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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검패검 2 권

제 1 장.

무창. 무창은 호북성의 성도였다. 예로부터 장강을 끼고 있어 수로를 이용한 운송수단이 발달하였고 상업의 중심지로 번창하 였다. 무창은 인접해 있는 한구, 한양과 더불어 호북성의 가장 중요한 도시로 불리웠다. 황혼무렵, 쓸쓸한 석양이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지는 석양은 항상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그것은 석양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바로 황혼이 가까워질 무렵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짧으면서도 가장 찬연히 세상을 물들인다. 마치 유난히 짧은 인생의 젊은 시절과 같이...... 그렇다고 감동에 젖거나 애석해 할 필요는 없다. 지는 해를 붙잡아 두려고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붙잡아 둘 수 없는 일은 허다하다. 우선 그것의 무정함을 깨달아야지만 비로소 인생의 온유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황혼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무창성내로 들어서는 한 인영이 있었다. 그는 거치른 흑의를 입고 허리에는 검집도 없는 낡고 초라한 장검 하나를 달랑 메고 있었 다. 풀어헤쳐 허리부분까지 길게 내려온 흑발은 흑의와 어울려 웬지 무거운 분위기를 느끼게 했 다. 그는 별로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터벅터벅 무창성내를 걸어다녔다. 보아하니 음식점을 찾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번화한 무창성내의 이곳저곳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무슨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막연히 거리를 배회하는 부랑자처럼 그는 성내를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그의 발길이 한 군데서 우뚝 멈춰섰다. 담벼락이 길게 늘어선 무창성의 동북대로의 끝머리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은 작고 왜소한 몸집에 머리에는 허연 비듬이 가득 있었다. 눈에는 눈꼽이 덕지덕지하고 얼마나 세수를 하지 않았는지 얼굴에 땟국물이 주르르 했다. 남들이 보면 영락없이 거지로 알 것이다. 허나 그는 거지는 아니었다. 비록 다 찢어져 거의 식별할 수 없었지만 그의 옆에는 깃발 하나가 걸려 있었다. 깃폭은 더러운 대나무였고 깃발은 어디서 구했는지 색깔이 누렇게 변한 삼베였다. 그 위에는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악필이 휘둘러져 있었다. < 천상천하 만사물불통지! > 보아하니 그는 점을 쳐서 먹고 사는 노인 같았다. 허나 이렇게 지저분하고 꾀죄죄한 꼴상을 하고는 도저히 손님을 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노인은 옷통을 벗고 깡마른 몸을 드러내며 이를 잡고 있었다. "제길..... 이 놈은 잘도 쳐먹었는지 배가 피둥피둥하군......" 그는 살이 퉁퉁하게 오른 이 한 마리를 잡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는 톡톡 건드렸다. "재주도 좋다. 이놈! 노부는 이렇게 비쩍 말랐는데 네 놈은 노부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주 제에 이 렇게 살이쪄.....?" 그는 손톱 사이에 이를 집어넣고는 가볍게 으깼다. 찍! 이가 부숴지며 피가 튀어나왔다. "아이구 아까와라...... 내 피!"


노인은 더럽지도 않은지 그 피를 혀로 낼름 핥아 먹었다. 그때 그의 앞에 한 쌍의 발이 나 타났다. 그것은 평범한 신발을 신고 있는 평범한 발이었다. 거친 흑의, 기다란 장발, 낡은 장검 하나, 그리고 쓸쓸한 눈빛...... 흑의사내는 노인의 앞에 선 채 그를 내려다 보았다.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 라보더니 히죽 웃었다. 대문짝만한 누런 이가 드러나며 지독한 악취가 풍겨나왔다. "점을 보려고 하는가?" 흑의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묵묵히 응시했다. 그 시선을 받자 노인은 갑자기 몸이 가려운 듯 약간 떨었다. (이상한 녀석이군.....) 노인은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이라 억지로 미소를 띄며 손을 흔 들었다. "자. 앉게. 무엇이 알고 싶은가?" 흑의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이 노인의 전신을 쓰윽 훑어보았다. 노인은 더러운 손으로 등을 박박 긁었다. (제길..... 저 놈의 눈빛을 받으니까 왜 이렇게 근질근질하지?) 그때 흑의사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소." 그의 음성을 나직했으나 노인의 귀에는 아주 또렷하게 들렸다.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궁금한게 무엇인가?" 그리고는 그는 흑의사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손을 휘휘 내저었다. "우선 복채부터 내야하네. 물건에 관계되는 것이면 백냥, 사람에 관계된 것이면 이백 냥 일 세. 그 사람이 여러명이라면 복채는 조금 더 올라가지." 백 냥이라면 웬만한 사람은 일년 동안 편히 먹고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헌데 이 비루먹은 늙은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하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에헴. 자네는 보아하니 별로 넉넉한 것 같지 않군. 또 그리고...... 오늘의 첫 손님이니....... 에라 기분이다! 오십 냥만 내게." 그는 흑의사내가 비단 오늘 뿐 아니라 올해의 첫 손님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흑의사내는 천천히 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돈을 꺼내 노인에게 주었다. 허나 오십 냥은 아니었다. 그는 단 한냥의 동전만을 던져주었을 뿐이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진 동전 하나, 그것은 시중에서도 흔히 불 수 있는 동전이었다. 그러나 그 동전을 보는 노인의 눈은 벼락을 맞은 듯 흔들리고 있었다. 시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동전의 한가운데에 깨알만한 작은 글씨로 <풍> 자가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노인의 시선은 그 풍자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는 한동안 몸을 부르르 떨 었다. 문득 그의 입술 사이로 감회어린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마지막 동전을 회수하게 되는구나." 갑자기 그는 고개를 들어 흑의사내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조금전과는 달리 엄숙하게 가라앉 아 있었다. 그는 흑의사내를 바라보며 무뚝뚝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주자앙이 보내서 왔나?" 흑의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노인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아직도 죽지 않았나?"


"그는 당신만큼 건강하오." 흑의사내는 무심히 대답했다. 그는 물론 전옥심이었다. 그의 곁을 따라다니던 제일비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호북성의 이름모를 야산에서 해시신루를 익히기 위해 머물고 있는 것이다. 노인은 탄식을 터뜨렸다. "그런 몸으로 아직도 죽지 않았으니 그도 명이 길구나......" 그는 동전을 품 속으로 넣으며 말했다. "노부는 평생 단 세 사람에게 은혜를 입었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동전을 한개씩 주며 동 전을 가 지고 오는 사람에게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지. 두 개는 오래전에 회수되었다. 허 나 마지 막 한개는 십 여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노부는 주자앙이 죽은 줄로만 알았 지." 전옥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노인은 그를 힐끗 보더니 불쑥 물었다. "너는 노부가 누구인지 아느냐?" 전옥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호풍자 호불귀가 아니오?" 호풍자란 미친 사람을 뜻한다. 세상에 이런 이름으로 불리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 이다. 허나 의외로 노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노부가 바로 호풍자다!" 호풍자 호불귀! 그는 지난 십 여년간 강호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인물이었다. 허나 이십 년 전만해도 천하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행동이 괴이하고 무공이 추측을 할 수 없을 만큼 신비했다. 허나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기행이나 무공이 아니었다.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그 사람을 찾아내는 데에 이 세상에서 따를 자가 없었기 때문이었 다. 알려진 바로는 그가 어느 누구를 찾으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그 사람이 어디에 숨어 있어도 소용이 없다고 한다. 그의 사람을 찾는 솜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이었다. 호불귀는 가느다란 한숨을 쉬었다. "먼저 노부에게 동전을 가지고 찾아왔던 두 사람도 나에게 사람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했 지. 그 두 부탁을 이행하다가 하마터면 나는 죽을 뻔 했다. 허나 그래도 나는 그것을 완수했다. 보아 하니 너 도 노부에게 사람을 찾아달라는 것이겠지?" 전옥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호불귀는 다시 눈을 반짝였다. "노부는 주자앙이 언젠가는 사람을 보낼줄 알았다. 그는 무척 비범한 인물이기 때문에 노 부는 그 동안 그가 어떤 사람을 보내올 지 무척 궁금했었지. 헌데 막상 이렇게 보니......" 그는 말을 중단하고 전옥심을 빤히 바라보았다. 전옥심은 말없이 서있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했고 얼굴에도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래서 호불귀는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주자앙은 내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았군. 아주 괴짜가 왔어." 그는 신발 사이로 삐죽 삐져나온 더러운 발가락을 꼬불거리며 물었다.


"그래 네가 찾고 싶어하는 사람은 누구냐?" 전옥심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고자군이라 하오." 그 말에 호불귀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의 흐리멍텅하던 눈빛이 갑자기 무서울 정도로 빛났 다. "바로 그 아무도 종적을 알 수 없고 지혜가 천하에서 세 번째 안에 든다는 구천환유 고자 군 말이 냐?" "그렇소." 호불귀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비록 그의 종적이 신비해 천하제일의 신비인이란 말을 듣지만 노부는 그가 어디 있 는지 알 아내겠다. 이번 일은 재미 있겠군." 전옥심은 불쑥 물었다. "언제까지 찾을 수 있겠소?" 호불귀는 히죽 웃으며 되물었다. "언제까지 찾았으면 좋겠느냐?" "빠르면 빠를수록 좋소." 호불귀는 귓밥을 손가락으로 후비며 헤헤거렸다. "석달 후가 어떠냐?" "좋소." "그럼 오늘부터 정확히 석달 후에 노부가 너를 찾아가겠다." "당신은 그때 내가 어디에 있을지를 어떻게 알 수 있소." 호불귀는 묘하게 웃었다. "헤헤..... 노부의 솜씨를 못믿겠다는 거냐? 석달이 아니라 삼십년 후라도 네가 어느 곳에 있는지 를 알 수 있다." 전옥심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리려 했다. 그때 호불귀는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 한가지만 묻자." 전옥심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엇이오?" 호불귀는 눈을 반짝 빛내며 흥미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로 고자군을 찾는 것이냐?" 전옥심은 침묵을 지켰다. 호불귀는 다시 물어보았다. "설마 그가 주자앙을 그 꼴로 만든 흉수는 아니겠지? 그들은 의형제 사이였는데....." 전옥심은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허나 침묵은 곧 시인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호불귀는 나직하게 탄식했다.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더니..... 그토록 친했던 그들의 사이도 결국은 비참 한 결 말을 맞고 말았구나....." 전옥심은 불쑥 입을 열었다. "할 말이 그것 뿐이라면 그만 가보겠소." 호불귀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래 어서 가거라. 이 무심한 녀석아! 젊은 놈이 벌써부터 그렇게 말이 없어서야 어디 여 자가 달 라 붙겠느냐?" 그는 더 이상 전옥심이 꼴도 보기 싫다는듯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전옥심은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올때와 마찬가지 걸음으로 길 저쪽으로


사라졌다. 그의 몸이 골목 너머로 사라지자 호불귀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는 한동안 전옥심이 사라진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문득 그의 두꺼운 입을 뚫고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주자앙은 어디서 저런 괴물같은 녀석을 데려 왔을까? 보아하니 그 때문에 무림은 또 차례의 폭풍이 일겠구나....."

그는 마침내 돌아왔다. 하늘은 검은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 금시라도 빗방울이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는 멍하니 개봉성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칠년 만이었다. 칠년! 그것은 정녕 긴 세월이었다. 그냥 지내면 빨리 지나갈 수도 있었다. 허나 기다리며 지낸다면 죽음같이 긴 나날인 것이다. 그가 어른이 된 탓일까? 개봉의 하늘조차 전과 달라보였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낮아졌다. 높다란 개봉의 성벽을 바라보는 그의 심정은 그 자신도 알지못 할 정도로 미묘한 것이었다. 항상 쓸쓸한게 반이던 그의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어 지 금 그의 심사가 어떠한지를 종잡을 수 없게 했다. 개봉...... 그리고 황가장! 그곳은 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달콤한 추억이 있었고 가슴을 깎는 고통이 있었다. 평생 풀기 어려 은과 원이 마구 얽혀 있었다. 그는 무엇때문에 이곳까지 왔을까? 과거의 사랑을 못잊어서 일까? 허나 지금은 모두 흘러갔을 뿐이다. 다시는 잡을 수 없는 추억속의 한 부분인 것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그리움과 외로움 뿐, 그리움은 고뇌스러운 것이지만 그리움마저 없다면 그는 이 미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도 차면 기울듯이 정도 농후해지면 얄팍해지는 법일까? 그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두 눈을 실명당했을 때의 고통스런 기억을 떨쳐 버릴 수 가 없었 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째서 원한이란 은혜보다 잊기가 어려운 것일까?" 휘잉! 한줄기 차가운 바람이 그의 흑의를 펄럭이며 지나갔다. 전옥심. 그는 말없이 개봉의 성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세월은 흘렀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황가장의 주변은 예전과 조금 달라지지 않았다. 허나 황가장이 있던 곳은 쓸쓸한 폐허로 변해 있었다. 전옥심은 주위 사람들에게서 황가장 의 장주 인 황지원이 모든 재산을 사위인 위종산에게 불려주고 은퇴해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위종산은 개봉의 남쪽에 살고 있었다. 전옥심은 위가장의 정문을 바라보며 묵묵히 서있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마음을 결정할 수 가 없었다. 이대로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그들 만나야 할지......


허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은과 원이 생겨 났으니 당연히 그 귀결을 맺어야 할 것이다. 설사 그 결말이 어떻게 되더라도 말이다. 그는 천천히 위가장의 정문으로 다가갔다. 그때였다. 삐걱! 위가장의 문이 조금 열리며 한 소동의 머리가 대문 사이로 쑥 나타났다. 그는 이제 갓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작은 소동이었다. 눈이 커다랗고 둥글어 총명해 보 이면서도 귀여웠다. 소동은 커다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아무도 없음을 알고는 문을 열고 살짝 밖 으로 나왔다. 그는 질이 좋은 화의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두 갈래로 땋고 앞머리를 다시 묶어 ���린아이다운 치기감을 느끼게 했다. 소동은 위가장을 나오다가 그 앞에 서있던 전옥심을 발견하고는 흠칫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는 전옥심을 찬찬하게 살펴보다가 갑자기 불쑥 물었다. "아저씨는 누구야?" 전옥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동을 바라보았다. 소동은 귀여운 얼굴을 찌푸리며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왜 우리 집을 보고 있는거야?" 전옥심이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집이 너의 집이냐?" 소동은 두 손을 허리춤에 척 올리고는 영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개봉에서 제일 부자인 위가장이 바로 우리집이야." 전옥심은 다시 물었다. "네 아버지가 위종산이냐?" 소동은 갑자기 성을 내며 달려와 전옥심에게 발길질을 했다. "왜 우리 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그래? 남들처럼 위대인이라고 불러!" 전옥심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소동은 그가 말을 하지 않자 더욱 성을 냈다. "빨리 잘못했다고 사과하지 않을거야?" 그의 귀여운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는 숨을 씨근씨근거리더니 갑자기 눈빛을 영악하게 반짝이며 말했다. "아저씨는 이 근처 사람이 아니구나. 그래서 우리 아버지를 잘 모르지?" 그 목소리는 언제 화를 내었느냐는 듯 부드러웠다. 전옥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소동은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어른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가 용서해주지. 몰라서 한 일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갑자기 소동은 말을 하다말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은 전옥심의 등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거......" 전옥심은 몸을 돌려보았다. 그의 뒤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때였다. 쐐애액!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쇳털같은 암기가 뻗어나와 그의 몸에 격중었다. 동시에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헤헤헤...... 너는 이제 죽었다." 전옥심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소동은 오른손에 길죽한 죽통을 든 채 간교한 웃음을 띄고 있었다. 그는 오른손을 흔들며 전옥심을 노려보았다. "이건 무림인들이 쓰는 악독한 암기야. 곧 넌 죽을거야." 전옥심은 씁쓸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이런 짓을 했지?" 소동은 악동답게 히죽 웃으며 입을 놀렸다. "우리 아버지를 앝보는 놈은 용서할 수 없어. 다른 지방 사람도 마찬가지야. 우리 아버지


를 몰라 봤다는 게 벌써 죽을 죄를 진거야." 전옥심은 소동의 말에 가슴이 아파왔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다워야 한다. 이것은 그가 고통 속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인생의 무게를 알았다. 그래서 항상 나이보다 조숙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불행했던 것이다. 그는 어린아이답게 응석을 부리고 친구들과 같이 뛰어놀고 싶었으나 아무도 그의 응석을 받아주거 나 같이 놀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우울하고 말이 없게 되어 버렸다. 소동은 응석을 받아주고 자신과 놀아줄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전옥심으로서는 영원히 가 질 수 없 는 귀중한 행복이었다. 헌데도 소동은 나이답지 않게 영악했다. 전옥심을 속이고 암기를 발출한 수법은 어린아이답지 않게 간악한 것이었다. 이것은 소동을 위해서나 세상을 위해서나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그는 장차 커서 배워도 될 것을 너무 빨리 배워 버린 것이다. 남을 속인다는 것을. 소동은 한동안 헤헤거리며 웃더니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왜 쓰러지지 않지?" 그는 자신이 들고있는 죽통을 흔들며 그 안을 들여다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쇄혼침을 맞으면 모두 피를 토하고 죽던데......" 전옥심을 불쑥 물었다. "너는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죽인 적이 있느냐?" 소동은 득의만면하게 웃었다. "그럼. 벌써 다섯 명이나 죽였는걸. 모두 우리 아버지를 흉본놈들이야." 전옥심은 어린아이에게 이런 흉기를 준 인물이 가증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물었다. "누가 네게 그것을 주었느냐?" 소동은 고개를 까딱까딱거리며 입을 조잘거렸다. "아버지의 친구인 다비수 송광 아저씨야. 내가 가지고 놀 장난감을 달라고 하자 이것을 가 지고 있 다가 나쁜 사람들이 있으면 혼내주라고 했어." 전옥심은 문득 탄식을 했다. "네 눈에는 내가 나쁜 사람으로 보이냐?" 소동은 싸늘하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나쁜 사람이야." 소동은 역시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는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기질이 남아 있다는 것은 남아있지 않는것에 비해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없었다. 소동은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말 이상한데? 벌써 쓰러질 때가 되었는데......" 전옥심은 천천히 왼 손을 내밀었다. "너는 이것을 찾는거냐?" 그의 손바닥에는 쇠털같은 암기 일곱 개가 놓여져 있었다. 소동은 그것을 보더니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놀라는 눈으로 전옥심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헤헤거렸다. "헤헤...... 이제보니 아저씨는 무공을 익힌 사람이구나...... 어쩐지 별로 놀라지를 않더라." 그는 얼굴 가득 환하게 웃으며 전옥심을 바라보았다. 어린아이다운 아주 티없는 웃음이었다. 누구라도 이런 소동을 만나면 귀엽고 사랑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그때 소동은 갑자기 손에 들고 있는 죽통을 전옥심에게 마구 쏘았다. 쐐애애액! 소동은 암기가 전옥심의 몸에 맞았는지 안맞았는지도 보지않고 급히 대문으로 뛰어 들 어갔다. 쾅! 그는 문을 굳게 잠그고 문 너머로 욕지거리를 던졌다.


"이 나쁜놈아! 이 위천당이 그렇게 순순히 항복할 줄 알았느냐?" 전옥심은 가만히 서있었다. 그의 발밑에는 솜털같은 암기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직 세상물정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악에 물들게 한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아무 것도 모 르는 어린아이에게 흉기를 맡겨 마구 사람을 살해하게 내버려둔 어른들이 미웠다.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불행했는데 저 아이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행했 다. 전옥심은 갑자기 이를 악물며 몸을 날렸다. 휙! 그는 위가장의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흑의가 어두워오는 하늘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한 사나이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벌써 술에 취한 듯 얼굴이 시뻘갰다. 그래도 그는 쉬지않고 술병을 들이키고 있었다. 그의 발 아래에는 십 여개의 술병이 뒹굴 고 있었 고 값비싸 보이는 옷에는 오물이 잔뜩 묻어 있었다. 벌컥벌컥! 취한은 미친 듯이 술을 들이켰다. "크으...... 흐흐...... 정말 웃기는 세상이군......"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킬킬대며 술을 마셨다. 미처 입속으로 흘러들어가지 못한 술 이 그의 입을 타고 목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래도 그는 연신 술을 들이켰다. 그의 나이는 이십대 후반이었다. 전에는 그래도 상당히 준수했을 만큼 얼굴의 윤곽은 뚜렸 했다. 허나 이미 벌겋게 주독이 오른 그의 얼굴은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흐흐...... 돈도 있다...... 부귀도...... 권세도 있다! 허나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는 툴툴거리며 웃었다.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져 우는건지 웃는거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 다. "흐흐....... 마누라의 마음도 사로잡지 못하는 놈이...... 하남제일의 귀공자라고......? 키득키 득......" 그의 얼굴은 술과 땀과 눈물로 뒤법벅이 되었다. 그는 시뻘건 눈으로 허공을 쏘아보았다. "흐흐...... 천하에 부러운 것이 없던 위종산이...... 겨우 그까짓 계집 하나 때문에......." 취한은 들고있던 술병을 휙 집어던졌다. 팍! 술병이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그 바람에 술병에 담겨있던 술이 사방으로 튀었 다. 그 술은 한 사람의 옷에도 튀었다. 거칠은 흑의. 흑의를 입은 사람은 키가 헌칠한 청년이었다. 취한은 그가 언제 들어왔는지 몰라 흠칫했다. 그는 흐릿한 눈을 들어 흑의사내를 바라보았다. 허나 이미 잔뜩 취해 있는지라 흑의사내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누구냐?....... 송광인가.....?" 흑의사내는 말없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취한은 그 눈빛이 어디서나 낯이 익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 번 보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 독특한 눈빛. 갑자기 취한은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겼다. (서...... 설마...... 그럴 리가......) 그는 흐릿한 눈을 문지르며 다시 자세히 흑의사내를 바라보았다. 먼저 들어온 것은 헌칠한 키였다. 그리고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흑발....... 흑발사이로 반 듯한


이마. 이마의 아래에 있는 그 우울한 듯한 눈빛...... 우뚝한 코....... 굳게 다물어진 입 술.......취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전신이 후들거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그는 분명 눈이 멀었거늘......" 취한은 자신이 본 것이 환상이길 바라며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흑의사내는 그대로 있었다. 그 슬픈 듯한 눈만이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취한은 몸을 격렬하게 떨었다. 두려움인지 공포인지 모를 감정이 그의 전신을 불태웠다. "저....... 정말 너냐?" 그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 흑의사내는 말이 없었다. 취한은 휘청거리는 몸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다시 물었다. "저....... 전옥심! 정말 네 놈이냐?" 이미 취기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취한, 아니 한때는 위종산이라고 불리웠던 사내는 흑의사내를 보며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오랜만이군." 그 음성은 아주 나직했다. 허나 위종산의 귀에는 벼락치 듯 들리는 것이었다. 그의 눈이 툭 불거졌다. 그는 입으로 침을 질질 흘리며 중얼거렸다. "저....... 정말이구나....... 네놈이 살아 돌아왔구나......" 전옥심은 그동안 그토록 자신의 몸을 짓누르던 원한의 불길이 점차 사그러지는 것을 느꼈 다. 위종산은 이미 폐인이 되어 있었다. 오만하고 언제나 자신만만했던 그의 모습은 흔적도 찾 기 어려 웠다. 다만 술에 찌들은 폐인 한 사람만이 그의 앞에서 떨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왜 사람들은 불행해지려고 애쓰는 것일까?) 전옥심이 말없이 가만히 있자 위종산은 갑자기 악을 썼다. "이놈! 잘왔다. 과거의 원한을 갚으러 왔겠지? 이제는 나보다 힘이 더 세겠구나.......!" 그는 처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죽여라..... 나를 죽여라! 옛날의 원한을 갚아야 하지 않느냐?" 위종산은 실성한 듯 키득키득 웃었다. 이상하게도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연화는 이제 내 여인이 되었다. 아무도 내게서 그녀를 떼어가지는 못한다. 네놈도 마 찬가지 지......!" 그는 갑자기 발악하듯 외쳤다. "그년의 마음따윈 문제도 안돼...... 단지 그녀는 이제 내 여자가 되었고 내 아이를 낳았다 는 것 뿐이야!" 전옥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달리 뭐라고 할 말도 없었다. 위종산은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놈! 나를 죽여라....... 나를 죽여......!" 그의 목소리는 울부짖는 듯 했다. 그는 벌겋게 핏발선 눈으로 전옥심을 보며 말했다. "나를 죽여다오....... 전옥심! 제발 나를 죽여줘....... 넌 벌써 과거의 원한을 잊었느냐? 애인 을 빼앗기고 눈을 뽑힌 그 원한을 잊어버렸느냐?" 전옥심은 아무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때였다. 방문이 소리도 없이 열린 것은........그리고 그녀가 들어왔다. 황연화.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칠 년전 전옥심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그 청초하면서도 깨끗한 모습은 비록 약간 사라졌지 만 그녀 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변한 것이 있다면 좀더 나이를 먹고 성숙해졌다고나 할까? 그녀가 나타나자 전옥심과 위종산은 몸을 굳혔다.


제 2 장.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기쁨도 괴로움도 보이지 않았다. 전옥심의 얼굴처럼 무심했다. 잠시 그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들이...... 쌓였던 사연들이 많을텐데도 이상하게도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전옥심은 슬펐다. 그들 사이에는 너무도 큰 공백이 가로 놓여 있었다. 단 한번에 뛰어넘기에는 칠 년이란 세월은 너무도 커다란 것이었다. 침묵은 왕왕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기 마련이다. 위종산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여보......" 황연화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전옥심을 보고 있을 뿐이다. "당신은 눈을 고쳤군요." 문득 그녀의 입술을 뚫고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옥심은 멍하니 그 음성을 들었다. 이 음성은 한때는 그만을 위해 울렸던 음성이었다.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를 위해 살겠다고 속삭이던 목소리였다. 허나 이제 그것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흘러간 목소리가 되고 만 것일까? 전옥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오." 그의 음성은 아주 나직했다. 황연화는 그 목소리를 듣자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만큼 미약 하게 몸 을 떨었다. 그의 음성은 언제 들어도 특색이 있었다. 항상 나직하게 가라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주 독특한 음색을 띠고 있어 들을 때마다 애잔한 분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지금도 그랬다. 오랜만이라고 말하는 그의 나직한 음성에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애수가 담겨져 있는 것이 다. "당신은 많이 변했군요." 그녀의 말에 전옥심은 문득 얼굴을 매만졌다. 그는 손가락으로 거칠게 수염이 자란 턱부위 를 쓰다 듬다가 코를 만졌다. 그의 손가락은 우뚝 솟은 코를 타고 올라가 광대뼈를 지나 눈에 닿았 다. 잠시 그의 손가락은 눈부위를 어루만졌다. 그러다가 그의 손은 뺨을 타고 내려와 천천히 얼굴을 떠났다.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까." 황연화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아주 헌칠해진 그의 키를....... 거친 흑의를 감 싸인 건장한 그의 몸을...... 그리고 여전히 쓸쓸한 그 눈을 들여다 보았다. 그녀의 눈이 아주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녀는 속삭이는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당신의 눈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요." 전옥심은 그녀도 여전히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었다. 허나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황연화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자신도 모르게 가느다랗게 떨려오고 있었다. 저 눈빛....... 허무한 듯한 태도....... 우울한 얼굴.......그것은 그녀가 꿈속에서도 그렸던 얼 굴이었다. 얼마나 많은 밤을 고통으로 지새며 그려보았던 모습인가? 예전에는 그 모습들이 모두 그녀의 것이었다. 우울한 얼굴에 ���득 담긴 웃음, 그녀를 사랑 한다고


속삭일 때의 그 독특한 목소리, 그리고 쓸쓸한 눈빛까지도 모두 그녀가 소유할 수가 있을 까? 그녀는 문득 가슴 깊은 곳에서 울음이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전옥심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입술이 떨리고 눈가에는 가느다란 이슬이 맺히기 시 작했다. 전옥심의 입가에 우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원래 이곳에 오지 않으려고 했었소." 그는 천천히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그런데 문득 언젠가 한번은 이곳에 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소." 황연화는 소리내어 부르짖고 싶었다. 그녀가 그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그를 지금도 변치 않고 사랑하며 그와 함께 영원히 있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허나 그녀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애꿎은 눈물만이 그녀의 두 볼을 적실 뿐이었다. 전옥심은 천정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천정은 훌륭한 장원에 어울리지 않게 한쪽 구석에 거미줄이 쳐 있었다. 거미뿐만 아니라 사람도 역시 거미줄을 친다.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사방에다 거미줄을 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그 나름대로의 거미 줄이 있 다. 그리고 그 자신은 평생동안 그 거미줄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그 거미줄이 원래부터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만약 그 거미로 인해 자신의 몸이 칭칭 감겨 버리게 된다면......? 그래도 거미줄에 매달려 있어야만 하는가? 전옥심은 거미줄을 바라보며 조용히 뇌까렸다. "나는 모든 은원을 종결지으러 왔소." 거미줄로 인해서 자신의 몸이 꼼짝 못하게 되어 버린다면 미련 없이 거미줄을 잘라내야만 하는 것 이다. 황연화는 뭄을 바르르 떨었다. 어떻게...... 어떻게 종결 짓는단 말인가? 그와 자신과의 사랑......? 그와 위종산과의 원한은......? 전옥심은 나직하게 탄식을 했다. "원한은 없소. 그건 이젠 지나간 과거의 일일 뿐이오." 그의 말에 황연화는 벼락을 맞은 듯 전신을 떨었다. 전옥심은 침울하게 말했다. "원한은 비록 잊기 어려 것이지만 나는 이제 그것을 잊겠소. 또한 당신도 잊겠소.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오." 황연화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서 있었다. 그녀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나를 잊겠다고......? 나를......?) 지난 세월 동안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하루 하루를 고통속에서 보냈던 황연화. 다시는 과거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그를 기다렸다. 헌데 이제는 그 기다림마저도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것인가? 문득 그녀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호호호......" 그녀는 마치 실성한 것처럼 정신없이 웃었다. 허나 그녀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호호호호......" 그녀는 처절한 웃음을 터뜨리며 방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위종산은 급히 그녀의 뒤를 따라 갔다.


