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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魔敎戰王 제 3 권 위대한 戰王 지은이: 사마달 ‥ 제 제 제 제 제 제 제 제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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례‥ 장 다시 찾은 天禁魔獄 장 變身 장 여우와 늑대 장 暗中協約 장 奸雄의 最後 장 魔敎出現 장 魔敎戰王의 傳說 장 劫爻의 牌 장 血劫終熄

제 18 장 다시 찾은 天禁魔獄 1 밤(夜), 한 조각 편월(片月)이 야공(夜空)에 위태롭게 걸려 있는 밤이었다. 천금마옥(天禁魔獄). 천하 모든 악(惡)의 온상이자 악마의 대성전(大聖殿)인 이곳도 지금은 어둠에 묻힌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한데, 마령전(魔靈殿)…… 천금마옥의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이곳은 아직도 깨어있었다. 무서운 음모를 머금은 채…… 부글…… 부글……! 커다란 가마솥에선 연신 허연 김을 피워 올리며 밀납이 끓고 있었다. 방 안 가득 늘어서 있는 온갖 천태만상의 밀납상들. 아! 이곳은 바로 천금마옥을 지배한 삼 인(三人) 중 제 이인자인 교사독도 음무극의 처소가 아닌가? 지금 음무극은 석대 앞에서 하나의 밀납을 제조하는 중이었다. 이번엔 화려한 궁장을 걸친 요염한 미부(美婦)의 밀납상이었다. 그는 신중한 기색으로 미부상을 이리저리 매만지고 있었다. 한데, 그의 곁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었다. 지극히 청수한 모습의 중년문사였다. 전신에 어린 비범한 기도와 심유한 두 눈빛은 그가 예사 인물이 아님을 느끼게 했다. 이때 문득 중년문사가 음무극을 직시하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음영주, 불사천령강시(不死天靈 屍)의 완성은 아직 멀었소?" 음무극은 여전히 밀납상을 매만지며 가볍게 너털웃음쳤다. "허허…… 금군사(金軍師), 오늘 따라 왜 이리 재촉이시오? 불사천령강시가 완전히 완성되려면 아직 육 개월이 더 걸려야 한다고 지난 번에 말씀드리지 않았소?" 그러자 금군사라 불리운 중년문사는 적이 곤혹의 기색을 띄웠다. "정녕…… 그 전에는 완성이 불가능한 것이오?" "물론이오." 음무극의 단호한 대답에 중년문사는 나직하게 침음했다.


"으음……" 음무극이 천천히 허리를 펴며 그를 향해 돌아섰다. "금군사께서도 아시다시피 불사천령강시는 일반 강시와는 전혀 질이 틀린 것이오." "……" "만독불침(萬毒不侵)은 물론 금강불괴에다 무려 육갑자(六甲子)에 해당하는 가공할 공력을 지닌 강시지왕( 屍之王)이오." 말과 함께 음무극은 한차례 방 안의 밀납상을 돌아보았다. 은은한 자부심이 깃든 시선이었다. "따라서 일반 강시와는 그 제조방법이 완전히 다를 뿐더러 제조시일 역시 훨씬 더 걸리는 것이오." 음무극은 중년문사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더욱이 하나도 아닌 무려 백인(百人)의 불사천령강시를 제조하는데…… 앞으로 육 개월의 기간도 짧으면 짧았지 결코 긴 것이 아니오." "으음……!" 중년문사는 다시 침음하며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정색을 하며 엄중히 입을 열었다. "음영주, 그러한 사실을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오. 하나 육 개월이라는 기일은 너무 기오." "……!" "헌원륭이 배신한 지금 삼월천의 장악은 수포로 돌아갔고…… 더욱이 당금 천하의 정세로 미루어 불사천령강시의 완성이 늦어진다면 자칫 모든 일이 틀어질 우려가 있소." "……!" "본 지옥부의 부주께서도 그 점을 몹시 우려하고 계시오." 음무극은 엄중히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알겠소. 내 어떻게 하든 불사천령강시의 완성을 앞당겨 보리다." 중년문사는 만면에 희색을 띄웠다. "고맙소! 음영주." 음무극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허허…… 별말씀을……! 부주님의 뜻은 천명(天命)이 아니오? 목숨을 바쳐 따르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지요." 중년문사는 두 눈을 번뜩 빛냈다. "그러면 불사천령강시의 완성은 언제쯤이 될 것 같소?" "늦어도 삼 개월 안에는 틀림없이 완성시키겠소." 중년문사의 안색은 더욱 희색이 짙어졌다. "알겠소. 그럼 부주님께 그렇게 보고하리다." 이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젠 이만 가봐야겠소." 음무극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밀납상을 향해 돌아섰다. "배웅하지 않겠소." "삼 개월 후를 기다리겠소. 부주께서도 몹시 기대하고 계시오." 중년문사는 곧 정실을 나갔다. 이제 방 안에 음무극만이 남게 되었다. 그는 잠시 만들다만 밀납상을 매만졌다. 그러더니 문득 그는 음침한 눈빛을 빛내며 웃었다. "흐흐흐……! 금사후…… 네놈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불사천령강시는 이미 완성되어 가고 있음을……!" 오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조금 전 그 인물이 금사후였단 말인가?


지옥이혼대법으로 다시 부활했다는 금사후가 바로 그자란 말인가? "흐흐…… 나 음무극이 한낱 네놈들 지옥부의 손아귀에 놀아날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다." 번갯불같은 신광이 음무극의 두 눈을 떠났다. "나 음무극…… 내게도 꿈과 야망이 있음을 네놈들은 알았어야 했어. 이제 승산의 육할은 나에게 있다. 불사천령강시의 완성이 오할의 승산을…… 그리고 지옥부 제일의 모사(謀士) 금사후가 나의 생각보다 그리 두려운 놈이 아니라는 사실이 일할의 승산을 더해 주었다." 음무극은 다시 나직한 득의의 괴소를 흘렸다. "흐흐…… 내가 가장 두렵게 생각했던 금사후…… 놈의 재평가는 하늘이 나의 편이라는 것을 입증해준 셈이지." 그는 한동안 득의에 잠겨 서 있었다. 하나 음무극은 이내 신색을 추스르며 신중한 눈빛을 빛냈다. "하나…… 속단은 금물이다. 지옥부주…… 그는 인간이 아닌 악마(惡魔)……!" 그의 얼굴은 은은한 두려움의 기색을 띄우고 있었다. "매사에 신중해야 한다. 그것만이 만사(萬事)를 그르치지 않는 길이다." 한데 문득 음무극의 표정이 굳어졌다. (기척……) 정실 밖에서 멀리 사라져 가는 인기척을 그는 느꼈던 것이다. 순간 음무극은 재차 사악한 웃음을 머금었다. "흐흐흐……! 만자혈탈 조사의…… 네놈이 아무리 기를 써봐야 모두 헛수고일 뿐이다. 이 방 안의 음향은 외부와 철저히 차단되도록 만들어져 있으니……크크크……!" 2 석가촌(石家村). 이곳은 천금마옥과 불회하(不廻河)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대대로 석(石)씨 성을 가진 인물들이 모여사는 곳, 그래서 이름도 석가촌이었다. 아서원(雅 苑). 운치있는 이름의 이곳은 기실 초라하고 작은 주루였다. 또한 석가촌 유일의 객잔겸 주루이기도 했다. 협소한 주루 안엔 손님이 거의 없었다. 단지 구석진 자리에 한 명의 흑의 중년인이 앉아 홀로 자음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이(邪異)하면서 냉막한 기운이 서릿발처럼 내뿜어지는 인물이었다. 그는 냉막한 시선을 창 밖에 주며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천금마옥……! 장차 천하의 패권을 결정하는 데 있어 가장 중대한 변수(變數)다. 또한 나 백리강이 더 강해지기 위해 꼭 필요한 곳이다!) 그렇다. 흑의중년인은 바로 백리강의 변신이었다. 지금 그는 변장을 하고 천금마옥을 눈 앞에 둔 채 주도면밀한 계획을 구상중이었다. (만약…… 천금마옥이 지옥부나 혈극천(血極天)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면…… 진정 종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술잔을 잡은 손에 부지중 힘을 주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천금마옥이 그들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무슨 수를 쓰든 나 백리강의 손 안에 쥔다. 천금마옥…… 그곳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이다……!) 씨익! 백리강의 얼굴에 신념과 자신에 찬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였다. 덜컹!


주루의 문이 열리더니 두 인물이 안으로 들어섰다. 한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인물들이었다. 그 중 한 명은 녹색 장포를 걸친 구척(九尺) 장신의 인물이었다. 하나 녹색의 죽립(竹笠)에 가려 그 진면목은 보이지 않았다. 허리춤에 꽂힌 고색창연한 장도(長刀)가 얼핏 눈에 띄였다. 또 한 명은 반대로 오척(五尺) 단구의 왜소한 인물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온 은발과 성성한 은염이 특이한 인상의 자의노인은 가히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청수한 모습이었다. 하나 그의 두 눈빛만은 알 수 없는 광기(狂氣)에 번뜩이고 있었다. 백리강은 이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으음…… 흔히 볼 수 없는 막강한 기도의 인물들이다!) 문득 그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한데 무슨 이유로 무림 고수들로 보이는 저들이 이런 외진 곳까지……?) 순간 그는 뇌리를 섬전처럼 스쳐가는 염두에 두 눈을 미세히 빛냈다. (이곳은 천금마옥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 그렇다면 저들 역시……?) 백리강은 다시 술을 들며 방금 들어온 두 인물을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다. 극히 대조적인 체구의 두 인물은 한쪽 창가에 자리한 채 약간의 술과 음식을 시켜 들기 시작했다. 식사가 끝나는 동안 그들은 시종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들은 들어왔을 때처럼 묵묵히 계산을 끝내고 주루를 나갔다. (……!) 백리강은 기광을 빛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입가엔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슬슬 행동을 개시해 볼까?) 3 숲 사이로 난 좁은 산로(山路)를 통해 두 인물이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크고 작은 키의 대조적인 그들은 바로 아서원에 나타났던 인물들이었다. 이때 녹색의 죽립을 쓴 인물이 이빨을 뿌드득 갈며 섬뜩하게 입을 열었다. "주사철장 대독행……! 그 천하에 다시 없을 배신자 놈이 천금마옥에 틀어박혀 있을 줄이야…… 감히 녹림대종사(綠林大宗師)인 나를 해하려 하고 나의 신패(身牌)마저 훔쳐 달아나고도 무사할 줄 알았다니…… 흐흐…… 간덩이가 부어도 이만 저만 부은 놈이 아니야……" 녹림대종사. 그렇다면 그가 바로 화운사신 독고령이란 말인가? 주사철장 대독행, 그는 과거 녹림의 오인자로서 독고령을 살해하려다 실패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 악행을 저지른 덕택에 그는 천금마옥에 입옥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독고령은 지금 대독행을 찾아 천금마옥으로 가는 중인가? 이때 은염은발의 왜소한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고 있었다. "실로 간교한 놈들이오. 그러니 우리가 그동안 천하를 샅샅이 뒤졌어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었소!" 그 역시 뿌드득 세차게 이를 갈았다. "심여시랑 호천패…… 기다려라! 감히…… 나 다수광인(多手狂人) 막청곡(莫靑谷)의 손녀를 간살하고도 오 년 동안이나 생명을 부지하고 있었다니…… 이번엔 걸리기만 하면 심장을 꺼내 씹어먹고 말리라!" 그 역시 손녀를 죽인 흉적을 찾아 천금마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다수광인 막청곡. 그는 사도무림(邪道武林)에서 첫손 꼽히는 고수였다. 이미 그의 나이 이백 세가 넘어있다.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거늘, 그가 녹림대종사와 함께 천금마옥을 찾아가고 있다니 실로 귀추가 주목될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이때 화운사신 독고령이 분노가 가시지 않은 음성으로 말을 다시


잇고 있었다. "놈들……! 지난 수년간 두 다리 쭉 뻗고 편안히 잠잤을 것이오. 놈들이 천금마옥 안에 있는 이상 우리가 어쩌지 못할 줄 알고…… 하나……" 그는 죽립 사이로 나직한 살소를 흘려냈다. "흐흐흐…… 나 화운사신 독고령……! 천금마옥쯤은 안중에도 없소." 다수광인 막청곡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 역시 마찬가지요. 설사 호천패…… 그 찢어죽일 놈이 지옥의 염라대왕을 배후로 삼고 있다해도 기필코 죽이고야 말겠소." 한데 바로 그때였다. 돌연 낭랑한 대소성이 허공을 울렸다. "하하하……! 천금마옥을 그렇게 우습게 여기다간 큰코 다칠 거외다." 순간, "……!" "……!" 독고령과 막청곡의 안색은 일시에 대변했다. (이…… 이럴 수가……!) (이렇듯 가까이 오도록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다니……) 그러했다. 그들이 어디 예사 고수들인가? 다음 순간 그들은 재빨리 등을 맞대고 서며 살기 띤 폭갈을 터뜨렸다. "웬 놈이냐?" "어떤 쥐새끼가 숨어 있느냐?" 그러자, 오오…… 한 덩이 구름이 내려 앉는가? 한 인영이 표표히 그들 앞에 내려서고 있었다. 냉막무비한 인상의 흑의중년인 바로 백리강, 그였다. 그의 놀라운 신법에 독고령과 막청곡은 재차 은은한 경악을 떠올렸다. 막청곡이 이내 싸늘하게 호통쳤다. "감히 우리들의 말을 엿듣다니 네놈은 죽음이 두렵지도 않느냐?" 백리강은 씨익 차가운 웃음을 떠올리며 태연자약하게 입을 열었다. "아……! 너무 그렇게들 흥분하지 마시오. 나는 어디까지나 그대들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연장시켜 주려는 의도에서 충고한 것 뿐이오." 그의 비양거림에 막청곡은 일순 광기어린 눈빛을 번뜩! 발했다.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막청곡은 다짜고짜 쌍장을 미친 듯 휘둘렀다. 실로 위맹무쌍할 공세였다. "허…… 왜 이러시나?" 백리강은 고개를 흔들며 여유있게 막청곡의 장력을 피했다. 막청곡은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놀라고 말았다. (이…… 이런! 아무리 오성(五成) 공력밖에는 쓰지 않았다지만 어린 놈이 이토록 가볍게 피하다니……)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사도무림 최고 배분의 무서운 거마(巨魔)가 아닌가? 하나 백리강, 그는 마교 사상 최강의 인물이었으니…… 그것을 알 리 없는 독고령은 막청곡의 공세가 무위로 돌아가자 급기야 수중의 도를 뽑았다. "네놈이 약간의 재간을 지닌 모양인데…… 그렇다면 어디 노부의 구환섬전도(九環閃電刀)를 받아 보아라!" 사태는 점점 험악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백리강은 그제야 정색을 하며 엄중히 고개를 저었다.


"본인은 불필요한 싸움을 벌이고 싶지 않소." "이미 늦었다!" 독고령은 싸늘히 일성하며 그대로 수중의 도를 맹렬히 내뻗었다. 쐐---- 액----! 귓청이 찢길 듯한 파공음과 함께 무시무시한 도강(刀 )이 백리강을 쪼개 들었다. 백리강의 안색이 적이 굳어 들었다. (과연…… 녹림대종사다운 솜씨다!) 그는 재빨리 신법을 펼쳐 가볍게 도강을 젖혔다. 독고령과 막청곡은 아예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백리강의 경공, 그것이야말로 과거 천존마제의 보법인 은형백변환(隱形百變幻)임을……! (미…… 믿을 수 없다. 팔성(八成)의 내력이 깃든 혈영폭멸구식(血影瀑滅九式)의 제 일식이 이토록 허무하게 무위로 돌아가다니……) 화운사신 독고령은 죽립 속에서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그 엄청난 놀라움은 막청곡 역시 마찬가지였다. (으음…… 이놈이 알고보니 대단한 고수였군!) 막청곡이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을 내뱉았다. "너는 누구냐?" 백리강은 히죽 웃었다. "왜……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소?" 막청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천하에서 노부와 여기 독고령의 공세를 그렇듯 가볍게 받아낼 수 있는 인물은 그리 흔치 않다." 그 말에 백리강은 뒷짐을 지며 태연히 대꾸했다. "천금마옥을 무너뜨리려는 사람." "뭣이?" 독고령과 막청곡은 재차 안색을 일변시키고 말았다. 그 누가 이토록 가공할 말을 서슴없이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천금마옥은 당금 황실조차도 손대지 못하는 가공할 악마의 집단이 아닌가? 기실 독고령과 막청곡도 자신들의 원수를 응징키 위해 천금마옥을 향했을 뿐 천금마옥의 비위를 거스른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고 있었다. 한데 눈 앞의 젊은 놈은 천금마옥을 무너뜨리겠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한편, 백리강은 이때 나름대로 염두를 굴리고 있었다. (어차피…… 나 혼자 천금마옥을 상대하기는 벅찬 일……! 이들 정도의 고수와 손을 잡는다면 훨씬 수월하게 일이 풀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는 눈빛을 빛냈다. 다음 순간 그의 얼굴 피부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중년인의 모습이 점차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잠시 후 백리강은 자신의 원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 모든것이 실로 눈깜짝할 순간의 일이었다. 독고령과 막청곡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천하에 이런 역용술이 있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던 것이다. 그 뿐인가? 그들은 백리강의 무공과 비범한 신태에 동시에 놀라고 있었다. 백리강은 그들을 향해 정중히 포권의 예를 취했다.


"우선…… 노선배들께 무례를 사과 드리오. 하나 결코 본의는 아니었소." "……!" "소생께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소? 긴히 의논드릴 말씀이 있소이다." 좀 전과는 너무도 다른 공손한 어조와 태도가 아닌가? "……!" "……!" 독고령과 막청곡은 일순 마주 보았다. 그러더니 곧 백리강을 향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한 번 속는 셈 치자." 그들은 왠지 백리강에게 이끌리는 마음을 느낀 것이다. 백리강은 잔잔히 미소지었다. "고맙소이다." 하나의 비동(秘洞) 안에 세 사람이 둘러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바로 백리강과 독고령, 막청곡이었다. 지금 막 백리강이 천금마옥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있었다. 막청곡이 무거운 침음성을 터뜨렸다. "으음…… 천금마옥이 그 정도로 엄청나다는 말인가?" 백리강 역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정녕…… 그 찢어죽일 놈들을 응징할 방법이 없단 말이지?" 막청곡이 탄식하듯 내뱉자 백리강은 엄중히 다시 말했다. "현재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소. 대독행과 호천패는 응당 죽어 마땅한 자들이지만 그들이 이미 천금마옥의 인물이 된 이상 어쩔 수가 없는 것이오." "으음……" "만일 노선배들이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천금마옥을 찾아가 그들을 내놓으라 한다면…… 그것은 곧 천금마옥 전체에 대한 도전이나 마찬가지요." "……!" "물론…… 두 분의 무공은 가히 적수를 찾기 힘든 고강한 것이라 하나……" 순간, 막청곡이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그의 말을 막았다. "알겠네, 그만하게." 이어 그는 영 못마땅한지 투덜거렸다. "제길! 어중이 떠중이들이 모인 천금마옥의 힘이 그 정도로 대단할 줄이야……" 이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독고령이 백리강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한데…… 자네는 그토록 엄청난 세력을 지닌 천금마옥을 무슨 수로 붕괴시키려는 것인가?" 그 말에 막청곡 역시 눈빛을 빛내며 백리강을 응시했다. 그로서도 그 점이 가장 궁금했던 것이다. 그의 의아스런 표정을 보며 백리강은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미소를 보면서 독고령과 막청곡은 왠지 자신들이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동시에 그들은 은연중 깊은 신뢰와 감복을 느끼고 있었다. 백리강이라 불리우는 이 불세출의 기재에게……! 독고령이 나직하게 탄식하며 재차 말문을 열었다. "으음…… 노부는 이제야 눈이 뜨이는 기분이네." "……" "소형제같은 인재를 보니 노부 이제껏 헛살아온 느낌이 든다는 말일세."


"나 막청곡도 마찬가지야." 백리강은 빙긋 웃었다. "과찬의 말씀이시오." 그는 정색을 하며 그들을 향했다. "그보다도…… 노선배들께 한 가지 부탁이 있소." "그게 뭔가?" "지금 소생에겐 힘(力)이 필요하오. 천금마옥을 깨부수려면 아무래도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오. 그러니 노선배님들의 고강한 무공을 빌려주셨으면 하오." 막청곡이 불현듯 광기어린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한데 자네는 왜 굳이 천금마옥을 통째로 부수려 하는가?" 백리강은 씨익 웃으며 간단히 말했다. "천하의 주인(主人)이 되기 위해서……!" 막청곡과 독고령은 흠칫 대경의 기색을 띄웠다. 진정 광오하다 할 만큼 엄청난 발언이 아닌가? 하나 다음 순간, "크핫핫핫……! 진정 통쾌한 말이다. 이렇게 통쾌할 수가…… 크핫핫!" 막청곡은 고개를 흔들며 박장대소했다. 독고령 역시 웃음기 어린 모습으로 백리강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왠지 백리강의 말 한 마디가 너무나 시원하게 들린 것이다. 백리강이 되물었다. "어떻소? 두 분께선 소생을 도와 주시겠소?" 막청곡이 여전히 대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핫하하…… 좋다, 좋아. 그 기백이 마음에 든다." 백리강은 이번엔 독고령을 향했다. "노선배님은……?" 독고령은 미소띤 얼굴로 대답했다. "허허…… 자네가 이미 노부를 승낙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지 않았나? 천하의 주인이 될 분에게 잘 보여야 노부의 미래가 탄탄해지지 않겠가?" 세 사람은 마주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으핫핫핫……" "하하하……" 동굴 속은 금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잠시 후 안색을 추스린 독고령이 다시 물었다. "소형제, 소형제는 어떤 방법으로 천금마옥에 잠입할 생각인가?" 백리강은 담담히 미소지었다. "단 한 가지 방법 뿐이오." "무슨……?" "바로…… 그들이 악당이듯 우리 역시 악인이 되는 것이오." "악인(惡人)……?" 독고령과 막청곡은 의아한 기색을 띄웠다. 하나 그들은 일순 그의 말뜻을 깨닫고 다시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그렇군. 바로 그거야……!" "하하하…… 그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구만." 백리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들을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4 황혼(黃昏), 타는 듯 붉은 노을이 서천(西天)을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는 시각, 천금마옥의 입구에 세 사람이 나타났다. 냉막무비한 흑의 중년인, 그리고 잔혹한 인상의 혈의노인과 음흉한 꼽추노인이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백리강과 독고령, 막청곡 등 삼인(三人)의 변신한 모습이었다. 휘이이잉…… 어둠을 실은 스산한 바람을 등에 지고 그들 삼 인은 입옥이계(入獄二戒)가 새겨진 석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막청곡의 시선이 힐끗 백리강을 향했다. "여기가 천금마옥의 입구인가?" 백리강은 석비에 시선을 둔 채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렇소. 가능한 이제부터는 철저히 자신을 위장해야 하오?" "음……" 막청곡과 독고령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헤헤헤…… 오늘은 웬일로 세 놈이나 무더기로 왔구나." 장난기 짙은 낭랑한 음성과 더불어 한 왜소한 인영이 백리강 등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불그레한 동안(童顔)에 천진난만해 보이는 모습의 소동(少童), 바로 천금마옥의 호옥사자인 소살마동이었다. 막청곡의 눈빛이 괴이하게 일렁였다. "저 어린 놈이……?" 백리강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자를 아시오?" "내가 어찌 저런 놈을 알겠는가? 내가 한창때 저놈은 어미의 젖꼭지나 빨고 있었을텐데 말이야." 막청곡은 희미한 조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 소살마동이라 했지?" 나직한 음성이었으나 그것은 소살마동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으음?) 소살마동은 일순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보통 놈들이 아닌 것 같다!) 그는 괴이한 눈빛으로 백리강 등 삼 인을 쭈욱 훑어보았다. "네놈들은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느냐?" 막청곡의 눈썹이 꿈틀 곤두섰다. "놈? 이런 쥐방울만한 놈이 감히 누구에게……" 백리강이 그를 제지하며 냉막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천금마옥에 입옥키 위해 온 사람들이오." 소살마동은 곁눈질로 막청곡을 일별한 뒤 괴이한 미소와 함께 백리강을 응시했다. "입옥이계는 읽어 보았겠지?" "그렇소." "그렇다면…… 바깥 세상에서 무슨 악행을 저질렀는지 말해 보아라. 아는지 모르나 이곳은 시시한 악인은 결코 입옥을 허락치 않으니까!" 백리강은 문득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흐…… 악행을 말하란 말이오?"


"그렇다." `"흐흐흐……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악행을 저질렀다고 생각한 적은 없소. 다만……" "다만?" "굳이 말하자면…… 나는 열 여섯 살 때 부모를 죽였다고 욕한 두 남동생을 난도질을 해 끓는 가마 솥에 집어 던졌으며, 누이동생 다섯은 모조리 창녀굴에 팔아 먹었다는 것뿐이오." "엉?" 소살마동의 눈이 아연 휘둥그래졌다. "뿐인 줄 아시오?" "또…… 있어?" "흐흐흐…… 사실 악행이라고 생각하고 저지른 일은 아니지만…… 나는 사십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모두 이백여 명을 겁탈한 뒤 교 살했소. 혹시 아실지 모르겠소. 계집들과 그 일을 할 때 목을 조르게 되면 엄청난 힘으로 사내의 그것을 조이게 된다는 것을…… 나는 거기에 맛을 들이는 바람에 그만…… 흐흐흐흐…… 당신도 한 번 해보시오. 정말 끝내주니까……" 소살마동은 입을 딱 벌렸다. 그로서도 이처럼 파렴치한 악행을 저지른 악인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저 악인은 자신의 행위를 조금도 악행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가? (나쁜 놈!) 소살마동은 내심 부르짖은 뒤 쫓기듯 독고령에게 시선을 옮겼다. "너는 무슨 악행을 저질렀느냐?" 독고령은 음침하게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흐흐흐…… 약간 부끄럽지만 물으니 대답을 해야겠군." (부끄러워? 혹시…… 저놈은 더 지독한 악행을 저지르고 저런 말을 하는게 아닐까?) 소살마동은 사뭇 긴장하며 독고령의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비구니들만 전문적으로 강간하고 죽이는 취미를 즐기고 있다." "계…… 계집 중을?" "흐흐…… 아마 천하의 비구니란 비구니는 모조리 내 몸을 지나갔을 것이다. 사실…… 누가 뭐래도 그 맛은 비구니가 최고지." "……!" 소살마동은 자신도 모르게 독고령의 하체를 응시했다. (오늘은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고 지저분한 놈들만 왔지?) 막청곡이 음침한 괴소를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크흐흐…… 이번에는 내가 말 할 차례인가?" 소살마동은 그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말해라." 막청곡은 소살마동을 똑바로 정시하며 눈빛을 음산하게 일렁였다. "크흐흐…… 나는 주로 어린 꼬마 놈들만 죽였다." "꼬…… 마?" "그렇다. 나이를 쳐먹으면서도 늙지 않은 꼬마놈들을 무려 오천 명이나……" 무슨 뜻인지 뻔한 말이 아닌가? 소살마동의 안색이 홱 돌변했다. "지…… 지금 너는……" "크흐흐…… 솔직이 지금 나는 너도 죽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다." 그 말에 소살마동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런…… 육시랄 놈 같으니……"


말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이었다. 경쾌한 음향과 함께 소살마동의 고개가 왼쪽으로 홱 돌아갔다. "윽!" 소살마동은 눈에 불똥이 튀는 것을 느꼈다. 뭐가 어찌된 일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막청곡에 의해 따귀를 얻어맞은 것이었다. 순식간에 소살마동의 뺨은 퉁퉁 부풀어 올랐다. "이…… 이런……" 소살마동은 아프기도 하고 화도 나 심장이 터져나가도 시원찮을 판국이었다. "너…… 지금 나를 때렸냐?" "그랬다." 막청곡은 대답과 함께 그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나는 네놈을 처음 본 순간부터 살심이 솟구치는 것을 억지로 참아왔다. 한데 가뜩이나 그런 판국에 감히 노부에게 반말을 지껄이다니……" "그…… 그렇다고 해서 천금마옥의 호옥사자이신 나를 쳐?" 막청곡의 눈썹이 괴이하게 씰룩였다. "너……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걸 보니 몇대 더 맞아야 되겠구나." "개수작…… 욱!" 소살마동은 노갈을 터뜨리다 말고 배를 움켜쥐며 휘청 허리를 꺾었다. 막청곡의 발 끝이 어느새 그의 복부를 후려갈긴 것이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퍽! 이번에는 수그렸던 턱에 주먹이 작렬했다. "어이쿠!" 재차 복부를 주먹이 강타했고, 그 뒤를 이어 두 뺨에 불꽃이 터졌다. 소살마동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숨돌릴 틈도 없이 막청곡의 손과 발은 무자비하게 날아드는 것이었다. (피, 피하자!) 얼핏 그런 생각을 떠올렸으나 그러는 순간에도 막청곡의 주먹은 아무데서고 날아와 소살마동의 얼굴에 작렬했다. 급기야 이빨이 부러졌고 소살마동은 피를 뿜으며 벌렁 나가 떨어졌다. 볼상사납게 나동그라진 그의 얼굴은 도무지 소살마동 본래의 그것이 아니었다. 온통 부어올랐거나 멍이 맺혀 있지 않으면 살가죽이 터져 피가 흘러나왔다. 하나 소살마동은 미처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비로소 임자를 잘못 만났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왈칵 치밀었던 것이다. (이…… 이러다간 뼈도 못추리겠다!) 소살마동은 양손을 정신없이 허우적거리며 악을 쓰뜻 외쳤다. "토, 통과다!" 막청곡은 재차 소맷춤을 걷어붙이다 말고 히죽 웃었다. "미련한 녀석! 진작 말했으면 한 대라도 덜 맞았지." 이어 그는 유유히 입구 안으로 걸음을 떼놓았다. 때를 같이해서 백리강과 독고령도 막청곡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소살마동은 대경하여 소리쳤다. "너…… 너희들의 무공은 아직 시험하지 않았다!" 순간이었다.


퍽! 틀림없이 쇠뭉치가 날아온 것이리라! "으악----!" 소살마동은 마치 수억 개의 바늘이 얼굴을 찌르는 듯한 극통을 느끼며 꽈당 나가 떨어졌다. 독고령이 힐끗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더 시험해 보고 싶으냐?" 소살마동은 여전히 나동그라진 채 미친 듯이 소리쳤다. "통과! 통과!" "왜? 조금만 더 시험해 보지 그러느냐?" 그러자 소살마동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목젖이 터져라 외쳤다. "시험 끝! 통과! 무조건 통과!" "녀석……" 독고령은 씨익 웃어 보인 뒤 천천히 앞서가는 백리강의 뒤를 따라갔다. 소살마동은 비로소 전신을 축 늘어뜨리며 수백 근은 됨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이젠…… 호곡사자를 그만둬야 할까보다……" 제 19 장 變身 1 "그들의 무공이 그 정도였단 말이냐?" 교사독도 음무극은 밀납상을 정성스레 어루만지며 무감동하게 물었다. 그의 앞에 한 중년인이 만면 가득 놀람의 기색을 담은 채 황망히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속하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소살마동 정도는 열 명이 있어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 음무극은 잠시 침묵하더니 조용히 입을 떼었다. "알았다. 물러가 보아라." "존명!" 스스스…… 대답과 함께 중년인의 모습은 이내 실내에서 사라졌다. 문득 여전히 밀납상을 매만지는 음무극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요노(妖老)." 허공 어디선가 극히 음사(陰邪)한 음성이 낮게 울려나왔다. "요노, 대령해 있습니다. 주군……" "어떻게 생각하느냐?" "소살마동이 그렇듯 어처구니 없게 당할 정도라면…… 즉시 손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포섭하자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음무극은 여전히 밀납상에 시선을 둔 채 침묵했다. 잠시 후 음무극의 입술이 천천히 떼어졌다. "시작해라. 단 실수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예의 음사한 음성이 극히 사이한 괴소와 함께 대답했다. "흐흐흐…… 염려마십시오. 그녀라면 놈들을 치마폭에 굴복시키는 것쯤은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음……" 음무극의 입언저리로 야릇한 미소가 번져나왔다. "그렇지…… 그녀라면 가능할거야…… 후후후……"


2 "허! 천금마옥이 이렇듯 엄청난 곳이었다니……" 독고령은 수많은 누각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며 연신 감탄을 터뜨 렸다. 그러다 문득 독고령은 어두운 눈길을 백리강에게 향했다. "과연…… 이처럼 거대하고 엄청난 세력을 붕괴시킬 수 있을까?" 일국(一國)을 능가하는 그 엄청난 규모에 압도당한 듯했다. 백리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일전에 독고령과 막청곡의 마음을 사정없이 뒤흔든 그런 류(類)의 미소만 잔잔히 떠올랐을 뿐이었다. (으음……) 독고령은 어쩐지 쓸데없는 질문을 했다고 생각하며 묵묵히 걸음을 떼놓았다. 한데 얼마쯤 갔을 때였다. 돌연, 스슥…… 섬세한 인영 하나가 나타나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기가 막히도록 아름답고 요염한 이십대 중반 가량의 여인이었다. 타는 듯한 홍의를 몸에 꽉 끼게 입고 있어 터질 듯 풍만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나타나자마자 백리강을 향해 날아갈 듯 사뿐히 일례를 올렸다. "세 분의 입옥을 환영하옵니다." 백리강 등은 각기 음침한 눈빛을 번뜩이며 여인의 몸매를 핥듯 훑어보았다. 그런 눈길들을 의식했음인지 여인은 교태로운 몸짓과 더불어 요염한 미소를 떠올리며 입술을 나풀거렸다. "다름이 아니옵고…… 세 분의 입옥 소식을 전해들으신 저희 주군께서 세 분을 잠시 뵙고 싶다 하셔서 천첩이 이렇듯 무례를 범하 고 있사옵니다." 천성적인 색기(色氣)가 몸에 배인 탓인지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몸을 비꼬고 눈빛을 요염하게 반짝였다. 백리강은 그런 그녀를 응시하며 문득 야릇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괜찮군." "예?" "후후후…… 아니다. 한데 네 주군이라 하면 어떤 인물이냐?" "저희 주군은 본 천금마옥의 이영주님이십니다." (교사독도 음무극!) 백리강은 내심 흠칫했으나 겉으로는 짐짓 음침한 웃음을 흘려냈다. "흐흐흐…… 천금마옥에 입옥하자마자 기막힌 계집의 초대라…… 괜찮군." 이어 그는 독고령과 막청곡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떻소? 두 분의 의향은?" 독고령은 여인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마른 침을 한 모금 꿀꺽 삼켰다. "좋다. 좋아…… 암, 거절할 이유가 없지." 막청곡 역시 음탕한 괴소를 흘리며 맞장구쳤다. "초대고 뭐고 다 좋지만 저 계집을 보니 몸이 근질거려 미치겠다. 홀라당 발가벗겨 놓고 꽉꽉 눌러줬으면 여한이 없겠다. 으흐흐……" 여인의 웃던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 역시 천금마옥에서 잔뼈가 굵어온 터이지만 이렇듯 노골적인 마두들은 처음 본 까닭이었다.


(지저분한 놈들이 입옥했구나!) 하나, 어찌 알았으랴? 그 지저분한 놈들이야말로 이 천금마옥에 대파란을 일으킬 문제의 인물들이라는 것을…… 3 (으음…… 그동안 강시화( 屍化)된 밀납상들의 수효가 무척 늘었군!) 백리강은 한차례 주위를 돌아보며 내심 염두를 굴렸다. 지금 그는 여인의 안내로 음무극의 처소에 들어와 있었다. 독고령과 막청곡도 방 안에 들어선 밀납상들을 보며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때였다. "핫핫…… 어서 오시오." 내실로 통하는 문이 열리며 한 인물이 나타났다. (교사독도 음무극……!) 백리강은 내심 일성을 터뜨렸다. 그러했다. 그 인물은 바로 음무극이었다. 한데 그의 뒤로 다시 세 인물이 등장하고 있었는데, 한결같이 음악하며 사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노인들이었다. (음…… 음무극 못지않은 심상치 않은 인물들이다!) 백리강이 내심 염두를 굴리고 있을 때, "하하……! 세 분의 입옥(入獄)을 진심으로 환영하오. 본좌가 바 로 세 분을 초대한 천금마옥의 이영주(二令主) 음무극이오." 음무극은 사뭇 정중히 예를 취했다. 하나 백리강 등은 자리에 앉은 채 거만하게 대꾸했다. "흐흐…… 별 말씀을……!" "흐흐…… 오히려 우리가 영광이오." 진정 안하무인격의 태도가 천하의 악인같은 모습들이 아닌가? 그 순간 음무극의 뒤에 시립한 세 인물의 눈빛이 살기를 쏘아내는 것을 백리강은 놓치지 않았다. 음무극 역시 안색을 미세히 꿈틀거렸으나 이내 다시 껄껄 웃고 있었다. "하하…… 과연 듣던 바대로 기도가 훌륭하신 분들이오." "우린 그걸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오. 기도 빼면 쓰러지지." "으흐흐…… 이영주는 정말로 눈이 제대로 박혀있는 것 같소이다……" 음무극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하나 그는 이내 표정을 수습하고 껄껄 웃었다. "천하의 영웅들을 이렇게 모시게 되다니 실로 오늘 이 음모의 기쁨이 아닐 수 없소." 백리강은 내심 조소했다. (음무극…… 진정 놀라운 인내력이군. 하나 네놈은 지금 독을 삼키고있는 거야.) 그가 의미심장한 염두를 품고 있을 때 음무극과 세 노인은 맞은 쪽에 자리했다. 음무극이 이번에도 먼저 말문을 열었다. "하하…… 그러고 보니 본인은 아직 세 분의 존성대명을 듣지 못 했구려." 그러자 독고령이 서슴없이 입을 열어 대꾸했다. "노부는 살인마자(殺人魔子) 만천택(萬天澤)이오." 막청곡이 그 뒤를 이었다. "나는 철면고행객(鐵面孤行客) 허백(許白)이오." 이어 백리강이 냉막하게 입을 열었다. "불초는 적한청이라 하오. 별호는 가지고 있지 않소."


