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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선자불래 제 2 권(전 3 권) 웅비(雄飛) 편 지은이: 사마달 - 차례 제 9 장 제 10 장 제 11 장 제 12 장 제 13 장 제 14 장 제 15 장 제 16 장 제 17 장 제 18 장

만 남 사대금강과의 대결 청해사와의 첫 조우 정무구혼 배반의 시작 일차 대혈전 탈 상 친구의 진면목 전검휘, 그 영웅의 말로 혁아, 그 어린 생명

제 9 장 만 남 1 연무관의 학승당 출입문을 들어선 주한성은 가슴이 심하게 두방망이질쳤다. 보광대사가 학승당으로 가라는 말을 했을 때만 해도 별 거 아니려니 했다. 허나 아니었다. 들어서는 그를 바라보는 일곱(七人) 남녀들은 천하에 다시 없을 영재들이었다. 놀랍게도 오비도인의 제자이면서 사형인 제갈성곤도 이곳에 있었다. 그는 놀라서 자신을 바라보는 주한성을 보고는 빙긋이 웃었다. "사제, 반갑군. 그러나 우리가 사형제간이라는 것을 내색하지는 말게. 사부께서 그렇게 명하셨네." 목소리는 들려오는데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복화술(腹話術)! 무공이 절정에 달해야 시전할 수 있는 무공이라고 했는데, 내가 허송세월한 지난 일 년 반 동안 제갈성곤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구나!' 주한성은 제갈성곤을 향해 멀건히 웃어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촌사람인가 봐!" "그런 것 같군. 재미있을 것 같은데?" 뒤에서 두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주한성을 거론하고 있었다. 여자와 남자였다. 그러나 주한성은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제갈성곤을 제외한 여섯 명이 호기심 찬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영기발랄하고 비범해 보이는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이 바로 소림을 비롯한 구파일방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우고 있는 정무구혼(正武九魂)이었다. 학승당에는 정무구혼만이 있지는 않았다. 후면에도 십여 명의 젊은이들이 눈을 빛내며 서 있었다. 그들은 정무구혼의 선발에서는 떨어졌지만 나름대로 장래를 주목받는 기대주들로 학승당의 무학 이론에 참여를 허가받은 젊은이들이었다. 그들도 하나같이 이 얼뜨기 촌놈 주한성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단상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십 후반의 초로인이다. 바로 보광과 정관효에게 민대협이라 칭함을 받던 인물이었다. 민문곡(閔文谷)!


네모난 각진 얼굴과 날카로운 눈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연무관에 든 정무구혼의 연무를 통괄 지휘하는 무술 교두(敎頭)였다. "주소협, 이리 올라오게." 주한성은 소협(小俠)이라는 칭호에 머슥한 표정을 지으며 단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주한성이 단상에 올라서자 민문곡이 입을 열었다. "이 소협은 주한성이라고 한다. 아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소협의 부친은……!" 주한성이 민문곡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백정입니다." 민문곡은 주한성의 양부가 천우사절의 일 인인 노천악이라고 소개하려고 했다. 민문곡이 의아해 바라보자 주한성은 눈을 꿈쩍하고 자기가 스스로를 소개했다. "부친은 포정해우(敍丁解牛)의 전통을 이어받은 백정이외다." 민문곡은 주한성의 겸손함에 흐뭇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비도인과 보광선사의 말이 맞는구나. 겉으로는 가벼운 것 같아도 속은 꽉 찬 청년이다.' 포정해우는 고금제일의 백정, 포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포정의 소를 잡는 실력은 상상을 초월해서 칼을 소의 몸통에 박고 한 번 휘저으면 집채만한 황소가 뼈와 살이 분리돼 스르륵 주저앉는다는 전설 같은 일화를 남긴 인물이었다. 민문곡이 다시 입을 열었다. "주한성은 무공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허나 정무구혼에 선발될 정도로 오성과 끈기가 발군이다. 동문인 여러분들이 그를 잘 지도해주기 바란다." 말을 마친 민문곡이 주한성을 향해 말했다. "빈자리를 찾아 앉거라." 민문곡의 말이 끝날 때였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영롱한 여인의 음성이 울렸다. 소리난 곳으로 시선을 옮긴 주한성은 두 눈을 빛냈다. 아직 이십이 안된 아름다운 소녀였다. "선화(鮮花)로군. 그래, 무엇이 궁금한고?" 소녀를 대하는 민문곡의 음성은 매우 부드러웠다. 선화라는 이 소녀가 이 곳에서 대단히 귀여움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선화는 고운 섬섬옥수로 주한성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 소협의 눈빛은 왜 저리 흐리죠? 사파인이 아닌가요? 저런 근본도 모르는 사람과 같이 무공을 수련하긴 싫어요. 내가 보기에 저 사람은 악명높은 혼세신공(混世魔功)을 익힌 것 같습니다." 혼세마공! 그런 무공은 없다. 선화는 주한성과 같이 무공을 수련하는 것이 싫었다. 말이 좋아 포정해우지, 따지고 보면 가장 신분이 낮은 백정이다. 그런 사람과 사형, 사매의 연을 맺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막상 말을 해 놓고는 자신이 너무 노골적으로 주한성을 매도했다는 생각에 선화는 조그만 입술을 다물었다. 민문곡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머지 사람들도 긴장한 얼굴로 이 사태를 바라보았다. 주한성은 오기가 치밀었다. "그렇소. 본인은 바로 그 혼세신공을 익혔소." "푸하핫! 저 머저리가 그런 무공이 있는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 "선화의 말이 맞아. 연무관에 들기에는 부적합 해!" 요란한 웃음소리가 참관자들이 늘어선 곳에서 울렸다. 주한성은 냉엄한 눈으로 좌중을 바라보았다. 최소한 그에게도 자존심은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무공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당장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갈(喝)! 조용히 하지 못할까?" 노한 민문곡의 호통소리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 침묵은 곧 한 사람에 의해 깨졌다. "민사부!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말을 한 자는 참관인 중에 섞인 거대한 거인이었다. 외공을 수련했는지 온몸이 근육덩이인 그는 키가 칠척을 상회했다. "산동성 패력장(覇力莊)의 소보주로군. 말해 보게." "소림 연무관에 들 인재 선발은 비밀리에 진행되었지만 엄중한 심사를 거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 주소협도 그 과정을 거친 것인지요?" "조환(曺還)!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라!" "나는 이번 선발에서 간발의 차이로 탈락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일 저 주한성이로 인해서라면 승복할 수 없습니다." 민문곡의 얼굴에 짧은 웃음이 스쳐갔다. "좋아!" 짧게 대답한 민문곡은 좌중을 빙 둘러보았다. "그것은 단지 조환의 불만만은 아닐 것이다. 이 자리에 참관한 사람들 중에는 선발된 사람들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리라 생각한다. 좋다. 결정을 내리겠다. 참관자 중 한 사람만 나서라. 저 주한성과 대련해 이긴다면 연무관에 드는 것을 허락한다." 참관자 중에 파문이 일었다. 소림 연무관에 들기만 한다면! 일신의 영광이고 소속된 사문의 명예를 날리는 일이었다. 십여 명의 참관자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형형한 안광을 발하는 조환과 시선이 마주치자 하나같이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패력장 소보주 조환! 역발산기개세의 항우와 비견되는 천하 역사다. 또한 패력장은 산동성은 물론 천하에 그 위명을 날리고 있어서 무림인들은 구파일방에 버금가는 예우로 패력장을 대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뒤로 물러섰다. "친구들 고맙네. 나중에 거나하게 한 잔 사지!" 조환은 사람들에게 포권을 하며 흡족하게 웃었다. 학승당 중앙에 십여 장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조환은 성큼 성큼 중앙에 섰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중히 민문곡과 정무구혼을 향해 포권례를 올리는 그의 양 주먹은 거대한 쇳덩이처럼 단단해 보였다. 외공으로 단련된 정권에 한 방 걸리면 그대로 황천길이었다. 주한성은 조용히 조환의 하는 양을 바라보다가 앞으로 나섰다. 그도 육척에 장신이란 말을 들었지만, 조환과 나란히 서자 아니었다. "한 수 가르침을 청하오!" 조환이 예를 갖추자 주한성은 싸늘히 웃고는 민문곡을 향해 말했다. "난 비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배운 것은 단 일초의 검법입니다. 내 검법은 바위조차 박살냅니다. 조환은 죽습니다. 살인을 해도 상관없습니까?" 순간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바위를 박살내는 것은 그들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외공을 어느 정도 수련한 사람은 누구나 가능한 것이다. 더구나 저 조환의 외공은 바위가 아니라 철벽이라도 박살내는 가공할 무공의 소유자였다. 민문곡이 대답하기 전 조환이 나섰다. "죽든가, 죽이든가 승부를 가리잔 말이지? 좋아. 진검(眞劍) 승부를 벌이자!"


주한성은 조환의 말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민문곡을 바라볼뿐이었다. "살인은 안된다." "그렇다면 저도 이 대결에 응할 수 없습니다. 난 연무관에 들어 무공을 배워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조건을 허락지 않는다면 저 조환에게 양보하겠습니다." 민문곡은 마지못해 결정을 내렸다. "최악의 경우 내가 개입하는 것으로 하고 허락하겠다." 조환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넌 소림에서 배운 일초를 믿는 모양인데 오늘 무학이 얼마나 깊고 정묘한지 보여 주마!" 주한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걸 사용하게!" 옆에 서 있던 제갈성곤이 검을 건넸다. 주한성은 검을 잡자 가볍게 한 번 떨쳤다. 검극이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미려한 곡선을 따라 검의 기운이 빛살처럼 퍼졌다. 검이 뿜어내는 검기는 해일처럼 조환에게 밀려들었다. "좋아. 자세는 그럴 듯하군!" 조환은 왼발을 반보 내 디디며 검을 가볍게 떨쳤다. 첨예한 예기가 쭉쭉 뻗어 주한성의 검막을 뚫었다. 검극은 순식간에 주한성의 육대사혈을 파고들었다. "타앗!" 낭랑한 외침과 함께 주한성이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세 번 내디디며 검극 역시 세 번 허공을 찔렀다. 삼악중첩이었다. 버번쩍! 검기가 맹렬하게 폭사됐다. 조환도 만만치 않았다. 그 역시 앞으로 전진하며 검극을 놀렸다. 허공에 무수한 검화가 피어났다. 찬란한 빛무더기가 주한성의 전신사혈을 노리고 번개처럼 쏘아갔다. 까가강! 두 사람이 맹렬하게 얽혔다. 주한성이 벽에 부딪친 공처럼 튕겨나왔다. 간신히 지면에 착지하는 그의 의복은 몇 군데가 베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몇몇 붉은 점이 보였다. 주요혈도를 한 치 정도 빗나간 위치였다. 조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주한성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이 묵묵히 서 있자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누가 이긴 것일까? 조환은 진땀을 흘렸다. 별 볼일 없던 주한성과 일초를 겨룬 후에야 자신이 상대방을 지나치게 경시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찔했다. 일초를 교환하는 순간, 조환은 자신이 펼친 공세를 부수며 가슴을 찔러오는 예기에 급히 호신강기를 펼쳤다. 그러나 한 곳에 더구나 세 번씩이나 공격당할 줄은 몰랐다. 외문기공이 파괴되었다. 기혈이 울렁거려 속이 메스꺼웠다. 저 촌놈은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주한성의 상태를 몰랐다. 삼악중첩은 절초다. 순간적으로 힘을 집중해 한 순간에 상대를 제압하는 쾌검술로 일단 공격이 시작되면 고수라 해도 방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절초로도 내력의 열세는 만회할 수 없었다. 주한성은 일초의 대적결과 내부에 심한 타격을 받았다. 오만하게 버티고 서 있기는 하지만 재차 공격을 펼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한성은 이상한 점을 느끼고 있었다. 일초를 겨뤄본 그는 자신이 많은 대적경험을 거친 고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조환의 공격을 보는 순간 허점이 확연히 눈에 보일 리 없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이길 수 있다. 그런 자신감이 들자 그는 굳이 생사를 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검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맨손이라면 훨씬 상대하기가 수월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단 일초에 겁을 먹다니. 상상 외로 겁쟁이였군!" 말과 함께 주한성이 검을 던졌다. "덤벼. 맨손으로 상대해 주지!" 양주먹이 푸르르 떨렸다. 조환은 솔직이 주한성의 검법이 두려웠다. 그런데 주한성이 스스로 검을 던져 버리자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검이 아닌 주먹이라면! 조환이 비릿하게 웃었다. 철퇴 같은 양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우르릉! 패력장의 소장주답게 한 주먹에 실린 힘은 능히 천근을 넘었다. 주한성은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본능이었다. 조환의 공격을 피하기는커녕 상대방에게 바짝 달라붙으며 팔꿈치를 돌려쳤다. 조환이 공격을 펼치는 찰나의 순간에 드러난 옆구리 허점, 그곳에 대포알 같은 팔꿈치가 파고들었다. 이 일련의 공격은 조환의 의중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어서 조환은 미처 방비하지 못했다. 퍽! 격타음이 둔중하게 울렸다. 조환이 피를 토하며 허리를 접었다. "저…… 저럴 수가!" "보기와 달리 대단한데! 그런데 저…… 저……!" 말을 더듬은 것은 주한성 때문이었다. 스르륵 주저앉는 조환의 등 위에 쇠뭉치같은 위력을 지닌 팔쿰치 공격이 재차 떨어진 것이다. "멈춰!" 민문곡이 명을 내렸지만 주한성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퍽! 요란한 소리와 함께 조환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혼절하고 말았다. 동시에 주한성도 명문혈에 가공할 일격을 당하고 비틀거리며 연달아 물러섰다. 그 순간, 누구도 알지 못하는 순간에, 조환의 두 눈이 고통으로 크게 떠졌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상태에서 그는 오공에서 피를 토하며 죽고 말았다. "이런!" 놀란 민문곡은 재빨리 조환의 상태를 살폈다. 그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조환은 이미 죽어 있었다. 척추뼈가 부러지면서 내장을 관통해 내부출혈로 즉사한 것이다. 민문곡은 아차 싶었다. 누군가 암수를 쓴 것이다. 그것도 자신조차 파악하지 못한 지독한 암수를! 음모다. 주한성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다. 대련을 가장한 암중인의 살인, 그것을 막지 못한 자신의 무능함과 주한성의 무모한 성격에 불같이 화가 일었다. 무술 교두인 그지만 살인사건은 그도 함부로 처리할 수 없었다. 보고를 해야 했다. "별도의 명이 있기 전까지는 한 사람도 이곳을 벗어나지 마라!"


민문곡은 조환의 시신을 옆구리에 끼고 서둘러 학승당을 나갔다. 장내가 순식간에 살얼음판처럼 얼어붙었다. 주한성은 빈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는 입술을 악다물었다. 빈 자리는 선화의 옆자리 뿐이었다. '첫날부터 더럽군!' 주한성은 빈자리에 털석 주저앉았다. 끼이익! 의자가 비명을 질렀다. 순간 선화의 얼굴이 냉랭하게 변했다. "일어서요!" 실내에 기이한 파문이 일었다. 선화의 삼단 같은 머리카락이 바람도 없는데 미미하게 떨었다. 별처럼 반짝이던 눈빛은 주한성을 향해 돌려진 순간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다른 자릴 찾으세요." 정중한 어투였다. 그러나 음색에 실린 싸늘함은 겨울 한풍도 무색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주한성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잠시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주한성은 홱 고개를 돌려 싸늘하게 말했다. "이봐! 나이도 어린 게 건방떨지 마. 수틀리면 벗겨 버리는 수가 있어!" "뭣이?" 선화의 음성에는 날이 서 있었다. 그녀는 극히 고귀한 신분이었다. 또 그에 걸맞는 신분의 남자가 그녀 옆자리의 임자였다. 전검휘, 그녀가 꿈에도 사모하는 바로 그였다. "알다시피 빈자리는 여기 하나 뿐이야. 싫으면 낭자가 다른 자리를 찾아봐!" "눈이 먼 모양이군요. 저 빈 자리가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요?"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본 주한성의 흐린 눈 속에서 싸늘한 노기가 번뜩였다. 바닥, 사람들의 발자국이 지저분하게 찍힌 바닥을 가리킨 것이다. "왜? 싫은가요? 인간 백정에게는 저런 자리가 어울릴 거예요." 주한성은 싸늘하게 선화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언젠가 이런 도도한 계집을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가슴 속에서 노화가 이글거리며 알 수 없는 울분이 솟구쳤다. 그의 입에서 갑자기 너저분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어떤 미친 년이 이런 계집을 키운 거야? 나이도 어린 게 얼굴에 분가루나 처바르고, 무공을 수련하는 것보다는 기루에 처박혀 손님이나 받지 그래?"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구나!" 주한성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언제 공격을 가한 것인가? 선화의 오른손이 소리도 없이 그의 단전에 박혀 있었다. 일체 파공성도, 그렇다고 사전 경고도 없는 공격이었다. 곧이어 정수리를 내려친 결정적인 한 수에 주한성은 피를 토하며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감히 나를 건드려? 이 선화가 조환인 줄 알았더냐?" 선화의 음성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스릉! 검을 뽑아든 그녀는 거침없이 주한성의 목을 향해 검극을 쑤셨다. 이 어이없는 행동, 아직 모욕을 감당할만한 정신적인 수련이 없어서인가? "멈춰!"


한 소리 냉랭한 음성이 울렸다. 동시에 챙 소리와 함께 섬광이 번뜩였다. 마치 빛을 가르듯 빠른 검광은 선화의 검을 퉁겨냈다. 선화의 검을 막은 사람은 연아였다. "아미파(峨嵋派)가 언제부터 이렇게 인명을 경시했는지 모르겠군요! 민사부께서 별다른 명을 내리기 전까지 주한성을 죽일 수는 없어요!" 그때였다. "아미타불! 손을 멈추시오. 주한성을 소림사의 계지원으로 압송하라는 방장의 명이십니다." 연아가 제지하고 나섰다. "지금 이 사람은 심한 부상을 당한 상태입니다. 절대로 이 사람을 넘겨줄 수 없어요. 그리고 연무관은 소림 안에 있지만 소림사의 제자들은 아닙니다. 정 주공자를 데려가고 싶다면 먼저 신룡문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연아는 검을 수평으로 눕혔다.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결의의 표현이었다. 결사적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이 연무관에 들어온 것은 정관효의 안배에 의해서였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나서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주한성의 사형인 제갈성곤도 앞으로 나섰다. "본인 역시 동감이외다. 연무관은 소림에 있지만 전 중원인들의 열망이 담긴 곳, 본인도 아무런 절차없이 주한성을 치죄하겠다는 소림의 결정에 따를 수 없소이다." 신룡문과 무당의 성세는 역시 대단했다. 나한당의 승인들은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2 보광대사와 민문곡은 암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보광은 민문곡의 보고를 받고 누군가 주한성을 노리고 암습을 펼친 것을 직감했다. 아니 주한성만이 아니라, 연무관을 노린 살인이었다. 적의 의도는 맞아 떨어졌다. 소림사 경내에서 벌어진 이 살인사건! 보광은 연무관의 폐지를 권하는 장로원에 맞서서 결사적으로 주한성이 아닌 다른 사람의 암습에 의해 조환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지금, 소림의 장문인을 위시한 소림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계지원에 모인 가운데 조환의 사인을 규명하는 검시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무거웠다. 그렇지만 승인들은 일말의 호기심을 담고 한 승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승인은 칠십이 넘었건만 손은 어린 아이의 손처럼 섬세했다. 혈관이 보일 정도로 창백한 흰 손에는 지금 예리하기 이를 데 없는 비수가 들려 있었다. 계지원에 모인 수십 쌍의 눈동자가 숨죽인 채 비수를 든 약학당의 당주를 주시했다. 그들의 전신 세포는 극도의 긴장으로 팽팽히 당겨져 있었다. 승인은 거침없이 조환의 복부를 갈랐다. 천하에 그의 눈을 벗어날 독과 암기는 없었다. 복부를 유심히 살피던 승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사색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시신에 나 있는 흔적으로 미루어 내부 울혈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우측 옆구리를 가격한 팔꿈치 공격에 의해 비파골이 몇 개 부러지고 간장에도 충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사인은 등 뒤에 가해진 충격입니다. 인체에서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발 뒤꿈치와 무릎, 그리고 팔꿈치입니다. 조환은 두 번의 팔꿈치 공격에 의해 치명적인 내상을 입었습니다."


"아미타불! 그것이 사인인가?" 약학당주는 고개를 저었다. "조환은 패력장의 소보주입니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패력장은 외가기공 중에서도 가장 수련이 힘든 금종조(金鍾弔)를 전문적으로 수련한 문파입니다. 주한성이 가한 팔꿈치 공격에 불구는 될지언정 목숨을 잃을 정도는 아닙니다. 문제는!" 약학당주는 말을 끊고 조환의 뇌호혈 근처를 갈랐다. 승인들은 이 의외의 행동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두상의 뒷부분을 노려보는 약학당주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 이것은……!" 급히 몰려들어 시신을 살핀 승인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목덜미에서 세치 오푼 위,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는 뇌호혈(腦戶穴)에 중인들의 시선은 집중됐다. 뭔가가 있었다. 안력을 돋우어야 간신히 발견할 수 있는 한 개의 작은 구멍이 뇌호혈에 뚫려 있었다. 기이한 것은 상처 주변이었다. 보리수의 잎사귀 같은 상흔이 나 있었다. "아미타불! 달마삼검 중 마혼멸(魔魂滅)이 아닌가?" 소림방장(少林方丈)이 나직하게 외쳤다. "아미타불! 맞습니다. 틀림없는 달마삼검 중 마혼멸입니다." "인면수심의 인간! 사람을 상케 한 것으로도 부족해 암습을 가해 죽이다니!" 분노와 탄식을 토하며 승인들이 일시에 웅성거렸다. 승인들은 보광과 약학당의 당주를 번갈아 보았다. 장내의 소란에 아랑곳하지 않고 약학당주는 거듭 조환의 뇌호혈을 파헤쳤다. 기이하게도 보리수의 잎사귀 같은 상흔은 파고들 수록 더욱 또렷해졌다. "초절정고수가 내가지력으로 마혼혈을 펼친 흔적입니다." "이 무공을 펼친 사람이 범인입니다." "아미타불!" 소림방장 고람(高藍)이 보광대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두 눈에는 고심이 가득했다. 그는 절대적으로 보광대사를 믿고 있었다. 보광이 사람보는 눈이 얼마나 정확한지, 그가 주한성에게 어떤 기대를 걸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해서 소림의 비전절기인 달마삼검을 속가제자인 주한성에게 전수하는 것도 허락한 고람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현실은 그조차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주한성에게 불리한 것은 그가 대결 전에 반드시 조환을 죽이겠다는 말을 한 점이다. 그 사실이 지금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증거는 명명백백해졌습니다. 현 소림사에서 달마삼검을 익힌 사람은 두 사람 뿐입니다. 범인은 그들 중에 있습니다." "아미타불!" 고람은 나직히 불호를 읊조렸다.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이 일을 어찌 처리할까 망설이던 고람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생각하던 고람은 결정을 내렸다. -아미타불! 결국 잠마전과의 일전은 이렇게 시작되는구나! "사대금강(四大金剛)을 불러 주게!" 소림사의 승인들이 놀란 얼굴로 고람을 바라보았다. 보광선사의 늙은 얼굴에 일말의 안도감이 떠돌았다. 방장은 현명했다. 사태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보광은 민문곡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미타불! 이제 우리가 움직일 때요. 갑시다." 민문곡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해야할 일! 조환을 암습 살해한 자를 색출해야 한다. 주한성은 눈을 떴다. 고개를 들자 우두둑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극심한 통증이 목에서부터 시작돼 전신으로 치달렸다. 가볍게 한 방 당한 것 같은데 오장 육부가 뒤흔들린 것 같았다. 음유한 장력이다. 당해도 제대로 당한 것이다. 울컥! 검붉은 피를 토한 주한성은 간신히 일어났다. 한순간 고통이 썰물처럼 사라졌다. 입이 쩍 벌어졌다. 눈빛이 몽롱하게 풀리고 두 다리에서 힘이 쭈욱 빠졌다. 다음은 비몽사몽, 주한성은 멍하니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깬 모양이군요." 정신이 아찔했다. 고통과 분노가 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졌다. 참으로 아름다웠다. 계란형의 얼굴에 자리잡은 오관은 하나하나가 극치였다. 커다란 눈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오똑한 콧날과 요요한 선을 그린 입술선, 튀어나올곳은 튀어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섬연한 몸의 곡선. '이놈아, 여자란 자고로 엉덩이가 펑퍼짐해야 자식을 무 뽑듯 쑥쑥 잘 뽑아내는 거여.' 노미령을 맞아들이던 날 저렇게 엉덩이가 큰 여자가 뭐가 이쁘냐는 투정석인 질문에 전검휘가 입이 함박만해져 한 말을 상기하며 주한성은 헤벌쭉 웃었다. '히히! 찍었다, 이 여인이다.' "소협이 노천악 대협의 양자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부드러운 음성에 그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음성은 꿀처럼 달콤하고 봄바람처럼 자상했지만 그 말에 놀란 것은 아니다. 자신의 신분을 아는 사람은 천우사절 이외에는 없었다. "따라오세요." "소저의 신분은?"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연아는 주한성을 대동하고 방을 나섰다. 일단은 이 위기를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희뿌연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고색창연한 승가람마(僧伽藍摩)가 서서히 드러나는 소림사의 위용, 바쁘게 오가는 중의 머리에 새겨진 계인에도 새벽은 깃들어 있었다. 모든 사물은 그렇게 새로운 여명에 깨어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미처 소림의 산문을 벗어나기도 전이었다. "아미타불! 멈추시오!" 우렁찬 불호소리가 그들의 뒷편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은 눈부신 태양 속에 허공을 축약하듯 날아오는 네 승인을 보았다. 연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승천하는 용처럼 허공을 빙빙 돌아 삽시간에 그들 앞에 당도하는 네 승려! 소림사의 사대금강! 바로 그들이었다. 사대(四大)! 불가에서는 사대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네 요소를 말한다. 이 네 물체가 상생상극(相生相剋)하여 만물을 생성한 것으로 믿고 있다. 물론 인간도 이에 포함된다. 금강(金剛)!


깨달음이 극에 달해, 대일여래(大日如來)의 내증(內證)한 지덕이 견고하기 이를 데 없어 일체의 번뇌를 깨뜨리는 것을 말한다. 대일여래는 대우주를 밝게 하는 대일륜(大日輪), 즉 세상 만물을 키우는 만인의 어미와 같은 깨달음의 본체를 말하니, 금강이란 불호를 받은 승인이 어떠한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대금강(四大金剛)! 소림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점한 네 승려. 사대금강이 불심이 깊은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무공만은 금강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소림은 내우외환을 수없이 겪고 오늘 날 태산북두의 위치에 당도했다. 그들은 과거를 거울 삼아 미래를 대비할 줄 알았다. 조사전(祖師殿)! 소림이 미래를 대비해 놓은 곳이다. 가장 우수한 근골을 지닌 기재를 선발해 비밀리에 무공을 수련케 한다. 이 사실은 극비 중의 극비인지라, 조사전에서 무공을 수련하는 무승이 몇인지, 그들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하늘조차 몰랐다. 그렇게 조사전은 철저한 비밀 속에 가려져 있었다. 사대금강이 조사전에 든 것은 이십 년 전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소림의 각종 절기를 통달했다. 불과 십 년 만에 그들은 손에서 무기를 놓았다. 해검(解劍)은 새로운 경지를 뜻한다. 처음 무인들은 무기를 손에 쥐기 위해 수련을 쌓는다. 무기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찾기 위한 노력이 연이어지는 가운데 천의무봉한 검초와 환상적인 도법, 분광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쾌검이 탄생했다. 이 경지에 도달한 무인들은 이제는 무기를 놓기 위해 고심하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 경지에 도달하기는 실로 요원하다. 사대금강은 무기를 놓는 단계까지는 이루었다. 이제 그들에게는 검, 도, 창이 필요치 않았다. 천하에 널린 모든 것이 그들의 손에 들리면 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본승은 무(無)자배로 무해(無海)라 하네. 사제들은 무(無), 공(空), 상(想)이라 하지. 본승들이 조사전에서 무공을 수련한 지 어언 이십여 년, 결국에는 자네로 인해 햇빛을 보게 되는구만!" 말을 하자 새삼스럽게 눈이 부신 듯 무해대사는 눈을 찡그렸다. 사대금강의 대형인 무해는 소탈한 인상에 해맑은 눈빛을 지녔다. 불승이라기 보다는 마음씨 좋은 옆집 아저씨 같았다. 인자한 웃음과 조금은 뚱뚱한 체구가 그러했다. 주한성은 담담하게 웃었다. 아미타불이라는 지겨운 불호를 듣지 않은 것만으로도 사대금강에 대한 호감이 일어난 것이다. "주한성입니다. 폐를 끼치는군요!" 무해 역시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사대금강은 이십 년 만에 방장께 명을 받았다. 우리 입장을 생각해 같이 동행해 주겠는가?" 주한성은 일시 대답하지 못했다. 상대가 정중할 수록 대하는 사람도 어려운 법이다. "나를 포함한 사대금강은 자네가 사람을 암습, 살인할 악인은 아니라고 판단했네. 우릴 파견한 방장도 같은 생각이시라네." 주한성은 난감했다. 가자고 갈 처지는 아니다. "대사, 이십 년 만에 강호에 나오셨으니 저와 같이 유람이나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군산 동정호의 수려한 풍광과 계림의 절경, 소항의 명기들을 구경치 못하고 죽는다면 이승을 산 보람이 없지요!" "허허허! 그래, 젊은 사람에게 여행이란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지. 세상을 아는데 여행보다 좋은 스승은 없는 법이야. 그러나 내 나이 사십, 이제는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할 일이 많은 법이네. 진정 강해져야 하는 시기이지만 어느 날 눈부신 아침 햇살을 보며 후회의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네. 난 자네가 시간을 낭비하길 원치 않는다네. 소림은 고리타분한 구석이 많지만 배울 것도 많은 곳일세."


절대 해가 되지 않는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주한성도 사대금강의 말을 쫓고 싶었다. 어려운 일은 정면으로 대응해야지 회피하면 할 수록 사람을 막다른 구석으로 몰고 간다. 사대금강은 그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연아가 문제였다. 그녀는 자꾸 주한성의 옆구리를 찔렀다. 어서 길을 가자는 재촉이었다. 무해가 연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는 주시주가 잘못 되길 바라는가?" 주한성을 대할 때처럼 인자하던 무해가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냉기가 묻어났다. 바라보는 시선은 칼날이다. 연아는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 얼른 눈길을 돌렸다. 이 땡중과 한 판 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해가 연아의 마음을 읽은 듯 나직하게 말했다. "여시주께서는 무력을 사용할 생각이군!" "그래요." 연아는 당돌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자신을 철저히 믿었다. 사대금강이라고 뭐 대수이겠는가? 사대금강의 셋째인 무공대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양발을 정중하게 모은 자세에서 한 손을 가슴 앞으로 당겨 합장의 자세를 취했다. 혜가(慧可)가 달마대사의 제자가 되기 위해 한 팔을 희생한 정신을 본받기 위해 만들어진 이 기이한 합장자세는 사대금강을 통해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합장을 한 무공대사의 승포 소맷단이 유달리 길었다. "시작하겠어요!" 연아의 손가락에서 쇳소리가 울렸다. 일선지력이 발출됐다. 전력을 기울인 이 한 수는 강하고 날카로웠다. "낭자의 나이를 생각해 직접 손을 쓰지는 않겠소." 무공대사가 둥실 떠올랐다. 허공에서 합장한 자세로 팽그르르 맴돌자 기다란 양 소맷단이 펼쳐졌다. 진기가 담긴 소맷단은 연검의 날과 진배없었다. 연아의 면전으로 접근할 수록 배가된 회전력으로 인해 파생된 와류(渦流)가 천지를 휘몰아갔다. 그 힘은 능히 천하를 허물 정도였다. "흥! 나를 얕보는군요. 후회하지 마세요!" 앙칼지게 외친 연아는 양손을 교차해 느리게 밀어 냈다. 천근 바위를 밀어내듯 진중한 행동이었다. 나풀거리던 옷자락이 팽팽이 부풀어올라 그녀는 마치 둥근 공처럼 보였다. 남자도 아닌 여자가 이런 중한 기운을 일으킨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한 순간 팽팽하던 옷자락이 바람빠진 풍선처럼 오그라들었다. 동시에 연아의 두 손에서 강맹한 기류가 뻗어나와 무공대사가 일으킨 와류를 향해 쏘아갔다. 콰광! 굉음이 터져나왔다. '훗! 대단하군!' 지면에 내려선 무공대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연아는 단지 두 걸음을 물러섰을 뿐이다. 이 아름다운 소녀는 고작해야 스물 안쪽이건만 내공은 상상을 초월했다. 수십 년을 수련한 그와 어깨를 견줄만 했다. "좋아. 한 수 겨룰만한 여시주로다." 형형한 안광이 일렁이는 시선, 팽팽히 부풀어오르는 승포, 한 걸음 전진할 때마다 전신에서 빛살처럼


뻗어나오는 가공할 압력! 무공대사는 그대로 태산이었다. 채앵! 연아는 지체하지 않고 검을 뽑아들었다. 검을 말아쥔 두 손이 떨렸다. 하지만 검을 양미간을 중심으로 곧추세운 자세는 완벽했다. 마치 선학이 날아오를 듯 가볍고도 영활한 자세였다. "신룡문의 절기로군!" "그래요. 전 이 일검에 승부를 걸겠어요. 조심하세요." 야무진 음성에는 한기가 풀풀 날렸다. 대결하는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은 삼 장, 고수들간에는 단 일초에 생사를 가를 수 있는 공간이다. 단 일초에 생사를 가른다. 그 상황 앞에 서보지 못한 사람은 손 끝까지 저리게 만드는 그 긴박감을 모른다. 무공대사가 합장한 왼손을 가볍게 밀었다. 우우웅! 진동음이 울렸다. 소림의 절기인 무영신권(無影神拳)이다. 연아는 무형의 강기가 삽시간에 가슴을 압박해 오는 것을 느끼고는 그대로 허공으로 솟구쳤다. "타앗!" 벼락치듯 솟구쳐오른 연아는 한 소리 앙칼진 기합과 함께 방향을 꺾어 무공대사를 향해 날아갔다. 번쩍! 초생달 같은 검기가 폭사되었다. 검기와 무영신권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꽈가강! 순간, 연아는 아차 싶었다. 검극을 타고 들어온 한 줄기 막강한 기력에 손목이 시큰거렸다. 검이 맥없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그러나 연아는 검을 주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앞뒤 돌볼 겨를없이 신속하게 지면을 뒹굴었다. 우지직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일주문 옆에 서 있던 아름드리 노송(老松)이 부러졌다. 무영신권의 위력이었다. 일단 선기를 잡았음에도 무공대사는 급하게 몰아치지 않았다. 무공을 전수하는 스승처럼 일초 일초 느리게 전개했다. 하지만 그 공격은 대단히 특이했다. 틀에 짜맞춘 초식이 아니다. 추측할 수 없는 방향에서 들리는 파공음, 좌측인가 싶으면 우측이다. 몸을 날려 피하면 어느새 뒤통수를 파고들었다. 연아는 무려 열 다섯 번을 뒹굴고, 연무복이 먼지투성이가 된 후에야 간신히 무공대사의 공격권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나마 무공대사가 손속에 인정을 베풀어서 부상을 면한 것이다. 무공대사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불가함을 알았으리라 생각하오.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말고 소승들을 따라 산사에 오릅시다." 연아는 몸에 묻은 흙을 탁탁 털어 냈다. 이마와 콧잔등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녀는 이런 낭패가 처음이었다. 정관효의 문하에 든 후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오늘에야 하늘 밖에 하늘이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신룡문의 제자지만 사대금강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공자, 미안해요. 힘이 돼 드리지 못하는군요." 침울한 연아의 음성에 주한성은 가슴이 찡 울렸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은 한순간에 파생될 수도 있다. 주한성이 그랬다. 연아는 애초에 그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그를 돕고 있는 것이다. 주한성은 처음 연아를 보았을 때 그녀의 진실을 보았고 지금 이 순간에는 가식없는 마음을 확인했다.


"내가 상대하리다!" "안돼요, 공자. 이길 수 없어요." 주한성은 빙긋이 웃으며 연아의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 주었다. 애정이 담긴 손길이었다. 급박한 상황하에서도 그는 소녀의 정에 마음이 설레이고 있는 것이다. 연아를 바라보는 눈길은 따사롭기 이를 데 없었다. "꼭 무공이 있어야만 이기는 것은 아니오. 두고 보시오!" 주한성은 연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고는 앞으로 나섰다. "대사, 제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패한다면 우리와 같이 산사에 오르겠나?" "좋습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승리한다면 저희를 막지 마십시오." 무공대사는 어이없어서 웃었다. "나를 이긴다. 대단한 기개군. 약속하지!" 주한성은 오른 손을 마치 검처럼 사용해 세 번을 연달아 찔렀다. "삼악중첩을 손으로? 임기응변이 대단해!" 삼악중첩은 소림의 비전절기다. 무공대사는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그 역시 왼손을 세 번 내질렀다. 일견 평범해 보이지만 절대 평범할 수 없는 수법이었다. 이 삼권은 소림무학의 근본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강하고 빠르고 무겁다. 주한성이 펼친 삼악중첩과 소림 권법의 정화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제 10 장 사대금강과의 대결 1 팡! 손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뒤로 젖혀진 손목은 탈골이 된 듯 통증이 일어 쓸 수 없었지만 주한성은 질끈 눈을 감고 맹렬히 내쳤다. 파바방! 충돌음이 두 번 더 울렸다. 오른쪽 어깨가 철퇴에 맞은 것처럼 움푹 패였다. 하지만 주한성은 다시 무공대사를 향해 짓쳐들었다. 그 모습은 역류를 타오르는 잉어였다. 주한성은 무공대사를 이긴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다만 전력을 다할 뿐이었다. 그는 유일한 장점인 순발력을 이용한 접근전을 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서사혼도에서 짐승을 상대로 싸울 때의 방법을 재현하고 있었다. 쇳덩이처럼 강한 주먹, 도끼 같은 팔꿈치. 예각으로 꺾이는 무릎과 발뒤꿈치가 연이어 허공을 갈랐다. 무공대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주한성의 공격이 당도할쯤에야 그는 번개처럼 움직였다. 주한성과 같은 수법이었다. 팔꿈치대 팔꿈치, 무릎대 무릎, 정권대 정권! 파바바방! 찰나간에 수많은 공방이 교환되었다. "우욱!" 주한성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철벽이었다. 손가락이 꺾이고 발등이 부르텄다. 무릎이 파열되어 피가 터졌다. "주한성, 겨우 그 정도에 비명을 지르나?" 무공대사가 바람처럼 접근했다. 매서운 주먹이 바람을 끊었다. 그때 주한성은 전음을 들었다. "주공자는 지금 강경일변도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 소림 무공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무공대사는


당신의 공격을 맞받아 치고 있어요. 자존심 때문이죠. 그것을 이용하는 겁니다. 상대방이 맞받아칠 때 다른 부위를 이용해 공격을 해 보세요." 연아였다. 주한성은 그 말을 듣자 깨닫는 게 있어 즉시 실행에 옮겼다. 펑! 팔꿈치가 부딪치는 순간, 다섯 손바닥이 부챗살처럼 쫙 펴지며 무공대사의 가슴을 훑어내렸다. 무공대사는 어이가 없었다. 주한성이 그런 변초를 보이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공이 신화경에 달해 아무런 충격도 없었지만 가슴 혈도를 점혈 당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이었다. "허허허! 그래, 셋째가 자만했어. 그러나 방심을 놓치지 않은 주시주의 오성은 역시 대단하군. 우린 이만 물러가겠네. 조심하게!" 방장의 명을 어기는 것은 중벌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사대금강은 패배를 인정한 것이다. 사대금강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멍하니 서서 사대금강을 바라보던 주한성은 물컹 부드러운 물체가 부딪쳐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연아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거예요. 당신은 강해질 소질이 다분해요." 아침 햇살을 받은 그녀의 얼굴은 선녀보다도 더 아름답고 고결해 보였다. 주한성은 그 아름다움에 취했다. 노미량이 천하에서 가장 예쁜 줄 알았고, 그녀만이 유일한 사랑일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순간 마음이 급격하게 기울고 있었다. "왜 나를 돕는 거요?" "난 당신을 탈출시키라는 명을 받았어요. 사부님께서는 당신이 좀더 강해져야만 한다고 했어요. 무공을 익히기에는 아직 인내가 부족하다고 말씀하셨죠." 인내가 부족하다? 듣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니다. 정관효가 어떤 인물인지, 그가 왜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는지는 지금 이 순간 알 필요가 없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지금 주한성이 듣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었다. 사랑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그러하듯이, 주한성도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그것은 무공의 강약 여부와는 별개다. 거절당할까 두려운 것이다. 말을 꺼내면 저 멀리로 멀어질 것 같았다. 행여나 차일까 봐 두렵기도 했다. 이렇게 가슴에 품고 있으니 마음이 둥둥 떠오르고 가슴 속에 설레임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할 때 진정한 즐거움은 이렇게 마음이 설레고, 뭔가를 가슴에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내밀한 즐거움이 훗날 사랑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촉발되는 모진 고통과 괴로움을 인내하게 만드는 것이다. 주한성과 연아. 약관이 채 안된 두 사람은 지금 파생되는 미묘한 감정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거리낌없이 바라볼 수 있었던 얼굴을 바라볼 수 없다는 것, 상대를 보면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또 쑥스럽다. 그럼에도 마음은 즐겁다. 주한성은 시선을 돌렸다. 웅장한 소림을 본 주한성은 그제야 소림을 탈출한 본래의 목적을 상기했다. "이러다가 또 추적을 당하겠소. 얼른 갑시다." 주한성이 재촉했다. 그런데 의외로 연아가 고개를 저었다. "안돼요. 전 연무관에 남아야 해요. 사부님께서는 당신을 이곳까지만 배웅하라고 명령하셨어요. 자, 검을 받아요." 주한성은 덜컹 가슴이 내려앉았다.


홀로 가야 한다는 말인가? 둘이 아니란 말이지? 가슴에 씁쓸한 감정이 일어났다. 연아가 소림에 남는다면 그 역시도 소림에 남고 싶었다. 정 들자마자 이별이라니, 가혹했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 있나? "알겠소. 고마웠소." 연아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런 말없이 돌아서는 주한성이 야속했다. 통속적일지라도 돌아온다는 말, 기다려 달라는 말이 듣고 싶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 사람은 내 고향이 어딘지도, 내가 어느 문파 출신인지 묻지도 않았다. 나에 대해 궁금하지 않은가? 그녀의 귓가에 발자국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그 사람이 멀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가슴 속에 미진한 불꽃 하나를 심어놓고. 연아는 발길을 돌렸다. 2 염진동은 소실봉의 중턱에서 아래를 지긋이 굽어보고 있었다. 그의 후면에는 감수경이 요염한 웃음을 머금고 서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을 예견하다니 당신은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군요." 염진동은 담담하게 웃었다. "아직 성패를 판단하기는 이르오. 자, 이제 슬슬 내려가 봅시다." 염진동은 감수경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자연스런 행동이다. 감수경이 요염하게 웃었다. 그녀는 염진동의 팔을 살며시 풀어내고는 주름살이 그어지기 시작하는 염진동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좀 더 극적으로 주한성을 만나고 싶어요. 처소에서 기다리겠어요." 등봉현의 너른 들판을 달리던 주한성이 걸음을 멈췄다.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염진동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예정보다 일찍 만나게 되는군!" 주한성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연아에게 건네 받은 검을 수평으로 뉘었다. 염진동은 양손을 치켜들었다. 내력을 운기하자 두 주먹에서 녹색 인광이 도깨비불처럼 번뜩였다. "이전에는 보광 때문에 사정을 봐 주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순순히 쫓아오너라. 반항하면 할 수록 괴로움을 당한다." 염진동이 시전하고 있는 무공은 잠마전의 무공 중 단혼벽과 더불어 이대신공으로 불리는 남존의 권법이다. 감수경이 그를 포섭하기 위해 전수해 준 것이었다. 주한성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염진동의 자세, 사사존의 일 인이었던 남존의 권법을 보고 일어난 현상이었다. 과거의 일부분이 본능적으로 반응을 보인 것이다. 물론 주한성은 몰랐다. "그렇지 않아도 당신 문제가 찜찜했었소. 떠나기 전에 만나 다행이오!" 주한성은 온몸이 망가진 상태였다. 검이 불을 뿜었다. 삼악중첩이다. 겹겹이 연이어지는 해일처럼 밀려오는 눈부신 검광을 본 염진동도 공격을 펼쳤다. 양손에서 녹색강기가 뻗어 나왔다. 쾅! 두 절세무공이 강력하게 충돌했다. 큭! 짧은 비명과 함께 핏줄기가 뿜어졌다. 주한성은 허공에 붕 떠 날아가 한쪽 구석에 처박혔다. 얼른 일어나 가슴을 바라보았다. 헤진 옷 사이로


녹광을 띤 손자국이 보였다. 반면 염진동의 오른쪽 가슴팍 옷도 길게 갈라져 피가 흘렀다. 삼악중첩은 염진동조차 일거에 파해하지 못하고 부상을 당할 정도로 무서운 무공이었다. 염진동은 서서히 검을 뽑아들었다. "삼악중첩, 위력은 대단했지만 내력이 부족하다. 그것으로 승부는 끝이다." 주한성은 침묵했다. 검을 수직으로 세웠다. 그가 알고 있는 무공이라고는 단 하나 삼악중첩 뿐이었다. 염진동은 칼을 사선으로 뉘였다. 두 사람의 호흡이 점차 가늘어지다가 곧 무호흡의 상태로 들어섰다. 일초에 생사를 건 것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주한성의 검은 대기를 가르며 직격했다. 염진동의 검은 사선으로 주한성의 마혈을 노렸다. 두 사람이 교차했다. 주한성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오른 어깨에 기다란 검상(劍傷)이 쩍 입을 벌리고 있었다. 가슴에도 점을 찍어 놓은 듯한 검상이 있고 그 검상은 점차 퍼져갔다. 내상은 더욱 심각했다. 속이 메스껍고 울렁거렸다. 오장육부가 강한 타격에 흔들린 것 같았다. 내부에서 들끓는 기혈을 억제하던 주한성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피를 토했다. 그 순간 염진동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급습, 목덜미를 강하게 내려쳤다. 주한성은 맥없이 스르륵 무너졌다. "후후후! 너를 만나고 싶어하는 분이 계시다. 기대해라." 염진동은 주한성의 수혈을 짚고 어깨에 들쳐맸다. 달콤했다. 그러면서도 의아했다. 정체를 모르는 여인이 그에게 애닯게 사랑을 고백하고 안겨왔다. 하늘거리는 나삼을 벗어던지고, 여인은 너울 너울 춤을 추었다. 이상하게도 여인은 알몸이 되자 모습이 뿌옇게 변했다. 안개 속의 환영처럼 여인의 나체가 몽롱하게 잡혀들었다. 알고 있는 여인 같았다. 그러나 기억을 되살리려면 막막한 어둠이었다. 그럼에도 몸은 무섭게 팽창했다. 벌떡 일어나 와락 껴안았다. 타는 갈증으로 여인의 입술을 찾았다. 그때였다. 쫘악! 주한성은 번쩍 눈을 떴다. "갈! 누구야?" 대갈일성. 천지가 무너질 듯한 커다란 고함소리를 내지르며 벌떡 일어서려던 주한성은 마음과 달리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혈도가 제압당한 것이다. 주한성은 누운 채로 내부를 둘러보았다. 실내는 십여 평 정도로 음산한 회색빛 공간이었다. 무슨 일인지 두 사람은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멍하니 넋을 놓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일 장 정도 떨어진 출입문에는 서생원 같은 작자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꿈이였던가? 서생원 같은 사내가 입을 열었다. "얼른 시행하지 않고 뭐하는 짓이냐?" 두 사내는 벌떡 일어났다. "희한한 놈일세. 고문도 받기 전에 미쳐 버리는 놈은 난생 처음이야." 주한성의 고함소리에 엉덩방아를 찧은 두 사람은 투덜거리며 그 중 한 사내가 벽에 걸려 있던 갑옷처럼 생긴 원통형의 물건을 집어들었다.


