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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영탑 제 2 권 -차례제 11 장 음모(陰謀) 대 음모 제 12 장 패자(敗者)의 철학(哲學) 제 13 장 귀향(歸鄕) 제 14 장 진실(眞實)은 어디서도 통한다 제 15 장 그는 단지 은공(恩公)이었다 제 16 장 불운한 남매(男妹) 제 17 장 그를 위한 사육제(謝肉祭) 제 18 장 잔혈맹주(殘血盟主)가 원하는 것 제 19 장 왜 무승부(無勝負)인가?

■ 무영탑 2 권 제 11 장 음모(陰謀) 대 음모

범호가 혈붕성으로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이다. 쏴아아―! 그는 한 필의 한혈마(汗血馬)에게 물을 끼얹었다. 대완산인 그 말은 털빛이 눈처럼 희고 잡털 한 올 섞이지 않았다. 일단 달렸다 하면 쉬지 않고 천 리를 한 달음에 내달린다고 하며 붉은 땀을 흘려 털빛이 붉게 물든다고도 한다. 그래서인지 한혈마는 여주인이 끔찍히도 아끼는 말이었다. 범호는 웃통을 벗어젖힌 채 말의 몸에 솔질을 해주고 있었다. 언 제나 그렇듯이 그는 자신의 일이 즐겁기만 했다. "헤헤... 혈설(血雪), 너는 참 행복하겠다. 매일 그렇게 아름다우


신 주인님을 등에 태우니 말이다." 그는 바보스러워 보이는 웃음마저 흘리고 있었다. 물론 지금의 범호는 천무영의 변신으로써 이 사실을 눈치챈 사람 은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지난 사흘 동안 그는 혈붕성의 사정에 대해 표면적인 것은 거의 전부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머무르고 있는 곳은 내성(內城)에 해당되었다. 정작 수천 필의 말들이 상주하는 마굿간은 외성(外城)에 있었지만 그는 특별히 내성에 근무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관리하는 말 이 모두 지체높은 한 여인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유월설(六月雪) 매강월(梅江月). 이런 이름을 가진 그 여인은 적어도 혈붕성 내에서는 누구도 건드 릴 수 없는 확고부동한 위치에 있었다. 그녀는 혈붕성주인 혈붕왕 (血鵬王) 사공무기의 양녀였던 것이다. 혈붕왕에게는 두 명의 후계자가 있다. 유월설 매강월과 또 한 사 람, 즉 사해서생(四海書生) 독강비(獨 飛)라는 인물이다. 본래 혈붕왕은 독신으로 소생이 없었다. 그는 두 명의 제자를 거 두어 그들을 각기 양자와 양녀로 삼았다. 결국 유월설과 사해서생은 제각기 혈붕성의 제 이인자들로서 막강 한 권력을 거머쥐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범호를 발탁하여 마부로 만든 사람은 유월설 매강월이었다. 그녀는 별호 그대로 유월에도 녹지 않는 눈처럼 성품이 차갑기 짝 이 없는 여인이었다. 얼굴에도 늘상 서릿발 같은 기운이 어려 있 어 누구를 막론하고 좀체로 가까이할 수가 없었다. 반면에 사해서생 독강비는 풍류남아로서 처음 본 사람과도 금세 친해지는 유형의 인물이었다. 그 호탕함 이면에는 만만치 않은 야 심과 함께 냉혹한 일면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아무튼 범호, 즉 천무영은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한혈마 혈설의 손질을 계속했다. "으흐흠... 좋을씨고, 세월은 태평하여......!"


와중에서 그는 등뒤로부터 인기척을 느꼈다. 그것은 아주 경미하 여 낙엽 한 장이 떨어져 내리는 정도였다. '왔군!' 천무영은 내심 중얼거리면서도 여전히 노랫소리나 솔질을 하는 손 만은 멈추지 않았다. "에헤야, 아가씨는 천상의 선녀와 같으셔서 감히 눈에 담았다간 내 눈이 짓무르고 말지. 만일에 한 번 살짝 웃으시기라도 하면 어 쩌누, 이 몸은 당장 녹아버릴 걸. 흐으응......!" 그의 뒤쪽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일신에 피처럼 붉은 옷을 입은 한 미녀가 서 있었다. 그녀는 일종의 상징성을 띤 그 노래를 모두 듣 고 있었으되 안면을 싸늘히 굳히고 있었다. 아름답기로 치자면 인세에 보기 드문 미녀였으나 기질 탓인지 그 녀의 얼굴에서는 얼음가루가 풀풀 날릴 것만 같았다. 눈빛만이 예외였다. 그녀는 시종 홀린 듯 천무영, 아니 범호의 우 람한 근육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눈에는 마치 훌륭 한 조각품을 감상하듯 감탄이 배어 있었다.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범호는 열심히 솔질을 해댔다. 쓱! 쓱쓱―! 동작에 따라 그의 동체가 힘찬 꿈틀거림을 보였다. 일체의 사고력 이 배제된 채 동물적인 본성만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흐음! 과연.......' 범호를 응시하는 혈의미녀의 눈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그녀의 내부에 잠재하고 있는, 지극히 원초적인 욕구가 빚어낸 현상이었다. 이윽고 솔질을 끝낸 범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헤헤... 무척 덥구나. 혈설, 네놈은 시원하겠지만 말이다. 이젠 이 어르신도 목욕 좀 하셔야겠다." 그는 서슴없이 아랫도리를 벗었다. '이... 이런!'


그를 지켜보던 여인은 움찔하여 근처의 나무 뒤로 소리없이 이동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자리를 떠나지는 않았으며 범호를 바라보 던 눈가에 더욱 열기를 피워 올렸다. 그 사이, 범호는 몸에 물을 쏟아 부었다. 쏴아아―! 한 통이나 되는 물이 시원한 물줄기를 이루며 구릿빛 근육의 골짜 기를 타고 세차게 흘러내렸다. 이렇게 되자 몸에 겨우 걸려 있던 한 장의 고의도 그나마 몸에 찰싹 달라붙어 버려 안 입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착각이었을까? 범호는 등뒤에서 흡사 신음과도 같은 가느다란 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슥! 공기를 가르는 미세한 음향은 그 다음 순간에 울렸다. 이와 동시 에 혈의여인은 유령처럼 그곳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수욕을 마친 범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옷을 주워 입었다. "헤헤... 시원하군." 그는 바보처럼 웃으며 무의식을 가장하여 지붕 위를 슬쩍 올려다 보았다. 그의 눈에 한 가닥 황영(黃影)이 잡혔다. 지금까지 은잠 해 있다가 어디론가 몸을 빼내는 듯한. 범호의 입술꼬리가 기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후후... 유월설과 사해서생, 그대들은 오누이나 다름이 없는 관 계인데도 서로 몹시 경계하고 있군.' 혈의미녀란 다름 아닌 유월설 매강월이었고, 지붕 위에 숨어 그녀 를 지켜보던 황영은 사해서생 독강비였던 것이다. 범호, 아니 천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짐작이 맞았다. 범호를 가까이 둔 이유는.......' 그는 유월설의 차가운 얼굴을 떠올리며 계속 중얼거렸다. '그녀도 본능을 가진 인간이니 그 점은 탓할 바가 못된다. 오히려 인간다운 면모를 발견했다고 해야 할지? 거칠고 비정한 승부의 세 계에서 나름대로 고독에 시달려 왔다고 하면 맞을 것이다.' 그의 얼굴에서 머물던 웃음기가 스르르 걷혔다. '유월설은 정녕 불행한 여인이다. 끝을 모르는 야심과 그에 위배 되는 정열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니 이중적인 심리로 인해 그녀 자 신이 겪는 고통도 그만치 클진저......!' 천무영은 쓴 입맛을 다셨다. '왜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껴안고 살게 되는 것일까?' 그는 사해서생이 몸을 감추고 있던 지붕 위를 새삼스레 힐끗 바라 보았다. '사해서생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 유월설을 의식한 나머지 그녀의 뒤꽁무니나 쫓는 짓은 그에게도 즐거울 리가 없다.' 천무영은 천천히 마굿간을 등졌다. '오늘까지 관찰한 바에 의하면 혈붕성은 와호잠룡지세다. 처처에 야심에 찬 인물들이 도사리고 있으니.' 그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누구도 혈붕왕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 그자는 한 마리 거 붕(巨鵬)이다. 놀랍게도 수하들의 특성을 일일이 파악하고 있으며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

십오야(十五夜). 만월이 떠올라 혈붕성 전역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오늘따라 천공 에는 유독 구름 한 점 없었다. 범호는 소변이라도 마려웠는지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창문을 열어제낀 그의 표정이 다소 굳어졌다.


'오늘로 혈붕성에 잠입한 지 오 일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 적인 내막은 알아내지 못했다. 이들은 점조직으로 되어 있어 보안 유지가 너무도 철저하다.' 그의 눈이 반짝하고 이채를 발한 것은 그때였다. 탁! 그는 창문을 닫더니 무슨 생각에선지 침상에 도로 드러누웠다. 그 순간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스스스......! 드러누운 범호의 코에서 뿌우연 기체가 흘러나와 허공에서 뭉쳐지 며 또 하나의 인영을 형성시킨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 인영은 천무영이었다. 그는 침상에 범호로 화해 곤히 잠들어 있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후후... 환법 중 제사법인 의이화영분체술(意以化影分體術)을 처 음으로 사용해 보는군." 그의 모습은 창문의 미세한 틈을 통해 한 가닥 연기처럼 빠져 나 가고 있었다.

사해각(四海閣). 이곳은 사해서생 독강비의 거처였다. 천무영은 사해각의 처마 밑에 유령처럼 달라 붙었다. 그의 곁으로 는 불이 환하게 켜진 하나의 창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으음! 아직 자지 않고 있구나.' 그는 창문을 통해 방 안을 들여다 보았다. 투시통안술(透視通眼 術)이라는 환요비자의 독문공부를 익히고 있는 그였지만 그것까지 는 굳이 발휘할 필요도 없었다. 방 안은 화려하기 이를데 없었다. 침상을 비롯한 가구는 물론


식물들도 모두 최고급품으로 호화의 극을 달리고 있었다. 거기서 사해서생 독강비가 뒷짐을 진 채 홀로 서성이고 있었다.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그는 일신에 황색 수사의를 입었으며 준수한 용모를 지닌 삼십 세 안팎의 청년이었다. 그는 허공을 향해 나직이 중얼거렸다. "공령활시대법(恐靈活屍大法)은 완성단계에 이르고 있다. 열 두 명의 공령활시녀(恐靈活屍女)와 마지막 단계인 음양통령대법(陰陽 通靈大法)만 거치면 끝이다." 그의 눈에 언뜻 살기가 어렸다. "문제는 매강월도 나와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그 계집도 공령활시 인들과......!" 사해서생은 불현듯 주먹을 불끈 움켜 쥐었다. "나의 영원한 호적수! 어떻게 해서라도 꺾어놓아야 한다." 엿듣고 있던 천무영은 충격때문에 하마터면 소리를 내어 정체를 노출시킬 뻔 했다. '맙소사! 공령활시대법이라면 전설적인 마문비전(魔門秘傳)의 무 시무시한 대법이 아닌가?' 그의 뇌리에는 어느덧 알고는 있으되 기억의 한편에 접어 두었던 사항들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 공령활시대법을 연단하기 위해서는 도합 이천 명의 남녀가 필요 하다. 그들의 생혈(生血)로 각각 십이 명씩의 공령활시지체(恐靈 活屍之體)를 가진 남녀가 탄생하게 된다. 이들 십이공령활시인과 십이공령활시녀는 구십구 단계의 연단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그들을 부리게 될 공령활시령주(恐靈活屍靈主) 와 몸을 섞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그들은 육신이 가루가 될 때 까지 영주의 지배를 받게끔 된다. 공령활시들은 천하무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무궁무진한 위 력을 가지고 있다. 이는 신체가 금강불괴인 데다가 아무리 써도 고갈되지 않는 내력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공령활시대법은 하늘을 거스르는 대법이다. 소위 악마의 대법이라 고까지 불리우는 이 대법의 연원은.......

천무영은 전율을 금치 못했다. '공령활시대법은 사라진 암흑마전(暗黑魔殿)의 비전이거늘, 그렇 다면 혈붕성이 암흑마전의 후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것은 단지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두렵고 섬뜩한 일이었다. 오죽 하면 암흑마전이라는 어휘 자체에서 벌써 그는 피의 수레바퀴가 구르는 듯한 소리를 감지하고 있었다. 이때, 사해서생이 의자에 가 앉았다. 그의 눈에서는 예리한 광채가 번뜩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순간 모종의 결단을 내리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입에서 나직하면서도 괴이 쩍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크ㅋ! 매강월, 네 소원은 이 오라버니에 의해 이루어지게 될 것 이다. 자고로 원하는 상대와 맺어지는 것이야말로 여인에게 있어 서는 최대의 행복이 아니더냐?" 비웃음은 아예 노골적인 것으로 화하기도 했다. "어리석은 계집, 그따위 하찮은 놈에게 넋을 뺏기다니! 그로써 내 게는 다시 없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지만. 후후... 그놈을 이용해 너의 순음을 깨면, 후후훗! 만사휴의가 될 것이다." 사해서생의 음성은 그 뒤로도 더 이어졌다. 하지만 천무영은 그곳 에 더 있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슷! 처마 끝에 붙어 있는 그의 신형이 어딘가로 이동해 갔다. ④

매화원(梅花院).


유월설 매강월의 거처이다. 이름처럼 매화를 좋아해서일까? 그녀가 기거하는 전각의 주변은 매화나무가 빙 둘러싸여 숲을 이루고 있었다. 스슷! 하나의 인영이 희뿌연 그림자로 화해 매화원 안으로 날아 들었다. 천무영이었다. 그는 사해각에서도 그랬듯 아무런 망설임없이 막바 로 매강월의 침소로 향했다. 그런데 여인의 규방답게 아늑하고 우아하게 치장된 침전에서는 뜻 밖의 음향이 울려나왔다. "하아아......!" 그것은 어찌 들어도 열에 달뜬 여인의 신음성이었다. '으음!' 이쯤 되고 본즉 꺼려지는 면도 없지 않았으나 천무영은 마음을 굳 게 먹고 방 안을 슬며시 엿보았다. 방 한쪽에는 은은한 분홍색의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안에는 침상이 놓여 있었으며 한 여인이 거기 누워 연신 신음 을 발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유월설 매강월이었다. 침의를 입은 그녀는 침상에 엎드린 채 전신을 비비꼬고 있었다. 게다가 한손으로는 자신의 젖가슴을, 다른 한손으로는 허벅지 안 쪽을 쉴새 없이 문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수음(手淫)만으로는 아무래도 내부에서 타오르는 격정이 다 해소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흐으... 윽......!" 그녀가 흘려내는 신음성에는 뭐라 형언키 어려운 안타까움이 깃들 어 있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낯뜨거운 장면이라고 할 수 있었지 만 또 어찌 보면 비애를 품고 있는 듯도 했다. 얼음장 같은 차가움으로 무장하고 있는 유월설에게 이렇듯 뜨거운 욕망이 내재해 있다면 과연 누가 믿겠는가?


급기야 그녀의 입에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듯한 한 사람의 이 름마저도 튀어나왔다. "범... 호......!" 운명은 어찌하여 유월설의 상대로 범호를 배정해 놓은 것일까? 그 녀는 가진 것이라곤 오직 몸뿐인 그 우직한 사내에게 마음이 기울 때, 스스로 환멸과 회의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범호를 혈붕성으로 맞아들이기까지 겪었던 심적갈등은 그녀가 평 생 경험한 것을 모두 합쳐도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더구나 가까이에 두고 있다 보니 이제는 육체적인 욕망 때문에 매 일 밤을 시달려야만 하고....... 유월설은 문득 입술을 세차게 깨물었다. "안돼, 이래선! 공령활시대법을 이루기 전에 순음을 깨면 모든 것 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그녀가 꿈꾸고 있던 것은 혈붕성 최고의 권좌, 그리고 더 나아가 서는 호령 한마디로 천하를 주름잡는 여제(女帝)였다. 여망이 달성되기만 하면 범호쯤은 색노(色奴)로 거느려도 무방할 터였다. 적어도 그녀의 냉정한 계산상으로는. 하지만 이성(異性)을 그리워하는 육체는 무시로 불이 붙었고, 그 때마다 그녀는 불길을 끄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다. 유월설 매강월. 그녀는 작금에도 부르짖는다. "범호, 너... 사흘 뒤엔... 그때에는 필히......!"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밖으로 내뱉으며 그녀는 일신을 한 차례 부 르르 떨었다. 슷! 방 안으로 스며들었던 기체가 창 밖으로 날아갔다. 천무영이다. 그는 달 속으로 스며들며 쓴 입맛을 다셨다.


'쯧! 사해서생의 말이 맞는 구석도 있다. 대체로 여인에겐 야심보 다 사랑이 우선이지.' 그는 방향을 돌렸는데, 그 목적지란 혈붕성 내에서도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그의 귓전으로 탄식과도 같은 매강월의 한숨소리가 아 주 멀게 전해지고 있었다.

혈붕전(血鵬殿). 이곳은 일명 군림전(群臨殿)이라고도 불리운다. 그 이유는 여기의 주인인 다.

혈붕왕의 뜻이 군림천하에 있기 때문이

혈붕왕은 항시 이곳 혈붕전에 기거하며 아무리 큰일이 벌어져도 전각 밖으로 모습을 내보이는 법이 없었다. 이는 그만치 자신의 안위를 중시한다는 얘기다. 그런 반면 그는 자부심이 무척이나 강한 위인이었다. 자신 외에는 누구도 믿지 않았으며 측근에 사람 두기를 싫어했다. 그 결과로 혈붕전에는 매복자가 수없이 깔려 있어 특별한 용무가 있기 전에는 아무도 발을 들이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랬다가 는 필시 귀신도 모르게 목숨을 잃게 될 테니까. 십오야의 만월은 혈붕전에도 풍성한 빛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는 괴괴하고 적막하기 그지 없었다. 의당 있음직한 호 위무사들도 이곳에만은 배치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혈붕전 특유의 풍경이다. 매복이라는 속성이 원래 그렇듯 일체 타인의 눈에 띄지 않는 법이므로. 이르자면 이 고요 는 완벽한 함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스스스....... 한 줄기 미풍이 불어 초목의 잎새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무엇인가 혈붕전의 주변을 뒤덮고 있는 교목림 사이를 가로지르며 일으킨 바람이었다.


슥! 분명 움직임은 있으되 형체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커다란 나뭇 잎 한 장이 바람을 타듯 날고 있었는데, 이를 두고 의혹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깊숙한 대전 안이다. 혈붕왕 사공무기. 그는 항간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매우 인자해 보이는 인상의 인물 이었다. 넓은 대전의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태사의가 놓여 있었고, 그는 거기에 앉아 홀로 바둑을 두고 있었다. 탁! 탁......! 혼자 두는 바둑이 취미인지 벌써 오랜 시간이 경과되었음에도 그 의 얼굴에서는 지루한 기색이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사공무기는 얼굴이 길고 눈매가 부드러워 웬만한 일에는 동요되지 않을 듯한 느긋함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는 턱밑에 짧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금삼(錦 衫)이었는데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듯 가슴 부분에 한 마리의 혈 붕이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나이는 어림잡아 칠순쯤 되어 보였으며 이렇다하게 특징적인 요소 가 없이 그저 평범에 가까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는 손에 흑(黑)을 쥔 채 백(白)의 대마(大馬)를 따라잡고 있었 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그가 흑을 놓기가 무섭게 백이 맞상대하 듯이 절로 놓여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허허... 낭패로군. 대마를 잡자니 대세를 그르치겠고, 대세를 굳 히자면 대마를 포기해야 할 판국이니 말이야. 이럴 땐 대체 어떻 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는 마치 상대에게 묻듯 말하고 있었다. 탁! 다시 백돌이 놓여지자 혈붕왕은 흰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장고


(長考)에 들어간 듯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던 그는 마침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역시 안되겠군. 문성공(文聖公), 자네의 묘수(妙手)에는 못당하 겠네. 불계패(不計敗)일세." 혈붕왕은 흑돌을 내려놓으며 짐짓 손을 털어 보였다. 과연 국면으로 보아 그의 패배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대국자, 즉 이제껏 실체를 보이지 않고 그로부터 문성공이라 불리운 자는 어떤 인물일지?

은은하고도 창노한 음성만이 대전을 울렸다. "헛헛... 혈붕왕, 자네는 앞으로도 영원히 노부를 이기지 못할 걸 세. 왠지 아나?" "글쎄?" 혈붕왕은 고개를 갸웃하며 짧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것은 자네가 너무 많은 없다는 뜻이네."

것에 욕심을 내고 있어서야. 획일성이

"내가 말인가?" 혈붕왕이 되묻자 예의 음성은 나무라듯 말했다. "자네는 일개 인간으로서 하늘의 뜻까지 거슬렀네. 적어도 도는 넘지 말았어야 했거늘, 자네는 그렇지 못했어." 혈붕왕의 눈에서 일순 그답지 않게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그의 음성도 어느덧 약간의 노기를 띠고 있었다. "당치 않은 소리! 이것저것 따지다가 망하면, 그때 가서 주저앉아 하늘이나 원망하고 있으란 말인가?" 앞서의 음성이 나직이 탄식했다. "어떻게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키


고, 또 그 위에 악업(惡業)을 쌓고......." 혈붕왕이 차갑게 그 말을 잘랐다. "적어도 자네가 나의 동지라면 그리 말해선 안되네. 내가 이루려 는 것은 이마제마(以魔制魔)의 방식이니 문제가 따르지 않을 수 없지.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은 불가피했네." 확고한 신념이 느껴지는 그의 태도에 반해 대응하는 음성은 딱하 다는 듯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자네는 아는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를? 만일 성공하 지 못할 시엔......." 혈붕왕에 의해 그 음성은 한 차례 더 가로막혔다. "그럴 수도 있겠지. 강월(江月)과 강비( 飛), 두 아이는 바탕이 순수하지 못한 아이들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 아이들의 그런 면을 철저히 역이용할 셈이네. 마전(魔殿)에 그들을 넘겨준 것도 실은 그때문이지."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 그 아이들은 명색이 자네의 후계자들이 아닌가? 양자와 양녀이기도 하고."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그들도 말이 양부(養父)이지, 내게 기대 는 이유는 따로 있네. 그 정도는 자네도 알텐데?" "쯧! 비정한 논리로군." "맞아. 그리고 그들은 내 계획대로 잘 움직여 주고 있네. 향후로 는 천금성의 준동을 막는데 크게 기여할 걸세." "하여간 재주는 비상하이. 늑대새끼를 키워 호랑이를 잡는다? 허 허... 부디 마전의 혈풍이 재현되지 않기만을 바라네."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말게. 현존하는 마전은 단지 지난 날의 잔당 들에 불과할 뿐이네. 거사가 끝나면 즉시 제거될테고." "무시무시하군. 헛허허......." 혈붕왕의 안색이 무겁게 굳어졌다. "자넨 끝까지 나를 비웃는군. 좋아, 어디 두고 보게."


그는 태사의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최소한 자네를 실망시키지는 않을 테니까." "무슨 뜻인가?" "사흘 뒤면 강월과 강비가 대법을 완성하네. 자네의 말마따나 그 것을 위해 적지 않은 인명을 희생시켰지만 이후로 수만 명을 살릴 수 있다면 하늘도 내 편이 되어 줄 걸세." "으음! 일단 화살이 시위를 떠났으니 그래야겠지." 침중하게 느껴지는 문성공의 음성에 혈붕왕은 묘한 웃음으로 답한 후, 화제를 돌렸다. "잠룡부(潛龍府)는 여전히 조용하던데, 별 기미는 없는가?" 그에 상응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아직은. 그렇지만 잠룡천자(潛龍天子)는 꼬리를 드러내지 않는 거룡(巨龍)이지. 하수(下手)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네." 혈붕왕이 재차 물었다. "말을 빙빙 돌리지 말고 확실하게 해주게. 자네는 필경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허허... 추측이 지나치군. 단지 나는......." "뭔가?" "이건 내 짐작이네만, 왠지 그들이 북경(北京)과 연이 닿고 있다 는 느낌이 드는군." 혈붕왕의 안색이 일시지간 침중하게 굳어졌다. "그게 정말인가?" "확신할 수는 없대도." "난 기억하고 있네. 자네는 설사 확신을 가지고 늘 그렇게 한다는 것을." "허허허... 좋도록 생각하게나."

있다 해도 말은


휘이잉―! 바람이 종전보다 강하게 불었다. 그로 인해 커다란 나뭇잎 한 장 이 바람결에 휩쓸려 혈붕전 밖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저 평범하게 곤두박질치고 있는 그 나뭇잎을 보며 뭔가 를 선뜻 감지해내는 인물이 있었다. "놀랍군! 환요비자의 환술을 쓰는 자가 있다니. 허허......." 한 가닥 너털웃음 소리가 들리더니 장내에 백삼을 입은 백발의 노 인이 내려섰다. 동시에 그는 손을 슬쩍 앞으로 뻗었다. 콰르르―! 놀랍게도 가벼운 한 번의 손짓에 의해 그의 소매로부터 막강한 강 기가 해일처럼 폭사되어 나갔다. "흑!" 짤막한 신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 직후였다. 바람에 나뒹구는 나뭇 잎이라 믿었던 물체가 강기에 부딪치자 갑자기 뿌얘지더니 하나의 인영으로 변했던 것이다. 졸지에 본연의 형체를 드러내게 된 그자는 천무영이었다. 다만 그 때까지도 그의 일신은 뿌연 기류에 휩싸여 있었다. 백발노인이 감탄의 기색을 내비치며 입을 열었다. "용케 이곳까지 숨어 들었군. 자네는 누군가?" 천무영도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문성공!' 눈앞의 백발노인은 바로 보이지 않는 대국자였다. 어쨌든 천무영은 초조하기 그지 없었다. 일각 내로 돌아가지 않으 면 의이환영분체술이 깨어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영(無影)이오." 의미있는 한마디를 던진 그는 전광석화와도 같이 상대를 덮쳐갔


다. 그 속도란 가히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헉!"

쾅! 굉렬한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은 그대로 격돌했다. 덕분에 백발노인은 옷자락이 찢어진 채 주르르 뒤로 밀려났으며, 천무영은 기혈이 역류한 나머지 핏물을 왈칵 토해냈다. 그러나 경황중에도 그의 신형은 허공으로 튕겨져 나가는 탄력을 이용해 눈깜짝할 사이에 그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단지 그 순간에 몸을 감싸고 있던 기류가 잠시 흩어졌던 것이나, 자신을 바라보던 백발노인의 눈에서 찰나적으로 번갯불 같은 안광 이 번쩍 일어났던 것만은 그도 알지 못했다. 요는 백발노인이 천무영의 본모습을 보았다는 말이다. 노인은 신 형을 바로세우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으음! 광한상인의 광한대강인(廣寒大 印)까지도 사용하다니, 의심의 여지가 없구나. 은자천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기재를 결 국 찾아낸 모양이로고." 문성공이라 불리운 노인은 대번에 천무영의 내력을 간파해내고 있 었다. 그는 잠시 명상에 잠긴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그렇고, 기이한 일이군. 분명 초면이긴 한데 그 청년의 모 습이 왜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일까? 마치 어디선가 한 번 쯤 본 듯한 얼굴이야."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뚜렷하게 잡히는 바가 없자 그는 일단 의혹을 접어두기로 작정했다. "정녕 대단한 무위였다.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인상을 보건대 그 청년이 마(魔)에 물든 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문성공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뜻이 같다면 언제고 다시 만나지겠지." 스슷! 그도 또한 그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아침이다. 범호는 눈을 뜨자마자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본능적으로 방 안 공기가 전날과는 다르다고 여겨진 것이었다. "뭐지? 이런 기분은......?" 그는 겁이 난 듯 몸을 잔뜩 움츠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착 그의 귓전을 두드렸다.

가라앉았으면서도 음산무비한 음성이

"범호, 내 말을 들어라." "누, 누구요? 당신은." 질겁을 하는 범호에게 음성이 물었다. "네 주인은 누구냐?" "주인......? 그야 매(梅)... 아가씨입죠." 그는 얼이 빠진 채 알고 있는 대로 더듬더듬 대답했고, 전해져 오 는 음성은 그런 그를 가차없이 몰아붙였다. "틀렸다! 너는 혈붕성의 수하가 아니더냐?" "그... 그렇기도 합죠." "그렇다면 네 주인도 당연히 혈붕성주여야 할텐데?" 범호는 갈등이 생긴 듯 떨리는 음성으로 답했다. "하... 하지만 여기로 소인을 데려온 분은......." 그의 말은 도중에서 끊겼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 너는 내 명령에 따르게 될 테 니까. 그러지 않으면 너는 죽는다." "주... 죽는다고요?" "그렇다." "다... 당신은 대체... 누구길래?" "나는 장차 혈붕성주가 될 사람이다." "흡! 그럼......?" 범호의 순진한 눈이 화등잔만하게 떠지는 순간, 음성은 그의 귀에 강한 진동을 울리며 퍼부어졌다. "지금부터 네 주인은 사해서생 독강비다!" 우웅......! 범호는 한 차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소리로 인해 그는 고막이 파열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놀라운 것은 그 진동이 뇌리에서 다시 반복되듯 크게 공명을 울리더란 사실이었다.

- 네 주인은 사해서생 독강비......!

그것은 마법을 거는 신비한 주문이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고자 하 는 현상과 비슷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상대가 단순한 위인이라서 그랬는지 대번에 나타났다.

"우우......!" 범호는 안색이 백지장같이 창백해진 채 괴상한 신음을 흘렸다. 그 러더니 침상에서 내려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나... 나의 주인은 사해서생 독강비다."


"후후... 명심해라. 잠깐이라도 그 사실을 잊었다간 너는 즉시 칠 공에서 피를 쏟으며 죽게 될 것이다." 음성이 전하는 위협에 범호는 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반쯤 넋이 나간 상태에서도 기계처

"무... 무엇이듯 하명하십시오. 주인님......." 예의 음성이 문득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변했다. "음, 기쁘구나. 그처럼 말을 잘 들으니. 좋아! 내 너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리겠다." 범호는 상대에게서 뜻하지 않았던 소리도 들었다. "너는 아주 훌륭한 몸매를 가졌구나. 근육도 쓸만하고." "벼... 별 말씀을." "매강월이 너를 탐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설마......!" "설마가 아니라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은밀하게 매강월의 소원을 이루어주려 한다." 범호의 얼굴에는 언뜻 의혹이 떠올랐다. 도무지 술수를 모르고 우 직하기만한 이 위인은 음성의 주인이 내뱉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전 혀 감을 잡지 못했던 것이다. "답답한! 후후후......." 그 웃음소리에는 복합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 말 그대로 답답해 하기도 했지만 재미있어 하는 기색이 역력히 엿보였다. 그자는 어리둥절해 있는 범호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 매화원의 시녀들은 하나같이 극심한 복통으로 앓아눕 게 될 것이다." "흐음?" 범호는 더욱 더 미궁을 헤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매강월은 아침마다 목욕을 하는 거르지 않는 행사다."

습관이 있다. 그것은 단 하루도

음성은 툴툴 웃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녀는 목욕물을 덥히기 위해 필시 너를 부를 것이야." "소... 소인을 말입니까요......?" 범호는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너는 대기하고 있다가 그때에 나를 위해 한 가지 일을 해 주어야겠다. 그것은 네게도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어... 어떤 일인뎁쇼?" "꽃을 꺾는 일." "넷?"

범호. 그는 여인의 매끄럽고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지난 팔 일 동안을 그는 매우 만족스럽게 지냈다. 아니, 꿈인양 행복하게 지냈다고 해야 더 적절한 표현이리라. 난화(蘭花). 이 여인은 항주에서 이름을 날리던 명기(名妓)였다. 그녀와 지낸 기간 중 범호는 한 발자욱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주지육림(酒池肉林)이었다고나 할까? 그는 환락경에 취해 오늘만 해도 새벽이 다 되도록 난화와 격렬한 씨름(?)을 치르고 난 후에야 곯아 떨어진 바 있었다. 그렇건만 범호는 잠이 깨자마자 또 생각이 달라져 산처럼 솟은 그 녀의 가슴에 얼굴을 박았다. 그는 난화의 도드라진 유두로 입술을 가져가며 손은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밀어 넣었다. 그리하여 열기가 그의 전신으로 번져갈 때였다.


(범호.) 한 가닥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와 그를 놀라게 했다. "엉?" 범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혹시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 가 싶어 주변의 정황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러자 때를 맞춘 듯 음성이 다시 전해져 왔다. (미안하다만 일정에 약간의 차질이 생겼다. 너는 오늘 해 뜨기 전 에 혈붕성으로 돌아가야겠다.) "시... 싫소!" 범호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그로서는 지금 누 리고 있는 이 안락함과 더 바랄 나위 없는 행복감을 깨고 싶은 마 음이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그의 즉각적인 반응에 음성은 한결 부드럽게 응해왔다. (네 심정은 충분히 알겠다만 내 말에 따른들 후회는 없을 것이다. 혈붕성에서는 더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더 좋은 일......?" 범호는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아 되물었고, 음성은 나직한 웃음과 더불어 생각지도 않은 질문을 던져왔다. (후후... 범호, 너는 유월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 어떻게 생각하다니......?" (매력이 있지 않느냐 말이다.) 범호의 우직한 얼굴에 일순 두려움이 짙게 깔렸다. "마... 말도 안되는....... 하늘 같은 아가씨를 내 어찌......!"


음성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 하늘 같은 아가씨가 너를 좋아한다면?) "우우... 그럴 리가!" (이해가 잘 안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좀더 확실하게 말해 주지. 그녀는 너와 자고 싶어한다.) "넷?" 범호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서 튕겨져 일어날 뻔 했다. 그는 턱을 덜덜 떨며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분은 저를 하찮게 여기실......." (믿기지 않겠지만 혈붕성으로 돌아가 보면 안다. 그녀가 너를 침 실로 불러들일 것이다.) "맙소사!" 범호는 아연실색하여 입을 딱 벌렸다. 언감생심 꿈조차 꾸어본 적 이 없는 일이 이처럼 태연스레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너는 그녀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도 진즉 부터 그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우......!" (또 한 가지, 그녀는 보기보다 맹목적이며 뜨거운 여인이다. 그래 서 너를 좋아할 수도 있었던 것이지. 너는 단 한 번이라도 그녀와 의 잠자리를 상상해 보았느냐?) "모... 못해... 봤습니다. 겁이 나서......." 범호는 솔직하게 시인을 하는 한편, 그 말을 듣게 됨으로써 처음 으로 금단의 영역을 넘어 상상의 나래를 펴보았다. 그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했다. 그것은 물론 이제까지 한사코 부정 해 왔던 욕망을 용인한다는 의미였다. 이렇게 되자 범호의 눈에는 때아닌 열기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곁에 난화가 있다는 사실은 깡그리 잊은 지 오래였다.


그는 오직 유월설의 환상적이도록 아름다운 자태만을 떠올리며 벅 찬 기대와 흥분으로 인해 몸을 떨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음성이 그의 귀에 또 한 번의 자극제를 불어 넣었다. (매강월은 너의 품을 애타게 그리워 했다. 그녀가 네 생각때문에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면 믿겠느냐?) "흐으으......." 어디선가 약병 하나가 날아와 호흡을 조절하지 못해 기를 쓰고 있 는 범호의 앞에 떨어졌다. 툭! (그것을 그녀의 목욕물에 풀어라. 일종의 방향제로 그녀가 평소에 즐겨 쓰는 것이다.) 허겁지겁 약병을 주워드는 그에게 음성은 또 말했다. (너는 즉시 말 채찍 한 벌을 사 가지고 돌아가거라.) "넷!" (걱정은 하지 말아라. 절대 안전할 테니까.)

■ 무영탑 2 권 제 12 장 패자(敗者)의 철학(哲學)

말 채찍을 사러 나갔던 범호가 혈붕성으로 돌아왔다. 이는 흔히 있는 일로써 누구도 그의 출입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 다. 성내의 사람들은 그가 팔 일 동안이나 외부에 나가 있다가 복 귀했다는 사실도 끝내 눈치채지 못했다. 따라서 범호가 성문을 통과할 때 그의 그림자나 관찰하고 있을 자 도 역시 없었는데, 그는 일출(日出)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희안 하게 발치 뒤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입성했다. 그 그림자는 또 하나의 범호로 변신했던 천무영이었다. 즉 범호의


그림자로 화한 그는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일은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 매강월은 독강 비의 간계에 빠져들어 여태까지 공들여 왔던 공령활시대법을 완성 시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천무영은 깊은 탄식을 안으로 삼켰다. '어쨌든 그간의 경위로 미루어 사해서생은 매강월보다 한 수 높은 자다. 내가 중도에 끼어들었건, 그렇지 않건 그는 무슨 수단을 써 서라도 종내에는 매강월을 눌렀으리라.' 사실 혈붕성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암투(暗鬪)는 여러 면에서 시 사하는 바가 컸다. 특히 혈붕전에서 엿들었던 대화들은 그로 하여 금 많은 점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었다. 천무영은 여기서 문성공의 정체에 호기심을 가지는 일면, 그 노인 의 관점이 매우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었다. 다만 입장의 차이만은 명백하여 그는 냉소하지도, 관망하지도 않 았다. 여하한 일이건 무림의 앞날에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는 한 직접 나서서 해결을 보리라 작정했던 것이다. 게다가 천무영의 방식은 철저하리만큼 인간적이었다. 그는 작금에 도 유월설을 떠올리며 이렇게 읊조리고 있었다. '정열의 여인이여! 나는 그대의 공령활시대법을 깨뜨리는데 일조 하고 있소만 회의하지 않소. 왜냐하면 그것을 이룬들 그대는 행복 해질 수가 없기에. 혹시 아시오? 남녀의 관계에서는 육체적 관심 도 사랑의 일부라는 것을.' 천무영은 범호가 무사히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아 무도 모르게 다른 곳으로 신형을 이동시켰다. 환요비자의 환술은 시종 그에게 기대치 이상의 도움을 주고 있었다.

유월설. 이 별호만큼 그녀의 마음에 꼭 드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는 매강월이 단단히 작심을 해서이지 본성이 그처럼 차 가워서는 아니었다. 예전에는 그녀도 현재와는 달리 봄날씨처럼 따스하고 다정다감한 소녀였었다.


그녀의 심적변화가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날은 유일한 혈육이자 친 오라비인 매검영(梅劍英)이 죽던 날이었다. 그녀는 졸지에 천애고 아가 되고 말았는데,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원래 독강비와 동문수학(同門修學)을 하던 사람은 매강월이 아니 라 매검영이었다. 그 역시 혈붕왕의 제자로서 독강비와 마찬가지 로 성내 인물들의 기대가 집중되던 젊은이였다. 이렇다 보니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게 경쟁심도 자리잡고 있 었지만 매검영 쪽은 어디까지나 선의(善意)에서였다. 반면에 독강비는 지독하리만치 위선으로 무장된 위인이었다. 그는 호탕한 기질을 내세워 둘도 없는 친구를 자처하면서도 매검영을 질시하던 끝에 제거하고자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 독강비의 속셈이 표면화되는 날이 왔다. 그것은 매검영이 사 냥을 나갔다가 허리를 심하게 다친 그 다음 날이었다. 독강비는 상대의 용태를 뻔히 알면서도 비검(比劍)을 요청했다. 그날따라 마침 혈붕왕도 출타하고 성내에 없었으므로. 매검영은 본시 유달리 자존심이 강한 위인이었다. 독강비는 처음부터 그가 거절하지 않을 것을 염두에 두고 일을 벌 였으며 나아가서는 진검(眞劍) 승부를 고집하기도 했다. 매검영이 이때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두 사람은 비검을 하게 되었고, 승리는 독강비에게로 돌아갔다. 허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매검영은 연속 밀리다가 절벽 끝에 이 르게 되자 검을 내리며 말했다.

- 강비, 내가 졌다. 날 쉬게 해다오. 그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매달렸다. 독강비의 지나친 승부근 성을 나무라면서도 일편으로는 이해한다는 듯. 그런데 그가 보여준 우정의 답례는 놀랍고도 잔혹했다. 독강비가 친구의 가슴에 곧장 검을 찔러 넣었던 것이다. 그 광경은 당시 열 살이던 매강월의 눈에 남김없이 담겼다. 적지 않은 나이차로 인해 부친이나 다름없던 오라비가 비명과 함께 절 벽 아래로 추락하는 장면도 그녀는 보았다.


이후로 독강비는 혈붕왕에게 불려가 호된 꾸지람을 들었으며 제자 로서 최초로 면벽백일이라는 수치스러운 벌도 받았다. 하지만 매강월의 찢겨진 마음은 그 정도로는 보상되지 않았다. 오 라비를 잃은 데다가 타인에 대해 불신까지 갖게 되어버린 그녀는 끝내 그 사건에 대해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오늘날까지 무서운 결심만을 거듭 다져왔다.

- 독강비! 내 언제고 네놈을 직접 처단하리라.

아침이다. 유월설 매강월은 여느 날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오늘은 그녀에게 있어 더없이 중요한 날이었다. 때문에 그녀의 가 슴 속에서는 벌써부터 모종의 기대와 은은한 두려움, 착잡한 감회 까지도 복잡하게 뒤섞이고 있었다. '아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오늘이야말로 천 왔던 공령활시대법이 드디어 완성되는 날이다.'

일 동안 준비해

이 말은 달리 표현하면 그녀가 이십 년간이나 고이 간직해 온 순 결을 스스로 깨뜨려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것도 열두 명의 혼(魂)이 없는 사내들을 상대로 말이다. 정녕 피치 못할 노릇이었다. 공령활시인들과 정사(情事)를 치루는 것은 하나의 정해진 절차였다. 그래야만 상호간에 영이 통하고 마 음이 연결되어 그들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으니까. 비장한 각오도 서 있었다. 그 일은 분명 겁이 나고 공포스러운 것 이었으나 복수에 대한 집념과 한껏 팽배해진 야망이 그녀로 하여 금 여성마저도 쉽사리 포기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일까? 눈앞에 우람한 체격을 지닌 한 사내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범호.......'


그 이름의 주인공은 일개 마부일 뿐이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색정 에 이끌리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유월설 매강월이 범호라는 인물에게 무엇을 발견했는지를 안다면 누구도 그녀를 비난하지 못하리라. 맨 처음 화전(火田)에서 그를 보게 되었을 때, 매강월은 소스라치 게 놀랐다. 심지어 자신의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범호의 모습인즉 죽은 오라비인 매검영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 것도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흡사하여 그녀로서는 죽은 오라 비가 살아돌아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매강월은 우선 기뻤다. 일찌감치 세상을 하직해 버려 다시는 만날 수 없었던 매검영의 모습을 그렇게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들뜨게 만들었다. 하지만 범호를 데려오는 일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본의 아니게 타인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으며 무엇보다 독강비의 존재를 의식하 다보니 고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그녀는 단안을 내려 그를 개인마부로 삼았다. 그리고 그를 내성에 머무르게 하며 틈만 나면 찾아가 은밀히 지켜보곤 했는데, 그 일은 불안하고 두려운 가운데서도 그녀의 삶에 유일한 즐거움 이 되어 주었다. 그러다 차츰 그녀의 마음에는 예상치 못했던 변화가 깃들기 시작 했다. 그것은 범호의 특징이자 전 재산이나 진배없는 훌륭한 근육 에서 남성을 느끼고부터였다. 본능적인 욕구는 일단 불붙게 되자 무섭게 타올랐고, 그녀가 지녔 던 냉정한 이지(理智)를 무참하게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현재도 매강월은 거기에서 파생된 감정에 대해서는 일체 무시하는 편이었다. 육친에 대한 그리움 외에는 아무 것도 인정할 수 없게 되어버린 그녀는 내심 부르짖는다. '범호! 오늘밤만 지나면... 너는 완전한 내 소유다.' 매강월은 스스로도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는 범호의 존재만 떠올리면 습관처럼 있어왔던 현상이었다. 그녀는 눈을 내 리감으며 슬며시 가슴과 허벅지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녀의 눈이 갑작스레 본연의 차 가운 빛을 회복했다. '독강비도 지금쯤 나와 똑같이 준비를 하고 있겠지?' 그녀는 서릿발 같은 기세로 연이어 중얼거렸다. '두고 봐라. 독강비! 너의 대법은 실패할 것이다.' 왜 그런지 그 이유까지는 알 신만만해 보였다.

수 없었으나 그녀의 태도는 매우 자

"천천, 네가 잘 해내리라고 믿어." 매강월은 나직이 읊조린 후,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몸 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미끈하면서도 농염한 육체의 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는 문 밖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방옥(芳玉), 화아(花兒), 목욕물을 준비해라."

