하면서도 커다랗게 빛나고 있는 두 눈은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했다. (나이는 대략 내 또래인 것 같구나……) 여인, 아니 소녀는 밖으로 나온 다음 빠른 시선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어느 한 순간 가볍게 어깨를 움직이는가 싶더니 바람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 그 같은 상황에 용천음은 입을 벌렸다. (저것이 말로만 듣던 무공(武功)이라는 것이구나.) 경신술(輕身術). 용천음으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자의소녀가 떠났건만 용천음의 뇌리에서는 왠지 그 소녀의 모습이 떠나지를 않았다. (만약…… 내가 그 소녀처럼 무공을 익힌다면? 아니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천하무적(天下無敵)의 무공을 익힌다면……?) 이렇게 생각하던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쓸데없는 생각…… 내가 어떻게 무공을 배워? 무슨 재주로……) 문득 그는 자신도 모르게 품 속을 더듬었다. 그러자 금황혈시의 딱딱한 감촉이 손 끝에 느껴졌다. 용천음은 그것을 더듬으며 싱겁게 웃었다. (금황혈시가 천하무적의 무공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 을까?) 용천음은 잠시 시선을 돌려 불꺼진 감철생의 창문을 응시했다. (덕망 높은 학자로만 알았거늘……) 그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곤 자신의 거처로 발길을 돌렸다. …… 한데 용천음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을 때였다. 스르륵! 돌연, 창문이 열리더니 그 창문으로 감철생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묵묵히 용천음이 숨어 있던 정원을 응시하다가 다시 용천음이 사라진 방향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동안 굳게 입술을 다문 채 용천음이 멀어져 간 방향만을 응시하던 감철생, 잠시 후 그는 말없이 창문을 닫고 있었다. 2 침상에 누운 용천음은 도무지 잠을 이루지를 못했다. 감철생의 정체도 그렇거니와 그 신비한 절세 미소녀(美少女)의 모습이 뇌리를 맴돌아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감어르신은 분명 평범한 노학사는 아니다. 그 분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한데 그때였다. "네놈이 용비후의 아들 용천음이냐?" 돌연 심장을 조일 것만 같은 싸늘한 음성이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용천음은 대경실색하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에는 이당점에 나타났던 바로 그 중년인이 침대 옆에 섬뜩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어…… 어떻게 소리도 없이 들어왔단 말인가?) 용천음은 알 수 없는 한기가 전신을 뒤덮어 오는 것을 막연히 느낄 수가 있었다. "누, 누구요? 당신은……" 중년인의 무심한 눈빛이 용천음의 얼굴 위에서 고정되었다. "네놈이 용천음이냐고 물었다." "그렇…… 소만……" 시커먼 어둠 속에서 중년인의 새하얀 이빨과 야수의 그것과도 같은 광채어린 눈빛이 스산하게 빛났다. "그것을 내놓아라!" 중년인은 불쑥 오른손을 내밀었다. "무엇을……?" 용천음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중년인의 손이 엄청난 빠르기로 날아와 용천음의 왼손 완맥을 움켜쥐었다. (욱……!) 찰나 용천음은 전신의 기운이 모조리 빠지고 뼈를 절단하는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중년인은 용천음을 벽쪽을 향해 거칠게 집어 던졌다. 퍼억! (으윽……!) 벽에 부딪치는 순간 용천음은 전신의 뼈마디가 부숴지는 듯한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입으로 뜨거운 선혈을 뿜어냈다. 중년인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용천음을 향해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중년인은 용천음 앞에 우뚝 선 뒤, 다시 한 번 오른손을 내밀었다. "내놓아라. 금황혈시를……" (금황혈시……! 그렇다면 그것을 엿 속에다 감춘 사람이 바로 이 사람……?) 용천음이 말이 없자 중년인은 살벌하게 웃으며 또다시 손을 뻗어 용천음의 완맥을 거머쥐어 왔다. 용천음은 눈을 부릅떴다. 도저히 피할 방도가 없었다. 바로 그때 용천음의 눈에 상대의 움직임이 돌연 느리게 보였다. 그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번갯불처럼 빠른 상대의 움직임이 갑자기 이토록 느리게 느껴지다니…… 그 순간 용천음의 머리속이 돌연 명경지수처럼 맑아졌다. 그리고 아까 중년인이 자신의 완맥을 잡을 때 사용했던 수법이 영상처럼 떠올랐다. 용천음은 엉겁결에 마주 손을 뻗어냈다. 그리고 곧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용천음과 중년인은 서로의 완맥을 똑같이 거머쥐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네…… 네놈이 어찌 내 독문수법(獨門手法)인 무영금나수(無影擒拿手)를……?"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중년인의 두 눈이 왕방울처럼 떠졌다. 그렇다.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용천음이 무공을 사용한 것도 놀라운데 자신의 수법을 똑같이 흉내낸 것이 아닌가? "어디서 무영금나수를 배웠느냐?" "조금 전 당신이 사용한걸 보고 배웠을 뿐이오." 중년인의 표정이 휴지처럼 구겨졌다. 말이나 되는가? 찰나간에 펼쳐진 것을 어찌 단 한 번 보고 그대로 따라서 펼칠 수가 있단 말인가? "네놈이 감히 날 희롱해?"


중년인의 두 눈에서 일순 짙은 살기(殺氣)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그는 용천음의 가슴을 향해 일권(一拳)을 내질렀다. 퍼엉! "으---- 악----!" 용천음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낙엽처럼 허공에 떠서 반대편 벽에 무자비하게 부딪치고 말았다. 그런 그의 가슴은 그대로 짓뭉개지고 말았다. 용천음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몸 속의 오장육부가 모조리 토막이 나는 것 같았다. 한데 놀랍게도 그 와중에서 그의 몸 속으로 돌연 따뜻한 열류(熱流)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따뜻한 기운이 흐르는 순간 용천음은 가슴의 고통이 사라지는걸 느꼈다.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괴이한 힘이 전신 팔만사천 모공(毛孔)을 통해 외부로 뻗치는 것이었다. 용천음은 칠공(七孔)으로 검붉은 선혈을 흘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저놈이……?) 중년인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적어도 지금의 일권(一拳)에는 삼성(三成)의 공력이 실려 있었 다. 그런데 무공도 모르는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서 어찌 그것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놀라는 동안 용천음은 비틀거리고 일어나 몸을 꼿꼿이 세웠다. "후후후…… 고작 이것 뿐이오? 무공이라는 것도 별 것 아니군." 악에 받쳐서인지 용천음은 선혈을 소매로 쓱 문지르며 증오에 찬 눈빛으로 중년인을 노려보았다. (저 놈의 몸이 쇳덩어리로 만들어졌단 말인가?) 도저히 납득이 안 간다. 바람만 불어도 날아가 버릴 듯한 저 유약한 몸이 어찌 바위라도 산산이 깨뜨려 버릴 수 있는 중년인의 일권을 맞고도 버틸 수가 있단 말인가? "크크크…… 생각 외로 몸뚱아리가 좀 단단한 모양이군." 중년인은 싸늘하게 말한 뒤에 느닷없이 일장(一掌)을 격출했다. 용천음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어서 그대로 내뻗었다. 순간 용천음은 실 끊어진 연처럼 또 한 차례 허공을 날아 무디게 벽에 가서 부딪쳤다. 죽었는가? 벽에 부딪쳐 떨어진 용천음의 몸뚱아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하나 중년인은 이 순간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 나올 듯이 놀라고 있었다. 그는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조금 전 저놈이 사용한 건 천수권(千手拳)이 분명했다. 비록 공력은 없었으나 한 줄기 권풍이 내 가슴을 강타했다. 만약 공력이 실려 있었다면 내 가슴은 이미 으스러졌을 것이다.) 중년인은 전신을 미미하게 떨었다. (틀림없다! 저 놈은 무엇이든 보는 순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무서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 조금 전 용천음은 또 다시 중년인이 사용했던 천수권을 똑같이 전개했던 것이다. 중년인은 싸늘한 눈으로 쓰러져 있는 용천음을 노려보았다. 용천음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중년인은 용천음의 숨이 끊어졌다고 생각되자, 문득 입가로 고소가 스쳤다. "철혈대전(鐵血大殿)의 여덟 번째 수좌(首座)라는 나 철검혈리(鐵劍血狸) 나래영(羅來影)이 무공도 모르는 꼬마놈에게 이토록 당황했다고 하면 누가 믿어 주겠는가?" 철혈대전(鐵血大殿)---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 네 글자, 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말인가? 일체의 것이 신비와 의문으로 가려져 있는 이 시대 최고의 신비단체(神秘團體)가 바로 철혈대전이다. 철혈대전을 이끌어 나가는 최고의 대전주(大殿主)가 누구인진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 근원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


미증유의 조직망을 지닌 채 뜨거운 야망의 피를 담고 사악한 강철의 세계에서 왔다는 철혈(鐵血)의 인간들. 기억해야 한다.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 이름 철혈대전을! 장차 엄청난 핵이 되어 우리들 앞에 다가올 그 이름을! 철검혈리 나래영은 용천음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허리를 굽혀 용천음의 품 속을 더듬기 시작했다. (있다!) 금황혈시의 감촉이 손에 만져졌다. "금황혈시, 철혈대전의 십이수좌(十二首座)가 이것을 얻기 위해 천하로 나왔고 나 나래영이 마침내 목적을 이루었다." 나래영의 입가에 미소가 번들거렸다. "놈…… 이건 바로 대전주가 필요로 하시는 물건…… 네놈이 잠시나마 이걸 갖고 있었던게 불운이야……" 나래영은 용천음의 품 속으로 손을 넣어 금황혈시를 꺼냈다. 한데 그가 막 용천음의 품 속에서 손을 빼내려는 순간이었다. 돌연, 느닷없이 하나의 손이 나래영의 손목을 움켜쥐는 것이 아닌가? (흐윽!) 나래영은 대경실색하며 자신의 손목을 움켜쥔 피묻은 손을 응시했다. 오오, 그 손의 임자는 놀랍게도 용천음의 것이 아닌가? "이…… 이놈이……!" 나래영은 용천음이 아직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모근이 쭈삣할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용천음은 피에 젖은 얼굴로 나래영을 노려보았다. "못가져…… 간…… 다……" 나래영의 안면근육이 무섭게 실룩거렸다. "죽여 버리겠다! 이놈……" 순간 용천음은 기이하게 웃었다. "죽인다고? 날…… 죽인다고……? 제발 그래다오. 나를 죽여만 준다면…… 금황혈시가 아니라 더한 것도…… 주겠다……" 죽여 달라고……? 죽여 주면 금황혈시를 주겠다니…… 나래영은 이 순간 용천음이 악마보다 더 한층 무섭고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묻은 얼굴에 섬뜩하게 어려 있는 웃음, 그리고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눈빛과 피가 스며들어 사악하게 빛나고 있는 새하얀 치아…… 나래영의 몸에 전율이 스쳤다. 상상도 못할 공포감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이…… 괴물같은……" 나래영은 왼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한데 그 위기일발의 순간에도 용천음은 나래영을 올려다 보며 새하얀 이를 드러낸 채 섬뜩하게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넌 날 못죽여. 나 자신도 성공 못했는데 네가 무슨 재주로 날 죽여?" 나래영이 치를 떨었다. 그리고 그는 미친 듯이 용천음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악마의 자식같은 놈!" 나래영의 왼손은 천 근 바위라도 단번에 박살낼 기세를 안고 용천음의 천령개로 떨어져 내렸다. 막 용천음의 머리가 박살나려는 순간, "나래영!"


돌연 등 뒤에서 한 줄기 심혼을 뒤흔드는 듯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나래영의 손이 백지 한 장 차이로 용천음의 머리 위에서 정지했다. 철검혈리 나래영은 경직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열려진 문(門), 그 바람이 몰아치는 사이로 표표히 백발을 휘날리며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노학사 감철생 바로 그였다. 철검혈리 나래영은 두 눈에서 싸늘한 살기(殺氣)를 피워올리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누구냐? 너는……" 감철생은 무심한 음성으로 말했다. "용공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노학사다." "후후후…… 시시콜콜한 글선생이란 말이군." 감철생은 고요하기 이를 테 없는 눈빛으로 용천음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나래영을 바라보았다. "철혈대전의 여덟 번째 수좌이자 좌수(左手)의 쾌검(快劍)이라고 불리우는 너 철검혈리 나래영……" "……!" "돌아가라. 그만……" 나래영은 너무도 태연하고 고요한 감철생의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내 정체를 알고 있는 저 놈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저 행동이며 말투…… 결코 용비후는 아닌 것 같다. 진정…… 놈은 글선생일 뿐 일까?) 문득 그의 입꼬리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돌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금황혈시만 돌려 준다면……" (금황혈시……!)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감철생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스쳤다. 이어 그는 용천음을 쳐다 보았다. "공자, 정말 금황혈시를 가지고 있소?" 용천음은 고통을 참느라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찰나 감철생의 얼굴이 몇 차례 씰룩거렸다. (금황혈시가 용공자의 손으로 들어간 것이 진정 하늘의 뜻인가……?) 동시에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좋아!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나 감철생이 지켜 주겠다.) 금황혈시를 지켜 주겠다는 뜻인가? 감철생은 지극히 담담한 시선으로 나래영을 응시하며 들릴 듯 말 듯한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는 철혈대전의 인물, 때문에 금황혈시는 필시 대전주에게 전해질 것이다. 만약 철혈대전의 대전주에게 금황혈시가 넘어간다면 그것은 무림으로서는 크나큰 불행이다." 나래영의 눈빛이 음산하게 빛났다. "무슨 말을 하자는 게냐?" "어차피 그에게 넘어갈 기보(奇寶)라면 용공자가 가지고 있는 편이 훨씬 낫겠지……" 찰나, "크하하하핫……" 나래영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가소롭다는 듯이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이어 그는 웃음을 뚝 멈추며 지독한 눈빛으로 쏘아 보았다. "나 철검혈리 나래영을 상대로 목숨을 걸겠다는 거냐?" 감철생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래영, 좌수의 쾌검이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그보다 더욱 빠른 사람도


있으니까……" 나래영의 눈빛이 굳어졌다. "너를 두고 하는 말이냐?" 감철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미미한 미소만을 머금고 있었다. 나래영의 눈썹이 꿈틀했다. "좋아! 천하에 누가 나의 쾌검보다 빠른지 두고 보아야겠다." 촤앙----! 말을 하면서 나래영은 등 뒤의 철검을 예리하게 빼들었다. 감철생은 조용한 눈길로 나래영이 쥐고 있는 철검을 응시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리석은 짓을 하는군. 그대는……" 그는 느릿하게 손을 허리로 가져갔다. 그리고 무척 느린 동작으로 요대(腰帶:허리띠)를 풀었다. 아니 풀었다고 느끼는 순간, 푸르르르…… 늘어져 있던 요대가 몇 번 떠는가 싶자 그것은 순식간에 한 자루 연도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요대가 병기였다니……) 그것을 본 용천음은 크게 경악했다. 수년 간 감철생이 두르고 있는 푸른 빛의 요대를 보아 왔으나 그것이 날카로운 도인지 어찌 알았겠는가? 철검혈리 나래영, 그 역시 연도를 보는 순간 내심 흠칫했다. (내공(內功)이 등봉조극에 이르지 못하면 저토록 부드러운 연도를 사용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저 놈은……?) 감철생은 연도를 아래로 늘어뜨리며 양다리를 가볍게 벌렸다. "오너라! 나래영……" 나래영의 눈빛이 찰나간에 흔들거렸다. (허점이…… 없다……!) 느끼는 순간, (좌수의 쾌검은 허점이 있고 없건 다 일초(一招)에 상대의 목을 떨어뜨린다!) 생각과 함께 나래영의 몸이 수직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떠올랐다고 깨닫는 순간 지면을 두 치 정도 격하고 그대로 감철생을 향해 쏘아갔다. 번개, 그것은 실로 불가사이한 쾌(快)였다. 찰나 감철생의 늘어뜨려졌던 연도가 어느 한 순간 미미하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그의 신형이 육안으로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숨가쁜 빠르기로 나래영을 향해 마주 쏘아갔다. 용천음, 그는 빛과 빛이 서로 쏘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가 누구인가? 그로서는 분간할 수가 없었다. (제발……)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번쩌억! 공간을 찢는 두 줄기 쾌섬(快閃)이 마주쳤다가 떨어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진정 이런 빠름은 형용할 수가 없었다. 서로의 병기가 상대를 피하여 일섬혼쾌(一閃魂快)로 쏘아가고, 팍하는 음향과 함께 서로의 어깨를 스치며 위치를 바꿀 때까지 그것은 정녕 형용불가의 쾌(快)라고밖에 할 수가 없었다. "……" "……"


위치를 바꾼 채 비스듬히 병기를 늘어뜨리고 있는 두 사람, 용천음은 그들을 번갈아 응시하며 마음을 조였다. (과연…… 누가 이긴 것일까?) 그때였다. "욱……" 돌연 나래영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는 철검으로 바닥을 짚으며 상체를 구부렸다. 피(血)! 한 방울의 피가 그의 두 다리 사이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흥건히 바닥을 적셨다. 동시에 나래영의 얼굴에는 온통 경악과 불신, 허탈함 등이 떠올랐다. "방금…… 그것은…… 전설(傳說)의…… 쾌도(快刀)라고 불리우는…… 지옥일도류(地獄一刀流)……" "……" 나래영은 무표정한 감철생을 쳐다보며 푸들푸들 웃었다. "느꼈어야 했는데…… 네가 좌수의 쾌검보다 더욱 빠른 사람이 있다는…… 말을 했을 때…… 네가 누군지를…… 깨달았어야 했는데……" 감철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래영은 실낱 같은 피를 입가에 흘리며 서서히 앞으로 쓰러져 갔다. "그래…… 당신이었어…… 바로…… 당신……" 풀썩! 앞으로 쓰러진 그의 가슴에서 피가 확 번지며 바닥을 붉게 적셨다. 그러면서 그는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나 철검혈리 나래영…… 당신의 손에 패했으니…… 죽어서도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철혈대전은 절대로…… 금황혈시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것을…… 얻을 때…… 까지……" 이 말을 끝으로 나래영은 죽었다. "……" 감철생은 담담한 행동으로 연도를 허리에 매었다. 또 다시 요대로 변하는 기이한 병기, 그는 천천히 용천음에게 시선을 돌렸다. "많이 놀란 모양이구려, 용공자……?" "……" 사실 감철생을 바라보고 있는 용천음의 눈빛은 경악과 흥분,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었다. "감어르신은…… 무림인이었군요?" 감철생은 담담히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시오?" "……?" 아니라는 뜻인가? 감철생이 되물은 말에는 무척 많은 함축성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문득 감철생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공자는 어떤 연유로 금황혈시를 얻게 되었소?" 용천음은 야시장에서 우연히 엿을 사서 먹다가 그 안에서 금황혈시를 얻었다는 말을 해 주었다. "음……" 감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용천음이 품 속으로 손을 넣으며 말했다. "금황혈시가 대체 어느 정도로 중요한 물건인지는 모르나 소생 대신 감어르신이 지니고 계십시오."


감철생은 용천음이 금황혈시를 꺼내기도 전에 급히 손을 저었다. "그만 두시오. 본시 기보(奇寶)라 함은 인연이 있는 자가 얻으며 또 갖게 되는 법…… 그리고 내가 성인군자(聖人君子)가 아닌 이상 금황혈시를 본다면 견물생심(見物生心)의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오." "……" 감철생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하니 노필부는 금황혈시를 보지도 간직하지도 않겠소." 용천음은 그의 인간됨에 크게 감복했다. 기보가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하여 보지도 않겠다는 감철생, 그가 진정 성인군자가 아니고 무엇이랴! 용천음은 금황혈시를 꺼내려다 그만 두고 말았다. 감철생은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천하에는 많은 기보가 있으나 그 중 금황혈시가 으뜸이오. 그리고 그것은 무림인에게 있어서는 꿈에서도 그리는 엄청난 물건이오." "……!" "노필부 역시 금황혈시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나 그것을 얻은 자는 천하무적의 무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오." (천하무적!) 용천음은 돌연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 금황혈시가 천하무적의 무공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불과 얼마 전에 이런 생각을 했었다. 한데 그게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는가? 감철생이 말했다. "공자가 금황혈시를 가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크나큰 풍파에 휩쓸리게 될 것이오." "……!" "문제는 과연 어떤 자들이 나래영을 쫓았느냐는 것이오.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상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또 어떤 신분으로 공자에게 접근할지 모르오. 공자는 십분 모든 사람들을 경계해야 할 것이오." 용천음은 정중하게 말했다. "어르신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친 감철생의 얼굴을 바라보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하다가 그만 두었다. 일순 감철생은 부드럽게 웃었다. "공자는 오늘밤 내 방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묻고 싶은 것 같구려?" 용천음은 깜짝 놀랐다. (내가 엿본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감철생은 두 눈을 반쯤 내리 감으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은 알려고 하지 마시오. 먼 훗날…… 공자는 노필부가 누구인지도, 그리고 또 누구를 죽이겠다는 것인지도 자연히 알게 될 것이오." "……!" 감철생은 여기까지 말한 뒤에 문득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공자는 내 방에 왔던 절세의 미소녀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소?" 용천음은 그 말을 듣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감철생은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이름은 은소옥(殷素玉), 호(號)는 적수월교(赤手月嬌)라 하오." (적수월교 은소옥……) 감철생은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말했다.


"자세한 것은 그녀를 만나거든 직접 물어보도록 하시오." (직접 만나면……?) 언제 또다시 그녀를 만난단 말인가? 감철생의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용천음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문득, 감철생이 아쉬운 듯한 눈빛으로 용천음을 바라보았다. "공자,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온 것 같소." 용천음은 아연 놀랐다. "헤어지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감철생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온 것 뿐이오. 허허헛…… 아마도 늙었기 때문인 것 같소. 한 군데 정착하지 못하는 떠돌이 성격은……" "……" 용천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감철생의 노안을 응시했다. 그리고 쓸쓸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르신은 은소옥에게 말했던…… 그 사람을 죽이러 떠나는 것이로군요……" "……" 감철생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과거…… 그토록 사랑했던 벽란(碧蘭)의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나였지만…… 왜일까? 이 녀석 앞에서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이 마음을……) 문득 감철생은 품 속에서 호도알만하게 생긴 붉은 환단(丸丹)을 꺼내 용천음에게 주었다. "공자의 상처는 무척 심하오. 이것을 복용하면 말끔히 나을 것이오." 용천음은 환단에서 풍기는 청아한 향기를 맡으며 감철생을 올려다 보았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감철생은 허공을 응시했다. "과거…… 한 여인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얻어낸 환단이오. 그 환단을 가져 갔을 때…… 그녀는 이미 죽고 없었지." 벽란이라는 여인을 말하는 것인가? "그러한 환단이거늘 어찌 소생에게……" "이별의 선물이라고 보면 될 것이오." 말을 하면서 감철생은 또다시 품 속에서 한 장의 쪽지를 꺼내 건네 주었다. "여기에는 그 동안 노필부가 공자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적어 놓았소이다. 노필부가 떠난 다음에 읽어 보도록 하시오." (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 용천음은 의아한 생각을 하며 쪽지를 받아 쥐었다. 감철생이 빙그레 웃었다. "환단을 복용하시오. 공자가 복용하는 것을 보고 떠나리다." "……" 용천음은 환단을 들고 한동안 슬픈 눈으로 감철생을 바라보았다. 눈빛과 눈빛, 비록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 눈빛 속에는 수많은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용천음은 가슴 한 가운데가 무거운 돌에 막혀 버린 듯한 느낌을 받으며 환단을 복용했다. 용천음은 환단을 복용하는 순간, 입 안에 청량한 기운이 가득 퍼지며 내장으로 흘러 들어가자 전신이 감전을 받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용천음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복용한 그 환단이 무림에 있어서 가장 구하기 어렵고 천 년(千年)에 한 알 얻을까 말까 한 희대(稀代)의 선단(仙丹)이라는 사실을…… 천불영지환(天佛靈芝丸)----! 평범한 사람을 탈태환골(脫胎換骨)시킬 뿐만 아니라 무공을 익힌 사람이 복용하면 화산이 분출되듯 무한한 공력(功力)이 솟아난다. 또한 온갖 독(毒)을 막아 주고 몰아내 주는 백독불침(百毒不侵)의 몸으로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엄청난 지혜의 능력까지 부여해 준다. 그리고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 차후 익히게 되면 잠재해 있던 기운이 발동하여 천지(天地)를 뒤집어 엎을 듯한 무시무시한 공력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동편 하늘로부터 뿌연 먼동이 터오르고 있었다. "음……" 용천음은 그제서야 무아지경(無我之境)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순간 그토록 엄중하던 상처는 씻은 듯이 가시고 체내에는 청아하고 맑은 기운이 용솟음치는 것이 아닌가? 몸이 그토록 가벼울 수가 없었다. (아……!) 용천음은 크게 기뻐하며 황급히 감철생을 바라보았다. 한데, "……!" 떠났다. 감철생은 용천음이 무아지경에 드는 순간 그렇게 떠나 버린 것이다. "어르신! 어르신----!" 용천음은 미친 듯이 밖으로 뛰어 나갔다. 자금성을 빠져 나오고, 하나의 강(江)을 넘을 때까지 감철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르신……" 용천음은 높은 봉우리에 올라 드넓은 산하(山河)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도 감철생은 없었다. "가셨어…… 떠나신 거야……" 그에게 있어서 친부모보다 다정했던 그 분이 이제는 그의 곁을 떠나 버린 것이다. 왠지 모르게 그의 메마른 뺨을 타고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찾을 겁니다. 이 땅의 십팔만리(十八萬里)를 온통 뒤져서라도 어르신을 찾고 말 것입니다. 약속드립니다. 저 하늘과 이 땅을 맹세로…… 나 용천음의 전부를 걸고 분명히 약속드립니다. 나는 어르신을 찾고 말 것입니다." 태양(太陽), 그저 찬란하기만한 붉은 태양이 봉우리 위에 있는 용천음의 머리 위로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3 <삼라(森羅)는 어둡고 만상(萬象)은 잠든 이 시간…… 지금 창 밖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 이 글을 쓰고있는 지금, 백년(百年)이라는 기나긴 인생의 여정을 살아왔으나 이 순간 만큼 심기가 어두운 적은 없었다. 이렇게 한 장의 서찰로써 나에 대한 모든 것을 대변해야 하는 나의 입장을 너는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나 감철생, 너와 함께 지내면서 하루라도 너에 대한 고통이 내 자신의 아픔으로 와닿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본 채 그저 마음 속으로 삭여야했던 나의 마음은 차오르는 갈등으로 메어져야만


했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수차에 걸쳐 반문해야만 했었다. 하지만 이미 붓 끝의 움직임은 시작되었고 멈추기에는 너무 늦고 말았다. 천음…… 너는 어쩌면 용비후의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용비후는 원래부터 성불구자였으며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천형(天刑)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가 너를 아들로 두었다는 사실을 나는 납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 둘 밝혀가면서 운명에 대한 거역이라는 생각에 스스로 자학해야만 했었다. 어쩌면 간신의 아들로 태어났으매 괴로움과 번뇌에 휩싸이고, 그것을 견디기에는 너무도 나약한 너였기에 수차에 걸쳐 자살하려던 너의 마음이 애처로와 그것을 밝히려 했는지도 모른다. 천음……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부탁하노니 용비후의 가슴에 못을 박지는 말아다오. 그가 비록 희대의 간신이기는 하나 너를 아끼는 마음은 그 어느 부모보다도 크고 넓을 것이다. 그러나 너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나이기에 이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부탁임을 나는 알고 있다. 이제 운명의 수레바퀴는 구르기 시작했고, 너의 갈길은 정해진 것이다. 감철생 필(筆).>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뭔가……!" 용천음은 방문을 열어 젖히며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 나갔다. 쏴아아---- 아 쏴----! 장댓살같은 폭우가 그의 몸을 삽시간에 집어삼켜 버렸다. "아니야…… 거짓말이야……!" 악다문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 내렸고, 체내의 모든 힘줄이 불끈불끈 튀어 나왔다. 꽉 움켜쥔 서찰은 분노의 땀과 빗물로 젖어 들고 있었다. "크흐흑……" 용천음은 찢어지는 고통과 충격을 견디지 못한 채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흠뻑 젖어든 육신…… 쏴아아---그 위로 비는 자꾸만 퍼붓고 있었다. 용비후, 그가 자신의 부친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글을 읽었을 때 용천음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집어지는 듯한 엄청난 충격을 받아야 했다. 어찌해야 하는가? 아니, 어찌하란 말인가? 이제 와서 그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용천음은 꽉 움켜쥔 서찰을 부들부들 떨며 바라보았다. "물어 보리라……! 아버님에게 여기에 대한 진상을 물어보리라!" 그는 벌떡 일어나 폭우 속을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용비후의 가슴에 못을 박지는 말아다오. 하나 용천음은 감철생의 말을 잊고 그저 폭우 속을 광적으로 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4 용비후는 평소와는 달리 물처럼 고요한 눈으로 탁자 위의 젖은 서찰을 바라다 보고 있었다. 용비후는 서찰에서 눈을 떼며 비에 흠뻑 젖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채 떨고 서 있는 아들을 바라 보았다. "심기가 흐려져 있구나……" 용천음은 탁자의 모서리를 움켜쥐며 이글이글 타는 눈빛으로 외쳤다.


"말씀해 주십시오! 소자가 정녕 아버님의 자식이 아니란 말입니까?" "……" 그러나 용비후는 답변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악물었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너는 서찰을 더 믿을 테지……" 용비후는 다시 고개를 돌려 탁자 위의 서찰을 내려다 보았다. "이 글은 감철생이 남긴 것이냐?" "그렇습니다." 용비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하며 길게 탄식을 토했다. "세월이란 참 빠른게야……" 그는 넋두리처럼 중얼거린 뒤 조용히 일어나 벽장 쪽으로 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찾는 듯하더니 하나의 강보를 가지고 와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푸른 빛이 감돌 정도로 흰 강보였으나 오랜 세월이 흐른 듯 빛이 바래 있었다. 용비후는 잠시 강보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무척 오래 전의 일이었지. 그래…… 내가 벼슬을 따기 위해 이곳으로 올 때였으니까 아마 십 팔 년 전쯤은 되었을 게야……" 용비후의 두 눈에 뿌연 안개가 서렸다. "함양(咸陽)땅을 지날 때였었지. 조그만 야산(野山)을 넘어가는데 웬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더구먼." "……!" 용천음은 용비후의 말을 들으며 전신을 미미하게 떨었다. 용비후는 강보를 내려다 보며 그때를 회상이라도 하듯 작은 미소를 떠올렸다. "백색 강보에 싸인 아기가 울고 있었지 지금 생각해도 무척 귀여웠어……" "그 주위를 하루 내내 헤맸지만 아기의 부모는 없더군." "……" "아기가 왜 거기에 버려져 있었는지. 아기의 부모가 누군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일체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지." 용비후는 갈증이 나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저 서찰에 적혀 있다시피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다. 그래서 아기를 데려다 키우기로 작정하고 그 길로 다시 이곳 자금성으로 왔지……" 용비후는 문득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모두들 웃더군. 아니, 웃을 수밖에 없었지. 과거를 보는 작자가 등에 아기를 업고 응시를 했으니 말이야……" 아기를 업고 과거를 보았다? 실로 기이한 일이 아니던가? "재수가 좋았는지 아니면 아기에게 복(福)이 많았는지 역사상 가장 높은 평가로 급제를 했지." 용비후는 살며시 강보를 쓰다듬었다. "벼슬은 자꾸만 높아갔고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 어느 덧 소년으로 성장했지……" 용비후의 얼굴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문득 그는 조용한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 보았다. "천음아." "……" "그때 백색 강보에 싸여 있던 아기가 바로 너였고 과거를 보기 위해 그곳을 지나던 사람이 바로 애비이니라." 오오, 그렇다면 용천음은 진정 용비후의 아들이 아니라는 뜻이 아닌가? 용천음은 격동을 억누르지 못한 채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주먹을 와락 움켜쥐었다.


