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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奇劍狂血舞 卷三 萬雄의 帝王 편 지은이: 사마달 - 차례 제 21 장 제 22 장 제 23 장 제 24 장 제 25 장 제 26 장 제 27 장 제 28 장 제 29 장 제 30 장 제 31 장

金劍堡의 決鬪 사라진 魔伽天의 눈 天魔의 最後 怪鳥와의 血鬪 百變神風客 無痕奪命飛魂板 死神秘話 死神出現 打殺! 金甲神星 魂飛魄散 魔伽天神像

제 21 장 金劍堡의 決鬪 "가소룹군. 지살 정도가 뭐 그리 대단한 존재란 말인가? " 나천웅은 차가운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광객과 죽귀의 눈에 찰나적으로 의혹이 스쳤다. '으응? 이놈이 이토록 태연히 말하다니 그렇다면 진정 그것이 사실이란 말인가?' 광객은 침중해진 음성으로 나천웅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놈은 대체 누구냐?" "나천웅!" 나천웅은 짤막하게 뱉아냈다. 찰나 광객과 죽귀는 대경실색했다. "뭐…… 뭐라고? 그렇다면 네놈이 바로 귀면수라 나천웅이냐?" "바로 맞추었다." 이때, 죽귀가 갑자기 무엇을 생각했는지 안색이 급변해 물었다. "그…… 그렇다면 냉혈삼신은?" "당신들은 그들이 나를 제지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지만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나천웅은 냉혹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러자 광객이 두 눈 가득 살기를 떠올린 채 다급하게 물어왔다. "냉혈삼신은 어떻게 됐느냐?" "그들은 모두 내가 조용히 극락으로 보내줬다!" 나천웅의 어조는 담담했다. "뭣이?" "뭐라고?" 광객과 죽귀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어 광객이 두 눈을 부릅뜨며 고함을 내질렀다. "미…… 믿을 수가 없다! 냉혈삼신이 어떤 인물인데 너같은 애송이에게 당한단 말이냐?" "지살의 시체를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냐?" 나천웅은 음산한 웃음을 흘려내며 냉막하게 쏘아붙였다. 광객과 죽귀의 안색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들은 잠시 동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곧 그들은 무엇을 결심한 듯이 나천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좋다! 애송이 놈! 네놈의 말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어차피 네놈은 우리의 손에 의해 죽을 것이다!" 광객은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마치 성난 야수처럼 잡아먹을 듯이 나천웅을 노려보고 있었다. "흥! 그것은 헛된 꿈에 불과하다!" 나천웅은 싸늘하게 비웃음을 날렸다. 광객과 지살은 살기 띤 눈으로 나천웅을 노려보며 서서히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들은 나천웅을 중심으로 해서 양쪽으로 갈라섰다. 다음 순간 광객이 양손에 들고 있던 비발을 천천히 치켜들었다. 바로 이때였다. "잠깐! 중원오마! 네놈들은 비겁하게 한 사람에게 합공을 가할 셈이냐?" 어디선가 냉막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광객은 휘두르려던 손을 멈춘 채 힐끗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남천괴걸이 떡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광객은 그를 보자마자 치밀어 오르는 분통을 참지 못하고 냉갈을 터뜨렸다. "이 찢어죽일 거지놈아! 아가리 닥쳐라! 네놈은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모양인데 이 애송이놈을 죽여놓고 네놈의 사지를 찢어주마!" 남천괴걸도 이에 질세라 두 눈을 부라리며 악을 써댔다. "정말, 네놈은 이름 그대로 미친 놈이 미친 소리만 하는구나! 네놈은 자신의 위치가 지금 어떻게 됐는 지도 모르고 헛소리를 씨부렁거리느냐?" 남천괴걸은 이렇게 쏘아붙이고도 분기가 치솟는지 천구신봉을 움켜쥔 채 성큼성큼 광객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때 나천웅이 손을 들어 남천괴걸을 저지시켰다. "양형님! 이들은 저 혼자서도 충분하니 잠시 뒤로 물러나서 이 아우의 실력이나 구경하십시오." 남천괴걸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이어 그는 나천웅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허지만…… 아우……" "하하하…… 염려는 묶어 놓으십시오." 나천웅은 한쪽 눈을 찡끗 감아보이며 웃어보였다. 남천괴걸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나천웅은 이내 광객과 죽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수중의 천무진뢰검을 서서히 뽑아들며 차가운 음성을 흘려냈다. "나는 사부님의 무덤 앞에서 이렇게 맹세했다. 천마십이성의 무리들은 이 중원에 영원히 한 발자국도 들여놓치 못하게 하겠다고 말이다!" 나천웅의 냉막한 음성이 떨어진 순간, 광객과 죽귀의 눈에서 살기가 뻗쳤다. "이 애송이 놈이 너무 큰소리를 치는구나! 네놈이 혼자서 우리들을 이길 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흐흐흐…… 너희들은 냉혈삼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듣지도 못했느냐?" 광객의 입에서 비웃는 듯한 냉소가 터져나왔다. "흥! 노부는 네놈이 제 실력으로 그들을 죽였다고는 절대로 믿지 않는다. 네놈은 분명히 어떤 계략으로 그들을 죽였을 것이다!" "하하하…… 좋다! 너희들의 생각이 진정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나천웅은 말을 마치자 마자 왼손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순간, 휘리릭! 그의 손에서는 지축을 흔들 듯이 살벌한 장풍이 무서운 파공성을 일으키며 광객을 향해 날아갔다. 허나 광객은 이를 바라보며 코웃음을 침과 동시에 소맷자락을 홱 휘둘렀다.


우르릉! 장력과 장력이 맞부딪치며 귀청을 울리는 듯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순간 나천웅은 왼손이 손목이 찌르르하게 저려옴을 느꼈다. '과연…… 중원오마의 무리답구나! 내공은 나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으니…… 그렇다면 오직 초식으로 속전속결을 하는 것이 최선책이겠구나!' 그는 내심으로 이렇게 생각을 굴리자마자 신형을 비스듬히 솟구쳤다. 다음 순간, "받아랏!" 나천웅의 입에서 날카로운 호통이 새어나왔다. 그는 왼손으로 단원오장 중 제 이초인 단봉조양을 전개했으며, 오른 손에 들린 천무진뢰검으로는 태극혜성을 전개한 것이었다. 수백 개의 장영(掌影)과 수천 줄기의 검광(劍光)이 중원오마의 몸을 통째로 덮어버렸다. 광객과 죽귀는 내심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감히 나천웅의 공격을 경시하지 못한 채 전력으로 맞섰다. 우르릉! 꽈르릉! 요란한 폭음이 울려퍼졌다. 세 인영은 순식간에 붙었다 떨어졌다. 나천웅은 쉬지 않고 재차 공격을 가했다. "복마진천!" 호통에 뒤이어 가공할 만한 검기가 수많은 은화(銀花)를 피워내며 광객과 죽귀에게 덮쳐들었다. "나천웅의 무지막지한 공격을 받은 광객과 죽귀의 안색이 급변했다. 허나 그들도 역시 절세의 대마두들이 아닌가? 그들은 급급히 자신들의 무기를 전력으로 휘둘러대며 나천웅의 대라검법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광객과 죽귀의 공격 또한 만만치가 않은 것이었다. 그 광경에 나천웅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안되겠다. 나의 현 무공으로 이들을 단숨에 처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나의 몸을 믿어보는 도리밖에는 없구나……!' 나천웅은 내심 이렇게 생각을 굴린 다음, 암암리 금라신공을 끌어올렸다. 또한 왼손에는 자화신공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이때 광객이 돌연 음침한 미소를 흘려냈다. "흐흐흐…… 애송이 놈아! 이제는 우리의 실력을 조금 알겠느냐?" 그는 제법 득의만면한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 어디 이번에는 나의 초식을 한 번 받아 보거라!" 광객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수중의 비발을 전력으로 내던졌다. 순간, 쉬이잉! 허공을 가르는 예리한 파공성이 울렸다. 광객의 손을 벗어난 두 개의 비발은 무서운 기세로 나천웅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었다. 실로 아슬아슬한 위기일발의 순간, 엉뚱하게도 나천웅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천무진뢰검을 허공으로 던져버렸다. 뒤이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비발을 향해 전력으로 부딪쳐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미친 짓이었다. 순간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대경실색했다.


"나소협!" "나소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설하경은 너무도 놀라 그만 두 눈을 감아버렸다. 한편, 광객은 이를 지켜보며 희색을 떠올렸다. '이 놈이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로군!' 드디어, 허공을 날던 비발이 나천웅의 신형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순간, 쨍그렁! 강철과 강철이 부딪치는 요란한 금속음이 울려퍼졌다. 모든 사람들은 나천웅의 비참한 모습을 연상했다. 허나, 엄청나게도…… 비발은 나천웅의 몸을 가르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나가는 것이 아닌가? "앗!" 내심 쾌재를 부르며 이 광경을 주시하던 광객이 이 돌연한 사태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때였다. 나천웅은 자신이 달리던 기세 그대로 광객에게 덮쳐들었다. 동시에 나천웅은 양손을 휘둘러 단원오장 중 사초를 전개했다. "단천지혈!" 광객은 혼비백산한 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나천웅이 비발을 맞고 죽으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전혀 수비태세를 갖추고 있지 않았었다. 바로 그 틈을 노리고 나천웅은 공격을 한 것이었으니…… 나천웅의 왼손은 어느새 광객의 인후(咽喉) 부근에 닿고 있었다. 순간, "으아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어느새 광객의 목은 동체를 벗어나 허공 멀리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의 목에서 시뻘건 선혈이 무지개를 그리며 사방으로 튀었다. 실로 두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일세의 대마두인 그가 그렇게 어이없이 죽고 말다니…… 이 광경을 관전하던 장내의 인물들은 모두 할 말을 잊었다. 그들은 잠시 혼백이 달아난 듯 멍하니 나천웅을 응시했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나천웅을 도무지 사람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발이 사람의 몸에 부딪쳐 튕겨나가다니…… 이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이때 옆에 서 있던 죽귀가 안면을 무섭게 경련하며 외쳐댔다. "오…… 오! 셋째형!" 그는 창백한 안색으로 광객의 목없는 시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는 오마 중 자신만이 살아남은 것이 아닌가? 죽귀는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은 처절한 통분에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으…… 으…… 네놈이…… 네놈이……" 죽귀는 부드득 이를 갈아붙이며 나천웅에게 덮쳐들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죽귀는 자신의 머리 위에서 한 줄기 섬광이 내리 꽂히는 것을 느꼈다. "앗!" 깜짝 놀란 그는 다급히 수중의 청죽장을 휘둘러댔다. 휙! 휘이익! 공기의 진동음이 들렸다. 순간, 탁! 무엇인가 청죽장에 부딪치는 둔탁한 음향을 발해냈다. 그 순간 죽귀는 그 물체와 부딪쳤던 자신의 손이 찢어질 듯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그의 청죽장은 그 끝이 산산조각으로 부숴지고 있었다. 죽귀의 청죽장을 부수고 땅에 내리꽂힌 것! 그것은 바로 나천웅이 던진 천무진뢰검이었다. 죽귀는 두 눈 끝이 가늘게 떨리며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이때, 그의 자세는 이미 흐트러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나천웅은 으스스한 웃음을 흘려내며 냉혹한 표정을 지었다. "흐흐흐…… 죽귀! 이제 너도 끝장이다! 죽어랏!"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양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미 그의 양손은 시뻘건 핏빛으로 변해있었다. "푸하하하하……!" 돌연 나천웅의 입에서 미친 듯한 광소성이 터져나왔다. 광소에 뒤이어 그의 냉갈이 울려퍼졌다. "노염무(怒炎舞)!" 나천웅은 생전 처음으로 단씨보전에 적혀 있는 자화삼식 중 제 일초를 전개한 것이었다. 화르르르! 그의 시뻘겋게 달아오른 양손에서는 실로 가공할 만한 화염이 쏟아져 나왔다. 곧 이어 시뻘건 화염들은 무섭게 소용돌이쳐대며 죽귀를 향해 몰아쳐갔다. 그 엄청난 공세에 죽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대경실색한 채 전력으로 신형을 피하려 안간힘을 썼다. 허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휘익! 무섭게 소용돌이치던 한 줄기 시뻘건 화염이 그의 전신을 휘감아 버렸던 것이다. "으아악!" 소름끼치는 단말마의 비명이 온 장내에 울려퍼졌다. 잠시 살타는 내음이 진동하는가 싶더니 그것도 잠깐이었다. 곧 이어 끔찍한 광경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죽귀의 몸이 순식간에 새까맣게 변하더니 곧 가루로 변한 채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 광경을 주시하던 주위의 인물들은 모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세상에……" "놀라운 무공이다……" "과…… 과연, 나소협다운…… 놀라운 실력이로다……!" 그들은 모두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감탄사를 발해냈다. 나천웅은 묵묵히 선 채로 장내를 둘러보았다.


어느덧 그곳에는 치열한 혈전이 멎어 있었다. 중원오마들이 모두 죽어버리자 그의 수하들인 복면인들은 모두 줄행랑을 쳤던 것이었다. 그동안 가슴 조이며 싸움을 지켜보던 설하경이 희열의 탄성을 내질렀다. "나대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나천웅에게로 달려가 그의 품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얼떨결에 그녀를 포옹한 나천웅은 일시 얼떨떨한 심정이었다. 설하경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부벼대며 흐느꼈다. "나대가! 나대가! 정말……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나천웅은 그 순간 그녀의 너무도 정열적인 행동에 그만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그는 가볍게 한 번 헛기침을 터뜨렸다. "험! 설낭자……" 그제서야 설하경은 자신이 나천웅의 품 속에 있음을 깨닫고는 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나천웅이 꼭 죽을 것만 같은 불안감으로 가슴을 조이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그것에서 헤어나며 동시에 안도감을 느끼자 자신도 모르게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때 그녀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나천웅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홍시처럼 물들인 채 수줍음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지금 그녀의 모습은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것이었다. 제 22 장 사라진 摩伽天의 눈 남천괴걸이 껄껄 대소를 터뜨리며 나천웅에게로 다가왔다. "핫핫핫…… 과연 나소제야. 이 우형은 앞으로 자네 앞에서는 무공의 무자도 꺼내지 말아야 할 것 같군. 핫핫핫……" 무위도장도 두 눈 가득 흐뭇함을 떠올린 채 나천웅을 바라보았다. '막내사제가 있는 한 본문은 앞으로 중원제일의 문파로 크게 각광을 받게 될 것 같군. 정말 사숙님께서는 놀라울 정도로 깊으신 혜안이 있구나……!' 한편 북령빙군은 힐끗 설하경을 바라보더니 다시 시선을 나천웅에게로 돌렸다. 그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허허허…… 나소협, 정말 노부는 존경을 금하지 않을 수 없네. 그토록 천하를 울리던 중원오마가 자네의 손에 모두 죽음을 당하다니……" 그 말에 남천괴걸이 무엇이 생각난 듯 황망히 두터운 메기입술을 움직였다. "참! 북령늙은이! 어째서 중원오마의 첫째인 천마(天魔)가 보이지 않지?" 그제서야 모든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들은 치열한 혈전으로 인해 잠시 그 사실을 상기시키지 못했던 것이었다. 북령빙군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 글쎄…… 어찌된 일인지 노부도 잘 모르겠소." "처음에는 천마도 함께 온 것 같던데……" 무위도장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간 나천웅은 문득 무엇이 떠올랐는지 안색이 대변했다. 그는 북령빙군에게 시선을 돌리며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설대협, 소생이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이다." "무엇인지 물어보게나." 북령빙군은 정색을 띄우며 나천웅을 주시했다. "제가 듣기로는 원래 금검보에서는 한 개의 구슬과 설하경 낭자를 걸고 비무대회를 연다고 하더군요." "맞았네. 허지만 놈들이 선수를 쳐서 들이닥치는 바람에 효과를 보지 못했네."


북령빙군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시인했다. "설대협, 죄송하지만…… 그 구슬을 좀 볼 수가 없겠습니까?" "하하하…… 자네가 그것을 달라고 해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줄 터인데 죄송하다는 말은 무엇인가?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이 늙은이가 좀 섭섭해지는군." 북령빙군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호쾌하게 승낙을 했다. 나천웅은 입가에 멋쩍은 미소를 떠올린 채 머리를 긁적거렸다. "설대협, 너무 소생을 부추기지 마십시오. 그러다간 정말 제자리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하하하…… 날 따라오게나. 내 그 구슬을 보여주지." 북령빙군은 성큼 앞서며 내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천웅도 북령빙군의 뒤를 따라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설하경은 나천웅이 움직이자 재빨리 그의 곁에 바짝 붙어서 종종 걸음을 떼어놓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천괴걸과 무위도장은 일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기이한 미소가 떠올려지고 있었다. 한편 나천웅과 북령빙군은 내당을 향해 나란히 걷고 있었다. 문득 나천웅이 힐끗 북령빙군에게 시선을 돌리며 질문을 던졌다. "설대협, 혹시…… 설대협께서 얻으신 그 구슬은 크기가 주먹만하고 또한 전체의 색은 황록색으로서 투명한 구슬이 아닙니까?" 북령빙군은 흠칫 놀란 눈빛으로 의아한 듯이 나천웅을 응시했다. "아니, 자네가 어찌 그것을 아나?" 순간 나천웅은 내심 흥분되어오는 심정을 느꼈다. '아! 드디어 찾아냈구나! 이곳에 있는 구슬은 틀림없는 마가천의 가운데 눈이로구나……!' 북령빙군이 소지하고 있다는 구슬은 나천웅이 학선기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마가천의 눈과 똑같았던 것이다. 그는 잠시 흥분되어오는 마음을 추스르며 북령빙군에게 말을 건넸다. "설대협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그 구슬은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원래 그 구슬은……" 나천웅은 북령빙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윽고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북령빙군은 아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맙소사!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그걸 비무대회의 상품으로 내걸었으니……!" 남천괴걸을 비롯해서 내막을 처음 알게 된 다른 인물들도 경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비로소 사안의 위중함을 깨달은 북령빙군은 황망히 말을 이었다. "서둘러 움직이도록 하세!" 일행은 일제히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그들은 곧 어느 전각에 도착했다. 북령빙군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는 나천웅을 돌아보았다. 그는 빙그레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나소협,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게나. 내가 안으로 들어가서 그 구슬을 가지고 나옴세……" 나천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북령빙군은 곧 몸을 돌려 전각 안으로 사라졌다. 남천괴걸과 무위도장도 나천웅과 함께 그곳에서 북령빙군을 기다렸다. 설하경은 여전히 입가에 고혹적인 미소를 떠올리며 나천웅의 곁에 바짝 붙어서 있었다. 이제 날은 거의 밝아 뿌옇게 여명(黎明)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새벽의 찬기운이 바람을 타고와 서 있는 그들의 옷깃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꽈과광! 돌연 한 차례 전각 안에서 천지를 울리는 듯한 요란스러운 폭발음이 터져울리는게 아닌가? 순간 나천웅 일행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이것이 대체 무슨 소린가?" "그…… 글쎄요……?" 그들은 영문을 몰라 당황해 하고 있을 때, 전각 안으로부터 북령빙군이 비틀거리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아니? 설대협!" 그의 모습을 본 나천웅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방금의 그 요란한 소리는……" "그건 내가 너무 분노한 나머지 일장을 격발하면서 난 소리라네." 북령빙군이 핏기없는 얼굴로 나천웅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그 구슬이 감쪽같이 사라졌네!" 찰나 나천웅은 머리 속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림을 느꼈다. 그야말로 뒷통수를 둔기로 얻어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구…… 구슬이 없어지다니!' 천지가 온통 뒤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이러하리라. 남천괴걸은 가늘게 찢어진 두 눈을 부라리며 분노의 외침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그 천마란 놈이 몰래 이곳으로 들어와 그 구슬을 훔쳐 달아난 것이 틀림없다!" "뭐…… 뭣이?" 북령빙군은 더욱 더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무위도장은 안색이 굳어진 채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 구슬이 나습포찰의 천마십이성에게 전달된다면 무림은 그것으로써 끝장이야! 끝장……!" 그의 말에는 섬칫할 정도의 절망감이 배어 있었다. 순간 나천웅의 입에서 서릿발 같은 일성이 크게 흘러나왔다. "반드시 천마를 잡고 말 것이오! 반드시……!" 그의 두 눈에서는 섬뜩하리 만치 무시무시한 안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파아앗!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땅을 박찼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하나의 점이 되어 까마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설하경이 대경실색하며 다급히 그를 불렀다. "아니? 나대가!" "나소협!" 장내의 인물들도 나천웅의 갑작스런 행동에 일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 사이 나천웅의 모습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장내의 인물들은 모두 멍하니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이곳은 북쪽 변방의 한 고을. 끝도 한도 없어보이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의 행렬이 멀리로 아련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위이잉! 위잉! 초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스산스럽게 몰아쳐 대며 음산한 울음소리를 발해냈다.


누런 황사가 바람에 의해 이곳의 하늘을 온통 뿌옇게 만들고 있었다. 때는 해가 지기 시작하는 신시(申時) 무렵, 극리파(克里巴)라고 불리워지는 이 마을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 인영의 뒤로는 마지막 열기를 사르듯 지는 태양이 주홍의 빛을 발해내고 있었다. 그 인영은 전신에 백의를 걸친 한 명의 청년이었다. 백의청년의 왼손에는 하나의 기다란 검은색 보자기가 들려 있었다. 매우 지친 듯이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그 청년은 왼발을 미세하게 절뚝거리고 있었다. 그는 바로 다름아닌 나천웅이었다. 금검보에서 마가천의 눈을 훔쳐간 천마를 뒤쫓아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나천웅이 천마를 쫓기 시작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장강 만(萬)여 리라는 기나긴 추적을 계속해 온 것이었다. 지금, 나천웅의 모습은 완전히 걸인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한 번도 갈아 입지 못한 백의는 이미 때에 쩔어서 거의 회색빛에 가까웠다. 게다가, 그의 얼굴, 손 할 것 없이 전신에는 누런 황사로 뒤덮혀서 차마 그 꼴을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문득 나천웅은 불타는 석양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천마…… 그를 쫓아 헤맨지도 벌써 한 달이나 지났구나. 그 자는 영리하기가 구미호보다 더하군……!' 천마는 실로 보통의 머리가 아니었다. 나천웅이 아무리 애를 써봐도 도무지 그의 손에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뒤쫓는 것을 눈치챈 이후로는 절대로 속력을 내지 않는다. 눈에 띄게 움직이면 오히려 흔적을 남긴다는 걸 아는 탓…… 그는 여유만만하게 모든 흔적을 없애가면서 느긋하게 도주하고 있는 것이다.' 나천웅은 긴 탄식을 흘려냈다. '놈을 잡을 뻔한 적이 벌써 서너 번이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놓치다니……' 그는 안타까움과 분노로 인해 얼굴근육을 실룩거렸다. '더군다나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나습포찰은 가까와지고 있다.' 나천웅은 은근히 조바심을 느끼며 불안한 생각이 치미는 것을 걷잡을 수 없었다.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 동안 그의 발걸음은 어느덧 극리파 마을의 중심에 이르르고 있었다. 이때 길거리에 나와 선 극리파 마을의 주민들은 모두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천웅을 바라보았다. 그의 행색이 꾀죄죄한 데다가 낯선 이방인임을 알아본 주민들은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허나, 나천웅은 그들의 그러한 시선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 걸음을 떼어놓았다. 얼마나 걸어갔을까? 그는 고개를 이리 저리 돌리며 주위를 훑어보았다. 곧 그의 눈에 아담한 객잔이 들어왔다. 나천웅은 그 객잔을 발견하자 갑자기 전신에 피로가 몰려옴을 느꼈다. '벌써 육 일 간이나 잠도 자지 못하고 놈을 쫓기만 했으니…… 오늘은 그냥 이곳에서 쉬면서 휴식을 취해야 겠구나!' 그는 내심 이렇게 작정을 하고 객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나천웅은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들어가자마자 한 명의 여인이 재빨리 다가오며 그를 맞았다. "어서오세요, 손님!" 나천웅은 그 여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허……! 이런 변방에 이토록 빼어난 미인이 있었다니……!' 과연, 나천웅이 그렇게 느낄 만큼이나 그 여인의 미모는 뛰어났다. 두터운 털외투를 걸치고 있는 그 여인은 얼굴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몸매 또한 늘씬하게 균형이 잡혀


있었다. 대략 삼십 세 정도나 되었을까?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는 만지면 금방 터져버릴 듯이 탄력이 있어보였다. 갸름한 얼굴 위로는 이국적인 맛마저 풍겨주는 그윽한 두 눈이 인상적이었다. 그 눈에는 촉촉하게 물기가 배여 영롱한 빛을 발했다. 오똑한 코와 붉은 빛의 앵도같은 입술은 깨물고 싶을 정도로 도톰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 그 여인의 두 뺨은 약간 상기가 되어 있어 그 모습이 더욱 더 요염하게 보였다. 그야말로 대단한 미색을 갖춘 여인이었다. 나천웅은 잠시 동안 멍하니 그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곧 정신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밤 하루 묵고 가야하는데 자고 갈 방은 있소?" 미모의 여인은 생긋이 웃으며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방은 얼마든지 있으니 마음대로 쉬십시오." 나천웅은 그 여인의 말을 들으며 객잔 안을 둘러보았다. 추운 날씨 탓인지 손님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부인께서 이곳의 주인이오?" 나천웅의 물음에 여인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그렇습니다. 원래는 저희 남편이 주인이었는데 그분이 돌아가신 이후로는 제가 맡아서 하고 있지요." 이때 나천웅은 문득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힐끗 여인의 눈을 바라보며 입술을 떼었다. "부인께서는 중원말을 잘 하시는군요." 그의 말에 돌연 여인의 얼굴에는 어두운 표정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원래 저의 남편은 중원인이랍니다. 그래서 저도 중원말을 조금은 할 줄 알지요." "아……! 어쩐지……" 나천웅은 그 이유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여인이 다시 나천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손님! 어떤 식사를 올릴까요?" "아, 식사는 나중에 하고 우선 목욕물부터 데워주시오." 나천웅의 말에 여인은 그제서야 그의 차림새를 보고는 가볍게 웃었다. "손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여인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보이며 곧 안으로 사라졌다. 나천웅은 여인이 준비해 준 물로 목욕을 충분히 한 뒤 행장 속의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잠시 후 그는 말끔해진 차림으로 밖으로 나왔다. 이때 나천웅의 전혀 달라진 모습을 발견한 객잔의 여자는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 여인의 두 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크게 떠지고 있었다. 그녀는 상대가 이토록 젊고 준수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천웅은 이 객잔에 들어올 때는 거의 걸인과 진배없었던 것이었으니…… 온통 헤지고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으며 전신에는 지저분한 때와 흙먼지로 뒤덮혀 있었으니 그의 준수한 용모가 나타날 리가 있었겠는가? 나천웅은 그녀가 멍하니 서 있자 한 번 헛기침을 터뜨렸다. "험! 부인 식사준비는 다 됐습니까?" 그제서야, 여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네…… 식사는 방에 준비해 놓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인!" 나천웅은 짤막하게 인사를 건넨 뒤 곧 몸을 돌려 객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여인의 눈에서 한가닥 야릇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천웅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그대로 침상에 몸을 눕혔다. 포만감이 느껴지자 그동안 참아왔던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이었다. 잠시 후, 그는 쉽게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나천웅이 달콤한 잠속으로 빠져들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미 밖은 칠흑의 어둠으로 깜깜해져 있었다. 이때다. 밖에서 희미한 기척이 들리더니 방문이 스르르 열리는 것이었다. 곧 이어 열린 문으로는 한 명의 여인이 들어왔다. 그 여인은 바로 객잔의 주인 여자였다. 그녀는 방 안으로 살며시 들어온 후 조심스럽게 나천웅이 잠든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 허나 나천웅은 이를 조금도 알아채지 못한 채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이었다. 여인은 나천웅의 머리맡에 서서 잠시동안 그의 잠든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가만히 자신의 가냘픈 손을 들어 나천웅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바로 그 순간, 자고 있던 나천웅의 손이 번개같이 여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어멋!" 그 여인은 깜짝 놀라 비명을 내지르며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나천웅은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 채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싸늘한 어조로 힐문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부인!" 그의 냉막한 호통에 여인은 몹시 놀란 듯이 말을 더듬거렸다. "다……당신, 주무시지 않고 계셨군요." "내가 자든, 안자든 그것이 부인과 무슨 관계가 있소." "……" 여인은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천웅은 그녀의 기색을 살펴보며 다그치듯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부인은 어찌하여 야밤에 남자가 자는 방 안으로 들어왔소? 도대체 그것이 어떤 연유요?" 이때 여인은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들어 잠시 나천웅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곧 그녀의 입에서는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휴우!" "……?" 나천웅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어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저는 남편과 사별한 후 육 년 동안 수절해왔습니다. 허나…… 오늘……" 그녀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오늘 당신을 보니……" 그녀는 다시 말을 이으며 고개를 들어 나천웅을 응시했다. 이때 그녀의 두 눈은 어떤 열정으로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순간 나천웅은 잠시 멍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곧 안색을 가다듬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부인! 이 사실을 구천(九泉)에 있는 남편이 안다면 지극히 슬퍼할 것이오! 허니, 어서 마음을 가다듬고 그만 돌아가시오!" 나천웅은 꾸짖는 듯한 어조로 말을 뱉아내며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녀는 잠시 뚫어질 듯이 나천웅을 응시했다. 그러는 그녀의 두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그 눈물은 곧 그녀의 터질 듯이 팽팽한 뺨 위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어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말을 꺼냈다. "저는 오늘 이곳에 오기 전에 수십 번 결심을 했어요. 오늘은 반드시……" 나천웅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냉엄한 어조를 뱉아냈다. "안되오! 나는 절대로 그 일을 용납할 수가 없소!" 여인은 멍하니 선 채로 나천웅을 응시했다. 이때 그녀의 모습은 왠지 처량해 보였다. 나천웅은 잠시 그러한 여인을 바라보며 담담한 음성으로 아무런 감정없이 입을 열었다. "부인, 어서 이 방을 나가시오." 허나 여인은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무엇을 결심한 듯이 자신의 손을 가슴 위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이미 갈아입고 있는 잠옷 앞자락의 끈을 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나천웅은 흠칫했다. "부인! 무슨 짓을?" 여인은 그의 말에는 아랑곳도 하지 않은 채 계속 앞가슴의 끈을 풀고 있었다. 이윽고 끈을 모두 풀고난 여인은 한 차례 전신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 걸쳐있던 얇은 잠옷은 매미가 껍질을 벗듯 순식간에 아래로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동시에 조물주의 완벽한 작품과도 같은 신비스럽도록 아름다운 여인의 나신이 한눈에 나천웅의 시선에 드러나고 있었다. 나천웅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매끈하게 쭉 곧은 두 다리와 가늘게 휘어진 두 팔의 곡선, 칠흑같은 머리카락은 길게 드리워져 그녀의 허리께에서 살포시 나붓거리고 있었다. 터질 듯이 풍만하게 부풀어 오른 젖가슴은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로 뒤덮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두드러져 있었다. 또한 가냘픈 허리에서 갑자기 굵어지며 둔부로 내려오는 곡선은 실로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이 꽉 막히게 할 지경이었다. 허나 그 무엇보다도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은 가슴에서 배, 그리고 허벅지로 내려오는 앞부분이었다. 여인의 가장 신비로운 부분이 나천웅의 눈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나천웅은 잠시동안 정신없이 그녀의 나신을 훑어보며 빠져들고 있었다. 그 여인의 나신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충격적이었다. 이때 나신의 여인이 천천히 나천웅에게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소협……" 그녀는 앵두같은 입술을 살짝 벌리며 비음을 흘려냈다.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린 나천웅이 자신도 모르게 커다랗게 외쳤다. "멈추시오! 부인!" 그러나 여인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나천웅에게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은 그녀가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뇌살적으로 출렁거렸다. 그에 따라서 같이 움직이는 귀여운 두 알의 보석은 짙은 보라빛을 발해내며 더욱 더 나천웅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천웅은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숨을 크게 뱉아내고 있었다. 그는 마음이 마구 진탕되어오며 이성이 아물거리며 흐려오는 것을 느꼈다. 나천웅은 내심 크게 부르짖으며 세차게 고개를 내흔들었다. '안된다! 이것은…… 안된다!'


드디어 여인이 나천웅의 바로 코 앞 면전에 이르렀다고 느낀 순간, 그녀는 나천웅의 품 속으로 전신을 던졌다. 나천웅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허나, 여인의 가녀린 팔은 거침없이 나천웅의 목을 강하게 휘어감아 버렸다. "부인…… 아…… 안되오……" 나천웅은 그녀의 몸을 밀어내며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썼다. 허나, 여인은 더욱 더 강하게 그의 목을 휘감으며 나천웅의 가슴에다 두 뺨을 부벼댔다. "단 하루 뿐이예요. 단 하루…… 공자, 당신은 저의 이 마음을 그토록 몰라 주시나이까……?" 그녀는 거의 매달리다시피 애절한 음성으로 그의 품 속에 얼굴을 묻고 속삭여댔다. 그녀가 나천웅에게로 몸을 밀착시켜오자 매끈하고도 뭉클한 유방의 감촉이 그의 전신으로 전해져왔다. 그 순간 나천웅은 자신의 단전에서 한 가닥 뜨거운 열기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서서히 이성의 벽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이때 여인이 나천웅의 가슴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녀의 그윽한 눈망울엔 반짝이는 물기가 촉촉하게 배여 있었으며, 불타듯이 뜨거운 입김이 앵두 같은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그녀의 얼굴을 마주 응시하던 나천웅은 가슴이 심하게 진탕돼옴을 느꼈다. 그 여인은 서서히 고개를 치켜들어 도톰한 입술로 나천웅의 입술을 덮어버렸다. 그 순간 나천웅의 가슴에 남아있던 최후의 이성은 완전히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미친 듯이 여인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으…… 음……" 여인은 나천웅의 목을 더욱 세차게 끌어안으며 비음을 흘려냈다. 이제 나천웅은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의 손은 어느덧 여인의 몸을 더듬고 있었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여인의 살갗이 그의 손 끝으로 전류처럼 스쳐갔다. 가슴에서 배로, 그리고 은밀한 곳으로…… 두 사람의 몸은 침상 위에서 뜨겁게 뒤엉켰다. 걷잡을 수 없이 뜨거운 열풍이 차가운 겨울의 한기를 녹이며 거칠게 몰아치고 있었다. 한순간 여인은 자신의 소중한 곳에 거대한 불기둥이 들어오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자지러지는 듯한 신음성을 발했다. "흐윽!" 나천웅은 해일처럼 거대한 힘으로 거칠게 그녀의 몸을 소유해갔다. 실내는 삽시간에 열락(悅樂)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허나 그런 방 안의 열풍(熱風)에는 아랑곳 없이 창문 밖에선 한 겨울의 삭풍이 스산하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 제 23 장 天魔의 最後 위이잉! 휘이잉! 북풍(北風)이었다. 살을 에일 듯한 차가운 북풍은 급기야 눈보라를 안았다. 휘르릉! 살점을 차곡차곡 도려내는 듯한 차가운 한풍(寒風)을 동반한 눈보라가 금세라도 천지를 뒤집어 엎을 듯이 몰아쳤다. 어디가 허공이고 어디가 지면인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게 하는 지독한 눈보라! 천지는 그야말로 은빛의 세계.


