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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奇劍狂血舞 卷二 神龍의 雲海 편 지은이: 사마달 - 차례 제 12 장 제 13 장 제 14 장 제 15 장 제 16 장 제 17 장 제 18 장 제 19 장 제 20 장

玄雲堡 어둠속의 暗襲者 忘年之友 千面妖姬 非運의 情事 邪天魔經 血笠 金劍堡 冷血三神

제 12 장 玄雲堡 "낭자가 아니라면 누구에게 배우라는 거요?" 나천웅은 짐짓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반문했다. 그러자 홍의소녀가 예의 낭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에게는 아주 친한 사백님이 한 분 계세요." 말을 하는 그녀의 눈망울은 흡사 별빛과도 같이 반짝거렸다. "……?" "헌데, 그분은 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기 때문에 아마 이번에도 저의 부탁을 들어주실 거예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천웅은 은근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분의 별호는 무엇이오?" 홍의소녀는 잠시 나천웅을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살포시 눈웃음을 치며 되물었다. "당신, 혹시 동해일기(東海一奇)라는 말을 들어보았나요?" "동해일기라……?" 나천웅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곧 무엇이 생각났는지 무릎을 탁! 치면서 말을 뱉아냈다. "동해일기라면 혹시 우내사기(宇內四奇) 중 한 분인 동해표풍객(東海飄風客) 도일진(陶逸震) 대협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오?" 그의 말에 홍의소녀가 생긋이 웃음을 지어보였다. "맞아요. 바로 그분이예요." 순간 나천웅은 내심 저으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당금 무림에는 손가락 안에 꼽히는 사대기인(四大奇人)이 있었다. 그들을 일컬어 일명 우내사기라고도 지칭한다. 동해표풍객 도일진은 바로 이 우내사기 중 한 명인 것이다. 올해 그의 나이는 약 백여 세, 허나 겉으로 보기에는 불과 사십 세 정도로 보이며 아주 건장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실상 그는 무림에서 별로 활동한 적이 없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모든 무림인들은 그의 무공정도를 우내사기 중에서도 제일 으뜸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의 무공은 고강한 것이었다. 나천웅은 무당에서 무공을 수련하면서 학선기로부터 우내사기에 대한 설명을 몇번인가 들은 기억이 있었다.


'정말 기이한 일이군.' 그는 홍의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내심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이 소녀의 정체는 무엇이길래 동해표풍객같은 기인을 사백이라 부른단 말인가……?' 나천웅이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홍의소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때요? 당신 생각은……?" 나천웅은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를 몰라 머뭇머뭇거렸다. "……" "그분이라면 충분히 당신을 가르칠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자격은 있소. 하지만…… 그분이 저같은 사람을 받아들일까 걱정이오." 나천웅의 조심스런 말에 그녀가 문득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그런 걱정은 아예 마세요." 여기까지 말한 홍의소녀가 갑자기 주위를 살펴보며, "어마, 얘기를 하다보니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잊었군요. 공자, 우리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라고 말하며 멍청히 서 있는 나천웅을 재촉했다. 이때 나천웅은 약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마디밖에 주고 받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스스럼없이 우리라는 말을 꺼내는 것이 아닌가? '이 소녀는 정말 활달하기 그지없구나!' 밤이 깊어간다. 무척이나 어두운 칠흑의 밤이었다. 이곳은 현운보의 후원(後園). 사위는 온통 암흑과 적막으로 휩싸여 고요하기 그지 없었다. 이때다. 스슥…… 어둠을 뚫고 두 개의 인영이 연기처럼 나타났다. 짙은 어둠 속이었지만 그들의 모습은 어렴풋이 볼 수가 있었다. 두 명 중 한 명은 육십여 세 정도로 보이는 청의노인이었다. 또 한 명은 전신에 홍의를 걸친 십 칠팔 세로 보이는 소녀였다. 그렇다. 바로 나천웅에게 깊은 호감을 나타내었던 바로 그 홍의소녀가 아닌가? 이때 앞서 달리던 청의노인이 우뚝 신형을 멈추었다. 이어 청의노인은 힐끗 홍의소녀를 돌아보며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하소저, 틀림없이 저것이 노운량의 거처요?" 하소저라 불리운 홍의소녀는 청의노인이 가리키는 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곧 고개를 돌려 나지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강대협, 그가 정말로 그 일을 저지른 장본인이 틀림없나요?" 그녀의 물음에 청의노인은 이를 지그시 깨물며 약간 흥분된 어조로 말을 뱉아냈다. "틀림없소. 그 당시 금사표국(金獅 局)의 표차( 車)가 습격당했을 당시 모든 사람이 참변을 당했지만 다행히 한 명은 살아남았던 것이오." "……?" "그자의 말을 빌어보면 그때 표국의 표차를 습격한 자들 중에서 금환과 판관필을 사용한 사람을 분명히 보았다는 것이오!" "……" 홍의소녀는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당금 무림에서 금환과 판관필을 동시에 사용하는 사람은 노운량 외에는 없소이다."


청의노인이 단호한 어조로 자신있게 말 끝을 맺었다. 이에, 홍의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좋아요. 그렇다면 그 사건의 범인은 노운량 그자가 틀림없어요." 하며 힐끗 예의 그 전각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자, 어서 저쪽으로 가보죠." 말을 마침과 동시에 홍의소녀가 신형을 날렸다. 이어, 청의노인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곧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헌데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즈음이었다. 근처의 커다란 고목 위에서 한 명의 인영이 유령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이 인영은 왜소하게 생긴 흑의노인이었다. 그 노인은 얼굴에 음침한 표정을 떠올리며 괴소를 흘려냈다. "흐흐흐…… 저 계집이 바로 우내사기 중 설산신니(雪山神尼)의 제자인 옥면날수 하소미(河素美)인가?" 중얼거리는 흑의노인의 얼굴이 일순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제법 한 수 하는 계집인 것 같다만 오늘은 일진이 좋지 않을걸. 흐흐흐……" 그 노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앞서 두 명이 사라진 곳으로 몸을 날렸다. 헌데 그 노인이 사라지고 난 직후였다. 바로 그 자리 뒷편에서 또 하나의 신형이 느릿하게 걸어나왔다. 그는 바로 나천웅이었다. 이 순간 그의 입가에는 기이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후후후…… 오늘밤의 형세는 무척이나 재미있군! 이를 두고 매미를 잡으려는 버마재비 뒤를 참새가 노리고 있는 것이라 했던가?" 나천웅은 야릇한 웃음을 흘려내며 흑의노인이 사라진 곳을 노려보더니 몸을 약간 꿈틀거렸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스스…… 한편, 하소미와 청의노인은 조심스럽게 몸을 날리며 그들이 가리켰던 방향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어렵지 않게 전각 앞의 뜰에 내려설 수가 있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그들이 뜰에 내려서는 것과 동시에 돌연 음침한 괴소가 터져나오지 않는가? "흐흐흐흐……" 순간 하소미와 청의노인은 대경실색했다. 그들이 놀라 황급히 주위를 살펴보는 순간 다시 어디선가 음침한 음성이 들려왔다. "옥면날수 하소미! 하북철검(河北鐵劍) 강성운(江成雲)! 너희들이 감히 이 현운보를 겁없이 들어오다니……" 하소미와 강성운은 안색이 대변했다. 허나 하소미는 곧 안색을 싸늘하게 굳히며 냉막하게 쏘아붙였다. "흥! 제법이군. 우리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보다니……" 그녀의 싸늘한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의 주위에서 음산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훗훗훗…… 하가 계집아! 너의 사부 설산신니만을 믿고 너무 까불지 말거라!"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음침한 음성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어투로 계속해서 호통을 쳐댔다. "잘 알아두거라! 너는 물론이고 설사 너의 사부가 온다 하더라도 이 현운보를 빠져나가지는 못할 것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음침한 괴소와 함께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 인영은 왜소한 체구에 흑의를 걸친 노인이었다. 이때, 그 노인의 눈에서는 음침한 흉광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노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강성운의 안색이 침중하게 변했다.


"현의왜수(玄衣倭 )!" 그의 입에서 한소리 경악성이 터졌다. 그러자 현의왜수라 불리운 흑의노인이 다시 음침한 괴소를 흘려냈다. "흐흐흐…… 과연 하북철검답군. 나의 명호를 단번에 알아맞추다니……" 현의왜수의 득의만면한 비양거림에 강성운이 냉소를 날렸다. "흥! 이십 년 전 갑자기 무림에서 사라졌다 했더니 결국은 이 현운보에 잠적해 있었군!" "강성운! 너의 말이 맞다. 노부는 지금 이 현운보에서 총관의 지위를 맡고 있다." 현의왜수가 음침한 음성으로 대꾸해 왔다. 순간 그 말을 들은 강성운은 가슴이 섬뜩해옴을 느꼈다. '저…… 저자가 현운보의 총관이라고……? 미…… 믿을 수가 없구나……' 하소미도 놀라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당금 무림에서 위명으로 따지자면 현의왜수가 금환신필 노운량보다 오히려 높다고 할 수 있다. 헌데, 어찌 그런 자가 스스로 허리를 굽히고 노운량의 밑으로 들어갈 수가 있단 말인가……?' 강성운의 가슴 속으로는 수많은 의혹이 불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현의왜수를 바라보며 냉막한 어조로 다그쳐 물었다. "현의왜수! 네가 진정 현운보의 총관이란 말이냐?" 바로 이때였다. 어디선가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강성운! 그의 말에는 조금도 틀린 점이 없다. 그는 실로 본보의 총관이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 명의 인영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나타난 인영은 백발이 성성한 금의노인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홍색이 가득하고 두 눈에서는 정광이 번득이고 있었다. 그 금의노인은 한눈에 보기에도 그야말로 인의대협(仁義大俠)이라 아니할 수 없는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강성운은 그 노인을 보는 순간, 나직이 신음성을 토해냈다. "으…… 음! 금환신필 노운량……" 이때 하소미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노운량을 바라보았다. "노대협! 소녀는 당신에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녀는 낭랑한 어조로 분명하게 또박또박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노운량은 하소미의 아래위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제법 격식을 갖춘 어조로 점잖게 입을 여는 것이었다. "낭자가 바로 요즘 위명을 떨치고 있는 옥면날수 하소미인가?" "노대협의 말이 맞아요." 하소미가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노운량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이어 그는 자신의 기다란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선선하게 승낙했다. "좋다! 낭자, 그대가 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란 대체 무엇인가?" 하소미는 힐끗 현의왜수를 바라보더니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금사표국의 표차를 습격한 자들의 주모자가 바로 노대협이라던데 그것이 진정 사실인가요?" 당돌한 그녀의 질문이었다. 이때 노운량의 입가에는 신비한 미소가 서리고 있었다. "하낭자는 그것을 믿나?" 노운량은 그녀의 물음에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어 오는 것이었다. "천하에서 금환과 판관필을 동시에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오직 노대협밖에는 없어요."


그녀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쌀쌀한 어조로 대꾸했다. 돌연 노운량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그렇다면 노부도 더 이상 부인할 수는 없겠군……!" 너무나도 태연스런 그의 행동이었다. 하소미는 그의 그러한 행동에 기가 막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이때 강성운이 두 눈에 살기를 가득 담은 채 냉막하게 내뱉았다. "그럼, 당시 금사표국의 국주인 금사신편(金獅神鞭) 천중한(千中漢)을 죽인 자도 바로 당신이겠군!" "원래 노부는 그 당시에 그자를 해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허나, 그자의 행동이 너무 거칠어서 약간 교훈을 내리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이지." 노운량은 빙그레 미소까지 떠올리며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말을 뱉아내는 것이었다. 순간 강성운이 이를 부드득 갈며 노성을 터뜨렸다. "노가야! 너는 그 금사신편과 나와의 관계를 아느냐?" 허나, 노운량은 강성운의 거친 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태연하게 웃음을 흘려내는 것이었다. "핫핫핫…… 천하에서 너희들이 하북오걸(河北五傑)의 한 일원임을 모르는 자가 누가 있겠느냐?" 강성운은 치솟는 분노로 인해 안면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천제(千弟)를 죽였느냐?" 밤하늘에 쩌렁쩌렁하게 강성운의 호통이 울려퍼졌다. 불현듯, 노운량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지더니 이제까지와는 달리 냉막한 어조로 말을 뱉아내는 것이었다. "강성운, 잘 듣거라! 다른 사람은 너희 하북오걸을 강하게 볼지 모르나 이 노부는 다르다. 이 노부가 보는 견지에서는 너희들 정도는 노리개감 정도에 불과하다!" 이렇게 말을 뱉아내는 노운량의 얼굴은 마치 얼음장과도 같이 냉기가 어리고 있었다. 강성운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갈일성을 터뜨렸다. "노가야! 아가리 닥쳐라!"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양손을 맹렬하게 휘두르며 공격을 가했다. 우르릉! 고오오…… 강맹한 장력이 강성운의 손에서 뻗어 나갔다. 허나 노운량은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강성운이 시출해낸 장풍이 거의 그의 몸에 닿을 즈음, 노운량이 왼손을 가볍게 뒤집더니 앞으로 내뻗었다. 퍼펑! 꽈르릉!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동시에, "헉!" 하는 비명과 함께 강성운이 뒤로 서너 걸음 후퇴하는 것이 아닌가? 반면에 노운량은 그 자리에서 끄덕도 안한 채 버티고 있었다. 강성운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놀란 눈빛으로 노운량을 응시했다. "이…… 이럴 수가……?" 현재 강호의 위명을 따져보면 하북철검이나 금환신필은 그 명성이 거의 비슷한 터였다. 헌데 지금 나타난 결과는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었다. 옆에 서 있던 하소미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미…… 믿을 수가 없구나. 저 노가의 무공이 저토록 강하다니…… 저 정도이면 사부님의 실력에 비해도 거의 손색이 없을 정도가 아닌가?' 이때였다. 노운량이 갑자기 득의의 웃음을 흘려냈다. "핫핫핫…… 당금 천하에서 노부의 진정한 실력을 아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현 강호에 알려진 노부의 실력은 본 실력에 비해 십분지 이삼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노운량은 잠시 말을 멈춘 뒤, 하소미와 강성운을 힐끗 바라보았다. "원래, 노부가 금사표국의 표차를 공격한 이유는 그곳에 있는 표물이 노부가 생각한 그 어떤 것과 일치하는가를 알기 위해서였다." 하소미와 강성운은 모든 것이 놀라워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허나, 실망스럽게도 그 안의 물건은 노부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말을 마친 노운량이 문득 두 눈에 살기를 띠운 채 싸늘하게 내뱉았다. "자, 이제 모든 것을 알았으니 너희 두 명은 어쩔 수 없이 이 현운보에서 반드시 뼈를 묻어야만 한다!"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손을 슬쩍 흔들었다. 순간 주위에서 유령같이 십여 명의 인영들이 나타났다. 스스슥! 스슷! 그들은 모두 흑의복면인들이었다. 이때, 노운량이 입가에 음산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들은 바로 현운보의 현운십살(玄雲十殺)이다. 자! 이제 너희들은 그만 죽어 줘야겠다." 노운량이 냉막하게 내뱉으며 손을 슬쩍 치켜세운 것을 신호로 흑의복면인들이 하소미와 강성운에게 연기처럼 접근해갔다. 이때였다. 어디선가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핫핫핫…… 노운량! 그대의 심보는 실로 악랄하기 그지 없구나!" 노운량의 안색이 순식간에 급변했다. 상대가 자신의 근처까지 오도록 조금도 눈치를 채지 못하다니…… 노운량은 황급히 주위를 훑어보며 침중하게 외쳤다. "어떤 놈이냐?" 바로 그 찰나, "으핫핫핫……" 기다란 웃음소리와 함께 한 명의 인영이 노운량의 앞으로 번개같이 내려섰다. 장내의 인물들은 모두 흠칫 놀랐다. 노운량도 그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어, 예리한 눈초리로 재빠르게 그자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상대는 체구가 건장한 백의청년이었다. 허나, 기이한 것은 바로 그 청년의 얼굴이었다. 마치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에 눈썹은 듬성듬성 빠져 있어 보기에 섬뜩할 정도였다. 또한 코는 마음대로 주물러서 만든 듯한 주먹코였다. 실로, 천하에 보기 드문 추남 청년이었다. 그 청년은 땅에 내려서자마자 서슴없이 노운량의 앞으로 다가왔다. 헌데 그 청년은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왼발을 절룩거리는 것이었다. 노운량은 그를 향해 걸어오는 청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노운량은 안색을 싸늘하게 굳힌 채 노성으로 물었다.


반면에 청년은 히쭉! 웃어보였다. "후후후…… 나에게는 명호가 없소." "……?" "허나, 굳이 붙힌다면 없을 것도 없소. 얼굴이 이토록 못생겼고 게다가 병신이니 귀면수라(鬼面修羅)라고나 할까?" "귀면수라……?" 노운량은 귀면수라라고 자칭하는 청년을 예리하게 노려봤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이름은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듯했다. 그의 머리속에는 강호에서 이렇게 생겨먹은 자를 도저히 기억해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 옆에 서 있는 하소미도 괴청년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녀는 내심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사람의 체격이나 음성은 그 사람과 무척 흡사하구나…… 허지만, 얼굴은 전혀 다르니…… 게다가 그 사람은 발도 절지 않았는데……' 이때 괴청년이 노운량을 바라보며 다시 히쭉 웃음을 날렸다. "노운량! 아마도 천하에서 그대의 정체를 완전히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걸." 순간 노운량은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곧 안색을 가다듬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핫핫핫…… 시치미 뗄 것 없소. 이미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일이니까!" "……" 괴청년의 자신만만한 어조에 노운량은 약간 주춤거렸다. 그 순간 괴청년이 갑자기 안색을 굳히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노운량! 당신은 분명히 나습포찰을 기억하겠지?" "나…… 나습포찰!" 괴청년의 말에 노운량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무척이나 놀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이때 괴청년은 그의 모습을 예리하게 살펴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토록 놀라는 것을 보니 과연 내 추측이 틀림없는 것 같구나……!' 이렇게 생각을 굳힌 괴청년은 다시 냉막한 어조로 노운량에게 힐문했다. "핫핫핫…… 노운량! 당신은 아마도 천마십이성의 수족 중 한 명이겠지?" 노운량의 안색이 흑빛으로 변했다. 그는 새파랗게 질린 채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입을 열었다. "네…… 네가…… 그것을…… 어떻게?" 노운량은 되묻다 말고 급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신이 말을 하므로 해서 시인했다는 실책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한 번 입 밖으로 쏟아낸 말이니…… "노운량! 이제야 마각(馬脚)을 드러내는군!" 괴청년이 싸늘하게 냉소쳤다. "노…… 노부는 네놈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노운량은 황급히 얼버무리려 했다. 그러자, 괴청년이 또 다시 가소롭다는 듯이 괴소를 흘려냈다. "으핫핫핫…… 그렇다면 내가 또 하나를 가르쳐 줄까?" 괴청년은 이렇게 운(云)을 뗀 후 노운량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주시했다. 그러는 괴청년의 얼굴이 차차로 싸늘하게 굳어져 갔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아마 당신이 금사표국의 표차를 습격한 이유는 마가천의 눈알 때문이겠지?" 순간 노운량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또한 그의 두 눈은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그는 그런 채로


말없이 괴청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때, 그의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여린 경련이 일고 있었다. 잠시 후 노운량은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듯 했다. 그의 안면 근육의 경련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으며 안색은 어느덧 평정을 되찾았다. 이윽고 노운량은 안색을 싸늘하게 굳히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좋다. 귀면수라, 네놈이 어떻게 노부의 비밀을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결국 네놈을 살려 보낼 수는 없다." 그는 분기가 충천한 듯 냉막하게 내뱉았다. 허나 괴청년은 입가에 조소를 머금은 채 나직이 코웃음쳤다. "흥! 노운량! 꿈꾸지 말거라. 너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나 절대로 나를 이기지는 못한다." 순간 노운량의 눈에 살기가 뻗쳤다. "십살! 저놈을 당장에 없애 버려라!" 그의 불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예, 명령 받들겠습니다." 현운십살은 공손히 대답한 후 신속하게 움직였다. 스스스……! 스슷! 다음 순간 그들은 순식간에 괴청년을 포위하고 말았다. 허나 괴청년은 그들의 움직임에 털 끝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태연자약한 채 입가에 조소를 흘려내고 있는 것이었다. 하북철검 강성운은 내심 기이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청년의 외모는 비록 볼품이 없지만 그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기질은 가히 초인적이라고 할만 하구나……! 도대체 저 청년의 사문은 어디일까?' 하소미 역시 같은 심정이었다. '정말 이상하다! 저자의 모습은 무척이나 못생겼는데도 불구하고 전신에서는 그 어떤 힘같은 것이 뻗어나오고 있다니……'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약간 야릇해짐을 느꼈다. '저 사람을 바라보면 왠지 모르게 나의 가슴이 두근거리니……' 그녀가 내심 이렇게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였다. 괴청년을 포위한 현운십살들은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이때 괴청년은 그들의 움직임에는 아랑곳도 없다는 듯이 조소를 날렸다. "후후후…… 이따위 시시한 십절귀진(十絶鬼陣) 따위로 나를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순간 노운량은 내심 흠칫 놀랐다. '저…… 저놈이 어찌 본보의 진법을 알아본단 말인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은근한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곧 강하게 자신의 두려움을 부인했다. '아니다. 상대는 겨우 이십 세 정도에 불과한 풋내기가 아닌가……? 그런 어린놈이 그렇게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을 리 만무하지……' 내심 생각을 굴린 노운량은 다소 마음이 가라앉음을 느꼈다. 그는 다시 큰소리로 외쳐댔다. "십절산검(十絶散劍)!" 노운량의 호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렁찬 함성이 울려퍼졌다. "와! 와아!" 현운십살은 현운보 내가 떠나가도록 함성을 내지르며 다가들었다. 그들은 모두 괴청년을 향해 한꺼번에 공격을 가했다.


허나 괴청년은 여전히 태연할 뿐이었다. 십살의 검이 그의 몸에 닿았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돌연, 괴청년의 양손이 가볍게 움직였다. 순간 그의 양손에서 금광이 번뜩거렸다. 동시에, 타--- 타--- 타--- 탁! 요란한 금속음과 함께 나직한 비명이 잇달아 터져 나왔다. "으윽!" "으헉!" 노운량은 대경실색했다. 그는 황급히 눈을 들어 장내를 둘러보았다. "아…… 아니……!" 장내를 둘러보던 노운량의 두 눈이 경악의 빛으로 가득 찼다. 놀랍게도 십절은 모두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헌데 이것은 또 웬일인가? 그들의 수중에는 모두 검의 손잡이만 들려 있는 것이 아닌가? 노운량은 황망히 괴청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노운량의 두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진 채 경련을 일으켰다. 놀랍게도 괴청년의 손에는 부러져 나간 열 자루의 검신이 모두 들려 있었다. 노운량은 도저히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당금 무림에서 현운십살의 합공을 당해낼 사람은 별로 많지가 않다. 헌데 상대는 그런 막강한 현운십살의 합공을 단 일초에 격패시켰지 않은가? 또한 그것도 모자라서 그들의 무기마저 모조리 빼앗다니…… 이 어찌 믿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무…… 무서운 놈이다! 당금 무림에 이토록 무서운 놈이 있었다니……" 노운량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바로 이때 괴청년이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노운량을 바라보았다. "핫핫핫…… 어떠냐? 노운량! 이제 순순히 굴복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노운량의 안색이 급변했다. 지금 그의 낯빛은 흡사 썩은 돼지간 빛과도 같았다. 그는 분노로 인해 안면 근육을 씰룩거리며 대갈일성을 터뜨렸다. "애송이놈! 현운십살을 꺾었다고 해서 실로 겁없이 날뛰는구나!" 그의 어조에는 역시 웅후한 내공이 실려 있었다. 노운량은 두 눈에 핏발을 곤두세운 채 다시 입을 열었다. "허나, 나의 무공을 현운십살 정도에 비교했다면 그것은 네놈의 커다란 오판이다. 노부가 지금 그것을 증명해주마!"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품속에 손을 집어 넣었다. 순간 그의 손에 주먹만한 쇠구슬과 금필 하나가 들려나왔다. "흐흐흐…… 애송이놈! 노부가 네놈에게 진정한 무공이 어떤 것인지를 견식시켜주마!" "얼마든지!" 노운량의 대갈에 괴청년이 싸늘하게 응수했다. "받아랏!" 호통을 뱉아냄과 동시에 노운량의 한쪽 손이 휘둘러졌다. 이어 그의 손에 들렸던 금환이 순식간에 괴청년을 향해 날아갔다. 쌔애액! "흥!" 괴청년은 싸늘히 냉소를 흘려내며 왼손을 살짝 흔들었다.


순간, 펑! 요란한 굉음이 울리며 날아오던 쇠구슬이 땅에 떨어졌다. 헌데 바로 그 순간 괴이한 일이 발생했다. 땅에 떨어진 쇠구슬이 돌연 두 개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더 더욱 놀라운 일은 다음에 벌어졌다. 땅에 떨어져 두 개로 갈라진 구슬이 다시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번--- 쩍! 쐐애애액! 그것들은 아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괴청년의 몸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흠칫 놀란 괴청년이 나지막한 신음성을 토해냈다. "앗!" 허나, 다음 순간 괴청년은 슬쩍 몸을 비켜 피해냈다. 헌데 두 개의 쇠구슬은 다시 네 개로 나뉘어지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다시 허공에서 핑그르르 돌며 재차 공격해 들어왔다. 이렇게 되자 괴청년은 약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음…… 이자의 무공은 듣던 것보다 훨씬 세구나!' 그가 내심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노운량의 음충맞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흐흐흐! 애송이놈! 네놈이 노부의 천강금환비(天剛金丸飛)의 수법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의 득의에 가득찬 말이었다. 괴청년은 은근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좋다! 노운량, 본공자의 진짜 무서운 실력을 보여주마!"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자화공(子火功)을 끌어올렸다. 순간 단전에서 무서운 열기가 솟구쳐 올라왔다. 괴청년은 그 열기를 서서히 왼손으로 모았다. 그러자 그의 왼손이 핏빛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실로 끔찍스러울 정도로 무섭게 보였다. "후후후…… 노운량! 어디 너의 금환이 나의 이 장공(掌功)을 막을 수 있나 두고 보자!" 괴청년은 말을 마치자마자 시뻘겋게 변한 그의 왼손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순간 그의 왼손의 장심에서는 한 줄기 붉은 기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휘류류륭! 콰우우우…… 그것은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광경이었다. 노운량의 얼굴에는 긴장한 표정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는 그런 채로 수중의 금환을 다시 던졌다. 이때, 금환은 이미 여덟 개로 변해 있었다. 여덟 개의 금환은 그대로 괴청년이 발출해낸 붉은 열기를 향해 쏘아져 갔다. 쿠우우우! 그것들이 자화공의 열기에 부딪히는 순간이었다. 퍼퍼펑! 꽈르르! 요란한 폭발음이 천지를 뒤흔들 듯 울려퍼졌다. 뒤이어, 여덟 개의 금환은 모두 폭발하듯이 산산조각으로 부숴지고 말았다. 그것들은 삽시간에 가루로 변한 채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이었다.


"앗!" 노운량은 안색이 흑빛으로 변한 채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는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운량이 놀라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사이, 괴청년이 유령같이 그의 앞으로 다가들었다. 동시에 괴청년의 입에서 짤막한 호통이 터져나왔다. "받아랏! 노운량!" 그때 붉게 변한 그의 왼손은 높이 치켜들려 있었다. 이어 그의 붉은 장심에서는 무서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야말로 핏빛처럼 붉은 열기가 마구 쏘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휘스스스스! 쿠우우…… 삽시간에 천지가 온통 붉은색 장영으로 뒤덮히는 것이었다. 뒤이어, "헉!" 노운량이 다급히 신음성을 토해내며 자신의 오른손에 들렸던 금필을 전력으로 휘둘렀다. 허나 괴청년은 조금치의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으핫핫핫…… 단봉조양(丹鳳朝陽)!" 괴청년의 입에서는 웃음에 뒤이어 호통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그의 양손이 홱 뒤집어지며 장력이 쏟아졌다. 실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노운량은 대경실색한 채 황망히 피하려 했다. 허나, 때는 너무 늦어 도저히 상대의 장세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으--- 윽!" 노운량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신형을 비틀거렸다. 동시에, 그의 수중의 금필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노운량은 뒤로 물러난 채 입가에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또한 그의 장삼에는 정확히 열 두 개의 손바닥 자국이 찍혀 있었다. 헌데 그 손자국들은 모두 시커멓게 타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바라보는 노운량은 등골이 오싹할 한기를 느끼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이…… 이자가 조금 전 나를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한 구의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헌데 이놈이 나를 살려 준 이유는……?" 이때였다. 괴청년의 입에서 냉막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후후후…… 노운량! 이제야 그대는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알았소?" 노운량은 치솟는 분노를 느끼며 안면근육을 씰룩거렸다. "네…… 네놈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대체 무엇이냐?"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듯이 괴청년을 다그쳤다. 괴청년은 그의 물음에 다시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핫핫핫…… 당신은 꽤나 눈치가 빠르군!" 짤막하게 말을 내뱉은 괴청년은 잠시 노운량을 뚫어질 듯이 주시했다. 그러는 괴청년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져 갔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침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단지 당신과 천마십이성과의 관계를 알고 싶을 뿐이오!" 괴청년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노운량의 안색이 대변했다.


지금 그의 낯빛은 시커멓게 변한 채 돌처럼 경직되어 있었다. "그…… 그것은……" "어떻소? 가르쳐 줄 수 있겠소?" 괴청년은 다시 한 번 그를 다그쳤다. 노운량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강하게 부인했다. "안된다! 그것은 어림도 없는 얘기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은 가르쳐 줄 수가 없다!" "후후후…… 당신이 그렇게 나온다면 하는 수 없지!" 노운량이 완강하게 버티자 괴청년은 싸늘한 웃음을 흘려내며 비아냥거렸다. "소생도 강압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괴청년의 보기 흉한 얼굴은 더욱 흉악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노운량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때, 그의 입에서 흘러내린 선혈은 이미 그의 장삼 앞자락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섬뜩할 정도로 비참한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괴청년이 다시 냉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후후후…… 노운량! 당신도 무림의 물을 먹은 사람이니 참맥절혈수(斬脈絶穴手)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겠지?" 순간, 노운량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차…… 참맥절혈수……!" 더듬거리며 되뇌이는 노운량의 두 눈에 공포의 빛이 스쳐가고 있었다. 제 13 장 어둠 속의 暗襲者 참맥절혈수! 이는 현 무림에서 내려오는 고문 수법 중 가장 무서운 수법인 것이다. 이것의 고통은 차마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다. 때문에 이에 걸려들면 천하에 그 어떤 자라도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발악을 하고야 만다. 허나 이 수법은 이미 실전된 지가 수백 년이나 지났다. 헌데 어찌 그 괴청년이 이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 이때, 노운량은 안면근육에 경련을 일으키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는 완전히 공포에 질려있었다. 괴청년은 그의 그러한 모습을 주시하며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떠올렸다. "노운량! 달아나고 싶은가?" 괴청년은 천천히 노운량 앞으로 다가가며 입술을 움직였다. "허나, 이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그대가 지금 나의 손을 벗어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지옥의 사자처럼 차갑고 냉혹한 그의 어조는 현운보의 밤하늘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노운량의 전신에 부르르 전율이 일고 있었다. "네…… 네놈이……?" 바로 이때였다. 괴청년의 등 뒤로부터 날카로운 여인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소협! 조심하세요!" 순간, 괴청년은 자신의 등 뒤로부터 누군가가 무서운 일격을 가하고 있음을 느꼈다. 허나 그의 안색에는 여전히 아무런 변화도 일고 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괴청년의 입가에는 비웃는 듯한 조소가 스쳐가고 있었다. 스슷!


암격을 가한 상대의 장력이 그의 등에 부딪치려는 찰나였다. 돌연 괴청년의 전신에서는 은은한 금광이 서리는 것이 아닌가? 뒤이어, 꽈광! 요란한 폭음이 울려퍼졌다. 동시에, "으--- 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뒤를 이으며 허공 멀리로 퍼져 나갔다. 그것은 누구의 비명이었던가? 이 광경을 주시하던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라!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놀랍게도 비명의 주인공은 괴청년의 몸에 장력을 날린 사람이었다. 그 자는 전신의 모공에서 선혈을 쏟아내며 허공으로 높이 날아가고 있었다. 다음 순간, 퍽!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허공을 날던 그 인영의 신형이 뒤에 있던 담벼락에 부딪힌 것이었다. 그 인영은 즉시로 선혈이 사방으로 튀며 뼈와 살이 문드러졌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형상이었다. 하소미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또한 하소미의 옆에 있는 강성운의 놀라움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런 광경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장력을 몸에 정통으로 맞은 사람은 끄덕도 없고 오히려 장력을 날린 사람이 죽다니…… 이때 괴청년은 시체를 향해 힐끗 고개를 돌렸다. 그 시체의 모습에서 원래의 제모습을 찾기는 어려웠다. 허나 괴청년은 그가 바로 현의왜수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노운량은 분노로 치를 떨며 괴청년을 노려보았다. "자…… 잔인한 놈!" 그의 말에 괴청년이 싸늘하게 코웃음쳤다. "흥! 잔인하다고?" 잠시 말을 멈춘 그는 곧 냉막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노운량!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고 했다. 만약 나의 실력이 부족했다면 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나였을 것이다!" "……" 노운량은 괴청년의 조리정연한 말에 할 말을 잊었다. 다만 그의 눈 끝에 여린 경련이 파르르 일고 있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괴청년이 다시 다그쳤다. "자, 노운량! 이제는 어서 말해 보시지!" 그러자 노운량도 어쩔 수 없이 무엇을 결심한 듯 낯빛을 수그러뜨렸다. 그런 후, 그는 무엇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씰룩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쉭! 어디선가 공기를 가르는 여린 파공음이 들려왔다.