"왜…… 왜 숨기셨습니까? 내가 당신의 아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두려웠던 게야. 너를 잃는 것이……"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모든 것이 위선으로 뭉쳐진 더러운 추물이로군요." 순간, 용비후는 번쩍 고개를 들어 무서운 눈으로 용천음을 쏘아보았다. 하나 그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그래…… 너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용천음은 피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용비후를 노려보며 입술을 악물었다. "당신의 아들이 아닌 나는…… 진정 당신의 아들인 줄만 알고 그 많은 질시와 손가락질을 받으며 죄책감 속에 살아와야만 했습니다." "……" "만약 내가 당신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그토록 괴로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성과 감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용천음은 잔혹할 정도로 퍼부었다. "아니, 괴로워 해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당신의 곁을 떠나면 그만이었으니까요." 용비후는 말없이 자신의 발 아래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후훗…… 웃기는 일이로군.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의 죄를 덜어 주기 위해서 수 차례나 목숨을 끊어야 했던 내 어리석음이 말 입니다."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이놈이……!) 용비후는 안면근육을 부르르 떨며 탁자 밑으로 불끈 주먹을 쥐었다. 하나 그의 손은 이내 힘없이 풀리고 말았다. (그래…… 네 말이 옳은 게야. 애당초 너와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이였으니까……) 허전함, 그리고 짙은 고독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지금 이 순간의 용비후는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용천음은 분노와 멸시의 눈빛으로 용비후를 쏘아보며 비웃음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더 할 말이 있으십니까?" 용비후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없다……" "후후후…… 그럴 테지요. 당신도 더 이상은 뻔뻔할 수가 없을 테니까요." 용천음은 핏발이 곤두선 눈으로 용비후를 한동안 노려보았다. 그리고 돌연 고개를 뒤로 젖히며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핫…… 크하하하핫…… 나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간신의 아들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는 울부짖듯이 외치다 돌연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 나갔다. "와하하핫…… 으하하하핫……" 용비후는 용천음의 멀어져 가는 광소 소리를 들으며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벽장 속에서 한 병의 술을 꺼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한 모금, 또 한 모금…… 그는 말없이 술만을 들이키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탁자 위의 젖은 서찰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길러준 정(情)은 정말 가치가 없는 것일까? 난…… 정말 녀석을 사랑했는데……" 참았던 눈물이 끝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람들은 모른다. 성불구인 나에게 아기가 생겼을 때의 그 기쁨을…… 정말이지 내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았지." 그는 과거장에서 용천음을 업고 응시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조용히 웃었다. "그때 맹세했지. 녀석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을 주겠다고…… 사람들은 모른다. 내가 왜 천하의


간신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까지 부귀와 영화를 거머쥐려고 했는지……" 용비후는 눈물 가득한 시선으로 창 밖에 쏟아지는 폭우를 응시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은 웃음보다는 눈물이 더 많았지." 용비후의 쓸쓸한 얼굴 위로 한 겹 허무의 그림자가 깔렸다. 그리고 그는 한 모금의 술을 목구멍 깊숙이 털어 넣었다. "지나온 반평생…… 정녕 헛살은 것일까?" 제 4 장 惡魔의 子息 1 "우아---- 아---- 아---- 아----!" 용천음, 그는 귀령애(鬼靈崖)의 까마득한 절벽 끝에 서서 하늘 저 끝을 바라보며 가슴 속의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쏴! 쏴아아…… 폭우는 여전히 내리고 목청이 터져라 포효를 질렀건만 가슴에 쌓인 그의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 "우우우…… 우우……" 그는 울었다. 울음이 다 타 마지막 한 방울이 남을 때까지 그는 울고 있었다. "나는 누굽니까? 나는 누구의 자식입니까……" 과연, 그의 부모는 누구였을까? 지금 용천음의 마음 속에는 두 가지 갈등이 충돌하고 있었다. -기뻐해라. 이제 너는 용비후의 아들이 아니며 지금까지의 모든 손가락질에서 벗어날 수가 있게 되었다. 너에게 가해진 속박은 이제 풀려진 것이다. 기뻐해라! 웃음을 토하며 마구 기뻐하란 말이다. -안된다. 네가 비록 용비후의 친아들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용비후가 너에게 무엇을 잘못했더냐? 간신? 이유가 될 수 없어. 그를 진정 양아버지로 생각한다면…… 간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지금 용천음은 마땅히 기뻐해야 했으나 그러질 못했다. "나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용천음은 머리를 쥐어 뜯으며 몸부림을 쳤다. 한데 그 순간 그는 문득 어떤 무서운 생각을 가졌다. (그래…… 죽는게야. 지금까지 수차에 걸쳐 목숨을 끊으려던 내가 아닌가? 이제와서는 무슨 미련이 있단 말이냐?) 용천음의 시선은 밑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잊어 버리는 게야. 모든 것을……" 쏴아아---- 쏴! 용천음은 비틀거리며 절벽 끝 가까이로 다가갔다. "……" 절벽 아래를 한참 내려다 보던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 용천음, 미련은 없다……) 그리고 그는 절벽 아래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한데 그가 막 몸을 날리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돌연 시커먼 손 하나가 튀어 나와 용천음의 발목을 갈쿠리처럼 꽉 움켜 잡는 것이 아닌가? (허억!) 느닷없는 상황에 용천음은 대경실색하며 황급히 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마치 강시( 屍)같은 손 하나가 발목을 잡고 있었다. 꿈틀꿈틀…… 땅이 몇차례 들먹이는가 싶자 이내 한 사람이 쑥 땅 속에서 빠져 나왔다. 한데 나타난 자를 보는 순간 용천음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뻔했다. 오오, 이것도 사람이란 말이냐? 일신에는 삭아서 다 떨어져 그 흔적만이 듬성듬성 남아 있는 썩어빠진 폐포를 걸치고 있었으며 무덤 속에서 막 빠져 나온 듯 살이라고는 단 한 점도 없이 뼈만 앙상한 몰골…… 그 뿐인가? 해골을 연상하게 만드는 얼굴에 두 눈은 움푹 꺼져 무저갱을 연상케 했으며 그 깊숙한 곳으로부터 시뻘건 귀화가 뭉클거리고 있었다. 또한 머리카락은 군데군데 빠져 섬뜩한 느낌마저 들게 했으니 대관절 이것도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있겠는가? 용천음은 발목을 움켜 잡힌 고통도 잊은 채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다, 당신은 사람이오. 귀신이오……?" 일순, 괴인(怪人)은 강퍅한 턱을 움직이며 음산하게 말했다. "크흐흐…… 사람이면 어떻고 귀신이면 어떠냐?" "……" 용천음은 괴인의 강시 같은 몸에 여러군데 상처가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간헐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며 몹시 괴로워 한다는 점도 발견하게 되었다. (누구와 치열하게 싸운 것 같다.) 이 몰골을 하고 누구와 싸운단 말인가? 싸움에 환장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 따위 사람같지도 않은 괴물과 싸우려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괴인은 귀화가 꿈틀거리는 눈으로 용천음을 쏘아보았다. "크흐흐흣…… 하늘이 도왔군." 용천음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무엇을 도왔단 말이오?" "흐흐흐…… 지금 나의 마기(魔氣)는 사지백해(四脂百骸)로 제멋대로 퍼져 있으며 일부의 혼천기류(混天氣流)마저 체내로 빠져 나가 깨져 버렸다." 괴인은 용천음의 발목을 더욱 굳게 움켜 잡으며 말했다. "네놈은 분명 동정(童貞)의 몸이렷다?" "그렇소만…… 그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소?" "흐흐흐…… 상관이 있지. 동정을 가진 네놈의 피를 내 몸으로 흡수하면 깨졌던 혼천기류가 다시 모여 들고, 흩어졌던 마기도 다시 되살아나니까……" 용천음은 대경실색했다. (내 피를 흡수한다고?) 그는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오싹함을 느꼈다. 일순 괴인은 일순간에 용천음의 전신 혈도를 빠르게 찍어 버렸다. (윽……) 혈도가 봉쇄되자 용천음은 온몸이 무력해지고 체내의 기운이 모조리 몸 밖으로 빨려 나가는 것을 느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다. "흐흐흐흐…… 미안하지만 네놈은 나를 위해 피를 헌납해야겠다." 제물이 되란 말인가? 괴인은 용천음을 안아 가부좌를 틀게 한 뒤에 바닥에 앉혔다. 그리고 그 역시 맞은편에 가부좌를 틀고 앉으며 음흉스럽게 웃었다.


"크흐흐흐…… 난정사태, 네년은 나 유령관시 음후독이 혼천기류가 깨져 도저히 살아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오산이다." (난정사태……!) 용천음은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내심 경악했다. (그렇다면 이 자가 난정사태와 싸워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정녕 놀라운 일이었다. 유령관시 음후독, 그가 다 죽어가는 상태로 이곳에 나타나다니…… "흐흐흐…… 네년은 미처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혼천기류가 완전히 깨지지 않는 한 동정을 가진 남녀(男女) 중 한 명만 있어도 그것을 원 상태로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음후독은 귀신의 그것처럼 기다란 손톱으로 용천음의 양 손바닥 장심을 찔렀다. (윽……!) 순간, 용천음은 고통과 함께 장심으로부터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흐흐흐…… 내 비록 계집에게 당해 간신히 도주한 꼴이 됐으나 차후 수백 배로 갚아줄 생각이다." 말을 하면서 손톱으로 자신의 양쪽 장심을 찢었다. 한데 기이했다. 장심을 찢었건만 피는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고 대신 붉은 기류가 꿈틀거리며 새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정녕 그는 인간같지가 않았다. 음후독은 소름이 끼치도록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용천음의 장심에 자신의 장심을 밀착시켰다. 결국 두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주본 상태로 손바닥을 밀착시킨 자세가 된 것이다. (이대로…… 피를 빨려 개죽음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비록 자살을 하려고 했으나 음후독 같은 인간에겐 피를 빼앗긴 채 죽고 싶지는 않았다. 용천음은 사력을 다해 손바닥을 거두려 했으나 그것은 생각 뿐이었고 꼼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콰르르릉----! 번쩌억! 쏴아---- 아----아! 천둥과 번개가 몰아치고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는 지금 그들 두 사람은 각기 생사(生死)를 가운데 놓은 채 마주 앉아 있었다. (안돼! 이런 인간에게 피를 빼앗길 수는 없어……) 용천음은 부르짖었다. 하나 혈도가 막힌지라 말 소리는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의 피가 지극히 느린 속도로 장심을 빠져 나가 음후독의 장심을 통해 체내로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 두 눈을 감고 있던 음후독이 스르륵 눈을 떴다. "흐흐흐…… 얼굴이 시뻘건 걸 보니 입이 근지러운 모양이군." "……" "좋아! 마지막 가는 마당에 아가리라도 실컷 놀리게 해 주지. 나한테 그 정도 아량은 있으니 말이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놀랍게도 막혔던 아혈(啞血)이 스르르 풀리는 것이 아닌가? 아마 무형(無形)의 기(氣)로 풀었으리라. 아혈이 풀리는 찰나, "안돼! 나는 너 같은 작자에게 내 피를 줄 수가 없어! 나를 놓아달란 말이다!" 용천음은 악을 쓰다시피 외쳤다. 순간, "어린 놈의 새끼! 깜짝 놀랬잖아." 음후독이 두 눈을 부라리며 쏘아보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혈이 막혀 입 속으로 외치던 말이 갑자기 아혈이 풀리자 와락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음후독은 사악한 웃음을 흘렸다. "크흐흐…… 피를 주기 싫다고? 멍청한 놈. 피를 주고 안 주고가 네놈 마음대로 되는 일인줄 아느냐? 이젠 싫어도 나에게 피를 주게 되어 있어." "싫다! 이 악마……" "이 자식이 왜 이렇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누가 듣고 달려오면 어쩌려고…… 그렇게 되면 네놈 죽고 나 죽고 몽땅 끝장나는 거야." 용천음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차라리 그 편이 낫겠다." 음후독의 퀭한 두 눈에서 마기(魔氣)가 폭출되었다. "이왕 죽는거 같이 죽잔 말이냐?" "그렇다!" "흐흐흐…… 그렇게는 안돼!" 용천음은 이 순간에도 계속 피가 빨려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문득 그는 원독에 찬 눈으로 음후독을 노려보며 말했다. "내 설사 혀를 물고 죽는 한이 있어도 당신같은 작자에겐 한 방울의 피도 줄 수가 없어." 동시에 용천음은 사력을 다해 혀를 깨물어갔다. 찰나, "아, 안돼!" 음후독은 혼비백산하며 황급히 무형의 기를 발출했다. 일순 용천음의 아혈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봉쇄되고 말았다. 음후독은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두 눈을 치켜 떴다. "대갈빼기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감히 얕은 수작을 부리다니…… 괘씸한 새끼! 이젠 아혈이고 나발이고 절대로 풀어줄 수 없다!" "……" 음후독은 두 눈을 감고는 한 줄기 거센 잠력(潛力)을 장심으로 운집했다. 찰나, 용천음은 체내의 피가 무서운 속도로 빨려 나가는 것을 인식했다. (아……! 이대로 끝나야 한단 말인가?) 그의 안색은 점차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음후독의 얼굴에는 서서히 생기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흐흐흐…… 피가 기해혈(氣海穴)을 채우고 백회혈(百會穴)로 치닫고 있다. 이제 마지막 하반신의 끝인 용천혈(湧泉穴)에만 닿으면……) 음후독은 가벼운 흥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한데 그 순간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불가사의한 일이 발생했다. 용천음에게서 빨아들인 피가 마침내 용천혈에 도착하려는 순간에 그 일은 터져 버린 것이다. "으허허헉……!" 돌연 음후독은 마치 급살이라도 맞은 듯이 사지를 부르르 떨며 두 눈을 번쩍 떠 용천음의 얼굴을 응시했다. 보라! 지금 이 순간 용천음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는데 그의 이마 한 복판에 지극히 미세한 혈선(血線)이 십자(十字) 모양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닌가? 대관절 이것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으흐흐흑……!)


음후독은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뜨며 이를 악물었다. 아아…… 그의 체내로 차곡차곡 쌓였던 피가 놀랍게도 다시 용천 음의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음후독이 이 괴이한 변(變)에 식은땀을 흘리며 젖먹던 힘까지 동원하여 최대의 공력으로 다시금 피를 빨아 들이려고 애썼다. 하나 그러면 그럴 수록 자신의 몸에 있던 피가 더욱 빠른 속도로 빠져 나가는 것이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괴변이란 말인가?) 음후독은 사력을 다해 당기고 또 당겼다. 한데 또 한 번의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음후독의 체내에 있던 피가 고스란히 용천음의 체내에 옮겨지는 순간, 이번에는 오히려 자신의 단전에 모여있던 혼천기류와 마기(魔氣)까지 용천음에게 빨려 버리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음후독은 전신을 와들와들 떨며 안간힘을 썼다. 하나 허사였다. 용천음의 피를 빨아 들이기는 커녕 도리어 자신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빼앗기게 생겼지 않은가? (저…… 저놈의 몸이 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졌기에 이런 불가사의한 현상이 벌어진단 말인가?) 음후독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대로 끝낼 순 없다!) 그는 최후의 발악으로 장심을 떼어내려고 했다. 하나 그럴 수록 손바닥은 더욱 밀착되어만 갔다. (크흐흐…… 이 무슨 개 같은 경우냐? 천우신조(天佑神助)로 목숨을 건지는가 싶었더니 오히려 이놈에게 나의 모든 공력과 마기를 깡그리 빼앗기고 비참하게 최후를 마칠 줄이야……) 음후독의 몸이 시간이 흐를 수록 거세게 떨리기 시작했다. (악마…… 악마의 자식이다. 이놈은……) 악마의 자식! 철검혈리 나래영도 용천음에게 이 같은 말을 했지 않은가? 그렇다면 정녕 용천음이 악마의 피를 타고난 악마의 자식이란 말인가? (크으으으…… 이놈의 피는 악마의 피고…… 이놈의 몸 속에는 악마의 무시무시한 기류가 숨쉬고 있다…… 그것이 나의 혼천기류와 마기를 무섭게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 용천음의 미간에 나타난 십자형의 혈선은 점차 짙어지고, 그의 표정은 물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반면 음후독은 점차 죽음의 늪으로 깊숙이 빨려들고 있었다. 콰르르---- 릉----! 번쩍! 쏴아아아---대지를 심판하는 듯한 자연의 포효가 또 한 차례 있었고 그 속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음후독의 음성이 실려 나왔다. "악마…… 악마의 자식……" …… 고요와 적막 속에 시간은 흘러갔고, 번쩍! 용천음은 눈을 떴다. 한데 놀랍게도 그의 눈동자는 마치 유리알을 박아넣은 듯 엄청난 빛을 뿌리며 투명하게 변해 있는 것이 아닌가?


투명한 백안(白眼)! 인간이 어찌 그런 눈을 가질 수가 있단 말인가? 소름이 끼치도록 섬뜩한 눈(眼), 유리알처럼 번쩍이며 무시무시한 광채를 뿜어내고 있는 백색(白色)의 눈동자……!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 그 눈빛은 용천음이 숨을 한 번 몰아쉬는 순간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그리고 본래의 맑고 깨끗한 눈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쓰러져숨져있는 음후독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벌(天罰)이야……" 용천음은 고개를 저었다. "한데 왜 다시 피가 나에게 돌아왔을까? 그리고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기류들이 내 몸으로 빨려들어온 것 같은데……" 그는 모르고 있었다. 음후독이 지니고 있던 천지개벽의 혼천기류와 마기가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그는 은연 중에 엄청난 대기연(大奇緣)을 얻은 것이다. 용천음은 그 같은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자신의 눈이 유리알처럼 투명한 백색의 눈동자로 변했음은 더욱 모른 채 음후독의 시체를 응시했다. "그는 왜 죽어가면서 나를 향해 악마의 자식이라고 부르짖었을까?" 희미함 속에서도 그 말을 들었는가? 용천음은 문득 씨익 웃었다. "그렇다면 내 아버지가 악마란 말인가? 재미있는 일이군." 그는 장난처럼 중얼거린 뒤 조금 전 자살하려던 절벽 아래를 바 라보았다. "결국…… 이번에도 실패로 끝났는가? 정말 운명이라는 놈이 나를 죽지 못하도록 붙잡고 늘어지는 것일까?" 문득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폭우 저 멀리로 용비후의 얼굴이 나타났다. (울고 계셔……) 우는 모습을 보았는가? (그래…… 어차피 나의 뿌리를 찾을 수 없는 지금 그 분만이 나의 유일한 뿌리였어……) 용천음은 비틀비틀 일어났다. (가야지. 가서 그 분 앞에 빌어야지.) 그의 신형은 폭우에 묻혀 아득히 멀어져 갔다. "그러나…… 무슨 말로 용서를 빈단 말인가? 내 이미 불효자거늘……" 용천음은 길게 탄식을 했다. -그래…… 내 그분 앞에 용서를 빌고 그분의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 될 때까지 천하를 주유하리라. 2 용비후는 속절없이 쏟아지는 폭우를 온몸으로 맞으며 조용한 걸음으로 승상부(丞相府)를 거닐었다. 그는 승상부를 한 바퀴 돈 뒤 용천음이 기거했던 방 앞에 서서 무척 오랜 시간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토록 사랑했던 녀석의 방…… 그러나 이제는 떠나 버렸다. 용비후는 허공을 한 번 쳐다본 뒤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병의 술을 말없이 마신 뒤 깊숙한 곳에 두었던 한 벌의 초라한 옷을 꺼내


입었다. 지난 날, 자금성으로 과거를 보러올 당시, 야산에서 용천음을 자식으로 거두었을 당시에 입었던 바로 그 의삼이었다. 그 옷을 입으면서 그는 고요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을 보고 있는가? 폭우인가, 아니면 슬픔처럼 물들어 있는 짙검은 하늘인가? 그런 게 아니다. 이 순간 그의 망막에는 지나온 과거의 순간들이 환상처럼 스쳐가고 있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자금성으로 오는 날부터 용천음을 만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간신으로 낙인 찍혀야만 했던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직 자식만을 위해 뛰었고 또 지칠 줄도 몰랐다. 오늘의 부귀와 영화를 손에 쥐기까지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자신의 시대(時代)가 마감하고 장차 자신의 후대(後代)가 이끌어갈 충신(忠臣)의 세계를 기대하며 그는 간신이라는 이름을 뒤집어 쓰고 그렇게 뛰어와야만 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서기까지 그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이상 무엇을 바랄 텐가? 단 하나의 희망이 사라져 버린 지금, 그에게 있어서 부귀와 영화 는 존재 가치가 없었다. 그렇다. 이제는 떠날 때가 온 것이다.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을 여기에 두고, 간신이라는 이름마저도 벗어 던진 채 이제는 그가 왔던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후회는 없다. 모든 것을 가져 보았고, 모든 것을 해 보았기에……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용비후는 승상부 저 먼곳에 선 채 우두커니 승상부의 대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마리 말(馬)에 자신을 실고 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빈 손으로 떠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올 때에는 핏덩어리 용천음이 있었으나 이제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비는 추적추적 그의 몸을 적시고 용비후는 꽤 오랜 시간을 움직이지 않은 채 자신이 이루어 놓았던 승상부를 바라다 보고 있었다. 시간이 다 했음인가. 용비후는 미미한 웃음을 지으며 한 차례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말을 돌렸다. 한데 그 순간 그는 무엇을 보았는지 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장댓살 같은 폭우 속에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용천음이었다. 용천음은 악물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못 가십니다. 이대로는 못 가십니다." "……!" 한 순간 용비후의 눈에서 참고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말았다. "허허헛…… 허헛……!" 그는 웃었다. 결코 슬퍼서 웃는 그런 웃음은 아니었다. 하늘을 보았다. 검은 저 하늘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밀려들고 있었다.


(아들아, 우리 아무런 말도 하지 말자. 우리에겐 이미 말이란 필요치 않은 게야……)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쏟아졌다. "용비후…… 고독한 길을 살아왔으나 오늘 가장 보람되도다……" 그렇다. 오늘처럼 보람된 날은 없었다. 이제 그는 진정한 아들을 얻은 것이다. 십 팔 년, 그는 무척이나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진정한 아들을 가슴으로 품은 것이다. (그래…… 지나온 세월이 결코 헛살아 온 것은 아니었어……) 말은 없었다. 그러나 용비후는 아들의 눈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정(情)의 불길을 보았다. 그것이 용천음의 대답이었고, 지금 그가 해야 할 말의 전부인지도 몰랐다. 억수같이 퍼붓던 폭우가 그치고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드러났다. 그저 따사롭기만 한 햇살이…… 한 차례 구름에 가렸다 나왔기에 더 더욱 온묘로운 햇살이 그들 두 부자(父子)의 어깨 위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3 왕사우(王師雨). 나이 서른 두 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장가도 들지 못한, 신세 딱한 이 사람은 성벽 어귀에 초라한 주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체구는 남 달리 거대해서 보통 사람의 서너 배는 됨직했으나 그런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천성적으로 우직하고 심성이 고왔다. 아무리 불쾌한 일이 있더라도 화 한 번을 낼 줄 모르고 그저 언제 보아도 싱글벙글 웃는 기분 좋은 사람, 그가 바로 왕사우였다. 흥얼흥얼…… 왕사우는 소매를 잔뜩 걷어붙이고 연신 콧노래를 불러가며 그릇을 닦고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이며 주먹 하나가 쑥 들어가고도 남을 듯한 커다란 입, 촌티가 머리 끝까지 자르르 흐르는 그는 혼자서 마냥 웃고 있었다. 그때 가벼운 인기척 소리와 함께 한 소년이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 왕사우는 젖은 손을 쓱쓱 앞자리에 문지르며 몸을 돌리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게 누굽니까? 공자님 아니십니까?" 그는 커다란 입을 쩍 벌리며 반색을 띄웠다. 소년은 다름 아닌 용천음이었다. 용천음은 썰렁한 실내를 둘러보며 빙그레 웃었다. "아직 일러서 그런지 손님이 없군." "뭐 늘 썰렁했습죠." 왕사우는 싱겁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어서 이리로 앉으시지요. 곧 술을 올릴 테니까요." "음……" 용천음은 고개를 끄덕이며 왕사우가 닦아준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용천음은 다시 한 차례 실내를 둘러보며 미미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잠시 후 왕사우가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왔다. 용천음은 그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대체 장가는 언제 가려나?" 왕사우가 머쓱하게 웃었다.


"소인 주제에 무슨 장갑니까요? 온다는 여자도 없지만 혼자 사는게 편합니다요. 훨씬……" 그는 재빨리 술병을 들어 잔에 가득 따라 주었다. "어서 드십시오." 용천음은 술잔을 집어 들며 말했다. "오늘은 내 곁에 바싹 붙어 있을 필요도 없고 공연히 힐끔힐끔 감시할 필요도 없네. 자살한다고 소동 피우지 않을 테니까……" 왕사우가 커다란 입을 쩍 벌리며 웃었다. "자살하도록 놔주지도 않습니다요." 그렇다. 용천음은 육 개월 전 이곳에서 자살을 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왕사우는 모든 일을 다 제쳐놓고 안간힘을 다해 용천음을 살려냈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결코 용비후의 문책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을 살리겠다는 인간 본연의 착한 심성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공자님, 속상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오셔서 마음껏 드십시오. 술값은 그저 공짜로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화가 나는 일이 있으시면 소인을 상대로 울화를 푸십시오. 하지만 장사 못할 정도로 두들겨 패면 안됩니다요. 그러면서 껄껄 웃던 왕사우가 용천음은 좋았다. 그가 왕사우를 좋아하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 수 없었다. 그냥 좋은 것이다. 왕사우가 맹목적으로 용천음을 좋아하듯이…… (장차 내가 크게 된다면 왕사우만큼은 반드시 내 곁에 두리라!) 용천음은 술잔을 비운 뒤 느릿하게 내려 놓았다. 직후 용천음은 우연히 고개를 문 밖으로 돌리다가 한 노파(老婆)와 소녀(少女)가 지나는 것을 보았다. 노파의 얼굴은 휴지조각을 수백 번 구겼다가 활짝 펼쳐 놓은 것 같이 잔뜩 주름살이 있었고 두 눈은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히 작았다. 거기에다 입술은 누구에게 한 방 얻어 터지기라도 한 듯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었다. 또한 몸은 통나무를 연상케 할 정도로 아래 위가 없었다. 그런 노파의 오른손에는 철근으로 만든 듯한 육중한 용두괴장(龍頭拐杖)이 들려져 있었다. 정말이지 못생긴 남자도 저 노파보다는 나으리라. 반면 소녀는 노파와는 정반대로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예쁘고 깜찍했다. 까무잡잡하고 윤기있으며 건드리면 팽 튕겨질 듯한 탄력있는 피부, 지혜로 똘똘 뭉쳐져 있는 듯한 반짝거리는 두 눈에 깊게 패인 볼우물, 제멋대로 풀어헤쳐 야성적으로 출렁이는 머리카락.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도포처럼 헐렁한 남자옷을 입고 있었다. 실로 괴이하기 이를 데 없는 노파와 소녀였다. 그녀들은 빠른 걸음으로 주점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지나갔다 싶은 순간 쏙 하며 소녀의 모습이 다시 나타나 주점 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일순 보이지 않는 노파의 음성이 들려왔다. "뭐해 이년아! 빨리 빨리 가지 않고?" 소녀는 못들은 척 용천음을 바라보며 돌연 방실 웃으며 오른손을 살짝 흔드는 것이었다. "……?" 소녀의 행동에 용천음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들고 있는 술잔을 탁자에 내려 놓았다. 문득 소녀가 다시 한 번 살랑 손을 흔들었다. 이 무슨 백주 대낮에 기상천외한 일이란 말인가? 그때였다. 깡마른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소녀의 목덜미를 우악스럽게 낚아챘다. "이년이 귀가 먹었나? 빨리 가자니까."


그러자 소녀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 배고프단 말예요. 우리 저기에서 뭣 좀 먹고 가요." "시간없어!" "잠깐이면 되잖아요." 다음 순간 노파의 신경질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망할년! 방금 성 밖에서 닭 한 마리 혼자 다 쳐먹고도 또 배가 고프단 말이냐? 배때기에는 거지가 들었냐!" 노파는 투덜거리며 마지 못해 주점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십쇼." 왕사우가 재빨리 다가서며 넙죽 절을 했다. 노파는 아무 곳에나 털썩 앉으며 손을 휘저었다. "아무 거나 빨리 먹을 수 있는 걸로 가져와." "예, 예……" 왕사우가 부리나케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소녀는 지금까지 시종일관 용천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방실방실 웃으며 교태로운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어디가 간지러운가?) 용천음은 내심 어이없다는 듯이 웃고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노파는 소녀가 계속 자신의 어깨 뒤를 넘어 한 곳을 주시하며 웃자 이상한 느낌을 받은 듯 고개를 돌렸다. (이…… 이년이……) 준수하게 생긴 용천음을 보는 순간 노파의 눈알이 홱 소녀에게 돌아갔다. "이 미친년아! 알고 보니 이곳에 들어오자는 이유가 있었구나?" 소녀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말했다. "이유라니요? 배가 고팠다니까요?" 노파는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대체 이년이 누굴 닮아서 이러는 거야? 반반한 사내새끼만 보면 아무 데서나 히죽히죽 웃고 꼬리를 흔드니……" "내가 뭐 여우인가요? 꼬리를 흔들게……" "이년이 어디대고 말대꾸야? 골통을 부숴 버릴까 보다……" 노파는 탁자를 두드리며 흥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년아! 사내새끼들은 모조리 도둑놈이라고 이빨이 닳도록 말했는데도 그걸 못 알아들어?" "……!" "내 꼴을 봐라. 네년도 사내 좋아하다가는 영낙없이 내 꼬락서니 면치 못한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해 둬! 이년아……" 소녀는 몹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왜 큰소리로 욕을 하고 그래요? 창피하잖아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힐끗 용천음을 쳐다보았다. "이년아! 창피한 줄 알면서 왜 사내새끼들 한테 체신머리 없이 꼬리를 쳐?" 소녀가 막 말대꾸 하려는 순간 왕사우가 음식을 가지고 와 탁자에 놓았다. "맛있게 드십시오." "……!" 노파는 왕사우가 갖다 놓은 음식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리고는 저만큼 가는 왕사우를 향해 소리쳤다. "야 임마! 너 이리와 봐."


