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u on Google+

영세일무존 제 2 권 내가위 저

제 9 장 공포(恐怖)로 뒤덮인 무림(武林) 율원양과 경설운은 허리를 껴안고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 년만의 만남이니 얼마나 할 말이 많을까. 또한 이제는 둘만이 남아 있지 않은가. 경설운은 아직도 감격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율원양을 바라 보았다. 율원양이 그녀를 와락 껴안으려는 순간,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대가, 우리 이곳을 떠나요. 너무 더러운 곳이에요." 그녀는 만독음혈존의 시체를 향하여 침을 뱉았다. 율원양은 빙긋이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합시다." 선선히 대답하고 난 율원양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웃음이 매우 야릇해졌다. "나도 우리의 사랑을 이런 더러운 곳에서 하고 싶지 않소." 경설운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에요?" 율원양은 그녀의 귓전으로 입을 가져 갔다. 매우 심각한 음성으로 나직이 속삭였다. "거 왜 있잖소? 남녀가 사랑을 할 때는 밤에 옷을 벗고... 흠흠... 뭘 하던데?" 경설운은 깜짝 놀라 율원양의 품 속에서 떨어져 나왔다. "어멋." 율원양의 말 뜻을 짐작한 그녀는 일시간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앙큼한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뭐예욧? 이 음탕한 악당같으니라고." "하하......." 율원양은 그녀의 표정과 행동이 너무 귀여워 품 안으로 끌어 안았다. 끌어 안지 않아도 이미 품으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던 그녀는 그의 품 속에 뛰어들어 그의 널찍한 가슴을 조그만 주먹으로 수없이 때렸다. 귀여운 앙탈이었다. 율원양은 한술 더 떠 능청을 부렸다. "설운. 내 품이 그렇게도 좋소?" 경설운은 부끄러움에 목덜미까지 온통 도화빛으로 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바람둥이." 그녀의 당치도 않은 말에 율원양은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어디 바람둥이의 실력을 아늑한 곳에 가서 발휘해 볼까?" "자꾸 이러면 난 산으로 돌......." 부끄러움을 못 이겨 앙큼을 떨다 율원양이 별안간 그녀의 몸을 껴안고 수평으로 몸을 날리자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두 눈을 꼭 감았다. 꼭 붙은 두 사람은 하나가 되어 허공을 가르며 동굴을 벗어났다. 곤륜산 상청궁 뒷산에 있는 어느 동굴. 동굴 안은 화섭자로 인하여 훤히 밝혀져 있었다. 이곳은 평소 경설운이 홀로 무공을 익히던 동굴이었다. 지난 이 년 동안 무공을 익히면서 매일같이 율원양을 그리워 하며 한숨을 내쉬던 곳이기도 했다. 율원양이 동굴 안을 둘러 보았다. 향긋한 처녀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것 같았다. "매우 아담하군." 매우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경설운은 아늑한 자리에 율원양과 단 둘이 있게 되자 무엇이 부끄러운지 한쪽 구석에 다소곳이 서 있었다. 힐끗 바라 보는 율원양의 시선은 짓궂은 기가 다분했다. "설운의 향기가 짙게 배어 있어 첫날밤을 보내기에는 더할 수 없이 분위기가 좋겠는 걸." "율... 율대가......." 그녀는 가지런한 열 손가락으로 앞섶 옷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부끄러움에 목덜미까지 온통 도화빛으로 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가슴은 크게 기복을 일으켰다. 심장이 마구 뛰는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급히, 그러나 율원양이 눈치 못채게 숨을 쉬느라고 가슴의 기복이 큰지도 몰랐다. 그녀는 왜 부끄러워 할까? 곧 닥칠 미지의 경험때문일까? 아니면 율원양과의 재회의 감격 때문일까. 부끄러움에 한껏 젖어 불빛에 비친 그녀의 자태는 정녕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실로, 불면 꺼질 듯한 천하의 미태(美態)였다. 율원양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설운, 그대는 이 년 전보다 더욱 아름다워졌군." 불과 이 년 사이에 더할 수 없이 성숙해진 그녀의 아름다움. 율원양의 탄성에 마냥 행복해진 그녀는 말없이 얼굴만 붉힐 뿐이었다. 율원양이 느낀 대로 지금 경설운은 완전히 무르익은 과일과도 같았다. 지금 경설운의 나이 방년 십구 세(十九歲). 한 줌밖에 되지 않을 것 같은 가냘픈 허리 선이 유연하게 타고 흘러 내렸고 그 아래로 세월의 흐름에 따라 풍만하게 부풀어 오른 둔부의 선은 유려하면서도 탱탱하기 이를데 없었다. 또한, 가슴 언저리에 봉긋이 솟아오른 두 젖무덤은 어떠한가. 알지 못할 미지의 첫경험을 앞두고 흥분과 두려움이 섞인 기묘한 흥분으로 기복을 일으키는 두 젖무덤이 뿜어내는 매력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아직 단 한 번밖에 경험이 없는 율원양의 눈에는 더욱 살인적인 매력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첫경험 때 한 번 맛을 본 이후로 황무곡에서 뜨거운 젊은 피가 끓을 때마다 미치도록 경설운이 그리워 한숨 짓곤 했었다. 경설운이 지닌 지금의 아름다움을 한 마디로 말하면 화용월태(花容月態)였다. 꽃의 얼굴과 달의 자태를 지닌 아름다움은 바로 그 화용월태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율원양의 시선이 더욱 뜨거워질수록 그녀의 고개는 점점 수그러졌다. 일순, 율원양의 얼굴에 더욱 짓궂은 웃음이 서렸다. "설운. 만독음혈존이 설운을 잡아 놓고 왜 그대로 두었는지 아시오?" "......!" 그녀는 고개를 들어 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나 싶어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 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어떤 표정을 지어도 아름다웠다. 이제야 여자 보는 눈이 열린 율원양은 그런 경설운의 모습에 약간 정신이 어지러워짐을 느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에게 빨려들 듯 천천히 다가갔다. 율원양은 한 손을 그녀의 어깨 위에 얹었다. 율원양은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경설운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그것은 만독음혈존은 동정녀의 순음기만 원했기 때문이오." "네?" 경설운은 깜짝 놀랐다. 그의 짓궂은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경설운은 율원양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랐다. "그런데, 설운은 이 년 전 이미 나에게 순결을 바쳤기 때문, 아앗--" 그는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율대가.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군요."


그녀는 눈을 살짝 흘기면서 율원양의 팔을 꼬집고 있었다. "어멋." 율원양은 그녀를 억세게 안아 버렸다. "설운" "율대가......." 부드러운 그의 음성이 그녀의 귓전에 닿자 경설운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둘은 미친 듯이 서로 입술을 빨기 시작했다. 이 순간 그녀는 이 년 전의 일이 아스라히 떠올랐다. 이 년 전, 그녀는 자신의 몸을 열고 그를 열렬히 원했었다. 난주에서 율원양의 냉막한 마음에 진실된 사랑을 심어준 그녀. 율원양은 그녀의 도움으로 무사히 곤륜산 황무곡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간의 육 개월. 그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즐거운 세월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말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기마술(騎馬術)을 배운 후 율원양은 편히 황무곡에 도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곤륜산 황무곡에 도달하기 전날 밤, 그녀는 자신의 몸을 그에게 주기로 작정하였다. 진정 절실한 마음에서였다. 율원양이 곤륜산 황무곡에 가서 기연을 못얻고 십구 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면 율씨 집안은 끝장나기 때문에 그녀는 그의 아이를 잉태하여 그의 아들을 낳고 싶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잃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그녀를 너무 두렵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의 분신(分身)! 그의 분신을 낳아 기른다면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될지라도 살아갈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율원양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날 두 사람은 뜨거운 정사를 나누었던 것이다. 온몸을 불태웠다. 경설운같은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떤 여자를 사랑한단 말인가. 그녀는 자신의 일생을 버리는 도박을 감행한 것이다. 율원양이 죽고 그의 아기를 가져 생산한 후 그 아이만을 바라 보며 평생을 살겠다는 그녀의 선택은 자신의 일생을 희생하여 오로지 율원양만을 위해 살겠다는 자기 희생인 것이다. 그러나 율원양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수가 되어 그녀 앞에 돌아온 것이다. 입을 맞추는 경설운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끝없이 솟구치는 감격과 희열의 눈물이었다. "율대가."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빨갛게 물든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상기된 그녀의 얼굴은 실로 사나이의 철담을 녹일 만한 요염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율원양은 안개 서린 그녀의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 보며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설운, 나는 필시 천하에서 제일 재수가 좋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소." 그의 말에 경설운은 눈꺼풀을 몇 차례 깜박이며 한없이 빛나는 눈으로 율원양을 올려다 보았다. 그것은 진정 깨물어 주고 싶도록 아름다운 눈빛이었다. 율원양은 가슴 속이 점차 격탕되어 감을 느꼈다. 그녀는 귀엽게 웃었다. 고혹적인 미소였다. 율원양은 그녀를 껴안았던 손으로 갸름한 경설운의 턱을 치켜 들었다. 경설운의 살포시 뜬 눈과 율원양의 불길같은 눈길이 마주쳤다. "설운" 꿈만같은 율원양의 은은한 목소리가 들리자 경설운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사르르 내리 감았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손을 옮겨 그녀의 백옥같은 뺨을 쓰다듬었다. 순간, 경설운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약간 벌어지면서 백옥같은 하얀 이가 나타났다. 율원양은 서서히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로 가져갔다. 순간, 경설운의 입술로부터 촉촉하고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왔다. 두 남녀는 평생 두번째로 겪어보는 흥분 속으로 젖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아... 율대가." 경설운은 타오르는 격정을 이길 수 없는 듯 백옥같은 팔을 들어 그의 목을 휘감았다. 순간, 율원양의 가슴에 그녀의 보드라운 젖가슴이 닿았다. 율원양은 일순,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점차 두 남녀의 숨결은 흥분으로 고조되기 시작했다. 율원양은 경설운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손을 아래로 가져갔다. 그의 손은 봉긋한 그녀의 둔부에서 멈추었다. 그녀의 둔부를 한 차례 쓸었다. 경설운은 아예 뼈조차 없는 사람처럼 전신을 온통 율원양에게 맡기고 있었다. 잠시 후, 율원양은 그녀를 안고 침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침상에 다다른 그는 경설운을 침상 위에 곱게 눕혔다. 그리고, 잠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온통 목덜미까지 도화빛으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속눈썹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동안 서 있던 율원양은 격정을 더 이상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의 상의를 벗기기 시작했다. 경설운은 가볍게 몸을 떨며 뒤척였다. 그녀는 그가 옷을 쉽게 벗길 수 있도록 상체를 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의 손길은 그녀의 도움 없이도 벌써 그녀의 상의를 반쯤 벗겨나가고 있었다. 상의를 벗기자 그곳에는 분홍빛의 젖가리개가 나왔다. 그는 미칠 듯이 터져오르는 격동 속에서 상의를 벗기고 젖가리개를 풀어 버렸다. 그곳에는 실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일대 장관이 펼쳐져 있으니, 백옥으로 다듬은 듯 뽀얀 살결에 봉긋이 솟아오른 두 개의 젖무덤이 있었다. 더군다나, 그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듯해 보이는 젖무덤의 가운데에 떨어질 듯 부끄럽게 떨고 있는 자주빛 열매가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신선과(神仙果)라도 이처럼 훌륭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의 손가락은 부들부들 떨면서 그 두 개의 육봉(肉峰)을 두 손으로 부드럽게 깜싸듯 쥐었다. 젖무덤은 그녀의 성감대가 가장 잘 발달된 곳인지 경설운은 전신을 부르르 떨면서 야릇한 교성을 내질렀다. "으음... 아......." 그녀의 입에서 연신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를 들으며 율원양의 손가락은 그녀의 가슴을 미끄러지듯 신속하게 흘러 내려갔다. 이미, 흥분을 주체할 수 없는 몸이 된 율원양의 손은 다시 그녀의 하체로 뻗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랫배는 기름졌다. 보드라웠고 탄력이 흘러 넘쳤다. 경설운은 온몸을 맡긴 채 품에 안겨 거친 숨을 할딱였다. 이 년 전에는 이별때문에 절박한 심정으로 그를 받아 들였기에 사실 정사가 주는 즐거움을 잘 몰랐다. 그저 율원양을 위해 모든 것을 주었다는 마음의 기쁨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재회의 감격 속에서 몸과 마음을 맡겼기에 율원양의 손길 하나하나가 그녀를 흥분시켰다. 그녀는 허벅지 맞닿은 안쪽 깊은 곳이 흥건히 젖는 것을 느꼈다. 숲이 젖는데 이상하게도 갈증이 타 올랐다. 율원양이 몸 위로 올라 오자 육중한 만족감이 전해졌다. 그녀는 양 다리를 활짝 벌렸다.


율원양은 매끄럽기 이를데 없는 속살을 파고들 때 더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경설운은 타오르던 갈증이 사라졌다. 경설운은 양 팔로 있는 힘껏 율원양의 목을 끌어 안았고 양 다리로 허리를 무자비하게 감았다. 그러나 처음은 활화산같이 타오르던 율원양의 불길은 이내 스러졌다. 아직 흥분과 힘만 앞섰지 오랜 지구력으로 서로 극도의 쾌감을 맛보는 실력이 율원양에게는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젊음에서 오는 뜨거운 피가 있기에 이내 다시 경설운을 덮쳤다. 그러기를 일곱 번 동굴 안은 밤새도록 쉴 새 없이 뜨거운 열풍이 흘러 넘쳤다. 동굴 밖에는 여전히 비바람이 쏟아져 내리고 있어 간간히 불어 드는 시원한 바람이 열풍을 식혀 주곤 했다. 율원양은 침상에 누운 채 천정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곁에는 비스듬히 누운 경설운이 율원양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누워 있었다. 그녀의 백옥같은 젖가슴이 팔에 가리워져 반쯤 드러나 있었다. 온몸의 숨을 고른 후 전신의 나른함이 어느 정도 가시자 경설운은 율원양의 가슴을 섬섬옥수로 쓰다듬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율대가가 천하제일의 무공을 익히고 돌아오셔서 소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뻐요." 율원양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경설운의 부드러운 머리결을 쓸어 올렸다. "율대가가 만독음혈존을 죽였다는 소문이 무림에 알려지면 대가는 그날로 천하제일고수로 추앙될 거예요. 그러면 좋긴 한데, 만약 대가의 아버님을 납치해 간 자들이 대가의 소문을 듣고 모두 꼬리를 감추면 어떻게 하지요?" "하하핫-- 벌써부터 미래의 시아버님의 안위를 걱정할 줄 알고 역시 설운은 현모양처감이요." 경설운의 얼굴이 빨개졌다. 벗은 몸이라 두 육봉마저도 빨개진 것 같았다. "몰라요. 당신은 다시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소녀를 놀리기만 하는군요." "하하하-- 참, 설운?" "네?" "당신은 이 년 전 나의 아기를 낳고 싶다고 하더니 낳긴 했소? 낳았으면 지금쯤 한 살이 됐을 텐데." 그녀는 그만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그의 ��� 속으로 숨어 들었다. "아이, 부끄럽게... 그 일은......." "설운, 사랑하오." 율원양은 짧게 말을 내뱉으며 그녀의 버들가지같은 허리를 힘주어 끌어당겼다. 동굴 안에는 다시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열기가 솟구쳐 올랐다. 그 뜨거운 열기와 격동 속에서 두 남녀의 몸은 심하게 요동쳤다. 그들은 점점 격랑의 깊은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지금 무림은 공포에 떨고 있다. 공포는 정확히 이 년 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명부귀요(冥府鬼妖)! 이 이름이 무림에 커다란 공포를 가져다 준 것이었다. 명부귀요는 외호에서 알 수 있듯이 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이 년 전에 무림에 출현했다. 이 년 동안, 그녀가 행한 일은 무림을 공포에 떨게 만들기에는 너무나 충분한 것이었다. 삼백여 명이 넘는 무림의 후기지수(後期之秀)들이 정혈을 갈취당한 채 피골이 상접되어 죽은 시체가 중원 전역에서 나타났다. 무림인들이 대노하여 흉수를 찾으려 했을 때, 검은 망사를 드리운 한 신비여인이 나타나 자신이 행한 일이라고 공언을 했다. 죽은 후기지수들의 사문과 가족 관계에 있는 천여 명에 달하는 무림인들이 일제히 그녀를 찾아 모여


들었다. 황산(黃山) 명부곡(冥府谷)! 그녀는 자신에게 원한을 풀려면 이곳으로 언제 몇점까지 찾아오라고 무림에 선포를 했다. 무림인들은 원한을 가슴에 품은 채 분분히 명부곡으로 몰려 들었다. 무림인들은 명부곡에 들어서는 순간 아차 싶었다. 명부곡은 이름 그대로 저승의 계곡같았다. 곡 안에서 풍기는 음산한 괴기와 번쩍이는 새파란 인광(燐光)들은 무림인들을 모골이 송연하도록 만들었다. 그날따라 대기는 침침하고 무서운 회색구름이 짙게 깔려 있었다. 때는 야반(夜半) 삼경이니 그 두려움이란 오죽하랴. 그러나, 품고 있는 원한으로 이 두려움을 간신히 억누를 수 있었다. 또한 머리 수도 천여 명에 달하지 않는가? 무림인들이 몰려든 지 얼마 안 되어 원흉이 나타났다. 무림인들은 원흉인 그 신비 복면여인을 대하자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 전체에 흐르는 고아한 자태(姿態). 걸음걸음을 옮길 때마다 풍기는 요염한 육향(肉香). 한눈에 남자를 뇌살시킬 듯한 쭉 빠진 몸매. 비록 얼굴을 망사로 가렸으나, 그녀의 얼굴이 어떠한지 능히 짐작될 만한 절세가인이었다. 채양보음(採陽補陰)으로 삼백여 명의 젊은 고수들을 죽인 여인이 저런 모습을 어찌 지닐 수 있단 말인가? 그녀에게서는 풍요로운 매력만 풍길 뿐, 음탕한 기색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을 대한 무림인들은 자신들이 잘못 생각했음을 알 수 있었다. 눈빛에서 흘러 나오는 저미한 새하얀 백광(白光) 속에 담긴 귀기서린 살기(殺氣)는 무림인들을 공포에 몰아 넣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어찌 그 눈빛을 일개 여인의 눈빛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오직 피에 굶주린 이리, 그 이리에게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눈빛이었다. "오호호호호--" 그녀는 나타나자마자 미친 듯이 웃으며 아무 말 없이 살인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터지는 살과 으스러지는 뼈조각들, 튀어 오르는 수급들. 그녀의 손에서 발출되는 백광은 일시에 삼십여 명씩을 죽여 갔다. 그녀의 살인 수법은 너무나 악독한 것이었다. 허공을 째는 여인의 웃음소리와 발출되는 백광. 뒤이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지는 비명은 지옥의 아수라 호곡소리도 그보다는 듣기 좋으리라. 그녀는 한 시진 동안 명부곡에 모인 무림인들 중 세 명을 남기고 모두 죽였다. 명부귀요(冥府鬼妖)라 자처하는 희대의 살인녀(殺人女)는 이렇게 공식적으로 무림에 등장했다. 무림은 발칵 뒤집어졌다. 무림의 구파일방(九派一幇)은 대노한 나머지 정예고수 일백 명을 선출하여 그녀를 죽이기 위하여 파견시켰다. 석 달만에 명부귀요를 찾아낸 정예고수 일백 명. 그러나 결과는 명부곡에서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머리가 으깨어져 허연 뇌수를 흘린 채, 처참한 시체가 되어 어느 이름 모를 계곡에서 발견되었다. 그후, 그녀는 거리낌 없이 끊임없이 음탕한 유희와, 살인의 유희를 즐겼다. 지난 이 년 동안, 그녀의 양 손에 죽어간 무림인들의 숫자는 가공하게도 오천여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녀는 가히 살아 있는 악마였다. 명부귀요(冥府鬼妖)!


이 이름은 무림의 공포의 대명사로 심어져 있었다. 이제, 무림인들은 오직 한 가지 소원밖에 없었다. 구원자(救援者)! 오직 명부귀요를 제거할 무림의 구원자를 바랄 뿐이었다. 이런 암흑의 시기인 무림에 두 가지 소문이 퍼졌다. 하나는 무림인들의 마음 속에 희망을 심어주는 밝은 소문이었다. 그것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초절한 무공을 지닌 절세기남이 무림에 나타났다는 소문이었다. 무림인들은 절세기남이 대마두 만독음혈존을 죽였다는 한 가지의 사실만으로도 경악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들의 신경은 모두 이 절세기남에게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만독음혈존을 죽인 인물이라면 그들이 원하는 구원자로서 충분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다른 한 소문은 무림인들을 미칠 듯한 흥분으로 몰아 넣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만무록(萬武錄)의 출현이었다. 만무록은 오백 년 전의 광세기인(廣世奇人) 청허상인(淸虛上人)이 저술한 무학총요(武學總要)의 책이다. 만무록에는 각대문파의 절정 무공은 물론 청허상인이 존재하던 그 이전의 절세기인들의 모든 무공이 수록되어 있다는 비급이었다. 이 비급이 태행산(太行山)에서 발견되었다는 소문이었다. 무림인들은 벌떼처럼 태행산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태행산 기슭의 낙월현(落月縣)! 낙월현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삼삼오오 모여드는 무림인들로 인해 장안성 내의 모든 객점은 초만원을 이루고 주루마다 무림인들이 짝을 지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곳은 낙월현 모퉁이에 위치한 낙월객잔(落月客殘). 주루까지 겸한 이 객잔은 낙월현에서 제일 큰 객잔이었지만 이곳 역시 시끄럽고 부산할 정도로 손님이 몰려 들어 빈 방이 없을 정도였다. 객잔의 주루 이 층 창가에 초립을 쓰고 핏빛 적의(赤衣)를 입은 율원양이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자음자작을 하고 있었다. 어떤 깊은 근심이 있는지 초립 속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으음, 천선마살개. 그 죽일 놈이 말한 것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구나. 내가 이 년을 황무곡에서 보낼 동안 일어난 살겁은 필시 그 놈이 말한 계집일 것이다. 명부귀요는 분명 원영곤음체를 타고 난 계집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출도한 이상 명부귀요가 악행을 저지를 시기도 끝났다.' 그는 찌푸린 중에도 입가에 고소를 흘렸다.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흘렀다. '나와 헤어지지 않으려고 떼를 쓰는 꼴이란?' 그는 곤륜산에서 경설운을 떼어놓고 오느라 혼이 났던 것이다. 그녀는 그와 헤어지지 않으려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발을 구르며 울면서 떼를 썼던 것이다. 그러는 그녀를 간신히 달래며 그는 곤륜의 실전 무공인 태청강기(太淸剛氣)와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을 전수해 주었다. 무공을 익히는 즉시 자신을 찾아 오라고 달래 간신히 떼어 놓고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서너 잔의 술을 다시 들이켰을 때, 아래층이 별안간 소란스러워지며 서너 패의 무림인들이 무더기로 올라왔다. 첫번째 들어온 손님은 두 사람이었다. 한 명은 백발이 성성하고 남색장삼을 입었으며 손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담뱃대를 든


노인이었다. 또 한 명은 검고 긴 두 줄기의 댕기를 늘인 소녀로 두 개의 영롱한 눈망울은 댕기보다 더 검게 빛났다. 보아하니 남삼노인의 손녀인 것 같았다. 그녀는 매우 아름답기도 하였으나 매우 재지(才智)가 뛰어난 소녀같아 보였다. 그들의 뒤를 따르듯 두번째 들어온 사람의 일행도 역시 둘이었다. 이들은 신체가 우람하고 거대하게 보이는 구레나룻을 기른 사나이들이었다. 한데, 이들 두 사람의 옷차림과 생김새는 서로 바꾸어도 모를 정도로 똑같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허리에 찬 칼마저도 똑같았다. 그리고, 세번째는 모두 네 사람이었다. 그들 중 하나는 몸집이 크고 다른 하나는 그와 대조적으로 왜소하여 웃음을 자아냈다. 또 세번째 인물은 젊은이로 안색이 자색에 장극(長戟)을 등에 메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 녹의를 입고 머리엔 금으로 된 장식을 꽂은 여자였다. 걸음걸이가 사뿐사뿐한 것이 처녀처럼 보였다. 하나, 나이는 다 큰 처녀의 어머니뻘은 되는 것 같았다. 이 층에 있던 무림인들은 그렇게 허리를 흔들고 다니다가 허리가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을 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올라온 인물은 단 한 명이었다. 이 인물은 마치 해골에다 가죽만 씌운 것처럼 깡말라 있었다. 게다가 얼굴은 지독하게 긴 말상이었다. 그리고, 긴 얼굴에 손바닥만한 푸른 점이 있는 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 얼굴을 찌푸리게 했다. 이 사람이 이 층에 나타나자, 주루는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 졌다. 그들 모두의 얼굴에 일순 두려움이 솟아올랐다.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무림인들은 슬금슬금 고개를 돌렸다. '저 자가 나타났으니 만무록을 얻을 생각은 일찌감치 집어치워야 겠구나.' 그들은 일시에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골바가지같은 얼굴의 인물은 냉막하고 거만한 태도로 주루를 훑어 보았다. 어찌된 일인지 그의 눈에는 오직 살인 의지만 담겨 있었다. 그 외는 어떤 추호의 감정도 없었다. 그는 자신 외에는 모두가 살인 대상으로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두 눈에 아무런 원한도 없는 사람들에 대한 살기만이 들어 있겠는가. 무림인들은 몸을 흠칫 떨며 술잔만 들이킬 뿐이었다. 그 인물은 그들이 알아서 설설 기는 태도를 보이자 만족한 웃음을 띠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에 항상 예외가 있듯이 주루에도 예외의 인물들이 있었다. 단 아홉 사람뿐이었다. 처음 나타났던 노인과 소녀, 뒤 이은 두 명의 구레나룻 대한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지 매우 안색이 평온했다. 그들 뒤에 들어선 나머지 네 명과 초립을 쓴 율원양이었다. 율원양은 새로운 인물이 나타난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이 네 패의 인물들도 모두 말이 없었다. 먼저 주루를 차지하고 있던 인물들은 음식과 술만 없애고 있을 뿐이었다. 율원양은 갑자기 주루 안이 조용해지자 이상히 여겼다. 무언지 모를 긴장감으로 주루가 가득 차 있을 때 긴장감을 깨고긴 댕기를 맨 소녀가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한 사람이 만든 자신의 계율때문에 무림에 명성을 떨치던 무림인들이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군요." 비록 나직한 음성이었으나 조용한 주루 구석구석까지 들리는 음성이었다. 주루 안의 무림인들은 자존심이 상해 모두 노기를 띠우고 소녀를 노려 보았다. 그러나 거친 숨소리 외엔 댕기머리 소녀를 향해 단 한 마디 음성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림인들의 눈길은 다시 해골바가지같은 인물에게 쏠렸다. 소녀의 말은 그를 두고 한 모양이었다. 일순, 주루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무거운 압박감이 감돌았다. 율원양은 힐끔 뒤를 돌아다 보았다. '이상한 노릇이로구나. 저 자가 누구이기에, 이 많은 사람이 두려움에 떠는 걸까?' 해골바가지같은 인물은 잿빛 음소를 흘리고 있었다. "으흐흐... 밑살에 잡초도 나지 않은 어린 계집애가 감히 노부를 입에 담다니, 생각 같아선 당장에 찢어 죽이고 싶다만 나 벽혈음사(碧血陰蛇)는 오늘 손에 피를 묻히기 싫다. 그러나......." 벽혈음사의 말은 소녀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모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댕기머리 소녀는 화를 내기는커녕 그의 말을 끊으며 오히려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호호호... 말대가리 주제에 입은 살아서... 벽혈음사, 네 이름은 다른 사람을 두렵게 만들지는 모르나, 이 소녀에게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호호호--" "뭐라고? 이 가랭이를 찢어 죽일 년같으니라고" 쾅. 벽혈음사라 자칭한 자는 탁자를 치면서 벌떡 일어섰다. 벽혈음사는 삼십여 년 전부터 악명을 떨치는 고수로서 아무도 그의 확실한 내력은 몰랐다. 단지, 그의 무공은 지독히 패도적이며 가공할 살수를 펼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에게는 자신이 세운 한 가지 계율이 있었다. 계율(戒律)은 바로 자신이 있는 곳에선 아무도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면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도 씨를 남기지 않고 몰살시켜 버리는 살인마였다. 이 계율이 삼십 년 동안 그가 지켜온 것이었다. 이런 벽혈음사에게 나이 어린 소녀가 입을 나불대었으니 참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때에, 소녀의 할아버지인 듯한 남삼노인은 두 눈을 반쯤 감은 채, 술을 한 잔 마시고 또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있었다. 벽혈음사는 음독한 눈으로 조손을 훑어 보더니 냉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네년을 지금 죽이지 않는 것은 내가 직접 손을 쓰지 않아도 네년을 죽일 인물이 곧 오기 때문이다. 흐흐흐......." 그는 연신 음소를 날리며 다시 주루를 훑어 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무림인들은 모두 움찔하며 시선을 피하거나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이 안에 있는 잡종들. 너희들도 모두 죽게 될 것이다." 목소리는 매우 낮은 것이었으나, 듣는 사람은 고막이 터질 듯 했다. 그의 목소리에 무림인들은 이상하게도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러나, 전혀 두려워 하지 않는 소녀의 입에서는 조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행동으로 보아서 벽혈음사의 말뜻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말을 마친 벽혈음사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벽혈음사를 알고도 겁 먹지 않던 네 명 중에 장극(=창)을 등에 멘 젊은이가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잠깐, 나는 장극무정(長戟無情) 양승조(陽升粗)다. 누가 우리를 죽이려 한다는 것인지 얘기해 보아라."


고함을 지른 그는 번개같이 긴 창을 뽑더니 몸을 날리며 장극을 내밀어 벽혈음사를 향해 찔렀다. 휙.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무수한 창화(槍花)가 형성되어 폭사되어 나갔다. 벽혈음사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을 하더니, "오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슬쩍 허리를 돌리면서 가볍게 그의 장극을 옆구리에 끼어 버렸다. 양승조는 가벼운 동작에 장극을 제압당하자 얼굴이 시퍼렇게 일그러져 버렸다. '과연, 저 놈의 명성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군.' 양승조는 전력을 다해 내공을 끌어 올려 장극을 빼내려 하였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자주빛 얼굴이 괴상한 색깔로 변했다. 벽혈음사는 음소를 날렸다. "흐흐흐... 까불지 말고 조용히 기다려라." 그리고서야 그는 슬쩍 창을 놓아 주었다. 그 바람에 있는 힘을 다해 창을 당기고 있던 양승조는 보기 좋게 뒤로 나가 떨어졌다. 다행히 옆에 앉아 있던 삐쩍 마른 여인이 그를 붙잡아 주어서 술상이 박살이 나지 않았다. 그때에 양승조의 창은 하나의 평범한 철봉으로 변해 있었다. 창날이 어느 틈엔가 부러져 나가 온데간데 없이 없어져 버리고 만 것이었다. 팍. 벽혈음사는 떨어진 창을 상 위에다 찍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서히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양승조는 너무나 창피해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찾아 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상한 체면을 회복하기 위해 다시 벽혈음사에게 달려 들려 했으나 여인이 그의 팔을 잡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지금은 참아요. 나중에 얼마든지 기회가 있을 거예요. 지금은 때가 좋지 않아요." 양승조는 분한 숨을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무림인들은 사색이 되어 서로 마주보면서 눈짓을 교환했다. '도대체, 누가 우리를 죽인다는 것인가? 누가.......' 이것은 그들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들은 주루의 많은 인원들을 한 차례 훑어 보며 의아심을 걷지 못했다. '만무록때문에 태행산에 온 우리 모두를 감히 누가 죽이려 한단 말인가?' '벽혈음사는 무슨 뜻으로 말을 한 것일까?' 무림인들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내심 불안해 하였다. 밖에는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으며 등불이 흔들릴 때마다 벽혈음사의 얼굴은 더욱 더 공포스러워 보였다. 무림인들은 벽혈음사를 바라보면서 안절부절 하였다. 어떤 무림인들은 도망갈 생각을 하였으나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만약, 쥐새끼처럼 도망갔다는 소문이 무림에 퍼지면 차후, 무슨 면목으로 사람들을 대한단 말인가? 홀로 술을 들고 있던 율원양은 벽혈음사의 안하무인(眼下無人)격인 태도에 일장으로 쳐 죽이고 싶었지만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그의 모습은 평범해 보여 어느 누구의 주의도 끌지 못했다. 침묵이 그들을 누를 때, 침묵과 긴장감이 주는 압박감을 참지 못하고 한 대한이 외쳤다. "어떤 놈이 나를 죽이러 오는지, 오기만 하면 나 철장소패왕(鐵掌小覇王) 호비(胡非)가 박살을 내주고야 말겠다." 그는 나중에 들어왔던 두 구레나룻 대한 중, 한 명이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음성들이 마구 터져나왔다. "나도 당신과 함께 한 몫을 담당하겠소."


"나도요." "우리 모두 힘을 합칩시다." 소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으면 담이 커지는 것이 군중들의 심리다. 모인 무림인들은 일시간에 기고만장하여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이들의 태도에 율원양은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쯧쯧쯧... 소위 무림인이란 작자들이 저렇게 쓸개가 없어서야 원.' 갑자기 차갑기 그지없는 냉소가 주루 이 층 입구에서 들려왔다. "흥!" 그 냉소는 족히 사람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 만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이구동성 한 마음으로 떠들던 무림인들의 안색은 동시에 급변했다. 그들은 일제히 입구로 시선을 던졌다. 그들은 시선을 던지는 순간 그대로 얼어 붙었다. 목에 무엇이 막힌 듯, 비단(非但) 한 마디 말도 꺼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냉랭한 웃음소리와 함께 이 층 입구에 여섯 명의 인물들이 뒤이어 맨 처음 나타난 자의 뒤에 나타났다. 여섯 사람은 색깔이 매우 선명한 황색장삼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이내 들어오지 않고 두 손을 내려뜨린 채, 장승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채, 그저 무표정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들을 바라 보며 얼어 붙은 무림인들의 얼굴은 급격히 공포로 물들어 갔다. 율원양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고만장해 있던 무림인들이 어째서 그들에 대해선 이처럼 두려워하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무림인들의 표정은 사람이 아닌 귀신을 보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율원양은 재빨리 주루 안을 살펴 보았다. 이상한 것은 백발이 성성한 남삼노인과 바람만 조금 세게 불면 여지없이 쓰러질 것 같은 가냘픈 댕기머리 소녀였다. 이 두 조손만은 매우 태연했으며 전혀 무서워하는 빛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남삼노인은 오히려 여유만만하게 술까지 마시고 있었다. 그 점은 벽혈음사도 마찬가지였다. 주루 안에 공포로 가득한 기이한 침묵이 흐르고 있을 때, 갑자기 입구에 서 있던 여섯 명의 황삼인들이 양 쪽으로 비켜서며 길을 터놓았다. 그 사이를 통해 나이가 매우 젊은 한 명이 뒷짐을 진 채, 서서히 걸어 들어왔다. 이 소년 역시 황색장삼을 입고 있었다. 황삼소년은 주루를 둘러보더니 벽혈음사한테 시선을 멈추었다. 벽혈음사는 그의 시선엔 아랑곳 하지 않고 태연하게 술을 마실 뿐이었다. 소년의 입가에 지극히 차가운 냉소가 흘렀다. 그러더니 서서히 몸을 돌리면서 무림인들을 번갈아 바라 보았다. 무림인들은 모두 황삼소년보다 험악하게 생긴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황삼소년의 시선을 받는 순간, 무림인들은 혼이 다 빠져나간 듯, 앉은 채 비틀거렸다. '빌어먹을. 금전방(金錢幇)도 만무록에 눈독을 들였을 줄이야.' 무림인들 비급 쟁탈에 오직 황금만을 추구하는 금전방이 개입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만약 사전에 금전방이 개입하는 줄 알았다면 그들은 하나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양승조 옆에 앉아 있던 여인이 양승조의 손을 꽉 쥐었다. 공포로 인해 안정이 안 되는지 그녀의 손은 쉴 새 없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황삼소년은 천천히 주루 안을 돌면서 품 속에서 노란 구리동전을 꺼낸 뒤, 무림인들의 머리 위에다 각각 하나씩 올려놓기 시작했다. 무림인들은 갑자기 돌부처라도 된 듯,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둔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아무도 반항은커녕 말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얼어 붙은 고드름처럼 가만 있었다. 황삼소년은 다시 몇 개의 동전을 꺼내 짤랑짤랑 흔들었다. 그는 남삼노인과 댕기머리 소녀의 탁자 앞으로 다가갔다. 남삼노인은 고개를 들어 황삼소년을 응시하며 빙그레 웃더니, "젊은이, 만약 술을 마시고 싶다면 여기 와서 앉게. 내가 한 잔 사겠네." 남삼노인은 술에 취한 듯 혀가 꼬부라져서 무엇을 말했는지 알아 듣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황삼소년은 노인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냉막하게 웃었다. 그의 입가에 웃음이 사라지는가 싶자, 별안간 탁자를 힘껏 내리쳤다. 꽝. 이 소리와 동시에 접시에 담겨져 있던 땅콩이 모두 튀어 올라 폭풍우와 같이 노인의 얼굴을 향해 폭사되어 나갔다. 남삼노인은 이 광경에 넋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갑자기 화석이라도 됐는지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땅콩이 벌떼같이 노인의 안면을 가격하려는 찰나, 황삼소년이 느닷없이 오른손을 뻗었다. 순간, 그 많은 땅콩들이 강한 접인신공에 끌려 그의 소매 속으로 모두 빨려 들어갔다. 황삼소년은 싱긋 웃으며 소매를 떨구었다. 다시 땅콩이 쏟아져 나와 접시 위에 담겨졌다. 남삼노인은 두 눈이 휘둥그래진 채 얼른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댕기머리 소녀는 황삼소년의 접인신공에 손뼉을 치면서 간드러지게 웃었다. "호호호... .정말 재미있군요. 소협이 그런 재미있는 놀이를 할 줄 아는 사람인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몇 가지 더 재미있는 솜씨를 보여 주세요. 그러면 제가 할아버지를 졸라 술을 사도록 하겠어요." 황삼소년은 극히 정중한 내가공력(內家功力)으로 비할 데 없이 절묘한 접인신공을 전개한 것이다. 그런데, 천진난만한 소녀는 이것을 아이들이 하는 장난거리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황삼소년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댕기머리 소녀를 위 아래로 훑어 보더니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서서히 몸을 돌렸다.

댕기머리 소녀는 어리광부리듯 급히 말했다. "재미있는 구경을 좀더 보여주시지 않겠어요." 이때였다.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않던 벽혈음사가 느닷없이 냉혹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이런 구경거리는 될 수 있는 한 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댕기머리 소녀는 두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무엇 때문이지요?" 벽혈음사는 살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너희들이 만약, 무공을 할 줄 알았다면 방금 그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너희들을 죽였을 것이다. 나는 네가 노부를 우습게 알기에 제법 이름깨나 알려진 무림인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구나." 댕기머리소녀는 황삼소년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가에는 아리송한 조소가 스치듯 서렸다. 황삼소년은 벽혈음사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천천히 율원양의 앞으로 다가와 수중의 동전을 흔들었다. 짤랑. 짱랑. 그러나 율원양은 여전히 등을 보인 채 술만 마시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율원양의 초립을 벗겼다. "고개를 돌려라." 시종일관 서릿발보다 더 차갑고 지금까지 한 마디 말도 없었던 황삼소년이 냉막한 어조로 말했다. 율원양은 목소리가 얼음보다 더 차가운 느낌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창을 향하고 있는 율원양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운에게서 네놈들 금전방(金錢幇)의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지금은 너희들이 하는 꼴을 두고 본다만 잠시 후면 영원히 너희들을 잠재워주마.' 율원양은 속으로 싸늘하게 웃으며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내심으로는 단번에 황삼소년의 몸을 두 쪽 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있었다. 원래 율원양의 얼굴은 여인이라면 꿈에서라도 그림직한 잘생긴 얼굴. 그 얼굴이 황삼소년을 쳐다보고 있었다. 감정없던 황삼소년의 얼굴에 흠칫 놀라는 기색이 서렸다. '아니, 이 놈의 얼굴은 나같은 것은 비교도 안될 정도로 잘 생겼구나. 그런데 놈은 전혀 무공을 익힌 것 같지 않구나.' 그가 보기에는 그랬다. 백옥보다 흰 관옥같은 얼굴이 연약한 서생(書生)으로 보일 뿐이었다. 황삼소년은 냉막하게 말을 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을 천지신명(天地神明)에게 감사하도록 하라." 만약, 지금 눈 앞의 백면서생이 만독음혈존을 죽인 장본인이라는 것을 황삼소년이 안다면 그의 표정은 어떻게 변할까?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율원양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댕기머리 소녀였다. 어찌나 또렷하게 쳐다보는지 그녀의 두 눈은 매우 빛나고 있었다. "녀석아, 저 청년 얼굴 닳겠다. 그만 쳐다보아라." 술취한 남삼노인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댕기머리 소녀는 그제서야 자신이 무얼하고 있는지 깨닫고는 얼굴이 새빨개져 고개를 숙였다. 조손의 말과 행동은 남들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웃음소리는 결코 일지 않았다. 그들은 웃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벽혈음사가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들이 무공을 익힌 사람보다 훨씬 잇점이 많을 때가 많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이지." 층계로 걸어가던 황삼소년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벽혈음사. 너무 득의양양할 것 없다. 조금 있다 방주께서 오시면 친히 너에게 동전을 내릴 것이다." 벽혈음사는 음사한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금안탈명마(金眼奪明魔)에게 그런 담력이 있나 내 친히 볼 것이다." 까마귀 우는 소리도 그의 웃음 소리보다는 듣기 좋을 것 같을 정도로 듣는 이로 하여금 구역질을 일으키게 하는 웃음 소리였다. "그래?" 가벼이 반문한 황삼소년은 냉막하게 웃으며 더 이상 이 층에있는 무림인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뒷짐을 진 채 서서히 층계 밑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괴변이 생겼다. 그가 내려가자 머리에 동전이 얹혀진 모든 무림인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끈으로 끌고 가듯 끌려 가는데 그들은 모두 울상을 하고 목을 학처럼 길게 뽑고 있었다. 머리 위에 올려진 동전 떨어지는 것이 두려운 듯 상반신을 꼼짝하지 않으며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였다.


