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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선자불래 제 3 권(전 3 권) 응보(應報) 편 지은이: 사마달 - 차례 제 19 장 제 20 장 제 21 장 제 22 장 제 23 장 제 24 장 제 25 장 제 26 장 제 27 장

이광혜를 만나다 단립의 비애 또 다른 배반 송검이전멸 가슴에 한은 쌓이고 양귀비 그를 보기 위해 무영문의 풍운 봉 문

제 19 장 이광혜를 만나다 1 종남파(終南派)! 태을 봉우리 하늘에 닿아 있는데 太乙近天都(태을근천도) 잇닿은 산은 바다 끝에 뻗쳐 있다 連山到海隅(연산도해우) 사방을 둘러보니 흰구름 모여들고 白雲廻望合(백운회망합) 푸른 안개 속에 들어가 보니 아무것도 없더라 靑靄入看無(청애입간무) 땅의 경계는 중봉에서 갈라지고 分野中峰變(분야중봉변) 개고 흐림은 많은 계곡 따라 갈라진다 陰晴衆壑殊(음청중학수) 장안(長安) 남쪽에 이어진 진령산맥의 중심 봉우리인 종남산은 그 산자수려한 풍경으로 당대의 뭇 시인들이 그 풍광을 읊었다. 종남산은 남산(南山)이라고도 불리웠다. 그러나 무림인들에게는 구파일방 중의 명문인 종남파가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더욱 유명했다. 예로부터 명산에는 산의 정기를 받은 인물이 나고, 그 기세를 받은 자는 천하가 우러른다고 했다. 구파일방이 하나같이 명문이라 할 것이나 세인들은 저 소림과 무당을 제일로 쳤을 뿐, 종남파는 장안이 차츰 성도로서의 위세를 잃은 것처럼 세인들의 기억 한 귀를 차지하는데 그쳤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이 하늘의 뜻이고,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인간사라 했다. 저 당대의 명시인이자 화가였던 왕유(王維)가 읊은 싯귀에서처럼 종남을 휘감은 푸른 안개를 뚫고 한 마리 청룡이 승천할 줄을 그 누가 알았으랴? 몇십 년 전까지 종남파가 쇠락하게 된 이유는 종남파 무술의 대표적인 두 절기인 천하삼십육검법(天河三十六劍法)과 현청건강기(玄淸乾 氣)가 유실되고 난 후였다. 한 문파를 대표하는 절기는 바로 문파의 사활이 걸려 있다. 종남파의 두 절기가 단절된 것은 물론 그 상승무공을 익힐만한 인재가 없었기에 연유되었을 것이지만,


그 결과 종남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추락하게 되고 종내에는 문파의 명맥을 유지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어느 날 종남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종의 하극상이 성공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십 년 전 종남파의 장문인이 피살당하고 한 사람이 종남의 장문인에 등극했다. 종남독웅(終南獨雄) 이무초(李武草)! 그는 피로써 집권하고 철권으로 문파의 기강을 세웠다. 장문인에 오른 이무초는 단절된 종남의 절기를 복원하는데 문파의 운명을 걸었다. 그것이 한날 한시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터, 장장 십 년 동안 뼈를 깎고 침식을 잊는 노력 끝에 마침내 천하삼십육검법과 현청건강기를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이무초의 능력이 뛰어났지만 사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이무초의 다섯 아들의 역할도 지대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세 번째 아들은 여타 형제보다 몇 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이광혜(李光惠)! 종남산에 웅크린 한 마리 청룡은 그를 상징하는 말이었다. 무가의 손은 걸음마를 걸을 때부터 손에 칼을 쥐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이 그들의 생존이기 때문이다. 이광혜는 특이하게도 유림(儒林)에 먼저 발을 디뎠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인 이무초의 명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무초는 앞날을 생각했다. 종남파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일단 문도들을 설득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무초는 종남파의 자긍심을 되살리는 방법에 착수했다. 과거의 영화를 되살린다면 문도들의 대폭적인 환영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 그는 긴 안목을 지니고 이광혜를 유림으로 보내 기초적인 학문을 수련토록 한 것이다. 이렇게 치밀한 안배 속에 성장한 이광혜는 당시 유림의 거두였던 단익제의 문하에 입문해 사사한 지 일 년 만에 그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고금(古今)의 학문을 두루 섭렵함은 물론, 유림의 인사들과 깊은 교우관계를 가졌다. 이 유림의 친구들이 훗날 이광혜를 도와 천하삼십육검법과 현청건강기를 해독, 습득케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이제 이십 중반이 된 이광혜의 명성은 천하를 울렸다. 그를 한 번이라도 만난 무림인들은 장차 종남파를 빛낼 영웅만이 아니라 정도무림을 선도해 나갈 동량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전검휘가 죽던 그 날, 이광혜는 종남파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은밀하게 종남산을 떠났다. 옷을 벗는 여인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그 여인이 천하인들에게 미인으로 손꼽히는 여인이라면 그 광경이야 아무리 보아도 신물이 날 리 없을 것이다. 또한 은근히 점찍어 놓은 여자라면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귓전에 들린다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현 상황이 결코 여인에게 눈길을 줄 틈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한성은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이건 내 잘못이 아냐! 망을 봐달라는 부탁을 해놓고는, 사람이 근처에 있는 줄을 뻔히 알면서도 스스럼없이 옷을 벗어 던지는 저 요물단지에게 문제가 있어!' 금방이라도 선녀가 하강할 것만 같은 폭포수 아래,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창천 하늘 아래서 여인의 희디 흰 몸뚱이가 불쑥 드러나니 피끓는 청년치고 가슴이 진탕되지 않을 자 누구이겠는가? 주한성은 연신 침을 삼켰다. 일전 후극진에게 험한 일을 당할 뻔한 위기에 처한 남궁설의 속살을 보았지만 당시에는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다. 사내자식이 비겁하게 위기에 처한 여인을 넘보는 것은 비겁하기 이를 데 없다. 그렇다고 지금 여인의 알몸을 훔쳐보는 것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죄책감은 훨씬 덜하다. 왜? 이것은 여인이 자의적으로 만든 상황이니까! '책임진다. 책임지면 될 거 아냐!' 속으로 외치며 눈을 더욱 크게 뜨는 주한성.


'히이익!' 꿀꺽! 히야! 무슨 여자 가슴이 저렇게 이뻐? 도도한 콧대만큼이나 가슴도 실하구만. 앞으로 튕겨나가지 못하는 것이 애닮다고 저리 꼭지를 내밀고 부르르 떨고 있는 거야? 침을 꼴딱 삼키던 주한성의 두 눈이 튕겨나올 듯이 커졌다. 단 하나 남은 의복! 손바닥만한 그것을 의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저 몸의 일부분을 가리고 있는것, 문제는 남자의 성적 호기심을 최대한 자극하는 그 부분을 가린 헝겊쪼가리에 남궁설의 손이 닿았다는 점이다. '벗어! 얼른 벗어! 바보야. 나 외에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얼른 벗어!' 다급한 주한성의 마음과 달리 남궁설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는데, 그 모양이 우습지 않은가? 이미 통통하게 살이 오른 상반신은 다 드러내놓고 고작 조그만 고의를 남겨놓고 망설일 것은 또 뭔가? 내심 투덜거리던 주한성이 허걱 소리를 내면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사방을 둘러보던 남궁설의 눈빛이 그가 보초를 서고 있는 곳에 머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오래 고개를 돌리고 있을 바보가 몇이나 될 것인가? '밑져야 본전이다. 까짓거 나중에 뺨 한 번 맡기면 될 거 아냐, 뭐!' 홱 고개를 돌린 주한성의 눈에 실망이 가득했다. 없어진 것이다. 아니 있긴 있다. 물 위에 목 윗부분만 내놓은 남궁설이! '쳇! 껀수 놓쳤구만. 내 팔자가 원래 이렇지. 지지리 복도 없는 내 주제에 일부분만 본 것으로도 만족해야지. 그나저나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기나 할까?' 아쉽다 생각할 수록 미련이 남는 법이다. 금방 보았던 남궁설의 그 뇌세적인 가슴살이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다시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래서인가? 곤하게 잠을 자던 혁아가 뒤척였다. 얼른 엉덩이를 두드려 줬지만 녀석은 단잠을 잔 듯 길게 기지개를 켜고 난 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눈빛을 보니 문득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불끈 솟구쳤던 몸의 한 곳에서 바람빠지듯 욕정이 빠져나갔다. "요놈! 네놈이 천사로다. 이 아저씨의 음흉한 마음을 없애 주었으니!"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데, 갑자기 귓전에 영롱한 남궁설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봐요! 당신 장가갔어요?" 여자가 산중이지만 노천에서 목욕을 할 양이면 조용히 할 것이지 남이사 장가를 갔든 말았든 상관할 일이 뭐란 말인가? 혹시 지나가던 건달이 덮치기라도 할 양이면 어쩌려고 저리 소리를 질러! 과거만 생각하면 열불이 뻗치는 주한성이다. 후극진을 비롯한 단우의 졸개들이야 싸그리 죽임을 당했으니 이승에서 저 여인의 알몸을 본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주한성이지만, 문득 남궁설의 그 기막힌 몸을 후극진이 보았다는 생각을 하자 이유없이 울화통이 터진다. "제 말이 안 들려요?" 저 여자가 무슨 꿍꿍이 속이 있는 거야? 본래 음탕한 피를 타고 나서 사람없는 산중이니까 한 바탕 일을 벌려보자는 거야 뭐야! 기껏 내게 혁아를 맡겨 운신을 불편하게 해 놓고서 사람 가슴에 불을 지르는 거야? "아직 안 갔수! 내가 장가 갔으면 이러고 있겠수? 누군가 그럽디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더 잘 먹는다고. 난 아직 고기맛을 못 보아 이렇게 외면하고 있으니 괜히 착한 사람 사고치게 하지 마쇼!" "내가 중매 서 줄까요?" 이 여자가! 여자가 다 그런 거 아닌가? 전에 노미량은 남편이 죽자마자 단우에게 꼬리치더니, 부인 친구 죽은 지 하루 만에 서방감을 구하는 저 여자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거야?


"이보쇼! 거 뭐 산중에서 목욕하는 것이 자랑이라고 그렇게 떠들어대는 거요? 내가 거시기를 잘린 환관으로 보이는 거요? 아니면 내가 부처처럼 가운데를 써먹지 못하는 성인군자로 보이는 거요? 이거 좀 도가 지나치지 않소?" 한 바탕 쏘아붙인 주한성의 기세에 눌렸는지 남궁설의 음성이 뚝 그쳤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고개를 돌리던 주한성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요물이다. 저렇게 창피한 줄도 모르고 알몸을 드러내 놓고 서 있다니! 철그럭! 물결이 부서지는 소리가 귓전에 들려왔다. "욕을 해도 좋아요. 날 어떻게 생각해요?" 주한성은 픽 웃고 말았다. "마녀(魔女)!" "그래요. 마녀라도 되고 싶어요. 남궁가의 혈맥을 이을 수만 있다면 난 마녀라도 되고 싶어요!" "이보슈! 거 보자보자 하니까 사람 열받게 만드는데. 남궁가의 핏줄이 뭐 그리 대단다하고 처음 본 남자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게요? 아닌말로 그렇게 남궁가의 핏줄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 고아라도 입양시켜 대를 이으면 될 거 아뇨?" 그가 떠들고 있는 사이 어느 틈에 다가온 남궁설이 뒤에서 주한성의 목을 껴안았다. 찬 물에 멱을 감고 나온 여인의 몸이 차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더욱 싱그럽게 느껴진다. 흐아, 이 웬 괴변이냐? 산중의 여우에게 홀린 것도 아닌데, 왜 이유없이 착착 감기느냐 말이다. 주한성의 반응을 살피던 남궁설이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난 남궁가의 원한을 잊지 못해요. 난 당신의 능력을 보았어요. 남궁가의 원한을 갚아 줄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요!" "어허! 양자들이는 게 빠르다니까?" "어느 세월에요? 누구보다 당신은 잠마전의 무서움을 알 겁니다. 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절대 잠마전의 추적을 피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당신이 내 남편이 되면 얘기는 틀려지죠. 내가 보기에 당신은 아내의 부탁을 거절할 사람은 아니에요!" 주한성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묘한 게 남자의 심리상태다. 일단 여자를 쫓아다닐 때는 죽자 사자 진드기처럼 달라붙지만 막상 여자가 결혼하자니까 갑자기 도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난 낭자같이 아무 데서나 훌훌 벗어던지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소이다. 낭자, 냉큼 옷이나 걸치쇼! 어…… 어……?" 제비초리라 부르는 뒷 머리카락이 당겨지자 저절로 목이 꺾였다. 역광을 받은 남궁설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안색은 극히 어두웠고 눈가에는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남궁설은 농담을 한 것이 아니었다. 욕정에 못 이겨 옷을 벗어던질 색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절박했던 것이다. 남궁세가의 가문주였던 남궁청이나, 전검휘나 당대에서 적수가 없는 절대고수들이었다. 잠마전은 그 가공할 절대고수 두 사람을 한 달 간격으로 저승으로 보내 버렸다. 노미량이 오죽했으면 잠마전에 투신할 생각까지 했을 것인가? 그 잠마전에 추적을 당하는 여인의 심정은 어떠할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극도의 공포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거의 반은 넋이 나간 상황에서 극으로 치달은 불안감은 수치심조차 망각케 하고 이런 극단적인 상황을 연출하게 만들었다. 주한성은 빙글 돌아섰다. 남궁설을 힘있게 끌어안았다. 남궁설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었다. 주한성의 마음도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그러나 어두운 분위기를 선천적으로 싫어 하는 그다. "만일 한 번만 더 이렇게 아무 데서나 홀랑 벗으면 두 번 다시 쳐다보지도 않겠소. 얼른 옷을 입으시오!" 남궁설은 수줍게 돌아서서 옷을 걸쳤다. 그 실한 엉덩이와 그린 듯한 곡선이 옷으로 가려지는 것을 본 주한성은 쩝! 입맛을 다셨다. "일단 일을 저지를 걸 그랬나?" 혁아가 배가 고픈지 몸을 보채자 주한성은 알밤을 한방 먹였다. "네 녀석 때문이야! 하필 결정적인 순간에 내 품에 안겨 있을 건 뭐냐?" 어른의 변덕을 알 리 없는 혁아는 입을 쭈물쭈물 하다가 아앙 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아이를 얼르느라 정신이 없는 주한성을 바라보는 남궁설의 시선에는 짙은 호감이 담겨 있었다. 그때 주한성은 산 아래에서 자욱하게 번지는 먼지 구름을 발견했다. "저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주한성은 혼수혈을 짚어 아직도 곤한 잠에 빠져 있는 노미량을 옆구리에 끼고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같이 가요!" 남궁설이 혁아를 옆구리에 끼고 역시 몸을 날렸다. 그것이었다. 종남파와의 조우! 이광혜와 주한성의 두 번째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2 "너는 마치 여자같구나!" 오 년 전, 그는 헤어지면서 그렇게 말했었다. 여자보고 여자같다던 사람, 다른 동료들은 모두 어렴풋이 그녀의 정체를 알고 수근거렸는데 유독 그만이 그녀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학당에서 단체로 천렵을 가는 날이면 그는 서슴없이 뒤처지는 그녀의 손을 잡아 끌었었다. 어쩌다 학과를 파한 후 주루에 들려 거나하게 한 잔 걸칠 기회가 있으면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그녀의 볼을 튕겨 놀리면서 그녀를 부축해 주곤 했다. 그때마다 얼마나 가슴졸였던가? 그녀는 신분을 속이고 사는 사람이었다. 잠마전의 초대전주였던 단뢰가 이룬 오조개화의 신화. 그녀는 바로 잠마전의 자금을 조달하는 금적산장주의 유일한 여식이었던 것이다. 행여나 그가 그녀의 정체를 알까 두려워 했고, 반면에 그의 체취가 가슴깊이 스며들어 이대로 그의 품에 안겨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실수로, 때로는 의도적으로 그의 어깨에 부풀어오르는 가슴을 기대면 짜릿하게 번지는 야릇한 쾌감을 즐기기도 했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어들고는 했었다. 자신을 친구로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 우정대신 사랑이 담기기를 얼마나 학수고대했던가? 그러나 부지세월이라! 그와 헤어진 지 오 년이 지났고 이제 그녀는 이렇게 그를 그리워 하는 일개 여인에 불과했다. "이광혜!" 나직히 그 이름을 불러본다. 음성은 그녀가 눈앞에 둔 작은 연못에 퍼지는 잔잔한 파문처럼 그녀의 가슴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민여림(閔廬林)은 가슴을 꼭 끌어안았다. 시선을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늦가을 정오의 햇살 아래 각양각색으로 꾸며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누각(樓閣)과 수만 냥을 호가한다는 정원수와 기화이목들, 그 너머 금적산장(金積山莊)의 위용을 상징하듯 높다랗게 자리한 탑루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소유다. 하다못해 저 장원을 수비하는 무사들조차 그녀의 명 한마디에 목숨을 내던질 것이다. "아냐! 나는 단 하나도 갖지 못했어. 그 사람과 맺어지지 못하는 한, 난 하나도 소유하지 못한 가련한 여인에 불과해!" 마음이 울적하니 스스로 외로워진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연못 속을 유유히 유영하는 비단붕어들이 부럽단 생각이 든 민여림은 작은 돌멩이를 들어 던졌다. 퐁 소리에 놀란 비단잉어들이 빠르게 흩어졌다. 그때였다. 댕댕댕댕!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친 탑루에서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무슨 일인가? 왜 타종로(打鐘老)는 갑자기 저렇게 요란하게 타종을 하는 것인가? 가만히 종루와 타종로를 살피던 민여림은 뭔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그대로 신형을 뽑아올렸다. 수직 담벽 이십여 장을 두 번의 탄력만을 빌어 오르는 그녀의 모습은 창공을 나는 매처럼 날렵했다. 종루에 오른 그녀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멀리 금적산장과 연결된 장안대로(長安大路)를 폭풍처럼 질주해 오는 일천여 명을 발견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올라오기 무섭게 오체투지의 예를 취하고 있는 노인을 향해 말했다. "할아범! 그러고 있을 시간이 어딨어요? 냉큼 일어나요! 저들이 누군줄 알아?" 할아범, 이곳에서 타종로를 그렇게 불러 주는 사람은 몇 안된다. 그 사실이 황송한 노인은 얼른 일어서서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아씨! 저들이 들고 있는 청룡기(靑龍旗)가 보이십니까? 저들이 바로 요즈음 욱일승천의 기세로 떠오르고 있는 종남파입니다." 일개 타로의 안목치고는 대단했지만, 본래 종을 치는 자들은 각 문파를 상징하는 깃발이나 무기를 식별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았으니 그리 대단하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타로를 대하는 민여림의 태도는 예사롭지 않았다. "종남파? 그들이 무슨 이유로? 일천 명이면 종남의 세력 절반이 출동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민여림의 말에 타로는 늙어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슬며시 어둠이 스쳐갔다. "글쎄요. 그 이유를 자세히 모르겠지만 저들의 모습으로 보아 좋은 일은 아닌 듯 싶습니다. 저들이 타고 있는 말을 보십시오. 수없이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지 않습니까? 본래 불행은 청하지 않아도 저렇게 바쁜 걸음으로 달려오는 법입니다." 민여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타로가 종남파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내심 가볍게 흥분했었다. 종남파에는 이광혜가 있지 않던가? 그가 혹시 자신에게 볼 일이 있어서 방문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상반된 일인 것 같았다. 그때였다. 휘이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렸다. 민여림의 옆에 한 사람이 내려섰다. 타로가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대주님, 옥체가 상하시면 어쩌시려고 이 높은 곳을 오르십니까?" 타로가 대주라고 칭하는 삼십대 초반의 장년인, 그는 금적산장에서도 범상치 않은 신분을 지닌 인물이었다. "손모가 아씨를 뵙니다." "손대주는 예를 거둬요!" 장한이 고개를 들었다.


사혼대! 자고로 장사라는 것은 정보와 재력과 기동성이 어우러져야 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룰 때만이 장사는 막대한 이문을 남길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중요한 것이 있다. 장사란 것이 꼭 이론만으로, 주어진 정보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대륙은 광활하다. 장강을 중심으로 남북 십삼성(十三省)으로 나뉘어졌지만 그 성 하나가 명나라 주변의 국가보다도 큰 경우도 있다. 이 거대한 대륙에 장사치가 하나 둘이고 상인집단이 한두 개일 것인가? 수만 개가 난립하고 있다. 그 중에는 상인집단을 초월해 군벌(軍閥)같이 막대한 재력과 권력을 지닌 단체도 수두룩하다. 금적산장은 그들을 누르고 천하의 상권을 한 손에 틀어쥐었다. 말로 안되면 무력(武力)으로, 무력으로도 안되면 바로 죽음이었다. 심할 경우에는 그 단체를 완전히 괴멸시켜 버린 적도 있었다. 그 일을 이룬 단체가 바로 서사혼도에서 연무를 통과한 사혼대였고 삼십대 초반의 장한 손일영(孫一榮)은 바로 사혼대의 대주였다. 손일영은 시선을 가늘게 좁혀 종남파 진영을 바라보다가 곧 타로를 향해 명을 내렸다. "타로, 사혼대를 출동시키는 타종을 울리게!" 타로의 얼굴이 미미하게 변했다. 그는 민여림을 바라보다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로소 허리를 굽혔다. "명을 받듭니다." 열 세 번의 다급한 종소리가 금적산장에 울려퍼졌다. 산장 곳곳에서 무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혼대! 장안은 물론 저 서역까지 공포의 존재로 알려진 그들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은 은밀히 담을 넘었다. 금적산장을 보호하기 위해 담 아래 파놓은 너비 삼 장의 참호를 가볍게 뛰어넘은 후 수천 평에 달하는 드넓은 광장을 표범처럼 질주해 단숨에 가로질렀다. 그 수효가 어언 이백여 명. 그들의 목표점은 금적산장을 향해 뻗은 대로 옆이었다. 산을 향해 난 그 길 양옆 숲 속에는 은폐물로 사용할 수 있는 나무와 숲과 바위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사혼대는 곧 민여림과 타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들의 움직임은 실로 빠르고 귀신같아 숲 곳곳에서 모이를 쪼던 꿩과 그 외 산짐승들조차 모를 정도였다. 그러나 손일영은 그 모습을 탑루에서 바라보며 이제 장안을 벗어나 산장으로 뚫린 넓은 산길을 질주해 오는 종남파 문도들을 바라보았다. 한 순간 손일영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본 것이다. 일천 명 대군의 선두에 선 주한성과 그 옆에 선 준수한 젊은이의 얼굴에 떠오른 비웃음을! 손일영과 젊은이 사이에는 무려 일백 장의 공간이 있지만 손일영은 매처럼 시력이 예리한지라 능히 그들을 살폈다. "주한성이다. 그리고 그 옆에 선 사람은 이광혜가 아닌가? 그가 무림에 출도했다면 일은 조금 심각하겠군. 아무래도 내가 직접 사혼대를 지휘해야겠군." 혼잣말로 중얼거린 손일영은 민여림을 향해 작별을 고하고는 탑루에서 몸을 날렸다. 허공에 몸을 띄운 그는 마치 새처럼 양손을 휘젓고 몸을 연신 뒤집으며 단숨에 사혼대가 은신한 곳을 향해 날아갔다. "대단하군요!" 타로의 말에 민여림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도 본 것이다. 이광혜를!


그런데 한 순간, 미친 듯이 말을 달려 질주하던 종남파의 무사들이 사혼대가 은신한 숲과 십여 장의 공간을 두고 일제히 멈춰섰다. 그들은 두 무리로 나뉘었다. 한 축은 이광혜를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넓게 포진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조는 주한성을 중심으로 숲을 우회해 사라졌다. 보보를 맞춰 앞으로 전진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사혼대를 노리고 그물을 치는 것 같았다. 민여림이 놀라 외쳤다. "저건 종남파에서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천하삼십육강검진(天河三十六剛劍陣)이 아닌가? 이광혜가 설마하니 그 검진마저 복원한 것이란 말인가? 그러나 보다 주의해야 할 사항은 후면으로 돈 주한성입니다." 타로에게 던진 이상한 질문, 이상하게 딱딱하게 굳는 타로의 얼굴. "그렇습니다. 아씨, 아무래도 오늘은 길보다 흉이 많을 것 같습니다. 내려가시죠! 장주께 보고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냐! 타로 혼자 가 봐! 난 아무래도 이 일전을 보아야 겠어. 종남파가 감히 금적산장에 함부로 도전장을 던질 정도로 대단한지!" -능숙한 어부가 그물을 펴는 것을 본 적이 있나? 그들이 그물을 던질 때는 마치 천하가 그물 속에 갇히는 것 같아. 천하삼십육강검진은 바로 어부가 그물을 치는 것 같은 기세로 적을 포위하는 거야. 적의 선봉이 충분히 안으로 들어왔을 때, 어부로 말하면 모든 고기가 그물 속으로 들어왔을 때 그물을 걷는 거야. 승부는 그것으로 끝이지! 이광혜가 수하들에게 전수한 공격법이었다. 그는 무공의 원리를 먼곳에서 찾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상적으로 보일 사물의 움직임에서 비범한 결과를 도출해 내곤 했다. 당연히 그는 천재라고 불릴 몇 안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거리는 일 장, 사혼대는 숨을 멈췄다. 칼의 손잡이를 쥔 손이 가늘게 떨린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다. 흥분한 상태의 맥박이 어찌나 빠른지 바늘로 살짝 찌르기만 해도 피가 만장을 솟구칠 것만 같다. 한순간, 누군가 튀쳐나가 공격을 개시하는 순간 그들의 칼은 불을 뿜을 것이다. 사혼대의 전면에 선 손일영이 가볍게 손을 들었다. 스스슥! 소리도 없이 칼이 칼집에서 빠져나왔다. 칼의 길이 일 척 반, 칼의 두깨는 매미의 날개처럼 얇고, 폭은 독사의 혓바닥처럼 좁고 가늘다. 척! 칼날을 아래로, 왼손은 가슴 앞 심장을 보호하는 듯한 자세를 취한 사혼대는 앞으로 전진했다. 종남파는 그물 같은 형상으로, 사혼대는 모든 것을 베어 버릴 정도로 날카로운 칼날을 쥔 채 서로를 향해 밀려들었다. 파앗! 사혼대에서 누군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뛰쳐나갔다. 일 장여 높이로 떠서 수평으로 날아간 그는 종남파의 진영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손으로 허공을 그었다. 번쩍! 얇고 가는 칼날이 목울대를 잘라오자 놀란 종남문인은 반사적으로 검을 날렸다. "후후후!" 괴이한 웃음이 허공에 울려퍼졌다. 사혼대원은 찔러오는 검날을 향해 거리낌없이 왼손을 내밀었다. 실로 어이없는 대응이다.


'미친놈 아냐?' 그러나 그 생각은 머릿속에서 찰나간 사라졌다. 검날이 파고들지 않는다. 가공할 속도로 적을 향해 파고들던 검날은 팔뚝에 닿자 그대로 미끄러지고 만 것이다. 놀란 종남문인이 뒤로 후퇴할 때였다. 쉬컥! 칼날이 허공에 반원을 그리고, 커억 소리와 함께 피가 솟구쳤다. 뒤로 물러서던 종남문인은 목이 반이나 잘려 뒹굴었다. "이놈!" 동료가 죽어가는 것을 본 종남문인이 검을 날렸다. 분기를 폭발시킨 그 공격은 가공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 줄기 검광이 번개처럼 쏘아져 일격을 성공시키고 미처 대비하지 못한 사혼대원의 인후혈을 꿰뚫어 버렸다. "큭!" 고통에 바르르 떨리는 육체가 지면에 고꾸라졌다. 그러나 이광혜나 손일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손일영의 눈빛이 바늘 끝같이 첨예한 반면 이광혜의 눈빛은 억겁의 호수처럼 조금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숨막힐 듯한 눈싸움은 손일영이 얼굴에 웃음을 띠우며 마감되었다. "손님 접대가 좀 거칠었군! 이해하게!" 종남파는 무림 구대문파에 속하는 명문인 반면, 사혼대는 오조의 일원인 금적산장에서도 일개 단체에 불과했다. 손해본 쪽은 종남파라는 손일영의 지적이다. "작은 일에 만족하는 사람은 큰 일을 보지 못하는 법이외다. 난 손형이 그 진리를 잊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군요!" "후후후! 그런가? 그러나 작은 내(川)가 모여 강(江)이 되듯이 자잘한 승리가 전체 승부를 좌우하는 분수령이 된다." 싸강! 손일영이 칼을 뽑아드는 소리가 날카롭게 허공을 찢었다. 두 자루의 비수, 하나는 길고 하나는 짧다. 이 평범한 무기가 손일영의 손에 들리면 한 번 허공을 가를 때 반드시 상대의 목을 베고야 만다는 가공할 병기로 둔갑한다. 길고 짧은 칼 끝에서 정오를 넘어선 햇살이 부서지는 것을 보면서 종남문인들은 긴장감에 길게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이광혜는 일절 동요가 없었다. "손형의 쌍도(雙刀)가 무림의 일절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소이다. 오늘 그 위력을 보게 된 점 심히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바외다." "물론! 이번 한판에 결정을 내지. 사혼대와 종남파도!" 손일영이 한 발을 내딛는 순간 양측 인영들의 긴장감은 도가 극에 달해 몇몇 사람은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그렇다. 목숨은 단 하나, 대결을 앞둔 가슴은 이렇게 살고자하는 긴장과 두려움으로 치떨고 있는 것이다. 일촉즉발의 긴장상태는 한 순간에 폭발하고 말았다. "접근전을 조심해라!" 종남문인측에서 굵은 음성이 주의를 주었다. "알고도 막지 못하는 것이 세월과 사혼대의 칼이다." 누군가의 비웃음 뒤, 사혼대는 먹이를 눈앞에 둔 포악한 맹수처럼 단숨에 종남파 진영으로 짓쳐들었다. 스팟!


대기를 가르는 가공할 섬광! 백색 검광 끝을 쫓아나오듯 솟구치는 피! 삽시간에 추색이 만연하던 숲은 그 단풍만큼이나 붉은 피로 얼룩져 버렸다. 탑루에서 두 진영의 대결을 보는 민여림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겉으로는 분명 사혼대의 승리로 보인다. 뿌려지는 피와 도끼에 잘린 나무처럼 쪼개져 넘어가는 종남문인들을 보노라면 당연한 것 같다. 특히 저 손일영, 길고 짧은 칼이 만들어내는 크고 작은 원에 걸린 모든 것은 산산조각나기 일쑤였다. 무서운 것은 단검이다. 손일영의 손 끝에서 팽그르르 원을 돌다가 화살처럼 쏘아지면 끝이다. 단검은 마치 가공할 속도로 회전하는 톱날처럼 상대의 몸을 파고들어 상하, 혹은 수직으로 양단하고 나서야 다시 손일영의 손으로 돌아왔다. 검도의 최상승인 이기어검술에 비견되는 손일영의 풍무도(風舞刀), 일명 바람의 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여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손대주는 상대를 너무 모르고 있���. 이광혜는 냉철한 사람이다. 적은 수를 희생해 사면을 완벽하게 포위하는 효과를 얻었다. 금적산장의 오늘을 만든 사혼대의 신화가 마침내 막을 내리겠구나!" 그녀의 한탄을 증명하듯 종남파의 포위망이 점차 오그라들었다. 종남문인들의 움직임은 절도있고 질서가 있었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검진은 더욱 엄밀해지고 강해졌다. 이것이 소위 정파의 무서운 점이었다. 정도를 추구한다. 정파와 사파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그 것이다. 마도무림인들은 후대를 생각하기 힘들다. 그들은 항시 무언가에 쫓기듯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오늘은 비록 천하를 얻을지라도 그 근본이 탁하고 어둡기에 그들의 영화는 오래 가지 않는다. 반면, 정파는 기다릴 줄 안다. 급할 게 없다. 내가 아니면 후대, 후대가 아니라면 그 다음대를 기대할 수 있다. 정파의 무서움이다. 아니 정파를 믿는 사람들 마음가짐의 무서움이다. 패도는 한 세월을 지배하지만 정도는 사람들의 마음을 영원히 지배하는 것이다. 정파의 무인들은 그래서 여유가 있다. 죽더라도 영광스런 죽음이다. 제마멸사(制魔滅邪)라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이 있다. 그렇게 이루어진 정파무림의 전통과 명예는 유구하다. 그 마음가짐에서 그들은 무공을 익혀도 전혀 급할 것이 없이 서서히 내력을 키우고 마침내 극점에 오르는 것이다. 해서 정파의 무공은 강해 보이지 않는다. 마도의 패도적인 무공에 비하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초식이 거듭될 수록 공격은 장중해지고 힘이 실리는 것이다. 사파의 무리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무서운 저력이다. 지금 그 현상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사혼대의 힘은 강했다. 그들의 팔을 보호하는 철제 비갑(臂鉀)은 종남파 문인들의 검을 막거나 흘리게 만들었다. 그것은 처음에 대단한 위력을 발휘해 종남 문인들의 공격을 방어하고 즉각적인 반격을 가능케 했다. 하지만, 그것도 밀물처럼 밀려드는 사람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들이 한 번 검을 날릴 때 종남파의 문인들도 한 번 검을 날렸다. 종남문인 한 사람이 죽어가면 사혼대도 한 사람이 희생되었다. 탈출은 불가능하다. 사면을 포위한 상황에서 점차 좁혀오는 종남파의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사혼대는 맹수처럼 날뛰었다. 그러나 한 사람을 죽이면 두 사람이 길을 막았다. 두 사람의 절묘한 협공을 받아 사혼대 한 사람이 죽어나가면 그 자리는 그대로 공백이었다. 이광혜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난전(亂戰)을 원치 않는 듯 허점을 보고도 총공격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첨예하게 날을 세운 칼끝이 쉬이 무디어지는 법. 사혼대의 포악함은 점차 장중한 힘이 실린 종남파 문인들의 검진 아래 기세가 꺾이고 있었다. 잠시만 더 기다리면 큰 희생없이 서전을 승리로 장식할 수 있다. 민여림의 안색이 암담하게 변했다. '이광혜! 실로 무섭게 변했구나!' 민여림은 손일영을 도울까 생각해 보았다. '아니다. 지금은 그를 도울 때가 아니다. 손일영은 어디까지나 수하에 불과하다. 그에게서 무언가를 얻어야 한다.' 때로는 냉철할 수 있는 여인, 평범한 여자가 아닌 금적산장의 후계자로 내정된 그녀이기에 가능한 성격이었다. 후욱! 손일영은 가쁘게 숨을 들이쉬며 손을 멈췄다. 그의 주변에는 수십 구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그럼에도 종남파가 펼친 포위망은 금성철벽처럼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빙 사방을 둘러본 손일영은 내심 답답함을 느꼈다. 무서운 놈이다. 일생에 가장 무서운 적을 만났다. 이렇게 철저하게 포위당한 적이 없다. 자칫 하다가는 이제 이십대 중반인 새까만 후배에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승부사는 때를 아는 법, 손일영은 지금이 바로 승부를 가릴 때라고 직감하고 있었다. "이광혜! 한수 겨룰 용기는 있나?" 이광혜는 빙긋이 웃었다. "그럽시다. 손형을 더 이상 피곤하게 방치하면 쌍도의 절초를 볼 수 없을 것 같소이다." 손일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비웃음까지?' 도대체 이 어린놈은 무얼 믿고 이렇게 여유있고 당당한 것인가? 설마 이곳이 종남산 종남파의 산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인가? 저 걸음걸이는 뭔가? 마치 산보나온 사람처럼 한가로움이란, 이것이 정파가 말하는 심후한 내공과 정신력이란 말인가? 이광혜는 검을 뽑아들었다. 사혼대의 생존자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종남파의 인물들도 검을 거두고 물러났다.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기대감으로 번뜩였다. 종남파의 신화, 그들이 신처럼 존경하는 이광혜의 무공을 견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십 보의 거리! 그 조그만 공간에 가을바람이 스쳐지났다. 휘이잉 먼지가 피어오를 때 일초는 찰나간에 교환되었다. 손일영의 손에 들린 검이 한광을 뿌린다 싶은 순간 그는 공간을 이동하듯 이광혜에게 근접해 번개같이 칼을 그었다. 지켜보는 종남파의 문인들은 손일영의 무공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자신들에게 공격이 퍼부어졌다면?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광혜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종남문도의 기대와 달리 이광혜는 절기를 펼치기는 커녕 고스란히 당하고만 있었다. "뭐야?" 누군가의 놀란 외침! 피가 튀었고, 손일영은 다시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이번에는 두 개의 검날이 번뜩였다.


직경 한 치의 원을 그리면서 돌풍 같은 기세로 파고드는 짧은 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반 바퀴 도는 몸을 따라 큰 원호를 그리는 긴 칼! 패앵 소리와 스팟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종남문인들은 다급히 숨을 들이켰다. 이광혜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지만 두 칼은 무시무시한 위력을 담고 있었다. 이광혜는 느리게 검을 쳐냈다. 몸을 쳐오는 긴 칼을 아예 무시한 듯 단도를 향해 신중하게 일검을 쳐냈다. 꽈가강! 단도가 튕겨지는 순간, 긴 칼은 그대로 이광혜의 몸을 가르고 지났다. 다행이라면, 단도에 실린 힘이 대단해서 검과 충돌하는 순간 이광혜는 두 걸음 물러서고 그 결과 손일영이 긴 칼로 펼친 회심의 일격은 청삼만을 가르고 지났다는 점이다. "어떻게 된 거야? 왜 반격을 하지 않지? 설마 패하는 게 아닐까?" "설마, 이공자가 어떤 분인데 패하겠어?" "그럼 뭐야? 왜 당하고만 있는 거야?" 수선스런 종남파의 인물들, 반면 손일영은 차츰 초조해졌다. 그만은 이광혜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이광혜는 자신의 무공에 대해, 엄밀히 말하면 내공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지니고 있다. 천하(天河)! 이광혜의 검법명 중 첫머리에 들어가는 두 글자! 하늘을 흐르는 강이라서 천하인가? 아니면 장강의 도도한 물결을 천하라고 평한 것일까? 손일영은 후자라고 판단했다. 저 이광혜의 장중하고 정기가 충일한 검법은 장강의 도도한 물결과 비유할 수 있다. 까가가강! 손일영의 비수는 마치 폭우를 동반한 벼락처럼 허공을 갈랐다. 그 가공할 속도와 위력은 천하무쌍이었다. 그러나 그 예리한 칼로도 이광혜가 펼친 천하삼십육검법에 대항하기란 불가능했다. 파도처럼 연이어 오는 공격은 마침내 해일이 되어 손일영을 덮쳤다. 쨍그랑! 긴 칼이 손을 벗어났다. 순간 손일영은 지면을 박차고 그림자처럼 이광혜의 곁으로 접근해 오른손으로 벼락치듯 일권을 내질렀다. 이광혜가 검을 재차 뻗어낸 순간, 파라락! 소리를 내며 손가락 위에서 맴을 돌던 단도가 화살처럼 쏘아졌다. 풍무도(風舞刀)! 두 치의 단검은 공간을 파고드는 바람처럼 상대의 허점을 파고든다. 회돌이치는 칼날은 상대의 몸을 꿰뚫고 난 후 다시 손일영의 손 위로 돌아온다. 그러나 단검은 다시 손일영의 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광혜가 발을 비스듬히 내밀며 왼편으로 반 바퀴 회전했다. 풍무도가 귓전을 스치고 지나갈 때 그는 손일영의 옆에 서 있었다. 풍무도를 던지느라 뻗어진 팔, 그 아래 선명하게 드러난 옆구리의 허점! 이광혜의 두 눈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싶은 순간에 손에 쥔 검은 바람을 끊었다. 커억! 손일영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오른쪽 옆구리 간장 부근을 뚫리는 고통은 철담의 사내라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겹쳐진 비극! 손일영의 손으로 돌아와야 할 단검이 가공할 회전력으로 주인의 심장을 뚫어 버리면서 두


절대고수의 대결은 끝나 버리고 말았다. 그 다음은 전멸이었다. 사파의 무리지만 사혼대는 항복을 몰랐던 것이다. 제 20 장 단립의 비애 1 도무지 얼마나 큰지 한눈에 다 담을 수 없는 거대한 대전에 수백 명이 모여 있다. 숨죽일 듯한 정막이 흐르는 가운데 한 사람이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이 시대의 거인이었다. 혹자는 그를 일컬어 하늘이 만들어낸 상술의 귀재라고도 했다. 그렇지 않다면야 그가 이룬 신화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열 두 살에 상계에 처음 발을 디딘 소년이, 스무 살에 중원의 상권 중 절반을 장악하고, 서른 살에는 서역을 포함한 남해 무역업의 해상선단(海上船團)마저 장악하고, 나이 마흔 살에 마침내 중원의 상권을 한손에 장악하는 전설을 이루었다. 군벌을 능가하는 상벌(商閥)을 형성해 마침내 오조개화의 신화인 금적산장주에 오른 것이 지금으로부터 십 오 년 전이었다. 민금산(閔金山)은 그런 인물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던 민금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허허허! 그래, 난 나 자신이 늙은 줄을 몰랐는데,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늙어 보이는 모양이구나! 타로, 그런가?" "하늘은 변치 않습니다. 제가 아는 하늘은 오직 하나입니다. 바로 존야이십니다." 타로의 음성에는 숨길 수 없는 비장함이 스며 있었다. "하늘이라! 그래 일생에 남에게 하늘이라는 말을 들었다면 내 인생이 실패한 것은 아닌 모양이군!" 민금산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타로만 남고 모두 물러가라!" 장내에 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민금산은 그 모습을 보고 허탈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황금은 영원하다. 난 단지 그것 하나만을 믿었다. 그 믿음은 아직도 변함없다. 타로, 내 생각이 잘못되었나?" "하늘의 뜻(天意)은 하늘만이 헤아릴 수 있는 법입니다. 소신이 무지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민금산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타로! 그대를 만난 것이 내 나이 스무 살 때였다. 그 때 자네가 내게 한 말을 기억하나?" "힘을 갖고 싶다고 했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힘을!" "그래! 그랬지. 내가 대답한 말도 기억하겠군?" "황색(黃色)은 변치 않는다 했습니다. 권력과 명예는 변할지언정 황금의 찬란한 황색만은 누천년을 이어간다 했습니다." 민금산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그래, 황금을 쫓던 시절이 있었어. 그런데 이제 난 황금의 찬란한 빛에 눈이 멀었던 것 같아! 눈앞에 다가온 죽음도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야!" 민금산은 품안에서 한 장의 서찰을 꺼내 타로에게 건넸다. "십 일 전에 내 손에 들어온 서찰이네. 보게!" <먼저 심심한 유감을 표하는 바외다. 귀장주와 본인이 친교를 맺은 지 어언 이십여 성상, 복을 같이 누리고 슬픔을 나눈 민형과의 친분은 능히 세인의 귀감이 되었으나, 작금에 이르러 본인은 민형의 진정한 정체를 알게 되었소이다. 종남파가 비록 여타 문파에 비해 세가 약한 것을 인정하지만 천하 마도의 본산인 잠마전의 세력거점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본인의 심정은 치욕을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소이다. 내 심정은 능히 민형도 짐 작할 것이외다. 옛말에 이르기를 한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같이 거할 수 없다고 했소이다. 금적산장이 장안을 떠난다면 공격을 가하지 않겠소이다. 민형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리며……! 종남파 장문인 이무초 배상.> 정중한 형식을 갖춘 서찰이었으나 내용은 간단했다. 떠나라. 타로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늙은 얼굴에 가득한 주름 속에 떠오른 한 줄기 웃음은 진정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살벌했다. "종남파! 훗, 이무초가 미친 모양이군요. 감히 금적산장을 노리다니요! 그는 금적산장의 진실한 힘을 모르고 있습니다. 금적산장의 힘 중 절반이면 종남을 멸문시킬 수 있습니다." "후후후! 타로, 이무초는 정확하게 판단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 사람이 내게 등을 돌렸지. 그래, 장사가 쉬운 것은 아냐. 무엇보다 심력이 상하는 것이 거래니까! 같은 조건이라면 젊은 사람의 추진력이 더욱 매혹적인 게야. 그래서 난 도태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제 소천야인 단우의 시대가 도래한 거야! 아니지,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난 감수경의 무서움을 알아. 사갈같이 독랄하고 무서운 여인, 단우는 그녀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어. 그녀는 구세력을 몰아내려는 거야. 난 이제 쉬어야 하고, 때맞춰 종남파가 움직여 준 것이지!" "하지만 종남파는…… 이무초와 친교를 맺은 것은…… 오늘 같은 날을 대비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민금산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가 종남파 장문인과 친교를 맺은 것은 앞날을 위한 대비였다. 물론 이무초를 이용하고자 하는 면도 강했으나 이무초에 대한 호감도 어느 정도 작용한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천하에 잠마전에 대항할 세력은 없었다. 종남파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할 길을 열어 주고 싶었다. 물론 그 이유는 외동딸인 민여림이 이광혜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그런데 저쪽에서 먼저 칼을 뽑아든 것이다. 민금산은 코웃음쳤다. 곧 오조의 일원인 십이비붕련에 서찰을 띄워 종남파의 근황을 세세히 파악해 줄 것을 당부했다. 십이비붕련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이 오늘 아침이었다. -종남파의 동태가 심상치 않음. 또한 소림과 무당도 이상한 조짐을 보이고 있음. 그 날이 온 것 같음.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기 바람. 소림과 무당이 움직였다. 종남도 동시에. 자신이 모르는 동안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소림과 무당, 종남파가 한 번에 움직일 정도로! 그러나 그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서신 밑에 조그만 표식이 있었다. 그것은 민금산만이 알아볼 수 있는 한 사람의 표기였다. 그의 최후에 전해지도록 되어 있던 최후의 명령! 잘려진 황금동전! "타로!" "하명하십시오." "황금은 영원하다는 내 말, 향후 네가 그것을 증명해라." 타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이대로?" "십이비붕련에서 전서구가 당도한 것은 오늘 아침이다. 종남파와 금적산장과의 거리는 칠백 리, 결코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지. 십이비붕련은 물론 민금산의 정보망에도 종남파의 문도들이 문파를 떠났다는 보고를 들은 적도 없는데, 종남파가 들이친 것일세. 만일 이 행동이 종남파가 독단으로 결정한 일이라면 종남파에 귀신이 곡할 용병의 귀재(鬼才)가 있다.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민금산은 말을 끊었다. 타로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타로! 밀전(密殿)으로 이동해라. 진을 가동시켜라." "그럼?" "빠르면 일 년, 늦어도 이십 년, 금적산장은 다시 재기할 수 있을 것이다. 넌 그 날을 기다려야 한다. 믿을 수 있는 자는 백 명까지 허용한다. 나머지는 모두 해산시켜라!" 민금산의 뜻은 명확했다. 종남파에 줄 수는 없다. 차라리 훗날을 대비해 그 동안 모아온 부와 세력을 땅 속에 묻어 버리겠다는 결심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다른 말은 필요없다. "그래, 죽어 주지! 그러나 그것이 곧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때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울리면서 민여림이 들어왔다. "아빠! 광풍무적대가 전멸했어요. 손일영 대주도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적은 강해요." 민금산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래? 종남파가 대단하구나. 어디 가보자꾸나!" 그러나 그때였다. 바람처럼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넌…… 주한성?" 한 소리 놀란 외침을 발한 타로가 수하들을 지휘해 주한성의 앞을 막았다. 그러나 마치 귀영처럼 허공을 누비며 바람처럼 날아든 주한성, 그의 손에 들린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타로의 지휘를 받아 제지하던 금적산장의 무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선두에 선 주한성을 본 민금산은 눈살을 찌푸렸다. 육 척의 훤칠한 키, 눈빛이 조금 흐리멍텅한 것이 흠이지만 희고 정갈한 살결과 귀공자같이 섬연한 용모에 입가에 머문 부드러운 미소는 단연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다. 깨끗한 청삼을 입고 단정히 문사건을 쓴 주한성의 헌앙한 모습에 민여림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광혜라면 어떤 가능성이 있지만 잠마전에 피 머금은 한을 품고 있는 주한성이라면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다. 민금산은 가만히 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 녀석만은 살려두고 싶다. "여림아,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들어가거라!" 민여림은 잠시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빠, 저도 무사예요. 공사를 구별할 줄은 알아요. 나는 아빠를 돕고 싶어요." 그녀가 주한성을 직접 상대하겠다는 표현이다. 상술에 밝아 남의 내심을 손바닥 보듯이 들여다 보는 민금산이 딸의 마음을 모를 리 없건만, 그냥 딸의 청을 받아들인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왠지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그가 잠깐 생각하는 동안 주한성을 필두로 한 종남파의 고수들은 노호탕탕한 기세로 눈앞까지 밀려왔다. "금적산장의 주인인 민금산 대인이신가요?" 정중히 포권례를 취하는 모습이 헌앙해 보여 민금산은 천하에 인재로 알려진 이광혜나 전검휘보다 주한성에게 더 점수를 주고 싶었다. 물론 지금은 한가한 생각이지만. 민금산은 한기가 가슴을 훑는 것을 느꼈다. 주한성의 명성을 들을 때마다 솟구쳤던 의문, 설마 젊은 녀석이 그 정도로 무공이 고강하겠느냐,