"네 얼굴에 허망한 빛이 감도는 것을 보니 꿈 속에서 어여쁜 낭자와 놀았나 보구나? 아쉬운가 본데 철처녀(鐵處女)를 안겨 줄까?" 찰그락! 동그란 원통형으로 생긴 빗장을 열어 안을 드러내자 철처녀가 얼마나 섬뜩한 물건인지 드러났다. 갑옷의 내피면, 즉 안쪽에는 수백 개의 바늘이 빽빽이 박혀 있었다. 고문도구였다. 졸개가 철처녀를 주한성에게 입혀 버렸다. "철처녀를 조이면 그 대침(大針)이 살 속을 파고 들어. 조금 심하게 조이면 내장까지 뚫어 버리지. 그 고통이 처녀가 첫날밤을 맞이하는 기분이라 해서 철처녀라 이름지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떤가? 맛을 보고 대답하겠는가, 아니면 알아서 불겠는가?" 무엇을 불라는 것인가? 이들은 무슨 목적으로 나를 납치한 것인가? "염진동은?" "아직도 빳빳하군." 서생원 같은 작자가 고개를 까딱 하자 졸개가 무지막지한 발을 들어 그대로 철처녀를 내질렀다. "크아아악!" 주한성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대침은 뼛골까지 저리게 만들었다. 피가 뿜어져 바지를 적셨다. 회초리 맞은 개구리처럼 부르르 떨던 주한성은 견디지 못하고 혼절하고 말았다. "뭐야? 소문과 달리 물렁텅이네." 졸개의 말에 서생원같이 생긴 염진동의 수하 채용(蔡容)은 사악하게 웃었다. "이놈아, 사람은 갑자기 고통을 받으면 혼절하고 말아. 고문은 말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심리전이야. 공포심을 최대한 조장하고, 착란을 일으킬 정도로 집요하게 추궁해야 돼. 쉽게 입을 열지 않을 상대일 수록 천천히 즐긴다는 생각으로 고문을 가해야만이 효과가 있는 거야. 깨워!" 찬물을 뒤집어 쓴 주한성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채용이 바로 앞에서 느물거리며 웃고 있었다. "서사혼도를 기억하나? 사람들을 괴어의 먹이로 던지던 일을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하군. 그때 너와 전검휘는 참으로 침착했지. 공포에 질려 버둥거리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네놈들은 조금도 흥분하지 않았다. 이제 그때 그 사람들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게 해 주마!" 주한성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멍하니 채용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채용, 잠시 멈춰라." 두 사람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이십 중반의 사내와 이십 초반의 여인이었다. 단우였다. 그는 주한성을 사로잡았다는 감수경의 전갈을 받고 급히 달려왔다. 이제 그는 헌헌장부가 되어 있었다. 서사혼도에 있을 때도 준수했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눈부신 청삼에 흰 피부, 별처럼 반짝이는 눈과 조각칼로 다듬은 것 같이 준수한 얼굴에 흐르는 잔잔한 웃음, 사내가 아니라 여자라고 착각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의 뒤에서 감수경이 서 있었다. 주한성을 바라보는 감수경의 표정은 이상야릇했다.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고 눈동자에는 미묘한 빛이 번뜩였다. 채용은 넙죽 허리를 접었다. "소주(小主)를 뵙니다." 단우는 그의 예를 무시하고 주한성을 향해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주한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은 나를 알고 있소?" 단우는 흠칫했다. "나를 모른다? 정말인가?" "당신을 본 기억이 없소." "그럼 이 여인은?" 주한성은 감수경을 바라보았다. 감수경도 주한성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불꽃을 튀기며 얽혀들었다. 감수경의 미모는 대단해서 주한성은 일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감수경은 미묘하게 몸을 틀었다. 마치 처녀가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는 듯, 몸에서 풍기는 청초한 향기와 더불어 사람을 홀리는 뇌쇄적인 자태였다. '이상하다. 저 여자의 분위기가 상당히 익숙하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것 같다.' 단우는 묵묵히 두 사람의 해후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들 두 사람이 육체관계를 맺은 것을 알고도 감수경과 결혼했다. 그는 왜 이런 모욕적인 결혼을 했을까? 단우는 아내를 능욕한 주한성을 보고도 일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흥분은 커녕 오히려 냉철해 보였다. 주한성은 자신이 지금 얼마나 위급한 상황에 처했는지 모른 채 감수경을 살피다가 주한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 여인이 형씨의 부인인 모양이오? 내 충고하건데 형씨, 부인을 조심하시오. 관상학적으로는 눈웃음이 잦고, 동자가 기름을 바른 듯 반짝이며 사내의 혼을 빨아당기는 눈을 일컬어 도화안(桃花眼)이라 하오. 당신의 부인은 도화안을 타고났소." 감수경이 웃음을 터뜨렸다. "잘못 알았어요. 우린 그저 남남이에요." 감수경은 단우를 향해 말했다. "그렇죠?" 단우는 대답하지 않고 주한성에게 말했다. "난 자네에게 이 여인을 알고 있냐고 물어봤지 관상을 봐달라고 하지는 않았다네." "난 저 여인을 알지 못하오." "전혀 기억이 없는가?" "그렇소." 단우의 눈동자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주한성이 연극을 하는 것이 아닐까 유심히 살폈지만 의심스런 구석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감수경도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주한성 앞으로 다가와 유심히 눈동자를 살펴보았다. 전과 다르게 눈동자에 탁기가 흐르는 것을 제외한다면 특이하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주한성이 싱긋 웃었다. "당신은 나를 알고 있소? 우리는 좋은 사이였소?" 감수경은 요염하게 웃었다. "좋은 사이였냐고요? 설마 사 년 전의 그 일을 잊었단 말인가요?" "사 년 전? 유감스럽지만 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 감수경은 주한성의 말을 믿었다. 그녀가 단우에게 주한성을 잡았다고 통보한 것은 정말로 주한성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가 실험하기 위해서였다. 모친을 강간하고 죽인 자를 눈앞에 두고 이렇게 담담한 사람은 없다. 이 사람은 정말 과거를 잊어 버렸다. 모친이 죽은 이후 주한성은 악마였었다. 그는 전과 달리 극히 무례했고, 남을 배려치 않는 독종 중의


독종으로 변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릴 때처럼 순박해보이고 과거의 광기도 보이지 않았다. '왜? 왜 주한성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구나. 동존 독마의 독 때문이구나. 이 사람은 비록 목숨은 구했지만 그 후유증으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단우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과거를 잃어 버린 적(敵), 자신의 약혼녀를 능욕한 놈! 연극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이대로 죽여 버리기에는 아깝지 않은가? 녀석을 이용할 방법은 없을까? 과거 주한성을 떠올려 보았다. 굴강(屈强)하다고 표현해도 부족할 정도로 뛰어난 놈이었다. 환경 탓이었을까? 어쩌면 이 순박한 모습이 놈의 참모습일지도 모른다. 단우의 입꼬리에 악마적인 웃음이 감돌았다. 주한성을 이용할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채용, 시작해라." 주한성 역시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난 누구였을까? 저들은 어떻게 나를 알고 있을까? 생각은 곧 끊어졌다. 쇳덩이가 살을 뚫고 들어오는 고통 속에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장장 반 시진에 걸친 채용의 독랄한 고문에 주한성은 마침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3 자극을 받았어. 확실해. 이렇게 강하게 몰아친 적이 없었어. 당신은 과거를 잊지 않고 있어. 겉으로는 대범한 척 하지만 당신도 평범한 남자야. 나를 멀리하고 싶겠지. 아니 죽여 버리고 싶을 거야. 그러나 탓하지는 않아. 당신이 다른 년들에게 눈길을 돌렸을 때 나도 그런 질투심에 시달렸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내게 돌아와야 해. 거미줄에 걸려서 바둥거려야 한단 말이야. 주한성과 염진동, 그들과의 염문에 초연한 듯하지만 당신은 결국 흥분하게 돼있어. 난 당신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 내 지위를 견고하게 해 줘. 자손에 연연하는 당신의 조부(祖父), 그를 흡족하게 해 줄 단씨의 씨앗을 내게 달란 말이야.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감수경은 불안했다. 결혼한 지 사 년, 수많은 밤을 같이 했어도 임신이 되지 않았다. 단우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 서사혼도에서 단우가 상대한 여인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어느 여자도 임신하지 못했었다. 불능인가? 확실히 알아야 했다. 만일 단우가 불능이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흑!" 하체 깊숙한 곳에서 번지는 강렬한 쾌락에 감수경은 일순 생각을 접었다. 서서히 뜨겁게 몸이 달아오르면서 그녀는 아득히 침몰해 갔다. 단우의 등을 강하게 움켜쥔 그녀는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믿기지 않아. 이런 남자가 불능이라는 게!' 단우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감수경이 손수 마련한 저녁상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겼던 단우가 감수경을 당겨 안았다. 감수경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단우의 품에 안겼다. 단우는 감수경의 두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주한성을 어떻게 생각하지?" "멍청하죠!" "그리고?" "황소같아요. 멍청하기에 가능한지도 모르죠." "그 아이를 손에 쥘 자신이 있나?" "어렵진 않아요. 그런데 그 아이를 손에 쥘 필요가 있나요? 무공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어떤 특정


세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용할 가치가 충분한 것도 아니잖아요?" "매개체로는 충분하지." "매개체라면?" "천우사절이 일체 행동을 멈추고 있어. 무언가 수상쩍은 기미가 보여. 단익제를 통해 서찰을 보냈는데도 오비도인과 노천악은 미동도 하지 않아. 그들은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을 것이야. 난 소림의 연무관이 잠마전의 이목을 숨기기 위한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난 당신이 그 사실을 파악해 주길 바래." "연무관에 잠입하라는 말인데, 불가능해요."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아. 주한성을 이용하는 거야. 놈은 소림의 전대방장인 보광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녀석을 유혹해. 이 일이 성공하면 당신은 단씨일문에 확고히 뿌리 내릴 수 있어." 감수경은 잠시 단우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부인으로 생각한다면 절대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당신은 무서운 사람이군요!" "그런가? 듣기 싫지는 않군!" 단우의 얼굴에 희미한 조소가 흘렀다. 감수경은 그에게 흥미의 대상일 뿐이었다. 과거를 생각케 하는, 서사혼도에서 자라야 했던 힘들었던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 편린에 불과했다. 단우는 항시 기억하고 있었다. 패배자의 한을! 잠마전의 소전주라는 지고무상한 신분, 그럼에도 그가 서사혼도에서 성장한 이유가 있었다. 귀족적인 삶에 앞서, 신분이 왜 중요한지, 왜 가문을 수호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하기 위해 그의 조부는 단우를 서사혼도에 파견한 것이다. 인생의 낙오자들이 어떤 고통을 받는지 손수 보고 느끼라는 것이었다. 조부의 의도대로 단우는 강하게 성장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단우는 이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한동안 무림에서 은퇴해야 했다. 그 전에 정리해야 할 일이 있다. "주한성의 감성을 자극하는 방법을 찾아봐. 당신이 직접 주한성을 간호한다면 놈은 감격할 거야!" "알았어요!" 방문을 나서는 감수경을 보는 단우의 눈꼬리가 가늘게 좁혀졌다. 음산한 살기가 감돌았다. 부드러운 손길에 눈을 떴다. 몹시 더웠다. 뿌우연 연기가 방 안에 가득했다. 그 속에서 빙어같이 흰 손이 온몸을 쓰다듬고 있었다. 손이 지나는 자리마다 통증이 가셨다. 아른거리던 초점이 모아졌다. 감수경이었다. 그녀는 얇은 나삼만을 걸치고 있었다. 그나마 무더운 실내공기로 인해 나삼은 몸에 찰싹 달라붙어 그녀의 풍염한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정신을 차렸군요!" 입을 열자 건강한 여체가 출렁였다. 철처녀의 그 모진 고문 속에서 간신히 목숨이 붙어 있건만 주한성은 단전이 당길 정도로 강한 충동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이 무슨 망신인가 싶어 얼른 손으로 가리려 했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부끄러워 할 필요없어요. 잘못하면 상처가 덧나요!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이전 당신과 나는 남남이 아니었어요." 감수경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듯했다. "남남이 아니라니 무슨 뜻이오? 그리고 왜 나를 간호한 것이오?" 감수경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얼굴은 처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음영을 드리운 깊은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고, 가늘게 내쉬는 한숨에는 애상이 담겨 있었다.


"정말이군요. 설마 설마 했는데 당신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군요." 주한성은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낭자, 당신은 내 과거를 알고 있소?" "호호홋! 낭자라니요? 당신과 나는 부부였습니다. 첫날밤을 잊었나요? 당신은 수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했었는데……!" "첫날밤을? 그럼……?" "당신과 나는 철부지 어린 시절에 만났어요. 우린 모종의 임무를 띠고 서사혼도에 파견되고 그곳에서 성장했어요. 사 년 전에 당신은 강제로 나를 취했어요.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제 동작을 자세히 보세요!" 감수경은 남존의 공수입백인을 펼쳐 보였다. "해보세요!" 주한성은 간신히 상체를 일으키고 그녀의 도움을 받아 공수입백인을 펼쳐보았다. 자연스러웠다. 마치 오래된 습관인 듯,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주한성을 본 감수경은 검을 꺼내들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이 검을 잡아보세요!" 파아! 검이 정수리를 노리고 떨어지는 순간, 주한성은 반사적으로 공수입백인을 펼쳤다. 검신을 쥔 손을 멍하니 바라보는 주한성! "그 무공은 나와 당신을 가르친 사사존 중 남존 사부님의 공수입백인입니다." "그럼 지금 이 상황은 어떻게 된 것이오?" "당신은 단우가 펼친 암계에 과거를 잊게 되었고, 난 단공자에게 납치를 당한 것입니다. 이제 그 사실을 아무도 증명해 줄 사람이 없어서 난 이곳에서 이렇게 잠마전의 인물들과 생활하는 것입니다. 주공자, 나를 구해 주세요!" 주한성은 떨떠름하게 웃었다. "나도 갈 곳이 없는 몸이오." 감수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이제 나를 버릴 생각인가 보군요. 그래요. 난 단우에게 몸을 더럽혔어요. 하지만 당신과 함께 한 첫날밤을 나는 지금껏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당신을 만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염진동을 매수해 당신을 모셔온 것인데……!" 감수경은 말꼬리를 흐렸다. 주한성은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전혀 기억이 없었다. 다른 사람의 과거를 듣는 것 같았다. "단우는 낭자를 사랑하는 것 같았는데?" 감수경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단공자요? 호호홋! 당신이 나를 강제로 취한 이유가 단공자 때문입니다. 그는 내게 청혼을 했습니다. 그는 대단한 신분이라 할아버지도 그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청혼을 받아들였죠. 그러나 막상 혼례를 치르고 난 후 그는 우리의 관계를 알고 나를 멀리하고 있습니다." "믿을 수 없소!" "당신의 몸에는 용의 문신이 있더군요. 그 금룡 문신은 살아 있는 듯 생생한데 용의 꼬리는……!" 감수경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고개를 숙이고 전음으로 속삭였다. "……!" 주한성이 푸르르 몸을 떨었다. 그것까지 알고 있다면? 주한성은 감수경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럼 정말 당신과 내가 부부였단 말이오?"


감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그렁한 눈이 주한성을 지긋이 응시했다. "과거일 뿐이죠. 난 이제 단공자의 부인입니다. 당신과는 더 이상 맺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난 이곳을 탈출하고 싶어요. 이 장원은 정말 싫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감수경은 품안에서 금창약을 꺼냈다. 주한성의 옷을 벗긴 그녀는 한동안 주한성의 건장한 몸을 바라보다가 오열을 터뜨리며 안겨왔다. 주한성은 얼떨결에 감수경을 안았다. "주공자! 우리 탈출해요!" "나조차 지금 갈 곳이 없는 몸이오. 당신의 말대로 단우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면 천하 어디에 숨을 곳이 있겠소? 하지만 기다리시오. 내 반드시 당신을 구하러 오리다." "아니요. 살 길이 있어요. 바로 소림입니다. 잠마전도 감히 소림을 침범하지는 못해요." 주한성은 고개를 저었다. "난 지금 그곳에서 도주해 온 중이오. 다시 돌아갈 수 없소." 감수경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푹 고개를 숙인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차라리 당신을 만나지 않을 걸 그랬어요. 당신이 죽은 것으로 알고 그냥 평범한 여인으로 살아갈 것을! 일어나세요. 당신을 탈출시켜드리겠어요." 주한성은 눈을 크게 뜨고 감수경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탈출시키기 위해 이 여인은 목숨을 걸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고작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이 여인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주한성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좋소. 지금 당장 탈출합시다." 감수경이 활짝 웃었다. 눈물이 어린 얼굴에 떠오른 환한 웃음을 본 주한성은 정신이 산란해지는 것을 느끼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감수경이 조용히 속삭였다. "지금은 안되요. 먼저 저들의 눈을 속여야 해요. 제가 직접 당신을 고문할께요. 그러다가 기회를 보아 당신을 탈출시켜 드리죠. 연후 저도 소림으로 찾아가겠어요!" 삼 일 간의 고문! 감수경은 모질게 다뤘다. 주한성은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생각되었지만 그는 초인적인 의지로 고문을 이겨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여겼다. 그러했기에 그는 모진 고문을 이겨낸 것이다. 이렇게 주한성을 이용한 감수경과 단우의 공작은 시작되었다. 주한성은 삼 일 후 감수경의 도움을 받아 장원을 탈출해 소림사로 향했다. 알싸한 향내음이 콧속을 파고들었다. 자애스런 웃음을 머금은 불상과 향로에서 타오르는 향이 보였다. 뒤편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깨어났구나." 주한성은 소리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전검휘였다. 노미량과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을 그가 이곳에 당도해 있었다. 주한성은 전검휘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를 살리기 위해 사선을 넘었던 형조차도! 전검휘가 천천히 다가섰다. 그러자 그 뒤에 선 연아도 시선에 들어왔다. 그녀를 본 주한성이 두눈에 생기를 띠었지만 급속히 사그라들었다. 감수경의 처량한 모습이 뇌리를 스친 것이다. 전검휘가 씨익 웃었다. "녀석, 어떤 일을 당했기에 그렇게 모진 상처를 입은 게냐?" "소림을 향해 오다가 정신을 잃었는데 전형이 나를 구한 것이오?" "처가에서 돌아오는 길에 부상을 당해 혼절한 널 발견했다. 누가 널 그렇게 만들었냐?" "전형, 목숨을 구해 준 것은 고맙지만 반말은 실례가 아닌가? 만일 계속 반말을 한다면 나도 누나의


체면을 생각지 않겠다." 전검휘가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석 달 안에 네가 달마삼검을 완벽히 터득하면 그때 도전을 받아 주마." "난 소림에서 도주했다. 누가 내게 달마삼검을 가르쳐 주겠는가?" 연아는 입술이 한 발은 튀어나와 있었다. 주한성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감정을 내색할 수 없어서 그저 태연을 가장하고 두 사람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러던 중 화제가 무공으로 바뀌자 그녀는 얼른 입을 열었다. "사대금강이 내게 부탁한 것이 있어요. 만일 주공자가 돌아오면 반드시 한 번 찾아오라고 전해 달라고 했어요!" "그들이? 왜?" 전검휘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 분들이 너에게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이런 몰골로 그 분들을 뵐 수는 없으니 가서 목욕하고 그 분들을 뵙자." 승방을 나서 불경을 독송하는 건물을 몇 구비 돌았다. 전검휘가 멈춘 곳은 장작더미가 산처럼 쌓인 곳이었다. 그곳은 불목하니가 거하는 곳이었다. "목욕물은 데워놓았다. 벗어라." 머뭇거리는 주한성을 본 전검휘가 먼저 옷을 벗었다. 역시 멋있는 몸이다. 전신 근육은 섬세하고도 우람했다. 특히 가늘고 긴 손가락과 달리 건장한 팔뚝은 수십 가닥의 힘줄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그것은 일반인들과는 틀린 근육이었다. 검을 수련하는 자만이 사용하는 근육이 섬세하게 발달했다는 것은 그의 검술이 무극(無極)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증거다. 전검휘의 상체, 검은 털이 수북한 가슴 한가운데 황룡이 승천하듯 새겨져 있었다. "그건 뭐지?" "신룡문 대사형의 표식이다." "신룡문?" "때가 되면 알 것이니, 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어라." 황룡은 신룡문도 중 대형의 표식이었다. 신룡문의 마흔 아홉 명은 신룡처럼 세인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오늘 전검휘가 마침내 주한성 앞에 신분을 드러낸 것이다. 사내들의 심리는 어떨까? 두 사람이 발가벗고 선다면 눈초리가 어디로 갈 것인가? 주한성의 눈이 반짝했다. 그만 소인지 알았더니 전검휘도 소였다. 더구나 두 다리는 건마처럼 날렵했다. "호오, 대단한데?" 쾅! 별이 오락가락했다. "어린놈의 사고방식이 그런쪽으로만 발달했구나." 상의가 벗겨졌다. 전검휘의 손이 한 순간 주춤했다. 주한성의 몸에 신룡처럼 꿈틀거리는 금빛 신룡을 발견한 것이다. "!" 무언가 말을 할 듯하던 전검휘가 말을 멈췄다. 그는 주한성의 금룡문신을 쓰다듬었다. 죽은 사부 주진룡의 유일한 아들 주한성,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문신을 볼 때마다 가슴이 떨려왔다. -용의 자식! 주한성은 히죽 웃었다.


전검휘가 주한성을 직시하며 말했다. "놈, 앞으론 더 크게 더 자주 웃어라." 쫘악! "앗 뜨거!" "이런! 이 구정물 좀 봐라. 처음 너를 치료하라고 연아에게 맡겼더니 연아가 코를 싸쥐고 나오길래 설마했더니 이유가 있었군." 주한성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연아, 그 이름! 가슴에 담은 지 불과 며칠 만에 지워야 하는 고통, 막상 그녀를 잊는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저려왔다. 목욕하는데 한 시진이 걸렸다. 하루 열 두 시진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지만 알몸의 남자 둘이서 어떤 유대감을 맺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주한성은 운신이 부자유스런 자신의 몸을 씻겨 주는 전검휘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마치 형제같다. 오래 전부터 연관을 맺어온 것 같았다. 주한성은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도대체 내 과거는 무엇인가? 내 과거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인가? 그런 주한성을 전검휘가 가볍게 토닥거렸다. '한성아, 아직은 때가 아니다. 네가 무공을 완성하는 날, 네 과거를 말해 주마.' 전검휘가 염려하는 것은 한 가지였다. 광기! 이유도 없이 돌출하는 무서운 광기에 휘감겨 주한성이 단우를 찾아갈까 염려스러운 것이다. "한성아, 잘 들어라! 신룡문은 천하제일문이다. 이 일련의 연무는 신룡문에 들기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생각해라. 난 네가 이 난관을 극복하고 나와 같이 일하게 되기를 원한다. 강해져라. 넌 장차 신룡문주가 될 수도 있다." 감수경이 소림에 잠입한 것은 그로부터 삼 일 뒤였다. 그러나 주한성은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그는 비밀리에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소림에 들어와 사대금강을 만난 지 어언 다섯 달이 흘렀다.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주한성의 연무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처음 두 달 동안 주한성은 무공은 커녕 숭산의 봉우리들을 다람쥐처럼 오르내려야 했다. 숭산은 수십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다. 그 산악을 하루에 한 번씩 종주하는 것은 보통 인내로는 어림도 없었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두 달 동안 뛰어다닌 주한성은 어느 날 자신의 발걸음이 무척 가볍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산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 준다. 숭산을 매일 접한 주한성은 스스로는 자각지 못했지만 마음 속에 숭산을 담고 있었다. 숭산의 깊이와 무게와 침묵을. 주한성은 나날이 변해갔다. 두 달이 지난 후 그는 본격적으로 소림의 무공을 전수받았다. 사대금강은 소림의 무공을 전수하는 종종 무공을 기록한 책자를 주한성에게 건네 주고 수련토록 했다. 그것은 소림의 무공과 전혀 틀린 종류의 무학이었다. 소림의 무공이 강하다면, 책자의 무공은 유연하고 부드러웠다. 오비도인의 무공이었다. 소림과 무당의 절기가 그렇게 한 사람에게서 영글어가고 있었다. 철퍼덕! 철퍼덕! 붉은 물이 튀어올랐다. 희디흰 백의가 발목까지 붉게 채색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이 사람 전체를 붉게 변하게 만들었다. 툭 하고 정수리에 떨어진 방울조차 붉디붉었다. 주르륵!


정수리를 타고 흐른 붉은 액체가 가는 실처럼 창백한 이마의 중앙을 거쳐 타내렸다. 차츰, 역시 창백한 미간을 지난 액체는 매부리코를 타고 흘렀다. 그럼에도 노인은 손을 들어 닦지 않았다. 그는 이 공간에 떠도는 붉은 색을 좋아했다. 강렬하다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이 핏빛을 좋아했다. 이 안에는 공기조차 붉은 색을 띠었다. 이 색깔이 이 노인을 자극했다. 이제는 핏빛을 보지 않으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생을 유지하는 유일한 도구인 것이다. 제 11 장 청해사와의 첫 조우 1 카아아!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처절한 비명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울렸다. 지하 수십 장에 위치한 이곳에는 오직 피냄새와 처절한 절규였다. 이곳은 지옥이었다. 사람들이 변해가고 있었다. 인간에서 짐승으로 한 단계 아래로, 그들은 철저하게 짐승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에 대항하듯 사람들은 인간으로 남기를 갈구하며 저렇게 마지막으로 처절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좋아! 마치 자장가를 듣는 것 같아!" "아미타불! 죄송합니다. 며칠 후면 이 즐거운 합창소리가 그치게 될 것입니다." "대법이 완성단계에 이르렀나?" "아미타불! 그렇습니다. 한 달 후면 가능합니다. 오늘 존야를 이렇게 청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독마련기(毒魔鍊氣)의 일부를 흡입하기를 청하기 위해서입니다." "환각 작용을 일으킨다고 했지?" "허허허! 어찌 환각작용이라 하십니까?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육체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면 육체적으로도 가능합니다. 존야같이 극고의 경지에 오른 초극고수들은 한 단계 더 발전하는 것이 지금껏 무공을 수련한 것보다 더 힘이 듭니다. 어떤 사람은 단숨에 초극고수에 도달하지만, 그 다음은 영 진전이 없는 경우도 있죠. 그들은 초조해지다 못해 나중에는 서두르다가 주화입마에 걸려 죽는 경우 도 허다합니다." "흥미가 가는군!" "독마련기는 바로 그 단계를 넘어서는 것을 가능케 해 줍니다. 환각상태같지만 환각이 아닙니다. 뇌의 기능을 일시간에 수십 배로 강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무인이라면, 더욱이 초극고수가 독마련기를 흡입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겠습니까?" "선인(仙人)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군!"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순간에 불과합니다. 선인의 경지에 들어서는 것을 기억하고 부단히 연마해 종내 그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본인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선인의 경지를 맛보게 해 준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노력이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허나 동존 독마의 독과 연관이 된다면 단숨에 선인의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독마련기라는 이름과 달리 효용이 무궁무진하군! 차라리 선계로 안내한다는 선도기(仙導氣)가 나을 것 같군!" "존야! 저희는 마도(魔道)입니다. 마도인은 마도인다운 발상을 해야 합니다." "그럼 독마련기를 이용할 방법을 강구했단 말인가?"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초극고수는 드뭅니다. 그들 중에 선도에 든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들에게 독마련기를 정재해 만든 환단을 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지요. 독마련기에 독을 섞어 그들을 조종하는 것입니다." "제조과정은?"


"역시 며칠 뒤면 완성됩니다. 저들 청해사의 승려들이 독마련기를 완성할 시점과 동시(同時)일 것입니다." "독마련기의 제련과정을 이곳으로 정한 것도 그 이유였군!" "그렇습니다. 독마련기를 각 문파의 고수들에게 전파할 사람까지 물색해 놓았습니다." "소림사의 연무관과 연관이 있나?" "역시 존야십니다." 끼이익! 저 멀리서 문이 열렸다. 일순간, 눈을 멀게 하는 찬란한 광채가 문 저쪽에서 뿜어져나왔다. 노인은 혀로 천천히 인중을 핥았다. 붉은 혓바닥 끝에 매부리코를 타내린 붉은 액체가 닿았다. 붉은 액체가 입 속으로 사라지고 잠시 후, 빛이 일렁이는 공간 안으로 들어서는 노인의 얼굴색이 변해가고 있었다. 창백하도록 흰 얼굴이 마치 불이라도 붙은 듯이 불게 타올랐다. 희고 긴 눈썹, 입가에 흐르는 인자한 웃음. 북존이었다. 비명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구역질이 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눈을 멀게하는 녹광 속에 머리를 삭발한 구십여 명의 승려들이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었다. 승려들의 이마 한 가운데가 뻥 뚫려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생의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그들의 몸뚱이를 뭔가가 스물거리며 타올랐다. 극독물들이었다. 가장 강한 극독을 지녔다고 알려진 사왕의 새끼부터, 새끼손톱 크기지만 피부에 발라진 독만으로도 능히 황소 일만 마리를 죽일 수 있다고 알려진 천축의 적독와(赤毒蛙), 서역의 사막에 존재하는 전갈까지 독충들은 총 망라되어 있었다. 민대머리들의 몸을 타오른 그 독물들은 승려들의 이마에 뻥 뚫린 구멍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크아아악! 그때마다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미동도 하지 않던 승려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다가 이마에서 녹색 액체를 쭉 뿜어내고 축 늘어졌다. 그러자 그가 앉아 있는 곳이 쫙 갈라져 그를 집어삼켰다. 허공에 뿜어진 녹광은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 녹색 액체는 허공에 부유물처럼 떠 있었다. 잠시 후 바닥 속으로 사라졌던 승인이 다시 위로 올라왔다. 그의 몸에는 다시 새로운 활력이 넘쳤다. 북존은 승인들의 앞에 가서 섰다. "동존 독마가 저승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는지 궁금하군. 꿈에도 만들고 싶어하던 독마련기가 완성되어 가는 이 광경을 말이야." "존야, 어서 독마련기를 흡입하십시오." "알겠네. 자네는 그만 연무관으로 돌아가게!" 음성의 주인이 사라졌다. 북존은 빙긋 웃고는 가부좌를 틀었다. 한순간, 허공에 떠 있던 녹색광채의 일부가 북존을 휘감았다. 잠시 후 그의 몸에서 마치 불타의 후광같은 빛이 떠오르더니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까마득한 천정으로 솟구치는 북존에게서 성스런 광휘가 뿜어졌다. 그것은 무림인들이 꿈에도 갈구하는 선인의 경지였다. 소림에 비상이 걸렸다. 괴이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 것이다. 소림의 약학당은 방장으로부터 비밀지령을 받고 환단 제조에 착수했다. 그런데 산에 약초를 채집하러 간 약학당의 승인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대대적인 수색 끝에 숭산의 한 골짜기에서 발견한 약학당 소속 승인들은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마에 구멍이 뚫려 있고 피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의 시신을 본 소림방장 고람은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마공을 수련하는 자들이 인간의 정혈을 뽑아내 발생한 현상이다.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청해사의 마승들, 그들이 중원 무림에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숭산 수십 개의 봉우리 중 세인의 접근이 금지된 곳이 있다. 언젠가부터 숭산의 음령(陰靈)으로 알려지고, 소림승들조차 접근을 금지당한 기이한 장소였다. 그날 밤부터 숭산의 음령곡에서 마치 귀신의 호곡 같은 음산한 비명소리가 울려오기 시작했다. 주한성은 사대금강의 부름을 받았다. 달도 없는 어두운 밤에 사대금강은 검은 색의 가사를 걸쳤다. 이례적으로 사대금강은 각자 무기를 하나씩 허리에 패용했다. 무기를 놓은 지 어언 십 년 만에 그들은 다시 무기를 든 것이다. 의아해 바라보는 주한성에게 사대금강은 진중하게 말했다. "오늘 소림의 무승 이백 명이 음령곡을 수색할 생각이다. 그곳에는 악마의 화신 같은 괴물이 있다. 다른 어떤 무기로도 그 괴물을 죽일 수 없다. 오직 쇄마혼검과 달마삼검만이 그 괴물들을 제압할 수 있다. 우린 네가 능히 그 짐승을 대적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짐승이요? 별일 아니군요!" 사대금강은 조용히 웃었다. -부처의 가호가 있기를. 사대금강은 속으로 그렇게 축원했다. 소름이 돋았다. 천하영산인 숭산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귓전을 울리는 음산한 바람소리, 끈적한 핏물처럼 몸을 휘감는 검은 안개, 그 속에서 마치 귀신의 그림자처럼 꿈틀거리며 흔들리는 나뭇가지들! 끼아악! 이따금씩 숲 속에서는 귓청을 찢는 듯한 괴이한 호곡소리가 울리며, 시퍼런 녹광이 검은 안개를 뚫고 음산한 허공을 날아다녔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것은 검은 바람, 흑풍(黑風)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정확하지는 않았다. 누구도 그 흑풍을 본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 괴이한 바람의 위력은 대단했다. 소림승들이 음령곡에 접근한 지 삼 일 만에 이십여 명이 실종되었다. 비명도 없이, 기척도 없이, 마치 불에 닿아 녹아내리는 성애처럼 소림승들은 사라진 것이다. 음령곡에 당도하기도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사대금강을 중심으로 한 소림승 일행이 음령곡을 눈앞에 둔 계곡에 당도한 것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석양 무렵이었다. 무심한 계절은 제 위태를 뽐내느라 여러 가지 색으로 치장하고 그에 발 맞추듯 하늘도 아름다운 노을로 어울리고 있었다. 일행의 선두에 선 나한당 소속 승려 화청(華靑)이 감탄을 발하였다. 나이 스물, 일곱 살에 소림에 출가한 후 처음으로 소림사를 벗어난 것이다. 마음이 들뜬 것은 당연지사, 화청은 산중의 가을경치에 취해 있었다. "청아! 본연의 임무를 잊었느냐?" 사대금강 무해대사가 하는 말에 화청의 얼굴에 자책감이 감돌았다. "아미타불! 제자가 잠시 일의 중대성을 잊었습니다." 무해대사는 화청의 말을 귓전으로 흘렸다. 내심 그도 주변경관에 감탄하고 있었다. 몇 년이었던가? 생기발랄하던 젊은 시절을 소림의 조사전에 묻었다. 그만이 아니었다. 소림 승려치고 무공연마를 게을리 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 결과 현재 소림은 그야말로 욱일승천의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윗사람은 후덕하고 젊은 인재들은 부지런했다. 문파 내 문도들의 경쟁심도 대단해서 무공을 익히는 자들은 심혈을 쏟고, 실전된 무공은 방장과 장로들의 노력으로 속속 복원되고 있었다.


"달마대사 이후 소림이 이토록 강한 적은 없었다. 잠마전이 강하다 하지만 능히 소림은 그들을 격파할 것이다." 무해대사는 나직히 중얼거렸다. 날이 어두워졌다. 무해대사는 일행을 사방에 배치했다. 어둠 속에 행군하는 동안 그 흑풍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던 무해대사가 돌연 손을 들어 승인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주한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행동을 멈추고 무해대사를 포함한 사대금강을 바라보았다. 무해대사의 전신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느끼고 있었다. 무해대사는 시선을 주한성에게 돌렸다. 주한성은 쇄마혼검의 검자루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 흑풍인가요?" 주한성의 질문에 무해대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소림승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재빨리 계도를 뽑아든 승인들은 사대금강을 중심으로 커다란 원형진을 펼쳤다. 찰나지간 적막하던 산중에는 계도에서 일어나는 싸늘한 기운이 만추(晩秋)를 이룬 산중에 퍼져나갔다. "어느 고인이 왕림하셨는가?" 무해대사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수림 속에서 느닷없이 검은 바람이 휘이익 불어왔다. 그 흑풍 속에는 수백 개의 녹색인광이 번뜩이고 동시에 비릿하고 역겨운 냄새가 풍겨왔다. "흑풍이다." 그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번뜩인 섬광(閃光). 주한성이었다. 그의 손에서 한가하게 쉬고 있던 쇄마혼검이 소리도 없이 흑풍의 중심부를 베어간 것이다. 쉬이익! 괴이한 바람소리가 일어나며 주한성이 전력을 다해 펼친 삼악중첩이 와해되었다. 쇄마혼검이 부르르 떨었다. 마치 스스로 흑풍에 대항하겠다는 듯이! 주한성은 두 손으로 검을 꽉 움켜쥐었다. "모습을 드러내라!" 한 소리 우렁찬 고함소리와 함께 쇄마혼검이 울부짖듯이 슈애액 소리를 한 차례 울리더니 곧장 흑풍의 중심부를 향해 재차 날아갔다. 쇄마혼검은 역시 일대의 명검처럼 묵강을 번개처럼 날려 그 신위가 능히 전설의 간장, 막사에 비견될 정도였다. 그러나 주한성의 이번 공격도 무위로 돌아갔다. 흑풍은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노한 주한성이 재차 공격을 가하려는 순간이었다. 스스스! 괴이한 소리와 함께 흑풍이 갑자기 범위를 넓히며 주한성을 휘감았다. "피햇!" 무해가 한 소리 호통을 날리며 양손을 번갈아 내쳤다. 우르르릉! 천둥 치는 굉음, 허공을 가르는 가공할 권, 흑풍의 중심부가 포탄이 작렬한 지면처럼 산산조각으로 찢어졌다. 그러나 그 순간 흑풍은 마치 살아 있는 해면체처럼 다시 뭉치더니 주한성을 향해 밀려들었다. 그 바람은 너무도 음산했다. 흑풍이 채 몸에 닿지도 않았는데 주한성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것은 대항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났을 때 본능적으로 느끼는 공포였다. 사라락!


미세한 음향과 함께 주한성의 가슴 옷자락이 주우욱 베어졌다. 허연 갈비뼈가 보이더니 눈깜짝할 순식간에 피범벅으로 변했다. 주한성은 부상을 당하는 그 순간에 희게 빛나는 그 무엇을 본 것 같았다. 일단 상대를 보았다는 사실이 주한성의 투지를 자극했다. "악마들, 모습을 드러내라!" 주한성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달마삼검의 필살무예 회천(回天)이 펼쳐졌다. 달마대사가 청해사의 기승을 패퇴시킨 검법이었다. 그 위력 무쌍한 살검이 흑풍을 향해서 무자비하게 짓쳐들어 갔다. 노호탕탕한 기세는 거침이 없었다. 회돌이치는 회오리 같은 검기가 곧장 흑풍을 휘감았다. 비명은 없었다. 그러나 주한성은 풀잎 위에 떨어진 녹색 액체를 발견했다. 액체가 닿은 풀잎은 곧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사부, 생명체였습니다. 흑풍은 몇몇 개체가 뭉쳤다가 찰나간에 흩어지며 연수합공을 펼치는 것입니다. 지금 추적해 몰살하지 않으면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주한성은 사대금강을 향해 외치고는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전검휘는 연무관의 인물들과 함께 음령곡의 전면에 당도해 있었다. 음령곡의 곡 입구에는 철벽 같은 검은 바위가 목책(木柵)처럼 쳐져 있었다. 그 모습을 살펴보던 전검휘의 안색이 대변했다. "저건 잠마전의 쇄룡진(碎龍陣)이다. 일단 저 진법에 걸리면 천하의 고수라도 빠져나올 수 없다. 그러나 잠마전이 진정한 적수로 생각한 것은 우리 신룡문이다. 어떻게 저것이 이 음령곡에 펼쳐진 것일까?" 중얼거리던 전검휘는 쇄룡진을 향해 몰려가는 검은 흑풍과 그 뒤를 추적해 쇄룡진에 다가서는 주한성을 발견했다. 전검휘는 몸을 뽑아올리며 크게 외쳤다. "안돼! 주한성, 물러서라!" 주한성이 전검휘를 보고 싱긋 웃었다. 멀리서도 그 눈빛은 활활 불타고 있었다. 사람을 감탄하게 하는 그 무언가가 눈 속에 담겨 있었다. 투혼(鬪魂)이었다. 반드시 원하는 것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의지였다. 전검휘는 가슴이 뭉클 젖어왔다. 참으로 오랜만에 주한성의 본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어서 물러서라고 연신 손을 저었다. 그러나 주한성은 물러서지 않았다. 찰나간 흑풍이 주한성을 휘감았다. "정무구혼은 뒤를 따르라. 전력을 다해 주한성을 구해야 한다." 전검휘가 흑풍을 향해 소리치며 외친 명령에 이곳 저곳에서 일곱 명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정무구혼, 소림에서 지난 몇 달 동안 수련을 거듭해 온 인재들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쇄마혼검을 들고 우뚝 섰다. 얼마나 오늘을 기다려왔던가? 지난 몇 달 동안 오늘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사대금강은 누누이 그에게 무인혼에 대해 가르쳐왔다. -개인을 위해 검을 들지 마라. -사사로운 원한을 위해 검을 들지 마라. -쇄마혼검을 욕되게 하지 마라. 그 검에 서린 중원혼을 잊지 말아라. 처음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의가 무엇인지, 마도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와 닿지 않았다. 사람은 개인의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무림에는 진정으로 무인혼을 구현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극소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사대금강이 바로 그들이었다.


저벅! 음령곡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그 순간 사방에서 미미한 파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흑풍, 그 공포스런 이름을 구성하는 다섯 괴물,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그긍! 철옹벽이 기관음과 함께 서서히 오그라들었다. 만개했던 꽃이 화려한 꽃잎을 접듯 철옹성은 주한성을 중심으로 오그라들었다. 철옹성의 겉면에는 무언가 끈적한 물체가 농액처럼 붙어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인화물질이었다. 동물의 몸에서 추출한 기름에 가장 인화성이 강한 물체를 배합해, 일단 불이 붙으면 돌멩이라도 녹여 버리는 가공할 화염진이다. 주한성은 잠시 그 광경을 보다가 천천히 쇄마혼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철옹성이 움직였다. 누군가 조종하고 있다. 이 안에는 사람이 있다. 그를 죽여 버리면 이 일전은 간단하게 끝난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몰랐다. 철옹성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높이 치켜든 쇄마혼검을 그대로 내리쳤다. 콰아아! 순간 하늘을 뒤덮는 가공할 열기가 솟구쳤다. "아뿔싸!" 한 소리 다급하게 외친 주한성은 방향을 틀었다. 그 순간 오그라들던 꽃잎 하나가 주한성을 향해 가는 실같은 것을 길게 뿜었다. 그것이었다. 이전 서사혼도에서 고패를 포박했던 그 무기 청린사였다. 주한성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쇄혼마검을 휘둘렀다. 쇄혼마검은 정확하게 청린사가 뿜어진 꽃잎 속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 수십 가닥의 청린사가 주한성을 휘감았다. 찰나간에 주한성은 불구덩이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어딜!" 웅혼한 외침이 울리며 한 자루 검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보광이 사방으로 뻗치는 검을 던진 것은 전검휘였다. 비록 그 검은 청린사를 자르는 데는 실패했지만 주한성을 끌고 가는 청린사의 방향을 틀어버렸다. 전검휘가 허공에서 검을 받아들었다. 그가 다시 주한성을 휘감은 청린사를 노리고 일검을 날릴 때였다. 다른 꽃잎에서 다시 수십 가닥의 청린사가 뿜어져 전검휘를 노렸다. 순간 주한성은 쇄마혼검에 힘을 주입해 톱날로 나무를 짜르듯이 연이어 그었다. 역시 쇄마혼검의 위력은 대단했다. 투두둑! 질기기로 천하에 소문난 청린사가 잘려나갔다. 순간 주한성은 쇄마혼검을 철옹벽을 향해 강하게 그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전형, 뒤에 흑풍. 어서 피해!" "으윽!" 고통에 찬 신음이 울렸다. 전검휘가 시커먼 구름같은 흑풍 속으로 속수무책 끌려가고 있었다. "놓아라!" 어디서 그런 힘이 난 것일까? 요란한 굉음이 숭산을 떨어울렸다. 주한성은 미친 사람처럼 사방을 향해 검을 날리고 있었다. 쇄마혼검에 맞은 철벽들이 쩍쩍 갈라졌다. 꽈지직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주한성은 철옹벽을 부수며 안으로 돌진했다. "저…… 저것은!" 우두둑! 뼈가 짓이겨지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십 장 정도 떨어진 흑풍 속에서 들려왔다. 누군가 죽은 모양이다.