사방이 밀폐된 밀실(密室)이다. 넓이는 방원 십 장쯤 되어 보였는데 전체적으로 음침하고 칙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언뜻 피비린내가 풍기는 듯도 했으나 정확한 출처는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천정에는 벽록색을 띤 한 알의 야명주(夜明珠)가 박혀 있었다. 그 것은 분명 조명효과를 위한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실내의 묘한 분 위기에 일조하고 있다면 맞았다. 밀실 안에는 여러 개의 흑침상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새까맣고 윤기가 흐르는 그 침상은 숫자가 도합 열두 개였으며 그 위에는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온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소녀들로 하나같이 죽 은 듯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고요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 소녀들의 나신이란 사뭇 기괴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하늘 을 향해 있는 위태롭게 솟아오른 육봉이나 유지처럼 매끈한 아랫 배, 쭉 뻗은 두 다리 등이 모두 아름다웠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 를 공포감을 자아냈던 것이다. 그 앞에서 한 명의 흑의소녀가 묵묵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일이란 시체나 다름없는 열두 명 소녀들의 몸에 향유(香 由)를 바르는 것이었다. 향유는 뽀얀 젖빛을 띠고 있었으며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방향을 실내에 전하고 있었다. 소녀들의 얼굴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얇은 면사가 덮혀 있어 용 모를 알아볼 길이 없었다. 몸매나 피부로 미루어 전부가 절세의 미녀임에는 틀림없을 것 같았지만. 쓱쓱......! 흑의소녀는 쉬지 않고 손을 움직여 나녀들의 몸 구석구석에 젖빛 향유를 발랐다. 향유는 발라지는 즉시 그녀들의 피부 속으로 침투 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한참 후. 흑의소녀는 마지막, 즉 입구에서 첫번째 나녀 앞으로 다가왔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추했다. 무엇때문인지 형편없이 망가져 있어 인간으로서 과연 이토록 끔찍한 얼굴을 소 유할 수 있을까고 의심이 갈 정도였다. 코와 입은 아예 존재를 잃었으며 눈은 각각 좌우로 문드러진 듯 괴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안면도 심하게 얽어 누구라도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볼만한 용기는 나지 않을 듯했다. 이 추한 용모를 가진 흑의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오늘이야말로 이 천천이 매아가씨의 은혜를 갚을 날이다." 그녀는 감회에 찬 음성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천천.


그녀가 하는 일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먼저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었다. 비록 얼굴은 추 하기 짝이 없었지만 몸매만은 지극히 아름다웠다. 가히 빙기옥골(氷肌玉骨)이랄 수 있는 맑은 피부에 은은한 수줍음 이 묻어 있는 그녀의 육신은 일견하기에도 아직 순결을 지키고 있 는 처녀지신임을 짐작케 했다. 그리 크지는 않았으나 소담스럽게 부풀어 오른 젖가슴이 그랬고, 꼭 오무려진 허벅지와 위로 바짝 당겨진 탄력있는 둔부도 그 점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천천은 자신의 옷을 한 나녀에게 입혔다. 이어 그녀는 아무런 갈 등도 없이 나녀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거세게 문질렀다. 파스슷―! 나녀의 얼굴은 금세 묵사발(?)이 되었다. 이르자면 천천과 형태가 같은 추한 모습으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천천은 나녀의 얼굴에서 벗겨낸 면사를 스스로 덮어썼다. 그리고 는 향유를 자신의 몸에 골고루 바르는 것이 아마도 십이공령활시 녀 중 한 명으로 위장을 하려는 것 같았다. 그녀의 변장술은 성공적이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완벽에 가까운 공령활시녀가 되어 흑침상에 드러누웠다. 툭! 까닭 모를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귓볼로 떨어졌다. 그그긍―! 돌이 마찰되는 음향과 함께 한쪽 석벽이 열리더니 두 가닥의 흑영 이 안으로 들어왔다. "엇! 천천이 죽었다." 개중 한 명이 벽에 기대서 있는 여인을 보고는 경악성을 발했다. 다른 한 명이 안되었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 그동안 계속 독을 만지더니 결국 죽고 말았군. 그나마 다 행이야. 일을 다 마쳐놓고 죽었으니."


그들은 바닥에 뒹굴고 있는 렇게 추측을 했던 것이다.

빈 향유병을 발견하고는 나름대로 그

"빨리 가서 보고하세." "그래야지." 두 사람은 급히 밖으로 사라졌다. 그들에게 천천은 이처럼 죽은 것으로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엄연 히 살아 숨쉬고 있었고, 모종의 목적을 품은 채 멀쩡하게 공령활 시녀들과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녀가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또 그녀와 매강월의 관계가 어 떤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의 행동이야말로 사해서생 독강비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리라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물고 물리는 무 서운 놀음 속에서 그녀는 희생을 자처하고 있었다. y 와중에도 시간은 거침없이 흐르고 있었다. 혈붕성 내에서 어떤 류 의 동상이몽이 연출되던.......

범호. 그도 인간이다. 나름대로 사고력이 있는지라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음성만 전해오는 자에 대해 줄곧 생각했다. '누굴까? 그는.' 하지만 이면에서는 그 인물에 대해 항거할 수 없는 위압감을 느꼈 다. 그의 음성만 들으면 오금이 저리고 웬지는 모르나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느낌까지 드니 어쩌겠는가? 범호가 알 리 없었다. 자신이 처음부터 이심통령제혼술(以心通靈 制魂術)이라는 술법에 깊이 걸려들어 있다는 것을. 그것은 은자십천 중 일 인인 마마대불사의 마마천심장경(魔魔千心 藏經)에 기재된 사공(邪功)이었다. 시전자의 뜻대로 인간의 마음


을 조종할 수 있는 것으로 실전된 암흑마전의 섭령유혼마법(攝靈 幽魂魔法)과 쌍벽을 이루는 술법이었다. 범호의 어설픈 고심은 오래 가지도 못했다. 한 가닥 싸늘하면서도 아름다운 음성이 그를 불렀던 것이다. "범호! 매화원으로 오너라." "네... 넷!" 그는 순간적으로 넋이 나간 듯했다가 자신도 모르게 앉았던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이유는 음성의 주인이 다름 아닌 유월설 매강월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 인물의 말대로 일이 이루어지려는 건가?' 그는 반신반의하면서도 허겁지겁 매화원으로 달려갔다.

범호를 보자마자 매강월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방옥과 화아가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 네가 좀 준비해 주어야겠다."

드러누웠다. 내 목욕물은

이의가 있을 까닭이 없었다. "네, 네! 아가씨." 범호는 대답과 함께 재빨리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심리는 정확히 둘로 나뉘어 양극을 치닫고 있었다. 마음 한 귀퉁이에 도사린 불안때문에 숨이 막히는가 하면 일편으로는 달착 지근한 기대감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으므로.

- 매강월은 너를 좋아하고 있다.

신비한 음성의 주인이 넌즈시 던져 주었던 그 말은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설마하는 의구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지 만 그로서는 밑져야 본전인 것이다. 워낙 어마어마한 일이고 보니 성사가 되지 않은들 이전과 같은 체 념 상태로 돌아가면 그뿐이라고 자위하는 그였다. 반대로 달성이


된다면야 필생의 꿈을 이루는 것이 되겠지만. '아가씨.......' 심중으로 혼자 뇌까리는 범호의 몸이 눈에 띌 정도로 떨렸다. 그 러는 가운데 목욕통 속의 물이 끓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그는 품 속에서 신비인물로부터 받은 옥병을 꺼냈다. 그리고는 마 개를 열어 내용물을 물 속에 쏟아 부었다. 주르륵! 옥병 속의 액체는 뜨거운 물과 섞이며 말할 수 없이 그윽한 향기 를 냈다. 그 향기가 코에 와 닿자 그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온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욕실은 매강월의 침실 안쪽에 있었다. 범호는 목욕물을 욕실로 옮겨 주고 난 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 매고 서 있었다. 매강월은 싸늘한 눈길로 그를 한 번 힐끗 보더니 아무말도 없이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난감해 있는 그의 귀로 물소리가 들려왔다. 첨벙! 쏴아아아― 범호는 일시지간 머리가 어지러워져 무엇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들여다보지 않아도 연상이 되는 풍경 때문이었다. 매강월은 별호대로 유월의 눈처럼 차갑기 그지 없는 여인이다. 그 러나 그녀의 몸도 그렇게 차가울지는 모를 노릇이다. 그녀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상태로 몸에 물을 끼얹고 있 다. 물줄기는 그녀의 학같이 우아한 목에 부어질 것이며, 우뚝 솟 은 가슴 사이로 폭포수인 양 급격히 쏟아져 내릴 것이다. 아마도 그 아랫부분의 평평하고 부드러운 평원을 지나면 물은 곧 장 어둡고 은밀한 계곡으로 모이리라. 그리하여 다시 옥주와도 같 은 다리를 지나....... '으으......!'


범호는 죽어라 이를 악물었다. 그러지 않았다간 이빨 사이로 신음 성이 새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이때였다. "아아!" 불현듯 욕실로부터 생각지도 않은 음향이 들려왔다. '혹시?' 범호는 막연했던 기대가 현실화 되는 듯하자 짜릿한 전류가 전신 을 관통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쏴아아아―! "으으음......." 물소리에 섞여 전해져 오는 한 열기가 묻어 나왔다.

야릇한 소리에서는 점점 더 끈적끈적

"끄윽!" 범호의 목울대에서 은연중 괴상한 소리가 울려나왔다. 배운 것이 없고 단순한 만큼 본능적인 욕구에 충실한 이 사내는 마침내 욕구 를 자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범호, 범호... 게 있느냐?" 욕실에서 숨이 차 헐떡이는 음성이 흘러나온 것은 그때였다. 급기 야 매강월이 그를 찾았던 것이다. "넷!" 범호는 하마터면 욕실로 뛰어들 뻔 했으나 그때까지도 떨쳐내지 못한 일말의 두려움 때문에 간신히 참고 서 있었다. "들어와라. 등을... 밀어다오." '아!' 매강월의 놀라운 요구는 마음 밑바닥에 앙금처럼 남아있던 꺼리낌 들을 거짓말처럼 일소시켜 버렸다. 아니, 어쩌면 그가 절실하게 기다린 것이 이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범호는 무엇에 홀린 듯 욕실 문을 밀고 들어갔다. 자욱한 수증기 속에서 황홀한 여인의 나신이 눈에 들어왔다. 매강 월은 등을 보인 채 욕통에 기대 서 있었다. 아무 저항없이 노출된 그녀의 지체는 가히 뇌쇄적인 염기를 발하고 있었다.

"이리로 가까이......." 그는 넋을 잃은 채 멍하니 매강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물방울 이 송글송글 맺혀 있는 그녀의 몸은 전체가 유지같이 기름졌으며 우유빛으로 뽀얗게 빛나고 있었다. 범호의 떨리는 손이 매강월의 등에 가 닿았다. "흑!" 그녀는 감전이라도 된 듯 일신을 바르르 떨었다. 범호도 떨기는 마찬가지였으되 서서히 매강월의 등을 밀기 시작했 다. 그 동작은 등을 민다기보다는 쓰다듬는다는 표현이 옳았다. 그의 손은 그렇게 매끄럽고 부드러운 등판을 훑어내려와 잘록한 허리까지 문질러가고 있었다. "하아아......." 매강월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뜨거운 입김을 토해냈다. 이때에 범호의 손은 놀랍도록 풍만한 그녀의 둔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희고 둥그런 둔부를 집어삼킬 듯 노려보는 그의 입에서는 풀무질에 버금가는 숨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흐으... 흐으으......!" 그러기를 한참여. 용기를 짜낸 듯 그의 손이 매강월의 둔부로부터 미끄러져 내려가 더니 허벅지를 지나 깊은 계곡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아흑!" 더 참을 수 없었던 듯 매강월은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발하며 휘 청 하고 몸을 앞으로 굽혔다. 그 허용의 의미를 알아차린 범호의 눈이 화로처럼 시뻘겋게 달구어졌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과감하게 매강월의 허리를 움켜잡은 그는 자신의 몸을 뒤에서 그대로 밀어붙였다. "허억!" 그 순간, 매강월의 눈이 소리없이 화등잔만하게 부릅떠졌다. 하지만 범호도 거기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미 여인을 수없이 다루어 본 그는 그때부터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쾌락을 위해 격렬한 율동을 보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두 남녀의 입에서 똑같은 기성이 흘러나왔다. 비로소 그들은 신분 의 차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껍질에서 일탈하여 가장 인간적이고 원 초적인 지점에서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욕실 바닥으로 쓰러져 나뒹 굴게 되었다. 그들의 뇌리에서 주인과 마부라는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직 한 덩어리로 얽혀 희열을 추구하는 것만이 전부가 되어 버렸으니....... 유월설 매강월. 그녀는 범호의 우람한 신체에 깔려 급속도로 열락의 나락으로 떨 어지고 있었다. 과연 범호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사내를 받아들이는 행위는 평소 그녀가 상상했던 선보다 훨씬 더 짜릿하 고 경이로운 체험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이후로도 그녀의 지체는 범호의 우악스런 힘에 의해 무수히 자세 가 바뀌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는 자지러질 듯한 교성을 발 했다. 대개 약간의 고통이 수반되기도 했지만 그 고통은 금세 걷 잡을 수 없는 쾌감으로 변해 그녀를 사로잡곤 했다. 범호는 미친 듯이 매강월을 탐하고 있었다. 어떤 여인을 안아도 최대치의 쾌락을 누려온 그였으나 이토록 열정적이고 강한 힘을 발휘한 것은 그로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상대가 매강월이어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 다. 욕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수증기 속에는 지독한 미약(媚藥)의


성분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두 남녀는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아아아......!" "허헉!" 두 남녀의 호흡성은 높아만 갔다. 그들은 가진 바 모든 힘을 쏟아 부으며 현재의 행위를 즐겼고, 그로 인한 희열과 쾌감을 서로에게 숨기려 들지 않았다. 범호는 끝까지 훌륭한 종마(種馬)였다. 미약의 효력까지 덧입혀지 자 그의 육체는 도시 지칠 줄을 모르는 듯 치달렸다. 덕분에 넓은 등판이 여인의 손톱에 의해 숱하게 할퀴어지고 있었 으나 그는 이 점은 채 의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슷! 욕실 창문에 흐릿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두 남녀의 격 전(?) 현장을 지켜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으음, 이로써 천하에 위협이 될 뻔했던 매강월의 공령활시대법은 와해되었다. 모두가 범호, 그대의 공로다.' 몽영(夢影)은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는 천무영이었다. 사실상 그가 혈붕성에 잠입한 것은 우연을 빌어서였다. 하지만 그 가 한 일들은 일개인은 물론 장차 무림의 안녕을 위해서도 누군가 꼭 했어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다만 마무리 단계를 남겨 놓고 있었는데, 거기에 대해서도 그에게 는 진즉부터 복안이 서 있었다. 천무영은 늘 잊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한때 밑바닥까지 이른 패 자(敗者)였으며, 패자들에 의해 키워졌다는 것을. 때문에 불패천의 여망을 달성하고자 하되 그 기저에는 그가 신념 처럼 지켜온 철학들이 깔려 있었다. 어떤 의미로든 패자를 부활 (復活)시키려 하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범호, 그대는 이제 새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림자가 그렇게 읊조리고 있었다.

범호는 멍청히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지난 며칠간을 통해 자신이 범호라는 사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틀 전 유월설 매강월과의 정사가 있은 뒤로는 더 그랬다. 그는 예전처럼 아무 때고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인생이 더 이상 즐거운 것으로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다. 범호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정사 직후에 매강월은 그를 쳐죽 이려고 몇 번이나 손을 들었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그를 죽이 지는 못했는데, 대신 서럽게 울며 그를 내쫓았다. 그 이후로 범호는 성내에서 매강월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사해 서생 독강비도 때를 같이 하여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그들이 어디 로 잠적했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어쨌든 그 일로 인해 범호의 인생은 색채를 달리 했다. 무엇보다 앞으로 일개 마부로서 살아갈 자신이 없어졌다. '매(梅)아가씨.......' 그는 하릴없이 계속 그 이름만을 되뇌이고 있었다. 침상도 아니고 욕실 바닥에서 벌였던 그 질탕한 정사는 작금에도 그로 하여금 숨이 넘어가게 한다. 타인의 관점에서야 어찌 해석되 든 그에게는 평생을 두고 가장 황홀한 기억이었기에. 그 일은 새삼 떠올려 보면 꿈인 듯도 싶지만 엄연한 현실이었고, 당시 그의 품에 뱀처럼 감겨 들었던 뜨거운 여체는 틀림없이 그가 동경해마지 않은 여인의 그것이었다. 또한 생애 최고의 쾌감을 선사해 준 매강월은 그에게 인생의 새로 운 일면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수천 번도 더 그 의 이름을 부르며 몸부림쳤지 않았는가 말이다.


자신이 그러했듯 상대도 자신을 원했으며,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 서로 맺어졌으니 이는 의당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호는 너무도 슬프고 불행했다. 그는 매강월 에게서 돈을 주고 여자를 샀을 때에는 느끼지 못한 감정을 느꼈던 바, 이처럼 넋이 나가버린 것이었다. 이른바 사랑을 알게 된 범호의 마음 속에는 매강월의 존재가 영원 히 지울 수 없는 영상이 되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매강월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밤이 되어도 범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매강월을 향한 그리움으로 목이 탈 지경이니 잠이 올 리가 없었 다. 잠시라도 그녀의 곁에 갈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내놓지 싶 은 것이 솔직한 그의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의 진심은 한낱 헛된 열망에 불과했고, 이 점을 스스로 도 아는 그는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소리내어 앓았다. "으응......!" 그의 증세를 두고 상사병이라한들 틀리지는 않으리라. 범호는 이처럼 이불자락을 붙들고 이리저리 뒤척거리는 것 외에도 여느 때의 그답지 않게 연 이틀간을 제대로 음식조차 들지 못했 다. 허기가 배를 쥐어뜯어도 도무지 무엇도 먹히지 않는데야 도리 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종내에는 전신에서 진땀이 솟기 시작한 그의 귀로 낯설 지 않은 음성이 들려왔다. '범호, 괴로우냐?' "으어어......!" 범호는 대답을 대신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건 매강월을 사랑하게 되어서겠지?' "그... 그렇습니다요." 눈물을 뿌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음성이 물었다.


'그녀의 마음이 너처럼 순수하지 못해도 말이냐?' 범호의 안면이 뚝 굳어졌다. "무, 무슨 말씀입니까?" '그녀는 애초부터 너와는 다른 부류에 속해 있었지만 향후로도 더 나쁜 쪽으로 흘러갈 소지가 다분하다. 너에게 무수히 상처를 입히 게 될 것이란 뜻이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범호는 힘주어 부르짖으며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아가씨가 어떻게 해도 소인은 끝까지 사랑할 겁니다." '범호, 그게 정말이냐?' 그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아가씨와 함께 살 수만 있다면... 저는 무슨 짓이고 사양치 않고 할 겁니다." 예의 신비한 음성의 주인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탄식과 함께 다시 말을 해왔다. '음, 그녀를 생각하는 네 마음이 정녕 깊구나. 내가 너를 도와 주 겠다.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말이다.'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물론이다.' "나으리!" 범호는 벌떡 일어나더니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는 상대가 누군 지는 아직도 알지 못했으나 최소한 자신의 꿈을 이룩하게 해줄 구 세주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매강월을 얻고 싶다면 우선 그녀만큼 강해져야 한다.' 음성은 차분하면서도 엄숙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내 너에게 개세의 절학을 전수해 주겠다. 이것은 일명 뇌문비학 (雷門秘學)이라 부르는 것으로 천지간에 가장 양강한 무학이다. 네 체질에 아주 적합하지.' "이렇게 감사할 데가......!" 범호는 주체할 수 없는 감동으로 인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것을 연성하면 머지않아 너는 강호상에서도 절정의 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고... 고맙습니다요, 나으리!" '자, 이 책자를 줄테니 외운 후에는 태워 버려라.' 툭! 과연 한 권의 책자가 범호의 앞에 떨어졌다.

<뇌문비서(雷門秘書)>

책의 표지에는 그런 제목이 씌여 있었다. 뇌문비서라면 은자십천 중 천뇌마군의 독문비급이다. 그밖에도 범 호에게는 또 하나의 진귀한 선물이 주어졌다. 그것은 하나의 옥병 으로 음성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은 소림의 대환단에 버금가는 천양신단(天陽 神丹)이다. 세 알을 백 일 간격으로 하나씩 복용해라. 그리고 열 심히 벽력뇌강심법을 운공하면 네 노력 여하에 따라 삼갑자의 내 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으어어... 이 은혜... 백골난망입니다." 비록 우직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범호가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이 순간 희대의 기연을 만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기연으로 인해 대변신을 하게 되리라는 것도. '범호, 언제고 내 너를 다시 찾을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에는 완


성된 너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범호가 급히 물었다. "자, 잠깐! 주... 주공(主公)의 존함은......?" 음성의 주인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주공은 무슨, 그저 무영(無影)이라고만 기억하면 된 다. 그럼 나는 이만 가겠다.' "주, 주공......!" 상대가 사양해도 범호의 호칭은 바뀌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튕기 듯 벌떡 일어나 사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의 주변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조용하기만 했다. 창밖 은 여전히 어두웠고 아직도 깊은 밤이었다. 범호는 이 밤에 자신이 한바탕 꿈을 꾼 것이 아닌가고 생각했다. 꿈치고는 너무 엄청나서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그는 수중의 뇌문비서와 천양신단이 든 옥병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이르자면 절세의 복연을 얻은 그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우우... 주공, 존함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범호는 울부짖듯 읊조리며 창문을 향해 큰절을 했다. 그것은 범호 라는, 일개 마부에 불과했던 평범한 사내가 대변신을 예고하는 경 건한 의식이었다.

■ 무영탑 2 권 제 13 장 귀향(歸鄕)

춘면불각효(春眼不覺曉), 처처문제조(處處聞啼鳥),


야래풍우성(夜來風雨聲), 화락지다소(花落知多少).

봄은 졸린 것, 날 밝은 줄을 몰랐네. 어디에서 새 소리만 지저귀는가? 밤새 비가 오더니, 꽃이 얼마나 졌을까?

과목이 울창한 숲 속으로부터 낭랑한 노랫소리가 들렸다. 이와 함 께 한 청년이 눈을 부비며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일신에 백삼을 걸쳤고 손에는 낡은 섭선을 들었다. 이 이상의 특징은 없었다. 청년은 여하한 개성도 찾아볼 수 없는 아주 평이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천무영이었다. 그는 야숙(野宿)을 한 듯 얼굴이 다소 부석부석해져 있었다. 복우산의 혈붕성을 떠나 북행(北行)중인 그는 개봉성으로 목적지 를 잡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 딱히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 었다. 다만 옛 추억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그의 발길을 무작정 이끌어 왔던 것이다. 그는 과거에 연연해 하는 인간형은 아니었다. 그러나 개봉성에서 만큼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바, 은연중 그것에의 치유를 스 스로에게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확인을 통해 또다른 상처를 입을 수도 있었지만. "후후... 무영탑은 건재할까? 그리고 철(鐵)노인은......?" 천무영은 아직 철자구 노인이 죽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는 짐짓 유유자적 걷기 시작했다. 간밤에는 큰비가 한바탕 쏟아 져 커다란 고목 속에서 잠을 잤었다.


어쨌거나 그 덕분에 산기슭은 지금까지도 습기를 머금고 있었으며 한낱 잡초에도 이슬방울이 영롱하게 맺혀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천천히 걷는 듯했지만 그는 행운유수 같은 신법으 로 일 다경도 못되어 산을 두 개나 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신발에는 물기 한 점 묻어 있지 않았다. 천무영은 묘한 기분이 되어 있었다. 개봉부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마음은 기이할 정도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꼭 지난 날에 대한 아픔과 회한만이 전부가 아니다. 일종의 자기 확인에 대한 기대에서 오는 설레임도 빼놓을 수는 없었다. 모름지기 과거가 없는 현재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천무영은 시 련과 고통의 극복으로 점철되었으되 그 자신이 느끼기에도 불투명 한 것들 투성이인 과거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스스슥! 그의 움직임이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복잡한 제반 의 감정들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한 데서 비롯된 현상이었으리라. 그는 더 이상 도피자가 될 수 없었으므로.

산기슭에는 몇 채의 초옥(草屋)이 그림같이 서 있었다. 조촐한 띠 집이 서로 처마를 맞댄 채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 정오가 가까울 무렵이다. 산중의 대기는 투명하게 깨어나 있었다. 그런데 무슨 연유에서인 지 초옥의 주변만은 살벌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 앞에는 십여 명의 거지들이 얼쩡거리고 있었다. 외벽에 기대앉아 이를 잡고 있는 중년의 거지가 있는가 하면, 싸 리문 좌우에서 낮잠을 즐기는 자들, 혹 몇몇이 모여 가벼운 농담 을 지껄이는 등 하고 있는 모양새도 가지가지였다. 초옥으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서는 다른 몇 명의 거지들이 모닥 불에 솥을 걸고 무엇인가를 계속 끓이고 있기도 했다. 필경 단체 (?)로 먹을 식사가 준비되고 있는 것이리라. 일견하기에 그것은 매우 평화로워 보이는 정경이었다.


그러나 거지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 들의 미간에 알게 모르게 서려 있는 긴장감은 초옥을 둘러싸고 있 는 팽팽한 살기와 무관하지 않을 듯했다. 삐익! 한곳으로부터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울려왔다. 그 소리에 거지들은 순간적으로 눈빛을 무섭게 번쩍였으나 어찌된 셈인지 나름대로 하던 일을 이어갈 따름이었다.

스스스....... 커다란 송목(松木) 위에서 하나의 백삼인영이 어른거렸다. 그 위 치로 이르자면 초옥들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다. 천무영이었다. 그는 그저 지나다 우연히 초옥을 발견하게 되었고,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껴 관망중이었다. '복장으로 미루어 저들은 개방의 제자들이다. 그것도 칠결(七結) 이상의 인물들인데 무슨 일로 여기에 와 있는 것일까?' 워낙 인연을 깊이 맺고 있는지라 개방의 일이라면 절대 무심할 수 없는 입장인 그였다. 삐익! 삑! 호각소리가 또 들려왔다. '흠! 이번에는 십 장 밖이다.' 소리는 방금 전보다 가까워져 있었다. 하지만 거지들은 여전히 의 식은 하면서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호탕한 웃음으로 그들을 비웃는 자가 있었다. "으핫핫핫......! 최근 들어 개방이 대단한 성세를 누린다더니 명


불허전이로군. 이토록 제자들의 담이 커진 걸 보면." 웃음소리의 뒤를 잇는 것은 예리한 파공성이었다. 슈욱! 슉―! 그에 따라 네마디의 비명이 꼬리를 물듯 터졌다. "크헉! 컥―!" 와당탕! 끓는 솥단지가 뒤엎어지고 요리를 담당하던 네 명의 중년거지들이 모두 튕겨지듯 나가떨어졌던 것이다. 십여 명의 인영이 옷깃을 펄럭이며 그 자리에 날아내렸다. 휙! 휘휙―! 앞장 선 자는 일신에 금의를 입은 뚱뚱한 중년인이었다. 얼굴이 둥글넙적한 그자는 살이 과다하게 찐 탓에 눈이 파묻혀 거 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았다. 그러나 그 눈에서 쏟아져 나오 는 안광만은 비수와도 같이 매섭고 날카로웠다. 그자의 뒤에는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삼십 세 가량의 청년이 서 있었다. 냉담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표정한 위인이다. 그는 흑색의 장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체구에 비해 너무 커 옷을 입은 게 아니라 옷 속에 파묻혀 있는 것쯤으로 보였다. 그들 두 사람의 뒤로는 여덟 명의 은의검수(銀衣劍手)들이 만면에 살기를 드리운 채 험악한 기세로 서 있었다. 싸리문가에서 서성이던 두 명의 중년거지가 금의인을 향해 히죽 웃더니 허리를 굽혔다. "위명이 쟁쟁하신 천금성의 전단주(全壇主)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어인 행차시오?" 금의인이 실처럼 죽 그어진 눈을 치뜨며 마주 웃었다. "후후! 중주쌍개(中州雙 ), 내 앞에서 허튼 수작 부리지 마라. 다 알고 왔으니까."


"엉? 허튼 수작이라니, 거 무슨 섭한 말씀을......!" "닥쳐라! 그대들은 알량한 위세를 믿고 옹호하고 있다."

본성에 대적하려 죄인을

중주쌍개라 불리운 두 거지 중 대개(大 )가 펄쩍 뛰었다. "아이쿠! 당치도 않소이다. 죄인을 옹호하다뇨?" 대개는 큰 몸집에 익살스러운 인상이었고, 그에 반해 소개(小 ) 는 체구가 작고 생김새도 거지답지 않게 곱상했다. 전단주가 여러 채의 초옥들 중 중심부에 위치한 쏘아보며 말했다.

한 채의 초옥을

"저 안에 필시 일진풍(一進風)이라는 애송이 거지가 숨어 있을진 저, 끝까지 아니라고 발뺌할테냐?" 직선적인 그의 추궁은 협박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개는 물론 연약해 보이는 소개조차 딴청이었다. "헤헤... 전단주께서는 천금성의 추명단주(追命壇主)가 되시더니 신수가 더 훤해지셨습니다그려." "동감이야, 하긴 추풍사신(追風死神) 전황(全黃) 어르신의 존명이 야 일로 하늘을 찌르지 않던가?" 두 사람의 너스레에 전황은 실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긴 말은 필요없다. 죄인이나 내놓아라." 대개가 그 말을 받았다. "허! 일진풍이라면 본방의 방주께서 근자에 맞아들이신 제자인데, 어째서 천금성의 죄인인지 모르겠구려." 그는 짐짓 눈을 껌벅이며 소개에게 물었다. "자네는 그 이유를 아나?" "글쎄, 그걸 낸들 알겠는가?" 소개는 어깨를 으쓱했고, 전황이 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육천풍(陸天風)!" "네." 부름에 그의 뒤에 서 있던 흑의청년이 무심히 대답했다. "문을 열라." 슈슈슈슉―! 육천풍이라는 청년의 몸에서 일순 수백 종의 암기가 폭사되었다. 그가 언제, 어떻게 몸을 움직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익! 과연 암기의 명인인 천수독객(千手毒客) 육천풍답군." "이크크......!" 암기세례를 받은 중주쌍개는 호들갑을 떨며 펄쩍펄쩍 뛰었다. 하 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현상일 뿐, 그들의 수선스러운 동작에 는 각기 절묘한 비기들이 숨어 있었다. 따땅... 땅......! 수백 종의 암기는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모두 퉁겨져 나가고 말았 다. 그 광경을 본 육천풍은 냉소했다. "흥! 나 육천풍에게 실수란 없다." 그의 소매가 재차 허공을 젓는 순간이다. 슈슈슈슉―! 이른바 만천화우(滿天化雨), 비가 쏟아져 내리듯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은 암기들이 중주쌍개를 휩쓸어갔다. "흑! 허억!" 중주쌍개는 질겁을 하며 급히 바닥을 뒹굴었다. 팍! 파팍......! 덕분에 암기는 모조리 땅바닥에 박힌 바 되었는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가 않았다. 놀랍게도 암기들은 도로 튀어나와 종전보다 훨


씬 빠른 속도로 그들에게 쏘아져 갔다. ③

"헉!" 중주쌍개는 급기야 타구봉을 꺼내 휘두르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검은 빛이 흐르는 묵철의 타구봉이었다. 타타타― 타앙―! 암기의 우박도 타구봉에는 못 견딘 듯 전부 퉁겨져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속셈인지 육천풍은 입가에 조소를 매달고 있었다. 그가 한 차례 탕 하고 발을 굴렀다. 파팟! "컥! 크헉!" 중주쌍개의 입에서 기어이 비명이 터져나왔다. 뜻하지 않게 땅 속 에서 은성표(銀星 )가 솟구치더니 그들의 몸에 들어가 박혔던 것 이다. 미리 땅 속에 묻어두기라도 한 듯. 쿵! 털썩....... 두 사람의 저항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쓰러진 그들의 곁에서 육천 풍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손을 툭툭 털고 있었다. 전황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 가볍게 한마디를 던졌다. "들어가자."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기중이던 여덟 명의 은의검수들이 초옥 안으로 번개처럼 쏘아져 들어갔다. 휘리리릭―! 중주쌍개의 저지가 실패로 돌아가자 초옥 안으로 뛰어들었던 칠, 팔 명의 거지들은 미처 전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그들 은의검수의 무자비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은의검수들의 공세는 신속하면서도 악랄무비했다. 그들은 각기 한


사람씩의 거지를 맡아 무섭게 검을 휘둘렀다. 츄아아악―! "큭! 어억―!" 한편. 송목 위에서 상황을 엿보던 천무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완전히 무뢰배들이로군!' 그는 자신이 이 사태에 개입하기를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렇지 않았으면 중주쌍개는 물론 단 일 초에 어이없이 쓰러져버린 거지들이 정말로 목숨을 잃고 말았을 터이므로. 짐작컨대 은의검수들은 개방의 무공에 관해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 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콰쾅! 전황이 초옥에 딸린 방문을 부수며 안으로 들어갔다. 걸리적거리 는 것이 없어져서인지 사뭇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를 응시하는 천무영의 눈에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어디 그대가 계속 그렇게 느긋할 수 있는지 보겠다!' 스슷! 그의 신형이 초옥의 지붕 사이로 유령처럼 파고들었다.

초옥의 방 안이다. 한 명의 소년이 피투성이가 된 채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아! 저 아이는.......' 천무영은 소년을 보자 크게 놀랐다. 익히 아는 얼굴이었던 것이 다. 그의 뇌리에는 불현듯 삼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금노적이 떠난 직후였던가? 천무영에게 그의 서신을 전해주며 대 가를 요구하던 맹랑한 어린 소년이 있었다.


천무영은 그때 소년에게 금전을 지불하는 대신 목미인상(木美人 像) 한 개를 깎아준 기억이 있었다. '소풍(蘇馮)... 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는 소년의 이름을 어렴풋이 떠올리고 있었다. 죽은 듯 축 늘어진 채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소풍의 입술은 한 일 자로 꽉 다물려 있었다. 과거에 비해 제법 성숙해 지기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강인한 기개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그것은 그의 왼팔이 어깨서부터 뭉턱 잘려져 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느덧 방에 이른 전황과 을 짓고 서 있었다.

육천풍이 소풍의 면전에서 음산한 표정

"일진풍, 더 이상 너를 지켜줄 사람은 없다. 모조리 죽었으니까. 좋게 말할 때 본성으로 가자." 그들의 위협에 소풍은 눈도 떠보지 않고 말했다. "당신들이 아무리 핍박을 해도 내 뜻에는 변함이 없소. 그건 설사 나를 데려간다 해도 마찬가지일 게요." 소년의 입가에는 오히려 엷은 비웃음까지 어렸다. 그것을 느낀 전 황의 반응도 못지 않았다. "건방진! 너는 노부가 왜 추풍사신이라는 별호를 가지게 되었는지 아느냐? 그것은 목표물이 정해지면 지옥까지라도 쫓아가 뜻을 관 철시키기 때문이다." 소풍은 그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을 어찌 해 석했는지 전황은 어투를 바꾸어 회유하기 시작했다. "너는 생각을 잘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고작 개방 따위에 의탁하느 니 본성에 충성을 바치면 많은 것을 얻게 될테니까." "크크크......!" 소풍은 괴이하게 웃더니 덧붙였다. "날 어린애로 취급하는 모양인데, 잘 들어두시오. 나도 뜻을 한


번 정하면 영원불변이외다." 전황의 가느다란 눈이 위로 홱 치켜 올라갔다. "못된 것! 본성은 무림화평의 지주다. 어째서 너는 그것을 알면서 도 반항을 하려 드느냐?" "듣기 싫소. 난 그저 자고 음대로 하시오."

싶을 뿐이니 데려가든 말든 당신들 마

소풍은 그 말을 끝으로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음, 말로 해서는 안될 아이로군." 전황이 턱을 까딱하자 두 명의 은의검수가 앞으로 나서서 소풍의 몸을 나꿔채갔다. 하지만 그 동작은 중도에서 멈추었다.

펑! "흑! 으헉!" 그들 두 사람은 똑같이 무형의 반탄력으로 인해 뒤로 벌렁 나가떨 어지고 말았다. 극심한 충격을 입은 듯 그들의 입과 코로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누, 누구냐?" 전황이 대로하여 외쳤다. 대답은 어디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소풍이 처음으로 눈을 뜨며 그 를 힐끔 보더니 개방의 인물답게 빈정거렸다. "히힛! 본방의 조사(祖師) 귀신님이 이 제자를 지켜주시나 보군. 이제 당신들은 죽었다." "놈!" 전황의 살찐 안면이 제멋대로 씰룩였다.


반면, 천정에 숨어 있던 천무영은 감탄해 마지 않았다. '대단하다, 소풍. 그 지경이 되고서도 절정의 고수인 상대를 놀릴 수 있을 정도로 여유를 보이는구나.' 그 직후, 전황의 노성이 들려왔다. "애송이 놈이 감히 본좌를 능멸하다니, 뭣들 하느냐? 어서 저 어 린 놈을 끌어내라!" 쐐액―! 다른 두 명의 검수가 쾌검을 전개해왔다. 전자의 실패가 있었는지 라 그들은 소풍의 몸 일부를 또 끊어내려는 모양이었다. 소풍도 이쯤 되자 각오한 듯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동시에 그는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갖다 붙였다. "조사 귀신님, 부디 이자들의 손목이나 댕강......!"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으악! 억!" 쨍강! 투툭......! 처절한 비명과 함께 허공으로 선혈이 뿜어졌다. 그것은 두 명의 은의검수가 양 손목이 잘리움으로써 빚어진 현상이었다. 그들은 검을 떨구고는 그대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이... 이럴 수가!" "으으......!" 전황과 육천풍, 그리고 나머지 은의검수들은 믿어지지 않는 상황 에 모두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소풍도 어지간히 놀란 듯했으나 날랜 입을 가만히 두지는 않았다. "크크... 그것 보시오, 본방의 조사님은 무심치 않으시오. 이번에 는 당신들에게 훈계를 내리기 위해 따귀를 치실 게요." 그 말은 지체없이 실현되었다. 철썩! 짜아악―!


전황을 위시한 그 일행들은 정말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차례로 뺨을 얻어맞고 있었다. "허억! 컥―!" "어찌 이런 일이......!" 졸지에 봉변을 당한 그들은 뺨을 움켜쥔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것도 어찌나 세차게 맞았는지 한결같이 코피가 터진 것은 물론 눈알이 튀어나오지 않았나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들은 몸을 휘청거리며 만면에 공포감을 나타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당금 무림에서 내로라 하는 고수인 전황도 예외 가 아니었다. 귀신의 존재를 믿고, 안 믿고의 차원을 떠나 그는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경외감이 들 지경이었다. "으으......!" 분노와 두려움이 섞인 그의 양하게 내뱉았다.

신음성을 들으며 소풍이 자못 의기양

"조사님, 이들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리 못했나 봅니다. 청컨대 금 번에는 이자들의 불알을 뽑아......!" 콰당탕! 휘휙―! 끝까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전황 일행은 꼬리에 불이 붙은 듯 눈깜짝할 사이에 전부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그들이 발휘한 눈부신 경공 덕에 부서진 문짝만이 형편없이 짓밟혀 납작해져 있을 따름이었다. 그제서야 소풍은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나타나신 것일까?"

수 있지? 진짜로 조사님의 귀신이라도

아무리 기개가 높아도 소년은 소년인지라 사태 파악은 느렸다. 읊 조리는 그의 음성에도 은연중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허공에서 한 가닥 괴이한 음성이 울려와 그 말을 받았다.


"맞다, 소풍. 노부는 개신( 神)이니라." "맙소사!" 소풍은 전신에 피칠을 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데구르르 침상에서 굴러떨어지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조사시여! 제자 소풍은 본방의 제삼십칠대 제자로서......." 울먹이는 소년을 괴음성이 부드럽게 달랬다. "그래, 내 너를 보니 안심이 된다. 본방의 유구한 전통이 와해되 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흑......!" 소풍은 기어이 오열을 터뜨렸다. 한쪽 팔을 잃고도 굳건히 지켜오 던 기세가 처음으로 뒤바뀐 것이었다. "쯧!" 음성의 주인은 혀를 차더니 한층 더 차분하게 물어왔다. "진정해라. 내 기왕 천계(天界)에서 내려왔으니 이번 일의 경위나 알아야겠구나. 천금성이 너를 쫓은 까닭은 무엇이냐?" 소풍은 계속 울먹이며 대답했다. "제자는... 오래 전부터 목미인상 하나를 가지고 있사온데, 저들 은 그것을 깎아준 인물이 누구냐고 추궁을 했더랬습니다." 괴음성이 약간의 떨림을 보였다. "목미인상......?" "그... 그렇습니다." 소풍은 더듬거리면서도 있는 사실을 그대로 고했다. 그는 삼 년 전부터 천무영이 준 목미인상을 지니고 있다가 얼마 전에야 한 조각수집가에게 은자 열 냥에 팔아 넘겼다. 그 뒤로는 소풍도 그 일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고, 방주인 동심천유개의 눈에 띄어 개방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목미인상은 천금성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때를 기해 소풍은 추적자들을 달고 다녀야 했는데 이유는 앞서 도 말했듯 조각을 한 인물, 즉 천무영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 어이없는 사태에 휘말려 소풍은 어린 나이에 왼팔을 잃는 불상 사를 당했으며, 작금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천무영은 내심 크나큰 의문에 봉착했다. '그 목미인상은 내가 가지고 있던 백옥미인상을 본떠서 조각한 것 이거늘, 천금성이 왜 그 주인을 찾아 나섰을까?' 그는 곧 짚히는 바가 있었다. '혹시 내 어머님이 천금성과 관련이 있으셨던 건 아닌지?' 하지만 심증이 확증이 될 수는 없었다. 툭! 소풍의 앞에 한 권의 책자가 떨어졌다. "받아라, 그것은 개방의 실전비기를 기록한 비급이니라. 열심히 연마하여 개방을 빛내되 다시는 패하지 않도록 해라." "네! 조사님." 소풍은 하나밖에 없는 팔로 비급을 소중히 껴안더니 코가 땅에 닿 도록 절을 했다. 그를 남겨두고 천무영은 한 줄기 연기가 되어 천 정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스스스....... 그 뒤로도 한참을 엎드려 있던 소풍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는 힘겹게 신색을 추스르면서도 눈을 빛냈다. "정녕 멋진 일이다. 조사께서 현신하셨으니 이제 누구도 감히 개 방을 무시하지 못하리라."


일진풍(一進風) 소풍. 그로 말하자면 개방에 떠오른 신성(新星)이었다. 동심천유개의 마 지막 제자로서 그의 자질은 사형제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소풍은 자못 의미심장한 표정이 되어 히죽 웃었다. "제자는 조사님의 정체도 압니다. 실전비급을 전해주고 불패를 당 부하시는 것으로 미루어 틀림없이 십절존사(十絶尊師)이실테니. 크크... 속히 사부께 이 사실을 알려야지." 소풍은 일신의 고통도 잊은 듯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급한 걸음으로 휑하게 뚫린 방문을 나섰다. 보다 더 놀라운 광경이 그 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초옥의 마당에 죽은 듯 널브러져 있던 거지들이 몸을 일으키고 있 었다. 그들은 저마다 피에 젖은 채 수치감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 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살아 있다는 점이었다. "아아! 이런 일도......." 재삼 눈물을 글썽이는 그에게 거지들이 말했다. "쯧! 자상(刺傷)을 완전히 모면할 수는 없었지만 누군가 적도들의 검을 비껴나가게 하여 치명상은 입지 않았다네." 역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중주쌍개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사형들께서도 살아 계셨군요!" 소풍이 반색을 하자 그들은 동시에 답했다. "클클... 그렇게 되었네, 소사제. 은성표가 사혈로 날아드는 찰 나, 솔잎이 날아와 공격을 한 치 정도 벗어나게 했지." "아! 조사님(?)의 은덕은 정말......!" "조사어르신? 그럼 우리를 구하고 타혈수법으로 깨어나게 하신 그 분이......?" 눈이 휘둥그레지는 거지들을 향해 소풍은 씨익 웃었다. "다들 의식을 잃고 계셔서 모르는 모양인데 그동안에 아주 재미있


는 일이 벌어졌었지요." 그는 몸을 날리며 말을 이었다. "자! 어서 방주께로 가 봐야지요. 가면서 얘기하겠어요." 그를 따라 신형을 뽑아올리는 거지들은 의혹을 금치 못했다. 그러 나 그 와중에도 그들의 꾀죄죄한 얼굴에는 일말의 희망이 깃들고 있었다. ⑥

무영탑은 오늘도 변함없이 칙칙한 검은 빛을 띤 채 홀로 우뚝 서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연들이 묻혀 있건만....... 탑신에는 무수한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대개가 사랑의 증표로 남아있는 이름들이다. 그것이 세월의 흐름 속에도 지워지지 않고 그리움의 정화인 양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개중에는 이런 이름도 있었다. 천무영(天無影). 천리단옥(千里壇玉). 푸른 빛이 감도는 한 쌍의 눈이 그 유치한 필체의 이름들을 바라 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천무영이었다. '흔들리지 않으리라 다짐했거늘......!' 무영탑과 마주한 그의 가슴은 어쩔 수 없이 암울한 상념에 젖어들 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불러보았다. "단옥......." 그것은 아무리 외쳐 부른들 되돌아오지 않을 이름이었다. 그는 잠시 목구멍에서 뭔가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어 망 연히 서 있었다. 그를 미칠 듯한 심정으로 몰고가는 그 뜨거운 느 낌의 정체는 역시 그리움이었다. 다만 자신을 살리고자 바닥을 알몸으로 기던 천리단옥의 모습을 떠올리자 그의 가슴은 불꽃으로 지지는 듯 아파왔다.