동시에, "으--- 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순간, 노운량이 양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앞으로 푹! 고꾸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는 어디선가 날아온 암기에 격중당해 그대로 쓰러지고 만 것이었다. 순간 괴청년의 안색이 대변했다. "어떤 놈이냐?" 괴청년은 짤막한 호통과 함께 신형을 번개같이 날렸다. 그는 암기가 날아왔던 방향으로 시위를 벗어난 화살과도 같이 쏘아져 갔다. 쐐애액! 다음 순간 괴청년은 몸을 날려 현운보의 담 위로 올라섰다. 이어 그는 재빨리 주위를 훑어 보았다. 허나 이상한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괴청년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도대체…… 어떤 놈이 암습을……?" 잠시 후 그는 신형을 서서히 돌려세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 나의 안목은 너무도 좁았구나. 이 정도의 실력이면 천하에서 당할 자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자는 내가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게 도망을 갔으니……" 괴청년은 다시 한 번 길게 탄식을 내뿜으며 담장 위에서 내려섰다.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담장 바깥쪽에 있는 조그만 바위 하나가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바로 조금 전 괴청년이 바라봤던 바위였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그것은 바윗덩어리에 불과했다. 헌데 놀랍게도 꿈틀거리던 그 바윗덩이가 한 명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그 인영은 체격이 무척이나 왜소한 흑의복면인이었다. 그는 등 뒤에 가죽으로 된 피풍(皮風)을 둘러쓰고 있었다. 이윽고, 신형을 일으켜 세운 흑의복면인은 괴청년이 사라진 담장을 바라보았다. "정말 나의 예상보다 훨씬 빠른 경공을 지닌 자로구나?" 그 흑의복면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로 낮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의외로 강한 적수가 나타난 것 같으니 앞으로의 일에 차질이 많겠는 걸……" 그는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 몸을 날렸다. 곧이어 그 흑의복면인은 앞서 날아갔던 괴청년과는 반대 방향으로 바람같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은 마치 밤하늘에 흐르는 한 줄기 유성과도 같았다. 한편, 괴청년은 담장 안으로 내려서자마자 쏜살같이 노운량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아직 하소미와 강성운이 당황한 채 어쩔 줄을 몰라 그대로 서 있었다. 괴청년은 재빨리 한쪽 무릎을 굽히고 노운량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노운량은 가슴 한복판에 암기를 격중당한 채 쓰러져 있었다. 그가 쓰러져 있는 땅바닥은 붉은 선혈이 낭자하게 흘러나와 있었다. 노운량의 가슴에 꽂힌 암기는 한 자루의 작은 비엽도(飛葉刀)였다. 괴청년은 즉시 노운량의 가슴에 박힌 비엽도를 빼보았다. 그 비엽도는 길이가 삼 치 정도이고 넓이는 오푼 정도밖에 안되는 아주 작은 것이었다. 또한, 얇기도 흡사 매미 날개와도 같아 하늘거릴 정도였다. 괴청년은 이것을 바라보며 침음한 채 중얼거렸다. "으…… 음, 이토록 얇은 비엽도를 십 장이 넘는 거리에서 정확히 명중시키다니…… 실로 대단하구나……!" 바로 이때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노운량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아주 미약한 것이었다. 순간, 괴청년은 흠칫 놀랐다. "아…… 아니……?" 그는 황급히 노운량의 코 끝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그러나, 곧 실망을 금치못했다. 노운량의 숨은 이미 멎어 있었다. 일순 그의 머리 속을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괴청년은 재빨리 노운량의 맥문을 잡아보았다. 과연 노운량의 맥박은 미약하지만 아직까지 실날같이 가늘게 뛰고 있었다. 괴청년은 큰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서둘러 자신의 한쪽 손을 노운량의 앞가슴에 대고 내공을 주입시키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렇게 했을까? 잠시 후, 노운량의 얼굴에 약간의 홍조가 돌았다. 곧 이어 노운량은 힘겹게 두 눈을 뜨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몸에 내공을 주입시키고 있는 괴청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내 노운량의 가물거리는 두 눈에는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소…… 소협…… 수…… 수고 할 필요는 없소…… 이미…… 나는 틀렸소……" 그는 떠듬떠듬 말을 이어 가며 괴청년에게 감사를 표했다. 괴청년은 그의 가슴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큰소리로 외쳐댔다. "노운량! 정신 차리시오!" 허나, 노운량은 허탈한 눈빛을 띤 채 고개를 흔들었다. "그…… 그들은…… 이미…… 내가 필요 없다고…… 생각…… 했기…… 때문에…… 나를 암습한 것이오……" 괴청년이 다시 큰소리로 외쳐대며 노운량에게 물었다. "그자는 누구요?" "그…… 그것은……노부도…… 모르오……" 바로 이때 노운량의 그나마 미약했던 숨결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노부는…… 어려서부터 나습포찰에서…… 자라왔소……" 노운량은 거친 숨을 몰아 쉬면서 힘겹게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나습포찰 천륭사(天隆寺)의 천마십이성들은 노…… 노부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며…… 수많은…… 지시를 내렸소……" 문득 말을 끊은 그의 안색이 돌연 새하얗게 변했다. 괴청년은 바짝 긴장한 채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노운량은 마지막인 듯이 안간힘을 쓰며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그…… 그들이…… 노부를 죽이려 한…… 이상…… 노부도…… 그냥…… 이대로…… 있을 수는…… 없소." 괴청년은 힘겹게 말을 뱉아내는 노운량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 소협, 워…… 원래 천마십이성은…… 이 무림에…… 십 명의…… 고수를 파견…… 시켰소……" "뭐…… 뭐이라고?" 괴청년은 흠칫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노부는…… 그 중에…… 한 명에 불과하오. 허나…… 노부는 그들 아홉 명이…… 누군지는 전혀…… 모르오……" 노운량은 무척이나 호흡이 가빠오는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죽어가는 순간의 이 대마두의 눈빛에는 회한과 후회의 빛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단지…… 그 중 한 명이 자의신검(紫衣神劍)이라는 것 외에는……"


여기까지 말을 마친 노운량이 갑자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동시에, "우--- 웩!" 그는 시뻘건 선혈 한 모금을 토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내 두 눈을 크게 부릅뜨는 것이 아닌가? 이어 그의 목은 뒤로 힘없이 젖혀지고 말았다. 그는 그대로 숨을 거둔 것이었다. 괴청년은 잠시 망연한 채 일세의 대마두 노운량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마를 그렇게 있던 괴청년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새어나왔다. "휴우!" 이어, 그는 천천히 노운량의 시신 곁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때 한쪽 옆에 서서 계속 이 광경을 주시하던 강성운이 괴청년의 곁으로 다가갔다. 강성운은 공손히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넸다. "소협, 정말 고마웠소이다. 만약 소협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오늘 큰 봉변을 당할 뻔했소이다." 괴청년이 입가에 쓴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흔들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찌 하북철검 강대협이 그토록 쉽게 당할 리가 있겠습니까?" "허허허…… 소협, 노부의 얼굴에 너무 금칠을 하려 하지 마시오." 강성운이 멋쩍은 듯 커다랗게 웃어대며 노운량의 시신을 힐끗 바라보았다. "실상, 노부는 저 노운량의 실력을 그렇게 크게 보지는 않았소이다. 허나, 아까의 싸움을 보니 노부는 도저히 저자의 상대가 아님을 통감했소." 이렇게 말을 뱉아내는 강성운의 안색은 침중했다. "최소한 저자는 나보다 몇 수는 위였소." 그는 스스로 자신의 뒤떨어진 실력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괴청년은 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무엇이 생각난 듯이 정색을 하며 강성운을 주시했다. "참, 강대협. 소생이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소이다." "그게 무엇이오?" 강성운이 진중한 표정으로 괴청년을 응시했다. "아까 말한 노운량이 공격했던 표차에서 그자가 빼앗아간 그 구슬이란 대체 무엇이오?" 강성운이 긴 탄식을 흘려내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하나의 피화주(避火珠)였소이다." 그 말에 괴청년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피화주라……? 그렇다면 그것은 마가천의 가운데 눈에 박혔던 구슬은 아니었구나……!' 이 괴청년은 누구인가? 그것은 물어볼 것도 없이 천하의 기재인 나천웅이었던 것이다. 나천웅!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얼굴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해서 무당산을 떠날 당시 받은 몇 개의 인피면구 중 한 개를 사용해 본 것이었다. 이때 강성운의 옆에 서 있던 하소미가 유심히 나천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어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정말, 이상해요. 소협의 얼굴은 대단히 생소한데도 불구하고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으니……" 이 말에 나천웅은 내심 흠칫했다. 허나 그는 정색을 띤 채 헛기침을 한 번 크게 뱉아냈다. "흠! 그럴 리가 있겠소? 소생은 강호에 나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실상 아는 사람도 거의 없소이다." 나천웅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태연한 신색으로 말을 마친 후 멋쩍게 주위를 한 번 훑어보았다. "자, 그럼 소생은 이만 물러가겠소이다."


그는 말을 마치자 마자 신형을 홱 돌렸다. 동시에 나천웅의 신형은 번개같이 앞을 향해 쏘아져 갔다. 즉시 그의 신형은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휘이익! 이때 강성운은 넋을 놓고 나천웅이 사라져 간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실로 신비한 인물이로군! 언제 무림에 저런 인물이 나타났을까?" 그는 혼잣말로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하소미의 얼굴에 당혹의 빛이 스쳐갔다. '저 사람은…… 혹시……?' 그녀의 뇌리에 퍼뜩 떠오른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 * * 남창(南昌). 이곳은 강서성(江西省)에 위치한 하나의 커다란 성(城)이다. 이 성의 왼쪽으로는 구령(九嶺)산맥이 거대한 자태를 자랑하며 길게 뻗어 있었다. 또한, 오른편으로는 드넓은 파양호( 陽湖)가 잔잔한 수면을 드러내며 널찍하게 펼쳐져 있었다. 때는 정오 무렵. 한 필의 백마가 천천히 남창성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백마의 마상(馬上)에는 대단히 준수하게 생긴 백의청년이 앉아 있었다. 백의청년의 왼손에는 기다란 검은 보따리가 들려있었다. 이 청년은 누구인가? 그 청년은 물어볼 것도 없이 바로 나천웅인 것이다. 나천웅은 남창성의 풍물을 구경하면서 느긋하게 말을 몰고 있었다. 무척이나 한가롭고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허나 현재 나천웅의 심정은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달랐다. 그는 내심 상당히 초조해 있었다. 실상, 그는 노운량이 그에게 들려준 말만을 믿고 이곳에 온 것이다. 나천웅은 강호 경험이 많지가 않았다. 그러나 무당산에게 들은 그의 견문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천웅은 무당산에서 단 한 번도 자의신검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었던 것이다. 나천웅은 내심 골똘하게 생각에 빠져들었다. '도대체 자의신검이란 어떤 자일까? 내가 요즘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는 이 남창성에 살고 있는 한 평범한 검객에 불과하다……' 다음 순간, 그는 문득 고개를 내저었다. '허지만, 노운량의 말이 틀림없다면 그의 명성이 그토록 보잘 것 없지는 않을 텐데……?' 나천웅은 계속해서 머리를 굴려보았다. 바로 그때 그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노운량을 눈 깜박할 사이에 해치우고 여유만만하게 자신의 눈을 벗어난 신비인, 바로 그자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나천웅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었지…… 아무리 상대의 무공이 강하다 해도 어찌 그렇게 될 수가 있단 말인가?' 바로 이때였다. 말을 타고 가며 상념에 젖어있는 나천웅의 귓가에 어떤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나천웅은 문득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는 이어 시선을 돌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길 한쪽으로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삥 둘러싸고 몰려있는 것이 아닌가? 욕지거리는 바로 그곳으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야! 이놈의 늙은 거지야! 이렇게 말해도 그 계집애를 내놓지 못하겠느냐?" 누군가가 커다랗게 고함을 질러댔다. 나천웅은 내심 은근한 호기심이 동했다. 그는 서서히 말에서 내려선 후 그쪽으로 다가가 보았다. 그곳에는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나천웅도 그들 틈에 끼여 그 안의 광경을 들여다 보았다.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는 중앙에는 한 명의 노개(老 )가 두 다리를 쭉 뻗은 채 앉아 있었다. 그 늙은 거지의 모습은 한 마디로 너무도 괴이했다. 전신은 대창처럼 깡말라서 걸치고 있는 누더기같은 옷이 마치 나뭇가지에다 걸어놓은 듯했다. 게다가 얼굴모습은 더욱 더 기이했다. 얼굴 전면에는 시커멓게 때가 끼여 아예 검은색 일절이었다. 그 위에 마치 칼로 짼 듯이 실같이 가느다란 두 눈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아래 주먹만한 코는 주독(酒毒)이 올랐는지 불그스름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또한 입술은 우스꽝스럽게도 메기입술같이 두툼했다. 한 마디로 볼썽 사나울 정도로 지독히 못생긴 얼굴이었다. 헌데 그 노개의 옆에는 한 명의 청의소녀가 바짝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대략 십 오륙 세 정도로 보였다. 전신에 청의를 걸치고 몸을 잔뜩 웅크린 그녀는 무엇엔가 놀란 듯 얼굴에 하나 가득 공포의 기색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대단히 귀엽게 생긴 모습이었다. 백옥같이 흰 피부에 초생달처럼 가늘게 휘어진 두 눈썹, 커다란 눈망울에 별처럼 반짝이는 영롱한 눈동자, 누르면 터질 듯이 도톰하고 붉은 입술…… 공포에 질린 듯 장한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대단히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이 노개와 청의소녀의 주위에는 다섯 명의 장한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다섯 명의 얼굴은 모두가 흉신악살같이 흉악한 인상이었다. 지금 이들은 하나같이 두 눈에 살기가 등등한 채 잡아먹을 듯이 노개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늙은 거지놈아! 네놈의 뼈다귀를 모조리 분질러 놓기 전에 어서 그 계집을 이쪽으로 보내라!" 그들은 호통을 쳐대며 노개를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허나 늙은 거지는 그 장한의 말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길게 하품을 해댔다. "아…… 음! 늙은이가 잠좀 자려하는데 웬놈의 파리들이 이토록 앵앵거리지……?" 노개는 매우 귀찮다는 듯이 한 마디 내뱉고는 그 작은 눈을 내리감았다. 장한들의 안색이 즉시 일그러졌다. "이 늙은 거지가 아무래도 지옥에 가고 싶어 환장을 한 모양이구나!" 다섯 명 중 한 장한이 노화가 치미는지 고함을 내지르며 노개 앞으로 다가갔다. 다음 순간 그 장한은 자신의 솥뚜껑 만한 손을 높이 쳐들어 노개의 얼굴을 후려쳤다. 탁! 살갗의 마찰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어이쿠!" 노개가 기겁을 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이 파리는 보통 놈이 아니군. 아무래도 독을 품고 있는 독파리 같구나!"


노개는 자신의 한쪽 뺨을 감싸쥔 채 옆으로 넘어질 듯 기웃뚱거렸다. 허나 그 순간 옆으로 쓰러질 줄로 믿었던 노개의 왼쪽 발이 기이하게 휘둘러지며 장한의 한쪽 정강이를 걷어차고 있었다. "억!" 노개에게 얻어맞은 장한은 큰소리로 비명을 내지르며 비틀거렸다. 그리고는 곧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노개를 노려보았다. "이제보니 이 거지가 제법 한 수 할줄 아는구나!" 그 장한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내 얼굴 가득 살기를 떠올렸다. "허나, 네놈이 우리 파양오귀( 陽五鬼)를 건드린 이상 네놈의 목숨은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 장한은 말을 마치자마자 등 뒤에서 귀두도(鬼頭刀)를 꺼내들었다. 챙!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려퍼졌다. "죽어랏!" 장한은 즉시로 귀두도를 휘두르며 노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파츠츠츳! 허나 노개는 여전히 앉은 채로 킬킬거리며 그 광경을 주시할 뿐이었다. "허허허…… 요즘 파리 새끼들은 예의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잡종들이군. 조종(祖宗)을 보고 절하기는 커녕 밥줄을 끊어 놓으려고만 하니……" 노개는 중얼거리며 왼손으로 옆에 있는 거적 말은 것을 슬쩍 집어들었다. 이때, 장한의 귀두도가 바로 노개의 면전을 향해 짓쳐드는 순간이었다. 찰나, 챙! 다시 한 번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려퍼졌다. 노개는 그 거적 말은 것으로 귀두도를 막아낸 것이었다. "으윽!" 장한은 자신도 모르게 얕은 비명을 내지르며 비틀거렸다. 그는 귀두도가 부딪히는 순간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던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칼이 무쇠덩어리를 친 듯한 느낌이었다. 장한은 그제서야 두 눈을 크게 뜬 채 혼비백산하여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섰다. 이때 노개는 손등으로 붉은 코를 쓱 문지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어 노개는 메기입 주위로 괴이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거적을 서서히 풀었다. "헤헤헤…… 네놈들은 결국 이 거지 할아버지로 하여금 개몽둥이를 꺼내게 만드는구나……" 노개는 혼자 말하듯 중얼거리며 파양오귀를 바라보았다. 한편, 파양오귀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노개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미 이 거지가 보통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었다. '도대체 이 늙은 거지 놈은 어떤 자일까? 무공을 아는 것을 보니 분명 개방( )의 인물같은데…… 개방에 이런 인물이 있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으니……' 그들이 나름대로 생각을 굴리고 있는 사이, 노개가 그 거적을 모두 풀었다. 그 거적 안에는 길이가 두 자 가량 되는 시커먼 몽둥이가 들어 있었다. 그 검은 몽둥이는 손때가 얼마나 묻었는지 반질반질하게 윤이 흘렀다. 나천웅은 그 몽둥이를 보자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저 나무는 실로 평범한 것이 아니구나! 내 추측이 틀림없다면 저 나무는 분명 천묵신향목(天墨神香木)으로 만든 것이리라……!' 그가 내심 이렇게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파양오귀들도 그 몽둥이를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처…… 천구신봉(天狗神棒)!" 누군가가 놀라 커다랗게 외쳐댔다. 그 몽둥이를 바라본 파양오귀들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들은 모두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노개를 바라보았다. 노개는 그러는 그들을 힐끗 쳐다보더니 검은 봉을 들어 허공을 향해 한 번 휘둘러댔다. "헤헤헤…… 아직까지도 노부의 무기를 기억하는 자가 있었군……!" 노개는 계속해서 웃음을 흘려내며 빈정거렸다. 이때 파양오귀 중 한 명이 잔뜩 겁먹은 눈으로 노개를 바라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노…… 노선배님께서는 혹시 우내사기 중 한 분이신 남천괴걸(南天怪乞)이 아니십니까?" 그 장한의 조심스런 물음에 노개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한 그의 작은 두 눈은 아예 감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헤헤헤…… 이거 정말 영광인 걸! 노부의 이름이 이토록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다니……" 남천괴걸이라 불리운 노개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파양오귀의 안색이 모두 삽시간에 흑빛으로 변했다. '주…… 죽었구나!' 그들은 내심 그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남천괴걸--그는 누구인가? 현 무림에서 가장 고강한 고수라 하면 누구든지 우내사기를 꼽을 것이다. 우내사기(宇內四奇)---! 동해일기(東海一奇) 동해표풍객(東海飄風客). 서주일니(西州一尼) 설산신니(雪山神尼). 남천일걸(南天一乞) 남천괴걸(南天怪乞). 북령일군(北嶺一君) 북령빙군(北嶺氷君). 이들은 모두 나이가 백 세를 넘은 일대의 고인들이다. 그 중에서 남천괴걸 양무위(陽武威)는 현 개방장문인인 천죽신개(千竹神 )의 사백 뻘이 된다. 지금부터 사십 년 전 그의 무공은 개방에서 최고로 고강했다. 그 당시 그는 마음만 먹으면 개방의 방주가 될 수도 있었다. 허나 원래 성격이 소탈하고 한곳에 정착하기를 싫어하는 양무위인지라 그는 그것을 마다했다. 그는 방주의 지위를 그의 사제에게 물려주고 개방에서 떠났던 것이다. '으으…… 저 늙은 거지가 하필 남천괴걸 양무위일 줄이야!' 지금 파양오귀의 얼굴은 퍼렇게 겁에 질려있었다. 자신들의 무공도 결코 약한 편은 아니었다. 아니 약하기는 커녕, 파양호 근처에서는 거의 당할 자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틀렸다. 상대는 백 세가 넘는 일대의 고인이 아닌가? 그것도 그 이름만 들어도 산천초목이 목을 움츠리는 우내사기 중의 일인이었으니…… '저…… 정말 잘못 걸렸구나……'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오늘은 정말 더럽게 운이 없구나……' '하필이면 저 계집이 하고많은 사람 중에서 저 거지에게 구원을 청하다니……' 파양오귀들은 각자 내심으로 이렇게 생각을 굴리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때 남천괴걸이 히쭉 웃으며 두터운 메기입술을 움직였다. "자, 파양오귀인지 동정오귀인지 하는 양반들! 어서 덤비지 않고 뭘하나?" 그는 여유만만하게 빈정거리며 자신을 둘러싼 파양오귀를 쭉 훑어보았다. 파양오귀의 손에는 어느새인지 모두 귀두도를 꺼내 거머쥐고 있었다. 남천괴걸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히쭉 웃어보였다.


"그 칼은 무를 벨려고 했나?" 그의 그러한 놀림을 받으면서도 파양오귀들은 입도 뻥긋 하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피며 손 끝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었다. 남천괴걸이 괴이한 웃음을 흘려냈다. "호호호…… 이제보니 자네들은 약한 자에게만 강한 잡졸들이었군…… 안그런가?" 순간 파양오귀의 안색이 대변한 채 수치감으로 잔뜩 일그러졌다. 그들도 제법 무공깨나 한다는 고수들이 아니었던가? 헌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이런 곳에서 그토록 극심한 모멸을 받다니…… 그들은 동시에 서로의 얼굴들을 마주보았다. 이내 눈빛을 교환하여 무언으로써 서로의 각오를 굳혔다. '좋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디 한 번 해보자! 상대가 아무리 우내사기의 일인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맹물이 아니다!' 파양오귀들은 어느 정도 얼굴의 안색을 되찾고 있었다. '더구나 우리는 다섯 명, 만약 우리가 전력을 다한다면 약간의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윽고 결심을 한 파양오귀 중 한 대한이 나머지 네 명을 바라보며 호통을 쳤다. "아우들! 공격해라!"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죽어랏!" 파양오귀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동시에 남천괴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오오! 츠츠츠츳! 허나 남천괴걸은 그들을 바라보며 히쭉 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오늘은 정말 오래간만에 커다란 개를 잡게 되는군……"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왼손을 가볍게 치켜 들었다. 이어, 치켜든 그의 왼손은 파양오귀 중 한 명이 휘두른 귀두도를 향해가고 있었다. 그 순간 그 귀두도의 임자인 파양오귀 중 한 명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희색을 떠올렸다. '이놈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맨손으로 감히 나의 칼과 부딪히려 하다니……' 허나 그의 칼이 남천괴걸의 맨손과 부딪히려는 찰나, 홀연히 남천괴걸의 손이 기이하게 변했다. 손가락이 괴이하게 비틀리는가 싶더니 날쎄게 그 장한의 칼을 잡아채는 것이 아닌가? 실로 눈 깜박할 사이였다. "앗!" 그 장한은 대경실색한 채 칼을 황급히 회수하려 했다. 허나 그것은 그의 무모한 노력이었다. 쨍! 요란한 쇳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장한은 안색이 흑빛이 되어 황망히 자신의 칼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 장한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크게 떠지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의 칼 끝은 이미 부러져 나간 것이 아닌가? 남천괴걸은 여전히 입가에 괴이한 웃음을 떠올리며 그 장한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때 그의 손가락 사이에는 부러진 귀두도의 칼 끝이 들려있었다. 한 순간 장내에는 쥐죽은 듯이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나천웅도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멋진 금룡탐조(金龍探爪)의 수법이로다……!' 파양오귀는 모두 공포에 질려있었다. '과…… 과연 남천괴걸답구나……!'


그때 남천괴걸의 괴이한 웃음이 딱 그쳤다. 웃음이 걷혀진 그의 얼굴은 이미 냉막하게 굳어져 있었다. "네놈들의 행위를 생각하면 한 번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겠지만, 오늘은 노부가 오랜만에 강호에 나온 날이기 때문에 손에 피를 묻히기가 싫다!" 그의 어조는 아까와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그는 싸늘한 눈초리로 다시 한 번 파양오귀를 노려본 후 추상같은 어조로 호통을 쳤다. "꾸물거리지 말고 내 앞에서 냉큼 꺼져라!" 남천괴걸의 호통이 떨어지자 파양오귀의 안색은 각기 제멋대로 일그러졌다. 이 무슨 수치란 말인가? 허나 상대와 자신들과의 무공 차이는 실로 엄청난 것, 화를 내봐야 자신들에게 아무런 이득도 없지 않은가? "조…… 좋다! 남천괴걸, 오늘은 그냥 돌아간다만, 차후에 오늘의 이 빚은 기필코 갚아 주겠다!" 그들은 목숨이라도 건지게 되자 엄포를 놓으며 꽁무니를 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파양오귀 중 한 명이 힐끗 시선을 돌려 청의소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공포에 질린 듯 온몸을 잔뜩 웅크린 채 겁먹은 시선으로 그 장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집! 오늘 운이 좋은 줄 알아라!" 못내 아쉬운 듯 한 마디 내뱉은 파양오귀들은 쏜살같이 사라져갔다. 휘릭! 휙! 남천괴걸은 사라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클클클…… 똥벌레같은 놈들…… 저런 놈들이 이토록 설쳐대다니 무림도 말세로구나……!" 그때 주위에 잔뜩 몰려있던 구경꾼들은 더 이상 볼것이 없자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이때 청의소녀가 몸을 일으켜 남천괴걸 앞으로 다가갔다. 이어 그녀는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었다. "노선배님! 소녀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하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그만 두어라. 이 일은 내가 좋아서 끼어든 일인데 어찌 은혜니 뭐니 하겠느냐? 자꾸 그런 말을 하면 이 거지 늙은이는 몸이 근지러워서 배길 수가 없다……" 손을 내저으며 만류하는 남천괴걸에 의해 그녀의 뒷말은 묻혀 버리고 말았다. 남천괴걸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지극한 시선으로 청의소녀를 응시했다. "아이야, 헌데 어쩌다가 그자들에게 쫓기게 되었느냐?" 그의 물음에 청의소녀의 안색이 금방 처연하게 변했다. 이윽고 그녀가 침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원래, 소녀의 부친께서는 노선배님과 같은 무림인이었습니다." "너의 부친도 무림인이었다고?" 남천괴걸이 의외라는 듯이 되물었다. "네, 강호에서는 저의 부친을 자의신검(紫衣神劍)이라 불렀죠." "자의신검……?" 남천괴걸은 그 이름을 되뇌어 보며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바로 이때였다. 그들의 주변 어느 한쪽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낭자의 부친이 진정 자의신검 단지현(段志玄)이란 말이오?" 순간 청의소녀가 깜짝 놀라며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준수하게 생긴 백의청년이 자신을 향해 미소를 보내고 서있는 것이 아닌가? 짧은 순간 그들의 눈길이 맞부딪쳤다. 허나 청의소녀는 왠지 모르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양쪽 뺨은 어느새 빨갛게 물이 들어 있었다. 그때 남천괴걸이 눈알을 부릅뜨며 고함을 내질렀다. "애송이놈, 네놈은 대체 누구냐?" 그의 호통에도 아랑곳없이 백의청년은 남천괴걸 앞으로 성큼 다가선 후 길게 읍을 하였다. "하하하…… 양대협, 소생의 이름은 나천웅이라 합니다." "야…… 양대협……?" 남천괴걸은 나천웅의 행동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의 작은 두 눈이 크게 떠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밖에…… 감히 우내사기의 일인에게 노선배란 호칭을 붙히지 않고 대협이라니…… 남천괴걸은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나천웅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약간 이죽거리는 어투로 말문을 떼었다. "자네는 꽤나 겸손하군……!" "하하하…… 원래부터 소생은 그렇소이다." 나천웅은 여전히 태연한 신색으로 넙죽 그의 말을 받아 넘겼다. 제 14 장 忘年之友 이때, 남천괴걸의 두 눈에 한가닥 노기가 스쳐갔다. "너의 사문은 어디냐?" "소생의 사문은 양대협에게 말해도 잘 모를 것이요." 남천괴걸은 가소롭다는 듯이 싸늘하게 코웃음쳤다. "흐흥, 애송이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실로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어디 노부가 네놈의 사부를 대신해서 교훈을 내려주마!"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왼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러자 나천웅이 가볍게 웃음을 흘려내며 응수했다. "하하핫…… 정말 멋진 횡도장강(橫度長江)의 수법이오." 그는 말을 뱉아내며 오른손을 쫙 펼쳐내 남천괴걸의 공격을 봉쇄해 버렸다. 순간 남천괴걸이 낮게 신음을 토해냈다. "벽산입수(劈山入手)!" 이어, 그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메기입을 들썩였다. "네놈은 청성파의 제자냐?" "청성파? 으하하핫……" 나천웅은 어이없다는 듯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양대협, 잘못 보았소이다. 자, 이것은 어떻소?"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오른손 인지를 약간 구부렸다. 그것은 곧장 남천괴걸의 곡지혈(曲池穴)을 노리고 비껴들고 있었다. 순간 남천괴걸이 기겁을 하며 황급히 신형을 피해냈다. "엇! 적성환월(摘星換月)! 그럼, 너는 아미파의 제자……?" "양대협, 당신의 견문은 꽤나 좁군요. 그럼 이번엔 이것을 받아보시오!" 나천웅은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떠올린 채 신형을 움직였다. 그는 조금 전 남천괴걸이 전개했던 금룡탐조를 펼쳐내고 있었다. 이것을 바라본 남천괴걸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금룡탐조!" 경악성을 내지른 그는 뒤로 홱 물러났다. "꼬마야, 그 초식은 어디서 배웠느냐?" "왜 그러시오?"