주한성이든가, 아니면 주한성을 노리고 있던 그 흑풍일 것이다. "흑풍! 모습을 드러내라!" "흐흐흐! 우리를 찾는가?" 말과 함께 괴상한 승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동작은 하나같이 느리고 느긋했다. 또한 엄청나게 컸다. 칠척이 넘는 키에 몸통은 황소를 연상시키고, 절구통만한 머리에 눈알은 툭 불거졌다. 검은 장포를 입고 있는 그들은 서로 서로가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특이한 점은 그들이 투구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양 미간까지 현철로 만들어진 투구였다. 투구의 양 끝에 나 있는 길이 한 자에 달하는 날카로운 칼날이 섬칫한 한기를 뿜었다. "당신들은 뭐야? 그대들이 흑풍이란 말인가?" "믿어지지 않겠지. 그러나 우리가 바로 그 흑풍이다." 주한성은 순간적으로 흑풍의 약점이 미간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약점을 감추니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곳이 꼭 함정같았다. 자신을 유인하기 위한 함정. 찰나간에 두 가지 생각이 얽히고 설켰다. '좋아, 한 번 시도한다. 미간에다가 쇄마혼검을 박아 버리자. 단숨에. 실패하면 나는 물론 전형도 위험하다.' 주한성의 눈동자가 서서히 변해갔다. 유리구슬에 금이 가듯 시뻘건 혈선이 곁가지를 쳐나갔다. 이전 서사혼도에서 보이던 그 광폭함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손이 쇄마혼검에 닿았을 때 눈동자는 마치 피칠한 것처럼 온통 혈광일색이었다. 주한성의 눈빛을 본 흑풍의 삼 인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도 주한성에게서 뿜어지는 심상치 않은 살기와 쇄마혼검의 위력을 감지한 것이다. "카아아아!" 광소를 터뜨리며 흑풍이 번개처럼 땅을 박찼다. 그 모습은 미련할 정도로 보이던 것과는 전혀 틀렸다. 그들은 말 그대로 바람이었다. 주한성은 산사태에 대항하는 사람처럼 흑풍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간 여섯 점이 번뜩였다. 투구에 붙어 있는 여섯 개의 칼날이었다. 주한성은 찰나간에 그들의 미간에 드러난 허점을 보았다. "끝났다." 주한성이 벼락치듯 고함을 질렀다. 쇄마혼검이 빠른 속도로 투구에 가려진 양 미간을 향해 일섬을 그었다. 공격은 연이어졌다. 삼악중첩, 세 걸음에 세 번 검을 놀린다는 그 수법을 주한성은 한 걸음에 삼검을 쳐낸 것이다. 그것도 세 방향으로! "크으윽!" 중앙에 선 자가 참혹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맹렬히 돌진하던 속도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투구에 붙은 칼날이 주한성의 정강이 바깥쪽에 박혔다. "으음!" 주한성이 비명을 삼키는 동안 흑풍은 투구를 휘저었다. 주한성은 허공을 날아 철옹벽의 잔재에 부딪치며 지면에 처박혔다. 그러나 주한성은 곧 일어났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그가 몸을 바로잡기도 전에 다시 흑풍의 공격이 이어졌다. 그들은 마치 황소처럼 돌진해 왔다. '미간을 관통당했는 데도 죽지 않는다. 미간을 찌를 때 마치 빈 허공을 찌르는 것 같았다. 저들의 급소는 미간이 아니다.' 허벅지에 당한 부상은 주한성의 야성을 부채질했다. 그도 미친 말처럼 달려오는 흑풍을 향해 직격했다. 투구 아래 주한성을 노려보는 흑풍의 툭 불거진 눈도 살기로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흑풍, 그들은 그야말로 암흑을 지배하는 마왕같았다. 주한성은 으스러져라 쇄마혼검을 움켜쥐었다. "마혼멸!" 쇄혼마검이 벽력 같은 세 줄기 전광을 뿜었다. 그것들은 허공에서 미묘한 호선을 그렸다. 공격목표를 종잡을 수 없는 가운데, 쇄마혼검은 정확하게 흑풍의 뇌호혈에 작렬했다. 흑풍대 삼 인이 머리를 휘저었다. 뇌호혈에 맞고도 죽지 않는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일검을 성공시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중에 가해진 기습!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지만 여섯 개의 칼날이 복부를 스쳤다. 온몸이 산산조각나는 통증에 주한성이 비틀거리자 흑풍대는 기회를 포착하고 달려들었다. "이판 사판이다. 회천!" 달마삼검의 마지막 초식! 일정한 목표없이 사방 오 장 안을 완전히 초토화시키는 가공할 검법이 펼쳐진 것이다. 마치 빛무리 같은 검기들이 원형 같은 강기막을 형성해 사방을 쓸어갔다. 파아! 피가 튀었다. 그런데 의외에도 녹색 피였다. 검은 현철로 만들어진 투구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가운데 흑풍의 목덜미가 몸체와 분리되었다. 삼 인이 툭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삼 인의 이마에 갑자기 엄지손가락만한 구멍이 뚫리면서 녹색 기체가 뿜어져 주한성을 휘감았다. 주한성은 순간 아찔한 생각을 느끼고 급히 숨을 멈췄다. 그런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 다음이었다. 그그긍! 요란한 굉음과 함께 주한성은 발 밑이 허전한 것을 느꼈다. "주공자님!" 멀리서 여인의 외침이 들려왔다. 연아의 목소리였다. 정신없이 추락해 가는 와중에도 주한성은 갑자기 이상한 것을 느끼게 되었다. 머리 속이 명경지수처럼 맑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가 자꾸 뇌를 두드리고 있었다. 마치 불투명한 유리가 깨지고 밝은 햇살이 비치듯 주한성은 갑자기 달마삼검의 묘리를 깨닫게 되었다. "뭐야? 갑자기 내가 천하기재가 되었나?" 쾅! 사람이 재수가 좋으려면 이런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떨어진 곳이 전검휘의 머리 위였다. 막 추락한 충격에서 깨어난 전검휘는 하늘에서 떨어진 육중한 물체에 짓눌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고, 주한성은 머리까지 튄 붉은 피에 멍청해지고 말았다. "전형! 여기가 어디지? 소림에 이런 곳도 있었나?" 전검휘는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상한 곳이다. 사방이 온통 시뻘건 핏빛이다. 그리고 유일한 통로는 발목까지 괴상한 붉은 액체에 빠져 있었다. "소름이 돋는군! 일단 통로를 쫓아 가보자!" 문은 먼저 북존이 들어섰을 때처럼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주한성과 전검휘는 눈을 부릅떴다. 한 노인이 정좌하고 앉아 있었다. 삼 장 높이의 허공에! "신선들이나 가능하다고 알려진 부공삼매(浮空三昧)!" 전검휘가 놀라 외쳤다.


북존은 다급했다. 그의 깨달음은 극에 도달하고 있었다. 전검휘와 주한성이 침입하지 않았다면 그는 오늘 대공을 완성했을 것이다. 지금 대공을 수련하는 상태라 그는 쉽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오직 전검휘가 그를 몰라 보기만을 고대할 수밖에 없었다. 주한성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녹색광채, 그 안에 늘어선 구십 인의 승려들, 그것은 흑풍의 삼 인과 같은 형색이었다. 승인에, 이마에 뚫린 구멍까지! 그 구멍을 통해 독물들이 스물스물 기어 들어가는 것을 본 주한성은 앞뒤 돌볼 겨를없이 몸을 날렸다. "이곳이 바로 악마의 소굴이었구나. 회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강한 진기가 승인들을 향해 회오리치며 몰려갔다. 전검휘는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결단코 자신도 저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북존은 주한성의 공격을 보자 소름이 돋았다. 더 이상 연공에 치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그는 단 일초만을 펼칠 수 있는 상태, 단 일격에 두 놈을 해치운다. 북존은 번쩍 눈을 떴다. '당신은……!" 전검휘는 북존이 눈을 뜨는 것을 보고서야 그를 알게 되었다. 전검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공격태세를 갖췄다. "후후후! 전검휘, 주한성, 생각지도 않게 너희들을 만나게 되었구나. 재회의 기념으로 멋진 선물을 선사하지!" 북존이 양손을 벌렸다. 순간 무형의 진기가 유형으로 화하면서 양손에 가공할 힘을 모았다. "잘 가거라!" 전검휘는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사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그것은 빛이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빛의 소용돌이에 파묻힌 것 같았다. 단전이 뜨끔하면서 몽롱한 정신상태로 빠져들었다. 전검휘는 가슴을 움켜쥐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주한성은 북존보다는 승인들을 먼저 칠 계획을 세웠다. 두 사람 모두 북존을 상대해도 쉽사리 승부가 갈리지 않는 이상, 승인들을 공격해 신경을 분산시켜 승기를 잡기 위해서였다. 북존이 공격을 펼칠 때 이미 쇄마혼검으로 승인들을 쳐가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죽은 듯이 미동도 하지 않던 승인 중 두 사람의 이마에서 녹색 액체가 뿜어져 주한성을 뒤집어 씌웠다. 급히 고개를 돌리려던 주한성이 행동을 멈췄다. 조금 전 녹색 기체를 흡입했을 때 겪은 기이한 상황을 떠올린 것이다. 주한성은 사대금강을 통해 익힌 토납술을 펼쳐 깊숙이 숨을 들이켰다. 순간, 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녹색광채가 주한성을 뒤덮었다. 북존은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마음 속에 살기가 솟는 것 만큼이나 기혈이 뒤틀리고 있었다. 저 두놈을 죽일 절호의 기회이건만, 저 멀리서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시간이 늦으면 탈출할 수도 없다. 또한 대공을 완성할 수도 없다. "카하하핫! 네놈들을 조금은 더 살려 주마. 아직은 내 적수가 아니니까!" 삐이익! 괴이한 휘파람 소리가 울리더니 승려들이 시체처럼 일어나 북존이 사라진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전검휘는 멍하니 누워 있었다. 멀리서 여러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정무구혼을 비롯한 사대금강이 달려오는 소리였다. 전검휘는 고개를 돌렸다. 주한성이 운기행공에 들어 있었다. 잠시 그의 상태를 지켜보던 전검휘는 주한성이 덜덜 떠는 것을 보고 놀라 그의 명문혈에 장심을 붙였다. 자신조차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하에서도 전검휘는 내력을 주한성에게


전이하고 있었다. 2 명문혈에서 한 줄기 진기가 밀려들자 단전부위에서 청량한 기운이 솟구쳐 사지백해로 뻗쳤다. 답답하던 가슴이 일시에 풀렸다. 돌연 명문혈에 불처럼 달구어진 손이 닿았다. "마음을 편하게 가져라. 호흡을 길게 늘이면서 너 자신을 관조하듯이 바라보거라." 전검휘의 음성이 들려왔다. 단전에 미미하나마 힘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한성의 사고는 막히는 곳이 없었다. 토납법에 따라 운기를 시작하자 콩알만한 기운이 생성되기 무섭게 곧 밤톨만해지고 이윽고 주먹만하게 변했다. 그것은 정신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머리가 손에 잡힐 듯이 맑아졌다. 그 동안 그를 괴롭히던 어둠의 장막이 말끔히 가시기 시작했다. 주한성은 자신이 아득한 나락으로 추락하는 듯한 가슴 떨림을 느꼈다. 무아의 상태에서 기와 생각이 움직였다. 주한성은 바위에 앉아서 발 밑의 호수를 지켜보듯이 단전의 움직임을 마음으로 관조했다. 마음을 비우고 명상에 잠기자 주한성은 차츰 마음 속에 어떤 깨달음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물이 유입되면서 혼탁한 물을 정화시키는 것처럼 주한성의 체내에 남아 있는 동존 독마의 독을 희석시키기 시작했다. 주한성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기억이 아득한 곳을 더듬어가고 있었다. 어둠 속을 걷듯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는 천천히 천천히 기억의 암로를 더듬어갔다. 섬이 보였다. 그곳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났다. 저 섬의 이름은? 그래 서사혼도였다. 감수경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를 능욕하는 자신의 모습도, 환영 속이지만 주한성의 얼굴이 붉어졌다. 곧이어 불구가 된 엄마가 보였다. 엄마를 강간하는 고패의 모습도,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상대의 얼굴은 고패가 아니었다. 단우. 그렇지, 그놈이 엄마를 능욕했다. 분노로 퍼득이던 것도 잠시, 주한성의 의식은 더 먼 곳을 향해 나아갔다. 전검휘와 함께 괴어와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보였다. 그래, 형이었다. 그를 목숨을 걸고 지켜 주던 형! 그래서 그에게 그렇게 정이 간 것일까? 기억은 더 흘러갔다. 서사혼도에 닿는 장면이 보였다. 만월이 밝은 해변이었다. 몇 마리 표범들이 두 살 정도 된 아기를 향해 흰 송곳니를 드러낸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날아드는 인영, 노천악이었다. 그가 자신을 구했다. 배를 타고 서사혼도로 향하는 장면이 보였다. 수많은 무사들이 소용돌이와 상어의 기습을 받으며 죽어가는 장면이 보였다. 그 기억! 왜 피를 보면 주체치 못하는 것일까? 보였다. 한 장한이 가슴을 움켜쥐고 자애스런 시선으로 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갓 두 살 정도가 된 아기가 보였다. 장한이 떨리는 손으로 아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기는 그 장한의 손길이 좋은 듯 방실거리며 웃었다. 한순간, 툭! 장한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피가 아기의 두 눈 속에 뚝 떨어졌다. 한순간 아기의 두 눈이 악마의 눈처럼 시뻘겋게 변했다. 그 핏방울이 싫은지 아기가 두 눈을 깜빡였다.


눈물에 씻긴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치 핏물처럼! -저 아기는 나다! 그리고 어느 해변에 닿은 엄마와 자신이 보였다. 그렇게 서사혼도를 향해 떠난 것이다. 임산부로 위장한 엄마의 배에 숨겨져서! 주한성은 긴 호흡을 추스리며 눈을 떴다. 명문혈에서 손을 떼고 한켠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전검휘가 입을 열었다. "괜찮느냐?" 주한성은 말없이 전검휘에게 다가가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고마워, 형!" 전검휘는 말없이 주한성의 등을 두드렸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주한성이 기억을 되찾은 것을. 주한성은 감수경이 소림에 합류한 것을 떠올리고 모종의 사건이 진행된다는 것을 직감하고 자신의 비밀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 차분히 하나 하나 정리해 갈 것이다. 3 가오충(可悟忠)은 스스로를 자신조차 나이를 모를 정도로 인생을 오래 산 노인이라고 했다. 출생은 물론, 살아온 여정조차 신비에 가려졌다. 혹자는 그를 가리켜 전대의 고인이라는 사람도 있는 반면 조정에 죄를 짓고 숨어사는 현자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어느 누구도 이 노인의 학문과 인생 연륜이 바탕이 된 지혜를 의심하지 않았다. 주한성은 말없이 가오충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대금강의 명을 받고 이 노인을 찾은 것이다. 살인검의 완성! 바로 그것을 위해서였다. 가오충은 계피학발(鷄皮鶴髮), 말 그대로 노옹이었다. 검버섯과 깊게 패인 고랑 같은 주름살이 온통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어둠 속에서 살아온 귀신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도록 하는 노인이었다. 다른 곳은 다 세월의 흔적을 피할 수 없었으나 한 곳만은 세월이 비껴갔다. 길게 늘어진 주름살에 반 이상 가려진 눈빛은 맑디 맑았다. 이제 갓 사물에 호기심을 보이는 어린 아이의 눈이었다. 노인과 주한성의 눈빛은 오래도록 서로에게 고정됐다. "가 어르신입니까?" "인사가 빨라 좋구나!" "녀석, 네가 소림의 진산보물인 쇄마혼검을 지녔다고 알고 있다. 그런 놈이 갑자기 웬 도살이란 말이더냐?" "생명체를 대상으로 제 무공을 시험하고 싶습니다. 실전이 없는 무공은 허상과 같으니까요!" 삼 일 만에 수련을 마쳤다는 주한성의 말에 가오충은 믿을 수 없는지 주한성에게 시범을 보이라고 했다. 쇄마혼검이 근육을 가르는 느낌을 생생하게 감지한 것은 도착한 당일이었다. 세 번째 소를 도살하면서 터득한 감각이었다. 대략 천관(千貫)이 넘는 황소를 일격에 격살시키려면 급소를 정확히 가격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쉬운 일일까? 죽음을 직면한 소들도 필사적이다. 소는 겁이 많은 대신 행동에 탄력이 붙으면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포악하게 변한다. 그 유동체(流動體)의 급소를 포착하고 공격할 수 있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피동적으로 무공을 익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감각을 주한성은 터득한 것이다. 가오충은 흐뭇하게 웃는 주한성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


"마진(馬眞)과 대결토록 해라. 만일 내공을 사용치 않고 마진을 이긴다면 실전대결에서 너를 당할 사람은 없다. 단 내공을 사용하면 안된다." 사방이 온통 피로 뒤범벅이다. 도살한 소의 몸체에서 뽑아낸 내장이 핏더미 속에 산처럼 쌓여 있다. 소의 몸에서 뽑아낸 온갖 부산물이 발걸음마다 질척였다. 그 한가운데서 조용히, 번개처럼 움직이는 칼날과 도끼들. 백정들의 손길을 따라 고기조각이 눈송이처럼 잘려 날린다. 주한성은 그 중에서 웃통을 벗어 우람한 아랫배의 지방질을 고스란히 드러낸 사십 중반의 사내에게 다가갔다. "마진 대장이십니까?" "가 어르신이 보냈는가?" "한 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마진도 가오충의 언질을 받았는지 몸을 일으켰다. 오백 관 거구의 황소를 옴쭉달싹 못하게 옭아매는 매서운 눈동자가 전신을 훑어내렸다. 그에게 걸리면 황소도 일 각 안에 뼈와 살이 분리된다. 마진은 비록 백정이지만 칼에 대한 감각만은 세상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내공도 일류고수를 능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진의 진정 무서운 무기는 다른 것이었다. 마진은 도끼를 집어들었다. 순간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무거운 기운이 도살장 안을 감돌았다. 마진이 도끼를 들었다. 단지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다른 백정들은 몸이 굳어 버린 것이다. 마진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쇄마혼검은?" "필요 없소이다. 이 손으로 대결해 보겠소이다." "내공을 사용치 말라는 말을 들었을 것인데?" "물론이오. 적수공권으로 대적하겠소이다." 마진은 도끼를 수직으로 치켜들었다. 마진의 자세는 허점 투성이였다. 허리, 다리, 가슴, 안면 모든 곳을 공격하고 싶으면 공격할 수 있다. 그러나 주한성은 섣불리 공격하지 못했다. "주한성, 상대의 기세에 눌리면 승부는 그로서 끝이다." "고맙소이다." 쓱……. 한 발을 움직여 보았다. 도끼가 예리한 반응을 보였다. 정면에 선 주한성 이외에 다른 사람은 감지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주한성은 다시 슬며시 한 발을 내디뎌 보았다. 역시 도끼는 예리한 반응을 보였다. 그럼에도 마진의 자세는 변한 것이 없었다. 주한성은 정면으로 짓쳐들었다. "악! 미친 짓이다." 누군가의 비명이 귓전에서 부서졌다. 도끼가 형용할 수 없는 속도로 내리쳐졌다. 정수리의 머리카락이 올올이 곤두섰지만 주한성의 감각도 예리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한 발 앞으로 전진하면서 그대로 박차올랐다. 손이 도끼자루를 향해 뻗어졌다. 두 발은 연속 십이퇴를 벼락치듯 쳐올렸다. 단전, 명치, 인후혈을 짓이기는 발의 촉감, 그러나 동시에 오른 손바닥이 으스러지는 통증을 느꼈다. 한 순간 그의 손이 기묘하게 움직였다. 마치 나무를 타오르는 뱀처럼 삽시간에 도끼자루를 타오른 손은 마진의 팔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제 12 장 정무구혼 1


마진이 흠칫했다. "쇄룡금나수!" 남존 권마의 무공을 알아보는 마진, 그는 서사혼도에서 동사혼도의 인물들에게 포섭된 단광비였다. 그는 이렇게 신분을 속이고 소림의 근처인 등봉도축장 인근에 은거해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 여인의 안배에 의해서였다. 노미량은 단우의 존재를 정확히 알고 있다. 그의 무서움과 치밀함을, 소림사를 주변으로 반드시 피비린내나는 살상이 벌어질 것을! 단광비가 손목을 비틀자 마치 탈피하는 뱀처럼 스르륵 주한성의 손을 빠져나갔다. 단광비가 싱긋 웃었다. "주한성, 오늘의 그 감각을 잊지 말거라." "그 동안 고마웠소이다." "허허허!" 모든 것을 마쳤다. 소림을 떠나기 전 이제 정리할 일만 남은 셈이었다. 연무관은 그대로였다. 제갈성곤을 비롯한 일곱 명의 젊은 영재들은 여전히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주한성은 사방을 빙 둘러 보았다. 여전히 선화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주한성이 그곳으로 다가가자 선화가 그를 노려보았다. 선화는 아직도 주한성이 옆에 앉는 것을 거부했다. 선화의 눈빛은 차갑지만 눈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주한성은 턱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아름다운 소저, 그 동안 잘 지냈는가?" "칫!" "화야, 이제 그만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어떠냐?" 낭랑한 음성이 울렸다. 음성의 주인공은 이십 초반, 귀공자풍의 생김생김인데 풍기는 기운은 한 자루 예리하게 날이 선 검과 같았다. 준수한 용모와 어우러진 그 예기는 보는 사람에게 절로 감탄을 터뜨리게 했다. 혜능(惠能), 소림사에서 심혈을 기울여 양성하는 인물이었다.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촉망받는 인재는 전검휘와 혜능, 그리고 연아였다. 연아의 진전은 상상을 초월했다. 만일 그녀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혜능을 능가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한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순간 주한성은 미묘하게 웃었다. 그녀였다. 감수경! 주한성이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민문곡 노인이 들어섰다. 그의 뒤, 도복 차림의 중년인이 따라 들어오면서 여덟 사람을 쭉 훑어봤다. 민노인이 그 도인을 소개했다. "공동파의 법통을 이으실 공령자( 令子)시다. 단익제가 제의한 정사 대전이 불과 보름 남았다. 공령자께서는 바쁜 와중에도 여러분들을 위해 불원천리 달려와 주셨다. 여러분들을 적극 지원하시는 각파의 사존들께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주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정사대혈전에 대비해 오늘부터 실전 훈련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공동파의 전설은 아득한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공동파의 절기가 무림에 별로 알려진 것은 없지만 구파일방에 든 것으로 미루어 신비한 무공이 전래되어온 것은 기정사실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은 옛날 황제가 광성자(廣成子)를 찾아간 것에서 알 수 있다. 공동파의 절기 중 무림에 알려진 대표적인 것으로는 복마검법과 복마장법이 있다. 명칭에서 알 수있듯이 공동파 무공의 특징은 만마를 제압할 패기와 신랄함에 있다.


실내에 기이한 침묵이 감돌았다. 공령자는 장검을 들고 정중앙에 서 있었다. "공동파 검법의 요체를 줄여 말한다면 천류불식(川流不息)이외다. 물이 쉬지 않고 흐르듯이 공동의 검법은 면면이 이어지는 초식으로 적에게 공격할 틈을 주지 않고 한 번 승기를 잡으면 반드시 필승하는 것이오. 오늘 미천한 본인이 공동의 절기를 십중 일이나 표현할지 모르지만 여러분께 조그만 도움이라도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외다." 검이 용음을 토하며 뽑혔다. 발검 자세가 완벽했다. 검이 수평구도를 취했다. 공령자는 왼발을 비스듬히 앞으로 내 디디며 삼검을 찔렀다. 직선과 곡선이 적절히 어우러져 눈앞에 검막이 형성된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그 기이한 선의 움직임에 여덟 사람은 탄성을 질렀다. 검극이 사선을 그었다. 아니 사선을 긋던 검극은 다시 묘하게 돌아서 일곱 군데의 방위를 점하고 있었다. 검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 있는 듯했다. 검의 변화가 일목요연하게 보이는 것은 공령자가 느리게, 사람들이 검로를 볼 수 있게 천천히 시전하기 때문이었다. 공령자의 움직임은 일정한 박자를 타고 있었다. 검은 느리게 움직이면서도 극점에 다다르면 딱딱 절도있게 끊어졌다. 그때마다 유리파편같은 검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공령자의 전면에 선 주한성은 수백 개의 검편이 파고드는 느낌을 받았다. 십오검을 펼친 공령자는 서서히 검을 거두었다. 그는 여덟 사람의 기색을 살피고는 빙긋이 웃었다. "지금 빈도가 펼친 검법은 복마검법으로 본문의 장령만이 익힐 수 있는 절기외다. 일차 검로를 보여 주었으니 이제 복마검법의 본 위력을 여러분께 보여 드리겠소이다." 공령자가 일순간에 솟구쳤다. 아! 그것은 검광의 바다였다. 폭발하는 섬광이었다. 삼 장의 높이로 솟구치는 공령자가 펼치는 검법은 완전히 팔 인의 혼을 압도했다. 공령자가 펼친 검법은 화인처럼 팔 인의 뇌리에 각인됐다. 그런데, 누군가 감히 겁도 없이 그 검광을 향해 몸을 날렸다. 주한성이었다. "위험해." 선화의 다급한 외침이 울리자 검광이 일시에 사라졌다. 놀랍게도 어느새 검극은 주한성의 인중과 한 치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소협! 목숨은 둘이 아니외다." 주한성은 멋적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었다. "소협이 사대금강의 가르침을 받는 주한성 소협이시구려! 헌데 왜 갑자기 검을 향해 뛰어들었소이까?" 주한성은 말문이 막혔다. 반사적으로 일어난 행동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아마 다른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할 것이다. 특히 저 선화의 조소하는 눈길을 보면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도장의 검법이 뛰어난 것은 인정하지만 한 곳 빈틈이 있는 듯하외다. 그것을 알려 주려고 했는데 검이 없어서……." 공령자의 눈에 호기심이 담겼다. 그는 단 한 번의 시전을 보고 검법의 허점을 파악하는 기재를 발견한 기쁨에 들떴다. 처음 주한성의 조금은 이상한 눈빛을 보고 그를 논외로 했던 경박한 자신을 책하면서 그는 빙 둘러보았다. "누가 이 분 소협에게 검을 빌려 주겠소?"


주한성은 정중하게 사양했다. "도장! 가르침을 받는 마당에 어찌 검을 들고 대적하겠소?" 공령자는 웃음을 머금었다. "사부에게 복마검법을 사사받은 이후 내 검법에 허점을 말한 사람은 소협이 처음이외다. 어렵게 생각지 말고 가르침을 주시게." 공령자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선화가 허리에 찬 검을 뽑아 주한성을 향해 던졌다. 그리고는 주한성을 바라보는데 그 눈길에 서린 의미가 심상치 않았다. 너 죽어 봐라! 이런 눈빛이었다. 주한성은 빙긋이 웃었다. 이제 그 얼굴도 밉지 않았다. 그는 정무구천이 정으로 뭉쳐 있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정감있는 단체생활 속에 자신이 끼지는 못할 망정 그들을 곤란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그에게는 소중했다. 주한성이 자신을 담담한 눈길로 바라보자 오히려 약이 오른 선화가 일행을 끌고 뒤로 물러났다. 주한성은 손에 든 검을 바라보았다. 선화의 검은 한눈에 보기에도 천하명검이었다. 검신에는 싸늘한 냉광이 흘렀다. 쇄혼마검은 무게만도 근 삼백여 근이었다. 지금 손에 든 선화의 검은 무게는 어림잡아 다섯 근 정도였다. 검이라지만 주한성은 마치 종이검(紙劍)을 든 것 같았다. "주소협, 내가 삼초를 양보하겠네." 주한성은 빙긋이 웃었다. 휭휭휭! 검을 가로 세로로 그어 버렸다. "허허허! 역시 주소협은 대단하군. 겸허히 삼초의 양보를 받아들이고 또한 가볍게 삼초를 그런 식으로 펼치다니, 기상이 좋군." 공령자가 일검을 날렸다. 바로 복마검법의 절초를 펼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채 삼검을 펼치기도 전에 주한성은 공령자가 펼치는 공격의 허점을 보았다. 주한성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추릿! 검명이 날카롭게 울린 순간 검은 공령자의 미간에 닿아 있었다. 실로 무섭도록 빠른 쾌검이었고, 놀라운 반사동작이었다. 두 사람의 비무를 살피던 사람들 중 누구도 주한성의 검이 언제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지 못할 정도였다. "주소협의 가르침에 감사드리오. 조금 전 빈도의 검법에 허점이 있다는 지적을 이제 깨달았소. 그렇소. 그 동안 난 초식에 얽매였소. 가르침에 감사드리오. 무량수불!"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전 조금 전에 도인께서 시전한 복마검법을 보고 허점을 파악한 것입니다. 그럼 전 이만!" 돌아서서 학승당을 나서는 주한성을 저 멀리서 한 여인이 달려오며 불렀다. "주공자! 잠시만요!" 연아는 그린 듯이 아름답게 변해 있었다. "참으로 대단해요. 난 주공자가 당할까 봐 간이 조마조마했어요! 호호홋!" "고맙소. 그런데 어쩐 일이오? 낭군 등밀어 주려고 이렇게 달려온 것이오?" 퍽! 애고. 이 비겁한. 알갱이 뽀개지면 어쩌려고. "치사하게 도망갈 때 도와줬더니 돌아와서 인사 한마디 없다가 오늘도 그냥 가버려요? 당신이 언제부터 그렇게 도도했나요?"


"저, 그게……!" 쾅! 머리에 벼락이 떨어졌다. 지금껏 얻어맞은 것보다 최소한 두 배는 더 강한 충격이 뇌를 흔들었다. 어물어물하다가는 맞아죽기 십상이다. 삼십육계 줄행랑이 상책이다. 주한성은 뒤로 돌아서기 무섭게 냅다 달렸다. "어딜 도망가요?" 연아가 지력을 날렸다. 퍽! 지력에 격중당한 무릎이 탁 굽혀졌다. 자동으로 꿇은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미끄러지는 곳이 하필 장작더미일 건 또 뭐냐? 쾅! 눈앞에서 불이 번쩍였다. 주한성은 급히 눈을 떴다. 장작더미가 요동을 치고 있었다. 질겁한 주한성은 주위에 구르는 통나무를 집어들기 무섭게 치켜들었다. 속이 빈 장작무덤이 만들어졌다. "휴! 다행이다. 자고로 여자는 피곤한 법이야." 주한성은 편안하게 두 다리 쭉 편 상태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웬걸 매운 연기가 콧속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꾸역꾸역 연기 속에 시뻘건 불길이 너울거렸다. "애- 애- 엣- 취!" "주한성, 통 돼지 구이될래요, 나올래요?" "으아-!" 연무관을 통과한 팔 인의 기재. 그들의 출관은 정파무림의 축복이었다. 각파에서 비밀리에 사람을 파견하고 그 동안 그들을 가르친 교두들과 보광대사를 비롯한 고람과 사대금강, 그리고 오비도인과 노천악도 소림에 당도했다. 전검휘의 처소는 학승당의 바로 옆이었다. 정무구혼의 대형인 그는 이제 눈앞으로 다가온 태산 모임에 대비해 사제들을 모이도록 한 것이다. 앞에서 둔부를 살랑이며 걷는 연아를 보자니 머리카락의 일부분이 타버린 것과 손에 입은 화상의 통증이 슬슬 꼬리를 말았다. 만인에게 사랑을 받기에 충분히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 미묘한 허리의 율동을 보노라면 절로 입가에 웃음이 감돌았다. "주공자, 지워요!" "응?" "눈길을 돌리든가, 생각을 지우든가 양자택일해요." "후후후! 낭자가 먼저 뇌리에서 지운다면." "뭘?" "내 거시기." 퍽! 주한성은 그저 좋았다. 과거를 되찾은 그는 이제 더 이상 감수경에게 연연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감수경을 아주 잊은 것은 아니었다. 뭔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그의 마음은 연아에게 향해 있었다. 이렇게 맞으면서 희열을 느낄 정도로까지! 변태로 변한 것은 아닌지! 두 사람이 들어서자 정좌를 하고 있던 전검휘가 눈을 떴다. 그곳에는 그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무구혼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총 교두인 민문곡과 공령자를 포함한 구파일방의 고수, 그 외에 사대금강을 포함한 소림의 고승들도 모두 자리하고 있었다. 주한성은 그들을 향해 정중히 예를 취하고 한 켠 의자에 앉았다.


주한성은 단순하게 오늘 출진령을 내리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사람들의 안색은 하나같이 침중했다. 소림방장 고람대사가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천우사절이 태산에 오르기 전 각파에서는 할 일이 있소이다. 그 동안 구대문파는 각파에서 암약해온 첩자들을 파악하기 위해 노심초사했소. 이제 그들을 정리할 시기외다. "협요궁전보(挾腰弓箭步)를 아느냐?" 전검휘의 물음에 주한성은 고개를 저었다. 협요궁전보란 소림사의 보법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보법이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서사혼도에서 배운 사사존의 무공과 그 동안 사대금강에게 배운 무공들이 복합되어 일정한 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이 과정이 지나면 그는 완벽한 무인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모를 뿐이었다. 아니 주한성은 감수경을 의식하고 자신이 과거를 되찾았다는 것을 비밀로 한 것이다. "본디 이 일은 정무구혼의 일이다만, 부득이 너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협요궁전보를 통과하는 관문은 연무관 중에서도 핵심이다. 그곳에 교두를 가장해 소림을 노리는 첩자들이 은거하고 있다. 너는 선화와 조를 이뤄 그 일을 맡아라." "선화와?" 전검휘는 조용히 웃었다. "그녀를 우습게 보지 마라. 그녀는 장차 아미파의 대통을 이을 여인이다. 나도 그 낭자에게는 한수 양보하는 형편이다." 주한성은 싱긋 웃었다. "왜 웃죠? 나와 같이 일하기 싫은 모양이죠?" "아니, 무슨 말을? 황홀하기 그지 없소이다." "시작해요." 싸늘한 선화의 음성에는 조롱기가 다분했다. 협요궁전보의 관문을 미리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지만 애초에 그녀가 그를 놀리기 위한 관문인 것은 뻔했다. 주한성은 그것을 알고 미리 손을 써 놓은 것이다. 히히! 그래, 맘껏 웃어라. 잠시 후 엉덩이에 불이 나도 과연 비웃을 수 있을까? 주한성은 선화가 미리 바닥에 그려놓은 협요궁전보의 도해를 따라 보법을 펼치며 난감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보단평격(馬步單平擊). 이 부분이 어색하오. 낭자의 가르침을 바라오이다." 조심스런, 조금은 아부섞인 음성으로 그녀에게 청했다. "시전은 단 한 번이다." 도해 속에는 도합 다섯 군데의 함정이 설치되어 있다. 걸려들면 순식간에 다섯 개의 함정이 연쇄고리를 이뤄 작동한다. 선화가 결코 피할 수 없는 함정이다. 그런 것을 알 리 없는 선화는 미려한 자태로 양 손을 허리에 대고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협요궁전보는 소림무학의 정수 중의 정수입니다. 소림승은 물론, 정무구혼 중에서도 이 무공의 정해를 터득한 사람은 거의 없어요." 선화의 시선은 정면을 향했다. 비단 꽃신에 가려진 발 끝이 사방 종횡으로 원을 그렸다. 우아하다. 가을 바람에 하늘거리는 옷자락이 나풀거리는 소리와 소녀의 몸에서 뿜어지는 체취에 주한성은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마세(騎馬勢)에서 항마세(降魔勢)로, 곧이어 금계독립세(金鷄獨立勢), 일학충천(一鶴沖天)으로 이어졌다. 그녀의 시범은 물흐르듯 자연스럽고 고아한 풍모가 엿보였다. 솟구칠 때는 회풍을 타고 날으는


독수리처럼 안정돼고 착지할 때는 먹이를 발견한 송골매처럼 재빠르고 날카로왔다. 협요궁전보를 시전한 그녀가 동작을 멈추었다. 주한성을 바라보는 표정에는 조소 비슷한 것이 서려 있었다. 마치 당신이 한 번 봐서 뭘 알겠느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어찌된 일이지? 그녀는 왜 함정에 빠지지 않은 것인가?' 주한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면을 살폈다. 없었다. 함정을 표시한 도해가 모두 지워졌다. 선화의 짓이었다. "펼치세요." '이크!' 주한성은 떨떠름하게 웃었다. 사태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공을 드러낸다면 어디선가 그를 주시하고 있을 감수경의 눈을 피할 수 없다. 주한성은 다리를 배배 꼬았다. 마치 뒤가 마려운 사람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 왜 갑자기 생리현상이 일어나지? 아이고, 급하다 급해." 재빨리 돌아서던 주한성은 숨이 턱 막히는 충격과 함께 이전의 자리로 되돌려졌다. 선화가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하필 이럴 때 옷은 찢어지지도 않는다.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는 선화와 시선이 마주쳤다. "에고! 아침은 보리밥을 먹었단 말이다. 빨리 놓지 않으면 삼 년 썩은 보리 방구 냄새를 맡아야 할 걸?" "흥! 당신의 속셈을 모를 줄 알고?" 선화가 손을 떨쳤다. 주한성이 허공으로 붕 떴다. 땅바닥에 충돌하던 주한성은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꼭 추락하는 자리가 자신이 함정을 파 놓은 자리같았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푸욱! 촤아악! 퍽! 앞서의 소리는 손바닥에 바늘이 박히는 소리였다. 두 번째 소리는 나무에 매달아 놓은 분뇨통이 뒤엎어지면서 몸을 뒤집어 씌운 소리였다. 세 번째 소리는 돌덩이에 가격당한 얼굴이 일그러지는 소리였다. 그 뒤 두 번의 충격이 연이어졌지만 주한성은 느끼지 못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곳은 소림사의 뒷편에 흐르는 개울 속에서였다. 계절은 구월 구일 중양절을 넘어서 중순에 접어들었지만 개울물은 이가 맞부딪칠 정도로 차가왔다. 피부는 퍼렇게 질려 있었다. "크으! 이 지독한 인분냄새!" 분뇨냄새를 없애느라 점심도 굶었다. 완패다. 댕∼ 댕∼!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팔대호원이라면 소림에서도 무상의 권위를 지닌 승인들이다. 팔대호원의 수좌인 혜각(惠覺)은 장로원에서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장로원으로 달려갔다. -각파의 기재들을 받아들인 후, 소림은 피에 젖었다. 자비의 근본이었던 소림의 무공은 살상을 위주로 한 무공으로 변질됐다. 혜각, 소림은 영원히 소림으로 남아야 한다. 수석장로의 음성이 긴 여운을 남겼다. 그 음성은 이전에 북존에게 존칭을 하던 그 음성이었다. 혜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도 수석장로의 의견에 찬성이었다. 피를 원하는 자에게는 피로 돌려준다. 속세의 거친 물살이 소림을 휩쓰는 것은 혜각도 용납하지 못했다. 돌아서는 혜각을 보며 수석장로는 사이한 웃음을 머금었다. '협요궁전보를 포함한 연무관이 정무구혼의 무덤이다. 소림의 혈운을 시작으로 전 중원의 대혈겁은


시작되는 것이다. 정사를 막론한 잠마전의 혈겁은 이제 도래했다.' 선화는 연무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난 이 관문을 통과하는데 한 달이 걸렸어요. 그 당시에 난 칠십이종예 중 열 다섯 가지를 익힌 상태였어요. 자신없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세요!" "그런가? 이거야 원 겁이 나서. 하지만 돌아갈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네." 주한성은 능글맞게 대답했다. 끼이익! 연무관이 열렸다. 생각 외로 안은 밝았다. 너비 오십 평 정도의 사각진 공간은 남향으로 뚫린 창으로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들어섰다. 삼 인의 승려가 실내의 정중앙에 서 있었다. 혜각이 정중히 합장했다. "아미타불! 방장께서 특별히 본승을 비롯한 십팔나한 중 삼 인에게 시주를 도와주라고 당부하셨소. 해서." 주한성은 손을 들어 혜각의 말을 제지했다. "시작합시다." 삼 인의 승려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동시에 창문이 휘장으로 가려졌다. 칠흑 같은 어둠이 주한성과 선화를 휘감았다. "아미타불! 시작하시오." 협요궁전보의 첫걸음은 소선문정자보(小扇門丁字步)다. 왼발을 앞으로 내디디면서 허리를 틀었다. 오른발을 뱀이 수풀을 헤치듯 사선으로 내 디디며 몸의 중심을 낮추었다. 맹호은림(猛虎隱林)의 자세를 취하기 무섭게 무릎의 탄력을 빌어 일 장여를 솟구쳐 올라 백학천류(白鶴穿柳)의 수법으로 오른발로 왼발 등을 찍어 다시 오척을 솟구쳤다. 허공에서 용이 꿈틀대듯 몸을 휘돌려 방향을 전환한 후 고양이가 지면에 내려서듯 가볍게 지면에 내려섰다. "시주의 자세에는 무수한 허점이 있소이다. 협요궁전보는 소림오권을 기초로 만들어진 신법이오. 용권의 수련목적은 신(神)을 단련하고 호권은 뼈(骨)를 단련하며, 표권은 힘(力)을 단련하고 사권은 기(氣)를 단련하며, 학권은 정(精)을 단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거외다. 헌데 시주의 시범을 보아하니 위 다섯 가지 목적 중에 한 가지도 부합되는 것이 없소. 지금부터 우리 삼 인이 시주의 자세를 교정해 주겠소." 시작이란 말이지?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주한성은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노리는 부위는 하체였다. 이 기회에 적의 무공수준을 가늠해 볼 생각이었다. 퍽! 무릎이 박살나는 듯한 충격, 아마 쇠몽둥이였을 것이다. 타격은 뼛골을 사무치게 만들었다. 내력이 최상승에 도달한 자들이다. 윙! 한 번에 저승길로 인도할만한 경력이 실린 철봉이 미간을 노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피하자 밑에서부터 솟구친 철봉이 턱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주한성은 재빨리 남존의 절기였던 공수입백인을 발휘해 봉을 잡음과 동시에 쇄룡금나수를 전개해 봉을 빼앗았다. "후후! 나를 죽일 생각인 것 같소이다?" "알고 있다면 다행이고, 그렇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그들이 번개처럼 산개해 세 방향에서 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주한성은 재빨리 걸음을 옮기며 봉으로 삼악중첩을 펼쳤다.


빡! 좌측으로 쇄도(殺到)하던 승인의 인중에 봉이 작렬하며 피가 뿜어졌다. 퍽! 정면에서 달려들던 승인은 명치에 일격을 맞고 화살처럼 피를 뿜었다. 나머지 우측으로 달려들던 승인의 양 어깨의 견정혈에 철봉이 떨어졌다. "크으윽!" 삼 인의 승려가 비명을 질렀다. 허나 그들의 종적이 갑자기 사라졌다. '암습? 못된 중들이군!' 주한성은 고개를 돌렸다. 스르륵! 칼이 뽑히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단우의 졸개들인가?" "제법 추리할 줄도 아는 놈이군." 그들의 음성에는 비웃음이 실려 있었다. 그때였다. 쾅! 연무관의 정문이 산산조각 박살났다. 일시에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 사이로 한 인영이 빛살처럼 날아들었다. 빛이 순간적으로 번뜩여 일어나는 착시 현상, 그것을 노린 암습이었다. 그 순간 세 개의 칼날 역시 목을 노리고 번뜩였다. 주한성은 반 바퀴 돌았다. 예리한 칼날이 머리를 스치는 느낌은 온몸에 소름이 돋도록 만들었다. 다시 칼날이 목을 쳐왔다. 그러나 주한성은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싱긋 웃었다. 선화가 번개처럼 움직이는 것을 본 것이다. "선화, 부탁한다." 주한성이 빙글 몸을 돌렸다. 그는 마치 신룡처럼 허공을 날아 문을 부수고 암습해 오는 자를 향해 마주쳐갔다. 손에 들린 봉으로 달마삼검의 최후초식인 회천을 펼쳤다. 거대한 강기가 마치 대포알처럼 암습자의 가슴에 작렬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사삭! 절단음이 울리면서 세 줄기 붉은 혈선이 허공에 쭉 그어졌다. 아귀같이 얼굴을 찡그린 세 개의 수급이 바닥을 뒹굴고, 선화는 놀란 눈으로 주한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로를 단 일격에 처리한 주한성의 무공에 놀란 모양이었다. "이들은 잠마전 천제맹 소속인 양가보의 육합팔모창법(六合八母槍法)을 봉으로 펼쳤어요. 당신을 암습한 사람은 양가보의 보주인 것 같아요. 그가 어떻게 소림의 수석장로로 변신했는지 모르겠군요." 2 그 감각을 느낀 것은 선화가 말을 하는 바로 그때였다. 위이잉! 무언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마치 모기가 허공을 나는 듯한 미세한 소리, 그 순간 선화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녀는 아미파에 입문하기전 대륙의 남쪽 끝 해남도에 살았었다. 같은 섬이고 변경이라고, 해남도와 동영은 교류가 빈번했다. 동영(東瀛)에는 기이한 무기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동영의 무사들이 사용하는 독이었다. 그들이 독을 사용할 때 대부분 이런 소리가 난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피해욧!" 선화의 앙칼진 음성을 들으면서 주한성은 재빨리 몸을 날렸다. 그들이 섰던 자리에서 풀썩 연기가 솟구치며 순식간에 죽은 세 승려의 시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독을 이용한 공격은 연이어졌다.