'살아 있기라도 했으면......!' 천무영은 그것이 얼마나 헛된 바램인지를 알면서도 그렇게 읊조리 고 있었다. 사실 그로서는 천리단옥이 설사 그 자리에서 북궁현리 에게 직접적으로 능욕을 당했다 해도 그녀를 탓할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죽음으로써 천무영의 곁을 영원히 떠나버렸고, 그 로 인해 그의 눈언저리가 붉게 충혈되고 있었다. '단옥, 너는 고결하다. 어떤 이유로 자진을 했건.' 그의 어깨가 일순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묻어 두었던 분노가 내부에서 거세게 타오른 것도 그때였다. 악다문 그의 이빨 사이로 짧은 부르짖음이 새어나왔다. "북궁현리!" 팍! 가벼운 음향과 함께 탑신의 한귀퉁이가 움푹 꺼져 들어갔다. 천무 영이 부지중 공력을 주입해 일 장을 내뻗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로 인해 단단하기 그지없는 석탑에 선명한 장인이 새겨 졌다. 그 깊이는 무려 다섯 치에 이르고 있었다. "빚은 갚겠다, 언제고!" 천무영의 눈은 어느덧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 는 어딘가로 섬전처럼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그 직후, 그 자리에는 한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일신에 칠흑 같은 흑삼을 걸친 청년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전혀 표정이란 것이 없어 보였다. 냉막하달지, 무정(無情)하달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무감한 표정의 소유자였다. 용모는 평범했다. 이렇다할 개성이라곤 없어 하루에도 수없이 스 쳐지날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누굴까? 저자는."


흑삼청년은 천무영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음성마저도 억양이 없어 무심을 내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청년의 얼굴에는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던 그의 표정이 몹시도 흔들리는가 싶더니 그 현상은 가느다란 신음성으로 이어졌다. "으음!" 흑삼청년의 시선은 탑신에 찍힌 장인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눈에 경악과 회의를 담은 채 나직이 읊조렸다. "이렇듯 높은 공력을 지닌 자가 있다니......." 그의 미간에는 언뜻 두려움이 스치기도 했다. 철자구가 경영하던 병기점(兵器店) 앞이다. 그곳에서 천무영은 또 다시 멍해지고 말았다. 병기점은 이미 헐려서 자취가 없어져 버린 지 오래였고, 거기에는 대신 엉뚱하게도 잡화점이 들어서 있었다. 그는 잡화점의 주인으로부터 철자구가 한때 미쳤었으며, 그 바람 에 자신이 만든 검을 들고 뛰쳐나가 사람들을 마구 베었다는 것, 그러다 애꾸눈의 사내에게 죽음을 당하고 검을 빼앗겼다는 사실 등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천무영은 대번에 애꾸눈의 사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그는 분명 무흔(無痕)일 것이다.' 그는 가슴 한곳에서 써늘한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일이 그리 되었다면 철노인이 만든 검은 신검이 아닐 것이다. 예 전에도 얼핏 느꼈었지만 그 검은 필경 귀검(鬼劍)이나 광검(狂劍) 이리라. 그리고 무흔은......!' 불안한 그의 뇌리에 그려지는 광경이 있었다. 그것은 통한을 되씹 으며 미친 듯이 괴검을 휘두르는 무흔의 모습이었다. '내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한 번 그를 찾아가 봐야겠다. 천일야 화원에 가면 만날 수 있을지? 금모란이 아직도 있다면 그도 떠나 지는 않았을텐데.'


천무영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스읏....... 천일야화원의 담을 넘어 소리없이 빠져나오는 인영이 있었다. 그 는 몹시도 허탈한 심정으로 그곳을 나와야만 했다. '없다. 그녀도, 무흔도!' 세월의 흐름은 천무영의 주위에 아무도 남겨놓지 않았다. 그가 금모란이 기거하던 곳에서 본 것은 단지 이름 모를 한 기녀 가 사내와 땀을 뻘뻘 흘리며 정사를 나누는 장면일 따름이었다. 그 어느 곳에서도 금모란과 무흔은 찾아볼 수 없었다. 천무영은 완벽하게 혼자였다. 이로써 최소한 개봉부에서의 과거는 지워져 버렸다. 아름다운 추억도, 쓰디 쓴 절망도 가슴 속에서만 존재할 뿐 주체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밖은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다. 짙은 어둠이 텅 빈 그의 내면에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스슷! 밤하늘을 가르면서도 천무영은 마음 둘 곳이 없어진 자신의 처지 가 너무도 처량하게 느껴졌다. 뼈저린 고독감과 함께 그의 심경에 찾아든 것은 일말의 회의였다. '나는... 오지 말아야 할 곳을 왔는가?' 그는 내심 후회를 하면서도 하나의 거대한 장원으로 날아가고 있 었다. 은연중 발길이 그곳으로 향했던 것이다. 스스스....... 그의 모습이 달무리처럼 뿌얘지더니 곧장 장원의 담장을 타넘고 있었다. 이어 수십 채의 전각 위를 스쳐지나며 그는 다시금 가슴 이 뭉클해져야만 했다. '후후... 이곳에서도 단옥의 흔적은 찾을 수 없겠지?' 그가 옛사랑의 상처를 껴안은

채 잠입한 그곳은 천리단옥이 태어


나고 자랐던 천문세가(天文勢家)였다.

별원(別院). 천문세가의 후원에 호젓하게 자리잡은 이 별원은 아담하면서도 정 취를 물씬 자아내고 있었다. 막 고개를 내민 달빛이 내리 비춰서 인지 전체적으로 그윽한 분위기가 감돌기도 했다. 중앙부에 인공의 호수가 있고 그 한가운데에는 월영정(月影亭)이 그림처럼 잠겨 있었다. 둥그런 월교(月橋)로 이어지는 정자 곁으 로는 비단 잉어들이 조용히 유영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호수의 주변에는 도화림이 형성되어 있었으니, 외 부와 따로 독립된 이 별원은 그야말로 도원경이었다. 월영정 안이다. 언제부터인가 하나의 검은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그자는 그저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을 듯 평범한 용모의 청년으로 무표정하기까지 해 호감을 갖기는 힘든 인상이었다. 그는 말없이 호면(湖面)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무영탑에 나타났던 흑삼청년의 것이었다. 그의 눈빛이 문득 몽롱하게 변했다. "어디에 있을까? 그는." 청년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뜻밖에도 매우 애잔한 기운을 품 고 있었다. 무정해 보이는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벌써 삼 년이 지났건만 생사(生死)조차 알 수 없으니......." 길게 울리는 음성의 여운 뒤로 경미한 파공성이 일었다. 슷!


그 소리를 감지한 흑삼청년은 흠칫 놀랐다. 그의 눈에 별원 안으 로 스며드는 한 가닥 인영이 들어왔다. '이 밤중에 누가?' 그의 신형이 불시의 침입자를 향해 빛살처럼 쏘아져 갔다. 내당(內堂). 본래 빈청이었으나 용도를 변경시킨 듯했다. 그 안에서는 향연이 가늘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앞쪽으로 제단 (祭壇)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위패도 놓여 있었다.

<천리단옥위패지신(千里壇玉位牌之身)>

위패에는 그렇게 씌여 있었다. 스슷! 천정에서 하나의 흐릿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백삼을 걸친 청년으로 위패를 보자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단옥......!" 떨리는 음성을 쏟아내는 그는 천무영이었다. 그의 눈에는 그 자신 도 어쩌지 못하는 듯 뿌연 물안개가 서리고 있었다. "정말로 그대는 죽었군. 후후후......." 이는 몰랐던 사실이 아니건만 가슴이 메어지는 듯한 슬픔은 그의 영혼을 사정없이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제단 앞에 가 무릎을 꿇었다. "그대......." 천무영은 손을 뻗어 위패를 잡았다. 차가왔다. 그리고 그 생경한 감촉은 그를 감상으로부터 깨어나 현 실로 되돌아오게 했다. 그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네가 죽었듯 너와 함께 했던 나도 죽었다. 나는 예전의 내


가 아니다. 참담한 좌절의 끝에서 불패자(不敗者)가 되어야 하는 거대한 운명의 굴레를 지고 새로 태어났지." 그는 위패에서 손을 떼었다. "과거는 지나갔어, 단옥. 많은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 들이 어서 이곳을 떠나라고 종용하고 있지." 천무영은 빙글 몸을 돌리다 말고 흠칫 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 의 앞에는 한 명의 흑삼청년이 목석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자의 냉막한 인상을 대하자 천무영은 퍼뜩 정신이 드는 한편, 자신을 꾸짖기에 이르렀다. '이 무슨 못난 꼴인가? 감상에 이끌려 어리석게도 지각조차 둔해 져 있었다니.' 그는 입술 끝을 일그러뜨리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누구요? 친구는." 천무영의 물음에 흑삼청년이 억양없이 되물어 왔다. "그러는 친구는 누구요?" "내가 먼저 물었소이다." "객(客)이 무례하군. 허락도 없이 찾아들었으면 그쪽에서 먼저 신 분을 밝히는 것이 도리일텐데?" 천무영은 상대의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반문했다. "그럼 당신이 이곳의 주인이라도 된단 말이오?" 흑삼청년이 흰이를 약간 드러내며 웃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이곳에 있겠소?" 천무영의 얼굴에는 은은한 노기가 드리워졌다.


"당치도 않은! 내 알기로 그대는 이곳의 주인이 아니오." 흑삼청년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호오, 친구는 장담할 수 있소?" "그렇소. 천문세가의 소가주(少家主)라면 의당......." "후후... 저 위패의 주인을 말하는 것이오?" 흑삼청년은 무심히 물었으되, 천무영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답했다. "맞소. 그녀는......." 그 말을 흑삼청년이 잘랐다. "그녀는 나의 의매(義妹)요." "흐음?" 천무영의 놀란 얼굴을 보며 흑삼청년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못 믿겠다는 게요?" "못 믿겠다고는 하지 않았소. 의외였을 뿐." "당신은 내 의매에 대해 잘 아오?" 표정에 비해 역시 별다른 억양이 느껴지지 않는 음성이었다. 천무 영은 낮게 탄식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답고 고귀한 여인이었소." 흑삼청년의 무감하던 눈이 순간적으로 반짝 빛났다. "그렇다면......?" "후후... 솔직히 말하리다. 그녀와 나는 그저 아는 정도가 아니라 서로 깊이 사랑하던 사이였소." 천무영의 말은 흑삼청년을 꽤 놀라게 한 것 같았다. 약간 왜소해 보이는 그의 체구가 일시지간 가느다란 떨림을 보였다.


"혹시... 친구의 성함은... 천무영이 아니오?" "나를 아시오?" "그렇소. 당신에 관해서라면... 내 의매에게서 몇 마디 들은 바가 있었소만... 당신의 모습은......!" 안면에 그늘이 깃든 천무영이 애써 담담히 대꾸했다. "삼 년의 세월은 짧지 않은 것이었소. 그동안 몇 가지 재주를 터 득하여 본 모습을 감추고 있을 따름이외다." "으음! 미처 몰랐소이다." 침음성을 흘리는 흑삼청년에게 그는 물었다. "이제는 귀하가 밝힐 차례요. 나는 그녀에게 한 번도 의오라버니 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소." 천무영이 의혹을 내비치자 흑삼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을 게요. 나는 오래 전부터 천문세가에 몸담고 있기 는 했지만 그녀가 죽고 나서야 양부님의 결정에 따라 천리가(千里 家)의 양자가 되었소. 성도 그때에 바뀌었소이다. 천리단검(千里 壇劍)이라 불러주시오." "천리단검......." 천무영은 낮게 그 이름을 되뇌이더니 불쑥 물었다. "그녀의 무덤은 어디에 있소?" 천리단검은 난감한 듯 쓴 입맛을 다셨다. "없소." "없다니?" "의매의 유언에 따라 그리 된 것이오. 자신의 시신을 화장(火葬) 하여 황하(黃河)에 뿌려달라고 했었소." 천무영은 일순 전신에 힘이란 힘은 모조리 빠져버리는 듯한 느낌 이 들었다. 그는 탄식하듯 혼잣말로 읊조렸다.


"철저하군.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일이라곤 없으니." 천리단검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렇지가 않소." '왜......?' 천무영이 눈으로 묻자 그는 종전과는 비교가 될 만큼 확고한 음성 으로 답했다. "내 옛날에 들은 기억이 나오. 의매는 당신이 꿈에라도 천하제일 인(天下第一人)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소." 천무영은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것은 천리단검의 말이 가슴을 너무도 아프게 쑤셔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극단의 모욕에 대한 자위수단만은 아니었을 터인 즉, 친구는 필히 그 말을 새겨들어야 할 게요." "우우......." 천무영은 낮게 울리는 천리단검의 없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음성에서 그 무엇에도 비할 수

동시에 그의 뇌리에 확연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옥문관 넘어 대과벽(大戈壁)이었다. 곳곳에 웅대한 모래벽을 이룬 대사막, 이글이글 타오르던 태양, 불의 혓바닥인 양 전신을 휘감아 오던 뜨거운 열기....... 그 가운데서 그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야 했다. 버려진 땅, 패배자들만이 모여있는 혹서(酷暑)의 오지에서 그는 불패의 초강자가 되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쌓았던 것이다. 당시 그가 들었던 말은 이런 것들 뿐이었다.

- 태양을 베어라, 대과벽을 점령해야 하느니!


- 네 일신에 관한 것들은 전부 잊어라. 너의 어깨에는 은자(隱者) 들의 여망을 달성해야 하는 막중한 의무가 지워져 있다.

천무영은 온통 모래뿐인 대과벽에서 시시때때로 엄습해오는 자기 연민과도 처절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

- 왜 꼭 나여야 했는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버린 고통들로 인해 그 질문은 끊임없이 뇌 리를 맴돌았고, 그때마다 그는 무너지려는 자신을 붙들어 세우고 자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곤 했다. 결국 그는 스스로 강자가 됨으로써 고통에서 해방되었으며 자신을 포함한 은자들의 숙원을 걸머지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는 또 다른 명제가 놓여 있었다. 아니, 다 른 것 같으나 실은 그의 운명과 일맥상통하는. 하여 그 명제에 대해 그는 새롭게 정의했다. '단옥, 그간의 고통은 결과적으로 너와도 무관하지 않구나. 내 너 를 위해서라도 기필코 천하제일인에 도전해 보겠다.' 천무영은 씨익 웃더니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물었다. "이 시대의 최강자가 누구요?" 천리단검이 그 말의 의미를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해하기 어려웠는지 그의 등을 향해

"무슨 뜻이오? 그건." "말 그대로요. 천리형은 정말로 이 시대의 최강자가 누구라고 생 각하시오?" 거듭되는 물음에 천리단검은 눈썹을 모았다. "글쎄, 그것이......." 그가 대답을 망설이자 천무영이 입을 열었다.


"혹시 천금성주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소?" "맞소. 천금성주 외에는 달리 거론할 사람이 없소이다." 천무영은 돌아보지도 않고 간단히 말했다. "내가 그를 꺾겠소." "귀하......!" 천리단검은 몹시도 당황한 짐작했는지 낮게 웃었다.

얼굴이 되었다. 천무영은 그의 표정을

"후후후... 지금은 무모하게 들리겠지만 두고 보시오. 내 반드시 그를 꺾어 단옥의 혼백을 위로하겠소." "그... 그런 만용은......." 천무영은 담담한 음성으로 상대의 말을 가로챘다. "만용이 아니외다. 사실 내 목표는 그 이상이니까." "그럼?" 천리단검의 무심한 얼굴이 급기야 하얗게 질렸다. "천리형은 무림고래(武林古來)의 최강자를 기억하시오?" "맙소사! 천부......?" "그렇소, 나의 최후 대적자는 천부외다." 천리단검은 할 말을 잃은 듯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전해오는 느낌으로 그의 반응을 감지한 천무영이 부언했다. "이건 단지 천리형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대서가 아니라 내 운명이 기도 하오. 처절한 패배로 인해 일생을 좌절과 기다림으로 보낸 분들이 계시오. 그분들의 염원이 천부를 꺾는 것이었소. 나는 그 분들에 의해 재탄생되어 무림에 나왔소이다." 천리단검의 눈이 한껏 크게 치떠졌다. "그... 그렇다면......!"


천무영은 여전히 담담하게 그 말을 받았다. "이제야 내 뜻이 천리형에게 전달된 것 같구려. 어쨌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소. 내게 또 하나의 명제를 안겨주어서." "으음!" 천리단검은 신음을 발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도 뜻밖 의 말을 들어서인지 그는 반쯤 넋이 나간 듯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심 이렇게 부르짖었다. '커 있다!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천무영. 그는 빈청을 나서서 인공호수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서는 조금치의 거리낌도 느껴지지 않아 자신의 집 안을 거 닐고 있는 듯 익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처음 와보지만 이곳의 지리를 꽤 잘 알고 있소. 혹시 그 까 닭을 아시오?" 천리단검은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천무영은 애 초부터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듯 상대의 반응은 개의치 않고 혼 자서 말을 계속했다. "그것은 단옥으로부터 이곳에 관한 얘기를 백 번도 넘게 들었기 때문이오. 그녀와 나는 무척 많은 얘기를 나누었소." 천무영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언젠가 그녀는 나를 초대하겠다고도 했었소. 후후후......." "......!" "지금은 다 소용이 없는 얘기가 되어 버렸소만 나는 아직도 그녀 가 여기서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오. 그것도 나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호흡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오이다." 천리단검의 일신이 문득 눈에 띌 정도로 크게 떨림을 보였다. 그 러나 꾹 다물린 그의 입은 좀체로 열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앞뒤로 나란히 월교를 건너고 있었다. 천무영이 달빛에 비치는 호수를 내려다보며 불쑥 말했다. "이상하오.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천리형에게는 낯설다는 생 각이 들지 않소. 흡사 오랜 친구를 대하는 듯하외다." 그는 빙글 돌아서더니 날카로운 눈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그렇지만 공사(公私)는 분명한 법, 잊지 마시오. 어쩌면 당신과 나는 차후로 적이 될지도 모르겠소이다."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천리단검이 그제서야 입을 뗐다. "맞는 말이오. 나는 천문세가의 소가주요. 천금성 오대가신(五大 家臣) 중 하나에 속해있단 얘기외다." 천무영은 입술꼬리를 슬쩍 말아올렸다. "되었소, 뜻이 금방 통해서." "여부가 있겠소?" "후후... 그건 내가 단옥을 사랑한 것과도 무관한 일이오. 어차피 나는 그녀와 가문을 별개로 취급해 왔으니까." "그 점은 진즉부터 의매에게 들어 알고 있소이다." 천무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덧붙여 말했다. "내 언제고 천문세가에 두 번은 양보하겠소. 이는 나로 인해 천금 성의 셋째 제자를 사위로 맞이하지 못한 것과 단옥이 목숨을 잃게 된데 대해 미안한 마음때문이오." 천리단검은 이의없이 수긍했다.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소." "그럼 또 봅시다." 천무영은 말을 마치자 수직으로 신형을 뽑아올렸다. 슈욱! 그는 달빛 한가운데로 까만

점이 되어 스며드는 듯하더니 그나마


눈 깜짝할 사이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천리단검은 그 광경을 바라보다 세차게 몸을 떨었다. 그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억눌렀던 격정이 표출된 것이었다. 그 상태로 한동안 천무영이 사라진 방향에 시선을 두고 있던 그는 불현듯 눈물 한 방울을 발치께로 뚝 떨구었다. 그가 무엇때문에 우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감정의 파고가 그만큼 심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 그것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천리단검은 곧 특유의 무표정으로 되 돌아갔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돌아섰다. 천문세가의 양자로 들어왔다는 청년 천리단검, 그에게는 과연 어 떤 비밀이 숨겨져 있으며 정확한 정체는 무엇인지? 밤은 바닷속으로 침몰하는 배처럼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 무영탑 2 권 제 14 장 진실(眞實)은 어디서도 통한다

북빙남화(北氷南火). 언제부터인지 남북으로 중원을 벗어난 오지(奧地)에 무학 방면에 서 상극(相極)에 해당되는 두 문파가 있다고 전해진다. 그들 전설적인 양대 문파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북해의 관음빙모곡(觀音氷母谷)과 남해의 화룡도(火龍島). 이 두 문파를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물과 불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양립(兩立)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관음빙모곡과 화룡도는 천 년간을 불공대천의 원수 사이였다. 중원을 가운데 두고 극과 극인 위치에 있어 서로 의식할 필요도 없어 보이건만 그들은 그처럼 세불양립을 주장했고, 그 이유로는 무학의 길이 다르다는 점을 들 수 있었다. 이른바 극음빙한지기(極陰氷寒之氣)와

극양열화지기(極陽熱火之


氣), 이는 피차에 치명적이리만큼 상극이었으므로. 때문에 관음빙모곡과 화룡도의 제자들은 대대로 숙적이었다. 그들 은 상대를 경원하기도 했지만 일편으론 몹시 두려워하여 각기 중 원 땅을 경계로 삼은 채 한 발도 나서지 않았다.

휘이이잉―! 바람이 마구 불어댄다. 살을 에일 듯한 한풍(寒風)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빙천설지(氷天雪地),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막막한 지평선과 눈, 그리고 얼음뿐이었다. 이곳을 일컬어 사람들은 통상 북해(北海)라고 부른다. 문자 그대 로 눈과 얼음의 바다였기에. 황량한 북해의 얼음벌판에 한 사람이 홀연히 나타났다. 약관을 다소 벗어난 듯 보이는 그는 일신에 얇은 백삼 한 벌만을 입고 있었다. 뼈를 저미는 이 혹한에 달랑 홑겹으로 된 백삼이라 니, 보는 이가 차라리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백삼청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기만 했다. 그는 추위 따위는 아랑곳 없다는 듯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여유있게 지나쳐가고 있었다. 휘이잉― 윙―! 설지를 할퀴는 한풍에는 얼음가루가 섞여 있어 자욱한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쯤이면 추위도 보통 기세가 아니련만 청년의 손에는 뜻밖에도 한 자루의 섭선이 쥐어져 있었다. 누구라도 혹한의 빙천설지에서 섭선을 들고 있는 그를 보았다면 필시 정신이 온전한가고 의심부터 할 것이다. 백삼청년이 걸음을 멈추며 중얼거렸다. "내 이제야 북해의 광활함을 실감하겠구나. 아무리 달려도 도무지 끝이란 것이 나오지 않으니." 그는 천무영이었다. "찰극관음파미륵대산(察克觀音破彌勒大山)은 아직도 멀었을까? 한


참 오기는 왔는데." 천무영은 아득하게 펼쳐진 눈과 얼음의 바다를 바라보며 사뭇 막 막한 심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스스로 말한 바대로 그는 관음빙모 곡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예로부터 관음빙모곡에는 남자가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지 만 그렇다고 얕보아서는 안된다. 여인들로만 이루어졌다는 그 문 파에는 무서운 전설이 깃들어 있었다.

- 관음빙모곡은 금남(禁男)의 세계다. 그곳에서는 십 년에 한 번 씩 자질이 우수한 청년들을 납치해 갔는데, 빙모곡의 여인들과 관 계를 갖게 한 뒤 모조리 죽였다. 그렇게 하여 태어난 아이도 사내 아이면 빙담(氷潭)에 던져버리고 여아만을 거둔다.

그것은 실로 냉혹비정한 전통이었다. 그러한 곳을 천무영이 찾아 가는 데는 달리 까닭이 있었다. '현음(玄陰) 노선배는 내게 부탁하셨다. 자신의 절기로 빙모곡을 꺾어 달라고. 빙모곡의 지보인 만년지정금란화(萬年地精金蘭花)의 빙정(氷精)을 취하라고도 하셨지.' 그는 눈을 들어 드넓은 빙원을 둘러보았다.

만년지정금란화. 천지간에서 극음(極陰)의 꽃으로 북해의 빙모담(氷母潭)에서만 자 생하며, 만 년이 지나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를 빙정(氷精)이라 하는데 만년지정금란화는 그 자체가 극 음무학을 익히는 사람들에게는 무상의 지보였다.

천무영은 계속 인내를 가지고 설지를 걸었다. 그의 뇌리에는 은자 십천 중 한 명인 현음곤월신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분은 사도의 인물이었지만 실은 정사를 가리지 않았다고 해야 맞다. 평생을 통해 고집스러울 정도로 극음무학만을 익혀 오셨지. 그때문에 최강자가 되시기도 했고.' 천무영은 관음빙모곡의 고수들과 겨뤄보지 못해 크게 유감인 외곬


수의 인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후후... 그분께선 극음지체로 빙정을 복용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셨다.'

- 무영, 네가 만일 빙모곡을 꺾어 준다면 현음문(玄陰門)으로서는 무한한 영광이다. 그런즉 내 빙정을 양보하지. 장담한다만 그것을 복용하면 너는 최소한 극음무학에서는 고금제일인이 될 것이다. 그럼 행운을 빌겠다. 크크크.......

천무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염려마십시오, 현음노선배. 당신은 평생토록 오직 한 번, 천부에 패했을 뿐입니다. 더 이상 패배의 기록은 없을 것입니다. 상대가 빙모곡이든, 그 외의 다른 어느 곳이든.' 마음을 굳게 다지며 다시 발길을 옮겼으되, 이따금씩 눈발 섞인 한풍이 모질게 휘몰아쳐 그의 방향감각을 위협했다. 화경에 이른 내공 덕에 칼날처럼 매서운 한파는 충분히 견딜 수 있었으나 그런 류의 위협에는 그도 흔들렸다. 우선은 시야가 자꾸 가로막히니 답답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전진이 다소 더디어졌을 때였다. 두두두두......! 느닷없이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천무영도 그 소리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적없는 이 설원에 갑자기 웬......?' 그는 내심 의아했으나 그대로 말없이 걸었다. 그 사이, 말발굽소 리는 점차 가까워지더니 그의 등뒤까지 이르고 있었다. 날카로운 교갈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뭣하는 놈이냐? 어디 얼굴이나 좀 보자."


쐐애액―! 날카로운 파공성이 일며 채찍이 날았다. 천무영은 그 기척을 알면 서도 불쾌감이 들어 고개조차 돌려보지 않았다. 파앗! 채찍은 급기야 그의 목을 휘감았고, 여인의 놀란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 직후였다. "앗!" 투두둑......! 놀랍게도 가죽으로 만들어진 끊겨져 나갔던 것이다.

말채찍이 썩은 새끼줄처럼 토막토막

"호호호... 제법 하는 놈이었군. 얘들아! 이 작자도 잡아가자. 필 경 좋은 재목일 것이다." 여인의 요란한 웃음소리와 더불어 마차가 멈추어섰다. 덜컹! 그 뒤로 옷자락 스치는 음향도 들려왔다. 휙! 휘휙―! 몇몇의 인영들이 천무영의 주위로 분분히 날아내리고 있었다. 그 인영들은 네 명으로 모두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은 기세도 당당했 거니와 삽시에 그를 네 방위에서 포위해 버렸다. 천무영은 네 여인을 차례로 힐끗 둘러보았다. 뜻밖에도 그녀들은 하나같이 앳된 소녀들이었다. 기껏해야 십오, 륙 세 남짓해 보였 으며 저마다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연한 것은 그녀들의 차림새였다. 그녀들은 팔다리를 다 드러낸 채 겨우 가슴과 엉덩이 부분만을 흰 가죽으로 가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차림으로 어찌 뼈를 저미는 혹한을 견딜 수 있는지가 의심스러웠다. 천무영은 짚히는 바가 있어 중얼거렸다.


'이 여인들은 틀림없이 빙모곡 출신일 것이다. 선천적인 체질과 극음무공을 익힌 탓에 추위를 타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비로소 빙글 돌아섰다. 그러자 전면에 두 대의 대형마차가 멈추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선두에서 삼십 세 가량 된 한 여인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 는 터질 듯한 몸매를 착 달라붙는 가죽옷으로 감싸고 있었는데 손 에는 여러 조각으로 끊어진 채찍이 들려 있었다. 마차는 한 대당 다섯 명씩의 여인들이 호위를 하고 있었다. 그것 은 일반적인 개념의 마차가 아니었다. 죄인을 호송하듯 굵고 단단 한 철책(鐵柵)이 쳐져 있었던 것이다. 철책 안에는 십여 명의 청년들이 갇혀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멀 쩡한 허우대에 얼굴도 미끈하게 생긴 위인들이었다. 짐승처럼 웅 크리고 있는 그들의 눈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천무영은 청년들의 그런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음, 소문은 사실이었군. 저들은 생산을 위해 십 년에 한 번씩 납 치되어 간다는 도구들이겠지. 빙모곡의 여인들로 하여금 아이를 잉태하게 만드는.' 여기까지 생각한 천무영은 재삼 설원을 둘러보았다. 그 어디에도 그가 찾는 산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그는 계획을 수 정했는지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때마침 아슬아슬한 옷차림을 한 네 명의 소녀들이 그를 향해 다가 섰다. 그녀들은 제각기 한마디씩 했다. "쳇! 생긴 건 너무 평범하군." "그래도 누가 아니? 그 방면에서는 끝내줄지." "호호호... 그 말은 맞아. 그림이 좋다고 꼭 건 아니더라구."

제 구실을 다 하는

그녀들을 향해 채찍을 들고 있던 여인이 명을 내렸다. "얘들아, 그만 떠들고 속히 그자를 처리해라. 다른 자들과 마찬가 지로 다치지 않게 사로잡아야 한다."


"네!" "호호호호......." 네 명의 소녀들은 대답과 함께 깔깔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분위기 에 반해 그녀들의 동작만은 눈이 부시도록 민첩했다. 쐐애액! 파파파팟―! 소녀들은 팔다리를 쾌속하게 휘두르며 동시에 공격을 퍼부어왔다. 네 개의 채찍이 영활한 뱀처럼 꿈틀거려 각각 천무영의 요혈을 노 리며 파고들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천무영도 쥐고 있던 섭선을 휘둘렀다. 팍! 파파팍! 연이은 격타음과 함께 소녀들이 휘두른 채찍은 일제히 튕겨져 나 가고 말았다. 그러나 소녀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냉소하 며 괴이한 수법으로 재차 공격을 시도했다. 윙! 위잉―! 네 개의 채찍이 풍차처럼 휘돌며 천무영을 몰아붙였다. 그 바람에 그의 수비는 금세 무력하게 와해되었다. "으음......!" 천무영은 힘에 겨웠는지 신음을 발하며 몸을 비틀거렸다. 소녀들 은 그때를 놓칠세라 더욱 무서운 기세로 덤벼 들었다. "좋다! 그 상태에서 쳐라." 우두머리 여인의 일갈이 떨어지는 찰나, 네 개의 채찍이 그물과도 같은 환영을 그리며 천무영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파파팍―! "크윽!"


두 개의 채찍은 가까스로 튕겨냈으나 다른 두 개의 채찍은 여지없 이 천무영의 다리와 목을 휘감고 있었다. 결국 그는 빙판 위에 맥 없이 푹 쓰러지고 말았다. "호호호... 한 가닥 하는 줄 알았더니 쑥맥이었군. 얘들아, 뭣들 하느냐? 어서 싣고 가자." "넷!" 득의양양한 우두머리 여인의 외침이 있은 후, 소녀들은 즉시 쓰러 진 천무영을 향해 다가들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한 소녀가 허리를 굽혀 자신을 안아드는 것을 보았다. 불룩하게 솟은 두 개의 젖가슴이 가죽옷을 경계로 얼굴을 간지럽혔고, 그로 인해 그는 좋은 구경까지 했다. 어쩌겠는가? 안보려 해도 가죽옷이 터질까 불안할 만큼 팽팽한 젖 가슴과 그 사이의 계곡까지 한눈에 들어오니 말이다. '후후... 내가 복이 많은가 보군.' 천무영은 씁쓸하게 웃으며 눈을 감아 버렸다. 그는 뭉클하고 탄력이 넘치는 소녀의 가슴에 얼굴이 파묻힌 바 되 어 마차로 옮겨졌다. 그리고는 다른 청년들과 함께 우리에 갇힌 채 설원을 달리게 되었다.

'북해에도 이런 곳이 있다니!' 주위는 온통 자욱한 수증기로 차 있었다. 이른바 천연의 온천(溫泉)이다. 지하로부터 쉴새 없이 뜨거운 물 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천무영은 그 거대한 온천욕탕 속에 들어가 있었다. 다른 십여 명 의 청년들과 함께 억지로(?) 끌려온 것이었다. 어쨌든 그는 바라던 대로 관음빙모곡에 무사히 입곡하게 되었으며 물에 몸을 푹 담근 채 주변 상황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그의 곁에 있는 십여 명의 청년들도 연신 겁먹은 눈초리로 사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혈도가 찍혔는지 손가


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 교소성과 함께 십여 명의 여인들이 나타났다. "호호호호......!" 그녀들은 무방비 상태로 끌려온 청년들을 차례로 주욱 훑어보더니 눈가에 야릇한 빛을 띠었다. "시작하자." 한 여인의 말에 따라 그녀들은 각기 한 청년에게 달려들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호호... 귀여운 사람......!" "자, 괜찮으니 놀라지 말아요."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천무영은 당황해 마지 않았다. 설마하니 여인들이 여기서부터 일을 벌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의 상대는 삼십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보기 드문 미녀였고 와닿는 손길도 부드럽기 그지 없었다. 천무영은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다. '후후... 그야말로 이율배반적인 느낌이로군. 이대로 가봐야 주어 지는 것은 죽음뿐이거늘.' 그는 시선을 움직여 다른 청년들을 보았으며, 그들의 얼굴에서도 자신이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 사이, 여인은 재빠른 솜씨로 그의 옷을 전부 벗겨냈다. "아아!" 그녀는 갑자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거기에는 언뜻 듣기에도 안 타까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것은 여인이 남자를 알고 있다는 의미다. 사내의 탄탄한 몸을 마주 대하게 되자 일종의 연상작용이 일었던 것이다. 그녀는 흥분으로 인해 가볍게 떨리는 손으로 천무영의 가슴을 더 듬어갔다. 상대가 어찌 생각하든 개의치 않는다는 듯.


여인의 그런 행동은 천무영을 더 할 수 없이 난감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녀와의 나이차를 감안하건대 그로서는 도저히 고분고 분하게 응해 주고 있을 입장이 못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꼼짝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제 와서 아무 소득도 없이 본색을 드러낼 수는 없었으므로. '쯧! 사람 바보되는 건 잠깐이군.' 천무영은 기가 막혀 혀를 차면서도 얌전히(?) 있었다. "으응......." 여인이 야릇한 신음을 발했다. 천무영의 가슴을 쓰다듬던 그녀의 손은 서서히 아랫배를 더듬어 내려가고 있었다. '점입가경이로군!' 중얼거리던 그는 일시지간 눈을 크게 휩떴다. '윽!' 우려하던 일은 마침내 벌어졌고, 그로 인해 천무영은 낯이 뜨거워 져 견딜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여인을 내치고 싶은 그였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도 그는 극도의 인내를 발휘해 얼이 빠진 사람인양 표정 관리까지도 철저히 하고 있어야만 했다. '추잡한......!' 그가 더 참지 못하고 부르짖을 때, 여인이 그의 몸에 물을 끼얹었 다. 그녀는 씻어준다는 핑계로 그의 몸 구석구석을 한곳도 빼놓지 않고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다른 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도 각기 한 명씩 맡게 된 사 내의 알몸을 신나게 주무르고 있었다. "호호호... 너희들은 운이 좋았어." "그러게 말이야. 너희들은 夜)를 보내게 되니까."

본곡의 십대빙녀(十大氷女)와 일야(一


"그녀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 호호... 상상도 못할 게야. 본곡의 대표격인 미녀들이니까." 제멋대로 떠들어대던 음성은 곧 탄성으로 바뀌었다. "어머, 어머! 이것 좀 봐. 대단하지 않아?" "정말, 흐응......!" 여인들은 저마다 달뜬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비 꼬기도 했다. 그 녀들은 접촉에 의한 자극으로 사내의 몸에서 일어나게 된 현상을 그런 식으로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을 무턱대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빙모곡의 여인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일생 동안 단 한 번밖 에는 사내를 접하지 못한다. 그 한 번의 관계로 임신을 하고 아이 를 낳으면 그뿐이며, 그런 연후에는 영원히 사내라는 존재 자체를 잊고 살아야 한다. 현재 깔깔거리며 청년들을 목욕시키고 있는 미녀들은 작게는 이십 대 초반에서 많게는 삼십 세 정도까지도 있었으나 모두가 이미 한 번씩 생산(生産)의 경험이 있는 여인들이었다. 따라서 성(性)에 눈이 떠져 있는 그녀들로서는 건장한 사내의 몸 을 매만지다 보니 흥분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그녀들은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빙모곡의 지엄하고도 냉 혹한 규칙에 얽매여야만 한다. 그런즉 가능한 한 온천탕 속에서 최대치의 만족을 건지려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와중에서도 시간은 흘렀고....... 여인들은 언제 떠들었냐 싶게 조용해져 있었다. 그녀들은 입을 열 었으되,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격렬한 숨결을 내뿜으 며 청년들을 애무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들에게 허용된 쾌락은 차라리 약소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아무리 몸부림을 쳐봐야 고작 혼자 달아올 라 씨근덕거리는 데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천무영. 그는 어느덧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여인들이 제공하는 쾌락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는 듯했으나 실제로는 매우 우울한 기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를 담당한 여인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녀도 다른 여인들과 똑같이 뜨거워진 몸을 그에게 밀착시킨 채 종전보다 더욱 부지런 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여인은 천무영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는 주위 를 둘러보며 짧게 외쳤다. "그만!" 어느 틈에 열이 식었는지 의외로 싸늘하게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그녀의 눈에서도 아까와는 달리 찬빛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여타의 여인들도 다를 바 없었다. 그녀들도 한결같이 안면 을 차갑게 굳힌 채 청년들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시약실(施藥室)로 옮겨라." 여인의 명이 있자 청년들은 각기 몸을 씻겨주던 여인들의 품에 안 겨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시약실은 꽤 넓었다. 청년들은 알몸 그대로인 상태에서 돌침상에 눕혀졌다. 그런 연후, 담당하는 여인들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사십대 쯤의 노련해 보이는 여인들이 등장했던 것이다. 약실의 내부는 뭐라 형용키 어려운 기이한 약내음으로 가득 차 있 었다. 그곳에서 이른바 약물요법이 실시되었다. 청년들의 몸에는 유백색의 진득한 액체가 발라졌다. 그것은 성분 이 무엇인지 피부에 닿자마자 금세 체내로 흡수되었다.


다음으로 청년들은 여인들의 입을 다.

통해 또다른 액체를 삼켜야 했

전달방식도 그렇지만 그 액체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천무 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이것은.......' 그의 뇌리에는 은자천에서 천독모후(天毒母后)로부터 들었던 말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독(毒)이 있다. 그것을 굳이 헤아리자면 팔만사천 종이나 된다. 개중에는 살을 썩게 하는 부시독(腐屍毒) 이 있는가 하면 뼈를 녹이는 식골독(蝕骨毒), 창자를 끊는 단장독 (斷腸毒) 등이 있는데 이런 류는 일차원적인 독이지. 그밖에도 미 혼독(迷魂毒)이나 사고(思考)를 마비시키는 마뇌독(麻腦毒), 최음 제로 쓰이는 춘독(春毒) 등도 있으니까.

독문의 고수인 천독모후는 적어도 그 방면에 있어서는 중원제일인 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서 천무영은 용독(用毒), 해독(解 毒), 활독(活毒) 등의 독술을 두루 익혔다. 심지어 그는 직접 수만 종에 달하는 독을 먹어본 적도 있어 이제 는 대충 맛만 보아도 독의 종류를 식별해낼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필요에 따라 그는 체내의 독을 한곳으로 몰아넣을 수도, 쉽사리 중화시킬 수도 있었다. 그것은 독의 대가인 천독모후가 자신의 전 독술을 아낌없이 천무 영에게 전수해 준 덕이었다. '이 독은 대막(大漠)의 전갈에게서 분비되는 정액분이다. 이것을 복용하면 전신의 기력이 다 소모될 때까지 정욕을 쏟아 붓다가 나 중에는 껍데기만 남은 채 죽게 된다.' 그는 빙모곡 여인들의 악랄함에 생각이 미치자 절로 심금이 떨려 왔다. 그리하여 마음을 굳게 먹는 한편, 체내에 들어와 있는 독을 모두 몸의 한곳으로 몰아넣었다. 이어 그가 한 가지 묘안을 짜내고 있는 사이, 약물요법을 시행하 던 중년여인들이 할 일을 마친 듯 모두 밖으로 나갔다.


천무영의 신형이 번뜩 하고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동시에 그는 누워있는 청년들을 향해 십지(十指)를 튕겨냈다. 파파파팟―! 그의 지력은 즉시 청년들의 체내로 뚫고 들어갔다. 그 직후, 약실 밖으로부터 인기척이 들려왔다. 천무영은 태연하게 도로 자리에 누우며 중얼거렸다. '후후... 이들의 체내로 유입된 독을 모조리 기해혈(氣海穴)에 모 아 두었다. 독기는 서서히 분해되기 시작할테니 적어도 이들이 복 상사(腹上死)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점혈만으로 그런 안배가 이루어질 수 있다니 그것은 기이한 노릇 이었다. 어쨌든 천무영을 비롯한 열 명의 청년들은 또 한 번 여인 들에 의해 다른 방으로 옮겨가야 했다.

방 안은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신방(新房)이다. 화촉동방이라던가? 원앙촉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는 데다가 붉은 휘장이 바닥에 닿 도록 길게 늘어져 있다. 게다가 비단금침까지 깔려 있는 그 방은 여염집의 신방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천무영은 침상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초로(初老)에 접어든 듯 한 한 여인이 그를 이곳에 데려다 놓았던 것이다. 무의미한 시간이 흘러갔다. 그저 막연히 이후의 사태를 기다리고 있던 천무영은 일순 쓴 웃음을 지었다. '대체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후후... 이러다간 정말로 신 부와 하룻밤을 치르게 될지도 모르겠군.'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행동이 우습게 여겨져 그만 생각을 달리 하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때마침 침상 머리맡의 원앙촉이 일렁이더니 방 안에 누군가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아아!" 나타난 인영은 무엇때문인지 안타까운 한숨을 흘려냈다. 그 인영은 일신에 백의를 걸친 미녀였다. 나이는 십팔, 구 세 가 량 되어 보였는데 세상에 존재하는 숱한 미녀들 중에서도 특별히 돋보이는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우선 피부가 얼음처럼 맑아 크고 까만 눈동자와 선명한 대조를 이 루었다. 또한 흑진주 같은 그 눈동자가 뿜어내는 빛은 정결한 심 성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설지(雪地)랄지, 그녀에게서는 일견하기에도 티 한 점 없는 깨끗하고 순수한 분위기가 읽혀졌다. 그런데 유리꽃인 양 투명한 아름다움을 지닌 이 여인이 시름에 잠 긴 채 읊조리고 있었다. "정녕... 나도 이 운명은 피할 수 없단 말인가? 더러운 사내와 몸 을 섞고, 그로 인해 아이를 낳는......." 여인의 이름은 빙옥지(氷玉芝)였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는 절망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처음 부터 천무영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본곡의 규칙은 도무지 이해가 안돼. 제자야 외부에서 어린 계집 애를 영입시켜도 되는 일이거늘 왜 꼭 이래야 하지?" 빙옥지의 음성은 한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행동에 대해 극도의 회의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 탓인지 그녀의 옆 얼굴은 얼음을 깎아 만든 듯 비정할 정도로 차가와 보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무슨 마음을 먹었는 지 갑자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렇게 육신을 더럽힐 바에야 차라리......!" 그녀의 눈에서 살기가 일어났다. 그녀는 희디 흰 소수(素手)를 치 켜 들더니 서서히 침상으로 다가갔다.


