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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치우검 제 3 권(전 3 권) 지은이: 백휴 - 차례 제 37 장·치우검의 임자는 제 38 장·치우검을 찾아서 제 39 장·맹발은 정체를 드러내고 제 40 장·부자(父子)의 운명은 제 41 장·사달노는 소림승을 만나고 제 42 장·치우신의 환생은 임박하고 제 43 장 소림사의 개입(介入) 제 44 장·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제 45 장·비무대회(比武大會)는 다가오는데 제 46 장·왕탁은 비무대회에 참가하게 되는데 제 47 장·맹발은 가공할 능력을 발휘하고 제 48 장·왕탁은 쫓기는 신세가 되고 제 49 장·소림파는 총력전을 기울이고 제 50 장·산지박의 계절이 오면 제 51 장·부자(父子)의 정리(情理) 제 52 장·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제 53 장·만불조종(萬佛祖宗) 제 54 장·맹발의 약점은 제 55 장·칼산 지옥 내가 가면 제 56 장·목각인형의 위력 제 57 장·최후의 결전 제 58 장·희망을 찾아서 제 37 장 치우검의 임자는 ① 왕탁은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방은 아수라장이었다. 여남은 명의 백의무사들이 흑의무사들과 한판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언뜻 보이는 것만 해도 흑의무사들은 쉰 명이 넘었다. 백의무사들은 정예(精銳)들인 듯 흑의무사들에 비해 날렵해 보였으나, 상대를 베어 넘어뜨려도 적의 수는 좀처럼 줄지 않고 있었다. 왕탁은 그 사이를 헤쳐가며 사미령을 찾았다. "사 단주! 사 단주!" 사미령은 두 명의 흑의무사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 사미령은 뒤에서 찔러오는 검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왕탁은 미소년에게서 빼앗은 칼을 흑의무사에게로 집어던졌다. 흑의무사는 사미령의 등판을 찌르려다가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칼을 막아내느라 동작을 바꾸었다. 사미령은 뒤에서 나는 소리에 돌아보며 입에서 뭔가를 내뱉았다. 푸우-! 은구슬 하나가 공기를 가르며 무섭게 날아갔다. 흑의무사는 예기치 못한 기습에 검을 넓게 세워 막으려 했으나, 이미 그의 이마에는 검은 점 하나가 생겨나더니 거목이 쓰러지듯 천천히 무너져내렸다.


동시에 사미령은 그를 덮쳐오는 다른 무사를 피하기 위해 두 장 위로 솟구쳐 올랐다가 놈의 백회혈을 향해 탄지신공(彈指神功)을 펼쳤다. 정수리로 쏘아져 가는 은구슬! 놈은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다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왕탁은 그 수법의 독랄함에 놀랐다. 은구슬 안에는 독(毒)이 있는지 곧 놈의 얼굴 표면에서는 징그럽게 생긴 물집이 부풀어올랐다. "날 구해줬군요! 고마워요." 사미령이 말했다. "놈들은 낙양표국 표사들인 모양인데 대체 어떻게 된 거요?" "치우검을 빼앗으러 왔어요." "치우검을요?" "당신들 때문이에요. 낙양에서부터 당신들을 미행했다고 하더군요." "낙양에서부터 우리를 미행했단 말이오?" "그래요. 흑소랑 광삭이란 자가 자신의 입으로 말했으니까요." "흑소랑 광삭이...." 왕탁은 광삭과의 악연에 새삼 아연해졌다. 잠시 조미미 생각이 났지만 머리를 흔들어 떨쳐 버렸다. "공공아 소저는 어딨소?" "말해 줘도 알지 못할 거예요. 그녀를 살리려면 날 도와줘요." "살아있기는 한 거요?" "손톱 하나 다치지 않았으니 그 점은 걱정말아요. 그 보다 날 좀 도와줘야겠어요. 저기 치우검이 보이시죠?" 왕탁은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보았다. 치우검이 놓인 제단 주위에서는 더욱 치열하게 백의무사와 흑의무사의 공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저 유리는 보통 유리가 아니에요. 돌로도 깨뜨리지 못해요. 유리덮개를 여는 방법은 나만이 알고 있어요. 덮개가 열리면 치우검을 들고 도망치세요. 내 곧 뒤따라갈 테니까요." "수하들에게 직접 시키시지 그러오?" "저 한심한 꼴을 보아요. 안 그래도 제단옆으로 두 번이나 접근을 시도하다가 두 번 다 당했어요." "좋소. 한 번 해 봅시다. 한데, 그 전에 한 가지만 물읍시다. 대체 왜 치우검을 이런 지하에 숨겨놓고 지키고 있는 것이오?" "오늘 같은 일을 진작부터 예상했기 때문이에요. 자, 가요!" 사미령은 알쏭달쏭하게 말했다. 왕탁은 더 캐물을 여유가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는 입을 다물었다. ② 그들은 훌쩍 뛰어올라 허공을 날아가다가 제단 앞에 내려앉았다. "저 년놈들을 죽여라!" 어디선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낙양표국의 표사들이 왕탁을 알아보았더라면 겁을 집어먹고 움츠러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정신없이 싸우고 있던 와중이라 그를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사미령의 수하쯤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놈들은 사미령이 우두머리라는 것을 알고는 그녀를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네 명이 사방에서 공격해 들어왔는데, 사미령은 은구술을 입과 손가락으로 퉁겨 금방 상대를 제압했다. 왕탁은 특별히 손 쓸 일도 없이 그저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극히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덮개를 벗겨낼 테니 날 좀 엄호해 줘요!"


왕탁은 사미령을 등뒤에 버티어 섰다. 사미령은 손가락으로 제단 밑의 땅을 파기 시작했다. 왕탁은 파도처럼 밀려드는 적들을 동벽서원으로 막아내고 있었는데, 불사초를 먹은 후 동벽서원에 엄청난 힘이 붙었다고는 하나 개미떼처럼 몰려드는 군단(軍團)을 일시에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왕탁은 사미령이 필요한 시간만큼 잘 지켜주었다. "지금이에요!" 사미령이 소리쳤다. 일순 왕탁은 붕 날아올랐다. 사미령의 손에 의해 밑에서 유리덮개가 벗겨지자 치우검이 빛을 받아 번쩍하고 빛났다. 왕탁은 자신과 같은 높이로 솟구쳐올라 검을 찔러온 표사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표사가 중심을 잃자 머리통을 타고 올라앉았다. 곤두박질치는 순간 놈의 어깨를 차며 제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다른 놈들이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 낙양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팽이처럼 맴을 돌았다. 주위에 엄청난 돌풍이 불어닥쳤다. 쓰고 있던 두건이 벗겨져 날라가고 두 발로 버티고 서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왕탁은 그 틈을 타 치우검을 집어들었다. 그러자 그 순간이었다. 콰르릉- 쾅! 콰과과과광! 뇌성과 함께 푸른 광망(光芒)이 왕탁의 전신을 휘어감았다. 무언가 엄청난 힘이 지하 동굴의 천정을 쩍 하고 갈라놓더니 푸른 기운이 쏟아져 들어와 뱀의 혀처럼 날름대며 왕탁을 집어삼킨 것이었다. "으아악!" 왕탁은 제단 아래로 떨어졌다. 아직 치우검을 오른손에 거머쥔 채였다. 푸른 기운은 치우검을 잡은 왕탁의 손에서 검푸른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사들은 다들 놀라 싸움을 멈추고 그 모습을 망연히 지켜보고 있었다. 천지를 집어삼킬 듯한 뇌성이 다시 한 번 울렸다. 왕탁의 전신에서 푸른 광망이 사라졌다. "하하하하하--!" 냉막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허공을 날아와 왕탁의 옆에 사뿐히 내려앉는 사내가 있었다. 광삭이었다. 그는 왕탁을 내려다보며 다시 한 번 조롱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네놈의 죽음을 여기서야 보게 되는구나!" 광삭이 치우검을 집어드는 순간 사미령은 사정없이 몸을 부딪쳐 갔다. 그 바람에 치우검은 광삭의 몸에서 퉁겨져 나가 공중 높이 솟아올랐다. 그것을 잡기 위해 광삭과 사미령이 죽자사자 달려들었다. 사미령은 광삭과의 거리가 반장으로 좁혀졌을 때 입안에 있던 은구슬을 훅 하고 내뱉았다. 그러나 광삭은 이미 그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옷자락을 펼쳐 은구슬을 소매로 받아냈다가 되던졌다. 사미령이 놀라 피하는 순간 광삭은 허공에서 치우검을 빼들고는 곧바로 왕탁을 향해 검을 내리꽂아갔다. 그러나 왕탁의 심장에 검이 채 닿기 전에, 후두두둑! 하며 주먹만한 밀가루덩이들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검을 거두어들인 광삭은 바람개비처럼 그것들을 먼저 떨쳐내었다. "어떤 놈이냐?" "내 아우를 내버려 두어라." 지하식품창고에서 밀가루반죽을 해온 반삼계가 괴(塊)로 공격을 한 것이었다. "넌 누구냐?"


"바보같은 놈! 왕탁이 내 아우면 형이지 누구겠느냐?" "운명은 운명인 게로구나. 형제가 한 배에서 태어나 같은 장소에서 죽게 되다니! 허나, 따로 죽어 한쪽이 괴로움을 당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광삭은 왼다리를 반보 가량 내밀고 상체를 뒤로 빼며 검을 치켜올렸다. 궁보(弓步)와 흡사한 자세였다. "우주색변(宇宙色變)!" 그가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왕탁이 낙양표국에 침입했을 때 그가 취했던 바로 그 절초였다. 검끝은 정북을 향하고 있었는데, 이제 한 줄기 광채가 생겨나며 섬전이 오가야 했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전혀 반응이 없었다. 광삭은 자세가 잘못되었는가 싶어 자세를 고쳐잡았다. "우주색변!" 그러나 이번에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색변이라 하더니 자네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군!" 반삼계가 비웃었다. 광삭은 지하(地下)라 자신의 검법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는 짓쳐들어갔다. "얍!" "타!" 반삼계는 금어압장(金魚鴨掌)이라는 절초를 사용했다. 이것 역시 그가 요리를 하다 개발한 공격수법으로 오리의 물갈퀴처럼 손가락을 쫙 펴서 손가락 사이에 다섯 가지의 향신료통을 끼워넣어 후각과 시각을 자극하는 방법이었다. 그 속에는 여러 가지로 배합된 재료들이 섞여 있어 한 번 눈 속으로 흘러 들어가기라도 하면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는 독수(毒手)였다. 반삼계는 광삭이 공격을 해올 때마다 원무(圓舞)를 그리듯 이리저리 피하기만 했다. 그때마다 알싸한 향기와 함께 시야가 희뿌옇게 흐려져 왔다. ③ 광삭은 콧속이 따끔해져서야 그것이 암기임을 알았다. 그러나 암기라면 그도 뒤지지 않았다. 그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호리병을 꺼내들더니 반삼계와 몸이 교차될 때마다 속 안에 있는 가루를 뿌렸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비무(比武)에 고통을 느낀 것은 주변에서 싸우던 무사들이었다. 고통에 찬 기침소리와 신음소리가 지하동굴 속에 가득 들어찼다. 광삭은 치우검을 구했으니 부하들을 희생해가며 싸울 까닭이 없었다. 수적으로 우세한 터라 더 밀어붙이면 적들을 괴멸(壞滅)시킬 수 있겠지만,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길을 열어라! 치우검을 구했으니 돌아가겠다!" "그렇게는 안돼!" 잠시 물러나 있던 사미령이 솟구쳐오르며 그를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광삭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사미령에게 그렇게 보였을 뿐 순간적으로 도망치는 교묘한 은신술(隱身術)이었다. 사미령은 공중에서 두리번거렸지만 광삭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광삭은 그녀의 눈을 피해 저만치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까지 달아나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지하 동굴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소리가 사라지자 곧 그의 부하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미령은 밖으로 통하는 지름길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허망하게 치우검을 빼앗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지름길을 가로질러 곤륜객잔 앞으로 나갔다. 거기에는 세 명의 흑의무사들이 오십여 마리의


말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사미령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사미령을 발견하고 검을 앞세워 달려들었으나 몇 수 겨뤄보지도 못하고 피칠갑이 되어 모래바닥을 적셨다. 그녀에게 치우검을 지키는 일은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섭간이 자신에게 준 임무였다. 섭간은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곤륜객잔을 지어준 것도 섭간이고 한 달에 얼마간의 돈을 보내와 곤륜객잔의 형편이 궁핍하지 않게 돌봐준 사람도 섭간이었다. 섭간은 자신의 수결(手決)이 찍힌 서한을 갖고 있지 않는 한 그 누가 치우검을 내어놓으라고 해도 주지 말라는 얘기를 누차에 걸쳐 강조했었다. 섭간의 몸이 안 좋다는 소식은 진작에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나쁠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녀가 곤륜객잔 밑으로 숨어든 이유도 섭간의 의식이 불투명하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나서였다. 시기적으로 왕탁 일행이 곤륜산행을 한 직후였다. 치우검을 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섭간은 치우검을 세상 사람 아무도 모르게 꽁꽁 감추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광삭과 그의 부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미령은 물불을 안 가리고 달려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총동원해 흑도의 무리들을 쳐부수어 나갔다. 그녀는 검법에 익숙하지가 않았기 때문에 광염수(廣炎袖)와 광한수(廣寒袖)를 펼쳐 광삭의 부하들과 맞서싸웠다. 광한수는 본래 소림승에게서 배운 것으로 거기에 스스로 터득한 광염수를 첨가했다. 보통은 한몸에 음공(陰功)과 양공(陽功)을 동시에 가질 수 없는 법인데, 그녀는 특이체질을 타고 난 셈이었다. 광염수는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 상대의 호흡을 어렵게 만드는 수법으로 자신의 체력도 어지간히 소모해야 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쓰지 않았다. 반대로 광한수는 갑자기 한기를 불러일으켜 몸의 신진대사를 흩뜨러놓는 수법이었다. 광염수에 이어 광한수를 연달아 시전하면 상대는 동작이 굼떠지고 호흡이 불규칙해져서 실력의 세 푼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먼저 사미령이 비단 자락을 펄럭이며 광염수를 시전하자 곤륜객잔 주변의 기온이 찜통처럼 끓어올랐다. 광삭을 포함한 무사들은 온몸에 땀을 뒤집어쓴 채 개처럼 혓바닥을 내놓고 헐떡거렸다. 그들은 갑자기 가마솥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사막의 밤은 춥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지나 축시(丑時)로 접어들고 있었다. 찬바람이 불어오고 있어 온기가 남아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런데도 찜통같은 더위앞에 그들은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있었다. 덥다못해 뜨거워 살갗이 델 것 같았다. 광삭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상의를 벗어던졌다. 그때, 그의 부하들은 이미 알몸이 되어 있었다. 그 순간, 사미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광한수를 펼쳤다. 그러자 흘러내리던 땀이 순식간에 얼음의 결정체로 변했다. 그 신묘한 술법에 표사들은 오합지졸이 되어 우왕좌왕했다. 그나마 몇 발짝 움직일 수 있는 자는 다행인 셈이었고 대부분의 표사들은 오싹한 한기에 얼어붙어 제자리에서 옴짝달싹을 못하고 있었다. 사미령은 표사들 사이를 뚫고 들어가 광삭이 들고 있던 치우검을 낚아채려고 했다. 그러나 광삭의 끈기도 녹록치가 않았다. 옷가지는 집어던지면서도, 동검(銅劍)이라 뜨거워졌다가 다시 얼음처럼 차가워진 치우검을 행여 빼앗길새라 꼭 그러쥐고 있었던 것이다. 광삭은 교활하고 영민했다. 갑작스런 온도의 변화를 스스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정공법으로 상대하지 않고 모래를 발로 차올려 사미령의 눈에 뿌렸다.


사미령은 치우검을 뺏기에 급급한 나머지 그의 발움직임을 미처 보지 못했다. 일시에 눈에 모래가 들어간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하며 허우적댔다. 촤르륵--! 그 순간, 사미령은 목줄기를 향해 찔러오는 검의 기세를 느끼고는 서둘러 뒤로 이 장쯤 물러났다. 그러나 검세(劍勢)는 멈추지 않고 계속 짓쳐들어왔다. 눈을 뜰 수 없게 된 그녀는 이제 청각과 육감에 의지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뒤로 물러나던 그녀는 옆구리가 불에 데인 듯한 통증을 느꼈다. 광삭의 검은 그녀의 연한 허리살을 뚫고 들어가 박혀 버렸다. 상대가 검을 빙글빙글 돌려 살을 후벼파지 못하도록 왼손으로 날을 잡은 다음 수풍(袖風)을 일으켜 떨쳐냈다. 그녀는 박힌 검을 빼내었다. 그러자 검붉은 피가 콸콸 쏟아졌다. 사미령은 금방 현기증을 느꼈다. "저 년을 죽여라!" 고함과 함께 살기에 노출된 그녀는 죽을 힘을 다해 다시 한 번 광염수를 펼쳤다. 그러자 갑자기 사위가 조용해졌다. 그녀가 만들어 낸 열풍(熱風)은 검을 녹일 듯이 뜨거웠다. 광삭의 부하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몇몇은 화상을 입고 쓰러졌다. 화기(火氣)에 탄 옷에서 지글지글 연기가 솟아올랐다. 사미령은 너무 힘을 쓰는 바람에 진기(眞氣)가 손상되어 울컥 피를 토해냈다. 그리고는 볏단이 쓰러지듯 맥없이 고꾸라졌다. 그녀는 혼미해지는 의식을 부여잡으며, "치우검... 치우검...." 하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피에 젖은 그녀의 손가락은 모래속을 파고들어가 뭔가를 악착같이 잡으려고 했으나 이내 맥을 놓았다. 광삭이 탄 말이 투레질을 하는 소리가 별들이 총총한 까만 밤하늘 너머로 차츰 작아지고 있었다. 모래 위라 그런지 오십 두가 넘는 말들이 몰려가는데도 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제 38 장 치우검을 찾아서 ① 사미령은 눈을 떴다. 별이 채광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힘이 부쳐 눈을 도로 감았다. "좀 어때요?" 목소리가 들려 눈을 다시 뜨자 희끄무레하던 형상이 차츰 왕탁의 얼굴로 변해갔다. 왕탁만이 아니었다. 그의 옆에는 염군조, 익다, 공공아의 모습도 보였다. 다들 걱정스런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치우검을 빼앗겼다는 분통함에 부르르 떨며 주먹을 쥐려고 했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도리화 사미령... 제 아버지 섭간과는 어떤 사이죠?" 그렇게 물어온 사람은 공공아였다. "너, 넌 누구지?" 그녀의 목소리를 내는데 무척 힘들어 보였다. "섭간 어른의 딸이에요." "믿을 수 없어." "대단히 죄송한 말이지만 당신은 죽어가고 있어요. 무엇인가 아버지와 관련해서 아는 게 있다면 저한테 말씀해 주셔야 해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아버님은 돌아가셨어요." "알고 있어." "아버님은 왜 저더러 당신을 만나보라고 한 걸까요?"


"무, 물 좀...." 염군조가 표주박을 들이대려고 하자 공공아가 말했다. "물을 마시게 하면 안돼요." "아니오. 잠시라도 편안하게 해 주는 게 나을 듯싶소." 왕탁이 말했다. 염군조가 물을 먹여주었다. 얼굴을 드는 것마저 힘에 부쳐 물은 입가로 줄줄 흘러내렸다. 다행히 그녀는 잠시 생기를 찾는 듯했다. "도리화... 말씀해 주셔야 하오." 왕탁이 말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 먼길을 찾아왔겠소? 대체 무엇 때문에 망설이시는 겁니까? 당신의 부하들은 다 떠났소. 여기 사달노만 남았소." 왕탁의 어깨 뒤로 사달노가 불쑥 나타났다. "단주님, 아니, 누님! 이 자들 말이 맞아요. 이 자들은 목숨을 걸고 누님을 도와주었잖아요. 제가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던 것도 다 염 사형이 도와줬기 때문이에요." 사달노는 침소 옆에 무릎을 꿇고 사미령의 손을 꼭 잡았다. 따뜻한 손길이었다. 사미령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치우검을 반드시 찾겠다고 약속하겠니?" "약속해요. 놈들을 뒤쫓아가 원수도 갚고 치우검도 찾아올게요." "그래, 난 곧 죽을 목숨... 뭘 비밀로 묻어두겠니? 오래 전... 섭간 어른을 만났다. 난 환술(幻術)과 요술(妖術)로 이름난 호사훙(胡思薨)이라는 사부님을 모시고 이런저런 무예, 아니 무예라기보다는 잡술(雜術)을 익히고 있었지. 사부님은 호구지책으로 이따금 강도질도 하셨는데, 나와 단둘이 나갔다가 섭간 어른을 만난 거지. 그때 그 분은 젊으셨고 지금처럼 호위무사에 둘러싸여 다니시지를 않으셨다. 우린 좋은 먹이감이라 생각하고 대들 었는데, 그만 보기좋게 당하고 말았다. 사부님의 환술도 위력이 있었지만, 섭간의 검술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사부님은 내 앞에서 수치를 당했다고 생각하셨는지 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다가 끝내 목숨을 잃었다. 나 또한 그때 저 세상으로 갔어야 하는 건데... 섭간 어른은 나를 살려주셨다. 사부님의 죽음앞에서 내가 기꺼이 목을 내놓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소저, 소저는 어이 이런 요망한 늙은이의 죽음을 슬퍼하여 목숨까지 내놓으시려는 거요?' '공자님께는 요망한 늙은이로 보일지 몰라도 제겐 삼 년을 정성껏 모셔온 사부님입니다. 사부님이 요망하다면 저 또한 그런 사부님을 택했으니 요망하다고 할 수밖예요. 지금 눈앞에서 사부님이 비참한 죽음을 당하셨는데 저 혼자 살자고 달아난다면 그 누가 나를 인정머리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인정 때문에 목숨을 버린단 말이오?' '세평(世評)은 부침하는 것이지만 제 마음이 그걸 허락할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더 괴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이 섭간 어른을 감동시켰는지 난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섭간 어른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의리가 있다 하여 날 거두어주셨지. 하지만 오해는 말아라. 불순한 남녀관계가 끼여든 것은 아니니까.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섭간 어른은 곤륜객잔을 세운 뒤 그 운영권을 나한테 넘기겠다고 했지. 그 대신 조건은 한 가지, 보검 하나를 지하에 숨겨두고 지켜야 한다고 했어. 그 보검이 바로 치우검이야." "그럼 아버님을 만난 후 계속 치우검을 지켜오셨단 말인가요?" 공공아가 물었다. "그런 셈이에요." "치우검이 대체 무엇이길래 아버님이 그리 애지중지하신 거죠? 저한텐 일언반구도 없었는데...." "아버님은 치우검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모르면 모를수록 좋다고 하셨어요. 처음엔 나한테도 말씀을 해 주지 않다가 너무 궁금해 하니까 나중에서야 설명을 해주더군요."


사미령은 거기서 광우룡이 아들 광삭에게 한 얘기와 비슷한 얘기를 했다. 무림파천황 매요신 사부에게서 배우던 일, 사막에서의 치우검 발견, 악몽, 곧 닥칠 악의 세력에 대한 예언, 매요신이 죽자 사막에 묻어두었던 일, 그리고 광우룡 몰래 빼돌려 그것을 곤륜객잔밑에 숨겨놓은 일까지.... 다 이해가 갔지만 왜 아버님이 발호자 광우룡 몰래 치우검을 빼돌렸는지에 대해 공공아는 의아했다. "그건... 아버님은 광우룡이란 자를 믿을 수가 없다고 했어요." "하지만 결국 아버님이 치우검을 빼돌렸으니 광우룡 어른이야말로 아버지에 대해 화가 나셨겠군요." "그 점은 광우룡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치우검이 잘못 쓰인다면 온 나라에 피바람이 불고 화가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어요. 아버님은 치우검을 단 한 번도 사사로이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친구는 배반했지만 스스로에게 한 약속은 지킨 셈이죠." "하지만 어리석은 짓을 했군요." 익다가 말했다. "섭간 어른이 정히 세상 누구의 손도 닿지 못하게 치우검을 없애 버리려고 하셨다면, 대장간 화로(火爐)로 집어던져 넣으면 그만인 것을 왜 그리 복잡하게 일처리를 하셨을까요?" "그건... 큭... 쿨럭... 화로에 넣여 녹여보려고도 했고 소금물 속에 담그어 녹슬게도 해보았지만 통 소용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 그럴 리가요?" "그 검은 보통 검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 검이 흑도의 무리들에게 들어가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 폭풍처럼 세상에 불어닥칠 거라고 했어요." "하긴 그러니까 지하에 모셔놨겠구먼." 염군조는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어서 그들을 쫓아가 치우검을 찾아주세요." "도리화 사미령, 몹시 피곤해 보이는데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을게요." 공공아가 말했다. "아버지를 죽인 자의 배후에 대해 아는 게 있나요?" "아니요... 난... 전혀 몰라요." 사미령은 팔을 허우적대다가 잠이 들었다. 몇 번이나 의식이 오락가락 하더니 더 이상 맥의 진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달노는 사촌 누나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창을 집어들더니 객잔 밖으로 뛰쳐나갔다. 왕탁이 뒤쫓아가 만류했다. "사형, 흥분을 가라앉히시오. 지금 쫓아가 봤자 말을 탄 저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놈들이 누님을... 누님은 엄마같이 따뜻한 분이셨는데...." 사달노는 왕탁의 만류가 완강하자 모래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익다가 쫓아 나오며 말했다. "왕형, 아까부터 반형이 보이지가 않아요." "반삼계가? 그럼, 같이 찾아봅시다." 왕탁은 사달노와 함께 객잔 이층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사달노만을 사미령의 시체 옆에 있게 한 후 지하로 내려갔다. 반삼계를 외쳐 불렀지만 지하의 통로가 미로처럼 사방으로 뻗어 있어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각자 흩어져서 찾기 시작했다. 왕탁이 치우검이 놓여 있던 석굴에 이르렀을 때였다.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난 곳으로 쫓아가자 반삼계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다친 거야?"


왕탁은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 "아, 아냐...." 왕탁은 반삼계의 얼굴을 살폈으나 피가 묻어 있을 뿐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보이지가 않아." "보이지가 않다니?" "무홍이가 보이지가 않는다구. 석굴을 죄다 뒤지고 다녀도 없어. 분명히 여기 있었을 텐데." "무홍 소저가 여기 왔었어?" "그건 모르지." 반삼계가 울음을 그쳤다. "그럼 여기에 없을 수도 있잖아. 시체가 없는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여기에 없었을 거야." "그, 그럴까?" 반삼계는 그 말이 큰 위안이 된 듯이 반문했다. "바보야, 시체를 발견한 것보다야 백배 천배 낫지." 반삼계는 왕탁의 말에 히죽 웃기가지 했다. 왕탁은 반삼계에게 이렇게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었는지 생각하자 웃음이 나왔다. 그들은 공공아와 염군조 그리고 익다를 찾아 객잔으로 돌아왔다. 사달노는 보이지 않았다. 사미령 옆에 사달노가 급히 갈겨 쓴 서한이 남아 있었다. - 도저히 못참겠소! 나는 치우검을 찾아 놈들을 쫓아가오. "허어, 참! 급한 사람이 여기 또 있었구먼." 염군조가 혀를 찼다. "자, 일단 시체를 수습한 다음 다음 대책을 논의합시다." 왕탁의 말에 힘을 합친 그들은 사미령의 시체를 객잔 뒤에 묻고 지하석굴에서 죽은 사람들은 구덩이를 파 한곳에 매장했다. 그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객잔으로 올라와 잠시 휴식을 취했다. "곧 날이 밝을 텐데 어찌들 하겠어요?" 공공아가 초조한 듯이 말했다. "글쎄요, 난 내일 동이 터봐야 알겠소." 익다가 대꾸했다. 그는 곤륜산으로 돌아가 무라신을 만날 건지 아니면 그냥 여자의 몸으로 생활할 건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난 무홍이를 찾아야 하오." 반삼계는 공공아와 행동을 같이 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공공아의 눈길이 왕탁에게 쏠렸다. 그때, 왕탁은 치우검과 조미미가 한 말이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 자의 정체는 모르지만 전 치우신에 의해 점지되었고, 치우신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어요.' 왕탁이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자 익다가 말했다. "왕형은 무슨 특별한 생각이라도 있소?" "아니오." ② 그제서야 왕탁은 생각에서 깨어나며 말했다.


"난 치우검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그것이 혈겁(血劫)의 바람을 몰고 오기 전에 우리가 합심해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오." "동감이오! 전 형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입니다." 염군조가 동조했다. "저를 도와주신다면 충분히 쓸 수 있는 돈을 드릴게요." 공공아가 제안을 했다. "돈이라... 그거 좋죠. 한데 치우검만 찾아주면 되는 건가요?" 익다가 반응을 보였다. "물론이에요. 치우검을 찾는다면 평생을 먹고 살 돈을 드리겠어요. 반 주사님은요?" "나는 아까 말했잖소? 무홍 소저를 찾아야 한다고. 아우, 섭섭하군 그래. 난 자네가 날 도와 무홍이를 찾아나설 줄 알았는데." 반삼계는 못마땅한 듯이 말했다. "미안해." 왕탁은 미처 그 점을 생각하지 못한 것을 사과했다. 하지만 그로서도 사정이 별반 반삼계와 다르지 않았다. 나중에 왕탁은 반삼계에게 따로 조미미의 얘기를 했다. 그러자 십분 왕탁의 처지를 이해했다. 다음날, 마지막 순간까지 쉽게 결정을 못 내리던 익다는 치우검을 찾는 일행에 합류했다. 이틀 후, 반삼계는 왕탁 일행과 헤어져 자신의 갈 길로 떠났다. 왕탁은 무홍 소저를 찾게 되거나 찾는 데 지치면 낙양으로 오라고 일러두었다. 왕탁, 공공아, 익다, 염군조--그들은 치우검을 되돌려 받기 위해 낙양으로 떠났다. 제 39 장 맹발은 정체를 드러내고 ① 낙양표국, 내당 집무실. 광우룡은 붉은 비단에 쌓여 쟁반 위에 놓인 치우검을 내려다보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흠, 보검이야... 보검이고 말고!" 탁자 맞은편에는 만족한 표정의 광삭이 앉아 있었다. "정녕 이걸 곤륜객잔의 지하석굴에서 구했단 말이지?" "치우검을 보호하기 위해 제단을 쌓아 놓고 단단한 유리로 덮어 씌워 습기가 배지 않게 해 두었던 걸요." "오호... 그래, 내 뭐랬느냐? 섭간 그 놈이 나 몰래 치우검을 빼돌렸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버님, 말씀이 맞았습니다요." "난 네가 정예표사들을 이끌고 공공아를 뒤쫓아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처음엔 화가 났었다. 한데, 이렇게 되고 보니 네가 자랑스럽구나." "고맙습니다, 아버님!" "네놈이 이렇게까지 쓸모가 있다니! 허허허... 큰상을 내리마." "저, 정말이십니까?" "물론이다. 그래, 원하는 게 무엇이냐?" "아버지...." 광삭의 어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래, 말해 보거라." "조 소저를 제 아내로 맞아들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안돼! 그건...." 광우룡이 몸을 돌렸다. "아버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장안에서 한다 하는 유력한 관리나 내노라


하는 부호댁 처자를 며느리로 맞아들이고 싶겠지요. 하지만 전... 이미 마음을 정했습니다. 소자가 아버님의 뜻을 거역하고 싶어 이러는 것이 아니옵니다. 소자도 노력해 봤습니다. 하지만 안되는 걸 어쩌겠습니까? 부디, 허락을 해 주십시오." "어허, 안된다니까...." 광우룡은 끝까지 안된다고 버텼지만 지난번보다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 누가 뭐래도 조 소저는 제 자식을 배고 있습니다." "뭐야?" 광우룡은 부릅뜬 눈으로 돌아보았다. "어허, 이 놈 보게, 사고칠 게 없어 아무 밭에나 씨앗을 뿌리고 다닌 게야?" "죄송합니다. 아버님, 그럼 아버님이 허락하신 걸로 알고 전 물러가보겠습니다." "쯧쯧... 누굴 닮았는지...." 아들이 사라지자 광우룡은 혀를 찼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마음 한귀퉁이가 뿌듯해 왔다. 자신 몰래 일을 추진해 이렇게 시원하게 해결하는 것을 보니 이제 표국의 일을 물려줘도 별탈이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조변석개(早變夕改)라고, 광우룡이 아들을 대하는 마음이 그랬다. 아침에 흡족했다가도 저녁에 실망을 하거나 그 반대인 경우가 많았다. 광삭이 나간 문 사이로 달빛이 교교하게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광우룡은 치우검을 들고 집무실 뜨락으로 나갔다.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그는 뜨락 한가운데 서서 보법을 이용하여 체내의 기를 끌어모아 빼어든 치우검에 실어보았다. 검날이 음극(陰極)인 달빛을 받아 번쩍 하더니 오묘한 기운(氣運)이 그를 에워쌌다. 청광(靑光)은 푸르디 푸르렀다. 신검합일(身劍合一)! 그는 치우검과 한몸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치우검이 자신이요, 자신이 치우검이었다. 그가 다리를 움직여 일 보를 더하면 치우검은 스스로 알아 위치를 잡아주는 것 같았다. 그는 스승 매요신에게서 배워 스스로 발전시킨 파황검(破荒劍)을 몇 초식 시전해 보았다. 파무초(破無草), 파석쇄(破石碎), 파공허(破空虛).... 고오오오! 바람을 휘어감으며 사위가 검의 사정권 안에 들어왔다. 그는 일보 일보에 온몸의 힘을 불어넣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인영(人影)이 스치듯 다가와 그의 앞에 멈춰섰다. "웬 놈이냐? 무례하게!" 광우룡은 상대를 부하 표사로 생각하고는 말했다. "총표두님, 소인이옵니다." 처마 밑의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걸어나오자 얼굴이 드러났다. "아니, 자넨 삼척동자 맹발이 아닌가?" 맹발은 대꾸없이 무표정하게 광우룡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광우룡은 그의 태도에서 평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으나 개의치 않고 치우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래, 또 무슨 긴요한 정보가 있는가?" "그렇습니다. 공공아 총표두가 모레쯤 낙양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건 아들을 통해서 이미 대충 얘기를 들었네. 자네가 한발 늦었구먼." 광우룡은 치우검을 좀더 몸에 익혀 보려는 생각에 몸을 돌려세웠다. 그런데도 맹발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수고비를 달라는 거라면 나중에 찾아오게." "오늘은 수고비 때문이 아니옵니다." "그럼, 뭔가?"


"들고 계신 치우검을 제게 주셔야겠습니다." "뭐? 방금 자네 뭐라고 했나?" "치우검을 제게 주셔야겠다고 했습니다." 맹발은 꿔준 돈을 받으로 온 것처럼 당당했다. 광우룡은 어이가 없었다. "이걸 달라고? 이게 뭔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 "잘 알고 있습니다. 치우신의 검이지요." "그래, 치우신의 검인데 자네가 왜 이걸 달라고 하지?" "치우신은 제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치우신이 네놈의 주인이라고?" 광우룡은 호통을 치거나 팔 하나를 잘라 내칠 수도 있었지만 놈이 하는 꼴이 가관이라 오히려 대꾸해 주고 싶은 흥미가 생겨났다. 광우룡이 맹발을 알게 된 것은 어느 날 객점에서였다. 술을 마시는 자신에게 접근해 와 섭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겠다며 돈을 요구했다. 그가 제시한 정보는 굉장한 것이었다. 물론 며칠 후면 알게 될 것이었지만, 섭간이 중태라는 것을 그때까지 광우룡은 까맣게 모르고 있던 것이다. 은밀히 확인해 본 결과, 그의 정보는 정확했다. 그때부터 맹발은 낙양표국의 정보원 노릇을 해 왔다. 곤륜산으로 떠난 공공아의 동태를 수시로 보고해 왔음은 물론이다. 광우룡은 맹발의 접근을 미심쩍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크게 의심은 하지 않았다. 우선 용호표국을 꺾어보려는 야심에서 그의 정보가 매우 긴요했던 것이다. "네, 주인입니다. 십이 년을 가까이서 모셨죠." 맹발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어허, 이 놈이 미친 게로군!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치우신을 네놈이 모시다니? 네놈이 그러면 수천 년 전의 사람이라도 된단 말이더냐?" "전 아주 오래 전 치우신의 호위무사였는데 현생에서는 구루병에 걸린 하찮은 존재로 환생했습니다. 기나긴 세월을 뛰어넘어 다른 모습으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본질은 하나도 변한 게 없습니다. 곧 주인님이 이 세상에 도래할 날이 임박했습니다. 전 주인님에게 치우검을 찾아 드려야 할 임무를 띠고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걸 내게서 건네받겠다고?" "그렇습니다." "이걸 받아서는?" "치우신에게 되돌려 드려야지요." "치우신이 지금 어딨는데?" "아직 환생하시지 않았습니다." "아직 환생하지 않았다. 허허... 오래 살다보니 별 소리를 다 듣게 되는군." "허튼 소리가 아닙니다. 총표두님은 오래 전에 절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내가 자네를 보았다고?" "총표두님은 사막에서 경험한 일을 잊으셨습니까? 섭간과 함께 치우검을 손에 넣게 되었던 순간을요. 치우신이 황제신의 응룡동검에 맞서 싸우시다 검을 떨어뜨린 순간 제가 달려갔죠. 그때, 섭간이 치우검을 집어들더군요. 총표두님은 그 옆에 서 계셨구요." "네놈이 나까지 염탐했구나. 그 얘기는 얼마 전 아들 놈한테 밖에 한 적이 없는데...." "염탐이 아니옵니다." "허면 삭이에게 듣기라도 했단 말이냐?" "그도 아니옵니다."


"어허, 이 놈이 이제 나를 놀리려는 게로구나! 건방진 놈!" 광우룡의 인내심은 차츰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방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전 치우신의 호위무사였고, 치우신이 검을 떨어뜨린 순간 검을 집어들기 위해 달려갔다고!" "허튼 소리! 그 자는 키가 컸고 다부진 체격에 눈가에 검은 점이 있어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인상이었지. 그래도, 끝까지 헛소리를 늘어놓을 테냐?" 그 순간이었다. 맹발의 눈에서 푸른 광채가 일더니 그 빛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광우룡은 주춤 물러났다. 그의 몸이 엿가락처럼 휘어지며 여러 차례 변형을 거듭하더니 육척 장신에다가 근육질의 체구로 변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눈가에 팥알 크기의 검은 점이 박혀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 자였다. 광우룡이 사막에서 보았던 바로 그 호위무사! "크하하핫!" 맹발은 돌변했다. 용모뿐만 아니라 조용하던 어투도 사뭇 달라졌다. 큰 대롱에서 김이 빠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숨이 아깝거든 치우검을 당장 내놓으렷다!" "다, 당신은...." 광우룡은 목이 메어 말이 다 안 나올 정도였다. "크하하하하하...." 머리를 쳐든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그의 광소(狂笑)는 밤하늘 높이 울려 퍼져나갔다.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광우룡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② 맹발이 상큼성큼 다가와 치우검을 낚아채려고 했다. 광우룡은 급히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맹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의 두 눈은 무시무시하게 빛나고 있었다. 광우룡은 평생 그렇게 무서운 눈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맹수가 먹이감을 노릴 때도 저런 눈빛을 내지는 못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짧은 순간, 눈빛이 붉은 색으로 변하더니 거기서 두 줄기 빛이 쏘아져 나왔다. 다행히 광우룡은 상대의 기습을 간파하고는 붕 날아올라 집무실 지붕 위로 몸을 피했다. 붉은 두 줄기 빛은 땅을 움푹 패여 놓았다. 맹발이 쫓아왔다. 광우룡은 이렇게까지 겁먹은 적이 없었다. 상대가 귀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얼어붙게 만들었던 것이다. 광우룡은 얼떨결에 치우검을 휘둘러댔다. 젊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무예를 매일 연습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한몸 정도는 누구와 맞닥뜨려도 능히 보호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맹발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파황검의 초식들을 피해내고 있었다. 처음 몇 동작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어설펐다. 하지만 상대가 선뜻 공격을 해오지 않자 안정감을 찾으면서 제대로 된 공격을 펼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광우룡의 공격은 무기력했다. 유년시절 삼촌 앞에서 목검을 휘두를 때처럼 상대는 입가에 웃음마저 띠면서 공격을 쉽게 받아냈다.