"……?" 왕사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노파에게 다가서며 싱글 벙글 웃었다. 노파는 힐끔 그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이놈이 허우대는 멀쩡해 가지고 실성했나? 왜 그렇게 웃어?" "……!" 왕사우의 웃음이 졸지에 쑥 들어가고 말았다. 노파는 탁자에 놓인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 방금 맛있게 먹으라고 그랬지?" "예." "여기가 자금성 맞지?" "그런데요." 순간 노파는 입언저리를 꿈틀거렸다. "자금성에는 개(犬)만 사냐?" "무슨……?" "개만 사냔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싯누런 개밥을 먹으라고 주느냐 말이다." (개밥……?) 왕사우가 떫은 표정을 지었으나 곧 소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헤헤……! 개밥이라니요? 노태랑의 손녀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없지 않습니까?" 찰나 노파의 눈알이 홱 까뒤집혀지며 허연 백태가 드러났다. "이놈의 새끼가 어디다 함부로 아가리를 놀려? 누가 손녀야?" 왕사우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저 낭자가 손녀 아닙니까?" "이놈의 새끼! 저년은 내 딸이란 말이다, 딸!" (딸……?) 용천음조차 아연실색하며 고개를 돌려 노파와 소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맙소사! 노파의 나이가 몇인데 저런 딸이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저 얼굴에 미녀딸이 생기다니!)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돌연변이가 아니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좌우지간 희한한 모녀(母女)로군.) 이때 소녀가 말했다. "어머니, 그냥 먹어둬요. 정말 창피해서 같이 못 다니겠어요. 가는 곳마다 트집을 잡고 난리를 부리니……" "어라? 이 망할년 봐라? 반반한 새끼가 보고 있다고 이제는 이 에미를 악질로 만들어?" "엄마!" "귀 안 먹었다, 이년아." 소녀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정말……!" 노파는 잡아 먹을 듯이 소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네년이 지금 창피하다 뭐다하며 저 반반하게 생긴 녀석한테 잘 보이려고 애쓰는데 어림도 없다, 이년아! 넌 평생 시집갈 생각하지 말어. 사내새끼들은 다 도둑놈들이니까." 딸을 시집 보내지 않겠단 말인가? 무슨 심보가 그런가? 돌연 노파는 소녀의 팔을 홱 잡아채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년아! 빨리 가자!"


"어머니, 시켜놓은 음식은 먹어야 하잖아요?" "시끄러워! 이년아. 네년이 뭐 먹으러 들어왔냐? 저놈의 새끼 때문에 기어 들어왔지." 노파는 벼락 같은 고함을 지른 뒤 고개를 돌려 용천음을 쳐다보았다. "꼬마 놈!" 용천음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노태랑……" "너 혹시 이 근방에 사는 공초스님이라고 모르냐?" (공초스님……) 용천음은 내심 흠칫하며 다시 한 번 노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노파가 무엇 때문에 공초스님을 찾는 것일까?)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순간 노파는 천 근 무게의 용두괴장으로 바닥을 냅다 찍으며 두 눈에서 엄청난 분노의 빛을 뿜어냈다. "이놈의 늙은이, 잡기만 해 봐라. 뭐 공초? 제놈이 언제부터 중노릇했다고……" 노파는 바람소리가 나도록 소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이때 왕사우가 급히 따라가며 외쳤다. "노태랑, 음식값을 주고 가셔야죠?" 일순 노파가 빙글 몸을 돌리며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이놈아! 개밥 주고 돈 받냐?" "예?" 왕사우는 멍청하게 선 채 두 눈을 멀뚱거렸다. 그러는 순간 노파는 소녀를 데리고 휭하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용천음은 두 모녀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천천히 들고 있던 술 잔을 내려 놓았다. (저 노파와 소녀가 누군지는 모르나 공초 스님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그는 곰곰이 생각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노파의 성질이 불같고 앞 뒤 가릴 것 없이 마구잡이로 행동하는 것으로 보아 일단 공초스님에게 귀띔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용천음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공초스님에게 알렸다가 공연히 코끼우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어……) 4 "쯧쯧쯧…… 한사코 마다하고 혼자 가더니 이 꼴이 됐지 않수……?" 공초스님, 그는 정성스레 금창약을 발라 주며 혀 끝을 찼다. 그 앞에 두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난정사태였다. 그녀는 지금 심한 내상(內傷)과 외상(外傷)을 입고 있었다. 유령관시 음후독과는 정말 사력을 다한 일전(一戰)을 벌였었다. 음후독의 혼천기류를 어느 정도 파괴시켰으나 그녀 역시 그로 인해 공력이 완전히 탈진해 버렸다. 적어도 삼 개월은 요양을 해야 원래의 공력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지금 그녀는 상의를 풀어 백옥 같은 어깨를 드러내 놓고 있었다. 공초스님은 그 어깨에 정성스레 금창약을 발라주고…… 묘한 상황이라 할 텐가? 그렇지 않다. 공초스님이 비록 쓸데없는 말을 자주 하기는 했으나 난정사태는 누구보다도 공초스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깨를 드러내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쯧쯧쯧…… 그래 내 뭐라 그랬소?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빈승과 함께 일을 처리하자고 했지 않았소?" 마치 마누라에게 힐책하는 듯한 그 말투에 난정사태는 담담히 웃을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공초스님, 천음입니다." 밖에서 용천음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런 눈치 없는 놈! 꼭 이럴 때 나타나 훼방을 놓는단 말이야……) 공초스님은 지극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화풀이라도 하듯이 소리쳤다. "들어와!" 그러면서 금창약을 난정사태의 어깨 상처 위에 신경질적으로 박박 문질렀다. 그때 문이 열리고 용천음이 들어왔다. 그는 들어서는 순간 난정사태를 보자 흠칫 굳어졌다. (엄중한 상처를 입은 모양이군. 한데…… 대체 그 강시 같은 괴물과는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웠을까?) 알 수 없는 의문이었다. 용천음은 공초스님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노사태께서 많이 다치신 모양이군요?" "보면 모르냐? 다 죽어간다, 다 죽어가……" "……!" 용천음은 눈을 감고 있는 난정사태를 한동안 응시하다 나직한 음성으로 공초스님에게 말했다. "공초스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공초스님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볼멘 소리로 말했다. "드리지 마라, 지금 바쁘다." "……?" 용천음은 주춤하다가 또다시 입술을 바싹 들이대며 말했다. "웬 사람들이 공초스님을 찾고 있습니다." "향시주들이겠지." "그게 아니라……" 공초스님은 고개를 돌려 용천음을 쏘아보며 두 눈을 부라렸다. "아니긴 뭐가 아냐? 이놈아, 원래 암자란 사람이 많이 찾아올수록 좋은 게야. 그래야 국물이라도 얻어 먹지." "……!" 용천음은 담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보기에 향시주들이 아니라니까요." "그럼 소림사(少林寺)의 땡초들이겠지. 내 소문을 듣고 특별히 초빙하러 온……" 용천음은 목소리를 약간 높였다. "글쎄 그게 아니라 이상하게 생긴 노파와 소녀가 공초스님을 찾는다니까요." 공초스님은 난정사태의 어깨에 금창약을 골고루 문지르며 신경쓸 일 없다는 듯이 별무관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세상에 노파와 소녀가 한둘이냐?" 그러다 문득, "……!" 그는 눈알을 딱 고정시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급히 고개를 돌려 용천음을 쳐다보았다. "방금 이상하게 생겼다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일순 공초스님의 얼굴색이 기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혹시…… 노파의 얼굴이 지지리도 못생겼고, 육중한 용두괴장을 들고 다니며 입술이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지 않더냐?" 용천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바로 그 노파입니다." 찰나, "맙소사……!" 공초스님은 돌연 사색으로 변한 채 문지르던 손마저 딱 멈추고 말았다. 그는 안절부절을 하지 못하며 계속 안면근육을 씰룩거렸다. "빌어먹을! 정말 끈질기구나. 내가 여기 숨어 있는지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쫓아왔단 말인가?" (숨어 있어? 쫓아왔다고?) 용천음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놈아, 혹시 그 노파가 내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지 않더냐?" "물어봤습니다." "뭐, 뭐라고 했느냐?" "그런 사람 모른다고 딱 잡아 뗐습니다." 공초스님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안도의 빛이 스쳐갔다. "잘했다. 정말 잘했다." 용천음은 공초스님이 몹시 불안해 하고 아절부절 하지 못하자 크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대체 그 노파가 누굽니까?" "누군 누구야? 원수덩어리지." "……?" 공초스님은 이마에 식은땀까지 흘리며 눈길을 어디다 두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듯이 연신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돌연 그는 술이 반쯤 든 표주박을 주섬주섬 집어 옆구리에 끼며 다급하게 말했다. "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마주치면 끝장이다." 그는 승포자락을 치켜 잡고는 방 안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무, 문이 어디냐? 문이……" 공초스님은 난정사태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대관절 그 노파가 누구이기에 천하의 낙천가 공초스님이 똥오줌을 못 가린단 말인가? 한데 바로 그때였다. "나와라! 꽁초인지, 골초인지 썩 나오란 말이다----!" 돌연 밖에서 하늘이 무너지고 천둥벼락이 내리치는 듯한 엄청난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찰나, "으아악----!" 그 음성을 듣는 순간 공초스님은 그 자리에서 빳빳하게 굳어지며 자지러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오금이 저리는가? 공초스님은 두 다리를 모은 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이때, 콰아---- 아---- 앙----! 갑자기 방문이 산산조각이 나며 휴지조각처럼 사방으로 날아갔다. 동시에, 휘익---- 번쩍! 두 개의 물체가 벼락같이 뛰어들었다.


순간 공초스님은 떨다 못해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으며 실성한 사람처럼 외쳤다. "으갸갸갸! 할망구가 나타났다아----!" 승방 안엔 어느 새 나타났는지 노파와 소녀가 우뚝 서 있었는데 그런 노파의 두 눈은 잡아 먹을 듯이 공초스님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 할망구……" 공초스님은 전신을 와들와들 떨며 억지 웃음을 띄운 채 노파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 지금 노파의 귀에 그의 말이 들어올 턱이 없었다. 난정사태의 도복이 아래로 미끄러져 있고 백옥 같은 어깨가 드러나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이다. "크아아악……!" 노파는 짐승같이 울부짖으며 잔뜩 독기 어린 눈빛으로 공초스님을 쏘아보았다. 공초스님은 노파의 괴성을 듣는 순간 온몸이 아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전율을 느끼며 황망히 입을 열었다. "하…… 할망구, 아니야. 오해야, 오해……" "이런 찢어죽일 인간들! 명색이 중과 도사라는 년놈들이 이따위 엉터리 암자나 지어 놓고 벌건 대낮에 그 짓을 해?" 노파는 공초스님이 난정사태의 옷을 벗기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은 터진 것이다. 노파는 분을 참지 못하는 듯 주먹을 쥐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개 같은 늙은이! 마누라와 딸년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도사년과 눈이 맞아 놀아나?" 이 순간 난정사태는 조용한 모습으로 도복을 바로 입고 있었다. 공초스님은 두 손을 마구 저으며 외쳤다. "할망구, 오해라니까 그래, 저 여도우(女道友)와 나는 아무 관계도 아니야. 그저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일 뿐……" "뭐라구? 오호라! 귀찮으니까 옷도 안 입고 허물없이 지낸단 말이지?" 노파는 두 눈에 쌍심지를 켜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런 억지도 있는가? 허물없이 지낸다고 하니까 옷 안 입고 지낸다는 말로 받아들이다니…… 그러자 소녀가 급히 말했다. "어머니, 허물없이 지낸다는 말은 그게 아니라……" "시끄러, 이년아! 내 앞에서 유식한 척하지 마라. 개뿔도 모르는 년이 나서긴 왜 나서." "……!" 노파는 버럭버럭 고함을 쳤다. "내 아무리 무식하다고 하지만 그 말은 안다. 이년아! 허물 벗는 다는 소리도 못 들었더냐? 그게 무슨 소리냐, 다시 말해서 옷 벗는다는 소리 아니냐 말이다!" 더 이상 무슨 대책이 필요하겠는가? 이때 정말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던 소녀는 바로 옆에 서 있는 용천음을 발견했다. (어머! 이 사람……) 또 발작하는가? 그녀의 얼굴에 배시시 웃음이 피어올랐다. 공초스님은 무척 다급해졌다. "할망구, 제발……" 그의 얼굴은 비참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문득 옷을 단정하게 정리한 난정사태가 노파를 향해 말했다.


"무량수불…… 실례하오만 노여시주께서는 공초도우와 어떤 사이인지……" 노파의 눈알이 한 바퀴 돌아갔다. "왜 몰라서 묻냐? 지금껏 같이 끼고 놀아나면서 그것도 몰랐냐? 하기야 응큼한 영감탱이가 자식 새끼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겠지." 찰나 난정사태의 얼굴로 가벼운 놀람의 기색이 스쳤다. "그럼…… 공초도우의 부인이란 말인…… 가요?" "그렇다, 이 불여우야!" "……!" 맙소사! 저 추악하고 억지투성이인 노파와 그저 심삼하면 추파나 던지는 소녀가 공초스님의 마누라와 딸인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용천음과 난정사태는 어이가 없는지 멍하니 공초스님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 장가 들었소? 마치 이렇게 묻는 듯했다. 난정사태는 고인답게 곧 냉정을 되찾으며 노파를 향해 말했다. "실례했어요. 공초도우의 부인이신지 모르고…… 빈니는 난정사태라고 해요." "난정사태!" 그녀의 명호를 듣는 순간 노파는 크게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나 그것도 일시 뿐 그녀는 눈을 까뒤집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 저 영감이 왜 우리 모녀를 놔두고 야밤에 도망쳤나 했더니 무림에서도 이름이 자자한 불여우한테 푹 빠져 버렸기 때문이었군?" 공초스님이 다급히 말했다. "할망구, 내가 야밤에 도망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소. 생각해 보시오. 불문(佛門)에 몸담을 사람이 어찌 처자를 데리고 다닐 수가 있겠소?" 공초스님은 침을 튀겨가면서 말했다. "저 유명한 소림사에도 그런 법은 없다오." "소림사 좋아하네. 영감이 소림사 제자야?" "……!" 공초스님은 할 말이 없었던지 눈을 꿈벅거리고 있다가 돌연 난정사태를 향해 말했다. "아! 난정도우, 우리 마누라가 누군지 아시오? 이름만 대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귀수혈파(鬼手血婆) 호연랑(胡蓮娘)이 바로 우리 위대한 마누라라오." 그러자 노파가 냉소를 쳤다. "흥! 오랜만에 바른 소리 하는군." 싫지 않은 모양이다. 늙었건 젊었건 간에 그저 추겨 세워주면 나긋해지는 것이 여인이던가? 난정사태는 귀수혈파 호연랑이라는 말에 크게 놀랐다. (저 여시주가 사십 년 전 한 자루 용두괴장으로 천산(天山)의 팔마황(八魔皇)을 단 이십초(二十招) 만에 박살내 죽였다는 그 여자란 말인가?) 귀수혈파 호연랑. 치마만 둘렀다 뿐이지 남자와 진배 없었다. 성질이 불같고 지랄같아 무림인이라면 그녀의 그림자만 보아도 슬금슬금 피하는 형편이었다. 거기에다 무공은 어찌 그리 강한지, 일단 초식을 전개했다 하면 상대가 피떡이 되기 전에는 거두는 법이 없다. 이백 년 전 혼세의 살인마녀(殺人魔女)라고 불리웠던 천염사희(天閻死姬) 호요경(胡妖景)의


이대손녀(二代孫女)가 바로 그녀인 것이다. 천염마희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아래가 아니라고 알려진 여자가 귀수혈파 호연랑이었다. 난정사태는 공초스님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공초도우에게 천하제일의 여장부라고 일컬어지는 부인과 저렇게 아름다운 딸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공초스님은 몹시 어색한 듯 뒤통수를 긁었다. "사실 마누라와 딸은 불문에 들어오기 전에 얻은 것이라오." 그때였다. "흥! 이제 순순히 털어 놓아요. 영감과 난정사태가 어떤 관계인지를……" 귀수혈파가 또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공초스님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까." "그런데 왜 옷을 벗기고 있어? 뭣 때문에……?" 한 차례 존대를 해준다 싶었더니 대뜸 반말이다. 공초스님은 울상을 지으며 난처한 기색을 보이다가 문득 한쪽에 있는 용천음을 가리켰다. "저놈이 처음부터 다 보았소. 내가 난정도우를 치료하고 있는 것을……" "……?" 귀수혈파는 시선을 돌려 용천음을 보았다. 순간, "어라? 저 새끼는……" 귀수혈파는 빠르게 용천음과 공초스님을 바라보았다. "오라! 알고보니 저 어린 새끼는 처음부터 영감을 알고 있었군?" "……!" 용천음은 쓴 입맛만 다셨다. "괘씸한 새끼! 그러면서도 내가 물으니까 모른다고 딱 잡아 떼? 새끼가 벌써부터 대가리 굴려 잔꾀나 쓰고……" "……!" "뉘집 새낀지 노랗다, 노래! 이 자식아……" 이때 공초스님이 두 눈을 크게 뜨며 화를 내듯이 말했다. "아니, 저 녀석이 나를 모른다고 했단 말이오? 그럴 수가 있나? 저 녀석은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알고 있는데……" "……?" 용천음은 느닷없이 변하는 공초스님의 태도에 망연해졌다. "이놈아! 무엇 때문에 안 가르쳐 주고 시치미를 떼서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게냐? 나쁜 놈 같으니라고……" 이럴 수가 있는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떠했는가? -그 노파가 내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지 않더냐? -모른다고 딱 잡아 뗐습니다. -잘했다! 정말 잘했다. 잘했다고 칭찬까지 늘어 놓고는 지금 와서 모든 것을 용천음에게 미뤄 버리다니…… 용천음은 은근히 부아가 났다. 그때 문득 귀수혈파가 물어왔다. "네놈이 처음부터 다 보았다고 했는데 저 영감이 난정사태의 상세를 치료하고 있었다는 말이


사실이냐?" (어디 혼좀 나 봐라.) 용천음은 내심 중얼거린 뒤 무슨 소리냐는 듯 정색을 했다. "공초스님의 말을 그대로 믿습니까?" "엉?" 귀수혈파가 고개를 바싹 앞으로 내밀었다. 용천음은 짐짓 고개까지 저어가며 말을 이었다. "치료는 커녕 제가 이곳으로 들어오니까 공초 스님께서 허겁지겁 아랫도리를 올리던데요." "뭐…… 뭐야?" 귀수혈파의 눈이 말 그대로 뒤통수까지 쭉 찢어졌다. "키야아악! 저…… 저놈의 새끼가 새빨간 거짓말을……" 공초스님은 길길이 날뛰며 고함을 내질렀다. "이놈의 영감쟁이! 가만두지 않겠다!" 용천음의 한 마디에 일은 폭발하고 만 것이다. 그는 입가에 한 줄기 미소를 머금으며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난 이제 필요없으니 이만 가 볼까?" 용천음은 유유히 승방 문을 나섰고, "으아아악…… 크아아악!" 승방 안에서는 공초스님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숨가쁘게 터져나오고 있었다. (후후훗…… 천하제일의 낙천가이신 공초스님께서도 이번에는 톡톡히 당할 것이다.) 용천음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인이야. 부인과 딸을 내버려 두고 도망을 치다니……) 그는 암자 모퉁이를 돌아섰다. 한데, 그때였다. "용시주……" 돌연 모기소리보다 작은 음성이 또렷하게 귓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난정사태의 음성……?) 기이한 일이었다. 난정사태는 분명 안에 있거늘 어찌하여 그녀의 음성이 이토록 분명하게 들린단 말인가? 하나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최상승의 전음입밀(傳音入密)이라는 사실을…… 난정사태의 전음술이 빠르게 이어졌다. "오늘 밤 삼경(三更)에 시주를 찾아 가겠어요. 다른 한 사람과 함께……" "……!" 용천음은 흠칫했다. (삼경에 나를 찾아온다고? 난정사태와 또 한 사람이……) 난정사태의 전음술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왜 나를 찾아온다는 것일까? 그리고 그녀와 함께 온다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삼경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시각이다. 그 시각에 온다는 자체는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는 뜻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어쨌든 오늘 밤 삼경이 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겠지……) 난정사태, 그는 왜 용천음을 찾아 가겠다는 것일까? 그리고 함께 온다는 그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수수께끼 같은 의문이 던져진 순간이었다. 제 5 장 江湖出師表 1 승상부(丞相府). 삼경이 가까워 오면서 불은 하나 둘 꺼져가고 있었다. 하나 유독 단 한 곳에서는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은 채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온갖 꽃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소축(小築), 용천음이 기거하는 바로 그곳이었다. …… 시간이 흐를 수록 용천음의 입 안은 바싹 말라만 갔다. 간혹 창 밖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알 수 없는 기대감과 긴장으로 자꾸만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그는 여간해서는 집에서 마시지 않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공초스님으로 인해 난정사태를 알게 되었다고는 하나 그 이유 한 가지만으로 야밤에 나를 만나자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낯선 사람까지 동행하고……) 시종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의문이었다.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 것일까? 전에 없던 긴장을 다 하고……) 용천음은 마음을 진정하기라도 하려는 듯 한 잔의 술을 목구멍 깊숙이 털어 넣었다. 그는 문득 나뭇가지 끝에 걸린 새하얀 달(月)을 응시했다. 일순, 둥, 둥, 둥…… 멀리서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삼경…… 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는 술잔에 불끈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스스스슥…… 그의 눈 앞에 희뿌연 안개가 어리는가 싶더니 두 사람이 소리없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난정사태……?) 용천음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난정사태라는 사실을 알고는 마른 침을 한 차례 삼켰다. 난정사태 옆에는 도저히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한 사람이 서 있었는데 용천음은 그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찬바람을 들이켰다. 눈보라를 몰고 왔는가? 모조리 새하얗다.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그는 한결같이 백색(白色)으로 휘감겨 있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섬뜩하도록 무표정한 그 얼굴 표면에는 보일 듯 말 듯 한 은은한 자광(紫光)이 있었고, 두 눈은 마치 벽 속에 박아 고정시켜 놓은 듯 전혀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이렇게 섬뜩한 인간도 있었단 말인가?) 용천음은 백색장포(白色長袍)의 인간을 보는 순간 전신의 피가 싸늘히 식는 듯한 오싹함을 느꼈다. 아니 백색장포의 인간에게서 그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항거할 수 없는 질식감을 느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백색장포인은 나타나는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용천음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난정사태를 향해 물었다. "저 소년이 사태가 말한 그 사람이오?" 뼈를 얼릴 듯한 냉음(冷音)…… 용천음은 그의 입에서 차가운 서리가 섞여 나오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무슨 사람이……?)


이때 난정사태가 몹시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저 소년이 빈니가 말한 바로 그 소년이예요." "……!" 백색장포인은 심장을 도려낼 듯한 눈빛으로 용천음을 직시하다가 자색이 감도는 입술을 떼었다. "그 분과 닮았군. 무척……" "……?" 용천음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난정사태가 이처럼 기괴한 사람을 데리고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 세 사람은 품자(品)형으로 앉은 뒤 한 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문득 백색장포인이 말했다. "사태, 천지밀영세(天地密影細)를 펼쳐 이 방에서 나누는 대화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시오." 순간, "알겠습니다." 난정사태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식지와 중지를 합해 수도자세를 취한 뒤 허공에 큰 원을 그렸다. 이것을 보며 용천음은 의구심을 가졌다. 이때 백색장포인은 돌연 왼손의 식지와 오른손의 중지를 삼각형의 형식으로 마주 붙여 세운 뒤 약 일곱 치 정도 위로 올렸다. 찰나 마주 붙어 있는 손가락 사이에서 기이한 빛이 흘러나오는가 싶자 방 안을 한 바퀴 돌고는 이내 사라져 버렸다. (저것은 또 뭘하는 것일까?) 백색장포인은 합쳤던 손가락을 떼며 생명이 없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이 방에서 하는 대화는 외부와 차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밖으로 불빛도 새어나가지 않소." "……!" 용천음은 크게 경악했다. (불빛도 새어나가지 않는다고……?) 장난친다고 할 텐가? 하나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지금 방 안에는 불빛이 있으나 외부에서 보면 불이 꺼진 것처럼 캄캄하게 보이는 것이다. 백색장포인, 그는 어떠한 능력을 지니고 있기에 그 같은 불가사의한 일을 가볍게 처리할 수가 있는 것일까? 백색장포인은 한참 용천음을 응시하다가 입술을 떼었다. "공자는 노부가 누구인지 무척 궁금할 것이오." 용천음은 힐끔 난정사태를 바라본 다음 다시 백색장포인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백색장포인은 웃는 듯 마는 듯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노부는 세 개의 달(月)이 뜨는 삼월령(三月嶺)의 사람이오. 그리고 노신이 온 곳은 월백(月白)이라는 곳이오." (세 개의 달이 뜨는 삼월령? 월백……?) 용천음은 얼토당토 않은 말에 흠칫 눈빛이 굳어졌다. 세 개의 달이 뜨는 곳이 세상 천지에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리고 월백이라는 기이한 곳은 또 어디란 말인가? 백색장포인의 모습도 기괴했거니와 그가 삼월령의 사람이라는 것도, 월백에서 왔다는 것도 모두가 기괴한 일이었다.


백색장포인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이번에 노부가 이곳에 온 것은 한 가지 사실을 규명하고자 해서요." "……?" 용천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한 가지 규명이란…… 그것이 소생과 관계가 있습니까?" "있소. 아주 중대한……" "그 규명이란 게 무엇입니까?" "……!" 백색장포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엄청난 빛무리가 꿈틀거리는 눈으로 용천음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직시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입술을 떼었다. "공자가 진정 용비후의 아들이냐 하는 것이오." "……?" 용천음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백색장포인과 난정사태가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하나 그들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용천음은 눈을 내리 깔은 채 침묵을 지켰다. (그렇다. 언젠가 난정사태가 내게 물은 적이 있었다. 혹시 성(姓)이 남궁이 아니냐고…… 그 당시 나는 내가 용비후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아니라고 대답했었다. 허면…… 이들이 찾아온 것은 바로 그 문제 때문에?) 그의 두뇌는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는 부모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들이 돌아가셨건 살아 계시건……) 일순 그의 눈동자에 고뇌의 그림자가 깔렸다. (하나…… 이제 와서 그것을 안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내 뿌리를 찾고 나 혼자서 만족한다면 지금의 아버지는 어떻게 한단 말이냐?) 그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 분에게 또 한 번의 아픔을 줄 수는 없다. 그래…… 포기하는 게다. 내 뿌리를 찾는 일은 포기해 버리는 게다.) 용천음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번져 올랐다. (앞으로…… 지금 아버님에 대한 효도를 해야 하는 일만으로 무 척 바쁘고 벅찬 인생이 될 테니까……) 뿌리를 찾는 일을 포기하는가? 그는 끝내 길러준 은혜를 택했는가? 용천음은 백색장포인과 난정사태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 일로 인해 소생을 찾아 오셨다면 유감된 일이지만 헛걸음을 하신 겁니다." 두 사람의 눈빛이 일순 돌뿌리처럼 굳어졌다. 용천음은 말을 이었다. "소생은 틀림없는 용비후 그 분의 아들입니다." "……!" "……!" 백색장포인과 난정사태의 눈꼬리가 순간적으로 미세한 움직임을 보였다. 문득 백색장포인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자신하오?"


"자신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난정사태가 격한 음성으로 말했다. "용시주는 사실을 숨기고 있는 거예요. 시주의 얼굴에는 갈등의 그림자가 깔려 있어요. 왜 간신 용비후를 그토록 옹호하는 건가요?" 용천음은 내심 고통스러웠으나 미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용승상의 친자임은 세상 천하가 다 알고있는 사실이오. 두 분이 무슨 이유로 날 찾아왔는진 모르지만 뭔가 착각을 하신 것 같소." 그는 두 사람을 차례로 응시한 뒤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밤이 깊었으니 이제 그만 두 분은 돌아가시오." 축객령인가? 용천음은 문을 열어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반쯤 몸을 일으키며 백색장포인의 기이한 눈동자를 응시했다. 바로 그 순간, "……!" 용천음은 백색장포인의 눈을 보는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자리에 앉고 말았다. (왜……?) 그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고이며 두어 번 고개를 흔들어 보았다. 찰나, "용공자……" 돌연 온몸의 털이 모조리 곤두설 것만 같은 귀기스러운 음성이 실낱같이 고막을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바로 백색장포인의 음성이었다. "……!" 용천음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오오, 지금 이 순간 백색장포인의 얼굴이 더욱 짙은 자색을 띠고 빛처럼 스물거리는 것이었으니…… 또한 두 눈 깊숙한 곳에서는 알 수 없는 두 줄기 찬란한 금빛선이 쏘아나와 용천음의 동공에 쏘아 박히듯 파고들고 있었다. 그러자 용천음의 눈동자가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무엇에 홀린 듯 석상처럼 굳어져 버렸다. 이 무슨 현상인가? 백색장포인은 용천음을 응시하며 지하유부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공자, 용서하시오. 이렇게 하지 않고는 공자에 대한 과거를 밝혀낼 수가 없소." 과거……? 그렇다면 백색장포인은 이러한 수법을 써서 용천음의 과거를 알아내기 위하여 월백이라는 곳에서 직접 왔단 말인가? "심광미령묘(心光迷靈妙)를 펼치게 되면 공자께서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오. 그리고 기억나는 모든 것을 노부가 묻는대로 대답해야 할 것이오. 아시겠습니까?" "알겠…… 습니다……" 용천음은 나무토막처럼 뻣뻣이 앉은 채 입술만 달싹거려 대답했다. 심광미령묘----! 이것은 인간의 두뇌를 지배하여 먼 과거의 기억을 속속들이 파헤쳐 내는 불가사의한 대법(大法)이다. 지금까지 심광미령묘라는 수법은 이 세상에 나타난 적도 없거니와 전개한 적도 없었다. 백색장포인은 잠시 여유를 둔 뒤에 서두를 꺼내기 시작했다. "공자는 진정 용비후의 아들이오?" "아닙니다……"


용비후의 대답을 듣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난정사태의 얼굴에 어떤 기대와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무거운 떨림과 함께 백색장포인은 거듭 물었다. "태어나서 눈을 뜰 무렵…… 공자가 제일 처음 본 것은 무엇이었소?" "……!" 용천음은 즉시 대답하지 못한 채 희미한 눈을 몇 번 굴리고 있었다. 기억 속의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잠시 후, "여자의 얼굴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나를 안고…… 미소를 띄운 채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여자……!) 백색장포인의 안면 근육이 가늘게 움직였다. "어떻게 생긴 여자였소? 모습을 말해 주시오." 용천음은 영혼없는 사람처럼 고개를 가로 저었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희미한 윤곽만이……" 백색장포인이 급히 물었다. "혹시 주위에 다른 사람은 없소?" "아…… 있습니다. 웬 남자입니다. 얼굴은…… 얼굴은…… 모르겠습니다. 안개에 가린 듯 뿌옇기만 합니다." 난정사태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백색장포인 역시 실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틀렸다! 바로 태어난 아기이기에 얼굴 형태를 분간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다시 물었다. "공자가 한 살 때로 거슬로 올라갑시다. 그때 공자는 무엇을 하고 있었소?" "……!" 용천음은 기억을 더듬는 듯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물방울이 보입니다. 아…… 그렇습니다 호수입니다. 나는 남자 품에 안겨 있고…… 남자 옆에는 여자가…… 나와 그들은 호수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뱃놀이?" 백색장포인과 난정사태는 동시에 외쳤다. (뱃놀이…… 그래, 그분들은 어린 주군(主君)을 안고 언제나 뱃놀이를 즐기셨지.) 백색장포인은 흥분된 음성으로 물었다. "그 호수의 이름이 용혈지(龍血池)가 아닙니까?" 용천음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그것은……" 일순 침착하기 이를 데 없는 난정사태가 격동을 억제치 못하여 백색장포인에게 물었다. "그들 두 남녀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 물어보세요." 백색장포인이 고개를 끄덕인 뒤에 용천음에게 말했다. "공자를 안고 있던 남자와 옆에 있던 여자가 어떤 대화를 했소?" "남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녀석 만큼은 인간의 삶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가장 평범한 아이로 키우고 싶소. 여자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요. 소첩도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하지만……" 용천음의 얼굴에 가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 여자는 말 끝을 흐리며 흐느끼고 말았습니다. 나의 손을 꼭 잡으며……" -평범한 아이로 키우고 싶다.