"내 이자를 죽이고 죄를 빌리라. 빙모동에서의 폐관 십 년도 사양 치 않겠다." 우우우웅―! 그녀의 장심에 계란만한 반흔(半痕)이 생기는가 싶은 순간, 방 안 에는 얼음장 같은 냉기가 감돌았다. 팟! 소수는 그 상태로 거침없이 천무영의 가슴팍에 떨어졌다. 맞았다 간 전신이 얼음덩이가 되어 즉사하고 말리라. 그러나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후후... 첫날밤의 신랑접대 치곤 너무 후하군." 천무영이 웃으며 침상에서 상반신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 이런......!" 빙옥지는 뜻밖의 사태에 경악성을 발했다. 더우기 상대가 발가벗 고 있다 보니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민망하여 눈을 질끈 감았으되, 관음빙혼신공(觀音氷魂神 功)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상태인지라 공력을 회수하지는 못했다. 그녀의 소수는 여지없이 천무영의 가슴을 내리쳤다. 펑! 폭음이 울렸으나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소수가 상 대에게 적중되는 것은 그녀도 틀림없이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솜덩이를 친 것 같은 느낌은 어쩌란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무시무시한 신부, 후후... 어디 얼굴이나 좀 봅시다." 한 가닥 웃음소리가 그녀의 정신을 일깨웠다. "흡!" 그녀는 기겁을 했다. 그것은 완강하고 억센 사내의 팔이 자신의


몸을 당겨 안았기 때문이었다. "놓아라! 놔―!" 그녀는 가히 발악에 가깝도록 몸부림을 쳤으나 의지와는 별개로 사내의 품에 파묻히게 되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천무영은 짐짓 빙옥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갖다댔다. "호오! 기세에 비해 얼굴은 무척 아름답군. 난 또 하도 사납게 굴 기에 박박 얽고 험상궂을 줄 알았지." 그는 자세를 바꾸어 상대를 넘어뜨리고는 그 위로 올랐다. "주... 죽일 놈! 감히......!" 빙옥지는 분노하여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으나 더 말을 잇지는 못 했다. 천무영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어 버렸던 것이다. "으읍... 읍!" 그녀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도리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럴수록 그녀의 입술은 더 욱 더 깊숙이 함락되어 갈 따름이었으니까. 생경한 사내의 체취와 더불어 뭉클하고 뜨거운 그 무엇이 그녀의 입 안을 꽉 채우며 밀려들었다. 그것은 그녀로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는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빙옥지는 일시지간 천지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난생 처음 당하는 그 일은 수치감 외에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그녀는 가 히 정신을 잃을 지경에 이르러 독랄하게 부르짖었다. '너! 갈기갈기 찢어 죽일 테야. 기필코......!' 반면에 천무영은 나름대로 계산이 서 있었다. 지금 그의 뇌리를 메우고 있는 것은 마마대불사의 잠언(?)이었다.

- 사람을 굴복시키려면 몸과 마음을 모두 점령해야 한다.


마마대불사로 말하자면 천축의 마공과 아울러 좌도방문의 음양방 중비기(陰陽房中秘技)에도 달통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불법의 해석에도 남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어 색(色)은 두 말 할 것도 없고 술과 고기도 일체 가리지 않았다. 그의 머리에는 숱한 마도병책(魔道兵策)들이 담겨 있었다. 살아있 는 마병서(魔兵書)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 친구를 사귀되 마음의 삼분(三分)은 항상 감추어라. 특히 적에 대해 알지 못할 시엔 실력을 반만 내보이도록 하라. 그러나 일단 틈을 발견하게 되면 무조건 짓밟아라.

그 가운데는 여정론(女征論)도 포함되어 있었다.

- 여인은 함락되어야 다루기가 쉬워진다. 그쯤 되면 사정없이 학 대해도 무방하다. 대개의 여인들이 오히려 그것을 즐기니까. 콧대 가 높은 여인일수록 그런 경향은 더 심하다.

'후후... 그 희안한 명언들을 한 번 시험해 보리다.' 천무영은 내심 짓궂게 웃는 한편, 우선적으로 마마대불사에게서 배운 기술부터 한 가지씩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의 혀가 빙옥지의 입술을 타고 넘어가 구석구석을 뜨겁게 우롱 했는가 하면, 그의 한손은 어느새 빙옥지의 가슴으로 파고 들어가 봉긋한 융기를 틀어쥐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손은 그녀의 더듬더듬.......

하의 속으로 침범하여 허벅지 어림을

"흑......!" 긴 입맞춤이 끝나자 빙옥지는 애써 억눌렀던 오열을 터뜨렸다. 하 지만 그녀의 흐느낌에 열기가 묻어 있는 것을 느낀 천무영은 그녀


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서서히 여체를 점령해가기 시작했다. 뜨거운 호흡과 함께 가 볍게 시작한 그의 애무는 점차 농밀하고 섬세한 것으로 발전하여 빙옥지의 일신에 불꽃을 당겨놓고 있었다. "흐윽!" 급기야 빙옥지의 울음소리가 야릇한 기성으로 화했다. 그러는 사 이에 반나(半裸)가 되어버린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천무영의 목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 바람에 고무공처럼 팽팽한 그녀의 젖가슴이 천무영의 가슴팍에 눌려 모양이 이지러지고 있었다. 그녀가 두 다리를 활짝 열어 뱀 처럼 천무영을 휘감아간 것은 그때였다. 빙옥지는 그렇게 자신의 존재마저도 망각해가고 있었다. 단지 열 망을 주체하지 못해 몸부림을 치고 있을 따름이었다. 누가 가르쳐 준 바도 없건만 무공을 익히는 것 외에 육체가 원하 는 행위를 일시에 깨달아버린 그녀는 온몸이 짜릿해지는 희열과 쾌감으로 인해 정신까지 몽롱해져 있었다. "하아아아......!" 그녀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숨가쁜 신음을 뿜어냈다. 그러나 그 열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한창 달아올라 있는 그 녀의 귀로 흡사 찬물을 끼얹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후훗! 고결한 척 하더니 그대도 별 수 없군." 두마디도 필요 없었다. 빙옥지는 충격을 입고 싸늘하게 굳어지더 니 정신이 들자마자 대성통곡을 했다. "으흐흐흑―!" 황홀경에서 아득한 절망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진 그녀는 연신 눈물 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치욕감이 그녀의 가 슴에 거센 회오리를 일으켜 놓았던 것이다. 천무영은 그녀가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 여자가 울 때는 실컷 울도록 놔 두어라. 울음이 멎은 후에 부드 럽게 대해 주어라. 그러면 그녀는 너의 것이 된다.

마마대법사는 확실히 연구대상이었다. 그처럼 장대한 체구의 인물 이 어떻게 여인에 대해 그다지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지 천무영 으로서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아울러 그는 감탄을 금치 못하기도 했다. '키만 해도 구 척이 넘는 분이... 후후.......'

한참 후에야 빙옥지의 울음은 잦아 들었다. 그때까지 잠자코 기다 렸던 천무영이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쓸어 주었다. 빙옥지는 그의 손길이 와닿자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처음과는 달리 움츠러 들거나 피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천무영의 얼굴 을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당신... 뭣하는 사람이죠?" 천무영은 피식 웃었다. "그걸 몰라서 묻소? 빙모곡에 씨를 제공하는 도구." 빙옥지의 얼굴이 은연중 스르르 붉어졌다. "당신은 본곡의 행위를 비판하고 있군요." "너무 잔혹하니까. 그건 이곳의 여인들에게도 마찬가지요. 그런 식으로 아이나 생산하는 건 불행한 일이오."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이곳에 들어왔느냐고 묻는 것이오?" 빙옥지는 그의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당신은 스스로 잠입해온 것 같아요. 분명 약을 먹었을텐 데 아무렇지도 않고, 혈도도 풀려 있잖아요." "후후......." 천무영은 웃음 뒤로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이곳의 제자들은 모두 몇 명이나 되오?" 빙옥지는 의외로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삼백 명 정도예요." "흠, 그녀들은 모두 과부이거나 아니면 처녀들이겠지?" 천무영은 난감해 있는 빙옥지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당신은 참으로 아름답소." 빙옥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까만 보석과도 같은 그녀의 눈동자 가 기쁨으로 인해 반짝 빛을 발했다. "그 말, 정말인가요?" "그렇소. 그리고 이렇듯 아름다운 처녀가 독신으로 늙는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라 생각하오."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빙옥지는 고개를 젓더니 자못 심각하게 덧붙였다. "소녀만 해도 본곡의 법칙에 익숙해져 있어요. 아이를 생산해야 하는 부담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혼자 살 수......." 천무영이 그 말을 가로챘다. "아닐텐데?" "네?" "얼마 전까지는 가능했을지 몰라도 향후로는 아닐 게요. 그래, 지 금도 빙소저는 남자라면 무조건 더럽다고 느껴지오?" "그... 그건....... 몰라욧!"


빙옥지는 할 말을 잃어 어쩔 줄 몰라하다가 그만 두 손으로 얼굴 을 감싸쥐고 말았다. 그녀를 향해 천무영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바로 그것이오. 그게 인간의 본성이오. 남자건 여자건 서로를 배척하는 건 천리(天理)를 역행하는 짓이오." "으음!" 신음을 흘리는 빙옥지에게 그는 말했다. "빙소저, 나를 좀 도와주시오." "무엇을?" "내가 빙모곡의 금법(禁法)을 한 번 풀어보겠소." "네엣?" 빙옥지는 놀란 나머지 커다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에 천무영 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자신있는 어조로 부언했다. "소위 금남지처(禁男之處)인 이곳에 남자들이 들어와 함께 살 수 있도록 하겠단 말이오." "그... 그건 불가능해요." 빙옥지는 잔뜩 겁먹은 얼굴이 되어 도리질을 해댔다. "후후... 그럼 빙소저는 역시 평생을 혼자 살겠단 말이오?" 천무영은 손을 들어 빙옥지의 젖가슴을 가만히 쓸었다. 그의 손가 락이 도드라진 유실을 건드리자 빙옥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꿈 틀하며 낮은 신음을 발했다. "왜 말을 못하오?" 재차 물어도 그녀는 한숨을 내쉴 뿐 대답하지 못했다. "빙모곡의 금법은 누가 세운 것이오?" "그건... 조사이신 빙천모모(氷天母母)께서 정하셨어요." "조사의 금법을 깨는 방법은 없소?"


"한 가지가 있기는 한데......." "그게 무엇이오?" 빙옥지는 타오르는 뺨을 천무영의 가슴에 살며시 기댔다. "쉽지 않을 거예요. 그 일은 본곡의 세 관문을 꺾어야 가능하니까 요. 물론 그렇게만 되면 금법을 없앨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본곡을 뜻대로 움직일 수도 있지요." 천무영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물었다. "그 삼관(三關)에 대해 내게 말해 주겠소?" "그러죠. 첫번째는 빙모동의 만년빙혼굴(萬年氷魂窟)을 통과하는 것이에요." "두번째는?" "빙모구장로(氷母九長老)를 격파해야 해요." "그녀들의 무공은 어느 정도요?" "무척 높아요. 그분들은 내공만 해도 저마다 이 갑자가 넘어요. 본곡에서 최고령인 기인들이세요."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천무영은 빙옥지의 둔부를 어루만져 주려다 관두었다. 의도한 바 가 있으니 의당 마마대불사의 지론에 따라야겠지만 그녀를 상대로 더 이상의 희롱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곡주를 쓰러뜨리는 일이에요." "거기까지가 전부요?" 그 말에 빙옥지가 정색을 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절대 가볍게 생각해선 안돼요. 곡주님의 무학은 가히 입신지경에 이르러 있어요. 본곡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그분을 하늘처럼 여기 며 섬겨 왔지요. 소녀도 예외는 아니구요." "고맙소, 얘기해 주어서."


천무영도 남자다. 그 자신도 앞서 말한 천리에 따라 빙옥지가 가 진 친화력(親和力)에 이끌리고 있었다. 더구나 알몸이나 다름이 없는 상태로써 여체에 바짝 밀착이 되어 있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능히 빙옥지를 취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 런 충동도 없지는 않았다. 아마도 손만 뻗으면 그대로 나긋하고 부드러운 여체가 저항없이 품 안에 안겨올 것이다. 그러나 천무영은 마음을 다스려 욕망을 억제했다. 그는 지금 두 은자의 말을 함께 뇌리에 떠올리고 있었다.

- 지배자가 되려면 여인보다 먼저 달아올라서는 안되며, 끌려가서 도 안된다. 자신은 항상 얼음같이 차가워야 하지.

이는 마마대법사의 마병법 중 또다른 여정론이나 천무영에게는 부 합되지 않는 논리였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연민지심을 발견 하고는 빙옥지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빙소저, 그만 일어납시다. 서 좋을 건 없을 듯하오."

기왕에 작정한 일이니 시간을 지체해

"네." 빙옥지는 얼굴을 붉히며 신색을 추스렸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일 말의 두려움이 깃든 음성으로 물어왔다. "과연 제가 하는 일이 옳은 걸까요?" "아직도 확신이 안서오?" 천무영은 되묻더니 생각한 바를 솔직하게 말했다. "그 점에 관해서라면 소저 자신에게 물어보시오. 그대는 외인(外 人)과 결탁하여 사문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아 사문을 옳은 길로 이끌려 하고 있소."


"으음!" "낭자가 아무 남자에게나 살의(殺意)를 품던 습관이 고쳐진 것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축하하는 바이오." 빙옥지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정녕 저로 하여금 할 말이 없게 만드시는군요." 천무영은 빙그레 웃었다. "자, 마음을 굳게 먹고 내게 옷을 갖다 주시오." "네." 빙옥지도 어설프게나마 미소를 보이며 일어섰다. 그녀를 보며 천 무영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마마대법사의 마병법이 아니라도 이심통령제혼술(以心通靈制 魂術)을 전개하면 빙옥지 쯤은 얼마든지 뜻대로 부릴 수가 있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쉬운 방법을 마다했으며 그나마도 중 도에서 노선을 바꾸고 말았다. 그것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광한상인의 말때문이었다.

- 기계(奇計)가 전부는 아니다. 인간은 항상 진실을 동경하지. 따 라서 진정한 지인(知人)을 얻으려면 술수를 쓰지 말고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천무영은 빙옥지를 향해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대는 마음이 바르고 현명한 여인이오. 빙모곡의 여인들이 더 이상 불행을 겪지 않으려면 그대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오. 부 디 나를 도와 주시오." 담담한 그의 음성은 빙옥지의 가슴에 아무런 여과없이 스며들었 다. 그녀는 옷을 내밀며 천무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에 종전과는 다른 의미로 눈물이 차 올랐다. "왜... 이제야 나타나셨죠?" "후후......."


천무영은 옷을 몸에 걸치며 쓰게 웃었다. "정말로 사랑을 하고, 인생을 배우느라 그랬소." "아!" 빙옥지는 탄성을 발하며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 물을 훔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정한 사랑이란... 어떤 것이죠?" 천무영의 대답은 간단했다. "자신보다 상대를 더 사랑하는 것." "으음, 그럼...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겠군요?" 의외로 예리한 질문에 그는 비감을 웃음으로 풀어냈다. "물론이오. 상대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지." "아아! 아름다운 거군요. 사랑이란......!" 빙옥지의 흑진주 같은 눈동자가 눈물을 머금은 채 꿈꾸듯 몽롱해 졌다. 그 광경을 본 천무영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아주... 고통스럽기도 한 거라오." 빙옥지가 정신이 번쩍 든 듯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건 왜 그렇죠?" "후후후......." 천무영은 또 웃었으나 답변에는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음, 상대가 내 마음과 같지 않을 수도 있고... 혹은 먼저 죽어버 려 상처를 안겨줄 수도 있......." "안돼요!" 빙옥지는 비명처럼 외치며 펄쩍 뛰듯 그에게 안겨왔다.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어요. 무서워요, 너무......!" 그녀는 정말로 그의 품에서 몸을 으스스 떨고 있었다. '일 났군!' 천무영은 비로소 자신이 난감한 처지가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에게는 아직 천리단옥이 아닌 다른 여인을 맞아들일 만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빙소저." 천무영은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는 한편, 그녀를 몸으로부터 떼어 냈다. 그는 한결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랑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요하는 것이라오. 육체적인 수단이 란 그저 그 일부분에 불과할 뿐이고 말이오." 빙옥지가 처음으로 그의 말에 반발을 보였다. "그건 틀려요!" "흐음?" 그녀는 이상하게도 다음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 가 한 짓이란 돌아서서 심중으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난 당신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당신이 좋단 말이에요. 이런 것도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랬다. 사랑은 학습(學習)이 아니었다. 일상처럼 자연스레 알아 가고 느낌으로 확인하게 되는 미묘한 것이므로.

예측도 불가하다. 그녀가 잠깐 사이에 천무영을 정말로 사랑하게 되고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도 아깝지 않노라고 스스로를 향해 부 르짖게 될 줄을 과연 누가 알았겠는가? 빙옥지는 눈에서 재삼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분 말은 다 맞나 봐. 사랑은 고통스러운 거라더니.' 그녀는 이십여 년 동안 무감했던 빙심을 여지없이 녹여낸 한 사람 에 대해 그렇게 읊조리고 있었다. 이윽고 눈물을 씻고 돌아서는 빙옥지는 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 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야무지게 결심한다. '난 꼭... 이분을 얻고 말 거야.' 그녀는 문쪽으로 걸어가다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참! 당신의 성함은요?" 천무영은 씨익 웃었다. "무영(無影), 천무영이오." 스슷! 빙옥지는 문을 나서자 가볍게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혼자 남게 된 천무영은 멍하니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천정에 매달린 궁등에 시선을 둔 채 자문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사실 그가 빙모곡에 온 목적은 이것이 아니었다. 현음곤월신마의 부탁을 받은 그는 극음무학을 인증하고 만년지정금란화의 빙정을 탈취하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므로. 그런데 그는 원래의 목적과는 상관없이 엉뚱하게도 빙모곡의 금법 을 뜯어 고치려 하고 있었다. 그런즉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절로 실소가 터져나올 노릇이었다. 그는 쓴 입맛을 다시더니 나직이 읊조렸다. "이왕 내친 걸음인데 어쩌겠는가? 빙모곡이 늙은 과부들의 무덤이 되는 건 현음 노선배도 바라시는 바가 아닐 게야." 어떤 연유에서든 시작을 했으니 마땅히 끝을 봐야만 했다. 천무영은 짐짓

맥이 빠지는 듯 침상에

벌렁 드러누웠다. 하지만


팔다리를 쭉 뻗고 누운 그에게는 힘이 넘치고 있었다. 전신 구석구석에 죽을 때까지 써도 못다 쓸 만큼 무궁무진한 잠력 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던 것이다.

■ 무영탑 2 권 제 15 장 그는 단지 은공(恩公)이었다

관음빙모곡(觀音氷母谷)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찰극관음파미륵대산에서도 가장 깊은

그래서인지 의외로 곡내의 기후는 따스했다. 특이한 지세가 직접 적으로 영향을 미쳐 항상 봄날씨처럼 포근했던 것이다. 덕분에 푸른 초지(草地)가 형성된 빙모곡에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궁(宮)들이 여러 채 세워져 있었다. 스슷! 두 개의 인영이 북쪽의 빙벽(氷壁)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천무영과 빙옥지였다. 그들은 의논이 있었던 바대로 빙모동(氷母 洞)의 만년빙혼굴로 들어가려는 것이었다. 빙옥지는 가면서 빙모곡의 내부사정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빙모곡의 여인들은 대부분이 곡 주위의 분지에서 생활했다. 그러 나 곡주를 위시하여 구장로 등 배분이 높은 여인들은 곡내에서 따 로 기거하고 있었다. 까마득하게 치솟은 빙벽은 유리알처럼 투명한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아래쪽에 빙모동의 입구가 있었다. 슷! 빙옥지가 먼저 동구 앞에 내려섰다. "무슨 일이냐?"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두 여인이 그녀를 막아섰다. 아마도 그녀들 은 동구를 지키는 임무를 맡은 여인들인 모양이었다. 빙옥지는 웃는 얼굴로 두 여인에게 접근해 갔다. "무슨 일은요? 곡주께 아뢸 말씀이 있어서 왔죠." "네가 뭔데 사전통고도 없이... 음!" "너......!" 두 여인은 말을 채 맺지도 못하고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져 쓰러지고 말았다. 빙옥지가 재빨리 손을 써 그녀들의 연마혈(軟魔 穴)을 찔러버렸던 것이다. "수고했소, 빙소저." 그녀의 옆으로 천무영이 기척도 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를 보며 빙옥지는 불안을 감추지 못해 길게 탄식을 불어냈다. "이제 소녀는 꼼짝없이 빙모곡의 반역자가 되었어요. 만일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전......." 천무영이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염려 마시오. 그대는 빙모곡의 은인이 될 테니까." 빙옥지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앞장 섰다. "방해자가 없어졌으니 어서 들어가죠. 만년빙혼굴은 항상 열려 있 으니까요.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발각되겠지만." "후후후... 두려운가 보구려?" "그렇지는 않아요." "그럼 왜 그리도 표정이 굳어 있소?" "솔직히 말해도 돼요?" "물론." "당신이 걱정되어서예요."


이렇게 되자 난처해진 것은 오히려 천무영 쪽이었다. 그의 안색이 달라진 것을 의식했는지 빙옥지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지금쯤 저를 제외한 구대빙녀들이 뜻을 모으고 있을 거예요." 그녀는 큰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그녀들은 자질도 워낙 우수하지만 근래 들어 눈부신 활약을 한 바 있어요. 본곡의 정화(精華)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에요. 그 녀들도 모두 저와 생각이 같아요. 더구나 각자 배필을 얻었으니까 전력을 다해 곡내의 중지를 모으려 할 거예요." 천무영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그렇다면 빙모동 안의 인물들만 굴복시키면 되겠구려." "그런 셈이죠." 빙옥지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면서도 왠지 자신이 없는 듯한 표정 을 지었다. 천무영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를 재촉했다. "자, 그만 들어갑시다." 이번에는 그가 앞서 신형을 날렸다. 빙모동은 미로(迷路)였다. 도무지 끝이 없는 것처럼 긴 데다가 길 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복잡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빙옥지는 그곳 지리에 망설임 없이 전진해 갔다.

익숙해 있는 듯 이리저리 꺾어지며

그러기를 한참여. 두 사람은 정면에서 오싹하는 한기가 다가드는 것을 느꼈다. 그것 은 앞으로 나아갈수록 기세를 더해 가더니 잠시 후에는 내공을 끌 어올려도 견디기가 힘들 정도였다. "다 왔어요." 빙옥지는 안색이 창백할 뿐만 아니라 입술마저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는 비단 추위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음, 아무래도 심적부담이 크겠지.'


천무영은 곁눈으로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뭐 라 한들 위로가 될 것 같지 않아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는 태연을 가장한 채 걸음을 옮기며 전면을 보았다. 이제 동굴은 얼음 통로였으며 칠흑같이 어두웠다. 예까지 이르는 동안에는 그래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야명주(夜明珠)가 밝혀져 있 었으나 이 지점부터는 완전한 암흑의 공간이었다. 천정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 본 그 광경이란 마치 악마의 입 속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휘우우― 휘우우웅―! 귀음(鬼音)을 동반한 한풍이 혹독하게 몰아쳐 와 그들의 진로를 방해했다. 천무영은 발길을 옮기며 필경 지옥의 입구로 들어가는 기분이 이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동부의 길이는 어느 정도요?" 그가 묻자 빙옥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몰... 라요. 얼마나 긴지는......." 그녀는 이빨이 딱딱 마주치는 가운데 겨우 대답하고 있었다. 이를 느끼자 천무영은 음성이 다소 가라앉았다. "우리 말고도 이곳을 통과한 사람이 있소?" "곡주님... 한 분뿐이에요." 그는 빙옥지의 눈치를 살피며 넌즈시 물었다. "함께 들어가겠소?" "아... 아뇨, 전 자신... 없어요." 빙옥지는 공포를 느낀 듯 잔뜩 움츠러 어깨를 감싸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들었다. 천무영이 그녀의

"이곳은 추운 만큼 극음무공을 연마하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은 장소일 게요. 만일 이곳을 통과할 수만 있다면 당신의 내력은 상 상도 못할 정도로 크게 증진될 것이오."


"그... 그렇지만......." 빙옥지는 여전히 그의 권유에 선뜻 응하지 못했다. 빙모곡의 여인들은 선천적으로 추위에 강한 체질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하나같이 관음빙혼신공을 익히고 있어 웬만한 냉기쯤은 끄 떡도 않고 견뎌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만년빙혼굴만은 차원이 달랐다. 그곳에는 지하의 극음빙맥 (極陰氷脈)에서 흐르는 한빙지기가 뭉쳐 있었다. 이르자면 여하한 생명체도 살아남지 못하는 죽음의 장소로서 빙옥 지가 공포감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가 도와주어도 안되겠소?" 천무영은 그녀를 끌어당겨 안았다. '후후... 그대에게도 뭔가 혜택이 돌아가야 되지 않겠소? 구대빙 녀는 낭군을 얻는다지만 모험을 시도한 당신은 정작.......' 빙옥지에게 인간적인 선 외에 마음을 열어주지 못하는 그는 내심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반면에 빙옥지는 그의 품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녀는 남자의 가 슴이 생각보다 훨씬 넓고 따뜻하다고 느꼈다. 침상에서 경험했던 열정과는 다른 의미를 발견했던 것이다. 천무영의 입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열류(熱流)가 그녀에게 슬며시 전도된 것은 그때였다.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빙옥지는 몸이 훈훈하게 덥혀지자 탄성을 발했다. "아! 이제 살 것 같아요." 빙옥지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꽁꽁 얼어붙었던 육신이 금세 나른하도록 기분좋게 풀려 버렸으니 말이다. 천무영은 그녀에게서 약간 물러서며 빙그레 웃었다.


"그럼 같이 들어가는 걸로 알겠소." 휙! 그의 신형은 곧바로 만년빙혼굴 안으로 쏘아져 갔다.

'과연!' 천무영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눈앞에 내민 자신의 손가락이 보이 지 않을 정도의 캄캄한 어둠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곳은 사방이 자욱한 빙무(氷霧)로 꽉 차 있기도 했다. 따라서 도처에 솟아있는 날카로운 얼음기둥이나 천정에 매달린 고 드름 등을 피해가는 일이란 결코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아차하면 여지없이 몸이 꿰뚫릴 판국이었으므로. 천무영은 빙옥지가 염려되어 팽팽하게 긴장의 끈을 당긴 채 전진 하고 있었다. 방심은 단 한순간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는 안력(眼 力)이 통하지 않는 어둠 속에서 피부에 와 닿는 공기의 저항에 의 존한 채 그녀를 인도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만년빙혼굴은 점점 더 아래쪽으로 깊숙이 이어지고 있었다. 내려 갈수록 빙한지기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으음... 너무 추워요. 전... 못 견디겠어요......." 빙옥지는 천무영에게서 열기를 계속 전달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중되어가는 추위를 이기지 못해 고통을 호소해 왔다. "잠시 기다리시오." 천무영은 침착하게 말한 후, 일신에 공력을 일으켰다. 그는 축융대제의 독문심법이자 여하한 음한지기도 물리칠 수 있는 대축융건양진결(大祝融乾陽眞訣)을 운용하는 한편, 공력을 팔성까 지 끌어올린 다음 전진을 시도했다. 그러는 동안 빙옥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 순간 부터인가 천무영이 자신을 보호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 었으며, 그때문에 지금은 그에게 미안해 하고 있었다. '쯧! 조용히 참고 있을 것을.'


그녀는 내심 자책하며 천무영에게 몸을 기댄 채 따라갔다. 얼마쯤 더 내려갔을까? 휘류류륭―! 괴이한 음향과 함께 빙무가 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앞에서 요란하게 소용돌이

'웃! 이 정도였던가?' 천무영은 전신의 피부가 갈라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부르짖었 다. 어디 그뿐인가? 곧이어 손발이 뻣뻣하게 굳고 등골까지 섬뜩 해 오자 그로서도 당혹을 금치 못했다. 그는 급히 대축융건양진결을 십성으로 끌어올려 한기에 대응했다. 그러자 방금 전에 비해 추위가 한결 가셨지만 그것은 빙옥지에게 는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쓰러지듯 안겨드는 그녀의 몸은 거 의 얼음덩이가 되어 있었다. '큰일이군! 잘 견디더니.' 그는 차디찬 빙옥지의 몸을 힘주어 끌어안으며 지닌 바 열력을 최 대한으로 주입해 보았다. 하지만 무반응이었다. 빙무의 소용돌이가 전하는 한파로 굳어져버 린 그녀의 몸은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곳만 통과하면 될텐데......!' 그는 역시 공기의 저항을 통해 주변상황을 가늠해 보며 중얼거렸 다. 그의 판단에 의하면 빙무의 소용돌이는 일 각 이내에 틀림없 이 빠져나갈 수 있을 듯 싶었던 것이다. 문제는 빙옥지였다. 그녀는 현 상태로라면 빙무를 통과하기는커녕 더 이상 가까이 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무리하게 욕심을 부렸다 간 정말로 얼음덩이가 되어버릴 테니까. 천무영의 고심은 길지 않았다. 빙옥지를 여기까지 데려온 사람은 그 자신이다. 때문에 그녀를 탓하기보다는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나름대로 방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서슴없이 빙옥지와 입을 맞추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그녀의


입술이 느껴지자 그는 즉시 체내의 순양진력을 끌어올려 그녀의 입 속으로 깊숙하게 불어넣었다. 잠시 후. "음......." 낮은 신음성과 더불어 빙옥지의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이를 감지 한 천무영이 그녀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빙소저, 나를 힘껏 끌어안되 일체의 잡념을 버리시오. 정신이 흐 뜨러지면 그대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오." "네." 빙옥지는 짧게 대답했다. 그러나 와중에도 그녀의 의식은 가물가 물해지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공력으로는 이곳까지 이른 것만 해 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천무영의 손이 그녀의 가슴과 둔부를 더듬어갔다. "으음!" 빙옥지는 경황중에도 부지불식간 묘한 신음성을 흘려냈다. 극도로 억제하고는 있지만 몸이 서서히 달아오르는 것도 그녀로서는 어쩌 지 못하는 현상이었다. 그 순간을 빌어 천무영은 그녀를 안고 몸을 날렸다. 스읏―! 두 사람의 신형은 한 덩어리가 된 채 소용돌이치는 빙무의 중심부 를 향해 빛살처럼 쏘아져 나가고 있었다. 고오오오― "악!" 빙옥지는 그 찰나, 온몸이 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산산조각 나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그

하지만 천무영은 빙무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며 보게 되었다. 빙무 가 뭉쳐져 있는 곳에서 하나의 연못, 즉 빙담(氷潭)을.


'아! 저것은.......' 그는 그것이야말로 전설의 빙모담(氷母潭)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방원 십 장 정도인 그 투명한 연못에서 뼈를 얼릴 듯한 빙무가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빙모담 위를 스쳐지나며 그의 눈은 번쩍 빛을 발했다. '오오, 있다! 만년지정금란화(萬年地精金蘭花)가.' 연못의 한가운데에서는 금빛찬란한 난이 자라고 있었고, 그 광경 은 숨을 죽여야 할 정도로 신비스럽기 그지 없었다. '이로써 현음 노선배의 말은 사실로 입증되었다.' 천무영은 감탄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빙담의 건너편에 내려섰 다. 그리고는 새삼 뒤를 돌아보았으나 관찰 각도가 달라지자 자욱 한 빙무가 앞을 가려 더는 무엇도 볼 수가 없었다. 우드득......! 그의 몸에서 뼈마디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일어났다. '아차!' 천무영은 그제서야 빙옥지를 의식하고는 정신을 차렸다. 그의 몸 이 그런 반응을 나타낼진대 그녀의 연약한 육신이 어떤 상태가 되 어 있을지는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뻔한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그곳에서 더 버틴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할 수 없지. 다음 기회로 미루는 수밖에.' 그는 아쉬운 마음을 접고 신형을 뽑아올렸다.

통로는 위로 향해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냉기도 점차 둔화되어 갔으나 천무영은 품에 안긴 빙옥


지의 맥을 짚어 보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쯧! 내가 만년빙혼굴을 너무 과소평가했나 보군.' 빙옥지의 맥은 거지반 정지되어 있었다. 그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편편한 암석이 눈에 띄었는 데, 그것은 얇은 얼음이 덮혀 있는 빙대(氷臺)였다. 천무영은 빙옥지를 조심스럽게 그 위에 눕혔다. 그는 거침없이 빙옥지의 옷을 벗겨냈다. 그녀의 몸에 대해서라면 보지 않고도 환하게 그려낼 수 있는 그였다. 더구나 상황이 상황이고 보니 이렇다할 동요는 일지 않았다. 보기 좋게 상향으로 치솟은 젖가슴을 비롯하여 군살이라고는 없는 매끈 한 여체가 그의 관심 밖에 놓여 있었다. 다만 그의 주의를 끄는 것은 그녀가 되살아날 수 있느냐는 문제였 고, 그는 최선을 다해 그 일에 임하고자 할 뿐이었다. 천무영은 운공에 들어갔다. 스스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몸은 희뿌연 백무에 휩싸였다. 그것은 그 가 현음곤월신마의 독문절기인 현음빙백신공(玄陰氷魄神功)을 완 전하게 터득하고 있어 일어난 현상이었다. 이윽고 천무영은 두 손을 내리더니 한 손은 빙옥지의 양 젖가슴 사이의 옥당혈(玉堂穴)에, 다른 한 손은 그녀의 아랫배 부근인 단 전혈(丹田穴)에 올려놓고 지그시 눌렀다. 우우웅―! 그가 손에 공력을 주입하자 기이한 음향과 함께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백무가 빙옥지의 체내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천무영은 애초 빙옥지를 보자마자 그녀의 자질이 비범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를 만년빙혼굴로 데려와 내공을 증진시켜 주려는 마음도 먹지 않았을 테니까. 현음빙백진기는 서서히 그녀의 양대혈을 거쳐 사지백해로 스며 들 어가고 있었다. 그는 손을 이동하여 이번에는 그녀의 백회혈(百會


穴)과 발바닥의 용천혈에 갖다 붙였다. 우우우웅― 그로부터 잠시 시간이 지난 후, 그는 빙옥지의 전신 곳곳으로 장 심을 옮기며 막힌 혈맥을 연속적으로 터주었다. 천무영이 그녀의 몸에서 손을 뗀 것은 대략 한 식경쯤 지났을 때 였다. 덕분에 그는 많은 공력을 소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체내에는 여전히 장강대하와 같은 공력이 흐르고 있 어 일주천(一周天)의 운공이면 능히 보충이 될 수 있었다. 그는 빙옥지의 나신이 투명한 빛을 발하는 것을 보며 안도하는 기 색과 더불어 눈을 스르르 내리감았다. ........ 천무영이 눈을 떴을 때, 그의 앞에는 빙옥지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채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왜......?' 그가 눈으로 묻자 빙옥지는 고개를 꺾었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그녀의 어투가 바뀌어 있는 것을 느낀 천무영은 약간 당황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사이를 급격히 벌려놓았기에. 그 상태로 그녀는 애써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기경팔맥이 막힘없이 흐르고 태음경락이 훤히 뚫렸어요. 짐작이 긴 하지만 이로써 소녀의 내력은 최소한 일백 년 수위까지 도달해 있지 않나 싶어요." 천무영은 지나치는 말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아마 그럴 것이오." "이 모두가... 은공(恩公)의 덕분이에요." '은공이라......?'


천무영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잠자코 빙옥지는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진즉 느끼고 있었으면서도 소녀, 시인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어 요. 그건 은공께서 저와 격이 다른 분이라는 점이지요." "갑자기 무슨 소리를......?" "아니에요, 소녀가 욕심을 부렸던 거예요." "허어, 참!" 헛웃음을 터뜨린 천무영은 문득 그녀를 정시했다. "빙소저, 혹시 아시오?" "무엇을......?" 빙옥지의 반짝이는 눈이 그를 조심스레 응시했다. "지나친 배려는 되려 상대를 불편하게 한다는 것을 말이오." "그 점이라면 별로 걱정하지 않아요." "흐음?" "은공께서도 제게 그렇게 하셨으니까요." "빙소저......." 천무영은 상대의 마음이 읽히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빙옥지 가 지금과 같은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이 순간 얼마나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고심이 그러했듯

빙옥지의 번뇌나 고충도 결국은

그 녀 스스로가 감당해 나가야 할 몫이었다. 그것은 그들 두 사람의 인연이 거기까지가 한계였기 때문이었다. 천무영의 무거운 입이 떨어졌다. "나는 무엇보다 빙소저가 전 무림에 위명을 떨치는 여협(女俠)이 되기를 희망하오. 빙모곡의 제자로서 말이오."


"아!" "그대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도 갖추어져 있소." "저는 아직... 한 번도 그런 생각은......." 당혹해 하는 빙옥지에게 그는 빙긋 웃어 보였다. "어떤 일이건 하고자 굳게 마음을 먹으면 반 이상 달성된 것이나 다름이 없소.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 않소?" "으음......." 그녀는 신음을 발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 의 얼굴에 나타난 기색으로 미루어 뭔가 중대한 결심이 이루어지 고 있다는 것쯤은 천무영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한결 가뿐해진 마음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자, 다음 관문으로 안내를 부탁하리다." "네." 빙옥지도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고, 두 사람은 곧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동부를 빠져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때에 천무영의 뇌리에 불현듯 한 사람의 영상이 선연하 게 떠오른 것은 우연이었을까? '단옥......!' 영원히 잊지 못할 이름이 그의 가슴에 시린 별빛이 되어 박혀 들 었다. 언제고 고통으로 다가오는 그 이름은 현재까지도 그에게 있 어 떨칠 수 없는 하나의 이상(理想)이었다. 천무영은 그 이름을 그대로 품은 채 입을 떼었다. "빙소저는 참으로 좋은 여인이오. 후일 무림에서 다시 만나게 되 면 그때는 내 술 한 잔 사리다." "네, 은공." 심중이 다른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제이의 관문은 만년빙혼굴을 벗어나자마자 자동적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듣기 거북한 욕설로 시작되었다. "고약한 것들이로다!" "클클... 죽지 못해 환장을 한 연놈들이지." 거창한 환영식(?)에 천무영은 신형을 멈추었다. 그가 당도해 있는 곳은 지하의 광장으로 흰 빛이 번뜩인다 싶은 순간, 여러 개의 인 영이 기척도 없이 그를 포위했던 것이다. '음, 이들이 내가 격파해야 할 구장로들인 게로군.' 천무영은 그처럼 짚히는 바가 있는지라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태연하게 그 인영들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과연 그들은 아홉 명의 노파들로 머리카락이 눈처럼 하얗게 센 데 다가 안면이 주름투성이여서 모두 구순이 넘어 보였다. 노파들은 하나같이 투명한 죽장(竹杖)을 짚고 있었다. 그것은 얼 음으로 만들어진 지팡이로서 그녀들의 꼬부라진 허리를 지탱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 정도로 늙은 노파들에게서 소름이 오싹 끼칠 만큼 한기가 발산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 노파의 입에서 빙옥지를 향해 추상 같은 호통이 떨어졌다. "몹쓸 것! 네년이 감히 본곡에 외인을 끌어들이다니, 법규가 무섭 지도 않으냐?" 빙옥지는 질린 듯 몸을 가늘게 떨었으나 침착을 잃지 않으려 애쓰 며 대꾸했다. "장로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이분은 벌써 첫번째 관문을 돌파하셨어요. 그러니......." 예의 노파가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닥쳐라! 네년은 간덩이가 부어도 한참 부었구나. 그 따위 소리는 빙옥(氷獄)에 가서나 해라." 빙옥이란 죄인을 가두는 곳이었다. 그 낱말이 주는 공포감은 빙옥 지의 안색을 더욱 창백하게 만들어 놓았다. 천무영이 듣다 못해 나섰다. "청컨대 빙소저를 너무 몰아세우지 마시오. 이곳에 들어온 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뜻에 의해서였소이다." 그의 태도는 담담하면서도 자신감이 엿보이는 것이었다. 이에 노 파는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빙죽장으로 바닥을 찍었다. 쾅! "더러운 꼬마 놈! 누가 네놈에게 물었느냐?" 연이은 욕설에도 천무영은 여유있게 응수해 갔다. "듣고 보니 그건 맞는 말이구려. 본인은 그저 아홉 명의 노과부들 과 싸워서 이기면 그뿐이었는데." "뭐, 뭐라고?" 슈욱! 노파는 대노했고, 그에 따라 빙죽장이 수십 개의 환영을 일으키며 천무영을 덮쳐 왔다. 활동범위가 좁은 탓이겠으나 그녀로서는 여 태껏 살아오면서 그런 모욕은 처음 당했던 것이다. "후후... 무리하지 마시오, 흥분하면 몸에 해롭소." 천무영은 짐짓 웃음을 흘리며 수중의 섭선을 갈라쳤다. 차르륵― 퍽! "흑!" 노파는 질겁을 했다. 예상과는 달리 그녀의 빙죽장이 막강한 반탄 지기에 의해 튕겨나갔기 때문이었다. "너, 너......!"


씩씩거리는 노파에게 천무영은 정색을 하며 선언했다. "자! 전부 덤비시오. 내 정면승부로 당신들을 꺾고 나서 빙모곡주 와 담판을 짓겠소." 말을 마치자 그는 신형을 풍차처럼 회전시켰다. 쉬이익―! 펼쳐졌던 섭선이 도로 접히며 빙모구장로에게 뻗어갔다. 그 순간, 놀랍게도 부채의 길이는 일 장도 넘어 보였다. 그의 기세는 빙모구장로의 분노를 극도로 부추겼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놈!" "뒈져랏!" 슉! 슈슈슉―! 빙모구장로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녀들은 앞서 빙옥지 가 말했듯 곡내의 최고령자들로 각기 이 갑자가 넘는 공력을 지니 고 있었으며 연수합격에도 달통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아홉 자루의 빙죽장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천무 영을 그물처럼 옭아매가고 있었다. 하지만 감탄스러운 것은 그 가 운데서 보여주는 천무영의 신기막측한 동작들이었다. 쉬이익―! 쉬쉭! 부채는 연신 접혔다 펼쳐지기를 거듭하며 빙죽장들을 밀어내고 있 었다. 뿐만 아니라 단번에 칠, 팔 초가 전개되어 기습적으로 노파 들의 목밑으로 파고들곤 했다. 그 바람에 노파들은 눈앞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그녀들의 시각은 천무영의 신형을 전혀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천무영은 지금 무림 최고랄 수 있는 개방의 실전 보법을 운용하며 환요비자의 환신술에다 도천성(刀天聖)의 유화환 도술(柔花幻刀術)까지 펼치고 있었다. 어쨌든 싸움은 치열했으며 백여 초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관전중이던 빙옥지가 들리지 않게 탄성을 발했다.


'아! 그토록 불안해 했건만 저분은 구 대 일의 싸움을 여유있게 이끌어 나가고 계시구나.' 그녀의 얼굴에는 비로소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빙모구장로라면 빙옥지에게 있어서는 감히 올려다 보기도 힘든 존 재들이었다. 그런데 그녀들이 단 한 사람을 상대하면서 믿을 수 없게도 허둥대고 있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빙옥지는 생애 최초로 무해(武海)라는 것이 얼마나 넓 은지를 실감하는 한편, 천무영의 말마따나 드넓은 강호무림에 나 가 활보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때마침 천무영의 음성이 그녀의 귓전에 부딪쳐왔다. "후후후... 이만하면 빙모곡의 절기는 충분히 견식한 것 같소. 자, 본인의 미천한 솜씨도 한 번 구경해 보시오." 그는 빙죽장의 끝을 밟고 허공으로 차 올랐다. "단혼일척(斷魂一擲)!" 그의 신형이 일순 허공에서 뚝 정지하는 듯 싶었다. 그러자 아홉 자루의 빙죽장이 기다렸다는 듯 그를 무섭게 쓸어 갔 으나 그 결과는 추측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눈부신 빛이 사위를 점령하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에는 정 반대로 암흑의 세계로 돌변했다. 그러한 현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했다.

쾅! 콰르르르― 굉렬한 폭음 뒤로 몇 마디 비명이 꼬리를 물듯 이어졌다. "악―! 아아악!"


곧이어 암흑의 장막이 걷히고 장내의 상황이 드러났다. "맙소사!" 빙옥지가 넋이 나간 듯 부르짖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단단하기 이를데 없는 아홉 자루의 빙죽장이 모조리 두 동강이 났는가 하면 빙모구장로는 한결같이 안색이 검 게 변색된 채 뒤로 물러나 있으니 말이다. 그녀들이 물러난 자리 에는 세 치 깊이의 족흔(足痕)이 찍혀 있었다. 잠시 장내에는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흘렀다. 노파들은 부러진 빙 죽장을 움켜쥔 채 아무 말도 못하고 망연히 서 있었다. 그녀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은 그 다음 순간부터였다. 쿵! 쿠쿵......! 빙모구장로는 모두 가슴 부위가 정확히 베어져 나가 있었다. 그녀 들은 바닥에 쓰러지자 검붉은 핏물을 토해냈다. 천무영은 서서히 바닥에 내려서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서 땀방울 하나가 툭 하고 굴러떨어졌다. 그 광경은 빙옥지에게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선사했다. "은공......!" 그녀의 떨리는 음성에 천무영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빙모구장로의 무공은 정녕 대단했소. 평생에 걸쳐 신념과 긍지를 지켜온 인물들답게 말이오." 이 일전은 그에게도 강호에 출도 이후 가장 힘든 싸움이었다. 빙 모구장로의 합격술에는 천 년 공력에 육박하는 잠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가까스로 허를 찔러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빙옥지가 물었다. "설마 저분들... 타계하신 건 아니겠죠?" 빙모구장로가 움직이지를 않으니 당연한 질문이었다. "염려 마시오. 난 본래 살인에는 취미가 없으니까."