아까 파황검의 보법을 밟을 때만 해도 치우검은 자신과 한몸이 된 듯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왠지 치우검이 손에 잘 잡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이 거북했다. 그러는 사이 광우룡은 더 물러설 수 없는 곳까지 내몰렸다. 뒤꿈치가 처마끝에 닿았다는 물리적 상황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상황도 그랬다. 지붕 아래로 뛰어내릴 수는 있었지만, 광우룡은 그런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리라고는 보지 않았다. 더는 피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팔을 쭉 내뻗어 치우검을 찔러갔다. 퍽! 뭉클한 감촉이 느껴지며 치우검은 맹발의 복부를 꿰뚫었다. 맹발이 기묘한 웃음을 흘리며 허리를 비틀었다. "흐흐흐...." 광우룡은 그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검을 좀더 깊이 쑤셔넣었다. 그러나 여전히 신음소리는 나지 않았다. 다만, 얼굴 위로 웃음인지 고통스런 일그러짐인지알 수 없는 표정이 떠오를 뿐이었다. 광우룡은 치우검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치우검은 맹발의 복부에 박힌 채 뽑히지가 않았다. 맹발이 잡고 있는 것도 아닌데, 치우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크흐흐흐...." 맹발은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광우룡은 급기야 치우검에서 손을 뗐다. 맹발은 기다렸다는 듯이 배에 꽂힌 치우검을 뽑아들었다. 피는 분출되지 않았다. 튀기는 피 한 방울 없이 멀쩡하자 광우룡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넌 진짜 사람이 아니구나...." "자, 이번엔 내 차례다!" 맹발의 손에 들린 치우검은 광우룡의 백회혈을 향해 떨어져내렸다. 제 40 장 부자(父子)의 운명은 ① 같은 시각. 광삭은 조미미와 함께 별당에서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왕탁에게 붙들려 갔다가 맹발의 등에 업혀 돌아온 이후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신열을 내며 앓더니 곤륜객잔으로 떠날 무렵에는 그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별당 앞까지 나와 그를 배웅하며 조심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었다. 자신을 보는 그녀의 시선은 따뜻했고 손길은 부드러웠다. 전에는 기대도 하지 못하던 것들이었다. 광삭은 자신의 변함없는 애정공세가 먹혀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미미에게 눈이 먼 그는 왕탁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어떻게 해서 풀려났는지 일체 묻지 않았다. 그것을 물어 그녀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왕탁의 사이가 어떻다는 것쯤은 쉬 짐작이 갔다. 질투심이 생겨나긴 했지만, 천해객점에서 납치하다시피 하면서 데려왔을 때는 이미 그 정도는 각오했었다. 조미미의 배는 눈에 띄게 불러오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과의 사이가 이제 인력으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아버지도 조미미를 보게 된다면 완고한 고집을 꺾게 될 것이었다. 조미미의 뱃속에 잉태된 생명이 자신의 아기라도 굳게 믿고 있는 광삭은 곤륜객잔 지하동굴에서 왕탁과 마주쳤다는 얘기는 행여 충격을 줄까봐 입 밖에 일절 내지 않았다. 그는 그저 표국 일로 표물을 운반해 주고 왔다고만 말했다.


그녀는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용정차를 한 모금 마신 후 광삭이 말했다. "배가 많이 불러오고 있는데 산달이 언제요?" "아직 멀었어요." 수줍은 듯 조미미는 얼굴을 붉혔다. "아직 아버님은 우리의 혼인을 반대하고 계시지만 떡두꺼비같은 아들 하나만 낳으면 아버님도 생각을 달리 하실 거요. 물론 나는 딸이라도 상관하지 않겠지만. 한데, 듣기로 임신중엔 견과류나 신 것을 충분히 섭취해야 한다던데?" "걱정말아요. 취랑이가 제 조섭(調攝)엔 무척이나 신경을 쓰고 있어 불편한 거 없어요." 사는 건 떨칠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일까,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조미미는 이제 광삭을 다루는 방법을 터득해 가고 있었다. 그녀는 뱃속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왕탁의 아이도 광삭의 아이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낙양표국 내에서 살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고래(古來)로 여자가 남자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했던가? 조미미는 이제 왕탁에 대한 그리움은 마음 깊은 한구석에 묻어두리라고 결심하고 있었다. 결심은 확고했다. 이제 그의 얘기를 듣거나 그를 다시 만난다 해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깊은 밤에 아무도 몰래 깨어나 울면서 왕탁을 떠올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왕탁도 자신이 다른 사내의 아기를 밴 이상 찾아오거나 미련을 두지는 않을 터였다. 그녀는 요즘 정신적인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더불어 낙양표국에서의 생활도 익숙해져 갔다. 처음엔 난데없는 그녀의 출현에 하녀들조차 백안시(白眼視)하거나 질시하곤 했었다. 그러나 광삭의 사랑이 두텁다는 것을 알고는 차츰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변해 이제는 그녀의 말 한 마디면 다들 굽실거리며 앞을 다투어 일처리를 해주었다. "달빛이 고운데 물놀이라도 나가겠소?" "모처럼 먼 여행에서 돌아오셨는데 피곤하시잖아요." "난 괜찮소. 밖에 나가 바람을 쐬는 게 피곤을 더는 일이오." "고생한 표사들에게 푸짐한 술상이라도 내리시지 않구요?" "안 그래도 그들은 지금 낙양의 기루로 나가 질펀하게 술에 절어 있을 거요." "잘 하셨어요." "자, 일어납시다." 그때였다. 표국 내의 청소를 도맡아 하는 하인 하나가 후다닥 툇마루로 뛰어올라왔다. "웬 놈이냐?" 광삭이 소리쳤다. "도련님, 큰일이 났사옵니다." "큰일이라니?" "내당 집무실 앞에서 총표두님이 웬 괴한과 싸우고 있습니다." "뭐야?" 광삭은 놀라 조미미를 돌아보았다. "어서 가보세요." "알았소." 광삭은 조미미의 양 손을 뜨겁게 잡은 후 하인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동문(東門) 안으로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까, 여섯 명의 표사들이 피를 쏟은 채 고꾸라져 있었다. 대부분의 표사들이 기루로 술을 마시러 나갔기 때문에 여섯은 적지않은 수였다.


"아버님!" 광삭은 소리치며 집무실로 뛰어들어갔다. 광우룡은 보이지 않았다. 집무실 안은 흐트러진 집기 없이 멀쩡했다. ② 광삭은 광우룡을 소리쳐 부르다가 대꾸가 없자 집무실을 나오려고 돌아서는데, 광우룡이 거기에 서 있었다. "아니, 아버님!" 광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까닥하면 죽을 뻔했다. 맹발이라는 놈이 날 죽이려고 했어." "맹발이라면 구루병에 걸린 땅딸막한 우리의 정보원 아닙니까? 한데, 그 자가 왜 아버님을 죽이려고 해요?" "이 치우검을 노렸어." 광우룡은 패검한 치우검을 툭툭 쳤다. "놈이 어떻게 치우검에 대해서 알았죠?"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알려고만 들면 얼마든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그보다도 조 소저는 괜찮느냐?" "지금 막 별당에서 오는 길입니다." "별당에서? 놈이 막 그쪽 방향으로 도망을 쳤는데 어서 가보거라. 아니, 같이 가보자꾸나." 광삭은 광우룡과 함께 별당으로 돌아왔다. "조 소저!" 광삭은 툇마루로 올라섰다. 조미미가 드르륵 문을 열며 나왔다. "아버님은요?" 그러다가 그녀는 툇마루 아래 서 있는 광우룡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물었다. 광삭은 조미미가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는 돌아보았다. "그래, 천만다행이구나. 난 놈이 별당 쪽으로 달아나길래 혹시나 했다." 광우룡이 말했다. 광삭은 감동했다. 아버님에게 이런 정도로 조미미를 염려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조 소저 뭘 해요? 정식으로 인사드리지 않구?" 광삭이 말하자 조미미는 툇마루 아래로 내려가 꾸벅 인사를 했다. 광우룡은 다가가 조미미의 손을 잡았다. "그 동안 내 너를 너무 심하게 박대했나 보구나. 앞으로는 잘 지내 보자꾸나." 조미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던 광우룡은 갑자기 앙천대소(仰天大笑)했다. "크하하하핫!" 광삭은 아버지의 호탕한 웃음에 낯설음을 느꼈다. 그는 아버지가 남 앞에서 그렇게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크하하핫!" 다시 한 번 대소를 터뜨린 광우룡은 광삭과 조미미가 지켜보는 앞에서 맹발로 모습을 바꾸었다. "아, 아니 넌...." 광삭은 섬뜩 놀랐다. "조 소저는 내가 데려가야겠다!" "내 아버지는?" "이미 고인이 되었지." "뭐라고? 네놈이 아버지를 죽였단 말이지."


광삭은 양 손을 새의 부리처럼 모아 찍어갔다. 목의 급소를 찍어 맹발을 순식간에 제압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맹발은 왼손으로는 조미미를 잡은 채 큰 움직임 없이 한손으로 광삭의 공격을 막아냈다. "합! 야합!" 패검을 하고 있지 않았던 광삭은 소림사의 학권(鶴拳)과 유사한 권법을 이용해 숨쉴 틈을 주지 않고 공격해 나갔다. 광삭의 몸동작은 날렵하면서도 우아했다. 그를 둘러싼 공간은 수족(手足)에 포용되어 그가 내뿜는 기(氣)로 충만했다. 안유신(眼有神), 권유혼(拳有魂)! 그의 눈에 신이 깃들어 있음으로 해서 그의 권에는 혼이 들어 있었다. 광삭은 구정(鉤頂:구부린 손목 관절의 둥근 부분)과 구첨(鉤尖:손가락 끝부분)을 이용해 머리를 노리거나 턱을 올려치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광삭은 맹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역부족인 능력으로 상대를 제압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언제까지고 방어자세만을 취할 것 같던 맹발은 눈에서 붉은 광선(光線)을 내뿜어 광삭의 가슴에 격중시켰다. 광삭은 가슴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에 신음하며 부르르 떨다가 제자리에서 고꾸라졌다. 그렇게 단 일격에 맥없이 허무하게 쓰러져 갈 걸 뭣하러 혼신의 힘을 다해 애를 썼는지 안쓰러울 정도였다. 평소 우주색변이라는 초식으로 하늘과 검의 합일을 유도하던 광삭의 당당한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검이 없어서 그렇게 무력해진 것일까, 아니면 맹발의 가공할 위력앞에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여서일까. 아무튼 광삭은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조미미는 경악했다. 그녀는 쓰러진 광삭을 부둥켜안아 정신을 차리게 했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조미미는 눈물과 분노가 뒤범벅이 된 얼굴로 맹발을 올려다보았다. 흰자위가 드러난 눈엔 독기마저 서려 있었다. "왜, 왜 죽인 거죠?" "어쩔 수 없었소. 내가 당신을 데려간다면 그 자는 날 죽이려 했을 테니까. 자, 갑시다." "어디로 간다는 거예요?" "가보면 알게 되오." 맹발은 뿌리치는 조미미의 손을 잡느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조미미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몹시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그런지 쉽게 그녀의 손을 잡아끌지 못하고 있었다. 광삭을 찰나에 죽여 버린 상황을 생각한다면 이상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 41 장 사달노는 소림승을 만나고 ① 한사코 따라가지 않으려는 조미미가 악을 쓰며 반항하고 있을 때, 별당의 모퉁이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이 하나 있있다. 다름 아닌, 사달노였다. 그는 아까 광우룡이 맹발에게 당할 때부터 맹발을 지켜보고 있었다. 치우검을 찾아 득달같이 이곳까지 쫓아와 숨어든 그였지만 맹발이 광우룡과 싸우는 장면을 보고는 너무나 섬뜩해 섣불리 대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맹발을 알지 못했다. 무림지사(武林之事)에 비교적 정통한 그로서는 눈으로 붉은 강기를 쏘아대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광우룡의 파황검도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그가 듣거나 본 동작의 큰 형세(形勢)를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했거늘, 스스로 창안한 독창적인 검법이라 해도 기존의 것을 모방하고 응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에 반해 현란한 요환술(妖幻術)처럼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맹발의 기공(氣功) 능력이야말로 기이하고 독랄했다. (저 자는 누구인가? 근본이 무엇이란 말인가? 대체 어느 문파의 소속원이길래 저토록 색다른 능력을 보이는가?) 사달노는 맹발이 광우룡과 싸우는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고 만 있었다. 동귀어진(同歸於盡)을 하게 되면 절로 치우검이 손에 들어오게 되겠지만, 결투는 광우룡의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 치우검에 백회혈을 시작으로 인중, 단전, 사타구니가 쩍 갈라진 광우룡은 피를 분출하는 즉시 한줌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려갔다. 헉! 하마터면 사달노는 숨소리를 상대방에게 들킬 뻔했다. 그 다음부터 한동안 사달노는 쿵덩대는 심장을 추스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맹발이 광우룡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걸 볼 때는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사달노는 맹발이 광삭을 죽이는 것까지 보았지만 아직은 치우검을 빼앗을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맹발이 모습을 감추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맹발은 여전히 조미미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맹발은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는지 그녀의 수혈(睡穴)을 짚어 기절시킨 다음 품으로 받쳐안았다. 그 순간이었다. 맹발은 등이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고, 두 손을 못 쓰는 상태였다. 절호의 기회임을 직감한 사달노는 삼지창을 움켜쥐고 득달같이 달려들 기세였다. 그 찰나 뒤에서 누군가가 덮쳐들며 입을 틀어막았다. "쉿!" "대체 무슨 짓이야?" 사달노는 소리쳤지만 입 안에서 맴돌았다. "쉿, 조용!" 사달노는 상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내칠 수 있었지만 맹발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실행하지는 못했다. 그 사이 맹발은 조미미를 안고 담 너머로 훌쩍 뛰어올랐다. 사달노는 뒤늦게야 괴한을 밀쳐내며 맹발을 쫓아가려 했으나 뭔가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아서시오!" 올려보자, 눈썹이 한일자로 시꺼멓게 뻗은 투박한 인상의 갈의(葛衣)의 사내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를 빡빡 깎은 중이었다. "당신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소. 죽음만 재촉하게 된단 말이오!" "당신은 누군데 남의 일에 참견이오?" 사달노는 여차하면 찌를 생각으로 창파(槍把:창자루)를 그러쥐었다. "무량수불...." 사내는 한 손을 꼿꼿이 세워 혜가를 기린다는 소림사 특유의 예를 갖추며 말했다. "빈승은 소림사 사대천왕 중의 하나인 항마천왕(抗魔天王) 마종기(馬鐘琪)요. 사형은?" "난... 한데 날 왜 말린 거요?" "말하지 않았소. 사형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내 실력을 당신이 어떻게 알아?"


사달노는 맹발을 놓친 분풀이를 소림승에게 토해냈다. 먼저 그는 반마보(半馬步) 자세를 취하며 허리를 찔러가는 척 하다가 뒤로 물러나며 오른발을 좌로 교차시킨 채 창날 끝으로 반원을 그렸다. 이것은 난창이라는 수법으로 소림승의 발등을 노린 것이었다. 그러나 소림승은 그런 초보적인 공격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가볍게 피했다. 사달노는 몸을 돌려 궁보(弓步)의 자세를 취하며 수평으로 내찔렀다. 소림승이 허리를 돌려 피한 후 장외연으로 내려치자 창은 두 토막이 났다. 사달노의 손에는 총채만한 크기의 막대기가 달랑 들려 있을 뿐이었다. 사달노는 내친 김에 막대기로 어깨를 후려치려 했으나 소림승이 나한권(拿漢拳)의 복호항룡(伏虎降龍)을 시전하자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어이쿠!" 사달노는 겨드랑이에 충격을 느끼며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소림승이 반푼의 힘만을 실었기 때문에 충격이 커 보이지는 않았다. "사형, 난 사형과 싸우고 싶지 않소. 제발 흥분을 가라앉히시오!" "난 누님의 원수를 갚고 치우검을 되찾아야 한단 말이야. 당신이 나서는 바람에 놈이 다람쥐처럼 달아났잖아. " 사달노는 실력으로 소림승에게 상대가 되지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가 죽지 않고 말했다. 소림승이 허리를 굽혀 손을 내밀자, 사달노는 손을 뿌리치며 일어서더니 다시 큰소리를 쳤다. "당신, 어떻게 책임질 거야?" "뭘 말이오?" "맹발이란 자를 내 앞에 되돌려 놓으란 말이오!" "사형, 언성 높이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요. 난 놈의 거처를 알고 있으니 지금 같이 찾아가면 되잖소?" "그 말이 정말이오?" "무량수불, 빈승은 거짓말을 하지 않소." "한데, 당신 정말 소림승이오?" "그렇소. 빈승이 소림승이 아니라면 뭘로 보인단 말이오?" "그렇다면 다행이오. 아, 아야...." 사달노는 갑자기 얻어맞은 겨드랑이를 주무르며 엄살을 부렸다. "거, 손이 되게 맵구먼! 그 권법은 어디서 배운 거요?" "허허허...." 소림승의 얼굴에 웃음이 번져갔다. "참, 소림승이랬으니 소림사에서 배웠겠군. 자, 어서 길을 안내하시오." "자, 힘을 썼으니 목이 탈 텐데 이거부터 한 모금 마시시오!" 소림승은 차고 있던 표주박을 내밀었다. "이게 뭐요?" "뭐든 마시기나 해요." 물인 줄 알고 꿀꺽꿀꺽 마시던 사달노는 격렬하게 기침을 해대며 토해냈다. "아니, 이건 술이잖소?" "내가 손수 빚어 만든 곡차요. 몸에 좋은 것이니 걱정말고 쭉 들이키시오." "무슨 중이 술을 마신단 말이오! 그러고 보니 당신 땡초잖아?" "허허, 사형도 입이 걸군! 좋은 술 마셔놓고 남 욕할 건 없잖소. 마시기 싫으면 돌려주시오." 소림승은 사달노에게서 표주박을 빼앗더니 냉수를 마시듯 꿀꺽꿀꺽 마셔댔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시고 나서도 아쉬운지 소림승은 표주박 주둥이를 게걸스럽게 혓바닥으로 핥아댔다. 그러더니 마른


멸치를 꺼내 씹어댔다. 사달노가 놀라자, "좀 더럽긴 한데 사형도 안주로 씹어 보겠소? 하고 말했다. "아, 아니오." "아니면 말구요." "보아하니 파계승이신 모양인데 어서 길이나 안내하시오." "파계승은 아니고 소림 속가제자(俗家弟子)요. 한데, 사형 이름은?" "창노(槍老) 사달노요." ② 마침 그때 우 하는 사람들의 발자욱 소리가 들려왔다. "표사들이 몰려오는 거 같은데 일단 이곳을 벗어납시다." 소림승은 사달노의 손을 잡더니 지붕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사달노는 마치 새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소림승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갔다. 소림승은 사달노를 낙양표국에서 꽤 떨어진 대나무숲 앞까지 데려갔다. "잠시 쉬었다 갑시다." 소림승은 바위 위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헤잉, 서두르시오. 얼마나 왔다고 피죽도 못 먹은 노인네처럼 벌써 쉰단 말이오?" "그게 아니오. 바지 뒤가 뜯어져서...." 그러더니 바늘쌈지를 꺼내 바늘귀에 실을 꿰더니 바지를 벗었다. 말대로 항문과 맞닿는 부위가 찢어져 있었다. "나, 원 참!" 그러나 사달노는 한숨을 내쉬더니 옆에 나란히 앉는다. "사형, 누님의 원수를 갚고 치우검을 되찾는다고 했는데 사연이나 들어봅시다." "사연이랄 것도 없어요. 흑소랑 광삭이란 자가 누님을 죽였는데, 그 자는 맹발이라는 자에게 죽었으니 원수는 갚은 셈이 됐고, 치우검은 그 자가 갖고 갔으니 이렇게 뒤쫓는 거지요. 사주(師主:중의 높임말)께선 왜 낙양표국을 염탐하시었소?" "허허, 참!" "왜 그러시오?" "한 입으로 땡중이라고 한 게 언젠데 이제 또 '사주'라고 하시오?" "아깐 땡중처럼 보였으니까 그리 부른 거고 지금 바느질을 하는 걸 보니 진짜 도를 닦는 사주처럼 보이는구려. 스스로 바느질을 할 정도라면 사치할 요량이 없는 스님일 테니까." "보기와는 달리 사람 보는 안목이 있구먼." "보기와는 다르다니? 그럼 내가 허수아비처럼 보인단 말이오?" "허허... 역정을 내시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에, 또... 물어오니까 나도 솔직히 말하는 건데 난 낙양표국을 염탐했던 것이 아니라 맹발이라는 자를 염탐했던 것이오." "맹발이라는 자를?" "그 자에 대해 아는 게 있소?" "아니, 모르오 난... 난 낙양표국의 표두인 광삭을 쫓아왔었소. 그 자가 곤륜객잔 지하동굴에 숨겨져 있던 치우검을 뺏고 내 누님을 죽였으니까. 한데, 누님의 뜻을 받들어 꽤 오랫동안 내 스스로 치우검을 지켜오긴 했지만 대체 치우검이 그토록 소중한 이유가 뭐요?" "그야 치우신이 사용하던 검이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과연 그게 정말로 치우신이 사용하던 검인지...." "의심스럽다는 것이오?"


"의심이나마나 치우신이 전설상의 존재인지 실제 인물인지조차 논란이 되고 있는 마당에, 맹발이 스스로 치우신을 주인으로 섬기는 호위무사였다고 주장하니 어찌 황당하지 않겠소? 그 자는 미친 놈이 틀림없소. 미친 놈이 아니라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소. 그런데 이상한 것은 광우룡 총표두가 그를 대하던 태도가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이오." "둘이서 얘기하는 것은 나도 보았소. 사막에서 봤다는 둥, 치우검 때문에 자신이 달려갔다는 둥... 그러다가 맹발이 구루병에 걸린 볼품없는 모습에서 키가 크고 당당한 장한(壯漢)으로 변하자 광우룡이 놀라 자빠질 뻔하지 않았소?" "바로 봤구먼. 둘 사이에 뭔가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았소. 용호표국의 전(前) 총표두였던 섭간의 얘기도 나오던데 그 분에 대해 아는 게 있소?" "섭간이 우리 누님에게 치우검을 맡겼다는 것뿐이오. 치우검은 섭간과 광우룡이 사막에서 주웠다고 했소. 한데, 사주께선 어떻게 맹발이라는 자를 염탐하실 생각을 다 하시었소?" "그 사정은 따로 있소." 소림승은 대화에 빠져드느라 잠시 바느질을 멈추었다. "청나라가 정권을 세우면서 무림의 세계도 영향을 받고 있소. 세상이 바뀌면서 자신의 이득과 영달을 위해 청의 세력을 등에 업으려는 자들이 있단 말이오. 당금무림의 제삼대 문파라고 할 수 있는 아미산파(峨嵋山派)가 그렇소. 아미산파에는 승(僧), 악(岳), 월(越), 두(杜), 홍(洪), 화(化), 자(字), 혜(慧)의 여덟 개 지파가 있는데, 그중에 악파가 혼란을 틈타 기존의 구도를 흔들어보려는 야심을 갖고 있소. 청의 세력과 어떻게든 끈을 연결해 무림의 맹주( 盟主)로 등장하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단 말이오. 그 악파의 장문인인 질마귀(疾馬鬼) 용골대(龍骨大)의 수하에 소청검법(少淸劍法)에 뛰어난 세 명의 무사가 있는데, 그들 중의 두 명인 혈우(血雨) 곡척치(谷隻治)와 혈검(血劍) 차차유(車叉庾)가 맹발을 만나는 것을 보게 되었소. 그 자들이 어떻게 서로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은밀하게 모략을 꾸미고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이오. 곡척치와 차차유에 대해서는 우리도 알 만큼 알고 있 으니 대비책이 있다 할 수 있지만, 맹발이라는 자는 그야말로 난데없는 자요! 아무리 뒷조사를 해도 그 자의 태생이나 문파, 과거의 신분에 대해 밝혀진 게 없소. 기껏해야 낙양표국의 정보원 노릇을 하며 낙양의 청루에서 숙식을 해결했다는 정도요. 그러나 오늘에서야 그 자가 노렸던 것이 뭔지를 알게 됐소." "치우검이란 말이오?" "그렇소." "누님이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언에 의하면, 치우검이 그 누구든 악한 자의 손에 들어가면 혈겁이 닥칠 거라고 용호표국의 총표두였던 섭간 어른이 경고했다고 했소." "으흠, 혈겁이라...." 바느질을 마친 소림승은 서둘러 바지에 다리를 꿰더니 앞서 걸어나갔다. "대체 맹발이라는 자는 어디에 있는 거요?" "나만 따라오시오." 걸음을 재촉하는 소림승을 따라 사달노를 어두운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대나무숲이 끝나고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소림승은 그곳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러시오?" "잠깐만 기다려 보시오." 소림승은 양 손을 말아쥐어 입에 대더니 새소리를 냈다. 뻐꾹- 뻐꾹--! 화답(和答)을 하듯 억새풀 너머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 승복차림의 머리를 빡빡 깎은 사내 두 명이 수풀을 헤치며 걸어나왔다.


마종기는 포권을 예를 취했다. 한 사내는 산신령처럼 눈썹이 길고 흰데다 부리부리한 눈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사내는 키가 작고 눈에 찢어져 매서운 인상을 주고 있었다. "무량수불, 날이 찬데 고생들이 많으십니다." 마종기가 말했다. "사제도 고생이 많소. 그래, 간 일은 어찌되었소?" 산신령이 말했다. "맹발이란 자는 낙양표국에서 광우룡 부자를 죽이고 치우검을 빼앗아 달아났습니다. 마침 표사들이 여행에서 돌아와 저잣거리로 나가 있었기 때문에 쉽게 죽일 수가 있었습니다. 흑소랑 광삭의 여자도 납치했구요. 참, 이 친구는 사달노라는 자인데...." 마종기는 사달노가 낙양표국에 숨어들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반갑소. 난 사대천왕 중 뇌벽천왕(雷霹天王)인 혁달(赫達)이라고 하오. 이쪽은 역시 사대천왕 중 한 사람인 무애천왕(無碍天王)인 천굴호(千屈昊)요."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반갑습니다. 보아하니 우린 서로 힘을 모아야 할 것 같소." 천굴호가 말했다. "아, 잠깐!" 사달노는 손을 들어 제지하며 말했다. "인연이 닿아 사주님들을 이렇게 뵙게 되니 저도 반갑습니다. 하지만 서로 힘을 모으자고 했는데, 사주님들이 원하는 것과 제가 원하는 것을 분명히 해두어야겠습니다." "뭘 분명히 해둔단 말이오?" 혁달이 물었다. "치우검을 찾게 된다면 그것은 제 것입니다." "난 또... 빈승들은 계율로 살생을 엄히 금하고 있는데 검을 가져가 무엇에 쓰겠소? 그 점은 걱정말아요." "그렇다면 힘 닿은 데까지 돕겠소." 세 명의 소림승들은 사달노가 주먹을 불끈 쥐자 껄껄하고 웃어댔다. 그들은 사달노의 눈빛이나 몸가짐에서 풋내기의 허풍을 금방 알아보았던 것이다. 굳이 마종기가 혁달이나 천굴호에게 그의 엉성한 실력을 일러줄 것도 없었다. 대충 얘기를 끝낸 그들은 마종기가 안내하는 덤불숲길을 따라 어둠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제 42 장 치우신의 환생은 임박하고 ① 천애산(天涯山). 낙양에서 북서쪽으로 오십 리 가량 떨어진 산곡(山谷). 그리 높지는 않지만 오름세가 가팔라 산초(山草)를 캐는 주민을 제외하고는 일반 주민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매봉(罵峰)은 돌산(石山)이라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이따금 정상을 정복하고 싶은 마음에 무리하게 오르다가 미끄러져 목숨을 잃은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후, 세월이 흐르면서 귀신(鬼神)이 나온다는 소문이 나돌아 귀봉(鬼峰) 내지는 귀곡(鬼谷)으로 불리워졌다. 천애산 정상 조금 못 미친 곳에 동굴 하나가 있었다. 동굴은 길이가 사십 장이고 높이가 일 장이 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조미미는 어깨를 덮쳐오는 한기에 눈을 떴다. 희미한 불빛이 머리 위에서 아른거렸다. (꿈은 아닌데... 여기가 어디지?) 그녀는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했다가 곧 전후 사정을 알아차렸다. 맹발이라는 자가 광삭을 죽이고 자기를


이리로 데려왔다는 것을. 어디선가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평평한 바위 위에 누워 있던 그녀가 일어나려고 하자, "가만 있으시오." 하며 구부정한 사내의 얼굴이 나타났다. 맹발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얼굴이 작고 갸름한데다 피부가 검었다. 눈매가 매서워 조미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자, 이걸 좀 마셔요." 맹발은 부드럽게 조미미의 허리를 받쳐올리더니 입에 사발을 갖다댔다. "이, 이게 뭐죠?" "마셔요. 몸에 좋은 거니까." 조미미는 사내가 베푸는 친절을 거역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발에 입을 가져가던 조미미는 역한 비린내에 동작을 멈추었다. 사발에 담긴 것은 붉은 피였다. "뭘 주저하오? 어서 마시지 않구." "아니에요. 빈 속이라 마시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핑계를 대지만 조미미는 그 피가 뱃속의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라 망설인 것이었다. "비위가 약한가 보군. 자, 그럼 이것부터 좀 들어요." 맹발은 소금가루를 건네며 말했다. "절 어쩌시려는 거죠?" 조미미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뭘 어쩌려는 게 아니오. 좋은 음식을 먹어야 태아가 잘 클 거 아니오? 사슴피니까 걱정말고 마셔요." 조미미는 맹발이 왜 태아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불안해졌다. 맹발은 더 강요하지 않고 사발을 옆에 내려놓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조미미는 배가 불러오기 전에 낙태를 시키지 못한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처음 달거리가 없었을 때는 생리불순인 줄만 알았다가 두 달이 지나서야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재빨리 조치를 취했어도 아비도 모르는 아이를 가지는 우(愚)를 범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두려운 나머지 주저하다가 기회를 놓쳤다. 그 일로 상심에 젖어 있을 즈음 광삭에게 납치되어 몸을 허락한 후 그녀는 뱃속의 아이가 광삭의 아이인 것처럼 속이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광삭이 죽은 지금 그녀는 더없이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한데 이 자는 뭐가 아쉬워서 뱃속에 있는 태아에게 관심을 보인단 말인가?' 조미미는 곤혹스러웠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파고(波高) 높은 운명 앞에 무력해진 자신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하지만 곧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떨쳐내며 생각했다. (어떻게든 여기서도 살아나가야 한다. 이미 치욕스럽게 더럽혀진 몸, 살 길이 막막하다고는 하나 자살이 능사는 아니다.) 그녀는 이미 왕탁을 잊고 있었다. 그가 생각난다고 해도 몸만이 아니라 광삭을 택한 순간 정신마저 순결(純潔)을 잃은 그녀로서는 의식적으로 그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새삼 살아야 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힌 그녀는 소금을 찍어 먹은 후 사발을 들고 사슴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역한 냄새와 함께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참고 견뎌냈다. 그녀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으아악!" 비명소리를 들은 것은 그때였다. 조미미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신경을 곤두세워 귀를 기울였다.


더 이상 비명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조미미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거기 누구 없어요?" 조미미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동굴 안은 잠잠했다. "여보세요!" 이번엔 좀더 크게 말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뿐이었다. 조미미는 통로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겨갔다. 동굴은 중간쯤에서 여러 갈래로 길이 갈라졌다. 어느 쪽으로 갈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맨 우측 길에서 맹발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맹발이었다. 그는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조미미를 본 맹발이 말했다. "어딜 가려는 거요?" "비, 비명소리가 나서요." "신경쓸 거 없소. 아까 그 자리로 돌아가시오." 조미미는 맹발의 눈에서 쏘아져 나오는 안광(眼光)에 섬뜩해져서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빈 사발을 본 맹발은 사슴피를 한 그릇 더 가져왔다. "이것도 마저 드시오." "토할 거 같아 더 이상은 마시지 못하겠어요." "시키는대로 해요." 말은 부드럽게 했지만 강렬한 눈빛을 보자 조미미는 맹발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코를 움켜쥐고 다시 한 사발을 남김없이 들이켰다. 맹발은 조미미가 사슴피를 열심히 마시는 걸 대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사발을 건네받으면서 말했다. "됐소! 하루 걸러 두 사발씩만 마시면 예정보다 일찍 출산을 할 수 있을 것이오." "예정보다 일찍 출산을 하다뇨?" "음풍(陰風)이 불어오는 본격적인 가을이 되면 음기(陰氣)가 가득찬 이 피가 출산 일정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오." "출산일정을 앞당기다뇨? 왜, 무엇 때문에 출산을 앞당기려는 거죠?" "겁먹을 거 없소. 그건 차차 알게 될 것이오. 나중에 알아도 늦지 않소. 그 보다도 내일이 보름이오. 달이 차올라 만월(滿月)이 되면 당신은 달에서 발산하는 음기를 충분히 받아들여야 하오. 그러니 내일은 몸을 깨끗이 씻고 마음가짐을 바로하여야 할 것이오." "공자님...." 조미미는 가슴을 졸이며 말했다. "전 공자님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왜 저를 이리로 데려오신 거죠?" "그것도 나중에 알게 될 거요. 초조해할 거 없소. 산후(産後)엔 원하는 곳으로 가게 해 줄 테니 그때까지 보양(保養)이나 잘 하시오. 그리고 잘 생각해 보시오. 조 소저가 지금 낙양으로 나간다면 낙양표국의 표사들에게 죽을 게 뻔하오. 광우룡 부자가 죽은 마당에 당신을 가만 놔둘 것 같소?" "그건...." 그러나 조미미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따져서 말싸움에 이긴다고 해서 그가 자신을 순순히 놔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② 다음날, 그녀는 석양이 질 무렵 밖으로 나가 계곡에서 몸을 씻도록 허락받았다. 주홍빛 노을이 천애산 봉우리를 물들이고 있었다. 폭포수가 떨어져 내리는 차가운 물웅덩이에 몸을 담그자 뼈가 아려왔다. 태아에게 나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되었지만 머리 속은 한결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몸을 깨끗이 씻은 다음 모닥불을 피워둔 곳으로 나와 몸을 따뜻하게 했다. 옷을 입고 나서도 맹발은 보이지 않았다. 맹발이 보이지 않자 도망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힌 그녀는 계곡 아래로 내달렸다. 어두워지기 전에 한 걸음이라도 더 멀리 달아나려는 생각에 서두르다 보니 무수히 넘어져 무릎이 깨어지고 손바닥에 피멍이 들었다. 그녀는 그에 개의치 않고 허덕허덕 내려갔다. 숨이 가빠왔지만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꽤 멀리 도망쳤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돌리는 순간 불쑥 인영이 나타나는 바람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우뚝 멈춰섰다. 맹발이었다. "어딜 그리 바삐 가는 거요?" 조미미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을 멀뚱히 뜬 채 숨을 죽였다. "나에게서 도망가고 싶나? 후후... 그렇겠지. 하지만 내 경고하는데 쓸데없는 짓으로 내 화를 돋우는 일은 삼가는 게 좋을 거야. 살고 싶다면 말이야. 저런, 쯧쯧... 내 깨끗이 씻으라고 수 차례 일렀거늘 흙이 묻어 몸이 엉망이 되었군. 계곡으로 돌아가 다시 깨끗이 씻으시오." 그런 후 맹발은 감쪽같이 모습을 감추었다. 조미미는 한동안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다가 발길을 돌렸다. 푸르스름하던 하늘은 차츰 먹빛 물이 들어갔다. 몸을 씻던 곳으로 돌아온 그녀는 숯이 되어 발갛게 타오르는 모닥불 옆에서 옷을 벗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달빛을 받아 유연한 굴곡을 드러냈다. 피부는 하얗고 적당히 솟아오른 유방은 탐스러웠다. 풍만한 엉덩이는 잘록한 허리 아래에서 쭉 뻗은 다리의 각선미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그녀는 넘어져 더렵혀진 부위를 씻기 시작했다. 몸을 다 씻고 난 후 물에서 나오는데 맹발이 다시 나타났다. 조미미는 서둘러 옷을 집어들고 젖가슴을 가렸다. "자, 잠깐만요. 옷부터 입구요." "옷 입을 거 없소." 맹발은 다가서더니 순식간에 그녀의 수혈을 짚었다. 쓰러지는 그녀를 안더니 바위벽을 타고 올랐다. 가볍게 발을 차올리며 동굴을 지나 산정(山頂)으로 올라갔다. ③ 산정은 하나의 바위가 뾰족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는데 밑에서 보기와는 달리 정상에는 가로, 세로 삼 장 정도의 평평한 공터가 나 있었다. 교교한 달빛이 그 자리에 충만했다. 맹발은 알몸의 조미미를 그곳에 반듯이 눕혔다. 그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보름달을 올려다보며 기도하듯 합장했다. 그의 입에서 알지 못할 주문이 술술 새어 나왔다. 눈을 감고 열심히 주문을 외우며 정신을 집중했다. 달은 조미미의 둥그렇게 부른 배 위에 빛을 던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음(陰)의 기운이 산정에 충만해지자 맹발의 관자놀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주문을 외워댔다. 석고대죄(席藁待罪)를 하듯 무릎을 꿇고 있던 그가 마침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신이시여! 음기를 듬뿍 받으시어 하루 빨리 옥체(玉體)에 왕성한 활력을 불어넣으소서!" 맹발은 허리에 찬 치우검을 빼어들었다. 그는 날을 비스듬히 들어올려 달빛을 반사시켰다. 날에 반사된 달빛은 조미미의 복부에 집중적으로 비쳐졌다.


"태음흡기(太陰吸氣)!" 아까 조용히 주문을 외우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기합을 넣으며 소리쳤다. 그의 몸은 푸른 광망(光芒)에 둘러싸였다. "음귀혈혈(陰鬼血穴)!" 그러자 한줄기 농도 짙은 달빛이 강기처럼 쏘아져 치우검의 날에 부딪친 다음 조미미의 복부로 스며들었다. 조미미의 온몸 역시 푸른 광망에 휩사였다. 그 순간, 달과 치우검 그리고 조미미는 하나가 되었다. "월수음결(月水陰結)!" "곤지습하(坤地濕河)!" "혈루택루(血淚澤漏)!" 구결을 외치는 맹발의 목소리는 산정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보름달이 차츰 산정으로 다가와 천애산을 뒤덮을 듯이 커졌다. 맹발이 치켜든 치우검이 만월에 겹쳐져 보였다. "치우신이시여! 깨어나시라!" "치우신이시여! 보양하시라!" "치우신이시여! 도모하시라!" 그러자 그때였다. 한줄기 섬전(閃電)이 밤하늘에 사선(斜線)을 그으며 치우검 끝으로 떨어져 내렸다. 쾅! 콰르르릉! 굉음과 함께 푸른 광망은 눈부신 하얀 빛으로 바뀌었다. 맹발은 더 이상 몸을 주체할 수 없는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치우검은 만월과 조미미를 맺어주는 가교(架橋)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달빛은 치우검을 통해 조미미의 복부에 엄청난 음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달은 음기의 덩어리다. 그것은 절대적 음의 영역이다. 어두운 밤, 달빛, 치우검, 여자....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산정을 푸른 광망으로 뒤덮었다. 푸른 광망은 붉은 광망으로 변해가더니 무지개 빛을 띠었다. 크하하하핫! 맹발의 앙천광소는 하늘 높이 퍼져 나갔다. 제 43 장 소림사의 개입(介入) ① 이때, 왕탁 일행은 허둥지둥 용호표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곧바로 표국의 무사들과 힘을 합쳐 낙양표국으로 쳐들어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광우룡과 광삭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에 아연해졌다. 광삭은 죽었지만, 광우룡은 시체도 없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인 하나가 전과정을 숨어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허리가 구부정한 키가 작은 사내가 조미미와 치우검을 가지고 어디론가 잠적했다는 것이었다. 왕탁은 조미미의 소식을 듣자 가슴이 쓰라렸다. 그녀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기에는 자신의 도량이 너무 작다는 것을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에서는 사그라들지 않고 불타오르는 그리움의 감정이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었다. 공공아는 보다 정확한 사정을 알기 위해 정보수집에 열을 올렸다. 그러자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구부정하고 키가 작은 사내!


그 사내가 바로 맹발이라는 것이었다. 가장 크게 놀란 사람은 공공아였다. "그게 확실해요?" "확실합니다. 그 자는 벌써 오래 전부터 광우룡 총표두와 은밀한 교통(交通)이 있었다고 합니다." 양화지가 말했다. "어떤 교통 말인가요?" "그건 비밀에 붙여져 있어 광우룡 부자만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짐작컨대는 정보원 노릇을 했던 게 아닌가 추측됩니다." "정보원이라... 대체 무엇을 염탐하는 자였단 말인가요?" "그것 역시 광우룡 부자가 죽어 알 길이 없다고 합니다." "광우룡 총표두가 한줌 재가 되어 날아갔다는 얘기는 뭐예요?" "그 집 하인이 두 눈으로 봤다는데...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그 자의 무공이 대단히 사이(邪異)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지금 낙양은 여러모로 어수선합니다. 곧 낙양에서 있을 전국적인 비무대회(比武大會)와 겹쳐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말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저도 들었는데 나라가 이런 판국에 비무대회는 무슨 얼어죽을 비무대회예요?" "비무대회가 북경이 아니라 낙양에서 열리는 건 청나라의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정치적인 의도라뇨?"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일이죠. 비무대회를 북경에서 열지 않은 것은 아직 정세(情勢)가 불안한 상황이라 자신들의 황실에 위해가 가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고, 장소를 옮겨가면서까지 낙양에서 개최하는 것은 비무대회에 열광하는 백성들을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정책이라고 봐야겠죠.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인다면, 이번 대회에서 청의 세력이 아미파를 민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아미파를 밀어요?" "무림의 태산북두랄 수 있는 소림파를 제압하겠다는 속셈이겠죠. 청의 세력이 미는 무림의 문파가 무림을 지배한다면 청나라는 한결 수월하게 백성들을 다룰 수 있게 될 겁니다." "하지만 아미파가 그렇게 쉽게 청의 세력에 아부를 할까요? 게다가 아부를 한다고 해서 소림파를 쉽게 물리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권력에 아부를 하는 것이야 드문 일이 아니죠. 그리고 소림파를 물리친다는 것은 반드시 멸문(滅門)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림파가 건재하다 하더라도 비무대회에서 패하게 된다면 그들도 별게 아니라는 인식이 퍼지게 되어 그들의 영향력이 현저하게 줄어들 것은 뻔합니다." ② 소림파는 최근 십여 년간 전국적인 비무대회에서 항상 우승을 해왔다. 대회의 주관은 구파(九派)가 중심이 되어 하게 되지만, 전국적인 규모이기 때문에 언제나 명 황실의 규제와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이번 대회는 명나라가 망하면서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우선은 집행부측에서 명나라가 망한 것에 대한 항의(抗議) - 그래 봤자 대세에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 의 뜻으로 향후 몇 년간 대회를 개최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순수한 비무대회를 정치적으로 오염시켜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폈다. 워낙 의견의 대립이 팽팽하다 보니 구파의 장로(長老)들이 모여 무기명 비밀투표에 붙이자는 제안을 했다. 결과는 오 대 사로 개최해야 한다는 우세로 드러났다. 그런데 이 일을 계기로 그동안 비교적 잠잠하던 서로간의 상호비방과 불신이 불거져 나왔다. 호승심(好勝心)에 넘친 집단들이다 보니 이따금은 사소한 시비로 앙숙이 되기도 하는데, 얼마 전에는 우연히 한 저잣거리에서 소림 속가제자와 아미파의 무사가 부딪쳤다. 싸움은 소림 속가제자의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 왜냐하면 일 대 삼으로 싸웠기 때문이다.