음무극은 고개를 끄덕이며 음침한 눈빛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세 분께서 바깥 세상에서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는 모르나 일단 이 천금마옥에 입옥한 이상…… 이제부터는 가장 안정되고 쾌락만이 넘치는 삶을 누리게 될 것이오." 그러자, "흐흐흐…… 우리가 여길 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오." "역시 이곳을 찾아오길 잘한 것 같군." 백리강 등은 만면 가득 희열과 기대의 빛을 떠올리며 괴소했다. 그런 그들을 음무극은 의미심장하게 응시하며 다시 말했다. "더욱이…… 세 분은 무공 역시 입신지경에 달해 계시니 본 옥 내에서도 높은 직위를 보장받으실 것이오." 이어 그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정색을 하며 물었다. "한데 세 분의 일신내력과 사문(師門)은 어찌 되시오?" (이제부터 시작이군!) 백리강은 내심 냉소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불초의 사문은 장한문(長恨門)이오." 음무극이 번뜩 눈을 빛내며 되물었다. "장한문……? 그렇다면 장한노조(長恨老祖)와……?" 백리강은 짐짓 자랑스런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불초는 바로 그분의 진전을 이어 받았소." 음무극은 안색을 미미하게 변화시켰다. 장한노조. 그는 천년(千年) 전 사파(邪派)의 일각을 지배한 무서운 고수였다. 천존마제보다 백 년 전의 인물로서 그의 무공은 추측이 불가능했다. 워낙 한(恨)이 많았던 그인지라 자신의 문파도 장한문이라 명명했던 것이다. 과거 백리강은 천오관불애 안의 서고에서 수천 권의 비급을 얻어 그 안의 무공을 터득치 않았던가? 그 중엔 장한노조의 장한혈경(長恨血經)도 끼어 있었다. 때문에 선듯 그것을 떠올리고 임기응변으로 대답을 꾸며낸 것이었다. 그의 거짓말이 어느 정도 먹혀들어간 듯 음무극은 은은히 감탄하고 있었다. "알고보니…… 적형께서는 그 분 장한노조의 진전을 이어 받으셨구려." 이어 그는 천천히 독고령과 막청곡에게 시선을 돌렸다. 순간, 그들도 각기 그럴 듯한 내력을 급조하여 자신을 소개했다. "노부는 살인가(殺人家)의 제 십오대 가주(家主)요." "나는 고행문(孤行門)의 문주(門主)요." 음무극은 적이 의혹어린 표정을 띄웠다. 그도 그럴 것이, 살인가니 고행문이니 하는 것들은 그로서도 난생 처음 듣는 문파가 아닌가? 그 기색을 눈치채고 독고령이 다시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험…… 본 살인가는 가문의 장자(長子)에게만 무공을 전수하오. 또한 가문의 문규에 따라 강호활동을 전혀 않기 때문에 아마 생소하실 것이오." "아…… 그런 내력이 있었구려." 음무극이 사뭇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막청곡이 낮게 괴소했다. "흐흐……! 본 고행문을 음영주께서 모르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오. 고행문은 노부가 세운 것이고 아직 제자를 한 명도 거둬들이지 않았으니까……" 음무극은 내심 의혹의 느낌이 들었지만 겉으론 연신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세 분의 무공은 보통이 아니라고 소살마동에게 들었소." "소살마동? 크크크크…… 우리가 강한게 아니라 그 어린 놈의 무공이 너무 형편없었소." 음무극은 더욱 은근히 미소지었다. "이 음무극의 눈을 새롭게 해주실 수는 없겠소?" "어찌 감히…… 음영주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재간을……" 하나 음무극은 끈질기게 늘어 붙었다. "아니오. 장한노조의 무공은 전설로만 들었을 뿐이니 한 번 견식하고 싶소이다." 분명 그것은 백리강을 시험코자 하는 의도인 것이다. 백리강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멋쩍은 듯 웃으며 사뭇 정중히 응낙했다. "미거한 실력…… 공연히 눈만 피로하게 할까 두렵소이다만…… 그럼……" 이어 그는 곧 전신에 공력을 운용했다. 동시에 방 안을 둘러보다 문득 구석에 놓인 화로에 시선을 멈추었다. "저 화로를 써도 되겠소?" "좋으실 대로……!" 그러자 백리강은 한 손을 화로쪽을 향해 천천히 내뻗었다. 일순 그의 손에 시뻘건 혈광(血光)이 떠올랐다. (장한혈공(長恨血功)을 이럴 때 써먹게 되다니……!) 백리강은 내심 웃으며 이내 혈광어린 손을 가볍게 뒤집었다. 순간, 휘르릉……! 소리와 함께 화로가 허공으로 붕 떠오르더니 이내 빙글빙글 회전하는 것이 아닌가? 이어 그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팽이처럼 돌았다. 그리고 회전을 멈춘 화로가 바닥에 다시 놓였다. 순간 음무극 등은 안색을 흠칫 굳히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아…… 보라! 화로엔 어느새 뒤엉킨 아홉 마리의 혈룡(血龍)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 그림 아래엔 필치도 웅휘한 네 글자까지 쓰여 있었으니……! 악인천하(惡人天下). 오오…… 진정 신기(神技)에 가까운 가공할 솜씨가 아닌가? "하하…… 화로가 너무 단순해 보여서…… 부끄러운 솜씨지만 그림을 좀 넣어 보았소." 백리강은 짐짓 겸손한 얼굴로 대소했다. 음무극과 세 노인들은 순간 할말마저 잊고 있었다. 한편 독고령과 막청곡도 내심 크게 놀라고 있었다. 백리강의 무공이 뛰어난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단하리라곤 생각을 못한 것이다. 하나 막청곡은 재빨리 경악을 추스르며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흐흐흐……! 셋째, 그동안 제법 늘었다만 아직 화후는 너무너무 부족하구나." 백리강은 그의 말뜻을 간파하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거야 형님들이 도와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제가 어찌 두 분 형님들의 능력에 비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으허허…… 아니야. 그 정도면 자네 나이에 걸맞는 충분한 화후이니 더 이상 욕심 부리지는 마라." 이때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음무극은 또다시 크나큰 경악을 머금었다. (저 정도가…… 너무너무 부족한 화후란 말인가? 결코 나의 하수가 아니거늘……)


그는 적이 경악어린 시선으로 독고령과 막청곡을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저 두 명은 도대체 어느 정도의 무공을……?) 상상조차 힘든 일이 아닌가? 음무극의 안색은 침중히 굳어들고 있었다. (으음…… 반드시 이들을 내 손 안에 끌어 들여야겠다. 절대 만자혈탈 조사의나 마령군 위지풍에게 포섭 당하게 할 수는 없다!) 번득! 그의 두 눈이 미세히 빛을 발했다. (만약…… 내 편으로 만들지 못할 바에는 무슨 수를 써서든 제거해야 한다!) 그는 결심했다. 눈 앞의 세 명을 끌어 들이기로…… 하나 그것은 백리강이 의도했던 바였다. (후후…… 드디어 놈이 독이 든 미끼를 덥썩 물었다!) 백리강은 음무극의 표정을 살피며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음무극…… 이제 네놈은 사신(死神)을 곁에 두게 된 셈이다. 후후후후……) 이때 음무극이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본인은 새롭게 눈을 뜬 기분이오. 적형의 무공은 실로 훌륭하오. 그리고 적형의 무공을 미루어 다른 두 분의 뛰어난 능력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소이다." "흐흐흐…… 별 말씀을……" 음무극은 정색을 하며 백리강 등을 돌아보았다. "실상…… 이렇게 세 분을 뵙고자 한 것은 여러분과 우의를 돈독히 하려는 의도도 있으나…… 실은 보다 더 큰 뜻이 있어서였소." "……?" "아시고 계신지 모르지만…… 본 천금마옥은 현재 세 개의 세력으로 갈라져 삼인(三人)이 각기 분할 통치하고 있소." 순간, "아……!" "그렇군." 백리강 등은 사뭇 놀랍다는 얼굴로 경탄했다. 음무극은 설명을 잇기 시작했다. 그의 설명은 현 천금마옥의 내부 사정에 관한 것이었다. 또한 주로 자신을 미화시키고 조사의와 위지풍을 천하악인으로 만든 그런 내용이었다. 그의 의도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날 밤, 음무극의 처소에선 은밀한 이야기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무��� 모르게…… 이렇게 백리강의 천금마옥 입옥 후 첫날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나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것이 천금마옥 대풍운(大風雲)의 시작임을. 4 호수(湖水). 천금마옥 내에 자리잡고 있는 그리 크지 않은 인공호수였다. 밤(夜), 은가루같은 월광(月光)이 잔잔한 물결 위에 잘게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 언제부터인가? 한 척의 일엽편주(一葉片舟)가 강심에 두둥실 홀로 떠 있었다.


그리고 편주에는 한 인물이 걸터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일신에는 피보다 붉은 혈의(血衣)를 걸쳤고 머리칼과 수염 또한 온통 핏빛 일색이었다. 그리고…… 눈(眼)! 마치 유리알을 박아놓은 듯 맑고 투명한 저 눈은 오래 전부터 낚싯대 끝에 고정되어 있었다. 누구인가, 이토록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그는……? 만자혈탈(卍字血奪) 조사의. 바로 그였다. 천금마옥의 대영주! 지금 낚싯대 끝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얼굴엔 단 한 올의 감정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눈빛 또한 심연처럼 깊숙이 침잠되어 있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그의 입이 열려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문득 꽉 다물렸던 조사의의 입술이 떼어지며 독백같은 음성이 나직이 흘러나왔다. "음무극 그가 삼 인의 고수를 거둬들였단 말인가?" 그러자 도무지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곳에서 누군가의 스산한 대답이 있었다. "그렇습니다, 주군!" 조사의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대가 보기에는 어느 정도의 인물들이었는가?" "근래 천금마옥에 입옥한 인물들 중 가장 강한 자들 같았습니다." "그대와 비교한다면?" "……!" 암중인(暗中人)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음?" 일순 조사의의 눈 깊은 곳에 괴이한 광채가 번쩍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예의 음성이 침중한 기색을 담고 이어져 나왔다. "주군, 어서 하명하여 주십시오." "……" "이대로 방관했다간…… 훗날 주군께서 천금마옥을 얻는 데 있어 가장 거추장스러운 방해물로 등장할지도 모릅니다." "……" 조사의는 침묵했다. 그의 입이 떼어진 것은 그로부터 꽤 오랜 후였다. "가서…… 귀영소소(鬼影素素)를 보내라!" 암중인은 확인하듯 되물었다. "진정…… 귀영소소입니까?" "음!" 조사의는 침성으로 대답을 대신한 뒤 이어 말했다. "하나 제거해야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들이 아니라면 그냥 놔두라고 전해라. 가치없는 인물들로 인해 쓸데없이 분쟁을 유발할 필요는 없다." "존명." 대답에 이어, 스으…… 마치 거미가 기어가는 듯한 극히 미세한 음향이 조사의의 등 뒤에서 있었다. 암중인이 사라진 것이었다. 조사의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한데 어느 순간이었을까?


문득 조사의의 입 언저리에 기이한 미소 한 줄기가 번져나왔다. "음무극…… 놈이 무슨 일을 하든 나 조사의는 안중에 두지 않는다." 비로소 그는 낚싯대에서 시선을 거두며 느릿하게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이 밤에 떠오른 달은 반조각 편월(片月)이었다. 5 믿을 수 없게도 천금마옥에는 하나의 사찰(寺刹)이 있다. 고행사(苦行寺). 바로 이것이 그 사찰의 이름이다. 우습지 않은가? 악인 중의 악인들만 모여사는 천금마옥에 사찰이라니…… 절이라도 하나 세워놓으면 죽어서 천당이라도 갈 수 있단 망상을 하고 있는걸까? 하나 그건 절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절을 찾는 신도의 발길은 고행사가 생긴 이래 한 명도 없었으니까. 자기 자신마저도 믿지 못하는 악인(惡人)들이 부처 아니라 부처의 할아비라도 믿을 리가 만무했다. 그래도 승려는 있었다. 승려라야 주지, 행자 등을 모조리 겸한 노승(老僧) 한 명 뿐이었지만, 그래도 이곳에 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고승(苦僧). 이것이 천금마옥의 유일한 사찰의 유일한 승려의 법호(法號)였다. 분명히 말하자. 고승(高僧)이 아니라 고승(苦僧)이다. 천금마옥의 번뇌란 번뇌는 모조리 혼자 도맡아 있어 붙여진 법호일까? 똑똑…… 또그르르르…… 제법 무게있는 목탁 소리가 사위의 정적을 울리며 들려온다. 그리고…… "마하반야바라밀다……" 목탁 소리에 걸맞는 독경 소리가 법당(法堂)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데, 아아…… 이렇게 괴로울 수가 있는가? 이렇게 권태스럽고 처량할 수가 있는건가? 독경을 하는 이유는 속세의 번뇌에서 벗어나고자 해서다. 한데 지금 들려오는 독경소리에는 사바세계의 온갖 번뇌와 괴로움 따위가 모조리 깃들어 있는 듯했다. 다 쓰러져가는 황폐한 법당 안, 한 노승이 좌정한 채 목탁을 두드리며 독경하고 있었다. 일신에는 금세라도 삭아서 부스러져 내릴 듯한 낡은 회색가사를 걸쳤고 극히 번뇌스러운 기운을 전신으로 풍겨내고 있는 노승, 그가 바로 유일한 사찰의 유일한 승려, 고승(苦僧)이었다. 똑똑…… 또그르르르…… 앙상한 손은 연신 목탁을 두드리고 있었고, "마하반야바라밀다……" 입으로는 아무리 들어도 똑같은 내용의 불경만 읊어대고 있었다. 혹시 그것은 그가 알고 있는 불경의 전부가 아닐까? 그때였다. 쾅----! 별안간 법당 문이 세차게 열리며 한 인영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소녀(少女), 이제 잘해야 십 칠팔 세나 되었을 게다.


이목구비가 강렬하도록 뚜렷한 절색의 미소녀(美少女)였다. 특히 별처럼 초롱초롱한 두 눈은 도무지 악의 소굴에 있는 사람의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맑고 영롱해 보였다. 소녀는 법당 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뾰족한 교갈을 터뜨렸다. "엉터리 중! 지금 그렇게 엉터리 염불만 외고 있을 때가 아니예요!" "……" 목탁소리와 독경이 뚝 그쳤다. 고승은 가늘게 실눈을 뜨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묘화(妙花),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듯 소란이냐?" 지독하게 번뇌스러운 음성이었다. 묘화라 불리운 소녀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황망히 말했다. "음무극이 초강고수 삼인(三人)을 끌어들였어요!" "……!" 고승의 어깨가 흠칫 미미한 움직임을 보였다. 묘화는 초조한 듯 이어 말했다. "어서 주군께 이 사실을……" "소용없다." "예?"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주군의 성격을……" "하지만……" "주군은 천금마옥 내 분규가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묘화는 당혹한 기색을 떠올렸다. "그럼 어떻게 하죠?" 고승은 피곤하다는 듯 스르르 눈을 내리 감았다. "대영주와 이영주의 움직임이 어떠하던지…… 삼영주이신 주군께선 오직 기다릴 뿐이다. 때가 오기를……" 삼영주! 곧 마령군 위지풍을 일컬음이 아니겠는가? 고승(苦僧). 온갖 번뇌만 지닌 줄 알았더니 무엇인가 또 다른 것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번뇌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6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백리강 등 삼 인에게 음무극의 파격적인 직위가 수여되었다. 백리강에게는 총감찰(總監察), 독고령과 막청곡에게는 대감찰(大監察)이란 직책이 부여된 것이었다. 입옥한 지 며칠 안되는 외부인에게 이같은 직책을 부여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고 파격적이었다. 하나 총감찰이란 직책이 실상 말은 거창했으나 당주급에 해당되는 것에 불과했다. 이 총감찰이란 직책에는 어떤 권한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대감찰이란건 천금마옥에서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백리강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음무극이 아직까지 우리를 완전히 신임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미 지금까지 진행된 그 자체만으로도 반은 성공한 셈이다. 서둘러서 이익될 것은 없다!) 천금마옥 내에 석양이 깔리고 있었다.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백리강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교에서 알아낸 바에 의하면…… 이 천금마옥 내에는 분명히 지옥부와 혈극천의 첩자가 있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지옥부의 첩자는 금사후가 확실하지만…… 아직 혈극천의 첩자는 파악하지 못했다!) 반드시 알아내야 하는 과제 중의 하나였다. 문득 백리강의 동공 깊숙한 곳에 기이한 광채가 일렁였다. (천금마옥은 현재 마교와 지옥부, 혈극천의 팽팽한 균형을 깰 수 있는 유일한 세력…… 장악하면 승리의 절반을 얻고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다! 바보가 아닌 이상 지옥부와 혈극천 역시 손을 뻗치고 있을 것이다!) 석양 때문일까? 백리강의 눈빛이 일순 석양처럼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눈빛 그대로 백리강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우선…… 그녀를 만나봐야 하겠구나!) 7 어느 계곡, 유리알처럼 맑은 청류(淸流)가 흐르고 수미화려한 화목(花木)에 둘러싸인 곳. 아! 이곳이 천상(天上)일까? 아니면 무릉도원(武陵桃源)에 잘못 들어온 것일까? 너무도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문득 계곡 입구에 한 인영이 등장했다. 꽃과 나비가 화들짝 놀라 달아날 냉막무비한 인상의 흑의 중년인, 그는 바로 변신한 백리강이었다. (아……! 진정 좋은 곳이다!) 그는 과거 천금마옥에 들었을 때 이곳을 지나친 적이 있었다. 이 계곡은 바로 혈매지주 상예화가 있는 화화지주방의 입구였던 것이다. 하나 그때는 한밤 중이라 경관을 자세히 살피지 않았었다. 한데 지금 보니 대단히 아름다운 곳이 아닌가? 백리강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깝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혈매지주…… 그 음탕한 계집이 모두 차지하고 있다니……) 그는 천천히 계곡 안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호호호……" "호호…… 아이…… 간지럽단 말이야, 그만…… 그만……!" 조그만 소(沼),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웅덩이를 이룬 곳이 온통 흐드러진 난장판이다. 열 명 쯤이나 될까?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나녀(裸女)들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을 어찌 목욕이라는 신성(?)한 말로 표현하랴? 여인들은 서로 뒤엉킨 채 더듬고 장난치고 깔깔거리고 있었다. 물씬 무르익은 여체들이 진한 색기(色氣)와 폭발적인 유혹을 뿌렸다. 계곡을 걷던 백리강은 잠시 발을 멈추고 연못 속의 진풍경을 바라보았다. (기막힌 광경이군……!) 하나 그런 정도에 흔들릴 백리강이 아니지 않는가? 그는 이내 고개를 돌리며 천천히 연못 곁을 지나쳤다. 한데 그때,

잠입해

이곳을 이곳에

모습의


"이봐요." 돌연 매끄러운 교성이 백리강의 발을 다시 멈추게 했다. 연못 앞의 바위 위에 비스듬히 누운 여인이 백리강을 손짓하고 있었다. 화화지주방의 모든 여인들이 그러하듯 상당히 아름다운 용모였다. 하나 화화지주방의 모든 여인들이 또한 그러하듯 그녀 역시 전신에 음탕한 기운이 절절이 흐르고 있었다. 알몸이 적나라하게 비치는 나삼차림은 차라리 나신보다 더 고혹적이었다. "……!" 백리강은 짐짓 여인의 전신을 음산하게 훑으며 입맛을 다셨다. "기막히군." 여인이 그를 요염히 흘겨보며 교소했다. "호호호…… 당신은 어디 소속인가요?" "제 이영주(二令主) 소속이다." "호호호…… 당신은 제법 사내답게 생겼군요." 그녀는 전신을 미묘히 뒤틀며 찡긋 한쪽 눈을 감아보였다. "어때요. 생각 없나요?" 백리강은 사뭇 여인의 속살을 샅샅이 훑었다. "흐흐…… 괜찮을 것도 같다만…… 지금은 생각이 없다." "흐응…… 어째서……?" 여인은 야릇한 비음을 토하며 전신을 더욱 크게 뒤틀었다. 그러자 출렁하고 그 큰 가슴이 흔들리며 물씬한 육향(肉香)을 풍겨냈다. (추잡스럽게 노는군!) 백리강은 내심 구역질이 솟구쳤으나 짐짓 담담히 말했다. "혈매지주를 만나야 하기 때문이지." "방주님을……?" "그렇다." 백리강은 말과 함께 여인에게 다가가 한쪽 발을 바위 위에 척 걸쳤다. "상예화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풍염히 무르익은 여체가 코 끝에 닿을 듯했지만 백리강은 눈하나 까딱않고 있었다. 그제야 여인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백리강은 말없이 품에서 한 개의 영패를 꺼내 보였다. "초…… 총감찰령……!" 여인은 안색이 대변하여 화들짝 몸을 일으키며 부복했다. 그녀는 이미 얼마 전 들어온 세 명의 감찰들이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 귀가 따갑게 듣고있었다. 소살마동이 피떡이 되도록 얻어터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천금마옥 내에 아무도 없었다. "처…… 천녀 매교랑이 총감찰님을 몰라뵙고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백리강은 영패를 다시 갈무리하며 냉막하게 입을 열었다. "혈매지주 상예화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처…… 천녀가 안내하겠사옵니다." 매교랑은 황급히 일어나 공손히 앞장섰다. 한편 연못 안에 있던 십여 명의 미녀들은 모두 물 안에서의 장난질을 멈춘 채 멍하니 백리강을 응시하고 있었다. 백리강은 일부러 그녀들의 알몸을 음침히 쓸어보며 지나쳤다. "흐음…… 모두 기막히게 빠졌군."


매교랑의 입가에 재차 요염한 교소가 떠올랐다. "호호…… 생각 있으시면 천녀에게 말씀만 하세요." "음…… 그러지." 백리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득, (음? 저 소녀는……?) 백리강의 시선이 한 여인에게 못박히듯 머물렀다. 열 여덟 살이나 되었을까? 이지적인 기품과 요염한 미태를 동시에 갖춘 절세미녀였다. 팔등신을 이룬 몸매가 약간 마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데 백리강의 눈에 그녀는 상당히 익어 있었다. (누구일까? 분명…… 어디선가 한 번 본 적이 있는 모습인데……) 그때 매교랑이 그의 기색을 살피며 의미심장하게 미소지었다. "호호호…… 백향희가 마음에 드시옵니까?" "백향희……?" "네. 지금 보시고 계시는 소녀가 바로 백향희이옵니다." "음…… 그녀는 언제 이곳에 입옥했느냐?" 백리강이 묻자 매교랑은 비교적 소상히 그녀에 대해 설명했다. "향희는…… 석 달 전에 새로 들어온 아이입니다." "무슨 죄로……?" "호호호…… 향희는 그 짓을 즐긴 후 가차없이 사내를 죽이곤 했답니다." "음?" "호호…… 괴상한 버릇이죠." "대체…… 몇명이나 죽였다더냐?" "글쎄요. 한 삼십 명쯤 된다지요, 아마……?" "……!" "그것 때문에 향희는 무림의 공적이 되어 석 달 전 이 안으로 쫓겨 들어 왔습니다." 백리강은 입을 다문 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얼마 전 강호에서 나도 그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그 계집이 이곳에 들어와 있었군!) 그는 이어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의외로 낯이 익구나!) 하나 아무리 기억을 되살리려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 매교랑이 은근히 물어왔다. "생각이…… 있으신지요?" 백리강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말라서 틀렸다." 하나 문득 그는 생각이 달라진 듯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내일 밤…… 저 계집을 내 처소로 보내도록 해라. 많은 사내를 죽였다는 그 솜씨를 한 번 보고 싶구나." 매교랑은 두 눈에 음탕하고도 의미심장한 기색을 담았다. 이어 그녀는 나붓이 대답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알겠사옵니다. 이제 소녀를 따르시지요." 백리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그러지. 오늘은 상예화나 보고 가야겠다."


"이리로……" 그들은 곧 연못가를 떠나 계곡 안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그 뒤를 열 쌍의 봉목(鳳目)이 따르고 있었다. 특히 백향희라 불리운 소녀의 시선은 백리강의 등에 따갑게 박혀 있었다. "……!" 제 20 장 여우와 늑대 1 한껏 화려하고 우아하게 치장된 여인의 규방. 실내에는 규방 특유의 방향(芳香)이 은은히 감돌고 있었다. 방의 한쪽에 한여인이 침상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한데 그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사정없이 뒤흔들고도 남을 만큼 너무나도 뇌쇄적인 자태였다. 칠흑같은 머릿결은 폭포수처럼 치렁치렁 늘어뜨렸고 일신에는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분홍빛 엷은 망사의를 걸치고 있었다. 걸치나마나한 망사의 밖으로 보일 것은 모조리 다 보였다. 한껏 팽창되어 솟아오른 터질 듯한 가슴과 그 위에 탐스럽게 매달려 있는 포도 송이같은 유실, 쥐면 으스러질 듯한 잘록한 허리와 갑작스레 퍼져내려간 저 풍만한 둔부…… 뿐이랴? 알맞게 살이 오른 아랫배와 그 밑으로 은은히 내비치는 여인의 그늘진 밀림지대, 그 은밀하고 신비스런 아름다움이여…… 누구인가? 농염할대로 농익은 자신의 육체를 과시라도 하듯 이런 차림에 이렇게 누워 있는 여인은? 혈매지주 상예화, 바로 그녀였다. 지금 그녀는 한 낯선 사내를 눈 앞에 두고도 조금도 부끄럽다거나 수줍은 기색없이 이런 자태로 누워있는 것이다. 사내는 다름아닌 백리강이었다. 백리강은 야릇한 시선으로 그녀의 전신을 훑듯이 쓸어보고 있었다. 문득 혈매지주의 붉고 육감적인 입술이 떼어졌다. "웬일이시죠? 신임 총감찰께서 천첩의 처소를 다 찾아오시고?" 백리강은 괴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상방주의 화명(花名)을 듣고 이렇게 찾아왔소." "화…… 명?" "그 방면에 관해선 천하제일이라고 들었소." 순간, 혈매지주는 간드러진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 그 바람에 터질 듯한 가슴도 덩달아 파도치듯 출렁였다. "으음……" 백리강은 무겁게 침음하며 침상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아무 스스럼없이 그녀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혈매지주는 귀밑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코먹은 음성을 발했다. "그러니까…… 천첩과 한 번 즐기고 싶다 이 말씀인가요?" 백리강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뜻이오." 혈매지주의 눈에 미묘한 빛이 도발적으로 넘쳐 흘렀다. "아무래도……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아요."


"어째서?" 혈매지주는 요염한 눈길로 그의 전신을 훑어보며 말했다. "어쩐지…… 이번에는 무서운 상대를 만난 것 같아요." 백리강은 그 말에 씨익 웃었다. "그동안 시원찮은 놈들 하고만 즐겼나 보구려." 혈매지주는 교태롭게 미소했다. "그런건 아니지만…… 당신은 어쩐지 강하고 또……" "또?" "남달리…… 호호호…… 아무튼 내가 불리할 것 같군요." 백리강은 기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떻소? 한 번 시험해보고 싶지 않으시오?" 노골적인 음탕한 질문에…… "좋아요!" 노골적인 대답이 있었다. 한 마디로 합의(合意)가 된 것이었다. "흐흐흐…… 좋소!" 백리강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대뜸 옷을 훌렁훌렁 벗기 시작했다. 혈매지주의 눈빛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아름다왔다! 그녀는 사내의 몸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충격으로 발견하고 있었다. 백리강의 나신(裸身), 그것은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싫증나지 않을 신(神)의 위대한 예술품이었다. 몸도 닿기 전이건만 혈매지주는 짜릿한 쾌감의 전율이 벌써부터 전신 구석구석에 퍼져가는 것을 느꼈다. 백리강은 씨익 웃었다. "어떻소? 상대해 볼만 하겠소?" 해볼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는 취한 듯한 눈길로 백리강의 전신을 훑으며 천천히 양팔을 내뻗었다. "어서……" 순간 백리강은 거칠게 그녀에게 몸을 던졌다. 혈매지주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거머리처럼 휘감겨 들었다. "아음……"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숨막히는 교성을 토해냈다. 어이없게도 그녀는 백리강의 몸을 끌어안기 무섭게 한차례 절정의 쾌감을 느낀 것이었다. 손을 뻗어보니 그녀의 샘은 이미 뜨겁게 넘쳐 흐르고 있었다. (후후…… 요물(妖物)은 요물이구나. 어쩌면 오히려 잘되었는지도 모르겠군!) 무엇이 잘되었다는 것일까? 그는 무슨 꿍꿍이속을 가지고 오늘의 정사를 생각한 것일까? 한 순간 백리강은 전희를 모두 생략하고 격렬하게 그녀를 향해 진입해 들어갔다. 그 거역할 수 없는 힘(力)에 혈매지주는 숨 넘어가는 교성을 토하며 전신을 휘청였다. 일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혈매지주는 칠흑같은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채 피곤한 얼굴을 백리강의 가슴에 파묻고 있었다. "당신…… 정말 굉장한 사내에요." 완전히 기진맥진한, 하나 달작지근한 음성이었다. 백리강은 그녀의 나신을 어루만지며 느긋하게 말했다. "나도 너같은 계집은 처음이다."


반말이었지만 왠지 상예화는 그것이 거슬리지 않았다. "너는…… 마치 마르지 않은 우물같은 계집이다." 혈매지주는 힘없이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예감이 맞았어요. 어쩐지 당신은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어요." 백리강은 괴이하게 웃었다. "흐흐…… 꽤 좋았던 모양이군." "좋았던 정도가 아니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아닌 게 아니라 그녀의 몸은 마치 물에 젖은 솜처럼 완전히 흐물흐물 늘어져 있었다. "좋았다니 다행이군. 한데……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 "무슨……?" "내게 춘고(春蠱)를 쓴 이유는 무엇이냐?" 혈매지주의 안색이 홱 급변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죠?" 백리강은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 상예화, 내가 고술(蠱術)의 달인(達人)이라는 것은 미처 몰랐겠지?" "……!" "묘강의 고왕(蠱王)이 저술한 마고비경(魔蠱秘經)을 모조리 머리 속에 담고 있는 나다." "마고…… 비경!" "흐흐…… 너는 정사를 통해 내 몸 속에 춘고를 넣으려 했지만 그 춘고는 지금 네 몸 속에 들어가 있지." "……!" 혈매지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서…… 설마……?" 백리강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흐흐…… 믿기 어려우면 운공을 해보아라." 혈매지주는 퉁기는 듯 벌떡 일어서더니 급히 진기를 끌어올렸다. 순간 혈매지주는 고통스런 비명을 토하며 배를 와락 움켜쥐었다. 오장육부가 모조리 칼로 도려내는 듯한 극통을 느꼈던 것이다. 그녀는 온통 경악과 불신이 뒤범벅이 된 표정으로 백리강을 응시했다. "나…… 나에게…… 왜……?" "너는 왜 나에게 춘고를 사용했느냐?" "……!" 백리강은 괴이롭게 웃으며 말했다. "네 목적이 곧 내 목적이었다. 네가 춘고를 이용해 나를 손아귀에 쥐려했듯이 나 또한 너를 손에 넣고자 했으니까……" 순간, 혈매지주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 당신…… 이곳 천금마옥에 들어온 것은 분명히 어떤 목적이 있어서였군요?" "그런 셈이지." 일순 혈매지주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감히 이영주님을 속이다니……" 백리강은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은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너는 오직 한 가지만 기억하고 있으면 된다. 만약 네가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음무극에게 일러바친다면…… 입을 여는 그 순간 바로 네몸이 한줌의 혈수(血水)로 변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혈매지주의 벌거벗은 몸뚱이가 한차례 부르르 떨렸다. (와…… 완전히 당했어!) 그때 백리강의 손이 혈매지주의 풍만한 가슴을 지긋하게 움켜잡았다. "흐흐흐…… 어떠냐? 또 한 번 즐겨볼까?" 혈매지주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멀뚱한 눈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하나 생각은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 그녀의 몸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또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그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혈마고가 아니더라도…… 어쩌면 영원히 이자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 같다……!) 자신의 욕정을 만족시켜주는 사람은 전 생애를 통틀어 눈 앞의 사내가 처음인 까닭이었다. "으음……" 여체(女體)가 침상에 뉘여지며 사내를 부르고 사내는 또다시 여인의 궁 속으로 깊이 진입해 들어갔다. 끈적끈적한 그날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2 <주군께 아뢰옵니다. 적한청, 그 자는 천첩이 섭혼술로 조사한 결과 분명한 장한문(長恨門)의 후예임이 밝혀졌습니다. 이미 춘고(春蠱)를 주입하여 그자를 영원히 천첩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으니 염려치 마옵소서 혈매지주 상예화.> 음무극은 다 읽고 난 서찰을 손 안에 움켜 쥐었다. 지금 그의 입가엔 극히 사이하며 음침한 괴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흐흐흐…… 좋다, 좋아. 이것으로 포섭은 완전한 성공을 보았다." 그는 두 눈에 일순 비수처럼 섬뜩한 살광을 담았다. "이제…… 남은 것은 금사후…… 놈을 제거하는 일 뿐이다. 그리고 지옥부의 손길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천금마옥을 송두리째 장악하는 것이다." 다음 순간 자신감에 넘치는 엄청난 대소성이 그의 입을 떠났다. "으하하하하……!" 3 백리강은 침상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이미 밤도 깊고 불을 끈 지 오래이건만 왠지 잠이 오질 않았다. 그는 어둠을 응시하며 이리저리 상념만 이어가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음무극…… 그 자가 조만간 어떤 음모를 드러낼 것 같다!) 그도 눈치채고 있었던가? 하나 백리강은 씨익 어둠 속에서 밝은 미소를 떠올렸다. (놈의 음모를 역이용해서…… 나 백리강이 천금마옥을 장악한다. 후후……) 한데 바로 그때였다. 불현듯 그의 고막 속으로 극히 미세한 인기척이 파고 들었다. 백리강은 멈칫했다. (경공으로 미루어 대단한 고수같은데 천금마옥에서 이 정도의 경공을 가진 자라면 대체 누구일까?) 그는 문득 경공의 일인자인 산영묘수 허관백을 떠올렸다. 산영묘수 허관백. 그는 과거 소서시란 어린 소녀와 경공대결을 벌인 인물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백리강이 알기로 그의 경공은 천금마옥 내에서 으뜸이었다. 하나 백리강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허관백이라 해도 이 정도의 경공을 발휘하진 못한다. 그럼 누가……?) 이때 지극히 미세한 음향은 바로 백리강이 머문 전각 위에서 멈 추었다. 실로 웬만한 고수라면 눈치채지 못할 절륜무비의 경공이었다.