천무영은 씨익 웃더니 그녀의 손목을 잡고 날아올랐다. 스읏!

빙전(氷殿). 이름 그대로 그곳은 기둥은 물론 천정이나 바닥, 심지어는 대개의 기물들까지도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규모 또한 빠지지 않아 신비감 외에도 웅장함이 느껴지는 대전이다. 천무영은 빙옥지와 함께 빙전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곳은 빙옥지로서도 처음 들어와 보는 곳이었다. 그녀는 빙모구 장로를 대할 때와는 또다른 불안함을 내비치며 말했다. "궁주께서는... 틀림없이 여기 어딘가에 계실 거예요." 떨리는 그녀의 음성 뒤로 웬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호호호... 옥지, 너는 멋진 배필을 골랐구나." 꿈결인 듯 그윽하고 청아한 음성이다. '빙모곡주......?' 천무영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빙글 돌아섰다. 그의 눈에 얼음벽이 회전하더니 그 안으로부터 일단의 여인들이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고... 곡주를 뵈옵니다." 빙옥지가 안색이 창백해진 채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애초의 의도 와는 달리 두려워하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천무영은 일편으로 그녀의 태도를 이해하면서도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다. '쯧! 서열이란 것이 무섭긴 무서운가 보군.' 그는 여인들을 침착하게 살펴보았다. 앞장 선 여인은 일신에 연화(蓮花) 무늬가 수놓인 나삼을 걸치고


있었다. 나이는 삼십 세쯤 되어 보였는데 천상우물(天上尤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빼어난 미인이었다. 농염한 자태로 이르자면 건드리기만 해도 짙은 꽃물이 흐를 듯했 으며, 여인으로서의 완성을 느끼게 해서인지 향기로움으로 전신을 둘렀다 싶을 정도로 눈부신 미(美)를 지니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백설같이 흰 피부나 우아하게 이루어진 선(線) 에서는 고귀한 기품마저 느껴져 한눈에도 일문(一門)의 종주다운 면모를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그녀의 뒤로는 네 명의 소녀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녀들 역시 빙모곡주보다는 못해도 매우 아름다웠다. 더구나 팔 다리를 드러낸 반나(半裸)의 차림새로 인해 적어도 시선을 끌어당 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천무영이 빙모곡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소이다, 곡주." 정중한 그의 음성을 접하자 여인의 서늘한 눈이 반짝 이채를 발했 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응수해 왔다. "음, 안으로 기도를 감추신 공자시군요. 본 곡주는 관음빙모후(觀 音氷母后) 빙천려(氷天麗)라고 해요. 공자께서는......?" "천무영이라 하오." 천무영은 그녀에게서 읽혀지는 자신감이나, 그녀가 자신의 변용을 알아본 것에 대해 약간은 당혹을 느꼈다. 관음빙모후 빙천려는 빙옥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옥지, 너는 더 이상 본 곡주에게 무릎 꿇을 필요가 없다." 부드러우나 냉엄한 힐책이 깃들어 있는 그 말에 빙옥지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곡... 주님......!" "본 곡주는 그동안 너를 지극히 총애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지금 나에게 반기(反旗)를 들고 있지 않느냐?" "반기... 라고 하셨습니까?" "아니란 말이냐?" "물론 아닙니다." 빙옥지는 작심을 한 듯 안색을 굳히더니 말을 이었다. "외견상으로는 그리 되었으나... 실제론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소녀 또한 누구보다 곡주를 존경하고 따랐으되, 그 마음은 금후로 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녀는 빙천려의 미간이 슬며시 찌푸려지는 것을 보면서도 눈물을 흘리며 덧붙였다. "저분은... 소녀의 배필이 아니라 은인이십니다. 나아가서는 본곡 의 은인이 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흐음! 그렇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빙천려의 음성이 한층 더 강경해졌다. "너와 같은 생각을 가졌던 인물은 전대에도, 그 웃대에도 없지 않 았다. 하지만 명심해라. 옳든 그르든 본곡의 전통은 누대에 걸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을." "곡주, 흑......!" 빙옥지는 어깨를 들먹이며 오열했다. 그녀는 빙천려가 어떤 생각 을 하고 있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자신이 숭앙해마지 않던 곡주가 끝까지 본분을 지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리라는 점이었고, 그때문에 흐르는 눈 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가닥 은밀한 경기가 빙옥지의 몸을 떠받쳐 일으켰다. 천무영이 그녀를 향해 소매를 저었던 것이다.


"빙소저, 그만 물러나 계시오. 내 그대의 믿음이 헛되이 스러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보리다." 그는 빙천려를 응시하며 말했다. "곡주, 본인이 이곳에 온 이유는 세 가지요." 빙천려가 신비한 눈을 깜박이며 되물었다. "무엇이죠, 그건?" "첫째는 만년지정금란화의 빙정(氷精)을 얻는 것이오." 빙천려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녀는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쏘는 듯 한 시선으로 천무영을 바라보았다. "그걸 어째서 구하시려는 건가요?" 천무영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번째로는 당신을 꺾는 것이오." 빙천려는 태도를 바꾸어 생긋 웃었다. "이유를 물은들 답하지 않으실테니 관두기로 하죠. 좌우간 본 곡 주는 공자의 용기에 감탄했어요. 감히 본곡에 단신으로 들어와 그 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천무영도 마주 웃었다. "고맙소, 그 말씀은 칭찬으로 알겠소이다." "호호호... 맞아요. 세번째 이유는 무엇이죠?" "그건 이곳에 와서야 품게 된 뜻이오. 곡주를 비롯한 이곳의 모든 미녀들의 행복을 위해서 말이오." 빙천려의 입술 끝이 기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옥지가 말하던 그 얘긴가 보군요?" "그렇소." "안된 말씀이나 전 외인이

본곡의 일에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아


요. 공자께서는 공연한 참견을 하고 계세요." "그렇게 느껴졌다면 본인의 신념쯤으로 해 둡시다. 언제, 어느 곳 에서고 안타까운 일을 보면 도저히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미라 서 말이오." "감히!" 빙천려의 고운 얼굴에 처음으로 노기가 드리워졌다. "더 이상의 설전(舌戰)은 무용해요. 서로 뜻이 다르니 관철시키자 면 속히 일 장을 나누는 편이 낫겠어요." "본인도 원하던 바요." "대전장소는 관례에 따라 빙모담으로 하겠어요." 말을 마치자 빙천려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홱 돌아섰다. 그 광경을 보며 천무영은 쓰게 웃었다. "좋소. 후후후......."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을 수행하던 미소녀들과 빙옥지를 향해 엄중하게 명했다. "너희들은 모두 이곳에서 기다리도록 근해서는 안된다."

해라. 아무도 그 근처에 접

"네, 곡주." 대답을 듣고 난 그녀는 즉시 앞장 서 신형을 날렸다. 휙! 천무영도 빙옥지에게 안심하라는 뜻으로 가볍게 후, 그녀의 뒤를 따랐다.

눈짓을 해 보인

스읏! 빙옥지는 사라져가는 천무영과 빙천려의 뒷모습을 보며 불안과 두 려움이 뒤섞인 어조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제발......!"


우우우웅―! 방원 십여 장에 이르는 빙모담은 극음빙맥(極陰氷脈)의 정화답게 굉음과 더불어 줄곧 한기의 회오리를 이루고 있었다. 천무영과 관음빙모후 빙천려. 두 사람은 빙모담을 가운데 두고 대치했다. 우우우― 우우우웅―! 빙무가 그들 사이에서 무섭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자칫 정신을 흐뜨리면 두 사람은 즉각 얼음덩이로 화하고 만다. 빙천려가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먼저 공자의 진면목을 보여주세요. 신념 운운하던 분이니 거절은 하지 않으시리라 사료되는군요." "좋소이다." 천무영은 그녀의 요구에 이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역 용술을 풀어 본 모습을 회복했다. "으음!" 빙천려는 의미를 짐작할 수 없는 묘한 신음을 발했다. 한참 후에 야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생각보다 미남은 아니시군요." "맞소. 후후후......." 천무영의 웃음 뒤로 그녀는 진솔하게 덧붙였다. "감탄스러운 것은 공자의 풍모예요. 혹시 아세요? 본 곡주가 공자 의 담백한 기도에 오히려 위축되고 있다는 것을."


"농담이겠지만 그리 듣기 싫은 말씀은 아니구려." 그의 눈이 심해(深海)와도 같이 깊고 푸른 빛을 뿌리며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그 기오한 눈빛을 대하자 빙천려는 움찔하여 자신도 모르게 얼른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간단히 말했다. "벽안(碧眼)이 특히 압권이로군요." "고맙소." 천무영은 짧게 응수한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승부는 어떤 방법으로 가릴 작정이시오?" 빙천려가 얼굴을 굳히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빙모담에서 피어오르는 빙무의 덩어리를 내력으로 받아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에요." "흐음?" 천무영의 눈이 크게 휩떠졌다. "그것은 필살(必殺)의 수법이 아니오?" 그랬다. 빙천려가 택한 대결방법은 필히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죽 어야만 승부가 가능한 것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오?" 어이없어 하는 그에게 빙천려는 자르듯 차갑게 말했다. "이유는 분명해요. 빙모곡의 금법이 깨진다는 건 곧 곡주의 죽음 을 의미하니까요." '이런 말도 안되는......!' 천무영의 눈살이 절로 찌푸러 들었다. 그러나 빙천려의 완고한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먼저 손을 뻗어왔다.


"자, 시작해요!" 우우우웅―! 그녀의 장심이 투명해지는가 싶자 두 가닥 백기가 사출되었다. 그 광경을 본 천무영은 낮게 부르짖었다. "관음빙혼신강(觀音氷魂神 )......!" 콰르르르― 굉음과 함께 소용돌이치던 빙무가 그를 향해 몰아쳐 왔다. 천무영은 일시지간 전신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지체 없이 공력을 끌어올리는 한편, 손을 들어 허공에 크게 원을 그리 더니 곧장 앞으로 내뻗었다. 콰우우우! 두 종류의 상반된 힘을 받은 빙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침내 중원최강의 극음지학(極陰之學)들이 격돌한 것이었다.

우우우웅―! 새하얀 빙무덩이가 무시무시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빙모담 을 가운데 두고 양편으로부터 지상에서 가장 한랭한 경기가 계속 쏟아부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츠으으으― 두 가닥의 경기는 맹렬하게 피어오르는 빙무를 점차 압축시켜 하 나의 형체를 갖춘 덩어리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천무영과 빙천려의 공력은 백중지세였다. 덕분에 빙무의 덩어리는 어느쪽으로도 밀리지 않고 정확히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는 중간 지점에 머물고 있었다. '오오, 이럴 수가!' 천무영은 내심 크게 놀라고 있었다. 그는 이제껏 자신보다 높은 공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과는 마주쳐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빙모곡주라지만 일개 여인인 빙천려가 뜻밖에도 자


신과 평수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콰르르르― 두 사람은 필사적으로 경력을 발출해 냈다. 그에 따라 빙무덩이는 더욱 단단하게 뭉쳐져 회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급기야 두 사람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빙무의 덩어리는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빠른 회전력 을 보였으며 종내에는 하나의 빙구(氷球)로 화했다. 와중에서 천무영은 문득 다리가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전신의 공력을 양 팔에만 집중시킴으로써 빙모담에서 솟아오르는 빙한지기를 방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윽!' 그는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안으로 삼키며 맞은편의 빙천려를 바라 보았다. 그녀는 고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아마 그녀 역 시도 그와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웅― 우우웅―! 두 사람은 각기 공력을 극한대까지 끌어올렸다. 어차피 공력을 거둘래야 거둘 입장도 못되었다. 약간만 힘을 줄여 도 빙무덩이에 얻어맞고 전신이 얼음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 라질 판국이었으므로. 천무영의 눈썹이 마구 꿈틀거렸다. '승리가 문제인가? 아니면.......' 그의 내부에는 어느덧 크나큰 갈등이 일고 있었다. 사실 그는 현음곤월신마의 무공으로 빙천려와 겨루며 한계를 느끼 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패배하면 그것은 현음곤월신마에게 패 (敗)의 기록을 추가시켜 주는 셈이 된다. 그런즉 축융건양대진력을 운용하기만 하면 그는 즉시로 현 상황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는데, 여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그가 다른 무공을 사용하면

빙천려를 이겨봐야 그 승부가 현음곤


월신마의 염원과는 무관한 것이 된다는 점이었다.

천무영의 갈등은 부피에 비해 쉽게 접혔다. '쯧! 역시 이대로 밀고 나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다음 순간, 그의 이마 위로 뿌연 기체가 피어올랐다. "하압!" 짤막한 기합성과 함께 빙무의 덩어리는 회전하는 상태에서 급속히 빙천려에게로 날아갔다. 우우우웅―! "우웃!" 빙천려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투명한 장심을 빙글 돌림과 동시에 왼팔로 오른 팔꿈치를 받쳤다. 고오오오― 그녀를 향해 짓쳐가던 빙구가 순간적으로 허공에서 멈칫하더니 방 향을 바꾸어 반대편의 천무영에게로 쏘아져 갔다. 그는 지체없이 쌍수를 마주쳐 앞으로 쭉 뻗어냈다. 콰우우웅―! 빙구는 다시 떼밀려 빙천려 쪽으로 날아갔다. "흑!" 그녀는 비명을 발하더니 매서운 기세로 재빨리 손가락을 구부렸다 가 폈다. 슈슈슈슉―!


예리한 파공성과 함께 그녀의 오지(五指)에서 다섯 가닥의 눈부신 지력이 발출되었다. 그에 따라 두 사람 사이를 오락가락하던 빙구 는 끝내 폭발하고 말았다. 꽈꽝꽝―! 폭발의 잔해가 무섭게 천무영을 덮쳐왔다. 파아아아― 하지만 그의 대응은 침착했다. 그는 현음빙백신공을 극으로 끌어 올리고는 손바닥을 접었다 펴며 둥그렇게 원을 그렸다. 그러자 흩어졌던 빙무는 다시 한 덩이로 모이더니 그에게서 튕겨 져 나가듯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 이런!" 빙천려가 다급성과 함께 공력을 재차 끌어올렸다. 그녀의 머리카 락이 일제히 곤두서고 나삼마저도 찢어질 듯 부풀어 올랐다. 그런 가운데 그녀는 천무영을 향해 쌍장을 내쳤다. "어딜!" 천무영도 지지 않고 막바로 양수를 마주쳐 갔고, 두 가닥 장력은 허공에서 무섭게 격돌했다. 콰쾅! 콰르르르― 굉렬한 폭음이 일더니 그 여파로 빙모담에 고여있던 물이 거꾸로 흐르는 폭포수인 양 위로 솟구쳐 올랐다. 촤아아아― "아악!" "큭!" 두 마디의 참담한 비명이 그 뒤를 이었다. 휘류류륭―! 빙한지기가 회오리치며 장내의 모든 것을 덮어 버렸다.


"으음!" 천무영은 육중한 물체에 눌린 듯한 압박감을 전신으로 느끼며 신 음을 흘렸다. 어찌된 셈인지 그는 몸을 움직이는 것은 고사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이어 그가 눈을 뜨자 괴이한 음향이 울렸다. 빠지직......! 그것은 얼음이 깨지는 소리였다. 설명하자면 그가 눈꺼풀을 들어 올림에 따라 얼음의 일부가 부서졌던 것이다. '맙소사!' 천무영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깨닫고는 아연실색했다. 놀랍 게도 그는 커다란 얼음덩어리 속에 갇혀 있었고, 그 두께는 어림 잡아도 한 자는 될 듯했다. 그는 빙천려와 최후의 일격을 나눈 뒤 정신을 잃었었다. 그리고 깨어나 보니 이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천무영은 즉시 운공부터 해보았다. '된다!' 그는 저으기 안도했다. 비록 전신이 마비된 듯 감각이라고는 없었 으나 느릿하게나마 기혈의 운행만은 가능했다. 그로부터 약 일 다경이 흐른 후였다. 필사적인 노력으로 일신의 공력을 완전에 가깝도록 회복한 천무영 은 축융건양대진력을 일으켰다. 화르르릉―! 그의 몸에서 시뻘건 불꽃이 일어났다. 파지지직....... 그를 둘러싸고 있던 얼음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삽시에 녹아버렸 다. 그는 재빨리 팔다리를 비롯한 신체의 각 부위를 놀려보았는데 다행히도 곳곳이 약간 뻐근할 뿐 별 이상은 없었다.


천무영은 빙천려를 찾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 저기......." 그의 시야에 잡힌 빙모곡주 빙천려의 모습은 얼마 전 그의 모습이 나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도 그와 십여 장 정도 떨어진 곳 에서 얼음덩이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녀가 알몸이 되어 있다는 정도였다. 입고 있던 옷은 아마도 격전 중에 바스라져 버린 모양이었다. 천무영은 고소를 지었다. '후후... 얼음 속에 갇힌 알몸의 미녀라......!' 확실히 그녀의 모습은 특별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뭐랄까? 마치 예술적 가치를 지닌 조각품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빙천려의 나신이 그만큼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아름다움 을 구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무영에게는 그런 것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목숨을 내걸고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이기는 했으나 그로서는 빙천 려에게 유감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그 과정을 치르고 나 니 그녀가 오랜 지기(知己)처럼 여겨지는 그였다.

천무영은 빙천려를 향해 쌍장을 뻗었다. 츠츳! 화르르르― 얼음덩이는 화염에 뒤덮이는 듯 싶더니 이내 녹아내렸고, 그는 얼 음에서 놓여난 빙천려에게 다가가 맥을 짚어보았다. '죽다니!' 그는 충격을 입은 나머지 눈을 크게

부릅떴다. 뜻밖에도 그녀의


맥은 아무런 느낌도 없이 잠잠했던 것이다. 천무영은 맥이 탁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분명 이런 것은 아니었거늘.......' 그는 전신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빙천려를 응시하며 가히 넋을 잃 었다. 공력의 수위가 자신과 엇비슷한 점으로 미루어 방금 전까지 도 그녀가 죽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그럼 결국 내가 이 여인을 죽인 것인가?' 천무영은 다른 것은 몰라도 살인에 관한 한 철저히 명분을 따지는 위인이었다. 그런 고로 그는 빙천려의 죽음을 대하게 되자 극도의 회의와 자기혐오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기를 한참여. 천무영의 눈이 언뜻 푸른 광채를 발했다. "혹시?" 그는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빙천려를 다시금 면밀히 관찰해 보 았다. 그러다 곧 그의 생각은 그녀의 살결이 투명해 보일 정도로 광택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에 미쳤다. '그렇다! 완전히 죽어버린 있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시신이라면 피부가 푸르죽죽하게 변해

천무영은 확신을 가지고 부르짖었다. '오오! 이건 아직 피는 얼지 않았다는 징조다.' 그는 급히 굳어져 있는 빙천려의 몸을 안아 일으켰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천무영은 빙천려를 자신과 마주보도록 하여 무릎에 앉혔다. 알몸 의 여인과 그런 자세를 취하고 있으니 만일 누가 보았다면 망측하 다는 비난을 서슴치 않았으리라.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천무영은 아무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전 신에 축융건양대진력을 극으로 끌어올렸다. 천무영의 일신은 금세 은은한 자홍광(紫紅光)에 휩싸였다. 그 상 태에서 양 손을 뻗자 그의 장심은 붉게 달아올랐다.


치치직......! 그는 장심을 빙천려의 양 젖가슴 밑 유근혈(乳根穴)에 밀착시키고 는 입을 벌렸다. 그의 입에서 자홍빛 기류가 흘러나왔다. 스으으....... 그는 주저하지 않고 빙천려와 입술을 맞붙였다. 휘류류류― 자홍빛 기류는 두 사람을 모두 휘감았다. 천무영은 극음무학의 극성인 축융건양대진력을 그녀의 체내로 밀 어넣었다. 이는 내공소모가 극심한 요상법이었다. 그런 채로 시간은 말없이 흘러갔다. "으음!" 어느 순간인가 빙천려가 신음을 흘리더니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었다. 천무영은 희색을 보이며 그녀의 체내에 주입된 축융건양대진력을 임의로 유도했다. 그에 따라 뜨거운 진력이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돌며 막혀 있던 혈맥을 차례로 타통시켜 나갔다. 잠시 후. 빙천려의 차갑고 창백했던 얼굴에 점차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 런 반응은 몸에도 전반적으로 나타나 부드럽게 풀려가는 것을 촉 감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되었다, 이 정도면.' 천무영은 그녀로부터 입술과 손을 다 함께 떼었다. 그는 그녀를 안아 바닥에 뉘고는 겉옷을 벗어 덮어주었다.

빙천려. 빙모곡주인 그녀는 깨어나자마자 급급히 신색을 추스르더니 침중 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왜 저를... 구해 주었죠?" 그 말에 담긴 의미는 추궁이 전부가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자신이 내건 싸움의 규정까지 어기면서 직접적으로 천무영에게 살의(殺意)가 깃든 일장을 내쳤었다. 설사 그의 손에 죽었다 한들 억울할 일은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천무영의 도움을 빌어 사경(死境)에서 헤어나오 게 된즉 자책을 그런 식으로 표명하고 있었다. 천무영이 그녀의 심리를 눈치채고는 정색을 했다. "생명은 귀중한 것이외다, 곡주. 당신은 진즉부터 그것을 너무도 소홀히 여기고 있었소." "공자께 신념이 중요하듯 제게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빙천려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저는 공자께 비겁 한 수를 쓰고도 완패했는 걸요." "정녕 그리 생각하오?" 천무영의 물음에 그녀는 체념한 듯 어렵지 않게 대꾸했다. "그래요, 저는 이제 빙모곡주도 아니에요." "그럼 당신을 꺾은 본인은 무엇이 되어 있는 게요?" 빙천려는 움찔하더니 씁쓸히 웃었다. "앞서 두 개의 관문을 통과하고 마지막 관문인 저까지도 무너뜨리 셨으니 의당......." 천무영이 그녀의 말을 중도에서 가로챘다. "곡주에 버금가는 자격이 주어지겠구려? 이곳의 금법을 뜻대로 조 정할 수 있으니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겠고?" "맞아요."


빙천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녀를 향 해 천무영은 선언이라도 하듯 말했다. "내 지금부터 수정된 법규를 말하리다. 빙모곡의 곡주에게는 목숨 을 바쳐 금법을 수호할 의무가 없소." "아!" "그리고 빙모곡에는 남자들의 출입이 얼마든지 가능하며 원한다면 결혼을 하여 곡내에서 살아도 무방하오. 그것은 곡주에게도 당연 히 해당되는 사항이오." "공자......!" 빙천려는 충격으로 인해 잔뜩 굳어져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에 게 천무영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이는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빙모곡주께 본인이 드리는 선물이 외다. 물론 당신이 거느린 모든 여인들에게도." "우우......." 빙천려는 괴상한 신음으로써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천무영이 반쯤 넋이 나가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자, 어서 이곳을 나갑시다. 밖에서 눈이 빠지게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지 않소?"

희고 아름다운 한 쌍의 손이 투명한 열매를 받쳐들고 있었다. 그 래서일까? 여인의 손마저도 투명해 보이는 것 같다. 손은 공손히 받쳐졌다. "공자께 이것을 드리겠어요." 천무영은 줄곧 열매보다는 그것을 올려놓고 있는 아름다운 손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마음이 굳건하다 해서 미를 느끼는 감각 까지 둔화된 것은 아니므로.


손의 주인은 얼굴도 환상처럼 아름다웠는데, 천무영이 감탄을 한 것은 그쪽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씀씀이였다. 그녀는 다름 아닌 빙모곡주 빙천려였다. "본래는 화룡도(火龍島)를 생각이 바뀌었어요."

꺾기 위해

제가 복용하려고 했었지만

천무영은 씨익 웃었다. "혹시 조건부로 이러는 건 아니오? 이를테면 나로 하여금 곡주를 대신하여 화룡도주와 맞붙게 한다던가......." "설마요?" 빙천려는 질겁을 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최소한 책임을 회피하지는 않습니다." "아! 본인이 크게 실수를 했구려. 곡주께서 얼마나 기개가 높고 고집이 센 분인지를 잠시 망각하고 있었소이다." 이번에는 그녀가 입가에 웃음을 떠올렸다. "공자께는 제가 번번이 지는군요." "얘기가 그렇게 되는 것이었소? 하하하......." 두 사람은 어느 덧 격의없는 농담을 주고 받을 정도로 친해져 있 었다. 그 뒤로 빙천려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만년지정금란화의 빙정은 공자께 드리고 싶어요. 극음무 공을 익힌 사람에게는 더없는 보물이지요." 천무영이 물었다. "화룡도와의 대결은 어찌 하시려고?" 빙천려는 불안을 내비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어떤 일에고 최선을 다 하는데 의의를 두고 있지요. 승패도 중요하겠지만 그건 차후의 문제이니까요."


"으음!" 천무영은 신음을 발했을 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이로써 두 사람의 관념은 한 차례 더 엇갈림을 보이고 있었다. 그 는 은자들의 여망을 빌지 않더라도 더 이상 패배를 해서는 안되는 위인이었으며 그 사실을 항시 잊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천무영이라는 일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무인(武人) 특유의 자부심이나 긍지와도 통하는 얘기인지도 몰랐다. 따라서 그는 처음으로 빙천려에게서 아쉬움을 느꼈다. '쯧! 이 여인이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필경 안목이 좁아서 이리라. 하긴 그동안 드높은 기개를 고작해야 빙모곡에 눌러앉아 금법을 고수하는 데나 사용하고 있었으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천무영은 잘라 말했다. "만년지정금란화의 빙정은 곡주께서 드시오." "네?" "호의는 고맙지만 사양하겠다는 얘기요." "공자!" "그것도 지금 이 자리에서 들도록 하시오." "갑자기 왜......?" 천무영은 짐짓 정색을 지으며 빙천려를 응시했다. "모름지기 싸움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법이오. 패자로서의 치 욕감이 어떤 것인지 곡주께서는 아직도 다 알지 못하오. 곡주와 나 사이의 일전에서는 명예고, 이권이고 따질 필요가 없었으나 화 룡도를 상대로는 무척 다를 것이외다." "아!" 빙천려는 뭔가 강한 깨달음이 있는 듯 탄성을 발했다. 그런 모습 을 보고 나서야 천무영은 안색을 풀었다. "내 말뜻을 아셨으면 속히 빙정을 복용하시오."


"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키는 대로 순순히 손을 들어올려 빙 정을 입 안에 털어넣었다. 그런데 그녀가 느닷없이 천무영의 입술 을 덮어누른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읍!" 천무영은 그녀의 갑작스런 공세에 당황해마지 않는 한편, 서늘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급급히 그것을 밀어냈으나 그때는 이미 반 이상 삼켜진 후였다. '어찌 이렇듯 어리석은 짓을......!' 그는 내심 탄식하며 남은 빙정지액(氷精之液)이나마 성의를 가지 고 빙천려의 목 안으로 흘려넣어 주었다. 이윽고 입술은 서로 떨어졌으되,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특히 천무영으로서는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쯧! 이 상황에서는 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침묵을 깬 사람은 빙천려였다. "결례를 용서하세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는......." "되었소." 천무영은 그녀의 말을 자르더니 진지하게 덧붙였다. "내 빙모곡에 와서 느낀 점이 실로 많소이다." "어떤......?" "빙모곡의 여인들이 하나같이 정열가라는 것, 그처럼 불꽃 같은 정열을 품고 있으면서도 놀라우리 만큼 자제력이 강하다는 것, 그 외에도 더 있소." 그는 손을 내밀어 빙천려의 턱을 가만히 받쳐 들었다.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것......!" 그녀의 얼굴이 사르르 붉어졌다.


"하지만 저는... 늙었는 걸요." "후후... 당신이 말이오?" 천무영은 되묻더니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얹었다. 빙천려는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으나 그렇다고 거부하지는 않았 다. 그녀의 꽃잎 같은 입술은 진한 향기를 뿜어내며 천무영의 입 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의 혀가 빙천려의 입 안을 유영하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달콤 한 느낌에 젖어들고 있었다. 그럴수록 오히려 가슴이 텅 비어오는 것만은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지만.

금법이 파해된 관음빙모곡은 마침내 천 년의 껍질을 벗어던졌다. 그로 인해 찰극관음파미륵대산의 일부인 빙모곡은 그 풍경이 완전 히 뒤바뀌어 버렸다. 곡구는 활짝 개방되었으며 그 사이로 예전에는 들을 수 없었던 남 자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구대빙녀는 곡주의 축복 아래 성대한 혼인예식을 올릴 수 있었다. 원래는 생산의 도구로서 억울하게 납치되어온 아홉 명의 청년들이 그녀들의 어엿한 신랑이 되었던 것이다. 관음빙모곡은 더 이상 냉혹비정한 얼음세계가 아니었다. 주변이 얼음으로 이루어진 것이야 여전했지만 그 안은 따스한 기후와 마 찬가지로 훈기가 봄빛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이를 두고 선부(仙府)라 한들 틀리지는 않으리라. 종일토록 행복 에 겨운 웃음이 그치지 않고, 그들을 흉내내듯 벌과 나비가 곡내 에 핀 화목(花木) 위를 분주히 날고 있으니 말이다. 관음빙모곡의 전설은 금후로 크게 수정될 것이다. 이 시대에 등장 한 한 사내에 의해 기나긴 동면으로부터 깨어났다고. 그러나 주인공 격인 그 사내는 홀연히 그곳을 떠났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슬며시 자취를 감추어 버렸던 것이다. 관음빙모곡주인 빙천려와 십대빙녀 중 한 명이었던 빙옥지가 뒤늦 게야 그 사실을 알고 몹시 섭섭해 했다. 의외인 것은 그 사내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고 죽기살기로 격돌했던 빙모구장로까 지도 아쉬워서 끌탕을 했다는 점이었다.


그녀들은 천무영이라는 그의 이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더러 는 그가 남겨 놓고 간 흔적들을 기억할테고. 아니, 어쩌면 강호주 유를 핑계삼아 그를 찾아 나설지도......?

■ 무영탑 2 권 제 16 장 불운한 남매(男妹)

휘이이잉―! 추풍(秋風)이 대지를 스산하게 훑고 지나간다. 이를 느끼는 세인들의 마음은 더욱 써늘했다. 그것은 중원대륙을 질타하는 대혈풍이 주원인이었다. 사분오열(四分五裂) 된 채 도저에서 혈육이 난비하자 사람들은 자 신이 그 피해자가 될까봐 하루하루 가슴을 졸여야 했다.

- 혈붕잠룡(血鵬潛龍)의 이패(二覇)가 남북의 경계를 긋고, 지옥 잔혈(地獄殘血)이 동서를 피로 물들이다.

항간에 떠도는 이 경구는 현 무림의 상황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 다. 실제로 혈붕성(血鵬城)과 잠룡부(潛龍府), 그리고 지옥성(地 獄城)과 잔혈맹(殘血盟)이 제각기 동서남북에서 무시무시한 혈풍 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혈붕성과 잠룡부가 중원을 장악하려 한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 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랜 준비를 거쳐 점차로 세력을 키워왔으되 그 과정에서 이미 실체를 드러낸 바 있었다. 거기에 보태 최근 들어 새롭게 준동한 마의 세력이 바로 지옥성이 었다. 그들은 중원의 서쪽 끝에서 발원하여 믿을 수 없을만치 빠 른 속도로 영향권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들은 무자비한 살수를 펼쳐 전 무림을 피로 씻고 있었다. 오죽 하면 다음과 같은 경구가 나돌 정도였다.


- 지옥성의 사자(使者)들을 만나지 마라. 그들과 마주친다는 것은 염라대왕을 알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중원의 동쪽에도 신흥(新興) 세력이 있었으니, 이른 바 잔혈맹이라 불리우는 단체가 그것이었다. 그들의 출발연원은 그저 단순한 살객(殺客)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동태산(東泰山)을 거점으로 하여 그곳에 상징성을 띤 거대 한 탑을 세웠을 때, 무림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살수집단(殺手集團)!

이것은 애초 그들이 내건 기치였으되, 현재는 아예 그들 자체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되어 버렸다. 여타의 단체들과는 달리 그들에게는 목적이 따로 없었다. 단지 그 들은 피에 굶주린 야수처럼 살인을 즐길 따름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적포적건(赤袍赤巾)을 두르고 있었는데 출신이나 나이는 물론 성별까지도 철저히 숨기고 행동했다.

자연의 법칙이 다 그렇듯 계절변화는 누구도 막지 못한다. 가을은 본시 짧거니와 어느덧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다. 산을 울긋 불긋하게 물들였던 단풍도 그 사이에 벌써 낙엽이 되어 흙 속으로 회귀(回歸)하고 있었다. 대지를 흥건하게 적셨던 혈흔도 다를 바 없었다. 서서히 몰아쳐 오는 한풍에 못이겨 싸늘하게 얼어붙어 버렸으니 말이다. 무영(無影)이라는 이름이 무림에 던져준 충격파는 컸다. 도의에 어긋나는 죄를 지은 자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왜냐하면 그 는 죄를 묻고 대가를 치르게 하는 심판자였으므로. 그는 말한다.

- 너는 네 그림자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 말에 따른 활약상은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로 대단했 다. 그는 중원 전역을 누비며 죄인들을 징벌했으되 살인만은 극도 로 자제하는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치죄는 대부분 상대에게 참담한 패배를 안겨주는 선에서 그 치곤 했는데 이 점에 대해 세인들은 각기 상반된 두 가지의 견해 를 가지고 있었다.

- 차라리 죽이느니만 못하다. 악의 씨앗이란 완전하게 제거하지 않으면 언제고 다시 발아(發芽)하게 마련이므로. - 무영, 그 같은 존재는 꼭 필요하다. 그의 독특한 철학은 종내 세상을 두루 밝혀 줄 것이다.

어쨌거나 장본인은 그런 논란이 일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 지 여전히 자신이 정해놓은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적(敵)도 무수히 많았다. 그를 증오하며 치를 떠는 자들은 거개가 혈붕성 등의 동서남북 사 패에 소속된 위인들이었다. 그의 존재로 인해 행하려던 일이 번번 이 저지되곤 했으니 이는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었다. 이런 배경을 가진 그가 향후로 어떻게 더 활동을 벌여 나갈지는 두고 볼 일이다. 시세(時勢)에 영합하는 불상사를 연출해 내지야 않겠지만, 보보(步步)에 위기가 중첩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닌즉 언제까지 건재할른지 의문인 것이다.

인생의 끝은 어디매뇨? 터벅터벅 걷노라면 언젠가는 다다르겠지 살며 사랑하며 즐거운 날들이 또 와주려는지


그대여 울지 말게나 저무는 석양도 내일이면 다시 떠오르리니 그대여 죽음도 두려워할 것 없다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거니 차라리 하늘을 향해 웃을진저, 세상은 어찌 저리도 아름다운가고......

황혼이 깃든 들판에 한 가닥 낭랑한 노래소리가 울려퍼졌다. 사위 에 내려앉기 시작한 어둠보다 그림자는 더 검었다. 주인의 낙천적 인 인생관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림자는 무척이나 외로워 보였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그림 자의 주인은 고독을 사랑하는 위인이었다. 그는 평범하게 생겼다. 일신에 걸치고 있는 백의도 그 범주에서 튀지 못한다. 약간 남다른 점이 있다면 기후를 무시하고 오른손에 낡은 섭선 하나를 들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동태산(東泰山)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림인 치고 동태산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산세가 거창하지도, 그렇다고 경관이 특별히 빼어난 것도 아닌 이 산이 그토록 유명해 진 이유라면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것은 당금 무림을 피로 물들이는 잔혈맹의 근거지, 즉 혈혈마탑 (血血魔塔)이 이 산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탑신에 피를 발라놓은 듯 짙붉은 빛을 띠고 있는 그 탑은 동태산 의 낙일애(落日涯)에 우뚝 솟아 있었다. 이제까지 수많은 협성(俠星)들이 잔혈맹이 일으키는 혈겁을 종식 시키기 위해 이곳을 찾아 왔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덧없이 피를 뿌리며 사라져 갔다. 그 뒤로 동태산역에는 자연히 뭇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기게 되었 다. 혈혈마탑에 속해 있는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누구고 그 근처에


는 얼씬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또 한 명의 인물이 오고 있었다. 무엇때문에 그가 자청하 여 이 험한 곳에 뛰어들려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전자에 그러했 듯 그도 동태산에 뼈를 묻으려는지......? 산기슭은 초입부터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범인(凡人) 같아서는 오를 엄두조차 내지 못할 험난한 곳이었다. 백삼청년만은 예외였다. 그는 별로 아름다울 것도 없는 주변의 풍 광을 감상하며 미끄러지듯 산을 오르고 있었다. 청년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암청색 을 띠고 있던 천공은 벌써 칠흑같이 캄캄해져 있었다. "쯧! 목적지에 당도하기도 전에 날이 저물고 말았군. 어차피 이렇 게 된 것, 일단 아무 곳에서나 쉬어야겠다." 그는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야색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쓸쓸한 시선을 어두운 허공으로 옮겨갔다. 시야에 잡히는 것은 무(無)였다. 달은 구름에 가렸는지 빛을 발하 지 않았고, 몇 개의 가물거리는 별빛에 의존하여 건네다 본 세상 은 그저 적막한 암흑의 공간일 따름이었다. 그는 천무영이었다. 일시지간 그의 눈이 본래의 색채인 푸른 빛을 내비쳤다. 그에게도 분명 자신이 의식되는 순간이 존재했으므로. 한동안 천무영은 마음이 동하는 곳이면 어디고 서슴치 않고 그 땅 을 밟곤 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중원 각처를 주유하게 되었는데 아무 때고 진면목을 드러내는 일은 회피해 왔다. 그는 산정(山頂)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분명 그는 잔혈맹의 살수 중 한 명일 것이다.' 천무영은 뇌리에 한 인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사실일 확률이 높았다. 그것은 그가 상대의 독특한 살인수법을 통 해 내린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늘 그랬듯 급하게 서두르지는 않았다. 어떤 연유로 혈혈마탑 을 찾아오게 되었건 우선은 밤이슬을 피해야 했고, 현 상황에서의


그는 이 일을 가장 중시했다. 주위를 살피던 그의 눈에 한 가닥 이채가 떠올랐다. 검은 흑암의 덩어리가 뭉쳐져 있는 듯한 숲 속으로부터 가물거리는 작은 불빛 을 발견했던 것이다. '음, 인가(人家)일 리는 없고.......' 스슷! 신형을 날린 그는 검은 숲으로 스며들었다.

사당(司堂). 숲 속에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는 것은 한 채의 사당이었다. 흔해 빠진 산신묘로서 향화는 끊긴 지 오래인 듯했다. 지붕에는 구멍이 뻥 뚫려 있었으며 인적이 닿지 않아 그런지 여기 저기 잡초가 무성한 가운데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후후... 짐승들의 거처로도 쓰기가 어렵겠군.' 이것이 사당의 주위를 둘러본 천무영의 소감이었다. 그래도 바깥 에 비하면 내부는 별세계라 할 수 있었다. 타닥... 타다닥......! 장작 타는 소리가 고적한 사당 안을 울리고 있었다. 뜻밖에도 한 가운데에서 모닥불이 기세좋게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곁으로는 두 명의 소년소녀가 불을 쬐고 있는 것도 보였다. 둘 다 일신에 허름한 마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행색이나 분위기로 미 루어 아마도 근처 화전민의 자식들인 모양이었다. 소년은 겨우 칠, 팔 세 남짓해 보였으나 그에 반해 소녀는 제법 어른 티가 나는 것이 십오, 륙 세쯤은 된 듯했다.


휘이이잉―! 밖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는 다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래서일까? 소년이 몸을 잔뜩 움츠리며 소녀에게 물었다. "누나, 추워?" "난 괜찮아. 걸아(乞兒), 네가 추운가 보구나." 소녀는 물을 것도 없이 그대로 어린 동생에게로 다가가더니 어머 니를 대신하듯 다정하게 품어안아 주었다. 사실 사당 안은 그리 춥지 않았고, 이로 미루어 그녀는 일찌감치 여인 특유의 모성본능에 눈이 뜨여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용모도 꽤 반듯했다. 산골에 사는 소녀답지 않게 피부가 하얗고 깨끗했으며 한 쌍의 눈은 봉목(鳳目)이었다. 서늘한 그 눈 속에서 모닥불의 불빛이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거친 마의에 감싸인 채 봉긋 솟아있는 가슴이나 잡초를 깔고 앉은 펑퍼짐한 둔부에서는 성숙한 여인의 냄새도 풍겼다. 그 정겨운 분위기를 깨고 하나의 인영이 날아들었다. 휙! 그는 인상이 무척이나 험상궂은 자였다. 야풍(夜風)에 흑의자락을 펄럭이고 있는 장한의 모습을 보자 오누 이는 겁을 집어먹었는지 몸을 잔뜩 옹송그렸다. "휴우! 마침 불을 피워 놓았군. 얘들아, 이 아저씨도 불을 좀 쪼 일 수 있겠느냐?" 흑의장한은 의사를 물어보기는 했으나 대답은 들을 생각도 없는 듯 거침없이 모닥불의 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소년이 불안한 표정이 되어 누이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것은 어 찌 보아도 거절하기를 종용하는 몸짓이었다. 흑의장한도 이를 눈치채고는 소년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너, 설마 이 아저씨가 불을 쬐는 게 싫은 건 아니겠지?"


기세에 눌려 소녀가 얼른 갖다붙였다. "그... 그럴 리가요? 거... 걸아는 착한 아이예요." "음, 당연히 그래야지." 흑의장한은 흡족한 미소와 더불어 모닥불에 손을 녹이기 시작했 다. 와중에 그는 이따금씩 번들거리는 시선으로 소녀의 몸을 훑어 보기도 했으나 다행히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거북한 시간이 그들 세 사람의 곁을 말없이 흘러갔다. 화르륵! 타닥....... 모닥불은 불똥을 튕겨내며 더욱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덕분에 사당 안도 종전보다 한층 더 훈훈해져 있었다. 따라서 긴장도 대충 풀렸는지 오누이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잠시 후에는 서로 몸을 기댄 채 모로 쓰러져 누웠다. 을씨년스러운 바람결을 뚫고 어디선가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처량 맞게 들려왔다. 산신묘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으음, 뜨거워......!" 소녀가 문득 낮게 읊조리며 몸을 뒤척였다. 잠결에도 불기운이 너 무 바짝 느껴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눈도 뜨지 않고 팔꿈치로 기 어가 동생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드러누웠다. 그 바람에 그녀의 치맛자락이 약간 걷혀 올라가 뽀얀 종아리를 드 러냈다. 흑의장한의 표정이 일변한 것은 그때였다. "흐흐흐......." 그는 괴이쩍은 웃음을 흘리며 소녀의 종아리를 바라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모닥불의 붉은 빛이 투영되자 그녀의 종아리는 위 험스러울 정도로 육감적인 색감을 띠고 있었다. 장한은 슬며시 손을 뻗어 소녀의 종아리를 어루만졌다. 하지만 그녀는 순간적으로 몸을 꿈틀했을 뿐 깊은 잠에 빠진 듯 깨어나지는 않았다.


"쩝! 귀여운 것." 흑의장한은 입맛을 다시며 소녀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눈 에는 벌써 욕정의 불길이 당겨져 있었다. 그는 별로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소녀의 치마 속에 손을 밀어 넣 더니 허벅지 어림까지 더듬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으응?" 급기야 소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 "뭐... 뭐하는, 읍!" 그녀는 기겁을 한 나머지 냅다 소리를 질렀으나 사내의 커다란 손 에 입이 틀어막혀 중도에서 그쳐야 했다. "더 고함을 쳤다간 너는 물론 네 동생도 죽을 줄 알아라." "으으......!" 소녀가 공포에 질려 눈으로 긍정의 뜻을 표하자 흑의장한은 그제 서야 그녀의 입에서 손을 떼었다. 그는 뜨겁고 거친 숨을 몰아쉬 며 소녀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얌전히만 있으면 된다, 넌." "아!" 소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되는 것을 보면서도 흑의장한은 탐욕 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치마를 걷어올렸다. 소녀는 추위를 막기 위한 방편인 듯 치마 속에 두툼한 속바지를 껴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내의 무지막지한 손길에 따라 단 번에 훌러덩 벗겨져 나갔다.

"사... 살려 주... 세요!"