"네가 전개한 그 초식은 바로 본문의 독문장법인 금룡장이다." "……" 나천웅이 빙긋이 웃어보였다. "이 장법은 원래가 본문의 직전제자에게만 전수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헌데, 네가 그것을 알고 있다니……" 남천괴걸의 안색은 경악과 분노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하하하…… 이제보니 당신은 나에게 그 초식을 가르쳐준 사람을 징계하겠다 그 말이구려." "물론이다. 너는 대체 그 초식을 어디서 배웠느냐?" 이때 나천웅은 짐짓 망설이는 척하더니 결심한 듯 입술을 떼었다. "좋소! 원래는 말해서 안되지만 양대협을 봐서 말해주겠소." 그의 태도는 계속해서 오만스럽기 짝이 없었다. 남천괴걸은 극심한 노기가 치솟았으나 꾹 눌러 참으며 나천웅의 입술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 초식을 가르쳐준 사람은……" "……?" 나천웅이 잔뜩 긴장하고 있는 남천괴걸을 힐끗 바라보았다. "바로 남천괴걸이란 분이요." "뭐…… 뭐라고?" 남천괴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 애송이놈이 감히 노부를 희롱하다니……!" 분기탱천한 남천괴걸이 고함을 내질렸다. 나천웅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 초식은 조금 전 당신이 파양오귀를 상대로 전개했지 않소? 그때 내가 한 번 보고 익힌 것 뿐이요." "뭐…… 뭣이?" 남천괴걸이 흠칫 놀라며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곧 이어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클클대며 빈정거렸다. "흐흐흣…… 그럼, 자네는 무척이나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 났군……!" "보통이요." 나천웅은 그의 야유에도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응수했다. 그러자 화가 극도로 치민 남천괴걸이 안색을 싸늘하게 굳히며 냉막하게 쏘아붙였다. "애송이놈, 노부에게 말도 안되는 터무니없는 농담을 씨부리다니……!" "하하하…… 양대인, 믿고 안믿고는 당신 자유니까 소생은 더 이상 변명은 않겠소." 이때 남천괴걸이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좋다. 네놈이 그렇게 말한다면 네놈의 실력 또한 보통이 아니겠구나." 하며 짐짓 그의 실력을 인정해 주는 척했다. 이어, 두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그럼 어디 나의 공격을 받아보거라!"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왼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금룡회천(金龍回天)!" 우우웅! 남천괴걸이 자신의 독문장법인 금룡장을 전개한 것이다. 순간 노도와 같은 잠력이 나천웅을 향해 물샐틈 없이 밀려들었다. 고오오! 나천웅은 남천괴걸의 공격이 매서운 것을 보고는 약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겉으로는 여전히 태연한 척하며 침착하게 대처했다. 그는 재빨리 곤륜파의 비운십팔장(飛雲十八掌)을 전개해 금룡회천에 맞섰다. 다음 순간 남천괴걸이 싸늘한 냉소를 날렸다. "어린 놈! 어디 이것을 받아봐라!" 그는 말을 뱉아냄과 동시에 오른손에 들고 있던 천구신봉(天狗神棒)을 기이하게 휘둘렀다. 일순 그가 휘두르는 천구신봉에서 기이한 향기가 발해지는 것이었다. 같은 시각 나천웅의 눈에는 수백 수천의 봉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어! 이거 보통이 아니구나……' 나천웅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허나 남천괴걸의 천구신봉은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 붙으며 그의 전신을 노리고 공격해 오는 것이 아닌가? 나천웅은 대경실색했다. '아! 이거 안되겠다. 상대를 얕보았다가는 내가 먼저 당하겠구나……' 내심 이렇게 생각을 굴린 그는 황급히 금라천현보(金羅天玄步)를 전개했다. 순간 삽시간에 그의 신형이 수십개로 나뉘어졌다. 남천괴걸이 기겁을 하며 황망히 천구신봉을 회수하려 했다. 순간 나천웅이 번개같이 남천괴걸에게 접근하더니 이어 왼손에 들고 있던 보자기에 싸인 검을 휘둘러댔다. "태극혜성!" 나천웅은 드디어 태극혜성(太極慧星)을 전개한 것이다. 무섭도록 강렬한 한 줄기 빛이 번뜩였다. 번쩍! 태극혜성은 바로 대라삼검(大羅三劍) 중 제 일초였다. 이것은 무당의 원조(元祖)인 천무진인 장삼봉이 남긴 단 삼초의 검법 중 제 일초인 것이다. 찰나지간 남천괴걸은 정신이 아찔함을 느꼈다. '헛!' 그는 재빨리 수중의 천구신봉을 전력으로 휘두르며 나천웅의 공세를 차단시켰다. 파파파--- 팍! 검(劍)과 봉(棒)이 부딪히며 둔탁한 마찰음이 울려퍼졌다. '우욱!' 남천괴걸은 손아귀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경악의 눈으로 나천웅을 응시했다. "네…… 네놈이 쓴 검법은 무엇이냐?" "하하핫…… 왜 이제 좀 가슴이 뜨끔하오?" 침중한 안색의 남천괴걸은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입술을 떼었다. "너의 그 검법은 무당의 독문절기인 태청검법(太淸劍法)과 비슷하다. 너는 무당의 제자냐?" 순간 나천웅은 흠칫 놀랐다. 태청검법---! 이 검법은 비전 무예였다. 때문에 이것은 장문인이나 장로급 이외에는 익힐 수 없는 것이었다. 원래 무당에는 최고의 무공인 대라검법이 있었다. 허나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실전되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부터 약 수백 년 전이었다. 무당의 오대 장문인인 태청도장(太淸道長)은 자신이 어렴풋이 알고 있는 대라검법의 구결을 기초로 하여 모두 십이초의 검법을 창안해 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태청검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태청검법과 대라검법은 어떻게 보면 서로 상통하는 면이 있는 것이다. 허나 실상 태청검법의 위력은 대라검법에 비해 실로 십 중 삼사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천웅이 호방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역시 양대협의 혜안(慧眼)은 놀랍소이다. 소생은 바로 무당의 제자요." "정천(丁天)의 제자냐?" 남천괴걸이 다시 물었다. 나천웅은 씩! 웃어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분명 무위(無爲), 무진(無盡), 무회(無懷)의 세 장로 중 한 명의 제자가 틀림없겠군!" 남천괴걸이 뻔하다는 듯이 뇌까렸다. "으하하하…… 양대협 당신은 반밖에 맞추지 못했소." 나천웅이 껄껄거리며 나머지 말을 뱉아냈다. "무자 돌림의 세 분은 바로 나의 사형이오!" "뭐…… 뭐라고?" 나천웅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남천괴걸의 안색이 급변하였다. "그…… 그렇다면 자네는 바로 학노선배의 제자란 말인가?" 남천괴걸이 흥분된 어조로 질문했다. 나천웅이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순 남천괴걸의 얼굴에는 온통 격동의 빛이 떠오르고 이었다. "오! 이럴 수가…… 이런 실수가 있나……? 이제보니 자네가 바로 나…… 나현제였군……!" 이때 나천웅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찌 저의 이름을……?" 그가 어리둥절하며 되물었다. "자네는 모르고 있지만 실상 노부는 자네가 천무전에 있을 당시 무당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제, 남천괴걸은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듯했다. "그때, 학사숙을 뵙고 자네에 대한 말을 들었다네." 그제서야 나천웅은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양…… 대협……" 이때 남천괴걸이 나천웅의 양손을 꽉 잡아 쥐었다. "이 사람아! 자네와 나의 배분은 똑같은데 어찌 대협이니 어쩌니 할 수 있나?" 이렇게 말하는 남천괴걸의 못생긴 얼굴에는 하나 가득 인자한 미소가 떠올려지고 있었다. 나천웅은 그의 그러한 모습을 대하며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양형님……!" 그는 그만 그렇게 부르고 말았다. "하하하…… 그렇지, 그래…… 이제야 아우답군……" 남천괴걸은 호방한 웃음을 터뜨리며 나천웅을 잡은 손에 더욱 더 힘을 주었다. 이윽고 서로 마주보는 두 노소. 그들의 눈길이 맞부딪치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처음 만난 사이이고 나이 차이가 심했지만 마치 오래 정들었던 형제와도 같은 느낌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었다. 지금 그들의 가슴 속에서는 뜨거운 무엇인가가 치밀고 있었다. * * * 남창(南昌)의 중심에 위치한 어느 객잔,


그 객잔 안, 구석진 곳에는 세 명의 인물이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담소를 나누며 음식을 들고 있었다. 탁자의 왼편으로는 한 명의 준수하게 생긴 백의청년이 앉아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누더기같은 옷을 걸친 삐쩍 마른 노개가 앉아 있었다. 그 노개는 흡사 아귀처럼 정신없이 음식을 먹어댔다. 그리고, 그 노개의 옆에는 전신에 청의를 걸친 무척 아름다운 소녀가 다소곳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누구인가? 말할 것도 없이 나천웅과 남천괴걸의 일행이었다. 그들은 곧장 이곳으로 들어와 주린 배를 채우는 중이었다. 이때, 남천괴걸이 손에 들었던 술잔을 목구멍에 털어 부었다. "크--- 윽!" 그는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는 빈잔을 나천웅 앞으로 내밀었다. "현제, 정말 반갑네. 자, 한 잔 들게나!" 그는 술잔이 가득 넘치도록 술을 부어주었다. "자네에 대한 말은 무당산에 머무르는 동안 학사숙으로부터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었지……" 나천웅은 묵묵히 술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남천괴걸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계속 이어갔다. "허허허…… 당시 노부는 사숙의 말이 너무 과장된게 아닌가 싶었네. 헌데 지금 막상 현제를 대해보니 오히려 당시 사숙의 말씀이 조금 부족한 것 같이 느껴지는군……" 그의 과찬에 나천웅이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양형님, 너무 소제를 부추기지 마십시오. 그것은 소제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이 우형은 결코 남을 헛되게 칭찬하는 사람은 아닐세." 나천웅의 겸손한 말에 남천괴걸이 손을 내저으며 말을 뱉아냈다. "확실히 자네는 이 우형의 평생 처음보는 기재(奇才)일세. 아마 동해(東海)의 그 글선생이 보아도 자네에게만은 굴복할 걸세. 허허허……" 그는 흡족한 듯이 계속해서 웃음을 흘려냈다. 그러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청의소녀를 바라보았다. "참, 아이야, 이때까지 노부는 너의 이름도 묻지 못했구나." 그러자, 묵묵히 음식을 들고 있던 청의소녀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소녀는 단혜미(段慧美)라 하옵니다……" 그녀의 낮은 목소리는 맑고 청아했다. "단혜미라…… 허허허…… 생긴 그대로 무척이나 아름다운 이름이구나……" 남천괴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자 청의소녀 즉, 단혜미가 부끄러운 듯 나천웅을 힐끗 바라보며 양쪽 뺨을 붉게 물들였다. 이때 나천웅이 청의소녀를 응시하며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단낭자, 아까 듣자하니…… 낭자의 부친께서는 자의신검 단지현이라는 것 같던데……?" 순간 단혜미의 미간에 갑자기 어두운 그늘이 서렸다. 그녀는 가벼운 한숨을 흘려내며 말문을 열었다. "네…… 확실히 부친의 별호는 자의신검이옵니다." 나천웅은 내심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허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은 채 담담하게 말을 뱉아냈다. "그분의 별호에 신검(神劍)이란 말이 들어간 것을 보니 부친께서는 무척이나 검에 대해 조예가 깊으신 모양이구려."


그의 말에 단혜미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버님의 무공 실력은 소녀도 자세히 알지는 못해요. 단지 남못지 않게 하신다는 정도 외에는……" 그러자 남천괴걸이 무척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단혜미를 응시했다. "헌데 너는 어쩌다가 파양오귀에게 쫓기게 되었느냐?" 그의 물음에 단혜미는 아까의 끔찍했던 상황이 다시 떠올랐는지 전신에 한 차례 여린 경련이 일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복잡한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원래…… 저의 아버님께서는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대단히 인자하시고 가정에 충실하셨습니다. 헌데…… 삼 년 전……" 잠시 말을 끊은 그녀의 입에서는 가벼운 탄식이 새어 나왔다. "어떤 일로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신 이후로는 갑자기 성격이 돌변하셨습니다." "성격이 변하다니?" 남천괴걸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네…… 전에 없이 냉혹하고 싸늘하게 변하셨지요. 도저히 예전의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나천웅은 바짝 긴장한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요즘 들어서는 저희 장원에 저로서는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가 흉악한 모습이었지요. 저는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더 제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해 애착을 잃어갔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어두운 표정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결국…… 그래서 저는 저희 집을 나오게 된 것이예요. 그러다가 우연히 파양오귀를 만나……"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남천괴걸이 혀를 끌끌 찼다. "쯧쯧…… 그렇다고 집을 나오면 되나?" 단혜미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아무튼 일이 이렇게 됐으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서 부친께 깊이 사과하도록 하거라." 남천괴걸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를 타일렀다. 그러자 돌연 단혜미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저…… 저는 집에 가기가 싫어요! 무…… 무섭단 말이예요." 그녀를 바라보며 남천괴걸이 난처한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허…… 참……!" 바로 이때, 나천웅의 뇌리 속으로는 문득 기이한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자의신검이 진정으로 천마십이성이 중원에 보낸 십 인의 고수 중 한 명이라면 노운량이 말한 것과 약간 부합된 것이 있다……' 그는 내심으로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으…… 음! 아무래도 이 일은 신중하게 조사를 해봐야 되겠구나……!' 모든 것이 고요히 잠든 적막한 밤이었다. 삼라만상은 온통 칠흑의 어둠에 뒤덮인 채 어느 것 하나 깨어 있는 것이 없었다. 스슷…… 어느 한순간 그 어둠을 흔들며 한 인영이 소리없이 나타났다. 그자의 몸놀림은 흡사 유령과도 같았다. 나타난 인영은 어떤 높은 전각 위에 가볍게 내려서는 것이었다. 그 인영은 조심스레 주위를 훑어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으…… 음, 이곳이 분명 자의신검의 장원이 틀림 없으렷다……!" 그 인영은 전신에 백의를 걸치고 있었다. 헌데, 그 자의 용모는 대단히 추해보이는 모습이었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에 눈썹은 듬성듬성 빠져 있었으며, 코 또한 마음대로 주물러서 만든 듯한 주먹코였다. 그는 바로 다름아닌 나천웅인 것이다. 그가 인피면구를 써 약간의 변장을 한 것이었다. 나천웅은 발로 땅을 살짝 박찼다. 다음 순간 그는 전각 아래로 한 잎의 낙엽인 양 가볍게 내려섰다. 조심스레 전각 앞으로 다가선 나천웅은 흡사 연기같이 한 창문 사이로 들어갔다. 스스스…… 전각 안은 지척을 분간키 어려울 정도로 캄캄했다. 허나, 내공이 뛰어난 나천웅은 마치 대낮같이 훤히 보이는 것이었다. 그곳은 하나의 서재였다. 사방으로는 빙 둘러 많은 책들이 꽂혀있었다. "으…… 음, 이곳이 진짜 단지현의 서재라면…… 어쩌면 천마십이성과의 관계를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이 떠오른 그는 천천히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때, 그의 눈에 하나의 문갑이 들어왔다. 그 문갑은 검은 옻을 입힌 듯 전체가 모두 검은 빛이었다. 그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히 연륜이 오래된 것 같았다. 나천웅은 서서히 그 문갑 앞으로 다가갔다. 이어 그는 문갑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순간, "응?" 나천웅이 한소리 탄성을 발해냈다. 그곳에는 몇 개의 서찰이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나천웅은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그는 재빨리 그 중에서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가 서둘러 그것을 펼치자,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팔(八)호가 금사표국의 표차를 공격해 보았지만 그곳에 있는 것은 한 개의 비화주였소. 불행히도 그것은 마가천의 눈이 아니었소. 아무래도 다시 계획을 짜야할 것 같소. 오(五).> 나천웅은 그것을 읽어보며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오…… 음, 과연 자의신검 단지현은 천마십이성의 한 수하였구나……!" 그는 그것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까지의 일로 미루어 본다면 팔(八)은 분명 금환신필 노운량이로군…… 헌데 오(五)는 대체 누구일까?" 나천웅은 의혹을 느끼며 다음 서찰을 뜯어보았다. <금검보주(金劍堡主) 설운청(薛雲淸)이 요즘 자신의 딸을 걸고 비무대회를 열려고 하고 있소. 헌데 그자가 그때 상품으로 내건 구슬이 수상하오. 그것이 아무래도 마가천의 눈과 흡사한 것 같소. 그러니 육(六)호와 연락을 취해서 그것을 탈취할 방도를 꾸며보시오. 사(四).> 서찰을 읽고 난 나천웅은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금검보주가 마가천의 눈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그 순간, 나천웅은 긴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금검보(金劍堡)를 찾아 그 연유를 살펴봐야 겠구나……?" 내심 결심을 굳힌 그는 마지막에 놓여 있는 서찰을 집어 들었다. 그곳에는 또한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팔호는 이미 쓸모가 없어서 내가 해치웠소. 헌데 아무래도 팔호를 꺾은 그 백의청년이 마음에 걸리오.


그자는 앞으로 우리 일에 큰 장애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드오. 허나, 다른 일은 젖혀 두고 우선 그자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제거하시오. 이(二).> 순간 나천웅은 가슴이 섬뜩해왔다. "이제보니 금환신필을 죽인 자는 열 명의 고수 중 두 번째였군……!" 그 서찰을 읽어보며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자가 나를 제거하겠다고……?" 나천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세 통의 서찰들을 모두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이어 그는 그곳을 나가려고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 찰나, 우연히도 그의 눈에 서재 한 구석에 있는 조그만 문이 들어왔다. 그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문에 손을 대보자 그것은 의외로 쉽게 열렸다. 스륵…… 그는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하나의 좁은 통로가 나타났다. 나천웅은 그 통로를 따라 계속 걸어가 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덧 그 좁은 통로는 끝이 났다. 헌데 그곳에는 또 하나의 문이 나타나 있었다. 나천웅은 갈 수록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 앞으로 다가가 그 문을 열어보았다. 그 문 역시 쉽게 열렸다. 그는 조용히 그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그때 그의 코 끝에 기이한 향기가 풍겨져왔다. "응?" 나천웅은 흠칫 놀라며 슬쩍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곳은 하나의 화려한 침실이었다. 한쪽 구석으로는 침상이 놓여 있었으며 그 앞으로 길게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휘장이 분홍빛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이곳은 어느 여인의 규방인 듯했다. 나천웅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단지현의 서재의 문이 여자의 방으로 통해 있었다니……" 바로 이때였다. 어디선가 청아한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꽤나 대담하군요! 감히 이곳에 들어오다니……!" 제 15 장 千面妖姬 나천웅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한 명의 여인이 서 있었다. 약 삼십 정도로 보이는 소부였다. 전신에 궁장(宮裝)차림을 한 그녀는 대단히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계란처럼 갸름한 얼굴에 날선 칼날과도 같이 오똑 솟은 코, 그 아래 도톰하고 붉은 입술, 불룩하게 솟은 앞가슴과 날씬하게 쭉 곧은 몸매는 마치 옥을 다듬어 놓은 듯했다. 그러나 두 눈에 촉촉하게 물기가 흐르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음탕해 보였다. 이때,


나천웅의 얼굴을 바라본 그녀의 눈살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이 남자의 뒷모습은 대단히 헌출한데 의외로 얼굴은 추악하기 그지 없구나……!' 궁장여인은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며 나천웅의 이모저모를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무엇을 발견했는지 교갈을 터뜨렸다. "호호호…… 이제 보니 당신은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군요." 나천웅은 내심 흠칫 놀랐다. '이 여인의 안력은 보통이 아니구나! 금환신필조차도 눈치채지 못한 나의 인피면구를 알아보다니……' 그러나 그는 겉으로는 의아하다는 듯이 오히려 되물었다. "부인,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변장을 했다니……?" "호호호…… 당신은 꽤나 태연한 척을 잘 하시는군요. 허나 당신은 한 가지 모르고 계시는 것이 있죠." "아니……? 모르는 것이라니……?" 궁장여인은 계속해서 교갈을 터뜨리며 자신만만하게 응수해 왔다.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변장에 있어서는 상당한 일가견이 있다는 것을 알아두셔야 해요." "……" "호호호…… 공자, 어서 그 면구를 벗어 보시지요." 궁장여인은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에 교태를 담고 지그시 나천웅을 바라보았다. 나천웅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망설임 없이 안면의 인피면구를 벗어 내렸다. 순간 그의 준수한 얼굴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나천웅의 진면목을 바라본 궁장여인의 두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그녀의 그러한 눈에는 찰나적으로 감탄의 빛이 스치고 있었다. "정말…… 예상 밖이로군요. 괜찮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미남일 줄이야……!" 궁장여인은 나천웅의 용모에 실로 감탄한 듯 찬사를 발해냈다. 하기야 천하의 그 어느 여인이 나천웅의 용모에 반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때, 나천웅의 준수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부인, 나도 면구를 벗었으니 이제 부인의 정체도 밝히시오. 부인은 자의신검과 어떤 관계요?" 궁장여인의 눈빛이 야릇하게 변했다. "호호호…… 당신은 내가 그와 어떤 사이라고 생각되나요?" 그녀는 눈가에서 교태로움을 지우지 않은 채 오히려 질문을 해왔다. 나천웅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을 뱉아냈다. "글쎄올시다…… 부인이 말하지 않는 이상 내가 그것을 어찌 알겠소?" 문득, 그녀가 입가에 고혹적인 미소를 떠올린 채 입술을 열었다. "당신은 내가 그의 첩이라면 믿을 수 있나요?" "……?" "어때요? 믿을 수 있겠나요?" 그녀의 계속된 질문이었다. 나천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 "만약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다면 믿을런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지금은?" 그녀는 나천웅을 빤히 주시하며 다그쳤다. "좀 믿기가 어렵소." "그 이유는?"


"부인의 성격으로 봐서 남의 첩 정도에 만족할 여인이 아닌 듯싶기 때문이오." 순간 궁장여인은 까르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당신은 꽤나 생각이 깊군요." 이렇게 말을 뱉아낸 궁장여인은 눈웃음을 치며 나천웅에게로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었다. 매우 교태스러운 몸짓이었다. 나천웅이 얼굴을 굳히며 그녀를 저지시키려 했다. "멈추시오!" 냉막한 음성이었다. 허나 궁장여인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왜…… 제가 두려운가요?" 그녀는 야릇한 콧소리로 물어왔다. 순간 나천웅은 약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내가 묻고 싶은 것이오. 당신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두렵지도 않소?" 그는 되물어 보며 슬쩍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그녀는 깜짝하지 않은 채 계속 다가오는 것이었다. "호호호…… 저도 나름대로의 안목이 있어요. 나의 안목으로 봐서 당신은 결코 모르는 사람에게 손을 쓸 분이 아니예요?" 궁장여인은 자만에 가득찬 어조로 뇌까리며 더욱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과…… 과연 그럴까요?" 그녀가 또 한차례 요란스런 교갈을 터뜨렸다. "호호호…… 저는 자신의 안목을 누구보다도 믿고 있어요." 이미 그녀는 나천웅의 바로 코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궁장여인이 가까이 다가오자, 아까의 그 기이한 향내가 점점 짙어졌다. 순간 나천웅은 머리가 약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는 뒤로 주춤 물러나며 싸늘한 어조로 내뱉았다. "당신은 자신의 실력을 너무 믿고 있군!" 궁장여인은 요염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 그녀의 요란스런 웃음소리에 나천웅은 머리 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짐을 느꼈다. "잘 생긴 공자님! 당신은 이미 나에게 당했어요." "……?" 나천웅은 무슨 영문인지를 몰랐다. '당하다니……?' "당신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천면요희(千面妖姬)의 미향분(迷香粉)을 맡은 이상 당신은 이미 나에게 진거예요." 나천웅은 흠칫 놀랐다. "천면요희……? 미향분……?" '아니……? 그렇다면…… 아까 그 향내는……' 나천웅은 내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자칭 천면요희라 지칭한 궁장여인이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떠올렸다. "귀여운 동생…… 지금부터 이 누님이 좋은 것을 보여 주지……" 그녀는 스스럼없이 나천웅에게 동생이란 호칭을 사용하며 한 걸음 다가섰다. "무슨 짓을……?" 나천웅은 기겁을 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때 그는 갑자기 자신의 단전(丹田)에서 한 가닥 뜨거운 기운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순간 나천웅은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아뿔사! 내가 암수(暗手)에 걸렸구나……!' 곧 바로 뜨거운 기운은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동시에 기이한 욕정이 활화산 같은 기세로 치밀어 오르는 것이 아닌가? 나천웅은 대경실색했다. "이…… 이제보니 당신은 춘약을……?" 당황한 그가 노성으로 외쳐댔다. "호호호…… 맞았어요. 호호호……" 그녀가 전신을 흔들어대며 교태스럽게 웃어댔다. 그러자, 그녀의 풍만한 젖무덤이 여리게 물결쳤다. "동생! 너무 화내지 말아요. 그래보았자 이미 때는 늦었어요. 미향분에 걸린 이상 그대는 이미 나의 포로예요." 일순 나천웅의 눈에서 살기가 뻗쳤다. "요부! 그것이 너의 뜻대로 쉽게 될 것 같으냐?" 허나, 천면요희는 두 눈에 음탕한 빛을 띄운 채로 요염하게 웃어댔다. "호호호호…… 천하에서 아무리 굳센 남자라도 미향분의 기운을 절대로 이길 수가 없어요." "흥! 하지만 나는 좀 다를 것이다!" 나천웅은 차가운 코웃음을 뱉아냄과 동시에 왼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는 곧장 천면요희의 완맥(院脈)을 잡아채려 했다. 허나, "호호호호호……" 그녀가 가소롭다는 듯 교소를 터뜨리며 가볍게 피해내는 것이었다. 나천웅은 내심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여인의 실력은 실로 보통이 아니구나! 금환신필 노운량에 비교해도 한 단계 위겠는걸……' 그가 이렇게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였다. 천면요희가 다시 풍만한 가슴을 흔들어대며 입술을 움직였다. "자, 동생! 싸움은 그만하고 우리 서로 즐겁게 놀아보는 것이 어때요?" "닥쳐라! 요부!" 나천웅이 호통을 내지름과 동시에 오른손을 쭉 뻗쳐냈다. 순간 그의 손에서 매서운 경풍이 쏟아져 나왔다. 쌔애액! "앗!" 흠칫 놀란 천면요희가 황급히 몸을 피해냈다. 다행히 그녀는 나천웅의 장력을 간신히 피해낼 수 있었다. "어디 다시 한 번 받아 보거라!" 나천웅이 싸늘한 음성으로 호통을 발해냈다. 동시에 그의 왼손이 기이하게 움직이며 가볍게 피해내는 것이었다. 이어 그녀의 입에서는 갑자기 야릇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호호호…… 동생이 아무리 안달을 해도 이미 그대는 내 수중의 물건이야!" 천면요희는 계속해서 요란스럽게 웃어대며 전신을 묘하게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 걸치고 있던 옷이 스르르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앗!" 너무도 급작스런 사태에 나천웅은 대경실색했다. 찰나간에 천면요희의 전신에 걸쳐졌던 옷은 모두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말았다.


사르륵…… 나천웅의 눈에는 눈부시도록 현란한 여인의 전라(全裸)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그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천면요희의 자태는 너무도 고혹적이었다. 터질 듯이 풍만하게 솟아 출렁거리는 두 개의 젖무덤, 그 위에 수줍은 듯 자리한 신비스러운 두 알의 신선과(神仙果). 휘어질 듯이 오목한 허리며 갑자기 굵어지는 둔부의 곡선은 마치 하나의 예술품과도 같았다. 또한 윤기 흐르며 팽팽한 아랫배, 그 밑으로 백설같이 새하얀 허벅지가 반듯하게 뻗어 있었다. 더구나, 그 사이에 깊숙한 비밀의 문까지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나천웅은 두 눈이 어지러워지며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그로서는 난생 처음 대하는 여인의 전라가 아닌가? 그는 정신이 흐릿해지며 갑자기 몽롱한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그의 몸이 빠른 속도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나천웅의 호흡은 마구 가빠지고 있었다. 천면요희는 그러한 그를 주시하며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녀는 전신을 비비꼬며 나천웅에게로 다가왔다. 그러자 탐욕스럽도록 풍만한 그녀의 젖가슴이 율동에 따라 더욱 크게 출렁거렸다. 너무도 뇌살적인 광경이었다. 나천웅의 전신은 마구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는 그만 그녀의 선정적인 자태에 이성을 잃고 있었다. 드디어 천면요희는 나천웅의 코 끝까지 다가왔다. 나천웅은 가쁜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다음 순간, 그녀의 가느다란 두 팔이 나천웅의 목을 휘어 감았다. 부드럽고도 야릇한 촉감이 나천웅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천웅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떤 뜨거운 물체가 그의 정신을 온통 휘감아 버리는 것이었으니…… 나천웅은 더 이상 충동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찰나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천면요희의 허리를 와락! 껴안고 말았다. "으…… 음……" 그녀가 나천웅에게 전신을 내맡길 듯 기대오며 야릇한 콧소리를 발해냈다. 실로 매끄러운 여인의 피부였다. 또한, 탄력있고 뭉클한 젖가슴의 감촉이 나천웅의 장삼을 통해 느껴져 왔다. 충동을 이기지 못한 그는 그만 천면요희의 입술을 덮쳤다. 순간 촉촉한 느낌이 그의 입술에 전해지며 달콤한 액체가 입 속으로 하나 가득 들어왔다. 나천웅의 목을 휘어감은 그녀가 불타듯이 뜨거운 입김을 불어내며 더욱 더 그에게 밀착되어왔다. "으음!" 이제 나천웅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계속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신없이 천면요희의 몸을 더듬었다. 천면요희는 두 눈 가득 춘색(春色)을 띄운 채로 더욱 나천웅의 품속으로 파고 들었다. "으…… 으…… 으……" 비음을 흘려내는 천면요희의 손은 어느새 나천웅의 겉옷을 벗기고 있었다. 바로 이 순간이었다. 나천웅의 단전에서 갑자기 한 줄기의 청량한 기운이 퍼지는 것이 아닌가? 뒤이어 그는 정신이 약간 맑아짐을 느꼈다. 동시 그의 뇌리에 인자한 사부 학선기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음 순간, "에--- 잇!" 나천웅은 자신도 모르게 양손으로 천면요희를 밀어버렸다. 그녀는 넘어질 듯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도…… 동생…… 왜 그러지?" 천면요희는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어조로 의아한 듯이 물어왔다. 달뜬 그녀의 음성이 겨우 추스르려는 나천웅의 마음을 다시 뒤흔들었다. 그는 춘약(春藥)인 미향분(迷香粉)에 중독되어 있지 않은가? 허나 그는 이를 악물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요부! 더 이상 나를 홀린다면 나의 손속의 매운 맛을 맛보게 해주마!" 나천웅이 냉막한 음성으로 싸늘하게 호통을 쳤다. 순간 천면요희가 두 눈 가득 야릇한 사기(邪氣)를 떠올렸다. "호호호…… 내 예상보다 훨씬 정력이 센 것 같군! 허나, 미향분의 효력에서 벗어나기는 힘들걸……" 그녀는 교태로운 웃음을 흘려냈다. 이어 그녀가 다시 둔부를 가볍게 흔들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덜커덩! 소리와 함께 문이 확 열렸다. "진설(眞雪)! 그만 두시오!" 뒤이어, 약간 침중한 음성이 두 사람의 귀에 울려퍼졌다. 천면요희는 흠칫 놀라며 뒤를 바라다 보았다. 그녀의 뒤에는 어느새 한 명의 자의노인이 서 있었다. 노인의 왼손에는 하나의 긴 검이 들려져 있었다. 이 순간 노인의 두 눈에서는 핏발이 곤두선 채 노기가 서려 무시무시한 광망이 폭사되어 나오고 있었다. 그를 발견한 천면요희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지현……" 자의노인이 싸늘한 눈초리로 천면요희를 바라본 후, 냉막한 음성으로 호통을 쳤다. "도대체 그게 무슨 꼴이오? 어서 옷을 입으시오!" "흥!" 그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천면요희는 가볍게 코웃음을 흘려냈다. 허나 이미 그녀는 흥이 가셨는지 떨어진 옷을 주워 대강 걸쳤다. 바로 그때 자의노인이 핏발이 곤두선 채로 나천웅을 노려보았다. "애송이놈! 네놈은 대체 누구냐?" 그의 냉막한 호통이 쩌렁쩌렁 방 안을 울렸다. 나천웅이 안색을 침중하게 굳힌 채 입술을 움직였다. "당신이 바로 자의신검 단지현이오?" "그렇다! 헌데 네놈은 누구길래 감히 이곳까지 들어왔느냐?" 순간 나천웅의 눈이 묘하게 흔들렸다. 그는 시선을 돌려 힐끗 천면요희를 바라다 보았다. 이어 그는 시선을 단지현에게로 돌린 채 싸늘한 어조로 내뱉았다. "단지현! 당신은 아마도 천마십이성을 기억할 것이오!" 일순 단지현의 안색이 급변했다. "무…… 무엇이……?" 동시에 천면요희의 얼굴도 새하얗게 질려갔다. "후후후…… 과연 찔리는 데가 있긴 있나보군……!"


나천웅이 싸늘하게 비웃음을 날렸다.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듯 단지현이 안색을 가다듬으며 나천웅을 바라다 보았다. "그렇다면 네가 바로 금환신필을 처치한 자칭 귀면수라라는 자로구나!" "후후후…… 바로 맞혔소!" 나천웅이 여유만만한 웃음을 날리며 거침없이 자인했다. 그런 나천웅을 노려보던 단지현의 눈 끝에 찰나적으로 여린 경련이 일고 있었다. 다음 순간 단지현이 왼손의 검을 서서히 치켜올리며 냉막한 음성을 뱉아냈다. "흐흐흐…… 그렇다면 네놈을 절대로 살려둘 수가 없지! 자, 받아랏!"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오른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잡아쥐었다. 찰나, 스르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검이 그대로 검집을 벗어났다. 거의 동시에 무서운 은광이 내뻗치며 예리한 칼날이 나천웅의 전신요혈을 노리며 공격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파아앗! 나천웅은 싸늘히 냉소를 날렸다. "어림 없는 짓!" 그는 앞으로 가볍게 비켜남과 동시에 왼손을 기이하게 휘둘러댔다. 슈슈슉! 허공을 가르는 예리한 파공음이 울려퍼졌다. 지금 이 시각, 무당의 독문장법인 태극십팔장(太極十八掌)이 나천웅에 의해 펼쳐진 것이다. 그것은 순식간에 단지현의 강맹한 공격을 차단시켜 버렸다. 고오오…… 나천웅도 그 여세를 이용해 단지현에게 공격을 가했다. "엇!" 삽시간에 뒤바뀌어 버린 사태에 단지현이 다급한 경악성을 토해냈다. 황망히 놀란 그가 뒤로 급급히 물러나며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너…… 너는 무당의 제자냐?" "그런 것은 알 필요도 없고 또한 알려 줄 수도 없다! 잔소리는 집어 치우고 이것이나 받아랏!" 나천웅이 우렁찬 고함을 발해냄과 동시에 우장을 쭉 뻗쳤다. 그의 우장은 곧장 단지현의 거궐혈(巨闕穴)을 노리며 짓쳐 들어갔다. 쐐애액! 단지현은 그의 날카로운 공세를 피해내며 이를 악물었다. "애송이놈! 과연 듣던 바대로 제법 한 수 할 줄 아는구나!" 그는 말을 뱉아냄과 동시에 들고 있던 검을 휘둘러댔다. 이어 그의 검에서는 실로 무시무시한 광망이 발출되었다. 허나 나천웅은 상체를 약간 구부려 그의 일검을 가볍게 받아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나천웅은 갑자기 자신의 단전에서 다시 뜨거운 기운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진력이 서서히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크…… 큰일났구나!' 나천웅은 내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그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단지현은 그러한 나천웅을 바라보며 안면 가득 희색을 떠올렸다.


"애송아! 죽어랏!" 그는 입가에 잔인한 웃음을 떠올린 채 검을 휘둘러댔다. 무서운 살기가 서린 단지현의 공격이 그대로 나천웅을 향해 몰아쳤다. 나천웅의 안색이 급변했다. '위기다!' 나천웅은 황망히 진력을 끌어 올리며 뒤로 신형을 제꼈다. "흥!" 단지현이 가소롭다는 듯 싸늘한 콧방귀를 날리며 재차 날카로운 검기를 떨쳐냈다. 쐐--- 애--- 액! 살을 저밀 듯이 싸늘한 검기가 나천웅의 미심혈을 섬전같이 베어왔다. 찰나 나천웅은 왼손에 들고 있던 천무진뢰검을 뽑아 들었다. 다음 순간 검은 용의 울음소리를 내며 검신을 드러냈다. 이어, "태극혜성!" 나천웅의 입에서는 한소리 냉막한 호통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꽝--- 꽈르릉! 뇌성 벽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퍼졌다. 찰나지간 상상도 못할 만큼 무서운 검광이 사방으로 난무했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그 누가 그것이 인간이 전개한 검법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순간 단지현은 대경실색했다. 태극혜성의 엄청난 위세에 그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황망히 뒤로 신형을 미끄러뜨렸다. 그는 경황 중에도 수중의 검을 전력으로 휘둘러댔다. 허나 그것은 바위에 대고 계란을 부딪치는 어리석은 항별거였다. 나천웅의 천무진뢰검은 곧바로 단지현이 휘두른 검을 향해 비껴들어 갔다. 천무진뢰검과 단지현의 검이 정면으로 부딪친 순간, 파--- 파--- 파--- 팍! 섬뜩할 만치 무서운 파열음이 울려퍼졌다. 동시에 단지현의 검이 산산조각으로 부숴지고 파편조각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헉!" 단지현의 입에서는 헛바람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안색이 백납처럼 새하얗게 질린 채 혼비백산하는 것이었다. '이…… 이럴 수가……?' 이미 단지현의 손에는 검자루조차 들려 있지 않았다. 그는 젖먹던 힘까지 모두 내어 급급히 뒤로 물러났다. 허나 그것 또한 무모한 짓이었다. 나천웅의 검은 흉사 악마의 이빨처럼 단지현의 면전으로 다가들었다. 다음 찰나, 어느새 다가든 나천웅의 검은 여지없이 단지현의 가슴을 긋고 있었다. 순간, "으--- 아--- 악!" 단지현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갈라진 그의 가슴에서는 한 줄기 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실로 모골이 송연하도록 끔찍한 광경이었다.