그것도 쉴새없이 거대한 전신을 꿈틀대는 은빛세계였다. 휘이잉! 쉬임없이 북풍과 눈보라가 꿈틀대는 변방. 천지는 북풍과 눈보라를 제외하곤 온통 은빛으로 죽어 있었다. 한순간 그 북풍을 헤치고 한가닥 파공성이 눈보라 저쪽 끝에서 일었다. 휘이잉! 그 파공성을 일으키며 가공할 속도로 날아오는 것은 하나의 눈덩어리였다. 아니 그것은 눈덩이가 아니라 한 명의 백의청년이었다. 눈빛처럼 새하얀 백삼을 입고 너무나 빨리 날아온 까닭에 그의 모습은 얼핏 하나의 눈덩이처럼 보였던 것이다. 실제로 그의 전신은 눈보라에 파묻혀 온통 눈투성이었다. 휘리릭! 문득 백의청년은 달리던 신형을 잠시 멈추었다. 그는 잠시 주위를 쓸어보더니 손을 들어 온몸에 달라붙은 눈을 털었다. 그러자 이내 영준한 미청년의 멋들어진 모습이 드러났다. "휴……! 정말 천지간의 종말을 보는 듯한 지독한 눈보라군……" 미청년은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그러한 청년의 눈빛이 일순 한가닥 기이한 열기를 발했다. 지금 그의 망막에는 아름다운 한 여인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어젯밤 그 여인의 진정한 뜻은 무엇이었을까?' 미청년은 가슴 밑바닥에서 알 수 없는 한 가닥 뜨거운 기운이 치솟았다. 이 준수미려한 미청년은 바로 나천웅이었다. 지금 그는 어젯밤 묘하게 이룬 하룻밤 인연을 되새기고 있는 것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아름다운 여인, 허나 타오르는 활화산(活火山)과도 같이 뜨거운 여인이었다. '내 평생 아마도 어젯밤의 일은 결코 잊지못할 것이다……' 나천웅은 이유모를 한가닥 탄식을 길게 내뿜었다. "휴……!" 간밤의 정사(情事)는 두 사람 모두의 본능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대체 사람의 도리라는 것은 무엇일까? 만약 그 여인이 평생 동안 수절해야만 옳은 삶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 또한 이기적인 편견이 될 것이다. 허나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나천웅으로선 심기가 편치 않았다. "나는 자제심을 잃었다. 그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스스로조차 다스리지 못하면서 어찌 천하무림의 안위를 염려한단 말인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무림인의 운명속에서 어쩌면 간밤의 정사는 실상 대수롭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허나 나천웅의 생각은 달랐다. "나는 내 자신에게 진 것이다.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고 한들 자신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꺾이게 된다." 나천웅의 눈에 일순 강렬한 신광이 뿜어졌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가슴을 활짝 펴고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다시는 절대 추호의 방심도 용납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그였다. 저벅…… 저벅…… 나천웅은 다시 가벼운 마음으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의 전신에는 또 다시 눈이 쌓이고 있었다. '앞으로 나습포찰까지는 이백여 리…… 나의 추측이 틀림없다면 천마 그자는 나에게서 십여 리 이상은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나천웅의 뇌리에는 이미 그 아름다운 여인의 생각이 지워지고 있었다. 오직 천마와 그가 소지하고 있는


마가천의 눈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천마! 오늘 아니면…… 내일 쯤에는 반드시 그와 부딪치게 될 것이다!' 그때 문득 날렵하게 움직이던 그의 발길이 우뚝 멈추어졌다.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서릿발같은 호통이 울렸다. "어떤 쥐새끼들이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라!" 그의 외침성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크흐흐……!" "으흐흐……!" 무시무시한 살기가 담겨있는 괴소가 사방에서 울렸다. 동시에 지면에 두텁게 깔려있던 눈이 사방으로 튀었다. 파파팟! 이미 나천웅은 전신에 모든 진력을 끌어올려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재빠르게 사위를 돌아 보았다. 아직도 눈보라는 그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 기세가 점점 더하고 있었다. 따라서 모든 시계(視界)는 불투명할 수밖에 없었다. 나천웅은 한껏 안력을 돋구었다. 그때 사방을 뒤덮은 눈보라 속에서 몇가닥 인영이 나타났다. '으음! 모두 세 명이다!' 이미 세 가닥의 인영이 나천웅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고 있었다. 그들은 눈보라와 눈더미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형체없는 공격을 펼쳐온 것이었다. '오른쪽이다!' 드디어 나천웅의 예리무비한 안력은 세 줄기 인영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는 즉시 전신에 금라신공을 끌어올렸다. 찰나 그의 전신에 은은한 금빛 광채가 서리기 시작했다. 휘류륭……!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금빛광채가 더욱 신비감을 주었다. 나천웅이 막 금라신공을 끌어 올린 순간, 슈우욱! 세 가닥 노도와 같은 장력이 나천웅의 전신 삼대사혈(三大死穴)을 노리며 쏘아들었다. 나천웅은 금라신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려 그들의 장력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순간, 펑펑펑---! 세 마디 우뢰와 같은 굉음이 울렸다. "으윽!" 나천웅은 답답한 신음성을 터뜨렸다. 그는 이미 대여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의 안색은 종이장처럼 창백해졌으며 금세라도 쓰러질 듯 심하게 비틀거렸다. "흐흐……" 음산한 괴소를 날리며 세 명의 신형이 나천웅의 주위를 에워쌌다. 전신에 먹물같은 흑의를 걸친 괴인들이었다. "흐흐! 이제보니 별 힘도 못쓰는 애송이 놈이구나……" 한 명의 흑의괴인이 비양거림이 담긴 조소를 날렸다. "냉혈삼신이 당했다 해서 바짝 긴장했더니…… 이토록 보잘 것 없는 놈일 줄이야!" "이 따위 애송이를 가지고 그 어르신네들이 그토록 신신당부 하시다니……" 흑의인들은 마치 고양이가 쥐를 놀리듯 나천웅을 사이에 두고 연신 비웃음을 날렸다. "이 애송이 덕택으로 이번에 우리는 큰 공로를 세운 셈이군……"


흑의인들은 매우 기분이 흡족한 듯 연신 득의의 괴소를 날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천웅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들이었다. 나천웅의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림을 보였다. 동시에 그의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네놈들은 누구냐?" 그러나, 흑의괴인들은 여전히 경멸의 괴소만 날릴 뿐이었다. "비겁한…… 암습을 가해 승기(勝機)를 잡고도 득의양양해 하다니……" 나천웅은 힘겨운 호통을 터뜨렸다. 허나 그는 이미 적지않은 내상을 입은 듯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흐흐…… 우리들은 나습포찰에서 오신 마마삼존(魔魔三尊)이라는 어르신네들이시다." "마마삼존……?" "그렇다. 우리는 네놈이 천마를 쫓고 있는 것을 알고 네놈을 저지키 위해 특별히 수고를 하신 것이다." 나천웅은 그들의 말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큰일이다! 내가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천마는 계속 나습포찰을 향해 쉬지않고 달릴 것이 아닌가?' 나천웅이 내심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흐흐…… 천륭사의 어르신네들은 네놈을 잡아 시간을 벌라고 했지만…… 이렇게 해치울 수 있게 되다니……" 흑의괴인들은 또 한 차례 득의의 괴소를 날렸다. 그때 순간적으로 나천웅의 안색에 변화가 일었다. 동시 창백하기 그지없었던 그의 신색이 거짓말처럼 회복되는게 아닌가? "으하하……! 득의양양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나천웅의 입에서 호방한 웃음과 함께 한 마디 호통이 일었다. 순간 흑의괴인들은 동시에 대경실색의 경악성을 터뜨렸다. "네…… 네놈은……?" "하하…… 이 괴물들아! 본 공자께서 하잘 것 없는 네놈들 따위에게 당할 줄 알았더냐!" 원래 나천웅은 일부러 그들에게 당한 것 같은 형세를 취한 것이었다. 이미 그는 금강불괴의 경지를 이룬 몸인데다 금강신공마저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상태였는지라 전혀 충격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속전속결이다!' 그렇다. 나천웅은 단숨에 마마삼존을 단 일장에 격살시키기 위해 속임수를 썼던 것이었다. 마마삼존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나천웅의 입에서 대갈일성이 터졌다. "타앗!" 동시에, 회리릭! 그의 전신이 팽이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자화신공(子火神功)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찰나적으로 그의 전신은 하나의 화염덩이로 변했다. 그 화염의 덩어리는 천지를 그대로 녹여 버릴 듯 가공할 열기를 뿜어냈다. 고오오…… 쿠오오오! "앗!" "아니?" 마마삼존은 혼미백산하며 본능적으로 일제히 쌍장을 내밀었다. 허나 이미 나천웅의 화신(火身)은 폭풍처럼 그들을 휘감고 있었다. 화르르! 화염덩이가 마마삼존을 한 차례 쓸면서 지나간 순간 처절한 세 마디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크윽!" "아악!" 그들의 몸은 눈깜짝할 새에 시커면 숯덩이처럼 변해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스윽! 나천웅의 신형이 다시 원위치로 돌았다. 이어 그의 전신이 다시 원래의 면목을 회복했다. 그의 시선은 마마삼존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휘이잉…… 때마침 불어 오는 북풍에 의해 마마삼존의 시신은 가루처럼 흩어져 날아가고 있었다. 스스스…… 스스스! 이윽고 마마삼존의 마지막 숯덩이 시신이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빨리듯 솟아 올랐다. "우---!" 갑자기 나천웅의 입에서 한 마디 장소성이 울렸다. 이어 그는 눈보라를 헤치고 전력 질주를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어느새 눈보라는 그쳐 있었다. 그러나 차가운 북풍은 잠시도 그 움직임을 멈추려 들지 않았다. 나천웅은 계속 두 팔을 휘저으며 앞으로 달렸다. 차가운 북풍도 그의 날렵한 움직임을 어쩌지 못했다. 한참을 달리던 그의 시선이 일순간 번뜩 기광을 뿌렸다. 저 멀리 빠르게 움직이는 하나의 그림자를 발견한 것이었다. '천마다!' 나천웅은 내심 환성을 터뜨렸다. 그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멈춰라!" 그의 입에서 우렁찬 교갈이 터졌다. 순간 전력을 다해 질주하고 있던 인영이 화들짝 놀라며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휘익! 나천웅은 눈깜짝할 새에 오십여 장을 날아가더니 섬전처럼 그림자를 덮쳐갔다. "아니? 저놈은……" 천마는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단이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는 사력을 다해 빛살처럼 빠르게 다시 질주하기 시작했다. 휘이이익! "흥! 이번에도 본 공자의 손아귀를 벗어날 줄 아느냐?" 나천웅은 어림도 없다는 듯 차가운 냉소를 날렸다. 그는 진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천마의 뒤를 쫓았다. 허나 천마의 경공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어찌된 판국인지 거리가 오히려 더 멀어지고 있지 않은가? '이건 뜻밖이군!' 나천웅의 눈가에 경이의 빛이 스쳤다. 실상 그는 천마의 일신절기 중 가장 뛰어난 무공이 경공술이라는 걸 미처 모르고 있었다. '이러다가 또 놓치고 말겠구나!' 나천웅은 아무리 전력을 경주해도 천마를 따라 잡을 수 없자 내심 초조해졌다. 순간 그는 한 가지 특별한 방법을 떠올렸다. '그렇다!' 내심 쾌재를 부른 나천웅은 왼손에 들고 있던 천무진뢰검을 빼들었다.


순간, 우우웅! 요란한 뇌음을 울리며 천무진뢰검이 검집에서 그 위용을 드러냈다. 이때 나천웅은 허공을 날아가는 상태였다. "무극조원!" 그의 입에서 청아한 외침이 일었다. 찰나, 번--- 쩍! 가공할 한 가닥 백광이 달리고 있는 천마의 등 뒤를 노리고 쏘아졌다. 무극조원! 이 초식은 대라삼검의 마지막 절초로서 어검술(馭劍術)에 버금가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헉!' 천마는 가공할 위력의 검기가 쏘아져 오자 내심 다급성을 발했다.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몸놀림으로 황망히 신형을 지면으로 미끄러뜨렸다. 파앗! 그러나 나천웅이 발출해낸 백색의 검기는 그의 상상을 완전히 초월할 만큼 위력적이었다. 스파앗! 미묘한 격타음이 일었다. 가공할 기세로 짓쳐든 검기가 그대로 그의 가슴에 격중된 것이었다. "아윽!" 허파가 짓뭉개지는 듯한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북풍을 뚫고 울려퍼졌다. 동시 한 줄기 자욱한 피보라가 일었다. 그가 비틀거리는 사이 나천웅은 삽시간에 신형을 날려와 앞을 막아섰다. "이런 날이 오리라 믿었다." "으……!" 천마는 선혈이 콸콸 쏟아지는 가슴을 쓸어안고 비틀거렸다. 나천웅은 천무진뢰검을 천천히 검집에 꽂았다. 이어 그는 천마에게 서서히 한 걸음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천마! 네놈이 마가천의 눈을 가지고 무사히 나습포찰로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나천웅은 냉막한 표정으로 천마에게 경멸의 시선을 폭사시켰다. 천마는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로 나천웅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핫핫핫! 너는 절대 구슬을 얻지 못한다!" "천마, 감히 헛수작을 부린다면 본 공자는 네놈에게 이 세상의 온갖 고통을 다 맛보여 주리라!" 나천웅은 한광이 폭사되는 시선을 천마의 두 눈에다 꽂았다. 기이하게도 그 순간 천마의 신색은 차분한 평온을 회복하고 있었다. "애송이놈! 본좌가 어찌 네놈 따위에게 굴복하겠느냐? 이미 지금쯤 구슬은 나습포찰에 당도했을 것이다." "……!" 나천웅은 일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천마는 득의의 괴소를 날리며 음산하게 말을 이었다. "크흐흐! 이곳으로 오기 전 나는 비합전서구(飛盒傳書鳩)를 이용해 구슬을 나습포찰로 보냈다. 결국 네놈은 나의 계획에 철저히 농락당한 셈이지!" 마지막 말은 나천웅의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그는 일시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아뿔사! 일이 이렇게 돌아가다니……' "크하하……!"


천마는 미친 듯한 앙천광소를 멈추지 않았다. "애송아! 비록 나는 죽지만…… 나의 이 원한은 천마십이성(天魔十二星)께서 수천 배로 갚아 줄 것이다." "이런 쳐죽일……" 나천웅이 막 분갈을 터뜨리며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어디선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듯 쩌렁쩌렁한 장소성이 들려왔다. 얼마나 가공할 내력이 깃든 장소성인지 사위의 대기가 일시에 터져버릴 듯 무섭게 파동칠 정도였다. 마치 수백마리의 용이 한꺼번에 울부짖는 듯한 굉음이라고나 할까! 나천웅의 안색이 급변했다. '당금 무림에 저런 내공을 지닌 고수가 있었다니!' 이때 천마의 얼굴에 온통 희열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아……! 드디어 오셨구나!" 천마는 자신의 상처도 잊은 양 감격하여 넋나간 일성을 흘려내고 있었다. "천마십이성…… 천마십이성……!" 천마는 신들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뭣이라고?" 나천웅이 그제서야 그 엄청난 장소성의 정체를 깨닫고는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때 천마의 얼굴에는 거의 광기(狂氣)같은 기운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크크크……보인다! 내 눈에는 똑똑히 보인다! 우리 나습포찰에 의해 전무림이 굴복하는 모습이……" 저주같은 그 한 마디를 뱉아내기가 무섭게 천마는 느닷없이 자신의 천령개를 찍어버렸다. 퍼억! 허연 뇌수를 쏟아내며 천마의 몸뚱아리가 썩은 짚단처럼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어차피 자신이 살아날 수 없음을 깨닫고는 자결해버린 것이었다. "……!" 나천웅은 멍하니 천마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 사이 장소성은 점점 가까워 오고 있었다. "우우우우우……!" 나천웅은 멍한 시선을 들어 장소성이 울리는 곳을 응시했다. 휘익! 하나의 인영이 유령인 양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가공할 속도로 허공을 날아오고 있었다. 그 그림자는 눈깜짝할 새에 깃털인 양 가볍게 나천웅의 앞에 내려섰다. 팟! 나천웅은 일순 주위에 으스스한 한기가 감도는 걸 느끼며 눈 앞의 인물을 바라보았다. 회색장포를 입은 깡마른 노인(老人)이었다. 아아, 인간이 과연 저토록 마를 수도 있는 것일까? 전신이 어찌나 깡말랐던지 마치 한 자루 지팡이에 장포를 입혀 놓은 것 같았다. 특히 괴이한 것은, 한 뼘이 훨씬 넘는 두 눈썹의 길이였다. 더욱이 그 두 눈썹은 완전히 진홍빛 색깔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 눈썹 아래로 번갯불같은 신광이 쉴새없이 뻗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괴이하면서도 은연중 상대를 오시하는 패도적인 분위기의 노인이었다. 적미(赤眉), 붉은 눈썹의 노인은 마치 오래전부터 거기에 서 있었던 것처럼 미동도 않은 채 나천웅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는 그저 그렇게 한 마디 말조차 없이 서 있었지만 그 순간 나천웅은 등줄기에 전율을 느껴야만 했다. 상대방을 질식시켜버릴 듯한 가공할 기도!


'과연 명불허전이로구나!' 나천웅은 암암리에 내력을 양손으로 끌어올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때 적미노인은 비로소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죽어있는 천마를 한 차례 훑었다. 순간 그의 안색이 찌푸려지며 한 차례 적미(赤眉)가 꿈틀거렸다. "네가 천마를 죽였느냐?" 한줄기 삭풍인 양 일체의 감정이 배제된 음성이었다. "그렇소!" 나천웅은 아랫배에 힘을 주며 딱 잘라 말했다. 적미노인은 약간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천웅은 적미노인이 무어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되물었다. "당신은 천마십이성 소속이오?" "……" 적미노인은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없이 나천웅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천웅은 눈썹 하나 흔들림 없이 태산처럼 우뚝 선 채 그를 마주 정시했다. 순간이다. 적미노인이 갑자기 쩌렁쩌렁한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우하하하……!" 내력이 실린 그 어마어마한 웃음소리에 주위의 백설이 분분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노부는 천마십이성 중 열 두 번째인 혈랑신성(血狼神星) 천납도(天拉道)다!" 나천웅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래도 설마했던 한가닥 희망이 여지없이 짓뭉개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마가천은 세상에 나오고 말았는가!' 혈랑신성 천납도는 서릿발같은 냉갈을 터뜨렸다. "천마는 우리 나습포찰의 일개 고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우리 나습포찰에 지대한 공로를 세운 인물…… 그런 만큼 천마의 원한을 풀어줄 의무가 노부에게 있느니라." 이때는 나천웅도 이미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의 신색이 엄중하게 변했다. "본 공자는 당신들 천마십이성의 중원 침입을 절대로 묵과할 수 없소. 당신들이 끝내 중원침입의 뜻을 꺾지 않는다면……" 나천웅의 두 눈에서 냉엄하기 그지없는 정광이 폭사되었다. "본 공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당신들의 헛된 야욕을 분쇄할 것이오." 기개넘치는 나천웅의 결연한 어조였다. "흥!" 혈랑신성 천납도는 가소롭다는 듯 싸늘한 콧방귀를 날렸다. "네놈이 학선기의 제자라는 소문은 수차례 들었다. 허나 학선기 그놈조차도 우리 천마십이성 앞에서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헌데 네놈같은 애송이가……" 혈랑신성 천납도는 비릿한 냉소를 날렸다. 실상 지금 혈랑신성의 눈에는 나천웅이 한낱 토끼같은 어린애로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나천웅의 준미한 두 눈썹이 꿈틀거렸다. 동시에 그의 두 눈에서 엄청난 살광이 폭사되었다. "뚜껑은 열어 봐야 아는 법!" 그는 천천히 천무진뢰검을 빼들었다. 우르릉! 굉음이 울리며 천무진뢰검이 검집 밖으로 빠졌다. 동시에 서릿발처럼 내뿜어지는 검기가 혈랑신성 천납도의 눈을 한 차례 흔들었다. '정말 훌륭한 검이다!'


혈랑신성 천납도가 암중으로 경탄성을 터뜨렸다. "자! 다시 한 번 묻겠소. 당신들의 야욕을 거두어 들이겠소? 아니면 본 공자의 검을 받겠소?" 나천웅의 준열한 음성이었다. "가소로운 놈!" 천납도는 나천웅의 호통에는 아랑곳없이 천무진뢰검에만 시선을 두었다. "한 수 가르침을 받겠소!" 나천웅은 거침없이 사자후를 터트리며 허공으로 비상했다. "태극혜성(太極彗星)!" 번--- 쩍! 쐐애애액! 가공할 파공성이 울리며 순식간에 방원 수 장 이내가 은빛 광망으로 휘감겼다. 마치 여름밤 하늘의 은하수가 이 자리에 그대로 내려 앉은 듯한 광경이었다. "겨우 대라삼검(大羅三劍)인가……" 천납도는 여전히 비웃음만 던질 뿐이었다. 번쩍! 번--- 쩍! 찰나지간 수 갈래의 백광(白光)이 은빛 광망 속에서 섬전처럼 천납도를 향해 쏘아졌다. "파옥혈마장(破玉血魔掌)!" 천납도의 입에서 드디어 대갈이 터졌다. 동작은 말보다 훨씬 이전에 이루어졌다. 그의 장심에서 발출된 무형의 경기가 정면으로 태극혜성의 초식과 충돌했다. 순간, 꽈르르릉! 경천동지를 무색케 하는 굉음이 울렸다. 잠력의 여파를 받아 주위 십여 장 이내의 흙더미가 눈더미와 함께 미친 듯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콰아아…… 두 사람은 각기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으음……!' 나천웅은 내심 무거운 침음성을 터뜨렸다. 상대는 육장(肉掌)이 아닌가? "하하……! 애송이가 제법이구나!" 천납도는 한바탕 야유와 같은 칭찬을 늘어 놓았다. "아직 멀었다!" 나천웅은 대라삼검 중 두 번째 초식인 복마진천(伏魔震天)을 펼쳤다. 쏴아아! 마치 대해(大海)의 격랑이 그대로 쉴새없이 밀려드는 듯한 파공성이 있었다. 무수한 은광(銀光)이 노도의 포말인 양 점점이 뿌려지며 천납도를 쓸어갔다. 고오오…… "복마진천이라!" 천납도는 싸늘한 냉갈을 날렸다. 동시에, 그의 좌수(左手)가 하늘을 가리키고 우수(右手)가 그에 수직되게 뻗쳤다. "탈백축혼괴멸장(奪魄逐魂壞滅掌)!" 찰나, 파츠르르르---!


기기묘묘한 파공성이 울리며 천납도의 전신에서 마치 분말과 같은 무형의 조각들이 하늘과 땅을 뒤엎을 듯 발출되었다. 노도의 포말과 같은 검기와 무형의 막대한 잠력을 지닌 장력이 한차례 격렬한 부딪침을 이루었다. 꽝꽈꽈르릉!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뒤이어, 휴르르르……! 방원 수십 장 이내의 백설이 그대로 허공 수십 장 높이로 치솟았다. 마치 세상의 종말이라도 온 듯한 광경이었다. 잠시 후, 눈발이 가라앉으며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번에도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했다. '으……! 대라삼검도 이 천마십이성 앞에는 아무런 위력을 발휘치 못하다니……' 나천웅은 일순 초조해짐을 느꼈다. "하하…… 어린 놈, 이제 순순히 목을 내어놓는 것이 어떠냐?" 천납도는 일그러지는 나천웅의 안색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펄럭! 펄럭! 바람도 없는데 나천웅의 옷자락이 찢어질 듯 나부꼈다. 전신의 모든 진력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좋아, 좋아! 얼마든지 받아 줄테니 있는 재간을 모조리 발휘해 보도록!" 천납도는 나천웅이 다시 한 번 새로운 공격을 시도하려 하자 짐짓 호방한 태도를 보였다. "혈단회천(血丹廻天)!" 나천웅은 다짜고짜 단원오장 중 삼 장을 펼쳤다. 순간 수천 가닥의 무시무시한 기류가 나천웅의 전신에서 피어 올랐다. 휘류류륭! 그 엄청난 기류들은 마치 부챗살같은 형상으로 천납도를 쓸어갔다. "혈광개세무(血光蓋世舞)!" 천납도의 입에서도 대갈이 터졌다. 찰나 그의 전신이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그의 몸은 한 차례 급박한 회천의 형태를 취했다. 팟팟팟---! 수천 가닥의 혈광이 쏘아드는 부챗살 형상의 기류에 맞부딪쳤다. 순간 한 차례 짤막한 굉음이 울렸다. 허나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럴 수가……" 나천웅은 내심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원래 단원오장은 천허자의 초식 중 가장 위력이 강대한 초식이었다. 허나 그 옛날 현현자는 천허자의 비급중 중권밖에 획득하지 못했었다. 제일 중요한 단원신공이 들어있는 내공편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때문에 나천웅이 펼치는 단원오장은 진실한 단원오장의 막대한 위력을 발휘치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천웅이 내심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이번에는 네놈에게 혈운수미공(血雲首彌功)의 따끔한 맛을 보여주마!" 천납도의 쌍장이 서서히 치켜들렸다. 그의 쌍장은 이때 붉은 선혈로 보이고 있었다. 급기야 그의 쌍장에서 붉은 홍운이 은은히 서렸다. 나천웅은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자신도 황망히 진력을 끌어올려 단봉조양(丹鳳朝陽)의 초식을 시전키 시작했다.


"야핫!" "하앗!" 두 마디 우렁찬 기합성이 울렸다. 이어, 두 사람의 신형이 한 차례 부딪쳤다. 그러나, 이번에도 결국은 두 사람 모두 승부를 결치 못했다. '아……! 짐작은 했지만 천마십이성이 이토록 강하다니……' 나천웅은 부지불식 중에 상대방에 대한 한 가닥 두려움이 솟았다. 그러나 천납도 그 순간 내심 크게 놀라고 있었다. '이 일을 어떻게 믿어야 하나? 일개 애송이놈의 무공이 이토록 높다니…… 만약 이대로 몇 년의 세월이 흐른다면……' 그는 가슴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다시 나천웅이 폭풍같은 기세로 공격을 감행해왔다. 천납은 추호도 방심하지 못하고 마주 공세를 펼쳐냈다. 우르릉! 고오오오! 그들은 눈깜짝할 새에 다시 수십 초를 더 주고 받았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용호상박(龍虎相搏)이라고나 할까? 나천웅은 초식의 횟수가 거듭될 수록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을 더 이상 끌면 나에게 불리하다. 이곳이 나습포찰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기 때문에 자칫 시간을 끌다간 언제 또 다른 놈이……' 나천웅은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더욱 초조해짐을 금할 수 없었다. 비장한 결의에 찬 그는 전신에 자화신공(子火神功)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순간 그의 전신에서 은은한 불꽃이 서리기 시작했다. 휘스스스! 그 광경을 본 천납도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자…… 자화신공(子火神功)! 이제보니 네…… 네놈은 단씨보전(丹氏寶典)을 얻은 모양이구나!" 천납도의 음성은 가는 떨림을 보였다. 그의 한뼘 길이의 적미가 제각기 묘한 떨림을 보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그가 얼마나 경악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나천웅 본인은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현재 그가 익힌 무학 중 가장 위력이 있는 것은 바로 자화신공과 자화삼식(子火三式)이었다. 물론 단씨보전이 현현비록이나 장삼봉의 무학보다는 강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단지 나천웅은 이미 만년화령지과(萬年火靈之果)를 복용했으므로 알게 모르게 그의 전신은 극양(極陽)의 기운으로 뭉쳐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전신 곳곳에 무서운 양강지기(陽剛之氣)가 뭉쳐 있음으로, 그 양강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자화신공은 그야말로 가공할 위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었다. "자! 우선 일초식부터 맛보아라!" 나천웅은 서서히 쌍장을 가슴부위로 끌어 모았다. "노염무(怒炎舞)!" 순간, 화화르르르! 천지를 그대로 용해시켜 버릴 듯한 화염이 천납도를 향해 쏠렸다. 마치 두 마리 화룡(火龍)이 푸른 창공을 누비는 듯한 형세였다. '으…… 과연 자화신공이구나!'


천납도는 마치 자신이 용광로 속에 들어와 있는 착각을 느꼈다. 그러나 천납도 역시 두 손을 가만히 버려두지는 않았다. "괴천지복(壞天地覆)!" 순간 그의 전신이 완전히 흑색기류에 뒤덮혔다. 이어 그의 쌍장이 펼쳐졌다. 찰나, 슈르릉! 마치 수만 근 무게의 암석이 밀리는 듯한 굉음이 울리며 주위의 공기가 온통 뒤엉키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꽈르르릉! 지독하기 그지없는 엄청난 굉음이 울리며 흑기와 화기가 그대로 하늘로 치솟았다. 잠시 후 주위가 선명해지며 두 사람의 신형이 드러났다. 허나 그들은 각기 한 차례씩 신형을 비틀거렸을 뿐이었다. 그들의 눈빛이 한 차례 허공에서 불꽃을 튀겼다. 이번에도 선공(先攻)을 시작한 건 나천웅이었다. "분광섬(分光閃)!" 나천웅은 자화삼식 중 제 이초식을 시전했다. 그의 쌍장은 번개처럼 합쳐졌다 떨어졌다. 순간, 쐐애액---! 수십 갈래의 화광(火光)이 섬전처럼 천납도를 쏘아갔다. "야핫!" 천납도의 입에서 대갈이 터졌다. 순간 그의 신형이 한 줄기 연기인 양 흩어졌다. 콰드드드! 천납도가 서 있던 자리에 거대한 불기둥과 함께 큼직한 구덩이가 패였다. 천납도는 가까스로 나천웅의 공격을 피해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의 표정은 엄청난 불신의 빛으로 채워진 상태였다. '으……! 이럴 수가……?' "이제 마지막 공격이다!" 나천웅은 서서히 자화삼식 중 최후의 제 삼식을 시전키 시작했다. 그의 좌수가 붉게 물들며 가벼운 떨림을 보였다. 그런데, 급기야는 은은한 백광(白光)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그는 우수로 천무진뢰검을 꽉 움켜 잡았다. '이번엔 결코 피할 여유를 주지 않을 것이다!' 천납도는 내심 중얼거리며 그 역시 전신의 공력을 십이성으로 끌어 올렸다. 그의 입술이 꽉 물려 있어 얼마나 이 일전에 전력을 기울이는지 보여 주었다. 그의 쌍장에서 점차 붉은 홍운이 일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회색장포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이어 그의 쌍장이 쫙 펴지더니 갈쿠리 모양으로 오그렸다. 오그려진 십지(十指)의 끝이 짙은 진홍빛으로 물들었다. "잔마소(殘魔燒)!" "무극조원(無極造元)!" 나천웅의 입에서 두 마디의 대갈이 연속적으로 터졌다. 순간,


번쩍! 번--- 쩍! 두 가닥의 백광이 천납도를 향해 쏘아졌다. "천섬화혈지(天閃化血指)!" 휘류류륭---! 천납도의 십지에서 열 가닥의 홍광(紅光)이 빗살처럼 쏘아졌다. 백(白)과 홍(紅)의 가공할 기류는 허공에서 무시무시한 잠력을 일으키며 정면으로 충돌했다. 꽈르르릉! 파츠츠츳! 거의 동시 두 마디의 처절한 비명성이 터져울렸다. "큭!" "커억!" 혈랑신성 천납도는 두 걸음이나 밀려나며 비틀거렸다. 아, 보라! 그의 복부에는 천무진뢰검이 깊숙이 박혀져 있었다. 또한 가슴 부위는 온통 잿더미인 양 새까맣게 타있는 것이 아닌가? 나천웅은 동시에 두 가지 초식으로 천납도의 복부와 가슴을 공격한 것이었다. 허나 나천웅 역시 무사하지는 않았다. 천납도의 천섬화혈지가 두 군데에 상처를 입혔던 것이다. 어깨와 가슴에 각기 한 대씩의 지풍을 얻어 맞은 그의 안색은 밀납처럼 창백했다. 금강불괴지신의 몸인 그도 천납도의 개세적인 무공에는 속수무책으로 상처를 입고 만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열이 선명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나천웅은 태산처럼 요지부동으로 서 있었다. 그때 천납도의 귀와 눈에서 핏줄기가 주르륵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네…… 네놈의 무…… 무공이…… 이…… 이토록 강할 줄이야…… 꿈…… 꿈에도 생각 못……" 그의 눈은 아직도 현실을 받아 들이지 못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로서는 자다가 어린아이에게 귓쌈을 맞은 격이라고나 할까? 허나 승부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그의 몸은 이내 바람이 빠져나간 풍선처럼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쿵……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현실을 인정할 수 없는 듯 눈을 부릅뜬 상태였다. 그렇다. 이것으로 천마십이성이 이제 천마십일성으로 변해 버렸다. "……!" 나천웅은 한동안 멍하니 그의 시신을 응시하더니 돌연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냈다. "으……! 만약 만년화령지과를 복용치 않았다면 이미 나의 심장에는 커다란 구멍이 났을 것이다……" 나천웅은 지금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마치 꿈인 것만 같았다. 그렇다. 천섬화혈지는 분명히 그의 어깨와 가슴을 격타했지만 근육을 완전히 꿰뚫지는 못했다. 그것은 심장 부근 바로 근처에까지만 구멍을 뚫어 놓았을 뿐이었다. 휘잉! 한 줄기 한풍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그제서야 그는 퍼뜩 정신을 추스렸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만약 천마십이성 중 한 명이라도 더 나타난다면 그것으로 나는 끝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 앞으로의 무림은 어떻게 될 것인가?'