그렇다면 용천음은 평범한 아이로 자랄 수 없는 운명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용천음과 함께 뱃놀이를 하던 그들 두 남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닌 어떤 특수한 인간들이었단 말인가? 백색장포인과 난정사태는 이 순간 어떤 감정을 억제치 못한 채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손바닥에는 흥건한 땀이 배어 있었다. "공자가 태어난 곳의 형태가 어떤지 설명해 줄 수 있겠소?" 용천음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아름답고 화려한 곳이었습니다. 광활한 대지 위에 수천의 고루거각(高樓巨閣)이 서 있고, 또한 헤아릴 수 없는 금전옥루(金殿玉樓)가 천자만홍(千紫萬紅)의 자연과 온갖 새(鳥)들의 지저귐 속에 묻혀 있는…… 그렇습니다. 나는 일찍이 그렇게 아름다운 별천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용천음의 말이 거듭될 수록 두 사람의 흥분은 더욱 고조되어 갔다. "공자, 그 후의 기억을 더듬어 주시오." 용천음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아버지는 나를 업으시고 무엇인가를 쓰고 계셨습니다. 아……! 과거를 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웃는 모습도 보입니다." 백색장포인의 얼굴에 당황의 기색이 스쳤다. (기억이 건너 뛰었다. 지금 말한 것은 용비후를 가리키는 것이다.!) 난정사태 또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큰일이군요. 가장 중요한 부분의 기억이 모조리 사라진 것 같소. 지워져 버린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면 확증을 얻을 수 없소." "어떻게 하면 좋을까?" "……!" 백색장포인은 손 끝마저 가늘게 떨었다. 잠시 후 그는 비장한 음성으로 말했다. "혈음지(血陰指)를 사용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 같소." "그…… 그건 안돼요……!" 난정사태는 대경실색을 하며 안색이 창백해졌다. 대체 혈음지가 무엇이기에……? 백색장포인이 말했다. "모험을 걸어보는 방법 외에는 없소……" "혈음지를 펼쳐서 용시주가 중간 부분의 기억을 떠올렸다 해도 만에 하나 심경의 충격을 받으면……" "알고 있소. 그렇게 되면 공자와 노부는 피를 토하며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계시면서 어찌……?" 백색장포인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운명에 걸고…… 시도하겠소……!" "……!" 백색장포인은 말이 끝나는 순간 품 안에서 섬뜩하고 시뻘건 하나의 소혈도(小血刀)를 꺼내 자신의 손가락 식지를 약간 찔렀다. 순간 한 방울의 피가 동그랗게 솟아 올랐다. 그러자 그는 주저없이 손가락의 피를 용천음의 이마 한 가운데에 찍었다. 부르르…… 용천음의 전신이 경련을 일으키듯 떨리기 시작했다. 백색장포인은 무척 신중하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한 다음 빠르게 입술을 떼었다. "공자, 별천지와 같은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어떻게하여 용비후의 손으로 넘어가 자라게


되셨는지 그것을 말해 주시오." 용천음의 몸이 급살을 맞은 듯 크게 떨렸다. 이어, "불(火)…… 온통 불길이…… 으으으…… 뜨거워…… 비명소리……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 용천음의 이마를 찍고 있는 백색장포인의 손도 이 순간 무섭도록 거세게 떨리고 있었다. "계속해…… 보시오……" "무리들…… 어떤 무리들이…… 공격을…… 피가…… 피가 내몸을 적시고 있습니다. 아! 누군가가 강보에 싸인 나를 안고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싸우며 뚫고 나가고 있습니다." 이때, "윽……!" 돌연, 백색장포인의 목구멍에서 역한 신음이 흘러나오며 한 줄기 선혈을 주르륵 흘렸다. 난정사태가 다급하게 외쳤다. "안돼요! 더 이상은 안돼요. 어서…… 혈음지를 거두세요." 백색장포인은 혀를 깨물었다. "중단할 수 없소! 설령 내가 죽는다 해도…… 이 한 목숨이 사라진다 해도 반드시 밝혀야 하오!" 강철같이 단단한 용단이었다.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알아야할 정도로 중요하단 말인가? 이 순간 용천음의 코에서도 실낱 같은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난정사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큰일이다. 일각만 더 지체한다면 두 사람 모두가 목숨을 잃는다!) 백색장포인은 사력을 다해 물었다. "공자…… 조금만 더…… 마지막…… 마지막 기억을……" "그 사람…… 그 노인은…… 나를 안고…… 처절하게…… 울부짖었습니다……" -소주군(少主君)이시여! 신(臣) 예황백(芮黃白), 사지가 찢기고 뼈가 가루가 된다 해도 반드시 소주군(少主君)만은 살리고 말 것입니다. "예황백…… 만겁사야(萬劫邪爺) 예황백……!" 난정사태는 벌떡 일어나며 미친 듯이 외쳤다. 찰나 그녀의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백색장포인 또한 폭발하는 듯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며 마지막으로 안간힘을 기울였다. "예황백은…… 무슨 말을…… 남겼습니까?" 용천음은 안면 근육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그 사람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면서…… 나에게 말했습니다. 죽어도…… 죽어도 잊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백색장포인은 이을 악물며 물었다. "잊지말라던 그 말은…… 무엇입니까?" 그때 용천음의 상체가 돌연 앞뒤로 두어 번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는 한 모금의 선혈을 쏟으며 힘없이 탁자에 쓰러져 갔다. 쓰러지면서 마지막으로 흘러나온 말은 바로…… "백풍…… 백풍의…… 마…… 궁……" 2 <대재(大才)하신 용천음 공자님께 노신 가야백(架冶伯)이 감히 붓을 들어 남기옵니다. 먼저 미천한 이 몸이 공자님을 상대로 심광미령묘를 펼친 점 모쪼록 용서를 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노신의 마음을 공자님께서는 헤아려 주시리라 믿습니다.


무릇 인간이라 함은 전생(前生)에 이어온 업보를 조금이나마 풀 어야 할 의무가 있고 또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습니다. 어차피 공자님께서는 노신의 이러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알고 있습니다. 아니 왜 하는지조차 의문스러울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지금 노신 가야백과 난정사태는 천해탄(千海灘)을 건너고 있을 겁니다. 공자님께서 현존(現存)해 계신다는 흥분과 기쁨으로 인해 노신의 두 눈이 뜨겁게 차오르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공자님이 굳이 용비후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지금에 와서 말입니다. 하나 노신 가야백 엎드려 간하오니 부디 한 번쯤 묘백산(妙白山) 월백에 들러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그 이상 우리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노신 가야백 남김.> 아직 먼동이 터오기 전 매몰찬 새벽 바람을 뚫으며 한 대의 쌍두마차가 끝없는 벌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마차 안에는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난정사태와 가야백이었다. 난정사태는 짙은 회색의 눈빛으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백색장포인 가야백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는데 그의 안색은 핏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무거운 암색으로 변해 있었다. 전신은 간헐적으로 떨고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혈음지를 펼친 대가인가? "쿨룩 쿨룩……" 가야백은 심한 기침을 하며 몹시 괴로운 듯 비스듬히 옆으로 몸을 기댔다. 난정사태가 급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겠습니까?" 가야백은 입가에 실낱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직…… 견딜만 하오……" 난정사태는 수건으로 가야백의 이마를 닦아 주었다. "왜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고 떠났습니까?" "쿨룩……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이제는…… 우리 모두 그가 월백을 찾아올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소." "그가 찾아올까요?" "……" 그 물음에 대해서 가야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두 눈을 지그시 감아 버렸다. 두두두두…… 마차는 황량한 벌판을 질풍같이 내달리고 가야백은 무척 오랜 시간이 지나 두 눈을 힘없이 뜨며 중얼거렸다. "와야만 하오. 그는……" 3 끝없는 벌판이 내려다 보이는 한 절벽, 칼끝같이 서 있는 그 벼랑 위에 한 중년 사나이가 버티고 서있었다. 흑풍(黑風)을 몰고 왔는가? 몹시 준수하며 차가운 저 얼굴, 이토록 강렬한 인상을 지닌 사람은 극히 드물다. 칠흑 같은 머리결을 묶지도 않은 채 허리까지 늘어뜨렸고, 이마에는 핏빛 매화(梅花)가 수놓아져 있는 검은 끈을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일신에는 먹물 같은 흑삼(黑衫)에 옆구리에는 석 자 가량의 검은 장검(長劍)을 비스듬히 꽂고 있었는데


검집에도 한 송이 매화가 새겨져 있었다. 신발 또한 검은 가죽신이었다.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모조리 흑색 일변이었다. 한데 오오, 그의 왼쪽 눈에 씌여져 있는 저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먹빛의 안대, 그리고 그 안대 밑의 턱에는 한 줄기 예리한 칼자국이 섬뜩하게 그어져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의 전체가 더욱 냉혹하게 보였다. 특히 한쪽 눈에서 가느다랗게 쏘아져 나오는 그 눈빛은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오싹했다. 그것은 바로 늑대의 눈빛이었다. "……!" 검은 안대의 흑삼인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벌판 저 멀리로 멀어져 가는 쌍두마차를 말없이 눈빛으로 쫓고 있었다. 문득 칼날처럼 예리하고 얄팍한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만상유공(萬像流公) 가야백…… 이제 우리의 약속은 깨졌다." 무슨 소린가, 약속이 깨지다니……? "가야백, 너는 우리가 했던 그날의 약속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흑삼인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렸다. "둘 중 누가 먼저 약속을 깬다면…… 상대의 손에 죽어야 한다는 그날의 맹세를……" 흑삼인의 손이 천천히 옆구리의 검으로 이동했다. 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이제 그 맹세대로…… 나는 너를 죽일 것이다……!" 순간, 버언쩍! 언제 뽑았는가? 한 줄기 섬뜩한 검무리가 천공 아득한 곳으로 빛살처럼 뻗어나갔다. 그 빛살의 끝에서 열 두 송이의 매화(梅花) 검기가 화려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4 용천음은 창가에 선 채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고, 백색장포인 가야백과 난정사태는 한 장의 서찰을 남긴 채 이미 어디론가 떠난 뒤였다. "전생에 이어온 업보를 조금이나마 풀어야 할 의무가 있고 또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용천음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탁자 위에 놓인 서찰을 응시했다. 용천음은 다시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들이 나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아냈다면 왜 한 마디 해 주지 않은 채 홀연히 떠나버린 것일까?" 짙은 의혹이 일었다. "나에게 한 말일까? 전생에 이어온 업보…… 그것을 풀어야 하고 또 알아야 한다는 그 말은……" 용천음은 입술을 깨물며 창 모서리를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그들은 나에게 너무나도 많은 궁금증을 남겨두고 떠나버렸다." 심광미령묘!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비춰 보았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들은 나에 대한 어떤 확신을 가지고 떠난 것이 분명하다." 용천음의 눈빛이 어느 한 순간 빛을 발했다. "월백…… 묘백산에 있는 월백이라 했던가?" 그는 밝게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래…… 어차피 천하를 주유해 보겠다는 결심을 했던 나…… 월백이라는 곳을 찾아가 모든 의문을


풀어보리라." 허공 가득 미소짓는 용비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내가 월백에 간다는 말은 아버님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내 과거가 어떻다는 것을 알았다 해도…… 나는 결코 지금의 아버님을 배신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 줄기 눈부신 햇살이 용천음의 두 눈 가득 밀려들고 있었다. 5 "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좋겠지……" 용비후는 식어버린 찻잔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버님……" "……" 용비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용천음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있어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너 하나 뿐이다. 그러한 너를 모진 세파에 보내 놓고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애비가……" 용천음은 고개를 떨구었다. "아버님……" 용비후는 문득 시선을 허공으로 던졌다. "천하를 주유하며 세상의 온갖 일들을 보고 느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보다 많은 것을 깨달을 수가 있을 테니까……"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 했던가! 용비후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후 그는 담담하게 입술을 떼었다. "네 결심을 바꿀 수는 없느냐?" 용천음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남아(男兒)로서 한 번 한 결심이옵니다." "음……" 용비후는 무거운 신음을 토했다. "어쩌면 이 애비가 너무도 많은 것을 너에게 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너에게 유독 많은 것을 원했다고도 할 수 있지……" "그것은 아버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용비후는 조용히 웃었다. "그렇게 이해해 주니 고맙구나." "……" "남아로서의 결심이라면 이 애비도 더 이상은 만류하지 않겠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용비후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용천음을 응시했다. "네가 떠난 다음…… 이 애비는 대명십육성(大明十六省)에 전갈을 띄울 생각이다. 네가 이르는 곳에 불편함이 없도록……" 용비후가 친히 대명십육성에 전갈을 보낸다! 그리하여 용천음이 이르는 곳에 조금치의 불편도 없게 만들겠다! 용비후가 누군가, 당금 대명을 한 손에 거머쥐고 뒤흔드는 최강의 권력자가 아닌가? 그러한 용비후의 아들이 나타난다면 대명십육성이 아니라 대명천지가 발칵 뒤집히고 말 것이다. 용천음은 내심 크게 감격했으나 공손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하오면 오히려 소자가 더 불편하게 되옵니다." 용비후는 빙그레 웃었다.


"하여튼 이 애비는 그렇게 할 것이니 그 문제 만큼은 더 이상 거론하지 말도록 하자꾸나." "알겠습니다, 아버님……" "……" 용비후는 우수에 찬 듯하면서도 몹시 복잡한 눈빛으로 한동안 용천음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문득 그는 느릿하게 창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달(月), 한 조각 편월(片月)이 남긴 잔광이 잘게 부서져 창문 안 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용비후는 다시 탁자 위의 식은 찻잔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찻잔을 들어 천천히 입가로 가져가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네가 떠난 뒤 며칠이나 견딜 수 있을까? 그 밀려드는 적적함을……" 그 순간 용천음은 용비후의 두 눈 깊숙한 곳에 어떤 우수의 그림자가 스쳐가는 것을 보았다. 동시에 용천음은 갑자기 마음 한 구석이 찡해오는 것을 느꼈다. (아버님……) 기억하기에 용천음이 성장하면서 지금까지 용비후로부터 이처럼 갑작스럽고 묘한 감동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알 수 없는 그만의 감동이 밀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6 이별(離別)한다는 건,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이건 우선은 슬픈 법이다. 부자지간의 이별이란 그래서 더 더욱 슬픈 것이다. 눈부신 백마(白馬)에 몸을 싣고 아련히 멀어지는 자식의 뒷모습을 보면서 용비후는 저녁 햇살이 다 할 때까지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눈물이 나오려는가? 그는 고개를 들어 연분홍색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좋겠지……" 스치듯 한 마디를 던진 그는 두 눈을 내리감으며 허전한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뿌리를 찾는다는 것……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야……" 용비후는 다시 한 번 용천음이 떠난 그곳을 바라보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 힘없는 어깨 위로 한 줄기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다. 제 6 장 恐怖의 血禁魔令 1 亂搖白羽扇(란요백우선) 裸體靑林中(나체청림중) 脫服卦石壁(탈복괘석벽) 露頂絲松風(노정사송풍) 衆鳥高飛盡(중조고비진) 孤雲獨去閑(고운독거한) 相看兩不厭(상간양불염) 只有敬亭山(지유경정산) 백우선 부채질 귀찮아, 숲 속에 빈몸으로 들었다. 겉옷도 벗어 돌벽에 걸고, 송풍에 머리 훌치어 식히니…… 뭇새들 높이 날아 사라진 하늘에,


한 조각 외로운 구름 유유히 떠서 흐르네. 서로 마주 보아도 물리지 않음은, 오로지 경정산 너 뿐인가 하노라…… 밤(夜)이 깊어 달빛이 휘영한 이 시각, 경정산(敬亭山) 깊은 곳에서 시(詩) 한 수가 흘러 나왔다. 용천음, 승상부를 떠난 지 사흘 만에 이곳 경정산에 도착한 그는 푹신한 풀잎에 누워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헤아리고 있었다. 하늘을 지붕삼고 땅을 베개삼아 노숙한다는 말…… 난생 처음 노숙이라는 것을 해보는 용천음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시 한 수가 절로 읊어진 것이다. 팔베개를 하고 누운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는 용천음의 옆에는 한 병의 술과 먹음직스러운 안주가 놓여 있었다. 더 이상 무엇이 부러울 텐가?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있고 술(酒)과 시(詩)가 있으니 그야말로 남들이 다 부러워 하는 풍류공자(風流公子)가 아니겠는가? "객점에 들지 않기를 정말 잘했어……" 용천음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제부터는…… 지금까지 못해본 것들을 마음껏 해볼 생각이다." 제멋대로 행동에 보겠다는 뜻인가? 아니면 이 넓은 강호(江湖)가 제집 안방인 줄 착각하고 있는가? 용천음은 고개를 약간 돌린 뒤 옆에 있는 술병을 집어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닭다리를 쭉 찢으려는 순간, "……?" 이 무슨 괴변인가? 돌연 닭 한 마리가 통채로 두둥실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용천음이 놀랄 겨를도 없이 허공에 뜬 통닭은 발이 달리기라도 한 듯 어느 한 곳을 향해 휙 날아가 버렸다. 맞은편 숲 속이었다. (저……) 용천음은 입을 떡하니 벌린 채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때, 휘휘휘휙----! 돌연 그 숲 속에서 무수한 물체들이 날아와 용천음의 코 앞에 떨어졌다. (이…… 이건!) 그 물체를 확인하는 순간 용천음은 기겁을 하고 말았다. 보라! 그것들은 무수한 닭뼈다귀가 아닌가? 방금 숲 속으로 들어간 닭 한 마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뼈다귀만 남아 되돌아온 것이다. 한데 그 다음, 두둥실…… 둥실…… 아직 바닥에 있던 안주들이 허공으로 떠오르는가 싶자 이내 휙휙 맞은편 숲 속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 용천음은 일순 모골이 송연해가는 것을 느꼈다. (귀…… 귀신의 장난?) 그가 언제 이런 신기한 일을 본 적이 있겠는가?


마지막 남아 있던 술병마저 낼름 숲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 후, 빈 껍데기만 남은 술병이 다시 날아와 용천음의 앞에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우라질! 입만 버렸네." 숲 속에서 지극히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누구……?) 용천음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맞은편 숲을 바라보았다. 찰나 숲 속 밑으로 하나의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왔다. 무엇이 귀찮아 머리통만 내밀고 보는가? 노인(老人)이었다. 석삼 년은 감지 않은 듯 꾀죄죄하고 지저분한 머리에는 날아가던 까마귀가 자기집으로 착각하고 내려 앉아 까악까악 울 정도였고, 대패로 밀어내야 간신히 피부가 드러날 정도로 때가 잔뜩 낀 얼굴은 윤기마저 자르르 흐르고 있었다. 그 뿐이면 말도 안한다. 두 눈동자는 무엇이 불만스러운지 제멋대로 사방을 향해 달아나 있었는데, 이를 테면 사팔뜨기였다. "……!" 용천음이 멍청한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고 있자니 노인이 인상을 팍 구기며 버럭 고함을 쳤다. "우라질 자식! 뭘 그렇게 째려보냐?" "……?" 노인은 한 마디 욕설을 퍼붓고는 뽀르륵 기어나왔다. 한데, 이 무슨 해괴망측한 몰골이단 말인가? 까짓것 얼굴이야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마땅히 입어야 할 남자 바지는 어디가고 누가 입다 버렸는지도 모를 여자 치마를 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불행 중 다행으로 상의는 남자옷이었지만 그나마도 납작 짓눌려진 젖꼭지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다 떨어진 누더기였다. 용천음은 어이가 없는 듯 노인의 발을 쳐다보다가 다시 한 번 기겁하고 말았다. (여자 신발이다!) 용천음은 두 눈을 멀뚱거리며 노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노인은 커다란 보따리를 질질 끌며 용천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저 보따리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이러한 궁금증이 용천음을 압박해 왔다. 노인은 보따리 위에 척 걸터 앉으며 힐끔 좌측을 가리켰다. "저거 타고 갈 거냐?" 용천음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얼 말입니까?" 노인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저거 말이다! 저거……" "……?" 용천음이 바라보니 좌측 나무에 묶어 놓은 백마(白馬)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노인은 입맛을 몇번 쩍쩍 다시면서 약간은 민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웬만하면 걸어가고 잡아 먹자, 우리……" (자, 잡아 먹자고……?)


용천음은 대경실색하며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노인은 힐끗 쳐다보며 히죽거렸다. "자식, 놀라기는……" "……!" 용천음은 한동안 노인을 쳐다보다가 그의 몰골이며 행동, 말투 등을 떠올리고는 그만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하하……!" 순간 노인은 팩 고개를 잡아 돌리며 정말 잡아먹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용천음을 쏘아보았다. "이 우라질 놈아! 남은 배고파 죽겠는데 웃기는 왜 웃어? 누구 약 올리는 거야?" "……!" 용천음은 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방금 제 식사를 드셨지 않습니까?" "우라질 놈아, 방금 말했지 않느냐? 입만 버렸다고……" (생긴건 바싹 말라 가지고 먹기는 굉장히 먹는 모양이군.) 노인은 군침을 꿀꺽 삼켜가며 곁눈질로 힐끔힐끔 백마를 쳐다보았다. "아쉬운 대로 저 놈 한 마리면 우선 허기는 때울 텐데……" 진정으로 하는 말인가, 아니면 농담으로 하는 말인가? 용천음은 빙그레 웃었다. "농담을 무척 좋아하시는군요." 찰나 노인이 두 눈을 부릅떴다. "뭐야? 농담이 어쨌다구? 이런 우라질 놈이 있나? 야, 이 자식아! 노부가 할 일이 없다고 사타구니에 솜털도 가시지 않은 너 같은 어린 놈하고 농담하고 앉아 있냐?" "……?" 용천음은 대꾸도 못한 채 물끄러미 노인을 보고 있다가 문득 그가 깔고 앉아 있는 보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한데…… 그 보따리는 무엇입니까?" "아! 이거 말이냐? 팔 물건들이지." 용천음이 얼굴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노인장은 장사꾼이십니까?" "장사꾼? 그래…… 뭐 그런 셈이지." "무엇을 파십니까?" 노인은 어깨를 쭉 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돈 주고도 구할 수 없는 희귀한 물건들이지. 아마…… 노부 아니면 그런 물건 파는 사람 이 세상에 없을게야. 암! 없구말구……" (대체 무엇을 팔기에……?) 용천음은 몹시 궁금한 눈빛으로 보따리를 응시했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노인은 기이한 미소를 흘리며 넌지시 말했다. "네놈한테 얻어 먹은 것도 있고하니 하나쯤은 너에게 줄 마음도 있다." "정말입니까?" "대신……" "대신?" 노인은 힐끗 백마를 가리켰다. "저 말하고 바꾸는 게야. 어떠냐? 노부도 평범한 것 말고 쓸만한 것으로 줄테니 말이다." 용천음은 주춤했다.


"백마를 잡아 먹으려고 그러십니까?" "이놈아! 잡아먹든 삶아먹든 그것은 내 맘이야." 용천음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자식……! 너 정말 생각 잘했다." 노인은 말을 끝낸 뒤에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아니 보따리 주둥이만 빠끔 벌린 채 머리와 손을 쑤셔 넣고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뒤지며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얼마 후, "여기 있었군." 노인은 머리와 손을 쑥 잡아 빼며 용천음에게 어떤 물건을 휙 집어 던졌다. "받아라, 이놈아! 이건 노부가 특별히 아끼는 진품인데 돈 주고 살래도 살 수 없는 물건이야." 노인이 던진 물건은 용천음이 미처 받기도 전에 얼굴에 척하니 달라붙었다. 일순 용천음으로서는 난생 처음 맡아보는 기이한 향내가 코를 간지럽혔다. (무척 작고 부드러운데……? 헝겊으로 만들어진 것 같어.) 그는 엉겁결에 그것을 잡아 살펴보았다. (이…… 이…… 이건……?) 그는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뜨고는 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고, 고의다! 여자의 고의……!) 용천음은 안면 근육을 씰룩거리며 노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노인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잘 간직해 둬. 그게 누구 고의인 줄 알아? 당금무림 최고의 고수라는 신검제(神劍帝) 영호표(令狐表)의 딸년 거야." (신검제 영호표의 딸……?) "눈알이 돌아가도록 아름다운 계집이지. 강호에서는 그녀를 신주제일미(神州第一美)라고 부를 정도로 절세적이야. 월영검희(月影劍姬) 영호수혜(令狐秀慧)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니까……" (월영검희 영호수혜……?) 용천음은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는 고의를 내려다 보았다. 왠지 찌르르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노인을 바라보았다. "하면…… 노인장께서는 여인의 고의만을 파는…… 그런 장사를 하고 계신 겁니까?" "남는 게 없어. 기를 쓰고 벗겨내 봐야……" "벗기다니? 무슨……" "답답한 놈! 몰래 훔치는 것을 말하는 게다." (몰래 훔쳐? 안에 입고 있는 그것을……) 듣기에는 쉬운 것이나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렇다면 그 보따리에 있는게 모두……!" "몽땅 고의다. 난 다른 건 거래하지 않아……!" 노인은 힐끔 용천음을 응시했다. "너도 필요하면 부탁해라. 어떤 여자의 고의든 간에 청탁받은 지 사흘 안에 예쁘고 아름다운 그녀의 고의를 가져다 줄테니까……" 노인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크크크…… 청탁만 들어온다면 당금 황제의 애첩인 다혜왕후(多慧王后)의 고의라 해도 감쪽같이 벗겨올 나다!" 문득 노인은 용천음의 어깨를 툭 치며 일어섰다.


"그럼 노부는 바빠서 이만 실례하겠다." 그는 뒤퉁뒤퉁 백마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용천음은 그를 보며 물었다. "한데…… 노인장의 존성대명은 어찌 되십니까?" "자식, 문자 쓰네." "……?" "그냥 괴도(怪盜)라고만 알아둬." (괴도……?) 노인은 말고삐를 푼 뒤 커다란 보따리를 말 위에 척 올려 놓았다. "한데 걱정이란 말이야……" 노인은 말고삐를 잡아 끌며 산 언덕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소수옥녀(素手玉女) 사유란(史瑜蘭)…… 그 계집의 고의를 어떤 방법으로 벗겨낸다지?" 노인은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계집의 고의만 벗겨내 상품으로 내놓기만 하면 최고의 인기를 누릴 텐데……" (소수옥녀 사유란……?) 용천음은 멀어져 가는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그때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워낙 천방지축 날뛰는 계집애라 쉽게 벗길 수가 있어야지. 어쨌든…… 미리 선포는 했으니 벗기긴 벗겨야지……" 노인의 모습은 달빛 저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소수옥녀 사유란. 무림이 좁다하고 천방지축 날튄다는 그 여자는 누구란 말인가? 그녀를 상대로 괴도는 과연 고의를 벗겨낼 수 있을 것인지…… (정말 변태같은 영감이로군.) 용천음은 쓴웃음을 지으며 문득 아직까지 손에 쥐고 있는 작고 예쁘장한 고의를 내려다 보았다. (버릴까……?) 하나 그러기에 왠지 망설여졌다. 그렇다고 남자가 여자의 소중한(?) 고의를 품 속 깊이 간직하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신주제일미 월영검희 영호수혜라고 했던가?) 용천음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차후 그녀를 만나서 이 고의를 내밀면 그녀는 어떤 표정이 될까?) 무슨 뚱단지 같은 생각인가? 단칼에 목이 날아가고 싶은가? 용천음은 빙그레 웃으며 영호수혜의 고의를 달빛에 비춰 보았다. "얇아도 너무 얇군. 달빛이 그대로 들여다 보여." 무슨 말을 하자는 겐가? "이런 걸 입으면 입으나 마나지. 훤히 들여다 보이긴 마찬가질 테니까……" 용천음은 고의를 차곡차곡 접어 쓰윽 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잘만하면 재미있겠어……" 그는 만면에 장난기 서린 미소를 지으며 팔베개를 하고 벌렁 드러누웠다. 드러누운 그의 입술 사이로 다시금 한 줄기 시(詩)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美人捲珠簾(미인권주렴) 深坐賓蛾眉(심좌빈아미) 但見淚痕濕(단견루흔습)


不知心恨誰(부지심한수) 예쁜 여인 주렴 걷어 올리고, 깊이 앉아 눈썹 찡그리어라. 눈물 자죽 촉촉하니 내보이나, 뉘를 한하나 가슴 속은 알 수 없네. 2 일신에는 눈부신 청의(靑衣), 피(血)를 흠뻑 뿌려놓은 듯한 혈립을 쓰고 등 뒤에는 활처럼 휘어진 한 자루의 낭월도(狼月刀)를 비 스듬히 메고 있는 이 사람, 유난히도 길고 매끄러운 그의 손가락은 아침 내내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톡톡……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는 그 소리는 열빈객잔(悅賓客棧)을 싸늘한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다. (무슨 손(手)이 저렇게 고울까? 계집애처럼……) 점소이 곽칠(郭七)은 간혹 두려운 시선으로 사내의 손을 보며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 사내의 섬뜩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두 손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희고 아름다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 이렇게 표현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때 조용히 탁자를 두드리고 있던 사내가 곽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봐……" "……!" 등골을 잡아 뽑는 듯한 차가운 음성에 곽칠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급히 허리를 조아렸다. "마, 말씀하십시오. 손님……" 사내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몇시 쯤 되었는가?" "……?" 곽칠은 느닷없는 질문을 받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정오(正午)가 막 지난 듯싶습니다." "……" 사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채 다시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탁자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앞으로 세 시진 후면 백리향(百里香)의 향기가 사라진다. 그 안에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무슨 소린가? "철검혈리 나래영, 네놈이 우리 손아귀에서 얼마나 더 도망칠 수 있는지 두고 보아야겠다." 한데 그때였다. 스윽……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마치 뭉쳐진 안개가 내려 앉듯이 세 개의 그림자가 사내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나타나는 즉시 사내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삼혈비(三血匕)입니다." 삼혈비! 일신에는 핏빛의 혈삼(血衫)을 입고 있었으며 챙이 넓은 죽립(竹笠)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서른 여섯 자루의 혈비(血匕)를 허리에 빙 둘러차고 있었다. 그들이 나타나는 순간 곽칠은 혼백이 빠져나갈 듯 놀라고 말았다. 그들의 분위기도 그렇거니와 유령처럼 흔적도 없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


사내는 지루하도록 느리게 입술을 떼었다. "어찌 되었나?" 가운데 인물이 말했다. "찾아냈습니다." "찾아…… 냈다고……?" 사내의 두 눈에서 돌연 엄청난 광채가 뿜어졌다. 그것은 모골이 송연하도록 끔찍한 독사의 눈빛이었다. 삼혈비는 사내의 그런 눈빛을 대하는 순간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사내의 시선이 처음으로 삼혈비에게 못박았다. "이상한 일?" "백리향의 향기를 따라 추적한 결과…… 그것을 가지고 있는 철검혈리 나래영이 아닌 엉뚱한 소년이었습니다." "소년?" "그렇습니다." "소년이라……?" 사내는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것이 어떤 경위로 소년의 손으로 넘어갔는지 모르나 그것은 관계없다. 우리는 그것만 얻어내면 그만이니까……" 말을 하면서 사내는 천천히 일어났다. "가자……" 사내를 필두로 그들의 모습은 열빈객잔에서 사라졌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곽칠의 안색은 잿빛으로 질려 있었다. 3 저녁이 되면서 가랑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용천음은 안휘성(安徽省)을 빠져나와 북쪽의 관도(官道)를 따라 걷고 있었다. 그는 촉촉히 젖어내리는 자신의 옷을 보며 문득 야릇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천하제일미라고 일컬어지는 계집애의 고의 한 장과 백마를 바꾸었다?) 고금사(古今史)에 남을 기사(奇事)가 아닌가? (정말 기분이 묘하군. 계집애의 고의를 품고 다니니……) 남자가 여자의 고의를 품 속 깊이 간직하고 다닌다? 정말 해괴망측한 일이었다. (어떻게 생겼을까? 월영검희 영호수혜라고 하는 그 여자…… 이 고의 만큼이나 곱고 부드러울까?) 용천음은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씨익 웃고 말았다. "고의 한 장 가지고 별 생각을 다 하는군." 그는 생각을 떨쳐 버리며 바삐 걸음을 떼어 놓았다. "……!" 한데 그 순간, 무엇을 보았는지 용천음은 주춤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십여 명의 인물들이 정면에서 관도를 막은 채 우뚝 버티고 있었다. 맨 앞에는 유난히도 아름다운 손을 가진 낭월도의 혈립인(血笠人)이 가랑비 속에 조용히 서 있었고, 그 뒤로는 삼혈비와 붉은 복장을 한 예닐곱 명의 섬뜩한 인물들이 죽음처럼 늘어서 있었다. (웬 사람들이……?) 용천음은 자신도 모르게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혈립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용천음을 직시했다. (헉……!)