단지현의 얼굴은 고통으로 인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양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단지현의 양손은 붉은 선혈로 이미 붉게 물들고 있었다. "으…… 으…… 네…… 네놈이……." 그의 안색은 짙은 잿빛으로 변해져 갔다. 무엇인가 말하려던 그가 갑자기 한차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몸은 이내 썩은 고목처럼 서서히 고꾸라졌다. 쿵! 둔탁한 음향과 함께 단지현의 시신은 피범벅이 되어 바닥으로 나뒹굴어졌다. 바로 그때 나천웅은 갑자기 단전에 모였던 진기가 서서히 새어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내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되겠다! 천면요희의 미향분이 벌써 전신으로 퍼졌구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후일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을 굴린 나천웅이 뒤로 물러서려할 때, "호호호…… 귀면수라! 자의신검을 죽여 놓고 이대로 도망갈 셈인가?" 앙칼진 천면요희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천웅은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천면요희가 얼굴에 하나 가득 찬서리를 드리운 채 나천웅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그러한 천면요희를 바라보며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대는 나를 저지할 생각이오?" 천면요희는 두 눈에 한 가닥 싸늘한 살기를 떠올렸다. "처음 나는 너에게 약간의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허나 지금 네가 단지현을 죽인 이상 나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오뉴월의 서리만큼 싸늘하고 앙칼진 음성이었다. 나천웅은 비웃는 듯한 어조로 빈정거렸다. "후후후…… 아마도 천마십이성의 문책이 두려운 모양이로군……!" 천마요희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허나 그녀는 곧 안색을 가다듬으며 찢어질 듯 앙칼진 음성을 내뱉았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좋다. 허나 절대로 너를 보내줄 수는 없다!" 나천웅이 싸늘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나의 검맛을 보여줘야겠군!"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신형을 날렸다. 이어 곧 바로 천면요희를 향해 공격을 가하려는 찰나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헛!" 나천웅은 그만 공중에 뜬 상태에서 그대로 힘없이 떨어져버린 것이다. 그러한 나천웅의 안색은 놀라울 정도로 창백해져 있었다. 천면요희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그대의 무공은 내 평생 처음 볼 정도로 무서운 것이다. 허나, 그대는 이미 나의 미향분에 중독되었다. 때문에 공력을 쓰면 쓸 수록 그대의 내공은 감소 될 것이다." "죽일 년!" 나천웅이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천면요희는 기이한 웃음을 흘려내며 나천웅을 노려보았다. "자, 이제 네놈도 끝장이다. 내 기필코 단지현의 복수를 해놓고야 말겠다!" 그녀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소맷자락을 휙! 펼쳐냈다.


이어, 백옥같은 양손을 휘둘러대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천웅을 향해 기이한 공격을 퍼부었다. "헉!" 순간 나천웅은 진력을 기울여 간신히 피해냈다. "호호호…… 네가 움직이면 움직일 수록 너의 내공은 감소된다! 허니, 애쓰지 말고 일찌감치 나의 손에 굴복하는 것이 어떠냐?" "닥쳐라! 요부!" 나천웅이 냉갈을 터뜨리며 두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천면요희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흥! 어리석은 놈!" 다음 순간 그녀가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들었다. 일순 나천웅은 갑자기 자신의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천면요희의 손에는 어느새 하나의 긴 채대(彩帶)가 들려 있었는데, 바로 그것에서 오색의 찬란한 빛이 발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다시 싸늘한 음성을 뱉아냈다. "귀면수라! 내 너에게 채대 연혼비술(烟魂秘術)의 위력을 보여주마!"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휘--- 익! 천면요희가 공기를 가르며 채대를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놀라운 솜씨로 채대를 기묘하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러자 긴 채대는 흡사 한 마리의 영사(靈蛇)인 양 혓바닥을 널름거리며 나천웅의 목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으--- 헉!" 절대절명의 순간, 나천웅은 황급히 금라천현보(金羅天玄步)를 전개했다. 간일발(間一髮)! 그는 교묘하게 채대를 벗어날 수가 있었다. 천면요희는 그 순간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채대가 나천웅의 목을 찌르려는 찰나에 돌연 나천웅의 신형이 한 가닥 연기가 되어 사라졌던 것이다. '노…… 놀라운 보법이다……!' 천면요희는 다시 채대를 회수시킨 뒤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몸을 팽그르 돌렸다. 다음 순간 그녀는 더욱 빠르고 기이한 수법으로 채대를 휘둘러댔다. 허나 천면요희의 채대는 계속해서 허공만을 가를 뿐이었다. 휘리리릭! 그녀가 아무리 공격을 가해도 나천웅의 신형은 흡사 한 마리의 나비처럼 천면요희의 채대를 자유자재로 피해내는 것이었다. 금라천현보! 이는 무당의 장삼봉 사조가 심혈을 기울여 창조해 낸 절세(絶世)의 보법이었다. 이 보법은 실로 놀라운 것으로 그 신묘하기가 천하에서 비할 바 없이 으뜸인 것이다. 때문에, 아무리 나천웅의 내공이 격감되었다 해도 그 무엇도 쉽사리 금라천현보의 그물을 뚫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 천면요희의 채대도 결코 나천웅의 금라천현보를 뚫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천웅의 마음은 대단히 조급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피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는 자신의 내공이 점점 더 흩어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그의 눈에 한 줄기 굳건한 의지의 빛의 스쳐갔다. '좋다! 어디 한 번 모험을 해보자!' 나천웅은 내심 이렇게 결심을 굳히며 천면요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를 악문 채로 마구 채대를 휘둘러대고 있었다. 순간, '이때다!' 나천웅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채대를 보며 웬일인지 갑자기 몸을 비틀거렸다. 찰나 천면요희의 약이 올라 붉게 상기되었던 얼굴에 한 가닥 희색이 스쳐갔다. '네놈도 결국엔 지쳤구나……!' 그녀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채대의 끝에 더욱 더 힘을 가했다. 챠--- 르--- 르--- 르! 천면요희의 채대는 순식간에 나천웅의 목을 감아버렸다. "으--- 윽!" 나천웅의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어 그의 안색은 새하얗게 변해갔다. 천면요희가 그러한 나천웅을 바라보며 요란스럽게 웃어댔다. "호호호호…… 귀면수라! 이제야 나 천면요희의 무서움을 알았느냐?" 그녀가 예의 갈라질 듯 앙칼진 음성으로 말을 뱉아내며 채대를 앞으로 잡아 당겼다. 그러자 나천웅의 큼직한 체구는 힘없이 천면요희의 앞으로 끌려갔다. 천면요희의 두 눈에 냉혹한 살기가 내뻗쳤다. "죽어랏!" 그녀가 한소리 호통을 내지름과 동시에 오른손을 쭉 뻗어냈다. 이미 그녀의 손에는 십이성의 진력이 들어가 있었다. 천면요희의 그 손은 정확하게 나천웅의 가슴 앞 거궐혈을 강타하고 말았다. 순간, 퍽! 둔탁한 음향이 울려퍼졌다. 헌데, 실로 상상도 못할 일이 일어났다. 천면요희는 마치 자신의 손이 강철벽을 친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녀는 손 끝이 모두 으스러질 것만 같은 엄청난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아앗!" 천면요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주춤 물러나려 했다. 바로 그 순간, 나천웅의 오른팔이 순식간에 천면요희의 허리를 잡아채버렸다. 휘리릭! "앗!" 천면요희가 놀랄 틈도 없이 나천웅의 팔은 이미 천면요희의 가냘픈 허리를 그대로 죄어버리는 것이었다. 이때 천면요희는 허리가 부숴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 옴을 느꼈다. "으…… 으…… 윽……" 그녀는 전력으로 몸부림을 쳐대며 나천웅의 팔을 벗어나려했다. 그러나 한 번 천면요희의 허리를 옭아맨 나천웅의 오른팔은 마치 태산처럼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다. 그것은 마치 강철의 팔과도 같았다. 나천웅의 눈에는 어느새 무서운 살광이 내뻗치고 있었다. "죽어라! 요녀!"


그는 음침한 음성으로 말을 뱉아내며 오른팔에 전력을 집중시켰다. 순간, 우--- 드--- 드--- 득! 뼈가 으스러지는 섬뜩한 음향이 들려왔다. 동시에, "으--- 아--- 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천면요희의 입에서는 한 줄기의 선혈이 기다랗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으…… 으…… 으……" 나천웅의 팔 안에서 요동을 쳐대던 천면요희는 전신을 바르르 떨더니 곧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녀의 두 눈은 이미 하얗게 뒤집어져 있었다. 나천웅이 오른팔을 힘없이 풀어버렸다. 순간, 툭! 천면요희의 몸은 그대로 스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천웅은 잠시 동안 바닥에 나뒹구는 천면요희의 시신을 바라다 보았다. 천면요희는 두 눈을 허옇게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또한 그녀의 입가로는 아직도 한 줄기의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죽을 당시 요동을 치는 바람에 그녀의 몸에 걸쳐졌던 얇은 나삼은 반쯤 흘러 내려져 있었다. 거의 벗겨진 상태와 다름이 없었다. 때문에 천면요희의 터질 듯이 풍만한 젖가슴이 그대로 나천웅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신비스런 부분 역시 조금 드러나 있는 것이었다. 나천웅이 건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 여인은 죽어서까지 색정(色情)을 풍기는군!" 곧이어 그는 신형을 일으켰다. 나천웅은 내공이 많이 상실된 터라 제대로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그는 힘없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갔다. 바로 이때 그의 귀에 사람들이 몰려 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장주님의 방 안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도대체 누가 장주님의 방 안에 침입을 했단 말인가?" 이내, 나천웅의 앞으로 다섯 명의 장한들이 나타났다. 나천웅은 내심 바짝 긴장한 채 진기를 애써 끌어올리고 있었다. 나타난 장한들은 곧바로 나천웅을 발견했다. 찰나 그들은 흠칫 놀라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네…… 네놈은 누구냐?" 나천웅은 시선을 들어 슬쩍 장한들을 바라본 뒤, 입술을 움직였다. "귀면수라!" 음산하기 그지없는 음성이었다. "귀면수라?" 장한들은 나천웅의 준수한 용모를 바라보며 이상하다는 듯 의혹에 잠긴 눈빛을 반짝였다. 이때 나천웅이 품 속에서 인피면구를 꺼내 뒤집어 썼다. 그러자 그의 용모는 순식간에 추악한 모습으로 뒤바뀌어졌다. 시체처럼 창백한 안색에 눈썹은 듬성듬성 빠져 있어 흉칙한 형상이었다. 또한 제멋대로 울퉁불퉁한 주먹코는 더할 나위 없이 추악했다.


이를 바라본 장한들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 그럼, 네가…… 바로 금환신필 노운량을 죽인 바로 그 귀면수라……?" 장한들의 물음에는 대꾸도 없이 나천웅이 다시 음침한 음성을 흘려냈다. "천하에서 나의 얼굴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오늘 너희들이 나의 진면목을 본 이상 어쩔 수 없이 너희들은 죽어줘야겠다!" 장한들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들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더니 그 중 한 명이 제법 호기스런 음성을 뱉아냈다. "좋다! 네놈의 의도가 정 그렇다면 우리도 그냥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 이어 그자는 장한들을 둘러보며 냉막한 음성으로 호통을 쳤다. "형제들, 쳐랏!" 그의 명령이 떨어진 순간 장한들은 제각기 검을 휘둘러대며 나천웅을 향해 쳐들어왔다. 순간 매서운 검망이 나천웅의 전신을 뒤덮어 버렸다. 허나 나천웅은 손 끝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추호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장한들의 안색에는 웬 떡이냐는 듯 희색이 떠올려지고 있었다. '이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허나 그것은 그들의 착각이었다. 장한들의 무기가 나천웅의 몸에 부딪히는 순간, 차창창! 까강! 요란한 금속성이 진동함과 동시에 그들의 무기가 마치 단단한 강철벽을 친 듯 모조리 튕겨 나가는 것이 아닌가? "앗!" "이…… 이런……!" "세…… 세상에……?" 장한들은 모두 뜻밖의 사태에 혼비백산했다. 그들이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 나천웅의 입에서 냉혹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복마진천!" 바로 대라삼검 중 제 이초가 전개된 것이다. 장한들은 대경실색하며 황망히 뒤로 물러났다. 허나 보잘 것 없는 그들이 어찌 대라삼검의 검망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애초부터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뒤미처, "으악!" "윽!" "카악!" 처절무비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삽시간에 그곳은 아수라장으로 변한 채 엄청난 피보라가 난무했다. 다섯 명의 장한들은 시뻘건 선혈을 흘려내며 사방으로 날아가 떨어져 내렸다. 쿵! 쿵! 털썩…… 순식간에 목숨을 잃은 다섯 명의 시신들이 제멋대로 나뒹굴어졌다. 실로 가공할만한 대라삼검의 검초였다. 장한들이 흘려낸 피는 그곳을 붉게 물들이며 피바다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비릿한 피내음이 진하게 풍겨와 나천웅의 코를 자극했다. 나천웅은 잠시 동안 무심(無心)한 눈빛으로 시체들을 바라다 보았다.


"천마십이성의 중원 침입을 막기 위해서는 어떠한 대가라도 치르어야 한다. 설사 그것이 중원 무림을 혼란속으로 몰아 넣을지라도……" 낮고 침중한 음성이었다. 허나 그의 어조엔 어떤 굳은 결의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이윽고 서서히 신형을 일으킨 나천웅은 걸음을 옮겼다. 밖은 아직도 짙은 어둠이었다. 그의 신형은 이내 칠흑의 어둠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제 16 장 悲運의 情事 교교하게 빛나는 월색(月色)이 칠흑의 어둠을 가르고 대지 위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사위는 적막하기 그지 없었다. 바로 이때, 한 명의 인영이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그는 바로 나천웅이었다. 나천웅은 비록 간신히 단가장(段家莊)을 탈출하기는 했으나 중독된 미향분의 독기는 이미 그의 전신으로 퍼졌던 것이다. 그는 비틀거리며 겨우 몸을 가누고 있었다. 만약, 나천웅이 만년화령지단을 복용치 않았더라면 그는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 나천웅의 신체는 금강불괴지신이다. 따라서 창검은 물론, 여타의 모든 독(毒)이라 할지라도 침범할 수가 없는 것이다. 허나 미향분은 독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춘약이었던 것이다. 천하의 그 어떤 자라도 이 미향분을 들이마신 뒤 여자와 교합을 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심맥(心脈)이 파열되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 때문에, 지금 나천웅도 전신의 혈맥이 모두 터져버릴 듯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도저히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벌써 심맥이 파열되어 죽고 말았을 것이다. 허나 나천웅이 어디 보통의 신체를 지녔던가? 만년화령지단으로 단련된 몸에 내공이 이미 초범입성(超凡入聖)의 경지에 이른 절정고수였으니…… 그렇기 때문에 나천웅은 지금까지도 견디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는 법. 나천웅의 고통은 시시각각으로 가중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천웅은 어느새 그가 묵고 있던 객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객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객점 안은 모두들 잠이 들었는지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나천웅은 서서히 자신이 묵고 있는 방으로 다가갔다. 헌데 자신의 방에는 이상하게도 불이 켜져 있는 것이었다. 나천웅은 아까 밖으로 나가면서 분명히 불을 끄고 나갔던 것이다. 허나 이미 이성을 잃은 그는 그런 것을 깊이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그의 전신은 온통 죄어들 듯 뒤틀려오며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엄습해와 정신까지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나천웅은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았다. 그는 쓰러질 듯 몸을 기대며 자신의 방의 방문을 열어제쳤다. 그 순간, "어머! 공자님!" 방 안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져나왔다. 나천웅은 흠칫 놀랐다.


방 안에는 단혜미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양손에 쟁반을 받쳐든 채 나천웅을 바라다 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내 반가운 눈빛을 띄우며 입술을 열었다. "나공자님, 도대체 어디를 갔다 오신거예요?" 그 순간 그는 이를 악물었다. "단소저! 어서 밖으로 나가시오!" 나천웅이 버럭 큰소리를 내질렀다. 그의 돌연한 태도에 단혜미는 어리둥절해졌다. 이어 그녀가 의아한 듯이 나천웅의 얼굴을 자세히 응시했다. 나천웅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 올라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 아닌가? 그녀는 그러한 나천웅을 바라보며 무슨 영문인지를 알 수가 없어 약간 더듬거리며 조심스레 말을 뱉아냈다. "조금 전에…… 약간의 음식을 만들었는데…… 공자님께 드리기 위해서…… 헌데,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기에 안으로 들어와 본 것 뿐이예요." 나천웅의 흥분은 걷잡을 수 없이 치솟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자, 이내 한 줄기의 선혈이 입가로 흘러내렸다. 나천웅은 단혜미를 노려보며 더욱 큰소리로 고함을 쳤다. "단소저! 무엇하는 것이오? 어서 밖으로 나가라니까?" 그제서야 단혜미는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공자님! 대체 왜 그러시죠?" 그녀는 조심스레 물어보며 조용히 나천웅의 앞으로 다가왔다. 순간 한 줄기 은은한 여인의 체취가 나천웅의 코 끝에 스쳐갔다. 이제 나천웅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미 그의 이성은 사라진 뒤였으니…… 나천웅은 자신도 모르게 단혜미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다음 순간 나천웅의 거친 팔이 단혜미의 허리를 안아버렸다. "어멋!" 단혜미는 너무도 뜻밖인 나천웅의 행동에 자지러질 듯이 놀랐다. "나…… 공자님! 대체……읍!" 그녀의 다음 말은 더 이상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했다. 이미 나천웅의 입술이 단혜미의 보드라운 입술을 덮친 뒤였으니…… 단혜미는 본능적으로 반항을 했다. 허나 그녀의 미약한 힘이 나천웅의 억센 팔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단혜미는 눈물이라도 쏟을 만큼 다급한 심정이었다. 단혜미는 안간힘을 쓰며 양손으로 나천웅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천웅의 몸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나천웅은 더욱 거칠게 그녀를 애무하는 것이었다. 이미 그의 손은 단혜미의 앞가슴을 더듬고 있었다. "고…… 공자님…… 제발……" 단혜미는 거의 애원하다시피 그를 만류하려 했다. 물론 그녀는 나천웅에게 첫눈에 반했으며, 마음깊이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허나,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치고 싶은 사람일망정 이렇게 빼앗기고 싶지는 않은 것이 그녀의 심정이었다. 찌--- 익! 옷자락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앞가슴 옷이 찢겨져 버린 것이다. 재차 그녀의 입에서


절박한 비명이 새어나왔다. 동시 터질 듯이 소담스러운 단혜미의 젖가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천웅은 욕정(慾情)이 활화산(活火山)같이 치솟아 올랐다. "우우……!" 그는 눈까지 붉게 충혈된 채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 약간이나마 남아 있었던 이성의 벽이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던 것이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나천웅은 거칠게 단혜미의 옷을 찢어버렸다. 순식간에 단혜미는 나체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조물주의 예술품인 양 아름답기 그지없는 그녀의 육체가 드러났다. 우유빛의 뽀얀 피부가 불빛 아래 여리게 떨고 있었다. "어흥!" 나천웅은 야수처럼 단혜미의 몸을 덮쳐갔다. 단혜미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반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눈 끝에서는 쉴새없이 이슬 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끝없는 설움이 그대로 이슬로 화해 단혜미의 뺨을 적셨다. 이때, 휘--- 익! 한 줄기의 바람이 스쳐 가물거리는 촛불을 꺼버렸다. 방 안에서는 이내 깜깜한 어둠이 찾아들었다. 어둠! 어둠은 모든 죄악을 덮어버린다. 또한, 그 어떤 아름다움까지도…… 지금 이 객점의 방 안에서는 거친 숨소리와 가냘픈 여인의 신음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한 송이의 어여쁜 꽃이 이 짙은 어둠 속에서 가련하게 꺾여지고 있는 것이었으니…… 다음날 아침, 태양은 다시 떠오르고 대지는 전날과 조금도 다름없이 밝은 광명을 되찾고 있었다. 눈부신 태양빛이 한 방 안의 창문 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그 방 안에는 두 남녀가 깊은 숙면에 빠져들어 있었다. 그들은 지난 밤 격정에 시달렸던 나천웅과 그를 미향분에서 헤어나게 해준 단혜미였다. 비록 강압에 못이겨 꺾여져 버린 꽃송이였으나 단혜미는 엷은 미소를 떠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잠시 후, 나천웅은 창문 틈으로 새어들어온 한 줄기의 빛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전신은 이미 전보다 더욱 더 산뜻하고도 쾌적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흠칫 놀랐다. 자신의 손 끝에 따뜻하고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나천웅은 깜짝 놀라 황급히 옆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놀랍게도 자신의 옆에는 단혜미가 고이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그녀는 전라의 모습이었다. 나천웅은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신형을 일으켰다. "이…… 이런……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 문득 나천웅의 뇌리 속으로 어렴풋이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그럼, 내가 이미…… 단소저를……" 순간, 나천웅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때마침 방 안으로 새어든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단혜미의 나신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몸 군데군데에 생긴 약간의 상처가 나천웅의 시선에 아프게 와서 박혔다. 또한 찢어진 채 흩어져 있는 옷자락…… 특히 그녀의 가장 소중한 부분에 묻어 있는 붉은 선혈 등은 나천웅으로 하여금 모든 하기에 충분했다. "오…… 맙소사…… 이…… 이럴 수가……?" 나천웅은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모든 사태를 깨달은 그는 눈 앞이 아찔했다. 그는 미친 듯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괴로워 하는 것이었다. "내…… 내가……" 그는 자책감이 들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음 순간 나천웅은 이를 악물고 천무진뢰검을 뽑아들었다. "나는 죽어 마땅한…… 놈이다!" 그는 죽음으로써 자신의 실책에 대한 대가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나천웅은 망설임 없이 검 끝을 자신의 목에 갖다댔다. 이어 검으로 목을 찌르려는 찰나, 그의 망막에 인자한 사부 학선기의 모습이 나타났다. -천웅아! 너는 절대 죽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결코 너의 잘못이 아니다. 또한 너는 잊었느냐? 나천웅이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렇다! 천마십이성! 내가 천마십이성을 잊었구나……" 그제서야 이성을 되찾은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천웅은 침중한 표정으로 힘없이 검을 검집에 꽂았다. 이어 그는 멍하니 단혜미의 얼굴을 이때도 단혜미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나천웅은 얼마동안 그렇게 단혜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한 그의 눈에는 안타까움과 괴로운 빛이 역력히 드리워져 있었다. 잠시 후 나천웅이 허탈한 어조로 내뱉았다. "미안하오, 단소저. 허나 결코 당신에게 변명은 하지 않겠소." 잠시 말을 끊은 나천웅의 눈에 한 가닥 의지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모든 것을 끝내는 날, 내 그대 앞에 처분을 맡기리라!" 나천웅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단혜미와 자신이 맺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은 이미 그녀의 부친을 죽인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아닌가? 나천웅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단혜미는 곧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었으나 자신은…… 잠시 후 그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걸쳤다. 그리고는 다시 단혜미의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단낭자, 그대는 결코 나를 사랑해서는 안되오. 아니, 증오해야만 하오. 왜냐하면 나는 원수이기 때문이오!" 나천웅은 침중하게 안색을 굳힌 채 이를 악물었다. 이어 그는 문방사보(文房四寶)를 찾아 단혜미 앞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얼마 후, 나천웅은 그것을 단혜미 옆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잠시 단혜미의 잠든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깊이 잠들어 있는 듯 새근거리며 여린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문득 나천웅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조심스럽게 단혜미의 몸을 덮어주었다.

것을 깨닫게

천마십이성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대의


"가련한…… 여인……!" 그는 진정으로 가슴이 아파왔다. 단혜미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니 그는 차마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허나 나천웅은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어 그는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객점을 벗어난 그의 신형은 어디론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단혜미는 아직까지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입가에 달콤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따갑도록 부신 햇살이 방 안 가득 비쳐 단혜미의 전신 위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 * * 진화(眞華). 복건성(福建省)의 북서(北西)편에 위치한 이 도읍은 복건성 내에서도 몇 손가락에 꼽히는 커다란 성(城)이다. 이 진화의 성문(城門)을 벗어나 다시 북쪽으로 삼십여 리 정도를 가다보면 한 개의 조그맣고도 낡은 사찰이 나타난다. 비록 조그만 절이기는 하지만 옛날에는 수많은 신도들의 발걸음이 한시도 끊이지 않았던 절이었다. 허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제는 이곳도 하나의 폐찰로 변하고 만 것이다. 때는 신시(申時) 무렵, 황혼이 이 고찰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군데군데 허물어진 담장과 기와들…… 뜰 안에 가득 채운 무성한 잡초. 이 모든 것이 석양의 빛을 받아 오는 이의 마음을 더욱 더 스산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때 어디선가 무엇이 다가오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삐그덕! 삐그덕! 가끔가다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속에 섞여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잠시 후, 이 고찰 앞으로 한 대의 낡은 마차가 다가왔다. 그 마차를 모는 사람은 안색이 차디찰 정도로 창백한 한 명의 중년대한이었다. 그 장한은 고찰의 음산한 풍경도 아랑곳없다는 듯이 천천히 마차를 절 안으로 옮기고 있었다. 곧 그 마차는 절 앞에 있는 뜰에 멈추어섰다. 이때 마차 안에서 침중한 음성이 들려왔다. "노이(老二), 주위의 광경은 어떠한가?" 차디찬 중년대한은 슬쩍 주위의 경물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이곳은 낡은 사찰이라 아무도 없는 것 같소." 마차 안에서 음침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흐흐흐…… 그렇다면 더욱 더 잘됐군. 그 북해의 늙은 놈은 꽤나 끈질겼는데 이제서야 완전히 그놈의 눈을 벗어난 셈이군." 마차문이 삐그덕 열리더니 한 명의 회의노인이 나타났다. 약 오십 정도 되었을까? 무척이나 왜소한 체격에 얼굴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할만큼 역겨운 것이었다. 빗자루같이 거칠고도 군데군데 빠진 눈썹, 가느다란 새우눈에서는 교활한 빛이 번득이고 코는 무척이나 날카로와 보이는 매부리코였다. 회의노인은 주위를 훑어보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흐흐흐…… 이곳에서 한 사흘 정도만 묵는다면 그 북령빙군(北嶺氷君) 늙은


폐물도 더 이상 우리의 뒤를 쫓지는 못할 것이다." 차디찬 중년대한은 힐끗 마차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노일(老一)! 어차피 일이란 완전무결할 수록 좋은 것입니다. 우선 그 계집을 꺼낸 다음 저 마차를 숨겨 놓읍시다." 회의노인은 그의 말에 입가로 가느다란 미소를 띄웠다. "훗훗훗…… 과연 백면제갈(白面諸葛)답군. 그토록 용의주도하니…… 나 추면인도(醜面人屠)가 완전히 굴복하는 도리밖에 없군." 무표정한 중년대한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노일께서 그런 말을 하니 이 아우의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소. 아무튼 이번 일은 정말 커다란 성과요. 모든 무림인들을 물리치고 우리가 그 계집을 얻었으니……" 추면인도는 문득 어떤 생각이 났는지 백면제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노이, 나는 아직도 그 소문을 믿을 수가 없다네. 어찌 일개 여아(女兒)의 몸으로 그토록 엄청난 지식을 지니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육십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그런 말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네." 백면제갈의 입술이 약간 씰룩였다. "솔직히 말해서 소제도 처음에는 그 소문을 믿지 않았습니다. 허나 삼 년 전에 소제는 저 계집에게 한 번 크게 당한 적이 있지요. 정말…… 그때는 나의 이 백면제갈이라는 별호가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 "으--- 음, 그 말은 나도 전에 현제에게 한 번 들은 적이 있지." 추면인도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헌데…… 그 계집이 진짜로 사천마경(邪天魔經)의 구결을 외우고 있을까?" "전 무림인들이 저 계집을 빼앗으려는 것도 바로 그 사천마경 때문이지 않습니까? 아마 그 소문은 조금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추면인도는 아직도 이해가 안가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내 듣기로는 그 사천마경은 사도(邪道) 천 년 사상 최고의 마경(魔經)이라고 들었는데 어찌 저 계집은 무공이 그토록 형편없을까?" "하하하…… 노일은 한 가지를 모르고 계시는군요. 형님은 혹시 삼음절맥(三陰絶脈)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계십니까?" 추면인도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삼음절맥을 모르는 사람이 이 세상 어디있나? 헌데 그 삼음절맥과 저 계집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백면제갈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스치며 지나갔다. "제가 듣기로는 바로 저 계집은 선천적으로 삼음절맥을 타고났다 합니다." "뭐…… 뭐라고?" "원래 삼음절맥을 타고난 사람은 머리의 총명함이 천하의 그 누구도 따를 수가 없지요. 허나 하늘의 시새움으로 그것에 걸린 사람은 제대로 십 세를 넘기지 못하지요." "……" "하지만 저 계집의 할아버지인 북령빙군은 무림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우내사기의 일인이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저 계집이 무사한 것이지요." "으--- 음, 어쩐지 이상하다고 여겼더니 과연 그런 비밀이 있었군." 백면제갈은 차디찬 안색을 씰룩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튼…… 어서 저 계집을 마차에서 끌어냅시다. 그리고…… 이곳에서 며칠간 숨어 있으면서 사천마경의 비밀이나 알아냅시다." 추면인도는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무래도 노이의 생각이 가장 좋은 것 같군."


백면제갈은 히죽 웃음을 띄우더니 마차에서 몸을 내렸다. "그 계집은 제가 끌어내리겠습니다." 백면제갈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마차의 문을 거칠게 열어 제쳤다. 탁! 마차의 문이 열리자 그 안의 광경이 자세히 드러났다. 마차의 안은 겉보기와는 달리 상당히 깨끗했다. 헌데 그곳의 한 귀퉁이에는 지금 한 명의 소녀가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 약 십 칠팔 세 정도로 보이는 그 소녀는 안색이 무서울 정도로 창백해서 보는 이의 마음을 섬뜩하게까지 만들었다. 허나 만약 누군가가 자세히 그녀의 얼굴을 뜯어본다면 그 사람은 도저히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할 것이다. 그 소녀의 얼굴은 그 어떤 필설(筆說)로도 설명을 다하지 못할 만큼 실로 미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입 하나, 눈 하나, 심지어는 전신의 모든 부분이 보는 이의 눈을 어지럽게 만들 만큼 그 미모는 대단한 것이었다. 창백한 안색이 그녀의 미모를 가리고 있음에도 그 정도일 때야, 만약 그 소녀의 얼굴이 건강한 혈색을 찾는다면 어떻겠는가? 지금 소녀는 긴 속눈썹을 낮게 드리운 채 무표정한 안색으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이때 백면인도는 마차의 문 안으로 몸을 약간 들이민 채 음침하게 입을 떼었다. "흐흐흐흐…… 설소저, 앙탈은 그만 부리시고 이만 마차 밖으로 나옴이 어떠하오?" 그의 말에 창백한 안색의 소녀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소녀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헌데 기이한 것은 그녀의 눈이었다. 그녀의 두 눈은 마치 한 겨울의 호수처럼 차갑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어떤 표정도 드러나있지는 않았지만 웬일인지 백면제갈은 그 눈과 마주치자마자 가슴 한쪽이 싸늘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으…… 음.' 백면제갈은 내심 큰숨을 들이마셨다. 허나 곧 입가에 억지로 웃음을 띤 채, "흐흐…… 설소저, 아직도 마음이 거슬리나?" 그 말에 창백한 소녀의 눈가에 일말의 비웃음이 보일 듯 말 듯 스치며 지나갔다. 허나 무슨 마음에서인지 그녀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추면인도는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 징그러운 미소를 띄운채 음충맞게 입을 열었다. "과연 주소저는 사태를 잘 판단하는군. 흐흐흐…… 실상 이런 곳에서 쓸데없는 고집을 피워봤자 소용이 없지." "……" 창백한 소녀는 여전히 입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사찰의 법당쪽으로 걸어갔다. 추면인도는 재빨리 그녀의 뒤를 따르며 음흉한 웃음을 날렸다. "흐흐흐…… 소저는 지금 그대의 조부인 북령빙군이 구해주기를 바라고 있겠지만 그것은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오." 추면인도는 법당의 문을 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좀 불편하겠지만 며칠간은 이곳에서 머물러 줘야겠소." "……" 창백한 소녀는 여전히 말이 없는 채 천천히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그들의 뒤에서 백면제갈이 따라오며 큰소리로 입을 떼었다. "노일, 마차는 치웠으니 오늘은 이곳에서 그동안 쌓인 피로나 마음껏 풀어 봅시다." 추면인도는 그에게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낸 채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들은 법당 안으로 모두 들어갔다. 법당 안, 그곳은 이미 컴컴해진 하늘을 따라 칠흑처럼 어두웠다. "노이, 어서 불을 밝히게. 우선 안이나 살펴봐야겠네." "네, 알았습니다." 백면제갈은 품 속에서 화섭자를 꺼내 불을 붙였다. 법당 안은 화섭자의 불로 인해 금방 환하게 밝아졌다. 백면제갈은 법당 안을 두루 살펴보았다. 헌데 무엇을 보았는가? 그의 안색이 돌연 홱 변했다. 추면인도는 그의 기색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곧 그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았다. 순간, "으악!" 하는 탄성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도대체 그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놀라게 만들었는가?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은 바로 석가불의 좌상이 놓여져 있는 아래였다. 지금 그곳에는 낡은 백의를 걸친 사람 한 명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머리를 무릎 사이에 묻고 앉아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허연 먼지가 끼인 채 상당히 헝클어져 있었다. 더욱 기이한 것은, 그의 옆에 놓여진 한 자루의 고검(古劍)이었다. 별로 특징이 없게 생긴 검이었지만 그 검에서는 알게 모르게 기이한 서기가 서리고 있었다. 이때, 백면제갈은 안색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곧 백의인영의 면전에 우뚝 서서는 안색을 싸늘하게 굳힌 채 입을 떼었다. "너는 어떤 자이길래 이런 고찰에서 얼쩡거리고 있느냐?" "……" 백면제갈은 두 눈에 살기를 띤 채 음침하게 물었다. "네놈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백의괴인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허나 그의 입에서는 감정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음성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너희들도 이곳에 왔는데 나라고 오지 못하란 법은 어디 있느냐?" 백면제갈의 안색이 약간 일그러졌다. 옆에서 보고있던 추면인도가 음흉한 미소를 띤 채 물었다. "네놈은 우리가 누군줄 알고 있느냐?" 백의괴인은 여전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너희들이 누구인지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다." 추면인도의 두 눈이 야릇하게 변했다. "흐흐흐…… 이거 뜻밖에 이런 고찰에서 고인을 뵙게 되는군." "……" "네놈은 추면인도, 백면제갈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추면인도의 말에 백의괴인의 입에서 나직한 괴소가 흘러나왔다. "흐흐흐…… 이제보니 광동성(廣東省)에서 사악하고 음흉하기로 이름높은 쌍면이살(雙面二殺)이었군."