그러나 그 순간 주한성은 전혀 다른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조금은 매캐한 냄새! 고개를 든 주한성은 천정에 거미줄처럼 늘어진 도화선을 보았다. 그리고 사방 팔방으로 늘어선 화약과 연결된 도화선의 마지막 부분이 맹렬히 타들어 가는 것도. 동영의 독을 쓰는 듯한 소리는 도화선이 타들어가는 것을 감추기 위한 위장이었다. "화약!" 두 사람은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 순간 협요궁전보의 관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너져내렸다. "당신같이 응큼한 사람은 처음이에요. 어둠 속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디로 손이 함부로 들어와요? 내가 당신의 연아인 줄 알았어요?" 상체를 거의 주한성에게 안기다시피 한 선화! 팔 하나를 선화의 어깨에 걸치고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주한성! 부슬 부슬! 가을비조차 구성지게 내려 먼지가 빗물로 얼룩진 두 사람의 몰골은 가관이었다. "체, 답답해 죽겠다면서 가쁘게 숨을 몰아쉰 사람이 누군데? 이대로 죽기 전에 입맞춤이라도 한 번 해보고 싶다고 조른 건 선화가 아니고 귀신 이었나?" 선화는 뾰로통해서 주한성을 노려보았다. 항시 정갈하던 그녀의 머리는 흐트러지고, 얼굴에는 먼지가 부옇게 앉아 있었다. 그것은 주한성도 마찬가지였다. 선화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녀의 관점에서 본다면 참으로 멋대가리 없는 남자였다. 그녀가 알아왔던, 그리고 그녀가 마음을 준 남자는 전혀 틀렸다. 이광혜(李廣惠)! 정무구혼 중 가장 미약한 종남파 소속이면서도 추측할 수 없는 무공과 뛰어난 학식, 겸손의 미덕까지 갖춘 사내. 태중혼약을 맺고 이제 몇 년이 지나면 혼인할 사이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와의 관계는 비밀이었다. 피식! 바람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의아해서 몸을 돌려 주한성을 바라보자 그는 출입문의 한 곳을 가리켰다.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출입문을 먼지 투성이인 두 사람은 천천히 나섰다. 저 멀리서 까까머리 승인이 그들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달려왔다. 소림의 후기지수 증 가장 촉망받는 기재인 혜능이었다. 그는 두 사람을 보더니 휴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미타불! 걱정했소이다." "그 아미타불 좀 뺄 수 없소? 매일 그 염불을 외우는 게 지겹지도 않느냔 말이오?" "하하하!" 혜능이 호쾌하게 웃었다. 그는 서슴없이 다가와 주한성의 두 손을 꽉 쥐었다. "고생하셨소. 자, 갑시다. 천우사절의 두 분께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혜능의 체온은 따스했다. 오비도인과 노천악은 여러 사람을 대동하고 소림을 방문해 있었다. 가오충으로 변장한 단광비와 마진, 그리고 이전 북존과 일전을 벌였던 고패도 부상을 회복하고 그 노웅의 여실한 풍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외에 동사혼도에서 수련한 수십 명도 함께였다. 그러나 주한성의 시선을 끄는 사람은 노미량이었다. "누나, 오랜만이야." 노미량은 잔잔하게 웃었다. 지객당의 젊은 승인이 손님접대법을 망각하고 힐끔거릴 정도로 노미량의 미모는 여전히 화사했다. 혜능 또한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시선 처리에 애를 먹고 있었다.


"당신에게 저런 누이가 있었소?" "허튼 생각하지 마시오. 전검휘의 부인이니까." 옆구리를 찔린 혜능은 움찔 놀랐다. "그래? 쩝, 아쉽군!" "왜 땡중도 장가 가고 싶소? 그럼 하나 골라 보시오. 감수경은 어떻소?" "아미타불!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무슨 아미타불? 땡중은 누나 같은 여자가 이상형이지?" 단도직입적인 말에 혜능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쏘아보는 시선에 노염이 이글거렸다. "한성아, 장난이 심하구나." 점잖게 꾸짖은 노미량은 요조숙녀처럼 혜능을 향해 돌아섰다. 또 한 사람 걸렸다. 봉의 눈 같은 아름다운 눈이 혜능을 응시하자 발갛게 상기된 혜능은 노미량을 향해 정중히 합장을 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성아가 말썽이 심하지요?" "명성이라니 부끄럽습니다. 저희 정무구혼을 위해 노고가 많은 줄 알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노미량이 정무구혼을 위해 무얼 했다는 건가?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말을 횡설수설 늘어놓은 혜능은 허둥대면서 방을 나섰다. 서둘러 물러서는 그의 뒤에 문설주가 있었다. "조심하세요!" 쾅! 문설주가 혜능의 머리에 받혀서 부르르 떨었다. 소림 무공에 머리를 석두로 단련하는 무공이 있는지 그는 전혀 아픈 표정이 아니었다. 별이 오락가락 하는 그의 눈에는 기이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황홀한 눈으로 노미량을 바라보면서 사라졌다. "재미있는 분이구나." "침 삼키지 마. 형님에게 일러 버릴 테니까!" 어이가 없는지 노미량은 픽 웃고 말았다. 주한성은 그런 노미량을 보며 시선을 돌렸다. 서사혼도에서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감수경에게 당한 후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그를 살려낸 것은 바로 이 노미량이었다. "누나, 가슴 한 번 더 만져 봐도 될까?" 노미량이 놀라 두 눈을 번쩍 떴다. "너……!" "왜? 서사혼도에서는 항상 그랬잖아?" 노미량이 덮치듯이 주한성을 끌어안았다. "한성아, 너 기억을 되찾았구나!" 주한성은 노미량의 배가 불러온 것을 보고 가슴 한곳이 뭉클해졌다. 아기를 가진 것이다. 정녕 축복받을 일이다. 주한성은 내심 전검휘의 그 틈실했던 하체를 떠올리며 짓궂게 웃었다. "신혼재미를 만끽하기도 전에 아가를 잉태했네? 축하해. 아가 이름은 나중에 내가 지어 줄께!" 오비도인은 그 요란한 웃음소리와 함께 덥석 주한성을 끌어안았다. "녀석! 몰라보게 컸구나!" 주한성은 오비도인을 향해 정중히 배사지례를 올렸다. 그는 기억을 찾은 순간부터 이전 서사혼도에서나 중원에서나 오비도인의 안배에 의해 목숨을 부지해 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사부님을 뵙니다." "허허헛! 녀석, 이제 이 늙은이를 사부라 칭하는 것을 보니 그 동안 고생이 심했던 모양이구나!" 주한성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사부의 옆에 서 있는 제갈성곤을 보고 빙긋 웃었다. 제갈성곤도 마주


웃었다. 사형제가 간단한 눈인사를 나눈 것을 본 오비도인이 물었다. "그래, 그 동안 달마삼검은 다 익혔느냐?" "아니? 그 쇄마혼검도 사부님의 작품이었습니까?" "놈, 쇄마혼검 뿐이냐? 애초에 보광에게 당부해 너를 이곳에서 수련토록 한 것도 나다.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까 네놈을 가르치는 것이 만만치 않더구나. 해서 염불이나 외는 늙은 땡중의 손을 빌렸지!" "아미타불! 그래, 땡중의 손에 큰 제자의 모습이 어떠하오이까?" 온화한 음성이 들리면서 보광이 들어섰다. 그 뒤를 따라 민문곡, 공령자와 구파일방의 고수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그 중에는 전대 신룡문주 정관효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량수불! 그래 땡초가 공치사를 듣고 싶은 게요?" 분분이 인사말이 오갔다. 잠시 소란한 장내는 보광의 묵직한 음성이 들리자 조용해졌다. "자! 약속 날자가 칠 일 남았소이다. 약속 시간에 당도하려면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할 거외다. 오비도인이 제자와 회포를 풀고 난 후 출정식을 가집시다." 사람들이 오비도인을 향해 작별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갔다. 제갈성곤도 전검휘와 의논할 일이 있다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는 방문을 나서기 전 주한성의 귀에 속삭였다. "사제, 오늘 저녁에 오랜만에 술 한잔 하는 게 어떤가?" "좋습니다. 생각만 해도 벌써 취하는 것 같습니다. 소림사는 다 좋은데 거 술을 먹을 수 없는 것이 흠이지요!" 그의 말에 제갈성곤은 흡족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오비도인은 한동안 주한성을 바라보더니 나직히 입을 열었다. "지금 모든 것을 다 말해 줄 생각이었다만, 아직은 모르는 것이 나을 것 같구나. 한성아, 내가 당부할 말은 하나다. 무영문의 앞날이 네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오비도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품안에서 한 권의 서책을 꺼내 주한성에게 건넸다. "그 동안 네가 수련한 것은 무영문의 절기를 수련하기 위한 준비과정에 불과했다. 이 책자는 무영문의 무공을 수록해 놓았다. 또한 책의 말미에는 신룡문과 구파일방의 무공, 또한 마도의 무공을 총정리해 그 동안 사부가 연구한 것을 기록해 놓았다." 주한성은 책자를 받아 품안에 넣었다. 그러면서도 오늘따라 사부가 진중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더구나 무영문의 절기를 직접 전수하지 않고 책자로 건넨 것은 모종의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사부는 이제 연로해 올해를 넘기기 힘들 것 같구나. 한성아, 만일 내가 죽으면 넌 삼 년 상을 치룬다고 각처에 연락한 후, 무영문을 폐쇄한 후 삼 년 동안 무공을 수련토록 하라."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이번에 천우사절은 잠마전의 전주와 일전을 벌이기로 했다. 그 동안 우리 천우사절도 부단히 무공을 수련했지만 잠마전의 전주는 결코 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내가 너에게 삼 년 상을 치르라는 뜻은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뜻이다." "제자로서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허허! 내 말하지 않더냐? 무영문의 앞날은 네게 달렸다. 내 말을 명심하고 그만 가 보거라!" "무영문은 제갈성곤이면 충분합니다. 사형이라면 능히 무영문을 잘 이끌 수 있습니다." 오비도인은 고개를 저었다. "내 이미 제갈성곤에게 말해 놓았느니라. 그 아이는 하고저 하는 노력은 칭찬할만 하다만 일문의 문주를 맡을 인물은 아니니라. 그리 알고 이만 물러가도록 하거라!" 3 "흥! 자기가 무슨 대단한 존재라고." 연아는 생각할 수록 약이 올랐다. 주한성은 노미량과 오비도인을 보자 그녀는 뒷전이었다. 더욱이


이전에 한바탕 드잡이질을 벌인 선화라는 계집과 희희낙락 껴안고 협요궁전보의 관문을 내려오던 광경이라니! 더구나 오늘 주한성의 사부인 오비도인을 처음 뵙기 위해 감춰둔 사향을 가볍게 뿌리고 출정식에 참가했거늘, 그것이 사건의 시발이었다. -어라? 네가 다가오니까 갑자기 퀴퀴한 냄새가 난다. 시집 갈 나이가 다가오니까 남자를 꼬시려 발악을 하나 본데? "불한당 같은 작자, 유식이라는 단어하고는 담을 쌓은 놈." 망신은 어차피 당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장차 시아버지가 될 노천악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연아는 구원의 눈빛으로 민문곡을 바라보았었다. 그러나 민문곡은 오히려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터뜨렸다. 문제는 오늘 그 자리에는 각파의 장문인들과 무림명숙들이 모두 모여있었다는 점이다. 강호가 어떤 곳인가? 하루아침에 파다하게 소문이 도는 곳이다. 눈앞이 아찔했다. 조금 전까지 천향선미(天香仙美)로 칭송받던 미명은 내일 아침에는 시궁창에 뒹굴게 될 것이다. 연아는 얼굴을 가리고 그 자리를 뛰쳐 나왔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거처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흥! 좋다, 주한성. 감히 나를 놀렸겠다." 욕을 한들 사형인 제갈성곤과 한잔 거나하게 걸치러 간 주한성에게 들릴 리 만무다. 연아는 답답함을 풀기 위해 창가로 다가가 휘장을 걷었다. "어마! 어쩜!" 조금 전까지 내리던 비가 그치고 서쪽 하늘에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그때, "연아, 방에 있어?" 영롱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감수경이었다. 연아는 얼른 문을 열었다. 화사한 웃음을 머금은 감수경이 한 손에 비단옷을 들고 서 있었다. 연아는 감수경의 웃음을 좋아했다. 학처럼 고고하면서도 타인에게는 냉정한 여인이 그녀에게만은 친절하고 다정다감했던 것이다. "언니군요. 들어오세요!" 제 13 장 배반의 시작 1 감수경은 방안에 들어서자 먼저 비단옷을 내밀었다. "연무를 마친 기념 선물이야! 잘 어울릴지 모르겠네?" 연아가 놀란 얼굴로 감수경을 바라보았다. 신룡문에 입문한 후 그녀는 의복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미색 비단으로 만든 고급옷을 대하자 가슴이 설렌 것이다. "어서! 이 언니 팔 떨어지겠다." "고마워요, 언니!" 옷을 갈아입은 연아의 용모는 가히 천상의 선녀였다. 자신의 미모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감수경마저 탄복할 정도였다. "아무리 옷이 날개라지만 어쩜, 하늘의 선녀가 하강한 것 같아! 자, 거울을 한 번 봐, 내 말이 거짓인가?" 자신이 보아도 예뻤다. 잠시 거울에 비친 모습을 취하듯이 바라보던 연아는 감수경의 손을 잡아끌었다. "언니, 우리 무지개 구경해요!" 발걸음이 파생시킨 몸의 움직임이 요요롭다. 미색 비단에 가려진 둔부가 미묘한 선을, 그리고 가볍게 상하로 요동하는 풍만한 젖가슴의 움직임에 어깨 또한 가볍게 출렁인다. 감수경은 힐끔힐끔 연아의 몸매를 감탄어린 눈길로 살폈다.


"햐아!" 밖으로 나선 연아는 탄성을 발했다. 정원에 국화가 만발했다. 갖가지 나무들이 단풍으로 치장하고 저마다 자태를 뽐냈다. 화단 한 귀퉁이에 놓인 볼품없던 돌덩이도 낙엽을 얹자 그럴 듯한 풍취를 풍겼다. 바람이 불자 낙엽이 바닥에 떨어진다. 연아는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오색 영롱한 무지개가 시선을 파고들었다. 취한 듯한 눈으로 오색 무지개를 바라보던 연아의 두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갑자기 왼쪽 측면에서 기이한 빛이 번뜩인 것이다. 그것은 말로 형용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고 현란했다. 수만 송이의 눈송이가 일제히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암습!' 연아는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녀는 늑대를 피하다가 호랑이를 만난 격이었다. 여자처럼 곱고 아름다운 사내가 빙긋이 웃으며 서 있었던 것이다. 단우였다. 그리고 그 옆에 인자한 웃음을 머금고 서 있는 사람은 북존이었다. 순간, 연아는 절망을 보았다. 저 북존이라는 사람, 자신이 결코 넘을 수 없는 무학을 지닌 절대고수의 풍모가 여실했다. 연아는 검을 잡았다. "아하! 칼부림을 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오. 난 당신의 미명을 듣고 확인하러 온 것이요. 역시 소문이 사실이었구려! 하늘의 선녀가 하강한 것 같이 아름답소이다." 느물거리는 단우, 연아가 눈꼬리를 곤두세웠다. "웬 놈이냐?" 단우는 빙긋이 웃었다. 순간 북존의 손이 허공을 그었다. 연아 역시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채 검이 검집을 빠져나오기도 전에 연아는 마혈이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간신히 눈동자를 돌린 연아는 요염하게 웃고 있는 감수경을 발견했다. 설마? 저 여인이? 그때 그림자가 분리되듯 감수경의 뒤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제갈성곤이었다. '배반이다. 저들이 배반한 것이다.' 그녀의 생각을 확인시키듯이 제갈성곤이 말했다. "후후후! 이렇게 쉽게 너를 제압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제갈성곤! 당신이 왜…… 나를……!" 단우가 연아의 수혈을 제압하며 나직이 말했다. "난 선녀 같은 아가씨를 보면 사랑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거든. 낭자가 주한성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오랫 동안 궁리를 했지. 어떻게 당신을 만족시켜 줄까하고." 감수경의 안내를 받은 세 사람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같은 방법으로 다른 한 여인도 단우와 감수경에 의해 제압, 납치 당했다. 오늘 소림에는 각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승려들은 단우와 북존 역시 손님이라고 생각했다. 잠마전이 이렇게 대담하게 손을 쓸 줄은 몰랐던 것이다. 또한 두 사람을 안내한 것은 감수경과 제갈성곤이었다. 소림사의 승려들은 단우와 북존을 감수경과 제갈성곤의 지인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 시간에 주한성은 등봉현의 기루에 있었다. 한 잔 걸치자는 제갈성곤이 사라진 후 주한성은 입을 헤벌쭉 벌리고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주한성의 시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히히히! 아주 좋아. 설매, 너도 좋으냐?" 설매, 기녀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무엇이 좋다는 것인가? 술맛? 아니면 경치? 아니다. 손 가득 느껴지는 몽실거리는 유방의


감촉이 좋은 것이다. 몸을 밀착한 여인의 몸에서 풍겨오는 육향이 좋은 것이다. 젖가슴의 절반을 주한성의 손에 쥐어준 설매는 교태롭게 몸을 꼬았다.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몇 개 나지도 않은, 자칭 용의 수염이라는 주한성의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코먹은 소리로 맹맹거렸다. "이 정도가 뭐가 좋아요? 진짜 재미는 따로 있는데." 설매는 은근슬쩍 우연을 가장해 손으로 그곳을 툭 쳤다. 손에 전달되는 느낌이 묵직했다. 아니 그곳은 한 번의 손장난에 그야말로 등천하는 천룡처럼 불룩 솟구쳤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곳만은 진짜 용이었다. "어쩜! 대단한 무기를 소지하고 있군요?" 설매는 탄성을 발했다. 탐욕스런 눈으로 눈앞의 먹이감을 훑어내렸다. 오관은 큼직하면서도 나름대로 조화를 이뤄 호쾌한 기상을 풍겼다. 단지 약간 바보 같은 표정과 흐리멍텅한 눈빛만이 흠이었다. 그 외 특이한 점은 없다. 그러나 수많은 사내를 경험한 설매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주한성의 눈빛은 겉으로는 색욕이 번들거린다. 그러나 설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 사내의 눈은 마치 억겁의 세월 동안 고여 있는 늪처럼 내심을 짐작할 수 없었다. "악!" 설매가 돌연 숨넘어가는 교성을 터뜨렸다. 발딱 돌기한 유두가 팽그르 꼬이면서 파생된 짜릿한 쾌감이 전류처럼 전신을 관통한 것이다. 젖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탱탱해졌다. "히히! 이것 봐라. 여자도 발기하네?" 주한성의 손놀림은 돌연 열기를 띠었다. 탱탱히 굳은 유방을 가볍게 누르는가 하면 쥐어짜듯이 움켜쥐고 아프단 생각이 들기 무섭게 빙글 돌려 애무한다. 그 후 두 손가락으로 유두를 이빨처럼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그때마다 전혀 새로운 쾌감이 밀물처럼 전신으로 퍼졌다. 설매는 믿을 수가 없었다. 수많은 사내를 거친 몸이다. 유방을 희롱하는 가벼운 손놀림에 달아오를 몸이 아니었다. 그러나 달아오르지 않는가? 그것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뻐근할 정도로 딱딱하게 굳은 젖가슴을, 주한성이 부드럽게 애무하면 다시 풀리고 거칠게 자극하면 전보다 더욱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하아! 무공을 수련했다더니 순 여자 다루는 비법만을 연구했나 봐?" 설매의 입에서 달뜬 교성이 터져나왔다. 언제 주한성의 무릎에 올라탓을까? 설매는 잡아먹을 듯이 주한성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옷을 입은 채로 서서히 요동질을 치기 시작했다. 주한성은 허리를 묘하게 틀었다. 그러자 묵직한 것이 설매의 거웃에 닿았다. 마치 옷이라도 뚫을 듯이 그것은 요동질쳤다. "하아!" 아! 그 소유할 수 없는 애닯음이여! 야속한 옷자락이여! 설매는 미친 듯이 몸을 놀렸다. 그러나 송곳이 아닌 이상 어찌 인간의 살이 옷을 뚫을 것인가? 설매는 참다못해 주한성의 옷가지를 들추고 손을 쑥 밀어넣었다. 세상에! 반 정도나 손에 잡혔을까? 육모방망이보다 더 큰 것 같다. 그녀는 경악한 눈으로 주한성을 바라보았다. 주한성은 짓궂게 웃으면서 물었다. "되겠어?" 설매는 고개를 잘래잘래 저었다. "도저히. 욕심은 나지만 폐업하고 싶지는 않아요." "어쩔 수 없지. 그럼 기분이나 내봐." 설매는 다시 몸을 놀렸다. 팽창할 대로 팽창한 그것은 거목같았다. 질려 버린 설매는 그냥 형식적으로 몸을 놀렸다. 그러나 거웃에 닿는 묵직한 촉감에 이내 몸이


달아올랐다. "세상에, 장가는 갈 수 있겠어요?" "짚신도 짝이 있겠지." "짚신을 찾는 것보다 틈실한 암소를 찾는 게 빠를 걸요?" 주한성은 헤벌쭉 웃었다. 그의 멍청한 시선은 맞은편 건물의 꼭대기에서 반각 동안 자신을 주시하는 인물에게 돌려졌다. 꼼짝도 하지 않던 인영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선 자리에서는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하체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야행객은 틀림없이 두 사람이 정사를 치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부분은 보이질 않는다. 그것이 훔쳐보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 감질나는 법이다. 주한성은 멍청한 척 실없이 웃으면서 야행객의 행실을 추측해보았다. 짐작컨데 놈이 사내라면 놈의 눈은 색광으로 이글거리고 손으로는 그곳을 꾹 움켜쥐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라면? 모르지. 주한성은 혀를 쭉 내밀었다. "으으으! 설매, 죽인다. 너야말로 명기 중의 명기다." 주한성의 때아닌 감창(?)이 설야에 울려퍼졌다. '아마 후끈 달아올랐을 걸?' 그의 짐작이 맞았는지 야행객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주한성은 가만히 설매를 들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아직도 육모방망이 같은 그것을 움켜쥐고 있었다. "한 번만 보여 줘요. 네?" "아서라. 밤에 잠 못 자." "상관없어요. 딱 한 번만 봐요." "후회할 텐데?" 설매는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저었다. 보고 싶었다. 도대체 얼마나 큰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설사 남은 평생을 그것만을 그리며 산다해도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더욱 잠못 이룰 것 같았다. 그리고 설매는 보았고, 까무라쳤다. "세상에……. 꼬로록!" 이백 평의 내부는 화려했다. 가구는 물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금(金)으로 이루어졌다. 마치 황금궁전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단우는 사방 스무 자의 거대한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금으로 제작된 본체와 촘촘이 장식된 장신구는 금강석을 비롯 홍옥, 비취 등으로 치장되어 황상의 용상보다 화려했다. 이 처소를 꾸미면서 단우는 추노인에게 황제의 처소와 똑같이 꾸미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이전 궁중의 태감이었던 추노인 추곽(秋廓)을 총관의 우두머리로 삼아 황제가 된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지금 그의 발을 씻기는 여인들은 궁녀복장을 하고 있었고, 태사의의 양 옆으로는 단우의 말을 기록하는 사관이 책상에 두툼한 종이를 놓고 단우의 입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모든 것에 소용되는 경비가 금화로 수만 냥을 넘을 것이지만 단우에게 있어서는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했다. 야행인은 바로 단우가 밀파한 자였던 것이다. "그래! 주한성이 기녀와 어울리고 있다고?" 야행인을 뒤쫓아 와 은밀한 곳에 몸을 숨긴 주한성은 소리없이 웃었다. 야행인이 단우의 처소로 데려다 줄 것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 외로 이렇게 단우를 만나게 된 것이다. 살심이 파랗게 타올랐다. 살기가 심장으로 심장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독사의 독처럼 심장을 아프게 자극해 열화 같은 불꽃으로 타올랐다.


단숨에라도 칼을 뽑고 싶지만 주한성은 일단 숨을 골랐다. 저들이 자신을 염탐한 것으로 미루어 단우와 감수경은 오래 전부터 이 일을 계획한 것이 분명했다. "그래요." 주한성이 익히 아는 목소리였다. '감수경이다. 역시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것이군. 한 때나마 그녀가 개과천선한 줄 알고 방치했었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천우사절과 함께 약속장소로 향했어요!" 발을 씻기는 여인들의 손길이 간지러운지, 아니면 감수경의 보고가 흡족한지 단우는 빙긋이 웃었다. "모든 게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군." 말을 하던 단우가 고개를 돌려 주한성이 은신한 곳을 노려보았다. "추태감, 밖에 손님이 오셨다. 가서 모셔오너라." 추노인은 어리벙벙한 얼굴로 단우를 바라보다가 이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큰 소리로 외쳤다. "침입자가 있다. 천라지망을 펼쳐라." 그 순간 추노인은 눈을 부릅떴다. 주한성이 턱 나타난 것이다. "추노인, 그 동안 잘 있으셨소?" 질겁을 하도록 놀란 추노인은 기다시피 얼른 단우의 뒤로 도주했다. "하하! 다시 만나는군. 이전에는 내 아내를 데리고 도주하더니,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이렇게 화급하게 달려오다니!" 단우가 비아냥거렸다. 그는 아직 주한성이 과거 기억을 되살린 것을 모르고 있었다. 주한성은 단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단우, 언제까지 나를 우롱할 생각인가?" 의외의 말이었다. "오호라. 이제 과거 기억을 되찾은 모양이군! 그래, 서사혼도의 기억을 되살렸다면 이제 저 감수경이 네 여자란 것도 알겠구나." "악연은 일찍 정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넌 어떤가?" "도전이라면 언제든 환영한다. 그 동안 네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궁금하거든! 하지만 일단은 차라도 한 잔 하는 게 어떤가?" 주한성은 단우의 바로 코앞에 의자를 당겨 앉았다. 복면을 벗지도 못하고 있는 감수경을 본 단우는 혀를 쯧쯧 찼다. "수경, 복면을 벗어라. 그를 보기가 두려운가?" 감수경은 당혹스러웠다. 그 동안 주한성을 속였다고 생각한 일들이 자신은 벌거벗은 채 남의 옷차림을 흉본 것 같았다. 치욕감에 감수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는 역시 대단한 여자였다. 얼굴에 쓴 가면을 벗고 주한성을 향해 요염하게 웃었다. 주한성은 가늘게 눈을 좁혀 감수경을 바라보다 품안에서 조그만 금덩이를 꺼내 단우 앞에 던졌다. 그의 얼굴에는 비릿한 조소가 담겼다. "금이다. 남자가 아내를 적의 심장부에 밀파할 정도로 자금이 달려서야 어디 큰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열 냥이군. 열 냥이면 열 식구가 일 년은 호의호식할 수 있는데 과거의 여인을 위해서 무리한 것 아닌가?" "그녀만을 위한 것은 아니지!" "그럼?" "자네 몫까지일세." "이해할 수 없군."


주한성의 두 눈에 혈선이 서서히 그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필사적으로 이를 물어 심중의 분노를 삭였다. 흥분하면 당한다. 그는 누구보다 단우의 냉철함을 잘 알고 있었다. "몇 년 전 내가 무공을 수련하느라 어머니는 몹시 적적한 상황이었지. 남자를 구하실 생각이었나 본데, 소문이란 두려운 것이거든. 그때 마침 자네가 내 어머니에게 접근하더군. 지금 그 대가를 치른 것일세." "하하핫!" 단우가 커다랗게 웃었다. "고패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어? 외상값을 갚겠다? 좋아, 받지!" 단우가 금을 품안에 넣자 주한성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다른 것을 계산할 차례인 것 같군. 어머니의 손가락과 혀, 그리고 그 분의 나머지 일생, 자네는 어떻게 지불할 생각인가?" 단우는 빙긋이 웃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번지는 웃음은 사람의 가슴을 설레게 할 정도였다. 그는 그렇게 웃으면서 주한성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급할 것 뭐 있나? 앉게. 난 아직 자네에게 못다 받은 빚이 남았거든." 주한성의 얼굴에 싸늘한 웃음이 떠올랐다. "청구해 봐!" "먼저, 자네는 저 여인을 어떻게 생각하나? 가격으로 치면 얼마를 주겠는가?" "후안무치한 인간이군. 아내의 몸값을 흥정하다니!" "아내라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저 여자가 어떻게 내 아낸가? 자네가 버린 것을, 아니지. 이럴 때는 망실(亡失)이라고 해야지? 아무튼 자네가 버리고 간 것을 내가 잠시 보관하고 있었을 뿐이네. 이제는 돌려줄 생각인데 양육비가 꽤 되거든?" 감수경이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그녀는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오래 전부터 자신을 바라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충격적인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래, 나를 버리겠단 말이지? 멍청한 단우, 넌 결국 네 인생을 네 스스로 파멸시키고 있다. 아직은 그것을 모르겠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감수경은 짐짓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당신……? 어떻게 그런 말을?" 씨익 웃는 단우의 얼굴이 섬뜩했다. "감수경, 꿈도 야무지게 꾸고 있었구나. 말 그대로다. 어떠냐, 주한성? 감수경을 돌려줄까? 만일 그녀를 가져간다면 널 살려 줄 용의도 있다. 옛날처럼 둘이 껴안고 감동적인 해후를 해야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감수경은 어찌 되었든 자신과 연관이 있는 여인이다. 단우가 그녀를 등한히 하는 이유는 뻔했다. 남의 손을 탄 여인을 거둘 정도로 그가 후덕하지는 않았다. 결국 자신이 한 여인의 일생을 망친 것이다. 감수경에 대한 연민이 일었지만 지금은 내색할 단계가 아니었다. "흥미없어." "왜? 내가 품어서?" "이전에 말하지 않았나? 그녀는 도화안을 지니고 있다고. 난 굳이 여자 때문에 내 행동에 제약을 받기는 싫다네." "그럼 연아도 흥미가 없겠군." 주한성의 눈썹이 곤두섰다. "연아? 무슨 소리냐?" "후후후! 말 그대로야. 이전에 자네가 날 위해 고생했는데 그냥 묵과할 수 있나? 자네가 수경이한테 한 그대로 사내맛을 알게 해 줬지. 다음에 자네를 만나면 고분고분해질 것이네." "네가 그녀를 납치했다는 말인가?" "당연한 것을 묻는군. 나도 인간인데 불문 성지인 소림사에서 추잡스런 짓을 할 수는 없지. 믿기지


않는 모양이군. 불러서 확인시켜 줄까?" "납치한 것은 사실인 모양이군. 허나 네가 그 여인을 납치했다고 해도 그녀에게 패악을 부리진 못했을 거다." "뭐?" "그녀는 천우사절을 위협하기 위한 인질이었겠지. 그것도 네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런 제안을 했겠지. 그녀가 치욕을 당하고 살아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아. 그녀는 지금쯤 태산을 향해 이동하고 있을 걸?" "하하핫! 기억을 되찾더니 더욱 영리해졌군. 그러나 늦었어. 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고, 며칠 후면 천우사절은 목숨을 잃어. 이것은 이미 정해진 사실이야. 그 뒤 네 여인은 모두 내 노리개가 되는 거다." "잠마전이 아무리 강하다해도 절대 천우사절을 이길 수 없어." "천우사절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군. 그러나 그들도 결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유를 말해 주겠나?" "후후! 누군가 천우사절을 배반하게 되어 있다. 그는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사람이지. 오비도인은 물론 누구도 그 음모를 벗어날 수 없어!" 도대체 어떤 음모가 펼쳐지고 있는 것인가? 단우가 그것을 말해 줄 리는 없다. 그럼 자신을 미행한 것은? 그것이었군. 첫번째 음모가 실패할 경우 제 이의 복안으로 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를 이곳으로 유인한 것도 결국은 인질로 삼아 천우사절을 제약하겠다는 뜻이다. 넌 아직도 나를 이전 서사혼도의 그 어린 주한성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만! "이 정도 푸념을 들어 주었으면 저승에 가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가? 아직도 할 말이 남았나?" 단우가 씨익 웃었다. "급해졌군." "이럴 때는 추진력이 좋다고 하는 거다." "좋아! 추노인." 단우의 부름에 추노인이 얼른 부복했다. "명하십시오." "네가 주한성에게 이를 갈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어떠냐? 그와 한 수 겨뤄 보겠느냐?" 추노인이 당황해 화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공자를 보위하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바삐 말한 추노인, 그러나 단우는 고개를 저었다. "해봐!" 추노인은 변명해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고개를 돌려 주한성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놈, 어서 공자께 무릎을 꿇지 못하겠느냐?" 주한성은 불쌍하다는 듯이 추노인을 노려보았다. "영악한 개가 늙으면 주인을 몰라 본다더니, 당신이 그런 꼴이군. 과거에는 북존에게 아부를 해 한목숨 부지하더니, 이제는 북존을 버리고 단우란 말인가?" "이…… 이놈이 무슨 헛소리를?" 한 걸음 내디뎌 주한성 앞에 당도한 추노인은 늙고 볼품없는 주먹으로 주한성의 가슴을 공격해 왔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단우가 부채를 꺼내 촤라락 부치자 추노인은 갑자기 한 줄기 경풍이 등 뒤 한 가운데를 통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추노인은 그 알 수 없는 힘에 왼손을 힘차게 내질렀다. 빡!


추곽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말짱했다. '어라? 이게 뭐야? 무공도 별거 아니잖아?' 기세등등해진 추노인은 묵사발을 내겠다는 듯이 주한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것이 실수였다. 겁없이 달려들던 추노인은 단 한방에 단우의 발 밑으로 벌렁 나가 떨어졌다. "왜? 안돼?" 단우의 물음에 추노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합니다. 조금 전에는 분명히 됐었는데!" 단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추곽을 통해 시험해 본 주한성의 무공은 별로였다. 섭선을 쥔 손이 슬며시 방향을 틀었다. 주한성은 긴장했다. 단우가 무기로 사용하는 부챗살은 상어뼈로 만든 것이다. 어떤 장치가 되어 있는지 기척도 없이 발출되는 부챗살은 그 빠르기가 섬전 같아서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서사혼도 수백 명이 이 부채에 죽어갔다. 주한성이 긴장하자 단우는 싱긋 웃었다. 비스듬히 미간을 겨눈 섭선이 미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항시 네 정체가 궁금했었다. 넌 좀 특이했거든. 서사혼도에서도 항시 위험은 너를 비껴갔단 말이야. 운이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넌 특이한 신체를 지닌 놈이야. 그래서 너를 살리기 위해 사람들이 애를 쓴 거겠지." 슈액! 섭선이 공기를 찢었다. 주한성이 허깨비처럼 뒤로 쭉 물러났다. 단순하게 뒤로 물러서는 것 같지만 단숨에 다섯 방위를 옮기면서 좌우로 휘돌고 상하로 꺾이며 치솟았다. 변위보, 노천악의 절기가 펼쳐진 것이다. 이 기이한 보법에 놀란 단우는 얼른 공격을 회수하며 뒤로 물러섰다. "역시 한 수 감추고 있었구나." 말과 함께 단우가 맹수가 도약하듯 허공으로 솟구쳤다. 섭선은 사라지고, 양손이 번개처럼 번뜩였다. 버번쩍! 차돌처럼 단단하게 뭉친 장력이 주한성을 향해 쏘아갔다. "혼세일원장(混世一圓掌)!" 감수경이 놀라 외쳤다. 혼세일원장은 중원 무림에서 손꼽는 삼대장공 중의 하나로 과거 사사존의 일원이었던 남존 권마의 절기다. 남존조차 주한성에게 내공 중 이할을 전수한 뒤에는 내공이 달려 펼치지 못한 절대적인 무공이다. 차돌처럼 단단하게 뭉친 백광은 극양(極陽)기운을 띤 강기( 氣)여서 가로막는 모든 것을 태워 버렸다. 고오오오! 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초열지옥에 든 것처럼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근처에 서 있는 사람들은 금새 땀에 젖어 버렸다. 그러나 놀람은 시작에 불과했다. 주한성은 태연했다. 태산처럼 우뚝 서서 침착하게 양손을 놀렸다. 코앞까지 다가온 단우의 공격에 땀방울이 비오듯 흐르건만 내공을 극성으로 운용하며 상하로 나눈 양손을 풍차처럼 맹렬하게 휘돌려 내쳤다. 감수경은 몸서리쳤다. 저 돌개바람처럼 무섭게 회전하는 장력은 천하를 석권하고 있는 신룡문의 풍뢰장(風雷掌)이었다. 역시 삼대장력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녀는 오늘로써 주한성이 이전보다 더욱 강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에게 내력을 잃은 후 다시는 재기할 수 없으리라 여겼는데 불사신처럼 되살아난 것이다. '속았다. 그 동안 저 사람은 철저하게 주변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 퍼버벅, 펑! 허공에 뜬 단우가 벽에 부딪친 듯 지면에 내려섰다.


주한성의 양 어깨도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얼굴은 술취한 사람처럼 붉어져 있었다. "넌 신룡문 출신인가?" "천만에." "그래? 그럼 신룡문이 어려움에 처해 무공도 내다 파는 모양이지? 그렇지 않다면 신룡문에서 삼대금룡(三大金龍)만이 익힐 수 있는 풍뢰장을 아무런 연관이 없는 네가 펼칠 수는 없을 터인데?" "지금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단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가 허리에 찬 요대를 가볍게 누르자 챙 소리와 함께 한 자루 연검이 튀어나왔다. "끝장을 내자!" 주한성도 희미하게 웃었다. "바라던 바다." 그는 진중하게 쇄마혼검을 잡았다. 주한성이 지금껏 본 무공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사부인 오비도인의 분광검과 소림의 달마삼검이었다. 처음 오비도인의 분광검을 보았을 때 그는 그 깨끗하고 첨예한 검법에 반해 분광검의 수련에 몰두했다. 발검에서부터 적의 미간에 한 점을 찍기까지 무수한 선을 그리면서, 적을 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분광검(分光劍)! 그는 아직 한 번도 분광검을 펼쳐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있었다. 쇄마혼검을 꽉 움켜쥔 주한성은 마음 속으로 단우의 미간을 향해 곧게 한 선을 그었다. 장내에 숨죽일 듯한 긴장감이 흘렀다. 한 사람이 한 걸음을 내디디면서 긴장감은 산산이 부서졌다. 단우였다. 스스슥! 그는 귀영처럼 움직였다. 그러나 그가 쥔 연검에서 뻗어나온 검기는 상리(常理)를 벗어나 산악을 자를 정도로 무겁고 장중했다. 츄아악! 대기를 가르며 둔중한 위력을 담은 연검은 주한성을 양단할 듯 내리쳐졌다. 검자루를 쥔 주한성의 오른손 장포자락이 부풀어올랐다. 스팟! 백색 빛줄기는 곧장 단우의 미간을 향해 섬단을 그었다. 차자장! 일격을 교환한 두 사람의 간격이 급속히 좁혀들면서 한순간 교차했다. 까가가강! 대전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흔들렸다. 공격이 부딪칠 때 주한성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압박감을 받았다. 단우의 내공은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 담겨 있었다. 주한성은 주르륵 일 장여를 밀려났다. 등이 벽에 닿았다. 반면 단우도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가 펼친 연검에는 잠마전의 독보적인 내공심법인 단혼벽(斷魂壁)이 실려 있었다. 단혼벽은 강기를 펼치는 무공으로 검로(劍路)에 놓인 모든 물체를 산산조각으로 부숴 버리곤 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전혀 틀렸다. 주한성이 들고 있는 쇄마혼검은 말짱한 반면 오히려 단우의 연검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그 때문에 단혼벽은 다 발산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내부에 강한 충격을 입힌 것이다. 차력사(借力士)가 격파에 실패하면 불구가 되는 것과 흡사한 이치였다.


단우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주한성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단우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한 올의 힘만 있다면. 한 올의 진기를 모을 수만 있다면. 단우를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주한성 역시 움직일 수 없었다. 단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단우를 노려볼 뿐이었다. 사관은 덜덜 떨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추노인은 바삐 머리를 굴렸다. 지금이 주한성을 죽일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눈을 부릅뜬 주한성의 모습이 너무도 공포스러워 몸이 생각을 따라 주지 않았다. 감수경은 냉정히 생각했다. 주한성을 제압할 사람은 그녀 뿐이었다. 감수경은 천천히 주한성을 향해 다가갔다. 채앵! 검이 날카롭게 뽑혔다. 검극을 쳐든 그녀의 얼굴에 서릿발같은 기운이 감돌았다. "미안해요!" 그녀는 정말 미안했다. 이 사람을 이렇게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직은 단우를 포기할 수 없다. 단우는 이용가치가 아직 많다. 최후의 순간까지는 그를 손아귀에 쥐고 있어야 한다. 그녀가 지모가 뛰어나고 영리해도 역시 평범한 사람들처럼 타인보다는 자신이 중요하다. 파앗! 검날이 목을 쳐왔다. 주한성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생각인가가 머리 속을 스쳐갔다. 주한성은 고개를 젖혔다. 그리고 검날을 향해 입을 벌렸다. 따당! 이빨이 모조리 흔들렸다. 공수입백인의 수법을 응용해 검날을 이빨로 물어 버린 것이다. 그 고통에 몸이 푸르르 떨며 깨어났다. 주한성은 검을 뱉아냄과 동시에 바람처럼 접근해 감수경의 양쪽 견정혈을 짚으며 어깨로 사정없이 들이받았다. 감수경이 검을 놓치고 비명과 함께 허공을 훨훨 날았다. 주한성이 그 검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쇄마혼검을 쓰기에는 힘이 달렸다. 휘리링! 검이 맴을 돌았다. 주한성은 힘겹게 단우를 향해 다가갔다. 동시에 단우도 조금씩 움직였다. 두 사람이 멈췄다 다시 움직인 것은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지만 숨을 세 번 들이킬 시간에 불과했다. 일단 몸을 움직이자 기혈이 트여 내공의 운용이 원활해진 단우는 다가서는 주한성을 향해 섭선을 눌렀다. 기관장치가 풀린 섭선은 맹렬하게 주한성의 사대요혈을 파고들었다. 피할 수 없다. 주한성은 필사적으로 삼악중첩을 펼쳤다. 따다당! 열 아홉 개의 부챗살 중 열 다섯 개가 튕겨졌다. 나머지 네 개는 사정없이 주한성의 사대요혈을 파고들었다. 그 순간에 삼악중첩도 사정없이 단우의 왼 어깨를 파고들었다. "크으윽!" "으음!"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주한성이 비척 밀려났다. 그러나 그는 불타는 눈으로 단우를 노려보며 다시 단우를 향해 다가갔다. 단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도 죽을 망정 패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도주라는 것을 배우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긴 피줄을 그으며, 두 사람이 다시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이제 끝장을 보게 되는군!" 주한성의 말에 단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후후후! 악연이지만 실로 지겹도록 질기다. 서사혼도에서 처음 마주칠 때부터 왠지 네놈이 싫었다. 싫어할 이유가 없었는데 말이야. 오늘일을 미리 예감한 것인지 모른다. 이렇게 저승길까지 동반하게 될 줄을 알았던 거지." "쓸데 없는 말 말고 진기를 모아. 당당하게 죽여줄 테니!" 단우는 씨익 웃었다. 적이지만, 그래 진정한 친구는 적밖에 없다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저 여자, 부인조차 나를 이용하려는 세태에, 이렇게 서로를 죽이겠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대할 적이 있다는 것이 문득 좋다고 생각됐다. 이런 적이라도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주한성은 최후의 절초인 회천을 펼쳤다. 단우는 자신의 절기인 단혼벽을 펼쳤다. 장원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피가 점점 짙어졌다. 단우는 허공에 떠 있었다. 감수경의 품에 안겨, 지면에 고꾸라져 피를 콸콸 쏟아내는 주한성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에서도 피가 점점이 떨어져 지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살아 있다. 가슴을 통쾌하게 가른 주한성의 공격에서도 아직 죽지 않고 이렇게 숨을 쉬고 있다. 주한성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단우는 고개를 돌렸다. 감수경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그것은 오래 전에 죽은 모친을 생각하게 했다. 천하제일인의 아내이면서도 병에 걸려 항시 유약하던 엄마. 숨을 놓는 그 순간까지 다섯 살인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엄마였다. 단우는 문득 감수경에 애착을 느꼈다. 이 여인은 왜 그렇게 악착같이 천하를 원하는 것일까? 세상에는 남자보다 더한 욕망을 지닌 여인이 있다고 들었는데 감수경이 그러할까? "수경! 넌 왜 천하를 원하느냐?" 감수경은 말없이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밤 하늘에는 반달이 떠 있었다. 새 한 마리가 그 반달을 반으로 가르며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있었다. 감수경이 말했다. "몰라요. 새들이 왜 하늘을 나는지 그 이유를 알까요? 본능이죠. 내 피에는 천하를 품겠다는 본능이 숨쉬고 있어요. 할아버지는 그 본능을 깨우쳐 주셨고, 당신은 그 디딤돌이 되어 줄 거예요. 난 그렇게 믿어요." 2 "좋은 것만을 보아야 하오." "알았어요." "고운 소리만을 듣고, 하루에 세 번 이상 나를 생각해야 하오." "이 이가? 차라리 당신닮은 아들을 낳으라고 솔직히 말해요." "하하핫! 그러고 싶지만 그 일이 어찌 마음대로 되겠소? 딸이든 아들이든 튼튼하고 건강하기만 하면 되지."