제 24 장 怪鳥와의 血鬪 윙위잉윙--벌판에는 뼈를 깎는 듯한 한풍(寒風)이 계속 불어닥쳤다. 광풍(狂風) 속에 더 이상 눈은 섞여있지 않았다. 어느덧 눈은 그친 것이었다. 허나 광막한 변방의 벌판에는 눈이 두텁게 쌓여 광풍에 휘날리고 있었다. 윙위잉윙--광풍에 휘날린 눈보라는 천지를 뒤덮을 듯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이때 광풍 속에서 나천웅이 나타났다. 그는 심하게 신형을 비틀거리고 있었다. 눈은 거의 무릎까지 푹푹 빠져들고 있었다. 나천웅의 형상은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그가 입고 있는 백의(白衣)는 지금 완전히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어깨와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는 온몸을 물들였으며 한풍에 뻣뻣이 얼어 있었다. 그는 천마십이성(天魔十二星)의 열 두 번째인 혈랑신성(血狼神星)과 악투를 벌인 끝에 극심한 내상을 입고 있었다. 그가 비록 금강불괴지신의 몸이라고는 하나 혈랑신성의 공격에 처음으로 중상을 입고 만 것이었다. 그는 신형을 비틀거릴 뿐 아니라 정신마저 혼미해지고 있었다. 단지 광풍의 벌판을 걷게하는 것은 자신을 지탱시키는 한 가닥의 의지 때문이었다. 강인한 의지력이 없었다면 결코 그는 더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으리라. 얼마나 걸었을까? 그는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속에서 벌판을 비틀비틀 가로질러갔다. 모진 광풍이 마구 피에 젖어 얼어붙은 그의 옷자락을 휘날리고 있었다. 이때, 돌연 허공에서 한 줄기 듣기 거북한 괴음(怪音)이 혼미해 가는 그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까아아! 까아……! 나천웅은 흠칫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눈에 이내 놀람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하늘에는 한 마리의 거대(巨大)한 괴조(怪鳥)가 날고 있었다. 그 괴조는 실로 기이하게 생긴 것이었다. 전신은 완전히 금빛을 띠고 있었다. 다시 말해 괴조의 털은 모두 금색이었던 것이다. 또한 괴조의 길이는 근 일 장여나 되었다. 날개를 편 모습은 더욱 거대해 보였고 한눈에도 인간세상에서 결코 볼 수 없는 영물(靈物)임이 분명했다. 허나 더욱 괴이한 것은 금빛 괴조의 꼬리부분이었다. 괴조는 근 몸통만한 길이의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헌데 그 꼬리는 마치 찬란한 금룡(金龍)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실로 괴이하기 짝이 없는 거조였다. 나천웅은 크게 놀라 부르짖었다. "세상에…… 저런 새가 있다니!" 이때, 괴조는 웬일인지 다른 곳으로 떠날 생각을 않고 나천웅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또한 괴조는 지상에 가깝게 내려와 타는 듯이 붉은 두 눈으로 무섭게 나천웅을 쏘아보고 있었다. 위잉! 괴조의 날갯바람이 폭풍이 되어 지상으로 눈을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는 괴조의 붉은 눈알을 본 순간 섬뜩해졌다. '저놈이…… 나를…… 노리고 있구나!' 과연 그의 생각은 그대로 적중되었다. 금빛 괴조는 한동안 나천웅의 머리 위에서 혈안(血眼)을 굴리며 노리더니 돌연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내리찍어 왔던 것이었다. 휘이잉---! 세찬 광풍이 괴조와 함께 덮쳐 내렸다. "앗!" 나천웅은 다급한 비명을 내지르며 급히 옆으로 몸을 날렸다.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어깨부분 옷자락이 찢겨져 나가고 말았다. 그는 어깨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통증을 느끼고 급히 살펴보았다. 어깨부분에 한 가닥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나천웅은 그만 크게 놀라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내 몸에 상처가…… 나다니! 도검(刀劍)에도 상하지 않는 나의 신체가 한낱 새의 발톱 따위에……' 이때 괴조는 그를 스치고는 괴성을 내지르며 다시 허공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나천웅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미 금강불괴지신이 된 그의 몸에 괴조가 상처를 낸 것이 아닌가? 그의 경악에 일그러진 눈은 다시 허공으로 향했다. 그순간 괴조는 다시 엄청난 기세로 내리 꽂혔다. 이번에는 부리와 발톱을 동시에 사용하여 공격하고 있었다. 끄아악---! 귀를 찢는 듣기 거북한 울음소리와 함께 날개에서 쏟아져 나오는 세찬 광풍이 나천웅의 정신을 어지럽게 뒤흔들었다. 허나 나천웅은 이번엔 경황중에도 침착하게 응수했다. 그는 광풍과 함께 덤벼드는 괴조를 향해 단원오장 중 제 일초인 단천지혈을 펼쳐냈다. 순간, 펑---! 폭음이 울리고 그의 장력은 정확히 괴조의 몸에 격중되었다. 허나 어찌 알았으랴? 끄악! 괴조는 날카로운 괴음을 발했을 뿐 전혀 타격을 입지않고 그대로 공격해 오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나천웅은 당황한 외침을 발했다. 그가 미처 자세를 가다듬기도 전에 괴조는 또다시 날카로운 발톱으로 찍어 그를 눌러왔다. 쉬이익! 공기를 갈가리 찢는 듯한 파공음이 일었다. 나천웅은 급히 신형을 이동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금라천현보(金羅天玄步)를 펼친 것이었다. 그의 신형은 스르르 연기처럼 괴조의 공격권에서 빠져나갔다. 쾅---! 괴조의 발톱은 바닥을 내리 찍었다. 엄청난 폭음과 함께 바닥의 눈은 물론 단단히 얼어붙은 흙덩이까지 파여 사방으로 날아갔다. 실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바닥은 괴조의 발톱에 의해 깊은 웅덩이가 파이고 만 것이었다. '우…… 무서운 괴조로구나!'


나천웅은 더욱 경악심을 금치 못했다. 괴조는 공격을 헛탕치자 성이 난 듯 귀청을 찢는 듯한 부르짖음을 터뜨렸다. 꾸아악---! 괴조는 빙글 선회하더니 다시 날카로운 발톱으로 나천웅을 할퀴어 왔다. 쌔애액---! 나천웅은 세찬 경기가 전신을 오그라들게 함을 느끼고 아찔한 심정에 금라천현보를 펼쳐 아슬아슬하게 괴조의 공격을 피해낸 다음 섬광처럼 몸을 솟구쳤다. 다급한 김에 임기응변을 펼친 것이다. 파아앗! 다음 순간 그는 괴조의 널찍한 등으로 올라타고 있었다. 그러자 괴조는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꾸아아악! 휘이잉---! 날개를 마구 저어대자 바닥에 깔린 눈은 광풍에 말려 온통 휘말려 올랐다. 순식간에 천지간은 눈더미로 뒤덮여 어두어질 정도였다. 허나 나천웅은 두 손으로 괴조의 금빛 갈기털을 꽉 움쳐쥔 채 바짝 엎드렸다. 괴조는 그를 떨구기 위해 미친 듯이 버둥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나천웅은 몸이 요동하자 급히 양손으로 괴조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되니 괴조가 아무리 버둥거려도 그의 몸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휘잉---! 마침내 괴조는 그를 떨구지 못하고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괴조는 그야말로 섬전 같은 속도로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이때 나천웅은 전신의 내공을 끌어올려 괴조의 등판을 쳤다. 퍽---! 허나 어찌된 셈인지 괴조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나천웅의 전신공력을 다한 장력과 주먹이 괴조의 몸을 마구 난타했으나 오히려 기이한 반탄력에 튕겨나갈 뿐이었다. 나천웅의 이마에는 팥알 만한 땀방울이 맺혔다. '도…… 도대체…… 이 괴물은 쇳덩이로 만들어졌단 말인가?' 나천웅은 놀라움과 당황함으로 정신이 혼란스러워졌다. 이때 이미 괴조는 까마득하게 하늘 높이 올라와 있었다. 거의 지상이 안보일 정도였다. "좋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 나천웅은 입술을 씰룩였다. 그는 이번에는 자화신공을 십성(十成)까지 끌어올렸다. 그의 쌍장에서 대번에 이글거리는 화염(火焰)이 내뻗치며 괴조를 가격해들었다. 쾅---! 허나 역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도대체가 금빛 괴조에게는 어떠한 공격도 통하지가 않았던 것이었다. 자화신공을 운기한 장력을 일반 사람이나 동물이 격중 당하면 일시지간에 재가 되어 버리는 신공이었다. 헌데 괴조에게는 통하지가 않았다. 나천웅은 일시 넋을 잃었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결국 나천웅과 괴조는 가마득한 하늘 위에서 근 한 시진 가량이나 격투를 벌였다. 나천웅은 거의 탈진할 지경이었다. 허나 괴조 역시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괴조는 쉴새없이 나천웅의 공격에 격심한 고통을 치르고 있었다.


실상 나천웅의 공격은 개세적인 신공(神功)만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제아무리 불가사의한 괴조라 하여도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바로 그때, 나천웅의 시야에 문득 괴조의 목덜미 부근에서 유독 금모(金毛)가 아닌 하얀 털로 된 부분이 들어왔다. 순간 괴조와의 싸움에서 지칠대로 지친 그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우장(右掌)을 들어 바로 그 부분을 가격했다. 퍽! 둔탁한 음향이 울렸다. 헌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끄악! 괴조는 몹시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뒤트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흰털이 덮여 있는 부분에서 한 줄기 액체가 스며나왔다. 그것은 놀랍게도 금빛의 피였다. 황금색 피를 허공에 뿌리는 괴조의 몸동작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그것을 발견한 나천웅의 눈썹이 성큼 치켜 떠졌다. 이어 그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이놈의 급소는 바로 이곳이다!"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외친 그는 다시 우장에 자화신공을 운기했다. 이때 괴조는 느닷없이 기다란 용(龍)의 형상을 한 꼬리를 쳐들더니 나천웅의 등을 내리쳤다. 퍽---! "으윽!" 나천웅은 비명을 내질렀다. 용의 꼬리에 정통으로 등을 얻어맞자 그는 흡사 전신이 산산이 갈라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던 것이다. 놀랍게도 그의 등은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선혈이 낭자해 있었다. 아마 보통의 무림고수라면 괴조의 꼬리 공격에 완전히 박살이 났으리라. 나천웅은 고통으로 인해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우장에 운기한 자화신공으로 다시 괴조의 흰털이 덮힌 목덜미를 폭사해갔다. 퍽! 다시 금빛 피가 흘러내렸다. 동시에 괴조는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온 몸을 요동쳤다. 나천웅은 다시 그곳을 전력으로 쳐내갔다. 끄악! 괴조는 연신 비명을 질러대더니 다시 꼬리로 나천웅의 등을 쳤다. 퍽---! "으윽!" 나천웅은 비명을 내질렀으나 이를 악물고 괴조의 급소를 계속 내리쳤다. 정신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허나 여기서 포기하면 모든 게 끝장이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사력을 다해 괴조를 껴안고는 금빛 피가 흘러나오는 괴조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피를 많이 흘리면 결국 이놈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피를 빨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괴조의 피는 끊임없이 그의 목구멍을 타고 뱃속으로 넘어갔다. 퍼퍽! 그 순간에도 용의 꼬리가 계속 그의 등을 때리고 있었다. 허나 나천웅은 더 이상 반격할 힘도 없었기에 오직 목덜미를 끌어안은 채 힘껏 괴조의 피를 빨아들일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괴조는 점점 힘이 빠지니까 더 이상 자신의 꼬리로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천웅은 더 이상 괴조에게서 피가 빨리지 않음을 느꼈다. 그렇다. 결국 그는 괴조의 피를 거의 대부분 빨아 마신 것이다. 끄으악---! 괴조의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들렸다. 다음 순간 나천웅은 괴조의 몸이 축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괴조는 서서히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천웅은 자신이 괴조와의 싸움에서 승리했음을 느꼈다. 허나 이때 괴조의 몸은 쏜살같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앗!" 나천웅은 그만 비명을 내질렀다. 신법을 운용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은 탓이었다. 괴조와 그의 몸은 한 덩이리가 된 채 아래로 박히듯이 추락하고 있었다. 나천웅은 얼굴에 부딪치는 싸늘한 바람의 감촉을 느끼며 그만 정신이 아득한 나락으로 추락해갔다. 땅에 충돌하기도 전에 정신을 잃고 만 것이다. 슈우욱! * * * 암흑. 막막한 암공(暗空)이었다. 하늘(乾)과 땅(坤)이 어디인지, 삶(生)과 죽음(死)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암흑 공간. 나천웅은 그러한 막막한 시공(時空) 속에서 누워 있었다. 그의 육신을 떠난 의식은 아직도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 밖을 헤매고 있었다. 헌데 어느 순간, 나천웅은 부옇게 밝아오는 여명이 암흑의 공간을 뚫고 들어옴을 느꼈다. 그는 격렬한 고통 속에 몸을 버둥거렸다. "윽!" 그의 입에서 고통스런 비명이 터졌다. "젊은이, 움직이지 말게나. 아직도 자네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네." 갑자기 어디선가 극히 부드러운 음성이 그의 귀로 전해져 왔다. "……!" 나천웅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며 급히 물었다. "누…… 누구십니까?" 그러자 곧 노인의 웃음소리가 그의 물음을 받았다. "허허허…… 노부는 바로 자네를 구해준 사람이네." "네……?" 나천웅은 멍청히 되물었다. 아직도 시야가 흐릿하였다. 다시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자네는 정말 천운(天運)을 타고 났는지 무척이나 운이 좋았네." 나천웅의 시야는 비로소 걷히기 시작했다. 그는 급히 주위를 훑어 보았다. 그가 있는 곳은 하나의 석실(石室)이었다.


동시에 나천웅은 자신이 하나의 돌로 된 침상에 누워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눈길을 다시 돌렸다. 그러자 곧 침상 옆에 정좌하고 있는 한 명의 노인이 보였다. 그는 대략 육십여 세쯤 되어 보였다. 일신에는 낡은 자의(紫衣)를 입고 있었으며 전신에서 풍기는 인상이 지극히 인자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반듯이 정좌한 채 나천웅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천웅은 멍하니 자의노인을 마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노…… 선배님께서 소생을 구해 주셨습니까?" 자의노인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나천웅은 그 말에 몸을 일으키려 했다. "으윽!" 허나 그는 곧 전신이 부러져나갈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자의노인이 급히 말했다. "가만히 있게. 자네는 아직 상세가 치유되지 않았으니 절대로 움직여선 안되네." 나천웅은 안면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노선배님의 구명지은을……" "허허…… 그런 허례는 치우게! 노부는 사소한 예의범절은 싫어하네." 자의노인은 그렇게 말한 후 잠시 기이한 눈으로 나천웅의 신체를 살폈다. 나천웅은 묵묵히 그의 시선을 받았다. "헌데…… 어떻게 해서 자네는 그 만년금룡신응(萬年金龍神鷹)과 함께 떨어졌나?" 그 말에 나천웅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만년금룡신응……?" 그러자 자의노인은 약간 놀라는 빛을 보였다. "아니! 그럼 자네는 그 새의 이름도 모르고 싸웠단 말인가?" 나천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자의노인은 의혹의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그럼 어떻게 되어 만년금룡신응과 싸우게 된 것인가?" 나천웅은 그 말에 처절했던 하늘에서의 혈투를 생각해 내고는 그만 진저리를 쳤다. 너무도 끔찍한 혈투였기 때문이었다. 이어 그는 자의노인에게 괴조와 만나게 된 경위부터 자세히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자초지종을 다 듣고난 자의노인은 경악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경이로운 눈으로 나천웅을 내려다 보며 탄성을 발했다. "허어! 기연이로다! 기연……!" "……?" 나천웅은 자의노인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기연이라뇨……?" 그의 물음에 자의노인은 약간 들뜬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정말 크나큰 광세기연을 얻었네!" "……" 나천웅은 여전히 영문을 몰라 눈을 크게 뜨고 자의노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자의노인은 한동안 무슨 생각을 더듬는 듯 침묵하더니 비로소 입을 열었다. "자네는 그 만년금룡신응이 어떤 새인지 알고 있나?"


나천웅은 고개를 흔들었다. "불초가 어찌 알겠습니까?" 자의노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그럼 노부가 설명해 주겠네." 노인은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만년금룡신응은 바로 천라금응(天羅金鷹)이라는 희귀한 독수리와 용(龍)이 교배하여 그 사이에서 태어난 신령한 영물이네." "아……!" 나천웅은 탄성을 발했다. '세상에 정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믿기 힘든 일이다……' 허나 자의노인은 분명한 어조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어 태어난 놈은 전체의 몸이 강철보다도 단단하네. 천하의 그 어떤 병기(兵器)로도 절대 그놈을 다치게 할 수는 없지. 단지 그놈에게 약점이 있다면……" 자의노인은 여기에서 잠시 말을 끊고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나천웅을 응시했다. "그놈의 유일한 약점은 바로 목덜미 부근의 흰털이 덮힌 곳이네!" "아!" 나천웅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 그랬었구나.'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만년금룡신응을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게되었다. 자의노인은 그의 놀라는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놈은 만년(萬年)을 자란 다음 한 개의 과일을 찾아 헤매게 된다네." 나천웅은 그 말에 급히 반문했다. "과일이라니……?" 자의노인은 곧 대답했다. "바로 만년화령지과(萬年火靈之果)라는 과일이네." "넷……!" 나천웅은 크게 놀랬다. 만년화령지과라면 바로 자신이 복용한 영과가 아니던가! 그의 놀라움이 채 가라앉기 전에 다시 자의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 만년화령지과를 먹으면 그 새는 비로소 한 마리의 응룡(鷹龍)이 되어 하늘을 승천(昇天)하게 되네." "……" 나천웅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직 그의 마음 속에는 놀라움이 가시지 않았던 것이었다. 자의노인은 문득 유심히 나천웅을 주시하더니 중얼거렸다. "헌데 어찌하여 그 새가 자네에게 덤벼들었는지 모르겠군. 그 새는 좀체로 사람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는데……" 그 말에 나천웅은 갑자기 크게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 그렇다면 그 만년금룡신응은 바로 나의 체내에 잠재되어 있는 만년화령지과의 냄새를 맡고 공격했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자 나천웅은 이내 그 짐작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노부가 자네와 그 만년금룡신응을 발견했을 때 그 새를 보니 이미 피가 한 방울도 없는 상태였네. 이제 자네의 말을 들어보니 자네가 그 피를 모두 마셨군."


"……" 나천웅은 묵묵히 고개만을 끄덕였다. 그러자 돌연 자의노인은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 나천웅은 어리둥절하여 의혹의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자의노인은 이윽고 웃음을 그치더니 호탕하게 말했다. "정말 기연이야! 대단한 기연이야! 이제 자네는 그 만년금룡신응의 피로 인해 무궁한 혜택을 받게 될 것이네." 나천웅이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떤 혜택을 받게 됩니까?" 자의노인은 다소 흥분된 빛을 보이며 설명했다. "원래 그 만년금룡신응의 몸은 극음지체(極陰之體)네. 따라서 그 새의 피도 극음의 기운을 띠고 있네. 또한 무궁한 영효(靈效)를 가지고 있네. 그러나 극음의 성질 때문에 남자보다도 여인이 복용하는 것이 더욱 신묘한 효용을 얻을 수가 있네." "……" 나천웅은 묵묵히 귀를 기울여 듣기만 했다. 자의노인의 말이 계속 되었다. "허나 남자가 복용하더라도 그 효능은 이루 말할 수 없을만치 무궁하네. 즉, 우선 전신에 창칼이 안들어 감은 물론 수화(水火)가 불침하게 되네." "……!" "또한 무림인이 복용하면 내공은 즉시로 일갑자(一甲子)나 증가하게 되네." "일갑자!" 나천웅은 놀라 부르짖었다. 그러자 자의노인은 다시 말했다. "더구나 만약 자네가 인연이 되어 만년화령지과나 영과를 마저 복용할 수만 있다면 자네는 무림사상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일세기인이 될 것이네." 그 말에 나천웅은 크게 가슴이 진동되었다. '일세기인……?' 자의노인은 나천웅의 눈에서 광채가 어리는 것을 내려다 보며 설명했다. "음…… 원래 만년금룡신응과 만년화령지과는 각기 천지간의 극음(極陰)과 극양(極陽)의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이네. 이들은 서로 극성이지만 만약 함께 복용하여 조화(造化)를 이루면 천지만물(天地萬物)의 기이한 법도(法道)에 따라 자네의 몸은 그야말로 불사신(不死神)이 될 것이네. 즉, 자네는 수백 년 동안 결코 늙지도 않고 영원히 살게 될 것이네." 나천웅은 크게 놀라 부르짖었다. "그…… 그럴 수가……?" 그는 너무도 엄청난 자의노인의 말이 도저히 믿기가 힘들었다. '어찌…… 인간이 수백 년 동안 늙지도 죽지도 않고 살 수가 있단 말인가?' 나천웅은 자의노인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가 없는 심정이었다. 허나 그는 다음 순간 문득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그러나…… 세상에 이토록 공교로운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일까? 결국 천지간의 두 영물을 내가 모두 복용하게 될 줄이야……!' 그것은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또한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것은 하늘의 안배라고 해도


너무나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천웅은 눈을 크게 뜬 채 자신에게 닥친 놀라운 현실에 대해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이것은…… 어쩌면 하늘이 내게 내린 숙명일지도 모른다. 어떤 큰일을 하게 하려는……' 그의 표정이 점차 굳어갔다. 그는 문득 자신의 한몸에 매여져 있는 커다란 짐을 생각했던 것이다. 나습포찰! 천마십이성! 그들을 나천웅은 모두 괴멸시켜야 했다. 이미 마가천의 구슬이 그들의 손에 들어간 이상 수백 년을 기회만 노리고 있던 나습포찰의 마승들은 결코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무서운 기세로 중원무림을 침략할 것이 틀림 없었다. 천마십이성! 실로 그들의 무공은 상상을 불허할 만큼 높았다. 나천웅은 이미 그들 중 가장 마지막 서열의 혈랑신성과 일대 혈전을 벌인 바 있지 않은가! 헌데 그의 무공은 나천웅의 금강불괴지신인 몸에 중상을 입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나머지 천마십일성의 무공은 어떠하겠는가? 더구나 그들이 모두 한꺼번에 덤빈다면……? 나천웅의 마음은 무겁기 그지 없었다. 당금 중원무림의 상황으로 미루어 과연 나습포찰에 대항할 만한 세력이 있는지도 너무도 미지수였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암담한 것이었다. 나천웅은 표정이 굳어진 채 멍하니 눈길을 천장 한 가운데로 못박았다. 오직 무림의 운명은 그의 두 어깨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허나 그는 무림의 안위도 안위이지만 그의 혈족인 천수제군의 죄를 씻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한몸을 바쳐야 했다. 그것은 그의 남아로서의 강력한 의지이자 불타는 신념이었다. 나천웅의 두 눈에서는 무서운 광망이 내뻗쳤다. 헌데 바로 그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자의노인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하게 변하더니 정좌한 자세 그대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으음……!" 그의 입에서는 참을 수 없는 듯한 비명이 고통스럽게 터져나왔다. "……!" 나천웅은 놀라 외쳤다. "노선배님! 왜 그러십니까?" 그러자 자의노인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진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또…… 또…… 다시 발작이 시작…… 되었군…… 으윽!" 자의노인의 얼굴은 백지장같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또한 그는 정좌한 그대로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어찌나 심한 고통을 참고 있는지 그의 악다문 입에서는 선혈이 가늘게 흘러 나왔다. "무…… 무서운…… 고통이…… 나의 몸에 다시…… 닥치는구…… 나…… 윽!" 자의노인의 형상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의 낡은 자의는 순식간에 식은 땀으로 흠뻑 젖어 버렸다. 허나 무슨 까닭인지 그는 정좌한 채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고스란히 앉은 채로 몸에 다가오는 격심한 고통을 참고 있었다.


그의 안면을 비롯하여 온 전신의 피부와 근육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노……선배님!" 나천웅은 당황하여 크게 그를 불렀다. 허나 그는 중상을 입은 몸이므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고통에 시달리는 자의노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자의노인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어 그의 만면에는 허탈한 표정이 짙게 드리워졌다. 격렬한 고통이 지나간 모양이었다. 그의 모습은 한 순간에 겪은 엄청난 고통에 전보다도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그 모습을 나천웅은 놀라운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윽고 자의노인은 장탄식을 터뜨렸다. "아아---! 이것이 열 한 번째의 고통이구나. 이제 앞으로 한 번만 더 닥쳐오면 노부는 이 세상에서 종말을 고하고 말겠구나……" "……!" 나천웅은 눈을 크게 뜨고 자의노인을 응시했다. 그는 도대체 자의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무엇인가 커다란 비밀이 자의노인의 신상에 얽혀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았다. 나천웅은 조용히 자의노인을 주시하며 그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자의노인은 한동안 비감어린 안색으로 천정을 올려다보며 말이 없었다. 허나 이내 그는 고개를 돌리더니 나천웅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갑자기 기이한 빛이 어렸다. 무엇인가 간절한 염원이 있는가 하면, 극히 복잡한 심중이 난마처럼 엉클어져있는 시선이었다. 나천웅은 자의노인의 시선을 접하자 문득 가슴이 진동되는 것을 느꼈다. 이때 자의노인은 가라앉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젊은이…… 노부가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나천웅은 급히 반문했다. "무엇입니까? 소생이 할 수만 있다면 필히 성의를 다하겠습니다." 그러자 자의노인의 안색에는 다소 안도감이 서렸다. 허나 다시 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뒤덮였다.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는 듯 시선을 허공으로 향했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 노부는 지난날 남창(南昌)의 단가장(段家莊)이란 곳의 주인이었네." 순간 나천웅은 그만 가슴이 철렁하고 말았다. 허나 자의노인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노부의 별호는 자의신검(紫衣神劍)이며 이름은 단지현(段志玄)이라고 하네……" '단지현……!' 나천웅은 재차 안색이 일변했다. 제 25 장 百變神風客 나천웅은 두 눈을 한 번 크게 뜬 채 자의노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노선배님! 지금 단지현이라고 하셨습니까?" 자의노인은 의아한 듯이 나천웅을 쳐다보며 물었다. "자네는 노부의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 그 말에 나천웅은 의혹에 싸였다.


그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그때…… 내가 죽인 자는 틀림없이 자의신검 단지현이었다. 그렇다면 이 노인의 말은……?' 나천웅의 표정은 의혹으로 잔뜩 물들어 있었다. 그의 모습에 자의노인은 오히려 더욱 의아한 듯 물었다. "여보게! 자네는 노부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 같군. 어떻게 해서 알고 있지?" 나천웅은 지그시 자의노인을 응시했다. 그는 이 사태가 어찌된 일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의혹의 눈으로 자의노인을 한동안 주시하다가 이윽고 긴 탄성을 터뜨렸다. 이어 그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저는 이 일이 어찌된 것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헌데 지난날……" 나천웅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생각을 더듬었다. 이어 그는 단혜미를 만났을 때, 그리고 곧 단가장에 가게된 경위를 이야기했다. 이어 단가장에서의 음모와 더불어 그곳에서 벌어진 혈투(血鬪)를 얘기했다. 결국 그가 만난 자의신검 단지현을 죽인 얘기를 다 마쳤을 때, 자의노인의 안색은 완전히 경악으로 일그러지고 말았다. 그의 안색은 자꾸만 거듭하여 변하고 있었다. 이윽고 자의노인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안색은 이미 백지장같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 그럴 수가……" 자의노인의 입에서 당황과 경악의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나천웅은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말했다. "불초는 아직도 영문을 알 수가 없습니다. 노선배님과 그때의 자의신검이라는 자는 얼굴도 전혀 틀림니다. 헌데 어찌 노선배님이 단가장의 주인이라 말씀하시는 것인지……?" 자의노인은 긴 탄식을 터뜨렸다. 이윽고 고개를 든 자의노인의 눈에는 짙은 회한의 빛이 물기에 젖어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천정을 응시했다. 그의 회한에 싸인 눈 속에는 수많은 사연이 깊이 묻혀 있는 듯했다. 나천웅은 계속 그를 주시하였다. 이윽고 자의노인은 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떼었다. "노부는 일찍이 어렸을 때부터 무공 익히기를 밥 먹기보다 좋아했네. 그리하여 닥치는 대로 무공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지 연마했네." "……" 나천웅은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허나, 당시 노부가 있던 단가장의 집안은 대대로 문사(文士)의 집안이었네. 무부(武夫)가 되는 것은 부모들이 극력 반대를 하였네. 헌데도 노부는 그때 무공에 대한 끈질긴 집념과 강호무림에 대한 커다란 동경 때문에 결코 집안에 눌러앉아 글이나 익힐 마음이 추호도 없었네." 자의노인의 얼굴에는 과거를 회상하는 몽롱한 기운이 잔잔하게 깔려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추억에 젖은 듯 흐릿하게 변해 있었다. "결국…… 노부는 부모 몰래 단가장을 빠져 나와 무림에 발을 내딛게 되었네. 그때부터 노부는 풍운무림의 거센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었지……" 자의노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러다 그는 나천웅을 주시하더니 문득 물었다. "자네는 혹시 백변신풍객(百變神風客)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 나천웅은 따라 되뇌었다. "백변신풍객……?"


그러다 갑자기 그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문득 사부인 학선기에게서 들은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백변신풍객! 그는 어디서 왔는지 그 정체를 아는 사람은 무림에서 아무도 없었다. 그는 무림에서 가장 신비스런 인물이었다. 강호인들은 그를 생각하기를 완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에 싸인 그림자같은 인물로 여기고 있었다. 그의 특기는 걸세적인 경공술(輕功術)과 역용술(易容術)이었다. 천하에서 그의 진실한 얼굴을 본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무림에 출현한 이후로 신비막측한 기인(奇人)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헌데 그는 원인 모르게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 실종되고 말았다. 그 후 무림에서는 전혀 그의 종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의 소식은 바다에 빠진 돌멩이 모양 완전히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노선배님의 말씀은…… 백변신풍객과 무슨 관계가……?" 나천웅의 물음에 자의노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바로 노부 단지현이네." "넷?" 나천웅은 놀라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허나 그의 놀라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자의노인, 즉 단지현은 다시 입을 열었다. "옛날…… 아주 오래전 약 팔백 년 전에 천허자(天虛子)라는 일대기인이 있었네. 그는 자신의 개세적인 무공을 모아 절세비급을 남겼네." "천허경……!" 나천웅이 어찌 천허경을 모르겠는가? 바로 그 자신이 천허경의 중권(中卷)을 획득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나천웅은 입을 열지 않고 계속 단지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천허경은 상중하(上中下) 모두 세 권이었네. 헌데 무림에 나온 나는 천재일우의 기연을 만나 그 중의 하권을 얻게 되었네." "……!" 나천웅은 가슴이 뜀을 의식했다. "하권에는 영무환신술(靈霧幻身術)이라는 인간의 능력을 훨씬 초월하는 절세의 경공술이 수록되어 있었네. 노부는 크게 기뻐하며 그 비급을 미친 듯이 연마했지. 결국 노부가 강호에서 이름을 날리는 독보적인 존재가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영무환신술 덕분이었네." 나천웅은 마음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그랬었구나……!' 단지현은 한동안 침묵에 잠겨있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헌데 노부는 하늘의 도움이 있었는지 또 다시 기연을 만났네. 바로 이십 년 전에 다시 한 권의 절세비급을 얻게 된 것이었네." "……" "그 비급은 삼백 년 전 변장의 대가(大家)였던 삼환노인(三幻老人)이 남긴 삼환비급(三幻秘 )이었네. 그 비급에는 그의 각종 역용술과 변환술(變幻術)이 수록되어 있었네. 결국 노부는 천허경의 하권과 삼환비급을 모두 익힌 후 강호에 새롭게 출도하게 하였네." 여기서 단지현은 말을 끊었다. 그의 얼굴은 완전히 과거를 회상하는 몽롱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더구나 이때 그의 눈에는 기이하게도 한 줄기 자부심과 긍지의 기운이 뻗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입을 떼었다.