소문은 한 치 이동하면 한 치 커지는 법이다. 그렇게 주한성을 평가했던 생각이 일시에 사라졌다. 이런 상대는 정녕 쉽지 않은 것이다. 이 놈은 적을 경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적을 두려워 하지도 않는다. "그렇네만, 무슨 일인가?" 주한성은 얼굴에 드리운 웃음을 거두며 검을 뽑아들었다. "잠마전 오조의 수뇌라는 것이 당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요." "허허! 그런가? 그런데 난 아직까지 내가 죽는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네." "그렇군요. 어르신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콧구멍에서 연기가 뿜어질 노릇이다. 민금산으로서는 울화가 솟구쳐 오를 것이다. 하지만, 민금산도 천하를 좌우하는 상술의 달인, 일개 젊은이의 격장지계에 호락호락 넘어갈 인물은 아니었다. "허허허! 과거 주진룡을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당당한 남아였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 한 잔 술을 나누는데 그쳤지만 무엇보다 그가 적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오늘 그의 아들을 또 내가 죽이는 죄를 짓는구나! 이것도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게지!" 주한성은 조용히 웃었지만 그의 바늘 끝처럼 날카로운 시선은 민금산의 두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예리한 시선을 접하자 오히려 민금산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민금산은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그가 채 검을 다 뽑기도 전에 민여림의 야무진 음성이 울렸다. "아빠! 저에게 맡기세요. 절대 아빠를 실망시키지 않겠어요!" 민금산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가 이번 기회에 딸에게 무림이 어떤 곳인지 알게 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판단했다. 만일 오늘 이곳에서 살아난다면 오늘의 일전은 딸에게 절대적인 교훈이 될 것이다. "조심해라." 민여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나섰다. 궁장형으로 틀어올렸지만 몇 가닥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늦가을 바람에 부드럽게 휘날렸다. 미색 비단옷을 곱게 차려입고 허리에 연검을 두른 모습은 누가 보아도 무림인이라기 보다는 여염집의 규수가 값비싼 채대를 착용한 것 같았다. 특히 주한성을 바라보는 두 눈빛은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뒤에 서 있던 종남파의 문인들은 하나같이 눈살을 찌푸렸다. 남자들이 겨루는 자리에 감히 여인이 나서다니. 더구나 저 요염한 눈길은 영락없이 주한성을 유혹하기 위함이다. 행여나 그가 잘못될까봐 누군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후후후! 금적산장에 인물이 없는 모양이군." 민여림은 사방을 둘러보며 요염하게 웃었다. "뒤에서 말꼬리만 잡지 말고 앞으로 나서 봐요. 주한성을 제외한 당신들 중 내 일초를 감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그 사람에게 출가함은 물론 금적산장도 종남파로 귀속시키겠어요!" 실로 어이없는 말이었다. 여인이 시집온다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금적산장을 종남파의 밑으로 귀속시킬 수만 있다면 대단한 성공이다. 정파라고 공명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지 말라는 법은 없다. 색에 환장한 사람들이 없다는 보장도 없다. 다만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종남수사(終南修士) 모개(模芥)였다. 사십 중반의 청수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민여림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은연중에 색기가 감돌았다. "낭자의 입이 참으로 무섭소이다. 감히 대종남파의 문도들을 일초지적으로 단언하다니, 내 사문의 앞날을 위해서도 반드시 오늘 낭자에게 따끔한 교육을 내리겠소." 흥! 싸늘한 코웃음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민여림이 가볍게 손을 떨쳤다. 빙어같이 하얀 손이 허공에 번뜩였다. 찰싹! 경쾌한 타격음이 울렸다. 종남수사 모개의 얼굴에 백색 손도장이 찍혔다.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검을 채 뽑기도 전에 승부는 끝나 버렸다. 더 놀라운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잠시 분노를 삭이며 서 있던 종남수사가 맥없이 고꾸라지더니 땅에 닿은 그의 얼굴이 가루로 변했다. "뭐야?" 여기저기서 놀라 웅성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소수마인(素手魔引)이로군!" 주한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한 사람이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 역시 일초도 버티지 못하고 얼굴에 손도장을 찍은 채 숨을 거뒀다. 그제야 사람들은 민여림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쉽사리 나서지 않았다. 주한성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낭자의 모친이 혹시 마후(魔后) 임초향(林草香)이 아니신지?" 임초향! 이십 년 전 무림에는 두 명의 여걸이 있었다. 정파에는 봉황신녀(鳳凰神女) 나군약, 사파에는 마후 임초향이었다. 두 여인의 미모는 경국지색이었지만 보다 세인들을 놀라게 한 것은 그녀들의 무공이었다. 나군약은 주진룡과 혼인한 후 중원에서 사라졌지만, 임초향의 소수마인은 당시 중원 무림의 기재들을 수없이 저승길로 안내한 최명부였다. 물론 그녀의 미색을 탐한 마도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개중에는 정파 무림의 후기지수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구파일방을 비롯한 정파무림에서는 임초향에 대한 추적을 시작했다. 겁을 먹은 것인지, 출도 일 년 만에 임초향이 무림에서 차례로 사라져 한동안 중원무림이 잠잠했는데 오늘 민여림의 손을 빌려 다시 소수마인이 등장한 것이다. "역시 추적술사 주공자의 안목은 대단하시군요. 소수마인을 알면서도 나선 것은 이 무공을 능가할 자신이 있어서겠죠?" "그렇소! 임초향이 무림의 공적으로 몰린 이상, 당신을 죽이는 내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하외다. 그러나 난 여인과 다투기 원치 않으니 물러선다면 한 번 목숨은 살려 주겠소." "흥! 제가 여자란 말인가요? 그러나 만일 임초향이 제 모친이라면 상황은 어찌 되죠?" 주한성이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민여림을 주목했다. 민여림이 희미하게 웃었다. 마치 겨울 한성처럼 차가운 두 눈에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위엄이 실렸다. 장내에 새로운 긴장이 높아갔다. 같은 시각, 금적산장과 다른 두 곳에서도 처절한 전투가 연이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일반 무림인들의 비무가 아니었다. 흉기가 난무하고 암기와 화약을 비롯 사람을 살상할 수 있는 모든 무기가 총동원된 가공할 살육전이었다. 아미타불을 읊조리던 입에서 적을 향한 욕과 신음성이 터져나오고 무량수불 대신 가공할 기합성이 터져나오는 곳. 바로 잠마련 오조신화의 한 곳인 청해사와 천제맹이었다.


서장 밀교의 중원 본산인 청해사를 친 곳은 소림이었다. 반면 오조 중 가장 강한 집단인 천제맹을 공격한 것은 무당파였다. 소림과 무당, 중원 무림의 태산북두격인 두 문파가 대대적으로 잠마전을 공격한 것은 잠마전의 이목이 전검휘와 신룡문에 집중되었을 때를 노린 기습이었다. 한 마디로 사소취대의 전형적인 공격이었다. 그러나 소림과 무당은 잠마전을 경시했다. 그들의 정보망은 소림과 무당을 향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행동거지 하나 하나가 모두 파악되었다. 알몸을 드러낸 공격, 음지에 숨어 적의 심장부를 노리고 발사된 화살, 그 결과는 확인치 않아도 충분했다. 소림사의 절대적인 주축이 되었던 사대금강과 십팔나한, 그 외에 수백 명의 무승들이 청해사의 드넓은 대웅전에서 이승의 고개를 넘어갔다. 무당파는 더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천제맹주 단계광, 밑에 포진한 기라성 같은 고수와 무사들, 그 가공할 무위와 힘은 무당이 홀로 감당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공격자는 수비자의 세 배의 공격력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무당은 천제맹을 넘어설 수 없었다. 평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패착이 있었다. 전검휘를 노리고 펼친 일련의 살겁이 그들을 유혹하기 위한 함정인 줄은 소림도 무당도 몰랐던 것이다. -전검휘는 미끼에 불과했다. 천하를 얻기 위한 대계의 시발점에 불과했다. 오판의 결과 생존자 겨우 이십 칠 명! 소림과 무당의 역사에 치욕의 붉은 점이 찍힌 구월 이십 이일이었다. 그리고 이 날의 마지막 혈전, 훗날 중원 무림의 구심점으로 떠오른 주한성과 이광혜의 활약은 미시 말엽이 되면서 극점에 도달하고 있었다. 스팟! 허공을 가르는 백색 섬광 하나, 그 칼날을 향해 마주쳐 가는 어렴풋이 보이는 희디 흰 손그림자! 허공 오 장여 높이에서 빛살처럼 교환되는 절초를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의 고개는 하늘높이 쳐들려 있는데, 그들의 시야에 잡히는 것은 선녀처럼 허공을 나풀거리며 날아가는 민여림의 고고한 자태와 천신처럼 위풍당당한 주한성의 모습 뿐! 손은 보이지도 않고, 다만 아슴푸레 검기와 손의 형태만 보일 뿐이다.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았던고! 스스로 자책하지만 눈길을 돌릴 수 없는 사람들의 눈에 흰 빛과 빛이 번개처럼 교차했다. 까가강! 쇳소리가 울리면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낙엽처럼 떨어져 내리는데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민여림이었다. "림아!" 당황한 민금산이 허공높이 솟구쳐 올랐지만 주한성이 빙글 돌아서서 가볍게 검을 휘저었다. 달마삼검 중 삼악중첩! 그 일검! 검로를 따라 느닷없이 청천 하늘에 은하수가 흘렀다. 도도한 일검은 삽시간에 민금산을 휘감아 버렸다. 민금산은 주한성이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어도 결코 쉽게 패할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모종의 전음을 듣고 있었다. "여보, 딸을 살리려면 대항을 포기하세요!" 한순간 민금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내의 음성, 오래 전에 집을 나간 아내의 음성이 귀에 들려온 것이다. 허공에서 두리번거리는 그 찰나간의 순간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크으윽!" 딸을 안아들려던 두 손을 검날은 사정없이 베고 지났다. 힘줄의 절반이상이 잘린 팔이 너덜거렸다. 곧 다시 번뜩인 일섬은 민금산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잘못하면 민씨일가도 남궁가처럼 몰살을 당해요. 당신의 죽음이 그 사태를 막는 유일한 길이에요!" 전음, 그리고 찾아오는 죽음! 민금산은 사력을 다해 사방을 둘러보았다. 보였다. 주한성의 뒤 저 멀리 서 있는 중년부인의 모습이! "난 이번에 회회루의 루주로 발탁되었어요." 그래, 이것이었구나! 아내가 그의 곁을 떠난 것도, 오늘 이렇게 주한성과 이광혜가 그를 기습한 것도 잘 짜여진 각본이었구나! 거친 물살에 휘감긴 사람처럼 민금산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허공에서 뿜어지는 피가 사람들의 머리 위에 안개처럼 내렸다. 퉁! 지면에 떨어진 민금산은 푹 고개를 떨궜다. 딸을 향해 힘겹게 내밀어진 손이 부르르 떨다가 툭 지면에 닿았다. "와!" 중인들의 우렁찬 함성이 요란하게 천지를 울렸다. 동시에 꽈가강 하는 굉음과 함께 천하에 그 위세를 자랑하던 금적산장이 소리도 없이 무너져내렸다. 이광혜가 금적산장을 폐가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자욱한 먼지가 가실 때까지 쥐죽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이만 작별을 고해야겠소이다." 주한성의 말에 이광혜는 주한성의 두 손을 꾹 잡았다. 전검휘가 죽고난 후 정파의 핵심으로 부상하게 된 이광혜의 손은 뜨거웠다. "고맙소. 주형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우린 이렇게 쉽게 금적산장을 멸망시키지 못했을 것이오." 주한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아니었어��� 이광혜의 용병술과 지략은 탁월했다. 자신이 끼어들어 오히려 그의 공적을 가로챈 것 같아 뒷맛이 씁쓸했다. "다 이형의 공이오. 부탁할 말은 난 지금 잠마전의 추적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오. 되도록 나에 관한 소문이 나지 않도록 수하들에게 명을 내려 줄 것을 당부하고 싶소." 명성을 거부하는 특이한 사내, 이광혜는 탄복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주형과의 만남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오!" 주한성은 종남문인들을 향해 가볍게 포권례를 올리고는 사라졌다. 뚜벅! 민여림은 고개를 들었다. 자욱한 먼지 속에 이광혜가 주한성과 뭔가 대화를 주고받은 후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닌 목숨을 거두어 가기 위한 저승사자로. 민여림의 얼굴에 참담한 웃음이 떠올랐다. 천령개를 내려치기 위해 처들은 그녀의 손을 제압하는 손 하나, 그리고 음성! "여림! 나를 용서하시오. 난 진정으로 그대를 좋아했었소. 그대가 여인이라는 것을 난 감사하고 있소이다. 죄인 줄 알지만, 이 일의 결과가 알려지면 문책을 당할 것은 뻔하지만, 그대를 좋아하기에 그대와 부친을 살려 주겠소이다. 이 먼지 속이라면 뚫고 나가는데 지장은 없을 거외다." 믿을 수 없는 말, 그러나 믿고 싶은 말! 나를 좋아한다는 말과 자신의 목숨을 걸고라도 부녀를 살려 주고 싶다는 그의 침중한 음성, 민여림은 고개를 떨궜다. 한 가지를 잃었다. 그러나 잃은 것은 부(富). 대신 평생을 의지할 수 있는 한 남자를 얻었다.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던 일이었다.


아비를 안아들고 먼지를 뚫고 달려가는 민여림의 귓가에 이광혜의 음성이 다시 울려왔다. "여림! 곧 찾을 것이오! 사랑하게 될 것 같소이다." 슬픔 속에 피어난 한 줄기 희망에 민여림은 발길을 재촉했다. 먼지를 벗어나니 천하는 그렇게 청명할 수가 없다. 2 기어이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주한성이 마침내 공격의 칼을 뽑아들었던 것이다. 한 번만 안아보자고, 당신이 꿈자리까지 쫓아와 정신을 뒤집어 놓는 바람에 도무지 머리 속이 정리되지 않는다는 푸념반, 하소연 반! 그러나 대가는 따귀 다섯 대! 물론 미리 각오하고 한 일이지만, 얼굴이 퉁퉁 부은 주한성은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며 방 가운데에 앉아 있고, 그와 일 장 정도 공간을 두고 남궁설은 표독스런 얼굴로 주한성을 째려 보고 있었다. "도대체 정신이 있어요?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잊어 버렸냐는 말이예요? 앞으로 가야할 길이 얼마나 남았죠?" 이광혜와 힘을 합쳐 잠마전 오조를 멸문시키느라 허비한 시간이 이틀이다. "천 리!" 머리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걸어온 길은요?" "이백 리!" "별다른 일이 없다고 해도 오 일이 걸리겠군요. 혁아가 칠 일 안에 벌모세수를 받아야 하니까 여유 날짜는 단 하루예요. 그런데 한 번 안아보자는 말이 나와요?" 주한성은 어이가 없었다. 그가 청부자와 만나기로 한 곳이 장장 천리길이다. 그 먼길을 달릴 생각을 하면 그도 아득하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말 나온 김에 마무리 짓겠는데 말야! 그래 한 번 안아 보자는데 일 각이 걸려? 반 시진이 걸려? 금방이라고, 불과 두 호흡이면 끝나잖아!" 남궁설이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당신 토끼군요?" "난데없이 웬 토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두 호흡 만에……!" 남궁설이 얼른 입을 막았다. 자신이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 사람은 그냥 순수하게 한 번 안아 주고 싶다는 것을 자신이 미루어 짐작한 것이 아닐까? "오호라! 이 처녀 이제 보니 순 내숭덩이아냐? 뭐 토끼? 그럼 뱀이면 한 번 안겨 보겠다는 거야 뭐야? 가만히 보니 당신 기술자 같은데? 그 방면에 도통한 것 아냐?" 남궁설은 찍소리도 못했다. 피치 못할 사정이으로 단계광에게 몸을 허락하기는 했지만 단 한 번의 경험만으로도 알 것은 다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주한성의 말을 오해한 자신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지! 표독스런 얼굴이 스르륵 풀렸다. "그런 뜻인 줄 몰랐어요. 그나 저나 길을 재촉해야죠?" 얼른 화제를 바꾸는 남궁설, 하지만 주한성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남궁설을 바라보다가 홱 하니 일어섰다. "마차 구해 올 테니까 당신은 누나가 깨어나면 수발을 잘 들도록 해!" 요란하게 고함을 지른 주한성은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침 공기가 청명하기 이를 데 없다. 손이 왕복해 부어오른 얼굴의 열기가 그나마 조금 가셨다. "휴우! 적당히 얼버무려 넘어가기는 했지만 무슨 여자가 저리 사납누? 잠자리라도 같이 하자고 했으면


뼈도 못 추릴 뻔했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어떻게 안아 보겠다니까 토끼가 튀어나오지? 설마…… 에이, 뭔 상관이냐. 나만 좋으면 장땡이지!" 주절거리는 주한성이지만 머리는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잠마전의 추적이 있어야 당연하다. 그런데 왜 저들은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일까? 설마하니 혁아를 포기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무언가 퍼득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누가 그를 툭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뇌리를 스쳐간 생각은 미처 어떤 형상을 이루기도 전에 사라졌다. 화가 나 홱 고개를 돌린 주한성이 얼굴에 헤벌죽한 웃음을 띠었다. "헤헤헤! 개방의 소취(小醉)옹이 아닙니까?" 주한성의 눈앞에 서 있는 칠 척의 장신, 얼굴이 불그레한 것이 낮술을 얼큰하게 걸친 것 같았다. 입가에 붙은 고기 부스러기를 혀로 핥는데 혀까지 술에 취했는지 주변을 몇 바퀴 빙빙 돌 뿐이다. "어? 자넨가? 한동안 보이지 않더니 다시 영업을 시작한 모양이지?" 말투가 퉁명스럽다. 주한성과의 만남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듯하다. 퉁방울만한 눈을 사방으로 빙빙 돌리는 꼴새는 얼른 이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표시다. 주한성은 희미하게 웃었다. '뭔가를 물은 모양인데?' 소취옹은 능글맞은 작자였다. 그는 개방의 정보망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쉽게 말해 이재(理財)에 밝은 노인이었다. 수하라고는 이십 명에 불과한 노인네가 뭐 자랑이랍시고 어디가든 대형(大兄)소리를 듣고 싶어하는데 그에게 정보를 끄집어 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삼박 사 일 동안 대형이라며 수백 번 허리를 굽신거려야 하는 것은 물론 시시콜콜한 잔소리를 들어야 하고 소취옹이 먹어치우는 것들을 계산해야 하는 것이다. "바쁘신 모양인데 전 이만……!" 주한성이 돌아서자 소취옹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보의 생명력은 신속 정확이다.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재빨리 팔아야 한다. 주한성은 정보의 보고였고, 소취옹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일종의 경쟁자인데 주한성이 바쁜 듯 돌아서자 소취옹은 이상했다. "어어! 왜 이러나? 일 년 만에 만났는데 술이라도 한 잔 해야지?" 주한성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자칫 시간을 놓치면 내 목이 달아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만……." 주한성이 바삐 돌아서자 소취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내가 저 작은 구렁이에게 또 속지 하는 요량으로 홱 돌아섰다. '그래, 일단은 돌아서겠지. 그러나 그 가벼운 엉덩이가 몇 번이나 움직일까? 냄새를 풍겼으니 곧 뒤쫓아 올 것이다.' 주한성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소취옹은 그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귀신 같은 놈이다. 자칫하다가는 그가 취한 정보는 껍데기도 아니 남을지 모른다. 급히 개방 분타로 향하려던 소취옹이 걸음을 멈췄다. '그 여우새끼가 무슨 일로 이 하남성에 나타난 거지? 사부의 삼 년상을 치루고 무공 수련을 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혹시 내가 모르는 어떤 일이 생긴 것 아닐까?' 일단 의심이 들자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우의 사부가 죽은 지 어언 삼 년, 혹시 녀석이 사부의 죽음에 관한 비밀을 알아냈을지도 몰랐다. "쩝!" 소취옹은 입맛을 다셨다. 만일 주한성이 비밀을 알게 된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는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소취옹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정보가 싱싱해야 돈육 한점이라도 얻어먹는 법이다. 팔아 버리자!


돈육 두 접시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소취옹은 입맛을 다시며 주한성이 하는 요량을 바라보았다. 먹으라는 말 한마디 없이, 죽엽청에 잘 익은 돈육을 쓱쓱 입 속으로 쓸어담는 그가 실로 얄밉기 그지없다. "무당이 봉문한 것을 알고 있나?" 무당이 봉문을? 왜? 무슨 이유로? 돈육이 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눈에 불을 켜고 바라보는 소취옹을 향해 주한성은 능글맞게 입을 열었다. "정보가 늦군요. 어제 파다하게 퍼진 소문인데!" 무슨 소리야? 소취옹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어제? 난 오늘 아침에 알았는데?" "정보원을 바꿔 보쇼. 아니면 소취옹께서 드시는 것의 절반이라도 부하들에게 먹여 살을 찌우든가! 원 대형이라는 양반이 허구한 날 독식(獨食)에 대식가니 수하들인 비렁뱅이들이 빌빌거리는거 아뇨! 그러니 정보를 취해도 냉큼 달려올 수가 있나, 돈이 없으니 전서구를 날릴 수가 있나!" 소취옹은 끙 하고 말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네놈이 요것도 알겠냐는 식으로 슬며시 밑밥을 던졌다. "하기사 무당과 소림이 연합했다면 모를까 독단적으로 오조를 기습한것은 무리였어. 앞으로 무림은 종남파의 것이야. 안 그런가?" 종남파! 그 말을 듣는 순간 이광혜가 후다닥 머리를 스쳐갔다. "이광혜 말인가요? 그는 어려요! 한 번 성공했다고 해도 경륜이 없어서 대업을 맡기기에는 위험부담이 많다는 말입니다." 소취옹은 다시 찔끔하고 말았다. 무슨 놈의 새끼가 이렇게 귀신같아.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손금보듯 알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어허! 그게 무슨 소린가? 금적산장이 오조 중의 한 곳인데 하루 만에 멸망시킨 인물일세. 벌써 발빠른 무림인들은 종남으로 종남으로 줄을 서고 있단 말이야." 소림과 무당은 오조에게 당하고, 구파일방에서 제일 하급이었던 종남파가 성공하자 인심은 벌써 종남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뜻! 그러나 정작 중요한 사실은 조금 전 소취옹과 부딪치는 바람에 잊었던 생각이 확 잡혀들었다. '미끼였다. 전검휘와 신룡문은! 잠마전은 늙어가는 노마를 팔아 적토마를 구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신룡문은? 잠마전과 천하를 양분하고 있는 신룡문이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한 이유가 뭔가?' 주한성은 머리를 굴리다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이광혜를 다음대 무림맹주로 추대하는데 개방도 찬성이란 말이군요?" "당연하지 않은가? 그 이외에는 대안이 없어. 작금과 같은 위기상황일 때 무림은 우리처럼 늙은 사람들이 아니라 이광혜같이 젊고 패기넘치는 사람들의 것이네!" 주한성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더 이상 이곳에서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소취옹이 은근히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문조천에 대해서는 알아 봤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오래 전에 사문을 박차고 나가 벼슬길에 오른 사제를 왜 이 노옹은 거론하는 것일까? "후후후! 아직 거기까지는 정보가 흘러가지 않은 모양이군!" 주한성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점원, 하고 부른 그는 노취옹이 좋아하는 홍소육 한 접시와 죽엽청을 안겼다. 이 정도면 대가는 충분하지 않소라는 무언의 뜻, 소취옹도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오비도인은 양자산의 창에 죽은 것이 아니야.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자네 사부는 암중의 인물에게 중독당해 내공을 펼칠 수 없었던 거야. 그 내막을 문조천은 알고 있어."


사실이냐고 묻지 않았다. 노취옹은 확실하지 않은 정보는 발설하지 않는다. 하늘이 두쪽 나도 확인된 사실만 취급한다. 그 동안 주한성은 사부의 죽음에 의심을 하지 않고 있었다. 무공을 익힌 무사가 검 아래 죽는 것은 어쩌면 영광일 수도 있다. 그래서 주한성은 그 동안 사부의 죽음을 그렇게 애통해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사부가 단립과의 대결 때문이 아닌 다른 모종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왜? 누가? 과연 누가 사부님을 중독시킬 수 있단 말인가? 사부님을 속일 정도의 인물은 누구인가? 단 한 사람! 단 한 사람만이 있다. 주한성은 자신이 아는 정보를 소취옹에게 알려 주었다. 이 상황을 풀어 나가려면 개방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에. 전검휘가 죽었다는 말에 소취옹은 뚝 행동을 멈췄다. 열심히 입안에 집어넣던 홍소육을 뱉아낸 그는 취월거가 있는 방향을 향해 경건하게 고개를 숙였다. "의인이 소인에게 덜미를 잡혔구려. 단우, 그 야비한 자가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어!" 소취옹은 자리에 앉지 않았다. "이상해! 갑자기 모든 일이 이렇게 한쪽으로 흐르는 것이 누군가 뒤에서 조종하는 것 같아. 이광혜에 대해서 알아 봐야겠어. 자네와 긴밀하게 연락을 취해야 할 듯하이! 움직일 때면 반드시 거지에게 연락을 남겨두게나!" 말을 마친 소취옹은 바삐 사라졌다. 천하 무림의 정세가 급격하게 회돌이치기 시작했다. 그 파문의 시작은 남궁세가의 멸망으로 시작되어 전검휘의 죽음으로 천하를 경악시키더니, 소림과 무당의 임시 봉문으로 절정을 맞이했다. 그러나 한 줄기 청량제 같은 소식이 강호에 퍼졌다. 금적산장의 멸망, 소림과 무당의 임시 봉문으로 급격히 세를 잃어가던 정도무림은 혜성처럼 등장한 이광혜와 종남파의 선전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사람들의 이목은 하나같이 종남파로 쏠렸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생각과 달리 종남파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팔랑! 나뭇잎이 허공에 파랑을 일으키며 날았다. 말없이 나무를 올려다 보던 단립은 막 나뭇잎이 진 자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메마른 가지가 움푹 패여 있다. 나무눈이다. 지금은 죽은 것 같지만 겨우내 눈보라 속에서 이곳은 조금씩 성장할 것이다. 나무눈은 봄날에 대한 희망이다. 봄이 오면, 겨울바람 끝에 잔설이 녹기 시작하면 이곳에서 새순이 움틀 것이다. 그러나 지금 불어오는 것은 삭풍이다. 단립은 백의를 여미었다. 이제 늙은 것인가? 젊은 시절, 칼끝 같은 바람조차 차다고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을 쫙 펴고 몰아치는 눈보라를 맞이하며 힘차게 앞을 향해 걸었었다. 삐죽 삐죽 솟구쳐 오른 칼날 밭을 맨발로 치달리고, 끈질기게 달라붙는 죽음의 신을 한 주먹에 부숴 버리며 올라온 정상이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보니 바람만 차디찰 뿐이다. 강철같던 근육들은 이제 탄력을 잃고 남은 것은 늙은이의 아집 뿐이다. 늙은 노구 홀로, 오늘날 그를


정상으로 끌어올린 아집만으로 이 겨울을 나기에는 허전하기 이를 데 없었다. 피붙이가 그리웠다. 이제 장성한 아들놈은 그러나 죽은 나뭇가지였다. 이제 자신은 늙어 힘이 없거늘, 아들과 젊은 손자 놈은 힘은 팔팔한데 퍼뜨릴 씨앗이 없었다. "천벌인 게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갑자기 대가 끊기는 천형을 당할 수는 없는 게야!" 스산한 날에 정원에 나와 휑하니 빈 정원을 바라보노라면 지난 과거가 생각난다. 파천수라도! 잠마전의 초대 전주 단뢰조사의 혼이 담긴 거도(巨刀)! 그리고 자신과 오조! 그들이 스치고 지난 자리에 남은 것은 이런 황량함 뿐이었다. 정사를 막론하고 그의 발치 아래 부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언젠가부터 그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의 신이 쓸고 지난 중원은 말 그대로 황폐함이었다. 황량한 들판을 바라보는 것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오래 걸렸다. 황무지에 비가 내리고, 토양이 다시 지력(地力)을 되찾으면 씨앗이 발아해 다시 숲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요즈음에야 깨달았다. -하지만 잡초로는 숲을 이룰 수 없다. 쓸쓸하다. 아들인 단계광이라는 거목과 손자인 단우는 무수한 잡초들에 둘러싸여 있을 뿐이다. 단계광은 단우를 낳고는 더 이상 후손이 없었고 단우는 씨를 퍼뜨릴 생명력이 없었다. 단씨가문은 절손되어 가건만 그와 일족이 황폐하게 만든 중원무림에는 숲이 조성되고 있었다. 비록 소림과 무당이 봉문했다지만 구파일방과 신룡문이라는 거목은 분명 기사회생한 것이다. "허허허!" 그는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아들과 손자의 계획은 완벽했다. 단우가 금학우로 변장해 전검휘와 연을 맺은 것도 완벽했다. 전검휘를 무림에서 은퇴시킨 것도 완벽했다. 그리고 그들이 생산해낸 자식, 혁아는 정녕 완벽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무엇인가? 단우는 결정적인 순간에 실패하고 말았지 않은가? 천룡대법! 잠마전의 생사결(生死訣)인 잠마등천대법(潛魔騰天大法)과 쌍극을 이루는 천하의 비기다. 잠마전과 신룡문, 두 가문의 비기를 한 몸에 지니게 된다면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다. 대대로 자손만대 동안 잠마전은 천하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천룡대법을 혁아의 몸에 안배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의외의 변수가 발생해 혁아를 탈취당할 줄은 정녕 생각도 하지 못했다. "소문을 두려워 했던 게야. 잠마전의 전 문도를 풀어서라도 반드시 혁아를 품에 안았어야 했거늘, 아들과 손자 녀석이 비밀이 퍼져나갈 것을 두려워 해 전력을 다하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패착인 게야!" 이렇게 참담할 수가 없다. 이제는 씨도둑으로 소문이 날까 두려워 해야 한다. 만일 단씨일가가 생식능력이 없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자칫 잠마전전체가 동요할 수도 있는 일이다. 단립은 망연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방실거리던 혁아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몇 차례 비밀리에 취월거를 방문했을 때 혁아를 보았다. 그 어린 잠룡을! 단씨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았지만 혁아를 보는 순간 자신을 확 끌어당기는 강한 흡력을 느꼈었다. 무인의 본능이었다. 천무골(天武骨)을 타고난 아이를 거두고 싶은 본능적인 욕심이었다. 앞으로 그 녀석이 자신의 대를 잇는다 생각하니 참으로 뿌듯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칠 일 내로 혁아를 살려야 한다는 것을.


칠 일이 지나면 혁아의 몸에 펼쳐진 천룡대법은 그 아이에게 득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생기를 갉아먹는다는 것을! 물론 금사금강환과 신룡백팔주를 혁아가 죽은 다음에 회수할 수는 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천무골, 그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멍청한 인간들이 혁아를 죽음 속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애초에 혁아를 죽일 생각은 했었다. 혁아를 살리기 위해서는 전검휘가 이곳을 택할 것을 짐작하고 한 치밀한 안배였다. 혁아는 이곳에서 잠마문의 잠마등천대법을 전수받아 완벽한 무인으로 자라나야 했다. -그것이 잠마문의 영광을 대대로 유지할 수 있는 길이다. 천형을 받아 대가 끊긴 단씨일맥을 이어가는 유일한 방법도 혁아 뿐이다. 혁아를, 녀석을 칠 일 안에 반드시 찾아와야 한다. 우두두둑! 전신의 뼈마디에서 비명 같은 울림이 연이어졌다. 어린 혁아, 이제 두 살에 불과한 녀석이 늙어 사라진 줄 알았던 그의 호승심을 깨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인간, 추적술사 주한성! 그놈이 서사혼도 출신이라고 했다. 그 놈을 죽이는 것도 혁을 되찾는것만큼 중요하다. "마풍(魔風)!" 스스슥! 단립의 발치 아래 그림자 속에서 귀영처럼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명하십시오!" "오조를 소집해라! 빠를 수록 좋다." "이미 조치를 취했습니다. 일각 안이면 당도할 것입니다." 마풍이 사라졌다. 단립의 몸에서 폭풍이 일었다. 정원이 산산이 부서져 나갈 듯 공기가 팽창했다. 단립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걸음을 옮기자 나목과 그 외 정원이 흔적도 없이 가루로 변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주변 경물이 변하기 시작했다. 바위가 사라지고, 나무와 그 외 무수한 경물들이 급변했다. 단립이 거대한 전각으로 향할 때까지 그 현상은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전각! 잠마전이란 현판이 붙어 있었다. 천하의 어떤 전각도 이곳보다는 화려할 수 없다. 전각 안에는 수천 명이 앉아 있지만 숨소리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오조개화의 신화가 다시 뭉친 것이다. 노인은 이십 년 만에 다시 태사의에 앉았다. 다섯 사람, 사남일녀가 몸을 일으켰다. "전주를 뵙니다." 공손히 예를 취하는 다섯 사람이 바로 오조개화의 신화를 이룬 장본인들이었다. 그 중의 한 명은 복면인이었다. 이제는 다시 한 단계 강등된 천제맹주 단계광! 금적산장주! 십이비붕련주 염진동. 청해사 주지승 탈리대선사. 회회루주 상관경. 노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삼 년 만에 본좌가 다시 이 자리에 앉았다. 다시 또 나를 실망시키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그대들


오조의 수뇌에게 먼저 책임을 물을 것이다." -단계광, 태인(太人)을 청해라! 그리고 신룡문주(神龍門主)를 예의 주시하여 살펴라. 그가 이번에 움직일 것이다. -상관경, 염진동은 수하들을 총동원해 주한성의 위치를 파악해 제갈성곤에게 알려 주도록, 일각마다 그에게 보고토록 하라. -금적산장주는 지금 곧 해남도(海南島)로 가라. 그곳의 선화를 회유해 빠른 시일 내에 결혼해라. -탈리대선사, 청해사를 움직여라. 시기가 도래했다. 제 21 장 또 다른 배반 1 오조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치밀했지만 그 움직임은 한 단체에 즉각적으로 파악당했다. 신룡문, 그들이었다. 바야흐로 천하를 양분한 두 거대집단 잠마전과 신룡문이 다시 이 년 만에 준동하기 시작했다. 대기가 숨을 죽이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어둠이 자욱하게 깔리기 시작했다. 눈(眼)! 감정을 철저히 억제한 상태를 무심한 눈이라고 한다. 승부사들이 요원하는 경지가 바로 무심안(無心眼)이다. 지금 감수경을 보고 있는 눈이 그러했다. 무심할 뿐만 아니라 탁안(濁眼)이기도 했다. 흑백이 없다. 동자가 없어서 무슨 감정을 품고 있는지 전혀 들여다 볼 수 없다. 그 눈빛을 보고 있자니 마치 암갈색 늪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 같다. 그의 나이가 몇이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니 그를 본 순간 그런 것은 전혀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저 눈동자를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감수경은 그런 충동을 누르고 눈앞의 사내를 유심히 살폈다. 참으로 완벽한 변신이라고 감탄했다. 누가 저 사람을 보고 이전 주한성의 사형이었던 제갈성곤이라고 할 것인가? 그는 이제 이십대 후반 정도에 그저 평범한 용모의 인물로 변해 있었다. 특징이 없는 용모였다. 굳이 특이한 점을 찾자면 입모양새다. 흐린 눈빛과 달리 입매무새는 마치 조각칼로 그어놓은 것처럼 또렷하고 붉다. 여인의 그것같이 요염한 입술에서 흘러나온 음성 또한 이전과 달리 예상외로 굵은 저음이었다. 감수경은 흡족하게 웃었다. "단지 그것 뿐이오?" "그래요!" "소문주의 부인께서 이런 부탁을 하러 나를 찾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소. 잘 생각하시오. 나는 이제는 천하 누구와도 단 한 번만 거래를 이룰 뿐이니까!" 감수경은 요염하게 웃었다. "그대는 이 일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것 같군요?" "나 제갈성곤은 위대한 인물은 아닐지언정 이제는 대륙의 어느 누구와도 비교 당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오." 제갈성곤! 그가 무영문을 배반하고 잠마전에 붙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용모를 바꾸고 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장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제갈성곤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난 아직 누구를 죽여달라고 지명하지 않았어요." "부인께서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소?" "물론 그대가 단 세 번만 청부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대가는 일개 성을 살 정도의 거금이라는


것도. 또한 이번이 마지막 세 번째 거래라는 것도 알고 있지요." "그것을 알고 있다면 신중하시오. 기회는 단 한 번 뿐이오." 감수경은 조용히 재갈성곤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놈은 이 땅 위에서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어요. 유일하다면 바로 그대, 혈수인(血手刃)의 수좌인 태인(太人) 뿐이에요." 재갈성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혈수인은 살수집단이다. 특이하게 삼십 년 동안 단 세 번만 청부를 받겠다고 천하에 공포한 기이한 살수집단이다. 그들은 이미 두 번을 움직였다. 그때마다 중원무림의 축은 두 번 변했다. 마도에서 정도로, 정도에서 마도로. 오늘이 약정한 삼십 년의 마지막 날이었고 이제 마지막 한 번이 남았을 뿐이다. 제갈성곤이 혈수인의 태인이 된 데는 그만의 사정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한은 그의 가슴 깊은 곳에 독사처럼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밤이 깊어 자시가 지나 자정이 다가왔을 때 제갈성곤은 마지막 세 번째 청부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 동안 모아온 재력으로 꿈꿔온 일을 착수할 때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자시 중엽에 감수경의 방문을 받은 것이다. 제갈성곤은 이것이 운명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감수경이 찾아올 리 없는 것이다. "좋소! 청부를 받아들이겠소. 이름은?" 감수경은 품안에서 종이를 꺼내 제갈성곤에게 건넸다. 제갈성곤은 그를 배웅하지 않고 천천히 쪽지를 펼쳤다. <추적술사 주한성. 단우.> 태인 제갈성곤의 얼굴이 갑자기 뒤틀리기 시작했다. 마치 가면이 구겨지듯 얼굴 표면이 일그러졌다. "못 본 것으로 하겠소!" "두려운가요? 하나는 덤이에요. 만일 당신이 성공한다면 나를 취할 수 있게 해 주겠어요!" "여자와 목숨을 바꿀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소이다." "나를 여자로 생각하나요? 안목이 좁군요. 난 천하에요. 그것을 싫다고 거절한다면 당신은 남자가 아니죠!" "후후훗! 부인께서는 스스로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시는구려!" "거부하는 건가요?" 태인은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는 대답을 하지 않고 쪽지를 삼매진화를 일으켜 태웠다. 감수경은 흡족하게 웃었다. 돌아서는 그녀의 등 뒤에 태인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늘부터 다른 남자와 만나는 것을 허락지 않겠소. 명심하시오!" 감수경은 돌아서서 생긋 웃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태인 제갈성곤은 그녀가 사라지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주한성! 너다. 드디어 너를 죽여달라는 청부가 들어왔다." 태인은 조용히 숨을 골랐다. 혈수인이 두 번째 살겁을 벌인 것이 한 달 전이었다. 그때 혈수인은 제갈성곤의 지시를 받아 청해사를 기습하다 실패해 간신히 살아돌아온 소림을 기습, 무승 절반을 제거했다. 그가 가한 타격은 실로 막대했다. 그 후 소림을 비롯한 구파일방은 임시 봉문을 철회하고 혈수인을 추격하는 본격적인 행동에 나섰지만 그들은 이미 잠마전의 상대가 아니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에 사제(師弟)를 죽이라는 청부가 들어온 것이다.