그녀는 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듯 더듬거리며 애원했다. "누가 너를 죽인다고 했느냐? 나는 다만 너에게 좋은 것을 가르쳐 주려고 할 뿐이다. 흐흐흐......." 흑의장한은 여리고 흰 소녀의 속살을 주물러대며 지극히 만족스러 운 웃음을 흘렸다. 그는 소녀의 치마를 허리까지 뒤집어 올리더니 무명으로 된 고의 하나만을 달랑 걸치고 있는 그녀의 하반신을 잡 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흐으! 정말 죽여 주는구나." 잠깐의 감상(?) 뒤로 흑의장한의 손은 소녀의 고의 속으로 파고들 어갔다. 졸지에 가장 은밀한 곳까지 허용하게 된 그녀는 안색이 흑빛이 된 채 입술을 떨며 부르짖었다. "제... 제발... 이러지 마세요."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흑의장한은 그녀의 어떤 반응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남은 한 손을 움직여 소 녀의 가슴에서 옷고름을 풀어내고 있었다. "여기도 잘 익어 있겠지?" 흑의장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이의 목적도 달성했다. 소녀의 꽃 봉오리 같은 육봉을 덥썩 움켜쥐었으니 말이다. "악!" 소녀의 입에서 뾰족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아픔도 아픔이려니와 너무도 충격이 큰 탓이었다. 그 소리는 옆에서 곤히 자고 있던 소 년을 깨워 놓았다. "으음......." 소년은 주먹으로 눈을 부비며 누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엉?" 그는 멀뚱해진 채 몇 번인가 눈을 껌벅거렸다. 누이가 거의 발가 벗은 채로 바닥에 누워 있다던가, 사내가 그녀의 몸을 떡주무르듯 하고 있는 등의 아연한 행태를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도 흑의장한은 손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소년 이 깨어난 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기어이 소녀의 고의를 뜯어냈다. 부욱! "아아......!" 소녀의 입에서 절망에 찬 탄식성이 새어나왔다. 이후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뻔한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곁에서 흑의장한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녀의 아랫도리를 노려보며 바지춤을 후다닥 까내리고 있었다. "자! 기대해라, 이 어르신이 너를 황홀경으로 인도해 주마." 그는 음충맞은 웃음과 함께 난폭하게 소녀를 덮쳐갔다. "아악!" 소녀의 입에서 급기야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런데 그 찰나였다. 시뻘건 불꽃이 이글거리는 장작 하나가 막 행위에 돌입하려는 흑의장한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츠읏! "죽엇! 나쁜 놈." 소년이었다. 그가 마침내 누이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죽기살기로 덤벼든 것이었다. '앗차!' 흑의장한은 장작개비가 날아오는 것보다 소년의 외침을 먼저 듣고 는 그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고, 그 바람에 돌이킬 수 없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팍! "으헉!" 흑의장한은 자신도 모르게 한쪽 눈을 움켜쥐며 소녀의 몸에서 튕 겨져나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불붙은 장작이 재수없게 하필


그의 한쪽 눈을 상하게 했던 것이다. "이... 이 죽일 놈......!" 그는 벌떡 일어나 소년을 향해 일 장을 후려쳤다. 펑! 소년은 그의 장력에 가슴을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소년은 피분수를 뿜으며 날아갔다. 그의 어린 육신은 사당의 한귀퉁이에 무참하게 처박혔다. 퍽! "걸아야―!" 소녀는 피를 토하듯 울부짖었으나 흑의장한의 기세가 워낙 험하다 보니 공포로 인해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크으으! 내 너희 연놈들을 죽여 포를 뜨리라." 그는 살기가 번뜩이는 한쪽 눈으로 차디찬 땅바닥에 누운 채 벌벌 떨고 있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사... 살려 주세요! 흐으윽......!" 하지만 흑의장한의 눈에서 떠오른 것은 무서운 욕정일 따름이었다.

일말의 가학성까지 겸한

"악!" 소녀가 눈을 휩뜨며 비명을 발했다. 흑의장한이 종전보다 훨씬 더 흉험한 기세로 그녀를 찍어 눌렀던 것이다. "완전히 짓밟은 후에 죽여주마. 내 네년은 특별히 가랑이를 찢고 가슴을 도려낼 테다. 흐흐......!" 그가 웃자 불길이 닿아 일그러져 버린 한쪽 눈이 춤을 추듯 마구 씰룩였다. 공포감을 자아내는 그 섬뜩한 눈짓은 다행히도 그리 오 래 가지는 못했다.


"쯧! 망측해서 못봐주겠군." 한 가닥 음성이 사당 밖으로부터 들려왔다. "헉!" 흑의장한은 질겁을 하며 튕겨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웬 놈이냐?" 그는 문쪽으로 뛰어가더니 무작정 수중의 도를 떨쳐냈다. 따당! 그의 도가 무엇엔가 부딪혀 금속성을 울렸다. 그러나 그 뒤를 이 은 것은 그 자신의 비명이었다. "으악!" 흑의장한은 맥없이 뒤로 벌렁 넘어갔다. 그가 계획했던 겁간(劫 姦)이나 잔혹한 살인행위도 실행될 전망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순간 무공이 전폐(全廢)되었으므로. 그가 누구에게, 어떤 수법으로 당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그는 금후로 남은 힘이 있다면 오직 생을 영위하는데 써야 하리 라.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 만한 능력은 되지 못할 것이기에.

끼익―! 듣기 거북한 음향이 울리며 사당의 문이 빼꼼히 열렸다. 그 사이 로 일신에 백삼을 입은 한 청년이 들어섰다. 손에 섭선을 들고 있는 그의 기색은 전자의 일과는 무관한 것 같 았다. 그는 담담한 눈으로 사당 안을 둘러보았다. "쯧, 처참지경이로군." 청년은 인간이 어떻게 하면 그처럼 잔혹해질 수 있는가를 생각하 며 흑의장한을 향해 조용히 일지(一指)를 뻗었다.


"어엉?" 눈을 번쩍 뜨는 그에게 백삼청년은 일갈했다. "죽기 싫으면 썩 사라져라!" "우우우......!" 흑의장한은 두려움에 질린 채 비칠비칠 일어나더니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들고 꽁무니가 빠져라 달아났다. 옷도 채 걸치지 못하고 달아나는 그 모습이란 말 그대로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위인의 전형이었다. "저런 자는 길게 상대할 가치도 없다."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리는 백삼청년은 천무영이었다. 흑의장한에게 능욕을 당할 뻔한 소녀는 어느 틈엔지 혼절해 있었 다. 그는 무심히 소녀를 바라보다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 때까지 도 그녀는 알몸을 드러내고 있었으므로. 천무영은 바닥에 떨어져 불꽃이 사그라든 장작을 집어들었다. 어 린 소년이 용감하게 휘둘렀던 그 장작이다. 그것을 보자 그는 앞서 보았던 흑의장한의 찌그러진 눈과 연결시 켜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한심한 작자! 어린애에게 못보일 꼴까지 보였던 게로군." 천무영은 고개를 저으며 장작을 모닥불 속으로 던졌다. 그는 그다 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물론 소녀를 깨우기 위해서였다.

타닥... 화르륵―! 모닥불의 기세는 여전했다. 천무영은 그 옆에 상세를 돌보는 중이었다.

소년을 눕혀 놓고

소년은 중상을 입고 있었다. 가슴이 짓이겨져 뼈와 살이 뒤엉켜 있었던 것이다. 하긴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그가 내공이 실린 일 장을 얻어맞았으니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제 동생은... 살아날 수 있을까요?" 마의를 단정히 입은 소녀가 그의 뒤켠에 서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 었다. 천무영이 부드러운 어조로 그녀를 위로했다. "소(少)낭자, 안심해라. 피부가 상하고 늑골이 몇 대 부러지긴 했 으나 심맥은 끊어지지 않았으니 죽지 않을 것이다." "감사해요, 정말 공자가 아니셨다면 저희 남매는......." 소녀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제 설움에 겨워 눈물을 떨구었다. 그 러더니 그녀는 한참 후에야 떨리는 음성으로 덧붙였다. "소녀의 이름은 아란(阿蘭)이에요. 동생은 아걸이구요. 저희들은 부모님이 호환(虎患)을 당하시는 바람에 고아가 되어...y 외삼촌 댁으로 가는 중이었어요." 묻지도 않은 말까지 읊조리게 된 데에는 아마도 누군가에게 기대 고 싶은 심정이 작용했으리라. 그녀가 처해 있는 상황은 흑의장한 과의 사건이 아니더라도 이미 절박했던 것이다. "으음, 그랬었군." 천무영은 탄식과 더불어 소년의 혈도를 몇 군데 짚었다. 그런 연 후에야 그는 소녀 아란을 돌아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도 위로는 아니었다. "자, 이리 와서 동생의 몸을 좀 지탱시켜다오." "네." 아란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곧 시키 는 대로 아걸을 일으켜 앉히고는 어깨를 잡았다. 천무영은 아걸의 뒤로 돌아가 가부좌를 틀었다. "낭자는 그 자세에서 약간 옆으로 물러서야겠군. 동생에게 진기를 불어넣어야 하니까." 그는 아걸의 명문혈에 손바닥을 갖다 붙였다. 이어 그는 체내에 일으킨 진기를 장심에 모아 서서히 주입시켜 주었다. 그런데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아란의 눈이 순


간적으로 천무영을 향해 독랄한 빛을 띠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은밀히 중지를 창날처럼 꼿꼿하게 세우 더니 천무영의 머리 뒷부분 옥침혈을 찔러갔다. 스읏! 그것은 그야말로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누구고 진기를 운행하던 중에 급소를 공격당하게 되면 주화입마하거나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우연이었을까? "소낭자, 수건 있나?" 때마침 천무영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무심히 말했다. 그로 인 해 아란의 중지는 파르르 떨더니 그의 옥침혈 한 치 앞에서 딱 멈 추었다. 그녀의 얼굴이 되려 핼쑥해졌다. "네... 여기......!" 아란은 전신에서 진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으나 태연을 가장하느라 급히 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참, 잊었었군. 낭자도 기력이 많이 쇠했을텐데 내가 무리한 부탁 을 한 것이나 아닌지?" "아... 아니에요." 천무영은 받아든 손수건으로 아걸의 가슴에 엉켜붙은 피를 닦아냈 다. 아걸은 의식을 회복한 듯 비명을 터뜨렸다. "으윽! 아파......." 천무영은 그를 향해서도 담담하게 말했다. "소형제, 조금만 참아라."


아걸은 눈을 반쯤 뜨고 천무영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빛은 몹시도 천진해 보였다. 그는 작금의 상황도 납득이 잘 안되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 나쁜 아저씨는......?" "이분 공자님께서 쫓아 버리셨단다." 아란이 동생에게로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를 외삼촌 댁에도 데려다 주신댔어. 그렇죠?" 그녀는 일단 말을 해놓고 나서 간절한 눈으로 천무영을 바라보았 다. 그는 의외인 듯했으나 선선히 응해 주었다. "그렇다, 아걸. 이젠 안심하거라." "그 말 정말이죠? 아저씨는 좋은, 아앗!" 아걸은 신이 나서 손뼉을 치다 말고 비명을 질렀다. 아직까지는 마음껏 기뻐할 수도 없는 상태인 듯 그는 손을 움직이자 가슴이 결렸던 듯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천무영은 빙그레 웃었다. "나이에 비해 영리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헤헤... 가끔씩은 바보짓도 해요." 아걸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야지, 자고로 어린애는 어린애다와야 하는 법이니까." 천무영은 소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말했다. "좀 있으면 날이 밝을 것이다. 너희 두 눈을 붙이도록 해라."

명 다 그때까지만이라도

"알겠어요." 두 남매는 그의 말대로 각기 자리를 잡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다 만 그들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당혹을 그는 보았다.


천무영은 내심 착잡한 기분이 되어 중얼거렸다. '과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제대로 된 것일까?'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어쨌든 그러는 사이에 두 남매는 벌써 잠들어 있었다. 잠시 그들 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는 눈을 내리감았다. 무엇인가 나름대로 깊 은 생각에 빠져드는 듯.

아침은 언제나 신선하게 마련이다. 대개 눈부신 햇살과 함께 열리 는 아침은 싱그러운 느낌과 함께 희망을 안겨준다. 그러나 겨울에는 다르다. 그것도 뼈가 시릴 만큼 추운 날씨라면 긴 밤이 끝나고 찾아온 새빛도 별로 달갑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경물이 꽁꽁 얼어버린 숲 속. 그 가운데 자욱한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천무영은 아걸을 등에 업은 채 숲 사이로 난 길을 가로지르고 있 었다. 그의 발걸음은 다소 무거워 보였다. 옆에서는 아란이 불편 한 듯 다리를 절룩이며 걷고 있었다. 그는 아란남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삼촌이 산다는 곳 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 그곳은 혈혈마탑이 있다는 단장애 와 가까운 위치이기도 했다. 아걸이 그의 등에서 고개를 쑥 내밀며 말했다. "아저씨! 아걸은 이 다음에 커서 꼭 아저씨처럼 훌륭한 무사가 될 거예요." 천무영이 고개를 약간 뒤로 돌리며 담담히 물었다. "어째서 내가 무사일 거라고 생각하지?" 아걸은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아저씨가 그 나쁜 놈을 물리친 수법......!" 그는 말하다 말고 제풀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너는 그때 깨어 있었느냐?" 천진하던 소년은 물음에도 움찔할 뿐 답하지 못했다. 곁에 있던 아란이 그를 대신하듯 재빨리 얼버무렸다. "그렇게 짐작을 한 것이겠지요." 천무영은 피식 웃었다. "무인이 되는 것은 좋은 일만은 아니란다." "왜요?" 잠시 움츠리고 있던 아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천무영은 짐짓 인상을 찌푸리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무인의 삶이란 칼끝에 서 있는 것과도 같단다." 그는 아걸의 이해도를 감안해서인지 그 뒤에 덧붙여 간단한 설명 도 해주었다. "무릇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하는 법이고, 남을 해치려던 자는 반드시 해침을 당하게 되어 있다. 어쩌면 땅을 벗삼아 사는 농부 처럼 단순한 삶이 가장 행복한 것인지도 모르지." 아걸도, 그의 누이인 아란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둘 다 안색이 굳어져 있는 것만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아직 멀었느냐?" 천무영이 심각해진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화제를 돌렸다. "다 왔어요. 저기 보이는 산 하나만 넘으면......." 그의 옆에서 아란이 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리켜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음, 길을 잘 알고 있어 다행이구나. 아주 어릴 때 한 번밖에 가 본 적이 없다면서."


아란은 뭐라 변명도 못하고 고개를 푹 떨구었다. 옆얼굴이 울긋불 긋한 것으로 미루어 어지간히 당황한 모양이었다. 와중에서도 그녀의 눈만은 섬뜩하도록 예리한 광채를 발했으나 그 것은 너무도 짧은 찰나인지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 어색한 침묵은 작은 사고로 인해 깨졌다. "어맛!" 아란이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앞으로 넘어졌던 것이다. "저런......!" 천무영이 막 한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하려 할 때였다. 슉! 한 줄기 파공성이 긴장된 공기를 갈랐다. 아걸이 어느 틈엔지 비 수를 뽑아들고 그의 뒷통수를 내리찍은 것이었다. 그러나 소년의 악랄한 공격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 순간에 천무영은 쓰러져 있는 아란을 잡아 일으키고 있었는데, 이를 위해 그는 이미 고개를 틀어 공격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파팍! 목표물을 잃은 비수는 길 가장자리로 늘어진 소나무 가지 하나를 자르는 데서 움직임을 그치고 말았다. "쯧! 조심할 것이지." 말을 하는 중에도 아란을 부축했던 천무영의 손은 눈부신 속도로 그 소나무 가지를 잡아채고 있었다. 단, 그의 소매 속에서 한 마 리의 검은 뱀이 딸려나온 것은 누구도 보지 못했다. 이윽고 그가 슬며시 손을 펴자 잘려진 나뭇 가지와 함께 뱀은 두 동강이 난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때에 아걸은 그의 등에서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상 대가 자신의 암습을 교묘하게 피해내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태 연하게 업혀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무영은 천천히 돌아서더니 겁을 먹고 비칠비칠 물러서는 아걸에 게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뱀을 툭 차 보였다. "고맙구나. 뱀이 있을 줄은 몰랐다. 겨울에도 땅 속으로 들어가지 않은 놈이라면 필시 독종(毒種)일텐데 말이다." '맙소사! 대체 언제 뱀까지 동원했단 말인가?' 아걸은 질려버린 듯 굳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영악하기 짝이 없는 소년이었다. 그는 금세 안면 가득 천진한 미소를 떠올리며 이렇게 응수해 왔다. "헤헤... 뭘요, 뱀이 아저씨를 노리기에 다급해서......." 천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고 보니 너는 칼을 제법 쓰는구나." 그 말은 아란이 받았다. "아걸은 늘상 비수를 가지고 놀곤 했어요. 위험하다고 부모님께 야단도 많이 맞았었는데 이런 때엔 도움이 되는군요." 그녀의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대고 천무영이 말했다. "알겠다. 갈 길이 바쁘니 서두르도록 하자꾸나." 그는 아걸을 향해 등을 내밀었다. "자, 어서 업히도록 해라." 천무영은 아걸을 업더니 아란의 손목을 잡고 몸을 날렸다. 휘익―! 세 사람은 한 덩어리가 되어 아침 안개가 자욱이 낀 숲을 가르고 있었다. 기쾌무비하게 날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은 절로 감탄사가 나올 만큼 신선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야아!" 아걸은 신명이 난 듯 고함을 지르며 팔을 내저었다. 그런 그의 손 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쥐어져 있었다.


아란은 아란대로 계속 그에게 눈짓을 하고 있었다. 그 신호에 따 라 아걸은 수도 없이 비수로 천무영의 요혈을 찌르려 했다. 사실 그는 아까부터 괜히 팔을 내젓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아걸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무려 서른네 번이나 비 수를 휘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천무영은 우연을 가장하여 그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냈던 것이다. 확실히 그들 남매는 불운했다. 그토록 머리를 굴리고 수를 써도 한 사람을 놓고 어쩌지를 못하니 말이다.

■ 무영탑 2 권 제 17 장 그를 위한 사육제(謝肉祭)

아란, 아걸 남매와 함께 천무영이 당도한 마을은 단장애에서 약 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은 일종의 분지로서 거기서부터는 관목림이 우거져 있었다. 입구에서 본즉 좌측으로 엉성하게 지어진 띠집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것은 누가 보아도 영락없는 사냥꾼 부락이었다. 한겨울이었지만 빼쪼롬이 내리쬐는 한 줌 햇살은 그래도 얼마간의 포근함을 가져다 주었고, 마을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밥짓는 연기 가 인간 세상의 온정(溫情)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에 반해 미심쩍은 구석도 없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십여 채의 가호가 있는 부락 치고는 너무도 조용했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의례 있음직한 소음들이 여기에는 일체 없었다. 하긴 사람 자체가 한 명도 보이지 않으니 그것은 어쩌면 논할 바 가 못되는지도 몰랐다. 그 근처에는 어찌된 셈인지 눈을 씻고 보 아도 사람은커녕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으니까.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천무영은 줄곧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침 묵에 감염이 된 듯 아란남매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 삼 인이 빚어내던 어색한 공기는 마을 안으로 깊숙이 접어든 후에야 해소되었다. 아걸이 외쳤던 것이다.


"야! 드디어 다 왔나봐요." 아란도 손가락을 내밀며 탄식하듯 한마디 거들었다. "저 가운데 있는... 집이에요." 천무영은 눈썹을 꿈틀 했다. 그들이 가리키는 띠집은 다른 집들에 비해 규모가 약간 컸는데, 문제는 나머지 이십여 채의 집이 그 집 을 은연중 포위한 형세라는 점이었다. 그는 아란 남매의 안내에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제서야 이집 저집의 창문들이 빠꼼히 열리더니 그 사이로 다수 의 사람들이 얼굴을 드러냈다. 그들은 저마다 기이한 눈으로 그를 관찰하듯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천무영은 그들 시선의 벽을 뚫고 띠집 앞에 당도했다. 아란이 재 빨리 뛰어가 문을 두드렸다. 쿵, 쿵, 쿵......! 그러자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모습을 보였다. 그는 오순 정도 되 어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인물이었다. 아란이 그를 보자마자 뛰어들듯 안겼다. "외삼촌, 저희들이에요. 흐흐흑......!" "아란!" 그녀가 울음부터 터뜨려서인지 노인은 멍한 표정이었다. 그는 잠 시 후에야 아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네가 여기에는 웬일이냐?" "그... 그것이... 흐흑! 호환을 당하는 바람에......." "뭣이?" 노인은 대경하여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 그럼 설마... 네 부모가 죽기라도 했단 말이냐?" 아걸이 천무영의 등에서 내려와 그에게 달려들었다.


"무서워요, 외삼촌. 어머님과 아버님은 호랑이에게......!" "세상에! 이런 날벼락이 있나?" 노인은 조카들을 양 팔로 품어안으며 넋을 잃었다. "그래... 잘들 왔다. 내 바빠서 한동안 찾아가 보지도 못했거늘, 그런 기막힌 일까지 일어나고 말았구나." 그의 얼굴에도 어느덧 짙은 비감이 떠올라 있었다.

방 안은 매우 조촐했다. 사냥꾼의 거처답게 바닥에는 손질이 덜된 모피가 깔려 있었다. 탁 자를 비롯한 가구들도 모두 원목으로 된 것이었으며 직접 제작한 듯 짜임새가 잘 맞지 않아 어설퍼 보였다. 아란 남매의 모친과 한 핏줄인 이 노인의 이름은 장자유(張子柔) 라고 했다. 그는 조카들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라며 천무영을 극진히 대접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내 공자를 위해 밤에는 크게 잔치를 벌일까 하네. 마침 오늘은 사냥 나갔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오는 날이니 함께 어울려 주시게 나. 그들도 공자를 보면 틀림없이 반가워할 게야." 천무영은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니 고맙소이다, 노인장." "고맙다니, 그 무슨 당치 않은 말을? 우리가 입은 은덕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네." 장자유는 치하를 거듭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따라 오시겠나? 밤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내 쉴만한 곳으로 모시겠네. "


그는 천무영을 다른 정실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원목으로 만들어 졌으되, 커다란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다. 푹신한 모피가 덮혀 있어 의자는 더없이 편안했다. 천무영은 그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눈을 내리감았다. '이 마을의 촌장(村長) 직을 맡고 있다는 장자유 노인... 그는 내 내 평범을 가장하고 있으나 절대 그렇지 않다. 그 점에 있어서는 여타의 인물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의 뇌리에는 낮에 창문을 통해 본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선명하 게 떠올랐다. 눈빛으로 미루어 그는 결코 그들을 일반적인 사냥꾼 들로 여기고 넘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눈빛에서는 야성(野性) 외에 별도의 색채가 느껴졌었다. 엄격한 훈련을 거쳐 극도로 절제된 듯한.' 그는 생각의 연결고리를 아란남매에게로 돌렸다. '그들 남매는 나이에 비해 너무도 영악하다. 나에게 무수히 암습 을 가하고도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했었다.' 천무영은 도로 눈을 뜨더니 천정을 응시했다. 무슨 작정을 했는지 그의 입은 더욱 굳게 다물려졌다. 그 순간에 그의 머릿 속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맴돌고 있었다. '잠시 후면 날이 저물고 잔치가 벌어지겠지. 표면상으로는 나를 위한다는 명목이나 그것은.......' 둥! 둥! 둥―! 연속해서 울리는 북소리가 산중의 밤을 점차 가열시켰다. 횃불들 이 도처에서 부락 전체를 환하게 밝히우고 있었다. 축제는 거창했다. 넓은 마당의 한가운데에서는 거대한 짐승이 통 째로 불에 구워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중심으로 줄잡아도 백여 명 에 이르는 사람들이 빙 둘러앉아 있었다. 개중 몇몇 사람은 신명이 오른 듯 일어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그간의 회포를 풀기 위 해 토주(土酒)를 마구 퍼마시기도 했다. 천무영은 그 광경들을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장 자유와 함께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축


제의 주인공이다 보니 그리 된 것이다. "헛허... 공자, 시끄럽기만 했지 준비한 것은 별로 없네. 그저 성 의로 알고 마음껏 드시게나." 장자유가 얼굴이 붉어진 채 연신 술을 권해 왔다. 천무영도 사양 하지 않고 그가 따라주는 대로 계속 받아 마셨다. 아란남매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두두둥둥......! 북소리가 문득 가슴이 진동할 정도로 빨라졌다. 그것을 계기로 사 냥꾼들은 너도 나도 일어나 괴이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에는 감산도에서 귀두도(鬼頭刀), 장창(長槍), 탄궁(彈 弓) 등 각종의 무기가 들려져 있었다. 술기운 탓인지 그들은 안색 은 물론 눈까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저마다 팔다리를 휘젓고 몸을 흔들어 대고 있으니 그것은 일편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광경이었다. "헛헛... 어떤가? 저들은 비록 비천하다는 수렵에 의존해 살아가 고 있지만 나름대로 충직하기 이를데 없는 자들이지." 장자유는 유쾌한 듯 들뜬 음성으로 말했고, 그에 반해 천무영은 술을 들이키며 담담히 응수했다. "본인의 소감을 이르자면 약간 다르오이다. 범의 용맹에 늑대의 영활함이 겸비된 인물들 같다고나 할까? 후후후......." "그렇게 보아 준다니 고맙군." 장자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자, 우리가 귀빈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선물이 있네." 그는 장내의 한가운데를 향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에 따라 미리 대기하고 있던 네 명의 장한이 통째로 구워진 예의 짐승을 떠메고 천무영에게로 다가왔다. 쿵! 거대한 짐승구이가 그의 앞에 있는 제단(祭壇) 위에 놓여졌다. 곁


에서 장자유가 자랑스러운 듯 말을 건네왔다. "이것은 황상께서도 맛보지 못한 진품요리일세. 겉의 고기는 동태 산의 신령이라는 백호(白虎)를 구운 것이지." "호오! 호랑이 고기도 먹소이까?" 천무영은 신기했던 나머지 고개를 움직여 백호구이를 이리저리 훑 어 보았다. 그 모습에 장자유는 껄껄 웃었다. "그 속에 곰이 한 마리 들어 있다면 믿겠는가?" "설마......?" "실은 곰의 뱃속에도 뭔가 들어 있다네. 그게 무엇인지 한 번 알 아맞춰 보겠는가?" "글쎄올씨다?" 천무영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충 갖다붙이듯 말했다. "혹 늑대가 아닐런지......?" "헛헛... 바로 맞추었네. 늑대의 뱃속에는 산양이 들어 있지. 또 그 속에는 무엇이 있겠는가?" 장자유는 일순 안색을 굳히며 천무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 제까지와는 달리 자못 진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 속은 공자가 직접 열어보도록 하시게. 이 의식이야말로 귀빈 께 대한 최대한의 예우일세." 천무영은 빙긋 웃었다. "그리 말씀하시니 너무 황송한 느낌이외다." "부디 사양치 마시게. 여기 목도(木刀)가 있네." "흐음?" "왜 목도냐고 묻는 거겠지? 안심하게. 푹 익어 쉽게 갈라질 뿐만 아니라 쇠 성분이 닿지 않아야 제맛이 나는 법이네." "음, 알겠소이다."


목도를 받아든 천무영은 몸을 일으켰다.

둥둥둥둥―! 북소리는 더욱 더 강하고 빨라져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거의 모 든 사람들이 일어나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기도 했다. 그 행태란 광란에 가깝다면 맞을 듯했다. 천무영은 목도를 들어 짐승구이에 갖다댔다. 그에 따라 북소리가 급촉해지고 사냥꾼들의 눈에는 열기가 피어올랐다. 스스슥! 마침내 백호의 배가 갈라졌고, 향육(香肉) 내음과 함께 과연 그 속에서는 한 마리 거대한 곰이 나타났다. "와아아아―!" 사냥꾼들이 일제히 함성을 발했다. 그들을 향해 천무영은 빙긋 웃 어 보인 뒤, 곰의 배를 갈랐다. 툭! 장자유의 말대로 이번에는 늑대가 나왔다. 두두두둥―! 계속해서 울리는 북소리는 전장에서 적들을 격살하라는 신호음과 도 같았다. 그런 느낌 가운데서 천무영은 늑대 배를 갈랐으며, 그 속에서 잘 익은 산양(山羊)을 구경할 수 있었다. 문득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솟았다. 곧이어 땀방울은 그의 볼을 타고 목도 위로 떨어져 내렸다. 치칙......!


경미한 음향과 함께 땀방울은 기이하게도 목도에 닿자마자 기체가 되어 증발해 버렸다. 그러나 이 뜻밖의 광경을 본 사람은 천무영 외에 아무도 없었다. 목도가 아주 천천히, 산양의 배를 갈라갔다. 두두두두둥―! 북소리가 드높아지며 백여 명에 이르는 장한들 모두가 천무영에게 로 번뜩이는 시선을 모았다. 그런데 산양의 배가 막 갈라지던 그 순간이었다. 쐐애액! 놀랍게도 한 자루의 검이 그 속에서 번쩍 하며 솟구쳐 올라와 천 무영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놈! 네가 바로 이 사육제의 제물이었다." 파앗! 때맞추어 목도 또한 아래에서 위로 빠르게 그어졌다. 그것은 그야말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한 올을 움켜잡듯 지 극히 허망해 보이는 동작이었다. 진검(眞劍)과 목도의 대결이라면 어차피 승부는 뻔하지 않은가 말이다. 파팍! 격돌음과 함께 진검과 목도가 맞부딪쳤다. "와아아아―!" 기다렸다는 듯 사위에서 광기에 찬 함성이 일어났다. "으아악!" 고막을 찢을 듯 처절한 비명이 인 것은 그 직후였다. 동시에 피분 수가 뿜어져 허공을 시뻘겋게 수놓았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사냥꾼들의 눈에 광적인 희열이 떠올랐다. 적 어도 그들의 생각으로는 천무영의 육신이 머리끝서부터 가랑이까 지 정확히 쪼개져 있으리라 여겼으므로.


그러나 취중에도 그들은 곧 볼 수 있었다. 쿠쿵! 두 쪽으로 갈라져 쓰러지는 자는 천무영이 아니라 그들이 오늘의 사육제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살수였다는 것을. 키라야 사, 오 척밖에 되지 않는 그들의 살수는 목도와 진검이 부 딪치는 순간 검과 함께 양단되어 버렸던 것이다. 난쟁이 살수의 처참한 주검은 부락민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충 격을 가져다 주었다. 오죽하면 그들은 눈으로 뻔히 보고 있으면서 도 그 일을 선뜻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장자유의 살벌한 외침이 그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뭣들 하느냐? 쳐라―!" 춤추기 위한 도구로 쓰이던 고자 분연히 떨쳐졌다.

갖가지 무기들이 본래의 용도로 쓰이

쉬쉭! 차차창―! 백여 명에 달하는 사냥꾼들이 천무영 한 사람을 노리고 일제히 공 격해온 것이었다. 스읏! 천무영의 신형이 뿌옇게 흐려지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바야흐로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은 그의 수중에 들려진 목도였다. 휘류류륭―! 목도의 도기(刀氣)는 대번에 거대한 회오리를 일으켰다. 그 바람 에 그를 향해 일차적으로 발출되었던 탄궁(彈弓), 강전(强箭), 비 도(飛刀) 등의 암기들은 남김없이 튕겨져 나갔다. "으악! 컥......!" 사냥꾼들 중 다수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거나 휘청거렸다. 불행 하게도 암기들은 눈이 없는 고로 본래의 주인에게도 발출 시와 마 찬가지로 무섭게 쏘아가 틀어박혔던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공세가 약화되지는 않았다. 재수없이 그 참에 정신을 잃은 자들을 제외하고는 이내 기세를 회복한 듯 살벌하게 재공격을 시도해왔기 때문이다. 천무영은 어느덧 지면으로 내려서서 취팔선대나이보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는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면서도 물 흐르듯 유연하게 사냥꾼들 사이를 누볐다. 그들도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제각기 전력으로 천무영을 향 해 병장기를 휘두르며 짓쳐들고 있었다. 쉬쉭―! 츠츠으― "크헉! 큭―!" 천무영의 취무(醉舞)는 연신 장한들의 비명으로 이어졌다. 그는 일신으로 날아든 도검이 살갗과 불과 머리털 한 올 차이로 근접했을 때에야 몸을 틀곤 했다. 그러면 상대방은 영락없이 오류 에 빠지고 만다. 그를 찔렀다고 믿는 순간 섬전처럼 뻗어온 목도 에 자신들의 목을 허용해야 되었기에. 그런 식으로 천무영은 삽시에 사십여 명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더 이상 장내에 피를 뿌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장한들의 목을 베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고, 그럴 마음도 없 었다. 그저 그들의 혈도만을 찔렀을 뿐이었다. 아무튼 시종 일방적이던 전세는 종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 때를 기해 또다른 사태가 야기되었다.

파파팟―! 천무영의 발밑 땅이 솟구치며 비장의 무기인 듯한 칠 인의 살수가 솟아 올라왔던 것이다.


"하하... 환영한다, 잔혈맹의 엽살수들!" 천무영은 대소와 함께 수중의 목도를 휘저었다. 탓탓탓타― 전법이 바뀌어 요란한 격타음이 일었다. 그의 목도는 기막히게도 일곱 명의 엽살수들을 개패듯 두들겨 패고 있었다. "크윽! 컥......!" 그것은 개방과의 인연 탓이었다. 그 타격법은 바로 복마신개의 복 마칠십이로(伏魔七十二路)였다. 그런 연후, 천무영은 신형을 움직여 유희라도 즐기듯 엽살수들을 비롯한 장한들의 혈도를 차례로 짚어갔다. 관전중이던 장자유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부르짖었다. "저... 저럴 수가......!" 슈슉! "큭!" 마지막 장한이 거꾸러지는 것도 그는 보았다. 그 앞에서 천무영이 목도를 세워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미소를 짓 고 있었다. 그는 무려 백여 명의 장한들을 혼자 요리했건만 어찌 된 셈인지 숨결 하나 흐트러져 있지 않았다. 그가 장자유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으음!" 장자유는 목상처럼 굳어진 채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의 일 보 앞까지 이른 천무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사육제는 끝났소. 제물이 바뀌어 유감이오만." "그건 나도 심히 유감이네." "그렇겠지. 내 이름이 잔혈맹 살인명부에 올라 있었소?"


장자유는 만면에 체념을 떠올리며 짧게 대답했다. "그렇네." "아란과 아걸은 친남매가 맞소?" "물론." 천무영이 재차 물었다. "그들이 나를 죽이기 위해 겪어야 했던 일도 알고 있소?" 장자유는 질문의 요지를 깨닫고는 입이 달라붙은 듯 아무 말도 하 지 못했다. "그래서는 아니되는 일이었소. 고육계(苦肉計)도 아직 배워나갈 것이 많은 어린 아이들이오."

좋지만 그들은

천무영의 엄중한 질책에 그는 눈을 내리감았다. "더 듣고 싶지 않으니 어서 나를 죽이게." "쯧! 당신이 죽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소. 어차피 당신의 존 재란 잔혈맹 내에서는 미미하니까." 장자유의 눈이 도로 뜨였다. "내게 모욕을 주면 달라질 게 있는가? 아서게. 잔혈맹인들에게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똑같은 신조가 있다네." "후후... 본인이 당신을 징계하지 않으려는 이유도 실은 그때문이 외다. 그 대단한 신조를 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나는 잘 알고 있소." "그... 그럼......?" 천무영은 목검을 그에게 내밀었다. "자, 받으시오." 장자유는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들고는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갖고 가 전하시오. 그렇지 않아도 혈혈마탑에 오를 참이었으니


애쓰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라고 말이오." 낮았으나 그 음성에는 천 근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이를 느낀 장 자유가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천무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내 목적은 단 두 가지뿐이오." 그는 자신의 얼굴에 고정되어 를 띤 채 말을 이어갔다.

있는 장자유의 시선을 느끼며 미소

"첫째는 당신들의 살인청부업을 중지시키는 것, 또 한 가지는 잔 혈맹주를 만나 겨루는 것이오." 장자유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말도 안되는......! 그것도 단신으로 그 두 가지 일을 해결하러 가겠단 말인가?" "후후... 본인에 대한 염려를 해 주는 것이라면 사양하겠소. 난 언제고 혼자 움직여왔으니까." 장자유는 할 말이 없는 듯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가 생각하기로 도 상대는 나이와는 별개로 무공에서든, 신념에서든 자신이 넘볼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기에. 천무영이 말했다. "잔치도 파장난 것 같으니 그만 사람들을 깨우는 것이 어떻겠소? 이곳 사람들을 관장하고 보살피는 것이야말로 당신 본연의 임무일 텐데, 아니었소?" 장자유가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 그렇다면 저들은......?" "그렇소. 제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살아 있소." "오오!" "본인은 내일 아침 해가 뜰 때 혈혈마탑에 오를 것이니 이 말도


함께 전해주시오." 장자유는 감격한 듯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오늘밤에는 어디서... 지낼 작정이신가?" "나는 원래 이곳의 귀빈이었지 않소? 주인이 쫓아내지 않는 한 여 기서 유할 것이외다." 천무영은 어느덧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우선은 술을 마시고 싶구려."

그는 선 채로 술 몇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그 곁에서 물끄러미 서 있던 장자유가 물었다. "이곳이 불편하지 않은가?" 천무영은 상대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렇지 않소." "적진(敵陣)이나 다름이 없는데도 말인가?" "그리 생각하자면 나는 사해가 두루 적진인 사람이외다." 장자유는 쓴 입맛을 다셨다. "도시 이해할 수가 없군." "무엇이 말이오?" "자네라는 사람을 말일세." "후후후......." 천무영은 낮게 소리내어 웃더니 입을 열었다.


"내 한 가지 청이 있소." "무엇인가? 말하게." 그 말에는 어떤 것이든 거절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었 다. 천무영은 그를 향해 가볍게 목례해 보인 뒤 말했다. "아란과 아걸이 시중을 좀 들어주었으면 하오." "흐음?" 장자유는 의외라는 듯 눈을 치떴다. 일시지간 그의 안색이 묘하게 흔들렸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천무영에 대한 호감과 적대감이 반 반씩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의 고개는 끄덕여졌다. "알겠네, 공자. 그러나 그 전에......." 슈슈슉―! 빙그르르 도는 장자유의 몸에서 백팔 종에 이르는 암기가 우박처 럼 발사되었다. 그것은 너무도 지척간에서 벌어진 사태인지라 인 간의 경공술로 어떻게도 피할 수 없었다. "미안하네만 이것이 잔혈맹의 규칙일세. 일단 목표한 자는 절대 놓쳐서는 안되......!" 장자유의 말은 중도에서 그쳤다. 천무영은 처음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따라서 백팔 종의 암기는 모조리 그의 몸에 박혀 있었다. 장자유가 굳어진 것은 그러고도 그가 빙그레 웃었기 때문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옷이 한 벌밖에 없소. 그런데 이처럼 구멍이 숭숭 뚫렸으니 아무래도 변상을 요구해야 되겠구려." 이어 그가 옷을 툭툭 털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우수수....... 그의 몸에 빽빽히 꽂혔던 져 내렸던 것이다.

암기들이 모래알처럼 가루로 화해 쏟아


"장노인, 본인은 당신을 나무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소. 이것 이 당신의 본업이니 말이오." "공자......!" 장자유의 노안에 언뜻 뿌연 안개가 서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를 드러내는 것이 싫었는지 그는 어딘가로 신형을 날렸다. 휙―! 그의 모습은 관목이 우거진 숲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천 무영의 귓전으로 그의 전음성만이 전해져 왔다. (조심하시게나. 그 두 아이들도 나와 비슷한 인종들이니. 금후로 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암습을 하려 들 걸세.) 천무영은 숲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후후... 아무려면 내가 그걸 몰라서 그들을 초빙했겠소?" 웃음 뒤로 그는 빙글 돌아섰다. "나오너라, 숨어서 엿보지 말고." 그 말에 따라 과연 한 그루의 나무 뒤에서 아란과 아걸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나타났다. 그들은 지은 죄가 있는지라 이었다.

고삐를 잡힌 송아지와도 같은 모습들

그들의 죄를 묻자면 암습만이 아니었다. 천무영을 유인(?)해 이곳 까지 오게 한 것도 역시 그들이었으므로. 하지만 그들을 대하는 천무영의 태도는 예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 었다. 그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말을 건넸다. "낭자, 고기가 식었다. 자리를 빈청으로 옮겼으면 하는데, 상을 다시 보아주지 않겠는가?" 아란은 대답은 않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신기한 듯 그를 바라보 았다. 그것은 그녀와 나란히 선 아걸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난 먼저 가 있겠다."


천무영이 돌아서자 그들은 그때서야 불맞은 새처럼 부산을 떨며 고기와 술을 챙겨 주방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빈청 안이다. 원목으로 된 둥그런 탁자를 사이에 두고 삼 인의 인물이 앉아 있 었다. 그들은 천무영과 아란, 아걸 등이었다. "음! 호랑이 고기도, 곰의 고기도 처음 먹어보지만 맛이 썩 괜찮 군. 이건... 늑대의 고긴가?" 천무영은 술과 더불어 고깃점을 들며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 고 있었다. 아란 남매는 그의 좌우에 무릎 꿇고 앉아 연신 눈치만 을 살피고 있을 뿐 감히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너희들도 들어라. 그렇게 구경만 하고 있지 말고." 천무영이 권했으나 두 남매로서는 고기를 들기는커녕 물 한 모금 조차 마실 수 있는 처지가 못되었다. "아! 배가 불러 더는 못먹겠군." 마침내 그가 젓가락을 상에 내려놓을 때였다. "저어......." 다시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아란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무엇이냐?" "왜 저희들을... 죽이지 않죠?" 천무영이 오히려 반문했다. "내가 너희들을 왜 죽여야 하지?" "죽어야 마땅하니까......."


아란은 고개를 푹 떨구며 말끝을 흐렸다. "하하... 내 전에도 말하지 않았느냐? 남을 해치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자신도 당하게 되어 있다고. 내가 이렇듯 건재할 수 있었 던 것은 너희들을 해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천무영은 자못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어찌 해석했는 지 아란 남매는 종전보다 더욱 움츠러 들었다. 그 기색을 알아본 천무영이 별 수 없이 한마디 덧붙였다. "안심해라. 너희들을 어찌해 볼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의 진심은 통하지 않았다. 슷! 아걸이 품 속에서 비수를 뽑아 들었다. 그의 천진한 얼굴에는 어 느새 새파란 살기가 떠올라 있었다. "어림도 없는 소리!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거야." 쉬이익! 비수는 기어이 허공을 가르며 천무영에게로 날아왔다. 하지만 그 는 자세를 원상태대로 유지한 채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비수는 천무영의 미간으로 정확히 파고들었다. 앗차하 면 미간이 꿰뚫려 즉사를 면치 못할 판국이었다. 그런데 비수는 막 살갗에 닿으려는 찰나, 급격히 멈추었다. 아걸 이 얼굴이 시뻘개진 채 발작적으로 외쳤다. "왜, 왜 피하지 않는 거야?" 천무영은 빙긋 웃었다. "넌 왜 찌르지 않았지?" "그... 그야 당신이 멍청하게 피하지 않으니까......." 더듬거리는 아걸이 천무영의 눈에는 무척이나 귀엽게 보였다. 그 는 손을 뻗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후후... 정정당당하고 싶었단 말이지?" 아걸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부르짖듯 말했다. "놀리지 말아요! 그런 말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아니, 그렇지 않다." 천무영은 자르듯 강경하게 말하고는 다시 부언했다. "잘 들어라, 아걸. 너는 내게 한 번도 비겁했던 적이 없었다. 다 만 나름대로의 목적에 충실했을 따름이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릴.......?" 아걸의 안면이 제멋대로 마구 씰룩였다. "요는 목적 그 자체가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 으면 네 바탕이 아무리 선량해도 소용이 없지. 이 점은 아마 너도 그간에 갈등을 겪으면서 충분히 느꼈을 것이다." "우우......!" 아걸은 눈에 띌 정도로 일신을 떨었다. 어린애이면서도 어린애답 지 않은 소년은 천무영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알아들었으며, 그로 인해 자신의 본심까지를 재확인한 것이었다. "정말이지... 나쁜 사람이야, 당신은......!"

쨍그랑! 아걸의 수중에 들려 있던 비수가 맥없이 접시 위로 떨어졌다. 동 시에 소년의 눈에는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천무영은 격정을 이기지 못하는 독여 주었다.