"여보!" 전옥심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텅빈 방안에 그녀의 울음보다도 더 처절한 웃음소리가 메아리 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휘잉-----! 차가운 밤바람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허나 전옥심은 실성한 듯이 멍하니 걷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녀와의 달콤했던 추억도..... 그 쓰라린 이별도...... 허무한 재회도...... 아무것도 머리에 떠 오르지 않았다. 그는 무작정 걸었다. 발이 부러지도록 걷고 싶었다. 그때 그의 앞으로 한 사나이가 불쑥 나타났다. 그는 비단 화복을 입은 중년인이었다. 아니 중년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나이를 많이 먹었다. 그는 반백의노인이었다. 전옥심은 그의 얼굴을 보더니 몸을 우뚝 세웠다. "오랜만이군요." 반백의 노인은 한동안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문득 그는 감회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 었다. "많이 늙으셨군요." 화복을 입은 반백의 노인은 황지원이었다. 지난 세월동안 그는 수 십 년을 살아온 듯 늙어 있었다. "옛날 황가장이 있던 곳에서 너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길래 반신반의 했었다. 다신 나타나 지 않기 를 바랬는데......." 전옥심은 할 말이 없어 다물었다. 황지원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위종산을 만났느냐?" 전옥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딸도?" "그렇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했느냐?" "그들은 안에 있읍니다." 황지원은 문득 길게 탄식을 했다. "너는 원래 좋은 놈이다. 그들을 내버려 둘 줄 알았지." 그는 잠시 어두운 하늘을 바다보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허나 나는 네게 미안한 일을 저질러야겠구나......" 전옥심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우울한 눈빛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황지원은 모질게 말했다. "네가 살아 있으면 내 딸 아이는 영원히 행복을 찾을 수 없게 된다.네 그림자를 지울 수가 없지."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 인물이 어둠속에서 불쑥 나타났다. 그는 푸른 옷을 입은 삼십 대 초반의 사나이였다. 키가 약간 작고 눈이 쭉 찢어져 잔인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등 뒤에는 커다란 마대 자루가 들려 있었다. 황지원은 청의사내를 돌아보며 천천히 말했다. "이 사람은 위종산의 친구다. 그는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다시 길게 탄식을 했다. "옥심. 너는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더 이상 있기 싫은 듯 고개를 흔들며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전옥심은 말없이 그의 뒤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음독한 눈에는 잔인한 빛이 뻗어올랐다. "흐흐...... 네 놈은 조금 전 당아를 놀린 놈이 아니냐?" 당아란 위종산의 아들인 위천당을 말하는 것이다. 전옥심은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가에 서늘한 빛이 감돌았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당신이 어린 아이에게 함부로 악독한 암기를 줘 사람을 죽게 만든 다비수 송광이오?"


청의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흐흐...... 제법 안목이 날카롭군. 내가 바로 다비수 송광이다." 다비수 송광은 요근래 호남성 일대에서 혁혁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절정고수였다. 그는 이름 그대로 수 십 가지의 암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해 많은 무림인들을 두려움에 떨 게 하는 인물이었다. 전옥심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어쩔 셈이오?" 송광은 흉측한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 과거의 친분을 빙자해서 잘 살고 있는 남의 유부녀를 유혹하려 한 놈은 죽어 마 땅하 다. 안됐지만 네놈은 위종산의 행복을 위해서도 죽어줘야겠다." 전옥심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서늘한 눈길을 받자 송광은 괜히 마음이 떨려왔다. (보통 놈이 아니구나. 조심해야겠는걸......) 그는 전옥심의 눈빛에 찔끔거리며 그를 경솔하게 생각했던 마음을 고쳐 먹었다. "나는 아직까지 네 놈의 이름을 몰랐구나. 네 놈은 누구냐?" 전옥심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송광은 문득 조금 전 황지원이 그를 옥심이라고 부른 것을 생각해내고는 눈빛을 이상야릇 하게 빛 내며 그의 흑의와 허리에 찬 녹슨 장검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빛이 약간 달라지며 음성이 가늘게 변했다. "요 근래 강호에 한 명의 검마가 나타났다고 하던데 네가 혹시 그 전옥심이 아니냐?" 그제야 전옥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이 빠르군." 송광의 안색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더니 눈빛이 더욱 흉악하게 빛났다. "흐흐...... 하도 소문이 자자하기에 어떤 자인가 했더니 별 다른 놈은 아니었군." 그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경솔할 수가 없었는지 마대를 풀어 그 속에서 칠팔 개의 색깔 이 다른 표낭을 꺼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하나 하나 몸에다 묶는 것이었다. 전옥심은 묵묵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두운 하늘을 이고 선 채 우뚝 서 있는 모습은 마치 하나의 철탑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송광은 준비가 끝나자 싸늘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일전에 하남칠검을 한꺼번에 죽인 적도 있다. 네가 하남칠검을 한데 합친 것보다 강하다고 는 믿지 못하겠다." 검을 쓰는 자에게는 송광과 같은 암기의 명인은 천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송광이 자신만만 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전옥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심지어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묵묵히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송광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는 지금까지 많은 적들과 싸웠다. 그러나 어떤 고수를 막론하고 그와 대적할 때에는 눈을 자기의 두 손에 집중시켜 이동하는 변화를 주시했다. 그러나 전옥심은 뜻밖에도 눈을 허공에 고정시킨 채 그의 손을 지켜보지도 않는 것이 아닌 가? 송광은 화가 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흐흐...... 이 놈이 죽을려고 환장을 하는군......) 전옥심은 심지어 검을 뽑지도 않았다. 마치 삶의 의욕을 잃고 자포자기에 빠진 사람같았다. 스윽! 송광의 두 손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빨리 움직였다.


그의 두 손은 순식간에 많은 손으로 변하였다. 다비수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순간이었 다. 이것이 바로 그가 암기를 발사하는 기본 동작이었다. 먼저 두 손을 어지럽게 휘둘러 상대방의 눈을 현혹시킨 다음 암기를 던지는 것이다. "아얏!"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기합과 함께 십 여개의 싸늘한 광채가 전옥심을 향해 폭사되었다. 송광은 전옥심이 호남 제일의 고수라는 우문양을 죽여 검마라고까지 불리우는 고수라는 것 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전 공력을 다한 수법으로 암기를 발사했다. 그것은 연환십이참이라는 수법이었다. 열 두개의 각기 다른 암기가 마치 풍차처럼 회전하며 날아가는 것이었다. 송광은 아직까지 이 수법을 펼쳐 상대를 죽이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순간, 전옥심의 몸이 휘청거더니 갑자기 한줄기 광채가 번쩍였다. 동시에, "으악!"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나의 장검이 송광의 양미간을 뚫고 뒤통수로 빠져 나온 것이 다. 전옥심의 이 수법은 능광백팔형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비홍단혼이었다. 멀리 있는 적을 장검을 던져 살해하는 절정의 수법인 것이다. 전옥심은 송광의 앞으로 걸어가 시체에서 장검을 뽑았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장검을 허리춤에 다시 찼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곳을 벗어나려 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다시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위종산이었다. 헌데 그의 얼굴은 마치 넋이 빠진 듯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전옥심은 움직이려던 몸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위종산은 확실히 이상해 보였다. 눈은 텅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입가로는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전옥심은 심혼이 빠져나간 듯한 그의 얼굴에서 뭔지모를 불안을 느꼈다.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문득 위종산은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잘됐어...... 잘됐어...... 아주 잘됐다고......" 갑자기 그는 미친 듯이 웃어젖혔다. "크하하하...... 정말 잘된 일이야......" 그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웃더니 전옥심을 바라보았다. 전옥심은 그의 눈이 텅 빈 것을 보 고 흠칫 놀랐다. 그의 동공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위종산은 그를 보며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전옥심. 넌 이제 영원히 그녀를 빼앗아 갈 수 없다...... 흐흐...... 아주 영원히 말이야......" 전옥심은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위종산의 입에서 차라리 울음이라고 해야 할 웃음 터져 나왔다. "흐흐...... 그녀는 죽었다...... 죽어 버렸다고......" 전옥심의 헌칠한 몸이 휘청거렸다. 그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했다. 그는 머릿속이 터져 나간 것 같아 한동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위종산은 정신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흐흐...... 네가 나간 후 그녀는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갔지...... 기척이 없길래 들어가 보니 까 그녀는 목을 메고 죽어 있던군...... 죽어 버린거야...... 죽은 거라구......" 그는 다시 웃었다. "잘됐어...... 정말 잘된 거라구...... 크하하......" 그는 미친 듯이 웃었다. 아니 절반쯤 미쳐 있었다. 슬픔과 분노로 이미 반쯤은 미쳐 있었다. "헤헤헤..... 잘 죽었어...... 이젠 아무도 그녀를 빼앗아 갈 순 없지...... 다른 놈에게 빼앗길


걱정으로 밤을 지샐 필요도 없어...... 정말 잘 죽었지......" 어느새 눈물은 그의 뺨을 적시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전옥심을 바라보았다. "이제 속이 시원하나......? 그녀가 죽으니까 속이 후련하지?" 그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전옥심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달려드는 위종산의 팔을 뿌리치고 휘청거리며 걸어갔다. 위종산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전옥심은 비틀거리며 어둠속으로 사라져 갔다. 사방은 칠흑같이 검었다. 휘이잉! 차가운 바람이 불자 후두둑 비가 떨어졌다. 위종산은 그 비를 맞으며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의 눈이 서서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이 가볍게 떨리더니 점차 몸이 떨려왔 다. 그는 전신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전옥심이 사라진 곳을 노려보았다. "모든 건 그놈 때문이다..... 그놈 때문에 연화가 죽고 말았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며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 놈만 나타나지 않았어도 그녀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음성은 나직했지만 웬지 오싹 소름이 끼치는 것이었다. 어찌보면 넋두리 같기도 했고 어찌보면 세상을 한탄하는 저주같기도 했다. "전옥심...... 네 놈을 용서하지 않을 테다...... 내 전 재산을 다 바쳐서라 결코 네 놈을 용서 하 지 않겠다." 그는 허공을 바라본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또 한 사람이 비를 맞고 있었다. 위천당-----. 이제 겨우 나이 여섯 살의 소동. 허나 그의 얼굴은 빗불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그는 어두운 구석에 멍하니 선 채 자신의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엄마가 죽었다고......?)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을 단 한 번도 안아주지 않던 엄마였다. 그 때문에 그는 다른 여인의 젖을 먹고 자라야만 했다. 응석을 부릴 나이에도 놀아줄 사람이 없어 악인들의 틈에 끼어 흉기를 가지고 어울려야만 했다. 그녀는 그를 싫어했다. 그의 아버지를 싫어한 만큼 그를 싫어했다. 그는 태어나지 않았어야만 했을 아이였다. 자기를 싫어하고 태어난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안아주지 않던 그녀도 결국 죽어버렸다. 그런데도 그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아직 세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여섯 살 꼬마가 눈물 을 흘린 다는 건 좋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그게 진정으로 슬퍼서라면 그 아이의 인생이 너무 불행하다 고 밖에 표현할 말이 없을 것이다. 쏴아아......무정한 비는 언제까지고 앉아있는 두 부자의 모습을 감춰버릴 듯 퍼붓고 있었다.

제 3 장.

주루의 주인은 구석진 자리를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개봉성 밖의 허름한 술집이었다. 그는 빗소리를 들으며 술잔을 들이키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벌써 대 여섯 개의 술병이 널려져 있었다. 그는 비를 흠뻑 맞은 채 주적주적 들어와서는 술만 마시고 있는 것이다.


(이상한 사람이군, 비가 이렇게 오는 데 집에 갈 생각은 하지않고 술만 마시다니.....) 주인은 흑의사내의 전신을 쓰윽 훑어보고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거친 흑의를 입고 있었다. 그것은 시중에서 파는 옷 중에서 가장 싸구려에 속하는 것 이었다. 허리춤에는 그냥 주어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만큼 낡은 철검이 달랑 매어 있었다. (제길...... 혹시 돈도 없는 빈털터리 아냐?) 주인은 투덜거렸다. 허나 비가 오니 자신의 마음도 괜히 울적해져 그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가만히 있었다. 쏴아아아......비는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듯 퍼부어대고 있었다. 주인은 팔짱을 낀 채 창 문 너머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았다. "억세게도 퍼붓는군. 아주 세상을 물바다로 만들려나 보지?" 내리는 비를 보고 있자니 그는 문득 오래전에 죽은 마누라 생각이 났다. 그는 괜히 코가 시큰거리는 것을 느끼고 코를 핑하니 풀었다. "바보 같은 마누라...... 하필이면 비가 오는 날 죽어 이렇게 생각나게 만들지?" 그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마음이 울적해져서 자기도 술병을 하나 갖다놓고 들이키기 시작 했다. 쓴 죽엽청이 목 안으로 넘어가자 가슴이 후끈거렸다. "마누라 생각이 날 때는 술이 최고란 말이야......" 주인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다시 한 잔을 들이켰다. 그는 흑의사내가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마누 라와의 즐거웠던 추억을 회상하며 혼자서 술잔을 기울였다. 쏴아아......비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씻어내려는 듯 그치지 않고 내렸다. 전옥심은 멍하니 그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였던가...... 그 날도 비가 이렇게 퍼붓고 있었다. 그는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황가장 의 작 은 방 안에 누워 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프고 고통스러웠었다. 그래서 그는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 퍼붓는 비를 맞으며 한동안 서 있었다. 그때 그녀가 다가왔았다. "사랑해요......" 그녀의 나직한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나를 데리고 가줘요.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겠어요." 그녀의 진주처럼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는 당신을 떠나서는 살 수 없어요. 나를 데리고 가줘요......" 그때 그는 무어라고 대답했었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웃었던가? 아니면 눈물을 흘렸던가? 기억이 흐릿해지고 눈앞이 가물거려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허나 그때 그는 행복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것 처럼 행복했었다. 비록 고통스럽고 고뇌스러웠지만 그래도 행복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그때처럼 고통스럽고 고뇌스러웠지만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때처럼 방문을 박차고 나가 비를 맞고 싶었다. 그때처럼 빗물에 가려 울고 싶었다. 허나 그는 단지 이렇게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은 무엇때문에 술을 마시는 걸까? 술을 빌어 시름을 달래려 하는 것일까? 허나 술을 마실수록 시름은 더해갈 뿐이었다. 그는 일이 왜 이렇게 변해 버렸는지 알 수 가 없었 다. 그는 진정으로 그녀가 행복해지기를 빌었었다. 그녀가 자신을 잊고 행복하게 살아주기를 바랬었다. (헌데 그녀는 죽어버렸다!) 대체 어째서 가장 바람직한 일이 가장 나쁘게 되어 버리는 것일까? 아주 올바른 일이 아주 잘못된 일이 될수 있을까?


(그녀는 결국 죽었다!) 그는 이것이 꿈이기를 바랬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꿈보다 몇 갑절 잔혹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현실을 피할 수 있는 여유가 주어져 있지 않았다. 그는 심한 갈증을 느끼고 다 시 술을 들이켰다. 이미 열 병의 술을 들이켰지만 이상하게도 조금도 취하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고통은 깊어만 갔다.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녀는 이제 죽었다......) 주인은 두 병의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비내리는 밤에 혼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은 언제나 홍취가 있는 것이었다. 그는 더이상 마누라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잊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술이 들 어감으로 써 오래전에 흙으로 돌아갔던 마누라의 생각은 차차 엷어갔다. 한때는 그도 아무리 술을 마셔도 마누라를 잊지 못했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그는 술을 마시고 밤새도록 울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가서 소리없이 통곡을 했었다. 허나 그것도 이제는 모두 지나가 버린 일이 되었다. (마누라가 죽은 지 벌써 십오년이 됐군.) 세월은 사람의 정을 얄팍하게 만드는 것일까? 해가 바뀔수록 그는 울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단지 비가 오거나 마음이 울적할 때 가끔 마누라의 추억이 생각날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 되었다. 그 시간도 이제 슬슬 끝나가고 있었다. 그는 기분좋게 취해서 더 이상 마누라 생각이 나지 를 않았 다. 그때 그는 문득 손님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저런...... 아직도 가지 않고 있었군.....) 흑의사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인은 흐릿한 눈로 그의 탁자를 바라보 았다. 수 십 병은 족히 될 술병들이 어지러히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이제까지 저렇게 술을 많이 마신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안주도 없이 독한 죽엽청을 수 십병이나 들이킨 사내를 보자 주인은 동정심을 느꼈다. (저 사람도 나처럼 죽은 마누라를 생각하고 있는걸까?) 그는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고 그 흑의사내와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다. 그가 휘청거리는 몸으로 일어섰을 때 흑의사내는 마지막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주인은 이왕이면 그에게 새로운 술을 주고 싶어 주방으로 들어갔다. 허나 그는 흑의사내에게 술을 가져다 줄 수 없었다. 한 사람이 주방에 있다. 그는 비오는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주인이 들어오자 그는 주인대신 술병을 들고 나갔다. 그리고 주인은 주방바닥에 길게 쓰러져 버렸다. 술병을 든 백의인은 천천히 흑의사내 앞으로 가 술병을 그 탁자에 놓았다. 전옥심은 흐릿한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는 상당히 취해 있었다. 고통을 잊기 위해 억지로 들이킨 술이 그의 몸과 마음을 취하게 만들었다. 그는 가물가물한 눈을 들어 백의인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백의인의 얼굴이 낯에 익었다. 전옥심은 취한 눈으로 백의인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당신이었군......" 백의인은 그를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털썩 전옥심의 맞은 편에 앉았다. "많이 취했군." 전옥심은 남과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헌데 그는 문득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무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백의인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한잔 하지 않겠소?" 백의인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술잔을 받아들었다. 전옥심은 잔이 넘치도록 그 에게 술 을 따랐다. 백의인은 전옥심의 흐릿한 눈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눈을 어떻게 고쳤나?" 전옥심은 피식 웃었다. "그 이야기는 하지 않는게 좋겠소." 백의인은 술잔을 들고 그것을 빙빙 돌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 었다. "그게 좋겠군." 전옥심은 문득 꿈틀거리며 웃었다. 그는 불쑥 물었다. "오형은 누굴 좋아해 본적이 있소?" 백의인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은 없네. 보아하니 자네는 있는 것 같군." 전옥심은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오...... 풋풋...... 그러고 보니 오형보다는 내가 인생의 달 고 쓴 맛을 더 본 것 같군." 백의인은 들고 있던 술잔을 들이켰다. 그는 다시 빈 잔을 전옥심의 앞에 내밀며 말했다. "받게. 조금 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자네에게 술 한 잔은 따라주고 싶네." 전옥심은 묵묵히 술잔을 받았다. 백의인은 술잔 가득 술을 따랐다. 전옥심은 그 특명한 액체를 보며 천천히 중얼거렸다. "술이란 놈은 정말 묘하군. 목구멍에 들어가면 말이 슬슬 나오니......" 백의인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는 것 같네." 전옥심은 술잔을 든 채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형은 알고 있소?" 그는 무엇을 알고 있느냐고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백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들었네. 불행한 일이지." 전옥심은 흐릿한 눈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오형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오?" 백의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나직하게 탄식을 했다. "나는 잘 모르겠네. 아직 그런 경우를 당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지. 하지만 인간의 정이란 것은 뜻 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네." 전옥심은 피식 웃었다. "정불의란 말이오? 풋...... 멋진 말이로군......" 백의인은 다시 말없이 그를 주시했다. 전옥심은 들고 있던 술잔을 들이켰다. 그도 역시 말이 없었다. 쏴아아아......빗줄기는 약간 가늘어져 있었다. 허나 빗소리는 오히려 요란해졌다. 땅에 물이 고여 사방으로 빗물이 튀기고 있기 때문이다. 전옥심은 문득 고개를 돌려 창 문너머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백의인은 그의 옆 모습을 주시했다. 같은 남자라도 취해버릴 듯한 그 모습, 거기에는 과거 어두운 토지묘의 안에서 만났던 작 은 소년 의 모습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허나 그래도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저 눈빛은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군.)


백의인은 전옥심의 쓸쓸한 눈을 보며 나직하게 탄식을 했다. 전옥심은 창문을 바라보며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일전에 절정검 곽위란 자를 만났소." 백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곽위는 내 막내사제일세." 전옥심은 묵묵히 말을 이었다. "당시 그의 무공은 별로 대단한게 못되었소. 허나 그의 기백만은 아주 뛰어나서 나는 화산 파에 인 재가 낳음을 알게 되었소. 헌데 이제 오형을 다시 만나고 보니 인재가 많을 뿐 아니라 고 수도 많 다는 것을 알겠군." 전옥심은 똑바로 백의인을 바라보았다. "칠년 동안 당신의 무공은 많이 발전했군. 매화검 오상!" 백의인은 말없이 전옥심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많이 자랐군. 전옥심!" 오상은 별빛같은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지난 칠 년간 단 한시도 자네를 잊어본 적이 없네. 비록 잠깐이었지만 내가 만났던 그 불 행한 소 년의 일을 뇌리에서 지워본 적이 없지. 그래서 난 언제고 자네가 나를 찾기를 기다리고 있 었지." 이번에는 전옥심이 말이 없었다. 오상은 나직하게 탄식을 했다. "굳이 그때의 일을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네. 어쨌든 이렇게 자네를 만나고 보니 내 마 음은 무 척 개운하군."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때문에 화산파의 다른 사람들까지 끼어들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네. 이건 전적으로 개인적인 일일세. 그래서 나는 조용히 자네를 찾은 걸세." 전옥심은 취기어린 눈으로 그를 올려보며 웃었다. "당신의 말을 믿소. 당신은 성격이 고지식해서 거짓말을 할 줄 모르오. 하지만 만사불의랄 까, 세 상일은 왕왕 혼자의 뜻대로는 되지않는 법이지." 그의 말에 오상은 흠칫 놀랐다. 그는 잠시 눈을 빛내다가 밖을 쳐다보았다. "밖에 있는 사람은 누구냐?" 몇 명의 인물들이 비를 맞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백의를 입고 있는 화산파의 제자들 이었다. 오상은 그들을 보자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너희들은 이곳에 어찌 왔느냐?" 그들 중 가슴에 네 개의 매화문양이 있는 사나이가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제자들은 오사숙께서 저 자를 찾아갔다는 말을 듣고 이 일대를 뒤진 끝에 간신히 찾아왔읍 니다." 오상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가 너희들보고 나를 찾아오라고 했느냐?" 그의 호통에 백의검수는 쩔쩔맸다. "제...... 제자들은 오사숙께서 혹시라도 저자에게 해를 당할까 싶어......" 오상의 얼굴에 서릿발같은 기상이 어렸다. 그는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너는 본문의 매화십조를 알고 있겠지?" 매화사품의 백의검수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예." "그중 매화사조를 외어 보아라." 매화사품의 사나이는 어쩔 줄 모르고 망설이다가 오상의 사나운 눈빛을 받자 찔끔하여 입 을 열었 다. "사조는 화산파의 제자는 절대로 비겁하지 않는다!" 오상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매화구조를 외어보아라." "사승의 명령은 하늘과 같으니 어기는 자는 반드시 벌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오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는군. 그럼 내가 너희들을 돌려보내는 이유도 알겠지?" 매화사품의 백의검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희들은 이제 그만 가보아라." 백의검수는 망설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제자들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저자의 검은 아주 무섭다고 알 려졌읍 니다." 오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의인들은 전옥심을 사나운 표정으로 쏘아보고는 모두 밖으로 사라졌 다. 전옥심은 술잔을 든 채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불쑥 말했다. "저들은 당신을 존경하는 것 같군." 오상은 대답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일대 제자들 중에서 가장 신망이 두터웠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고 한 번 입밖으로 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실천을 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젊은이들의 이상적인 영웅이었다. 모두들 비단 그를 존경할 뿐 아니라 또한 진심으로 감탄하고 좋아했다. 유성검 좌백은 비록 무공은 일대제자들 중 가장 강하지만 너무 오만해 따르는 사람이 없었 다. 귀검 악무방은 좌백과 필적할 정도로 강하지만 너무 차가워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이대나 삼대 제자들은 일대제자들 중에서 오상을 가장 존경하고 따랐다. 전옥심은 천천히 술병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의 겨룸은 일초로 제한하겠소." 오상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너무 짧지 않을까?" 허나 전옥심은 묵묵히 말을 이었���. "만약 당신이 내 일 초를 견딘다면 과거의 일을 청산한 것으로 하겠소." 오상은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는 전옥심의 의중을 알려는 듯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안타깝게도 전옥심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이 없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 었다. 오상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검을 뽑으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하하...... 이런 훌륭한 시합에 공증인이 없다니 유감스러운 일이오."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리며 천정에서 한 인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이제 막 약관을 넘었 을 황의 서생이었다. 얼굴이 아주 준수했고 특히 두 눈이 크고 반짝여 지혜가 남다른다는 인상을 주 었다. 전옥심은 취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묵묵히 말했다. "두 시진이 넘게 대들보 위에 앉아 있다니 별난 취미를 가진 사람이군." 황의서생은 그 말에 흠칫했으나 곧 껄껄 웃었다. "하하...... 이거 창피막심하게 되었군. 미안하오. 귀하의 마음이 너무 무거워보여 잠시 지켜 보았


을 뿐이오." 황의서생은 이미 두 시진전에 들어와 지금까지 전옥심을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소?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제가 두 분 시합의 공증인이 되는 것이?" 오상은 황의서생의 준수한 인상이 호감이 갔는지 부드럽게 불어보았다. "귀하는 누구요?" 황의서생은 오상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이거 인사가 늦었군요. 천하에 대명이 자자한 매화검 오상 대협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 다. 불초 는 삼절서생 서문광이라 합니다." "삼절서생?" 오상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기 때문에 어리둥절했다. 서문광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 불초는 강호의 무명소졸이니 당연히 오대협께서 아실 리가 없어요." 오상은 계면쩍게 웃었다. "하하...... 이것참...... 그렇게 말씀하시니 오히려 송구스러워지는군요. 헌데 귀하의 삼절이 란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요?" 서문광은 미소띈 얼굴로 말했다. "그것은 지절과 기절, 그리고......" 그때 전옥심이 불쑥 말했다. "무절이겠지." 서문광은 그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렇소. 귀하는 정말 눈치가 빠르시군요." 스스로 바둑과 지략, 무공이 뛰어나다고 내세우는 삼절서생 서문광.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전옥심은 천천히 술병을 놓고 몸을 우뚝 세웠다. "시간이 너무 지체됐군." 오상도 눈을 빛낸 채 그의 이장 앞에 우뚝 섰다. 그는 한동안 전옥심을 응시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자네의 검법이 무림에서 근래 보기드물게 절륜하다는 소문을 많이 들었네. 하지만 나는 화산파의 일대제자 중에서 유성검 좌백과 귀검 악무방을 제외하고는 아직 남에게 뒤진다는 말을 듣 지 못했 네. 자네가 과거의 복수를 하고 싶으면 전력을 다해야 할걸세." 서문광은 한쪽 구석에 선 채 흥미있는 얼굴로 두 사람을 주시했다. 전옥심은 아무 말도 하진않고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오상을 응시했다. 오상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쾌검을 익힌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싸우기 전에 검 을 뽑아 드는 것이 상례였다.그는 전옥심이 검을 뽑지않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좌수쾌검은 익히기가 어려운데 자네는 그것을 익혔나 보군." 전옥심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오상은 천천히 검을 가슴께로 끌어올렸다. 이것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예의를 차리는 것으로써 동자배불이라고 했다. 오상은 검을 눈 높이로 올린 채 전신의 공력을 가득 끌어올렸다. 무림고수들간의 결투에서 단 일초로 승부를 내는 경우는 왕왕 살벌해지기가 쉽다. 그것은 서로 자신의 무공중 가장 무서운 초식을 펼치기 때문이다. 오상은 자신이 가장 자랑하는 매화칠검중의 최고절초인 매화파천을 펼치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일대제자 중에서도 익힌 사람이 다섯 명 밖에 되지 않는 절초중의 절초였다. 전옥심은 별다른 자세를 잡지 않은 채 가만히 서있었다. 숨막히는 순간이 흘렀다. 갑자기 오상의 입에서 폭갈이 터졌다. "매화파천──!"


동시에 싸늘한 검광이 뿌옇게 일어났다. 쑤아앙! 천지가 매화로 뒤덮이는 듯 찬연하게 빛났다. 어두운 주루안이 검광으로 인해서 환하게 빛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눈부신 검광은 전옥심의 몸을 그물 씌우듯 덮어버렸다. "아!" 서문광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때 전옥심의 손이 번쩍였다. 그는 전옥심이 검을 뽑는 것을 보지도 못했는데 그의 왼손에는 어느새 검이 들려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한 줄기 뇌전처럼 매화검광을 갈랐다. 매화검광이 정확하게 두쪽으로 갈라졌다. 파악! 선혈이 튀어 오르며 팔 한쪽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검광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오상은 왼 팔이 잘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전옥심은 어느새 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아무도 그가 어떻게 손을 써서 오상의 팔을 잘랐는지 보지 못했다. 오상은 팔을 지혈시킬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를 보고 있었다. 문득 오상은 준수한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잘려진 자신의 왼팔을 내려다 보았다. 그곳에서는 시뻘건 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네는 왜 나를 죽이지 않았나?" 전옥심은 아무 말이 없었다. 오상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팔 하나로 자네의 원한이 풀어질거라고 생각했나?" 전옥심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그는 천천히 밖을 향해 걸어나갔다. 문득 오상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왜 나를 죽이지 않았지?" 그의 음성은 자신도 모르게 거칠게 흘러나왔다. 그는 자신이 상대에게 패했다는 것 보다 도 그가 사정을 봐주어 살아났다는 것이 더욱 치욕스러웠다. 문득 전옥심은 몸을 멈춘 채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소. 그러니 나도 당신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는 것 뿐이 오." 그는 말을 마치자 마자 천천히 퍼붓는 빗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오상은 멍하니 서 있었다. 팔의 고통도 잊은 채 그는 전옥심이 사라진 곳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그의 심정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내리는 비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사람. 삼절서생 서문광은 눈빛을 기이하게 반짝이며 전옥심이 사라진 곳을 보고 있었 다. 그의 눈빛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맡큼 이상야릇한 것이었다.

그들은 빗 속에 서 있었다. 그들의 수는 서른 여섯 명이었다. 푸른 청의를 입고 머리에는 영웅건을 두른 채 그들은 빗속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옥심은 비를 맞으며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서른 여섯 명의 청의 검수들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문득 그중에서 가장 나이를 먹은 청의검수 한 사람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는 전옥심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우리는 동정십팔채의 인물들이다. 네가 본 채에 와서 채주를 죽이고 가버렸기 때문에 동 정십팔채 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너를 이대로 보내지는 않겠다." 그들의 표정은 비장한 것이었다. 퍼붓는 빗속에서 장승같이 서 있는 서른 여섯 명의 고수들.


전옥심은 천천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이들은 죽은 자가 진짜 우문양이라고 믿고 있군.) 빗물이 그의 얼굴을 때렸다. 허나 이상하게도 가슴속에서 후끈한 열기가 퍼졌다. 온 몸에 퍼져 있는 술기가 치밀어 오르며 그는 문득 마음속의 응어리를 마음껏 풀어버리 고 싶은 욕망 느꼈다. 그래서 그는 천천히 철검을 빼들었다. 싸우기 전에 검을 빼든 것은 출도이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않고 검을 빼들자 서른 여섯 명의 동정십팔채의 정예고수들도 일제히 병기를 빼들었다. 차창! 날카로운 검명이 울리며 눈부신 검광이 사지를 뒤덮었다. 그들은 일제히 무기를 빼든 채 전옥심을 에워쌌다. 서로간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쏴아아......끝없이 퍼부어지던 빗줄기가 어느 한순간 가늘어진 것 같았다. 그 순간 검광이 요란하게 불을 토하기 시작했다. 차창! "야앗......!" 폭갈소리와 함께 서른 여섯 명의 고수들은 일제히 전옥심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 삼십육 대 일! ----훗날 개봉혈겁이라고 이름지어진 검마의 첫번째 살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끝이 없었다. 사람을 베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그는 춤을 추고 있을 뿐이었다. 가슴 속의 맺힌 한을 풀어버리려는 한 바탕 한풀이 춤을 추고 있을 뿐이었다. 서른 여섯 명의 고수들은 그 춤을 보고 넋을 잃었다. 소리도 없다. 비명도 없다. 칼이 부딪치면 칼이 부서지고 살이 부딪치면 살이 갈라졌다. 한 자루 녹슬고 낡은 철검. 단돈 서푼짜리 고철장검이 이토록 무서운 살인흉기가 될 수 있다고는 예전에 미처 몰랐었 다. 그들은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인간이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차창! 피가 하늘로 튀었다. 피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살점이 마구 튀고 잘라진 장검이 주위를 하얗게 뒤덮었다. 그래도 전옥심은 춤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죽음의 춤......마침내 청의 고수들 중 한 사람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 자는 사람이 아니다...... 악마다....... 검의 악마!" "미쳤다...... 저 자는 미친 놈이다.......!" 한 명이 도망가자 금세 여러 명이 뿔뿔이 흩어져 갔다. 허나 전옥심의 검은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도망가면 도망가는 대로, 덤비면 덤비는 대로 그들의 몸은 차디찬 시신이 되어 빗속을 뒹 굴었다. 마침내 전옥심의 춤이 멈추어졌을 때 내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우뚝 서 있을 뿐이다. 거친 흑의는 비에 찰싹 달라붙어 강인한 근육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수중에 든 녹슨 철검은 피에 젖어 붉게 보였다. 전옥심. 그는 춤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나의 지옥도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잘려진 팔과 다리....... 부러진 목들....... 퍼붓는 빗물이 씻겨 내를 이루며 흘러가는 선열한 핏물.......시체는 산을 이루었고 몇 몇 생존자들의 입에서는 고통에 가득찬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 다. 전옥심은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는 이를 악물고 빗속을 뚫고 사라졌다. 이때의 살겁으로 서른 여섯 명중 스물 아홉 명이 죽었다.