"노부는 강호에 나타난 이래 수많은 싸움을 치뤘지만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네. 그것은 영무환신술의 놀라운 위력 때문이었네." 나천웅은 계속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단지현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을 느꼈다. 헌데 갑자기 단지현은 긴 탄식을 터뜨렸다. "아---! 그러나 결국 노부는 임자를 만나게 되었네. 바로 십 오 년 전이었네……" 단지현의 얼굴에는 갑작스럽게 참담한 고통의 빛이 가득히 떠올랐다. "십 오 년 전…… 노부는 한 황산(荒山)에서 이름 모를 노인을 만나게 되었네. 노부는 그와 자웅을 겨루게 되었지. 헌데…… 노부가 그에게 패하게 될 줄이야……!" "……" "노부는 그에게 완전히 패배하고 말았네. 허나 다행히도 노부는 신비한 나의 경공술 덕분에 그에게서 간신히 도망을 칠 수가 있었지……" 여기까지 말한 단지현의 얼굴은 그때의 비참했던 기억이 가슴을 찌르는 듯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그후…… 노부는 나 자신의 무공이 너무도 보잘 것 없었음을 통탄하게 되었네. 그리하여 다시 미친 듯이 무공을 연마하기 시작했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단지현은 문득 말을 끊었다. 그의 얼굴은 점점 더 비참하게 일그러졌다. "십 년 전…… 노부는 한 통의 서찰을 받게 되었네. 당시 노부의 정체를 무림에서는 아무도 알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일세. 그것은 바로 노부의 가장 절친한 한 친구의 죽음과 맞바꾼 것이었네." "……?" 나천웅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의혹의 표정을 띄웠다. 단지현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나의 친구를 비롯하여 그의 전 가족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몰살되고 말았네. 그리하여 그 소식을 듣고 달려간 노부는 친구의 품에서 그 서찰을 얻게된 것이었네." "아……" 나천웅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는 그 말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기껏 한 통의 서찰을 전하기 위해 죄없는 많은 사람들을 죽이다니……!" 단지현은 그의 분노에 찬 말을 듣고 잠시 침통한 표정을 짓더니 계속 말했다. "그 서찰에는 바로 노부와 호북성(湖北省)에 있는 천무산(天武山)에서 만나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네." "……" "노부는 서찰을 읽은 즉시 서찰을 보낸 자가 누구인지 깨닫게 되었네. 그 자는 바로 지난날 노부와 한 황산에서 싸웠던 그자라는 것을……" 여기까지 말한 단지현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결국 노부는 그 서찰에 적힌대로 천무산으로 갔네. 헌데…… 그것이…… 노부의 마지막 길이 될 줄이야……" 갑자기 단지현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동시에 그의 이마에는 식은 땀이 맺혔다. 그렇다. 그는 격심한 고통이 몸에 닥쳐온 듯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고통에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저…… 젊은이…… 시…… 간이 없다. 열…… 두 번째의 고통이 찾아왔…… 네. 이 고통이 끝나면…… 노…… 노부도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나천웅은 크게 놀랐다. "노선배님!" 허나 단지현은 이를 악물며 계속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노…… 부의…… 말을…… 계속 듣게…… 노…… 부는 자네에게 한 가지 부…… 탁이 있네……"


나천웅은 급히 말했다. "노선배님, 어서 말씀하십시오." "노…… 부는 십…… 년 전 집을 떠날 때 일곱 살 된…… 딸이 하나 있었네……" "……!" 나천웅은 즉시 단지현이 말하는 딸이 바로 단혜미임을 알았다. 허나, 그는 내색치 않고 계속 귀를 기울였다. 단지현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단혜미라고 하네…… 서찰을 받고 집을 떠나던 때 나는…… 나의 어린 딸이 홀로 있게 되는 것을 염려…… 하여…… 노부의 의형제에게…… 노부의 모습…… 그대로 변장을 시켜 딸을 돌…… 보게…… 했네…… 그런데……" "……!" "그가 바로…… 자네가 죽였다는 자의신검이네…… 그가 나습포찰의…… 주구…… 였을 줄이야……" "아!" 나천웅은 탄성을 발하며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그는 한 가지 의혹을 느꼈다. "그렇다면 어째서 노선배님의 지금 모습과 그 가짜 자의신검은 전혀 틀림니까?" 단지현은 그의 질문에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빛에는 말할 수 없는 비탄의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그 동안에도 그는 격심한 고통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모…… 든 것이 어쩌면 하늘의 뜻이지…… 인과응보인지도……노부는…… 평생 삼환비급의 변장술로 거의 매일같이 얼굴을 바꾸고 행동…… 했네…… 헌데…… 결국 그것이 오늘 날…… 영원히 나의 진면목을 회복할 수…… 없는 경과에…… 이르게 될…… 줄이야……" "……?" 나천웅은 의문의 눈으로 그를 계속 주시했다. 단지현은 괴로운 눈빛으로 다시 천정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바로…… 노부는 역용을 한 채 천무…… 산에서 과거의 그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오늘 이 지경이 되도록…… 중상을 입어…… 모든…… 공력이…… 상실되고 말았네…… 결국…… 그래서 당시 안면 근육을 이완시켜 변용한 용모는 영원히 굳어버려…… 오늘까지…… 풀 수가…… 없게 된…… 것이네……" "아……!" 나천웅은 입을 벌리고 말았다. 결국 백변신풍객은 자신의 절학에 의해 자신을 해치고 만 셈이었다. "모두가…… 하늘의 뜻이란 말인가…… 내 얼굴은……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았으니……설사 딸아이가 본다고 해도…… 노부를 부인할 것이네…… 허허헛!" 단지현은 처참한 웃음을 흘려냈다. 실로 비감하기 그지없는 웃음이었다. 허나 그 바람에 그의 몸은 더욱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되고 안색은 완전히 밀랍을 연상케 할 정도로 질려갔다. "노…… 노선배님!" 나천웅은 당황하여 그를 불렀다. 허나 단지현은 잠시 고통을 누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젊은이…… 자네는…… 노부가 보기에 분명…… 좋은…… 젊은이네…… 노부는 나 자신의…… 눈을…… 믿네……" 그는 이어 떨리는 손을 간신히 들이 한곳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돌로 된 탁자가 놓여 있었다. 헌데 그 석탁 위에는 하나의 검은 색 목갑(木匣)이 올려져 있었다. 목갑은 언뜻 보기에 한 자 정도의


길이를 가지고 있었다. 단지현은 떨리는 손 끝으로 목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상자에 든…… 물건을…… 자네에게……주겠…… 네…… 저 안에 든…… 물건은…… 천하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귀중한 것이네…… 심지어…… 자네가 마신 만년…… 금룡신응의…… 피…… 보다도…… 수…… 십…… 수천 배 더…… 귀중한 것이네……" "……!" 나천웅은 그의 말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검은 목갑을 쏘아보았다. '도대체 저 안에 무엇이 들어있길래 그토록 귀중하다는 것일까?' 이때 단지현의 말이 이어졌다. "목갑 속의 물건은 천하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지만…… 노부에게는…… 인연이…… 없었네…… 아마도 자네에게…… 인연이 닿는…… 모양이네……" "……" 나천웅은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묵묵히 단지현의 점차 사색(死色)이 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단지현은 숨이 차는지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계속 말했다. "자네……자네가 만약…… 내 딸을 만난다면…… 나의…… 소식을…… 전해…… 주게…… 그리고…… 그 아이를…… 잘…… 잘…… 돌봐주게…… 결코…… 결코…… 그아이를 슬프게…… 하지…… 말게나……" 단지현의 눈에서는 이슬 같은 것이 맺히고 있었다. 그는 묵묵히 슬픈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품 속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한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한 개의 금패(金牌)였다. 전후면에는 모두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용(龍)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는 금패를 꺼내는 순간 갑자기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그의 눈에는 생기(生氣)가 거의 소멸되고 있었다. 그는 크게 떨리는 손으로 금패를 내밀었다. "이…… 이것……은…… 나의…… 신물(信物)…… 이것을…… 딸에게…… 보여주면 알아볼…… 것이네…… 윽……!" 단지현은 재차 묵직한 신음을 토했다. 그의 얼굴에는 이때 검은빛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는 마지막 안간힘인 듯 입술을 굳게 깨물더니 힘겹게 말했다. "젊은이…… 노부를…… 불러낸…… 서찰의 주인은…… 바로…… 바……로…… 천(天)…… " 단지현은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자의신검(紫衣神劍)과 백변신풍객(百變神風客)으로 일생을 풍미했던 단지현! 그는 이렇게 하여 한(恨) 많은 생의 종지부를 찍고 만 것이다. 나천웅은 망연자실 그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시신은 그대로 정좌한 자세였으나 이미 혼(魂)은 육신을 떠나 있었다. 가슴으로 푹 꺾인 고개는 그의 일생(一生)이 얼마나 비참하고 한스러웠던가를 보여주는 비감한 광경이었다. "아! 노선배님……!" 나천웅은 비로소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허나 그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단지 그는 누운 채로 단지현의 싸늘히 식어가는 시신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의 눈은 생(生)의 유한(有恨)이 난마처럼 헝클린 채 허탈과 무상(無常)으로 흐린 안개를 감고 있었다.


그러나 나천웅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현이 마지막으로 뱉아내었던 한 글자, -천(天)…… 그 한 글자의 의미가 자신에게 있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그렇다. 만약 그가 끝까지 말을 들었더라면, 어쩌면 그는 더 이상 풍진혈원(風塵血怨)의 세계에서 더 이상 머무르고 있지 않아도 되었으리라. * * * 나천웅은 말없이 석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탁 위에는 하나의 목갑이 놓여 있었다. 지금 나천웅은 목갑을 놓고 짙은 의혹속에 빠져 있었다. '도대체 이 안에 무엇이 들어 있길래 만년금룡신응보다 수십 배나 더 귀하단 말인가?' 그는 의혹속에 그보다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일단 열어 보자!' 나천웅은 손을 뻗쳐 목갑의 뚜껑을 열었다. 덜컥! 의외로 목갑은 가볍게 열렸다. "……!" 나천웅은 한 차례 고개를 갸웃뚱거렸다. 목갑 안에는 네 권의 양피지로 된 책자와 피묻은 승포자락, 그리고 두루마리 하나가 있었다. 나천웅은 먼저 한 권의 책자를 집어 들었다. '도대체 이것들이 무엇이길래 그토록 귀중하단 말인가?' 나천웅도 그 책자를 살펴보았다. 순간 그의 입에서 부지불식중에 놀란 일성이 튀어나왔다. "이럴 수가……?" 그는 도시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책자로 눈길을 돌렸다. 책자의 겉면에는 전자체(篆子體)로 다음장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만상검경(萬象劍經).> 만상검경---! "이것은 스승님의 형님되시는……?" 그렇다. 만상검경은 바로 그의 스승인 학선기의 친형인 학선룡이 얻은 비급, 바로 그것이 아닌가? '이……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이런 곳에……' 나천웅의 대경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백옥마궁의 비극을 모르는 나천웅으로서는 대경실색하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사부님께서는 언제나 사백님의 검법이 천하무적(天下無敵)인지라 그 어느 누구도 따를 수가 없는…… 그야말로 무림사상 최고의 검법이라 말씀하신 적이 있었지……' 나천웅은 조금씩 시각이 흐를 수록 만상검경에 대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과연…… 만년금룡신응보다 더욱 값진 것이 분명하다.' 비로소 나천웅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는 책장을 넘겨 보았다. 역시 복잡한 전자체의 글이 빽빽히 적혀 있었다. 그는 계속하여 장을 넘겨 갔다. <검(劍)이란 크게 구분해서 활검(活劍)과 살검(殺劍)이라 한다. 활검이란 문자 그대로 모든 생물을


활(活)케 하는 것이고, 살검이란 살상(殺傷)하는 데 쓰이는 것을 이름이다. 무릇 모든 우주의 삼라만상은 한 가닥 기(氣)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검(劍)에도 기가 있다. 검기(劍氣)가 바로 그것이다. 검기에는 활기(活氣)와 살기(殺氣)가 있느니라. 검과 검기는……> 검의 일반적인 원리에 대해 낱낱이 적혀 있었다. 사실 나천웅은 가끔 검을 사용하기는 해도 이토록 검의 심오한 원리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나천웅은 넋을 놓고 온통 책자 속의 글에 빠져 들었다. 그것을 읽어 가는 동안 그는 대라삼검에서 완전히 깨우치지 못했던 여러 가지 부분들이 속속 터득됨을 느꼈다. 책에는 거의 백여 장 정도가 검의 원리에 대해 기술되어 있었다. 마침내, 검의 원리에 대한 기술이 끝났다. "휴……! 운검(運劍)을 하는데도 이토록 심오한 경지가 있다니……" 나천웅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제 책자에는 마지막 두 장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천웅은 마지막 두 장을 들쳐 보았다. 순간, "아니?" 그의 가슴에 한차례 폭풍같은 격동이 일었다. 거기엔 단 두 초식의 검식(劍式)이 기술되어 있었다. 제 일초식 검광폭혈비망혼(劍光暴血飛芒魂). 제 이초식 천공사극한명살(天空死極寒冥殺). 나천웅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두 가지의 검식을 훑어 보았다. 차츰 그의 안면 근육이 심한 경련을 보이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전신에 세찬 경련까지 일었다. 그는 전신의 근육이 죄다 오그라드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무…… 무시…… 너무도 무시무시한 검법이다!" 나천웅은 숨죽인 듯한 음색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전신에 한 차례 식은 땀이 흘렀다. 기이한 일이 아닌가? 도대체 얼마나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니고 있기에 나천웅으로 하여금 이토록 충격에 휩싸이게 한단 말인가? 그렇다. 제 일초식인 검광폭혈비망혼. 그것은 원래 대라삼검 중 최절초인 무극조원보다 적어도 한 단계 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제 이초인 천공사극한명살은 제 일초식 검광폭혈비망혼보다 더 높은 경지의 검식이었다. 이러니 제아무리 나천웅이라 할지라도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나천웅은 한동안 정신을 가누지 못했다. 터질 듯한 희열에 앞서 이초식의 검식에 그대로 압도 당해 버린 것이었다. 얼마가 흘렀을까…… 나천웅은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고 만산검경을 덮었다. 이어 또 한 권의 책을 목갑 속에서 꺼내들었다. <마음패도경(魔音覇刀經).> 나천웅은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잠시 후 그는 한 차례 으스스 치를 떨었다. '으…… 이름 그대로 악랄하기 그지없는 마음이다!' 나천웅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만 오싹하니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마음패도경에는 두 가지


무공이 기술되어 있었다. 혈강삼음(血 三音). 패천일도(覇天一刀). 혈강삼음은 일종의 음공(音功), 그 중에서도 철저한 마음공(魔音功)이었다. 혈강삼음---! 제일음(第一音) 환살(幻殺)! 이 음공은 한 번 펼치면 방원 십 장 이내에 있는 모든 생명체가 단번에 즉사하고 마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제이음(第二音) 멸혼(滅魂)! 이를 한 번 펼치면 방원 이십 장 이내의 모든 생명체가 즉사. 제삼음(第三音) 혈강(血 )! 이것이 펼쳐지면 한 가닥 혈선(血線)이 상대를 향해 섬전처럼 쏘아든다. 이 혈선은 음(音)이 너무도 거세어 하나의 형태로 변화되어 생긴 것이다. 일단 이 혈선은 생물체를 격타하게 되면 순식간에 그 생물체는 한 가닥 먼지로 화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천하의 제아무리 초절무비한 신공(神功)이나 강기( 氣)라 할지라도 이 혈선에 격타 당하면 완전히 박살이 나고 마는 것이다. '세상에 이토록 악랄한 마음(魔音)이 있다니……' 나천웅은 또 한 차례 전신을 으스스 떨었다. 이번엔 도법(刀法)인 패천일도(覇天一刀)를 훑어 보았다. 도법은 단 일초식이었다. 패천일도(覇天一刀), 일단 이 도법(刀法)이 펼쳐지면 사람과 도(刀)는 완전히 일체가 된다. 마치 검법의 어검술과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든 일단 이 도법에 걸려들면 순식간에 전신이 정확히 삼백 육십 개의 토막으로 변해 버리게 되었다. '우…… 이름 그대로 진정 패도적(覇道的)인 도법(刀法)이다.' 나천웅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마음패도경을 접었다. 그리고 또 한 권의 책자를 꺼내 들었다. 이번 책자는 열 장 정도의 무척 얇은 책자였다. <천허경(天虛經).> '음…… 이것이 바로 단노선배님이 얻은 천허경의 하권(下卷)이구나!' 워낙 경악이 계속되었는지라 이번엔 그리 큰 놀라움이 일지 않는 나천웅이었다. 나천웅은 천허경의 겉장을 넘겼다. 영무환신술(靈霧幻身術)! '음…… 이 비급은 경공술과 신법에 관한 것이구나……' 나천웅은 계속하여 책장을 넘겨갔다. 책장을 넘겨가는 나천웅의 입이 차츰 따악 벌어지기 시작했다. 영무환신술---! 이 경공신법은 도가(道家)의 지고(至高)한 신공(神功)을 바탕으로 한 무쌍(無雙)의 경공신보법(輕空身步法)이다. 놀랍게도 이 영무환신술을 연마하게 되면 사람의 몸이 하나의 안개로 화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공격에도 결코 목숨을 잃지 않는다. 또한 이 영무환신술이 최절정에 이르게 되면 안개로 화하는 것은 물론 허공까지도 자유자재로 날아


다닐 수 있는 것이다. '정말 귀신이 곡할 만한 일이다!' 나천웅은 거듭되는 경악에 희열의 기분이 무엇인지 느낄 수가 있었다. 이어 그는 네 번째의 책자를 꺼내 들었다. <삼환비급(三幻秘 ).> 이 비급에는 기괴무쌍(奇怪無雙)한 역용술(易容術)이 기술되어 있었다. 삼환신공이라는 절세적인 신공을 이용해 전신의 근골(根骨)을 완전히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신공이었다. 나천웅은 그저 감탄에 감탄만 거듭할 뿐이었다. 이제 네 권의 비급은 모조리 살펴 본 셈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피묻은 승포자락과 두루마리 하나 뿐인데……' 나천웅은 손을 뻗쳐 피묻은 승포자락을 집어 들었다. 그곳엔 온통 깨알같이 작은 혈서(血書)가 쓰여 있었다. 때문에, 승포는 그냥 진홍빛으로 물들어 보인 것이었다. 나천웅은 차근차근히 혈서를 읽어가기 시작했다. 그 혈서는 한 가지 강기( 氣)에 관해 기술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름하여 마라강기(魔羅 氣)였다. 이윽고 혈서를 끝까지 읽은 나천웅의 안색이 무겁게 굳어졌다. '으…… 이것은 사도(邪道)의 극악무도한 마공이구나……' 마라강기---! 이 강기를 십이성 연마하여 펼치게 되면 방원 십 장 이내의 모든 물체는 완전히 박살이 나버리고 만다. 아니, 완전히 먼지로 화해 버리게 되는 지독히 엄청난 사공이었다. '휴……! 내가 익히고 있는 금라신공도 강기의 일종이지만 이 마라강기에 비할 바가 못되는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금라신공과 마라강기를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잠시 후 나천웅은 두루마리를 펼치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두루마리는 앞뒷면 모두에 글이 적혀 있었다. <혈신독경(血神毒經).> <혈신독마공(血神毒魔功).> 혈신독경은 전면에 기술되어 있는 독의 사용법이었다. 세상의 기독(奇毒)과 맹독(猛毒)은 모조리 수록되어 있었다. 또한, 그 독들의 사용과 해독에 관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혈신독마공은 뒷면에 기술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이름 그대로 독공(毒功)이었다. 이 독공의 최절정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어느 무엇과 스쳐도 살아 있는 생물체라면 그 즉시 하나의 핏물로 화해버리는 가공할 무공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다니……' 책자와 두루마리 등을 모조리 다 읽고난 나천웅은 혀를 훼훼 내둘러야 했다. '나는 여지껏 우물안 개구리였구나!' 나천웅은 자신의 안목과 견식이 좁았음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나천웅이 아니라 세상의 어떤 인물이라 할지라도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마찬가지 심정에 젖으리라! '그렇다! 천하는 넓고도 넓은 것!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기이한 무공이 있을 수도 있겠지!' 이어 그의 가슴은 터질 듯한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 '이 모든 무공을 익힌다면…… 천마십이성의 마수(魔手) 아래서 이 중원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곧 이어 그의 입에서 우렁찬 사자후가 터졌다. "천마십이성! 기다려라! 나 나천웅이 네놈들의 헛된 야욕을 깨끗이 분쇄해 주리라!" 그의 사자후는 석실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 * * 흐르는 세월은 유수(流水) 같은 것, 밀폐된 석실 속에서도 어김없이 세월은 흐른다. 나천웅이 석실 속에서 오대기인(五大奇人)의 무학을 연성한 지도 어언 이 년여…… 나천웅은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고는 오로지 무학 연마에 열중했다. 때문에, 그는 이 년이란 세월을 두 달인 양 정신없이 보낸 것이었다. 석실 안, 석탁 위에는 여전히 목갑이 놓여 있었다. 목갑 속에는 네 권의 비급과 피묻은 승포자락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목갑 옆에는 두루마리가 놓여 있었다. 지금 나천웅의 시선은 두루마리에 가 있었다. '이것을 끝으로 모든 무공을 연마했구나!' 나천웅은 무한한 감회에 젖어 있었다. 그렇다. 그는 오늘에서야 드디어 혈신독마가 남긴 두루마리를 끝으로 오대기인의 모든 무학을 완성한 것이었다. '으음……! 그동안 강호에는 어떤 변동이 있었을까?' 나천웅은 모든 무공을 연성하고 나자 어서 빨리 강호에 재 출도하고 싶은 마음에 조금 들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혈신독마의 두루마리를 목갑 속에 갈무리했다. "오대기인이시여! 이제 모든 무공을 완성하였습니다." 나천웅은 목갑에 대고 경건하게 삼 배의 예를 올렸다. 정중한 예를 올리고 난 나천웅은 잠시 머뭇거렸다. '으음…… 목갑을 어떻게 한다……' 나천웅은 목갑을 그냥 둘 것인지 또는 없애버릴 것인지에 대해 약간의 갈등을 느꼈다. '만약을 대비해 일단 없애 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개세적인 무학들이 만약에 사도(邪道)의 손에 넘어 간다면……' 나천웅은 이내 결심을 굳혔다. 그의 좌수(左手)가 목갑 위에 놓여졌다. 이내 그의 좌수가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어 그것은 차차 투명하리만치 아름다운 홍옥(紅玉)빛으로 변해가는 것이 아닌가? 번쩍! 한 가닥 섬광이 그의 좌수에서 일었다. 그것은 옥광이었다. 순간, 파시식! 목갑이 완전히 하나의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이것은 나천웅이 사성의 자화신공을 운용한 결과였다. '음…… 옛날과는 엄청난 차이가……' 그는 가슴이 터질 듯한 희열에 휩싸였다. 사실, 그는 만년금룡신응의 영혈(靈血)을 복용한 뒤로는 이미 신(神)의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나천웅은 목갑이 완전히 잿더미로 변하자 목갑에서 천천히 손을 떼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나천웅의 눈에 기광이 번뜩 스쳤다. "이건……?" 그의 시선은 석탁 위 목갑이 놓여 있던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뜻밖에도 거기엔 몇 자의 글이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무슨 조화인가?' <석탁을 우(右)로 세 바퀴, 좌(左)로 두 바퀴 돌려라.> '석탁을 돌리다니? 석탁이 움직이다니……' 나천웅은 내심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일단 적혀 있는 대로 해보자!' 나천웅은 석탁의 양 귀퉁이를 잡았다. 그리고는 먼저 우(右)로 세 바퀴 돌려 보았다. 그러자, 우르릉! 굉음이 울리며 석탁은 어렵지 않게 빙글 도는 것이 아닌가? '정말 교묘한 장치로구나!' 나천웅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어 그는 좌로 석탁을 두 바퀴 회전시켰다. 순간, 우르릉! 굉음이 울리며 석탁이 순간적으로 밑으로 가라앉는 것이 아닌가? "앗!" 이런 현상에 나천웅은 대경의 외침을 터뜨렸다. 석탁이 밑으로 꺼지고 대신 몇가지의 물건이 위로 떠 올랐다. 하나의 현금(玄琴), 흑색 가죽주머니, 둘둘 말려있는 한 자루의 연검(軟劍), 도합 세 가지의 물건이었다. 나천웅은 먼저 현금을 들어 보았다. '굉장한 무게구나!'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족히 수백 근 이상의 무게인 듯 현금은 묵직했다. 그리고, 현금 전체가 온통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는 검은색이었다. 그리고 현금에 한 가지 조각이 양각(陽刻)되어 있었다. 아홉 마리의 흑룡(黑龍). 그것이 서로 한데 뒤엉켜 승천하는 형상이 양각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 26 장 無痕奪命飛魂板 기이한 점은 또 있었다. 일반 현금이 열 두 줄인데 유독 이 현금은 기이하게도 단 세 줄로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이 현금은 아마도 마음패도경의 임자가 남긴 것 같구나!' 나천웅은 현금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니?" 한참을 이모저모 뜯어보던 나천웅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현금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이었다. '유독 이 흑룡만이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다니……' 과연, 현금에 양각되어 있는 아홉 마리의 흑룡 중 단 한 마리의 흑룡이 입에 하나의 여의주를 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상하다? 이것은 꼭히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잠시 후, 나천웅은 손가락으로 그 흑룡이 물고 있는 여의주를 살짝 눌러보았다. 순간, 쨍! 하는 맑은 금속성이 울렸다. 동시에 한 가닥 광채가 현금에서 뻗쳤다. 그 광채는 짙은 청옥(靑玉)빛이었다. '이것은 또 무슨 조화인가?' 나천웅은 대경하여 광채가 쏟아지는 곳을 바라보았다.


광채가 한 자루의 검에서 쏟아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현금의 윗부분에 한 자루의 검이 자루 부분까지 튀어 올라 있었다. 나천웅은 떨리는 기분을 추스르며 현금에 박혀있는 검을 뽑았다. 약 두 자 반 정도의 짧은 길이의 검이었다. 검신(劍身)은 거울처럼 매끈하니 다듬어져 있어 연신 번쩍이고 있었다. 그리고 검에서는 연신 차가운 한기(寒氣)가 뻗치고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예사 검은 아닌 듯했다. '으음…… 이러니 검이 현금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지.' 나천웅은 또 한 번 탄복의 표정을 떠올렸다. 검의 손잡이는 현금과 똑같은 재질의 나무로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때문에, 검이 현금 속에 박혀 있어도 전혀 표시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천웅은 한 차례 검을 휘둘러 보았다. 쐐애액! 주위의 공기를 그대로 얼려 버릴 듯한 어마어마한 한기가 검기에서 발출되었다. '과연……' 나천웅은 검을 현금에 꽂았다. 이어 이번엔 연검을 손에 잡았다. 나천웅은 호기심과 야릇한 흥분에 들뜬 자세로 연검을 풀어 보았다. 연검의 길이는 대략 다섯 자! 기이하게도 손잡이는 순 황금(黃金)으로 되어 있었다. 또한, 검신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얀 백선(白線)이 그어져 있었다. '으음…… 이 연검이 사백께서 제일 사랑하시던 검이구나!' 그렇다. 바로 이 연검은 만검지왕 학선룡이 평생을 통해 제일 사랑하던 검이었다. 나천웅은 그 옛날 사부인 학선기를 통해 연검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때문에 이 연검을 대하자마자 학선룡의 검임을 알 수 있었다. 원래, 학선룡에게는 애용하던 검이 두 자루 있었다. 한 자루는 젊은 시절 우연히 얻은 검으로 설백검(雪魄劍)이라 했다. 또 한 자루는 지금 나천웅이 만지고 있는 연검으로 만상백선검(萬象白線劍)이었다. 만상백선검은 그가 만상검경을 얻을 때 검경과 같이 얻은 것이었다. 학선룡은 평생을 통하여 이 만상백선검을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설백검 한 자루만으로도 중원 천지에 군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옛날 천수제군과 백옥마궁에서의 결투 당시에 쓴 검은 바로 설백검이었다. 때문에 학선룡은 이곳에다 만상백선검을 남겨둘 수 있었던 것이다. '음…… 정말 지고무상한 명검(名劍)이다.' 나천웅은 재삼 감탄을 금치못했다. 잠시 후, 그는 검은색 가죽 주머니를 끄르고 있었다. '우…… 지독한 냄새구나!' 순간 나천웅은 코를 틀어막고 싶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가죽 주머니 안에서는 코를 쥐게 하는 역겨운 내음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왜냐하면 가죽 주머니 안에는 혈신독마가 평생을 통해 모은 온갖 수만 가지의 독물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냄새만 맡아도 그대로 즉사해 버릴만한 지독한 독성을 지닌 독물들이었다.


그러나 나천웅은 그 독물을 만지기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이상도 느끼지 못했다. 나천웅은 가죽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이것저것을 만져 보았다. "응? 이것은……?" 그의 눈가에 기이한 빛이 스쳤다. 분명히 손 끝에 무엇인가 이상한 감촉이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나천웅은 손가락으로 그것을 집어 주머니 밖으로 꺼내보았다. 그것은 매미 날개보다 더 얇은 두 개의 투명한 판(板)이었다. 판의 크기와 모양은 마치 계란의 형상과도 흡사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몰라도 굉장이 부드럽구나!' 그 기이한 판은 모두 두 개였다. 그 두 개의 얇은 판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나천웅의 두 눈에 일순 반짝 한 가닥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아……! 이것이 바로 혈신독마경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수록되어 있던 무흔탈명비혼판(無痕奪命飛魂板)……' 무흔탈명비혼판---. 일명 음양신판(陰陽神板). 이것은 지극히 고명한 일종의 암기였다. 어째서 지극히 고명한가 하면, 이 두 개의 무흔탈명비혼판은 손바닥 안에 감출 수 있기 때문에 상대가 조금도 눈치챌 수 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이 무흔탈명비혼판은 손바닥에 부착하게 되면 완전히 피부색으로 변하고 만다. 때문에, 안력을 돋구어 장심을 살피지 않는 한 무흔탈명비혼판이 부착되어 있음을 발견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무흔탈명비혼판은 발출자의 의사에 따라서 무궁한 변화를 보일 수 있다. 장력 속에 섞여 발출할 수도 있고, 검기에 섞어 발출할 수도 있다. 두 개의 얇은 판은 홍색과 청색의 색깔을 지닌 채 발출되는 것이었다. 물론, 일단 발출되어야만 색깔이 두 가지 색으로 구분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장력(掌力)이 만약에 홍광을 지니고 있다면 붉은 색의 판을, 청색 검기에는 청색 판을 발출하면 상대는 그것으로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이었다. 또한 이 두 개의 무흔탈명비혼판은 워낙 얇은지라 상대의 장력이나 강기 등도 무난히 뚫고 진입할 수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이 무흔탈명비혼판에 격중 당하게 되면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된다. 극도의 예리한 안력으로 살펴 보아야만 무흔탈명비혼판이 스치고 지났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무흔탈명비혼판은 발출과 회수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세상에 이토록 교묘한 암기가 있다니……' 나천웅은 단지 감탄할 뿐이었다. 잠시 후, 나천웅은 자의신검 단지현의 묘에 경건한 삼배를 올렸다. "단노선배! 이제 나천웅은 이곳을 떠납니다. 모든 강호의 악도를 멸한 후 다시 노선배님을 뵙겠습니다." 그의 음색엔 형용할 길이 없는 감회가 서려 있었다. * * * 사천성(四川省)의 마운산(摩雲山). 험난한 촉(蜀)의 관문인 검문(劍門)을 통과하여 처처험경(處處險境) 속에 일좌(一坐)를 차지하고 있는


산(山)이었다. 때는 이른 새벽이었다. 산기슭에 한 명의 백의를 입은 중년문사(中年文士)가 나타났다. 대략 사십 이삼 세 정도로 보이나 중년문사는 한눈에 보기에도 극히 청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썹은 진하게 관자놀이로 뻗쳤으며 두 눈은 신광(神光)은 없었으나 은은하고 고고한 기품을 품고 있었다. 헌데 그는 등에 비스듬히 현금(玄琴)을 가로질러 메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극히 유유자적해 보였다. 그는 마운산 기슭을 가로지르는 길을 마치 구름을 밟듯이 은은하게 걷고 있었다. 언뜻보면 마치 산경(山景)을 구경나온 선비같이 보였다. 그는 누구인가? 바로 다름아닌 나천웅이었다. 나천웅은 바로 그간 익힌 삼환비급의 변용술로써 자신의 용모를 중년문사로 변화시킨 것이었다. 그가 등에 메고 있는 현금은 물론 단지현의 석실에서 얻은 것이었다. 나천웅은 경공을 펼치지 않고 단지 물이 흐르는 듯한 걸음으로 기슭의 협로를 걸어갔다. 그때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여인의 비명소리가 희미하게 그의 귀를 울렸다. '음……?' 그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비명소리는 적어도 십여 리(里) 밖에서 들린 것이었다. 만일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결코 들을 수가 없을 만치 희미한 소리였다. 허나 이미 무공이 극에 이른 나천웅의 청력은 그 비명을 대번에 감지했던 것이었다. 그는 곧 비명이 들린 방향을 가늠했다. 다음 순간 그는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의 신형은 뿌옇게 변했다. 마치 그의 육신이 안개처럼 흐트러지는 것 같았다. 이어 그의 모습은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스스스…… 아! 그것은 바로 전설적인 천허경(天虛經)의 경공술인 영무환신술(靈霧幻身術)이었다. 나천웅은 이미 완숙의 경지에 이른 영무환신술을 시전한 것이었다. 초옥(草屋). 산비탈의 아늑한 공간에 한 채의 모옥이 있었다. 초옥의 주변으로는 송림(松林)이 우거져 우아하고 한적한 풍치를 돋구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초옥 안에서는 이곳의 풍치와는 전혀 다른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방 안, 한 명의 소녀가 나무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소녀의 나이는 십 칠팔 세 가량. 한눈에 보기에도 절세의 미색(美色)을 갖춘 미소녀였다. 둥그스름한 얼굴에 두 뺨은 터질 듯이 빨간빛을 띠고 부풀어 있었다. 두 눈은 맑고 깊숙하여 호수를 연상케 했다. 그녀는 청의를 입고 있었다. 헌데, 지금 그녀는 만면에 분노의 빛을 가득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분노의 눈으로 한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바로 침상 옆이었다. 침상 옆, 그곳에는 한 명의 괴인(怪人)이 서 있었다.


그런데 그는 도인(道人)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허나 괴이하게도 그의 얼굴은 시뻘건 핏빛이었다. 괴인은 흉칙하도록 붉은 얼굴에 잔뜩 음탕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흐흐흐…… 귀여운 계집……!" 괴인은 음소를 흘리더니 돌연 우악스런 손을 뻗어 소녀의 젖가 슴부분을 주물렀다. "아앗! 치워랏! 음적!" 소녀는 비명을 지르며 온통 수치감과 모욕에 질린 얼굴을 파르르 떨었다. 허나 괴인은 결코 소녀의 말에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의 손은 거칠게 소녀의 앞가슴을 주무르더니 급기야는 소녀의 청의 앞자락 속으로 불쑥 침입해 들어갔다. 소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날카롭게 외쳤다. "혈면괴도(血面怪道)! 네놈은 삼도(三道)의 일인으로서 어찌 이따위 음행을 저지르느냐?" 아, 혈면괴도라고 했는가! "클클클…… 계집애야, 이곳에는 아무도 없다. 이 어르신이 무슨 짓을 해도 알 놈은 아무도 없다. 클클…… 설혹 안다 해도 어르신은 겁내지 않을 것이다." "닥쳐라!" 소녀는 그 말에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혈면괴도! 너의 음행은 무림인들에게 지탄을 받을 뿐더러 가혹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자 혈면괴도는 음소를 흘렸다. "흐흐흐…… 계집애야, 그만 지껄여라. 이 어르신네가 곧 네년을 즐거워서 몸부림치도록 만들어 줄테니 그때 가서 고맙다고나 해라." 다음 순간, 혈면괴도는 소녀의 앞가슴 속에 집어넣은 손을 잡아챘다. 찌이익!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소녀의 웃옷이 길게 찢어져 나갔다. "앗! 이 음적(淫賊)!" 소녀는 당황하여 안색이 하얗게 바래졌다. 허나 혈면괴도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거친 손이 계속 움직였다. 찌이익! 찍! 소녀의 청의는 수십 조각으로 찢어져 나갔다. 그러자 삽시간에 소녀의 백옥같은 상체가 드러났다. 가냘픈 목덜미, 연약하게 뻗은 양팔, 그리고 가슴…… 가슴에는 분홍빛 젖가리개가 둘러져 있었다. 소녀는 그만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자 너무도 당황하여 두 눈에 눈물이 고이고 말았다. 혈면괴도는 계속 음탕한 괴소를 흘리며 두 손으로 소녀의 몸을 쓰다듬었다. "크크……" "……!" 소녀는 그만 체념한 듯 두 눈을 감고 말았다. 그녀의 양 눈꼬리로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흐흐흐…… 계집애야, 울지마라. 이제 조금 후면 인생의 즐거움을 알게 될 것이다." 혈면괴도는 음탕하게 지껄이며 소녀의 젖가리개에 손을 대었다. 바로 그때였다. "후후후…… 정말 더 이상 못봐 주겠군!" 어디선가 얼음장처럼 냉막한 음성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혈면괴도는 안색이 일변했다.