너무나도 담담한 그의 태도에 추면인도는 아연실색했다. 그는 도저히 상대의 내심을 추측할 도리가 없었다. '도대체 이놈은 어떤 놈일까?' 이때 백의괴인의 입에서 으시시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쌍면이살! 너희들은 오늘 임자를 잘못 만났다. 원래 나는 너희들의 일에 참견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이제는 입장이 좀 다르다." 백면제갈이 냉소를 쳤다. "네놈도 사천마경을 노리고 이곳으로 온 놈이냐?" "사천마경?" "흥, 모르는 척 하지마라. 천하에서 그 누가 사도 최고의 마경인 그 비급을 모르고 있겠느냐?"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백의괴인은 돌연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핫핫핫핫…… 사천마경인지 뭔지는 내 알 바가 아니다. 나는 그런 것에는 조금도 흥미가 없다. 내가 너희들에게 볼일이 있다는 것은 단지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한 가지 이유?" 백의괴인은 헝클어져 얼굴을 완전히 가린 머리카락 사이로 싸늘한 한광을 내뿜으며 으시시하게 소리쳤다. "쌍면이살! 너희들은 혹시 십여 년 전에 광동성에서 다섯 명의 도인을 죽인 일을 기억하느냐?" 쌍면이살의 안색이 급변했다. "네…… 네놈은 누구냐?" "흐흐흐…… 네놈들이 죽인 그 다섯 도인은 바로 무당의 도인들이었다." 추면인도가 냉갈을 터뜨렸다. "흐흥, 이제보니 네놈은 바로 무당의 잡졸이었구나. 흐흐흐…… 웬놈인가 하고 긴장했더니 겨우 무당 소졸들의 잡귀라니……" 백의괴인의 두 눈에서 의미있는 빛이 나타났다. "너희들은 그 다섯 도인이 나와 어떤 관계인지 아느냐?" "그것을 우리가 어찌 알겠느냐?" "그들은 배분상으로 나의 사숙뻘들이다." "뭐…… 뭐라고……" 잠시 멍청히 백의괴인을 바라보던 쌍면이살. 곧 그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소를 터뜨렸다. "푸핫핫핫…… 네놈이 그들의 사숙이라고…… 하하하……" 잠시 후 웃음을 멈춘 쌍면이살은 두 눈에 비웃음을 담은 채 냉소를 쳤다. "미친 놈, 정말 돌아도 이만저만 돈 것이 아니구나. 그들이 지금 살아있다면 모두 고희가 넘는 자들인데 네가 그들의 사숙뻘이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구나." "너희들이 믿든 안믿든 그것은 내 알바가 아니다. 내가 필요한 것은 단지 하나…… 바로 네놈들의 목 뿐이다!" 쌍면이살의 눈빛이 크게 변했다. 그들은 곧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들은 이재서야 이 괴인이 보통인물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어쩌면 저놈의 말은 모두 사실일지도 모른다. 허나 대체 무당에서 그토록 배분이 높은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들이 알기로 그 정도의 배분을 가진 사람은 무당에서 단 세 명, 바로 무자돌림의 세 도인들이었다. 허나 상대의 모습을 보건대 결코 늙은이는 아니다. 어쩌면 상대는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을 굴린 그들은 안색을 침중하게 굴렸다.


이어 재빨리 백의괴인을 중심으로 해서 양옆으로 나뉘어 섰다. 허나 백의괴인은 여전히 무표정한 채 조금치의 거동도 하지 않았다. 단지 싸늘한 눈빛으로 그들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바로 이때 백면제갈이 음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체 네놈의 이름은 무엇이냐?" 백의괴인이 냉막한 음성을 흘려내는 것이었다. "죽을 놈들이 그런 것은 알아서 무엇하느냐?" 순간 백면제갈의 안색이 분노로 인해 싸늘하게 일그러졌다. "흐흐흐…… 건방진 놈!"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품 속에서 한 자루의 판관필(判官筆)을 꺼내들었다. 그 판관필은 끝이 새파란 것이 분명 독을 묻힌 것 같았다. 다음 찰나, "죽어랏!" 파아앗! 백면제갈이 호통을 내지르며 허공으로 신형을 솟구치는 것이었다. 그 즉시 그는 판관필을 휘두르며 무서운 기세로 백의괴인의 천돌혈을 노리며 짓쳐 들어갔다. 고오오…… 이때에도 백의괴인은 여전히 무표정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허나 백면제갈의 판관필이 그의 몸에 닿으려는 찰나, 백의괴인의 오른손이 무서운 속도로 움직였다. 다음 순간, 탁! 둔탁한 음향이 들려왔다. 그것은 단 한 번의 움직임이었다. 허나 그 간단한 움직임이 백면제갈의 모든 변화를 너무나도 간단히 격퇴시켜버린 것이었다. 백면제갈은 다급한 신음을 내뱉았다. "헉!" 백의괴인이 싸늘한 눈초리로 그를 응시하며 입술을 떼었다. "백면제갈! 너는 오늘 임자를 잘못 만났다!" 그는 냉막하게 말을 뱉아낸 후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이때, 그의 손은 어느새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또한 붉게 변한 그의 오른손 장심에는 동전 정도 크기의 백색 반점이 생겨 눈부신 광채를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저…… 저럴 수가……?" 백면제갈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겁에 질린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었다. 이때, 백의괴인이 음침한 음성을 흘려냈다. "도가(道家) 무학의 정수인 자화공(子火功)과 단원오장(丹元五掌)의 위력을 보여주겠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오른손을 전광석화처럼 휘둘렀다. "단천지혈(丹天之血)!" 순간 무시무시한 열기가 백면제갈을 향해 덮쳐드는 것이었다. 우우웅! 찰나 백면제갈의 안색이 흑빛으로 변했다. 그는 황망히 수중의 판관필을 전력으로 휘둘렀다. 바로 이때 옆에 서 있던 추면인도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호통을 내질렀다. "노이! 위험하다!"


추면인도는 호통을 내지름과 동시에 다급히 백의괴인을 막아섰다. 그 순간, 콰르르륵! 시뻘건 화염과 함께 무시무시한 화기가 소용돌이쳤다. 동시에, "으--- 아--- 악!" "크--- 윽!" 처절한 비명이 잇달아 터져나왔다. 뒤이어 쌍면이살 두 명이 거의 동시에 한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백면제갈은 입에서 한 줄기 피화살을 내품으며 바닥으로 나뒹굴어졌다. 쿵! 둔탁한 음향이 들려왔다. 그의 앞가슴은 완전히 숯처럼 까맣게 변해 있었다. 또한 추면인도는 입가에 한 줄기 선혈을 흘려내며 비틀거린 채 물러서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짙은 잿빛으로 변해 여린 경련이 일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물어왔다. "네…… 네가 쓴 무공은…… 무엇이냐……?" 백의괴인이 냉막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단원오장이다!" 추면인도가 고개를 흔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아니라…… 너의 손바닥 장공을 물어본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화신공이다!" 백의괴인이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한 마디 덧붙여 주었다. "이는 바로 도가의 최고 양강신공(陽剛神功)인 것이다!" "과…… 과연…… 무서운 무공이로다. 내 평생 그토록 무서운 장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추면인도는 말을 하면서도 몹시 고통스러운 듯 안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힐끗 백면제갈의 처참한 시체를 응시하는 그의 입에서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휴…… 한 순간의 물욕을 참지 못하고…… 무림에 나온 것이…… 이런 화를 자초할 줄이야……" 순간, "우--- 웩!" 말을 뱉아내던 추면인도가 붉은 선혈 한 모금을 토해냈다. 이어 그는 전신을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서서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털썩……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백의괴인은 무심한 눈으로 그 시체를 응시했다. 이내 그의 입에서 침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모든 인과(因果)에는 응보(應報)가 있는 법! 너희들의 죽음도 그 이치에 따른 것 뿐이다!" 그의 말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쓰러진 쌍면이살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제 17 장 邪天魔經 잠시 동안 묵묵히 서 있던 백의괴인은 이윽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의 눈에 한 구석에 몸을 기댄 채 서 있는 창백한 소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창백한 미소녀는 쌍면이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백의괴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의괴인은 잠시 그녀를 응시했다. 허나 곧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는 눈길을 거두고 법당을 나서기 시작했다. 이때,


"잠깐!" 창백한 소녀가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백의괴인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시선을 돌려 창백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소?" 창백한 소녀는 백의괴인을 훑어보며 조용히 물었다. "당신은 이대로 그냥 가실 생각인가요?" "그렇소." 창백한 소녀의 눈에 일말의 의혹이 스쳐갔다. "당신은 이슬을 피해 이곳저곳 머무는 신세가 아니던가요?" "낭자의 말은 조금도 틀림이 없소. 허나 일이 이렇게 되어서 이곳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어졌소." 창백한 소녀의 안색이 기이하게 변했다. "당신은 그 외에 또 한 가지를 잊은 것 같군요" "그게 무슨 말이오?" 창백한 소녀는 힐끗 쌍면이살의 시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저들이 왜 나를 잡으려고 했는지 아세요?" 백의괴인의 눈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물론……나는 이곳에 앉아 있으면서 당신들의 대화를 모두 들었소." "헌데 왜 그냥 가려는 거죠? 당신은 내가 지니고 있는 사천마경이 조금도 탐나지 않나요?" 백의괴인의 눈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나는 사천마경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한 알고 싶지도 않소. 허나…… 한 가지, 그것이 아무리 귀한 물건이라 할지라도 내 물건이 아닌 이상에는 내가 그것을 탐낼 이유가 없는 것이오." 창백한 소녀의 눈에 야릇한 빛이 지나갔다. "당신은…… 꽤나 고고하시군요." "그것은 고고하고 않고를 떠나서 나의 신념이오." 백의괴인은 힐끗 창백한 소녀를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낭자께서 더 이상 나에게 볼일이 없다면 나는 그만 가보겠소." 그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당신은 절대 그대로 갈 수가 없어요." 백의괴인은 약간 놀란 듯이 창백한 소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소녀의 창백한 뺨에 찰나적으로 한줄기 홍조가 스쳐갔다. 허나 그녀는 곧 표정을 가다듬고는 백의괴인을 바라보며 말을 시작했다. "당신이 스스로를 대장부라고 자칭한다면 결코 이런 곳에 연약한 여자를 두고 떠나지는 않을 거예요." 백의괴인은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목숨을 살려줬더니 옷까지 내놓으라는 셈이군."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좋아요. 허나…… 반드시 당신은 나를 안전하게 호송해줄 의무가 있어요.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이 일에 끼어들었기 때문이예요." "터무니없는 억지요." "억지라도 좋아요. 하지만 당신은 이것을 알아야해요. 쌍면이살이 비록 흑도의 마두들이기는 하지만 내가 사천마경의 비밀을 털어놓을 때까지는 결코 나를 건드리지는 않았어요." "……" "허나 당신이 그들을 죽인 이 마당에 있어서는 오히려 나의 안전이 전보다 더욱 위협을 받게 된 것이예요." "……"


백의괴인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그는 무엇을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낭자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도 더 이상 할말은 없소. 자, 말해보시오. 대체 어디까지 그대를 호송해주면 되는 것이오?" 창백한 소녀의 눈에 희색이 떠올랐다. "당신은 과연 영웅답군요." "시시껄렁한 칭찬은 그만두고 어서 행선지나 말해보시오." 창백한 소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호호호…… 좋아요. 내가 원하는 곳은 바로 금검보(金劍堡)까지예요." 순간 백의괴인의 눈빛이 확 변했다. "금검보?" "그래요. 바로 금검보까지예요. 헌데…… 당신은 그곳을 알고 있나 보군요?" "아니오. 잠시 어떤 생각이 나서……" 약간 말 끝을 흐린 그는 곧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곳은 별로 좋지 못한 곳이니 어서 나갑시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상대방의 표정도 살피지 않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창백한 소녀의 입가에 의미모를 미소가 지나갔다. 그녀는 곧 그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밖은 이미 어둠으로 덮혀 있었다. 단지 가느다란 초승달만이 어렴풋이 대지를 밝혀주고 있을 뿐이었다. 백의괴인은 자신의 뒤에 소녀가 따라오는지도 확인을 하지 않고 말없이 걸음을 옮겨 놓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백의괴인의 뒤를 따르던 창백한 소녀의 얼굴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의 창백한 안색은 아까보다 더욱 심해져 있었다. 허나 그녀는 여전히 아무말도 하지 않고 백의괴인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이때, "어멋!" 하는 소리와 함께 창백한 소녀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백의괴인은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급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창백한 소녀는 얼굴에 미안한 기색을 가득 띤 채 그를 응시했다. "미…… 미안해요. 허나 다친 것은 아니니까 당신의 걸음을 충분히 따를 수가 있을 거예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허나 그녀는 다시 짧은 비명을 토하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앗!" "조심하시오." 백의괴인은 급히 그녀의 어깨를 잡아 몸을 부축했다. 순간 부드러운 살갗의 감촉에 백의괴인의 손 끝이 약간 떨렸다. 창백한 소녀는 얼굴에 홍조를 띤 채 어쩔 줄을 몰라했다. "자…… 자꾸만 폐를 끼쳐서 미안해요." 그녀의 그런 모습에 백의괴인은 일순 마음 한 구석이 설레어옴을 느꼈다. 허나 그는 곧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는 잠시 창백한 소녀를 응시하더니 무엇을 결심한 듯 등을 뒤로 돌렸다. "보아하니…… 더 이상 걷기는 힘들 것 같소. 허니 낭자만 불편하지 않다면 나의 등에 업히시오." "하…… 하지만……" "무림에서의 남녀관계란 굳이 예절에 구애될 필요가 없는 것이오." 창백한 소녀는 두 눈에 묘한 빛을 띄운 채 백의괴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웬일인지


백의괴인의 등이 천하의 그 어떤 곳보다도 아늑하고 넓어 보였다. '이분은……' 그녀는 수줍은 표정으로 천천히 백의괴인의 등에 업혔다. 백의괴인은 창백한 소녀가 자신의 등에 업히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켜 걷기 시작했다. "……" "……"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창백한 소녀가 백의괴인의 등 뒤에서 조용히 물었다. "당신은 정말 무당파 사람인가요?" "왜, 아까 내가 말한 것이 의심스럽소?" "그런 것이 아니라…… 무당의 인물치고는 당신의 무공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예요." "나는 분명히 무당의 제자요. 그러니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소." "……" 창백한 소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곧 두 눈을 빛내며 물었다. "당신은 사천마경이 어떤 물건인지 아나요?" "모르오." 창백한 소녀의 얼굴에 한 줄기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럼 제가 말씀드리지요. 원래 사천마경은 지금부터 팔백 년 전 정사양대진경(正邪兩大眞經) 중 하나로 불리워진 것이예요." "정사양대진경이라니?" "정사양대진경이란 그 당시 무림에서 가장 강했던 두 명의 정사고인들이 지은 것으로 무림역사상 최고의 비급으로 꼽히는 것이지요." "……" "그 두 가지 비급은 바로 사천마경과 천허경(天虛經)을 말하는 것이예요." 창백한 소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사천마경은 당시 사도의 제왕(帝王)이나 다름이 없었던 사천존인(邪天尊人)이 지은 것이고, 천허경은 한 명의 신비한 도인(道人)이 지은 거예요. 무림인들은 그 도인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천허경에서 따와 보통 천허자(天虛子)라고 칭하죠." 그녀의 말에 백의괴인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렇지…… 옛날 사부님께서는 본문의 삼대장문인이신 창운도장이 천산(天山)에서 우연히 얻은 두 권의 비급 중 하나가 바로 천허경의 일부분이라고 했지.' 대체 이 백의괴인은 누구인가? 그렇다. 그는 말할 것도 없이 바로 나천웅이었다. 천면요희의 미향분에 당해 단혜미와 깊은 관계를 맺은 지도 벌써 보름이란 기간이 흘러갔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나천웅은 이미 단혜미에 대해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 보름 동안 그 폐찰에서 묵으면서 수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쌍면이살과 창백한 소녀를 만난 것이었다. 이때 나천웅의 뇌리에는 계속 몇가지 생각이 스치며 지나갔다. '원래 그 천허경이란 것은 모두가 상중하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했다.' 천허경--이는 바로 팔백 년 전 무림의 최고기인으로 꼽혔던 천허자의 독문비급이다. 그 당시 무림은 사천존인의 천지교(天地敎)에 의해 무척이나 어지러웠다. 바로 그때 나타난 기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천허자인 것이다. 당시 천허자는 무림의 운명을 걸고 사천존인과 일대결투를 벌였다.


하지만 그 결투의 결과는 팔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일종의 미궁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결투 이후, 천허자와 사천존인은 모두가 무림에서 실종되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그 두 고인이 남기고 간 두 권의 비급은 그 후 수백 년을 내려오는 동안 무림에서 수많은 분쟁을 야기시키고 있었다. 천허경--나천웅이 알기로는 이 비급은 모두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었다. 그 첫 번째 부분은 내공편이며, 두 번째 부분은 초식편,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은 경공편이다. 그 중 두 번째 부분은 옛날에 현현자가 얻은 것이다. 그래서 그것에 자신의 무공을 가미시켜 현현경이란 비급을 남긴 것이고, 그것이 다시 창운도장과 학선기의 손을 거쳐 나천웅의 손에 들어온 셈이었다. 단원오장(丹元五掌)! 이 절세의 장법이야말로 바로 저 천허자가 평생에 익힌 무공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천웅은 이 모든 사실을 창백한 소녀의 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는 소녀에게 조용히 물었다. "아까 듣기로 낭자는 이미 사천마경을 얻었다고 했는데……" 소녀의 눈에 웃음이 감돌았다. "네, 그것은 정말 대단한 인연이었어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일 년 전……" 일 년 전. 창백한 소녀, 즉 설하진(薛霞眞)은 우연히 한 명의 꼽추노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꼽추노인은 전신이 피로 물들어 대단히 위험한 상태였었다. 설하진은 북령빙군의 손녀로서 삼음절맥의 신체 때문에 무공은 익히지 못했지만 의술이나 천문지리학 등 기타 잡학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대단한 실력을 쌓고 있었다. 그녀는 꼽추노인의 상처를 보고는 가엾은 생각이 들어 상처를 정성껏 치료해 주었다. 한 달 후, 꼽추노인의 상세는 완전히 치료가 되었다. 꼽추노인은 그녀의 정성에 감복하여 그 대가로 한 권의 비급을 주었다. 그리고는 그곳을 떠나며 한 마디의 말을 덧붙였다. -진아야! 이 비급의 이름은 사천마경이라 한다. 원래 이 비급은 노부가 주인으로 섬기던 어른이 옛날에 우연히 얻은 것이었다. 허나…… 그분은 이 비급을 얻음으로써 성격이 엄청나게 변화하고 말았다. 결국 나의 주인께서는 이 무림을 재패하겠다는 거대한 야망을 품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하늘은 주인을 돕지 않았다. 주인어른의 노력도 헛되어 모든 것은 물거품같이 사라지고 심지어는 주인께서도 목숨을 잃으시고 말았다. 원래 노부는 이 비급을 주인어른의 단 하나밖에 남지않은 손자에게 주려했다. 허나 노부가 주인어른의 집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그분의 손자는 집에 없었다. 아! 아! 노부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 후 열흘이 지난 뒤 한 가지 커다란 결심을 하게 되었다. 진아야! 이 결심은 무림의 엄청난 혈겁(血劫)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노부는 물론 노부의 주인까지도 모두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원래 주인어른은 저 변방의 나습포찰이란 곳에서 중원으로 파견시킨 열 명의 절세고인 중 제 일호였다. 그분도 처음에는 나습포찰에 모든 충성을 바쳤지만 우연히 사천마경을 획득한 뒤로는 그 모든 생각이 없어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분은 나습포찰의 천륭사(天隆寺)에 남은 천마십이성(天魔十二星)이라는 무서운 대마두들을 역으로 이용하려고까지 생각했다……


설하진은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고는 긴 탄식을 내뿜었다. "하지만 그분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지요. 꼽추할아버지가 그 당시 말씀하신 것을 들어보면……" -그것은 주인어른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원래 주인어른은 그분이 최대의 적으로 여기던 오대기인을 죽이기 위해서 노부로 하여금 천 명의 장인을 비밀리에 데려오게끔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 장인들을 이용해서 백옥마궁(白玉魔宮)이라는 무서운 궁을 건축했다. 헌데 바로 그 시기에 천마십이성으로부터 무서운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그 명령이란 바로 주인어른이 데리고 있었던 천 명의 장인들을 나습포찰로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설하진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그 당시 천마십이성은 주인어른이란 분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있었대요. 그래서 그분의 충성심을 마지막으로 시험해 보기 위해 천 명의 장인을 나습포찰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지요." 나천웅은 이미 그녀의 이야기에 흠뻑 젖어들고 있었다. 뜻밖에도 그녀의 입을 통해서 천마십이성에 대한 비밀이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럼 그 주인이란 분은 어떻게 행동했소?" "그분은 결국 그 장인들을 모두 나습포찰로 보냈다는군요. 그분의 야망이 천 명의 장인들 목숨보다 컸다는 이야기지요." "비극이로군." "그렇죠. 그것도 엄청난 비극이지요. 당시 꼽추할아버지는 극력(極力)으로 그 일에 반대를 했지만 결코 주인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는군요." "……" "그렇게 많은 희생을 감수해 가면서까지 꾸민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그것이 바로 하늘의 뜻이요. 사도는 결코 무림을 제패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나천웅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설하진에게 물었다. "헌데, 어째서 그 꼽추노인은 그런 상처를 입게 되었소?" 설하진은 가벼운 탄식을 내뿜었다. "꼽추할아버지는 주인어른이 돌아가시자 그 원한의 화살을 천마십이성에게 돌린 것이지요." "그…… 그럼 그분이 나습포찰을 찾아갔단 말이오?" "네, 바로 그래요." "화약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든 격이군!" 설하진은 무서운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꼽추할아버지는 나습포찰로 들어가 천륭사의 천마십이성에게 도전을 했지요. 허나…… 그분은 천마십이성의 셋째와 삼천 초를 싸운 끝에 간일발의 차이로 패배를 했지요. 결국…… 그분은 전신에 무서운 상처를 입고 나습포찰을 벗어나야만 했던 것이예요." 나천웅은 그녀의 말에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꼽추노인이 천마십이성 중 일인과 막상막하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의 무공은 사부님과 거의 평수라는 이야기인데……' 나천웅은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의 생각으로는 천하에서 천마십이성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사람은 단지 자신의 스승 학선기 뿐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나천웅은 문득 무엇이 떠올랐는지 신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설낭자, 그럼 그 꼽추노인과 그 주인이란 분의 성함은 어떻게 되오?" "꼽추할아버지의 성함은 저도 잘 알지 못해요. 하지만 그 주인어른의 성함은 저도 알아요. 그분의 이름은 나진우(羅震右)라고 하더군요."


"나…… 나진우!" 순간 나천웅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머리 속에서 날벼락이 터지는 충격이라고나 할까? 그의 전신은 폭풍우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격렬한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진우…… 나진우……!' 오오, 이럴 수도 있는 것인가! 나진우라면 바로 수년 전 아들과 며느리의 죽음도, 손자의 상처도 아랑곳없이 자신의 야망만을 위해서 말도 없이 떠나버렸던 조부의 이름인 것이다. '오! 세상에……' 나천웅은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착각에 정신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설하진은 아직도 나천웅의 그런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채 침통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꼽추할아버지께서는 소녀의 곁을 떠날 당시 저에게 사천마경을 건네주며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만약 언제든지 주인어른의 손자를 만날 수만 있다면 사천마경을 전해주라고 말이예요. 그리고 또 하나……" "……" "그분의 주인께서는 부탁하신 말씀도 전해주라고 하더군요.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아무리 입이 백개 천개 있어도 변명할 수는 없지만 말이예요. 그분은 표현은 안하셨지만 자신의 손자를 깊히 사랑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 나천웅은 자신이 점점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왔다. 어느새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순간 그는 하늘을 향해 땅을 향해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신이여, 신이여! 어찌하여 나만이 이토록 크나큰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만 합니까? 왜! 왜? 무엇 때문에……?' * * * 하늘에는 하나 가득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짙은 잿빛으로 잔뜩 찌푸려진 하늘은 금시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후드득! 후득! 곧 이어 굵직한 빗발이 내리치기 시작한 것이다. 한두 줄기 내리던 빗줄기는 금시 억수같은 장대비로 바뀌어졌다. 쏴아! 쏘아--- 와! 우르르릉! 하늘이 온통 무너져 내리듯 폭우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가을에, 그것도 늦가을에 웬 비가 이토록 많이 내린단 말인가? 하늘은 이미 캄캄한 어둠으로 뒤덮혀 있었다. 쏴--- 아--- 와! 쫘--- 왁! 조금도 그칠 기미가 없이 쏟아지는 비……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온갖 근심, 걱정을 씻어 내릴 듯이 줄기차게 쏟아붓고 있었다. 쏴--- 아--- 와! 쏴--- 아! 대지를 삽시간에 물바다로 만들며 늦가을의 장대비의 음향이 멀리멀리 퍼져나가고 있었다. 진화(眞華)에 위치한 어느 객점의 한 방 안,


그곳은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깨끗하고 청결해 보이는 아담한 방이었다. 그 방 한가운데로는 탁자가 놓여 있었으며, 한쪽 구석에는 조그마한 침상이 놓여 있었다. 지금 그 탁자에는 한 명의 소녀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무엇인가 깊이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그 소녀는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뚜렷한 대단히 아름다운 용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볼라 치면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올 정도로 절세적인 미색(美色)이었다. 헌데 안타깝게도 그 미모는 그녀의 백납처럼 창백한 안색으로 인해 많이 가려지고 있었다. 그녀의 안색은 유난히 창백해 보는 이로 하여금 가엾은 인상을 풍기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창백한 소녀는 여전히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밖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한 그녀의 두 눈은 어떤 우울함과 고독감으로 잔뜩 흐려져 있었다. 문득 그녀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우!" 이 소녀는 다름 아닌 바로 설하진이었다. 그녀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이나 나약해 보이는 여인같았지만 실상은 그 누구보다도 의지가 굳센 여인이었다. 헌데 그 무엇이 이토록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단 말인가? 그녀는 재차 긴 한숨을 발했다. 지금 그녀의 망막에는 문득 백의괴인 즉, 나천웅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었다. 고찰에서 그를 만난 지도 벌써 이틀이 지나고 있었다. 허나 그동안 나천웅은 늘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던 것이다. 설하진은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벼운 탄식을 터뜨렸다. "그분은 어째서 그렇게 얼굴을 가리고 다닐까……? 추악하게 생겨서……? 아니면……" 백의괴인 나천웅! 이 순간, 설하진은 그의 모습을 생각하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양손으로 가만히 자신의 가슴을 안아보았다. 보드랍고도 뭉클한 젖무덤의 촉감이 양손에 잡혀왔다. 비록, 빈약한 체구였지만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몇해 전보다는 훨씬 완숙해진 몸매였다. 자신의 젖가슴의 감촉을 느끼는 순간, 설하진은 다시 한 번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어째서 나는 그분을 생각할 때마다 이토록 가슴이 뛰는 것일까……?" 나천웅! 가슴에 와 박히는 세 글자의 이름. 설하진은 그의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출신도…… 그의 원래 모습도…… 하지만,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빛나는 그의 눈빛을 대할 때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진탕되었던 것이다. 약간의 우수(憂愁)와 고독이 서려 뿌옇게 물기가 밴 듯한 그의 두 눈, 그리고 그 속에 번뜩거리며 총기가 흘러나오는 검은 눈동자. 설하진은 나천웅의 그러한 눈빛이 그토록 좋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분은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하며 자란 것 같아……" 설하진은 다시 한 번 나천웅이 고찰에서 싸우던 모습을 상기시켜 보았다. 쌍면이살! 그들은 결코 강호의 소졸(小卒)이 아니었다. 아니, 소졸은 커녕 강호의 일역(一域)을 주름잡던 흑도(黑道)의 거두(巨頭)들이었던 것이다. 헌데도 그런 그들이 나천웅의 손 아래에서는 제대로 손 한 번 놀리지 못하고 흡사 추풍낙엽인 양 쓰러지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설하진은 내심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분의 무공은 내 평생 처음 보는 무서운 것이었어. 아마도 할아버지가 직접 싸운다 해도 쌍면이살을 그토록 쉽게 이기지는 못했을 텐데……' 설하진이 이렇게 상념에 잠겨있을 때였다. 똑! 똑! 누군가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에 설하진은 문득 생각에서 깨어났다. "누…… 누구세요?" "소생 나천웅이오. 좀 들어가도 되겠소?" 설하진의 조심스런 물음에 나천웅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던 것이다. 그녀는 뜻밖의 나천웅의 방문에 흠칫 놀랐다. "어머! 나공자님! 어서 들어오세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그녀의 눈에 밖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전신에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백의를 걸친 대단히 준수한 용모의 청년이었다. 순간, 설하진은 깜짝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다…… 당신은 누구세요?" 그녀의 앞에 서있는 준수한 청년은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아닌가? 나천웅은 그녀의 그런 모습에서 곧 무엇을 깨달은 듯 어색하게 웃으며 얼굴을 쓰다듬었다. "목욕을 하고 옷을 새로 갈아입으니 알아보기가 힘든 모양이구려." 놀랍게도 무척이나 낯익은 음성이 아닌가? 설하진은 그제서야 넋나간 듯 나천웅의 용모를 주시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그녀의 얼굴은 보기좋게 상기되었다. 비로소 상대방이 의심할 여지없는 나천웅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정말…… 나공자님이셨군요." 설하진은 다시 한 번 힐끗 나천웅의 얼굴을 바라보며, "너무나 달라져서…… 처음에는 전혀 딴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녀의 얼굴은 흡사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물들고 있었다. 나천웅은 그러한 그녀를 바라보며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다. 설하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나공자님! 그렇게 서있지만 말고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나천웅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 설하진도 그의 앞에 다소곳이 마주 앉았다. "……" "……" 방 안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천웅은 그녀의 시선에 약간 어색함을 느꼈는지 헛기침을 터뜨렸다. "내가…… 어디 이상한 점이라도 있소?" "그게…… 아니라……" 설하진은 그의 물음에 얼굴을 가볍게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공자님의 달라진 모습이……" 나천웅이 씁쓸하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이 모습이 거북하다면 예전으로 되돌아 갈 수도 있소."


"후훗…… 그럴 필요는 없어요." 설하진은 엷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윽한 눈망울로 나천웅을 응시했다. 이때 그녀는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마…… 영원히 당신의 얼굴은 나의 가슴속에 새겨질거예요……!' 그때 나천웅은 불현듯 무엇이 생각났는지 설하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참! 낭자, 내 한 가지 낭자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소." "그게 무엇인가요?" 나천웅은 힐끗 설하진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운(云)을 떼었다. "듣자하니…… 이번 금검보에서는 하나의 구슬과 금검보주의 딸을 걸고 비무대회를 개최한다던데……" 그의 말에 돌연, 설하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어 그녀는 가벼운 한숨을 흘려내는 것이었다. "맞아요. 나공자님의 말은 조금도 틀림이 없어요…… 하지만, 실상 그 속에는 많은 사연이 있어요." "사연?" 나천웅이 어리둥절한 듯이 되물었다. 설하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 소녀는 금검보주의 둘째 딸이예요." "낭자가? 그렇다면 북령빙군은?" 설하진의 뜻밖의 말에 나천웅은 흠칫 놀랐다. "저의 부친인 금검보주께서는 사실 북령빙군의 외아들이예요." "……!" "아버님께서는 오직 두 명의 딸을 두셨어요. 헌데, 소녀는 어려서부터 삼음절맥이기 때문에 몸이 허약했어요. 그래서 소녀는 여태까지 할아버님이 계신 북해(北海)에서 살아왔어요." 나천웅은 묵묵히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헌데, 얼마 전이었지요. 동해에 계신 도(陶)할아버지께서 한 통의 서찰을 보내오셨어요." 설하진은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분의 서찰에 의하면, 얼마 전에 바다에서 우연히 수천 년 묵은 구령자(龜靈子)라는 거북이를 잡았다고 하더군요. 헌데, 그 구령자의 피를 마시면 삼음절맥이 완치된다고 소녀더러 동해로 오라고 하셨지요." "……?" "그래서 소녀는 할아버지와 함께 동해로 가다가 그만 쌍면이살의 흉계에 빠져 잡히게 된 것이예요." "아……!" 그녀의 말을 모두 듣고난 나천웅은 사태를 깨달은 듯 감탄성을 발해냈다. "헌데, 그것과 금검보에서의 일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오?" 나천웅이 의아스럽다는 듯이 다시 질문을 했다. "아버님께서는 삼 년 전 우연히 한 개의 구슬을 얻었어요. 헌데, 얼마 전부터 그 소문이 무림에 퍼지게 되었지요. 무림에서는 그 구슬이 천하의 기보(奇寶)와 무슨 연관이 되었다는 등 별별 해괴한 소문이 나돌았던 것이예요." "어떻게 생긴 구슬이오?" 나천웅은 호기심이 동함을 느끼며 다그쳐 물었다. "저도 보지는 못했어요. 헌데, 한 달 전부터 금검보에는 알게 모르게 수많은 흑도의 고수들이 운집하기 시작했어요." 그녀의 말에 나천웅이 이해가 안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 음, 이상하군. 무림인이라면 금검보주가 북령빙군의 아들임을 대부분 잘알고 있을 터인데……그들은 후환(後患)을 생각치도 않고 금검보로 몰려왔단 말이오?"