그 문제를 두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본래 소림사는 방이 삼십오 개 였으나 핍박받는 백성들 즉 출가하지 않은 속가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한 방이 더 생겨나 삼십육 방이 되었다고 한다. 속가제자이다 보니 엄격하게 규율에 얽매일 필요가 없고 그간 쌓아온 소림사의 위상이 크게 실추될 것은 없었지만, 속가제자도 엄연히 제자라는 의견을 무시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소림사는 즉각 아미파에게 전문을 띄워 시비를 걸어온 아미파의 무사들에게 징벌을 가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술을 마신 상태에서 시비가 붙은 것을 트집잡아 제자들을 문책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번번이 소림파와 아미파간에 충돌이 생겨났다. 아미파의 무사들이 일방적으로 시비를 걸어온 탓이었다. 소림사는 방장의 지시에 따라 시비를 걸어오더라도 행실을 자제해 줄 것을 전국 각지에 퍼져 있는 산문(山門) 포교사들에게 교지(敎志)를 내렸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소림사의 조치를 선의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언가 꿇리는 구석이 있어 꼬리를 내린 것이라고 비꼬았다. 소림사 무술을 중흥시킨 각원상인(覺遠上人)의 소림 십계명(戒名)에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주목되는 점이 있다. 一. 자기가 강하다는 것을 함부로 보여서는 안된다. 一. 타인과 겨루려는 마음을 자제하라. 방장의 지시는 그런 전통에 충실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세평은 소림파가 자신이 없어 겁을 집어먹은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아미파를 누르기 위해 혈풍(血風)을 일으킬 수는 없는 일! 이렇게 된 이상 소림사는 이번 비무대회에서 당당히 자신들의 실력을 보여주어야 하는 부담감을 안고 있었다. 오랫동안 늘 우승을 해왔지만, 소림파는 비무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을 자랑으로 드러내 놓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만약에 우승을 놓치게 된다면, 특히나 아미파에게 우승을 넘겨주게 된다면 세평과 여론이 자신들에게 훨씬 불리하게 돌아가게 될 터였다. 소림사를 한층 긴장시킨 것은 대외업무를 수행하는 백의전(白衣殿:관음당으로도 불리우며 주로 정보수집의 역할을 담당한다)에 아미파와 청의 세력이 결탁하려 한다는 구체적인 첩보(諜報)가 날아들면서였다. 그것은 사뭇 다른 의미가 있었다. 저잣거리에서 포교를 하던 소림승들에게 시비를 걸어왔던 것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생겨났다. 청의 세력을 업고 무림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깔린 게 아닐까? 소림사는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미파를 철저히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달노가 낙양에서 백의전 소속의 항마천왕 마종기, 뇌벽천왕 혁달, 무애천왕 천굴호를 만나게 된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들은 백의전 소속이면서 현재 소림파에서 가장 무예가 출중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사달노가 뱅발을 뒤쫓아 천애산으로 들어갔었다는 사정을 알 리 없는 왕탁과 공공아는 맹발의 행방을 수소문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러나 좀처럼 맹발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 설상가상으로 오랜 여행에 지친 탓인지 왕탁은 용호표국에 도착한 지 이틀이 지난 후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신열(身熱)이 나며 몸이 불덩이처럼 끓어올랐다. 의원이 다녀간 뒤에도 왕탁의 신열은 좀처럼 누그러들 기미가 없었다. 공공아는 극진하게 왕탁을 간호했다. 그의 옆에서 밤을 새다시피 하면서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③ 때는 가을이 절정에 달해 하늘은 맑고 달빛은 아름다웠다. 창문으로 새어드는 그 교교한 달빛을 받으며 왕탁은 잠에 빠져 있었다. 몽(夢). 왕탁은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 있는 동안 자주 뒤숭숭한 꿈을 꾸었다. 조미미가 나타났다. 그녀는 산발이 되어 괴로움을 호소하면서 살려달라고 몸부림을 쳤다. 왕탁은 애써 그녀에게 손길을 뻗어보았지만 번번이 그녀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런가 하면 양아버지가 불쑥 나타나, "치우검을 맹발이라는 자로부터 반드시 빼앗아 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혈겁의 세상이 도래하게 돼! 절대 포기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펄펄 끓는 몸으로 사 일을 앓고 나서야 왕탁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왕성한 식욕을 보였다. 그는 점심식사를 마친 후 녹차를 들다가 공공아에게 말했다. "그래, 맹발의 행방을 캐내시었소?" "아니오.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여기저기 끄나풀을 풀어놨지만 오리무중이에요." "저런... 낭패로군. 그럼, 어쩐다...." 왕탁이 침중한 표정을 짓자 옆에 있던 염군조의 안색도 어두워졌다. 답답하고 초조하기는 공공아도 마찬가지였다. 이러다가 영영 치우검을 잃게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버지를 죽인 배후를 못 캐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인내력을 갖고 기다려 보는 수밖에요." 그것은 스스로도 위안을 받기 위해 공공아가 한 말이었는데, 다음날 뜻밖에도 사달노가 찾아왔다. 사달노는 재회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맹발의 행방에 대해 얘기했다. "놈은 지금 천애산에 있습니다." "천애산이라면 여기에서 얼마 멀지 않은데... 등잔 밑이 어두웠군요. 당장 쫓아가 봅시다. 맹발이 치우검을 가져간 것을 보면 아버지를 죽인 배후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거예요." 공공아가 말했다. "아니에요. 지금 가봤자 소용없습니다. 투명한 은빛 막이 놈이 있는 동굴을 하늘에서부터 둥글게 감싸고 있습니다." "투명한 은빛 막이라뇨?" 그것은 한층 호기심을 부채질했다. 소용없다는 사달노의 만류가 왕탁이나 공공아에게 먹혀들 리 없었다. 그러나 천애산에 도착한 왕탁 일행은 사달노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기이한 막(幕)이었다. 햇빛이 내려비치는 각도에 따라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않기도 하는 장세(場勢) 같은 것이었다. 막은 동굴이 위치한 기암괴석을 중심으로 사방 백여 장 가량 뻗어 있었다. 그 어디로도 뚫고 들어갈 길이 없었다. 그런데도 안은 훤히 들여다보였다. 투명한 막에 몸을 부딪치면 반탄력을 받아 십여 장 밖으로 퉁겨 나간다. 그런한 막이 계란의 노른자처럼 둥그렇게 동굴을 보호하고 있으니 가히 놀랄 일이었다. 전후좌우상하를 탐색하던 왕탁 일행은 지친 나머지 근처의 풀숲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기상천외(奇想天外)한 일과 이사(異事)에 대해 많이 들어보았지만 저런 건 처음 봅니다." 염군조가 혀를 내둘렀다. "저 막이 생긴 게 언제부터였습니까?" 왕탁이 사달노에게 물었다. "맹발이 광우룡 부자를 죽이고 조 소저를 납치해 천애산 정상으로 모습을 감춘 다음날부터입니다." "저 안에 맹발이 있는 건 확실합니까?" "두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 아무튼 확실합니다. 소림사 사람들도 그렇게 믿고 있구요." "소림사 사람들이라뇨?" 그는 백의전 소속의 소림승들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들은 아직도 이 근처 어딘가에서 맹발을 감시하고 있을 겁니다. 그들은 아미파를 경계하고 있는데 맹발이 그들과 자주 접촉하는 것을 보고 나서는 맹발의 신분을 캐내는데 혈안(血眼)이 된 모습이었습니다." "소림사의 백의전이라면 무림세계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보통이라고 들었는데, 맹발에 대해 알아낸 게 있답니까?" 염군조가 말했다. "아니오. 그들도 맹발이 아미파 사람들과 접촉하고 있다는 정보 이상은 알아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왕탁 일행은 천애산을 떠나지 않고 하룻밤을 꼬박 지새웠지만 막에 변화는 생겨나지 않았다. 새벽 일찍 몇 차례 막을 없애보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막은 검(劍)에도, 날카로운 침(針)에도 찢기지 않았다. 장풍의 강기에도 끄덕없었다. 뿐만 아니라 염군조가 반짝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며 왕탁의 목각인형--목각인형이 예의 위력을 발휘해 주리라 생각했었다--을 벗겨내 막에 대보았지만, 그 또한 소용이 없었다. 왕탁 일행은 일단 철수한 다음 동향을 살피기로 했다. 사달노는 자신의 무예가 크게 부족하기 때문에 소림파 사람들을 후원해서 치우검을 찾기로 했다며 돌아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누나 사미령의 원수인 광삭이 죽은 만큼 이제 이번 일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진 것 같았다. 맹발은 좀처럼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대체 막 속에서 무엇을 하는지 맹발이 모습을 보였다는 첩보(諜報)는 없었다. 혹시 몰래 빠져 나간 게 아닐까? 그런 의혹을 가져보지만 막이 건재하다는 것은 맹발이 안에 있다는 반증이었다. 결국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낙양에서는 밤마다 처녀들이 사라진다는 괴이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괴이한 소문만이 떠도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자신의 딸이 간밤에 납치되었다는 피해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왕탁과 공공아는 그런 소문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보다 사달노를 통해 소림승을 만나보는데 역점을 두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항마천왕 마종기를 낙양의 한 객점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오랜 수련과 내공을 쌓아온 탓인지 마종기의 얼굴에서는 활력이 넘쳐났다. 그는 공손히 인사를 한 뒤 찻잔을 가운데 두고 왕탁과 마주앉았다. 왕탁 옆에는 공공아가 앉았다. "아미타불... 사달노 사형을 통해 빈도(貧道)를 찾는다는 얘기를 전해들었습니다만, 안 그래도 저희쪽에서도 왕 사형과 공 소저를 만나려던 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잘 되었습니다. 용건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원하는 것은 맹발에 대한 정보입니다." 왕탁이 말했다. "어허, 이런!"


마종기의 눈동자가 커졌다. 찻잔을 잡더니 만지작거린다. "왜 그러십니까?" "저희도 같은 이유 때문에 사형을 찾아뵈려 했는데... 이거 낭패로군요! 서로가 원하는 게 맹발에 대한 정보라면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반증 아니겠소?" "딴은 그렇군요." 공공아가 말했다. "하지만 실망하기에는 아직 일러요. 먼저 질문을 해보시죠. 서로 얘기를 하다보면 몰랐던 것을 알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좋습니다. 우선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 자가 어디에서 나타났는가 하는 것이오. 신분을 알고 싶은 것이지요. 어느 지역에서 태어나 자라났으며 어떤 무공을 어느 단체나 스승에게서 배워 왔는지에 대한 것이오. 낯빛을 보아하니 원하는 대답을 듣기는 어렵겠지만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 점은 우리가 가장 궁금해 마지않던 것이기도 합니다. 유감스럽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그 자가 어느 날 발호자 광우룡의 낙양표국과 접촉을 하면서 여기 있는 공공아 소저를 감시해 왔다는 정도입니다. 추측컨대, 그 이유는 치우검을 손에 넣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결국, 치우검을 손에 넣었구요." "목적은 분명한데 난데없는 자라... 역시 그렇군." 마종기는 빡빡깎은 머리 위에 선명히 찍힌 여섯 개의 계인(戒印)을 쓰다듬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 소림사는 맹발의 출현에 대해 아주 거시적(巨視的)인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그의 느닷없는 출현은 청나라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중원(中原)뿐만 아니라 나라에는 온통 사마(邪魔)의 기운이 팽배해 있습니다. 고래(古來)로 역사가 환란의 때를 당하여 그런 괴이한 기운이 팽배해 온 시기가 있었습니다. 당나라에 이은 오대십국 시대와 원나라의 세력이 극성하던 시기가 그랬습니다. 그 시기에 적어도 강 호의 세계에선 치우검이 사악한 세력이 결집하는 상징의 도구로 여겨졌다는 게 우리의 믿음입니다. 소림사 장경각(藏經閣)에 소장된 역사서(歷史書)에서 그런 기록을 확인하였구요." "그럼 맹발의 출현이 우연(偶然)이 아니라는 겁니까?" 왕탁이 물었다. "그건 인간이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은 아니지요. 허나, 한 가지 분명한 건 그가 치우검에 대한 맹신도(盲信徒)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디선가 치우검에 대한 기록을 보고 나서 그것을 구하기 위해 엉뚱하게 나선 과대망상증 환자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달노 사형에게 듣자하니 치우검은 곤륜객잔의 지하에 감추어져 있었다던데, 우리가 입수한 최근 그 자의 행적으로 봐서 치밀하게 움직였던 게 분명해요. 그것은 용호표국에서 입수 한 정보와도 일치할 테구요."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맹신도가 아니라는 것은 맹발이 치우검의 존재에 대해 본래부터 알고 있었단 말입니까?" "본래(本來)부터라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태어날 때부터 혹은 어느 특정한 시기에 영감이나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흐흠...." 마종기는 콧구멍을 벌름거리더니 말했다. "왕 사형께선 예리한 안목이 있으시군요. 우리 소림사에서도 잠정적으로 그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그의 독류무비(獨流無比)한 무공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맹발은 구루병에 걸린 추한 몰골을 하고 있지만, 광우룡의 모습으로 변한 채 광삭의 앞에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인피면구를 쓰지 않고 그런 능력이 보인 자가 있다는 걸 빈도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천애산에 친 그 이상한 막(幕)은 또 무엇입니까? 검막(劍幕)이나 호신강기를 능수능란하게 펼칠 수 있는 자라고 해도 자신의 신체 둘레 몇 장이 되지


않지요. 더구나 그것은 싸울 때 극도의 내공을 모아 펼치는 순간의 일이 아닙니까? 산 정상에 둘러쳐진 막이 몇 날 며칠이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가히 놀랄 일입니다. 아니, 무섭고 두려운 일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요. 한 마디로 말해 그 자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은 배워서 습득되 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니, 그럼...." 왕탁은 놀라 공공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도 놀라 흠칫해진 기색이 역력했다. 공공아는 마른 목을 축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 자는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요?" "인간은 인간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인간이 아니지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인간의 탈을 쓰고 나왔다는 점에서는 분명 인간입니다. 그 자도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상처가 생기면 고통을 느끼고 급소를 검에 찔리면 죽게 될 겁니다. 물론 만독불침(萬毒不侵)이거나 금강불괴지체(金剛不壞之體)일 수는 있지만 사람인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자라면 인간의 한계를 넘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그렇게 짐작하는 이유는 우리는 그 자가 환생(還生)을 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환생이라면... 과거의 누구란 말입니까?" "치우신과 가까운 자였을 겁니다. 물론 무사였구요." "환생을 하여 치우검을 얻어 뭘 어쩌자는 거죠?" 마종기의 대답을 바랐다기보다는 스스로 되묻듯 왕탁이 말했다. 마종기는 침묵했다. 공공아도 침중해져 있었다. 죽은 광우룡을 통해 진실의 일면을 들을 수만 있었다면 그들은 돌파구를 찾을 단서에 접근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섭간과 광우룡이 죽은 지금 아무도 치우검에 얽힌 사연을 정확히 알 수 없는 터라 그들은 막막하고 답답했다. 한동안 그들은 차만 계속 마셔댔다. "소림사라면...." 이윽고 왕탁이 입을 열었다. "무림의 태산(泰山)이요, 북두(北斗)라고 들었습니다. 무소불위(無所不爲)한 능력이 있을 법한데 막을 뚫을 수 있는 묘책이 없으신지요?" "허허, 과찬이십니다. 우리도 사람인 게지요. 능력밖이라면 어쩔 수가 없는 거지요. 저로서도 그런 막은 처음 봅니다. 여러 날 뚫고 들어가기 위해 별별 노력을 다해 봤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허나, 우리는 아미파 사람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 혈우 곡척지와 혈검 차차유가 비무대회를 앞두고 일찌감치 낙양에 당도해 맹발과 접촉하는 것을 포착했는데, 막이 처진 후에도 천애산에 드나드는 것 을 보아 맹발과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 자들을 예의주시한다면 조만간 막을 뚫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될 겁니다." "좋은 소식이 있으면 저희에게도 즉각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래야지요. 정보를 공유하고 일사불란하게 행동을 같이 한다면 맹발이 꾀하는 음모를 사전에 분쇄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듣기로는 왕 사형의 여자가 맹발에게 납치되었다고 하던데...?" 왕탁은 '왕 사형의 여자'라는 말이 왠지 어색하게 들렸다. 하지만 곧 꿈속에서 조미미가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던 장면이 떠오르지 목이 메어왔다. "그렇소. 그 여자를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가슴이 아픈 일이군요. 한데... 맹발의 과거 행적으로 보아 여자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던데, 왜 '왕 사형의 여자'를 납치해 간 것일까요?" "그건... 모르겠소." 그러나 오동소의 모옥 앞에서 헤어지기 전 조미미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치우신에 점지되었고, 치우신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 제 44 장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① 왕탁과 공공아가 소림사의 마종기를 만난 이틀 후, 낙양 변두리의 한적한 토담집. 방 두 칸에 협소한 부엌이 하나 딸린 집안은 웃음꽃이 피어나 고 있었다. 그 집 과부는 며칠 후면 시집 보낼 딸을 앞에 두고 수런수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편이 죽은 지 십여 년, 든든한 울타리가 없자 과부는 저잣거리로 나가 산채(山菜)나 찐만두를 팔았다. 가세가 기울어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근근이 살아온 것이다. 실로 모진 세월이었다. 다행히 연년생인 아들 딸은 무럭무럭 자라나 주었다. 과부에게 있어 인생의 보람은 아들 딸이 대견하게 성장해 나가는 모습뿐이었다. 재취(再娶) 자리이긴 하지만 후덕한 인품의 젊은 나이인 데다 전처와 사별한 유생이라 과부는 딸의 혼사를 흡족해 했다. 사돈이 될 집은 가산도 넉넉했다. 이제 고생 뒤에 낙이 오는가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딸과 마주한 달밤이 한결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엄마, 오빠가 일할 자리도 걱정할 거 없어. 내 한 번 알아볼게." 딸 영영(英英)은 함박 웃으며 말했다. 모녀(母女)는 솜이불에 발을 집어넣고 마주앉아 있었다. 이 솜이불도 며칠 전 사위 될 사람이 사서 넣어준 것이었다. "오빠 일자리까지? 아서라. 비빌 언덕 있다고 너무 기대다간 시집가서 미움받을라." "아냐, 저쪽 집사가 넌지시 오빠 뭐하고 지내느냐고 여쭤보던걸." "그래서?" "소작일을 하지만 벌이가 시원칠 않다고 솔직히 말했지, 뭐. 그랬더니 객점에서 일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묻잖아. 좋다고 했어. 나중에 오빠한테 얘기했더니 오빠도 좋대." "그래? 그거 잘된 일이다만 매사에 사돈집에 기대려는 모습을 보이게 되면 사람 밉보이게 돼. 에미 말 알겠니?" "알고 있어. 걱정하지 마." 그때였다. 느닷없이 문이 와장창 박살나며 흑의의 두 괴한이 들이닥쳤다. 모녀는 놀라 비명을 질렀다. 괴한들은 살기에 넘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둘 다 거구의 장한이었는데, 등에 검을 꿰차고 덥수룩하게 수염을 길렀으며 바지는 다니기 편하도록 동여맨 차림세였다. "누, 누구세요?" 과부의 놀란 한 마디가 채 내뱉아지기도 전에 발길이 얼굴로 날아들었다. 퍽. 단 일격에 과부는 기절하고 말았다. "이봐요, 당신들...." 영영은 대들 듯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그들 중에 눈매가 매섭게 생긴 사내가 영영의 혈도를 짚었다. 영영은 힘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맥없이 쓰러지며 사내의 품에 안겼다.


이들은 아미파 중에서도 악파 소속의 혈우 곡척지와 혈검 차차유였다. 영영을 어깨에 둘러멘 곡척지는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툇마루를 내려서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영영의 오빠가 보였다. 그들은 끙끙대는 영영의 오빠를 발로 걷어찬 후 신속히 사립문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민가를 벗어나 천애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달빛에 의지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이게 벌써 몇 번째인가? 아마 벌써 예닐곱 번은 되었지." 곡척지가 무거운지 투덜댔다. "그래도 그 자야말로 우리 악파를 지존(至尊)의 위치에 올려놓을 분이니 원하는 것을 무조건 해드리라고 용골대 장문인께서 누누이 당부하지 않으셨나?" "허나, 눈꼴시리지 않은가? 자기는 가만히 앉아서 이래라 저래라 시키는데, 지금 우리가 여염집 처녀나 납치해 갖다 바칠 때냔 말이야. 비무대회가 며칠 남지 않았어. 그동안 무예를 연마해도 시원찮을 판에." "그건 그렇네. 하지만 그 자가 달빛을 받아 치우검을 시전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난 정말 무서웠네." "뭐, 무서웠다구? 으하하하... 천하의 혈검 차차유가 겁을 집어먹다니! 그러고 보니 자네의 배포도 콩알만한 것이었군. 난 무섭기는커녕 그 자와 맞서 싸우고 싶은 충동이 일던데." "맞서 싸우고 싶다구? 예끼, 행여 그런 소릴랑은 말게. 그 자의 화를 돋우어서 우리에게 이득될 건 하나도 없네." "아니야,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얘기지만 난 정말 그 자와 한 번 붙어보고 싶더라구. 용골대 장문인께서 그 자에게 쩔쩔매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어. 우리가 모셔온 어른이 그런 정도의 그릇밖에 안되는가 싶어 말일세." "하지만 천애산 정상에 은막(銀幕)을 친 것을 보고서도 그러나?" "그거야 인연이 닿아 보기 드문 환술(幻術)을 배운 덕택이겠지. 자신을 보호하는데 탁월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은막으로 사람을 죽일 순 없지 않겠나?"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법이네. 방어법에 탁월하다면 공격법도 탁월할걸세." "자넨, 무턱대고 순종하는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해 탈이야." "자넨, 아무데나 나서려는 그 돌출근성이 탈이지.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언젠가 한 번 큰코다칠 걸세. 그나저나, 자꾸 처녀를 잡아다가 뭘 어쩌려는 거지?" "계집 잡아다가 어쩌긴 뭘 어째? 재미보는 것이지." "재미를 보려면 기루에서 얼마든지 예쁜 계집을 취할 수가 있는데 괜한 위험을 감수해 가면서까지 처녀를 고집하는가 말이야." "그야, 입맛이 까다로운 미식가인 게지. 참, 그러고 보니 우리도 힘들게 품만 팔게 아니라 재미도 좀 보자구." 그러더니 곡척지는 영영을 풀숲에 털썩 내려놓았다. "뭐하는 짓이야?" 차차유는 바지춤을 헤치는 곡척지를 나무랐다. "내가 뭘 하는 거 같은가?" 바지가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자 시꺼먼 사타구니가 드러났다. 무성한 음모 사이로 커다란 연장이 덜렁거렸다. "이봐, 그 자의 얘기 못 들었어? 파과(破瓜)하지 않은 처녀야 한다고 했잖아. 함부로 손댔다가 큰 곤욕치르지 말고 참게나." "내가 먼저 맛 봄세. 자네도 생각 있으면 하라구." 곡척지는 차차유의 만류를 뿌리치고 영영의 하체를 더듬고 있었다. 곡척지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차차유는 소나무 뒤로 물러났다. 끙끙대는 곡척지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솔방울을 만지작거리며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차차유도 아랫도리가 달아올랐다. 녀석이 볼일을 다 봤는지, "생각 있으면 와서 하라구." 하고 말해왔다. ② 차차유는 소나무 밑에서 빠져나와 허리춤을 추스르는 곡척지에게로 다가갔다. 녀석은 만족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달빛 아래 정액과 피로 뒤범벅이 된 영영의 하체가 드러났다. 차차유는 그것을 보자 구역질이 나며 욕정이 사그라들었다. "왜 그러나?" 곡척지가 어깨를 툭 쳐왔다. "아닐세." "왜, 내가 먼저 선수를 쳐서 화라도 난 거야?" "아냐...." "이 친구, 비위가 약하긴. 싫으면 관둬." 곡척지는 잡초로 영영의 사타구니를 닦아냈다. 이번엔 차차유가 영영을 들쳐메었다. 곡척지가 앞서고 그 뒤를 차차유가 따라갔다. 그들은 천애산 정상의 막 앞에서 맹발이 알려준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은막의 일부가 스르르 사라지며 그들의 앞길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동굴 입구에 이르자 에헴하고 헛기침을 했다. "어서 들어오너라!" 맹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쥐새끼만한 놈이 반말은... 언젠가 기회가 있다면 콧대를 한 번 납작 꺾어 놓으리라.' 곡척지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횃불이 밝혀진 동굴 입구를 따라 걸었다. 통로가 끝나자 넓은 원형의 석실이 나왔는데, 한가운데 단(壇)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고 그 위에 맹발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석실 안에는 은은한 침향(寢香)이 감돌고 있었다. "계집은?" "여기 있습니다." 곡척지가 차차유가 들쳐메고 있는 영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디에 내려놓을까요?" 그 순간, 맹발은 코를 벌름거리더니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누구냐?" "뭐가 말입니까?" 차차유가 되물었다. "아무 데서나 정액을 흘리고 다닌 놈이!" 차차유는 흠칫 놀라 곡척지를 바라보았다. 곡척지는 태연을 가장하며 말했다. "어르신,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입니다. 정액을 흘리고 다니다뇨?" "그러고 보니 네놈이로구나!" "일껏 처녀를 데려왔는데 왜 생트집이십니까?" 그러더니 곡척지는 차차유의 등에서 영영을 빼앗듯이 건네받더니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그때, 맹발의 안광(眼光)이 시퍼렇게 변하는 것을 곡척지는 보지 못했다. "그 계집은 처녀가 아니다. 다른 계집으로 바꿔 오너라." 시퍼런 안광에 주눅든 차차유가 곡척지의 허리를 툭툭 쳤다. 어서 명령대로 시행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곡척지는 고분고분 따라주지 않았다. 오히려 맹발을 향해 큰소리를 쳤다. "어르신, 처녀를 잡아오는 것이 어디 방귀 뀌듯 그렇게 쉽게 되는 건가요? 이 처녀를 물색하느나 우리는 아까운 시간을 이틀이나 낭비해야 했습니다. 어지간하면 그냥 접수하시지요." "클클...." 맹발의 입에서는 웃음도 해소 기침소리도 아닌 이상한 소리가 났다. "건방진 놈!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 다녀오거라!" "이봐, 혈우(血雨)! 날도 선선해졌는데 땀 한 번 더 내면 건강에도 좋을 걸세. 썩 다녀오자구." 차차유가 긴박한 상황을 모면해 보려고 말했다. "갔다 오려면 너 혼자 갖다 와. 난 도저히 힘들어 못하겠어. 게다가 난 할 만큼 했단 말야. 우리가 모시는 분은 질마귀 용골대만으로 족해. 대체 이 따위 개뼈다귀같은 자식에게까지 우리가 설설 기어야 하는 이유가 뭐냔 말이야?" 이제 곡척지는 대놓고 까발렸다. 맹발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얼굴에 감돌던 화기(火氣)가 사라진 것이 변화의 전부였다. 맹발은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인지를 쭉 폈다. 그것이 공격 동작이라는 것을 알고 곡척지가 뒤꿈치를 들어 피할 자세를 취했을 때였다. 가만히 가부좌를 튼 자세에서 더 이상의 아무런 움직임도 내공을 끌어모으는 동작도 없었는데, 맹발의 인지에서는 한 줄기 가공할 강기가 발출되어 곡척지의 이마 한가운데를 꿰뚫었다. 파츳! 실로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차차유는 거의 십 년간을 동고동락하던 곡척지의 두개골이 파열되어 허연 뇌수(腦髓)를 쏟는 것을 멀거니 보고만 있었다. 그는 감히 맹발에게 대항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빠르고 강력한 지공(指功)은 처음 보았다. 그것도 이렇다 할 예비동작도 없이 해낼 수 있다는 것은 맹발의 내공수준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삼갑자 아니면 사갑자.... 그러나 그 또한 막연한 짐작일 뿐, 차차유는 혀를 빼물고 한동안 움직이지조차 못했다. 발이 얼어붙고 숨이 막혀왔다. 차차유는 명색이 이번 비무대회에 아미파의 대표로 나선 자였다. 그런 자가 단 한 번 지공을 보고는 두 손을 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네도 내게 불만이 있는가?" 맹발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말했다. "아, 아닙니다요." 턱이 덜덜 떨려왔다. "시체를 파묻게." "시체를요?" 그때까지 차차유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자네의 친구이잖나. 명복을 빌어줘야지. 계집도 내다 버려. 파과를 한 계집은 필요없어." 차차유는 뇌수를 쏟고 즉사한 곡척지를 오른어깨에, 영영을 왼어깨에 들쳐메고 석실 밖으로 나갔다. 곡척지의 머리통에서는 선혈이 뚝뚝 듣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맹발은 석벽 뒤로 신형을 날렸다. 휘릭-! 도포자락이 부풀어오르면서 돌가루가 휘날렸다. 맹발은 조미미가 누워 있는 제단 앞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곤히 잠든 그녀의 배는 눈에 띄게 불러 있었다.


만족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맹발은 무릎을 꿇더니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아주 소중한 것을 만지듯 손길은 부드러웠다. "크흐흐흐흐...." 괴이한 웃음이 낮게 흘러나왔다. "곧 치우신의 세상이 도래한다!" 맹발은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포효하듯 소리쳤다. 제 45 장 비무대회(比武大會)는 다가오는데 ① 한편, 천애산 정상을 빠져 나온 차차유는 둘러멘 시체와 영영을 내려놓고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의 겨드랑이에는 아직도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휴! 촌철살인(寸鐵殺人)이 아니라 촌지살인(寸指殺人)이군. 지공이 그 정도 수준이라면....' 잠시 휴식을 취한 차차유는 목숨을 부지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듯이 다시 두 사람을 들쳐업고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적당한 곳에서 땅을 파고 곡척지를 묻었다. 그리고 영영의 혈도를 풀어준 다음 소나무 둥치에 기대어 놓고 나서 그곳을 떠났다. 낙양객잔으로 들어서던 차차유는 왁자지껄한 소란스러움에 놀랐다. 구대문파와 군소제파의 무사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있었다. 그러고 보니 비무대회가 사흘 뒤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소림(少林), 무당(武當), 화산(華山), 청성(靑城)... 각 문파를 상징하는 문양(文樣)이 그려진 색색깔의 깃발이 웅성대는 사람들 머리 위로 보였다. 차차유는 아미파를 찾았다. 그는 곡척지와 함께 미리 이곳으로 와 방을 잡아놓고 있었다. 이번에 아미파는 악파 외에 홍파(洪派)와 자파(字派)에서 각각 한 명씩을 선수로 파견하고 있었다. 비무대회의 규칙은 각파에서 파견된 참가자가 다섯 명을 넘지 못하게 돼 있었다. 그는 홍파의 마풍(馬風) 단조휘(段趙揮)와 자파의 설상적(雪上跡) 조룡(鳥龍)을 만났다. 그들은 오랜 여행에 지친 듯 피곤한 기색이었다. 차차유는 그들을 예약한 방으로 안내했다. 여섯 명까지 투숙할 수 있는 커다란 방이었다. "자, 어서 목욕부터 하시지요. 그 사이 제가 특별히 귀한 음식들을 주문해 놓겠소." 차차유가 말했다. "한데 곡형은 왜 안 보이는 거요?" 단조휘가 물었다. "사정이 있어 급히 고향으로 귀가했소." 맹발과의 접촉은 다른 아미파 사람들도 모르고 있는 일이었다. "비무대회를 사흘 앞두고 고향으로 떠났단 말입니까? 싸우는 걸 밥 먹는 것보다 좋아하던 사람이." "아버님에게 중병(重病)이 생긴 모양이오." "어? 아버님은 오래 전에 돌아가신 걸로 아는데." "그럼, 어머님인 게지요." "무슨 소리요? 곡형은 어머니 얼굴은 보지도 못했다던데." "나야...." 거짓말을 하자니 차차유는 좀이 쑤셨다. 그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되는 대로 씨부렁거렸다. "집안에 위중한 사람이 있다니까 부모님인 줄 알았지요. 아무튼 곡형은 비무대회에 참가할 수 없게 되었소." "하는 수 없죠, 뭐. 자 온통 먼지를 뒤집어쓴 데다 땀냄새가 배어 갑갑한데 사람들 몰려오기 전에 서둘러 목욕이나 합시다."


조룡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 먼저 나가자 단조휘도 뒤따라 나갔다. 차차유는 기다렸다는 듯이 창을 통해 낙양객잔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몇 칸의 지붕을 타넘더니 낙양객잔과 건물 두 채를 사이에 두고 있는 황룡객잔의 어느 별실로 들어갔다. 상투를 튼 백발의 사내가 탁자에 앉아 있었다. 차차유는 오른쪽 무릎을 꿇고 오른팔을 가슴쪽으로 끌어당겨 예의를 갖추었다. 백발의 사내 용골대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무슨 일인가?" "곡척지가...." 차차유는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더듬었다. 용골대의 날카롭게 생겨먹은 칼눈썹은 독랄한 이력(履歷)을 보여주는 듯했다. "곡척지가 어떻게 됐단 말이냐?" "송구스럽게도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죽다니! 대체 누구에게?" "다름 아닌 맹발이...." "맹발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예상하고 눈을 질끈 내려감았던 차차유 머리 위로 용골대의 우렁찬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지 않았어도 알 만하구나. 또 놈이 급한 성질머리를 죽이지 못하고 나선 것이겠지." "하오나 곡척지는 저의 친구이자 어르신의 수족과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 자에게 단단히 본때를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가 그 자를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으냐?" "저야 대볼 것도 없이 어렵겠지요. 하지만 어르신이 나서준다면...." "바보같은 소리! 우리의 목적은 소림과 무당같은 명문파를 무너뜨리고 아미파의 깃발을 무림의 정상에 당당히 꽂는 것이야! 그깐 일로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인물을 거꾸러뜨리자는 것이냐? 그 자는 곧 강호에 혈풍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자를 후원해 주기만 하면 된다. 그 자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어." "아무리 능력이 있기로서니 혈혈단신인데 강호에 어떻게 혈풍을 일으킨단 말입니까? 설마 혼자의 몸으로 소림파나 무당파를 괴멸시킬 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니시겠지요?" "그럴 수야 없겠지. 허나, 비무대회에 참가하는 소림사의 사대천황 정도야 식은죽 먹기로 해치울 수가 있을 게야. 사대천왕이 누구이더냐? 그들을 이길 수 있다면 이미 혈풍이 불어닥친 거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느냐?" "어르신, 한데 그 자를 어떻게 아시게 되었습니까?" "난 발호자 광우룡 총표두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 광우룡이 그만큼 표국을 크게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뒤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지. 물론 나는 그에 상당하는 보수를 받아 악파를 운영해 왔구. 맹발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광우룡이 죽기 얼마 전이었어. 맹발은 대뜸 나를 조용한 곳으로 불러내더니 자기가 비무대회에 참가해 소림파를 무찔러 주겠다고 하더군. 나는 처음엔 가소로웠지만 몇 번 만나면서 맹발의 능력이 보통이 아니라 는 것을 알게 되었지. 아무튼 맹발은 이번 비무대회에 참가해서 우리를 대신해 소림파의 사대천왕과 맞서게 될 거다." "우리 문파의 소속인으로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다. 무소속으로 참여하게 될 게야." "그럼 저는요?" "너는 너대로 참가하면 되는 거야." 그때였다. 용골대의 눈빛이 긴장한 빛을 띠었다.


그가 오른손바닥을 쫙 벌렸다. "파형단석(破形斷石)!" 그의 손바닥에서 빛덩어리가 발출되더니 밖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에게로 쏘아져 갔다. 동시에 용골대는 앉은 자리에서 신형을 날렸다. 파츠츠츳! 그가 팔각형 창문을 부수며 통과해 나가자 검은 그림자가 지붕 아래로 뛰어내리는 것이 보였다. 용골대는 뒤쫓아가려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신형을 멈추어섰다. 차차유가 뒤쫓아 나왔다. "웬 놈입니까?" "염탐꾼이겠지. 뒤를 밟힌 모양이구나." "그, 그럴 리가 없는데." "멍청한 놈! 내 그렇게 일렀거늘...."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앞으론 각별히 조심하도록 해." "그럼, 전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차차유는 신형을 날려 낙양객잔으로 돌아갔다. 그때까지도 검은 그림자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② 검은 그림자는 둘이었다. 왕탁과 공공아,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천애산을 지키다가 차차유가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여기까지 미행을 한 것이었다. 원래는 염군조도 있었는데, 염군조는 영영이라는 아가씨를 보 살피느라 뒤쳐졌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군요." 왕탁이 용골대에게 붙들릴 뻔한 걸 두고 공공아가 말했다. "아미파 지파 중 하나인 악파의 장문인이라면 상당한 무공의 소유자이겠지요. 그나저나 이렇게 들켜 버렸으니 앞으론 정보를 캐내기가 어렵겠군요." "맹발이 비무대회에 참가한다고 했으니까 그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어요." "공 소저, 맹발이 비무대회에 참가한다는 게 정말일까요?" "왜요? 직접 듣고서도 의심스러운가요?" "그게 아니라 맹발이 비무대회에 참가한다면 나도 참가하겠소." "왕 공자님이오?" "그렇소. 어차피 놈과 맞설 거라면 비무대회에서 당당히 맞서보고 싶소." "그렇게까지 할 건 없어요. 맹발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비무대회에서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힘을 합쳐 공격을 하거나 맞서 싸울 기회가 있을 거예요." "그렇긴 하지만...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니 일단 나도 무소속의 자격으로 비무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나 합시다." 제 46 장 왕탁은 비무대회에 참가하게 되는데 ① 비무대회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무림맹 주최의 비무대회는 낙하 근처의 널따란 공터에서 열렸다. 대회기간은 열흘. 목적은 늘 그래왔듯이 무(武)를 숭상하는 전통적인 기풍을 진작하고 무림인은 물론이고 일반인의 체력을 증진시키는 데 있었다. 그 목적대로라면 불순한 음모나 계략이 끼여들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각 문파의 명예가 걸려 있는데다 호승심을 앞세워 서로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되고 보니 어떻게 해서든지 이겨야 한다는 의식이 상호간에 팽배해 있었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우선 전국적인 규모의 비무대회이니만큼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심사위원은 구대문파에서 각 일 인씩이 담당한다. 그들이 각각 예선의 심판장이 되고 결선에서는 선임(選任)의 아홉 명 다수결에 의해 결정한다. 총심판본부장은 아홉 명 중에서 누구라도 될 수 있으나 대개의 경우 소림사와 무당파에서 나오게 된다. 이번에는 무당파 소속의 냉천인(冷天忍) 청허진인(淸虛眞人)이 총심판본부장을 맡았다. 냉철하고 이지적인 인물로 조직을 압도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인원은 구대문파에서 사십오 인, 군소문파에서 백여 명, 그리고 무소속의 일반인 참가자가 이백여 명, 해서 도합 삼백오십여 명이나 된다. 인원수가 많아 다소 번잡한 느낌을 주지만 일반인 대부분은 상호대련이 아닌 기본능력 시험해서 탈락하게 돼 있어 금방 실력자들이 솎아진다. 일반인 참가자를 허용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무림인만의 대회가 아니라 온 나라의 백성들이 참가하는 축제의 뜻과 둘째, 간혹 일반인 중에서도 신비막측한 능력을 보유한 자가 있어 그들을 발굴해 낸다는 점이 그것이었다. 예선을 통과하려면 근력, 활쏘기, 창검술, 격파, 장법 등의 시험에서 합격점을 받아야 한다. 특별한 경우에는 시험과목에 없더라도 자기만의 독창적인 능력을 보여도 된다. 가령, 환술이나 요술은 기본적으로 제외되지만, 그것이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사악한 것이 아닐 때는 인정될 수도 있다. 맹발이 끝내 천애산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왕탁은 염군조와 함께 비무대회에 참가했다. 왕탁은 예선을 가볍게 통과했다. 그는 날렵한 경신술을 선보여 준준결선(準準決選)에 올랐다. 왕탁이 속한 조에서 결선에 오른 참가자는 다섯 명, 그 중 한 명이 뽑기를 통해 부전승으로 올라가고, 남은 네 명이 부전승 승자와 싸우기 위해 힘겨운 전초전을 벌여야 했다. 그러니까 왕탁은 세 번을 이겨야 준결(準決)에 오를 수 있게 된다. 준준결부터는 자신의 능력을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싸워 이겨야 하는 실전(實戰)이었다. 규칙은 없었다. 상대가 항복을 하거나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 맨손을 이용해도 되지만 어떤 무기를 사용해도 상관없다. 단, 화약탄이나 암기(暗技) 수법은 불허된다. 왕탁의 첫 상대는 군소파 출신으로 혈의쾌살(血衣快殺)이라는 별호가 붙은 눈빛이 매서운 사내였다. 별호로 보아 필시 살인을 즐기는 자임에 틀림없었다. 무기는 낭아봉(狼牙棒)과 유성추(流星錘)였다. 낭아봉은 애호박처럼 길쭉하게 생긴 봉의 표면에 날카로운 침(針)을 박은 무시무시한 형태로 그것이 살을 파고드는 상상만 해도 가슴이 졸여지는 무기였다. 그에 반해, 유성추는 상대가 비교적 원거리에 있을 때 사용하는 무기로 긴 끈에 날카로운 추가 매달린 형태를 하고 있었다. 혈의쾌살은 왼손에 낭아봉을 잡은 채 오른손으로는 머리 위에서 유성추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유성추로 기선을 제압한 뒤,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낭아봉으로 공격해 들어오려는 자세였다. 기실, 왕탁은 유성추가 어떻게 움직여지는지 낭아봉은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유성추가 혈의쾌살의 커다란 머리 위에서 도는 것을 보았을 때, 실에 돌을 매달아 돌팔매질을 하던 어린시절을 떠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유성추는 바람을 가르며 왕탁의 시야를 어지럽혀 왔다. 바람을 가른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마치 공기의 입자를 찍듯이 유성추는 돌아가고 있었다. 휘릭-! 휘릭-! "얍!"