"누구냐?" 그는 고함을 친 뒤 몸을 홱 돌렸다. 이때 갑자기 방 안에 뿌연 안개가 서리는 듯하더니 곧 하나의 인영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스스스…… 그는 백의를 입은 중년문사였다. 바로 현금을 둘러멘 나천웅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혈면괴도는 상대가 유약해 보이는 문사임을 보자 괴소를 대뜸 흘리며 호통쳤다. "흐흐흐…… 책벌레같이 생긴 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느냐? 감히 어르신의 일에 참견을 하다니!" 나천웅은 그 말에 가볍게 실소했다. "책벌레라고?" 이어 그는 고개를 쳐들더니 곧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나는 혈면괴도가 삼도의 일인이라 해서 제법 크게 보았건만 알고보니 눈먼 일개 소졸에 지나지 않았구나!" 그의 말에 혈면괴도는 그만 노기충천하고 말았다. "이놈! 정말 죽고 싶어 미친 놈이구나!" 이어 그는 다짜고짜로 나천웅을 향해 장력을 발출했다. 우웅! 그의 장력에서는 웅후한 파공성이 일었다. 허나 나천웅은 피하지도 않고 선 채로 싱긋이 웃기만 했다. "제법인걸." 혈면괴도는 그 모습에 더욱 분기탱천했다. "이놈이 정말 미쳤구나. 죽어라!" 다음 순간, 꽈꽝! 하는 폭음과 함께 그의 장력은 정통으로 나천웅의 가슴에 격중되었다. 허나, 나천웅은 끄덕도 없이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혈면괴도는 일시 귀신에 홀린 듯 넋나간 표정이 되고 말았다. "이…… 이건…… 대체?" 나천웅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헛헛헛…… 여기까지 오느라고 땀이 좀 난 것 같은데 이제야 좀 더위가 가신 것 같군. 이보게, 어디 다시 한 번 해줄 수 없겠나?" 그 말에 혈면괴도의 안색은 흑빛이 되어 내심 부르짖었다. '무…… 무시무시한 놈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이어 그는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그 말에 나천웅은 히쭉 웃었다. 동시에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억양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아미태산(阿彌泰山)에서 왔네. 이보게, 헌데 자네는 왜 자꾸만 물러나나?" 혈면괴도는 다시 한 걸음 더 물러났다. 그는 이 순간 무서운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 아미태산에서 왔다고……?'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그는 문득 아득한 옛날에 아미태산에 은거했던 기인(奇人)을 떠올린 것이다. 그는 하얗게 질린 채 더듬더듬 물었다.


"노…… 노선배님께서는 혹시…… 이백 년 전에 아미태산에 은거하고 계시던 천금상인(天琴上人)이 아니십니까?" 나천웅은 내심 중얼거렸다. '천금상인……?' 그는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천금상인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때 혈면괴도는 문득 나천웅이 등 뒤에 비스듬히 메고 있는 현금을 발견했다. 그러자 그의 안색은 더욱 흑빛이 되고 말았다. 그는 내심 크게 부르짖었다. '삼현신금(三絃神琴)! 이…… 이자는 과…… 연 아미태산에 은거했던 기인이 틀림없구나! 더군다나 이자의 내공으로 볼 때에도……' 실상 이때, 나천웅은 지극히 평범한 자태를 하고 있었다. 그는 양쪽 태양혈(太陽穴)이 두드러지게 솟아오르지도 않았을 뿐더러 두 눈에도 무공을 익힌 자에게서 발산되는 신광(神光)이 전혀 없었다. 그러면서도 혈면괴도 자신의 장력을 맨몸으로 받아낸 것을 보면 그는 이른바 무학의 최고경지인 반박귀진(返樸歸眞)의 수위에 오른 것이 분명하다고 혈면괴도는 판단한 것이다. 즉, 신광이 안으로 갈무리되어 전혀 무공을 익힌 흔적은 보이지 않는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혈면괴도는 지난날 그의 사부에게서 들은 기인에 대해 기억을 떠올렸다. '그…… 그…… 기인은 이미 무공이 신화경(神化境)에 달하여 늙지 않고 오히려 젊어지는 반로환동(返老還童)의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했다. 그렇다면 이자가 바로 틀림없이 천금상인(天琴上人)일 것이다!' 이때, 나천웅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자네는 무엇을 보고 나를 천금상인이라 부르는가?" 혈면괴도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의 두려운 빛이 담긴 눈은 나천웅의 등에 메어져 있는 삼현신금을 쳐다보고 있었다. "노…… 노선배님의 등 뒤에 메어진 삼현신금은 바로 노선배님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삼현신금……?' 나천웅은 내심 되뇌었다. 그러나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혹시…… 아미태산의 천금상인이라는 기인과 마음패도경(魔音覇刀經)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나천웅의 추측은 과연 맞는 것이었다. 원래 패왕천도(覇王天刀) 환진악은 천금상인의 수제자였던 것이다. 혈강삼음(血 三音)과 패천일도(覇天一刀)는 바로 천금상인의 독문무공이었던 것이다. 비로소 나천웅은 알 수 있었다. 혈면괴도가 엄청난 착각에 파묻혀 있다는 것을. 그는 내심 어이가 없어 웃음이 흘러나왔다. '헛…… 정말 이자의 상상은 너무나 웃기는구나…… 내가 바로 이백 살이 넘는 천금상인이라고?' 그는 문득 장난스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 그래…… 이백 년이나 지났는데도 나를 기억하는 자가 있다니 정말 기특한 일이군……" 그러자, 혈면괴도는 만면에 황송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것은 후배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옛날 후배의 사부께서 제게 노선배님에 대해서 말해준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천웅은 점잖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나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는 물었다. "참, 내 자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네." 혈면괴도는 급히 물었다. "무엇입니까?" 나천웅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실로 이백여 년 만에 무림에 나와보니 별별의 잡동사니들이 나타나 무림을 어지럽히고 있더군……" 그 말에 혈면괴도는 안색이 변해 더듬거렸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흠, 자네 혹시 나습포찰에서 왔다는 천마십이성이라는 애송이들에 대해 들은 적이 있나?" "천마십이성!" 혈면괴도는 안색이 대변해 크게 외쳤다. 그의 얼굴은 물론 두 눈도 이때 완전히 공포에 젖고 있었다. 그는 무엇이 두려운지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천웅은 약간 놀라는 듯 물었다. "아니, 왜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무서운 존재들이란 말인가?" 혈면괴도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습니다. 이 년 전부터 그들이 중원에 나타난 이후로 전 무림은 그야말로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뭣이?" 나천웅은 두 눈썹을 성큼 치켜올렸다. 혈면괴도는 두려운 듯 진저리를 치더니 다시 말했다. "그…… 그들은 중원에 발을 딛자마자 남칠성(南七省) 북육성(北六省)을 완전히 장악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나 강하단 말인가?" 나천웅의 물음에 혈면괴도는 공포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의 무공은 실로 상상을 불허합니다! 중원에는 아무도 상대가 되지 않아 그들이 가는 곳에는 시산혈하(屍山血河)를 이루고 있습니다.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마왕(魔王)들입니다." 나천웅은 침음했다. "흠! 뜻밖이군. 지난 날 나도 무림에 은거하기 전 나습포찰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넷?" 혈면괴도는 크게 놀란 듯 표정이 대변했다. 나천웅은 계속 말을 이었다. "허나 당시 천륭사의 주지인 아달극(阿達克)은 나와 막상막하에 불과했었는데…… 천마십이성이라면 분명 아달극의 수하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의 말에 혈면괴도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너무나 엄청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천웅의 말은 모두가 거짓말이었다. 그는 한껏 혈면괴도를 놀리고 있는 중이었다. 허나 그럼으로써 그는 혈면괴도에게 자신이 알고 싶은 사실을 얻고 있었다. 아달극이란 인물도 역시 그가 꾸민 것에 불과했다. 허나 귀를 기울여 듣는 혈면괴도의 눈에는 두려움과 함께 온통 존경이 어려 있었다. 그는 얼굴에 감탄의 빛을 띄우며 말했다. "정말…… 노선배님은…… 천하제일의 기인이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천마십이성도 노선배님에게 상대가 되지않겠군요……"


나천웅은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으나 겉으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과찬일세…… 참, 또 한 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네." "네 말씀하십시오, 노선배님!" "지금 구파일방의 정세는 어떠한가?" 그러자 혈면괴도는 돌연 비웃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흥! 그들은 모두 겁을 집어 먹고 일제히 봉산령(封山令)을 내린 후 산문(山門)을 닫아 걸고 말았습니다. 때문에 구파일방의 인물은 한 명도 강호에 나오지 않습니다." 나천웅은 그 말에 좋지않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무림에는 아무도 천마십이성에 대항하는 인물이 없단 말인가?" 그러자 혈면괴도는 갑자기 생각난 듯 아! 하더니 말했다. "단지 한 명이 있습니다!" "한 명? 그가 누군가?" "그자는 귀면수라(鬼面修羅) 나천웅이라는 자입니다." 순간 나천웅은 크게 놀랐다. "뭐…… 뭐라고? 귀면수라 나천웅?" 나천웅은 정말 크게 놀랐다. 자신은 이미 이 년 이상을 강호에 발을 딛지 않았건만 도대체 그 누가 자신의 이름을 빌어 천마십이성에게 대항한단 말인가? 한편, 혈면괴도는 그가 놀라는 모습에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자 역시 천마십이성에게는 역부족입니다." 그 말에 나천웅은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떤 자가 나로 변장해 행세하는 것일까……?' 그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제 27 장 死神秘話 혈면괴도는 잠시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선배님, 노선배님께서는 어떻게 해서 아미태산을 떠나셨습니까?" 그의 물음에 나천웅은 짐짓 침중한 표정을 떠올렸다. "으…… 음, 노부는 실상 한 명의 인물을 쫓아 무림에 나온 것이라네." 나천웅의 말이 떨어지자 혈면괴도가 깜짝 놀란 듯이 의아한 눈빛으로 재차 질문을 해왔다.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노선배님께서 친히 나오셨단 말입니까?" "그 자는 이백 년 전부터 노부와 겨루어 오던 자일세." "……?" "그자는 일명 사신(死神)이라고 불리웠지." "사신……?" 혈면괴도는 나직이 되뇌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나 그는 도무지 기억이 안나는지 의혹이 어린 얼굴로 나천웅을 응시했다. 나천웅은 그의 표정을 보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마디 덧붙여 주었다. "으…… 음, 아마도 자네는 그자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것이네." 그러자, 혈면괴도가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저의 견문이 좁아서 그런지……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 것 같습니다." 나천웅이 혈면괴도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그것은 자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네. 실상 그는 무림에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네."


그제서야, 혈면괴도가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쩐지……!" "허나, 백여 년 전에 그의 두 제자가 무림에 나온 적이 있지……" "두 제자라면……?" 혈면괴도가 매우 궁금한 듯이 눈빛을 빛냈다. 나천웅이 혈면괴도의 얼굴을 들여다 보며 입술을 떼었다. "자네는 혹시 지옥쌍절이란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있나?" "지옥쌍절!" 혈면괴도의 안색이 급변했다. "무…… 물론입니다. 지옥쌍절로 말할 것 같으면 백여 년 전 사도를 주름잡던 최고의 마왕들이 아닙니까? 헌데 어찌 제가 그들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혈면괴도가 다소 흥분을 보이며 나천웅을 바라보았다. "허허…… 그 아이들이 그토록 유명했던가……?" 나천웅이 짐짓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자못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떠올렸다. "허…… 헌데 그 사신이란 사람이 바로 지옥쌍절의 스승이란 말입니까?" 혈면괴도가 안색이 급변한 채로 되물어 보았다. "그렇다네." 나천웅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럴 수가……?" 혈면괴도는 너무도 뜻밖의 사실에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실로 기막힌 광경이 아닌가? 그야말로 혈면괴도는 완벽하게 나천웅의 화술에 말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나천웅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겉으로는 짐짓 큰 탄식을 흘려냈다. "이백여 년 전부터 사신은 이십 년을 주기로 한 번씩 결투를 해왔다네." "아니? 대체 무슨 연유로……?" "사신의 무공은 너무도 극악하여 만약 그가 무림에 나온다면 무림은 완전히 붕괴될걸세. 그것을 염려한 노부는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내걸었지." 혈면괴도는 신경을 곤두세운 채 나천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말이란 아까 말한 바와도 같이 이십 년마다 한 번씩 결투를 하자는 것이었지. 또한 결투 결과 지는 쪽은 반드시 무림에 나가지 못하도록 서로 약속을 했었다네." "아……!" 나천웅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럴 듯하게 꾸며낸 말에 혈면괴도는 실로 감탄한 듯이 탄성을 발해냈다. "그것 참 좋은 묘안이로군요." "그 후 이백 년이 흐르는 동안 노부는 언제나 반초의 차이로 승리를 했었지." 잠시 말을 끊은 나천웅의 안색이 갑자기 침중하게 변했다. "허나…… 석 달 전, 열 번째의 결투에서 노부는 그만 그와 똑같은 초로 비기고 말았다네." "……" 혈면괴도도 안색을 침중하게 굳힌 채 묵묵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천웅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때, 사신은 이 노부에게 못을 박듯이 음산한 음성으로 외치며 사라졌지. 이제는 모든 약속이 깨진 것이다 라고 말일세." 여기까지 말한 나천웅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을 뱉아냈다. "아무튼…… 그자는 반드시 찾아내야만 하네. 그렇지 않으면 이 무림은 그야말로 피바다로 화해 끝장이 나고 말 터이니……!"


나천웅은 두 눈빛에서부터 어떤 결의 같은 것을 띄워보였다. 잠시 말을 끊었던 그는 시선을 돌려 침상에 누워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때, 혈면괴도는 내심 조바심을 치며 나천웅의 표정을 곁눈질로 살펴보고 있었다. 그 소녀에게 눈길을 주었던 나천웅의 눈살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그의 이러한 모습에 혈면괴도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이었다. 그는 재빨리 나천웅의 면전에서 허리를 숙였다. "노…… 노선배님, 용서…… 하십시오. 후배가…… 그만…… 눈이 멀어……" 혈면괴도가 사죄를 하자 나천웅은 약간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으…… 음, 자네가 진심으로 죄를 뉘우쳤다면 노부도 더 이상 긴 말은 하지 않겠네." 나천웅은 짤막하게 말을 끝냄과 동시에 소맷자락을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소매에서는 보이지 않는 경기가 흘러나왔다. 순간 침상의 소녀는 자신의 혈도가 스르르 풀려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황급히 일어나 옷을 걸쳤다. 그리고는 곧, 나천웅에게 다가가 공손히 절을 올렸다. "노선배님! 소녀의 위기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의 말에 나천웅이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젓는 것이었다. "얘야! 지나가면서 도운 일에 불과하니 인사할 필요는 없다." 순간 소녀는 자신의 몸이 어떤 잠력에 의해 떠받쳐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정말 이분의 무공은 심오하기 그지없구나!' 그녀는 재빨리 나천웅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소녀는 화산파의 오대 제자로서 민옥령(閔玉玲)이라 하옵니다." "화산파?" 이때 나천웅의 뇌리 속으로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옛날에 자신이 만났던 화산파 여제자였던 강설연의 기억이 났던 것이다. '으…… 음, 강낭자도 바로 화산의 문인이었지……!' 나천웅은 잠시 그녀를 떠올리며 옛날을 그려보았다. 이어 그는 민옥령을 바라보며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얘야, 조금 전에 혈면괴도가 저지른 행동은 그의 순간적인 잘못이었으며, 더구나 지금 그는 크게 후회하고 있는 것 같으니 노부의 얼굴을 봐서라도 그를 용서해 줄 수 있겠느냐?" 나천웅의 말에 민옥령은 잠시 혈면괴도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아까의 분노와 수치감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얼굴표정이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이때 혈면괴도는 그녀의 그러한 눈길을 받으며 좌불안석(坐不安席)이었다. 그는 계속 나천웅의 눈치를 힐끗힐끗 살피며 안절부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 낭자…… 조금 전에는 노부가 큰 실수를 했소이다. 낭자가 어떤 욕을 하더라도 노부는 할…… 할말이 없소." 혈면괴도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진정으로 사과한다는 듯이 더듬거리며 자신의 잘못을 빌었다. 민옥령은 그제서야 약간의 노여움이 풀리는지 굳었던 안색을 풀었다. "흥, 당신은 정말 운수가 좋군요." 이때 나천웅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버렸다. "허허허…… 됐어, 됐어. 이제 그만 됐으니 우리 이곳을 떠나세." 그러자 혈면괴도가 조심스럽게 나천웅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저…… 노선배님……" "응? 무슨 일인가?" "노선배님께서는 앞으로 어디로 갈 작정입니까?" 혈면괴도의 엉뚱한 질문에 나천웅은 잠시 의아해졌다.


"그건 왜 묻나?" "불편하시지만 않다면…… 후배도 노선배님의…… 뒤를 따르고 싶습니다." 그는 더듬더듬 말을 뱉아내며 나천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뜻밖의 제의에 나천웅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이자가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나천웅은 혈면괴도를 주시하며 다그치듯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자네는 대체 어떤 이유로 노부에게 그런 제의를 하는 것인가?" 혈면괴도는 약간 머뭇머뭇거리며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윽고 그는 결심한 듯이 말의 서두를 꺼냈다. "얼마 전 후배는 감숙성에서 한 고수를 죽인 적이 있습니다. 헌데 알고보니 그자는 바로 천마십이성이 데리고 있던 고수들 중 일인이었습니다." "……!" 나천웅은 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혈면괴도의 속셈을 금방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혈면괴도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천마십이성은 모든 부하들에게 후배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난 나천웅은 빙그레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하하…… 이제보니 자네는 나의 뒤를 따라다님으로써 그 위험에서 벗어나자는 생각이로군." 혈면괴도는 머쓱하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에 나천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쾌히 승낙을 했다. "좋네. 노부 역시 너무나 오랜만에 무림에 나오는지라 모든 것이 생소하기만 하네. 허니 자네의 힘이 필요할지도 모르지." 나천웅의 승낙이 떨어지는 순간, 혈면괴도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는 재빨리 나천웅 앞으로 다가가 계속해서 허리를 굽신굽신거렸다. "감사합니다, 노선배님!" 나천웅이 손을 흔들며 혈면괴도의 행동을 만류했다. "노부는 예의같은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네." 이어 나천웅은 시선을 돌려 민옥령을 바라보았다. "얘야! 내 언젠가 화산파에 찾아갈지도 모르니 그렇게 알고 있거라." 그의 말에 민옥령은 얼굴에 희색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께서 화산파에 오신다면 모두들 환영해 줄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민옥령은 힐끗 혈면괴도를 바라보며 약간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허나 곧 무엇을 결심했는지 나천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만약 시간이 있으시다면 복우산 와룡곡(臥龍谷)으로 한 번 와 주세요." "와룡곡?" 나천웅이 의아한 듯이 반문하자 민옥령은 방긋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곳으로 와 보시면 소녀의 말뜻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나천웅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으음…… 무슨 사유가 있는 모양이로구나……!' 민옥령의 이야기는 계속 흘러나왔다. "노선배님께서 만약 그곳에 오신다면 모든 정도(正道)의 무림인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민옥령은 말을 마치자마자 나천웅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여 절을 올렸다. "노선배님! 오늘의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럼……" 다음 순간 그녀는 몸을 날려 밖으로 멀어져갔다.


나천웅은 잠시 그녀가 사라진 곳을 지그시 바라본 후 혈면괴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 우리도 그만 가세!" 얼마 후 나천웅과 혈면괴도는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마운산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들의 등 뒤로는 하나의 모옥이 점점 작은 모습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 * * 감숙성(甘肅省). 최남단에 위치한 천수(天水). 석양(夕陽). 거대한 화염(火炎)이 서녘 하늘에 한무리 홍운(紅雲)을 이루었다. 아니, 서녘 하늘 뿐만 아니라 온누리가 그야말로 하나의 붉은 덩어리였다. 그 석양에 파묻혀 두 개의 인영이 천수에 나타났다. 한 명의 백의중년인과 도인(道人)이었다. 백의중년인은 대략 사십여 세 가량의 나이로 보였다. 전신에 은은하니 고고한 기품이 서려있는 지극히 청수한 중년인이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등 뒤에 하나의 커다란 현금(玄琴)을 메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백색장삼이 붉은 노을빛에 산뜻한 색감을 불러 일으켰다. 또 하나의 인물은 늙은 도인(道人)이었다. 대략 백여 세 가량 되어 보임직한 늙은 도인은 얼굴이 온통 시뻘건 색이었다. 그야말로 지금 전개되고 있는 석양이 무색할 정도로 혈면(血面)이었다. 그렇다. 그들은 다름아닌 나천웅과 혈면괴도(血面怪道)였다. "노선배님!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혈면괴도는 조심스럽게 나천웅의 신색을 살폈다. 지금 혈면괴도는 조금이라도 나천웅의 비위에 거슬리게 될까 두려운 마음이었다. "허허…… 제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더라도 인간은 인간인 법! 노부도 시장기는 도는데……" 나천웅은 짐짓 점잖게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혈면괴도가 잽싸게 말을 이었다. "노선배님! 가까운 객잔에 가서 간단히 요기를 하도록 하시지요." 나천웅은 입가에 한 가닥 웃음을 띄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좋으이! 그럼…… 노부가 객잔이라는 곳을 한 번 가볼까? 백 년 동안 통 객잔이라는 곳을 가보질 않았으니……" "네에……?" 혈면괴도는 백 년 동안 한 번도 객잔에 가보질 못했다는 나천웅의 말에 아연실색했다. 그의 표정은 얄궂기 짝이 없었다. '이거…… 내가 너무 심한 거짓말을 했나?' 나천웅은 내심 한 차례 고소를 날렸다. 잠시 후 그들은 어느 한 객잔에 이르러 있었다. "손님들! 미안하지만…… 다음 기회에 들려 주시지요. 이미 저희 객잔에는 예약된 손님들로 초만원……" 점원 하나가 미안하다는 듯 연신 두 손을 싹싹 비볐다. 허나 그 정도에 물러날 혈면괴도가 아니었다. "네 이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되네 안되네 하는 것이냐?" 혈면괴도가 점원을 향해 버럭 호통소리를 냈다. "아이구, 소…… 손님! 아…… 아니 어르신네……" 점원이 당황하여 외쳤다.


지금 그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본래 괴이하게 생긴 혈면괴도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 괴이하게 생긴 얼굴에 잔뜩 흉험한 흉광을 내뿜고 있으니 마치 흉신악살이란 이를 두고 일컬음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이놈! 어서 안내하지 못하겠느냐?" 혈면괴도는 재차 호통을 쳤다. "네…… 네! 이리로……" 점원이 화들짝 놀라며 앞장을 섰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혈면괴도는 나천웅에게 허리를 숙였다. 마치 자신이 점원인 양 하는 태도였다. 나천웅은 내심 씁쓸한 고소를 흘렸다. 이윽고 그들은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과연, 점원의 말대로 객잔 안은 그야말로 초만원이었다. 아래층은 발디딜 틈도 없었다. 혈면괴도는 어물쩡거리고 있는 점원을 젖히고 앞장을 서서 이층으로 올랐다. 나천웅은 내심 쓴웃음을 날리며 혈면괴도를 따랐다. "아니? 이층엔 웬 무림인(武林人)들이 저리 많아?" 혈면괴도가 문득 눈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과연, 이층에는 온갖 병장기들을 소지한 무림인들이 거의 백여 명 정도 모여 있었다. 그들은 무엇인가 열심히 떠들썩하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간간이 천마십이성이 어쩌고 하는 대화도 튀어 나온다. "어디 앉을 만한 자리가 있나?" 혈면괴도는 이층을 쓱 훑어 보았다. 그의 음성은 나지막했지만 무한한 위력이 담겨 있었다. 이층의 무림인들은 한창 숙의를 거듭하고 있던 차에 혈면괴도의 음성이 들리자 일제히 그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순간, "혀…… 혈면괴도!" 누군가의 입에서 대경실색의 외침이 일었다. 주루 안의 무림인들은 일순 안색을 창백하게 일그러뜨렸다. 혈면괴도! 이 이름 앞에 당금 그 어느 누군들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허나 모든 인물들이 그 이름 앞에서 꼬리를 내린 것은 아니었다. "흐흐…… 잘 만났다!" 중인들 중에 돌연 한 마디 괴소가 울렸다. 동시 벌떡 일어서는 한 명의 인물이 있었다. "흐흐…… 삼 년 만에 네놈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이런 것을 두고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던가?" 냉랭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혈면괴도는 웬 미친놈이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상대를 살폈다. 마침 나천웅도 그 음성의 주인공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한 명의 도인(道人)이었다. 혈면괴도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황의도인이 싸늘하기 그지없는 신광으로 혈면괴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신에서 온통 강직(剛直)함이 풍기는 도인!


"누구신가 했더니 용조진인(龍爪眞人)이셨구려!" 혈면괴도는 황의도인을 바라보며 한 차례 깊숙한 예를 올렸다. 그러나, 지금 혈면괴도의 안색은 침중하기 그지없었다. '뭣이라고? 용조진인이라고?' 나천웅은 혈면괴도의 말에 내심 경악성을 터뜨렸다. 용조진인--그는 바로 혈면괴도 등과 명성을 나란히 하는 삼도(三道) 중의 한 인물이 아닌가? 그러나, 나천웅은 내심 경악성만 터뜨렸을 뿐 안색은 여전히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흥!" 황의도인 용조진인은 혈면괴도의 말에 냉랭한 콧방귀를 날렸다. "혈면괴도! 네놈이 그때 노부의 사질들에게 상처를 입혔겠다! 그렇지 않아도 네놈을 찾아다녔었는데 마침 이곳에 나타나 주다니…… 정말 잘 만났다." 용조진인은 당장에라도 한바탕 혈전을 치를 듯 으르렁거렸다. '으음……! 이들 사이에 어떤 은원(恩怨)이 얽혀 있는 모양이구나!' 나천웅은 용조진인이 다짜고짜 노기를 터뜨리자 슬쩍 혈면괴도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한편, 혈면괴도는 대중들 앞에서 용조진인이 자신을 핍박해 들자 은근히 부화가 치밈을 금치못했다. 허나, 지금 그의 곁에는 나천웅이 서 있지 않은가? '으……! 당장에 저놈의 혓바닥을 뽑아 버리고 싶지만……' 혈면괴도는 치밀어 오르는 노기를 꾹꾹 눌러 참아야 했다. 이어 그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입가에 머금으며 용조진인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용조진인! 그 당시의 일은 노부 자신도 후회하고 있소이다. 이것은 노부의 거짓없는 진심이오. 그러니, 우리 서로 화해하도록 합시다." 혈면괴도의 말에는 진심의 빛이 짙게 서려있었다. 그의 말을 들은 용조진인은 어리둥절 하기만 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기분은 주루 안의 모든 무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천하의 악인인 혈면괴도가 언제부터 심성(心性)이 저렇게 성인군자(聖人君子)와도 같이 변해 버렸을까?' 이층 안은 순식간에 조그만 소요가 일었다. 하긴 혈면괴도의 입에서 그러한 말이 쏟아졌으니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그들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 저 마두는 워낙 음흉한 놈이니…… 혹 어떤 악독한 음모가 있을지도……' 용조진인은 재차 냉랭한 콧방귀를 날렸다. "혈면괴도! 또 무슨 수작을 꾸미려 드는 것이냐?" 용조진인의 말에 중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동감한다는 무언의 표시이리라. "용조진인, 노부는 추호도 그러한 뜻이……" "헛수작 부리지 마라! 오늘은 네놈에게 운룡신조(雲龍神爪)의 맛을 보여 주리라!" 용조진인은 추호의 아량도 베풀지 않겠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원래 사람이 하루아침에 달라진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급기야 혈면괴도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당장이라도 폭발할 지경이었다. '저놈을 당장에…… 어휴……!' 계속 앙앙거리는 용조진인을 당장에 박살내버리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실상 나천웅을 의식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한심한 모습이 되었겠는가?


"자! 혈면괴도 여기서 한바탕 할테냐? 아니면……" 용조진인은 의자에서 한 발짝 걸어 나왔다. 이층은 순식간에 터질 듯한 긴장을 보였다. 그때 혈면괴도가 난처한 기색으로 나천웅을 돌아 보았다. "노선배님! 이러한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순간이다. 이층 안 곳곳에서 대경실색의 외침이 일었다. "뭣이라고?" "뭣이?" 특히 용조진인은 아예 할 말을 잊어 버렸다. '저 인물은 많이 봐줘야 이제 갓 마흔을 넘긴 나이인데…… 혈면괴도가 노선배라고 호칭하다니 대체 이건 무슨 조화인가?' 나머지 중인들도 일제히 경악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천웅에게 일제히 시선을 던졌다. 한편, 나천웅은 혈면괴도가 자신에게 구원을 청하자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이어 용조진인에게 시선을 두며, "자네가 용조진인이란 인물인가?" 그의 목소리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진하게 서려 있었다. "……!" 용조진인은 갑자기 꿀먹은 벙어리라도 된 듯 아무런 대답도 하질 못했다. 그는 단지 내심으로 섬뜩한 한기를 느꼈을 뿐이었다. 나천웅의 눈빛에서 그만 압도되어버린 때문이었다. '무시무시한 정광이다!' "흐음!" 나천웅은 용조진인이 아무런 응대를 해오지 않자 심히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헛기침을 날렸다. "다시 묻겠네. 자네가 용조진인인가?" 나천웅은 재차 용조진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 그…… 그렇습……" 용조진인은 얼떨결에 대답을 했다. "흠…… 그래?" 나천웅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가 자네에게 한 마디 해도 좋은가?" "아…… 네…… 네!" 용조진인은 여전히 곤혹과 당황의 빛으로 혼란의 와중에 빠져 있었다. '이런 순진무구한 인물을 봤나?' 나천웅은 내심 쓴 웃음을 날렸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노부가 보기에는 이미 혈면괴도 후배가 개과천선한 것 같고, 더욱이 자네의 사질들도 그 부상으로 인해 죽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이 기회에 묵은 원한을 툭 털어 버리고 서로 화해하는 것이 어떻겠나?" 진정 후배(?)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서려있는 듯한 나천웅의 설득이었다. 용조진인은 입에 가득 쓴 약을 물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 하지만……" 그는 말 끝을 흐렸다.


'도대체 이 인물은 누구란 말인가?' 용조진인은 순간적으로 생각을 굴려보았다. '혈면괴도가 이 인물을 노선배라고 깍듯이 모시는 것을 보면 분명 전대의 절세기인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나의 기억으로는 이런 인물이 있었다고는 볼 수 없으니……' 용조진인이 한창 염두를 굴리고 있을 때, "여보게! 용조진인! 그대는 노부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기 그지 없었다. "그…… 글쎄…… 요……" 용조진인은 나천웅의 말에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졌다고나 할까? 중인들은 용조진인과 나천웅을 번갈아 주시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층은 쥐죽은 듯한 고요속에 빠져 있었다. 이때 잠자코 있던 혈면괴도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한 모금 비웃음을 띤 채 용조진인을 향해 불쑥 말을 던졌다. "용조진인! 당신은 이분 노선배님이 어느 분이신지 알고나 있소?" "……!" 순간 중인들의 두 귀가 일제히 그 문을 크게 열었다. 정작 그들이 가장 궁금해 하고 있는 점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혈면괴도는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의 입으로 향하자 괜히 자신이 나천웅이 된 기분을 맛보았다. "흐흐……! 아마도 그대들은 이분이 누구신지 알면 기절초풍할 것이오." 이렇게 한 번 더 뜸을 들인 후 큰 인심이라도 쓰듯 나천웅을 중인들에게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분 노선배님은 지금부터 이백여 년 전에 아미태산(阿彌泰山)에 은거하였던 당시 천하제일기인이신 천금상인(天琴上人)으로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내는 벌컥 뒤집어지고 말았다. "맙소사! 처…… 천금상인!" "그…… 그럴 리가?" 중인들은 대경실색하여 이구동성으로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들 중에는 이 상황이 꿈이냐 생시냐는 식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살점이 떨어지도록 꼬집어 보는 인물도 있을 정도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천금상인이라면 전설 속에서나 내려오는 인물이거늘……!' 용조진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나천웅을 훑어 보았다. '어깨에 현금을 메고 있는 것으로 보아 믿지 못할 일만도 아닌데…… 그러나 아무리 꼽아도 갓 사십이 지난 중년문사의 행색이니……' 용조진인은 도저히 눈 앞의 인물이 천금상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다른 중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중인들의 경악은 짙은 의심의 눈길로 변해 갔다. 그러한 눈치를 채지 못할 혈면괴도가 아니었다. 그는 비릿한 냉소를 흘렸다. "흐흐……아무래도 못 믿는 모양이로군……" 혈면괴도는 나천웅을 향해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 아무래도 이들이 노선배께서 천금상인이심을 못믿는 모양인데 한 번 시범을 보여 주시는 것이……?"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나천웅은 짐짓 호통을 발했다. "……?"


느닷없는 그의 호통에 혈면괴도의 목이 자라목인 양 쑥 기어 들었다. "무공이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시전하는 것이 결코 아닐세." 나천웅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혈면괴도를 향해 연신 호통성을 발했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의 날카로운 일성이 두 사람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노부는 당신들의 수작을 도저히 못믿겠소!" 제 28 장 死神出現 중인들 가운데서 한 인물이 의자를 박차며 터뜨린 노성이었다. "어찌 인간이 이백 년을 산단 말이오?" 그는 가늘고 날카로운 눈매의 청의노인이었다. 청의노인은 혈면괴도와 나천웅을 향해 삿대질을 해댔다. "대체 이런 엉터리 같은 수작을 꾸미는 의도가 무엇이오?" 순간, "청살기검(靑殺氣劍) 유구령(劉九齡)!" 혈면괴도의 입에서 살기 충만한 외침이 일었다. "네놈이 감히 노선배님께 이토록 엄청난 무례를 범하다니…… 노부가 네놈의 혓바닥을 뿌리째 뽑고 말리라!" 혈면괴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 올랐다. 그야말로 완전히 혈색(血色)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꾹꾹 눌러 참고 있던 그의 노기가 이 기회를 빌어 그대로 터진 것이었다. "유가야! 어서 이 앞으로 썩 나서도록 해라! 당장에 끝장을 내주마!" 혈면괴도가 씨근벌떡하니 연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자네는 가만히 있게나!" 잠자코 사태를 지켜보던 나천웅이 손을 저어 펄펄 뛰는 혈면괴도를 만류했다. 이어 그는 여전히 부드러운 시선으로 청살기검 유구령을 주시했다. "자네는 어떻게 하면 노부의 신분을 믿을 수 있겠나?" 사실, 나천웅은 이미 청살기검 유구령에 대해 호감을 품고 있었다. 그의 대쪽같은 성품이 나천웅의 마음에 든 것이었다. "당신이 진정 전설 속의 기인(奇人)인 천금상인이라면 노부의 이 청살기검을 상대해보실 용기가 있으시오?" "저런! 찢어 죽일……" 혈면괴도는 재차 고함을 터뜨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허어! 자네는 가만히 있으래도?" 나천웅의 눈꼬리가 한차례 위로 솟구쳤다. 그러자 혈면괴도는 머쓱하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뜨거운 콧김을 씩씩 내뿜고 있었다. 혈면괴도를 무마한 나천웅은 여전히 미소를 띄운 채 청살기검 유구령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좋으이! 어디 손을 써보게나!" 청살기검 유구령은 나천웅이 선선히 승낙하자 허리에서 검을 뽑아들며 앞으로 나섰다. "아니오. 자칭 천금상인이라는 당신이 먼저 손을 쓰시오!" 청살기검 유구령은 가슴 앞에다 검을 곧추세웠다. "하하……! 노부는 여지껏 먼저 손을 써본 적이 없다네. 그러니…… 노부는 이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네. 만약 조금이라도 노부가 움직이게 된다면 자네의 승리로 쳐주겠네." 순간, 중인들은 아연실색하며 할 말을 잊었다.