백리강은 어둠 속에서 눈빛을 번뜩였다. (이것 재미있겠는데……? 분명…… 나를 노리고 있다는 얘기렷다!) 그 순간 그의 뇌리엔 상예화가 실토한 모종의 사실이 섬전처럼 퍼뜩 스쳤다. -대영주인 조사의나 삼영주(三令主) 위지풍은 분명히 당신을 노릴 것이에요. 그들은 결코 음영주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니까요. -조사의의 주위를 항상 따라다니는 이남이녀(二男二女)가 있어요. 그들은 잠천사비(潛天四秘)로 불리우는데…… 역시 무서운 무공을 지닌 자들이예요. -그리고 위지풍에게는 묘화(妙花)와 고승(苦僧)이라는 두 무서운 수하가 있어요. 묘화 그녀는 심기가 깊고 독랄한 여인이예요. 또한 고승은 중은 중인데 보통 중들과는 달라요. 괴이무쌍한 성격의 소유자로, 소문엔 그의 무공이 위지풍에 비해 별 차이 없다는 것이예요. 문득 백리강은 상예화가 일러준 고수들 중 한 인물을 떠올렸다. (혹시 이토록 뛰어난 경공을 지닌 자라면 조사의 휘하의 귀영소 소가 아닐까?) 그때 그는 염두를 굴리다말고 번뜩 미세한 기광을 떠올렸다. 보라! 그가 누운 천정의 한쪽 구석으로 조그만 구멍이 뚫리고 있었다. 동시에, 푸스스…… 그 구멍 속으로 한 가닥 연기가 소리없이 스며들어 오는 것이 아닌가! (이것 봐라!) 백리강은 가늘게 실눈을 뜨며 그것을 흥미있게 응시했다. 그 사이 연기는 더욱 짙게 모이더니 점차 한 인영의 모습을 이루었다. 스스스……! 왜소한 체구의 회의복면인이었다. 백리강은 내심 은은한 경악을 머금고 말았다. (저것은…… 서역(西域) 밀전의 잠형술의 일종인 투천잠형(透天潛形)이 아닌가? 그가 놀라고 있을 ㄸ 회의복면인은 마치 귀신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순간 백리강은 실눈 사이로 보았다. 복면 위로 드러난 인영의 눈빛, 그것은 기이하게도 푸르스름한 안광(眼光)이 아닌가! 괴기스럽기조차 했다. 이때 복면인은 백리강의 가슴에 인정사정없이 맹렬히 일장을 후려치고 있었다. 퍽! 그의 일장은 그대로 백리강의 가슴에 적중했다. 하나 그 찰나, "으……!" 복면인은 짧은 신음을 토하며 뒤로 퉁겨나 버렸다. 때 맞춰 백리강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후후후…… 누가 어르신네의 단잠을 깨우느냐?" "……!" 회의복면인은 불신과 당혹어린 눈빛으로 급히 신형을 변화시켰다. 스스스…… 그의 신형은 이내 연기로 다시 화하기 시작했다. "흥, 어림없다."


휘---- 익! 백리강은 누운 그대로 비쾌히 몸을 날려 그를 잡아갔다. 회의복면인은 미처 연기로 화하기도 전에 백리강의 강철같은 손아귀에 완맥을 잡히고 말았다. 진정 눈깜짝할 순간의 일이어서 피하고 자시고 할 여유도 없었다. 백리강은 신형을 바로 세우며 복면인을 직시했다. "너는 누구냐?" "……" 복면인이 아무 대꾸가 없자 백리강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발했다. "귀영소소…… 혹시 이것이 네 이름이 아니냐?" "……!" 복면인의 푸른 동공이 미세히 물결쳤다. "흐흐흐…… 역시 맞는가 보군." 백리강은 음침하게 괴소한 뒤 다시 물었다. "조사의가 보냈느냐?" 복면인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백리강은 눈꼬리를 꿈틀 치켜뜨며 이를 갈듯 나직이 내뱉았다. "부인하는가? 그렇다면…… 어디 얼굴 좀 봐야겠군." 다음 순간 그는 복면인이 채 손 쓸 새도 없이 다짜고짜 복면을 벗겨 버렸다. 차르르…… 기다렸다는 듯 눈부신 황금빛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음?" 백리강은 흠칫 두 눈을 크게 뜨고 ���았다. 복면인, 그는 뜻밖에도 금발벽안의 이국적인 용모를 지닌 미녀가 아닌가! 빙옥(氷玉)처럼 맑고 깨끗한 피부에 잔잔한 심해(深海)를 보듯 푸르고 신비한 벽안, 꼬옥 다물린 앵두빛 입술과 뚜렷한 콧날의 선(線)…… 이 모든 것이 가히 완벽에 가까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물결치듯 풍성한 금발은 황금빛 들판을 보듯 풍요로왔다. 백리강은 일순간 넋을 통째로 앗겨 버렸다. (이토록 특이한 미녀는 처음이다……!) 하나 지금 때가 어느 땐가? 그는 이내 정신을 추스르며 음침하게 입을 열었다. "흐음…… 귀영소소가 뜻밖에도 여인이라……?" 귀영소소,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홱 돌렸다. 백리강은 짐짓 나직하게 살소를 흘렸다. "흐흐…… 끝까지 말을 않겠단 말이지? 아니면 벙어리라도 된단 말이냐?" "……" "귀영소소,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백리강은 슬쩍 화제를 돌렸다. "흐흐흐…… 너는 내가 어떻게 해서 천금마옥에 들어온 줄을 아느냔 말이다." 이어 그는 슬슬 귀영소소에게 위협을 주기 시작했다. "내 나이 열 여섯에 부모를 죽이고…… 그것을 욕한 두 형제를 난도질해 끓는 가마 속에 집어 넣었지. 그리고…… 다섯 누이들은 모조리 창녀촌에 팔아먹은 사람이 바로 나다." "……!" 귀영소소, 여인은 역시 여인이었다. 그 희뽀얗던 옥용이 창백하게 질려가는 것을 백리강은 똑똑히


보았다. 백리강은 그러나 한 술 더 뜨기로 했다. "특히…… 내 취미는 미녀를 보면 끝내주게 즐기고 난 후 토막내어 내다버린다는 것이다." "……!" 바르르…… 귀영소소는 급기야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하나 그녀의 입술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안되겠군!" 백리강은 두 눈을 무섭게 굳혔다. 그는 귀영소소의 턱을 쥐고 강제로 그를 향하게 돌렸다. "자…… 말해라! 조사의가 왜 나를 죽이려 하느냐?" "……!" 귀영소소의 입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백리강은 두 눈빛을 다시 음침하게 빛냈다. "흐흐흐…… 말로는 안되겠군. 정…… 그렇다면……" 그는 천천히 한쪽 손을 그녀의 가슴께로 가져가 젖가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아…… 으…… 으……" 귀영소소가 당혹과 분노의 눈빛을 뿌리며 괴성을 질렀다. 하나 백리강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흐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보여 주도록 하마." 찌---- 익!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귀영소소의 앞가슴 옷자락이 길게 찢어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불쑥 튀어나오는 새하얀 동산…… 그것은 실로 정성들여 빚고 다듬은 듯 풍염하고 탐스러운 가슴이었다. "아…… 으으……" 귀영소소의 파란 눈은 수치와 분노로 금시라도 눈물을 쏟을 듯했다. "……!" 백리강은 퍼뜩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진짜 벙어리……?) 그는 자신의 느낌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흐흐…… 이래도 말 않겠느냐?" 그는 말과 동시에 귀영소소의 가슴을 애무하듯 어루만졌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조그만 분홍빛 돌기가 유린당했다. 여인으로서 그보다 더한 수모와 치욕은 없다. 하나 귀영소소는 아예 눈을 꽉 감으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 뿐이었다. (으음…… 역시 벙어리였나?) 그렇게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지 않은가? 백리강은 내심 고소를 지으며 손을 거두었다. "그만 두자. 귀영소소……! 하나…… 한 가지만 알아 두어라. 나를 죽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 그가 쉽게 포기하자 귀영소소는 의외인 듯 고개를 들었다. 몹시 기이하다는 얼굴이었다. 한데, 그 찰나 귀영소소의 눈빛이 기괴야릇하게 흔들렸다. (음?)


백리강은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그의 귓속을 파고드는 미세하고도 예리한 파공성이 있었다. (……!) 그 음향을 느낌과 동시에 백리강은 신쾌히 신형을 옆으로 미끄러뜨렸다. 순간 방금 백리강이 서 있던 그 자리가 눈녹듯 흔적없이 녹아버린 것이 아닌가! "이것은……?" 백리강은 흠칫 안색을 굳혔다. "어떤 놈이냐?" 그는 일성대갈과 함께 신쾌히 창 밖으로 신형을 쏘아갔다. 하나 창 밖엔 아무런 자취도 없었다. 백리강은 이내 전각 위로 신형을 솟구쳤다. 이어 그는 두 눈에 최대한 안력을 끌어올려 사위를 살폈다. 그러자 어둠 속 저 멀리 하나의 흑영(黑影)이 사라지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흐흠…… 제놈이 뛰어야 벼룩이지. 어디 두고 보자!) 그렇게 생각한 순간 백리강은 쏘아진 살처럼 비상하여 이미 십 장 밖을 달리고 있었다. 흑영, 그의 경공은 일견키에 보통 절륜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 그가 어디 백리강에 비견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한데 백리강이 막 어느 야산(野山)까지 추적한 그 순간이었다. (……!) 돌연 흑영의 자취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음?" 백리강은 우뚝 신형을 멈추며 한 차례 주위를 살폈다. 하나 하늘로 솟았는가? 아니면 땅으로 꺼졌는가? 흑영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그림자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이럴 리가……?) 백리강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좋아…… 시각(視覺)이 안되면 청각이다!) 백리강은 희미한 조소와 더불어 청각을 최대한 곤두세웠다. 최소한 백 장 이내라면 개미새끼 기어가는 소리도 감지해낼 수 있는 그의 청각이었다. 문득 백리강의 눈에 번쩍 기광(奇光)이 솟구쳤다. (땅 속이다!) 그의 신형이 빙글 돌아섬과 동시에 우수를 칼 끝처럼 세워 일직선으로 쭉 뻗었다. 다섯 줄기 광채가 그의 손 끝에서 벼락같이 폭출되었다. 대비단혼수(大悲斷魂手)! 못 자를 것이 없다는 천하최강의 파옥신공(破玉神功)이 펼쳐진 것이었다. 일순, 꽈꽝! 요란한 폭음과 더불어 땅거죽이 뒤집혀 허공으로 솟구쳤다. 동시에, "으윽!" 한 소리 답답한 신음과 함께 한줄기 흑영(黑影)이 땅 속에서 번쩍 솟구쳐 나왔다. 하나 그가 채 신형을 추스르기도 전에 백리강은 가볍게 냉소하며 신쾌무비한 몸놀림으로 흑영을 따라붙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일장이 그대로 흑영의 가슴에 명중했다. 순간,


"우---- 욱!" 흑영은 신음을 터뜨리며 지면 위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는 놀랍게도 희다 못해 파리한 안색의 준수한 청년이었다. 하나 그의 두 눈은 기이하게도 섬칫한 느낌의 백색 광망을 내뿜고 있었다. 백리강은 유령처럼 미끌어지듯 청년에게 다가가 우뚝 섰다. "으…… 으……" 청년은 낮게 신음했다. 백리강이 그를 내려다 보며 음산하게 괴소를 터트렸다. "흐흐…… 네놈이 바로 수혼마랑이겠군." 수혼마랑, 그는 바로 조사의의 수하 중 한 명이 아닌가? "……!" 청년은 일순 흠칫했으나 아무런 말이 없었다. 백리강은 번뜩 소름끼치는 살광을 내뿜었다. "네놈을 당장 죽일 수도 있다. 하나 죽이지 않겠다. 가서 조사의에게 말해라. 머지않은 날 그를 직접 찾겠다고……!" "……!" "가라!" 백리강이 싸늘히 내뱉자 수혼마랑은 천천히 신형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백색 안광으로 백리강을 쏘아보며 뿌드득 이를 갈았다. "두고 보자." 수혼마랑은 이내 야산 너머로 신형을 쏘아 사라졌다. 백리강은 잠시 그가 사라져 간 곳을 응시했다. 하나 그의 두 눈빛이 암암리 이채를 발한 것은 귀신도 알지 못했다. (쥐새끼가 두 마리라……! 하나 내가 수혼마랑에게 한 말은 하나도 듣지 못했을테니…… 후후…… 열심히 귓밥을 파 보라지……!) 누가 그를 엿보고 있었던가? 하나 백리강에게 이미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유유히 신형을 옮겨 처소로 되돌아 가기 시작했다. (조사의…… 우리는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외다. 과거 당신이 말했듯이……!) 4 음무극은 지금 가장 통쾌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진 술상 주위로 모두 일곱 인물이 앉아 있었다. 변신한 백리강과 독고령, 막청곡, 그리고 음무극을 보좌하고 있는 예의 범상치 않은 세 노인들. 지금 막 백리강이 간밤에 있었던 일들을 들려주던 참이었다. 그래서 음무극은 통쾌하기 그지 없었다. "하하…… 적총감찰, 정말…… 어젯밤 일은 너무도 통쾌하오. 과연…… 장한노조의 후예답소." 백리강은 씨익 웃었다. "과찬의 말씀이시오." 음무극은 완강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오. 귀영소소와 수혼마랑은 천금마옥 내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요. 더욱이 그들은 조사의의 가장 뛰어난 수하중 두 명인데…… 그들을 총감찰이 속시원하게 꺾었으니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이오? 하하하하……" 그는 이어 득의어린 눈빛을 번뜩였다. "이번 일로 조사의는 크게 망신한 것이오. 물론 스스로 화를 자초한 셈이지만…… 또한 나 음무극의


위신은 총감찰 덕분에 크게 세워지지 않았소? 진정 수고 많았소." 음무극은 진심인 듯 백리강을 바라보며 연신 껄껄 웃었다. "흐흐흐…… 이영주께서 자꾸 그러시면……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소." "과찬이 아니오. 단지 아쉬운 점은 두 놈을 죽이지 못했다는 것이오. 하나 차후에 또 다시 그런 일이 있을시엔 절대 살려두지 마시오. 우리가 먼저 손을 쓰는 것은 안되지만 놈들이 먼저 공격해 오는 데는 살려둘 필요가 없소." 음무극의 일침에 백리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이다." 하나 그의 내심은 이 순간 싸늘한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 (흥…… 음무극…… 모든 것이 네놈 뜻대로는 안될 것이다. 구태여 귀영소소 등을 죽여 네놈에게 이익을 주는 일 따위는 절대 하지 않을테니까……) 동시에 그는 암암리 음무극 곁의 세 노인 중 두 명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간교한 놈들……! 네놈들이 간밤에 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것을 모를 줄 알았더냐?) 그들이었던가? 그 두 마리 쥐새끼가? 백리강은 다시 음무극을 향하여 냉막한 입술을 떼었다. "사실…… 어젯밤 귀영소소와 수혼마랑을 살려둔 것은 내게 따로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오." 음무극을 비롯한 세 노인들이 일제히 의아한 기색을 띄웠다. 백리강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만약 그들을 죽였다면 장차 조사의와 주군 사이에는 심각한 암투가 벌어질거요. 그렇게 되면 삼영주 위지풍만 어부지리(魚父之利)를 얻게 되는 셈이외다." 음무극이 두 눈에 이채를 떠올렸다. "으음…… 그것도 일리가 있군." 이어 그는 새삼 놀랍다는 듯 백리강을 똑바로 직시했다. "적총감찰, 무공만 강한 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지모 또한 대단하구려." "별 말씀을……!" 백리강은 자못 겸손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음무극은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기실 그의 내심 또한 몹시 흐뭇하기 한량 없었다. (거물을 얻었다. 이미 나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 이상…… 흐흐…… 이놈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야……!) 그는 대어(大魚)를 낚았다고 생각했다. 하나 그는 아직도 알지 못했다. 그 대어에게 다시 낚일 자신의 처지를…… 어쨌든 그는 호쾌히 웃으며 좌중에게 술을 권했다. "하하……! 모두들 오늘은 한 번 거나하게 취해 봅시다. 오늘처럼 통쾌한 날……" "하하하…… 좋지요…… 좋아." "하하……!" 5 다음날 아침, 음무극은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무섭게 누군가를 맞이해야만 했다. 날이 밝자마자 찾아온 사람은 바로 금사후였다. 음무극은 지금 금사후가 건네 준 한 장의 서찰을 읽고 있었다. <불사천령강시(不死天靈 屍)의 제조 작업을 급속히 완성시키기 바란다. 지옥부주(地獄府主).> (으음……) 음무극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지옥부주…… 놈이 이렇게 다그칠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는 천천히 서찰을 탁자에 내려 놓았다. (최소한 한 달 정도는 여유가 있을 줄 알았더니만……) 이렇게 되면 예상은 크게 빗나간 것이었다. (하나 흔들려선 안된다. 늦출 수 있는 데까진 늦춰야 한다!) 그가 내심 염두를 굴리고 있을 때 금사후의 음성이 그의 귓전을 울렸다. "회답을 주시오, 음영주." "으음……" 한 차례 묵직한 침성을 흘린 뒤 음무극은 곤혹스런 표정으로 금사후를 응시했다. "금군사." "말하시오." "부주님의 명령에는 다소 무리가 있소." "음?" "그렇게 서두르면 오히려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위험이 있소. 더구나……" 음무극은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이미 조사의나 위지풍도 금군사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는 듯하오." 금사후는 가볍게 미간을 모았다. "그렇다면 음영주의 뜻은?" "한 달만 더 기한을 주시오." "……!" 금사후의 표정이 가볍게 변했다. 그는 문득 음무극을 깊숙이 응시하며 음침한 어조를 내뱉았다. "음영주, 혹시…… 딴 마음을 먹고 있는건 아니오?" 음무극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예전에 음영주는 내게 석 달의 시한을 약속했소. 하나 그 시한이 지난 지 며칠이 흘렀소. 한데 지금 음영주는 다시 한 달의 시간을 요구하고 있소." "생각못한 변수가 생겨서 그런거요. 계획대로라면 벌써 끝났을거요. 하나 나도 최선을 다했으니 너무 문책하지 마시오." 금사후의 입가에 문득 야릇한 미소가 감돌았다. "음영주께서 끌어들인 세 명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들었소. 그들 때문에 천금마옥 내에서 음영주의 위세도 한층 강화되었고 그로 인해 힘의 구도가 조사의에서 음영주 쪽으로 기울었다고 하더구려. 하나…… 말이오. 돌연한 변화는 그리 좋은게 아니오. 내가 보기에 음영주는 그들을 너무 믿고 있는 것 같소." 음무극의 표정이 일순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표정 그대로 음무극은 무뚝뚝한 음성을 내뱉았다. "그들을 믿고 안믿고는 본좌의 소관…… 금군사에게 본영주의 일까지 간섭할 권한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소. 더욱이 그들은 이제 본영주의 감찰직을 맡고 있는 인물들이오. 본영주의 수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일은 더 이상 없기를 바라겠소." 쐐기를 박는 일언(一言)이었다. (이놈이……?) 금사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깨끗이 무시당한 기분이었다. 금사후는 안색을 굳히고 차갑게 말했다. "좋소. 더 이상 음영주의 일에는 상관 하지 않겠소. 하나……" 그는 눈빛을 음산하게 빛내며 한마디 덧붙였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될 시에는 부주의 엄중한 추궁이 음영주에게 떨어질 것이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튀듯 부딪쳤다. "이만 가보겠소." 금사후는 벌떡 일어서더니 거칠게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문득 음무극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피어 올랐다. (흐흐흐…… 금사후 네놈이 부주만 믿고 겁없이 날뛴다만 그럴 날도 멀지 않았다!) 조소가 더욱 짙어지며 눈빛이 음산하게 일렁였다. (한 달…… 한 달이면 모든게 끝난다. 그때 금사후 네놈은 나 음무극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이다!) 언제 움켜 잡았는지 탁자 위에 있던 지옥부주의 서찰이 음무극의 손에서 가루로 화해 떨어져 내렸다. 바로 그 시각 음무극의 처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 거목 위, 냉막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의 한 흑의 중년인이 가느다란 가지를 딛고 우뚝 서 있었다. 백리강, 바로 그였다. (후후…… 역시 추측이 맞았다. 음무극은 역시 지옥부와 손이 닿아 있었다!) 금사후가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모두 보았던 백리강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후후…… 혹시나 해서 살피고 있었더니만…… 예상외로 큰 수확을 얻었다!) 이어 그는 금사후가 사라져간 방향을 느릿하게 돌아 보았다. (금사후…… 마교를 배신한 지옥부의 끄나풀……) 그의 입가로 문득 차가운 조소가 배어 나왔다. (지금은 너를 죽이지 않겠다. 훗날…… 마교의 율법 중 가장 잔인한 형벌로 너를 다스릴 것이다……!) 스스…… 그의 신형은 안개가 흩어지듯 그곳에서 사라졌다. 6 고행사(苦行寺). 절이라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이곳에도 밤(夜)은 어김없이 찾아들었다. 그나마 목탁소리와 독경마저 들려오지 않는 지금 고행사는 죽음같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고승(苦僧), 그는 밤이 꽤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법당 안에 좌정해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그렇게 괴로워하고 고민하는지 모르지만 그는 잠도 안자고 이렇듯 황폐한 법당을 지키고 앉아있는 것이었다. 한데 이때였다. 돌연 미세한 소리와 함께 흰 물체 하나가 뒤통수를 향해 날아왔다. 순간 뒤통수가 쪼개질지언정 꼼짝도 안 할것 같던 고승의 손이 번개같이 허공에서 번뜩였다. 순식간에 흰 물체를 낚아챈 것이었다. 그 한 수(手)는 고승의 무공이 절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 고승은 가늘게 눈을 뜨며 수중의 흰 물체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발목에 서찰 하나가 묶여있는 전서구였다. 고승은 즉시 서찰을 끌러 펼쳤다. <뜻밖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적한청이 오늘 밤 자신의 처소로 소녀가 와줄 것을 지시했습니다.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 같은 즉, 속히 지시 바랍니다. 백향희 서(書).> 고승의 이마가 와락 구겨졌다. "제기랄…… 가뜩이나 복잡한 머리 속이 터질 것만 같구나."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전신에 서린 고뇌스런 기운은 서찰을 보는 순간 더욱 짙어졌다. "한데…… 그건 그렇고 그놈은 무엇 때문에 백향희에게 까지 손 을 뻗친단 말인가?" 고승은 고민스럽게 중얼거리더니 문득 눈빛을 괴이하게 빛냈다. "할 수 없지. 이렇게 된 바에야……" 그는 문득 소맷춤에서 문갑을 꺼내더니 그 속에서 종이와 붓을 꺼내 들었다. 곧 이어 그는 종이 위에 붓을 가볍게 놀렸다. <그를 죽여라.> 고승은 붓을 내려 놓고 종이를 전서구의 발목에 묶은 다음 훌쩍 전서구를 날려 보냈다. 푸드드득! 전서구는 순식간에 밖으로 사라졌다. 고승은 비로소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일어서면서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제야 끝을 맺을 때가 다가온 것 같군." 끝이라니……? 무슨 말인가? 고승은 문을 향해 느릿하게 걸음을 떼놓았다. "내가 이 천금마옥에 들어온 지도 어언 이십 오 년……" 문 밖엔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고승은 천천히 야공을 올려다 보았다. 문득 고승의 주름진 입가로 한 줄기 씁쓰레한 고소가 번져 나왔다. "마령군 위지풍…… 지난 이십 오 년 간 그를 위해 일해왔고 그 또한 나를 잘 대해주었다. 하나 이젠 끝을 맺을 때가 온 것이다. 나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천하를 위해서……" -천하를 위해서…… 실로 거창한 말이 아닌가? 그렇듯 거창한 말을 하는 이 고승의 진정한 내력은 무엇이란 말인가? 문득, "아미타불……" 진실로 고뇌에 찬 불호 한 소리를 남겨둔 채 고승은 유유히 법당 밖으로 사라져 갔다. 하나 고승은 꿈에도 몰랐다. 자신의 일거일동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는 인물 하나가 있었다는 것을. 보라! 법당의 한 벽면, 한 인영이 환영(幻影)처럼 전혀 소리없이 벽 위에 나타나고 있지 않는가! 말할 수 없이 신비스런 눈을 가졌고 무척 준수하고 단아한 풍모의 중년인이었다. 그는 바로 마령군 위지풍이었다. "……" 위지풍은 고승의 뒷모습을 묵묵히 응시하더니 문득 한 줄기 신비스런 미소를 입가에 피워 올렸다. 그것 뿐 위지풍의 모습은 다시 벽 속으로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뭔가 일이 심상치 않게 변해가고 있었다. 제 21 장 暗中協約 1 <그를 죽여라.> 달빛을 빌어 읽는 서찰에는 그렇게 씌여 있었다. 서찰을 응시하는 백향희의 눈에 어떤 굳은 결의의 빛이 떠올랐다. 곧 이어 그녀는 품 속에서


지필(紙筆)을 꺼내더니 무엇인가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전서구 한 마리가 힘차게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백향희는 날아가는 전서구를 힐끗 일별한 뒤 야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중원을 위해서……아니 군주님과 오천(五天)께서 하시는 일이 잘되기 위해서라면…… 내 한 몸이 문제가 아니다." 오오, 이 무슨 말인가? 군주와 오천(五天)이라니, 그렇다면……? "가 봐야지, 놈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백향희는 그 말을 끝으로 총총히 그 자리를 떠나갔다. 한데 그녀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백향희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 한 인영이 뚝 떨어져 내렸다. 그는 다름아닌 백리강이었다. "……!" 그는 백향희가 사라져간 방향을 힐끗 쳐다본 뒤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조금 전 허공으로 힘차게 날아올랐던 바로 그 전서구가 지금 그의 손에 잡혀져 있지 않은가! 백리강은 서둘러 전서구의 발목에 묶인 서찰을 풀었다. <그를 그 무기로 죽이겠습니다. 그럼으로써 그의 사인(死因)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의에게 향하도록 하겠습니다. 백향희 서(書).> "그래 백향희…… 이제 그녀가 누군지 알았다!" 백리강의 얼굴에 신비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일 년 전 진무왕가에 들어갔을 때…… 서하군주 주여설의 시녀 중 한 명이 바로 백향희였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백향희는 오천(五天) 중 무곡성군 화진성의 제자가 분명할 것이다." 백리강은 문득 나직한 기소를 터뜨렸다. "후후…… 고승과 백향희…… 역시 정도무림맹인 천룡단의 첩자 도 이곳에 잠입해 있었구나." 이어 그는 눈빛을 기이하게 빛내며 짓궂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생각해보니 괘씸하구나. 뭐? 나를 죽이겠다고? 나 마교의 대지존인 백리강을?" 그는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어쨌든 그 무기가 뭔지 몰라도 어서 가서 죽을 준비나 해야 되겠군." 순간 그의 신형이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2 백리강은 느긋한 표정으로 의자 깊숙이 상체를 파묻고 있었다. 그 앞에 백향희가 약간 창백한 표정으로 다소곳이 서 있었다. "흐음…… 전에 얼핏 보았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이제보니 상당한 미인이군." "……" "이리 오너라!" 백향희는 움찔하는듯 했으나 곧 조심스럽게 백리강의 앞으로 다가섰다. 백리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을 건넸다. "네 이름이 백향희라고 했었지?" "그렇사옵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제일 싫어하는 백씨냐? 화(華)씨나 주(朱)씨 같이 좋은 성도 많은데……" "……!" 백향희는 순간 가슴이 섬뜩했다. 얼핏 주여설과 화진성이 상기되었던 것이었다.


(설마……) 그녀는 은은히 불안한 눈길로 조심스럽게 백리강의 눈치를 살폈다. 하나 백리강은 그 순간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몸매를 찬찬히 훑어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좀 마른 것 같군." 이어 그는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위에서 아래로 쫙 내리 훑는 시늉을 했다. 백향희는 의아한 듯 눈에 의혹의 빛을 떠올렸다. 백리강이 불쑥 말했다. "벗어라." "예?" "홀랑 벗어라. 하나도 남김없이……" 백향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나 그녀는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어차피 굳히고 들어온 마음이 있지 않는가! 스륵…… 슥…… 뱀이 허물을 벗듯 천조각들이 그녀의 몸에서 하나씩 떨어져 내렸다. 약간 마른듯 하나 팔등신(八等身)으로 미끈하게 흘러내린 몸매가 드러나고 마지막 은밀한 곳을 가린 분홍빛 가리개와 고의만 남았을 때에는 그녀의 행동이 일순 주저함을 보였다. 하나 그녀는 이내 그 두 가지도 거침없이 떼어내 버렸다. 나신(裸身)…… 무엇 하나 거침없이 적나라한 모습으로 백리강의 눈 속에 쏘아져 들어갔다. "흐음……" 백리강은 눈빛을 야릇하게 번들거리며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백향희의 주위를 느릿하게 맴돌며 그녀의 알몸 구석구석을 핥듯이 훑어보았다. 그러다 문득 백리강은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나온 옷들을 하나씩 집어 코로 가져갔다. "흠…… 좋은 향기다."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는 그 모습은 누가 보아도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일종의 변태(變態)라고나 할까? 하나 그 순간을 빌어 백리강의 손은 그녀의 옷을 빠르게 뒤지고 있다는 사실을 뉘라서 알겠는가? (없군!) 무엇을 찾는 것일까? 문득 백리강은 분홍빛 고의를 집어들며 괴상한 음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고것 참 깜찍하기도 하지……" 그는 그것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이번에도 어김없이 코로 가져갔다. 이때 백향희의 얼굴에 언뜻 수치스런 기색이 스쳐갔다. (소살마동에게 듣던대로 정말 지저분한 놈이구나……) 하나 백리강은 모르는 척하고 계속 코 끝을 괴이하게 씰룩였다. (여기에도 없다!) 그는 분홍빛 고의를 내던지고 백향희를 힐끗 돌아보았다. "돌아서라! 백향희." "……!" 백향희는 흠칫했으나 곧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백리강은 야릇한 미소와 더불어 말했다. "다리를 벌려라!" "……!" 백향희는 얼굴이 순간 화끈 달아올랐다. 사내 앞에 알몸으로 서 있는 것도 죽고싶은 심정이거늘


다리까지 벌리라니! (죽일 놈!) 생각 같아선 웃고 있는 저 얼굴에 냅다 뺨따귀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나 그녀는 두 다리를 천천히 벌렸다. "흐흐흐…… 좋다. 아주 좋아……" 백리강은 몹시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 끝에서부터 천천히 훑어 보기 시작했다. 이마에서…… 목덜미…… 가슴…… 아랫배…… 백리강은 조금씩 무릎을 꺾으며 샅샅이 훑어보았다. 한데 백리강은 문득 여체(女體)의 가장 은밀한 부분 앞에서 내려가던 동작을 뚝 멎었다. 그리곤 뚫어지게 한곳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백향희는 차라리 죽고싶은 심정이 왈칵 치밀었다. 하필이면 딴 데도 아닌 그곳을 저렇듯 뚫어지게 응시할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 그녀는 보지 못했다. 백리강의 시선이 자신의 왼쪽 허벅지 부근을 스쳐가면서 이채롭 게 번쩍 빛났던 것을…… 문득 백리강은 힐끗 백향희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백향희." "……!" 백향희는 눈을 번쩍 뜨고 그를 마주 보았다. 백리강은 씨익 웃었다. "너…… 사내 경험이 있느냐?" 백향희는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음을 떠올렸다. "많지는 않으나…… 몇번…… 있었사옵니다." "흠…… 그래?" 백리강은 두 눈을 기이하게 빛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잘됐군. 불필요한 수고를 덜게 되었으니까." 그러면서 그는 거침없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벗으면서 그는 생각했다. (주여설…… 그녀의 계획을 파악하려면 먼저 이 여인부터 정복해야 한다!) (주여설 당신은 천금마옥을 없앨 계획이겠지만 난 천금마옥이 필요해…… 당신은 현명하나 아직 혈극천과 지옥부를 상대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아. 결코 당신에게 천금마옥을 넘겨줄 수는 없어!) 생각이 끝난 것과 그가 완전히 알몸이 된 것은 거의 동시였다. "흐흐…… 어떠냐?" 백향희는 홍조를 떠올리며 살그머니 시선을 외면했다. 순간 백리강은 그녀의 몸을 와락 끌어 안았다. "아이……" 백향희는 별 저항없이 그의 몸에 자연스럽게 파고들었다. (제법이군!) 백리강은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가벼웠다. 백리강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그녀의 몸을 침상 위에 반듯하게 눕혔다. 백향희는 사르르 눈을 감으며 고개를 모로 돌렸다. "으음……" 백리강은 묵직한 신음과 함께 천천히 그녀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실었다. 여체 특유의 촉감이 그의 전신에서 느껴졌다. 하나 어쩐지 차갑게 느껴지는 굳어있는 여체였다.


백리강의 손놀림은 뜨겁고 격렬했다. 뜨거운 열정을 담고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불꽃을 심었다. 백향희는 그의 손길이 스쳐갈 때마다 관능적으로 신음하며 꿈틀거렸다. 하나 백리강은 느낄 수 있었다. 비록 꿈틀거리고 있긴 했으나 데워지지 않는 차가운 몸뚱이라는 것을…… (놀랍구나, 본능을 이성이 억제하고 있다니……) 백리강은 적이 놀람을 금치 못했다. "아음……" 누르면 튀어오르고 스쳐가면 부르르 경련하는 육신, 그것은 누가 보아도 희열과 쾌감을 만끽하는 모습이었다. 한데 그 모든 것이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이라니……! (좋아, 그렇다면……) 백리강은 일체의 동작을 중단하고 그녀의 몸 깊숙이 진입해 들어갔다. "아음……" 백향희는 기쁨에 겨운 신음을 흘리며 백리강의 목을 힘껏 끌어 안았다. 하나 백리강은 그래도 알 수 있었다. (건조하다!) 최소한 조금은 젖어 있을 줄 알았던 예측이 여지없이 빗나간 것이었다. (이럴 수가…… 이 상태에서도 쾌감을 느끼지 못한다니……) 문득 기이한 예감이 뇌리를 스쳐갔다. (설마…… 석녀(石女)?)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백리강은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음…… 음……" 백향희는 연신 희열에 찬 교성을 터뜨리며 전신을 꿈틀거렸다. 백리강의 몸이 부딪쳐 올 때마다 그녀는 파도치듯 전신을 출렁였다. 하나 여전히 믿을 수 없을 만큼 메말라 있었다. (오오…… 이럴 수도 있는 것인가?) 백리강의 놀라움은 차라리 감탄으로 변해갔다. 놀라운 기교에 무서운 연극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전쟁이었다. 정사(情事)는 격렬했다. 전쟁처럼 격렬했다. 하나 그것은 환희도, 쾌감도, 희열도 아무것도 없는 죽음같은 것이었다. 한데 어느 순간이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리는 백향희의 왼손이 소리없이 왼쪽 허벅지로 미끄러져 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백향희의 손이 기쾌무비한 속도로 허공에 번뜩였다 싶은 순간 실같이 가느다란 은사(銀絲)가 백리강의 목을 번개같이 휘어감았다. 순간 백향희의 입에서 섬뜩한 교소가 터져나왔다. "호호호……" 동시에 손에 쥐어진 은사를 사정없이 잡아 당겼다. 한데, "교살인가?" 백리강은 끄덕도 없이 오히려 빙그레 웃어 보이는 게 아닌가? 백향희의 웃던 얼굴이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 들었다. "이…… 이럴 리가……" 그녀는 재차 최대한으로 은사를 잡아당겼다. 하나 결과는 하나마나였다. "후후…… 무쇠조차 자른다는 백련강사(百鍊剛絲)를 갖고 있었군."


"……!" "쓸데없는 짓이다. 너는 내 몸이 그 어느 것에도 손상되지 않는 불괴지체(不壞之體)라는 것을 모르고 있단 말이다." 백리강은 말을 하는 중에도 몸은 쉴새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그럴 리가 없어!" 백향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사력을 다해 백련강사를 잡아 당겼다. 세상에 이렇듯 괴이한 정사가 또 어디 있으랴! 목을 자르려고 사력을 다해 힘주는 여인과 그 위에서 느긋하게 웃으며 계속 몸을 움직이는 남자, 그것은 이미 정사(情事)가 아니었다. 그 어느 것보다 치열하고 격렬한 죽음의 승부였다. 이윽고, "아아……" 절망에 찬 부르짖음과 더불어 백향희의 몸에서 힘이란 힘은 죄다 빠져나갔다. 이보다 비참한 패배는 없었다. 때를 같이해서 백리강의 몸도 천천히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는 씨익 웃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주여설…… 그녀다운 방법이었으나 유치했다." "……!" 백향희의 눈이 순간 더 할 수 없이 부릅떠졌다. "후후…… 놀란 모양이군." 백리강은 나직이 웃으며 옷을 줏어 입기 시작했다. 백향희는 아예 넋을 잃은 표정으로 망연히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옷을 다 입은 백리강은 백향희의 앞에 털썩 앉았다. 그는 신비롭게 미소하며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백향희, 우리 서로 타협하자." "……!" 백향희는 퍼뜩 정신을 추스르며 의아한 듯 되물었다. "무슨……?" "나는 네 정체를 누구에게도 폭로하지 않겠다." "……!" "대신…… 너 역시 내 정체를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마라. 주여설이나 고승에게도 말이다." "……!" 백향희의 눈빛이 또 한차례 놀라움으로 흔들렸다. (고승도 알고 있다니……!) 그녀는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왜…… 나를 살려 주시려는 거죠?" 백리강은 싱긋 미소했다. "그냥이다." "그냥?" "너같은 여인은 평생 처음이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살려주는 것이다." 일순, 백향희의 눈에 야릇한 기운이 감돌았다. "저를…… 믿나요?" "믿는다." "왜죠?"