기합성이 터져 나오는 순간 유성추는 왕탁의 이마 한가운데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왕탁은 허리를 틀어 유성추를 피하며 추와 이어진 줄을 잡다가 불에 데인 듯한 통증을 느꼈다. 줄에는 날카로운 유리가루가 발라져 있었던 것이다. 왕탁의 손바닥에서는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크흐흐흐...." 혈의쾌살은 유성추의 끈에 묻은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더니 낮게 괴소(怪笑)를 흘렸다. "맛이 어떠냐?" "미친 놈! 맛이야 네가 봤지, 내가 봤느냐?" 왕탁은 손바닥이 아려왔으나지지 않고 대꾸했다. "가벼운 그 입이 언제까지 나불대는지 두고 보자. 각오해라!" 혈의쾌살은 성급하게 나왔다. 왕탁을 얕보았을까. 유성추가 성에 차지 않는 듯 썩은 수박을 쪼개는 듯한 자세로 낭아봉을 앞세워 덮쳐왔다. 왕탁이 누구인가? 왕탁이 그나마 변변히 내세울 수 있는 무예는 동벽서원이라는 장풍 하나였다. 그것도 어딘가 문약(文弱)한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그러나 지금의 왕탁은 예전의 왕탁이 아니었다. 아직 내공이 신체적인 움직임과 일치하지 않아 유연하지 못한 약점이 있지만, 그 힘과 파괴력만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② 왕탁은 보기에 따라서는 어리숭한 면이 있다. 강호(江湖)에서 수년을 혹은 수십 년을, 목숨을 담보로 헤쳐 나온 자의 안광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殺氣)가 그에겐 없었다. 그랬으니 혈의쾌살이 왕탁은 얕잡아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초장부터 기를 꺾겠다는 그의 계산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음에 틀림없었다. 혈의쾌살은 낭아봉에서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느낌에 만족했다. 이만한 느낌이면 상대의 머리통은 박살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한데, "어?" 분명히 낭아봉은 왕탁의 머리에 격중되었는데, 왕탁은 꿀밤을 맞은 아이가 투정하는 눈빛으로 어른을 치켜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왕탁 자신조차도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바로 이 순간 그러니까 유성추를 낚아채려 하다가 피를 흘린 순간, 막혔던 구멍이 뚫리듯 몸 속의 피(血)가 돌기 시작했다. 피가 돌면서 경락을 통해 기(氣) 또한 돌기 시작했다. 불사초의 약효가 이제껏 삼 푼의 효과밖에 나타내지 못했다면, 지금 이 순간을 고비로 십푼 즉 일할의 효과를 나타내는 셈이었다. 왕탁은 태양혈(太陽穴)이 불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혈의쾌살의 눈에도 왕탁의 변화가 똑똑히 보였다. 혈의쾌살은 섬뜩해졌다. 태양혈이 불거져 나온 강호인들을 많이 보아왔지만, 싸우던 중에 태양혈이 나오는 놈은 처음 보았던 것이다. 왕탁은 태산이라도 들어올릴 것 같은 활력으로 넘쳐났다. 그가 허리를 굽히자 혈의쾌살은 공격을 하는 줄 알고 삼 장이나 뒤로 물러났다. 혈의쾌살이 찌그러진 낭아봉을 매만지며 고소(苦笑)를 금치 못하고 있을 때, 왕탁은 땅에 박힌 장돌 하나를 집어들었다. 돌은 결이 없이 단단했다.


왕탁은 그것을 피가 났던 손바닥 안으로 말아쥐었다. 그러자 피 묻은 돌가루가 부스스 흘러내렸다. "야하!" 구경꾼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저런 힘은 처음 본다!" "돌머리에 태산같은 힘이다!" "승부는 이미 난 것이나 다름없다!" 환호하는 구경꾼들이 무심코 내던진 말이었지만 혈의쾌살의 등에서는 비오듯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난 피를 흘리고 싶지 않네." 왕탁은 상대의 눈빛에서 약세(弱勢)를 본 후 조용히 말했다. "큿큿! 날더러 항복을 하라고?" "기회란 자주 오는 법이 아니지." "이번에야말로 네놈의 골통을 박살내 주마!" 혈의쾌살은 선불 맞은 멧돼지가 저돌적으로 달려들 듯 돌진해 왔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그는 도중에서 우뚝 멈춰섰다. 아니, 스스로 멈춰선 것이 아니라 엄청난 충격을 받아 일순 멈춰섰다가 고목이 쓰러지듯 천천히 쓰러졌다.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군중들의 시선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던 혈의쾌살에 쏠려서 왕탁이 돌 부스러기 하나를 엄지와 중지로 퉁겨내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혈의쾌살의 이마 한가운데를 움푹 파놓았다. "홍승(紅勝)!" 왕탁이 이겼다는 깃발이 올라갔다. "와아~!" 다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왕탁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천막 아래로 돌아왔다. 염군조는 이미 경기를 끝내고 돌아와 있었다. 그는 쉽게 상대를 제압했는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왕탁은 상처부터 치료했다. "형님, 한데 이거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곤란하게 되다니?" "방금 공 소저가 다녀갔는데 출전자 명단에 맹발이 보이지 않는답니다." "뭐야? 그럼 맹발이 출전하지 않았단 말이야?" "그런가 봅니다." 낭패였다. 왕탁과 염군조가 출전하게 된 것은 오직 하나, 맹발과의 결투를 염두해 두었기 때문이다. 왕탁 혼자만 나가겠다고 고집하는 걸 염군조가 부득부득 우겨 참여한 이유는 맹발과 만날 수 있는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이런... 어쩐다?" 더 이상 비무를 하는 것은 무의미해졌다. 그때였다. 왕탁과 같은 조의 시합이 금방 끝났는지 진행요원이 다가와서 다음 경기를 위해 대기하라고 이르고 돌아갔다. "형님, 기권하십시오. 맹발이 참가하지 않았다면 싸울 이유가 없질 않습니까?"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그럼 뭘 망설이십니까?" 왕탁이 선뜻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데 예의 진행요원이 다시 다가와 출전을 요구했다. "일단 이번 대련(對鍊)을 끝내 놓고 생각해 보자." 왕탁의 다음 상대는 종남삼검(終南三劍)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비룡(飛龍) 하평효였다. 그는 종남파의 절기(絶技)인 천하삼십육검(天河三十六劍)에 능했다. 왕탁은 초반부터 수세에 몰렸다. 하평효는 초절정고수는 아니었지만 경험에 있어 왕탁을 능가했다. 한 마디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왕탁은 실전 경험이 전무하다고 할 수 있었다. 평생을 통해 제대로 싸워본 것이 열 번도 채 되지 않았다. 그것마저 동네 건달들을 상대로 주먹을 휘둘러보는 정도였지 무림인을 상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왕탁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의지에 불타고 있었다. 맹발이 출전했든 안 했든 이겨놓고 보아야 그와 맞닥뜨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맹발이 참가하지 않았다는 정보가 그를 맥빠지게 하고 있었다. 왕탁이 초반부터 몰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는 몸은 움직이면서도 머리 속은 완전히 겨루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하평효는 천하도도(天河濤濤), 천하성산(天河星散), 천하도사(天河倒瀉)의 삼 초를 펼쳐 왕탁의 소맷부리를 잘라놓았다. 요행히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하마터면 외팔이가 될 뻔했다. 섬뜩한 느낌이 가슴에 와닿자 왕탁은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대는 만만치가 않았다. 왕탁이 공세로 나가자 재빠른 발놀림으로 무력화시킨 다음 자신의 공격권 내에 왕탁을 끌어들이는 능란함을 보였다. 왕탁은 모처럼 등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고 맞섰는데, 검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몇 수 겨뤄보지도 못하고 그의 검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구경꾼들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왕탁은 쓸모없게 된 검을 내던지며 짓쳐들어갔다. 상대는 검막(劍幕)을 뿌리며 먼지바람을 일으켰다. "차앗!" "파파팟" "야합!" ③ 싸움은 호각지세(互角之勢)였다. 상대가 일보 전진하면 이쪽이 일보 후퇴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가운데 왕탁의 실력은 눈에 띄게 늘어가고 있었다. 우선 달라진 점은 혈의쾌살과 싸우다 몸 속에서 기가 통한 후 왕탁의 몸이 유연해졌다는 것이었다. 몸이 유연하다보니 바로 코앞으로 검날이 지나가는데도 발의 움직임 없이 허리만으로 피해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반격! 하나, 무엇보다 왕탁에게서 돋보이는 점은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함이었다. 검이 바로 귀밑을 스쳐가도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 태연함이 상대의 기를 질리게 했다. 그것이 결국 왕탁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하던 하평효가 잠시지간 지친 기색을 보였을 때였다. 왕탁이 발출한 동벽서원이 그대로 격중하고 말았다. 다행히 격중된 곳은 대퇴부(大腿部)라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왕탁이 한 번 더 장풍을 날리려 했을 때 하평효는 항복을 하고 말았다. 중도기권승!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하평효는 겉보기와는 달리 대퇴부만 다친 것이 아니었다. 콩팥과 아랫창자 등 하복부가 심하게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내친 김에 삼연승(連勝)! 왕탁은 치친 몸을 이끌고 출전선수가 대기하는 천막 밑으로 돌아왔다. 염군조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염군조는 회선장법(廻旋掌法)에 능한 개방파의 걸걸(乞杰)이라는 자와 일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상반신을 벗어부친 염군조는 힘으로 대항하고 있었지만, 상대의 손바닥에서 나온 강기를 맞고는 여기저기 멍이 들어 있었다. 왕탁은 구경꾼들 틈에 끼여들어 열심히 응원을 했다. 왕탁은 염군조를 믿었다. 그의 가공할 힘이 쉽게 꺾이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걸걸이 선풍발수(旋風拔樹)와 천풍경도(天風驚濤)의 초식을 펼치고 있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툭 쳐왔다. 돌아보자 공공아였다. "공 소저!" "고생 많으셨어요. 어디 다친 데는 없으세요?" "괜찮소. 한데 맹발이 비무대회에 불참했다는 것이 사실이오?" "사실이에요." 그들은 구경꾼들에게서 물러나왔다. "한데...." 공공아가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 "뭐가 말이오?" "맹발이 비무대회에 참가하지 않은 건 분명한데 아미파 악파 소속의 곡척지라는 자가 수상해요. 차차유가 천애산 정상의 은막속에서 영영과 시체 하나를 들고 나온 후 곧바로 시체를 파묻고 떠났었잖아요. 우리가 듣기로 그 시체가 바로 곡척지였을 것으로 추정됐는데, 오늘 비무대회에 곡척지가 버젓이 나타났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저도 처음엔 영문을 몰랐다가 맹발이 광삭을 죽일 때 광우룡으로 변신했다는 얘기를 떠올렸어요." "그럼 맹발이 곡척지의 얼굴 모습을 하고 비무대회에 참가했단 말이오?" "그런 것 같아요." 그때, 환호성이 들려 왕탁은 대화를 중단하고 비무장을 바라보았다. 염군조와 걸걸은 껴안듯이 맞붙어 있었다. 상호간에 마지막 수를 펼친 뒤 접신(接身)이 된 상태였다. 그 순간, 누가 이겼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먼저, 염군조의 무릎이 꺾여졌다. 왕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걸걸이 주르르 흘러내리더니 얼굴을 땅바닥에 처박았다. 승리를 알리는 깃발이 올려지자마자 왕탁과 공공아가 쫓아나갔다. 염군조는 그때까지도 무릎을 꿇은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친 거야?" "아, 아닙니다, 형님!" "그럼 뭐야? 안색이 안 좋은데." "그게 아니라... 복부를 몇 대 얻어맞았더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요."


그러더니 염군조는 측간(厠間)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마침 그때 곡척지가 싸운다는 소식이 들려와 왕탁과 공공아는 그리로 가보았다. 경기는 제사구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는데, 비무가 시작되자마자 곡척지는 단 한수로 상대를 제압해 버렸다. 상대는 소림사의 뇌벽천왕 혁달이었는데, 혁달은 소림 칠십이절예 중 쌍쇄공(雙鎖功)과 와호공(臥虎功)이 주특기인 자로, 사대천왕이라면 이제껏 한 번도 패배를 당한 적이 없었다. 그런 자가 단 한수에 나가떨어졌으니 놀랄 만도 했다. 구경꾼도 구경꾼이었지만 각 문파의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곡척지를 주목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곡척지가 어떤 무공을 사용하여 혁달을 일격필살(一擊必殺)시켰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곡척지의 양 팔이 호선(弧線)을 그으며 한 번 움직였다는 것뿐.... 그 미미한 움직임에 비해 혁달의 상처는 너무나 컸다. 시체를 조사한 결과 시커멓게 타들어간 가슴이 시뻘건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 밤, 왕탁은 염군조와 함께 천애산에 올라 곡척지가 묻힌 곳을 팠다. 공공아의 짐작대로 그곳에서 부패하기 시작한 진짜 곡척지를 만날 수가 있었다. "그럼, 역시...." 곡척지는 바로 맹발이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미파의 용골대와 차차유 그리고 왕탁 일행뿐이었다. 그 외에는 누구도 그가 아미파의 곡척지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준준결승전을 마친 시점에서 곡척지는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아미파 하면 떠오르는 절기인 태청검범(太淸劍法)이나 소청검법(少淸劍法)을 곡척지가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적하신장(赤霞神掌)이나 나운장(拏雲掌) 같은 수법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출현은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곡척지의 무공은 신비막측하기 짝이 없었다. 달랑 맨손으로 나온 그가 세 명의 강호인을 깃털을 훅 불듯 단숨에 제압해 버렸던 것이다. 왕탁 일행은 그가 치우검을 차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미파를 도와 뭘 어쩌려는 건지도 두고 볼 일이지만, 천신만고 끝에 손에 넣은 치우검을 사용하지 않는 까닭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비상이 걸린 것은 소림파였다. 곡척지가 혁달을 단 한 수만에 죽여 버리는 것을 본 소림사 관계자들은 자신들 정보망의 허술함을 자탄(自歎)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의전에서조차 곡척지를 미미하게 평가해 왔던 터였다. 그러다가 소림파는 용호표국으로부터 곡척지가 바로 맹발이라는 것을 전해듣고는 다시 한 번 놀랐다. "그 자가 그럼...." 제 47 장 맹발은 가공할 능력을 발휘하고 ① 한편, 왕탁 일행은 맹발의 출현을 두고 설왕설래(說往說來)가 많았다. 맹발이 나타난 이상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덮쳐드는 게 상책이라는 게 익다의 주장이었다. "비무대회에서 우승하는 게 목표가 아닌데 내일 또 나갈 게 무에 있소?" 곡척지가 맹발이라는 것이 드러난 이상 망설일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생각처럼 만만치가 않았다. 우선 맹발이 대회기간 중 아미파 소속원들과 같이 행동을 하고 있는데다 그들은 다시 본부에서 파견된 무사들이 철통같이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모두를 이겨낼 힘이 왕탁 일행에게는 없었다.


곡척지가 맹발이라는 것을 알리며 소림파에게 넌지시 의중을 전달했으나, 소림파는 대회기간 중에 아미파를 공격하는 일을 할 수는 없노라고 잘라 말했다. 그것이 바로 아미파의 노림수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곡척지 아니 맹발이 우승후보로 널리 알려진 마당에서 아미파를 공격하게 된다면 소림파가 비무대회에서 패배할 것을 우려해 엉뚱한 짓을 저질렀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된다. 물론 소림파도 맹발이라는 존재와 치우검에 대해 왕탁 일행 못지않게 우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어디까지나 명예를 존중하는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해결을 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조미미를 납치당했거나 아버지가 보관하던 치우검을 빼앗긴 - 그리고 그것이 섭간이 죽게 된 이유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추정되었다 - 왕탁과 공공아와는 사뭇 다른 점이 있었다. 소림파가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라면 왕탁과 공공아는 피부에 와닿는 본능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소림파가 난색을 표명하자 왕탁 일행도 일단은 추이(推移)를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자 경기에 참가하는 문제가 다시 대두되었는데, 맹발과 맞닥뜨리기 위해 계속 싸울 것이냐를 두고 팽팽하게 의견이 맞섰다. 익다와 공공아가 싸울 필요가 없다고 한 반면, 정작 경기에 참가한 왕탁과 염군조는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준준결승전이 끝난 후, 휴식은 하루가 주어졌다. 그들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용호표국으로 반가운 사람이 찾아왔다. 반삼계였다. 반삼계는 지쳐 보였고 끝내 무홍 소저를 찾지 못해 크게 낙담한 모습이었다. 이날 저녁 술좌석이 있고 나서 왕탁 일행은 다시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계속 출전을 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얘기를 전해들은 반삼계도 한쪽 편의 손을 들어주지 못할 만큼 의견대립은 평행선을 긋고 있었다. 그러나 맹발이 우승할 경우 더더욱 그를 물리치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왕탁과 염군조는 출전을 강행했다. 염군조는 목각인형이 왕탁을 보호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다음 날, 공교롭게도 비가 내렸다. 억수같은 장대비가 낙양 전역에 내려꽂히고 있었다. 경기는 취소되었다. 비가 천애산에 뿌려놓은 맹발의 은막에 영향을 줄지 모른다는 생각에 산행을 했으나 여전히 막은 그들의 입성(入城)을 거부하고 있었다. 비가 감상(感傷)을 휘저어 놓아서일까. 천애산에서 돌아온 왕탁은 무기력감과 향수(鄕愁)에 젖어들었다. 그는 반삼계와 함께 술잔을 주거니받거니 했다. 항주를 도망쳐 여기에 오기까지 모진 우여곡절을 겪었던 터라 깊은 시름이 왕탁의 주량을 늘렸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무홍 소저를 잃은 반삼계도 거푸 술잔을 비웠다. "아직 시육을 갖고 있나?" 왕탁이 문득 말했다. "아, 시육! 시육을 깜박했어. 이렇게 오랜만에 술을 마시는데 시육을 맛보지 않을 수 없지." 반삼계는 금방 군침 도는 요리를 해왔다. 왕탁은 젓가락으로 시육 한 점을 집어삼키면서 말했다. "네놈은 이곳 낙양에 음식점을 차리는 게 무홍 소저를 하루라도 빨리 찾는 지름길일 수 있어. 이렇게 기막힌 맛이라면 금방 떼돈을 벌 테니까 나중에 용인(傭人)을 사서 수소문해 보면 되잖아."


"그래, 이 넓은 세상 구석구석을 혼자 다 찾아볼 수는 없겠지? 하지만 당장 음식점을 차리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내게 재산이라곤 불알 두 쪽밖에 없는걸." "불알 두 쪽이면 큰 재산이지!" "뭐야?" 둘은 웃었다. 하지만 왠지 씁쓸한 웃음이었다. 왕탁이 다시 말했다. "내 공 소저에게 말해볼게." "공 소저에게?" 반삼계가 손사래를 쳤다. "행여 그런 말 입 밖에 내지 말게.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와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염치가 없는 일인데 돈까지 내라니! 게다가 그 돈이 어디 한두 푼이겠는가?" "그게 아니지. 공 소저가 돈을 갖고 있다면 자넨 시육을 갖고 있어. 시육을 담보로 투자를 하게 하면 되는 거야. 버는 돈을 반반씩 나누면 공 소저에게도 불이익이 돌아가진 않을 거구." "그럴까?" 반삼계는 처음에는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태도였지만, 왕탁의 계속되는 말을 듣고 나서 구미가 당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중의 일이었다. 비는 다음날도 오락가락했다. 그러나 대회는 강행되었다. 낙하의 둔치에 마련된 비무장은 비에 젖은 모래와 진흙이 뒤범벅이 되어 질척댔다. ② 준준결승을 통과한 자는 모두 열여섯 명이었다. 이들이 다시 상대를 거꾸러뜨리는 방식으로 경기는 속행되었다. 왕탁은 이조, 염군조는 일조에 속해 있었다. 맹발도 일조였다. 염군조가 두 번을 이기면 세번째 맹발과 맞닥뜨리게 돼 있었다. 경기는 이전처럼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전에 일조가 오후에 이조가 치러지게 돼 있었다. 염군조의 첫 상대는 무소속으로 관외쌍살(關外雙煞)의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악독한 혈마대(血摩臺)란 자였다. 그는 예선에서 상대의 목을 부러뜨리고 쿵쿵 뛰는 심장을 꺼내보이는 잔인함을 보였다. 주특기는 호조수와 금강지를 위주로 하는 권법이었다. 파내고 찌르는 동작을 위해서는 근접전을 펼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습게도 염군조의 가슴패기 근육은 너무나 단단해서 그의 호조수와 금강지는 먹혀들지가 않았다. 혈마대는 방심한 채 공격을 하다 두 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물러났다. 예상외로 경기는 간단하게 끝나고 말았다. 다음 상대는 운중마룡(雲中摩龍)이라고 자처하는 창술(槍術)의 달인이었다. 싸움은 호각지세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힘에 부친 운중마룡이 차츰 밀리고 있었다. 체력이 떨어지자 민첩하기 짝이 없던 창도 무딘 솜방망이처럼 느릿느릿 날아올 뿐이었다. 염군조는 결국 창대를 꺾어 놓았다. 그리고 씨름을 하듯 허리를 잡아 들어메치는데, 녀석의 팔꿈치에서 수리검(袖裏劍)이 튀어나와 염군조의 배를 갈랐다. 아릿한 통증과 함께 피가 뚝뚝 떨어졌다. 염군조는 상대를 밀쳐냈다. "죽일 테다!" 광분한 놈은 옷자락 안에 숨겨두었던 수리검을 빼어들더니 당황해하고 있는 염군조의 복부를 쑤셔왔다.


그때였다. 쐐애액--! 한 줄기 금빛이 파공성을 일으키며 날아가 운중마룡이 들고 있던 수리단검을 쳤다. 쨍그랑-! "네 이 놈!" 수리단검이 모래밭에 떨어지자마자 불호령이 떨어졌다. 호통을 친 사람은 심판관이었다. "비겁하게 암수(暗手)를 사용하다니! 저 놈을 잡아 뇌옥에 가두렷다!" 운중마룡 주위로 창을 든 청나라의 병졸(兵卒)들이 몰려들었다. 이번 비무대회는 청나라 관청의 허락하에 개최되었으며 탈없는 대회진행을 위해 병졸들이 내, 외곽 경비를 맡고 있었다. 경기도중 반칙하는 자는 그즉시 투옥되게 돼 있었다. 운중마룡은 눈가에 절호의 기회를 놓친 자의 안타까움이 번져갔다. '놈을 죽일 수 있는 다시 없는 기회였는데....' 운중마룡은 들릴 듯 말 듯 그렇게 중얼거리며 오랏줄에 포박을 당했다. 염군조의 반칙승! 그 사이 왕탁도 운좋은 이연승을 거두었다. 첫 상대는 상처를 입어 기권승을 거두었고, 두번째 상대는 동벽서원 한방에 나가떨어졌다. 그것도 전날 비 때문에 상대가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손쉽게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다행히 염군조의 상처는 크지 않았다. 칼날이 배를 가르긴 했지만 상처가 깊지 않아 출전에 무리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 상대가 맹발인 만큼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탁은 이날 밤 격려하기 위해 염군조의 방을 찾아갔다. "상처는 어때?"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염군조는 붕대(繃帶)을 감은 배를 두드려 보였다. "아서! 꿰맨 상처가 뜯어지면 어쩌려구? 그나저나... 내일 경기에 자신은 있는 거야?" "형님, 뭐가 걱정이십니까? 사나이 한 목숨 이럴 때 걸어보는 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염군조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게 스스럼이 없었다. "맹발의 무예는 상상을 초월해. 오늘도 그 자는 단 두 수로 두 명을 해치웠어. 그 자는 공포의 대상이야. 소림파에서조차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얘기야. 뇌벽천왕 혁달이 당금 소림파에서 차지하던 비중이 만만치가 않았던 모양이야. 무예로만 친다면 소림파 전체를 두고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라는 거였어. 그런 자를 일격필살시켰으니...." 왕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 얼굴 좀 펴십시오. 우리가 비무대회에 참가한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맹발 그 놈이랑 맞닥뜨리기 위해서죠. 이제 그 기회가 이렇게 찾아왔는데 주저하시다뇨?" "네 목숨이 걱정돼서 그런다." "형님, 그럼 제가 죽으면 무서워서 맹발이랑 싸우지 않으시렵니까?" "그럴 리가 있나? 당연히 싸워야지." "저도 형님처럼 기꺼이 싸우겠습니다. 그리고 자꾸 패배의식에 젖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놈이 엄청나게 센 것은 사실이지만 약점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약점을 노리면 제게도 충분히 승산(勝算)이 있을 겁니다." "고맙네, 아우. 용기를 줘야 할 내가 도리어 위로를 받는군." "한데, 아까 이상한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뭐가 말인가?"


"운중마룡이라는 자 말입니다. 절 진짜 죽이려고 했었습니다." "그야 이기려면 당연한 노릇 아닌가?" "그게 아니라 놈은 내게 마치 원한이 있는 것처럼 대들었단 말입니다. 수리검으로 내 배를 찌르려다가 잡혔는데, 절 죽이려는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을 원통해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럼, 아우가 예전에 뭔가 원한을 산 게로군." "저도 혹시나 싶어 여러모로 기억을 더듬어 봤는데 도무지 원한을 산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럼, 잊어 버려! 기억에도 없는 일을 들춰낼 필요는 없으니까." ③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넷이었다. 맹발, 왕탁, 염군조 그리고 공교롭게도 소림파의 항마천왕 마종기! 오전에 맹발과 염군조가 먼저 싸우고 왕탁은 오후에 마종기와 싸우게 돼 있었다. 왕탁은 마종기를 만나 정정당당한 대결을 펼칠 것을 약속했다. 낙하의 비무장에는 맹발과 염군조의 대결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아침부터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갖가지 장사들이 몰려들어 둔치 언저리에 임시 시장이 형성될 정도였다. 장난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소란, 술에 취한 사람들, 가족단위로 구경 나온 사람들.... 구경꾼들에게는 비무대회가 풍성한 축제였다. 그러나 염군조는 초조해져 있었다. 상처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침부터 피똥을 쌌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왕탁에게 알리지 않고 출전했다. 그는 일신에 활력이 없고 어깨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설상가상으로 설사(泄瀉)의 기미마저 있어 죽 한 그릇 먹지 못하고 출전을 한 것이었다. '맹발은 나를 맞아 과연 어떤 공격을 펼쳐올까?' 염군조는 상대의 수법에 의식을 집중했다. 공공아에게 듣기로는 두꺼비처럼 몸을 부풀려 상대를 바람으로 날려 보내기도 했다는데, 이번 대회에서 그는 한 번도 그 수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단 한 수만에 맹발이 상대를 즉사시킨 방법은 탄지신공(彈指神功)에 의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그 탄지신공조차 지풍(指風)에 의한 것인지 작은 돌멩이 같은 것을 날려 보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만에 하나 그게 지풍이었다면 얼마나 가공할 노릇인가! 장풍이 아니라 손가락 끝에서 발출되는 강기 단 한 수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니! 일지급살(一指急殺)!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짐작될 뿐 누구도 맹발의 독문절초(獨門絶招)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가을 바람이 소슬소슬 불어오는 가운데 염군조는 모래사장 위에서 맹발과 맞섰다. 맹발은 원래 삼척동자라는 별호처럼 아주 작은 체구였는데, 곡척지로 변한 그의 모습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당당해 보였다. 맹발은 팔뚝까지 내려오는 피풍(被風)을 둘러쓰고 각반을 한 두 다리에 의지해서 꼿꼿이 서 있었다. 한 줄기 선득한 바람이 불어와 유난히 윤기가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염군조는 두 장의 거리를 두고 마주보며 서 있었는데도, 그의 날카로운 두 눈에서 폭사되어 나오는 살기(殺氣)를 느낄 수가 있었다. "네놈을 죽이기 전에 다른 사람을 대신해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네가 잡아간 조미미 소저는 아직 살아 있느냐?" "......." 맹발은 대꾸하지 않았다.


"설마 이미 죽인 건 아니겠지?" "......." "필시 두려움 때문에 벙어리가 된 게로구나! 용호표국의 섭간 총표두가 죽게 된 까닭도 네놈이 훔쳐간 치우검과 무관하지 않을 듯 싶은데?" "......." 맹발은 한 마디도 뻥긋하지 않았다. 막힌 벽에 대고 얘기하는 것 같자 염군조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때, 어디선가 낙엽 하나가 날아와 살랑대며 맹발의 피풍 위에 내려앉았다. 정적(靜寂)! 순간, 긴장감이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 구경꾼들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입 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야하-!" 선공(先攻)은 염군조의 몫이었다. 그는 시위에서 화살이 쏘아져 나가듯 칼(刀)을 앞세워 짓쳐들어갔다. 그의 기세는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것 같았다. 그러나 맹발은 움직임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수천년 동안 한자리를 지켜온 돌부처처럼 늠연(凜然)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염군조의 칼은 맹발을 베고 지나갔다. 그랬다. 분명히 맹발의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다. 한데.... 아아--! 보는이 모두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수수량량(水水量量)! 누군가의 입에서 그런 말이 새어 나왔지만 그것은 들어본 적도 없는 초식이었다. 맹발의 몸은 물처럼 염군조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움직임이 물이 흐르릇 유연하다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물 자체였다. 염군조가 찌른 것은 물이었고, 그가 칼 뒤를 따라 통과한 것도 물이었다. 젖지 않는 물! 건수(乾水)! 염군조는 사력을 다해 칼을 휘둘렀지만 '칼로 물베기'였다. "푸하하하하핫...." 맹발은 고개를 젖혀 경멸의 웃음을 터뜨렸다. "네놈의 실력이 고작 그것이냐?" "흥, 그게 아니다. 네놈의 헛장단에 응해 준 것뿐이다." 염군조는 크게 당황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지지 않고 말했다. "자, 이제 내 차례다! 한 번 받아보거라!" 맹발의 웃음이 그치자 염군조는 오금이 저려왔다. 극도의 긴장감으로 인해 염군조의 겨드랑이는 촉촉이 젖어들었다. "아우, 마른 모래를 한 움큼 집어 던져봐!" 구경꾼 사이에서 왕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염군조는 재빨리 그대로 시행했다. 파시싯! 이상한 소리가 나며 물빛(水色)이던 맹발의 형체가 급속히 곡척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탄성(歎聲)! 경악성(驚愕聲)! 염군조는 그것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발로 차서 모래를 흩뿌렸다. 하지만 이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맹발에게는 통하지가 않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러는 동안 맹발이 공격시기를 놓쳤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맹발은 분기충천(忿氣沖天)하여 삼장을 솟구쳐오르더니 염군조의 머리 위로 덮쳐갔다. 카가가가각! 염군조는 도막(刀幕)을 뿌려 방어막을 쳤다. 슈릉! 슈르릉! 파팟! 일진일퇴가 거듭되었다. 하지만 말이 일진일퇴지 누가 보아도 맹발이 봐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염군조는 수비에만 급급했을 뿐 변변한 공격 한 번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염군조는 수세에 몰렸다. 왕탁이 열심히 이래라 저래라 소리치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한수에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이 갸륵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맹발의 표정이 냉막해졌다. 그것은 그가 마지막 공격을 준비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그의 손이 염군조의 인후를 공격하기 위해 게의 집게발 모양의 월아우수(月牙又手)로 변형되었을 때, 위기감을 느낀 것은 염군조보다도 밖에서 지켜보던 왕탁이었다. "각오해라!" 촤르르--! 맹발의 일신은 빛줄기처럼 쏘아져 갔다. 그 순간, 염군조는 같이 신형을 날려야 하는데도 지쳐서인지 가만히 서서 맹발의 공격을 받아내려 하고 있었다. "안돼!" 맹발의 월아우수가 염군조의 목을 찍기 일보직전 왕탁이 뛰어들어 맹발의 손목을 내려쳤다. 맹발은 왕탁을 뿌리치며 뒤로 이 장을 물러났다. "중지(中止)!" 심판관이 백색 깃발을 흔들었다. 그 즉시 경비를 보던 병졸들이 쫓아와 왕탁을 포박했다. 염군조는 실격패를 당하고 왕탁은 곧바로 투옥되었다. 동시에 마종기와 싸울 자격도 박탈당했다. 왕탁이 투옥된 뇌옥은 세 평이 될까말까한 크기였다. 그 안에는 한 사내가 족쇄(足鎖)가 채워진 채 구석 그늘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왕탁의 발목에도 곧 족쇄가 채워졌다. 왕탁은 허탈한 심정으로 벽에 기대어 앉았다. 사내는 무릎을 곧추세우고 턱을 괸 채 빛나는 눈으로 왕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탁은 답답한 나머지 한숨을 내쉬다가 사내의 눈길이 의식되어 말했다. "이봐요, 뭘 그리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요?" "당신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건 댁이 무슨 상관이오?" "말하는 싸가지 좀 보게.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뭘 그리 까탈스럽게 구는 거지?" "지금 그런 질문에 일일이 대답할 기분이 아니라서 그렇소." "건방진 놈!" 사내는 시비조였다. 냉큼 어둠을 박차고 일어났다. 육척이나 되는 건장한 체구였다.


그늘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왕탁은 외면한 채 눈을 감았다. 사내가 족쇄를 짤그랑거리며 다가왔다. 왕탁이 눈을 뜨자 사내가 발끝으로 툭툭 차며 말해 왔다. "일어나!" 왕탁이 눈을 치켜뜨고 어이가 없다는 듯 올려다보자 다시 발끝으로 툭툭 찼다. "일어나라니까!" 이쯤 되자 왕탁도 화가 났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왕탁이 일어나는 순간 사내가 느닷없이 이마로 내리받았다. "어이쿠!" 왕탁은 얼굴을 감싸쥐며 나뒹굴었다. 사내는 고래고래 소리를 치다가 옥졸(獄卒)이 달려오자 왕탁 위로 덮쳐들었다. 왕탁과 사내는 부둥켜안고 나뒹굴었다. 옥졸이 놀라 뇌옥문을 열었다. 옥졸이 들어오는 순간, 사내는 왕탁을 떨쳐내더니 옥졸에게로 달려들었다. 창졸간에 옥졸은 차고 있던 패검을 사내에게 빼앗겨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사형, 정말 미안하오. 이러지 않으면 여기서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았소." 왕탁은 그제서야 사내의 무례한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난 비무대회에 참가했던 운중마룡이라고 하오." '아니, 운중마룡이라면 염군조를 죽이려 했던 자가 아닌가.' 번득 그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지만 왕탁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서요?" "당신에게 유감이 있어 코피 나게 한 게 아니란 말이오." 그 말에 왕탁은 손바닥으로 코를 문질러 보았다. 뜨뜻한 피가 묻어났다. "제기랄!" "화내지 말아요!" "지금 내가 화가 안 나게 생겼소?" "같이 탈출합시다." "내가 뭣하러 탈출을 해? 내일쯤이면 두 발로 당당히 걸어나갈 텐데." "비무를 방해한 자를 하루밖에 여기 잡아두지 않을 것 같소?" "좀 길어진다고 해도 뭘 어쩌겠소? 잘못을 한 것은 한 거니까 죄과를 달게 받으면 될 것을...." "난 그럴 여유가 없소. 염군조란 놈을 내 손으로 반드시 잡아 죽여야 하는데 비무를 하다가 오늘중으로 죽을지 모른단 말이오." "잠깐, 대체 염군조란 자가 당신에게 무슨 해코지를 했길래 그리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거요?" "얘기를 하자면 길어요. 어떻하겠소? 갈 거요 안 갈 거요?" 그러자 그 순간이었다. 옥줄은 운중마룡이 대화를 나누느라 방심한 틈을 타 각반속에 숨겨두었던 단검을 빼들었다. 그것을 먼저 본 것은 왕탁이었다. "위험해요!" 왕탁이 소리쳤다. 다음 순간, 둘은 엉겨들며 서로 상대를 제압하려고 애썼다. 얼떨결이라 왕탁은 누구 편도 들어 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엉거주춤 보고 있는데, 일순 옥졸의 몸동작이 굳어지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런...." 운중마룡은 옥졸의 복부에 박힌 단검에서 손을 뗐다. 옥졸은 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서너 발짝 걷다가 무릎이 꺾이더니 풀썩 쓰러졌다. 운중마룡은 신속히 옥졸의 허리춤에서 족갑(足匣)의 열쇠를 찾아 양 발을 자유롭게 했다. 그리고나서는 그 열쇠를 왕탁에게 던져주었다. 왕탁은 열쇠를 받았지만 선뜻 마음의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여기서 개죽음을 당할 거요?" 그것은 옥졸이 죽었으니 이제 빼도 박도 못할 거라는 의미였다. 왕탁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운중마룡이 혼자 도망간다면 옥졸을 죽인 누명을 뒤집어쓸지도 모른다. 왕탁은 결심이 선듯 족쇄를 풀고는 운중마룡을 따라나섰다. 왕탁이 잡혀 있던 곳은 낙하(洛河) 천변(川邊) 비무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형조관아였는데, 고함과 탈출을 알리는 피리소리를 뒤로 하며 운중마룡을 쫓아갔다. 왕탁은 용호표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내일이면, 아니 오늘 밤에라도 포졸들이 그곳으로 들이닥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운중마룡이 안내한 곳은 깊은 산중의 초라한 모옥(茅屋)이었다. 왕탁은 모옥 앞 우물가에서 피 묻은 얼굴을 씻었다. "이곳이 어디요?" "천애산이오." "천애산?" "왜 그리 놀라오?" "그럴 일이 있소." 그러나 곧 그곳은 천애산의 후면이라서 맹발을 찾아갔던 측면과는 방향이 달랐다. 모옥이 운중마룡의 거처였던 모양으로 소흥주를 가져왔다. "코는 좀 어때요?" "다행히 주저앉지는 않은 듯하오. 한데 소협께선 염군조라는 자를 왜 죽이려 하는 거요?" 왕탁이 묻자 운중마룡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그 자는 엄밀히 따지자면 내 아버지요." "아버지?" 왕탁은 깜짝 놀랐다. '염군조의 나이가 이제 겨우 삼십대 후반인데 스무 살이 넘어 보이는 아들을 두고 있다니!' "양아버지인 셈이죠." "아, 네... 그래서요?" "부끄러운 얘기이오만 주막을 하던 제 어머니와 일 년쯤 동거를 하시다가 훌쩍 떠나셨소. 정식으로 혼인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머닌 지극정성으로 그 자를 모셨고 백년해로(百年偕老)하리라고 꿋꿋이 믿고 계셨죠. 그런데 어머니가 몸져 누운 어느날 그 자는 간다는 말도 없이 집안에서 사라졌소." "불쑥 나타나 어머니와 동거를 하다가 불쑥 사라졌단 말입니까?" "그렇소. 바람처럼 홀연히 사라졌지요." "염군조라는 자가 잘못했군요. 하지만 떠날 수밖에 없는 급박한 사정이 있었는지도 모르죠." 왕탁은 은연중에 염군조의 편을 들고 있었다.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그렇게 갑자기 떠나야 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때 어머니가 그 자의 자식을 잉태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말을 마치고 나서 술잔을 기울이는 운중마룡의 눈가에 언뜻 눈물이 내비쳤다. 호흡이 거칠어진 그가 말을 이어갔다..