그에게 다가가 가만히 어깨를 다


"쯧! 그렇다고 낙심하거나 좌절할 건 없다. 그것이야말로 네 나이 와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니까." "어어엉......! 그럼 이제 와서 무얼 어떻게 해요?" 급기야 소년은 목놓아 울었고, 천무영은 이렇게 달랬다. "지금부터라도 목적을 달리 하면 된다. 일개 살수가 아닌, 진정한 무사가 되는 것으로 말이다." 아걸이 눈물로 흠씬 젖은 얼굴을 들어 그를 응시했다. "진정한 무사... 요?" "그래, 너는 능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어찌 하면......?" 천무영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살인에도 정당한 이유를 가지면." "아!" "청부살인이란 야비한 자들이나 하는 짓이지." 아걸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먹으로 눈물을 훔쳐낸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소년은 누이를 지그시 건네다보았는데, 누이는 누이 대로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무언의 답을 보내 주었다. 이후로 두 남매는 밤이 새도록 천무영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하여 얻게 된 결론이란 역시 참된 무사의 도(道)였다. 그들은 또한 천무영이라는 희안한 인물로부터 뜻하지 않게 조화신 기옹(造化神機翁)의 절전절예를 전수받기도 했다. 태극십팔산(太極十八散)을 비롯하여 조화삼십육해(造化三十六解), 조화검법(造化劍法) 등. 그것은 은자십예(隱者十藝) 중에서도 제일예에 해당되는 무학으로 그중 일 초만 익혀도 능히 한 지역을 군림하고도 남을 만큼 극상


승의 절예였다. 반면에 천무영은 그들 남매의 입을 통해 잔혈맹의 내력을 일부나 마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꼭 그가 무엇을 베풀어 주었 다 해서 그 대가로 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아란과 아걸은 의외로 의리가 깊었으며, 그 일환으로 잔혈맹도 자 신들처럼 뭔가 변화의 계기가 있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잔혈맹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의 집단이었다.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자, 타인에게 멸시를 당하던 자, 단지 약하 다는 이유로 강자에게 억압받던 자, 하늘을 찌를 듯한 원한을 가 진 자, 벌레만도 못한 삶을 살다 자신을 포기했던 자 등등이 잔혈 맹의 구성원이었다. 때문에 잔혈맹의 인물들은 세상을 철저히 불신했고, 자신들을 버 린 세상에 대해 엄청난 증오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정(正)도 사(邪)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단지 자체적 인 결속력만이 그들을 지탱시켜 주는 수단이 되어왔다. 그들을 관장하는 잔혈맹주(殘血盟主)는 그들에게 있어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지상 최대의 살수집단을 이끌고 있음에도 불구하 고 신비에 묻혀 있었다. 얼굴이나 나이는 고사하고 성별조차 아무 도 알지 못한다. 잔혈맹의 인물들은 죽음도 불사하고 그의 명을 따르되 그에 관해 서는 알려고 들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은 그 신비를 지켜주는 것 마저도 충성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살인의 대가로 그들은 많은 것을 누리기도 했다. 금전은 두 말할 것도 없고 술, 여자, 도박 등 원하기만 하면 그 무엇이라도 마음 껏 즐길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상최대의 환락에 취해 있다가도 명을 받으면 즉 시 출동한다. 살인명부에 오른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그것이 그들의 철학이자 인생이었다.

■ 무영탑 2 권 제 18 장 잔혈맹주(殘血盟主)가 원하는 것


혈혈마탑(血血魔塔). 단혼애 위에 우뚝 서 있는 이 혈흑색의 탑은 워낙 거대하기도 했 지만 연원이나 상징성 탓인지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이 막힐 정도로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칙칙하고 암울한 빛의 탑신을 정면으로 대 하게 되면 가히 공포감마저 갖게 된다. 항간에 알려졌다시피 그동안 수많은 협골간담을 지닌 인물들이 혈 혈마탑을 찾았으나 개중 살아나간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일설에 의하면 탑신이 원래는 검었는데 그들이 흘린 피가 뿌려지 는 바람에 현재와 같은 색채를 띠게 되었다고도 한다. 스슷! 한 가닥 백영이 혈혈마탑의 앞에 나타났다. 천무영이었다. 그는 담담하게 혈혈마탑을 올려다보았으되, 구층의 아득한 높이는 오연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휘이이잉―!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탑신을 휘감고 있었다. 천무영은 일층의 탑문(塔門)을 바라보았다. 단아하게 만들어진 목 문이었는데 이도 피를 발라놓은 듯 검붉은 색이었다. 그는 서서히 걸음을 옮겨 문앞에 다가섰다.

- 살고자 하는 마음을 버린 자만 들라!

목문에 새겨진 그 글은 들어오면 죽는다는 경고문이었다. 천무영 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꽤 자신만만한 글귀로군. 하긴 전력으로 미루어 볼 때 저 문구가 주는 위협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그는 손을 뻗어 문을 밀었다.


끼익! 의외로 문은 쉽사리 열렸고, 그는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들려오는 소리조차 없는 암흑의 공간이 그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어둠이란 본시 인간에게 공포를 심어주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 은 적어도 천무영과는 무관한 사항이었다. 쿵! 그가 서너 걸음 정도 앞으로 나아가자 뒤에서 문이 저절로 닫혔 다. 이와 동시에 한 가닥 기괴한 음성이 들려왔다. "살고 싶으냐, 죽고 싶으냐?" 우우우웅― 음성이 주는 위협은 그 내용보다는 사방의 벽에 반사되어 고막을 파열시킬 듯 울려오는 메아리 쪽이 훨씬 더 컸다. 천무영이 물었다. "질문은 그뿐이오?" 그의 음성은 진동 없이 그대로 상대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어떤 질문을 더 바라느냐?" 다시 울려오는 메아리에 천무영은 비로소 대답했다. "승자와 패자 중 어느 쪽을 원하는가 물어주시오." 그 말은 잠시 동안의 답답한 침묵을 가져왔다. 그러다 이어진 것 은 소름이 오싹 끼칠 듯한 괴소성이었다. "크크크... 승자를 원하느냐, 패자를 원하느냐?" "승자외다." 천무영의 음성은 사뭇 단호하게 울려나왔다. 이는 신념에 관한 부 분이므로 당연한 노릇이었다.


팟! 어둠의 한귀퉁이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하나의 등 불로서 춤을 추듯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크크크......!" 등불 뒤에서 한 명의 괴인이 음침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움푹움푹 패인 주름살 위로 무수한 칼자국까지 겹쳐져 있 어 본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신체도 그랬다. 등이 활처럼 굽은 데다가 다리까지 심하게 절고 있는 등 멀쩡한 구석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꼽추괴인은 천무영의 면전에 함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킬킬... 이 속에는 두 개의 목패가 있다. 원래는 각기 생과 사,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지금 막 승과 패로 바꾸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오?" "뽑아라. 네 운을 시험해 보겠다." 가까이에서 보게 된 괴인의 모습은 더욱 끔찍했다. 웃을 때마다 눈가에 더 많은 주름이 잡힌 것은 물론 입가에서 볼 언저리까지 이어진 칼자국들이 마구 꿈틀거렸는데, 그 형상이란 실로 인간의 것이라고는 보아줄 수가 없었다. '쯧! 차라리 지옥의 야차를 대면하는 게 낫겠군.' 천무영은 내심 고소를 짓는 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편, 상대의 얼굴에 비추어 한 인물

- 사십 년 전, 뇌주(雷州)에 한 복사(卜師)가 있었다. 그도 다른 점쟁이들처럼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점치는데 흉조가 뽑히면 무슨 수를 쓰든 자신의 점괘대로 상대방을 죽인다. 그러다 결국 강호인 들의 공분을 사 협살을 당했다.

그것은 개방의 주유서고에서 읽었던 책의 한 대목으로 천무영은 그자의 이름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사복(死卜) 우문추(于文秋), 이처럼 멀쩡히 살아 있었군.'

그는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매달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승패를 잡으면 오늘의 승자가 되고, 패자(敗字)가 쓰여 있는 패 를 잡으면 패자가 된다는 말이겠구려?" "그렇다." "좋소." 천무영은 짧게 대답한 후,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함 속에 손을 집 어넣었다. 과연 그 속에는 두 개의 목패가 들어 있었다. 그는 개중 먼저 집히는 패를 꺼내 상대에게 내밀었다. "너는 패를 잘못 골랐다. 크크크......." 사복 우문추는 패를 확인해 볼 생각도 않고 그렇게 단정지으며 비 웃음을 흘렸다. 그를 바라보며 천무영도 웃었다. "후후... 천만에! 나는 승패를 골랐소." 패를 쥔 손이 활짝 펴졌다.

<승(勝)>

선명하게 새겨진 그 글자를 보자 우문추는 대경했다. "어... 어찌 이런 일이......!" 천무영이 빙글거리듯 그 말을 받았다. "흠, 두 개에 다 패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어찌 승자를 집어낼 있느냐, 뭐 그런 말이오?"


"놈! 감히 노부를 우롱하다니......." 우문추가 뱀가죽을 방불케 하는 안면에 노기를 떠올리며 어깨를 반쯤 틀었다. 그 광경을 보며 천무영은 씨익 웃었다. "안되지!" 동시에 그는 부채를 뻗어 상대의 목을 찔렀다. "크윽!" 쿵! 사복 우문추는 전신이 뻣뻣하게 굳어져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천 무영이 그의 손에서 재빨리 등불을 가로채며 읊조렸다. "나는 당신이 그 함을 무기로 쓴다는 것도 알고 있었소." 등불은 그때까지도 꺼지지 않고 건재해 있었다. 천무영은 그것을 이리저리 비추며 안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분명 어딘가에 길이 있을텐데?' 지나고 보니 일층은 그저 밋밋한 공간으로 우측 벽의 끝쪽에 달랑 위로 오르는 계단이 하나 있을 따름이었다. 천무영은 천천히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그리하여 이층에 오르자 그를 맞이하는 것은 또 하나의 낡은 목문이었다. '일층에서는 점쟁이가 가로막았었는데 여기서는 어떤 위인이 대기 하고 있을지 모르겠군.' 그는 문을 밀었다. 끼익......! 사람의 손길이 별로 닿지 않은 듯 이번의 문은 처음과는 달리 듣 기 거북한 음향을 내며 힘겹게 움직였다. '흡!' 문이 열리자마자 천무영은 우선적으로 호흡부터 멈추어야 했다. 도저히 맡아줄 수 없는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러왔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돌아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지? 물론 그런 이유로 경거망동할 그는 아니었지만. '괴롭군!' 천무영은 내심 투덜거리면서도 문안으로 들어섰고, 그의 뒤에서 문은 자동적으로 닫혔다. 쿵! 둔중한 음향에 이어 그가 듣게 된 것은 실로 상상을 절하는 소리 들이었다. "끼아악―!" "끄윽, 끅! 살려 줘." 사방에서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신음성과 비명이 울려왔던 것이 다. 아연하여 주변을 둘러본 천무영은 아연실색했다. '저럴 수가!' 그의 눈은 통로의 좌우를 번갈아 보며 한껏 치떠져 있었다. 그곳에는 시체나 다름 없는 자들이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의 처지는 시체보다 못할지도 몰랐다. 그들은 하나같이 전신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는데 그나마 어떤 자는 안구가 빠져나가 휑한 눈에서 누런 고름을 흘리고 있었고, 또 어떤 자는 몸에 구멍이 뚫려 창자가 비어져 나와 있는 등 목불 인견의 참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개중 팔 다리가 잘려져 나간 사람은 그래도 양호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으리라. 그들이 눈에서 광기를 번뜩이며 천무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 들 엄청난 고통으로 인해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끄아아... 나를, 나를 내보내다오!" "차라리 죽여라! 크으윽......." 천무영이 지나가자 신체를

결박당한 그들은 철그렁거리며 온힘을


다해 발버둥을 쳤다. 그 기세로 보아서는 쇠사슬도 얼마 견디지 못하고 끊어져 나갈 것 같았다. '끔찍하군. 어찌 인세에서 이런 일이......?' 천무영이 경악 반, 탄식 반인 심정으로 중얼거릴 때였다. 철컹, 철컹―! 정말로 쇠사슬이 풀어지는 듯한 음향이 울렸다. '설마!'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사태가 현실로 화했다. "키키키......!" "크크... 죽여 버리겠다!" 벽에 매달려 있던 자들이 일제히 풀려나와 천무영에게 덤벼들었 다. 그들은 아수라귀들처럼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쉬쉭! 천무영은 그들을 향해 수중의 섭선을 떨쳐냈다. 펑! "끄아악!" 두 명의 괴인들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전신이 피고름 투성이인 그들은 섭선에 격중당했음에도 불 구하고 쓰러졌다가 이내 벌떡 일어섰다. 휘류류륭―! 그들은 아예 쇠사슬까지 휘두르며 덮쳐오고 있었는데, 그 공격법 이란 방어라고는 염두에도 두지 않은 것이었다.


천무영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이들과 같이 죽어줄 수는 없지.' 스스스....... 그는 취팔선대나이보를 전개하여 교묘하게 그들 사이를 헤치고 나 아갔다. 하지만 이성이 마비되어 본능적인 감각을 앞세우고 있는 괴인들은 오히려 그를 쉽게 따라잡고 있었다. "크크크......!" 그들의 집요한 육탄공세에는 실로 대책이 없었다. 특히 천무영의 경우에는 살수를 자제하자니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는 등에서 절로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의 백의는 어느 덧 괴인들의 피와 고름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쯤 되자 천무영도 마음을 고쳐 먹기에 이르렀다. '이들에게는 안되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혈도를 찌른들 통하 지 않으니.' 그의 읊조림이 뜻하는 것은 살생(殺生)이었다. 그러지 않고는 도 저히 이곳을 통과할 수가 없었으므로. 파파파팟―! 그의 섭선이 방금 전과는 달리 무서운 기세로 뻗어나갔다. "으악! 카아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꼬리를 물듯 연이어 울려퍼졌다. 이와 더 불어 괴인들은 피분수를 뿜으며 차례로 쓰러져갔다. 그 뒤로는 다 시 일어서지도, 덤비지도 않았다. "비켜라!" 천무영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져나왔다. 딱히 뭐라 형언키 어려운 감정이 그를 휩싸 버렸던 것이다. 그 자신도 그것이 분노인지, 혹 은 자책인지 끝내 규정짓지 못했다.


취리리릿―! 그의 신형은 팽이처럼 빠르게 회전하며 괴인들 사이를 누비고 있 었다. 그러는 사이, 그의 주변에서는 시뻘건 핏물이 우박처럼 쏟 아져 바닥에 내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콰쾅! 와지직....... 세번째의 문은 부서져 나갔다. 삼층으로 뛰어오른 천무영이 그답 지 않게 일 장에 날려버린 것이었다. 그는 극도의 자기혐오에 빠져 있었다. 사육제에 이어 이번이 두번 째였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잔혈맹의 냉혹비정한 논리에 그가 부응하게 된 것은. 난쟁이 살수를 벨 때에는 그래도 처단(處斷)의 의미가 강하게 내 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괴인들을 상대로는 아니었다. 그런 류의 살인은 특히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그였다. 천무영은 허공을 향해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잔혈맹주! 어디 숨어 있는 것이냐? 속히 모습을 드러내라. 더 이 상 헛된 피를 흘리게 하고 싶지 않다." 우우우웅― 외침은 메아리가 되어 삼층을 진동시켰다. 잠시 후. 스스스스―! 그의 앞에 일단의 인물들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들의 숫자는 도 합 삼십육 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적포를 걸치고 이마에 혈건을 두른 자들이었다. 손에 도 모양이 같은 파풍도(波風刀)를 들고 있었다. 그들 삼십육 인의 도수(刀手)들은 수중의 파풍도를 곧추세운 채 천무영을 중심으로 하나의 진을 형성해 갔다. "으음!"


천무영은 타오르는 시선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반면에 그들은 눈에 초점이 없었다. 모두 맹인이었던 것이다. 츠으으으― 맹인도수들은 원진(圓陳)을 유지한 채 천무영의 주위를 서서히 맴 돌기 시작했다. 그의 눈살이 절로 찌푸러 들었다. "그대들과는 싸우지 않겠다. 어서 맹주를 불러라." 그 말은 무고한 살인을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들 중 입을 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단지 회전 속도를 배가시킴으로써 말을 대신하고 있었고, 그 바람에 긴장된 공기를 가르며 살벌한 도기가 전해져왔다. 츠츠츠츳―! 천무영은 전신을 통해 섬뜩한 예기를 느끼며 중얼거렸다. '도세로 미루어 이들은 최소한 오십 년 이상 도법을, 그것도 전문 적인 살초(殺招)만을 익힌 자들이다.' 츠파앗! 정면에서 문득 여섯 자루의 그리며 그를 베어왔다.

도가 가공할 도기와 더불어 포물선을

"어딜!" 천무영도 때를 같이 하여 섭선을 휘둘렀다. 쐐애애액―! 그의 섭선이 여섯 줄기의 가공할 암경을 뿌려냈으며, 그에 따라 고막을 파열시킬 듯한 금속성이 사위를 울렸다. 쩡! 쩌정―! 믿을 수 없게도 그 순간 도수들의 도는 맥없이 허공으로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천무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섭선의 방 향을 틀어 그들의 목을 찔러갔다.


쉬쉬쉿! 그러나 그 공격은 의외로 실패였다. 맹인도수들은 섭선의 끝이 목 부분에 이르기 직전, 하나같이 그 공세를 피해냈던 것이다. '이럴 수가......!' 천무영이 내심 놀라 부르짖고 있는 사이, 이번에는 그의 등 뒤에 서 예의 막강한 도기가 뻗어왔다. "웃!" 그는 다급성과 함께 취팔선대나이보를 전개했다. 스스슷! 그의 신형이 비틀거리며 공격권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으나 그 일은 그다지 여의치 않았다. 맹인도수들의 칼날은 눈이라도 달린 듯 영 활하게 그를 따라붙고 있었다. 이 상황은 천무영으로 하여금 울화가 치밀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이자들도 앞서의 괴인들과 마찬가지로군.' 그랬다. 이층의 괴인물들이 본능적인 감각을 활용했듯 도수들도 앞이 보이지 않다보니 주로 청각에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바람 소리만으로도 능히 방향을 판단해내는 그들에게는 여하한 보법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슈슈슈욱―! 열여덟 자루의 파풍도가 허공에서 그물 같은 도기를 형성시키더니 천무영에게로 떨어져내렸다. 그는 재빨리 섭선을 접어 그들의 공 세에 맞닥뜨려갔다. 파츠츠츳―!


그 순간 그의 섭선은 도법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것은 도천성(刀 天聖)의 도법이었다. "헉!" 맹인도수들은 도망(刀網)을 찢고 쇄도하는 가공할 도세에 경악성 을 터뜨리며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하지만 이때를 기해 나머지 열여덟 명의 도수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슈슈욱― 천무영은 숨돌릴 겨를도 없이 그 새로운 공세를 맞받았다. 그러는 동안 싸움은 벌써 오십여 초에 이르고 있었다. 그는 줄곧 혼신의 힘을 다해 섭선을 뻗어내고 있었으되 그때까지도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맹인도수들이 이루고 있는 도진의 위력은 실로 막강했다. 그들의 원진은 물샐틈 없는 방어막을 구축한 가운데 차륜전법으로써 그에 게 무시무시한 위협을 가해오고 있었다. 천무영은 이를 악물었다. '안되겠군! 계속 이렇게 나가다간 내가 당할지도 모른다.' 그의 전법이 전환된 것은 그 순간이었다. "휘이이이......!" 그는 입을 오므리더니 기이한 음향을 토해내 사위의 모든 음파(音 波)를 차단했다. 그것은 청각으로 자신의 움직임을 간파해내는 맹 인도수들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 과연 그 방도는 주효했다. 맹인도수들이 혼란을 느껴 주춤하는 찰 나, 천무영은 재빨리 손을 뻗어 십지(十指)를 튕겨냈다. 무형무풍의 지력은 여지없이 그들의 혈도를 점해 버렸다. 쿠쿵! 털썩....... 맹인도수들은 결국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나무토막처럼 쓰러지 고 말았다. 그들을 보며 천무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힘겨운 일전이었다.'


그의 입가에는 슬며시 미소마저도 떠오르고 있었다. '다행이다, 이들을 죽이지 않을 수 있어서.' 천무영은 그들을 뒤로 하고 사층을 향해 몸을 날렸다.

문은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활짝 열려 있었다. 천무영은 애써 담담한 기색을 유지하며 걸음을 옮겼다. 삼층에서 있은 맹인도수들과의 싸움은 그에게 다소나마 위안이 되어 주었 고, 그때문에 마음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던 것이다. 그는 호전적(好戰的)인 인물이 아니었다. 예정된 운명을 따르고는 있었으나 그 나름의 사고방식에는 변함이 없었다. 천무영은 발길을 멈추고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두 명의 인물이 서 있었다. 그들은 적포에 적건을 둘렀 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너무도 상반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개중 우측에 서 있는 자는 말라 비틀어진 고목을 연상시키는 인물 이었다. 삐쩍 마른 그의 몸은 마치 뼈대에 껍질만을 씌워 놓은 듯 했으며 안색도 밀납처럼 창백했다. 반면에 좌측의 인물은 어찌나 비대한지 전신이 하나의 거대한 공 같았다. 눈은 두터운 볼에 짓눌려 단추구멍이나 진배없었고, 뱃살 은 숨을 쉴 때마다 파도처럼 출렁거리고 있었다. "네놈이 무영이라는 애송이냐?" 뚱뚱이의 실낱 같은 눈에서 횃불 같은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그 광경에 천무영은 입술 끝을 기묘하게 말아올렸다. "알면서 왜 묻소?" 이번에는 홀쭉한 자가 음산한 음성으로 물었다.


"너는 본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천무영은 별로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굳이 생각하고 말고도 없소. 당신들은 신비를 가장한 채 특별한 명분도 없이 도처에서 혈풍을 일으켜 왔소. 그것이 어디 어제 오 늘의 일이오?" "뭣이?" 뚱뚱이와 홀쭉이는 대노했다. 그 말인즉 자신들의 집단을 삼류로 취급하고 아주 하찮게 여기는 투였기 때문이었다. "이... 이... 찢어죽일 놈!" 두 사람은 욕설을 퍼부으며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덮쳐들려 했다. 천무영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시켰다. "잠깐! 나는 당신들과 대적하고 싶지 않소. 당신들의 주인을 만나 일을 해결하면 그뿐이외다." 뚱뚱이가 살찐 안면을 씰룩이며 기소를 발했다. "크크... 멍청한 놈! 맹주를 만나려면 먼저 우리를 꺾어야 하는데 도 말이냐?" 천무영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확실히 나는 머리가 나쁜가 보오. 도무지 이해가 안되니 말 이오. 천지쌍괴(天地雙怪)가 어찌하여 고작 남을 지키는 하인 따 위로 전락했는지." "뭐, 뭣......!" "감히!" 두 괴인은 종전보다 더욱 노한 듯했으나 각기 전신을 한 차례 부 르르 떨었을 뿐, 뭐라고 더 말하지는 못했다. 천무영의 비양거림은 계속되었다. "후후... 내 기억이 잘못 되지 않았다면 당신들은 오십 년 전만 해도 마도서열 백위 내에 들던 고수들이었소. 아니오?"


"닥쳐라! 건방진 꼬마 놈." 뚱뚱이, 즉 천괴(天怪)가 위맹한 일 장을 뻗어왔다. 꽈르릉―! 거창한 벽력성과 함께 태산 같은 장경이 밀려왔다. 이에 천무영은 그저 가볍게 주먹을 내미는 것으로써 맞부딪쳐 갔다. 꽈꽝! 폭음이 장내에 거센 진동을 울렸다. "그... 그것은 풍뢰마권(風雷魔拳)......!" 천괴는 놀란 음성을 발하며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그 광경을 본 지괴 역시도 눈을 크게 부릅뜬 채 물었다. "꼬마! 너는 천뇌마군(天雷魔君)과 어떤 사이냐?" 천무영은 대답 대신 그를 향해 손바닥을 흔들었다. 스스스......! 경미한 음풍이 지괴의 면전으로 밀려들었다. 이를 느끼자 한껏 치 떠져 있던 지괴의 눈에 일말의 공포가 어렸다. "우우... 현음진유공(玄陰眞柔功)까지......?" 동시에 그는 번뜩 신형을 날렸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쾅! 폭음에 이어 그는 입에서 피화살을 뿜으며 나가 떨어졌다. 일 대 일, 그것도 전면전일 경우라면 천하에서 천무영을 당해낼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있어서도 안되었다. 운명의 안배에 의 해 은자십천의 불패기학들을 모두 섭렵한 그였으므로. 천무영은 천지쌍괴를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들은 금후로 산자수명한 곳을 찾아가 조용히 쉬도록 하시오. 부디 나와 다시 마주치게 되지 않기를 바라오."


그것은 이르자면 일종의 협박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말을 마치 자마자 돌아서더니 오층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천지쌍괴는 추격할 생각도 않고 멍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 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풍부한 강호견식을 통해 그들에게도 진즉 부터 짚히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우... 저자가 은자(隱者)들의 절기를 쓰다니....... 그럼 은자 천이 열렸단 말인가?"

오층 안으로 들어선 천무영은 멈칫 했다. 그곳에서 그를 맞이한 것은 백 개의 철인상(鐵人像)이었다. 질서정연하게 양쪽으로 도열해 있는 그들은 각각 창(槍), 검(劍), 도(刀), 륜(輪), 부(斧), 추(錐), 봉(棒), 선인장(仙人掌), 괴장 (拐杖) 등의 열 가지 중병기(重兵器)로 무장하고 있었다. 끼끼끼끼―! 철인들은 천무영을 보자 듣기 거북한 음향과 함께 움직임을 개시 했다. 그는 고소를 지으며 그들을 응시했다. "후후... 기관까지 동원했을 줄은 몰랐군." 그아앙―! 우측의 전면에 서 있던 열 개의 철인들이 동시에 그를 향해 미끄 러져 오며 장창을 휘둘렀다. 천무영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쌍장을 합쳤다가 뻗었다. 콰르르릉―! 지축을 뒤흔드는 폭발음과 함께 쇳가루가 자욱하게 휘날렸다. 놀 랍게도 천무영에게로 쇄도해 오던 열 개의 철인상은 반 이상 으스 러져 있었다. 창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철인들은 인간보다 강하되 감정이 없다. 그들은 단지 정해진대로 상대를 죽이고자 할 뿐 요령을 부릴 줄은 몰랐다. 따라서 이번 싸 움의 주도권은 당연히 처음부터 천무영의 몫이었다. 쐐애애액―! 다시 허공을 갈라온 것은 열 자루의 검이었다. 그는 신형을 팽이 처럼 회전시키며 연달아 십권(十拳)을 뻗었다. 꽈꽝! 꽝―! 검수인 철인들도 예외없이 으스러져 박살이 나는 순간이다. 그 뒤 부터는 천무영이 선제공격을 가했다. "고철들! 너희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없구나." 그는 전신에 공력을 끌어올리는 한편, 재공격을 시도하려는 철인 들 사이를 눈부시게 누비고 다녔다. 꽈꽈꽈꽝―! 폭음이 울림에 따라 압도적인 기세로 정렬해 있던 철인들은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차례로 무너져 갔다. '더 이상 이들과 시간을 끌 이유가 없다.' 천무영의 일신이 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그러 더니 그는 하나의 거대한 불덩이로 화하여 나머지 철인들을 무섭 게 휩쓸어 갔다. 화르르륵―! 얼마 남지도 않았던 철인들은 되어 녹아내렸다.

한순간에 모두 형태를 잃고 쇳물이

"끝났군!" 천무영은 산뜻하게 읊조리며 다음 층으로 날아올랐다. 그 직후, 오층의 벽면에서는 한 가닥 괴이한 음성이 울려나왔다. "으음, 정녕 예상밖이로구나. 설마하니 저 아이가 이 정도의 전력 손실을 가져올 줄이야......." 음성은 끊어질 듯하다가 다시 이어졌다.


"어쩌면 저 아이에게 기대를 걸어볼 수도.......?" 끝을 맺지 않은 그 음성의 여운은 길었다.

천무영은 단숨에 육층에 당도했다. 그런데 한결 더 치밀한 안배가 마련되어 있으리라 여겼던 그 곳은 뜻밖에도 텅 비어 있었다. '무슨 의도인가? 이 현상은.' 천무영은 무척 의아했으나 그렇다고 전진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 는 칠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여기도!' 그의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칠층도 육층과 마찬가지로 텅 빈 공간이었던 것이다. '설마하니 그들이 벌써 포기했을 리는 없고?' 천무영은 안색이 다소 굳어진 채 팔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는 하나의 거대한 석문이 진로를 막고 있었다. 천무영은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 석문의 곳곳을 살펴 보았다. 하지 만 전체가 돌로 이루어진 그 문에는 손잡이는 고사하고 문을 열만 한 기관장치조차 보이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것은 가운데가 세로로 가늘게 패인 것을 제외하고는 출입을 차단하기 위해 세워진 석벽과도 같았다. 뚜벅, 뚜벅....... 마침내 문앞에 당도한 천무영은 부지중 긴장을 다졌는데, 의외의 사태는 그 순간에 다시 일어났다. 스르릉! 석문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동적으로 열렸던 것이다. '이것이 과연 다행스런 조짐일지?'


천무영은 내심 중얼거리며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웃!" 그의 입에서 다급성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코끝으로 한 가닥 기향 이 스쳐왔기 때문이었다. '맙소사!' 천무영은 일시지간 정신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그 향을 언젠가도 한 번 맡아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예전에 금모란이 가져다 준 차 속에......!' 그가 충격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향기의 정체가 미혼향이 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자 그의 뇌리에는 어느덧 그 때문에 파 생되었던 일까지 고스란히 떠올라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당시의 상황은 재현되었다. 천무영은 금모란의 영상에 사로잡힌 바 되어 단전어림이 후끈해지 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이를테면 상상의 세계를 빌어 내부에서 걷잡을 수 없는 욕구가 치밀었던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천무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성으로 제어하지 못하는 본능 은 순간적으로 그로 하여금 극도의 분노를 느끼게 했다. 그러나 당장에 시급한 것은 망을 억누르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전신을 확확 달구어가는 욕

'으음, 일단은 독성을 체외로 몰아내야 한다.' 천무영은 즉시 가부좌를 틀고 운공을 시작했다. '이럴 수가!' 진즉부터 벌겋게 변해 있던 그의 안면이 더욱 무참하게 일그러졌 다. 그것은 맹렬한 약성이 이미 전신에 골고루 퍼져 있어 손을 쓰 기에는 너무 늦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으음! 당해도 철저히 당했구나."


그는 참담한 신음과 함께 천독모후의 말을 떠올렸다.

- 명심해라, 아이야. 세상에서 내가 해독시키지 못할 독은 거의 없었다만 단 두 가지만은 예외였다. 바로 광음환락산(狂淫歡樂散) 과 천황지독(天荒之毒)이었지.

천무영은 낙심천만이었다. 하필 미혼향 중에서도 가장 지독하다는 광음환락산에 중독되었은즉 향후로 어떤 일이 벌어져도 헤쳐나갈 전망이란 불투명했으므로. 그의 이마에 진땀이 송글송글 맺힐 때였다. 띵... 띠잉......! 어디선가 불현듯 은은한 주악소리가 울려나왔다. 동시에 그의 주 변에는 홍등이 무수히 밝혀졌다. 천무영은 경황중에도 고개를 갸웃했다. '팔층이 이렇듯 화려한 곳이었던가?' 그도 그럴 것이, 사방의 벽에는 갖가지 장식물 외에도 분홍빛 휘 장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으며 바닥에는 발등이 푹 덮힐 정도로 푹 신한 천축산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연이어 천정을 올려다보던 천무영은 흠칫 했다. 그곳에는 단지 보 기만 해도 낯이 뜨거워질 정도의 춘화도(春畵圖)가 잔뜩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추잡한......!" 시선을 돌리는 그의 귀로 이번에는 기이한 음향이 들려왔다. 사륵... 사르륵....... 그것은 다름 아닌 옷자락 끌리는 소리였고, 곧 휘장 뒤편으로부터


일단의 여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들을 본 순간 천무영은 전신의 피가 급격히 흐르는 듯한 느낌 을 받았다. 현 상태에서 그런 반응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여인들은 하나같이 일신에 잠자리 날개 같은 나삼만을 걸치고 있 었다. 덕분에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젖가슴이나 그 위에 얹힌 연 분홍빛 유실까지도 환히 내비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위태로와 보이는 세류요나 펑퍼짐한 둔부 등은 가 히 폭발적인 유혹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크으으......!" 천무영의 입에서 한 가닥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이것은 욕념과 싸 우느라 빚어진 극단의 고통을 대변한 것이었다. "호호호호호......!" 여인들은 교소를 터뜨리는가 싶더니 주악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소맷자락이 황홀하게 너울거리며 희디흰 팔을 간간이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치마폭이 빙그르르 돌 때마다 탄력이 넘치는 허벅지 가 유감없이 노출되고....... 연이어지는 그녀들의 율동은 점차로 천무영의 고통을 가중시켰건 만 불행히도 그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으으음......!" 여인들은 이제 웃음이 아닌, 야릇한 비음을 발하며 저마다 터질 듯한 젖가슴을 스스로 쓰다듬고 있었다. "으윽!" 천무영은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입술을 세차게 깨물었다. 그 바람에 그의 입술이 툭 터지며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어느덧 그의 전신 혈맥은 부풀대로 부풀어 올라 피부표면으로까지 툭툭 불거지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는 공력을 끌어올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호흡조차도 흐트려서는 아니되었다. 그랬다간 봇물 터지듯 발산되는 욕망으로 인해 그는 대번에 한 마


리의 수컷으로 화하고 말테니까. 띠잉! 띠디디딩―! 주악소리는 종전에 비해 더욱 현란해져 있었고, 그에 따라 여인들 의 춤도 가일층 노골화 되어갔다. 사르륵......! 급기야 그녀들은 몸에 걸쳤던 나삼마저도 벗어던졌다. 그러더니 서로 뒤엉켜 격렬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으흑... 흑......!" 나녀들이 행하고 있는 짓은 일종의 애무로서 동성(同姓)간에는 불 가한 행위였다. 따라서 역겨움도 배제할 수 없으련만 지금의 천무 영으로서는 그럴 만한 입장이 못되었다. 당장에라도 뛰어들어 함께 어울리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느라 그의 이마에는 굵은 힘줄이 불끈 솟아오르고 있었다. '우우... 안된다!' 가쁜 숨을 훅훅 몰아쉬던 천무영의 눈이 일순 푸른 섬광을 발했 다. 동시에 그는 사력을 다해 부르짖었다. "멈추어라!" 쏴아아아―! 그의 일신에서 폭풍 같은 진기가 일어나 사위를 휩쓸었다. "아아아악―!" 나녀들은 제각기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무력하게 사방으로 나가떨 어지고 말았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으되 그 결 과는 처참하기 이를데 없었다. 쓰러진 나녀들은 칠공으로 피를 뿜고 있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천무영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그의 입과 코에서도 검붉은 선혈이 쉴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패배하지 않았다!'


그는 와중에도 자신을 향해 그렇게 부르짖으며 구층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그가 사라지자 한 가닥 탄성이 들려왔다. "놀랍구나! 천하은밀색(天下隱密色)의 광음환락산을 견뎌내며 파 천마무(破天魔舞)를 깨뜨리다니......." 이는 오층에서와 마찬가지로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나 벽면에서 은 은히 울려나온 음성이었다.

쾅! 천무영은 구층의 문을 몸으로 부딪쳐 열어 그 안으로 뛰어들어갔 다. 그것은 일신에 밀어닥친 위기를 의식해서였다. 구층은 사면이 다 흑색으로 칠해져 있었으며 그 한가운데에 흑색 을 띤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 의자 위에는 백포로 전신을 감싼 한 인물이 앉아 있었다. 천무영은 그자를 보는 순간 안면을 굳혔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인 간이라면 의당 있어야 할 사지(四肢)가 없었으므로. 놀라운 점은 그뿐이 아니었다. 허옇게 센 머리카락이 길게 자라 얼굴은 물론 전신을 뒤덮고 있었는데, 그런 그의 모습이란 한 마 리의 흰 짐승을 보는 것 같았다. 천무영의 시선은 언뜻 보기에도 휑하니 뚫려 구멍만 남아있는 듯 한 상대의 눈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광음환락산의 독성으로 본신 의 기혈이 뒤틀어지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반갑소이다, 이렇게 상면하게 되어서." 털썩!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한 쌍의 맑은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무영은 깨어나자마자 그 눈과 마주했으며 몹시 낯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독 깨끗하고 맑은 눈빛으로 인해 평범한 사람의 눈과는 확연히 달라보였던 것이다. 아무튼 천무영은 몸을 일으키면서 매우 놀랐다. 그것은 일신이 언 제 죽을 고비를 넘겼나 싶게 가뿐해져 있어서였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자는 잔혈맹 소속인지 적포를 입었는데 여느 인물들과는 달리 적건을 얼굴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천무영은 그자의 투명한 눈빛과 왜소한 체구를 보자 분명 어디서 한 번은 보았지 싶었으나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주위를 둘러 보았다. '내가 쓰러졌던 그 자리로군.' 전면에 의자가 놓여 있는 것도 여전했고, 그 위에는 변함없이 머 리통과 몸통만 남은 괴인이 버티고 앉아 있었다. 적건인이 입을 열었다. "귀공의 체내에 퍼져 있던 광음환락산은 해독시켰소." 천무영은 움찔하여 적건인을 바라보았다. '이 음성은......!' 뭐라 말할 겨를도 없이 적건인은 뒤로 물러나더니 그림자처럼 괴 인의 의자 뒤로 가 섰다. 그 모습은 한 자루의 예리한 검이 괴인 을 보필하고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이로 미루어 천무영은 적건인이 자신과 대화를 나눌 의사가 없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괴인을 향해 물었다. "왜 본인을 살려 놓으셨소이까? 잔혈맹주." 괴인은 듣기가 역겨울 정도로 기이한 음성을 냈다. "크크... 나는 본맹의 맹주가 아니다." "무슨 뜻이오?" 천무영이 묻자 괴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창건자라 해서 꼭 맹주가 되라는 법이 있느냐? 노부는 잔혈맹을 세우기는 했지만 맹주 자리는 비워 두었다." "쯧! 그건 의외구려." 천무영도 별 관심 없다는 듯이 간단히 덧붙여 말했다. 어찌 표현 이 되든 그는 원하던 바대로 잔혈맹을 관장하는 대표자를 눈앞에 두고 있는 상태이므로. 괴인은 묘한 웃음을 떠올리며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꼬마야, 우리는 현재 맹주감을 찾고 있는 중이다." 천무영은 그제서야 본의 아닌 참견을 하게 되었다. 맹주가 새로운 인물로 정해졌다면 문제는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래, 찾기는 했소?" "크크... 찾았지." "그게 누구요?" "너!" 천무영은 흠칫 놀랐으나 곧 눈살을 지푸렸다. "이보시오, 나는 당신과 농담이나 하러 온 사람이 아니외다. 내가 예까지 온 이유는 당신들의 혈행을 막기 위해서요." 괴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머리 카락이 헤쳐지며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맙소사!' 천무영은 목젖까지 차 오르는 비명을 애써 눌러야 했다. 괴인의 얼굴은 꿈에 볼까 싶을 만큼 끔찍하여 일층에서 보았던 사 복 우문추도 그에 비하면 미남이다 싶을 지경이었다. 그의 안면에도 길고 짧은 칼자국들이 한 치의 틈도 없이 그득했는 데, 정도가 우문추보다도 훨씬 지나쳐 이목구비조차 사라져 버리 고 그 잔흔만이 대충 존재할 따름이었다.


"꼬마, 너는 그 일이 가능하다고 보느냐?" 괴인의 얼굴 어딘가에서 울려나와 스산한 음파를 전하는 그 음성 은 부지중 전신에 소름이 돋게 했다. 그리하여 천무영은 신색을 가다듬은 후에야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면, 본인이 잔혈맹주가 되는 일은 가능할 것 같소?" "크크... 그야 당연하지. 나에게 꺾이면 너는 무조건 내 말을 들 어야 하니까." 천무영은 정색을 하며 괴인을 응시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그 말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냐?" "그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또 있소.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나 나 는 패해서는 안되는 사람이외다." 괴인의 흉측한 안면이 충격을 받은 듯 마구 씰룩거렸다. "그렇다면... 너는 역시 은자천에서 나왔느냐?" 천무영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어떻든 나는 당신과 싸울 작정이오. 내가 이기면 당신도 필히 내 뜻에 따라주리라 믿소." "크크큭......!" 괴인은 크게 웃더니 물었다. "꼬마, 너는 노부가 두렵지 않느냐?" 천무영도 마주 웃었다. "그건 당신의 외양을 두고 하는 말이오?"


"뭐, 뭣?" "나는 당신에 대해 그다지 아는 문에 두려워해야 한단 말이오?"

바가 없소. 그런데 대체 무엇 때

괴인은 그가 자신을 놀리는 줄 알고 벌컥 화를 냈다가 그렇지 않 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굳어졌던 안면을 풀었다. "크크... 일리가 있는 말이구나. 하지만 나를 진정으로 알게 된다 면 그때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생각일 뿐이오." 동공이 뽑혀나간 괴인의 눈이 하릴없이 껌벅였다. "헛소리가 아니다. 설사 은자천의 은자들이 모두 나타난다 해도 노부의 이름을 들으면 놀라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천무영은 도시 믿어지지 않는 심경이 되어 중얼거렸다. '정말로 과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대체 이 괴인은 정체가 무엇이길래 이토록 호언장담을 한단 말인가?' 괴인은 종전에 비해 사뭇 진중한 기색으로 말했다. "꼬마야, 무림에는 네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팔대마역(八大魔 域)이란 것이 있었다." 천무영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팔대마역은 이름 그대로 제각기 강대한 마세(魔勢)를 형성하고 있는 여덟 개의 집단이었다. 또한 그들은 수백 년에 걸쳐 정도(正 道)에 짓눌려온 나머지 그 한을 풀기 위해 칼을 갈며 호시탐탐 기 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괴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때에 마침 꿈을 실현시켜줄 대마주(大魔主)가 나타나자 그들은 하나로 뭉쳤다. 모두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한편, 천하무림을 갖다 바치겠노라는 혈서를 쓰기도 했지." 천무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괴인의 말에 깊이 빠져들어갔다. 그에 반해 괴인의 음성은 한층 더 무거워져 있었다.


"팔대마역을 통일시킨 대마주는 그들을 중심으로 가공할 단체를 세웠다. 세칭 암흑마전(暗黑魔殿)이 그것이다." 듣고 있던 천무영의 눈에 거센 파랑이 일었다. '암흑마전......!' 그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괴인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 인물이... 암흑마전주라도 된단 말인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건도 보통 사건이 아니었다. 암흑마전주는 백 년 전 마도의 절대자로 군림했던 위인이다. 죽은 것으로 알려진 그가 이렇듯 버젓하게 살아 있으니 향후로 어떤 사 태가 야기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천무영은 결국 괴인으로부터 우려했던 말을 듣게 되었다. "노부의 이름은 사마천홍(司馬天洪)이라고 한다. 짐작했겠지만 당 년의 암흑마전주였었지." "으음!" 천무영은 신음을 발하더니 침중하게 덧붙였다. "당신이 아직 살아있을 줄은 정말 몰랐소." 그 말에 암흑마전주 사마천홍은 괴소를 터뜨렸다. "크크크큭......! 그래서 유감인 자는 많지. 특히 천금성주(天禁 城主) 모용천우(慕容天宇)라면 더할 것이다. 그의 천왕겁(天王劫) 은 내 심장을 정확히 찌르지 못했으니까. 당시 나는 단지 늑골 두 개를 잃었을 뿐이다." 태연하게 읊조리고 있었지만 그 내용인즉 천무영에게는 온통 충격 적인 것들뿐이었다. "꼬마, 이래도 노부에게 도전하겠느냐?" 천무영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당신이 누구이든 내 뜻에는 변함이 없소."


"크크크... 크카카캇......!" 사마천홍의 입에서는 아예 광소가 터져나왔다. 우웅― 소성에 깃든 공력으로 사방의 벽이 무섭게 진동했다. 천무영은 그 소리에 가슴 깊은 곳에서 웅크리고 있던 혼(魂)이 마 구 뛰노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그는 도전을 청했던 바, 이제 와 서 의지를 꺾는다면 그것이야말로 패배였다. '은자들의 염원이 식지 않는 를 받쳐줄 것이다!'

한 그것은 이 싸움에서도 끝까지 나

확고한 신념을 다지는 그의 뇌리에 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 의 주인은 은자천의 대천주인 광한상인이었다. 천무영은 전신에 공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리며 말했다. "사마전주, 얘기는 끝났소."

■ 무영탑 2 권 제 19 장 왜 무승부(無勝負)인가?

두 사람의 대치는 현장에서 막바로 이루어졌다. 천무영은 사마천홍과 정면으로 마주하자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 했다. 비록 눈동자는 없었으나 사마천홍이 뿜어내는 안광은 그에 게 동공이 파열될 듯한 충격을 전했던 것이다. "크크크... 가소롭다만 꼬마, 너는 미워할 수가 없구나." 한 덩이의 육괴나 다름없는 사마천홍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 더니 그로부터 가공할 무형의 강기가 폭사되었다. 우우우웅―!