"피! 내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군요." 그 말에 남편은 아내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정녕 걱정하는 것은 당신이오. 난 절대 내 자식을 어미 없는 자식으로 키우고 싶지 않소!" "호호호! 왜요? 이번에 당신의 수하 중 한 사람이 마누라가 죽은 지 삼 일 만에 새장가를 갔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수하는 우두머리를 본받는다고 했어요. 그것만 보아도 당신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 훤해요." 노미량은 전검휘가 태산을 향해 떠나기 전 주고받은 대화를 상기하며 방긋 웃었다. 행복했다. 특히 전검휘가 그녀의 투정에 대해 해 준 대답은 그녀를 매우 흡족하게 했다. -백년해로를 하고 싶어. 그러나 만일 당신이 나보다 먼저 죽으면 난 석상이 되지. 석상이 되어 영원히 당신의 무덤을 지켜 주지. 좋은 남편이다. 남들이 들으면 유치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사랑하는 남녀간에는 사랑이 되고 절절한 감정이 되는 것이다. 전검휘의 말이 그녀를 행복하게 했다. 아직도 그녀의 귀에는 전검휘가 한 말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때였다. "아씨! 손님이 오셨는데요?" 시비가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손님이?" "삼지(三指)라고 하던데요?" 노미량은 은밀히 비밀조직을 운영해 강호정세를 살폈다. 정보가 가장 많이 나도는 곳은 바로 주루였다. 설매가 소속된 주루의 점소이도 정보원 중의 하나였다. "모셔라!" "뭣이? 주한성이 제갈성곤과 헤어진 후 단우를 만났다고?" 뱃속의 아가에게 해로운 줄 알면서도 그녀는 튕기듯 일어났다. 주루의 점소이는 마치 자신이 죄라도 지은 양 푹 고개를 숙였다. "확인한 정보인가?" "예! 틀림없습니다. 주공자와 단우가 대결을 펼치는 것을 보고 부리나케 달려왔습죠!" 주루의 점원이 단우를 아는 것은 그녀가 누누이 단우의 생김새를 설명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단우가 반드시 이곳 소림인근에 나타나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각 파의 고수들이 운집해 태산을 향해 떠난 다음 단우가 나타날 줄은 몰랐다. '주한성이 위험하다.' 태산을 향한 대진군이 시작되었다. 밤을 세워 경공을 펼친 강행군이었지만 각파에서 차출된 정예고수인지라 누구 하나 피곤한 줄을 몰랐다. 아침 해가 뜰 무렵 천우사절을 포함한 구파일방의 인물들은 객잔에 투숙했다. 오비도인은 객잔의 이층에 투숙해 있었다. 전망이 좋은 이층인지라 바삐 오가는 사람들과 농기구를 짊어지고 논밭으로 나가는 농군들도 보였다. 그들의 발걸음은 하나같이 활기찼다. 비록 먹을 것이 부족하고, 근심에 잠겨 있어도 아침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심어 주는 것이다. "휴우……." 오비도인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칠 일이 남았다. 생사를 건 대혈전이 다가오건만 그는 마음의 평정을 찾지 못했다. 그는 누구보다 잠마전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그러나 적을 너무 잘 알아도 안되는 것이 있다. 무인의 경우, 더욱이 광명정대해야 하는 정파 무림의 영도자인 경우 적을 알아도 방법이 없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그것이 오비도인의 가슴을 멍울지게 했다.


잠마전주, 그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사람이었다. 더욱이 그의 직계 수하인 팔 인의 절대 고수들은 천우사절과 필적하는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소림에 비밀 연무관을 만들고 정무구혼을 키운 것도 모두 이 일전을 대비해서 였다. 처음에는 자신했었다. 그러나 날짜가 다가오면서 자신감은 사라지고 근심이 앞섰다. 정무구혼은 절대기제답게 일인 일인이 초극고수이지만, 팔대고수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인 점이 있었다. 바로 실전경험이었다. 그들은 튼튼하고 건강했지만 모두 정원에서 자란 보기좋은 꽃이었다. 반면 잠마전주 휘하의 팔대고수는 풍부한 실전경험과 살인에 관한 한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살인마들이었다. 그들의 뿌리는 잡초처럼 넓고 깊게 무림이라는 풍토에 뻗어 있어 암기, 변환술, 기습, 합격 등 온갖 자양분을 닥치는대로 섭취했다. 그들을 상대할 사람은 자신을 포함한 천우사절 뿐이었다.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가장 중요한 병기인 주한성을 남겨두었다. 그것이 옳은 판단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정파를 수호할 최후의 일 인은 남겨두어야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오비도인이 기대를 거는 것이 있었다. 마군자(魔君子). 잠마전 천제맹 소속 서열 이위! 본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삼 년 전에 혜성처럼 잠마전의 핵심에 등장한 그는 정인군자였다. 지난 삼 년 동안 중원 무림에 평화가 유지되었던 것도 그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그는 정사의 공존을 바라는 인물이었다. 마도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잠마전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지닌 능력이 너무도 탁월해서 였다. 만일 잠마전이 그를 배격한다면, 그래서 그가 정파무림에 가담한다면! 정세는 단숨에 역전이었다. 오비도인은 마군자와 연줄을 대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정사대혈전을 피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것을 건의했었다. 마군자 역시 동의했다. 삼 년 후, 정사 무림의 대표를 뽑아 정정당당한 비무를 벌여 천하제일인을 뽑자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제안을 해왔다. 그 의견은 잠마전주의 허락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휴우! 참, 신세 처량하구만.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누!" 이렇게 되니 더욱 절실해지는 것은 죽은 주진룡이다. 그 아이만 있다면 무에 걱정할 것이 있었는가? 그때였다. "사부님! 성곤입니다. 소림사의 약학당 당주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제 14 장 일차 대혈전 1 "약학 당주가? 어서 모시거라!" 제갈성곤이 들어서고, 곧이어 인자한 인상의 약학당주가 제갈성곤의 안내를 받아 들어섰다. "아미타불! 번거롭게 해 죄송합니다." "무량수불! 무슨 말씀을. 헌데 무슨 일이신지요?" 약학당주는 품안에서 조그만 옥병을 꺼내들었다. "지난 삼 년 동안 약학당에서는 방장의 명을 받아 환단을 제조하고 있었습니다. 대환단에 비할 수는 없지만 심신을 명쾌하게 함은 물론, 인간의 사고능력을 배가시키는 특이한 환단입니다." 오비도인이 불쾌한 듯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환단을 내게 주겠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약학당의 조그만 노력이 이번 정사대전에 미력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말을 하면서 약학당주는 옥병을 내밀었다. 오비도인은 약학당주의 손을 탁 쳐냈다. "무공이란 본인의 노력으로 정진해야 하는 법이오. 승부는 정정당당해야 하고, 만일 우리가 복용했다


칩시다. 그 승부가 어찌 정정당당하다 할 수 있을 것이오?" "허나 악의 뿌리는 깊고도 깊습니다. 그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번 일전을 승리로 이끌 비책을 세워두었을 것입니다. 이번 일전은 비무가 아닙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살상대회입니다." "흥! 승인이 못하는 말이 없구려. 스님의 생각이오, 아니면 소림방장 고람의 생각이오?" 약학당주는 오비도인의 격앙된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붉혔다. "이 환단은 내력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정신을 맑게 하고 심신을 강하게 해주는 효과만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보광선사께서도 이 환단을 복용하셨습니다. 또한 노천악대협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간 오비도인의 얼굴에 경멸의 빛이 떠돌았다. 그러나 그는 굳이 그들을 비방할 마음은 없었다. 지금은 사소한 언행이라도 조심해야 할 때다. 사람이란 아무리 수양이 깊어도 자존심을 건드리면 누구든 흥분하기 마련인 것이다. 지금 자신이 약학당주의 말에 화를 내는 것처럼! "알겠소. 두고 가시오!" 냉랭한 오비도인의 말에 약학당주는 그 온화한 얼굴을 붉히며 합장을 해 예를 올리고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그러자 제갈성곤이 주저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송구스럽지만 구파일방에서 참가한 고수 중 수뇌부들은 이미 그 환단을 복용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분들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다시 없는 신약이라고 합니다. 난해한 무공비결이 한순간에 해석되는 것은 물론, 그 동안 절대 불가능하리라고 여겨졌던 초극고수의 반열에 올라섰다는 것입니다." 그 말에도 오비도인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물러가거라. 명심할 것은 절대 이 환단에 관심을 두지 마라. 사람의 의지란 간사한 것이라서 한 번 약물에 의지하다 보면 반드시 다시 그것을 찾게 된다. 무공은 의지다. 스스로 노력해 최고 경지에 올라서는 것이다. 약물을 이용해 내공을 증진시킨 절대고수들이 결국 초극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제갈성곤이 물러가고 오비도인은 홀로 방안에 남았다. 약학당주로 인해 노한 심정을 누르기 위해 그는 가부좌를 틀었다.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한 시진 정도 지났을까? 오비도인은 어두운 얼굴로 운공을 마쳤다. 최후의 단계 무당무공의 정수인 태극현공(太極顯功)의 최후단계, 삼원합(三元合)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무의식적으로 오비도인의 시선은 환단에 닿았다. 그러나 오비도인은 곧 고개를 저었다. 삼 일이 지났다. 산동성 경내에 들어섰다. 그토록 조심스럽게 이동했지만 중원 무림에는 어느 덧 잠마전과 구파일방이 생존을 건 일전을 벌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사람들은 수도 없이 산동성의 태현으로 몰려들었다. 태산에 당도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법이다. 종내에는 이번 대결에서 패한 문파는 봉문을 하게 되고, 구파일방이 망하든가, 잠마전이 망하기 전에는 절대 봉문을 풀지 않는다는 약속을 했다는, 이른바 생사결(生死結)에 관한 소문이 나돌았다. 그 말은 삽시간에 중원 전역으로 퍼져 무사들은 물론 뒷골목의 하류배까지 대결을 하면 반드시 생사결을 입에 올리고 승부를 가리곤 했다. 그리고 약속을 어기면 일구이언 이부지자(一口二言二父之子)라는 험한 욕설을 퍼붓고는 했다.


결국 단익제와 한 일련의 약속은 잠마전과 구파일방의 존폐를 건 일전으로 인식되어 버리고 말았다. 오비도인의 근심은 더더욱 깊어갔다. 그는 소문이 잠마전에서 퍼뜨린 것을 직감했다.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마군자에게서 이번 대결을 연기할 수 없다는 전갈이 왔다는 점이다. 소문이 나돌아 이제는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마군자의 변이었다. 백척간두에 선 심정! 오비도인이 그러했다. 오비도인은 환단을 바라보았다. 절대 복용하면 안된다는 다짐과 달리 그의 손은 어느덧 환단이 든 옥병을 집어들었다. 그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팔십 년의 생!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다고 자부해 왔다. 그러나 전 중원의 운명이 걸린 일전에 자신 한 사람의 명예를 위해 동료들에게 누를 끼칠수는 없었다. 뚜껑을 열었다. 순간 고아한 향기가 방안 가득 퍼져나갔다. 말로만 듣던 천상의 향기가 이러할 것이다. 환단은 녹색을 띠고 있었다. 오비도인은 천천히 환단을 입에 넣었다. 그것은 삽시간에 녹아내려 기도를 타고 넘어갔다. 일순간, 오비도인은 충격에 몸을 떨었다. -삼원합! 천지인(天地人)! 이 세 개체를 합입하는 오묘한 구결이 뇌리 속에서 실타래 풀리듯 풀려나갔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였다. 마치 우화등선에 든 듯한 새로운 경지였다. 제갈성곤은 희미하게 웃었다. 마침내 천우사절 중 한 사람이 환단을 복용한 것이다. 오비도인의 입을 빌어 소문이 나게 되면 결국 나머지 세 사람도 환단을 복용하게 될 것이다. 절대 신약인 줄 알면서! "오비도인, 당신은 편협했어. 내가 주한성에게 뒤지는 것이 무언가? 그 멍청한 녀석보다 내가 뒤진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무영문의 문주자리? 흥, 이제는 관심이 없다. 당신이 기대를 걸고 있는 주한성은 이미 시신으로 변했을 테니까!" 제갈성곤이 멀어져갔다. 오비도인은 한 시진 만에 눈을 떴다. 자신이 부공삼매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을 그는 느꼈다. 그것은 새로운 환희였다. -이길 수 있다. 절대로! 오비도인은 방을 나섰다. 천우삼절에게 환단에 관해 의논을 하기 위해서였다. 태산 정상 관일봉에는 바람이 휘몰아쳤다. 어느새 가을은 온산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일출이 떠오르자 음영에 가려 있던 단풍이 일제히 보석처럼 영롱한 빛을 뿌렸다. 오늘이 구월 십오일! 단익제와 약속한 날이다. 아니 잠마전과 천우사절이 약속했다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오비도인을 비롯한 보광과 노천악, 정관효는 태산 제일봉에 우뚝 서서 일출을 바라보고 있었다. 건곤일척의 대결을 눈앞에 두었건만 그들은 급해 보이지 않았고 안색도 평온했다. 대자연의 장관을 눈에 담는 그들의 면모는 하나같이 거대한 산악이었다. "좋군! 가을 풍취가 이렇게 새삼스러운 줄은 몰랐네." 오비도인의 말에 보광이 나직히 불호를 외며 말했다. "허허허! 세상 천지에 아름답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소이까? 미물 하나 풀잎 하나도 다 아름답소이다. 다만 인간의 욕심만이 추할 뿐, 하지만 그 욕심이 세상을 발전케 하니, 참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사이지요." 보광의 말에 노천악은 빙긋이 웃었다.


"나는 이번에 경사가 있었다네. 미량이 임신한 것일세. 아직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손주의 이름을 내가 작명해 주려는데 미량이 막무가내야. 뭐 한성이 그 녀석이 이름을 지어 준다고 했다는 게야." "난리났구만! 난 그 녀석이 천자문을 배웠다는 말도 듣지 못했는데 웬 작명(作名)을 하겠다는 거지? 어쨌든 축하해. 일단은 외손(外孫)이지만 대를 이었지 않은가?" 오비도인을 뒤이어 다른 사람들도 덕담을 나누었다. 화기애애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었다. 한편, 그들과 반대쪽 절벽 옆에는 백색 장포를 입은 일단의 무리들이 서 있다. 하나같이 효웅의 풍모가 여실한 자들이었다. 중앙에 선 선풍도골의 노인을 중심으로 팔 인이 기러기 날개처럼 도열해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몰아쳐 그들의 장포를 흔들었다. 휘리릭 소리를 내면서 휘날리는 백색 장포, 하지만 그들의 가슴에 이는 폭풍에 비할 바는 아니다. 중앙의 노인은 시선을 동쪽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태양은 벌겋게 불타오르며 떠올랐다. 노인의 눈동자도 어떤 열망으로 타올랐다. "참으로 오랜 세월이었다.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오늘을 위해 이십 년 동안 잠마전은 침묵했으니까요!" 노인의 오른쪽 옆에 서 있는 평범한 키의 노인이 대답했다. 일 장의 긴 창을 주무기로 하는 잠마전 서열 일위 양자산(梁自山)이었다. 노인은 태산 아래 도열한 수천에 달하는 구파일방의 인물들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이제 중원 무림에서 구파일방의 막을 내릴 때가 된 것 같군!" "그렇습니다. 천우사절만 제거한다면 정파의 혼은 말살될 것입니다." "좋아! 자네가 대결을 주제하게." 양자산은 노인을 향해 정중하게 일배를 올린 후 돌아섰다. "정관효! 이만 시작해 볼까?" 나직하지만 그 음성은 태산이 쩌렁 울릴 정도로 힘이 실려 있었다. "흐흐흐! 지난 십 구 년 동안 숨어 있던 자가 어디 겁이 나서 나설 수가 있겠는가?" 장대한 체구의 중년인, 잠마전 서열 팔위 가릉(可凌)이 비웃음을 날렸다. 그러나 정관효는 그들에게 일별도 주지 않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 때 정관효는 이전 노학사같이 유한 기운은 씻은 듯이 가셨고 두 눈에서는 한광이 번뜩였다. "단립(丹立)! 오랜만이군. 십 칠 년 전 네 손에 죽은 제자의 복수를 오늘에야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양자산이 손으로 한 사람을 지목했다. "가릉! 네가 상대하라!" "존명!" 가릉이 칼을 잡았다. 그의 발도식은 군더더기 하나 없는 완벽한 동작이었다. 칼날은 뇌전처럼 정관효의 목을 쳐갔다. 그러나 정관효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를 너무 무시하는군?" 사실 가릉이 펼친 공격은 허초였다. 정관효의 반응에 따라 임기응변의 공격을 펼칠 생각이었는데 상대는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다. 가릉은 힘을 배가시켰다. 그러자 칼날에서는 용의 울음소리 같은 파공음이 일며 사방 십여 장이 회오리에 휘감겼다. 허초가 실초로 변환한 것이다. 정관효는 빙그레 웃었다. 가릉의 공격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어깨를 흔들었다. 환상처럼 열 두


개의 환영이 파생되었다. 가릉의 공격이 주춤하자 환영은 한 데로 겹쳐져 미끄러지듯이 도세 속을 파고들었다. 가릉의 코앞에 당도한 정관효의 손이 번뜩였다. 그러자 무수한 손 그림자가 파생되었다. 파바바방! 정확히 열 다섯 번이었다. 가릉이 실끊긴 연처럼 날았다. 그 뒤를 정관효는 그림자처럼 바짝 붙어 따르며 연달아 십이수를 펼쳤다. 휘젓고 내지르고 감아치는 일단의 손공격이 화려하게 허공을 수놓았다. 퍼버버벅! 가릉의 얼굴이 피멍으로 얼룩졌다. "아직 멀었군!" 비로소 한 마디를 던지며 정관효가 마지막 초식을 펼쳤다. 부채처럼 펼쳐진 손이 정권으로 변해 허공을 횡으로 갈라치자 퍽 소리와 함께 가릉은 회오리에 휘감긴 가랑잎처럼 삼 장여 밖에 고꾸라졌다. 일단의 공격을 성공시킨 정관효는 척 뒷짐을 지고 단립을 노려보았다. 나서라는 뜻! 그러나 가릉은 아직 죽지 않았다. 소리없이 일어나 지면을 박차고 정관효를 향해 몸을 날렸다. "강뢰( 雷)!" 도에서 발해진 일섬이 번개같다. 또한 생명을 도외시한 채 득달처럼 달려드는 모습은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동귀어진을 하자는 겐가? 주제를 모르는군!" 정관효가 왼발을 가볍게 한 발 내디디면서 뒷짐을 지고 있던 오른손을 반 정도 밀어냈다. 단지 그것 뿐인데. 고오오오! 천지를 말아가는 진공음이 일었다. 정관효의 오른손과 가릉의 칼날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꽈지직! 칼날이 산산조각 부서졌다. 그 뿐이 아니다. 정관효가 어깨를 틀면서 반쯤 오므리고 있던 팔을 쭉 뻗자 주먹은 가릉의 심장을 꿰뚫어 버렸다. "크아아악!" 가릉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곧장 절벽 아래로 추락해 갔다. 정관효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뒷짐을 졌다. 태산 같은 장중한 힘이 전신에서 뿜어져나왔다. "단립! 이번엔 누가 나설 텐가?" 하늘을 우러르고 있던 노인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담담했다. "금강수(金剛手)를 완성했군. 양자산, 너라면 금강수를 파할 수 있다." "명을 받듭니다." 그러자 오비도인이 앞으로 나섰다. "무량수불! 정대협, 이번엔 본도가 상대하겠소이다." 양자산이 장창을 휘두르자 오 척 단구의 오비도인은 금방 창그림자 속에 갇혔다. 오비도인은 양손을 가볍게 앞으로 내밀었다. 창극이 눈앞에 도달하자 두꺼비가 파리를 잡듯이 창날을 잡아갔다. 뻔히 두 눈으로 보면서도 양자산은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창을 거두며 쾌속하게 물러섰다. "켈켈켈! 피하는 데는 천하제일이군!" 양자산의 두 눈썹이 꿈틀 역팔자를 그렸다. 그는 곧 자신의 절기인 창법 중 파자결을 일으키며 질풍노도같이 오비도인을 덮쳤다. 오비도인은 서두르지 않았다. 웃음 띤 얼굴로 양자산의 공격을 바라보았다. 양자산의 창법은 실로


신묘하고 변화무쌍했다. 한 자 간격으로 쥐고 있던 창대를 비틀자 끼릭 소리와 함께 창날이 세 개로 분리되었다. 세 개로 나뉜 창극이 갑자기 맹렬하게 회전했다. "전륜창(轉輪槍)! 오비도인, 피하시오." 정관효가 놀라 외쳤다. 그가 놀랄 정도로 전륜창법은 무서운 위력을 담고 있었다. 외문무공의 정수인 금강불괴를 깰 수 있음은 물론 천하의 어떤 병기도 저 회전축에 걸리면 부서져 버린다. 허나 오비도인은 자신의 분광검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스팟! 검은 보이지도 않았다. 오비도인의 분광검은 그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그도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오비도인이 분광검을 펼치는 그 짧은 순간에 양자산의 손에서도 창이 떠났다는 점이다. 검이 양자산의 가슴을 벨 때 오비도인은 승리감에 취해 방심했고, 그 때 맹렬하게 회전한 창은 사정없이 오비도인의 심장을 향해 쏘아왔다. 오비도인은 급히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충일했던 진기가 끊어져버린 것이다. 당황해 멍하니 서 있는 그는 전륜창법의 좋은 먹이감에 불과했다. "크윽!" 오비도인이 가슴을 안고 비틀거렸다. 죽는다. 오비도인은 허허 웃었다. '소림사 약학당주, 결국 네가 나를 죽이는구나. 며칠 전 네가 제갈성곤과 같이 나를 찾아왔을 때 의심했어야 했는데, 후후! 이제와 그를 탓한들 무엇하겠는가? 내 잘못인 것을!' 환단. 오비도인이 독약이라는 것을 안 것은 조금 전이었다. 대결을 펼칠 때까지 그는 전혀 몰랐었다. 그것을 소림의 약학당에서 만든 일세의 신단이라고만 알았었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결정적인 순간에 진기가 끊어지다니! -순리를 벗어난 천벌을 받은 게야!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갈성곤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가 처음에 주한성을 쫓아 자신을 찾았을 때부터 마음이 찜찜했었다. 그러나 흠잡을 곳이 없었다. 성격이 편협하지만 악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 그를 포섭대상으로 삼고 접근한다면 쉽게 넘어갈 성격이 제갈성곤이었다. '역시 문조천에게 제갈성곤에 대한 단서를 수집하고 문서로 남겨두라는 명을 내리길 잘했다. 그 녀석이 무영문을 떠난 것이 이럴 때 도움이 되는군!' 오비도인은 바득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최후의 힘을 다해 단립을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 분광검을 재차 펼쳤다. 비록 진기는 실리지 않았지만 분광검의 오묘한 위력은 태양이 양단되는 기경을 연출했다. "오비도인이라는 이름이 허명은 아니었군!" 단립이 가볍게 오른손을 떨쳤다. 쿠우우웅! 산정 전체가 부르르 떨었다. 마치 금성철벽같은 무서운 강기벽이 그대로 오비도인에게 작렬했다. 파- 파팟! "오비……!" 정관효가 부르짖으며 몸을 날렸다. 하지만 단립의 공격은 무시무시했다. 그가 당도하기도 전에 오비도인은 심장이 뻥 뚫려 피를 분수처럼 뿜어냈다. 정관효는 얼른 오비도인을 안아들었다. 오비도인은 허탈하게 웃었다.


"무영문을 떠난 문조천을…… 그…… 그리…… 환……!" 오비도인은 푹 고개를 떨궜다. 환단에 대해 말을 하려고 했지만 말을 맺지 못한 것이다. "편히 쉬게. 내 곧 자네의 원한을 갚아 줌세!" 정관효는 오비도인의 시체를 한 곳에 내려놓았다. "어차피 한쪽은 전멸해야 이 승부가 끝날 터. 단립, 더 이상 피하지 마라!" 단립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가 몸을 날리는 것을 기점으로 피아를 분간할 수 없는 혈전이 벌어졌다. 검이 난무하고 피가 혈해를 이뤘다. 그때였다. "사부! 저희들이 돕겠습니다." 태산의 아래에서부터 일단의 함성이 울려왔다. 양진영은 일단 손을 멈추고 갈라섰다. 속속 태산에 집결하는 인물들, 그들은 구파일방과 중원 사대세가의 인물들이었다. 정파무림인들의 선두에 선 사람은 이십 후반의 훤출한 미장부, 그리고 이십 초반의 절색의 미녀였다. 그 뒤를 이어 소림사의 사대금강과 여타 구파일방의 고수들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인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선두에 선 두 남녀였다. 두 사람의 기상은 천하에 다시 없을 정도로 헌걸차고 고고해서 마치 용과 봉이 어우러진 것 같았다. 정관효의 얼굴에 기쁨이 번졌다. "주운백, 그리고 남궁수련, 너희들이 와 주었구나!" 주운백! 주한성의 숙부인 주운백을 말함이고, 남궁수련은 주운백과 백년지약을 맹세한 천하명가 남궁세가의 장중보옥을 말함이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정파진영은 아연 활기를 띠었다. 그 뿐인가? 구파일방의 후미에는 전관휘와 혜능을 비롯한 젊은 기재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후후후! 정관효, 좋아하기는 이르다!" 음침한 괴소와 함께 관일봉에 또다시 수많은 인영들이 내려섰다. "아미타불! 저들은?" 보광대사의 흰 수염이 파르르 떨었다. "잠마전의 오조외다. 그들이 모두 모인 것이오!" 잠마전의 오조. 잠마전 초대전주 단뢰가 만들어낸 신화, 그들이 모두 등장한 것이다. "아미타불! 관일봉이 피에 젖겠구려. 그러나 천하의 마를 멸할 수 있다면 내 어찌 죽음을 마다하리오!" "후후후! 보광, 이들을 봐라." 한소리 웅혼한 외침이 울려왔다. 음성이 끝났을 때 사람들의 앞에는 북존을 비롯한 서사혼도에서 탈출한 인물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옆구리에는 혼절한 연아와 또 한 여인이 끼여져 있었다. 북존은 노천악을 보고 온화하게 웃었다. "노천악, 아직까지 살아 있었구나. 일단 회포를 풀고 싶지만 먼저 처리할 일이 있으니 잠시 뒤로 미루겠다." 말을 마친 북존은 소림방장 보광을 향해 말했다. "긴말하지 않겠다. 여아들을 살리고 싶다면 천우사존은 스스로 마혈을 짚고 투항해라." 2 선화를 기억하는가? 아미파에서 연무관에 파견한 그 여인을. 지금까지 조용히 장내를 주시하고 있던 그녀는 지금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곳의 땅가죽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선화의 아름다운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스스슥! 그녀가 땅 속으로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그녀는 일행의 후미에 처져있었고 행동은 극히 은밀했기에 아무도 그녀가 땅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장내가 북존의 느닷없는 등장과 두 여인이 인질로 잡혀 혼란스러울 때 돌연 북존이 선 땅가죽에서 검이 솟구쳤다. "암습이다." 예리한 이물질이 발하는 살기를 눈치챈 북존이 몸을 날렸지만 꼬챙이같은 검날은 여지없이 그의 용천혈을 관통하고 사라졌다. 연아와 한 여인을 제압한 채 서 있던 두 사람의 땅가죽도 확 뒤집어지면서 검날이 솟구쳤다. "크아악!" 짧은 비명이 두 마디 울렸다. 항문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양단되는 것과 동시에 땅 속에서 솟구친 두 사람이 번개같이 연아와 한 여인을 구해 정파진영에 합류했다. 선화도 정파진영에서 연기처럼 스르륵 솟아나왔다. "와아! 지신(地神) 하진청(河眞靑) 형제다." 지신 하진청 형제, 그들은 신룡문 문도 중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두 여인이 인질로 잡힌 것을 알게 되자 선화와 연합해 인질을 구한 것이다. 정파진영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나왔다. 반면에 잠마전측에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 넋을 놓고 있었다. "이때다. 쳐라!" 천하에 다시 없을 대혈란이 벌어졌다. 도가 허공을 누볐다. 검은 용울음을 울리며 수급을 분분이 허공으로 날렸다. 그 와중에 두 진영은 조용히 서로를 주시하고 있었다. 정관효를 필두로 한 보광과 노천악. 단립을 중심으로 한 잠마전의 네 사람! 그들은 자신들의 일전에 오늘 혈전의 승자가 가려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칠 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비산했다 느낀 순간, 그들은 벼락치듯 서로를 향해 무시무시한 공격을 퍼부었다. 콰과광! 천번지복(天飜地腹)하는 굉음이 울렸다. 칠 인의 절정고수가 맞부딪친 강기의 여파는 대기를 진공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새로운 공기가 유입되면서 일진광풍(一陣狂風)이 일어나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관일봉 방원 이십 장이 완전 초토화됐다. 지면은 거대한 웅덩이가 움푹 움푹 패어 있었다. 목숨은 처음부터 생각지도 않았다. 목숨을 담보로 한, 수비는 생각지도 않는 무식한 수비와 공격이 연이어졌다. 강자의 승부였다. 생사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먼저 목을 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먼지가 가셨을 때, 칠 인은 벌써 재각각 상대를 찾아 재차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노천악의 상대는 잠마전주 단립이었다. '한 번에 끝내야 한다. 누가 이길지, 누가 죽을지 결과는 신(神)이 알 뿐이다.' 노천악은 변위보를 펼쳤다. 도깨비처럼 사방으로 신형을 날리며 순식간에 추시검을 펼쳤다. 츠츠츠츠! 검에서 괴이한 음향이 연달아 울렸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혈전을 벌이던 전검휘도 맹렬히 삼검을 쳐내며 장인을 도왔다. 단립의 두 눈에 싸늘한 조소가 흘렀다.


사람의 그림자가 번뜩였다. 단숨에 공간을 이동한 단립이 일장을 쳐냈다. 그의 장력에선 찰나간이지만 홍광이 번뜩이다 사라졌다. 소리도 없었다. 그러나 노천악의 얼굴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그도 오비도인과 같은 경우를 당한 것이다. 천우사절 중 단 두 사람만이 환약을 복용했다. 그들은 그만큼 절실했던 것이다. 동사혼도에 자원해 서사혼도를 결심할 때부터 두 사람은 오늘을 예견했을지도 모른다. 중원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기에 그들은 스스럼없이 환단을 복용했을 것이고 이렇게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어르신!" 전검휘가 득달같이 단립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에게 노천악은 사부이자 부친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소중한 딸을 내준 장인이었다. 그의 죽음을 본 전검휘의 두 눈에 불이 튀는 것은 당연했다. 승패? 죽음? 그는 그것을 잊었다. 단립이 재차 일장을 쳐냈다. 다시 홍광이 번뜩였다. 순간, "물러나라!" 무서운 폭갈이 일면서 정관효가 번개처럼 단립의 앞을 막아서며 일장을 날렸다. 펑! 굉음이 일면서 두 사람이 한 걸음씩 물러섰다. 전검휘는 두 절대고수의 충돌 여파에 밀려 장내에서 밀려났다. 정관효와 단립, 두 절대고수가 디딘 지면은 움푹 패이고 두 사람의 눈에서는 전광 같은 빛이 일렁였다. 무림의 양대거두가 대결을 펼치자 사람들은 대결을 멈추고 일제히 두 사람을 주시했다. 단립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관효! 신룡문과 잠마전이 대립한 것이 장장 천년이었다. 이제 그 긴 세월을 마감하자!" "동감이다. 두 문파 중 하나는 이승에서 사라져야 한다." 돌이켜 보면 즐거움이란 없는 무미건조한 일생이었다. 무림지존이 돼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칠십이 넘도록 오직 무(武) 한글자만을 목표로 삼고 살아온 생이었다. 정관효는 뒷짐을 졌다. 단립은 다시 쌍장을 치켜들었다. 숨죽인 침묵 속에 살기가 만장을 솟구쳤다. 3 -누나, 태산으로 가야 해! 주한성은 간신히 그 말을 하고 혼절했다. 주한성의 상태는 심각했다. 단우의 섭선을 이용한 공격에 사대요혈을 관통당한 상태에서 이름조차 모르는 초극강의 수법에 거듭 부상을 당해 시체나 다름없었다. 그를 구한 것은 노미량이었다. 노미량은 먼저 치료부터 하자고 했지만 주한성은 한사코 거부하고 길을 나선 것이다. 숭산에서 태산의 초입까지는 마차를 이용, 밤을 도와 도착했지만 문제는 태산의 정상인 관일봉에 오르는 길이었다. 그는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했다. 노미량이 거의 안다시피 부축해 줘서 간신히 태산을 오르고 무공이 대단한 경지에 도달한 노미량으로서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해산을 불과 한 달 앞둔 그녀였기에 고통은 더욱 심했다. 하지만 그녀는 모진 길을 나서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주한성은 남이 아니었다. 단 하나 뿐인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실천하고 있었다. "상처가 너무 심해. 이러다 죽어!"


노미량은 안타깝기 그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난 죽더라도 가야 해." 가슴에 기대다시피 한 주한성의 핼쓱한 얼굴에 서린 의지는 강인했다. 노미량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가슴 시리도록 파고든 것이다. 이러다 정말 죽는 것이 아닐까? "그런 말이 어디 있니? 가면 가는 거지 왜 불길하게 죽는다는 거야?" 주한성은 묵묵히 태산을 바라보았다. 단우, 그는 마도인이지만 허언을 하지는 않는다. 저 태산에 모종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 "누나, 내 주변 사람들을 잃기 싫어." 주한성의 음울한 목소리였다. 노미량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 가자. 무엇이 두렵겠니. 그곳에는 아버지도 있고 남편도 있는데! 산 모퉁이를 돌아서서 태산 관일봉으로 난 돌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 정상에 다다르자 구름처럼 운집한 거대한 인파가 시야에 들어왔다. 수천 명은 될 듯한 사람들이 모여 있건만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두 사람이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정관효와 단립이었다. 노미량은 대치한 두 사람을 둘러싼 일단의 군웅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녀가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사방을 주시했지만 노천악은 보이지 않았다. 거리가 멀어서인가 생각한 노미량은 주한성을 옆구리에 끼고 솔개처럼 허공을 날아 단숨에 태산 관일봉의 정상에 내려섰다. 주변을 살피던 그녀의 시선은 한 곳에 그대로 붙박혔다. 사람들과 떨어진 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검휘를 발견한 것이다. 아니 그녀의 시선은 전검휘의 옆에 누군가의 옷으로 덮어놓은 시체 한 구에 고정되어 있었다. 전검휘는 부상당한 주한성과 그녀를 보자 어색하게 웃었다. "웬일이오? 오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 했는데!" 어눌한 그의 목소리를 듣는 노미량이건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 시신은 누구죠?" 대답을 듣기보다는 마음 속에 이는 불안감으로 그녀는 주한성을 내려놓고 시신을 덮은 옷을 거둬냈다. "악!" 짧은 토막 비명과 함께 노미량은 양 손을 푸들 푸들 떨었다. -전검휘가 잘 생기긴 했다만, 손주 녀석이 나를 닮았으면 한다. 그 아버지의 얼굴이 없었다. 푸들거리며 떨던 노미량은 맥없이 스르륵 무너졌다. 전검휘가 몸을 날려 안아들었다. 노미량의 입술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아니죠? 저 시신이 아버님이 아니죠?" 전검휘는 대답하지 못했다. 노미량이 시선을 돌렸다. 정관효와 대치하고 있는 단립을 본 그녀의 입가에 흐르는 피가 더욱 짙어졌다.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아버지와 대적할 만한 단 한 사람의 고수! 단립, 그를! 한편 주한성도 망연자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럴 수가 있는가? 심장이 뻥 뚫린 오비도인의 시신. 창백한 얼굴에 떠오른 통한의 분노! 주한성은 보광대사를 향해 다가갔다. 하늘을 찌를 듯한 분노는 이미 상처에 대한 고통을 잊게 하고, 그의 피를 덥히고 있었다. 분노를 용출하기 위해 심장이 쾅쾅 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소림승들과 함께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보광대사는 주한성을 보더니 쓸쓸하게 웃었다. "누구입니까?"


보광선사는 손을 들어 단립을 지목했다. "오비를 죽인 양자산은 죽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양자산을 죽인 것은 저 잠마전주인 단립이다." 잠마전주 단립! 주한성의 두 눈에 희미한 붉은 혈선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제갈성곤이 그에게 다가왔다. 거짓 슬픔도 슬픔인가? 그의 두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다가서기 무섭게 주한성의 두 손을 잡고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제, 저 단립이 사부를 죽였다. 제자된 자의 도리로 당연히 그를 죽여야 하지만 난 힘이 없다. 그를 이길 자신이 없다." 주한성은 쓸쓸하게 웃었다. 누군들 힘이 있을 것인가? 제갈성곤이 이렇게 나약하게 변한 것을 본 주한성은 이를 악물었다. 제갈성곤은 지난 몇 년 동안 사부에게 가르침을 받아 그보다는 훨씬 정신적인 충격이 컸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저 놈을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습니다." 제갈성곤은 품안에서 옥병을 꺼내들었다. "사부님이 남기신 유품이야. 심한 상처도 곧 아물게 하는 절세영단이지. 아마 무당의 진산지보인 자소단과 비견되는 효능을 지니고 있을 게야! 어서 복용해!" 주한성은 그 말을 듣고 서슴없이 환단을 복용했다. 순간 그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상처의 고통이 가셨다. 동시에 머리가 맑아졌다. 기억이 났다. 그래, 소림의 음령곡에서 청해사의 승인을 죽인 후 이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녹색 광채를 흡입한 적이 있다. 주한성은 제갈성곤을 바라보았다. "사형, 이것이 정녕 사부님의 유품이오?" 제갈성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주한성은 마음 속에 의문을 접었다. 단립, 그를 죽이는 것이 우선이다. "우리가 돕겠다." 말과 함께 소림에서 사대금강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지금껏 고람대사의 명령에 의해 이 혈전에 가담하지 못했다. 그러나 주한성이 나서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 혈겁에 참여한 것이다. 그것은 정파인들에게 거대한 힘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주한성은 고개를 저었다. "내 일입니다." 그렇다. 저 단립과의 일전, 그것은 그만의 것이다. 다른 사람이 간섭할 수 없는 그만의 일이다. 사대금강은 주한성의 고집을 익히 아는지라 내심 속이 탓지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묵과만 하지는 않았다. 사대금강과 고람을 비롯한 정무구혼, 그리고 주운백을 비롯한 남궁설은 천천히 한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목표로 하는 곳, 바로 잠마전의 오조였다. 주운백의 무공은 대단했다. 신룡문의 문주를 맡고 있는 이 장년인의 무공은 가히 입신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남궁설과 짝을 이뤄 펼치는 합공에 잠마전의 주요인물들은 추풍낙엽처럼 베어져 나갔다. 노한 검은 광풍처럼 산정과 허공을 갈라 적의 목을 치고, 노한 광룡은 승천하듯 울부짖으니 태산은 일시에 생의 종말이 닥친 듯 무수한 비명 속에 휘감겼다. 산은 그렇게 피에 절며 노하고 있었다. 두 집단의 혈투는 극에 도달하고 있었다. 관일봉 정상에는 무수한 시체들이 뒹굴었다. 대부분이 잠마전 오조 소속의 졸개들이었다. 정무구혼을 비롯한 구파일방의 고수들은 전검휘의 지휘하에 똘똘 뭉쳐서 잠마전 오조의 공세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압권의 활약을 보이는 것은 주운백과 남궁설, 전검휘와 혜능, 그리고 선화와 일조를 이룬 이광혜였다. 그들의 활약은 실로 신출귀몰해 잠마전의 오조는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 사대금강의 활약도 무시무시했다. 양 팔목, 팔꿈치, 무릎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무기였다. 사대금강은 마치 노한 숫사자처럼 혈전의 와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소림경공의 절기인 대나이신법(大那移身法)을 펼치면서 바람처럼 장내를 휘저었다. 적과 최단거리로 접근해서 소림의 절기를 연달아 펼쳤다. 평시에도 그들의 무공은 소림일절로 꼽히거늘 지금 그들은 살기가 극에 달해 전신은 무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내딛는 한 걸음마다 어김없이 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팔꿈치에 얻어맞은 자, 무릎에 차인 자, 도리깨마냥 돌려치는 손목에 격중된 자. 누구 하나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잠마전의 오조는 주춤 공세를 늦췄다. 그 틈을 이용해 전검휘는 노미량을 보호하며 폭풍처럼 잠마전 무사를 일도에 양단하며 적 진영을 갈라쳤다. 피, 자욱한 피가 날렸다. 주한성은 보기에 끔찍할 정도였다. 단 삼 초 만의 대결에서 그는 이렇게 완전히 혈인으로 변모했다. 치아를 제외한 의복과 눈동자 등 모든 부분이 피로 범벅이었다. 단우에게 당한 부상이 단립의 가공할 무공에 충격을 받아 도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잠시 호흡을 고른 후 다시 단립을 향해 다가섰다. "네가 주한성인가?" 주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정관효를 저승길로 보낼 작정이었는데 네가 끼어들 줄은 몰랐구나. 난 네가 조금 더 성장한 후 단우의 먹이로 남겨두고 싶었는데!" 주한성은 불문곡직, 단립을 향해 폭풍처럼 날아들었다. 소문선정자보를 펼치며 순간적으로 방위를 이동한 그의 주먹이 측면에서 단립의 관자노리를 향해 예각을 그렸다. 단립이 담담하게 웃었다. "권은 권으로 상대해 주마." 비쩍 마른 단립의 주먹이 주한성의 공세를 정면으로 받아쳤다. 빠직! "크으윽!" 주한성이 비명을 질렀다. 정권이 부서진 듯한 충격이 인 것이다. 주한성은 그러나 이를 악물고 협요궁전보의 두 번째 변화를 일으키며 찰나간에 오른쪽으로 돌며 그 탄력을 빌어 무릎을 올려쳤다. 예각으로 꺾인 무릎이 순식간에 단립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소림의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내게는 역부족이다." 제 15 장 탈 상 1 단립은 다시 주먹으로 주한성의 무릎을 향해 일권을 날렸다. 큭! 짧은 토막 비명과 함께 살떨리는 파육음이 다시 울렸다. 단립의 정권은 주한성의 무릎뼈를 거의 불구로 만들 정도로 강한 타격을 준 것이다. 주한성은 그럼에도 굴하지 않았다. 팔꿈치를 도리깨마냥 돌려쳤다. 동시에 부상당한 발로 간신히 몸을 지탱하면서 다른 발로 연속 십이퇴를 걷어찼다. 단립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이 무식한 녀석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겠다는 듯 오직 권법으로만 대적했다. 두 사람의 양 팔꿈치가 부서졌다. 발이 예리한 파공음을 울리며 허공에서 빠지직 소리를 내며 충돌했다. 정강이 뼈가 부딪친 충격으로 엇갈린 순간 무릎을 휘돌려 상대의 발을 감아 당김과 동시에 칼날처럼 변한 수도로 상대의 심장을 향해 쑤셔박았다. 그 손이 다시 허공에서 충돌했다. 그것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단립은 단씨일문의 절예인 단혼벽을 극성으로 익혀 전신이 쇳덩이처럼 강하게 단련된 상태였다. 그 금성철벽을 향해 연속 육탄공격을 펼치는 주한성은 주먹은 물론 무릎 아래 모든 근육이 뒤틀리고 뼈마디가 속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멍청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주한성은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단립, 넌 오늘 여기서 죽어! 그것은 불변이야!"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무식했다. 검법, 도법, 신법은 배우지도 않은 사람처럼 무식하게 접근전만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의 두 눈, 핏빛 혈선이 그어진 두 눈은 소름끼치는 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냉정했다. 정식 무공으로는 아직 단립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방심하게 만든다. 아주 철저하게. 나를 얕보게 만든 후 최후의 일격을 펼칠 것이다. 그리고 그 때는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집요하게 달라붙는 주한성의 끈기에 단립의 담담한 표정이 천천히 금이 가고 있었다. 짜증이었다. 주한성은 최후의 일초를 시도하기로 마음먹었다. "넌 죽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넌 오늘 죽는다." 주술인 양 전신에서 피와 뼈에서 나오는 진한 핏물을 줄줄 흘리며 연신 죽임을 뇌까리는 주한성, 그 모습을 본 단립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죽음을 각오하고!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주한성은 몸을 잔뜩 뒤로 젖혔다가 벼락치듯 솟구치며 이마로 단립의 허연 머리를 향해 그대로 내리찍었다. "이런 무식한 놈이!" 단립이 짜증을 내며 주먹을 들어 그대로 주한성의 이마를 향해 내질렀다. 우우웅 무시무시한 소리가 울리는 것으로 미루어 그가 대노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주한성이 희미하게 웃었다. 으스러진 주먹에 힘이 모이지 않았다. 그러나 주한성은 이를 악물고 양손에 힘을 주었다. 부서진 뼈마디가 살점을 가르는 고통이 통렬했지만 주한성은 바를 아득 갈면서 허리에 찬 쇄마혼검을 잡았다. 우두두둑! 소름끼치는 파열음이 울린 순간, 단립은 두 눈을 부릅떴다. 두 사람이 대치한 삼 척의 공간, 그 좁은 공간에서 느닷없이 섬광이 번뜩인 것이다. 그 섬광은 마치 뇌전처럼 미간을 향해 쏘아왔다. 산전수전 다 겪은 단립이건만 이 상황에는 주춤했다. 순간 주한성이 한 걸음 내 디디며 빙글 회전했다. 몸에서 뿜어지는 선혈이 자욱한 핏빛 운무를 만드는 순간, 검은 그렇게 한 줄기 찬란한 검기의 원을 형성했다. 단립은 일시지간 위기에 처했다.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펼친 이 공격을 파해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는 근 백여 년 간을 천하무림에서 군림한 마제(魔帝)였다. 그것은 피와 땀으로만 오를 수 있고 지킬 수 있는 자리였다. "단혼벽!" 짧은 일갈, 그리고 거대한 파장! 한 사람의 몸에서 저런 무시무시한 기운이 일어난다는 것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쇄마혼검이 허공에서 뚝 멈췄다. 귀신처럼 일그러진 주한성의 얼굴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소리없이 다가온 거대한 타격에 그렇게 몸의 일부분이 무너지고 있었다. 치지직!