율원양은 얼마 살지 않았지만 이처럼 괴이한 일은 생전 처음 보았다. 이들, 무림인들이 모두 합세한다면 어떠한 인물이든 능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 황삼소년에게는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쩔쩔매는 것일까? 율원양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상대가 살인을 밥먹듯이 저지르는 마두들이라지만, 각자에게 지니고 태어난 자존심이 있거늘 어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주루 밖은 바람과 함께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주루 밖은 일견해 보아도 천여 개에 가까운 수많은 원이 그려져 있었다. 그 동그라미는 두 발이 들어가면 꽉 찰 만한 원이었다. 무림인들은 황삼소년의 뒤를 따라나가 극히 자연스럽게 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망부석같이 우뚝 서서 옴짝달싹 하지 않았다. 황삼소년은 다시 주루로 돌아와 아래층 빈 탁자에 앉았다.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다. 한 명의 황삼인이 주루 앞으로 나타났다. 이 황삼인은 비교적 나이가 많은데 한쪽 귀와 한쪽 눈이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그의 외눈에서는 화염이 이글거리듯 무서운 신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입고 있는 황삼에도 금빛 테가 둘러져 있었다. 그의 뒤로 수십 명의 무림인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의 차림새로 보아 결코 무명지배(無名之輩)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도 앞의 무림인들과 똑같은 울상이었다. 목을 학처럼 길게 내뻗고, 극히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머리 위에도 한결같이 동전이 하나씩 얹혀 있었다. 그 중에는, 피부가 검고 깡마른 데다가 매우 위맹하게 생긴 사람도 끼어 있었다. 앞서의 무림인들은 그 사람을 보자 의아하게 생각했다. '저 사람이 어째서 이곳에 왔지?' 외눈 장삼인이 앞서 온 무림인들을 훑어보더니 싸늘하게 웃었다. 그 역시 뒷짐을 ��� 채 서서히 주루 안으로 들어가 황삼소년의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은 마주보면서 서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들은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 이미 묵계가 되있는지 서로 아무런 말도 없었다. 다시, 차 한 잔 끓일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주루 앞으로 또 한 명의 황삼인이 나타났다. 이 황삼인은 매우 창노했으며 머리와 수염이 모두 눈처럼 희었다. 그의 황삼에도 예외없이 금빛 테가 둘러져 있었다. 그의 등 뒤에도 역시 수많은 무림인들이 멍하니 따르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황삼노인에게는 별로 이상한 점이 없었다. 하지만, 가까이 와 보자 그제서야 그의 얼굴이 녹색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처럼 하얀 수염과 머리카락 그리고 녹색 얼굴은 보는 사람에게 신비감과 공포심을 함께 느끼게 했다. 비단 얼굴 뿐 아니라 두 손까지 녹색이었다. 주루 밖의 원 안에 서 있던 무림인들은 그 노인을 보는 순간,지옥의 악귀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떤 자들은 새파랗게 질린 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노인을 따라온 무림인들의 숫자가 제일 많았다. 무려 삼백 명이 넘는 숫자였다.


이렇게 해서, 반 시진도 채 못돼 주루 밖에 그려진 수많은 원 안에는 사람들로 꽉 찼다. 끌려온 자들은 마치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없이 그 자리에서 서서 돌부처처럼 굳어 있었다. 황삼에다 금빛 테를 두른 사람은 모두 네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황삼인은 더 더욱 늙어 보였다. 몸이 꼬부라진 것이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노인이 데리고 온 무림인들은 그 누구보다 많았다. 오백 명이 넘는 것 같았다. 이 네 명의 황삼인은 한 자리에 모여 앉았다. 이들은 모두 벙어리인지, 그렇지 않으면 말을 잊어 버렸는지 도통 말이 없었다. 차츰 시간이 흐를수록 커다란 주루 안과 밖은 마치 공포의 무덤처럼 변하였다. 일정치 않은 숨소리와 바람소리만 들릴 뿐, 아무소리도 나지 않았다. 질식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모두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율원양과 남삼노인, 그리고 벽혈음사만은 시종 무표정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댕기머리 소녀는 아예 밖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심 밖인 듯 했다. 그녀는 턱을 두 손에 괴고 오로지 율원양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율원양에 대한 감탄과 호기심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정녕 이곳의 광경을 구경하고자 하는 것일까?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부터 갑자기 쇠붙이가 땅을 치듯 맑고도 무거운 소리가 들려왔다. 딱. 딱. 딱. 딱. 지금과 같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을 때에 이러한 소리를 듣게 되자 더욱 음산하고 공포스럽게만 느껴졌다. 계속해서 규칙적으로 들려 오는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는 사람의 혼을 빼앗는 듯한 소리였다. 네 명의 황삼인은 마주 보더니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쇠붙이가 땅을 치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깝게 들려왔다. 마침내 어두운 장막을 뚫고 한 인영이 서서히 나타났다. 나타난 인물의 왼쪽 다리는 무릎 부분에서부터 잘려져 나간 채 없었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혼을 뺏는 듯한 소리는 바로 그 지팡이에서 난 것이었다. 주루 앞에 걸린 등불이 희미하게나마 나타난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다. 이 사람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었다. 솥 밑바닥같이 검은 얼굴엔 수많은 칼자국이 나 있었다. 삼각으로 된 뱁새눈에 땅을 쓰는 빗자루와 같은 눈썹을 달고 있었고 코와 입은 사자보다도 더 큰 것 같았다. 이러한 모습의 소유자는 설사 얼굴에 칼자국이 없다 하여도 보는 이로 하여금 간담을 써늘하게 할 것이다. 네 명의 황삼인은 급히 달려나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려 예를 올렸다. 외발의 괴인은 손을 가볍게 흔들 뿐 역시 말이 없었다. 괴인은 서서히 주루 안으로 들어왔다. 그제서야 괴인도 황색 장삼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장삼의 아래쪽을 걷어 허리에다 끼었을 뿐이다. 옷은 색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웠다. 그러나 그 더러운 황색 장삼에도 역시 금테가 둘러져 있었다. 이미 아래층으로 내려와 있던 네 사람 중 벽혈음사는 이 괴인을 보자 안색이 급변했다.


댕기소녀는 무서운 듯 고개를 한쪽으로 돌린 채 더 이상 바라보지 않았다. 황삼괴인은 들어서자마자 벽혈음사를 보고 미간을 다소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모두들 수고했다." 비록, 흉악하기 비할 데 없이 생겼지만 말투는 몹시 부드러웠다. 네 명의 황삼인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스럽습니다." 외다리 괴인이 다시 물었다. "낙월현 내의 무림인들을 모두 데려왔소?" 황삼노인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모두 몇 명이나 되오?" "일천백칠십일 명입니다." "그들은 모두 만무록 때문에 온 것이 틀림없소?" 황삼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속하 등은 이미 엄밀히 조사해 보았습니다. 이 무림인들은 요 삼 일 내에 온 인물들로서 만무록 때문에 온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약속도 없이 모두 태행산으로 몰려 왔겠습니까?" 외다리 괴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됐소. 무고한 자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오." 황삼노인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외다리 괴인이 다시 말했다. "우리의 뜻에 대해서 무림인들은 모두 알고 있소?" "아직 모를 것입니다." "그럼 그들에게 가서 설명해 주시오." 황삼노인은 공손히 예를 취했다. "분부대로 받들어 거행하겠습니다." 그러더니 이내 문 앞으로 걸어나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지 여러분들은 모두 알고 계시리라 믿소. 그리고 여러분이 이곳에 온 뜻에 대해서 우리도 분명히 알고 있소. 여러분들은 필시 태행산에서 발견되었다는 만무록 때문에 왔을 것이오." 원 속에 들어가 있는 천여 명의 무림인들은 감히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고, 또 말을 하는 것이 두려운 듯 그저 흐리멍텅하게 콧소리로 대답했다. 황삼노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여러분이 지닌 바 무공으로는 이곳에 와 다른 생각을 하기엔 아직 자격들이 없소. 그러므로 여러분들께선 우리 금전방이 만무록을 얻을 때까지 기다렸다 후에 다시 떠나는 것이 좋겠소. 아시겠소?"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만무록 탈취에 뛰어 들면 그것은 스스로를 해치는 길이오. 지금 태행산에는 전대고인들까지 모두 몰려오고 있소. 그들은 모두 일당천(一當千)의 개세절학을 지닌 인물들이오. 그저 여러분들께서 조용히 서 있기만 한다면 그 누구도 여러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여기까지 말한 그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여러분들께서도 모두 아시리라 믿습니다. 우리 금전방은 부득이하지 않은 이상 사람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누군가가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엣취!" 재채기를 한 사람은 다름아닌 녹의를 입은 중년부인이었다. 그녀는 호북(湖北)일대에서 명성을 떨치는 수사(水蛇) 호미(胡美)였다. 아까 주루에서 장극을 쓰는 양승조에게 참으라고 권고했던 여인이기도 했다. 여인들은 자신의 몸매를 과시하기 위해 대부분 추위를 느낄 망정 옷을 껴입지 않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호미는 이런 버릇이 심했다. 그녀는 옷을 적게 입은 데다가 주루 밖의 바람이 심하고, 거기에다 맨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감기에 걸린 것이다. 재채기를 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나,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이었다. 머리 위에 얹혀 있던 동전을 떨어뜨린 것이었다. 순간, 호미의 안색이 급변했을 뿐만 아니라 모두의 안색도 변했다. 황삼노인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은 우리의 규칙을 모르고 있소?" 호미는 사색이 되어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알고 있어요" 황삼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으면서 어찌 그리 조심성이 없소?" 호미의 몸이 심하게 떨렸다. "후배는 절대 일부러 한 짓이 아닙니다. 갑자기 재채기가 나와서 한 것 뿐이니 선배님께선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일부러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규칙을 어길 수는 없소.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위신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오. 당신도 무림에서 컸으니 이런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 아니오?" 호미는 고개를 돌려 철장소패왕 호비를 바라보면서 애걸했다. "오빠, 어떻게 얘기좀 해 주세요" 그러나 누가 우리를 죽이려 들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호언장담 했던 철장소패왕 호비는 들은 척도 안했다. 다만 네가 저지른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곤란한 빛만이 가득했다. 수사 호미는 기가 막힌 얼굴로 한동안 철장소패왕 호비를 쳐다 보다가 미친 듯이 허망한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호호--" 그녀의 눈에서 새파란 한기가 쭉 일어 났다. "나는 오빠가 친여동생의 생사를 도외시할 줄은 여태 몰랐군요." 물론 철장소패왕 호비는 수사 호미의 친오빠였다. 그는 친 여동생의 비웃음 가득 찬 말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번에는 장극무정 양승조를 쳐다 보았다. 장극무정 양승조는 그녀가 자신을 쳐다 보지 않기를 마음 속으로 빌고 빌었다가 자신을 쳐다 보자 속으로 냅다 욕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년같으니.' 욕하는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수사 호미는 양승조의 얼굴을 보며 절망감을 느꼈다. 그래도 그녀는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그에게 애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양승조는 상당히 괴로운 듯한 표정을 쥐어 짜내며 말했다. "당신 오빠도 당신을 도울 수 없는데 내게 무슨 힘이 있겠소?나에겐 아무 힘도 없으니 아무 말 말아 주시오. 미안하오." 장극무정 양승조는 말을 하면서도 혹시나 머리 위의 동전이 떨어질까봐 무척 조심스레 한 자 한 자 말을 했다.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비수가 되어 수사 호미의 가슴에 와서 박혔다. "깔깔깔깔깔--" 그녀는 친오빠가 거절할 때보다 더 큰 절망감에 미친 듯이 웃었다. 그녀는 양승조를 바라보며 한의 눈물을 흘리며 원한 맺힌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 이 사람이 바로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어저께 밤만 하여도 내 몸 위에서 용두질을 치면서 이 사람은 나를 위하는 일이라면 죽음을 불사하겠다고 말했지요. 하지만 지금 그는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어젯밤의 정사까지 들먹이며 말했지만 아무도 그녀를 비웃지 않았다. 여기까지 말한 그녀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또한 실성한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리던 말소리도 점점 낮아졌다. 그녀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더니 혼자 말인 양 다시 중얼거렸다. "정이란 무엇이죠?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도 제 목숨 앞에서는 그간 쌓은 사랑을 배신하는데 사람이 살아 가는데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요. 모든 번뇌를 버리고 말이에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돌연 몸을 굴려 칠팔 자 밖으로 나갔다. 두 손을 휘둘러 황삼노인을 향해 암기를 떨쳐 내었다. 그리고는 이내 몸을 날려 주루의 지붕으로 솟구쳤다. 수사 호미는 암기와 경공으로 이름을 떨친 지라 수법이 과연 비범했다. 그녀가 발해낸 암기는 많을 뿐만 아니라 신속하고 정확했다. 그러나, 황삼노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은 또 무슨 망발인가?" 그의 말은 매우 느리고 온순했다. 하지만, 그의 동작은 육안으로는 거의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신속했다. 휘- 익! 짧은 한 마디를 하는 순간, 수사 호미가 발출한 수십 개의 한성이 모두 그의 소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주루 지붕 위로 날아갔던 호미는 어찌된 일인지 갑자기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쿵. 얼굴을 땅바닥에 박으며 떨어졌기에 그녀의 얼굴은 완전히 깨져 피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황삼노인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본래 편하게 죽을 수 있었소. 그런데 이게 무슨 경거망동한 짓이오. 쯧쯧쯧......." 그는 혀를 길게 찼다. 호미는 가슴을 움켜잡은 채 쉬지 않고 기침을 터뜨렸다. 기침을 할 때마다 붉은 선혈이 쏟아져 나왔다. 황삼노인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죽기 전에 당신의 한 가지 부탁을 받아 주겠으니 얘기해 보시오." 호미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입을 열었다. "그것도 규칙 중의 하나인가요?" "그렇소." 호미가 다시 물었다. "제가 무엇을 요구하든지 다 들어 줄 건가요?"


"만약,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우리가 대신해 줄 것이며 아직 끝내지 못한 원한이 있다면 우리가 대신 그 원한을 해결해 주겠소." 순간, 숨을 헐떡이며 괴로워하던 호미의 두 눈에서 괴이한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다. "내가 꼭 죽어야 할 몸이라면 누구 한 사람을 지적해서 나를 죽이도록 해도 괜찮겠습니까?" "안 될 것은 없소. 누구를 택할 것이오?" 호미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한 사람을 가리키며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바로 저 사람 양승조예요." 순간, 양승조의 안색이 급변했다. "당신은, 당신은 그게 무슨 뜻이오? 나더러 당신을 해치라는 것이오?" 제 10 장 금전방(金錢幇)의 멸망(滅亡) 호미는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비록 나에 대해서 위선적으로 대해 왔지만, 나는 진정한 마음에서 당신을 사랑해 왔어요. 그저 당신 손에 의해 죽을 수만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을 거예요." 황삼노인은 담담하게 웃으면서 양승조에게 말했다. "살인하는 것은 손을 들었다 놓는 것에 불과한 것인데, 친구는 한 번도 살인을 해본 적이 없소?" 이렇게 물은 황삼노인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한 황삼인이 허리에서 검을 뽑아 양승조에게 건네주면서 살며시 웃었다. "이 검은 매우 예리하오. 한 번만 가벼이 휘두르면 한 사람 죽이기엔 충분할 것이오." "나는......." 당황한 양승조는 자신도 모르게 절로 고개를 저었다. 순간, 고개를 젓는 바람에 머리 위에 있던 금전이 떨어지고 말았다. 양승조는 안색이 금세 잿빛으로 변해 이마에서 식은땀을 비오듯 흘렸다. 그러자, 호미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호호호-- 당신은 내가 죽으면 당신도 같이 죽겠다고 말했지요. 당신은 과연 신���이 있는 사람이군요. 깔깔깔깔--" 그녀가 노린 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양승조는 전신을 떨기 시작하더니 미친 듯이 소리쳤다. "네 이 나쁜 년. 악랄하기 그지 없구나." 황삼노인이 담담하게 웃었다. "허허허-- 이제 두 사람은 나란히 황천길로 달리게 됐으니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오." 양승조는 벼락같이 황삼인의 손에서 검을 빼앗아 수사 호미의 목을 쳤다. "으- 악." 순간 목이 떨어져 나가면서 붉은 핏기둥이 치솟아 양승조의 전신을 붉게 물들었다. 과연 황삼인이 장담한 대로 칼은 예리해 수사 호미의 목은 싱겁게 잘려 졌다. 양승조는 떨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눈으로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라고 모두에게 물었다. 천여 명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쏠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모호할 뿐이었다. 어느새인지 알 수 없으나 어두컴컴한 주위엔 뿌연 안개가 어리기 시작했다. 양승조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손을 들어 이번엔 자신의 목을 쳤다. 다시 핏기둥이 치솟아 오르면서 그의 몸이 호미의 시체 위에 떨어졌다. 무림인들은 어째서 자신들이 옴짝달싹 하지 못해야 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누구든지 동전을 떨어뜨리는 날엔 영락없이 죽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금전방이 목적한 일을 치루는 방식이었다. 밖의 사단에도 주루 안의 네 명의 금전방 사람들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율원양은 내심 혀를 찼다. 금전방 고수들을 보며 눈쌀을 찌푸렸다. '이 놈들은 하나같이 잔혹한 무림의 기생충들이군.' 지금, 주루 앞에 천여 명을 공포로 묶어둔 이들은 과연 어떤 인물들인가? 그들은 금전방의 인물들이라 했다. 금전방(金錢幇)! 이 방은 무림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금안탈명마(金眼奪命魔)가 이 년 전 소리 소문 없이 결성한 방파이다. 금전방은 방주 밑에 부방주, 사대당주(四大堂主), 그리고, 십호법(十護法)과 팔십육 명의 고수(高手)들로 구성된 살인마방(殺人魔幇), 즉 자객집단이다. 자고로 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 신(神)과도 통(通)한다는 옛말이 있다. 금안탈명마는 천하의 만물 중 돈보다 더 큰 마력을 지닌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금전방은 그들이 요구하는 액수만 채워주면 어떤 일이든 다 하는 잔악무도(殘惡無道)한 인물들이었다. 살인, 방화, 약탈 등 지난 이 년 동안 그들은 엄청난 악행을 너무 많이 저질렀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좋은 점이라 할 것은 꼭 대상자만을 죽인다는 것이었다. 가급적이면 무관한 인명은 해하지 않는 법칙이 있다. 또한, 그들이 일을 할 때, 방해자가 있으면 지금과 같이 방해자들의 머리 위에 금전을 올려둔다. 물론 금전을 떨어뜨리는 자는 가차없이 그들에게 죽는다. 금전탈명(金錢奪命). 이것은 명부귀요와 함께 무림의 이대(二大) 최명부(催命府) 중의 하나인 것이다. 외다리 괴인이 갑자기 일어나 천천히 벽혈음사의 자리로 가 맞은편에 앉았다. 벽혈음사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외다리 괴인을 바라보았다. 번쩍! 버언-- 쩍! 두 사람의 눈은 모두 예리한 칼과 같으며 당장이라도 상대방의 심장을 꿰뚫을 것만 같이 부딪혔다. 밤안개는 갈수록 짙어만 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외다리 괴인의 얼굴에 갑자기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웃음은 매우 독특하고 괴상하였다. 그가 일단 웃음을 띠면 그 흉악함은 무형 중에 사라지고 말할 수 없이 부드럽고 친절하게 보인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벽혈음사. 우리는 당신의 명예를 존중해 주겠소. 지금 몇몇 전대 고인을 빼고는 본 금전방이 모든 무림인들을 장악했소. 당신이 만무록을 포기하고 물러만 간다면 우리는 곱게 보내 드리겠소." 벽혈음사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징그럽게 웃었다. "독각광풍(獨脚狂風). 당신은 아직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소." 그의 모욕적인 말에 독각광풍은 가볍게 웃었다. "흐흐흐......." 그러나, 눈에는 살염이 타오르고 있었다. 독각광풍은 금전방의 제이인자인 부방주였다. 독각광풍이 막 발작하려는 순간 한 젊고 낭랑한 목소리가 그들의 귀를 때렸다. "벽혈음사. 당신은 주루 앞의 멍청이들보다는 그래도 기개(氣槪)가 뛰어났구료." 말을 한 사람은 바로 율원양이었다. 율원양(律元陽)은 아무 말 없이 사태만 추이(推移)하다가 드디어 나선 것이었다. 남삼노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단히 놀란 표정이었다. 특히 댕기머리 소녀의 놀라움은 극히 더했다.


"저 분은 무공을 전혀 모르는 서생 같았는데 겁없이 뛰어드는 것일까?" 나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염려가 가득했다. 남삼노인이 가볍게 웃었다. "허허허-- 녀석아,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할아비가 보기에 저 젊은이의 적수가 될 만한 인물은 이 자리에, 아니 어쩌면 아마도 무림 전체를 통털어서도 없을 것이다." 고수가 고수를 알아본다는 격일까? 그러나 소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할아버지도요?" "허허허-- 그렇다. 이 할아비도 저 젊은이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댕기머리 소녀는 입술을 삐죽였다. "피이, 아무렴 그럴라고요?" 그녀는 할아버지의 무공을 대단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바로 그 순간 독각광풍의 폭갈이 터졌다. "사대당주.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오? 이들은 모두 무림인들 아니요? 눈 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다니, 쓸모없는 인간들같으니라고......." 사대당주들은 원 안에 무림인들을 가두었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독각광풍의 힐책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독각광풍이 서서히 남삼노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정중히 포권을 했다. "노부가 숨은 고인을 몰라보아 죄송스럽기 그지없소이다. 고인들의 존성대명(尊姓大名)은 어떻게 부르시는지요?" 댕기머리 소녀가 빙긋 웃었다. "나는 당신보다 나이도 많지 않고 키도 크지 않은데, 어찌 고인이라 부르시지요? 그리고, 당신은 우리 할아버지의 명호를 물을 자격이 아직 없어요." 일순, 금전방 인물들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맨 처음 나타났던 독안독이(獨眼獨耳)의 황삼인이 냉막하게 외쳤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주둥이를......." 욕을 퍼붓다가 그는 귀싸대기를 얻어 맞았고, "으억." 퉁.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져 나동그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 보다 더 빠른 찰나간의 일이었다. 황삼인이 고함을 치는 순간, 어느새 댕기머리 소녀가 유령같이 일어나 그의 뺨을 때린 것이었다. 얻어 맞은 황삼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뺨은 손자국이 선명했으며 입가에는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감히 덤비지를 못하고 독각광풍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신법은 너무나 빨라 아무도 막지를 못한 것이었다. 댕기머리 소녀는 가벼운 조소를 띠었다. "이번은 경고에 불과해요. 다시 한 번 더러운 주둥이를 놀리면 가만 두지 않겠어요." 꾀꼬리같은 음성이었다. "이 찢어 죽일 년이!" 황삼인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독각광풍이고 뭐고 간에 당장 찢어 죽이고 싶어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순간, 독각광풍이 부드럽게 말했다. "멈춰라." 황삼인은 오른 손을 치켜든 채 부들부들 떨다 힘없이 오른 손을 내렸다. 독각광풍은 소녀의 모욕적인 언사와 수하의 봉변에도, 안색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살인자객(殺人刺客)이 꼭 지켜야 하는 냉정을 무서우리만치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단 한 순간에 살인을 결정하는 자객들이 냉정을 잃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죽음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하에서도 항상 냉정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그들 세계의 철칙이었다. 독각광풍은 남삼노인에게 다시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다. 율원양의 목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었다. "본인이 여러분들의 동전을 전부 거두었으니 모두 돌아가시오. 여러분들의 목숨은 본인이 책임질 것이니 차후, 보물같은 것에 추호도 자신의 목숨을 걸지 마시오." 독각광풍의 안색이 대경했다. 사대당주들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어떤 놈이냐?" 독각광풍은 벼락같이 외치고 철장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주루 밖으로 몸을 날렸다. 휙-그는 비록 다리가 하나였지만 오히려 두 다리를 지니고 있는 사람보다 더욱 빨랐다. 휙. 휙! 휘- 익! 사대당주들도 뒤를 따라 밖으로 몸을 날렸다. 댕기머리 소녀가 다급한 듯이 남삼노인을 일으켰다. "그 분이 왜 호랑이 수염을 건드리지요?" "아마, 그 반대일 것이다. 허허허......." "할아버지, 어서 나가봐요." 남삼노인은 손녀에 의해서 거의 이끌리다시피 밖으로 나갔다. 무림인들 머리 위의 금전을 회수한 사람은 바로 율원양이었다. 남삼노인과 댕기머리 소녀가 주루 밖으로 나갔을 때, 이미 그 많던 천여 명의 무림인들은 어느새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없었다. 있다면 무림인들을 지키던 수십 명의 황삼인들이 장승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자세가 굳은 것으로 보아 마혈(麻血)이 제압된 모양이었다. 율원양은 한 입 가득 비릿한 냉소를 머금은 채, 독각광풍 그리고 사대당주와 대치하며 서 있었다. 그들 다섯 사람 중 맨 처음 낙월주루에 나타났던 황삼소년은 따로 떨져 있었다. 그의 감정에는 오직 냉막함만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안면에 변화가 전혀 없었다. 황삼소년은 금전방의 소방주로서 바로 금안탈명마의 제자였다. 독심인랑(毒心人狼) 하일비(何日飛)가 그의 명호와 이름이었다. 그는 금안탈명마보다 더욱 잔인한 인물로 무림에 알려져 있었다. 댕기머리 소녀는 그들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저들의 위세는 매우 당당한데 금전방이란 방파의 이름은 그다지 고명하지 않아요. 그야말로 속되고 가소로울 뿐이에요." 남삼노인이 정색을 하면서 답을 했다. "돈이란 세상을 이루어가는 근본이다. 네가 내 나이가 되어 보면 금전방이란 이름이 조금도 가소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때에, 독각광풍의 으스스한 괴소가 터져나왔다. "으히히히-- 오늘 노부가 벌써 두번째 실수를 했군. 네놈이 옥황상제(玉皇上帝)의 수염을 뽑는 담력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구나. 으히히히--" 율원양의 조소가 더욱 짙어졌다. 물기없는 메마른 음성이 뒤이어 흘러나왔다. "나에게는 옥황상제의 수염을 뽑을 만한 담력은 없다. 다만 피에 굶주린 미친 이리들의 꼬리를 자를 담력은 있지." 금전방 무리의 얼굴은 분노로 인하여 일그러졌으며 눈에서는 무서운 분노의 화염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때 독각광풍도 지닌 바 냉정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그의 헝클어진 모발이 하늘로 일제히 치솟고 있었다. "크크크... 네놈은 천여 명의 목숨을 대신 하겠다고 했는데, 네놈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느냐?" 독각광풍의 음성은 무거웠으나 분노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율원양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한가로이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웬 강아지가 짖느냐는 투였다. 독각광풍의 부릅 뜬 독사같은 눈에 수십 가닥 핏발이 어렸다. 그가 언제 이런 수모를 받아보았던가? 더군다나 한낱 무명의 애송이에게 받는 수모라 그의 분노는 더욱 큰 것이었다. "크크크-- 좋다. 한 가지만 묻겠다. 너는 무엇 때문에 금전을 거둬 들이고 무림인들을 돌려 보냈느냐? 개를 때리려면 주인을 보고 때리라는 무림의 불문율(不問律)도 모르느냐?" "개도 개 나름이고 주인도 주인 나름이지. 개보다도 못한 놈들의 행동을 저지했기로써니 무슨 잘못이란 말이냐? 그리고, 개가 이 모양이니 주인이야 오죽 하겠느냐?" "으으으, 이런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발칙한 놈 같으니라고......." 독각광풍과 사대당주는 일제히 이를 부드득 갈았다. "부방주, 이대로 보고만 있을 겁니까?" 얼굴과 손이 녹색인 백발노인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좋소. 천당주(千堂主). 저 놈을 십초 이내로 도륙 내시오." "알겠습니다. 부방주님." 백발노인은 율원양 앞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안개서린 밤에 녹색 피부는 밤공기를 더욱 음산하게 만들었다. 그의 눈에서 새파란 녹광이 번뜩였다. "노부는 녹혈잔마(綠血殘魔)다. 노부는 이름 없는 놈은 죽이지 않는다. 네놈의 이름을 밝혀라." "너는 여태까지 사람을 몇 명이나 죽였느냐?" 율원양은 전혀 엉뚱한 반문을 했다. 녹혈잔마는 일순 움찔했으나 음침한 괴소을 터뜨리더니 곧 자랑스럽게 말했다. "으흐흐... 노부의 손 아래 죽은 놈들은 꽤 많지. 아마 못되어도 이백 명은 넘을 것이다." "너는 곧 있으면 생매장 당하여 죽을 것이다." 살얼음같은 율원양의 음성이 떨어졌다. 일순 녹혈잔마는 겪어보지 못했던 한기를 느껴야 했다. 꼭 그의 말대로 생매장당하여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으... 저 어린 놈에게서 저만한 살기가 뻗치다니. 저런 살기는 자신의 능력을 믿는 안정감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어떤 고수에게서도 보지 못했던 안정감이다. 저 놈의 모습으로 보아 저 놈은 이미 삼화취정 오기조원(三化聚頂 五氣朝元)의 공력 수준에 이르렀단 말인가? 흐흐흐... 그럴 리는 없겠지. 내가 미쳤군. 한낱 어린 놈을 두고 전설상의 경지까지 떠올리고 말이야. 제깐 놈이 어미 뱃속에서부터 무공을 익혔다 하더라도 노부를 당 할 리야 있겠는가?' 혼자 염두를 굴리던 녹혈잔마는 결론이 서자 폭갈을 터뜨리며 손을 썼다. "어린 놈이 주둥이만 살았구나. 뒈져라!" 녹혈잔마는 맹렬하게 두 소매를 휘둘렀다. 쌔애액! 쌔쌕! 예리한 파공음이 발해지면서 열세 개의 붉은 빛이 율원양의 전신 각 대혈을 향해 폭사되어 갔다. 붉은 빛은 맹독이 칠해진 비수였다. 발해지기는 큰 비수가 먼저였지만 율원양의 몸에 도착하기는 짧은 비수가 빨랐다. 그러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정작, 율원양은 비수가 몸 한 치 앞까지 다다르도록 가만 있지 않는가? 녹혈잔마는 그 모습에 냉소를 흘렸다. "흐흐흐... 그럼 그렇지. 애송이 놈이." 같은 시각에 뾰족한 비명이 터졌다. "어머낫!" 댕기머리 소녀의 비명 소리였다. 그녀는 율원양을 처음 본 순간부터 고이 간직해 왔던 첫 순정을 뺏긴 터였다. 그런데, 율원양이 죽임을 당하는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비명은 눈 앞의 상황을 보고 저절로 지르는 자연발로의 현상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남삼노인의 손을 꽉 잡았다. 긴장감으로 인해 손에는 땀이 촉촉히 배어 있었다. 남삼노인은 곰방대를 뻑뻑 빨면서 손녀의 행동에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비수가 코 앞까지 날아 들었는데도 율원양의 얼굴에는 이상하게도 아무런 두려움도 없었다. 파파파팍! 열세 개의 비수는 여지없이 율원양의 전신 요혈에 박혔다. 그 모습을 보는 댕기머리 소녀는 '악!'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두 손에 가려진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런데, 정작 들려야 할 율원양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어찌된 상황인지 가린 손가락 사이로 상황을 살피려는데 녹혈잔마의 실성한 듯한 음성이 들렸다. "아니, 이럴 수가?" 그 뿐이 아니었다. 시종 냉막했던 금전방주의 제자 독심인랑 하일비마저도 안색이 대변했다. 율원양은 전신 대혈에 비수가 꽂혔는데도 가만히 서 있었다. 이런 경우 당연히 피가 튀고 비명이 들리며 나가 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피도 튀지를 않았고 나가 떨어지기는커녕 비명조차도 들리지 않고 그것도 조소를 띠우면서 서 있었다. 당연히 일어나야 할 상황이 일어나지 않으면 사람들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남삼노인을 빼 놓고 모두가 현 상황에 어이없어 하는데 바로 더욱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다. 냉소를 머금고 있던 율원양은 살짝 몸을 움직였다. 순간, 그의 몸에 꽂혔던 비수가 모조리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모두들 두 눈을 부릅 떴다. 댕기머리 소녀는 상황이 어찌 되었든 일단 율원양이 멀쩡하자 신이 났다. 금전방의 인물들 모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특히 당사자인 녹혈잔마의 녹색 얼굴이 벌개지자 더욱 보기가 징그러웠다. 그는 눈 앞의 사실을 보고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 놈, 그것은 무슨 사술(邪術)이냐?" 율원양이 냉막하게 반문했다. "사술? 너의 개눈깔에는 이것이 사술로 보이겠지. 이제 내가 말한 대로 너는 생매장당할 때가 되었다." "뭐, 뭣이라고?" 녹혈잔마는 덜컥 심장이 내려 앉았다. 율원양은 힐끔 그를 보더니 냉막하게 말했다. "혀는 세 치 정도 빠지고, 코와 귀는 들려지며 눈은 툭 불거져라." 율원양의 태도는 마치 예언자같았다. "으엑." 율원양의 주문(主文)같은 말이 떨어지자마자 즉시 녹혈잔마의 몰골은 상접되어 버렸다. 혀는 빠져 축 늘어졌으며, 코는 하늘을 향한 들창코가 되었고 귀는 들려져 당나귀 귀가 되어 버렸다. 눈은 불거져서 만 년 이상 산 거북이 눈알이 되어 버렸다. "거꾸로 서라."


돌연, 귀신보고 놀란 몰골이 된 녹혈잔마의 몸이 허공으로 올려지더니 거꾸로 뒤집어 졌다. 녹혈잔마의 꼴이 말 그대로 되어 버리자 어느 정도의 능력을 지녔는지 지켜 보고만 있던 금전방 인물들은 더 이상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저 놈을 쳐라." 독각광풍이 제일 먼저 벽력같이 외치며 율원양을 향해 날아 들며 장력을 쏟아내었다. 우르르르릉. 우뢰와 같은 음향이 일면서 그의 장심에서 오색광망이 폭사되었다. 그의 독문절기(獨門絶技)이며 무엇이든지 가루로 만드는 오행신강(五行神剛)이 발출된 것이었다. "죽어랏." 나머지 세 명도 벼락같이 외치며 일제히 장력을 쏟아내었다. 태산을 엎을 것 같은 여덟 줄기의 장력이 휘몰아쳤다. 율원양은 오른손을 떨쳐내 네 명의 여덟 줄기 장력을 흐뜨러 뜨리면서 왼손은 식지로 녹혈잔마를 가리키며 냉엄하게 외쳤다. "녹혈잔마. 네놈은 땅 속으로 들어가라." 율원양의 오른손 장심에서 번쩍 빛이 발하더니 여덟 줄기의 장력을 향해 폭사되었다. 천번지복의 폭발음이 울렸다. 꽈꽈꽝! 꽈꽝! 장력이 부딪치면서 급격히 숨을 집어 삼키는 듯한 답답한 신음이 터졌다. "으- 억." "으엑. 으윽." 독각광풍과 세 명의 당주는 졸지에 삼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동시에 허공에 거꾸로 떠 있었던 녹혈잔마의 몸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회전을 하면서 땅으로 내리 꽂혔다. 퍽. 땅바닥에 부딪치는 순간 처절한 비명이 들리면서 터진 머리에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으악." 그것 뿐이 아니었다. 그의 몸은 계속 회전을 하면서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글로 표현하기엔 매우 긴 것 같으나 그 시간은 거의 찰나에 가까웠다. "오늘 이 시간부터 무림의 쓰레기인 금전방의 이름은 영원히 지워질 것이다." 율원양은 냉엄하게 외치더니 손가락을 퉁겼다. 쉬-- 익! 쉬시쉭! 소름이 끼치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리면서 세 줄기 지풍이 폭사되었다. 지풍은 막 몸을 일으키는 세 명의 당주에게 폭사된 것이었다. 퍽! 퍽! 퍽! "으- 아악." "으악. 악." 독각광풍을 제외한 세 명의 당주들은 턱이 박살이 나면서 즉사했다. 댕기머리 소녀는 그만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할아버지, 저 분은 왜 저렇게 잔인하죠?" 율원양의 안위만을 걱정하던 댕기머리 소녀는 잔인한 손속에 마음이 서늘해져 물었으나 남삼노인은 묵묵히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그의 눈에는 어느새 취기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일반 무림인(武林人)들에게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깊디 깊은 놀라움만이 담겨 있었다. '저 젊은이의 공력이 상상 밖일 것이라는 것은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다만 뜻으로서 진기를 발출해


내는 경지에까지 이르렀을 줄이야.......' 그의 신색은 담담한 것이었으나 내심 생겨난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저런 경지는 무위화성(無爲化成)이나 비상비비상처(悲想非非想處)라는 전설(傳說)의 경지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아아, 진정 놀랍구나.' 무위화성은 도가에서 말하는 무공의 완성을 말하는 것이고 비상비비상처는 불가에서 말하는 경지이다. 물론 전설의 경지다. 세인들은 아마도 이백 년 전의 신안천기자나 영세무존이 아마도 그런 경지에 도달해 있지 않을까 말하곤 했다. 당대에 최고 명성을 떨치는 일개이니 삼령사마오천신도 그런 경지에 다달았을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 정도이니 율원양의 경지를 보고 무위화성이나 비상비비상처의 경지가 아닐까 하고 추측하니 남삼노인이 느끼고 있는 놀라움은 진정 큰 것이다. 사람의 혼을 묶어버릴 듯한 냉엄한 호통을 율원양이 터뜨렸다. "돌아 와라." 휙-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인물이 그의 앞에 내려섰다. 벽혈음사였다.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에 절은 공포, 경악,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의 몸은 겨울 삭풍에 사시나무 떨 듯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천하에 다시 없이 잘생긴 율원양의 얼굴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염라대왕보다 더 무섭게 비치고 있었다. 댕기머리 소녀가 나직이 목소리로 물었다. "할아버지, 저 분은 독심인랑은 왜 그냥 보내 주었을까요?" "허허허-- 이제는 너의 머리도 아주 쓸모없이 되었구나. 저 젊은이는 독심인랑이 가서 금안탈명마를 데리고 오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 분은 진정 금전방을 완전히 몰살시킬 뜻인가 보군요." "무림의 이리들이 호랑이를 만난 꼴이지. 실상 그들은 벌써 없어져야 했다." 율원양의 메마른 음성에 조손이 대화를 중단했다. "벽혈음사. 너는 본 공자가 직접 손을 쓰길 원하느냐? 아니면 네 스스로 자결을 하겠느냐?" 벽혈음사는 다시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공자와 저는 아무런 원한도 없지 않소이까? 공자께서 저를 죽이려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유? 이유는 지금부터 만들어도 된다." 벽혈음사는 내심 공포가 어리기도 했지만 또한 기가 막혔다. "이유를 만들다니요? 없는 이유를 어떻게 만들겠소?" 아까 주루에서 그토록 위맹했던 그의 태도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율원양의 신위를 보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필부(匹夫)일 뿐이었다. 율원양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았다. 그의 태도에 벽혈음사는 더욱 움츠러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유는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다. 첫째, 너는 지니고 있는 일신의 절기가 남들 보다 한 수 위라는 이유 때문에 돼먹지 않은 규율을 세워 남을 핍박했다. 둘째, 네놈에게 억울하게 죽은 원혼의 피비린내가 너무 짙다. 셋째, 네놈의 낯짝은 본 공자로 하여금 너무 구역질을 나게 한다. 그 외에도 많다. 넷째......." "그만, 그만 하시오." 벽혈음사는 괴로운 비명을 토하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공자께서 직접 죽여 주십시오." 예상 못한 벽혈음사의 돌연한 행동에 율원양은 어이가 없었다. 마치 청동을 부어서 만든 듯, 조금의 감정도 엿보이지 않던 율원양은 눈쌀을 찌푸렸다. "너의 기개와 거만함은 전부 어디로 갔느냐?" "공자, 금전방의 오대고수들도 단 일초를 견디지 못했는데, 제가 무슨 능력이 있어 대항을 하겠소. 어차피 죽게 될 것, 차라리 공자의 손에 죽고 싶소." 율원양은 냉소를 쳤다. "너는 살고 싶지 않느냐?" "한낱 미물이라도 자신의 목숨을 아끼거늘, 어찌 사람인 제가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겠습니까?" 무릎 꿇은 벽혈음사를 내려다 보는 율원양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자는 제법 굽힐 때 가서 굽혀야 하는 법을 알고 있군. 보기 보단 매우 약은 자군. 하긴 그렇기 때문에 여태 살아 남은지도 모르니까.' 죽여 달라고 스스로 목숨을 맡긴 자를 죽일 만큼 율원양은 잔인하지 못했다. 율원양은 그를 살려주기로 결심했다. "좋다. 몇 가지 약속만 하면 너를 살려주겠다." 언뜻 벽혈음사의 얼굴에 기쁨이 어렸다. 그는 진작 목숨을 포기한 터라 율원양에 대한 두려움이 걷힌 상태였다. 살 가망성이 없는 바에야 마음이라도 편히 갖고 죽을 결심이었다. 그런데, 살려주겠다고 하자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든 약속하겠습니다." "첫째, 네가 세운 규율을 파기하고 둘째, 앞으로는 절대 인명을 해하지 말고 셋째, 올바른 의(義)를 행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는가?" "약속 하겠습니다." "이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서 거짓으로 약속한다 해도 본 공자는 너를 살려줄 것이다. 하지만 차후 계속 악행을 저지른다면 너를 찾아갈 것이다. 이제 그만 떠나라." 율원양은 말을 마치고는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으면서 운기조식 하고 있는 독각광풍한테 다가갔다. 그는 극심한 내상을 입고는 통증을 견딜 수가 없어 운기조식을 하는 중이었다. 벽혈음사의 굵직한 음성이 들렸다. "공자와 약속을 하는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소이다." 율원양은 서서히 몸을 돌려다. "부탁이라니?" 율원양은 눈쌀을 찌푸리며 물었다. 벽혈음사가 꿇은 자세에서 몸의 방향을 그의 앞으로 바꾸었다. 돌연, 그는 머리를 조아렸다. "노부는 오늘 공자의 손에서 새롭게 태어난 몸이니 이 늙은이의 목숨은 공자 것 입니다. 노부를 공자의 하인으로 거두어 주십시오. 부탁은 바로 이것입니다." 율원양은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짓이오? 얼른 일어나시오." 그러나, 벽혈음사의 결심은 매우 단호한 것이었다. "안됩니다. 공자가 허락을 하시지 않으면 이 늙은 하인은 절대 일어날 수 없소이다. 만약 이 늙은이를 받아주지 않겠다면 이 자리에서 자결하겠소." 그는 자신의 손을 들어 천령개(天靈蓋)로 가져갔다. 이건 완전히 협박이었다. 잠자코 구경하고 있던 남삼노인이 담담하게 한 마디 거들었다.


"젊은이, 그의 청을 받아 들이도록 하게. 그대는 아직 무림의 경험이 모자란 터라, 그를 받아 들이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네." "그렇게 하세요. 공자님." 흥미롭게 구경하던 댕기머리 소녀도 한 마디 잊지 않았다. 율원양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벽혈음사, 나는 집도 절도 없는 몸이오. 나에게는 당신을 거둘 만한 능력이 없소이다." "저도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런 점은 저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결단코 물러나지 않을 모양인지 벽혈음사는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율원양은 어쩔 수 없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어쩔 수 없구료. 당신의 뜻을 허락하니 일어나도록 하시오." 마침내 율원양이 허락을 하자 벽혈음사의 얼굴에 더할 수 없는 기쁨이 흘렀다.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옷매무새를 갖추어 다시 큰 절을 올렸다. "노복(老僕)이 주인님을 배알합니다." 율원양은 그의 절을 받으면서 씁쓸히 웃을 뿐이었다. 어느새 운기조식에서 깨어난 독각광풍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도둑 고양이처럼 몸을 날렸다. 휘-- 익-필사(必死)의 힘을 다한 것이라, 그 속도는 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댕기머리 소녀가 깜짝 놀라 외쳤다. "독각광풍이 도망쳐요." 도망가는 독각광풍은 내심 이를 부드득 갈았다. '쳐 죽일 년.' 율원양은 이미 알고 있던 터라 냉소를 쳤다. "돌아와라." 감히 항거할 수 없는 위엄이 서린 냉막한 음성이 터졌다. 십 장 밖의 허공에 있던 독각광풍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쿵. 그는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엄청난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진기가 흐트러져 그대로 땅으로 떨어졌다. "우엑." 그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울컥 선혈을 토해내었다. 벽혈음사는 두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나의 주인께서는 음성에 공력을 실어 사람을 상케 하는 공력의 소유자이시구나. 어떻게 저만한 나이에 저와 같은 초절한 공력을 익힐 수 있으셨을까?' 그의 얼굴은 점점 짙은 존경심으로 덮여갔다. 율원양의 입에서 냉엄한 명령이 떨어졌다. "무릎을 꿇어라." 엄중한 내상의 고통에 몸부림 치던 독각광풍은 즉시 율원양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댕기머리 소녀는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저 분에게서 우러나는 위엄은 어디에 기인된 것일까? 저 나이에 저토록 위엄을 부리니, 향후 십 년 후면 전 무림이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겠구나.' 그녀는 진정 감탄을 하면서 남삼노인을 올려다 보았다. 시종 담담하던 남삼노인의 얼굴에도 율원양에 대해서 감탄하는 빛이 역력했다. 남삼노인은 손녀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허허허-- 이 녀석. 얼마 안 있으면 너의 마음 속에 이 늙은 할아비가 차지할 자리는 없겠구나." 댕기머리 소녀는 눈을 반짝였다.