2 호젓한 산길을 두 사람이 걷는다. 한 여인은 품안에 아기를 안고 있고 사내는 커다란 마대자루를 어깨에 들쳐메고 있다. 인적이 드문 산길에는 이따금씩 늦가을 풀벌레 울음소리와 마른 풀잎이 서걱거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남궁설은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설마 주한성이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녀의 인생에 이런 가공할 진드기를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된 남자가 평생 여자를 처음 본 것처럼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데 그 시선은 끈적끈적 할 뿐더러, 한시도 그녀에게서 떠나지를 않았다. 옆에서 숫캐마냥 코를 킁킁거리는 것을 보면서 남궁설은 정말 저 남자가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주한성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더욱이 이렇게 야밤에 산길을 걸을 때 절호의 기회를 포착한 듯 옆에 달라붙어 치근거릴 때면 그냥 한방 줘갈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제 그만 내게 한 번 안겨 보는 게 어때?" 처음 그 듣기 좋던 목소리마저도 닭살이 돋았다. "지금 제 정신이에요?" "허허허! 그 무슨 말이 그리 험해. 잊은 모양인데, 이미 수 차례 당신의 모든 것을 볼 것 다…… 큭!" 옆구리에 작렬한 한 방, 자루를 걸머멘 채 상체를 구부린 주한성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래서요? 위난에 처한 여자 구해 준 보답을 하란 말인가요?" "뭐 그렇다기 보다는 낭자나 나나 청춘이니까 한 번 그럴 듯하게 대화를 진행시켜 보자는 뜻이야. 혹시 알어? 서로가 꿈에서 그리던 이상형일지?" 남궁설은 걸음을 멈췄다. "이봐요. 주한성 나으리! 입좀 다무세요. 처음에는 그럴 듯하게 등장하더니 왜 갈 수록 그렇게 개차반이 돼 가요?" 주한성의 얼굴이 다시 창백하게 변했다. "개차반이라니? 아니 목숨을 구해준 사람에게 그런 막말을 할 수 있는 거야?" 열변을 토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파편이 튄 것이 문제였다. 남궁설은 어이없다는 듯이 얼굴에 튄 파편을 닦으며 냉랭하게 말했다. "후회되는군요. 차라리 당신보다 후극진이 나았어요." 뚝! 주한성의 입이 꽉 다물어졌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남궁설은 서서히 살아나고 있다. ���증을 낼망정 눈에는 생기가 돌고있는 것이다. 그때 주한성이 걸머진 마대가 꿈틀거렸다. "누나가 깨어난 것 같소. 어서 상을 펴시오." 그 말에 남궁설은 샐죽 입을 내밀었다. 노미량과 그녀는 친구 사이였지만 그 동안 길을 오면서 주한성이 노미량과 심상치 않은 사이란 것을 직감한 것이다. 굳이 마차에 실어도 될 것을 한사코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것만 보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잠마문으로 가야 해요!" 수혈을 짚여 며칠 동안 긴 잠을 자고 난 노미량은 다짜고짜 고집을 부렸다. 그녀는 초조했다. 혁아의 생명이 이제는 삼 일 밖에 남지 않았다. 삼 일 안에 혁아의 몸에 펼쳐진 천룡대법을 완수해야 한다. 초조감이 그녀를 미치게 했다. 그러나 주한성은 요지부동이었다. 노미량의 부탁을 들어 주지 못하는 마음은 칼로 도려내는 것 같지만 그는 냉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안된다면 차라리 날 죽여요!"


"누나, 누나가 날 죽여. 그리고 잠마전의 단우에게 가. 그 전에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죽어도 잠마전으로 향할 수 없어." 주한성의 음성에는 피가 묻어나고 있었다. 현명한 노미량이 이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변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노미량은 싸늘하게 말했다. "그럼 갈라 서면 되겠구나!" 주한성은 고개를 저었다. 순간, 노미량이 손을 들어 주한성의 뺨을 사정없이 갈겼다. 짝 소리가 울리며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주한성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노미량은 잠시 멍한 상태에 있더니 다시 연달아 주한성의 뺨을 내갈겼다. "넌 몰라! 알지도 못하면서 왜 내 갈 길을 막는 거니?" "알아! 누나가 혁아를 살리기 위해 잠마전으로 가려는 것을. 허나 그건 함정이야. 혁아를 마문으로 집어넣는 함정이란 말야!" 노미량이 번쩍 눈을 떴다. "흥! 잊은 모양이구나. 너도 악마들 속에서 자라났어. 그러나 지금은 어엿한 장부가 되었잖아? 혁아를 믿어. 그 아이는 절대 악한이 될 아이가 아냐!" 주한성은 노미량을 바라보았다. "내겐 누나가 있었어. 내가 모질고 나쁘게 성장할까 걱정해 주고 보살펴 준 누나가 있었어. 그 고통을 알아? 한 번 무릎을 꿇으면 눈앞에 모든게 보장되건만 그것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 어떠한지? 배고픈 것을 참아야 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아? 난 혁아가 그 고통을 겪는 것을 볼 수 없어. 검휘형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래도 살 가능성은 있어!" "누나, 다른 길도 있어. 정관효 어르신을 만나면 해결 방법이 있어!" 노미량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아냐! 그 분은 신룡문의 안위만 신경쓰는 위선자야. 그는 이차혈전에도 참가치 않았어!" 그 말에 주한성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일단 체력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야. 누나, 식사를 해!" 단호한 주한성의 말에 노미량은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단 벌모세수를 받은 후 탈출할 계획, 그것을 주한성이 알 리 없다. 그러나 이제와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자칫 남편과 언약한 사실이 타인에게 알려져 단우의 귀에 들어가면 혁은 물론 자신도 다시는 햇살을 보지 못할 것이다. "좋아, 네가 혁을 구해준 것은 인정해. 하지만 네가 나와 혁을 책임질 것은 아니잖니?" 순간 주한성이 움찔했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감정이었다. 노미량을 처음 본 순간부터 처음에는 누나처럼, 나중에는 이성으로 좋아한 적이 있었다. 그 과거는 때로는 아프게, 때로는 슬프게 되살아났다. 양자, 그래 오누이가 되어 버린 현실! 이 길을 걸어가면서 어깨 위에 올려놓은 노미량의 무게를 생각하며 차라리 저 짐을 내가 지고 싶다는 생각도 수없이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금수나 할 짓이었다. 결혼을 한 이상, 더욱이 가장 존경하던 형의 아내인 이상 이 여인은 자신이 지켜줘야 할 혈육이고 누나였다. "그 말은 맞아. 난 아직 총각이고 당연히 처녀와 결혼하고 싶은 평범한 남자일 뿐이니까." 그 말은 두 여인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노미량도 장성한 주한성을 보며 흐뭇한 마음 가운데는 이성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섞여 있었다. 아주 없진 않았던 것이다. 남궁설도 가슴이 철렁하긴 마찬가지였다. 처녀, 이럴 때 여인의 순결은 감당할 수 없는 부피로 그녀를 눌러왔다. 노미량이 표독스럽게 주한성을 노려보며 해서는 안될 말을 쏴붙였다. "그럼 나를 풀어줘. 나와 너 사이엔 이젠 아무런 관계가 없잖아." 주한성은 빙긋이 웃었다. "관계가 있어. 난 천성적으로 게으른 놈이라 돈이 되지 않는 일은 나서질 않아. 그러나 일단 돈을 받은 이상, 맡은 일은 반드시 완수해!" "그럼, 당신이 나를 도운 것도 의협심이 아니라 청부를 받아서……?" 남궁설의 물음에 주한성은 왜 그것이 이상하냐는 듯이 남궁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아무런 이득없이 내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에 가담을 한 것으로 알았어? 그랬어?" 남궁설은 픽 웃고 말았다. 하기사, 말이 좋아 추적술사지 알고 보면 일종의 전문직업이 아닌가? 그런 사람에게 의협심을 기대하고 은근히 호감을 지닌 자신이 초라해졌다. "얼마를 받았죠?" "닷냥." 닷냥? 추적술사 주한성을 움직이는데 단돈 닷냥이 들었단 말인가? 남궁설은 품안에서 금가락지를 꺼내 주한성에게 내밀었다. "받아요. 그리고 눈앞에서 사라져요!" 주한성은 냉큼 금가락지를 받아들었다. "잘 됐군. 마침 다시 마차를 하나 구할까 생각했는데!" 노미량의 고집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잠마문으로 가기 전에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곳에 무엇 하러 가냐는 물음에 노미량은 코웃음을 날렸다. "주한성, 넌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있어. 신룡문과 전검휘, 남궁세가도 감당하지 못한 게 잠마전이야. 잠마전으로 가거나, 아니면 풀어줘!" 주한성은 재차 노미량의 수혈을 짚은 상태로 마차에 실어 길을 재촉했다. 혁아에게 문제가 발생한 것은 그날 밤이었다. 금광(金光)! 처음엔 금사금강환과 신룡백팔주를 삼킨 녀석의 백팔혈도에서 미미하게 금빛이 일렁였다. 두 기보가 위력이 대단해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채 반 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금광은 더욱 찬란해져 마차 안 전체가 금광에 휘감겨 버렸다. 놀란 남궁설과 주한성은 겉옷을 벗어 혁아를 칭칭 동여맸지만 금광은 시간이 지날 수록 점차 짙어져 마침내는 금불상같이 변해 버렸다. 주한성은 별 수 없이 노미량을 깨웠다. "천룡대법을 펼친 후 칠 일 안에 이 갑자 이상의 능력을 지닌 다섯 사람이 백 팔 개 혈도에 녹아 있는 두 기보의 기운을 녹여 전신에 퍼뜨려놓아야 해. 만일 칠 일 안에 대법을 풀어 주지 않으면 혁아는 혈맥이 굳어 죽게 돼. 어서 잠마전으로 가!" 노미량의 초조한 말을 들은 주한성은 난감했다. "다른 방법은 없어?"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남궁설이었다. "신룡문주만이 익힌 신룡개정대법(神龍改精大法)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 외에 유일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을 아는 사람은 신룡문주 뿐입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 혁아는 한 시진 간격으로 발작을 일으켰다. 그 조그만 몸뚱이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눈동자가 획획 돌아갔다. 비록 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아무래도 포악한 표견과 아비의 죽음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주한성은 피눈물을 흘렸다. 한 시진 간격으로 내력을 돋워 녀석의 상중하 단전을 비벼 녀석을 안정시켰다. 그러던 중 주한성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혁의 몸에 서린 금광이 자신의 몸에 새겨진 금룡문신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사실에 매달릴 때가 아니었다. 하루 만에 주한성의 얼굴은 초췌해지고 그 또한 극심한 피로에 시달리게 되었다. 하남성 공현(鞏縣)에 당도한 것은 미타산을 떠난 지 오 일이 지나서였다. 공현은 하(夏)의 걸왕(桀王)이 주지육림(酒池肉林)의 고사를 남긴 요대라는 호화궁궐을 건립했던 고읍(古邑)이다. 그 동안 혁아의 발작증세는 차츰 안정을 보였지만 금광은 더욱 짙어져 마침내 옷가지와 마차로서도 광채를 가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엿새째 저녁부터 새로운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닿는 것은 모조리 부순다. 백 팔 개의 혈도에서 뿜어지는 금광에 닿는 것이 부서져나가기 시작했다. 옷은 가루로 변하고 마차도 삭아내리기 시작했다. 노미량은 거의 사색이 되었다. 그녀는 주한성의 멱을 틀어잡고 뒤흔들었다. 머리카락이 올올이 곤두선 그녀는 영락없이 미친 여자같았다. "병신같은 작자! 살려내! 금사금강환과 신룡백팔주가 혁아에게 이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천무골의 정기를 흡입해 혁아의 전신 경락이 차츰 굳어지는 거야. 네놈 때문에 시간을 놓친 거야. 내가 왜 단우를 쫓아가려고 한 줄 알아? 잠마전만이 혁아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단 말이다. 그것이 안되면 소림에 펼쳐진 연무관에 드는 것이 차선책이었다. 이제 이것도 저것도 모두 불가능해진 거야!" 노미량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왜 이제야 그 사실을 말해?" 노미량의 대답은 매몰찼다. "널 어떻게 믿어?" 주한성은 절망을 느꼈다. 누나의 고민조차 풀어 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울분이 솟구쳤다. 그 와중에도 혁아의 몸에서 뿜어지는 금광은 더욱 짙어갔다. 이러다가는 큰 변고를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주한성은 유비산(幽秘山) 깊은 곳, 은밀한 동굴에 혁아와 노미량, 남궁설이 은신하도록 조치했다. 그는 동굴을 나섰다. -정관효를 찾아야 한다. 공현은 그와 같이 무공을 수련하던 동료인 문조천이 수련을 그만 두고 관아에 투신한 후 발령받은 임지였다. 오비도인의 죽음에 관한 비밀과 혹시 정관효와 연락이 있지 않을까 싶어 문조현을 찾은 것이다. 주한성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문조천을 찾았다. 문조천은 주한성이 처음 무당산을 찾을 때 산문에서 보았던 그 젊은 도사였다. 그는 대쪽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강직하고 열정이 대단했다. 타고난 천성은 부정을 보면 참지 못하는 의혈인이었다.


대신에 그는 무인과는 영 동떨어진 신체조건을 타고났다. 백 보를 걸으면 일 각을 쉬어야 했고, 반 시진 권법연습을 하고 나면 칠 일 간을 구들장 신세를 져야 했다. 반대로 학문에 대한 열정은 대단해서 관리로 나가면 청백리로 이름을 날릴 그런 인물이었다. 문조천이 자신이 무공쪽에 별 소질이 없다는 것을 일찍 파악한 것은 여러모로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가 입신양명을 목표로 삼아 분투노력, 마침내 벼슬길에 오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주한성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었다. 그런 문조천이 수령으로 있는 곳이지만 관아를 찾아가는 것은 역시 찜찜했다. 관아와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왠지 으스스 떨리고 관아를 나타내는 깃발만 보아도 주눅이 든다. 무림에 몸 담은 이후 죄지은 것이 한둘인가? 그의 손에 죽어나간 원귀만도 백은 넘지 않아도 근처는 되었다. 주한성은 픽 웃음이 터져나왔다. 우스운 세상일세! 관아에 있어야 할 친구가 벌건 대낮에 관기들이 득시글거리는 기루에 처박혀 있다니. 요즈음은 관아업무도 기루로 이전해서 볼 수 있도록 법이 개정이라도 된 것인가? 그러나 문조천의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아침에 등청, 도장찍고 이렇게 기루에 처박혀 놀다가 저녁에 퇴청, 도장 찍으면 그만이란다. 백 관이 넘는 돼지 같은 몸뚱이를 나긋한 기녀들의 품에 파묻혀 두면 복잡해진 머리가 식는단다. 송사를 처리하느라 경직된 몸뚱이를 기녀들의 나긋나긋한 손에 풀어 버리면 무병장수한단다. 그 뿐인가? 이제 중원제일주로 알려진 금존청도 관인들 세계에서는 푸대접을 받는단다. 저 멀리 서역에서 가져온 서역주를 먹어야 끗발이 선다나? 제기랄! 걸왕의 주지육림이 만들어진 고장이라 살아가는 방식도 나와는 천태만상으로 틀렸다. 주한성은 뒤돌아 나와 버리고 싶었지만 일단 목적이 있었기에 치솟는 토악질을 꾹 누르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나마 반반한 얼굴이 이럴 때는 또 고역이다. 돼지랑 놀던 기녀들이 웬 먹이냐 하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데 요것들이 남자 옷벗기는 것은 식은죽 먹듯 가볍게 해치워 버린다. 제기랄! 무림의 기루는 그래도 아취나 있지! 이 관인을 상대하는 관기들은 얼굴은 반반하지만 하나같이 관인들의 썩어 문드러진 정신과 썩어 문드러진 정액을 받아 육체는 물론 정신까지 썩어 버렸다. 주한성이 아무리 여자를 좋아한다고 해도 기녀들의 손이 몸 위를 어슬렁거리자 마치 구더기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꺼져!" 주한성의 냉랭한 일성에 관기들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곧 그네들은 별 시답잖은 인간 보았다는 듯이 눈을 부라리다가 문조천을 바라보았다. "나으리! 친구분이 이상하군요. 앞서의 친구분들과는 전혀 틀려요!" "허허허! 손님이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그것을 풀어 주는 것이 너희들의 임무가 아니더냐?" 기녀들은 문조천의 말에 힘을 얻은 듯 입을 삐죽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문조천의 전신을 주물럭거리는데 주한성으로서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남자가 계집을 희롱하는 것은 보았으나 계집이 남자를 희롱하는 것은 처음 보는 것이다. 주한성이 얼굴을 찌푸리자 문조천은 술을 권하며 빙긋이 웃었다. "꼬장꼬장한 성격은 여전하군! 그래 무슨 일로 나를 찾은 것인가?" "그냥, 이곳을 지나는 길이라 안부를 물을겸 들렸다네." "허허! 안부인사라? 천하의 주한성이 안부인사를 다닐 정도로 한가하던가? 아마 누구도 믿지 않을 걸세!"


문조천은 진결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주한성과 동문수학한 사이다. 무공에 관심이 아주 없지는 않았을 터, 주한성의 명성은 들었을 것이다. "사람은 두렵지 않으나 입이 두려운 걸세! 칼앞에 벌어지지 않는 입은 없으니까!" 기녀들을 물려달라는 간접적인 표현이었다. 문조천은 빙긋이 웃을 뿐 기녀들을 물릴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기녀의 가슴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희롱하는 것이 주한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 같았다. "청탁이라면 거절하겠네. 난 이 생활에 만족하고 있어. 굳이 회오리에 휩싸이고 싶지 않다네! 자네가 원한다면 이 중에서 가장 괜찮은 계집과 어울릴 수 있게 해주지. 노자가 필요하면 두둑히 줌세. 그 외에는 뭐든지 사양하겠네!" 문조천의 말에 기녀들이 일제히 인상을 찌푸렸다. "싫어요! 저런 남자랑 무슨 재미로 운우의 정을 나눠요!" "맞아요. 차라리 홀로 독수공방하는 게 나아요!" "떼끼! 네년들이 저 친구를 몰라서 하는 말이다. 하룻밤만 자고 나면 죽어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사정할 것들이!" 주한성은 무섭게 문조천을 노려보았다. 문조천은 빙긋이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먹물을 먹더니 사람이 변했군!" 주한성의 말에 문조천은 느물거리며 웃었다. "어허! 왜 이러나? 내가 이런 호의를 배푸는 것은 자네가 처음이야. 다른 놈들은 나를 만나려면 황금을 싸들고 찾아오지만 나를 대면하는 자들은 열에 하나야!" 더 이상 말이 필요없었다. 주한성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얼굴에 가느다란 웃음을 머금고 이전의 동문을 바라보았다. "다시 이곳을 방문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겠네!" 입조심을 하라는 경고였다. "걱정말게! 나 또한 자네를 다시 보고 싶지 않으니까!" 쾅! 거칠게 문을 닫고 나서는 주한성의 귓전에 기녀들의 비웃음과 문조천의 음담패설이 들려왔다. 입맛이 쓰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람보는 안목이 그렇게 없었던가? 스스로 비참해진 주한성이 기루를 나설 때였다. "주공자님!" 대문 뒤에서 여인이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녀는 남의 이목을 두려워 하는지 대문에 몸을 반 이상 가리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기분이 상한 주한성은 기녀가 부르는 소리에 언짢은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이곳을 나가면 상산(常山)에서 온 정대인의 거처를 물어보세요. 어디어 온 사람이냐고 물으면 추룡(追龍)이라고 대답하세요. 제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기녀는 빠른 걸음으로 후원을 향해 사라졌다. 그제야 주한성은 머리가 일시에 환해졌다. 문조천은 연극을 한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천하에 산재한 기루 중에 잠마전 회회루의 이목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 몇이나 될 것인가? 그렇다면 문조천은 왜 그를 기루로 부른 것일까? 설마 그의 주변에도 잠마전의 첩자가?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도 한때는 무영문의 제자였으니까!


문조천은 일단 끄나불의 이목을 속이고, 회회루의 이목을 속이고 그를 만나려는 것이다. 같이 동행했던 기녀들은 회회루의 첩자들일 가능성이 농후해서 연락을 취하지 못하도록 잡아놓은 것일 게다. 그가 어떻게? 설마 그의 목적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문조천, 그 동안 장족의 발전을 이뤘구나. 이전보다 열 배는 더 신중해지고 생각이 깊어졌어!" 3 상산 정대인은 공현에서는 가장 유명한 인물이어서 그의 집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주한성은 입을 딱 벌렸다. 어마어마하게 컸다. 집이 아니라 궁궐이었다. 골목을 휘돌아간 드높은 담장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담장 너머는 일 장 간격으로 아름드리 백양목이 서 있어서 내부를 옅보는 것은 전혀 불가능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친 대문으로 다가간 주한성은 가볍게 두드렸다. 곧 저쪽에서 신분을 물어와 기녀가 가르쳐 준대로 '추룡'이라고 대답하자 대문을 지키는 문지기는 그를 안내했다. 밖에서 보던 것과 안은 또 달랐다. 중원대륙의 땅덩이가 워낙 거대해 고루거각을 수없이 보아온 주한성이지만 이 정대인의 가택보다 넓고 큰 것은 자금성 정도일 것이다. 문지기는 그를 군집을 이루고 있는 고루거각을 지나 후원으로 안내했다. 눈앞이 탁 트였다. 후원에는 거대한 인공호수가 있었다. 푸른 물결의 한 중앙에는 고풍스런 정자가 서 있었고 무지개형상을 한 가교가 놓여져 있었다. 수면에는 낙옆들이 둥둥 떠다니고 잔잔하게 부는 바람에 파도가 금빛으로 출렁였다. "저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문지기는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멀어졌다. 주한성은 가교를 걸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거택에 살고 있는 사람과 문조천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버럭 의심이 든 주한성은 이목을 집중해 사방을 살폈다. 그의 감각기관은 맹수의 그것처럼 발달해서 이목을 속일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주변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 가교의 정점에 올라서서 힐끗 정자 안을 바라본 주한성은 재차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사람이 정자 안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정대인이 기다릴 것이라는 추측과 달리 두 여자가 정자 안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를 이곳으로 오라고 말한 기녀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었다. 정자 안에는 팔각형의 탁자가 놓여 있고, 장식품이라고는 때늦은 국화가 몇 송이 자라는 화분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주공자, 어서 오세요!"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기녀는 태도가 정숙하고 얼굴에는 기품이 서려있어 조금 전 겪은 기녀들과는 격이 틀렸다. 주한성도 포권례를 취하며 답했다. "주한성이외다." 기녀는 그의 예를 받은 것이 송구스러운지 재빨리 옆의 여인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미천한 것이 어떻게 공자의 예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천녀의 주인이십니다." 주한성은 면사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비록 얼굴은 면사로 가려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지만 팽팽하게 물이 오른 몸매로 보아 삼십 아래의 여인이었다. 바람결에 은은한 향기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여인이 사용하는 지분향이었다. 그렇다고 여인을 규방의 여인이라고 판단하면 오산이다. 주한성은 여인에게서 흘러나오는 무형의 힘을 감지하고 있었다.


버들가지처럼 연약해 보이지만 그녀에게서는 절대고수(絶代高手)만의 기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낭자가 나를 부른 것이오?" "초청장을 먼저 보내고 객을 청해야 하는데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자, 앉으실까요?" 여인은 음성마저도 그윽했다. 귓전에 착착 감겨드는 음성이었다. 여인은 자신이 먼저 팔선탁의 한귀를 차지하고 앉으며 주한성에게 자리를 권했다. "하란(夏蘭)아! 가서 주안상을 봐 오너라!" 기녀의 이름이 하란인 모양이었다. 여인이 그녀를 물리는 것은 두 사람만이 나눌 긴요한 이야기가 있다는 간접적인 표현이었다. 마음은 급했다. 그러나 내심 초조한 것을 드러내 이득 볼 것은 없다. 주한성은 편하게 마음먹었다. 그렇게 보이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주한성은 코를 킁킁거렸다. 바람에 은은히 실려오는 여인의 향취는 이 늦가을 호수 풍경을 그림처럼 아름답게 만들었다. 얼굴에 닿는 여인의 따가운 시선이 기분좋다. 사실 여인의 관심을 싫어할 남자가 몇이나 될 것인가? 여인은 주한성의 경박한 행동을 보고 화를 내기는커녕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공자님, 이 호수 풍경이 어떤가요?" "자금성에 북해(北海), 백해(白海), 습찰해(什刹海) 세 개의 인공호수가 있어 풍취가 훌륭하다고 들었소만 이 인공호수도 그에 못지 않은 것 같소이다." "정말인가요?" "그렇소." "자금성 안에 들어가 보신 적이 있나요?" "없소."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추적술사 주한성 공자도 불가능한 것이 있나요?" "허허허! 낭자는 나를 궁궐침입자로 옭아맬 생각이시오? 나 같은 평인이 양상군자로 탈바꿈하지 않는 이상 어찌 자금성을 출입할 수 있겠소?" "그래도 누군가를 추적하기 위해 한 번쯤은 궁 안에 들어가셨을 것 같은데요?" 주한성은 빙긋이 웃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이 세 가지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싫어하는 것이 여자를 닮은 남자외다. 궐 안에는 동창(東廠), 서창(西廠)의 우두머리인 종주(宗主)를 비롯해 거세한 환관들이 득시글거린다는데 내가 굳이 그들을 만날 필요가 뭐 있겠소?" 환관과 내시가 만나기 싫어서 침입하지 않을 뿐 불가능하지 않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당신이 싫어하는 나머지 두 가지는 뭐죠?" "여자요!" "여자요?" "여자는 단 한 가지는 쓸만 한데 그 외에는 남자를 피곤하게 하는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오." "이해할 수 없군요." "내 취향이니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소이다." "그럼 나머지 한 가지는?" "잠깐! 내가 낭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고 대답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소만?"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처음으로 외부인을 대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했을 따름입니다." "그럼? 그 동안 이 집안에만 거했단 말이오?"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한성은 갑자기 가슴이 찡 울렸다. 고대광실에, 황금산 속에 파묻힌들 무엇할 것인가? 조롱이 아무리 훌륭해도 새는 그 안을 벗어나려 하는 법이다. 비록 자연에 동화하지 못해 죽을지언정! "이런, 그럼 내가 첫번째 대하는 외부인이라니 영광이구려. 내 흔쾌히 낭자의 궁금증을 풀어 주겠소. 그런데 듣고 실망하지 마시구려!" 여인은 궁금한 듯 눈을 빛냈다. "얼굴에 복면을 하는 사람들이오. 낭자처럼 얼굴을 가린 면사여인도 마찬가지외다." 순간 여인의 면사가 미미하게 떨렸다. "당신은 여인을 싫어한다고 했는데, 여자의 용모는 궁금한가 보죠?" "오해하지 마시오. 난 여인의 용모를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얼굴을 가린 것을 싫어한다는 뜻이오. 당신은 내 눈을 보면 내심을 알 수 있지만 나는 당신의 눈을 볼 수 없으니 그만큼 손해보는 것이 아니겠소?" "달변이시군요!" 주한성은 그 말에 빙긋이 웃었다. 자신도 모르게 참새처럼 재잘된 것이다. 이왕 엎질러진 물, 주한성은 가슴에 담은 말을 연달아 토해냈다. "그런 편이오! 이제 그만 나를 당신의 아버님께 안내해 줄 수 없겠소?" "당신은 어떻게 내가 아버님의 딸인 것을 알았죠?" "오늘 완전히 내 밑천이 거덜나게 생겼구려. 이 정도 거택이라면 주인은 대단한 신분의 사람일 터, 호위만도 수백 명에 이를 것이오. 내 추적술사라는 별호가 거창하지는 않다해도 웬만한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것은 사실이오. 그런데 지금 이곳에는 경비병이 하나도 없소이다. 그것은 곧 당신의 무공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이오. 그리고 당신이 얼굴을 가린 것은 당신의 신분이 중하다는 뜻이 아니겠소?" "그러나 얼굴을 가리는 것은 집 내부의 사람들이라도 가능해요!" "하녀를 말하는 거요? 그녀들이 과연 얼굴을 가릴 필요가 있겠소? 결정적인 것은 당신은 조금 전 한 번도 외부에 나가본 적이 없다고 말한 점이오." 여인은 잠시 말을 잊었다. 주한성이 자신의 추측이 맞는 것 같아 으쓱 어깨를 들썩일 때 여인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훌륭한 추리시군요. 그런데 나는 정대인의 딸이 아니라 정실이예요!" 맙소사! 주한성은 멍해졌다가 허허 웃었다. "어째 오늘 입이 방정맞게 잘 돌아간다 했지. 어떻게 좋은 인연이 되나보다 기대했더니 결국 대부인 앞에서 헛품을 팔고 말았구려." 여인은 손을 들어 입부근의 면사를 가렸다. 웃고 있는 듯! 하지만 주한성은 그 동작에서 자신을 향해 검날이 치고 들어오는 듯한 강한 기운을 느꼈다. '정대인이 어떤 사람이기에 젊은 부인조차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가 문조천과도 연관이 있으니 아무튼 신비한 인물이다.' 여인이 다시 물었다. "누군가를 찾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이런, 추적술사라는 별호는 나보다 대부인께 어울릴 것 같소." "우리는 당신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어요. 대신 주공자도 저희를 한번 도와주셔야 해요!"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오. 거래가 사리에 어긋나지 않으면 굳이 마다하지 않겠소." "좋아요. 대인께 안내하죠." 여인은 앞장 서서 걸음을 옮겼다.


뒤따르는 주한성은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할 지 몰랐다. 앞서가는 여인이 나붓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굴곡진 몸이 미려한 율동을 보이는데 그 모양을 보고 있자니 치한같고, 시선을 돌리자니 그 또한 어색하기 이를 데 없다. 자칫 발을 헛디뎌 호수 속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그 또한 민망스런 일이 아닌가? 정자의 가교를 다 건넜을 때 주한성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팔랑! 손수건 한 장이 날아들었다. "젊은 분이 생각이 깊군요!" 손수건에서는 여인의 체취가 깊게 스며 있었다. "다음부터 유부녀를 만나는 것은 삼가야 할 듯하외다." 정대인은 칠십이 넘은 노인이었다. "대인, 주한성 공자이십니다." 여인의 말에 주한성이 들어온 뒤에도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있던 노인이 눈을 떠 주한성을 바라보았다. 주한성도 노인을 살폈는데 그는 체구도 그리 크지 않고 눈매도 유순해보였다. 꼿꼿한 허리와 은연중 몸에서 풍기는 진한 먹내음은 그가 익히 알고 있는 한 사람과 비슷했다. '사부님은 유림의 학자처럼 부드럽고, 품위가 넘쳐 그 분이 천하의 고수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었는데 이 노인도 사부님과 흡사하구나.' 주한성은 노인을 향해 고개를 조금 숙였다. "무림말학이 무례히 방문한 점 용서하십시오." 노인은 빙긋이 웃었다. "허허! 무슨 말씀을. 바쁜 사람을 청해 오히려 내가 미안한 것을!" 두 사람이 일단 말문을 열자 여인은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자네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문조천과 알고 있는지 몹시 궁금하다고 쓰여 있군!" "그렇지 않아도 질문을 올릴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조천이 스무 살 때였네. 그는 무공을 수련하다가 자신이 둔재라는 것을 알고 실의에 잠겨 있었지. 그 아이의 관상을 보니 관운이 트여 있었네. 내가 그를 가르친 지 삼 년 만에 조천은 관계에 진출할수 있었다네." "그럼 조천의 사부님이 되시는군요." "나는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네. 뜻이 맞는 사람들을 규합해 한 가지 일을 실행하려는 것 뿐일세." "그럼 오늘 저를 청한 것은?" "거래라 생각하게. 난 자네가 궁금해 하는 것을 알려 주고 자네는 내게 도움을 주는 것 뿐이네!" 간단한 거래다. 그럼에도 주한성으로서는 신중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 믿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오늘 처음 만났는데 거래를 한다는 것은 빠르지 않습니까?" "허허허! 주공자, 노인이 서두르면 이유가 있는 법일세!" "그러나 저는 노인장을 믿을 수 없습니다." "자네가 전검휘의 후손을 돕고 있듯이 나도 그를 돕고 싶은 것 뿐일세!" 주한성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전검휘를 알고 있는지요?" "물론. 그가 죽고 아들이 자네 수중에 있는 것도 알고 있다네!" "존함을 알고 싶습니다." "일을 처리하는데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닐세. 서로간에 상대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느냐가 문제이지!" "그러나 이름도 모르는 상태에서 거래를 하자는 것은 노���장의 고집에 불과합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는군. 주공자, 노인이 고집을 부릴 때는 이유가 있는 게야!" 노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점차 가늘게 좁혀졌다. 눈빛은 비수같이 노인의 기색을 살폈지만 노인은 오히려 담담하게 웃었다. 주한성의 가늘게 좁혀진 눈 끝에서 희미한 웃음이 흘렀다. "검을 뽑아야만이 노인장의 이름을 알려 주겠다는 뜻 같군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사실 자네가 추적술사라는 명호를 감당할 실력을 지녔는지 궁금했거든!" 두 사람은 방을 나섰다. 너른 호수를 앞에 두고 섰다. 노인이 미리 명령을 내렸는지 이 넓은 집안에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만이 대치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 22 장 송검이전멸 1 노인은 품안에서 부채를 꺼내들었다. 촤락 펼치는 부채질이 예사로운 솜씨가 아니었다. 노인이 부채를 가볍게 흔들 때마다 부채면에 수놓아진 용이 튀어나오는 듯한 환상이 일었다. 주한성은 검을 뽑아들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태연히 부채를 부치는 노인의 동작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으나 섣불리 공격을 펼쳤다가는 불가사리에게 잡아먹히는 조개꼴이 될 것이다. 밝은 달은 진나라 때처럼 빛나고, 관은 한나라 때 것과 같은데, 秦時明月漢時關(진시명월한시관) 만리 멀리 원정 나간 군사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다. 萬里長征人未還(만리장정인미환) 오직 용성의 비장군과 같은 이가 있다면, 但使龍城飛將在(단사용성비장재) 오랑캐 말에게 음산산맥을 넘지 못하게 했을 텐데! 不敎胡馬度陰山(불교호마도음산) 느닷없이 노인이 읊은 시를 들은 주한성이 흠칫했다. 당나라 때 소백(少伯) 왕창령(王昌齡)이 지은 세 편의 출새(出塞)시 중 하나였다. 오랑캐를 정벌하러 떠난 이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한하며, 새북을 떨어울리던 한나라의 명장 용성의 비장군을 그리는 시가였다. '혹시? 이 노인이 전검휘의 친 혈육이 아닐까?' 주한성의 뇌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젊은 사람이 예의가 있어. 늙은이에게 선수를 양보하는 미덕은 좋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야 가능하지! 좋아. 초식만으로 한 수 겨뤄 보세!" 말과 함께 노인은 천천히 다가왔다. 주한성은 퍼뜩 생각에서 깨어났다. 노인이 왜 초식만으로 겨루려는지 의도는 몰랐지만, 일단 대결이 시작되자 주한성은 상대의 허점을 노렸다. 검 끝이 천천히 하단으로 이동했다. 척, 검 끝이 지면에 닿는 순간 주한성은 그대로 노인을 향해 마주쳐 갔다. 버번쩍! 검이 번뜩였다. 하지만 검에는 내력이 실리지 않았다. 사라라락! 부채가 부드럽게 허공을 휘저었다. 부채에도 공력이 실리지 않았다. 파바박!


초식으로 겨루건만 두 사람의 공격이 충돌하자 불똥이 튀었다. 찔러가는 검극은 전광석화, 하늘거리는 부채질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데 검 끝은 부채를 뚫지 못했다. 내공이 실렸다면 어떨지 모르지만 일단 검은 부챗살에 막혔다. 주한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손목을 홱 뒤집어 부채를 떨쳐낸 검날이 섬광처럼 노인의 목덜미를 솟구쳐 올랐다. 그 뿐인가? 검날은 노인의 목 앞 세 치 거리에서 부르르 떨면서 세 갈래로 나뉘어져 미간과 인중, 인후혈을 동시에 노렸다. 실로 소름이 돋도록 무서운 공격이었다. -송검이전멸( 劍已電滅)! 검이 솟구치매 번개같이 사라진다! 바로 분광검의 절초 중 절초였다. 그 기세가 어찌나 사납던지 노인은 휘릭 반 바퀴 돌면서 부채를 맹렬하게 휘저었다. -신룡상삼열(神龍上森列)! 용이 숲을 뚫고 솟구쳐 창공을 뒤덮는 듯한 환상이 눈에 아른거렸다. 파바박! 검극은 다시 부챗살에 막혔다. 노인과 주한성이 서로를 깊은 눈길로 주시했다. 노인이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래 전부터 네 사부가 너를 극찬하기에 설마 했는데 오늘 한수 겨뤄보니 칭찬이 오히려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주한성은 검을 거두고 노인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그도 알고 있었다. 눈 앞의 이 노인이 이제는 고인이 된 사부가 생전에 친교를 맺은 몇 안 되는 친구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남궁가의 일을 청부한 죽립인이면서 전검휘의 사부라는 것도! 사실 노인이 출새시를 읊는 순간 어느 정도 짐작했고, 신룡상삼열을 보고는 확신을 한 것이다. "미처 어르신을 몰라 뵈었습니다." 노인 정관효는 빙긋이 웃었다. "자! 이만 들어가세!" 2 대청 안으로 들어선 주한성은 다소 놀라 마지않았다. 유비산의 동굴에 있어야 할 남궁설과 노미량, 혁아가 저택으로 이주해 있었던 것이다. "허허허! 자네에게 묻지 않고 내가 독단적으로 처리했다네!" 정관효를 본 노미량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다. 눈 가장자리가 실룩이는 것이 대단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오히려 냉랭한 눈빛으로 정관효를 노려보았다. 정관효는 노미량을 모르는 척 일견도 하지 않았다. 그는 대청 한켠에 풍성하게 차려진 식탁에 앉았다. 정관효가 자리에 앉자 대청 뒤편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는데 그 용색(容色)이 절륜하고 아름답기가 천상의 선녀같았다. 이십 중반 정도의 여인은 정관효를 향해 무릎을 굽혀 가볍게 인사하고는 그 옆자리에 앉아 주한성을 바라보았다. 추수같이 맑은 두 눈에 은은한 정이 흘러 사람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입가에 흐르는 웃음은 봄날의 훈풍처럼 부드러웠다. 주한성은 감히 그 여인의 눈길을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는 본디 여자에게 거칠 것이 없다고 자부하고, 또한 그렇게 행해 왔건만 여인과 눈길을 접하자 마음이 흔들렸던 것이다. "호호호! 주공자는 조금 전까지 나를 대부인이라 칭하더니 어째 지금은 예를 취하지 않죠?" 그녀였던가?


주한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젊은 여인을 향해 고개를 숙이려 했다. 정관효가 웃음띤 얼굴로 손을 저었다. "고얀 녀석이로고! 천하에 어찌 너와 내가 부부가 된단 말이더냐? 네녀석이 나를 망신주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구나!" 정관효는 주한성을 바라보며 여인을 지목해 말했다. "자네는 이 아이를 잊은 모양이군. 연아네." 주한성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디로 보나 연아는 아니었다. 그러자 여인은 빙긋이 웃으며 얼굴을 문질렀는데, 주한성은 가슴이 뭉클했다. "연아! 당신이 어떻게? 살아 있었단 말이오?" 이 년 전 이차 대혈전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 연아였다. 정관효는 연아에게 말했다. "얼른 일어나 주공자께 사과드려라!" 연아는 정관효를 향해 귀엽게 눈을 흘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대부인의 성함은 이제 정홍채(鄭弘砦)라고 하네. 앞으로 조카에게 많은 가르침을 베풀 어르신이니까 잘 알아모시도록 하게나!" 마치 타인을 소개하듯, 그리고 여전히 대부인을 사칭하는 그녀의 모습에 정관효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고, 주한성도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내심 웃고 말았다. "대부인의 지엄한 명, 알아 모시겠습니다." 주한성의 능글맞은 대응에 연아는 옥쟁반에 구슬이 구르는 듯한 웃음을 터뜨리고는 자리에 앉았다. 이 년 전 신룡문주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한 그녀는 이름을 바꾸고 정홍채로 위장해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별처럼 빛나는 두 눈은 주한성에게 고정되어 있어서 옆에 앉은 남궁설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사실 주한성이 그녀를 구해 준 이후부터 그녀는 주한성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고 있었고 같이 동행하는 동안 장난을 치면서 더욱 정이 깊어졌던 것이다. 반면 노미량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정관효과 연아를 노려보는데 눈에서는 냉기가 더욱 짙어졌다. 마치 굶주린 독사가 먹이를 노리는 듯한 눈길이었다. 사실 그녀는 정관효에게 불만이 많았다. 금학우와 친교를 맺었다는 이유로 전검휘를 멀리한 사람이 정관효였다. 평시의 노미량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갔을 것이지만 지금은 남편이 죽은 후다. 해서 그녀가 정관효를 대하는 시선은 저리 살벌한 것이다. 그러나 정관효도 연아도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주한성은 눈앞의 술잔을 들었다. "소생이 한잔 권해 올리겠습니다." 정관효가 잔을 받는 것을 시발로 술이 몇 순배 돌고 난 후 정관효는 주변 사람들을 물렸다. 넓은 대청에 단 둘만이 대좌했다. 고적감이 감도는 가운데 정관효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고 표정은 비감하게 변했다. "전검휘의 일로부터 지금까지 궁금한 점이 많을 것일세!" 그렇게 일단 운을 뗀 정관효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사람이 죽고 나면 비로소 귀한 줄을 알게 된다고 했지. 지금 생각하면 전검휘가 금학우와 교제를 시작할 때 어떡하든 설득했어야 했어! 나는 전검휘 주변에 그를 죽일 정도로 엄청난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금사금강환과 신룡백팔주는 신룡문의 무가지보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검휘형님이 지니게 된 것입니까?"


"원래 두 보물은 신룡문의 신물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쓰임새는 본문의 진산대법인 천룡대법을 펼치는 데 있다네. 그러나 두 개의 보물이 존재해도 천룡대법을 전수받을만한 인물은 극히 드물지. 천무골을 타고나야만 천룡대법을 전수할 수 있는데 혁아가 천무골을 타고났다네! 천무골은 아울러 천룡대법과 쌍극을 이루는 잠마전의 잠마등천대법을 전수받을 귀골이기도 하네." "천무골이 탄생하려면 전검휘와 노누님이 결합해야만 가능했던 모양이군요?" "그렇다네." 한때 주한성은 무공을 익히는 데 신체를 구분한다는 것에 반감을 지닌 적이 있었다. 그러나 무공을 수련하면서 그는 왜 각파의 문주들이, 또는 세가의 가주들이 그렇게 무골을 탐내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특성이 있다. 어떤 사람은 백 장을 단숨에 돌파할 수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백 장은 느린 속도로 달리지만 백 리를 쉬지 않고 달릴 수가 있다. 이처럼 사람은 저마다 차이가 있는 것이다. 무공을 익히는 데 있어서 타고난 오성(悟性)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이 백 리를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지구력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체력이다. 무공수련은 반복수련이다. 지겹다 못해 파문을 당하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로 고단하고 피곤한 일상의 연속이다. 사람은 재능이 뛰어나면 지구력이 없고, 지구력이 뛰어나면 재능이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천무골은 이 두 가지를 겸비한 극히 드문 인재인 것이다. "그럼 이 년 전 형님을 외면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는 이 년 전 내력의 절반을 잃었다네! 나만이 아니라 일차 대혈란에서 생존한 신룡문도 절반의 내력을 잃었지! 그 상태로 잠마문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야!" "혹시 사부님과 마찬가지로 어르신도?" 정관효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우리는 그 암중에 숨은 음모자를 경계했지만 색출하는 데 실패했네. 해서 우리는 완벽한 준비가 되기 전에는 잠마전과 대결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전검휘에게 대결 연기를 명한 것이네." 그렇게 된 일이었다. "우린 전검휘가 돌아오자 그를 은거시켰네. 잠마전의 십이비붕련과 회회루의 이목은 천하에 널려 있다네. 그들의 시야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산중을 택했지!" "예로부터 피신하려면 시장으로 피하라 했습니다." "허허허! 내 어찌 그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평범한 사람에게는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이 숨기에 좋지만 혁아 같은 인재는 쉽게 드러나는 법일세. 이것은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이 언젠가는 튀어나오는 것과 같아서 결코 감출 수 없는 게지!" 주한성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 수록 매사 신중하고 경륜이 깊어 좀체 실패하지 않는 법이다. 정관효의 안배가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측근 중 누군가 배반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럴 것이다. 측근이 배반했다면 전검휘로서도 대책이 없었을 것이다. "어르신,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듣기로는 제 사부님의 죽음이 정당한 대결 중에 당한 것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소취옹을 만난 게로군. 사실 자네가 나를 찾아오도록 하기 위해 소취옹에게 정보를 흘렸지. 사실이네. 자네 사부는 만성독약에 중독되었네. 며칠 전에야 문조천을 만나 알게 되었는데 중독시킨 자는 자네에게는 사형인 제갈성곤이라네." "예?" 주한성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만일 제갈성곤이 그런 만행을 저질렀다면 결국 제갈성곤을 사부에게 소개시킨 자신이 사부를 죽인 것이잖은가?