'맙소사!' '전 중원을 통틀어 그 어느 누가 청살기검 유구령의 공격을 손을 묶어두고 대항할 수 있단 말인가?' 중인들, 심지어는 용조진인마저도 가슴에 한 가닥 서늘함을 느꼈다. '청살기검은 이곳에서 나를 제외하고는 제일 고강한 고수이다. 으음…… 결코 헛수작만은 아닌 것 같은데…… 일단 두고 보자!' 한편, 검을 곧추 세우고 있는 청살기검 유구령도 전신의 털구멍이 몽땅 오그라드는 기분을 느꼈다. '으음…… 허장성세일 것이다! 허나 큰소리를 치는걸 보니 예사로운 자는 아닐터…… 조심하지 않으면 괜한 망신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그때 다시 나천웅의 음성이 그의 귓가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허허…… 청살기검, 노부는 자네에게 십초를 양보하겠네!" "좋습니다!" 이층 안은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중인들은 손에 땀을 쥐고 이들의 대전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갑니다!" 청살기검 유구령이 대갈을 터뜨렸다. 순간, 쐐애액---! 가공할 검기가 나천웅의 미심혈을 노리며 뻗쳐 들었다. 신랄하기 그지 없는 검초였다. 유구령의 검이 나천웅의 미간을 일촌 거리에 이를 때까지 나천웅은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고 태연히 뒷짐까지 지고 있었다. "……!" 중인들은 태연자약한 나천웅의 태도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동시에, "아……!" 중인들의 입에서 부지불식중 경탄성이 일었다. 물밀 듯 몰아치는 유구령의 검세 속에서 나천웅의 모습이 안개처럼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중인들은 그러한 광경에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어찌 그들이 경악하지 않겠는가? 지금 나천웅은 영무환신술을 펼친 것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청살기검이 공격한다 해도 나천웅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수밖에. 파파파팟! 츠츠-- 츠츳! 눈깜짝할 새에 십여 초가 흘렀다. "자! 이제 약속한 십초가 다 지났네." 나천웅은 여전히 뒷짐을 진 채 부드러운 시선으로 유구령을 바라보았다. '무…… 무서운 자다! 내가 평생토록 연마한 검법을 이토록 여유만만하게 피해내다니……' 청살기검 유구령은 도시 혼란이 이는 정신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자! 노부가 시작하겠네." 찰나 또 한 번 그의 신형이 안개인 양 흩어졌다. 스스스…… 어느새 나천웅은 청살기검 유구령의 검신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것도 단 두 손가락으로. 그런 행동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맙소사!' 혼백이 달아날 정도로 놀란 청살기검은 황망히 나천웅의 손가락에서 검을 빼내려 들었다. 파앗! 허나 검은 자석에라도 붙은 양 꼼짝하려 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검신이 차츰 벌겋게 달아 오르는 것이 아닌가? "하하……! 자네는 이제 손을 놓아야 할걸세!" 나천웅은 여전히 부드러운 신색이었다. 찰나, "아앗!" 청살기검 유구령은 대경하여 검을 놓았다. 보라! 검이 엿가락처럼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이 아닌가? "시…… 신기(神技)다!" "오오! 저럴수가!" 중인들은 이제 완전한 경악의 구렁텅이로 휘말려 들었다. 허나 가장 충격을 받은건 용조진인 자신이었다. 그는 넋나간 얼굴로 나천웅을 망연히 응시하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다. "노선배님! 이 후배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뒤이어 청살기검 유구령도 손목을 움켜쥔 채 황망히 허리를 숙였다. "후배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선배님의 무학을 접하니 후배의 안목이 좁았음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들의 뒤를 이어 뭇 중인들은 분분히 나천웅에게 예를 올렸다. "하하……! 새삼 이게 무슨 짓들인가?" 나천웅은 짐짓 호방한 웃음을 날리며 한차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순간, 막 허리를 숙이던 백여 무림인들의 상체가 막대한 잠력에 의해 그대로 튕기듯 벌떡 일으켜지는 것이 아닌가? "……!" 중인들은 다시 한 번 감탄성을 터뜨렸다. 한바탕 소요가 가라앉은 후, 나천웅은 용조진인 등에 의해 제일 상석으로 모셔졌다. "노부는 예나 지금이나 무림에 크게 다른 생각은 품고 있지 않다네. 헌데……" 이어 그는 자신이 지어낸 지옥쌍절의 스승인 사신과의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해주었다. "때문에, 노부는 아직도 늙은 몸을 이끌고 이렇게 중원을 돌아 다니는 것일세." 그의 이야기가 끝을 맺었다. 중인들은 나천웅의 말에 재차 까무라칠 듯한 경악을 터뜨렸다. 그들은 마치 꿈길을 헤매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천웅은 그들이 대경한 안색을 풀지 못하자 내심 계속 고소를 지었다. "저…… 천금노선배님! 만약에 노선배님과 그 사신노선배님이 다시 한 번 격돌을 하신다면 결과는……?" 청살기검 유구령은 무척 송구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흐음! 석달 전에 노부가 그놈과 겨룰 때는…… 노부가 약간 방심한 탓으로 비기는 결과가 되었지만…… 이번에 그 놈을 다시 찾을 때는 충분히 그놈을 제압할 수……" 그때였다. "크하하……!"


어디선가 무시무시한 괴소가 터졌다. 순간 중인들은 일제히 고통스런 비명을 터뜨렸다. 그야말로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우렁찬 괴소였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심후한 내공이 담긴 괴소였던지 객잔의 지붕이 들썩였다. 탁자들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탁자 위 접시들이 추풍낙엽처럼 바닥으로 떨어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크하하하……! 천금 늙은 놈아! 네놈이 감히 노부를 제압하겠다고……? 이놈! 착각에서 깨어나지 못하겠느냐? 노부가 사갑자(四甲子)에 걸쳐 익힌 무공을 네놈이 충분히 꺾는다고? 네놈이 노부를 찾지 않아도 내 스스로 백 일 안에 네놈을 찾아가 이백 년 묵은 빚을 청산하겠다!" 이어 중인들의 고막을 찢어버릴 듯한 괴소가 끝을 맺었다. 정적(靜寂)! 장내는 마치 처음부터 아무일도 없었던 듯 고요함 속에 빠져들었다. 허나 중인들은 마치 세상의 종말을 겪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나천웅만은 여전히 태연자약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이 모든 일은 나천웅 자신이 벌인 일이 아니었던가? 그는 회선복화술(廻旋腹話術)로 사신의 목소리인 양 허공에서 들리게끔 술수를 부린 것이었다. 허나 그의 임기응변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아니? 이것은……?" "아앗!" 중인들의 입에서 또 한 번 혼비백산의 외침이 일었다. 그들의 시선은 자신들의 앞에 놓인 탁자에 얼어 붙을 듯이 고정되어 있었다. 보라! 세상에 이런 기현상이 있단 말인가? 파스스스……! 탁자들이 몽땅 가루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윗부분부터 차례로 먼지로 화하는 탁자들. 그것도 극히 짧은 시각에 벌어진 일이었다.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저승의 사신(死神)이 나타난 것 같았다. "우우……!" "이건……!" 중인들은 온 몸의 털이란 털은 모두 곤두서는 듯한 충격에 빠져들었다. 이런 일을 어디까지 믿어야 한단 말인가?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로는 볼 수 없는 무공이 연이어 눈 앞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허어! 일이 예사롭지 않구나. 사신의 무공이 이토록 증진되다니……" 잠자코 있던 나천웅은 짐짓 심히 염려스럽다는 듯 장탄식을 날렸다. 그의 장탄식에 중인들은 가까스로 제정신을 되찾았다. "휴……!" 용조진인 등도 떨리는 탄식을 내뿜었다. 그들은 아직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는지 가루가 되어 쌓인 탁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 정말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만약에 이런 인물이 강호를 휩쓸려 든다면……' 용조진인 등은 눈 앞이 캄캄해옴을 느꼈다. 중인들도 한결같이 침통한 안색이었다. 중인들이 극도의 당혹감에 빠져 있을 때, 나천웅은 한차례 고개를 흔들었다. "사신이 옛날보다는 살기(殺氣)가 많이 누그러졌구나!" 중인들은 그의 말에 무슨 뜻이냐는 듯 나천웅에게 일제히 시선을 두었다. 지금 그들의 시선은 마치 사신(死神)을 대하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함부로 살상을 하지 않고 탁자만 가루로 만들었으니……" 나천웅의 말에 중인들을 한 모금 싸늘한 냉기를 마셨다.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닌가? 사신이 일단 살의를 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살아있을 인물이 몇이나 될까? 그들은 다시 한 번 공포에 젖은 채 먼지로 변해 버린 탁자를 바라 보았다. "그자가 백 일 안으로 노부를 찾는다고 했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놈이 다시는 중원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여야겠다!" 나천웅이 독백처럼 말을 끝냈을 때였다. 용조진인이 나천웅의 신색을 살피며 근심스레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께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 주시겠습니까?" 나천웅은 태연한 신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워 하지 말고 말해 보게나!" 순간 용조진인의 눈에서 한 가닥 희망의 빛이 어렸다. "사실, 우리들이 이 객잔에 모인 것은 한 가지 극히 중대한 일을 의논코저 함이었습니다." "한 가지 중대한 일이라니?" "그 이유는 감숙성에 있는 천마십이성의 아홉째인 금갑신성(金甲神星)을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 나천웅은 아직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용조진인은 다시 한 번 천마십이성에 대해 설명을 했다. "…… 천마십이성의 무공이 제 아무리 강하다 해도 우리의 힘을 하나로 합친다면 금갑신성 하나쯤은 어떻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여기까지 말한 용조진인은 말꼬리를 흐리며 슬쩍 나천웅의 눈치를 살펴 보았다. 이어 잠시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허허……! 자네들의 뜻은 정말 갸륵하구만! 암! 어떤 일이든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정의(正義)를 행한다면 하늘도 그대들의 일을 도울걸세." 나천웅은 흔쾌한 음성으로 중인들의 의기를 칭찬했다. 그러자 용조진인은 용기가 생긴 듯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말씀인데…… 아무리 저희들이 힘을 합친다 해도 한가닥 불안을 어쩔 수 없답니다. 때문에 저희들은 노선배님…… 노선배님께 한 가지 어려운 부탁을……" 나천웅은 그의 말에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자네의 뜻은 노부가 이 일에 앞장서 달라…… 이런 뜻이 아닌가?" 용조진인은 나천웅이 문제의 핵심을 말하자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하하……! 노부가 이왕 무림에 몸을 담은 이상 자네의 높은 뜻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나?" 나천웅은 심히 유쾌하다는 듯 만면에 흡족한 웃음을 떠올렸다. 순간, "와아!" 이층에 모여 있던 중인들이 일제히 환성을 터뜨렸다. 잔뜩 먹구름이 깔려 있던 객잔 안에 터질 듯한 희열의 환성이 만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노선배님!" 용조진인은 감격에 어린 표정으로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하하……! 더 이상 노부의 낯을 간지르지 말고…… 술이나 한잔 사게. 노부는 그대들과 오늘 취해 보겠네." 이어 그는 좌중의 인물들과 한데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 * * 때는 한창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칠월 중순. 작열하듯이 뜨거운 태양은 중천에 떠올라 온 대지를 불태워 버리기라도 할 듯 강렬하게 그 기염을 쏟아내고 있었다. 찌는 듯한 무더위로 온 천하는 삽시간 불덩어리로 화할 듯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하나의 거대한 장원, 이곳에도 태양빛은 조금의 차별도 두지 않은 채 여지없이 그 열기를 쏟아 붓고 있었다. 신마장(神魔莊). 이것이 바로 이 장원의 이름이었다. 때는 정오(正午) 무렵, 한낮의 더위를 피해 한낱 날짐승까지도 그늘 밑에서 오수(午睡)를 즐길 시간이었다. 신마장 안에도 모두들 오수를 즐기는 듯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이때, 신마장 주위로 수십 명의 인영이 소리없이 나타났다. 맨 앞에 서 있는 인물들은 바로 나천웅과 혈면괴도, 용조진인, 또한 청살기검 유구령이었다. 그들은 이어 조심스럽게 장원 근처로 다가가고 있었다. 얼마나 장원 가까이 접근했을까? 조심스럽게 나아가고 있던 용조진인이 돌연 몸을 멈추었다. 그는 이어 나천웅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 저곳이 바로 신마장입니다. 원래 저곳은 사도의 고수였던 명유신(冥幽神) 황곤의(黃坤義)가 살던 곳이었습니다." 나천웅은 묵묵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헌데, 이 년 전 천마십이성이 무림을 휩쓸자 명유신은 이 산장을 천마십이성에게 바치고 그들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 후 그는 천마십이성의 배경을 믿고 감숙성내에서 마음대로 횡포를 부렸습지요." 나천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용조진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흠…… 그럼, 저 신마장에는 어떤 고수들이 있는가?" "예, 저곳에는 금갑신성 외에도 천마십이성이 나습포찰에서 키우던 고수 중 하나인 구환마(九環魔)라는 아홉 명의 고수들이 있습니다." "구환마?" 나천웅은 의아한 듯이 되물었다. "네, 그들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허나, 추측하건대 그들의 무공은 상당히 강할 것 같습니다." 용조진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천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네. 그렇다면 금갑신성은 노부가 맡을테니 구환마와 명유신은 자네들이 알아서 처리하게나." "네, 알았습니다." 용조진인은 나천웅에게 약간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어 그는 뒤를 돌아보며 커다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공격합시다!" "와아!" "와와!" 나천웅의 일행은 사기충천한 듯 제각기 환호성을 내지르며 기세를 돋구었다. 이어 그들은 일제히 경신술을 전개하여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휘릭! 휘이익!


오래지 않아 그들 일행은 신마장의 바로 보문 앞으로 날아 갔다. 그곳에는 두 명의 장한이 꾸벅꾸벅 졸며 보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나천웅 일행을 보자 크게 혼비백산했다. 그리고 너나할 것 없이 잠이 확 달아났는지 두 눈을 부라리며 고함을 내지르는 것이었다. "누…… 누구냐?" "멈춰라!" 허나 어디 멈추라고 해서 멈추겠는가? 일행이 한꺼번에 발출해낸 해일같은 경기가 그들의 면전으로 쏘아져 갔다. 우르릉! 파파파팟! "으악!" "으윽!" 짤막한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두 장한의 목이 동시에 허공으로 날아갔다. 뒤이어 용조진인의 양손이 빙글 뒤집혔다. 슈웅! 해일처럼 막강한 장풍이 그의 양손에서 쏟아졌다. 우르릉! 우지직찍! 신마장 장원의 보문이 그의 장풍에 의해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다. 대문이 박살나자마자 모든 중인들은 고함을 내지르며 신마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와아!" "와아아!" 한편, 장원 안에서는 많은 장한들이 이 돌연한 사태에 대경실색했다. 그들은 급작스런 변괴에 어리둥절한 채 급급히 무기를 빼어들고 맞서왔다. 허나 그들이 정도(正道)의 정예고수들의 무공을 당해낼 리가 없었다. 장한들은 순식간에 가슴에서 시뻘건 피를 뿌려내며 쓰러져 갔다. 바로 이때, "멈춰라!" 우렁찬 고함소리와 함께 두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한 명은 체격이 무척 외소해 보이는 청의노인이었는데 코 밑과 턱으로 염소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 노인은 쭉 찢어진 새우눈에 음침하고도 악랄한 인상이 물씬물씬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대략 오십여 세 정도로 보이는 체격이 무척 건장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 자는 백색 장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가슴 한 복판에는 커다랗게 은(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이때, 그들을 발견한 용조진인이 나천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 저들 중 저 청의노인은 바로 이 신마장의 명유신 황곤의입니다. 또한 그 옆의 인물은 구환마 중 은환마(銀環魔)라는 자이지요." 나천웅이 용조진인의 설명을 듣고 있을 때, 명유진이 살기를 가득 띄운 채 노성을 내질렀다. "네놈들은 대체 어디서 굴러 먹던 놈들이기에 감히 이 신마장까지 들어와 소란을 피우느냐?" 명유신의 호통에 용조진인이 성큼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입을 떼었다. "무량수불! 황곤의, 빈노는 너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어서 금갑신성이나 나오라고 해라!" 이때, 명유신이 그의 작은 새우눈을 부라리며 유심히 용조진인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순간 그는 자신의 가슴이 섬뜩해짐을 느꼈다. '이…… 이 자가 바로 삼도 중 한 명인 용조진인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굴린 명유신은 재빨리 어색한 웃음을 떠올렸다. "헛헛…… 나는 또 누가 이곳까지 와서 큰 소리를 치나 했더니 바로 용조진인이셨군." 용조진인이 그를 노려보며 싸늘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황곤의! 네놈은 비열하기가 짐승만도 못한 놈이다. 중원의 인물이면서 변방의 야인들에게 굴복하여 그들에게 아첨을 떨다니……" 용조진인의 비양거림에 명유신은 수치감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 수치심은 이내 분노로 뒤바뀌었다. 그가 흉험한 얼굴로 행동을 취하려는 순간이었다. 옆에 서 있던 은환마가 황급히 그의 앞을 막아섰다. "잠깐! 황장주! 내가 한 번 저자와 말을 해 보겠소." 은환마의 제의에 명유신은 간신히 노화를 눌러 참으며 뒤로 물러났다. 이어 은환마가 용조진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네가 바로 중원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곤륜파의 용조진인이냐?" "그렇다!" 용조진인은 은환마의 물음에 싸늘한 시선을 쏘아보내며 짤막하게 대꾸했다. "이곳에 온 이유는 대체 무엇이냐?" 은환마가 재차 물었다. "악의 온상인 천마십이성을 없애기 위해서다." 용조진인의 대답에 은환마가 찰나적으로 두 눈에 살기를 떠올렸다. "흐흐흐…… 용조진인! 네놈은 지금 무엇인가 커다랗게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너의 무공이 강하다고는 하나 그것은 중원에서이고, 우리 나습포찰에는 너보다 강한자가 부지기수다!" 은환마는 이렇게 말을 뱉아내며 입가에 싸늘한 조소를 떠올렸다. "더구나, 천마십이성 그분들과 비교한다면 네놈 정도는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다!" 그의 호통에 용조진인이 가소롭다는 듯이 냉소를 흘려냈다. "은환마!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그만한 자신이 있기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두거라!" 순간 은환마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음산한 냉갈을 뱉아냈다. "건방진 놈!" 다음 찰나 그는 양손은 번개같이 뒤집었다. 순간 벼락줄기같은 장력이 가공할 기세로 뻗어나갔다. 꽈르릉! 허나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용조진인이 아니었다. 그는 싸늘한 냉소를 날리며 마주 소맷자락을 떨쳐냈다. 우르릉! 꽈광! 장력과 장력이 맞부딪치는 굉음이 대기를 찢어발기며 울려퍼졌다. 휘우웅…… 사납게 휘몰아치던 흙먼지가 가라앉자 그들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은환마는 뒤로 세 걸음 물러나 있었다. 반면 용조진인은 뒤로 두 걸음 물러나 있었다. 은환마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으음, 예상 보다 강한 것 같구나……!' 용조진인 역시 안색이 침중해져 있었다. '뜻밖이다. 나는 이곳에서 금갑신성 외에는 적수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헌데 이자의 무공은 나에 비해 별로 뒤지지 않으니…… 그렇다면 나머지 팔환마 역시 이자 못지 않을 텐데……' 이때 은환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다! 듣던대로 과연 보통이 아니구나! 자, 어디 다시 한 번 나의 일장을 받아봐라!"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일장을 번개같이 격출해냈다.


쉬익! 매서운 파공음이 울려퍼지며 거센 장풍이 용조진인의 전면으로 몰려들었다. 바로 그때 용조진인의 뒤에서 엄숙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은환마! 너는 노부가 상대해 주마!"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쪽에서는 무서운 잠력이 뻗어나오는 게 아닌가? 우르릉! 폭음이 진동하는가 했더니 뒤이어 은환마의 입에서 나직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우욱!" 그는 창백한 안색으로 다섯 걸음이나 밀려난 채 간신히 서 있었다. 그는 경악의 눈으로 잠력이 뻗어나왔던 곳을 응시했다. 그러자 용조진인의 뒤에서 걸어나오는 한 명의 중년문사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너…… 너는 누구냐!" 허나 중년문사는 빙그레 웃을 뿐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바로 나천웅이었다. 용조진인이 황송한 표정으로 급히 말했다. "노선배님! 이자는 후배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허나 나천웅은 고개를 흔들며 그를 바라보았다. "노부도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닐세. 허나, 노부가 예상한 것보다 구환마의 무공이 높다네. 자네의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고는 해도 아홉 명을 모두 상대하기란 불가능한 것이지. 그러니 이번에는 노부가 한 번 상대해 보겠네." 나천웅은 말을 마치자 곧 시선을 은환마에게 돌렸다. "자, 은환마! 어디 노부에게 그 나습포찰인지 뭔지하는 곳의 무공을 사용해 보거라!" 나천웅은 은환마를 향해 비양거리며 앞으로 성큼 한 걸음 나섰다. 이때 은환마는 용조진인과 나천웅의 대화를 들으며 가슴이 섬뜩해져 있었다. '저 중년인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용조진인이 노선배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상당히 배분이 높은 인물인 것 같구나……! 허나, 나는 저같은 인물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는데……' 이렇게 생각을 굴린 은환마는 나천웅을 향해 약간 공손한 어조로 재차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나천웅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노부는 저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금갑신성을 제거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온 사람이다!" 표정과는 달리 그의 어조는 흡사 지옥의 사자인 양 차갑기 그지 없었다. 순간 은환마의 안색이 싹 변했다. "크크! 보아하니 한가닥 하는 모양인데 그렇다고 감히 이 어르신네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허허허…… 은환마! 너는 아마도 천마십이성을 신처럼 존경하는가 본다만 노부가 보기에는 그들 천마십이성은 시시한 무공나부랭이나 믿고 까부는 어린아이들에 불과하다!" 나천웅은 따끔하게 그들을 비웃어 주었다. 찰나 은환마의 얼굴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뭣이라고?"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천웅을 향해 벼락같은 일장을 내뻗었다. 우르릉! 나천웅은 냉소를 날리며 슬쩍 손을 치켜들었다. "그 정도로는 노부에겐 삼초 감에 불과하다." 뭐가 어찌된 상황인지도 미처 알아보기도 전에 무시무시한 굉음이 진동했다. 고오오…… 꽈과광!


"우욱!" 은환마는 마치 수천 근의 쇳덩어리에 충돌한 듯 커다란 충격을 느끼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잇달아 뒤로 다섯 걸음이나 물러나 있었다. 그가 미처 놀랄 사이도 없이 나천웅이 번개같이 그의 옆으로 접근하며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핫핫핫…… 은환마! 제 이초다!" 말이 끝났다고 느낀 순간 나천웅의 오른손이 기이하게 휘둘러졌다. 바로 단원오장 중 단봉조양을 전개한 것이다. 순간, 쇄애액! 무서운 경풍이 소용돌이치며 마치 노도와 같이 은환마를 향해 밀어닥쳤다. '헉!' 은환마는 얼굴이 흑빛이 되어 혼비백산한 채 간신히 몸을 비켜냈다. 나천웅은 그러한 그의 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제법이구나!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것을 받아보거라!" 나천웅은 전광석화같이 왼손을 휘둘러냈다. "단천지혈!" 그러자 사방 방원 이십여 장은 이내 시뻘건 홍장으로 뒤덮혔다. 휘류류륭! 은환마는 대경실색했으나 이번엔 도저히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온통 시뻘건 피구덩이로 빠지는 듯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으아악!" 처절무비한 단말마의 비명이 은환마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그는 가슴에서 선혈을 뿜어내며 바람 앞의 낙엽처럼 날아갔다. 쿵!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는 이미 숨을 거둔 채 시체로 변해 있었다. 착각인가? 나뒹굴어진 시체가 한 차례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는 듯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다시는 움직일 줄 몰랐다. 용조진인 등은 새삼 나천웅의 가공할 무공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나천웅은 그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비웃듯이 입을 열었다. "보잘 것 없는 무공을 지니고 그렇게 큰소리를 치다니……" 바로 이때였다. 어디선가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구! 정말 보통 실력이 아니군!" 나천웅은 힐끗 시신을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대체 언제 나타난 것일까? 그곳에는 아홉 명의 인물이 어느새 유령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제 29 장 打殺! 金甲神星 아홉 명의 인영 중 가장 특이한 사람은 정가운데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자는 백발이 성성한 가운데 두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안광이 폭사되어 나오고 있었다. 또한, 그는 전신에 번쩍거리는 금빛 비늘로 덮힌 옷을 걸치고 있었다. 때마침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을 받자 그 비늘은 찬란한 빛을 발해내며 빛나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나천웅은 내심 생각을 굴렸다. '으…… 음! 저자가 바로 금갑신성(金甲神星) 찰가융(察伽戎)이로구나!' 나천웅은 또한 금갑신성의 옆에 있는 여덟 명이 구환마 중 은환마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가 이렇게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금갑신성이 나천웅을 노려보며 냉막한 어조로 입술을 떼었다. "노부는 현무림에서 그대같은 고수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정체를 밝혀라." 그의 물음에 나천웅이 두 눈을 가늘게 뜨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핫…… 자네가 바로 금갑신성이란 아이인가?" 나천웅의 안하무인격인 말투에 금갑신성의 안색이 홱 변했다. "이…… 이놈이……?" 그자는 치솟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어 안면 근육이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허나 나천웅은 그러한 금갑신성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다시 껄껄 대소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허허허…… 노부가 근 이백여 년 간 무림에 처음 나와보니 새파랗게 젊은 것들이 함부로 능멸(陵蔑)하려 드는군!" 나천웅의 그 말에 금갑신성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뭣이……? 이백 년 전이라고……' 금갑신성은 힐끗 시선을 돌려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은환마를 바라다보았다. 은환마는 너무도 끔찍한 형상으로 죽어 있었다. '이자의 무공은 실로 독랄하구나……!' 이렇게 생각을 굴린 금갑신성은 다시 나천웅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침중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이때 그의 말투는 약간 누그러져 있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나천웅은 힐쭉 웃어보였다. "자네는 천금상인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 "천금상인?" 금갑신성은 되뇌어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떠올렸다. 허나 곧 그는 표정을 바꾸며 다시 냉막한 어조로 호통을 쳐댔다. "그대가 누구건 노부는 상관이 없다! 단지 그대가 은환마를 죽인 것만으로도 노부와 이미 원한이 맺어진 것이다. 노부는 도저히 이 사실을 묵과할 수가 없다!" 금갑신성의 칼로 자르듯 단호한 일성이었다. 나천웅이 그를 향해 담담한 어조를 흘려냈다. "너는 감히 노부를 훈계할 자격이 없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 금갑신성은 얼굴 전면에 음흉한 미소를 떠올린 채 양옆을 둘러보았다. "더구나, 노부의 옆에는 절세의 무공을 지닌 여덟 명의 고수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 두거라!" 금갑신성은 말을 마치자마자 양옆을 향해 손짓을 했다. "철환마(鐵環魔)! 혈환마(血環魔)! 놈의 무공은 보통이 넘는다. 너희들이 합세해서 공격하거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옆에 있던 구환마 중 두 명이 쏜살같이 앞으로 나섰다. 파앗! 그들은 나서자마자 곧 나천웅을 향해 호통을 쳐댔다. "흐흐흐…… 다섯째의 원한을 갚겠다!" "특별히 대접하는 의미에서 협공을 하는 것이니 영광으로 알아라!" 그 즉시, 그들은 동시에 나천웅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허나 나천웅은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은 채 냉소를 날렸다. "쓸데없는 만용(蠻勇)은 죽음을 재촉한다!" 그는 이렇게 내뱉으며 조금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자 철환마와 혈환마는 득의양양한 희색을 떠올렸다.


'승부는 끝났다!' 고오오! 우르릉!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듯 굉렬한 폭음이 울려퍼졌다. 철환마와 혈환마가 시출해낸 두 줄기의 막강한 장력이 나천웅의 가슴과 복부에 명중된 것이었다. 허나 사태는 엉뚱하게 뒤바뀌어 있었다. "헉!" "윽!" 두 마디의 비명과 함께 오히려 철환마와 혈환마가 몸의 중심을 잃은 채 튕겨져 나가는 게 아닌가? 나천웅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두 눈에 살기를 떠올린 채 비틀거리는 철환마와 혈환마를 노려보았다. "만용은 곧 죽음이라고 노부가 말하지 않았느냐?" 그는 냉막하게 호통을 내지르며 양손을 재차 휘둘렀다. 순간 무지막지한 장력이 비틀거리는 두 명을 향해 격출되었다. 쿠오오오! 찰나 대경실색한 철환마와 혈환마가 다급히 맞서려 했다. 허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우르릉! 꽈과광! 회오리가 휘몰아치며 뽀얗게 흙먼지가 일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으억!" "크헉!" 처절한 두 마디 비명이 자욱한 피보라와 함께 허공을 수놓았다. 저 멀리 나뒹굴어진 그들은 모두 칠공에서 시뻘건 선혈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의심할 여지없는 즉사(卽死)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금갑신성의 안색이 급변했다. "이…… 이놈이……?" 그는 곧 두 눈에 하나 가득 살기를 떠올리며 호통을 내질렀다. "모두 한꺼번에 놈들을 쳐랏!" 순간 나머지 육환마와 옆에 서 있던 명유신까지 합세하여 나천웅 일행에게 덮쳐들었다. 금갑신성은 곧장 나천웅을 향해 가공할 살기를 내뿜으며 유령처럼 접근해왔다. "흐흐흐…… 천금상인이라고 했던가? 네가 누구든 노부는 상관않겠다! 허나, 우리 천마십이성을 건드린 자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네놈에게 똑똑히 보여주겠다!" "……" 나천웅은 대꾸도 없이 묵묵히 선 채로 금갑신성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때 괴이하게도 금갑신성의 눈빛은 점점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어찌된 판국인지 그 눈빛은 삽시간에 누런 황금빛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응?' 그의 눈빛을 발견한 나천웅은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저것은 금린혈혼갑(金鱗血魂甲)!' 나천웅은 내심 부르짖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금갑신성의 금빛비늘로 된 옷에서는 무서운 광망이 폭사되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앗!"


너무나도 찬란하고 눈부신 광채에 나천웅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아버렸다. 바로 이때, "크핫핫핫…… 금린혈혼갑의 무서운 위력을 보여주마!" 금갑신성이 커다랗게 웃어제치며 냉랭한 호통을 내질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금갑신성의 금린혈혼갑에 붙어 있던 수천 개의 비늘이 떨어지며 삽시간에 엄청난 기세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위기의 순간, 나천웅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직감적으로 엄청난 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밀리면 끝장이다!' 나천웅은 두 눈을 감은 그대로 금갑신성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만상백선검이 들려져 있었다. 거의 동시 그의 입에서 한소리 냉막한 호통이 터져나왔다. "검광폭혈비망혼!" 만상백선검이 검집에서 뽑혀져 나오며 날카로운 검기를 발해냈다. 휘류륭! 파파파팍! 괴이한 음향이 울려퍼졌다. 만상백선검에서 뻗치는 검기에 수많은 비늘이 튕겨져 나간 것이었다. 허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만상백선검의 검망을 뚫고 나간 몇개의 비늘이 나천웅의 몸에 격중되는 찰나 우수수 맥없이 떨어져 내리고 마는 것이 아닌가? 그 비늘들은 단지 나천웅의 옷만 약간씩 찢어놓았을 뿐이었다. 이 상황에 금갑신성은 대경실색했다. 그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급급히 뒤로 물러나려 했다. '저…… 저 무공은 이제보니!' 금갑신성의 얼굴은 공포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바로 그 짧은 순간 금갑신성은 자신의 가슴이 갑자기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번쩍! "크아악!" 그의 입에서는 도저히 인간이 발해내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괴성이 흘러나왔다. 나천웅은 비로소 두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에 금갑신성이 가슴을 양손으로 움켜쥔 채 나천웅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그가 양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가슴에서는 분수같은 선혈이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금갑신성은 두 눈 가득 의혹을 떠올린 채 더듬거리며 말을 뱉아냈다. 이미 그의 눈에 빛나던 황금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미…… 믿을 수가 없다. 노…… 노부의 금린혈혼갑의 비술이 깨지다니……" 간신히 말을 뱉아내는 그의 입에서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부…… 분하다……" 그의 몸이 서서히 앞으로 숙여지더니 이내 거대한 고목이 무너지듯 고꾸라졌다. 쿵! 둔탁한 음향이 울려퍼졌다. 나천웅은 묵묵히 쓰러진 금갑신성의 시체를 잠시 동안 내려다 보았다. 그런 그의 입에서는 암암리에 여린 한숨이 새어나왔다. '참으로 무서운 무공이었다! 만약 내가 석실의 무공을 익히기 전이라면 패하는 쪽은 나였을 것이다.' 그는 시선을 돌려 옆을 바라다 보았다. 그곳에서는 중인들이 육환마를 상대로 치열한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곳의 혈투 또한 처절했다. 명유신은 이미 전신이 두 토막으로 양단된 채 죽어 있었다. 육환마의 무공은 결코 약한 편은 아니었으나 삼십여 명이 넘는 중인들의 합공에는 그들도 견뎌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사태가 점차 이쪽에게 유리해짐을 느낀 나천웅은 이윽고 시선을 돌려 하늘을 응시했다. '으…… 음…… 이곳에는 더 이상 내가 없어도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굴린 그는 즉시 영무환신술을 전개했다. 스스스…… 그의 신형은 삽시간에 뿌옇게 변하더니 마치 안개가 사라지듯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 * * 호북성(湖北省). 이곳에 위치한 어느 조그마한 마을. 그곳의 이름은 소하(邵霞)라 일컬어졌다. 이 마을의 위쪽으로는 양자강(揚子江)의 지류인 한수(漢水)가 흐르고 있었으며 아래로는 무산(巫山)이 길게 뻗어 있었다. 이곳 소하에 위치한 어느 객점 안, 나천웅과 혈면괴도가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천웅은 여전히 천금상인으로 분장한 모습이었다. 그는 술잔을 쭉 들이킨 다음 혈면괴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왜 노부의 뒤만 그렇게 쫓아오는가? 자네를 위협하던 감숙성의 금갑신성이 죽은 이상 이제 자네는 별 위험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의 물음에 혈면괴도는 멋쩍은 듯이 웃음을 지어보였다. "저…… 후배는 그래도 노선배님의 뒤를 따르고 싶습니다." 혈면괴도의 이같은 대답을 들으며 나천웅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도무지…… 자네의 마음을 모르겠군……! 노부도 더 이상 상관하지 않을 테니 앞으로의 일은 자네 마음대로 하게나……" 바로 이때였다. 나천웅의 귓가에 언뜻 스쳐가는 가느다란 음성이 있었다. "정말 웃기는 일이군! 새파랗게 젊은 놈이 감히 천금상인의 흉내를 내고 있다니……" 순간 나천웅은 가슴이 뜨끔해져서 재빨리 주위를 훑어 보았다. 허나 그 객점 안에는 의심이 갈만한 사람이 없었다. 나천웅은 내심 괴이한 생각이 들었으나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그의 시야에 한 인물이들어왔다. 그자는 객점 한 구석에서 몸을 잔뜩 웅숭그린 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무척 늙어보이는 꼽추노인이었다. 꼽추노인은 머리가 온통 새하얗게 세어버린 은발이었는데 특이한 것은, 양쪽 귀 밑으로 약 한 자 가량이나 되는 머리카락이 흘러내려와 있었다. 나천웅은 그 노인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왠지 등줄기에 한기가 스치는 느낌이었다. 그 꼽추노인의 전신에서는 실로 무어라 필설로 형용키 힘든 기(氣)가 줄기줄기 뻗어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저 노인은 실로 보통이 아니로구나……!' 그가 꼽추노인을 주시하며 이렇게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꼽추노인이 식사를 모두 마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그 꼽추노인은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느릿하게 걸어나갔다.