"그냥이다." "……!" 백향희는 그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더니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군주님은…… 어떻게 아시죠?" 백리강은 신비로운 미소를 떠올렸다. "내가 모르는 것은 하늘 아래 아무 것도 없다." 어찌 듣자면 광오한 말일 수도 있었다. 하나 백향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시죠?" 하나, 백리강은 대답대신 기이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어떠냐? 타협을 하겠느냐?" 백향희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하겠어요." "후후후…… 좋다." 백리강은 문득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백향희, 그 댓가로 나는 네가 잃어버린 여인의 본능(本能)을 되찾아 줄 것이다. 머지 않아서 말이다." "……!" 백향희는 멍하니 넋나간 듯한 표정으로 백리강의 얼굴만 응시할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그녀는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3 백리강의 처소에 세 사람이 모여 있었다. 바로 백리강과 함께 천금마옥에 입옥한 화운사신 독고령과 다수광인 막청곡이었다. 그들은 지금 득의어린 표정을 떠올린 채 그동안의 경과를 얘기하고 있었다. 독고령이 막 백리강을 바라보며 빙글빙글 웃었다. "노부가 그동안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음무극을 항상 따라 다니는 그 세 놈의 호법(護法)들 간에는 상당한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네." "……?" "우선…… 그 요사한 늙은이 요노(妖老)와 칠독신사(七毒神砂) 악천령(岳天靈)의 사이를 들 수 있네. 악천령은 요노보다 무공이 월등히 앞서나 음무극의 신임도는 오히려 요노에 뒤떨어져 있었네. 이유는 악천령이 요노처럼 비상한 머리를 굴리지 못하기 때문이지." "……!" 백리강은 묵묵히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독고령은 더욱 흥이 난듯 음성에 열기를 띄워갔다. "그런 까닭에 악천령은 요노를 극히 불만스럽게 생각하게 되었고…… 심지어 살기(殺氣)까지 품고 있었다네." "으음……" 백리강은 나직이 침음하다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러면…… 삼대호법 중 나머지 한 명인 무정비환(無情飛環) 풍륜(風輪)은 어떻소이까?" 그 말에 독고령은 적이 난색을 표했다. "풍륜…… 그자는 절대 충성을 목숨처럼 간직하고 있어서 좀 곤란하네." 하나, 그는 이내 은은히 미소를 띄웠다. "하지만 관계없네. 노부는 이미 악천령에게 접근하여 그와 요노 사이를 이간질시켜 놓았으니까…… 악천령으로 하여금 요노를 더욱 증오하게 만들었지. 하하……"


독고령은 통쾌한 듯 가볍게 대소했다. 백리강 역시 그를 바라보며 마주 웃어 보였다. "노선배님, 진정 수고 많으셨소이다." "허허…… 무슨 소리, 자네의 수고에 비하면 우리들의 수고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독고령은 너털웃음과 함께 의미심장한 눈빛을 빛냈다. 그들 역시 백리강의 눈부신 활약(?)을 이미 들어서 알고있었던 것이다. 백리강은 그저 멋쩍게 웃었다. 이어 그는 문득 생각난 듯 정색을 하며 두 사람을 향했다. "두 분은 이후 한 가지 유의하셔야 할 것이 있소. 음무극의 세력 그것은 결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오." "……!" "우리가 모르고 있는 두 개의 세력이 있는데 그것의 힘은 우리가 아는 음무극의 전 세력보다 열 배는 강한 것이오." 이 무슨 놀라운 소리인가? 독고령과 막청곡은 일시에 대경과 의혹의 빛을 떠올렸다. "그게…… 대체 무엇인가?" "그럴 리가……?" 백리강은 진중히 말을 이었다. "아니오. 혈매지주 상예화를 통해 알아낸 바에 의하면 음무극의 휘하엔 불사천령강시라는 강시와 무영살인대(無影殺人隊)라는 세력이 있다고 했소. 불사천령강시…… 그것들은 모두 백 명인데 만독불침은 물론 불사신(不死身)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오." "……!" "더욱이…… 각기 육갑자씩의 공력을 지니고 있어 그 위력은 상상도 못할 정도라 했소." 순간 독고령과 막청곡은 재차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백리강은 적이 침중한 신색으로 설명을 이었다. "불사천령강시 백인(百人)을 합친 것은…… 천금마옥 전체의 절 반에 해당하는 힘이오!" "으음……" "그리고…… 무영살인대는 삼십 명으로 구성된 음무극의 비밀 조직이오. 그들은 비록 삼십 인밖에 안되지만 각기 그 능력이 특이하며 천금마옥내에 비밀리에 분산되어 있다하오. 음무극 외에는 그들 삼십 인에 대해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소." 그는 천천히 두 사람을 돌아 보았다. "그 조직에 대해서는 소생이 계속 알아보는 중이오. 하나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바로 백 인의 불사천령강시들이오." "으음……" 독고령과 막청곡은 놀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무겁게 침음했다. 문득 백리강의 두 눈빛이 미세히 뿌려졌다. "그것에 대해서는…… 한 가지 짚이는 것이 있기는 하오만……" "……?" 독고령 등이 의아한 듯 그를 응시했으나 백리강은 입을 다물며 눈마저 감았다. 그런 그의 뇌리 속에선 지금 음무극이 정성스레 밀납상을 만들고 있는 광경이 환상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백리강은 눈을 크게 뜨며 조용히 말했다. "그것은…… 나중에 이야기하겠소." 독고령과 막청곡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으리라 짐작한 까닭이었다. 그들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네." "그럼…… 우리들은 이만 나가 봐야겠네." 백리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편히들 쉬십시오." "고맙네." 독고령과 막청곡은 곧 그의 방을 나갔다. 백리강은 홀로 탁자 앞에 앉은 채 그만의 상념에 잠겼다. "……!" 문득 한 얼굴이 그의 눈 앞에 떠올랐다. (백향희……! 후후…… 그녀의 몸에 뿌려놓은 천일신류향(千日神留香)…… 그 냄새는 천 일 동안 사라지지 않는 것이지!) 그는 어느새 백향희의 몸에 그런 조치까지 취해 놓았는가? (그녀를 이용하면 천룡단(天龍團)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씨익…… 그의 입가엔 신비한 미소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지금쯤…… 천일신류향의 냄새를 추적하여 천마사견수가 따르고 있겠지?) 천마사견수----! 오오! 그것은 천 년 전 천존마제가 남겨준 천고의 영물이 아닌가? (천룡단…… 곧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남김없이…… 모조리……) 그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주여설…… 삼태혈성의 상극이라고 했던가? 언제고 난 그녀에 의해 죽어간다고 했지? 하나 그따위 전설은 절대로 이뤄지지 않을거야…… 절대로……) 백리강은 부지중 나직한 웃음을 입 밖으로 흘렸다. "후후후……!" 바로 그때였다. "총감찰님! 구양표(歐陽剽)입니다." 정실 밖에서 한 소리 음산한 음성이 일었다. "……!" 백리강은 번뜩 기광을 빛냈다. "안으로 들라." 그러자 대답과 함께 한 인영이 정실 안으로 들어섰다. 몹시도 간교하고 극악스럽게 생긴 오십대 인물이었다. 그는 백리강을 보필하는 수하였으나 실상은 음무극이 배치한 자였다. 또한 잔인하기로 이름난 악인이기도 했다. 백리강의 입가엔 이때 왠지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앉게." "감사합니다! 총감찰님." 그와 동시에 그들은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마주 보았다. 순간 백리강의 웃음이 더욱 짙어지며 뜻밖의 일성이 터졌다. "성혼, 제법 악인티가 나는구나." 구양표가 씨익 웃으며 한차례 얼굴을 쓰다듬었다. 순간 구양표의 모습이 사라지고 뼈에 가죽을 발라놓은 듯한 얼굴이 나타났다. 아! 그는 바로 천하에서 가장 마른 사나이…… 그리고, 지상에서 가장 빠른 쾌감을 구사하는 성혼이 아닌가?


백리강은 은은히 미소띈 얼굴로 재차 입을 열었다. "성혼, 수고가 많네." 그러자, 성혼은 지극한 감복의 기색과 함께 고개를 숙여 보였다. "대지존을 위해 존재하는 몸…… 목숨인들 아깝겠습니까?" 진정어린 충정이 짙게 우러나는 음성이다. 백리강은 흐뭇한 신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신색을 추스르면서 물었다. "그래……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성혼은 다시 정중히 입을 열었다. "네. 하명하신 대로 천금마옥 전체에 흩어져 있는 무영살인대의 모든 인원의 신상을 완전히 파악했습니다." 백리강은 희미한 경탄의 표정을 지었다. (역시……!) 성혼이 품 속에서 한 개의 두루마리를 꺼내 공손히 바쳤다. "여기…… 그 명단이 있습니다." 백리강은 묵묵히 두루마리를 펼쳐 한차례 훑어 보았다. 이내 그의 얼굴엔 적이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으음…… 무영살인대의 고수들이 이런 자들이었다니……!" 그는 다시 두루마리를 집으며 성혼을 향했다. "진정 수고 많았다. 성혼…… 그대가 아니면 천하에 그 누구도 해결해내지 못할 일을 했다." "감사하옵니다, 대지존." 성혼은 또다시 짙은 감복의 표정으로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백리강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앞으로 보름 후 내가 지시한 대로 모든 행동을 개시하도록 하라." "존명 받드옵니다." "나는 빠른 시일 내에 먼저 만자혈탈 조사의를 만나볼 것이다." "……!" "성혼, 너는 그사이 천금마옥 내에 잠입해 있는 혈극천의 세력을 전력을 다해 찾아내야 한다." 아아…… 혈극천----! 그곳 역시 천금마옥에 마수(魔手)를 뻗치고 있었던가? 백리강의 엄중한 음성이 이어졌다. "천룡단에서는 백향희와 고승이 이곳에 잠입해 있다. 그리고 지옥부에서는 금사후가…… 하나 혈극천의 세력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반드시 거사(巨事) 전까지 찾아내도록 하라." 백리강이 재삼 강조하자 성혼은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존명!" "이만 물러가라." "알겠습니다. 그럼……" 성혼, 방을 나서는 그는 어느새 구양표의 모습으로 화해 있었다. 그가 나가자마자 백리강은 천천히 신형을 일으켰다. "이제…… 나도 슬슬 움직여야겠군." 4 진홍빛 은은한 노을이 호수의 서편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곳이 천금마옥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그림같은 정경이었다. 만자혈탈 조사의는 오늘도 호수에 낚싯대를 드리운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한점 감정의 흔들림도 없는 그 모습은 실로 내심을 전혀 짐작키 어려운 모습이다. "……!"


한데 어느 순간 그의 두 눈빛이 미세히 격랑쳤다. 그리고 때를 같이 해서 한 인영이 그의 곁에 나타났다. 일신에 흑의를 걸친 냉막하고 잔인한 인상의 중년인, 그는 바로 변장한 모습의 백리강이었다. "……" 그는 조사의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털썩 그 곁에 자리했다. 하나 조사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낚싯대 끝만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 백리강 역시 아무런 말없이 조사의의 낚싯대 끝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문득 조사의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대가…… 적한청인가?" 백리강 또한 시선을 낚싯대 끝에서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를…… 만나 보겠다고 했는가?" "그래서 이렇게 온 것이오." 백리강의 음성은 지극히 담담했다. 조사의는 그제야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를 응시했다. "듣던 것과는 다른 인상이군." "내 인상이 어떻다고 들었소?" 조사의의 입가에 얼핏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그대는 이 호수의 이름이 뭔지 아는가?" "……?" 그 엉뚱한 물음에 백리강은 어리둥절했다. 하나 그가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조사의가 스스로 대답을 하고 있었기에…… "이 호수의 이름은 사호(死湖)이네. 한데 왜 이곳이 사호일 것 같나?" 그는 또 다시 묻고 있었다. 백리강은 불쑥 냉막한 일성을 내뱉았다. "모르겠소. 나는 그 따위 시시한 말을 들으러 온 것은 아니니까……" 하나 조사의는 여전히 한 줄기 미소를 베문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에는 물고기가 한 마리도 없네. 그래서 사호라는 ���름이 붙었지. 자네는 왜 이곳에 물고기가 한 마리도 없는지 아는가?" 백리강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호수의 물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야. 이곳의 물은 매우 특이해서 어떤 생명체의 성장도 용납하지 않지." 조사의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한데 의아한 생각이 들지않나? 물고기도 없는 이런 곳에서 내가 왜 낚시를 하는지……" 백리강은 또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는 않소." "음……?" "인간에게는 각자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특이한 취미가 있는 법 이니까 말이오." "……!" 문득 조사의는 기이한 눈빛으로 백리강을 직시했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그리고 나직하게 열렸다. "자네는…… 그를 무척 닮았어……" 백리강은 내심 움찔하며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누구를 말이오?" 조사의는 빙긋 기이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자네는 무슨 이유로 나를 보자고 했는가?" 백리강은 그 냉막한 얼굴에 씨익 웃음을 떠올렸다. "나를 죽이려는 자의 주인 얼굴 정도는 봐두어야 할 것 같기에……" "그래…… 지금 보니 어떤가?" 백리강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실망이오." "실망……?" "그렇소?" "왜?" "지금 당신의 모습은 매우 배포가 크고 심기가 깊어 보이오." "한데……?" 조사의는 눈빛을 빛내며 백리강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자 백리강은 냉막하고 단호하게 일성을 내뱉고 있었다. "당신의 그 기도(氣道)가 아깝소." "……!" "음무극 정도의 세력이 커지는 것이 두려워…… 나같은 인물을 죽이려 하다니……!" 조사의는 고개를 젖히며 크게 대소했다. "푸하하하하……!" 무척 통쾌하다는 모습이었다. 이어 그는 웃음을 뚝 그치더니 백리강을 똑바로 바라 보았다. "자네는 내가 왜 웃었는지 아나?" "……?" "갑자기 기쁜 마음이 들었네." "기쁜…… 마음……?" 조사의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몇년 전 내 앞에서 그대처럼 당당하게 나를 바라보던 소년이 있었지. 이제껏 내가 본 인간들 중 가장 뛰어난 기도를 지닌 인물이었어. 그 후 나는 그와 같은 인물을 본 적이 없었지. 한데 지금…… 그대에게서 그런 기도가 느껴졌다." 백리강은 짐짓 태연히 대꾸했다. "그래서 기쁘다는 말이오?" "아니다. 그것은 결코 아니야." "……?" "단지…… 그 두 인물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나니 기쁘다는 말이지." "……!" 백리강은 자신도 모르게 미세히 안색을 굳혔다. 조사의의 은근한 음성이 이어졌다. "자네는 적한청이 아니다. 분명…… 자네의 이름은 엽소천일 것이다. 맞는가?" 실로 예리한 안목이 아닐 수 없었다. 백리강은 씨익 웃으며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조사의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 문득 정색을 띄웠다. "왜…… 음영주를 찾았나? 나를 먼저 찾지 않고……" 백리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을 찾으면…… 모든 것이 너무 수월하오. 하나 음영주를 찾음으로써 비로소 나의 목적이 이루어질 것 같기에 그를 찾았던 것이오." "목적……?" "그렇소. 그것은 바로 천금마옥의 장악이오." "음?" 조사의는 뜻밖이라는 듯 투명한 두 눈에 기광을 떠올렸다. 하나 그것은 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광오하군." 그는 담담히 일성을 내뱉았다. 백리강은 그를 기이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왜…… 자격이 없소?" 그 말에 조사의는 싱긋 웃음을 머금었다. "아니…… 자격은 있다. 한데 어째서 천금마옥을 장악하려는 것인가?" 백리강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마디를 툭 내던졌다. "천하(天下)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 조사의의 안색이 적이 굳어 들었다. 그는 그런 채로 잠시 백리강을 응시하더니 불현듯 기광을 빛냈다. "그렇군. 자네는 엽소천도 아니었어." "……" "자네…… 본래 이름을 말해주지 않겠나?" 백리강은 그를 지그시 응시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강…… 그것이 나의 이름이오." "백리강……! 그렇다면 자네가 바로 마교의 새 주인……?" 조사의의 얼굴에 대경과 불신의 기색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 역시 강호에 흩어진 수하들의 정보를 통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소." 백리강의 고개가 끄덕여지자 조사의의 얼굴이 화석처럼 굳어졌다. 그가 마교의 대지존이었을 줄이야 어찌 짐작이나 했을까? "으음……" 조사의는 낮게 침음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쩐지…… 처음부터 보통 기도가 아니라 생각했는데……! 자네가 바로 마교의 대지존이었다니……" 백리강은 그저 씨익 웃어 보일 뿐이었다. 조사의는 그를 새삼스런 눈길로 응시하며 물었다. "나에게…… 어떤 도움을 바라는가?" 백리강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음무극을 제거한 후 천금마옥을 장악하는 데 힘써 주시오." 조사의는 재차 안색을 미세히 굳혔다. "내가 허락할 것 같은가?" 백리강은 그 말에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하실 것이오." "어째서…… 그렇게 자신하는가?" "나는 누구보다 당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우하하하하……!" 조사의는 또다시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동시에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그 기백이 예전보다 더 높아졌군." "……" "내…… 쾌히 자네를 돕겠네. 하나 한 가지 조건이 있네." "그게 무엇이오?" "나는 원래 강자(强者)를 좋아한다. 모든 일이 끝난 뒤 자네와 내가 무공을 겨루어 진정한 강자를 가리는 것이다." 백리강은 적이 흠칫했다. 조사의의 의미심장한 음성이 이어졌다. "노부가 강하면…… 자네는 내 아래에 있어야 한다." "당신이 약하면……?" "당연히 그대 아래다." 백리강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렇게 하겠소." 조사의 역시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어 문득 그는 눈빛을 빛내며 다시 말했다. "그리고…… 노부가 자네를 돕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네." "……?" 조사의의 미간에 얼핏 그늘이 서렸다. "실상 근래들어 천금마옥 내에 노부의 세력은 사상누각(砂上樓 閣)처럼 되어 버렸다네." "……!" "그것은 바로…… 혈극천(血極天) 때문이지." "혈극천……!" 백리강은 은은한 경악을 떠올렸다. 조사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혈극천…… 그들의 첩자들이 이미 노부의 세력 중에 깊숙이 침투되어 있다네. 그 중에 하나가 수혼마랑임을 나역시 최근 들어 알게 되었네." "수혼마랑이……?" 실로 놀라운 사실이 아닌가? 조사의의 수하 중 가장 강한 고수 중 한 명이 혈극천의 첩자라니……! 이때 조사의는 적이 침음한 음성을 계속 잇고 있었다. "지금의 수혼마랑은 진짜가 아니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직접 나서서 그들을 찾아내어 처단할 수도 없는 일……!" "……" "만일 노부가 표면에 나서게 되면 일은 크게 확대될 것이 분명하네." 이어 조사의는 진중한 눈빛을 백리강의 두 눈에 똑바로 주었다. "자네가 나서서 그들을 처단해 주게. 그렇게 해 주겠다면 노부 쾌히 자네의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돕겠네. 그리고 그 후에 노부와 진정한 강자를 가리는 비무를 갖도록 하세." 백리강은 가타부타 말없이 있을 뿐이었다. 조사의는 재차 진중히 입을 떼었다. "수혼마랑 그의 무공은 진정 대단한 것이네. 노부의 수하 중에 그를 상대할 만한 고수는 아무도 없다네."


"귀영소소도 말이오?" 백리강이 의아한 듯 묻자 조사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가짜 수혼마랑의 상대는 되지 못하네." "으음……" 백리강은 나직이 신음했다. (혈극천……! 진정…… 무서운 곳이다. 하나 그곳 역시 언젠가는 나 백리강의 손에 붕괴되어야 할 곳…… 좋다! 해보자. 이번 기회에 혈극천의 무공도 시험해 보는 거다……!) 다음 순간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당신의 청을 수락하겠소." 조사의의 안색이 은은히 희색을 띄웠다. "고맙네. 자네가 수락할 줄 알고 있었네. 자네의 무공이라면 능히 가짜 수혼마랑 정도는 꺾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노부가 자네와의 비무 때 사정을 봐줄 것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네." 찰나, "하하하……" "푸하하……!" 그들은 서로 마주보며 가가대소했다. 의기상통!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두 영웅의 호쾌한 웃음이었다. 낭랑한 웃음소리는 석양빛 짙은 호수 저편으로 잔잔히 흩어졌다. 그때 문득 조사의가 호수에 드리웠던 낚싯대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대어(大魚)가 물렸으니 이제 가세." "……?" 백리강은 따라 일어서며 의아한 기색을 떠올렸다. 빈 낚시에 빈 바구니인데 대어라니 이상할 만도 했다. 더욱이 사호(死湖)엔 물고기가 전혀 살고있지 않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기색을 눈치챈 듯 조사의가 빙긋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 세상에서 자네보다 더 큰 대어가 있겠나?" 백리강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감돌았다. 조사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이내 재촉했다. "자, 내가 살고있는 집으로 가세. 사라가 저녁 준비를 모두 끝내 놓았을 것이네." "사라……?" "그녀는 나의 의손녀이네. 지금 나와 단 둘이 살고 있지." 이어 조사의는 백리강을 이끌다시피 호숫가를 떠났다. 그렇게 마교의 대지존과 천금마옥 제일영주의 협약이 이루어졌다. 노을 짙은 호숫가에서…… 제 22 장 奸雄의 最後 1 사호(死湖)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아담한 모옥이 있다. 조각품인가?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미녀가 그린 듯 창 밖을 내다보며 서 있다. 그녀는 금발에 청옥(靑玉)처럼 푸른 벽안을 지닌 이국미녀였다. 바로 귀영소소였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옷차림이었다. 야행복 차림이 아닌 단아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 더욱 현란한 미태가 돋보이고 있었다. 이때,


덜컹! 문이 열리며 두 인물이 모옥 안으로 들었다. 만자혈탈 조사의와 백리강이었다. 백리강은 모옥 안에 들어서자마자 흠칫 놀라고 있었다. "……!" 창가에서 막 신형을 돌리고 있는 귀영소소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자 만자혈탈 조사의가 그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놀랄 것 없네! 저 아이가 바로 나의 의손녀 사라일세." "아……!" 백리강은 그제야 나직한 탄성을 뿜어냈다. (뜻밖이군! 귀영소소가 조영주의 의손녀였다니……) 이어 그는 귀영소소를 향해 한차례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오, 소저." 하나 귀영소소는 그 푸르고 신비한 벽안 가득 적개심을 떠올릴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리강 그는 자신의 속살까지 본 치한(?) 중의 치한이 아닌가? 조사의가 씁쓸하게 웃으며 귀영소소에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사라야, 화내지 마라! 이분은 나의 옛 벗이니라." "……?" 귀영소소는 그 말에 흠칫 의혹어린 눈빛을 떠올렸다. 조사의는 이어 백리강을 향하며 다시 말했다. "사라는 나의 의손녀이자 내가 제일 사랑하는 수하이지. 하나 사라는 벙어리라네." "……!" 백리강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라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의는 다시 사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라야,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저녁 준비와 함께 술상을 마련하도록 해라." 사라는 잠시 머뭇거리다 곧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정성들여 만든 음식이 향긋한 냄새와 함께 한껏 구미를 돋구었다. 백리강은 내심 은은한 경탄을 머금고 있었다. (무공만 높은 줄 알았더니…… 요리 솜씨 또한 일품이군!) 조사의가 그에게 식사를 권했다. "자…… 부족한 솜씨지만 맛있게 들게." "하하…… 너무 성찬이라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고민이오." 백리강의 너스레에 조사의는 빙그레 웃었다. 이어 그들은 술과 함께 저녁을 들기 시작했다. 사라는 시종 그들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백리강이 사라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라소저는…… 중원인이 아닌 듯하군요." 조사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서역인(西域人)이네." 백리강은 가볍게 경탄했다. "어쩐지 사라소저의 무공이 서역밀전의 무공이라 했더니……" 조사의가 쓰게 웃으며 그의 말을 중도에서 끊었다. "사라에 대해서는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세." "……"


"그건 그렇고…… 자네의 이야기를 듣고 싶군. 어떤가? 노부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겠나?" 백리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우린 동업자가 아니오?" 그는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들려 주었다. 천금마옥을 통과해 마교로 들어갔을 때부터 다시 천금마옥에 들어오기까지…… 그 엄청난 내용에 조사의는 연신 탄성을 발했다. 진정 경악과 경악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잠시 후 백리강의 모든 설명이 끝나자 조사의는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진정…… 대단하군. 마치 전설을 듣는 기분이야." 동시에 그는 미묘한 눈빛으로 백리강을 지그시 응시했다. "아무래도 차후 자네와 나의 비무는 불공편한 것 같네. 예감인데 내가 질 것 같단 말일세. 하하……" 백리강은 그제야 말뜻을 깨닫고 나직하게 웃었다. "하하…… 그 무슨 과찬의 말씀을……!" "아니…… 절대 과찬이 아니네." 그러다 문득 조사의는 정색을 띄우며 말했다. "자네, 진정한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겠나?" "갑자기 왜……?" "그동안 자네의 변한 모습을 보고 싶네. 지난 세월이 변화시킨 자네의 모습을……" 백리강은 빙긋 웃었다. "좋소." 순간 눈 깜짝할 사이 백리강의 모습이 바뀌었다. 갑자기 모옥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천신도 감탄할 백리강의 완벽한 용모가 드러난 것이다. 조사의는 부지중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진정……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군. 그동안 이토록 훌륭한 청년으로 변모했을 줄이야……" 백리강은 쑥쓰럽게 웃었다. 이때 사라는 아예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조사의가 그녀를 힐끗 응시하며 빙그레 웃었다. "하하…… 사라는 여간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아이인데 아무래도 자네에겐 반한 듯하군." 사라의 옥용이 순식간에 빨갛게 노을 빛으로 물들었다. 조사의는 짓궂게도 한술 더 뜨며 말했다. "오늘밤…… 말만 잘하면 사라는 자네 품에 그냥 안길 수도 있네. 하하……" "……!" 백리강이 어색하게 웃는 사이에 사라는 아예 두 손으로 홍당무가 된 옥용을 가린 채 밖으로 뛰쳐 나가 버렸다. 한 마리 사슴이 놀라 달아나듯 그 뒷모습조차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하하하……" "하하……" 유쾌한 대소가 그 뒤를 따랐다. 2 "마하반야바라밀다……" 아침나절부터 시작해서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는 염불, 듣는 이의 마음을 온통 짜증스럽고 고민스럽게 만들어줄 이 염불은 끊임없이 고승(苦僧)의 입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승, 그는 오직 그 하나의 염불만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죽어라고 그 염불만 되뇌이고 있었다. "마하반야바라밀다……"


이제는 목탁 치는 것조차 권태스럽고 귀찮은 듯 목탁은 법당 한 구석에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져 있었다. 한데 이때였다. 휙----! 돌연 섬세한 인영 하나가 경미한 파공성과 더불어 법당 안으로 뛰어들었다. 백향희, 바로 그녀였다. 그녀의 시선은 들어서자마자 빠르게 고승의 모습을 포착하더니 이내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백향희옵니다." 뚝! 그나마 하던 염불도 뚝 멎었다. 고승은 눈살을 찌푸리며 여전히 등을 보인 채 입을 열었다. "이곳은 오지 않도록 되어있거늘 어찌 이렇듯 경거망동이냐?" 다분히 꾸짖는 듯한 음성이었다. 백향희는 초조한 듯 다급히 입을 열었다. "큰일났습니다! 노선사님." "큰일이라니……?" "천룡단의 일곱 시비 중 소녀를 제외한 모두가 제거되었습니다." 순간 고승의 안색이 싹 대변했다. 그는 앉은 채로 빙글 몸을 돌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조금 전 그들이 보낸 서찰을 받았거늘……" 백향희는 다급히 대꾸했다. "모든 것이 전격적으로 처리되었습니다." "누구에 의해서 말이냐?" "위지영주입니다." 고승의 얼굴에 커다란 놀람의 빛이 솟구쳤다. "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는 노선사님의 정체도 이미 파악한 듯했습니다.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그들이 곧 이곳으로 밀어닥칠 것입니다." 고승의 안색이 짧은 순간 여러차례 변했다. 그러다 문득 고승은 침중히 입을 열었다. "이리 와보아라." 백향희는 급히 고승의 앞으로 다가갔다. 순간, 고승이 백향희를 향해 벼락치듯 우장을 내뻗었다. 느닷없는 기습이었다. 한데 백향희는 이미 예측이나 했었다는 듯 훌쩍 뒤로 물러서는 게 아닌가? 무섭게 빠른 신법에 고승의 우장은 고스란히 허공만 갈랐을 뿐이었다. 고승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역시 너는 백향희가 아니었구나." 그러자 백향희는 까르르 간드러진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호……" 하나 그녀는 이내 교소를 뚝 그쳤다. "역시 보통 땡초는 아니었구나. 내가 백향희가 아닌 줄은 어떻게 알았지?" 고승은 천천히 가부좌를 풀고 몸을 일으켰다. "천룡단 일곱 시비들에게 각기 신분을 알리는 표식이 있다. 귀 아래의 붉은 점이 그것이지." "오라…… 그걸 몰랐구나." "너는 누구냐?" "나? 이런 사람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얼굴을 쓱 문지르자 전혀 엉뚱한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오! 숨막힐 듯 아름답고 요염한 얼굴이 아닌가? 두 눈에 일렁이는 요사스러운 광채만 아니면 어디 내놔도 흠잡을 곳 없는 절색미인, 그 미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고승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소서시…… 바로 너였구나……!" 오오…… 소서시! 그녀는 소서시 서비연이었다. 몇 년 전에는 귀엽고 깜찍한 모습이었으나 지금은 몰라보도록 아름답게 성숙해 있는 것이다. 고승의 미간에 문득 그늘이 깔렸다. "위지영주가 보냈느냐?" 소서시는 차갑게 냉소했다. "그렇다. 배신자 땡초중." "모두…… 알았나보군." 소서시의 얼굴에 경멸의 조소가 떠올렸다. "이미 오래 전부터 영주님은 너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단지 이곳에 잠입해 있는 천룡단의 끄나풀들을 파악하기 위해 모른척 하셨을 뿐이지." "그랬…… 던가?" "고승, 순순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라." 소서시의 야멸찬 어조에 고승은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정도(正道)를 위해서인데 어찌 목숨을 두려워하겠는가? 아미타불……" 이어 그는 정말 고뇌에 찬 표정으로 소서시를 응시했다. "하나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닌 즉…… 그대를 제거한 후 이곳을 떠나리라." 그때였다. "떠나지 못한다! 고승." 돌연 한소리 무거운 음성과 더불어 한 인영이 법당 안으로 들어섰다. 마령군 위지풍, 바로 그가 나타난 것이었다. 고승의 눈에서 번뇌스런 눈빛이 파도처럼 쏟아져 나왔다. "영주……" 위지풍은 유현(幽玄)한 시선을 고승의 얼굴에 꽂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본좌를 실망시켰다, 고승." 고승은 씁쓰레한 고소를 떠올렸다. "미안하오, 영주. 그 동안 나 역시 영주를 진심으로 좋아했소. 하나…… 어쩔 수 없었소." "어찌됐든…… 천금마옥이 외부인의 음모에 의해 흔들리는 것을 용납치 않는 본좌로서는 그대에게도 예외를 둘 수 없다." "미안하오! 영주." 짤막한 말과 함께 고승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바로 그 순간 돌연 허공을 스치며 금빛 광채가 일었다. "우욱!" 고승은 묵직한 신음을 터뜨리며 급격히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음……?" 위지풍은 순간 법당의 천정을 힐끗 올려다 보았다. 다음 순간 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보라! 대들보 위에 고양이 비슷한 황금빛 괴물 한 마리가 잔뜩 웅크린 채 나타나 있지 않은가?


고양이 비슷하게 생기긴 했으나 그것은 절대 고양이는 아니었다. 은빛 눈에 온몸에선 황금빛 비늘이 번뜩번뜩 빛나고 있었다. 뿐이랴? 꼬리는 세 개에 전신에는 온통 핏빛 실뱀이 휘감겨 있는 저 무서운 모습! 문득 위지풍의 입술 사이로 신음같은 음성이 띄엄띄엄 새어나왔다. "천…… 마…… 사…… 견…… 수!" 순간이다. "흐흐흐…… 맞았소. 천마사견수외다." 비할 데 없이 냉막한 음성과 함께 한 인영이 문가에 나타났다. 아니, 나타났다기보다 그는 원래부터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 던 사람같았다. 왜냐하면 그가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위지풍의 안색이 굳어졌다. "적한청……" 그렇다. 적한청의 모습을 한 백리강이었다. 그때 대들보에 있던 천마사견수가 백리강의 어깨 위로 가볍게 떨어져 내렸다. 이어 천마사견수는 혓바닥으로 백리강의 얼굴을 한차례 부드럽게 핥았다. 위지풍은 경악과 의혹이 어우러진 복잡한 눈길로 천마사견수와 백리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대는……?" 백리강은 싱긋 웃었다. "아직도 나를 적한청으로 생각하시오?" 그것은 더 이상 적한청의 것이 아닌 백리강 본래의 음성이었다. 순간 위지풍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제보니 자네는……?" 백리강은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당신은 나에게 말했었소. 언젠가 다시 한 번 나를 만나고 싶다고…… 나 또한 그런 때가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오." 위지풍은 실같이 가느다란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분명히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만나고 싶었소이다." 간단한 한 마디에 이어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다가서더니 서로 의 손을 덥썩 잡았다. "반갑네! 엽공자." "백리강이외다." 위지풍은 그 말에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알고 있네. 천마사견수의 주인이면 천존마제의 전인인 백리강 밖에 없다는 것을 말일세."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백리강의 손을 더욱 굳게 움켜쥐었다. 3 세 사람이 원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백리강과 위지풍, 조사의였다. 숙연한 분위기가 열기처럼 흐르는 지금 백리강은 자신의 목적 등을 상세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윽고 백리강은 이야기를 끝맺고 조사의와 위지풍을 침중한 눈길로 응시했다. "이제…… 두 분의 결정만 남았소이다." 위지풍과 조사의는 무거운 표정으로 서로의 시선을 부딪쳤다.


백리강은 침중히 물었다. "두 분…… 도와주시겠습니까?" 순간 조사의의 시선이 느릿하게 백리강의 얼굴로 옮겨갔다. "노부는 이미 결정했네. 만약 자네를 나의 적이라고 생각했다면 아예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네." 말인 즉 백리강의 요청을 수락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랴! "단 혈극천의 첩자들을 찾아내어 처단하겠다고 약속했던 일만큼 은 자네가 직접 처리해주기 바라네." 백리강은 빙그레 웃으며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이어 그는 위지풍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위지풍은 잔잔한 미소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천금마옥의 평화가 계속 유지될 수 있다면 기꺼이 자네를 돕겠네." 백리강은 밝게 웃으며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백리강, 두 분 선배님의 은혜는 반드시 잊지않을 것이오." 조사의는 문득 괴이한 표정으로 위지풍을 돌아 보았다. "이거…… 마교의 대지존에게서 이런 예우를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소이다." 순간, 백리강과 위지풍의 입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으하하하……" "하하핫……" 그들의 웃음은 승부의 어떤 결정을 예고하는 소중한 의미의 웃음이었다. 4 사호(死湖). 물고기조차 살기를 거부하는 죽음의 호수. 그 검푸른 수면 위로 황혼빛이 점차 번져가고 있었다. 백리강은 뒷짐을 진 채 사호의 낙조를 담담히 응시하고 있었다. 하나 그의 뇌리 속은 이 순간 재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성혼의 보고가 생생히 떠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혈극천…… 놈들이 조영주의 세력 내에 잠입시킨 첩자는 모두 열 일곱 명이었습니다. 그 중 열 여섯은 이미 귀신도 모르게 처치했습니다. 하나 수혼마랑으로 변장한 놈의 무공은 보통이 아니어서 아직 손을 못대고 있습니다. 놈의 진정한 정체는 바로 혈극천의 천주 서문일백의 네 명 제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놈의 이름은 한도성(翰道星)! 아직 무공을 시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석양빛이 더욱 짙어질 무렵 한 인영이 사호로 통하는 산로(山路)에 번뜩 나타났다. 파리하다 못해 창백한 안색을 지닌 청년이었다. 제법 준수한 용모를 지녔지만 기괴하게도 희뿌연 백색 광망을 두 눈에서 뿜어내는 그는 바로 수혼마랑이었다. 지금 그는 만자혈탈 조사의의 부름을 받고 사호로 가는 길이었다. 무슨 일인지 한 시진 전에 급작스런 연락을 받았던 것이다. 잠시 후 수혼마랑은 사호에 도착했다. "……?" 하나 어디에도 조사의의 모습은 없었다. 그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가 문득 수혼마랑의 시선이 우뚝 멈추며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뜨여졌다.