용천음은 그의 눈빛을 대하는 순간 호흡이 컥 막히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도, 독사의 눈빛이다!) 혈립인은 말없이 용천음을 직시하다가 불현듯 섬세한 옥수(玉手)를 불쑥 내밀었다. "다오." "……?" 용천음은 혈립인이 내민 손을 바라보며 의아한 듯이 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네가 가지고 있는 물건!" "……!" 혈립인은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지독무심한 눈빛으로 용천음을 응시하며 생명이 없는 사람처럼 입술만 달싹였다. "그 물건에는 백리향이 묻어 있다. 때문에 그 물건이 어디에 있든 우리는 찾아낼 수 있다." (백리향……?) 용천음은 자신도 모르게 품 속을 더듬었다. (백리향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향기가 멀리까지 뻗치는 모양이구나. 어쩐지 향기가 좋다 했더니……) 무슨 소린가? 용천음은 지금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것을 원한단 말인가?) 이때 삼혈비 중 한 명이 반 보 앞으로 나섰다. "속하가 처리하겠습니다." 죽이겠다는 겐가? 일순 혈립인이 조용히 손을 들어 저지했다. "그럴 필요 없다. 무공을 모르는 서생(書生)을 상대로 무력을 쓸 필요는 없어." "……!" 앞으로 나섰던 자는 흠칫 놀라며 혈립인을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독사보다 더 지독하고 추호의 용서도 없는 분이 어찌 오늘은……) 그는 무심코 용천음을 바라보았다. 혈립인은 다시 한 번 용천음에게 말했다. "그 물건은 너에게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가지고 있으면 해가 될지언정……" 용천음은 주춤하다가 입을 열었다. "무엇 때문에 이것을 요구하는 것이오?" 혈립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굳어졌다. "필요하니까……" "……" 용천음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필요하다? 이것이……?)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주지 않으면 무척 불리한 일이 발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나 역시 굳이 이것을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어……) 생각이 이에 미치자 용천음은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당신들이 요구하는 것을 주겠소. 대신 나를 무사히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시오." 혈립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지." 용천음은 곧 품 속에서 물건을 꺼내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여기 있소. 가져 가시오." 순간, 혈립인을 비롯한 나머지 인물들은 용천음이 내민 물건을 보는 찰나 안면 근육을 부르르 떨었다. 맙소사----! 그가 내민 것은 월영검희 영호수혜의 고의가 아닌가? 신주제일미라고 불리워지는 미녀의 고의가 사람들 앞에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혈립인의 한쪽 눈이 위로 치켜졌다. "지금 나하고 장난하자는 거냐?" 용천음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왜 저러지? 달라고 해서 준건데……) 그는 손에 들고 있는 고의를 바라보았다. 일순 혈립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배짱이 좋은 건지 모르고 그러는 건지는 모르나 우리가 요구한 것은 그 따위 계집의 냄새 나는 고의가 아니다!" (이 물건이 아니라고? 백리향을 묻혀 향기가 나게 한다고 했는데…… 이 물건이 틀림없지 않은가?) 이를 어찌하는가? 용천음은 그들이 원하는 물건이 영호수혜의 고의인 줄 지금까지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리향을 묻혀 놓았다. 다시 말해 고의에서 향기가 나도록 고의에 뿌린 향수를 뜻하는 것으로 알았고…… -그 물건은 너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 남자가 여자의 고의를 가지고 있어봐야 어디에 쓰겠는가? 자칫하면 망신만 당하지…… 용천음은 지금까지 그들이 말한 게 고의를 가리키는 것인 줄 알았다. (한데 이게 아니라면 나에게서 무엇을 원한단 말인가?) 용천음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혈립인이 등 뒤에 서 있는 삼혈비를 향해 말했다. "임혈(林血)!" "옛!" 삼혈비 중 가운데 있던 인물이 쓱 걸어나왔다. 아니 걸어나왔다고 느끼는 순간 그의 신형은 번쩍하는 사이에 용천음 앞까지 쏘아가고 있었다. "……!" 용천음은 느닷없는 상황에 깜짝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찰나, 위이이---- 잉! 삼혈비 중 한 명은 교묘한 자세로 손바닥을 뒤집자 장심(掌心)으로부터 한 줄기 무시무시한 장력(掌力)이 쏘아져 나갔다. 퍼---- 엉! (윽……!) 용천음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가 사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것을 보며 혈립인은 무심한 음성으로 말했다. "철검혈리 나래영이 가지고 있던 금황혈시, 그것이 어찌하여 네 손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묻지 않겠다. 금황혈시만 준다면……"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한 용천음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크게 놀랐다. (아……! 저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금황혈시였구나.) 용천음은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이들은…… 철검혈리 나래영을 추적했던 그 정체 모를 인물들이란 말인가?) 그는 문득 감철생이 떠나면서 남겼던 말을 떠올렸다. -문제는 과연 어떤 자들이 나래영을 쫓았느냐는 것이오.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상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또 어떤 신분으로 공자에게 접근할지 모르오. 결국 감철생이 말한대로 그들이 나타난 것이다. 금황혈시를 노리고…… 혈립인은 지독히 싸늘한 눈빛으로 용천음을 응시하며 임혈에게 명령했다. "놈을 뒤져라." "예!" 임혈은 성큼 용천음에게 다가가 손을 쭉 뻗었다. 한데 그의 손이 막 용천음의 품 속으로 쑤시고 들어가려는 순간, 쐐애---- 액----! 푸욱! 돌연 어둠을 꿰뚫고 하나의 검은 물체가 날아와 용천음과 혈립인 사이에 깊숙이 꽂히는 것이 아닌가? (윽……!) 혈립인은 물론이거니와 손을 뻗어가던 임혈과 나머지 고수들도 느닷없이 출현해 박힌 물체를 보는 순간 일제히 흠칫 놀랐다. 그리고 그 물체를 확인하는 찰나, "혈, 혈금마령(血禁魔令)----!" 그들은 심장이 덜컥 내려 앉을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크게 두 걸음씩 물러섰다. "……?" 용천음 또한 이을 악물며 그 물체를 바라보았다. 땅에 깊숙이 박힌 물체, 마치 불장(佛杖)처럼 생긴 그것은 전체가 소름끼치는 먹빛이었다. 또한 맨 윗부분에는 둥그런 해골형상이 있었는데 쩍 벌린 입 사이로 피처럼 끈끈한 액체가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다. 실로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섬뜩한 물건이었다. 어둠 속에서 더욱 스산한 빛을 뿌리고 있는 해골 형태의 표기(標旗)! 혈립인을 제외한 나머지 고수들은 갑자기 급살이라도 맞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떨며 황망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런 그들의 이마에는 굵은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으며 두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대관절 혈금마령이 무엇이기에 그들이 이토록 겁에 질린단 말인가? (혈금별노(血禁別老)……! 그 백발의 여마귀(女魔鬼)가 아직도 살아있단 말인가?) 혈금별노---- 백발의 여마귀! 백 이십 년 전 천하무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던 희대의 여마귀! 그녀의 혈금마령이 나타나는 곳에서는 어떠한 이유를 막론하고 피를 볼 수가 없겠끔 되어 있다. 피의 금지령(禁止令)----! 그것이 혈금마령이었으며 그것을 다스리는 노귀(老鬼)가 바로 혈금별노였던 것이다. 문제는 이미 사십여 년 전에 자취를 감추었던 그녀가 왜 갑자기 나타났느냐 하는 점이었다. 문득 혈립인은 주위를 세세히 살피는 한편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무림의 대선배님께서 왕림하신 줄도 모르고 영접이 늦은 점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일순 올빼미가 흐느끼는 듯한 소름끼치는 음성이 사방에서 울려나왔다. "키키키키…… 노신(老神)을 알고 또 혈금마령의 유래를 안다면 그 자리에서 썩 꺼져야 하지 않느냐?" 속이 뒤집힐 정도로 역겨운 음성을 들으며 혈립인은 다시 한 번 예를 갖추었다. "하오나…… 후배들은 아직 할 일이……" "키키키키…… 혈금마령의 율법(律法)을 어기고 피를 흘려야겠단 말이지?"


"……!" "키키키키…… 사십 년 만에 다시 무림에 나오니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들이 무척이나 많이 늘었군." (도무지 어느 방향에서 말을 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혈금별노의 귀기스러운 음성은 동쪽에서 들려오는가 싶으면 다시 서쪽에서 들렸고, 그런가 싶으면 사방에서 한꺼번에 울리듯 들려오는 것이었다. (천리회음령(千里回音靈)……! 이백 년의 공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전설의 천리회음령을 펼치고 있단 말인가?) 혈립인의 눈언저리가 가는 경련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노귀신! 신비한 척하지 마라!" "사십 년 전의 무림과 지금의 무림을 같이 비교하지 마라!" 파앗! 임혈을 비롯한 나머지 이혈비(二血匕)가 한 소리 외침을 토하며 벼락같이 신형을 날려 좌측의 우거진 송림(松林)을 향해 날아갔다. 쾌(快)----! 불가사의하도록 빠른 경공이었다. "괘씸한 것들!" 돌연 송림 안에서 분노의 음성이 터져나왔고, 찰나 한 줄기 눈부신 혈광(血光)이 송림 안에서 발출되어 나왔다. 동시에 한 줄기 혈광은 삽시간에 세 줄기로 분리되더니 형언불가 의 속도로 삼혈비를 향해 덮쳐갔다. (허억!) "……!" 피하고 어쩌고 할 겨를도 없었다. 세 줄기 혈광은 허공에 떠 있는 삼혈비의 몸에 여지없이 격중된 것이다. 일순, 퍼어어억----! 한 소리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삼혈비의 몸뚱아리가 허공에서 산산이 찢어지며 혈우(血雨)를 뿌렸다. 오오, 이 무슨 끔찍한 일인가? "키키키키…… 내 오늘 네놈들을 톡톡히 징계하겠다." 혈금별노의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들렸고 연이어 아무런 빛도 없고 소리도 없었는데 공포에 질린 채 서 있던 혈립인의 수하들이 돌연 머리통이 수박처럼 깨지는 것이 아닌가? (저럴…… 수가……?) 혈립인은 대경실색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대관절 혈금별노는 어떠한 괴공으로 그들의 머리통을 박살냈단 말인가?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고…… (무서운 기공이다. 과거 소문 듣던 것보다 족히 세 배 이상은 강해진 것 같다.) 혈립인은 내심 경악하며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노선배! 숨어 암수(暗手)를 펼치는 것은 소인배들이나 하는 짓이오. 모습을 나타내시오!" 그는 말을 하면서 등 뒤의 낭월도를 천천히 잡아갔다. "건방진 놈! 너의 사부(師父)인 만사십제(萬邪十帝) 천수비(天帥 飛)조차 노신 앞에서는 그 따위로 말하지 않거늘 네놈이 감히……" 혈금별노의 분노한 음성에 혈립인은 흠칫했다. (혈금별노가 어찌 사부님을……?) 그가 놀라고 있을 때 혈금별노의 음성이 재차 들려왔다.


"전례대로 한다면 마땅히 네놈의 사지를 잘라야 하나 네놈 사부의 얼굴을 봐서라도 이번만은 용서하겠다. 그러니 썩 사라져라!" "……!" 혈립인은 주춤거렸다. 혈금별노의 말대로 자기의 사부와 그녀가 안면이 있다면 혈립인으로서는 섣불리 도(刀)를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이때 다시 혈금별노의 올빼미 같은 음성이 다시 울려왔다. "다 큰 계집애가 시집갈 생각은 안하고 천방지축 날뛰고 다니다니……" "……!" 그 말을 듣는 순간 혈립인은 깜짝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얼굴에 뒤집어 쓴 인피면구는 일반 사람은 속일 수있을지 모르나 고인(高人)들의 눈은 속일 수가 없어. 다음부터는 좀 좋은 인피면구를 쓰고 다녀라." 혈립인은 재차 놀란 듯 몸을 가늘게 떨었다. 혈금별노의 싸늘한 음성이 허공을 울렸다. "가서 네 사부에게 전해라. 조만간 노신이 한 번 찾아 가겠다고……" 혈립인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노선배님과 제 사부님은 어떤 사이십니까?" "어떤 사이냐고? 키키키……" 혈금별노는 기이하게 웃은 뒤 말했다. "그렇고 그런 사이지……" "……!" 문득 혈금별노의 음성이 차갑게 흘러나왔다. "아울러 이 말도 전해라. 만사십제 천수비가 이끄는 천예비전(千藝秘殿)이 비록 최강이라고는 하지만 결코 뜻한바 대로 무림을 정복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찰나 혈립인의 안면 근육이 가늘게 떨렸다. 무척 놀란 것 같았다. (사부님의 백년대계까지 알고 있다니……) 혈금별노의 음성이 숲 속을 진동했다. "되었다. 이제 그만 가 보아라." "……" 혈립인은 잠시 주저하는 듯하면서 힐끔 용천음을 쳐다보았다. 용천음은 깊은 상처를 입고 있는 듯 상체만 일으킨 채 왼팔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오늘 혈금별노와 있었던 일은 사부님께서 해결할 것이다. 그리고 저 놈이 가지고 있는 금황혈시는……) 혈립인의 눈빛이 싸늘하게 꿈틀거렸다. (혈금별노가 있는 지금 그것을 뺏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좋다! 일단 저자의 얼굴을 알고 있으니 다음 기회에 탈취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혈립인은 빠르게 생각한 뒤 숲 속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그럼 노선배님의 말씀 그대로 사부님에게 전하겠습니다." "……" 혈립인은 예를 마친 뒤 신형을 날렸다. 아니 신형을 날리려는 듯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용천음을 바라보았다. 용천음도 그의 눈빛을 정면으로 보았다.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저 눈빛은……)


용천음은 그의 눈동자 깊숙한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문득, "아……" 혈립인은 허공을 응시하며 탄식과도 같은 한숨을 내쉰 두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리고는 동쪽 하늘 저 멀리로 까마득히 사라져 갔다. (상당히 익숙한 눈빛이었어……) 용천음이 생각하기에 전에도 그런 류의 눈빛을 본적이 있는 것 같았다. 벽소희 그녀에게서…… 용천음은 팔로 땅을 짚은 채 몸을 일으켰다. 일순, "윽……!" 그는 조금 전 임혈에게 가격당한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오는 고통을 받으며 힘없이 풀썩 쓰러졌다. 용천음은 바로 옆에 피떡이 되어 나뒹굴고 있는 임혈의 시체를 바라보며 고소를 떠올렸다. (별거 아닌 인물로 알았더니…… 제법 쓸만한 장력을 지닌 인물 이었군.) 용천음은 잠시 진정을 취한 뒤에 숲쪽을 향해 물었다. "소생의 목숨을 구해 주신 점 어르신께 깊이 감사합니다." 순간, "킥킥킥……!" 돌연 숲 속에서 기이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용천음은 이에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뭘 그렇게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어요? 그런 표정을 하니까 꼭 바보같애……" 천진하면서도 아리따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 이거……?) 용천음은 올빼미같던 혈금별노의 음성은 간데없고 엉뚱하게도 은방울 같은 음성이 흘러나오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이때, "호호호호홋……" 귀를 즐겁게 하는 교소와 함께 하나의 인영이 숲 속에서 허공으로 쭉 솟아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깃털처럼 가볍게 용천음 앞에 떨어져 내렸다. 제 7 장 怪盜와 少女 1 소녀(少女)…… 일신에는 봄날을 연상하게 만드는 화사한 채복(彩服)을 입었으며 머리는 궁장형으로 틀어올렸고 달빛보다 더욱 영롱한 눈동자를 가진 십 육칠 세 가량의 소녀였다. 살짝 화장기가 감도는 얼굴은 꽃처럼 화려했으며 은싸라기 같은 달빛에 흔들리는 두 귀의 귀걸이는 몹시도 앙증맞았다. 실로 선녀(仙女)가 하강한 듯 아름다운 묘령의 소녀였다. (이…… 이렇게 젊은 묘령의 여자가 무림의 대선배……?) 용천음은 상처의 아픔도 잊은 채 멍청히 채복의 소녀를 올려다 보았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행여 노파가 소녀로, 아니 여우가 여자로 둔갑한 것이 아닌가! "놀라셨죠?" 채복소녀는 볼우물을 움푹 패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용천음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조금전…… 혈금별노라고 하는 분은 어디 가고…… 낭자가……?" 소녀는 옥같은 손으로 입을 막으며 웃었다. "킥킥킥…… 그 노파가 바로 나예요." "예?" 용천음은 혼비백산하며 주춤주춤 앉은 채로 뒤로 물러갔다. "대체…… 무슨 무공을 익히셨기에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젊어 보이십니까?" 일순 채복소녀는 되레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약간 토라진 듯한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늙긴 누가 늙어요? 난 이제 겨우 열 일곱 살이란 말이예요!" 그러면서 팔짱을 끼며 팩 옆으로 돌아섰다. (여, 열 일곱 살? 겨우……) 용천음은 도무지 정신이 혼동되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혈금별노는……?" "혈금별노는 뭐가 혈금별노에요! 다 내가 흉내낸 것 뿐인데……" "……!" 세상에 새파란 아가씨가 천하제일의 여마귀라는 혈금별노의 흉내를 내다니…… 채복소녀가 문득 아직까지 땅에 박혀 있는 혈금마령을 쑥 뽑아들었다. "호호홋…… 생각만 해도 재미있어. 당금무림 최고의 냉나찰(冷羅刹)이라고 불리우는 그 계집이 내 말 한 마디에 칼도 뽑아보지 못하고 사라졌으니……" (당금 무림 최고의 냉나찰? 그 계집……?) 용천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채복소녀는 혈금마령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진짜 같아요? 아니면 가짜 같아요? 한 번 알아맞춰 보세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용천음은 더듬거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필경 가짜일 것이오." "아……! 틀렸어요. 이건 진짜예요." (진짜……?) 채복소녀는 혈금마령을 품 속에 넣었다. 용천음은 그런 그녀의 손을 보며 무척 곱고 아름답다고 느꼈다. 채복소녀는 힐끔 용천음을 응시하며 말했다. "혈금별노가 알면 펄쩍펄쩍 뛸 일이지만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이걸 무림인들 앞에 던지기만 하면 모두들 벌벌 떤다니까요." 천하만인이 떠는 혈금마령, 그 공포의 표기가 한 소녀의 손에 의해 위엄이고 나발이고 깡그리 뭉개지는 순간이었다. 한낱 노리개로 변했으니…… 어떠한 경위로 혈금마령이 채복소녀의 손에 있는지는 모르나 혈금별노가 이 사실을 안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조용히 까무라치고 말 것이다. 문득 채복소녀가 혈립인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전 그 혈립인이 누군지 알아요?" "……" 용천음은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채복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이상한데……? 전혀 모르는 사이라면 왜 공자님을 위태로운 경지로 몰아넣었을까?" 그녀는 용천음이 금황혈시를 지니고 있기에 이같은 경우에 처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채복소녀는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겠다는 듯이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은 채 장난기 서린 미소를 지었다. "공자께서는 그 혈립인이 남자인 줄 알았죠?" "……?" 채복소녀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실은 여자예요. 남장을 하고 질 나쁜 인피면구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지만……" (여자? 혈립인이……?) 용천음은 아연 놀라고 말았다. "그 계집애 아주 백여우예요. 나이는 이제 스무 살인데 무림에서는 여우소리를 듣거든요. 아마…… 그녀의 사부 천수비를 제외하고는 그녀의 진면목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 채복소녀는 몹시 못마땅한 듯 계속 말을 이었다. "성격이 워낙 못되먹어서 용서하는 것을 모르는 냉혈동물이예요. 그리고…… 소문에 의하면 남자를 무척 경멸한다고 해요." 그녀는 코를 찡긋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순 거짓말이예요. 남자를 경멸하기는 커녕 먼저 꼬리를 치던데요. 조금 전 공자님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주 야릇했어요." "……!" 용천음은 흠칫했다. 그도 느꼈던 것이다. 그 혈립인의 기이했던 눈빛을…… (설마……) 그러나 용천음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 다른 이유에서 그런 눈빛을 띠었을 것이다.) 그는 생각하는 한편 채복소녀를 바라보았다. "한데, 낭자는 소생을 구해 주었건만 아직 방명도 여쭈어 보지 못했구려." "푸……! 서생냄새 풍기는 저 말……" 채복소녀는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손바닥을 부채마냥 흔들어 냄새를 쫓는 듯한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고 귀여울 수가 없었다. "내 이름은 사유란이예요. 무림에서는 소수옥녀라고 불러요." (소수옥녀 사유란!) 용천음은 아연 경악했다. -천방지축 날뛰는 그 계집애의 고의를 어떻게 벗기지? 그 계집의 고의는 최고의 상품이 될 텐데 말이야…… 괴도(怪盜)라고 했던 노인이 떠나면서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던 말이 번개같이 용천음의 뇌리에 스쳐갔다. (이 낭자가 괴도가 노리는 바로 소수옥녀였다니……?) 이런 기막힌 우연도 있는가? 용천음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사유란의 중심부 그곳에 못박았다. 그리고는 뚫어지게 응시했다. "어딜 쳐다 봐요?" 사유란은 암팡지게 소리치며 살짝 두 다리를 오므렸다. 그러는 그녀의 양 볼은 은은히 홍조에 물들어 있었다. (아차!) 용천음은 큰 실수를 깨달으며 황급히 그녀의 그 부분(?)에서 시선을 떼었다. 수만 마리 개미가 얼굴을 기어 다니는 듯 간지러웠다.


한데, 바로 그 순간…… "욱……!" 용천음은 돌연 가슴을 움켜쥐며 주먹만한 핏덩이를 울컥 토해냈다. 바닥에 흥건한 시커먼 핏덩어리를 보는 순간 사유란의 안색이 싹 변했다. "어디 좀 봐요." 그녀는 다짜고짜 용천음의 앞가슴 옷을 헤치고 바싹 다가들었다. "……!" 용천음은 이에 크게 놀랐다. 여자의 몸으로 한 마디 양해도 없이 어엿한 사내의 옷을 활짝 벌리고 가슴을 들여다 보다니…… 한데 용천음의 가슴을 보던 사유란이 순간 손 끝을 가늘게 떨며 경악의 외침을 토했다. "이건 장풍(掌風) 중에서도 가장 지독하다는 부골혈독장(府骨血毒掌)이예요!" (부골혈독장……?) 용천음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보라. 가슴 한복판에는 도장을 찍어 놓은 듯 시커먼 손바닥 자국이 또렷이 박혀 있었으니…… 사유란은 황급히 용천음의 얼굴을 응시했다. "큰일이예요. 부골혈독장에 맞으면 하루를 넘기지 못해 전신의 뼈가 썩어버리고 피가 고름으로 변해 비참하게 죽고 말아요." 용천음의 눈 언저리에 가는 경련이 일었다. (그렇게까지 지독하단 말인가?) 그는 피떡이 되어 있는 임혈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이때, "빨리 입을 벌려요!" 느닷없이 들려오는 사유란의 음성에 용천음은 고개를 돌리며 엉겁결에 입을 벌렸다. 순간 무엇인가 동그란 물체가 휙 입 안으로 날아들었다. (무엇……?)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그 물체는 꿀꺽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렸다. 넘어가는 순간 차마 못견딜 정도로 역한 냄새를 느껴졌지만 이미 뱉아 버리기에는 늦었다. 사유란은 용천음에게 영단을 먹인 뒤에 재빠른 행동으로 그의 칠대요혈(七大要穴)을 봉쇄했다. 그리고는 등을 들이대는 것이었다. "빨리 업히세요." (업히다니……) 순간, 용천음이 주춤했다. 그러자 사유란이 홱 돌아보았다. "지금 남자 여자 따질 때가 아니예요. 반시진 안으로 체내의 독 을 몰아내지 못하면 설령 화타나 편작이 살아돌아 온다해도 어쩔 수가 없어요." "그…… 그래도……" "무슨 남자가 이렇게 앞뒤가 꽉 막혔어?" 사유란은 찢어져라 외친 뒤 느닷없이 용천음의 두 군데 혈도(穴道)를 찍어 버렸다. 그리고는 불문곡직 그를 번쩍 안아들었다. "……!" 그녀의 품에 안기는 순간 용천음은 온몸이 아득한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듯한 아찔함을 느꼈다. 뿐인가! 겨드랑이며 어깨부분으로 사정없이 와닿는 물컹한 감촉, 무엇이기에 그렇게 기분이 좋은가! 사유란은 용천음을 안아듬과 동시에 번개같이 신형을 날렸다.