나천웅은 재빨리 혈면괴도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자네, 이곳에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게." "저……!" 혈면괴도가 주춤하며 입을 떼기도 전에 나천웅은 이미 객잔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휘릭! 나천웅은 조심스럽게 꼽추노인을 뒤따르고 있었다. 꼽추노인은 어느덧 성문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미행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일까? 꼽추노인은 갑자기 경신술을 발휘하며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나천웅도 지지않고 경공술을 시전하여 노인의 뒤를 계속 쫓았다. 얼마를 그렇게 쫓기고 쫓았을까? 좀체로 꼽추노인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나천웅의 귀에는 꼽추노인의 전음입밀성이 들려왔다. "후후후…… 젊은 놈이 실력이 대단하구나! 허나, 노부를 잡기는 힘들 것이다!" 그 순간 나천웅은 오기가 솟구침을 느꼈다. 그는 재빨리 영무환신술을 전개했다. 그러자 그는 삽시간에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꼽추노인은 전속력을 내어 계속 달리고 있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스스스…… 꼽추노인은 자신의 바로 한 치 앞에 뿌연 안개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대경하여 멈춰섰다. "엇!" 그가 흠칫 놀라는 사이 그 안개가 순식간에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꼽추노인의 입에서 한소리 신음같은 일성이 새어나왔다. "영무환신술!" 꼽추노인의 눈꼬리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나천웅이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바로 맞추었소. 당신의 안목은 실로 훌륭하외다!" 그의 말에 꼽추노인이 괴이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정말 뜻밖이로다! 이런 곳에서 영무환신술을 쓰는 사람을 만나다니……" 나천웅은 꼽추노인에게 다짜고짜 다그치듯 따져물었다. "객잔에서 당신이 내게 그런 말을 한 의도는 무엇이오?" 나천웅의 말이 떨어진 순간 꼽추노인은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꼬마야! 너의 변장술은 아마도 삼환비급에서 얻은 것 같구나! 허나, 그 비급 내의 변장술은 너보다 내가 더 고명할 것이다!" "……?" 나천웅은 흠칫 놀라 멍하니 꼽추노인을 응시했다. "핫핫핫…… 이제는 노부가 어떻게 해서 너의 정체를 알아냈는지 궁금증이 풀렸느냐?" 꼽추노인이 껄껄 대소를 터뜨리며 묻는 말에 나천웅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였다. "으…… 음! 정말 뜻밖이오. 삼환신공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다니……" "그런 것 따위는 별로 중요한게 아닐 터……" 꼽추노인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갑자기 정색을 띠었다. "꼬마야! 노부에게 너의 진면목을 한 번 보여주지 않겠느냐?" 돌연한 꼽추노인의 제의를 받으며 나천웅은 약간 망설였다. 허나 나천웅도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내 승낙을 했다.


"좋소. 내 원래 아무에게도 나의 신분을 밝혀본 적은 없소. 허나, 당신에게만은 왠지 모르게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그는 이렇게 말을 마치자 즉시 삼환신공을 운기했다. 투투둑! 투툭! 잠시 후 나천웅은 그의 본래의 준수한 청년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꼽추노인은 나천웅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순간, 꼽추노인의 표정은 기이할 정도로 심각하게 변했다. 이어 그는 나천웅에게 진중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아이야!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그것은…… 대답하기 곤란하오." 나천웅은 이 알 수 없는 노인에게 자신의 이름까지 밝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꼽추노인은 두 눈이 더욱 더 심각해진 채 나천웅을 계속해서 뚫어질 듯이 응시하는 것이었다. 나천웅은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때, 꼽추노인은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나천웅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네 이름이 혹시 나…… 나천웅이 아니냐?" "……!" 순간 나천웅은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이…… 이 노인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누군데 나의 이름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꼽추노인은 계속해서 나천웅의 얼굴을 주시하며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닮았다, 닮았어. 너무도 닮았구나…… 눈, 코, 입 등 모든 것이 주인의 젊은 시절과 똑같다……!" 꼽추노인은 알 수 없는 말을 혼자 뇌까리더니 완전히 확신을 가진 듯 감격의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천웅 앞에 무릎을 꿇는 게 아닌가? 나천웅은 깜짝 놀라 황급히 그를 만류하려 했다. "노인, 아니 왜 이러십니까?" "아! 소주인, 소주인…… 정말 이렇게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꼽추노인의 갑작스럽고도 괴이한 행동에 나천웅은 더욱 더 오리무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노인, 도대체 왜 이러시오?" "지금부터 약 오십 년 전 노부는 주인 나진우 어른께 크나큰 은혜를 입은 몸입니다. 세 번씩이나 그 어른께 구원을 받았습지요……" 순간 나천웅은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 그렇다면 당신의 주인이란 바로…… 할아버지……?" 그는 경악성을 내지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짧은 순간 그의 안색은 수십 차례 복잡한 변화를 일으켰다. 허나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싸늘하기만 했다. "노인! 나는 당신과 상관이 없소이다. 나에게는 그렇게 악한 조부는 애당초부터 없었소이다!" 나천웅의 음성은 칼로 자르듯 단호했다. 그는 지난 어린 시절 자기에게 차가운 아픔만을 남긴 채 홀연히 떠나던 조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그는 얼마나 많은 비애를 느껴야만 했었던가? 또한 설하진에게서 들은 조부에 대한 내력…… 나천웅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내심 강하게 도리질을 쳤다. 일순 꼽추노인의 안색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소주인……"


"나를 소주인이라 부르지 마오!" 나천웅의 음성은 여전히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아까도 말한 것처럼 나는 천마십이성 따위에 굴복하여 천 명이나 되는 장인을 나습포찰로 보내 죽이게 한 그런 조부는 필요없소이다!" 이때 꼽추노인은 나천웅의 말을 듣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이제보니 소주인은 주인이 백옥마궁을 지어 오대기인을 죽인 사실을 모르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이 든 그는 어떤 희망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꼽추노인! 이자는 바로 그 옛날 천수제군의 심복인 신타였던 것이다. 내심 생각을 정리한 신타가 조용하고도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소주인! 이 노복이 소주인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듣지 않겠소!" 나천웅은 여전히 냉랭한 음성으로 내뱉고는 몸을 돌렸다. 순간 그의 귓가에 신타의 음성이 빠르게 스며들었다. "사실, 주인어른이 그런 행동을 하신 것에는 그 나름대로의 크나큰 고충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지금 그 천 명의 장인들은 아직도 죽지않고 살아 있습니다." "뭣이라고?" 나천웅은 깜짝 놀라 반문했다. 실로 그의 충격은 큰 것이었다. 그 천 명의 장인이 아직도 살아 있다니…… 기실 나천웅은 그동안 자신의 조부가 죄없는 천 명의 장인을 죽게 한 것에 얼마나 많은 죄책감을 느껴왔던가! 나천웅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신타를 주시했다. 꼽추노인 신타는 긴 탄식을 흘려내며 말문을 열었다. "얼마 전 이 노복은 나습포찰에 갔다가 큰 상처를 입고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때 그곳에서 한 가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천 명의 장인들이 살아 있다는 것이지요." "그…… 그…… 게 분명 사실인가요?" 나천웅은 실로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계속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신타를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물론, 그들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 나천웅은 일시 꿈을 꾸는 듯 망연자실한 심정이었다. 허나 그는 이내 전신의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어쩌면 조부에게 자신이 모르던 새로운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이때 신타가 감개무량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주인님께서는 소주인을 만나면 이런 말을 꼭 전하시라고 하셨습니다. 소주인을 사랑했다고……" 그 순간 나천웅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혈육(血肉)의 정이란 이렇게도 끈끈한 것인가? 신타의 말 한 마디에 그는 그동안 조부에 대해 품었던 증오심이 차차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 세상에 영원히 끊어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혈육(血肉)의 정(情)이리라. 나천웅은 말없이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뺨 위로는 자꾸만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천웅의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며 꼽추노인은 긴 탄식을 터뜨렸다.


'아! 주인어른! 용서하십시오. 이 노복은 도저히…… 도저히 그 모든 사실을 소주인에게 알릴 수 없습니다. 아마 주인님께서도 소주인님이 불행 속에서 괴로워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신타는 내심 이렇게 부르짖으며 자신의 마음을 달랬다. 잠시 동안 그들은 그곳에 그런 채로 움직일 줄을 몰랐다. 두 사람은 각각 자신만의 깊은 상념에 빠져있었다. 제 30 장 魂飛魄散 협서성(陜西省). 중앙부(中央府)에 위치한 여산(麗山). 협서성의 맥(脈)이 시작된다 해서 협서성의 사람들은 주산(主山), 또는 성산(聖山)이라고도 일컬었다. 그 여산의 남쪽 기슭에 하나의 곡(谷)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용이 웅크리고 있는 듯하다 해서 와룡곡(臥龍谷). 와룡곡 입구에 세 개의 인영이 유성(流星)처럼 쏘아 들었다. 세 개의 인영은 일제히 곡 입구에 나란히 내려섰다. 두 명의 노인과 한 명의 중년문사였다. 얼굴이 온통 시뻘건 도인과, 등이 심하게 휜 꼽사등이였으나 전신에 위엄이 감도는 황의노인, 그리고 고고한 기품이 끓어 넘치는 한 명의 백의의 중년문사였다. 그렇다. 이들은 바로 나천웅과 신타, 그리고 혈면괴도였다. 그 사이 나천웅은 여유를 찾으면서 신타를 더욱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삼환신공을 익힌 덕분에 나천웅은 신타의 모습이 원래 본모습이 아니라는 걸 파악해냈다. 그렇다. 원래 신타는 꼽추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기나긴 세월을 변장한 모습으로 살아왔을 뿐이었다. 원래 그의 진실한 명호는 신주괴협(神州怪俠) 사천릉(史天陵)이었다. 그는 이미 백여 년 전에 강호상에서 사라진 그야말로 전설 속의 인물이었다. 지옥쌍절이 강호에 활약하기 수년 전에 은거한 전대기인인 것이다. 당연히 그의 나이는 이미 백 오십여 세에 달하고 있었다. "사(史)노인……! " 나천웅은 문득 눈가에 기이한 이채를 발하며 신타, 즉 사천릉에게 말을 건넸다. "앞으로는 본래의 모습을 회복해서 활동하는 게 어떻겠소?" "네! 주인 어른!" 황의노인 사천릉은 일시 멈칫하는 기색이었으나 주저없이 대답했다. 그런 그의 눈가에는 무한한 감회가 스쳐가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삼환신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으드드득! 이내 사천릉의 등에서 뼈가 움직이는 기묘한 음향이 울려퍼졌다. 다음 순간 사천릉의 등 뒤 혹이 쑥 들어가며 그의 신형이 우뚝하니 우람한 자세를 드러냈다. '거의 오십 년 만에 내 진실한 모습을 되찾았구나!' 사천릉은 가슴이 뭉클해 옴을 느꼈다. 그 순간 그의 뇌리에 천수제군의 모습이 떠올랐다. 원래 그는 오십여 년 전 나천웅의 조부인 나진우에게 크나 큰 은혜를 입은 적이 있었다. 그 후 그는 나진우를 주인으로 모시면서 그 스스로 자신의 진실한 신분을 감추었던 것이다.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오직 나진우에게 충성을 다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혈면괴도는 사천릉이 제모습을 되찾자 감탄성을 발했다


'이렇게 보니 신선의 풍도가 따로 없구나!' 이미 혈면괴도는 나천웅을 통해 사천릉을 소개 받았을 때 충격을 금치 못했었다. 자신보다 한 배분이 높은 사천릉이 살아 있다는 사실도 그렇거니와, 나아가 나천웅을 향해 주인이라고 부르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사천릉 또한 나천웅이 천금상인으로 변장해서 움직이고 있음을 알고는 행동을 맞춘 것이다. 때문에 그는 타인이 보는 앞에서는 나천웅을 일컬어 소주인이라 하지 않고 그냥 주인이라 불러오던 중이었다. 이들은 호북성을 떠나 지금 와룡곡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주인어른! 주인께서는 천마십이성에 대해 완전히 알고 계시는지요?" 사천릉은 나천웅을 향해 걱정스러운 신색으로 질문을 던졌다. 지금 그는 나천웅이 홀로 천마십이성을 상대하려드는데에 일말의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나천웅은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확실히는 모르고 있소." 그러자, 사천릉은 그럴 것이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부분의 강호인들은 천마십이성의 무공수위를 거의 비슷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도 커다란 격차의 무공을 지니고 있지요." 순간 혈면괴도가 크게 놀라 부르짖었다. "격차라니요?" 놀라기는 나천웅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노인, 그것이 무슨 말씀이오?" "그러한 사실은, 노복이 몇 년 전 나습포찰에 갔을 때 알 수 있었습니다." "음……!" 나천웅은 묵직한 침음성을 터뜨렸다. 이것은 실로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사실이었다. 사천릉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때 노복은 천마십이성 중 몇 명과 부딪쳐 본 일이 있습니다. 맨 처음 노복은 천마십이성중 여덟째인 귀염신성(鬼焰神星), 다음 번엔 열 한 번째 현운신성(玄雲神星)과 겨루었지요. 허나 노복은 그들과 평수(平手)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허나 세 번째인 천극신성(天極神星)과 붙었을 때는……" 사천릉은 거기서 잠시 말을 끊었다. 혈면괴도는 마른 침을 삼키며 사천릉의 입을 주시했다. 사천릉은 엄중한 신색으로 말을 이었다. "그 천극신성과는 거의 삼천여 초를 겨루었지요. 그때 노복은 반초의 차이로 천극신성에 패배를……" 나천웅은 재차 침음성을 터뜨렸다. "음……! 그렇다면 그들 간에도 무공의 차이가 있다는 말인데……" "그렇습니다! 천마십이성 중 진짜로 무서운 인물들은…… 세 명인데, 첫째인 천우신성(天宇神星), 둘째인 천공신성(天空神星), 셋째인 천극신성(天極神星)입니다. 이들 세 사람은 오백 년 전 아사마, 아녹다, 아비야의 진정한 무학을 그대로 물려받은 인물들입니다. 허나 네 번째서부터는 그들에 비해 몇 단계 떨어지는 편이지요." "으음……?" 나천웅은 사천릉의 말에 깊은 생각에 젖어들었다. '천우, 천공, 천극신성…… 과연 이들의 무학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주인어른! 그들 세 명을 만났을 때는 더욱 더 조심을 해야할 것입니다." 그것을 끝으로 그들의 대화는 끝을 맺었다.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 침묵하며 와룡곡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은 점차 와룡곡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잠깐!" 나천웅은 반짝 눈을 빛내며 혈면괴도 등을 돌아 보았다. "……?" 사천릉 등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천웅을 바라보았다. "이십여 리 근방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 듯 하오." 순간 사천릉은 내심 경이를 금치 못했다. '나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거늘…… 아…… 소주인의 무공은 내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에 이른 것 같구나!' 그는 새삼 나천웅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혈면괴도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나천웅의 무공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 어서 그곳으로……" 나천웅의 신형이 지면을 박찼다. 동시에 사천릉과 혈면괴도도 일제히 신형을 솟구쳤다. 세 가닥의 인영은 섬전처럼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야말로 비조(飛鳥)가 무색할 정도의 경공신법이었다. 휘-- 이-- 익! 휘이익!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어느 한 장원 앞에 이르렀다. 장원은 매우 거대하고 웅장했다. "……!" 나천웅 등은 장원 앞에 내려서는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의 후각을 찌를 듯한 피비린내가 주위를 진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그들의 시선은 부서진 장원의 대문에 꽂혀 있었다. 문가에는 수많은 시신들이 즐비하니 쌓여 있었다. "주인어른! 이들의 상처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천마십이성의 손속 같습니다." 사천릉은 시신들의 상처를 예의 주시하며 말문을 열었다. 나천웅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동감의 뜻을 표했다. 아무리 훑어 보아도 시신들은 중원 무학에 당한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형을 날려 장원 안으로 날아 들었다. 장원 안에서는 한창 치열한 접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장내는 완전한 난장판이었다. 가장 처절한 혈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은 현의노인(玄衣老人)과 추악하게 생긴 한 명의 청년과의 접전이었다. "아니? 저자의 얼굴은……?" 나천웅은 대경의 외침을 터뜨렸다. 그의 시선은 추악한 청년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 과연 추악한 청년의 얼굴은 나천웅으로 하여금 대경실색케 할 만했다. '으음…… 분명히 저 청년의 얼굴은 인피면구로 위장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 지금 그 추악한 청년의 얼굴은 그 옛날 나천웅이 귀면수라로 분했던 면구의 모습과 똑같지 않은가? 지금 그 추악한 청년은 현의노인과 막상막하의 대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밖에 또 한 군데에서 처절한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으니---


그쪽은 사 대 일의 혈투였다. 그 네 명의 인물들 중에는 나천웅이 익히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북령빙군 설운청, 남천괴걸 양무위였다. 그리고 한 명의 중년인과 늙은 여승, 이렇게 네 명이 연합하여 한 명의 백의노인을 공략하고 있었다. 그 백의노인은 기이하게도 두 눈이 완전히 흰자위로 덮혀 있었다. 놀라운 것은, 백의노인이 단신으로 북령빙군 등의 공격을 여유만만하게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 역시 막상막하의 혈투였다. "주인어른, 저 백의노인이 바로 백안신성(白眼神星)입니다." 과연, 그의 두 눈에 어울리는 외호였다. "그리고…… 저 청년과 겨루고 있는 흑의노인은 현운신성(玄雲神星)입니다." 사천릉은 나습포찰에 갔을 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장내의 사람들을 나열하였다. 하나 나천웅은 이때 그러한 것들을 흘려 들으며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추악한 청년을 주시하고 있었다. '으음……! 정말 훌륭한 무공이다! 옛날 나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어떻게 보면 더 뛰어난……' 나천웅은 내심 감탄성을 터뜨렸다. 추악한 청년의 무공은 상상 외로 뛰어나 현운신성을 계속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에 따라 현운신성의 기세는 시간이 흐를 수록 자꾸만 몰리고 있었다. '저자가 바로 요즘 내 행세를 하는 자인가 본데…… 정체가 뭘까?' 이때 추악한 청년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던 사천릉의 두 눈에 일순 한 가닥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이어 그는 나천웅에게 전음을 날렸다. "소주! 노복은 저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습니다." 순간 나천웅의 눈에 기광이 스쳤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해 하던 참이오." 신주괴협 사천릉은 계속 전음을 보냈다. "일전에 노복과 인연을 맺었던 소녀(少女)입니다." 순간 나천웅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지금…… 소녀라고 했소?" "그렇습니다. 언젠가 노복이 소주께 말씀드린 적이 있지 않습니까? 노복의 상처를 치료해 준 적이 있다는…… 그때, 노복은 그 소녀에게 사천마경을 주었지요. 지금 저자가 사용하는 무공은 바로 그 사천마경에 수록된 초식들이 분명합니다. 이로 미루어……" 그제서야 나천웅은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아, 그렇다면 저 인물은 바로 설하진이란 말인가?' 나천웅이 대경하고 있는 사이에 추악한 청년--- 설하진의 입에서 대갈이 터져나왔다. "하하하……! 천마십이성! 나, 나천웅이 살아있는 한 중원무림은 영원히 굳건할 것이다." "흐흐…… 애송이 놈, 너무 으스대지 마라! 아직 본 신성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느니라!" 이어 그들은 또 한 번 공전절후의 대혈투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우르릉! 한편 나천웅은 설하진에 대해 깊은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나를 위해 저런 위험한 행동을 불사하고 있구나!' 그는 그녀에 대해 가슴이 터질 듯 묘한 기분을 느꼈다. 한편 현운신성과 백안신성은 초식의 횟수가 거듭될 수록 자신들이 몰리자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삼십육계(三十六計) 줄행랑이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순간에 눈길을 주고 받았다. 일단 결심을 굳히자 그들의 행동은 추호도 망설임이 없었다. "흐흐……! 애송아! 오늘은 이만 물러간다만 다음 번엔 오늘의 빛까지 톡톡히 갚아주마!" 현운신성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신형을 솟구쳤다. 그때였다. 째앵! 어디선가 소름이 오싹 끼치게끔 하는 예리무비한 음향이 일었다. 순간, 번쩍! 한 가닥 혈선(血線)이 섬광인 양 현운신성을 향해 뻗어나가는 게 아닌가? 피우욱! "아악!" 격타음과 처절무비한 단말마의 비명이 함께 일었다. 찰나간에 현운신성의 전신이 완전히 가루로 화해 허공에 흩뿌려졌다. "아앗!" "엇!" 장내에는 순식간에 경악의 물결이 휩쓸었다. "누…… 누구냐?" 백안신성의 공포에 질린 외침은 심하게 떨려나왔다. "하하……!" 일순 호탕한 웃음이 일며 세 가닥의 신형이 장내로 날아들었다. 바로 나천웅 일행이었다.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천웅 등에게 집중되었다. 순간 그들은 의아하다는 듯 일제히 고개를 갸웃뚱거렸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이 알고 있는 인물은 혈면괴도 한명 뿐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들이 알고 있는 바로는 제 아무리 혈면괴도의 무공이 증진되었다 해도 현운신성을 어쩌지는 못할 일이었다. 그리고 사천릉은 이미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있기 때문에 꼽추의 모습을 한 번 대면한 일이 있는 백안신성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렇다. 현운신성을 눈깜짝할 사이에 가루로 만든 것은 나천웅의 걸작이었다. 그것은 혈강삼음(血 三音) 중 가장 무서운 초식인 혈강(血 )을 시전한 결과였다. 허나 백안신성은 이내 나천웅을 알아보았다. 그가 현금을 안고있음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으음! 바로 네놈이……" "하하……! 시원찮은 눈으로 나를 알아보겠느냐?" 나천웅은 경멸의 웃음을 날렸다. "이 찢어 죽일 놈이……?" 백안신성은 나천웅이 자신의 눈을 빗대어 비양거리자 불길같은 노화가 일었다. 다음 순간, "죽어랏!" 백안신성은 대갈을 날리며 나천웅을 덮쳐 들었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쾌무비한 공격이었다. 허나 천외천(天外天)이라고나 할까. 나천웅의 반응은 최소한 그보다 두 배는 더 빨랐다. 번쩍!


한 가닥 흑색 광선이 일었다. 대체 무엇이 어찌된 것일까? "……!" 백안신성은 아무런 비명성도 지르지를 못했다. 자신의 눈 앞에 흑광이 번뜩였다고 느낀 순간, 이미 그의 전신은 정확히 네 등분으로 도륙된 채 무너지고 있었다. 투둑…… 툭! 그 가공할 광경을 본 중인들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오!" "저건 대체 무슨 무공이란 말인가!" 그들이 어찌 나천웅의 패천일도(覇天一刀)를 헤아릴 수 있겠는가. 중인들은 나천웅에게 분분히 몰려들었다. 영웅(英雄)이 필요한 시대(時代)에 그들은 어둠 속을 밝히는 위대한 빛줄기를 본 것이다. …… * * * 밤. 나천웅은 방 안 침상에 걸터 앉아 있었다. 그의 표정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그는 멍한 시선을 허공에 둔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는 간간히 무거운 한숨마저 내쉬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깊은 고뇌의 갈등이 엿보이고 있었다. 나천웅은 설하진을 만나고도 왠지 마음이 침통하기만 했다. 그 이유는 단혜미 때문이었다. 단혜미. 나천웅은 그녀에 대해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단혜미는 그를 위해 정절을 희생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나천웅은 단지현으로부터 그녀를 잘 봐달라는 유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생각에 나천웅은 설하진을 만났음에도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그는 잠을 잘 생각도 않고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았다. 이때 문득 방문이 가볍게 열렸다. 동시에, 문으로부터 한 여인이 들어왔다. 나천웅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방으로 들어선 여인은 바로 이제까지 그가 생각하고 있던 설하진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실로 천하절색이었다. 과거의 병(病)을 앓고 있던 창백하고 핏기없는 소녀와는 완전히 천양지차를 보이고 있었다. 지금 설하진은 두 뺨이 붉고 화사했으며 완전히 성숙한 몸매는 여인의 완숙미를 한껏 발산하고 있었다. 호수같은 눈망울은 꿈을 꾸듯 일렁였으며 백옥같은 피부는 환상적인 기품을 풍기고 있었다. 정말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설하진은 방 안으로 들어선 뒤 침상에 앉아있는 나천웅을 응시했다. 나천웅은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말없이 얽혔다. 헌데 웬 영문인가?


설하진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가득 고였다. '……!' 나천웅은 마음 속으로 나직이 신음을 토했다. 이때, 설하진은 돌연 한 걸음 나서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틀림…… 없어요. 당신이 아무리 변장을 했어도 제 눈은 속일 수가 없어요." 뜻밖의 말이었다. 나천웅은 그 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당황하여 급히 반문했다. "변장이라고 했느냐?" 그러자, 설하진은 처연한 안색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더 이상 부인하지 마세요. 이미 사할아버지께서 저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했으니까요." 나천웅은 그 말에 내심 뜨끔했으나 여전히 무표정하게 잡아떼었다. "낭자, 사람을 잘못 봤소. 도대체 무슨 얘기를……" 그러나, 설하진은 안색이 굳어지더니 약간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저를 피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이…… 하진이 그토록 보기 싫은가요?" "……!" 나천웅은 그만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그는 멍하니 설하진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설하진이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침상 가까이 이르더니 돌연 무릎을 꿇었다. "제…… 제가 정말 그렇게 보기 싫은가요?" 그녀는 나천웅을 올려다 보며 애처롭게 물었다. 나천웅은 바로 눈 아래 눈물을 글썽이며 묻는 그녀를 내려다 보며 가슴 속이 마구 들끓고 있었다. "낭……" 그는 입을 열었으나 한 마디밖에는 발음되어 나오지가 않았다. 설하진은 기어이 복숭아같은 두 뺨에 두 줄기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열었다. "당신에게 이 하진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가요?" 그녀의 만면에는 비감한 표정이 덮히고 있었다. 나천웅은 그만 더 이상 마음을 굳게 붙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하…… 하진!" 그는 바닥에 꿇어 앉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공자……!" 설하진은 눈물을 쏟으며 나천웅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나천웅, 그 얼마나 애타게 그려온 이름인가! 그녀가 그를 생각하는 마음은 실로 삶보다도 죽음보다도 깊었다. 지난날 나천웅에게 사랑을 갈구했던 이래로 그녀의 마음은 온통 그에게 가 있었다. 나천웅이 무림에서 이 년 이상이나 사라졌을 때, 설하진이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었으면 귀면(鬼面)을 쓴 채 그의 행세를 하였겠는가? 그런데 다시 강호에 등장한 그녀의 영원한 정인(情人) 나천웅은 또한 얼마나 매정했던가? 오직 천금상인으로 변장한 채 그녀를 피하지 않았던가? 설하진은 나천웅이 천금상인으로 변장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찢어지는 듯한 마음의 상심을 억제키 어려웠다. 왜? 무엇 때문에 그가 자신을 피한단 말인가? 설하진은 이 순간 나천웅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천웅은 그녀의 들먹거리는 어깨를 힘주어 끌어 안으며 등과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낭자, 아니……하진…… 내가 잘못 했소, 내가……" 그 말에 설하진은 그간 맺히고 맺혔던 한(恨)이 그대로 녹아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공자……!" 그녀는 더욱 깊이 그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천웅은 그녀의 몸을 안아 일으켜 침상 위에 앉혔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의 몸은 저절로 포옹이 되고 말았다. "하진…… 나는 결코 그대를 피하려는 마음은 없었소. 단지……" "단지…… 뭐예요?" 설하진은 그의 품 속에서 눈물젖은 얼굴을 들며 물었다. 나천웅은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내…… 마음 속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자, 설하진의 안색이 변화를 일으켰다. "뭔가요? 그 사정이……?" 나천웅은 두 손바닥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쥐며 말했다. "그것은…… 어느 한 여인 때문에……" 순간, 설하진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하게 변했다. 그녀는 삽시에 피가 얼어붙는 듯한 냉기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허나 나천웅은 완강한 힘으로 그녀를 끌어 안았다. "하진……! 내 말을 들어 보시오, 끝까지." 그러자, 비로소 설하진은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 하세요, 지금……" 허나 그녀의 상처입은 여심은 이미 얼음장처럼 식어가고 있었다. 나천웅은 그 변화를 느끼며 탄식했다. 허나 그는 곧 정신을 가다듬어 지난날 단혜미를 알았을 때의 상황과 또 단지현을 만난 얘기를 들려주었다. 이윽고 모든 얘기를 들은 설하진은 잠시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돌연 어깨를 귀엽게 들썩이더니 방긋 미소짓는 게 아닌가? "……?" 나천웅은 느닷없는 그녀의 웃음에 어리둥절했다. 이때 설하진의 미소는 너무도 아름다왔다. 눈물에 젖은 가련한 부용이 막 아침 햇살을 받아 흐드러지게 피는 듯한 그런 미소의 자태였던 것이다. 설하진은 방긋 웃으며 꽃잎같은 입술을 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진작 저에게 말씀하셨을 일이지. 제가…… 그토록 속이 좁은 여자인 줄로 아셨나요?" 나천웅은 그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설하진은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며 말했다. "저는…… 결코 일반 아녀자처럼 질투 따위나 하는 여자는 아니예요. 단지 당신께서…… 저를 냉대만 하시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그 순간 나천웅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말을 막았다. "하진!" 다음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뜨거운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아……!" 설하진은 신음을 발했다. 나천웅의 타는 입술로 자신의 모든 혼백이 빨려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의 몸이 금세 불길에 싸이고 말았다. 나천웅은 거센 정렬의 힘으로 그녀를 으스러지도록 끌어 안았다. 두 남녀의 혼백은 완전히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다. "아…… 천웅……!" "하진……!" 그들의 농밀한 애정이 깃든 음성이 방 안을 춘정(春情)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나천웅의 타는 입술은 설하진의 입술에서 목덜미로 내려왔다. 그의 손은 어느새 성급하게 그녀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스르륵……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에서 옷자락이 벗겨져 나갔다. 이윽고 백설같이 희디힌 그녀의 알몸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학같이 긴 목덜미 아래로 살풋한 어깨의 선(線)이 고고하게 내보이고…… 흡사 날개처럼 뻗은 두 팔, 또한 앞가슴에는 천도복숭아같은 탐스러운 젖가슴이 장미빛을 띄운 채 수줍은 듯이 내밀고 있었다. 나천웅의 손이 숨가쁘게 그녀의 젖가슴을 쓰다듬었다. "아…… 천웅……!" 설하진의 음성은 뜨겁게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장미빛 가슴에 맺힌 결실도 갈망으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하의마저 벗겨져 나갔다. 매끄러운 동산을 연상시키는 아랫배의 신비스런 흐름이 은밀한 부위로 이어졌다. 눈부신 허벅지가 드러나고 그녀의 모든 신비는 이제…… 모두 나천웅에게 내맡겨졌다. 나천웅의 손은 그녀의 아랫배로 내려갔다. "하진, 사랑하오!" "음…… 천…… 웅……" 설하진은 신음을 발하며 몸을 꿈틀거렸다. 나천웅의 두 손은 이제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았다. 허나 곧 그의 두 손은 그녀의 머리 뒤로 돌아갔다. 순식간에 나천웅 역시 알몸이 되고, 두 사람은 태초 이전의 상태가 되어 완벽한 결합을 위해 포개어졌다. 그 사이에는 한 치의 틈도 없었다. 또한 거센 열류(熱流)가 그 사이로 마구 분출되고 있었다. "아아!" 흡사 화산(火山)처럼…… 뜨거운 재회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제 31 장 摩伽天神像 무림. 중원무림의 동태는 수레바퀴처럼 회전하고 있었다. 어제가 백(白)인가 하면 오늘은 흑(黑)이 되는 변화무쌍한 것이 무림의 양상이었다. 수년 동안, 나습포찰에서 중원으로 넘어온 천마십이성으로 인해 중원무림은 온통 암흑 속에 싸여있었다. 그것은 완전한 암흑이었다. 천마십이성의 마수(魔手)는 중원무림의 숨통을 무섭게 쥐어틀고 있었다. 천여 년을 내려온 중원무림은 그들로 인해 그대로 붕괴되는 것 같았다. 그 누구도, 그 어느 분파도 감히 천마십이성에 대항하지 못했다. 가공할 만한 무공을 지닌 천마십이성!