네명은 팔이 잘렸고 세 사람은 심한 중상을 입었다. 동정십팔채는 이것으로 완전히 멸망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검의 전설을 알리는 첫 신호탄이기도 했다.

< 안건에 대한 보고.그 무공 내력은 다음과 같다고 사료됨. 1. 망혼유곡에서 죽은 시체의 흔적으로 보아 그는 탄검과 환검의 일종을 익혔음. 2. 동정십팔채에서는 검으로 흡인지기를 일으켰음. 이정도의 흡인지기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곽 무극의 자전십이파검 외에는 없음. 3. 개봉에서는 쇄검과 연환검을 사용했음. 4. 이상으로 볼때 그는 다수의 절정검법을 익혔으며 이를 알기 위해선 좀더 그를 방치해 둘 필요 가 있음. 추신.호불귀가 그곳으로 가고 있음. 그는 고자군의 행방을 추적중. 남자호님께 충성을. > 하나의 눈이 종이 위의 글을 읽고 있었다. 그 눈은 아주 신비했다. 티없이 맑으면서도 예리한 눈동자였다. 눈의 주인은 천천히 종이를 움켜 잡았다. "호불귀가 내 뒤를 쫓고 있다고?" 그의 음성은 아주 청량하면서도 듣는 이의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것이었다. 우수수......별로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그의 손바닥에 있던 종이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허공에 흩어지는 먼지사이로 언뜻 그의 손이 보였다. 그 손가락에는 하나의 반지가 끼어 있었다. 그것은 남색 여우모양의 반지였다.

제 4 장.

십 여년 동안 조용했던 강호가 한 사람 때문에 온통 시끄러워졌다. 그는 항상 흑의를 입고 다니며 허리에 낡은 철검을 하나를 찼다고 한다. 그는 제일 처음 악양에 나타나 화산파의 일대제자로 이름이 나 있던 절정검 곽위를 격파했 다. 이어 동정십팔채에서 수백명의 군웅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채주인 천뢰장 우문양을 간단 하게 죽 여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허나 그의 이름이 강호를 시끄럽게 한 것은 개봉에서의 혈겁때문이었다. 그가 개봉에서 매화검 오상의 팔을 자르고 서른 여섯 명의 동정십팔채 고수들을 도륙한 것은 온 강호를 진동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는 희대의 살인광으로 알려졌고 그의 검은 마검 으로 소 문이 났다. 그래서 무림인들은 그를 검마라고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가 항상 흑의를 입고 있기 때문에 오의광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오의광생 전옥심! 이 이름은 삽시간에 천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화산파에서는 그를 제일공적으로 지목을 했고 많은 제자들이 그를 꺾기 위해서 무림에 나왔 다. 특히, 오상과 제일 친한 것으로 알려진 유성검 좌백과 귀검 악무방은 오의광생을 죽일 때 까지 화


산파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일로 소란스러워진 무림에 다시 하나의 놀라운 소문이 들려왔다. --- 검후가 나타났다! --그 소문은 먼저 멀리 절강성의 향주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남해에 있는 보타산의 청조각에서 검후가 출도했다는 것이다. 보타산은 사천의 아미산, 산서의 오대산, 안휘의 구화산과 함께 불교의 사대명산이었다. 헌데 언제부터인지 보타산에는 여승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과거 무림에서 혁혁한 명성을 떨쳤던 여협들이 상당히 있었다. 그들은 보타산에 모여 하나의 절을 세우기 시작했 다. 그것이 바로 청조각이었다. 청조각이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이십년전이었다. 그 당시 청조각에서 한 명의 여승이 무림에 나타났다. 그녀는 검을 사용했는데 그 검법이 어찌나 놀랍던지 당시 무림에서는 그녀의 검을 제대로 막아내는 사람 없었다. 더구나 당시 무림은 백검회가 실종된 직후였기 때문에 더욱더 그녀의 검술에 견줄만한 인 물이 없 었다. 그래도 그녀의 검술은 엄청나 거의 백검회주에 필적할만하다고 소문이 났다. 더구나 그녀의 미모는 가히 천하제일이라 할 만큼 뛰어나 뭇 청년협객들의 가슴을 태우게 하는 것 이다. 그래서 무림인들은 그녀를 신검절염니라 불렀다. 그녀는 일 년간 무림을 거의 무인지경으로 누빈 끝에 보타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때 그녀는 이렇게 말을 했었다. 이십 년내에 청조각에서 한 명의 여검사가 나올 것이다. 그녀는 여중제일검이며 검후라 불리울 것이다. 그리고 그녀로 인해 천하의 모든 검이 평정될 것이다. 그녀의 말은 지난 이십 년간 무림인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얼마전 보타산에서 멀지않은 향주에 한 명��� 여검사가 나타났다. 그녀는 자신이 보타산의 청조각에서 나왔노라 말했다. 처음에 무림인들은 그녀의 말에 반신반의했으나 항주의 제일검객인 절검마자 구풍이 단 일초만에 무릎을 꿇는 것을 보고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검후의 첫 등장이었다. 그 뒤로 천대산의 제일고수인 화옥신검 강천민, 괄창산의 괴객인 육지검 사진후, 절강성 제일의 고수인 천래검 연풍비등 쟁쟁한 강호의 절정검객들이 모두 그녀의 일초를 받지 못하고 패 하고 말 았다. 그녀는 절강성을 거의 초토로 만들고 강서로 들어섰다. 그곳에서도 모두 열 두명의 절정검객들이 그녀의 검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그녀는 강서를 지나 이번에는 호북성을 향한다고 했다. 그래서 수많은 무림의 내노라하는 검객들이 호북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그녀의 검술을 비교하기 위해, 또다른 사람은 그녀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라 도 한번 보기 위해서 너도 나도 호북성으로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해가 천천히 중천으로 떠오를 무렵. 따스한 양광을 받으며 하남성에서 호북성의 경내로 들어오는 흑의인이 한 명 있었다. 허름한 흑의에 녹슨 철검을 찬 흑의사내는 쓸쓸한 눈빛을 한 채 걷고 있었다. 그가 걷고 있는 곳은 절경으로 유명한 동백산이었다.


동백산은 산세가 깊지는 않았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 예로부터 문인들이나 풍류객들이 많이 찾 는 곳이었다. 흑의사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었다. 주위는 여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어 온갖 나무들이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름모를 새들이 아름답게 울부짖고 어디선가 꽃항기가 미풍에 실려와 상쾌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헌데도 흑의사내가 나타나자 주위에 무거운 분위기가 깔리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고독과 적막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같았다. 어딘지 모르게 우울해 보이는 그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은 얼굴 표정과 어울려 황량하게 보 였다. 그때 갑자기 그의 발길이 우뚝 멈춰섰다. 그가 걷고있는 오솔길의 전면에 이상한 물체가 놓여 있는 것이다. 그것은 크기가 어른의 머리통만한 말머리였다. 나무로 정교하게 깎은 말머리는 얼핏 보기에 진짜 살아있는 말의 머리를 잘라놓은 것과 똑 같았다. 이런 산중의 오솔길에 나무로 깎아 놓은 말머리가 놓여 있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흑의사내는 잠시 말머리를 바라보았다. 말머리는 어찌나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지 갈기는 금시라도 바람에 휘날릴 것 같았고 툭 튀어나 온 눈은 깜박이며 그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헌데 그가 걸음을 멈춘 채 말머리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크하하...... 제법 담이 큰 놈이군." 어디선가 걸걸하기 짝이 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말이 울부짖는 듯한 거친 목소리였다. 흑의사내는 얼굴 표정을 바꾸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괴이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너는 그게 무엇인지 아느냐?" 흑의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괴이한 음성은 그가 아무런 말이 없자 약간 노기가 치미는 것 같았다. "크흐흐....... 건방진 놈이로군. 그것은 온 천하의 마인들이 두려워하는 참마마두상이다!" 동시에 한 인영이 흔적도 없이 나무 말머리의 옆에 나타났다. 그는 나무로 만든 마두와 똑같이 생긴 인물이었다. 인간이 어찌 말과 똑같이 생길 수가 있단 말인가? 허나 그는 정말로 말의 머리와 비슷하게 생긴 인물이었다. 통방울만한 눈, 기다랗게 내민 코, 툭 튀어나온 뻐드렁니...... 갈기만 달렸다면 누구든지 말로 착각할 것이다. 다행히도 머리외의 부분은 정상적인 사람이어서 그가 말이 아님을 알게 했다. 허나 머리만 말인 모습은 더욱 괴이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 다. 말머리의 사나이는 천천히 바닥에 있는 나무 마두를 집어들며 흑의사내를 바라보았다. "흐흐...... 네가 요즘 검마라고 알려진 오의광생 전옥심이냐?" 흑의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말머리의 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퉁발울만한 눈을 깜박거렸다. "보아하니 너는 조금도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구나." 전옥심은 나직하게 말했다. "오직 귀신만이 사람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는 법이오." 말머리의 사내는 흉측하게 웃었다. "흐흐...... 그렇다면 네 눈에는 내가 귀신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냐?" "물론 당신은 귀신이 아니오."


말머리의 사내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럼 내가 누구냐?" 전옥심은 감정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마두관음이 아니오?" 그말에 말머리의 사내는 커다랗게 웃었다. "크하하...... 맞았다. 내가 바로 마두관음이다." 마두관음이란 불가에서 악귀를 쫓는 팔대명왕 중의 하나였다. 허나 불가뿐만 아니라 당금 강호에도 악귀를 쫓는 팔대명왕이 있었다. 그들은 비단 악귀를 쫓을 뿐 아니라 그들을 영원히 나다니지 못하게끔 죽여버리곤 했다. 그래서 강호의 마도들은 그들을 귀신보다도 더 두려워했다. 지금 전옥심의 앞에 나타난 이 마두관 음도 마도인들이 귀신보다 더 무서워하는 그 팔대명왕 중의 하나였다. 마두관음은 전옥심의 위 아래를 쓰윽 훑어보았다. "네가 개봉에서 스물 아홉 명의 동정십팔채 고수들을 죽였다는데 그게 정말이냐?" 전옥심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두관음이 얼굴에 갑자기 싸늘한 미소가 어렸다. "하룻밤새 스물아홉 명의 고수를 죽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네가 사람을 함부로 죽인다기 에 어떤 놈인가 한번 보고 싶었다." 전옥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보았다. 마두관음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은 그의 습관인 것 같았다. "너는 출도한지 이제 한 달밖에 되지 않는데 벌써 삼십명의 인명을 해쳤다. 그래서 내가 온 것이 다. 네가 앞으로 함부로 인명을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면 나는 그냥 돌아가겠다." 전옥심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마두관음은 그의 허무에 보이는 듯한 눈을 찬찬히 들여보다가 다시 말했다. "만일 네가 그렇지 못하면 너는 오늘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한다." 문득 전옥심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단지 그일 때문에 왔소?" 마두관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전옥심은 무심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단지 삼십 명 밖에는 죽이지 않았소. 하지만 어떤 사람은 수백 명을 죽이고도 무사 한 사람 이 있소." 마두관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누구냐?" 전옥심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바로 당신이오." 마두관음은 깜짝 놀랐다. "나라고?" "그렇소. 당신은 마두를 해친다는 미명아래 지금까지 수백 명의 고수들을 죽였소. 하지만 대체 당 신이 말하는 마인이란 뭐요?" 마두관음은 멍청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전옥심은 묵묵히 말을 이었다. "단순히 사람을 많이 죽인 자를 마두라고 한다면 당신은 누구보다도 더 큰 마두라고 할 수 있소.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나를 찾아온 것은 이유가 되지 않소." 그의 말에 마두관음은 할 말이 없어졌다. 사실 그는 이제까지 삼백 명이 넘는 사람을 죽였 다.


그리고 그보다 많은 사람을 다치게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지금까지 죄의식을 느지 않았었 다. 자신이 죽인 자들이 모두 죽어 마땅한 마두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헌데 전옥심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자신이 죽인 마두들 보다 훨씬 더 나쁜 마두이지 않는가? 이러한 논리는 그로서는 아직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마두관음은 얼굴을 찡그리며 가만히 있다가 불쑥 말했다. "네 놈의 말은 제법 일리가 있구나." 전옥심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주니 다행이오." 마두관음의 얼굴이 다시 점점 차가워졌다. "하지만 나는 함부로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 내가 죽인 자들은 모두 죽어 마땅한 흉인 들 뿐이 다." 전옥심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당신은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군." "그게 무엇이냐?" "누구도 아무 이유없이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는 것이오." 마두관음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전옥심은 그런 그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기 마련이오. 더구나 무림에서는 살인하기에 가장 적당한 이유가 있소.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것이오." 마두관음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너는 제법 말을 잘 하는구나. 많은 사람들이 네 입 때문에 곤욕을 당했겠군." 전옥심은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은 또 잊은 것이 있소." "그게 무엇이냐?" "내 검은 비록 말을 하지 않지만 내 입보다는 훨씬 설득력이 있소." 전옥심의 말에 마두관음은 껄껄 웃었다. "하하....... 맞다. 정말 마음에 드는 놈이로군." 예리한 검은 비록 말을 할 줄 모르나 어떠한 명령보다도 더 큰 효과가 있는 것이다. 마두관음은 흉축한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전옥심을 바라보았다. "허나 이대로 물러선데서야 마두관음의 체면이 서지 않지. 네놈은 나와 내기를 해보지 않겠 느냐?" "그게 무엇이오?" "하남성의 구주제일장에서 십일 후에 영웅대회가 벌어진다. 네가 그곳에서 우승을 한다면 나는 네 말이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겠다." 그의 말에 전옥심은 눈을 번쩍 빛냈다. 구주제일장은 화산파, 수라교등과 함께 천하를 주름잡는 오대세력 중의 하나였다. 그곳에서 벌어질 영웅대회는 벌써부터 온 무림을 술렁이게 하고 있었다. 영웅대회란 십 년에 한 번씩 개최하는 무림인들의 비무대회였다. 이 비무대회에서 우승하면 천하무림의 제일인자로 인정되어 천하인들의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영웅대회가 생긴 지는 올해로 육십 년이 되었다. 일회 대회의 우승자는 당시 백년제일검사라 칭송받던 남궁검문의 남궁산이었다. 그후 모두 다섯 명의 천하제일고수가 탄생을 했다. 영웅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은 비단 개인의 영광일 뿐 아니라 소속문파의 영광이기도 했다. 그래서 영웅대회의 우승은 거의 모두 천하를 주름잡는 거대문파의 고수들이 차지를 했다.


십 년전의 영웅대회 우승자는 현 구주제일장의 장주인 천룡도 섭풍송이었다. 전 대회의 우승자가 십년 후에 영웅대회를 개최하기 때문에 올해에는 구주제일장에서 영 웅대회가 열리는 것이다. 마두관음은 무엇때문에 전옥심을 이 대회에 출전시키려 하는 것일까? 전옥심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마두관음은 껄껄 웃더니 갑자기 일장을 날렸다. "그러면 어디 그 대회에 참가할 자격이 있는지 볼까?" 스윽! 그가 날린 일장은 별다른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날아왔다. 헌데 전옥심의 눈가에 번쩍 이채가 떠올랐다. 그 일장은 절전된 것으로 알려진 무영금강 장이었기 때문이다. 이 장은 발출될 때 소리도 없고 별다른 흔적도 없어서 무시하기가 쉽다. 허나 그 솜털처럼 부드러운 기운 속에는 무시무시한 위력이 숨어 있어 금강신이라도 박살 낼만 했 다. 그래서 무영금강장이라고 불리운 것이다. 전옥심은 거의 보이지도 않게 검을 빼들고 자신을 향해서 날아오는 무형의 경력을 향해 가 볍게 검 을 휘둘렀다. 순간, 콰앙! 벼락치는 듯한 폭음이 일어나며 전옥심과 마두관음의 중간지점에서 강풍이 일어났다. 그 강풍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땅이 일장 가량 움푹 꺼져 있었다. "으음......" 마두관음은 그 여파에 못이겨 비실비실 두 걸음을 물러났다. 그의 얼굴에는 경악이 파도치듯 물결치고 있었다. 한동안 어이가 없다는 듯 멍하니 서있던 마두관음은 돌연 껄껄 웃었다. "하하...... 좋다. 이놈! 정말 대단하구나. 검경을 일으켜 나의 무영금강장을 막아내다니......" 갑자기 그의 얼굴이 진진해졌다. "헌데 네놈은 탈백우사 곽무극과 어떤 사이냐?" 전옥심은 얼굴 표정을 바꾸지도 않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흐흐...... 나를 속일 생각은 마라. 지금 네가 펼친 것은 분명 곽무극의 절기인 탄검이었다. 오 직 곽무극의 탄검만이 검경으로 무영금강장을 막을 수 있지." 전옥심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두관음은 그를 빤히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 곽무극은 내 둘도 없는 친구인데 오랜만에 그의 절기 를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군. 한동안 소식이 없어 죽은 줄 알았더니 어디서 이런 기재를 키우고 있 었나 보 군." 그가 갑자기 몸을 날렸다. "그에게 안부를 전하거라." 이어 그의 커다란 몸은 마치 거조처럼 날아 사라졌다. "크하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주위를 요란하게 뒤흔들었다. 전옥심은 묵묵히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검을 허리춤에 집어 넣었다.

호북성에는 무림인들이 잘 찾아가지 않으려는 곳이 한 군데 있었다. 바로 대홍산이었다.


대홍산은 동백산에서 서남쪽으로 이백여리 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무림인들이 대홍산을 가지 않으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이 바로 천하마도의 우상인 수라교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천하를 피로 씻는다는 수라교는 대홍산의 깊숙한 절곡에 있었다. 수라교는 천하를 주름잡는 문파인만큼 그들의 조직은 엄밀하고 방대해서 세력이 도처에 깔 려 있었 다. 그래서 이곳은 오히려 다른 곳에 비해 고수들의 수가 적었다. 사실 누가 감히 수라교의 본거지에 찾아와서 행패를 부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수 없었기 때 문에 방 비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은 탓도 있었다. 수라교의 교주는 수라시만 구양승이지만 실무를 맡고 명령을 내리는 자는 비홍, 조령당, 임비 세 사람이었다. 구양승은 초인적인 무공과 기백으로 수라교을 거의 혼자 세우다시피했다. 하지만 수라교가 오늘의 마도제일문파로 까지 발돋움하는 데는 이 세 사람의 힘이 결정적 인 역할 을 했다. 그들 세 사람은 비단 수라교를 우내오대문파로 발돋움 시켰을 뿐 아니라 구양승 을 도와 명실상부한 천하제일문파로 이끌기 위해 일심동체로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허나 그들 세 사람의 성격은 전적으로 달랐다. 그것은 각기 다른 세 사람이 전형적인 성격이었다. 비홍은 나이가 가장 위이고 성격 또한 냉철할 정도로 명석해 수라교이 지낭이라 할 만했다. 그의 머리에서 나오는 지략은 가히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꺼지게 하는 것이어서 많은 무림인들 은 그를 제일 두려워하여 만리신통이라고 불렀다. 만리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의 ���을 벗어날 수 없다는 데서 붙은 이름이었다. 조령당. 그는 수라교의 조직을 관장하고 있었다. 그는 그야말로 조직의 명수라 할만큼 사람을 보는 안목이 높았다. 그래서 그가 임명한 고수들은 모두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자기의 능력 이상으로 일을 훌륭히 처리했다. 그는 항상 웃고 다니며 대인관계가 넓어 아무도 그의 앞에서는 화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소면군자라고 불렀다. 수라교의 세 인물들 중 가장 대외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유명한 것이 바로 무정도 임비였다. 그는 수라교의 상징이라 할만큼 살명을 떨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항상 싸늘한 얼굴에 말이 별로 없었다. 그는 모든 말을 자신의 칼로 대신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지옥의 염라대왕보다 무서워했다. 수라신마 구양승을 제외하고는 그의 무공이 가장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심지어는 강호의 후기지수중 손꼽히는 고수이며 천하인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지옥마검 진궁조차도 그에게는 한 수 양보하는 처지라고 했다. 이들 세 사람이야말로 수라교를 이끄는 실질적인 기둥인 것이다. 비홍은 거울을 보고 있었다. 문득 그는 나직하게 탄식을 했다. "나도 이제는 나이를 먹었군." 수라교의 삼대거두중 하나인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나이는 이제 오십이 되었다. 예전에는 새카맣게 윤기가 흐르던 머리털은 어느덧 드문 드문 흰 머리카락이 비추기 시작했고 팽팽하고 탄력있던 피부는 거칠어져 있었다. 수십년을 도산검림 속에서 살아오면서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던 그도 세월의 무상함에는


어쩔 수 없었던지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자신의 귀밑에 난 흰머리를 뽑았다. 이때 밖에서 한 사람이 불쑥 들어왔다. 비홍은 그를 힐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오게, 임비." 임비는 들어오자마자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비홍은 이것을 보고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임비가 평상시에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임비는 이제 사십 줄에 들어선 인물이었다. 얼굴은 마치 가면을 씌운 듯 무표정했고 하루에도 한 마디를 제대로 한 적이 드물 정도로 입이 무 거웠다. 헌데 지금 그는 눈살을 찌푸린 채 비홍을 보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인가?" 비홍은 수 십년 동안 그와 가까이 있었지만 그의 이런 표정 보는 것은 처음인지라 궁금하 여 물었 다. 임비는 불쑥 말했다. "밖에 누가 왔소." 이번에는 비홍의 눈살이 가볍게 찌푸러졌다. 물론 수라교는 마도의 제일문파이니 매일 많 은 사람 들이 드나든다. 허나 그때마다 임비가 이렇게 인상을 찌푸렸다면 무정도라는 이름은 붙지 않았을 것이다. 임비의 말은 수라교에 누군가가 와서 시비를 건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비홍은 찾아온 사람이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임비가 알았다면 처음에 말했을 때 누가 찾아왔는지 말했을 것이다. 임비는 한 번에 할 수 있는 말을 절대로 두 번에 나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비홍은 거울을 탁자에 내려놓은 채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임비와 함께 조용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수라교가 있는 대홍산은 크기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동백산과는 달리 산세가 상당히 깊 고 험했 다. 대홍산의 가운데는 커다란 절곡이 있었다. 그 절곡은 주위가 천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분지를 연상케 했다. 분지의 초입에는 거대한 철문이 우뚝 서 있었다. 이곳이 바로 수라교의 입구인 입마문이었다. 입마문을 들어서면 다시 반경 백여장의 거대한 공지가 나타난다. 그리고 공지의 끝에 수라 교로 들 어오는 정문이 있는 것이다. 공지에는 수 십 명의 사람들이 어지러이 늘어서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이 있다면 통상 시끄럽게 마련이다. 헌데도 장내는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했다. 누런 황의를 입은 수 십명의 장한들이 반원을 이룬 채 묵묵히 전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같은 복장을 한 열 두명의 인물들이 혈해 속에 누워 있었다. 그들은 수라교의 정문을 지키던 십이사였다. 십이사는 비록 절정고수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누구도 그들을 한꺼번에 해칠 수가 없는 고수들이 었다. 헌데 그들은 한 인물의 손에 허무하게 쓰러져 있었다. 단 일검에 그들을 모두 도륙한 인물은 황의인들의 오장 앞에 우뚝 서 있었다. 허름한 흑의, 녹슨 철검 하나, 그리고 쓸쓸한 눈빛. 전옥심은 가만히 선 채 말없이 황의인들을 응시했다. 황의인들은 십이사가 단 일검에 죽 자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멀리서 반원을 그린 채 그를 막고 서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두려워서 몸을 움츠린 사람은 없었다. 전옥심은 십이사의 죽음에도 그들이 별로 동요를 보이지 않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수라교는 사람들을 잘 가르쳤군.) 그가 지금까지 만난 인물들은 동정십팔채와 화산파, 그리고 지금 수라교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중 화산검파와 수라교의 고수들은 모두 기초가 잘 닦여있고 기백이 있었다. 그들이 천하를 주름잡고 있다는 것을 실증이라도 하듯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것이다. 전옥심이 처음 수라교를 찾아왔을 때 정문을 지키던 십이사는 그를 강제로 막으려다가 일 검에 도 륙이 났다. 그러자 주위를 지키고 있던 다른 수라교의 무사들이 그를 저지한 채 있는 것이 다. 전옥심은 그들을 뚫고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좀더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 며 움직 이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늘어서 있던 황의인들의 틈 갈라지며 두 명의 인물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우측의 인물은 조각상같이 생긴 사십대 장한이었다. 그의 허리에는 붉은 칼이 한 자루 꽂혀 있었다. 좌측의 인물은 준수하게 생긴 오십대의 중반의 대한이였다. 중늙은이는 천천히 걸어나오더니 전옥심을 바라보았다. 그는 전옥심의 흑의와 허리에 찬 녹슨 장검을 바라보더니 눈을 반짝 빛냈다. "자네는 혹시 요즘 명성을 떨치고 있는 오의광생 전옥심이 아닌가?" 전옥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중늙은이는 가느다란 미소를 띄었다. "자네의 명성이 천하를 진동하기에 마침 만나보고 싶던 참에 이렇게 보게 되니 반갑네. 나 는 비홍 이라고 하네." 전옥심은 비홍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다. 그는 꾀가 많고 지력이 탁월해 상대하기 힘든 인물로 알려졌다. 전옥심은 설마 비홍이 직접 나설지는 몰랐는지라 뜻밖인 듯 물었다. "당신이 만리신통이라는 비홍이오?" 비홍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다네. 헌데 자네는 무슨 일로 본교를 찾아왔나?" 전옥심은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구양승을 만나러 왔소." 수라교에 와서 교주의 이름을 직접 부른 사람은 아직 없었다. 비홍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교주님을 뵈오러 왔다고?" "그렇소." 그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득 실날같은 눈에 광채를 빛냈다. "일전에 진대공자에게 들었지. 자제가 교주님을 만나려고 한다는 말을......." 진대공자는 지옥마검 진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진궁은 수라교주의 대제자이기 때문에 수 라교 내 에서는 그를 진대공자라 부르는 것이다. 비홍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침 교주님께서는 지금 다른 곳에 가셨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네." 전옥심은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는 어디로 갔소?" 비홍은 미소를 그치지 않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 분은 지금 절혼곡에 가셨네." 절혼곡이란 말에 전옥심의 눈이 반짝 빛났다.


"태산의 절혼곡 말이오?" "그렇네. 자네는 그곳을 잘 아는가?" 전옥심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문득 그의 가슴에 의혹이 치밀어 올랐을 뿐이다. 탈백우사 곽무극은 그와 헤어질 때 백검회 의 배반자인 오행마검자 서잠허가 절혼곡에 은거하고 있다고 말했다. 헌데 수라신마 구양승이 절혼곡으로 갔다니 것은 단지 우연일까? 전옥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나는 그곳으로 가겠소." 그가 몸을 돌리려 하자 비홍이 부드럽게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 기다리게." 전옥심은 몸을 멈춘 채 무슨 일이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비홍의 입가에 있는 미소가 약간 싸늘해졌다. "자네는 수라교에 와서 사람을 죽였네. 헌데 자네가 이대로 돌아가게 된다면 강호의 동도 들이 우 리를 비웃지 않겠는가?" 전옥심은 말없이 서 있었다. 비홍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교를 지키는 십이사는 비록 교내의 중요한 인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외의 상징적 인물들 이었네. 그러니 자네는 마땅히 그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네." 전옥심은 우뚝 선 채 무심히 말했다. "어떻게 하면 되겠소?" 비홍은 나직하게 말했다. "간단하네. 본 교에는 수라십팔방이라는 절진이 하나 있네. 자네가 이 절진 속에서 살아 날 수만 있다면 오늘 일은 없던 것으로 하겠네." 그 말에 전옥심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도 수라십팔방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이것은 마도의 제일절진이라고 할 정도로 가공할 진이었 다. 알려진 바로는 수라십팔방은 지금까지 단 세번 펼쳐졌다고 한다. 그것으로 인해 당시 무림의 이십 오명이 죽었다고 했다. 그 뒤로 수라십팔방의 무서움은 천하에 널리 퍼졌고 감히 이 절진의 위력을 시험해 보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허나 전옥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 그렇지 않아도 수라십팔방이 어떤 것인지 한 번 구경하고 싶었소." 비홍은 가늘게 웃었다. "소문대로 자네는 광오하군." 그는 손을 가볍게 들었다. 그러자, 휙! 어디선가 십 여명의 황의인이 나타나 전옥심의 주위를 에워싸 버렸다. 그들은 모두 열여덟 명이었다. 나이는 이십대에서 삼십대 초반의 청년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제각기 다른 열 덟 개의 병기들이 쥐어져 있었다.그것은 검, 도, 창, 곤, 봉, 당파, 패, 등 십팔반 병기였다.

제 5 장.

열 여덟 개의 손. 열 여덟 개의 병기!