"어머니는 내 이복동생을 낳으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자, 드시지요." 왕탁은 빈잔에 술을 채워주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일 것까지야 없잖소. 사람의 목숨이란 둘도 없는 것인데...." "내 어머니의 목숨도 소중하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다 그 자 때문이오. 그 자가 떠난 후 어머니는 음식도 잘 드시지 못하고 가슴 아파하셨으니까요." "그만큼 어머니가 그 자를 사랑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 자를 죽이려는 것은 온당하지가 못하오. 구천(九泉)에 계신 어머님도 원하시지 않을 거구요." 왕탁은 의외로 사연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을 당한 당사자야 구구절절 가슴에 와닿은 애절함이 있겠지만, 염군조의 행동이 악질적(惡質的)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운중마룡의 눈이 번득였다. "대협께서 내 이복동생의 모습을 봤다면 그런 무책임한 소리를 함부로 내뱉진 못했을 것이오. 산고(産苦)로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이복여동생은 천형(天刑)을 받아 기형아로 태어났죠. 세 살이 되었을 때 그 아이의 머리통은 어른만 해졌고 오른쪽 눈은 흰자위밖에 없었으며 왼다리를 절었소. 동네 주민들은 그 아이를 두려워했소. 결국 역병(疫病)이라도 옮을까봐 우리를 동네에서 쫓아냈죠. 난 그 아이와 함께 산사(山寺)의 조그마한 암자에서 생활했는데, 그곳에서도 두 달을 버티지 못하고 쫓겨났소. 난 그 아이를 등에 업고 구걸을 하고 다녔지만 그 또한 신통치가 않았소. 결국, 우리는 배고픔과 추위에 떨어야 했소. 아무도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지 않았죠. 눈보라가 몹시 치던 어느 날 우리는 느티나무 밑에서 밤을 새웠죠. 다음 날 동이 터왔을 때 나는 그 아이의 체온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한 걸 알게 되었죠. 그때 나는 결심했었소. 그 아이 봉아(縫牙)의 아 버지를 찾아내어 죽이겠다고... 그 후 나는 세상으로 나와 강호를 떠돌게 되었소. 처음엔 무예가 별게 아니었지만 차츰 실력이 늘었죠. 염군조를 찾은 것은 봉아가 죽은 지 육 년만이었소. 그 동안 여러 차례 부질없는 짓을 하지 말자고도 맹세해 봤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소. 아, 이런! 내가 왜 이러지?" 그는 다시 술잔을 비우더니 말했다. "대협을 오늘 처음 뵙는데 오래된 친구들 만난 것처럼 속 얘기를 털어놓다니!" "아니오. 말씀 잘 하셨소. 옛말에도 가슴에 맺힌 한을 품어두면 화병이 도진다고 했소. 계속 해보시오." "그 자를 찾은 것은 바로 이 낙양에서였소. 나는 당장 들이닥쳐 죽일까도 생각했지만, 왜 그런지 망설여졌소. 피눈물도 없는 야속한 사내이지만 그래도 그 자가 봉아의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요. 죽일 때 죽이더라도 정정당당히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 참에 그 자가 비무대회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소." "그래서 비무대회에 참가한 거란 말인가요?" "그렇소." "하지만 당신은 수리검을 옷소매에 감추지 않았소?" "당신이 그걸 어떻게...." "그야 나도 당신이 직접 싸우는 걸 봤으니까." 왕탁은 거짓말을 했다. "그건...." 운중마룡의 얼굴이 벌개졌다. "변명할 거 없어요. 보아하니 당신은 실력에서 뒤지면 암기를 쓰겠다고 결심했던 모양인데, 그런 태도는 온당치가 않소. 비겁한 짓이란 말이오." 그러자 할 말을 잃은 운중마룡은 거푸 술잔을 비워냈다. 급기야 술은 떨어지고 말았다.


급하게 마셔서 그런지 운중마룡은 거적이 깔린 바닥에 쓰러져 코를 드르릉드르릉 골기 시작했다. 왕탁은 그를 들어 침상에 눕혀두고 밖으로 나왔다. 스물스물 박혀 있는 별밤이 아름다웠다. '이제 어쩐다?' 그는 졸지에 살인자가 된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러워졌다. 뇌옥 앞에 칼에 찔린 옥졸이 널브러져 있을 테니 옥졸을 죽이고 탈옥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었다. 영락없이 탈옥수(脫獄囚)가 되고 만 것이었다. 그는 탈옥한 것을 잠시 후회하기도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고 고쳐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가을이 깊어가는 이 밤, 근심이 하나 더 생긴 왕탁의 안색은 밤하늘만큼이나 어두웠다. 제 48 장 왕탁은 쫓기는 신세가 되고 ① 포졸들이 몰려와 샅샅이 수색을 하고 돌아가자 용호표국은 발칵 뒤집혔다. 왕탁이 탈옥을 하다니! 그것도 옥졸을 죽이고 달아나다니! 공공아는 표사들을 죄다 풀어 왕탁이 갈 만한 곳을 찾아봤지만 허사였다. 왕탁은 포졸들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꽁꽁 숨어 버린 듯했다. 늦은 밤, 용호표국의 별당에서는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모임이 있었다. 공공아, 반삼계, 염군조, 익다가 머리를 맞댔지만 일단 왕탁을 찾아 사태의 전말(顚末)에 대해 들어볼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소극적인 의견이 전부였다. 물론 은밀히 왕탁을 찾는다는 데에는 추호의 변화가 있을 수 없었지만, 만에 하나 왕탁이 줄행랑을 쳤다면 속수무책이라는 우려도 생겨났다. 그러나 이들은 왕탁을 믿었다.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들에게는 연락을 해오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까지 왕탁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자 그들은 낙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항마천왕 마종기가 맹발과 싸우는 것을 보기 위해 관도(官道)로 나섰을 때, 이 장 간격으로 깔려 있는 포졸들을 발견하고는 왕탁이 올 수 없었던 이유에 수긍이 갔다. 밤새 포졸들이 용호표국을 감시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낙하 천변의 비무장에는 어제까지와는 달리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었다. 비무장 주위에도 줄을 쳐 구경꾼들이 어느 한도 이상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경기가 방해되는 불상사는 한 번으로 족하다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우승자를 가려내는 날이어서 그런지 시합 전에 여러 가지 의례절차가 번잡했다. 바라춤을 추는 것 같은 불교행사와 각 유명문파의 절정무공의 시전, 민간인이 참여한 놀이 같은 것이 다양하게 펼쳐졌다. 그런 것은 예년 대회에는 없던 것으로 청나라의 지시에 의해 민심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후문이다. 그것이 끝나자 벌써 점심 때가 되어 구경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공공아 일행은 나무그늘 밑에서 쉬다가 손님들이 좀 뜸해지자 소면을 파는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소면 네 그릇요!" 반삼계가 주문했다. 포장마차안은 구수한 국물 냄새가 났다. 다른 사람들이 소면이 나오기까지 별말 없이 앉아 있는데 반해 반삼계는 역시 요리사다운 태도로 주인이 냄비물을 끓이고 반죽한 소면을 도마 위에서 써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주인은 검은 수염이 덥수룩하고 눈썹이 짙었는데, 풍성한 수염으로 인해 나이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칼질을 하는 솜씨는 형편없는데다 손도 늘 물에 담궈야 하는 요리사의 손 같지가 않았다. 반삼계의 의혹의 눈길에 맞서 주인이 눈을 찡긋 해왔다. 마침 그때 포장마차 안에는 공공아 일행밖에 없자 주인은,


"나야!"하고 말했다. "아니, 너...." 반삼계가 가장 먼저 알아보았다. "형님이십니까?" 염군조가 놀라 말했다. "쉿! 조용! 포졸들이 와!" 포졸 셋이 우르르 몰려들어와 소면을 먹고 가는 동안 그들은 한 마디의 대화도 나눌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건성으로 젖가락질을 하며 어서 포졸들이 나가주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포졸들은 바쁜 일이 있었는지 소면이 나오자마자 후루룩 먹어치우고는 포장마차를 나섰다. "왕 공자님, 몸은 괜찮으세요?" 그제서야 공공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난 괜찮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어떡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소. 운중마룡이라는 자와 같은 뇌옥에 들어 있었는데...." 왕탁은 사정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럼 왕 공자님은 아무 잘못도 없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만 누가 그럴 믿어주겠소? 칼 맞은 옥졸은 어찌 되었소?" "죽었어요." "저런...." "형님, 운중마룡이라는 자는요?" 염군조가 물었다. "천애산 깊은 계곡 모옥에 있다." "그 자식 나를 죽이려 했던 놈이에요. 아직도 거기 있습니까?" "거기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낙양을 떠나지는 않았을 거다." "멱살을 잡아 제 앞으로 데려오지 않구요? 대체 왜 나를 죽이려 했는지...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하고... 참, 익형은?" "배탈이 났다고 표국에서 쉬고 있어요." 공공아가 대꾸했다. "그래, 이제 어쩔 셈이냐?" 반삼계가 말했다. "당분간은 아까 말한 모옥에 숨어지내야겠어." "조 소저와 치우검을 찾는 일은 어떡하구요?" 공공아가 조바심을 냈다. "오늘 항마천왕 마종기와 맹발의 싸움이 어떻게 끝나는가를 보고 결정합시다. 맹발이 이기게 되면 맹발이 비무대회에 참가한 이유가 보다 확실히 드러날 것이오. 질마귀 용골대는 용골대대로 움직일 것이구요. 그 경우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보다 구체적으로 생겨날 것이오. 어제 오늘 소림파의 동향은 어떻소?" "충격 그 자체인가 봐요. 맹발의 무공의 모체(母體)가 무엇이지 알아내 급소를 파악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여의치 않자 몹시 당황하고 있나 봐요. 이래저래 항마천왕이 맹발을 이기지 못할 거라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구요." "자, 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소. 소면들이나 많이 드시고 힘들 내요." 왕탁은 염군조를 가까이 오게 하더니 귓속말로 모옥의 위치를 알려준 후 말했다. "긴급한 일이 생기면 군조 편으로 연락하겠소." 제 49 장 소림파는 총력전을 기울이고


① 혁달이 졌다는 소식에 낙양 인근에서 머물던 소림파의 나한전주(羅漢殿主)와 자운당(紫雲堂) 주지가 마종기를 독려하기 위해 직접 찾아왔다. 법호가 각천(覺天)인 나한전주와 법호가 공철(空哲)인 자운당 주지! 당금 무림의 정신적인 스승이자 좌장(座長)격인 그들이 중인(衆人)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 자체가 화젯거리였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단 하나! 마종기를 격려해 반드시 맹발을 쓰러뜨려 보겠다는 일념에서였다. 그만큼 소림파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자파 소속의 무림인이 비무대회에서 우승을 한 번쯤 놓치는 것이 무엇 그리 대수랴만은, 그 결과가 불러일으킬 무림세계의 일대 지각변동과 청나라의 영향력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 소림파의 좌장들이었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켰지만 민심은 아직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백성들을 위한 주요시책을 펴는 것 못지않게 잠재적인 적(敵)으로 볼 수 있는 강호인(江湖人)들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하겠다는 고도의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있지만 청나라의 위정자들은 기존 무림 구도의 중심이랄 수 있는 소림파가 이번 비무대회에서 은근히 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만 강호인들을 분열시켜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워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소림파가 당황한 것은 당금 무림의 절정고수(絶頂高手)와 후기지수(後起之手)가 아닌 전혀 엉뚱한 인물이 혁달을 무너뜨렸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가공할 한 수에! 언제나 혜성같이 나타나는 신진고수가 있는 법이지만, 문파(門派)와 스승조차 불분명한, 그야말로 난데없는 자가 혁달을 물리친 것은 너무 뜻밖이었다. 더구나 맹발은 치우검을 손에 넣고 천애산에 은거(隱居)한 자였다. 치우검! 그 존재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것은 혈풍을 예고하는 뚜렷한 증거였다. 소림의 고수들이 부산을 떤 것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였다. 소림파 고수들은 한눈에 곡척지로 변한 맹발에게서 사마(邪魔)의 음습한 기운을 감지할 수가 있었다. 맹발은 대체 누구인가? 어디서 왔으며 아미파 소속으로 비무대회에 출전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했다. 치우검을 중심으로 사악한 기운이 일어나 뭉치게 된다는 것! 그것은 사도(邪道)가 정도(正道)를 제압할 조짐이었으며 저간 백여 년 동안 누려온 안정과 질서가 파괴되는 것이었다. 소림파는 대책 수립에 분주했다. 우선 치우검의 존재가 확실히 드러난 만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모든 무림인이 단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처럼 여의치가 않았다. 아직은 시간이 촉박해 사태의 심각성을 다른 문파에게 알려 동의를 끌어내는 것이 수월치 않은데다 비무대회 기간 중 - 가령, 무당파만 하더라도 자파 소속의 선수가 소림파 소속의 선수에게 패했다 - 의 앙금이 남아 있어 쉽지가 않은 탓이었다. 괜시리 소림파가 아미파를 모함한다는 인상을 줄 여지도 있었다. 단결이 여의치가 않자 일단 사대천왕의 하나인 마종기에게 희망을 걸어보기로 한 것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기 반 시진 전. 구름이 날아가는 듯한 눈썹에 백발이 성성한 각천과 공철이 마종기를 가운데 앉혀두고 조용한 방 안에


모였다. 각천은 중대한 의식을 집전하듯 소림사의 신물(信物)인 녹옥불장(錄玉佛杖)을 마종기의 정수리에 갖다대고 알 수 없는 주문 같은 것을 외우더니 말했다. "상의를 벗어라!" 마종기가 상의를 벗자 각천이 다시 말했다. "소주천(小周天)과 대주천(大周天)을 시행하도록 해라." 운기(運氣)는 제하삼촌(臍下三寸)에 위치한 단전(丹田)으로부터 회음(會陰)을 거쳐 척추, 정수리에 이르는 독맥(督脈)과 머리끝의 백회혈(百會穴)로부터 명치, 단전, 회음까지의 임맥(任脈)으로 기운을 통하게 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소주천이다. 그 다음 단계는 대주천으로 기운을 하지까지 보냈다가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마종기는 앉은 자세로 성의껏 운기조식을 끝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공철이 말했다. "사제(師弟)는 정신을 집중해 들으라! 자네 실력으로는 맹발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네가 막강한 호신강기를 몸 주위에 칠 수 있도록 내공의 힘을 끌어올려주려고 한다." "경기 시간이 반 시진밖에 남지 않았는데요?"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은 알지만 다른 수가 없질 않느냐? 사제는 의심을 하지 말고 우리가 하는 말에 따르라." 속가제자(俗家弟子)인 항마천왕 마종기! 그는 불교의 계율을 지키지 않아서일 뿐이지 소림사 원로의 사랑을 그 누구보다도 듬뿍 받고 있었다. 이번 비무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런 애정과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기대에 부합해 마종기는 결승전까지 무난히 올라왔다. 하지만 결승전에서 만난 맹발은 너무나 고강한 상대였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한다고 했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도 있는 법! 내공이 정순해지면 기를 발출하여 몸 주위에 무형의 막을 칠 수가 있다. 맹발로부터 공격을 당했을 때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마종기의 내공력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자, 이걸 씹어먹게." 공철은 소림사의 영약(靈藥)인 대환단(大還丹) 세 알을 내밀었다. 속인(俗人)들이 환중에 있는 병자를 위해 구하지 못해 안달하는 것이 바로 대환단이었다. 시장에 나가 내다팔면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귀한 약이었다. 그것을 입 안에서 잘게 씹어 고인 침과 함께 넘기고 나자 절로 힘이 솟는 듯하였다. "눈을 감고 한 번 더 운기조식을 하게." 내공 구결을 운용해서 한 차례 더 토납공부(吐納功夫)를 하고 나자 몸이 펄펄 끓어오르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숨을 내쉴 때마다 열기가 토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때, 각천이 손을 뻗어 마종기의 오른쪽 옆구리 아래 장문혈(章門穴)을 지그시 눌렀다. 장문혈은 전신(全身)을 마비시키는 열두 개의 혈도 가운데 하나로 짚히면 몸이 시큰시큰하면서 힘이 쭉 빠진다. 동시에 마종기는 팔만사천 모공(毛孔)이 열린 것처럼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각천과 공철은 마종기 옆에서 정좌를 하더니 역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들은 앉아서 기를 모으고 뿌리는 동작을 반복했다. 삼화취정과 오기조원의 경지에 오른 그들은 일지선(一指禪)과 공경기공(空勁氣功)을 통해 마종기의 연공을 도울 뿐 아니라 자신들의 기를 끊임없이 주입시켰다. 다행히 마종기는 선목체질(鮮目體質)이어서 기를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일각이 지나자 세 사람은 땀으로 후줄근히 젖어들었다. 한증탕에라도 들어간 것처럼 온몸은 땀범벅이 되었다.


다시 일각이 지나자 각천과 공철의 몸은 서리가 내린 듯이 하얀 얼음꽃처럼 탈색된 반면, 마종기의 몸덩어리는 숯불처럼 벌겋게 달라올라 있었다. 마종기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호흡과 함께 상체가 자율신경을 잃은 듯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격렬한 경련이 반각 가량 계속되다가 그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각천이 천천히 일어나 그를 일으켜 세운 다음 장문혈을 다시 눌렀다. 이윽고 마종기가 부시시 깨어났다. "좀 어떤가?" 각천이 물었다. "으음... 괜찮습니다." "자, 이것을 마시게." 표주박을 내민다. 그것은 씁쓰레한 맛이 나는 약초즙이었다. 마종기는 녹빛으로 물든 입가를 훔쳤다. 원기가 나는 것 같았다. 몸 근육을 움직이자 우드득우드득 소리가 났다. 좀 있자 곧 출전하라는 연락이 왔다. "자네 주특기가 나한권이라고 했지?" 각천이 말했다. "네, 전주님!" "오늘은 그것을 쓰지 말아라." "하오시면...?" "놈은 인간이 아니다. 그렇게 보면 틀림없다. 항마연환신퇴(降魔連還神腿)를 쓸 줄 아느냐?" "남만큼은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그 발차기와 항마십삼장(降魔十三掌)을 주로 사용하거라." 항마천왕이라는 별호답게 마종기는 항마가 붙은 초식에 능했다. 항마(降魔) 자(字)가 붙은 초식들은 마귀와 붙어도 이길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들이었다. 각천은 맹발에게서 느껴지는 마귀성(魔鬼性)을 깨닫고 충고한 것이었다. "자, 그럼 최선을 다해주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들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흡사 연기가 바람에 빨려 나가듯 눈깜짝할 새였다. 마종기는 진행요원의 안내를 받아 비무장으로 나섰다. 인산인해를 이룬 구경꾼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소림사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고 놈을 한 주먹에 때려눕혀라!" "혈기방장한 열혈남아(熱血男兒)의 기상을 보여주어라!" 그런가 하면, "놈의 약점은 새끼 발가락 티눈에 있어! 그곳을 집중공략해!" "아미타불이라는 불호만 계속 외쳐대면 놈은 무서워서 도망칠 거야! 하나도 걱정할 게 없다구!" 따위의 장난스런 외침도 있었고, 소림사를 비방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타도(打倒) 소림사!" "소림사를 괴멸(壞滅)시키자!" 소림사에 대한 비방(誹謗)은 전에 없던 것으로 민심이 분열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명나라 밑에서 소외받던 계층의 목소리일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소림사를 헐뜯으려는 불순한 자들의 고함일 수도 있지만, 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마종기는 그런 함성에 아랑곳없이 당당히 비무장으로 걸어나갔다. 그는 등에 보검을 차고 있었다.


그의 눈썹은 역팔자 올려 뻗었으며 햇빛을 받은 이마와 정수리는 동경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허름한 마의(麻衣)는 그가 오래도록 염원하던 원수를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 복수혈전(復讐血戰)이라도 벌이는 것처럼 비장해 보였다. 아닌게 아니라, 그의 마음은 비장(悲壯)했다. 혁달이 누구인가? 죽마고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친하게 지내온 소림동문이었다. 비록 혁달이 나이가 두어 살 많아 남들 앞에서는 깍듯이 예의를 지키고는 있었지만 둘만 있을 때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이번 비무대회에 참가하면 그들은 누가 우승할 건지 서로 내기를 했었다. 만약에 결승전에서 만나게 되면 자신이 기꺼이 양보하겠노라고 했던 혁달! 자신처럼 고아로 태어나 일곱 살때 동자승(童子僧)이 되어 한 번도 소림사를 떠나본 적이 없었던 혁달! 마종기는 그 누구보다도 슬펐지만 바로 이 순간을 위해 꾹 참아왔다. ② 비무장에 먼저 모습을 드러낸 곡척지 아니 맹발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마종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를 등진 그는 사양(斜陽)이 비쳐들자 빛이 싫은 듯 둥근테 모자의 차양으로 햇빛을 가리고 있었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마종기는 맹발의 뛰어난 실력을 아는지라 긴장되었다. 운기조식을 통해 몸을 풀었는데도 사지가 금세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심판관이 본부석을 향하라는 지시가 있자 두 사내는 본부석을 향해 돌아섰다. 총심판관은 경과보고를 한 후, 열심히 싸워달라는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둥둥둥--! 하나로 시작된 북은 여러 개의 소리가 더해지더니 태산이 우는 것 같은 큰소리로 변해갔다. 그 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켰다. 먼저 곡척지 즉 맹발에 대한 소개가 있자 환호성이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다. 구경꾼들은 그의 잔인함과 독랄함을 잘 알면서도 일격필살의 살인방식을 즐기는 것 같았다. 마종기를 연호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마종기는 더 이상 그 함성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道 何事不成)! 마종기는 선승(禪僧)이 화두를 곱씹듯 맹발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는 아무도 없는 황량한 벌판에 혼자 서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혼자다! 혼자다....' 그러자 빽빽히 들어찬 구경꾼들이 뒷배경으로 퇴색되어 가더니 차츰 시야에서 사라지는 듯싶었다. 그것은 고도의 정신집중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선정일궤(禪靜一軌)라는 수법으로 정신을 외물(外物)이나 환경에 흔들림 없이 하면 전적으로 자아에 의식을 몰입시킬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의 모공에서 땀방울 하나가 흘러나오는 소리와 움직임까지 포착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잠시지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마종기와 마찬가지로 맹발 또한 움직임이 없었다. 폭풍 전야의 고요라고나 할까.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다. 일순, 마종기는 내공을 돋우어 호신강기를 몸 주위에 펼친 다음 공격해 들어갔다. 처음엔 상대를 탐색하기 위해 검을 빼어들지 않고 연환퇴(連還腿)를 펼쳤다. 연환퇴란 몇 가지 기법을 연결해서 연달아 차는 것으로서 먼저 쌍비각(雙飛脚)을 앞세워 신형을 날렸다.


모래바람이 일었지만 맹발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 꼿꼿이 선 채 아무 초식도 펼치지 않았다. 한데도 마종기는 헛발질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곧 손으로 땅을 짚으면서 천궁퇴(穿穹腿)를 펼쳤다. 옆구리를 노린 것이었는데 발길은 어깨 밖으로 빗나가고 말았다. 땅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재차 소퇴(掃腿)로 상대를 쓰러뜨리려 했으나 그것마저 여의치가 않았다. 연환 삼초식이 먹혀들지 않아 마종기가 검을 빼드는 순간, 맹발이 양 손바닥을 벌리고 가볍게 밀 듯이 쭉 뻗어왔다. 맹발과의 거리는 두 장 반! 강기가 발출되는 느낌은 없었다. 그저 무성(無聲)의 적요(寂寥)가 가슴 안으로 밀려드는 기분이었다. 펑! 소리와 함께 마종기는 십 장이나 뒤로 날아가 군중들 위로 떨어졌다. 그 때문에 구경꾼들 삼십 명 가량이 덩달아 쓰러졌다. 놀라움과 환호성! 호신강기가 아니었다면 즉사했을 정도의 강력한 장풍이었다. 역시 맹발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 다시 한 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마종기는 머리를 흔들며 일어났다. 손에 청량검(淸凉劍)이라는 보검을 들고 있었지만, 왠지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곧 검을 가슴 앞에서 끌어안는 듯한 자세를 취하더니 기합을 넣는다. "항마신검(降魔神劍)!" 쿠릉, 쿠릉, 쿠르릉-! 이상한 굉음(轟音)이 들리더니 마종기의 발 밑에서 돌개바람이 일어 모래먼지를 휘감아올렸다. 모래먼지가 마종기의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뒤덮었다. 돌개바람은 달팽이껍질같은 모양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마종기의 몸 일부가 사라졌다 보였다하기를 반복하다가 나중에는 돌개바람이 도는 것만 보였다. 더욱 놀라운 점은 어미 돌개바람이 새끼를 치듯 그 옆에 똑같이 생긴 돌개바람이 하나 더 나타났다는 것이다. 곧이어 하나 가 더 생겼다. 이제 세 개의 돌개바람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중 어느 곳에 마종기가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돌개바람 하나가 떨어져 나오더니 맹발을 향해 짓쳐들어갔다. 슈웅-! 돌개바람에 파묻히면 천하의 맹발이라 하더라도 맥을 못 출 것 같은 위세였다. 맹발은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으로 맞받아쳤다. 슈와와왕--! 콰쾅! 폭발음이 들리면서 돌개바람이 힘을 잃고 사그라들었다. 동시에 모래가루가 사방으로 뿌려졌다. 두번째 돌개바람도 맹발을 덮치기 전에 맥없이 허물어졌다. 마종기가 숨어 있던 곳은 마지막으로 남은 돌개바람의 속이었다. 맹발은 기회다 싶었는지 지체없이 신형을 날렸다. 쉬릭-! 전광석화같은 움직임이었다. 구수(鉤手)로 찔러가는 악랄한 손! 그 순간 마종기도 돌개바람을 헤치고 나와 신형을 솟구치며 달마삼검(達磨三劍)의 초식을 펼쳤다.


서래범음(西來梵音)! 대라일망(大羅一望)! 일주마천(一柱摩天)! 허공에서 검화(劍花)가 일었다. 가공할 일은 맹발이 검이라고는 지니고 있지 않았는데도 검과 검이 부딪쳐 검화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온몸이 흉기란 말인가? 마종기가 열푼의 공력을 쏟는 것이라면 맹발은 서너푼의 공력으로 싸우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의미에서 싸움의 결말은 너무나도 뻔한 것이었다. 하지만 맹발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극적인 승리를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극적인 승리를 통해 관중들의 흥분을 불러일으키려는 계산이 서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가 단순히 이기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관중들의 마음에 깊이 각인시키고 싶어 한다는 증거였다. 물론 그 누구도 그런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는 못하였다. 마종기는 혼신의 힘을 다했다. 여러 번 맹발의 장풍과 퇴법(腿法)에 격중당했지만 고통을 참으며 잘도 견뎌냈다. 장풍에 나가떨어졌다가 비틀대며 일어나는 마종기에게 맹발이말했다. "내 너를 살려줄 터이니 항마천왕 마종기가 혈우 곡척지에게 졌을 뿐만 아니라 소림파가 아미파에게 졌다는 것을 만천하에 고할 수 있겠느냐?" "쿨럭... 쿨럭...." 마종기의 입가에는 선혈이 묻어나 있었다. 그는 피를 흘리면서도 투지는 빛바래지 않고 있었다. "미친 놈! 내가 네놈의 발 밑에 짓밟히는 지렁이 신세가 될지언정 나를 먹여주고 키워준 소림사를 어떻게 배신하겠느냐? 네놈이라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렇게 하겠느냐?" "소림사의 원로들은 네놈을 용도폐기했을 뿐이야. 그 누구도 네놈이 나를 이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네놈을 사지(死地)로 내몬 거야. 그것을 어찌 은혜라 부를 수 있겠느냐?" "네놈이 뭘 안다고 주절거리느냐?" "소림파는 이제 기운이 쇠했다. 늙은 중 따위가 머리를 맞댄다고 해서 무슨 좋은 궁리가 나오겠는가 말이다." "쿨럭... 아미파도 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거늘 그것이 무슨 차이가 있느냐?" "모르는 소리! 아미파는...." 그때 마종기가 말허리를 잘랐다. "시끄럽다! 네놈은 아미파 소속의 혈우 곡척지가 아냐! 네놈의 별호가 삼척동자(三尺童子)라는 걸 내 모를 줄 알았더냐?" 맹발의 얼굴에 한순간 당황하는 빛이 스쳐가더니 허리를 젖혀 광소(狂笑)를 터뜨렸다. "푸하하하하...." "뭐가 우습지?" "언젠가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예상보다는 첩보가 빠르구나!" 그러더니 맹발은 구루병에 걸린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③ 아아-! 관중들은 하나같이 신음성을 낮게 흘렸다. 인피면구를 쓴 것도 아닌데 얼굴과 외양이 천양지차(天壤之差)로 변한 것에 벌벌 떨면서 땅에 고개를 처박고 절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체 네놈의 목적은 무엇이냐?" 마종기가 말했다.


"세상이 곤원(坤元)의 뜻에 따라 순종(順從)하는 것!" 맹발은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너 같은 하찮은 미물이 알 바는 아니다. 또 말해 줘도 모를 테구! 네놈의 뜻이 정녕 그렇다면... 자, 마무리를 지어야 할 때가 왔구나!" 맹발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져가는가 싶더니 이내 뚝 그쳤다. "수수심해(水水深海)!" 일순 그의 몸덩어리는 물로 변해갔다. 수수양양이 방어법이었다면 수수심해는 공격법인 듯했다. 물기둥이 된 맹발은 마종기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물기둥이 걸어가다니! 항마천왕은 위기를 느끼고 피하려 했으나 족쇄를 채운 듯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파도같은 공포가 그를 덮쳐왔다. 반장(半丈) 가까이 물기둥이 다가왔을 때 항마천왕은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찔끔 오줌을 쌌다. 물기둥이 덮쳐드는 순간, 마종기는 청량검을 휘둘렀다. 칼로 물베기! 그것을 알자 마종기는 한층 다급해졌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 자신의 양 발목을 잘라냈다. "아악--!" 단말마(斷末魔)의 비명과 함께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동시에 마종기는 신형을 솟구쳐올랐다. 잘린 두 발목에서 허연 뼈가 내비쳤다. 너무나 끔찍한 장면에 구경꾼들이 얼굴을 돌렸다. 마종기는 떨어지면서 발을 사용할 수 없자 청량검을 바닥에 내려꽂았다. 검이 모래사장에 박혀 있고 그 검을 쥔 채 마종기는 물구나무를 서 있는 셈이었다.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한 장면이었다. 잘려 나간 발목에서는 쉼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물기둥은 마종기의 잘려 나간 발 앞에 가 섰다. 잘려 나간 두 발은 금방이라도 혼자 알아서 저벅저벅 걸어갈 것만 같았다. 물기둥이의 모습이 변형되더니 작은 물줄기가 잘려 나간 두 발을 감쌌다. 두 발은 그 물줄기를 통해 빨려들더니 물기둥에 흡수되었다. 보륵, 보르륵! 물기둥이 탐욕스런 포식자(捕食者)처럼 마종기를 양 발을 집어 삼켜 버린 것이었다. 경악성(驚愕聲)! 마종기는 자신의 양 발이 사라지는 것을 청량검에 의지한 채 지켜보고 있었다. 과다한 실혈과 엄청난 통증으로 인해 그의 정신은 차츰 혼미해져 갔다. 다시 물기둥이 움직였다. 마종기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뭔가 수단을 강구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물기둥은 모래사장 위를 천천히 걸어갔다. 믿기지 않는 것은 물기둥이 지나간 뒤에도 모래가 전혀 젖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물기둥을 파해(破解)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마종기는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그는 기다렸다. 물기둥이 자신을 덮쳐오는 순간 요절을 내리라고! 그러나 그것은 허망한 착각에 불과했다.


물기둥이 일신에 닿는 순간 마종기는 엄청난 흡인력앞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중인환시리에 마종기는 물기둥 속으로 스며들었다. 보르륵! 이번엔 좀더 큰소리가 났다.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감이 구경꾼들을 덮쳤다. 그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망연자실(茫然自失)한 모습들이었다. 잠시 뒤, 물기둥은 맹발로 모습을 바꾸었다. 깃발을 든 심판관조차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봐요, 심판관! 승리의 깃발을 들어주지 않을 셈이오?" 맹발이 말하자 그제서야 겨우 맹발이 이겼다는 깃발이 올라갔다. 하지만 곧 구경꾼들 사이에서 먼저 웅성거림이 생겨났다. 비무장에서의 승리란 상대가 항복을 하거나 정정당당히 싸워 죽였을 때를 말한다. 한데, 이번 경우는 그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육(人肉)을 먹는 포식자라니! 그런 자에게 우승의 영광을 안겨줄 수는 없다! 그에 반해 어쨌든 승리를 했으니 곡척지 즉 맹발에게 우승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견해도 만만치가 않았다. 심판관 사이에서도 의견은 분열되었다. 하지만 맹발의 오연(傲然)한 외침에 비무장은 모래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난 상 따위는 싫소! 내가 겨우 우승의 영광을 안기 위해 비무대회에 나섰다고 보는 거요?" 그는 보는 사람들을 멸시(蔑視)하는 듯한 웃음을 연신 터뜨렸다. 구경꾼들은 물론이고 심판관들조차 멍하니 지켜보는 가운데 맹발은 낙하(洛河)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순식간에 그의 몸은 다시 물기둥으로 변했다. 낙하로 들어선 물기둥은 강물과 하나가 되어 하류를 향해 도도히 흘러갔다. 제 50 장 산지박의 계절이 오면 ① 도전장(挑戰狀)! 곧 산지박(山地剝)의 계절인 음력 구월이 온다. 그 초닷새날에 천애산 초입 공터에서 소림사(小林寺) 나한전주 각천과 자운당 주지 공철에게 정식으로 도전하겠노라! 내 도전장을 보고도 하남성 숭산(崇山)으로 돌아간다면 두려워 도망치는 것으로 알겠으니 그리 알라! 질마귀 용골대 비무대회가 끝난 다음날 그런 도전장이 낙양 시내는 물론 인근 변두리까지 쫙 나붙었다. 노골적으로 소림파에게 시비를 건 것이었다. 아미파 악파의 장문인 질마귀 용골대의 의도는 분명해 보였다. 나한천주 각천과 자운당 주지 공철이 배분으로는 소림사에서 최고가 아니지만 무공만으로는 당대 최고의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을 이길 수 있다면.... 이번 비무대회에서 소림사 후기지수들의 무기력함과 함께 그들의 실력이 별게 아니라는 것을 세상에 증명해 보임으로써 소림사의 위상을 뿌리에서부터 흔들 수가 있게 된다. 용골대는 소림사의 원로 및 중견들이 낙양에서 철수하기 전에 선수를 친 것이었다. 각천과 공철의 귀에도 곧 그 소식이 들려왔다. 그 문제로 모여 의논했을 때 다들 흥분하는 표정들이었다. "아니, 용골대 제놈이 굽신굽신하며 무공비급을 얻으러 다닐 때가 언젠데 감히...."


지객당(知客堂) 소속의 무애거사(無碍居士) 자명(紫明)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성정이 포악한 자라 우리 문파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지." 각천이 먼 기억 속을 더듬듯 말했다. "그런 적이 있었습니까?" 호법원(護法院) 소속의 옥면승(玉面僧)이라는 웅비(雄飛)가 물었다. "아주 오래 전 일이라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네." "지독한 놈이군요. 그 오래 전 일을 아직도 못 잊고 원망의 감정을 갖고 있다니!" "그러고도 남을 작자야." 공철이 말했다. "그런 자를 왜 아미파에서는 받아들였을까요?" "아미파는 지난 삼십 년 내내 분열된 모습을 보였어. 특히 악파의 경우에는 무공에 뛰어난 자라면 살인귀(殺人鬼)라도 받아들였을 걸세." "아무튼 곤란하게 되었군요.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도 신중하지 못한 행동이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못 본 척 외면할 수도 없질 않습니까?" "벌써부터 당금 무림계를 통틀어 맹발을 당할 자는 없다는 소문이 쫙 깔렸습니다. 아직은 비무대회를 참관한 사람들에게 국한된 얘기지만, 비무대회을 보러 온 사람들은 전국 경향 각지에서 올라온 만큼 비무대회의 소식이 중원뿐만 아니라 온 천하에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소림사가 용골대의 도전을 받고도 회피했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소림사를 우습게 볼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명이 말했다. "우리가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 용골대의 노림수이네. 그 뒤에 무슨 함정이 있는지 알 수가 없지." 공철이 혀를 찼다.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웅비가 말했다. "놈에게는 자신의 무공이 주지님이나 전주님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을 뽐내려는 허영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허영심을 건드려 자극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여기 있는 자명 사제와 제가 용골대와 대적해 보겠습니다." 다음 날 용골대의 도전장이 붙은 곳에 소림파의 응전장(應戰狀)이 떡하니 붙었다. ② 용골대! 아직 코흘리개인 줄 알았는데, 그 사이 제법 컸구나! 그렇다 고 해서 오만(傲慢)하게 굴 것까진 없지 않은가? 한 수 배우기 위해 비무(比武)를 청해오는 것을 어찌 무례하다고만 몰아붙이겠냐만은, 비무란 본시 실력에 있어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상대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고 수련의 과정을 통해 무예를 발전시키는 데 목적이 있는 법! 처음부터 고수를 상대해 자신의 당연한 패배를 능멸하게 되 거나 스스로 비하(卑下)하는 마음이 생길까 염려된다. 그래서 우리 소림파에서는 나, 웅비가 나서서 너의 도전을 받아주려고 한다. 단, 어느 비무에서나 그렇듯이 목숨에 대한 미련은 접어두는 게 좋다! 후회란 언제나 늦는 법이니까. 네놈의 요구대로 음력 구월 초닷새에 천애산의 초입 공터로 나가겠다. 혹시 비명횡사로 슬퍼할 가솔(家率)이나 친인척이 있다면 미리미리 예정된 운명에 대해 암시라도 해 주는 게 슬픔을 덜게 하는 너의 마지막 배려가 될 것이다. 옥면승 웅비 拜上 상대를 얕잡을 뿐만 아니라 한 수 접고 들어가 극히 깔보는 말투와 문구였다.


그것은 용골대를 자극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그렇게 맞불을 지핀 셈이었는데, 소림파로서는 용골대를 이겨봤자 본전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하등 이로울 게 없는 싸움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용골대는 응전장을 본 날 밤, 여염집 처녀를 납치해 천애산으로 향했다. 은막 앞에 서서 맹발이 가르쳐 준 주문을 외우자 막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렸다. 맹발은 석단(石檀) 위에 앉아 가부좌를 튼 채 명상에 잠겨 있었다. 용골대는 그런 맹발을 보자 두려운 마음이 생겨났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자신보다 하급(下級)으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언제나 반말 투로 대해 왔었고, 또 그럴 때마다 맹발이 크게 불만이 없어 보였기에 무공의 수준이 자신의 실력을 넘지 않을 걸로 생각했었다. 맹발이 곡척지의 모습으로 변해 비무대회에 참가한 순간부터, 그리고 결승전이 끝났을 때, 질마귀 용골대는 자신의 목숨이 그때까지 붙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차차유를 시켜도 될 일을, 이렇게 손수 나선 것은 그간 용골대가 맹발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변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였다. "흠흠, 저...." 용골대는 명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한참을 기다렸지만 맹발의 움직임이 없자 헛기침을 했다. "저... 소생 질마귀 용골대 왔습니다." "아, 어서 오시오." 그제서야 맹발은 눈을 떴다. 눈에서는 기이한 광채가 번득이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믿기가 어렵다. 볼품없는 저 외양 어느 속에 가공할 무공이 숨어 있는 것인가. 외모로만 치자면 객점 앞에서 구걸을 하는 거렁뱅이나 창녀촌 포주의 똘마니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뚜렷한 대비(對比)가 한층 신비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 계집은 여염집 규수의 딸로 올해로 열네 살입니다. 파과하지 않은 처녀를 늘 구하신다 하기에...." "처녀가 확실하오?" "지난 번엔 곡척지가 무례하게 실수를 하였지만 이번엔 확실합니다." "그럼, 어디 한 번 볼까?" 맹발이 팔을 쭉 뻗자 용골대가 들쳐메고 있던 처녀가 둥둥 떠서 맹발 쪽으로 움직였다. '아니, 이럴 수가! 과연, 이 자의 무공은 끝간데를 모르겠구나!' 용골대는 내심 움찔했다. 처녀는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허공에 반듯이 떠 있는 자세가 되었다. 그 순간 맹발의 눈에서 시퍼런 안광(眼光)이 폭사되더니 처녀의 하체를 더듬었다. "음... 좋군. 음기(陰氣)가 충만한 계집이야." 잠시 뒤, 처녀의 온몸은 푸른 무형의 막으로 둘러싸여 갔다. 흡사 파란 투명의 비단보자기로 둘러싼 것 같았다. 맹발이 양 팔을 뒤로 휘젓자 처녀는 원래 있던 위치에서 좀더 높이 떠올라 맹발의 머리위를 타넘더니 석실벽 위쪽에 가 멈추었다. 그때였다. 용골대가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용서해 주십시오. 몰라뵙고 감히 죽을 죄를 저질렀습니다." "아, 이게 무슨 짓이오? 왜 이러시는 겁니까? 우린 서로가 돕기로 한 동지(同志)가 아니오?" "어인 말씀을요... 정말 몰라뵈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용골대는 처신을 잘하기로 이름난 자였다. 그는 지금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한다는 것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그간의 무례에 대해 용서를 비는 것이었다. "그보다도 도전장을 낸 것은 어찌 되었소?" 맹발은 그런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응답이 있었는데 각천과 공철은 고수이니 그 휘하의 중견들이 소생과 상대하겠다고 했습니다." "흠... 예상대로군." "이제 어쩔 셈이십니까?" "당연히 싸워야지. 자신있소?" "옥면호 웅비나 무애거사 자명쯤은 해 볼만하지만 각천과 공철은 무공은 목숨을 버릴 각오가 아닌 한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이지요." "크하하하하...." 맹발의 웃음소리가 동굴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용골대는 머쓱해져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저... 주제넘은 질문이온데... 각천과 공철은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소림승들이옵니다. 더구나 저들 둘이 함께 대항해 온다면...." 그 다음 말은 안 했지만 '천하의 당신일지라도 별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기고 지는 것이야 하늘의 뜻이겠지. 내 어찌 싸워보지도 않고 승패를 알겠느냐?"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완전히 하대(下待)로 말투를 바꾼 맹발이 다시 웃었다. 웃음을 뚝 그치더니 말한다. "그래, 민심의 동향은 어떻느냐?" "다들, 어르신의 출현에 놀라고 두려워하는 모습들입니다." "자네가 내 일을 기꺼이 돕겠다고 했으니까 하는 말이네만 난 하수인에 불과해." "하오시면 어르신이 뫼시고 있는 주군(主君)이라도 있단 말씀이십니까?" "암, 있다마다! 곧 천지비(天地否)의 세상이 도래할 걸세." "천지비의 세상이라뇨?" "양이 가고 음이 온다는 뜻이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성(盛)할 거라는 말씀이옵니까?" "그건 반쪽에 불과해! 곧 마도(魔道)가 온 세상을 뒤덮을 걸세." "헤헤... 그런 세상이 오면 저도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자네가 나를 돕는다면 자네도 단맛을 볼 수 있을 게야." "돕는 거야 두말하면 잔소리죠. 특별히 도울 일이라도 있습니까?" "오늘처럼 싱싱한 처녀가 필요해!" "얼마나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서둘러야 하네." "다른 것은요?" "없어." "그럼 다음달 초닷새날 뵙기로 하고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용골대가 나가자 맹발은 석대에서 내려섰다. 그는 동굴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푸른 막으로 둘러싸인 처녀의 몸체도 공중에서 서서히 움직였다. 맹발은 조미미가 누워 있는 곳으로 갔다. 조미미는 이곳 동굴로 납치된 이후 계속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그것은 강제로 미혼약(迷魂藥)을 투여당했기 때문이다.