"그게 무슨 뜻이죠, 할아버지?" 그녀는 분명 남삼노인의 뜻을 알고 있음에도 시치미를 떼는 것이었다. "이 녀석. 능청 떨지 마라. 저 젊은이가 벌써 네 마음을 반 이상 차지하고 있을 걸." 그녀는 낼름 혀를 한 번 내밀더니 율원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율원양을 응시하는 그녀의 두 볼은 어느새 홍시처럼 익어 있는 것이 아닌가? 율원양을 바라보며 감탄하던 그녀의 두 눈은 어떤 환상으로 물들어 갔다. 마치 아지랑이와도 같��� 환상의 그물이 짜여 있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독각광풍은 고개를 잔뜩 웅크린 채 율원양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를 내려다 보는 율원양의 얼굴은 짙은 살염으로 덮여 있었다. 남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던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 덮이자, 그것처럼 볼썽 사나운 것도 없었다. "몇 마디 묻겠다. 대답을 하고 안하고 간에 그것은 너의 자유다." 실로,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들어 있지 않은 듯한, 소름이 오싹해 질 무서운 음성이었다. 독각광풍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네놈들의 방주(幇主)는 어디 있느냐?" 독각광풍은 잔뜩 목을 움츠린 채 간신히 대답을 했다. "방주께서는 워낙 신룡(神龍)같으셔서, 그 분의 행적은 그 분만이 알고 계실 따름이오." 그의 눈빛과 어조에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추호의 거짓도 들어있지 않았다. 율원양도 그것을 직감했다. "너는 혹시 요 근래에 원주(院主)라는 칭호를 쓰는 무림집단에 대해서 들어보았느냐?" "그런 것은 듣지 못했소이다." "만무록(萬武錄)은 지금 누가 지니고 있느냐?" 독각광풍의 몸이 흠칫 떨렸다. "공자께서는 만무록에 관심이......." 순간, 퍽! 옆에 서 있던 벽혈음사가 독각광풍의 면상을 무쇠같은 주먹으로 갈겨 버렸다. "으- 억." 독각광풍은 참담한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시뻘건 피와 함께 이빨 대여섯 개가 부러져 흘러나왔다. 벽혈음사가 냉랭하게 외쳤다. "견심(犬心)으로 인심(人心)을 측정하려 들지 마라. 노부의 주인께서 어떤 분이신데 한낱 무공 비급 따위를 욕심낼 분으로 보이느냐?"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아무튼,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는지 독각광풍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다시 무릎을 꿇으려 애썼다. 그는 고통이 너무 심한지 눈빛이 흐릿해졌다. 율원양은 그의 옥침혈(玉枕穴)을 향해 가볍게 지풍을 날렸다. 그러자, 희미해져 가던 독각광풍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린 그는 원독이 가득한 눈으로 벽혈음사를 노려보았다. 벽혈음사가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흥. 아직 정신을 덜 차린 모양이구나." 그는 다시 손을 번쩍 쳐들었다. "잠깐, 멈추시오." "예, 주인님." 율원양의 만류에 그는 공손히 물러났다. 그의 태도는 완전한 충복의 자세였다. 얼마 안된 사이에


이토록 변신한 그의 태도는 지켜보는 두 조손으로 하여금 웃게 만들었다. "할아버지, 저도 하인 하나 구해주세요." 남삼노인이 무어라 대꾸하려 할 때 벽혈음사가 웃는 얼굴로 앞질러 말했다. "귀여운 아가씨. 노부의 주인에게 시집 오면 자연히 노부도 아가씨의 하인이 되는 것이니 너무 하인을 구하려 하지 마시오." "어머?" 댕기머리 소녀는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했다. 냉막하기만 한 율원양의 얼굴마저 머쓱해졌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구고 옷자락을 만지고 있는 댕기머리 소녀는 목까지 붉어져 있었다. 벽혈음사의 말은 너무나 듣기 좋았던 말이라 가슴이 연신 콩닥거렸다. 남삼노인이 껄껄 웃었다. "껄껄껄-- 이 계집애야. 그러게 이 할아비가 말만한 계집애가 항상 입을 나불거리면 큰 코 다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댕기머리 소녀는 아무 대꾸 없이 고개만 푹 수그릴 뿐이었다. 그런 모습의 소녀를 바라보는 남삼노인의 얼굴에는 따뜻한 사랑이 흐르고 있었다. 벽혈음사가 뭐라고 한 마디 더 하려 하자, "당신은 허튼 소리 하지 마시오." 머쓱해질 대로 머쓱해진 율원양이 차갑게 말하였다. 벽혈음사는 그만 움찔하여 뒤로 물러났다. 율원양은 다시 냉막한 표정으로 돌아와 독각광풍에게 물었다. "두 번 묻지 않겠다. 만무록은 누가 지니고 있느냐?"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너의 방주는 무슨 일 때문에 이 자리에 오지 않았느냐?"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방주님이 행하시는 행적과 행동이 워낙 신룡같......." "그깐 놈이 신룡은 무슨 얼어죽을 신룡이냐?" 벽혈음사가 그의 말을 막으며 버럭 외쳤다. 독각광풍도 지지 않았다. "방주께서 필히 이 원수를 갚아줄 것이다." 벽혈음사가 다시 욕설을 퍼부으려 하자, 율원양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너는 음혼공자(陰魂公子)란 자를 알고 있느냐?" 벽혈음사가 그를 잘 알고 있는지 얼른 대답했다. "주인님께서는 어찌 그런 추잡한 놈에 대해서 물으십니까?" 율원양의 두 눈에 순간적으로 살광이 폭사되었다. "당신은 그 자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소?" 벽혈음사는 폭발하듯 몰아치는 그의 살광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자는 이 년여 전만 하여도 무림을 돌아다니며 못된 짓만 저질렀으나, 요즘은 어찌된 일이지 전혀 종적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커다란 실망감을 안겨주는 그의 대답이었다. 율원양은 커다란 기대를 걸었다가 더욱 크나큰 실망감을 맛보아야 했다. 그는 곤륜산으로부터 중원으로 들어올 때, 태행산에서 만무록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음혼공자에 대해 혹시 무엇인가 단서를 잡을 수 있을지 기대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었다. 그가 여태까지 독각광풍을 살려두고 있는 것도 그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마음이 허탈해질 정도의 실망감 뿐이었다. 율원양의 냉막한 살음(殺音)이 독각광풍의 고막을 찢어놓았다. "독각광풍, 너는 일어서거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두 눈에 의혹이 서렸다. 그러나 자석에라도 이끌린 듯 그의 몸은 벌써 일어서고 있었다. 의혹은 없어지고 율원양이 자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전신으로 스며 들었다. "나... 나를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율원양은 서서히 벽혈음사에게 손을 뻗었다. "당신이 지니고 있는 동전을 하나 주시오." 벽혈음사는 의아해 하면서 동전 하나를 꺼내 공손히 건네주었다. 율원양은 그 동전을 독각광풍의 머리 위에 올려 놓았다. "너의 방주인 금안탈명마가 너를 구하러 올 때까지 너는 동전을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만약, 동전을 떨어뜨릴 때는 너희들이 남에게 했듯이 나도 너에게 똑같이 행할 것이다." 독각광풍의 안색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이 늘 쓰던 방법에 자신이 직접 당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터라, 이 순간 만큼 비참함을 느낀 적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율원양은 그의 얼굴을 냉엄하게 바라보더니 벽혈음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저 놈과 겨루게 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소?" 그는 호기롭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주인님. 저 놈이 부상을 입지 않았어도 천 초면 능히 제압할 수 있는데, 지금의 저깐 놈이야" "알았소. 그럼 당신은 여기서 저 놈을 지키고 계시오. 만약 동전을 떨어뜨리면 저 놈을 가차없이 죽이시오." 벽혈음사의 입이 쩍 벌어졌다. "알았습니다. 주인님, 이 놈은 저에게 맡기시고 주루로 가셔서 편히 쉬십시오." "그럼, 수고하시오." 율원양은 주루로 들어섰다. 상이 오십여 개가 넘는 아래층 주루에는 조손만이 있었다. 남삼노인이 그가 들어서자 술잔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젊은이. 이리로 오게. 노부가 한 잔 사겠네." 매우 여유있는 웃음이 남삼노인의 얼굴에 흐르고 있었다. 율원양은 그들과 합석을 했다. 지금 그의 얼굴에 냉막한 살기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무공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온화한 책벌레와 같은 전형적인 서생의 모습이었다. 남삼노인이 술잔을 율원양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술잔에 가득 술을 따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독심인랑을 놓아준 것은 커다란 실수이네." "독심인랑이라뇨? 그가 누구입니까?" 율원양이 반문을 하자, 댕기머리 소녀가 대신 답을 하였다. "쥐새끼처럼 도망친 황삼소년이 바로 독심인랑 하일비에요." 율원양은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그의 웃음은 보석과도 같았다 차갑도록 맑으면서도 신비로운 광채가 나는 웃음이었다. 남삼노인은 그토록 맑은 미소를 본 적이 없어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댕기머리 소녀는 아예 그 웃음에 넋을 잃고 말았다. 제 11 장 귀령검제(鬼靈劍帝)의 출현(出現)


그녀의 넋나간 모습에 남삼노인과 율원양은 동시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남삼노인은 술을 들이키더니 말을 꺼냈다. "그 놈은 자네가 의도한 대로 금안탈명마를 찾으러 갔으나 금안탈명마는 결코 오지 않을 걸세." 율원양의 얼굴에 약간 놀란 기색이 서렸다. '이 노인은 내가 그 놈을 일부러 놓아준 것을 눈치채고 있었구나.' 남삼노인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금안탈명마는 교활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놈이네. 그 놈은 독심인랑으로부터 자네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틀림없이 오지 않을 걸세. 그러나 그 놈은 심기가 독랄하고 음흉하기 이를데 없는 놈이라 정면에 나타나지 않고 필시 암중에서 자네를 노릴 것이네." 남삼노인은 장담을 하듯 말했다. 율원양은 다만 담담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댕기머리 소녀는 여전히 율원양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매우 당돌한 성품을 지녔는지 아니면 격식을 중요시 하지 않는 활달한 성격인지 도무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남삼노인은 그런 모습의 손녀가 민망했던지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험험. 참 인사가 늦었네. 지금 자네에게 넋을 잃고 있는 이 계집애는 노부의 손녀로 이름은 손영령(孫永靈)이라 하네. 그리고 노부는 손천행(孫天行)이라 하지." 손영령은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참, 할아버지도......."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한 마디 하고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삽시간에 그녀는 드러난 목덜미까지 새빨개졌다. 공연히 율원양의 얼굴까지 붉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급히 포권을 하며 자신의 소개를 했다. "소생은 율원양이라 합니다. 잠시 고인 앞에서 추태를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신위를 떨쳤던 젊은 고수답지 않게 그는 겸손하게 말했다. 남삼노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술잔을 들어 올렸다. "추태라니 별 말 다하는군? 실례가 되는 질문이지만 자네를 키워낸 분은 필히 천하제일고수라 추앙받아도 손색이 없으실 것 같네. 자네의 사문(師門)은?" 율원양은 사부 영세무존을 생각할 때마다 벅찬 감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분에 대해서 쉽게 말할 수 없는 율원양은 말하기가 곤란한 지 머뭇거렸다. "죄송합니다. 사부님의 엄명이 있으셔서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습니다. 양지해 주십시요." 남삼노인이 술을 쭉 들이키더니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물론 말하기 곤란하면 하지 않아도 되네. 그러나 노부는 자네의 사문을 이미 짐작하고 있네." "......?" 율원양은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율원양이 놀란 표정을 띠우자, 남삼노인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당금 무림에 생존해 있는 인물들 중에는 자네같은 인물을 키울 만한 인재가 없네. 허허허--" 손영령은 조부가 막상 중요한 대목에서 웃음으로 흘려 버리자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 소협의 사문을 아셨으면 저에게도 가르쳐 주세요." "이 계집애야, 너는 무림의 예의도 모르느냐?" 손천행의 핀잔에 손영령은 그만 샐쭉 토라져 버렸다. 그러면서도 눈길은 여전히 율원양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특히, 그녀가 율원양에게 반한 점은 말로 형용할 수도 없을 만큼 신비로운 광채를 뿜어내는 그의 두 눈이었다. 천하의 어떤 여인이라도 한 번 보기만 하면 그대로 빠져 버릴 듯한 아름다운 두 눈동자. 그녀는 다시 넋을 잃고 멍하니 율원양의 두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저 분과 단 둘이서 강호를 주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손영령은 마치 그렇게 하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벅차 올랐다. '천하제일고수라 부를 수 있는 저 분과 같이 다닌다면 아마 무척 재미있을 거야.' 그녀는 생각만 해도 행복한지 얼굴을 발그스름하게 물들이며 요염한 눈으로 율원양을 바라 보았다. 율원양은 그녀의 그윽한 눈길에 자신의 얼굴을 어디에 두어야 좋을지 정말 곤란했다. 그녀의 태도는 남이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손천행은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제기랄. 저 계집애는 완전히 이 젊은이에게 빠져 버렸군. 저 녀석이 벌써 남자를 알 나이가 됐으니 세월이 참 빠르구나.' 손천행은 커다란 아쉬움을 느끼면서 술을 마셨다. 손영령의 넋나간 모습이 왠지 늙은 자신의 모습을 돌이키게 만든 것이었다. 마음 한 구석으로 찬바람이 휑하니 지나갔다. 그는 불현듯 생각나는 것이 있어 율원양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보게, 자네는 조금 전 부원주란 칭호를 쓰는 어떤 집단을 찾는 것 같았는데 거기에 무슨 연유가 있는가?" 순간, 아름답기만 하던 율원양의 눈동자에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살기가 서렸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던 손영령이 깜짝 놀랐다. 손천행마저도 그 살기에 몸을 으스스 떨었다. '이 청년에게는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한이 있는 모양이구나.' 율원양이 띄웠던 살기는 금세 사라지고 다시 신비한 매력의 눈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손영령의 눈빛은 다시 그에 대한 환상으로 물들어 버렸다. 그는 다시 손영령의 그윽한 눈길을 느끼는 순간, 당황하여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무슨 이런 처녀가 있지?'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율원양을 바라보며 손영령이 생긋 웃었다. "율공자님. 소녀가 술을 한 잔 따르겠어요." 여태까지 그녀의 눈길을 의식적으로 무시해 왔던 율원양은 그만 움찔 하고 말았다. 그녀가 공손히 술병을 들어 술을 따랐다. 율원양은 엉겁결에 술잔을 갖다대고 말았다. "감... 감사하오, 손낭자." 그가 술을 마시자 손영령은 커다란 눈망울을 깜박이며 입을 떼었다. "율공자님. 저에게도 술 한 잔 주시겠어요?" "술을요?" 그녀의 행동은 갈수록 태산이었다. 옆에 있는 손천행은 손녀 딸의 태도에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손영령은 상큼 아미를 치켜뜨며 밝게 웃으며 율원양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호호호-- 저도 술 몇 잔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율원양은 술을 따르면서 이 좌석을 모면할 길이 없을까,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장은 별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 그는 손천행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손천행도 그의 의도를 알아챘으나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율원양은 어쩔 수 없이 그녀가 내민 잔에 술을 따랐다. 손영령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녀는 술이 독한지 콧등을 찡그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토끼같아 손천행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술을 들이킨 손영령의 볼에 차츰 홍조가 어리기 시작했다.


불빛에 반사된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었다. 비봉옥녀 경설운에 비하여도 떨어지지 않을 미모였다. 그녀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손천행이 앞서 말을 꺼냈다. "자네의 의협심은 높이 살만 하나 살수가 너무 매정하더군. 금전방은 그렇다치고 차후 다음부터는 마두들을 처단할 때 그들의 시신만이라도 온전히 남겨주게." 율원양의 입가에 냉막한 웃음이 어렸다. "노선배님의 옥언은 지당한 말씀이오나, 항상 두려움을 주던 자들한테는 두려움이 무엇인가 느끼게 해 주어야 합니다. 개관천선의 여지가 없는 놈들은 그들이 행한 만큼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율원양은 돌연 귀를 쫑긋 세웠다. "동쪽 십 리 밖에서 호각소리가 진동하는구나" 순간, 두 조손의 얼굴에 아연 놀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손천행은 다시 한 번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으음, 이 젊은이는 무림초행같은데 기지가 놀랍기가 그지 없구나. 우리와 같이 있으면서도 천이통(千耳通)을 잊지않고 있었다니' 실은, 천이통을 펼치고 있었던 것은 율원양만이 아니었다. 손천행 역시 천이통을 시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데, 손천행의 공력은 십 리까지 천이통을 발휘할 정도는 못되었던 것이다. 율원양은 급히 포권을 하였다. "손 노선배님의 말씀대로 금안탈명마는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후배는 호각이 들린 곳으로 가보아야겠습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율원양이 사라졌다. 그는 손영령이 무어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재빨리 사라진 것이었다. 손영령은 졸지에 품 안에 있던 보물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버렸다. 그가 자신한테 말 한 마디 없이 떠나자 순식간에 자신도 모르게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그녀는 젖은 눈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우리도 그 분이 간 곳으로 가요." 손천행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꾸나. 네 사부도 거기에 있을 지 모르겠구나." 그의 마음에 탄식이 절로 생겼다. '저 애가 품은 정(情)이 한(恨)으로 바뀌지 말아야 할 텐데' 조손이 주루 밖으로 나섰을 때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독각광풍의 시체였다. 그는 사혈(死穴)이 찍힌 채 죽어 널브러져 있었다. '율원양. 자네는 필히 어두운 무림의 등불이 되어야 할 걸세.' 손천행은 손녀를 이끌고 동쪽으로 사라져 갔다. 안개는 점점 짙어져 밤하늘을 완전히 덮고 있었다.

율원양은 한 줄기 빛과 같았다. 허공을 가르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마치 번갯불과 같았다. 동시에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던 벽혈음사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호각소리가 들렸을 만한 곳에 도착한 시각은 일각의 반의 반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그는 그곳에 도착한 후 다시 천이통을 펼쳤다. "으으으-- 악." "크액. 커억."


동쪽으로 십 리 정도 더 떨어진 곳에서 참담한 비명소리들이 아스라이 귀에 잡혔다. 휘- 익. 율원양은 다시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는 나는 중에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 리를 더 날았을 때 수많은 시체들이 널려져 있었다. "으- 아- 악." "크윽- 악." 비명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렸다. 날아가면서 그는 무수한 시체를 보았다. 잘라진 사지(四肢)와 으깨어진 머리들과 으스러진 골육(骨肉)들이 역겹도록 잔인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거의 수백여 구의 시체들이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율원양은 씁쓸한 비애감을 느꼈다. '이들은 탐욕으로 인하여 스스로 삶을 버렸구나. 도대체 무학비급이 무엇이길래 자신의 능력도 생각 않고 목숨을 버리면서 까지 쟁탈전을 벌인단 말인가? 천하제일의 자리가 그토록 좋단 말인가.' 역겨운 피비린내를 맡으며 날아가는 그는 연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보다 조금 긴 시간이 흘렀다. 율원양은 수많은 무림인들이 한데 어우러져 싸우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얏. 가거라." 창. 창. "와- 우. 저 놈들을 죽여라." "크아-- 악. 크억." 고함과 처절무비한 단말마들이 연속적으로 율원양의 고막을 긁었다. 율원양은 거듭 탄식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낱 금전방 따위의 위세에도 굴복했던 인물들이 탐욕을 이기지 못하여 다시 모여 들었구나.' 그렇다. 시체들과 한데 어우러져 싸우는 무림인들은 대부분 그들이었다. 그들은 율원양으로 인하여 금전방의 마수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몰려든 것이었다. "만무록은 공공문(空空門)의 문주(門主) 잔결신투(殘缺神偸) 황곤의(黃坤義)가 갖고 있다. 공공문 놈들을 모두 죽여라." 누군가가 격전 중에 커다랗게 외쳤다. 율원양은 높이 삼십 장 정도 되는 노송 위에 몸을 안착시켰다. 율원양은 급히 격전장을 살펴 보았다. 가슴에 하얀 실로 공(空)이라 수놓은 흑의를 입은 삼십여 명의 인물들이 원을 이루어 백여 명의 무림인들과 피나는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공공문인들이 이룬 원 속에는 살벌한 인상의 약 팔순 가량 된 노인이 서 있었다. 그의 왼팔 소매가 헐렁한 것으로 보아 그는 외팔임에 틀림없었다. 그가 바로 공공문의 장문 잔결신투 황곤의였다. 공공문(空空門)은 하류층을 형성하는 각양각색의 모든 인물들이 모여 이룩한 문파이다. 그러니까 도적, 약장수, 광대, 점쟁이 등 별의별 신분을 가진 사람이 다 모인 문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파의 결속력은 대단하기 이를데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무림에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나타나는 곳에는 꼭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무림의 보물이 있다. 그러니까 이들은 무림에 기진이보(奇珍異寶)가 출몰될 때만 나타난다. 재물에 대한 그들의 집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특히, 공공문에는 전대미문의 각종 무학비급들이 산재해 있다는 소문도 있다. 무림인들은 그 소문을 듣고 공공문이 모아둔 무학비급과 재물을 탈취하기 위하여 그들의 총단을 찾아 헤매었으나 결코 찾을 수 없었다. 그만큼 이들은 신비하고 행적이 신출귀몰한 문파이다. 이들 공공문 개개인들의 무공 또한 놀랄 만한 것이어서 그들은 절정의 무공을 구사할 줄 안다. 율원양의 예리한 눈은 잔결신투 황곤의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살기 띈 눈을 굴리며 장중의 변화를 예리하게 살피고 있었다. 태양혈이 속으로 잠적하고 신광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초절정 고수같았다. 율원양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개 하오문(下五門) 따위의 수뇌가 저만한 공력을 지니고 있다니 대단하구나.' 무림인들은 공공문인들에 의하여 추풍낙엽처럼 베어지고 있었다. "으- 아- 악." "크- 아- 악." 공공문인들은 타고난 체질에 맞추어 각종 무학들을 연성했기 때문에 일반 무림인들은 당해낼 수가 없었다. 끊어진 팔 다리는 튀어 오르고 쌓인 시체는 산을 이루어 갔다. 짙은 피비린내와 함께 흐르는 피는 강을 이룰 정도였다. 율원양은 더 이상 처참한 살육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소리를 질러 혈전을 멈추려 할 때, 쌔애액! 허공을 찢는 살기어린 파공음이 들리면서 하나의 깃발이 공공문주 앞에 떨어졌다. 잔결신투 황곤의는 대경실색했다. "귀령기(鬼靈旗). 귀령기가 나타났다." 잔결신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대경실색하여 크게 외쳤다. 순간, 장중은 삽시간에 숨소리조차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언제 고함소리가 들리고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나 싶게 사위는 무섭게 정적이 깔려 버렸다. 찰나의 시간에 사위는 무거운 정적으로 고요하였고 짙은 피비린내만이 풍기고 있었다. 거친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흐흐흐... 너희들은 본 검제(劍帝)의 규율도 잊었느냐? 앞으로 반시각 이내에 모두 사라지지 않으면, 흐흐흐... 염라대왕이 와도 너희들의 목숨은 구하지 못할 것이다." 돌연, 어디선가 음산하기 이를데 없는 음성이 들려와 장중의 고요함을 깨뜨렸다. 그 음성은 사면팔방에서 들려오는 것 같아 어디서 들리는지 전혀 추측할 수가 없었다. 한데, 그 음성에는 괴이하게도 이를데 없는 마력이 서려 있어서 듣는 이로 하여금 으스스한 공포를 느끼게 했다. 장중의 모든 무리들은 이 음성을 듣더니 별안간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모두 피해라." 두 눈에 공포의 빛이 가득 서린 한 인물이 벼락같이 외쳤다. 그토록 아비규환의 지옥도를 연출하며 죽기살기로 싸우던 무림인들 사이에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휙-휘-- 익, 휙. 휙. 걷잡을 수 없는 혼잡이 일어나더니 공포에 질린 무림인들이 다투어 몸을 날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일순, 예의 그 괴이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잔결신투. 네놈만은 그 자리에 남아 있거라. 흐흐흐......."


잔결신투는 이 소리를 듣자 두 눈에 경악, 그리고 갈등이 마구 뒤엉켰다. 그는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장승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너희들은 모두 물러가라." 그는 남아 있는 공공문인들에게 침중한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문주님을 두고 어떻게 물러갈 수 있습니까?" 한 인물이 외치자 나머지 인물들은 호기롭게 호응했다. "흐흐흐... 이제 반각이 지나갔다. 너희들은 이제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인물이 소리없이 나타났다. 마치, 유령과도 같은 그림자 하나가 표연히 공공문 인물들 앞에 나타났다. 그 그림자는 황금색의 옷을 입고 있는데 기이하게도 신형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어 형체가 분명치 않았다. 짐작컨데 사파의 경공절기 중의 하나인 환영신법(幻影神法)인 것 같았다. 그 황금색 장포를 입은 인영은 머리에 혈립(血笠)을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다. 잔결신투의 입에서 벌레씹는 듯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귀령검제(鬼靈劍帝) 혈립객(血笠客)." 나타난 인물은 천하제일고수들인 삼령(三靈) 중의 하나인 귀령검제였다. 귀령검제 혈립객 갈천악은 검 한 자루로 제검(帝劍)의 명성을 얻은 천하제일의 검객이다. 그는 언제나 핏빛처럼 빛나는 붉은 초립을 쓰고 다녔다. 평범한 초립에다 사람의 피를 적셔 만들었다는 공포의 혈립(血笠)이다. 그는 혈립을 쓰고 나타나기 전에 언제나 먼저 하나의 기를 발출한다. 사람들은 그 깃발을 귀령기라 불렀다. 무림인들이 염라대왕의 초혼부보다 더 무서워하는 귀령기는 귀령검제의 최명부이다. 귀령기가 나타나면 그 기를 본 무림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반각 이내에 자취를 감추어야 한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은 남아야 한다. 귀령기가 발 밑에 떨어진 사람만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귀령기를 받은 사람은 저승 외에는 갈 곳이 없게 된다. 그리고, 귀령기를 받은 사람 중에 여태 한 번도 목숨을 건진 인물이 없다. 만약, 귀령기가 목적했던 인물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살아난 인물이 있다면 모든 사람이 이렇게 귀령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율원양은 호기심을 가지고 귀령검제를 훑어 보았다. 온몸 전체가 살기로 뒤덮여 있는 귀령검제는 혈립과 황금색 장포가 이상한 조화를 이루어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일견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초절정의 공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율원양은 내심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 자는 만독음혈존보다 훨씬 뒤지는 공력을 지니고 있구나. 왜일까? 내가 듣기로는 그의 공력은 분명 삼령들 중, 최우위를 차지한다고 들었는데.......' 귀령검제의 흔들리는 환영이 하나로 나타났다. "흐흐흐... 본 검제의 불문율을 어긴 너희들을 이제 징벌하겠다." 공포로 물들어 있던 공공문인들이 몸을 흠칫 떨었다. 잔결신투가 침통한 얼굴로 앞으로 나섰다. "갈선배님, 이들은 못난 문주인 노부를 위하여 남았으니......." 그러나 그의 말은 길지 못했다. 어느새, 귀령검제는 한 줄기 빛이 되어 공공문인들 사이를 헤집고 있었다.


번쩍! 버- 언쩍! 세 번의 검광이 악마의 이빨처럼 번뜩였다. "키- 억." "컥. 컥." 길지 않은 짧은 단말마 비명이 속출됐다. 순간, 공공문인 삼십여 명 전부가 목이 반쯤 잘려진 채 모조리 시체가 되어 버렸다. 시체 나뒹구는 소리들이 끊이지 않고 지척을 울렸다. "흐흐흐... 본 검제의 귀령기를 보고도 도망가지 않는 자는 이렇게 된다." 어느새 처음 서 있던 자리로 되돌아온 귀령검제가 스산한 음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잔결신투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으으으......." 자신의 문인들이 죽음을 당한 것에 대한 원한을 느낄 사이도 없었다. 그는 다만 공포에 젖은 신음소리만 토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분명 귀령검제가 몸을 움직인 것을 보았다. 그런데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가 귀령검제에게 살수를 펼치려고 마음 먹었을 때는 이미 귀령검제는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 가 있었다. 그가 언제 검을 뽑았는지, 언제 다시 검집에 꽂았는지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다만, 귀령검제가 빛이 되어 움직인 것만을 보았을 뿐이고 허공을 그리는 세 가닥의 검광만 간신히 보았을 뿐이다. 귀령검제는 깊숙이 눌러쓴 혈립을 더욱 깊숙이 내리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잔결신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노송 위의 율원양도 절로 감탄을 하고 있었다. '저 인물은 진정 쾌검(快劍)의 진수를 보여주는구나. 정녕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검초였다. 빈틈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그런데, 그의 공력은 소문보다 훨씬 뒤떨어지니 어찌된 일인가?" 귀령검제는 아직도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잔결신투 앞에 이르러 멈추었다. 잔결신투는 비통한 마음을 억누르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갈선배. 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살수를 펼치는 것입니까?" 귀령검제는 잔인하게 들리는 냉소를 쳤다. "흐흐흐... 자업자득이다." 잔결신투는 다시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갈선배께서 본인에게 원하시는 것이 만무록입니까?" 귀령검제가 그 소리를 듣자 벽력같이 외쳤다. "닥쳐라. 본 검제가 어떤 인물인데 하찮은 비급 따위를 노리겠느냐? 나는 너에게 한 가지 물을 것이 있기에 찾아온 것이다." 잔결신투가 두려움에 움찔 했다. "질문이라니? 갈선배께서 본인에게 하문(下問)할 것이 있습니까?" 귀령검제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쓰고 있는 혈립에서 말할 수 없는 살염이 폭사되었다. 잔결신투는 그 살기에 전신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공포를 더욱 느꼈다. 그 틈을 노려 귀령검제가 별안간 오른손을 쭉 뻗었다. 쌔-- 액. 어느 틈엔가 그의 손에서 한 가닥 살벌한 지풍이 발출됐다. 팍.


잔결신투의 혈도를 때리는 소리가 마치 가죽북을 찢는 소리와 같이 예리하게 울렸다. "으윽." 마혈이 찍힌 잔결신투는 신음을 토하며 풀썩 쓰러졌다. 순간 귀령검제가 신속하게 몸을 돌리며 호통을 쳤다. "주위에 숨어 있는 쥐새끼들은 모두 종적을 드러내라."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십여 명의 인물들이 여기저기서 몸을 나타냈다. "하하하하" "컷컷컷컷." 창노한 웃음소리, 음침한 괴소 등 고막을 찢어놓을 듯한 공력이 실린 웃음들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귀령검제는 나타난 인물들을 차례로 훑어 보았다. 그들은 안색이 하나같이 흉흉했으며 짙은 살기를 만면에 나타내고 있었다. 노송 위의 율원양은 그들을 살펴 보면서 이내 눈썹을 찌푸렸다. '하나같이 좋은 자들은 없군.' 귀령검제가 음산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이제 보니 본 검제가 강호를 횡행할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조무래기들이군." 머리카락이 쭈뼛 솟아오를 듯한 냉막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나타난 늙은이들은 그 말에 겁먹을 위인들은 아니었다. "과연 그럴까?" 온 얼굴이 자색(紫色)으로 물든 백여 세 가량의 노인이 먼저 나서며 음침한 음성으로 반문했다. 이 자는 바로 악명이 드높은 자면염라(紫面閻羅) 임비문(林丕文)이었다. 자면염라 임비문의 의미심장한 뜻이 담긴 말에 귀령검제는 흠칫 떨었다. "조무래기. 무슨 뜻이냐?" 다시 한 노인이 나섰다. "정작 애송이 놈이 노부들을 희롱하다니. 노부는 이미 네놈이 귀령검제로 가장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놈은 누구냐? 어서 정체를 밝혀라!" 귀령검제는 몸을 부르르 떨었으나, 이내 신색(身色)을 안정시켰다. "흐흐흐-- 귀영마제(鬼影魔帝) 여간웅(呂干雄). 네가 감히 본 검제를 능멸하다니, 죽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그는 서서히 걸음을 옮겨 귀영마제 앞으로 다가섰다. 귀영마제는 칠 척에 달하는 키에 음침한 눈을 가진 인물이었다. 귀영마제는 사도의 거두(巨頭)로서 특히 산동성 일대에서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나이는 거의 백 세에 다다르고 있었다. 귀령검제가 다가오자 귀영마제의 눈에서 무서운 살광이 뿜어졌다. "어린 놈. 귀령검제로 가장을 하다니 간덩이가 팅팅 부었구나. 네놈이 하는 행동을 보니 이미 사는데 염증을 느낀 모양이로군." 귀령검제는 유들유들한 모습으로 걸어오면서 놀리듯이 말했다. "귀영마제. 네놈이 본 검제의 외호를 도용(盜用)하여 쓰는 것을 지난 수십 년 동안 참아왔다. 그러나, 오늘은 네놈을 진짜로 귀신으로 만들어 주겠다." 찰나 귀영마제가 뭐라고 대꾸할 사이도 없이 귀령검제의 입으로부터 정갈한 기합성이 터지며 한 줄기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차- 앗." 슉! 쌔애액--! 정녕 전광석화를 무색케 하는 절륜한 쾌검이었다.


"귀영무허(鬼影無虛)." 귀령검제가 이토록 빨리 검을 날릴 줄은 미처 몰랐던 귀영마제는 날카롭게 부르짖으며 자신이 평생 자랑해 온 신법 귀영무허를 펼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순식간에 귀영마제의 몸에 자욱한 안개가 서리는 듯 하더니 그의 몸이 일시에 사라지는 듯 싶었다. 그러나 귀령검제의 검은 벌써 자욱한 안개를 핥듯이 스치고 지나 갔다. "으윽." 몸을 움직여 안개에 쌓였다 싶은 순간 벌써 삼 장 밖으로 날아 갔던 귀영마제는 몸을 멈추며 숨이 막히는 비명을 토했다. 그는 가슴에 번지는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내려다 보았다. 어느 틈엔가 그의 가슴은 세 치 가량 갈라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귀영마제의 얼굴에 공포심이 드러 났다. '놈의 쾌검이 강호 제일이라면 노부의 경공 역시 강호 제일이다. 아무리 급습이었지만 단 일검에 가슴을 갈라 놓다니.' 그는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몸을 날려 피했어야 했다. 귀령검제는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달라붙었다. "흐흐흐... 역시 무림 제일의 경공을 지닌 놈 답구나. 그러나 본 검제 앞에서는 어린애 장난일 뿐이다." 쌔애액. 기이한 음향이 불꽃송이처럼 작렬하며 군더더기 없는 귀령검제의 검이 귀영마제의 목줄기를 매섭게 파고 있었다. 마치 천지가 붕괴되고 해일(海溢)이 휘몰아치는 듯한 기세로 몰려가는 검기의 소용돌이는 정녕 이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는 듯한 검의 폭풍이었다. 다시 귀영마제의 몸이 번뜩였다. 그는 공격을 하고 싶었지만 귀령검제가 워낙 쾌검을 발출하는 지라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피하지 말고 손이라도 한 번 썼어야 했다. "캑." 폐부를 쥐어 짜는 듯한 단말마의 비명이 튀어오르며 귀영마제의 목줄기에서 피가 분수처럼 뻗쳤다. 혈우(血雨). 마치 피의 비가 오는 것만 같았다. 갈라진 귀영마제의 목에서 핏물이 소낙비처럼 쏟아지며 생의 종지부를 찍은 귀영마제가 곤두박질 했다. 귀령검제 갈천악은 검의 출수와 회수에 있어서는 진정한 천하제일이었다. 그만큼 그의 검은 쾌속절륜한 경지에 있는 것이다. "흐흐흐... 이젠 어느 놈이 본 검제가 가짜라고 우길 것이냐? 앞으로 나서라." 본래의 제 자리로 돌아온 귀령검제가 다시 좌중을 훑어 보았다. 단 두 번의 출수만에 백 년 가까이 악명을 떨쳐온 대마두를 죽인 귀령검제를 바라보며 나타난 마두들은 모두 대경실색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소태를 씹은 듯한 얼굴로 귀령검제를 노려볼 뿐이었다. '귀령검제로 가장한 애송이라 마음 놓고 나타났더니 놈의 쾌검이 진짜 귀령검제에 버금갈 줄이야.' 지금까지 떨쳐 온 명성때문이 아니라면 노마들은 모두 도망치고 싶었다. 귀령검제는 다시 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쥐새끼같은 놈들. 그 나이가 되도록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한낱 비급 따위에 현혹되어 본 검제의 규율을 어기다니? 너, 자면염라." 귀령검제의 손가락이 자면염라를 가리켰다. "어느 놈이 너희들에게 본 검제가 가짜라고 말해 주었느냐? 대답하면 일검에 편안하게 죽여 주마." 귀령검제의 지적을 받은 자면염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얼굴은 흙빛으로 되어 있었다. 지켜 보던 율원양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백여 장 밖에 십여 명의 인물들이 몸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중 한 명은 백의나삼을 걸친 몽면여인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흑의복면인들이었다. 율원양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으음. 나의 청각을 뚫고 백 장 가까이 저들이 다가오다니. 실로 놀라운 공력을 지니고 있구나.' 그들을 발견한 순간이 지났는데, 그들은 벌써 십 장 정도로 다가서고 있었다. 순간, 몽면여인을 제외한 흑의복면인들이 신속하게 몸을 움직여 장중의 인물들을 포위해 갔다. 그런데도, 장중의 인물들은 어느 누구 하나 그들의 행동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역용한 가짜인지 진짜인지 모를 귀령검제마저도 그들을 발견 못했다. 이로 보아, 나타난 자들의 공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율원양의 예리한 신광(神光)은 몽면여인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때에, 장중에 다시 검풍이 일고 처참한 비명이 터졌다. "으아악." 율원양이 급히 고개를 숙이니 귀령검제의 검이 자면염라의 목을 꿰뚫고 있었다. 귀영마제와 거의 비슷한 악명을 누리던 그도 귀령검제의 검 아래 원혼이 되고 있었다. 율원양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일체의 허식을 배제한 검이다. 오직 살인만을 위해 언제나 최단 거리를 노리며 펼쳐지는 쾌검이다.' 자면염라의 목을 꿰뚫고 있는 검을 뽑기 위해 그의 가슴을 발로 차버린 귀령검제가 냉막하게 외쳤다. "지금 이곳에는 다시 십여 명의 쥐새끼가 나타났다. 흐흐흐이제 네놈들은 오갈데가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내가 너희들에게 한 가지 일러주지. 잔결신투가 귀수탈혼(鬼手奪魂) 만웅비(萬雄飛)에게서 탈취한 만무록(萬武綠)은 가짜이다. 흐흐흐... 만무록은 무림에 대혼란을 야기시킬 목적으로 명부귀요, 그 계집이 가짜를 만들어 무림에 유출(流出)시킨 것이다. 그 년의 차도살인계에 걸려든 줄도 모르고 죽을 둥 살 둥 저희들끼 리 살겁을 일으키고 있으면서 쯧쯧, 그러면서도 무림의 선배들로 자처하고 있다니 너희들을 차도살인계에 몰아넣은 명부귀요는 바로 너희들 뒤에 와 있다." 그들이 포위를 끝내고서야 그들의 출현을 알아 차린 귀령검제가 말을 하는 동안, 여러 차례 안색이 바뀌었던 무림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모두 몸을 홱 돌렸다. "오호호호-- 사령수라들은 이 쓰레기들을 모두 처치하라. 오호호호." 뒷면에 유령같이 몸을 드러낸 몽면여인, 즉 명부귀요가 요염한 웃음을 터뜨리며 명령을 내렸다. 흑의로 전신을 감싼 열두 명의 복면인들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일시에, 열두 명의 복면인들은 소리없이 검을 뽑아들고 마두들한테 달려 들었다. 율원양은 지금 나타난 흑의살수들이 보통 고수들이 아님을 알았다. 그들의 몸에서 풍기는 기도로 보아 젊은 고수들 같았다. 그러나, 그들의 신법은 이 자리에 있는 마두들에 비해서 조금도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내, 이십여 명의 초절정 고수들이 한데 어울려 치열한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율원양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이들을 주시하였다. "귀령기가 나타나자 도망쳤던 무림인들은 이미 모두 추살됐다. 또한, 여기서도 살겁이 일어나고 있다. 귀령검제의 말이 사실이라면 명부귀요라는 저 계집은 오늘 태행산에 운집한 모든 무림인들을 전부 몰살하려 함에 틀림이 없다. 으음... 명부귀요, 네년은 정말 천선마살개 그 놈의 말대로 악독하기 짝이 없구나.' 율원양은 늘 가슴 속에 묻어 두고 벼르고 있던 명부귀요를 만나게 되자 살기가 치솟았다. 명부귀요는 절대 살려주어서는 안될 여자였다. 지금 벌이고 있는 짓을 보더라도 그녀가 얼마나 악독한지 여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틈엔지 사령수라들에 의해서 전대미문의 마두들 몇이 어이없게도 피를 뿌리고 있었다. "으- 아- 악."