주한성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복잡하게 자네를 만난 이유는 잠마문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함이네. 그 중 가장 주목할 사실이 혈수인이네. 그들이 자네를 추적하기 시작했다네." 주한성은 그러냐는 듯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제갈성곤이 혈수인의 태인이 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아울러 제갈성곤이 사문을 뛰쳐나가야만 했던 그의 쓰라린 과거를 모르고 있었다. 그 후 그가 어떻게 해서 혈수인에 가입하게 되었는지도! 제갈성곤이 가담한 후 혈수인은 중원에 공포의 존재로 부상했다. 제갈성곤은 단 한 번 청부를 받아 완벽하게 성공시켰다. 이 년 전 소림사를 태산북두라는 고고한 위치에서 나락으로 떨어뜨려 자신의 이름과 혈수인을 만방에 알렸다. "나와 신룡문의 문도들은 혁아에게 나머지 내력을 쏟을 생각이네. 나와 문도들이 혈수인을 막을 힘은 없네. 대신 자네가 협조해 준다면 혈수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자신은 있네! 협조해 주겠는가?" "당연히 하겠습니다." "자네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일세!" "잠마전을 부술 수 있다면 목숨이 문제가 아닙니다." 정관효는 한동안 뜨거운 눈길로 주한성을 바라보다가 품안에서 둥근 팔찌를 꺼내 건넸다. "북해빙궁의 신물인 빙백환(氷白環)이네. 혈수인과 대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일세!" 빙백환을 받아들던 주한성의 눈빛이 미미하게 변했다. "쥐가 스며들었군요!" 정관효가 흠칫 놀랐다. 내공의 절반을 잃었다 하나 그는 천성적으로 이목이 밝아 방원 십 장 안의 기척은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허허허! 대단하구나. 이런 인재가 있는한 무영문이 다시 중원에 일가를 이루기에 충분할 거야!' 정관효의 다음 말은 전음으로 이어졌다. 주한성의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거택에 상주했던 수백 명이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요한 문서를 챙기고 사라졌고, 그들의 식솔들이 하나 둘 빠져나갔다. 거택의 담장 위, 한 사람이 묵묵히 그 상황을 바라보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3 십이비붕련 중 열 두 번째, 즉 십이비붕(十二飛鵬) 채용(蔡勇)은 경공술로는 천하에 당할 자가 없다고 자부하는 자였다. 한 걸음에 무려 오 장을 쭉쭉 전진하는 그를 본 사람들은 '바람의 아들'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채용은 지금 내력을 최고조로 발휘해 그야말로 전광처럼 달렸다. 약 이십여 리를 눈깜짝할 순간에 주파하던 그가 갑자기 우뚝 걸음을 멈췄다. 관도상에 한 사람이 길을 막고 서 있었다. 석양을 등지고 선 자를 확인한 채용은 흠칫 놀랐다. 조금 전까지 정관효의 집에 있었던 주한성이었다. 나보다 빠르단 말인가? 추적술사라는 말만 들었지 이렇게 빠르단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채용은 재빨리 뒤를 바라보았다. 뒤를 추적하는 사람이 없다. 채용은 희미하게 웃었다. 일 대 일이면 해볼만 하다. 최악의 경우 다급하면 삼십육계 줄행랑이다. 그는 아직도 도주(逃走)는 그의 전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한성, 혼자 나를 가로막은 것인가?" 주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하군! 감히 혼자서 나를 가로막을 생각을 했다면 스스로 지옥을 찾아온 것과 진배없다." 말이 끝나는 순간에 채용은 허공에 떠 있었다.


주한성은 싱긋 웃었다. 오른손이 검을 쥐고 검을 뽑아냈을 때 검 끝은 어느새 채용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채용은 놀라서 급히 몸을 뒤집었다. 스스슥! 주한성이 지면을 현란하게 밟으며 순식간에 수많은 환영을 만들어냈다. 채용이 도주할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놀라운 신법이었다. 채용의 안색이 대변했다. 주한성이 만들어 낸 수많은 환영들이 일제히 검을 쳐냈다. 채용은 일시지간 어느 것이 실제인지 몰라 허둥거렸다. 푸욱! 등 뒤에서부터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검날이 심장을 관통하고 앞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주한성이 느리게 검을 뽑아내자 벌써 수축된 근육이 재차 베어지면서 지독한 통증이 파생되었다. "크으윽! 믿을 수 없다! 강호에 이렇게 빠른 보법과 검법은 없다." "넌 추적술사라는 내 명호를 좀더 유의했어야 했다." 찰칵! 검이 검집에 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채용은 맥없이 고꾸라졌다. 심장에서 흘러내린 피가 삽시간에 길 위에 자욱히 퍼졌다. 주한성은 떠나가고 관도에는 스산한 바람만이 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한 사람이 유령처럼 날아들었다. 오십 중반의 그는 채용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품안에서 환약을 꺼내 채용에게 복용시켰다. 그 후 채용의 등 뒤 명문혈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일 다경 정도가 흐르자 축 늘어졌던 채용이 미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한성! 너는 제갈성곤과 십이비붕련을 우습게 보았다. 우리가 호락호락 당할 것 같았더냐?" 초로의 늙은이는 채용을 품에 끼고 동쪽을 향해 질주했다. -정관효와 수하들은 모두 모종의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누군가 첩보를 전해 주었든가, 아니면 그쪽에 귀신 같은 자가 있어 우리의 계획을 미루어 짐작한 것입니다. 채용은 띄엄띄엄 간신히 보고를 마치고 숨을 거뒀다. 제갈성곤은 의자에 앉아 사색에 잠겼다. 채용을 구해온 십이비붕련의 대형 염진동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정관효가 눈치채고 모종의 장소로 이동한 것이 틀림없다. 아무래도 공격을 연기해야 할 것 같다. 만일 무리하게 공격한다면 정관효의 거대한 장원은 우리의 무덤이 될 것이다." 제갈성곤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니, 예정대로 공격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함정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죽으러 가자는 말이냐?" 제갈성곤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는 창문을 확 열어젖혔다.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혼탁한 두 눈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주한성, 나를 부르나?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인가? 좋아. 이번에 끝장을 보자." 일 대 일이라면 그를 잡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함정에 곁들여 또다른 함정이 펼쳐진다면? 놈의 약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면? 제갈성곤의 입에 미소가 감돌았다. "주한성, 넌 죽은 것이다." 제갈성곤은 시선을 염진동에게 돌렸다. "혁아라는 아이를 먼저 빼돌리도록 조치해 주십시오. 단 자시 말엽까지 그 일을 완수해 주십시오. 그 다음 일은 혈수인이 알아서 하겠소." "후후후! 혁아를 빼돌릴 자신이 있다면 혈수인에 청부하지도 않았다."


"불가능하다는 말인가요?" "당연히!" 제갈성곤은 희미하게 웃었다. "난 주한성을 죽여달라는 청부를 받았을 뿐입니다. 혁아를 구하는 것은 당신들 십이비붕련에 달린 것, 그 아이가 죽든 말든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염진동도 빙긋이 웃었다. "후후후! 난 다만 거처를 알려 주라는 명만을 받았을 뿐이다." 제갈성곤은 희미하게 웃었다. "좋을대로 하시오. 허나 혁아가 죽으면 당신 역시 죽은 목숨이오." 염진동은 미묘하게 웃었다. 혁아? 그것은 방해물이다. 그는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다. 감수경에게 아들 하나만 낳도록 만든다면, 그는 명실상부한 감수경의 남편이 된다. '후후후! 제갈성곤, 당랑 뒤에는 참새가 있는 법이다.' 제갈성곤도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사륜거가 어두운 밤하늘을 유령처럼 허공을 떠다녔다. 단우였다. 그는 주한성과 남궁설의 협공에 당한 부상이 아직도 완쾌되지 않아 사륜거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없다. 어느 곳에도 혁아는 없다. 그러던 단우는 초조하게 서 있는 노미량을 보고는 미리 적어둔 서찰을 슬며시 밀어넣었다. 밤, 삼라만상이 고요히 잠든 시각. 노미량은 얼굴을 찡그렸다. 이상하게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며칠 전 주한성에 의해 부상을 당한 오른쪽 귀가 하루가 다르게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노미량은 천천히 귀를 매만졌다. 오해로 인해 빚어진 일이었고, 또한 출가한 여인이었으나 주한성에 대한 원망이 사무쳤다. 감히 내 몸에 칼질을 하다니! 주한성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가정하면서도 야속하고 분하기 이를데 없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혁아를 위해 애쓰는 주한성을 생각하면 알 수 없이 마음이 설레이기도 한다. 그녀가 키워온 아이가 이제는 자신과 아들을 구하겠다고 저리 설치는 것이다. "한성아, 고맙구나. 그러나 곧 네 짐을 벗도록 해주마." 거울을 보기 위해 다가선 그녀는 전에 없던 쪽지를 발견했다. <혁아를 구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소. 오늘이 마지막 날이오.> 단우였다. 노미량은 도둑고양이처럼 발자국소리를 죽였다. 소리나지 않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저 멀리 주한성의 방에도 아직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창호지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가녀린 몸매로 보아 여인이다. 무언가를 숙의하는 듯 두 사람은 밀착한 상태에서 대화를 나눠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문 밖에서 잘 들리지 않았다. 한동안 귀를 귀울이던 노미량은 여인이 친구인 남궁설인 것을 알게 되었다.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저 남궁설만 아니었다면 이번 일이 이렇게 꼬이지 않았을 것이다. 노미량은 자신도 모르게 성격이 변하고 있었다. 아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초조감과 남편이 죽었다는 상실감이 그녀를 극도의 혼란에 몰아넣어 이전의 냉철함을 상실케 했다. 노미량은 빠드득 이를 갈았다. '흥! 아주 잘 어울리는 한쌍이군. 남궁설, 그 동안 고고한 척했지만 별 수없어. 한목숨 살자고 단계광에게 아양을 떤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내 동생에게 관심을 보이는 거야? 좋아. 어쨌든


나에게는 혁아를 탈취할 절호의 기회다.' 그녀는 품안에서 가늘고 기다란 향을 꺼내들었다. 미혼향(迷魂香)이었다. 주한성의 이목이 영민한 것을 아는 그녀는 가까이 접근하지는 못하고 멀리에서 불을 당기려 부싯돌을 찾았다. 그런데, 부싯돌을 꺼내들던 그녀의 안색이 일순간 하얗게 질렸다. 갈코리같은 다섯 손가락이 목을 꽉 움켜쥔 것이다. "움직이면 쥐도새도 모르게 죽여 버린다." 컥! 기도가 꽉 막힌 노미량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가 손을 푸는 순간 갑자기 코 속으로 이상한 향기가 파고들었다. 일전 서사혼도에서 한번 이 약물에 혼이 난 그녀는 직감적으로 이 향냄새를 알아차렸다. '최음제!' 놀란 노미량은 얼른 숨을 멈췄다. 그러나 목을 조른 사내의 손가락이 목덜미 몇 군데 혈도를 누르자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킨 노미량은 갑자기 온몸으로 퍼지는 열류를 느꼈다. 욕정이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날카로운 비수가 목에 닿았다. 그러나 이미 부질없는 짓이었다. 노미량은 이미 최음약에 중독되어 이지를 상실한 뒤였다. 노미량이 죽은 듯 미동도 하지 않자 목덜미를 움켜쥔 손이 스르륵 밑으로 내려와 가슴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거친 손이 삽시간에 유방을 꽉 움켜쥐었다. "!" 노미량은 일순간 고통에 정신이 되돌아와 몸부림쳤다. "죽고 싶나?" 목이 따끔했다. 살이 잘려나가는 아주 기분 나쁜 감촉에 노미량은 몸을 떨었다. 사내가 짐짝을 끌 듯이 노미량을 질질 뒤로 끌었다. 거친 손이 유방을 아프게 쥐어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 노미량은 애타는 눈길로 주한성의 방을 바라보았다. 다급하자 자신을 구할 사람은 주한성 이외에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사내는 그런 낌새를 알아차린 듯 음흉하게 웃었다. "얌전히 있어." 다시 한 번 엄포와 함께 손가락 두 개가 유두를 비틀었다. 노미량은 입을 딱 벌렸다. 처음엔 참기 힘든 고통이었으나 곧 야릇한 쾌감이 고통을 누르고 전류처럼 퍼져나갔다. 자신도 모르게 노미량은 몸을 떨었다. "흐흐흐!" 사내는 징그럽게 웃으면서 가슴을 더듬던 손으로 단숨에 하의를 들추고 밑으로 쑥 내려갔다. 노미량은 재빨리 두 다리를 오므렸다. 그러자 사내는 거웃을 한 움큼 움켜쥐고 좌우로 흔들었다. "아…… 아파요." 다리 사이로 사내의 손이 파고들었다. 수치심에 눈까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노미량의 숨소리는 가빠졌다. 이래선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뚱이가 거친 손길에 급격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후후후! 서로 좋자고 하는 일이니까 앙탈 부리지 마. 말만 잘 들으면 너의 아들을 찾아 주마." 노미량은 저항을 포기했다. 사내는 그녀를 옆구리에 끼고는 대저택의 인물들이 떠나 빈 처소로 스며들었다. 주한성의 이목을 상대적으로 경계한 처사였다. 그 와중에도 사내의 손가락은 여전히 그녀를 거칠게 애무했다. 노미량은 대항할 수 없었다. 이미 그녀의 몸은 사내의 손길에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출렁. 침상이 물결쳤다. "흐흐흐, 좋아. 감촉이 아주 그럴 듯해." 삼십 중반의 사내였다. 얼굴 전체를 검은 묵탄으로 칠해 용모를 알 수 없지만 눈매가 독살스러웠다. 그의 시선은 흐트러진 자세로 침상에 누워있는 노미량을 샅샅이 핥아내렸다. 입맛이 도는 듯 혀로 입가를 훔친 그는 상의를 거머쥐었다. 찌이익! 사내의 거친 손길에 옷이 찢겨나갔다. 풍만한 유방이 튕기듯이 솟구쳐올랐다. 공포와 그에 상반되는 욕정으로 노미량은 몸둘 바를 몰랐다. 사내는 음욕이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그 모양을 바라보더니 노미량을 부둥켜 안았다. 유두가 입 속으로 사라졌다. "앗." 부드러운 혀가 유실을 희롱하자 몸에 아릿한 쾌감이 번져나갔다. 노미량은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두 팔로 사내의 목을 휘감았다. 사내가 잘근 유두를 깨물었다. "하악! 당신은…… 당신은 누구죠?" 노미량이 숨죽인 비명을 토하며 엉겁결에 사내의 머리카락을 쥐고 있던 두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나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마라. 네 아들을 구해 주러 온 사람인 것은 확실하니까." 누굴까?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의문은 곧 뇌리에서 지워졌다. 사내의 애무는 집요했다. 입과 양손이 한시도 쉬지 않았다. 애무가 이어질 수록 노미량은 열기에 휘감겼다. 한순간 사내의 입김이 귓전에 닿았다 싶은 순간 사내가 행동을 멈췄다.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미미한 파공성을 들은 것이다. "두의(豆義), 죽고 싶은가?" 타오르는 욕정에 가물거리던 노미량은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그의 음성이었다. 단우. 혈수인의 일 인인 두의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염병할, 재미좀 보려니 글러먹었군.' 두의는 침상을 박찼다. 허공에 뜬 그의 손에 검이 들리고 검은 독사처럼 창 밖을 향해 쏘아갔다. 그러나 그가 펼친 검기는 채 창살을 꿰뚫기도 전에 허공에서 뚝 멈췄다. 그 앞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강기막이 쳐져 있던 것이다. 두의가 채 그 사실을 알기도 전에 강기막은 돌연 수백 개의 예리한 비수가 되어 두의의 전신을 휘감아 버렸다. 머리에서부터 발 끝까지 두의의 몸뚱이가 그대로 분해되었다. 피와 잘린 육체가 발가벗은 채 누워 있는 노미량의 몸 위에 비처럼 내렸다. "아아악!" 노미량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 비명성은 방 안에서만 요동쳤다. 무형의 강기막. 그것은 단우의 성명절기인 단혼벽이었다. 사륜거가 미끄러지듯 창문을 넘어와 소리도 없이 방바닥에 내려섰다. 단우는 사륜거에 앉아 무심한 눈길로 노미량을 바라보았다.


노미량은 수치심에 몸둘 바를 몰랐다. 그 앞에 이렇게 적나라하게 치부를 드러내 놓을 줄은 상상한 적이 없었다. "노미량, 옷을 입어라." 당연히 옷을 입어야 했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시뻘건 피, 그 선렬한 핏빛이 노미량의 욕망을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 단우의 모습이 차츰 한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뜨겁게 그녀를 안아주던 남자, 그 앞에서는 수줍음도 스스럼도 없었다. 사랑으로, 애욕으로 서로를 탐했었다. 그가 눈앞에 있다. "여보, 안아줘요." 여인의 몸이 고혹적으로 율동했다. 빙어 같은 손으로 스스로를 애무하는 여인의 입에서는 달뜬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해초처럼 풀어진 머리는 침상에 열정의 파도를 일으켰다. 자욱하게 퍼지는 성숙한 여인의 체향이 콧속으로 뭉클 스며들건만 단우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차가웠다. "그래, 원한다면 아주 철저하게 밟아 주지." 오래도록 내면에 숨어 있던 열등감이 스물 스물 솟아오른다. 그는 지금껏 남에게 ���시당하고 산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단 한 번, 여인을 앞에 두고 좌절했었다. 그에게 생산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놀아날 때, 그는 난생 처음으로 대단한 충격을 받았었다. 단우는 천천히 옷을 벗었다. 노미량이 달려들었다. 마치 샘을 찾듯 여인은 서슴없이 그를 삼키기 시작했다. 달뜬 신음소리가 높아갈 수록 단우의 마음은 반비례해 싸늘하게 식어내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노미량의 움직임이 고조될 수록 단우의 숨결도 차츰 거칠어졌다. "이런 이런, 내가 실례를 범했군." 단우는 매끄러운 여체를 바라보다가 활짝 벌린 양다리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디를 어떻게 건드린 것인가? "하악!" 노미량의 몸이 작살맞은 물고기처럼 튕겨올랐다. 허공에 뜬 엉덩이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단우는 이전 일은 잊은 듯 집요하게 애무를 퍼부었다. 노미량이 도리질쳤다. 몸 깊은 곳에서 인화된 쾌감이 불꽃처럼 타올라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몸을 태우는 열기에 휘감겨 단우의 머리를 움켜쥐고 미친 듯이 요동쳤다. 단우가 문득 애무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후후후, 전검휘가 눈을 감지 못하겠군. 이렇게 관능적인 부인을 두고 죽었으니 말이야." 그 말이 타오르던 노미량의 욕정에 찬물을 끼얹졌다. 달아올랐던 몸이 찰나간 식어가는 것과 동시에 온몸이 굳어 버렸다. 그제야 비로소 사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벌거벗은 자신, 그 앞에 발기한 상태로 서 있는 단우. 그녀의 눈빛이 찰나간에 정상적으로 되돌아오고, 달아올랐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단우는 만족한 듯 웃었다 "좋아. 이렇게 온몸이 경직된 상태라야 흥취가 나지. 안 그래?" "놔!" 노미량이 벌떡 일어서려는 순간 단우는 허리를 둔중하게 밀었다. 굳어 있는 몸을 관통하는 물체에 노미량의 눈이 하얗게 뒤집어졌다. "아악!"


노미량이 힘없이 무너졌다.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었다. 단우는 생각도 못할 정도로 크고 강했다. 단숨에 내부를 관통하고는 썰물처럼 후퇴했다. 그러나 곧 더 강한 밀물이 되어 인정사정없이 여체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차츰 노미량은 다시 환각상태로 접어들었다. 고통은 차츰 희열이 되고 실핏줄까지 달아오르게 만드는 열기는 온몸을 활짝 열게 만들었다. 노미량은 단우의 등을 강하게 부여잡았다. 미친 듯이 단우의 율동에 맞춰 쾌락 속으로 침몰해 갔다. 모든 것이 꿈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 정겨웠던 남편과의 정사! 상대가 단우인 것은 엄연한 현실이거늘. 시간은 끝없이 흘러갔다. 황소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던 단우가 한순간 행동을 멈췄다. 순간 그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얼마나 허망한 짓인가? 그러나 말초신경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움직였다. 노미량의 눈동자가 하얗게 뒤집어졌다. 단우는 옷을 걸쳤다. "지금으로부터 일 각 후에 공격이 시작된다. 이곳은 완벽하게 초토화 될 것이다. 아들을 살리고 싶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빼돌리도록." 단우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최음제의 약기운이 떨어지며 노미량은 차츰 이성을 되찾았다. 노미량은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았다. 몸 안의 공력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단우는 정조만이 아니라 내공조차 빼앗아 간 것이다. 키득 키득! 그녀는 실성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남편을 죽인 원수에게 몸을 더럽히고도 살아야 하다니! -일 각 뒤에 공격이 시작된다. 노미량은 일어섰다. 버린 놈뚱이. 그러나 아들은 살려야 했다. 서둘러 목욕을 마치고 새로운 의복을 꺼내 걸쳤다. 만일을 대비해 사천당문에서 제조한 암기통을 품 안에 넣었다. 일 각이란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4 같은 시각, 정관효의 거택 지하 석실. 정관효를 제외하고도 이십여 명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신태비범한 인물들, 선인의 도를 익힌 듯 속탈한 성스러움이 감도는 그들이건만 지금 그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푸르스름한 연무가 휘감았다. 푸른 연기는 두 개의 청동향로에서 향이 타오르며 뿜어지고 있었다. -혜심향(慧心香). 코끝을 자극하는 향기. 이것은 향기와 달리 죽음을 부른다. 역혈진력세를 펼치는데 절대적으로 도움을 주는 향이다. 신룡문의 역사상 혜심향이 타오른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신룡문주가 죽음을 앞두고 그 다음대의 인물에게 진력을 전하려 할 때 이 향이 피워졌다. 지금 오십 년 만에 다시 이 향이 피워진 것이다. 두 살짜리 소동을 위해서.


연아는 한켠에 눈물을 머금고 서 있었다. 혜심향이 다 타고 나면 그녀는 이곳을 떠나야 했다. 다시는 정관효를 보지 못할 것이다. 단정히 눈을 감고 앉아 있던 정관효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시작하지." 스스슥!. 십여 명이 일제히 허공에 떠올랐다. 부공삼매(浮功三昧). 무공이 극상승에 도달한 사람이 운기토납을 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무영문의 인물들이라고 해서 하나같이 이 부공삼매의 경지에 든 것은 아닐 터, 혜심향과 역혈진력세가 그 경지를 가능케 했다. 파바바밧! 십 인이 일제히 지력을 발출했다.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강한 기류가 누워 있는 혁아의 몸 위로 폭우처럼 쏟아져내렸다. 지력에 격타당한 백 팔 개의 혈도가 폭발직전의 화산처럼 불끈 불끈 융기했다. 그 순간 혁아의 몸에서 뿜어지는 금광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지고, 막 지력을 발출한 십여 인이 금광에 휘감겨 가루로 변해 사라졌다. "때를 놓치지 마라." 남은 십여 인이 득달같이 재차 지력을 발출했다. 이번에 그들이 발출한 지력은 혁아를 격타하지 않았다. 마치 빛무리처럼, 그들이 지력을 통해 발출한 진력은 허공에서 마치 뱀처럼 또아리를 틀어 한 가락 기류로 변했다. 순간 정관효가 번쩍 눈을 떴다. 그의 몸이 허공으로 높이 솟구쳐 올랐다. 양손에서 금빛 광채가 뿜어져 벼락치듯 혁아의 백회혈과 용천혈에 작렬했다. 한순간 혁아의 머리와 발바닥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면서 작은 몸뚱이가 고무공이 튀듯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개혈!" 정관효의 양손이 혁아의 명문혈과 단전에 밀착되었다. 우우웅! 가공할 음향이 혁아의 몸뚱이에서 울렸다. 정관효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갔다. 피를 머금은 땀이 전신에서 흘러내렸다. 혁아의 백 팔 개의 혈도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한순간 혁아의 혈도가 일제히 열리면서 눈을 멀게 하는 금광이 사방으로 뻗쳤다. 실내 석실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졌다. "이때다." 정관효의 외침에 십여 인이 재차 장력을 발출했다. 또아리를 틀었던 기류가 백 팔 개로 나뉘어 백 팔 개의 혈도로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혁아의 몸에서 뿜어지는 금광이 사라졌다. 대신 은은한 서기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한 가닥 진력마저 뿜어낸 십여 인이 흐뭇하게 웃었다. 성공한 것 같소. 그들의 입가에 서린 웃음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푸스스스! 먼지처럼 그들이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정관효가 천천히 지면으로 하락했다. "연아야, 가라." 제 23 장 가슴에 한은 쌓이고


1 연아는 혁아를 안아들었다. 아이는 정신을 수습했는지 똘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이야, 너는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희생해서 다시 살아난 것이란다. 넌 평생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혁아는 방실 웃었다. 그 해맑은 웃음에 연아는 자신도 모르게 혁아를 꽉 끌어안았다. 연아가 비밀통로를 통해 사라지고, 정관효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마지막 안배만 남았다. 단우를 비롯한 혈수인을 이곳에 뼈를 묻게 만드는 것이다. 한편, 단우에게 치욕을 당하고 몸을 추스려 방을 나선 노미량은 흠칫 굳어졌다. 어둠 속에서 형체도 없이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 살갗에 왕소름이 돋을 정도로 지독한 살기가 전각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노미량은 재빨리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일단의 무리들이 거택의 드높은 담장을 넘어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누구 한 사람 제지하지 않았다. 담을 넘어온 적들도 그 사실이 의아한 듯 사방을 살피다가 서둘러 대문을 열었다. 그러자 일단의 무리들이 우르르 대문을 넘어섰다. 그들은 한 사람의 인솔을 받아 주한성이 머문 전각을 포위했다. 그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미량은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단우가 행동을 개시했다.' 사사삭! 수백 명이 사방으로 산개했다. 주한성이 투숙한 방을 중심으로 전각을 삽시간에 겹겹이 포위했다. 연후, 그들은 각기 품안에서 실을 감은 실패 같은 것을 꺼내 사방에 빙 둘러 치기 시작했다. 무공이 약한 듯한 수백 명은 전각을 빙 둘러 실같이 가는 철사를 겹겹이 치고, 무공이 고강한 자들은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라 공중에 푸른빛이 도는 실선을 얼기설기 엮었다. 지상과 허공에 삽시간에 거대한 푸른 거미줄이 쳐졌다. 노미량의 얼굴이 핼쓱하게 질렸다. -청린화망사(靑燐火亡絲). 일명 청린사. 고패를 통해 청린사에 관한 말은 들었었다. 그러나 지금 거택을 휘감는 것은 종류가 틀렸다. 푸른 인광, 그것이 불을 붙게 만드는 새로운 종류라는 것을 감수경은 직감했다. 충격을 가하면 불타오르도록 개량한 기이한 열선이다. 천잠사로 만들어진 이 열선은 도검으로도 끊을 수 없어 한 번 포위망에 갇히면 탈출이 불가능하다. 더 무서운 점은 일단 불길이 붙으면 청린사는 급속히 오그라들기 시작해 조그만 구슬처럼 뭉쳐 폭발하는 가공할 병기라는 점이다. '청린사는 잠마전만이 사용한다. 그렇다면 저 혈수인은 잠마전의 사주를 받아 공격해 왔다는 말인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노미량이 치를 떨었다. 혈수인은 공격물을 중심으로 청린사를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치고 있었다. 만일의 경우, 극히 드물지만 청린사를 파괴할 인물이 있다면 같이 죽기 위해 청린사를 펼친 자들도 스스로 포위망에 갇힌다. 말 그대로 옥석을 구분하지 않는 전멸인 것이다. -설마 단우가 혁아를 포기한 것이란 말인가? 아니야. 절대 그럴 리 없어! 노미량은 속으로 외쳤지만 상황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드르륵! 노미량은 다급히 주한성의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남궁설과 무언가를 숙의하던 주한성이 화급히 뛰어들어온 노미량을 보고는 놀라 물었다. "누나? 이 야밤에 웬일이야?" 노미량은 재빨리 방안을 살폈다. 혁아가 보이지 않았다. "내 아들은 어디에 두었지?" "그 아이에게 해 될 일은 없어. 안심해." 노미량은 주한성이 혁아를 미리 다른 곳에 은신시킨 모양이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좋은 아이니까 만약을 대비해 미리 방비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 노미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처음의 의도대로라면 응당 혈수인의 기습을 알려야 정상인데 노미량은 이 순간 삶의 의욕을 잃고 있었다. 그리고 죽음, 아들을 두고 죽는다는 생각에 그녀는 문득 서글퍼짐을 느꼈다. 저 세상에 가는 길은 아주 멀고 어두울 것 같았다. 그 먼길을 홀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주한성을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같이 가고 싶었다. 그와 같이, 서사혼도에서처럼 저 주한성과 같이 전검휘에게 가고 싶었다. 주한성의 죽음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단우도 아직 이곳에 있을 것이다. 그래, 정리하자. 이 기회에 사혼도의 악연을 모조리 정리하자! 그녀의 정신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파탄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연이어지는 충격 속에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아들 뿐이었다. 그 외에 무엇도 그녀를 속박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노미량은 살고 싶었다. 절대로 아들을 타인의 손에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은 차츰 악마적인 상상으로 비약했다. 만일 주한성을 죽이는데 협조하면 단우도 그녀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돕는 방법은 다른 게 아니다. 혈수인이 완벽하게 포위하도록 시간을 끄는 것이다. 노미량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호호호. 참으로 보기 좋구나. 내가 두 사람의 다정한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아!" "누나, 말을 해 줘. 왜 혁아를 찾는 거야?" "창호지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더구나. 행여나 아들이 변을 당하지 않을까 싶어서 화급히 달려왔다." 두 사람의 대치를 보던 남궁설이 얼른 끼어들었다. "주공자, 냉정하세요. 미량은 당신을 걱정해서 온 것이잖아요. 미량도 같이……." 주한성이 손을 들어 남궁설의 말을 막았다. "누나, 이리와. 지금 우리는 모종의 계획을 짜고 있었어." 노미량은 싸늘하게 웃었다. 쾅! 문을 닫고 나선 노미량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어느 새 오 장 앞까지 청린사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청린사 안에 들어와 있는 수백 명의 흑의인들은 곳곳에 무리지어 서 있었다. 이상한 것은 대부분의 흑의인들이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다는 점이다. 언뜻 보기에도 육십이 넘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노미량은 그들을 유심히 살피다가 팔짱을 끼고 후면에 서 있는 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제갈성곤의 직전제자인 두굉(豆宏)으로 단우에게 죽은 두의의 친형이었다. 그는 오늘 공격의 선봉을 맡고 있었다.


"난 노미량이라 해요." "그래서?" "설마 나까지 죽이려는 것은 아니겠죠?" 두굉의 눈가에 조소가 흘렀다. "혁이라는 꼬마 외에는 누구도 살아날 수 없다." "그럼?" "단우가 그대를 살려둘 정도로 관대하리라 생각했었나?" 노미량은 대담하게 두굉의 곁으로 바짝 붙었다. "호호홋. 그래? 단우가 나까지 죽이라고 했단 말이지? 어디 죽여 봐라." 두굉이 곁의 수하에게 눈짓했다. 파앙! 거도가 허공을 갈랐다. 무공을 쓸 수 없는 노미량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독기가 펄펄 날리는 눈으로 공격을 가해 오는 자를 노려보았다. 두 눈에 서린 독기가 어찌나 지독한지 목을 쳐오던 자가 주춤했다. "흥." 싸늘하게 코웃음을 날린 노미량은 품 안에서 죽통을 꺼내 발사단추를 눌렀다. 패앵. 무서운 파공음과 함께 아악하는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일격에 졸개를 죽인 노미량은 재빨리 암기통을 두굉을 향해 돌렸다. 그러나 그녀가 채 자세를 잡기도 전에 어깨가 짓이겨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암기통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사천당문의 암기를 숨기고 있었군. 넌 노천악의 딸치고는 참 여러 가지로 재미있는 계집이구나." 그때 조용한 음성이 두굉의 뒤에서 들려왔다. "두굉, 그 여자가 누구인 줄 잊었는가?" 태인, 제갈성곤의 음성이다. 고개를 돌린 두의는 거미줄처럼 처진 청린사밖 사륜거에 단정히 앉아있는 단우를 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학의 날개처럼 도열한 태인 제갈성곤과 혈수인의 동료들도. 노미량은 이전 태인을 본 적이 있었지만 그를 기억하지는 못했다. "단우, 정말 나를 죽일 생각이었나요?" 단우의 얼굴에 부드러운 바람이 맴돌았다. "당신은 왜 청린사 안에 있소? 얼른 이곳으로 나오시오." "혁아를 빼돌리다 보니 시간이 지체되었어요. 혁아는 제가 안전한 곳에 은신시켰으니 어서 이 청린사를 거두어 주세요." "그래? 혁아가 안전하다니 다행이오. 그런데 난 당신에게 일각이라는 충분한 시간을 주었는데 어찌된 일인가?" 노미량은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당신에게 강간당해 몸을 씻느라 늦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마는 노미량은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 "당신과 정사를 나눈 후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어요. 그래서 늦은 거예요." 두의는 물론 단우도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지금껏 이곳에 있었소. 아마 무언가를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이구려." 노미량의 얼굴이 다급하게 변했다. "무슨 소리예요? 당신은 분명……." 노미량은 입을 다물었다. 단우의 눈에 떠오른 냉엄한 노기를 본 것이다. 그 노기는 서서히 조소로


변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단우의 시선이 문득 뱀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요. 그렇다치고 나를 구해 주세요." 단우가 옆의 제갈성곤에게 물었다. "청린사를 제거할 수 있소?" 제갈성곤은 무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불가능하외다. 천하의 보검이라는 간장, 막사검으로도 청린사를 잘라낼 수 없소이다." 단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간장 막사로도 안된다니 그럼 혁아의 어미는?" "포기하시오." 단우는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안타깝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방법이 없다는구려." 노미량은 절망에 휘감겼다. '이미 단맛을 보았다 이거지? 이제와 날 버리겠다고? 어림없다.' 노미량은 다급하게 말했다. "내가 죽는 것은 억울하지 않아요. 그러나 혁아를 키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그 아이의 몸에 펼쳐진 천룡대법을 잊었단 말인가요?" 애원하는 그녀의 얼굴은 측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단우는 빙긋이 웃었다. "당신이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소. 당신만이 여자라고 생각하오? 내 주변에는 수없이 많은 여인들이 있다는 것을 잊은 모양이군. 그리고 천룡대법이 이미 펼쳐진 이상 혁아를 키우는데 당신이 절대로 필요한 것은 아니오." 제갈성곤이 재촉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단우는 사륜거를 청린사 앞으로 이동시켰다. 방 안의 주한성은 그런 단우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처절한 분노로 타올랐다. 노미량이 갑자기 파탄을 보인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단우에게 욕을 보인 그녀는 이미 이지를 상실하고 있었다. 남궁설도 그 옆에 서서 단우를 지켜보고 있었다. 청린사를 모르진 않을 터인데 그들은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지금이 적기 아닌가요?" 남궁설이 말했다. 주한성은 담담하게 웃었다. "아직은. 좀더 두고 봅시다." 단우는 청린사 앞으로 다가가 노미량을 향해 말했다. "들으셨소? 청린사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 우리에게는 시간도 없다는구려. 안타깝게도 나로서는 당신을 살릴 방법이 없소. 이렇게 된 것 혁아의 위치를 말해 주시오. 당신은 죽더라도 혁아는 살아야 할 것이 아니겠소?" 노미량이 푹 고개를 떨궜다. 잠시 후 그녀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고개를 들고 처연하게 입을 열었다. "가까이 오세요. 저 안에 주한성이 있어서 옅들으면 곤란해요." "그가 들어도 상관없소. 어차피 그도 이곳을 벗어나지는 못할 테니까." "나는 서사혼도에서 당신을 본 후 오래 전부터 당신을 사모하고 있었어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당신의 손이라도 잡아보고 싶어요." 단우는 청린사 앞으로 더 다가갔다. 그가 매섭게 노미량을 노려보며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사랑했다고? 천만에. 난 너를 한번도 여자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슈슈슉! 그의 열 손가락에서 지력이 뿜어져 청린사에 작렬했다. 핑- 피피핑! 푸른 빛이 감돌던 청린사가 삽시간에 붉은 빛으로 타올랐다. 마치 도화선이 타들어가듯 청린사는 전체로 번져갔다. 그 순간, "호호호홋!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이놈, 죽어라." 노미량이 처절하게 웃었다. 버번쩍! 노미량의 손에 들린 암기통에서 수백 개의 암기가 발사되어 단우를 노리고 짓쳐들어 갔다. 단우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사륜거 중 한 곳을 누르자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사륜거의 양옆 손잡이에서 철판이 튀어나와 단우의 앞을 막았다. 파바바박! 암기가 모조리 튕겨지고, 사륜거는 바람처럼 뒤로 물러났다. "잘 가게." 단우의 음성을 들은 노미량은 허탈하게 웃었다. 인면수심의 인간, 저 인간을 믿고 혁아를 맡기려던 자신이 얼마나 미련한지 그녀는 직감하고 그에게 어떤 기대를 품은 자신에게 회의가 느껴졌다. "허억! 이게 뭐야?" 당황한 늙은 음성에 노미량은 홱 고개를 들었다. 청린사가 급격히 오그라들고 있었다. 붉은 혈선들이 마치 악마의 혓바닥처럼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한가롭게 서 있던 늙은 노인들이 놀라서 청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화르륵! 미처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청린사를 향해 달려든 사람들이 온몸에 불길이 옮겨붙어 삽시간에 타버렸다. "어어? 저게 뭐야? 뭔데 사람을 불태우는 거야? 혹시 놈들이 우릴 속인 거 아냐?" "그런 것 같은데? 시키는대로만 하면 황금 두 냥씩을 준다고 했는데." 노미량은 어이없어서 허허롭게 웃었다. 어쩐지 행동이 이상했던 사람들은 혈수인의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돈을 받고 고용된 평민들이었던 것이다. 무엇을 노린 것인가?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 그녀는 주한성이 있는 방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2 주한성은 묵묵히 침상에 앉아 있었다. "뭐해? 저 청린사가 보이지 않아?" 주한성은 노미량을 보고 허무하게 웃었다. 노미량은 청린사를 진작 발견했을 것이다. 이 방에 들어올 때부터. 그것이 그를 슬프게 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단우에 대한 불타는 적의로 타올랐다. '죽어도…… 그래, 형. 죽어도 단우를 죽여 버리겠어. 그리고 다소 잔인할지언정 누나를 형 곁으로 보내 줄게!' "낭자, 들어가시오!" 농담을 할 때의 그 쾌활한 표정이 아닌 진중한 얼굴에 남궁설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노미량은 주한성의 표정을 보고 어떤 대비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흥! 나를 이대로 버리고 갈 생각이야? 만일 그렇다면 생각을 달리 해야 할 걸? 내가 소리치면 모든 것은 허사가 될 테니까." 남궁설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우리가 뭘 어쨌다고?" 노미량이 조롱기 짙은 눈으로 남궁설을 노려보았다. "나서지 말아. 네가 왜 참견해?" "너……?" "왜? 내가 지저분해 보여? 그렇다면 당장 나가서 단우에게 애원해 봐. 난 네 애비와 그렇고 그런 사이니 제발 목숨만 살려 주……." 짝! 노미량의 뺨에서 불이 일고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남궁설은 파르르 몸을 떨었다. "못 됐다. 정녕 못 됐구나." "오호라. 이제는 사람까지 쳐? 네가 뭐 잘한 게 있다고 사람을 쳐?" 악에 받친 고함을 지르면서 노미량이 손을 쳐들었다. "그만." 두 사람의 다툼을 본 주한성이 노미량의 손을 잡으며 고함을 질렀다. 노미량은 손을 잡히자 오히려 주한성을 향해 바짝 접근했다. "한성아, 너 나를 좋아했지? 난 너를 키우다시피 했어. 소원을 들어줘. 나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 줘. 난 죽을 수가 없단 말이야. 혁아를 봐야 해. 그 아이를 살려야 해." 비극이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주한성의 두 눈에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노미량을 죽일 수 없다. 누나는 누나대로의 생이 있는 것이다. 단우와 살든, 혁아와 살든, 그것은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것 같았다. "그래, 누나. 누나의 마음 충분히 알아. 살려 줄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누나를 살려 줄게. 대신 정신을 차려. 이전의 그 냉정하고 이지적인 누나로 돌아가!" 순간 우드득 소리가 울리며 방이 무너지면서 일단의 무리들이 방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당황한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방 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주한성 뒷편으로 우르르 달려가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크아악! 여기도……." 주한성이 노미량을 향해 물었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된 일이지?" "황금 두 냥에 팔려온 인간들이지. 너를 공격하는데 단우가 이들을 이용하다니, 그도 정신이 어떻게 된 것 같아." 그녀의 말과 달리 주한성은 심각했다. 치사한 인간이다. 단우의 인간성을 알고 있지만 이렇게 비열한 방법까지 동원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무공도 없는 노인들을 어찌 희생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만큼 혁아가 중요하다는 뜻. 하지만 자신이 살기위해 노인들을 무작정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길게 이어지던 비명소리가 사그라들면서 일단 혼란도 진정되었다. 그런데 그때, 노인들의 뒷편에서 몇 사람이 다람쥐처럼 주한성과 남궁설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설낭자, 조심하시오." 주한성은 일단 두 여인을 뒤로 끌어당겨 공격을 피했다. 연후 번개처럼 손을 놀렸다. 어느 덧 뽑아든 쇄마혼검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찰나간에 묵빛 검광이 사방으로 난무하는 가운데 교묘하게 몸을 숨기며 접근 공격을 펼치던 흑의인들이 검날에 양단되어


나뒹굴었다. 두굉은 교활했다. 그는 수하들이 달려드는 순간 지면을 뒹굴면서 품 안에서 두 자루 비수를 꺼내 팔방풍우(八方風雨)식으로 휘저었다. 주한성의 이목을 숨기기위한 적절한 공격이었으나 그는 다른 한 사람을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검. 푸른 검날이 그대로 그의 이마를 향해 내리꽂혔다. 푸욱! 검날 뒤에서 표독스럽게 안색을 굳힌 여인은 남궁설이었다. "제기랄, 계집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니." 느닷없이 벌이진 일단의 살인광경을 본 노인들이 몸을 떨었다. 그런 사람들을 남궁설이 차분하게 설명을 하며 진정시켰다. 좁은 방 안이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일단, 정리를 했으나 위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화르륵! 부서진 건물이 불타오르면서 거미줄보다 촘촘해져 이제는 빈틈조차 없는 거대한 불덩어리가 방 안 사람들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왔다. "저게 청린사예요. 뭐하는 거예요? 이대로 개죽음할 생각이었나요?" 노미량의 다급한 외침을 들으면서 주한성은 품 안에서 두 개의 둥근 팔찌를 꺼내 양손에 끼웠다. 노미량은 꽁지에 불이라도 붙은 멧돼지마냥 어찌할 줄을 모르는데 주한성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무슨 수를 써야 할 것 아니야?" 노미량의 앙칼진 말에 남궁설이 침상을 밀었다. 침상 밑바닥에 몇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드러났다. "미량, 자 들어가자." 그러나 노미량이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노인들이 불길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보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다시 한 번 아비규한이 벌어지고, 방 안 곳곳에서는 불에 타죽는 노인들이 지르는 신음과 살기 위한 아우성이 교차했다. 주한성은 노미량의 혈도를 짚었다. 노미량은 쿵 소리를 내면서 지하로 굴러떨어졌다. 뒤를 이어 남궁설이 뛰어내렸다. 그 외에 노인 몇몇이 다시 뛰어내렸다. 고개를 돌린 남궁설은 빙긋이 웃고 있는 주한성을 보았다. "설낭자, 부탁하오. 개봉에서 봅시다." 그그긍 소리와 함께 침상이 원위치되었다. -빙백환. 대륙의 남북에는 잠마문과 신룡문에 비견되는 두 개의 거대한 방파가 군림하고 있다. 북쪽에는 천년의 신비를 지닌 북해빙궁(北海氷宮)이고, 남으로는 해남도에 본거지를 둔 남해검문(南海劍門)이다. 북해빙궁은 거란족을 비롯한 여진족을 아우러 거대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남해검문은 동영을 비롯한 남단 새외방파를 총괄한 세력이었다. 두 문파의 문도수도 구천에서 일만 오천여 명. 중원에 미리 진출해 있는 암중세력까지 합친다면 무려 이만을 상회하는 거대한 문파였다. 다행히 이들은 아직 중원무림에 본격적으로 세력을 떨치지 않은 상태였지만 중원무림은 항시 긴장하고 있었다. 빙백환은 그 중 북해빙궁의 삼대기보(三大奇寶)로 꼽히는 보물이었다. 내력을 주입하면 방원 십 장 안을 얼리는 한기가 분출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한 가지 묘용이 더 있었다. 정관효는 혈수인을


상대하도록 그것을 주한성에게 전해준 것이다. 화르륵! 열기가 몸을 태울 듯이 다가왔다. 이미 방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피아를 구분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안쪽으로 피신하려고 아귀처럼 날뛰고 있었다. 주한성은 내력을 운기했다. 찌이잉-! 팔목에 찬 빙백환에서 괴상한 소리가 울리더니 백색 기류가 회오리처럼 일어 가공한 열기를 뿜어내는 청린사를 휘감았다. 치이이익……. 청린사의 열기가 순간적으로 주춤하면서 축소되던 속도도 급격히 늦어졌다. 노인들은 경이에 찬 눈으로 주한성을 바라보았다. "노인장들, 비켜 서십시오." 노인들은 몸을 비키려고 아우성쳤다. 그러나 이미 운신할 틈이 없어서 주한성은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주한성은 별 수 없이 그대로 허공으로 수직으로 솟구쳐올랐다. 찰칵! 내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리자 지독한 한기를 뿜어내던 빙백환에서 괴이한 소리가 울렸다. 환에서 삼 척 길이의 가느다란 비수가 다섯 개씩 튀어나왔다. 그 모양은 영락없이 고슴도치 형상인데, 삐져나온 칼날은 눈을 멀게 하는 광채가 번뜩였다. '금강석이다. 세상에 이것으로 자르지 못할 쇳덩이는 없다.' 주한성은 청린사를 향해 양손을 뻗었다. 꽈가가강! 벽력치는 듯한 음향이 울리면서 청린사의 수축작용이 주춤했다. 주한성은 피를 토하며 지면으로 떨어져내렸다. 주한성은 다시 내력을 끌어올려 허공으로 도약하면서 강하게 양손을 떨쳤다. 과가가강! 청린사의 일부분이 뭉그러져 나갔다. 이에 힘을 얻은 주한성은 다시 한 번 전신의 내력을 기울여 강력하게 청린사에 부딪쳐갔다. 세 번의 연이은 공격에 마침내 청린사가 가닥가닥 잘려나갔다. 일각이 무너지자 청린사는 곧 걷혔다. "살았다." 노���들은 앞다투어 뛰쳐나갔다. 그러나 노인들은 세 걸음도 전진하기 전에 모조리 죽음을 당했다. 어느 틈에 대기하고 있던 자들이 노인들을 추살하고는 사라진 것이다. 주한성은 분노한 시선으로 저 멀리 사륜거에 앉아 있는 단우와 태인을 바라보았다. "어리석은 놈이군." 단우의 말에 제갈성곤은 조용히 웃었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은 여전히 내심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혼탁했다. "태인, 당신은 주한성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주한성은 최소한 사내외다." "나는 계집같이 보인다는 말이구려."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오." 단우의 얼굴이 씰룩였다. 그러나 그는 곧 빙긋이 웃었다. 제갈성곤의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와 겨룬다면 승산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소. 최후에 검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이 승자일 것이오."