조미미의 부풀어오른 배를 그윽하게 지켜보던 맹발이 가만히 서서 호흡을 멈추었다. 호흡을 멈추었는데도 늑골이 아래 위로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순간, 조미미의 몸체가 천천히 떠올라 처녀와 나란히 섰다. 이제 조미미의 몸은 숯불덩어리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몸에서 나오는 열기가 처녀의 몸으로 옮아갔다. 시퍼렇던 처녀도 조미미와 같은 색을 띠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이각 후.... 처녀의 몸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털썩! 곧이어 처녀의 몸은 허연 가루로 변해 버렸다. 동굴이라 통풍(通風)이 잘 될 리 없는데도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더니 그 뼛가루를 휘감아가 버렸다. 처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맹발은 조미미를 가만히 쳐다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차츰 보양(保養)이 되고 있어. 이제 곧 주군(主君)이 태어나실 게야.' 제 51 장 부자(父子)의 정리(情理) ① "네놈을 가만두지 않겠다!" "무어라? 나야말로 네놈이 왜 나를 죽이려 했는지 알아내야겠다!" "내 얼굴을 뻔히 보고서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네놈의 그 옹색한 얼굴이 뭐 대단하다고 그 따위 뜬금 없는 얘기를 지껄이느냐?" 왕탁이 잠깐 나간 사이 천애산 동북쪽 모옥에 염군조가 찾아왔다가 운중마룡과 맞닥뜨린 것이었다. 둘은 보자마자 으르릉대기 시작했다. 운중마룡은 대뜸 쌍룡쟁주(雙龍爭珠)의 수법을 펼쳐 염군조의 눈을 공격해 갔다. 이지관수(二指貫手)라고도 불리우는 그 수법은 실명을 노린 독랄한 수였다. 그만큼 운중마룡은 원한에 사무쳐 있었던 것이다. 염군조는 허리를 틀며 상대의 공격을 비껴가게 한 다음 회중포월(懷中抱月)로 맞받아쳤다. 그러나 낙법에 관한 한 천재적이라는 소리를 듣는 운중마룡은 깃털이 떨어지듯 평사낙안(平沙落雁)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과연 운중(雲中)이라는 앞 두 글자가 명불허전이었다. 이번에 운중마룡은 오룡취주(烏龍取珠)를 펼쳤다. 상대의 낭심을 걷어차는 기술로 역시 급소를 노린 것이었다. 염군조는 피하지 않고 대룡파미(大龍擺尾)로 같이 걷어올려찼다. 탁! 정강이가 서로 부딪치자 통뼈인 염군조보다 더 고통을 느낀 운중마룡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날 죽이려 하는 거지?" 염군조가 말했다. "정녕 네놈의 입으로 그걸 물을 수 있단 말이냐?" "내 손으로 네놈의 모가지를 끊어놓기 전에 알아야겠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말이 아니라 거친 주먹이었다. "맹호출림(猛虎出林)!" 운중마룡이 쏜살같이 공격해 들어가자 염군조는 숨을 들이킨 후 배를 잔뜩 부풀렸다. 띠용~ 운중마룡은 정권을 내질렀으나 상대가 충격을 느끼기는커녕 자신의 팔과 어깨에 엄청난 반탄력을 느꼈다. 그의 몸은 염군조에게 달려들던 속도의 두 배 이상으로 뒤로 날아갔다.


모옥을 덮친 그의 몸은 지푸라기를 뒤집어썼다. "죽일 놈! 용서 못해!" "흥, 이제까지는 손에 사정을 두면서 대든 거란 말이냐?" 염군조는 운중마룡의 비위장을 거슬리는 격장지계(激將之計)를 펼쳤지만, 운중마룡은 냉정을 잃지 않고 몸에 붙은 검불을 털며 일어났다. "천망회회(天網恢恢)라는 말을 들어보았느냐?" "천망회회?" "무식한 놈!" "뭐야?" 염군조가 두 주먹을 움켜쥐며 발끈했다. "그건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가만 둘 수 없다." "자, 잠깐! 내 말이나 듣고 대들거라." 운중마룡의 제지에 염군조가 멈칫했다. "그 뜻은 하늘의 그물은 너무 넓어 성긴 것 같아도 결코 악인(惡人)은 빠뜨리지 않는다는 의미다." "내가 악인이란 말인가?" "천벌을 받을 놈이지." 역으로 운중마룡의 격장지계에 염군조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네놈의 그 세 치 혀를 뽑아 버리겠다!" 염군조는 무작정 달려들다가 운중마룡의 부인각(斧刃脚)에 옆구리를 격중당했다. 그러나 운중마룡의 발차기 정도에 염군조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우하하하... 발차기의 힘이 겨우 그 정도냐? 풀죽도 못 먹고 사는 모양이구나!" 염군조는 자신이 순간적으로 흥분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공격태세를 늦추며 말했다. "급소만 때리지 않는다면 하루종일 얻어맞고 있어도 탈이 없겠다. 정말로 가소롭구나!" "네놈이야말로 그 혀가 가볍기 짝이 없구나. 자, 간다!" 그들은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손에 사정을 두지 것 같지는 않은데도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는 왠지 멈칫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싸우기 시작한 지 반 시진.... 둘은 모두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좀 쉬었다가 하는 게 어때?" 먼저 그렇게 말한 사람은 염군조였다. "흥, 네놈이 지친 게로구나. 난 그렇게는 못한다! 안되지. 절대 그렇게는 못해!" 그러나 염군조를 향해 주먹을 내뻗으려던 운중마룡이 그 자리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염군조가 낄낄댔다. "어리석은 놈! 국으로 가만 있으면 중간이나 되지. 잠시도 지키지 못할 말은 왜 내뱉어?" 염군조도 운중마룡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들은 한동안 거친 숨을 토해내기만 했다. "입냄새가 지독하군! 소금으로 양치질이나 제대로 하고 다니게!" 염군조가 비아냥대더니 슬그머니 일어났다. "어딜 가나? 설마 도망을 가려는 건 아니겠지?" "의심 많은 놈! 날 뭘로 보는 거야?" 염군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개울가로 가더니 몸을 엎드려 물을 꿀꺽꿀꺽 마셔댔다. 그때, 표주박이 날아와 염군조의 다리 밑에 떨어졌다. "네놈의 입만 입인가?" "썩을 놈!"


그러면서도 염군조는 표주박에 물을 담아 와 운중마룡에게 건네준다. 입은 육두문자를 거칠게 내뱉고 있었지만, 원수가 만났다기보다는 오랜 지우(知友)가 만난 것처럼 정답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기조차 했다. 어떻게 된 걸까? 염군조는 모옥에 찾아오기 전 왕탁에게 운중마룡의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운중마룡 또한 최근 염군조의 사정과 그의 인감됨됨이에 대해 왕탁에게 얘기를 들음으로써 칼날같던 감정이 많이 누그러져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염군조는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미안함과 어색함--운중마룡을 본 것은 칠 년 전 그가 어린시절이었다--을 드러내기 싫은 무뚝뚝한 기분에 대뜸 소리부터 질렀던 것이다. 운중마룡 또한 그런 그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험하게 싸우면서도 결정적인 공격은 가하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상대를 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을 마신 운중마룡은 이제 조금 살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말했다. "자, 어지간히 휴식을 취했으니 이제 다시 시작할까요?" "허, 그 양반 성질머리 한 번 되게 급하구먼!" "좋시다! 잠시만 더 휴식을 취하지 뭐!" 운중마룡은 쌈지담배를 말아 화섭자로 불을 붙인다. "더 있으면 나도 한 대 줘." "옛수!" 운중마룡은 담배쌈지와 화섭자를 던져준다. 어둠 속에서 두개의 담뱃불이 빨갛게 타들어간다. 담배를 다 피울 동안 그들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왜 그런지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한량없이 쉴 수야 없지. 그만 일어나실까?" 이윽고 염군조가 일어나며 말했다. 운중마룡도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뒤로 두 장을 물러났나가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그러자 그때였다. "그만들 두게!" 그들이 멈춰서서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자 왕탁이 양 손에 뭔가를 들고 서 있었다. "아까부터 쭉 지켜보았네! 서로 싸울 생각도 없으면서 왠 주접들인가?" "그야, 이 놈이...." 염군조가 운중마룡을 가리켰으나 끝까지 말을 잇지는 못했다. "아, 글쎄, 이 자가...." 사정은 운중마룡도 마찬가지였다. 염군조를 비난할 듯했지만 가벼운 푸념으로 끝나고 말았다. "자자, 앉으시게." 왕탁은 큼직한 술병 하나와 갓 잡은 씨암닭을 내려놓았다. 그들은 불을 지피고 닭을 굽는다 하여 때 아닌 수선을 피웠다. 왕탁의 중재로 뜻하지 않게 대작(對酌)을 하게 된 그들은 서둘러 독주(毒酒)를 마시는 바람에 금방 취해 버렸다. 수런수런 얘기를 나누다가 왕탁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주었다. 고함소리와 욕설이 오가고, 허장성세(虛張聲勢)와 고성방가(高聲放歌)로 설쳐대던 두 사람은 갑자기 서로 포옹을 한 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꼬박 지새운 밤 하늘 한가운데로 사선(斜線)을 그으며 유성 하나가 떨어지고 있었다.


제 52 장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① 팔짱을 낀 용골대는 달빛을 등진 채 비스듬히 서 있었다. 둥근 모자의 차양 밑으로 숱이 많은 백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칼날같은 눈썹 아래에서 형형(炯炯)한 안광이 폭사되고 있었다. 대결에 임한 상황에서 엉뚱한 느낌을 갖는 것이겠지만, 옥면승 웅비는 용골대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등에 찬 검도, 옅은 바람에 펄럭이는 도포자락도, 금수(禽獸)를 쏙 빼닮은 눈빛도 그리고 심지어는 오른발과 어깨를 앞쪽으로 내밀고 뒷발을 당긴 비스듬한 자세마저 멋져 보였다. 수많은 살인을 저질러오면서 체득(體得)하게 된 자태(姿態)! 선혈(鮮血)을 자양분으로 피어난 혈화(血花)처럼, 음산한 괴기로움이 그에게서 배어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까닭없이 웅비에게서 전의(戰意)을 앗아가는 듯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웅비는 새삼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저 자가 가진 것은 바로 핏빛의 아름다움이구나!' 왜 그런지 웅비는 자꾸 이상한 상념(想念)이 떠오르는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곧 그는 때 아니게 생겨나는 상념이 죽음의 공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죽음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웅비는 왠지 자신이 없었다. 용골대가 멋있게 보인 것은 자신을 죽이는 용골대의 모습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패배의식으로 몸이 굳은 그는 선뜻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난 불필요한 살인은 원하지 않는다. 각천과 공철은 어디에 있느냐?" 용골대가 말했다. "징검다리도 밟지 않고 개울을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웅비는 정신을 차리며 대꾸했다. "징검다리라... 후훗! 그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구나. 네놈은 내 발 아래 짓밟힐 테니까." "짓밟힐 때 짓밟히더라도 한 가지 묻기나 하자. 너와 맹발은 어떤 관계지?" "내가 모시고 있는 분쯤으로 해두자." "어떻게 그 자를 알게 되었나?" "알고 싶은가?" "자, 이제 누가 죽든 죽어야 할 판이다. 말한다고 해서 손해볼 일도 없질 않느냐?" "말하자면 인연(因緣)이지. 전생에 얽힌 인연의 매듭이라고나 할까!" "가소로운 소리! 윤회(輪廻)와 업(業)을 입에 담는 자가 사도(邪道)의 늪에 스스로를 빠뜨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 네놈의 목숨이 오늘로 끝난다고 해도 나를 원망 말아라. 그것이야말로 업이고 피할 수 없는 인연일 테니까. 자, 간다!" 웅비는 검을 휘두르며 짓쳐들어갔다. 그의 검은 웅혼(雄魂)한 기상으로 넘쳐 있었다. 찌르고 베고 자르는 일체의 동작 속에 사내다운 기백이 넘쳐 있었다. 크고 넓고 깊게 인생을 보아온 자만이 해낼 수 있는 대범한 초식들! 그는 소림승이었지만 검법은 여러 문파의 것을 종합해 응용하고 있었다. 무당의 대라검범(大羅劍法)인가 하면 화산의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같이 보이기도 했고, 때로는 아예 무예의 초보자가 휘두르는 것처럼 어설퍼 보이기도 했다. 그에 반해 아미파의 소청검법(少淸劍法)을 주로 사용하는 용골대는 침착하면서도 경험이 풍부해 보였다. 그는 쓸데없는 군동작으로 힘을 낭비하지 않았다.


웅비의 공격을 교묘하게 피하면서 허점을 유도하고 있었다. 용골대는 기다릴 줄을 아는 자였다. 인생이란 어떻게 보면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진검승부(眞劍勝負)도 마찬가지다. 이쪽이 월등하게 뛰어나지 않는 한 상대의 실수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웅비는 너무 성급했다. 그는 시원하게 검을 휘둘러대고는 있었으나, 왠지 쫓기는 사람처럼 서두르고 있었다. 자기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용골대의 눈에는 그 성급함이 훤히 내다보이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웅비는 자신이 뿌려대는 검막(劍幕)과 옹골찬 기세에 용골대가 쩔쩔매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으흐흐흐...." 웅비가 지친 기색을 보이자 용골대는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왜 공격을 안 하는 거지?" "안 하긴?" 바로 그 순간, 용골대는 품속에서 단검(短劍)을 빼어들더니 거꾸로 잡고 내던졌다. 휙-! 힘은 실려 있었으나 정확하고 빠르지는 못했다. 단검은 웅비의 어깨 위를 지나쳤다. "후후... 네놈의 솜씨도 녹이 슬었나 보구나!"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웅비는 시위가 당겨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② 그것은 등뒤에서 나는 소리였다. 등골이 오싹해진 웅비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공포로 커졌다. 그의 투명한 망막(網膜) 위로 쏘아져 오는 단검이 새겨졌다. 쩍-! 이마 한가운데가 꿰뚫리는 소리! 용골대는 느티나무에 동아줄을 팽팽히 묶어놓고 그 줄을 겨냥해 단검을 날린 것이었다. 물론 단검이 거기에 맞아 어떤 각도로 되돌아올 것인지를 꼼꼼히 계산한 뒤였다. 추성간월(追星看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목표점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맞춘 것은 실로 놀랄 일이었다. 뒷골을 헤집고 나온 검끝에 허연 뇌수가 묻어 있었다. 너무나 갑작스런 죽음이어서 일까? 웅비는 쓰러지지도 못하고 꼿꼿이 서 있었다. 용골대는 승리의 쾌감에 앙천광소(仰天狂笑)했다. 그때 무애거사 자명이 능공허도(凌空虛渡)의 비행술을 이용해 어둠속에서 내려왔다. 그는 죽은 웅비를 보자 자신의 갈의(葛衣)를 잡아뜯으며 울부짖었다. "죽이겠다!" 무애거사가 들고 있는 병기는 생긴 것부터가 이상했다. 모양은 철퇴 같았는데 가운데 긴 봉을 축으로 해서 양쪽에 각각 세 개씩의 철퇴가 달려 있었다. 그 철퇴 하나가 오십 근이니 합해서 삼백 근의 무게였다. 그것을 머리위에서 나무젖가락 돌리듯 하면서 세찬 바람소리를 냈다. 보통 사람이라면 병장기가 웅웅거리는 용음봉명(龍吟鳳鳴)만 듣고도 질겁을 했을 터였다. 용골대는 힘자랑을 하는 많은 강호인을 보아왔다. 동네에서 먹혀든 힘자랑을 강호에 나와서까지 뽐내보려는 건달 녀석들을....


하지만 무애거사가 병기를 휘두르는 솜씨는 단순히 힘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었다. 힘도 힘이었지만 기교(技巧)가 대단했다. 그 무거운 것을 들고도 움직임은 깃털처럼 가벼워 보였다. 철퇴에 머리를 얻어맞게 된다면 두부처럼 으깨질 것은 뻔한 일! 용골대는 수비를 강화하면서 파고들 방도를 생각했다. 그러나 여섯 개의 철퇴가 무애거사의 일신을 감싼 채 바람개비처럼 돌고 있어 뚫고 들어갈 허점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조금씩 뒤로 밀리던 용골대는 턱하니 나무가 등을 가로막아오는 바람에 더 이상 후퇴를 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휘잉--! 마치 공간이 갈라지며 아래 위로 깊은 틈입(闖入)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용골대는 간담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로 날아오는 병기를 피해 용골대는 무애거사의 바지가랑이 사이로 빠져 나갔다. 바로 그 순간, 무애거사는 가공할 양철추(兩鐵錘)라는 그 병기를 휙 내던졌다. 취릭, 취리릭-! 그것은 빙글빙글 돌며 용골대에게로 날아갔다. 용골대가 몸을 낮춰 쉽게 피하는가 했는데 양철추는 회전을 하면서 다시 날아왔다. 이번엔 급히 몸을 낮추느라 턱을 돌부리에 찧었다. "빌어먹을!" 욕설을 내뱉으며 일어서는데, 다시 바람소리가 났다. 용골대는 훌쩍 뛰어올라 양철추의 한가운데 올라탔다. 양철추의 회전에 따라 그의 몸도 팽글팽글 돌았다. 원심력을 받아 한순간에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용골대는 아슬아슬하게 잘도 버텨냈다. 양철추가 주인에게 돌아가는 순간 용골대는 무애거사의 얼굴을 걷어찼다. "어이쿠!" 무애거사는 맥을 못 추고 나가떨어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용골대는 양철추를 무애거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집어던지려고 했는데, 겨우 허리까지 들어올렸을 뿐 엄청난 무게 때문에 내던질 수가 없었다. 그는 그것을 도로 내려놓았다. "하하하하하...." 무애거사가 꼴 좋다는 듯이 웃어댔다. "양철추가 애들 장난감인 줄 알았더냐?" "괘씸한 놈!" 용골대는 무안한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벽력탄(霹靂彈)을 내던지며 자신은 느티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③ 펑! 벽력탄은 주위 수장을 초토화시키는 강력한 살상무기였다. 한데, 용골대는 무안을 당한 나머지 그것을 무애거사에게 던진 것이 아니라 양철추를 파괴하려 한 것이었다. 벽력탄을 맞은 양철추는 철퇴 부분은 끄떡없었지만 가운데 손잡이의 쇠가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말았다. "이런, 내가 아끼는 양철추를...." 양철추를 잃은 것은 새가 한쪽 날개를 잃는 것과 같았다. 무애거사는 양철추를 부둥켜안으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집어치우게!"


호통을 치는 소리가 들려와 용골대가 돌아보자 각천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누더기 같은 가사(袈裟)를 입은 각천은 큰소리로 무애거사를 나무랐다. "법호가 무애(無碍)라면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말아야 하거늘 네놈은 아직도 세상에 미련이 있어 양철추를 껴안고 울부짖는단 말이냐?" "......." 무애거사는 말도 못하고 벌벌 떨었다. "그럴 거였으면 저 자의 도전장을 애초부터 받지를 말았어야지." "송구스럽습니다." "안타깝구나! 내 너를 아꼈거늘...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다. 넌 처음부터 용골대를 이겨보려는 생각이 없었다. 죽을 각오조차 없이 어찌 저 자에게 덤벼들었단 말이냐?" "하오나... 양철추를 못 쓰게 된 이상 전 저 자에게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각오가 무르다고 하지 않느냐? 거기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웅비의 시체나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거라." 그때까지도 웅비는 땅에 박힌 채 꼿꼿이 서 있었다. 무애거사가 웅비를 데리고 어리론가 사라지자 각천이 말했다. "아미타불... 살생이란 무릇 극도로 자제해야 하는 법! 하지만 오늘 네놈이 나로 하여금 피로 손을 씻게 만드는구나!" 여기서 각천이 도달한 무예의 경지(境地)를 비유하자면 이렇다. 산(山)은 산(山)이요, 물(水)은 물이다.(一)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二)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三) 일단계에서는 사물에 대한 소박한 긍정이 나타나 있다. 이단계에서는 외물(外物)이나 현상(現象)을 부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단계에서 다시 평온한 긍정에 이른다. 무예도 마찬가지다. 여러 가지 이름이 붙은 무공초식의 구결을 외우고 동작을 익히는 것은 일단계에 해당한다. 완전히 숙달되었을 때, 다시 말해 모든 구결이 체득되어 교과서적인 내용을 자유자재로 응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 구결은 부정될 수 있다. 승고산문(僧叩山門)은 승고산문이 아니요, 불법무변(佛法無邊)은 이미 불법무변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 부정(否定)의 단계 또한 절정고수의 경지는 아니다. 구결을 부정함으로써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상승공(上乘功)의 활력을 느낄 수는 있지만 본래의 목적으로부터 너무 멀리 나아감으로써 중심을 잃을 수가 있다. 구결이란 인체로 말하자면 뼈대인 것이다. 다시 그 뼈대로 돌아오면 중심을 잡을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 산과 물을 긍정하던 소박한 상태는 아니다. 모든 것을 달관(達觀)한 자! 무념무상(無念無想)을 가슴 깊이 깨달은 자! 그런 자만이 삼단계에 도달할 수가 있다. 용골대는 각천이 느릿느릿 다가왔을 때 그가 출수(出手)를 포기한 줄로 알았다.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느리고 무방비인 상태로 자신에게 다가올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용골대의 착각이었다. 애초에 각천의 동작은 빠르거나 강하지가 않았다. 용골대에게로 다가선 각천은 친한 친구들끼리 오랜만에 만났을 때 반가운 나머지 행동하는 것처럼 어깨를 척 짚었다.


용골대는 그 순간 이상(異常)을 감지했다. 자신은 분명히 빠르게 뒷걸음질치려 했는데, 자신의 동작보다 한발 앞서 손이 닿았던 것이다. 어깨뼈가 바스러지는 통증이 전해져 왔다. 용골대는 각천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각천은 한발 앞서 반대편 어깨를 잡아왔다. 용골대의 눈이 휘둥그래진 것은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각천의움직임이 그렇게 느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막의 거북이가 따로 없었다. 그런데도 용골대는 각천의 공격을 피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자기가 빠르다고 느끼는데도 번번이 방어에 실패했다. 더군다나 각천은 어린애를 다루듯 자신을 조심스럽게 만질 뿐이었는데도 고통은 칼에 찔린 것보다 더 심했다. 용골대는 온몸의 뼈마디가 해체될 것 같은 통증에 몸부림을 쳤다. "크아악--!"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가 각천을 가까스로 밀쳐냈다. 전신의 모공을 통해 엄청난 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실제로 용골대의 몸통은 두꺼비의 그것처럼 크게 부풀어올라 있었다. 용골대는 무극무변(無極無邊), 연환영풍(烟幻迎風), 적우세영(赤雨細影)의 삼초를 펼치며 공격해 들어갔다. 놀랍게도 각천은 제자리에 양 발을 고정한 채, 몸을 좌우로 움직여 용골대의 소청검법(少淸劍法)을 피하고 있었다. 금강부동(金剛不動)이라는 신법이었다. 어찌나 허리가 유연하든지 용골대는 허공을 베고 찌르는데 온힘을 다 쏟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남은 두 개의 벽력탄을 한꺼번에 터뜨리며 느티나무 위로 솟구쳐올랐다. 펑! 퍼벙! 자욱한 먼지가 공터를 뒤덮었다. 안개가 끼듯 일 장 앞도 보이지 않았다. 용골대는 긴장하며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먼지가 바람에 흩어지며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가셔졌다. 시야가 넓어졌다. 각천은 보이지 않는다. 죽어 쓰러진 것일까? 그도 아니면 갈기갈기 찢어진 살점이 되어 사방으로 날아간 것일까? 아무리 둘러보아도 각천은 보이지 않았다. 용골대는 답답한 나머지 공터로 훌쩍 뛰어내렸다. 공터 한가운데가 움푹 주저앉아 있었다. 새삼스럽게 벽력탄의 위력이 실감되었다. 천하의 각천이라 하더라도 벽력탄 두 방을 맞고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럼, 역시....' 용골대는 각천이 죽었다는 확신이 들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소림사 나한전주 각천을 무찔렀다. 크하하핫!" 강호인에게 그보다 더 통쾌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각천이 누구인가. 각천을 무찌른 것만으로 용골대는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에 등극(登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벽력탄이라는 암기(暗器)를 쓰긴 했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진검승부에서는 어차피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세상을 자신의 발 아래 둔 느낌에 용골대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느낌에 돌아보자 공철이 서 있었다. "아니, 당신은...." "뭘 그리 놀라나? 내가 못 올 곳에 온 것도 아닌데." 용골대가 금교장(金橋掌)으로 어깨를 내려치려는 순간, 공철이 한 발 앞서 수혈(睡穴)을 제압하자 용골대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 수풀 뒤에서 각천이 허연 돌가루를 뒤집어쓴 채 나타났다. "처음부터 자네 말을 따를 것을 괜히 고생했네그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지 뭔가?" "난 자네가 콩가루가 되는 줄 알았네." "벽력탄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망정이지...." 각천은 아직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들이 용골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해 의논하는데, 파공성과 함께 제비가 허공을 스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곧이어 광오(狂傲)한 웃음소리! 웃음소리는 허공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나와라!" 각천이 소리쳤다. "하하하하하...." 웃음은 계속되고 있었다. 각천은 공철과 눈길을 교환했다. 그들은 그 즉시 가사자락을 휘날리며 공중으로 뛰어올라 웃음소리가 나는 허공을 휘젓고 다녔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을까? 더 이상 웃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각천과 공철은 공터에 나란히 내려앉았다. "역시 맹발이란 자인가?" 공철이 말했다. "그렇겠지." 그렇게 대답하던 각천은 화들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공철의 뒤에는 공철과 똑같이 생긴 또 하나의 공철이 서 있었던 것이다. 각천은 당황했다. "이런...." "자네 표정이 왜 그런가?" "자네 뒤를 보게." 공철은 자신과 턱 밑의 검은 점까지도 똑같이 생긴 상대를 보고는 놀라 나자빠질 뻔했다. "대체 누가 진짜지?" 각천이 말했다. "나지 누구겠나?" 뒤에 있던 공철이 말했다. "거짓말이네. 나야, 나! 번연히 보구서도 모르겠나?" 그들은 앞다투어 자신이 진짜 공철이라고 주장했다. "보는 것 가지고는 누가 진짜인지 판단할 수 없겠는 걸." "저 놈은 인피면구를 썼을 거야." "흥, 이게 인피면구라구? 의심이 나시면 직접 만져보시지."


"아, 아서! 맹발이란 놈은 무엇으로든지 변할 수가 있어. 얼굴을 살펴본다고 해서 알아낼 순 없어." 일이 골치아프게 되었다. 각천은 가운데 끼어서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했는데도 각천은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움직임 또한 구별할 수 없으리만큼 같아서 섣불리 단정짓기가 어려웠다. 공철은 반야신공(般若神功)과 달마역근경에 능했는데 그 또한 구별이 불가능했다. 각천은 관망하는 자세가 되어 누가 이기든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반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말했다. "가만, 가만! 그만들 두시게. 공철과 나는 삼십 년 지기이네. 둘만이 아는 은밀한 일들이 있지. 가령, 진짜 공철이 좋아하는 시(詩)가 있는데, 누가 먼저 읊어보겠나?" "내가 먼저 하겠네." 스스로 진짜라고 자처하는 공철은 즉시 형가의 즉흥시를 읊조렸다. 바람은 소소하게 불고 역수는 차가워라 장사 한 번 떠나면 돌아오지 못하노라 風嘯嘯兮 易水寒 壯士一去兮 不復還 "어떤가?" 시를 외우고 난 공철이 말했다. "맞았네. 협의(狹義)의 기개가 멋지게 표현되어 있다고 해서 좋아했지. 자, 이제 자네 차례네." 각천은 다른 공철을 보고 말했다. "자네가 가장 싫어하는 세 가지 일은?" "그야 누구나 싫어하는 게 세 가지쯤은 있지." 그러면서 얼버무린다. "그러니 말해보란 말일세." "어허, 서두르긴...." "바로 이 놈이 맹발이야. 쉽게 대답을 못하고 있지 않나?" 시를 외운 공철이 다른 공철을 몰아붙이며 말했다. "난 뜸들이지 않고 말할 수 있네." 그러자 그 순간이었다. "가만, 나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게.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건 말일세... 유연(遊宴:야유회)과 압기(押妓:기생놀이) 그리고 구선(九仙:점보는 것)이네." 각천은 드디어 가짜를 가려냈다고 생각하다가 멈칫했다. 그 또한 틀리지를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둘 중에 하나는 분명히 가짜일 터인데... 어떻게 호오(好惡)까지 알 수 있단 말인가?' 괜한 것을 물어 각천의 처지는 더욱 난감해졌다. "각천, 자네가 속은 것이네." 형가의 즉흥시를 외웠던 공철이 말했다. "속다니?" "이 자는 독심술(讀心術)에 능한 자야. 내 마음의 소리를 읽었던 걸세. 처음엔 몰랐다가 내가 말하려고 하는 순간 내 마음속에서 그 단어들을 읽었던 거지."


"설마 그렇게까지...." "맹발, 어설픈 장난은 그만치고 어서 본 모습을 드러내라!" 공철이 소리치자 아까 허공에서 울리던 예의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윽고 가짜 공철이 맹발로 변했다. "보시게! 바로 이 놈이었네." 공철은 이를 갈았다. "아무도 놀아줄 사람 없는 노인네들과 어울려 준 것을 갖고 뭘 그리 역정을 내시나?" 그 다음부터는 더 이상 말이 필요없었다. 각천과 공철은 협공을 펴나갔다. 제 53 장 만불조종(萬佛祖宗) ① 그들은 오랫동안 함께 생활해 왔기 때문에 호흡이 잘 맞았다. 앞뒤에서 나한권(羅漢拳)과 아라한신권(阿羅漢神拳)을 적절히 구사하여 맹발을 공격해 나갔다. 하지만 맹발의 초절(超絶)한 능력을 아는지라 권(拳)으로 끝장을 볼 요량은 아니었다. 나한권의 초식인 장미서벽(長眉舒劈), 휘진청담(揮塵淸談),나한득도(羅漢得道) 따위를 펼쳐보았지만, 맹발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각천은 지팡이에서 검을 뽑아들고 달마십삼검(達磨十三劍)을 시전했다. 허식분금(虛式分金), 금강복호(金剛伏虎), 금륜도겁(金輪渡劫), 부구포수(浮丘抱袖).... 앞서 얘기했듯이 각천과 공철이 누구인가. 한데도 그들의 권법과 검법은 헛돌고 있었다. 권검(拳劍)엔 군더더기가 없어야 하는데 오늘따라 웬 군더더기가 그리 많은지! 다른 무림인이었다면 벌써 지쳐 떨어졌거나 상대에게 일격을 당해 황천객이 되었을 시점(時點)! 천애산 초입의 공터는 각천과 공철 그리고 맹발이 토해내는 사자후(獅子喉)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역시 각천과 공철은 고수였다. 비무대회에서 맹발과 대결한 - 하긴 대부분 한 수에 끝나 어떻게 해볼 엄두도 못 낸 형편이었지만 상대가 미처 상상하지도 못한 점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우선, 맹발은 달빛을 안고 싸우려는 특색이 있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서로 몸이 부딪쳤다가 떨어질 때는 꼭 달빛이 잘 비치는 곳에 서려 한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동북쪽을 꺼려하고 서남쪽을 취하려 한다는 점! 본디 서남쪽은 음(陰)의 방위(方位)요, 동북쪽은 양(陽)의 방위인데 따라서 맹발이 싸우는 도중 음기를 흡수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달빛도 음기이니까 대충 들어맞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대세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못 되었다. 각천과 공철은 맹발이 수수량량과 수수심해의 초식 - 과연 그게 초식인지는 알 수 없으나 - 을 시전하기 전에, 그러니까 그가 물기둥으로 변하기 전에 서둘러 싸움을 끝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만불조종(萬佛祖宗)! 만법조종(萬法祖宗) 또는 만불귀종(萬佛歸宗)이라고도 하는 것은 소림 최후의 초식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천하무적(天下無敵)의 초식이었다. 과연, 맹발도 만불조종이 어떤 것인지 아는 듯했다. 그는 재빨리 물기둥으로 변하려고 했다. 그래,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엔 그 변화의 속도가 떨어짐으로 써서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물로 화하더니 무릎을 지나 허리 부근까지 차올랐다.


그런데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차오르던 물이 허리께에서 멈춰 버린 것이었다. 그러니까 허리 밑은 물이고 허리 위는 인간인 반인반수(半人半水)의 괴물처럼 되고 말았다. 놀란 것은 각천과 공철만이 아니었다. 당황한 기색의 맹발은 내공의 힘을 끌어모아 상반신도 물로 변하려고 했지만 그게 여의치가 않았다. 각천과 공철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상반신을 베려고 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물로 변하지 않은 상반신 또한 베어지지 않았다. 아직 변하지는 않았지만 상반신 또한 물의 성질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찌르면 들어가지만 맹발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남지 않았다. 맹발은 불편한 듯 몸을 뒤틀었다. 물기둥이 가슴께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허리 아래로 내려왔다. 맹발은 몸전체를 물기둥으로 만들려고 애를 썼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것이 원활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맹발은 그런 상태에서 재차 공격을 받자 물기둥으로 변하려는 노력을 포기해 버렸다. 그의 몸이 사람으로 돌아왔다. 그는 숨을 들이쉬며 몸을 부풀렸다. 그 흡입력이 어찌나 세던지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이파리들이 맹발을 향해 어지럽게 휩쓸려갔다. 각천과 공철은 그 자리에 버티어 서기 위해 체중을 뒤로 실으며 안간힘을 썼다. 맹발의 몸은 세 배로 불어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몸속의 바람을 일시에 쏟아냈는데 귀를 에이는 듯한 차가운 바람이 각천과 공철의 얼굴을 덮쳐왔다. 귀를 에이는 듯한.... 아니다. 그 정도가 아니었다. 우선 땅에 박힌 돌위에 눈꽃이 피고 나뭇잎들은 순식간에 메말라 얼어죽은 낙엽으로 화해 버렸다. 추위는 각천과 공철의 온몸을 얼어붙게 했다. 이윽고 맹발의 입에서 토해지는 한풍(寒風)이 그쳤을 때 각천은 몸에 이상을 느꼈다. 추위에 가장 예민한 부분의 하나인 귀끝이 와삭하고 부서져내렸던 것이다. 각천은 놀라는 한편 서둘러 공격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오른다리를 움직였을 때 오른쪽 새끼발가락이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완전히 얼어 있어서 그런지 아직 통증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몸이 마른 밀가루처럼 각질이 되어 떨어져 나가는 것이극심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고, 공철...." 그는 입술마저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공철도 각천과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이라 비교적 상태가 나았다. "어떻게 된 거야?" 공철은 어기적어기적 각천에게로 걸어가 말했다. "조, 조심하게!" 각천이 경고하는 순간 맹발이 다가왔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당금 무림의 최고 고수들이 고작 이 정도인가?" "너, 넌 대체 누구냐?" "치우신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다. 후후...." 맹발은 옅게 웃음을 머금었다.


"치우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도 안다. 치우검은 보검 중의 보검이자 악마의 검이라는 것도. 하지만 치우신을 모시고 있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구나. 대체 너의 정체는 무엇이냐?" "의심이 많은 자로군! 가는 귀가 먹었다면 한 번 더 말해 주지. 난 치우신을 모셨던 호위무사(護衛武士)였다. 수천 년을 뛰어넘어 환생(還生)했지. 곧 치우신도 현생(現生)으로 돌아오실 거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맹발은 금강지(金剛指)로 각천의 인후(咽喉)를 꿰뚫었다. 각천의 인후는 창으로도 뚫지 못하던, 그야말로 철벽(鐵壁)처럼 강했었다. 하지만 맹발의 금강지 앞에서는 두부처럼 물렁하기만 했다. 제 54 장 맹발의 약점은 ① 맹발의 금강지는 인후를 꿰뚫고 목 뒤로 뻗어나갔다. 금강지를 뽑았을 때 각천은 쿨럭하고 기침을 했다. 뚫어진 구멍을 통해 피가 밖으로 분출돼 나왔다. 핏줄기는 이슬이 내린 것 같은 바닥에 떨어져 눈꽃 위로 번져갔다. 공철은 부릅뜬 눈으로 친구의 죽음을 목도하고 있었다. 경악과 함께 가슴저민 고통이 엄습해 왔다.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광기어린 고함소리가 공철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공철은 이성을 잃고 맹발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하지만 아직 몸이 덜 풀려 있었기 때문에 그저 맥없는 몸짓으로 손을 허우적댔을 뿐이었다. 맹발은 남의 고통을 즐기는 듯한 눈으로 공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통스러운가?" "으흐흐흐흐...."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며 공철은 양 팔을 허우적댔다. 맹발이 공철의 가슴에 오른손을 갖다댔다. 공철이 뿌리치면 재빨리 피했다가 원래로 공격자세로 돌아갔다. 그러나 고양이가 쥐를 다루듯 치명적인 마지막 한 수는 삼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공철이 운기조식을 통해 몸의 상태를 정상으로 되돌리고 있었는데도 맹발은 계속 공격의 고삐를 늦추고 있었다. 아까 각천의 경우처럼 죽이기를 원했다면 벌써 죽였을 터였다. 왜 그랬을까? "네놈을 살려주마!" 맹발의 그제서야 본심을 드러냈다. "차라리 어서 날 죽여라!" 공철은 비장한 각오로 맞섰다. "아무리 불가의 고승(高僧)이라 하더라도 목숨이 아깝지 않단 말이냐?" 그 말에 공철은 껄껄대며 웃었다. "죽는다는 것은 고해(苦海)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 구원되는 길인데 무얼 두려워한단 말이냐?" "고해의 바다를 보기나 했는가?" 맹발은 반문은 차라리 비아냥거림이었다. 공철은 눈을 감았다. 몸이 차츰 풀려오고 있었으나 자신이 맹발의 상대가 안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섣불리 공격하지 않고 있었다. 맹발이 말했다. "저기 쓰러져 있는 질마귀 용골대란 놈은 큰 그릇이 못 되지. 세상 사람들이 그를


경이원지(敬而遠之)하는 것은 그의 그릇이 작기 때문이야. 노승(老僧)은 달라. 무공도 무공이지만 인품 또한 그에 못지않다는 걸 알고 있어. 하지만 말이야. 내가 노승을 죽이지 않고 이 자리를 떠나가면 어떻게 될까? 노승은 친구가 죽는데도 비겁하게 도망치는 데만 급급하다는 얘길 듣게 될 거야. 노승은 다시 소림사로 돌아가 옛날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가? 단 한 가지, 해결책은 자살을 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 또한 쉽지 않을 거야. 불가의 고승은 살생도 아주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는다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면 그 또한 부처님에게 죄를 짓는 일이지. 이래저래 노승은 내게서 빠져 나갈 수 없어." 공철은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입술 주변이 일그러졌다. "어차피 보름 후면 새 사상이 도래한다. 그것은 노승의 선택과는 상관이 없는 얘기야. 새 세상이 도래한다고 해서 호의호식(好衣好食)하던 사람들이 굶거나 건강하던 사람들이 질병(疾病)에 시달리고 서로 질시하고 미워하며 전쟁을 일으키는 세상이 도래하는 것은 아니야. 세상은 원래 그렇게 조용히 바뀌고 마는 거야. 소림사는 청나라와 절대 결탁하지 않겠다는 결의(決意)를 했다던데, 그 결의가 소용 있었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차피 순응을 하게 돼 있어. 등 따습고 배부르면 그곳이 천국이지 달리 무슨 정토(淨土)가 있고 극락(極樂)이 있겠나? 노승이 날 좀 도와줘야겠네. 내가 노승과 같이 일을 한다면 세상의 평판이 나쁘지만은 않을 거야." "네놈한테는 최상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최악이지." "그런가?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맹발은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공철의 수혈을 짚었다. 공철이 썩은 볏단처럼 풀썩 고꾸라졌다. 맹발은 쓰러진 용골대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용골대는 부시시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각천과 공철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만족한 듯이 말했다. "놈들을 해치웠군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맹발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느티나무 위로 솟구치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어르신, 같이 갑시다!" 용골대는 뒤쳐지는 것이 싫었든지 서둘러 맹발을 쫓아갔다. 각천과 공철이 나뒹굴고 있는 천애산 공터는 차츰 한기(寒氣)를 잃고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얼어붙었던 나무가 녹으면서 땅은 습기로 인해 질척거렸다. ② 그때, 저만치 언덕 아래에서 신형이 쏘아져오고 있었다. 몹시 서두른 탓인지 그들은 언덕을 다 올라오자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들은 왕탁과 염군조였다. "형님, 저길 보십시오. 우리가 한발 늦었나 봅니다." 염군조가 가리켰다. 왕탁은 공철을 염군조는 각천을 각각 살펴보았다. "여긴 죽었습니다. 그쪽은요?" 염군조가 말했다. "여긴 아직 맥박이 뛰고 있어. 체온이 많이 떨어진 것 같은데 불 좀 지펴야겠어." 염군조가 땔나무를 구하려다가 풀숲과 나무들이 온통 습기에 젖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말했다. "여긴 비가 왔었나 봅니다. 땅이 질척거리는데요." "그럴 리가 없는데? 우리가 여기 올라올 때 비가 오는 기색이 없었잖아." "그러 게 말입니다. 정말 이상하네. 아무튼 여기 있는 땔감으로는 불을 지피기가 어렵겠습니다." "그럼 좀 멀리 나가서 찾아봐." 염군조가 땔감을 구하러 간 사이 왕탁이 공철의 막힌 혈도를 풀어주었지만, 공철은 쉽게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불을 지피고 주변의 공기가 훈훈해지고 나서야 공철은 생명반응을 보였다. 그것도 처음엔 옅은 신음소리만을 냈을 뿐 의식이 돌아왔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영약(靈藥)이나 환약(丸藥) 따위를 갖고 다니지 않는 왕탁은 혹시나 해서 공철의 몸을 더듬었다. 영약 두 알은 공철이 아니라 죽은 각천의 몸에서 나왔다. 왕탁은 입안에서 영약을 으깨어 물과 함께 공철의 입속으로 흘려넣어 주었다. 그러면서 몸을 열심히 주물러대자 혈색이 좋아졌다. "이제 피가 제법 도는 모양인데요." 다리쪽을 주무르던 염군조가 말했다. 마침, 그때 공철이 깨어나 물을 요구했다. 물을 먹여주자 공철은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댁들은 뉘시오?" "소생은 왕탁이라 하옵고 이쪽은 염군조라고 합니다." "어디서 이름을 들어본 것 같은데." "맹발의 치우검 때문에 항마천왕 마종기와 정보를 교환하던 사람들입니다." "아, 바로 그 왕 공자이시구먼!" "저희들은 소림파에서 질마귀 용골대의 도전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고 쫓아온 것인데... 어떻게 된 겁니까?" 표정이 침울해진 공철이 기침을 콜록대며 일어나 앉는다. 모닥불이 그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보는 바와 같네." "졌단 말입니까?" 왕탁이 말했다. "그렇네. 하지만 질마귀에게 진 것이 아닐세." "그럼 누가?" "용골대를 물리치고 얼마 안 있자 맹발이 나타났네. 자네들도 비무대회에서 보았을 테지만 정말 무서운 자였어. 아니, 그 자는 인간이 아니었어. 도저히 인간이라고 할 수 없었지. 소림 최후의 초식인 만불조종을 펼쳤는데도 끄떡도 하지 않았어. 그 초식은 소림역사상 세 번밖에 쓴 적이 없는 초식이었네. 상대가 강하지 않으면 쓰지 않는 법이지. 한 마디로 우린 속수무책이었네. 빈도는 이제껏 누구와 싸우면서 그렇게까지 굴욕을 느낀 적이없었네." "하지만 두 분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염군조가 말했다. "그래, 자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겠네. 당금 무림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얘기하려는 것이겠지. 맞네, 난 이제껏 실력으로 누구에게 져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네. 각천도 그랬지. 하지만 우리 둘이 힘을 합쳐도 맹발을 당해낼 수가 없었어...." 공철은 패배의 고통과 친구를 잃은 슬픔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치우검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물건입니다. 치우검을 맹발의 손에서 빼앗아야 합니다." 왕탁이 말하자 공철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빼앗아야겠지. 하지만 무슨 수로?" 공철은 맹발의 실력을 알고는 그 누가 싸워도 그를 이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당금 무림에서 그를 이길 자는 없다. 각 문파의 용맹한 무사들을 다 끌어모은다 해도 그를 이길 수는 없을 터....' "저희도 무슨 수가 있는 건 아니지만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의욕이 왕성한 건 좋네만, 방법이 없질 않은가?"