나천웅의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설하진의 안색에는 금방 어두운 기색이 떠올려지고 있었다. "공자께서는 한 가지만 아시는군요." 그녀는 의미 모를 말을 한 마디 불쑥 내뱉았다. "……?" "확실히 할아버님의 무공은 강호에서 최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허나, 현 흑도의 무리에도 할아버님 못지 않은 고수들이 몇 명 있어요." 나천웅은 흠칫 놀랐다. "아니, 그들이 누구요?" "요즘 들어 현무림에서 가장 강한 사람들을 일컬어 표현하는 말이 있어요." -쌍승(雙僧)과 삼도(三道)가 천하를 울리고, 사기(四奇)의 무공이 제일(第一)이라 칭하지만, 그 어찌 중원의 오마(五魔)를 당할 수가 있겠는가? 무림의 독존(獨尊)은 오직 오마(五魔) 뿐이니라! 그녀의 말을 듣고 난 나천웅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사기가 바로 우내사기를 칭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허나 쌍승과 삼도, 오마는 나천웅으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이름이 아닌가? 나천웅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 다시 설하진에게 질문을 던졌다. "쌍승, 삼도, 오마란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설하진은 빙그레 미소를 지어보이며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쌍승이란 정사쌍승(正邪雙僧)을 일컫는 것이지요. 그들은 바로 현 소림의 장문인 광현(廣玄)대사의 사백인 천오신승(天悟神僧)과 이십 년 전 천축에서 건너온 적염마승(赤髥魔僧)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나천웅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흐흠! 그렇다면 삼도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오?" 설하진은 의미있는 눈빛으로 나천웅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음을 지어보였다. "삼도는 바로 무당파와도 관계가 있어요." "본문과?" 나천웅이 의외라는 듯이 되물었다. "네. 그러니까…… 삼도 중 한 분은 바로 무당의 무자(無子) 돌림의 도인 중 한 분이신 무위(無爲)도장이예요." 순간 나천웅은 내심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무위사형이……?' 그의 기색을 알아챈 듯 설하진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약간 뜻밖이신가요?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예요." 하며 그녀는 무위도장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나공자님은 아마 잘 모르시겠지만 약 삼십 년 전만 해도 무위도장의 위맹은 강호에서 대단한 것이었지요. 지금 무위도장께서는 무당산에서 은거하시고 계시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그분은 화운진인(火雲眞人)이라 불리워지며 무림을 휩쓴 적이 있답니다." "아……!" 나천웅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문득, 무위도장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가 천무전으로 무공을 수련하러 들어갈 당시 천무전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바로 무위도장이 아니었던가? 그때부터 나천웅과 무위도장과는 가까워지며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오던 터였다. 나천웅이 잠시 지난일을 돌이켜보며 무위도장을 생각하고 있을 때 설하진이 다시 입을 떼었다.


"삼도 중 나머지 두 명은 곤륜파(崑崙派)의 용조진인(龍爪眞人)이고, 또 한 명은 소속을 알 수 없는 괴이한 인물로 혈면괴도(血面怪道)라고 불리워지는 사람이지요. 한데, 삼도 중 이 사람만이 유일하게 흑도의 인물이예요." 나천웅이 침중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그들의 무공은 어느 정도요?" "실상 쌍승, 삼도, 사기의 무공은 우열을 가르기가 상당히 힘들어요. 하지만, 굳이 가른다면 사기 중의 동해표풍객과 무당의 무위도장이 조금 더 낫다고나 할까요?" "흐음……!" 나천웅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헌데, 오마는 어떤 인물들이오?" 하며 궁금한 듯이 물었다. 이때, 나천웅의 얼굴은 긴장한 채 약간 굳어져 있었다. "그들의 출신이 어딘지는 아무도 몰라요. 단지, 그들이 자칭 천마(天魔), 지살(地殺), 광객(狂客), 혈립(血笠), 죽귀(竹鬼)라고 부르기 때문에 무림인들도 그렇게 칭하고 있죠." 설하진의 청아한 음성을 들으며 나천웅은 그들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나지막하게 되뇌어 보았다. "헌데, 그들의 무공 수위는 어느 정도요?" "저도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얼마 전 그들 오마 중 죽귀(竹鬼)가 우내사기 중 한 명인 남천괴걸과 붙은 적이 있어요." 순간 나천웅은 내심 또 한 번 놀랐다. '양형님과……?' 그는 이때 강한 호기심을 느끼며 설하진을 다그쳤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됐소?" "놀랍게도 오백여 초 만에 남천괴걸이 패배했어요." "그런……!" 나천웅은 도저히 그녀의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고강한 무공을 지닌 남천괴걸이 패하다니…… 그럼, 대체 상대들의 무공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이때, 설하진이 다시 한 마디 덧붙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마가 무림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위명은 현무림을 진동시켰지요." 나천웅은 설하진의 설명을 들으며 침중한 안색을 짓고 있었다. 설하진도 그러한 나천웅의 안색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탄식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지금 금검보로 몰려오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쌍승, 삼도의 인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오마까지도 가세되어있어요." "……" "그러니…… 할아버님께서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지요." 나천웅이 여전히 침중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으…… 음! 그렇다면 비무대회를 연 이유가 무엇이오?" "그것은 바로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이지요." "목적이라면……?" 나천웅은 잠시 머리를 굴려보았다. 잠시 후 그는 무엇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보니 그렇군……!"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설하진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 나천웅의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으음, 설낭자! 소생이 한 번 그 목적을 맞춰보아도 되겠소?" "마음대로 해보세요. 허나, 그렇게 쉽지는 않을걸요." 이렇게 말하며 설하진은 생긋이 웃어보였다. "하하하…… 소생도 별 자신은 없소이다." 나천웅은 호방한 웃음을 흘려내며 그녀를 주시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아마도 소생의 생각으로는 그 비무대회를 개최한 목적은 모두 두 가지일 것 같소." 나천웅은 잠시 말을 멈춘 뒤 설하진의 얼굴을 응시했다. 설하진은 잔뜩 호기심이 어린 표정을 떠올린 채 나천웅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두 가지 목적 중 하나는, 낭자의 조부께서 혼자의 힘만으로는 마두들을 당해낼 수가 없기에 정파의 인물들까지 끌어들일 셈으로 비무대회를 개최한 것이 아니요?" "……!" 순간 설하진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천웅은 빙그레 미소를 떠올린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음……두 번째 목적으로는, 아마도 마두를 서로 싸우게 하려는 의도인 것 같소이다." 설하진은 두 눈 가득 경이(驚異)의 빛을 띄우며 나천웅을 응시했다. "당신은 정말 대단히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군요." 그녀가 실로 감탄했다는 듯이 탄사를 발해냈다. "맞았어요. 나공자께서 말씀하신 것은 조금도 틀림이 없어요." 나천웅은 설하진의 이야기를 듣고는 씩! 웃음을 지었다. 순간 설하진은 갑자기 나천웅의 웃음에 눈이 부심을 느꼈다. 참으로 맑고도 싱그러운 웃음이었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전신이 짜릿해짐을 느꼈다. 그것은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아…… 도대체 나의 마음이 왜 이럴까? 혹시…… 내가 이분을……?' 설하진은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며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이때 나천웅은 묵묵히 창 밖의 빗줄기를 바라다 보고 있었다. 쏴아아아! 쏴아아…… 창 밖으로는 아직도 장대비가 쏟아지며 온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무심한 시선으로 빗줄기를 바라보는 나천웅은 내심 깊은 생각에 골똘하게 잠겨 들었다. '으…… 음! 어쨌든 어서 금검보로 가보아야겠구나! 어쩐지 시간이 흐를 수록 나의 마음은 무거워 오는 것만 같으니……' 그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내심으로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문득 그의 눈에 한줄기 의지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에는 기필코 천마십이성의 음모를 분쇄하고 말리라!' 장대비가 땅을 후벼파며 퍼부어대듯이 그의 이러한 결심은 더욱 더 굳게 그의 마음 속 깊이 새겨지고 있었다. 나천웅의 이러한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설하진은 그윽한 시선으로 나천웅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방 안에는 다시 고요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설하진은 준수한 나천웅의 모습에 자신의 방심(芳心)이 마구 진탕돼옴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쏴아아아! 쏴아아…… 아직도 창 밖에는 그칠 줄 모르는 폭우가 빗발이 굵어진 채 더욱 더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제 18 장 血 笠 천진(天眞). 이곳은 강소성(江蘇省)에 위치한 하나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도읍(都邑)이었다. 이곳 천진은 그리 큰 곳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이유는 이곳에 위치한 하나의 보(堡)로 인해서였다. 금검보(金劍堡)! 바로 이것이 천진을 유명하게 만든 보의 이름이었다. 때는 미시(未時) 무렵, 이곳 천진의 금검보로 통하는 소로(小路)에 두 명의 남녀가 나타났다. 그들은 한 명의 준수하게 생긴 백의청년과 또 한 명의 매우 아름답지만 무척이나 창백하게 보이는 황의소녀였다. 이 두 남녀는 바로 나천웅과 설하진이었다. 설하진은 오랜 여정 탓인지 무척 피곤한 모습이었다. 나천웅은 설하진의 한쪽 팔을 잡고 부축하듯이 걷고 있었다. 설하진은 매우 지친 듯 나천웅의 어깨에 자신의 몸을 약간 기댄 채 걸음을 떼어 놓고 있었다. 허나 그녀는 무척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안색에는 오히려 발그스름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또한 설하진의 맑고 커다란 두 눈에는 왠지 모르게 행복이 충만한 것 같았다. 그들은 묵묵히 서로의 몸을 밀착시킨 채 걷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잠시 후, 나천웅의 눈에 높은 담장으로 둘러 싸인 거대한 하나의 보가 들어왔다. 설하진이 나천웅을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저곳이 바로 금검보예요." "정말 듣던대로 대단히 거대한 곳이로군……!" 나천웅이 감탄의 표정을 지은 채 그곳을 지그시 응시했다. 설하진은 생긋 웃으며 청아한 음성을 흘려냈다. "호호호…… 최소한 강소성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금검보인데 어찌 작을 리가 있겠어요?" "하하하…… 그렇소……" 이렇게 두 남녀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돌연 나천웅의 예민한 청각에 어디선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으응……?" 나천웅이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공자님! 왜 그러시죠?" 옆에 서있던 설하진이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의아한 듯 물어왔다. "으…… 음…… 아무래도 이 근처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 같소." 그녀의 물음에 짤막하게 대답을 한 나천웅이 곧이어, "낭자, 잠시 실례하겠소." 하며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손을 들어 설하진의 허리를 덥석 감아버렸다. "어멋!" 나천웅의 뜻밖의 행동에 깜짝 놀란 설하진이 한소리 내질렀다. 허나 어느새 나천웅의 몸은 허공으로 치솟고 있었다. 설하진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나천웅의 가슴에 바짝 붙였다. 그러자 강렬한 남성의 체취가 물씬 풍겨져왔다. 그 순간 설하진은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어느덧 그녀는 자신이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할 사랑의 소용돌이로 휘말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천웅은 그러한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무서운 속도로 허공을 날고 있었다. 그가 한 번씩 뛸 때마다 그의 신형은 거의 삼십여 장을 날고 있었다. 설하진은 나천웅의 품에 안긴 채 아득하게 내려다 보이는 땅바닥을 응시하며 내심 커다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정말 이분의 무공은 내 예상보다 훨씬 강하구나! 아마 할아버님도 상대가 되지 못할 것 같은데…… 그 누가 천하에서 이분을 당해낼 수가 있으랴……?' 설하진이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나천웅의 나직한 음성이 그녀의 귓바퀴를 울렸다. "설낭자, 다 왔소."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휘--- 익! 그들은 흡사 연기처럼 나무 위로 가볍게 내려섰다. 다음 순간 나천웅은 설하진의 허리에 둘러진 팔을 풀어주었다. 그의 품을 벗어난 설하진은 정신을 가다듬으며 나무 밑을 바라다 보았다. 헌데 그 나무 밑으로는 지금 대혈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대략 십여 명의 무리들이었다. 한쪽은 모두 머리카락을 길게 드리운 다섯 명의 장발의 괴인들이었다. 이때, 다섯 괴인들의 두 눈에서는 섬뜩할 만치 무서운 흉광이 줄기줄기 내뻗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수중의 칼을 무섭게 난무시키는 것이었다. 한편, 그들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은 다섯 명의 노소(老少)였다. 나천웅은 그들의 모습을 대하는 즉시 그 중 몇 명의 얼굴이 무척 낯이 익음을 깨달았다. '아! 그렇군. 이제야 생각나는구나.' 나천웅은 옛일을 떠올리며 문득 회상에 젖어들었다. 난생 처음으로 객잔을 찾았을 때의 기억, 절름발이에다 지저분한 몸으로 객점을 들어가려다 당했던 일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당시 자신에게 심한 모욕을 준 청의청년과 그를 만류하던 아름다운 용모의 홍의소녀, 그리고 그들의 장배인 사자수염의 노인 등……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과거를 생각하며 상념에 잠겨있던 나천웅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젠 모두가 다 흘러간 과거의 추억이다……" 나천웅은 다시 혈전장을 바라보았다. 그곳의 결투는 양쪽 모두가 거의 막상막하였다. 문득 나천웅은 싸움하는 그곳에서 몇장 떨어진 곳에 한 명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순간 그는 흠칫 놀랐다. "저…… 저자는……?" 서 있는 자는 전신에 붉은 혈의(血衣)를 걸친 자였다. 게다가 더욱 특이한 것은, 머리에 커다란 삿갓을 쓰고 있었다. 헌데 그 삿갓은 전체가 온통 핏빛이 아닌가? 거의 검붉은 핏빛이었다. 그러한 그자의 전신에서는 실로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무서운 살기가 내뻗치고 있었다. '어쩌면 저자가 바로 오마 중 한 명인 혈립(血笠)이 아닐까?' 나천웅이 그를 바라보며 내심 이렇게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예의 삿갓괴인이 싸늘한 호통을 터뜨렸다. "멈춰랏!" 순간 삿갓괴인의 호통이 떨어짐과 동시에 다섯 명의 장발괴인들이 급히 뒤로 물러섰다.


"바보같은 놈들! 저따위 조무라기들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시간을 끌다니!" 삿갓괴인이 분통이 터지는 듯 장발괴인들을 노려보며 호통을 쳐댔다. 그 순간 장발괴인들을 상대하던 다섯 명의 노소들은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삿갓괴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 중 청수하게 생긴 갈의노인이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삿갓괴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로 중원오마 중 한 분인 혈립(血笠)이오?" "흥! 무공은 약하지만 제법 보는 눈은 있군!" 삿갓괴인 즉, 혈립이 갈의노인의 물음에 싸늘하게 비웃음을 날렸다. 이어 혈립은 천천히 그들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중인들은 바짝 긴장한 채 자신들도 모르게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들 앞으로 다가온 혈립이 냉혹한 음성을 흘려냈다. "흐흐흐…… 화산삼웅(華山三雄)! 너희들의 무공이 비록 강호에서는 일류로 통할지 모르나 나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저 삼류고수에 불과하다!" 순간 화산삼웅은 심한 수치감을 느꼈다. "우릴 모욕할 셈인가!" "모욕이라고? 훗훗훗…… 화산삼웅! 잘 듣거라!" 화산삼웅의 반박에 혈립이 싸늘한 웃음을 흘려내며 냉막한 음성으로 힐문하듯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너희 화산삼웅의 무공이 장강오살(長江五殺), 천중이검(天中二劍), 하북삼패(河北三覇)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느냐?" 혈립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화산삼웅은 흠칫 놀랐다. "……" "흐흐흐…… 그놈들도 나의 손 아래에서는 손 한 번 변변히 써보지 못한 채 추풍낙엽같이 쓰러져 갔다. 헌데 너희 쯤이야…… 흐흐흐……" 혈립은 싸늘하게 비웃어대며 다시 화산삼웅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화산삼웅은 공포의 눈빛으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바로 그 찰나 혈립은 왼손에 들고 있던 기다란 혈도(血刀)를 치켜들었다. "너희들은 오늘 이 혈혼도(血魂刀)의 맛을 단단히 보게 될 것이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칼을 번개같이 뽑았다. "차--- 얏!" 혈립의 입에서 한소리 호통이 터져나옴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전광석화와 같이 움직였다. 파아앗! 순간 화산삼웅도 초긴장한 채 급급히 수중의 검을 빼어들어 전력으로 맞섰다. 어느 한순간 혈립의 혈혼도와 화산삼웅의 검이 정통으로 부딪쳤다. 차차차창! 무시무시한 금속음이 울려퍼짐과 동시에 시퍼런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으--- 윽!" "억! " 이때 화산삼웅은 모두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과…… 과연, 무서운 놈이다!' 그들은 내심으로 치를 떨었다. "삼초 안에 너희 세 놈의 모가지를 모두 잘라주겠다!" 혈립이 화산삼웅을 바라보며 냉혹한 미소를 지은 채 음산하게 입을 떼었다. 뒤이어, "제 일초, 혈한무(血恨舞)!"


그의 입에서 호통이 터졌다고 느낀 순간 천지가 완전히 피를 쏟아부은 듯이 시뻘겋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헉!" 찰나 대경실색한 화산삼웅이 전력을 기울여 혈립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허나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으니…… 챙! 챙--- 강! 화산삼웅 자신들의 수중에 들린 검과 혈혼도가 맞부딪치기가 무섭게 금속성과 함께 자신들의 검이 박살이 나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혼비백산한 채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갔다. "으윽!" 화산삼웅 중 한 명의 옆구리에서 이미 분수같은 선혈이 쏟아지고 있었다. 숨 쉴 틈도 주지않고 마치 죽음의 신이 부르짖는 듯한 냉혹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흐흐흐…… 제 이초 혈궁파(血弓破)!" 순간 세 줄기의 혈선(血線)이 흡사 전광과도 같이 화산삼웅을 향해 날아갔다. 번쩍! "으헉!" 화산삼웅이 다급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들은 이 순간 도저히 피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죽음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헌데, 바로 그 찰나였다. 쨍! 요란한 금속음이 울려퍼졌다. 순간 혈립은 흠칫 놀란 채 공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어떤 놈이 감히 방해를 놓느냐?" 혈립이 두 눈에 살기를 떠올린 채 냉막한 음성을 흘려냈다. 화산삼웅도 어리둥절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 자신들이 살아난 것이 마치 꿈만 같았다. 이때 어디선가 낮게 착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혈립! 그대의 무공은 무척 강하다. 허나, 결코 천하의 무적(無敵)은 아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무 뒤에서 한 명의 백의청년이 소리없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백의청년은 지극히 준수한 모습이었다. 허나 이때 그 청년의 표정은 놀라울 정도로 조금치의 변화도 일고 있지 않았다. 혈립은 그를 바라보며 흠칫 놀랐다. "……" 백의청년은 바로 나천웅이었다. 나천웅은 혈립을 쏘아보며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혈립! 그대는 절정의 고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보는 안목 또한 높을 것이라 믿는다." "어린 놈이 대단하구나! 내 비록 네놈을 처음 보지만 너는 나의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놈이다." 혈립이 나천웅을 뚫어질 듯이 쏘아보며 침중한 음성을 흘려냈다. 나천웅은 혈립의 말을 들으며 씩! 웃음을 지어 보였다. 혈립이 다시 침중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너의 행동 하나하나는 실로 너의 나이와 경력에 비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후후후…… 과연, 오마의 일인(一人)답군!"


나천웅이 여유만만한 웃음을 터뜨리며 빈정거렸다. 그러자 혈립이 싸늘한 냉소를 날렸다. "흐흐흐…… 꼬마야, 하지만 자만하지 마라! 너의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나의 손속을 당해내리라고는 조금도 믿지 않는다." "흐음…… 과연 그럴까?" "믿지 못한다면 보여주지!" 말을 마침과 동시에 혈립은 천천히 혈혼도를 위로 치켜올렸다. 이어 그의 입에서는 음냉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나는 평생 삼초의 도법만을 터득했다. 허나, 그 도법만으로도 내 평생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그것은 중원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이어 혈립의 입에서 한소리 호통이 터져나왔다. "제 일초, 혈한무!" 순간 천지가 온통 피바다같이 붉은 검영으로 뒤덮혔다. "으하하핫…… 피맺힌 한을 품고 도귀(刀鬼)가 춤을 춘다!" 혈립이 칼을 휘둘러대며 미친 듯이 외쳐댔다. 찰나지간 나천웅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무서운 도법이다! 내가 강호에 나온 이래 최대의 강적같구나!' 나천웅은 감히 혈립의 공격을 경시하지 못한 채 전력으로 금라천현보를 전개했다. 스스스…… 다음 순간 나천웅의 신형은 한 가닥 연기가 되어 순식간에 혈립의 공격권을 벗어났다. 허나 혈립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음침한 음성을 흘려냈다. "한 줄기 혈선(血線)이 하늘을 가른다! 꼬마야! 혈궁파(血弓破)를 받아랏!" 츠츠츠츠! 일시 나천웅의 안색이 무섭게 굳어졌다. "차--- 앗!" 그는 한소리 호통을 내지름과 동시에 수중의 천무진뢰검을 번개같이 뽑아 들었다. 피우우욱! 섬뜩한 음향이 울려퍼지며 천무진뢰검이 검집을 벗어났다. 순간 찬란한 음광이 천무진뢰검의 검신에서 줄기줄기 내뻗치고 있었다. "태극혜성!" 나천웅의 입에서 대갈일성이 터졌다. 파파파--- 팍! 요란스런 금속음이 온천지를 울렸다. 두 인영은 번개같이 허공에서 붙었다가 떨어졌다. 혈립은 왼손에 혈혼도를 비스듬히 치켜든 채 나천웅을 노려보았다. 또한 삿갓 밑에서 빛나고 있는 그의 두 눈은 놀라움으로 약간 일그러져 있었다. "네놈이…… 조금 전에 쓴 검법은 바로 태극혜성이 아니냐?" 이렇게 물어오는 혈립의 음성은 어떤 흥분으로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나천웅은 담담한 어조로 응답을 했다. "흐--- 음! 과연, 오마답게 제법 안력이 넓구나!" 순간 혈립의 눈빛이 홱 변했다. "흐흐흐…… 이제보니 네놈은 바로 학선기, 그놈의 제자였군……" 그의 냉막한 음성이 떨어진 순간, 나천웅 역시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혈립은 나천웅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이를 뿌드득! 갈아붙였다.


"학선기! 그놈은 몇 년 전 나의 오른쪽 손가락을 두 개나 잘라버린 적이 있다. 그리고, 이 얼굴도……" 혈립은 말을 뱉아내며 핏빛의 삿갓을 치켜올렸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혈립은 깡마른 얼굴에 광대뼈가 유난스레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코는 중간에서 급한 경사를 이룬 매부리코였으며, 입술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았다. 한 마디로 감정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은 메마른 얼굴이었다. 헌데 더욱 끔찍스러운 것은 그의 얼굴에 그어진 한 줄기의 상흔이었다. 그것은 왼쪽 이마에서 오른쪽 턱까지 섬뜩할만치 깊게 패여져 시뻘건 자욱으로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혈립이 그 상흔을 가리키며 흉험한 기세로 나천웅을 노려보았다. "흐흐흐…… 이 얼굴의 상흔은 바로 그 학선기란 놈이 나에게 남겨 준 것이다!" "……!" "오늘 바로 그놈의 제자를 만난 이상 절대로 그냥 둘 수는 없다!" 이 순간 혈립의 얼굴은 도저히 사람의 형상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치솟는 분노로 인해 그의 깡마른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채 두 눈에서는 마치 지옥의 야차인 양 섬뜩한 한광이 줄기줄기 내뻗치고 있었다. 혈립은 천천히 삿갓을 벗어 오른손에 들었다. "흐흐흐…… 네놈은 왜 나의 별호가 혈립인지 아느냐?" 그의 냉막한 물음이었다. "……?" 나천웅은 묵묵히 혈립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의 이 삿갓은 일반적인 삿갓과는 다르다. 이 삿갓은 바로 죽음을 부르는 마(魔)의 최명패(催命牌)다!" 혈립의 대갈일성이 허공을 가르며 멀리로 울려퍼졌다. 이어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왼손에 들고있는 혈혼도를 건(乾)의 위치에 갖다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삿갓은 곤결(坤結)을 짚고 있었다. "흐흐흐…… 이 초식은 내가 익힌 혈혼삼도(血魂三刀)의 최후 초식인 혈살비풍만립혼(血殺飛風萬笠魂)이다. 과거에는 내가 이 초식을 완전히 체득하지 못해서 학선기 그놈에게 패했지만…… 이번에는…… 훗훗훗……" 나천웅은 침중한 눈으로 그의 자세를 바라보았다. 허나 그가 아무리 살펴보아도 혈립의 자세에서는 일말의 헛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으음, 실로 무서운 살기(殺氣)를 내포한 초식이다. 이 초식을 그냥 피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나천웅은 서서히 발을 옮겼다. 동시에 그의 수중에 있는 천무진뢰검도 점차 기이한 자세로 변화하고 있었다. 적막한 침묵이 흘렀다. "……" "……" 두 절세의 고수는 아무런 말도 없이 단지 상대의 두 눈만을 노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주위에서 이 광경을 응시하고 있는 중인들 역시 손에 땀을 쥔 채 바짝 긴장되어 있었다. 설하진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그녀는 지금 나뭇가지를 꽉 잡은 채 나천웅을 응시하고 있었다. 싸늘한 가을 바람이 그녀의 옷자락을 날리며 그녀의 몸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조금도 의식하지 못한 채 여전히 나천웅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차--- 앗!" 적막한 대기를 가르며 날카로운 일갈(一喝)이 터져나왔다. 드디어 혈립이 먼저 공세를 취한 것이다. "혈살비혼---!" 무시무시한 일성과 함께 그의 손에 있던 삿갓이 허공을 날았다. 쌔애액! 혈립이 던진 삿갓은 사방으로 엄청난 혈광(血光)을 난무하면서 소용돌이 치듯이 나천웅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었다. 나천웅의 눈에 싸늘한 광망이 스쳐갔다. "찻!" 삿갓이 몸에 닿을 찰나 그의 신형이 번개같이 허공으로 날았다. 파아앗! 삿갓은 그의 발 밑을 순식간에 스쳐갔다. 허나 곧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나천웅의 발 밑을 스쳐간 삿갓이 다시 번개같이 방향을 바꾸더니 무서운 속도로 나천웅의 몸을 노리며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엇!"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혈립의 입에서 음침한 괴소(怪笑)가 터져나왔다. "으흐흐흐흐…… 꼬마놈! 너는 이제 끝장이다." 나천웅이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니, 아!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혈립의 손에 쥐어져 있던 혈혼도가 어느새 붉은 안개로 휩싸인 채 나천웅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고오오! 허공에 뜬 나천웅! 그의 처지는 완전히 진퇴유곡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뿔사, 실수다! 놈의 실력을 너무나 얕보았구나!'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전신의 내공을 오른손에 집중시킨 다음 천무진뢰검을 무서운 속도로 내둘렀다. "복마진천(伏魔震天)!" 드디어 대라삼검의 제 이초가 전개된 것이다. 허나 이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나천웅은 지금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삿갓은 완전히 무시한 채 오직 혈립의 혈혼도만을 상대로 전개한 것이다. 파파파팍! 차차--- 차창! 검과 도가 부딪치면서 무서운 음광이 사방으로 난무했다. "헉!" "으--- 윽!" 짤막한 비명이 잇달아 터져울린건 바로 그때였다. 중인들은 잔뜩 긴장한 채 그 광경을 응시했다. 지금 나천웅과 혈립은 약 삼 장 정도의 거리를 둔 채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헌데 놀랍게도 그의 혈혼도는 이미 절단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그의 앞가슴에서는 분수같은 선혈이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눈꼬리를 가볍게 경련하며 입을 열었다. "나…… 나의 사생혈립(死生血笠)이…… 너의 몸에 격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너…… 너는…… 상처를 조금도 입지 않다니……" 나천웅은 약간 창백한 안색으로 자기의 발 밑을 바라보았다. 그의 발 밑에는 시뻘건 삿갓이 산산조각이 난 채 흩어져 있었다.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혈립을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그것은……도가의 지고(至高)한 선천강기(先天 氣) 때문이다. 이번은 너의 무공이 약해서가 아니라 네가 나를 너무 몰랐기 때문에 당한 것이다." "흐흐흐…… 이유야 어쨌든 나는 진 것이다." 혈립은 눈을 돌려 나천웅의 손에 들려 있는 천무진뢰검을 응시했다. "이번에…… 네가 전개한 초식이 대라삼검이냐?" "그렇다." "과……과연…… 놀랍다. 비록 옛날에도 상대해본 초식이지만 너는 학선기에 비해 더욱 뛰어난 것 같구나." "……" "흐흐흐…… 애송아! 하지만…… 너는 결코 방심해서는 안된다. 내가…… 살던 나습포찰의 천륭사에는 나보다도 강한 고수가 수없이 많다." "무…… 무엇이?" 나천웅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 그렇다면 당신은 나습포찰에서 왔단 말인가?" "그렇다! 애송이놈, 이번에…… 본문의 천마십이성께서는…… 중원으로 우리 오마 외에도 세 명의 고수를…… 더 파견하셨다. 그들은 바로 마(魔)…… 으윽!" 갑자기 그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앗!" 나천웅은 급히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앞가슴에는 한 자루의 비엽도가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런?" 나천웅은 황급히 주위를 훑어보았다. 허나 사위는 아무런 소리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그리고 혈립과 함께 있었던 장발괴인들도 어느새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는 것이 아닌가? 나천웅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으로 두 번째의 암습이다. 도대체 그자의 정체는 무엇이길래 이토록 신비하게 사람을 해치고 사라진단 말인가?" 이때 혈립은 가슴에 있는 비엽도를 움켜쥔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허나 곧 그의 입에서 한 줄기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리더니 서서히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나천웅은 급히 그의 앞으로 갔다. 혈립의 두 눈은 이미 정기를 잃어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그는 나천웅을 노려보며 떠듬떠듬 입을 떼었다. "그…… 그 계집이…… 나에게…… 암습을……?" 쿵! 그것으로 끝이었다. 중원에 출현한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무서운 혈풍을 일으켰던 혈립! 그런 그도 결국에 가서는


이렇게 죽고만 것이다. 나천웅은 멍하니 그의 시신을 바라보며 아까 그가 한말을 되뇌이고 있었다. "계집이라고 했다…… 분명히! 그렇다면 노운량과 혈립을 암습한 자가 여인이란 말인가? 정말 믿을 수가 없구나!" 이때 나천웅의 주위로 중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화산삼웅 중 제일 첫째인 일웅이 그에게 정중히 포권예의를 취했다. "소협, 정말 고마왔소이다. 만약 오늘 소협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나천웅은 입가에 고소를 지었다. "무슨 말씀을…… 같은 정도(正道)의 사람끼리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또한 소생이 돕지 않았더라도 여러분께서는 그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화산삼웅 중 일웅이 그의 말에 긴 탄식을 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소협, 그것은 우리의 얼굴을 뜨겁게 만드는 것이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소이다. 실상 우리의 무공은 중원에서 그리 약한 편은 아니외다. 허나 저 절세의 마두 혈립에 비교한다면……" 이때 화산삼웅 중 이웅이 나서며 손을 흔들었다. "대가! 이제 그런 말은 하지 맙시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이분 소협의 성함조차 묻지 못했지 않습니까?" "아차, 이건 정말 이만 저만한 실례가 아니군요. 생명의 은인의 성함조차 아직 알지 못하고 있으니……" 나천웅은 빙그레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소생은 무당의 제자로서 나천웅이라 합니다." "무당……?" 화산삼웅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무당에서 이처럼 강한 고수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들은 것이다. 허나 그것을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고 정중하게 답례를 했다. "아……! 나소협이셨군요. 우리들은 화산의 속하제자로서 화산삼웅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소개를 마친 화산삼웅은 문득 생각이 난 듯 옆에 있는 청의청년과 홍의소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참, 그리고 이 아이들은 역시 본문의 삼대제자로서 무림에 약간의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노인의 말이 끝나자 청의청년이 급히 포권을 했다. "조금 전 소협의 무공을 보고 크게 감격을 했습니다. 소생은 청삼일원객(靑衫一元客) 우빈룡(右彬龍)이라 합니다." 그가 말을 하고 있는 동안 그의 옆에 있는 홍의소녀는 계속 나천웅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는 그녀의 표정은 점점 야릇하게 변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처럼 잘생긴 분이 있었다니…… 헌데 이분의 모습은 어디선가 한 번 본적이 있는 것 같구나……' 이때 화산삼웅 중 한 사람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연아야, 무엇하고 있느냐? 어서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그 말에 홍의소녀는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얼굴을 가볍게 붉히며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나소협, 소매는 강설연(康雪娟)이라 해요. 앞으로 많은 지도를 바라겠어요." 나천웅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말씀을…… 어찌 소생이 낭자같은 분을 가르칠 자격이 있겠소이까?" 그의 말에 강설연은 곱게 눈을 흘기며 생긋이 웃었다. "어머, 무슨 겸손의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소매는 앞으로 나소협의 무공 중 약간이라도 익힐 수만