그것이 바로 죽음을 부르는 마도제일의 절진, 수라십팔방의 실체였다. 열 여덟 명은 각기 다른 자세로 전옥심을 에워싸고 있었다. 전옥심은 잠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어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주위에 하나 둘씩 횃불이 밝혀지 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들은 그런 자세로 서 있었다. 열 여덟 개의 병기를 든 열 여덟 명의 고수들과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는 한 명의 흑의사 내, 그것은 무척 대조적이면서도 보는 이의 마음을 떨리게 하는 광경이었다. 비홍과 임비는 눈도 깜박하지 않은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감히 침도 삼키지 못했다. 주위는 이미 잔뜩 어두워 있었다. 타다닥! 횃불타는 소리만이 장내에 고적하게 울려퍼졌다. 휘이잉! 어디선가 차가운 밤바람이 불자 횃불이 흔들렸다. 그 순간이었다. "차압!" 열 여덟 명이 동시에 내지르는 기합소리가 대홍산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쫘아아악!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열 여덟 명의 황의무사도, 한 명의 흑의사내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미친 듯이 난무하는 검푸른 검광만이 장내를 뒤덮고 있을 뿐이었다. 파파파파파팍! 먼지가 하늘높이 치솟고 돌가루가 사방을 가려버렸다. 회오리바람 같은 무시무시한 검풍 속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수라교가 천하에 자랑하는 수라십팔방이었다. 수라십팔방이 그가 창안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교내에서 다섯 사람도 되지 않는다. 그는 이 수라십팔방과 열 여덟 명의 황의고수들을 언제나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다. 그리고 그 기대는 지금 충족되는 것 같았다.바로 그때였다. 그 일이 일어난 것은. 비홍은 너무도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는 한 순간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저것은......) 그는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뜬 채 전면을 바라보고 있다. 전옥심은 심한 압박감을 느꼈다. 무림에 출도한 이래 이런 중압감을 느껴 보긴 처음이었다. 사방천지가 온통 노도와 같은 광풍에 휩싸여 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쐐애액! 파도가 밀여오듯 끊임없이 밀려오는 병기들은 그의 급소만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단 한번도 같은 병기가 두 번 연달아 공격해 오는 적이 없었다. 검이 날아와서 막으려 하면 그것이 창으로 변하고, 다시 막으려 하면 창은 어느덧 봉으로 변해 버 렸다. 이어서 다시 그것은 도로, 당파로, 혼원패로 쉴 사이 없이 변화하며 닥쳐들었다. 이것이 바로 수라십팔방의 무서운 점이었다. 각기 다른 열 여덟 개의 병기가 풍차처럼 돌진해와 상대는 무엇을 막을지 모르는 가운데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전옥심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오래 끌면 불리하겠군.)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일단 하기로 마음먹은 일은 조금도 늦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침내 그는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휘둘렀다. 비홍의 눈에 보이는 것은 찬연한 빛줄기였다. 빛줄기는 회오리 광풍을 뚫고 하늘높이 솟구 쳤다. 그것은 마치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 뇌전과 같았다. 아니 폭풍우를 뚫고 솟구쳐 나오는 햇살 같다고나 할까. 차차창! "크아악!"


열 여덟 개의 비명이 거의 한 순간에 터져나왔다. 그것은 마치 한 사람이 동시에 지르는 것 같았다. 털썩! 땅바닥으로 나뒹구는 열 여덟 개의 수급. 따땅! 불꽃을 퉁기며 떨어지는 열 여덟 개의 병기. 그것은 수라십팔방의 허무한 종말을 알리는 조종이며, 검마의 두번째 혈겁을 알리는 신호였 다. 전옥심은 검을 든 채 우뚝 서 있었다. 누구도 그가 무슨 수법으로 수라십팔방을 일검에 격파했는지 알지 못했다. 전옥심은 무심한 눈으로 주위를 쓰윽 둘러보고는 천천히 낡은 철검을 허리춤에 찼다. 사람들의 눈에 이때만큼 이 낡고 초라한 철검이 무시무시한게 보인 적은 없었다. 그가 펼친 것은 중원의 무공이 아니었다. 그것은 멀리 바다 건너서 전해온 것이었다. ──일검에 떨어지는 해를 벤다! 단 일검으로 모든 승부를 갈라버리는 필살의 검법, 동영 의 낙이 류가 처음으로 중원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전옥심은 열 여덟 명의 목에 흘러나오는 피를 밟고 서 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횃불 사이로 비추는 그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이 없어 더욱 ���정함 을 느끼 게 했다. 문득 멍하니 서있던 임비의 몸이 서서히 움직였다. 임비의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눈에서는 거센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전옥심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가만히 서있던 비홍의 입이 열렸다. "임비, 물러나게." 임비의 몸이 굳어졌다. 그는 전옥심의 얼굴을 싸늘히 노려보았다. 그의 눈은 지독한 살기로 번들거리 있었다. 허나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몸을 돌려 비 홍의 뒤 로 물러났다. 비홍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전옥심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운 검법이군. 이런 검법을 본다는 것은 행운이야." 그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조금전 같이 나른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전옥심은 아무 말도 하지않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홍은 조용하게 말했다. "오늘은 약속대로 더 이상 자네를 막지 않겠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한 걸세. 앞으 로 자네 는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걸세." 전옥심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헌칠한 몸은 어둠속으로 서서 히 사라 졌다. 비홍은 횃불사이로 어른거리며 멀어지 그의 뒷등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임비의 입이 열렸다. "왜 말렸소?" 비홍은 슬쩍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자네는 그의 검을 꺾을 자신이 있나?" 임비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싸늘한 얼굴이 더욱 차갑게 굳어졌을 뿐이다. 그것은 비홍의 말에 대한 무언의 시위였다. 비홍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물었 다. "자네는 무적군자검을 이길 자신이 있나?" 처음으로 임비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의 얼굴이 한 줄기 경악을 담은 채 비홍에게 로 향했 다. 비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자는 무적군자검만한 고수일세. 그래서 자네를 말린 거야."


임비의 눈가에 믿을 수 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허나 그는 수십 년간 비홍을 사귀어오면서 그의 성 격을 잘 알고 있었다. 비홍은 절대로 허언을 하지 않으며 그의 말은 한치의 착오도 없다 는 것을. 그가 일단 상대방의 무공을 평가한 이상 그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임비는 아무 말없이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비홍은 그의 굳강한 등을 바라보다가 혼잣말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지. 설사 무적군자검이 다시 나타나나다 해도 이제는 우리 들을 꺾 을 수 없다는 것이지." 그의 말은 너무 나직해서 아무도 알아들은 사람이 없었다. 그가 말하는 우리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하나의 사당이 있었다. 이 사당은 너무 낡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이었다. 지붕은 다 떨어져 하늘이 훤히 들여다 보이고 담벼락은 금시라도 허물어질 듯 미약한 바람 에 흔들 리고 있었다. 이런 곳이라면 불공을 드리려고 찾아오는 참배객들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이 불쑥 사당앞에 나타났다. 그는 혹시 정신이 이상한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낡고 볼품없는 사당에 굳이 찾아올 수 있겠는가? 허나 그는 미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누구보다도 정신이 또렷하게 박힌 사람 같 았다. 얼굴은 아주 준수했고 입술이 붉었다. 몸에는 화려하기 짝이없는 금의를 입고 있었다. 단지 술독에 찌들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어 준수한 모습을 많이 감소시키는 것이 아쉬 울 뿐이 었다. 금의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낡은 사당안으로 들어갔다. 사당안은 밖에서 볼 때보다 더욱 낡았다. 천정에는 먼지가 우수수하고 뜰에는 잡초만이 무 성했다. 불상도 보이지 않았다. 헌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하나의 금종이었다. 금종은 불상이 놓여 있을 자리에 동그만이 놓여 있었다. 어느 돈많은 신도가 혹시 금불상으로 잘못알고 금종을 올려놓은 것일까? 금종은 어린아이 머리통만큼 컸다. 금종의 겉표면에는 하늘을 날고 있는 매 한 마리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솜씨로 양각되어 있었다. 금의사내는 조심스럽게 금종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금종을 잠시 보라보다가 결심을 한 듯 다가가 금종을 치기 시작했다. 데엥....... 데엥....... 데엥....... 생긴 것과는 달리 맑은 소리대신 무겁고 탁한 소리가 울렸다. 세 번 울린 금종소리.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금의사내는 종을 친 후 가만히 서있었다. 그는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듯 주위를 두리번거렸 다. 아무도 나타난 사람이 없었다. 차츰 사나이의 얼굴에는 초조한 표정이 어리기 시작했다. 일각 쯤 지났을까? 금의사내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다시 금종으로 다가가 그것을 치려고 했 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다시 칠 필요는 없소." 어디선가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금의사내는 흠칫 놀라 등을 돌렸다. 어느 사이엔가 그의 등뒤에는 한 명의 흑의인이 서 있었다. 그는 차갑게 생긴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의 가슴에는 금종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모양의 매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흑의중년인은 차가운 눈으로 눈앞의 금의사내를 훑어보았다. "종을 세번 친 것으로 보아 살인을 청부하러 왔소?" 금의사내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흑의중년인은 아무 표정없는 얼굴에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금은 언제나 선불이오. 살인의 대상자가 일반인일때는 지위의 고하에 관계없이 오천 냥. 상대 가 무림인일때는 그자의 무공과 지위에 따라 값이 결정되오." 금의사내는 급히 말했다. "그 자는 무림인이오." 흑의중년인의 눈가에 뜻밖이라는 빛이 떠올랐다. "보아하니 당신은 무림인이 아닌것 같은데 무림인을 죽이려 하다니 이상하군." 금의사내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흑응방은 청부하는 사람의 신분이나 이유는 캐묻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소문이 틀린 것이 오?" 흑의중년인은 차갑게 웃었다. "흐흐...... 물론 청부하는 사람의 비밀은 절대로 보장해주오. 당신은 의심하지 않아도 되오." 흑의중년인은 흑응방의 청부사자였다. 흑응방! 흑응방은 천하제일의 청부집단이었다. 그들은 돈 만 주면 무슨 일이든 했다. 사람을 찾는 일, 납치해 오는 일, 물건을 훔쳐오는 일, 그리고 살인청부까지 모두 해치웠다. 그중에서도 그들이 천하의 오대세력으로 불리우게끔 만든 것이 바로 살인청부였다. 그들은 지금까지 모두 천 여차례의 살인청부를 단 한 건의 실패도 없이 모두 해치웠다. 강호에 다른 사람을 죽이기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지만 그 모 든 청부 를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모두 해치웠다는 것은 더욱 흥미로운 일이었다. 아니 그것은 비단 흥미뿐만 아니라 공포심도 아울려 불러일으켰다. 흑응방에서 살인을 전담하는 자객들은 그 정체가 철저한 신비에 가려져 있었다. 단지 그들 중에서 천하인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은 흑응삼살이라는 자객들이었다. 그들은 잠마, 혈건휴, 필살유혼의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의 진짜 이름이나 신분들은 알지 못했다. 심지어 그들이 흑응방내에서 어느정도의 지위에 있는 자들인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흑의중년인은 잠시 눈앞의 금의사내를 보다가 다시 물었다. "당신이 죽이려는 사람은 누구요?" 금의사내는 그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확인하려는 듯 되물었다. "상대가 아무리 고수라도 죽일 수 있소?" 흑의중년인은 물어볼 것 없다는 듯 차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본 방의 행사는 아직 단 한 번도 실패한 일이 없소." 금의사내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고수에 따라 보수는 어떻게 달라지오?"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되고 있소. 무림에 아직 이름이 나지않은 무명고수들은 삼급으로 구 분되오. 그들을 죽이는 대가는 일만 냥이오. 이급은 무림에서 그래도 약간 명성을 얻었거나 이제 막 명성 을 얻는 신진고수들이오. 그들은 이만냥을 받소. 일급은 무림의 일류고수들이고 그들은 삼 만냥을 받소. 그리고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정고수들은 특급으로 분류되고 그들은 모두 오만 냥이 오."


금의사내는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다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천뢰장 우문양은 어느 급에 속하오?" 흑의중년인의 눈살이 가볍게 찌푸러졌다. "우문양은 이미 죽었소. 하지만 그가 살아있을 때는 특급에 속했었소." 금의사내는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특급보다 더 강한 고수들은 죽일수 없다는 말이오?" 그 말에 흑의중년인의 얼굴에 비로소 흠칫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금의사내를 주시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론 그들도 죽일 수 있소. 특급을 넘는 고수들은 본방에서는 무급이라고 부르오. 본 방 에서 무 급으로 지명한 고수는 모두 아홉 명이오. 허나 그들을 죽이는데 대한 대가는 엄청나오." 금의사내는 그래도 무급의 고수들에 흥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무급에 속한 고수들은 누구누구요?" 흑의중년인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말을 할까말까하다가 금의사내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무급의 첫째는 무적군자검이오. 그는 이십 년 전 천하를 주름잡던 백검회의 회주인데 지 금은 실 종되었소. 허나 살아있다는 가정하에 본 방에서는 그를 무급으로 구분해 놨소. 두 번째는 지난 오 십 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인물인데 만노사 최혼이라고 하오. 세번째는 현재 정파 의 최고 명숙인 장선생 육덕명이오." 만노사 최혼! 이 이름은 오랫동안 강호인들의 뇌리에 무공의 대명사로 기억되었던 이름이 다. 그는 오십 년전 이차 영웅대회의 우승자였다. 그의 유령인은 흔적도 없고 스치기만 해도 살이 문드러져 버려 마도의 오대장공중 수위에 꼽히는 천하제일장공이었다. 당시 그는 얼마난 많은 고수들을 죽였는지 천하인들이 공적으로 몰리 려 할때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장선생 육덕명 역시 사십 년전 제삼차 영웅대회의 우승자였다. 영웅대회에서 우승한 후 그는 명실공히 정파의 제일인자가 되어 천하에 군림해 오고 있었 다. 그는 뚜렷하게 세력을 키우고 있지는 않지만 구파일방을 비롯한 명문정파는 그의 말 한마 디에 절 대로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흑의중년인은 눈을 빛내며 계속 말을 이었다. "무급에 분류된 네 번째의 고수는 부동명왕이오." 부동명왕.그는 마도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팔대명왕중의 첫째였다. 그는 종적이 신비하면서도 무공은 팔대명왕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다섯 번째부터 여덟 번째까지는 현재 본 방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있는 천하 오대세력의 주인들이 오. 다섯 째가 천하제일검문인 남궁검문의 남궁진웅, 여섯째는 구주제일장의 장주인 천룡 도 섭풍 송, 일곱 째가 수라교의 수라신마 구양승, 그리고 여덟 째가 그 신비롭다는 매화검존이오." 매화검존은 이름만 알려진 신비의 고수였다. 그는 화산파의 막후인물로 알려졌으며 화산파를 오늘의 초강문파로 이끈 장본인이라고 했 다. 그는 현재 남궁진웅과 함께 천하의 이대검왕으로 손꼽히고 있다.


금의사내는 초조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듣다가 불쑥 물었다. "마지막 무급고수는 누구요?" 흑의중년인은 짤막하게 말했다. "검후요." 검후는 비록 출도한 지는 얼마되진 않았지만 그녀의 소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전설처럼 무 림에 전 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흑응방에서는 그녀가 무림에 모습을 나타내기도 전부터 일찌감치 무급으로 분류해 놓고 있는 것이다. 금의사내는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무급고수는 그 아홉 명 뿐이오?" 흑의중년인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최근에 무급 고수를 한 명 더 늘리려 하고 있소." 그 말에 금의사내는 눈을 번쩍 떴다. "그가 누구요?" 흑의중년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말했다. "요즘 굉장한 명성을 날리고 검마라고까지 불리우는 오의광생 전옥심이오. 그도 곧 무급고 수로 분 류될 것이오." 금의사내는 손뼉을 탁 쳤다. "바로 그요. 내가 원하는 인물은 바로 그 자요." 흑의중년인의 얼굴이 홱 변했다. "당신은 검마의 수급을 원하고 있소?" 금의사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를 죽여주시오." 흑의중년인은 약간 멈칫했다. "무급고수들에 대한 보수는 엄청나게 비싸오." 금의사내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어다. "금액은 얼마라도 상관없소. 그를 죽일 수만 있다면 아무리 많은 액수라도 내겠소. 얼마 면 되겠 소?" 흑의중년인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본 방이 출범한 이후 무급고수에 대한 살인청부는 없었소. 허나 당신이 원한다면......" 그는 눈을 빛내더니 고개를 끄덕다. "좋소. 이십 만냥을 내시오." 이십 만냥이라면 한 도시의 인구를 평생 먹여 살릴 수 있는 엄청난 액수였다. 헌데도 금의사내는 생각도 하지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이십 만냥이라면 비록 거액이지만 내겠소. 하지만 만약 살인에 실패한다면?" 흑의중년인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어렸다. "흐흐.......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요. 만일 실패한다면 본방은 세 배로 보상해 주겠소." "좋소." 금의사내는 품에서 한 뭉치의 은표를 꺼냈다. "이것은 현재 천하에서 가장 신용이 좋은 산서은호의 것이오. 확인해 보시오." 흑의중년인은 전표를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이것으로 청부가 접수된 것으로 하겠소. 오의광생은 한달내에 차가운 시체가 되어 있을 것 이오." 금의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방만 믿겠소."


흑의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몸을 날려 사라져갔다. 금의사내는 그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그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흐흐...... 전옥심! 이제 네 놈의 목숨도 얼마남지 않았다. 천하제일의 살수들이 곧 네 놈의 목 을 베기 위해 덤벼들 것이다." 그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서 살기에 번뜩이는 광기어린 안광이 흘러나왔다. "흐흐...... 내게서 연화를 빼앗아간 네 놈을 용서할 줄 아느냐? 크하하......" 실성한 듯 웃고 있는 사나이. 그의 이름은 위종산이었다.

제 6 장.

낙양. 낙양은 주나라 때는 낙읍이라 불렀고, 동한의 고도이며 중국의 오대고도중의 하나이 다. 동으로는 호로를 장악하고 있으며, 서쪽으론 함곡을 봉쇄하고, 남으로는 이락과 접하였고, 북쪽에 는 대강 황하가 유구하게 흐르고 있다. 또��� 지형이 험준하고 견고하여 옛부터 전쟁이 터 지면 병 가들이 서로 다투는 곳이었다. 백마사, 백마사는 낙양의 동남쪽에 있다. 후한의 명제가 영감에 따라 사자를 서방으로 보냈는데 그때 인도에서 불전과 불상을 백말 에 싣고 낙양에 왔다. 당시의 인도중 두 사람을 위해 세운 것이 바로 백마사라 한다. 백마사에는 십삼층 석탑이 유명했다. 세월의 무상함에도 아랑곳없이 장구하게 뻗어 올라간 백마사 의 십삼층석탑은 낙양의 명승지 중에서도 유명한 것이었다. 백마사의 십삼층탑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한 인영이 있었다. 허름한 흑의, 낡은 철검과 쓸쓸한 눈빛. 당금 강호를 위진시키고 있는 오의광생은 의외에도 조용한 백마사의 뒷곁에 선 채 오후의 잔양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석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십삼층의 석탑. 마치 거대한 보리수나무를 연상시키듯 층층이 쌓여진 석탑의 웅장함은 인간의 왜소함을 비웃는듯 하였다. 전옥심은 쓸쓸한 눈빛으로 석탑과 주위의 우거진 수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덧 해는 반쯤 서산으로 기울었다. 그래도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흑의를 석양 에 물들 이며 우뚝 서 있었다. 그때 문득 그의 뒤에서 나직한 읏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이거 또 만났군. 아무래도 우리는 인연이 많은 것 같네." 전옥심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등뒤에 석양을 이고 선 두 남녀가 있었다. 우측의 남자는 청의를 입은 중년인이었다. 그는 언젠가 악양에서 만났던 이언년이었다. 그의 손을 잡은 채 눈을 반짝이며 전옥심을 바라보고 있는 인영은 이제 십 삼사세 쯤 되었 을 소녀 였다. 이언년처럼 엷은 청의를 입고 있었는데 눈이 크고 반짝여 아주 총명해 보였다. 전옥심은 두 남녀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이언년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않자 웃으며 다가왔다. "정말 무정한 사람이군. 그동안 천하를 떨쳐 울리더니 옛 사람은 모른 척 하긴가? 두달만


에 만났 는데 이야기도 하면 좀 어떤가?" 전옥심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시선을 청의소녀에게로 돌렸다. 청의소녀는 큰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계속 전옥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아주 영롱하고도 아름다워 지혜가 넘치는 이상이었다. 전옥심은 가만히 그 눈을 들여다 보다가 불쑥 물었다. "이 소녀는 당신의 딸이오?" 이언년은 흐뭇한 눈으로 청의소녀늘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이비취라고 하지. 비취야. 인사해라. 아버지가 말하던 그 사람이란다." 전옥심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비취...... 좋은 이름이군." 이언년은 활짝 웃었다. "하하...... 자네가 내 딸아이에게 신경을 다 쓰니 놀라운 일이군." 전옥심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눈빛이 내가 아는 한 사람과 닮았소. 그래서 마음에 드는군." 이언년은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 "내 딸아이가 자네 마음에 들었다니 기쁘네. 헌데 이 아이가 누구를 닮았나?" 전옥심은 잠시 입을 다물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하에서 머리가 제일 좋은 사람이오." 이언년 다시 껄껄 웃엇다. "하핫...... 그것 공교롭군. 이 아이도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머리가 좋다네." 청의소녀, 이비취는 이름대로 비취같은 눈으로 전옥심을 바라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검마라고 알려진 오의광생이세요?" 전옥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비취는 배시시 웃었다. "헌데 광생이란 이름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군요." 전옥심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네가 잘못 보았다." 이비취는 눈을 반짝였다. "그럼 아저씨는 스스로를 광인라고 생각하세요?" "그렇다." 이비취의 큰 눈은 거의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큰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자신이 광인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있다니 놀랍군요. 나는 미친 사람을 많이 보았지만 아 저씨같이 정상적으로 미친 사람은 보지 못했어요. 아저씨는 무엇에 미쳤죠?" 전옥심은 허무한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는 오히려 불쑥 되물었다. "너는 항상 처음 만난 사람에 대해 그렇게 꼬치꼬치 묻느냐?" 이비취는 귀엽게 웃었다. "보통때는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귀여운 음성으로 말했다. "단지 미친 사람을 만났을 땐 예외죠. 특히 자기가 스스로 미쳤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만나 면 나는 아주 말이 많아져요." 그녀는 나이는 비록 어렸지만 말을 하는 투는 나이먹은 사람보다도 오히려 어른스웠다. 전옥심은 문득 이 소녀에게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그는 그답지 않게 빙긋 웃었다. 그의 웃음은 언제 보아도 특이하고 이상한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웃음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넋을 잃고 그것을 바라보게 된다. 지금도 이비취는 눈도 깜박하지 않은 채 전옥심의 차가운 얼굴이 웃음으로 물드는 것을 보 고 있었 다. 아쉬웁게도 그의 웃음은 금세 사라져버렸다. 이비취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어린 소녀답지 않은 것이었다. 전옥심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는 왜 한숨을 내쉬느냐?" 이비취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타까워서 그래요?" 전옥심은 어리둥절했다. "무엇이 안타깝느냐?" "아저씨의 웃음은 제가 난생 처음보는 멋진 것이예요. 헌데 그런 멋진 웃음을 차가운 얼 굴 속에 감춰 놓고 보여주지를 않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예요?" 그녀의 당돌한 말에 전옥심의 얼굴이 다시 무표정해졌다. 그가 아무런 말이 없자 이비취는 다시 물었다. "아저씨는 왜 항상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짓고 다니지요?" 전옥심은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이비취는 영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짐짓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았어요." 전옥심은 가만히 있는데 옆에 있던 이언년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넌 뭐를 알았다는 것이냐?" 이비취의 얼굴에 귀여운 웃음이 떠올랐다. "웃을 수 있는데도 항상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입이 있으면서도 말을 하지 않으니 이 아저 씨는 정 말로 광생이라고 할 수 있어요. 미치지 않고서야 사람이 그렇게 무뚝뚝할 수가 없지요." 이언년은 껄껄 웃으며 귀여운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하...... 맞다. 이 아비가 보기에도 그는 좀 이상하지. 하지만 그래도 말많은 남자보다는 낫지 않느냐?" 이비취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난 말많은 남자는 질색이예요." 질색이라고 말할 때 그녀의 눈썹은 살짝 찌푸러지고 귀여운 코가 이상하게 찡긋거렸기에 이언년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하지만 넌 아직 나이가 너무 어리지 어떤 남자가 마음에 들건 말건 상관이 없 지 않 느냐?" 이비취는 입을 삐쭉거렸다. "하지만 나도 여자란 말이예요." "푸하하......." 이언년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전옥심은 묵묵히 두 부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의 눈이 번쩍 빛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왜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것이오?" 그 음성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수림속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원래 백마사는 넓이가 거의 이백여 장에 달할 정도 커다랗고, 곳곳에 수림이 우거져 있기 때문에 마치 울창한 숲속과 같았다.


중앙에 있는 거대한 십삼층 석탑만 아니었다면 누구도 이곳의 지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 했을 것 이다. 이언년도 이 음성을 들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전옥심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들은 음성인데?" 전옥심은 아무 말없이 음성이 들려온 수림을 향해 걸어갔다. 이언년은 눈을 빛내고 있다가 딸의 손을 잡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이비취는 그의 손에 끌려가면서도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저쪽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누군데요?" 이언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아직 세상물정도 모르는 철부지지. 하지만 아주 순진하고 귀여운 아이다." 이비취는 고개를 갸웃거다가 배시시 웃었다. "알았어요. 일전에 아버지가 말씀하신 그 제일비라는 소년검사가 아닌가요?" 이언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저자는 그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 것 같구나." 이비취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들은 함께 다니지 않나요?" 이언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자는 원래 혼자 다니기를 좋아하는 것 같구나. 얼마전 개봉과 수라교에서 혈겁을 일으 킬 때도 혼자였다는구나." 말을 하고 있는 도중 그들은 숲속에 도착했다. 숲속에는 두 사람이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홍안의 소년과 황의서생이었다. 얼굴을 붉히며 큰 소리로 말하고 있는 사람은 이제 갓 십칠세를 넘었을 홍안의 소년검사였 다. "당신은 호북성에서부터 내 뒤를 졸졸 따라오지 않았소?" 그의 앞에 있는 황의서생은 이십세쯤 되어보이는 준수한 청년이었다. 그는 유들유들하게 대꾸했다. "허. 그게 무슨 말인가? 설마 자네는 호북성에서 이곳 백마사까지 오는 길을 전부 자네가 전세냈 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홍안검사는 머뭇거렸다. "그런 건 아니지만......" 황의청년은 빙긋 웃었다. "그런데 자네는 어째서 내가 자네의 뒤를 쫓아왔다고 억지를 부리는가?" "그게 무슨 억지란 말이오? 당신은 분명 내 뒤를......" "하하....... 자네는 아름다운 여자도 아니고 그렇다 돈 많은 부자도 아닌데 내가 무슨 볼일 이 있 다고 자네 뒤를 따라다니겠나?" 홍안검수는 약도 오르고 화도 나서 준수한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모습은 더욱 어리고도 순진한 것이다. 그때 흑의사내가 불쑥 그들 앞에 나타났다. 홍안검수는 그를 보더니 반색을 했다. "아! 형님." 전옥심은 그를 바라보았다. "일비. 이곳엔 언제 왔느냐?" 홍안검수는 제일비였다. 그는 반가우면서도 답답한 듯 큰소리로 말했다. "조금전에 왔습니다. 헌데 형님. 이자가......"


전옥심은 조용히 그의 말을 제지하고는 황의청년을 돌아보았다. "또 만났군." 황의청년은 어색한 기침을 했다. "오랜만이오. 사별삼일이면 괄목상대라고 하더니....... 단 한 달새 전형의 명성은 더욱 강 호를 진동하는 것 같소." 황의청년은 개봉의 허름한 주루에서 만났던 삼절서생 서문광이었다. 그가 무슨 일로 제일비의 뒤를 쫓단 말인가? "당신은 나를 만나기 위해 그의 뒤를 따라왔소?" 전옥심의 말에 서문광은 내심 움찔했다. (제길...... 눈치 한 번 빠르군.) 제일비가 전옥심과 동행이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서문광은 헛기침을 하며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허허...... 전형의 생각은 틀렸소. 내가 무슨 볼일이 있다고 전형을 만나려고 그의 뒤를 밟 았겠 소? 단지 우연히 낙양에 볼일이 있는지라 오다보니 방향이 같았을 뿐이오." 전옥심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제일비에게 말했다. "일비, 가자." 제일비는 서문광을 힐끗 노려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그때 서문광이 불쑥 말했다. "잠깐." 전옥심은 서늘한 시선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오?" 서문광은 어색하게 말했다. "하하...... 이렇게 만나 것도 인연이데 같이 동행하면 어떻겠소? 나는 구주제일장의 영웅대 회를 보러왔는데 당신들도 그곳에 가겠죠?" 전옥심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인연을 좋아하는 사람이 여기 또 있었군." 그때 그 인연을 좋아하는 사람이 불쑥 나섰다. "하하...... 좋. 그렇지 않아도 저 두 사람은 모두 말붙이가 힘들어서 말벗이 필요했던 참일 세." 이언년은 자기가 전옥심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양 큰 선심을 쓰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문광은 잽싸게 그의 앞으로 가서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서문광이라 합니다. 대협께서 잘 이끌어 주십시오." 이언년은 점잖게 웃었다. "허허...... 대협은 무슨대협. 난 이언년이란 사람일세. 이 아이는 내 딸인 이비취일세." 서문광이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동안 전옥심은 제일비와 함께 벌써 저만치 걷고 있었 다. 이언년은 그것을 보고 투덜거렸다. "제길. 정말 지독하게 차가운 자로군." 말을 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딸을 데리고 열심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서문광도 눈을 빛내며 그들과 걸음을 같이했다. 이언년과 서문광. 그들은 무엇때문에 그렇게 굳이 전옥심과 동행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전옥심은 제일비를 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해시신루는 다 익혔느냐?" 전옥심은 제일비와 헤어지면서 해시신루를 다 익힌 후 이곳 백마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 던 것이


다.제일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형님. 이젠 누구라도 자신이 있읍니다." 전옥심은 고개를 저었다. "자만은 금물이다. 검도의 경지는 끝이 없어. 아무리 강한 고수라도 언젠가는 꺾이고 만다." 제일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형님은 절대로 꺾이시지 않겠죠?" 전옥심은 천천히 말했다. "그건 장담할 수 없지. 강호는 끝이 없다. 중요한 것은 꺾이든 꺾이지 않든 중단없이 전진 하는 것 이지. 세월이 흐르면 검은 무디어질지 몰라도 마음의 힘은 점점 강해지는 것이다." 제일비는 알쏭달쏭했지만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전옥심을 신처럼 존경하고 있어서 그와 같이 있기만 해도 신이 났다. 그는 싱글벙글 거리며 걷다가 뒤를 힐끗 돌아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형님, 저 자가 계속 따라오는데요. 이번에는 아주 무더기로 오는군요." 그때 이언년이 이 말을 들었는지 껄껄 웃으며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허허...... 자네 한동안 안 본 사이에 말이 많이 거칠어졌군. 내가 그렇게도 싫은가?" 제일비는 원래 순진한 성격이라 그의 직접적인 핀잔을 듣자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언년은 그 모습이 귀여운 듯 미소를 띄며 보고 있다가 문득 전옥심에 물었다. "자네는 구주제일장으로 가려는가?" 전옥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언년은 눈을 반짝 빛냈다. "영웅대회에도 참가하겠는가?" 전옥심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그는 천천히 말했다. "제일비는 참가할 것이오." "자네는? 아직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나?" "그렇소." 문득 이언년은 목소리를 죽여 나직하게 소근거렸다. "제일비를 혼자 참가시켜선 안되네. 꼭 자네도 참가해야 되네." 처음으로 전옥심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건 무슨 말이오?" 이언년은 눈을 반짝였다. "내 말을 듣게. 제일비는 뛰어난 아이지만 그로서는 우승할 수가 없네. 자네가 참가해야만 우승할 수가 있지. 올해에는 막강한 고수들이 많이 참가하기 때문��� 꼭 자네가 참가해야하네." 전옥심은 나직이 되물었다. "내가 꼭 우승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소?" 이언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게 무엇이오?" "그건 우승하면 알게될 걸세." 전옥심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전에도 마두관음이 그에게 꼭 영웅대회에서 우승하라고 내기까지 걸었다. 헌데 이번에는 이언년이 또 꼭 그가 우승해야만 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들은 단순히 호의에서 이러는 것일까? 아니면 무슨 필연적인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전옥심의 눈빛은 여전히 무심하게 반짝였다. 영빈루. 영빈루는 낙양의 남쪽에 있는 유명한 객점이었다.