"크억." 연신 처절한 비명이 터지고 짙은 피보라가 허공으로 치솟으며 뭉개진 살점덩어리가 사방으로 흩어져 날았다. 폭우(暴雨)처럼 쏟아져 내리는 혈우와 으스러진 골육(骨肉)들이 역겹도록 잔인하게 장중을 장식했다. 절단된 사지들이 흥건한 핏물에 젖어들어 추풍(秋風)의 낙엽처럼 바닥을 굴렀다. 백 세나 됨직한 마두들이 일개 사령수라들에 의해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귀령검제는 무감각한 몸짓으로 예의 혈립을 깊이 눌러쓰며 손을 쓰지 않고 사령수라들의 행동을 면밀히 훑어보고 있었다. '대체 저 놈들을 누가 길러냈기에 전대 마두들이 변변히 손도 쓰지 못하고 죽어갈 정도의 고수들인가.' 명부귀요도 귀령검제와 마찬가지로 사령수라들을 지켜 보았다. 그녀의 몽면 속 두 눈은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싸움을 주시하는 그녀의 태도는 마치 재미있는 놀이를 구경하는 어린 계집아이와 같았다. 즐거워 하는 눈빛을 보니 그녀는 분명 살인을 즐기고 있음이 틀림 없었다. 율원양은 명부귀요를 주시하면서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실로 무서운 계집이로다. 처참한 상황을 즐거운 눈빛으로 보고 있다니.......' 율원양은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명부귀요.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명년 오늘이 너의 제삿날이로다.' 자신과 같은 신체인 원영곤음체를 지니고 태어난 몸으로 천성적으로 타고난 살심과 음탕한 요심(妖心)이 지배하는 명부귀요인 것이다. 신안천기자가 예언한 이백 년 후의 피의 혈겁을 일으키는 장본인. 무림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오늘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율원양은 그녀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벌써 차도살인지계를 펼쳐 천 명에 가까운 무림인들을 죽인 해악을 끼친 터였다. "멈춰라." 엄청난 공력이 실린 폭갈이 천지를 뒤흔들 듯이 율원양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태행산 전체가 무너져 내릴 정도로 강렬한 외침이었다. 더욱이 그 음성에는 감당하기 힘든 내력이 깃들어 있어 장중의 몇몇 인물들은 피를 토하며 나자빠졌다. "허억--" "욱." 그들은 제깐엔 백 년 가까이 무공을 익혀온 초절정 고수들이라고 자부하던 마두들이 아닌가? 한데, 율원양의 단 한 마디의 폭갈에 기혈이 뒤틀려 나동그라지다니 어이없는 일이었다. 느닷없이 터진 호통에 명부귀요는 안색이 홱 변한 채, 율원양이 있는 노송 위를 올려다 보았다. '어떤 자이기에 가히 천하를 뒤엎을 만한 공력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휘- 익. 마치 신선이 하강하듯 초립을 쓴 율원양이 표표히 지상으로 내려섰다. 새초롬히 빛나던 명부귀요의 눈이 율원양을 보는 순간 죽음의 빛인 잿빛으로 변해 버렸다. 그 눈은 방금 전, 소녀의 눈망울과 같던 여자의 눈이 아니었다. 지금은 세상의 모든 여세를 파헤친 쓰라린 여인의 한(恨)같은 감정이 담긴 죽음의 장막같은 눈으로 돌변한 것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괴인영에게서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살기를 느끼자 삽시간에 눈빛이 변해 버린 것이다. 율원양의 살기가 오직 자신만을 노리는 것임을 알 수 있었기에 섬칫 몸을 떨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끼자 자신에 대해 어이가 없어졌다. 율원양은 깊은 발자국을 만들며 서서히 명부귀요에게 다가갔다. 장중의 모든 눈길은 새로이 나타난 초립을 쓴 율원양에게 쏠렸다. 그를 바라보는 순간, 장중의 인물들은 숨이 콱 막히는 두려움을 느꼈다. 율원양은 명부귀요의 일 장 앞에 서서 멈추었다.


귀령검제가 냉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명부귀요. 저 조그만 계집애가 드디어 임자를 만났군." 순간, 명부귀요의 잿빛 살광이 일시간에 귀령검제에게로 퍼부어졌다. 그러나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명부귀요에 대해 전혀 두려움이 없는 귀령검제는 그녀의 잿빛 살기 찬 눈빛에 아랑곳 없이 다시 냉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어린 계집애야, 본 검제를 노려볼 것 없다. 본 검제가 친히 네년을 처단할 일이지만 초립을 쓴 인물이 나타났기에 내가 양보하는 것이다." 명부귀요의 눈에서 쏟아지는 잿빛 살광이 더욱 짙어졌다. "오호호호." 별안간, 그녀는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황폐한 황무지 같은 메마른 웃음이었다. "네가 귀령검제의 일신 절기를 물려받은 것을 내가 익히 알고 있거늘, 너는 끝까지 귀령검제의 흉내를 낼 참이냐?" 목소리조차 물기없는 황막한 음성이었다. 순간적으로 귀령���제는 움찔 하는 것 같았다. "흥." 그는 코웃음을 치고는 입을 다물었다. 명부귀요의 잿빛 살광이 다시 율원양에게 쏟아졌다. 율원양은 그 잿빛 살광에 담긴 그녀의 공력에 저으기 감탄했다.. '저 계집은 원영곤음체를 고친 이상, 틀림없이 사 갑자 이상의 공력을 지니고 있어 과연 쏟아내는 살기가 대단하구나.' 이렇게 염두를 굴린 율원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지난 이 년 동안 삼백에 달하는 젊은 고수들의 정혈(精血)을 빨아먹은 흡혈귀(吸血鬼)인 명부귀요가 맞느냐?" 그러나 명부귀요는 대답하지 않았다. 율원양을 한참 노려보던 그녀는 날카로운 음성으로 명령을 내렸다. "사령수라들은 뭐하고 있느냐? 저 놈은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나머지 놈들을 추살토록 하라."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 사령수라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령수라들이 죽이려 드는 노마들은 사실 살 가치가 없는 자들이었으나 그들의 목숨 역시 인간의 목숨이었다. 게다가 사령수라들이 더 이상 날뛰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을 놔둔다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무림인들이 그의 살검 아래 피를 쏟으며 죽어갈지 모를 일인 것이다. "어딜." 율원양이 짤막하게 외치며 몸을 빙글 돌리며 연속적으로 허공에다 손가락으로 점을 찍어 갔다. 쌔- 애- 액! 쌔액! 쉬- 익-- 쉭쉭-마치 화살이 허공를 가르는 것 같은 날카로운 파공성이 연속적으로 울렸다. 율원양이 지풍을 발출하는 동작을 본 명부귀요는 부르르 떨었다. "소림(少林)의 반야금강지(般若金剛指)다. 피해랏!" 명부귀요가 날카롭게 외치며 새하얀 오른손을 번쩍 쳐들었다. 번쩍. 그녀의 손에서 백광이 폭발하듯 발출됐다. 순간, 대지를 얼릴 듯 지대한 한기를 품은 장력이 쏟아져 나와 율원양이 발출한 반야금강지를 덮쳐 갔다. 그러나 반야금강지는 여지없이 명부귀요가 발출한 백광을 뚫고 사령수라들에게 날아 들었다. "크아- 악." "흑."


여섯 마디의 비명이 허공을 질렀다. 여섯 명의 사령수라들의 턱이 박살이 난 채, 쓰러지는 것이었다. 부서진 턱으로부터 피화살이 솟구치고 그들은 넋없는 시체가 되어 버렸다. 수하들 중 여섯이나 즉사를 당하자 명부귀요는 이를 갈며 율원양을 향해 백광을 발출했다. 백광을 발출하는 것을 본 율원양은 어찌된 일인지 손을 쓰지 않았다. 펑. 명부귀요의 장력이 율원양의 가슴을 여지없이 강타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것을 본 귀령검제가 대경실색 하였다. 율원양이 나타남으로 해서 아직 목숨이 붙어 있어 암암리에 내심 안심하고 있던 노마들도 마찬가지였다. 귀령검제는 율원양이 즉사할 것이라는 생각에 두 눈을 감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놀람은 기우(杞憂)에 불과했다. 율원양은 그녀의 장력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냉막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너는 명부귀요가 아니구나." 명부귀요가 아니라는 말에 명부귀요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휙. 말을 한 율원양은 빛살보다 빠르게 명부귀요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 놈이 어딜?" 명부귀요는 자신의 장력에도 끄덕하지 않는 율원양을 보고 그의 지적에 질겁을 하고 놀랐다가 그가 몸을 날려 달려들자 뾰족하게 외치며 연이어 팔장을 격출하였다. 율원양은 쏟아지는 장력 사이로 오른손을 뻗으며 말했다. "너의 명부빙극한공(冥府氷極寒功)이 매섭기는 하다만 아직 멀었다." 그의 장심에서 명부빙극한공을 향해 일장이 발출되자 대지를 얼릴 것만 같았던 차가운 기류는 흔적없이 사라지고 명부귀요는 전신을 태울 듯한 열기를 느꼈다. 율원양은 다시 명부빙극한공을 발출하려는 명부귀요를 향해 오른손을 쭉 뻗었다. "악!" 눈 깜짝 할 사이에 율원양에게 손목을 잡힌 명부귀요는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명부귀요가 손목을 잡히자마자 허공을 가르는 음향이 순간적으로 발출됐다. 츠- 츠- 츠- 츠 새- 애- 액. 남아 있던 사령수라들의 검이 일제히 율원양을 향하여 날아오는 것이다. "위험해욧." 어느새 현장에 도착해 손천행과 함께 몸을 드러내지 않고 구경을 하고 있던 손영령이 손천행의 손을 꼭 쥐며 자지러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팍. 파팍. 팍. 팍. 팍. 여섯 자루의 검이 여지없이 율원양의 등을 쑤셨다. 사령수라들은 일제히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그들은 암습하기 위해 벼락같이 펼친 검이 율원양의 등을 쑤시자 자신들의 쾌검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만족은 그저 만족만으로 끝나 버렸다. "이럴 수가?" "으앗? 이것은 사술(邪術)이다."


여기저기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경악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사령수라들의 검은 분명 율원양의 등을 찔렀다. 그러나, 그들이 율원양의 등을 관통시켰다고 생각한 것은 커다란 오산이었다. 보라. 그들의 검은 전부 율원양 등의 한 치 앞에서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검은 율원양의 호신강기 벽을 찔렀을 따름이었다. 그것 뿐이 아니었다. 율원양의 호신강기에 부딪힌 검은 호신강기가 쭉 확산 되자 모조리 가루로 변해 버리는 것이었다. 율원양이 냉막하게 외쳤다. "죽어랏." 율원양이 등 뒤를 향해 오른 손을 홱 뿌렸다. "대력무상장(大力無上掌)!" 꽈르릉. 우뢰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동시에 하얀 섬광이 넋을 잃고 있는 사령수라들에게 작렬하듯 퍼졌다. 하얀 섬광은 일시에 사령수라들의 가슴을 강타했다. "으- 아- 악." "커억. 컥. 컥." 처절무비한 비명소리들이 태행산을 떨어 울렸다. 여섯 명의 사령수라들은 온통 가슴이 빠개진 채, 십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단 일장에 사령수라들이 즉사하자 장중에 있던 모든 인물들의 얼굴에 공포가 맺혀 있었다. 그들은 두려운 눈으로 율원양을 바라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천하를 울린다는 흉명을 지닌 대마두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립객의 신위에 완전한 공포를 느끼고 뒷걸음질 치는 것이었다. 율원양은 그들이 뒷걸음 치는 데도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명부귀요를 주시하고 있었다. "으으윽." 맥문을 잡은 손에 내력을 가하자 그녀는 전신이 쇠사슬에 묶인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이를 갈고 입을 열었다. "너는 소림파의 제자냐? 아니면, 아미의 제자냐?" 소림의 반야금강지(般若金剛指)와 아미의 대력무상장(大力無上掌). 이 무공들은 이미 삼백여 년 전 실전된 두 파의 초절정 무공이었다. 두 무공은 모두 불문선공(佛門禪功)으로 역근세수(易筋洗手)하여 탈태환골이 익힐 수 있는 무공들이었다. 사령수라들이 제아무리 초절한 공력을 익혔다 하더라도, 율원양의 일장, 일지를 받아낼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다. 율원양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묵묵히 그녀를 노려볼 뿐이었다. 명부귀요는 그의 태도에서 오장육부가 터질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으으으." 꽉 다문 이빨 사이로 껄끄러운 신음이 토해졌다. 잡히 맥문의 아픔보다도 무형 중에 눌러오는 살기가 그녀에게는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녀는 땀을 비오듯 흘렸다. 복면 밖으로 땀이 뚝뚝 떨어졌다. 복면 밖으로 드러난 두 눈은 공포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몽면아, 벗겨져라." 율원양이 나직하게 말했다. 손도 쓰지 않았는데 말 한 마디에 복면이 벗겨져 나가자 명부귀요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굴을


움츠렸으나, 어느새 몽면은 벗겨졌다. 명부귀요의 얼굴이 일시에 드러났다. 명부귀요는 얼굴을 온통 찌그러뜨린 채 이를 갈며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음탕한 계집 년. 다시 입을 나불거리면 고운 얼굴을 난도질해 놓겠다." 율원양이 냉막하게 호통을 치자, 명부귀요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드러난 훤한 이마에 비지땀이 번들거렸고 턱에서는 연신 땀이 흘러 내렸다. 전신에도 땀이 찼는지 얇은 나삼이 착 달라붙어 여인의 완만한 곡선이 드러났다. 봉긋 솟아오른 두 젖무덤이 도발적인 매력을 뿜어 내었다. 처녀라면 당연히 젖무덤에 거의 묻혀 있어야 할 유두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었다. 이로 보아 명부귀요는 수많은 남자가 거쳐간 것이 틀림 없었다. 요염하게 패인 허리의 곡선을 따라 안락하고 풍요로움을 느끼게 하는 엉덩이와 곧게 뻗은 다리 등, 어느 곳 하나 나무랄데 없는 미려한 자태의 여인이었다. 몽면 속에서 드러난 그녀의 얼굴 또한 현종으로 하여금 아들의 여자를 뺏는 패륜을 저지르게 만들었던 양귀비(楊貴妃)에 비하여 아마도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단지, 흠이라면 그녀의 고운 미간 사이로 흐르는 음탕한 기색이었다. 명부귀요의 모습이야말로 전형적인 요부의 자태였던 것이다. 제 12 장 무적미검객(無敵美劍客)의 후손(後孫) 두려움에 밀려나 있던 마두들은 그녀의 미모에 일순 공포심 마저 잊은 듯 넋을 잃고 명부귀요를 쳐다보았다. 몇몇 노마들은 나이도 잊고 군침을 꿀꺽꿀꺽 삼키기까지 했다. 살벌하기만 했던 분위기가 그녀의 얼굴로 인하여 어이없게도 잠시나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돌연 노마들을 살피던 귀령검제가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흐... 이런 파렴치한 놈들 보았나. 조금 전만 하여도 두려움에 떨던 놈들이 음탕한 계집의 낯짝에 침을 질질 흘리다니. 네놈들부터 죽어라." 쉬-- 아-- 앙. 자욱이 서린 밤안개를 찢으며 예리한 백광이 가장 가까이 있는 한 노마를 향하여 폭사됐다. 제일 많이 침을 삼키던 노마 냉음탈백 간일곤이었다. 귀령검제의 검을 그의 목 위를 가르고 지나 갔다. "크-- 악." 재수없게도 귀령검제에게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탓으로 냉음탈백(冷陰奪魄) 간일곤(干一坤)은 목이 잘려 시체가 되어 버렸다. "......!" 노마들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 버렸다. 주위의 공기를 다시 살벌하게 돌변시켜 놓은 귀령검제가 아무렇지도 않게 율원양 쪽을 쳐다 보았다. 율원양은 힐끔 귀령검제를 쳐다보고 난 후 다시 명부귀요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그의 눈에서 쏟아지는 살기에 명부귀요는 눈알이 터질 것만 같은 아픔을 느꼈다. "너는 누구냐?" 명부귀요는 덜덜 떨며 간신히 대답했다. "명부귀요예요." 율원양은 냉소를 쳤다. "너는 오래 살기 싫으냐? 너는 분명 명부귀요가 아니다." 명부귀요는 강력하게 부인했다. "내가 왜 명부귀요가 아니란 말이냐?"


"내가 알기론 명부귀요의 무공이 너처럼 약하지는 않다." 그녀가 움찔 했다. 율원양의 말이 그녀의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너는 매우 예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머리도 매우 좋은 것으로 안다. 나는 친절한 사람이 아니다. 특히 너같이 예쁜 여자에게는 더욱 불친절하는 나쁜 버릇이 있지. 명부귀요는 어디 있느냐?" 명부귀요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모른다." 대답을 하고 난 명부귀요는 찔끔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가짜라고 시인을 하고 만 꼴이었다. 그녀는 아랫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원독이 가득 찬 눈으로 율원양을 노려 보았다. 율원양은 계속 다그쳤다. "그래. 너희들이 가짜 만무록을 만들어 살겁을 자행한 이유가 어디 있느냐?" "모른다." 그녀는 아랫 입술을 꼬옥 깨물며 야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율원양은 전혀 조급함을 보이지 않았다. "무당(武當)의 장삼풍(張三風) 사조께서는 광명정대(光明正大)한 도가의 무공도 만드셨지만 분근단맥참혈수(分筋丹脈斬血手)란 무서운 무공도 만드셨다. 너는 분근단맥참혈수란 무공에 대해 들어 보았느냐?" 물론 그녀는 이 무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분근단맥참혈수는 무당의 금나수법인 제룡쇄맥수(制龍碎脈手)의 한 수법으로 상대를 고문할 때 쓰는 무공이다. 일단 분근단맥참혈수에 제압되면 근육이 갈라지고 전신의 맥이 단근(單根)되며 피가 거꾸로 역류하게 된다. 종내에는 제압된 인물은 고통을 견디다 못해 마치 둥근공처럼 온몸이 오그라들어 죽는 참혹한 수법이었다. 분근단맥참혈수는 그녀 뿐만 아니라 무림인이라면 누구나가 모두 두려워 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공포로 인해 새하얗게 질렸다. "저... 정말 그 수법을 내게 쓸거예... 요... ?" 그녀는 공포에 질려 떠듬거리며 되물었다. "물론이다." 율원양은 번개같이 그녀의 십이 개 대혈을 찔렀다. "잠시 후면 괜찮은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사실대로 말하거라." "네놈은 진정 악독하구나." 그녀가 원독의 흉광을 쏟아내며 이를 뿌드득 갈아부쳤다. "내가 악독하다구? 차도살인지계를 일으켜 천여 명이나 되는 무림인들을 몰살시킨 네년이 나더러 악독하다고 하다니. 으하하하하." 돌연, 율원양이 우렁찬 광소를 터뜨렸다. "남을 해할 때, 너는 네 자신이 악독하다는 것을 한 번쯤이라도 생각해 보았느냐? 천여 명이나 몰살시킨 네년을 괴롭히는 내가 악독하다면 그런 네년은 대체 무엇이냐? 죽어랏. 이 독사같은 년아." 율원양은 울분을 토하듯 외치다가 별안간 손바닥으로 그녀의 머리를 내리쳤다. 퍽. 그녀는 두개골이 빠개져 허연 뇌수를 흘린 채, 처참하게 죽어 버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녀는 가장 참혹하게 죽은 것이었다. 율원양은 몸을 홱 돌렸다. "으으윽." "억." 장중에 있던 마두들이 갑작스런 그의 태도에 비명을 지르며 비칠비칠 물러났다. 명부귀요를 처치해


주어 이제는 살았다 싶었던 노마들은 율원양의 눈빛이 자신들을 향하자 심장이 오그라 들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왜 이 자리를 일찍 떠나지 못했나를 후회하고 있었다. 율원양이 한 명의 마두 앞으로 다가섰다. 팔순 가량 되는 마두는 질겁을 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는 생전 처음 맛보는 두려움에 치를 떨었다. 율원양은 초립을 깊이 누르며 냉막하게 물었다. "너는 여태까지 사람을 몇 명 죽였느냐?" "으으......." 노인은 다만 두려움에 질려 신음만 토할 뿐이었다. 귀령검제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 놈은 추혼인도살(追魂人屠殺) 방호파(方湖波)로서 평생 살인을 즐겨해 오던 놈이지. 너무 많아 셀 수도 없을 걸." 추혼인도살은 움찔하더니 고개를 돌려 귀령검제를 노려 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원망과 원독이 가득 찬 광망이 폭사되었다. 율원양은 냉막하게 웃으며 일 장을 쏟아냈다. "그렇다면 네놈은 이제 염라대왕 품 속에서 편히 쉬거라." 장심에서 벽력 터지는 소리가 일었다. 꽈르릉. 펑. "크아악." 추혼인도살은 앞가슴에 율원양의 일장을 얻어맞자, 처참한 비명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때를 같이하여 귀령검제도 노마들��� 향해 검기를 발출했다. "귀령검강(鬼靈劍剛)." 검이 날아들자 겁에 질려 있던 한 노마가 대경실색하여 몸을 날리려 했다. 파파팍. 검강은 십여 갈래로 비수처럼 날아 들어 노마의 전신을 꿰뚫어 버렸다. "으아악." 그 마두는 단 한 차례의 검강에 전신이 걸레조각처럼 찢겨져 죽어 버렸다. 숲 속에 숨어 있던 손영령은 무림의 여자답지 않게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손천행이 부드럽게 쓰다 듬어 안심을 시켜 주고 있었다. "저... 저 분은 어찌하여 저토록 참혹한 살수를 펼치지요. 너무 무서워요. 할아버지." "얘야. 젊은이가 죽이는 놈들은 벌써 죽었어야 할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흉악한 마도의 인물들 중에도 이류 정도밖에 안되는 인간들인데도 너무나 많은 피를 뿌려왔단다. 너도 나이가 들면 사람이 때로는 해서는 안될 일들도 해야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도 너무 무서워요." "인간의 마음 중에 제일 값어치 없는 것이 남을 용서할 줄 모르는 것이다. 분노로 가득 찬 저 젊은이의 가슴에 앞으로 네가 용서하는 덕(德)을 가질 수 있도록 심어주거라. 허허허......." 손천행은 오들오들 떨고 있는 손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사위는 점점 고요해 졌다. 답답한 적막 속에 속이 뒤집혀지는 피비린내만이 진동했다. 율원양은 묵묵히 침묵을 지키면서 서 있었다. 초립 속의 얼굴은 매우 허탈해 있었다. '내가 너무 성급했구나.' 귀령검제는 힐끔 그를 쳐다보더니 사로잡은 잔결신투에게로 다가갔다. 혈도가 제압당했던 그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휙.


귀령검제는 잔결신투의 마혈로 발을 날렸다. 퍼퍽. 그의 발은 제압된 마혈을 여지없이 강타하였다. "으- 억." 잔결신투는 묵직한 비명을 지르면서 힘겹게 눈을 떴다. 그의 눈엔 공포스런 귀령검제의 혈립이 가득했다. "일어나라." "......!" 잔결신투는 불가항력에 벌떡 일어섰다. 귀령검제의 혈립이 약간 위로 치켜졌다. 순간, 사람의 눈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무서운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귀령검제는 그의 목줄기를 움켜 쥐었다. 잔결신투는 바늘로 전신을 찌르는 듯한 예리한 통증에 비명을 내질렀다. "으으앗." 귀령검제는 냉혹한 어조로 추궁하기 시작했다. "잔결신투. 지금부터 본 검제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하면 너의 시체는 온전히 남겨 주겠다." 잔결신투는 덜덜 떨며 대답했다. "마... 말씀해 보시오." "너는 이십 년 전 무적미검객(無敵美劍客) 맹석빈의 혈겁을 잘 알고 있지? 모른다고 대답하지는 마라. 노부는 네놈이 그 혈겁을 일으킨 흉수 중의 하나임을 알고 있다." 순간, 목줄기가 잡혀 있는 잔결신투의 거대한 체구가 두어 번 휘청거렸다. 율원양은 귀령검제가 느닷없이 무적미검객 맹석빈의 혈사를 꺼내자 흠칫했다. "맹... 맹석빈......." 맹석빈이란 이름을 되뇌이는 잔결신투의 두 눈에서는 공포와 후회의 빛이 짙게 깔려 갔다. 그는 심히 떨리는 음성으로 힙겹게 말했다. "갈선배님. 선배님이 왜 그 일을 들추......." 귀령검제는 만년한설(萬年寒雪)과도 같이 냉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는 맹석빈의 장원이 참살당할 때, 정체 모를 무림인이 구해간 여아를 기억하느냐?" 귀령검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율원양은 몸을 흠칫 떨었다. '아버님이 말씀해 주셨던 그때 그 여아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럼 저, 자는 귀령검제가 아니고 그때의 여아란 말인가.' 귀령검제는 일시에 쓰고 있던 혈립을 벗어 제꼈다. 혈립 속에서 나타난 얼굴은 상상 외로 젊었다. 나이는 이제 겨우 이십 세가 간신히 되었을까? 하지만 세상에 이토록 뛰어난 절세 미남자가 있었단 말인가. 섬세하게 휜 눈썹과 한 쌍의 서릿발처럼 맑고 차가운 흑백이 뚜렷한 눈을 지닌 갸름한 계란형의 얼굴에 곧은 콧날과 자그마하고도 타는 듯 붉은 입술은 멋들어진 조화를 일으켯다. 게다가 백옥을 다듬어 빚은 듯 눈같이 뽀얀 흰 피부를 바탕으로한 그의 얼굴은 규방의 수줍음 많은 소녀들이라도 한눈에 혼백을 앗아갈 듯 보였다. 아니, 차라리 그의 모습은 서시와 같이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여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지경이니 같은 사나이라도 한눈에 반할 지경인 것이다. 그런데, 분명 그는 자신을 여자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남자처럼 틀어 올렸던 검은 머리채가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그 빛나는 여인의 모습이란 바라 보는 이의 영혼을 단숨에 멀어버리게 할 정도였다. 의외의 사태에 놀랐던 율원양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 보며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실로 천하에 둘도 없는 미인이로다. 실로 설운보다도 뛰어난 미모로다. 아버님이 그토록 찾으셨던 갓난 여아가 바로 저 여인이구나.' 잔결신투는 귀령검제로 변장했던 아름다운 여인을 보자, 정신이 아득해 지는 것을 느꼈다. "소저가 바로... 그때 구출 되었던 갓난 여아란 말이오?" "그렇다." 여태까지 창노한 노인의 음성을 토해냈던 그녀의 입에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발출됐다. 그러나 아름다운 목소리 속에는 너무나 짙은 살기가 서려있었다. 잔결신투는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드디어...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 노부는 그 혈겁에 참가한 후에 꼭 오늘과 같은 일이 올 줄 짐작을 했소." 그녀는 울분의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네놈은 잘못을 깨닫고 있는 모양이나 이미 배는 떠나간 뒤다." 잔결신투는 공허한 시선으로 밤하늘을 응시했다. "그렇소. 후회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는 이미 두려움은 걷힌 듯 했다. 그 대신 지난 날의 후회로 인하여 오는 처절한 심정 뿐이었다. "소저를 구출해 간 기인이 바로 귀령검제 갈선배님이셨소?" 그녀는 잔결신투의 물음을 받자 더욱 짙은 살기를 두 눈에서 폭사시켜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 그 분은 나의 목숨을 구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천하제일의 검법까지 전수해 주셨다. 그리고, 흉수 중의 하나인 너까지 가르켜 주셨지. 깔깔깔깔--" 그녀는 처절한 절규를 흘리는 대신 웃음으로 발출시켰다. 그녀는 소름끼치는 어조로 물었다. "잔결신투! 그 날, 장원을 멸망시켰던 나머지 스물아홉 명의 이름을 대라. 그러면 약속한 대로 편안한 죽음을 내리겠다." 그녀의 음성에는 깊은 한이 서려 있었다. "아아......." 잔결신투는 그녀의 살기 띤 어조를 듣자 심장이 얼어붙는 듯 했다. 그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영세무비도... 영세무비도... 아아 비도에 눈이 어두워 행했던 살겁이 기어코 천추의 한을 남기는구나." "꾸물대지 말고 네놈과 같이 혈겁을 일으킨 흉수들의 이름을 대라." 그녀의 폭갈에 잔결신투는 힘없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고개를 서서히 가로저었다. "소저, 노부는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오. 그때 노부는 다만 한 통의 서첩을 받아 혈겁에 참가했을 뿐이오." 그녀의 눈이 기이롭게 빛났다. "서첩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혈겁이 일어나기 사흘 전 노부에게 무적미검객이 영세무비도를 갖고 있다고 적힌 한 통의 서첩이 날아왔소. 그런데, 서첩에는 아무런 서명도 없었오. 본시 노부는 재물이라면 무조건 탐내는 욕심이 가득했는지라 열 일을 제쳐두고 낙양으로 달려가게 되었던 것이오. 그런데, 그 내용의 서첩은 나만 받은 게 아니었소. 노부가 도달했을 때, 노부 말고 이십구 명이나 되는 인물들이 와 있었오. 나는 물론 그들도 모두 복면을 했기 때문에 서 로를 알아보지 못했소."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무적미검객의 딸은 안색을 수시로 변화시켰다. 원수를 알 수 없다는 절망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다 이를 갈며 되물었다. "그럼 너는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냐?" "그렇소. 서첩을 발송한 진정한 흉수도, 직접 살겁을 일으킨 인물들도 모르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날까 봐 살겁을 저지를 때 썼던 무공조차 자신들의 절학이 아닌 매우 평범한 무림의 일반 무공을 썼소." 잔결신투의 대답을 듣는 그녀 두 눈에 회한의 눈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한참을 응시하다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하늘에 계신 영령이시여, 여태 원수조차 알아내지 못한 불민한 이 계집을 용서하소서.' 마음 속으로 그녀의 한탄은 계속 이어졌다. '아버님. 불효한 소녀는 사부님의 은덕으로 한 명의 흉수를 찾았으나 그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어머니. 만약 혼이라도 이 세상에 있거든 나머지 흉수들을 찾아 주십시오. 기필코 원수들을 찾아 소녀는 두 분과 장원 식솔들의 넋을 위로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녀는 속으로 뜨거운 절규를 부르짖었다. 율원양은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동병상련의 아픔을 맛보았다. 그 자신 역시 눈 앞에서 아버님이 납치당하는 일을 당했던 터라 그녀의 아픔이 절절이 가슴에 와서 닿았다. 잔결신투의 말대로 그녀의 흉수들은 정녕 찾을 길이 없을 것인가. 율원양은 내심 다짐했다. '내 힘 닿는 대로 그녀의 원수들을 찾아 주리라.' 그렇지만 정작 자신의 아버지를 납치한 자들의 종적조차 잡지 못한 율원양은 우울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녀는 무서운 눈으로 잔결신투를 쏘아 보다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 "잔결신투. 본 낭자는 약속한 대로 너에게 편안한 주검을 내려주겠다. 자결토록 하라." 잔결신투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눈을 감았다. 이내 체념의 빛이 감돌았다. "소저. 노부는 지옥에 가서 소저의 두 분 선친에게 용서를 빌겠소." 퍽. 잔결신투는 이 한 마디를 남기고는 미련없이 천령개를 쳐서 자결을 했다. 그녀가 그의 목줄기를 잡고 있던터라 그의 고개는 그녀의 손 안에서 옆으로 푹 꺽였다. 그녀가 손을 놓자 잔결신투의 시체는 힘없이 무너지 듯 쓰러졌다. 그녀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멍하니 잔결신투의 시체를 내려다 보았다. 이때 숲 속에서 손천행과 손영령이 걸어 나왔다. 손영령은 무적미검객의 딸에게 달려 갔다. "언니." 염려가 가득 찬 음성이 뒤에서 들려 오자 그녀는 몸을 돌이켰다. 손영령이 달려와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영령은 놀랍게도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금봉(金鳳)아. 너무 낙담할 것 없다. 차후, 너의 원수들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일 때문에 너의 사부가 친히 나서지 않았느냐?" 손천행이 천천히 다가오며 맹금봉에게 위로의 말을 했다. 맹금봉은 처연한 눈으로 다가오는 손천행을 응시했다. 한없이 슬픔을 띤 눈이었다. 그 눈을 바라보는 남자가 있다면 그 남자도 필히 그녀와 같은 진한 슬픔을 느끼게 할 눈이었다. "사백(師伯)님......." 맹금봉으로 불린 그녀는 슬픈 음성으로 힘없이 그를 불렀다. 손천행은 자애스런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맹금봉은 손천행을 사백이라 불렀다. 그녀의 사백이라면 손천행은 귀령검제의 사형(師兄)이 된다. 무림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귀령검제의 사형 역시 숨은 절세기인이었다. 율원양의 초립이 서서히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저 분이 귀령검제의 사형이었구나. 손소저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가리켜 천하제일인이라고 장담을 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군.' 손천행이 그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여보게, 이리로 오게. 노부가 절세의 사질녀(師姪女)를 소개 하겠네." 율원양이 그들 옆으로 다가섰다. 손영령은 할아버지의 말에 매우 난감한 얼굴이 되어 울상으로 변해 버렸다. '만약 금봉언니와 율소협이 서로를 소개받은 후 사랑을 느끼게 되면 나는 어떡하지.' 이런 생각을 하는 손영령은 과연 손영령다웠다. 손천행은 율원양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며 소개를 했다. "금봉아, 이 소협과 인사해라. 이 젊은이는......." "율원양이라 하오." 율원양이 앞질러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포권을 했다. 맹금봉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없이 담담하게 인사를 했다. "소녀는 맹금봉이라 합니다." 손영령은 율원양이 아직 초립을 벗지 않고 있음을 천만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언니가 아직 저 분의 용모를 보지 못해서 저토록 초연한 거야. 천지신명이시여, 제발 저 분이 언니 앞에서는 결코 초립을 벗지 않도록 해주세요.' 그녀다운 속마음이었다. 사실, 천하에 어떤 여자가 율원양의 용모를 보고 한눈에 반하지 않을 것인가? 손영령은 마음이 고운 여자였으나 이때만큼은 절실하리 만치 율원양이 초립을 벗지 않기를 빌었다. 그런데 원수(?)는 정작 다른데 있었다. 그녀의 할아버지였다. "율소협. 그 초립을 벗게나. 아마, 자네의 모습을 사질녀가 본다면 매우 기뻐할 걸세." 손천행은 점점 손영령이 애탈 만한 소리만 하고 있었다. 손영령의 눈꼬리가 샐쭉 찢어졌다. '아... 손녀 마음도 못 알아 주는 주책없는 우리 할아버지.' 평소 하늘같이 존경하던 할아버지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책없는 할아버지라 부르고 있었다. 손영령은 내심 코웃음을 치며 이제 다시는 앞으로 술 심부름을 안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그런데, 율원양의 말이 그녀의 착잡한 마음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하하-- 괜찮습니다. 참 맹소저,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반갑소." 그의 어투는 그녀를 매우 잘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들 세 사람 모두 의외의 빛을 띠었다. "맹소저의 할아버지는 인수검후(仁手劍侯) 맹대협이시지요?" 맹금봉이 흠칫했다. "그런데요? 소협." 율원양은 품 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꺼냈다. 이 책자는 자신이 곤륜산 황무곡에서 영세무존에게 전수받은 무공을 친히 수록한 것이었다. 율원양은 그 책자를 맹금봉에게 내밀었다. "소생은 이제야 불편한 마음을 덜게 되었소. 맹소저, 이 책을 받아 주시오." 밑도 끝도 없는 그의 말에 맹금봉은 물론 두 조손도 눈을 크게 떴다. 맹금봉이 아름다운 눈에 의혹을 가득 담고는, "소협과 저는 일면불식(一面不識)의 처지인데, 웬 책을 저에게 주시는 거죠?" 율원양은 나직이 한숨을 뿜어내었다. "휴-... 책을 주는 이유를 말하자면 길소. 그러니까" 율원양은 깊은 숨을 들이 마시더니 율성하가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부터 하기 시작했다. 긴 시간이 흘렀다.


그는 지나간 모든 이야기를 끝낸 후 책을 쥐어 주다시피해서 맹금봉의 손에 건네 주었다. "이 책은 내가 황무곡을 떠나기 전 맹소저를 만나게 되는 때를 대비하여 저술한 책이오." 세 사람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물결치고 있었다. 그들은 율원양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안색이 수시로 변했고 감탄을 했다. 특히, 천선마살개의 흉악한 탐욕의 이야기에서는 분노로 치를 떨었다. 바라만겁진에서의 끈질긴 삶의 조성(造成), 영세무존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 등은 절로 감탄을 일으키는 이야기였다. 그가 영세무비도를 얻었다고 털어놓은 사실만으로도 그의 마음이 광명정대(光明正大)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하물며 원주인이라 할 수 있는 인수검후의 후예를 위해서 영세일무존이 전수해 준 모든 무학을 수록한 책자를 만들었으니 그의 광명정대한 인품은 끝이 없을 정도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일견(一見)에 감격이 넘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순간에도 손천행은 농을 잊지 않았다. "계집애야. 네가 이처럼 사람 보는 눈이 높은 줄 몰랐구나." 손영령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문득, 맹금봉은 율원양의 모습이 새롭게 부각됨을 느꼈다. 비록, 초립은 썼으나 씁쓸한 마음에 발견할 수 없었던 율원양의 헌헌장부(軒軒丈夫) 기개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저 사람의 용모 역시 인품만큼이나 잘 생겼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슬며시 붉게 물드는 맹금봉의 얼굴이었다. 손영령은 맹금봉의 표정에서 그녀가 율원양에 대해 호감을 가졌음을 깨닫고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손천행은 장래 손녀 사윗감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용의 아들은 용을 낳는 법이네. 자네의 춘부장께서 성수란 칭호를 지녔듯이 자네도 성심(聖心)을 지녔군." 손영령은 발갛게 물든 얼굴로 율원양을 바라보며 남몰래 마음을 사랑으로 적시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저 분을 칭찬하는데 내가 왜 이토록 기쁠까?' 율원양은 멋적은 웃음을 띠었다. "맹소저. 소생은 소저의 할아버지로 인하여 광세절금(廣世絶今)의 무학을 익혔으니 은혜가 하해와 같소이다. 소생도 소저의 집안 흉수를 찾는데 힘을 아끼지 않겠소이다." 그는 말을 마치더니 돌연, 포권을 했다. "그럼 이만 소생은 물러가겠습니다. 노선배님, 두 분 소저도 옥체보중하시기 바랍니다." 휙. 율원양은 갑자기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이렇게 갑자기 사라져 버릴 줄은 미처 몰랐는지라 손영령은 더욱 다급하여 그를 부르려 하였으나 율원양의 종적은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손영령은 이내 풀이 죽어 눈물이 그렁했다. 맹금봉도 꿈많은 처녀인지라 사매의 마음을 능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손영령의 태도에서 그녀가 율원양을 사랑하고 있음을 느낀 것이었다. 급기야 손영령은 울음을 터뜨렸다. "흐흐흑... 야속한 사람 같으니......." 손천행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달랬다. "허허허... 계집애야. 차후 다시 만나게 될 터이니 너무 슬퍼할 것 없다."


손천행의 위로에 손영령은 눈물을 흘리다가 고개를 들어 율원양이 사라진 곳을 망연히 바라 보았다. 태행산에서 처참한 살겁이 있던 날로부터 며칠이 못가 무림은 태행산의 혈겁으로 인하여 벌컥 뒤집혀졌다. 영세무룡(永世武龍)! 상황도 상황이지만 태행산의 혈겁을 가라앉힌 율원양에게 붙은 이 명호는 강호를 경악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누가 붙인 명호인지 아무도 몰랐다. 혜성같이 나타난 젊은 살성(煞星)으로 금전방의 흉명을 하루 아침에 무너뜨리고, 흉악한 전대마두들을 단 일장에 때려 죽이는 놀라운 무공은 무림 전체를 경악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기협(奇俠)! 무림은 젊은 절세고수의 출현에 흥분했다. 어떤 인물은 그를 무림을 구원할 유일무이한 대협객이라 하였다. 어떤 인물들은 명부귀요로 인하여 일어난 혈운(血雲), 즉 무림을 피로 씻어낼 지옥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출현한 샛별이라고 말했다. 무림인들은 전해들은 젊은 기협의 초절한 무공을 이백 년 전의 천하제일 고수였던 영세일무존과 비유하여 그의 명호를 영세무룡이라 지은 것이었다. 영세무룡은 바로 무림의 태양이기를 바라는 무림인들의 소망이 담긴 별호였던 것이다. 태호(太湖)는 동정(洞庭), 파양(播陽), 홍택(洪澤), 소호(巢湖)와 더불어 중원의 오대호로 손꼽히는 곳이다. 이 경개절승(景槪絶勝)한 호수는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을 가로 지르는 경계 지점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호수의 주위에는 만학천봉(萬壑千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한층 더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태호에는 사시사철 풍류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이곳 태호를 아는 인물들은 등천루(登天樓)라는 주루를 기억하고 있었다. 등천루는 태호를 굽어보는 무석성(無錫城)의 절벽 높이 자리잡고 있어 태호의 아름다운 경개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술과 요리의 맛이 좋기로 천하에 알려져 있어 태호를 찾아온 풍류객과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은 이곳을 그냥 지나지 않았다. 이에 등천루는 계절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각양각색의 인물들로 붐비고 있었다. 도화궁(桃花宮)은 태호의 또 하나의 명소이다. 도화궁은 바로 무림기원(武林妓院)이었다. 도화궁의 기녀들은 모두가 절세미모라고 강호에 알려져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도화궁은 모두 팔원칠십이실(八院七十二室)로 나뉘어져 있다 한다. 각 원마다 아홉 명의 기녀가 있으며 기녀들을 통솔하는 원주가 있다. 그리고 여덟 명의 원주는 모두가 절세미모라 알려져 있다. 특히, 도화원 원주인 도화선자의 미모가 제일 뛰어나 그녀가 한 번 웃기만 해도 남자들은 그 자리에서 뇌쇄되고 만다는 미모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작 도화궁이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도화궁의 소재지는 어느 누구도 모르는 신비한 비밀 중의 하나였다. 무림인들은 도화궁이 어디 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태호에 설치되어 있는 도화정(桃花亭)에 가면 얼마든지 도화궁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도화궁에서는 도화궁으로 오고 싶어하는 무림인들을 위하여 도화사자(桃花使者)들을 도화정으로 보낸다.


때로 사흘마다, 어떤 때는 거의 일 년만에 나타나서는 도화정에 모인 사람들을 도화궁으로 데리고 간다. 이리하여 어느새 도화궁은 무림인들이 꿈에도 그리는 낙원이자 환상의 궁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도화궁을 찾는 무림인들이 하나 둘 실종되기 시작하였다. 약 이 년 전부터였던가, 그 후로 도화궁을 찾았던 무림인들은 계속 실종되고 있었다. 실종된 무림인들의 수만 줄잡아 육백여 명이 넘었다. 어느 틈엔가 환락궁(歡樂宮)인 도화궁은 공포의 마궁(魔宮)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수일 전부터 등천루의 상층에는 한 명의 서생이 창턱에 기대어 태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서생은 동이 틀 무렵부터 어둠이 깃들기까지 줄곳 술잔을 기울이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또한, 해가 저물면 어김없이 등천루를 나섰고 이튼 날 동이 트면 돌아와 같은 자리에 앉아 태호를 주시하고 있었다. 바로 율원양이었다. 점원들은 그의 괴이한 행동에 수근거렸지만 율원양은 눈 한 번 돌리지 않았다. 또다시 해가 호수의 서편에 걸쳐지며 아름다운 황혼을 그리고 있었다. 율원양은 창가에 기대어 수심에 싸인 얼굴로 노을 지는 태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는 온갖 상념이 교차되어 착잡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내심 중얼거렸다. '어느덧 이곳에 온 지도 열흘이 지났구나. 한데, 도화사자는 나타나지를 않으니 이를 어떻게 찾는담?' 그렇다. 율원양은 도화궁을 찾아 태호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동안 나는 도화정에서 열흘 밤동안 꼬박 기다렸다. 그러나, 도화사자는 전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정녕 도화사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인가?' 그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곧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럴 리는 없다. 지난 한 달 전에도 삼십여 명의 무림인이 도화궁에 들어갔다가 실종됐다고 소문이 나지 않았던가' 율원양은 태양이 완전히 사라지고 어둠이 깃들자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또 약속없는 기다림을 하기 위해 도화정으로 발길을 옮기려 하는 것이다. '무림에 일어난 겁운(劫雲)은 모두 지난 이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도화궁으로 들어간 무림인들이 실종되기 시작한 것도 이 년 전부터이다. 이 일에는 분명 모종의 흑막이 있을 것이다.' 그는 부친 율성하의 납치와 도화궁의 신비한 실종 사건이 모종의 연관이 있을 것 같은 의심을 품고 태호로 온 것이었다. 그의 예감에 꼭 무슨 단서가 잡힐 것만 같았다. 주루를 나선 그는 곧 태호의 서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태호에서 서편으로 오 리쯤 떨어진 곳에 도화림(桃花林)이 있었다. 도화림 가운데는 매우 화려하게 꾸며진 한 채의 정자가 자리잡고 있었다. 율원양은 한가한 풍류객인 양 정자로 천천히 걸어갔다. 율원양은 한숨을 길게 내뿜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도화정 안으로 들어섰다. 도화정은 매우 크고 화려했다. 율원양은 맥없이 한 의자에 걸터 앉았다. "휴---오늘도 밤새 기약없이 도화선자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그의 머리 속에는 다시금 부친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도화궁으로 인하여 아버지의 소식을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율원양은 묵묵히 생각하면서 활짝 핀 복숭아 꽃들을 바라보았다. 순간 처량하고 쓸쓸한 느낌이 문득 가슴을 스쳐갔다.