처음 안겨본 여자의 가슴이었다. 그러나 뿌리치고 싶은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 2 춘풍사관(春風舍館). 낙양성(洛陽城) 북쪽에 자리한 객잔. 삼경이 훨씬 지난 이 시각, 모든 방의 불은 꺼졌으나 유독 한 군데만은 아직도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용천음은 죽은 듯이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그의 호흡은 갈수록 미약해지고,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하다 못해 시커멓게 죽어가고 있었다. "큰일이다! 내가 아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으나 전혀 효과가 없다……" 사유란은 안타까운 눈으로 용천음을 내려다 보았다. 이곳에 오는 즉시 그녀는 봉황사혈금침(鳳凰死穴金針)을 사용하여 용천음의 독을 몰아내려고 했다. 한데 금침이 혈도(穴道)에 꽂히는 순간 그 어떤 힘에 의해 그 침이 튕겨지듯 빠져 나와 버리는 것이었다. 이에 사유란은 천하제일의 해독단(解毒丹)이라는 미륭해열(彌隆解熱)을 복용시켰으나 그것이 용천음의 체내로 들어가는 순간 삽시간에 연기로 화해 팔만사천모공으로 방출되는 것이 아닌가? (대체 이분의 체질이 무엇이기에 모든 해독 방법이 무효로 돌아간단 말인가?) 기이했다. 일체의 해독 방법도 용천음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기이한 일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전혀 해독이 되지 않은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사유란은 용천음의 얼굴을 응시했다. 독이 팽창되다 못해 피부 밖으로 뚫고 나오려는 듯이 살갗이 기이한 꿈틀거림을 보이고 있었다. (봉황사혈금침도 통하지 않고…… 미룡해열도 소용이 없다. 이대로 저분을 죽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단 말인가?) 그때였다. "낭…… 자……" 돌연 용천음이 두 눈을 힘없이 뜨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사유란을 불렀다. "공자님……!" 사유란은 급히 용천음의 손을 잡았다. 용천음은 생명이 꺼져가는 흐릿한 눈으로 사유란을 바라보며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낭자, 정말 고마웠소…… 내 죽어서도…… 결코 낭자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오……" "……" 용천음은 힘없이 고개를 돌려 창 밖의 달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삶이란…… 길고 짧음에 있을 뿐…… 한 번쯤은 가야 하는…… 것이오. 내 비록 짧은 생(生)을 살았다 하나…… 낭자같이 마음씨 고운 여인을 알고 간다는 것에…… 한가닥 보람을 느낄 것이오." 말을 하는 순간 그는 한 줄기 뜨거운 물방울이 자신의 손등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사유란의 눈물이 그의 손등으로 떨어진 것이다. "안돼요……! 당신은 죽을 수 없어요. 내가…… 허락하지 않아요……" 사유란은 입술을 악물었다. 알 수 없었다. 비록 자신의 눈 앞에서 한 남자가 죽어간다고는 하나 사유란이 왜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려는지에 대해서는 그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왜일까? 용천음을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은 그녀의 마음은…… 사유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럴 때…… 할아버지만 계셨어도……) 그녀의 할아버지, 그 사람만 있으면 죽어가는 용천음을 살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가 누구이기에…… 용천음은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사유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낭자, 울고 있소……?" "……" 사유란의 악다문 입술이 눈물과 뒤섞여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용천음은 문득 핏기없는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울지 마시오……" "……" "처음 만난 우리…… 그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그대…… 그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하고 있소……" 처음 만난 사람의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려주고 안타까와 한다는 것,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사유란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돌연 외쳤다. (처음 만난 사이라고요? 그래요. 우리는 처음 만났어요. 그런데 내가 왜 당신 앞에서 울어야 하나요? 왜……) 소리없는 절규가 하늘을 찢었다. (모르겠어요. 처음 느껴보는 이 마음…… 나도 모르겠단 말이예요……) 문득 용천음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낭자,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견딜 것 같소?" 사유란은 눈물젖은 눈으로 용천음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탄식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불과…… 몇 시각…… 뿐이예요." 그 말을 하는 사유란의 입술은 피가 나도록 악물려져 있었다. 용천음은 빙그레 웃었다. "몇 시각……" 그는 허탈한 눈으로 다시 창 밖을 바라보았다. "낭자, 부탁이 있소……" "……" "나를…… 밖으로 좀 데려다 주시오. 남은 몇 시각…… 내가 가야할 저 하늘을 보며…… 눈을 감고 싶소……" "아니예요! 당신은 죽지 않아요!" 사유란은 돌연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사유란은 기둥을 끌어 안으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단순한 계집…… 그래, 난 단순한 계집이었어. 아니 바보였어. 처음 본 남자…… 그것도 죽어가는 남자에게 난생 처음 사랑을 느끼다니……) 오오, 그녀가 용천음을? "할아버지, 난 어떻게 하면 좋아요……?" 하늘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서 쓰라린 연민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데 그 순간 무엇인가가 그녀의 뇌리를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염환칠십이연풍(艶歡七十二蓮風)……!" 언젠가 그것을 전수해 주며 할아버지가 한 말이 영상처럼 떠올랐다. -란아, 염환칠십이연풍은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음공 치유법이다. 여인이 남자를 상대로 염환칠십이연풍을 펼치면 아무리 엄중한 상황에서도 극적으로 살려 낼 수 있는 신비의 지술이다. 그러나 염환칠십이연풍이 기사회생의 묘법이기는 하나 여인의 희생이 따라야 한다. 란아, 이 할애비가 너에게 이 지술을 전수해 줌에 있어 다시 한 번 당부하노니 염환칠십이연풍을 만에 하나 펼쳐야 할 일이 있다면 네 번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라. 그리하여 너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염환칠십이연풍을 펼쳐도 좋다. "염환…… 칠십이연풍……!" 다시 한 번 중얼거리며 사유란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너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염환칠십이연풍을 펼쳐도 좋다. "할아버지…… 난 어떻게 하면 좋아요……?" 사유란은 기둥을 안은 채 그대로 미끄러져 바닥에 앉았다. 고통에 찬 용천음의 모습,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그의 창백한 모습이 시야에 가득차 들었다. 그러나 염환칠십이연풍을 펼쳐 극적으로 용천음을 살려낸다 해도 그는 과연 사유란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대로 외면하며 돌아서 버린다면 사유란의 희생은 너무도 큰 것이 될 것이다. 사유란은 일순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좋아…… 그 분이 날 어떻게 생각한다 해도…… 그래도 좋아……!" 이렇게 독백하면서 그녀는 일어서고 있었다. "……" 사유란은 아무런 말도 없이 용천음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무척이나 조용한 모습으로 흐느적거리고 있는 촛불을 껐다. "왜……?" 용천음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나 그녀의 촉촉한 눈망울을 보는 순간 그는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유란은 불을 끈 뒤에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다가와 용천음의 상의를 벗기기 시작했다. "나…… 낭자……?" 용천음은 크게 놀라며 상의를 벗겨가고 있는 사유란의 손을 움켜 잡았다.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손이 용천음의 손에 잡히는 순간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용천음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말씀도 하지 마세요. 그녀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일순 용천음은 그녀의 손을 잡았던 자신의 손을 힘없이 놓았다. 그녀의 눈빛만으로 왜 손을 놓아야 했는지 용천음은 깨달을 수가 없었다. 떨리는 손(手)은 다시 용천음의 하의를 벗겨가기 시작했다. 용천음은 너무도 놀란 탓에 전신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낭…… 자……?"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생각과는 달리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벗겨졌다. 용천음은 알몸 그대로인 채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것을 외면하려는 사유란의 눈동자가 갈등으로 흔들거렸다. 생전 처음 자신의 손으로 남자의 옷을 벗기고 그 알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 사유란은 와락 뛰쳐 나가고 싶었다. 수치, 그리고 부끄러움…… 용천음 또한 여인의 부드러운 손길에 의해 옷이 벗겨지고 알몸으로 여인 앞에서 부끄러움없이 누워 있다는 사실에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였다. 돌연 사유란이 자신의 옷을 천천히 벗어가는 것이 아닌가? "나, 낭자…… 지금 무슨 짓을……?" 용천음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 꺼풀…… 또 한 꺼풀…… 젖가리개가 벗겨지고 마지막 남은 손바닥만한 고의마저 아낌없이 벗겨지며 대리석 같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오오, 저 어둠의 빛에서 한껏 드러나 있는 싱싱한 여체여……!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순결한 나신(裸身)이 지금 한 남자 앞에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안개 같은 뽀얀 그 무엇이 백옥처럼 빛나는 그녀의 몸을 은은히 감싸고 있는 것도 같았다. 갈색의 수줍음을 담고 다소곳이 매달려 있는 꿈꾸는 듯한 유실, 한껏 부풀어 그 아름다움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눈부신 젖가슴, 잘록한 허리, 그 밑으로 놀랍도록 펑퍼짐하게 퍼져 나간 순백색의 달덩이 같은 둔부, 알맞게 살이 올라 진저리치듯 요염하게 느껴지는 허벅지의 그 화려한 각선미, 그리고 무성하다 못하여 은은히 그 신비스러움을 내놓고 있는 저 은밀한 비림(秘林)…… "……!" 용천음은 숨이 막히는 것을 느끼며 두 눈을 꽉 감아 버리고 말았다. 사유란은 잠시 눈을 감고 있는 듯하더니 사뿐사뿐 침상으로 다가왔다. 이어 작은 옥병의 뚜껑을 열었다. 옥병에는 맑고 청아한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공자님, 눈을 감으세요. 그리고…… 절대 떠서는 안돼요……" 그녀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이제 곧 염환칠십이연풍을 시전할거예요. 그것을 시전하는 동안…… 공자께서는 딴 마음을 가져서는 안돼요." (염환칠십이연풍……?) 용천음이 알 턱이 없었다. 염환칠십이연풍이라 함은 혀 끝에 해독액을 묻혀 해독액이 묻은 그 혀 끝으로 사내의 몸을 골고루 답사해야 하는 것이었다. 실로 여인에게 있어 그 같은 수치는 다시없는 것이었다. 비록 남녀화합의 정사(情事)까지는 가지 않는다 하여도 여자로서는 오히려 정사 그 이상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끼는 행위가 바로 염환칠십이연풍이었다. 그러나 시전하는 도중에 사내가 욕정을 참지 못하고 화합을 요구하게 되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때문에 딴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못 박은 것이다. 사유란은 용천음 옆에 쪼그리고 앉은 뒤 서서히 머리를 아래로 숙여갔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가슴에 닿자 용천음은 전율을 일으켰다. "나…… 낭자, 무…… 무슨……?" 찰나, "……!" 그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온몸을 활처럼 들어 올리며 급살이라도 맞은 듯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나…… 낭자……) 어쩌란 말이냐? 용천음의 몸은 삽시간에 용강로처럼 달아 올랐다. 사유란 또한 알몸에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혀 끝에 묻은 해독액을 용천음의 땀구멍을 통해 한 올 한 올 심어 넣기 시작했다. 어깨, 가슴…… 사유란의 혀는 지극히 느린 속도로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 어디를 어떻게 했는지 용천음은 벼락을 맞은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사유란의 휘늘어진 머리카락을 와락 움켜 잡았다. 뿐인가? 사유란 역시 전신을 파르르 떨며 두 눈을 꼭 감고는 뜨거운 입김을 훅훅 불어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용천음은 어느 한 순간에 자신의 단전(丹田)에서 무엇인가가 터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수백 줄기의 기이한 기류가 온 몸으로 미친 듯이 줄달음치는 것이었다. 그 기류가 지나가는 혈도마다 고통은 사라지고 대신 말할 수 없는 청아한 기분이 온 몸을 엄습해 갔다. 결코 염환칠십이연풍이나 욕정 때문이 아니었다. 제삼(第三)의 기류, 그것이 찰나간에 발동한 것이었다. 아는가? 지금 이 순간 바로 체내에 잠재해 있던 천불영지환이 마침내 그 신비로움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독(百毒)을 몰아내고 그 어떠한 위급한 상황에서도 회생이라는 불가사의를 탄생시키는 천하 최고의 선단(仙丹), 천불영지환! 두 사람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남녀의 묘한 상황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또 하나의 상황…… 바로 용천음의 백회혈(百會穴)에서 시커먼 연기 같은 것이 계속 빠져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에 따라 용천음의 정신은 점차 맑아지기 시작했고, 맑아짐에 따라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을 똑똑히 깨닫기에 이르렀다. 욕정! 천불영지환이 독을 소멸시키자 억제할 수 없는 무서운 욕정이 체내를 엄습했던 것이다. 눈 앞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유란의 알몸이 현란하게 꿈틀거리고 있으니 그 얼마나 참기 어려운 고문인가? (음……!) 용천음은 일순 와락 손을 뻗어 사유란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아……!" 염환칠십이연풍에 몰두해 있던 사유란은 그의 느닷없는 행위에 나지막한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혀를 뗐다. "공자님, 안돼……" 하나 다음 순간 그녀는 억센 힘에 의해 쓰러지듯 용천음의 품 위로 안기고 말았다. "이…… 이러시면……" 용천음은 그녀의 알몸을 으스러져라 끌어 안았다. "염환칠십이연풍이고 뭐고 다 필요없소. 지금 나에겐 오직 그대만이 필요할 뿐……" 사유란은 크게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미, 미쳤어요. 여기에서 중단하면 당신은…… 흑……!" 말을 하다 말고 그녀는 돌연 앵두 같은 입술을 반쯤 벌리며 전신을 와들와들 떨었다. 용천음의 손길이 그녀의 은밀한 곳을 내습한 것이다.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평생 느낄 수 없었던 느낌이 그녀의 온몸으로 번졌다. "공자님, 이러시면…… 안돼……" 그녀는 이렇게 말을 했으나 뱀처럼 비틀리는 자신의 몸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문득 사유란은 용천음의 힘이 억세게 변해 있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으며 급히 용천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독상(毒傷)의 흔적이 말끔히 사라진 것이 아닌가? "다…… 당신 어떻게…… 하악……!" 말을 하다 말고 그녀는 갑자기 백옥 같은 이로 아랫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뒤로 발칵 젖혔다. 항거할 수 없는 그 무엇이 그녀의 은밀한 곳을 통해 가득히 밀려 들어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자신의 그곳을 꽉 채우는 듯한 쾌감과 함께 극렬한 고통이 시작됐다. 졸지에 사유란은 여인의 성을 점령당한 것이다. 그러나 파과의 고통은 잠시였다. 사유란은 고통 뒤에 밀려오는 엄청난 환희와 쾌락, 야릇한 기분에 온몸을 묘하게 뒤틀며 신음과 같은 음성을 흘려냈다. "다…… 당신…… 날 속였…… 군요……" "……" "중독되지도 않아놓고…… 중독된 척…… 날……" "……" "사기꾼…… 비켜요. 빨리……" 말과는 달리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대담하게 적극적으로 파고 들었다. 살과 살의 마찰음과 함께 여인의 교성이 어둠 속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3 용천음과 사유란, 그들은 알몸 그대로 나란히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기나긴 항로를 밟아온 탓인지 두 사람의 몸은 물먹은 솜처럼 나른해 있었다. 문득 사유란이 아직도 춘흥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용천음을 바라보며 달콤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 순 엉터리예요." "왜?" 사유란은 곱게 눈을 흘기며 따지듯이 말했다. "일부러 그랬죠?" "뭘?" "날 가지려고…… 중독된 척 시치미를 떼고 있었던 것 아니예요?" 용천음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슬그머니 손을 뻗어 사유란의 펑퍼짐한 엉덩이를 조용히 내리 쓸었다. "그건 억지 소리요." 일순 사유란은 암팡지게 쏘아보며 자신의 둔부를 슬금슬금 쓰다듬고 있는 용천음의 손을 탁 쳐서 치워 버렸다. "그럼 어떻게 중독이 풀렸어요? 염환칠십이연풍은 시전 도중이었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아오?" "처음부터…… 꿍꿍이 속을 품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죠?" "……" 용천음은 쓴 입맛을 다셨다.


자신조차 어떻게 중독이 풀렸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혹시…… 노학사 감철생이 준 그 환단이……) 용천음은 감철생이 떠나면서 주었던 환단을 떠올렸다. 그것을 복용했을 때 엄중한 내상도 말끔히 치유되지 않았던가. 기실 사유란도 용천음이 어떤 영단을 복용했기 때문에 중독이 저절로 치유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묻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용천음이 죽음으로부터 벗어났다는 데 대한 기쁨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사유란은 조금 전 뜨거웠던 열애장면을 상상하며 다시금 얼굴을 붉혔다. "알고보니…… 순전히 바람둥이였어." 용천음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누구 말이요?" "당신말고 여기 누가 또 있어요?" 용천음은 빙그레 웃으며 그냥 손을 놀리고 있기에는 아깝다는 듯이 그녀의 젖가슴을 조심스럽게 주물렀다. "맹세코 나에게 있어서 낭자가 처음이오." "피……! 그걸 어떻게 믿어요? 여자같으면 확인이나 한다지만 남자는 표도 안 나잖아요." 수줍었던가? 그 말을 해놓고는 사유란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녀의 시선이 머문 침상 위에는 처녀를 상징하는 붉은 혈화(血花)가 수놓아져 있었다. 용천음이 찍어 누르듯이 그녀를 끌어 안았다. "유란, 정말 대단했소. 도대체 이 조그만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색기(色氣)가 나오오?" 사유란은 그만 귀뿌리까지 붉어지고 말았다. (짓궂어……) 그녀는 내심 웃으며 고개를 돌려 눈을 흘겼다. "그러는 자기는?" "내가 왜?" "흥! 얼마나 많이 그짓을 했는지 여자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넘던데요. 웬만한 여자는 애무만으로도 나가 떨어지겠어요." 용천음은 능글맞게 웃었다. "글쎄 유란이 처음이라니까……" "처음인 사람이 나를 수십 차례 까무라치게……" 찰나, (어머!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사유란은 화들짝 놀라며 급히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 막았다. 용천음이 기이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수십 차례나? 내 기술이 그렇게 좋았소?" "몰라요!" 사유란은 부끄러워 견디지 못하고 홱 하니 돌아 누워 버렸다. 그러자 희뿌연 둔부며 눈부신 각선미가 여실히 드러났다. 용천음은 또 다시 그녀의 둔부를 슬금슬금 어루만지며 징그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흐흐흐…… 아무래도 타고난 모양이오. 그렇지 않고서야 처음 하는데 그 정도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겠소?" 그것도 타고나는가?


(기가 막혀……) 사유란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용천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문득 용천음은 정색을 하며 물었다. "한데, 유란의 의술이 상당히 높은 것 같던데 어디서 배운 것이오?" "할아버지에게요." "할아버지?" 사유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할아버지가 누군지 모르죠?" "그걸 알면 귀신이게?" 사유란은 피식 웃었다. "잘 들어요. 우리 할아버지는 당금무림은 물론이거니와 고금사상(古今史上) 최초의 의술세가(醫術世家)라고 불리우는 천의세가(天醫世家)의 가주(家主)이신 신주의성(神州醫聖) 사명잠(史冥潛)이예요." (신주의성 사명잠……?) 진정 놀랄 일이 아닌가? 신주의성 사명잠. 모든 신의(神醫)에 우선하고 그 의술이 화경(化境)에 달해 고금제일(古今第一) 의성으로 받들어지며, 일찍이 그 유래가 없었던 의술만의 세가(世家)를 이룩한 최초의 인물. 그러나 무림인들은 신주의성에 대해 한 가닥 두려움과 신비함마 저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신주의성의 지닌 바 무공이 어느 경지에까지 도달해 있는지 점칠 수가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무공은 있으되 지금까지 남들 앞에서 단 한 번도 무공을 펼쳐 보인 적이 없는 기이한 성의(聖醫), 그가 바로 신주의성 사명잠인 것이다. 문득 사유란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두어 번 용천음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버리고 말았다. 이를 보고 용천음이 말했다. "유란, 할 말이 있는 게요?" "……" 사유란은 잠시 주저하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공자님께서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겠지요?" 용천음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보이오?" "공자님같이 절세적인 용모를 지니고 또 성격까지 부드러우니 당연히……" 일순 용천음은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하하핫…… 잘못 짚었소. 원래부터 주변머리가 없어서 그런지 여자라고는 손목도 잡아 보지 못했소." 사유란이 흥분한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정말이세요?" 용천음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살며시 사유란의 손을 잡아갔다. "유란……" "……" 서로의 손을 마주 잡은 채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뜨겁게 응시하고 있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굳이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은 느끼고 있었다. "……"


"……"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문득 어색했던지 사유란은 입가에 홍조를 떠올리며 살며시 손을 빼냈다. "천음, 제가 옷을 입혀 드릴께요." 사랑이란 정말 묘약인가 보다. 천하가 좁다하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소수옥녀 사유란이 이렇게 나긋나긋해 지다니…… 사유란은 용천음의 옷을 집어 들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막 입혀 주려는 순간이었다. 돌연 용천음의 옷 안에서 무엇인가가 빠져 나오더니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 사유란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굽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이…… 이건……?" 그녀는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앙증스럽고 귀여운(?) 물건을 보는 순간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뜨며 전신을 와들와들 떨었다. 맙소사----! 그건 바로 월영검희 영호수혜의 고의가 아닌가? 용천음도 보았다. (아이고! 하필이면 저게 떨어질 게 뭐람……) 사유란은 부들부들 떨며 고의를 앞으로 내밀었다. "여자라고는 손목 한 번 잡아 보지 못했다고요? 그럼…… 이건 뭐예요? 어떤 년 거예요?" 용천음은 황망히 손을 저었다. "유란,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녜요!" "……!" 사유란은 잡아 먹을 듯이 용천음을 노려보며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이, 이 사기꾼…… 이런 방법으로 계집애들이나 농락하고 다니고…… 그것도 모자라 고의를 벗겨 기념품처럼 간직하고……" "유란, 내 말 좀 들어 보라니까……" "듣긴 뭘 들어요!" 휙----! 사유란은 고의를 용천음에게 집어 던지고는 두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가 던진 고의가 용천음의 얼굴에 거머러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빌어먹을! 또 얼굴에……) 용천음은 신경질적으로 고의를 떼냈다. 그리곤 흐느끼고 있는 사유란의 어깨를 잡았다. "유란, 사실은……" 찰나 사유란은 홱 어깨를 돌려 용천음의 손을 치워버렸다. "더러운 손으로 어딜 만지는 거예요? 치워요! 내 몸 건드리지 말아요. 불결하단 말이예요!" 잘 나가다가 고의 한 장 때문에 이 무슨 난리법석이란 말인가? 용천음은 침상에서 내려가 사유란의 옆에 쭈그리고 앉으며 달래기 시작했다. "유란, 이 고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괴도라는 노인과 말 한 필을 주고 바꾼 것이오." "비켜요!" 용천음의 손길을 뿌리치며 옆으로 이동하던 사유란은 문득 흐느낌을 멈추며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괴도……?" 그리고는 급히 용천음을 쳐다보았다. "방금 괴도라고 했나요?" "그렇소."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용천음은 괴도를 만나 고의를 얻기까지…… 그리고 괴도가 사유란의 고의를 슬쩍 하겠다고 했던 말까지 고스란히 말해 주었다. 찰나, "흥! 망할 놈의 영감같으니라고……" 사유란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영감이 나에게 이런 선포를 했어요." -나흘 후 삼경 무렵부터 동트는 시각 안에 네년의 고의를 벗겨 가겠다. 용천음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정말 그렇게 말했단 말이오?" 사유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영감이 내 고의를 훔쳐 가겠다고 선포한 날이 바로 내일이예요." (내일……?) 사유란은 입가에 조소를 떠올리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흥! 하지만 어림도 없어요. 그 영감이 천하여인들의 모든 고의를 자기 것처럼 마음대로 벗겨간다고는 하지만 내 고의 만큼은 어림도 없어요." 용천음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이제는 유란의 고의를 훔쳐가도록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오." 일순 사유란이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럼 나를 알기 전에는 벗겨가도 좋다고 생각했단 말이지요?" 용천음은 황망히 손을 저었다. "아, 아니오." 말이야 사실이지 전에 괴도가 사유란의 고의를 벗겨간다고 했을 때 용천음은 벗겨가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나 지금은 경우가 틀리다. 사유란이 자기의 여자가 됐으니…… 세상천지에 자기 여자의 고의를 벗겨간다는데 가만히 있을 놈이 어디에 있겠는가? 용천음은 입술을 꽉 다물며 침상 위에 구르고 있는 사유란의 예쁜 고의를 슬그머니 움켜 쥐었다. 그러면서 그는 단호하게 중얼거렸다. "세상없어도…… 이것만은 안된다!" 4 괴도가 사유란의 고의를 훔쳐가겠다고 선포한 그 날, 용천음은 사유란을 춘풍사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잡아 두었다. 그녀로 하여금 의자에 앉아 꼼짝도 하지 못하도록 특별한 배려(?)를 했던 것이다. (엉덩이를 떼지 않고 있는데 무슨 재주로 고의를 벗겨 가?) 용천음은 창가에 의자를 갖다 놓고 그곳에 앉아 쉴 새 없이 밖을 감시하고 있었다. 사유란은 정말 행복했다. 용천음이 그렇게까지 자신을 생각해 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용천음을 바라보았다. 무공도 모르는 그가 자신을 괴도로부터 보호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보호해 주려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유란은 기뻤다. 문득, "천음……"


그녀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용천음을 불렀다. "……?" 열심히 밖을 살피던 용천음은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힐끗 고개를 돌리며 의아한 듯이 물었다. "왜 그러시오?" 사유란은 품 속에서 노란색 얇은 책자를 꺼냈다. "날이 어두워지려면 아직 멀었어요. 그러니 그 동안 이걸 익히고 계세요." "……?" 용천음은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간 뒤 책자를 받아쥐었다. <천의신록(天醫神錄).> 그것은 바로 천의세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비전(秘傳)이 아닌가. 사유란은 방실 웃었다. "그 안에는 천의세가의 의술과 무공 중 정수가 수록되어 있어요. 할아버지가 가장 아끼시는 것들이죠. 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이안에 적힌 의술 비법은 죽은 자도 살릴 수 있고, 무공은 세상을 혼돈 속으로 몰아넣을 만큼 대단하대요." "……!" "할아버지한테 그 의술과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막무가내잖아요. 그래서 어떡해요? 할아버지 몰래 슬쩍해서 가지고 나왔지요." 맙소사!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는 가전지보(家傳之寶)를 슬쩍해 가지고 나오다니…… 그리고 그걸 또 용천음에게 익히라고……? 신주의성 사명잠이 그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되겠는가? 눈이 뒤집어지지 않으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고맙소." 용천음은 미소를 보인 뒤에 천의신록을 가지고 원래의 자리로 돌 아갔다. 그는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전반부는 신기막측한 의술이 수록되어 있었고 후반부는 상상불허의 괴기한 무공들도 가득차 있었다. 만정불허(萬精佛虛)---- 요해결(要解決)! 하늘의 이치와 땅의 섭리를 이용한 불가사의한 의결(醫訣)이었다. 인간의 심성(心性)을 지배하여 악(惡)을 선(善)으로 만들고, 그리하여 모든 악한 자들을 선으로 유도한다는 미지의 의법. 인간의 마음을 자기 것으로 하여 반최면의 상태에서 어떠한 난치의 병도 치료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을 반대로 이용하게 되면 무서운 결과가 초래된다. 인간의 심성을 지배하여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가 있는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접인나전(接引羅傳)---- 금정결(禁霆訣)! 모든 정기(精氣)를 두 손바닥으로 흡수할 수 있는 기이한 의결이었다. 이를 테면 약초의 정기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사물이 가지고 있는 그 자체의 정기만을 손바닥에 흡수하여 사람의 체내로 투입시켜 치료해 주는 의법이었다. 만약 이것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을 치유하지 않고 본신의 내공과 합쳐버리면 엄청난 내공을 쌓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악이용하게 되면 되레 상대의 공력을 빨아들일 뿐 아니라 상대로 하여금 서서히 공력이 빠져 비참하게 죽도록 만들 수도 있는 것이었다. 용천음은 문득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의술이라기 보다는 무슨 사악한 기공(奇功)과도 같구나. 의(義)를 위해 사용한다면 더없이 좋으나 역으로 사용한다면 무서운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장을 넘겼다. 후반부의 무공편(武功篇)이 나왔다.


패음십이지수(覇陰十二指手)! 일단 발초(發招)되면 그 누구라도 막지 못한다. 모두 열두 초식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매 초식마다 백팔식(百八式)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일체의 다른 부위는 공격하지 않고 오직 상대의 목줄기만을 꿰뚫어 버리는 공포의 마수(魔手)다. 천파인(天破刃)! 일종의 강기( 氣)로서 부딪치는 모든 것은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 정중동(靜中動),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소리도 형체도 없이 쏘아가는 천파인의 무적강기를 눈치채거나 막아낼 자는 아직까지 없었다. 살인을 하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쥐도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는 불가사의한 무공! 바로 옆의 사람조차 누가 죽였는지 깨닫지 못한다. 자검십전류(紫黔十全流)! 철수환종(鐵袖環宗)! …… 용천음은 천의신록에 깊숙이 빠져 무아지경 상태에 있었다. 한 번 보면 삽시간에 기억해 버리는 무서운 두뇌의 소유자 용천음, 지금 이 시간 그의 두뇌는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5 뎅…… 뎅…… 뎅…… 멀리서 삼경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천의신록에 심취되어 있던 용천음은 그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책을 덮으며 힐끗 사유란을 쳐다보았다. 사유란은 환하게 웃어보였다. 용천음은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그의 입가에 언뜻 묘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리 신출귀몰한 괴도라고는 하나 의자에 앉아 꼼짝달싹도 안 하는데 어찌 유란의 고의를 벗겨갈 수 있겠는가? 하물며 내가 이렇게 지키고 있는데……) 유령이 아닌 다음에야 어림도 없지 않은가? 사유란 또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 영감은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앉아 고의가 짓눌려 있는데 무슨 재주로 벗겨 가?) 한데 왜 이렇게 불길한가? 사유란은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만에 하나 자신의 고의가 만인 앞에 상품으로 전시된다면 이 무슨 개망신인가? (나타나기만 해봐라. 단칼에 모가지를 날려 버릴 테니까……!) 그녀는 엉덩이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계속 흘러만 갔다. 그때였다. (응……?) 용천음은 인기척과 함께 어두컴컴한 저쪽에서 희끗한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괴도……?) 그는 흠칫하며 어둠 속에 움직이는 물체를 보았다. 하나 괴도가 아니었다. "크윽…… 취한다……" 그는 중년인(中年人)으로서 잔뜩 술에 취한 채 바짓가랑이를 움켜쥐고는 비틀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이곳에 묵고 있는 손님인데 아마 소변을 보기 위해 나왔던 것 같았다. 중년인은 비틀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용천음은 긴장을 풀었다. (바로 옆방에 묵고 있는 손님이었군. 괜히 긴장했어……) 이때, "천음……" 문득 사유란의 음성이 들려왔다. 용천음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유란은 무엇 때문인지 얼굴을 찡그리며 아랫배를 잡고 있었다. "천음, 소피가……" 오줌이 마려웠던가? 용천음은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움직이지 마시오. 이제 잠시 후면 동이 틀 터이니 어렵더라도 조금만 참으시오. 공연히 나갔다가 일 당할지 모르니……" 사유란은 상체를 숙이며 못 견디겠다는 듯이 말했다. "어떻게 참아요? 죽겠는데……" "글쎄 참아 보라니까……" "알았어요……" 사유란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두 손으로 아랫배를 움켜쥐고는 상체를 깊숙이 숙였다. 용천음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는 밖을 내다보며 싱긋 미소를 흘렸다. (두 사람이 정신 바짝 차리고 지키는데 제까짓 게……) 시간은 계속 흘러만 갔고 마침내 동쪽 하늘로부터 뿌옇게 먼동이 터오르기 시작했다. (되었어. 후훗……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군.) 용천음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사유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까지 잔뜩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유란, 동이 텄소. 이젠 괜찮으니 어서 다녀 오시오." "……!" 사유란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화살보다 빠르게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용천음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침상으로 가서 벌렁 누웠다. (괜히 긴장했어. 오지도 않을 걸……) 사유란은 황급히 측간문을 잡아 당겼다. 한데, "누구야?" 돌연 안에서 깜짝 놀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유란도 덩달아 놀라며 급히 말했다. "급하단 말예요! 빨리 좀 나와요." "빌어먹을! 한참 시원한 판에……"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이어 측간문이 열리며 중년인이 쑥 기어나왔다. 그 중년인은 바로 어젯밤의 취객이었다. 그는 깨지않은 취기 어린 눈으로 사유란을 노려보았다. "간밤에 뭘 했기에 새벽부터 설쳐?" (이 작자가……!) 사유란의 눈이 좌우로 길게 찢어졌다. 그러자 중년인은 슬금슬금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뒷걸음질 쳤다.


"들어가, 급하다면서……?" 중년인은 히죽 웃은 뒤에 비실비실 사라져 갔다. 사유란은 표독한 눈으로 중년인을 쏘아본 뒤에 휙 측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치마를 훌렁 들춰 올리고는 고의를 까내리는 자세를 취했다. 이어 막 앉으려는데…… "……?" 이게 웬 헛손질인가? 당연히 손에 걸려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와야 할 물건은 없고 빈손만 허전했으니…… 그녀는 황급히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한데, 손끝에 와 닿는 것은 까칠한 체모(體毛)와 달덩이 같은 엉덩이 뿐 고의는 그자리에 없었다. "이……!" 사유란의 안색은 삽시간에 파랗게 질려 버렸고 그녀는 허겁지겁 고개를 숙여 내려다 보았다. "없…… 다……!" 오호라…… 그 예쁘고 소중스러운 고의가 연기처럼 증발해 버리고 없는 것이 아닌가? "이…… 이 영감…… 어느 새 내 고의를……" 사유란은 치마 내릴 생각도 까맣게 잊은 채 급살맞은 사람처럼 전신을 와들와들 떨었다. (분명…… 측간에 올 때까지만 해도 확인했다. 그런데…… 어찌 눈 깜짝할 사이에……) 일순 그녀는 측간에서 마주친 조금 전의 술취한 중년인을 떠올렸다. "그 놈이다!" 콰앙! 사유란은 측간문을 그대로 박살내며 벼락같이 뛰어나왔다. "괴도! 이 영감……!" 만사가 잘 해결됐다는 안도감에 용천음은 안면 가득 미소를 머금으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후훗…… 이쯤 되면 나도 웬만큼 유란에게 신임을 얻은 것이 되겠지?" 그는 누운 자세 그대로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위로 올려놓았다. "괴도라고? 후후훗…… 괴도는 집어 치우고 졸도나 하지 말아라." 그가 득의만면해 있을 때였다. "졸도는 네놈이 해야지." "……?" 느닷없이 들려온 소리에 용천음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보았다. 어제의 그 중년인이 저만큼 지나가면서 잘 있으라는 듯이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여유있게 웃기까지 하며…… (졸도는 내가 하라고? 웃기는 사람이군.) 용천음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한데 그 순간 정말 졸도해야 할 일이 생기고 말았다. "……!" 천정을 올려다보던 그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치켜뜨며 안면근육을 씰룩거렸다. (저거……?) 한 장의 쪽지가 천정에 달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밤새 고생했다. 이놈아, 언제 그 계집애는 유혹했냐? 하여튼 네놈 재주도 보통은 넘는구나. 노부는 그 계집의 고의를 훔쳤지만 네놈은 그 계집을 통째로 훔쳤으니 그 방면에 있어서는 네놈이 한 수 위라는 것을 인정한다. 잠시 후면 그 계집이 난리를 부리며 들어올 것이다. 잘 구슬러 보아라. 하지만 자칫 네놈에게 화풀이가 떨어질 수도 있으니 웬만하면 그 계집이 오기 전에 삼십육계 줄행랑 놓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지도 몰라. 하여튼 밤새 땀 흘리며 씩씩거리랴, 눈알에 핏발서게 도둑지키랴 여러모로 수고 많았다. 네놈 체면도 있고


하니 그 계집의 고의는 경매에 붙여 가장 비싼 값에 팔아 주마. 괴고 심전도(深電盜).> "당…… 했…… 다……" 용천음은 두 눈을 부릅뜨며 시체처럼 벌떡 일어났다. 이왕 당한 건 당한 것인데 사유란의 고의를 만인이 보는 앞에서 경매에 붙이겠다니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한 일인가? "안…… 돼……" 용천음은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끼며 문짝이 부서져라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러나 중년인으로 변장한 괴도의 모습이 보일 리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 "캬아아악……!" 측간 저쪽에서 사유란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제 8 장 千年의 秘史 1 -가만 두지 않을 거야! 할아버지에게 일러서 그 영감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라고 할거야! 감히 나의 고의를 벗겨 가다니…… 사유란은 용천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를 버럭버럭 갈아붙이며 천의세가로 떠나버렸다. 홀로 남은 용천음은 다시 묘백산을 향해 길을 잡았다. 한데 왠지 사유란과 헤어지자 허전함을 느꼈다. 품 안에 있던 한 마리 작은 새가 후두둑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허전함…… 용천음은 사유란과 함께 있었던 짧은 시간을 생각하며 대별산(大別山)을 넘고 있었다. 비가 오려는지 하늘은 어둡기만 했다. 별조차 보이지 않는 이 밤…… 용천음은 오늘따라 짙은 고독감을 느꼈다. 그가 산중턱을 넘어 소롯길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돌연, "……!" 그는 무엇을 보았는지 주춤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한 노인이 길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두 눈은 지그시 감고 있었는데, 귀 밑까지 뻗어내린 허연 백미(白眉)가 무척 신비롭게 느껴졌다. 노인은 조그만 책장을 앞에 놓고 있었으며 그 옆에는 삼각깃발이 꽂혀 있었다. <길흉화복(吉凶禍福)---- 천복여의(天卜如意).> 용천음은 그 깃발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점장이인가?) 그는 노인 앞에 있는 책상 위에서 네 개의 동전과 하나의 산통(算筒)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상하구나. 인적도 없는 이런 산 속에서 점을 보다니…… 그것도 야심한 밤에……) 기이하지 않은가? 사람도 없는 산중, 더군다나 귀신이라도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은 심야에 점을 보겠다고 앉아 있다니…… (생긴 것은 멀쩡한데 미친 사람인 모양이군.) 용천음은 이렇게 생각하며 점장이 노인의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데, "윽!"