"당신이 승자가 될 것이오. 내가 보장하겠소." 제갈성곤이 그를 바라보았다. "정관효가 그를 돕기로 했지. 그러나 그는 이곳에 올 수 없소. 아버님이 직접 그를 상대하려 천제맹을 나섰으니까." "크하하핫." 제갈성곤의 입에서 우렁찬 웃음이 터져나왔다. 몹시 흡족한 웃음이었다. 단우는 그 옆에서 조용히 미소지으며 한발 한발 다가서는 주한성을 바라보았다. "저희들이 처리하겠습니다." 제갈성곤의 수하가 앞으로 나섰다. 제갈성곤은 고개를 저어 수하들을 물러나게 했다. 연후 그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검을 떠받들 듯이 앞에 놓고 정중히 삼배를 올리는 그의 행동은 극히 진중했다. 그의 두 눈은 허공을 향해 돌려졌는데 그 얼굴에는 무한한 감회가 휘돌았다. -넌 한성을 능가할 수 없다. 일차 대혈란 직전 사부가 그에게 한 말. 사부는 주한성에게 문파를 맡긴다며 그 말을 했었다. 참으로 지독한 모욕이었기에 그 후 그의 일생은 처절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모든 것을 극복하고 이 자리에 섰다는 점이다. 비록 사문을 뛰쳐나올 때는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았으나 그 아픔이 있었기에 이제 이렇게 주한성과 당당하게 겨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제갈성곤은 절을 마치고 검을 들어 약지를 가볍게 그었다. "사부, 삼 년 전 당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오늘 증명해 보이겠소. 이 피로 무영문(無影門)을 절손시키는 죄를 대신하겠소." 제갈성곤은 검을 들고 천천히 일어났다. "사형이 범인이었소?" 제갈성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한성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제갈성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제갈성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삼 년 반 만에 만난 사형제가 나눈 인사의 전부였다. 주한성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러나 사감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단숨에 베어 버릴 것이다. 제갈성곤도 마찬가지였다. 삼 년 전의 일이 떠오른다. 제갈성곤이 무영문을 몰래 도주한 후 그는 한 사람의 문하로 입문했다. 선풍도골의 노인은 자신의 명호는 물론 문파에 대해서 알려 주지 않았다. 노인은 그가 취하는 자세를 보고 단숨에 그가 무영문의 문도임을 알아보았다. 사연을 들은 노인이 말했다. -쾌검으로는 주한성의 달마삼검을 이길 수 없다. 더욱이 주한성은 새로이 분광검을 수련하고 있다. 분광검은 말 그대로 천하에서 가장 빠른 검법이다. 그 무공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쾌를 힘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수련을 마친 후에야 그 노인이 감수경의 할아버지인 북존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북존의 도움을 받아 혈수인의 수좌인 태인이 되어 두 번의 청부를 받았다. 이제 그 마지막 청부가 눈앞에 닥친 것이다. 제갈성곤은 검을 미간의 중심으로 곧추세웠다. 회오리였다. 제갈성곤이 검을 곧추세우기 무섭게 주한성은 폭풍처럼 치달려들면서 번개 같은 속도로 공격을 펼쳤다. 그 가공할 속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서, 누구라도 제갈성곤이 피를 뿜고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제갈성곤은 검을 수직으로 세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파파파팟!


제갈성곤의 상의가 마구 베어져 나갔다. 그 뿐인가? 살갗이 그물처럼 금이 가면서 피가 줄줄줄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제갈성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주한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제갈성곤이 곧추세운 검, 그곳에서 해일같은 기운이 뿜어져 자신의 공격을 튕겨낸 것이다. 비록 자잘한 상처는 입혔지만 승패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이 일격에 잠자고 있던 투혼이 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드러난 제갈성곤의 몸에서 근육이 불끈 불끈 솟구치고 있었다. '강해졌다.' 주한성은 하단세를 취했다. 버번쩍! 검이 번뜩였다. 검날은 그대로 제갈성곤의 심장을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제갈성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검날은 제갈성곤의 목 앞 세 치 부근에서 파르르 떨면서 미간과 인중 인후혈을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주한성의 절초인 송검이전멸이었다. 제갈성곤의 무심한 눈빛에서 한 줄기 기광이 번뜩였다. 주한성이 펼친 공격이 안면을 난자할 듯한 순간에야 제갈성곤은 태산을 밀어내듯 힘들게 검을 밀어냈다. 우우웅! 검극에서 무서운 파공음이 일었다. 꽈가가강! 주한성은 울컥 피를 토하며 물러섰다. 순간 제갈성곤은 느리게 앞으로 전진했다. 그 동작은 매우 느렸으나 검에서 뿜어지는 기운은 대단해서 주한성은 마치 만근의 바위에 짓눌린 듯한 압력을 느꼈다. 주한성은 재빨리 제갈성곤을 살펴보았다. 둔중하게 걸음을 옮기는 그의 머리카락은 올올이 곤두서 있었다. 근육이 풍선처럼 부풀어 그대로 폭발할 것 같았다. '한 치 접근할 수록 압력은 배가되고 있다. 피해야 한다.' 추풍무영.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는다는 경공법을 펼쳐 바람처럼 사라질 때였다. "주한성, 넌 그것으로 끝이다." 파아앙! 검날이 빙글 회전하며 심장부근을 찔러오는데 검극에서 뿜어지는 가공할 힘에 주한성은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주한성은 얼른 쇄마혼검을 들어 막았다. 채앵! 주한성의 검이 튕겨졌다. 그러나 그 순간 주한성은 번개처럼 몸을 돌려 그대로 다시 송검이전멸을 펼쳤다. 이 재빠른 임기응변은 제갈성곤의 상상을 초월했다. "크윽!" 심장부근이 불로 지지는 것 같은 충격을 느끼며 제갈성곤은 지면에 나뒹굴었다. 주한성이 둔중한 걸음으로 다가섰다. "사부님께 사죄하시오!" 검이 하늘을 향해 곤두섰다가 심장을 향해 내리꽂혔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제갈성곤이 갑자기 벼락치듯 튕겨오르면서 암기가 격출된 것이다. 퍼억! 이번에는 주한성이 피를 흘렸다. 갈비뼈가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의 중상이었다. 그 충격이 거대했는지 주한성은 움직이지 못했다.


제갈성곤이 비척이며 다가왔다. "주한성, 남길 말은?" "없소." 제갈성곤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감돌았다. 검날을 밀어넣었다. 한 치…… 두 치…… 검날이 주한성의 가슴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한 노인이 벼락치듯 제갈성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주변 인물들은 모두 제갈성곤과 주한성을 주목하고 있어서 노인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고패였다. 지난 세월 동안 가오충으로 위장해 숨어 있던 그, 그 후에는 잠마전 소속으로 숨어 있던 그가 주한성의 위기를 보자 마침내 몸을 드러낸 것이다. 그의 육비원진은 이전만은 못하지만 여전히 대단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고, 제갈성곤이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역시 단우의 감각은 빨랐다. "정관효의 끄나불이 숨어 있었군." 단우가 왼손으로 허공을 기묘하게 휘저었다. 마치 무언가를 끌어당기듯 손을 당겼다가 힘차게 밖을 향해 뿜었다. 팡. 가죽공이 터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허공에 피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퍼졌다. 고패, 그 노장이 처참하게 분시된 것이다. 그러나 그 찰나의 시간, 제갈성곤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감돌았다. 그의 손이 소리도 없이 움직였다. 손을 쭉 뻗자 파공음도 없이 검날은 그대로 단우의 가슴을 관통했다. "큭! 네…… 네놈이!" "청부자에 너도 포함되어 있었다. 저승에 가서 그 이유를 물어라!" 그 순간 주한성이 벼락치듯 몸을 날렸다. "회천!" 달마삼검의 마지막 초식, 그 가공할 무공이 전광처럼 두 사람을 휘감았다. 놀란 제갈성곤, 반면 담담한 단우의 얼굴. "그래, 졸개에게 죽을 수 없는 인생이었다. 북존, 그 늙은이가 배반한다는 것을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오늘일 줄은 몰랐다." 파아! 두 개의 수급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주한성이 갑자기 땅 속으로 푹 꺼졌다. 그때였다. 허공에서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훤출한 미장부, 이광혜였다. "정관효가 미리 철저한 안배를 해 놓았다만, 주한성 넌 살아남지 못한다." 무슨 말인가? 갑자기 그의 검이 지면 십 팔 방위를 무시무시하게 찔렀다. 땅가죽이 터져오르면서 처절한 비명과 함께 피가 땅 속에서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럼에도 찌푸러진 이광혜의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지신 하진청, 이 자가……!" 그의 중얼거림이 끝나는 순간 갑자기 지면이 푹 꺼져내렸다. 그들이 선 방원 일백 장이 그대로 푹 꺼져 버린 것이다. "크아악!" 지면 속에는 칼과 창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이광혜, 양지에서 커온 독버섯 같은 인간, 그를 포함한 혈수인의 주요 인물들은 대응이 빨라 함정에서 벗어났지만 위기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꽈가강! 천번지복하는 굉음이 울렸다. 땅 속에 묻혀 있던 화약이 일시에 폭발한 것이다. 지신 하진청이 만든 걸작이었다. 3 황하의 남단에 위치한 개봉(開封)은 각 나라의 수도로 정해졌던 그 역사로 인해서, 또 지리적인 중요성에서도 항시 중국 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개봉의 외곽은 거대한 평야지대다. 추수를 끝낸 드넓은 평원에 언제부턴가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어왔다. 텅빈 들판을 쓸 듯이 평원을 그리며 날아오르는 회오리바람 속에 아련하게 함성과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피(血)가 흘러 내렸다. 끝이 안 보이는 드넓은 평야에 붉은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드넓은 평원 군데 군데 볏단을 쌓아놓은 노적(露積)가리 주변에 시체 역시 노적가리만큼이나 쌓여 있었다. 가슴에 검을 꽂은 자, 사지가 분리된 자, 목이 잘린 시신들이었다. 까악! 까악! 까마귀가 흉하게 울며 날았다. 먹이를 발견한 놈들이 하나 둘 늘어가면서 삽시간에 하늘은 까마귀떼로 뒤덮였다. 까마귀의 흉흉한 눈빛이 시체를 노리건만 쉽사리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저 아래 팽팽히 당겨진 시위 때문이었다. 평야에서 멀지 않은 구릉지대였다. 누렇게 퇴색한 잔디 위에 십여 명이 무리를 지어 운기조식을 하는지 가부좌를 틀고 있다. 정관효와 그 외 십여 인이었다. 그들과 일 장여 떨어진 곳에 철탑같이 우뚝 선 사내가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 시위를 팽팽히 당긴 어깨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내렸다. 어깨가 깊이 패인 것이 도끼로 장작패듯 내갈긴 것 같은데 시위를 당긴 자세는 추호의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붉게 충혈된 눈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혈루(血淚)는 그도 어쩔수 없음인가. 핑! 꺄아옥! 화살은 선두에 선 까마귀의 목을 꿰뚫었다. 그 무서운 기세에 놀란 까마귀의 우두머리는 수하들을 이끌고 까악 소리만 남기고 저 멀리 멀어져갔다. 사내가 천천히 활을 내렸다. "의인혈(義人血)이다. 네놈들이 탐할 피가 아니다." "허허허. 혜능, 그럴 필요없다. 죽은 사람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게야." 혜능! 그였다. 정관효가 부드럽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뚝 서서 시체가 널린 들판을 바로보는 정관효의 두 눈에 허허로운 빛이 감돌았다. 뒷짐을 진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으로 미루어 그의 심중의 분노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데. "문주, 영을 내려 주십시오. 이렇게 쫓기다가 망할 수는 없습니다." 정관효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 그는 잠마전에 일격을 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의도는 산산이 부서졌다. 이렇게 수하들의 피로 대지를 물들이고 그저 이렇게 망연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정관효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악몽을 떨치듯이, 연후 정관효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북존, 그가 움직인게야." 혜능이 흠칫 몸을 떨었다.


"북존이라면? 감수경의 할아버지가 아닙니까? 서사혼도에서조차 천우사절에게 패한 그가 아닙니까? 그럼 단립은?" "그들은 연합한 거야. 일단은 신룡문을 멸망시키는 것이 중요했겠지. 그리고 혁아도 필요했고, 단립의 성격상 실패는 인정할 수 없어. 그에 부차적으로 섞인 북존. 그들이 연합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단적인 예가 오늘 벌어진 이 일전이야. 단립이나 단계광의 머리에서는 이런 치밀한 계략이 나오지 않아. 혜능, 북존과 단립이 연합했다면 우리는 꼬리를 잘라야 한다." "그럼……?" "멀리 보는 게야. 나나 북존이나 단립이나 그렇게 명이 길지 않아. 길어야 이십 년이지. 상당히 긴 세월같지만 막상 이십 년은 긴 세월이 아니야. 지금은 패배의 울분에 몸을 떨지만, 곧 상황은 역전될 것이야. 지금이 아니라면 이십 년 후라도. 혜능." "말씀하십시오." "넌 그 날을 보아야 해. 지금 곧 떠나거라. 단립이 움직였다면 연아가 위험할 수도 있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혁아가 반드시 무영문의 총단에 당도하도록 만들어야 해." "대체 무영문에 무슨 비밀이 있기에 문주께서 그토록 강조하시는 겁니까?" 정관효는 희미하게 웃었다. "무영문은 용을 키우는 곳이다. 오비도인이 처음에 집을 지을 때부터, 그 후 연아가 모종의 안배를 한 것이 모두 그 이유지." "그럼? 무영문의 총단이 전설처럼 전해오는 용(龍)의 연무관(鍊武館)이란 말씀이십니까?" 정관효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잠마전에게는 죽음의 장소가 될 것이다. 가라. 연아에게 말했지만 만일을 대비해 말해 주마. 무영문을 이용해 잠마전을 멸망시키려면반드시 한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 사람은 남해검문에 있다. 너는 반드시 그를 찾아 도움을 받아야 한다." 정관효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히 말해 주지 않았다. 만일의 경우, 누군가 잠마전에 제압당했을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남해검문에 파견한 제자는 정관효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혜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혜능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때, 갑자기 그들이 서 있는 지면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제 24 장 양귀비 1 잠시 후 땅이 솟구치고 그 안에서 일련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흙투성이인 지신 하진청이 피투성이인 주한성을 안고 있었고, 그 뒤를 남궁설과 노미량이 따라 나왔다. 정관효는 희미하게 웃었다. 성공인가? 연아를 이용해 혁아를 빼돌린 일이? 주한성이 극심한 부상을 당한 것으로 미루어 적의 주력은 둘로 나뉘어졌을 것이다. 십이비붕련과 회회루 또한 혈수인과 단우가 주한성을 죽이기 위해 추적했다면, 단계광은 자신을 추적했을 것이다. 결국 연아의 존재는 그들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하진청이 이상한 보고를 했다. "단우와 제갈성곤이 죽었습니다." "누가 죽어?" "단우와 제갈성곤입니다." 순간 정관효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감돌았다. -단립, 북존! 이번에는 내가 이긴 것 같다.


주한성의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정관효는 절망하지 않았다. 살려고 마음먹으면 세상에는 어려운 일 투성이이지만 죽음을 각오하자 모든 일이 하찮게 보인 것이다. "주한성, 자네에게 마지막 청부를 하고 싶은데 받아들이겠는가?" 지신 하진청에게 안겨 주한성은 힘겹게 웃었다. "이런 상태인데도 아직 날 이용할 일이 남아 있습니까?" 정관효는 담담하게 웃었다. "자네는 한 번 맡은 일은 끝까지 책임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설마하니 자네 사부가 잘못 판단한 것이란 말인가?" 주한성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감돌았다. 동시에 죽어가던 그의 두 눈에 형형한 전광 같은 빛이 감돌았다. 그렇다. 무영문에 있어서 그는 마지막 제자였다. 주한성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멈출 듯이 거칠게 뛰었지만 주한성은 이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그는 정관효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난 다른 것은 몰라도 맡은 일은 반드시 임무를 완수합니다. 그것은 무영문의 신조이기도 합니다." 정관효는 주한성의 손을 꽉 잡았다. "신룡문의 영화는 혁아에게 달렸다네. 난 혁아에게 무영문의 제자를 겸하게 할 생각이지." "신룡문의 절기로도 부족해 무영문의 절기까지 전수하란 말입니까?" "혁아에게서 무영문은 더욱 더 명성을 날릴 것일세. 그것은 내가 장담하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청부는 무엇입니까?" "십 년 후 혁아에게 내 내력을 전해 주는 것이네." "그럼 지금 저에게 내력을……?" 놀라 말을 맺지 못하는 그의 귓전에 정관효의 음성이 조용히 울렸다. "아니다. 단립의 이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희생되어야 하지. 그 전에 노미량을 치료해 볼 생각이다. 내 말뜻을 알겠느냐?" 절대 노미량을 포기하지 말라는 당부였다. "알겠습니다." 정관효는 내력을 전수하기 전 몇 가지 사항을 주한성과 그 일행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노미량에게 시선을 돌려 형형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전검휘는 어려서 일찍이 부모를 잃고 홀로 자라왔다. 그는 누구에게나 다정다감하고 친절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오직 너와 혁아 뿐이었다." 정관효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아직도 그의 혼이 저승에 들지 못한 것 같아 두렵구나." 노미량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단우에게 순결을 잃은 것을 언급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관효는 노미량의 두 눈을 뚫어져라 주시하며 말했다. "내 눈에는 선하게 보여. 검휘는 피묻은 손으로 너의 목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어. 미량아, 넌 네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느냐?" 정관효의 마지막 말은 벼락치듯 우렁차서 노미량의 귀에는 '넌 네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느냐?'라는 말이 윙윙 울리고 있었다. 노미량의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아악!" 노미량의 앙칼진 비명이 사방을 울렸다. 그러나 소리치는 그녀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목이 답답하게 막히는 것이 정말로 전검휘가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잠시 노미량은 갑자기 '살려주세요!' 소리를 반복해 외치면서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녀는 지독한 최면에 걸린 것이다.


섭혼대법(攝魂大法). 사람을 한 순간에 혼몽의 세계로 이끄는 가공할 최면술이었다. 이 수법에 당한 사람은 평생 동안 시술자가 의도한대로 살아가는 정녕 무서운 최면술이었다. 정관효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체 한 구를 든 그는 노미량의 앞으로 다가갔다. 섭혼대법에 이지를 상실한 노미량의 눈동자에서는 총기가 사라지고 풀린 상태였다. "자, 받아라. 네 아들이다." 노미량이 홀린 듯이 시체를 받아들었다. 시체를 살핀 노미량의 얼굴에 흡족한 웃음이 감돌다가 갑자기 안색이 변했다. 시신을 바닥에 패대기쳤다가 얼른 주워들었다. "이럴 수가……. 죽었어, 혁아가 죽었어." "그렇다. 혁은 죽었다. 아버지에게 돌아간 것이다." 노미량이 급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살피던 그녀가 시신을 내동댕이치고 저 멀리로 달아났다. 미친 듯이 달리던 노미량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다시 시체로 달려와 미친 듯이 끌어안으며 오열을 터뜨렸다. 서둘러 가슴을 헤집고는 젖을 시체의 입에 들이밀었다. "혁아, 눈을 떠. 어서 눈을 뜨고 애미의 젖을 빨란 말이야." 시체의 입에 고여 있던 죽은 피가 주르륵 젖가슴에 흘러내리자 노미량은 화들짝 놀라 시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망연히 허공을 바라보다가 호호홋하고 한서린 웃음을 날리며 평원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그녀는 곧 부르르 몸을 떨더니 스르륵 무너졌다. "아니야. 혁아는 죽지…… 않았어. 혁은 내 가슴에 이렇게…… 살아있단…… 말…… 이…… 야……!" "어르신, 지독하군요." 주한성의 말에 정관효는 허탈하게 웃었다. "별 수 없었다네. 미량은 혁아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도 깊어 그 아이를 잃고 나자 점점 더 본성을 잃어가는 것일세." "아무리 혁아를 단립의 이목으로부터 숨기기 위함이라 하지만 방법이 너무도 지독합니다. 누나가 불쌍합니다." "그 방법만이 미량을 살릴 수 있다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제정신으로 돌아올 것이네. 일단은 혁아가 잠마전의 이목을 숨기고 무영문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네." "혁아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마 지금쯤 무영문의 본단을 향해 떠났을 것이네." "과연 잠마문의 이목을 따돌릴 수 있을까요?" "난 오히려 그들이 추적하기를 바라고 있다네. 중원 무림은 더 이상 희생되어서는 안되네. 단립은 반드시 자네들을 추적해 무영문으로 갈 것이네. 그곳에서 제 삼차 대혈란이 벌어지게 될 것이네!" 주한성은 고개를 떨궜다. 숭고한 정관효의 뜻이 가슴 속 깊이 새겨지고 있었다. "내가 할 일은 다했네. 이제는 자네와 혜능, 연아에게 맡길 뿐. 자, 일을 마무리하세." 정관효는 품 안에서 두 개의 환약을 꺼내 하나는 주한성에게 먹도록 하고 하나는 노미량에게 복용시켰다. 주한성은 갑자기 온몸에 퍼지는 열기를 느꼈다. 그는 급히 내력을 운용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독한 고통을 수반했지만 주한성은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해 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관효는 노미량을 가부좌를 틀어준 후 장심을 노미량의 명문혈에 밀착시켰다.


일 각 정도, 피 마르는 시간이 흘러갔다. 잠마전이 기습한다면 누구도 생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하에서 벌어진 이 일련의 연무과정! 정관효는 번쩍 눈을 떴다. "흩어지면 잠마문에 당할 확률이 높네. 되도록 단체 행동을 하게. 주의할 것은 잠마문의 이목이 천하에 널려 있으니 절대 객점이나 주루에는 숙박하지 말게나." 모두를 떠나게 한 후 정관효는 홀로 단계광과 그 수하들을 막아섰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는다. 비록 내공은 잃었지만 정관효라는 이름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기에 단계광은 정관효를 죽이는데 무려 한 시진을 지체해야 했다. 그 한 시진은 소중했다. 주한성을 비롯한 신룡문의 인물들은 잠마전의 이목을 벗어나 무영문의 총단으로 향했다. 그러나 주한성은 급히 서두르지 않았다. 이번 도주는 유인책이었다. 잠마전은 전 세력을 결집해 주한성을 쫓았다. 결국 그들은 주한성 일행을 따라잡는데 성공했고 파상적인 공격을 연이어 펼쳤다. 하지만 주한성과 그 일행도 끈질기게 대항해 추적을 떨치며 간발의 차이로 도주하며 무영문에 들었다. 이때가 십 이 월 초였다. 2 "아앙!" 혁아가 자지러지게 울었다. 연아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연신 혁아를 얼르면서 사람들 사이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귀신에게 홀린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야 누가 변장한 자신을 알아보고 서신을 보내왔단 말인가? 그 마부 때문인지도 모른다. 젊은 여자가 홀로 아이를 안고 천하를 유랑한다는 것은 남의 이목을 끌기에 마차와 마부를 빌렸다. 첫 대면에 자신을 살펴보는 마부의 눈길이 심상치 않았지만 흔히 있는 놈팽이일 거라 생각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사내들의 눈초리를 견디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협사보다는 불한당이 더 많은 곳이 무림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울화를 억누르며 이동해 왔는데, 어젯밤 객점에서 무림인들과 말을 나누는 마부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더니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설마 잠마문이 내 신분을 알아챈 것인가?'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떠나질 않았다. 당장이라도 발걸음을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이 상대는 만일 그녀가 청을 거절한다면 십이비붕련에 밀고하겠다는 경고도 적혀 있었다. "아앙!" 어린 혁아는 연신 울어댔다. 엉덩이를 투닥거려 보지만 녀석은 쉽게 울음을 그칠 것 같지 않았다. 하기사 엄마품에서 귀하게 자란 녀석의 입에 만두인들 맞을 것이며, 쌀밥이 입에 맞을 것인가? 저렇게 울어젖힐 때 가끔 젖을 물려 보았지만 처녀의 젖가슴에서 젖이 나올 리 만무, 혁아는 힘차게 빨다가 이내 흥미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버리곤 했다. 그나마 지금은 인파 속을 헤집느라 젖을 물릴 수도 없었다. 그저 혁아의 엉덩이를 두드려 주는 수밖에. 다행히 앙앙거리며 울어대던 혁아가 등에 코를 묻고 잠이 들었다. 그녀가 물어 물어 마삼륙(魔三六)이란 주루 앞에 당도한 것은 약속시간보다 일 각 정도 빠른 시간이었다. 연아는 일단 주루 옆 허름한 노점에 들러서 국수를 시킨 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노점 안에는 한 사람이 탁자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고, 주인이 면발을 뽑아내고 있을 뿐 수상한 사람은 없었다. 다만 키가 작고 피부가 중원인들보다 검은 해남도의 원주민들만이 바삐 오가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주변을 살필 때였다. "연낭자이십니까?" 귓전에 들려온 낭랑한 음성에 연아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언제 들어선 것인가? 이십 후반의 영준한 사내가 그녀를 보고 빙긋이 웃고 있었다. 푸른 청삼을 입었는데 용모는 단아하고 전신에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탈속한 기품이 흐르고 있었다. "누구시죠?" 청년은 대답대신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연아가 경계심을 보이자 청년은 빙긋이 웃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정어르신의 명을 받고 낭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영문을 찾아오시지 않으셨는지요? 당신을 실고 온 마부가 잠마전과 내통하고 있습니다. 얼른 이곳을 피해야 합니다." 연아는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의 신분을 알 수 있을까요?" 사내는 빙긋이 웃었다. "신룡문 사십 구 인의 제자 중에 열 다섯 번째외다." 말과 함께 사내는 얼굴을 쓰윽 문지르는데 다름아닌 문조천이었다. "아, 문조천사형!" 문조천이 빙긋이 웃었다. "등에 업은 아이가 혁아인 모양이구려?" 연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문조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자리를 옮깁시다. 자칫하다가는 잠마전의 인물들에게 발각당할 수도 있습니다." 연아는 그를 따라 나섰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후 한쪽 구석에서 면발을 뽑아내고 있던 주인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감돌았다. "십이비붕련의 둘째가 성공했군." 노점 주인은 느긋하게 뽑아낸 면발을 가마솥에 집어넣은 후 할 일을 다했다는 듯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후 탁자에 기대어 졸고 있던 자가 고개를 들었다. 삼십 중반의 장한, 그는 다름아닌 주한성의 숙부인 주운백이었다. "신룡문에도 잠마전의 첩자가 있다 이건가?" 주운백은 연아가 사라진 곳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천하 무림의 마지막 변수, 신룡문은 이렇게 등장하고 있었다. 그는 여우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호랑이를 노리고 있었다. 저 문조천이 향하는 곳이 잠마문 십이비붕련의 비밀거점일 것이다. 주한성이 나름대로 잠마전을 무영총으로 유인하는 동안 그는 십이비붕련을 공격해 잠마문의 이목을 차단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주운백의 의도는 산산이 부서졌다. 연아를 유인해 간 문조천이 빙긋이 웃으며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연아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조천은 주운백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문주를 뵙습니다." 주운백은 일시 할말을 잃었다. 영악한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저를 의심하고 있을 줄 압니다. 믿으십시오. 저는 정관효 어르신의 명을 받고 잠마문에 침입한 첩자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근일 내로 오조의 일원인 청해사에서 마승(魔僧)들이 중원에 당도합니다. 그들을 대항할 세력은 현재 무림에는 없습니다. 그들을 대항할 문파는 단 하나 남해검문입니다.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신분을 드러내고 연낭자를 만난 것입니다."


주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청해사가 움직였다는 것은 곧 잠마전의 최후 세력까지 움직인 것을 뜻했다. 이것은 커다란 변수였다. 그들은 서둘러 무영총으로 향했다. 3 정관효의 예상대로 잠마전의 기습은 날이 갈 수록 심해져 이제는 한 걸음을 옮기는 것도 심사숙고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들의 암습은 끈질기고 독랄했다. 주한성으로서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루 하루를 신경을 곤두세운 끝에 주한성과 남궁설, 노미량은 무영문에 당도했다. 그러자 어찌 된 일인지 잠마전이 추적을 멈추고 행동을 개시하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주한성은 그들의 동태를 연이어 살폈다. 그런 어느 날 주한성은 한 장의 서찰을 받게 되었다. <올해 말까지는 서로 충돌하지 않기로 해요. 신년 일월 일일에 벌어지는 제 삼차 정사 대혈전에서 승부를 가리도록 하겠어요.> 감수경이 보낸 서신이었다. 그 동안 후면에 있던 그녀가 마침내 정면으로 나선 것이다. 원단까지는 한 달여가 남았다. 감수경의 무서움을 누구보��� 잘 아는 주한성은 무슨 꿍꿍이 속인지 의심스러웠지만 일단은 한숨을 돌릴 시간은 벌었다. 십이월 삼일! 주한성은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주한성과 주운백은 마주보고 섰다. 주운백은 주한성의 얼굴이 눈에 익다고 생각했다. 특히 두 눈이 유달리 낯이 익었다. "네가 진룡형님의 아들이란 말이더냐?" 주한성은 일배를 올린 후 말했다. "그렇습니다. 주한성입니다." 주운백은 일순간 멍했으나 곧 주한성의 어깨를 얼싸안았다. 그의 두 손이 감격으로 심하게 떨렸다. "이놈, 반드시 살아 있을 거라 믿었다.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주운백의 음성에는 눈물이 묻어났다. 주한성은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흐르는 구름의 형체가 희미했다. '숙부,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서사혼도의 고통을 겪어낸 것은 오직 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리겠다는 일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아버님의 희생을 결코 헛되이 할 수 없었습니다.' 혈육에게는 말이 필요없었다. 장성한 조카를 본 숙부는 한 잔 술을 권하고 이내 두주불사의 실력을 발휘하듯 그들의 앞에는 빈 술동이만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실없이 웃고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주한성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하고픈 말은 진정 많았다. 그러나 입은 열 수가 없다. 입을 열면 그 순간에 억지로 억누르고 있는 과거의 슬픔과 분노가 봇물처럼 터질 것 같기에. "남해검문으로 향해라. 그 동안 내가 취급한 정보에 의하면 그들은 중원정복을 노리는 진정으로 무서운 집단이다. 청해사가 동진하는 이때 그들마저 북상해 중원을 노린다면, 역부족이다. 이곳은 내가 책임지겠다." 주한성은 마지막 잔을 비웠다. 가야 할 곳이 있다. 숙부는 더 이상 조카를 방치할 수가 없었다. 평생을 홀로 살아온 피붙이다. 서사혼도의 죽음을 떨치고 이제 자신의 앞에 선 형님의 아들을 다시 홀로 음모의 와중을 헤쳐 나가도록 할 수가 없었다.


"따라가겠어요!" 남궁설은 막무가내였다. 주한성은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노미량은 혁아를 업고 묵묵히 주한성을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웃었다. 주한성은 이제 노미량의 얼굴에 서린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비록 어둡지만 마음의 평온을 찾은 사람의 웃음이었다. 언젠가는 그 웃음이 다시 활짝 핀 아름다운 웃음으로 변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주한성은 노미량을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노미량 역시 주한성을 당겨 안았다. 그때처럼, 아주 먼 옛날처럼 누나의 품은 따스했다. 노미량은 주한성을 바라보았다. 이전처럼 포근한 눈빛이었다. "무사해야 해!" "다녀올께요!" 길을 재촉해 해남도에 당도한 것은 예정보다 빠른 십 이 월 중순이었다. 양귀비(楊貴妃). 앵속(罌粟)이라고도 불리는 한해살이, 혹은 두해살이 식물이다. 그 식물의 잎은 분처럼 희고, 늦봄에 백(白), 홍(紅), 홍자(紅紫), 자(紫)색을 띤 꽃잎 네 개가 화려하게 피어난다. 마치 사기그릇같이 정갈한 흰 잎새 위에 각기 다른 색채를 띤 네 개의 꽃잎이 핀 모양은 그야말로 아름답기 그지 없어서 오래 전부터 앵속은 꽃중의 꽃으로 추앙을 받았다. 주한성이 연아를 생각하며 왜 앵속을 떠올렸는지는 모를 일이다. 아마 처음 학승당에 들었을 때 선화 때문에 일어난 사건을 사부에게 말했을 때 사부인 오비도인이 한 말 때문일 것이다. "아앵(牙罌)이다. 네 녀석을 홀린 것을 보니 앵속이 간직한 향만큼이나 독하고 독한 모양이다." 앵속의 송곳니, 여인은 자고로 악마의 송곳니 같으니 조심하라는 뜻에서 말한 것일 게다. 삼 년 전 헤어질 당시 선화는 스무 살이었고, 사부의 말마따나 강하고 독한 향을 지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 뿐인가? 그녀는 앵속의 덜 익은 열매에서 추출해낸 아편처럼 사람을 몽롱하게 취하도록 만드는 요염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주한성이 그녀를 기억하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언젠가 오비도인은 탄식하며 말했다. -보물이야. 사람들은 그녀의 겉모습만 볼 뿐 진정한 가치를 모르고 있어. "그녀를 만나볼 필요가 있겠군." 주한성의 혼잣말을 들은 남궁설이 말했다. "내가 그녀를 추적해 보겠어요." "설마하니 추적술사라는 내 명호가 탐이 난 것은 아니오?" 남궁설은 화사하게 웃었다. 아마 근자에 들어서 처음으로 활짝 웃는 것일 게다. 그녀 생각에 주한성은 절대적인 남자였다. 자신과 동갑 정도인데 사람에게 믿음을 줄 뿐만 아니라 행동에 여유가 있었다. "술사(術士)라는 말은 귀에 거슬려요. 왠지 사기꾼 냄새가 나요." "하하하!" 주한성은 호쾌하게 웃었다. 남궁설은 그 웃음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사라졌다. 양귀비에 비견될 정도로 대단한 미녀를 추적해 신분을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화를 추적하면서 알게 된 사실을 남궁설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날 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네요." 남궁설의 말에 주한성은 빙긋이 웃었다. "그녀가 그렇게 아름다웠소?" "당신이 근자에 그녀를 보지 않은 것이 다행일지도 몰라요. 만일 그녀를 보았다면……." 남궁설은 말을 흐렸다. 그녀의 덫에 걸리고 말았을 거예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경박스럽고 어색한 것 같았다. 주한성은 선화가 그렇게 예뻐졌나 싶었다. 남궁설도 천하의 미인이다. 그런 남궁설이 경국지색이란 단어를 사용할 정도라니. 그 네 글자에 부합되는 여인을 만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선화는 그 찬사를 들을 수 있는 여인으로 성장한 모양이다. "그녀가 대단한 신분인 것 같던데 남해검문에서 어떤 위치에 있소?" 남궁설은 잠시 주저했다. 왠지 이 사실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선화의 신분을 말하자니 자신이 점점 더 초라해진다. 한때는 천하명가인 남궁가의 후예였는데……. "그녀는 남해검문의 후계자였어요." 주한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잘못된 정보가 아니요?" 남궁설은 고개를 가로저어 대답을 대신했다. 주한성은 신룡문의 잠재력에 거듭 놀랐다. 남해검문은 해남도를 지배하는 초강집단이었다. 중원의 구파일방에 비교해 조금도 세가 눌리지 않는, 남해삼십육검(南海三十六劍)으로 대표되는 문파가 바로 남해검문이었다. 남궁설은 그녀가 알아낸 소식들을 설명했다. "선화는 남해검문의 문주인 선종한(宣宗漢)의 딸이에요. 실망하실 일이겠지만 구파일방의 한 문파인 종남파 장문인의 아들과 혼례를 약속했다고 하더군요." 주한성은 그러냐는 듯이 빙긋이 웃었다. 남해검문의 후계자인 선화가 무슨 이유로 신룡문에 투신, 무공을 배운 것인지 이유는 모르지만 주한성이 알아야 할 사항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선화가 남해검문의 후계자라는 점 뿐이었다. "내일부터는 도둑 신세가 되겠군." "킁킁." 갑자기 주한성이 코를 벌름거렸다. "이상한데. 어디서 이렇게 고소한 냄새가 나는 걸까?"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걸까? 주한성을 바라본 남궁설은 그의 눈에 요상한 빛이 감도는 것을 발견하고는 가슴이 콩콩 뛰었다. "주공자, 왜 그래요?" "험. 거 새해가 다가오니 고향에 가고 싶은데…… 그런데 내게는 고향이 없어서…… 오래 전부터 한 해의 마지막이 되면 인간 본연의 고향을 찾아 여행을 떠나곤 했다오." "인간 본연의 고향?" "그 뭣이오. 이제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곳이지만 다른 사람을 빌어 가볼 수 있는 고향 말이오." "그런 곳이 있나요?" "물론이오. 낭자를 통해서도 그 고향으로 갈 수 있는데, 당신이 협조를 해 주겠소?" 남궁설은 곱게 눈을 흘겼다. 이만여 평의 모래 광장, 그곳에서 천지를 무너뜨리는 함성이 있었다. 그 함성은 능히 산을 허물고


바다를 뒤엎을 힘을 담고 있었다. 해를 불러 올리듯, 꾸물거리는 일출을 잡아당기듯 그 함성은 어둠을 뚫고 해남도 전체에 울려퍼졌다. 함성에 질려 어둠이 소스라쳐 물러갔다. 태양이 둥실 바다 위에 떠오르면서 거대한 붉은 기운이 천지간으로 퍼져나갔다. 그 붉은 광휘는 곧 황금빛이 되어 천지의 기를 하나 둘 깨워나갔다. 그리고 빛,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에 사내의 가슴을 진탕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한 마리 봉황이 날아들었다. 정갈한 흰 이마 아래 긴 속눈썹이 음영을 드리웠다. 콧날은 명인이 심혈을 기울여 다듬은 것처럼 오똑하니 군형을 이루었고 화장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입술은 화편처럼 붉었다. 몸매 또한 완벽한 균형을 이루어서 불룩하니 솟아난 가슴과 잘룩한 허리의 선이 그린 듯이 아름답다. 이십여 명의 시중을 받으며 모래광장을 걸어오는 여인의 발 끝에 모래가 부서졌다. 젊은 해남도 무사들의 가슴이 모래처럼 부서지고, 곧 다시 희망이란 파도에 적셔들고, 여인을 본 감격은 거대한 자부심으로 터져나왔다. "와아-!" 다시 한 번 우렁찬 함성이 대지를 떨어울렸다. 일 년의 마지막 연무과정에 그들의 우상이자 자부심인 선화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부동(不動)!" 한 소리 우렁찬 외침에 남해검문 무사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윗통을 벗어던진 몸뚱이는 오랜 세월 동안 무술을 익히느라 검게 타 있는데 햇살이 닿자 살갖이 번뜩였다. "대례." 챙! 채채챙! 검이 검집을 벗어났다. 남해검문 문도들이 사용하는 검은 특이했다. 검신이 가늘고 길다. 마치 회초리 같아 볼품은 없지만 적의 몸뚱이를 파고들어 생명을 끊어 버리는 데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다. 검극이 하늘을 향해 곧추선 상태에서 그들은 갑자기 몸을 날렸다. 선룡처럼 허공을 휘저은 그들은 맹렬하게 사방을 향해 검을 날렸다. 일파(一波)가 만파(萬波)로 부서진다. 만 개의 파도를 이룬 검날이 허공에 찬란한 빛무리를 이뤄 용처럼 솟구쳐 오르니 이것이 남해검문의 절기 중 하나인 노룡출해(怒龍出海)다. 선화는 여인이다. 그러나 무사들의 인사를 받는 그녀의 가슴에는 한 줄기 격한 감정이 회오리처럼 솟아올랐다. 무사도, 그것이었다. 선화는 가볍게 손을 들어올렸다. 하연 파뿌리같이 고운 손을 들자니 저들의 건장한 몸과 비교되어 문득 부끄러움이 인다. 발갛게 양볼이 상기되자, 그것을 바라보는 무사들의 가슴에는 한 줄기 열풍이 분다. 남해검문을 지탱하는 율령(律令)이 자연스럽게 함성이 되어 터져나왔다. "나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나를 위해 문파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를 위해 후퇴하지 않는다." 선화는 눈이 부셨다. 남해검문은 강하다. 저들 무사로 인해. 선화는 무사들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주고 연단을 내려왔다. 바다 뒷편, 여모봉(黎母峯)을 등지고 건립된 남해검문의 본전으로 향하는 그녀의 귀에 무사들의 함성이 재차 들려왔다. 여인의 아름다움은 생기(生氣)다. 살아 있음으로 인해 아름다운 것이다. 선화가 좋아하는 것은 예상 외로 무생물이었다. 수석(壽石), 생명력은 없지만 살아 있는 것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존재들. 살아서 가치없느니


생명이 없을지언정 수석은 가치가 있었다. 그래서 선화는 수석을 좋아했다. 그녀의 방 안 네 귀퉁이와 한가운데는 제법 큼직한 수석이 놓여 있다. 돌의 모양이 그럴 듯하다. 흔히 중원을 대표하는 다섯 개의 거대한 봉우리를 통칭해 오악(五嶽)이라 하는데 다섯 개의 수석은 오악을 그대로 축소시켜 놓은 것 같았다. 선화는 방 중앙에 앉아서 다섯 개의 수석을 살펴보았다. 어떤 감정이라도 있을 법한데 그저 무덤덤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선화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학승당에서 처음 보았을 때 참 꼴불견인 남자도 있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의식적으로 그를 멀리 했다. 연무관에는 인재들이 널려 있었고 그에게 관심을 두는 것보다는 다른 여러 가지로 바쁜 일이 많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흰 얼굴의 기생오라비같은 작자가 만만치 않다는 점이었다. 무공은 물론, 사람을 홀리는 데도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은 그녀가 먼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헤어진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 이렇게 그를 그리워 하고 있었다. "게 있느냐?" 자애로운 부친의 음성에 선화는 눈을 떴다. 사람의 혼백을 빨아당기는 마력이 담긴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녀는 일어나 문가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방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은 사십대의 중년인으로 선화의 아버지이자 남해검문주인 선종한이었다. 사각진 얼굴에 검고 긴 수염이 자애롭기 이를 데 없다. 허나 깊고 서늘한 눈빛과 오만할 정도로 치켜올라간 눈매는 그가 대단히 보수적이면서 황소 고집의 소유자임을 증명했다. "어디 보자. 이 녀석, 허허. 내 딸이지만 정녕 눈이 부시구나. 갈수록 이렇게 아름다워지니 청년들이 몸살이 나지." 아버지의 칭찬에 선화는 방그레 웃었다. 선종한은 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고는 방 안을 빙 둘러보았다. 수석에 눈길이 닿자 그는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녀석, 아직도 마음을 잡지 못한 게냐? 저 수석을 아직도 처리하지 않다니……." "그냥 돌일 뿐인데요." "내가 너의 속을 모를 것 같으냐? 저 오악을 닮은 수석을 보면서 마음속에 야망을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선화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선종한은 자리에 앉았다. "너도 게 앉거라." 딸이 자리에 앉자 선종한이 농담하듯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내년이면 너도 스물 셋이 되는구나. 체구가 이제는 말처럼 커져서 딸이라기 보다는 처치곤란한 골동품으로 보이니 이거야 원." 쯧쯧, 혀를 가볍게 찬 선종한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녕 종남파의 이광혜는 마음에 들지 않더냐?" 아버지의 물음에 선화는 시선을 창 밖 허공으로 돌렸다. 대륙에는 아직 겨울의 한 중앙일 테지만 해남도는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았다. 아주 드물게 여모봉 정상에 흰 눈발이 날릴 때도 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극히 드물었다. 지금도 따스한 햇살이 창공을 나는 새들의 날개짓에 부서지고 있었다. "아빠, 궁금한 게 있어요. 왜 갑자기 제 혼사를 서두르시죠? 설마하니 이제 이 딸이 귀찮아지기라도 한 거예요?" 선종한은 잠시 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동안 애지중지 키워와 남에게 주고 싶지 않은 귀한 자식이다. 하지만 자식을 언제나 품 안에서 키울 수만은 없는 법, 이제는 한 남자를 섬기는 평범한 여인으로 만들고 싶었���. 그리고 또, 한 녀석이 마음에 걸렸다. 주는 것 없이 얄미운 녀석이다. 이상하게 미운살이 박혀 생각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짜증이 일었다.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딸은 오래 전부터 그 녀석을 좋아하고 있었다. 더구나 근자에 그 녀석이 해남도에 출현했다는 보고를 접한 선종한은 오래 전에 혼약을 맺은 종남파 이광혜와의 혼사를 서두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아비의 말을 거역하겠다는 말이더냐?" 선화는 푹 고개를 숙였다. 애궂은 손톱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녀는 가만히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고운 손이다. 십 오 년 동안 무공을 닦은 손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한 햇살에 실핏줄이 그대로 드러나 보는 자신조차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휴우." 선화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전 한 사람의 아낙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 것 같았으면 무인(武人)이 되기 위해 그 모진 고통을 감내치 않았을 것이고, 검로(劍路)를 체득키 위해 십 오 년 동안 머리를 싸매지 않았을 것입니다." "허허허, 처음에는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한단다. 너만이 아니라 네 애미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 청혼을 뿌리치곤 했었으니까. 그러나 결과는 어떠하더냐?" 잠시 말을 끊고 딸의 반응을 살핀 선종한은 말을 이었다. "애미는 지금 이 생활에 만족하고 있단다." "아빠의 바램이겠죠." "허허허!" 선종한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딸녀석과 말싸움을 해서 이긴다는 것은 포기해야 할 듯하다. 그럼에도 선종한은 미련을 접지 않았다. 아니 반드시 관철시켜야 했다. "네가 무술을 배울 때부터 누차 말해 왔다만, 협의(俠義)란 마음 깊은곳에 있어서 환경이 변한다고 변하는 것이 아니란다. 네가 이광혜와 결혼을 한다해도 내 가슴에 품은 웅지가 어디로 가겠느냐?" "꿈은 사라지죠. 아빠, 저를 이해해 주세요." "허허허! 녀석, 대륙을 가슴에 품는 것은 사내로 족해. 정히 그 뜻을 포기할수 없다면 시집가서 아들을 낳으려무나. 아들을 기린아(麒麟兒)로 키워 영웅으로 만든다면 중원을 지배하는 또다른 방법이 아니겠느냐?" "그럼 아버지는 왜 저를 기린아로 키우지 않았죠? 제가 여자라서였나요? 한낱 이렇게 힘없는 여인으로 살다 가기를 원하셨나요?" 선종한의 눈꼬리가 위로 치켜올랐다. "녀석, 이제는 마음을 숨기는 데도 도통했구나. 얘야, 애비가 솔직히 말하마. 난 주한성이 싫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네가 그 녀석과 어울리는 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선화의 붉은 입술에 자조적인 웃음이 감돌았다. "아빠, 잘못 알고 있어요.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내 야망보다는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왜 아버님께서 그를 그렇게 싫어하시는지 이유는 알고 싶어요." "내가 그 말에 답해도 되겠소?" 방문 밖에서 젊은 청년의 음성이 들려왔다. 선화의 눈빛이 금방 냉랭하게 변했다. 그녀가 벌떡 일어서려는 것을 선종한이 만류했다. 문이 열렸다.