사람이란 고독할 때에 온갖 상념이 떠오르는 법이다. 율원양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지난 사 년 동안 맛보지 않아도 될 고독을 얼마나 느껴야 했던가? 천하제일의 무공을 익힌 지금도 아버지를 찾아 혈혈단신 무림을 배회하고 있는 것이었다. 율원양은 울적한 기분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장탄식을 토해냈다. "아아......." 그때 율원양의 장탄식이 미처 끝나기도 전 사뿐사뿐 내딛는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울려오는 것이 아닌가? 율원양은 움찔 놀라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순간 율원양은 자신도 모르게 약간의 감탄을 터뜨렸다. "아......." 정자 앞에는 분홍 나삼을 입은 절색소녀 하나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오똑한 콧날에 호수같이 푸르고 맑은 눈이었다. 홍조를 띤 두 볼은 마치 연시를 연상케 했지만 바람이 불면 휘어질 듯한 가는 허리는 그야말로 서시나 양귀비가 다시 환생한 듯한 절세 미모였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새하얀 복숭아꽃과 어울려 한폭의 그림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만난 세 여인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소녀로구나. 무림의 여인들은 모두 이런 미인들 뿐인가.' 절색소녀도 율원양을 보고는 감탄한 표정이 확연하였다. '인중용봉지재(人中龍鳳之才)의 용상을 지닌 분이로구나. 천하에 이같은 인물이 존재할 줄이야. 저 남자는 너무 멋있게 생겼구나.'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사뿐히 정자 안으로 들어섰다. 율원양은 놀라움이 가시자 의문이 떠올랐다. '혹시, 이 소녀도 도화궁으로 가려는 게 아닐까? 그러나, 여자가 여자들만 있는 도화궁으로 갈 리도 없고 이상하군.' 절색소녀는 정자 안으로 들어서자 율원양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은방울이 구르는 듯한 음성으로 묻는 것이 아닌가? "상공 혼자 뿐이신가요?" 율원양은 담담히 웃었다. "이젠 두 사람이 되었잖소?" 절색소녀는 방그레 미소지었다. "제 말은 소매를 제외하고 상공 뿐이냐는 것이에요." 율원양은 자기도 모르게 풍류지심이 일어나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핫핫핫-- 낭자는 내가 이렇듯 홀로 앉아 꽃구경을 하는 것이 너무 쓸쓸하다고 생각하는구료?" 절색소녀는 호수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호호호-- 그러면 상공께서는 이곳에 도화를 구경하러 왔나요?" "그렇소이다. 그럼, 낭자는 꽃구경을 하러 온 것이 아니란 말이오?"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니예요. 나는 사람을 찾으러 온 거예요." 율원양은 알겠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낭자가 찾고자 하는 사람은 아직 당도하지 않은 모양이구료." "글쎄요" 몇마디의 얘기를 주고 받은 뒤 그들은 침묵을 지켰다. 낯선 일남일녀가 만났으니 적당한 화제를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는 이미 거의 삼경에 가까웠다. 호수바람이 거세게 불어와 복숭아 꽃잎을 떨구고 지나갔다. 율원양은 무료한 김에 고개를 들어 다시 절색소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마침, 그녀도 율원양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눈길이 교차하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야말로 해당화가 방긋 웃는 듯한 미소였다. 율원양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한 후 먼저 침묵을 깼다. "낭자는 이대로 기다릴 생각이오?" "그래요. 사경까지는 기다릴 거예요." 율원양은 하늘에 시선을 주고는 시간을 헤아려 봤다. "그렇다면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았소." 절색소녀는 방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율원양이 재차 물었다. "낭자는 혹시 남자를 기다리고 계시오?" 절색소녀는 뜻모를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그럴지도 몰라요. 그런데 상공께서는 꽃을 좋아하나요?" 율원양은 미소를 지었다. "꽃? 어느 꽃 말이오? 저기 피어있는 복숭아 꽃을 말하오. 아니면, 여인 꽃을 말이오?" "여인을 말하는 거예요." 율원양은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으하하하-- 천하에 밤에만 피는 아름다운 야화(夜花)를 싫어할 남자가 어디 있겠소?" 그러자 어찌된 일이지 절색소녀는 냉랭하게 코웃음 쳤다. "흥!" 율원양은 그녀가 코웃음을 왜 쳤는지 몰라 그녀의 코웃음에 그저 담담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더 이상 화제로 삼을 얘기가 없었던 것이다. 율원양은 빙그레 웃으며 절색소녀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율원양이 바람둥이인 것처럼 말하자 자신도 모르게 냉랭해졌던 절색소녀는 그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저 분의 웃음은 너무나 매력적이구나. 더구나 저 아름다운 눈동자는, 아아... 내가 도화궁의 사자만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도화사자인 내 처지가 정말 한스럽구나.' 어느새 고개를 숙인 그녀의 눈자위가 붉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지.' 그녀는 얼른 마음을 가다듬고는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정적을 깨고 허공을 스치는 옷자락 소리가 미미하게 들렸다. 이어 한 줄기 인영이 정자 안으로 쏘아 들었다. 인영은 푸르디 푸른 청의(靑衣)를 입고 있었으며 은빛 수염을 가슴 앞까지 드리우고 있었다. 자상한 모습을 풍겨주는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노인이었다. 나이는 줄잡아 팔십여 세로 보였다. 율원양은 속으로 크게 의아해 했다. '이 노인도 도화궁에 가려고 여기에 왔나?' 정자에 들어선 청의노인은 율원양과 절색소녀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크게 웃었다. "헛헛헛-- 웅준능위(雄俊稜威)한 젊은이와 폐월수화(閉月羞花)의 섬연한 용모를 지닌 선남선녀가 야밤 삼경에 도화림에서 사랑을 속삭인다? 좋은 일이군, 좋은 일이야. 하하하......." 노인이 부러운 듯한 얼굴로 농을 걸자 절색소녀의 고운 얼굴이 마치 내심을 들킨 소녀처럼 복숭아 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율원양은 노인의 모습이 엄숙하지 않은지라 능청스럽게 받아 넘겼다. "하하하-- 노인장께서도 한눈에 알아보시니 젊으셨을 때는 한껏 풍류를 즐기셨겠군요." 노인은 유쾌하게 받아 넘겼다. "자넨 나를 처음 보고도 그 점을 눈치챘으니 안력이 보통이 아니네. 하하하-- " "하하핫--" 일소일노(一少一老)는 오랜 지기인 양 마주보고 유쾌하게 웃었다. "그런 게 아니예요" 절색소녀는 부끄러움에 황급히 부인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다시 바람에 스치는 옷자락 소리가 허공을 뚫고 울려왔다. 휘익. 휙. 두 줄기 인영이 바람처럼 정자 안에 내려섰다. 새로 온 사람은 두 명의 중년인이었다. 한 사람은 흑의경장에다가 구레나릇을 기른 장한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서생차림으로 인상이 매우 냉막해 보였다. 율원양은 힐끗 절색소녀를 눈여겨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아마도 이 두 중년인들은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이 아닌 듯 했다. 곧이어 다시 세 사람이 계속해서 정자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도 절색소녀는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율원양은 내심 속으로 염두를 굴렸다. '지난 열흘 동안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더니 오늘은 꽤 많이 몰려 드는군. 무림인들이 모여드니 오늘은 도화사자가 나타날지 모르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율원양은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이 순간 잠자코 있던 냉막한 표정의 서생이 갑자기 절색소녀를 향해 묻는 것이 들렸다. "낭자가 도화사자이오?" 절색소녀는 율원양의 생각과는 달리 의외로 고개를 끄덕이며 시인을 했다. "그래요. 내가 바로 도화사자예요." 도화선자일 것이라고 생각도 해보지 않은 율원양은 일순 멍해졌다. 이윽고 그는 자신의 이마를 탁 쳤다. '여지껏 도화사자를 눈 앞에 두고도 몰라봤다니 내가 왜 이렇게 멍청해졌지.' 그 순간 도화사자인 절색소녀는 율원양이 놀라자 안색이 실망스럽게 변한 채 나직이 물어왔다. "상공께서는 제가 도화사자임에 실망하셨나요?" 그녀는 무슨 뜻으로 이렇게 묻는 것일까? "아니오. 그럴 리가 있겠소?" 율원양은 멋적은 표정으로 황급히 부인했다. 도화사자는 그를 바라보면서 씁쓸한 고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흐흐흐......." 음침한 괴소가 중인들의 고막을 때리면서 한 인물이 정자 안으로 들어섰다. 정자 안의 무림인들의 눈이 모두 그 인영한테 쏠렸다. 나타난 인영은 커다란 마대를 짊어진 중년인이었다. 그는 짐승과 같은 눈빛을 번들거리며 정장 안을 훑어보았다. 사람의 심장이 서늘할 정도로 차가운 안광이었다. 율원양은 중년인의 살벌한 안광을 쏘아보며 그의 위 아래를 훑어 보았다. 하늘로 뻗친 듯한 눈썹에 세모꼴의 독사 눈에 날카롭고 야멸찬 매부리 코와 심술이 더덕더덕 붙어있는 볼을 지닌 얼굴이었다. 음흉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얄팍한 입술에 시커먼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는


중년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섬뜩한 것은 얼음장보다도 냉막한 그의 안색이었다. 그는 마치 금시 무덤을 파헤치고 나온 송장처럼 파리한 안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등 뒤에 짊어지고 있는 마대는 분위기를 더욱 음산하게 만들었다. 흉물스런 사나이는 소름끼치는 안광을 발산하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도화사자 앞으로 갔다. 그가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머리 끝이 쭈빗쭈빗 곤두설 정도였다. 율원양은 그 중년인의 등장에 묘한 호기심을 느끼며 주의깊게 보았다. '이상한 인물이군. 저 자가 누굴까?' 율원양과 청의노인을 제외한 무림인들은 하나같이 경악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무거운 신음을 토해내었다. "탈혼도부(奪魂屠夫=혼을 뺏는 인간백정)가 여길 오다니!" 순간, 탈혼도부의 살벌한 살광이 경악을 토한 인물한테 돌려졌다. "흐흐흐... 평소같으면 너를 죽였을 터이나 오늘만은 예외로 하겠다." 그의 안하무인 격인 방자한 언사에 율원양은 지그시 눈썹을 찌푸렸다. '다음엔 내가 너의 혼을 앗아 주겠다.' 탈혼도부가 도화사자를 주시했다. 순간적으로 소름끼치는 그의 흉광이 도화사자의 위 아래를 훑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두려움을 나타내지 않았다. "네가 도화사자이냐?" "그렇다." 그녀도 냉막하게 반말로 대답했다. 도화사자의 건방진 태도에 탈혼도부의 흉악한 눈썹이 위로 치켜 떠졌으나 발작은 일으키지 않았다. "흐흐흐... .어린 계집이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군. 어린 계집아. 네가 도화사자임을 이곳에서 증명해 보여라. 내가 듣기로 도화사자들은 주화성화(洲花成花)의 독특한 신분으로 자신이 도화사자임을 나타낸다더구나." 그의 목소리는 마치 뚝배기 깨지는 소리 같았다. 도화사자는 싸늘하게 코웃음을 치면서 정자 밖으로 몸을 날렸다. 휙. 그녀의 신법이 새털같이 날렵한 것으로 보아 일신절기가 보통이 아닌 듯했다. 그녀는 허공 중에 떠서 도화나무를 향해 양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서 무거운 흡입력이 생겨나 도화 꽃송이들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수십 송이의 도화꽃잎들이 그녀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 왔다. 정자에 나타난 무림인들의 눈에 은은한 경악이 번져 갔다. '아직 밑살에 잡초도 우거지지 않았을 것 같은 어린 계집이 상승의 접인공력(接引功力)을 저토록 능숙하게 펼치다니 놀랍기 이를데 없군.' 접인공력이란 내공을 일으켜 흡입력을 만들어 물건을 손으로 끌어 들이는 공력이다. 도화사자는 감탄하는 무림들을 향해 정자 밖 허공에서 손을 뻗쳐 정자 안으로 도화를 던졌다. 도화꽃잎들은 수십 줄기의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가로 질러 날아 들었다. 휘- 익. 휙. 휙. 날아든 수십 송이의 도화꽃들이 정자 안에 마련되어 있는 돌의자 위에 떨어졌다. 순간 그곳에 있던 무림인들은 그것을 보자, 모두 놀라서 일제히 얼굴빛이 변하고 말았다. 돌의자 위에 떨어진 수십 송이의 도화는 그 자리에서 한 송이의 커다란 도화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야아-- 대단한 솜씨로다." "흐흐흐-- 고것, 생긴 것만치 예쁜 주화성화를 펼치는구나."


탈혼도부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녀의 이런 절묘한 수법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을 절로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녀가 공력을 이용해서 꽃송이들을 돌의자에 던져 한 송이도 떨어지지 않게 한 것만도 어렵고 보기 드문 대단한 일이다. 한데 공력과 지력을 각기 다르게 사용하여 여러개 작은 꽃송이를 가지고 커다란 도화 모양을 만들어 놓았으니 이것은 더 더욱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도화사자는 정자 안으로 들어서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부끄러운 솜씨를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자 안의 무림인들 모두 그녀 곁으로 모여들었다. 도화사자는 그들 모두를 둘러보며 입가에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러 협객들께서는 이제 제가 도화사자임을 믿으셨겠죠?" 누군가가 대답했다. "믿었소이다." "기왕에 여러 협객들께서 저를 믿으셨고, 이제 시각이 사경이 됐으니 우리들은 도화궁으로 갈 때가 되었어요. 그러나 본 궁에 들어가는 데는 한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저는 궁주의 명령을 받고 나왔으므로 그걸 전해 드리지 않을 수 없어요." "흐흐흐... 귀찮다. 빨리 말해라." 역시 탈혼도부가 옆에서 툭 튀어나왔다. 도화사자가 규칙에 대해 말하려는데 두 명의 인물이 정자 안으로 더 들어섰다. 한 인영은 혈립을 쓰고 팔장을 낀 인물이었다. 그리고 팔꿈치 안 쪽 사이로는 고색창연한 검자루가 삐죽 튀어나왔다. 귀령검제 혈립객 갈천악이었다. 제 13 장 성녀(聖女)의 얼굴 탕부(蕩婦)의 육체(肉體) 귀령검제의 돌연한 출현에 그곳에 모인 무림인들의 안색이 하나같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율원양은 움찔 했다. '아니, 맹소저가 무슨 일로 도화궁으로 가려 하지?' 그렇다. 방금 나타난 귀령검제는 귀령검제 본인이 아니고 그의 모습을 한 바로 맹금봉이었다. 무림인들은 무적미검객의 딸인 맹금봉이 귀령검제의 모습으로 출현했다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던 터라 혹시 맹금봉이 아닐까 싶어 처음의 두려움이 많이 가신 터였다. 두번째 나타났던 청의노인은 별로 놀라는 기색 없이 맹금봉을 유심히 훑어보고 있었다. 그들은 꾸짖는 듯한 말에 모두 고개를 돌렸다. "아이쿠, 냄새야. 이 거렁뱅이야. 너같은 몰골을 해 가지고 도화궁으로 갈 참이냐?" 탈혼도부가 코를 틀어 막으며 버럭 외쳤다. 맹금봉에 이어 나타난 인물은 상거지 중의 상거지였다. 거지는 한쪽 손으로는 술병을 움켜쥐고 있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연신 코를 후벼대고 있었다. 더구나, 그의 생김새는 가관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못생겼다. 눈썹은 불장난 하다가 타버린 듯 반 밖에 없었고 눈은 새우처럼 가늘고 작았다. 게다가 코는 위치를 잘못 잡아 벌러덩 제껴 있어 보기에도 흉했다. 날이 궂어 비라도 오면 수난을 겪을 코였다. 또한 그의 입은 메기처럼 큼지막하여 솥뚜껑 하나가 들락날락 할 지경이었다. 그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응수했다. "이 사람 백정 놈아. 사돈 남 말하지 말아라. 네놈에게서 나는 피비린내에 비하여 노부에게서 나는 냄새는 도화 향기라 할 수 있다."


거지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푸하하하핫--" "크크크--" 무림인들이 그 말에 모두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터뜨렸다. 시퍼렇던 탈혼도부의 안색이 벌개졌다. "아구걸개(餓口乞价)! 도화궁에서의 볼 일이 끝난 후, 필히 네놈의 모가지를 따 주겠다." 아구걸개라 불리운 거지는 탈혼도부가 전혀 두렵지 않은지 지지 않고 응대했다. "흐흐흐-- 그것도 좋지. 이 거지께서도 네놈을 잡아 술안주로 삼아 열흘 동안 술을 마시겠다." 인간백정과 아구걸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로 으르렁거렸다. 도화사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중인들을 훑어 보며 차가운 어조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시각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본 궁의 규칙을 말씀 드리겠어요. 첫째, 물의를 일으켜서는 안되고 둘째, 아무리 철천지 원한을 지닌 인물을 만나도 서로 싸우고 죽이면 안되고 셋째, 본 궁에 들어가시면 오직 환락을 누리시는 일 외에는 다른 일에 관심을 갖는다든가 물어봐선 안돼요." 탈혼도부가 물었다. "그 밖에 또 다른 규칙이 없느냐?" "또 있지요. 여러분들이 본 궁에 당도한 뒤 기녀들을 선택하게 되는데, 그건 여러분들 스스로 결정하는 거예요. 그러나 한 가지 알아둘 건 아무리 마음에 드는 기녀를 택한다 해도 그건 여러분의 무공 여하에 따라 정해질 거예요. 그건 여러분들이 본 궁에 들어가면 곧 알게 될 것이에요." 그녀는 잠시 말 끝을 흐리고 무슨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 외 또 한 가지 있는데 그걸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리지 않을 수가 없어요." 아구걸개가 다음 말이 궁금해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급히 말했다. "계집애야. 무슨 일이냐? 어서 말하라." 도화사자는 그를 냉랭하게 흘겨보더니 말을 꺼냈다. "제가 말하는 한 가지 조건에 저촉되는 사람은 갈 수가 없어요." "그게 뭐냐?" "그건 나이가 사십이 넘은 사람이에요." 그러자, 오십이 넘은 듯한 한 인물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건 무슨 이유요?" "이것도 단지 본 궁에서 정한 규칙이에요." 아래 위에 회색옷을 걸친 노인 하나가 그녀 앞으로 성큼 한 걸음 나서며 못마땅 하다는 듯이 투덜했다. "늙은이는 갈 수 없다니, 그건 공평치 못한 처사이다." "그래도 할 수 없어요. 본 궁의 규칙인 이상 여러분은 따라야 해요." 그녀의 단호한 말에 회의노인은 수없이 투덜댔다. "제기랄, 몸은 늙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까지 늙었나?" 회의노인은 여신 투덜거리더니 더 이상 따지지 않고 몸을 솟구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자 회의노인의 뒤를 따라 몇몇 인영이 다시 사라졌다. 도화사자는 남은 인물들을 훑어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아구걸개와 탈혼도부 그리고 귀령검제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청의노인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들을 손가락으로 일일이 가리키며 말했다. "노선배님들은 안돼요. 본 궁에 갈 수 없어요." 그러자 청의노인이 의외라는 듯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쳐다보았다. "아니, 내가 어디가 어때서 안된다는 것이오?" "제가 조금 전에 말씀 드렸잖아요? 노선배님의 나이는 적어도 팔십은 넘어 보여요." 그러자, 청의노인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누가 노부더러 팔십이 넘었다고 그러오?" "설마 노선배님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청의노인은 불쾌하다는 듯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나이는 이제 겨우 삼십구 세하고도 반이오." 누가 들어도 청의노인의 나이가 삼십구 세하고도 반이라는 말은 억지였다. 탈혼도부가 가만 있을 리 없었다. "흐흐흐... 나는 서른세 살이다." 탈혼도부는 자신의 가슴을 치며 재빨리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아구걸개도 빠지지 않았다. "히히히-- 이 거지는 스물세 살이다." 그들의 말이 떨어지자 나머지 무림인들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큰 소리로 웃었다. "으하하하-- " "헛헛헛-- " 도화사자는 셋 씩이나 나서며 어거지를 쓰자 어이가 없었다. 그들의 나이가 자산들의 장담대로 그만하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넋을 잃고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나이가 가짜라는 것을 무엇으로든지 입증할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그들 앞으로 발길을 옮겼다. "만약에 본 궁에 들어가서 우리 아가씨들에게 거절을 당하더라도 그때 가서 나를 탓하지 마세요." 청의노인이 호색가다운 웃음을 흘리며 장담을 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기녀들은 나를 보면 아마 꿀을 본 벌떼처럼 달려들 테니 말이오." 그는 무림인들의 웃는 ���리를 들으면서 한껏 위엄을 나타냈다. 마침내 도화사자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이제 남아있는 일곱 분께선 저를 따라오세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리면서 율원양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쉬움이 서려 있었다. 휙! 휘- 익! 휘. 휙. 휙. 율원양 등 일곱 사람은 빠르게 달리는 도화사자의 뒤를 쫓아 달렸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태호 부근의 어느 산골짜기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 골짜기는 끝이 없는 것 같이 길었으며 좌우로는 울창한 송림이며 잡목이 우거져 있었다. 그 사이로 좁은 길이 길게 나 있었다. 율원양은 그 길을 가는 도중, 한눈을 팔지 않고 지형을 면밀히 살폈다. 골짜기를 얼마쯤 들어가자, 어느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이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났다. 일행들은 모두 어리둥절해져서 절벽만을 쳐다보았다. 절벽이 우뚝 서 있는 곳에서부터 그들이 나갈 길이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화사자는 문제 없다는 듯이 절벽 위를 바라보며 긴 휘파람 소리를 울렸다. 휘파람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천 길이나 되는 절벽 위에서 줄에 매달린 커다란 통 세 개가 내려왔다. 도화사자는 뭇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모두 저 통 위로 올라 타세요." 그 통은 매우 컸음으로 하나에 최소한 이십 명은 탈 수 있었다. 그들은 묵묵히 통 위로 올라섰다. 율원양은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으음... 이런 곳에 도화궁이 있으니 어느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모두 타자 도화사자가 가볍게 몇 번 밧줄을 잡아 당겨 신호를 보냈다. 쉬- 익. 통은 신속하게 위로 끌려 올려졌다. 그런데 약 오십 장 정도의 높이에 오르자, 통은 갑자기 절벽에 가까이 붙으며 허공에서 멈추게 되었다. 통이 더 이상 안 올라 가고 멈추자 일곱 명의 무림인들은 흠칫 했다. 탈혼도부가 얼른 말을 꺼냈다. "왜 갑자기 멈추는 것이냐?" 도화사자는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별안간 손을 내밀어 돌벽을 두드렸다. 그것도 세 번은 간격을 길게 두 번은 짧게 다섯 번을 연거푸 두드렸다. 그러자, 거울처럼 매끄럽던 돌벽에 하나의 동굴이 나타났다. 이렇게 되자, 그들의 놀라움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범인으로서는 미처 생각지도 못할 절묘한 장치였다. 이렇게 오십여 장이나 되는 높은 암벽에다 이런 절묘한 기관장치를 해놓았으니, 줄로 끌어 올리지 않는다면 이 동굴로 들어오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꽤나 공을 들인 모양이구나.' 누구나가 이런 생각을 했다. 이들 일행은 도화사자를 따라 모두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앞에 선 도화사자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모두 저를 따라오도록 하세요." 청의노인이 궁금한 듯이 그녀에게 물었다. "이 동굴은 지키는 사람이 없소?" "왜 없겠어요. 만약, 지키는 사람이 없다면 동굴 문이 어떻게 열리겠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매번 문을 열게 하는 신호가 다르다는 점을 잊지 마세요." 율원양은 이미 문을 지키는 인물들이 어디 몸을 숨기고 있는 지 알고 있었다. 도화사자가 몸을 돌려 굴 안으로 들어갔다. 뒤를 따르던 아구걸개가 갑자기 생각이 떠오른 듯이 물었다. "계집애야, 한 가지 물어보아도 괜찮겠느냐?" "무슨 말이냐?" 그녀가 반말로 냉랭히 대꾸했는데도 아구걸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도화궁의 계집애들은 아름답지 않느냐?" "물론 아름답다." "너에 비해서 어떠했냐?" 도화사자는 아구걸개가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태연히 웃으며 대답했다. "설마, 너 거지는 강호에서 도화궁 안에 있는 사람 중에 도화사자가 제일 못생겼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아니겠지?" 아구걸개는 그녀의 대답이 흡족한지 만족한 웃음을 떠뜨리며 확인이라도 하듯 또 한 번 물었다. "히히히-- 그럼 그곳의 기녀들은 너같이 모두 아름답다 이 말이지?" "그렇다." "그럼, 그 중에 제일 미인은 누구냐?" "각자 특색이 있으니까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팔원(八院) 원주(院主)들은 한결같이 모두 경성지용(傾城之容)이다." 아구걸개는 모두 미인이라는 말에 기분이 좋은지 계속 질문을 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팔원 중에서도 도화원 원주 도화사자의 미모가 제일 뛰어나다면서?" "그렇다." "히히히-- 그럼 난 오늘 밤 그녀를 차지해야지."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탈혼도부가 끼어 들었다. "이 더러운 거지야, 도화사자는 내가 여기 오기 전부터 점찍고 있었다. 네놈은 꿈도 꾸지 말아라." 나머지 사람들은 쓴웃음을 짖지 않을 수 없었다. 도화사자가 어이가 없는지 멍청히 그들을 바라보더니, "킥." 실소를 터뜨렸다. 그들은 동시에 폭갈을 내질렀다. "너는 왜 웃느냐?" 탈혼도부는 성질이 났는지 당장이라도 도화사자를 때려 죽일 듯이 으르렁거렸다. "설마 내가 그의 짝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웃는 것은 아니겠지?" 도화사자가 냉랭히 말했다. "잔소리 말고 어서 뒤따라오기나 해라." 그녀는 휑하니 앞서 가기 시작했다. 맨 뒤에서 따라 오는 율원양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동굴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으음. 이 동굴에만도 백여덟 군데의 기관이 장치되어 있구나. 아마도 도화궁 전체에 모두 기관이 장치되어 있는 것 같군. 이런 무서운 기관 장치를 누가 했을까?' 이미 기관지학에 달통한 그는 동굴을 살펴보면서 기관의 무서움을 감지하고 서늘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커다란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무공이 달인(達人)의 경지에 이른데다 기관지학 또한 도통했기 때문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맹금봉이 정자 안에 들어설 때부터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비록 그녀는 혈립을 쓰고 있었으나, 두 눈은 온통 그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시선을 느끼자, 율원양은 웬지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동굴의 어느 모퉁이를 돌아가게 되었다. 거기에는 다시 다섯 개의 조그만 동굴 입구들이 나타났다. 도화사자는 그 중에서 한가운데의 굴로 들어갔다. 율원양은 일견 동굴의 배치가 역오행(易五行)을 이루고 있음을 알았다. '흐음... 흉악한 기관장치에다 절묘한 진식의 배합을 이루고 있으니 이곳은 아무래도 이상하군.' 동굴은 처음의 지나온 동굴보다 더욱 깜깜했다. 두서너 사람을 제외하고는 굴 속의 경물을 똑똑히 볼 수가 없었다. 도화사자는 조용히 말했다. "이 굴은 다른 곳보다 더 어둡고 또한 수십 개의 조그만 굴이 있어 어떤 진(陳)을 이루고 있어요. 여러분들께서는 손을 잡고 저를 따라오세요. 잘못하여 길을 잃었을 경우에 목숨을 잃더라도 본 사자를 원망하지 마세요." 일곱 명은 이 말을 듣자 자신도 모르게 긴장되었다. 도화사자는 말을 마치고 앞으로 나서서 동굴의 기관을 살피던 율원양의 오른손을 갑자기 쥐었다. 율원양은 별안간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상공, 저를 꼭 잡고 따라오세요.) 모기만한 작은 음성의 전음이 들려왔다. 그녀의 어투에는 그를 걱정해 주는 염려가 가득했다. 율원양은 문득 도화사자의 손이 매우 따뜻하다고 느꼈다. 따뜻한 감정이 담긴 손길이었다.


도화사자가 율원양의 손을 잡자 혈립으로 가린 맹금봉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일어난 질투심이었다. 맹금봉이 얼른 그의 왼손을 잡았다. 율원양의 코로 짙은 처녀의 내음이 물씬 풍겨 들어 오는 것 같았다. '이런 기분도 괜찮군.' 이들 일행은 손에 손을 잡고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 속을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해 갔다. 어두운 굴 속을 꼬불꼬불 돌아갔다. 또한, 종잡을 수 없이 좌 우로도 돌며 앞으로 나아갔다.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석벽 틈으로 흘러 들어오는 빛을 볼 수 있었다. 고수들은 그제서야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눈을 뜨고 돌아보았을 때 그들이 당도한 곳은 온통 울창한 숲이었고, 사방에는 깎아지른 암벽들이 높이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도화궁 내부라고 짐작이 될 뿐 여기가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문득 내심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도화궁이 흑심을 품고 우리들을 가두려 하면 영락없이 새장 속의 새꼴이 되겠군.' 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림의 첨단을 달리는 절정의 고수들이었다. 겉으로는 모두 여유만만한 표정들 뿐이었다. 도화사자가 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본 궁에 거의 다 왔어요." 확실히 도화궁은 매우 신비스런 장소에 위치하고 있었다. 비록,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곳이 어디인지 짐작할 수도 없었을 것 같았다. 도화궁의 신비로움은 항간에서 듣던 그대로 였다. 울창한 숲을 지나서 얼마를 더 들어가자 우람한 누각 한 채가 보였다. 그들이 대원(大院)에 도착하자, 두 명의 아름다운 중년부인이 서서 중인들에게 인사를 하며 그들을 반가이 맞이하는 것이었다. "여러분들이 즐거움을 찾기 위하여 본 궁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두 중년 부인이 안을 가리키자 일행은 곧 도화사자를 따라 커다란 누각으로 갔다. 도화궁(桃花宮)! 누각에 달려있는 커다란 현판에 도화궁이란 글자가 용사비등(龍蛇飛登)의 글씨체로 화려하게 새겨져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자, 매우 화려하게 꾸며진 하나의 대청이 보였다. 대청 안에 감돌고 있는 분홍빛 광선은 약간 어둡긴 했지만 사람을 홀리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진정 화려함의 극치로구나." 청의노인이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가야금소리, 피리소리, 비파소리, 노래소리가 각기 다른 곳에서 은은히 울려왔다. 이렇듯 사람을 유혹하는 정취에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허공을 나는 듯한 신비로움에 젖어 들어갔다. 율원양은 눈을 들고 대청 안을 두루 살펴보았다. '이곳 역시 용담호혈이로구나.' 대청 벽에는 몇폭의 여인의 그림이 걸려 있었지만, 화려함 속에 음산한 살기가 속속들이 숨겨져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의 화상은 모두 아홉 폭인데 사방 벽에 나누어져 걸려있었다. 율원양은 걸려있는 그림 하나하나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전면에는 매화선자(梅花仙子)라는 이름이 쓰인 여인의 화상이었다. 갑자기 도화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본 궁 궁주(宮主)와 팔원 칠십이실(七十二室)에 있는 아가씨들의 용모를 평가해서 모두 그림으로 그려 이 대청 안에 걸어 놓았으니, 여러분들이 가서 스스로 선택한 뒤라야만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어요." 그들은 모두들 그림이 걸려 있는 곳으로 다가섰다. 율원양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한 곳에서 도화선자의 그림을 찾아내게 되었다. 전신을 그린 화폭이었다. 율원양은 한 번 도화사자의 화상에 눈길이 닿자, 넋이 나간 듯이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릴 줄 몰랐다. 그림인데 마치 실물처럼 혼을 낚아갈 듯한 맑은 눈동자가 그려져 있었다. 맑으면서도 정이 듬뿍 담긴 눈빛이기에 율원양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의 솜씨인지 정말 잘 그렸구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드는 코의 아름다운 선과 혼백을 앗아갈 듯한 미소를 띠우고 있는 물기 젖은 입술은 정녕 매력적이었다. '그림이 이 정도이니 실물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녀의 얼굴에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아름다움은 일세에 보기 드문,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화폭 한 장이 이 정도로 아름다우니, 실상이야 말을 해서 무엇하랴. '설운이나 맹금봉, 손영령 소저들보다 뛰어나다 했음은 했지, 절대로 아래가 아니로다.' 도화사자는 아마도 매혹적인 자태로 사람을 항거하기 어렵게 할 것이다. 일곱 명이 그림을 세세히 살피는 것을 보며 도화사자가 물었다. "여러분들께선 이제 그림을 다 보셨나요?" 그녀의 말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잃은 정신을 되찾게 했다. 그들은 모두 도화사자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탈혼노부가 입가에 만족을 표시하는 징그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흐흐흐-- 이 계집들은 한결같이 선녀와도 같이 예쁘니 나더러 누구를 선택하란 말이냐?" 도화사자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럼, 그 중에서 아무나 하나 고르도록 해라." 여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율원양이 그녀의 얼굴을 주시하면서 물어 보았다. "이 중에서 어느 것이 귀궁(貴宮) 궁주의 그림이오?" 도화사자는 그를 곱게 흘겨 보면서 대답했다. "저기 흑의 몽면을 쓴 그림이 궁주님의 그림이에요. 그러나 궁주님은 손님을 받지 않으십니다." 율원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궁주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림 전체에 흐르는 기품으로 보아 궁주 역시 천상선녀처럼 아름다운 것이 분명했다. 도화사자는 잠시 착잡한 표정으로 율원양을 바라보다가 말머리를 돌렸다. "만약, 여러분들께서 화상을 다 보셨다면 저를 따라서 본 궁의 총관을 만나러 가시지요." 그녀는 다시 율원양을 힐끔 보았다. 그러더니 힘없는 발걸음을 천천히 뒷뜰로 옮겨갔다. 이때 맹금봉이 율원양의 어깨를 툭 쳤다. "아마 저 계집은 자네를 염두에 두고 있는 모양일세." 그녀의 음성은 매우 청노했다. 율원양은 그녀의 천연덕스러운 가성에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맹소저는 아직 나를 모르고 있는 모양이군.' 매우 우스웠으나 안색은 평온하였다. "원, 노선배님도, 별말을 다 하십니다."


뒷뜰에는 아담하게 꾸며진 한 채의 소청이 있었다. 그 소청에는 홍의소녀 하나가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도화사자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서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했다. "오늘 밤 도화궁을 찾아 오신 손님들입니다." 홍의소녀는 앉은 그대로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알았다. 물러가 있거라." "예." 도화사자는 다시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대답을 하고는 뒷걸음으로 그녀의 앞을 물러나 소청을 내려섰다. 도화궁의 직분에 고하(高下)는 매우 엄격한 것 같았다. 홍의소녀는 진정 절세가인이었으며 그녀의 아름다움은 도화사자보다도 더욱 뛰어난 것이었다. 그녀는 옥과도 같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 웃음은 뭇 사나이들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얌전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날아갈 듯이 일곱 명에게 절을 했다. "이 소녀가 여러분들께 인사 올립니다." 청의노인이 흡���한 미소를 흘리며 앞으로 나섰다. "총관, 뭐 그렇게 겸손할 것 없소이다. 당신의 용모가 그다지도 아름다운데 우리가 어찌 당신의 화상을 못봤는지 모르겠소이다." 홍의소녀는 홍조를 띠며 말했다. "저는 원래 손님을 받지 않아요." "오, 저런 아깝기 그지 없는 일이구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아쉬움의 탄식을 토했다. 그녀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러분들께서 이렇게 본 궁을 찾아 주셨으니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본 궁은 원래 무림 고수들의 긴장된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 드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에요. 보건데 지금의 무림은 너무나 살벌해서 무림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줄 만한 곳이 없으므로......." 탈혼도부가 음침하게 웃으며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흐흐흐... 그렇다면 어찌 지난 이 년 동안 이곳에 온 무림 친구들이 하나같이 실종되었단 말이냐?" 예상 못한 질문에 홍의소녀는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맑은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본 궁에 온 무림인들이 실종되었다니 무슨 섭섭한 말을 그렇게 하세요?" 그녀는 교태로운 미소를 한껏 머금었다. 완전히 남자를 홀릴 듯한 요염한 미소였다. "지난 이 년 전부터 본 궁의 내규가 바뀌었어요. 이제부터는 본 궁을 떠나기 싫으신 분은 얼마든지 본 궁에 남아 환락을 맛보실 수가 있지요. 호호호--" 귀가 번쩍 뜨이는 대답에 탈혼도부와 아구걸개의 눈빛이 유난히 반짝였다. 탈혼도부는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흐흐흐... 추호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렸다?" "본 총관은 한 마디 거짓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묵묵히 홍의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육백여 명의 무림인들은 실종된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남아 있는 것이란 뜻이었다. 기분은 좋았지만 의문점이 있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구걸개가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 많은 실종된 무림인들이 지금까지 전부 이곳에 머물러 있단 말이냐?" "물론 그건 아니예요. 본 궁에 남아 있기를 원한 그 분들은 이미 제이의 도화궁으로 가서 기거하고 계셔요."


율원양의 눈이 번쩍 빛났다. "설마 당신의 말은 그들 모두가 한결같이 남아 있겠다고 자청한 것이라는 뜻은 아니겠지요?" 매우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일순간 홍의소녀는 움찔하면서 고개를 돌려 율원양을 바라보았다. 한데, 홍의소녀는 율원양의 절세적인 용모를 보자마자 넋을 잃다시피 바라보는 것이었다. '아... 세상에 이토록 웅준영정(雄俊英挺)한 미공자가 있다니... 마치, 바람결에 선 옥수처럼 기도가 뛰어난 임풍옥수로구나. 너무 멋진 귀공자이구나.' 홍의소녀는 심중으로 지극히 감탄을 하며 정신없이 율원양을 바라보았다. 한 창노한 음성이 그녀의 정신을 되돌려 주었다. "어린 계집이 염치가 없군." 창노한 음성은 매우 살벌하게 들렸는데, 귀령검제의 모습으로 있는 맹금봉이 발출한 것이었다. 홍의소녀는 곧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소협의 질문은 틀렸어요. 그분들은 모두 저희 도화궁을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갑자기 삭막해진 분위기를 청의노인이 돌려놓았다. "총관의 말은 사실인 듯 싶소. 그런데 귀궁주께서는 무림인들을 위하여 그런 점까지 자상하게 생각하셨구료. 허허허-- " 그제서야 홍의소녀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궁주님께서도 옛날엔 외로운 세월을 보낸 적이 있었으므로 그 회포를 달래기 위해 손수 도화궁을 세운 거예요." 입만 열면 대개 여유로운 농만을 말하던 청의노인의 눈에 한 순간 날카로운 빛이 스치고 지나 갔다. "그 밖에 다른 목적은 없을까?" 홍의소녀는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고 되물었다. "목적이라고요? 물론 별다른 목적은 없지요."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가 큰 것을 보아 그녀가 과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청의노인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럼 됐소이다." "본 궁에는 여러분도 알다시피 팔원칠십이실이 있어요. 그녀들은 하나같이 월궁 항아와도 같이 아름답지요. 그러나 각자의 개성은 다릅니다. 그 중에서도 팔원 원주는 더욱 뛰어나지요.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들을 만나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는 거예요." 율원양이 그녀의 앞으로 나서며 비교적 정중하게 물었다. "어째서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말씀이시오?" "첫째, 본 총관의 보잘 것 없는 삼초(三招)를 받아내야만 겨우 팔원 원주를 만날 수 있어요. 둘째, 저의 관문을 통과하면 원주들이 다시 여러분을 시험할 거예요. 만약, 여러분이 그녀들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면 역시 그녀들을 만날 수 없게 되는 거예요." 율원양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럼, 소생은 곧 총관의 삼초를 받아보겠소이다." 홍의소녀는 빛이 반짝이는 눈길로 율원양을 바라보며 물었다. "소협께서는 그들 중에서 누굴 필요로 하시나요?" "도화사자요." 그녀는 약간 놀란 표정이 되어 율원양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반문하는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뜨일락말락한 아쉬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뭐라고요?" "나는 도화사자를 원하오. 그건 안되겠소이까?"


"물론 안될 거야 없지요." "그럼 왜 그러시오?" "도화사자는 팔원 원주 중에서도 미모가 가장 뛰어나며 본 궁에서 그녀의 무공을 따라갈 인물은 궁주 외에는 아무도 없어요." 율원양은 만족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욱 잘됐소이다." 제일 먼저 도화사자를 지목할 기회를 놓친 청의노인이 율원양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여보게, 자네가 도화사자를 고르겠다는 것인가?" 율원양이 담담히 웃었다. "그렇습니다." "나도 그녀를 만날려고 마음을 먹고 있네." "그렇습니까?" 청의노인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렇다니까." 그러자 탈혼도부와 아구걸개도 빠지지 않고 똑같이 끼어들었다. "나도 그녀를 원한다." "흐흐흐... 나라고 빠질 수야 있나?" 청의노인은 두 사람을 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번쩍! 잔잔하기만 하던 청의노인의 두 눈에서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한 안광이 폭사되었다. 두 사람은 안광을 접하는 순간 서늘한 기운을 맛보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놈은 도대체 누구일까? 무림에 저만한 고수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눈빛만으로도 그의 내공은 이미 반박귀진의 경지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홍의소녀는 그들을 중재하기 위해 나서며 말했다. "기왕에 네 분께서 택하신 분이 똑같은 도화사자라면 본 궁의 규칙에 따라 무공을 겨루어 보도록 하세요."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이기는 분이 도화사자를 차지할 수 있는 거예요." 율원양이 그녀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냉랭한 말투로 탈혼도부를 지적하며 급히 대답했다. "좋소이다. 나는 우선 저 피비린내 나는 백정 놈하고 싸우겠소." 그렇지 않아도 탈혼도부를 응징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율원양인지라 지금처럼 좋은 기회가 없었다. 탈혼도부는 자신을 지목하자 노화가 삼만 장이나 뻗쳐 올랐다. "아니 뭐라고, 이 솜털도 벗겨지지 않은 애송이 놈이. 죽어랏." 그는 율원양을 향해 벼락같은 일장을 내갈겼다. 우르르르릉-일순, 소청이 날아갈 것 같은 폭음이 울리며 강맹한 장력이 그의 장심에서 몰아쳐 나왔다. 제법 한 수 하는 모습이라 싱겁지 않겠다고 생각한 율원양이 냉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은 네놈을 반 쯤만 죽여주지." 그는 가볍게 소맷자락을 흔들었다. 휘리리리리링. 부드러운 잠력이 소매 끝에서 발출되었다. 퍼- 엉. 두 줄기 잠력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크- 윽."