용천음이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점장이 노인이 무거운 신음을 토하며 상체를 한 번 휘청거리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왼쪽 입가로 실낱 같은 선혈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이어 두 눈을 번쩍 뜨며 용천음을 직시했다. "……?" 용천음은 자신이 지나가는 순간 노인이 신음을 토하며 실낱 같은 선혈을 흘리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노인은 강한 충격을 받은 듯 아직도 상체를 휘청거리고 있었다. "……!" 노인은 어느 한 순간 무섭게 용천음을 쏘아보다가 아무 말없이 삼각깃발이며 산통 등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 자리를 떠나겠다는 듯이…… 노인은 물건을 다 챙기자 이내 몸을 돌려 사라지려 했다. 찰나, "노인장." 용천음은 급히 노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 노인은 용천음의 눈빛과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이 고개를 돌려 외면해 버렸다. 용천음은 급히 말했다. "방금…… 소생이 지나가는 순간 어떤 충격을 받은 듯한데…… 그리고 왜 소생을 보는 순간 떠나려 하십니까?"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용천음을 바라보았다. "공자의 몸에는 마(魔)가 끼어 있소. 전대(前代)에서 물려받은 무서운 마가……" (마가 끼어 있다고……?) 용천음의 안면근육이 가늘게 떨렸다. 악마의 자식! 벌써 두 번이나 들어왔던 말이다. 한데 지금 이 신비한 노인도 역시 같은 유의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노인은 굳은 음성으로 말했다. "공자께서 노부의 곁을 스치는 순간 그 마기로 인해 충격을 받은 것이오." "……!" "노부는 마(魔)를 몰아내는 직업을 가진 사람…… 때문에 모든 마는 노부를 없애기 위해 무형 중에 살기를 작용하게 되오." "그래서 소생을 피하셨습니까?"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하늘을 점치고 사는 노부는…… 솔직이 웬만한 마기쯤은 손가락 하나로도 몰아낼 수가 있소. 하나 공자가 지닌 마는 노부로서도 어쩔 수가 없을 정도로 무서운 것이오." "……!" "공자의 몸에 끼어 있는 마는 무엇으로도 제거할 수 없는 유전(遺傳)이오." (유전……?) 선조(先祖)들이 지니고 있는 기이한 형태나 성질이 그대로 자손에게까지 전해진다는 유전! (그렇다면 나의 조상들은……?) 용천음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노인은 용천음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공자가 비록 마의 유전을 물려 받았으나 다행히 하늘은 공자에게 착한 심성을 주었소." "……!" "만약 공자의 심성이 착하지 않고 포악했다면 천하는 벌써 무서운 혈란 속에 빠져들었을 것이오." 노인은 문득 눈가를 가늘게 떨었다. "공자의 앞날에는 많은 위험과 기연(奇緣)이 있을 것이오. 차후…… 공자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날이 오면은…… 그때 노부를 찾아 주시오." "……!" 노인은 말을 끝낸 뒤 걸음을 떼어놓았다. 한데 이 무슨 괴이한 일인가? 노인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십여 장씩 쑥쑥 미끄러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용천음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급히 소리쳤다. "노인장의 존성대명이라도 알아야 찾을 것이 아닙니까?" 일순 멀리서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하였으니…… 마가 있는 곳에 노부가 있을 것이며, 공자가 노부를 찾고자 한다면 노부는 언제라도 공자 앞에 나타날 것이오." "……!" (기이한 사람이다. 지금까지 공초스님과 백색의 장포인, 그리고 괴도 섬전도 등을 만나 보았으나 저 노인처럼 신비하지는 않았다.) 용천음은 노인이 사라진 방향을 언제까지 응시했다. (내가 찾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내 앞에 나타난다고……? 정녕 그는 어떤 사람일까?) -공자 스스로가 마기를 억제할 수 없는 날이 오면 그때 노부를 찾아 주시오. 결코 그냥 해본 소리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용천음의 마기가 언젠가는 그 스스로도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 무섭게 변한단 말인가? "……!" 용천음은 한동안 깊이 생각하다가 발길을 돌렸다. 한데 바로 그 순간 우연히 바닥을 내려다 보던 그는 무엇인가를 발견하고는 흠칫 굳어졌다. 언제 적어 놓았는지 노인이 앉아 있던 자리에 희미한 글이 쓰여져 있었다. <공자의 눈동자 속에는 세 개의 붉은 혈점(血點)이 찍혀 있으니 그것은 세 가지 화(禍)를 뜻하는 것이오. 그 세 가지 화를 여기 적어 놓으니 공자는 각골명심하도록 하시오. 첫째, 장미(薔薇)를 품은 뒤 잠을 자지 마시오. 그대는 물론이거니와 가까운 사람까지 화를 입게 되오. 둘째, 달(月)이 뜬 차(茶)는 마시지 마시오. 셋째, 일곱 개의 별(星) 중 여섯 개는 없애도 좋으나 나머지 하 나는 절대로 없애지 마시오.> 너무 막연하지 않은가? 장미를 품은 뒤 자지 말라는 말이 어디 있으며, 또한 마시는 차 안에 어찌 달이 들어가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가장 막막한 것은 도대체 일곱 개의 별이 무엇이며, 그 중 하나만은 없애지 말라니 그 또한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결코 장난으로 적어놓은 것은 아닐 것이다.) 용천음은 이렇게 생각하며 세 가지를 가슴 속 깊이 기억해 두었다. 칠흑 같은 어두움이 먹물처럼 내리고 너무도 신비했던 한 노인을 만난 대별산의 밤이었다. 2 여기, 그 누구도 모르는 인간들이 있다.


천 년의 한(恨)을 풀뿌리처럼 씹으며 묘백산 밑퉁치에서 저주(詛呪)의 칼날을 갈아온 그들…… 지난 세월 동안 그들에게는 어떤 조그만 희망마저도 없었고 오직 스며드는 증오를 혀 끝에 베어 물며, 차디찬 눈물을 어둠과 더불어 삼켜와야만 했었다. 그러나 다시 올 영광(榮光)을 위하여 피(血)로써 맹세해 왔고 묘백산 월백(月白)의 위에 권토의 성(城)을 쌓아 올린 불굴의 전사(戰士)들…… 그들은 바로 백색의 인간들이었다. 그 날…… 하늘은 유난히도 검게 물들고 거대한 폭풍우(暴風雨)가 천지를 뒤덮던 그날, 마침내 용천음은 묘백산에 당도했으니 월백의 모든 고수(高手)는 백색으로 갈아 입고 장장 백여 리에 걸쳐 좌우로 늘어서 용천음을 맞이했다. 피눈물을 흘리며 오체복지한 그들은 하늘과 땅을 우러러 이렇게 외쳤다. -천 년의 희망으로 돌아오신 백색의 주군(主君)이시여…… 아는가? 이것이 장차 대중원(大中原)에 몰아닥칠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일대폭풍이었으며 미증유의 힘을 안고 거대한 분노로서 이 땅에 설 한 인간의 파란만장한 일대기(一代記)였음을…… 3 용천음이 제일 먼저 안내된 곳은 장엄한 빛으로 가득찬 한 칸의 석실(石室)이었다. 석실 전체는 더 할 수 없이 성스럽게 느껴졌으며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케 하는 기이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정면의 좌대(坐臺), 그 위에는 한 명의 중년인이 조용한 모습으로 광휘에 휩싸인 채 앉아 있었다. 인간의 모습이 어찌 저토록 성스럽고 고요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그것은 신(神)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기품이었다. 일신에는 순백색의 백삼(白衫)을 두르고 있었으며, 중년임에도 불구하고 머리는 은은한 백발이었다. 용천음은 중년인이 죽은 지 무척 오랜 세월이 지났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 그는 경건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한데 중년인의 미소띈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용천음의 눈빛이 돌연 거센 파문을 일으키며 떨리고 있지 않은가? (저 얼굴…… 똑같다. 나의 얼굴과…… 너무도 똑같다……) 그렇다. 비록 연륜의 차이는 있었지만 중년인과 용천음의 얼굴은 거의 판박이처럼 같은 모습이었다. 용천음은 격동을 억누르지 못한 채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누구십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죽은 사람이 어찌 대답을 하겠는가? 그런데 정녕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한 줄기 담담한 음성이 신비로운 광휘 속에서 흘러나와 용천음의 귓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 아닌가? "아들아…… 오늘에야 비로소 너를 만난다는 기쁨에 이 애비의 가슴은 한없이 벅차오르는구나……" (말소리가……?) 용천음은 혼백을 빼앗기듯이 놀라며 황망히 고개를 들어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아들…… 아들이라고 말했는가?) 용천음의 눈동자가 무서운 기세로 떨리기 시작했다. 광휘를 헤치며 다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들아…… 이 애비는 너를 만나기 위해 마지막 남은 본신의 진기를 음(音)으로 뭉쳐 광휘 속에 남겨 두었다."


이 얼마나 신비한 일인가? 공력을 음으로 변환시켜 광휘 속에서 머물게 하는 기공(奇功)이라니…… "아들아…… 우리 부자(父子)가 다시 만난 지금 네 나이는 벌써 십팔 세가 되었을 것이다." 용천음은 놀랐다. (어떻게 그것을……?) "너와 애비가 말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은 불과 반 시진 뿐이다. 그 안에…… 이 애비는 너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 줄 것이다." 용천음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이…… 진정 제 아버님이십니까?" "아들아…… 이 애비와 너의 조상, 그리고 네 뿌리는 세 개의 달이 뜨는 미지의 땅, 삼월령이다." (삼월령……) 앞서 가야백에게 들었던 말이다. 중년인의 음성이 거듭 들려왔다. "삼월령은 지상에서 가장 마기(魔氣)가 왕성한 곳이며 그곳에서 태어나거나 그 핏줄을 받은 자손들은 자연적으로 마기를 타고 나느니라." 지상에서 가장 마기가 왕성한 곳---- 미지의 땅 삼월령! "삼월령의 사람들은 오직 백색만을 숭배해 왔고 또 백색으로 계 승되어 왔다. 그것은 전통이며 아무도 바꿀 수 없다." (백색……) 용천음의 눈 언저리가 미미한 경련을 일으켰다. "삼월령이 지속되어 온 지 천여 년…… 그곳의 마기는 날이 갈 수록 팽창하여 결국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지고 말았다." 중년인은 한숨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마기가 점차 거대해짐에 따라 삼월령의 산(山)은 무너져 내리고 강(江)은 범람하여 모든 지형이 갈수록 변해만 갔다." "……" "마침내…… 삼월령은 폭발 상태에 이르렀고 삼월령을 떠나게 되었고 끝내 삼월령은 대폭발과 함께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잠시 말이 끊겼다. 그리고 잠시 후에 중년인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삼월령을 떠나 대이동을 한 우리는 중원이라는 땅에 도착했다. 하나 중원은 삼월령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에 우리는 마기를 이용하여 전 중원을 휩쓸어갔다. 그리고 드디어는 우리가 살아갈 터전을 세웠다." 용천음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중원인들이 삼월령 사람들을 거부한다고 하여 그 보복으로 전중원을 휩쓸어 버린 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잘못이었지. 그러나 우리는 중원을 일통한 뒤에 우리가 살아온 땅 외에는 아무 것에도 간섭하지 않고 탐하지도 않았다." "……" "삼월령의 사람들은 그저 살아갈 땅으로 만족했던 게지……" "……!" "그 후…… 삼월령 사람들은 권운대산에 방대한 규모의 성(城)을 지었다. 세인들은 우리가 사는 곳을 백풍의 마궁이라고 불렀다." 잊을 수도 기억하지 않을 수도 없었던 백풍의 마궁----!


이곳 월백의 인간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광휘에 휩싸인 음성이 재차 들려왔다. "백풍의 마궁에서 지금의 너를 낳은 것이다. 이 애비의 이름은 남궁창새(南宮創塞), 그리고 네 모친의 이름은 설국령(薛菊玲)이었다." (남궁창새…… 설국령……!) 이것이 부모의 이름이었고 그들은 바로 세 개의 달이 뜨는 악마의 땅 삼월령의 사람들이었단 말인가?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왜 악마의 터전에 살아온 당신들의 아들이란 말입니까?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용천음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 뜯으며 괴로워 했다. 무서운 현실이었다. 자기가 바로 백풍마궁의 대주군(大主君)이었던 남궁창새의 아들이라니…… (하늘이시여! 너무도 야속하오이다. 간신의 아들로 낙인 찍혔던 이 몸…… 어찌하여 이제는 악마의 자식으로 변해야 한단 말입니까?) 처음에는 간신의 아들, 그리고 자신의 뿌리를 찾았으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악마의 자식이라는 또 다른 이름…… 운명은 그에게 너무도 많은 좌절을 가져다 주었다. 용천음은 부들부들 떨리는 눈빛으로 중년인, 남궁창새를 바라 보았다. "내가 당신의 아들이라면…… 어찌하여 용비후 그분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습니까?" 남궁창새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를 낳은 뒤 얼마 후…… 백풍의 마궁은 정체불명의 인물들로부터 무차별 공격을 받게되었다. 그들의 숫자는 십이만(十二萬), 가히 엄청난 숫자였다." (십이만의 고수가 백풍마궁을 공격했단 말인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 아닌가? "피(血)는 강을 이루고 시체는 산(山)을 이루었다. 십이만을 이끌고 온 최고수뇌는 복면을 하고 있었으며 그의 무공은 하늘을 쪼개고 바다를 가를 듯하여 백풍마궁에서도 이 애비를 제외하고는 그의 적수가 없었다." 정체불명의 복면인, 그가 남궁창새 외에 적수가 없었다면 가히 천하무적(天下無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 자의 간계는 치밀했고 음모 또한 거미줄처럼 완벽했다. 백풍마궁의 전 고수들은 생명을 걸고 분투했고, 결국 쌍방의 희생은 너무도 컸다." "……!" 용천음은 그 날의 혈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백풍의 마궁은 끝내 무너지고…… 놈들 십이만 고수도 불과 백여 명만이 간신히 살아 남았다." 용천음은 돌연 가슴이 뿌듯해지고 피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백풍마궁의 힘만으로 십이만 고수를 전부 섬멸하다시피 하고 불과 백여 명만이 살아 남았다고……?) 백풍마궁, 그 힘이 얼마나 엄청나기에…… 남궁창새의 목메인 음성이 들려왔다. "이 애비는 그 싸움에서 도저히 회생할 수 없는 부상을 입게 되었고, 네 어미는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또한…… 격렬한 싸움 속에서 오직 너 하나만을 살리기 위해 만겁사야 예황백을 비롯한 칠십 명의 제자가 너를 호위하며 백풍마궁을 빠져 나갔다." 용천음은 설국령이 비참하게 죽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을 부르르 떨며 피가 거꾸로 솟는 무서운 분노를 느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아, 무섭게 떨고 있는 그의 미간 사이에 열십자(十字) 모양의 혈선(血線)이 서서히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남궁창새의 음성이 한(恨)과 더불어 흘러나왔다. "살아남은 백풍마궁의 인물들은 무너져 내리는 백풍마궁을 뒤로 하며 피눈물과 함께 권운대산을 탈출해야 했다. 그리고…… 이곳 월백에 당도했으며 이 애비는 너의 생사(生死)는 물론이거니와 백풍마궁의 한(恨)조차 남겨둔 채 눈을 감고 말았던 것이다." 휘류류류---- 휘류류! 용천음의 몸 주위에서 돌연 무서운 회오리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열십자의 혈선은 더욱 가공할 빛을 뿜어냈다. 오오, 용천음이여! 너는 진정 악마로 돌아가려는가? 입술이 터져라 악문 그의 이빨 사이로 신음 같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소자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남궁영소(南宮影 )이다. 그 이름은 돌아가신 네 모친이 지어준 이름이다." (어머니……!) 이제는 완전히 밝혀졌다. 용천음은 남궁창새의 아들이자 삼월령의 후예이고, 또한 백풍마궁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불태워야 할 제이대(第二代) 주군인 것이다. 용천음은 격동과 감격을 억제하지 못하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떨리는 그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 나왔다. 그는 일어섰다. 그토록 그리웠던 부친의 시신을 바라보며 그는 일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가장 경건하고 장엄한 자세로 부친에 대한 배례를 올렸다. "아버님…… 크흐흑……" 용천음은 끝내 오열을 참지 못하고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엎드려 울음을 토하고 말았다. 그의 몸 위로 남궁창새의 마지막 음성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들아…… 기억해라. 네 모친이 어떻게 죽어갔고…… 이 애비가 어떤 한을 안고…… 눈을 감아야 했는지…… 굴려야 한다…… 피의 수레바퀴를…… 이제는 굴려야…… 한…… 다……" "아버님----!" 용천음은 다시는 들을 수 없는 부친의 음성이 다 했음에 처절한 외침을 토하며 안타까운 듯 몸부림을 쳤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부친의 음성을 들으려는 듯이…… 그러나 부친의 음성은 끝났고 이제 다시는 들을 수 없는 것이다. 휘류류류----! 우우웅---- 우웅----! 용천음의 두 눈은 피빛으로 벌겋게 달아 있었고 미간의 열십자 혈선은 사라지는 듯하다 나타나고, 나타나는 듯하다 사라지며 무서운 혈광을 뿌리기 시작했다. "맹세합니다. 소자의 전부를 걸고…… 맹세합니다." 용천음은 고요한 광휘 속에 잠들어 있는 남궁창새를 바라보며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차후…… 소자가 이끌어 나갈 후대(後代)의 백풍마궁은 더 이상 천하에 대해 관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하자는 겐가? 용천음의 이빨 사이사이로 시뻘건 피가 스며들었다. "정말입니다. 소자는 아버님처럼 너그럽지도 않을 것이며, 아버님처럼 그 누구도 용서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한 방울의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백풍마궁을 파멸의 길로 몰아 넣은 자…… 정체불명의 그 복면인을 찾을 수만 있다면 소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용천음의 모든 힘줄이 분노하듯 불쑥불쑥 표출되었다. "천하를 모조리 파헤쳐 놈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무림을 온통 피바다 속으로 몰아 넣어 놈을 찾을 수만 있다면 소자는 또 그렇게 할 것입니다." 바닥을 움켜쥔 그의 손가락이 찢어지며 검붉은 선혈이 흘러나왔다.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백풍마궁에 거역하는 자 사지를 자를 것이며, 백풍마궁을 욕하는 자의 두 눈을 뽑고 혀를 잘라낼 것입니다……!" 용천음은 처절한 슬픔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며 바닥에 엎드려 신음처럼 울부짖었다. "더 이상…… 더 이상은 나약한 놈으로 남아 있지 않을 생각입니다……!" 당신의 아들 남궁영소…… 이제 다시 악마의 자식으로 돌아가렵니다…… 제 9 장 史上最强의 武功 1 청우헌(淸羽軒). 월백의 북동쪽에 위치한 조용하고 아담한 소축(小築). 누구를 위해 지어졌는지는 모르나 용천음이 오기까지 이곳은 비워져 있었다. 아마도 용천음이 돌아올 것을 예견하고 이 소축을 건립한 것 같았다. 온갖 기화요초(奇花瑤草)가 둘러싸고 있었으며, 장원 한 가운데는 인공으로 만든 꽤 큰 연못이 자리하고 있었다. 청우헌, 이곳은 월백에 있어 또 하나의 별천지와도 같은 곳이며 신성불가침의 장소이기도 했다. 바로 용천음이 기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 용천음은 창가에 서서 정원의 인공 연못을 내다보고 있었다. 백풍의 마궁이 멸망하고, 용비후의 손에서 자라면서부터 지금 여기에 서기까지, 고통스런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 고통의 길을 갈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지 않고 불타는 분노를 증오처럼 끌어 안고 힘차게 솟아오르는 저 광구처럼 전진하고 또 전진할 것이다. 이 이상 무엇을 더 할텐가! 살아남든 죽든 그 결과가 무슨 소용이 있을손가! 앞으로 용천음이라는 이 젊은 영웅(英雄)이 이끌어 나갈 백풍의 마궁은 활화산의 뜨거운 분출처럼 그렇게 솟아오를 것이다. …… 나비(蝶), 한 마리 나비가 밖을 스치며 정원 저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용천음은 그 나비의 뒤를 눈빛으로 쫓으며 나직한 탄식을 흘려냈다. "내가 고금제일(古今第一)의 고수이자 천하무적이라고 불리웠던 백색의 제왕 남궁창새의 아들이었다니……" 실로 꿈만 같았다. 하나, 그에게 주어진 것은 멸망한 백풍마궁을 다시 부흥시키고, 지금까지 정체를 모르는 의문의 복면인을 찾아 복수해야 한다는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 뿐이었다. 용천음의 입가에 끈적한 미소가 번졌다. "차후…… 그 누구도 내 앞에서 위대하다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겠다. 아니, 그 누구도 내 위에 서지 못하도록 하겠다. 일찍이 그 누구도 갖지 못한 두 가지 힘이 나에게는 갖추어졌다. 하나는 사해를 뒤덮을 권세이며 또 하나는


백풍의 마궁이라는 거대한 단체다." 그렇다. 그는 두 가지를 모두 가졌다. 대명의 정계(政界)를 한 손에 거머쥐고 뒤흔드는 엄청난 권세! 천하최강을 자랑했던 백풍의 마궁! 이 앞에서 누가 당할손가? 용천음의 눈빛이 꿈틀거렸다. "무공으로 안되면 권세로 밀어붙일 것이고, 권세로 안되면 무공으로 해결할 것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를 함께 배합한다면 그 이상 없겠지……" 한 줄기 득의의 미소가 그의 입가를 스쳤다. 한데 바로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 바퀴 구르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 용천음은 움찔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일신에 녹색장포를 두르고 이륜거(二輪車)에 앉아 손으로 바퀴를 굴리며 서서히 들어오고 있는 한 인물…… 바로 가야백이었다. 그는 혈음지를 사용하여 하반신의 십이혈도(十二穴道)가 절단되어 반신불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힘으로 용천음을 돌아오게 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아니, 자랑스러움마저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이륜거에 몸을 의탁한 채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가야백……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도 많은 신비의 힘이 남아 있었다. 세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그러한 힘이…… 가야백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주군, 드디어 결정이 났습니다." "……!" "모든 제자와 원로(元老)들이 모여 단심지론(單心之論)을 연 결과 만장일치로 주군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마침내, 용천음은 공식적으로 백풍마궁의 제이대(第二代) 주군으로 인정된 것이다. 가야백은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며 약간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아울러 주군을 금단(禁斷)의 천문(天門)으로 들게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금단의 천문……?" 가야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단의 천문은 승화(昇華)하신 노주군 남궁창새께서 만들어 놓은 꿈의 무전(武殿)입니다." 용천음의 안면근육이 가늘게 떨렸다. "아버님이…… 눈을 감으시기 전에 만든 꿈의 무전……?" "금단의 천문에는 백풍마궁의 모든 정화(精華)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곳에 들어가 본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실질적으로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아무도 들어간 적이 없고, 또 무엇이 있는지조차 신비에 가려져 있는 금단의 천문----! 가야백은 거듭 말했다. "노주군께서는 금단의 천문을 완성하신 뒤 이런 유시(遺示)를 남 겼습니다." -금단의 천문은 오직 내 아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만약 내 아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금단의 천문은 끝내 열리지 않고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리라……! (나만이 들어갈 수 있는 금단의 천문……!) 용천음은 눈시울이 뜨겁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용천음을 제외하고 아무도 들어가지 말라는 한 마디의 유시, 그것을 지킨 채 지금까지 아무도 금단의 천문으로 들어가지 않은 백풍마궁의 제자들…… 그 하나만 보아도 백풍마궁의 제자들이 선친 남궁창새를 얼마나 존경했고 신뢰했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용천음은 이 순간 부친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가야백은 용천음의 격동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주군, 만나 보셔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만나볼 사람……?"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백풍마궁 최고의 장령(長領)이시며 몸과 마음이 인간의 경지를 넘어 입신(入神)에 이르신 그런 어른이십니다." (몸과 마음이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누구요? 그 어른이……" 가야백은 만면에 존경과 흠모의 빛을 떠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숙이면서 그는 더할 수 없는 장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백로(白老) 신도잠(辛桃岑)…… 바로 그 분이옵니다." 2 -그 분의 춘추(春秋)는 올해 일백 여든입니다. 삼월령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이곳 월백에 오기까지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표면적으로 나선 적이 없습니다. 그저 한쪽에서 조용히 방관만 하실 뿐 일체 어떤 일에도 개입하시지 않았습니다. 한때 노주군께서도 그 어른의 등에 업혀 자랐다고 합니다. 그 어른은 노주군에게도 경어(敬語)를 사용하지 않은 만큼 주군에게도 경어를 쓰지 않을 것이니 주군께서는 그 점 양지하셔야 합니다. 현재 그분은 외딴 곳에 떨어진 월성루(月星樓)에서 혼자 기거하고 계십니다. 월성루의 문(門)을 들어서 층계를 오르고, 거울 같은 대리석 복도를 따라 몇 번을 돌 때까지 용천음은 백로 신도잠이라는 인물에 대해 왠지 한 가닥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문(門), 두 마리의 백룡(白龍)이 꽈리를 틀고 있는 조각이 새겨진 단아한 문(門), 용천음은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 삼월령 최고의 배분을 지니고 있으며, 이미 일백 년을 넘어 팔십 년 간이나 더 살아온 인간영물(人間靈物)! 장령이라는 단 하나의 명예로운 자리에 앉았으나 그 어떤 일에도 일체 개입하지 않는다는 입신의 인물…… 그 앞에선 용천음이 어찌 긴장하지 않을 텐가? "……" 용천음은 옷을 단정히 만진 뒤에 천천히 손을 내밀어 문을 밀었다. 스르륵…… 문이 미끄러지듯 열렸다. 실내, 경건한 가운데 숙연함을 느끼게 하는 그런 분위기가 구석구석 배어 있었고, 보이지 않는 위압감이 가슴을 짓눌러 올 듯한 묵중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 한 노인이 태사의 위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창노한 백발, 백설 같은 칼날눈썹은 귀밑까지 쭉 뻗어 바람도 없는데 가볍게 휘날리고, 예리하게 각진 턱 밑으로 위엄스럽게 자라있는 눈부신 백염(白髥), 약간은 주름진 듯하면서도 말라 보이는 얼굴…… 그렇다. 노인은 전체적으로 약간 마른편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에게서는 감히 정면으로 쳐다볼 수 없는 강인한 기풍이 고요한 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이 노인, 백로 신도잠----! (숨이…… 막힌다……) 일찍이 용천음은 이렇게 위엄있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에 땀이 배는 것을 느끼며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후손(後孫) 남궁영소, 장령을 뵈옵니다." "……" 신도잠은 여전히 물처럼 고요한 눈으로 용천음을 바라보았다. 이어, "그대가 창새의 아들 남궁영소인가?" "그렇습니다." 신도잠은 용천음의 얼굴을 한 동안 주시하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닮았어. 무척……" 그러면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라." "감사합니다." 용천음은 긴장된 모습으로 맞은편에 앉았다. 신도잠의 입가에 언뜻 엷은 미소가 번졌다. "나는 알고 있었다. 네가 살아 있을 줄……" "……!" "짐작대로 자네는 돌아와 주었어……" 신도잠은 다시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인 뒤에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줄곧 용비후의 손에서 자랐느냐?" "그렇습니다." "그 동안 많은 고비를 넘긴 듯하구나. 네 신색을 보니……" "……!" 용천음은 스쳐가는 듯한 그의 말에 내심 경악했다. (과연……!) 신도잠은 두 눈을 반쯤 내리감으며 느릿하게 깍지를 끼었다. "잘 키워 주었어. 썩……" "무슨……?" "용비후 말이다." "……!" 신도잠은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며 무척 느린 동작으로 시선을 허공으로 던졌다. "그 동안 적지 않은 기연을 얻은 것 같구나. 자네 몸에 훌륭한 내공(內功)이 잘 갈무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 용천음은 아연실색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몸에 발휘하지 않은 엄청난 공력이 갈무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 사람은 신도잠이 처음이었다. 기실, 용천음도 미처 모르는 사실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잘 와주었다." 신도잠은 허공에 두었던 시선을 내리며 용천음을 똑바로 응시했다. "주군." 주군이라고 불렀는가?