영빈루는 이 지방에서는 첫 손에 히는 객점으로 주루와 찻집을 겸하고 있어 언제든지 손님 이 득실 거리고 있어 자리를 잡기도 어렵다. 저녁무렵. 영빈루로 들어서는 금의노인 하나가 있었다. 그는 오십대 초반의 중늙은이였다. 금의노인은 영빈루로 들어와 주위를 둘러보더니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빈 자리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눈을 번쩍 빛냈다. 창가에 접해 있는 자리에 한 사람이 동그만이 앉아 있는 것을 본 것이다. 금의노인은 그 탁자로 다가갔다. "동행이 있는가?" 금의노인은 짐짓 점잖은 말투로 물어보았다. 앉아 있는 사람은 이십 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여인은 머리를 뒤로 틀어 길게 묶어 내렸고 몸에는 간편한 은빛 무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는 붉은 수실이 달린 장검이 삐죽 져 나와 있었다. 은빛 무복의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먹다가 금의노인의 말에 천천히 얼굴을 돌렸다. 순간 금의노인의 눈빛이 가볍게 반짝였다. 고개를 든 여인의 얼굴이 너무 깨끗했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은 티 한점 없이 맑았다. 사람의 피부가 어찌 저럴수가 있을까 싶을 정돌로 하얗고 깨끗했다. 미목은 수려했고 콧날은 오똑했다. 특히 가을의 호수같이 맑고 서늘한 두 눈은 아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은의미녀는 그 서늘한 눈으로 금의노인을 잠시 바라보았다. 금의노인은 히죽 웃으며 자리를 가리켰다. "일행이 없으며 합석할까 하네만......." 은의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음식을 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습은 아주 차분하면서도 냉정한 것이었다. 금의노인은 괜히 어색함을 느끼고 그녀의 맞은 편 탁자에 엉덩이끝만 간신히 걸치고 엉거 주춤 앉 았다. (제길....... 내가 이게 무슨 꼴이람......) 금의노인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마침 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가던 점원을 손짓해 불렀다. "이보게. 여기 활어탕 하나하고 잘 구운 오리구이 하나 빨리 갖다주게. 술은 옥로춘으로 한 병." 점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금의노인은 주문을 하고는 느긋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루에 꽉 들어찬 사람들은 거의가 다 병기를 휴대한 무림인들이었다. 금의노인은 눈빛을 반짝이며 사방을 휘휘 둘러보다가 한군데 시선을 고정시켰다. (허! 굉장히 잘생긴 놈이로군. 노부 평생 드물게 보는 미남자인걸.) 노인에게서 두 탁자 건너에 앉아있는 한 청년에게로 그의 시선이 온통 쏠렸다. 청년은 눈부신 백의를 입고 있었다. 헌데 그의 얼굴은 백의보다도 더 하얗다. 칼끝같이 솟구친 검미, 우뚝 솟은 코, 얄팍해 오만해 보이면서도 매력적인 입술....... 무엇하나 빠지지 않은 천하의 미남자였다. 백의청년을 바라보던 금의노인은 그의 가슴에 유달리 작고 빨간 매화 다섯송이가 수놓아 져 있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청년이 바로 후기지수중의 제일인자라는 유성검 좌백이로군. 과연 천하제일의 미남자 라 할만 하군.) 백의청년은 천하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유성검 좌백! 그 이름은 당금 강호의 청년층들의 우상이었다. 수많은 젊은 고수들이 그의 신기에 달한 검술에


찬탄을 토했고, 강호의 미녀들이 그의 준수한 풍모에 방심을 끓였다. 화산파의 희망이라고까지 불리우는 좌백은 성품이 남달리 고고하고 깔끔한 것을 좋아하여 고학이 라는 애칭까지 있었다. 금의노인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좌백의 시선이 힐끗 그를 향했다. 금의노인은 좌백이 자신을 바라보자 히죽 웃어주었다. 좌백의 준수한 눈썹이 약간 찌푸러졌 다. 그대 그의 눈에 번쩍 이채가 떠올랐다. 금의노인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은의미녀를 본 것 이다. 그의 준수한 얼굴이 잠시 은의녀를 바라보았다. 선명한 얼굴로 은의미녀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천하의 모든 여인들의 마음을 취하게 할 만큼 뛰 어난 것이었다. 허나 은의미녀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묵묵히 식사만 들고 있을 뿐이었다. 일반적으로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라도 음식을 먹을 때는 약간 미태가 감퇴되는 법이다. 헌데도 은의미녀는 마치 득도한 고승처럼 깨끗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무척 매력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위엄어린 것이었다. 좌백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자신을 본 척도 않자 천천히 고개를 돌려 버렸다. 허나 그의 준수한 얼굴은 약간 찌푸러져 있었다. 그때 빈루에 다시 두명의 인물이 나타났다. 그들은 넒고 늙은 두 백의인이었다. 젊은 청년은 나이가 좌백과 비슷해 보였다. 얼굴이 아주 싸늘한 인상을 풍기고 귀밑으로 칼자국 하나가 길게 그어져 있었다. 눈빛은 얼마나 살벌한지 보기만 해도 으시시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그 옆의 노인은 매처럼 생긴 노인이었다. 허리에는 한 자루 송문고검을 차고 있었는데 태도가 우아하면서도 기품이 있어 보였다. 그들을 본 금의노인은 다시 눈을 빛냈다. (이거 오늘은 눈복이 터졌는걸. 저 노괴물이 다시 세상에 나타나다니.......) 백의청년과 노인은 잠시 장내를 두리번거리다가 좌백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좌백은 항상 오만하기로 유명했는데 놀랍게도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들을 맞았다. "사백. 어서 오십시오." 그는 백의노인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백의노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맞은 편에 털썩 앉았다. 그 뒤를 이어 싸늘하게 생긴 청년과 좌백이 나란히 앉았다. 금의노인은 백의노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싸늘하게 생긴 청년에게로 돌렸다. (저 청년이 바로 좌백과 함께 화산쌍수로 불리우는 귀검 악무방이군.) 세 사람은 잠시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금의노인의 시선을 느꼈는지 백의노인이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눈에서 실날같은 광채가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그는 잠시 금의노인을 보더니 다시 그의 앞에 있는 은의미녀를 바라보았다. 금의노인을 바라보았을 때는 약간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던 그의 얼굴이 은의미녀를 보자 일변했 다. 그는 잠시 은의미녀를 바라보더니 두 사람에게 무어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두 청년의 시선도 은의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 문득 금의노인은 의아심이 생겼다. (이 은의미녀가 도대체 누구이길래 저 오만무도한 노괴물이 이토록 관심을 보일까?) 금의노인은 다시 은의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차가운 듯 하면서도 기품있는 태도, 티없이 맑고 깨끗한 얼굴, 심혼을 얼릴듯 서늘한 눈빛. 그 외에는 세상의 다른 여인들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금의노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백의노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백의노인쪽을 바라보던 그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백의노인의 뒷편에 앉아있는 청의중년인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저...... 저 자는......?) 그가 바라보고 있는 청의중년인은 온화하게 생긴 사십대 초반의 사나이였다. 그는 누런 황의를 입은 서생차림의 청년과 딸인 듯한 눈이 커다란 소녀를 앉혀놓고 무어라 고 떠들 고 있었다. 그가 한 마디를 할 때마다 황의청년과 청의소녀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허나 금의노인의 시선은 청의중년인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문득 그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저 자가 이십 년 만에 다시 나타나다니.......) 은의미녀는 금의노인이 한숨을 쉬자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은 좌백의 준수한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가 곧 악무방을 거쳐 백의노인의 얼굴 에 머물 렀다. 그러다가 천천히 백의노인의 등뒤에 있는 청의중년인을 향했다. 그녀의 시선은 다시 청의중년인을 지나 황의청년을 거쳐 제일 나이어린 소녀에게로 향했다. 소녀를 향한 그녀의 눈에 문득 이채가 떠올랐다. 소녀의 커다란 눈에서 반짝이는 지혜어린 빛이 아주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소녀는 누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갸웃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 은의미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소녀는 큰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은의미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배시시 웃어보였다. 은의미녀이 차가운 얼굴에도 언뜻 엷은 미소가 스쳤다가 사라졌다. 소녀가 누군가를 향해 웃어보이자 청의중년인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취야. 누굴 보고 웃고 있느냐?" 청의중년인은 소녀가 바라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와 금의노인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 다. 청의중년인은 잠시 흠칫하더니 이윽고 미소를 띄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금의노인에게로 다가왔다. "하하....... 이게 누군가? 영감탱이가 코빼기도 안보여 죽었는줄 알았더니 이것에서 만나게 되었 군." 금의노인은 히죽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이런 빌어먹을 친구같으니...... 자네가 아직 죽지 않았는데 내가 어째서 먼저 죽을 수가 있 나?" 그들은 서로 낄낄대며 웃었다. 청의중년인은 금의노인과 히히덕거리며 장난을 주고받다가 문득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은 의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금의노인에게 물었다. "자네에게 언제 이렇게 큰 딸이 있었나?" 금의노인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에끼 이사람아! 이분 소저는 내딸이 아니라 우연히 동석하게 된 사람일세." 그 말에 이언년은 머리를 탁 쳤다. "아이고. 이런 실례가 있나. 이것 참 미안하게 되었소. 소저." 은의미녀는 다만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였을 뿐이었다. 그 모습은 어찌보면 그의 실수에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기도 했고 어찌보면 그들이 안중 에도 없 다는 태도 같기도 했다. 이언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금의노인의 팔을 잡아끌었다. "자. 우리 자리로 가세. 내가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네." 금의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일어섰다. "낭자. 실례했소." 그들은 곧 청의중년인의 자리로 갔다. 청의중년인은 미소를 띄며 청의소녀를 가리켰다. "이 아이는 내 딸인 이비취네. 비취야. 인사드려라. 아버지의 오랜 친구란다."


이비취는 커다란 눈을 깜박이고는 귀엽게 금의노인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금의노인은 히죽 웃었다. "오냐. 이언년이 언제 갔는지도 모르게 슬쩍 도둑장가를 가더니 어느새 이렇게 크고 예쁜 딸을 낳 았구나." 이언년은 껄껄 웃으며 황의청년을 가리켰다. "이 청년은 삼절서생 서문광이라네." 서문광은 자리에서 일어나 금의노인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불초 서문광이 노선배에께 인사드립니다." 금의노인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노선배 무슨...... 그냥 금노인이라고 부르게." "제가 어찌 감히......" 서문광이 송구스러워 하자 갑자기 금의노인이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렇게 부르기 싫으면 앞으로 나와 상종하지 말기로 하세." 그 말에 서문광의 준수한 얼굴이 어색하게 변했다. 이언년이 껄껄 웃으며 그들을 자리에 앉혔다. "하하...... 호칭이야 아무렇게나 부르면 어떤가? 자자...... 우선 앉게." 이비취는 자리에 앉으며 큰 눈을 깜박였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존성대명은 무어예요?" 어린 소녀의 입에서 존성대명이란 말이 나오자 금의노인은 어색한지 낄낄 웃었다. "헤헤...... 이 눈만 큰 귀염둥이야. 노부는 금성위라 한다." 이비취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그 유명한 팔대명왕주의 육족존이시란 말이예요?" 금의노인은 싱겁게 웃었다. "언년이 또 함부로 노인의 이름을 네게 알려줬구나. 그렇다. 노부가 바로 육족존이다." 그 말에 서문광은 깜짝 놀랐다. 육족존 금성위! 그는 팔대명왕중의 한 사람이었다. 육족존이란 불가에서 귀신을 잡은 여덟 명왕중 다리가 여섯개 달린 명왕을 말한다. 무림의 육존은 비록 다리가 두개 밖에 달리지 않았지만 여섯개인 불 가의 육 족존보다 훨씬 무서웠다. 알려진 바로는 그는 경공에서 가히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의 경공과 신출귀몰한 보법은 능히 천하를 오시할 만 했다. 이비취는 깜찍하게 눈을 반짝이며 금성위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의 몸은 너무나 빨라서 아무도 할아버지를 벨 수 없다는 데 그게 정말이예요?" 금성위는 껄껄 웃었다. "허허...... 아무도 라는 말은 약간 과장된 것이지. 하지만 웬만한 솜씨로는 노부의 옷자락 하나 벨 수 없지." 그 말에 이언년의 뒷자리에 앉아있던 백의노인이 낮게 코웃음을 쳤다. "흥!" 금성위는 백의노인을 힐끗 돌아보고는 다시 히죽 웃는 얼굴이 되었다. 이언년은 백의노인을 보다가 금성위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이 건방진 백의노인은 누구인가?" 금성위는 역시 전음으로 말했다. "자네는 혹시 매처럼 날카로우면서도 바람처럼 빠르게 검을 쓴다는 자를 알고 있나?" 이언년은 깜짝 놀랐다.


"아니 그럼 저 백의 노인이 그 비응추풍검 조군평이란 말인가?" "왜 아니겠나? 저 질랄같은 성미는 십 년이 지난 지난 오늘도 여전하군." 비응추검 조군평은 화산파의 장로 중 한 사람이었다. 화산파에는 모두 일곱 명의 장로가 있었는데 하나같이 검의 달인으로 소문이 났다. 그중에서도 비응추풍검 조군평은 성격이 날카롭고 검술이 표독해 많은 무림인들이 두려워 하고 있 는 절대의 검객이었다. 또한 그는 매화검 오상의 스승이기도 했다. 이언년은 가볍게 살을 찌푸렸다. "저 노괴물이 나왔으니 화산파에서는 이번 영웅대회를 단단히 벼르고 있군 그래." 금성위는 나직하게 말했다. "영웅대회도 영웅대회지만 저 늙은 괴물이 나온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네." "그게 무엇인가?" "요즘 세상을 온통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그 검마인가 오의광생인가 하는 애송이 때문이라 네." 그 말에 이언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랬군. 그럼 잠시 후엔 볼만한 구경거리가 생기겠는걸." 이번에는 금성위의 눈이 동그래졌다. "엉? ���건 무슨 말인가?" 이언년은 싱긋 웃었다. "그건...... 아! 마침 그가 왔군." 과연 영빈루의 입구로 들어서는 두 사람이 있었다. 흑의의 사내와 홍안의 소년검수.그들은 바로 전옥심과 제일비였다.

제 7 장.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한 인물에게로 쏠렸다. 허름한 흑의에 녹슨 철검을 차고 있는 사나이. 전옥심의 모습은 너무도 특징이 뚜렷해 한 번 본 사람은 영원히 그를 잊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무림의 고수들이기 때문에 화산파의 인물들이 이곳에 와 있다 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유성검 좌백과 귀검 악무방은 공공연하게 오상의 복수를 하겠다고 말했지 않는가? 헌데 그 장본인들이 모두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주위의 시선이 온통 그에게로 쏠리자 심지어 이제껏 냉정하게 앉아 있던 은의미녀도 고개 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아주 잠깐동안 마주쳤다가 헤어졌다. 두 사람은 모두 곧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전옥심도 그녀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고 은의미녀도 더 이상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허나 웬일인지 그들의 만남은 숙명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제일비는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집중되자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멋적게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언년이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전옥심에게 말했다. "형님. 그들은 저쪽에 있군요." 그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이언년 등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때 한 사람이 조용히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화산파의 악무방이오."


악무방은 화산파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성질이 잔인하고 손속이 사납기로 유명한 인물이었 다. 그가 전옥심을 가로막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너무 긴장이 되어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와 버릴 것 같았다. 전옥심은 천천히 악무방을 주시했다. 악무방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이야기좀 하지 않겠소?" 전옥심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악무방은 그들을 자신이 있던 탁자로 안내했다. 늙고 젊은 두 백의인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백의노인은 두 눈을 감은 채 잠을 자는 듯 가만히 있었고 청년은 별빛같은 눈을 들어 전옥 심을 보 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한순간 시간마저도 정지해 버린 것 같았다. 한 사람은 자타가 공인하는 후기제일지수. 다른 한 사람은 천하를 진동하고 있는 검마. 흑과 백의 두 기재는 잠시 서로 마주 보았다. 먼저 말을 한 사람은 좌백이었다. "어서 오시오. 이리 앉지 않겠소?" 전옥심은 그의 준수한 얼굴을 서늘한 시선으로 주시했다. "당신이 화산고학이라는 그 좌백이오?" "그렇소." 전옥심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귀검 악무방과 제일비도 각기 자리를 잡았다. 좌백은 제일비는 쳐다보지도 않고 오직 전옥심만을 주시했다. "당신은 왜 당신을 보자고 했는지 아시오?" 전옥심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좌백은 눈을 감고 있는 조군평을 힐끗 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귀하 때문에 본파는 천하제일검파로서의 명예가 많이 실추되었소. 굳이 귀하를 탓하고 싶 지는 않 소. 하지만 본 파의 명예는 꼭 되찾고 싶소." 전옥심이 여전히 말이 없자 좌백은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하겠소. 나는 내일 영웅대회에 참가할 것이오. 그 대회에 당 신도 꼭 참가해 주시오. 그곳에서 당신과 내가 자웅을 겨룹시다." 전옥심은 눈을 반짝였다. 흡사 약속이라도 하듯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영웅대회에 참가할 것을 권하고 있었다. 영웅대회! 그 마력은 무엇인가? 전옥심이 말없이 생각에 잠기자 문득 이제껏 잠을 자듯 앉아 있던 조군평의 눈이 번쩍 떠졌 다. "네가 영웅대회에서 좌백을 이긴다면 이제까지의 일은 모두 불문에 붙이겠다." 그는 싸늘하게 말을 뱉고는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전옥심이 그를 바라보자 좌백이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이 분은 오상 사형의 사부님이시오." 전옥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좋소."


그가 짤막하게 말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갑자기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우하하하...... 고학! 이곳에 있었군." 중인들은 그 음성이 너무 컸기 때문에 흠칫 놀라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빈루의 입구에 키가 거의 칠 척은 될 듯한 거대한 체구의 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눈이 퉁방울만하고 손은 다른 사람의 두 배는 될 듯 엄청나게 컸다. 입고 있는 옷은 붉은 홍의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성격이 화급해 보였다. 그의 허리춤에는 거의 노 만한 거대한 칼이 매어 있었다. 무게만해도 칠 팔십근은 족히 되어일 그 칼을 다른 사람이 찾다면 제대로 서 있지 못했을 것이나 황의청년은 나무막대기라도 차고 있는 양 아무렇지도 않았다. 좌백은 홍의청년을 보자 차가운 얼굴에 웃음을 띄었다. "섭붕! 자네로군." 섭붕이라는 말에 전옥심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 패도 섭붕 !그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네 명의 후기지수중의 하나였다. 일명 신주사수라고도 불리우는 네 명의 후기지수는 유성검 좌백과 지옥마검 진궁, 패도 섭붕, 그 리고 남궁검문의 수제자인 경천검 사마결이었다. 패도 섭붕은 구주제일장의 장주인 천룡도 섭풍송의 아들이었다. 그의 칼은 천하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것으로, 천부의 신력을 지닌 그가 이것을 한 번 휘두르면 감히 막아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패도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와 좌백은 생사지교를 맺은 사이였다. 섭붕은 아궁이만한 입을 크게 벌리며 다가왔다. "하하...... 낙양에 왔으면 바로 구주제일장에 올 것이지 뭣하러 쓸데없이 이곳으로 왔나?" 좌백은 가볍게 미소지었다. 천하의 미남자인 그가 웃자 주위가 온통 환해지는 것 같았다. 누가 뭐라해도 그는 천하제일의 미남자라 할 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곧 자네를 찾아갈까 했네." 섭붕은 미소를 띄우며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듯 정색을 했다. "그 전에 잠깐 할 일이 있네.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나러 왔네." "그게 누군가?" 섭붕은 아무 말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은의미녀를 보자 눈을 번쩍 빛냈다. 그는 은의미녀가 있는 탁자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갑자기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포권을 했 다. "섭붕이 이낭자를 뵈옵니다." 좌백은 어리둥절했다. 좌백 뿐만 아니라 섭붕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어안이 벙벙했다. 섭붕은 남에게 굽히기를 싫어하고 웬만한 인물은 발끝의 때만큼도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 이었다. 오죽하면 그에게 천오공자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였다. 헌데 그 오만하기로는 천하에서 뒤지지 않는 그가 은의미녀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다니.......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할 일이었다. 좌백의 눈가에 기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까 사백님이 저 여자의 몸에서 발출되는 무형지기가 생전 처음보는 강력한 것이라고 말씀하셨 는데...... 혹시......) 섭붕이 그렇게 정중히 인사를 했는데도 은의미녀는 다만 가볍게 목례를 했을 뿐이다. 허나 섭붕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부친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장으로 드시지요." 은의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니 그녀의 키는 여자치고는 아주 헌칠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몸매가 잘 빠졌고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녀를 보고 있자니 마치 하나의 난초를 보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몸에서는 난초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섭붕은 그녀가 일어서자 공손히 있다가 좌백에게 다가왔다. "나는 이 분 소저를 모시러 왔네. 자네도 지금 나를 따라 장으로 가세." 좌백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 여자가 누군가?" 섭붕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럼 자네는 아직까지 저 분이 누군지도 몰랐단 말인가?" 좌백은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섭붕은 입을 헤 벌리고 있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천하의 고학도 눈이 멀었군. 저 분이 바로 검후 이한상 소저라네." 그 말에 주위가 벼락을 맞은 듯 시끌벅적해졌다. 항상 침착하고 냉정하던 좌백도 이때만은 놀란듯 눈을 크게 뜨고 은의미녀를 바라보았다. 검후!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그녀가 출도한 것은 전옥심과 비슷했지만 명성은 그를 훨씬 능가했다. 그녀에 대한 전설은 이미 이십 년간 천하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출도하자 마자 그녀는 절강성을 휩쓸더니 이어 강서성과 호북성을 누비고 호남성 으로 들 어온 것이다. 그동안 그녀에게 패한 고수들이 무려 육십 사명에 달했다. 그녀는 이미 여중제일검으로 공인되었으며 어쩌면 천하제일검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파다 했다. 좌백이 멍하니 선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섭붕이 그를 툭 쳤다. "일어서게. 나와 함께 장으로 가세." 그제야 좌백은 정신이 든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생각이 난 듯 말했다. "내 정신 좀 보게. 인사드리게. 본파의 장로이신 비응추풍검 조군평 대협이시라네." 그가 백의노인을 가리키자 섭붕은 크게 놀라 넙죽 인사를 했다. "이제보니 조선배님이셨군요. 섭붕이 미처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그가 정중히 인사를 하자 조군평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네. 영존은 안녕하신가?" 섭붕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덕분에 무고하십니다. 어서 장으로 가시지요. 선배님께서 오셨다는 것을 아신다면 부 친께서 무척 기뻐하실 것입니다." 조군평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좌백은 이어 쥐검 악무방을 그에게 소개시켰다. 섭붕은 이미 전에 그를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가벼운 인사만 교환했다. 이어 그의 시선은 전옥심에게 향했다. "이 분은 누구인가?" 그가 좌백에게 묻는 시선을 던지자 좌백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나보고 눈이 멀었다고 하더니 자네 역시 마찬가지로군. 이 사람이 바로 요즘 본 파를 아 주 납짝 하게 만든 주인공이라네." 섭붕은 전옥심의 흑의와 녹슨 철검을 보고는 안색이 약간 변했다. "이제보니 검마라 불리우는 오의광생이었군." 그의 태도는 돌변해 조금 전 검후를 만났을 때와 전혀 딴판이었다. 그는 화산파와 친하고, 명문정파로 유명한 구주제일장의 소장주인지라 마인이라고 소문난 전옥심 에 대한 인상이 좋을리가 없었다. 전옥심은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고 묵묵히 그를 보고 있


었다. 섭붕은 그를 힐끗 보다가 마지막으로 제일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일비는 일어서서 포권을 했다. "소생은 제일비라 합니다." 섭붕은 피식 웃었다. "자네가 바로 검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는 꼬마검마인가? 요즘 제법 이름을 얻어 선 풍검으로 불리운다는데 이번에는 얼마나 선풍을 불러 일으킬지 의문이군." 그의 말투에 다분히 비꼰는 데가 있었다. 제일비의 얼굴이 점점 새빨개졌다. 그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강호경험이 없어 화가 나면 잘 참지를 못했다. 그가 막 뭐라고 욕을 하려 할 때 전옥심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제일비는 얼굴이 벌개져 숨을 씨근덕거리면서도 전옥심이 막자 화를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전옥심은 천천히 섭붕을 바라보았다. "나는 한 가지 단언할 수 있소." 그의 음성은 나직했지만 섭붕의 귀에는 천둥보다 더 요란하게 들렸다. 섭붕은 흠칫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옥심은 나직하게 말했다. "이번 영웅대회에서 제일비의 명성은 당신을 능가할 것이오." 섭붕은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는 전옥심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문득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 정말 소문대로 광오하군." 섭붕은 힐끗 제일비가 아직 소년 티를 벗지 못한 홍안을 바라보았다. 언뜻 그의 얼굴에 엷은 조소가 어렸다. "당신의 말이 사실이길 바라겠소...... 하지만 저런 어린 아이가 감히 내 패도를 능가할 거라 고......? 풋!" 제일비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으나 아까같이 화를 내지는 않았다. 단지 그는 감격한 눈으로 전옥심을 바라보았다. 천하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후기지수 중의 한 사람 보다 자신을 더 높이 평가해주는 그가 고마웠다. 하지만 자신이 과연 패도 섭붕보다 더 강해질 수 있을까? 제일비는 감격보다는 오히려 걱정이 앞섰다. 전옥심은 그의 마음을 아는 듯 어깨를 다독거렸다. "걱정하지 마라. 내 자질은 켤코 그들에게 뒤지지 않는다. 너는 누구와 대결하든 나의 동생 이라는 자신감을 잃어선 안된다. 알겠느냐?" 제일비는 감격해서 조그맣게 대답했다. "예. 형님!" 이미 섭붕과 좌백들은 검후 이한상과 함께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천하제일의 미남자인 좌백과 검후 이한상이 함께 걸어가자 주위가 온통 그들 때문에 환해 지는 것 같았다. 누가 보기에도 그들은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다. 전옥심은 묵묵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득 영빈루의 계단을 내려가던 이한상이 고개 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동안 허공에서 교차되었다. 그때 전옥심은 처음으로 그녀의 눈에서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만난 어떤 고수들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녀의 무공이 벌써 대홍락의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전옥심의 마음이 약간 어두워질 때 이한상의 눈빛에서도 흠칫한 빛이 떠올랐다.


허나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녀의 모습은 계단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전옥심은 천천히 몸을 돌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제일비의 어깨를 툭 쳤다. "앉거라." 제일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자리에 앉았다. "저 여자의 눈은 정말 특이하군요. 이쪽을 볼 때 마치 제 몸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어요." 제일비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전옥심은 술잔을 따르며 조용히 말했다. "넌 그 이유를 모르겠느냐?" "예." "그것은 검도를 상승의 경지에 익힌 고수들만이 느낄 수 있는 무형지기다. 네가 그녀의 무형지기 르 느꼈다는 것은 그만큼 네 무공이 많이 정진했다는 것이다." 제일비는 그의 말에 신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제 무공이 그렇게 높아졌읍니까?" "그렇다. 허나 만족해서는 안된다. 네가 좀더 높은 검도의 경지에 오르게 되면 너도 무형 지기를 발출할 수 있다." 제일비는 급히 물었다. "언제쯤 그렇게 될까요?" 전옥심은 제일비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궁금한 듯 물어보자 무심한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네 자신에게 달려있는 문제지. 네가 검도의 오의를 터득하기만 하 면 내일 이라도 될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백년이 지나도 무형지기를 발출할 수 없다." "아!" 제일비는 내일이라도 무형지기를 발출할 수 있다는 말에 탄성을 질렀다. "검도의 가장 낮은 경지인 자매판과 황화예에서는 얼마나 노력했느냐에 따라 무공이 결정 된다. 허 나 그 위인 백연탄과 대홍락은 다르다. 그것은 얼마나 익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깨우쳤느 냐에 따 라 결정되는 것이다. 너는 이제 막 백연탄의 초입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제일비는 신이 나서 이 말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풀이 죽었다. "헌데 제가 과연 그 패도 섭붕보다 더 강할 수 있을까요? 그자는 덩치도 저보다 훨씬 더 큰 데......" 전옥심은 무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벌써 잊어 버렸느냐?" "뭐를요?" "네가 해시신루를 익히게 되면 지옥마검 진궁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지옥 마검 진궁과 패도 섭붕은 실력이 비슷하다. 그러니 너는 섭붕을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된다." "아! 정말 그럴까요?" 제일비는 다시 기분이 좋아져서 얼굴에 환한 웃을을 지었다. "그렇다. 단지 네가 부족한 것은 경험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영웅대회는 네게 경험을 쌓을 좋 은 기회이지." 제일비는 그저 패도 섭붕같은 유명한 고수와 겨를 수 있다는 말에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전옥심은 그런 그를 보고 있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너는 한 가지 검법을 더 익혀라." "예?" 제일비는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해시신루는 너무 초식에 치우쳐 강맹한 맛이 없다. 내가 힘이 부족한 것도 너무 그것의 변화에 치우쳤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천하에서 가장 위력이 강한 한 가지 검법을 익혀야 할 것이다." "그게 뭔데요?" "그것은 쇄검의 일종이다. 쇄검은 검강을 일으켜 상대를 베는 수법이지. 이 검강을 일으켜 환검을 펼친다면 그 위력은 능히 천하를 주름잡을 수 있을 것이다." 제일비의 눈에 황홀한 빛이 떠올랐다. "아...... 쇄검이라고요?" "그렇다. 내가 너에게 가르쳐 주려는 것은 쇄검중에서도 가장 위력이 강한 천룡대라삼검이 다." 제일비는 신이나서 정신없이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때 그들에게로 한 인물이 다가왔다. "이런...... 아까부터 계속 불러도 본체만체 하긴가? 정말 너무하군." 다가온 사람은 이언년이었다.그는 전옥심과 제일비가 앉을 때부터 손짓을 했으나 그들은 너무 이 야기에 정신이 팔려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었다. 이언년은 전옥심과 제일비의 팔을 잡아 끌었다. "자, 우리 자리로 가게. 다들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할 수 없이 전옥심과 제일비는 그에게 반쯤 끌려가다시피하며 그들의 자리로 갔다. 금의노인 한 명이 이비취와 서문광과 함께 앉아 헤헤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다가오자 금의노인은 작은 눈을 반짝이며 전옥심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고 있었 다. 그러다가 그는 전옥심이 자신을 주시하자 얼굴에 미소를 지다. "자네가 바로 그 유명한 오의광생인가? 정말 멋잇게 생겼군. 조금전의 그 좌가놈은 너무 희멀겋게 생겨 약간 징그러웠는데 자네는 정말 사내답게 생겼군. 안그러냐. 비취야?" 이비취는 생길생글 웃었다. "할아버지 말이 맞아요. 아저씨는 몸만 빠른 줄 알았더니 말씀도 잘하시는군요." 금의노인은 귀여운 듯 그녀이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요 깜찍한 것이...... 벌써부터 어른을 놀리려고 그래." 이언년은 전옥심을 바라보며 웃었다. "아까 말을 들어보니 자네는 영웅대회에 참가하려는 마음을 굳힌 것 같군." 전옥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잘 생각했네." 그때 금의노인이 다시 불쑥 말했다. "자네 이번 영웅대회에서 우승할 자신이 있나?" 전옥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언년이 잽싸게 소개를 했다. "인사하게. 이 늙은이는 팔대명왕중의 육족존 금성위라네." 그제야 전옥심은 눈을 빛내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금성위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번 대회는 사상 어느 대회보다 흉험할걸세. 그러니 웬만한 자신이 없으면 아예 참가하 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로울걸."