그들을 당할 세력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남칠성북육성(南七省北六省)이 그들의 손에 들어간 이후로는 더욱 그들에 대항하는 세력은 사라지고 말았다. 무림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헌데…… 하늘의 뜻인가? 아니면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당연한 귀결인가? 돌연 암흑 같던 중원무림에 한 줄기 서광(瑞光)이 비쳤다. 바로 이백 년 전에 은거했던 기인(奇人) 천금상인(天琴上人)이라 자칭하는 자가 나타났던 것이었다. 천금상인, 그는 실로 하늘과 땅을 온통 덮어버릴 만한 개세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미 곳곳에서 나습포찰의 마왕(魔王)들인 천마십이성과 부딪쳐 그들 중에서 세 명을 죽여 그 위명을 크게 떨치고 있었다. 그의 손에 죽은 천마십이성 중 세 명은 다음과 같았다. 금갑신성(金甲神星) 현운신성(玄雲神星). 백안신성(白眼神星). 이 사실은 그야말로 전 무림을 경천동지하게 할 만큼 놀라게 만들었다. 허나 더욱 크게 놀란 것은 바로 나습포찰에 있는 천륭사의 대마왕들이었다. 천륭사에는 천마십이성의 첫째와 둘째, 셋째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자꾸만 천금상인에 의해 중원에 파견된 천마십이성이 피살당하자 곧 전서구(傳書鳩)를 날렸다. 그리하여 남칠성 북육성에 흩어져 있던 남은 천마십이성을 불러들였다. 결국 한곳에 모여 강대한 힘으로 천금상인을 제거하자는 속셈이었다. 결국 남은 천마십이성 중 다섯 명은 이제껏 중원에 다져놓은 기반을 버리고 북(北)으로 갔다. 중원무림은 그야말로 오랜 사슬에서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도저히 뿌리칠 수 없을 것 같았던 마수(魔手)가 서서히 풀려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천마십이성이 그렇게 호락호락 물러가기만 할 것인가? 또한 천마십이성 중에 가장 무섭다는 둘째, 셋째가 아직 천륭사에 있으니 그들의 가공스런 무학을 천금상인이 당해낼 수 있을런지가 무림인들에겐 의문이었다. 바야흐로 폭풍전야의 터질듯한 긴장감 속에 시일은 흐르고…… 무림인들은 흥분속에 새로운 역사를 마음 속으로 기원(祈願)하고 있었다. * * * 휘이이잉…… 거센 광풍(狂風)과 눈보라…… 이곳은 만리장성(萬里長城)도 이미 지난 삭막한 변방. 바로 나습포찰로 가는 황지(荒地)였다. 그 눈보라 속에서 한 인영이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헌데 그는 왼쪽 다리가 없었다. 인상은 음산하기 그지없는 갈의를 입은 노인이었다. 그러나 외다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서운 속도로 눈보라 속을 달리고 있었다. 그는 한 번 껑충 뛸 때마다 십여 장씩을 나아갔다. 전신에 풍설(風雪)을 맞으며 달리는 그의 안색에는 극도의 초조감과 당혹함이 어려 있었다. 헌데 무슨 일인가? "으훗!" 갑자기 갈의의 외다리 노인은 급박한 비명을 지르며 멈추어 섰다.


돌연 그의 앞에 눈보라를 무릅쓰고 괴이한 안개 덩어리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갈의노인은 놀라운 눈으로 안개덩이를 응시했다. 이때 뿌연 안개 속에서 냉막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잔결신성(殘缺神星)! 너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다!" 실로 놀라운 말이었다. 그렇다면 갈의노인이 바로 천마십이성의 하나인 잔결신성이란 말인가? 갈의노인, 즉 잔결신성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는 반면에 극도의 분노를 띠며 외쳤다. "이…… 이놈! 당당하게 정체를 드러내라! 왜 비겁하게 사술 따위로 숨어서만 행동하느냐?" 그의 말에 돌연 안개뭉치가 사방으로 흐트러졌다. 휘스스스……! 다음 순간 안개가 모두 사라지고 그 속에서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다. 그를 본 순간 잔결신성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천금상인! 또 네놈이냐? 도대체 네놈은 우리 천마십이성을 몇 명이나 죽여야 만족하겠느냐?" 그러자 나타난 인영이 차갑게 말했다. "모두 죽여야 한다!" 아! 그는 바로 백의 중년문사 차림을 한 나천웅이었다. 나천웅은 여전히 등에 삼현신금을 메고 있었으며 지금 이 순간 냉막한 눈으로 잔결신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이미 수개월 동안 북상(北上)하며 다섯 명의 천마십이성을 쫓고 있었다. 그리고 황막한 황야에서 그는 이미 차례로 네 명의 천마십이성을 격살했다. 이제 잔결신성이 마지막 차례인 것이다. 일순, 잔결신성은 쌍장을 사납게 치켜올렸다. 그의 눈에는 극도의 분노와 살기가 미친 듯이 폭사되고 있었다. "죽일 놈!" 그는 갑자기 폭갈을 터뜨리더니 쌍장을 무섭게 휘둘렀다. 다음 순간 그의 손이 시커먼 흑장(黑掌)으로 변하더니 검은 연기(黑煙)를 뭉클 쏟아냈다. 바로 잔결신성 독문의 흑연독마장(黑煙毒魔掌)이었다. 휘리링---! 흑연은 괴상한 음향을 내며 나천웅을 휘감아갔다. 찰나 나천웅의 몸은 안개처럼 흩어지더니 돌연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잔결신성이 멈칫하는 순간에 나천웅의 몸은 이미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 "검광폭혈비망혼!" 눈보라 속에서 무수한 검광이 폭사되어 떨어져 내렸다. 파츠츠츠츳! 그것은 실로 소름끼치는 공세가 아닐 수 없었다. 잔결신성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사력을 다해 흑연독마장을 연달아 세 번이나 쳐내었다. 허나 그가 다시 네 번째 장력을 쳐내려고 동작을 취했을 때 주위가 갑자기 창백한 은광(銀光)으로 뒤덮혔다. '흐윽!' 잔결신성은 자신의 가슴과 배에서 자욱한 피보라가 터져나가는 걸 똑똑히 보았다. 마음 속으로 내질렀던 비명은 이내 처절한 절규성으로 터져나왔다. "으아아악!" 참담한 그 비명은 한동엔 주위에 메아리치듯 울려퍼졌다. 땅에 쓰러진 그의 몸은 무참하게 허리에서 양단되어 있었다.


시뻘건 선혈이 백설(白雪)을 붉게 물들인다. 오래지 않아 그의 시체는 눈 속에 파묻히리라. "……" 나천웅은 묵묵히 잔결신성의 시체 앞에 서 있었다. 그가 비스듬히 아래로 내려뜨린 만상백선검에서 진한 선혈이 방울방울 검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멍하니 그 선혈이 흰눈을 물들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허나 그는 이내 마음을 단단히 가다듬었다. "이제는…… 천마십이성 중에 오직 세 명만이 남은 셈이로군…… " 다음 순간 그의 몸이 그 자리에서 안개로 화했다. 스스스…… 이제 장내에는 잔결신성의 시체만이 말없이 남아 눈보라를 맞이할 뿐이었다. 휘우우웅…… 광풍(狂風)은 더욱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 * * 황폐한 땅…… 나습포찰(那拾布刹)은 진정 죽음의 땅이었다. 아니 철저하게 버려진 땅이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막의 거친 모래바람밖에는 눈에 뜨이지가 않았다. 때로는 괴이하게 생긴 괴석 투성이이기도 했다. 하늘 아래 이곳처럼 메마르고 거친 사지(死地)가 과연 또 존재할까…… 나습포찰! 나천웅은 기어이 이곳까지 오고야 말았다. 허나 그는 혼자의 몸이 아니었다. 그는 사천릉과 설하진을 대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렵지 않게 나습포찰의 황폐한 지역에 우뚝 솟은 거대한 사찰(寺刹)을 찾아낼 수 있었다. 천륭사(天隆寺). 바로 중원무림을 피보라 속에 몰아넣었던 천마십이성의 근거지인 천륭사였다. 바로 마가천(摩伽天)의 신상(神像)을 숭배한 마승(魔僧)의 본거지인 것이다. 마찰(魔刹) 천륭사--기울어가는 석양 속에 천륭사는 말 그대로 음산한 마기를 뿌려내며 귀기스런 모습으로 그 웅자를 드러내고 있었다. 거대한 기둥은 모두 대리석이었으나 석양에 반사되어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원형으로 만들어진 지붕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휘우웅…… 스스스…… 메마른 바람속에 시간이 흘러간다. 어느덧 석양조차 기울어가고 어둠이 천륭사를 뒤덮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몇 개의 인영이 천륭사의 경내로 날아 들었다. 휘이익! 휙! 바로 나천웅과 사천릉, 설하진 일행이었다. 허나 괴이하게도 경내는 조용하기만 했다. 전혀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죽은 영혼(靈魂)들만이 오가는 영계(靈界)의 사찰인 양…… 나천웅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천릉이 침중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무나 조용하군……!" 나천웅은 그 말을 받듯이 냉소했다. "천마십이성 중의 남은 삼성(三星)이 이미 대비를 하고있다는 증거일 뿐이오." 바로 이때, 어디선가 휙휙거리는 옷자락 날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천웅은 번개같이 주위를 쓸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어느틈에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괴이한 복장의 무리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오십여 명이나 되었다. 한데 그들은 법복도 아니고 일반인의 복장도 아닌 괴상한 옷을 입고 있었다. 옷색깔은 모두 검은 색이었으며 팔과 다리가 노출되었고 노출된 부분은 다시 검은 천으로 감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한결같이 음산한 표정에 두 눈에는 짙은 살광을 내뿜고 있었다. 이들은 누구인가? 물론 이곳 나습포찰 천륭사의 무리들이었다. 허나 그들은 평범한 마가천의 신도들이 아니라 천마삼성이 심혈(心血)을 기울여 키운 고수들이었다. 나천웅은 그들이 차츰 포위망을 좁혀오는 것을 보며 냉막하게 중얼거렸다. "흥! 드디어 나타났군!" 그 순간 오십여 명의 흑의괴인들은 나천웅 일행을 완전히 포위했다. "……" "……" 장내는 죽음보다 더한 깊은 침묵에 싸였다. 허나 포위망은 시시각각 좁혀지고 있었다. 흑의인들은 수중에 각종의 괴이한 병기들을 가지고 있었다. 어둠 속이었지만 그들이 지닌 병기로부터는 살벌한 광채가 번뜩이고 있었다. 어느 한 순간 숨이 꽉 멎을 듯한 적막 속에서 갑자기 호통이 터졌다. "쳐라!" 다음 순간, "와아아아아---!" "죽여라!" 지옥의 악령(惡靈)들이 한꺼번에 울부짖는 듯한 함성이 정적을 삽시간에 와해시키고 말았다. 이윽고 피를 부르는 대혈전(大血戰)의 막이 오른 것이다. 쉬이익! 우르릉! 쨍! 쨍그렁!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장내는 격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었다. 한편 나천웅에게로 한 명의 흑의인이 벼락같이 덮쳐들고 있었다. 그는 수중에 괴상한 모양의 추(鎚)를 든 채 마구 휘두르며 정면 공격을 해왔다. 위잉! 족히 수백 근은 나갈 듯한 추가 허공에 위맹한 경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허나 나천웅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싸늘하게 비웃음을 날렸다. "흥! 무모한 짓!" 그는 내뱉는 순간 허리를 비틀었다. 다음 순간 그의 허리춤에서 한 줄기 은광이 섬전처럼 허공을 가르듯 내뿜어졌다. 번쩍! "크악!" 동시에 처절한 비명이 밤하늘을 찢었다.


추를 휘두르던 흑의인은 완전히 두쪽이 되어 쓰러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피보라가 날리고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허나 나천웅은 결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흑의인을 벤 뒤 바람같이 몸을 날렸다. "복마진천(伏魔震天)!" 그의 고함소리가 안개 속에서 울렸다. 다음 순간, 쾅---! "으악" 피보라가 사방으로 난무하며 나천웅의 장력에 의해 순식간에 사오 명이 날아갔다. 사위는 이제 완전히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으아악!" "크윽!" "큭!" 장내의 여기저기에서 처절한 비명이 밤공기를 갈랐다. 바로 사천릉과 설하진의 살수(殺手)에 의해 흑의인들이 절단나는 소리였다. 나천웅은 그 광경을 둘러보고는 호기가 크게 일었다. 실상 사천릉과 설하진의 무공은 이미 무림의 절대고수나 다름이 없었다. 아무리 천마삼성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흑의인들이라 해도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으핫핫핫핫……버러지들, 모두 지옥으로 보내주마!" 나천웅은 장내가 찌렁찌렁 울리도록 고함을 친 후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올렸다. 다음 순간 예외없이 죽음을 부르는 폭갈이 그의 입에서 터졌다. "검광폭혈비망혼!" 아아,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허공에서 무수한 검광의 빛살이 우박처럼 떨어져 내리며 한꺼번에 이십여 명의 인물이 끔찍한 시체로 변해 나뒹굴었다. "으아악!" "아악!" 꼬리를 무는 단말마의 비명! 정녕 하늘도 놀라고 땅도 탄식할 광경이었다. 주위는 완전히 죽음의 피바다 속에 잠기고 말았다. 대략 한 시진 가량이 흘렀을까. 결국 나천웅을 비롯한 사천릉, 설하진의 손에 의해 흑의인들은 전멸하고 말았다. 피바다---! 그 속에 나천웅은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옷은 피에 의해 완전히 젖어 있었다. 그는 만상백선검 끝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선혈 방울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역시 피에 젖은 사천릉과 설하진이 서 있었다. 바닥에는 처참한 형상의 흑의인들이 무참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은 꿈에서 깨어난 듯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들은 발길을 옮겼다. 그들은 천륭사의 대전(大殿)으로 향했다. 몇 채의 기이하게 생긴 불전을 지나니 곧 거대한 궁(宮)을 연상케하는 대웅전(大雄殿)이 나타났다. 대웅전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나천웅 일행은 문을 살펴보고는 안색이 굳어졌다. "이것은 한철(寒鐵)로 만들어진 문이 아닌가?" 사천릉의 말이었다.


과연 그러했다. 굳게 닫혀있는 대전의 문은 검은 한철로 만들어진 견고한 문이었다. 그것은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부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헌데 나천웅은 갑자기 철문을 향해 마주 서더니 등에 멘 삼현신금을 풀어냈다. 다음 순간, "혈강(血 )!" 그의 일갈과 함께 삼현신금에서 한 줄기 혈선이 내뻗쳤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혈선이 철문에 부딪치자 철문이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그그긍--철문은 사방으로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어느 한순간 엄청난 폭음과 함께 종이장처럼 터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 엄청난 광경에 사천릉과 설하진은 경악성을 금치 못했다. '아아!' "대체 소주님의 무공은 어디가 한계란 말인가?' 그때 나천웅이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사천릉과 설하진은 그제서야 퍼뜩 정신을 가다듬고 뒤를 따랐다. 대웅전 안은 커다란 광장을 연상케 할 정도로 넓었다. 헌데 그 대웅전의 중앙에는 세 명의 붉은 옷을 입은 노승들이 바닥에 정좌한 채 앉아 있지 않은가! 그들의 뒤로는 거대한 신상(神像)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실로 괴기하고 흉칙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전체는 피를 뒤집어 쓴 듯 붉은 빛이며, 팔이 무려 설흔 여섯 개나 사방으로 뻗쳐 있는 괴기스런 형상이었다. 그 팔의 형태는 그야말로 천태만상이었다. 주먹을 쥐고 있는가 하면 손가락을 갈구리처럼 구부려 무엇인가를 움켜쥘 듯했고, 식지를 뻗은 것, 수도(手刀)를 취한 것 등 갖가지 형태였다. 하나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얼굴 부분이었다. 그 얼굴에는 눈이 세 개나 되었다. 그 중에 가운데 눈에 황녹색의 주먹만한 구슬이 박혀 있었다. 그렇다. 나천웅이 어찌 그 신상을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마가천(摩伽天)의 신상!" 뒤이어 들어선 사천릉과 설하진도 그만 입을 크게 벌리고 말았다. 그들은 말로만 들었던 마가천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이때 중앙의 바닥에 정좌하고 있던 세 명의 혈의노승들이 일제히 눈을 떴다. 그들의 눈에서는 흡사 번갯불같은 광망이 내뻗쳐 나천웅 일행을 쏘아 보았다. 나천웅은 내심 섬칫했으나 앞으로 성큼 나서며 싸늘하게 말했다. "천마삼성! 이제 모든 일을 종결지어야 할 때가 왔다. 자, 어서 일어나라!" 그는 이미 모든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대전의 중앙에 있는 세 명의 혈의노승이 바로 천마십이성의 우두머리인 첫째와 둘째, 셋째임을 판단했다. 그의 말에 천마삼성은 무표정한 표정 그대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얼굴은 확실히 중원인(中原人)의 얼굴과는 틀린 점이 있었다.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섰다. 문득 가운데 서있는 화상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더니 입을 열었다. "무례하구나. 어르신이 수련 중인데 어찌 소란을 피우느냐?" 그의 음성은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낮고 거며, 또한 이방(異邦)의 서투른 발음 때문에 더욱 듣기가 거북했다. 허나 능히 뜻을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허나 네 기상이 출중함을 기특하게 여겨 죄를 따지지 않겠다. 이름이 무엇이냐?" "나천웅!" 짤막한 대답이 거침없이 나천웅에게서 흘러나왔다. 순간 천마삼성의 안색이 일시에 기이한 변화를 일으켰다. 앞에 나선 노승은 낯빛이 곧 침중해진 채 잠시 침묵하더니 나천웅을 둘러보며 물었다. "자네는 우리 셋을 이길 자신이 있는가?" 나천웅은 그 말에 간단히 대꾸했다. "오직 노력할 뿐이다." 노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너는 참으로 대단하구나. 우리들은 설마하니 네가 이토록 빨리 우리 앞에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나천웅은 눈을 들어 마가천의 신상을 바라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이제 당신들만 죽으면 천마십이성의 악명은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 말에 노승은 얼굴빛이 크게 변했다. "뭣이? 그럼 이곳으로 돌아오던 다섯 명도……" 나천웅은 그 말을 잘랐다. "물론 모두 우리의 손에 구천지옥으로 떨어졌다." 그 말에 천마삼성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무서운 노기가 떠올랐다. 가운데 노승은 다시 한 걸음 나서더니 기괴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네 능력을 평가하는 의미에서 말해주마. 노승은 바로 첫째인 천우신성(天宇神星)이다. 내 오른쪽은 둘째인 천공(天空)이며 왼쪽은 천극신성(天極神星)이니라." 천우신성은 두 눈에 기괴한 녹광을 발하며 나천웅을 정시했다. "어떤가? 수백 년을 끌어온 이 싸움을 이제 우리 두 사람이 끝내는 것이…… 바로 우리 둘의 싸움으로 모든 것을 종결짓는 것이다." 나천웅은 그 말에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떤 방식으로 하자는 것이냐?" 천우신성은 얼굴에 음산한 살기를 띄우며 잘라 말했다. "지는 자는 설령 숨이 붙어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자결을 하는 것이다! 물론 무림의 패권은 이긴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 말에 나천웅은 흠칫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설하진과 사천릉, 심지어는 무림의 안위가 함께 걸려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갑자기 설하진이 야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그것에 찬동해요!" 나천웅이 흠칫하자 그녀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천웅, 어차피 당신이 진다면 그 결과는 죽음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마땅히 저도 이 세상에 살아있을 이유가 없어요. 그래서 찬동을 한 것이예요." 나천웅은 그 말에 문득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이때 옆에 있던 사천릉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소주인, 진아의 말이 맞습니다. 노복도 찬동을 하여 소주인의 운명과 같이 하겠습니다." 그러자 천우신성은 자신의 옆에 있는 천공신성과 천극신성을 둘러 보았다. 그 순간 천공, 천극 두 사람의 눈에는 야릇한 빛이 스쳐가고 있었다. 이를 발견한 천우신성은 문득 느끼는 것이 있었다. 그는 내심 탄식을 터뜨렸다. '천마십이성이 이토록 약해졌는가? 천공과 천극이 설마……'


나천웅도 천공신성과 천극신성의 표정이 이상함을 발견했으나 별로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그는 천우신성을 주시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천우신성! 좋소. 당신의 제안대로 우리 두 사람의 승부로 모든 것을 결정지읍시다." 그 말에 천우신성은 기이한 눈빛으로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각자 내공을 끌어올렸다. 두 사람은 대전의 중앙에서 마주섰다. 거리는 이 장 정도. 어느 틈엔지 나천웅은 만상백선검을 움켜쥐고 있었다. 검신에서는 살벌한 한기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사출되었다. 한편 맞은편의 천우신성은 오른손에 벽옥으로 된 선장(禪杖)을 들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로 보이지 않는 숨막히는 기류가 흘렀다. 그것은 실로 보는 이의 심장조차 두근거리게 할 뿐 아니라 숨결마저 꽉 멎게할 정도의 팽팽하게 고조된 살기(殺氣)였다. 헌데 어느 순간 천우신성은 선장을 비스듬히 치켜들었다. 동시에 그의 선장이 바람을 끊듯 몰아쳐갔다. 그것은 벽옥색의 기류를 뻗치며 수백 개의 환영으로 분리돼 나천웅을 몰아쳤다. 슈우우우웅! 무시무시한 파공음이 울렸다. 순간 나천웅은 전신을 조여오는 무서운 압박감을 느꼈다. 그것은 흡사 엄청난 압력이 그를 그물처럼 가두는 것 같았다. 나천웅은 크게 놀랐다. '무…… 서운 공력이다!' 다음 순간 그는 영무환신술을 펼쳤다. 천하절세의 경공술인 영무환신술은 이제껏 한 번도 그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허나 어찌 알았으랴! 불과 두 발자국을 움직였을 때 그는 일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느끼게 되었다. 자신의 신형은 사방에서 눌러오는 무서운 압박감에 짓눌러 꼼짝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 이건!" 유우우우웅! 무시무시한 파공음과 함께 수백 개의 선장의 환영은 녹색철벽을 만들며 나천웅을 가두었다. "웃!" 나천웅은 일시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으나 본능적으로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켰다. 거의 동시 고막을 찢어발길 듯한 폭음이 울렸다. 콰르르릉! 꽈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수백 개의 선장이 그대로 나천웅에게 부딪쳤다. 허나 그 순간 나천웅의 몸에서는 이글거리는 화염이 가공할 기세로 발산되고 있었다. 바로 자화신공(子火神功)이 시전된 것이다. 두 가지 가공할 공세가 충돌하자 허공은 엄청난 소용돌이로 꽉 메워지고 말았다. 고오오오오…… 이윽고 장내에 소용돌이가 걷혔다. 두 사람은 삼 장여의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있었다. 그때 갑자기 나천웅이 만상백선검을 치켜들었다. 동시 그의 검신에서 폐부를 찌르는 한광이 사방으로


발산되었다. "이번에는 나의 공격을 받아 보아라!" 나천웅은 일갈을 발하고 나서 돌연 신형을 움직였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안개로 화했다. 이어 허공에서 그의 폭갈이 진동했다. "마지막이다! 천공사극한명살(天空死極寒冥殺)!" 허공에서부터 모든 방위(方位)의 빛을 일시에 차단하는 가공할 검기(劍氣)가 폭사되어 떨어져 내렸다. 파파파파파팟---! 엄청난 파열음! 실로 상상치도 못할 끔찍한 공세를 직면한 천우신성은 안색이 백짓장같이 변했으나 곧 수중의 벽옥선장을 무섭게 휘두르며 허공으로 마주 솟아 올랐다. 슈우우웅---! 그의 선장이 수백, 수천의 환영을 이루며 뻗쳐나가더니 정면으로 나천웅의 검기와 충돌했다. 꽈과과광! 고오오오…… 소용돌이와 함께 폭음이 울렸다. 무수한 검광과 불꽃이 사방으로 튕겨 나가고 있었다. 이윽고 사위가 조용해지며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나천웅은 가슴의 옷자락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앞가슴이 거의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드러난 가슴에는 시퍼런 멍자국들이 선명했다. 천우신성의 선장에 가슴이 격중되었던 것이다. 그는 문득 밀납같은 안색으로 몸을 비틀거렸다. 이미 그의 몸은 만년화령지과와 만년금룡신응의 피를 복용하여 금강불괴의 몸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미 그는 가루가 되고 말았으리라.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적지않은 내상(內傷)을 입고 말았다. 그의 입으로는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천우신성의 모습은 더욱 비참했다. 그의 가슴에는 놀랍게도 만상백선검이 정통으로 꽂혀 있었다. 그의 안색은 완전히 회색에 가까웠다. 그는 두 손으로 검을 움켜쥔 채 만면에 허탈하고 씁쓸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문득 그는 검게 변한 입술을 실룩 움직였다. "젊은이, 자네가…… 이겼다……!" 바로 그때였다. 나천웅의 등 뒤에서 설하진의 찢어지는 듯한 외침이 울렸다. "앗! 천웅! 조심하세요!" 동시에 천우신성도 급히 외쳤다. "천공…… 멈춰라!" 허나 이미 늦었다. 바로 천공신성이 나천웅의 등을 향해 무시무시한 혈장(血掌)을 격중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나천웅은 전신이 이미 싸늘히 식어옴을 느끼고 전력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신형이 뿌옇게 변하고 있었다. 몸을 돌리는 순간 어느 틈에 그의 손은 천우신성의 가슴에 꽂힌 만상백선검을 뽑고 있었다. "으흑!" 그 바람에 천우신성은 비명을 질렀다. 그의 가슴에서는 피화살이 치솟고 있었다. 이 모든 동작은 그야말로 섬전같은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그 순간 장내를 진동하는 나천웅의 폭갈이 울렸다. "패천일도!" 번--- 쩍! 가공할 은광이 허공을 온통 뒤덮었다.


"크아아악!" 뒤이어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섬뜩한 비명성이 터져울렸다. 이어 허공에 무수한 핏방울이 폭죽 터지듯 비산했다. 아! 천공신성은 나천웅의 패천일도에 의해 수백 조각으로 분리되어 허공에 분시(分屍)되고 만 것이었다. 정녕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장내는 삽시간에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고 주위는 피에 젖어버렸다. 이때 안개가 풀어지면서 나천웅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그의 등 뒤 옷자락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이미 그의 등은 피투성이였다. 바로 천공신성의 암격에 의한 것이었다. 허나 그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다. 암격이 실패로 돌아가고 천공이 죽자, 천극신성은 그만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 두 눈에 붉은 핏발이 선 그의 얼굴은 그야말로 악마의 형상 자체였다. "우어어어어어!" 그는 괴성을 내지르며 앞으로 내달았다. 이미 그의 몸에 걸친 혈의는 팽팽히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의 전신에서 자욱한 혈무(血霧)가 발산되어 나왔다. 고오오…… 붉은 저주의 기운은 그의 쌍장에서도 벼락같이 발출되었다. 허나 나천웅은 피하지 않고 제 자리에 서 있었다. 가공할 혈무의 기운이 막 그의 몸에 닿으려는 찰나, 돌연 그의 소매 속에서 두 줄기 청광(靑光)과 홍광(紅光)이 뻗쳐 나갔다. "무흔탈명비혼판(無痕奪命飛魂板)!" 번--- 쩍! 아아, 그것은 차라리 아름답기까지 한 빛(光)의 파동이었다. 천극신성은 갑자기 시야가 어지러워지며 자신의 양 손목이 뜨끔함을 느꼈다. "헉!" 그는 이내 사태를 깨닫고는 비명을 내질렀다. 놀랍게도 그의 양 손목이 깨끗이 절단되어버린 것이다. 쫘악! 그의 잘린 손목에서 두 줄기의 선혈이 분수처럼 내뻗쳤다. 그 사이 두 줄기의 청광과 홍광은 다시 나천웅의 소매 속으로 돌아갔다. 팟! 나천웅은 냉정한 눈으로 손목이 잘린 천극신성을 노려보았다. "이번엔 네 목 차례가 될 것이다!" "우우우!" 천극신성은 괴성을 내질렀다. 그는 끊어진 두 손목에서 피가 분출되는 것도 느끼지 못한 듯 괴성을 내지르며 나천웅에게 재차 덮쳐들었다. 그렇다. 그는 완전히 미쳐버린 것이었다. 나천웅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무심한 일성을 뱉아냈다. "마라강기(魔羅 氣)!" 휘류류륭! 꽈광!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미 시커멓게 변한 천극신성의 시체는 삽시간에 재가 되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실로 가공할 마라강기의 위력이었다.


나천웅은 기력을 완전히 소모한 듯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그의 얼굴에는 비장한 신색이 어리고 있었다. 이때 아직도 쓰러지지 않고 서 있던 천우신성이 비틀거리더니 고목이 무너지듯 앞으로 쓰러졌다. 쿵…… "허헛…… 사라진…… 마가천의 영광이여…… 결국…… 중원의 위대함을…… 넘지 못하는가……" 마지막 남은 천마십이성의 첫째인 천우신성은 그 말을 남긴 후 몸을 꿈틀거리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마지막 남아있던 생명의 기운이 모조리 빠져나가버린 것이다. 정적(靜寂). 장내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요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 나천웅은 멍한 시선으로 그의 주검을 내려다 보았다. 사천릉과 설하진도 모든 것이 끝난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듯 망연자실한 모습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명상에 빠진 듯 무거운 침묵에 싸였다. 모든 것이 해결된 지금 그들의 마음은 그야말로 무(無), 그것이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갑자기 머리속이 텅 비어버린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바로 그때 갑자기 요란한 진동음이 그들의 귀로 들어왔다. 우르르르르---! "엇?" 사천릉이 흠칫 놀란 외침을 발했다. 그 순간 세 사람의 시선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마가천의 신상으로 향했다. 아! 놀랍게도 거대한 마가천의 신상이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신상 곳곳에 선명한 균열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쩌저적! 붕괴의 조짐은 사방의 벽과 천정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천웅은 놀라 크게 외쳤다. "어서 밖으로 나갑시다! 곧 부서질 것 같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 줄기 인영이 번개처럼 밖으로 포물선을 그렸다. 동시 마가천의 신상이 완전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쾅! 대웅전이 뒤따라 산산이 금이 가더니 무너져 내렸다. 엄청난 굉음이 무려 일 다경 가량이나 계속 이어졌다.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던 대웅전은 완전히 함몰된 채 자욱한 먼지만을 하늘 끝까지 토해내고 있었다. 고오오오…… 고오오…… 나천웅 일행은 이미 천륭사에서 한 마장 정도 떨어진 곳에 도달해 있었다. 나천웅은 멍하니 천룡사가 붕괴되는 광경을 바라보더니 한참만에야 무거운 탄식을 발했다. "이제는 나습포찰도…… 죽음의 땅이라는 오명을 벗게 되겠군……" 그러자 옆에 있던 사천릉이 말을 받듯 뇌까렸다. "마가천이 사라진 이상 더는 마도(魔道)가 창궐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천웅은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때 그의 옆으로 가벼운 향풍(香風)이 불어왔다. 나천웅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는 이미 설하진이 다가온 것을 느끼고 있었다. 설하진은 손수건을 꺼내 나천웅의 입가에 묻은 선혈을 닦아 주었다.


"……" 나천웅은 그제서야 시선을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부드러운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 설하진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내리숙였다. 사천릉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띄웠다. '정말 어울리는 한 쌍이로군…… 마치 천상의 원앙인 듯……' 그러나 그는 문득 어떤 생각에 표정이 약간 변했다. '음, 천 명의 장인(匠人)이 갇혀있는 비궁(秘宮)을 잠시 잊었구나! 허나 그것은 혼자서도 충분한 일……' 사천릉은 다시 눈길을 돌려 나천웅과 설하진을 돌아보더니 소리없이 몸을 날리고 있었다. …… 나천웅과 설하진, 두 사람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설하진이 문득 나천웅의 품에 몸을 기대어 오더니 꿈결처럼 부드러운 옥음으로 물었다. "천웅, 이제부터 당신은 무엇을 하실 작정인가요?" 나천웅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글쎄……" 그러자 설하진은 머뭇머뭇하더니 입술을 열었다. "천웅……드릴 말씀이 있어요." 나천웅은 그녀의 어깨를 당기며 물었다. "무엇을 말이오?" 설하진은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 당신은 지난날 비엽도로 사람을 죽이던 여인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나천웅은 그 말에 흠칫했다. "그게 누구요?" 설하진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녀는 어렵게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그녀는 바로…… 저의 사촌언니인 설군벽이예요." "아니? 설군벽이라고?" 나천웅의 얼굴에 충격의 빛이 떠올랐다. 설하진은 급히 말했다. "천웅, 화내지 마세요. 당신은 결코 벽언니에게 화를 내서는 안돼요." "……?" 나천웅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설하진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지난날 나습포찰로 갈 때 극리파라는 마을에서 한 여인을 만난 적이 있었지요?" "아니, 그걸 어떻게……?" 나천웅은 놀라 물었다. "그녀가 바로 벽언니라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무엇이?" 나천웅은 크게 놀랐다. 설하진은 한숨을 내쉬고는 계속 말했다. "당시 벽언니는 천마십이성의 명에 의해 당신을 유혹하게된 것이예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당신을 죽이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천마의 추격을 끊게하려는 속셈이었지요. 헌데……"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계속 이었다. "헌데…… 벽언니는 자신의 청백한 몸을 버려가면서도 끝내는 당신을 죽이지 못했던 거예요." "……!" 나천웅은 멍하니 그 자리에 멈추어 버렸다.


'그…… 여인이 설…… 군벽이라고……!' 이때 설하진의 입에서 더욱 놀라운 사실이 터져나왔다. "벽언니는 얼마 전에 이미 당신의 아이를 낳았어요." "무엇이!" 나천웅은 머리를 둔기로 세차게 얻어맞은 듯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는 망연자실 할말을 잊은 채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이때 설하진이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천웅, 저에게 승낙해 줘요. 이 하진과 함께…… 벽언니도 같이 받아들이겠다고…… 그리고……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고 말예요." 나천웅은 그 말을 듣고 멍하니 설하진을 응시했다. 설하진은 더욱 더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윽고 나천웅의 안색에 훈훈한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는 설하진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받쳐들었다. "하진…… 너는 정녕 사랑스런 여인이다." 그 말에 설하진의 뺨이 도화빛으로 물들었다. "여보……!" 그녀의 작은 입술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뜨거운 입김이 자신을 온통 태울 듯이 덮는 것을 느꼈다. 뜨거운 입맞춤이었다. 설하진은 영원히 놓치지 않겠다는 듯 두 팔로 나천웅의 목을 휘감았다. 두 남녀는 서로의 영혼을 아낌없이 하나로 합치고 있었다. 차츰…… 황막한 땅 나습포찰에 어둠이 물러가고 있었다. 동시에 동녘이 부움해지더니 어느 순간엔가 찬란한 일출(日出)이 시작되었다. 온두리에 어둠을 몰아내는 찬란한 해가 불끈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죽음의 땅 나습포찰을 새롭게 밝히려는 듯 찬란한 해가 솟아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출의 서광을 받으며 두 남녀는 서로를 굳게 끌어안고 있었다. 나천웅은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묻고 있었다. 과연 인간의 생애(生涯)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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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 제 21장 金劍堡의 決鬪 제 22장 사라진 魔伽天의 눈 제 23장 天魔의 最後 제 24장 怪鳥와의 血鬪 제 25장 百變神風客 제 26장 無痕奪命飛魂板 제 27장 死神秘話 제 28장 死神出現 제 29장 打殺! 金甲神星 제 30장 魂飛魄散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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