쇄마혼검이 울부짖었다. 천하의 악을 징계한다는 소림사의 절대신병, 쇄마혼검도 단립이 펼친 단혼벽에 검신을 붉게 물들여 마치 피를 뿜듯 홍광을 뿜으며 울고 있었다. "단립, 넌 죽어! 그건 불변이야!" 으스스한 주술 같은 한 마디, 단립이 어이없어서 웃는 순간, 주한성은 돌연 쇄마혼검을 자신의 심장을 향해 돌렸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단립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단립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도인(導引), 당기고, 반출(搬出), 쳐낸다. 상대의 공격의 예봉을 거스리지 않고 찰나간 굴복하는 듯 예봉을 피하며 곧이어 이어지는 번개 같은 역습! 바로 그것이었다. 주한성은 목숨을 걸고 그 수법을 펼친 것이다. 단립은 이를 악물었다. 때로는 무공보다 더 무서운 것이 집념이고, 집념에 머리가 가미된다면 천하에 그 초식을 피할 수 없다는 경험을 그는 오래 전에 했었다. 그래,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단립도 주한성을 향해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이 마치 환상처럼 허공 한 곳에서 교차했다. 사사삭! 예리한 파열음이 울렸다. "아악!" 노미량이 놀란 고함을 질렀다. 주한성의 어깨를 관통한 채 박힌 단립의 수도, 그런 단립을 교차해 역시 어깨에 박힌 쇄마혼검! 허공에 찬란하게 번지는 핏줄기를 보며 단립은 허허롭게 웃었다. 무서운 놈이다. 북존을 경계했지만 그는 늙은 호랑이, 생각지도 않은 거호가 숭산 소림사에서 크고 있었다. 죽인다! 단립이 몸을 틀었다. 쇄마혼검에 관통당한 어깨뼈, 쇄골이 잘려나가는 고통이 섬뜩했지만 단립은 희미하게 웃었다. 늙은 생강이 달래 맵다더냐! 주한성 이놈, 넌 오늘 저승길이다. 어깨에서 쇄마혼검이 빠져나가는 순간, 단혼벽이 주입된 철퇴 같은 좌권(左拳)이 주한성의 안면을 통렬히 가격했다. 동시에 주한성의 어깨에서 빠져나온 오른손이 삽시간에 주한성의 사혈을 점해 버렸다. "크으으윽!" 주한성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미간과 인중이 부서지는 충격을 느꼈다. 그리고 예의 주먹이 백회혈을 강타했을 때 주한성은 정신을 잃고 허공에서 붕 날아 저만치 떨어지고 있었다. 으깨진 머리와 몸뚱이에서 뿜어지는 선혈이 긴 혈선을 그었다. "성아!" 놀란 외침을 날리며 노미량이 허공을 향해 떠올랐다. 주한성을 안아든 그녀의 미색 비단옷이 삽시간에 피로 범벅되었다. 주한성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죽은 듯이. 터진 머리에서 피를 뿜으며, 관통당한 어깨에서 피를 뿜으며 그의 생도 그렇게 서서히 침몰해 가고 있었다. 놀란 정관효를 비롯한 보광대사와 고람, 사대금강, 그 외에 모든 사람들이 놀라 주한성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단립은 힘들게 지면으로 내려섰다. 그의 오른팔도 치료불능일 정도로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단립은 형형한 눈초리로 주한성 주변을 애워싼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주한성이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정파쪽에는 아직도 절대고수들이 남아 있다. 지금 이곳에 투입된 잠마전의 인물들은 정예가 아니다. 그들은 북존과 함께 기습을 펼치고 있었다. 바로 정파인들의 이목이 이곳에 집중된 것을 노리고 구파일방을 기습, 정파를 흐트린다는 계획이었다. "정관효의 목을 따오는 자는 노부의 후계자로 봉하겠다." 단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섯 명이 솟구쳤다. "그는 우리가 처치하겠습니다." 정관효는 칼을 뽑아들었다. 그를 포위한 다섯 명이 풍기는 기도는 가히 당세무적(當世無敵)이었다. 오욕칠정을 완전히 제거한 무색의 눈, 전신에 흐르는 일격필살(一擊必殺)의 기도, 게다가 다섯 사람은 공수 요점의 방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자칫 섣불리 손을 썼다가는 돌아오는 것은 죽음이다. 정관효는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피에 절은 혈전, 정과 사 중 오늘 한 곳은 최후를 맞을 것이다. '이들이 잠마전 오조의 우두머리들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정관효는 검을 천중으로 치켜들었다. 정관효는 왼발을 비스듬히 앞으로 반발 내디뎠다. 그 때 보광대사가 정관효의 옆에 내려섰다.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교환하고는 공격을 개시했다. 정관효는 번개처럼 칼을 휘둘렀다. 일단 공격을 시작하자 기세는 태풍과 같았다. 불과 삼초 만에 칠 인은 검풍에 휘감겼다. 선기를 잡은 정관효는 거세게 밀어붙였다. 기척도 없이 목덜미를 쳐오는 검날에 다섯 사람이 뒤로 물러서려는 찰나, 보광대사가 벼락치듯 삼권을 펼쳤다. 권세는 맹호처럼 위맹하게 다섯 사람을 권경의 테두리에 감았다. 다섯 사람도 빠르게 양권을 휘둘러 정관효와 보광대사를 공격했다. 그들의 주먹은 불로 달군 듯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조심하시오. 단혼벽이오." 정관효의 외침에 보광대사는 담담하게 웃으며 몸을 틀어 다섯 사람의 공격을 피했다. 연후 보광대사는 공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오른 손에 주입한 후 소림무공의 정화인 무영신권을 펼쳤다. 다섯 사람이 일제히 한 곳으로 뭉치며 열 손바닥을 펼쳐 가공할 장력을 펼쳤다. 꽈지직! 보광대사가 주춤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다섯 사람 역시 공격을 펼치느라 드러난 허점, 그곳을 정관효의 검날이 파고들었다. 한 번도 손을 맞춘 적이 없지만 실로 절묘한 합격술이었다. "캐액!" 비명이 연이어 울렸다. 다섯 사람은 목이 잘린 시신으로 뒹굴었다. 상승세를 탄 정파의 인물들이 우르르 잠마전을 향해 몰려들었다. 그때였다. "멈추시오!" 젊고 낭랑한 음성, 불문의 사자후를 능가하는 음성이 관일봉 정상을 떨어울렸다. 신룡처럼 허공을 선회하며 한 사람이 잠마전 진영에 내려섰다. 이십중반에 후리후리한 키, 단아한 문사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 뒤를 이어 수많은 무리들이 내려서는데 그들을 본 정관효와 보광대사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느낄 수 없다. 도무지 상대의 기도를 감지할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이 장장 다섯이다. 그리고 그 뒤에 운집한 기라성 같은 고수들! "마군자!" 정관효의 말에 사내는 정중히 정관효와 보광대사를 향해 포권례를 취했다. "잠시 혈전을 멈춰 주십시오!" 그를 본 단립이 천천히 손을 거뒀다.


"금학우(金鶴羽)가 아니냐? 무슨 일이더냐?" 마군자 금학우,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그는 천제맹소속이지만 그 동안 끊임없이 잠마전과 신룡문의 대결을 결사적으로 반대해 왔다. 두 거대문파의 대결은 중원 무림의 멸망을 초래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해서 중원 정파의 무림명숙들은 금학우를 사파 속의 군자라 칭하며 그를 신임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신룡문과 잠마전이 커다란 충돌없이 지낸 것도 다 그가 중간에서 두 문파의 분란을 중재했기 때문이었다. "화급을 요하는 사항입니다. 속히 노야(老爺)께서 천제맹으로 돌아가 주십사 부탁을 드립니다." "천제맹에? 무슨 일이더냐?" "맹주께서 갑자기 혼절해 위독하시다고 합니다." 단립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오조 중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떨치고 있는 천제맹은 그 중요성으로 인해 단씨일가가 직접 통치하고 있었다. 현 천제맹주인 단계광은 단립의 독자로 주진룡을 제거할 때 심한 부상을 입어 아직도 병석에 누워 있었다. 그런 이유로 천제맹은 서열 이위인 금학우가 통치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 단계광의 생명이 위급하다는 전갈인 것이다. 단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결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관효, 차후 다시 만나 자웅을 겨루는 것이 어떤가?" 정관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쪽 피해도 상당했다. 특히 주한성의 부상은 치명적이었다. 더 이상 대결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정관효는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 잠마전의 인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주한성이 정신을 차린 것은 잠마전의 인물들이 모두 퇴각한 후 정파인들이 오비도인의 시신을 안장하려 할 때였다. 주한성은 한사코 시신의 안장을 거부했다. 잠마전의 의도가 진정 무언지 알려진 것은 그 다음 날이었다. 구대문파의 초토화! 잠마전주 단립이 오조의 수하들을 이끌고 천우사절을 비롯한 정파 기재들을 태산에 묶어놓은 동안 잠마전의 오조는 귀신같이 움직여 구파일방을 초토화시킨 것이다. 그러면서 등장한 것이 북존 검마와 감수경이었다. 그 조손의 손속은 참으로 지독하고 무서워 구파일방의 정예 중 태반이 그 조손의 암계와 독랄한 손속에 목숨을 잃었다. -패배! 정파무림은 치를 떨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아직은 힘이 없었다. 그렇게 태산 관일봉에서 벌어진 일차 혈전은 마무리되었다. 2 구월 말에 접어든 가을은 추색이 만연했다. 그 화려한 가을색은 한 사람의 가슴 속에 슬픔으로 차올랐다. 특히 이렇게 무심한 척 장원을 돌볼 때면 주한성은 더더구나 가슴이 아팠다. 그것은 퇴락한 영웅의 말로를 보는 것 같았다. 무영문은 텅텅 비어 있었다. 거대한 전각은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잡초가 우거지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후 드넓은 장원은 세월속에 하루 하루 퇴색해 가고 있었다. 잠마전과의 일차 혈겁이 벌어진 후 노미량과 전검휘는 모종의 장소로 이동했다. 노미량의 해산일이 다가왔으므로, 노천악의 장례를 치른 후 은거해 무공을 수련하기 위함이었다. 장차 잠마전과의 혈전을 앞두고 힘을 비축한다는 굳은 각오였다. 보광대사를 포함한 사대금강과 나머지 문파의 고수들도 제각기 힘을 비축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럼으로 인해서 무림은 좀체 보기 힘든 침묵과 고요 속에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부의 무덤에 한 잔 술을 올리고 오비도인이 남긴 책자를 살피던 주한성에게 귀한 손님이 찾아들었다. 연아였다. 함초롬히 비를 맞은 꽃처럼 아름답고도 순결한 여인, 그녀는 주한성을 바라보자 눈물을 글썽이며 주한성의 손을 꼭 잡았다. 주한성의 추레한 모습을 본 그녀는 서둘러 밥을 지어 식사를 마치고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입술을 꼭 깨물고 힘들게 입을 열었다. "동거해요!" 혼례를 치르지 않은 사람들간에 동거라! 여인의 입으로 언급하기 힘든 말이건만 힘들게 언급하는 연아. 주한성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두면 당신은 폐인이 될 것 같아요. 대장부가 한 번 부상을 당했다고 이렇게 위축되면 어떡해요? 이 먼지좀 봐요." 연아는 자신의 집이라도 찾아온 양 서슴없이 주한성을 목간으로 밀어넣고 집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간의 어정쩡한 동거생활은 시작되었다. 며칠이 흘렀다. 주한성으로서는 악몽같기도 하고 내심 즐겁기도 한 그런 시간이었다. 하지만 견딜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무공을 익히라는 연아의 닥달이었다. 그녀는 마치 사대금강의 화신이라도 된 양 주한성을 망룡대 옆에 위치한 연무장으로 내몰았다. 무공을 수련하지 않는다면 절대 가까이 하지 않겠다는 엄포와 함께! 주한성이 연무장으로 사라지면 연아는 복잡한 도해가 그려진 종이뭉치를 들고 무영문의 본관인 칠층 건물을 손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다. 오늘도 두 사람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망룡대의 정자에 술잔을 앞에 두고 마주앉았다. 시월 초를 알리는 편월이 살포시 고개를 내밀었다. 연아의 시선은 달에 고정돼 있었다. 그녀는 살포시 웃음을 머금었다. 이렇게 기습적으로 안방을 점거하고 나니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연아! 궁금한 것이 있소." 연아가 정감이 깃든 눈으로 주한성을 바라보았다. "말씀하세요." 주한성은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말했다. "나를 연무관에 보내고 무엇을 하는 것이오?" "훗날을 대비하기 위함이에요!" "훗날을?" "제가 이곳에 오기 전 구파일방의 총수들이 모여서 회동을 했어요. 그들은 더 이상 잠마전에게 당할 수만은 없다며 대반격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렇게 운을 뗀 연아는 그녀가 주한성을 찾게 된 연유를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구파일방에서는 정무구천을 중심으로 일치단결, 각파의 정예를 양성함은 물론, 천하에 널린 군웅들을 포섭한다고 했다. 반면, 정관효와 보광대사를 비롯한 몇 사람은 의견을 달리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면전을 원치 않았다. 각개격파를 하는 것이 혼란을 조성치 않고 잠마전이 노리는 단기간의 승부를 피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럼 이 무영문을 택한 것은?" "잠마전의 무덤이죠!" 주한성은 조심스럽게 연아를 향해 다가갔다. 그 모양이 우습기 그지없어서 연아는 조용히 웃었다. 며칠 동안 주한성을 겪어본 결과 그녀는 이 사내가 상당히 재미난 성격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전 연무관에서 본 주한성은 거칠고 남을 생각지 않는 안하무인의 인간이었었다. 혼자 독불장군처럼 매사를 처리하고 항시 그 뒷일은 다른 사람이 수습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겉으로 드러난 그의 일면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그의 내심은 따스했다. 어찌 보면 사람들이 그를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주한성은 타인에게 조심스럽고 정감이 있었다. 그 행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태산의 일차 대혈전이 있고난 후였다. 그는 사색하는 시간이 많아졌으며, 비로소 세상에 무공 이외에 다른 학문이 있는 것을 알게 된 사람처럼 다른 분야에도 몰두하게 되었다. 때로는 아주 쉬운 한자를 물어와 연아를 당혹케 하더니, 그 학문의 습득 속도가 하루를 다르게 늘어갔다. 연아는 그런 주한성이 좋았다. 강하지 않지만 남을 배려해 주는 자상한 마음 씀씀이가 마음에 들었다. 연아의 곁에 다가온 주한성은 조심스럽게 연아의 손을 잡고 귓전에 대고 입을 열었다. "안아…… 주고 싶어!" 연아의 얼굴에 고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았단 말인가? 사부의 죽음이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았지만 피가 끓는 젊은 청년이 여인을 눈앞에 두고 인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 그는 이 말을 하면서도 힘겨워 하고 있었다. "그런 것은 묻지 않으셔도 돼요." 연아에게 다가서는 주한성은 긴장으로 떨었다. 처음 연아를 마음에 담은 후 감수경의 문제로 고민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이상 감수경의 문제로 고민하지 않았다. 주한성은 연아의 턱을 가만히 받쳐 올렸다. 연아의 눈에서는 보석 같은 광채가 났다. 그 위 초생달처럼 휘어진 눈썹에 주한성의 입김이 닿았다. 연아는 다소곳이 앉아서 얼굴을 붉힐 뿐 거부하지 않았다. 덥수룩하게 자란 주한성의 구레나룻이 볼을 간지럽혔다. 주한성은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애무했다. 연아는 허리 부근에서 간지럼이 일어 전신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첫 입맞춤은 그렇게 강렬하게 그녀의 혼을 지배하고 있었다. 연아는 두 팔을 돌려 주한성의 목을 당겨 그의 혀를 깊이 빨아들였다. 알싸한 흥분이 전신으로 치달렸다. 연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서서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주한성의 숨결도 거칠어졌다. 두 사람은 점차 밀착했다. 그때, "호호호! 아무리 무영문이 퇴락했다지만 경비무사 하나 없다면 말이 되겠어요?"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떨어졌다. 무영문의 대문이 열려 있고 그 음영 아래 다섯 사람이 서 있었다. 선화였다. 그녀의 뒤에 다섯 사람이 시위하듯 그녀를 둘러싸고 망룡대를 향해 다가왔다. 두 사람이 얼굴을 붉히며 서 있자 선화는 고소한 듯 허리에 손을 올리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연애에 푹 빠지니까 기분이 어때요? 소문대로 하늘을 둥둥 나는 것 같나요?" 주한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빙긋이 웃어 보이고는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어째 어젯밤 꿈자리가 사납다 했지. 그대를 만나려 그런 모양이오!" 선화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구대문파와 잠마전이 일 년 후 이차 대혈전을 벌이기로 했다더군요. 전 사부의 명을 받아 사문으로 돌아가는 중이에요. 그 동안 신세를 진 여러 사람들에게 인사차 중원을 돌다가 마지막으로 이곳을 들렀어요. 주공자는 내게 잊을 수 없는 사람이거든요!" "이차 대혈전? 잠마전과 구파일방이 정면으로 대결한다는 말인가?" 선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관효 어르신입니다. 그 분은 한사코 이번 대결을 반대하고 있어요. 해서 정무구혼을 비롯한 연무관 출신들은 각자 모종의 장소에서 수련할 것을 명령받았어요. 그런데 전검휘대협은 사부들의 결정에도 무릅쓰고 일전을 불사할 생각인가 봐요." "형님께서?" "그 분의 의기는 하늘에 닿았어요. 누구도 그 분의 의중을 막을 수는 없어요!" "선화의 사문이라면? 해남도? 아니면 아미파를 말하는 건가?" "해남도에요. 언제 주공자도 시간이 있으면 들러 주세요! 물론 연아언니와 행복한 신혼생활이라 그런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선화는 말 끝을 흐렸다. 문득 그녀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힘겨운 동작으로 묵빛의 검을 내려놓았다. 쇄마혼검! 선화는 한동안 주한성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씁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는 세 사람을 마음 속에 두고 있었다. 전검휘, 그리고 이광혜, 마지막으로 알게 된 것이 저 주한성이었다. 누구보다 그녀를 강하게 끄는 인물은 정무구혼의 대형인 전검휘였고, 그 다음이 이광혜였다. 그러나 근자 들어 그녀의 생각은 심한 혼동을 빚고 있었다. 주한성에게 자꾸 관심이 끌리는 것이었다. 그것이 부질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화가 떠난 후, 하루가 지나기 전에 연아 역시 갑자기 정관효의 부름을 받고 무영문을 떠났다. -조심해요. 잠마전의 촉수는 끊임없이 주공자를 노리고 있어요. 주한성은 무영문에 칩거하는 듯 한 번도 중원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강호상에 은밀히 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추적술사(追跡術士)! 잠마전의 정체를 추적 살해하는 귀신 같은 인물. 그 행동이 신출귀몰해 잠마전에서 전력을 기울여 수색했지만 도무지 그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 년 후, 주한성은 충격적인 소문을 들었다. 이차 정사대혈전이 열리고 연아가 죽음을 당했다는 소문이었다. 슬픔은 이렇게 한 번에 밀려들었다. 주한성은 더욱 시름에 잠겼다. 그러나 강호에 진면목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쇄마혼검을 쥐고 사부와 연아의 원수를 가슴에 새겼다. 그런 와중에 세월은 흘러 삼 년이 경과했다. 3 입고 있는 것은 무명 삼베옷! 오비도인의 삼년상(三年喪)을 오늘에야 마쳤다. 그러나 주한성이 삼베옷을 벗기 무섭게 기다린 것처럼 무영문에 객(客)이 찾아들었다. 느낌이 좋지 않다. "닷냥이면 되겠는가?" '겨우?' 이 양반이 지금 제 정신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주한성은 꾹 눌러 참았다. 상대는 죽립을 푹 눌러써서 도저히 얼굴 표정을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성질을 누르며 상대할 수밖에 없는 것은, 늙수그레한 음성의 이 인물이 삼 년 전 고인이 된 오비도인의 친구라며 무작정 깎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세상에 사부를 내세우는 데 어떤 제자가 박대할 수 있단 말인가? "허허허! 젊은이! 그 정도면 충분히 계산한 걸세. 말이야 바른 말로 자네가 선사(先師)를 닮아


뜀박질이나 잘하지 그 외에 장기로 내세울만한 게 뭐 있는가?" 주한성은 픽 웃고 말았다. 오비도인이 경신술보다는 검술에 뛰어났었다. "노인장이 원하는 것도 그것 아니오? 보아하니 누군가를 구해서 줄행랑쳐 달라는 것 같은데, 뜀박질만으로도 충분할 거라 생각하오만?" "그럴 수도 있지만 세상사는 워낙 돌출변수가 많은 법이야. 예를 들어 도주하는데 누군가 검을 들고 막아서면 어찌할 텐가? 내가 구해 달라는 사람을 건네주고 나좀 살려 주십쇼 할 게 아닌가? 그래서 내가 자네를 믿을 수 없으니 이중으로 돈이 들어간단 말일세. 알기 쉽게 말하면 자네를 보호할 사람을 사야 하니 자연 사례금이 적을 수밖에 더 있겠나?" 주한성은 이를 악물었다. 이 노인이 정말 사부의 친구가 맞기는 맞는 건가? 오비도인의 친구라면서 어떻게 주한성이 달마삼검을 익힌 것을 모른단 말인가?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 안다. 주한성의 경신법이 중원 유수한 문파인 소림의 대나이신법을 비롯한 여타 구파일방의 경신법보다 빠르다는 것을! 하지만, 주한성의 주특기는 경신법이 아니라, 쇄마혼검으로 펼치는 달마삼검이라는 것을! 다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이제는 거의 다 죽어 증명해 줄 자가 없다는 게 문제지만. "잘 생각하고 결정하게!" 말하며 죽립을 깊게 눌러쓴 노인은 방안을 휘 둘러보았다. 이따금씩 죽립 속에서 번뜩이는 눈빛이 날카롭다. 주한성은 쌀을 담아놓는 나무 궤가 텅텅 빈 것이 들통날 것 같아 좌불안석이었다. 자고로 거래는 배짱이고, 배짱은 바로 쌀 궤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허허허! 이런 이런! 궁기(窮氣)가 자르르 흐르는구먼." 쌀궤 속이 보일 리가 없다. 노인은 주한성의 낯빛을 보고 넘겨 짚은 것이지만…… 주한성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하는 일에 겨우 은전 닷냥은 너무하지 않은가? 더구나 거래를 시작할 때에 적(敵)에 관해 물어 보았더니 하는 말이 고작 '자네가 알아 봐!'였다. '별 수 없다. 이렇게 박하게 나오면 훗날을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배짱을 부려야 한다.' 쓰윽 쌀 궤를 스치듯 바라본 주한성은 눈물을 머금고 정중히 닷냥을 밀어냈다. 그런데, 이 삿갓을 눌러쓴 노인은 남의 속도 모르고 서슴없이 은자를 품안에 집어넣는 것이 아닌가? 그 단호한 손길에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주한성을 향해 노인은 사각패를 꺼내들었다. 갑자기 주한성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넙죽 엎드렸다. "본 문파의 영패를 지닌 어르신을 몰라 뵈었습니다. 함자가……?" "늦었어! 죽은 친구 얼굴 생각해서 국수 사먹을 돈이라도 주려니까 젊은 사람이 영 버릇이 없구먼! 오늘 당장 출발하게." 문파의 영패를 보이는데 어쩔 것인가! 다만 마음 속으로 돌아가신 사부께 무영문의 명예를 헐값에 팔아 넘긴 죄를 심심히 사죄할 수밖에. 주한성이 주섬주섬 물품을 챙기는 것이 불만인지 노인이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이봐 젊은이! 그럴 시간이 어디 있는가? 천하가 오락가락 하는 판국에 그래 옷을 챙기겠다는 건가? 자네 선사께서 그렇게 가르쳤다면 내 훗날 저승에 가서 단단히 따져야겠군!" 주한성은 찔끔 놀라서 보따리를 팽개치고 냉큼 허리에 검을 찼다. "경천쌍미인(驚天雙美人)이라고 들어 봤나? 그들 중 한 여인을 추적해봐. 명심할 것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죽은 자네 사부는 물론이고 무영문(無影門)의 십대조까지 욕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걸세!" 여자?


퉁퉁 불어 있던 주한성의 얼굴이 활짝 개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음을 머금던 주한성은 자신이 오늘 막 사부의 삼 년 상을 마친 것을 상기하곤 어색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경천쌍미인이라면 지금은 전검휘의 부인이 되었지만 한때 천하에 미명을 날렸던 전검휘의 부인인 노미량과 아미파의 수제자이면서 해남도의 전설적인 집단인 남해검문의 소문주인 선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들 중 한 여인은 출가했고, 한 여인은 해남도에 거하고 있다. 그런데 노인은 그 여인들을 언급한 것이다. 주한성이 번쩍 정신이 든 것은 두 여인 모두 그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었다. 삼 년 상을 치르는 동안 주한성은 은밀히 무림에서 활동했다. 그 동안 수련한 무공을 실전을 통해 더욱 가다듬은 것은 물론이고, 추적술사(追跡術士)라는 그럴 듯한 명호를 들을 정도로 잠마전의 뿌리를 캐내고 있었다. 물론 그 동안 단우를 찾아 헤매었다. 그러나 단우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그 와중에 오늘 노인에게 잠마전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는 청부를 받은 것이다. '노미량과 연관이 있다면 혹시 이 노인장이 이 년 전 이차 대혈전 후 사라졌다는 전대 신룡문주 정관효어르신이 아닐까?' 노인은 품안에서 서찰을 꺼내 건넸다. 종이를 펼친 주한성은 미간을 좁혔다. -멸노문 필절손(滅盧門 必絶孫)! 천하에 이런 광오한 명을 내릴 단체는 단 한 곳 뿐이다. 잠마전, 이 년 동안 잠잠하던 그 무서운 단체는 한 달 전 남궁세가를 봉문시킨 것으로 시작해 다시 마수를 뻗치고 있는 것이다. "전검휘 부부를 구하기 위해 중원 구파일방이 회의를 열고 있다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전검휘 부부를 구할 힘이 없다네! 해서 불원천리, 오늘에야 탈상을 마친 자네를 찾아 온 것이네!" 앞서와 달리 노인의 음성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심중의 노여움을 삭이기 위해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가능하겠는가?" 노인은 진심으로 묻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삼 년 상을 마친 놈이 세상에 발을 들이자마자 바로 환락가로 접어들었으니, 행여 저승에 있는 사부가 벼락이라도 칠까 두렵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사부인 오비도인이 안배해 놓은 것이 이곳이 시발인 것을! 어느 덧 이십 중반! 주한성은 눈앞이 어른 어른했다. 삼 년 동안 잊고, 또 잊기 위해 노력한 것이 어찌 하나 둘일 것인가? 후각을 자극하는 술냄새에 뱃속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저 거리를 활개치듯이 돌아 다니는 여인들을 보더니 몸의 일부분인 이 괴물 같은 놈은 기승을 부리고 난리다. 삼 년 상! 모든 것을 죽인 세월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놈은 그 동안 속박했던 오랏줄을 벗어난 것처럼 대뜸 기승을 부리는 것이다. 주책없이 불끈 솟구친 놈을 붙들고 담벼락 으슥한 곳에 숨어서 일을 벌릴 수도 없는 일, 주한성은 죽은 오비도인을 주책이라고 내심 욕하며 서둘러 정보제공자를 찾아나섰다. 인간시장은 말 그대로 당일 당일 필요한 사람을 조달해 주고 그 대가를 받는 곳을 말한다. 쓰윽!


문을 열고 들어서니 별천지다. 도대체 몇 년 만인가? 사부의 삼 년 상과 그 전에 무공을 수련한답시고 발길을 끊은 것까지 합치면 족히 삼 년 반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불과 삼 년 반 만에 환락가는 다른 세계처럼 부딪쳐왔다. "어서 옵쇼!" 냉큼 달려와 고개를 숙이는 자의 얼굴을 살피니 이전에 연무관의 무공수련을 마치고 들렸을 때 그에게 설매라는 기생을 붙여준 그 점소이다. 그리고 그 뒤에 서서 유심히 바라보는 여인은 그 설매였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사부가 남긴 책자를 보고 무영문의 정보망을 달달 외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육오(陸五), 그 동안 재미가 좋은 모양이구려. 얼굴에 화색이 돌고 몸에는 부귀가 넘치오이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공자님의 얼굴을 뵈니 곤륜산(崑崙山) 제일봉에서 수련이라도 하셨는지 얼굴에 서광이 비칩니다그려!" 태연스럽게 받아넘기는 육오나 주한성이나 서로 흐뭇하기는 피차 일반이다. 육오의 입장에서는 대물주인 주한성의 사부가 죽은 후 처음으로 그의 제자인 물주를 만나 다행이고, 주한성으로서는 첫 걸음에서부터 일이 잘 풀려 즐거웠다. "허허! 역시 사람보는 눈이 절묘하구려. 자, 안내해 주시겠소?" 주한성이 말을 마치자 설매가 앞으로 나선다. 삼 년 반 동안 몸은 더욱 풍성해지고, 요염해진 것이 그 동안 한량들의 돈깨나 울궈낸 것 같았다. "호호호! 그 동안 어찌 지내셨나요?" 척! 설매는 팔짱을 꼈다. 십 년 살을 맞대고 산 낭군을 대하듯 다정스럽다. 물컹하니 어깨에 닿는 탄력있는 여인의 유방이 더할나위없이 그럴 듯하다. 그러나 주한성은 조그맣게 들려오는 설매의 전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노미량의 비밀은 좀 비싸요. 황금 백 냥, 물론 대금은 선불입니다." 황금 백 냥? 이 여자가? "설매! 내가 이 일을 얼마에 청부받았는지 알고나 하는 말이냐?" 설매는 냉큼 대답했다. "은화 닷냥이죠! 그러나 공자의 품안에는 지금 황금 이백 오십 냥이 들어 있군요! 그런데 무슨 남자가 그렇게 지저분해요? 백 냥짜리 전표 하나는 속옷 사타구니 사이에, 또 하나는 겨드랑이 사이에, 오십 냥은 머리에 두른 백건(白巾)에 숨겨두었군요!" 주한성은 눈이 동그래졌다. 투명안이라도 익힌 것 같다.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요. 소매치기에 익숙해지다 보면 상대의 몸에 닿는 순간 벌써 어디에 무엇이 숨겨 있는지 알게 되니까요. 더구나 돈이라면…… 그 돈은 벌써 제 것이나 마찬가지죠!" 아하! 결코 쉽게 생각할 여인이 아니다. "어떡할 거예요? 소매치기를 당하는 것보다는 직접 주시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을까요?" 육오는 이제 고인이 된 오비도인이 안배한 인물 중의 하나였다. 그다지 큰 일을 할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기실 간자(間者)로 가장 적합한 사람은 육오처럼 평범해 보이고 모나지 않은 성격의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부리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으로 위장해 절대적으로 비밀이 보장되었다. 이번에 남궁세가에 설매가 파견된것도 그런 이유였다. 한 달 전 남궁세가에 몰아친 피바람 중 희생당한 여인들의 숫자도 결코 적지 않았다. 그녀들을 염하고 옷을 입히는 데는 그래도 명가이기 때문에 당연히 여자일꾼을 구해 그 일을 하게 한 것이다. 설매가 그 일을 맡았던 모양이다.


주한성이 전검휘의 바쁜 임무를 뒤로 하고 나선 것은 다름 아닌 전검휘와 노미량이 은거한 곳을 모르기 때문이다. 주한성은 남궁가와 잠마전간에 벌어진 혈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 남궁설(南宮雪)이란 여인을 찾아나선 것이다. 노미량은 중원에 들어온 후, 사대명가 중의 한 곳인 남궁가와 친분을 맺고, 특히 남궁설과 친하게 지내, 얼마 전까지 그녀와 서신왕래가 있었다는 비밀을 탐지했기 때문이다. 말을 꺼내기 전 설매는 부르르 진저리부터 쳤다. "참으로 끔찍했어요. 시신이 남궁세가의 넓은 뜨락을 가득 메우고도 부족해 장원 곳곳에 방치되어 있었으니까요. 천여 명의 식솔 중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어요. 단 한 사람이 살아남았죠. 남궁세가주의 친여동생인데 놀랍게도 원수에게 투항했어요." 말을 하던 설매는 갑자기 정성스럽게 다듬어 묶은 머리카락을 풀었다. 엉망이었다. 머리카락 중 절반 이상이 한 치 정도만 남아 있었다. 대단히 예리한 병기로 한 번에 잘린 듯했다. "이 일은 극비 중의 극비라 이 사실을 알아내다가 내 머리카락이 이렇게 절반이나 날아간 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결코 백 냥에 대해 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 중 적에게 투항한 남궁설이란 여인에 대해 알고 싶기 때문이오." "그녀는 잠마전에 투항한 후 행적이 없어요. 그러나 그 정도 정보를 캐내지 못한다면 정보 제공자라고 할 수 없겠죠?" 설매는 다음 말을 전음으로 전했다. 주한성은 설매의 말을 유의해 듣고 기루를 나섰다. 하룻밤만 자고 가라는 설매의 성화가 대단했지만 일각이 급했던 것이다. "일 년 후에 폐업할 생각이니까 그 전에 반드시 한 번은 들려야 해!" 4 "오늘 저녁은 뭐로 하죠?" 노미량의 음성에는 생기가 넘쳐 났다. 지난 밤 내내 시달린 보람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해가 지는 저녁 무렵에 일어나도 야단은 커녕 코맹맹이 소리로 뭘 먹고 싶냐고 묻는 것을 보면! 애고, 이러다 삭신이 다 녹아 내리지! 전검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뭐 잘 만드는 게 있어야 주문을 하든가 하지? 비싼 재료들이 허구한 날 하수구에 처박히니 뭐 해달라기도 겁이 나서……!" 전검휘는 대답하다가 아차 싶었다. 그러나 이미 한발 늦었다. 빡! 영락없이 뒤통수에 불이 일었다. 이 정도 격타음이면 그나마 하나 남은 무쇠 솥이 부서지든가 머리에서 피가 튀든가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걱정과 상관없이 노미량의 고성이 귓전에서 콩튀듯 튀었다. "뭐예욧? 기껏 남의 귀한 딸 데려다 부엌대기나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재료가 어쩌고 하수구가 어째요?" 맞아도 싸지! 결혼생활이 이 년 만 지나면 신혼시절에 한 달콤한 약속들의 약발이 떨어진다는 가르침과 아내가 자식 낳고 나면 더 이상 나긋나긋하길 기대하지 말라는 고금의 진리를 망각했으니! "대충 아무거나 해줘! 아참, 개고기는 사양하겠어. 지난 저녁처럼 두어점 먹고 밤새 시달리기는 싫으니까!" 전검휘는 다시 찔끔했다. 그러나 생각 밖으로 아내에게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콧노래소리가 흥겨웠다. "후후후! 마나님, 즐거우신가?"


노미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전검휘는 천하에 부러울 게 없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이렇게 산골에 은거해 준 것만으로도 미안한데 아낙의 투정마저 스스럼없이 받아 주는 것이 고마웠다. 살며시 눈을 흘기는 노미량의 얼굴이 새색시처럼 곱다. 에라이! 전검휘는 아내의 펑퍼짐한 둔부를 냅다 갈기고는 밖으로 나왔다. 하남성 미타산(尾駝山)! 가을이 깊어 가는 산중은 고적하고 쓸쓸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날 때마다 단풍이 든 나뭇잎들이 떨어질 듯 위태하게 흔들린다. 그 광경에도 이렇게 무덤덤하니 산중생활에도 익숙해졌나 보다. "으아아!" 입을 쩍 벌리고 길게 기지개를 켜던 전검휘가 행동을 멈췄다. 석양을 가르며 날아오는 백색 비둘기들! 전서구들이다. 전서구는 사방을 둘러보다가 전검휘를 바라보고는 그대로 내리꽂혔다. 전검휘는 힐끗 고개를 돌려 노미량을 바라보았다. 노미량은 여전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저녁준비에 열심이었다. 전서를 받아든 전검휘는 취월거(醉月居)의 서재로 가 전서를 펼쳤다. 내용을 읽어 가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전검휘대협께! 먼저 전대협께서 그 동안 본문을 포함한 구파일방에 베푼 후의에 다시 한 번 고마움을 표하는 바외다. 소림의 산문이 아직도 소실봉의 입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도, 오늘도 석가세존께 새벽 예불을 올릴 수 있는 것도 모두 전대협께서 잠마전의 도발을 막았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알고 있소이다. 허나, 이 모든 전대협의 온정에도 불구하고 대협의 청을 거절해야 하는 소승의 마음은 실로 무겁기 그지없소이다. 구파일방의 장로들이 모 두 참석한 회의에서 전대협의 청은 수용불가라는 결정이 내렸소이다. 대협께서 무림에 끼친 공적이 혁혁하지만 금학우와의 관계를 청산하지 않는 한 구파일방은 전대협을 도울 수 없소이다. 전대협의 앞날에 부처의 가호가 함께 하시길 빌며 총총히 글을 마칩니다. 소림방장 고람.> 전검휘의 얼굴에 허무한 웃음이 스쳤다. "그렇지! 당신들에게 중요한 것은 문파의 보존과 명분 뿐이야. 그것을 알기에 도움을 청하면서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 작금의 이 위기가 나만을 노렸다고 판단한 것인가? 후후! 만일 이번 위기를 넘긴다면 구파일방과 나 전검휘는 남남이 될 것이다." 전검휘는 다시 몇 장의 서찰을 읽고 홱홱 던졌다. 남궁세가와 더불어 사대세가로 추앙 받는 곳에서 보내온 서신들이었다. 하나같이 전검휘의 당부에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전검휘는 마지막 남은 전서를 펼쳐들었다. 제 16 장 친구의 진면목 1 <자네에게 이 소식을 전하면서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는 바이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그대 부인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네. 현 무림은 자네도 알고 있듯이 정도(正道)가 아닌 마도(魔道)가 지배하는 세상일세. 정의보다는 사리사욕이, 우정(友情)보다는 권력(勸力)을 중시하는 세상이네. 이런 시대적 상황하에서도 전대 잠마전주 단립을 암살해 정파의 기개를 세우겠다는 남궁청의 단심(丹心)은 길이 무림의 표상이 될 것이나……, 어제 천제맹의 장로원에서는 남궁세가와 연관을 맺은 모든 생존자들을 모두 참살하기로 결정을 내렸다네. 자네 부인인 노미량도 이 범위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네. 이 결정은 한 달 안으로 집행될


것일세! 九月 二十日. 금학우.> 와락! 서신이 구겨졌다. 마지막 기대마저 이렇게 산산이 부서졌다. 그들은 끝까지 아내를 용납치 않았다. 이 전검휘의 명예를 걸고 그렇게 남궁가의 혈겁에 관여치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전검휘가 잠마전을 두려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무림에서 흘리는 피에 지쳐 버렸다. 평생 피 속에 살아오다 보니 피가 내뿜는 그 짙은 선혈에 질려 버린 것이다. 되도록 내년 원단에 갖기로 한 삼차 혈전까지 조용히 있고 싶었다. 그러나 잠마전에서는 벌써 서서히 준동하고 있었다. 화르륵! 서신이 삼매진화에 활활 타올랐다. -한 달이라! 오늘이 구월 스무 하루, 한 달여가 남은 건가? 한 달이 남았다! 긴 시간인가? 전검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동편에는 편월(片月)이 떠오르고 서편에는 석양이 스러지고 있었다. 과거의 영화와 현재의 안온한 생활이 모두 저 석양처럼 스러지는 것 같았다. 편월에 한 사람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와의 인연은 이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삼 년 전, 일차 태산 관일봉의 혈전에서 신룡문을 비롯한 정파 연합이 멸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금학우가 등장했었다. 그는 단계광의 생명이 위급하다는 거짓 보고로 정파의 위난을 벗어나게 해 주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그는 단립의 분노를 사 목숨을 버릴 뻔 했지만 단립의 아들인 단계광의 적극적인 비호로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이 년 전, 태산 관일봉에서 제 이차 대혈란이 벌어졌다. 당시 전검휘는 정파무림을 대표하는 신분으로 참석했다. 그때 놀랍게도 잠마전의 전주로 참석한 것이 단계광이었고 매사를 처리한 것은 금학우였다. 제 이차 대혈전도 일차 대혈전과 마찬가지로 잠마전, 구파일방과 신룡문에 막대한 피해를 초래했다. 당시 정파의 부흥을 위해 소림의 연무관에서 무공을 수련한 영재들 중 사문의 혈겁에 참가한 세 사람이 죽음을 당하고 잠마전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금학우와 전검휘의 우정은 시작되었다. 이 년 전, 무림을 등지고 은퇴할 때까지 금학우는 그의 벗이자 맞수였다. 금학우는 칼같이 단호한 성격이면서도 가슴 속에는 용광로 같은 정열을 품고 있었다. 권좌보다는 친구와 나누는 술 한잔을 더 중히 여겼다. 그와 헤어진 지 이 년, 흔히 사람들은 세월이 쏜살같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은 이 년 전 그와 금학우와의 일을 잊고 있을 것이다. 아니 이제는 누구도 전검휘란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묻혀지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인 노미량의 일로 해서 전검휘는 다시 강호로 나갈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한때는 천하를 위해 검을 들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가정을 위해서 검을 들 생각이었다. 통통통! 마치 고무공이 튀는 듯한 소리가 서재의 문 밖에서 들려와 전검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근심을 잊은 듯 웃음 지었다. 저 녀석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반드시 아내는 지켜야 한다. 끼이익! 서재의 출입문이 열렸다. 작고 앙증맞은 손이 문고리를 꼭 잡고 있었다. 손 주인은 이제 갓 두 돌이 지난 듯한 꼬마였고, 꼬마는


그네를 타듯 문고리에 매달려 방안으로 들어왔다. 오색 색동옷, 하늘거리는 웃옷고름, 바지 대님을 묶어놓은 색실,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뤄 천상의 신동 같은 소동이었다. 눈은 초롱초롱 영롱하게 빛나고, 전검휘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귀여운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빠빠! 찌…… 찌!" 모든 부모가 마찬가지이듯이 전검휘도 아들의 입모양만 보아도 녀석이 무엇을 말하려는 알 수 있었다. 아내가 저녁밥상을 준비하고 녀석을 보낸 것일 게다. "혁아! 이리 온!" 전검휘가 반쯤 쭈그려 앉아 두 손을 벌리자 소동은 문고리를 쥔 손을 놓고 전검휘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뒤뚱거리며 달려들었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이 위태로운 발걸음, 오직 아비만을 눈에 담고 아비를 향해 달려드는 소동을 그는 꼭 끌어안았다. "빠빠! 맘마!" "허허허! 알았다. 어디 우리 혁아가 많이 컸나?" 전검휘는 혁아를 번쩍 들어 목마를 태웠다. "꺄아아!" 혁아가 자지러지듯 소리쳤다. 녀석은 아비의 머리를 움켜쥐고 펄쩍거리며 뛰놀았다. "놈!" 전검휘는 어린 아들의 엉덩이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혁아도 아비의 손에 실린 정을 아는 듯 까르르 방울 구르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기저귀를 찬 아들의 엉덩이 살이 물컹하니 손에 잡혔다. 아직도 젖살이 남아 있는 살결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전검휘는 이를 악물었다. "캬아! 끼야! 끼랴!" 어린 혁아는 그저 목마를 탄 기분이 좋아서 아비의 머리카락이 한웅큼 빠지는 것도 모르고 엉덩이를 들썩이며 신바람을 내고 있었다. 취월거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니 폐부 가득히 서늘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붉은 단풍나무 곁에 홍시와 약과가 준비된 조그만 식탁이 놓여 있고 식탁 옆에는 노미량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부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마를 타고 있던 혁아가 몸을 뒤틀었다. "빠빠! 내 줘, 내려 줘!" 전검휘는 아들을 내려놓았다. 녀석은 발이 땅에 닿자마자 식탁을 향해 달려가 홍시를 덥석 집어들었다. 잘 익은 여린 감껍질이 손톱에 터져나가자 혁아는 작은 입술을 터진 부분에 대고 쪽쪽 빨았다. 전검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노미량이 전검휘의 옆에 앉아 두 부자를 번갈아 보다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혁아를 보면 꼭 당신을 보는 것 같아요!" 전검휘가 아내를 보고 물었다. "나를 보는 것 같다고? 어떤 점이?" "호홋! 신혼초야를 벌써 잊으셨나 보군요!" "아하!" 전검휘는 아내의 말뜻을 비로소 이해했다. 신혼 초야에 아내의 젖가슴을 애무하면서 한 말이 있었다. 이것은 꼭 단감 같소! 당시 노미량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말 한마디 못했는데 이제 아이를 낳고 나서는 서슴없이 이런 농담을 할 정도가 되었다. 하기사 그들 부부간에 숨길 일이 무어 있겠는가마는……. 아내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주면서도 전검휘는 가슴이 미어지고 있었다. 쉽지 않은 인연이었다. 단우에게 모진 고생을 당해 혼례를 적극 거부한 적도 있었고, 심중에 주한성이 미진하게 남아 끝내


혼인을 거부했던 노미량이었다. 그러나 전검휘는 그 모든 것을 인내해 냈다. 노미량은 그의 진정에 감복해 결혼한 후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영위해 왔다. "그 친구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군!" 전검휘가 '그 친구'라고 지칭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 금학우 뿐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상하게 노미량은 금학우를 좋게 보지 않았다. 마인은 마인이라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환경은 반드시 사람을 변하게 한다. 금학우가 비록 마군자라 칭송을 받는 사람이지만 그 내면은 알 수 없다는 것이 노미량의 주장이었다. 혁아가 홍시를 빨아먹는 소리만이 어색하게 흘렀다. 전검휘는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금학우, 적으로 만났으나 그 이상으로 가까워졌던 사내. "휴! 벌써 이 년이 지났군요!" 어둠 속에 울리는 노미량의 음성은 촉촉하게 젖어 들면서 계속 이어졌다. "난 당신이 금학우와 사귀는 것이 못내 의심스러워요. 그가 천제맹의 삼야(三爺) 중 소천야(少天爺)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앞이 캄캄했어요. 그가 만일 정인군자라면 어떻게 마도 총본산인 천제맹에 소속될 수 있을까 의아했지요! 그나마 다행인 것이 그가 중간에서 무림의 겁난을 중재했다는 점이지만요." "그렇지! 그의 단혼벽(斷魂壁)은 실로 무시무시했지. 그의 무공을 대적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노미량은 입을 삐죽였다. "그런 말 마세요! 이 년 전 태산 관일봉에서 벌어진 이차 대혈전에서 금대협의 단혼벽을 깬 당신의 변위추시검이 단혼벽보다 고명한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어요!" "허허허! 그것을 어찌 내 승리라 할 수 있나? 그 때 당신이 현학금(玄鶴琴:거문고)으로 모래를 날리고 바위를 부수는 신통한 힘(飛沙走石)을 곁들였기에 간신히 그를 이긴 것이지!" 노미량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의 말은 사실이었다. -남아는 홀로 일어서는 것이다. 죽은 노천악이 항시 딸에게 강조했던 말이었다. 거문고를 탄주해 전검휘를 돕기까지 그녀는 심한 번뇌를 했지만 결국 전검휘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의외인 것은 금학우는 깨끗이 패배를 승복하고 물러갔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단감을 맛있게 빨던 혁아는 어느새 의자의 등받이에 작은 몸을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노미량은 혁아를 안고 일어섰다. "이만 들어가요! 그 동안 당신의 거문고 탄주가 얼마나 늘었는지 들려 주세요!" 전검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취월거로 들어갔다. 아담한 정원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원의 한 구석 오동나무 아래에 한 사람이 조용히 서 있었다. 짙은 음영에 가려 사내의 용모는 보이지 않았지만 취월거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짙은 조소가 담겨 있었다. 스스슥! 사내의 뒤편에 한 사람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역시 음영 속에 서 있어 용모를 분간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준비를 마쳤습니다. 명을 내릴까요?" "곡양(谷樣), 조금 더 기다려 보자!" "지금이 적기입니다. 만일 전검휘 부부가 합격한다면…… 우리는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사내는 조용히 웃었다. "곡양! 그 동안 나를 보아왔으면서도 아직 나를 모르는가?"