용천음은 정중하게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장령……" "이 시대는 주군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 -이 시대는 주군의 것이 되어야 한다. 말은 간단했으나 그 뜻은 엄청난 것이 아닌가? 신도잠의 얼굴에 문득 쓸쓸한 기색이 어렸다. "내 생전에 다시 보게 될지 모르겠어. 백풍마궁이 일어서는 것을……" 용천음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노력하겠습니다. 그 날을 앞당기기 위해……" 신도잠은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자도 넘볼 수 없는…… 따라올 수 없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사상최강(史上最强)의 무공이 필요하겠지." 전무후무한 사상최강의 무공이라는 말을 신도잠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인가? "주군." "말씀하십시오." "무공이란 글을 배우는 것과는 달라. 뼈를 깎는 고행이 없이는 이룰 수 없고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피를 쏟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것이 무공이야……!" "……" 신도잠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남들은 그러더군. 무공이란 자질이 없으면 익히기 어렵다고…… 또 설령 익혔다 해도 최절정에까지는 도달할 수 없다고……"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생각은 달라. 자질 같은 건 필요없어.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오르고 못 오르는 것이 결정나는 게야." "……!" 신도잠은 감았던 눈을 뜨며 고요히 용천음을 바라보았다. "내 말, 알아 듣겠나?" 용천음은 고개를 숙였다. "명심할 것입니다." "음……" 신도잠은 가볍게 한 번 고개를 끄덕인 뒤에 깍지낀 손을 풀며 태사의 깊숙이 등을 묻었다. 그러면서 느릿하게 입술을 떼었다. "주군은 어떻게 생각하나?" 느닷없는 질문에 용천음은 움찔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이곳 말이야." "……?" 신도잠은 침음성 비슷한 소리를 낸 뒤에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이 안에는 불손한 마음을 가진 자가 있다. 무척 오래 전부터……" 용천음은 크게 놀랐다. (백풍마궁의 인물 중에 말인가?) 신도잠의 말은 계속되었다. "무서운 놈이야. 백풍마궁이 무너지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꼬리조차 밟히지 않고 숨어 있을


정도니까……" 용천음의 눈빛이 빛났다. "백풍마궁의 인물들 중에…… 이단자(異端者)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신도잠은 겨우 들릴 듯한 미약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단자 정도에 그친다면 별 문제는 없겠지. 하나…… 어쩌면 그 놈이 바로 정체불명의 복면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예엣……?" 용천음은 벌떡 일어날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백풍마궁을 뒤에서 조종했던 의문의 복면인, 그가 어쩌면 이곳에 숨어 있는 이단자일지도 모른다니……! 충격적인 일이었다. 신도잠은 문득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오직 내 생각일 뿐일지도 모르지. 그저 야망을 위해 단순히 우리를 배신했을 수도 있으니까……" 이단자가 복면인이든 단순 가담자이든 간에 일단은 밝혀내는 것이 급선무 아닌가? (백로 신도잠은 지금까지 어떤 일에도 개입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용천음의 마음을 읽었는가? 신도잠은 빙그레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주군, 내 비록 일체의 일에 나서지 않는다고는 하나 나 역시 백풍마궁의 사람이다. 때문에 백풍마궁에 대한 불길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막아야 하는 책임도 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나서면 경계의 대상이 될 뿐 그 무엇 하나도 알아낼 수도 살필 수도 없어." "……!" "아무런 일에도 개입하지 않는 척하며 은밀히 살피면 의외로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고 의심도 받지 않게 되지." 신도잠은 거듭 말했다. "또한 어떤 사실을 알았다 해도 함부로 누설할 수는 없는 법…… 지금까지 은밀히 살펴온 사실을 오늘 비로소 주군에게만 해주는 것이라네." "……!" "만약 끝까지 주군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는 이 문제를 묻어둔 채 땅 속으로 가지고 갔을 게야." 신도잠이야말로 백풍마궁을 위하는 진실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저 묵묵히 백풍마궁의 안위를 걱정해온 사람, 백로 신도잠!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여러모로 생각한 결과 정체불명의 복면인은 몇 사람으로 압축해 볼 수 있어." "……!" "그 첫째가 신비의 단체 철혈대전의 대전주!" 일순 용천음의 눈에 기광이 스쳤다. (철혈대전이라면…… 철검혈리 나래영이 소속해 있던 바로 그……) 신도잠의 입술이 무겁게 떨어졌다. "그 둘째가 천예비전의 만사십제 천수비……!" (만사십제 천수비! 그는 혈립인으로 나타났던 남장여인의 사부가 아닌가?) 마지막으로…… 신도잠은 상체를 반쯤 앞으로 당기며 말했다. "그 셋째가 천의세가의 가주 신주의성 사명잠!"


(신주의성 사명잠……!) 용천음은 크게 경악했다. 사명잠은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소수옥녀 사유란의 할아버지가 아닌가? 그러하거늘 사명잠마저 용의자에 포함되어 있단 말인가? 신도잠은 아랫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이들 세 사람의 무공은 당금무림의 최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이 복면인이 아닐까 하는 심증만 있으나 그들 외에는 복면인 만한 무공을 지닌 사람이 현재는 없다." 철혈대전의 대전주----! 천예비전의 만사십제 천수비----! 천의세가의 가주 신주의성 사명잠----!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은 모두 직접, 간접적으로 용천음과 연관이 되어 있지 않은가? 문득 신도잠은 꿈틀거리는 눈빛으로 용천음을 직시했다. 그 눈빛을 대하는 순간 용천음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전율했다. "하나 이러한 문제는 접어 두고라도 나에게는 아직도 풀지 못한 하나의 수수께끼가 있다." 풀지 못한 수수께끼! 용천음은 마른침을 삼켰다. "무엇입니까, 그것이……?" "네 모친의 죽음!" "……!" 용천음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장령……"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눈빛으로 신도잠을 직시했다. 신도잠은 지극히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솔직이…… 나는 그것을 의심하고 있다." 용천음의 눈 언저리가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어머님은…… 권운대산의 혈전(血戰)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신도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지. 하나…… 시체는 찾지 못했다." "……!" "아무리 혈전 중이라 해도 시체를 찾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시체를 찾기 위해 미친 듯이 헤맸던 사람이 바로 나인 이상……" 신도잠이 직접 찾아 보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단 말인가? "그 많은 시체 중에…… 못 찾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신도잠은 담담하게 웃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네 모친의 시체가 어찌하여 보이지 않았는지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는 한 백풍마궁의 문제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여타한 어떤 문제라 해도 풀리지 않는다! 이런 뜻이 아닌가? 이 말을 끝으로 신도잠은 두 번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용천음은 무척 오랜 시간을 기다렸으나 신도잠은 끝내 두 눈을 감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에 용천음은 경건한 자세로 예를 취한 뒤에 월성루를 물러 나오고 말았다. 백로 신도잠, 그는 용천음이 문을 나서는 것을 보며 조용히 눈을 떴다. "모른다. 너희들은 모른다. 이 늙은이의 아픔을……" 아아…… 다른 사람은 모른다. 너무도 많은 여정을 살아왔기에 심기 또한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던 이 거인(巨人)의 마음을…… 그래서 가슴을 헤집는 신도잠의 오열은 더욱 아픈 것이다. 3 천금마병(天禁魔兵) 포령사. 그는 모든 병기(兵器)를 다루는 데 있어 귀신이라고 불리운다. 썩은 지푸라기라도 한 올 쥐어진다면 내일 아침 떠오를 불타는 태양(太陽)을 여덟 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외팔이…… 백풍마궁의 멸망 당시, 서른 여덟 자루의 병기를 폭풍처럼 휘두르며 구천(九千)의 고수를 피떡으로 만들어 버렸던 초인(超人)의 인물. 쓰라린 패배의 잔해를 안고 권운대산을 떠나면서 끝내 울분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왼팔을 잘라 울분을 대신했던 강철 같은 사나이…… 천금마병 포령사! 유독 강철 같은 성격을 가졌기에 심성 또한 거칠 수밖에 없었던 이 사람, 그가 바로 천금마병 포령사인 것이다. 카아앙----! 한 소리 찢어지는 금속성과 함께 하나의 검(劍)이 하늘로 치솟았다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거칠은 음성, "주군, 정신을 똑똑히 차리셔야 합니다. 검이란 약하게 쥐면 손에서 날아가는 법이고 강하게 쥐면 손이 굳어져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용천음, 그는 왼손으로 오른팔을 움켜잡고 있었다. 손아귀가 찢어져 검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앞에는 장대한 체격의 사나이가 검을 비켜든 채 우뚝 서 있었다. 햇빛에 그을린 검게 탄 피부, 용맹을 뜻하는 듯한 시커먼 구레나룻은 턱을 절반쯤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에 펄럭이는 외팔의 소맷자락…… 얼굴에서만도 수십 개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 이 자가 바로 만병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병기의 귀신 천금마병 포령사였다. 포령사는 저 만큼 떨어져 있는 검을 가리키며 명령하듯 말했다. "다시 검을 잡으십시오." "알겠소." 용천음은 고통을 참으며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들었다. 일순 포령사가 말했다. "검이 만병의 으뜸인 이상 그 만큼 다루기가 어려운 법이오. 손에 이 푼의 힘을 가하시오!" 말과 함께, 팽! 포령사의 검이 귀폭을 찢는 듯한 파공음을 내며 용천음의 검을 그대로 강타했다. 카아앙----! (으윽!) 용천음의 검이 부러지는 듯 휘어지더니 그대로 허공으로 퉁겨져 날아갔다. 그러자 또다시 손이 찢어지며 선혈이 주르륵 흘렀다. 용천음은 이를 악물며 땅에 떨어진 검을 집었다.


순간, "윽……!" 손가락 마디마디가 부러져 나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 왔고 또한 찢어진 손바닥에 검이 닿는 순간 칼로 도려내는 듯한 극심한 쓰라림이 느껴졌다. 쨍그랑…… 잡았던 검이 다시 떨어졌다. 포령사는 무서운 눈빛으로 용천음을 쏘아보며 천둥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묻겠소. 당신이 진정 남궁노주군의 아들입니까?" "……?" 무엇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가? 포령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남궁노주군은 결코 이렇게 약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어떠한 일에도 포기라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 자극이 되었던가? 용천음은 혀를 악물고는 땅에 떨어진 검을 꽈악 움켜 잡았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났다. "다시…… 다시 합시다……!" 포령사의 입가에 한 가닥 미소가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주군! 과거의 남궁노주군도 바로 그런 기개였습니다.) 패앵----! 포령사의 검이 아까와는 비교할 수도 없으리만큼 무서운 기세로 용천음의 검 상단을 강타했다. 카가가가강----! "……!" 용천음은 검과 검이 마주치는 순간 내상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주르륵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검이 이번에는 날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용천음은 만면에 웃음을 떠올리며 소맷자락으로 입가에 흘러내리는 선혈을 쓱 문질러 닦았다. "다시 한 번!" 슈---- 욱----! 이번에는 오히려 용천음이 번개같이 검을 뻗어 포령사의 검을 노려갔다. "……!" 포령사는 의외의 행동에 흠칫했으나 이내 육안으로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쾌속도로 용천음의 검을 맞닥뜨려 갔다. 채앵---카아아캉----! 고막을 찢는 듯한 금속성에 이어, 뚝! 용천음의 검이 중간에서 부러지며 부러진 조각이 빙글빙글 회전하여 사 장 밖의 고목에 깊숙이 박혀 버렸다. "……!" 턱 밑으로는 뜨거운 선혈이 끊임없이 흐르고…… 검자루를 꽉 움켜쥔 손은 허연 뼈가 드러날 정도로 찢어지고 해어진 채 샘물처럼 피를 쏟고 있었다. (검이 부러지다니……? 틀렸어……) 용천음은 주저앉고 싶었다.


이때, "대단히…… 좋다……!" 포령사는 송충이 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자신도 모르게 한 소리 외쳤다. "……!" 용천음은 급히 포령사를 쳐다보았다. 포령사의 얼굴에는 감탄과 경악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번 일검(一劍)에는 이성(二成)의 공력을 실었습니다. 자화자찬인지는 모르나 웬만한 고수들도 저의 이성 공력을 받으면 검을 놓치고 맙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공을 모르는 주군께서는 단지 검만이 부러진 채 아직도 검자루를 쥐고 있다는 것은 경이할 일입니다." 그 말에 용천음은 기쁨의 미소를 떠올렸다. 이어 그의 얼굴에 어리던 미소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대신 돌처럼 굳은 표정이 떠올랐다. 포령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됐습니다, 주군……" 그는 슬쩍 용천음의 파열된 손을 응시했다. "오늘은 이만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품 속에서 풀처럼 생긴 약초를 꺼내 내밀었다. "이것을 빻아 즙을 낸 뒤에 손에 바르시면 많이 좋아질 것입니다." "……!" 포령사는 약초를 건네준 뒤에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막 몇 걸음 떼어 놓았을까? 돌연, "포령사" "……!" 그는 용천음의 나직한 부름에 흠칫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용천음은 그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고맙소." "……!" 포령사의 눈빛이 한 차례 흔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무심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용천음은 손에 든 약초를 내려다보며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그랬어…… 겉으로는 무쇠처럼 강해 보이나 속은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었어. 내유외강(內柔外剛)이라고나 할까?) 내유외강! 포령사가 그런 사람이었던가…… 4 단종철포(丹宗鐵布) 육양천(陸陽天). 그는 외문기공(外門奇功)의 제일인자였다. 도검(刀劍)조차 불침(不侵)한다는 가장 신묘하고 역사가 깊은 철포삼(鐵布衫)을 유사 이래 가장 완벽하게 터득한 인물. 철포삼! 오직 그 한 가지 외문기공에 평생을 바쳐온 옹고집…… 때문에 철포삼이 유명무실(有名無實)하게 전락한 지금에도 그가 전개하는 철포삼은 그 위력이 판이하게


다르다. 십 칠 년 전, 사상 최강의 신검(神劍)이라는 막사(莫邪)조차 육양천의 몸을 뚫지 못하고 피부에 찰과상만을 입힐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쇳덩어리보다 더 단단한 인간, 그가 바로 단종철포 육양천인 것이다. 용천음은 달빛을 밟으며 육양천의 거처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 밤부터 칠일(七日)에 걸쳐 육양천에게 철포삼을 전수받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철포삼이란 대체 어떤 기공(奇功)이기에 도검조차 뚫지를 못한다는 것일까?) 그러한 무공이 있다는 것에 신기함을 느꼈다. "……" 두 개의 호수를 지나 우거진 숲의 샛길로 접어들자 저 만큼에 하나의 건물이 보였다. 바로 단종철포 육양천이 머물고 있는 장원(莊園)이었다. (불과 보름……그 안에 육양천이 근 백 년을 익혀온 철포삼을 익힐 수가 있을까?) 의문이었다. 용천음은 슬쩍 야공에 뜬 달을 올려다 본 뒤에 걸음을 재촉했다. 한데 그가 막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으---- 아---- 악----!" 돌연 장원 안에서 비단폭을 찢는 듯한 처절무비한 비명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건……?) 용천음은 문을 열다 말고 흠칫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그때였다. 휘익----! 갑자기 하나의 시커먼 그림자가 넘어 날아온 것이 아닌가? (괴한이다!) 용천음은 일순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끼며 주춤 한 걸음 물러섰다. 괴한과 용천음과의 거리는 불과 지척, 괴한은 그 빠른 순간에도 용천음을 발견했던지 돌연 허공에서 허리를 비틀며 유성처럼 쾌속하게 용천음을 향해 날아왔다. 동시에 그는 우장(右掌)을 쭉 뻗어 산악 같은 장력을 밀어냈다. (읏……!) 용천음은 크게 당황하며 급히 한 걸음 옆으로 비켜나며 엉겁결에 오른손을 도(刀)처럼 뻗어 쏘아오는 괴한을 향해 맹렬하게 찔러갔다. 찰나 쇠북이 뜯어져 나가는 듯한 괴음과 함께 두 마디 짧은 신음이 뒤섞여 들려왔다. 용천음은 가슴에 일장을 얻어맞고 사오 장 밖으로 날아갔다. 한데 어느 한 순간 그는 허공에서 빙그르 회전하며 똑바로 지면에 내려서는 것이 아닌가? 다른 때 같았으면 그대로 곤두박질쳤을 텐데…… 한편 느닷없이 공격을 가한 괴한의 입에서 경악에 찬 침음성이 새어나왔다. "네놈이 어찌…… 지옥일도류(地獄一刀流)를……?" (지옥일도류……?) 용천음은 움찔했다. 그렇다. 그가 방금 쳐낸 것은 노학사 감철생이 전날 철검혈리 나래영하고 싸울 당시에 펼쳤던 바로 그 도법, 지옥일도류였던 것이다. 한 번 보았건만 그것마저 익혔던가? "지옥일도류……! 그것은 그의 독문무공이거늘 네가 어찌……?" 용천음은 다시 한 차례 움찔했다.


(이 자가 감어른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용천음은 재빨리 괴한의 모습을 살펴 보았다. 괴한은 흡사 유령처럼 검은 장포를 뒤집어 쓰고 있었으며 얼굴 또한 검은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다. 또한 두 눈에서는 사악한 기가 독사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용천음이 묻자 복면괴한은 음침하게 말했다. "네가 알아서는 안될 사람……!" (목소리를 변형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목소리를 바꾼단 말인가? 그렇다! 이 자는 바로 백풍마궁의 제자 중 한 명일 것이다.!" 용천음은 이같이 생각하며 만면에 분노의 빛을 떠올렸다. "괘씸한……!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용천음이 한 걸음 앞으로 썩 나오려는 순간, 퓨퓨퓨퓨퓨퓨! 돌연 괴한의 장포 안에서 파란 빛을 띄운 암기(暗器)들이 빛살처럼 쏘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읏!) 용천음은 대경실색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하나 어찌 암기를 피할 수가 있겠는가? 수십 개 의 암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용천음의 눈앞까지 다가왔고, 막 온몸에 적중되려하고 있었다. 한데 갑자기 눈앞에 빛이 어리는가 싶자 그 빛은 삽시간에 쏘아오던 암기를 훑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헉……!" 이 같은 상황에 복면괴한 역시 크게 놀란 듯 주춤 뒤로 물러섰다. 한 줄기 빛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언제 나타났는가? 면사여인! 하얀 면사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그 얼굴은 실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름다운 중년(中年)의 미부인(美婦人)이 그곳에 서있었다. 그녀는 하얀 소복(素服)을 입고 있었다. 한밤에 소복을 하고 나타난 섬뜩한 소복여인, 그녀를 보는 순간 복면괴한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는……?" 찰나 복면괴한은 더 이상 빠를 수 없는 행동으로 오른손을 한 바퀴 휘저었다. 슈슈슉! 허공을 가득 메우는 짓쳐 들어가는 수백 개의 암기(暗器). 복면괴한은 벼락같이 암기를 날린 뒤에 동쪽을 향해 번개같이 신형을 뽑아올렸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일단 물러서려는가? 암기는 무서운 속도로 소복여인을 향해 쏘아갔다. 그리고 막 그녀의 몸을 파고들려는 순간 돌연 소복미부인의 면전에 다다른 암기들이 어떤 무형의 벽에 박힌 듯 사방으로 퉁겨져 나가는 것이었다. (저럴 수가……?) 용천음은 아연 놀라고 말았다. 소복여인은 힐끗 용천음을 바라본 뒤에 빠르게 말했다. "어서 육양천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빛살처럼 신형을 날려 복면괴한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


용천음은 지독히 짧은 시간에 겪었던 일을 생각하며 의혹을 금치 못했다. (그 복면괴한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날 구해 주고 놈을 추적해간 그 아름다운 소복의 미부인은 누구일까?) 구름 같은 의문이 일었다. 한데 그 순간, "……!" 용천음은 소복여인이 떠나면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서 육양천을…… 용천음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렇다면 조금 전 비명소리가 바로 단종철포 육양천의……?" 다음 순간 용천음의 몸은 쏜살같이 장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방 안은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으며 왼쪽 벽에는 튕긴 피가 아직도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 피투성이가 된 노인이 모로 쓰러져 있었다. (육양천!) 용천음은 방 안으로 들어서는 즉시 그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달려가 육양천의 머리를 부축했다. "육양천! 육양천!" 찰나, 꽈아악----! 돌연 육양천이 피묻은 손으로 용천음의 멱살을 죽어라 움켜잡는 것이 아닌가? "끄르르륵……" 그의 목에서 피가 뒤엉킨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음…… 모…… 음모……" 용천음은 안타까운 듯이 육양천의 몸을 흔들었다. "육양천……!" 육양천은 안면근육을 푸들푸들 떨며 용천음의 멱살을 더욱 거세게 움켜 쥐었다. "주군…… 음모…… 외…… 다……" "누구요? 그 복면괴한은 누구요?" 육양천은 입을 벌려 뭐라고 말하는 듯했으나 그 말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입 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육양천! 좀더 크게 말해 보시오." 용천음은 고개를 숙여 귀를 바싹 육양천의 입술에 갖다대었다. "놈은…… 놈…… 은…… 바로…… 바…… 로……" 멱살을 움켜쥔 채 육양천의 머리가 옆으로 떨어졌다. 죽은 것이다. "육양천! 육양천!" 용천음은 미친 듯이 불러 보았으나 육양천은 대답이 없었다. "육…… 양…… 천……" 용천음은 고개를 떨구며 입술을 악물었다. "누구요……? 누가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단 말이오……?" 분노하고 있는가? 그의 안면근육이 무서울 정도로 비참하게 일그러진 채 쉴 새 없이 씰룩거리고 있었다. 문득 용천음은 육양천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사이로 역겨운 내장이 스물스물 기어나오고 있었다. (지독한 살수(殺手)다!) 용천음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육양천은 철포삼을 극한까지 익혀 웬만한 병기나 무공으로는 몸을 꿰뚫을 수가 없다.) 그는 조금 전 마주쳤던 복면괴한을 떠올렸다. (그는 아무런 병기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육양천의 가슴을 꿰뚫은 것이다. 맨손으로 철포삼을 깨뜨릴 수 있다면 대체 무슨 무공이란 말인가?) 용천음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으로 보아 놈은 무서운 신공을 지닌 인물임이 분명하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그는 육양천의 죽음에 대해서 떠올렸다. "놈이 무엇 때문에 육양천을 살해했을까?" 용천음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혹시…… 복면괴한이 그 놈이 아닐까? 백로 신도잠께서 말했던 백풍마궁의 이단자……" 용천음은 고개를 들어 벽에 흘러내리는 피를 응시했다. "그럴 가능성이 짙다. 육양천은 그 놈에 관해 뭔가를 알아냈거나 알고 있기에 입을 봉하고자 살해했을 것이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복면괴한……! 놈이 이단자인 줄 알았다면 끝까지 놓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용천음은 육양천을 반듯이 눕혔다. 그리고 막 일어서려는 순간, (응……?) 그는 무엇을 보았는지 두 눈에 기광을 번쩍였다. 그것은 잘려져 나간 어떤 물건의 한 조각이었다. 용천음은 천천히 그것을 집어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어 느릿하게 품 속에 넣으며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러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완벽한 살인이란 있을 수 없지……" 그가 품 속에 넣은 것은 어떤 물건에서 떨어져 나간 조각이었을까? 5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백로 신도잠은 물처럼 고요한 눈으로 용천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용천음 옆에 있는 만상유공 가야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자네는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 가야백은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몹시 신중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기는 하나 문제는 복면괴한이 어떤 신공으로 육양천의 철포삼을 뚫었느냐는 것입니다." "음……!" 신도잠은 무거운 침음성을 토했다. 가야백은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하는 듯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육양천의 철포삼을 꿰뚫을 수 있는 인물은 이곳에서도 그다지 많지 않을 정도입니다." 신도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가능성이 있는 제자들을 추려야겠지." "그렇습니다." 가야백은 힐끗 신도잠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놈이 공공연히 나타난 이상 주군에게 접근하여 암살(暗殺)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신도잠이 동의를 표했다. "나도 그 점이 걱정인 게야…… 주군에게는 아직 놈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없으니까." "……!" 용천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느닷없이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었던 소복의 중년미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여자도 백풍마궁의 인물일까?) 용천음은 소복여인에 대한 것을 신도잠에게 물어 보려다 생각을 거두고 말았다. 신도잠의 무거운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부득이 편법(偏法)을 쓰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편법……? 신도잠은 가야백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옳으신 판단입니다. 앞서의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지금 곧 주군을 금단의 천문으로 들게해야 할 것입니다." 용천음은 흠칫했다. "나는 아직 초보적인 무공입문(武功入門)도 마치지 못했습니다." 가야백이 말했다. "일이 급해졌습니다. 초보적인 입문 따위에 매달려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 기는 법 걷는 법 모조리 때려 치우고 나는 법부터 배우라는 뜻인가? 훌쩍 건너 뛰어서 말이다. 신도잠이 신중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초보적인 단계를 생략한 이상 이제부터 주군은 지상최강의 무공을 곧바로 익혀야 한다. 그것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일이며 전적으로 주군 혼자의 노력으로 해내야 한다." 혼자서 지상최강의 최절정 무공을 연마해라! 실로 황당한 말이 아닌가? 신도잠은 예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용천음을 직시하며 바윗덩어리 같은 묵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신이 없다면…… 금단의 천문에 들 생각을 버려라." 일순 용천음은 번쩍 고개를 쳐들며 어금니를 짓깨물었다. 이마에서는 굵은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용천음의 눈자위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나 용천음, 금단의 천문이 어떤 곳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곳이 어떠한 곳이던 간에 적어도 목숨 하나 내던져서 이루지 못할 그런 곳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도잠과 가야백의 얼굴에도 격동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과거 수 차례나 목숨을 끊으려 몸부림친 나입니다. 그러나…… 죽음도 나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 "나 용천음…… 이루지 못하면 그 안에서 죽을 것입니다……!" 용천음의 마지막 한 마디가 감전처럼 와 닿았다. "좋아!" 신도잠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만면에 미더운 빛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문득 좌측에 있는 조그만 문을 향해 가볍게 손벽을 쳤다. 순간, 스르륵…… 그 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한 소녀가 걸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오오, 꽃이 뭉쳐져 만들어졌는가?


아니면, 심산유곡(深山幽谷)의 한줄기 광휘가 현세(現世)에 나타났는가? 구름을 밟고 오듯 휘늘어진 치맛자락을 바닥에 끌며 선녀인 양 다가오고 있는 절세의 미소녀(美少女). (아름답다……!) 용천음은 자신도 모르게 내심 외쳤다. 일신에는 화사한 모란이 수놓여진 청렴한 백라의(白羅衣)를 입었고 가지런히 모은 채 수줍은 듯 옷고름을 만지고 있는 그 손은 백옥(白玉)과 같았고, 칠채보옥으로 단장한 채 구름처럼 땋아 올린 칠흑 같은 머리카락은 윤기가 흘렀다. 그 뿐이면 말도 안한다. 부끄러움과 정숙함을 가득 담은 한 쌍의 봉목(鳳目)은 샛별처럼 맑고 촉촉했으며 오똑 솟은 콧날은 빚은 듯 아름답고 꽃잎을 살짝 어 문 듯한 연분홍빛 입술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야릇한 충동을 느끼게 만들었다. 너무도 아름다워 인형과도 같은 이 소녀…… 아무리 목석 같은 사내라 해도 이 소녀를 한 번 보기만 한다면 만사 제쳐놓고 당장에 사고치려고 들 것이다. 소녀는 사뿐사뿐 다가와 신도잠에게 날아갈 듯 큰절을 올렸다. 문득 가야백이 그녀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소미(小美), 너는 갈수록 예뻐지는구나." "……!" 부끄러웠던가? 소녀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다소곳이 숙였다. 그 자그마한 동작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미치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신도잠이 용천음을 향해 말했다. "주군, 이 아이는 내가 우연히 거두어들여 키운 아이라네." "……!" 용천음은 움찔하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이 소녀는 삼월령의 후손이 아니란 말인가?) 아마 삼월령의 후손이 아닌 사람이 이곳에 있기는 그 소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심성이 착하고 수줍음을 잘 타는 것이 흠이지. 한 마디 더 한다면 지나칠 정도로 조용한 성격이라고나 할까?" 용천음도 느끼고 있었다. 소녀의 성격이 심산의 호수처럼 고요하다는 것을…… 신도잠은 온화한 음성으로 소녀에게 말했다. "소미야, 이 분이 주군이시다. 인사 올리도록 해라." "예……" 소녀는 모기소리보다 작게 대답하며 아름다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용천음을 향해 사뿐히 절을 올렸다. "소녀 백소미(白小美)라고 하옵니다." 이름을 말하는데 왜 얼굴이 붉어지는가? (백소미……?) 용천음은 시종일관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그녀의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었다. 어느 한 곳 완벽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 (그런데…… 장령이 무엇 때문에 이 소녀를 내게 인사시킨단 말인가?) 그것도 걱정인가? 신도잠은 느릿한 음성으로 말했다.


"앞으로 이 아이가 주군을 모실 것이네." 용천음은 두 눈을 휘둥그래 떴다. "무슨……?" 가야백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으며 슬쩍 백소미를 응시한 뒤에 다시 용천음에게 시선을 옮겼다. "소미가 금단의 천문 안에서 주군의 모든 수발을 들어줄 것이다." (내 수발을……?) 용천음은 아연실색하며 신도잠을 바라보았다. 신도잠은 탐스러운 백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단의 천문에 들게 되면 주군은 오직 무공연마에만 전념해야 할 뿐 일체 다른 곳에 신경 쓸 여가가 없을 것이네." 세심한 배려라고 해야 하는가? 문제는 저토록 아름다운 미소녀와 단 둘이 있어야 하는 데 있었다. 가야백이 낌새를 알았는가? 그는 미묘한 웃음을 머금으며 던지듯 말했다. "주군, 여자라고 얕보고 행여 딴 마음 먹으면 곤란합니다. 소미는 백풍마궁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이기 때문입니다." "……!" 용천음은 또 한 번 놀랐다. 백소미가 이곳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최강의 고수라니? 저토록 수줍어 하고 조용한 여자가…… 하기야 최고의 장령인 백로 신도잠으로부터 직접 무공을 전수받았으니 그럴 수밖에 더 있겠는가? 가야백은 여전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딴 마음을 품으시려거든 아마 금단의 천문에 있는 무공을 하루 속히 익히셔야 가능할 겁니다."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하는가? 백소미는 너무도 당황하고 부끄러웠던지 아예 고개를 푹 땅 속에 처박고 있었다. 뿐인가? 귀뿌리는 물론이거니와 아예 손등까지 붉은 홍조로 물들어 있었다. 용천음은 또 어떠한가? 그는 연신 헛기침을 해대며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 억지 웃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허허헛…… 허헛……" 좀처럼 웃지 않던 신도잠이 두 남녀를 번갈아 바라보며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이러니 두 남녀는 더 당황할밖에…… 문득 가야백이 웃음을 거두며 말했다. "주군, 내일 아침입니다." "……!" "내일 아침…… 금단의 천문을 열 것입니다." 용천음은 탁자 밑의 두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 쥐었다. (금단의 천문……! 아버님이 나에게 남긴 마지막 유산(遺産), 이루지 못하면…… 그 안에서 죽으리라!) 이때, "주군……" 신도잠의 음성이 귓전으로 파고 들었다. 용천음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눈빛과 눈빛! 그것이 허공에서 뒤엉켰고 신도잠은 형언할 수 없는 그 어떤 끈끈한 눈으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용천음의 눈빛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도잠은 일어섰다. 용천음은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신도잠은 더할 수 없는 경건한 자세로 용천음을 향해 올렸다. "장령……?" 용천음은 대경실색하며 황망히 신도잠을 부축했다. 고개를 쳐드는 신도잠의 두 눈에는 오오…… 눈물이 고여 있지 않은가? "주군이시여……! 이 신도잠, 삼월령에서 태어나 이곳에 오기까지 지금껏 그 누구의 앞에서도 꿇은 적은 없소이다. 아니 고개조차 숙이지 않았소이다……" "장령……" 신도잠은 입술을 악물었다. "지금의 이 대례는 신도잠의 대례가 아니오이다. 먼저 죽어간 삼월령의 영령들…… 그 선혈들의 나는 대례오이다……" 끝내 두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강퍅한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루셔야 합니다. 반드시 이루셔야 합니다……" "장령!"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말은 없었다. 그러나 가슴과 가슴으로 전해지는 그 뜨거운 대화는 수천, 수만의 오고감이 있었다. 눈물과 눈물! 이제는 떠나야 할 노영웅의 눈물과, 이제는 떠올라야 할 소영웅의 눈물이기에 그래서 그들의 더욱 슬펐던 것이다. 2 권으로 이어집니다

대례를

무릎을

피눈물

눈물은

b66-1  

지은이: 사마달 ‥ 차 례 ‥ 하얀 바람의 章 제 1 장 奸臣의 아들 제 2 장 금황혈시 제 3 장 不請客 제 4 장 惡魔의 子息 제 5 장 江湖出師表 제 6 장 恐怖의 血禁魔令 제 7 장 怪盜와 少女 제 8 장 千年의 秘史 제 9 장 史上最强의 武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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