하나의 바위에 핏빛 금강지(金剛指)의 글이 용틀임 하듯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혈극천 첩자 살(殺).> 바위 위엔 핏물이 뚝뚝 돋는 열 여섯 개의 수급이 올려져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수혼마랑의 입술 사이로 부지중 뼈골 저린 신음성이 새었다. 하나 다음 순간 그는 곧 담담한 예의 신색을 되찾으며 싸늘히 외쳤다. "숨어 있는 놈이 누구냐?" "청각이 꽤 예민한 놈이군." 삭막무비한 일성과 함께 바위 뒤에서 한 인영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인간이 얼마나 깡마를 수 있는지 그 한계를 보여주는 듯 강시같은 몰골의 인물이었다. 바로 성혼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그는 수중에 자신의 애검(愛劍)인 혈훼를 들고 있었다. (고수다!) 수혼마랑은 대뜸 직감했다. 하나 그는 내색치 않으며 싸늘히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냐?" 성혼의 깊숙이 꺼진 두 눈이 번뜩 소름끼치는 냉광을 뿜었다. "너를 제거하기 위해서 왔다. 한도성……" 순간 수혼마랑 아니, 한도성은 재차 흠칫 경악을 떠올렸다. (이미 나의 정체까지 발각나 버렸군!) 그때 성혼이 깡마른 얼굴에 삭막한 웃음을 피워 올렸다. "후후…… 한도성, 너의 수하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남은 것은 이제 너 혼자 뿐. 네놈은 내가 직접 해치운다." 불현듯 한도성의 두 눈이 희뿌연 백색 한광을 내뿜었다. "너는…… 천금마옥의 인물이 아니구나." "……" "천금마옥 내에서 너 정도의 무서운 기도를 풍기는 검(劍)의 고수는 없다." 성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나는 천금마옥과는 상관없다." "네놈의 정체는 뭐냐?" "나……?" 성혼이 이어 소름끼치도록 메마른 웃음을 떠올렸다. "나는 마교(魔敎)의 인물이다." 한도성은 부지중 뒤로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이곳에…… 마교까지……?" 성혼은 이내 웃음기를 싹 거두며 무심히 일성을 내뱉았다. "한도성, 이제 갈 때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천천히 걸음을 떼어 한도성에게 다가갔다. 한도성은 내심 등골 시린 전율을 금치 못했다. 성혼의 깡마른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안되겠다. 내가 먼저 선기(先機)를 제압해야겠다!) 내심 결심을 굳힌 한도성은 온 공력을 발 끝에 모아 힘껏 땅을 박찼다. 빛살인들 이처럼 빠를까? 번뜩! 하는 순간 한도성의 신형은 이미 성혼의 눈 앞에 닥쳐와 있었다.


(빠르다!) 성혼은 내심 은은한 감탄을 머금었다. 하나 성혼 그가 누구인가? 지상에서도 가장 빠른 사나이 지상제일쾌(地上第一快)가 아닌가? 일순 그의 한 손이 검집에 닿았다고 느낀 순간 섬광보다 더 찬란한 한 줄기 빛이 솟구쳤다. 그리고 그것은 나타났을 때보다 더욱 빠르게 사라졌다. "우욱!" 한 소리 신음과 함께 싯뻘건 피분수가 허공에 뿌려졌다. 한도성이 한쪽 어깨를 쥔 채 뒤로 비틀비틀 물러서고 있었다. 그의 왼쪽 어깻죽지는 이미 깨끗이 잘려나간 뒤였다. 반면 성혼은 어깨 부분의 옷이 한 치 가량 베어져 있을 뿐이었다. 한도성의 두 눈은 불신과 경악에 크게 휩뜨여 있었다. (나보다 한 수 위의 고수다!) 한도성의 눈빛은 급변에 급변을 거듭했다. 다음 찰나 그는 이를 악물었다. "차---- 앗!" 그는 재차 비쾌히 땅을 박차며 성혼을 덮쳐갔다. 자살을 하려는건가? 너무나도 무모한 동귀어진의 수법이었다. 한데 돌연 덮쳐가던 그의 신형이 허공에서 한 바퀴 빙글 회전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방향을 틀어 갑자기 사호쪽으로 뛰어들고 있지 않은가? 힘의 한계를 느끼고 도주를 결심한 것이다. 하나 성혼은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그의 입가로 비정한 미소가 스쳤을 뿐이었다. 한도성의 몸이 사호의 수면에 닿을 즈음 돌연 사호 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물체가 솟구쳐 올랐다. 엄청나게 뚱뚱한 인물이었다. 그는 바로 지상에서 가장 비대한 자, 만노였다. 만노는 매우 게으르고 느린 인물이다. 하나 물(水)에서만은 다르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 그것도 물 속에서라면 그는 누구보다 빠르다. 수중제일쾌(水中第一快)! 그가 바로 만노가 아닌가? 이 순간 그의 살찐 한 손이 무섭도록 빠르게 한도성의 심장을 쑤셔갔다. "크흑……!" 참담한 신음성이 일며 한도성의 신형은 그대로 물 속으로 잠겨 버렸다. 사호의 검푸른 수면엔 금시 시뻘건 핏물이 번져 나갔다. 만노는 지그시 그 광경을 응시하다 문득 나직이 괴소했다. "흐흐…… 네놈이 물 속으로 들어온 것이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다." 이어 그는 거북이같이 느릿한 동작으로 천천히 호숫가로 나왔다. 성혼이 그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응시하며 물었다. "놈은 어찌 되었느냐?" "죽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만노는 오히려 되물으며 씨익 웃었다. 성혼 역시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마령칠십이참혼대는……?" "오늘 밤이면 충분히 도착할 것이네."


성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이제…… 천금마옥에도 피의 혈풍(血風)이 무섭게 몰아치겠군." 5 으스름한 달빛에 천지가 온통 푸른 빛으로 채색된 야심한 시각. 불어오는 바람에는 터질 듯 영글어 있는 만추(滿秋)의 내음이 듬뿍 실려 있었다. 야트막한 야산(野山)이 구릉인 양 펼쳐진 한곳에 누군가 뒷짐을 진 채 야천(夜天)을 응시하며 우뚝 서 있었다. 달빛을 받아서일까? 그렇지 않아도 옥(玉)같은 피부가 더욱 하얗에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바로 백리강이었다. "……" 밤바람 소슬한 이 가을밤, 그렇게 서 있었는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그는 도무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이때, 스스…… 스으…… 유령(幽靈)의 움직임인가? 극히 미세한 음향과 함께 수십 줄기의 흐릿한 그림자(影)가 백리강의 뒷쪽에 나타났다. 한결같이 흰 천을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칭칭 휘감고 있는 그들 의 전신에선 실로 피를 말릴 듯한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겨나오고 있었다. 모골이 송연해지도록 짙게 풍기는 죽음의 냄새였다. 그들은 나타나자마자 백리강의 등을 향해 깊숙이 부복했다. "마령칠십이참혼대, 대지존을 배알하옵니다." 마령칠십이참혼대! 대지존 백리강 직하의 친위대이자 가장 무서운 죽음과 피의 집행자(執行者)들이 아니겠는가! 백리강은 야천에서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돌아섰다. 그는 맨 앞의 인물에게 깊숙한 시선을 던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느라고 수고 많았다, 염천백." 염천백! 백혈무영 염천백, 그는 마령칠십이참혼대의 수좌였다. 백리강의 말에 염천백은 머리를 땅에 대어 최고의 경의를 표시했다. "황송하옵니다, 대지존!" 백리강은 담담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내가 왜 너희들을 불렀는지 이유를 아느냐?" 염천백은 그 자세 그대로 정중히 대답했다. "약간은 알고 있사옵니다." 백리강은 조용히 말했다. "오늘밤 음무극을 제거할 생각이다. 하나 그는 내가 직접 제거할 것이고 너희들이 해야할 일은 따로 있다." "하명하십시요!" 백리강은 조용히 이어 말했다. "무영살인대…… 모두 삼십 인으로 구성된 음무극의 직속 수하들이다." 염천백은 더 듣지 않아도 자신들의 할 일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문득 음산하고도 자신에 찬 음성을 발했다.


"명령만 내리십시요. 한 시진 이내에 모두 씨를 말려 버리겠습니다." "음……" 백리강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염천백." "하명하십시요." "네가 죽여야할 고수는 따로 있다." "말씀하십시요." "요노(妖老)." 순간 염천백의 고개가 약간 땅에서 떨어졌다. "음무극의 모사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 자다." 땅바닥을 향해 있는 염천백의 눈빛이 스산하게 일렁였다. "놈은…… 내일 아침에 뜨는 태양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에 찬 음성이었다. 백리강은 싱긋이 웃으면서 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염천백의 머리 앞에 던졌다. "그 속에 무영살인대에 관한 전부와 요노가 머물고 있는 곳의 위치 등이 적혀 있다. 반드시 제거하라. 한놈도 놓치지 말고." "존명!" "가거라." 대세를 결판짓는 죽음의 선고는 이렇듯 간단하게 내려졌다. 6 장노방(張老方), 그는 천금마옥 내의 하급무사였다. 나이는 칠십 정도에 아무런 불만도 없이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노인이었다. 하나 그런 그에게도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곧 그가 무영살인대의 일인(一人)이라는 사실이었다. "오늘 따라 차맛이 쓰군." 장노방은 입맛을 씁쓸하게 다시며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 놓았다. 그 앞엔 상당한 미모의 서른살 가량 되보이는 미부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진교랑(陳嬌娘). -죽지도 않는 늙은이가 무슨 힘을 믿고 저렇게 아름답고 팽팽한 처녀를 처로 맞아 들였을까? 그런 비난과 질투를 받으며 십 년 전에 맞아들인 여인이 바로 진교랑이었다. 진교랑은 채 반도 마시지 않고 내려놓은 장노방의 찻잔을 응시한 뒤 상냥하게 입을 열었다. "다시 끓여 드릴까요?" 장노방은 주름진 얼굴 가득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물끄러미 진교랑을 응시했다. "그냥 두시오. 당신이 끓인 것인데 그냥 마셔야지……" "쓰시다면서요?" "됐소. 자고로 좋은 약일 수록 맛이 쓰다하지 않소?" 진교랑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나직이 웃었다. "호호호…… 그렇다고 쓴 걸 억지로 먹어요?" 입을 가리고 있는 저 손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장노방의 눈에 뜨거운 열기가 떠올랐다. "음……" 흘러 나오는 침음조차 어쩐지 끈적끈적한 열기를 담고 있었다. 진교랑은 어떤 낌새를 알아차린 듯 얼굴을 사르르 붉히며 요염한 미소를 떠올렸다. "어머, 또……?"


장노방은 천천히 두 팔을 벌렸다. "여보……" "아이…… 싫어……" 말이 그렇다 뿐이지 진교랑은 몸을 교태롭게 비틀며 은근히 장노방의 품 속으로 안겨왔다. "으음……" 장노방은 뜨거운 신음을 토하며 탄력넘치는 여체를 힘껏 끌어안았다. 이때였다. 돌연 어디선가 극히 음산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장노방…… 무영살인대 제육호(第六號)…… 너를 죽이러 왔다." "……!" 장노방은 대경하며 황급히 진교랑을 떼놓았다. 그 순간 폭음과 함께 종잇장처럼 우측 벽이 터지는가 싶더니 한 줄기 백영(白影)이 섬광처럼 장노방을 덮쳐왔다. "음?" 장노방은 경악했다. 하나 그는 진교랑을 밀쳐내며 몸을 옆으로 구르면서 어느새 신형을 날려 탁자 위에 놓인 자신의 검(劍)을 집어갔다. 무섭게 빠른 신법이었다. 한데 막 검자루에 손이 닿는 순간이었다. 파팟! 돌연 바닥이 갈라지며 또 하나의 백영이 땅 속에서 솟구쳤다. 그러자 장노방의 가슴이 베어지며 피가 튀었다. 딴에는 황급히 허리를 꺾었으나 검날이 스쳐간 것이었다. (윽!) 장노방의 신형이 가볍게 휘청거렸다. 그 순간 이번에는 천정이 터져나감과 동시에 백영 하나가 빛살같이 내리꽂히며 검날을 번뜩였다. 장노방은 대경실색하며 황급히 앞으로 신형을 날렸다. 하나 그는 보지 못했다. 최초로 벽을 뚫고 온 백영의 검이 그 순간 자신의 배를 찔러오고 있는 것을…… "컥!" 비명과 함께 복부에서 핏줄기가 뿜어 나가는 순간 이번에는 등 뒤가 화끈해지며 가슴 앞으로 검날이 쑥 빠져 나왔다. "윽!" 거의 같은 순간, 정수리 끝에서 또 한 자루의 검이 작렬했다. 슥! 이번에는 비명도 없었다. 그저 머리통 반쪽만 허공으로 튀어 올랐을 뿐이었다. 끝장이었다. 장노방은 호흡 한 번 제대로 가다듬어 보기도 전에 세상을 하직해 버린 것이었다. 삼인(三人), 온통 흰 천을 칭칭 휘감은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진교랑에게 눈길을 던졌다. 진교랑은 하얗게 질린 채 한쪽 구석에서 바들바들 몸을 떨고 있었다. "제…… 제발…… 목숨만……" 이때 삼 인의 백포인 중 가운데 인물에게서 전율스럽도록 스산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진교랑…… 무영살인대 제이십육호(第二十六號)…… 마교대지존의 명으로 너를 처단한다." 진교랑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하나 다음 순간 그녀의 신형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녀는 그대로 천정을 뚫고 밖으로 나갔다. 아니 머리만 빠져나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창백한 백광(白光) 한 줄기가 진교랑의 목덜미를 간단없이 베어 버렸다. 툭…… 떼구르르…… 뎅강 잘려나간 머리통이 지붕 아래로 구르고 목없는 시신은 원래 서 있던 자리로 사정없이 곤두박질쳐 나뒹굴었다. 목둥지에서는 그제야 피보라가 자욱이 뿜어나왔다. 이때 지붕으로부터 극히 무심한 음성 한 줄기가 뚫어진 구멍을 통해 실내로 스며들었다. "이제 남은 놈은 여섯…… 가자." 순간 방 안에 있던 삼 인은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있었던 한 토막의 살인극(殺人劇)이었다. 7 사면의 벽에 정확하게 일백 개의 밀납상이 세워져 있는 거대한 석실이었다. 음무극은 연신 희열에 찬 괴소를 흘리며 주위의 밀납상을 둘러보고 있었다. "흐흐흐…… 드디어 불사천령강시가 완성될 시간이 반시진 앞으로 다가왔다." 반 시진…… 몇년을 노력한 것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다. "흐흐흐…… 이것만 완성되면 천하패권을 움켜잡기란 문제도 아니다." 그는 생각만 해도 마냥 뿌듯했다. "먼저 조사의와 위지풍 두 놈을 제거하여 천금마옥을 장악한 뒤…… 지옥부와 혈극천, 마교 등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이다. 으하하하하……" 광소(狂笑)----! 원대한 야망을 실은 광소는 석실 안을 한동안 찌렁찌렁하게 뒤흔들었다. "이제…… 지난 몇 년 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음무극은 기쁨에 겨운 나머지 연신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백인(百人)의 절정고수들에게 일천 가지의 약초와 독(毒)을 사용한 다음…… 밀납으로 오 년 동안 공기를 차단시키면 불사천령강시는 완성된다. 흐흐흐…… 이제 반 시진만 지나면 백 인의 귀여운 아이들이 밀납을 깨고 이 세상으로 나온다. 그렇게 되면 나 음무극은……" "어떻게 되느냐?" "어떻게 되긴…… 당장 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무심코 대답하던 음무극은 돌연 심장이 떨어져 나갈 듯 크게 놀랐다. "누구……" 말이 미처 끝나기 직전 석실 저쪽으로부터 머리통 하나가 음무극의 발 앞으로 공처럼 굴러왔다. 순간 음무극의 눈이 귀신이라도 본 듯 있는대로 부릅떠졌다. "요노(妖老)!" 오오…… 요노! 머리통의 주인은 바로 요노였다. 음무극은 번쩍 고개를 들어 머리통이 굴러왔던 쪽을 쳐다보았다. "누, 누구냐?" 묻는 순간 그의 시선 속으로는 이미 세 사람의 모습이 쏘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조사의, 위지풍, 또 한 명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백리강이었다. "……!" 음무극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한 걸음 물러났다. "조사의…… 위지풍…… 너희들……" 백리강이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알아보지 못하겠소?"


순간, 음무극의 시선이 백리강의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너는……?" "백리강!" "뭣이?" 음무극의 안색이 홱 돌변했다. 백리강! 마교대지존 백리강의 이름이 어찌 생소하랴? 음무극은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왈칵 치밀었다. "네…… 네가 어떻게 여기를……?" 백리강은 나직이 웃었다. "후후후…… 벌써 잊어먹지나 않았는지 모르겠구려. 적한청이라고……" 순간, 음무극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그, 그럼?" "바로 나다." "……!" 음무극은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누구보다도 철석같이 신임하던 적한청이 마교대지존 백리강이었다니! (이…… 이렇듯 황당한 일이……) 백리강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음무극, 이제 너도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된 것이다. 네가 그토록 사랑하던 무영살인대의 뒤를 따라서 말이다." "……!" "그러고보니 이야기 순서가 바뀌었군. 너의 수하들이나 무영살인대 중 살아남은 자는 단 한 명도 없다고 먼저 말해주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어." "……!" 음무극의 몸이 한 차례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완전히 날벼락이라도 맞은 느낌이었다. 문득 음무극은 이빨을 으스러져라 악물었다. (반 시진…… 그래…… 반 시진만 버티자……!) 조사의가 불쑥 괴소를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후후후…… 혹시 시간이라도 끌어볼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포기해라. 음무극." 그는 등 뒤의 만자혈탈을 천천히 수중에 옮겨 잡았다. 백리강과 위지풍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한 뒤 세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조사의는 만자혈탈을 비껴들며 천천히 음무극을 향해 걸음을 떼놓았다. "후후후…… 옛날부터 나는 음무극 네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음무극은 부드득 이를 갈았다. "조사의…… 네놈이 결국……" 조사의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광소가 채 끝나기 전이었다. 파앗! 조사의의 신형이 음무극을 향해 번쩍 공간을 갈랐다. 갈랐다고 느꼈을 뿐인데도 그의 만자혈탈은 어느새 음무극의 머리를 내려찍고 있었다. (억!)


이렇게 빠를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음무극은 다급성을 삼키며 퉁기듯 물러났다. 만자혈탈은 아슬아슬하게 음무극의 어깨를 찢고 지났다. 자신의 어깨에서 튀어 오르는 몇방울의 피를 보는 순간 음무극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놈……!" 그는 재차 날아오는 만자혈탈을 피함과 동시에 옆구리에 차고있던 교사독도를 뽑아 미친 듯이 번뜩였다. 슈슈슛! 스치면 즉사요 일단 몸에 박혔다 하면 몸 속에 있는 것은 모조리 뽑아낸다는 죽음의 칼(刀), 교사독도! 그것은 마치 살아 움직이듯 허공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한 순간 두 괴병(怪兵)이 부딪치면서 새파란 불꽃을 허공에 흩뿌렸다. "후후…… 제법이다. 음무극……" 조사의는 환영처럼 신법을 구사하며 음무극의 전신 구석구석을 태풍처럼 휩쓸어갔다. "개소리치지 마라, 조사의!" 음무극은 뒤질세라 폭갈을 터뜨리며 교사독도를 기이무쌍하게 휘 둘러댔다. 싸움이 시작 되었는가 싶었더니 그들은 어느새 사십여 초의 공세를 주고받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쉽게 승패를 가리기 힘든 막상막하의 형세같았다. 하나 백리강은 초수가 거듭될 수록 음무극은 공격보다 방어하는 횟수가 늘어감을 볼 수 있었다. (저 상태라면 조사의에게 승산이 있다. 하나 시간이 문제다!) 그는 문득 밀납상들을 쭈욱 살펴보았다. 아직까지 이상이 있는 밀납상은 눈에 띄지 않았다. (으음……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좋지않다. 저러다가도 어쩌면 반 시진 이내에 어떤 변화가 발생할지도 모르니까……) 백리강은 위지풍을 응시하며 가벼운 눈짓을 보냈다. 위지풍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음무극은 경황중에도 그것을 발견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크, 큰일이다! 만일 저놈까지 가세한다면……) 더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고스란히 끝장나는 것이었다. 한데 잠시 생각이 분산되는 그 순간 음무극의 몸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헛점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것이 비록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다고는 하나 그냥 넘어갈 조사의는 절대 아니었다. 파팟! 소리��� 더불어 살점 한 덩이가 음무극의 옆구리에서 뭉텅 끊어져 나갔다. "으윽!" 음무극의 신형이 한차례 크게 휘청였다. 그것은 절호의 기회였다! 별안간 백리강의 신형이 광섬(光閃)처럼 음무극을 향해 쏘아져 날았다. 그 속도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 눈부신 백광(白光)이 부챗살처럼 뻗쳐나갔다. 이른바 대비단혼수(大悲斷魂手)! 순간, "헉!" 음무극은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본능적으로 교사독도를 휘둘러댔다. 하나 대비단혼수가 무엇인가? 천하에 못 자를 것이 없다는 최강의 파옥신공(破玉神功)이 아니겠는가?


카캉! 뼈저리는 금속성과 함께 교사독도는 여지없이 다섯 조각으로 부러져 허공에 튀어 올랐다. "끝내자, 음무극!" 짤막한 외침과 더불어 백리강의 손이 재차 허공중에서 번뜩였다. 정확하게 다섯 줄기의 광채는 눈을 찢어져라 부릅뜨고 있는 음무극의 전신을 사정없이 파고 들었다. 파파파팍! "윽!" 일시 음무극의 몸이 급살맞은 사람처럼 부르르 떨렸다. 다음 순간 다섯 줄기의 싯뻘건 핏둥지가 살갗을 헤집으며 몸 밖 으로 맹렬히 뿜어나갔다. 음무극은 연거푸 몇걸음을 물러선 다음에야 가까스로 신형을 가다듬었다. 그때였다. 백리강의 음성이 음무극의 바로 코 앞에서 잔잔히 흘러나왔다. "이제 너의 야망은 끝난 것이다, 음무극." 음무극은 흙빛이 된 얼굴을 힘겹게 치켜들었다. "네놈이 아무리…… 그래도…… 곧 있으면…… 불사천령강시는…… 움직인다…… 그렇게 되면…… 천금마옥은 끝이다…… 아무도 불사천령강시…… 막지 못한다……" 백리강은 묵묵히 듣고 있더니 문득 품에서 푸른 빛이 감도는 옥패(玉牌) 하나를 꺼냈다. 그는 싱긋이 웃으며 옥패를 들어 보였다. "이게 무엇인지 아느냐?" 순간, 촛점을 잃고 흐릿해지던 음무극의 눈에 번쩍 기광(奇光)이 솟구쳤다. "탐보의?" "그렇다. 바로 탐보의다." "……!" "과거…… 너는 이 탐보의를 갖다주면 네 세력 전부를 내게 넘겨준다고 말했었다." 그렇다. 음무극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백리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나는 마교에서 이 탐보의를 얻은 이후…… 세밀히 이것을 조사해 보았다. 결국 나는 이 탐보의의 뒤에 박힌 천령주(天靈主)가 너 의 불사천령강시와 상극(相剋)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 "간단히 말해서…… 이 탐보의만 있으면 네 대법(大法)이 아니라도 나 역시 불사천령강시를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이지." 음무극의 하반신이 힘없이 흔들리는가 싶었더니, "죽…… 일…… 놈……" 그 한 마디를 끝으로 그의 몸은 허물어지듯 바닥에 나뒹굴었다. 쿵! 그것은 천금마옥의 일각을 호령하던 거물(巨物), 교사독도 음무극이 생의 종지부를 찍는 소리였다. "결국…… 죽었어." 탄식처럼 흘러나온 위지풍의 말이었다. 조사의는 냉소했다. "당연한 결과지." 위지풍은 백리강의 얼굴을 힐끗 돌아보았다. "이제 앞으로의 계획은……?"


백리강은 담담한 미소를 떠올렸다. "지옥부의 궤멸이오." "음?" 백리강은 씩 웃으며 설명을 이었다. "음무극은 죽지 않았소이다. 그는 이 길로 지옥부로 가서 지옥부와 굳게 손을 잡게될 것이오. 따라서 지옥부는 소리없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지요." 위지풍과 조사의는 일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하나 그들은 이내 백리강의 말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 자네와 음무극과의 바꿔치기?" 위지풍의 물음에 백리강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한청도 되었는데 음무극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소이까?" 순간 위지풍과 조사의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와핫핫핫…… 그거 명안(名案)이다! 와하하하…" 제 23 장 魔敎出現 1 산해관(山海關). 휘이이이이잉----! 겨울 바람처럼 삭막한 한풍이 분다. 아직 겨울(冬)이 되기엔 이른 가을이건만 산해관을 스치는 바람은 살을 에일 듯 차가웠다. 인영…… 차가운 바람이 실어 왔는가? 얼음보다 더한 냉기가 풀풀 날리는 백의 미청년이 우뚝 서있었다. 얼굴은 빙옥(氷玉)을 깎은 듯 수려했고 그린 듯 절륜했다. 한데 기이하게도 은발에 은미를 지닌 신비로운 모습, 그가 누군가? 서문빙천(西門氷天). 그렇다. 그는 혈극천의 천주 서문일백의 아들인 서문빙천이었다. 이때 그의 여인처럼 붉은 입술이 무심히 열리고 있었다. "그래…… 실패했단 말이지?" 그의 발치에 한 명의 노인이 지면에 이마를 처박고 있었다. "그러하옵니다." "……" 서문빙천에게선 예사롭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노인은 이마를 피가 나도록 땅에 처박으며 적이 떨리는 음성을 이었다. "최선을 다했으나…… 모두 발각나고 말았습니다. 도저히 불가항력……" 서문빙천이 싸늘히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들을 누가 죽였느냐?" "그…… 그것마저도 증거가 없어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 서문빙천은 잠시 노인을 무심히 응시하다 낮게 입을 열었다. "한도성은 혈극천 내에서도 서열 십위 이내에 드는 고수다. 천금마옥 내에서 그를 죽일 수 있는 인물은 세 영주들 외에는 아무도 없다. 하나……" 지금 그는 천금마옥의 일을 얘기하는가? 불현듯 서문빙천의 두 눈이 냉전(冷箭) 같은 안광을 뿜어냈다.


"심천래(沈天來)!" 무심한 일성이 떨어졌다. 노인은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황급히 조아렸다. "말씀하십시요. 소종사(小宗師)." "산해관에 운집해 있는 혈극천의 고수들을 모두 출동준비 시켜라." 부르르…… 노인의 전신에 미세한 전율이 흘렀다. 서문빙천은 개의치 않고 다시 말했다. "중원(中原)으로 진입한다." 노인은 문풍지 떨리듯 떨리는 음성을 발했다. "이…… 이렇게나 빨리……" 서문빙천의 결심은 확고부동했다. "서둘러야 한다. 천금마옥 내의 혈극천 제자들의 죽음은 누군가 제삼세력이 끼어 들었다는 증거다. 만일 천금마옥과 제삼의 세력이 힘을 합치게 되면 극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전에 중원을 일거에 몰아치는 것이다." "……" 노인, 심천래는 미미하게 전율하고 있을 뿐이었다. 서문빙천의 싸늘무비한 일성이 다시 터졌다. "알아 들었느냐?" "조…… 존명 받듭니다." 심천래는 황망히 이마를 땅에 박은 후 급히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휘---- 이---- 잉……! 서문빙천은 냉풍을 정면으로 받으며 백의자락을 휘날리고 있었다. 이때 문득 또 하나의 인영이 서문빙천의 앞에 나타났다. 마치 오래 전부터 그렇게 있었던 듯 그는 그렇게 서있었다. 전신이 그대로 한 덩이 사(邪)의 기운으로 뭉친 듯한 인물이었다. 눈썹이 나있었다는 흔적조차 없다. 뿐인가? 묵빛의 검은 자위 위에 떠올라 있는 소름끼치는 백색 동공을…… 도저히 마주 보기에도 섬칫한 사이무비한 백의중년인이었다. 이때 서문빙천의 요사스럽도록 붉은 입술이 다시 열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사천공!" 아! 그렇다. 사천공, 그는 바로 백리가 멸화의 진정한 흉수인 사천공이 아니던가? 사천공은 서문빙천을 똑바로 응시하며 얇은 입술을 움직였다. "소공자, 방금 전에 하신 말씀…… 외람되지만 본의 아니게 모두 들었습니다." 서문빙천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사천공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러자 사천공의 백색독공이 괴기롭게 번뜩였다. "시기가 빠릅니다." "빠르다니……?" "천기(天機)의 흐름이 지금 엉켜있는 상태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움직인다면 별로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 서문빙천은 싸늘히 표정을 굳히며 그의 말을 일축해 버렸다.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소. 인간이 하는 일을 어찌 하늘의 천기에만 맡길 수 있소? 사천공께서는 내


옆에서 보좌만 잘 해주시오. 내 일 년 안으로 천하를 모조리 쓸어 버릴것이오. 마교…… 지옥부 …… 천룡단…… 그들 모두를 말이오." 서문빙천의 준미한 옥안엔 짙은 자부심이 서리고 있었다. "그 누구도 나를 거역치 못하오. 나 서문빙천에게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소." 일순간, 그는 한쪽 손을 내밀어 사천공의 눈 앞에 쫙 펴보였다. 그러자 손바닥에는 열심(十) 자로 그어진 괴이무비한 손금이 드러났다. 아아, 죽음(死)의 십자선(十字線)----! 바로 그것이 아닌가? 이 순간 죽음의 십자선은 짙은 핏빛을 띄우고 있었다. 동시에 서문빙천의 두 눈이 가공하리만큼 섬뜩한 한광(寒光)을 뿜었다. 사천공, 그조차 가슴이 서늘해짐을 금치 못한 그런 눈빛이었다. 서문빙천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며 겨울 바람같은 냉성이 흘러 나왔다. "나, 서문빙천…… 중원인들에게 일천 명의 혈극천위대(血極天偉隊)의 위력을 보여줄 것이오." 바로 그 순간 그의 손바닥에 그어진 죽음의 십자선이 돌연 단 한 자의 글씨로 돌변해 버렸다. <사(死).> 오오…… 심장이 통째로 오그라들 사악한 변화였다. "으하하하하……" 엄청난 앙천대소와 함께 서문빙천의 전신에 싯뻘건 혈무가 피어 올랐다. 이어 혈무에 휩싸인 서문빙천의 모습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하나 희미한 그의 음성이 사천공의 귓전을 때리고 있었다. "사천공께서도 준비하시오." 그 음성이 완전히 사라지자 사천공은 돌연 낮게 침음했다. "으음……" 그는 이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일이 꼬이고 있다. 몇 년 전…… 대종사의 풍효(風爻)의 패가 실패한 이후로 계속…… 천기가 꼬이고 있어……!) 번뜩! 그의 두 눈은 미미한 백색 광망을 뿌렸다. (소종사…… 그의 자질은 오히려 대종사보다 낫지만…… 너무 어리다! 십 년만 지난다면…… 소종사는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을 개세무적(蓋世無敵)의 고수로 성장하나…… 지금은 어쩐지 너무 서두르고 있는 느낌이다!) 문득 그는 침중히 안색을 굳혔다. (나 사천공은 혈극천의 군사(軍師)로서 혈극천의 천하패업(天下覇業)을 완수시켜야 한다. 내 목숨까지 바쳐서라도……!) 그는 이어 품 속에서 한 개 산목을 꺼내 흔들었다. 차르륵----! 차륵……! 사천공은 산목을 멈추며 신중히 들여다 보았다. 하나 이내 그의 안색엔 한 가닥 그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역시 천기가 보이지 않는다. 한 치 앞도 보이지가 않아……!) 사천공은 적이 곤혹스런 시선을 하늘에 주었다. 오늘따라 먹구름 짙은 음산한 하늘(天)을…… (이제…… 승부는 실력에 달렸다. 그 결과는…… 하늘도 알 수 없는 일……!) 그러나 사천공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 있었다. (이긴다. 반드시…… 반드시……!)


2 중원(中原). 지난 백여 년 이래 고요하기만 하던 중원 십팔만리가 온통 크나큰 대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북해(北海) 혈극천의 등장! 아아! 혈극천(血極天)! 오랜 세월을 호시탐탐 중원정복을 노리며 은밀히 싹터온 추측불가능한 그 엄청난 신비 세력이 마침내 포효를 터뜨렸다. 천하정복의 대야망을 위한 혈보(血步)를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아아…… 느껴진다. 뼛속까지 통째로 얼어붙을 무서운 전율의 공포가! 그리고 코가 문드러질 만큼 짙은 혈향(血香)이…… 혈극천위대(血極天偉隊)----! 혈극천 최강의 고수인 그들 천 명을 비롯한 삼만여의 북해 고수들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중원 무림 전역을 휩쓸기 시작했다. 혈극천위대의 무서움은 가히 극에 달했다. 그 어떤 문파도 그들의 앞을 막지못했다. 그들이 스친 곳에 굴복하지 않는 문파는 없었다. -무릎을 꿇고 대를 이은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라. 그것이 아니면 죽음(死)으로 대신하라! 혈극천 전 세력을 이끌고 있는 소천주 서문빙천의 무공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하나 혈극천위대는 그가 직접 손쓸 일을 남겨두지 않았다. 서문빙천은 항상 가장 결정적인 순간 가장 통천가공할 손속을 발휘했다. 때문에 중원인들은 그를 보기를 지옥의 사신(死神)보는 것보다 더 두려워했다. 게다가 혈극천을 총지휘하는 사천공의 지략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의 계획대로 혈극천은 중원 무림을 무서운 기세로 장악하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동안 평화에 젖어있던 중원무림은 그들을 막을 힘이 없었다. 한데 바로 그때 일단의 세력이 나타나 혈극천과 맞서기 시작했다. 천룡단(天龍團). 우내오천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의 여인이 이끄는 바로 천룡단이 바로 그것이었다. 전 정파인(正派人)과 구파일방(九派一幇)의 세력을 규합한 그들은 때를 만난 듯 봉기하며 크게 용틀임했다. 하나 그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혈극천이 그동안 얼마나 가공무비할 세력을 키워왔는가를…… 그들의 중원을 향한 야망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가를…… 우내오천! 정도무림 사상 최강의 기인들이라는 그들은 천룡단을 이끌고 혈극천에 맹렬히 대항했다. 하나 그들은 뒤늦게야 역부족이라는 한 단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천여 년 간 중원정복의 야심을 키워온 그들에 비해 천룡단의 힘은 너무도 미거했다. 그리고 중원은 그 일각에서부터 차츰 무너지기 시작했다. 대혈풍(大血風)! 사상 유래없는 피의 폭풍이 중원을 휘몰아쳤다. 하나 그것은 또 다시 불어닥칠 일대혈겁(一大血劫)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무서운 대혈겁의 서막(序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3 동정호(洞庭湖) 군산에 거대한 성(城)이 생겨났다. 하나 어찌 그것을 성이라 표현할 수 있으랴?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수백 개의 전각과 누각, 그리고 날으는 새도 넘나들 수 없을 듯한 높은 성벽,


그것은 가히 하나의 소국(小國)이라 일컬을 수 있으리라. 이곳에 거대한 공사가 벌어진 이후 꼭 삼 년 만에 세워진 성이었다. 하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이곳이 바로 마교(魔敎)의 총단임을…… 마교(魔敎)! 그렇다. 천존마제 사후 천 년 만에 드디어 그 위세를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태상전(太上殿). 마교 사태상(四太上)의 거처였다. 지금 이곳에는 마교의 핵심인물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사태상을 위시한 마교 십팔마궁(十八魔宮)의 궁주들. 좌중엔 지극히 엄숙하며 긴장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상석의 한 인물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백발은염의 청수하며 신비한 기태가 흐르는 자의노인, 그는 사태상의 제일태상인 천수마선 목인청이었다. 그는 좌중을 훑어보며 막 담담한 음성을 내뱉고 있었다. "오늘 천금마옥에 계신 대지존께서 연락을 보내셨다. 대지존께서는 천금마옥을 완전 장악하시는 데 성공하셨다." 순간, "오……!" "아아…… 과연 대지존이시다." 좌중 이곳���곳에서 짙은 경탄과 감복의 희성이 터졌다. 천수마선 목인청은 조용히 좌중을 응시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모두들 알고 있겠지만 혈극천은 이미 혈풍(血風)을 일으키고 있으며 지옥부 역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지금부터 우리 마교도 움직인다." "……!" "마도(魔道)의 사생아격인 혈극천과 지옥부를 몰살시킴과 동시 마교는 진정한 마도의 뿌리를 중원에 심는다." 목인청은 유리알처럼 투명한 두 눈에 섬뜩하도록 신비한 광채를 띄웠다. "마교의 사태상을 비롯한 십팔마궁주와 전 제자들은 내일 새벽 군산을 떠난다. 전 중원에 존마령(尊魔令)을 발동하여 마교의 십만(十萬) 고수를 집결시키도록 하라!" 우렁찬 일성이 떨어졌다. 찰나, "존명----!" 십팔마궁주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그 앞에 깊숙이 부복했다. 4 이곳이 어딘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단 하나 변함없이 단언할 수 있는 말은 아직도 단 하나뿐이다. 여기는 천하에서 가장 어둡고 음산한 곳이었다. 뭉클…… 뭉클…… 칠흑같은 어둠이 칙칙한 습기와 어울려 귀기롭게 일렁이는 이곳. 한 채의 웅장한 건물이 어둠 속에 괴물처럼 웅크린 채 자리해 있었다. 아아…… 그렇다. 지옥부(地獄府)! 저 악명높은 문제의 지옥부가 바로 이곳이었다. 대전(大殿)의 최상석에 위치한 태사의엔 지금 한 명이 몸을 깊숙이 묻은 채 앉아있었다.