있다면 더없이 큰 영광일거예요." 그녀는 아무 스스럼없이 자칭 소매라고 말하고 있었다. 옆에서 듣고 있는 청의청년의 눈에 언뜻 질투의 빛이 스쳐갔다. 허나,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때 나무 뒤에서 설하진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응?" 중인들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천웅은 그들의 그런 모습에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여러분, 저 낭자는 소생이 잘 아는 분입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춘 다음 중인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떼었다. "이 낭자는 설하진이라고 불리우며 금검보주의 따님인 동시에 북령빙군의 손녀입니다." "아!" "오오!" 중인들은 모두 감탄성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북령빙군--그는 우내사기의 일인으로 무림의 일대공인으로 유명한 사람이 아닌가? "이제보니 설낭자이셨구려. 이렇게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갑기 그지 없소이다." 설하진은 무표정한 안색으로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별…… 말씀을……" 화산삼웅은 그녀의 그런 태도에 내심 눈살을 찌푸렸다. 허나 내심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몇번 헛기침만 터뜨릴 뿐이었다. 이때 나천웅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밝게 웃으며 물었다. "참, 헌데 여러분은 혹시…… 금검보로 가시는 길이 아닙니까?" 화산삼웅 중 삼웅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이다. 우리는 이번에 장문인의 명을 받들어 금검보로 가는 도중이었소이다. 헌데 도중에 저 혈립과 시비가 붙어서 그만……" 나천웅이 빙그레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저와 같은 길이군요. 금검보는 바로 근처에 있으니 어서 같이 가시지요." 순간 화산삼웅 중 일웅이 탄성을 터뜨리며 반가워했다. "오! 소협께서도 금검보로 가시는 길이었소? 그거 정말 잘 되었구려." 바로 그때 화산삼웅 중 이웅이 건조한 음성으로 말을 뱉아내며 길을 재촉했다. "대가! 말은 그만하고 어서 떠나지요. 이러다간 해가 지겠소이다." "헛헛헛…… 그런가? 아닌게 아니라 시간이 너무 지체된 것 같군……!" 이어 대가라 불리운 그 노인은 나천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나소협, 어서 서둘러 금검보로 갑시다." "그러지요." 나천웅도 그의 말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인 후 걸음을 옮겼다. 그때 설하진은 힐끗 강설연을 바라보더니 재빨리 나천웅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곧 나천웅의 몸에 바짝 붙어 그의 팔을 잡았다. 나천웅은 아무 말도 없이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 광경에 강설연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이때 그녀의 눈빛이 묘하게 흔들리며 한 가닥 질투의 빛이 스쳐가고 있었다. 강설연은 잠시 그 자리에 선 채로 설하진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흥! 생긴게 꼭 다 죽어가는 병자같은 것이…… 네가 그런다고 이 강설연이 이대로 물러날 줄


알고……?' 그녀는 입가를 씰룩거리며 내심 이렇게 중얼거렸다. '만약,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지!' 천천히 그들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중인들도 모두 그들의 뒤를 따라 하나 둘씩 걸음을 떼어 놓았다. 잠시 후 극렬한 혈전이 벌어졌던 그곳에는 고요한 침묵과 함께 썰렁한 바람만이 불어대고 있었다. 단지 한 구의 시신만이 바람결에 핏빛 옷자락을 나부끼며 쓰러져 있을 뿐이었다. 그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으나 무림에 그 위명을 날렸던 마두 혈립이었다. 그의 옆으로는 이미 산산조각이 나버린 핏빛 삿갓의 조각들만이 흩어져 있었다. 제 19 장 金劍堡 나천웅 일행은 곧 금검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명성과 조금도 다름없이 금검보의 보문(堡門)은 대단히 웅장했다. 그 보문 위에는 하나의 편액이 걸려 있었다. 그곳에는 마치 봉(鳳)이 날고 학(鶴)이 춤추는 듯한 필체로 다음과 같이 글씨가 쓰여있었다. <금검보(金劍堡).> 눈이 부시도록 빛을 발하는 금빛 서체였다. 이때 보문을 지키고 있던 몇 명의 장한들이 설하진을 발견하고는 황망히 다가오며 반색을 띠었다. "아니? 둘째 아가씨!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또한 장한 중 한 명은 기쁜 안색을 떠올린 채 재빨리 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둘째 아가씨께서 무사히 돌아오셨다!" 그 장한은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쳐대며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보 안에서 여러 명의 사람들이 황급히 걸어나왔다. 그들 중 맨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검은 수염이 배까지 길게 내려온 대단히 위엄있게 생긴 노인이었다. 그 노인은 설하진을 발견하자 안색이 환하게 밝아지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오! 진아야! 네…… 네가……" "하…… 할아버지!" 설하진은 그 노인을 발견하자마자 달려가 한 마리의 작은새처럼 그의 품 안에 안겼다. 나천웅은 그 노인을 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음……저 노인이 바로 북령빙군이로군……!' 북령빙군은 설하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진아야! 네가 어찌 그들의 손을 벗어났느냐?" 그러자 설하진이 북령빙군의 품을 살며시 벗어나더니 부드러운 눈으로 나천웅을 응시했다. "저 나소협께서 저를 구해주셨어요." 설하진의 말을 듣고 북령빙군은 비로소 나천웅 등의 일행쪽을 둘러보았다. 비로소 나천웅을 발견한 북령빙군의 두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그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저 청년은 인중지룡(人中之龍)이로다! 내 백 년을 살아오는 동안 이토록 훌륭한 청년은 처음 보는 것 같군……!' 북령빙군은 나천웅의 앞으로 다가가 그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소협! 정말 고맙네. 나의 손녀를 마두들 손아귀에서 구해주다니 이 은혜를 어찌 갚을 수 있겠나?" 나천웅은 가볍게 웃으며 입술을 떼었다. "하하하…… 설대협! 과분한 말씀입니다. 어찌 그런 일에 칭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순간 북령빙군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설대협……?' 현재 자신의 배분은 현무림에서 거의 최고로 높았다. 헌데 이제 겨우 약관(弱冠)의 나이를 지났을까 말까한 상대 청년이 자신을 대협이라 칭하다니…… 나천웅의 무례한 행동에 북령빙군은 순간적으로 노기가 치솟았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구나!' 허나 그는 곧 안색을 가다듬었다. 어쨌거나 그 청년은 자신의 사랑하는 손녀를 구해준 은인(恩人)이 아닌가? 북령빙군은 한 번 크게 헛기침을 터뜨렸다. "허엄……!소협, 여기 이렇게 서 있을 것이 아니라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 북령빙군의 재촉에 나천웅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들은 모두 금검보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나천웅 일행은 내빈청으로 안내되었다. 이때 내빈청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쭉 둘러 앉아서 담소를 나누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천웅 일행이 내빈청으로 들어서자 그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때 술을 마시고 있던 중인들 중 몇명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일어선 자들은 모두 육십여 세 정도의 도인들이었다. 그 도인들은 황망히 나천웅의 앞으로 다가서더니 공손히 합장을 하는 것이었다. "무량수불! 소사숙님, 그동안 무척 궁금했었는데 이런 곳에서 뵙게 되니 정말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나천웅이 바라보니 그들은 바로 무당의 정(丁)자 돌림의 도인들이 아닌가? 지금 나천웅에게 인사를 건넨 사람은 정자 돌림의 도인들 중에서도 그와 가장 친분이 두터운 정현(丁顯)도장이었다. 나천웅은 빙긋이 웃으며 정현도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정현, 그동안 잘 있었소?" "소사숙님의 덕분에 평안 무사했습니다." 순간 내빈청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경악의 눈으로 나천웅을 응시했다. '소…… 소사숙이라면……?' '맙소사! 저 젊은 청년의 배분이 그토록 높을 줄이야!' 정현도장은 바로 무당의 장문인인 정천(丁天)도장의 사제가 아닌가? 헌데 그러한 정현이 새파랗게 젊은 청년 나천웅에게 사숙이라고 부르다니…… 중인들은 이 광경에 영문을 몰라하며 서로를 마주 볼 뿐이었다. 그러한 놀라움은 북령빙군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이 청년의 배분은 얼마나 높기에 정현이 사숙이라 부른단 말인가……?' 바로 이때였다. 덜커덩! 요란스런 음향과 함께 대청의 한쪽 문이 확 열렸다. 이어 그곳으로부터 큰 소리가 터져나왔다. "핫핫핫…… 어쩐지 많이 듣던 음성이라 했더니 바로 아우가 아닌가? 정말 반갑네, 반가와……!" 나천웅은 흠칫하며 그곳을 바라다 보았다. 그곳에는 남천괴걸이 주독이 올라 불그스름한 코를 벌름거리며 그를 향해 급히 다가오고 있었다. "양형님!" 나천웅도 그를 다시 만나게 되자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어 양무위는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그의 메기입을 함지박 만큼 벌린 채 나천웅에게로 다가왔다. 이때 남천괴걸의 뒤에는 백발이 성성한 한 도인이 따라오고 있었다.


나천웅도 그 도인을 발견하자 반색을 하며 재빨리 인사를 했다. "무위사형께서도 이곳에 오셨군요." 그러자 무위도장도 인자하게 웃음을 띈 채로 다가와 나천웅의 손을 덥석 잡아쥐었다. "막내사제! 정말 반갑다. 이런 곳에서 사제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나천웅 역시 무위도장의 손을 꽉 잡으며 입을 열었다. "소제도 사형과 같은 심정입니다. 정말 이렇게 뵙게되어 반갑습니다." 무위도장은 대견한 듯이 나천웅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허허…… 사제는 무당을 떠날 때보다 기우(氣宇)가 훨씬 좋아진 것 같군!" 무위도장의 말에 나천웅이 멋쩍어 하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남천괴걸이 무위도장의 등을 탁! 치며 불만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것봐! 늙은 도장, 나도 나소제와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 자네는 좀 옆으로 비켜주게." "핫핫핫…… 원, 사람도 급하기는……" 무위도장이 껄껄 웃어대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남천괴걸이 기다렸다는 듯이 부리나케 나천웅에게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 "이 사람아! 도대체 그때 왜 그 객점을 몰래 떠났나? 혜미 그 계집애도 그렇지…… 그 계집 역시 아무말 없이 떠났으니…… 원……" 남천괴걸은 그때의 섭섭했던 마음이 되살아 나는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천웅은 그러한 남천괴걸을 바라보며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다. "죄송합니다, 양형님." "죄송할 것까지는 없지만, 아무튼 자네가 없는 덕분에 한 괴물을 만나 크게 혼이 났다네." "괴물이라니요?" 나천웅이 어리둥절해 반문을 했다. "자네도 소문은 들었을 걸세. 중원오마 중 죽귀(竹鬼)란 자와 내가 싸운 일들 말일세." "아! 소제도 약간 들은 바가 있습니다." 나천웅은 설하진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남천괴걸을 바라보았다. "헌데 대체 어떻게 됐습니까?" 나천웅의 물음에 남천괴걸이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노부는 처음에 그놈이 오마 중 한 놈일 줄은 실로 꿈에도 생각 못했었지……" "……" "허나, 그놈이 끝까지 건방지게 굴길래 혼을 내주겠다고 덤벼들었는데……" 남천괴걸이 문득 말을 멈추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오히려 이 늙은 거지의 밥줄이 끊어질 뻔 했다네." "핫핫핫…… 형님께서 정말로 크게 혼이 나신 모양이군요." 이때 그들 곁으로 북령빙군이 다가왔다. "허허…… 나소협! 이거 정말 크나큰 실례를 범했네." 북령빙군이 나천웅을 바라보며 미안한 기색을 떠올렸다. "나도 이곳에서 자네에 대한 소문은 양형과 무위도장에게서 수없이 들었네." 이어 감탄에 가득찬 시선으로 나천웅을 지그시 응시했다. "지금 보니 나소협은 과연 그들의 칭찬에 조금도 손색이 없음을 알겠네." 남천괴걸이 눈을 부라리며 그들 앞으로 나섰다. "이것봐! 설가야, 나소제로 말할 것 같으면 무공이 신처럼 높으신 학사숙님의 제자야!" 이어 그는 거들먹거리며 북령빙군을 빈정댔다. "헌데, 자네의 그 시시한 북해의 무공정도로 나소제 앞에서 큰소리를 칠 수가 있을 것 같은가?" "허허허…… 알았네, 알았어. 자네가 무슨 말을 하든 다 승복하지."


남천괴걸의 익살에 북령빙군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그는 그제야 생각난 듯 황망히 나천웅에게 말했다. "참! 나소협, 이거 실례가 이만 저만이 아니로군. 귀한 손님을 이렇게 세워두기만 하다니…… 자,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나." 하며 그는 나천웅 등을 부추겼다. "감사합니다, 설대협!" 나천웅이 북령빙군을 향해 공손히 인사로 답례를 했다. 그들은 모두들 웃으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한편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설하진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가 지금까지 알고 있기로는 남천괴걸은 원래 그 누구에게도 승복하지 않는 성미였다. 심지어는 동해표풍객 도일진에게도 조금도 수그림 없이 대어드는 사람이었다. 헌데 지금 나천웅에게는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지 않은가? 그녀의 기억으로는 학선기란 이름은 도통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견문이 얕아서가 아니라 학선기가 별로 무림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설하진은 자신의 조부마저 나천웅에게 평배(平輩)로 대하는 것을 보자 왠지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이었다. '만약, 저분의 배분을 따진다면 나는 그의 손녀뻘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굴린 설하진은 삽시간에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이어 무심코 주위를 훑어보았다. 이때, 설하진의 눈에 한 명의 소녀가 들어왔다. 그 소녀는 바로 강설연이었다. 강설연은 지금 두 눈에 야릇한 빛을 가득 띄운 채 나천웅의 얼굴만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그녀를 발견한 설하진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저 계집이…… 나공자님을……?' 바로 그때 강설연이 방긋이 웃으며 남천괴걸에게 말을 건넸다. "양노선배님, 소녀가 한 가지 놀라운 소식을 들려 드릴까요?" 남천괴걸은 그녀의 뜻밖의 말에 일순 멍한 표정이 되었다. "아이야, 그게 무슨 말이냐? 나에게 놀라운 소식을 들려줄 것이 있다니……" 그는 곧 강설연을 주시하며 질문을 던졌다. 강설연은 남천괴걸을 향해 생긋 웃어 보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에 오기 전에 나소협께서는 한 명의 무서운 마두를 제거했답니다." "마두라니?" 남천괴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강설연이 교소를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호호호…… 바로 중원오마 중 넷째인 혈립이예요." "무…… 무엇이……?." "뭐라고……?" "세상에……!" 그 말을 들은 중인들은 모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천괴걸 역시 입을 딱 벌린 채 나천웅을 응시했다. "나…… 나소제, 그게…… 정말인가?" 나천웅은 그저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운이 좋았을 따름입니다." 나천웅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좌중의 인물들은 모두 술렁술렁거렸다.


그들은 나천웅의 무공 정도를 판단하게 된 것이었으니…… 남천괴걸도 그제서야 안색이 환해졌다. "허허허…… 과연, 과연…… 나소제답군. 그 무서운 혈립이 자네의 손에 죽음을 당하다니……!" 북령빙군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나천웅을 바라보았다. "허허허…… 나소협, 우선 자리에 앉게나. 그리고 이 노부의 술잔을 받게나!" 이어 그의 앞으로는 잔이 하나 놓여졌고, 북령빙군이 술병을 들어 그곳에다 철철 넘치도록 술을 따라 주었다. "감사합니다, 설대협!" 나천웅은 그것을 단숨에 쭉 들이켰다. "설대협, 이번에는 소생의 잔을 받으십시오." "하하하…… 고맙네." 남천괴걸이 째진 듯이 작은 눈을 부라리며 나천웅을 주시했다. "이봐, 나소제! 이 형님을 두고 저 늙은이에게만 술을 따라 주긴가?" "하하핫…… 형님, 죄송합니다. 자, 그 대신 이 아우가 벌주 석 잔을 마시겠습니다." 나천웅이 호방하게 웃어제치며 남천괴걸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헛헛헛…… 암! 그래야 우리 아우답지." 남천괴걸은 흡족한 듯이 메기입을 크게 벌리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바로 이때, 문 한쪽이 열리며 몇 명이 내빈청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나이가 약 오십 세 정도 되어 보이는 청의노인과 자태가 출중한 두 명의 여인이었다. 청의노인은 턱 밑에 짧은 수염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며 대단히 청수하게 생긴 인상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따라오는 소녀들은 지극히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 소녀 중 한 명은 대략 십 구 세 정도로 녹의를 걸치고 있었다. 녹의소녀는 이목구비가 대단히 아름다왔으며 전체적으로 요염한 인상을 풍겨주었다. 헌데, 그녀의 입가에는 특이하게도 까만 점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그 까만 점은 그녀의 요염한 자태와 묘하게도 조화를 이루어 녹의소녀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해주었다. 다른 또 한 명의 소녀는 약간 차고 냉정하게 보였지만 그녀 역시 나무랄 데 없는 미색(美色)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전신에 새까만 흑의를 걸치고 있어서인지 전신에서 싸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북령빙군은 안으로 들어온 그들을 보자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나소협, 내 자네에게 나의 식구들을 소개해 줌세." 이어 북령빙군은 청수하게 생긴 청의노인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운청(雲淸)아! 내가 너에게 한분 소협을 소개해 주마." 하며 그는 나천웅 쪽을 바라보았다. "이 소협이 바로 너의 양사백이 늘 자랑해오던 무당의 기인 나천웅 소협이시다." 순간, 청의노인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청의노인은 나천웅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소협의 위명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습니다. 저는 금검무적(金劍無敵) 설운청(薛雲淸)이라 합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나천웅은 내심 깨달을 수가 있었다. '아! 이 사람이 바로 금검보주인 설운청이었구나……!' 나천웅도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금검보주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설보주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소생 나천웅이라 합니다." "하하하…… 한집안 식구나 마찬가지니 그리 겸손해 할 것은 없네."


북령빙군이 손을 내저으며 커다랗게 웃어제쳤다. 그는 다시 두 소녀들 쪽을 가리키며 입술을 떼었다. "자, 나소협! 내 자네에게 내 사랑하는 두 손녀를 소개해 주지……" 하고는 옆에 서 있던 두 소녀에게 손짓을 했다. "너희들, 이리로 오너라." 두 소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오자 북령빙군은 그 중 녹의소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나소협, 이 아이는 운청의 첫째 딸로서 노부의 큰 손녀일세." 이어, 자애가 어린 눈빛으로 녹의소녀를 바라보았다. "경아야, 어서 나소협께 인사 드려라." 그러자, 녹의소녀가 생긋 웃으며 나천웅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소녀는 설하경(薛霞瓊)이라 하옵니다. 앞으로 많은 부탁을 드리겠어요." 맑고도 청아한 음성이었다. 이때 북령빙군이 다시 그 옆의 흑의소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아이는…… 지금은 죽고 없지만 내 둘째 아들의 딸이라네." 북령빙군이 이렇게 그녀를 나천웅에게 소개할 때, 흑의소녀는 나천웅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알 듯 모를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녀는 설군벽(薛君璧)이라 하옵니다." 흑의소녀는 짤막하게 자신을 소개하고는 곧 시선을 돌려버렸다. 이 순간 나천웅은 문득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두 눈이 기이하게 변화함을 느꼈다. 그는 내심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녀의 눈빛은 실로 묘하기 짝이 없구나! 마치 천하의 모든 사람을 조소하는 듯한 눈빛과도 같으니……' 그가 이렇게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설하경이 방긋이 웃음을 띄운 채 나천웅에게 말을 건넸다. "나소협, 제가 술 한 잔 따라드려도 되겠어요?" 순간 나천웅은 퍼뜩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는 황망히 설하경을 바라보며 술잔을 내밀었다. "아…… 고맙소, 낭자!" 설하경은 입가에 다시 한 번 고혹적인 미소를 떠올리며 다소곳이 그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듣자하니 소협께서는 양할아버님과 평배라 하더군요. 그렇다면 저도 나소협에게 할아버지라고 칭해야겠군요." 설하경의 장난기 어린 듯한 말을 들으며 나천웅은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그렇게 배분을 따진다면 저 자신이 골치가 아프니 낭자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주십시오." 그의 시원시원한 말투에 설하경은 눈빛을 반짝이며 요염스럽게 웃어보였다. 이어 그녀는 북령빙군을 힐끗 바라보더니 작은 입술을 움직였다. "음…… 그럼 제가 대가라고 칭해도 되겠어요? 아무래도 나소협의 나이가 저보다는 많은 것 같으니……" 순간 북령빙군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경아야, 나소협께 그 무슨 무례한 말이냐?" 그때, 나천웅이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 설대협, 저는 칭호에 대해서는 그렇게 신경쓰고 싶지 않습니다." 이어 나천웅이 설하경에게 시선을 주며 뒷말을 이었다. "그러니, 저의 칭호를 어떻게 부르든 상관이 없습니다." 남천괴걸이 히죽이 웃으며 나천웅의 말을 받았다. "흐흐흐…… 과연, 나소제야! 이봐, 북령 늙은이!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법이니


자네가 참견할 것이 못되네." 순간 장내에는 온통 웃음보가 터져 나왔다. 이에 설하경은 두 볼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달아 오른 채 고개를 푹 수그렸다. 문득 북령빙군의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흐…… 음…… 그렇다면 경아가……' 내심 이렇게 생각을 굴린 북령빙군은 그윽한 시선으로 설하경을 바라보았다. 이때, 북령빙군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여리게 감돌고 있었다. 잠시 후 북령빙군은 슬쩍 시선을 돌려 설하진을 바라보았다. 찰나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하진은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홀짝홀짝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는 그녀의 안색은 의외로 담담했으며 지극히 무표정했다. 허나 북령빙군은 그녀의 모습에서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고독감과 슬픔이 우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순간, 북령빙군의 가슴 한 구석이 쓰리게 아파왔다. '그…… 그렇구나! 진아가 나소협과 그동안 같이 있었다면……' 북령빙군은 갑자기 머리속이 혼란스러워지며 어지러웠다. 내빈청 안의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했다. 그러나 나천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몇줄기 여인의 눈길은 그 나름대로 복잡하기 그지 없었다. 나천웅은 그녀들의 뜨거운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호탕하게 웃어제치며 계속해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차츰 시간이 흐를 수록 술좌석의 흥은 고조되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여인네들의 열정(熱情)도 그 열기를 더해만 갔다. 모든 것이 깊이 잠든 한밤중이었다. 사위는 적막하기 그지 없었으며 칠흑의 어둠 속에 아득히 가라앉아 있었다. 이 시각, 나천웅은 불을 밝힌 채 탁자에 앉아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진주홍 빛의 촛불에 나천웅의 얼굴이 어렸다. 이때 그의 얼굴은 신비스러울 만치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그 어떤 성(聖)스러움까지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그는 한창 독서에 열중해 있었다. 헌데 그가 한창 책 읽기에 몰입해 있을 때였다. 똑! 똑! 누군가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퍼뜩 정신이 든 나천웅이 책을 놓으며 입술을 떼었다. "누구요?" "……" 허나, 방문 밖에서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천웅은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그는 일어서서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드--- 르--- 륵! 나천웅이 방문을 열어제치자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바로 설하진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문 채 창백한 얼굴로 나천웅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천웅은 설하진의 뜻밖의 방문에 흠칫 놀랐다. "아니? 설낭자, 이 밤중에 웬일이시오?" 설하진은 지그시 나천웅을 응시하더니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나소협, 좀 들어가도 괜찮겠어요?" 순간, 나천웅은 약간 머뭇거렸다. "안된다면…… 그냥 돌아가지요." 설하진은 힘없이 말을 뱉아내며 돌아서려 했다. "아…… 아니오, 어서 들어오시오." 나천웅은 황망히 되돌아 서려는 그녀를 만류했다. 그러자 설하진은 고개를 다소곳이 숙여 보이더니 조용히 방문을 들어섰다. 나천웅은 의자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앉기를 권했다. "자…… 좀 앉으시오, 낭자." "고마워요." 설하진은 눈을 들어 나천웅을 한 번 바라보고는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나천웅도 그녀의 앞좌석에 마주 앉았다. "……" "……" 잠시 묘한 침묵이 흘렀다. 방 안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왠지 설하진의 안색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나천웅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한 번 나직하게 헛기침을 터뜨렸다. "흠……! 낭자……" 그는 설하진을 가만히 불렀다. 그러자 설하진은 수그렸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나천웅은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그녀도 그윽한 눈으로 나천웅을 응시해왔다.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문득 설하진은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듯 잠시 머뭇거렸다. 나천웅은 그녀를 묵묵히 응시하며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그녀의 메마른 입술이 살며시 열렸다. "저…… 소녀는…… 공자님께 한 마디…… 할말이 있어요." "할말……?" 나천웅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낭자, 어떤 말인지 어서 해보시오." 그는 궁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설하진의 눈꼬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이어 그녀의 커다란 두 눈에는 갑자기 그렁그렁 눈물이 고이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보였다. 나천웅은 그녀의 그러한 모습에 왠지 모르게 가슴 한쪽이 찡하게 저려왔다. 웬일인지 오늘 따라 설하진의 창백한 안색이 더욱 더 가엾게 느껴졌다. 그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설하진에게로 다가갔다. 나천웅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설하진은 가만히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그렇다면……?" 나천웅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조심스럽게 그녀의 기색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설하진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나천웅을 뚫어질 듯이 응시했다. 이 순간, 그녀의 눈빛에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애틋한 감정의 열류가 수없이 교차되고 있었다.


잠시 후, 설하진은 나천웅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공자께서는…… 소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순간 나천웅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낭자, 그…… 그게 무슨 뜻이오?" 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만 설하진의 두 눈에 그렁그렁 고였던 눈물이 그녀의 창백한 뺨 위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나공자님께서…… 저를…… 수치도 모르는 계집이라고 욕해도 좋아요!" 설하진은 복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아내느라 애쓰며 목메인 음성으로 단숨에 말을 뱉아냈다. "허나…… 허나…… 그렇다고……" 그녀는 이제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했다. 울음이 잔뜩 그녀의 목을 잠기게 하고 있었다. 얼마나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가슴 속에 담긴 무수한 말들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행동은 순결한 소녀로서 대단히 힘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렸다. 왜냐하면, 실상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마음 속은 오직 사랑하는 정인(情人)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스란히 전하고 싶은 간절한 염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나천웅도 바보는 아니었다. 나천웅의 안색이 곧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그는 직감적으로 설하진이 지금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아! 이 소녀가……?' 이때, 설하진은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결국 그녀는 소녀의 자존심을 죽여가며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전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당신 주위에는 저보다 아름답고…… 귀여운…… 아가씨들이 많아요……" "……" 나천웅은 멍하니 그녀를 응시했다. 설하진의 자조에 가득 찬 음성이 계속되고 있었다. "당신은…… 아마도…… 저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을거예요." 이에 나천웅이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낭자,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소." 나천웅의 말이 떨어진 순간 설하진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물기가 촉촉히 배인 그녀의 두 눈에서는 연모와 안타까움이 한데 얽혀 교차되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다시 가늘게 떨렸다. "그렇다면…… 당신께서는…… 저를……어떻게 생각하세요?" "……!" 나천웅은 그녀의 애처로운 질문에 내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일시 어찌할 바를 몰라 더듬거렸다. "나…… 나는……" 결국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그러자 설하진의 안색은 어둡게 변하고 말았다. 그녀의 두 눈에는 다시금 그렁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결국…… 그랬군요! 모든 것이 나만의 생각이었군요……" 그녀는 힘없이 이렇게 내뱉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녀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흠칫 놀란 나천웅은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허나 설하진은 그의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 나천웅은 잠시 멍해진 채 설하진을 응시했다. 이때 문쪽으로 몸을 돌리려던 그녀가 무의식중인 듯이 전혀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모든 것을 나의 언니에게 빼앗겨만 왔어요. 할아버님과 부모님의 사랑부터 시작해서 친구도, 내가 좋아하는 물건도……" "……" "내가 어른들께 얻은 것은 단지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인한 동정 뿐……" 이 순간, 그녀의 음성은 메마른 건초처럼 서걱서걱한 음색이었다. "허나, 이번에는…… 이번에는…… 결코 빼앗기고 싶지 않았어요!" 그녀는 마지막 말을 뱉아내며 고개를 홱 돌려 나천웅을 뚫어질 듯이 응시했다. 이어 그녀는 결심한 듯 말문을 열었다. "그것은…… 바로……바로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예요!" 순간 나천웅은 강한 충격을 받았다. "나…… 낭자……" 이어, 나천웅은 한 손을 들어 설하진의 어깨를 잡았다. 일순 그녀의 어깨는 한차례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나천웅은 분명하게 그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찰나 설하진의 신형이 쓰러질 듯 무너지더니 나천웅의 넓은 가슴에 안겨왔다. 그녀는 북받쳐 오르는 설움을 참을 수 없는 듯 오열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으흐흑……!" 설하진의 뜻밖의 행동에 나천웅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천웅의 가슴에 뺨을 부벼대며 계속해서 흐느껴 울었다. 이어 그녀의 입에서는 목메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영원히 저의 마음을…… 알지 못하실 거에요. 영원히…… 저의 이 마음을 모르실 거예요……" 나천웅은 멍하니 그녀의 행동을 주시했다. 한 순간 나천웅의 눈 끝에 찰나적으로 여린 경련이 일었다. 그는 서서히 굳었던 안색을 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얼마 전…… 고찰에서 낭자를 처음 만난 이후…… 낭자의 영상은 나의 가슴 속에 뚜렷이 박혀 있었소." 낮고도 차분한 그의 음성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설하진은 그의 말에 흠칫 놀란 듯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나천웅을 바라보았다. 이때 그녀의 고운 눈매에는 의혹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천웅은 그윽한 시선으로 설하진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낭자, 아니…… 진매, 그대는 진정 모를 것이오. 내가 얼마만큼이나 그대를 생각하고 있는지를……" "다……당신……" 설하진은 전혀 뜻밖인 그의 대답에 흠칫 놀랐다. "나는 결코 빈말을 좋아하지 않소. 솔직히…… 나도 지금 내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겠소……" 설하진은 지금 이 순간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허나, 낭자가 싫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오!" "다…… 당신……" 설하진이 정녕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크게 뜬 채 나천웅을 응시했다. 나천웅은 손을 내밀어 설하진의 턱을 치켜들었다.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한 줄기의 감정이 나천웅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고 있었다. "하진! 남들이 그대를 어떻게 보든 나의 눈에는 그대의 모습이 천하의 그 어떤 여인보다도 아름답소." 나천웅의 입에서는 부드러운 어조가 흘러나와 그녀의 마음을 강하게 휘어감았다. 설하진의 눈 끝이 바르르 떨렸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다시금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곧이어 반짝이는 눈물이 그녀의 창백한 뺨 위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순간 나천웅의 부드러운 입술이 조용히 그녀의 눈두덩이를 덮었다. '아아……!' 설하진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차츰 나천웅의 입술은 점점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곧, 그의 입술은 설하진의 작은 입술을 덮어버렸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으…… 음……" 그녀의 입에서는 여린 비음이 새어나왔다. 설하진은 눈 앞이 아찔해오며 전신의 기운이 모두 빠진 듯 맥없이 휘청거렸다. 그러자 그들의 몸은 더욱 가깝게 밀착되었다. 한 순간 뜨거운 사랑의 열기가 두 사람을 휩싸고 있었다. 설하진의 눈에서는 계속해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허나 이 눈물은 슬픔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감격의 눈물이었다. 영원히 닿지 않을 듯이 높아만 보이던 것이 자신의 손에 들어온 듯한 느낌에서 오는 희열의 눈물이었다. 설하진은 가냘픈 두 팔을 들어 나천웅의 목을 껴안았다. 곧이어 두 사람은 모든 것을 내맡긴 채 정열적인 입맞춤을 나누었다. 이 순간만큼 설하진은 이 세상 그 무엇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은 서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뜨거운 사랑의 눈길을 교환했다. 설하진의 창백했던 두 뺨에는 부끄러움으로 붉은 홍조가 돌고 있었다. 나천웅의 타는 듯한 시선이 설하진의 얼굴 위에 따갑게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진매, 내 진정 당신을 사랑하는가 보오." 나천웅은 진심어린 어조로 나지막하게 뱉아냈다. 설하진은 부끄러움과 희열로 어찌할 바를 모르며 나천웅의 품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다시 한 번 사랑의 정열이 그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밀착시킨 채 기나긴 입맞춤을 나누었다. 진홍빛의 촛불은 마지막 촛농을 녹이며 가물가물 타오르고 있었다. 찌르르…… 찌르르…… 찡찡! 저 멀리 어디선가 밤벌레와 새 우는 소리가 아련하게 두 사람의 귓전을 울려주었다. 제 20 장 冷血三神 나천웅은 침상 위에 드러누운 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계속해서 설하진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것이었다.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척이던 나천웅의 입에서 갑자기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진…… 내가 그 소녀를 진정 사랑하고 있단 말인가……?"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허나 도저히 그 물음에 분명히 답할 수가 없었다. 나천웅, 그는 결코 설하진이 싫지 않았다. 아니 싫기는 커녕 오히려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마치 따스한 봄날처럼 훈훈해지는 것이었다. 사실 나천웅이 그녀를 좋아하게 된 동기는 그녀의 처지가 자신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情)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녀는 마음에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하고도 귀여운 소녀다……!" 나천웅은 설하진의 모습을 그려보며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내 반드시 그녀의 병을 고쳐주어 그녀의 진정한 미소를 되찾아 주겠다!" 시간이 흐를 수록 나천웅은 설하진에게 자꾸만 마음이 기울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계속 누운 채로 생각을 굴리며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도무지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천웅은 온몸이 약간 노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덧 서서히 잠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스르르 내리 감았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휙! 갑자기 허공을 가르는 파공성이 들렸다. 나천웅은 심상치 않는 기운을 느끼고 퍼뜩 두 눈을 떴다. 찰나 예리하고도 시퍼런 광채가 자신의 목을 노리며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도저히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였다. '위험하다!' 나천웅은 사태가 다급함을 느꼈다. 비록 자신의 몸이 금강불괴라고는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것만을 믿을 수는 없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허나 이미 때는 약간 늦어 있었다. 탁! 둔탁한 음향이 들림과 동시에 나천웅은 자신의 어깨가 뜨끔함을 느꼈다. 그는 황망히 자신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어깨의 옷은 약간 찢어져 있었으며 그곳으로 드러난 살갗은 불그스름하게 자욱이 나 있었다. 허나 놀랍게도 그의 살갗은 조금도 다치지가 않은 것이었다. 그는 급히 눈을 돌려 자신의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한 자루의 비엽도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이것은……?' 비엽도를 발견한 나천웅의 안색이 홱 변했다. '이 비엽도는 노운량과 혈립의 목숨을 앗아간 바로 그 비엽도가 아닌가?' 나천웅은 생각을 마치자마자 드러누운 그대로 신형을 박찼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은 어느새 창문을 뚫고 밖에 나와 있었다. 밖은 여전히 칠흑의 어둠에 휩싸인 채 고요하기 그지 없었다. 허나 이미 비엽도를 날린 인물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나천웅은 재빨리 주위를 훑어 보며 이를 갈아붙였다. "이번만은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운공을 시작했다. 창운비급에서 익힌 무당의 비전수법인 천지현청술(天地玄聽術)을 전개한 것이다. 순간 그의 귀에 미약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기울이고 있는 나천웅의 눈에서 순간 한 줄기 싸늘한 광망이 폭사되었다. "동북쪽 이백여 장 밖이구나……!" 그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경공술을 전개했다. 순간 나천웅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파아앗! 그의 신형은 어느새 삼십여 장을 날고 있었다. 실로, 입이 딱 벌어질 만큼 무서운 경공술이었다. 얼마나 갔을까? 나천웅의 눈에 저 멀리서 달리고 있는 왜소한 흑의인영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자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나천웅의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이 떠올려졌다. "네가…… 나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의 입에서 냉랭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일찌감치 그곳에서 멈추고 나의 일장을 받아랏!" 나천웅의 쩌렁쩌렁한 호통이 밤공기를 갈랐다. 허나 흑의인영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그자의 경공 또한 대단히 빠른 것이었다. 나천웅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흐…… 음…… 저자의 경공은 내가 강호에 나온 이래 가장 빠른 자인 것 같구나……!' 그러나, 곧 나천웅의 입가에 야릇한 조소가 떠올랐다. '허나, 네가 나의 경공을 당할 수는 없지!' 그는 단전에 내공을 집중시킨 뒤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으하하핫…… 이제는 멈추거라!"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전력을 다해 양발을 박찼다. 순간 나천웅의 신형은 무서운 속도로 흑의인영의 뒤까지 접근을 하는 것이었다. 그 속도는 흡사 빗살과도 같았다. 도저히 그것이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공할 속도였다. 나천웅이 바짝 따라 붙자 앞서 가던 흑의인영이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다 보았다. 찰나 그 인영의 눈빛이 홱 변했다.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찬공기를 들이 마셨다. '무…… 서운 경공이다! 이러다간 순식간에 추월을 당하겠구나……' 이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흑의인영이 갑자기 방향을 왼쪽으로 비틀었다. 그리고는 그곳에 자리한 거대한 숲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었다. 나천웅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네가…… 그곳까지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때, 흑의인영은 거의 숲속에 도착해 가고 있었다. 흑의인영이 숲속으로 들어 가려는 무렵, 나천웅의 신형이 꿈틀했다. 한 줄기 빛이 번쩍했는가 싶은 순간, 나천웅은 흑의인영의 바로 뒤까지 접근했다. 그는 재빨리 오른손을 갈구리같이 굽혀 흑의인영의 목을 노리며 전광석화같이 짓쳐 들어갔다. 바로 이때였다. "흐흐흐…… 애송이놈! 손을 멈춰랏!" 어디선가 싸늘한 음성이 울려퍼졌다. 그리고는 곧 숲속으로부터 한 가닥의 음유한 잠력이 뻗어 나왔다. 그 잠력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나천웅의 공격을 차단시키는 것이 아닌가?