그 순간 탈혼도부가 쥐어짜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십여 걸음을 밀려났다. 쿵. 그는 밀려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나가 떨어졌다. "우웩." 그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선혈을 주르륵 흘렸다. "아니, 이럴 수가......." 소청 안의 인물들은 이 예상 못한 상황에 소스라치게 놀라 버렸다. 일개 백면서생같은 젊은이가 단 일장에 인간 백정으로 악명을 떨치던 탈혼도부를 날려버릴 줄은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율원양의 냉막한 눈길이 아구걸개에게 쏠렸다. "너도 반 쯤 죽어라." 쉬-이- 액.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한 줄기 지풍이 날았다. 아구걸개는 탈혼도부를 단 일 장에 격상시킨 율원양이 느닷없이 자신에게 지풍을 날리자 대경실색해 들고 있던 호로병을 휘둘렀다. 퍽. 와장창그의 호로병은 지풍에 맞자 박살이 났으나 지풍은 여세를 잃지 않고 여전히 날아갔다. 지풍은 아구걸개의 어깨에 가서 박혔다. 퍽! "으억." 아구걸개도 비명을 지르며 어깨를 급히 감싸 쥐었다. 그의 지저분한 손 틈으로 진한 피가 꾸역꾸역 새어 나왔다. 그는 지풍에 맞아 어깨에 구멍이 나 버렸다. 율원양은 냉막한 얼굴로 아구걸개를 똑바로 주시했다. 그는 천선마살개에게서 배반을 당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거지꼴을 한 인물만 보아도 구역질이 치밀 정도였다. 게다가 아구걸개는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악행을 떨치던 노마가 아닌가. 탈혼도부와 아구걸개는 단 한 수에 중상을 입자 공포로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무말 없이 율원양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들은 율원양이 더 이상 손을 쓸 기색이 없자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율원양의 무공을 견식한 청의노인의 얼굴에 큰 놀라움이 서렸으나 이내 지워졌다. "허허허... 자네는 괜찮은 무공을 지녔군. 노부가 늙어 제대로 사람을 보지 못했다니 좋아. 도화사자는 노부가 양보를 하겠네. 하하하--" 헛 웃음을 터뜨리며 얼버무렸으나 율원양은 청의노인이 절대 두려움 때문에 양보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 노인의 무공이 손영령의 조부 손천행보다 절대 아래가 아님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율원양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노선배님. 양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율원양은 홍의소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정중한 태도를 보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총관의 삼초 절학을 가르침 받고자 하오. 어서 손을 쓰시오." 율원양의 용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총관은 상상을 뛰어 넘는 율원양의 초절한 무공에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그녀는 율원양의 음성을 듣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닙니다. 소협의 무공실력이라면 굳이 제가 삼초를 펼쳐 부끄러움을 자초할 필요는 없습니다."


홍의소녀는 천천히 물러서며 뒤를 돌아 보고 손뼉을 쳤다. 그러자, 문 밖에서 한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시녀 차림의 한 소녀가 그녀 앞으로 다가와 정중히 인사를 했다. "소비는 총관의 분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홍의소녀는 눈짓으로 율원양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이 분을 도화원주에게 모셔라." "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러자, 홍의소녀는 율원양을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소협에게 달콤한 하룻밤이 있으시길 바라겠어요." 율원양은 얼굴 가득히 미소를 담고 시녀를 따라 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곳은 도화궁의 후원지하에 있는 은밀하기 짝이 없는 밀실인데 밀실은 매우 호화롭고 거의 절반을 침상이 차지하고 있었다. 몽면을 쓴 한 여인이 침상에 걸터 앉아 있었다. 몽면여인은 속살이 은은히 드러나는 분홍 잠옷을 입고 있었다. 몽면여인은 자리에서 살며시 일어났다. 매미 날개같이 투명한 속옷이었다. 투명한 옷에 감추어진 몽면여인의 신비스런 육체는 보는 이가 있다면 그 마음을 뽀얀 안개로 뒤덮을만 했다. 몽면여인은 경대 앞에 서서 쓰고 있는 몽면을 벗었다. 몽면이 벗겨지고 드러난 여인의 얼굴은 요염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녀가 머리의 장식을 풀자 구름같은 머리채가 그녀의 몸 위로 폭포수와 같이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더없이 청순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우유처럼 뽀얗게 빛나는 피부와 애잔함을 간직한 맑은 가을날의 호수처럼 그윽한 아름다운 두 눈은 보석보다 더한 광채를 발했다. 초생달처럼 휘어진 눈썹과 오똑 솟은 귀여운 콧날과 놀란 듯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지런히 보이는 진주알과 같은 치아가 보였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그녀의 모습은 가을밤 달빛을 받아 초가지붕 위에 피어난 한 떨기 박꽃과 같은 청순하고도 깨끗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애석했다. 그 아리따운 얼굴이 너무도 유연해 보여 한 줄기 소슬바람도 견뎌내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실로, 그녀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애틋한 심정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그녀는 한 손을 들어 어깨로 가져가 나삼을 팔뚝으로 내렸다. 사륵. 가볍게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그녀의 몸에 걸쳐져 있던 분홍빛 나삼이 그녀의 몸을 떠나고 말았다. 나삼은 발 밑으로 떨어지고 그녀의 나신(裸身)이 드러났다. 활짝 핀 백합을 보듯 화려하게 혼을 빼앗을 것만 같은 육체였다. 그녀는 살포시 고개를 젖히면서 애잔한 눈길로 거울에 자신을 비쳐보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 정녕, 세상에 이토록 완전무결한 얼굴과 육체가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보름달 같은 미모에는 세월도 도망갈 정도였다. 학목과 같은 긴 목에 이어진 우유빛 육체는 참으로 넋을 잃을 만한 탄력과 젊음을 갖고 있었다. 둥글게 뻗어내린 어깨에 이어진 두 개의 젖무덤은 아담한 언덕과 같이 조금도 처지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쉴 때마다 출렁이는 두 젖무덤 가운데 발그스름한 유륜(乳輪) 위에 작은 앵두 하나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했다. 그리고 양지옥(羊脂玉)으로 깎은 듯 매끄럽게 뻗어내린 배와 배꼽 아래의 가볍게 경사진 곳에는 짙은 방초(芳草)가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 옆으로 뻗어간 두 허벅지는 금방이라도 기름이 흘러내릴 듯 탄력있고 기름졌다. 참으로 흠집 하나 없는 육체였으며 눈부시다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보드라운 자신의 손으로 배에서부터 가슴 위로 쓸어 올렸다. "아아......." 그녀의 두 손은 풍만한 젖무덤을 가볍게 감아 쥐었다. 그녀의 물기 젖은 입에서 전신을 녹여낼 듯한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녀는 놀랍게도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냥 바라볼 때 그녀는 수줍고도 청순가련한 얼굴을 가졌다. 그러나 나신은 달랐다. 익을대로 익은 그녀의 육체는 언제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봉긋 솟은 유두(乳頭)가 검은 빛을 발하는 것이 그녀는 필경 범상치 않은 수많은 육욕(肉欲)��� 시련을 겪은 것이 틀림 없었다. 성녀(聖女)의 얼굴이었으나 탕부(蕩婦)의 육체였다. 그녀는 이 두 상반된 모습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접한다면 어느 누가 그녀의 청초하고 가련한 모습에 음욕을 품을 것인가? 그러나 한풀 벗겨진 그녀의 육체는 애타게 남자의 손길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잦은 신음을 토하며 자신의 육체를 쓰다듬다가 마치 내동댕이치듯 침상 위로 몸을 던졌다. 침상이 흔들리고 뇌살시킬 듯한 육체가 요동쳤다. 동시에 가벼운 미풍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다섯 군데에서 불타고 있던 대황초가 한꺼번에 꺼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문이 열림을 의식했다. 동시에 그녀의 몸 위로 무엇인가가 덮쳐왔다. "으음." "헉" 거친 사내의 숨소리와 뒤얽혀 그녀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사내의 억센 손아귀가 그녀의 풍만한 젖을 움켜 쥐었다. 풍만한 젖은 사내의 손아귀에서 넘쳐 흐를 듯했다. 사내의 입술이 부드럽게 나머지 하나의 젖을 점령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내가 몸을 애무하는데도 조금도 반항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이것을 기다리고 있었단 말인가? 이 새초롬하고 고결한 모습의 그녀가 과연,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단 말인가? 어둠 속의 인영의 거친 숨소리가 그녀의 젖무덤에서 그녀의 목덜미를 거쳐 그녀의 입가로 다가왔다. "으응... 늦었군요?" 그녀가 가볍게 몸을 틀면서 콧소리로 신음을 내듯 말했다. 그 음성이 물기에 젖어 어찌나 감미로운지 누구라도 욕정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암중의 인영은 아무런 대꾸도 않고 계속 그녀의 온몸을 탐닉해 나갔다. 그때마다 그녀의 육체는 치밀어 오르는 환희와 빨리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고통에 떨었다. 그 인물은 의식적인 듯 가장 중요한 부분의 주위에서 맴돌 뿐 접근하지 않았다. 욕정으로 가득 찬 몸을 계속 애무만 하는 것은 그녀처럼 남자에 익숙한 몸에는 환희가 아니라 고통이었다. "아... 빨리요. 여보......." 마침내, 입술이 더 이상 다닐 곳이 없었던가?


입술은 드디어 깊이를 모를 숲 속의 샘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갔다. 거친 숨결은 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듯 연신 괴이한 소리를 토해내었다. "아음......." 그녀가 비명에 가까운 환희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몸부림을 쳤다. 사내가 그녀의 몸 위로 올라 왔다. 굵고도 뜨거운 것이 몸 안으로 파고 들어가며 용틀임을 하자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내의 엉덩이는 빠르게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뼈가 녹아나는 듯한 환희가 몰아치는 그녀의 사지는 사내의 몸뚱이를 칭칭 휘감으며 경련했다. 광란의 폭풍우가 얼마동안이나 휘몰아 쳤을까? 마지막 욕망의 숨결을 토해내던 암중의 사내는 길게 숨을 내쉬더니 창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정력은 여전하구나?" 한 차례 폭풍이 지나 갔는데도 그는 내려 오지 않고 여전히 그녀의 몸 위에서 그녀의 곳곳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녀가 비음으로 대답하며 그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당신께서도 여전하시군요. 나는 하마터면 온몸이 다 부서져 나갈 뻔 했어요." 그녀의 음성은 염정(艶情)스럽기가 짝이 없었다. 얼마 전의 그토록 고결하고 우아했던 자태는 찾아볼 수도 없고 끈적한 욕망이 연신 묻어났다. 사내의 음성은 나이가 상당한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그는 누구일까? 그리고 그녀는? 그들의 어투로 보아 어제 오늘 안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본 궁에 영세무룡으로 짐작되는 애송이가 들어왔어요." "알고 있다." "그의 진정한 정체는 무엇일까요? 소문대로라면 누가 그만한 고수를 키워냈을까요?" "흐흐흐... 글쎄?" "이번 기회에 제가 처지해 버릴까요?" "소문대로라면 너의 무공은 그 놈에 비해 아직 멀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직접 처단하시지요?" "흐흐흐... 네가 시험해 봐서 알겠지만 노부의 몸은 이미 무림 역사상 거의 아무도 이루지 못했던 금강불괴(金剛不壞)가 되었다. 노부가 손 한 번 들면 되겠지만 그 놈은 아직 쓸모가 있다." 여인은 즉시 두려움을 느끼며 기어 들어가는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뭘 시험했단 말이에요?" 암중인은 그녀의 풍만한 젖무덤 위의 꼭지를 비틀며 음랭하게 웃었다. "흐흐흐... 네가 노부의 삼백육십오 개의 모든 혈도에다 명부빙극음강(冥府氷極陰剛)으로 암습을 가한 것을 모르는 줄 알았더냐?" 명부빙극음강은 명부귀요의 독문 무공이다. 태행산에 나타났던 명부귀요가 비록 가짜였지만 그녀가 펼쳤던 명부빙극음강은 얼마나 무서웠던가. 암중인은 음침한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명부귀요(冥府鬼妖). 노부가 네년을 죽이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다. 너는 네가 원영곤음체(元瓔坤陰體)를 고치고 오갑자(五甲子)의 공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 누구 덕인지 항시 잊지 않도록 해라. 흐흐흐-- " 음침한 괴소의 뒤를 이어 명부귀요를 협박하는 암중인의 음색은 사악하기 이를데 없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개의 눈에서는 적색(赤色)의 귀화(鬼火)가 타오르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저는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요." 그녀의 음성은 공포에 질려있었다. 이로 보아, 평소 그녀가 얼마나 이 암중인을 두려워 하는지 알수 있었다.


놀랍게도 여인은 명부귀요였다. 그렇다면 암중인은 그녀의 원영곤음체를 고쳐 주고 그녀의 타고난 성품을 이용해 무림을 피의 서막으로 이끈 희세의 대마두란 말인가? 제 14 장 도화(桃花)는 한 점의 혈홍(血紅)이 되고 암중인은 협박을 하자 공포에 질린 명부귀요를 이번에는 안심을 시켰다. "겁낼 것 없다. 노부가 네 년을 죽이려면 이 따위 쓸데없는 말은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만약에 한 번만 다시 그런 짓을 했다간, 흐흐흐... 알겠지?" 명부귀요는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도대체, 이 희세의 대마두는 누구란 말인가? 그는 명부귀요를 어떻게 다스렸기에 이와 같은 위력이 있단 말인가? "너는 노부의 지시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흐흐흐... 노부가 천하를 손에 쥐게 되면 약속대로 무황비(武皇妃)의 자리는 네 것이다." 그러자 명부귀요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는 듯 농염한 웃음을 터뜨리며 화제를 돌렸다. "호호호... 이번에 들어온 놈들 중에 대어(大魚)는 있나요?" "이번에는 의외로 수확이 좋다. 영세무룡이란 애송이 말고도 귀령검제의 여제자인 맹금봉이란 계집아이도 들어왔지. 그야말로 이번에는 대어(大魚)들이 걸려 들었다." 명부귀요는 엄청나기 이를데 없는 사실을 물었다. "구파일방(九派一幇)을 피로 씻을 날은 언제지요?" 암중인은 의기양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바로 내일이다." "내일이라고요?" 그녀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렇다 내일이다. 흐흐흐... 내일이 지나면 천하는 노부의 것이다." "아이......." 암중인이 어떻게 했는지 명부귀요가 비음을 토해냈다. 동시에 암중인의 몸이 명부귀요의 몸 위에서 또 다시 폭풍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헉헉... 그럼 당신과 내가 출정을 해야 할 텐데 여기는 어떡하 지요. 아흑......." "궁주 계집하고 대환희여보살(大歡喜女菩薩)과 그의 제자들이 있으니 염려 없다. 또한 그놈들은 이미 산공독(散功毒)과 절명독(絶命毒)에 중독되어 있으니 산송장이나 다름없다." 말을 하면서 그는 연신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풍만한 백말을 타고 달렸다. "도대체 아아... 흑흑흑......." 그녀는 희열이 극에 달했는지 급기야는 울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당신이란 아음... 전혀 지칠 줄도 모르는군요? 아아...흑흑흑......." 절정을 몇 번씩이나 계속해서 맛보는 그녀는 너무 좋은지 울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노부보다 더한 색골인 네 년이 앙큼을 떠느냐?" 명부귀요와 암중인의 거친 환락은 점점 더 짙어져 갔다. 암중인이 입에 올린 대환희여보살(大歡喜女菩薩)은 또 누구인가? 율원양 일행 등은 이미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공력이 흩어지는 산공독과 천하에 해약이 없는 극악(極惡)한 절명독에 중독되어 있는 것이었다. 또한, 두 흉악한 일남일녀는 날이 새면 전 구파일방을 피로 씻는다고 말을 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의 장담대로 정녕 무림은 이제 바람 앞의 등불이란 말인가?


도화궁은 혈겁이 벌어질 때 이곳에 있는 율원양과 일행들이 뼈를 묻어야 하는 사지(死地)란 말인가?

율원양은 시녀의 안내를 받으며 도화원으로 갔다. 두 사람은 대청을 가로질러 옆에 나 있는 작은 문을 통해서 뒷뜰 숲 속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그 작은 누각으로 들어가자 그 안에는 한 채의 매우 아름답고 화려한 객청이 있었다. 그 객청 양 쪽으로는 여덟 개의 작은 문이 나 있었다. 율원양은 넌즈시 질문을 던졌다. "이 문 안에는 모두 여인들이 기거하고 있소?" 시녀는 정중한 태도로 대답을 했다. "그렇습니다. 상공. 이 여덟 개의 문마다 방이 있고, 그 방에는 모두 소저 한 분씩이 살고 있지요. 도화원주 휘하의 팔실(八室)이에요." 율원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도화원주는 어디 있소?" "원주님은 각루 위에 계십니다. 위로 올라 가시지요." 각루로 올라가자, 시녀는 어느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그 방 안에서 갑자기 사람의 넋이라도 앗아갈 듯한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누구냐?" 시녀가 공손히 대답했다. "선자께 아룁니다. 소비는 총관의 명을 받들고 손님 한 분을 이곳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다시 그 방문 안에서 은방울과도 같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알겠다. 너는 그만 아래로 물러가거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시녀는 정중히 대답을 하고는 총총히 걸어 내려갔다. 시녀가 물러 갔는데도 문은 열리지 않고 넋을 빼앗아갈 듯한 여인의 목소리만이 다시 들려 왔다. "이렇게 저를 찾아주셔서 반갑습니다. 기왕에 당신이 나의 도화원까지 찾아왔으니, 이곳의 규칙이 어떠한 것인지 잘 알고 있겠지요. 만약 당신이 나의 초식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비록 이곳을 일부러 찾아오셨다고는 하지만 내가 당신을 접대하지 않는 걸 그리 서운케는 생각지 마세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율원양은 솟아오르는 노기를 느꼈다. "일개 기녀 따위가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지 않소? 우선 사람이 찾아왔으면 규칙이 어떤 것이든 먼저 얼굴을 내미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소? 나는 당신같은 건방진 기녀 따위에는 흥미가 없소." 율원양은 냉막하게 말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가 막 층계를 내려갈 무렵 그를 부르는 다급한 도화원주의 음성이 울렸다. "여보세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냉랭한 음성이 다시 들렸다. "멈추세요." 율원양은 걸음을 멈추었다. 문 앞에는 한 떨기 백합과도 같은 아름다운 도화사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한 송이의 양귀비 꽃과 같이 귀여웠고 요염한 가운데 풍요로움까지 함께 하고 있었다. 그녀의 미간에 은은한 노기가 서려있었다. 율원양은 층계 입구에 서서 냉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들의 눈길이 부딪혔다.


도화선자는 율원양을 보자마자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머나, 세상에 저토록 뛰어난 인물이 있었다니?' 충격이 몰아쳐 왔다. 관옥같은 깨끗한 얼굴에 길게 쭉 뻗어 올라간 검날같은 눈썹과 알맞게 솟아오른 우뚝한 콧날에, 굳은 의지가 담겨있는 듯 일자로 닫혀 있는 그의 입술은 실로 천하의 미장부가 아닌가. 특히 그녀의 마음을 단숨에 휘어잡는 것은 그의 두 눈이었다. 천하의 어떤 여인이라도 한 번 보기만 하면 그대로 빠져버릴 듯한 아름다운 두 눈동자였다. '저 분의 눈은 말할 수 없이 신비하구나.' 하얀 문사건을 머리에 두른 채, 깨끗한 기상을 은은히 풍기고 있는 그의 용봉과 같은 자태에 도화사자는 분노는 단숨에 사라지고 완전히 넋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용모에 대한 감탄 때문에 자신의 상한 자존심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었다. 또한 그녀의 용모 역시 자타가 공인하는 절세적인 미모가 아닌가? "당신은 누군데 감히 본 선자를 모욕하지요?" 그녀가 도발적으로 묻자 율원양이 고개를 계단 쪽으로 돌려 버렸다. 그는 아래로 내려가려고 한 발을 층계 밑으로 내려놓았다. "아니!" 그의 행동에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불같은 노기가 치솟으면서도 율원양이 자신을 거들떠 보지도 않자 마음 속이 지극히 착잡해 졌다. "당신은 오늘 밤 저를 가지실 생각이 없나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애원 비슷한 말을 하고 말았다. '지금 단 한 번 보았는데 놓치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라니. 나는 저 분에게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구나.' 율원양이 힐끔 도화선자를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무감각하기 이를데 없었다. 도화선자의 미모는 조금도 그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지 못했다. 율원양은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이 무례했던 점을 깊이 사과한다면 나는 돌아가지 않겠소." 그의 말은 비수가 되어 그녀의 마음을 헤집고 들어왔다. 천하의 도화선자가 일개 무림인에게 사과를 하라니, 그녀로서는 이런 말은 생전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녀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노여움으로 가득 덮혀있었다. 그러나 율원양의 냉막하면서도 무표정한 얼굴을 한참 노려보던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붐어내었다. "할 수 없군요, 소협. 제가 실례한 점을 사과 드리겠어요." 미인은 자고로 자신의 자존심을 꺾어줄 남자를 만나기 위하여 평생을 산다는 말이 있다. '발 밑에 무릎을 꿇고 애원을 하며 사랑을 갈구하던 수많은 청년고수들 따위와 저 분은 너무나 다르구나.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다 뺏긴 내 마음을 그가 채워 주어야 할텐데.' 여인의 자존심 따위를 무참히 꺾어버리는 매력은 율원양의 전신에 철철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의 어떤 표정이라도 여인은 반하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한다. 율원양이 뚜벅뚜벅 그녀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녀의 방문 앞에 섰다. 도화선자의 눈에는 자신의 자존심이 꺾인 것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자존심을 무참히 꺾어버린 율원양을 만나게 된 것에 대한 기쁨이 한데 어우러져 이슬이 맺혔다. 남자에 대하여 늘 느껴오던 정복감이 율원양에 의해서 무참히 깨어진 것이다. 원래, 여인이란 정복 당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동물이 아니었던가? 그녀는 공���히 허리를 굽혔다. "소협의 존성대명(尊姓大名)은 뭐라고 부르시는지요?"


"내 이름은 율원양이라 하오." "율상공께서는 어서 안으로 드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공손한 자세로 한 곁으로 비켜났다. 율원양은 그녀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눈에 화려하게 장식된 규방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방 안은 사람을 유혹하는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망사로 만든 엷은 휘장 뒤로 상아(象牙)로 만든 침상에는 비단 금침이 깔려 있고 꽃을 수놓은 베개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베개는 물론 도화선자와 그녀에 의해 선택된 남자가 함께 벨 베개인 것이다. 율원양의 눈길은 다시 한가운데로 옮겨졌다. 거기에는 꽃이 아로새겨진 의자와 경대, 여인의 옷장 등이 벽을 의지하고 놓여있었다. 창문 앞에는 조각이 뛰어난 팔선자가 놓여 있었다. 방 안 한 구석에는 몇 개의 화분이 있었고 화분마다 만발한 도화가 심어져 있어서 실내의 정취를 더욱 고상하게 만들어 주었다. "앉으세요." 그녀는 창가로 다가서며 조용히 말했다. 창가에 선 그녀의 자태와 방 안의 분위기가 아늑하면서 요염한 조화를 이루었다. 창가에 선 그녀는 그야말로 나무랄 데 없는 절세가인이었다. 율원양은 무표정했으나 마음 속은 이미 그녀의 미모에 상당히 끌리고 있었다. 도화선자에게는 정녕 부인다운 정숙함과 남자를 홀리게 하는 요염한 매력이 있었다. 소녀다운 천진스러운 정감도 함께 지니고 있기에 남자 뿐 아니라 여자라도 누구나 그녀에게 호감을 느낄 것이다. 더구나 세상의 풍진을 다 겪은 여인과도 같이 불과 같은 정열도 언뜻 느껴지기도 했다. 율원양은 지금 그녀를 유심히 살피면서 감탄을 하고 있었다. 도화선자는 지그시 바라보는 율원양의 눈길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당신은 아무 말 않으시고 왜 나를 쳐다 보시기만 하는 건가요?" 율원양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과연 여기 오기 전 듣던 소문 그대로요." 도화선자는 자신에 대해 소문을 들었다는 말을 듣자 두 눈이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듣던 소문대로라니요?" "소저는 과연 절세의 미모를 지니고 있군요." 그녀는 안도의 숨을 암암리에 내쉬었다. 그녀는 살짝 웃으며 겸손을 떨었다. "지나친 칭찬이세요." "어쩐지......." 도화선자는 궁금증에 그의 말을 끊고 재빨리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어쩐지 당신을 찾은 무림인들이 전부 넋을 잃었다 하기에 믿지 않았소." 도화선자는 그의 말이 마음에 들어 더욱 짙은 미소를 띠었다. 그녀는 두 눈을 빛내며 물었다. "당신은요?" 율원양은 빙그레 웃으며 점점 더 그녀의 마음에 드는 대답을 했다. "그렇소. 나도 당신의 미모에 완전히 넋을 잃었소이다." 도화선자는 마음이 매우 뿌듯했으나 짐짓 그 말을 믿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당신은 저를 보면서도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않고 있잖아요."


"그랬던가." 나직이 말한 율원양은 가볍게 웃었다. 그녀도 따라서 남자의 넋을 사로 잡을 듯이 웃었다. 도화선자는 그의 미소를 바라보며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의 웃음은 여자로 하여금 저절로 옷을 벗게 하는 마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 깔고 나직이 말했다. "저는 이미 당신의 여자예요." 율원양은 담담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오늘 밤만이겠지?" 도화선자는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숨을 내쉬었다. "네, 그래요." "그건 당신같은 미인과 하룻 밤을 보내는 남자에게 너무 잔인한 일이오." 그의 말은 옳았다. 어느 남자가 그녀와 같은 미인과 단 하룻밤 인연으로 끝내고 싶어할 것인가. 그런데, 도화선자는 의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오래 가면 무미건조(無味乾燥)해 지는 거예요. 미모의 여자라도 마찬가지예요. 옛말에도 이런 말이 있잖아요.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요. 부인이 있는 남자는 남의 아내가 더 아름다워 보인다고 종종 말하곤 해요. 그건 한 부인과 오래 살다보면 권태를 느끼게 되는 것이므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도 오래 가지 않고 오래가면 자신의 부인이 아름답지 않다고 여겨지는 가 봐요." 그렇다. 아름다움이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으며 오래 가게 되면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권태기이다. 물론 외모에 국한된 얘기지만 말이다. 율원양은 그녀가 제법 인생 맛을 본 여자처럼 말하자 내심 우스으면서도 겉으로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오." 창가에 어느새 서서히 여명이 깃들기 시작했다. "당신은 오늘 밤에 잠을 자지 못했고 이미 날이 밝아오니 제가 당신의 잠자리를 시중 들어 드리겠어요. 이제 저를 당신의 아내라고 생각하세요. 다만 제가 당신에게 한 가지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드릴 수 있기를 바라겠어요." 그녀는 곧 섬섬옥수를 내밀어 율원양의 옷을 벗겨주려고 하였다. "잠깐만."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도화선자는 약간 어리둥절했다. 율원양이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당신에게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소이다." "무슨 말인가요? 물어보세요." "당신은 방금 나더러 당신을 아내로 생각하라고 말했소." 도화선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율원양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다면 부부간에는 비밀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걸 알아야 하오." 도화선자는 율원양의 이 말에 흠칫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그녀가 어찌 이 말 속에 담긴 뜻을 짐작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율원양이 알고 싶어하는 것을 부인이 된 도화선자는 반드시 그에게 알려주어야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도화선자는 스스로 따귀를 때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녀는 문제 없다는 듯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물론이지요." 율원양은 주저없이 묻기 시작했다. "당신의 나이는 얼마나 됐소?" "스물 하나예요." "이곳에 얼마나 있었소?" "사 년 됐어요." 율원양은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지금까지 몇번이나 남의 아내 노릇을 했소?" 도화선자는 말하기가 난처한 듯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율원양은 다그쳤다. "왜 그러시오? 그건 말할 수 없다는 것이오?" 도화선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말할 수 없는 건 아녜요. 저는 당신 말고 네 사람을," 율원양은 그녀의 말을 자르며 더욱 곤란한 질문을 했다. "당신은 혹시 그들 네 명과 모두 정사(情事)를 나누었소?" 순간 도화선자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리고, 심한 모욕감을 느꼈는지 가슴의 기복이 심하게 일어났다. 표정도 냉랭하게 변했다. 그녀는 싸늘하게 율원양을 쏘아보다가 섬섬옥수를 뻗어 그의 웃옷을 벗기려 했다.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순간 율원양은 그녀의 손목을 거머 쥐면서 거칠게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어멋." 그녀는 느닷없는 행동에 깜짝 놀라 비명을 터뜨렸다. 더욱 기경할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품 안으로 끌어 들이자마자 율원양의 오른손은 벌써 도화사자의 옷깃을 풀어 헤치고 있었다. 뭉클하고 그 신비로운 열매가 율원양의 손 끝으로 닿아오는 것이 아닌가. "아... 안돼요." 품 속에 안긴 그녀는 숨이 넘어갈 듯이 간신히 말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왜 이렇게 마음이 착잡해 지는지 몰랐다. 율원양의 손은 점차로 과육(果肉)을 탐하듯 그녀의 전신으로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어느새 율원양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는 두 눈을 감고 그의 애무를 즐겼다. "흐음......." 어느 틈엔가 가냘픈 교성이 그녀의 입술을 연신 타고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한참 애무를 하던 율원양은 더 이상 욕정을 참을 수 없는 듯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는 성큼성큼 큰 걸음걸이로 침상으로 갔다. 그는 도화선자를 거칠게 침상 위에 내던졌다. 침상의 탄력으로 인해 그녀 몸은 약간 퉁겨 올랐다. 도화선자는 거칠은 행동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흥분으로 인하여 얼굴을 도화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이윽고, 율원양은 서서히 그녀의 옷을 벗기기 위해 손을 그녀의 몸에 대었다. 울상이 된 그녀의 얼굴에 조금 있다 벌어질 일에 대한 남 모르는 흥분이 서려 갔다. 율원양은 조금 미숙한 솜씨로 도화사자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옷이 벗겨지고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율원양의 손길에 의하여 도화선자의 어깨가 드러나는 것이었다. 더 벗겨지자 남자를 혼란 속으로 밀어 넣는 분홍빛 젖가리개가 드러난 것이었다. 젖가리개에 가려진 육봉이 드러나자 처녀의 향긋한 육향(肉香)이 율원양의 코를 찔렀다. 육향을 맡자 율원양은 흐흡이 심하게 거칠어지며 자신도 모르게 단전 아래 쪽으로부터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오름을 느낄수 있었다.


도화선자는 수치심인지 흥분 때문인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그녀의 표정을 찬찬히 살피던 율원양의 손은 다시 그녀의 하의를 벗기고 있었다. 잠시 후, 도화선자는 율원양의 손길에 의하여 겉옷이 모조리 벗겨져 버렸다. 그녀는 단지 중요한 부분만을 간신히 가린 속옷만을 걸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녀는 아예 두 눈을 꼭 감은 채 뜨지 않고 있었다. 율원양은 요염한 그녀의 몸매를 취한 눈길로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흘러가듯 매끄러운 배, 그리고 쭉 시원하게 뻗어 내려간 백옥같은 다리는 그야말로 남자를 뇌살시켜 버릴 듯한 각선미였다. 잠시, 그녀의 전신을 훑어보던 율원양은 떨리는 손을 들어 분홍빛 젖가리개를 풀기 시작했다. 순간 진정 만든 조물주마저도 감탄할 아름답기 짝이 없는 그녀의 젖가슴이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아름답다는 표현은 너무나 짧은 표현이리라. 봉긋하게 솟아오른 그 한정없이 부드럽고 탄력이 넘칠 듯한 백옥빛의 젖가슴 뿐만 아니라, 젖가슴의 가운데에는 부끄러운 듯 연분홍빛 수줍은 꼭지가 숨겨진 채 가볍게 떨고 있었다. 율원양의 입에서 절로 감탄성이 터져나왔다. "정말 아름답기 그지 없구나." 율원양이 감탄하는 소리를 들은 도화사자의 전신이 바르르 짧게 경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문득 율원양의 눈에 그녀의 꼭 감은 눈꼬리로 눈물이 맺혀있는 것이 보였다. "어찌 부부지간의 화합(化合)에 눈물을 보이시오." 율원양이 그녀의 귓밥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이어, 그는 자신의 입술을 촉촉히 물기 젖은 그녀의 입술로 가져갔다. 그녀의 입술은 부드럽고 달콤했다. 기나긴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입술을 꼬옥 다물었던 도화선자의 입술이 서서히 무너져가듯 벌려지며 율원양의 혀를 받아 들였다. "으음" 그녀는 서서히 자신의 몸이 달아오르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 손으로 애무받을 때보다 더 깊이 느껴지는 흥분이었다. 깊은 흥분을 느껴가는 도화선자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두 눈에 차츰 투명한 액체가 가득 차 오르는 것이었다. '여자의 육체란 이런 것이란 말인가? 마치 나의 몸은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구나.' 그녀는 어느새 율원양의 분위기 있는 애무에 전신이 불같이 달아 올라 갔다. 율원양의 입술은 그녀의 전신 어느 곳이라도 거침없이 스치며 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깊숙한 곳에 감추어져 있던 애욕은 율원양에 의해서 급기야는 봇물 터지듯 터지고 말았다. "으윽." 그녀는 하복부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율원양의 불기둥이 마침내 그녀의 몸을 점령하고 만 것이다. 몸이 점령당하면 마음도 점령당하는 것이 여인의 인지상정(人之常情). 그녀는 그의 거친 율동에 퍼져오는 흥분을 느끼며 그를 끌어 안아가고 있었다. "이것이 영원하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수없이 그 말만을 되풀이 했다. 피(血). 분명 피였다. 금침 위에 선명히 새겨진 대여섯 방울의 핏자국. 핏자국을 보는 순간 율원양은 대경실색 하였다. "흑흑흑"


그녀는 이불을 푹 뒤집어 쓰고 흐느끼고 있었다. 흐느낌은 애절하기까지 했다. "......!" 율원양은 할 말을 잊고 흐느끼는 그녀를 멍하니 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가녀린 흐느낌과 율원양이 어이없어 지키는 침묵이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음" 침묵을 깼지만 율원양이 고작 낸 소리라고 무거운 신음 소리 뿐이었다. 흐느끼는 소리는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만한 시간 동안 계속 나왔다. 마침내 율원양이 나직이 한숨을 뿜어내었다. "후우-- 나는 당신이 숫처녀인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소." "흑흑흑." 그 말을 듣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흐느끼는 소리를 더욱 크게 내었다. 첫 몸을 주고 나자 일생을 잃어버린 것 같은 허전함은 어디에서 기인되는 것일까. 아니면 이제 완전한 여자가 됐다는 기쁨에서 우는 것일까. 율원양은 그녀가 덮고 있는 이불을 살며시 들어내었다. 가냘프면서 둥그런 어깨가 드러났다. 잠시 내려다 보던 율원양은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너무 낙담하지 마시오." 그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는 내심 말했다. '바보. 난 지금 낙담해서 우는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여자의 심정을 당신이 어찌 알겠어요.' 그녀에게 자신이 첫 남성이라는 점이 율원양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그의 손길에는 어느새 따뜻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했다. "상공은 너무 부담가지실 필요 없어요. 이것은 모두 제게 씌워진 운명의 굴레인걸요. 저는 상공에게 부담을 끼치고 싶지 않아요." "......!" 율원양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녀의 옆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내쪽으로 얼굴을 돌려주구료."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율원양은 그녀의 턱을 가벼이 쥐고는 얼굴을 돌렸다. "이렇게 말이오." "어머."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십일 년 동안 고이 지켜온 순결에는 한 절세 미장부의 육인(肉印)이 내면 깊숙이 찍혀버렸다. 그녀의 얼굴은 아쉬움과 기쁨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율원양은 그녀를 감싸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흠." 격정적으로 안자 그녀는 격한 숨결을 내뿜었다. 그녀는 그가 따뜻하게 대해 주자 차츰 서럽던 마음이 안정되어 갔다. 율원양은 입술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품 속에 안긴 그녀는 입술로 눈물을 닦아 주자 미묘한 간지러움에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그와 살이 맞닿는 곳마다 율원양의 따뜻���이 전해졌다. "당신은 아까도 말했지 않소. 오늘 밤은 나의 잠자리 시중을 들어주겠다고 말이오. 나는 그것을 영원히 연장하고 싶소." "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라 그녀의 눈이 토끼눈만큼 동그랗게 커졌다. 그러나 이내 그 말은 영원한 동반자로 맞아 들이겠다는 말인지라 그녀의 얼굴에 감격이 물밀 듯 솟아올랐다.


기뻤다. 그의 말은 전혀 기대하지 않은 것이어서 그녀는 하늘로 붕 떠올라 가는 극(極)의 환희를 맛보게 되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난 죽어도 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환희는 잠시,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녀의 얼굴이 이내 참담하리만치 어두워졌다. 율원양은 그녀의 얼굴에 닿은 입술이 차가와 짐을 느꼈다. 그녀 자신에게 씌어져 있는 어두운 상념이 그녀의 체온에서 따뜻함을 빼앗아 간 것이다. "상공, 그렇게만 된다면 소녀는 당장 죽어도 원이 없어요. 그러나........" 그러나 하고 말끝을 흐린 그녀는 몇 번이고 무슨 말인 듯 하려다가 두려운 표정으로 천정 어두운 한 곳을 응시하였다. 그곳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율원양이 빙긋 웃었다. "당신은 아무 염려 말고 말하시오. 저 쪽 천정 구석에 장치된 도청기관(盜聽機關)은 이미 내가 진기로써 봉쇄시켜 놓았오." "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버렸다. 그녀는 재빨리 그의 품 속을 빠져나왔다. 어찌나 놀랐는지 그녀의 얼굴은 백납같이 창백해져 버렸다. 율원양이 담담히 말했다. "나는 이미 도화궁 구석구석에 모든 기관장치가 되어 있음을 알고 있소. 또한 당신과 내가 사랑의 묘약을 주고 받을 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기관을 부순 것이오." 도화선자는 놀랐으면서도 한편으로 어찌나 부끄러운지 순결이 한 점 혈홍(血紅)으로 변한 허망함도 잊어 버렸다. 율원양은 담담히 웃으며 질린 그녀를 품 속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지금 당신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은 당신이 지닌 따뜻함이오. 그 따뜻함 외에 지금 나는 아무 것도 필요가 없소." 그녀도 여자였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가져간 율원양의 사랑이 넘치는 몇마디 말에 굳은 몸이 간단히 녹아버렸다. 그녀는 입을 샐쭉 삐죽이면서 코웃음을 쳤다. "흥. 당신은 정말 그럴 듯 하게 말을 하는군요. 그 알량한 말솜씨로 얼마나 많은 여자를 울렸지요?" "알량한 말솜씨?" 율원양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질투에 차서 뽀로통해진 그녀의 얼굴은 너무 예뻤다. 율원양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왜 웃죠?" 그녀가 앙칼지게 물었다. 율원양은 한참을 웃고 난 후에도 웃음이 가라 앉지 않는지 헛기침을 터뜨리며 웃음을 멈추었다. "진정 이해할 수 없는 게 바로 여자인가 보구려." 그렇다. 세상에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단 두 가지 있다. 남자와 여자다. 남자는 언제나 자신만큼은 여자를 가장 잘 이해한다고 떠들곤 한다. 여자도 대개 비슷한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실상은 서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가장 복잡한 인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도화사자는 어렴풋이 그의 말을 알아 들었다.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녀는 그만 몸과 마음을 다 준 후 반 각도 지나지 않아 십 년 이상은 살을 맞대고 살아온 사이처럼 율원양에게 조그만 투정을 부리지 않았던가?


그녀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그의 넓적한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율원양은 신나는 마음으로 그녀를 포근히 감쌌다. "참, 내 정신 좀 보게. 평생 잠자리를 돌보아줄 여자의 이름도 여태 물어 보지 않고 있었다니." 그녀가 모기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은 당신이 그만큼 제게 관심이 없었다는 증거예요." "여보, 당신의 이름은 어떻게 부르오?" "아니, 뭐라고요?" 듣기에 따라 매우 징그럽게도 들릴 수 있는 그의 호칭에 그녀는 깜짝 놀라 반문을 했다. "왜? 듣기가 거북하오?" "아... 아니예요."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율원양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기어드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을 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또 한 번 거센 환희의 물결이 넘나 들었다. "상공,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저는......." "당신은 자신이 도화궁 기녀라는 신분이 마음에 걸린다 이말이오?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그런 것 따위에 연연해 문제 삼을 좀씨는 아니니까." 그녀는 또 놀랐다. "아니 어떻게?" "당신의 표정에 그렇게 쓰여져 있었소. 이미 내 피를 받은 이상 당신은 내 여인이오. 그러니 그 점에 관해서는 더 이상 마음을 쓰지 마시오." 그녀는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마음을 헤아려 주는 율원양에게 거듭 감탄하였다. "당신은 한 번 보기만 하면 모르는 것이 없군요?" "그건 그렇고 당신은 아직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소." "저의 이름은 하난경(何蘭京)이에요." "하난경, 하난경? 매우 좋은 이름이오." 율원양은 두 번이나 속으로 읊조리더니 별안간 그녀의 입술을 점해 버렸다. "흡." 그녀는 숨이 막혔다. 이번의 입맞춤에 느낀 감정은 처음과는 전혀 달랐다. '당신은 입을 열 때마다 나를 감격시키는군요. 당신은 정말 따뜻한 사람이에요.' 입맞춤은 달콤하며 정겨웠다. 도화사자 하난경은 지금이야 말로 사랑을 느낄 수 있었고 진정한 사랑을 줄 수가 있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환희의 눈물이었다. 서서히 율원양은 백마(白馬)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뽀얀 탄력을 지닌 백마는 안락하고 포근한 정감을 아낌없이 주인에게 주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율원양은 한 순간 모든 동작을 중지했다. 찰나 그와 그녀의 얼굴은 더할 수 없는 육체의 환희에 떨어야 했다. 율원양은 하난경의 몸 속 깊숙이 자신의 모든 사랑을 아낌없이 부어주었다. 방 안은 완전히 밝아져 있었다. 율원양은 천천히 그녀의 몸 위에서 떨어져 나갔다. 하난경이 그의 우람한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율대가. 저는 너무 행복해요." 율원양이 빙그레 웃으며 사랑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콧속이 근질거리도록 진한 사랑이 느껴졌다. 그녀에게서 처음 받았던 나쁜 감정은 눈 녹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그녀의 자존심이 쓸모없는 남자들에 의해서 키워졌음을 능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경설운에게서도 발견했던 것이기도 했다. "......!" 그녀는 말없는 율원양을 올려다 보며 눈웃음을 보냈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쓸고 있었다. "당신을 따르는 여인은 많나요?" "많소." 율원양이 짓궂게 대답했다. 그녀의 얼굴에 실망감이 서려갔다. 그녀는 힘없이 물었다. "얼마나요?" 율원양은 매우 잘난 척 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천하의 모든 여인이 전부 나를 사랑하오." 하난경은 입술을 삐죽였다. "피. 이런 바람둥이. 그러지 말고 솔직히 말해보세요. 몇 명이나 되지요?" "당신까지 네 명이오." 하난경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그의 가슴을 마구 때리며 앙탈을 부렸다. "어머, 어쩜. 그렇게 많이요? 당신은 진짜 바람둥이군요." "하하핫-- " 율원양은 그녀의 귀여운 앙탈을 마음껏 받아 들였다. 그녀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질문을 하였다. "그녀들은 모두 예쁘겠지요." "그렇소. 당신만큼 예쁘오." 순간 무엇을 생각했는지 하난경은 얼굴이 약간 붉어지더니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냉수도 차례가 있다고, 그녀들이 먼저 알았다고 저를 용납하지 않으면 어떡하지요." 율원양은 어이 없는 얼굴로 걱정하는 하난경을 보다 코를 비틀어 주었다. "이런 바보. 별걸 다 걱정하는구료." 하난경은 쉽게 걱정을 거두지 못했다. "저한테는 별게 아닌 걸요?" "실상은 아직 당신이 두번째 여인이고 나머지 둘은 아직 내 사람이 아니오. 그러나, 그녀들도 곧 당신과 같은 걱정을 하게 될 것이오." 능청스러운 말을 들은 하난경이 그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어휴, 이런 능청, 당신 정말 이렇게 절 놀리시기예요?" "하하하--" 그는 즐거운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품 안 가득히 끌어 안았다. "그런 얘기는 그만 합시다. 내 몇가지 당신에게 물어볼 말이 있소." 율원양의 목소리에 심각함이 깃들자 일순 그녀의 두 눈이 빛나면서 긴장감이 서렸다. "무엇을요?" 율원양의 장난기 서렸던 얼굴이 일시에 걷혀졌다. 그의 표정을 살피던 하난경은 흠칫 했다. 율원양은 몸을 일으켜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의 품에 더 이상 있지 못하자 그녀의 입에서 아쉬운 한숨이 흘러 나왔다. 율원양과 하난경은 옷을 입고 서로 마주보고 섰다. 율원양은 창가 쪽에 서 있었다. 햇빛을 받으며 우뚝 서 있는 그가 갑자기 거대한 산(山)으로 느껴졌다. 이런 기개와 위엄에 천하의 어떤 여인이 반하지 않으랴? 천하를 호령하고 풍운을 질타하는 듯한 영웅의 패기와 드높은 기상이 물씬물씬 넘치고 있는 정인(情人)이었다.