"대단하구려! 정녕." 천무영은 그 막강한 기세에 자신도 모르게 경탄성을 발했다. 아울 러 그는 전신을 통해 눈부신 백강을 피워올렸다. 츠으으― 그 광경을 본 사마천홍도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오오, 놀랍구나! 너로 인해 광한상인의 광한여의천강(廣寒如意天 )을 보게 되다니." "별 말씀을!" 천무영은 말과 함께 일신을 눈부신 속도로 회전시켰다. 슈우우웅―! 그를 휩싸고 있던 백강이 무섭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고, 그 여파 로 사방의 기물들이 차례로 으스러졌다. 심지어는 벽이나 천정, 바닥의 철판 등도 무사하지 못했다. 모두 가 진동을 일으키며 잘게 바수어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허공에서 한 가닥 음산한 외침이 일었다. "무형살인마척(無形殺人魔拓)!" 사마천홍이었다. 그의 몸 주위로도 천무영이 발출시킨 백강에 버 금가는 거대한 강기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휘류류륭―! 두 사람의 공세는 마침내 격돌했다. 꽈꽈꽝! 천번지복의 벽력음이 사위를 뒤흔드는가 싶더니 태초의 혼돈인 듯 한 암흑이 그 모든 것을 덮어씌우고 말았다. 그 속에서 두마디의 참담한 신음성이 터져나왔다. "크윽!"


"이럴 수가......!" 잠시 후. 격류와도 같던 소용돌이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장내의 전경을 드러 냈다. 하지만 그것은 도저히 인간 대 인간의 격돌이 빚어 놓은 결 과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놀랍게도 혈혈마탑의 구층이 날아가 버렸다. 천정은 아예 흔적조 차 없어졌으며,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벽도 허물어졌으되 그 잔해 마저 일부만을 남기고 있을 따름이었다. 천무영은 백치가 되어 버린 듯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안색은 창 백하게 질려 백지장처럼 되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암흑마전주 사마천홍은 의자가 아닌 맨바닥에 있었는 데,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백포가 핏물로 인해 시뻘겋게 젖어 있 었다. 긴 백발 또한 적발(赤髮)이 되어 있었다. 쿠웅! 천무영의 신형이 급기야 모로 쓰러졌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는 자 욱한 혈무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전신 팔만사천 개의 모공에서 미 세한 핏줄기가 뿜어짐으로써 빚어진 현상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사마천홍은 낮게 부르짖었다. "과연 너는 노부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그 이 상이었다. 쿨룩, 쿨록......!" 심한 기침을 한 뒤로 그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놈... 감히 노부를 이 꼴로 만들어 놓다니! 네가 멀쩡했다면 따 귀를 한 대 갈겨주었을 것이다." 사마천홍은 애초에 보여 주었던 태도와는 달리 승부에는 도시 관 심도 없는 듯했다. 한때 암흑마전주로 불리우던 인물치고는 기이 할 정도로 만사에 초탈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말을 마치자 지면의 하부로 쑥 꺼져 들어갔다. "연홍(蓮紅), 그를 돌보아 주어라." 그가 쏟아낸 음성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스슷! 쓰러져 있는 천무영의 앞에 한 인영이 내려섰다. 그는 시종 사마천홍의 곁을 지키던 왜소한 적건인이었다. 그 덕분 에 그의 적건과 적포도 갈가리 찢겨져 있었다. 싸움의 여파는 그 에게도 이런 식으로 미쳤던 것이다. 그는 천무영의 상세를 살피기 위해 몸을 앞으로 숙였고, 그로 인 해 찢어진 적건 사이로 얼굴을 드러내게 되었다. 하나의 조각품인 양 준미하기 이를데 없는 얼굴을 그는 가지고 있 었다. 아마 천무영이 혼절해 있지 않았다면 그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워 손이라도 덥썩 잡았으리라. 적건인은 천인혈(千刃血)이었다. 예전에 천무영과 술내기를 하여 진 바 있는 그 괴벽한 인물이다. 사실 천무영이 이곳을 찾아온 이유도 당금 제일의 살수라는 천인 혈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잔혈맹에 당했다는 시신 들을 통해 미리 천인혈의 수법을 탐지해냈던 것이다. 사마천홍과의 일전이 있기 전에 벌써 그는 기도나 음성을 통해 천 인혈의 존재를 알아보았었다. 다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묻고 확인 하는 절차를 뒤로 미루었을 뿐이다. 휘이이잉―! 한 가닥 세찬 바람이 붕괴된 혈혈마탑의 구층을 무심히 휩쓸고 지 나갔다. 그 탓인지 가뜩이나 맥없이 덜렁거리던 천인혈의 머리끈 이 기어이 툭 끊어지고 말았다. 그의 어깨 위로 칠흑 같은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내렸다. 그 러자 그 머리칼이 지닌 검은 색조와의 대비로 인해 희디 흰 그의 얼굴이 발산해내는 아름다움은 더욱 돋보였다. 하지만 천인혈, 아니 연홍(蓮紅)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그런 것 따위에는 일체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근심이 깃든 눈으로 천 무영을 지그시 내려다볼 따름이었다. 그의 눈에는 어느덧 뿌연 기운이 어리고 있었다. "당신을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곧이어 창백한 그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과거에 저는 마음 속으로 약속했었습니다. 당신에게 그림자를 잃 은 이후, 당신의 사람이 되겠노라고." 의식을 잃은 천무영이 알아들을 리 만무였으나 천인혈 연홍은 읊 조림을 그치지 않았다. "그 당시 당신의 지적으로 검법에 진전을 얻고 벅찬 상대를 무사 히 벨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손을 뻗어 천무영을 안아들었다. "어쩌면 당신과 같은 길을 렇게 되었으면......."

걷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아니, 꼭 그

슷! 그는 천무영을 안은 채 꺼져 들어갔다.

앞서의 사마천홍과 마찬가지로 밑으로 쑥

휘이이― 휘이이잉―! 바람은 혈혈마탑을 휘감으며 어두워지는 암천으로 휘말려 올라가 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달빛은커녕 별 하나 눈에 띄지 않는 암천 은 무섭도록 가라앉아 있었다.

똑... 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언제부터인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잠든 영혼을 일깨우듯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들려오는 그 소리가 천무영 을 무의식 속에서 이끌어낸 것이었다. 그는 깨어나자마자 고개를 움직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유 감스럽게도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이지? 이곳은 어디......?'


천무영은 자못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자신이 살아 있다는데 대해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기뻐하기에는 일렀다. 무엇보다 몸상태가 어떨지 심히 걱정되는 그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일신을 움직여 보았다. "윽!" 그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나왔다. 우려했던 바대로 그는 멀쩡하지 못해 그저 약간 움직였을 뿐인데 도 전신이 부서져 나갈 듯한 고통이 엄습해 왔다. 아마도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의 고통이 있다면 이런 것이리라. 천무영은 이를 악물고 다시 움직임을 시도해 보았다. 무인으로서 만일 이대로 몸을 쓰지 못하게 된다면 살아 있은들 죽 은 것이나 무에 다르겠는가? 따라서 그는 고통으로 인해 주저앉기 보다는 차라리 고통과 싸우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전자에도 무수히 많은 고통의 순간들이 있었다. 그것은 대과벽에서의 혹독한 무공수련 과정을 이름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 당시에도 지금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었다. 적어도 이렇듯 운신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똑... 또독......!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이 순간에도 계속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몸이 젖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무영은 이번에는 시험 삼아 안력을 돋구어 보았다. '아! 보인다.' 그의 심중에서 탄성이 인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말 그대로 시력이 점차 회복되며 뿌옇게나마 주위의 정경을 볼 수 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거무죽죽한 담(潭) 위에 떠 있었다. 물방울은 천정에 매달려 있는 종유석(鐘乳石)에서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으음!"


천무영은 부지중 미간을 슬며시 찌푸렸다.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있으면서 물방울 소리 나 듣고 있자니 그에게는 심적고통까지 겹쳐왔다. 요컨대 그 소리 는 더할 나위 없는 무력감과 직결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미쳐버릴 것만 같은 심정을 가히 초인적인 인내 로 이겨내야만 했고, 그러는 사이에 삼 일이라는 시간은 삼 년과 도 같이 지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떠냐, 꼬마. 견딜만 하느냐?" 삼 일 내내 들려오던 물방울 소리도 지겨웠지만 암흑마전주 사마 천홍의 빈정거리는 음성은 더 들어주기가 힘들었다. 천무영은 차라리 툴툴 웃었다. "그렇게도 재미있소? 내 이런 꼴이." "크크...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궁금하면 너도 나중에 한 번 해 보아라. 네게 그럴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설사 기회가 주어져도 나는 그따위 짓은 하지 않소. 타인의 고통 을 보며 즐기는 행위는 내 적성이 아니외다." 사마천홍의 음성은 더욱 비릿해졌다. "힘들겠구나, 크ㅋ! 그 지경이 되고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면. 나 야말로 너처럼 구는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아 못한다." "그만 하시오, 더 듣고 싶지 않소." 천무영은 낮은 음성으로 잘라 말하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평소 같았으면 그에게 일 장을 날렸을 것이나 현재로선 그저 눌러 참는 수밖에는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놈! 그래도 오기는 살아가지고, 크크큭......!"


반응도가 떨어지자 흥미를 잃어서였을까? 다행히도 사마천홍의 조 소는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열흘이 흘렀다. 그 사이에 천무영은 전신을 옥죄이던 고통에서 조금씩 해방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보던 그는 낙 심한 나머지 탄식을 금치 못했다. '틀렸다! 이 상태로는.......' 사마천홍의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꼬마야, 그만 항복하고 내 제안을 받아들여라. 너는 분명 나에게 패하지 않았느냐?" "시끄럽소." "크크크큭......!" 두 사람의 대화에도 별 진전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시 열흘이라는 긴 시간이 흘러갔다. 그동안에도 낮과 밤은 어김없이 바뀌었고, 천무영은 운신을 못하 는 부자유스러움 속에서 똑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사마천홍이 언제나처럼 그를 찾아왔다. 그리고 늘 그랬듯 끈질기 고도 집요한 설득이 반복되었다. "어때, 생각 좀 해보았느냐? 네가 잔혈맹주의 자리를 맡아 준다면 천하를 독패하게끔 도와줄 수도 있다." "이미 말하지 않았소? 내게 그런 욕심 따위는 없다고." 천무영의 음성도 예외없이 무감동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만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그의 어감에서 적의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 는다는 점이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마천홍은 게 말하지 않고 물러났다.

큭큭거리며 웃더니 더 이상 길


이십오 일이 지났다. 천무영은 팔다리를 약간씩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모조리 소실되 어버린 공력은 여전히 한 올도 회복하지 못했지만. 사마천홍이 말했다. "이젠 지겨우니 고집을 꺾어라, 꼬마 놈! 기회라는 게 어디 항상 있을 줄 아느냐?" 천무영은 웃었다. "그건 나도 아오." "그런데 왜 노부의 말을 듣지 않는 게냐? 원한다면 나는 본신의 공력을 너에게 이전시켜 줄 수도 있다." "후후... 그래도 싫소." 천무영은 사마천홍과 말을 나누면서도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그것이 몸의 변화에 따른 현상 이라는 사실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오십여 일만에 천무영은 정말로 웃을 수가 있었다. "후후후후......!" 마침내 길고 긴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더욱 더 그를 기쁘게 한 것은 운공을 해보면 그때마다 약간씩이나마 단전 에 공력이 모아진다는 사실이었다. 사마천홍이 와 그를 을렀다. "크크크... 꼬마야, 나는 너를 포기할지도 모른다. 내 인내력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그 전에 맘이 변하면 말해라." 천무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느냐, 슬슬 겁이라도 나는 것이냐?" 조소가 섞인 추궁에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그 자신 외에 누구도 알지 못했다.


백일째 되는 날이다. 꽝! 꽈르르릉―! 굉렬한 폭음에 이어 담(潭)에서 무엇인가 날아나왔다. 천무영. 자욱한 흙먼지 속에 우뚝 선 그는 사지백해에 믿을 수 없으리만큼 강한 힘이 넘쳐흐르는 것을 느꼈다. 느낌 같아선 이 정도라면 일 장에 산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으음! 공력이 이전보다 오히려 증진된 듯하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그다지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무엇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그 상태로 어딘가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지하광장(地下廣場). 천무영은 담의 측면을 따라 에 당도해 있었다.

십여 장쯤을 걸었고, 그 결과로 이곳

끼익......! 쇠를 긁는 듯한 음향과 함께 천천히 굴러왔다.

그의 앞으로 바퀴 달린 의자 하나가

"으음!" 천무영은 자신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발했다. 의자 위에는 암흑마 전주 사마천홍이 사뭇 거만하게 버티고 앉아 있었다. "크크... 꼬마, 너는 또 노부와 싸우고 싶겠지?"


사마천홍이 파면(破面)을 씰룩거리며 물었다. 천무영은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왜 나의 몸을 회복시켜 주었소?" 그는 지난 백 일 동안 아무 생각없이 지낸 게 아니었다. 중상이 완치되고 공력까지도 증진되었으되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것이 모 두 사마천홍의 안배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으므로. 사마천홍은 음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크ㅋ! 그렇다고 너무 감격해 할 건 없다. 노부는 단지 공평한 대 결을 하고 싶었을 뿐이니까." "어찌 하면 공평한 대결이오?" "전번의 싸움에서 노부가 이긴 것은 공력의 우세 탓이었다. 내가 공력이 우위인 것은 나이로 보아 당연한 노릇이고. 그러니까 이젠 초식으로도 굴복을 시켜보겠단 말이다." 천무영은 일시지간 마음이 크게 흔들려 무슨 말도 할 수가 없었 다. 이 순간 그의 눈에 비친 사마천홍의 모습이란 마객(魔客)이 아니라 대협객(大俠客)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겁이 나면 거절해도 좋다. 내 너와의 승부라면 그 결과에 대해 일체 비밀로 붙여줄 용의도 있다." 천무영의 눈썹이 무섭게 꿈틀거렸다. "남에게 모욕을 주는 건 당신의 취미요?" "크ㅋ! 맞다. 특히 삼태성체(三太星體)인 꼬마놈을 가지고 노는 일은 아주 재미있거든." "끙!" 천무영의 입에서 그답지 않게 괴상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러더 니 사마천홍을 응시하며 내심 투덜거리기에 이르렀다. '빌어먹을! 가지가지로군. 내 등에 찍힌 삼태성점(三太星點)은 언 제 또 보았지?' 자존심이 구겨진 가운데서도 그는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 리하여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당신은... 정말로 초식대결이 가능하오?" 그 말에 사마천홍은 의외로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걱정할 것 없다. 노부가 불구자가 된 건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충분히 극복을 했다는 얘기지." 쨍! 쨍......!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놀랍게도 인(劍刃)이 튀어나왔다.

그의 어깨와 다리 부분에서 검

"음!" 천무영은 사마천홍에 대해 새삼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가 어떤 부류의 인간이든 적어도 좌절을 모르는 기질만큼은 능히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너도 검을 쓰겠느냐?" 슉! 한 자루의 보검이 날아왔다. 천무영은 그 검을 받으며 자신도 모 르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 상대에게 예를 표했다. "고맙소." "크크... 고마울 것 없다. 자, 간다!" 파츠츳―! 예리한 검강이 일직선으로 뻗어오자 천무영은 일순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있을 시간은 없었다. "차앗!" 그는 검신합일(劍身合一)되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사마천홍의 실력을 알고 있기에 그는 처음부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카카카캉―! 불꽃이 사방으로 찬연하게 퍼져나갔다.


그 광경은 눈앞이 현란하다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변화무쌍한 검과 검의 대결은 무림사상 일찌기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장면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콰쾅! 콰르르르― 지하광장의 천정과 벽이 검기의 소용돌이에 의해 폭발음과 함께 마구 깎여나가고 있었다. 천무영. 그는 전신에 땀을 비오듯 흘리며 지닌 바 절학들을 모두 쏟아내고 있었다. 은자십천은 물론이고 은자구십구천의 절세비학까지도 그 를 통해 무수히 발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사마천홍을 제압할 수 없었으며 사마천홍 또한 천무영을 제압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의 대결은 벌써 일천 초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 끝에 천무영은 정신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다. '이럴 수가......!' 그는 자신이 익히고 있는 절학들을 전부 다 펼쳤으나 종내 사마천 홍을 이길 수 없었다. 그때마다 괴공마초(怪功魔招)를 전개해 그 의 공격을 무위로 돌아가게 하니 어쩌겠는가? 이로써 천무영에게는 더 이상 펼칠 무학이 남아있지 않았고, 싸움 은 어느덧 삼천 초도 넘게 흘러가고 있었다. 파츠츠츳―! 전세는 갈수록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크크크......." 사마천홍은 사지를 대신한 검인을 마구 휘두르며 쉴새 없이 공격 을 가해왔다. 그 기세란 시종 굳건하면서도 막강했다. 반면에 천무영은 백의가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채 악전고투를 면 치 못하고 있었다. 물심양면에 걸쳐 상처를 입고 운신을 못해 담 위에 떠 있을 때보다 손톱만큼도 나을 것이 없었다. 그는 언뜻 두통을 느끼기도 했다. 이는 홍수처럼 밀어닥치는 사마


천홍의 공격에 숨이 막힐 지경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말의 체념 탓인지 천무영의 답답했던 가슴은 곧 가라앉 기 시작했다. 그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밀려드는 공세를 막아내며 상대의 동작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는 사이, 천무영의 눈은 크게 떠졌다. 그는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우박처럼 쏟아지는 사마천홍의 공격에 일 점의 살기도 담겨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완만한 가운데 끊임없이 반복되는 공세들을 보며 막아내기에 바빴 던 천무영은 그 내용을 간파해낼 수가 있었다. 그렇게 다시 일천여 초수가 흘렀을 때 그는 사마천홍이 발출해낸 초식들을 대강이나마 모두 머리 속에 그릴 수 있었다. 종내 천무영은 이를 악물고 상대의 초식을 역으로 받아쳤다. 파팟! 콰쾅―! "윽!" "크큭......!" 한 바탕의 격돌을 거친 두 사람은 각기 피를 뿜으며 허공으로 튕 겨져 나갔다. 그것으로써 일대 격전도 종(終)을 고했다.

지글지글....... 지옥불과도 같은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으으윽!" 천무영은 심신을 송두리째 태워버릴 듯한 뜨거운 불길이 정수리로 떨어져내리는 것을 느꼈다.

대과벽.


중천의 일륜은 대열사(大熱砂)의 사막을 가루로 태워버리고도 모 자라 아주 녹여버리려는 듯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모래는 너무도 뜨거워 맨살을 대면 살익는 냄새가 날 지경이었다. 천무영은 벌거벗은 채 일륜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벌써 구십구 일이 지났으나 그동안에 그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그렇게 누워 있었던 것이다. 밤이 되면 상황은 급변한다. 삼라만상을 다 태워버릴 듯한 폭양은 거짓말처럼 서쪽 사구(砂丘)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대신 암흑과 함께 뼈를 에일 듯한 한기가 엄습해 온다. 천무영은 그런 극과 극의 고통 속에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했 다. 그는 신지가 마비된 가운데 낮에는 가히 잿더미로 바스러졌고 밤에는 반대로 얼음덩이처럼 굳어 버리곤 했다. 죽기는 더 힘들었다. 일신의 기력이 모조리 쇠하여 사경을 헤매고 있으면 그때마다 예외없이 은자십천 중 누군가가 찾아와 그의 정 수리에 전신내력을 주입해 주고 사라졌으므로. 그런 식으로 백 일이 되던 날, 천무영은 머리 속에서 무엇인가가 폭발하는 듯한 충격을 받으며 혼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쏴아아아―! 천무영은 전신 사지백해에 노도와도 같은 경기가 무서운 속도로 치달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 미친 듯한 경기의 흐름은 어떻게 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십이 경락과 삼십육 중추는 물론 칠십이 경맥과 백팔 요혈, 삼백 육십 경혈소로 흐르는 경기가 두루 막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서 언뜻 천무영은 일신이 구름이 된 듯 둥둥 떠오르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다만 의식이 가물가물하여 그것이 꿈인 지, 생시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귀에 익은 음침한 음성이 들려왔다.

- 꼬마야, 기분이 어떠냐?


천무영은 충격을 받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음성을 통해 그는 환각의 세계로부터 현실로 튕겨져 나왔던 것이다. '사마전주......!' 그 음성의 주인은 암흑마전주인 사마천홍이었다. 천무영은 도로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애써 가다듬으며 상대를 향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오오! 다... 당신, 내게 무슨 짓을......." 그는 크게 당황하고 있었고, 이를 눈치챈 사마천홍도 굳이 내심을 숨기지 않고 광소를 터뜨렸다. "크허허헛......! 꼬마야, 너는 나를 거부해서는 안된다. 노부는 어차피 죽을 사람이다. 이제껏 이런 몸으로 버텨온 것만도 천행이 었지. 앞으로는 채 일 년도 살아 있지 못할 것이다." 천무영은 격정이 치밀어올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는 온 갖 만행을 일삼는가 싶어 사마천홍을 무척이나 혐오했으되, 그런 마음은 눈이 녹아내리듯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사마천홍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동안 노부가 잔혈맹의 맹주 자리를 비워둔 것도, 줄곧 이끌어 나갈만한 새로운 인재를 찾았던 것도 모두 그때문이었다. 죽음은 다정한 벗인 양 늘 내 곁에 가까이 있었지." "우우......!" 천무영의 입에서는 비명과도 같은 기이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 는 희망을 잃어 체념으로 일관된 삶 속에서도 극기(克己)에 성공 한 한 인물에 대해 경외감을 표현한 것이었다. "장자유로부터 너에 관한 보고를 받았을 때만 해도 노부는 반신반 의 했었다. 그런데 네놈이 혈혈마탑을 한 층씩 정복해 가는 것을 보면서는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다. 크크큭......!" 사마천홍의 음성은 시종 음침하기 그지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없었으나 천무영은 그런

"크크... 네놈의 자질은 고금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수하다. 하지만 노부가 자청하여 삼백 년에 달하는 내공을 전수 하려는 이유는 네게 따로 부탁이 있어서이다." "저, 으윽!" 뭐라 말을 꺼내려던 천무영은 비명으로 대신해야 했다. 체내에서 무섭게 휘돌던 진기가 입을 벙긋 열자마자 거대한 힘으로 그의 전 신을 압박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크ㅋ! 입은 꽉 닫고 있는 게 좋다. 그렇지 않으면 아까운 진기가 밖으로 유출되어 버리는 불운한 사태가 빚어진다." 사마천홍은 천무영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환히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계속하여 담담하게 말했다. "네놈은 영리하니까 노부와의 비무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너와 나는 싸운 게 아니다." 천무영이 심중으로 답했다. '그렇소, 나는 당신에게 시험을 당했을 따름이외다.' 사마천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는 기쁘다. 네놈이 마음에 들었을 뿐만 아니라 네놈으로 하 여금 노부의 무학을 습득하게 만들었으므로." '역시......!' 천무영의 가슴은 또 한 차례 들끓듯 진탕되었다. 그의 머리 꼭대 기에 앉아 있는 듯한 사마천홍이 이렇게 덧붙였다. "크크... 은자천이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전설의 정사양대지맥(政 邪兩大之脈)의 무학에는 비할 수 없느니, 크크......." 그 말에 천무영은 눈을 크게 치떴다. '오오, 정사양대지맥이라면......!' "그들 대라천부(大羅天府)와 만겁종(萬劫宗)의 무학만이 진정한 무종(武宗)이라고 할 수 있다. 노부의 무학은 그중 만겁종에서 유 래된 것이지." '아!'


천무영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노부는... 크크... 천하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다. 암흑마전 을 세운 것은 그 불행을 증오했기 때문이고." 사마천홍의 음성은 차츰 가라앉았다. 그는 여태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과거지사를 털어놓고 있었다.

사마천홍. 그는 본래 중원제일의 명가라는 사마세가(司魔勢家) 출신이었다. 대대로 일곱 번이나 승상(丞相)이 나온 사마세가는 삼대에 걸쳐 구문제독(九門提督)과 금군통령(禁軍統領)까지도 배출해낸 유수의 가문이었다. 그러나 사마천홍은 분명 사마세가에서 태어나기는 했으되 그에 따 른 혜택을 누리기는커녕 성장하는 동안 내내 고초만을 겪어야 했 다. 이유는 그가 적자가 아닌 서자이기 때문이었다. 대장군인 사마대운(司魔大運)이 어느날 밤 술이 잔뜩 취해 사마세 가의 하녀를 건드림으로써 생긴 씨앗이 그였다. 어떻든 그는 허울만은 사마세가의 팔공자 중 막내로 적출(嫡出)인 일곱 명의 형들보다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불행은 전부 거기에서 야기되었다. 그는 자라면서 부친에게는 매우 사랑을 받았는데 일곱 형들에게는 종종 까닭도 없이 끌려가 모진 매질을 당하곤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사마세가를 떠나라는 강요도 수태 받았다. 하지만 사마천홍으로서는 형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우애를 믿었던 바,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을 떠올리며 형들의 질시를 묵묵히 참아냈다. 그런 그릇의 차이는 칠공자의 노여움을 더욱 부추겼다. 그들은 사 마천홍이 굴복하지 않자 급기야 그의 모친에게 손을 썼다. 힘깨나


쓰는 불한당을 사 겁간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직후, 사마천홍의 모친은 한 장의 혈서를 남긴 채 자결을 하고 말았다. 그 혈서에는 아들에게 복수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 모든 것을 버리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숨어 살라는 처절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모친의 권고야말로 사마천홍을 더 없이 자극시켰다. 그는 모친을 잃고도 도피나 해야 되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처음으로 깊 이 생각하게 되었고, 그 원인을 규명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사마천홍은 복수지검을 잡았다. 그는 편월이 뜨던 어느날 밤, 일곱 형 중 여섯 명의 목을 베고 그 길로 사마세가와 이별했 다. 그리고 폭발할 듯한 분노를 천하를 향해 돌렸으니....... 그것이 바로 암흑마전이 천하를 혈세하게 된 동기였다. "그로부터 근 백 년의 세월이 지났다. 크크......." 사마천홍은 쓴 웃음 뒤로 짧게 부언했다. "노부는 지난 인생을 후회한다." '아!' 천무영의 눈이 휩떠지는 순간이다. 그는 그 상태에서 새삼 사마천 홍을 바라보았으며 그제서야 그간에 이해하기 힘들었던 두 사람 간의 관계를 확실하게 정의할 수 있었다. '이분은 진정으로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것도 자신의 인생 기 록을 고쳐 쓰기 위해......!' 천무영의 눈에서 물기가 내비쳤다. 그로서는 기질상 상대가 백여 년에 걸쳐 절대마존으로 군림했었다는 사실보다는 그 처절한 동기 와 본연의 자신을 되찾고자 하는 몸부림에 더욱 마음이 기울 수밖 에 없었던 것이다. 이때에 사마천홍은 타는 듯한 시선으로 천무영을 응시하고 있었 다. 비록 실제의 눈은 없었지만 마음의 눈이 열려진 만큼 그 퀭한 구멍에서 쏘아져 나오는 빛은 강렬하기 그지 없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마주하고 있었다. 천무영은 어느덧

정신이 회복된 만큼

진기의 압력에서도 놓여나


있는 자신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입을 열어 물었다. "내게 하려는 부탁이... 무엇이었소?"

잔혈맹의 한 내실이다. 그곳에서 지극히 대조적인 두 인물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 사람은 젊고 활력이 넘치는 아름다운 청년이었으며 다른 한 사람 은 사지가 없고 얼굴이 뭉개진 추악한 노인이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천무영과 사마천홍이었다. 두 사람은 처음으로 격의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노부는 네가 삼태성, 즉 천지인삼태지교(天地人三太之交)의 체질 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무척 놀랐었다. 일편으로는 의외의 수확이 다 싶어 뛸 듯이 기뻤던 것도 사실이고. 크크......." 웃음소리와 마찬가지로 그의 기괴한 음색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 에 응하는 천무영의 어투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건 저로서는 반가운 일이 못됩니다." "크ㅋ! 그렇겠지. 어찌 보면 세상 이치는 공평한 게야. 뛰어난 자 질을 타고난 자는 필히 그만큼의 불운도 따르게 마련이니까. 은자 들이 너를 괜히 선택했다고는 믿지 않는다." "맞습니다." "어쨌든 나는 그 점을 매우 다행으로 여긴다." "왜입니까?" 천무영이 묻자 사마천홍은 정말로 허심탄회하게 답했다. "무엇보다 노부의 마음에 드는 것은 은자천이 정사지간(正邪之間) 의 집단이라는 점이다. 네가 정도 출신이었거나 혹은 사도에서 배


출해낸 자였다면 노부와 인연이 닿지 않았을 것이다." "으음!" "노부는 체질적으로 정도를 혐오한다. 그들은 늘상 도의를 앞세우 는데 그러다 보면 위선이 되곤 하지. 인간은 누구고 완벽하게 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악에도 나름의 사유가 있은즉 헤아릴 아량 이 필요하거늘, 그들에게는 그것이 없다." "그럼 악을 모두 허용해야 된단 말씀입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크크큭......!" 사마천홍은 과장되이 웃더니 불쑥 물었다. "당돌한 꼬마 놈, 너는 지금 노부가 스스로를 용납하고 변명이나 늘어놓고 있는 것처럼 보이느냐?" 천무영은 씨익 웃었다. "죄송합니다, 노선배." "쓰헐! 하여간 너는 감탄스러운 놈이다. 노부의 생각을 뻔히 알면 서도 굳이 짚고 넘어가야 하는 그 성정까지도 말이다. 자신의 관 념과 조금이라도 부합되지 않으면 절대 굽히지 않는. 크크... 그 런 면에서라면 너는 노부와 꽤 닮았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노선배께서 제게 베푸신 집요한 추궁과 시험 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텐데요?" "크크크크......!" 사마천홍은 크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제 너는 천하제일의 내공을 지니게 되었다. 뿐만 아니 라 노부의 뒤를 이어 만겁종의 전인(傳人)이 될 테고." "으음!" 천무영의 안면에서 웃음기가 걷혀나갔다. 되도록 밝은 얼굴을 보 이려 했으나 여기까지가 그의 한계인 모양이었다. 사마천홍은 현재 일신의 내공을 거의 다 천무영에게 쏟아부어주고 빈 껍데기만 남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였다.


이나마 생명줄을 잇고 있는 이유는 지금과 같은 대화의 시간을 가 지기 위해서였는데, 자신의 일은 젖혀두고 주로 잠언에 가까운 얘 기만을 하여 종내 심금을 울려놓은 것이다. 천무영은 침착하려 무진 애를 쓰며 요지를 상기시켰다. "노선배께선... 아직 부탁 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 셨습니다." "그랬었나? 크크크......." 사마천홍은 기소를 발했으나 말을 돌리지는 않았다. "노부는 네가 잔혈맹을 발판으로 삼아 천하를 얻기를 원한다. 물 론 그 방식은 노부가 고수해온 것이 아닌 네 것이어야 한다. 하지 만 단 한 명에게만은 예외를 두었으면 한다." "무슨 뜻입니까?" "그자를 죽여다오." "그게 누구입니까?" "크크... 노부를 배신한 제자 놈!" "아!" 천무영은 의외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암흑마전주에게 제 자가 있었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가 제자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것 역시도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분노와 다소 격앙되어 흘러나왔다.

증오를 대변하듯 사마천홍의 음성은

"놈은... 한마디로 존재가치가 없다. 필요에 따라서는 수단과 방 법을 가리지 않고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놈이니까. 아마 제 부모라도 걸리적거리면 가차없이 처단할 것이다." 천무영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세상에 그런 자가 있었습니까?" "그렇다. 천하에서 가장 잔인한 놈이지. 게다가 치밀한 두뇌와 엄


청난 무공까지도 겸비하고 있다." "그가 대체 누굽니까?" "놈의 이름은 등천륭(登天隆), 현재 지옥성주(地獄城主)다." "으음!" 천무영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발했다. 지옥성이라면 잔혈맹와 더불어 당금 무림에 대혈풍을 일으키고 있 는 신비의 집단이었다. 그런데 성주가 암흑마전주와 그런 인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실로 상상키 어려운 일이었다. "크크... 등천륭, 그놈은......." 사마천홍의 입에서 또 하나의 비사(秘史)가 흘러나왔다.

암흑마전주 사마천홍. 그는 백여 년 전 천금성주인 모용천우에게 패한 이후 절치부심했 다. 그는 팔대 마역을 수중에 넣는 한편, 암중으로 각처에 흩어져 있는 마도의 고수들을 끌어모으기에 이르렀다. 이르자면 제이의 혈세를 이루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작업에 들어갔 던 셈인데, 그 와중에 사마천홍은 평소부터 탐내던 천지쌍괴를 포 섭하고자 직접 길을 나선 적이 있었다. 그것은 근 삼십 년이나 지난 일로서 그는 당시 낭산(狼山) 부근을 지나고 있었다. 사마천홍은 그곳에서 이리떼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한 사내아이를 보게 되었다. 아이는 이리의 먹이가 되기 직전으로 얼굴이 벌써 반 이상 뜯겨나간 상태였다.


어쨌든 그러고도 살아 있는 끈질긴 생명력은 사마천홍을 감동시켰 고, 그로 인해 아이는 이리떼들로부터 구출되었다. 더구나 아이는 무공을 익히기에 더없이 좋은 자질을 천부적으로 갖추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바로 등천륭이었다. 사마천홍은 아이를 근처의 동굴에서 요상시켜 주었으며 그러는 동 안 본래의 목적도 잊고 무한한 집착을 가지게 되었다. 끼니는 주로 아이를 습격했던 늑대로 해결했은즉 그것은 희대의 대마왕다운 발상이었다. 그 괴행을 통해 그는 뜻하지 않게 일생일 대의 기연과 만나게 된다. 저녁식사 감이었던 늑대의 뱃속에서 놀 랍게도 한 장의 지도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름하여 만겁지중별부비도(萬劫地中別府秘圖). 이는 소위 만사만악(萬邪萬惡)의 근원이라는 만겁종의 마공지학이 묻혀 있는, 구천만겁지중별부(九天萬劫地中別府)의 위치가 그려진 비도였다. 사마천홍은 이 모든 안배를 하늘의 뜻이라 여겨 아이를 유일한 직 전제자로 삼았다. 등천륭이라는 이름도 그때 지어졌다. 이후로도 등천륭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자질만 해도 예 상을 훨씬 뛰어넘어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았으니, 그는 대견하 게 생각해 자신의 절학을 모조리 전수해 주었다. 반면에 등천륭은 성격상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절대로 남 을 믿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은인이자 사부인 사마천홍에게도 그 점에서는 예외를 두지 않았다. 사마천홍은 등천륭의 그 면조차도 마음에 들었다. 남을 믿었다간 언제고 실수를 범하게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으므로. 등천륭은 그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나날이 변화해갔다. 그리고 그 동안에 사마천홍은 만겁지종별부비도를 꾸준히 연구, 분석해 마침 내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는데 성공했다. 그것은 등천륭이 이십 세 되던 해의 일이었다. 사마천홍의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정도였다. 그는 만겁종의 무학만 익히면 천금성을 깨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으며 뒷일 을 등천륭에게 맡기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구천만겁지중별부는 천하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그곳을 찾아낸 사마천홍은 전설의 만겁종이 남긴 마공절학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일명 마공구천구백구십구예(魔功九千九百九十九藝), 이것은 가히 상상을 절하는 기상천외한 마공기학이었다. 사마천홍은 천하일통을 확신하며 암흑마전으로 돌아왔다. 그는 제반사를 다시 등천륭에게 일임하고는 막바로 폐관수련에 들 어갔다. 그때까지도 그는 자신이 없는 동안 등천륭이 반심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등천륭은 사마천홍이 폐관해 있는 동안 암흑마전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고, 급기야 사부가 먹을 음식에 독을 넣었다.

"크크... 빈사상태에서 백 일만에야 깨어나고 보니 기가 막히더구 나. 놈에 의해 사지가 끊기고 눈이 뽑혀 나갔는가 하면... 전신의 심줄마저 가닥가닥 끊겨 있었지......." "으음!" "여하튼... 만겁마종 중 불사대마천공(不死大魔天功)을 익히고 있 었던 덕에 노부는 되살아났다. 그것은 육신이 아무리 망가져도 숨 만 붙어 있으면 회생할 수 있는 기적의 마공비예다." 말을 이어가는 사마천홍의 음성은 계속 떨려 나왔다. "놈은... 그런 나를... 천장단애 아래로 내던졌다." "그럴 수가......!" 천무영은 전율을 금치 못했다. "크크... 노부는 그래도 죽지 않았고, 후일을 도모했다. 불사대마 천공 외에도 내 머릿 속에는 놈이 미처 익히지 못한 만겁마학(萬 劫魔學)은 절반 이상 들어있었으니까 말이다." "음....... 그랬었군요." "당시 노부는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았지. 천하은밀색(天下隱密色) 과 천하은밀살(天下隱密殺)이 그들이다."


"천하삼은밀 중 두 사람 말씀입니까?" "그렇다. 크크... 당시 그들은 천금성주에게 원한을 품고 천금성 에 잠입했다가 중상을 입고 패주하던 중이었다. 그들이 노부를 이 곳으로 데려왔다." 사마천홍은 옛일을 회상하듯 나직이 말을 이어갔다. "그후로 그들은 상세를 이기지 못하고 나보다 먼저 생을 마감했 다. 쌍둥이 딸을 남겨둔 채로 말이다." 천무영은 거기까지 듣자 짚히는 바가 있었다. '그럼 잔혈맹의 살수들이나 혈혈마탑의 팔층에서 만난 요녀들은 천하은밀살과 은밀색이 키웠겠군.' 사마천홍의 음성이 이어졌다. "그 두 계집아이도 복수에 혈안이 되어 있다. 현재는 잔혈맹의 일 급 살수들이지. 물론 노부의 영향이다." "그녀들도 세상에 대해 증오를 품고 있습니까?" "크크... 아직은 아니야. 개정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 "으음......." "그 계집아이들도 네놈에게 맡기겠다. 크크.... 다루기는 좀 힘들 겠지만 본성만은 선량한 아이들이니 잘 이끌어 주어라." 천무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노선배." 사마천홍은 자신이 해야 할 마지막 말을 그에게 했다. "노부는... 너를 믿는다." "노선배......." 천무영의 눈에 기어이 눈물이 고였다.


혈혈마탑의 구층이다. 사마천홍이 앉아 있던 흑색의 의자에는 천무영이 앉아 있었다. 결 국 그는 잔혈맹의 맹주 위(位)를 계승한 것이었다. 그의 전면에는 천인혈이 부복하고 있었다. "의외로군. 그대가 여인이었다니." 천무영의 말에 천인혈은 일신을 가늘게 떨었다. 그러더니 곧 고개 를 반짝 들며 또렷한 음성으로 반문했다. "그래서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흐음?" 천무영은 놀란 듯 눈썹을 불쑥 치켜올렸다. 아닌 게 아니라 상대 의 말에는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실은 천인혈이 여인이고, 게다 가 빼어난 미인이어서 부담스럽던 그였다.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맹주." 천인혈의 인사에 천무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직은 맹주라 부르지 기 전까지는 사양하겠네."

말게. 잔혈맹 내에서 내 소신을 펴

"무슨 뜻입니까? 그 말씀은." "그것은 그대가 상관할 바가 었던 약조의 일환이니까."

아니다. 사마맹주와 본인 사이에 있

천무영은 상대가 원하는즉 그대로 남자로 대하고 있었다. 그는 내 친 김이라 여겼는지 과거의 일까지 들추어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 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천인혈, 그대가 말했듯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이는 그대와 나 사이도 마찬가지다. 잊지는 않았겠지? 그대의 그림자가 내 것이라 는 사실을."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삼 년 동안이라는 것도?" 천인혈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말했다.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맹주... 아니, 주공(主公)께서는 이제 부터 영원히 저의 주인이십니다." "쯧! 그렇게 되나?" 천무영은 쓴 입맛을 다신 후, 그녀에게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어찌 되는가?" "금연홍(金蓮紅)이라 합니다만 천인혈로 불러 주십시오." "음, 알겠네. 그럼 그대와 쌍둥이 자매인 처자는?" 금연홍은 서슴치 않고 대답했다. "금모란입니다." "뭐, 뭣이?" 천무영은 놀란 나머지 눈을 크게 떴다. "자네 지금... 금모란이라고 했는가?" "그녀를 아십니까?" "그녀는... 개봉성 천일야화원의 제일화가 아니었는가?" "맞습니다." "어찌 이런 우연이......!" 천무영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들의 용모는 어찌된 것인가? 내가 보기에는 전혀 다른 것 같은데." "닮지 않았습니다, 기이하게도."


"음....... 그녀는 어디 있는가?" "천금성에 있습니다." "천금성......!" 금연홍은 놀라는 그에 반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녀는 현재 천금성 내에서도 가장 무서운 실력자인 북궁현리의 애첩으로서 잠입해 있습니다." '맙소사!' 천무영은 기절할 듯 놀라는 한편, 심중에서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억누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좀더... 자세히 얘기해 보게." 금연홍은 돌연한 그의 태도에 다소 당혹을 내비쳤으나 품 속에서 두터운 책자를 꺼내 두 손으로 내밀었다. "여기에... 본맹의 조직과 활동사항이 적혀 있습니다." "으음!" 천무영은 책자를 받아든 후, 굳은 얼굴로 첫장을 열었다.

- 제일살(第一煞) 금모란(金牡丹). 천금성 잠입에 성공. 북궁현리로부터 지극한 총애와 신임을 얻고 있음. 목적은 천금성주의 천금성 내의 동태를 살피는 것. 현재까 지 많은 보고를 해 왔음.

- 제이살(第二煞) 금연홍(金蓮紅). 잔혈맹 내부의 일을 관장함. 모든 조직의 총 지휘책. 지옥성에 첩 자를 집어넣는 일을 추진중임.

- 제삼살(第三煞) 무흔(無痕).


역시 천금성에 잠입해 있음. 제일살의 방수( 手)로 맹활약 중. 광혈살인조(狂血殺人組)의 영반임.

책자에는 이 삼 인 외에도 숱한 이름들과 더불어 그들의 세밀한 활동내역까지 적혀 있었다. 그러나 천무영은 대충 그 부분만 가지 고도 크게 충격을 받았다. "무흔... 그도 천금성에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으음......!" 그의 뇌리에는 어느덧 무흔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금모란의 곁에서 배회하며 그림자처럼 그녀를 지켰던 사내, 사랑 의 부피가 너무도 커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려 들었던 그 고독한 영상은 잊지 못할 기억이 되어 있었다. 천무영의 음성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광혈살인조란 무엇인가?" 금연홍은 대답했다. "그들은 본맹의 선봉격인 행동조입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짧게 덧붙였다. "살인 자체를 즐기는 자들이라고 보시면 맞습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군." "그러실 겁니다. 전 맹주께서도 그들을 부리기는 하셨지만 종내에 는 주공과 같은 생각이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흠, 그대는 보기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군?" "그런 편입니다." 금연홍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천무영은 그녀에게서 시선 을 옮겨 책장을 넘겨 보았다.


그것은 책자 속에 적힌 구십구살까지의 구체적인 인적사항과 활동 내역을 머리 속에 담아두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읽어 나갈수록 그 는 아연함을 금치 못했다. '이럴 수가! 천금성, 지옥성, 혈붕성, 잠룡부(潛龍府), 심지어는 각대문파와 황궁에 이르도록 안 들어간 곳이 없구나.' 눈으로 확인되는 잔혈맹의 세력은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 었다. 구십구살은 천하은밀살이 직접 단련시키고 사마천홍의 무공 까지 체질에 맞게 전수시킨 최정예 고수들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천일야화원을 중심으로 중원의 숱한 기루들이 잔혈맹 산하의 옥혈화화조(玉血花花組) 소속이라는 점이었다. 영 반은 제일살인 금모란이 맡고 있었으며 정탐 외에도 미모를 무기 로 고수들을 영입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천무영. 그는 눈을 내리감고 있었다. 열흘이라는 기간에 걸쳐 잔혈맹의 전 부를 파악한 그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 없었다. '이 정도라면 능히 천하를 장악할 수도 있으리라.' 이는 곧 그가 손댈 부분도 그만치 많다는 의미였다. '너무하시다, 그분은! 이것들을 모두 내게 떠맡기다니.' 하지만 그 투덜거림은 역설적인 것에 불과했다. 이 순간 그의 뇌 리에는 사지와 눈을 잃었으되 결코 불행하다고만은 말할 수 없는 일대기인, 사마천홍의 모습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열흘 전 사마천홍은 그곳을 떠났다. 아무도 모르게 자신이 거두었 던 천지쌍괴와 더불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천무영은 알고 있었다. 사마천홍이 이후로 다시는 세상에 그 모습 을 드러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심중에 차오르는 격정을 억누르며 중얼거렸다. '노선배, 당신이 남기고 가신 말씀들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금 후로 이 무영의 삶 중 절반은 당신의 것이외다.'


- 3 권으로 이어집니다 -

■ 무영탑 제 2 권이 끝났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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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패자(敗者)의 철학(哲學) 제16장 불운한 남매(男妹) 제19장 왜 무승부(無勝負)인가? 제17장 그를 위한 사육제(謝肉祭) 제15장 그는 단지 은공(恩公)이었다 제14장 진실(眞實)은 어디서도 통한다 "헤헤... 혈설(血雪), 너는 참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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