이십 중반의 청년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광혜였다. 선화는 바짝 고개를 들었다. 이광혜를 바라보는 두 눈에는 설핏 경멸이 흘렀다. "장차 종남파의 수장이 될 분이 아녀자의 처소나 옅보다니 종남의 앞날이 눈에 훤하군요." 신랄한 비웃음에도 이광혜는 빙긋 웃었다. 그는 먼저 선종한에게 정중하게 예를 취한 후 선화를 향해 말했다. "한 가문의 흥망은 그 집안에 어느 여인을 맞아들이는가에 달렸다고 들었소이다. 그것은 문파에도 적용될 터, 난 종남파를 반석에 올려놓는 일이라면 어떤 모욕이라도 참을 각오가 되어 있소이다." "흥. 얼굴이 상당히 두껍군요. 그래, 아버님이 주한성을 싫어하는 이유를 안다고 했지요? 어디 한 번 말씀해 보시겠어요?" 이광혜는 빙긋이 웃었다. "낭자는 서사혼도를 알고 있소?" "흥! 천하에 서사혼도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몇 사람에 불과해요. 나도 그 중의 하나라는 것을 이공자께서는 망각한 모양이군요." "하하, 말 끝이 비수같구려. 그럼, 이십 년 전 사혼도를 탈출한 한 사람에 대한 소문 역시도 알고 있소?" 순간, 선화의 얼굴색이 일변했다. 그녀는 소림에서 무공을 수련할 당시 대단히 중요한 업무를 병행해서 강호의 기사(奇事)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 그 중에는 절대 세인들에게 알려져서 안되는 일도 있었는데, 사혼도를 탈출한 사람들에 관한 일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녀가 알기로도 서사혼도는 진정한 죽음의 섬이었다. 그곳에서 사람이 살아나온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그 섬에서 한 사람이 탈출해 중원무림에 스며든 것이다. 서사혼도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 비밀을 아는 단체는 신룡문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잠마전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광혜가 그 사실을 거론하고 나선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녀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건 말건 이광혜는 설명을 덧붙였다. "주한성은 그들 중 한 사람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의심을 받고 있소.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그가 서사혼도에서 행한 난잡한 행실이오." 선화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광혜는 빙긋이 웃었다. 그는 웃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는 성격인 듯했다. 그것이 선화를 더욱 열불 터지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이어 들려온 음성이 선화를 아연실색케 했다. "그는 이미 수없이 많은 여인과 장래를 약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소. 지금 동행하고 있는 남궁설은 물론이고, 낭자도 알고 있는 연아, 그리고 북존의 딸인 감수경도 포함되오. 한 가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지만 전검휘의 부인인 노미량도 그가 건드렸다는 소문이 파다하오." 실로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어찌 사람으로서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낭자가 장차 아미파는 물론 남해검문의 대를 이을 가장 유력한 인물이라는 점이오. 그런데 만일 낭자가 주한성 같은 인물과 결혼한다고 해보시오. 남해검문의 앞날은 어찌되겠소?" 선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조용히 선화의 반응을 지켜보던 이광혜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고려해야 할 것은 낭자의 부친이시오. 낭자같이 어리고 꽃다운 처녀가 그런 악인을 사랑하는데 어느 부모가 방관할 수 있을 것이오?" 선화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깊이 가라앉았던 여인의 두 눈이 차갑게 빛났다. 글렀군. 이광혜는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가장 크게 염려한 것은 선화의 야망이었다. 그녀는 절대 한 남자의


부인으로 만족할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무림역사상 전무후무한 여제(女帝)를 꿈꾸고 있었다. -전설을 만들어 간다. 더구나 그것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면 절대 포기할 여인이 아니다. 그 얼마나 가슴설레는 일인가? 가슴 속에 천하를 품고 있는 그녀에게 이 사실은 견딜 수 없는 유혹일 것이다. 이광혜는 선화에 대해 확실히 알고 대비책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진정 주한성을 사랑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과의 결혼을 피하기 위해 주한성을 내세우는 것인가?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는 절대로 선화를 포기할 수 없었다. 남해검문은 반드시 포섭해야 할 대상이었다. 만일 불가능하다면 비무를 해서라도 그녀의 환상을 깨버릴 각오를 품고 있었다. 자신이 익힌 천하삼십육검법과 현천건강기라면 능히 선화를 제압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선화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빠도 이공자와 생각이 같나요?" 선종한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선화는 신비하게 웃었다. 입가에 서린 잔잔한 미소는 절망이 아닌 앞날에 대한 희망이었다. 선종한은 더 이상 딸을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늘부터 금족령이다." 이광혜가 선종한을 바라보며 전음으로 빠르게 말했다. "금족령은 자칫 사태를 더 악화시킵니다. 티끌같던 열정을 삽시간에 활활 불태울 수도 있습니다." 선종한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판단하기에는 선화의 상태는 최악이다. 이미 활활 타오르고 있어서 도저히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진화할 수 없네." 마음 속에는 다른 말이 남아 있었다. 딸이 주한성을 좋아해서만은 아니다. 녀석은 천하를 향한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녀석은 한 번도 아비의 명을 거역한 적이 없다. 이런 물리적인 방법으로라도 일단 딸의 열정을 식혀야 한다. 선종한은 정확히 딸을 파악하고 있었다. 저 아이의 무서움은 미모가 아니라 머리다. 녀석은 자신의 미모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바로 너 이광혜, 너 같은 사내를 대상으로 해서 말이다. 아버지와 이광혜를 배웅하고 돌아온 선화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머리는 온갖 상상으로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일을 서두르는 것으로 보아 무슨 일인가 있다. 어쩌면? 그래, 주한성이 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 -방법은? 선화의 얼굴이 일시간에 환하게 변했다.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해남도였다. 아버지인 선종한은 학식이 뛰어나고, 의술에 일가를 이룬 것은 물론 온후한 성품을 지녀 해남도의 원주민인 여족(黎族)과 묘족(苗族)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해남도의 원주민들은 피부가 검고, 키가 작았다. 중원인들은 그런 원주민들을 천시하고, 경원했다. 그러나 남해검문은 틀렸다. 원주민들과 그들의 생을 이해했다. 현재 남해검문은 해남도에 파견된 관리보다 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들을 이용할 수 있다면. 일단 조치를 취한 그녀는 방문을 나섰다. 아버지의 뜻에 정면으로 위배하는 가슴이 저렸다.


그러나 선화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빠, 나도 이제 성인이예요. 아빠가 나를 출가시키려 할 정도로, 이제 나는 내 생을 개척할 자신이 있어요. 제 25 장 그를 보기 위해 1 남궁설은 애가 타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 또한 자신이 포기할 수는 있어도 남에게 무시를 당하고 살아갈수 없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연아와 선화! 아니야. 절대 그럴 리가 없어. 남궁설은 건너편 방 안에 앉아 생각에 잠긴 주한성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그 얼굴을 보자 가슴이 끓어올랐다. 주한성은 전서구와 개방을 통해 끊임없이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만일 한 차례 삐끗 발을 헛디뎠다가는 일거에 잠마전에 붕괴되고 만다. 그는 생각에 골몰해 남궁설의 시선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휴우……!" 남궁설은 가는 한숨을 내쉬다가 창문을 향해 다가갔다. 해남도의 겨울은 시시했다. 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바람이 찬 것도 아니고 그저 밋밋한 날씨에 밋밋한 풍경이었다. 심지어 창 밖에 빗물을 받아놓은 함지박에 담긴 물빛조차 밋밋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것이 싫었다. 살며시 손끝을 물었다. 이빨에 찢어진 둘째 손가락 끝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핏방울은 함지박에 뚝뚝 떨어져 자욱하게 퍼져나갔다. 남궁설은 그 광경을 보면서 야릇하게 웃었다. 귀여운 악마 같은 음성이었다. '그래. 이렇게 하는 거야.' 남궁설은 돌아섰다. 그녀의 얼굴에 음모가 서린 웃음이 감돌았다. 그녀는 조그만 환약을 입에 물고는 품 안에서 비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칼날을 심장부근에 찔린 것처럼 위장했다. 그리고는 얼른 상처난 손으로 가슴에 피를 묻혔다. '이렇게 죽음을 가장하는 거야. 그럼 달려오겠지.' "아악! 암습……!" 쿵! 주한성이 놀라 눈을 돌렸다. 남궁설의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피를 본 그는 마치 유령처럼 찰나간에 공간을 이동해 남궁설의 방 안에 나타났다. 실로 경악할 경공법, 추풍무영의 위력이었다. "정신 차려!" 주한성은 재빨리 남궁설의 옆에 앉았다. 코밑에 손을 대보자 아직도 미미하게 숨결이 남아 있었다. 여인의 옹긋 도드라진 가슴에 난 상처를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름하게 젖어들었다. 그것도 잠시, 그가 가볍게 손을 떨치자 파아 소리를 내면서 단검이 뽑혀져나왔다. 다섯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연후 품 안에서 금창약을 꺼내 피묻은 상처에 바른 주한성은 남궁설의 목덜미를


가볍게 쳤다. 남궁설은 힘겹게 눈을 떴다. 자신을 안고 있는 주한성을 본 그녀는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왜 저를 살리셨어요? 쓸데없는 자비를 베푸셨군요." "?" 남궁설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눈가에 고였다가 또르륵 굴러 떨어졌다. 남궁설은 살며시 주한성의 품을 벗어났다. "저를 욕하시죠?" "아니오." "저는 이미 남자를 경험한 여자에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순간 남궁설은 고개를 돌려 주한성을 노려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탐색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당신은……?" "난 본디 천성이 게으른 놈이었소. 허나 강호동도들이 추적술사라는 명호를 내 이름 앞에 붙이고 나서는 게으름을 부릴 수 없게 되었소. 사람은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 나면 이름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오. 나도 그런 불쌍한 사람 중의 하나에 불과하오." "설마 남궁가를 속박한 음모를 알고 있었단 말인가요?" "그것을 알기에 당신을 구하려 한 것이오. 물론 나만의 결심이 아닌 신룡문의 뜻이기도 했소." 갈등이 인다. 이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라고 믿고 싶었다. 차라리 이 사람에게 남궁가의 혈채를 넘겨 주고 이대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하지만…… 남궁설은 마음을 다잡았다. "아……." 남궁설이 비틀거렸다. 놀란 주한성이 엉겁결에 그녀를 안아들었다. 순간, 주한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미묘한 향기였다. 가늘게 뿜어지는 남궁설의 숨결이 콧속을 파고들자 일시지간 피의 순환이 급박해졌다. '최음약……? 어리석은 여인이군.' 그렇게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나 주한성은 곧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을 깨달았다. 최음약은 그의 예상을 훨씬 벗어나는 강력한 것이었다. "저를 미워하지 마세요. 난 당신을 다른 여자에게 빼앗길 수 없어요." 남궁설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한성의 두 눈은 벌겋게 변해 갔다. 핏빛을 띤 혈안(血眼)은 소름을 돋게 만들어 남궁설은 스스로 만든 상황임에도 진저리쳤다. 주한성은 느리게 가부좌를 틀었다. 우선 내부에서 솟구치는 욕정을 삭이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내공을 운용하자 상태는 더욱 악화됐다.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그러지 말아요." 사라락……. 남궁설이 옷고���을 풀자 옷이 몸을 타고내렸다. 흰 살결이 드러나는 것도 잠시, 그녀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자 해초같이 윤기 감도는 검은 머리카락이 탐스럽게 부푼 젖가슴을 덮었다. 옷자락이 흘러내리기 무섭게 경주 하듯이 머리카락이 다시 추르륵 흘러내려 덮었다. 갸름한 아랫배와 허리를 타내린 머리카락은 남궁설이 가볍게 머리를 휘젓자 하복부의 은밀한 곳을 보일 듯 말 듯 가렸다. 그 자태가 오히려 요염하기 이를 데 없어 한 송이 꽃이 핀 듯 아름다웠다. 팔등신의 늘씬한 몸, 우유같이 뽀오얀 살결, 살결 위에서 해초처럼 출렁이는 머리카락.


진정 우물(尤物)이었다. 주한성은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몸은 내부에서부터 활활 타올랐다. 운기토납이 길어질 수록 호흡이 미치는 곳마다 불에 달구어진 인두로 지지는 듯하고, 그 참담한 고통은 이내 불꽃 같은 욕망으로 타올랐다. "휴우." 주한성은 한숨을 내쉬며 마침내 운기토납을 그만 두었다. 남궁설이 수줍게 웃으며 주한성의 무릎에 앉아 그를 올려다 보았다. "저를 미워하세요?" 주한성은 고개를 저었다. 미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다급한 상황에 이런 일을 저지른 남궁설의 대담함과 연아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걱정스러울 뿐이다. 주한성은 남궁설의 눈을 바라보았다. 여인의 눈은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당신은 여러 가지로 사람을 당혹하게 만들어." 주한성이 무릎을 꿈틀거려 떨쳐내려 하자 남궁설은 빙어 같은 손으로 그를 휘감았다. 골짜기를 이룬 여인의 투실한 젖가슴이 바로 눈 아래에 있었다. "여자는 때로는 남자보다 적극적일 수 있어요. 오늘 당신은 그것을 깨닫게 될 거예요." 남궁설은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 연체동물같이 부드러운 팔 다리가 삽시간에 온몸을 휘감았다. 엉덩이를 들썩거릴 때마다 두 사람의 몸은 더욱 밀착되어 마침내 주한성과 그녀는 바늘 한점 들어갈 틈이 없게 되었다. 남궁설이 갑자기 입으로 주한성의 입을 틀어막았다. 말랑한 입술 끝이 벌어지며 혀가 쏙 안으로 들어왔다. 여인의 입김이 직접 닿자 욕정은 더욱 강해져 주한성은 참지 못하고 남궁설을 꽉 끌어안았다. 방 안에는 뜨거운 열풍이 몰아쳤다. 한 여인이 허공에 높이 떠서 창문으로 보이는 그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극히 무심했고 분노가 푸들거리고 있었다. 선화였다. 두 사람의 교성이 높아갈 수록 그녀의 눈은 더욱 싸늘해져 마침내 두 사람이 격하게 율동하다가 뚝 멈췄을 때 그녀의 눈에서는 서릿발 같은 한기가 줄줄이 뻗어나왔다. '그렇군. 이광혜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군!' 남궁설은 주한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순진무구하고 깨끗했다. '남궁가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난 반드시 이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 그때였다. "주공자!" 숨가쁜 음성이 주한성을 찾고 있었다. 문을 연 주한성은 피투성이인 소취옹을 발견하고는 놀라 그를 부축했다. 그러나 소취옹은 힘겹게 몇마디를 하고 숨을 거뒀다. "이광혜를 조심…… 그는 잠……!" 소취옹은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2 선화는 결정을 내렸다. 중원으로 간다. 더 이상 과거에 연연하지 않겠다.


그 시각 무영문의 총단에서는! 노미량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혁아를 품에 안고 연아의 거처로 향했다. 오랜 시간 동안 방황했었다. 그리고 이제 결정은 내려졌다. 자신이 가야 하는 길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연아의 방 앞에 잠든 혁아를 내려놓았다. 방긋 미소지며 잠자고 있는 혁아의 볼에 입을 맞추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단장의 아픔을 안고 돌아섰다. 둥근 만월이 사위를 고즈넉히 감싼다. 괴기한 정적 속에 호수의 물결만이 이른 바람에 화답하듯 물결치는 호변. 음영을 드리우고 한 여인이 앉아 있다. 간절히 희구하듯 두 손은 모여 있고 사포시 감긴 두 눈 주위에 축축히 젖어 있는 습기. 보는 이로 하여금 측은지심을 일으키는 모습에 달마저 애처로웠을까, 구름 속으로 얼굴을 가린다. "검휘, 어느 덧 백 일이 지났군요. 당신이 떠난 지." 그랬다. 전검휘가 죽은 지 백 일째 되는 날이었다. 노미량은 이전 전검휘와 같이 찾았던 호수에 와 있었다. -미량, 물은 진실하오. 이 전검휘,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오. 그러나 또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소. 모든 더러움을 중화시키는 물처럼, 중원의 악인 잠마전을 정화하는 전검휘가 되고 싶소. 눈이 부셨었다. 남자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 본 날이었다. 그가 그녀의 가슴에 화인처럼 박힌 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가고 이제 자신은 홀로다. 이대로 죽어서는 저승에서 그를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죽이리라. 잠마전의 수괴 단립을!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이 합장한 양손을 적시고, 설움에 겨움일까. 여인의 두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은? 호수도 노미량의 애처로운 신세에 감응한 듯 눈물인 양 새벽 물안개를 피워 올렸다. 노미량은 일어섰다. 슬픔의 장막을 거두어 내려는 듯이, 내딛는 한 발 한 발에 당혜의 발자욱은 호변에 아로 새겨지는데, 그 족적에서 비릿한 피내음이 느껴졌다. 바늘 끝처럼 첨예한 살기가 전신을 죄어온다. 전후좌우 사방을 둘러보아도 출처를 알 수 없는 기운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송곳을 밟고 올라선 듯이 섬칫한 살기는 은밀히 아무런 기척도 없이 주위에 둘러 있다.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오싹한 냉기가 척추를 훑으며 전신으로 퍼진다. 노미량의 예리한 육감은 여기서 발길을 돌리라고 이미 수 차례 경고성을 울렸다. 그리고 자신도 안다. 돌아서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이곳에서 자신의 발자국을 되집어 간다면 남편의 원한을 갚을 길은 영영 없다. 그리고 혁아를 볼 면목도 없다는 것을! 엄마라고 불리웠던 여인, 자신 육신의 즙액으로 미욱한 생명에 한 호흡, 한 호흡 숨을 불어 넣어 주었던 여인. 그 아들조차 두고 온 노미량의 발걸음을 가로 막을 수 있는 것은 세상천지에 존재치 않았다. 슈애액! 날카로운 파공음이 대기를 갈가리 찢으며 노미량에게 쇄도해 들어왔다. 순간 노미량이 번뜩였다. 변위보를 펼쳐 순식간에 삼 장을 전진하면서 번뜩인 일검! 챙! 맑은 쇳소리가 고요한 새벽을 깨웠다. 호구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점점이 떨어지는 선혈, 남편을 그리는 그녀의 마음인 양 붉디붉은 피. 단립을 찾아가는 길이 쉬우리라 여기진 않았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감내해 내리라고 수십, 수백 번을 다짐한 그녀였지만 잠마전의 본단에 접근하기도 전에 암습을 당하니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잠복해 있고 자신은 새벽의 여명에 드러나 있는 상태다. "모습을 드러내라!" 푸르릉! 노미량의 앙칼진 외침에 이름모를 산새가 날아 오를 뿐 사방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흥! 잠마전도 별 수 없군." 그 말에 자극 받은 듯 이제 막 걷히려는 어둠의 잔영인 양 검은 그림자가 망막에 피어올랐다. 한 번도 흑의 이외에는 입어보지 않은 듯이 검정색의 흑포가 음침한 기운을 더하는 노인. 회색빛이 감도는 눈빛은 인정이라는 단어를 알지도 못한다는 것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냉혹하게 빛났다. 노미량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잠마전에서 신분은?" "십이비붕련의 연주인 염진동이라 한다. 저승으로 보내 주지!" 말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염진동에게서는 독사의 독즙 같은 살기가 뻗어나왔다. 염진동의 손이 왼쪽 허리춤에 닿았다. 좁고 긴 검집! 노미량은 상대의 검집만을 보고도 그가 쾌검의 달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스릉! 염진동이 검을 뽑아들었다. 바늘 끝처럼 첨예한 귀검(鬼劍)이었다. 검을 든 염진동에게서는 붉은 피를 낼름거리며 핥는 굶주린 늑대의 광포함과 맛 좋은 먹이감을 발견한 맹수의 표독스러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노미량은 잠시도 염진동에게서 눈길을 돌리지 못했다. 미세한 틈이라도 허용한다면 염진동의 예리한 병기에 자신의 몸이 갈가리 찢어짐을 알기에. 여명에 자욱히 깔리는 안개가 짙어질 수록 두 사람 사이에 드리워진 살기도 가중되어 갔다. 숨막힐 듯한 대치 상태가 견디기 어려움일까. 노미량이 일직선으로 염진동의 인중을 질러갔다. 출수는 번개와 같았고 검은 쏘아진 화살 같았다. 이 한수에 전력을 기울인 듯 검기가 짙어가는 안개를 양단했고 검봉(劍鋒)은 벼락치듯 염진동의 인중에 다다랐다. 염진동이 고개를 좌로 약간 꺾었다. 검기가 살을 에일 듯이 스쳤다. 그의 입꼬리에 조소가 물리었다. 찰나간 오른손이 벼락치듯 움직였다. 귀검은 먹이를 노리며 도약하는 맹수와 같이 노미량의 목젖을 노렸다. 비록 일검이지만 소름이 오싹 끼친 노미량은 급급하게 검을 휘둘러 염진동의 전신을 향해 십 이 개의 매화송이를 그렸다. 빛으로 이루어진 꽃송이들. 나풀거리듯 피어난 검매화는 염진동을 향하여 빛살 같은 속도로 폭사되었다. 염진동의 입가에 물려 있던 조소가 자취를 감췄다. 자신의 검 끝을 현란한 몸놀림으로 살짝 비껴보내고 펼쳐진 일검. 열 두 송이의 검화 아래 전신의 혈도가 노출됐다. 사방 어느 곳으로도 피할 곳은 없는 듯이 보였다. 염진동이 용수철처럼 튀어오른 것은 그 순간이었다. 늑대의 송곳니처럼 번뜩이는 귀검은 노미량의 정수리를 노리며 찔러왔다. 까깡! 검이 서로 맞부딪쳤다. 고요하던 새벽의 정적은 한 번의 충돌로 인하여 산산이 파괴되고 이제 막 얼굴을 내밀던 태양조차 다시 숨어 버리는 것 같았다. 노미량, 그녀의 손에 쥐어졌던 연검은 형체도 없다. 곱기만 하던 그녀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졌다. 악다문 입술을 비집고 선혈은 점점이 초록색의 대지를 불게 물들였다. 내부는 막대한 타격으로 인하여 진탕되었고 두 다리는 주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자꾸만 접혀지려 하였다.


상대의 공력은 무시무시하였다. 재빨리 변위보로 찰나간에 여섯 번을 움직이지 않았다면 검에 실린 압력으로 인해 그녀의 몸은 양단되었을 것이다. 염진동은 망연자실하여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한 줄기 혈선이 그어지더니 피가 솟구쳤다. 이럴 수가 없다. 천하의 염진동이 여인의 한 수에 죽음에 이르다니! 노미량이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몸에서 한 줄기 검광이 다시 번뜩이고 한 줄기 선혈이 미간에서 허공으로 솟구쳤다. 염진동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남자는 누구나 여자를 상대하면 삼 푼 정도는 마음이 헤이해지지. 염진동, 넌 발검과 동시에 공격해야 했다. 나를 여자로 생각한 것이 너의 실수다! 난 더 이상 여자가 아니다." 십 일 동안 수십 번의 대결을 검 하나로 관통했다. 노미량이 잠마전에 끼친 피해는 실로 엄청났다. 그럼에도 그녀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이 원하던 그곳에 당도할 수 있었다. 저 멀리 현 마도 무림의 하늘이 보였다. 천제맹! 가문에 치욕을 안겨준 잠마전 오조의 신화를 간직한 천제맹의 현판이 오만하게 노미량을 굽어보았다. -녀석, 혼자는 안돼. -미량, 돌아가! 아버지와 남편의 음성이 마음 속에서 울려왔다. 노미량은 희미하게 웃었다. 난 더 이상 비겁자가 아니에요. 이제는 피하지 않겠어요. "누구냐? 멈춰!" 직선으로 뻗은 검날이 천제맹 무사의 미간을 뚫었다. 캑! 무사는 단말마의 비명을 남기고 이승을 하직했다. '난 비겁자였다. 가슴에 칼을 꽂을 용기가 없었다. 난 혁아를 살리기 위함이라 했지만 죽음을 두려워 했다.' 노미량이 한 발을 내딛기도 전에 오 인의 무사가 그를 포위했다. 노미량은 일체 말이 없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움직였고 본능에 따라 검을 놀렸다. 변위보는 빛과 같았고, 추시검은 추상 같은 위엄을 떨치며 천제맹의 정문을 휩쓸며 지났다. "멈춰라!" 웅혼한 외침이 울렸다. 노미량의 안색이 급격히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의 눈에서는 섬전 같은 전광이 뿜어졌다.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 가문을 멸망케 한 잠마전의 총수이자 부친을 죽인 원수! "노미량이 목을 가지러 왔소!" 말투도 전형적인 무사의 음성으로 변해 있었다. 단립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노천악의 딸이로군. 여자를 상대하기는 싫다. 그만 돌아가거라!" 노미량의 가슴에서 피가 흘렀다. 대못을 쾅쾅 두둘겨 박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가슴에서 파생돼 전신으로 퍼졌다. "네 목을 가지고!" 메마른 음성으로 답한 노미량이 번개처럼 땅을 박찼다. 그녀의 눈빛은 광기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빛보다도 빠른 속도로 단립을 베어가는 노미량의 추시검법!


"말로는 안될 여인이로다." 냉엄한 호통을 내지르며 단립이 우수를 가볍게 밀쳤다. 노미량은 피하지 않았다. 피하기는커녕 쳐가던 검에 힘을 배가시켰다. 단립의 안색이 대변했다. 그는 설마 노미량이 제 일초에 동귀어진의 수법을 사용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는 급히 단혼벽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아악!" 노미량이 벽에 튕긴 고무공처럼 튀어져 나왔다. 처참한 비명성을 울리며 실끊긴 연처럼 허공을 날아 지면에 처박힌 그녀는 그러나 그보다 빨리 일어났다. 단립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비틀거리며 그가 몸을 바로잡기도 전에 노미량이 섬전처럼 쏘아갔다. 허공에 찬란한 검화가 연이어 피어났다. 단립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죽은 사람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순간적으로 노미량은 공포를 느꼈다. 그녀는 내심을 숨기려는 듯 기습적으로 검을 틀었다. 가문의 독문무공인 추시검이었다. 검의 쾌속함과 치명적 사혈만을 노리는 공격의 악독함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치를 떨게 했다. 단립은 느리게 오른손을 천중으로 치켜들었다. 부상으로 인해 팔을 들기도 힘든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의 동작은 완만했다. 노미량의 공격이 코 앞에 당도할 때까지 단립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노미량의 공격이 전신을 난도질할 듯한 순간에야 단립은 단순하게 칼처럼 변한 수도를 내리그었다. 단지 그것 뿐이었는데……. 하늘이 양분되고 있었다. 가볍게 내리친 팔이 우주를 양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 끝에 노미량이 있었다. "부딪치면 안됩니다." 순간, 누군가 다급한 음성을 토하며 지면을 박찼다. 문조천이었다. 그는 생명을 도외시하고 몸을 날려 단립을 향해 ���려들었다. 단립이 가볍게 왼손을 떨쳤다. "크으윽!" 문조천이 피를 뿜으며 나뒹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미량이 받은 압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아리하게 시선을 파고드는 붉은 전광, 단혼벽이었다.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감에 노미량은 질끈 눈을 감으며 단립을 향해 벼락 같은 삼검을 펼쳤다. 퍽! 우지직! 치떨리는 파열음 뒤에는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노미량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수도가 가슴을 관통하고 지난 고통을 몸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죽는다는 것, 그 공포감도 잊었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단립의 가슴에서 뿜어지는 선혈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죽이지는 못했어요. 그러나 난 한 사람이 성공하리라 생각해요. 주한성, 그 아이가 내가 못다한 것을 해 줄 겁니다. 노미량의 흰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변했다. 적의 대지, 천제맹의 땅에 붉은 피를 칠하며 그녀의 몸은 천천히 넘어갔다. 하늘에 불타듯 노을이 피어나던 그 날, 십여 일 동안 잠마전을 공포에 떨게 했던 노미량의 전설은 그렇게 스러졌다. 그러나 그녀의 투혼은 정파인들의 가슴에 새로운 혈기를 끓게 만들었다. 구파일방을 비롯한 정파에서 긴급 회동을 갖고 무영문의 총단인 주한성의 거처로 몰려들었다. 이때가 십이월 이십 칠일이었다. 3 감숙성의 사내가 외팔이 라마승에게 '당신은 어디서 왔소?' 라고 묻자 외팔이 라마승은 웃으며


대답하기를 '시주가 본승에게 그런 질문을 할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오고 있소이다' 라고 했다. 물론 그 말은 알아듣기 힘든 흉노족(匈奴族)의 언어였지만 사내는 다행히 젊은 시절에 군관으로 흉노정벌에 나선 적이 있는지라 라마승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그 사내가 다시 묻기를 '그곳이란 어디를 말하는 거요?' 하자 그 외팔이 라마가 대답하기를 '그곳이 어디인 줄을 아는 것보다 시주께서는 먼저 집으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청해사의 성승들이 당도했으니 흉노에 죄를 진 사람들은 모두 도주하라 이르는 게 우선일 것이오' 라고 했다. 사내는 어안이 벙벙해 다시 물으려 했다. 그때 사내는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숨을 쉴 수 없는 것이다. 가슴을 쥐어 뜯는 그의 손에 녹색 액체가 묻어나고 그는 곧 자신이 암수를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내는 자신의 가슴이 녹아내리는 것을 역시 녹아내려 점차 뿌옇게 변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개방( ) 사람들은 궁금증이 너무 많아. 그것이 자신들의 명을 재촉하는 것을 알만도 할텐데, 개방은 한사코 많은 일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단 말이야.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이렇게 광동성에까지 제자들을 파견하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었어. 외팔이 라마승은 바쁜 걸음으로 거대한 장원으로 사라졌다. 곧이어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라마승들이 외팔이 라마가 들어간 장원 안으로 속속 사라졌다. 그들이었다. 오조 중 가장 은밀하고도 가장 강한 단체로 알려진 마승의 집단, 청해사의 출현이었다. 그 시각 이광혜 역시 감숙성의 남단에 도착해 있었다. 그 역시 감숙성에 볼 일이 있었다. 천하에서 명성이 쟁쟁한 그의 행차는 은밀히,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해서 중원 무림에서 그의 행차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관부에서는 이광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처음 이광혜가 감숙성에 진입하자 놀랍게도 감숙성주가 직접 마중을 나와 그를 맞아들였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광혜 진영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단익제였다. 유림계의 거목이자 천하 유림인들의 대사부인 그는 당금 황제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그가 은거지인 하남성을 떠나 이광혜와 같이 감숙성으로 향한다는 소문은 관부의 연락망을 통해 은밀히 알려졌기에 감숙성의 성주는 만사 제쳐놓고 마중을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이광혜는 단 한시도 거하지 않고 곧장 목적지로 향했다. 멀리서 댓잎을 스치는 바람소리와 섞여 들려온다. 굵기가 어른 허벅지만한 대나무들이 울창한 수림을 이루고 있다. 그 죽림(竹林)의 한 가운데는 호수였다. 호수의 중앙에는 아름다운 대나무 정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다. 달이 없는 정월 초하루의 하늘은 온통 별들이 펼치는 은하의 세계였다. 몇 사람이 정자에서 야음을 벗삼아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인자한 인상의 노인과 이십 중반의 청년, 그리고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외팔이 라마승 하나였다. 또한 그들과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는 두 여인이 별이 잠긴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들의 생김새는 각기 틀렸지만 두 여인은 하나같이 하늘이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들이었다. "허허허! 그것 참 재미있구나. 천하에 그렇게 특이한 소년이 있단 말이더냐? 내 수십 년 동안 천하의 기재들을 보아왔지만 너 이광혜에 필적할 인물은 단우 뿐이었거늘, 그런 괴물이 있었단 말이지?" 늙은 노인의 음성은 잔잔하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사람을 편안케 하는 온기가 담겨 있어 그와 담소하노라면 마음이 절로 평온해질 것이다. "사부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하니 제자가 그 녀석을 처음 보았을 때 살의를 느낀 것은 절대


잘못이 아닙니다. 더 괘씸한 것은 그 녀석은 당시 제자의 약혼녀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허허허! 천하에 종남파 이광혜의 여인을 눈독 들이는 소영웅도 있었단 말이더냐? 그래서 결과는 어찌 되었더냐?" 이광혜는 빙긋이 웃었다. "제가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노인은 한 자 가까이 기른 수염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넌 포기했을 것이다. 넌 여인에게 집착하는 성격이 아냐. 그래 그녀를 주고 무엇을 었었느냐?" 이광혜는 지체없이 단호하게 답했다. "천하를 얻었습니다." "허허허, 천하는 아직 이렇게 멀쩡하지 않느냐?" "천하를 이루는 것은 백성이다. 그 백성을 주도하는 것은 몇몇 인재다. 넌 항시 이 말을 명심토록 하라. 이렇게 가르치신 분은 사부님이십니다." "그렇지. 네 녀석이 강호에 출도해 인사를 올렸을 때 그런 말을 했었지. 그래 인재를 얻었느냐?" 이광혜는 고개를 저었다. "얻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없애 버렸고 앞으로도 계속 없앨 심산입니다. 똑똑한 자들은 결국 윗자리를 탐하는 법, 애초에 싹을 잘라 버릴 것입니다." 그 말에 대단한 충격을 받은 듯 노인은 잠시 이광혜를 바라보다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혜야, 중원이 어떠하더냐? 좀 과장되게 말해서 십팔만 리 중원이라 하지 않더냐? 그 넓은 땅은 한두 사람이 소유할 수 없느니라." 이광혜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파랗게 빛났다. "무림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지금 이 천하는 한 사람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순간 단익제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노련한 그가 이광혜의 말뜻을 못 알아 들을 리 없다. 가늘게 떨리는 눈빛으로 잠시 제자를 바라보던 단익제는 돌연 하늘을 향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그러하더냐? 정녕 그러하더냐?" 이광혜는 조용히 웃었다. 지난 두 달 전의 일이 뇌리에 스쳐갔다. 그가 오조의 신화를 쳐 없애던 것을 멈춘 것은 금적산장 때문이었다. 민금산이 금적산장에 안배한 것을 얻기 위해 그는 활동을 중단했다. 처음부터 이광혜가 금적산장을 친 것은 잠마전주 단립의 명을 받아서였다. 이광혜가 민금산과 민여림을 살려둔 것은 마음 속에 어떤 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광혜는 지닌 역량을 총 발휘해 금적산장의 비밀을 푸는데 주력했다. 금적산장은 고대 진나라 시대부터 암중에 천하를 좌우해 온 무서운 상인집단이었다. 오조에 가입하기 전부터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힘이 있었고, 민금산은 모종의 일을 획책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잠마전이 중원을 점령하자, 일단 뜻을 멈추고 잠마전의 오조에 편입해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민금산은 한 가지를 실수했다. 잠마전주 단립이 이광혜를 앞세우고 단숨에 치고 들어올 줄은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금적산장이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한 것을 알게된 민금산은 타로를 시켜 금적산장의 비밀을 묻어버리려 시도했다. 이광혜도 그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았던 주한성이 개입하면서 그의 의도는 빗나갔다. 허나 그는 주한성의 이목을 숨기고 타로를 놓아 주는 대신 기지를 발휘해 민금산과 민여림을 수중에 취한 것이다. 이광혜는 아버지인 이무초가 중원 무림의 실권을 잡은 것을 기회로 민금산과 민여림, 구파일방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금적산장의 비밀을 파헤쳐 들어갔다. 금적산장에는 두 개의 비밀이 있었다. 그 중 타로를 비롯한 금적산장의 인적 자원은 이광혜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러나 이광혜는 그보다 더 중요한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금마번(金魔幡)! 그것이었다. 금마번은 고래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상권을 일괄 통치할 수 있는 신물이었다. 그것은 민금산과 민여림보다도 더욱 중한 가치가 있었다. 이광혜는 단호히 도전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금적산장의 기관지학을 통과하고 금마번을 얻었다. 그것은 전 대륙의 상권을 한 손에 쥔 것을 뜻했다. 한 마디로 호랑이가 날개가 단 격이었다. 사람의 인심은 곡간에서 나오는 법이다. 이광혜는 전 중원대륙을 좌우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의 황금을 발판으로 이제 자신의 꿈을 실행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이광혜의 야망이 이토록 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저 원나라를 세운 징기스칸이 처음 자신의 수하를 죽인 자들을 응징하다가 부족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어 결국에는 천하를 일통하는 위업을 달성했듯이, 금적산장의 비밀을 풀고 금마번을 얻은 것을 시발로 이광혜는 천하를 넘보는 웅대한 꿈을 지니게 된 것이다. 이광혜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에게는 구파일방이 있습니다. 잠마전 오조를 한 손에 쥔 북존의 딸 감수경도 저의 통솔하에 있습니다. 장수는 넘치고 자금은 충분합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병사입니다. 전 이곳 감숙성에서부터 시작할 생각입니다." 이광혜의 말을 들으면서 단익제는 흰 수염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언젠가는 반드시! 유림에 첫 발을 디디며 다짐했던 맹세. 가슴에 품은 청운의 꿈을 숨겼다. 젊은 시절에는 할 일이 많았다. 서두르지 않고 차근 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갔다. 그러나 세월은 결코 한 사람을 위해 머물지 않았다. 사람이 일평생을 통틀어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단익제는 자신을 천고의 기재로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인정했지만 유림은 늪이었다. 아니 학문이 그러했을 것이다. 깊이 파고들 수록 자신은 점점 그 늪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었다.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청춘은 이미 가고 흰 머리가 듬성듬성 돋아나고 있었다. 세월은 머리카락만 변케 한 것이 아니라 웅지(雄志)조차 빛이 바래도록 만들었다. 때로는 천하의 현자라도 늙었기에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경륜이 깊어진 것은 그만큼 용기를 버렸다는 뜻. 그리고 세상에는 종종 용기없이 실행할 수 없는, 무모한 추진력이 곁들여져야 성공하는 일들이 있다. 역모(逆謀), 그 것이다. 성공하면 만고의 영웅이요, 실패하면 천하의 역적이 되는 것이다. 늙어서야 그는 자신이 매우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빠진 동안 세월은 그렇게 흘러가 버린 것이다. 포기했었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조력자를 찾는다. 자신의 경륜과 조화를 이룰 패기에 찬 젊은이를 찾아나섰다. 두 사람을 발견했다. 이광혜와 단우였다. 결국 그는 이광혜를 선택했다. 단우는 두려운 점이 많았다. 잠마전 오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 두려웠었다. 겉으로는 피는 역시 물보다 진한 것처럼 행동하며 단우를 도왔지만, 그러나 결과는 정해진 일이었다.