얼굴에는 황금빛이 번쩍이는 금빛 면구(面俱)를 썼고 일신에는 어둠보다 짙은 먹빛 장포를 걸친 인물. 한데 흑포인의 전신에서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저 엄청난 사기(邪氣)는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 만약 전신에서 풍겨내는 기운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바로 이 흑포인을 서슴없이 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앞엔 수십 명의 흑포인들이 마치 어둠의 한 부분인 양 미동도 없이 좌우로 도열해 있고 그들의 중앙에는 한 인물이 태사의를 향해 깊숙이 부복해 있었다. 흠잡을 곳이 없는 청수한 얼굴의 중년인, 어쩐지 주위의 분위기와는 이질적인 인상의 이 중년인은 다름아닌 금사후였다. 그렇다면? 태사의에 앉아 그 금사후를 굽어보고 있는 인물은 누구이겠는가? 지옥부주(地獄府主)----! 바로 그가 아니고야 어찌 금사후를 눈 아래로 굽어보고 있겠는가? 문득, 지옥부주의 금빛 면구를 통해 지독하게 음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음무극의 일은 어찌 되었느냐?" 금사후는 머리를 조아리며 공손히 대답했다. "곧 완성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음……" 이들은 아직 음무극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음무극의 죽음으로 그의 수하들 사이에 어떤 분란이 일어 날 것을 우려한 백리강 등 삼인(三人)이 음무극의 죽음을 철저한 극비에 부쳤기 때문이었다. 지옥부주는 잠시 침묵하더니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음무극은 지난 몇년 동안 계속 일을 지체해왔다. 하나 이제는 더 기다릴 수 없다." 이어 그는 금사후를 향해 말했다. "금사후." "하명하십시요." "너는 지옥백팔도객(地獄百八刀客)을 데리고서 천금마옥으로 가라. 가서 음무극을 제거하라." 금사후는 흠칫 놀라며 약간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면 불사천령강시의 제조는……?" "놈은…… 이미 그것을 완성했을 것이다." "……!" "놈의 존재가치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다. 너는 놈을 제거한 후 지옥섭령대법(地獄攝靈大法)으로 불사천령강시의 비밀만 알아내면 된다. 그리고 너는 한 달 이내에 천금마옥을 완전히 장악하도록 해라." 순간 금사후의 눈에 적이 당혹스런 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너무…… 시간이 촉박……" "금사후." 지옥부주는 그의 말허리를 끊고 음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너는 음무극만 제거하면 된다. 그 후의 일은 본좌가 직접 개입해서 처리할 것이다." 금사후의 눈에서 당혹의 빛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부주께서 직접 개입하신다면 일은 이미 성공이나 다름없습니다." "가라. 너와 지옥백팔도객이면 음무극 하나는 충분히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존명!" 자신에 찬 대답을 끝으로 금사후의 모습은 홀연 연기처럼 대전에서 사라졌다.


지옥부주는 태사의 깊숙이 상체를 파묻으며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문일백…… 네가 아들을 시켜 중원을 침공하긴 했다만…… 너무 빨랐다." 서문일백----! 혈극천의 천주인 서문일백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일차로 할 일은 천금마옥을 장악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혈극천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이다." 흘러 나오는 지옥부주의 음성에는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 "흐흐흐…… 이제 곧 천하는 내가 어떤 인물인가를 알게될 것이다. 물론 그때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나 있을 때이겠지만…" 돌연 그의 입에서 천지를 허물 듯한 광소가 벼락치듯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5 대홍산(大洪山). 일단의 인마(人馬)가 어둠을 가르며 산중(山中)을 질풍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대략 백여 명, 모두 먹빛 장포를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덮어 썼고 등에는 숯덩이같은 묵빛 쌍도(雙刀)를 교차시켜 걸러 메고 있었다. 하나같이 죽음의 냄새를 전신으로 짙게 풍겨내는 이들은 대체 누구인가? 그들은 뿌연 흙먼지를 구름처럼 자욱이 피워 올리며 북쪽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다. 한데 유독 한 사람, 그들의 맨 앞을 달려가는 인물은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있었다. 금사후! 달빛 아래 드러난 그 얼굴은 분명히 금사후였다. 그렇다면, 아아…… 그렇다! 금사후를 뒤따르는 흑포인들을 일컬어 지옥백팔도객으로 불리우는 바로 그들이었다. 지옥백팔도객----! 오직 살인(殺人)만을 취미로 삼고, 오직 살인(殺人)만을 즐기며 살아가는 죽음의 도객(刀客)들! 그들이 지금 천금마옥을 향해 이렇듯 무서운 기세로 치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을 데리고 가는 금사후의 기분은 매우 유쾌한 상태였다. 까닭인 즉, 그토록 꼴보기 싫어하던 음무극을 제거하러 가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사흘 후면 천금마옥에 도착한다!) 금사후의 눈에 문득 스산한 살기가 일렁였다. (음가놈…… 이번에는 아예 변명할 기회도 주지않고 그대로 죽여버릴 것이다!) 그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우두두두…… 지옥백팔도객, 그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도 없이 묵묵히 따라붙고 있었다. 금사후는 그런 그들이 믿음직스러운 듯 흡족한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바로했다. (지옥백팔도객…… 지옥부 최강의 고수들인 이들 앞에 누가 적수가 되겠는가?) 그렇다. 지옥부 일천 명의 고수 중에서 추리고 추린 다음 장장 삼십 년에 걸쳐 오직 살인수업(殺人修業)을 혹독하게 가르친 죽음의 도객들이 바로 지옥백팔도객들이었다. 그런 만큼 금사후는 나름대로 자신에 차 있었다. 뿐이랴? 더 더욱 믿음직스럽게도 자신의 뒤에는 지옥부주까지 따라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금사후의 심정은 날아갈 듯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흐흐흐…… 이것으로 대세는 깨끗이 판가름나는 것이다." 이때 돌연 한소리 불호성이 웅장하게 허공을 가르며 울려퍼졌다. "아미타불…… 섣부른 판단은 곧 패배와 직결되는 것이라오. 금사후 시주."


금사후의 안색이 홱 돌변했다. 그는 급히 말고삐를 잡아채며 벌컥 외쳤다. "어떤 놈이냐?" 때를 같이해서 뒤를 따르던 지옥백팔도객도 그 자리에 일제히 말을 멈추었다. 바로 그 순간, 스스스…… 스스슥…… 도합 백여 명의 인영이 사방에서 환영(幻影)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사십 세가 넘어보이는 승인들이었다. "음?" 금사후는 의외롭다는 표정으로 사방을 쓸어보다 말고 어느 한 곳에 시선을 딱 멈추었다. 그곳엔 잿빛 법의(法衣)에 황색가사를 걸친 인자한 모습의 노승(老僧)이 우뚝 서 있었다. 일순 금사후의 안색이 기이하게 변했다. "너는 누구냐? 땡추 놈." 노승은 물같이 고요한 시선으로 그를 마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빈승은 불광(佛光)이라 하오. 금시주." "불광?" 금사후의 눈에 순간 경악의 빛이 솟구쳤다. "그대가 바로…… 우내오천 중 한 명인 불광신승이란 말인가?" "아미타불…… 바로 빈승이외다." 금사후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빌어먹을…… 놈들이 어떻게 알고 우리를 막아섰단 말인가?) 그는 내심 의아해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슨 일로 우리를 막아선 것인가?" 불광신승은 무겁게 대꾸했다. "지금 금시주는 지옥부의 고수들을 데리고 어디를 가는지 모르겠으나…… 천하대의를 위해 이곳에 남아 주셔야 하겠소." "남아 달라고?" "물론 혼은 가도 좋지만……" 말인즉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순간, 금사후의 눈빛이 스산하게 일렁였다. "흐흐흐흐…… 우리를 막겠다고?" "아미타불…… 지옥백팔도객의 소문은 익히 들어왔소. 하나……" 불광신승은 잔잔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빈승 부족하오나 백팔비발대진(百八飛鉢大陣)으로 그대들과 맞설까 하오." 순간 금사후의 눈이 커졌다. 커진 눈 속으로 급속히 차오르는 것은 경악! "백팔…… 비발대진……!" 그는 알고 있었다. 백팔비발대진! 백팔나한대진과 함께 불문최강의 양대진법으로 일컬어진다. 백팔나한대진이라 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소림(少林)의 것이요, 백팔비발대진은 저 여의성(如意城)의 것으로 이미 천 년 전에 실전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비록 백팔나한대진처럼 장중한 맛은 없으나 그 뜻이 멸사항마(滅邪降魔)에 있기에 그 위력은 불가(佛家)의 것이라 할 수 없

중년인

부득불

유명한 도저히


을 만큼 잔인무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자 한 명이 열 두 개의 비발(飛鉢)을 가지고 있으며 백 팔 명이 한꺼번에 날리는 비발의 위력은 태산도 쪼개버릴 정도라고 전해진다. (빌어먹을……) 금사후는 내심 투덜거리며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하나…… 지옥백팔도객이 그까짓 비발 따위에게 당하지 않는다……!) 생각을 마침과 동시 그는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며 싸늘한 폭갈을 터뜨렸다. "지옥백팔도객! 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거의 동시에 불광신승의 입에서도 한소리 웅후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백팔비발대진을 발동하라!" 싸움이 시작되었다. 칠흑같은 어둠조차도 비켜나버리는 피튀는 혈전(血戰)이 전개되었다. 그것이 중원(中原)과 지옥부와의 첫 충돌이었다. 대홍산 계곡의 혈투는 치열했다. 지옥부의 지옥백팔도객(地獄百八刀客), 그리고 천룡단의 백팔비발대진(百八飛鉢大陣). 과연 비발대진은 그 명성만큼 위력적이었으며 가공했다. 위이잉----! 위잉----! 귓청을 찢을 듯 엄청난 파공성! 아아…… 보라! 허공을 새까맣게 뒤덮은 수백 수천 개의 비발들을…… 그것들은 종횡무진 지옥백팔도객들을 짓쳐들고 있었다. 태산도 일시에 가루를 낼 듯 통천가공의 위력이 아닐 수 없다. 하나 지옥백팔도객 그들은 너무도 무서운 고수들이었다. 전혀 끄덕도 하지 않았다. 비발에 적중 당해도 가벼운 외상만을 입을 뿐 전혀 치명상을 입지 않았다. 대체 그들은 산사람이란 말인가? 진정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 수록 백팔비발대진은 점차 그들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으---- 악!" 폐부를 통째로 쥐어 짜내는 듯 처절한 비명성이 솟구쳤다. 한 명의 승인이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두 쪽이 나버린 것이 아닌가? 그것이 시작이었다. 백팔비발대진은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처절했고 참혹했다. "아흑----!" "아---- 악!" 귀를 틀어막고 싶도록 처절한 비명성과 함께 시뻘건 피보라와 육편(肉片)이 튀었다. 비발들의 난무는 멎은 지 오래였다. 대신에 허공을 가득 메우는 것은 처참무비한 비명성 뿐이었다. 지면을 메꿔가는 것은 승인들의 토막난 시신들…… 아아, 살륙(殺戮)도 이러한 살륙이 어디 있겠는가? 말그대로 이건 도살극(屠殺劇)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일각 후 백팔비발대진을 펼쳤던 승인들이 모조리 전멸했다. 그 시체들 가운데 단 한 명의 생존자가 전신에 핏물을 뒤집어 쓴 채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바로 불광신승, 그였다. 반면 지옥백팔도객들은 겨우 십여 명만이 쓰러졌을 뿐 대다수가 건재했다.


불광신승은 비틀거리는 신형을 간신히 지탱하며 내심 신음했다. (아미타불……! 아아…… 이럴 수가…… 지옥부의 지옥백팔도객이 이토록 무서울 줄이야……!) 그의 자비롭던 노안은 이 순간 크나큰 경악에 얼룩져 있었다.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지옥부…… 천룡단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세력이다!) 하나, 너무 때늦은 깨달음이었다. "흐흐흐……!" 나직한 괴소가 피비린내에 휩싸인 허공을 헤집었다. 금사후가 사이한 눈빛을 빛내며 불광신승을 쏘아보고 있었다. "불광 땡초, 이제 너의 최후만 남았다." 불광신승은 묵묵히 안색을 굳혔다. 금사후의 득의어린 음성이 이어졌다. "흐흐…… 천룡단이 아무리 발버둥쳐야 지옥부의 절반도 당하지 못한다." "……" "우내오천…… 네놈들은 애당초 우리의 상대가 아니었다." 다음 순간, "죽여라!" 싸늘한 살인 명령이 떨어졌다. 휘---- 휙……! 지옥백팔도객들 중 네 명이 기쾌히 불광신승을 포위했다. 불광신승의 안색은 무겁게 굳어 버렸다. 이미 그의 진력은 거의 소모된 상태였다. (아미타불…… 불존(佛尊)이시여! 천하창생을 위해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자신의 죽음이 결코 두려운 것은 아니다. 단지 장차 닥쳐올 무서운 혈겁(血劫)을 생각하니 눈 앞이 아찔한 것이다. 하나 불광신승은 이내 엄중한 눈빛을 뿌리며 신형을 추스렸다. 마지막까지의 결전을 결심한 것이다. 한데 바로 이때였다. 우…… 우…… 우……! 멀지 않은 곳에서 음산한 귀곡성(鬼哭聲)이 들려왔다. 구천지옥에서 들려오는 악마의 신음성인가? 아니면 유계의 혼들이 울부짖는 소리인가? 전신에 소름이 쭉 돋는 공포스런 귀곡성이었다. "……!" 불광신승은 물론 금사후의 안색도 미세히 급변했다. "이…… 이것이 무슨 소리냐?" 크아아…… 끼아……! 아수라의 절규같은 괴성은 사방에서 점차 가까워오고 있었다. 금사후조차 심장이 떨리는 전율을 느꼈다. 그는 급히 주위를 응시했다. 그러자 먹물같은 어둠 속을 흐느적거리며 다가오는 괴인영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분명 인간들이었다. 하나 전신에서 풍기는 기운이나 걸음걸이는 전혀 사람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복면을 하고 있었는데 복면 위로 드러난 두 눈은 전혀 생기(生氣)가 없이 괴기로우며 공포스럽다. 그런 괴인영들이 하나…… 둘…… 열…… 모두 백 명이 아닌가?


"크…… 크…… 끼아……!" 괴인영들은 연신 괴성을 지르며 흐느적 흐느적 금사후 등을 포위하듯 거리를 좁혀왔다. 금사후는 무언가 심상치 않으며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마치 심장이 조여오는 듯 무시무시한 느낌이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금사후는 불길한 느낌을 떨쳐내기라도 하듯 소리쳤다. 크…… 크…… 크……! 괴인영들은 연신 공포스런 괴성을 발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않고 여전히 금사후와 지옥백팔도객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금사후의 두 눈이 급기야 잔인한 살광을 떠올렸다. "막아라!" 그의 벼락같은 일성이 터지자 지옥백팔도객 중 두 명이 살같이 쏘아 나갔다. 그들은 그 기세를 몰아 그대로 괴인영들의 가슴에 일도를 후려쳤다. 한데, 카---- 캉! 캉----! 돌연 예리무비한 금속성이 고막을 쑤셔들지 않는가? 동시에 지옥백팔도객 두 명의 도(刀)가 그대로 퉁겨나 버렸다. "헉!" "으음……" 그들은 손목이 부러질 듯한 통증에 부지중 신음했다. 크…… 으…… 크크……! 괴인영들은 화가 난 듯 더욱 빨리 그들에게 다가 들었다. 지옥백팔도객들은 일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다음 순간 그들은 각기 나머지 일도(一刀)를 뽑아들고 재차 괴인영들을 덮쳤다. 하나 그들이 채 괴인영들의 신형에 다다르기도 전에 괴인영들이 갑자기 손을 뻗어 그들의 도를 그대로 낚아챘다. 아…… 걸어올 때는 그토록 느리더니 지금 이 동작은 가공할 정도로 빨랐다. "엇!" 지옥백팔도객들은 순식간에 수중의 도를 빼앗기고 말았다. 순간 그들의 도는 괴인영들의 손아귀에서 한줌 가루가 되었다. "헉!" 지옥백팔도객들은 숨넘어가는 대경성을 터뜨렸다. (대…… 대체…… 이놈들은…… 사람이냐…… 귀신이냐?) 반시진 전만 해도 백팔 승려들이 머금었던 경악을 지금 그들이 떠올리고 있다. 하나 그들이 놀라는 그 순간 지옥백팔도객 두 명은 어느 새 괴인들의 손에 잡혀 버렸다. 그들은 공포가 극에 달해 혼비백산했다. 그들은 각기 적수공권으로 괴인영의 머리통을 맹렬히 갈겼다. 퍽! 퍽! 한데 이것은 또 무슨 가공할 노릇이란 말인가? 괴인영들의 머리통은 마치 강철이라도 되는지 전혀 끄덕도 안했다. "끄---- 악!" 처절무비한 비명성은 오히려 지옥백팔도객에게서 터졌다. 괴인영에게 잡힌 팔목이 뼈째로 으스러져 버린 것이다. 다음 순간 가슴 섬칫한 괴음향이 일었다. 그토록 비발에 맞고도 끄덕않던 지옥백팔도객이 괴인영의 수도(手刀)에 그대로 가슴을 관통당한 채


피를 뿜고있었다. 그토록 단단하게 단련된 그들의 몸체가 마치 물먹은 종잇장처럼 가볍게 뚫려버린 것이다. 그 광경을 바라본 금사후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저…… 저게 무슨 괴물이냐?" 그때였다. "아---- 흑!" "끄---- 아---- 악!" "컥----!" 사방에서 갖가지 처절한 비명성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금사후는 급히 사방을 돌아보았다. 보라! 지옥백팔도객들이 도처에서 괴인영들에 의해 척살 당하고 있지 않은가? 지옥부가 자랑하던 지옥백팔도객, 그들은 아예 괴인영들의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마치 어른과 어린애의 싸움을 보듯 지옥백팔도객들이 아무리 가공할 공세를 펼쳐도 괴인영들은 꿈쩍도 안했다. 반면 괴인영들의 손이 그저 가볍게 스치기만 해도 지옥백팔도객들은 작살나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불현듯 넋을 놓고 있던 금사후가 무엇이 생각난 듯 짙은 공포의 기색을 떠올렸다. "불사천령강시(不死天靈 屍)……!" 신음하듯 경악성이 그의 악다문 이빨 사이로 흘러나왔다. "흐흐흐…… 이제 알았느냐? 금사후." 극히 음산한 괴소와 함께 금사후의 전면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잔인하며 음침한 인상의 은의노인, 그는 바로 음무극이었다. 그를 본 금사후는 흠칫 낯빛을 굳히며 재차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네놈…… 음무극……" "흐흐흐…… 금사후, 네놈은 나에게 당한 것이다." "……!" 금사후는 이내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배…… 신…… 자……!" "배신자?" 음무극은 기광을 번뜩 빛냈다. 다음 순간 그는 돌연 크게 앙천대소했다. 이어 웃음을 뚝 그친 그는 금사후를 무섭게 쏘아 보았다. "금사후,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 금사후가 의혹의 빛을 드러내자 음무극은 한차례 얼굴을 쓰윽 문질렀다. 순간 어둠이 몸을 사렸다. 어둠조차 밀어내는 그 눈부신 모습은 바로 백리강이었다. 금사후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다…… 당신은……" 그는 부지중 뒤로 물러서며 경악성을 내뱉았다. 백리강은 무서운 신위가 줄기줄기 내뻗치는 모습으로 일성했다. "이제 알았느냐?" "……!" 금사후는 불현듯 아득한 절망감을 맛보았다. 급히 주위를 응시했으나 이미 지옥백팔도객들은 불사천령강시에 의해 모조리 시체로 화해 있었다.


(도…… 도저히 방도가 없다. 도망가는 수밖에……) 백리강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직시하며 다시 말했다. "이번엔 지옥이혼대법 따위는 펼치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마." 동시에 그는 스르르 미끄러지듯 금사후의 전면으로 다가 들었다. 금사후는 어금니를 꽉 물며 벼락같이 쌍장을 후려쳤다. "비켜라!" ㅆ---- 와---- 앙……! 장강대하와 같은 장력이 해일처럼 백리강을 덮쳤다. 실로 잔혹독랄한 수법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백리강은 가볍게 냉소하며 마주 일장을 내뻗었다. 아무런 소리도, 파공성도 없었다. 한데 그의 장력은 금사후의 전면에 이르러 돌연 수만 가닥으로 분산되는 것이 아닌가! 이어 그것은 폭우처럼 금사후의 전신사혈(全身死穴)을 격타해 들었다. 일순, 꽝----! 굉렬한 격돌음이 터졌다. 동시에, "아---- 악!" 금사후는 비명을 지르며 일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금사후, 그가 어찌 천존마제의 유천마장을 받아낼 수 있단 말인가? 전신에서 피를 뿜으며 금사후는 그대로 절명해버렸다. 한데 돌연 금사후의 시체에서 짙디짙은 혈광이 떠올랐다. 백리강의 입가에 한 줄기 희미한 조소가 피어 올랐다. "후후…… 지옥이혼대법도 한 번이면 족하다." 그는 소매 속에서 한 자루 묵빛 검을 꺼냈다. 아! 그것은 바로 마교 대지존의 신물(信物)인 묵류혼(墨流魂), 그것이 아닌가? "영원히 구천으로 돌아가라!" 다음 순간, 번---- 쩍----! 묵류혼이 빛살처럼 백리강의 손을 떠나 쏘아졌다. 파---- 악! 묵류혼은 그대로 금사후의 정수리를 꿰뚫고 깊숙이 박혔다. 부르르…… 이미 죽은 금사후의 시신이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하나 그것도 잠시 뿐 금사후의 시신은 괴음과 함께 한 구 백골(白骨)로 화해버렸다. 이제야 그는 완전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백리강은 잠시 그 몰골을 보다가 묵류혼을 뽑아 다시 갈무리했다. 이어 장내를 둘러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정리되었군!) 이때 불사천령강시들은 마치 백리강의 명령을 기다리듯 우뚝 서 있었다. (불사천령강시…… 진정 무서운 위력을 지녔다. 만일 저것들이 음무극에 의해 지옥부수 중에 들어 갔다면……)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질 일이었다. 백리강은 이내 불쑥 한 마디를 내뱉았다.


"너희들은 잠시 기다려라." 이어 그는 망연자실해 있는 불광신승에게 다가갔다. "대사, 오랜만이오." 불광신승은 퍼뜩 정신을 추스르며 적이 반색을 했다. "종리시주, 그동안 시주를 얼마나 찾았는지 아시오?" 그는 아직도 백리강을 종리단목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백리강은 씨익 신비한 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종리단목이 아니오. 마교의 대지존인 백리강이 바로 나요." "……?" 불광신승은 아연경악하고 말았다. "후후…… 그때 서래산에서 본 종리단목은 사실은 나였소." 불광신승은 그제야 무엇을 깨달은 듯 흠칫 안색을 굳혔다. 백리강은 정색을 떠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가서 서하군주에게 전하시오. 천룡단의 힘으로는 지옥부와 혈극천을 쳐부술 수 없다고……" "……!" "그들은 나 백리강이 처리할 것이오. 공연히 참견해서 일을 번거롭게 만들지 말라고 하시오." 실로 무서운 기도(氣道)였다. 우내오천의 한 명인 불광신승조차 숨통이 꽉 막히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의 노구에 잔경련이 스쳤다. 하나 그가 채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백리강은 찬바람이 일도록 신형을 돌리고 있었다. "가자." 그의 일성이 떨어지자 불사천령강시들이 그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깐!" 불광신승이 다급히 그를 불렀다. "시주는 여의성(如意城)의 후예가 맞소?" 백리강이 고개를 돌리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천존마제의 후인이오. 하나 여의존자 그분과도 약간의 관계는 있소." 말을 마친 백리강은 한 마리 야조처럼 허공으로 도약했다. 그의 모습은 불사천령강시들과 함께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불광신승은 멍하니 서있다 불현듯 긴 탄식을 불어냈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그는 암울한 눈빛으로 주위에 널려있는 시신들을 훑어보았다. 짙은 피비린내가 그의 코를 자극했다. 불광신승은 모든걸 토하고 싶었다. 불도(佛道)에 평생을 몸바쳐온 그로선 상상도 못했던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곤 천근같은 발걸음을 천천히 떼어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6 주여설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차분했다. 워낙 생각이 깊고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녀였기에 겉 모습만으로 심중의 생각을 읽기는 무척 어려웠다. 그렇기에 지금 그녀를 바라보는 백향희의 마음은 왠지 초조함으로 가득했다. 주여설이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가 너의 정체를 알고도 그냥 놔주었단 말이지?" 백향희는 창백한 얼굴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네, 그러하옵니다." "이유는……?" "서로의 존재에 대해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가 그런 조건을 내걸었을까? 간단하게 널 제거하면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을……" 백향희는 더 이상 대답할 말을 잊었다. 주여설은 신비한 광채를 담은 봉목으로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이어 그녀는 다시 낮은 옥음을 발했다. "불광대사의 말에 의하면 이미 천금마옥이 그의 수중에 들어 갔다는데…… 너는 그가 누군지 아느냐?" 백향희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마교의 대지존인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맞다! 바로 그다." "……" "그는 결코 정도인(正道人)이 아니야. 또한 그는 얼마 전 종리단목으로 변신하여 나의 비밀을 파악해 가기도 했다." 주여설의 음성은 매우 느려졌고 또한 약간의 노기마저 담겨져 있었다. 백향희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몇번인가 그녀의 두 눈빛이 갈등을 일으키며 변화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고개를 들며 신중히 입술을 열었다. "소녀가 군주님께 한 말씀 드려도 되겠는지요?" "말해보아라." "백리 공자…… 그분은 비록 마교의 대지존이나 중원에 혈겁을 일으킬 분 같지는 않았사옵니다." "향희!" 주여설이 싸늘한 일성을 발했다. "네, 군주님." "그에게 빠졌구나!" "……!" "너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를 사랑하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야." "……" 백향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수그렸다. 그녀 역시 자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하나 그런 내 마음과 그분이 악인이 아니라는 것과는 상관이 없어. 그분은 절대 혈겁을 일으킬 분이 아니었어!) 그러나 백향희는 차마 자신의 그런 마음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렇듯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자 주여설은 홀연 긴 탄식을 불어냈다. "그만 나가 있거라." "……!" 백향희는 적이 그늘진 얼굴로 주여설을 조심스레 응시했다. 하나 곧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그녀가 정실을 나가자 주여설은 곧 깊은 상념에 빠져 들었다. (그때 그는 전력을 다해 비무한 것이 아니었어…… 그는 분명 나보다 강하다!) 그녀의 아미에 그늘이 내렸다. (물론 그는 혈겁을 일으킬 인물이 아니야. 과거 천존마제가 그랬듯이 진정한 마도(魔道)를 추구하는 인물일 뿐…… 하나 그렇다한들 마도는 결국 마도 아닌가?) 그녀의 옥용에 한 줄기 고뇌의 빛이 떠올랐다. 그녀가 깊은 상념에 잠겨있을 때 청아한 음성의 그녀를 깨웠다.


"언니." 주여설은 퍼뜩 정신을 수습하며 눈을 떴다. 정실문을 들어서고 있는 주상아의 모습이 보였다. 꽃같던 주상아의 모습은 오늘따라 왠지 몹시 수척해 보였다. 주여설은 염려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상아…… 네가 웬일로……?" "언니에게 상의할 일이 있어서야." 주상아는 주여설과 마주 앉았다. 이어 잠시 머뭇거리더니 앵도 입술을 꼭 깨물며 입을 열었다. "종리…… 아니 백리공자 때문에……" "……!" 주여설은 또다시 흠칫 옥용을 굳혔다. (이 아이까지도…… 그를……?) 그녀는 내심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대체…… 그의 어디가 그토록 매력이 있길래……!) 그녀는 곧 쓴 고소를 머금으며 주상아를 향했다. "말해 보아라, 상아야!" "언니." 주상아는 용기를 얻은 듯 야무지게 입술을 떼었다. "백리공자와 손을 잡아요. 지금은 그분의 힘이 필요할 때예요." 그 말에 주여설의 안색이 석고처럼 굳어졌다. 자신을 약하게 평가하는 듯한 주상아의 말투에 자존심이 흔들린 것이다. 서하군주 주여설! 그녀는 기실 자신의 무공은 물론 자신의 세력 천룡단에 크나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 백리강, 그에 의해 그 자부심은 여지없이 꺾여 버리지 않았던가? 한데 이제 주상아마저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주여설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주상아를 향했다. "상아야, 이것은 나의 일이다.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야." "언니……" 주상아가 안타까운 음성을 발했으나 주여설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번 일에 개인의 감정을 개입시키기는 싫다. 모두가 중원 천하를 위한 일이니 그리 알고 물러 가거라." 주상아는 정색을 하며 다가 앉았다. "그렇다면 더욱 더 그분과 손을 잡아야 해." "상아야." "아니야. 언니는 뭔가 착각하고 있어. 현 천룡단의 세력으로는 결코 혈극천과 지옥부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언니 자신이 잘 알잖아? 언니가 만약 그 분과 손을 잡지 않는다면 천룡단은 끝내 멸화하고 말거야. 또한…… 중원천하 역시……!" 주상아 그녀의 말은 확실히 근거있고 타당한 논리였다. ���나 주여설은 어두운 신색으로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상아야! 네가 아무리 그를 높이 평가한들 그는 결국 마도인이다." "……" "이리를 잡으려고 호랑이를 끌어 들인다면…… 그 결과는 더 안좋을 뿐이야." 하나 주상아는 완강히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그 분은 절대 호랑이가 아니야. 언니도 잘 알잖아?"


주여설의 옥용이 차갑게 굳었다. "그만 나가 있거라. 더 이상 너와 다투고 싶지 않다." 주상아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하나 그녀는 이내 화가 난 음성으로 야무지게 입술을 열었다. "언니는 지금 그 분에게 위축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해. 그렇지 않고야……" "상아!" "언니는 원래 어려서부터 남다른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어. 그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오만한 자존심을! 그렇기 때문에 지금 언니는 아닌줄 알면서도 만용을 부리는거야." 찰나, "닥쳐!" 싸늘한 일성과 함께 돌연 한소리 격타음이 일었다. 주여설이 주상아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주상아의 뺨은 금시 빨갛게 부어 올랐다. "흑……!" 주상아는 얼굴을 감싸 안으며 후다닥 정실을 나가버렸다. 주여설은 망연히 주상아가 사라진 곳을 응시했다. 이어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길게 탄식했다. 그녀는 자리에 앉으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검선생, 들어 오세요." 그러자 그녀 앞에 한 청수한 노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바로 검선생 엽장청이었다. 그는 곧 주여설을 향해 정중히 예를 취했다. "군주님을 뵙습니다." 주여설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중히 입을 열었다. "검선생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요?" "……!" "과연…… 제가 잘못 생각한 것일까요?" 검선생 엽장청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 "……?" "객관적인 판단으로는…… 분명히 천룡단이 지옥부나 혈극천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이 상태로는…… 더 이상 천룡단이 버텨 나가지 못합니다." "그럼……?" 엽장청은 다시 엄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 동안 조사한 바에 의하면 현 마교의 대지존인 백리강은 마도인이기는 하나 진정한 마웅(魔雄)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그는…… 마중정(魔中正)의 인물이지요." 주여설이 적이 곤혹스런 얼굴로 엽장청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검선생은…… 소녀가 어떻게 했으면 좋다는 말씀인가요?" 엽장청은 엄중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군주께서 결정하실 문제일 뿐…… 노부는 군주의 뜻을 따를 수밖에는 없습니다." "……!" 주여설은 멍하니 탁자 위의 황촉을 응시했다. "후우……!"


그녀의 꽃잎같은 입술이 벌어지며 고뇌짙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이어 복잡한 눈길을 엽장천에게 주었다. "검선생." "말씀하십시오! 군주." "백리강 그에게 서찰을 보내세요. 본 군주와 손을 잡자고……" 엽장청의 노안 그득 반색이 떠올랐다. "훌륭하신 결단입니다. 곧 연락을 취하도록 하지요." 주여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 이만 쉬고 싶으니 나가 보세요." "알겠습니다.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엽장천은 나타났을 때처럼 소리 없이 모습을 감추었다. 주여설, 왠지 그녀는 여전히 그늘진 표정이었다. (과연…… 잘한 결정일까?) 그러했다. 그녀는 아직도 미심쩍은 것이다. 불현듯 그녀의 두 눈에 백리강의 늠연한 모습이 스쳤다. 하나 주여설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후우……" 다음날 아침, 진무왕가(震武王家) 깊숙한 곳에서 한 마리 전서구가 날아 올랐다. 전서구는 맑게 개인 하늘을 힘차게 비상해 갔다. 그것은 장차 무림 판도를 바꿔놓을 중대한 의미의 비상(飛翔), 바로 그것이었다. 제 24 장 魔敎戰王의 傳說 1 황촉불 아래에서 백리강의 얼굴은 짙은 음영을 드리운 채 그린 듯 뚜렷한 윤곽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지금 뭔가 골똘한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의 맞은편 의자엔 섬연한 체구를 지닌 미모의 여인이 한참 수를 놓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여인(女人), 마치 활짝 핀 장미처럼 눈부신 미모를 지닌 그녀는 바로 목소홍이었다. 세월은 목소홍에게 일단의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순진하고 깜찍한 소녀가 어느새 성숙한 여인으로 변해있는 것이다. 지금 그녀는 새로 만든 백리강의 옷 위에 열심히 수를 놓고있었다. 백리강은 이때 탁자 위에 중원지도를 펴놓은 채 골똘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무언가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때 목소홍이 문득 손을 멈추고 백리강을 정겨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번…… 일은 무척 어려운 모양이군요?" 백리강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며 싱긋 웃었다. "왜…… 그렇게 보이느냐?" 목소홍은 은은히 얼굴을 붉혔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 백리강은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미…… 주여설에게 회답을 보냈다. 천룡단과 마교는 이제 합쳐진 셈이지. 또한 지옥부의 총단 위치 역시 알아냈다. 남은 것은 누가 이기느냐 하는 승부 뿐……" 백리강은 펼쳐 놓았던 중원지도를 접어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내일 아침…… 우리는 지옥부 총단을 총공격할 것이다."


백리강의 두 눈이 불같은 신광을 뿜어냈다. "승률은 백(百)……! 반드시 우리가 이긴다! 지옥부를 일거에 쓸어 버리고 말것이다!" 그의 전신에선 이 순간 누구도 항거치 못할 가공할 기도가 뻗치고 있었다. 가히 일대 종사다운 풍도가 아닐 수 없다. 목소홍은 한동안 그의 모습을 눈부신 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 문득 그녀는 생각난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 백리강은 다시 상념에서 깨어나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자 목소홍은 부끄러운 듯 수줍게 수중의 옷을 내밀었다. "출정 때 이 옷을…… 입으세요." 백리강은 뜻밖인 듯 눈빛을 빛내며 그녀가 내민 옷을 받아 들었다. 그것은 흑의로 가슴에 금실로 단 두 글자가 수놓여 있었다. <전왕(戰王).> 백리강의 고개가 갸우뚱했다. "전왕? 이게 무슨 뜻이지?" 목소홍이 수줍게 웃었다. "그건 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마교의 전설이예요. 언제고 마교의 후예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 나올 것이라고 했어요. 삼태혈성을 지니고 이 세상 무엇보다도 강력한 힘을 지닌 그런 사람이 말이예요…… 마교에선 그 전설의 인물을 칭하여 마교전왕(魔敎戰王)이라고 불렀어요." "……" "마교의 제자들은 바로 대지존이 전설의 마교전왕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들에게 있어 대지존은 신과 같은 존재죠." "마교전왕이라…… 아무래도 너무 날 높이 평가하는 것 같군. 하여간 그동안 열심히 만든 옷이 바로 내 것이었다니 고맙다! 소홍." 목소홍은 기쁜 얼굴로 발그레 홍조를 띄웠다. 이어 그녀는 적이 망설이는 듯하다가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그동안 대지존의 마음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어요." "……!" 목소홍은 백리강이 빤히 응시하자 홍조띤 얼굴을 푹 떨구었다. 그리고는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수줍게 입을 여는 것이다. "그때 마교 내에서 그 일…… 대지존께서 왜…… 소녀를 거부하셨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그녀는 사 년 전 일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은 실로 꼭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소홍……!" 백리강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뜨거운 기운을 느꼈다. 목소홍은 살며시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꼭…… 이기세요. 기다리고 있겠어요." "……!" 백리강은 스르르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두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소홍, 오늘 따라 더욱 아름답구나." "……!" 목소홍, 그녀는 흡사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아…… 름답다고……? 내가……) 그녀의 옥용이 사르르 붉어지고 두 눈은 꿈꾸듯 몽롱한 빛을 발했다.