"아무리 무공이 고강한 자라도... 설혹 맹발이 인간이 아니라 하더라도 약점은 있을 겁니다." "물론 약점이야 있겠지만...." 공철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든다. "게다가 그 치우검이라는 것을 우리가 빼앗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지도 모르겠어." "왜 그리 나약한 소리를 하십니까?" "마도(魔道)가 지배하는 세상이 오는 것을 누가 바라겠나? 하지만 맹발은 자기가 환생한 치우신의 호위무사라고 했어." "치우신의 호위무사요?" "그래." "분명히 그 자가 자신의 입으로 그렇게 말했단 말입니까?" "사실이네. 그렇다면 우리가 치우검을 반드시 빼앗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 것인가?" 그러나 왕탁의 입장은 달랐다. 맹발이 환생한 치우신의 무사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일단은 조미미를 찾아야 한다. 치우검은 그 다음 문제다. 그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공공아였다. 공공아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다. 왕탁은 소림사의 고수들마저 맥을 못 추고 패배한 이상,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물러나든가 그 자와 일대 사투를 벌이든가! 그리고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왕탁은 공철에게 조언을 구했다. "노승께선 그 자와 싸워보셨으니 장단점을 파악하고 있을 게 아닙니까?" "장점만 있었지, 단점은 없었네." "아무리 그래도...." 왕탁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 공철은 마지못해 말하는 듯 대답했다. "그 자는 음의 방위에서 우리와 맞서려는 것 같았네." "서남쪽 말입니까?" "그렇네. 가능하면 달빛도 안고 싸우려는 듯했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이기지 못했을 걸세." 왕탁은 뒷말을 흘려들으며 다시 말했다. "그래서요?" "뭐가 그래선가? 그게 다일세." "그 외에 다른 약점은 없습니까? 노승께서 공격하셨을 때 약점을 보인 곳이 있을 거 아닙니까?" "자네, 비무대회에서 맹발이 싸우는 걸 보지 못했나?" "웬걸요. 그 대회에 참가까지 했는데요." "그러구서두 묻는 겐가? 보았을 거 아닌가. 맹발이 단 한수에 상대를 거꾸러뜨리는 걸." "그럼, 노승께서도 단 한수에...." "그렇진 않았네. 하지만 내 무공이 뛰어나서 그런 건 아니었지. 그 자는 우리를 봐주는 것 같았네. 참, 그 자는 낙하 모래밭에서와는 달리 물기둥으로 변하는 것이 힘들어 보였네. 반은 물기둥으로 변하고 반은 자신의 본래 모습 그대로였지." "수수양양(水水量量)이라는 초식 말입니까?" "그렇네. 지금 아무런 근거도 없이 떠올려 보는 것이네만, 만일 그 초식을 막을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자가 물기둥으로 변하기 전에 싸움을 끝낼 수 있다면 승산(勝算)이 있겠지. 하지만 그 자는 수수양양이라는 초식을 쓰지 않아도 능히 다른 고수들을 이길 수 있을 걸세." "달빛, 음의 방위, 낙하(洛河), 수수양양...." 왕탁이 중얼거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염군조가 말했다.


"하나같이 음기(陰氣)와 관련돼 있군요." "그래, 나도 그 생각을 했어. 노승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비무대회 때는 벌건 대낮이었네. 햇빛은 더할나위없이 강한 양기(陽氣)가 아닌가? 그 자는 그런 상황에서도 유감없이 힘을 발휘한 걸세." "딴은 그렇군요." 염군조가 말했다. "하지만 비무장 옆에는 큰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물의 음습한 기운이 햇빛의 양기를 차단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글쎄...." "이 산속에서 쉽게 물기둥으로 변하지 못한 것은 습기가 부족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왕탁이 말했다. "낸들 어찌 알겠는가? 공철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생기발랄한 청년이 맹발을 이기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철의 나이가 되면 사람 보는 눈이 절로 생기게 된다. 청수한 얼굴에 예의바른 태도, 눈빛이 살아있었지만 그것은 거짓 없고 매사 본의(本義)에 충실하려는 유사(儒士)의 풍모이지 무사의 매서움은 아니었다. 그런 매서움 없이 어찌 맹발을 상대하겠는가. 왕탁이 적극성을 보이자 공철이 말했다. "설마 자네가 맹발을 상대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니긴요. 소인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맹발과 맞설 작정입니다." "허허... 나를 보구서도 그러는가? 이란격석(以卵擊石)일세.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지. 사내대장부가 싸울 용기가 없어 겁을 집어먹는 것도 문제이지만, 헛된 죽음을 용기라고 생각하는 건 곤란하네. 그건 만용(蠻勇)일세.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도 목숨을 아껴야 할 때는 아껴야 하는 법이네." "아니, 노승께선 친구분이 저렇게 처참하게 죽었는데도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흥분한 것은 염군조였다. "날 몰아세우지 말게나." "아니면요? 이제 그 자가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걸 보시겠다는 겁니까?" 왕탁은 염군조의 무례한 말투를 나무랐다. 그러나 염군조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세상을 휘젓다니? 누가 말인가?" 공철이 말했다. "맹발이지 누구겠습니까?" 왕탁이 반문했다. "난 또... 그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네. 맹발이라는 자가 초인적인 힘을 지녔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 자 혼자서 뭘 어쩌겠는가? 용골대가 붙어 다닌다고는 해도 그리 큰 힘이 되지는 못할 걸세. 그걸 알기 때문인지 내게 도와달라고 하더군." "노승께 말입니까?" "그렇네. 하지만 난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했지. 그것은 반대로 얘기하면 맹발 그 자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있다는 증거이지." ③ 그때였다. 한 줄기 전광(電光)이 천애산 위 어두운 밤하늘을 갈랐다. 번개였다.


우르릉 쾅! 우르릉--! 이어 세상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가 났다. 후둑, 후둑,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형님, 이거 아무래도 오늘은 철수를 해야겠는데요." 염군조가 말했다. "노승께서 머무시는 곳으로 저희들이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왕탁이 말했다. "아닐세. 난 여기 있겠네." "폭우가 내릴 것 같은데 도롱이 하나 없이 어찌 여기 머무른단 말입니까? 비를 막을 도롱이가 있어도 그렇지요." "비가 오든 말든 난 여기 머무르겠네." 그러며 끙하고 돌아앉는다. 왕탁은 공철이 왜 그러는지 곧 눈치를 챘다. 각천이 죽은 상황에서 혼자 돌아가기가 꺼려진 듯했다. "그럼, 저희가 있는 모옥으로 가시죠. 넓진 않지만 비도 피할 수 있고 약간의 따뜻한 음식도 있습니다." 공철은 그것까지 마다하지는 않았다. 염군조는 시체가 된 각천을 들쳐업고 모옥으로 돌아왔다. 염군조는 폭우를 고스란히 맞으며 운중마룡과 함께 각천을 가매장(假埋葬)했다. 비는 밤새 내렸다. 다음날 아침까지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구름 사이로 햇빛이 났다. 염군조는 낙양 시내로 나가 먹을 것을 사올 겸 해서 동정을 살피고 돌아왔다. 낙양에는 아직 왕탁과 운중마룡을 찾는 용모파기(요즘의 몽타주)가 곳곳에 나붙어 있다고 했다. 또한 공공아는 반삼계, 익다와 함께 용호표국에 머물면서 하루라도 빨리 이쪽에서 소식을 전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였다. 밤이 되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을에 낙양에서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기는 처음이었다. 번개와 천둥이 동반된 비는 이틀 동안 더 계속되었는데, 모옥에 모인 네 사내는 거의 말을 나누지 않고 있었다. 특히 공철은 자리보전을 한 채 돌아누워 승려의 신분도 잊은 채 염군조가 받아온 술만 축내고 있었다. 그러나다 문득 공철은 사람들을 불러모아 놓고는 말했다. "자네들 현해(懸解)라는 말을 들어봤나?" 염군조와 운중마룡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왕탁은 서책을 가까이 하던 시절에 외웠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노자 아니면 장자에 나오는 얘긴인 듯합니다만." "바로 보았네. 장자(莊子)의 양생편(養生篇)에 나오는 말씀이지. 그 풀이는 이렇네. 때를 만나서 안정하고 변을 당해서 순종하면 슬픔과 기쁨이 내심(內心)에 들어가 방해할 수 없다. 어떤가? 과연 그래 보이나?" "......." 세 사내는 침묵했다. 공철이 굳이 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정을 이성으로써 다스릴 수 있다는 의미로 이(理)로서 정(情)을 완화하거나 혹은 이로써


정을 순화(醇化)한다는 것이지. 나는 어제 오늘 각천의 죽음을 잊어 버리려고 갖은 애를 썼네. 그것은 이미 지난 일이고 나로선 손을 쓸 수 없는 일이라는 명분이었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치욕스런 일이긴 해도 어쩔 수 없다는 낭패감에 사로잡혔기 때문일세. 나도 확실히 늙긴 늙었나 보네. 젊었을 때야 어찌 한 번의 실패에 낙담을 하 겠는가. 자네들을 보고 있자 나의 무기력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깨닫게 됐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네들의 혈기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지. 자네들이야말로 의(義)로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네. 의란 말뜻 그대로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겠나? 맹발이라는 자, 그리고 치우검... 확실히 예감이 안 좋네. 먹구름이 세상을 뒤덥고 있어." "생각이 바뀌신 모양이군요. 그럼, 저희들을 도와주시겠습니까?" 왕탁이 말했다. "물론 기꺼이 도와주지." 왕탁과 염군조 그리고 운중마룡까지--운중마룡은 염군조와 화해를 한 후 그를 아버지라 부르고 있었다--반겼지만, 아직 공철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묘책이 없네." "묘책이야 저희들이 마련하겠습니다." 염군조가 큰소리를 쳤다. "그건 말로 되는 게 아니지. 이를 테면 말일세. 이미 알고 있듯이 음기(陰氣)가 충만한 때 그 자와 싸워서는 안된다는 것이네." "지금이 음력 구월 만추(晩秋)인데 그럼 언제 맞서야 한단 말입니까?" 왕탁이 말했다. "일양(一陽)이 내복(來復)을 해야지." "음력 십일월이라면 두 달이나 더 기다려야 한단 말입니까?" "그때가 되면 맹발도 힘을 잃게 될 걸세." "감이 익어 떨어지기를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그때가 되면 맹발은 이미 자신이 원하던 것을 성취했을지도 모르구요." "허나, 짐작대로 맹발의 무공과 초인적인 능력이 음기를 보양받음으로써 그리 된 것이라면 과연 우리가 그 자를 당해낼 수가 있을까?" "그러니까 죽음을 각오해야지요." 운중마룡이 말했다. "죽음을 각오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닐세. 무작정 해보겠다는 생각들은 버리게. 그거야 말로 헛되이 목숨만 버리는 바보같은 짓이니까." 과연, 묘책이 있을 수 있을까? 여러모로 궁리를 해 봤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칙 외에 정해진 것은 없었다. 一. 밤을 피해야 한다. 二. 강변이나 습지 같은 곳을 피해야 한다. 三. 하루 중 양기가 가장 충만한 미시(未時)가 유리하다 四. 맹발이 수수양양(水水量量)의 초식을 시전하기 전에 그를 제압해야 한다 이상의 원칙이란 것도 그리 해야 한다는 것이지, 그렇게 한다고 해서 반드시 승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란 점에 왕탁의 고민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마저 천애산 정상에 펼쳐진 막(幕)을 여하간 뚫고 들어갈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래저래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것!


왕탁은 일단 맹발을 자극할 수단을 찾았다. 그 하나로 아미파의 용골대에게 도전장을 냈다. 귀하(貴下)의 실력이 하늘을 찌르고도 남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이렇게 붓을 들게 되었습니다. 소림파의 각천과 공철이 귀하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 사실이라면 감히 비무를 청하고 싶습니다. 천하를 주유(周遊)하며 고수에게 한 수 배우는 게 소생의 학업(學業)입니다. 강호말학(江湖末學)인 소생에게 한 번 기회를 주신다면 다시 없는 광영으로 알겠습니다. 허나, 기회를 주시지 않는다면 강호에 떠도는 소문이 거짓인 것으로 믿고 용골대란 인물의 실력이 과장된 것으로 알겠습니다. 응답은 용호표국으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 건목도광 왕탁 정중하면서도 상대를 자극하는 내용이었는데, 아미파에서는 아무런 답장도 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만수(萬壽) 객점에 머물고 있던 용골대와 차차유는 이미 자취를 감추고 난 뒤였다. 그러자 다시 천애산 정상의 막(幕)을 여하간 뚫을 수 있느냐가 관건으로 대두되었다. 구수회의가 열렸다. 이번에는 공공아와 반삼계도 모옥을 찾아와 참여했다. 그들도 더 이상 조미미를 구하고 치우검을 찾는 것(더불어 섭간을 죽인 배후를 밝혀내는 것)을 미룰 수 없다는 데 공감했다. 비무대회를 통해 맹발의 괴이한 능력을 알게 된 만큼 더 이상 미룬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천애산 정상의 막을 뚫는 비결(秘訣)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원래 좀 엉뚱한 데가 있는 반삼계가 이런 말을 했다. "흠... 얘기를 듣고 보니 맹발의 무공은 음기(陰氣)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거구먼. 그렇다면 그 막도 음기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왕탁이 반문했다. "이제껏 물리적 힘으로 그 막을 뚫으려고 했지, 음과 반대되는 성질인 양을 이용해 보지 않았잖아." 그러고보니 막을 뚫는 것에 대해 집요하지가 못했었다. 왕탁의 목각인형을 갖다댔는데도 실패하자 그저 몇 번 애를 써보고는 포기한 점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럼 불이라도 지피라는 건가?" 염군조가 말했다. "좋은 생각이네요. 왜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공공아가 말했다. 그것은 이양제음(以陽制陰)의 전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쇠뿔은 단김에 빼라고 했던가! 다음날 그들은 미시가 되기 전 천애산에 올랐다. 제 55 장 칼산 지옥 내가 가면 ① 익다를 제외하고 여섯 명 모두가 참여했다. 익다는 급한 볼일을 본 후 나중에 합류하겠다고 했다. 천애산 정상은 돌산(石山)이라 주위에 수목이 거의 없다시피했다. 은막은 예전 그대로 투명하면서도 강력한 저항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몸을 부딪쳐 보기도 하고 검으로 찔러 보기도 했으나 여지없이 퉁겨져 나왔다. 무거운 돌을 던지거나 뜨거운 물을 뿌려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철옹성(鐵瓮城)이었다. 그러나 이미 예상한 일이였기에 크게 낙담하지는 않았다. 미리 짚더미와 장작을 준비한 그들은 막 앞에 높이 쌓아놓고 화섭자로 불을 지폈다.


따닥, 따닥! 좀 있자 장작개비가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열이 오르자 불길에 닿은 투명한 막 주변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왕탁 일행은 환호했다. 조짐이 좋았다. 아니나 다를까, 벌겋게 달아오른 부위가 차츰 넓어져 갔다. 막에 구멍이 생기거나 녹아내리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런데.... 쪽빛으로 청량(淸凉)하기만 하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비는 불을 지핀 곳 위로만 내리고 있었다. "아미타불... 신령한 노릇이로고!" 공철은 염주알을 굴리며 입안에서 뭔가를 중얼거렸다. 빗방울이 굵어지는가 싶더니 인력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양의 소나기가 쏟아졌다. 활활 타오르던 불길은 순식간에 꺼져 버렸다. 동시에 벌겋게 열을 받았던 막도 원상태로 되돌아갔다. 혹시나 싶어 달아올랐던 부위를 여러 차례 두드려 보고 칼로 찔러도 보았지만 끄떡도 없었다. 왕탁은 다시 불을 지피기 위해 죽은 나무와 메마른 낙엽을 긁어모으기를 제안했다. 다들 왕탁의 의견에 동조했으나 공철만은 반대였다. "헛수고일세. 불을 지핀다 해도 비가 또 올 걸세. 비는 맹발이내리게 한 거야." 그러자 다들 웅성댔다. "맹발에게 그런 능력까지 있단 말입니까?" 왕탁이 말했다. "그보다 더한 능력을 갖추었다 해도 난 놀라지 않을 걸세." "그럼 어쩌면 좋습니까?" "다른 방법을 강구해 봐야지." 그러나 공철의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공허하게 들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왕탁 일행은 서로 수군대더니 공철을 제쳐두고 한 번 더 불을 지피는 방법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등유(燈油)까지 구해와 불을 지핀 장작에 연신 끼얹어댔다. ② 그렇게 부산을 떠는 사이 시간은 신시(申時)로 접어들고 있었다. 왕탁 일행이 열심히 작업을 하는 가운데 공철은 서너 장 뒤로 물러서서 포도알 크기만한 염주알을 굴리며 불호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등유에 젖은 장작은 순식간에 활활 타올랐다. 불길이 센 만큼 금방 투명한 막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아까와는 달리 왕탁 일행은 긴장한 채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번개도 치지 않았는데 어디선가 천둥소리가 들려오더니 집중적으로 폭우가 쏟아져내렸다. 불길은 삽시간에 사그라들었다. 왕탁 일행은 공철을 볼 면목이 없어졌다. 공철은 눈을 지그시 내려감은 채 불호를 외우고 있었다. 한데 두 눈에서 구슬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왕탁 일행은 왜 우는지 선뜻 물어보지도 못하고 멀거니 서 있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노승(老僧)의 눈물은 예사롭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거 젊은 사람들 앞에서 초라한 꼴까지 보이게 되는군." 이윽고 공철이 입을 열더니 이내 씁쓸하게 웃는다.


왕탁은 그런 그의 모습에 연민을 느꼈다. "남은 등유가 있나?" "네, 반쯤 남았습니다만...." 염군조가 대답했다. "잠깐 시간을 좀 주게." "어인 말씀이신지요?" "여기서 기다리게.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하고 오겠네." 공철의 심각한 얼굴에 다들 어리둥절했다. 공철은 날랜 신법을 이용해 바람처럼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이각이 채 못 되어서였다. 의복은 아까 그대로 잿빛 장삼에 고동색 가사(袈裟)를 입고 있었는데, 손에는 커다란 목탁을 하나 들고 있었다. 공철은 막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천수경(千手經)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 아약향도산(我若向刀山) 칼산지옥 내가 가면 도산자최절(刀山自催折) 칼산 절로 무너지고 아약향화탕(我若向火湯) 화탕지옥 내가 가면 화탕자소멸(火湯自消滅) 화탕 절로 없어지고 아약향지옥(我若向地獄) 모든 지옥 내가 가면 지옥자고갈(地獄自枯渴) 지옥은 절로 마를지니라 아약향아귀(我若向餓鬼) 아귀 세계 내가 가면 아귀자포만(餓鬼自飽滿) 아귀 절로 배부르고 아약향수라(我若向修羅) 수라 세계 내가 가면 악심자조복(惡心自調伏) 악한 마음 항복되리라....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南無觀世音菩薩摩訶薩) 나무대세지보살마하살(南無大勢至菩薩摩訶薩).... ....... 나무본사아미타불(南無本師阿彌陀佛)! 비장한 각오가 선 듯 공철은 천수경을 두 번이나 읊조린 후 말했다. "염 소협, 등유를 내 머리위에서부터 붓게." "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염군조는 놀라 왕탁을 바라보았다. 왕탁이 공철의 뒤로 가 무릎을 꿇었다. "대사님, 대체 뭘 어쩌시려는 겁니까?" "심지가 곧아야 불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지 않겠나?" "허면... 불길 속에서 등신불(等身佛)이라도 되시려는 겁니까?" "못할 것두 없지." 너무나 쉽게 나온 대답에 다들 할 말을 잃고 있었다. "대사님, 이러시면 안됩니다. 이건 무모한 짓입니다. 만용(蠻勇)은 용기가 아니라고 하신 분이 누구셨습니까?" "그래, 못난 내 입으로 그랬지. 자네한테 그 얘기를 할 때만 해도 나는 미련이 있었던 걸세. 내 가슴


밑바닥에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거지. 하지만 내 친구 각천이 어떻게 죽었나? 그런데도 난 잠시나마 수치심을 잊고 있었던 걸세. 하지만 이제 와서 그 수치심을 보상하기 위해 이러는 건 아닐세. 보상심리 또한 속진(俗塵)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되는 거니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목숨까지 내던질 필요야 없질 않습니까?" "그럼 이 투명한 막을 어떻게 뚫으려는 건가?" 그러자 왕탁은 대꾸할 말을 잃고 막막해졌다. "하지만...." "그만두게. 난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네. 맹발이 비를 뿌리는 신통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내가 공력을 돋우고 있으면 불은 꺼지지 않을 걸세." "대사님, 이러시면 안됩니다!" 하나같이 달려들어 공철을 만류했지만, 공철은 마음을 굳힌 듯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왕탁이 안되겠다 싶어 등유가 든 통을 뒤집어엎으려 하자 공철이 말했다. "자네들이 나를 외면하기 위해 이곳을 떠난다 해도 난 혼자서 할 것이네." 워낙 공철의 결심이 굳자 왕탁 일행도 더 이상 만류할 수가 없었다. 왕탁 일행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왕탁과 염군조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편 반면 공공아와 반삼계는 불가피하지 않느냐는 융통성 있는 입장을 보였고, 운중마룡은 무덤덤하게 관망하는 자세였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아니었다. 공철의 의지는 확고했다. 심각한 시간이 지나자 왕탁 일행은 마음의 평정(平靜)을 되찾았다. 이윽고 공철의 지시에 따라 염군조가 머리 위에서 등유를 끼얹었다. 시꺼먼 기름이 반질반질한 머리를 타고 흘러내려 장삼과 가사를 적셨다. "한곳으로 흘러내리게 하지 말고 골고루 뿌리게. 그래야 잘 타지 않겠나?" 공철이 들어가 앉을 짚더미와 장작 위에도 남은 기름이 부어졌다. 온몸에 등유를 뒤집어쓴 공철이 그 위로 걸어들어가 앉았다. 그는 착잡하고 초조한 마음을 달래려는 듯 목탁을 두드리며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密多心經)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密多時)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사리자(舍利子)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 암송이 끝나자 공철은 왕탁에게 목탁을 내밀며 말했다. "자네들이 맹발을 죽이고 살아남는다면 이 목탁을 소림사에 전해주게." "부디 열반(涅槃)에 드소서!" 왕탁이 목탁을 받아 품으며 합장을 했다. "극락왕생(極樂往生)하소서!" "정토(淨土)에 드소서!" "적멸(寂滅)하소서!" 뒤에서 각자 한 마디씩 했다. 왕탁이 짚더미에 불을 붙였다. 하얀 연기와 함께 짚더미가 먼저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불이 장작으로 옮겨 붙었을 때는 등유로 인해


시꺼먼 연기가 치솟았다. 마침내 뱀의 혓바닥처럼 날름대던 불길이 공철의 몸을 휘어감았다. 공철은 잠깐 움찔하는 듯했으나 어금니를 악다물며 고통을 참고 있었다. 곧 불기둥이 그의 일신을 뒤덮었다. 운중마룡은 왕탁에게서 건네받은 목탁을 두드리면서 열반송(涅槃頌)을 읊조렸다. 공공아와 반삼계의 눈에서는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불길은 엄청난 기세(氣勢)로 타올랐다. 공철이 입고 있던 장삼과 가사가 다 타고 피부가 그을리면서 피하지방의 기름이 지글지글 타들어갔다. 투명한 막은 열화(熱火)에 견디지 못하고 숯불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때, 예상대로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금방 폭우로 변한 비는 공철의 머리 위로 집중적으로 쏟아져내렸다. 그러나 공철의 일신을 연료(燃料)로 연소(燃燒)되는 불길은 쉬 꺼지지 않았다. 빗방울이 굵어지면 굶어질수록 불길 또한 맹렬하게 타올랐다. 급기야는 장대비가 내리꽂히고 있었다. 왕탁 일행의 몸은 이미 후줄근히 젖어 있었다. 발밑은 금세 진흙탕이 되어갔다. 그런데도 불길은 오히려 내리꽂히는 빗줄기를 밀어내며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다. 불길의 위세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불길에 닿아 열이 오를 대로 오른 투명한 막이 이윽고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흡사 유리물이 녹아내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막 한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렸다. 안쓰러움과 슬픔에 넘쳐 있던 왕탁 일행이 일제히 환호했다. 천지를 진동시키는 폭음이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③ 콰르릉! 쾅! 콰르릉--! 쾅!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동시에 비는 그치고 투명한 막 또한 감쪽같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단단하고 파괴불능의 저항력을 갖고 있던 막(幕)이 일시에 사라진 것이었다. 공철을 휩싸고 있던 불길도 차츰 잦아들었다. 불길속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공철은 고개를 왼쪽으로 꺾은 채 풀썩 넘어졌다. 염군조와 운중마룡이 흙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반삼계는 파낸 흙을 불길속으로 던져넣었다. 잠시 뒤, 불길이 잡혔다. 잿더미속에 쓰러져 있는 공철은 이미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볼품없는 숯덩이로 변해 버린 그는 몹시 고통스러웠던 듯 양 손을 가슴에 꼭 모은 채 쓰러져 있었다. 그러자 그때였다. "크하하하핫!" 머리 위에서 흉측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소리가 난 곳을 올려보자 하얀 바위산 한가운데 뻥 뚫린 동굴입구가 보였다. "군조야, 넌 대사님의 시체를 수습해서 잘 보관하고 있거라! 삼계와 공 소저는 나를 따르시오." "아닙니다, 형님! 시체 수습은 제 아들 놈에게 맡겨주십시오." 운중마룡이 염군조의 말에 이의를 달지 않자 왕탁은 그를 남겨두고 잠룡승천(潛龍昇天)의 신법을 이용해 바위산으로 신형을 날렸다.


왕탁을 뒤쫓아 공공아, 반삼계, 염군조가 각각 연자삼초수(燕子三抄手), 궁신탄영(弓身彈影), 종사도약(종斯跳躍)을 이용해 도약했다. 하나같이 전광석화같은 동작이었다. 바위산은 가팔랐기 때문에 몸이 날렵한 왕탁과 공공아 그리고 반삼계는 쉽게 동굴입구에 도달할 수 있었으나 염군조는 바위산 중간쯤에서 다시 벽호공(壁虎功)을 사용해 도마뱀처럼 기어올라가야만 했다. 다들 동굴입구에 안전하게 올라오자 왕탁이 말했다. "한꺼번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해! 삼계와 공 소저는 여기 남으시오." "무슨 소리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지?" 반삼계가 독두(禿頭)를 흔들며 말했다. "반형, 형님 얘기가 맞습니다. 한꺼번에 들어가는 건 무모한 짓입니다. 형님이랑 제가 먼저 들어갈 테니까 기회를 봐서 뛰따라 오십시오." 염군조가 말했다. "그래, 놈은 동굴에서 살아 어둠에 익숙한 반면 우리는 동굴 구조도 모르고 있어. 일단 우리 둘이 먼저 들어가 살펴볼게." "그러다가 당하면?" "무슨 소리가 나면 곧바로 뒤쫓아오면 되잖아." "여기서 지체할 시간 없어요. 두 분 먼저 들어가든지 다 함께 들어가든지 어서 결정해요." 공공아가 재촉했다. 왕탁은 지체없이 염군조와 함께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동굴은 초입부터 어두컴컴했다. 왕탁은 안광(眼光)을 돋우어 전방을 살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갔다. 염군조는 왕탁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형님, 뭐가 좀 보이십니까? 전 아무것도 안보이는데요." "쉿, 조용해!" 작은 말소리에도 동굴 안은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았다. 동굴은 폭이 넓고 높이도 꽤 높았다. 그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맹발이 선제공격을 해온다고 해도 피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돼 있는 셈이었다. 그들은 신경을 극도로 곤두세운 채 조심조심 걸어갔다. 염군조는 검을 뽑아들고 있었고, 왕탁은 하시(何時)라도 장풍을 날릴 수 있게 발걸음에 맞춰 호흡을 조절하고 있었다. 그때, 석단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맹발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방금 들었던 광오한 웃음소리에 비해 그의 지금 자세는 너무나 침착하고 평온해 보였다. '역시 이 자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구나. 석벽(石壁) 뒤에 숨어서 기습공격을 해왔다면 훨씬 유리했을 텐데 조금도 위축됨 없이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구나.' 왕탁은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서 또 왕형을 만나게 되다니! 기이한 인연이군!" 맹발이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나야말로 맹형이 이런 모습으로 변해 있을 줄 몰랐소." "대관절 내 모습이 뭐가 어떻다는 건가?" "곤륜객잔으로 향하던 마차 안에서 그리고 살인적인 더위로 애를 먹던 사막에서 공공아 소저와 함께 서로를 도와가며 고통을 나누던 진실된 모습은 아니지." "오호, 그런가?"


"능청스럽군! 적어도 그때는 감춰진 이면(裏面)을 짐작조차 못했었지. 조미미는 어디 있나?" "조미미?" "그래, 설마 모른다고 발뺌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나? 난 그녀를 천해객점에서부터 점찍어 두었었는 걸!" "천해객점에서부터 점을 찍다니! 그럼...?" 불길한 예감이 왕탁의 뇌리를 스쳐갔다. 조미미는 천해객점에서 강간을 당했다고 했다. 맹발의 얼굴에 조롱섞인 미소가 번져갔다. "설마 네놈이 미미를...." "하지만 오해 말게. 성욕을 채우기 위해 조 소저를 겁탈한 것은 아니니까!" 왕탁의 눈이 홱가닥 뒤집혔다. "형님, 대체 저 놈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겁니까? 조 소저를 겁탈하다뇨!" 염군조가 물어왔지만 왕탁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다 함께 온 것으로 아는데 공공아 소저는 왜 보이지 않지?" 맹발이 말했다. 염군조는 멍해진 왕탁의 표정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되물었다. "오호, 그게 궁금한가?" "아니, 이렇게 된 김에 그녀의 궁금증도 풀어주려는 걸세. 아마도 그녀가 알고 싶은 것은 섭간을 죽인 살수(殺手)의 배후가 누구냐는 것이겠지." "그래 너, 말 잘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네놈이 제법 아는 눈치로구나! 내 듣고 나서 전해줄 터이니 말해 보거라." "네놈을 상대로 번잡하게 설명할 건 없겠지. 그 살수는 내가 제물로 삼은 희생양이라고만 해 주게." "그럼... 섭간 어른을 죽인 것도 네놈이란 말이냐?" 왕탁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이제서야 조금 충격에서 헤어났나보군!" "대답을 해봐, 어서!" 왕탁은 눈을 부릅뜨고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소리쳤다. "물론이야. 난 그날 섭간에게 치우검을 숨겨 둔 곳을 물으러 찾아갔었지. 하지만 섭간은 이미 인사불성이더군. 그의 건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었어. 난 그냥 나올까 하다가 나중에라도 화근이--그는 어차피 나한테 치우검이 있는 곳을 말해 줄 수 없는 데다 내가 치우검을 구한 시점쯤에 되살아난다면 성가시기만 할 테니까--될 수 있다는 생각에 죽여 없애 버린 거야. 한데, 하필 왜 독약을 써서 죽였느냐구 ? 그건 특별한 의미는 없어. 난 오래 전 치우신의 호위무사일 때부터 늘 독약을 갖고 다녔으니까." "그렇다면 왜 그날 내 누명(陋名)을 벗겨준 거지?" "내가 막 뜨락을 빠져 나가는 순간 자네가 들어오는 걸 봤네. 난 호기심이 생겨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지켜보았는데, 곧 공공아가 들이닥쳐 상황이 이상하게 전개되더군.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네. 섭간이 죽은 이상 치우검이 있는 곳을 아는 유일한 사람은 공공아일 것 같은데 - 내가 그전에 낙양표국의 정보원 노릇을 하면서 곤륜산까지 공공아를 쫓아갔던 것도 다그녀가 치우검을 찾으러 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지 - 나로선 당 연히 그녀와 좀더 친해질 필요가 있었지. 자네의 누명을 벗겨줌으로써 나는 그녀의 돈독한 신임을 받을 수가 있었던 걸세. 물론 난 그전부터 공공아의 은인이었던 터라 반드시 그리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 순간 왠지 장난끼가 발동하더군. 그 때문에 용호표국 앞을 우연히 지나던 무사 하나가 애꿎게 목숨을 잃게 됐지만.... 한데, 얄궂게도 광우룡 부자가 그렇게 쉽게 치우검을 찾을 줄 알았다면 이 모든 것은 생략했어도 좋은 일이었지."


그제서야 왕탁은 납득이 갔다. 그는 다시 조미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천해객점에서 조 소저를 충분히 괴롭혔으면 그만이지 납치까지 해서 뭘 어쩌자는 거지?" "조 소저는 치우신을 잉태하셨네. 새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치우신이 곧 현생으로 돌아오실 걸세. 조 소저는 자신의 몸을 빌려 치우신이 태어나시는 걸 영광으로 생각해야 하네." "미친 놈!" "형님, 대체 저 놈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겁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염군조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왕탁, 자네 눈빛을 보아하니 조 소저를 끔찍히도 사랑한 게로군!" "죽일 놈! 조미미는 어딨나?" 맹발은 대답 대신 일진광소를 터뜨렸다. 왕탁도 더 이상 인내심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동벽서원! 비취색의 현란한 강기가 발출되어 맹발을 행해 쏘아져 나갔다. 맹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강기는 맹발의 심장에 격중되었다. 아니, 맹발의 심장을 뚫고 지나가 뒷벽에 가 부딪치며 굉음과 함께 돌조각 파편을 사방으로 뿌렸다. 과연, 강기가 격중된 것인지 의심을 하고 있는데, 석단에 앉아 있던 맹발의 모습은 홀연히 사라졌다. 표홀영영(飄忽影影)이라는 수법이었다. 처음부터 석단에 앉아 있는 맹발은 가짜였던 것이다. "크하하하하하...." 머리 위에서 귓속을 긁어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맹발은 박쥐처럼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염군조가 검을 상승시켜 일직선으로 내지르며 솟구쳐올랐다. 그러나 맹발이 청룡회전신법(靑龍回轉身法)을 응용한 수법을 통해 몸을 회전시키자 엄청난 바람이 일었다. 염군조는 바람에 밀려 쿵하고 떨어졌다. 거센 바람에 왕탁도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왕탁은 지혜로왔다. 상대가 천장 가까이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동굴벽을 양 손바닥으로 밀어쳤던 것이다. 쾅! 벽에 금이 가며 천장까지 영향을 미쳤다. 천장에서 돌조각이 떨어져내리자 맹발은 신형을 날려 석단 위에 내려섰다. 왕탁과 염군조는 서둘러 그리로 쫓아갔다. "여긴 비좁으니 밖으로 나가서 싸우자." 왕탁의 제안에 맹발은 입가에 기분 나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왕탁은 유리한 환경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승산이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불사초를 먹은 이후 내공의 수준이 엄청나게 높아졌다는 것은 느끼고 있으나 공격수단이 보잘것 없었다. 그는 맹발의 약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동굴 안은 천애산의 정상인데도 습기로 들어차 있었다. 어딘가 수맥(水脈)이 닿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 수맥의 기운을 차단하지 않는 한 승산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조야, 내가 상대할 테니 넌 조 소저부터 찾아보거라." "알겠습니다, 형님!"


염군조가 석실 안쪽으로 움직이려고 하자 맹발이 막아섰다. "그렇게 되지는 않을걸!" 염군조는 검을 휘둘러갔다. 그의 검법은 유래(由來)와 문파(門派)가 모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식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어깨너머로 보아둔 동작을 이것저것 섞어 스스로 익혔기 때문이다. 게다가 검 자체가 길고 무거워 완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지난번 비무대회에서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가서인지 염군조의 어깨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맹발은 그야말로 무예의 달인(達人)이자 초인(超人)이었다. 그의 권법은 용호(龍虎)처럼 강맹하고 독수리처럼 날카로웠다. 염군조는 몇 초식 겨뤄보지도 못하고 숨을 헐떡거리며 왕탁의 뒤로 몸을 숨겼다. "형님, 도저히 못 당하겠습니다." 마침 그때 반삼계와 공공아가 쫓아왔다. "우리가 늦진 않은 거죠?" 공공아가 말했다. "적절한 시간에 들어와 주었소." 왕탁이 대꾸했다. 공공아를 바라보는 맹발의 눈이 기이한 빛을 발했다. 그것은 공공아도 마찬가지였다. "난 당신에게 물어볼 게 있어!" 공공아가 소리쳤다. "물을 것도 없어요. 저 자가 당신의 아버지 섭간 어른을 죽였다고 고백했으니까!" 염군조가 말했다. "뭐라구요?" 놀란 공공아의 시선이 염군조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맹발에게로 향했다. "당신에게 고통스런 일이 되겠소만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오!" 맹발이 말했다. "내 널 요절낼 테다!" 공고아의 그 말이 신호이기라도 하듯 반삼계의 손에서 국수 가락이 쏘아져 나갔다. 국수 가락은 거미의 다리처럼 뻗어 나가 올가미를 씌우듯 맹발의 몸을 칭칭 감아 버렸다. 맹발도 뜻하지 않은 공격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고금(古今) 어디에 국수가락에 의한 공격법이 있겠는가! 사지를 뒤틀어 국수가락을 끊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국수가락은 피부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그때 공공아가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은 맹발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그것이 격중된다면 의외로 손쉬운 승리를 낚아챌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맹발의 능력을 너무 얕잡게 생각한 것이었다. 맹발은 날아오는 채찍끝을 정확히 이빨로 잡아채더니 턱 힘으로 채찍을 잡아당겼다. 끌려가는 채찍을 놓지 않고 힘으로 맞서던 공공아는 원심력에 휘둘려지더니 결국 동굴벽에 가 부딪쳤다. 맹발은 국수가락이 몸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자 석실 안쪽으로 자리를 피했다. "놈을 놓쳐선 안돼!" 왕탁이 소리쳤다. 그때, 바람처럼 나타나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자들이 있었다. 용골대와 차차유였다.