"엇!" 나천웅은 깜짝 놀라 몸을 우뚝 세웠다. 그 순간 흑의인영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나천웅은 내심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떤놈이 숲속에서 암습을 가하느냐?" 나천웅의 호통이 떨어지는 순간, "흐흐흐흐……" "크흐흐흐……" 싸늘한 밤공기를 가르며 음침한 괴소가 스산하게 흘러나왔다. 동시에 숲속에서 네 명의 인영이 유령같이 그 모습을 드러내며 천천히 걸어나왔다. 나천웅은 흠칫 놀라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전신에 하얀 옷을 걸친 괴인들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안색은 모두가 약간의 투명한 기운마저 엿보일 정도로 창백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전신 또한 새하얀 백색이 아닌가? 나천웅은 그들이 나타나는 순간, 전신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무서운 한기다! 거리가 십여 장이나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강한 한기가 몰아치다니……!' 헌데, 더 더욱 놀라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세 괴인이 지나오는 사오 장 근처는 모두가 새하얀 서리로 뒤덮히는 것이 아닌가? 파스스스! 파스스……! 나천웅은 다가오는 그들을 쏘아보며 냉막한 음성을 뱉아냈다. "너희들은 누구냐?" "냉혈삼신(冷血三神)!" 세 백의괴인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그들의 음성에는 전혀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다만 얼음물을 뒤집어 쓴 듯 소름끼칠 정도로 차가울 따름이었다. "냉혈삼신이라고?" 나천웅으로서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이때 냉혈삼신이라 자칭한 괴인들 중 가운데 서 있는 인물이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네놈이 학선기의 제자임을 잘 알고 있다. 또한…… 네놈이 자칭 귀면수라라는 애송이임도 알고 있다!" 그 말을 들은 나천웅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허나 그는 곧 평정을 되찾으며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후후후…… 상당히 자세히 알고 있군!" 그가 빈정거리자 냉혈삼신이 다시 얼음같이 차가운 음성을 흘려냈다. "흐흐…… 귀면수라! 우리가 네놈을 잘 아는 이유는 바로 네놈이 우리쪽의 고수들을 상당히 해쳤기 때문이다!" "뭐라고?" 나천웅의 눈빛이 확 변했다. "그럼 너희들도 천마십이성의……?" "그렇다! 흐흐흐…… 우리는 바로 나습포찰에서 네놈을 죽이라는 사명(使命)을 받고 온 몸이니라!" 그 말에 나천웅은 대경실색했다. '이럴 수가…… 도대체 천마십이성은 얼마나 많은 고수들을 거느리고 있단 말인가?' 그는 어쩐지 그들의 기세가 범상치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중원오마, 냉혈삼신…… 앞으로 이들 외에도 또 어떤 고수들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니……'


나천웅이 내심 생각을 굴리는 순간 냉혈삼신이 천천히 세 방향으로 나누어 서기 시작했다. 이어 그들 세 괴인의 입에서 냉혹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언제나 셋이 함께 공격한다. 그것은 상대가 약하건 강하건 전혀 개의치 않는다. 또한…… 그 수가 많거나 적거나도 상관치 않는다!" 나천웅은 침중한 표정을 지은 채 잠시 머리를 굴려보았다. '내 보기에 이들 개개인의 무공은 결코 혈립에 못지 않다. 그렇다면 이들의 합공은 가히 상상을 불허할 만큼 가공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왼손에 들린 천무진뢰검을 힘주어 잡았다. "좋다! 어디 한 번 해보자!" 나천웅은 냉막한 음성을 뱉아냈다. 냉혈삼신은 천천히 나천웅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나천웅은 바짝 긴장한 채 전신의 진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다. 그는 예리한 눈으로 그들의 행동을 주시했다. 휘우우…… 냉혈삼신의 속도는 갈 수록 빨라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들의 모습은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가 않을 정도까지 되었다. 고오오…… 이미 그곳의 주위는 무서운 한기의 소용돌이로 뒤덮혀 있었다. 허나 나천웅은 극양의 과일인 만년화령지과를 복용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한기에도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한순간 누군가의 음침한 냉갈이 터져나왔다. "흐흐흐…… 죽어랏!" 동시에 냉혈삼신 중 한 명이 무서운 속도로 허공으로 솟구치는 공격을 개시해왔다. 끼우우웅! "흥! 어림없다!" 나천웅은 싸늘한 냉소를 날리며 일장을 쭉 내뻗었다. 꽈르릉! 천붕지괴의 엄청난 폭음이 울려퍼졌다. 나천웅은 전신이 가볍게 흔들림을 느꼈다. 이어 상대를 바라보니 그자는 이미 원위치에 선 채 다시 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과연 만만치가 않구나!' 찰나 나천웅의 주위를 돌고 있던 냉혈삼신의 입에서 다시 귀기 어린 음성이 새어 나왔다. "죽여! 죽여……!" 실로 듣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로 섬뜩한 음성이었다. 순간 나천웅의 입에서 갑자기 살기 뻗친 음성이 흘러나왔다. "천마십이성의 무리라면 중원에 단 한 걸음도 들여놓치 못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나천웅만은 절대로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리라!" 쩌렁쩌렁한 그의 음성은 주위에 깔린 새하얀 서리마저 흔들릴 지경이었다. 나천웅은 말을 마치자마자 왼손의 검을 뽑았다. 순간, 쿠르르릉! 천무진뢰검이 뽑혀지면서 뇌성벽력이 치는 듯한 무시무시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태극혜성!" 뒤이어 나천웅의 입에서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고함이 터져나왔다. 순간 가공할 만한 은광이 내뻗치는


그 광채가 사방으로 난무했다. 번--- 쩍! 츠츠츠--- 츠! 그 음향은 실로 귀청이 찢어질 듯이 요란스러웠다. 허나 냉혈삼신은 조금도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입가에는 한줄기 비웃음마저 떠오르고 있었다. 찰나지간 그들의 전신에서 하얀 백무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하얀 백무는 순식간에 그들의 몸을 덮어버렸다. "흐흐흐…… 애송이 놈! 냉혈귀무진(冷血鬼霧陣)의 위력을 보여주마!" 백무 속에서 괴소와 함께 그들의 냉갈이 들려왔다. 동시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가 소용돌이치듯이 나천웅을 향해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우욱!' 나천웅은 온 전신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마치 온몸의 피부가 얼어서 갈라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 오는 것이었다. '무…… 무서운 무공이다!' 나천웅은 대경실색하며 급급히 뒤로 물러났다. "흐흐흐…… 네가 피한다고 우리의 손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냉혈삼신은 냉갈을 터뜨리며 계속해서 나천웅의 몸을 쫓아오는 것이었다. 순간 나천웅은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좋다! 냉혈삼신! 어디 누구의 무공이 강한지 정면으로 부딪쳐 보자!" 그는 분기탱천한 듯 노갈을 터뜨렸다. 다음 찰나, "복마진천!" 나천웅의 입에서 날카로운 호통이 터져나왔다. 드디어 대라검법 중 제 이초를 전개한 것이다. 일전에 오마 중 혈립은 바로 이 검법에 의해 목숨을 잃었던 것이 아닌가? 구우우웅! 파츠츠츳---! 무시무시한 파공성이 허공을 갈랐다. 천지(天地)가 온통 천무진뢰검의 검광에 휩싸였다. 그 검광은 곧장 냉혈삼신의 새하얀 백무를 향해 쏘아져 가는 것이었다. 헌데 이럴 수도 있는 것인가? 천무진뢰검에서 뻗치는 검기가 그들의 백무와 부딪히는 순간 나천웅은 엄청난 반탄력을 느꼈다. "이…… 이런……" 그가 당황하며 주춤거리는 찰나, 퍼펑! 한 가닥 백무의 줄기가 나천웅의 어깨에 격중되고 말았다. "으--- 윽!" 나천웅은 어깨에 무서운 통증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냈다. 그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자신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의 어깨부분의 옷은 이미 가루가 되어 있었다. 또한 어깨부분은 새하얀 서리로 뒤덮혀 있는 것이었다. '이…… 이럴 수가……' 그가 경악하는 사이 냉혈삼신이 음침한 광소를 터뜨렸다. "으핫핫핫…… 혈립이 당했다고 해서 좀 쓸만한 줄 알았더니 듣던 것보다 훨씬 약하구나!"


자못 득의에 가득 찬 그들의 냉갈이었다. "꼬마야! 이번에는 네놈의 전신을 얼음덩어리로 만들어주마!" 냉혈삼신의 호통이 떨어지자마자 다시 새하얀 백무가 나천웅을 향해 몰아쳐 왔다. 순간 나천웅은 다급한 위기를 느꼈다. 헌데 바로 그 위기의 순간 그의 뇌리에 문득 번개처럼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 이들의 무공은 음(陰)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 그렇다면……' 생각을 굴린 나천웅은 그 즉시 자화신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렸다. 곧 이어 신형을 한 마리 학처럼 허공으로 솟구쳤다. 순간, "단봉조양(丹鳳朝陽)!" 나천웅의 입에서 천지를 가를 듯한 대갈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 한 줄기 붉은 기류가 열기를 포함한 채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휘류류륭! 그 붉은 기류는 곧장 하얀 백무를 향해 쏘아져갔다. 그것이 새하얀 백무에 닿았다고 느낀 순간이다. 파스스슷---! 푸스스스…… 마치 시뻘겋게 달군 쇠가 찬물 속에 담궈지는 듯한 음향이 들려왔다. 동시에 하얀 백무가 커다랗게 진동을 일으켰다. 우르릉! 대체 무엇이 어찌된 것일까? 연이어 뿌옇게 증기가 허공으로 퍼져나가며 백무가 차츰 엷어지기 시작했다. 나천웅이 그것을 바라보며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핫…… 복마진천!" 그는 다시 한 번 천무진뢰검을 휘두르며 백무 속을 파고 들었다. 파파파팍! 뒤미처 섬뜩할 만치 무서운 음향이 울려퍼졌다. 나천웅의 천무진뢰검에서 뻗어진 검기가 냉혈삼신의 백무를 양단한 것이었다. 순간, "으--- 악!" 누군가의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동시에 백무 속에서 한 줄기의 시뻘건 선혈이 허공 높이로 뿜어져 올랐다. '성공이다……!' 나천웅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는 희색을 떠올린 채 즉시 왼손을 치켜들었다. "혈단회천(血丹廻天)!" 나천웅의 입에서 다시 한 번 대갈이 터져나왔다. 그는 단원오장 중 제 사초를 전개한 것이었다. 번--- 쩍! 쿠오오오! 나천웅의 왼손에서는 실로 무시무시한 열기가 뻗쳐나왔다. 그 열기는 곧장 이제 거의 사라져가는 백무 속의 한 인영의 가슴을 강타했다. "으--- 악!" 비단폭 찢어지는 듯한 처절한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뒤이어 냉혈삼신 중 한 명이 온통 숯처럼 시커멓게 탄 채 허공으로 날아갔다. 실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나천웅의 무공이었다. 나천웅은 재빨리 시선을 돌려 장내를 둘러보았다.


냉혈삼신 중 나머지 한 명만이 살아남아 공포에 질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천웅의 싸늘한 눈빛과 그자의 겁에 질린 시선이 맞부딪치는 순간 그는 비틀거리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나천웅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 "네놈이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천웅은 말을 마치자마자 오른손의 천무진뢰검을 치켜들었다. 다음 순간, "무극조원(無極造元)!" 그의 입에서 무서운 호통이 터짐과 동시에, 천무진뢰검이 나천웅의 손을 벗어나 빗살처럼 날아갔다. 순간 천기가 삽시간에 새하얗게 변했다. 검에서 뻗치는 검기는 한 치 앞조차 볼 수 없도록 눈부신 은광으로 허공을 가득 메우는 것이었다. 번--- 쩍! 고오오오…… "으--- 아--- 악!" 울부짖는 듯한 처절무비할 비명이 허공에 메아리쳤다. 곧 허공을 가득 메웠던 은광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자 냉혈삼신 중 마지막 남았던 한 명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자는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러한 그자의 가슴에는 이미 주먹만한 크기의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네…… 네놈이……" 그는 처절한 눈으로 나천웅을 노려보았다. 나천웅은 싸늘하게 냉소하며 냉막한 음성을 뱉아냈다. "이제야 나 귀면수라의 진정한 무서움을 깨달았느냐?" 순간 상대의 안면에 부르르 경련이 일었다. "과연……네놈은 대단하다…… 허나…… 너…… 너도 결국은 죽을…… 것이다……" 그는 무척이나 고통을 느끼는 듯 쓰러질 듯 비틀대고 있었다. "네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천마십이성의…… 무공에 비하면……" 잠시 말을 멈춘 그는 한 모금의 검붉은 선혈을 뱉아냈다. "우웩!" 그의 전신은 다시 세차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힘겹게 나천웅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또…… 한 가지 네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오늘 네가 이곳까지 온 것은…… 우리들의 계략이었다……" "……!" 일순 나천웅은 흠칫 놀랐다. "흐흐흐…… 금검보는…… 이미 불바다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나천웅은 순간 뒷통수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겨…… 결국…… 네놈은 우리에게 당한 것……" 냉혈삼신은 말을 마치자마자 앞으로 힘없이 고꾸라지고 말았다. 쿵! 나천웅은 멍하니 그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설마하니 그런 음모가 있을 줄을 어찌 상상이나 했으랴? '이러고 있을 틈이 없다!' 나천웅의 눈에 핏발이 곤두서며 강한 살기가 뿜어졌다. "천하에 간교한 놈들!"


파아앗! 그의 신형은 어느새 허공을 섬광처럼 날고 있었다. 목적지는 말할 것도 없이 금검보였다. 그리 오래지 않아 그의 시야에 금검보가 들어왔다. 차차창! 차창! 뒤이어 그의 귓가에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아뿔사! 벌써 싸움이 시작되었군." 나천웅은 초조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온 진력을 기울여 신형을 날렸다. 눈 깜짝할 새에 그의 신형이 담장을 넘었다. 파앗! 금검보 안으로 들어선 그는 황망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그의 안색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아아, 목불인견(目不忍見)의 끔찍한 참상이 벌어져 있었다. "이럴 수가……!" 금검보의 뜰 전체에 나뒹구는 시신들로 인해 사방은 온통 피바다였다. 대부분 금검보의 제자들로 보이는 시체들은 팔다리가 모두 잘려진 채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심지어는 전신이 두 토막으로 잘려진 시체도 눈에 띄였다. 나천웅은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천마십이성! 이놈들이……" 그는 치솟는 분노로 인해 안면 근육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내당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바로 그때였다. 그의 귀에 여인의 노기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이 악귀같은 놈들 같으니!" "……!" 흠칫 놀란 나천웅은 곧 몸을 세웠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채 숨을 한 번 내쉬기도 전에 나천웅은 그곳에 당도했다. 그곳에는 설하경이 다섯 명의 복면인들에게 둘러 싸인 채 협공을 받고 있었다. 차차창! 우르르릉!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지만 사태는 완전히 역부족이었다. 다섯 명의 복면인들은 음흉한 괴소를 터뜨리며 설하경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헤헤헤……이 계집의 엉덩이가 큰 것을 보니 꽤나 그것을 밝히겠군!" "흐흐흐…… 어디 엉덩이 뿐인가? 유방은 어떻고? 흐흐흐……" 설하경은 심한 수치감을 느꼈다. 허나 그녀는 두 눈에 독기를 떠올린 채 안간힘으로 복면인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허나 역부족, 설하경은 자꾸만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한 순간 그녀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져울렸다. "아앗!" 동시에 한 복면인이 음탕한 괴소를 흘려냈다. "헤헤헤…… 이 계집의 엉덩이에 제법 물이 올랐군!" 그자는 말을 뱉아냄과 동시에 기묘한 초식으로 설하경의 둔부를 공격했다. 쐐애액! 설하경은 대경실색한 채 급급히 신형을 피해냈다. "헤헤…… 이 계집아! 네가 내 손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 복면인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날리더니 더욱 집요한 공격을 퍼부었다. 바로 그때였다. 장내의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으--- 악!" 설하경을 공격해가던 복면인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울리는게 아닌가? 그는 미간에서부터 복부까지 한일자로 길게 그어진 채 고꾸라지고 있었다. 자욱한 피보라가 이는가 했더니 이내 둔탁한 음향이 들려왔다. 쿵…… 복면인이 쓰러진 곳은 순식간에 시뻘건 선혈로 인해 피바다를 이루었다. 나머지 네 명의 복면인들은 이 돌연한 광경에 아연실색했다. 그들은 일제히 주위를 돌아보며 호통성을 내질렀다. "누…… 누구냐?" "나다!" 어디선가 냉막한 음성이 울려퍼지는가 했더니 나천웅이 그들의 면전에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스슷…… "나대가!" 그를 발견한 설하경의 안색이 대번에 환하게 밝아졌다. "네…… 네놈은……!" 복면인들은 나천웅의 유령같은 신법에 재차 놀라 주춤 뒤로 물러섰다. 나천웅은 그들을 쓸어보며 냉혹한 음성을 흘려냈다. "너희들 같은 놈들은 살아있을 가치가 조금도 없다. 그러니 염라대왕에게 안부나 전하도록 해라." "건방진 놈!" "어리석은 놈들." 나천웅의 두 눈에는 전에 없이 강렬한 살기가 뻗치고 있었다. "태극혜성!" 뒤이어 나천웅의 짤막한 호통성과 함께 은광이 번쩍였다고 느껴진 순간이다. "으아악!" "크윽!" 한꺼번에 세 마디의 처절한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뭐가 어찌된 것인지조차 모르는 사이에 세 개의 주인을 잃은 수급들이 시뻘건 피무지개를 뿌리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쾌검(快劍)! 그것은 도저히 인간의 빠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불가사이한 쾌검이었다. 창졸간에 동료들을 모두 잃은 나머지 한 명은 너무나도 놀라 그저 입만 딱 벌리고 있었다. 그는 이내 밀납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부르짖었다. "지…… 지옥귀(地獄鬼)다!" "그래, 네놈 말대로 나는 지옥귀다! 그것도 너희들 같은 놈만 죽이는 귀신이다!" 나천웅은 음침한 음성을 흘려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복면인은 공포로 인해 전신을 부들부들 떨더니 갑자기 신형을 홱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화락! 나천웅은 싸늘한 조소를 날렸다. "도망을 가겠다고! 어림도 없는 짓!" 그는 말을 뱉아냄과 동시에 좌장을 쭉 내뻗었다. "단천지혈(丹天之血)!" 호통이 떨어졌다고 느낀 순간 나천웅의 장력은 정확하게 도주하던 복면인의 등 뒤를 강타했다. 퍼펑!


"으--- 악!" 그 복면인은 순식간에 등 뒤가 박살이 난 채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몸뚱아리는 십여 장 이상 퉁겨져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그때 설하경이 아름다운 옥용에 가득 감격의 빛을 띄운 채 나천웅에게로 다가왔다. "대가! 정말 고마워요. 만약 대가가 안오셨다면……" "경낭자, 그런 말은 하지 마오. 오히려 내가 어색하지 않소?" 나천웅이 그녀의 말을 제지하며 무겁게 말을 이었다. "놈들이 이런 습격을 벌일 줄은 미처 예상못했소." 설하경은 그제서야 사태의 위중함을 새삼 깨달은 듯 다급하게 말했다. "방금 전 중원오마가 수십 명의 졸개들을 이끌고 안으로 쳐들어갔어요!" "낭자, 어서 가봅시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신형을 날렸다. 그 뒤를 따라 설하경도 몸을 날렸다. 휘이익! 휙! 그들은 삽시간에 금검보의 중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이미 처절한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한 폭의 아수라지옥도(阿修羅地獄圖)가 펼쳐졌다고나 할까! 차차창! 우르릉! "으아악!" "우욱…… 금검보 만세!" 수백 명의 고수들이 한데 어우러져 피보라가 난무하는 가운데 비명소리는 끝없이 이어졌다. 사위에 나뒹구는 시체들은 모두가 금검보의 인물들이었다. 나천웅의 시야에 일순 북령빙군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 순간 북령빙군은 땅딸한 황의노인과 결투를 벌이고 있었다. 황의노인은 얼굴에 불그스름한 혈기가 도는 데다 작은 체구가 단단한 근육으로 뭉쳐져 있어서 마치 커다란 쇠공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고오오오! 콰콰쾅! 그는 양손을 번개같이 휘두르며 북령빙군을 몰아붙였다. 그가 동작을 취할 때마다 무시무시한 경기가 회오리처럼 일어났다. 북령빙군은 그의 장력을 피해내며 뒤로 계속 밀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의 실력은 황의노인에 비해 한 수 뒤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천웅으로선 가장 위기에 처한 인물부터 도와야 할 입장인지라 다시 다른쪽을 살펴보았다. 남천괴걸, 그는 깡마른 갈의노인을 상대하며 혈전을 치르고 있었다. 콰우우우! 우르릉! 갈의노인의 인상은 매우 음침한 인상이었다. 특히 중간에서 툭 불거져 구부러진 매부리코가 유난히 음충맞게 보였다. 그의 오른손에 든 청죽(靑竹)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고 현란하게 남천괴걸을 궁지로 몰아넣는 중이었다. 허나 남천괴걸은 그를 향해 계속 욕설을 퍼부어대며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똥물에 튀겨죽여도 시원치 않을 작자로다! 핫핫핫! 네 무기는 개를 패는 회초리로 쓰면 딱 좋겠구나!" 파츠츠츳! 끄아앙!


그들의 혈투는 그야말로 막상막하였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무위도장이 양손에 비발(飛鉢)을 든 노인과 격투 중이었다. 그 노인의 눈은 등등한 살기를 띄운 채 시뻘겋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떡처럼 엉켜붙은 머리카락은 어지럽게 헝클어져 지저분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들의 무공 실력 역시 엇비슷했다. 나천웅은 더 볼 것도 없이 나타난 괴노인들이 바로 중원오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과연 소문대로 저들의 손속은 악랄하고 매섭기 그지없구나!' 원래 북령빙군과 싸우는 황의노인은 바로 중원오마 중 지살(地殺)이었다. 또한 남천괴걸과 싸우는 깡마른 갈의노인은 다름 아닌 죽귀였으며, 무위도장과 격투를 벌이는 양손에 비발을 든 노인은 바로 광객이었다. '이상하군! 한 명이 보이지 않는다!' 나천웅에게 죽음을 당한 혈립을 제외한 사마 중 천마만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이때 설하경이 다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대가! 할아버지께서 위험해요!" 나천웅은 재빨리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북령빙군은 지살에게 완전히 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과연 중원오마 중 둘째답구나! 천하의 북령빙군을 저토록 궁지에 몰아넣다니……' 그 찰나 지살은 양손을 교묘하게 움직여 북령빙군의 요혈을 노리고 짓쳐 들어갔다. "윽!" 다급히 놀란 북령빙군은 헛바람 소리를 내며 간신히 신형을 피해냈다. 지살은 이미 승리를 확신한 듯 득의에 가득찬 광소를 날렸다. "크하하핫! 북령빙군! 오늘은 바로 너의 제삿날이다!" "으음!" 북령빙군은 묵직한 침음성을 토해냈다. 이미 그는 적지않은 내상을 입은 터라 급속도로 자세가 흐트러지고 있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같이 죽는 동귀어진의 수법을 택하리라!' 그가 내심 비장한 각오를 세운 채 최후의 공격을 개시하려는 순간이었다. "지살! 모든 일이 그렇게 쉽게 될 것 같으냐?" 냉막한 일성과 함께 한 인영이 유령처럼 날아와 지살의 앞을 막아섰다. "웬 놈이……?" 지살이 흠칫 두 눈을 부라리며 상대를 살펴보니 뜻밖에도 유약해 보이는 애송이 백의청년이 아닌가? 그때 북령빙군은 그가 나천웅임을 발견하고 크게 반색을 띄웠다. "오! 나소협……!" 지살은 기가 막힌 듯 껄껄 대소를 터트리더니 노기어린 눈으로 나천웅을 직시했다. "지금 네놈이 나를 막았느냐?" "도적(盜賊)의 앞은 누구나 막아설수 있는 법이다." 나천웅이 얼음장같은 어조로 응수했다. 지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조소를 날렸다. "흐흐흐…… 애송이놈이 실로 겁을 모르는구나!" "그 말은 잘못 되었다. 겁을 모르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다." 지살의 눈에 일순 기이한 이채가 스쳤다. 너무도 당당한 나천웅의 태도에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네 이름은 무엇이냐?" "나천웅이라고 한다." "나천웅!"


지살의 안색이 일순 급변했다. 이미 그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미소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살! 지금 당신은 어째서 내가 이곳에 왔는지 궁금하겠지?" 나천웅은 입가에 싸늘한 웃음을 띄운 채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 답을 말해주지. 냉혈삼신은 모두 나의 손에 죽었다!" 순간 지살의 몸이 부르르 진동했다. "미…… 믿을 수가 없다!" "자세한 것은 지옥에 가서 그들에게 물어보아라!" 나천웅의 손에서 순간 무시무시한 은광이 섬전같이 뻗어나갔다. 언제 뽑아들었는지 천무진뢰검이 용틀임을 시작한 것이었다. 번--- 쩍! "헉!" 지살은 나천웅의 갑작스런 기습에 저으기 당황한 듯 헛바람 소리를 터뜨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사력을 다해 상체를 비틀었다. 찌익! 지살은 땅바닥까지 구르며 가까스로 피해냈으나 가슴의 옷자락이 길게 찢어지고 말았다. "으하하하핫…… 복마진천!" 나천웅의 입에서 다시 호통이 터졌다. 다음 순간 천무진뢰검의 검기가 사방 수십 장을 완전히 그물처럼 에워쌌다. 파츠츠츠츳! 휘류류륭! 장내의 인물들은 눈부시도록 예리한 은빛 검망에 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으--- 윽!" 지살의 입에서 일순간 묵직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어느새 그의 옆구리에서는 시뻘건 선혈이 한 줄기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순간 나천웅의 눈이 더욱 예리한 광채를 뿜었다. "악인은 지옥(地獄)으로!" 슈아아아악! 어느덧 나천웅의 손에서는 시뻘건 기류가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 기류는 곧장 지살의 전신을 향해 쏘아져 갔다. '헛!' 대경실색한 지살은 쌍장을 전력으로 휘두르며 다급히 맞서왔다. 허나 그것은 그의 부질없는 몸부림에 불과했다. 꽈르릉! 천지를 가르는 폭음이 진동했다. "으허억---!" 지살의 입에서 비명이 터짐과 동시에 그의 신형은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어느새 그의 장삼자락에는 온통 불이 붙어 있었다. "무극조원! 나의 마지막 선물이다!" 나천웅의 사자후가 사위를 쩌렁쩌렁 울렸다. 동시 그의 일검이 가공할 번개불을 토해냈다. 파츠츠츳! "으--- 악!" 지살의 입에서 처절무비할 마지막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살은 전신이 둘로 양단된 채 허공에서 피보라를 뿌려냈다. 그 선명한 피보라는 한 줄기 피무지개로 화해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중원에 일시 마(魔)의 바람을 휘몰았던 오마(五魔) 가운데 일인이었던 지살(地殺)! 그는 창졸하게 불귀(不歸)의 객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다른 한쪽에서 한창 치열한 혈투를 벌이고 있는 광객과 죽귀는 비명소리를 듣는 순간 안색이 대변했다. 바로 둘째 형인 지살의 음성이 아닌가? 그들이 황망히 시선을 돌려 바라본 상황은 실로 목불인견의 끔찍한 것이었다. "저…… 저럴 수가!" "우우……!" 광객과 죽귀는 그 즉시 땅을 박차 싸움권을 빠르게 벗어났다. 이어 그들은 미친 듯이 사방으로 장력을 쳐내며 지살의 시신 옆에 신형을 날려왔다. 파라락! 바람도 없는데 그들의 전신 옷자락은 터질 듯 부풀어올랐다. 처절한 분노와 살기로 인해 그들의 표정은 거의 흉신악살처럼 보일 정도였다. "대체…… 대체 어느 놈이냐……" 죽음의 사신(死神)이 바로 이런 모습이리라. 그들은 시퍼런 귀화가 일렁이는 섬뜩한 눈으로 사위를 쓸어보았다. 그제서야 지살의 죽음을 알아차린 무위도장과 남천괴걸은 경이의 눈길로 북령빙군을 응시했다. 허나 북령빙군은 고소를 지어보이며 슬쩍 나천웅을 응시했다. 자신이 아니라 나천웅의 솜씨라는걸 무언중에 말해준 것이다. 이때 다시 광객이 무섭게 이를 갈아붙였다. "어떤 놈이 우리 둘째형님을 죽였는가 말이다! 어디 그 솜씨를 본좌에게도 자랑해 보아라!" 순간 광객의 바로 옆에서 차가운 비웃음이 터져나왔다. "흥!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지살이 나의 손에 죽었는데 어찌 네 실력으로 나를 해할 수가 있겠느냐?" 광객은 분노로 안색이 새파랗게 변한 채 시선을 돌렸다. 헌데 뜻밖에도 상대는 유약해 보이는 백의청년이 아닌가? 광객의 눈에 엄청난 불신의 빛이 떠올랐다. "애송이 놈아, 지금 뭐라고 했느냐?"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지살을 죽인 사람이라고." "뭐…… 뭣이……" 나천웅의 입이 다시 한 번 떨어진 순간 광객과 죽귀의 몸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허나 그들은 여전히 나천웅의 말을 믿지 못했다. "헛소리 마라! 이마에 피도 안마른 네놈에게 둘째형님이 당했을 리가 없다!" 3 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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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 제 12장 玄雲堡 제 13장 어둠속의 暗襲者 제 14장 忘年之友 제 15장 千面妖姬 제 16장 非運의 情事 제 17장 邪天魔經 제 18장 血笠 제 19장 金劍堡 제 20장 冷血三神 제목: 奇劍狂血舞 卷二 神龍의 雲海 편 지은이: 사마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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