전옥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금성위는 홀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마두관음과 약속한 것이 있지?" 마두관음과의 약속이란 영웅대회의 우승이었다. 그것은 마두관음이 거의 반 강제적으로 떠맡기다시피한 일이었다. 헌데 금성위가 그 일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자네가 영웅대회에서 우승하려면 조금전의 그 놈들보다도 한 놈을 주시해야 할 걸세." 옆에 있던 제일비가 궁금해서 물었다. "그가 누군데요?" 금성위는 제일비의 앳된 얼굴을 보다가 웃었다. "이 놈도 좀더 크면 여자 쾌나 울리게 생겼군." 난데없는 그의 말에 제일비의 얼이 새빨개졌다. 그 모양이 하도 순진해서 이비취와 중인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이언년이 웃으면서 물었다. "쓸데없는 소리말고 말해보게. 그 조심해야할 자가 누구인가?" 금성위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비라는 자일세." "형비?" 이언년은 견문은 무척 넓어 강호의 고수들 중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나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 지 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허나 금성위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그는 자칭 폭섬쾌검이라고 한다네." 폭섬쾌검! 섬칫하기 그지없는 외호였다. "그가 정말 이름 그대로 검을 빨리 쓰나요?" 이비취가 궁금한 듯 큰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금성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는 두 달 전에 우연히 그 놈을 만났다." "그래서요." "헌데 그 놈이 하도 도도하게 굴어서 버릇을 고쳐주려고 잠시 놀려댔지. 헌데 놈이 갑자 기 검을 뽑았다. 그것은 정만 노부 평생 처음보는 쾌검이었다." 금성위의 얼굴 심각해졌다. "그때 그 놈은 딱 한 번 검을 휘둘렀는데 노부는 평생 처음으로 옷자락이 잘렸지." 금성위는 신법으로는 천하제일이라 공인된 절세의 고수였다. 그가 단 일 초만에 옷자락이 잘려졌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과거의 천하제일 쾌검이라는 능광검 한우령도 그 놈보다는 빠르지 않을 것이다. 그 놈은 단 일초 만에 노부의 옷자락을 베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자신을 보고 싶으면 영웅대회로 오라 는 말을 남기고...... 그러니 자네는 그 자를 주목해야 할 걸세." 전옥심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이 신비스럽게 반짝거렸을 뿐이었다. 단 일검에 금성위의 옷을 베어버린 푹섬쾌검 형비!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제 8 장.

환 우 주 천 하 영 웅 대 회

영웅! 이 두글자에는 필설로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마력이 숨어있다. 허나 영웅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살인이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닐까?


적어도 무림의 영웅이란 살인자를 일컫는 말이다. 사람을 많이 죽일수록 명성이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영웅이 되고 나서는 계속해서 살인을 해야하는 좁은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 다. 왜냐하면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생명은 짧아지게 된다. 유성처럼! 허나 아무도 영웅이 되기를 포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강호인이기 때문이다. 강호인은 원래 뿌리가 없는 것이다. 흡사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같고 햇살에 사라지는 무지개같은 것이다. 허나 그중에는 물론 영원히 생명이 존재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그들의 정신이 죽지 않 았고 그 들의 명성이 영구불멸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림에는 숱한 영웅대회가 벌어진다. 허나 그중에서 가장 권위가 있고 명성이 큰 것은 십 년에 한번씩 벌어지는 환우천하영웅대 회였다. 이 대회의 우승자는 천하제일고수의 칭호와 함께 웅풍만리벽에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새겨 놓는 영 광을 가질 수 있다. 웅풍만리벽! 이것이야말로 천하제일의 상징이며 군웅들의 꿈에도 그리는 야망의 무대였다. 웅풍만리벽은 전대회 우승자가 십년동안 보관하게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웅풍만리벽에 이름이 오른 고수는 모두 여섯 명이었다. 육십 년 전, 백년제일검사라 추앙되는 남궁산이 초대 우승자로 선정된 이후 환우천하영 웅대회는 모두 다섯 명의 우승자를 배출해 낸 것이다. 그들은 모두 중천에 떠오른 별처럼 찬란한 명성을 무림에 남겼다. 허나 과연 그들 중 몇 명이나 지금까지 생명을 유지하고 있느냐고 물어보면 아무도 답하 지 못할 것이다. 이름은 남았건만 인물은 간 곳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강호의 진리인 것이다. 낙양의 남쪽 이수가 분지에 흘러드는 곳이 천하에 유명한 이궐용문이었다. 여기에는 북위의 효문제가 낙양에 천도한 이후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석굴이 만들어졌다. 용문석굴이 바로 그것이다. 용문석굴이 빤히 바라보이는 곳에 한 채의 커다란 장원이 있었다. 그곳이 바로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구주제일장이었다. 구주제일장! 구주제일장이 세워진 것은 십 오년 전이었다. 당시 약관이었던 천룡도 섭풍송이 구주제일장이란 거창한 이름으로 장원을 짓자 많은 무 림인들이 그를 비웃었다. 허나 섭풍송은 오년 후 제육차 환우천하영웅대회에서 뭇 군웅들을 꺾고 당 당히 천 하제일고수의 보좌에 올랐다. 그 후로 그의 구주제일장을 얕보는 사람은 감히 없었다. 섭풍송의 구주제일장은 많은 도객들을 배출해 내 이제는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의 도문이라 할 만 했다. 구주제일장은 반경 삼백 장에 달하는 거대한 장원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마치 한 채의 성같이 거대했다. 그 구주제일장이 지금은 수많은 무인들로 들끊고 있었다. 구주제일장뿐만 아니라 낙양성 전체가 인파의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오늘이 바로 제 칠 차 영웅대회가 시작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구주제일장의 중앙에 있는 커다란 연부장에는 비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비무대의 사방에는 수천 명에 달하는 많은 무림인들이 구름처럼 운집해 있었다. 정오경. 해가 정확하게 중천에 뜨자 비무대위로 한 인물이 올라섰다. 그는 갈의를 입은 육십대 초반의 노인이었다. 염소수염을 기르고 눈빛이 유달리 날카로운 노인이었다. 갈의노인은 주위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들어찬 군웅들을 쓰윽 훑어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인은 구주제일장의 총관인 개비수 장홍이라 하오. 오늘 본 장에서 개최하는 영웅대회에 이렇게 많은 군웅들께서 참석해 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이오." "와아......" 주위에서 요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장홍은 손을 들어 그것을 제지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지만 소모는 무한한것이오. 그래서 본 대회는 지금까지의 영 웅대회에 서 했던 차륜전의 부당함을 없애기 위해 새로운 규칙을 제정했소. 누구든지 다섯명의 고수 를 연달 아 격파한다면 일차관문을 통과한 것으로 하겠소. 또 북을 열번 칠때까지 상대가 나타나지 않아도 역시 통과한 것으로 간주하겠소. 칠일동안 예선전을 벌여 일차관문을 통과한 사람끼리 결 선을 벌 일 것이오. 본 대회의 심사를 더욱 공정하게 하기 위해 본 장에서는 세 분의 참관인을 모시 었소." 참관인을 모시었다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비무대의 옆에 특별히 마련되 참관인석을 향했다. 그곳에서 세 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여자는 은빛 무복을 입고 등에는 붉은 수실이 다린 장검을 찬 미녀였다.얼굴이 아주 무표정했고 깨끗하면서도 차가운 모습이었다. 장홍이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한 분은 검후 이한상 소저이시오." 검후라는 말에 군웅들은 일제히 함성을 울렸다. "와아아......!" 저토록 아름다운 미녀가 바로 천하에 대명이 자자한 검후라는 사실에 중인들은 더욱 흥분을 했다. 이한상은 주위를 향해 가볍게 목례 한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장홍은 더욱 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리고 그 옆의 분은 강북녹림의 총표파자이신 흑수마적 문천옥 대협이오." 이한상의 옆에 있던 인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얼굴이 관옥같이 준수한 사십대 중년인이었다. 일신에는 푸른 장포를 입었는데 기이하게도 손에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것은 흑마갑이라는 것으로 마도의 오대병기중 하나에 속하는 마병이었다. 이 장갑을 끼고 있으면 아무리 날카로운 병기를 맨 손으로 잡아도 살끝하나 베이지 않는 다고 했 다. 흑수마적 문천옥은 십 여년 전부터 강북녹림을 석권한 일대의 고수로 항상 행적이 신비하고 기행을 일삼았는데 오늘 이 곳에 나타난 것이다. 문천옥이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자 장홍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마지막 인물을 가리켰다. " 이분은 정파의 최고명숙이자 삼차 영웅대회의 우승자이신 장선생 육덕명, 육대협이시오." 그 말에 중인들의 시선이 벼락을 맞은 듯 떨리며 일제히 그 인물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는 머리가 눈처럼 하얀 백발의 노인었다.얼굴이 대추처럼 붉고 아주 온화한 인상이었다. 몸에는 푸른 학창의를 입고 있었는데 마치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가 바로 정파무림의 영수인 장선생 육덕명이었다.


군웅들은 설마 그가 이곳에 와 있는 줄은 몰랐는지라 모두들 놀라고 기뻐했다. 개중에는 그의 얼굴을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 앞으로 나가려고 애쓰는 사람도 많았다. 육덕명은 주위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그가 자리에 앉자 장홍은 다시 입을 열었다. "되도록이면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우열이 분명히 가려졌을 때는 세분 참관인께서 시합을 중지시 키고 승자를 지명할 것이오. 아무쪼록 본 대회가 무사히 끝나기를 빌겠소. 그러면 지금부 터 영웅 대회를 시작하겠소!" "와아아......!"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함성소리가 한동안 장내를 뒤흔들었다. 영웅대회! 육십 년의 역사를 가지고 숱한 무림영웅들의 피를 들끊게 만들었던 제 칠 차 환우천하영 웅대회가 드디어 정식으로 개회된 것이다. 장홍의 몸이 비무대아래로 내려가자 어느새 대 위로 한 인물이 올라왔다. 그는 신체가 거대하고 손에는 커다란 금배산도를 들고 있었다. 얼굴이 수염이 가득한 그 사나이는 대에 올라서자 큰 소리로 외쳤다. "본인은 제남의 금백도 반풍이라 하오. 오늘 영웅대회에 처음 출전하는 영광을 누리겠으니 강호동 도들의 ���은 성원을 부탁하오." 금벽도 반풍은 산동성 일대에서는 아주 유명한 고수였다. 그가 처음으로 비무대에 올라오자 군웅들은 흥미있는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휙! 반풍의 앞으로 한 인영이 날아내려왔다. 그의 신법은 아주 표홀해 군웅들 틈에서 탄성이 일어났다. 그 자는 얼굴이 창백하고 사지가 가늘면서도 부드러웠다. 그는 비록 검처럼 치켜진 눈썹에 호랑이같은 눈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연약한 여자와 같 은 자태 를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나타나자 반풍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낙성검 허관이로군." 허관과 반풍은 옛부터 사이가 좋지않은 앙숙지간이었다. 그들이 서로 마주 서자 중인들은 흥미를 느끼고 이 두 숙적이 어떻게 싸우나 잔뜩 긴장해 서 주시 했다. 반풍이 먼저 말했다. "허관. 이제까지 우리는 다섯 번을 싸워 승부를 가리지 못했는데 오늘은 반드시 결판을 내야겠 다." 허관은 허리에 찬 검을 빼며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 중 하나는 영원히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할걸." 이어 왼발을 앞으로 내밀더니 즉시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은 아주 빠르고 날카로웠다. 반풍은 이미 그와 여러번을 싸워 그의 무공을 잘 알고 있는지 라 경시하지 뭇하고 즉시 금배산도를 빼들고 반격을 했다. 파파팍! 칼빛과 검영이 서로 교차되어 종횡왕복하고 비무대를 온통 에워쌌다. 그러기를 십 여초가 지나자 누가 보아도 쉽사리 승부를 가름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실력은 그야말로 막상막하라서 아무 누가 승리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중인들 틈에 섞여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이언년은 문득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번 영웅대회는 범상치가 않겠군. 처음부터 저런 고수들이 등장하다니......" 일반적으로 무림의 영웅대회에서는 고수일수록 나중에 등장을 하게 된다.


허나 이 환우천하영웅대회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대회일자가 칠 일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칫 머뭇거리다가는 우승후보들끼리 예선전부터 격 돌을 피 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첫대결부터 반풍과 허관같은 유명한 고수들이 서로 자웅을 겨루 는 것이 다. 그들의 결투는 어느덧 오십 여초를 넘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결정적인 우세를 점하지는 못했다. 허나 이언년과 함께 있던 전옥심은 허관의 검이 조금 더 날카로운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 문득 이언년이 이비취를 바라보았다. "비취야. 누가 이길 것 같으냐?" 이비취는 큰 눈을 깜박이며 비무대 위를 바라보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비록 반풍의 칼이 위력이 강맹하지만 허관의 검은 신속하고도 변화무쌍하니 백 여초가 지 나면 반 풍은 막기 힘들 거예요." 그녀의 말에 전옥심은 슬쩍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옥심도 허관이 유리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그가 검도의 최상승 경지를 올라있는 절대고수였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었 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제 아무리 눈을 까뒤집고 보아도 짐작하기가 힘이 들었다. 헌데 이 나이어린 소녀는 어떻게 단번에 것을 알수 있을까? 단지 우연일까? 문득 전옥심은 이비취를 처음 보았을 때 이언년이 했던 말이 기억이 났다. -- 하하...... 이 아이도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머리가 좋다네. -그의 말은 단순한 칭찬이 아닌 것이 아닐까? 전옥심이 이비취를 바라보자 그녀는 큰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고는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은 무척 천진난만하면서도 귀여운 것이다. 그때 제일비가 탄성을 질렀다. "아! 저것봐요." 그들이 비무대를 바라보니 반풍이 이미 왼팔을 붉게 물들인 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허관의 검이 그의 팔을 스친 것이다. 반풍은 수치심에 몸을 떨며 사납게 덤비려 했다. 그때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 싸움은 허관이 이겼네." 그것은 참관인석에 앉아 있던 육덕명의 음성이었다. 육덕명은 정파의 최고 배분일 뿐 아니라 자타가 공인하는 정도 제일인이었다. 반풍은 감히 그의 말에 대꾸하지 못하고 허관을 노려보고는 그대로 물러가고 말았다. 이것을 보고 있다가 제일비는 신통한 듯 이비취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가 이길 걸 알았지?" 이비취는 그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일비오빠의 무공이 좀 더 올라가면 오빠도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녀와 제일비는 서로 나이 차이도 별로 많지 않아 쉽게 친해졌다. 그래서 그녀는 제일비를 오빠오빠하고 부르며 굉장히 따랐다. 제일비는 그녀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아니 그럼 네가 나보다 무공이 훨씬 높다는 말이냐?" 이비취는 큰 눈을 깜박거리며 신비스럽게 웃었다. "그렇지는 않지만 나는 눈이 있단 말이예요." 제일비는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눈은 나도 있는데......" "그런 눈이 아니라 안목말이지요." 제일비는 알쏭달쏭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금성위가 피식 웃으며 그를 툭 쳤다. "녀석아. 넌 입을 다물고 구경이나 계속해라."


제일비는 머쓱해져서 다시 비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허관은 다시 다른 무림인과 싸우고 있 었다. 이번에 허관과 싸우고 있는 사람은 광동의 유명한 고수인 철륜풍 호경이었다. 호경의 무기는 톱날처럼 생긴 두 개의 륜이었다. 호경은 두개의 륜을 마치 풍차처럼 휘두르며 공격을 하고 있었다. 문득 그들의 결투를 지켜보고 있던 이언년이 전옥심을 돌아보며 한곳을 가리켰다. "자네는 저기 저 자가 누구인지 아는가?" 전옥심은 이언년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괴이하게 생긴 사람이 열심 히 주위 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는 지독히도 못생긴 사람이었다. 전옥심은 아직까지 이렇게 못생긴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 퉁방울만한 눈은 금방이라도 툭 빠져 나올 것 같았고 코는 잔뚝 짜부러진데다 콧구명이 하 늘로 향 하고 있어 비가 오면 빗물이 들이칠 것 같았다. 게다가 입고 있는 옷은 어찌나 헐렁한지 어른 서너 명이 안으로 들락날락할 수 있을 것 같 았다. 어두운 곳에 보았다면 영락없는 귀신으로 오인될 인상이었다. 그는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이쪽을 보고는 입을 헤 벌리고 히죽 웃으며 다가왔다. 이언년은 전옥심을 돌아보며 미소띈 얼굴로 물었다. "저 자를 보면 뭐 생각나는 게 없나?" 전옥심은 못생긴 사나이를 힐끗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천하에서 제일 추남인 사람에 대한 말을 들은 적이 있소." 이언년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자네도 알고 있었군. 저 자가 바로 팔대명왕중의 금강야차일세." 금강야차! 머리가 셋이고 팔이 여섯 개인 불가의 명왕이었다. 허나 무림의 금강야차는 머리도 하나이 고 팔도 두개였다. 하지만 그는 두 가지 점에 있어서는 팔대명왕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이었다. 첫째로 한 눈에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는 그야말로 천하제일의 추남이라 할 만큼 얼굴이 못생겼 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그가 천하에서 암기를 가장 잘 쓰는 고수라는 점이었다. 알려지기로는 그는 한꺼번에 활과 화살, 칼, 고리, 방울, 방망이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 고 했 다. 불가의 금강야차처럼 팔이 여섯 개는 아니지만 그처럼 여섯 가지 무기를 쓰는 것이다. 금강야차는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정신없이 비무를 구경하고 있는 금성위의 등을 툭 쳤다. "금가야! 형님이 오셨는데도 본 체도 하지 않기냐?" 금성위는 고개를 돌려 금강야차의 못생긴 얼굴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제길......오늘도 일진이 사납군. 이 못난이를 또 만났으니....." 금강야차는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싱겁게 웃었다. "네 놈은 속으로는 좋으면서도 겉으로는 꼭 그렇게 싫은 척을 한단 말이야......" 금강야차와 육족존은 팔대명와중에서도 가장 친한 사이였다. 금성위는 시큰둥한 얼굴로 다시 비무대로 얼굴을 돌려버렸다. 금강야차가 그것을 보고 막 뭐라고 하려할 때 이언년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하하...... 아직도 그 얼굴은 여전하군." 이어년을 보자 금강야차는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을 아주 우거지로 만들었다. "아이구...... 어쩐지 금가놈이 시건방지게 굴더니...... 믿는 사람이 있었군." 이언년은 흉허물없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어쨌든 반갑네. 이십 년만인가......? 그동안 좀더 잘 생겨지기를 바랬는데 조금도 발전하


지 못 했군." 그와 금강야차는 서로 반갑게 말을 주고 받았다. 이언년은 팔대명왕의 모두와 전부 친한 사이인지 거리낌이 서로 농담을 지껄였다. 이언년은 금강야차를 끌고와 이비취 등과 인사를 시켰다. 그때, "으악!" 대위에서 처참한 비명이 들려왔다. 철륜을 무시무시하게 휘두르던 호경이 허관의 검에 가 슴을 찔 린 것이다. 진한 선혈이 뿜어지며 호경의 몸은 차가운 시신이 되어 대위에 쓰러졌다. 그는 영웅대회의 첫 희생자가 된 것이다. 허나, "와아!" 군웅들은 오히려 함성을 질렀다. 환호와 박수소리가 허관에게 퍼부어졌다. 이것이 바로 무림인 것이다. 승자는 환호를 받지만 패자는 생명을 잃는다. 그래도 아무도 패자를 비호해주거나 동정하지 않는다. 환호와 갈채가 한 사람의 선혈과 바꾸어지는 곳. 자신의 생명보다도 단 한 번의 패배를 더 두려워하는 것이 무림인들의 생리였다. "우와와와.....!" 허관이 연거푸 두 사람의 절정고수를 물리치자 군웅들의 함성으로 주위가 떠나갈 듯 했다. 그 함성소리를 듣고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지 않는다면 무림인이라고 할 수 없으리라. 제일비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시키고 부러운 눈으로 허관을 바라보았다. 검을 비켜찬 채 비무대위에 우뚝 서 있는 허관의 호리호리한 몸은 조금전과는 달리 아주 당당해 보였다. 두 사람이 연거푸 패하자 그에게 도전하는 사람이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둥! 둥!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 북이 열 번 울릴 때까지 도전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는 이 번 영웅 대회에서 첫 번째로 일차관문을 통과하게 되는 것이다. 둥! 북이 다섯 번쯤 울렸을 때였다. 비무대의 서쪽에서 한 인물이 올라왔다. 그는 키가 무척 크고 삐쩍 마른 사람이었다. 제일비는 사람이 이렇게 마를 수 있는가 하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는 흡사 바람이 불면 금시라도 날아가 버릴 듯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머리는 더부룩했고 손가락은 뼈마디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허리춤에는 길쭉하고 불품없는 쇠꼬챙이같은 장검이 매어 있었다. "뭐 저렇게 마른 사람이 다 있지?" 제일비는 신기한 듯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허나 전옥심은 눈을 반짝 빛냈다. 그에게서 칼날같은 기운을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무림에 출도한 이후 두 번째 받아 보는 강 력한 무형지기였다. 그가 나타나자 금성위의 안색이 홱 변했다. "저 놈이다!" 어언년 등이 그를 바라보았다. 금성위는 눈빛을 굳힌채 마른 사나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자가 바로 폭섬쾌검 형비라는 놈이다. 과연 나타났군." 그 삐쩍마른 사나이가 천천히 비무대위로 오르자 허관의 얼굴이 기이하게 변했다. 앙상하게 마른 그의 몸이 점차 다가올수록 한 줄기 날카로운 기운이 허관의 몸을 찌르는 것 이다. 허관의 안색이 침중해져서 그를 바라보았다. "귀하는 누구요?" 마른 사나이는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눈을 반작 빛냈다. 그의 눈빛은 아주 맑고도 차가워 맹수의 눈빛 연상시켰다.


그는 메마른 입술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열고 차가운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형비!" 허관은 그의 이름을 처음 듣는지라 약간 어리둥절했으나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천천히 검 을 빼들 었다. "좋소. 귀하는 준비하시오." 형비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마치 깎아놓은 석상같았다. 허관의 눈이 아주 매서워졌다. 그는 신중한 걸음으로 형비의 주위를 다가오더니 검을 번개같이 휘둘렀다. 쏴악! 한 줄기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검빛이 무지개처럼 뻗어나갔다. 허나 형비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마른 몸이 검광에 양단되는 듯 했다. 순간적으로 허관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별 놈도 아니었군.) 바로 그때였다. 번── 쩍! 허공 사이로 무언가 흰 빛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 순간 허관은 무언가 거의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미약한 기운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자 신의 목 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한줄기 기이한 전율이 그의 몸을 뒤흔들었다. (천하제일쾌검......!) 그의 생각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털썩! 허관의 몸은 싸늘하게 식은 채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의 목에서는 어느 새 커다란 구명이 뚫린 채 검붉은 선혈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군웅들은 입을 딱 벌렸고 침묵만이 장내를 무겁게 짓눌 렀다. 참관인석에 있던 세 명의 절대고수들도 눈을 크게 뜬 채 형비의 마른 몸을 보고 있었다. 그의 몸은 처음과 조금도 달라진 곳이 없었다.다만 한 가지, 그의 허리춤에 있는 쇠꼬챙이 같은 장 검의 끝에서 방울방울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을 뿐. 짝짝짝! 어디선가 박수소리가 울리가 시작했다. 이어 그것은 거대한 함성으로 변해버렸다. "와아아..... 최고다!" "고금제일의 쾌검수다!" 함성소리는 주를 온통 뒤흔들며 꺼질 줄 모르고 계속 되었다. 제일비는 정신이 번쩍든 듯 손바닥 이 부서져라 박수를 쳤다. 금성위는 눈을 침중하게 굳히고 있다가 전옥심을 돌아보았다. "어떤가? 정말 빠르지 않나?" 전옥심은 말없이 형비의 몸을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이 없어 그가 지금 무 슨 생각 을 하고 있는지 알수가 없었다. 전옥심이 보고 있는 것은 형비의 손이었다. 비록 거리가 멀었지만 전옥심은 아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형비의 손가락은 아주 길었다. 그리고 뼈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아니 비단 뼈뿐만 아니 라 신경 줄기가 마치 조각한 듯 두드러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백골의 손과도 같았다. 허나 전옥심의 눈은 그 손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 손은 한 가지 무서운 사실을 가리키 고 있었 다. 그것은 형비의 온 신경이 그의 의지의 지배하에 있다는 말이었다. 즉, 형비가 검을 뽑는 속도는 그의 신경이 반응하는 속도와 같다는 것이다. 인간의 신경은 천하에서 가장 빠르다. 헌데 그 신경과 같은 속도로 빨리 검을 쓴다면 가히 천하제일의 쾌검이라 할 만 하지 않을


까? 전옥심은 천천히 그 손에서 눈길을 돌렸다. 그는 금성위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의 차가운 얼굴에는 엷��� 미소가 어려 있었다. "세상은 정말 재미있군." 그는 한 마디를 내뱉은 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금성위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저런 무서운 쾌검을 쓰는 고수가 영웅대회의 경쟁자로 나선 마당에 재미있다니.......혹시 전옥심은 자포자기가 되어 영웅대회를 포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이언년도 전옥심의 말을 들었다. 그렇지만 그는 금성위처럼 놀라지 않고 단지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전옥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도 검을 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검을 배우는 사람으로서 가장 기쁜 일은 바로 다른 사람의 검법을 보는 일이었다. 그 사람의 검법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 기쁨은 커지게 된다. 적수가 없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검객으로서의 가장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전옥심은 형비의 검을 보고 자신의 상대가 될만 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적수와 만나 검을 겨룰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기쁜 일일까? 그것은 검을 배우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인 것이다. 허관과 같은 고수를 단 일초만에 죽여버리는 형비에게 감히 도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그는 도전자가 나타나지 않아 이번 영웅대회에서 처음으로 일차관문을 통과한 고수 가 되었 다.

제 9 장.

유성이 흐르는 밤 !

구주제일장에서는 이번 영웅대회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군웅들을 위해 모두 네 곳의 숙 소를 준 비했다. 각각 천지현황으로 이름 붙여진 이 숙소들은 모두 이천여 명이 묵을 수 있을만큼 엄청나 게 거대했다. 화산파를 비롯한 명문정파는 천방에, 수라교를 비롯한 사마외도의 인물들은 지방에, 그 외에 중도를 걷는 문파의 인물들은 현방, 그리고 문파가 없는 고수들은 황방에 배정되었 다. 이것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무리들을 떼어 놓아 쓸데없는 시비를 없애기 위한 적절 한 방법 이었다. 저녁무렵, 전옥심은 황방에 배정된 자신의 방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의 귓전에는 아직도 조금전의 비무대의 함성과 요란한 병장기의 부딪침 소리가 들려오 는 것만 같았다. 휘잉! 서늘한 밤바람이 그의 거친 흑의를 흔들고 지나갔다. 기다랗게 늘어뜨린 흑발이 바람에 날려 마치 검은 깃발처럼 나부꼈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가고 있었다. 전옥심은 꽃밭속을 천천히 걸어갔다. 별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갑갑한 방을 벗어나 바람을 쐬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두워오는 하늘에 별이 하나 둘 씩 떠오르고 있었다. 보석처럼 반짝이며 점점이 박혀있는 별.