"길을 비키시오. 당신들과는 싸우고 싶지 않소!" 왕탁이 말하자 검을 빼든 용골대가 대꾸했다. "그렇게는 못하지." 용골대와 차차유는 아미파의 무사답게 난파풍검법(亂波風劍法)의 법륜연환삼절식(法輪連環三絶式)을 펼쳤다. 현란한 그 검법은, 그러나 일종의 허초(虛招)인 셈이었다. 이목(耳目)을 그리로 돌려놓고 그들은 암기를 사용했다. 그들은 검을 휘두르는 척하다가 구독봉미침(九毒鳳尾針)을 발끝으로 차올리는 척퇴비침(척腿飛針)의 수법을 썼다. 맹독이 묻은 침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민첩한 왕탁과 공공아는 그것을 재빨리 피했으나 반삼계와 염군조는 동작이 굼떠 몸에 격중되고 말았다. 한데 다행스럽게도 반삼계는 독침을 맞기는 맞았으되 들고 있던 밀가루반죽에 맞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했다. 문제는 염군조였다. 독침이 옷을 뚫고 어깨 아래에 격중되었던 것이다. 독이 퍼지면 반시진이 지나지 않아 즉사하게 된다. 왕탁은 서둘러 염군조를 데리고 뒤로 빠졌다. 공공아와 반삼계가 용골대와 차차유를 저지하는 동안 왕탁은 염군조의 상의를 벗게 했다. 벌써 오른쪽 팔뚝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참게!" 왕탁은 염군조에게서 단검을 건네받아 상처부위를 후벼팠다. "아악-!" 고통에 찬 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왕탁은 도려낸 상처에 입을 대고 빨았다. 입안에 피가 고이면 퉤 하고 뱉어내고 다시 빨기를 수 차례.... 왕탁은 염군조를 부축해 굴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아우는 내려가 있게. 독을 뺐으니까 뒷탈은 없을 거야. 당장은 지혈(止血)이 급선무야." 다시 싸우겠다는 염군조를 억지로 떼놓고 왕탁은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불꽃 튀기는 격전(激戰)이 전개되고 있었다. 공공아는 불사초 덕분에 내공이 정순(精純)해졌는지 능히 용골대를 감당해내고 있었다. 반삼계가 차차유에게 밀리고 있었지만 왕탁이 뛰어들자 사태는 역전되었다. 왕탁은 이들을 상대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다가는 맹발이 달아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상대를 신속히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왕탁은 염군조가 사용하던 검을 빼들고 내공을 최고조까지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몸은 비취색(翡翠色)을 띠어 갔다. 이것은 곤륜산에서 불사초를 먹고 나타난 변화 중 하나였다. 왕탁만이 그런 게 아니었다. 공공아도 공력을 도모하자 피부가 비취색으로 변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채찍은 형광(螢光) 작용을 일으켜 휘두를 때마다 눈을 어지럽혔다. 용골대와 차차유는 왕탁과 공공아의 변화를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자들도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얕보다가는 큰코 다치겠는 걸.' 용골대는 그렇게 생각하며 차차유와 함께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한발 앞서 공공아가 채찍으로 상대의 퇴로를 차단하는 순간 왕탁은 장풍을 날렸다.


같은 동벽서원이었지만, 아까 맹발에게 날렸을 때와는 그 위력에 있어 사뭇 달랐다. 그 장풍에 격중된 차차유는 벽에 가 부딪쳐 즉사하고 말았다. 왕탁은 왠지 가슴이 아팠지만, 그런 감정에 발목이 잡혀 있을 수는 없었다. 용골대는 잘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근근히 버텨낼 뿐 공격다운 공격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안되겠다 싶었는지 맹발이 사라진 곳으로 도망쳤다. 왕탁과 공공아가 앞다투어 뒤쫓아갔다. 그때, 저만치 앞쪽에서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놀라 왕탁과 공공아가 멈춰섰다. 잠시 뒤, 그들 앞으로 용골대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공공아가 채찍을 휘두르려고 하자 왕탁이 제지했다. 용골대의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린다. 가까이서 보자 그의 눈은 이미 반쯤 풀린 상태였다. 그는 비틀거리며 몇 걸음 더 걸어나오더니 꺼져가는 생명을 잡으려는 듯이 허우적대다가 풀썩 쓰러졌다. 그의 뒤통수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검붉은 피는 금방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맹발이 얼마나 독랄한 자인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을 때 가차없이 용도폐기된다. 왕탁은 조심조심 걸어들어갔다. 그의 뒤에 공공아가 반삼계가 바짝 붙어서서 따르고 있었다. 통로를 지나 모퉁이를 돌아가자 상당히 밝고 넓은 석실이 나왔는데, 오래 전 누군가가 인공석(人工石)을 사용해 꾸며놓은 듯 잘 정돈돼 있었다. 맹발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저, 저거 조 소저 아냐?" 반삼계가 제단 위를 가리켰다. 제단 위에는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불룩 튀어나오다 못해 터질 것 같은 배가 보였다. 왕탁도 조미미가 아기를 가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임신기간으로 보아 저렇게까지 배가 커져 있을 리가 없었다. 왕탁이 미심쩍어하는 가운데 맹발이 앉은 자세에서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왕탁 일행을 공격하기 위한 예비동작이 아니었다. 맹발은 자신들이 뒤에 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도 전혀 뒤를 돌아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반면, 왕탁 일행은 순간적인 망설임과 섣불리 공격하다가 제단 위에 누워 있는 여자가 다칠까봐 자제하고 있었다. "치우신이시여!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맹발의 외치면서 일어났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치우검(蚩尤劍)인 게 분명했다. 치우검은 과연 보검(寶劍)이었다. 영롱한 무지개빛 광채(光彩)가 시야를 어지럽혀 왔는데, 그 빛은 맹발의 주문(呪文)이 이어지자 더욱 강렬해졌다. "태음흡기(太陰吸氣)!" "음귀혈혈(陰鬼血穴)!" "월수음결(月水陰結)!" "곤지습하(坤地濕河)!"


"혈루택루(血淚澤漏)!" "건패곤패(乾敗坤覇)!" 주문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왕탁 일행은 무형의 저항력에 부딪친 듯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이러다간 당하겠어요!" 뒤늦게서야 공공아가 말했다. "어쩌지?" 좋은 수가 없어 왕탁도 당황했다. "자네 등판이 얼마나 딱딱해?" 반삼계가 물었다. "그건 왜?" "이러고 있다간 당해. 공 소저와 내가 힘껏 밀어볼게." "알았어." 가까스로 몇 발짝 움직인 반삼계와 공공아는 뒤에서 힘껏 왕탁을 밀쳤다. 아니, 공공아의 경우는 내공을 실어 장풍을 내뻗었다. 왕탁의 신형이 그 충격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는 날아가면서 잠시 아찔했던 정신을 수습하여 맹발의 뒤통수를 향해 무영각(無影脚)을 펼쳤다. 그 직전! 맹발이 간발의 차이로 돌아서면서 치우검을 들이댔다. 왕탁은 피하기 위해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불에 데인 듯한 통증이 전신을 꿰뚫었다. 왕탁의 몸이 균형을 잃고 곤두박질쳤다. 치우검에 찔린 것 같지는 않았다. 피도 보이지 않는다. 일순 치우검에서 발산되던 오색 영롱한 광채가 사라졌다. 하지만 무형의 저항력이 걷혀지지 않고 있어 공공아와 반삼계는 왕탁을 도우러 달려갈 수가 없었다. 왕탁은 가슴을 위로 향한 채 큰대자로 쓰러져 있었다. "날 원망하지 말아라! 명을 재촉한 것은 네놈이니까!" 맹발은 치우검 손잡이를 양 손으로 거머쥐더니 왕탁의 가슴을 향해 내리찍었다. 퍽! 제 56 장 목각인형의 위력 ① 맹발은 예상과 달리 손끝에 전해져 오는 딱딱한 감촉에 이상을 느꼈다. 분명히 심장의 정중앙을 향해 치우검을 내리찍었는데, 치우검은 심장이 아니라 왕탁이 목에 걸고 있는 목각인형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 목각인형에서 뻗어 나온 강렬한 빛이었다. 그 빛에 노출되자 맹발은 얼굴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해골로 변하고 있었다. "수수양양(水水量量)!" 맹발은 재빨리 물기둥으로 변하려고 했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공공아와 반삼계는 어느 틈엔가 무형의 저항력에서 벗어나 넋을 잃고 그 기이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맹발의 얼굴은 이제 살점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해골 특유의 퀭한 눈과 이빨이 흉측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쓰러지기는커녕 물기둥으로 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자 치우검을 들고 제단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 사이 왕탁은 퉁겨나듯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제 목각인형에서 새어나오던 빛은 그쳐 있었다. 왕탁의 눈빛은 예전의 그가 아닌 듯이 보였다.


"그 여자에게 손대지 마!" 왕탁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해골로 변한 맹발은 치우검을 들어 조미미의 배를 가르려고 했다. "건양태양(乾陽太陽)!" 왕탁이 외치자 목각인형에서 한 줄기 강렬한 강기가 발출되었다. 그 강기는 맹발의 등판 한가운데를 꿰뚫고 지나갔다. 그 순간 그의 일신은 해골이 된 얼굴처럼 앙상한 뼈만 남고 살은 발라졌다.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삐끄덕--! 뼈는 더 이상 자신의 신체를 지탱하기가 힘겨운 듯했다. 한순간을 고비로 뼈는 무너져내리며 해체되었다. 그 위로 치우검이 쇳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왕탁이 제단 앞으로 다가서는데, 산발한 여인이 벌떡 일어났다. 조미미였다. "미미야!" 왕탁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조미미의 얼굴은 수척해 보였으나 부푼 배 때문에 몸은 둔하게 느껴졌다.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왕탁은 그간의 감정적 앙금 때문인지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말했다. "네놈은 누구냐?" 조미미는 왕탁을 알아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목소리 또한 남자의 그것처럼 굵은 저음이었다. "아니, 미미야? 나야, 나! 왕탁이야!" 조미미는 핏발 선 눈으로 왕탁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공공아가 왕탁의 뒤로 다가와 말했다. "조 소저가 맞아요?" "맞소." "한데 왜 왕 공자님을 못 알아보는 거죠?" "납치된 후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거 같소." "하지만 남자 같은 목소리는요?" 왕탁도 그 점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조미미가 허리를 굽혀 해체된 뼈마디 위에 놓여 있던 치우검을 집어들었다. "위험해!" 공공아가 손을 뻗어 낚아채려고 했지만 왕탁이 만류했다. "내버려 둬요. 위험하지는 않을 거요. 서 있을 힘조차 없어 보이는데." "정말 괜찮을까?" 쫓아온 반삼계가 불안해했다. 조미미는 치우검을 얼마간 세세하게 살펴보더니 말했다. "너희들은 내 앞에서 무릎을 꿇어라!" 역시 남자의 목소리였다. "......." 그제서야 섬뜩한 느낌이 든 왕탁은 그녀에게 조심스레 접근해갔다. 왕탁이 조미미의 어깨 위로 손을 얹으려고 하자 조미미가 말했다. "날 건드리지 마라! 날 건드리면 죽는다!" "이봐, 미미!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날 정말 못 알아보겠어?" 왕탁은 절박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조미미는 전혀 왕탁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제단 위로 풀쩍 뛰어오르더니 왕탁을 향해 돌아섰다. "크하하하하... 나는 치우신(蚩尤神)이다! 나에게 대항하는 자는 모두 죽는다!" 조미미가 치우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자 한 줄기 광선이 뻗어나가 천장의 두꺼운 석벽을 꿰뚫었다. 쾅! 우르릉-! 진동이 생겨나면서 발밑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동굴이 무너지고 있어요. 어서들 피해요!" 공공아가 소리쳤다. "안돼! 그럴 수는 없어!" 왕탁은 조미미에게서 치우검을 빼앗으려고 제단 위로 뛰어올라갔다. 제단 위에서 옥신각신하던 왕탁은 치우검을 빼앗기는커녕 오히려 목에 차고 있던 목각인형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미미의 힘이 엄청나게 셌기 때문이다. 왕탁을 제단 아래로 밀쳐 떨어뜨린 조미미는 고개를 쳐든 채 괴이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나서 목각인형을 아무데나 내팽개쳤다. 콰르릉-! 콰르릉-! 머리 위에서 돌무더기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우, 뭐하고 있어? 어서 피해야 해!" 반삼계가 팔을 잡아끌었다. "잠깐, 내 목각인형!" "이미 늦었어. 그걸 찾다가는 돌무더기에 깔려 죽게 된다구! 공 소저 어서 피하시오!" 공공아가 먼저 석실을 나갔다. 뒤이어 반삼계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왕탁을 잡아끌다시피 하면서 나가는데, 뒤에서 석실이 주저앉는 소리가 났다. 반삼계와 왕탁은 부리나케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엄청난 폭음이 들려왔다. ② 동굴초입에 다다랐을 때는 자신들의 바로 위 천장까지 주저앉을 기세였다. 그들은 바위산 아래로 몸을 던졌다. 저만치 공공아가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왕탁은 반삼계와 나란히 떨어져 내리면서 먹구름이 끼어 어둠이 사위(四圍)를 점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시간은 유시(酉時)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푸르스름한 기운이 산 위를 감돌고 있었다. 게다가 천애산 뒤쪽에서는 뿌연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안전하게 바위산 아래에 내려 선 왕탁은 안타까운 눈으로 천애산을 올려보았다. 동굴 입구는 주저앉은 돌무더기에 막혀 있었다. 그러자 그때였다. 천애산 위에서 폭발음이 들리더니 무언가 엄청난 속도로 솟구쳐올랐다. 그것이 치우검을 든 조미미라는 것을 아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를 검을 든 사내가 뒤따라 솟구쳐오르더니 허공에서 몇 합을 겨루었다. 치우검은 오색영롱한 검막을 뿌려댔다. 그러나 조미미와 겨루는 사내도 만만치가 않았다. 얼른 보기에도 그의 검법 초식은 무애(無碍)와 무겁(無怯)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왕탁은 곧 그 사내가 오동소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부딪치는 검에서 쏟아지는 검화(劍花)가 불꽃놀이처럼 어두운 하늘을 장식하고 있었다. 왕탁은 두 발로 차듯이 바위산을 타고 올라 능공허도(凌空虛渡)의 수법으로 그들 사이로 끼여들었다. 치우검을 든 조미미와 오동소는 왕탁의 갑작스런 출현에 놀라 떨어져 나갔다.


"어르신, 어떻게 된 겁니까?" 왕탁이 오동소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자네와 공공아가 걱정이 돼서 줄곧 뒤따라 다녔었네." 오동소가 옅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아까 동굴 속에 계셨단 말입니까?" "물론이지.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나누도록 하고 그보다 먼저 저 괴물을 처치하자구." "괴물이라뇨? 저 아가씨가 바로 항주에서 저와 함께 도망친 조 소저입니다."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외양만 그렇지 실은 조 소저가 아닐세." "무슨 소립니까? 그럼 치우신이 조미미의 모습으로 변했단 말입니까?" "그야... 아무튼 조 소저가 아닌 건 분명하네." 그때, 조미미가 치우검을 앞세워 공격해 들어왔다. 사실, 그들이 나눈 대화는 잠시지간에 불과했다. 왕탁은 더 이상 허공에 머물 수 없어 밑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고, 오동소는 어검비행(馭劍飛行)을 통해 공중에 머물러 있는 상태였다. 조미미의 목표는 오동소였다. 왕탁은 반삼계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오동소는 공중에서 상당히 오래 겨루다가 힘에 밀리자 왕탁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도망쳤다. 오동소는 기운이 다 빠진 듯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힘이 굉장한데." "하지만 이상하군요. 힘은 굉장할지 몰라도 실력은 맹발보다도 못한 것 같은데요." 공공아가 대꾸했을 때 조미미가 그들 앞으로 날아와 내려섰다. "미미야, 제발 정신을 차리고 내 말 좀 들어! 넌 지금 치우신에게 미혹(迷惑)되어 있어! 너 속에 들어앉아 치우신과 맞싸워야 해! 어서 치우검을 버려!" 왕탁이 소리쳤다. 조미미는 동문서답하듯 예의 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나, 치우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너희들도 나와 맞서려 하지 말고 조복(調伏)하라!" "미미야, 제발...." 안타까워하는 왕탁의 시선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던 조미미의 표정이 한순간 일그러졌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는 치우검을 든 채 머리를 감싸쥐며 괴로워했다. "미미야!" 왕탁이 다가서려고 하자 오동소가 필사적으로 만류했다. "위험하네! 접근해선 안돼!" 다들 섣불리 행동하지 못하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치는 조미미를 숨을 죽인 채 응시하고 있었다. 왕탁의 눈에는 조미미가 도와달라고 절규하는 모습이 언뜻 비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고, 그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했다. 조미미의 거센 몸부림은 발광(發狂)이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내부에서 충동되는 강력하고 거역할 수 없는 힘이 그녀를 미치도록 휘저어 놓고 있는 듯했다. 그 힘에 맞서 조미미는 몸부림을 쳐보지만 역부족인 것 같았다. 몸부림은 계속되었다. 귓속을 후벼파는 듯한 비명과 치우신을 저주하는 욕설이 교차됐다. 조미미는 자신의 몸속에 들러붙은 치우신의 정령(精靈)에 절망적으로 대항했다. 그러다가 더 이상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풀썩 고꾸라졌다.


왕탁이 쫓아가 부둥켜안았다. 창백한 얼굴에는 핏기라곤 없었다. 오동소가 와서 맥을 짚어보았다. "어떻습니까?" "글쎄...." 그 사이 공공아가 치우검을 집어들었다. 치우검은 동검(銅劍)이었는데, 외관상으로는 평범했다. 손잡이 아래의 운두(雲頭)는 뾰족한 형태였다. 가죽에 둘둘 말려져 있는 검병(劍柄) 부분은 닳고 해어져 무슨 가죽인지 분명하지가 않았다. 보검은 대개가 호수(護手) 부분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데, 치우검은 그 부분이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질박했다. 그러나 공공아는 치우검을 집는 순간 신령스러운 기운에 휩싸였다. 뿐만 아니라 손가락끝에서부터 짜릿짜릿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그 느낌은 차츰 강해지더니 팔꿈치를 지나 어깨까지 압박해 왔다. 공공아는 자신도 모르게 치우검을 떨어뜨렸다. "공 소저, 왜 그러시오?" 반삼계가 말했다. "아무래도 저 검이...." 공포를 느낀 공공아는 말까지 더듬었다. 공공아가 조심하라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치우검을 집어드는 순간, 반삼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손에 느꼈다. 지지직--! 손은 허연 연기를 내며 불타올랐다. 반삼계는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비명을 내지르며 치우검에서 손을 떼내려고 했지만, 치우검은 손바닥에 붙어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놀란 오동소가 달려왔다. 반삼계는 고통을 못 이겨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잠시지간(暫時之間), 그것을 응시하던 오동소가 신속히 결정을 내렸다. "손을 내밀게!" 반삼계는 그 뜻도 모른 채 팔을 내밀었다가 오동소의 검에 손목을 댕강 잘렸다. 언제 검을 빼들고 다시 집어넣었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전광석화 같은 동작이었다. 다시 한 번 소름끼치는 비명소리! 잘린 손목은 땅바닥에 떨어져서도 치우검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치우검과 엉겨붙은 손은 급기야 꺼멓게 타들어가더니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 옆에서는 왕탁이 조미미를 깨우려고 갖은 애를 써봤지만, 조미미는 끝내 깨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왕탁은 죽음을 예감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다가 조미미의 얼굴 위로 뚝뚝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째 눈물이 볼에 닿자 조미미는 괴성(怪聲)을 지르며 깨어났다. 왕탁은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조미미는 나무토막처럼 뻣뻣이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양 팔을 하늘 높이 쳐들고 일진광소를 터뜨렸다. 다음 순간 조미미의 정수리를 뚫고 무언가가 솟구쳐오르기 시작했다. 가만 보아하니 그것은 구리로 된 머리통이었다. 뒤이어 전신의 피부가 갈가리 찢기며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점액질의 끈끈한 액체를 뒤집어쓴 모습에 다들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괴물은 키가 팔척이나 되고 팔뚝 하나가 성인 남자의 허리굵기만 했다. 이마는 물론이고 근육질의


가슴과 복부는 두꺼운 강철판으로 뒤덮여 있었다. 조미미의 가냘픈 몸 안에 그 큰 몸집이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 상상이 안 되었다. 괴물이 손을 내뻗자 땅바닥에 놓여 있던 치우검이 날아가 그의 손에 얹혀졌다. 그때서야 괴물이 치우신이라는 것을 깨달은 왕탁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반삼계와 염군조가 부상을 당한 상태라 운중마룡이 그들을 돌보며 뒤로 빠져 있었고, 왕탁과 공공아 그리고 오동소가 치우신과 맞서고 있었다. 먼저 공격을 한 사람은 공공아였다. 그녀는 왕탁과 오동소가 치우신의 위용(偉容) 앞에 주눅든 모습을 보이자 치우신의 오른쪽 다리를 향해 채찍을 휘둘러갔다. 채찍은 보기 좋게 오른 정강이에 감겼다. 채찍을 잡아당겼으나 치우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푸른 빛깔이 감도는 눈빛이 공공아에게로 쏠려드는 순간, 공공아는 치우신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빨려들어갔다. 아니, 정확히 치우검의 검인(劍刃)을 향해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합!" 눈이 번쩍 뜨인 오동소가 신형을 날렸다. 공공아가 치우검의 날에 닿기 직전 오동소는 공공아를 손바닥으로 밀쳐내었다. 그러나 그는 공공아 대신 자신이 치우검에 빨려드는 것을 감당하지는 못했다. 오동소는 허리가 잘려 나가는 통증을 느꼈다. 치우신이 부상당한 오동소의 팔목을 잡았다. 왕탁은 공력을 끌어올려 치우신에게 동벽서원을 날렸다. 펑! 퍼벙! 발출된 강기가 날카로운 불덩어리 모양으로 날아가 치우신의 가슴에 꽂혔다. 그러나 치우신은 왕탁의 장풍이 가소로운 듯 힐끗 쳐다본 후 팔을 잡고 오동소를 빙글빙글 돌렸다. 우득, 우드득-! 오동소의 팔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공아가 늦을세라 치우신의 팔을 베려고 검을 앞세워 짓쳐들어갔다. 공공아가 현란하게 검을 구사했지만, 치우신은 그 검이 몸에 닿는 것쯤은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치우신은 오동소의 사지를 찢으려는 듯 거꾸로 들고 양 다리를 잡았다. 그때, 오동소의 몸에서 뭔가가 떨어져 내리더니 왕탁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왔다. 그것은 왕탁이 차고 있다가 동굴 속에서 잃어버린 바로 그 목각인형이었다. 왕탁은 재빨리 그것을 집어들었다. 목각인형만이 자신을 보호해 주리라는 것을 그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그에 보답하듯 목각인형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치우신이 오동소의 사지를 찢으려다 말고 목각인형을 바라보았다. 일순, 목각인형에서 한 줄기 빛이 쏘아져 나가 치우신의 눈을 쳤다. 그 충격에 치우신은 오동소를 놓쳤다. 오동소가 도망쳐오자 왕탁이 말했다. "아니, 이 목각인형을 주웠으면 진작 주시지 않구요?" "대체 거기서 뭐가 나온 거지?" 그러나 그들은 목각인형에 대해 더 이상 얘기를 나눌 여유가 없었다. 화가 난 치우신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해 왔기 때문이다. 치우신은 온몸이 흉기였다.


치우검에서뿐만 아니라 눈, 입, 손바닥, 팔꿈치 등에서 상상을 초월한 강기가 발출되었다. 왕탁과 공공아 그리고 오동소는 피하기에 급급했다. 운중마룡은 부상을 당한 염군조와 반삼계를 데리고 멀찌감치 물러났다. 아름드리 나무가 우지끈 부러지고 단단한 바위가 산산조각이 났다. 인간이 아닌 바에야 무공(武功)의 고하(高下)를 논할 순 없겠으나, 치우신의 무예는 짐승의 싸움을 모방한 각저희(角抵戱)의 형태였다. 곰이 되고 호랑이가 되고, 때로는 용의 모습으로 변해 공격해왔다. 믿기 어렵게도, 엄청난 강기를 발출하는 치우신은 때로는 우직한 소처럼 구리 머리통을 앞세워 돌진해 오기도 했다. 그럴 때의 기세는 정말이지 태산(泰山)이라도 무너뜨릴 것처럼 대단했다. 오동소는 듣고 보아온 연륜(年輪) 덕에 치우신의 움직임에 대해 나름의 판단을 내렸다. "역시 곤(坤)이 문제야! 곤위우(坤爲牛)라면 우위곤(牛爲坤)인 셈이지!" 치우신이 서남쪽을 등지고 공격해 오는 것은 맹발이 보인 행동 양식 그대로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움직임은 최외(崔嵬:바위산 봉우리가 톱날같이 솟은 모양)처럼 날카로운가 하면 운표(雲標:구름 위의 높은 곳)처럼 날렵했다. "취모검(吹毛劍)이나 상검(霜劍)은 물론이요 오의 손권이 가지고 있었다는 유성검(流星劍)으로도 당해내지 못하겠는 걸!" 오동소는 계속 주절대며 묘안을 짜내고 있었다. ③ 일각이 지나자 사방 오십장 안에는 풀 한 포기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져 있었다. 일각이나 견디면서 목숨을 부지한 것만도 다행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웅크리며 피하기에만 급급할 것인가? 그들은 이제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줄행랑을 쳐서 살든가 죽기를 각오하고 마지막 수단을 강구하든가. 한데, 그 '마지막 수단'이라는 것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은 피하면서도 자신들의 절초(絶招)를 모두 사용해 본 셈이었다. 오동소로 말하자면 야화출고상(野火出枯桑)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맞서 살아난 적이 없었던 종랑대화중(縱浪大化中), 불희역불구(不喜亦不懼), 응진편수진(應盡便須盡)의 연환(連環) 삼초를 시전했는데도 먹혀들지 않았다. 하물며 비록 불사초를 먹은 이후 놀라운 공력이 실렸다고는 하나 왕탁의 동벽서원(東壁西園)을 말해 무엇하랴! 사정은 공공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채찍으로 안되자 쌍검을 휘둘렀지만 그 또한 조금도 상대에게 위협적이지 못했다. 그때, 뒤늦게 나타난 익다는 중요한 얘기가 있다며 떠벌여댔다. "아까 낙양시내에서 추괴소녀 소부용을 봤지 뭔가?" "지금 그 따위 말을 지껄일 때가 아냐!" 왕탁이 핀잔을 줬지만 익다는 계속해서 소부용이 청나라 고관(高官)의 아내가 되어 있더란 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익다는 치우신를 하찮은 괴물쯤으로 여겼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극도로 지쳐 있는 것 같아 발애고자(拔愛固刺)와 애전위사(愛箭爲射)를 펼쳤는데, 그제서야 왜 왕탁이 입을 나불대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했는지를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가 던진 단검이 치우신의 눈에서 쏘아져 나온 강기에 맞아 공중에서 녹아내렸던 것이다. 치우신의 초인적인 능력에 놀란 익다가 도망치자고 제안했다. "저런 괴물을 당할 순 없어!"


오동소는 익다의 말에 동조했다. "그렇네. 개죽음을 당할 순 없잖은가?" "저도 개죽음은 싫어요." 공공아는 치우검을 찾기 위해 여기까지 온 셈이었지만 치우신의 상상을 초월한 능력을 보고 난 후에 갈등이 생겨나고 있었다. "겁들을 먹었군요. 그럼, 다들 가세요. 저 혼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테니까!" 왕탁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는 눈앞에서 조미미가 갈기갈기 찢기는 광경을 보았기 때문에 치우신이 죽든가 자신이 죽든가 결판을 낼 작정이었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왕형, 생각을 해봐! 단 일푼의 승산이라도 있어야 목숨을 내놓지." 익다가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돌아가라잖소!" 왕탁의 언성이 높아졌다. "언성을 높일 건 없네. 치우신에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야. 내가 알기론 아주 옛날 탁록의 벌에서 치우신과 싸웠던 황제의 응룡동검(應龍銅劍)만이 치우신의 치우검에 대적(對敵)할 수가 있네." "이제 와서 응룡동검을 어디서 구한단 말입니까?" 그 말에 오동소는 머쓱해졌지만, 할 말은 해야되겠다는 듯이 말했다. "응룡동검을 사용해 적혜료혜(赤兮了兮), 독립불개(獨立不慨), 상무욕(常無慾), 건목도광(建木都廣)의 초식을 사용하지 않는 한 이길 수가 없네. 그건 전설(傳說)의 초식들이지." 그때, 왕탁은 귀를 후벼파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방금 건목도광이라고 했나요?" "그래, 왜 그러나?" 그 순간, 다시 치우신의 공격을 피하느라 그들은 혼비백산하며 흩어졌다. 왕탁은 오동소를 쫓아 나무 위로 올라갔다. "건목도광에 대해 더 얘기해 주십시오." "내가 아는 건 그게 다 일세. 참, 그러고 보니 이런 구절이 생각나는군. 건목은 도광에 있어서 뭇 황제들이 오르내린다. 해 속에도 그림자가 없고 소리쳐도 메아리가 없다. 천지의 중앙이다. 한데, 대체 왜 그러나?" "제 양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이 목각인형을 주시면서 제 별호를 건목도광이라고 지어주셨습니다." "그 말이 사실인가?" 오동소는 드러나게 놀랐다. "물론입니다." "잠깐 목각인형을 줘 보게." 오동소는 왕탁으로부터 목각인형을 건네받더니 면밀히 살폈다. "아까 동굴 안에서 치우신이 이 목각인형을 자네에게서 빼앗아 내팽개친 곳이 우연히 내가 숨어 있던 부근이었네. 그래서 주운걸세. 자네, 아버님 얘기가 맞다면 이건 건목(建木)으로 만든 게 틀림없을 걸세." "건목이라는 게 존재하나요?" "낸들 알 수 있겠나? 아무튼 이걸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오동소는 목각인형을 치우신에게 던지려다가 동작을 멈추고는 말했다. "자네가 던져보게." "왜 그런 짓을...?" "머뭇거리지 말고 해보라니까! 내 예상이 틀리다면 우린 놈을 이길 수가 없네."


왕탁은 오동소의 요구를 미심쩍어 하다가 목각인형을 잡고 치우신을 겨냥해 힘껏 내던졌다. 제 57 장 최후의 결전 ① 목각인형은 치우신의 눈을 향해 날아갔다. 치우신의 눈에서 벌건 불덩어리가 쏘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목각인형은 불길에 휩싸였다. 그러나 아까 익다가 던진 단검처럼 공중에서 녹아내리지는 않았다. 목각인형은 치우신의 가슴을 쳐 쓰러뜨린 후 그 반탄력을 받아 되돌아왔다. 그 순간 놀랍게도 목각인형은 검으로 변해 있었다. 왕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뻗었다. 검이 왕탁의 손 안에 감겨드는 것을 본 오동소가 확신하듯 말했다. "이게 바로 응룡동검이네! 자, 이제 나가서 저 놈과 맞서 당당히 싸우게!" 왕탁은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짓쳐들어갔다. 쓰러졌던 치우신이 일어났다. 과연, 황제신의 응룡동검을 든 왕탁과 치우검을 든 치우신의 싸움은 호각지세(互角之勢)였다. 검이 부딪칠 때마다 대지진(大地震)이라도 날 듯 온 천지가 진동했다. 그것은 인간의 싸움이 아니었다. 수천 년 전 전설상에 존재하던 치우신과 황제신의 싸움이었다. 조미미의 몸 속에 잉태되어 새롭게 환생(還生)한 치우신에 맞서 왕탁은 응룡동검을 들고 황제신의 대리전(代理戰)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콰르릉-! 콰르릉-! 오동소와 공공아는 두려움에 떨며 싸우는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싸움은 단조로웠다. 강호인들이 보이는 기술의 현란함이나 다양한 공격과 움직임은 없었다. 그저 검을 들고 힘겨루기를 하듯 뻔히 보이는 속도로 상대를 베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 어떤 무공보다도, 그 어떤 초식보다도 엄청난 힘과 기(技)가 배어 있었다. 도무지 결판이 날 것 같지 않은 싸움이었다. 좀 있으면 달이 떠오를 시각이었다. 아까 먹구름이 끼어 칠흑같이 어두워져 있었던 하늘은 다소 밝아졌으나, 태양은 이미 기울어 서쪽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붉은 복숭아같은 저 해가 기운다면... 왕탁은 그 점에 주목하고 있었다. 오동소는 뭔가 도움을 주고 싶어 고래고래 소리쳤다. "황제신이 치우신과 탁록의 들판에서 싸울 때 항상 오색구름과 금지옥엽(金枝玉葉)이 황제신의 머리 위를 맴돌았는데, 아름다운 꽃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네!" "그래서요?" 왕탁은 그것만 가지고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뭐가 그래선가? 그 다음은 자네가 알아서 해야지." 오동소가 가르쳐 준 적혜료혜, 독립불개, 상무욕, 건목도광 따위의 초식--움직임이나 동작을 알 리 없으므로 초식의 이름들을 외쳐 부른 다음 응룡동검을 아무렇게나 휘둘렀다--조차 치우신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달이 뜨면 끝장이란 생각에 왕탁은 초조해졌다. '오색구름이라... 하지만 벌써 어두워져 있어 사방 어디에도 오색구름은커녕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구나.' 구름이 떠 있다면 그것을 이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려본 것이었다.


'금지옥엽이란 또 무엇인가? 임금의 자손이나 집안 또는 귀여운 자손을 일컫는 것인데....' 그러다가 왕탁은 '금지(金枝)'의 말 그대로의 뜻에 주목했다. 황금으로 된 나뭇가지라.... 흡사 태양에서 솟아나는 광선(光線)을 비유한 것 같았다. 치우검이 음검(陰劍)이라면 응룡동검은 양검(陽劍)이요, 치우검이 태음검(太陰劍)이라면 응룡동검은 태양검(太陽劍)이 아닌가? 금지란 바로 그 태양검에서 솟아하는 빛줄기를 뜻하는 게 아닐까? 그 순간, 왕탁은 느티나무 위로 뛰어올라 서편 하늘로 떨어져내리는 태양을 향해 응룡동검을 겨누며 소리쳤다. "건목도광(建木都廣)!" 그러자 기력을 잃은 하오(下午)의 태양이 정오(正午)의 태양처럼 환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위가 밝아지더니 오시(午時)처럼 환해졌다. 강렬한 빛이 시야를 덮쳐오자 치우신은 신음성을 내며 두 눈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바로 그 순간, 가공할 빛의 덩어리가 태양에서부터 쏟아져 나와 응룡동검의 검인(劍刃)에 반사되더니 한층 밀도(密度) 있고 집중된 빛줄기로 변해 치우신의 얼굴에 가 격중되었다.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갈가리 찢긴 치우신은 사방으로 날아갔다. 머리통이었던 구리조각과 치우검이 날아와 느티나무 아래에 내려선 왕탁의 발 앞에 툭 떨어졌다. 갑자기 번개가 내려치고 뇌성(雷聲)이 울리며 세상이 뒤흔들렸다. 빛나던 태양은 금세 몰려온 먹구름에 가려 빛을 잃었다. 비가 쏟아졌다. 퍼붓는 폭우 속에 씻기던 구리조각과 치우검은 흰 연기를 내며 부식(腐蝕)되기 시작했다. 지직, 지지직-그것은 순식간에 흘러내리는 빗물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왕탁은 조미미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비가 피를 씻어 내려간 탓에 아까처럼 끔찍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해어져 너덜거리는 사지와 몸통을 보자 절로 얼굴이 돌아갔다. 슬픔이 복받쳐 올라 왕탁은 돌아서서 눈물을 흘렸다. 끝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그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더니 괴성을 내지르며 응룡동검을 땅바닥에 꽂았다. ② 우르릉-! 이상한 소리가 나며 응룡동검이 꽂힌 곳에서부터 작은 골이 생겨나더니 조미미의 시체가 있는 곳까지 이어졌다. 그때,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해어져 너덜거리던 시체 조각이 하나하나 모아져 붙기 시작하더니 온전한 조미미로 되살아났던 것이다. 비는 그치고 사위는 원래대로 석양이 지는 밤하늘로 돌아와 있었다. 조미미가 일어섰다. 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왕탁은 조미미의 부활(復活)을 번연히 보고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미미야!" 왕탁이 다가갔다. "왕 공자님!" 뜨겁게 포옹한 그들은 가슴이 저며오는 느낌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들의 머리 위로 주홍빛 노을이 아름답게 부서지고 있는 것을 오동소와 공공아가 먼 발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제 58 장 희망을 찾아서


① "어르신, 어디로 가실 작정이십니까?" 도선장(渡船場) 뒤로 넘실대는 낙하(洛河)를 바라보며 왕탁이 말했다. "나같은 사람에게 목적지가 어디 있겠나? 발길 닿는 대로 흘러갈 뿐이지." 오동소는 등을 돌린 채 낙양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이렇게 훌쩍 떠나는 것에 아쉬움이 남는 모양이었다. "공 소저에게 진실을 밝히시지요?" "그래서 누구에게 도움이 되겠나? 너무 걱정하지 말게! 간다고 해서 영영 떠나는 것은 아니니까." 그때, 사공이 어서 타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자, 이제 헤어져야 할 때가 됐군! 다른 사람들에게도 안부 전해주게." 그 말을 남긴 후 오동소는 훌쩍 신형을 날려 나룻배에 올라탔다. 바람에 실려온 낙엽들이 나룻배 위로 흩어져 내렸다. 늙은 사공이 시퍼런 힘줄이 드러난 팔뚝을 놀려 노를 젓기 시작했다. 배가 물살을 타며 출렁이자 오동소가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나룻배가 작은 한 점이 되어 시야에서 사라지자 왕탁은 몸을 돌려 낙양시내로 들어섰다. 이별(離別)의 감회(感懷) 탓이었을까. 왕탁은 자신의 용모파기가 아직도 낙양 곳곳에 나붙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뒷길을 택했을 그가 무심코 시내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갔다. 번화가를 거의 다 가로질러 갔을 때였다. "저 놈 잡아라!" 하는 소리에 돌아보자 두 명의 포졸이 달려오고 있었다. 왕탁이 신형을 날리려는데 한 발 앞서 올가미가 발목을 잡아챘다. 콰당! 넘어져 얼굴이 짓이겨진 왕탁의 목줄기로 세 자루의 칼날이 디밀어졌다. 그는 사지가 묶여져 관아의 뇌옥에 투옥되었다. ② 다음날 오전이었다. 그는 관아의 뜨락으로 불려 나가 형조 관리의 문초를 받고 있었는데, 한순간 문초가 중단되더니 주위가 조용해졌다. "죄인은 고개를 들거라!" 하는 귀에 익은 여자 목소리가 나 고개를 들어보자 소부용이 입가에 옅은 웃음을 머금은 채 서 있었다. "아니, 소 소저!" "고생 많으셨죠?" 그러고보니 소부용은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눈부신 비단옷을 걸치고 화장을 곱게 한 모습은 그야말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된 거요?" "아까 문초를 했던 형조의 관리가 제 지아비가 되었어요." "그럼 정식으로 혼례(婚禮)를 올린 거요?" "아직 정식으로 혼례를 올린 건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거예요. 제가 그 분에게 잘 말씀 드릴게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참, 조 소저는 찾으셨어요?" "그래요. 지금 용호표국에 머물고 있소." "참, 듣기에 공 소저가 용호표국의 총표두라고 하던데?" "그렇소." "내일 같이 찾아뵈어요."


"내일중으로 풀려날 수 있겠소?" "그 분은 제 말이라면 하늘의 별도 따올 사람이에요." 소부용의 장담대로 왕탁은 다음날 풀려났다. 그녀는 왕탁과 함께 용호표국을 방문했다. 공공아와 반삼계 그리고 염군조가 그녀를 반갑게 맞이한 반면, 익다는 몸을 숨긴 채 한사코 나오려 들지를 않았다. 그는 곤륜산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소부용에게 복수하고 싶었지만, 차마 여자로 변한 자신의 꼴을 내보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인간지사(人間之事)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던가. 익다를 따라다니던 추괴소녀가 천하의 미인으로 변하고, 바람둥이 익다가 여자로 전락할 줄이야! 익다가 워낙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그들은 익다에 대해 함구했다. 소부용이 돌아간 다음날, 왕탁과 조미미는 함께 길을 나섰다. 세상이 여전히 시끄럽지만 항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염군조도 동반했다. 비록 한 손을 잃긴 했지만 반삼계와 공공아는 동업(同業)을 하기로 약속했다. 시육의 환상적인 맛으로 승부해 낙양에 최대규모의 반점(飯店)을 개업할 야심찬 계획이었다. 반삼계는 왕탁의 충고를 받아들여 용호표국의 표사를 이용해 증발한 무홍 소저를 찾을 생각이었다. 표사들은 업무상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니만큼 무홍 소저를 훨씬 더 찾기 쉬우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익다는 용호표국에 좀더 머물며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결정을 내리겠다고 했다. 공공아의 배려로 용호표국의 표사들이 낙하(洛河)까지 왕탁 일행을 배웅해 주었다. 막 배에 오르려는데,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백마(白馬)가 달려왔다. 투레질을 하며 멈춰 선 백마 위에 익다가 타고 앉아 있었다. "아니, 익형!" 왕탁은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익다의 얼굴이 여자에서 남자로 돌아와 있었다. "가기 전에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요." 익다는 껄껄껄 웃으며 말했다. "왕형을 배웅하고 방 안으로 돌아갔는데 얼굴 피부가 간질간질 해지더니 금세 이렇게 변했지 뭐요! 그럼, 잘들 가시오!" 익다는 말고삐를 돌려 되돌아갔다. 염군조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평생 여자로 살 줄 알았는데 저렇게 본래 모습을 찾았으니 천만다행이군." "어서 오르세요." 조미미가 배 위로 왕탁의 손을 잡아끄는 순간, 왕탁은 문득 생각했다. '순초의 약효가 다해 원래의 얼굴로 되돌아온 것이라면 소부용 소저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 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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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치우검 제3권(전3권) 지은이: 백휴 - 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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