(아아…… 대지존께서…… 나를……) 그러나 그녀의 상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백리강의 입술이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덮쳐 버린 것이다. (아아……) 입맞춤은 길고도 길었다. 목소홍은 전신에 힘이 모조리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매달려야 했다. 그녀의 백사(白蛇)같은 두 팔이 백리강의 목을 휘감았다. 백리강은 가슴에 와닿은 뭉클한 감촉을 느꼈다. 그것은 사내의 가슴에 불을 당기기에 충분했다. "소홍……" 백리강의 입술은 미끄러지듯 목소홍의 목덜미께로 내려갔다. "아아……" 목소홍은 마치 전신이 불구덩이 속에 든 듯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에 빠졌다. 백리강의 손길은 자연스레 목소홍의 가슴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손이 그녀의 옷깃 사이로 스며들어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더듬고 있었다. 목소홍의 전신에서 잔경련이 일었다. 그녀의 두 팔은 더욱 힘껏 백리강의 목을 끌어 안았다. 그것은 보다 적극적인 유혹의 발로였다. 사방에 켜놓은 황촉불이 신이 난 듯 밝게 타오르고 실내는 뜨거운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남(男)과 여(女)는 어느새 알몸이 되었다. 뜨거운 열정(熱情)과 목마른 갈증으로 그들의 알몸은 뒤엉켜 있었다. 사내는 적극적이되 결코 서두르지 않고 여체의 구석구석에 불꽃을 당겼다. 그때마다 여체는 물고기처럼 파닥이며 환희에 찬 신음을 토했다. 한데 어느 순간이었을까? 춤추던 불꽃이 일시에 정지하고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실내에 충만했다. 그리고 한 순간 찢어지는 듯한 비명성이 실내의 공기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멎었던 불꽃은 다시 화려하게 타오르며 일렁이기 시작했다. 대출정을 하루 앞둔 이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2 휘이---- 이---- 잉---바람(風), 겨울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듯 불어오는 바람은 벌써부터 옷깃을 여미게 하는 스산한 삭풍이었다. 한데 언제부터인가? 세 사람, 불어오는 바람을 가슴에 안고 거칠고 험한 봉우리 정상에 우뚝 서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백리강이었고 다른 두 명은 각기 청의(靑衣)와 흑의(黑衣)를 걸친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었다. 지옥파천도 담대혈궁. 만독마존 장손천우. 바로 마교 사태상(四太上) 중의 두 사람이었다. 백리강은 담대혈궁에게 눈길을 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담대노인, 준비는 모두 끝났소?" 담대혈궁은 음침하게, 하나 예의를 갖춘 공손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십팔마궁주 중 십 이 명과 본교의 고수 이만(二萬) 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음……" "명령만 내리십시오. 지옥부 정도는 일거에 싹 쓸어버리겠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지옥부를 쓸어버리다니…… 그렇다. 백리강은 지옥부를 공격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광서(廣西) 땅의 거칠고 험한 이 대명산(大明山)에---"……" 백리강은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비라도 오려는지 시꺼먼 먹장구름이 머리 위로 낮게 깔려 있었다. 담대혈궁은 독사 눈을 음산하게 빛내며 말했다. "싸움을 하기에 아주 좋은 날씨입니다." 백리강은 빙그레 미소하며 그를 응시했다. "어쨌든 이번 일은 담대노인의 수고가 많았소. 아무도 알지 못하는 지옥부의 위치를 알아냈으니 말이오." 담대혈궁은 비릿한 조소를 떠올리며 말을 받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무척 쉬운 일이었습니다. 금사후 그 놈이 키우던 전서구를 제가 키우던 독수리가 추적해갔던 것이니까요." "음……" "하나…… 이놈들이 이토록 험악하고 음습한 곳에 위치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오오…… 그렇다면 지옥부는 이 대명산 어디엔가 있다는 말인가? 문득 백리강은 장손천우에게 시선을 옮겨갔다. "장손노인, 서문빙천 쪽은 어떻소?" 장손우는 공손히 대답했다. "그는 아직도 천룡단과 계속 대치 상태입니다. 하나 아마도 천룡단이 얼마간 이상은 버티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음……" 백리강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물었다. "서문빙천을 어떻게 보시오?" "강한 고수입니다. 하나 너무 성급한 것이 단점입니다. 특히……"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는 자신의 수하인 사천공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최악의 단점입니다." "음……" 백리강은 나직이 침음하며 눈빛을 깊숙이 가라 앉혔다. (주여설…… 비록 열세라고는 하나 어느 정도는 혈극천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이에 우리는 지옥부를 궤멸시키고 빠른 시간 안에 주여설과 합류해야 한다!) 그는 생각을 정리한 다음 다시 담대혈궁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담대노인" "말씀하십시오." "정확히 세 시진 후 공격 명령을 내리시오." "존명!" 대답이 끝나는가 했더니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백리강의 시선이 장손천우를 향했다. "장손노인!" "말씀하십시오." "본교의 이만(二萬) 제자들로 대명산을 철통같이 포위하게 하여 지옥부의 단 한 명도 살아나가지 못하도록 하시오."


순간 장손천우의 눈빛이 짧게 흔들렸다. 백리강은 마지막 쐐기를 박듯 단호한 어조로 말을 끝맺었다. "이번 일에 추호의 차질도 없도록 하시오." 장손천우는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명심하겠습니다." 스슷…… 그가 허리를 편 것과 그의 모습이 산봉에서 사라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 백리강은 천천히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비(雨)는 머지않아 곧 쏟아질 기세였다. 3 두두두두…… 협곡(陜谷), 대명산의 어느 협곡을 질풍처럼 달려가는 일진의 기마대가 있었다. 그 숫자는 대충 백여 명, 두 눈만 빼놓고 전신이 온통 먹빛 장포로 가려진 이들은 바로 지옥백팔도객이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한 명도 남김없이 몰살한 지옥백팔도객이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서 움직이다니…… 한데 맨 앞을 달려가는 인물은 또 누군가? 아무리 눈을 부비고 보아도 그는 틀림없이 금사후였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인가? 이미 죽은 자들이 이렇듯 시퍼렇게 살아 움직일 수가 있는건가? 아니다. 설사 신(神)이라 할지라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두두두두두…… 달린다. 그들은 대명산 전역을 뒤흔들며 미친 듯이 달려갈 뿐이었다. 그들이 십여 개의 협곡을 거침없이 통과했을 때였다. 돌연 협곡이 확 트이며 전면에 거대한 분지가 드러났다. 한데 이럴 수가! 하늘 아래 어찌 이렇듯 어둡고 음습한 곳이 존재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곳은 빛이 없는 세상이었다. 티끌 만큼의 빛도 찾아 볼 수 없는 완벽한 어둠의 세계였다. 뭉클…… 뭉클…… 먹물같은 흑무는 어디선가 끊임없이 흘러나와 어둠을 더해가고 하늘과 땅을 온통 뒤덮은 흑무에는 음습한 기운이 칙칙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오오…… 그렇다. 지옥부(地���府)----! 바로 그 지옥부가 있는 곳이기에 그토록 어둡고 음습한 것이었다. "……!" 금사후, 그는 더 나아가지 않고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칠흑같은 어둠 속, 그곳에 한 채의 거대무비한 전각이 괴물처럼 자리해 있는 것이 금사후의 동공에 맺혀져 있었다. 문득 금사후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냉소가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이곳이 바로 지옥부……) 그의 눈빛이 음산하게 번뜩였다.


(후후후…… 앞으로 일각 후…… 모조리 쓸어주마!) 그는 천천히 말을 몰기 시작했다. 따가닥…… 따가닥…… 그 뒤를 지옥백팔도객은 유령(幽靈)처럼 따라가고 있었다. 이윽고 금사후가 전각 앞에 당도했을 때였다. 돌연 전각 안에서 한소리 짤막한 외침이 일었다. "금군사께서 돌아오셨다. 문을 열어드려라." 순간, 쿠구구궁…… 육중한 대문이 웅장한 소리와 함께 활짝 열렸다. "……" 금사후는 느릿하게 전각 안으로 말을 몰았다. 그때 문득 금사후의 이마에 한 방울의 물이 떨어졌다. 빗방울이었다. 투둑…… 툭…… 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이곳에도 비는 내리나보다. 일순 금사후의 눈 깊숙한 곳에 한 줄기 스산한 광채가 스쳐 지나 갔다. (잘됐군. 빗속에서 모조리 고혼이 되게 생겼으니……) 후두둑…… 후두두둑…… 폭우(暴雨)가 되려나? 빗방울이 급격히 굵어지며 드세지기 시작했다. 4 지옥부주, 그는 세 명의 인물과 탁자를 사이에 두고 깊은 숙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천(天). 지(地). 인(人). 각자 가슴에 그런 글씨가 수놓아진 음침한 인상의 삼인(三人). 그들은 이른바 지옥부 최고의 고수로 일컬어지는 지옥삼마(地獄三魔)였다. 천마(天魔) 축천궁(祝天弓). 지마(地魔) 축천세(祝天世). 인마(人魔) 축천륭(祝天隆). 가슴의 글씨는 바로 그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워낙 판에 박은 듯 똑같이 생긴 얼굴들이라 가슴에 쓰여진 글씨가 아니곤 누구라도 식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숙의는 이제 거의 결론에 도달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었다." 지옥부주는 지옥삼마를 둘러보며 음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혈극천과 천룡단의 싸움은 곧 끝난다. 천룡단이 강하다지만 혈극천의 적수는 아니다. 조만간 천룡단은 붕괴될 것이다." "……"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얼마 전 마교가 동정호의 군산을 떠나 북상 중이라고 한다. 예측대로라면 그들은 반드시 혈극천과 충돌할 것이다. 마교와 혈극천…… 매우 흥미있는 싸움이 될 것이다……" "……"


"놈들은 우리 지옥부의 움직임은 조금도 모르고 있다. 하기야 지옥부의 위치조차 모르는 놈들이 우리의 움직임을 알 리가 만무하지만 말이다." 이때 묵묵히 듣고있던 천마 축천궁의 입술이 떼어졌다. "그럼 이제부터 부주님은 어떻게 행동하실 것입니까?" "보름 후 이곳을 떠난다." 지옥부주는 눈빛을 사이하게 번뜩이며 이어 말했다. "그런 연후에 혈극천과 마교와의 싸움 결과를 기다린다." "그럼……?" "누가 이기든 그 피해는 엄청날 것이다. 최소한 절반 이상의 전력 손실이 올 것이다. 우리가 노리는 건 바로 그것이다." 지옥삼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지옥부주는 잠시 침묵하더니 깊숙이 가라앉은 음성을 흘려냈다. "모든 것은 금사후가 천금마옥에서 돌아오는 보름 후부터 시작한다." 이때 문 밖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부주님께 아룁니다." 지옥부주의 시선이 느릿하게 문쪽을 향했다.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한 육순 가량의 노인이 들어섰다. 음침한 인상에 눈이 하나 뿐인 독목노인(獨目老人)이었다. "무슨 일이냐?" 지옥부주의 물음에 독목노인은 깊숙이 부복하며 공손히 대답했다. "조금 전 금군사께서 지옥백팔도객과 함께 돌아오셨습니다." 지옥부주의 눈빛이 일순간에 정지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 그 빛이 곤혹과 불신으로 변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금사후가……돌아왔다고?" 독목노인의 어깨가 왠지 움츠러들었다. "그…… 그렇사옵…… 니다……" "지옥백팔도객과 함께……?" "예……" "지금쯤 천금마옥에 도착했을 금사후가…… 이곳 지옥부로 돌아와……?" "하지만…… 분명 금군사님이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지옥부주는 싸늘한 냉갈을 터뜨리다 말고 돌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 설마……?" 그는 급히 독목노인을 향해 물었다. "문을 열어 주었느냐?" 그의 어조에서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은 듯 독목노인은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 그렇습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독목노인은 가볍게 몸을 떨며 황망히 대답했다. "지…… 지옥천에……" 지옥부주의 몸에 태풍같은 경련이 일어났다. "멍청한 것!" 지옥부주는 노갈을 터뜨리며 냅다 일장을 내갈겼다. "으악!"


독목노인은 피분수를 칠공으로 내뿜으며 펄쩍 튀어 올랐다가 멀찌감치 나가 떨어졌다. 더 볼 것도 없이 즉사였다. 지옥부주는 급히 지옥삼마들을 돌아보았다. "삼마(三魔), 어서 가서 막아라. 지옥전에는 우리가 쓸 백 팔십만 근의 화약이……" 한데, 말도 다 끝나기 전이었다. 꽝----! 돌연 천지를 무너뜨릴 듯한 엄청난 굉음이 멀지 않은 곳에서 터져 나왔다. 순간 지옥부주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이…… 이건……" 쿠콰콰콰쾅----! 또 한 차례의 천번지복할 굉음이 터져나옴과 동시에 지옥부주가 딛고 있는 땅이 소리내어 뒤흔들렸다. "이…… 이럴 수가!" 지옥부주의 전신에 한 차례 격렬한 진동이 일었다. 다음 순간 그는 미친 듯이 밖으로 신형을 쏘아갔다. 5 쏴아---- 아---- 아----! 쏴쏴쏴! 비(雨), 장대같은 폭우(暴雨)가 미친 듯이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 천지를 집어삼킬 듯한 불기둥이 지옥부의 중심에서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치고 있었다. 꽈꽈꽈꽝! 꽈르르르르릉! 지옥부(地獄府)! 그 이름 그대로 온통 불바다의 지옥으로 변해있었다. 지옥부주는 사방을 둘러보며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지옥부 전체가 불타고 있었다. 그 엄청난 폭발 속에서 몇명이나 생존자가 있는진 생각하기도 끔찍했다. "이…… 이럴 수가……" 그는 한 차례 크게 비틀거리며 신음하듯 뇌까렸다. 그때였다. 슈우우우…… 퍼퍼퍼펑! 펑! 오색찬란한 폭죽이 밤 하늘에서 화려하게 폭발하는가 했더니 하늘이라도 허물어뜨릴 듯한 함성이 사방에서 터졌다. "와아----!" "죽여라! 지옥부의 씨를 말려라!" 동시에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인영이 사방에서 노도처럼 쏟아져 나왔다. 일률적인 흑의차림에 가슴에는 각자 마(魔)라는 글자가 수놓여 있었다. "마…… 마교!" 지옥부주의 눈이 더할 수 없이 확대되며 격렬한 진동이 전신을 태풍처럼 휩쓸었다. 하나 그는 이내 신형을 추스르며 치떨리는 음성을 씹어뱉듯 내뱉았다. "당했다……! 마교의 백리강 그놈에게……" 일시에 대해(大海)라도 뒤집을 듯한 무서운 기운이 그의 전신에서 폭풍처럼 쏟아져 나왔다. 쏴아---- 아---- 아----! 쏴쏴쏴쏴쏴……


하늘에선 폭우(暴雨), 땅에선 혈우(血雨)…… 이 땅에서 가장 처참한 대살륙이 지옥부의 땅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불사천령강시, 지옥백팔도객을 위장하고 백리강과 함께 지옥부로 침투한 그들은 눈 앞에 보이는 지옥부의 고수들을 닥치는대로 죽이고 무너뜨렸다. 죽일 수도 없지만 죽지도 않는 괴물들이 바로 불사천령강시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마령칠십이참혼대! 이 잔인한 죽음의 집행자들은 때를 만난 듯 광란하고 있었다. 실로 환상처럼 움직이며 눈부시게 활약하는 그들 마령칠십이참혼대였다. 뿐이랴? 아무데서고 노도처럼 쏟아져 나오는 저 마교의 정예들은 어떠한가? 살인 방면에 있어선 누구에게도 뒤지기 싫어하는 그들이 아닌가? "으아아악!" "크---- 악!" 분명히 지옥부는 무너지고 있었다. 원래 이렇듯 허무하게 무너질 지옥부는 아니었다. 하나 기습이 치명타였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서 고스란히 날벼락을 맞은 것이었다. 또한 두 번째 결정적 원인은 불사천령강시들 때문이었다. 그들의 무서운 위력에 지옥부의 고수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내노라 하는 지옥부의 일급고수들도 일단 불사천령강시에게 걸리면 죽는 일밖에 할 일이 없었다. 완전히 끝장을 보겠다는 하늘의 뜻이련가? 쏴아---- 아---- 아---- 아----! 폭우는 갈수록 격렬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마치 지옥부의 붕괴에 덩달아 신이라도 난 것처럼…… 6 지옥부주는 이 순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미친 듯이 움직이며 닥치는 대로 마교 고수들을 죽였다. 얼마나 많은 마교의 고수들이 그의 손에 죽었는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 그의 육신은 이미 피로 완전히 젖어있었다. "크흐흐……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그는 마치 짐승같은 괴소를 터뜨리며 쌍장을 쉴새없이 맹렬하게 뻗어냈다. 여섯명의 머리가 일격에 수박처럼 깨졌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 땅바닥에 고꾸라지기도 전에 다시 네 명의 몸이 풍선처럼 터지며 피보라가 난무했다. 실로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하나 상대는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죽이고 또 죽여도 끝이 없는 것이었다. 한데 어느 순간이었을까? 스스스스…… 지옥부주의 주위로 핏빛 인영들이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며 몰려 들었다. 바로 불사천령강시들이었다. 지옥부주의 곁에 있던 지옥삼마 중 인마 축천륭의 입에서 한소리 폭갈이 터졌다. "이놈들! 모조리 죽여주마!" 동시에 그의 신형이 한 불사천령강시를 향해 빛살처럼 쏘아져 갔다. 꽈꽝! 인마 축천륭의 쌍장은 여지없이 불사천령강시의 가슴에서 작렬했다. 격전이 시작된 이후 그런 식으로 이 백여 명의 심장을 터트린 그였다.


한데 이번에는 상황이 완전히 딴판이었다. 심장이 터지기는 커녕 불사천령강시는 끄덕도 안하며 오히려 양손으로 축천륭의 머리를 사정없이 찍어갔다. "헉!" 축천륭은 뜻하지 않던 사태에 까무라칠 듯 놀랐다. 상대가 자신의 일장을 정통으로 맞고도 움직이리라곤 생각조차 안했던 터라 그는 미처 피할 자세조차 갖추지 못했다. 뿌지직! 끔찍했다. 불사천령강시의 두 손이 하나로 합장되며 축천륭의 머리통이 두부처럼 으스러진 것이다. 순간 지옥부주의 입에서 짤막한 경악성이 터졌다. "불사천령강시!" 천마 축천궁과 지마 축천세는 그 말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는 순간에도 불사천령강시는 흐느적거리며 계속 지옥부주 등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숫자가 무려 백여 명! 일순 지옥부주의 눈에서 소름끼치는 광채가 폭사 되었다. "음무극…… 그놈이 마교와 손을 잡았구나!" 천금마옥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그로선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때 지마 축천세의 입에서 별안간 쥐어짜는 듯한 비명이 터졌다. "으---- 악!" 지옥부주의 고개가 지마에게 홱 돌아갔다. 축천세의 정수리 중앙에 별모양의 동전만한 구멍이 뚫린 채 핏줄기가 쭉 뻗어나오고 있었다. 지옥부주의 눈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은하비성백리탄(銀河飛星百里彈)!" 오오…… 아는가? 한 번 시전하면 은빛 고리 형상의 지풍이 끊임없이 발출되고 격중된 곳에는 어김없이 별모양의 자국이 남는 죽음의 지법(指法) 은하비성백리탄(銀河飛星百里彈)을! 축천세의 몸이 맥없이 바닥에 쓰러진 것과 우렁찬 대소가 허공을 뒤흔들며 울려 퍼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으하하하하……" "와핫핫핫……" 다음 순간, 스스슷! 세 줄기 인영이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백리강과 담대혈궁, 장손천우 등 삼인(三人)이었다. 때를 같이해서 신기하게도 주위에서 좁혀들던 불사천령강시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지옥부주는 백리강 등 삼 인을 빠르게 쓸어보며 말했다. "네놈들은……?" 백리강이 천천히 입을 열어 대꾸했다. "마교대지존 백리강이 바로 나다." "……!" 지옥부주의 시선이 칼날처럼 백리강에게 꽂혔다. 그는 놀라지 않았다. 백리강을 보는 순간 그럴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지옥부주는 살을 태울 듯한 분노의 안광을 쏟아내며 부드득 이를 갈았다. "네놈이…… 내 모든 것을 이토록 허무하게 부숴 놓다니……"


백리강은 싸늘하게 말했다. "마교를 무시하고 천하를 넘본 댓가다." "이…… 이……" "오직 마교만이 마도의 진정한 최강자일 뿐…… 혈극천이나 지옥부 따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죽일 놈……!" 지옥부주의 옷자락이 바람도 없는데 찢어질 듯 펄럭였다. 백리강은 문득 음침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지옥부주, 네놈의 목숨은 나 마교대지존이 손수 거두어 주마." "건방진 애송이……!" 지옥부주는 부드득 이를 갈더니 문득 품에서 옥빛 단도를 꺼냈다. 길이는 한 자 가량인데 검자루에서 검신의 끝에 이르기까지 온통 투명한 옥빛을 띠고 있었다. 장손천우의 안색이 미미한 변화를 일으켰다. "수라옥도(修羅玉刀)……!" 이어 그는 백리강을 향해 빠르게 전음을 보냈다. "대지존, 조심하십시오. 저것은 전설의 마도(魔刀)로 불리우는 수라옥도입니다." "……" "놈이 수라옥도를 갖고 있다면 틀림없이 수라삼도(修羅三刀)도 익히고 있을 것입니다." 백리강은 희미하게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간이었다. "마교의 애송이! 죽어랏!" 한소리 폭갈과 함께 지옥부주의 신형이 유성처럼 허공을 갈랐다. 번---- 쩍! 백광(白光)! 마치 태양이 폭발하는 듯 눈부신 광채가 수라옥도에서 일었다. 순간 백리강은 담담하게 웃으며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단지 흔들었을 뿐이건만 일시에 백리강의 신형이 수십 개의 환영(幻影)을 창출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환상의 신법인 은형백변환(隱形百變幻)이었다. 순간, 쿠쾅! 폭음과 함께 백광이 백리강이 서 있던 자리를 강타하며 커다란 웅덩이가 패여졌다. 오오…… 그것을 어찌 도(刀)에서 쏟아져 나온 힘(力)이라 할 수 있으랴! 다음 순간 지옥부주는 그대로 허공에서 신형을 꺾으며 재차 수라옥도를 번뜩였다. "수라마겁(修羅魔劫)!" 쿠쿠쿠쿠…… 마치 햇살같은 백옥빛 광채가 무서운 파공성을 일으키며 백리강에게로 휘몰아쳤다. 같은 순간 백리강은 우수를 가슴 앞에서 한 바퀴 회전시킨 뒤 앞으로 쭉 내뻗었다. "여래팔법의 제칠법 불법무변(佛法無邊)! 불법은 끝이 없으매 그 뜻 또한 누구도 헤아리지 못하도다." 순간, 번---- 쩍! 가공할 묵광(墨光)이 허공을 찢으며 뻗쳐 나갔다. 콰콰쾅! 이 소리를 어찌 인간의 힘이 맞부딪힌 소리라 할 수 있겠는가? 고막을 갈기갈기 찢을 듯한 폭음과 함께 엄청난 경력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동시에 지옥부주의 신형이 허공 중에서 약간 퉁겨 나갔다.


하나 다음 순간 지옥부주는 재차 앞으로 쏘아져 가며 벼락같은 일갈을 터뜨렸다. "아수라의 혼(魂)이 모두 여기에 모여있다! 수라멸천(修羅滅天)!" 순간, 오오…… 보라! 일시에 하늘을 뒤덮으며 쏘아져 내려오는 수백 개의 아수라악마상을! 콰콰콰콰! 그것은 지옥부주가 뽑아낼 수 있는 최고 최대의 힘이 아수라악마상들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소리였다. 바로 그때다. 마검 묵류혼이 백리강의 수중에 모습을 드러내고 동시에 그리 크다 할 수 없는 짤막한 외침이 그의 입 밖을 떠났다. "표향검우(飄香劍雨)!" - 향기는 바람을 타고 흐르며…… 검(劍)의 비(雨)는 천하를 뒤덮는다. 살인을 예술로까지 승화시킨 단 일식의 살인검초(殺人劍招)! 바로 마검살인십삼예가 아니고 무엇이랴! "……!" 지옥부주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다만 자신이 펼쳐낸 아수라악마상의 모습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사라졌다고 느낀 순간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불로 지지는 듯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것이 곧 자신의 몸뚱이가 반으로 쪼개지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두 동강난 그의 시체가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내리 꽂혔다. 지옥부주,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그의 죽음이었다. 때를 같이해서, "으---- 악!" 어디선가 처절한 비명이 허공을 떨어 울렸다. 천마 축천궁이 담대혈궁의 지옥파천도에 의해 이승을 하직하는 비명이었다. "……" 백리강은 어느새 마검 묵류혼을 품에 넣고 느릿하게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거의 끝나가는군." 승리를 쟁취했기 때문일까? 극히 잔잔한 미소 한 줄기가 그의 입가로 소리없이 번져 나왔다. …… 싸움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폭우가 거의 잦아들 무렵, 스스슷! 한 인영이 백리강의 면전에 뚝 떨어져 내렸다. 금사후였다. 그는 내려서기 무섭게 백리강을 향해 깊숙한 부복지례를 취했다. "대지존께 아룁니다." 백리강은 잔잔한 미소와 더불어 입을 열었다. "말하라! 성혼." 금사후는 다름 아닌 성혼의 변장한 모습이었다. 성혼은 정중한 어조로 짧게 대답했다. "지옥부 내에 생존자는 없습니다. 몇명이 도주했지만 대명산을 포위한 형제들에 의해 모조리 제거당했습니다."


백리강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 많았다." 이때 장손천우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지존." 백리강은 간단히 대꾸했다. "혈극천과 천룡단이 싸우고 있는 횡산으로 갈 것이오." "……!" 백리강은 문득 신비스런 미소를 지으며 거듭 말했다. "이미 목노와 월노가 본교 고수 이만(二萬)을 대동하여 횡산으로 떠났소. 지금쯤 천금마옥의 조사의, 위지풍과 합류하여 그들 휘하의 오만(五萬) 고수와 함께 혈극천과 싸우고 있을거요." "……!" 백리강의 신비스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 정도면 서문빙천의 세력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오." "……!" 장손천우는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나타냈다. 백리강의 얼굴에서 문득 미소가 사라졌다. "하나 만약 서문일백이 지옥부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혈극천 전체를 움직일 가능성도 크오. 그 전에 우리가 먼저 도착해야 하오." 장손천우는 문득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하오면……?" 백리강은 간단히 힘주어 말했다. "십 일 이내에 천룡단이 있는 횡산까지 도착해야 하오." "불가능합니다. 뛰어난 경공을 지닌 사람이 한시도 쉬지않고 간다면 몰라도…… 하나 인간이 무쇠가 아닌 이상 그럴 순 없습니다." "아니…… 십 일 안으로 분명히 도착할 수 있소." 백리강의 눈빛이 섬뜩하게 변했다. "최소한 그들만큼은……" …… 비(雨), 그토록 사납게 쏟아지던 폭우는 어느샌가 멎어 있었다. 제 25 장 劫爻의 牌 1 중원무림(中原武林)에 일대혈겁(一大血劫)을 예고하는 대풍운의 조짐이 일었다. 그것은 바로 마교(魔敎)의 등장 때문이었다. 천년(千年) 전 천존마제의 실종 후에 사라졌던 마교가 재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천 년 전보다 훨씬 더 거대한 세력을 갖추고…… 천 년 동안 침묵해온 마교(魔敎)의 힘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천금마옥(天禁魔獄)이 마교 대지존에게 단숨에 장악되었다! -지옥부(地獄府)가 깡그리 멸망하고 지옥부주는 단일검에 두 동강이가 나서 죽었다. 이 놀라운 사실들은 속속 중원무림인들의 귀에 전해져 간담을 서 늘케 만들었다. 무림인들은 벼락같은 전율의 충격을 받고 말았다. 동시에 마교의 대지존에게 중원의 모든 이목이 집중되었다. -누구인가?


황실(皇室)조차 손대지 못한 천금마옥을 순식간에 손에 넣은 그자는 대체 누구인가? 악마의 세력 지옥부를 일거에 휩쓸어 버린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이란 말인가? 중원 십팔만리를 뒤덮으며 백리강(百里剛)이란 이름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그의 이름 앞에는 마교전왕(魔敎戰王)이란 칭호가 붙기 시작했다. -마교전왕(魔敎戰王) 백리강(百里剛). 2 북해(北海)의 포극마인산(布克麻刃山)에 자리잡은 천 년 얼음의 빙성(氷城). 뭉클…… 뭉클…… 화로에선 연신 시뻘건 혈무가 피어 오르고 혈무보다 더 짙은 두 줄기 핏빛 섬전이 혈무 속에서 쏘아졌다. 그 무서운 두 눈의 임자는 서문일백이었다. 지금 그의 두 눈은 전면 한곳에 꽂힌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 그의 앞에 위치한 제단 위엔 푸른 빛이 감도는 여덟 개의 서죽(筮竹)이 나란히 꽂혀 있다. 문득 혈무 속의 두 눈빛이 미세히 흔들리며 침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놈이 천금마옥을 장악하고 지옥부까지 멸망시키다니……!" 혈무 전체가 태풍을 만난 듯 흔들렸다. "과거의 예측은 너무나 정확했어. 잠룡이 번개(雷)를 타고 승천(昇天)한 뒤 비룡(飛龍)으로 화했고, 천공을 노닐며 구름(雲)과 비(雨)를 얻는다…… 이것은 바로 천하의 모든 무학을 얻는다는 수집무권(手執武權)의 천품…… 점쾌가 제시한 놈의 운명은 독좌고위(獨坐高位), 만인앙시(萬人仰視), 위이뇌정(威以雷霆)의 고금무적 신위……" 피빛의 안개가 출렁였다. 그 속에서 들려오는 서문일백의 음성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아 갔다. "풍효(風爻)의 패로 놈을 제거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이제 점쾌의 예언대로 놈의 기운이 나의 모든 것을 파괴시키려고 노리고 있다……" 번---- 뜩……! 혈무 밖으로 드러난 두 눈이 짙은 혈광을 내뿜었다. "놈의 능력과 놈의 미래를 알아야 한다. 그것을 통해 놈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얻어야 한다. 단 한 번…… 기회는 단 한 번 뿐이다! 그 한 번의 기회로 놈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 마지막 역전을 노려야 한다." 섬뜩한 중얼거림과 함께 화로에선 더욱 짙디 짙은 혈무가 쏟아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휘리릭! 탁----! 여덟 번째 서죽이 용수철처럼 퉁겨 오르더니 뒤집힌 채 떨어졌다. 찰나 서문일백의 두 눈이 크게 부릅뜨였다. 그 눈은 이어 풍랑치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 겁효(劫爻)의 패……!" 서문일백은 혈무 속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동시에 그는 서죽을 모조리 박살내 버렸다. "이…… 이럴 수가…… 놈이 그렇게까지 강하단 말인가?" 겁효의 패----! 과연, 그것이 무엇이길래 서문일백이 이토록 경악하는가? 서문일백은 두 눈빛을 무섭게 굳히고 있었다. "빙천……! 그 아이가 위험하다! 그 아인 지금…… 놈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번뜩!


그는 심상치 않은 듯 기광을 뿌렸다. "놈이…… 지옥부를 붕괴시키고 열흘 안으로 섬서(陝西)에 도착한다면…… 모든 것은 끝장이다!" 그의 음성은 차츰 불안에 떨려나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이제 사천공 그에게 달렸다. 사천공! 내가 갈 동안 네가 잘해야 한다. 부탁한다. 사천공……!" 다음 순간 서문일백의 신형은 혈무의 소용돌이와 함께 사라졌다. 3 섬서성(陝西省) 횡산(橫山). 산세 험준한 이곳은 바로 정도무림맹인 천룡단(天龍團)이 자리한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반 년 전, 서문빙천이 이끄는 혈극천의 삼만 고수들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넘어 물밀 듯 중원으로 쳐들어 왔었다. 그리고 이곳 횡산에서 천룡단과 밀고 당기는 대치 상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서하군주 주여설과 우내오천을 비롯하여 구파일방이 합친 천룡단 고수들 오만(五萬)은 혈극천의 무리들과 생사를 건 대혈전을 벌였다. 그것은 실로 필설로 표현키 어려운 처참한 싸움이었다. 지난 반 년 간 수천 고수들이 희생 당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 수록 전세는 점차 천룡단이 불리해지기 시작했었다. 혈극천의 승리는 기정사실로 보였다. 하나 그때 누구도 생각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천룡단의 단주인 주여설이 전격적으로 마교의 백리강과 손을 잡은 것이다. 마교의 사태상 중 두 명이 이끄는 마교 고수 이만이 횡산으로 도착했고, 곧이어 천금마옥의 오만 고수가 그들과 합세했다. 그 뿐인가? 녹림대종사인 화운사신 독고령이 이끄는 녹림의 무리 칠천 명도 횡산에서 그들과 합류했다. 아아…… 마침내 중원무림(中原武林)이 힘을 합친 것이다. 정(正)과 사(邪)를 초월해서 그들이 뭉친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전세는 조금씩 뒤바뀌기 시작했다. 하나 그렇다고 중원인들이 우세를 점한건 아니었다. 비록 혈극천이 숫적으론 열세였지만 사천공의 신기막측한 전략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조금도 밀리지 않고 중원무림인들과 격돌했다. 오히려 싸움은 더욱 치열해졌고 희생자는 갈수록 늘어만 갔다. 중원무림의 모든 촉각은 횡산대혈전에 집중되었다. 횡산대혈전의 결과에 따라 중원의 운명이 바뀌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시각, 지옥부를 멸망시킨 백리강과 마교의 전 고수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횡산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4 석실 안에서 두 인물이 마주앉아 있었다. 바로 혈극천의 소천주인 서문빙천과 군사 사천공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매우 침중했다. "……" "……" 긴 침묵이 이어졌지만 누구도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 침묵을 깬건 서문빙천이었다. "지옥부가 그토록 쉽게 무너지다니…… 믿어지지 않는군."


그의 음성은 괴이할 정도로 착 가라앉아 있었다. 바로 한 시진 전에 지옥부의 멸망에 대한 보고를 받은 것이다. 그때 그가 느낀 충격은 실로 심대했다. 지옥부가 멸망했다는 사실이 그를 놀라게 한건 아니다. 단지 지옥부가 그토록 쉽게 붕괴되었다는 사실이 그를 충격의 회오리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분명 뭔가 이유가 있어…… 지옥부가 그렇게 어이없이 붕괴될 리가 없어……" 사천공이 무감동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옥부가 약해서 무너진 건 아닙니다." "그럼……?" "그만큼 마교가 강한 겁니다. 그들은 지난 천년(千年) 간 가공할 힘(力)을 키워 왔습니다. 그 힘의 끝이 어디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서문빙천은 얼음알처럼 투명한 두 눈에 냉광을 떠올렸다. "혈극천보다도…… 강하단 말이오?" 사천공의 신색이 침중해졌다.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 "지옥부를 멸망시킨 이상 마교의 다음 표적은 뻔합니다. 그들은 분명 전 세력을 끌고 이곳으로 오고있을 겁니다." 서문빙천은 적이 안색을 굳혔다. "얼마나 걸릴 것 같소?" 사천공이 잠시 침묵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만약 제가 쉬지 않고 달린다면 열흘 안으로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나 인간이 쉬지 않고 달릴순 없소. 만약 그렇게 달린다면 전신의 모든 기력이 탈진될거요." 사천공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서문빙천의 말이 맞음을 안다. 하나 그럼에도 그는 왠지 열흘이란 숫자가 마음에 걸렸다. 서문빙천이 단정하듯 말했다. "내 예상으론 최소한 보름은 걸릴거요. 오늘이 지옥부가 멸망한 지 십일째니…… 닷새 후쯤 그들이 올거요." 사천공은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 "만약 백리강이 속도를 극으로 낸다면 며칠 단축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서문빙천이 냉소했다. "그래봐야 그놈 한 명 뿐이오. 단 한 명으로 수만 명이 싸우는 이 싸움의 전세를 바꿀 순 없소." "……" "놈들이 아무리 시간을 단축해서 빨리 온들 열이틀은 걸릴거요. 남은 시간은 이틀. 그 전에 전력을 기울여 횡산에 있는 천룡단과 마교의 세력을 붕괴시켜야겠소." 사천공의 두 눈이 번뜩 기광을 뿜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어째서……?" "그 싸움 도중에 백리강이 도착하면 우리는 안팎의 협공을 당하게 됩니다." 서문빙천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놈들은 절대 사흘 안으로 올 수 없소!" 사천공은 안색에 적이 그늘진 표정을 드리웠다.