그녀는 그를 향한 넘치는 사랑과 더불어 경외심(敬畏心)이 절로 우러나고 있었다. "도화궁 궁주의 정체(正體)는 무엇이오?" "도화궁 사람들은 그녀를 구천성모(九天聖母)라 불러요." "구천성모?" 율원양이 말을 받아서 그녀의 이름을 되뇌이자 하난경은 설명을 시작했다. "그래요. 구천성모예요.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출신내력(出身內歷)을 몰라요. 우리들은 그저 궁주를 구천성모라 부르며 자랐을 뿐이에요." 율원양은 깜짝 놀랐다. "자라다니? 그럼 당신은 이곳에서 컸단 말이오?" 그의 물음에 하난경의 얼굴에 한없는 쓸쓸함이 고여갔다. "저는 어려서 고아가 됐는데, 구천성모께서 저를 데려다 길러 주셨어요. 이곳의 모든 여인들의 대다수가 저와 같은 처지예요. 저희들은 구천성모에게 너무나 큰 은혜를 입고 있어요. 그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에요." 그녀의 표정에는 구천성모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빛이 역력했다. 율원양은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였다. "당신을 길러준 구천성모는 아직도 똑같은 인물이오?" "예." 율원양의 검미가 약간 찌푸러졌다. "그런데, 구천성모는 당신과 다른 여인들을 한껏 길러놓고는 어찌 이런 환락궁의 기녀(妓女)를 시킨단 말이오?" 그녀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건 모르겠어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녀 노릇은 우리가 자원을 한 거예요." 율원양이 흠칫 놀랐다. "자원을 하다니?" "아무리 길러 주었다 해도 궁주께서는 기녀 노릇을 원하지 않는 여자들은 절대 시키지 않아요." 율원양은 구천성모가 어떤 인품을 지닌 여자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 대신 우리들은 그녀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스스로 몸을 던진 것이에요." 율원양은 가느다란 신음을 토해내었다. "으음......." 잠시 침묵을 지키던 율원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요 근래에 들어 구천성모에게서 무슨 별다른 변화를 못느꼈소? 이를테면 한 이 년 전부터 말이오?" 하난경이 약간 놀랐다. "변화라니요? 모르겠어요. 변화같은 건 전혀 못 느꼈어요." 율원양이 미간을 깊게 쭈그렸다. "음총관의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지난 이 년 동안 도화궁을 찾은 육백여 명의 무림인들이 실종된 것을 어떻게 풀어야 한단 말인가?" "아니, 실종이라니요?" 하난경은 그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표정으로 놀라 반문했다. "지난 이 년 동안 여기를 찾은 무림인들이 모두 실종됐소." "네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버렸다. 율원양은 도리어 더욱 크게 놀랐다. "그럼, 당신은 전혀 모르고 있었소?" "그런 일이 일어난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어요." 율원양은 그녀가 도화궁의 속사정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음을 직감했다.


"지난 이 년 동안 당신은 구천성모를 몇 번이나 만나 보았소?" "글쎄요. 한 달에 한 번씩 의례적으로 만나는 일 외에는 만난 기억이 없으니까 한 스무 번 만났을까요. 그 외에는 개별적으로 만난 적이 없어요." "의례적으로 만났을 때 정말 별다른 변화를 못느꼈소?" "글쎄요. 전에 보다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가 좀 냉랭해진 것이 변화라면 변화랄까? 그점 외에는 그 분에게서 아무런 변화도 못느꼈어요." 율원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도화원주의 자리에까지 있는 난경이 이 정도라면 궁주를 직접 만나기 전에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가 없겠군. 오늘 밤에 직접 궁주를 찾아 보아야겠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침중한 침묵이 흘렀다. "구천성모는 이 도화궁을 언제 설립했소?" "글쎄요. 제가 알기론 이십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구천성모가 도화궁을 설립한 목적을 알고 있소?" "들어오셨을 때, 총관이 이유를 말해주지 않던가요?" "진정 그 이유 뿐이오?" "제가 아는 건 그것 뿐이에요." "으음." 거의 안 들으니만 못한 대답에 율원양은 굵은 탄식을 뿜어 내었다. "......!" 하난경은 어색한 표정으로 묵묵히 율원양을 쳐다보았다. 율원양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도화궁은 이상하리만치 전체가 온통 위험한 기관장치와 진식으로 뒤덮여 있다. 또한 하난경은 자신의 몸에 만성독약(慢性毒藥)이 잠재되어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 모든 것이 신비 속에 감추어져 있다.' 하난경은 그의 무거운 얼굴을 근심 서린 표정으로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가 지금과 같은 표정을 띄우고 있을 때는 아무런 말도 꺼내서는 안된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율원양은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껴안고 그녀의 입술을 덮어버렸다. "웁." 그녀는 갑작스런 그의 태도에 매우 의아했으나 그의 혀를 받아 들였다. 율원양은 일부러 소리를 내가면서 그녀의 입술을 탐닉했다. 잠시 후 율원양은 애원이 가득 찬 큰소리로 떠들었다. "도화사자, 나는 이제 내일이면 이 도화궁을 떠나게 되오. 당신을 두고 떠날 걸 생각하니 내 마음은 지금부터 미쳐 터져 버릴 것만 같소." 그는 전혀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면서 문가를 쳐다보았다. 영리한 그녀는 곧 정랑(情郞)의 뜻을 알아챘다. 즉시 그녀는 얼굴을 가득 슬픈빛을 띄우고 울먹이는 목소리를 능청스럽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아...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율상공. 나는 이제 어디 가서 율상공같은 헌헌장부를 만나야 한단 말인가요? 내일이면 이별이라니 정말 아쉽군요. 율상공, 저도 당신을 따라 이 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궁주님이 제게 베푼 은혜가 너무 커 이 도화궁을 떠날 수가 없군요. 용서 하세요, 흐흐흑흑흑--" 그녀는 끝에 가서는 울음소리까지 냈다. 어찌나 실감나게 능���을 떠는지 정말로 우는 것 같았다. 율원양이 문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장단을 맞추었다. "당신이 궁주에 대한 생각이 그리 깊다니 당신은 정말 좋은 여자이구료. 이 점만 보아도 당신이 얼마나


좋은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소." "흑흑흑-- 상공." 그녀는 어깨까지 들먹였다. 잠시 후 율원양은 그녀를 안은 팔을 풀면서 말했다. "방 안을 엿보던 자는 이제 갔소. 도청 장치로 방 안의 정경을 엿들을 수 없으니까 직접 사람을 보내 우리의 동정을 엿보려 했군." 그녀는 비록 연극이었지만 율원양의 품 속에서 벗어나자 매우 아쉬었다. "저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밖의 기척을 알다니 율가가의 무공은 매우 놀랍군요. 하마트면 큰일날 뻔 했어요." 안도의 숨을 내쉬던 하난경은 무엇이 생각이 난 듯 빠른 어조로 말했다. "참, 오늘이 지나면 내일은 궁주가 율가가와 일행을 부를 것이에요." "궁주가 부르다니?" "궁주는 늘 초청 인물들을 불러 같이 식사하곤 했어요." 그녀는 무엇이 생각이 났는지 손벽을 쳤다. "참 생각난 게 한 가지 있어요. 율가가가 말한 그 변화 말예요." 순간 율원양의 두 눈이 번쩍 빛이 났다. "어떤 변화요?" "그러니까 궁주가 궁으로 온 무림인들을 만나보기 시작한 것이 꼭 이 년이 됐어요." "흐음, 그렇소?" 율원양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지난 이 년 동안 실종되었던 무림인들은 궁주에게 끌려간 후 실종된 것이군? 오늘 밤에 필히 궁 안을 돌아보아야 겠군." 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하난경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율원양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난경. 당신은 지금 만성독약에 중독되어 있는 사실을 알고 있소?" "아니 뭐라고요?"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버렸다. "내가 만성독약에 중독되었다고요?" 율원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을 했다. "그렇소. 당신은 만성독약에 중독되어 있소. 내가 짐작하는 바로는 약 이 년 전부터 중독된 것 같소." 그녀는 대경실색했다. 안색이 어찌나 창백한지 죽은 지 사흘쯤 되는 시신의 얼굴처럼 푸르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요." 그녀는 강하게 부정했다. 율원양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틀림없소. 당신 자신은 모르겠지만 당신 미간에는 극히 희미한 푸른 기운이 서려 있오. 그것은 너무도 희미하여 웬만한 사람은 발견할 수조차 없었소." 하난경은 급히 거울로 가 세세히 미간을 살폈다. 과연 희미한 한 줄기 푸른 줄을 간신히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이그러졌다.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요?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어떻게 만성독약에 중독되었을까요?" "궁 안의 누군가가 아마 음식에다 독약을 살포했을 것이오. 만성독약은 무색무미무취(無色無味無臭)하기 때문에 중독된 사람은 독에 대가(大家)가 아니고는 전혀 알 수가 없소. 아마 내 짐작으로는 당신 뿐만이 아닐 것이오. 당신과 같은 처지의 여자들은 모두 중독되었을 것이오." 그녀는 너무 놀라 할 말을 잊은 채 멍하니 율원양만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두려움이 밀려와 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떨기 시작했다. "만성독약은 해약도 없다면서요?"


율원양이 빙그레 웃으면서 그녀를 끌어 안았다. "하하하, 당신은 너무 겁낼 것 없소. 당신의 만성독약은 이미 해독되었을 테니까. 나는 벌써 당신에게 해약을 주입했소." 그런 사실이 없는지라 그녀는 깜짝 놀랐다. "아니 언제요?" "나는 만독불가침(萬毒不可侵)의 몸이오. 아까 당신이 나의 몸을 받아들였을 때, 나는 모든 사랑의 결정체를 당신 몸 안에 주입시키지 않았소. 그것이 바로 해독제요. 하하하-- " 하난경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그녀는 얼굴이 너무 새빨개져서 마치 불에 익은 듯 했다. 그녀는 그의 가슴을 마구 때리며 투정을 부렸다. "몰라요. 몰라." "하하하." 제 15 장 여인사태(女人沙汰) 도화궁에도 어김없이 밤은 찾아 왔다. 사경쯤 되었을까. 한 줄기 흑영이 도화궁 후원(後院)을 향하여 빛살처럼 날아갔다. 후원은 사위를 에워싸고 있는 절벽 맨 끝에 자리잡고 있었다. 흑영은 후원 쪽으로 몸을 날리면서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정말 도화궁은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철옹성(鐵甕城)같은 위세의 경비를 펼쳐 놓았구나.' 그렇다. 도화궁은 한 걸음 정도 옮기는 곳마다 경비무인들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침입자가 있을 시를 대비하여 곳곳에 천라지망(天羅地網)을 펼쳐 놓았기 때문에 아무리 경공이 초절하다 할 지라도 어느 한 곳에 걸리게끔 기관이 수없이 깔려 있었다. 흑영, 즉 도화궁을 염탐하기 위해서 몸을 후원으로 날린 율원양은 궁의 엄밀한 경비망에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새도 빠져 나가기 힘들 겠군.' 그러나 일신에 지닌 공력이 이미 세월을 초월한 율원양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했다. 세월을 초월한 공력에 의해서 그의 눈은 이미 신안(神眼)이 되어 있었다. 그의 눈은 이미 모든 사물을 한 번 보면 파악할 수 있었던 신안천기자(神眼天奇子)의 것과 같은 경지에 놓여 있었다. 무공을 꿰뚫는 능력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후원에 이르도록 삼백여 장의 거리를 날으면서 무려 백 명에 달하는 경비무인들의 마혈(麻穴)을 제압했다. 물론,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잠이 들었을 뿐이었다. 율원양은 후원으로 들어서는 계곡 입구에 가볍게 도달하였다. 순간, 후원 깊숙이 어디선가 아름다운 음률이 아련하게 울려퍼졌다. 율원양은 음률을 들으면서 잠시 사위를 돌아보았다. 전면에 가로막힌 두 절벽은 빙벽처럼 매끄러운 단애였다. 월광(月光)에 웅장한 단애를 드러낸 절벽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온통 녹음(綠陰) 방초(芳草)로 인해서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그야말로, 청송녹죽(靑松綠竹)과 천자만홍(千紫萬紅)의 기화이초(奇花異草)가 절경(絶景)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데다가 은은하게 도화(桃花)의 향기(香氣)마저 풍기고 있어 세속(世俗)의 풍치(風致)가 아니라 선계의 무릉도원 같았다.


음률은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계속하여 들려왔다. 율원양은 검미를 꿈틀거리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만월이 떠 있는 밤하늘, 실바람을 타고 아련히 울려 퍼지는 음률은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그야말로 구곡간장을 애달프게 했다. 율원양은 여인의 애틋한 심정(心情)을 하소연하듯 구슬프게 들려오는 음률 가락에 감염(感染)이라도 되었는지 꿈쩍도 안했다. 음률의 본령(本領)은 본래 사람의 감정과 같은 것이다. 음부(音符)는 서서히 천태백양(千態百樣)을 이루어 한없이 변해갔다. 그러더니, 차츰 희노무상(喜怒無常)의 가락으로 변해서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게 했다. 임종을 맞은 노인의 외롭고 쓸쓸한 심정을 달래 주기라도 하듯이 음률은 몹시도 처량하고 애절했다. 율원양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단장인(斷腸引)이로구나." 음률의 곡목을 알아내 율원양은 나직이 혀를 찼다. "단장인을 이토록 심오하게 불 수 있는 인물이라면 일생이 한(恨)으로 얼룩져 있는 인물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만약 이 단장인을 율원양이 아닌 다른 인물이 들었다면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마음이 다정다감(多情多感)한 인물이라면 아마 앞가슴의 옷섶이 홍건히 젖도록 울 것이다. 만약, 이 음률에 도취된다면 그 사람은 선 채로 눈물을 흘리다가 진기가 고갈되어 서서히 죽어 가게 된다. 그것도 피골이 상접된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말이다. 그러나 율원양은 예외다. 그는 뜻만으로도 자신의 심령(心靈)상의 모든 감정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음률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 공력을 운집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는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음률을 켜는 사람은 공력이 삼갑자 이상이 되겠구나.' 한동안 희노무상의 음률이 밤하늘을 애심에 젖게 하더니, 이제는 또 다시 가락이 변했다. 허공에는 운무가 자욱하게 깔린 듯 포근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변했다. 그야말로 심신이 솜처럼 부드러워지는 감촉을 느끼면서 허공에 두둥실 떠 있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머리도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성심인(聖心引)?' 율원양은 심중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해 내심 곡목을 부르짖었다. 깊은 잠재력을 함유하고 있는 성심인은 계속해서 아늑하게 울려퍼졌다. 삼라만상을 고요하고 편안하게 잠들게 하는 음률이었다. 이렇게 얼마나 흘러갔을까? "음률은 후원의 끝에서 들려오는구나." 음률이 사라지면서 율원양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정말 의문점이 많은 곳이군." 그는 이미 음률의 출처를 파악하고 있었다. 음률은 약 오백 장 정도 되는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정도의 거리를 음률로 덮을 수 있다는 것은 음률을 탄주한 사람의 공력이 어느 정도 뛰어난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탄주한 인물이 만약, 율원양이 음률이 흘러나온 근원을 파악했다는 것을 알면 기절초풍할 것이다. 왜냐하면 음률은 실바람을 타고 밤하늘에 울려 퍼졌기 때문에 도저히 어디서 들려오는 것인지 출처를 알 수가 없다. 감히, 음률의 방향을 알아 내려고 하다가는 저절로 감염이 된다.


이것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운기행공(運氣行功)으로 무아(無我)의 경지에 몰입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환상을 찾아서 주위를 헤매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은연중에 진기(眞氣)가 고갈되어 기력(氣力)이 쇠퇴해져서 자칫하다가는 목숨을 잃게 되기 십상이다. 율원양은 음률이 사라지자 고개를 갸우뚱했다. "심오(深奧)한 선운륜음(仙韻綸音)으로 서정이정(敍情怡情)을 연주한 것이로구나. 누굴까? 누가 이렇게 심오한 취기성음(聚氣成音)을 연주한 것일까? 도화궁주인 구천성모? 무림에서 금음(琴音)을 선음(仙音)의 경지까지 연성한 사람은 삼백 년 이래 사부님과 동일 시대의 세외음성(世外音聖) 임천뢰(林天雷)뿐인데."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면서 서서히 계곡 입구로 걸어 갔다. 푸르릉. 한 차례 부드러운 미풍이 불자 도화의 향기가 더욱 짙게 풍기며 아련하게 죽뢰소리가 들려왔다. 율원양은 도화의 향기를 피부 깊숙이 마시며 달빛에 드러난 주위의 정경을 세세히 살펴 보았다. "청송녹죽과 기화이초는 모두 기문진식(奇門陳式)으로 심어져 있구나. 쳇, 이따위 이형미종섭혼진(移形迷踪攝魂陳)으로 누구를 막겠다는 건지. 다른 인물이라면 몰라도 나에게야 애들 장난이지." 이형미종섭혼진은 사 년 전, 나부산에서 얻었던 무외총감 만진편(萬陳編)에 기재된 바에 의하면 지극히 무서운 절진(絶陳)이라고 되어 있었다. 제 아무리 심후한 무공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일단 진세임을 모르고 걸려들면 그 길로 혼백(魂魄)이 비산(飛散)하여 절명(絶命)한다고 한다. 율원양은 이형미종섭혼진의 변화를 능히 알고 있는 지라 이만한 진은 눈에 차지도 않았다. 그는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최악의 사진(死陳)인 파라만겁진(波羅萬劫陳)에서도 살아난 몸이었다. "실상(實像)이 허상(虛像)이고 허상이 실상이라. 허허실실(虛虛實實)은 결코 내 눈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나직이 뇌까리더니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신형은 구름이 떠 가고 물이 흐르듯 경쾌하게 청송노죽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율원양은 이내 진세를 벗어났다. 이것으로 보아 어떤 인물에게도 경심동백(驚心動魄)하고 초혼절륜(招魂絶倫)한 진법도 그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진세를 벗어나자 주위는 온통 계수나무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도화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 바로 여기였다. 도화림 중심으로는 안 쪽으로 길이 나 있었다. 율원양은 도화림을 주시하더니 천천히 걸어갔다. '흠, 숨어 있는 쥐새끼가 꽤 여럿이 되는군.' 천공에 떠 있는 월광만이 사위를 비추고 있을 뿐 주위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율원양이 울창한 도화림 사이로 뚫려진 길로 들어섰을 때, 스윽. 갑자기 예리한 검기(劍氣)가 공기를 가르며 전광처럼 율원양의 목줄기로 뻗어왔다. 그는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팍. 암습한 검은 정확히 그의 목줄기를 쳤다. 순간 좌측 도화림으로 한 줄기 백광(白光)이 섬전처럼 날아갔다. "윽." 묵직한 신음이 터짐과 동시에 쿵 하고 한 인물이 지면으로 떨어졌다. 어느새 율원양은 암중으로 기습한 인물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정녕 귀신같은 신법이었다. 그에게 느닷없이 출수한 인물은 반토막난 장검(長劍)을 지닌 흑삼인(黑衫人)이었다. 그의 검은 율원양의 목을 가르는 순간, 부러진 것이었다. 만독수화도검불가침(萬毒水火刀劍不可侵)의 신체인지라 청강검(靑剛劍) 따위로는 도저히 그를 상하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흑삼인은 마혈이 제압되었는지 지면에 쓰러진 채 움쩍도 못했다. 그의 눈에는 경악, 회의, 공포 등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서려있었다. 냉막한 얼굴로 내려다 보는 율원양의 모습은 흑삼인에게는 갖은 공포를 다 가져다 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분명히 율원양에게 번개같이 제압당한 흑삼인이 신음을 터뜨렸는데도 주위는 여전히 조용했다. 다만 공기가 팽팽해진 채 죽음같은 긴장이 감돌았다. 율원양은 도화림을 날카롭게 주시하더니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십여 보를 걸었을까? 사사삭. 일순간, 검광(劍光)이 번뜩이더니 그의 좌우에서 살벌한 검날이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그 빠르기란 빛과 같았다. 이러한 암습은 좀처럼 피하기가 어려웠다. 그야말로 명창역타(名槍易陀), 암전난방(暗箭난難防)이었다. 밝은 곳에서 찔러오는 창은 피할 수가 있지만 어두운 곳에서 날아드는 화살은 피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지금이 바로 암전난방(暗箭難防)이었다. 하나 영세무룡(永世武龍) 율원양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의 두 손은 찰나적으로 뻗어 나갔다. 일순 두 줄기 음산한 백광이 도저히 육안으로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쾌속하게 좌우로 뻗어 나갔다. 퍽. 퍽. "으윽." "으으윽." 가죽북 때리는 듯한 소리에 이어 두 마디 답답한 신음이 터졌다. 쿵. 쿠-웅. 역시, 두 흑삼인이 지면에 나뒹굴었다. 율원양은 두 흑삼인은 아랑곳 하지 않고 도화림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주위에는 살벌한 공기가 잠재할 뿐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이렇게 얼마나 들어갔을까? 율원양의 사방에서 네 명의 흑삼인이 소리없이 다가왔다. 하나같이 섬전같은 광망을 폭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서운 고수(高手)들임이 틀림없었다. 율원양은 담담한 표정으로 네 명의 흑삼인을 주시했다. 흑삼인들은 감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냉막했다. 그들은 매우 괴이한 형태로 장검을 들고 있었다. 검건(劍乾), 검곤(劍坤), 검종(劍縱), 검횡(劍橫)으로 장검을 들고 있었다. 율원양은 나직이 웃었다. "사상수라검진(四象修羅劍陳)이로군." 흑삼인들은 무표정하게 아무런 말도 없이 율원양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이들의 검신(劍身)은 살벌한 살광을 발하고 있는데 살기가 줄기줄기 뻗치고 있었다. 잠시 질식할 것 같은 순간이 흘렀다. 율원양은 이들의 기도에서 검공(劍功)이 절정에 달했음을 알았다. 무림의 절정고수라 해도 이들의


사상수라검진을 십초(十招)도 상대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만큼 이들이 이룬 검진은 무서운 것이었다. 만약, 율원양이 아닌 다른 인물이었다면 혼백이 반쯤 달아났을 것이다. 진에 형성된 무형(無形)의 살기(殺氣)는 그만큼 무서웠다. 율원양은 이들이 벙어리인 양 한 마디 말도 없이 사상수라검진을 이루고 석상처럼 서 있자 냉막하고 살기찬 살광(殺光)을 쏟아냈다. 순간, "차앗." 흑삼인들의 입에서 동시에 기합이 터져 나왔다. 도화림을 뒤흔드는 쩌렁한 기합이 사위를 진동시켰다. 때를 같이하여 제각기 방향이 다른 곳에서 검날이 쾌속무비하게 율원양의 현기대혈(玄機大穴)을 노리고 날아 들었다. 너무도 쾌첩한 천라지망의 검초(劍招)였다. "반야금강지(般若金剛指)!" 율원양의 냉랭한 외침이 터지며 박심정대(博心正大)한 백광이 허공을 갈랐다. 파-- 파-- 팍. 네 줄기의 백광이 둔탁한 물체를 꿰뚫는 소리가 들렸다. "으-- 억." "커억. 크-- 어-- 억." 흑삼인들은 괴로운 비명과 함께 모두 일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보라. 그들이 들고 있는 장검들은 정확히 반 토막으로 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흑삼인들은 반야금강지에 의해서 장심(掌心)이 파열되었는지 핏물이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검자루를 움켜잡고 있었다. "흐흐흣." 율원양은 싸늘한 냉소를 터뜨리며 손가락을 가볍게 퉁겼다. 퍼- 퍽. 퍽. 퍽. 그러자 흑삼인들은 턱이 박살이 나며 썩은 고목이 쓰러지듯 맥없이 고꾸라졌다. 이들도 무림에 나가면 내노라 하는 절정고수였지만 영세무룡 율원양과 비교한다면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났다. 그는 뒤도 돌아다 보지 않고 가볍게 신형을 날렸다. 이윽고 율원양은 도화궁을 지나서 청석(靑石)이 깔려있는 정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원은 아담한 연못과 함께 지극히 청결했다. 연못의 수면은 수정알처럼 맑고 투명하여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신에 평온함을 주었다. 그리고 연못 속에서 청아함을 자아내며 아름답게 피어있는 연꽃은 십분 아치(雅致)가 그득했다. 연못 중심에는 수헌(水軒)이 자리 잡고 있는데 한쪽으로는 은하수같은 운교(雲橋)가 보기 좋게 놓여 있었다. 운교를 지나게 되면 화려하고 섬세한 단청(丹靑)이 수려하게 뻗어 내린 청루(靑樓)가 있었다. 청루에 걸려있는 편액에는 봉무(鳳舞)하는 필체로 낙하루(落霞樓)라고 쓰여 있었다. 편액은 만월의 은광을 받아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곳 역시 고요한 정적에 휩싸인 채 조용하기 그지 없었다. 분명히 도화림에서 외침이 울려퍼진 소리를 들었을 텐데 왜 이렇게 조용한 것일까? 율원양은 낙하루를 주시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곳은 여인이 거처하는 구중심처가 분명하구나. 그런데 어찌 아무도 없을까?" 그는 날렵하게 낙하루를 지나쳤다.


백 장 밖에 또 한 채의 누각이 있었다. 그 누각은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율원양은 가볍게 몸을 솟구쳤다. 휙-그는 가공하게도 가벼운 몸짓으로 백 장에 달하는 거리를 단숨에 날았다. 한 번도 지상에 발을 내리지 않았다. 그의 누가 경공을 보았다면 그 사람은 필시 그를 야조(夜鳥)로 생각했을 것이다. 누각은 이층으로 되어 있었다. 누각에는 향기로운 술과 향미의 음식 냄새가 풍겼다. 그뿐 아니라, 남녀의 음탕한 웃음까지도 섞여 들려왔다. 율원양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남녀 합해서 한 삼십 명은 되겠군." 율원양은 서서히 누각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율원양은 마치 누각에 있는 인물들이 함정을 설치해 놓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나 한 듯 매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누각 위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율원양은 막 문 입구 쪽으로 다가가다가 그만 안색이 확 변하며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아니?" 그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세상에 이럴 수도 있단 말인가? 누각 안에는 십여 명의 여자들과 이십 명 가까이 되는 남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여자들은 그 어떤 의자라 하더라도 앉을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앉을 수 있다 하더라도 십중팔구는 부서지고 말 것이다. 여자들은 너무나 비대하고 뚱뚱했다. 율원양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처럼 비대한 여자들을 많이 보기는 처음이었다. 율원양이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보고 대했던 뚱뚱한 여인들을 다 합쳐도 여기 모인 여인의 반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누각은 비록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리 작은 편도 아니었다. 그래서 율원양같은 사람은 일이 백 명은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누각 위에 있는 사람들은 단지 삼십여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온 누각은 꽉 들어차 있었고 율원양이 들어서기조차 불편할 정도였다. 누각 안은 본래 얇은 나무로 칸을 만들어 몇 개의 방을 형성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칸들이 모두 치워졌고 사방은 완전히 터졌다. 그리고 크고 작은 상들을 한데 모아 두었는데 그 상 위에는 각양각색의 음식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러나 이 여자들은 결코 돼지라 부를 수도 없었다. 이 세상에는 이 여자들 만큼 살찐 돼지도 없을 뿐더러 설사 있다고 한들 이들만큼 많이 먹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율원양이 막 입구에 도착했을 때 마침 잘 튀겨진 닭 열 마리가 커다란 쟁반에 받쳐서 올라 오고 있었다. 십여 명의 여인들은 닭튀김이 상 위에 내려지기도 전에 일제히 손을 뻗어 한 마리씩 집고는 뜯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모습은 필설(筆舌)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들이 닭을 먹어 치우는 속도에서 나는 그 씹는 소리는 도저히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고 소름이 끼치는 것이었다. 만약 청초한 처녀가 이것을 보고 씹는 소리를 들었다면 평생 먹어야 산다는 점을 잊고 악몽에 시달렸을 것이다.


율원양은 눈 앞이 아찔해 지는 것을 느꼈다. 음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상 옆에는 대여섯 채의 이불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 여자들 중 가장 비대한 여인이 뚱뚱한 몸매를 과시하듯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그 주위에는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호위를 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금방 눈에 띄는 선명한 붉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얼굴도 매우 준수할 뿐 아니라 나이도 젊었다. 남자들의 몸집은 작거나 말랐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가운데 앉아 있는 그 비대한 여인에 비교하면 마치 갓 태어난 강아지 새끼들 같았다. 이것은 완전히 공포스러울 만큼 비대한 여인이었다. 여인은 몸집이 뚱뚱할 뿐 아니라 귀 또한 말할 수 없이 컸고 두 팔은 코끼리 다리보다 더 굵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신고 있는 신발 역시 최소한 일곱 자의 가죽이 소요되었을 것 같았다. 율원양은 지금 자기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다른 세계에 와 있는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대여섯 명의 남자들은 그녀를 위에 안마를 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들 중에는 얼굴에 분까지 바른 자들도 있었다. 어떤 남자는 다리를, 어떤 남자는 머리와 어깨와 등을 안마했고 또 다른 남자는 시원하게 부채를 해주는 등 술잔을 기울여주며 제각기 맡은 부위를 충실히 주무르며 두드리고 있었다. 또한 얼굴에 분을 바른 두 명의 남자는 각기 그들의 머리통 보다 두 배나 더 큰 그녀의 젖을 부지런히 주무르고 있었다. 그런데다 더욱 가관인 것은 뚱뚱한 여자는 다리를 벌리고 있는데도 두 허벅지는 맞닿아 있었다. 한 남자가 그녀의 허벅지에 작은 원숭이처럼 구부리고 앉아 열심히 그녀의 치부를 애무하고 있었다. 이 모든 광경을 보며 율원양은 저녁을 안먹고 온 것을 천만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먹었던 음식을 다 토해냈을 것이다. 율원양은 이처럼 구역질이 나는 광경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율원양은 속이 뒤집힐 지경이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오히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순간 왁자지껄하던 모든 소리가 일시에 멈추었고 여인의 모든 시선이 율원양에게로 집중되었다. 구역질 나는 십여 명이나 되는 여인들의 시선을 한꺼번에 받는다는 것은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은 못되었다. 율원양은 다시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특히 어떤 여자들은 율원양을 마치 기름에 튀긴 통닭처럼 착각을 한 듯, 한꺼번에 집중되는 그 눈초리는 마치 그를 잡아먹을 듯했다. 확실히 돼지들의 식욕을 돋우어주는 먹이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율원양의 냉막한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가장 비대한 여인은 율원양을 본 순간 안색이 싹 변했다. 그녀는 마치 한눈에 반한 듯 눈을 반쯤 내리감기까지 했다. 여인의 눈은 그렇게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얼굴에 온통 비계살이 끼어 마치 눈을 감고 있는 듯했다. 목줄기 역시 겹겹이 살이 붙어 층을 이루고 있어 마치 어머니 젖을 빨고 있는 우량아와 같았다. 거대한 산덩이라고 부르면 너무 과장이 심할까. 비스듬히 앉아있는 모습을 약간 과장을 한다면 진정 산더미가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은 완전히 고기덩어리로 이루어진 산이었다. 순간 비대한 여인의 두 눈이 갑자기 밝아졌다. "후원으로 들어선 쥐새끼가 이토록 잘 생긴 중년인일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군." 의외로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가늘었다.


그렇다. 율원양은 천변만환술(千變萬幻術)로 자신의 모습을 청수한 중년인의 모습으로 역용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안색을 더욱 냉막하게 굳히며 깊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너처럼 커다란 인육돈(人肉豚)을 보았지만 너는 어디서 나같이 잘 생긴 쥐새끼를 보았느냐?" 율원양의 반문에 그녀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눈을 크게 뜨느라 그녀의 살들이 파도처럼 물결쳤다. "오호호호--" 그녀는 갑자기 소리내어 크게 웃기 시작했다. 우르릉-- 쿵. 쿵. 갑자기 이상한 굉음이 울렸다. 그것은 그녀가 웃을 때, 누각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녀의 전신의 비계살이 흔들리면서 커다란 파도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녀 뿐만 아니라 누각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녀의 몸이 흔들리면서 일어나는 진동에 의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등을 안마하고 있던 남자는 그녀의 살이 흔들리면서 일어나는 반탄력에 의해 뒤로 발랑 나자빠졌다. 또한 상 위에 올려져 있던 접시와 술잔이 요란하게 흔들리면서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과 같았다. 다행히 모든 사람들의 넋을 뺏는 그녀의 웃음은 곧 멎었다. "지난 삼십 년 동안 본 대환희여보살 앞에서 이만한 호기(豪氣)를 부리는 인물을 보지 못했었지. 너의 담량은 보기보다 매우 크구나." 그녀는 말을 마치고 잠시 율원양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제깐에는 매우 아늑한 정감이 담긴 눈길을 보내는 것 같았다. "너는 본 여보살이 권하는 술을 한 잔 받아라." 대환희여보살은 탐스럽게 율원양의 전신을 훑고 나서, 자신의 허벅지에 붙어 음부를 애무하고 있는 사내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너는 저 분에게 술을 한 잔 그득 부어 갖다드려라." 이 남자는 자색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소매 언저리에는 화려한 수가 놓여져 있었다. 몸도 그다지 작지 않았다. 그런데, 몸을 움츠리고 있어 더욱 작아보였고 얼굴에는 짙은 분을 바르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 윤곽이 선명함으로 보아 옛날에는 매우 영준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옛날에 이 남자를 알았던 사람이 지금에 와서 본다면 정말 알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 남자의 행동으로 보아 보통 무예를 지닌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남자는 두 손으로 금잔을 돌려 율원양의 앞으로 내밀며 웃음띤 어조로 말했다. "자, 드시오." 율원양은 찌푸린 미간을 펼 수 없었다. 이런 인물을 그는 도대체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할 수도 없었다. 율원양은 여색에 빠져 비참한 꼴이 되어 있으면서도 웃을 수 있는 그 남자의 가련함에 동정조차도 느낄 수가 없었다. "너는 무엇 때문에 숨을 쉬고 사느냐?" 순간 그 남자는 술잔을 들고 있던 손을 가늘게 떨었다. 그의 얼굴에는 죽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이 아로 새겨졌다.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율원양은 더욱 냉랭히 말했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이런 꼴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뜻이 맞지 않으면 차라리 자결하시오. 내가 보기에는 당신은 결코 비굴을 감당할 수 있는 위인이 아닌 것 같소. 남자라면 자신을 깨끗이 간수해야


하는 것을 잊으면 안되오. 더욱이 당신같은 사람 말이오." 그의 말은 너무나 냉혹했다. 남자가 들고 있던 술잔이 떨어지며 술이 사방으로 튀겼다. 그의 몸은 학질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율원양은 자신이 왜 그러한 말을 했는지 잘 몰랐다. 하나 지금 한 말만이 이런 비참한 상황에 있는 눈 앞의 사내를 구원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죽음. 그렇다. 죽음만이 그를 이런 비굴한 삶에서 구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대환희여보살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지금 그녀의 관심은 분을 바른 사내가 죽느냐, 아니면 계속 비굴하게 자신에게 봉사하며 삶을 유지하느냐에 있는 것 같았다. 대환희여보살(大歡喜女菩薩)이라 불리우는 이 여인은 서역의 인물로서 보제살마궁(菩提殺魔宮)의 궁주였다. 그녀는 살아있는 생물(生物)이라면 무엇이든지 먹는 대단한 식욕을 지닌 인물이었다. 또한 재물에 대한 탐욕도 식욕 못지 않은 것으로 보물이라면 눈을 까뒤집고 덤벼드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무공은 초절하기 이를데 없는 것으로 서역은 물론이고 중원에서도 그녀와 대적할 인물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런 대환희여보살의 심성(心性)은 어떠할까? 서역 사람들은 그녀를 대환희흉마살(大歡喜凶魔殺)이라 불렀다. 그녀는 잔독무정(殘毒無情)하기 이를데 없어 흉악한 짓으로 서역의 재물을 거의 한손에 쥐고 있는 여인이었다. 퍽. 호박 깨지는 것 같은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분을 바른 남자는 몸을 수없이 떨다가 한없이 괴로운 표정으로 자신의 천령개를 쳐서 자결을 하였다. 대환희여보살의 전신을 주무르고 있으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 보던 남자들의 안색은 하나같이 흙빛이 되었다. 율원양은 그들을 싸늘히 훑어 보다가 대환희여보살에게 고정시켰다. 율원양이 쳐다 보자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웃음을 띠우자 얼굴의 살이 일렁이는 것이 해일(海溢)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네놈이 자결한 저 놈을 대신하여 나에게 시중을 든다면 후원을 침입한 죄를 용서해 주겠다. 그리고, 천하제일의 서역 무공도 전수해 주겠다. 어떠냐?" 율원양은 저녁을 먹고 오지 않았음을 다시금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너의 무공이 진정 천하제일이냐?" "호호호-- 믿지 못하겠다면 직접 보여주어 너로 하여금 믿게 하겠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는데, 역시 돼지가 먹이를 앞에 놓고 꿀꿀 거리며 환성을 지를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탈정검(奪情劍) 상관룡(上官龍)은 앞으로 오너라," "예. 여보살님." 등 뒤에서 안마를 하던 인물이 공손히 대답하며 앞으로 나섰다. 탈정검 상관룡은 지난 십 년 이래 가장 뛰어난 쾌검(快劍)을 구사하던 점장파 제일고수였다. 그런 그가 무슨 이유로 대환희여보살의 시종 노릇을 하는지는 그밖에 몰랐다. 대환희여보살은 뚱뚱한 손으로 역시 뚱뚱한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자기의 목을 가리켰다. "너는 검으로 나의 이곳을 찔러 저놈에게 견문을 넓혀 주어라." 상관룡은 급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아첨의 웃음을 흘겼다. "안됩니다. 여보살님이 당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땐 정말 제 가슴이 아플 것입니다." 대한희여보살이 웃으며 꾸짖었다. "네 이놈. 네 주제에 날 상하게 하기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자, 안심하고 찔러라."


그러더니 목을 들어 상관룡의 앞으로 쑥 내밀었다. 상관룡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마지막 다 자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번쩍하고 싸늘한 검광이 빛을 발했다. 쌔- 애- 액. 싸늘한 검기가 몰아치는 데도 대환희여보살은 그 자리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퍽. 검광이 번쩍 했다가 사라지는가 싶었는데 여지없이 그녀의 목을 관통했다. 역시, 점창 제일고수다운 쾌검의 정확성이었다. 상관룡의 검법으로 말할 것 같으면 비단 신속할 뿐 아니라 그가 사용하는 탈정검은 더할 수 없이 날카로운 것이다. 율원양은 그의 검기를 측정하면서 설마했다. 그녀가 금강불괴지신의 몸이 아닌 이상 인간의 육체로서 이 일검을 막기란 매우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완전히 상상에서 벗어났다. "악." 순간, 누군가의 입에서 경악의 비명이 터져 나오는가 싶었다. 대환희여보살이 죽기는커녕 오히려 상관룡이 마치 탄력성이 강한 나무에 부딪힌 듯 튀어나와 그 반대 쪽에 있는 여자의 몸에 쓰러졌다. 그 여인은 반갑게 웃더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 상관룡을 꼭 껴안고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상관룡이 뻗어낸 검은 정확하게 대환희여보살의 목청 가운데 꽂혔다. 그러나 대환희여보살은 고통의 빛은커녕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단정하게 앉아 율원양을 바라 보며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대환희여보살은 목에 있는 비계살로 검을 꽉 끼고 있는 것이었다. 율원양은 냉랭한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말할 수 없는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공력에 대해서, 그는 비단 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듣지도 못했다. 율원양은 가볍게 웃으며 입을 떼었다. "뚱뚱한 여자에게는 뚱뚱한 대로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을 나는 하나 깨달았다." 대환희여보살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 이제 마음을 굳힐 수 있겠지? 지금 나의 시중을 들고 있는 녀석들도 아마 너에 못지 않은 무공을 지니고 있을 게다. 어떡할 테냐?" 그러더니, 그녀는 율원양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계속 지껄였다.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네가 나이가 많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너는 보면 볼수록 호감이 가고 매력이 넘치는 남자다. 그러니 너는 어서 나의 제안을 응낙해라. 그럼 네가 여태까지 가져 보지 못했던 부(富)와 쾌락을 주겠다." 율원양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걸렸다. "네가 나를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나는 네가 너무 비대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네가 그 몸에 있는 비계 덩어리를 이삼백 근 정도 없앨 수 있다면 나는 너와 같이 있는 것을 고려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정말 솔직히 말해 도무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순간 음탕함으로 물들어 있던 대환희여보살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이 놈,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방자하기 이를데 없는 놈이구나." 그녀는 폭갈을 치며 육중한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누각의 사방에 앉아있던 몇 명의 여인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그녀들은 비록 비대하기는 했지만 행동은 결코 느리지 않아 거의 비호같이 일어났다. 코끼리와 같은 육중한 다리를 움직여 천천히 율원양을 향해 육박해 들어왔다. 여인들 중에서 가장 마른 여자가 율원양의 세 배가 되었다. 그녀들이 그의 주위를 둥그렇게 에워싸자 개미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그렇다고 공중으로도 밑으로도 숨을 수 없는 것이 그야말로 진퇴양난일 것 같았다. 아니 그것은 잠깐 감수한다 하여도 여자들의 이 육중한 몸을 보니 절로 구토증이 났다. 여인들은 점차 가까이 다가오면서 마치 율원양을 산 채로 찢어 죽이려는 것 같았다. 율원양이 포위된 것을 보는 대환희여보살의 우렁찬 웃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오호호호호, 이놈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승낙을 하면 용서해 주겠다." 율원양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나의 한 가지 제안을 들어주면 너의 요구를 승낙하지." "그게 무엇이냐?" "나에게도 탈정검 상관룡과 같은 기회를 달라. 내가 너의 목에 검을 날려 상관룡과 같은 결과가 된다면 너의 요구에 응낙하겠다." 대환희여보살의 얼굴에 의외에 빛이 떠올랐다. 율원양이 이런 제의를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녀는 낄낄거리고 웃었다. "오호호-- 그 녀석, 의외로 귀여운 데가 있는 놈이군. 얘들아, 비켜나라. 내가 저 놈의 제의를 승낙하겠다." 이번에는 율원양이 의외로 느낄 만큼 그녀가 선선히 응낙을 했다. 그녀들은 인육의 장벽을 허물고 길을 내주었다. 대환희여보살이 명령을 내렸다. "저 놈에게 탈정검을 갖다 주어라." 번쩍. 불빛에 검날이 시퍼렇게 빛이 났다. 보검은 아니지만 예리하기가 동지섣달 한기가 내리듯 했다. 율원양은 냉막한 웃음을 지으며 검신을 한 차례 손으로 쓸어 올렸다. 일순 대환희여보살의 눈에 기이함이 서렸다. '저 놈의 자세를 보니 검도(劍道)가 의외로 대단해 보이는구나. 내가 너무 쉽게 승낙한 거 아닐까?' 그녀는 이어 그를 잘못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이런 생각을 지워버렸다. '제깐 놈이라고 별 수 있을라고?' 그녀는 자신의 무공에 자부심이 대단한 여자였다. 율원양의 기도는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다만 그것이 남자의 객기(客氣)로만 여겨졌다. 왜냐하면 자신 앞에 섰던 모든 남자들이 다 한 번씩은 객기를 부렸기 때문이다. 물론, 객기를 부렸던 인물들은 모두 그녀를 죽이는데 실패를 했고 도리어 죽음을 당했다. 순간 율원양의 냉소는 거두어지고 눈빛은 차고도 맑아졌다. 그는 검을 비스듬히 들고 대환희여보살을 바로 보았다. 일순 신비롭고도 맑은 광채가 그의 눈에서 쏟아졌다. "차앗." 번쩍. 한 차례 검광이 번뜩였다. 쐐액. 검이 나는 소리가 지극히 짧게 울렸다. 퍼어억.