이번에 하남성을 벗어나 감숙성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시작된 것이다. 이광혜, 그를 등에 업기로! 그런데 그런 괴물이 있다는 것이다. 이광혜의 말을 종합적으로 들어보면 주한성이란 인간은 무식한지는 모르나 앞 뒤 생각지 않는 추진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그가 혼자라는 점이었다. 원하면 언제든 제거할 수 있다. 바로 그 점이 구미를 당겼다. '아직은 미완이다. 하지만 주시해 볼 필요는 있다. 이번이 기회가 될 것이다.' 단익제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은 더욱 차게 빛나고 암천을 가르는 유성은 더욱 찬란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단익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후 난간에 기대선 두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화월용태의 두 여인, 민여림과 감수경이었다. "철옹성도 한 줄 금이 가면 무너지는 것이다. 너의 주변에는 항시 여인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그것이 틈이다. 이광혜, 너의 약점이다." 이광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자신의 주변에 무수한 여인들이 몰려들고 개중에는 불측한 생각을 하고 있는 여인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그러나 그가 택할 수 있는 여인은 한정되어 있고 결국에는 대다수의 여인들이 버림을 받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주변에 널린 여인들이 하나같이 범상하지 않은 신분인 이상, 그녀들은 자신의 목을 자를 정도로 예리하게 날이 선 비수를 하나씩 들고 있다. 허점을 보인다면 단번에 비수는 심장을 파고 들 것이다. 그러나 정녕 이광혜가 걱정하는 것은 여인들이 아니었다. 그도 단익제를 경계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승부다. 누가 먼저 선택하느냐는! "정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정리하지는 않죠." 단익제는 희미하게 웃었다. 상황판단이 빠른 녀석이다. 이광혜의 그 철두철미한 계산력과 사람을 휘어잡는 능력. 그러나 그것이 단익제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광혜는 한 번 승기를 잡으면 절대 제거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것이 단익제가 판단한 이광혜였다. 그는 제거 대상이었다. 남은 것은 주한성이다. 피로써 동지를 맺지만 결국에는 피로써 갈라서는 법, 단순한 사람이 정리하기도 쉬운 법이다. 한편, 호수를 바라보는 두 여인 중 감수경은 이광혜의 말을 듣고 얼굴이 굳었다. 이광혜, 너는 충분히 그럴 사람이다. 여자조차 이익에 따라 선택하는 사람이니까! 감수경은 힐끗 고개를 돌려 이광혜를 바라보았���. 행복한 듯 웃었다. 모든 것은 연극일 뿐이니까. 쉬이이잉! 기회는 있다. 주한성이 살아 있는 한 그녀는 절대 자신을 드러내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 기한이 멀지 않다. 주한성이 제거되면 그녀와 북존은 단씨 일가와 이광혜를 제거하고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야 했다. '이광혜, 현명하길 바란다. 네가 나를 거역한다면 넌 단우보다 더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된다.' 북존은 할아버지지만 진정 무서운 사람이었다. 서사혼도를 지배한 것은 그들 사사존이었다. 지금은 동사혼도에 멸망당해 세력이 축소된 것처럼 보이지만 겉으로 드러난 사실일 뿐이었다. 잠마전의 세력 중 삼할 이상은 서사혼도 출신 무사였다. 감수경은 한 번도 본연의 실력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이전부터 무공이 뛰어났었고, 주한성의 공력을 흡정한 후 더더욱 강해져 있었다. 다만 그녀가 내색지 않았고 북존이 주도면밀한 성격이라 지금껏 그녀의 무공과 북존의 계획은 비밀 속에 가려져 있을 뿐이었다.


감수경은 옆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민여림, 금적산장주 민금산의 유일한 혈육이자 아비의 한을 풀기 위해 가슴에 칼을 갈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행복한 여인이 웃는 웃음이 아니다. 왠지 서글픈 웃음이다. 이광혜의 약혼녀로서는 결코 저런 웃음을 띄울 이유가 없다. 감수경은 희미하게 웃었다. 또 한 여인이 있다고 했지? 선화! 그녀를 이용할 생각이다. 그녀는 지금 남해검문의 무사들을 이끌고 무영문으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정녕 이광혜를 포기한 것인가? 아니면! "자, 혜야. 이만 가보자!" 앞장 서서 정자를 나서는 단익제를 쫓아 이광혜도 정자를 나섰다. 그는 두 여인에게 일별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두 여인은 말없이 뒤를 따랐다. "여림, 사냥을 마친 후 너를 찾겠다. 넌 이곳에 남아 준비해라." 찰나, 어둠 속에서 하얀 섬광이 빛을 발했다. 두 여인의 눈빛이었다. 민여림의 창백한 안광과 질투심이 이글거리는 감수경의 눈빛이었다. 외팔이 라마승은 묵묵히 사람들을 쫓아 걸음을 옮겼다. 그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심했다. 잠마전과 정파간의 제 삼차 대혈전. 그것은 중원 무림을 뒤흔들었다. 천하 무쌍의 무학을 지닌 고수들은 모두 무영문의 총단으로 몰려들었다. 이 기회에 중원에 명성을 날리겠다는 야망을 품은 인사들과 그 외 남몰래 야망을 키워온 천하의 효웅들이 모두 무영문으로 집결했다. 제 26 장 무영문의 풍운 1 달도 없는 어둠 속에 밤은 깊어가거늘 하남성의 번화가인 동학대로(東鶴大路)는 무림인들로 인산인해였다. 그들은 흥분되어 있었고 눈빛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왜 아니겠는가? 오늘 무영문의 총단에서 사상 초유의 대결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흥분하게 하는 것은 이 천하 기인들의 대결에 참관이 허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설레는 일은 은밀히 중원에 나도는 소문이었다. -남해검문에서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오늘 밤 무영문에서 벌어지는 혈전에서 남해검문을 돕는 사람은 과거를 따지지 않고 제자로 받아들인다는 소문이다. 만일 누구든 단립의 목을 따내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소원을 들어 준다고 했다. 잘만 하면 경천쌍미인 중 일 인인 선화를 아내나 첩으로 맞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체,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무공이라도 열심히 수련할 걸." "이 사람아, 무슨 소리야? 대회 참가자는 천하의 고수들이야. 그들이 뭐 등굽은 할배나 기루의 나긋한 계집들인 줄 아나? 손바람을 날리면 산이 무너지고, 칼을 그으면 하늘이 두쪽 난다는 무서운 인물들이란 말이야." "까짓거.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이야. 경천쌍미인 중 일 인인 선화소저를 품을 수 있다는 희망만으로도 난 죽을 수 있단 말이야." "그래. 너 잘났다. 그렇게 선화소저를 사모할 것 같으면 차라리 진작에 남해검문에 무사로나 들어갈 것이지 뭐하러 뒷골목에서 건들거려?" 그들의 기치창검은 대단했다. 수백 명에 달하는 장한들은 일인 일인이 초극고수였다. 그들의 중앙, 화려하게 단장한 사인교에 올라앉은 선화는 거만하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흠모하는 눈빛들이었다.


선화는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무영문이란 현판이 보였다. 이미 정사대혈전이 시작되고 있는지 안에서는 치열한 칼부림 소리와 떠들석한 소리가 연이어 들려오고 있었다. 선화는 남해검문의 제자들을 쭉 훑어보았다. 일기당천의 고수들, 그들을 키우는 데는 남모르는 고충이 있었다. 영락 삼 년에 정화가 일차 항해를 한 것을 시발로 명나라는 해양무역에 심혈을 기울였다. 정화는 중화인들의 세계관을 넓히고 명조의 문물을 세계에 전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허나 정화의 항해는 궁극적으로 평화적인 교역이었으나 필연적으로 무장충돌이 있는 곳도 있었다. 명조에서는 먼 앞날을 보고 정책을 수립했다. 사람들을 각처로 이주시켜 한족의 영역을 넓혔다. 나라에서는 남양(南洋)의 각처로 이주할 사람들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농경생활에 익숙한 한족치고 누가 고향을 떠나고 싶어할 것인가? 지원자가 없자 명조에서는 극비리에 정화의 배에 승선할 사람들을 선별하기 시작했다. 가장 손쉬운 상대가 바로 죄수들이었다. 대륙 십팔만 리에서 벌어지는 범죄가 하나 둘이 아닐 것이고, 죄를 짓고 체포된 사람들 또한 하나 둘이 아닐 것이다. 그 수만에 달하는 죄수들 중 죄질이 극히 무거운 사람들을 수차례 선별해 정화의 항해에 동참시킨다는 명령서가 얼마 전 광동성 안찰사(按察使)를 통해 해남도주에게 전해졌다. 본래 이곳 해남도에 도착한 죄수들이 갈 곳은 사혼도였다. 죽은 혼조차 탈출할 수 없다는 지옥이 바로 사혼도였다. 죄수들은 사혼도에 유배되는 것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 이곳 광동성 해남도가 사혼도로 향해 가는 마지막 경유지였다. 남해검문에서는 그 중에서 가장 강한 무사만을 선별하기 위해 관부와 짜고 모종의 일을 벌였다. -사면(赦免). 죄를 면죄받는 기회를 준다. 이곳에서 사면받은 사람들은 모종의 장소로 이송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앞날은 아무도 몰랐다. 다만 서사혼도에 유배되지 않는 것만을 다행으로 알았다. 사면을 받는 조건은 간단했다. 살아남는 것이다. 몇 명, 몇십 명을 죽여서라도, 도전하는 자들을 죽여 승자조에 포함되는 것이다. 살인대회(殺人大會)였다. 겉으로는 사면을 받기 위한 대결이었지만 내면을 살피면 살인귀를 선발하는 대회였다. 그 과정을 거쳐 최강의 고수들이 선별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선화로부터 지난 삼 년 동안 소림의 연무관에서 배운 무공을 그대로 전수받았다. 선화가 소림의 연무관에 든 이유, 진정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용호(龍虎), 이제 남해검문의 제자들은 용호가 되어 있었다. "남해검문이 당도했소이다." 무영총의 정문을 지키는 무사의 고함소리는 꼬리를 물고 안으로 전달되었다. 끼이익! 웅장한 삼십 척의 무영문 총단의 대문이 열렸다. 몇 번의 외침이 지난 후 선화는 마침내 그를 보게 되었다. 주한성! 그가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 손수 마중을 나온 것이다. 그의 뒤에 소림의 방장을 비롯한 구파일방의 수뇌들과 사대금강을 비롯한 각파의 정예고수들이 도열해 있었다. 선화가 내려섰다. 주한성은 가볍게 포권하며 말했다. "선화! 더욱 이뻐졌소이다."


주한성의 말에 선화는 방긋 웃었다. "늦지는 않았나요? 잠마전은요?" "지금 일차 대결이 벌어지고 있소! 자, 들어갑시다." 끼이익! "와-!" 함성이 방파제를 치는 해일처럼 고막을 파고든다. 선화는 숨이 막혔다. 무영총 안은 사람을 질식시킬 듯한 열기에 휘감겨 있었다. 수천 명이 왁자하니 모여 뿜어내는 열기만큼이나 땀냄새가 지독하다. 그들이 열광하는 것은 피 때문이었다. 무영총의 중앙에 마련된 이십여 평의 사각진 연무대 위에서는 유혈극이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장내에 자욱한 열기 때문에 난무하는 피와 살점들과 비명이 안개 속에서 일어나는 환영처럼 보였다. 선화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순간, 와 하는 함성이 다시 한 번 폭죽처럼 터졌다. "죽여. 사정 볼 것 없어. 그대로 죽여 버려." 선화는 재빨리 연단 위를 바라보았다. 오만하게 서서 기세등등하게 검을 치켜든 사람. 그 앞에 흐느적거리듯 비척이는 사십대의 중년인. 그는 말 그대로 혈인이었다. 온몸에 뚫린 수십 개의 구멍에서 피가 작은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풀린 눈동자는 사신에 대항할 여력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런 연약한 패배자를 죽이라는 것이다. 선화는 뚫어지게 연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귓전에서 점차 멀어졌다. 허공에 높이 뜬 검날만이 시야에 잡혔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저 검을 거두게 해야 한다는 측은지심과, 아니야, 이게 삶이야, 나약한 사람은 도태되는 거야라고 외치는 두 감정이 충돌하고 있었다. 한 순간, 시퍼런 검광을 뿌리는 검날이 허공 한 지점에서 그대로 벼락처럼 떨어졌다. 중년인의 눈빛이 암담하게 변했다. 흐느적거리던 그의 몸뚱이가 가가각 소리와 함께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양단되었다. 선화는 부르르 진저리쳤다. 폭탄이 터져 파편이 날 듯, 일시에 위를 향해 뿜어진 피가 사방으로 퍼져 떨어지는 것을 본 순간 몸 안에 숨어 있던 무언가가 일제히 비상하며 날아오른 것이다. 그 알 수 없는 힘은 전류처럼 몸을 관통해 솜털조차 빳빳이 고개를 들게 만들었고, 전신 세포들이 일제히 깨어나는 듯한 전율을 맛보게 만들었다. 투두둑! 핏방울 하나가 선화가 있는 곳까지 날아와 척 이마에 튀었다. 이마가 불에 지진 듯이 화끈했다. 선화는 자신도 모르게 얼른 손을 들어 이마에 튄 피를 닦아냈다. 흰 손에, 길게 그어진 선명한 붉은 자국. "이런! 실례했소이다." 주한성의 말에 선화는 배시시 웃었다. -실례라고? 이게 피야. 이게 무사의 가슴을 들끓게 만드는 피야. 어떠니? 영혼이 떨리지 않니? 선화는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다시 주변 사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영총 총단은 족히 삼천 평은 될 듯한 거대한 대전이었다. 중앙의 연무대를 중심으로 빙 둘러 목책이 서 있었고, 그 너머 이층의 관람석이 만들어져 있었다. 건물의 동쪽에는 잠마전을 상징하는 파천수라도를 새긴 거대한 용기아래 천 오백여 명이 운집해 있고, 반대편 서쪽에는 구파일방의 깃발과 무영문을 상징하는 기가 즐비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역시 천 오백여 명에 이르는 각파의 고수들이 질서정연하게 앉아 있었다. 함성은 멎어 있었다.


대신 잠마전 측에서 수많은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집중되어 있었다. 마치 여인을 겁탈하다가 순라를 만난 강도처럼 그들의 눈빛은 어색했다. 하지만, 차츰 그 눈빛들은 복잡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굶주린 동물의 광포함과 어떤 절대적인 것을 보았을 때의 경외감, 다시 경외심을 깨버릴 듯한 흉폭함이 담겼다. "허허, 이럴 수가! 선화소저 아니시오?" 서쪽에서 들리는 굵은 음성이 장내의 긴장을 깼다. 선화라는 한 마디에 모든 것이 한 번에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고정되었던 시선들에 일제히 굴종이 떠오르고 사람들은 부산하게 일어서서 그녀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선화는 소리난 곳을 바라보았다. 이층, 전망이 좋은 상좌(上座)에 구파일방의 총수들과 더불어 삼십 중반의 장년인이 앉아서 그녀를 보고 빙긋이 웃고 있었다. 선화는 방그레 웃으며 양손을 마주잡았다. "주대협이시군요." 주운백의 옆에는 삼십 중반 정도 사내가 관복(官服)을 입고 거들먹거리며 앉아 있는데 비대한 몸에 얼굴에는 욕심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한눈에도 썩어빠진 관리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느글거리는 시선이 몸을 훑어내리자 선화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주운백은 비어 있는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허허허, 소저께서는 신년을 맞더니 더욱 이뻐지신 것 같소이다. 난 눈이 부셔서 원체 바라볼 수도 없구려. 자, 이리로 오시겠소?" 신룡문주인 주운백이 자리를 권하자 사람들이 분분이 비켜서며 길을 터 주었다. 선화는 빙 고개를 돌려 사방을 바라보았다. 잠마전의 전주와 이광혜를 찾기 위해서 였으나 워낙 사람이 많고 복잡해 그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저곳이라면. 옆의 관인이 조금 신경에 거슬렸지만 선화는 주운백의 옆자리로 향했다. 주한성은 일층 연무대 바로 옆에 있었다. 그의 형상은 매우 꾀제재하고 지저분했다. 그와 그 주변 사람들 모두가 한결같았다. 그는 대회에 참가한 개방의 인물들로 위장해 있었다. 잠마전 오조가 모종의 행동을 개시한다는 보고를 받고 만일을 대비해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주한성의 시선은 여러사람의 환대를 받으며 자리에 앉는 선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후후. 뭇 짐승들 중 새(鳥類)의 새끼가 제일 볼품없다 하지만, 그러나 날개가 굳고 창공을 나니 그야말로 봉황(鳳凰)이로구나. 주한성이 처음 선화를 보았을 때 선화는 야생화였다. 그녀는 무공수련에 열중할 뿐 치장이라는 것을 몰랐다. 해서 그녀의 타고난 아름다움은 종종 먼지와 땀얼룩에 가려져 있었는데, 이제 저리 장성하고 나니 한 마리 봉황이 된 것이다. -현자(賢者)는 때가 아니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법, 선화가 본연의 모습을 찾은 것은 녀석의 가슴에 담긴 원대한 포부가 펼쳐지려는 것을 의미하는구나. 선화의 옆에 앉은 비대한 인물, 하남성의 안찰사가 선화에게 추근대는 모습을 보며 주한성은 빙긋이 웃었다. '좋지 않아. 선화에게 저 녀석 정도는 성에 차지도 않아. 두고 볼 일이야. 결국 저 안찰사도 선화를 살찌우는 희생양이 되고 말 것이야.' 딱딱! 출전을 알리는 각패(角牌)소리가 울렸다. 본디 각패는 정삼품 이하의 문무대신들이 패용하는 검은 뿔로 만든 호패인데, 지금은 이 정사 대혈전이 전 무림은 물론 관에서도 주목한다는 것과 공정한 승부를 가린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다. 단상에는 이전, 일검에 상대를 양단한 무당파의 인물이 형형한 안광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잠마전의 고수는 앞으로 나서시오!" 그러자 이층 관람석의 중앙에서 한 인물이 비쾌하게 솟구쳤다. 날렵한 제비처럼 날아오��� 그는 허공에서 두 바퀴 회전하면서 단상에 내려섰다. 힐끗 출전자를 바라보던 주한성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육척의 거구에 두 다리가 유달리 길었다. 눈알 하나는 어디다 팔아 먹었는지 하나뿐인 외눈이지만 날카롭기는 독수리를 보는 듯했고, 몸 전체에 흐르는 먹물 같은 기도는 사람을 질식시킬 듯했다. '산동성(山東省)을 공포에 떨게 한 독안룡(獨眼龍) 왕양(王梁)이 아닌가? 저 자가 나서면 이제 본격적으로 고수들이 나서겠군.' "멋지다." 사람들이 박수를 칠 때, 왕양의 얼굴에는 조소가 감돌았다. 그는 이런 환호를 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다. 단상을 박차 다시 탄력을 받은 그는 포탄처럼 검을 든 자를 향해 짓쳐들어 갔다. 무당파의 도인은 놀라 엉겁결에 검을 날렸지만 그의 기다란 양발은 검날을 피해 도리깨처럼 허공을 갈랐다. 퍽! 일격에 상대는 바람빠진 공처럼 찌그러졌다. 왕양은 반대편 발로 상대를 가볍게 차올렸다. 연후 그도 지면을 박차고 솟구쳤다. 양발이 다시 용권풍처럼 상대를 휘감았다. 퍼버벅! 검을 든 자의 머리서부터 하체까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발길질(脚法)에 실린 힘은 날카롭고 강해서 상대는 대항 한 번 변변히 하지 못하고 그대로 황천길로 직행한 것이다. 왕양은 지면에 착지해 사방을 둘러보았다. "무당의 무공도 별 것 아니군. 자, 주한성은 어디 있는가?" 무당을 모욕하는 처사에 분노한 몇 사람이 호기로운 기합을 지르며 연이어 연무대에 올랐다. 나름대로 명성을 날리던 자들이었으나 그들은 다만 독안룡의 포악함을 증명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한 사람당 정확히 삼 초였다. 독안룡이 허공에 뜨고 착지하는 순간에 펼쳐진 각법에 그들은 피떡이 되어 사방에 나뒹굴었다. 각패소리는 연이어 울리고, 독안룡의 포악한 살상은 이십여 회를 넘었다. 마침내 그가 보인 포악한 공격에 질린 무당파의 문인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무영총 안이 일시간에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딱! 딱! 각패소리가 조용한 실내에 울렸다. 아홉 번이 울릴 때까지 나서는 자가 없다면 잠마전은 최후의 승자가 되는 것이다. 여덟 번을 울릴 때까지 나서는 사람이 없자 왕양은 단상의 상단에 앉은 선화를 이글거리는 독안으로 노려보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카하하하! 좋아, 좋아. 이 독안룡이 십 년 만에 미녀를 품어 보겠구나. 냉큼 이리와 품에 안겨라." 선화의 얼굴에 경멸의 미소가 떠돌았다. 그녀가 사방을 빙 둘러보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각패를 치는 진행자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만 할 뿐 나서지 않자 각패를 높이 쳐들었다. "뭐해? 죽고 싶나?" 으스스한 독안룡의 재촉에 진행자는 재빨리 두 손을 마주쳤다. 그런데 각패 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가느다란 두 줄기 철사가 진행자의 양손을 휘감고 있는 것이다. 철사가 팽팽히 당겨졌다. 진행자가 꽈당 넘어지면서 한 사람이 유령처럼 연단 위에 올라섰다. 상당히 젊은 자였다. 아니 젊다고 할 수도 없이 이제 십대 후반 정도의 어린 나이에 몸매조차 호리호리했다. 사내는 독안룡 앞에 내려서서 쭈욱 훑으며 냉랭하게 말했다.


"독안룡, 당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다. 주제를 알고 물러서라." 어린 놈이 건방지구나라는 호통이든가, 아니면 단번에 발길질이 날아야 했다. 그러나 독안룡은 외눈으로 상대를 무섭게 쏘아보다가 긴장한 음성으로 말했다. "의외로군. 종남파에서 나를 막아서다니." 독안룡의 말에 장내에 파문이 일었다. 종남파가 참가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사람들이 의아해 바라보자 독안룡은 자신이 실언한 것을 깨닫고 얼른 말을 돌렸다. "흐흐흐! 좋아! 구파일방이건 종남파가 자랑하는 종남사검(終南四劍)이건 부숴 버리면 끝이니까!" 주한성은 싱긋 웃었다. 그가 어찌 선화와 이광혜의 관계를 모를 것인가? 그는 결국 이광혜가 나설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은 그도 상황을 보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광혜는 구파일방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 중의 고수다. 주한성은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선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옆에 진드기처럼 달라붙는 안찰사와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주한성과 반대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기이한 빛을 담고서! 주한성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이광혜가 있었다. 그의 뒤에는 세 젊은이가 서 있는데 그들이 종남사검 중 나머지 삼 인이었다.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앉아 있는 이광혜의 냉엄하게 굳은 얼굴에서는 서릿발 같은 기운이 뿜어지고, 멀리서 보기에도 검을 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왼발 뒷축은 살며시 들려 있고 발 끝은 못처럼 바닥에 서 있었다. 안찰사가 허튼 짓을 하면 십여 장의 공간을 날아 그대로 목을 베어 버리고도 남을 자세였다. '쯔쯔쯔! 자고로 여자는 요물이라더니, 그러나 이광혜가 그렇게 쉽사리 동요할 인물은 아닌데?' 타앗! 폐부를 떨어울리는 기합소리에 주한성은 시선을 돌렸다. 독안룡이 허공에 떠 있었다. 그의 양발이 가공할 속도로 종남사검의 일 인인 북검(北劍)을 향해 휘몰아쳤다. 북검은 종남의 고수다웠다. 그는 어린 나이이지만 침착하게 독안룡의 공격을 바라보았다. 다변(多變)은 필허(必虛)라! 눈에 보이는 현란한 공격은 일견 화려하고 빈틈이 없는 것 같지만, 부동심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짧고 강하게! 옹골차게 말아진 주먹이 공간을 끊었다. 허공에 무수한 원호를 그리는 각법 속을 주먹은 간단하게 파고들어 한순간 왕양의 복부에 작렬했다. "커억!" 왕양의 입에서 피가 뿜어졌다. 허공으로 붕 떠오른 그는 무려 삼 장여를 날아가 단상을 막아놓은 목책을 으스러뜨리고서야 푹 널브러졌다. 북검은 천천히 주먹을 거둬들였다. 주무기인 검을 사용치 않고, 단 한 수 만에 독안룡을 처치하는 그의 권법에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잠마전측이 잠시 침묵 속에 잠겼다. 주한성은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중앙에 앉아 있는 단립의 옆에 일 장 길이의 긴 칼을 목에 차고, 전신에는 쇠사슬이 거미줄처럼 엉켜 있는 자였다. 푹 숙인 고개로 인해 목덜미가 드러났는데 마치 장정의 넓적다리만큼이나 굵었다. 하지만 얼굴은


기형적으로 작아서 그가 매우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맷집이 강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각패가 다섯 번을 울릴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여섯 번째 울리고서야 그는 쓱 일어섰는데 키가 무려 칠 척이 넘는 장신에 몸뚱이는 강철처럼 단단해 보여 철탑이 우뚝 선 것 같았다. 마침 그와 주한성은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거인은 번갯불 같은 눈초리로 주한성을 노려보았다. 강팍하게 마른 얼굴 아래 얇은 입술이 벌어졌다. 전음이건만 그 소리는 천둥치는 음향 같았다. "잠마전 오조 중 천제맹의 부맹주다. 넌 나서지 않을 생각인가?" "아직은, 당신 같은 조무래기를 상대하기는 피곤해!" 거인은 싱긋 웃었다. 피냄새가 풍기는 웃음이었다. "곧 그 말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북검은 여전히 냉오했다. 눈앞에 칠척거구가 서 있음에도 눈빛은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무공의 본질이 힘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공은 타고난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신력(神力)을 타고 나면 좋은 점이야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정신을 집중해 한 번에 적의 단점을 끊어 버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천제맹의 부맹주인 천탑마(天塔魔) 갈여(葛余)를 보고도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갈여는 전광 같은 눈길로 북검을 노려보며 이죽거렸다. "애송이, 넌 들어가고 주인을 나오라 해라." 그 말에 북검은 담담하게 웃었다. "사람은 때때로 나이가 많고 체구가 크면 어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당신이 전형적인 인물인 것 같습니다." "때때로 대가리가 큰 아이들은 뼈가 아물기도 전에 자신들이 다 컸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넌 바로 그런 놈이구나!" "그렇습니까? 사람은 때때로 보는 관점에 따라 사람이 다르게도 보인다고 하더군요. 보아하니 당신은 당신의 작은 머리에 대단한 열등감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갈여는 고개를 저었다. 도무지 요즈음 젊은 아해들의 입심을 당할 수 없다. 하라는 무공수련은 게을리하면서 허구한 날 말주변만 배운 모양이다. "놈! 버릇을 가르쳐 주마!" 갈여를 휘감고 있던 쇠사슬들이 일제히 곤두섰다. 일 장에 달하는 쇠사슬이 사방팔방을 향해 곤두선 모습은 마치 천 개의 손을 지닌 천수관음(千手觀音)을 본딴 마귀같았다. 슝슝슝! 쇠사슬이 무서운 소리를 내면서 북검을 향해 몰아쳤다. 북검은 당황하지 않았다. 챙, 검을 뽑아든 그는 형형한 눈으로 갈여의 공격을 살피다가 바람처럼 왼쪽 측면으로 돌았다. 갈여의 공격이 옆으로 흘렀다. "파(破)!" 짧은 외침 한 마디, 곧이어 검기가 벼락치듯 뻗어 갈여의 쇠사슬을 측면에서 절단해 들어갔다. 짜라라랑! 수십 개의 쇠사슬이 반으로 잘려나갔다. 그러나, 그 순간 갈여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서렸다. 반 보 앞으로 전진한 그는 단숨에 회전했다. 슝! 목에 씌워진 일 장에 달하는 거대한 칼이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며 맹렬하게 돌았다. 일격을 가한 북검이 채 피할 시간도 허용치 않는 매서운 공격이었다. 그 모습을 본 이광혜의 눈썹이 곤두섰다. 그가 자리를 박차려는 순간, 북검은 공력을 주입해 검을 곧추세웠다. 싸가가강!


퍽! 두 마디 소리가 동시에 울리면서 북검이 비척이며 연신 물러섰다. 그가 후퇴하는 걸음걸음마다 청석으로 만들어진 연무대가 가루로 변했다. 순간 갈여가 바람처럼 북검의 뒤를 쫓았다. 그가 양손을 가볍게 휘젓자 온몸을 휘감고 있던 쇠사슬이 영사처럼 북검의 혈도를 두드렸다. 북검은 자신이 격퇴시켰던 독안룡 왕양처럼 빙 날아 연무대의 목책을 부순 후에야 지면에 내려설 수 있었다. 그러나 갈여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가해진 일격에 북검은 허공에 붕 떠 이광혜의 옆자리에 풀석 쓰러졌다. 갈여는 오만하게 연무대 위에 버티고 서서 북검을 바라보며 조소를 날렸다. "후후후! 검기가 제법 날카롭다만, 내 목에 쒸워진 칼이 만년정강(萬年精鋼)인 것은 몰랐을 것이다." 북검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이미 숨을 거둔 것이다. 갈여는 이광혜를 바라보며 외쳤다. "자 이제 종이 패했으니 주인이 나설 때가 아닌가?" 이광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서도 힐끗 선화를 바라보니 그녀는 두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광혜는 대붕처럼 날아올랐다. 그때 주한성에게 어이없는 일이 발생하고 있었다. 문제가 생긴 것이다. 한 여인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무영문 안으로 들어오는데 다름아닌 남궁설이다. 그녀의 미모야 당연히 뛰어나기에 무영문 안에 모인 사람들은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남궁설을 취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녀와 선화를 비교하듯 번갈아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출중한 두 여인의 미모, 잠시지만 두 여인의 눈빛이 허공에서 불똥을 튀겼다. 아름답다. 질투가 일 정도로! 그러나 남궁설은 곧 시선을 돌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주한성을 찾기 위함이다. 주한성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남궁설을 살폈다. '아니, 혁아는 어떡하고 홀로 온 것인가?' 혹시 등에 업고 찾아온 것인가 싶어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그녀는 홀홀단신이다. '어떻게 된 거야? 설마하니 혁아가 납치라도 당한 것인가?' 걱정이 되어도 남궁설을 자세히 살피기만 할 뿐 나설 수는 없다. 만일 지금 위치를 노출한다면 영락없이 선화의 눈에 띠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그가 지금까지 몸을 숨긴 진정한 목적은 이룰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남궁설에게 한 사람이 천천히 다가서는 것이 보였다. 당연히 주한성의 이목은 그 사내에게 주목되었다. 이광혜와 갈여가 대결을 하는 것은 이미 뒷전이다. 주한성은 청각을 최대한으로 발휘했다. 얼굴이 보기싫게 일그러졌다. 아직 능력이 부족한 것인가? 내전 안에서 일어난 모든 소음이 일시에 확대되어 귀가 멀어 버릴 정도로 윙윙거린 것이다. '지랄같군!'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열심히 귀를 기울인 보람이 있어 주한성은 자신이 듣고저 하는 목소리를 마침내 찾아냈다. "아가씨, 보아하니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데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씀하시오. 내 돕겠소이다." "예? 뭐라고 말씀하셨죠?" "흐흐흐! 원하는 일이 있다면 돕겠다는 말씀이올시다."


대답하면서 사내의 손이 슬슬 움직인다. "저…… 저…… 저놈이?" 주한성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곳, 오늘 밤에 그의 손길이 닿았던 곳, 탱탱하고 감촉이 이루 말할수 없이 좋아서 아직도 마음 속에 여운이 남아 있는 남궁설의 엉덩이를 놈이 슬슬 어루만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만으로도 열불이 터질 일인데 남궁설은 주한성을 찾느라 여념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후끈 달아오른 내전의 열기에 놀라서인지 사내의 손길을 미처 알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저 여자가? 저거 은근히 이런 상황을 즐기는 변태 아냐?' 사랑일까? 정녕 저 여인을 사랑하는 것일까? 그래서 이렇게 울화가 치미는 것일까? 그럴 리야 없지만 사내의 손길을 방치하는 남궁설 때문에 부아가 치밀어 오공에서 연기가 솟구쳐올랐다. 그러나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어찌할 줄을 모를 뿐이다. 그 동안 숱하게 배워왔던 무공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이럴 때는 전혀 무용지물이었다. 사랑이란 이렇게 요물 같은 것인가 보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어서, 더욱이 열불이 터져서 까막눈이 된 주한성은 다짜고짜 남궁설을 향해 달려갔다. 무공도 펼치지 않고! 평범한 건달처럼 무지막지한 고함을 지르며 단숨에! "너! 새꺄, 손 안 치워? 너 오늘 임자 만나고 싶어?" 퍽! 정신없이 달리던 주한성은 눈에서 불똥이 난무하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남궁설의 엉덩이를 만지던 사내가 가볍게 일권을 날린 것이다. 선불맞은 멧돼지처럼 뛰어드는 그에게 가볍게 내친 일권은 절대고수의 권법처럼 막강한 효력을 발휘했다. 꽈당! 주한성은 눈을 비볐다. 남궁설을 농락하는 사내의 얼굴이 정확하게 잡히지 않고 아른거렸다. 한쪽 눈두덩이가 완전히 묵사발이 나서 초점이 모여지지 않는 것이다. 이 돌연한 주한성의 고함소리와 어이없는 상황 때문에 막 대결을 펼���려던 갈여와 이광혜는 우뚝 손을 멈추고 말았다. "쌍놈의 새끼! 어르신이 하는 일에 감히 초를 쳐?" 기세 등등하게 한 손을 치켜드는 건달을 보며 주한성은 어이가 없어 픽 웃고 말았다. "허허허! 네가 오늘 저승 구경을…… 큭!" 퍽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주한성의 고함소리가 큰 것이 한 가지 이유였고 곧이어 주한성이 재차 땅바닥에 패대기쳐지는 소리가 요란했기 때문이다. 곧이어, "어머! 주공자!" 남궁설의 놀란 외침이 울리고서야 주한성은 고통에서 깨어나며 동시에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가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느꼈다. 순간 단립의 얼굴과 선화의 얼굴, 이광혜의 눈빛이 동시에 변했다. 주한성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더구나 주인이, 이곳은 무영문의 총단,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이 아닐까? '큰일났군! 저들이 눈치채면 그 동안 연아와 만든 함정이 모두 허사가 된다.' 주한성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주공자라니, 난 당신의 주공자가 아니오." 만인에게 그럴듯이 보이고저, 허리 반동을 이용해 벌떡 일어서서 건달녀석이 어안이 벙벙해 여전히 내밀고 있는 손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름대로 뒷골목에서 한 자리 차지하자고 주먹을 단련해 정권마다 굳은 살이 툭툭 불거져 나온 망치 같은 주먹이다. 빡! 꼬르르륵! "와!" 장내에 일시간에 폭소가 터졌다. 악극단의 연극이라도 관람하듯이 사람들은 왁자하니 난리가 났다. 일반인들이 이러할지니 주한성의 신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재미야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붙어. 고수들의 싸움은 재미없다." "그래, 너희들이 해라. 저 이광혜나 갈여보다 너희들이 싸우는 것이 더 낫다." 사람들이 이렇게 설치고 나서니 삽시간에 내전 안의 긴장되었던 분위기는 엉망이 되었고, 단립과 이광혜, 그리고 선화조차 저 사람이 주한성인가 의심할 정도가 되었다. 주한성은 좀더 확실한 연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뭉그적거리며 일어서는 즉시 건달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너! 좋게 말할 때 빨리 무릎꿇고 빌어!" 더 우스운 것은 봉사가 어찌 호랑이를 더듬다 운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재수가 없어서인지 호랑이의 꼬리를 만진 격이라. 그 부드러운 꼬리를 만지는 봉사의 눈에 호랑이가 호랑이로 보일 리(?)도 없다. 만만하면 그대로 빙빙 돌려 패대기를 칠 심산인지라, 건달은 감히 겁도 없이 주한성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어 휘휘 내저었다. 넌 내 상대가 아냐? 가봐! 그런 뜻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오늘은 주한성에게 일진이 사나워도 보통 사나운 날이 아니다. 재수가 없어도 덤태기로 없는 날이다. 스슥! 뭔가 귓전에 잡혔다. 극히 미세하지만 그 소리는 절정에 달한 무공을 지닌 절정고수가 허공을 날아와 내전을 포위하는 소음이었다. 주한성이 미미한 기척만을 감지했을 정도면 지금 내전을 포위한 상대방의 신법은 그야말로 초절정에 달한 고수들이다. 주한성은 안색이 변해 홱 고개를 돌렸다. 건달의 눈이 반짝 빛났다. 눈칫밥 삼 년이면 건달이라지만 싸움에는 이골이 났을 것이다. 절호의 기회다. 사내의 두 눈에 흉측한 빛이 감돌았다. 눈앞의 절세미녀 남궁설을 보니 자신을 자랑하고 싶고, 그 방법이라고는 고작 완력 뿐이다. 건달의 귀에 절정고수가 다가서는 기척이 들릴 리는 만무, 놈은 여유있게 온 힘을 모아서 그대로 주한성의 남은 눈두덩이를 향해 한방 내갈겼다. 빡! "크윽, 이……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주한성은 입에 거품을 물고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어안이 벙벙한 것은 남궁설이다. 엉덩이를 더듬던 손이 사타구니 사이로 파고들 때야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놈팽이의 농간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과 동시에, 주한성이 맥없이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봉황의 눈처럼 고혹적인 두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그녀는 말없이 암경을 발휘해 사내에게 일격을 가했다. 사타구니 사이로 파고든 손가락으로 결정적인 곳을 탐험하려던 사내의 안색이 휴지처럼 구겨지면서 그대로 고꾸라졌다.


남궁설이 주한성을 끌고 군중 속으로 사라지자 장내의 소란은 일단락 되었다. 명문정파(名門正派)의 전통은 문인의 행동거지 하나에도 나타나는 법이다. 수하인 북검이 패배를 당했는 데도 이광혜는 담담한 표정으로 정중하게 양손을 모았다. "이광혜외다." 갈여의 얼굴에 조소가 흘렀다. "쓸데없는 예의는 집어치워. 생사를 가르면 그 뿐, 그 동안 종남파가 본문에 끼친 죄를 알렷다?" 이광혜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소. 본인은 많은 죄를 저질렀소. 첫째 마인(魔人)들의 목을 쳐 중원 무림의 안녕을 구축했다지만 그 또한 살인일지니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요. 둘째, 부모가 정해 준 약혼자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해 이렇게 여러분들을 번거롭게 한 죄요. 셋째, 부모님과 장차 빙장 어른이 되실 남해검문주의 심기를 불편케 한 죄외다." 갈여의 얼굴이 보기싫게 일그러졌다. "허허! 그것 참! 조금 전 수하에게 당하고도 말을 붙인 내가 어리석지. 이광혜, 단숨에 끝장을 보자." 장내에 숨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이 고대하던 두 절정고수의 대결이 목전에 임박한 것이다.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검을 뽑아들던 이광혜가 행동을 뚝 멈췄다. "잠시 기다려야 할 것 같소이다." 갈여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입을 열려다가 그대로 굳어졌다. 그도 느낀 것이다. 한편 남궁설의 품안에 안겨 정신을 놓고 있던 주한성은 그때야 정신을 차렸다. 여인에게 안긴 그 포근한 감촉은 더할나위없이 부드러워 주한성은 한동안 모든 것을 잊고 그 촉감을 음미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은근 슬쩍 허리춤 사이에다 손을 넣어 풍만한 남궁설의 젖가슴과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던 그가 무슨 생각이 든 것인지 번쩍 두 눈을 떴다. 주한성은 눈을 빛냈다. 갑자기 내전 안이 사형집행을 앞둔 단두대처럼 팽팽한 긴장이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대결을 앞둔 갈여나 이광혜 때문이 아니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전혀 새로운 강자가 등장한 것이다. 주한성은 손을 빼냈다. 남궁설이 얼른 힘을 주어 주한성의 두 손을 꽉 끼었다. 그녀의 두 눈은 아득한 열락이 타오르고 있었다. 왜 그래요? 남궁설의 눈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남궁설은 쉬이 달아오르는 몸뚱이를 지닌 모양이다. 벌써 주한성의 애무에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주한성의 귓전에 뜨거운 숨결을 토하고 있는 것이다. "왜 나를 찾은 것이지?" "노미량이 죽었대요!" 순간 주한성의 두 눈에서 가공한 살기가 뿜어졌다. 노미량이 죽었다는 그 사실은 그의 혼을 뒤흔들어 그는 모든 것을 망각했다. 되도록 살기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결국 내가 한 일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선화를 포섭하지 못한 것은 물론, 누나마저 잃었다. 그때 주한성은 갑자기 차디찬 전율을 느꼈다. 귓전에 들려오는 파공음. '한두 사람이 아니다. 삼십 장 허공을 자유로이 날 수 있는 고수들이 수십 명이다. 구파일방에도 이런 초극고수는 드물다.' 한창 흥이 나서 혈투를 즐기던 사람들도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함성을 멈추고 경계하는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주한성은 사방을 빙 둘러보았다. 이광혜도 기척을 눈치챘는지 안색이 변해 있었다. '잠마전이 움직인 것일까?' 갑자기 따라락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그것은 내전 이층의 사십 오 개 출입문이 일제히 열리면서 난 소리였다. 눈 깜짝할 순간에 적색 가사를 입은 라마승들이 칠흑같은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등장해 이 인 일조를 이뤄 내전의 모든 출입문을 봉쇄했다. 깊게 패인 눈과 높고 긴 코, 얇은 입술. 얼굴은 하나같이 비쩍 마르고 각이 져 있었고 표정이 동상처럼 차가울 뿐 도무지 나이를 추측할 수 없었다. 라마들은 말이 없었다. 시선은 내전 빈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움직이지도 않았다. 공포의 침묵과 부동(不動)이다. "대단한 고수들이군요!" 남궁설의 긴장한 목소리에 주한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슬며시 주한성의 손을 쥔 남궁설의 두 손에 땀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사람들은 긴장했다. 이광혜나 갈여, 주한성도 굳은 얼굴로 라마승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해 있다. 눈빛은 하나같이 형형하게 빛났다. 살생을 앞둔 맹수처럼 온몸의 촉각을 곤두세우고 전신 공력을 양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중앙 출입문에 서 있던 외팔이 라마가 중인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나머지 라마들의 시선도 일제히 움직였다. 단지 눈동자만 움직일뿐이었는 데도 웅성거리던 장내가 다시 질식할 듯한 침묵에 휘감겼다. "너, 너, 너, 너…… 너." 라마승이 하나 뿐인 팔을 들어 열 두 사람을 지목했다. 그의 손가락은 유난히 긴 데다가 손톱조차 가늘고 길어 근 반자에 달했다. 또한, 녹광이 번쩍여 섬칫했다. 지목당한 자들은 구파일방의 장로급에 속하는 기인들이었다. 불안감은 형체가 없지만 분명 존재했다. 지목당한 사람들은 모두가 일파의 고수였지만 알 수 없는 본능적인 공포에 몸을 떨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여서 모두 한 줄기 차디찬 전율이 목덜미를 타 내리는 것 같아 부르르 진저리쳤다. 독비(獨臂) 라마가 지목한 팔을 거둬 합장하며 눈을 감았다. "옴디야마. 옴디야마!" 폐부를 긁어대는 듯한 괴이한 법문이 독비 라마승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잔잔한 호수에 퍼지는 파문과 같이 법문은 내전을 출렁였다. 스스슥! 그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어느 누가 사람의 이마 한 가운데가 뻥 뚫리며 그 구멍에서 기류가 솟아 오를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닌 장승처럼 서 있는 구십 명의 승려들 모두에게서. 기류는 마치 안개처럼 허공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캬아악!" 처절한 비명이 여기저기서 울렸다. 독비 라마승이 지적한 열 두 명이 목울대를 움켜쥐고 부르르 떨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단지 기류만이


흩어져 허공에 사라졌을 뿐인데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열 두 명은 목이 졸린 듯 안색이 퍼렇게 변했다. 그들의 눈은 절박하게 변했다. 숨을 쉴 수 없는 고통, 가슴이 터져라 숨을 들이키지만 기도를 통과하는 것은 공기가 아니라 불붙은 숯불이었다. "옴디야마. 옴디야마!" 독비 라마승의 법음이 악령의 저주처럼 높아갔다. 열 두 명이 목살을 한 움큼 뜯어냈다. 으적! 피(血)? 아니다. 녹색 액체다. 열 두 명의 상처에서 튄 액체가 붉은 비단 위에 떨어졌다. 곧 열 두 명의 몸뚱이는 허파가 위치한 양쪽 가슴에서부터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주한성의 두 눈이 한기를 발했다. '저건 독마련기(毒魔練氣)다.' 오비도인이 남긴 서책에 적혀 있던 오조에 대한 설명이 떠오른 것이다. 그때 남궁설이 툭 옆구리를 찔렀다. "뭐하는 거예요? 얼른 나서지 않고?" 주한성은 급히 내력을 끌어올렸다. "멈춰라!" 내공이 실린 부르짖음은 창룡의 승천음처럼 기세가 사납고 웅혼해 라마승의 법문을 소멸시켰지만 독마련기는 이미 완벽하게 펼쳐진 뒤였다. 퉁! 가슴이 녹아 상하(上下) 두 개로 분리된 몸뚱이들이 붉은 비단 위에 떨어져 녹아내렸다. 그 광경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끔찍했다. 붉은 비단 위에 홍건히 고인 액체, 그 속에서 불에 닿은 성애처럼 녹아내리는 분리된 열 두 사람의 몸뚱이. 모두가 말을 잊었다. 주한성은 형형히 빛나는 두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로서도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3 휘이잉!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바람이 불어 사람들의 옷자락을 표표히 날렸다. 라마승의 법문은 어느새 그쳐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뇌를 마비시키는 공포와 두려움이 사고능력을 정지시켜 버린 것이다. 라마승의 시선이 천천히 장내를 훑었다. 최면이라도 걸린 듯이 사람들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쭈욱 장내를 훑던 시선은 주한성에게서 뚝 멈췄다. 매섭게 쏘아보는 눈동자 속에서 알 수 없는 적대감이 번뜩였다. 주한성 역시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본질적으로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그는 표범의 피를 보며 삶에 대한 열정을 꿈꿔왔고, 닥쳐드는 위험 속에서 강인한 투쟁정신을 키워왔다. 사부의 삼년상을 치르면서 그는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 지금은 다소 유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의 성격이 변한 것은 아니다. 오늘 이 광경을 보자 저 밑바닥에 숨어있던 잔인한 살기가 다시 살아났다. 눈동자에 붉은 빛이 감돌면서 그의 입가에 악마적인 웃음이 감돌았다. 말없는 침묵 속에 오가는 팽팽한 시선, 살기를 품고 번뜩이는 눈동자들. 두 사람을 중심으로 내전 안은 차갑게 응결되었다. 독비 라마가 이층에서 몸을 날려 가볍게 연무대 위에 내려섰다.