"소종사…… 대종사께서 오시길 기다립시다." "아버님을……?" "그렇습니다." 서문빙천은 준미한 얼굴을 싸늘히 굳혔다. "나는…… 과거 아버님께 약속했소." "……!"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중원(中原)을 아버님께 바치겠다고……" "……" "반드시 이길 수 있소. 그리고 그 삼 일 내에 백리강 그놈이 온다면 그놈까지 제거해 버리겠소!" 실로 대단한 자부심이 오만스럽도록 그의 얼굴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사천공은 안타깝게 진언했다. "소종사! 그것은 모험입니다." 하나 서문빙천의 결심은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다. "이미 결정은 내려졌소. 사천공께선 모든 준비를 갖추시기만 하면 되는 것이오." "……!" "이만 내 처소로 가보겠소." 이어 서문빙천은 더 이상 의논할 여지도 없다는 듯 자리를 떠났다. 그가 석실을 나가자 사천공은 침음한 탄식을 내뱉았다. 그의 백색 동공은 이때 암울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진정…… 큰일이다. 소종사는 이성을 잃고 있다!) 하나 그가 더 이상 어찌하겠는가? (어쩔 도리가 없다!) 사천공은 재차 탄식을 내뿜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노부는 최선을 다해 소종주를 돕는 계획을 짜는 수밖에……) 불현듯 두 눈에 적이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 (하나…… 만에 하나 싸움 도중에 백리강이 온다면……?) 단 한 마디가 악몽처럼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끝장이다!) 서문빙천, 그는 드디어 혈극천의 전 고수들에게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틀! 그 안으로 모든 걸 끝내지 못하면 그가 오히려 위험하다. 이틀의 도박! 하나 이미 승패의 패는 젖혀지고 있었다. 5 섬서성과 산서성을 연결하는 꽤 넓은 평원. 하늘은 어두컴컴하고 사위는 질식할 듯한 정적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때 저 멀리 평원의 끝에서 자욱이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황진 속에서 일진광풍처럼 사람들이 질주해 오는 것이 보인다. 그것은 실로 무서운 속도였다. 마치 넓은 벌판을 일시에 가로질러 횡단할 듯 그들은 그렇게 빨리 질주하고 있었다. 숫자는 대략 백여 명이 조금 넘어보였다. 누런 먼지로 인해서 그들의 모습은 거의 식별이 어려울 정도로 가려져 있었다. 하나 그들의 두 눈 만큼은 무섭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마치 악마의 불꽃처럼……


한데 그들의 선두에서 누런 먼지를 쓴 채 달리는 그는 누군가? 아아! 그렇다. 아무리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어도 그의 신태 만큼은 가릴 수 없다. 천하를 진압할 듯 놀라운 기세, 그리고 먼지 속에서도 뚜렷이 보이는 수려한 용모, 그는 바로 백리강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르는 자들은 바로 불사천령강시들이었다. 지옥부를 멸망시킨 직후 그는 혈극천과의 최후 승부를 위해 열흘 안으로 횡산에 도착하기로 결심했다. 하나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고수라도 그건 불가능했다. 설사 열흘 안으로 도착한들 모든 진기가 탈진되어 손 하나 움직일 힘조차 없을 것이다. 하나 백리강은 장손천우에게 장담했다. 최소한 그들 만큼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그들……? 그렇다. 그건 바로 불사천령강시를 두고 한 말이었다. 인간의 모습을 했지만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영원히 죽지않는 불사의 강시들, 그렇기에 그들은 지치지도 않는다. 백리강은 불사천령강시를 이용해 혈극천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버 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오늘은 지옥부가 멸망한 지 꼭 십 일째가 되는 날이다. 그리고 백리강은 이미 섬서성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 횡산까진 얼마 남지 않았다. 분명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아아! 이것으로 사천공의 우려는 그대로 적중한 셈이다. 이때, 끼아악! 한소리 괴성이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터져 나오는가 했더니 곧 거대한 독수리 한 마리가 빠른 속도로 백리강을 향해 날아왔다. 순식간에 눈알이라도 파먹을 듯한 가공할 기세였는데 정작 백리강에게 가까이 가서는 급격히 속도를 늦추더니 그의 어깨 위에 사뿐히 내려 앉았다. 백리강은 질주하는 기세를 약간 늦추곤 독수리의 발목을 만져 그곳에 묶여있는 전서통을 풀었다. 그리고 전서통 안에 있는 서찰을 꺼내 읽었다. <서문빙천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목인청.> 백리강의 입가로 섬뜩한 미소가 스쳤다. "열흘을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네가 걸려들지 않으면 내가 얼마나 섭섭하겠느냐?" 그는 뒤를 힐끗 돌아보며 낭랑한 외침을 토해냈다. "전력을 다해 달려라! 오늘 저녁 안으로 횡산에 도착해야 한다!" 제 26 장 血劫終熄 1 황혼(黃昏). 붉은 석양의 잔재가 마치 쇠락한 왕조의 운명처럼 스러져 가고 있었다. 오늘 따라 유난히 일륜의 침몰은 붉고 장엄했다. 그 시각 서문빙천은 사천공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횡산 유운봉(流雲峯)의 정상에 우뚝 서 있었다. "……" "……" 그들 두 사람은 서천(西天)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오랫 동안 말이 없었다. 문득 서문빙천의 입술이 떼어졌다. "사천공!"


사천공의 시선이 느릿하게 서문빙천을 향했다. "말씀하십시오." 서문빙천은 여전히 전방을 응시하며 무겁게 말했다. "모든 것…… 다 잘 될 것이오." 사천공의 눈빛은 여전히 무심했다. "물론입니다." 그의 마음은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오늘 오전 그는 서문빙천의 명을 받들어 혈극천의 모든 고수들에게 총공격의 명령을 내렸다. 결정을 내리기 전이라면 몰라도 일단 결정이 떨어지면 사천공은 더 이상 뒤를 보지 않는다. 뒤를 돌아본다는 건 꺼림직한 마음이 있음이고, 그것은 곧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신만 줄 뿐이다. 이제 그에게 주어진 건 이 싸움을 어떻게 승리로 이끄냐는 것 뿐이었다. 2 수백의 인마(人馬)가 황혼 속으로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다. 맨 앞을 달려가는 인물은 다름아닌 서문일백이었다. 지금 서문일백의 표정은 무겁게 굳어져 있었다. (빙천, 무사해다오. 부디……) 그의 심정은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의 예감이 기우로 끝나기를 바란다만…… 겁효(劫爻)의 패로 보아 그럴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 그래서 그는 이렇듯 혈극천을 떠나왔으며…… 그래서 그는 이렇듯 바람처럼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의 뒤를 쫓는 고수의 숫자는 모두 사백 명. 혈극천위대(血極天偉隊)와 더불어 서문일백이 친히 양성시킨 혈극천 최강 고수들인 빙혈사랑대(氷血邪狼隊)가 합쳐진 숫자였다. 비록 숫자는 사백 명이지만 그들 하나 하나가 일당천의 고수들이기에 그들의 힘은 혈극천 전체의 삼할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두두두두두…… 서문일백은 가끔씩 하늘을 쳐다보며 계속 질주에 질주를 거듭했다. 한데 평원을 지나 막 어느 계곡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문득 서문일백의 눈에 기광이 스쳐 지나갔다. 멀리 세 인영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 점차 거리가 좁혀지면서 그들의 모습이 뚜렷이 보였다. 서문일백은 그들의 범상치 않은 기도에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끼곤 빙혈사랑대를 멈추게 했다. 그리곤 냉오한 시선으로 그들 삼 인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너희들은……?" 그러자 세 사람은 차례로 입을 열었다. "노부는 무곡성군 화진성이라 하오." "흐흐…… 이 거지는 괴신걸, 이름은 도무방이라고 하지." "아미타불…… 빈승은 불광이오." 그렇다. 막아선 세 사람은 다름 아닌 우내오천 중의 삼인(三人)이었다. 하나 서문일백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냉담하게 물었다. "본좌를 막겠다는 뜻이냐?" "그렇소." 화진성의 대답에 이어 도무방이 말을 받았다.


"흐흐…… 그대는 절대 횡산으로 가지 못한다." 불광신승이 장중한 불호와 더불어 한 마디 덧붙였다. "아미타불…… 천하의 평화를 위해 그대는 하루 동안만 이곳에서 머물러 주셔야하오." 의도는 분명했다. 생명을 걸고 막아서겠다는 뜻이었다. 서문일백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렸다. "본좌가 누구인지 아느냐?" 무곡성군 화진성이 안색을 굳히고 무겁게 말했다. "어찌 모르겠소? 혈극천의 대종사 서문일백을……" 서문일백의 비웃음이 짙어졌다. "본좌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다분히 비꼬는 어투였지만 이어지는 화진성의 음성에도 굽힐 수 없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승부가 끝나기 전에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소.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이곳에 뼈를 묻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오."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화진성은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어 허공에 휘저었다. 순간 한눈에도 일천 명은 됨직한 인영들이 계곡의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서문일백의 눈썹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설마하니…… 이렇듯 많을 줄이야……) 그는 힐끗 하늘을 쳐다보았다. 태양은 이제 거의 서천 하늘 아래로 스러져 가고있었다. (시간이 없다!) 서문일백은 입안이 바싹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때 불광신승의 묵직한 음성이 서문일백의 조바심을 더욱 북돋았다. "서문시주, 내일 아침 저 태양이 다시 뜰 때까지만 그렇게 있어 주시오." "……!" "굳이 가시고자 한다면 우리 일천 명의 시신을 밟아야만 될 것이외다. 아미타불……" 이미 죽음을 각오한 이 노승의 눈에는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혜광(慧光)이 잔잔히 일렁이고 있었다. 서문일백의 두 눈 깊숙한 곳에 화르르 살광(殺光)이 피어올랐다. 그는 고개를 약간 치켜들며 싸늘하게 말했다. "일천 명이라 했던가? 좋아, 모조리 죽인 다음 지나가겠다!" "아미타불……" 불광신승은 그런 말이 나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묵직한 불호와 함께 천천히 한 걸음 물러났다. 서문일백은 꼿꼿한 자세 그대로 냉혹한 음성을 토해냈다. "빙혈사랑대!" "하명하십시오!" "모두 죽여라!" "존명!" 대답에 이어 사백여 기마대들이 노도처럼 앞으로 밀려 나갔다. 때를 같이해서 불광신승 등 삼인(三人)의 신형이 일제히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거의 같은 순간 태산이라도 허물어뜨릴 듯 우렁찬 함성과 함께 일천 명의 인영들이 일제히 신형을 날리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 또 하나 격전의 막이 올라가고 있었다. 3 이미 서쪽의 능선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대신 하늘엔 둥근 만월이 떠올라 있었다. 한데 그 고적한 달빛 아래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전개되고 있었다. 무림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공전(空前)의 대혈전(大血戰)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피가 튀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땅덩이 또한 온통 핏빛으로 채색되고 있었다. 사천공이 계획한 전법은 실로 가공할 것이었으나 마교와 천룡단의 저항 역시 절대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으아악----!" "아---- 악!" 누구를 위한 죽음인가? 무엇을 위한 싸움인가? 살륙(殺戮), 그 끝은 어디에 있는가? 하늘 높이 치솟는 흙 먼지는 이미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달빛을 어둡게 하는 강렬한 도기(刀氣)와 검광(劍光)은 쉴 새 없이 천공을 난도질했다. "크아아아악!" "으아악!" 불협화음으로 이어지는 비명은 끝이 없다. 격전 네 시진째, 시체는 이미 산(山)을 이루고 있었고 피(血)는 벌써부터 강(江)이 되어 흘렀다. 아아! 죽이고 죽는 이 싸움은 도대체 그 끝이 있기나 한 것일까? 하늘(天)과 땅(地)도 이미 숨죽인 지 오래였다. ……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욱 치열하게 싸우는 두 사람이 있었다. 얼마나 치열하게 싸우는가는 그들이 싸우고 있는 곳이 방원 십여 장 정도의 공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누구도 근처로 접근하지 못했다. 쉴 새 없이 작렬하는 경력의 격돌, 거기에서 회오리쳐 나오는 여파에 휩쓸려 죽거나 천지를 뒤덮을 듯한 검기(劍氣)의 폭풍에 갈가리 찢겨 죽는 애꿎은 목숨만도 부지기수였다. 두 사람은 다름아닌 주여설과 서문빙천이었다. 그들과 약간 떨어진 곳에는 사천공과 천수마선 목인청이 막상막하의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으나 결코 주여설과 서문빙천의 싸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주여설, 시간을 끌 수록 그녀는 자신이 조금씩 밀리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서문빙천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공은 너무도 패도적인 극사마공(極邪魔功)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주여설이 장시간 감당하기에 너무나 벅찬 것이었다. 이미 주여설의 전신은 땀으로 후줄근하게 젖어 있었다. 반면 서문빙천은 숨돌릴 틈도 없이 거세게 몰아 붙이면서도 상당히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서문빙천은 자신했다. 자신 스스로도 물론이거니와 시간이 흐를 수록 주위의 상황이 혈극천 쪽으로 우세가 기울기 시작한다고 파악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 싸움을 시작한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자부했다. "후후후…… 주여설, 아직도 늦지 않았다. 어서 무릎을 꿇어라!" 서문빙천은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연신 맹공을 퍼부었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어딘가 통째 날아갈 듯한 강기를 발산해 쉴 새 없이 주여설을 압박했다. (이 상태로는 백초 이상 버티기도 어렵다!) 주여설은 조금씩 당황하고 있었다. 이미 심신이 극도로 지쳐있는 그녀였다. 지금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몸만 움직일 뿐 맞공세는 펼쳐낼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승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성격이었다.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는 그녀의 자존심이었다. 주여설은 알고있다. 만약 자신이 서문빙천에게 죽는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모든 이들이 전의를 상실할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들은 연쇄적으로 무너질 것이다.


하나 그걸 알면서도 그녀는 점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아…… 이제는 더 이상……) 주여설은 언뜻 죽음이란 것을 뇌리에 떠올렸다. 한데 그녀가 죽음을 떠올리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저, 저기를 봐라!"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나 서문빙천은 여유있게 외침이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보고 있었다. 다음 순간 서문빙천의 눈이 흠칫 부릅떠졌다. 주여설도 본능적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주여설 역시 안색이 변했다. 보라! 능선을 따라 거대한 일진광풍이 밀려오고 있었다. 하나 그것은 바람이 아니다. 마치 폭풍같은 기세로 질주해오는 일단의 무리들이었다. 한데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가히 모든걸 휩쓸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일진광풍 속에서 엄청난 음파가 터져나왔다. "우아아아아아아----!" 순간 주위에 있던 혈극천의 고수들 백여 명이 칠공에서 피를 뿜으며 날아가 곤두박질쳤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광경이었다. "마…… 마곡신후!" 마곡신후! 그건 바로 천존마제의 음공이 아닌가? 이 세상에서 그 무공을 아는 사람은 단 한 명 뿐이다. (그…… 그 분이다!) 주여설은 갑자기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 왠지 두 눈으로 눈물이 고였다. 천수마선 목인청의 입 밖으로 날벼락같은 앙천광소가 터져나왔다. "와하하핫…… 모두 힘을 내라! 대지존께서 오셨다!" "와---- 아!"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이 횡산을 뿌리째 뒤흔들며 물결쳤다. -대지존께서 오셨다. 그 한 마디가 던진 파장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 이렇게 빨리 밀어닥치다니……) 서문빙천은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런 느낌은 사천공도 마찬가지였다. (기…… 기어코 불안해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구나!) 먼지가 사라지면서 백리강과 불사천령강시의 모습이 완연하게 드러났다. 서문빙천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럴 수가……) 그는 지금까지 쌓아올린 탑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싸움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4 "으---- 아---- 악!" 생(生)의 종말을 알리는 듯 처절무비한 비명성이 솟구쳤다. 불광신승이 가슴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며 물러서고 있었다. 아! 구멍뚫린 그의 심장에선 지금 콸콸 뜨거운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으……" 그는 경악과 공포 등이 뒤섞인 눈빛으로 전면을 응시했다. 그의 앞에 서문일백이 찬바람이 풀풀 날릴 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한데, 오오…… 보라! 주위엔 이미 혈해(血海) 속에 괴신걸 도무방과 무곡성군 화진성의 시신이 나뒹굴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없었다. 정도 무림사상 최강기인 중 하나로 손꼽히던 우내오천, 그 중 삼 인의 합공도 서문일백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상대가 되기는 커녕 그의 옷자락도 건들이지 못했다. 서문일백의 무공은 과연 어느 정도란 말인가? 이때 불광신승은 가물거리는 의식의 끈을 피나게 움켜 잡으며 이를 악물고 있었다. (으…… 악마의 무공…… 이것이 어찌…… 더운 심장을 가진 인간의 무공이란 말이냐?) 그의 입으로 핏덩이가 토해졌다. (좀더…… 조금 더 시간을 벌어야 하거늘……) 그때 서문일백의 냉혹무비한 일성이 고막을 강타했다. "불광, 이제는 영원히 가거라." 불광신승의 핏기없는 노안에 희미한 자비의 웃음이 떠올랐다. "노…… 노납…… 이제는 여한이 없다. 그대를 술시까지 막았으니…… 우리…… 임무는…… 달성되었…… 다……" 울컥! 그는 다시 토막난 내장이 섞인 검붉은 피를 토했다. 그리고는 더욱 창백해진 신색으로 입을 열었다. "허…… 하나…… 그대 역시…… 파멸하고 말…… 것이다. 마교 대지존과…… 마교의 전 힘이…… 이미…… 서문빙천…… 그대 아들을…… 공격하고 있을 것……" "……!" "아미타불……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그대 역시 쓰러질 것이다……" 순간, "닥쳐라!" 쑤---- 앙! 벼락같은 노갈과 함께 서문일백의 쌍장이 무자비하게 휘둘러졌다. 꽝----! "아---- 악!" 불광신승은 그 일장에 전신이 완전 박살난 채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진정 잔혹무비한 손속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서문일백은 다급히 천공을 응시했다. "……!" 만월이 이미 천공의 중심에 떠 있었다. 서문일백은 얼음같은 얼굴을 창백히 굳혔다. 이어 두 눈빛을 무섭게 이글거리며 입술을 피가 나도록 물었다. "가자! 전속력으로 횡산을 향한다." 휙----! 말(言)보다도 발(足)이 앞섰다. 하나 빛살같은 신법보다도 그의 마음(心)은 훨씬 더 앞지르고 있었다. (빙천…… 이 아비가 갈 때까지만 버티거라. 부디……!) 서문일백, 이 비정냉혹한 인간에게도 부정(父情)이 있었던가? 5 "……!"


서문빙천은 넋을 잃고 말았다. 짙은 피비린내가 바람에 실려와 코 끝을 아리게 했다. 주위는 온통 시체 뿐이었다. 한데 대부분이 혈극천의 제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불사천령강시들에 의해 완전 포위되어 있었다. 아무리 둘러보고 또 보아도 모두가 그의 적(敵)들 뿐이었다. 그의 편이라고는 오직 한 명, 그 곁에 선 사천공 뿐인 것이다.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였다. (다…… 당했다! 완전히……) 서문빙천은 내심 절망의 외침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의 시선이 불사천령강시들을 훑었다. (악마같은 놈들……) 서문빙천은 전율했다. 실상 백리강이 나타났을 때 그는 암담했지만 그가 데리고 온 자들이 겨우 백여 명 정도라는 데 그는 희망을 가졌다. 백 명 정도로 대세에 영향을 끼칠 순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하나 불사천령강시가 일단 움직였을 때 서문빙천은 자신의 생각이 엄청난 착각임을 깨달았다. 불사천령강시, 놈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에 의해 혈극천의 고수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그 막강하던 혈극천위대(血極天偉隊)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창칼이 들어가지 않는 상대와 싸운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것이었다. 결국 놈들에 의해 혈극천이 무너졌고 전의를 상실한 제자들은 마교와 천룡단의 고수들에게 무참히 도륙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자신과 사천공 두 사람만 남은 것이다. …… 불사천령강시 사이로 한 명이 걸어나왔다. 바로 백리강이었다.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서문빙천의 앞에 섰다. "이제 혈극천은 마지막이다. 서문빙천,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서문빙천은 냉소했다. "놈…… 장담하지 마라. 난 아직 쓰러지지 않았어." "그건 이제 시간 문제일 뿐이야. 지금의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고 망상을 하진 않겠지?" 서문빙천이 입술을 깨물었다. "설사…… 그렇다 한들…… 내겐 아버님이 계시다……" 백리강의 입가에 한가닥 신비한 미소가 베물렸다. "후후후…… 서문빙천, 너는 알아야 한다. 너의 부친이 살아 있다 해도 그 혼자만으로 혈극천 전체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 "이미 혈극천은 이 횡산의 혈투에서 대부분의 힘을 잃었다." "으……" 서문빙천은 두 눈에 분노의 전율을 떠올렸다. 그런 그를 백리강은 신광어린 눈빛으로 지그시 응시했다. "이제 곧…… 너의 부친이 올 것이다." "……!" "하나…… 이미 때는 늦었다. 아침 해가 뜨기 전에 혈극천은 영원한 종말을 고하게 된다. 서문빙천…… 너도……!" 서문빙천은 나직하게 쿡쿡 웃었다. 약간 그늘진 그의 눈빛이 하얗게 이글거렸다. "결코…… 그렇게는 되진 않을 것이다!" 그는 품 속에서 한 자루 기형도(奇形刀)를 꺼내 들었다. 백설같이 흰 도신(刀身)의 반월형 도였다. "빙극천도(氷極天刀)로군."


백리강이 그 기형도를 알아보고 냉소했다. 문득 백리강은 시선을 사천공에게로 돌렸다. "사천공……" "……!" "너는 내가 누군지 알겠지?" 사천공은 침중히 굳은 얼굴을 끄덕였다. "알고 있다. 백리강……" 백리강의 눈빛이 불같은 냉전을 뿜었다. "백리가를 멸망시키고 나의 부친을 살해한 너…… 언제고 네놈을 죽이리라 결심했지……" "……" "너도 함께 덤벼라! 한꺼번에 두 개의 목적을 달성하리라!" 사천공이 허허롭게 웃었다. "단 한 번의 실수가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은 생각못했어…… 모든 건 나의 불찰…… 그때 패를 다시 짚어 너의 죽음을 확인했어야 하는 것을……" "과거는 다신 오지 않아…… 후회해도 소용없어." 사천공이 음산하게 웃었다. "아직도 늦진 않았어. 비록 모든 것을 잃었지만 죽더라도 네놈만 은 데리고 간다." 다음 순간 사천공의 몸에서 괴음이 발생했다. 아! 그의 머리 위, 백회혈에서 한 자루 기검이 백무와 함께 솟아나오고 있지 않은가? 바로 풍화검(風火劍) 그것이었다. "……!" 그 가공할 광경에 장내의 고수들은 일제히 대경의 빛을 떠올리고 있었다. 백리강이 천천히 묵류혼을 검집채 치켜 들었다. "덤벼라!" 나직하고 힘찬 외침이 그의 입을 떠났다. 서문빙천과 사천공의 시선이 한 차례 마주쳤다. 이내 그들은 수중의 병기를 곧추잡은 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기(殺氣), 긴장된 살기가 터질 듯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인가? "죽어랏!" "가라----!" 살기띤 폭갈과 함께 서문빙천과 사천공의 신형이 일시에 허공으로 솟구쳤다. 동시에, 쐐---- 액! 번---- 쩍! 황혼빛마저 삼켜버린 눈부신 도광과 검광이 사위를 뒤덮었다. 대해(大海)를 일거에 가를 듯 통천가공의 위력이었다. "……!" 중인들의 안색이 대변했다. 목인청마저 은은히 눈빛을 굳히고 있었다. (대단하다!) 그러했다. 천하에 그들 두 명의 적수는 찾아볼 수 없을 듯했다. 백리강은 냉소하며 은형백변환(隱形百變幻)의 신법을 전개했다. 스스스……!


백리강의 신형은 가볍게 미끄러져 전권 밖으로 비쾌히 빠져 나갔다. 귀신도 이렇게 빠를 순 없었다. 서문빙천과 사천공의 합공은 번갯불처럼 빨랐으나 백리강의 신법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 (……!) 하나 사천공과 서문빙천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격권을 벗어난 백리강을 쫓아 빠르게 움직였다. 번---- 쩍! 빙극천도와 풍화검은 무서운 기세로 백리강의 전신을 쪼개갔다. 도광과 검광이 죽음의 천라지망을 펼쳤다. 하나 백리강은 이번에도 은형백변환을 펼쳐 그들의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이번엔 사천공과 서문빙천도 마음이 흔들렸다. 백리강의 신법이 너무나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그들은 그래도 공격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그들은 미친 듯이 소나기같은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하나 결과는 매번 마찬가지였다. 백리강은 흡사 그들을 조롱이라도 하듯 여유있게 피하고 있었다. 서문빙천은 두려움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이…… 이놈은 사람도 아니다. 인간의 상식을 완전히 초월한 능력을 지녔어.) 그런 감정은 사천공 역시 똑같았다. (과거 천존마제도 이놈에 비하면 상대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이렇듯 절망어린 신음성을 품고 있을 때였다. 번뜩! 백리강의 두 눈빛이 불현듯 기광을 발했다. 아! 보인 것이다. 횡산 계곡 너머 수백의 인영들이 빛살같이 쏘아오고 있는 광경이…… (왔구나. 서문일백……) 내심 일성을 터뜨린 백리강은 그 쪽을 향해 명했다. "모두 길을 열어라." 그러자 불사천령강시를 비롯한 마교쪽의 인물들이 계곡 입구의 길을 터주었다. 서문일백과 그 휘하 사백 명의 빙혈사랑대들이 그 길을 통해 장내에 도착했다. 휙! 휘---- 휙! 서문일백은 장내에 도착하자 마자 천천히 훑어보았다. 사방에서 혈극천의 무리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서문일백은 싸움의 결과를 충분히 짐작했다. 하나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아들과 사천공이 무사한 것만으로도 그는 위안이 된 것이다. 이미 겁효의 패를 통해 결과를 짐작한 그가 아니던가? 서문일백의 시선이 처음으로 아들에게 향했다. 서문빙천은 참담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하나 서문일백은 담담히 웃었다. "괜찮다…… 빙천…… 미래는 얼마든지 있어." 그 말을 들으며 서문빙천은 뭉클하는 감동을 느꼈다. "아버님……!" 그때 백리강의 앙천광소가 그들의 대화를 중단시켰다. "으하하하하……!" 서문일백과 서문빙천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서문일백, 네 아들이 살아있는 게 기쁘냐?" "……" "하나 넌 알아야 해. 내가 일부러 네 아들의 생명을 끊지 않았음을! 난 바로 네가 이곳에 오길 기다린


것이다!" "……!" "너는 과거 나의 부친을 무참히 살해했다. 이제 너는 네 눈 앞에서 너의 아들이 죽는 장면을 지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네가 갚아야할 응보(應報)다!" 백리강의 음성은 아예 분노를 초월한 무섭도록 담담한 것이었다. 하나 그것이 더욱 전율스러운 공포를 자아냈다. 서문일백은 유리알 같은 두 눈에 넘칠 듯 살광(殺光)을 떠올렸다. "그것이 네 뜻대로 될 것 같으냐?" "그렇다! 이 세상의 모든 건 이제 내 의지에 의해 좌지우지될 것이다!" 백리강이 외쳤다. "불사천령강시들이여! 서문일백과 그 수하들을 모조리 죽여라!" 핏빛 천을 두른 불사천령강시들이 서문일백 등을 덮쳤다. 그 악마같은 모습에 서문일백은 불현듯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하나 그에겐 아들을 구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비켜라!" 그는 자신을 덮쳐오는 불사천령강시를 향해 일장을 후려쳤다. 꽝----! 불사천령강시는 가슴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뒤로 열 보나 물러섰다. 하나 불사천령강시, 그것은 불사지체(不死之體)의 괴물이 아닌가? 크크크……! 그것은 전혀 충격을 받지 않은 듯 무서운 기세로 다시 서문일백에게 덮쳐 들었다. 서문일백의 안색은 급변을 보였다. (이…… 이것들이 인간인가?) 그가 어찌 불사천령강시의 무서움을 알겠는가? 그때였다. "끄---- 악!" "카---- 흑!" 사방에서 처참무쌍한 비명성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빙혈사랑대, 서문일백이 천하무적으로 여겼던 그들이 이 순간 맥없이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아예 불사천령강시들의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이…… 이럴 수가……) 한데 바로 그때였다. 또 다시 백리강의 일성이 서문일백의 정신을 퍼뜩 차리게 했다. "서문일백! 보아라----!" 다음 순간, "향기는 바람을 타고 찾아오며 검의 비(雨)는 천하를 뒤덮는다. 표(飄)---- 향(香)---- 검(劍)---우(雨)----!" 낭랑한 외침과 함께 백리강의 신형이 신쾌히 지면을 박차고 솟았다. 찰나 서문일백은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뜨고 말았다. 아아! 인세(人世)에 이토록 통천가공할 검학(劍學)이 있던가? 검화(劍花)! 하늘(天)에 온통 현란한 검광의 꽃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검광의 폭우가 되어 무섭게 쏟아져 내렸다. 순간,


"크---- 아---- 악!" 사천공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단말마가 처절하게 터졌다. 마검살인십삼예(魔劍殺人十三藝)! 천지조화의 위력이 깃든 죽음의 십삼변식 중 제 육변식이 다 전개되기도 전에 사천공은 풍화검과 함께 두 동강이 난 채 즉사하고 말았다. "헉……!" 그 짧은 순간 서문빙천은 엄청난 두려움에 주춤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사력을 다해 도망치려 했다. 하나 백리강의 표향검우는 이미 십변식(十變式)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서문빙천은 자신의 목 천돌혈 부근이 뜨거운 불에 지져지는 고통에 처절하게 비명을 터뜨렸다. "으---- 아---- 악!" 동체와 분리된 서문빙천의 수급이 피보라와 함께 튀어 올랐다. 백리강의 마검 묵류혼은 그대로 서문빙천의 빙극천도까지 박살내고 있었다. "빙천----!" 서문일백은 아들의 참혹한 죽음에 피토하게 부르짖었다. 다음 순간 그의 전신으로 가공할 한기(寒氣)가 폭풍처럼 휘몰아쳐 올랐다. "죽---- 인---- 다----!" 악마의 저주처럼 뼈저린 외침과 함께 그의 몸에서 천신도 놀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서문일백의 몸이 마치 얼음(氷)으로 빚은 듯 투명하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단지 무섭게 이글거리는 두 눈만이 시뻘건 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이 더욱 전율스럽도록 가공할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그런 채로 서문일백은 벼락같이 신형을 날렸다. 그의 앞을 불사천령강시들이 막았다. "비켜라!" 그의 투명무비한 쌍장이 휘둘러진 순간 그를 막은 다섯 명의 불사천령강시가 그대로 얼음으로 화했다. 금강불괴의 불사천령강시들을 한꺼번에 얼려 죽이다니 서문일백의 빙공(氷功)은 대체 얼마나 무서운 것이란 말인가? 서문일백은 그 기세 그대로 무섭게 백리강을 덮쳐가고 있었다. 주위에서 바라보던 사람들의 안색이 급변했다. 위기를 직감한 것이다. 하나 정작 백리강은 조금도 흔들림 없는 신색으로 우뚝 서있을 뿐이었다. "이제 모든 은원을 종결할 때가 되었다. 서문일백!" 그의 신형이 수십 개로 불어났다. 은형백변환이 극성으로 펼쳐진 것이다. 다음 순간 수십 명으로 불어난 백리강의 분신들이 일제히 쌍장을 내뻗으며 대갈했다. "유천마장(流泉魔掌) 제 사식 육합화일(六合化一)----!" 천존마제의 가공할 장법 유천마장의 마지막 초식이 전개된 것이다. 휘---- 우---- 웅! 휘웅----! 수백 가닥의 장강(掌 )이 회오리를 이루며 곧장 서문일백을 짓쳤다. 사상 유래없을 가공무비의 격돌이 벌어졌다. 꽝---- 꽈르르르릉----! 천지개벽의 엄청난 폭음이 솟구쳤다. 희뿌연 먼지 속에 백리강은 세 걸음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반면 서문일백은 허공에서 빙그르 회전한 뒤 재차 그를 덮쳐오고 있지 않은가? "죽어라---- 백리강!" 동귀어진(同歸於盡)을 각오한 죽음의 공세였다. 백리강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하나 그는 이내 수중의 묵류혼을 꽉 움켜 쥐었다. 우---- 웅……! 묵류혼이 웅후한 용음(龍音)을 토해낸 순간 우렁찬 외침이 재차 백리강의 입을 떠났다. "표향검우(飄香劍雨)----!" 수천 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작열하는가? 눈조차 뜨지 못할 엄청무비의 검광이 허공을 뒤덮었다. 그리고 마검살인십삼예(魔劍殺人十三藝)의 십삼변식이 연속해서 모조리 펼쳐졌다. "크---- 악……!" 폐부를 쥐어 뜯듯 참혹무비한 단말마가 검광 속을 꿰뚫었다. 그와 동시에 허공을 가득 메웠던 검광이 씻은 듯 자취를 감추었다. 아…… 보라! 서문일백은 삼 장 밖에서 곤두박질한 채 나뒹굴고 있었다. 한데 그의 양팔은 이 순간 깨끗이 절단되어 있었다. 하나 피는 흐르지 않았다. 잘린 부분이 마치 허연 서리가 앉은 듯 끔찍한 형상을 이루었다. 그런 채로 그는 비틀거리며 간신히 신형을 일으키고 있었다. 스윽! 그 앞으로 백리강이 다가섰다. 그는 좀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의연하며 눈부신 신태였다. 그는 서문일백을 담담히 응시하며 일성했다. "네가 졌다. 서문일백." 서문일백은 힘겹게 그를 향하며 신음하듯 입을 열었다. "당대에만은…… 나의 적수가 없을 줄…… 알았건만……" "……" "그래…… 백리강, 네가…… 이겼다……" 쩍…… 쩍쩍……! 서문일백의 전신에 돌연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치 단단한 얼음이 균열을 일으키며 갈라지듯 끔찍한 모습이었다. "너의…… 승리…… 다……" 힘겨운 한 마디가 흘러나온 순간 고목이 쓰러지듯 서문일백의 금간 육신이 둔탁하게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그의 몸은 순식간에 수천 조각으로 부숴졌다가 금시 붉은 물로 녹아 지면으로 스며들어 버렸다. 한 줌의 물(水)…… 그것이 일대효웅(一大梟雄)이었으며 야심많은 서문일백의 최후였다. 또한 중원을 지킨 마교전왕 백리강의 눈부신 승리이기도 했다. "으음……" 백리강은 뜻모를 신음성을 내뱉으며 묵류혼을 거두었다. 이어 천천히 신형을 돌리자, "와---- 아!" "대지존께서 승리하셨다----!" 엄청난 함성이 계곡을 떠들썩하게 뒤흔들었다. 서하군주 주여설이 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백리강에게 다가왔다. "백리공자, 수고 많으셨어요." 그녀의 고귀한 옥용은 상기된 듯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백리강은 담담히 미소를 머금었다. "모두가 여러분들의 노력 덕분일 뿐이오." "……" 주여설은 말없이 그의 눈부신 신태를 그윽이 응시했다. 문득 그녀는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소녀가 이제껏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은근한 사과의 음성이 아닌가? 백리강은 그저 빙그레 웃었다. 그들 주위로는 많은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고 있었다. 무림사상 가장 위대한 최강자인 마교전왕 백리강을 보기 위해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 일출 속에 천 년 이래 대혈겁은 종식(終熄)을 맞았다. 일출의 서광은 더욱 짙어져 갔고, 그 빛살 속에 대단원의 막(幕)을 내리는 유쾌한 웃음소리가 번져가고 있었다. 평화(平和)는 이렇게 찾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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