"그러나 저들은……!" 뒷짐을 진 사내의 두 손이 슬며시 쥐어졌다. 가늘고 긴 손이 한 데로 모아지자 철권(鐵拳)처럼 단단하게 변했다. 사내는 눈길을 곡양에게 돌렸다. "난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곡양은 달리 할말이 없었다. 눈앞의 인물은 자신의 말대로 한 번도 실수하지 않는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죄송합니다." 탁자에 놓인 것은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고풍스런 현학금! 그것을 집어드는 굵은 손가락! 거문고의 음색은 사내를 닮았다고 했다. 강하게 퉁기면 사자후(獅子吼)처럼 기개가 솟구치고, 느리게 긁어 울리면 칠척 장부의 정한(情恨)처럼 둔중한, 음울한 가락을 토한다했다. 사각진 얼굴에 부리부리한 두 눈, 태산준령 같은 콧날에 굳게 다문 입술, 사내로서는 극히 강한 용모를 타고난 전검휘이었지만 거문고 앞에 앉자 고고한 학자 같았다. 퉁! 전검휘의 손길을 따라 낮고 굵은 음파가 실내에 깔렸다. 노미량이 검을 들고 전검휘의 옆에 섰다. 전검휘가 의아해 바라보자 노미량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제가 당신의 탄주에 맞혀 검무(劍舞)를 추죠!" 전검휘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아내가 혹시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다! 절대 알 리가 없다! "내가 잠든 동안에 연락이 왔었나?" "그래요. 비록 노씨일문이 봉문했다고 하나 천하에는 아직 동사혼도 출신의 무사들이 퍼져 있어요. 그들의 정보망은 절대 개방에 뒤지지 않아요!" 현 위에 놓인 전검휘의 손이 미미하게 떨렸다. 남은 한 달 동안 아내에게 정성을 기울이고 싶었는데 아내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챙! 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뽑혔다. 아내는 유달리 자존심이 강했다. 삼 년 전 풍비박산이 난 가문의 영화를 아직도 가슴 속에 품고 살아가고 있었다. 다시 노천악의 뒤를 이어 노씨일문을 재건하겠다는 일념이 저 여린 몸에 옹이처럼 박혀 있을 것이다. 전검휘는 현을 강하게 눌렀다. 두우웅! 거문고가 둔중한 울음을 토해내는 순간 허공에 세 송이 검화가 찬란하게 피어났다. 노미량이 노천악의 절기인 변위추시검을 시전한 것이다.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혼백을 절단하는 듯한 파공음이 울렸다. 일검 일검 정성을 쏟는 아내의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다. 전검휘는 추혼곡(追魂曲)을 탄주하며 얼굴을 싸늘히 굳혔다. 추혼곡은 아내에게 전수 받은 것으로 지난 삼 년 동안 익혀온 절대음공(絶代音功)이다. 마음을 명경지수처럼 가다듬어야 하건만 그의 내심은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제거해 주지, 잠마전을! 그 수괴 단계광을! 노미량, 당신을 위해서라면 내 자존심을 묻어 버리겠다. 당신을 택하게 된 와중에 떠나야만 했던 사문, 신룡문에도 도움을 요청하지! 전검휘의 손이 갑자기 빨라지고 급해졌다.


현이 끊어질 듯이 퉁겨지면서 마치 광풍노도같이 거센 기운이 실내를 휘저었다. 용이 난비하듯, 사자가 울부짖듯 거칠고 기운찬 음률이 취월거를 휩쓸었다. 그 가공할 음률은 전검휘가 마지막으로 현을 강하게 탄주하면서 끝을 맺었다. 투우우웅! 음파의 여운이 길게 이어졌다. "검을 이리 주게!" 노미량은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남편은 지난 이 년 동안 한 번도 검을 쥐지 않았다. "당신…… 무슨 뜻인가요?" "이 년 동안 몸에 슨 녹을 제거하려면 한 달이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야. 당신이 거문고를 탄주해 주게!" 2 그 시각, 취월거를 향해 길게 이어진 오솔길! 헉헉헉! 사력을 다한 질주가 이어진다. 취월거를 향해 질주하는 인영들의 발에 막 시들기 시작하는 풀잎 끝이 휘청 휘어진다. 열 세 명은 허공을 날았다. 풀잎이 구부러져 펴지는 탄력을 빌어 빛살처럼 앞으로 앞으로! 초상비(草上飛)! 절정의 경공술을 시전하는 것으로 보아 무림의 일류고수이련만 그들이 밟고 지난 풀잎 위에는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부상자들이다. 그들은 삽시간에 바람처럼 사라졌다. 숲은 다시 태고의 정적을 찾는 듯했지만 곧바로 다른 움직임이 이어졌다. 크르르르! 숨죽인 낮은 포효성! 지면을 치달리는 네 발 달린 짐승과 한 자 정도 떨어져서 달리는 조련사들의 빠름은 육안으로 식별하기 힘들었다. 짐승과 사람이 밟고 지나가는 것은 어김없이 먼저 달려간 인영들의 몸에서 떨어진 핏물이 맺혀 있는 풀잎들이다. 크르르르! 낮은, 그러나 살기돋힌 포효에 숲이 진저리쳤다. 사람과 짐승이 사라져서야 숲은 태고의 정적을 되찾았다. 그러나 지상에서도 한 사내가 움직이고 있었다. 달빛 아래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하얀 얼굴, 조금은 흐릿한 한 쌍의 눈이 이 모든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는 것은, 숲도 모르고 짐승을 조정해 앞서간 인물들을 추적해 간 자들도 몰랐다. 스윽! 그는 전혀 급한 것이 없었다. 이 급박한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답답할 정도로 한가하게 움직였다. 그럼에도 실질적으로 그는 매우 빨랐다. 한 발을 내딛는 순간에 십여장 앞을 전진하고 있었다. 추풍무영(追風無影)! -바람을 쫓되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강호인들은 이 경공술을 이와 같이 평하고 있었다. 추적술사(追跡術士)라는 이름과 함께 추풍무영은 마도의 인물들에게는 공포의 존재로 부각되어 있었다. 특히 어떤 비밀을 간직한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취월거가 다가오는 모양이군. 그런데 이거 곤란한 걸. 잡견에다가 색마로 알려진 놈이 나섰으니,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아! 하지만 검휘 형님이 있는한……!" 추적하는 자는 사냥을 하는 기분이고, 쫓기는 자는 피가 마르는 듯한 고통이다. 도주를 해본 사람만이 도주자의 심정을 안다. 더욱이 낯선 장소에서의 도주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이다. 저 앞에 서 있는 키작은 소나무조차 진로를 막아선 적(敵) 같다. 그것이 나무란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몇 척으로 접근한 뒤고 칼은 바람을 끊고 나무를 베어 버리고 난 후다. 나무 뒤에 사람이 서 있었다면 결과는 뻔하다. "크윽!" 참담한 비명 뒤에 확 피가 뿜어졌다. 남궁설(南宮雪)은 치를 떨었다. 벌써 몇 명째인 줄 모른다. 어둠이 유죄라면 유죄고, 이 늦은 밤에 숲에 들어와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면 문제다. 어차피 촌음이 중요한 이 시간에 피할 길은 없다. 양단된 시신이 쫙 벌어지며 파생된 공간, 피가 확 뿜어진 그 좁은 공간으로 전진하면서 남궁설은 이를 악물었다. '지독한 놈! 그놈에게 꼬리를 밟힌 것이 실수라면 실수다! 금학우, 그놈이 나를 감시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저 산굽이만 넘어서면 목적지인 취월거다.' 남궁설은 노미량과 절친한 친분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한 달 전, 남궁가를 봉문하게 만든 살겁에서 간신히 목숨을 연명했다. 누구의 도움으로 살아난 것이 아니었다. 청백지신을 잠마전주인 단계광에게 노리개로 바친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연명한 것이다. 그런 그녀가 그녀를 도우라고 은밀히 파견한 전검휘 휘하 수하들과 함께 잠마전을 탈출해 전검휘 부부를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다. 이 비열한 음모를 알려야 한다! 금학우, 그가 친구로 가장하고 노미량 부부를 노리고 펼친 이 함정을! 한 달이라는 시간은 거짓이다. 오늘밤 죽음의 신(神)이 그네들 부부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 몰랐다. 자신이 길을 나서는 순간, 방원 오백 리 안의 모든 지형이 산산이 파악되고 그 결과 전검휘 부부의 은거지가 파악되었다는 것과 이미 잠마전의 핵심세력이 그곳에 당도한 것을! 그녀가 막 산모퉁이를 돌아서려 할 때, 뒤편에서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조심하십시…… 큭!" 경고음은 비명으로 끝을 맺었다. 남궁설은 고개를 돌렸다. 삼 장 밖 어둠 속에서 마치 맹수의 송곳니 같은 흰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때마다 시뻘건 피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표견(彪犬)! 서사혼도에서 포획한 표범과 만주의 늑대를 교배시켜 만든 특수견! 머리부터 꼬리까지의 길이 육 척, 몸동작은 말 그대로 비호같고 후각은 일반 사냥개보다 몇 배는 뛰어났다. 한 번 추적을 시작하면 별도의 명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결코 멈추지 않는 독종이다. 잠마전에서조차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면 놈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악마가 이번에 이십여 마리가 출동한 것이다. 그 중 선두에 선 황소 만한 놈이 남궁설 일행의 후미를 노리고 도약했다. "능진(凌眞), 피해라!" "저는 염려 마시고 어서 가십시오! 살아나셔서 반드시 남궁가를 재건해 주십시오." 달리며 말하는 것은 금기(禁忌), 능진은 한두 걸음 처지게 되었고, 그 순간 그는 가슴을 섬뜩하게


울리는 파공음을 들었다. 쉬이익!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능진은 쩍 벌린 거대한 주둥이와 칼날처럼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고 재빨리 고개를 틀어 피했다. 하지만 표견의 공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일격이 빗나가자 놈은 허공에서 교묘하게 허리를 틀면서 앞발로 능진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공격을 가하는 순간 놈들의 발 끝에서 고양이과 특유의 발톱이 삐져나왔다. 능진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막았다. 가각! 뼈마디가 부서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리면서 발톱에 할퀸 살점이 허공을 날았다. 뼛골이 쑤시는 고통과 함께 눈앞이 캄캄해졌다. 표견의 앞발 공격은 황소의 대가리조차 박살내는 위력을 담고 있어서 단 일격에 팔이 짓이겨진 것이다. 뼈를 쑤시는 고통에 정신이 아득하던 능진은 뭔가가 다가오는 느낌에 후딱 정신을 수습했다. 표견이었다. 놈은 포효도, 기척도 없이 다가와 능진의 머리를 덥석 삼켜 버렸다. 퍽! 머리가 놈의 아가리 속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표견은 머리를 휘돌려 능진을 던져 버린 후 다시 도약했다. 이 표견의 공격은 급작스럽고 또한 빠르게 끝나 버려 남궁설은 도움의 손길을 뻗치지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크르르르! 갑자기 공기를 울리는 살음이 사방에서 울려왔다. 표견과 적은 영악했다. 남궁설 일행이 능진의 참사에 잠시 주춤한 틈을 타 측면으로 돌아 일행을 둥글게 에워싼 후 포위망을 좁히는 것이다. "십방검진(十方劍陣)을 펼쳐라!" 한 사람이 말했다. 십방검진은 노씨일문이 자랑하는 검진이다. 열 명이 십방을 점하고 두 명이 안에서 보조를 이루는 이 검진은 현 무림에서 아직까지 파해되지 않은 절대검진 중의 하나였다. 남궁설을 중심으로 전검휘의 수하들이 둥글게 원을 만들었다. 차라랑! 일제히 검을 뽑아들어 전방을 가리키자 검기가 사방으로 뻗치면서 반경 십 장 안의 나무들이 검기에 휘말려 가루로 변했다. 하지만 이 가공할 검진에도 표견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포위망을 좁혔다. 그때였다. 삐이익 하고 호각 소리가 울렸다. 살기를 뚝뚝 흘리며 일행을 노려보는 표견 뒤편에 사람들이 하나 둘 출현했다. 전신을 둘러싼 철갑(鐵甲), 허리에 찬 철검, 눈썹을 가릴 정도로 눌러쓴 철립, 발에 신고 있는 검은 색의 신발은 달빛을 고스란히 반사하고 있었다. 추적자로서는 황당할 정도의 중무장이다. 분명 무언가를 대비하지 않고는 이런 복장을 할 필요가 없다. 단 한 사람만이 청삼을 걸친 평복 차림이었다. 그는 철객(鐵客)들의 선두에 서 있는데 얼굴에 길게 칼자국이 그어졌지만 상당히 준수한 자로 나이는 삼십 중반 정도였다. 남궁설을 바라보는 가늘게 째진 눈에는 의외로 살기보다는 음침한 색기가 감돌았다. 남궁설은 이마를 찌푸렸다. 사내의 눈빛을 접하자 마치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낸 듯한 기분이 든 것이다. 동시에 단계광의 수하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는 사실에 울화가 치밀었다. 청삼인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만 잠마전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소?" 목소리조차 음침했다. 상대를 향해 쏘아붙이려던 남궁설이 주춤했다. 그의 왼쪽 가슴에 수놓여진 글자를 본 것이다. <계(戒)!> 잠마전 추살대(追殺隊)만이 저 글자를 수놓고 있었다. 이들은 잠마전을 배반하는 반도와 비협조적인 자들을 척살하는 죽음의 사신들이었다. -반드시 죽여라! 잠마전주 단계광이 그렇게 명한 것이다. 지난 한 달 동안 그녀를 노리개로 가지고 논 후에! 남궁설은 앞에 선 인물을 냉랭하게 노려보았다. "네가 잠마전 추살대의 두목인 후극진(候極鎭)인가?" "후후후! 이렇게 아름다운 낭자가 본좌를 알아 주다니, 무상의 영광이로소이다!" 남궁설은 파르르 떨었다. 설마 설마 했다. 그러나 후극진이 자신을 추적한 뜻은 명확했다. 오늘 단계광은 남궁가의 씨를 말리려 작정한 것이다. -승자의 아량이라 착각하다니, 이렇게 죽을지도 모르고 비열한 삶이나마 살아가려고 놈의 온갖 요구를 들어 주었단 말인가? 남궁설의 눈동자가 표독스럽게 변했다. 수하들도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그녀를 중심으로 검진을 축소했다. 사방 십 장으로 퍼졌던 기운이 삽시간에 오 장 안으로 좁혀지면서 검진은 더욱 강해져 허점이라고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후극진은 그 모습을 보고 살며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는 손을 들어 십방검진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목하며 입을 열었다. "제군들의 목적은 전검휘부부에게 오늘 우리가 기습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 아니었나?" 전검휘의 수하들이 주춤하자 후극진은 손을 들어 취월거를 향해 난 오솔길을 가리켰다. "그대들의 충정을 기특히 여겨 길을 열어 주지! 물론 시간은 반의 반각! 그 후 추적한다." 남궁설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흥! 교활한 작자 같으니! 속지 마세요. 십방검진이 두려우니까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네 말이 옳아! 십방검진은 분명 두렵다는 것을 시인하지. 그러나 그대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달려온 목적이 뭔가? 그대들이 여기서 머뭇거리는 동안 취월거는 쑥대밭이 될 것이다." 남궁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한 달 전, 남궁가에 불어닥친 피바람에서 살아난 사람은 남궁설 자신 뿐이었다. 그녀는 지금 잠마전을 탈출해 전검휘부부에게 몸을 의탁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천하에 오직 신룡문만이 잠마전과 대적할 수 있기에. 만일 그들마저 해를 입는다면? 남궁가의 맥이 끊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부친의 원수는 영영 갚을 수 없는 것이다. 남궁설은 자신의 안위를 돌볼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가세요!" "낭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서 가세요! 가서 전검휘 부부를 도와요! 아니 돕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아요. 한 사람이라도 잠마전의 기습을 알려요! 전검휘 부부가 사실만 안다면 탈출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에요." 남궁설의 단호한 명령에 수하들은 푹 고개를 숙였다. 후극진이 삐이익 호각을 불었다. 전방을 포위하고 있던 표견들이 스르르 물러났다. 비록 명을 따라 물러섰지만 놈들의 목덜미 털은 빳빳이 곤두서고 으르렁거리는 입가에서는 침이 질질 흘렀다. 기필코 피를 보고야 말겠다는 듯이!


십 일 인은 진을 풀고 하나 둘 포위망을 벗어났다. 연후 한 방향으로 도주하지 않고 부챗살처럼 퍼져 도주했다. "제법 머리를 쓴다만은……!" 후극진의 말에 표견들이 땅바닥을 긁었다. 열 한 명이 사라진 곳을 노려보는 놈들의 발 끝에서 다섯 치 가량 되는 비수처럼 예리한 발톱이 삐져나와 땅을 갈랐다. 실로 무서운 광경이다. 삐이익! 후극진이 호각을 불었다. 열 한 마리가 지면을 박차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 뒤를 수하들이 남은 표견들을 지휘해 곧장 오솔길을 향해 치달렸다. 철갑에서 나는 철그럭 소리만이 여운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제 장내에 남은 것은 후극진과 남궁설 뿐이었다. 한순간 남궁설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부르르 떨었다. 후극진이 이상야릇하게 웃었다. "후후후! 야밤에 미녀와 단둘이 있으니 운치가 그럴 듯하군! 어떠냐? 이렇게 된 것 앙탈 부리지 말고 그럴 듯하게 한 번 어울려 보는 것이?" 남궁설이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미친놈! 너 같은 작자와 어울릴 바에는 차라리 죽고 만다." "그래? 과연 그 장담이 이뤄질까?" 비웃으면서 다가서는 몸 일부분이 불룩하게 솟구쳐 올랐다. 아마 벌써 음심이 동한 듯했다. 남궁설은 품안에서 비수를 꺼내들었다. "설령 죽더라도 네놈에게 그런 영광은 없을 것이다." 후극진은 느물거리며 웃었다. "금학우대협을 아나?" "흥! 친구를 배반한 놈을 왜 입에 담느냐?" "그 분께서 취월거에 당도해 계시다. 그 분이 직접 나섰는데도 노미량과 전검휘가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나?" "흥! 그들이라면 최소한 금학우와 동귀어진은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궁세가의 원수도 값는 것이지." "후후! 그럼 남궁세가의 대는 누가 잇느냐? 그냥 이대로 무림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건가? 애초에 네가 맹주님께 몸을 바친 것도 최악의 경우 남궁가의 맥을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알고 있는데?" "네놈의 말뜻은?" "후후후! 너를 살려 주겠다." "흥! 그 대가로 몸을 달라 이건가?" "물론! 거래야 항상 공평해야 하니까!" "더 좋은 방법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군! 바로 네가 죽어 주는 거다." 남궁설은 곧장 달려들면서 살벌하게 검을 그었다. 파르릉! 일검은 찰나간에 십검으로 변하면서 후극진을 휘감았다. 마치 열 사람이 열 방향에서 공격하는 것 같은 신랄한 검초는 후극진이 피할 방위를 완벽히 차단하고 있었다. "그래! 그 정도 앙탈은 각오하고 있었다." 후극진은 허리를 교묘하게 틀어 남궁설의 공격을 흘려 버린 후 앞으로 크게 한 걸음 내디디면서 오른 손을 부채처럼 뻗었다. 쫘르르릉! 열 손가락에서 뿜어진 지력에서 쇳소리가 울렸다. 놀란 남궁설은 재빨리 검을 회수해 번개같이 반원형의 검막을 형성했다.


그러나 후극진이 펼친 강맹한 지력은 거칠 것이 없었다. 남궁설이 만든 검막을 산산조각으로 부숴 버리고는 몇 군데 혈도를 점해 그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후후후! 이거 너무 간단하잖아? 설마하니 마음 속으로 날 사모하고 있던 거 아냐?" 남궁설은 입술을 깨물었다. 후극진의 무공이 이토록 강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혈도를 제압 당한 그녀는 미동도 하지 못했다. 쓰윽! 후극진은 서슴없이 남궁설의 가슴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탄탄한 유방이 한 손에 잡혀들자 그는 음흉하게 웃으면서 연신 손을 놀렸다. 그 뿐인가? 남은 한 손도 놀고 있으면 심심하다는 듯이 하의 속으로 사라졌다. 남궁설의 부릅뜬 눈에서는 연기가 풀풀 날릴 지경이지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그저 눈동자 뿐이었다. 그 앙칼진 표정이 후극진을 더욱 자극했을 것은 뻔한 이치! "후후후!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후극진은 남궁설을 바닥에 눕히가 무섭게 손을 놀렸다. 밝은 달빛 아래 드러난 여인의 알몸이 너무도 아름다워 후극진은 꿀꺽 침을 삼켰다. 어느 한 곳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하늘로 솟을 듯 탐스럽게 부풀어오른 유방과 적당히 살이 오른 둔부와 대리석같이 쭉 뻗은 두 다리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어둠 속 달빛 아래 반짝이는 저 하얀 살결은……! 후극진은 서둘러 옷을 벗었다. 자칫 시간을 끌다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다는 주변의 경험담을 수없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암! 실수할 수는 없지! 이 좋은 때를 놓칠 수 없고 말고!' 거추장스런 것들을 제거한 그는 서둘러 남궁설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 더 빨랐어야 했다. 막 허리를 놀리려고 할 때 패앵 하는 파공음이 울렸다. 귀가 무언가에 베어진 듯 화끈했다. 그의 귀에 상처를 남긴 물체는 무엇에 끌리기라도 한 것처럼 처음 날아온 곳으로 되날아갔다. "회…… 회풍비(回風匕)!" 후극진은 자신도 모르게 떠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못된 작자일세. 하인주제에 주인의 밥상을 넘보면 어쩌자는 거야? 단계광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줄까?" 쩝! 후극진은 입맛을 다셨다. 단계광은 죽이라고 했지 재미를 보라고 하지는 않았다. 맹주가 손댄 여인을 함부로 넘보았다면 그가 아무리 추살대의 대주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해도 죽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그럼에도 후극진은 재차 입맛을 다셨다. 어차피 지그시 한 번 눌러 버리면 끝난다. 은근 슬쩍 저걸 한 번 밟아 버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벌떡 일어서면서 얼른 옷을 걸쳤다. 아직은 아니다. 회풍비를 사용하는 놈은 단 하나다. 추적술사라는 명호로 삼 년 전부터 위명을 날리는 자 뿐이다. 그를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나 이대로 꽁지 빠지게 도주할 수는 없는 법. "당신이 추적술사요?" "지금 나에 관해 물을 시간이 없을 텐데. 난 개들이 홀레를 붙어도 일단 마칠 때까지 기다리지만 그렇다고 인내심이 강한 편은 아냐. 그나마 너를 살려 주려는 것은 내가 이 일에 관여한 것을 네 두목에게 알리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곧 마음이 변할 수도 있어." 후극진은 벌떡 일어나 도주했다. 건들거리는 그것을 다급히 가리기 위해 허둥거리는 모습을 본 남궁설은 전혀 웃을 상황이 아님에도 웃음이 터졌다. 남궁설은 고개를 돌렸다. 오 장여 떨어진 곳, 나무 그늘 아래 한 사내가 음영처럼 서 있었다. 이십대 중반에 눈빛이 조금은 흐린 사내였다.


"아름답구려. 내가 본 여인 중에 당신의 몸매가 가장 멋졌소." '미친 놈!' 달빛 아래 여인이 옷을 입는 희한한 광경을 주한성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남궁설은 이마를 찌푸렸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로 시간을 끌 수는 없다는 생각에 서둘러 몸을 날렸다. 제 17 장 전검휘, 그 영웅의 말로 1 "검휘아! 검을 든 이유가 무엇이냐?" 처음 검을 들었을 때 사부인 노천악이 물었다. "검도(劍道)를 알기 위함입니다." 노천악은 고개를 저었었다. "검은 살상의 무기다. 난 다른 사람들과 달리 검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검에 도가 있다? 난 모른다. 난 강해지기 위해서 검을 들었다." "강해지기 위함이라 하심은?" -사람은 무릇 태어나는 순간에 이미 여러 사람의 운명을 거느리고 있다! 작게는 너, 너를 둘러싼 식구들, 훗날에는 너를 믿고 일가를 이룰 여인과 네 자식들이 바로 너의 운명이다! 넌 그들을 위해 강해져라! 검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마라. 검은 오직 적을 죽이기 위해서, 너와 네 운명을 지키기 위해서만 들어라! 처음 전검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스승은 검도를 추구하는 현자(賢者)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분이 제자에게 살검(殺劍)을 가르치신 것이다. 강호에 출도한 후에야 비로소 전검휘는 사부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강호에서는 힘이 모든 것에 우선했다. 힘없는 자의 논리는 한낱 패배자의 넋두리에 불과했다. 노미량의 거문고소리가 점차 장중해졌다. 대지를 질타하는 말발굽소리처럼 드높아지는 음률을 따라 전검휘의 검은 공기를 끊고, 휘몰고, 갈라쳤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면서 기혈의 순환이 원활해지고 지난 삼 년 동안 몸 속에 퇴적되어 있던 탁한 기운이 몰려나갔다. 취월거 안의 공기가 금방이라도 검기와 음률에 폭발할 듯이 부풀어올랐다. 그때였다. 탄주하던 노미량이 돌연 탄주를 멈췄다. 동시에 전검휘도 허공을 베던 검을 멈추고 홱 돌아섰다. 검이 겨눈 곳은 취월거의 출입문, 검 끝에서 살기가 솟아났다. "누구냐?" 노미량이 앙칼지게 외쳤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대신 문 밖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부부의 시선이 부딪쳤다. 전검휘는 아들이 홀로 잠자고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 -혁아가 위험하다. 와장창! 전검휘가 창문을 부수며 뛰쳐나갔다. 크르르르! 낮은 포효성이 울리면서 거대한 짐승이 코앞으로 달려들었다. 근거리에 있던 표견이 기습공격을 가한 것이다. "미물이 감히!" 번쩍! 섬광이 허공을 가르면서 자욱하게 피가 튀었다. 표견이 단 일검에 양단되어 나뒹굴었다. 그러나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소리 없이 접근하는 것은 표견과 그 뒤를 따르는


검은 인영들이었다. 그때 반대편 창에서도 와장창 소리와 함께 짐승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노미량도 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급해진 전검휘는 그대로 허공으로 솟구쳤다. "변위추시검!" 파아앙! 수백 가닥의 검기가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검기에 닿는 것이 모조리 부서져 버렸다. 표견은 물론, 그 뒤에 서 있던 검은 인영들도 단 일검에 전멸 당하고 만 것이다. 그 순간, 아내가 있는 쪽에서 둔중한 거문고음이 들려왔다. 투우웅! 마치 고막을 짓이기는 듯한 음파가 거대한 해일처럼 취월거 주변을 휩쓸자 사방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추혼곡이었다. 아마도 은신해 있던 인물 중 대부분이 고막이 터지고 내부가 진탕되어 죽었을 것이다. 전검휘는 취월거의 후면에 위치한 아들의 잠자리로 치달렸다. '후후후! 놈 어서 오너라. 그래 아들을 보고 싶어 서두른다만 이것이 지옥길이라는 것을 모르겠지.' 한 사람이 땅 속에서 이를 갈았다. 이전 그는 한 번도 땅 속에 은신한 적이 없었다. 땅 속에 은신하기는 커녕 키가 구 척을 넘고 타고난 신력에다 무공도 고강해 당당하게 중원 무림을 누볐다. 그러나 오 년 전 그는 전검휘에게 패한 후 이렇게 땅 속에 은신하는 두더지 신세로 전락했다. 오직 전검휘를 죽인 다음에 하늘을 보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셋, 둘, 하나! 푸아아악! 아들의 처소와 몇 걸음 앞두고 전검휘는 흠칫 놀랐다. 땅이 벌떡 일어선 것이다. 아니 한 사람이 땅에서 솟구치는데 그렇게 보였다. 키가 무려 칠 척을 넘는 거한이 기다란 장도를 사선으로 쳐들고 자신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올올이 곤두서 있었고, 두 눈에는 흉광이 마치 번갯불처럼 일렁였는데 휘두르는 거대한 칼날은 시퍼런 녹광을 띠고 있었다. "전검휘! 어딜 가느냐? 먼저 내 칼을 받아라!" 쉬아앙! 거도가 일진광풍을 휘몰며 정수리로 떨어졌다. 전검휘는 일단 몸을 날려 공격을 피했다. 퍼엉! 거도가 땅을 치자 땅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쳤다. 천번지복의 난리가 난 듯 지면이 뒤집어지면서 뿌우연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먼지 속에서도 거도는 재차 정확하게 정수리를 내리쳐왔다. 전검휘가 눈을 부릅떴다. "광중광마(狂中狂魔)!" 광중광마! 그는 마도 무림의 거두였다. 그가 오늘 이곳에 침입한 것도 의외였지만 그가 감히 자신에게 검을 겨눈다는 것 자체가 어이가 없었다. 그는 오 년 전에 단 삼 초 만에 그에게 패해 도주했던 인물이다. 전검휘의 노기는 만장을 솟구쳤다. "너 같은 마두가 감히 취월거를 침범하다니 죽음으로 징계하리라!" 전검휘가 분노의 일성을 터뜨릴 때였다. 소리도 없었다. 전검휘가 선 후면 땅거죽이 스르륵 일어섰다. 마치 그림자가 움직이듯 기척도 없이 일어난 삼 인은 품안에서 조그만 활과 화살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화살이 이상했다. 여인의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길었다. 또한 머리카락처럼 바람에 출렁였다. 그러나 세 사람이 시위에 거는 순간 화살은 마치 철사처럼 꼿꼿이 곤두섰다. 이 모든 행동이 전검휘가 분노의 일성을 내지를 때 일어나고 마무리되었다. 그것도 모른 채 전검휘는 검을 광중광마를 향해 수평으로 뉘어 곧게 뻗었다. 츠츠츠츠! 검 끝에서 사람의 눈을 멀게 할 듯한 광채가 번뜩여 광중광마의 공격과 충돌했다. 꽈가강! 거대한 충돌음이 울리며 광중광마가 정신없이 뒤로 밀려났다. -이때다! 세 사람은 일제히 시위를 놓았다. 세 가닥 가는 실선이 파공음도 없이 전검휘의 머리 뒤 뇌호혈(腦戶穴)과 명문혈, 뒷등을 뚫고 단전으로 파고들었다. 이 세 혈도는 자칫 잘못 공격을 당하면 정신착란을 일으키거나 그대로 즉사하는 치명적인 급소였다. 피를 뿜는 광중광마를 추적하려던 전검휘가 주춤 멈춰섰다. 뒤통수가 마치 벌에 쏘이는 것처럼 따끔했던 것이다. 전검휘는 반사적으로 돌아서면서 그대로 검을 수평으로 그었다. "캐애액!" 세 사람이 비명과 함께 그대로 양단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하나같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보았던 것이다. 전검휘의 몸 세 곳을 통해 사라진 가느다란 화살을! 이제 그것들은 마치 뱀처럼 전검휘의 머리와 단전으로 파고들어 그를 폐인으로 만들 것이다. "클클클! 전검휘, 네놈도 오늘밤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미친놈들. 어림없다." 장담은 했으나 전검휘의 고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피를 토하고 물러섰던 광중광마가 부러진 거도를 비표처럼 던지며 덮쳐온 것이다. 신력을 타고난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던진 비표는 휭휭 소리를 내면서 전검휘의 허리를 쳐왔다. 전검휘는 파공음을 듣자 홱 돌아서면서 그대로 일검을 쳐냈다. 그런 전검휘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갑자기 진기가 뚝 끊긴 것이다. 검초를 채 반도 펼치지 전에 광중광마가 던진 거도와 충돌했다. 까가가강! 서걱! 충돌음과 파육음이 동시에 울렸다. "우욱!" 전검휘는 배를 움켜쥐고 비틀 물러섰다. 틀어막은 손 사이로 피가 울컥울컥 솟구쳐 올랐다. 뱃가죽이 완전히 거덜난 것 같았다. 그러나 전검휘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디며 검을 수평으로 뻗었다. 스팟! "크아아악!" 득의에 찬 표정으로 서 있던 광중광마가 비명을 질렀다. 전검휘가 비록 부상을 입었지만 그의 일신 공력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었다. 광중광마는 전검휘가 죽은 줄 알고 방심하다가 무방비상태에서 일격을 당한 것이다. 광중광마는 길게 베어진 심장부근을 두 손으로 틀어막고 이를 갈았다. "놈! 비록 네 의지는 존경스럽다만 오늘 네 가족은 반드시 몰살당한다." 광중광마는 저주를 퍼붓고는 비척이며 쓰러졌다. 전검휘는 비척이며 그 시신을 밟고 아들의 방으로 향했다.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합공이 아니다. 미리 철저히 준비한 후 감행한 습격이다. 아내와 혁아가 위험하다.' 전검휘는 아들의 침실로 달렸다.


크르르르! 짐승의 포효가 혁이의 방안에서 들려왔다. 노미량은 앞뒤 돌아보지 않고 방문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그녀가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비웃음이 들려왔다. "후후후! 경천쌍미인답게 뛰어드는 동작도 우아하시군!" 노미량은 재빨리 방안을 살폈다. 후극진은 침상 옆에 서 있었고 표견은 혁아의 머리 위에서 송곳니를 드러내고 나직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노미량은 소름이 돋았다. 설마하니 저런 짐승이 존재한다는 것은 예상도 하지 못했다. 표견의 입에서 질질 흘러내리는 침이 혁아의 얼굴에 흘러내렸다. 혁아는 제재를 당해 움직이지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있었다. 어미를 바라보는 눈에 공포가 가득해 노미량은 가슴이 미어져내렸다. "나도 자식이 있는데 이런 광경은 좀 민망하군. 한 가지 참고로 말하면 당신이 어떻게 협조하느냐에 따라 이 아이의 생이 결정돼. 현명한 선택을 하리라 생각한다." "원하는 게 뭐냐?" 후극진은 노미량을 샅샅이 훑어 내렸다. 후극진의 시선은 한 곳에서 딱 멈췄다. 바로 노미량의 하복부였다. 그 눈빛이 어찌나 집요한지 노미량도 이전 남궁설과 마찬가지로 치부를 그대로 드러내놓고 서 있는 듯한 수치감에 몸을 떨었다. 노미량은 거문고를 당겨 안아 후극진의 집요한 시선을 막았다. 후극진은 음탕하게 웃었다. "스스로 공력을 폐하는 것, 나를 즐겁게 해 주는 것!" "내가 보기에 넌 졸개야! 우두머리를 오라고 해!" "후후후! 자고로 미인은 머리가 석두(石頭)라던데…… 오늘은 그 상례가 깨지는군.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는 똑똑한 것보다는 멍청한 게 좋아! 어쩔 거야? 난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아!" 후극진이 삑 호각을 불었다. 표견이 입을 쩍 벌려 비수 같은 송곳니로 아들의 목을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듯이 으르렁거렸다. "멈춰!" "아들을 살리고 싶다면 소리칠 것이 아니라 협조방안을 생각해 봐!" 노미량은 이를 악물었다. 만에 하나 자칫하다가는 아들이 죽을 수도 있다. 등허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남편은 어디 있단 말인가? 원망보다는 눈앞의 상황이 급했다. 단칼에 후극진과 표견을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해도 아들 때문에 섣불리 감행할 수 없었다. "결정이 어려운 모양이군!" 후극진이 음흉하게 웃었다. 그가 표견의 목덜미 아래 털을 쓰다듬었다. 표견의 털이 올올이 곤두섰다. 눈에서 광기가 이글거리고, 벌린 아가리에서 긴 혓바닥이 늘어져 혁아의 얼굴을 핥았다. "안돼!" 노미량이 비명을 질렀지만 표견은 아가리를 쫙 벌려 혁아의 머리를 천천히 집어삼켰다. 혁아가 공포를 견디다 못해 파르르 떨더니 눈동자가 상하좌우로 불규칙하게 움직였다. "멈춰!" 당황해 소리치면서 노미량은 들고 있던 거문고를 내려놓고는 재빨리 스스로 혈도를 짚었다. "후후후! 이제야 머리가 돌아가는 모양이군!" 후극진이 다가왔다. 그의 손은 거침없이 여인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순백한 여인의 순결은 악마의 손에 유린당하기 시작했다. 2


깡! 까가강! 검날 끝에서 불똥이 튀었다. 동시에 주한성의 눈에서도 불똥이 튀었다. 상대를 바라보니 놈들은 몸통을 몇 번 좌우로 움직여 보고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철그럭, 철그럭! 철갑이 부딪치면서 쇳소리가 울렸다. "제법 준비를 했다만!" 주한성은 투덜거리면서도 마음은 바쁘기 그지없었다. 앙칼진 남궁설을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녀는 의리를 아는 여자였다. 일단 이쪽에도 뭔가 노림수가 있어야 하고 최악의 경우 전검휘 부부와 도주해야 남궁가의 핏줄을 이을 것이 아니냐고 설득하는데 진땀을 뺐다. 결국 남궁설이 수긍했지만! 전검휘 부부를 구하기 위해 마음이 바쁘기 그지 없는데 웬 갑옷을 입은 무림인이란 말인가? 미친놈들이 아닌가? 갑옷은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이나 입는 줄 알았다. 속도를 위주로 하는 무림에서 철갑을 두르고 공격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 그런데 문제는 눈앞의 이 철갑인들이 전혀 멍청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전신 혈도에는 세 치 두께의 철판! 그것들은 수없이 담금질을 했는지 금강석(金剛石)처럼 단단하기 이를 데 없었다. 힐끗 고개를 돌린 주한성의 시선이 불을 뿜었다. 방안에서는 망측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한 곳에 놓인 아기! 그 옆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표견! 유린당하기 일보 직전의 노미량, 그리고 그 앞에 선 놈 후극진! 놈은 어느 틈에 노미량의 옷을 다 벗겨놓고 아들과 괴상한 짐승이 보는 앞에서 강간하려 하고 있었다. 끄덕거리는 그것이 단숨에 노미량을 짓이길 듯이 곤두서 있었다. 주한성은 눈이 뒤집혔다. 아픈 과거가 눈 앞에 아른 거린 것이다. "야! 이 지저분한 놈아! 개새끼도 아닌 게 때와 장소를 구분 못해! 당장 떨어지지 않으면 네 놈을 육시를 해 버린다." 주한성은 추풍무영을 펼쳐 휘릭 날아올랐다. 그런 주한성의 두 눈에서 갑자기 시뻘건 혈선이 그어졌다. 그와 그가 든 쇄마혼검을 뭐 말라 비틀어진 무 정도로 생각했는지 철갑을 입은 자들은 득달같이 달려들고 있었다. 어느 틈에 뽑아든 검은 흉흉한 소리를 내면서 전신을 무자비하게 베어오고 있었다. "비켜서! 반동강이 내기 전에!"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경고와 동시에 공격이 펼쳐졌다. 쇄마혼검 끝에서 묵빛 광채가 뻗어 나왔다. 수백 근의 검이 일으키는 파공음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검은 바람을 끊고 수십 번 현란한 움직임을 보였다. 싸가강! 철립객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생기가 사라지는 퀭한 두 눈에 경악이 떠오르고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적은 만만치 않았다. 다시 십여 명의 철객들이 주한성의 앞을 가로막았다. 주한성은 다급한 와중에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전검휘와 노미량의 은거장소는 비밀 중의 비밀이었다. 주한성도 남궁설을 추적해 온 것이다. 그런데 적은 이미 취월거 주변에 은거하고 있었다. 금학우와 전검휘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을 주한성은 모르고 있었다. 주한성은 다급한 상황에서도 방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증오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주한성은 다시 한번 검강을 시전했다. 철객들 중 절반을 도륙한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철객들의 포위망을 벗어나 취월거를 향해 달렸다.


그때, 그는 보았다. 한 사람이 취월거를 향해 다가가고 있는 것을. 걸음걸음마다 피칠을 하면서! 전검휘, 그였다. "형!" 다급하게 외치며 몸을 날리던 주한성이 흠칫 굳어졌다. 사방에서 물밀 듯이 밀려오는 거대한 검기를 느낀 것이다. 전검휘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열린 방문 사이로 발가벗겨진 채 누워 있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그 앞에 남근을 드러내고 아내를 능욕하려하고 있는 후극진의 모습도,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전검휘는 단숨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전검휘는 냉철하게 주변을 살폈다. 천이통(天耳通)을 시전하자 숨죽인 채 은신해 있는 무수한 숨결이 들려왔다. '일류고수들이 일백 명, 그 중 대부분이 취월거 오 장 안에 매복해 있다.' 아내가 탄주한 추혼곡에 적지 않은 수가 죽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백여 명이나 남았다면! 전검휘는 미간을 좁혔다. 상처 부위에서 피가 철철 흘러 넘치고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극랄하던 고통이 서서히 마비되는 것으로 미루어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단 일 초, 단 한 수 만에 상대의 명줄을 끊어야 한다. 전검휘는 육대사혈(六大死血)을 지그시 눌렀다. "검휘야! 무인은 항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너에게 최악의 상황이 닥칠 경우, 넌 어찌하겠느냐?" "일단은 협상을 하겠습니다. 세상에 진정한 악인은 없고, 진정한 선인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이익에 따라, 상황변화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한다고 생각합니다." "녀석, 넌 아직 세상을 모른다. 세상에는 공맹(孔孟)의 도와 이해득실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아주 소수이지만 양보를 모욕이라 생각하며, 패배를 죽음이라 생각하며, 과거의 치욕에 매달려 사는 부류가 있다. 그들은 결코 과거를 잊지 않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철저하게 복수한다." 노천악은 그렇게 말하며 한 가지 수법을 전수해 주었었다. -역혈진력세(逆血眞力勢)! 사혈(死穴)을 누르면 죽는다. 그러나 사람은 죽음에 이르면 가공할 잠재력을 발휘하게 된다. 회광반조나 불가사의한 초능력이 바로 이 죽음에 대항하기 위한 잠재력이 폭발하여 나타난 현상이다. 역혈진력세는 인위적으로 죽음을 유발시켜 전신의 잠재력을 총 발휘케 하는 무공이다. 즉, 육대사혈을 스스로 제압해 잠재력을 폭발시켜 그 힘을 최후까지 모은 후 한순간에 폭발시키는 가공할 수법이었다. 투두둑! 힘줄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꿈틀거렸다. 동공이 파열될 듯, 뇌가 터져나갈 듯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고통 속에 한 줄기 힘이 솟구쳤다. 마치 미친 말처럼 전신을 휘돌던 한 줄기 기운은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 모으듯 전신의 힘이란 힘은 모조리 끌어 모아 가공할 열류를 만들었다. 쿵! 전검휘는 한 걸음 내디뎠다. "크아악!" 집 근처에 은신해 있던 인물들 중 절반 이상이 전검휘가 내딛는 걸음에 실린 역혈진력세를 견디지 못해


피를 울컥 울컥 토하면서 튀어나왔다. 방안에서 막 노미량을 덮치려던 후극진은 그 현상을 보고 놀라 삐이익 호각을 불었다. 표견이 그대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 순간 전검휘가 일지를 튕겼다. 화산이 폭발하듯, 몸안에 날뛰던 기운이 그대로 손 끝을 통해 썰물처럼 빠져나가 빛처럼 쏘아갔다. 표견이 뚝 행동을 멈췄다. 살기가 이글거리던 동공에 공포가 서리더니 급히 몸을 날렸다. 표견은 채 허공에 떠오르기도 전에 소리도 없이 부서져 버렸다. 쿵! 취월거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전검휘가 다시 한 걸음 전진한 것이다.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취월거 주변에서 연이어 울렸다. 마치 태풍의 눈처럼 전검휘 주변 방원 오 장 안은 이상이 없었지만 그 외 지역은 참혹하게 망가지고 있었다. 나무가 뿌리째 뽑혀 허공을 날고, 땅 속에 은신해 있던 자들은 칠공에서 피를 뿜으며 튕겨오르는 반면, 지상에 은신해 있던 자들은 땅을 타고 흐르는 진력에 오장육부가 진동되어 검은 피를 토했다. 실로 무시무시한 무공이었다. 후극진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설마 이런 무공이 있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더구나 저렇게 온몸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인간이 그렇게 무서운 공격을 펼치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는 급히 검을 뽑아들어 혁아의 목에 바짝 들이댔다. "전검휘! 멈춰라! 다가오면 이 놈을 죽인다!" 전검휘의 시뻘겋게 충혈된 두 눈에 조소가 흘렀다. 후극진은 겁에 질려 얼른 검을 들이밀었다. 그런데 이 무슨 괴변인가? 칼이 마치 모래로 만들어진 것처럼 혁아의 목에 닿자 스스슥 부서지는 것이 아닌가? "이…… 이놈! 무슨 사술을 펼친 게냐?" 놀라 외치면서도 후극진은 왼손으로 혁아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역시 손도 마찬가지였다. 후극진은 산산이 부서지는 자신의 손을 보면서 그제야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 혁아 주변에는 가공할 강기막이 형성되어 있었다. 전검휘가 역혈진력세를 펼치면서 미리 아들 주변에 강기막을 펼쳐놓은 것이다. 해서 강기막에 닿은 물체는 무엇이든 부서지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이 없었다. 후극진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전검휘가 재차 비릿하게 웃었다. 그가 양손을 벌리자 다시 가공할 열류가 손가락 끝에서 뻗어나갔다. "!" 후극진은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는 그저 멍청하게 서 있다가 스르르르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전검휘는 노미량을 일으켜 세워 등을 가볍게 쳤다. 울컥! 검은 피를 토해낸 노미량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는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온통 피투성이인 전검휘를 바라보았다. 전검휘는 돌아섰다. 지금은 아내와 한가하게 말을 주고받을 때가 아니었다. 이 잠력이 끊어지기 전에 아들에게 해줘야 할 일이 있었다.