별은 떠오르고 있건만 사람의 목숨은 덧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오늘 벌써 열 두명이 자신의 선혈을 비무대 위에 뿌려야만 했었다. 허나 일차관문을 통과한 사람은 형비를 비롯하여 겨우 세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전옥심은 문득 주자앙이 보고 싶어졌다. 그의 애처로워 보이는 몸뚱이와 부드러운 미소가 그리워 졌다. 그리고 혜성처럼 반짝이는 눈빛도 보고 싶어졌다. 누군가가 그리워 졌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마음이 외로와 졌기 때문이리라. 비록 황연화의 죽음에 따른 고통은 많이 가셨지만 그는 고독했다. 주위의 권유로 영웅대회에 참가해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있었어도 그는 항상 고독해 왔다. 허나 아무도 한 가지 사실은 모를 것이다. 그가 영웅대회에 참가하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계획되었던 일이라는 것을. 그는 남의 말에 흔들리거나 목적없이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상대할 적은 너무나 거대했다. 십자맹! 흔적도 없고 자취도 없지만 그들은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 끝도 모르고 시작도 모르는 엄청난 힘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 다. 무림에 출도하기전, 주자앙은 전옥심에게 영웅대회에 참가할 것을 권했었다. --- 이제 너는 무림 역사상 가장 강대한 집단과 상대해야만 한다. 나는 더 이상 너를 도 울 수 없 다. 하지만 너 혼자의 힘으로는 힘에 벅찰 것이다. 너는 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그들이 너를 도울지는 나도 모른다. 허나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의 도움을 받고 힘을 뭉쳐 야 한다. 그래야만 십자맹을 꺾을 수 있다. 세 사람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나의 대형인 환우일기사 종리을 진이다. 그는 무공만으로 따진다면 백년제일검사라는 남궁산에 절대 뒤지지 않는 절대의 고수이 다. 허나 그의 종적은 지난 이십년간 사라져 버렸다. 나에게 그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종리을진은 사 차 영웅대회의 우승자이다. 영웅대회의 우승자는 웅풍만리벽에 자신 의 이름 을 기록하게 되어 있다. 허나 단지 그것만이 아니.웅풍만리벽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네가 이 번 칠차 영웅대회에서 우승하게 된다면 웅풍만리벽의 비밀을 알수 있을 것이고 종리을진의 행방도 알게 될 것이다.--웅풍만리벽! 천하제일의 상징이며 모든 무림인들의 우상인 웅풍만리벽의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천하제일기사였던 종리을진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십자맹......그들은 과연 지금 어디에 있을까? 혹시 그의 곁에 숨어 그의 일거일동을 지켜보는 곳이 아닐까? 전옥심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가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생각에 열중하다 보니 그의 몸은 어느 새 황방을 지나 후원에 이르러 있었다. 그의 앞에 달빛을 받으며 세 명의 황의복면인이 우뚝 서 있었다. 모두 몸이 거대했고 안광이 뼈골을 시릴듯 차가운 인물들이었다. 전옥심은 천천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허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가 말없이 자신들을 바라보고만 있자 황의복면인들 중 가운데에 있는 황의인이 무뚝뚝한 음성으


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수라교의 삼귀들이다. 본교에서의 일을 잊지는 않았겠지, 전옥심?" 수라삼귀! 이들은 천하제일마교라는 수라교에서도 공포스런 존재로 불리우는 초절정고수들이었다. 천귀 막비! 지귀 해천파! 인귀 허광! 개개인의 무공도 가공스럽지만 이들의 합격술은 수라교 내에서도 최고라고 알려져 있었다. 전옥심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그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허공을 올려다 보 았다. 어느덧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중 별 하나가 유성이 되어 긴 꼬리를 끌며 떨어지고 있었다. 별은 하나하나가 목숨이라던가? 목숨 하나, 별 하나! 별이 떨어진다는 것은 목숨 하나가 사라진다고 하지 않는가? 오늘 밤은 또 누구의 맑은 영혼이 사라질 것인가? 살귀는 전옥심을 가운데 둔 채 둘러쌌다. 스르릉! 서늘한 음향과 함께 그들의 손에는 기형의 도가 쥐어져 있었다. 도신이 무척 얇으면서도 폭은 굉장히 넓은 칼이었다. 삼귀는 기형도를 쥔 채 전옥심을 노려보았다. 전옥심은 떨어지는 유성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반짝이는 것은 빛을 잃게 된다......." 그 말은 자신을 제일 처음 가르쳤던 능광검 한우령이 죽기전에 마직막으로 했던 말이었다. 지금 이 순간 문득 그 말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자의 검도 저 유성과 같이 찬란하게 피었다가 사라졌다......) 형비! 낮에 보았던 형비의 눈부신 쾌검이 떨어지는 유성과 겹쳐 그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때 삼귀의 폭갈소리가 터져나왔다. "차앗──!" 세 자루의 기형도가 날카로운 호선을 그리며 그의 몸을 짓쳐 들어왔다. 그들의 배합과 방위는 그야말로 완벽하여 물방울 하나라도 그들의 엄밀한 도막을 뚫고 나 올 것 같 지 않았다. 허나 전옥심은 멍하니 유성을 바라본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유성처럼 짧고 빠르게 검을.......) 세 기형도 그의 몸을 갈라놓을 순간 그의 몸이 미약하게 흔들거렸다. 어두운 밤공기를 뚫고 유성이 피었다가 사라졌다. 하늘에는 떨어지는 유성하나, 땅에는 피어오르는 유성 하나. 두 유성은 서로를 향해 부딪혀 가는 것 같았다. 유성 사이로 처절한 비명이 밤하늘에 메아리쳤다. "으악!" 선열한 핏줄기가 뿜어지며 유성을 가렸다. 삼귀는 기형도를 든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허나 그들의 목은 어느 새 한치쯤 갈라 져 있고 그 사이로 붉은 선혈이 샘물 솟듯 뿜어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믿을수 없다는 눈으로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전옥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런 쾌검이......" 말이 반쯤 나오다가 끊겼다. 동시에, 털썩! 그들의 몸은 마치 짚단처럼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수라삼귀! 천하를 떨쳐 울리 합격술의 명인들은 너무도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다. 밤하늘을 가로지르던 유성도 그들의 생명이 끝남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전옥심은 언제 검을 썼느냐는 듯 유연하게 밤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우 측을 바


라보았다. 언제부터인지 그곳에 한 인물이 서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눈부신 은의가 별빛을 받아 더욱 하얗게 보였다. 칠단같은 머리와 별빛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는 두 눈. 이한상은 밤바람을 맞으며 전옥심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한동안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두 사람은 묵묵히 서로를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은의와 흑의, 싸늘한 눈빛과 우울한 눈빛, 검후와 검마...... 그리고 여와 남! 달빛이 두 사람의 어깨위로 조용히 부서지고 있었다. 문득 이한상의 피처럼 붉은 입술이 조용히 열렸다. "눈부신 쾌검이로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심혼을 씻어주듯 맑았다. 허나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전옥심은 그녀의 티 한점 없이 맑은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곁을 스치고 지나가려 했다. 그때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너무 강하군요." 전옥심은 걸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울하게 반짝이는 전옥심의 눈. 이한상은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며 말을 이었다. "강한 것은 언제고 부러지는 법이예요." 문득 전옥심의 입가에 하얀 선이 그어졌다. 그것은 드물게 보는 그만의 독특한 미소였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강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소." 이한상은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 사람은 모든 걸 이룰 수가 있지요. 당신에게도 이루고 싶은 것이 있나요?" 전옥심은 헝클어진 흑발사이로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게 무엇이지요?" 전옥심은 무심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승부요. 강한 자와의 승부!" 처음으로 이한상의 싸늘하고 맑은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그것은 마치 녹은 얼음이 풀리고 차가운 바다에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것 같았다. "나도 그래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은 검이예요. 아쉽게도 나는 강호에 출도한 이래 진정으로 강한 검수 를 만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전옥심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생이란 참으로 흥미가 있소. 강호는 넓고 고수는 끊이지 않아 어느때고 강자를 만날 수 있소." "하지만 검으로 진정한 강자 된 사람은 거의 찾을 수가 없지요. 만약 검의 강자를 만나 서 로의 검 법을 비교하게 된다면 검수로서 그보다 기쁜 일은 없을 거예요." 전옥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오." 이한상은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나와의 비무를 승낙하시겠어요?" 전옥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그들은 말을 끊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달빛이 부드럽게 쏟아지고 있는 야. 말없이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은 왠지 상대방이 그렇게 먼 타인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다. 전옥심의 눈은 아주 쓸쓸했다. 어찌보면 고독에 못이겨 소리내어 우는 어린아이 눈빛 같 기도 했


다. 이한상의 얼굴은 얼어붙은 대지에 고고히 피어난 한송이 난초 같았다. 두 사람은 서로 남이면서도 아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전옥심은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별빛을 받으며 가만히 서있는 그녀는 마치 사랑의 여신 같았다. 그가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안았을 때 놀랍게도 그녀는 거부의 몸짓을 보이지 않았다. 별빛에 취했음인가? 그녀의 눈은 유달리 반짝이고 있었다. 전옥심은 그녀의 별빛같은 눈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자신의 눈으로 가득차 들어오는 그 고독한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스르 르 눈을 감았다. 입술과 입술이 마주쳤을 때 그녀의 진한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강한 사내의 채취가 밀려와 그녀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억센 팔과 단단하게 부딪혀오는 강한 가슴의 근육. 그녀의 차갑게 얼어붙었던 가슴은 자신도 모르게 난생 처음으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전옥심은 마치 꿀물을 빨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을 했다. 그녀의 몸은 꿀로 만든 것일까? 향긋한 여인의 내음...... 달콤한 입술...... 부드럽고 탄력있는 가슴의 촉감.......두 사람의 숨 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졌다. 두 사람을 구해준 것은 봄 밤에 취해 자지 않고 울어대는 한 마리 밤새였다. 쪼르릉! 그 소리에 두 사람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전옥심은 그녀를 안은 팔의 힘을 서서히 빼내었다. 그의 몸이 떠나자 그녀는 약간 비틀 거리다가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휘잉! 차가운 밤 바람에 기다란 머리를 휘날리며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도리질을 했 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조금전 같은 일은 없겠지.) 아쉬움인지 후회인지 모를 감정이 한 차례 회오리처럼 그녀의 몸을 흔들고 지나갔다. 그녀는 은어같은 두 손을 들어 머리를 어루만지고는 가볍게 얼굴을 문질렀다. 세차게 뛰었던 가슴이 가라앉고 마음이 다시 냉정해졌다. 그녀는 다시 차가운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흑의를 펄럭이며 선 채 허공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해 그의 지금 마음이 어떠한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이제는 무슨 상관이람.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비무일은 언제로 하겠어요?" 전옥심은 점점이 박혀있는 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려 그녀쪽으로 그 우울한 눈빛을 던졌 다.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영웅대회가 끝난 다음이 어떻겠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동안만이라도 서로 상대를 지켜주기로 해요." "좋소." 검후��� 검마의 약속! 후일 후마지약이라 이름지어진 두 절대고수의 대결은 이렇게 해서 결정되었다. 전옥심은 먼저 몸을 돌렸다. 그의 마음속을 뒤흔들었던 조금전의 격동도 이미 가라앉아 있 었다. 그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생각했었지만 후회따위는 하지 않았다. 사람이 때로는 기분이나 분위기에 좌우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일은 봄의 내음과 정취....... 우박처럼 쏟아지던 달빛과 떨어지는 유성이 만들어낸 돌발 적이 일이었을 뿐이다. 앞으로는 그와같은 일은 두번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황방 이백 사십사.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단촐한 의자 하나와 침상만이 동그만이 놓여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의자로 가서 앉았다. 잠시 어둠에 묻혀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때 무언가 어둠속에서 반짝거렸다. 파앗! 의자가 정확하게 반쪽이 났다. 허나 그 위에 앉아 있던 전옥심의 몸은 어느새 침상으로 가 있었다. 무엇이 어찌되 연유인지 알기도 전에 다시 어둠 속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파앗! 침상이 네쪽으로 갈라졌다. 그 찰나적인 순간, 전옥심의 몸은 이미 허공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날아가며 그는 검을 빼들어 허공을 향해 그어댔다. 번쩍! 어둠이 반으로 갈라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분명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툭! 무언가 둔탁한 물체가 어둠속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은 전신을 흑포로 칭칭 감싼 체구가 왜소한 복면인이었다. 체구가 얼마나 작았는지 얼핏 보기에는 오륙 세 가량의 소동 같았다. 전옥심은 천천히 철검을 허리춤에 차며 그를 바라보았다. 난장이 복면인의 눈은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어...... 어둠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내 종적을......." 전옥심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잠행술은 아주 뛰어났다. 하지만 나는 예전에 장님으로 지낸 적이 있었지." 난장이 복면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전옥심을 올려보다가 피를 울컥 토해냈다. 그의 가슴에서 배까지는 쩌억 갈라지 채 내장을 쏟아내고 있었다. 전옥심은 천천히 물었다. "무슨 일로 나를 죽이려 했지?" 난장이 복면인의 눈에서는 이미 생명의 빛이 꺼져가고 있었다. 그는 희미한 눈으로 전옥심을 보았다. "크으으...... 과...... 과연 검마답다...... 하지만 흑응방의 손을 피할 수는 없다." "흑응방의 살수인가?" "나...... 나는 흑응삼살중의 잠마다...... 고....... 곧 다른 자가 너를......."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전옥심은 잠시 잠마의 작은 시신을 내려다 보았다. 흑응방에서의 습격! 이것은 확실히 그로서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허나 전옥심은 별로 당황하지 않았 다. 그가 상대해야 할 적은 어쩌면 흑응방보다 몇 배나 더 강할지도 모르는 십자맹이었다. 십자맹과 대적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설사 흑응방이 아니라 천하오대세력이 모두 그를 합공 한다 해 도 그는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이다.

10 장. 천하 제 일 기 녀 하나의 손이 허공을 뒤덮고 있었다. 영웅대회 사흘 째. 군웅들은 경악에 찬 눈으로 비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위는 온통 백의와 하얀 손바닥 뿐이었다.백의의 주인공은 이제 갓 십 칠팔세 쯤 되었을 아름다 운 소녀였다. 소녀는 입술이 피처럼 붉고 얼굴이 하얗다. 그녀의 상대자는 산서지방의 제일패주인 천왕장 학천표였다. 학천표의 무공초식은 비록 변화가 많지는 않았지만 무서운 힘이 있었다.


그의 초식은 전개하는 것도 깨끗하여 결코 지저분하게 끄는 것이 없었다. 헌데도 그는 백의소녀의 하얀 손에 쩔쩔 매고 있는 것이다. 스읏! 장내가 하얀 색으로 뒤덮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백의소녀의 신법의 가벼움은 가히 경악스러울 뿐 아니라 자세 또한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그녀가 한 번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몸은 마치 나비가 하늘에서 가볍게 춤을 추는 것 만 같았 다. 결코 살기나 흉기는 보이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일은 수 천의 군웅들은 물론이려니와 이언년이나 금성위같은 절정고수들까지 도 그녀 의 초식변화를 완전히 알아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비취는 큰 눈을 깜박거리지도 않고 대 위를 바라보다가 감탄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아름다운 장법이군요. 또 난 저렇게 총명한 여자를 본 적도 없어요." 그러자 옆에 있던 이언년이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넌 그녀가 총명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이비취는 배시시 웃었다. "저 여자의 장법을 잘 보세요. 저 장법은 보기에는 매우 화려하기만 하고 실속은 하나도 없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도 흐트러지거나 혼란스럽지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지요." 이언년은 그말을 듣고 다시 시선을 비무대 위로 집중했으나 백의소녀의 몸놀림이 너무 빠 르고 변 화가 많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난 잘 모르겠는걸." "그건 그녀의 초식이 변화무쌍한데다가 매우 복잡하기 때문이예요. 그러나 그녀의 지혜가 뛰어나 지 않다면 어찌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저런 초식을 배울 수가 있겠어요?" 이언년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의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제 십 오세도 되지않은 어린 소녀가 절정고수들도 잘 알지 못하는 무공에 대해 저렇게 상세한 설명을 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제일비는 아무래도 신통한지 이비취의 커다란 눈을 보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비취야. 그러면 넌 저 여자의 무공 내역도 알 수 있느냐?" 이비취는 그를 바라보며 귀엽게 웃었다.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금강야차는 못생긴 얼굴을 활짝 펴며 그녀의 팔을 잡았다. "요 귀염둥이야. 빨리 말해봐라. 난 아무리 눈깔을 뒤집어 보아도 알 수가 없구나." 이비취는 두 눈을 지혜롭게 반작였다. "천하에서 저렇게 복잡하고 화려한 장법은 하나 밖에는 없어요. 저것은 천하제일의 기녀 가 만든 장법이예요." 천하제일 기녀라는 말에 이언년과 금성위 등의 안색이 홱 변했다. "천향비자 말이냐?" 이비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외에 누가 저런 아름답고 변무쌍한 장법을 만들겠어요? 저 장법은 천향비자의 소녀 만화장이 예요." 그녀의 말에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천향비자는 이미 이십 년 전부터 여중제일고수로 부리웠던 일대의 기녀였다. 한때는 천하삼미중의 하나로 불리웠고, 무공은 당시 천하를 떨쳐 울리던 남해 청조각의 신검절염


니와 버금갔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언년은 대위로 시선을 움직여 눈부시게 움직이고 있는 백의소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저 소녀는 천향비자의 제자이겠군." 금성위도 고개를 끄덕였다. "천향비자는 지난 십 여년간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오늘 그녀의 무공을 다시 보게 되 다니......" 그의 음성에는 감개무량한 데가 있었다. 당시, 그녀의 미모는 너무나 뛰어나 숱한 청년협객들이 그녀의 사람을 얻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 다. 허나 그녀는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과거의 청년협객들은 모두 얼굴에 주름이 진 노호로 변해 버렸고, 그녀도 종적이 사 라진 채 이름만 전설처럼 날아잇을 뿐이었다. 천향비자란 말이 나올 때부터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던 금강야차는 갑자기 작은 목소 리로 중 얼거렸다. "그녀는 종리을진과 사이가 좋았는데 그 뒤로 두 사람의 소식이 모두 끊겨 버렸으니 둘 사 이도 끝 장이 난 게로군." 그의 음성은 왠지 퉁명스러웠다. 허나 이언년과 금성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단지 속으로 쓴웃음만을 짓고 있을 뿐이었 다. 과거 금강야차는 천향비자에 반해 정신없이 따라 다닌적이 있었다. 허나 천향비자가 그와 같은 추남을 거들떠 보기라도 하겠는가? 당시 그녀는 천하제일 기사로 소문난 종리을진과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말이 파다했다. 그 소문에 격분한 금강야차는 종리을진에게 도전했으나 허무하게 패하고는 피눈물을 뿌리 며 돌아 서야만 했었다. 이제 세월은 흘렀건만 금강야차는 아직도 그때의 정을 잊지 못하고 있는 걸 까? 그것은 아무도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마 금강야차 자신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때 제일비가 탄성을 질렀다. "아!" 중인들이 대 위를 바라보니 대 위의 싸움은 이제 막바지에 와 있었다. 스으으..백의소녀의 백어같이 하얀 손은 이미 수 백번이나 비무대 위를 종횡으로 누비고 있 었다. 허나 학천표도 산서성의 제일고수인지라 쉽게 꺾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백의소녀의 표홀하고 현란한 장법에 못이겨 점차 대의 구석으로 몰리는 것이다. 누가 보기에도 학천표의 패색이 역력했다. 학천표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연신 뒤로 몰리고 있었다. 휘이잉! 백의소녀의 손이 풍차처럼 회전하며 그의 늑골을 강타해왔다. 그 순간 학천표는 여전히 얼굴을 싸늘하게 굳힌 채 다시 한 발짝 뒤로 후퇴했다. "아앗!" 구경을 하고 있던 군웅들 틈에서 경악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왜냐하면 학천표의 발은 이미 대 밖으로 뻗어 나갔기 때문이다. 허나 그 순간, 학천표는 오른 발을 축으로 번개같이 몸을 돌아 허공으로 솟구치는 것이 아 닌가? 팟! 그의 거대한 몸집은 거짓말처럼 허공을 향해 거꾸로 날아 백의소녀의 등뒤로 날아갔다.


쑤아앙! 그의 유명한 천왕장이 무시무시한 바람소리를 내며 폭풍처럼 백의소녀를 향해 폭사되어 갔다. "아앗!" 군웅들이 자신도 모르게 거듭 경악의 탄성을 질렀다. 백의소녀의 좌, 우, 뒤쪽의 길은 모두 그 폭풍같은 천왕장의 장영으로 온통 뒤덮였다. 그러므로 백의소녀의 지금 상태로는 앞으로 피할 수 밖에는 없었다. 허나 그렇게 되면 그녀의 몸은 자연히 대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과연 그녀의 가녀린 몸이 천왕장의 기세에 몰려 대 아래로 떨어지려고 했다. 다음 순간, 눈이 번쩍 뜨일만한 일이 벌어졌다. 대 아래로 떨지는 줄 알았던 그녀의 몸은 실로 놀라웁게도 몸은 아래로 떨어졌건만 두 발 만은 여 전히 꽂혀 있는게 아닌가? 마치 하나의 표창처럼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그녀의 몸은 대의 끝에 비스듬히 꽂혀 있었 다. 그렇게 되자 노도와 같은 기세로 공격가던 천왕장은 결국 허탕을 치게 되었다. 그 순간 백의소녀는 극히 가벼운 동작으로 몸을 일으키며 번개같이 손을 내저었다. 펑! 학천표는 헛손질한 탓으로 미처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다가 그대로 그녀의 일장 에 격중 당해 바닥에 나뒹굴었다. "와아...... 최고다!"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가 이번에 시전한 능공번등의 신법은 비단 영민할 뿐 아니라 조금도 어색함이 없는것 을 볼때 그녀의 경공은 이미 신의 경지에까지 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과하게 손을 쓰지 않은 탓인지 학천표는 입으로 실핏줄 같은 선혈을 흘리면서도 비틀거리 며 일어났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백의소녀를 바라보다가 포권을 했다. "학모는 패했음을 시인하오." 그는 말을 마치자 마자 거대한 몸을 날려 군웅들 틈으로 사라졌다. "이번 싸움은 유소파, 유여협의 승리요!" 총관인 개비수 장홍의 기다란 외침이 들리자, "와아!" 군웅들의 함성이 다시 한 번 장내를 뒤흔들었다. 이언년은 이것을 보고 있다가 감탄스런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신법이 대단하군. 천향비자의 왕년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구나." 그때 전옥심은 누군가가 자신을 빤히 주시하고 있음을 깨닫고 시선을 돌렸다. 그들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두 인물이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과 여인이었다. 노인은 청의를 입고 있었는데 몸이 비쩍 마르고 원숭이같이 생긴 늙은 이였다. 여인은 황의를 입고 있었는데 나이는 십 구세쯤 되어 여인이라기 보다는 소녀에 더 어울렸 다. 머리를 두 갈래로 땋고 눈이 아주 아름다운 미녀였다. 전옥심이 바라보자 그녀는 빙긋 웃었 다. 무척 화사하고 귀여운 웃음이었다. 청의노인도 투박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왔 다. "야. 이녀석! 오랜만이구나!" 청의노인은 다가오다가 전옥심의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언년을 보고는 얼굴에 이 상한 을


띄었다. 이언년도 청의노인을 보자 몸이 굳어졌다. "자네......" 두 사람은 서로 말을 잇지 못한 채 멍하니 서서 마주보았다. 격동을 금치 못하고 있는 두 사람.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언년이었다. "이철심. 살아 있었군......" 그의 음성에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깊은 감회가 어려 있어 듣는 이의 가슴을 찡하게 울 리는 것 이었다. 청의노인. 그는 전옥심이 애뇌산에서 우연히 만났던 검사 이철심이었다. 이철심은 원숭이같은 얼굴을 실룩거리며 이언년을 바라보았다. "이십 년 만이로군. 그날 이후 소식이 없어 죽은 줄 알았더니 다시 중원에 나왔군." 이언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았었네. 자네는 그동안 많이 늙었군." 이철심은 돌연 히죽 웃으며 자신의 흰머리가 듬성듬성 박힌 머리털을 쓰다듬었다. "흐흐...... 제길. 나만 늙었나? 왕년에 천하를 떨쳐 울리던 서역제일검 금검신풍객도 이제 는 기 세가 한풀 꺾였군 그래." 금검신풍객이란 말에 전옥심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이언년도 백검회의 인물이었군.) 금검신풍객은 서역지방에서 활동하던 절정의 검객이었다. 항상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금검을 휘두르며 협명을 떨치던 그의 찬란했던 행적은 지난 수 십년간 서역지방에서는 거의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이언년도 우내십검의 한 사람이었다. 곽무극이 금검을 사용하며 중원말씨가 아니라고 했던 삼호검사, 그가 바로 이언년이었던 것이다. 이언년은 빙그레 웃으며 이철심의 손을 따스하게 잡았다. "아무튼 반갑네. 살아있으니 결국 만나게 되는군." 이철심은 원숭이같은 얼굴로 히죽 웃다가 생각이 난 듯 황의소녀를 손짓해 불렀다. "환아! 이리와서 인사드려라. 할아비의 옛 친구란다." 이환이 다가와 인사를 하자 이언년은 빙긋 웃었다. "자네에게 이렇게 예쁜 손녀가 있을 줄은 몰랐네. 나는 결혼한지 얼마 되지가 않아 딸 하 나 밖에 는 두지 않았네." 이비취가 눈치 빠르게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이철심은 눈이 얼굴의 반을 차지하고 ���는 그녀의 얼굴이 몹시 귀여운 듯 머리를 쓰다듬으 며 낄낄 거렸다. "크흐흐......이언년은 평생 독신으로 늙을 줄 알았더니 늦장가를 가서 이렇게 귀여운 딸을 낳았 구나........" 이철심은 연신 히죽거리며 웃다가 전옥심을 바라보았다. "이놈. 요 근래 명성이 아주 대단하더구나." 이언년이 의아한 듯 물었다. "자네는 언제부터 그를 알게 되었나? 그는 출도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이철심은 전옥심을 향해서 눈을 찡긋거리며 득의한 웃음을 지었다. "크흐흐....... 왜 나는 알고 있으면 안되나?" 이환은 서문광과 인사를 나누고 서로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가끔씩 그윽한 눈을 들어 힐끔


힐끔 전 옥심을 바라보았다. 허나 그의 표정이 너무 무뚝뚝해 다가와서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이러고 있는 동안 비무대에서는 다른 한 인물이 주위를 경악시키고 있었다. 백의소녀, 유소파는 이미 일차관문을 통과한 후였다. 지금 비무대에 올라서서 세 명째의 도전자를 격파한 사람은 체구가 거대한 황포중년인이었 다. 그는 안색이 아주 붉은 인물이었는데 표정은 반대로 싸늘해 어딘지 모르게 조화가 맞지 않 았다. 그의 수중에는 대나무로 엮은 채찍이 들려 있었다. 채찍은 유난히 길었으며 새카만 것이 아무 빛도 발하지 않았다. 구절편 황열!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의 구절편은 모두 아홉 가닥의 대나무로 엮어졌으며 매 한가닥마다 모두 혼 백을 앗아갈 수 있는 묘용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그가 눈깜박할 사이에 세 명의 고수를 쓰러뜨리자 아무도 감히 도전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황렬은 득의만면한 미소를 지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둥! 둥! 북이 다섯 번 울릴 때까지 아무도 그에게 도전하지 않았다. 둥! 북이 여섯 번 째 울릴 때, 휘익! 북쪽에서 한 인물이 비무대 위로 날아 올라왔다. 그는 체구가 황열보다 더 큰 인물이었다. 피처럼 붉은 홍포, 부릅뜬 고리눈, 그리고 허리에 찬 어마어마한 크기의 패도! 그의 얼굴을 보자 황열은 얼굴은 떪은 감을 씹은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나타난 인영을 향해 싸늘하게 말했다. "이제보니 섭소장주이군요. 설마 소장주가 이 황모를 싫어할 줄은 몰랐소." 대 위로 올라온 사람은 구주제일장의 소장주인 패도 섭붕이었다. 섭붕은 냉랭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좋고 싫은건 문제가 아니오. 비무대 위에서는 오직 무로써 다투는 것이오. 그러니 황형은 서운하 게 생각할 필요가 없소." 말은 부드러웠으나 어조는 아주 딱딱하고 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과연 천오공자라는 말이 그대로 맞을 정도로 오만한 모습이었다. 황열은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채찍을 힘껏 움켜잡았다. "좋소. 정 그렇다면 섭소장주께서는 내 손이 독하다고 탓하지 마시오." 그는 말을 마치자 마자 즉시 채찍을 휘둘렀다. 벽력초동 초식은 매우 평범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그의 손에 전개되자 정말 벽력같은 위력이 있었다. 쐐애애애액! 뱀의 꼬리같은 실날이 공중에서 번뜩이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으며 오척 길이의 채찍 은 이미 섭붕의 몸 앞 삼 척 정도까지 왔다. 섭붕은 패도를 꺼내지도 않고 슬쩍 몸을 날려 그것을 피했다. 황열은 얼굴에 힘줄을 돋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말 광오하구나!" 구절편이 다시 크게 원을 그리며 황열의 앞으로 되돌아 오더니 새카만 채찍이 마치 불을 퉁겨내듯 자색빛을 발함과 동시에 섭붕의 몸을 에워쌌다. 쐐애액! 비무대 위가 온통 편영으로 뒤엎였다. 뿐만 아니라 비무대 아래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의 옷자락까지 찢어질 듯 날리는 무시무시한 위력이 었다.순간 섭붕은 번개같이 패도를 꺼내들고 휘둘렀다.


쏴아아앙! 듣기에도 소름이 끼치는 가공할 음향이 들리며 온 공중에 꽉 차서 거미줄처럼 얽혀 있 던 자색 편영이 어이없이 허물어졌다. 파파파팍! 패도에 닿자 채찍이 거미줄처럼 토막토막 잘리며 황열의 몸에서 피가 뿜어져 나 왔다. "으윽!" 중인들이 놀라 보니 황열은 손에 한치도 남지않은 구절편의 손잡이 부분만을 든 채 멍하 니 서 있 었다. 그의 전신은 구절편의 파편과 패도의 도풍에 찢겨 피로 목욕을 한 듯 했다. 섭붕은 패도를 든 채 그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정녕 가공할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천하의 기병인 구절편이 마치 장난감처럼 한순간에 박살이 난 것이다. 황열은 몸을 부르르 떨고 있다가 섭붕을 악독하게 노려보고는 몸을 날려 사라졌다. 섭붕의 패도는 길이만 해도 다른 사람의 두 배는 될 길었고 무게는 거의 칠팔십근에 육박했 다. 그것을 칠 척이 넘는 그가 들고 있자 마치 천신상을 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의 기세에 위압당해 갈채를 보내는 것도 잊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문득 전옥심은 제일비를 돌아보았다. "일비. 그와 한 번 겨루어 보지 않겠느냐?" 그 말에 이언년은 대경실색을 했다. "아니 하필이면 일비를 저 자와 대결시키려는가? 다른 사람도 많은데......" 허나 전옥심은 묵묵히 제일비를 바라보았다. "결정은 네가 해라." 제일비는 비무대 위에 우뚝 서 있는 섭붕을 바라보았다. 마치 철탑같이 장대한 체구를 자랑하며 서 있는 그의 얼굴은 위풍이 당당해 오만해 보이기 까지 했 다. 제일비는 눈가에 굳은 결의의 빛이 떠오르며 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도전하겠읍니다." 전옥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금성위는 아니꼬운 눈으로 그를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이런 제기랄...... 약한 놈을 다 놔두고 하필이면 저런 무지막지한 놈에게 도전시키니......" 이언년도 아무리 생각해도 불안한지 전옥심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섭붕과 싸울 방법이라도 말해줘야 하지 않겠나?" 허나 전옥심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저었다. "필요없소." 이언년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제일비의 상대로는 섭붕은 너무 벅찬 상대라네. 그러니 무슨 초식이나 하다못해 어떻게 대적해야 한다는 지시라도 해야 할 게 아닌가?" 허나 전옥심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다. 그가 아예 입까지 닫아 버리자 이언년은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비취를 바라보았다. "비취야. 네가 한 마디 말이라도 해 주어라." 허나 이비취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아빠. 일비오빠는 잘 할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금성위가 옆에 있다가 투덜거렸다. "제길. 저 기생오라비 같은 녀석이 불곰같은 놈을 이긴단 말이냐? 계란으로 바위치는 게 낫 지." 전옥심과 이비취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불안스런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막상 제일비 자신


은 그리 떨리거나 걱정되지가 않았다. (형님이 말씀하신 이상 나는 이길 수 있다!)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천천히 비무대로 걸어갔다. 이철심은 아까부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가 이언년에게 불쑥 물었다. "저 꼬마는 누구지? 천환검사 조형의 용천검을 차고 있는데......" 아직 화가 안풀린 이언년은 전옥심을 힐끗 가리켰다. "그에게나 물어보게." 이철심은 다시 전옥심을 바라보자 전옥심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일비는 해남검파의 직전제자요. 이번에 그는 해남검파의 명성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 오." 중인들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비무대 위로 올라가고 있는 제일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 다. 섭붕은 도전자가 없겠거니 하고 있다가 한 사람이 비무대 위로 올라오자 눈살을 살짝 찌푸 렸다. (어떤 미친 녀석이 감히 나에게 도전을 하지?) 그러다가 그는 비무대 위로 올라온 인물의 얼굴을 보고는 멍청해졌다. (저...... 저 녀석은......)

제 11 장.