착지하기 무섭게 그는 손을 들어 주한성을 지목했다. 나오라는 뜻, 머뭇거릴 주한성이 아니다. 우스운 것은 남궁설이었다. 그녀는 주한성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다. 이 기회에 장래의 낭군감의 위명을 천하에 알리고 싶은 그녀는 주한성의 등을 냅다 디밀었다. 이렇게 잠마전 오조개화의 하나인 청해사와 주한성의 대결은 시작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불가사의하다고 하더군." 주한성의 말에 독비 라마는 무덤덤한 얼굴로 응시할 뿐이다. 더 지껄여보라는 뜻, 주한성은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난 많은 무공을 배웠다. 그럼에도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정통무공에는 별 다른 진전이 없어. 난 오직 한쪽 방면으로만 발전하고 있지." "감각! 시주의 모습을 보니 야수의 감각과 잔인함을 추구하고 있군." 주한성은 싱긋이 웃었다. 바로 그것이었다. 무림인들이 명칭만 들어도 눈에 불을 켤 분광검, 소림의 달마삼검, 신룡문의 절기들은 그에게 논외였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한 순간에 적의 허점을 파고드는 필살의 일격! 단 한방에 적의 대항의지를 산산이 부숴 버리는 가공할 일권, 그에게는 그것이 목표였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주한성은 라마를 바라보았다. "당신도 나와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군. 특히 그 팔이 신경쓰여." 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청해사의 무공은 중원 무학과 다른 특이한 무공을 수련하는 문파였다. 그들은 독공과 장공법(掌攻法)을 중시했다. 청해사는 독인의 경지에 도달한 독을 이용한 공격 수단으로 장공법을 택했다. 독비 라마, 탈리대선사는 청해사에서도 장공의 일인자로 꼽혔다. 본디 서역인들은 색목인들과 내왕이 잦아 그들과 혼인하는 일이 많았는데, 탈리대선사는 바로 색목인과 서역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이었다. 그는 두 민족의 장점만을 취해 태어났다. 발이 튼튼하고 빨랐으며 두 팔의 힘 역시 일반인들에 비해 월등했다. 잠마전 전주 단립이 탈리대선사를 발견했다. 우연히 탈리대선사를 대면하게 된 단립은 그를 제자로 받아들인 후 정성을 다해 청해사의 주요 인물로 키웠다. 탈리대선사는 스물 다섯 살에 스스로 왼팔을 잘랐다. 두 팔에 분배되는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였다. 정신 이상자 같은 이 행동은 다른 승인들의 비웃음을 샀다. 그러나 무공으로만 따진다면 궁극적으로는 탈리대선사가 옳았다. 달랑 하나만 남은 그의 오른손 손바닥 힘은 평인의 열 배에 이르렀다. 파앙! 두 사람의 공격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주한성은 가슴이 철퇴에 가격당한 것 같은 지독한 통증을 느끼며 주춤 한 걸음 물러섰다. 그대로 서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라마의 힘은 강했다. 또한 멍청하게 대항하다 죽을 정도로 고지식한 주한성이 아니었다. 우우웅! 탈리대선사의 주변에서 괴이한 소리가 울렸다. 마치 수백 마리의 벌떼가 윙윙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다름아닌 그의 오른 손바닥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탈리대선사는 천천히 외팔을 치켜들었다. 그 손이 주한성을 지목했다. "옴디야마. 옴디야마!" 괴이한 주술이 울렸다. 라마승들의 이마가 다시 벌어졌다. 뭉클거리며 피어오른 무색 기류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또 시작이군. 그러나 독은 내게 안 통해. 난 독무 속에서 십 삼 년을 살았거든!" "다른 자들도 그런 말을 즐겨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 죽었다 이 말인가? 그러나 사람이 틀려. 죽는 것은 당신이야. 그런데 당신은 누구의 명을 받은 것이지? 북존도 이곳에 당도한 것인가?" 순간 탈리대선사의 안색이 흠칫 변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저승에 가서 염라에게나 물어보도록!" 공격은 단숨에 시작되었다. 부르르 떨리던 손, 그 손바닥에 쩍쩍 균열이 가면서 갈라진 틈 새에서 청색 기류가 뿜어졌다. 수백 가닥의 실선을 이룬 기류들은 여인의 풀어헤친 머리카락처럼 주한성을 휘감아왔다. 주한성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장내에 있는 의자를 들어 막았다. 스슥! 의자가 삽시간에 가루로 변했다. 기류 한올 한올이 낫처럼 예리했다. 실선이 닿는 물건은 모조리 절단되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뭐야?"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주한성은 어깨를 틀어 몸을 반 바퀴 회전해 전력을 다해 양주먹을 뻗었다.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쇄룡금나수와 소림 무공인 무영신권이 펼쳐진 것이다. 고오오오! 진공음이 울렸다. 쇄룡금나수를 펼친 손에 청색 실선이 잡힌 것 같은 순간 주한성은 왼팔에 흡력을 발휘해 탈리대선사를 당김과 동시에 팔꿈치를 벼락치듯 내갈겼다. 독비라마는 무방비 상태로 끌려왔다. 대책없이 다가오는 그 가슴에 쇳덩이 같은 팔꿈치가 작렬했다. 팡-! 파방! 울컥! 그러나 피를 토한 것은 주한성이었다. 일격을 성공시킨 주한성이 오히려 붕 떠서 멀리 날아갔다. 사람들이 어안이 벙벙해 입을 쩍 벌린 순간 탈리대선사가 바람처럼 움직였다. 삼 장의 공간을 단숨에 좁힌 탈리대선사의 양손이 허공에서 무수한 장영을 만들어냈다. 가공할 위력이 담긴 장경은 고스란히 주한성의 오대사혈에 작렬했다. "안돼!" 남궁설의 비명이 울렸지만 때는 늦었다. 퍽! 퍼버벅! "으아아악!" 요란한 비명이 울렸다. 주한성은 튕겨져올랐다. 제 27 장 봉 문 1 장내에 숨죽일 듯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들 중 일부분은 주한성의 명성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이렇게 단 한 수 만에 패배하자 경악한 것이다. 특히 놀란 것은 선화였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허탈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주한성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 정도 타격이면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도 아니면 이미 병신이 되었든가. 이마를 찌푸리던 선화가 흠칫 놀랐다. 누군가를 보고 있다.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퉁퉁 부운 눈 속에서 눈빛만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주한성의 눈길을 쫓아 시선을 돌리던 선화는 남궁설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하튼 알아줘야 할 사람이야. 영리해. 일부러 패한 거야. 자신에게 쏠린 관심을 돌린 후, 일단 대결에 방해가 되는 라마승들을 제거할 생각이다. 그러나 누가 독비 라마를 상대하지? 그렇다. 이광혜다.' 선화의 생각이 옳은지는 모르나 보기 흉하게 널브러진 주한성은 선화를 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선화도 역시 그를 향해 빙긋이 웃어 주었다. 주한성은 쩝 입맛을 다셨다. '영악한 아이다. 만일 저 아이가 잠마전에 가담하면 천하는 혈란에 휘감긴다.' 주한성은 부르르 떨었다. 그때 연무대 위에 올라 있던 이광혜가 탈리대선사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거인은 쉬이 움직이지 안되 일단 한 발을 내디디면 천하가 진동한다고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광혜에게 쏟아졌다. "이광혜라고 하오이다." 탈리대선사는 그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탈리대선사의 시선은 주한성에게 고정되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주한성의 의중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북존은 주한성을 대단하게 평가했었다. 그런 자가 일격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은 의외였던 것이다. 그의 귓전에 다시 이광혜의 음성이 들려왔다. "잠마전이 무림인들의 공분을 사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외다. 허나 만일 대사께서 물러서신다면 오늘의 허물은 따지지 않겠소이다." 놀고 있네. 이광혜의 말을 들으면서 주한성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넌 절대로 탈리대선사와 싸우지 않아. 그 이유는 잠시 후면 밝혀지겠지!' 사실 그는 탈리대선사와 라마승들을 동시에 상대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독비 라마 탈리대선사의 공격은 어떻게 막는다해도 허공에 퍼져 있는 라마승들의 독마련기까지 감당할 자신은 없었다. 이전의 주한성이라면 죽어도 물러서지 않았을 것이지만, 지금은 남궁설과 혁아를 책임져야 할 막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주한성은 얼른 상황을 살펴보았다. 주변에 서 있는 승려들은 구십 명, 분광검으로 공격한다 해도 한 번에 상대 가능한 적은 이십여 명, 한 호흡 가다듬어 재차 공격을 한다 해도 다음에는 열 명 남짓이다. 누군가 도와준다면, 누군가 한쪽을 교란시켜 준다면 승산은 충분하다. "이광혜!" 느닷없이 들려온 주한성의 전음에 이광혜는 고개를 돌렸다. 퉁퉁 부은 주한성을 본 그는 고소하다는 듯이 웃다가 전음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합작하자! 만일 당신이 도와준다면 나도 당신을 한 번 돕겠다." 이광혜는 흥미롭다는 듯이 주한성을 바라보았다. 그는 야망이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애초에 남을 믿기 보다는 자신의 두 주먹과 무공을 믿는 사람이었다. 더욱이 탈리대선사의 한 수도 감당하지 못하는 작자와 무슨 합작이란 말인가? 하지만, 하지만 이광혜는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탈리대선사가 어떠한가? 손수 목격한 바에 따르면 그 일격에 격중당하면 최하가 중상이요, 사망이다. 그런데 저 놈은 퉁퉁 불어 터진 얼굴이지만 눈동자는 전보다 더 반짝이고 입가에 흐르는 피도 멎어 있지 않은가? "여우로군!" "상황판단이 예리한 거지!"


"흐음! 그래? 좋다." 실패한다고 해도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다. 그가 어차피 이곳에 온 목적은 선화가 아니었다. 보다 근본적인 목적은 따로 있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을 중원혼이 흐르는 사람처럼 가장하고 흔쾌하게 수락한 것이다. "지금 당장 공격할까?" 주한성은 빙긋 웃으며 빠르게 말했다. "잠시 기다려. 사전 공작을 좀 해 보자고. 내가 왼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면 그것이 공격신호야." 처음부터 끝까지 반말 투성이지만 이광혜는 웃고 말았다. 주한성은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최상의 공격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그는 안찰사와 한담을 나누는 선화에게 전음을 날렸다. "선화, 나 주한성이다. 한 번 도와줄 수 있나?" "많이 약해졌네요. 나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니!" "후후후! 그래, 무공을 써 본 지 오래여서 녹슨 모양이다. 어떠냐? 도와 줄 생각이 있느냐?" "어떤 도움을 말하는 거죠?" "남해검문의 인원들을 시켜서 라마승들의 주의를 끌도록 소란을 일으키라는 명을 내려 주는 것이다." "내가 굳이 그런 모험을 할 필요가 있나요? 실패할 경우 당신은 도주하면 그만이지만 남해검문은 잠마전에 몰살할 수 있어요. 확실히 이득보는 일이 없다면 굳이 나서고 싶지 않아요." "이전 사형제간의 정으로 안될까?" "나를 연아나 노미량, 아니면 저 여자로 착각하셨군요." 선화가 말한 저 여자는 남궁설이었다. 주한성은 잠시 고민하다가 마지 못한 듯 입을 열었다. "좋아. 손해 보는 셈 치고 한 번 안아 주지!" 선화는 주한성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냉정하다. 사람의 표정보다는 그 내심을 꿰뚫어 볼 줄 아는 지혜가 있었다. 주한성이 저렇게 장담하고 나서면 분명 이길 가능성이 있기에 서두르는 것이다. '잘만 하면 저 괴물을 포섭할 수도 있겠군.' 선화는 요염하게 웃었다. "호호홋! 그 기술은 녹슬지 않았나요? 하긴 얼마 전에도 한 여인을 천상에 올려보내는 것을 목격했으니 기대해 보죠!" 선화가 요염하게 웃으며 승낙하자 그 웃음을 본 주한성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가빠져 얼른 고개를 돌렸다. 찔리는 것이 있다. 남궁설과의 정사! '설마 보았단 말인가? 내 이목을 숨기고 그렇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단 말이지? 그런데 저 아이는 왜 나를 훔쳐보아야 했을까?' 의아하게 생각하던 주한성은 고개를 절레 절레 저었다. '어째 여우를 피하다가 호랑이를 맞이하는 것 같다.' 주한성은 숙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와 구파일방의 고수들에게 잠마전을 대비하라고 부탁한 후 주한성은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장내에 이상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남해검문의 문도들이 드러나지 않게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미리 준비를 한 것인지, 아니면 항시 품안에 품고 다니는 것인지 그들의 손에는 주먹만한 둥그런 물체가 들려 있었다. '연막탄! 역시 선화다.' 그때 선화의 전음이 들려왔다. "내가 셋을 세면 행동을 개시하세요."


선화가 둘을 세자 주한성은 이광혜를 향해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리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퍼버버펑! 연막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터졌다. "독이다." 사방에서 터지는 폭발소리에 고함소리가 어우러졌다. 내전 안은 금방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깔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그 속을 주한성은 바람처럼 움직였다. 연기 속에 번뜩이는 흰 검날. 적의 목을 베어내는 검날에 전달되는 묵직한 충격! 주한성은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연막의 효력은 불과 세 호흡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열린 문을 통해 바람이 들어오고, 또한 자칫하다가는 라마들이 밖으로 피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이 대응하기 전에 최상의 효과를 거두어야 한다. 노천악의 변위보를 펼쳐 다섯 방위를 이동하며 분광검과 추시검을 번갈아 펼쳐 사십여 명을 도륙했을 때, 건너편에서는 갈여가 목에 찬 큰 칼을 무기삼아 연신 남해검문의 인원들을 박살내고 있었다. 그의 공격은 무식하다 할 정도로 패도적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쇠로 만들어진 이 일 장 길이의 네모난 널판지 같은 쇳덩이는 모든 것을 산산조각으로 만들 위력이 담겨 있었다. 그때 사태의 진전을 보고 있던 이광혜의 수하들 삼검이 일제히 몸을 날려 갈여를 공격했다. 순간 사태의 진전을 보고 있던 선화도 몸을 날렸다. 검은 안개 속에서 한 줄기 흰 선이 그어지고 흰 선에서 번갯불처럼 튀어나온 청색 선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무수한 승인들이 검날에 베어지고, 육신이 잘려져 나갔다. 그러나 아무런 소음도 없었다. 공격을 가한 사람이나 공격을 당한 사람이나 파공음도 비명도 없었다. 더구나 찰나간의 공방은 극히 짧아서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다. 그들은 그저 매운 연기에 눈물, 콧물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탈리대선사도 뒤로 물러서서 이 돌연한 사태에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광혜의 수하들인 종남사검은 어느 틈엔가 이광혜를 완벽하게 호위하고 있었다. 휘이잉! 바람이 불어와 검은 연기가 걷혔다. 주한성을 비롯해 공격을 가한 사람들은 망연자실 말을 잃었다. 성공했다. 그러나 효과가 없었다. 라마승인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잘린 육신만이 어지럽게 그들 주변에 널려 있었다. "믿을 수 없군. 쇠로 만들어졌어도 산산조각 났을 터인데." 망연자실한 이광혜의 말에 주한성은 멋적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분광검은 빠르고 만년정강이라도 두 조각으로 쪼갤 수 있는 위력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허무했다. 몸을 쪼갰을 뿐 그들의 생명을 거두지는 못했다. "괴물들이군." 그때 어느 틈에 제자리에 돌아가 앉아 있는 선화가 전음을 보내왔다. "괴물이 아니에요. 다만 그렇게 보이고 있을 뿐 그들은 내부가 진탕되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어요. 약점은 이마에요. 어서 공격하세요." "그래?" 반문한 주한성은 다시 허공으로 솟구쳤다. 까마득한 허공으로 솟구친 주한성에게서 갑자기 금빛 찬란한 금광이 사방으로 쏘아졌다. 그 금광은 예사롭지 않았다. 부처의 후광처럼 서기를 뿌리는 것은 물론, 주한성이 쥐고 있는 쇄마혼검에서도 묵광이 아닌 금빛 광채가 햇살처럼 번지고 있었다.


탈리대선사가 흠칫했다. 그가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송검이전멸!" 주한성이 내지른 한 소리 폭갈, 동시에 번뜩인 검날. 사사삭! 한 줄기 금빛 검기가 전진하다가 갑자기 수십 가닥으로 변해 내전의 출입문을 향해 부챗살처럼 퍼져나가 라마승들의 이마를 쪼개갔다. 구십 인의 승려들이 번쩍 눈을 떴다. 그들의 이마 한가운데가 뻥 뚫리면서 저주의 독마련기가 자욱하게 퍼져나갔다. 치치칙! 칙칙! 금광이 허공을 난비하는 동안 괴이한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대격돌이다. 주한성의 공격과 허공에 퍼진 독마련기의 독기는 서로를 향해 맹렬히 쏘아가고 있었다. 폭사하던 금빛 검기가 주춤하다가 소멸되었다. "신룡상삼열!" 벼락 같은 외침이 다시 울리고, 주한성이 회오리치듯 휘돌면서 재차 수십 번 허공을 그었다. 정관효의 절초이자 신룡문의 절초인 신룡상삼열, 용이 승천하는 듯한 환상을 만들어 내면서 검기는 맹렬하게 라마승들을 덮쳤다. "신룡문의 절기다. 피햇!" 탈리대선사가 놀라 외쳤다. 그러나 음성보다는 검이, 검보다는 검기가 빨랐다. 푸스스스! 주한성의 공격에 이마를 격중당한 구십 명의 라마 중 다섯 명의 이마에서 갑자기 푸른 불꽃이 솟구쳤다. 그러자 마치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나머지 라마들의 이마에서도 갑자기 푸른 불꽃이 일어났다. 투다닥! 거칠게 타오르는 푸른 불꽃, 그것에 휩싸인 라마들의 살점이 녹아내리면서 횅하니 드러난 뼈(骨)까지 삽시간에 사라져 없어져 버렸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들은 그렇게 사라진 것이다. "구십 명이 서로 정신적으로 뭉쳐 있었군. 그래서 처음에 사십여 명이 공격을 당했을 때 다른 라마들이 협조하지 못했고, 한 사람의 혼이 파열되니까 다른 라마들도 결국 죽고만 것이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연환계에 속아 제갈량과 주유의 화공에 일패도지한 것과 마찬가지 결과다." 주한성의 나직한 말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되면 저 독비 라마만 남은 것인가? 청해사를 정리할 좋은 기회로군!" 그때였다. 멀리서 잔잔한 외침이 들려오고 있었다. 무슨 소리인지 명확지 않으나 탈리대선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주한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온 것이다. 북존! 활짝 열린 내전의 문으로 거대한 사인교와 수백 명이 들어섰다. 사인교에 앉아있는 북존을 본 탈리대선사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명을 이행치 못한 죄 죽음으로 사죄하겠습니다." 북존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것이 어찌 대사의 잘못일 것이오? 저 주한성은 나조차 쉽게 감당하지 못한 괴물이외다. 지금까지 그를 잡아놓은 것만으로도 대사는 임무를 완수한 것이외다. 대사, 고생하셨소." 탈리대선사가 북존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단립이었다. 탈리대선사의 행동을 보고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더욱 이상한 사태가 발생한 것은 잠시 후였다. 잠마전의 인물들이 하나 둘 북존을 향해 깊이 읍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삼가, 수하들이 전주를 뵙니다." 북존은 얼굴에 온화한 웃음을 담고 손을 들어 그들의 예를 파한 후 천천히 사인교에서 내려 주한성을 향해 다가왔다. 두 사람, 서사혼도에서부터 맺어진 악연, 그후 십 년 가까운 세월을 서로 대치한 두 사람이 다시 정면으로 마주섰다. "주한성! 보아하니 그 동안 무공이 더욱 발전한 것 같군. 아울러 이제는 협조자도 몇몇 거느려 그런 데로 세력도 형성했고!" 주한성은 말없이 북존을 노려보았다. 그에게는 더 이상 북존에게 할 말도 없었고 말도 필요치 않았다. 목을 베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질기고 질긴 악연의 고리를 잘라 버리는 것이다. 주한성이 쇄마혼검을 잡아가는 것을 본 북존은 온화하게 웃었다. "그래, 이 정도에서 정리를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같은 시각, 무영문의 총단 지하에서는 기이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드넓은 대전에는 커다란 황촉 하나가 어둠을 밝히고 있고, 그 방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승도속개(僧道俗 ). 구파일방의 내노라하는 고수들이었다. 봉문을 한 것으로 알려진 소림과 무당의 고수들을 필두로 아미, 화산 점창, 그리고 저 멀리 서역과 인접해 있는 곤륜승들과 공동파의 도인들까지 총망라되었다. 죽음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앞날을 기약하고 이대로 돌아서야 할 것인가? 양자택일 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의 안색은 하나같이 무겁고 신중했다. 한 사람이라도 입을 연다면 이 침묵은 단번에 깨지고 행동방침은 결정될 것이건만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은 사안의 중대성 때문이다. 기습(奇襲)! 중원 무림이 생성된 후 처음으로 구파일방의 전 고수들이 운집해 필승의 형세를 이루기 위해 기습을 논의하고 있었다. 대상은 잠마전 오조였다. 이전의 실패를 거울삼아 치밀한 첩보와 사전 정세를 파악한 후 이루어진 오늘의 회동이었다. 잠마전의 전 인원과 정보망이 이광혜와 주한성으로 인해 무영문의 총단에 몰려 있을 때, 구파일방은 잠마전의 오조를 기습 섬멸하는 것은 물론, 잠마전주 단립을 제거한다는 것이 주된 골자였다. 처음에 그 계획을 수립하고 세부적인 계획까지 추진한 사람은 이광혜였다. 그후 그는 잠마전의 이목을 숨기기 위해 현재 종남파의 고수들을 거느리고 무영문의 혈전에 참가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칼을 뽑을 시기였다. 그런데 엉뚱한 데서 문제가 터져나왔다. 느닷없이 개방에서 거사를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각파의 고수들이 그 이유를 물었어도 개방장문인 대취옹(大醉翁)은 대답이 없었다. 그것이 사람들을 더욱 의아하게 만들었다. 개방의 정보망은 천하에 널려 있다. 개방 방주가 반대하는 이유를 말하지 않고 이렇게 침묵을 지키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믿지 못한다. 그리고 이렇게 무거운 침묵이었다. 참다못한 아미파(峨嵋派)의 삼장로 중 한 사람인 수월(水月)사태가 벌떡 일어났다. 이제 칠십을 넘어선 노사태의 얼굴은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이 아직 흔적은 남아 있지만 지금은 서릿발 같은 한기에 가려져


있었다. 수월사태는 냉랭한 눈으로 소림방장 보광을 쏘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보광, 기억하시는지요! 처음 소림에서 연무관을 만들었을 때 본인은 그 사실을 적극 반대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동도들이 찬성해 나는 가장 촉망하는 제자인 선화를 학승당에 파견했어요." "아미타불!" 보광대사는 깊숙이 허리를 굽혀 예를 취했다. 연무관의 기재들 열 명 중 일곱 명이 일거에 몰살당한 것은 그로서도 대단히 유감스런 일이었다. "난 그 연무관에서 희생당한 젊은 기재들의 원수를 갚고야 말겠어요. 단립과 북존이 모습을 드러낸 이상 반드시 잠마전을 멸망시켜 그 두 노마의 목을 따 죽어간 기재들의 영전에 바칠 것입니다. 그런데 개방이 반대하고 있어요. 원치 않는 문파는 제외시켜요." 절절한 한과 고집이 담긴 음성이다. 충분히 실현 가능한 말이었다. 아미파가 세력을 떨치고 있는 아미산 인근 삼백 리 이내에는 마도의 인물들이 없었다. 일 년 전, 아미파 인근에서 세력을 떨치던 마파맹(魔派盟)이 수월사태가 이끄는 아미십이선자(峨嵋十二仙子)에게 몰살을 당한 것이 마도의 마지막이었다. 장내에는 숙연한 기운이 감돌았다. 대취옹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차림은 비록 남루하고 용모는 괴이롭기 이를 데 없었으나 노인의 두 눈은 형형한 안광으로 빛나고 사각진 얼굴은 사자처럼 위맹하기 그지 없었다. 개방의 신물인 구절죽간을 쥐고 있는 커다란 손은 검은 돌처럼 단단해 보였다. 사자철권(獅子鐵拳)! 개방 방주의 위명을 천하에 떨어울린 무적 권법. 그 손을 보는 것만으로도 십만에 이르는 문도를 일사불란하게 통솔하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대취옹은 좌중을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노사태, 당신이 열불이 나도 안되는 것은 안되는 거야. 설마하니 아미파의 여제자들을 놈들의 노리개로 던져 주고 싶은 건가?" 수월사태의 얼굴이 노염으로 이글거렸다. "방주! 말조심 하시오. 아미의 문도수가 비록 개방의 이십분지 일에 불과하다고 해도 비렁뱅이에게 겁을 먹지는 않으니까!" "끌끌끌!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은 만고의 진리야.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 여자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결국 남자보다는 강할 수 없다는 거야. 잠마전의 오조가 노사태가 멸망시킨 마파맹과 같다고 생각하나? 가고 싶으면 가봐. 굶주린 악마들에게 정절을 짓밟히는 제자들의 통곡을 듣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당연히 고함이 터져나와야 정상일 터, 그러나 수월사태는 잔주름이 그어진 입술을 깨물었다. "방주, 이해할 수가 없어요. 개방은 중원무림의 수호신, 개방이 두려워 꽁지를 말 정도로 잠마전이 그렇게 강한가요?" 대취옹은 푸우 한숨을 내쉬었다. "노사태, 본 방의 사대장로(四大長老)를 알고 있지?" 수월사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방의 사대장로는 개방의 무공을 십이성 대성한 인물들로 소림의 사대금강과 동반열에 오르는 절대 고수들이었다. 대취옹은 허탈하게 웃었다. "불과 한 달 만에 개방의 제자 이천 명이 죽었어. 그 중에는 사대장로의 제자로 본문에서 가장 촉망받는 네 명의 비렁뱅이도 포함되어 있지. 십만문도가 이를 갈아. 원성이 하늘에 사무쳐. 그러나 개방의 사대장로 중 누구도 잠마전을 치자는 말을 하지 못해! 왠지 아나?" 질문하는 대취옹의 두 눈에서 섬광 같은 빛이 뿜어졌다. "잠마전이 무섭기 때문이야. 그 악마 같은 놈들을 이길 자신이 없어서 개방은 복날 개처럼 꼬랑지를 말고 있는 거야."


"그러나 이대로 두면 무림정의가……!" "집어 치워! 무슨 얼어죽을 무림정의야? 제자들을 다 죽이는 게 무림정의야? 하나 묻자. 잠마전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적이 있어? 막말로 구파일방이나 잠마전이나 다를 게 뭐 있어? 서로 세력다툼 아냐? 개개인의 원한이 있으면 갚아. 그러나 무림정의라는 말은 쓰지 마. 역겨우니까! 공식적으로 개방은 이번 원정에서 빠질 거야." 장내에 웅성거리는 소란이 일었다. 십만 개방을 대표하는 용두방주 대취옹, 중원 정의의 수호신인 개방 방주가 현 무림의 사태를 정면 부정하는 말이 튀어나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좋소. 이번 거사에 개방은 제외요." 단호하게 결정을 내린 인물은 종남파의 장문인 이무초였다. 이광혜가 금적산장을 멸망시킨 후 종남파는 무림에서 대단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맹주로 추대되면서도 한사코 겸양하는 이무초와 묵묵히 강호 마도를 제거하는 이광혜에게 무림인들은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지금 거검을 들고 선 이무초는 천장(天將)의 위엄을 뿜어냈다. "허나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있소. 방주의 한 마디로 구파일방은 사파의 무리와 동격이 되었소." 스릉! 거검이 뽑혔다. "사자철권의 위력을 보겠소이다." 대취옹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일 없어. 당신하고 힘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이 사지를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야. 잘 있게!" 말을 마친 대취옹은 '어험'하고 큰 기침을 날리고는 대자 걸음으로 대전 밖으로 사라졌다. 그 뒤를 따라 대전 안에 몰려 있던 개방의 제자들도 일제히 대전을 나섰다.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대취옹의 이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사라지는 대취옹을 멀끔히 바라보는 이무초의 반응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정대로 시행합시다. 개방이 맡은 임무는 우리 종남파가 대신 수행하겠소." 그런데 그때였다. "아미타불! 방장께서는 잠시 제자의 말을 듣고 결정하소서!" "무량수불! 장문인께서도 본인의 말을 들어 주소서."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소림방장과 무당 장문인은 퉁기듯 일어났다. "혜능이냐?" "넌 연아가 아니더냐?" 두 사람이 포박해 들어온 사람, 단익제를 본 이무초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2 검! 무인에게 전부다. 그들은 삶의 가치를 사랑에 두지 않는다. 부의 축적, 권력욕? 별거 아니다. 부수적이다.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검이다. 그것 뿐이다. 한 번의 대결을 위해 그들은 무기에 혼을 담아온 것이다. 북존은 얼굴에 떠오른 웃음을 지웠다. 주한성 역시 신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대 위에 서 있던 이광혜를 비롯한 갈여와 각패를 치던 심판관도 한 켠으로 물러섰다. "뭐야? 왜 그래?" "그러게."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갈여나 이광혜가 주역이 아니다. 지금까지 벌어진 대결은 결국 두 사람이 마주서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 주한성이 명성이 있느냐는 부차적이다. 북존이 상대로 지목한 것만으로도 그의 가치는 충분했다. 눈빛이 전광처럼 교차했다.


무겁게 드리운 침묵이 두 사람의 눈길에 갈렸다. 살기, 증오, 투기심. 그것이다. 다른 것은 없다. 그들이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이유는 원수이고 거추장스럽기 때문이다. 그 외에 다른 무슨 이유가 있냐고 묻는다면 주한성이나 북존이나 코웃음칠 일이다. 한두 사람이 죽는다고 정의가 실현되지는 않는다.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던가. 타앗! 폐부를 긁어내는 굵은 기합이 울렸다. 송검이전멸, 그것은 가히 빛의 폭발이었다. 가슴을 노리고 짓쳐들던 검 끝이 파르르 떨었다. 순간 몇 개로 불어난 검 끝이 벼락치듯 북존의 인중과 미간으로 파고들었다. 피한다? 당연할 것이지만 북존은 피하지 않았다. '단 한 번에 끝내는 거야. 이제 더 이상의 승부는 지겨워!' 북존은 독기를 파르스름하게 세웠다. 미간을 찔러오는 검날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미친 놈!' 주한성은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공력을 가일층 배가시켜 검 끝을 번개처럼 놀렸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생각했던지 몸을 던졌다. 최악의 경우, 북존이 공격을 파할 때를 대비해 제 이의 복선을 깐 것이다. 북존이 사이하게 웃었다. "끝이다. 주한성!" 북존이 갑자기 양 손을 벌렸다가 벼락치듯 손을 겹쳤다. 주한성은 경악했다. 커다랗게 떠진 두 눈에 쇄마혼검이 마치 자석에 끌리는 쇳가루같이 북존의 손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 이런 일이! 낭패다.' 비로소 북존의 속셈을 알았다. 그러나 거리는 짧았고 대응할 시간은 더더욱 없었다. 팟! 잡혔다. 남존의 독문무공이었던 공수입백인의 절정, 찰나간 기를 뿜어 적을 제압하는 무공에 주한성의 쇄마혼검이 잡힌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주한성이 몸으로 부딪친 이차 공격을 북존은 반 보 옆으로 옮겨 피함과 동시에 쇄혼검의 날을 잡은 양손을 틀었다. 땅! 구십 근의 중병 쇄혼검이 중간에서 뚝 부러졌다. 북존은 손에 쥐고 있던 반쪽의 쇄마혼검을 그대로 밀어 버렸다. 놀란 주한성이 재빨리 잘린 검으로 막았으나 항상 공격이 수비보다는 반촌이라도 빠른 법이다. 푸욱! 섬뜩한 파육음이 울렸다.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라고 했다. 과연 그랬다. 쇳���이가 살을 베고 들어오는 것은 혼을 질식시킬 정도로 지독한 고통이었다. 주한성은 창백해진 얼굴로 반 동강으로 부러진 채 가슴에 박힌 쇄마혼검을 바라보았다. 심장을 관통한 것인가? 아니면 폐를 관통한 것인가? 숨쉬기가 거북하고 서 있는 것이 힘이 들었다. 그나마 주한성이 자신을 살필 시간은 매우 짧았다. 폭풍 같은 이차 공격이 펼쳐진 것이다. 단혼벽, 살인강기가 내포된 주먹이 허공을 끊고 주한성의 안면에 작렬했다. 주한성은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하고 무려 십여 장을 날아갔다. "가라."


북존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는 마치 그림자처럼 주한성을 따라 붙었다. 허공은 삽시간에 그가 만들어낸 그림자와 그가 내지른 주먹이 파생시킨 파공음으로 갈가리 찢어져 나갔다. 주한성은 속수무책이었다. 만일 한 번 더 가격당하면 그는 그대로 황천길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도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정당한 비무였고 결과도 정당하니까! 그러나 한 사람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 놈, 북존!" 된 고함을 지르며 남궁설이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남궁가의 절기인 남궁검법이 현란하게 펼쳐졌다. 한 줄기 검기가 유성처럼 북존의 등 뒤를 찔러갔다. 북존은 내심 이를 갈았다. 주한성을 죽일 절호의 기회였다. 오늘 실패한다면 다시 언제 또 이런 기회를 잡을 것인가? 남궁설의 공격에 죽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렇게 판단이 서자 북존은 이를 악물고 그대로 주한성을 향해 필사의 일격을 가했다. 그러나 그는 모르는 것이 있었다. 이 자리에 최소한 세 사람이 더 있었다. 선화와 이광혜, 그리고 단립이었다. 그들의 내심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일제히 북존을 향해 쇄도해 들었다. "죽일 놈들, 어디서 기습이야!" 북존의 진영에서도 몇 사람이 날아올랐다. 내전 안은 삽시간에 초절정 고수들이 뒤엉킨 살육장으로 변했다. 주한성은 한숨을 돌렸다. 촌각을 틈탄 그는 부러진 쇄마혼검을 몸에서 뽑아냈다. 피가 솟구쳤다. 주한성은 재빨리 상처 주변 혈도를 짚어 지혈하고는 금창약을 발랐다. 연후 장내를 살피던 주한성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알 수 있다. 진실된 대결과 거짓 대결을. 이광혜와 선화는 합작해 승부를 벌이고 있었다. 남궁설이 그 옆에 바람처럼 내려섰다. 그녀는 필사의 공방 끝에 주한성이 염려되어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온 것이다. 그녀의 뒤쪽에 검날을 앞세운 북존의 졸개가 번개처럼 치달려들었다. 그러나 남궁설은 그 사실을 몰랐다. "검!" 주한성이 손을 내밀었다. 남궁설은 흠칫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안 죽어. 그러니 어서 줘!" "약속할 수 있어요?" 난 당신없이는 이제 살 수 없단 말이에요. 그 말이 뒤이어 나오려는 것을 재수없는 상상이라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지만 주한성이 이미 여인의 내심에는 도통한 인물, 어렵지 않게 남궁설의 마음을 읽어냈다. "아직 죽지 않아. 아직 대도 잇지 못한 몸인데 쉽게 죽을 수가 있나?" "체! 내가 뭐 짐승인……?" 말을 하던 남궁설이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몇마디 속삭이는 순간 어느 틈에 지척에 다가선 자가 득달같이 검을 날린 것이다. 순간 주한성의 얼굴에 싸늘한 비웃음이 감돌았다. 파아! 섬광이 번뜩였다. 그 한 번의 움직임에 상처에서 다시 피가 솟구쳤다. 중상도 이만저만한 중상이 아니었다. 더욱이 피는


사람의 진력이다. 과도한 출혈로 주한성은 눈앞이 일시에 캄캄해졌다. 갈여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넌 죽었다.' 갈여의 얼굴에 사이한 웃음이 감돌았다. 황금과 미녀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저 인간의 목을 치기만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거리는 이 척, 주한성은 충격을 견디지 못해 비틀거리고 있는 상태다. 성공치 못하면 이상할 것이다. 휘리릭! 검날을 돌려 잡은 그는 주한성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 꽂았다. "멈춰라!" 앙칼진 고함을 지르며 남궁설이 봉황처럼 솟구쳐올라 정수리를 노리는 검을 쳐냄과 동시에 재차 공격을 펼쳤다. 일검을 펼친 뒤에 곧바로 이어진 일검은 다른 문파에서는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남궁가만의 비전절기였다. 주한성에게 위기가 닥치자 본능적으로 펼친 일검이었다. "크으윽!" 갈여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머리는 정확하게 양분되었다. 단숨에 암습자를 처치한 남궁설은 주한성을 부축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순간, 남궁설은 선화가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것을 발견했다. "가면 안돼!" 주한성의 말에 남궁설은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체, 이 남자가 마치 사람을 종부리듯 하네. 저 여자의 도움은 받고 싶지는 않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치 일단 사는 게 우선이야.' 남궁설은 급히 선화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장내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벌어지던 살겁이 일시에 선화를 향해 집중되었다. 전력을 다해 북존을 막던 이광혜도 세가 불리함을 느끼고 일단 뒤로 물러섰다. "검을 줘!" 주한성의 말에 남궁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그 몸으로 적과 싸우겠다는 말인가요?" 주한성은 담담하게 웃었다. "이제 정리를 해야지!" 3 묵직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남궁설은 의아해 주한성을 바라보았다. "연아와 혜능이 행동을 개시할 시간이다. 옥석을 구분하지 않는 파멸이다. 그 전에 정리해야 한다." "알겠어요. 하지만 몸조심하세요." 주한성은 남궁설이 그토록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에 짓궂은 웃음이 감돌았다. 주한성은 선화를 향해 말했다. "어쩔 생각인가? 선화, 아직도 중원 무림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나?" 선화는 배시시 웃었다. "그래요. 당신보다는 중원 무림이 더욱 내 구미를 당겨요!" 주한성은 빙긋 웃었다. 그러나 그의 내심은 결코 편하지가 않았다. 남해검문, 이들이 중원을 지배하고자 단단히 준비를 한 이상 중원무림도 적지않은 희생은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 느닷없이 이곳 저곳에서 수많은 무림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에 선 사람은 소림의 전대방장인 보광을 비롯한 구파일방의 숨은 고수들이었다. 그들을 본 주한성의 안색이 밝아졌다. 보광은 형형한 눈초리로 좌중을 둘러보며 사자후를 터뜨렸다. "아미타불! 오늘 잠마전과 중원 무림간에 마지막 승부를 가릴 것이오. 지금 이 자리에 선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야심을 품고 있는 것을 알고 있소. 허나 중원 무림은, 특히 구파일방은 호락호락지 않소이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는 사람은 돌아가시오. 절대 앞을 막지 않겠소! 사대금강, 대령하라!"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대금강이 후면에서 포박한 사람을 끌어냈다. 온몸에 선혈이 낭자한 초로인, 이무초였다. 보광대사는 이광혜를 향해 말했다. "아미타불! 종남파가 무림에 야망을 품은 것을 알고 있다. 허나 지금껏 드러난 죄상은 없는 터, 만일 지금이라도 야욕을 거둔다면 종남은 종남산에 안주하게 될 것이다." 이광혜의 안색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는 최후에 믿는 것이 있었다. 잠마전과 단익제였다. 특히 단익제, 그가 모종의 조치를 취한 것이 효력을 발휘한다면! 그러나 보광대사의 다음 말이 그의 야망을 산산이 부숴뜨렸다. "단익제를 대령하게!" 그 초라한 몰골, 그를 포박한 것은 소림의 기승 혜능이었다. 이광혜는 자신의 꿈이 산산조각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야망검이 허무하게 떨어졌다. 그것은 선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슴 속에 품은 웅지는 오늘 아침에 떠오른 찬란한 태양이 지고 말았듯이 스르륵 허물어지고 말았다. "남해검문은 돌아간다." 4 그러나 두 사람, 그들에게는 더 이상 버릴 것이 없었다. 단립과 북존이었다. 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찰나간 두 사람이 허공으로 도약했다. 순간 보광대사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대승범천신공(大乘凡天神功)!" 보광선사가 내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리며 양손을 맹렬히 휘두르자 붉은 홍광이 수백 가닥 뿜어져 단립을 향해 폭사되었다. "북존은 제가 상대합니다." 북존은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네가 나를?" 주한성은 검을 북존의 미간을 향해 겨누었다. 그가 펼친 무공은 노천악의 절기이면서 노미량에게 전수받은 변위추시검의 기수식이었다. "주한성, 노천악의 검법으로?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북존은 양손으로 검을 쥐고 아주 느리게 천중으로 치켜들었다. 두 사람의 대격돌이 임박하자 장내는 순식간에 침묵에 휘감겼다. 정적이 흘렀다. 수천 쌍의 눈동자가 긴장으로 굳어지고 두 사람은 서서히 상대를 향해 다가갔다. 아주 느린 속도였다. 굼뱅이도 그들보다는 빠를 정도로. 북존의 미간을 겨눈 검 끝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간 주한성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검극에서 수백 가닥의 금빛 전광을 뿜어냈다. 북존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오르며 그의 검이 허공을 그었다. 뿌우연 달무리 같은 검광이 일어났다. 두 사람의 신형이 전광처럼 교차했다. 싸악! 푹! 지면에 내려선 주한성의 가슴에서 피분수가 피어올랐다. 반면 북존은 허무한 시선으로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수십 년 동안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검이 그의 손에서 빠지려는 듯이 움찔거렸다. 마치 주인의 가슴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감지라도 한 듯이 검은 꿈틀거렸다. 북존은 왼손으로 검날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에서 피가 베어났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검날의 꿈틀거림이 멈췄다. "할아버지!" 북존이 고개를 돌렸다. 감수경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웃던 북존이 두 눈을 부릅떴다. 미동도 하지 않고 있던 이광혜, 그가 소리도 없이 솟구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수경아…… 안돼!" 그러나 그의 말은 웅얼거림에 불과했고, 이광혜의 검날은 그대로 감수경의 목을 꿰뚫어버렸다. "악인이 갈 곳은 지옥 뿐이다. 그것은 당신 단립도 마찬가지야!" 자신의 죄를 씻겠다는 듯 우렁찬 외침을 토하는 이광혜, 그가 단립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러나 단립의 얼굴에 떠오른 기이한 살소를 그는 보지 못했다. -네놈이 감수경을 충돌질해 단우를 죽였겠다. 잠마전은 망한다. 그러나 너도 마찬가지다. 허공에 한 줄기 흰 선이 그어지는 순간, 자욱한 피가 사방에 난무했다. 단립은 강했다. 그의 단혼벽은 그대로 이광혜를 산화시켰다. 그러나 그 순간 주한성이 지면을 박차오르고 그의 검극은 빛살 같은 한 줄기 검광을 그었다. 악연의 종말이었다. -누군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주한성은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들을 볼 수 없었다. 자신을 위해, 또는 대의명분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 그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들, 친구와 형과 누나를 잃었을 뿐이다. 다시는 검을 잡지 않는다. 주한성은 그렇게 다짐하며 핏물이 흐르는 검을 홱 던졌다. 무영문의 현판이 가루로 변해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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