노미량도 얼른 거문고를 집어들고 남편의 뒤를 따랐다. 주한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악착같이 포위하던 철객들은 전검휘가 펼친 역혈진력세에 칠공에서 피를 뿜고 죽어 있었다. 마침내 움직임이 편해진 주한성은 휘리릭 취월거를 향해 몸을 날렸다. 정문을 찾을 정신이 없는 그는 일단 창문을 부수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런 주한성이 우뚝 행동을 멈췄다. 자신과 반대쪽 상당한 거리를 둔 허공에 한 사내가 둥둥 떠서 방안을 살피고 있었다. 마치 유령처럼! 금학우였다. "이봐! 자네 수하들은 어째 하나같이 그 따위야? 틈만 보이면 여자를 덮칠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그러면서도 잠마전이 천하를 움켜쥔 것이 신통방통하구만! 혹시 여자들을 겁탈하고 각 가문의 비전 절기를 빼돌리라고 협박해 오늘날 위세를 떨치게 된 거 아냐? " 느닷없이 천둥치듯 들려온 전음성에 금학우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다가 주한성을 발견했다. "주한성, 너로구나?" "그래, 주로 썩은 고기들을 처리하는 청소부일세. 그런데 내 일생 중 오늘처럼 구역질이 나도록 썩은 고기들은 처음 보았네. 강간에, 암습에, 더군다나 우두머리라는 작자는 친구를 배반하는 위선자에, 휴! 악취가 지독하구만!" 주한성이 눈을 빛냈다. 금학우가 움직인 것이다. 한 발을 앞으로 쭉 내밀자 그는 벌써 반대편 창문에 당도해 있었다. 주한성은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저 무공은……!' 주한성은 생각을 접었다. 오비도인은 죽기 전 잠마전 단씨일가의 무공을 세세히 기록해 놓았다. 만일 금학우가 단씨일가의 무공을 익혔다면 어찌 되는 것인가? 생각조차 하기 싫은 무서운 일이었다. 만일 금학우가 잠마전의 직계손이라면 이 사태는 단순하지 않다. 그가 생각한 것보다 몇 백 배 무서운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갑자기 무형의 진력이 파도처럼 그를 향해 밀려들었다. 그와 금학우와의 거리는 십여 장, 그러나 밀려드는 힘은 막강하고 또한 바늘 끝처럼 첨예했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닌데, 자칫하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어!' 주한성은 다급히 몸을 날려 금학우의 공격을 피했다. 3 아들을 바라보는 아비의 두 눈이 다른 이유로 충혈되기 시작했다. 마치 투명한 유리알이 깨지면서 금이 가듯, 쭉쭉 혈선이 그어지는 전검휘의 두 눈에 아들에 대한 사랑이 차 올랐다. 이심전심인가? 아니면 아비의 죽음을 목전에 둔 하늘의 도움인가? 파탄을 보이던 혁아의 두 눈이 점차 정상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 초롱한 눈으로 혁아는 아비를 바라보았다. "빠빠……!" 툭, 눈물 한 방울이 아들의 입술에 떨어졌다. 혁아는 혀로 아비의 눈물을 핥다가 눈을 찡그렸다. "허허! 이놈, 혁아!" 작고 앙증맞은 손이 아비를 잡으려고 꼼지락거렸다. 그러나 심적인 충격이 컸는지 종내 손을 올리지 못했다. 아비는 아들의 작은 손을 꾹 움켜쥐었다. 혁아는 안심이 되었는지 방실 웃었다. 녀석은 아비의 몸에 흐르는 피를 모르고, 아비의 몸에 퍼지는 죽음의 기운을 몰랐다. 이렇게 아비의 체온을 느끼니 좋은 것이다. 전검휘의 두 눈에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어린 아들과 아내를 두고 생을 마감해야 한다니!


고아로 자라난 자신의 일생, 그러나 이렇게 또다시 아들을 고아로 자라게 해 그 모진 세파에 시달리게 해야 한단 말인가? "혁아! 이것은 작은 시련에 불과하다. 아비도 이런 시련을 무수히 겪었다. 그리고 강자가 된 것이다. 알겠느냐?" 무엇을 알 것인가? 이제 두 돌이 지난 어린 꼬마가 무엇을 알 것인가? 혁아는 그저 방긋 웃을 뿐이었다. 전검휘는 천천히 돌아섰다. 전검휘는 노미량을 바라보며 당부했다. "추혼곡을 탄주해 주게!"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들려온 말이었다. 노미량의 귀에는 남편의 전음이 들려왔다. "내 남은 생은 길어야 이각(二刻:약 30 분)여, 당신은 거문고 안의 두 보물을 꺼내 대법을 시전할 준비를 해주게." "여보,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 치료를 하면 살 수 있어요!" "이곳에 오기 전 삼호랑(三虎狼)의 삼염궁(三炎弓)에 당했소! 삼염이란 체내의 세 가지 기운을 불태우는 것으로 내공을 불태워 없애고 잠력을 불태워 없애고 정기를 불태워 없애지! 생존확률은 전혀 없소!" 노미량은 푹 고개를 숙였다. 이런 비극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노미량의 두 눈에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간이 없소이다." 전검휘가 재촉했다. 노미량은 단정히 앉아 현을 골랐다. 그녀의 두 눈에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투우웅! 거문고를 퉁기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음파가 사방으로 난비하면서 여기저기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강렬한 음파에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일제히 취월거에서 십여 장 정도 후퇴했다. 그 틈에 노미량은 빠르게 거문고의 끝을 양손으로 나뉘어 쥐었다. 공력을 운기해 힘을 주자 쩌르릉 맑은 소리와 함께 거문고의 끝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또르륵! 두 물체가 굴러 떨어졌다. 실내가 휘황찬란한 보광(寶光)에 휩싸였다. 거문고 안에서 나온 두 개의 물건에서 오색찬란한 광채가 뿜어져나온 것이다. 하나는 백 팔 개의 조그만 환이었고, 다른 하나는 백 팔 개의 천연진주로 만든 염주형태를 띤 목걸이였다. "금사금강환(金絲金剛環)!" "저것은 신룡백팔주(神龍百八珠)다." "저들은 아들에게 모종의 조치를 취하려 한다. 막아야 한다. 신룡문의 천룡대법(天龍大法)이 펼쳐지면 향후 잠마전은 무림에 발을 붙일 수 없다." 취월거 밖 여기저기서 놀란 외침이 터져나왔다. 곧이어 수많은 인영들이 취월거 안을 향해 몰려들었다. 그때였다. 우렁찬 외침이 취월거 전체를 울렸다. "멈춰라!" 위엄이 서리 서리 맺힌 명령에 일시에 달려들던 인물들이 모두 행동을 멈췄다. 전검휘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 친구가 온 모양이군." 노미량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가 왔군요." "난 그가 아직도 이전의 금학우일 거라 믿고 싶소. 부탁하오!"


노미량의 몸이 파르르 떨었다. "당신…… 당신은 이 상황하에서도 그를 믿나요?" "그렇소! 난 그를 믿고 싶소! 시간이 없소. 그가 있는 이상 적들도 쉽사리 손을 쓰지는 못할 것이오." 노미량은 앉아서 차분히 거문고의 현을 골랐다. 취월거를 둘러싼 적들은 긴장한 채 노미량의 행동을 예의 주시했다. 음공을 극치에 도달하도록 수련하면 인간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 노미량은 아직 그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음공을 이용해 사람의 혈도를 개폐(開閉)할 수 있고, 이공(耳孔)에 충격을 주어 뇌에 압력을 가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노미량은 온 정신을 모았다. 띠디디딩! 부드러운 음률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거문고의 음은 거칠고 강하다. 그러나 지금 노미량의 손끝에서 울려나오는 음은 부드러우면서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듯 애달프기조차 했다. 소슬히 불어오는 가을바람조차 거문고에 취하고, 취월거를 둘러싼 수많은 적들도 거문고에 취하네. 이제는 희미한 자취만 남은 편월마저도 수그러들거늘, 암천에 깊어 가는 어둠만이 여심을 외면하고 있다네. 죽어 가는 이여, 정든 사람이여, 날 원망하지 마오. 모든 사람들이 거문고 음에 취해 있을 때 전검휘는 천룡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전검휘의 양손이 혁아의 몸 위를 미끄러지듯 흘렀다. 전신 삼백 육십 대혈을 훑는 손길을 따라 가공할 열류가 혁아의 몸 안으로 스며들자 어린 몸뚱이는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주한성과 금학우는 취월거 안에 들어온 후 단 한번 움직이고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다. 오늘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 가장 강한 두 사람, 만일 누구 한 사람이 움직인다면 곧 피비린내나는 혈전이 벌어질 것이다. 주한성이 두려워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형에게, 그 분에게 편한 임종시간을 주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 금학우라는 인간을 제어해야 한다. 주한성이 입을 열었다. "개새끼! 알고 보니 넌 잠마전 출신이었군? 어쩐지 친구를 배반하는 상판대기에 부끄러운 빛 하나 없다 했지!" "삼 년 동안 공백기가 있는 줄 아는데 역시 무영문의 후계자답게 안목이 예리하군!" "넌 누구냐? 왜 이들 부부를 노렸나?" "후후후! 잠마전과 신룡문의 관계도 모르고 신룡문주의 청부를 받아들였다면 이거 천하가 웃을 일인데!" 주한성은 그러냐는 듯이 씨익 웃고 말았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천룡대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설마 했었다. 그러나 전검휘부부의 행동을 보고서야 이들이 그 동안 신룡문에서 절전되었던 한 가지 대법을 아들에게 전수하기 위해 은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전검휘는 금학우와 우정을 나누게 되어 스스로 은거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가 은거한 것은 모종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금학우는 오조문의 수좌인 천제맹의 소맹주였다. 그런데 주한성은 그를 잠마전의 인물로 단정한 것이다. 곧 그는 천제맹 소속이 아니라 천제맹을 만든 잠마전 소속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간단한 것 같지만 대단히 중요했다. 잠마전은 대대로 자신들의 후손으로만 대를 잇는 일맥(一脈)이었던 것이다. "나를 모르겠나? 잘 알 것인데?"


"그래, 얼굴만 인면수심인지 알았더니 이름도 두 개를 지니고 있었군. 넌 금(金)씨가 아니라 단(丹)씨야. 금학우라는 이름은 다만 전검휘를 속이기 위한 변성(變姓)이었다. 이름이 뭐냐?" 금학우의 청수한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주한성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뜻모를 비웃음이 감돌았다. "주한성, 놀라지 마라!" 말과 함께 금학우가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얇은 인피면구가 벗겨지면서 단우 본연의 여인처럼 영준한 용모가 드러났다. 전검휘와 노미량이 푸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들의 놀라움이 주한성에 비할 것인가? 주한성은 싸늘히 단우를 노려보았다. "어쩐지 네놈이 행방불명이다 했더니만!" "후후후! 삼 년 동안 나를 찾아 헤매더군. 좀 일찍 알려줄까 했는데 숨바꼭질도 재미있어서 말이야!" 주한성과 단우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질기게도 이어져온 십 년 가까운 세월, 그 동안의 피비린내나는 혈전! 서로를 노려보는 두 시선에 살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러나 그들은 곧 시선을 돌려야 했다. 전검휘가 아들의 몸을 쓰다듬기 시작한 지 일 각여, 놀라운 광경이 벌어진 것이다. 혁아의 백 팔 개의 혈도가 열리기 시작했다. 개혈(開穴)된 백 팔 개의 혈도들은 마치 굴뚝이 탁한 기운을 뿜어내듯 온몸의 탁기(濁氣)를 회색 연기로 뿜어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회색 연무는 점차 사라지고 혁아의 몸뚱이에는 은은한 금광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비는 자신의 생명을 아들의 몸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땀방울로, 내공으로, 그리고 피로! 울컥! 전검휘는 피를 토했다. 영준하고 당당하던 얼굴은 푸르스름하게 변해 귀기마저 감돌았다. 노미량은 울고 있었다. 엄밀히 따진다면 그녀의 잘못으로 인해 죽음을 눈 앞에 두었건만 전검휘는 한마디 원망없이 자신과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있었다. 거문고의 음은 갈 수록 고조되고 취월거를 둘러싼 긴장감은 일촉즉발, 더욱 짙어 가는데……. 전검휘는 천천히 아들에게서 손을 거뒀다. 주변을 둘러보는 그의 두 눈은 충혈되다 못해 이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실명(失明) 한 것인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바닥을 더듬던 그가 흡족한 얼굴로 금사금강환을 집어들었다. 그의 시선이 잠시 거문고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돌려졌다. 노미량은 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허허허! 당신의 거문고소리를 들으며 죽음을 맞이하다니, 나는 복이 많소이다." 전검휘는 담담하게 웃었다. 아내를 위로하기 위한 웃음 뒤, 강한 기합을 지르며 손을 맹렬히 떨쳤다. 투두둑! 금사금강환을 묶어놓았던 금사가 끊어졌다. 파파파팟! 백 팔 개의 금강환이 절로 둥실 떠올랐다. 찬란한 보광이 취월거를 뚫고 하늘로 충천했다. 백팔금강환은 꿈틀거리면서 서서히 하나의 문양을 만들었다. 신룡상(神龍像)이었다. "저…… 저건!" 사방에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다. "죽여라! 놈을 죽여야 한다."


성질 급한 천제맹의 몇몇 인물이 몸을 날렸다. 순간, 그들 앞에서 시퍼런 번갯불 같은 광선이 솟구쳤다. 광선은 곧 몇 가닥으로 나뉘어 취월거를 덮쳐들던 사람들을 향해 내리꽂혔다. "헉! 이것은 소천야의 단혼벽! 크아악!" "왜……?" 의문은 비명으로 끝나고 사방 팔방으로 피가 난무했다. 곡양은 멍하니 단우를 바라보았다. 그가 왜 수하들을 죽이는 것인가? 설마하니 단우의 목적이 다른 곳에 있단 말인가? 단우는 천천히 양손을 거두며 싸늘하게 말했다. "경거망동하지마라. 소란을 일으키는 자는 무조건 척살 한다." 취월거 주변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곡양은 단우의 내심을 짐작할 수 없었지만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반면, 전검휘는 차갑게 웃었다. -단우! 네 목적을 이제야 알겠다. 네가 왜 이 년 전 금학우로 변신해 나타난 것인지! 넌 지금껏 우리 부부가 아들에게 대법을 펼치길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대법을 마치면 아들을 납치할 생각인가 본데……! 한편, 주한성은 신룡문주가 왜 전검휘보다 혁아를 모종의 장소로 이동시켜 달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룡문이 왜 직접 손을 쓰지 않고 자신에게 청부했는지는 의문이었다. 나서기 곤란한 일이라도 있었나? '좋아! 신룡문은 별도다. 그들이 무슨 속셈이든 나와 상관없다.' 주한성은 아직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아픈 시선으로 전검휘의 최후를 바라볼 뿐이었다. 전검휘의 악다문 이빨 사이에서 피가 흘렀다. 개중 몇몇 개는 이미 부서져 버렸건만 허공을 향해 내뻗은 양손은 기이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빈 허공에서 무언가를 끌어 모으는 것 같았다. 주한성은 그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역혈진력세의 마지막 현상인 원양대진공(元陽大眞功)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아들을 위해 펼치는 무공은 아비의 부정이 고스란히 담긴 손길이었다. 그 손길을 따라 허공을 뒤덮듯이 펼쳐졌던 신룡상은 점차 축소해 한 자 크기의 소룡(小龍)으로 변해갔다. "이기합체(二氣合體)!" 절규하듯 터진 기합! 휘리리링! 백 팔 개의 금강환은 맹렬하게 회전하면서 혁아를 향해 밀려들었다. 금강환 하나하나가 향한 곳은 개혈된 백 팔 개의 혈도였다. 스스슥! 금강환이 혁이의 백 팔 개 혈도 속으로 사라졌다. 순간, 갑자기 거문고의 음이 고조되었다. 벼락이 치듯, 천지종말이 닥친 듯 거문고음은 취월거 주변을 휩쓸었다. 사람들이 분분히 뒤로 물러나자 노미량은 거문고를 놓고 빠르게 신룡백팔주를 집어들었다. "원정일체(元精一體)!" 노미량이 앙칼진 기합성과 함께 손을 휘저었다. 신룡백팔주가 허공에 낱낱이 뿌려지면서 혁아의 백팔혈도를 향해 짓쳐들었다. 촤르르륵! 백 팔 개의 신룡백팔주 역시 혁아의 몸 속으로 사라졌다. 그 변화를 마지막으로 개혈되어 있던 혈도들이 일제히 폐혈(閉穴)되었다. 주한성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 부부는 목숨을 도외시하고 아들에게 천룡대법을 시전한 것이다. 지금은 비록 효과가 없을지


모르지만 혁아가 열 다섯이 넘어서면 지금 시전한 안배는 그 효능을 백 배 천 배 발휘할 것이다. 주한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 줄기 가공할 섬광이 전검휘를 향해 뻗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마치 벼락이 횡으로 치는 듯한 가공할 무학을 펼친 사람은 단우의 옆에 서 있던 곡양이었다. "단우, 넌 끝까지 비겁한 놈이구나!" 주한성이 노성을 지르며 검을 날렸다. 파악! "크아악!" 넋을 놓고 구경하던 천제맹의 철객이 목을 감싸고 비틀거렸다. 전검휘를 노리고 날아들던 섬광이 홱 각도가 꺾이면서 목을 가차없이 날려 버린 것이다. 곡양의 공격이 날아든 것은 찰나간, 그것을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버린 것은 촌음을 반으로 쪼갠 시간과 맞먹는 빠르기였다. 실로 무서운 주한성의 쾌검이었다. 단우가 주한성을 바라보았다. "경고하는데 웬만하면 자중해라! 잠시 후 죽여 줄 테니!" "청소부가 쓰레기를 보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않아?" 단우가 조소를 날렸다. "청소부라? 자신의 주제를 잘 아는군. 그런데 네놈의 마음부터 청소하는 것이 어때. 주한성이 네놈은 오래 전부터 남의 여인을 탐하는 것이 주특기였으니까. 넌 오래 전부터 노미량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오늘이 아내와 아들을 한 번에 얻을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것은 아닌가?" 주한성 역시 조소를 머금고, 그러나 싸늘한 시선으로 말했다. "추잡스런 놈이라 생각하는 것도 그런 쪽이군. 듣기로는 네놈이 고자란 소문이 파다하던데 그런가?" 순간 단우의 안색이 푸르르 떨렸다. "그 말 한마디로 넌 죽은 목숨이다. 감수경의 당부를 생각해 한 번이라도 살려 줄 생각을 했었는데!" 그들의 대화를 듣던 노미량은 놀라 시선을 돌렸다. 당당하게 단우의 앞을 가로막고 선 주한성을 본 그녀의 두 눈에 희미하게 아픔이 잡혔다. 생사의 기로에서 이렇게 그를 만나게 되다니! 노미량은 눈을 돌렸다. 참으로 끈질긴 악연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다시 주한성을 향해 이동했다. 주한성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에 일말의 희망이 솟았다. 그때 주한성은 곡양을 향해 묻고 있었다. "늙은이, 당신이 천제맹 전륜관(全侖關) 관주(關主) 곡양인가?" 곡양은 음침하게 웃었다. "후후! 중원의 제일신비객(第一神秘客) 추적술사 주한성이 노부를 알아보다니 영광이군!" "영광? 이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거야? 우두머리는 청소부라고 하고, 졸개는 중원신비객이라고 추켜세우며 영광이라고 하니 말야. 아부하는 건가? 그러나 늦었어. 내가 상대를 아는 체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해. 당신도 예외일 수는 없어." 말과 함께 주한성의 허리어름에서 빛이 번뜩였다. 그것 뿐이었다. 장내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곡양은 의아해서 주한성을 바라보았다. 이마가 갈라져 피가 흐르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주르륵 흘러내린 피가 콧방울을 타고 흐를 때야 그는 사고가 점차 정지되는 것을 느꼈다. "이…… 이건, 분광검(分光劍), 절전된 것으로 알려졌……!" 푹! 곡양이 쓰러지는 소리에 침묵이 깨어났다. "죽여!" 은신해 있던 수십 명이 일제히 지면을 박차고 주한성을 덮쳤다.


단우는 그런 수하들을 말리지도, 그렇다고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주한성도 뚫어지게 단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수십 명이 일 척 안으로 접근해들었을 때 주한성은 느리게 검을 잡아갔고. 스팟! 허공이 찰나간에 수십 번 잘려나갔다. 마치 시간을 정지시켜 상대방을 허공에 띄워놓고 무자비하게 난자하는 듯한 공격이었다. 투두둑! 비명도 없었다. 잘린 육신만이 취월거 주변에 후두둑 떨어졌다. 단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제 18 장 혁아, 그 어린 생명 1 단우는 변해 있었다. 삼 년 만에 이렇게 침착하게 변한건지 아니면 주한성의 무공 수위를 알기 위함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수하들이 죽어가는 데도 주변을 빙 둘러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고맙군. 내 대신 수고를 해 주었으니!" 주한성은 눈썹을 찌푸렸다. 단우는 살인멸구를 생각하고 있었다. 곧 전검휘 부부는 물론 여타 수하들도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는 속내를 비친 것이다. 무슨 이유일까? 그는 왜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것일까? 한편, 노미량은 귓가에 들려오는 힘없는 전음을 들었다. "미량, 이리 오시오!" 전검휘의 전음이었다. 그는 아들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손이 힘겹게 떨고 있었다. "나를 믿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노미량은 남편을 바라보았다. "금학우, 아니 단우는 혁아를 노리고 있소!" "!" "기억하오? 한때나마 그가 당신을 좋아했다는 것을!"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노미량 역시 전음으로 물었다. "천룡대법을 펼친 이상 반드시 칠 일 안에 벌모세수나 그에 필적하는 수단으로 혁아의 혈도를 풀어 주어야 하오. 그렇지 않는다면 혁아는 전신 경락이 굳어져 죽음을 당하게 되오. 소림과 무당이라면 가능한데 그들은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했소. 방법은 한 가지 뿐이오." 노미량은 침묵했다.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하시오. 혁아를 데리고 일단 단우를 쫓아가시오. 그 방법만이 혁아를 살릴 수 있소. 그들이 노리는 것은 나와 당신이 아니오. 바로 혁아요. 그들은 혁아를 살리기 위해 개정대법을 실시할 것이오. 그후 때를 봐서 혁아와 탈출하시오. 만일 그것이 어렵다면 혁아를 죽이시오. 절대로 원수의 손에서 크게 할 수는 없소." 전검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진력이 떨어지는 상태에서 전음을 시전하는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몸에서 흐른 피는 내를 이루고 있었다. "혁아의 성을 전씨가 아닌 노로 이름은 외자 혁, 노혁(盧赫)이라 부르시오! " 아들을 노씨 일가의 뒤를 잇게 양자로 들인다는 남편의 해량한 마음 씀씀이에 노미량은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 한 말이 남편의 유언일 것이다. "여보!" 노미량의 외침에 단우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전검휘는 희미하게 웃었다. "단우를 불러 주시오!" 말을 할 때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피가 혁아의 얼굴로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혁아는 깊은 잠에 든 듯 깨어나지 않았다. 다만 아비가 손을 쥐고 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포만감에 찬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노미량은 망연히 전검휘를 바라보았다. 숫사자처럼 중원을 질타하던 일대 영웅이 자신 때문에 이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노미량은 고개를 돌렸다. 단우와 주한성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팽팽히 대치해 있었다. "단우, 냉큼 달려와라. 남편이 부르신다." 단우는 전검휘를 향해 다가왔다. 주한성은 몇 걸음 뒤에 처져서 따라왔다. 그의 손은 검의 손잡이에 닿아 있었다. 전검휘와 단우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노씨일문의 혈육들을 모조리 참살한다는 것은 자네가 한 결정인가?" 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만인가, 아니면 아이까지인가?" "자네는 어떻게 해주길 원하는가?" "혁은 내 아들이다. 노씨라는 성과는 연관이 없다. 말장난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만일 네놈이 원한다면 그 아이를 데리고 가도 상관치 않는다는 말이다." 단우의 눈 깊은 곳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죽음에 앞서서 비로소 현명해졌군!" "그래. 이전에 조금 더 현명했어야 했는데…… 넌 아직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노씨의 후예는 모두 죽도록 되어 있네. 그러나 자네가 원한다면 혁아를 양자로 받아들이지!" "후후후! 양자는 거절한다. 사자새끼가 개새끼들과 섞여 있으면 질시를 당하는 법, 혁에게는 차라리 하인의 신분이 더 족하다." 전검휘는 마지막으로 시선을 주한성에게 돌렸다. 그 눈속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심정이 담겨 있었다. 혁아를 부탁한다는 말, 내 주검을 보고 경거망동 하지 말라는 말, 노미량을 잘 부탁한다는 말 등, 온갖 복합적인 뜻이 담겨 있었다. 주한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검휘는 눈동자가 굳어지면서 초점이 흐려지고 있었다. 손이 힘겹게 아내인 노미량을 향해 내밀어졌다. 노미량은 전검휘의 손을 꽉 쥐었다. "혁아를 부탁……!" 전검휘가 한 차례 부르르 진저리를 치더니 움직임을 멈췄다. "여보!" 노미량이 울부짖었다. "죽었군! 노미량, 결정을 내리지?" -혁아를 반드시 살려야 하오. 노미량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 돌아가자!" 단우는 미리 돌아가기로 약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이상한 것은 노미량이었다. 그녀는 잠시 단우를 바라보다가 혁이를 품에 안고 일어섰다. 주한성은 미간을 찡그렸다. 전검휘와 노미량이 나눈 대화를 듣지 못한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멈추시오!" 2 동녘이 밝아오고 있었다. "왜?" 주한성의 말에 단우는 빙긋이 웃었다. "이제 알았나?" "네가 씨 없는 수박이라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양자를 구하는 것은 물론 신룡문까지 한입에 꿀꺽 할 생각이었나?" 노미량은 한 걸음 뒤에 처져서 무심한 얼굴로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한성이 오해를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녀의 시선에 취월거 하늘너머로 급격히 사그라지는 어둠이 보였다. 남편의 얼굴도 그렇게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여보, 당신만은 오해하지 마세요. 마음을 모질게 먹지만 단우를 따르기란 쉽지 않았다. 허무하게 웃던 그녀는 곧이어 들려오는 주한성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당신이 진정 예전의 그 누이요?" 단우가 노미량 대신 대답했다. "그렇다. 그녀는 분명 과거의 노미량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오조개화의 일원인 회회루의 주인이 될 고귀한 신분이기도 하지!" "흥! 웃기는 자식이군. 내가 듣고 싶은 것은 누나의 대답이다. 넌 빠져!" 노미량이 주한성을 보고 담담하게 웃었다. 그녀는 단우의 옆으로 가서 섰다. 주한성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삼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이들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노미량은 귀를 막았다. 더 이상 주한성의 말을 들을 수 없어서 그녀가 돌아설 때 주한성은 처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누나, 검휘형은 누나를 위해 목숨을 버렸어. 나 또한 누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 그런데 누나는 고작 남편의 원수를 쫓아가겠다는 것이오?" 노미량은 푹 고개를 숙였다. 어떤 비난이라도 감수할 수 있었다. 혁아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버릴 것이다. 오늘 펼쳐진 음모는 어떤 방법으로도 피할 수 없는 천라지망이었다. 이제 모든 것을 가슴에 품을 뿐이다. 노미량이 단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더 볼일이 남았나요?" "한 사람의 입을 막아 천하를 속일 수 있다면 어찌하겠소?" 주한성을 죽이자는 말뜻이다. 노미량은 단우가 자신에게 물은 것이 이미 그가 마음을 굳힌 것을 알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충격을 준다면 주한성은 이곳을 벗어날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해서 주한성을 살리고 싶다. "죽여야지요!" 노미량은 독하게 대답했다. 주한성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지독하군요!" "그래!" 말을 하는 노미량의 음성이 미미하게 떨려 나왔다. 주한성은 고개를 돌려 전검휘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후후후! 품안의 그 아이가 성장하면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오. 누나는 그것이 두렵지 않소?" "창녀라 한들 내가 혁아의 어미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주한성은 소름이 돋았다. 노미량은 이전의 그 누이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된 여인, 그 강함을 아직 모르는 주한성은 노미량을 오해하고 있었다. 독을 품은 독초. 섬연하고 아름다운 여인, 수국처럼 곱고 화사해 보이는 여인의 내면에 악의 기운이 숨어 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주한성은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기로 했다. 사람들은 간혹 고육계를 써서 난관을 돌파하기도 하기에, 혹시 저 여자가 그런 방법을 사용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나와 전검휘에게 접근했었소?" 노미량은 멈칫거렸다. 단우는 흥미롭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미량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주한성은 대답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픽 웃었다. "아이를 건네시오. 그 꼬마는 전씨의 후예요!" 전씨의 후예란 말을 하면서 주한성은 문득 가슴이 뭉클했다. 노천악과 전검휘의 핏줄은 이 조그만 꼬마 뿐이었다. 무림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마당에 무에 대를 잇는 것에 연연할 것인가마는 조상에게 그보다 더 욕됨은 없을 것이다. 이 꼬마는 두 가문의 운명을 짊어진 운명이었다. 자신은 죽을지언정, 저 혁아는 반드시 살리겠다고 다짐했다. "이 아이는 안돼. 절대로 넘길 수 없어!" 노미량은 혁아를 끌어안았다. "경고하는데 아이를 넘기지 않으면 죽습니다. 난 지금껏 잠마전의 인물치고 살려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주한성은 천천히 검을 잡아갔다. 검을 잡은 그의 눈초리가 뱀눈처럼 가늘게 좁혀졌다. 단우가 앞으로 나섰다. "주한성, 네게 그런 실력이 있을까?" "오호라, 대신 죽으시려고?" "네 목숨을 걱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래?" 주한성은 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단우도 노미량을 가만히 밀쳐내고 앞으로 나섰다. 이제는 중원 제일신비객으로 떠오른 주한성과 잠마전의 후인인 단우, 천하에 명성이 쟁쟁한 최고봉의 초극고수들이 대결을 펼치려는 것이다. 남궁설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만일을 대비해야 한다는 주한성의 설득을 받아들여 취월거의 마루 밑 땅 속에 은신해 있었다. 귓전에 들려온 말들은 하나같이 청천벽력이었다. 이 사실들을 믿어야 하나? 그녀 역시 전검휘와 노미량의 전음을 듣지 못한 상태라 오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남궁설은 냉정해 지기 위해 노력했다. 노미량의 행동은 어딘가 이상했다. 설사 그녀가 전검휘를 배반했다고 해도 한 가지 의문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아버지의 원한과 남편조차 돌보지 않게 만든 것인가? 그녀도 역시 몰랐다. 어머니가 된 여인을! 그녀들이 무엇으로 살아가는지를! 자기 육신의 즙액으로 한 생명 한 생명 생명의 호흡을 키워온 그 사랑을! 도대체 그녀는 무엇이 부족했던 것인가? 남궁설은 일단 생각을 접었다.


중요한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노미량이 단우를 쫓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녀마저 잠마전에 가입한다면 남궁세가를 되살린다는 그녀의 꿈은 그것으로 종말이었다. 남궁설은 품안에서 비수를 꺼내들었다. -배반자는 반드시 자신의 피로 배반의 피를 보상해야 한다. 단우, 오늘 네게 그 교훈을 주마! 남궁설은 비수를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느리게 움직였다. 비수로 땅을 파면서 굼벵이같이 단우를 향해 전진했다. 주한성은 지난 삼 년 동안 특이한 방법으로 무공을 수련했다. 그 삼 년이라는 시간은 그에게 무척이나 중요했다. 사혼도에서 아홉 살 때부터 무공을 수련한 이후 소림의 연무관과 사대금강 오비도인이 남긴 무영문의 무공을 완성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 그러면서 훗날을 위해 그는 중원 곳곳을 유람했다. 그는 삼 년 동안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오늘날 그가 중원지리에 환한 것도 삼 년 전 무공을 수련할 당시 중원을 떠돌아다닌 이유 때문이었다. 서사혼도에서 주한성은 짐승들의 혈투를 수없이 보아왔다. 학과 뱀, 표범들끼리의 혈투, 서사혼도에서 나중에 수련한 일 년 동안은 홀로 표범과 늪지의 괴어와 혈투를 벌이면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시력의 중요점이었다. 대결에 앞섰을 때 짐승들의 눈은 활활 타올랐다. 그 눈빛은 바늘 끝처럼 첨예하고 칼날처럼 무서웠다. -이거다! 무공의 시작은 육감 중 시력의 단련에 있다고 보았다. 찰나간에 교환되는 공격에서 눈이 얼마나 빠르냐에 따라서 승패는 좌우한다고 생각했다. 적의 허점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단숨에 허점에 치명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어야 한다. 주한성은 삼 년 동안 먼저 정시하는 습관부터 길렀다. 한 번 눈길에 사물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을 정도의 집중력을 길렀다. 그 다음이 넓게 빠르게 살피는 것이다. 이 수련을 위해 주한성은 오비도인이 남긴 두툼한 책자의 책장을 화르륵 넘기면서 그 글자 하나하나를 읽어 내렸고, 그 단계를 넘어서자 콩을 한줌 쥐어 던져 땅에 닿기 전에 숫자를 헤아렸다. 그것은 눈의 빠름을 가능하게 했다. 이 수련을 거친 후 그는 다시 정시를 연습했다. 이제는 단순하게 사물을 주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의 본질을 꿰뚫기 위해 노력했다. 궁수들이 활을 쏘기 전 심적으로 과녁을 최대한으로 끌어당겨 크게 하듯이 주한성도 대상물체를 앞으로 당겨 그 낱낱을 해부했다. 이 모든 수련을 익힌 후 그는 비로소 검을 잡았다. 눈이 이동하는 공간, 그 공간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찰나간에 백 팔 번을 찌르는 분광검은 이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그런 주한성이건만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단우! 그도 역시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이다. 지금의 그는 이전 경박하고 천한 인간이 아닌 바위처럼 묵직한 기도를 풍기고 있었다. 주한성의 예리한 시선으로도 허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단우가 양발을 어깨넓이로 벌린 상태에서 가볍게 앞으로 내민 양손 안에 천하가 잡혀 있었다. 둥글게 돌아가는 손의 궤적을 따라 우주가 환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배장타(拜掌打)! 육합장(六合掌), 장력을 이용하는 가장 초보적인 무공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진정 그 무공의 무서움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배장타는 한 순간에 여섯 가닥의 진기를 끌어 모아 개개별로 융합하면서 위력을 발휘한다. 상대의 공격이 펼쳐질 때 손바닥을 뒤집는다. 둥글게 손 안에 모여 있던 공력이 화약처럼 폭발하면서 모든 것을 산산이 부숴 버린다. 단우가 취한 자세가 바로 그 배장타였다. 그러나 승부는 가려야 하는 법, 주한성은 공격을 시작했다. 푸른 섬광이 번뜩였다. 검광은 찰나간에 상하 열 다섯 군데의 급소를 찔러갔다. 실로 무서운 쾌검이었고 신랄한 공격이었다. 단우는 양손목을 홱 뒤집었다. 꽈르릉! 동심원이 폭발하면서 강기의 파편이 주한성의 공격을 맞받아 쳤다. 꽈지지직! 파열음이 연이어 울리면서 극도로 좁혀진 두 사람이 교차했다. 스슥! 단우가 비척 한 걸음을 물러섰다. 그의 어깨는 길게 갈라져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반면, 주한성의 오른팔 옷자락도 길게 잘라져 있었다. 주한성은 미간을 모았다. 구십 근 쇄혼검으로 펼치는 분광검을 막아낼 수 있는 무공이 실존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단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배장타로도 죽일 수 없었다. 이놈은 끝없이 발전하는 괴물이다. 오늘만은 절대 살려둘 수 없다. 스릉! 칼이 천천히 칼집을 벗어났다. 넓은 도신에 번개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칼집을 다 벗어난 도신에서는 푸른 전광이 일렁였다. "파천수라도!" 주한성의 나직한 음성에 단우는 차갑게 웃었다. 잠마전 조사 단뢰! 그가 십팔만리 중원을 종횡할 때 그의 손에 들려 수많은 중원혈을 흡취한 마검이 파천수라도였다. 단우가 파천수라도를 소지하고 있다는 것은 곧 자신이 단뢰의 후손이라는 것을 웅변했다! 그가 도를 뽑아드는 순간, 사방 팔방에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파바박! 칼! 수십 개의 칼날이 휭휭 휘돌며 주한성을 쳐왔다. 단우의 수하들이 주인이 사냥하기 쉽도록 미리 사냥감몰이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주한성의 입꼬리에 차가운 웃음이 매달렸다. 단우는 자신을 경시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그랬었다. 오비도인은 책자에 가급적 살인을 금하라고 명령했었다. 주한성도 이제는 성격이 많이 순화되어서 굳이 피를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저런 조무래기들을 상대로는 더더구나 싫었지만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주한성이 둥실 떠올랐다. 스팟! "허억!" 급촉히 달려들던 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주한성의 손이 허리어름에 닿았을 때 거대한 섬광이 번뜩였던 것이다. 일검에 하늘이 갈라졌다. 검기는 하늘을 쪼개고 벼락치듯 그들을 절단해 간 것이다.


"피해!" 누군가 소리쳤지만 움직인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몸을 날리려는 순간에 검기가 그들을 가르고 지난 것이다. 후두둑! 잘린 육체 조각들이 하나 둘 떨어져내렸다. '이때다!' 단우의 밑에 접근한 남궁설은 비수를 머리 위로 향한 채 솟구쳐 올랐다. 푸욱! "큭!" 단우는 파르르 떨었다. 느닷없이 땅 속에서 튀어나온 비수가 발바닥 용천혈을 꿰뚫고 종아리 살을 가르며 위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기습이어서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 그러나 단우는 침착했다. 휘리릭! 파천수라도를 휘돌려 거꾸로 쥔 단우는 솟구치는 남궁설의 머리에 내리꽂았다. 남궁설도 단우의 역습을 미리 대비하고 있었기에 몸을 날렸다. 하지만 단우의 공격에는 필사의 힘이 담겨 있어서 남궁설의 반사동작이 빨랐지만 칼날은 귀밑머리를 스치면서 상의 옷자락을 여지없이 베어버렸다. 남궁설은 잘린 옷자락을 여미며 급히 뒤로 물러섰다. "어딜!" 단우는 다리 부상으로 쫓아가지 못하자 몸을 앞으로 넘어뜨리면서 그대로 일섬을 그었다. 분노의 힘이 담겨 있는 공격이었다. 남궁설은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방비해야 할지 몰라 주춤했다. 단우의 수하들을 처치한 후 아직도 허공에 떠 있는 주한성이 그 광경을 보았다. "이봐! 치사하게 여자를 죽이면 어쩌자는 거야? 너같이 씨없는 수박은 여자에게 관심이 없지만 세상에 득시글거리는 홀애비들도 생각해야지! 물론 그 중에는 나도 포함되지만."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주한성. 무인이 공격을 펼치면서 입을 여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행동이다. 그러나 일단 그렇게 해서라도 단우의 신경을 분산시켜야 했다.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생식능력이 없는 비밀을 공공연히 떠드는 놈의 입을 뭉개버리고 싶고, 그 비밀을 듣고 의아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살아 있는 수하들의 눈초리도 눈에 거슬렸다. 그가 주춤하는 순간 주한성의 행동이 번개처럼 빨라졌다. 내력을 돋워 휘리링 한 바퀴 맴돌며 먹이를 발견한 매처럼 하강했다. 분광검법이 단우를 향해 독사처럼 파고들었다. "크아악!" 단우의 오른쪽 어깨가 삽시간에 피범벅이 되었다. 그 틈에 남궁설은 몸을 날려 위기를 모면했다. 단우도 별 수 없었다. 상하에서 이루어진 임기응변은 절묘해서 심한 부상을 당한 채 지면에 나뒹굴 수밖에 없었다. 노미량은 잠시 판단했다. 도주할 것인가? 그러나 자신이 없다. 홀몸이라면 모르는데 혁아의 생명을 담보로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일단 남편의 말대로 혁아가 칠 일 안에 벌모세수를 받는 것도 중요할 뿐더러, 잠마전의 추적을 따돌릴 자신도 없었다. "단가가!"


노미량은 단우를 향해 달렸다. 주한성의 눈썹이 역팔자를 그렸다. 노미량이 채 삼 장을 움직이기도 전에 한 줄기 검광이 허공을 갈랐다. "안돼요!" 남궁설의 다급한 외침에 주한성은 검을 틀었다. 노미량도 위기를 직감하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사사삭! 검날은 목덜미를 스쳤다. 살점이 갈라지며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노미량은 고통도 잊은 채 홱 고개를 돌려 안타까운 눈으로 주한성을 쳐다보고는 다시 단우를 향해 몸을 날렸다. "멈춰요!" 주한성의 고함에도 노미량은 멈추지 않았다. 파아! 어깨가 검날에 베어지는 섬뜩한 고통에 그녀는 혁아를 놓치고 말았다. 순간 그림자가 번쩍했다. 주한성이 혁아를 받아든 것이다. 단우의 안색이 대변했지만 이미 부상을 당한 몸, 운신하기조차 힘들었다. 일단 혁아를 확보한 주한성은 폭풍 같은 공격을 펼쳐 세 번 공격만에 노미량을 혼절시키고 옆구리에 끼었다. "갑시다!" 몸을 날리는 주한성을 따라 남궁설도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단우는 묵묵히 사라지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 표정은 참으로 기이했다. 뭔가 씁쓸한 표정이었다. 그는 시신으로 변한 전검휘를 향해 다가갔다. "전검휘! 미안하다. 그러나 난 절대 혁아를 포기할 수 없다. 그 아이는 너의 피를 타고났으나 반드시 내 아들이 되어야 할 운명이다.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혁아를 가로챌 것이다." 죽은 자에게 사과할 줄도 아는 단우, 이렇게 그를 변하게 한 것은 무엇인가? 생존한 몇몇 수하가 그를 부축했다. "이만 돌아가시……!" 수하들의 입에서 피가 뿜어졌다. 보아서는 안될 광경을 본 것과 들어서는 안될 말을 들은 것이 그들의 죄였다. 단우는 힘들게 걸음을 옮겼다. 초승달도 이 비극이 싫은 듯 산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바람만이 하늘거리며 부는 하늘에 갑자기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다. "무당이 당도했소이다. 전대협께서는 어디 계시오?" 천리전음이라고 하던가? 저 멀리서 들려온 음성은 곧 눈앞에 닥치고 풀잎을 헤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백색 도복을 걸친 도인들이다. 먼길을 달려온 듯 얼굴에는 땀방울이 맺혔지만 도복에는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선두에 선 오십 중반의 도인의 위풍당당한 기세와 그 뒤를 따르는 수십 명의 도인들의 기도는 수십 년 동안 고련한 자들만이 가능한 여유와 위엄이 담겨 있었다. 대무당파(大武當派)! 천무진인 장삼봉이 개파한 후 단숨에 무림의 주축세력으로 자리잡은 이 거대명문은 오늘날 소림과 더불어 그 혁혁한 무명을 천하에 날리고 있었다.


지금 선두에 선 사람은 대무당의 팔대고수 중의 일 인인 진천검(震天劍) 송자(松子)도인이었다. 송자는 잠시 취월거를 살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무량수불! 한 발 늦고 말았구나!" 도인은 다급히 방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산산이 부서진 방안 한가운데 시체로 변한 전검휘를 본 송자는 연신 불호를 외우며 정중히 합장을 올렸다. "전검휘대협, 미안하외다. 당신의 죽음이 잠마전이 천하를 움켜쥐기 위한 천하겁난의 시발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구파일방은 힘이 없었소이다. 허나 그것은 변명일 뿐, 오늘 중원무림은 주대협을 외면한 대가로 항차 피의 폭풍우에 잠길 듯하외다. 늦었지만 구파일방(九派一 ) 중 세 방파에서 주대협의 원수를 갚는 것은 물론, 잠마전의 뿌리를 뽑기 위해 지금 잠마전과 전면전을 벌이고 있소이다." 전검휘의 죽음을 외면한 구파일방, 그들이 왜 갑자기 잠마전을 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구파일방 중 세 문파가 움직였다는 것은 천하를 위진시킬 무서운 태풍의 핵이었다. 3 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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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 제 9 장 만 남 제 10 장 사대금강과의 대결 제 11 장 청해사와의 첫 조우 제 12 장 정무구혼 제 13 장 배반의 시작 제 14 장 일차 대혈전 제 15 장 탈 상 제 16 장 친구의 진면목 제 17 장 전검휘, 그 영웅의 말로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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