짧은 둔탁음 소리가 긴 여운을 남기며 누각을 진동시켰다. "끼- 아- 악." 대환희여보살이 짐승의 고함소리와도 같은 커다란 비명을 질렀다. 보라! 탈정검은 그녀의 목에 박혀 검자루만 남은 채 파르르 떨고 있다. 그녀의 눈에는 경악과 공포, 그리고 자신의 목이 관통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회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보통 사람의 손바닥 만한 혀는 길게 축 늘어졌으며 핏방울이 점점이 아로 새겨지더니 한 방울 한 방울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머지 인물들은 할 말을 잊은 채 율원양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도 대환희여보살의 눈빛과 똑같은 감정이 담겨있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율원양의 제일 가까이 있던 여인이 외쳤다. "저 놈을 죽여라." 여인의 말이 떨어지자 그녀들은 일제히 장력을 쏟아내었다. 휘리리리리링우르르르르릉그녀들의 양 손에서 가공할 광풍들이 쏟아지며 누각 전체가 뒤흔들렸다. 그 순간 검광이 허공에 난무했다. 슈슈슈슈슈슈숙츠츠츠츠츠어느 틈엔가 대환희여보살의 목에 꽂힌 검을 뽑아들은 율원양이 두 번 검을 휘둘렀다. 그 속도는 어찌나 빠른지 광풍을 쏟아냈던 여인들은 다만 흰빛만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녀들은 흰 빛이 사라지기도 전에 자신들이 쏟아낸 광풍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또한 목언저리에 시원한 기운이 감돌았다고 생각했다. "으- 아- 악." "크- 아- 악." 그녀들은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십여 개의 목이 일시에 굴러 떨어졌다. 쿵. 쿵. 쿠- 응. 꽈다당. 그녀들의 몸이 넘어지면서 우뢰와 같은 폭음이 연신 터졌다. 그녀들이 쓰러지는 소리들은 엄청났다. 꽝- 꽈르르르릉. 꽈꽝꽝! 우르르릉 꽈과꽝. 갑자기 경천동지할 폭음이 연속 터지더니 온 누각이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녀들의 하중을 견디지 못할 누각이 무너지면서 누각 안에 있던 시체들과, 여인들의 시중을 들어주던 남자들이 한데 어우러져 속속 떨어져 내렸다. 흙먼지가 수없이 일어났다. 율원양은 이때 벌써 누각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는 삼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무너져 내린 누각을 바라보고 있었다. 율원양의 눈 앞에 펼쳐진 정경은 너무나 비참했다.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하고 누각과 비계덩어리 시체들에 눌려 죽은 남자들은 한 덩어리의 고기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엄청난 무게의 시체들에 깔리자 육신이 모두 으깨어져 죽은 것이었다. 율원양은 그곳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서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후원으로 들어서기 전에 들었던 음률의 근원지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율원양은 음률이 흘러나온 근원지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천시지청술을 시전했다.


'이상한 일이로다. 상황이 이토록 변했는데 도화궁에서는 어찌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의 의문점이었다. 누각이 박살이 나고 대환희여보살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들이 모두 죽음을 당했는데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눈과 귀는 후원에 오직 한 사람만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약 이백여 장 떨어진 곳에 한 사람이 있다.' 휙. 그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순간이 두어 번 거듭되었다. 율원양은 송죽(松竹)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초옥 앞에 내려섰다. 송죽 안의 초옥은 매우 아담하고 운치가 그득했다. 달은 교교로운 빛을 발하며 초옥을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초옥에서 받은 율원양의 느낌은 달랐다. 그는 왜인지 코 끝이 찡한 느낌을 받았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왜 그럴까? 아무튼, 초옥은 율원양에게 많은 슬픔을 갖다주었다.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군.' 그가 발걸음을 막 옮기려 할 때, 초옥 안에서 쓸쓸한 중년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밖에 온 사람은 나를 죽이러 오셨나요?" 율원양은 흠칫 놀랐다. 중년여인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그 여인의 음성에 담겨있는 슬픔 때문이었다. 슬픔이 담긴 음성은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슬프게 했다. 제 16 장 슬픈 여인(女人) 율원양은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담담히 말했다. "아닙니다." "그럼 조금 전, 소란을 일으켰던 분인가요?" "그렇습니다." "대환희여보살을 죽이다니, 오신 분의 무공은 깊이를 측정할 수 없겠군요." 율원양의 담담했던 표정에 다시 놀라움이 서렸다. '이 여인도 필시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 모양이군. 그런데, 저 여인의 음성이 어찌 이다지도 쓸쓸하단 말이냐?' 사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여인의 음성이 세상 모든 슬픔을 혼자 간직한 여인의 목소리 같았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여인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한서린 탄식이 뿜어져 나왔다. "휴우-- 오신 분께서 저를 죽이러 오지 않았다면 무슨 일로 저를 찾아 오셨나요?" "부인께서 탄주하셨던 음률을 듣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모옥 안에서 가벼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오, 그럼 당신은 음률에도 매우 조예가 깊으신 모양이군요." "아닙니다. 저는 음률엔 문외한입니다. 그러나 부인께서 탄주한 곡목이 삼백 년 전의 기인 세외음성 임천뢰 선배님의 단장인을 탄주하셨기에 호기심이 일어 찾아온 것입니다." 조금 전보다 더한 탄성이 중년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머. 지난 이십 년 동안 음률의 곡명(曲名)을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정말 뜻밖이로군요. 밖에 계신 분은 잠시 들어 오세요." 율원양은 주저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모옥 안의 방은 매우 단아(端雅)했다.


여인의 향기가 물씬 풍겨 율원양의 코 끝을 감돌았다. 창가에는 우아하게 생긴 중년여인이 돌아서서 창 밖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밝은 만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율원양은 방 앞에 서서 모옥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뒷모습이란 말할 수 없이 쓸쓸한 것이었다. 율원양은 포권의 예를 취했다. "야심한 시각에 무례를 저지르게 되었으니 용서하십시오. 소생은 율원양이라 합니다." 여인은 천천히 몸을 돌이켰다. 그녀는 이 낯선 방문객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율원양은 중년 여인의 진한 슬픔의 미소를 보자 가슴��� 저려 왔다. '저 여인은 처음 보는 인물에게 어찌 저런 진한 슬픔의 미소를 띠우는 것일까?' 어찌된 일인지 율원양은 숨이 꽉 막혔다. 중년여인은 일견 나이를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귀밑 머리는 희끗한 회색빛이 서려, 언뜻 보기에는 고희(古稀)를 지난 노부인 같았으나 얼굴만은 사십 대의 중년부인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름다왔다. 너무나 아름다왔다. 어찌나 아름다운지 율원양은 눈이 시릴 정도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고결한 기품과 우아한 멋이 풍겨났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얼굴 가득한 슬픔이었다. 얼굴에 담긴 지울 수 없는 슬픔은 여자만이 지닐 수 있는 정한(情恨)이기도 했다. 율원양은 그 정한에 숨이 꽉 막힌 것이었다. '아, 저 부인은 난경이 들려준 구천성모의 모습과 똑같구나. 그렇다면 저 부인이 바로 구천성모란 말인가?' 중년부인은 그의 이름을 나직이 뇌까렸다. "율원양, 율대협(律大俠)이셨군요?" 율원양은 뭉클한 슬픔을 하나도 남김없이 전해 받은 심정이었다. "부인께서는 혹시 도화궁의 궁주, 구천성모가 아니신지요?" 그녀는 일순 깜짝 놀란 표정이었으나 이내 씁쓸한 자조의 빛이 깔렸다. 그녀의 표정은 자신이 구천성모임을 시인하는 것이었다. 율원양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저 부인은 구천성모임에 틀림이 없구나. 그렇다면 난경이 말한 지금의 궁주는 틀림없이 누군가가 가장한 것이다. 그러나, 난경은 구천성모의 손에 의해서 길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궁주가 본래의 이 여인인 줄 알고 있었다. 누굴까? 누가 가장을 하였기에 그토록 완벽한 또 하나의 구천성모 역할을 능히 해낼 수 있었을까?' 율원양의 마음 속으로는 끝없는 의문이 일어났다. "부인께서는 구천성모가 틀림없군요? 그런데, 궁주께서는 어인 일로 이 후원 깊숙한 곳에서 홀로 생활하고 계신지 그 연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그녀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운 고뇌가 떠올랐다. 그녀는 마음의 고통을 견디기 어려운 듯 휘청거렸다. "부인......." 율원양은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습니다." 말은 이렇게 하였으나,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식은땀이 이마에 배어났다. 율원양은 구천성모를 부축하여 의자에 앉혔다. 잠시 후 그녀는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슬픈 눈으로 율원양을 바라보았다. "그 이유를 꼭 아셔야 하나요?" 율원양은 침묵을 지켰다.


그가 알고 싶어하는 이유를 구천성모가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괴로운 고문(拷問)이 된다는 것을 율원양은 직감했다. 그녀가 입을 연다면 그것은 뼈를 깎는 고통보다 더 아플 것 같았다. 그러나 율원양은 알아야 했다. 그는 커다란 슬픔을 안고 평생을 살아옴직한 눈 앞의 여인을 괴롭히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아니 그녀의 슬픔을 같이 나누고 그녀를 위로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율원양은 한 여인의 슬픔보다 더욱 중요한 무림대의(武林大義)를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무림대의(武林大義) 앞에서는 그 어느 것도 장애가 되지는 못하리라. 율원양은 결심을 굳히고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나 매우 공손한 음성이었다. "궁주님, 제가 묻는 연유는 괴로우시더라도 꼭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그녀는 처연한 눈을 창 밖으로 가져갔다. 처연한 음성으로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율대협께선 그 점을 꼭 아셔야 하나요?" "예, 꼭 알아야 합니다. 지난 이 년 동안 도화궁을 방문한 육백여 명의 무림인들이 실종되었습니다." 구천성모는 대경실색했다. "아니, 그 말이 사실인가요?" 그녀는 고개를 홱 돌리고 율원양을 주시하였다. 율원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뿐이 아닙니다. 도화궁에는 각종 기문진이 설치되어 있고 모든 기녀들은 놀랍게도 이 년 전부터 만성독약에 중독 되어 있습니다." 구천성모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넋을 잃고 말았다.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교교한 멋을 잊지 않을 월광(月光)은 그녀의 넋 잃은 모습을 더욱 한스럽게 보이게 했다. 율원양은 문득 돌아가고 싶었다. 그녀가 간직한 알 수 없는 사연을 털어놓게 하여 그녀의 마음을 더욱 쓰라리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은 결단코 없었다. "궁주, 불초는 그만 돌아 가겠소이다." 듣기를 포기한 율원양은 몸을 돌이켰다. 그가 막 방문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 구천성모의 힘 없는 음성이 들렸다. "당신은 그 이유를 알려고 오셨는데 어찌 그냥 가시나요?" "그 이유는 궁주를 가장한 여인을 붙잡아 직접 알아 보아도 됩니다." 율원양의 대답에 구천성모의 표정이 급변했다. "잠깐 그 연유를 제가 말씀 드리겠어요." 율원양은 그 자리에 섰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굳이 궁주께 강요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율원양의 몸은 벌써 오십여 장 밖을 날고 있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켰던 구천성모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녀는 한참을 넋을 잃고 앉았다가 힘없이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그 아이가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아아... 이 일을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구천성모는 뜻 모를 소리를 하며 주저앉듯이 앉았다. 도화궁! 신비함과 알 수 없는 음모가 가득 서린 도화궁에 아침이 왔다. 율원양은 침중한 얼굴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의 뒤로 아름다운 하난경이 침중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렇다면 궁주로 가장한 여인은 누구일까요?"


율원양은 대답이 없었다. 하난경도 더는 물어보지도 않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실을 율원양이 알 턱이 없었다. 그녀의 서글서글한 아름다움이 담긴 눈에 이슬이 맺혔다. 구천성모는 바로 하난경에게 있어서는 어머니였다. 율원양이 느릿느릿 몸을 돌렸다. 그는 하난경의 어깨가 가볍게 들먹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녀를 품 안에 안으면서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너무 상심하지 마오. 조금 있다 구천성모로 가장한 궁주를 만나보면 모든 전모가 밝혀지겠지." 율원양의 품에 안기자 하난경은 그의 믿음직함에 안심이 되어 마음을 가라 앉혔다. 율원양은 어젯 밤의 정황에 대해 설명을 했다. "어젯 밤 후원을 벗어나면서 도화궁 전체를 샅샅이 살펴보았으나 수뇌인물들로 짐작이 되는 위인들은 거의 없었소. 궁에 들어 오는 날 만났던 총관이 궁 안의 사무를 모두 총괄하고 있었소. 난경, 조금 있다 내가 가짜 궁주를 만나러 가면 궁 안의 여인들을 모두 한 곳에 모으도록 하시오. 내가 그들의 만성독약을 해약시켜 주겠소." "알겠습니다. 율가가!" 그녀는 사랑이 듬뿍 담긴 눈으로 율원양을 올려다 보았다. 행복한 눈이었다. 오직,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올 수 있는 말은 이것 뿐이었다. "저는... 기뻐요. 율대가." "나도 기쁘오. 난경. 자, 지금 나를 부르러 오고 있소." 율원양은 그녀를 풀어주었다. 일순 하난경의 얼굴에 이별의 서글픈 표정이 하나 가득 떠올랐다. 상황에 대처하는 그녀의 기지였다. 그녀는 율원양과 헤어지는 모습을 연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율원양은 속으로 웃음을 머금었다. '난경은 정말 귀여운 여인이군. 설운과 좋은 벗이 되겠구나.' 똑, 똑, 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고운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선자, 안에 계십니까? 손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율원양은 지금의 목소리가 누군지 알았다. 그녀는 바로 자신을 도화궁으로 안내한 도화사자, 그녀였다. 하난경이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다." 이어 율원양의 표정에도 떠나기 싫은 표정이 하나 가득 떠올랐다. 그도 장단을 맞출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도화사자, 또 만나게 되기를 바라겠소." "흑흑흑......." 그녀의 울음 소리를 듣는 율원양은 속으로 킥킥 웃으며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만큼은 도저히 도화사자를 두고 떠나기 싫은 아쉬운 얼굴이었다. "흑흑흑... 안녕히 가세요. 상공......." 그녀는 방문 앞에서 오열을 터뜨렸다. 율원양을 데리러 온 도화사자는 두 남녀를 번갈아 쳐다 보며 결코 유쾌한 표정이 아니었다. 율원양과 하난경은 손까지 흔들면서 헤어졌다. 도화사자는 착잡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섰다. 율원양은 뒤를 따라 가면서 그녀의 뒷모습이 매우 쓸쓸하다는 것을 느꼈다. 율원양은 모른 체 했다. 도화사자는 묵묵히 길을 인도하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도화궁의 제일미녀인 도화사자를 함락시킨 당신이야말로 천하 제일의 기남자예요."


율원양에게 하는 건지, 아니면 그녀가 느끼고 있던 감정을 실토하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율원야은 씁쓸한 웃음을 띠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도화원을 벗어난 두 사람은 소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소로 양 편으로는 울창한 도화림이 널려 있었다. 도화림을 벗어나자 커다란 누각이 드러났다. 누각에는 정한루(情恨樓)란 편액이 걸려져 있었다. 정한루도 어젯 밤에 율원양이 스쳐갔던 곳이었다. 어제는 이곳을 경비하는 인물들만 있었을 뿐이었다. 도화사자는 율원양을 대청까지 안내하고는 돌아갔다. 그녀는 돌아가기 전에 쓸쓸한 눈으로 율원양을 바라보고는 총총히 물러갔다. 율원양은 그녀의 눈에 담긴 뜻을 잘 알 수 있었다. 경설운에게서 보았고, 손영령, 그리고 하난경에게서도 발견하였던 눈빛이었다. 그녀들이 율원양을 바라볼 때에는 그의 마음에 찌르르할 정도로 정감을 담고 있었다. 도화사자의 눈빛에도 그녀들이 보였던 정감이 담겨 있었다. 사랑은 이런 것일까? 율원양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소저. 미안하구료.' 율원양은 대청 안으로 들어섰다. 대청에는 산해진미의 요리와 진효가주의 향기로운 술이 하나 가득 차려져 있었다. 식욕을 돋구기에 너무나 충분한 음식이었다. 식탁이 차려진 둘레에는 도화궁에 같이 왔던 일행 여섯 명이 먼저 와 있었다. 청의노인이 은염(銀髥)을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었다. "소협, 어서 오게나. 자네는 지난 이틀 동안 충분한 운우지락(雲雨之樂)을 즐겼나 보군. 신색이 환하군, 그래?" 그 말에 율원양의 멋진 얼굴이 약간 달아 올랐다. 일순 그는 청의노인의 옆에 앉아있던 맹금봉의 혈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율원양은 청의노인의 옆자리에 앉다가 안색이 약간 굳어졌다. 청의노인의 짓궂은 말에 얼굴을 약간 붉혔던 그는 청의노인의 미간에 서려 있는 미세한 푸른 줄기를 발견했다. 그 푸른 줄기는 너무 미세하여 정작 본인인 청의 노인도 찾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눈길은 나머지 사람들의 얼굴로 급히 옮겨갔다. 맹금봉은 혈립을 썼기 때문에 얼굴을 볼 수 없었으나 모두들 미간에 푸른 줄기가 있었다. 탈혼도부와 아구걸개는 율원양이 자신들의 얼굴을 스치듯 보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탈혼도부는 안색이 창백한 것이 앞으로도 한 달은 고생해야 내상이 나을 것 같은 안색이었다. 아구걸개는 두꺼운 헝겊으로 구멍난 어깨를 싸매고 있었다. 그의 부상은 더욱 심한 것이어서 족히 석 달은 치료해야만 완전히 아물 수 있는 것이었다. 청의노인은 율원양의 안색이 심상치 않게 변하자, 급히 질문을 하였다. "갑자기 왜 그런 표정을 띠우는가?" "아닙니다." 율원양은 담담한 안색으로 고치며 가벼이 부인하였다. 그러나, 마음 속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이들은 언제 독약(毒藥)에 중독된 것일까? 하나, 난경이 중독당했던 만성독약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상하다. 음식에 독약을 넣어 가지고서는 이들을 중독시킬 수는 없었을텐데.' 율원양은 곰곰 생각해 보았으나 알 수가 없었다. 어떤 방법으로 하독(下毒)을 했는지 그로서는 당장은 모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전부 무색무미무취의 절명산과 산공독에 중독된 것은 도화궁으로 들어서는 미로의 동굴 속에서였다.


율원양은 만독수화도검불가침의 금강불괴지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이 스며 들어도 자연적으로 소멸된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율원양은 아무리 생각해 보았으나, 이들이 어떻게 중독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율원양은 곰곰히 생각하다 그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불초가 하는 말을 듣고도 놀라지도 말고 안색에 변화도 일으키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지금 약명 미상의 극독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아무도 모르게 평온한 자세로 운기조식하여 독을 태양혈로 운집 시키시오. 그러면, 불초가 해독시켜 주겠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아무 말도 묻지 말고 급히 운기조식을 하십시오. 믿고 안 믿고는 여러분들의 자유입니다.) 율원양은 전음을 보내는 동안 청의노인의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노인, 불초가 한 잔 올립니다." 율원양은 술에 독이 들었나 암암리에 조사를 하였으나 독은 들어있지 않았다. 청의노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고맙네." 청의노인은 흡족한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술을 들이켰다. 그러면서 그는 입술을 달싹거려 전음을 보내왔다. (자네의 말이 틀림없군. 노부가 운기조식을 하니까 기해혈(氣海穴)에 은은한 통증이 저려오네.) 전음을 마치고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가 아침 나절에 운기조식할 때만 하여도 이런 현상은 조금도 없었었다. 그런데 한 시진여 가량 흘러간 지금에서는 중독 현상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로 보아 독을 시술한 인물은 틀림없이 중독의 현상이 나타날 때를 맞추어 독을 푼 것이 틀림 없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독의 대가일 것이다. 청의노인은 이만한 용독(用毒)의 대가가 누구인지 생각하다 한 인물을 떠올리고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독심약왕(毒心藥王) 무기군(武基郡).' 이 인물을 생각해 낸 청의노인은 등골이 오싹하는 전율을 느꼈다. 사십 년 전 무림에는 두 명의 신의가 있었다. 남극성수 율성하와 독심약왕 무기군이었다. 무림인들은 두 신의를 한데 묶어 성독절신의(聖毒絶神醫)라 불렀다. 그런데 남극성수의 명호를 듣는 무림인들은 한없는 존경심을 갖는다. 그러나, 독심약왕이란 명호를 들으면 이를 갈며 치를 떤다. 독심약왕은 의술은 뛰어났을망정 의도(醫道)는 모르는 위인이었다. 그는 결코 남을 구하지 않았으며 어쩔 수 없이 의술을 펼쳐야 할 때는 막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인물이었다. 그 요구는 전부가 들어줄 수 없는 무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남을 위하여 뛰어난 의술을 펼친 적이 ���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런 괴팍한 성격에다 음침함과 악랄함이 곁들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만독(萬毒)을 다스리는 인물이라 자신의 비위를 건드리는 인물은 누구를 막론하고 가차없이 독을 뿌려 죽이는 인물이었다. 그가 선한 마음으로 독을 사용하면 이독제독(以毒制毒)을 시술할 수 있는 뛰어나 의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독을 남을 해치는 데만 썼던 것이다.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남을 구해주지 않았던 독심약왕 무기군. 무림에서 그만이 만독을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에 청의노인은 그를 생각해 낸 것이었다. 만약 그가 추측한 대로 독심약왕 무기군이 하독을 한 것이라면 큰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청의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 내었다. "으음......."


그가 신음을 흘리자 평온을 가장하고 있지만 내심 긴장으로 가득 찬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율원양은 그의 표정에서 그가 무엇인가를 알아냈음을 느꼈다. 그러나,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이미 독수를 펼친 이상 어차피 알게 될 것이니까 율원양은 술을 들이켰다. 그가 빈 술잔을 놓자마자, "궁주께서 행차시오." 아름다운 옥음(玉音)이 대청 안으로 들렸다. 이어 아름다운 음률이 울려 퍼지면서 그들이 앉아있는 전면의 벽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벽이 완전히 갈라졌다. 일시에 넓은 대청 안에 짙은 여인의 분향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날아갈 듯한 투명한 나삼을 입은 절색의 소녀들이 들어서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속살이 은은히 드러나 보이는 가운데 간신히 치부만 가리고 있었다. 실로 사람의 혼백을 빼앗아 갈만한 아름답고 요염한 소녀들이었다. 율원양은 눈썹을 살며시 찌푸렸다. 동시에 청의노인의 눈썹도 가볍게 찌푸러졌다. 맹금봉은 여인인지라 더욱 기분이 나쁜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나머지 네 인물들은 달랐다. 그들은 들어서는 소녀 등을 보자 이내 눈알이 번들거리고 입가에 징그러운 웃음이 어리는 것이 음욕(淫慾)이 당기는 표정들이었다. 율원양은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쯔쯧. 죽을지 살지 모르는 상황에 처했는데 밝힘증이라니. 한심한 작자들 같으니라고.' "오호호호--" 맑고 청아한 웃음이 중인들의 귀를 때렸다. 절색의 소녀들 열여덟 명이 들어서고, 이어 궁장차림에 면사로 얼굴을 가린 풍요로운 몸매의 한 여인이 들어섰다. 그 여인의 뒤를 따라 다시 여섯 명의 시비들이 날아갈 듯한 걸음걸이로 뒤를 따랐다. 그야말로 화려함이 극에 달하는 궁주의 행차였다. 도화궁주는 연신 맑은 웃음을 터뜨리며 주인석(主人席)에 앉았다. 그러자 그녀를 호위했던 소녀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공손히 시립을 하고 섰다. 도화궁주는 면사 속에서 남자의 혼백을 뺏아갈 듯한 요염한 눈길을 쏟아내며 한 사람 한 사람 쳐다보는 것이었다. 율원양은 그녀의 눈을 접하는 순간, 코웃음을 쳤다. '저 여인이 바로 가짜 궁주이군. 조금 있으면 모두 밝혀지겠지.' 별안간 율원양의 눈에 더할 수 없이 싸늘한 냉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당장에 그녀의 면사를 벗겨버릴 수도 있었으나 꾹 눌러 참았다. 도화궁주는 일곱 사람을 일일이 쳐다보고는 옥음을 터뜨렸다. "저는 도화궁의 궁주인 구천성모이옵니다. 여러분께서 본 궁을 찾아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의례적인 인사말을 한 가짜 궁주 구천성모는 좌우의 소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얘들아, 너희들은 저 분들에게 각기 술 한 잔씩을 따라 올려라."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투명한 나삼을 걸친 소녀 일곱 명이 걸음을 옮겨 일곱 명에게 각기 한 잔씩 술을 따라 올렸다. 도화궁주도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르더니 높이 쳐 들었다. "본 궁주가 여러분들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먼저 한 잔을 들겠습니다."


그녀가 단숨에 들이키자, 율원양을 비롯한 일행들도 술을 들이켰다. "흐흐흐... 매우 좋은 술이로구료. 궁주." 탈혼도부가 술잔을 내려 놓으면서 음침하게 말했다. 궁주가 명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고마운 말씀이군요. 그런데, 저 분 대협께서는 아예 술독째 드시는군요." 궁주가 지적한 인물은 바로 아구걸개였다. 그는 잔으로는 주량이 차지 않는 인물이라, 아예 한 말 들이 술독을 들이키고 있었다. "대협. 본 도화궁에는 술은 얼마든지 있으니 천천히 드시도록 하세요." "크윽. 삼십 년 이상 된 감홍로(甘紅露)라 진정 술맛 하나는 뛰어나구료. 궁주." 아구걸개는 독 안의 술이 바닥이 나자 입을 떼 한 차례 트림을 하더니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도화궁주가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 했다. 감탄했다는 표정도 떠올렸다. "대협께서 맛만 보시고도 술의 이름을 맞추시다니 주도에 조예가 매우 깊으시군요." 탈혼도부가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궁주. 내가 듣기로는 도화궁의 규율이 바뀌어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기 싫으면 도화궁에서 평생을 살 수 있다던데, 그 말이 사실이오이까?" 도화궁주는 정감이 촉촉히 젖은 눈망울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협께서는 무척 풍류를 밝히시는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대협이 본 궁에 남기를 원하신다면 본 궁주는 쌍수를 들어 대 환영입니다." 아구걸개가 말을 받았다. "히히힛-- 그러면 우리들 몸에 들어있는 독도 해독(解毒)해 주시겠구료." 의외의 말은 도화궁주의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으나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오호호홋--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두 분 대협께서 본 궁에 남아있겠다고 이 자리에서 결정만 하신면 해독을 시켜드릴 뿐만 아니라, 마음에 드시는 도화궁의 기녀는 물론 매일같이 산해진미, 진효가주로 목을 축이실 수 있답니다." 탈혼도부는 매우 흡족해 궁주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칭찬을 했다. "크크크-- -궁주는 여자지만 매우 시원시원하구료." "마음에 들어. 아주 마음에 든다고." 아구걸개의 흡족한 말이 뒤를 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침묵을 지킨 채 있었다. 탈혼도부와 아구걸개가 연신 떠들자 중인들의 눈길이 모두 그 두 사람에게 쏠렸다. 율원양이 자신들을 응시하자 탈혼도부와 아구걸개의 눈빛은 더할 수 없이 흉악해졌다. 무림에 흉명을 떨쳐온 그들로서는 이틀 전에 율원양에게 당한 치욕을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원독과 함께 공포심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탈혼도부가 안색을 더욱 음침하게 했다. "흐흐흐-- 이 자리에서 결정 못할 것도 없지. 궁주. 나는 도화궁을 떠나지 않겠소이다." 아구걸개도 뒤를 따랐다. "나도 마찬가지요." 도화궁주는 그들의 결정에 약간 의외의 몸짓을 하더니 교소를 터뜨렸다. 참으로 웃음이 많은 여인이었다. "호호호-- 두 분께서 그런 결정을 내리시다니 도화궁으로써는 대환영 입니다." 둘을 치하한 그녀는 그윽한 눈길로 나머지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을 하였다. "나머지 다섯 분들 중에서도 결정을 내리실 분은 안 계신지요?" 나머지 사람들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냉막한 표정의 중년서생과 구레나룻의 대한이 잠시 염두를 굴리더니 결정을 내렸다. "나도 남겠소이다." "궁주의 호의를 받아 들이겠소이다." 그들의 결정을 흐뭇한 눈길로 주시하던 도화궁주는 눈길을 율원양과 청의노인, 그리고 맹금봉에게로 넘겼다. 그들은 담담한 표정을 띠우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 "세 분은 아직 결정이 서시지 않은 모양이군요." 재촉하던 도화궁주는 그들이 침묵을 지키자 할 수 없다는 듯이 손뼉을 두어 번 쳤다. 딱. 딱. 그러자 궁주가 들어섰던 벽이 열리며 한 명의 시비가 나타났다. 그녀는 궁주 옆으로 다가와서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궁주님, 분부만 내려 주십시오." "너는 저 네 분을 모시고 계화궁(桂花宮)으로 가거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녀가 일어서자 결정을 내린 네 사람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탈혼도부는 율원양을 향해 한 마디 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흐흐흐-- 애송이 놈아, 다음번에 강호에서 만나게 되기를 빌겠다." "히히히-- 청산(靑山)이 푸르른 동안 땔감 걱정은 않는 법이니, 네게 받은 선물은 잊지 않고 꼭 돌려 주겠다." 율원양은 시종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있다가 그들의 원한 서린 말을 듣는 동안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흘렀다. "다음은 필요 없지. 세상 일은 언제나 오늘이 가장 중요한 법이니까 말이다." 말을 마친 율원양의 식지(食指)와 중지(中指)가 벼락같이 허공을 찔렀다. 휘이익! 휘-- 이-- 익. 그의 두 손 가락에서 음랭한 지풍이 발출되었다. "아니, 저 놈이?" "어엇." 이런 자리에서 공격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탈혼도부와 아구걸개는 경악을 하고 몸을 피하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벌써 늦고 말았다. 퍽! 퍽! 두 줄기의 지풍이 그들의 턱을 갈겨버렸다. "아악." "크아악." 처참한 비명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짙은 피보라를 뿌리며 나가 떨어졌다. 쿠웅. 쿵. 그들의 죽음은 너무나 처참했다. 턱에 지풍이 맞는 순간, 그들의 얼굴은 박살이 나서 죽어버린 것이었다. 이 일은 예기치 못한 것인데다 너무나 빨리 일어난 것이어서 아무도 막지 못했다. 도화궁주는 소스라치게 놀란 눈으로 율원양을 주시하였다. 그의 눈에는 난생 처음 느껴보는 듯 경악이 서려 있었다. 도화궁에 남기로 결정했던 나머지 두 사람은 얼굴이 잿빛이 되어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율원양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팔장을 끼고는 태연히 앉아 있었다.


도화궁주는 놀란 눈으로 뚫어져라 율원양을 노려보다가 시비를 향해 손짓을 했다. "너는 어서 남은 두 분을 모시고 나가거라." 시비 또한 공포에 질려 있다가 궁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밖으로 달려나갔다. 휙. 휙- 익. 두 사람은 두려움에 질려 혹시 율원양이 자신들에게도 독수를 펼칠까바 신법을 펼쳐 시녀보다 앞서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벽은 빠르게 닫혔다. "......!" 뜻을 알 수 없는 무거운 침묵이 대청에 깔렸다.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흘렀을까? 도화궁주가 침중한 탄식을 뿜어 내었다. "으음, 과연 강호에 알려진 대로 영세무룡(永世武龍)께서는 수법이 매섭기 이를데 없군요." 율원양은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자 흠칫했다. 일순 혈립을 쓰고 있던 맹금봉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태행산에서 그녀에게 선명한 그림자를 남겨주었던 죽립의 사나이. 그때, 그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얼음처럼 차갑던 자신의 마음에 하나의 그림자를 남겨준 사나이. 그녀는 그후 그의 외호가 영세무룡이라 불러지게 되자 남 몰래 얼마나 좋아했던가. 꼭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도화정에서 율원양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혹시나 하고 긴가민가 했었다. 저 분은 혹시 태행산의 바로 그 죽립의 사나이가 아니었던가. 만약 그렇다면 그녀로서는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는가. 그런 그녀의 상상은 도화궁주에 의해서 사실과 확신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청의노인은 이미 율원양의 존재를 짐작하고 있었던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율원양은 담담한 어조로 도화궁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궁주께서 본인을 알고 있다니 정말 다행이군요. 피차 상대방을 잘 알고 있으면 애기하기가 편해지는 법이오." 청의노인이 헛기침을 했다. "흠, 그렇다면 궁주께서는 노부가 누군인지도 알고 있겠구료?" 도화궁주는 그의 말에 움찔 하는 기색이었다. "물론 알고 있어요. 노인께서는 천하제일고수인 귀령검제 갈천악 노선배님이 아니십니까? 그리고 옆에 계신 분은 갈노선배님의 제자인 맹금봉 여협이 아니신지요?" 율원양은 힐끔 청의노인을 바라보았다. '저 노인이 귀령검제라니, 실로 명호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군.' 청의노인이 커다랗게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노부가 귀령검제임을 알면서도 궁주가 친히 내 앞에 나타날 줄은 몰랐소. 궁주는 혹시 노부가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너무 믿는 것이 아니오?" "호호호... 갈노선배님의 말씀이 옳아요. 세 분은 보통 독에 중독된 것이 아니거든요. 갈노선배님도 잘 알고 계실 거예요. 독심약왕의 절명독과 산공독은 천하에 해약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그러나 세 사람의 안색에는 전혀 변동이 없었다. 그들은 그녀의 말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도화궁주가 도리어 놀라버리는 것이었다. '아니 이 작자들은 만독불가침의 몸이라도 된단 말인가? 전혀 놀라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으니.' 그녀는 놀랍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매우 무안하기도 했다. 율원양은 담담한 가운데 매우 차갑게 입을 열었다. "궁주. 지난 이 년 동안 도화궁주 노릇을 하면서 이런 치사한 수법으로 육백여 명의 무림인들을 붙잡아 두었겠구려?"


"알면서 왜 물으시지요?" 이렇게 되면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有分數)였다. 갑자기 율원양의 안색이 만년빙굴(萬年氷窟)의 얼음벽처럼 냉엄하게 변해 버렸다. 공기를 얼어 붙일 듯한 살기가 그의 전신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 살기는 온통 도화궁주를 향하여 물밀듯 밀려갔다. "으헉."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일말의 경악성을 내지르며 몸이 굳어버렸다. 그의 살기를 접하는 순간,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무형의 압박에 내심 치를 떨었다. 좁지 않은 대청에 냉기서린 살기가 그득했다. 율원양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당신이 삼령 중의 하나인 만독음혈존보다 무공이 강하다고는 생각지 않소. 또한, 그보다 강해도 상관이 없소. 만독음혈존은 나의 삼성(三成) 내력도 받아내지 못하고 죽었으니까. 이 말을 하는 내 뜻을 궁주는 짐작하리라 믿소." 율원양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는 잠시 그녀를 물끄러미 주시하였다. 그의 어조와 우러나오는 위압감에 대청 안의 모든 것이 얼어버렸다. "으- 억." "으윽." 그에게서 쏟아지는 무형의 살기를 견디지 못한 여섯 명의 시비들이 피를 토하며 비칠대다 나가 떨어졌다. 귀령검제 청의노인과 제자인 맹금봉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또한 쏟아지는 살기를 감당 못할 정도였다. 살기를 감당하기 위해 귀령검제는 극도로 공력을 끌어 올리면서 속으로 탄식하였다. '검 한 자루로 만인을 굽어보았던 내가 일개 청년의 살기에 공력을 극한���지 끌어 올렸다면 천하의 어느 누가 나의 말을 믿어줄 것인가?' 백 육십 살이 넘은 천하제일고수 귀령검제마저 이 정도이니 가짜 도화궁주야말로 말해서 무엇하랴. 그녀는 완전히 공포에 질린 듯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바람도 일지 않았는데 무형의 살기에 의해 그녀의 몽사가 벗겨졌다. 몽사가 벗겨졌는데도 그녀는 아무런 감각을 못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이로 보아 그녀가 어떠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율원양의 냉막한 표정에 한 가닥 놀라는 기색이 서렸다. 도화궁주의 얼굴은 어젯 밤에 본 구천성모의 모습 그대로였다. 눈 앞의 여인도 아름다왔다. 처절하리만큼 예뻤다. 어제 본 구천성모와 어느 한 곳 틀리는 곳이 없었다. 다만 틀리는 점이 있다면 눈 앞의 여인에게서는 우아한 기품과 고아한 중년부인의 운치있는 매력이 없었다. 우선, 그녀에게서 받은 느낌은, 매우 잔인할 거라는 느낌이었다. 남에게 양보할 줄 모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배신이라도 할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율원양은 탄식을 했다. "당신은 후원에서 홀로 살고 있는 진짜 구천성모와 쌍둥이 형제인가 보구료." 그렇다. 눈 앞의 여인은 진실한 구천성모와 한날 한시에 태어난 쌍둥이 형제였다. 율원양은 혹시 그녀가 역용(易容)이나 공력으로 얼굴과 몸을 변형시킨 것이 아닌가 했으나 그녀는 본래의 모습이었다. "아니?"


도화궁주는 율원양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얼굴이 서늘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얼른 손을 얼굴로 가져가고는 그제서야 자신의 몽사가 벗겨진 것을 알았다. 율원양이 냉막하게 외쳤다. "궁주. 당신이 어떻게 하여 도화궁의 궁주가 되었는지 그 연유를 말해주시오. 그리고 무림인들을 독약으로 중독시켜 끌어모은 이유가 무엇이오? 내가 짐작하기에는 당신 혼자의 담량으로는 그만한 일을 저지를 만한 인물이 못되오. 틀림없이 당신을 조종하는 배후 인물이 있을 것이오. 그 배후 인물이 누구인지도 말해주시오." 율원양의 위엄있는 기상에 압도된 귀령검제는 아무 말 없이 율원양의 모습을 지켜 볼 뿐이었다. 맹금봉은 율원양의 신룡(神龍)같은 기개와 사자후(獅子吼) 같은 음성에 무한한 기쁨을 누리며 율원양을 주시하고 있었다. 도화궁주가 대청이 떠날갈 듯한 대소를 터뜨렸다. "오호호호--" 이 웃음은 경악과 두려움을 떨쳐버리는데 커다란 효과를 발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미친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율원양은 아무 말 없이 비릿한 조소를 입가에 지은 채, 도화궁주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한 번 기다려 주기로 했다. 그녀가 자신 앞에서 아무리 날고 뛴다 하여도 그녀는 일초지적(一招之敵)도 안되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 그녀의 웃음이 뚝 그쳤다. 안색이 매우 창백해졌다. 얼굴에 깔린 창백함이 그녀를 더욱 표독스럽게 만들었다. "영세무룡. 너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구나. 어젯 밤 도화궁에서 초청한 대환희여보살과 그의 제자들을 죽인 것도 다 네놈 짓이겠지?" 그녀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어졌다. 부드럽고 요염하던 말투가 냉랭하고 잔독(殘毒)한 음성으로 바뀌었다. "......!" 율원양은 여전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도화궁주를 바라보았다. 귀령검제가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돼지가 서역의 음식을 혼자 처먹어 와서 그 지역 인물들이 해마다 중원으로 식량을 꾸러 왔었는데 이제는 그런 일이 없어지겠군. 자네는 참 큰일을 했네 그려. 하마터면 중원사람들 마저 사해(四海)로 식량을 구하러 갈 뻔한 것을 자네가 막아주었네. 틀림없이 중원사람들은 앞으로 일어날 식량기근(食糧饑饉)에서 구해준 자네에게 모두 고마움을 표시할 걸세." 천하의 어느 누가 죽음과 공포의 대명사인 귀령검제에게 이만한 해학이 있다는 것을 알랴? 다른 장소 같으면 그의 말을 들은 사람은 틀림없이 대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웃지 않았다. 다만 맹금봉만이 약간 킥 하고 웃었을 뿐이었다. 도화궁주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영세무룡. 너의 물음에 답을 하기 전, 본 궁주가 탄주하는 단장인과 도화십팔비(桃花十八妃)가 펼치는 도화소혼무(桃花銷魂舞)를 견디어 낸다면 본 궁주는 네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모두 알려 주겠다." 율원양은 냉소를 쳤다. "그래?" "정한비파(情恨琵琶)를 가져 오너라." 여섯 명의 시비 중 비파를 들고 있던 시비가 그녀에게 공손히 건네주었다. 귀령검제는 흠칫 놀라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단장인(斷腸引)! 그는 단장인이라는 음률이 이백 년 전의 대기인들인 신안천기자와 영세일무존과 거의 어깨를 겨루던 세외음성 임천뢰의 독문절기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천뢰삼음(天雷三音)은 이백 년 전 일명 세외음성(世外音聖) 임천뢰(林天雷)가 남긴 광세음공(曠世音功)이었다. 임천뢰는 정한비파라 명명한 비파를 가지고 천하를 주유(周遊)했으나 적수를 만나지 못한 고수였다. 그의 적수는 오직 신안천기자와 영세일무존 두 기인 뿐이었다. 세외음성 임천뢰는 이들에게 각기 패배하자 비파의 줄을 끊고 은거했던 숨겨진 일화가 있다. 그런데 그 세외음성의 음공을 지금 도화궁주가 펼치려 하는 것이다. 단장인(斷腸引)! 성심곡(聖心曲)! 천뢰멸(天雷滅)! 이것이 천뢰삼음의 악보 이름이었다. 두 기인에게 패배한 후, 임천뢰는 더욱 음률에 심혈을 기울여 호풍환우(呼風換雨) 풍운조화(風雲造化)의 신선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설혹 그 정도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인간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지배하고 조수(鳥獸)까지도 조종할 수가 있었다. 그야말로, 생명체는 모조리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가공할 위력인 것이다. 그중 특히, 천뢰멸의 음공은 그 위력이 너무도 가공하여 주위 십 리 이내의 모든 생물을 죽일 수 있는 가공할 음공이라 세외음성 임천뢰도 일생에 두 번 밖에 펼치지 않은 정도였다. - 다음 권에 계속 -


b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