무 서 운

혈 전

제일비는 비무대 위로 올라오자 호흡을 가다듬고는 섭붕의 앞에 우뚝 섰다. 섭붕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우락부락한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갑자기 그는 미친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오의광생이라면 모를까? 그의 종자놈이 감히 나에게 도전을 하다니......" 제일비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번쩍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은 이 검이 말해 줄 것이오." 스르릉! 용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의 허리춤에 있던 용천검이 뽑혀져 나왔다. 용천검은 태양을 받아 사방으로 날카로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휘황하게 빛나는 용천검을 든 채 우뚝 서 있는 홍안검수! 그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군웅들의 마음에 강한 인상을 풍기는 것이었다. 섭붕은 제일비의 모습을 노려보고 있다가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좋다. 애송이놈! 세상의 무서움을 알게 해 주겠다!" 그의 거대한 몸이 번개같이 달려들며 패도가 불을 뿜었다. 번쩍! 뇌전같은 강력한 도기가 뻗어나오며 제일비의 몸을 짓쳐들어갔다. 제일비는 안면을 바짝 긴장시킨 채 몸을 돌려 섭붕의 강력한 일도를 피해냈다. 동시에 그는 해풍기파의 초식으로 섭붕의 미간을 향해 용천검을 그어댔다. 쐐액!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칼날같은 검기가 솟아 올라오자 섭붕의 얼굴이 흠칫해졌다. (얕볼 녀석이 아니군.) 섭붕은 의외로 제일비의 검이 사납다는 것을 깨닫자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패도를 기이하 게 회전 시켜 용천검에 맞서갔다. 까깡! 불똥이 사방으로 튀기며 패도와 용천검이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제일비는 패도의 엄청난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 순간, 휘잉! 무시무시한 바람소리를 내며 섭붕의 패도가 벼락처럼 미간으로 떨어져 내려


왔다. 제일비는 이를 악물며 몸을 비틀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해조천파의 초식이 용천검에서 뿜어져 나왔다. 휘익! 쐐애액! 두 사람의 몸은 너무도 빨리 움직이는지라 대 위는 온통 칼바람과 검기로 뒤덮어 그들의 신형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군웅들은 이 경천동지할 격투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섭붕의 무공이 강한 것은 알려진 사실이지만 채 약관도 되지 않은 홍안검수, 제일비가 그 와 정면 으로 맞설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섭붕이 시전하고 있는 것은 구주제일장이 천하에 자랑하는 광풍십팔도였다. 이것은 위력이 강대하고 속도가 빨라 마치 노도치듯 십팔도가 날아들면 아무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허나 제일비는 영활한 몸놀림으로 막강한 도풍 사이를 누비며 거의 환상적이리만 큼 변화 무쌍한 검법을 펼쳐 섭붕을 당혹시켰다. 이들의 무시무시한 싸움을 보고 있던 이언년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금성위는 옆에 있다가 궁금한 긋이 물었다. "아니 저 놈은 잘 싸우고 있는데 자네는 왜 그렇게 한숨을 쉬나?" 이언년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이제껏 저 아이와 같이 있어 그의 무공에 대해 꽤 안다고 자부했었네. 헌데 이제 보 니 제일 비의 검술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뛰어났군. 아무래도 내눈이 많이 무디어진 모양일세." 사실 제일비의 무공은 동정십팔채에 처음 나타났을 때보다 훨씬 정진하여 이언년같은 고 수로서도 그의 검술을 정확히 추축하기가 힘들었다. 제일비의 검술이 이토록 높아진데는 전옥심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으리 라. 패도와 환검! 두 절기는 군웅들의 시선과 신경을 온통 비무대로 집중시켰다. 때때로 섭붕의 무시무시한 패도가 바람을 가르며 제일비의 몸을 짓쳐 올 때는 군웅들 틈에 서 자신 도 모르게 나직한 비명소리가 들려나왔다. 또 제일비의 용천검이 불가사의한 각도로 변화를 일으키며 섭붕의 몸을 위협할 때는 여 기저기서 탄성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야말로 용호상박! 두 사람 중에서 누가 우세할지 좀처럼 분간할 수 없는 한판이었다. 이언년은 한참동안 그들의 격전을 보고 있었으나 누가 더 승산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구경하고 있는 이비취를 바라보았다. "비취야. 네가 보기에는 누가 이길 것 갔으냐?" 이비취는 큰 눈을 깜박거리지도 않고 장내를 주시하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두 사람은 각기 강과 유에 장단점이 있어 승부를 속단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힘에서는 섭붕이 위인만큼 오래 시간을 끌수록 일비오빠가 불리할 거예요." 그 말에 이언년의 얼굴에 불안의 그림자가 어렸다. "과연 그렇겠군. 일비는 비록 검술이 정묘하지만 내공에서는 아무래도 섭붕보다 뒤진다고


할 수 있지. 그럼 큰일인걸......." 허나 이비취는 오히려 눈을 빛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럼 일비에게도 승산이 있단 말이냐?" 이언년이 반색을 하자 이비위는 옆에 있던 전옥심을 슬쩍 바라보았다. "지금 상태로 가면 물론 일비오빠에게 승산이 희박하지만...... 아저씨께서 그런 것도 짐작못 하고 일비오빠를 출전시켰을 리가 없지요." 이언년이 묻기도 전에 금성위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일비에게 무슨 특별한 수법이라도 있단 말이냐?" 이비취는 배시시 웃었다. "그건 알 수 없지요. 하지만 저는 일비오빠가 이대로 지고 있지만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어 요." 이언년과 금성위는 그녀의 말뜻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아 동시에 전옥심을 바라보았 다. 허나 이 무심한 사내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비무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표정은 너무나 무관해 보여 얼핏 보기에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결투 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금성위는 제일비를 만난지는 비록 얼마되지 않았지만 그의 순진함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지라 내심 전옥심의 태도가 성에 차지 않았다. "제길....... 저러다가 일비 녀석이 지기라도 한다면 그건 순전히 저 얼음덩어리 때문일 게다." 그때 제일비는 과연 점점 힘이 부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 한동안은 섭붕의 광풍십팔도에 정면으로 맞서 싸울 수 있었으나 백여초가 넘자 그의 공력이 서서히 감소되는 것이었다. 휘이잉! 섭붕의 패도는 처음과 조금도 다름없이 무서운 위력으로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오히려 처음보다 더욱 빠르고 위력이 있는 것 같았다. 허나 제일비는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비장의 절초가 있는 것이다. 섭풍의 패도가 아슬아슬하게 그의 귓등을 스치고 지 나갔다. 그 순간 제일비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남해삼십육검의 절초인 해와선풍과 해풍노도를 연거 푸 펼쳐 내었다. 쐐애액! 마치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듯 기이한 검풍과 함께 섭붕의 몸이 뒤로 주르르 밀려났 다. 섭붕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채 이를 악물고 패도를 휘둘렀다. 콰르르.......광풍십팔도중에서도 무섭기로 유명한 광풍천지가 펼쳐지며 주위가 온통 광풍으 로 뒤 집힐 듯 흔들거렸다. 그 무서운 위력에 비무대 아래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몇몇 군웅들이 허겁지 겁 뒤로 피해 버렸다. "아아.......!" 여기저기에서 자신도 모르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누가 보아도 제일비의 몸이 금시 광풍에 갈가리 찢겨만 같았다. 제일비는 눈을 매섭게 빛낸 채 용천검을 힘주어 잡았다. (안개처럼......)


그의 용천검이 부르르 떨렸다. 그 검끝이 처음에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게 떨리다가 점차 심하게 요동을 쳤다. 우웅......마치 벌떼가 우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가공할 기세로 덮쳐오던 광풍천지의 초식 가 운데 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순간, 스윽......! 환상인가? 신기루인가? 제일비의 검끝에서 끝도 알 수 없는 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비무대위는 순식간에 그 안개로 온통 뒤덮여 버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이로 번쩍이는 눈부신 검광! 이언년과 이철심은 자신도 모르게 격동에 차 부르짖었다. "해시신루다!" 아아...... 해시신루! 해남검파의 영광이며 천년 무림사상 환검의 제일정화라는 해시신루가 조현이 사라진 지 실 로 이십 년만에 무림인들의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섭붕은 일순간 자신이 망망대해의 한가운데 빠져버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주위 어디를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끝없는 안개와 그 사이로 언뜻 언뜻 보이는 검광뿐. 그 안개는 질식할 듯한 살기를 담고 자신의 몸을 뒤덮었다. 섭풍은 눈을 부릅뜬 채 속으로 부르짖었다. (이것은 환상이다......!) 그는 사력을 다해 패도를 휘둘렀다. 차차창! 고막을 찢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안개사이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으윽!" 안개는 어느 사이엔가 씻은 듯이 걷혀 있었다. 군웅들은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뜬 채 비무대위를 정신없이 바라 보았다. 섭붕은 여기저기 혈흔이 가득한 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가 자랑하는 천하제일의 패도는 군데군데 톱니처럼 패여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눈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이...... 이럴수가......" 제일비는 그의 앞에 용천검을 든 채 우뚝 서 있었다. 햇살이 머리를 뒤로 틀어묶은 그의 준수한 얼굴에 비치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금동같았 다. 한순간 장내가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 최고다!" "선풍검이 패도를 꺾었다!" 그 벼락같은 환호를 들으며 제일비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동안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 았다. 섭붕을 이기다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 꽉 쥐어진 오른 손 느껴지는 검의 서늘한 촉감...... 선망의 눈초 리 로 자신을 쳐다보는 주위의 따가운 눈길......그것은 자신의 꿈에서도 그리던 영광의 순간이 아니 었던가? 제일비는 격동과 흥분에 휩싸인 채 얼굴을 상기시키며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문득 그의 앞으로 섭붕이 다가왔다. 섭붕은 흐르는 피를 대충 지혈한 후 날이 빠진 패도를 들고 있었다. 그는 뚜벅뚜벅 제일비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갑자기 그의 손을 덥석 움켜 잡았다. "자네가 이겼네." 그의 음성은 강한 울림이 있어 장내에 터져 나갔다.


제일비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섭붕을 바라보았다.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뛸 줄 알았던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섭붕은 고리눈을 부릅뜬 채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비록 오만하여 천오공자라고 불리우고 있지만 그렇다고 졸장부는 아닐세. 내가 전에 자네를 비웃었던 것은 솔직히 사과하겠네. 나의 패도를 이긴 이상 자네의 선풍검은 앞으로 더욱 천하에 명성을 떨칠걸세." 말을 마치자 그는 잡았던 손을 놓고 당당하게 비무대를 내려갔다. 그의 이 의연한 모습을 보자 장내에서 다시 구름같은 환성이 일어났다. "와아......!" 상대를 이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패배를 승복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제일비는 섭붕이 이렇게 호쾌한 사람인지는 몰랐는지라 한동안 격동된 눈으로 비무대를 내려가는 섭붕의 우람한 등을 바라보았다. 대 아래에서 개비수 장홍이 길게 외치는 소리가 아련히 그의 귓가에 울려왔다. "이번 싸움은 선풍검 제일비 소협의 승리요!" "잘했네!" 제일비가 일차관문을 무사히 통과하고 내려왔을 때 이언년은 제일 먼저 다가와 그의 손을 움켜 잡 았다. 제일비는 아직도 조금전의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준수한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고개를 수그렸다. "감사합니다." 그때 문득 검사 이철심이 그에게 다가오며 불쑥 물었다. "헌데 네 놈은 언제 조현의 제자가 되었느냐? 그는 지금 살아있느냐?" 이철심은 백검회시절, 천환검사 조현과 가장 친한 사이였다. 이제 과거의 옛 친구의 무공을 오늘 다시 보게되자 그의 감회는 자못 새로운 것이었다. 이철심의 물음에 제일비는 움찔하여 자신도 모르게 전옥심을 바라보았다. 전옥심이 앞으로 걸어나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노인은 죽었소." 그 말에 이철심의 얼굴이 홱 변했다. "그걸 네가 어찌 아느냐?" 전옥심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가 죽었을 때 마침 내가 옆에 있었소." 이철심은 그의 말을 잘못 오해하고는 두 눈을 살기로 번들거렸다. "네 놈이 감히......." "그를 죽인 것은 유성검흔을 쓰는 자요. 나는 죽어가는 그를 잠깐 보았을 뿐이오." 유성검흔이란 말에 이철심은 물론이고 이언년도 대경실색했다. "유성검흔이라니...... 혹시....... 탈혼......."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언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길게 탄식을 했다. "결국 그가 다시 나타났군......" 이철심은 눈가를 실룩거리다가 이를 악물었다. "그 악마같은 놈이 조현을......" 잠시 주위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금성위와 금강야차, 제일비 등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허나 한 사람, 삼절서생 서문광만은 눈을 빛내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서문광! 항상 없는 듯 주위를 조용하게 파묻혀 있는 그의 진실한 정체는 무엇일까?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이비취였다. 그녀는 제일비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가 조잘거렸다. "일비오빠. 잘했어요. 헌데 마지막 초식은 정말 절묘하더군요." 제일비는 피식 웃었다. "그건 해남검파의 절초인 해시신루야." 이비취는 큰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그 속에 뭔가 다른 묘용이 숨어 있던 것 같았어요." 그 말에 제일비는 움찔하여 입을 다물었다. 이언년이 궁금하여 대신 물었다. "다른 묘용이라니?" "해시신루는 비록 천하제일의 절초라 할만 하지만 섭붕의 광풍십팔도도 그에 못지 않아요. 단순히 해시신루만 펼쳐졌다면 물론 섭붕이 패했겠지만 조금전 같이 참패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조금전 일비오빠가 펼쳤던 해시신루 속에는 다른 오묘한 절기가 숨어 있었어요." 이제껏 말이 없던 금강야차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게 무어냐?" 이비취는 신비스럽게 웃었다. "그건 일비오빠에게 물어보세요." 중인들의 시선이 다시 제일비에게 향했다. 허나 그는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거리고만 있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금강야차는 못생긴 얼굴을 콱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제길...... 저 꼬마놈은 벌써부터 남에게 말못할 비밀을 가지고 있군 그래. 이거 비밀없는 사람 은 서러워 살겠나?" 제일비는 전옥심을 슬쩍 바라보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조금전 그는 해시신루에 최근에 전옥심에게서 배운 검강을 운용했던 것이다. 그것은 거의 찰나적인 일이라 그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었다. 헌데 이비취는 어떻게 이것을 알았을까? 그는 이 눈만 크고 항상 신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녀가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일비는 이비취의 그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큰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허나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큰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괜히 자기가 그 눈 속에 빨려들어 가는 듯한 착각만 들 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갸우둥거리면서도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비취는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더욱 신비스럽게 웃고 있었다.

주먹. 이 주먹은 다른 주먹과는 조금 달랐다. 우선 주먹의 크기가 남달리 컸다. 더구나 장난처럼 반쯤 말려있어 얼핏 보기에는 별다른 위력을 보일 것 같지가 않았다. 허나 이 주먹을 보는 군웅들의 시선은 공포와 경악에 어린 것이었다. 주먹의 주인은 평범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그는 체구가 그리 크지도 않았다. 몸집이 우람하거나 얼굴이 흉악하게 생기지도 않았다. 허나 주먹만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컸다. 사나이는 언제나 한쪽 주먹을 반쯤 쥐고 다녔다. 권왕 황보일악! 그의 반쯤 말린 주먹은 천하에서 가장 강한 주먹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그는 항상 왼쪽 주먹은 반쯤 쥐고 다녔다. 식사를 하거나 남과 대화를 할 때도 그는 자신의 왼손을 남에게 펼쳐 보인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세수를 하거나 화장실을 갈때도 는 왼 주먹을 쥐고 다녔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감히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 엉성하게 말린 주먹이 한 번 휘둘러지면 어떤 고수라도 쓰러지고 말기 때문이었다. 영웅대회 육일 째. 황보일악은 다섯 명의 고수를 모두 한 주먹씩에 날려 보냈다. 그에게 마지막로 도전한 사람은 강호에서 성질이 포악하기로 유명한 혼원패 헌원광이었다. 허나 헌원광은 두번 다시 혼원패를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천하제일권으로 불리우는 권왕 황보일악은 영웅대회의 육일 째를 처음부터 화려하게 장식했 다. 황보일악이 알차관문을 통과하고 비무대에서 내려오자 한 인물이 천천히 대위로 올라왔다. 놀랄만한 뛰어난 용모. 화산파의 자랑이자 천하제일의 후기지수라 불리우는 좌백이 드디어 영웅대회에 출전한 것이 다. 그의 임풍옥수같은 모습이 비무대 위에 나타나자 군웅들은 즉시 우뢰와 같은 환호성을 보냈 다. "우와!" 좌백은 주위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인 후 참관인석에 앉은 세 명의 참관 인에게 목 례를 했 다. 특히 그의 시선은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하게 앉아있는 검후 이한상에게 고정되었다. 그의 별빛같은 시선을 받은 여자라면 천하의 누구라도 방심이 뛰고 말리라! 과연 항상 무표정하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던 이한상도 가볍게 눈인사를 보내왔다. 그제야 좌백의 준수한 얼굴에 자신만만한 웃음이 떠올랐다. 천하의 미남자인 그가 웃자 주위 환해지는 것 같았다. 금성위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연신 투덜거렸다. "제길....... 천하의 복은 저 놈 혼자 다 가지고 있는 것 같구나....... 출신 좋겠다. 무공도 높 겠다. 얼굴도 잘 생겼겠다...... 게다가 여인의 환심을 살 줄도 아니 말이야......" 좌백이 비무대위 우뚝 서 있자 한동안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부러움과 질시, 동경에 찬 시선들이었다. 헌데 그때 한 인영이 번개같이 비무대위로 날아들었다. 중인들은 설마 좌백에게 도전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라던지라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 다. 그는 황의를 입은 서생이었다. 그의 얼굴은 좌백에 버금갈 정도로 준수했다. 한가지 흠이라면 입술이 너무 얄팍해서 냉정하고 싸늘하게 보인다는 것 뿐이었다. 그의 허리에는 시뻘건 핏빛 혈검이 매달려 있었다. 그의 얼굴은 보자 군웅들 틈에서 탄성이 일어났다. "아! 지옥마검 진궁이다!" 지옥마검 진궁! 수라교의 대제자이며 좌백과 쌍벽을 이루는 흑도의 제일 기재가 나타난 것이다. 각기 백도와 흑도를 대표하 두 절대기재가 설마 영웅대회의 첫 관문에서 격돌하게 될 줄은 몰랐는 지라 중인들은 감히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진궁은 싸늘한 눈으로 좌백을 바라보았다. "좌백, 오랜만이군." 좌백은 냉정할 정도로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렇지 않아도 일전에 본파의 매화사품 고수들이 귀하에게 죽었다는 말을 듣고 꼭 만나 보고 싶었소." 진궁은 비정하리만치 차가운 미소를 얄팍한 입술에 매달았다. "흐흐...... 오늘에야 비로소 천하제일의 기재가 누구인지 판가름이 나게 되었군."


좌백은 준수한 얼굴 아무런 표정도 띄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귀하의 검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고 싶소." 진궁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원한다면 보여주지!" 파앗! 꽤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의 몸이 어느새 좌백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의 손에는 언제 뽑아들었는지 보기만 해도 섬칫한 핏빛 혈검이 들려 있었다. 천하에서 제일 악독하다는 멸절마검이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내며 좌백의 전신을 짓쳐 들어 왔다. 좌백은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지도 않고 빙글 몸을 돌려 비무대의 좌측으로 날아갔다. 그의 신법은 마치 물흐르듯 유연하고도 빨랐다. 진궁은 좌백이 너무도 간단하게 자신의 검세를 빠져나가자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제법이군." 그의 눈가에 서늘한 살기가 감돌며 허공에 황영이 가득했다. "멸절수혼!" 쫘아악! 뼈를 깎는듯한 소름끼치는 음향과 함께 진궁의 혈검이 좌백의 목덜미를 찔러 들어 왔다. 좌백은 허리를 반쯤 뒤틀며 손을 떨쳤다. 채앵! 가슴을 트여주는 청량한 음향과 함께 좌백의 허리춤에서 하얀 백선이 섬전같이 진궁 의 손목 을 노려갔다. 드디어 좌백이 출수한 것이다. 진궁은 손을 크게 휘둘러 좌백의 검을 피하며 절초인 멸절단백을 펼쳤다. 그순간 허공을 벗어날줄 알았던 좌백의 검이 두 개로 갈라지며 그의 목과 이마를 노려오 는 것이 아닌가? "어엇?" 진궁은 설마 좌백의 검술이 이리도 신묘할 줄은 몰랐는지라 흠칫 놀라 급히 앞으로 덤벼들 던 몸을 뒤로 제치며 검을 휘둘러 막았다. 찡! 이마로 덮쳐오던 좌백의 검과 그의 혈검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진궁과 좌백의 몸이 거의 동시에 부르르 떨렸다. 그들의 공력은 백중지세였던 것이다. 허나 놀랄 일은 다음에 벌어졌다. 혈검에 부딪쳤다 튀어오른 좌백의 검이 이번에는 네 개 로 나뉘 어져 또다시 진궁의 몸을 덮쳐오는 것이다. 그것은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좌백의 검은 분명 하나이건만 한 번 좌백이 손을 떨 칠 때마 다 그 수가 점점 불어나는 것이다. 진궁의 몸은 졸지에 네 개의 검으로 뒤덮였다. 진궁의 눈에 악독한 살기가 떠올랐다. 진궁은 이를 악물며 자신에게 덮쳐오는 네 개의 검에 정면으로 부딪쳐갔다. "멸절참육!" 까까깡! 불이 사방으로 튀기며 대 위가 온통 검풍으로 뒤흔들렸다. 실로 무시무시한 격돌이었다. 그 격돌의 와중에서 진궁은 뒤로 한걸은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빛이 떠올랐다. (좌백의 검을 막아냈다!) 그는 좌백의 공세를 한 번만 늦추기만 하면 자신의 멸절마검으로 그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과연 좌백의 네 개의 검은 모두 그의 혈검에 차단되어 사라져 버렸다. 헌데, 스읏! 더욱 기경스럽게도 이번에는 모두 여덟 개의 검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앗?" 진궁은 그야말로 혼비백산이 되었다.


그는 미처 피할 사이가 없어 멸절마검에서 절초중의 절초인 멸절건곤을 펼쳤다. 쑤아앙! 밀물같은 검기가 일어나며 천하에서 유명한 멸절마검이 여덟개의 검영에 덮쳐 들었 다. 차차창! 고막이 터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진궁의 몸은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그는 멸절건곤을 펼쳤는데도 좌백의 검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밀려난 것이다. "이럴 수가......" 그가 놀라 우뚝 서 있을 때, 휘잉! 좌백의 검이 풍차처럼 회전하며 다시 덮쳐 들었다. 이번에는 어이없게도 열 여섯개의 검영이 날아 들었다. 하늘이 온통 검영으로 뒤덮인 것 같 았다. 진궁은 멍하니 서 있다가 악독한 기색을 떠올렸다. 그는 양밗보여주마. 멸절만리홍! 멸절마검중의 최절초이며 천하에서 가장 잔인하다는 멸절만리홍이 가공할 검기를 뿜어대며 좌백에 게 덮쳐 들었다. 쑤아앙......! 좌백의 몸은 열 여 개의 검영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무섭게 회전하며 풍차처럼 덮쳐드는 열 여섯 개의 검. 그리고 끔찍한 파공음을 내며 짓쳐 들어오는 하나의 혈검. 두 개의 정면으로 마주쳤다. 쾅! 검과 검이 부딪쳤는데 어이없게도 벼락치는 소리가 들렸다. 비무대가 온통 지진을 만난 듯 마구 뒤흔들렸다. 중인들은 너무도 긴장되어 숨도 쉬지 못한 채 비무대위를 주시했다. 대위에는 두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좌백은 손에 눈부신 은검을 든 채 백의를 펄럭이며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전면에는 진궁이 시뻘건 혈검을 든 채 있었다. 두 사람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중인들은 누가 이겼는지를 몰라 어리둥절해졌다. 허나 아무도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문득 진궁이 눈가를 실룩거리다가 광소를 토해냈다. "크하하...... 좌백! 정말 대단하구나......" 그는 악독한 시선으로 좌백을 노려보더니 몸을 날려 사라져 버렸다. 군웅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해져 두리번거렸다. 그때 참관인석에 앉아 있던 이한상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번 싸움은 좌소협의 승리예요!" 군웅들은 모두 그녀를 주시했다. 그녀는 티한점 없는 깨끗한 얼굴에 별다른 표정을 짓지않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지막 격돌에서 두 사람은 모두 사십 육검을 사용했어요. 진궁이 이십 사검, 좌소협이 삼 십이검 이예요. 진궁은 좌소협의 삼십이검을 모두 막아냈지만 그 여력을 감당치 못하고 내상을 입게 된 것이예요." 그제야 군웅들은 이번 싸움이 좌백의 승리임을 알고 함성을 질렀다. "와아...... 과연 천하제일수다!" "화산고학 만세!" 이번의 격돌은 올해의 영웅대회에서 가장 치열한 것이었다. 군웅들 중 고수들은 많이 있었지만 누구도 그들의 승부에 대해 정확히 알지를 못했다. 헌데 검후 이한상은 그 찰나적인 순간에 그들이 몇 회의 검법을 구사했는지도 모두 알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중인들은 검후라는 이름이 단순한 허명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 었다. 좌백의 검은 실로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형비와는 또 다른 면에서 검의 절정을 보여준 것이다. 형비가 쾌검의 정상이라면 좌백은 분검술의 정상이라 할만 했다. 좌백의 준수한 모습을 보며 이언년은 전옥심을 돌아보았다 "저 자의 검은 정말 대단하군. 막기가 힘들것 같네." 전옥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비는 궁금한 눈으로 전옥심을 바라보았다. "형님. 저 자의 검은 무척 신기하군요. 어째서 검이 두 개 네 개로 막 불어납니까?" 전옥심은 무시한 눈을 빛내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것은 그가 그만큼 빨리 검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너무 빨리 움직이기 때문에 검이 여러 개로 보 이는 것이지." "아! 그럼 쾌검의 일종이겠군요?" 전옥심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다. 저것은 쾌검과는 엄연히 구분된다. 저것은 산검이라고 부르지." "산검이라고요? 형님이 말씀하셨던 그 십이검류중의 산검 말입니까?" 제일비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전옥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산검이란 검의 힘을 분산시키는 검법을 말한다. 즉, 다른 검법이 모두 한 방향만을 노릴때 산검은 검을 더욱 빨리 움직여 동시에 여러 곳 을 공격 하게 된다. 상대가 산검이 공격하는 모든 부위를 막다가는 조금전의 진궁과 같이 그 힘을 감당치 못하고 내상을 입게 된다. 그리고 단 한 부위라도 막지 못하면 또 검에 격중되어 쓰러지게 된다. 그래서 산검은 방비하기가 가장 힘든 검법의 일종이었다. 제일비는 탄성을 지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저런 것은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단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다. 네가 배운 환검은 여러곳을 공격하는 척 하다가 한 군데를 공격하는데 비 해 산검 은 실제로 여러곳을 공격한다. 그러니 막기가 힘이 들지. 산검을 이기려면 한 가지 방법 밖에는 없다." 제일비는 궁금하여 급히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제일비 뿐만 아니라 이언년과 이철심같은 절정검수들은 흥미를 느끼고 전옥심을 바라보았 다. 전옥심은 무심한 눈으로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좌백은 준수한 얼굴로 이한상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전옥심은 조용히 말했다. "이대도강(이대도강:상대는 살을 베게하고 이쪽에서는 뼈를 자른다.)이지."

제 12 장.

의 살

한 명의 노인이 혈첩을 읽고 있었다. <안건에 대한 보고. 웅풍만리벽은 그곳에서 찾을 수 없음. 재가바람. 흑자호님께 충성을.> 노인의 얄팍한 입술에서 너무도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가 나를 속였군." 그 음성은 무심했으나 듣는 이의 마음에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스르르......노인은 손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혈첩은 순식간에 녹아 버렸다. 노인의 비쩍 마른 손가락 사이에 검은 전갈 모양의 반지가 끼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흑갈 반지를 낀 노인. 그의 얼굴은 어딘지 낯이 익은 것이었다.

영웅대회의 칠일 째에는 유달리 많은 고수들이 출전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이 예선전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오늘 출전하지 않으면 앞으로 영 웅대회에 참가할 기회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날의 비무는 왕왕 치열해지기 십상이었 다. 어제까지 일차관문을 통과한 사람은 모두 스물 아홉 명이었다. 헌데 오늘은 해가 중천을 넘어서도록 한 사람도 일차관문을 통과한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그만큼 강한 고수들이 몰려들어 실력이 백중했기 때문이었다. 삼상의 제일검객이라는 비화검 양곤이 세명째의 도전자를 물리쳤을 때 전옥심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출전하시렵니까?" 제일비는 조심스럽게 전옥심에게 물었다. 전옥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지 않은 걸음으로 비무대로 향했다. 양곤은 비대위에 우뚝 선 채 다음 도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다가 한 흑의사내가 대 위로 올라오 자 눈살을 찌푸렸다. 흑의사내는 거친 흑의를 입고 허리에는 검집도 없는 낡은 철검을 찬 인물이었다. 양곤은 막 무어라고 말하려다가 그의 특이한 모습을 보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안색이 홱 변한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귀하는 혹시 검마라 불리우는 오의광생 전옥심이 아니오?" 전옥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짐작이 확실하자 양곤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전옥심은 최근에 강호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그동안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던 세 명의 참관인들도 모두 관심있는 얼굴로 그 를 주시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이한상의 눈은 별빛같이 반짝였다. 허나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차고 냉정해 조금도 마음이 흔들릴 것 같지는 않았다. 북녹림의 총표자인 문천옥과 정파의 우두머리인 육덕명도 당금 천하를 위진시키고 있는 이 신비한 사내의 모습을 흥미있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인물이 막상 자신에게 도전하자 삼상일대를 수십 년간 석권했던 양곤으로서도 내심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곤은 수중에 든 장검을 힘주어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요즘 명성이 대단한 당신의 검이 얼마나 무서운지 한번 보겠소." 이어 그의 장검이 흔들리며 여섯 송이의 검화가 피어 올랐다. 스윽! 전옥심은 허리춤의 철검을 뽑을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검화가 자신의 몸에 닿을 때까지 기다렸다. 검화가 그의 몸에 격중되어 피분수가 뿜기 직전, 그의 헌칠한 몸이 유령과 같 이 검화 사이로 뛰어 들어갔다. "어엇?"


양곤은 그가 설마 이런 무모한 일을 벌일 줄은 몰랐는지라 순간적으로 검세가 주춤거렸다. 그 순간 전옥심은 그의 검을 덥석 잡아 버렸다. 그 손길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보여 얼핏 보기에는 두 사람이 각본을 짜고 하는 것 같았다. 스윽! 전옥심이 손에 힘을 주어 장검을 잡아 당기자 양곤은 손아귀가 파열되는 고통을 느 끼고 엉 겁결에 장검을 놓아 버렸다. "으음!" 실로 너무도 어이없는 일이었다. 삼상의 제일검객이라는 양곤이 미처 손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검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검을 빼앗긴다는 것은 패한것보다도 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양곤은 얼굴이 시뻘개져 전옥심을 바라보다가 몸을 날려 사라져 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군웅들은 어리둥절하고도 전옥심의 무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옥심은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비무대 위로 우뚝 서 있었다. 휘잉!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그의 흑의와 길게 늘어뜨린 흑발을 휘날렸다. 한동안 아무도 그에게 도전하는 사람이 없었다. 중인들은 그가 쉽사리 일차관문을 통과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의 앞으로 한 인물이 날아들었다. 그는 체구가 왜소한 회의인이었다. 얼굴이 작고 눈이 길게 찢어져 어딘지 모글게 사이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전옥심의 앞에 우뚝 서더니 허리춤에서 괴이한 병기를 꺼내들었다. 길이가 팔 척 가량 되고 신축이 자유로워 보이는 채찍이었다. 헌데 괴이하게도 끝에 갈고리처럼 날카롭게 구부러진 날이 달려 있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도 않고 전옥심을 싸늘히 노려보더니 갑자기 덤벼 들었다. 휘익! 그 괴이하게 생긴 병기가 휘둘러지자 주위가 온통 편영으로 뒤덮이는 듯 했다. 전옥심은 그런 병기를 난생 처음 보는지라 슬쩍 몸을 날려 피했다. 병기의 특징을 알지 못하고서는 그 초식을 알수가 없었다. 그럴때 섣불리 덤볐다가는 어이없게 당하기 일쑤인 것이다. 허나 전옥심의 몸이 번개처럼 좌측으로 피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윽! 허공으로 스쳐갔던 그 괴이한 병기가 기이하게 꺾이면서 전옥심의 허리춤으로 덮쳐 오는 것 이 아닌가? 그 빠르기와 각도의 절묘함은 경악스러워서 도저히 피할 곳이 보이지 않았다. "아앗!" 비무대의 아래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전옥심의 몸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움직였다. 그는 편과 편이 휘둘러지는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틈을 노려 몸을 날린 것이다. 휘익! 괴병이 다시 허공에 헛손질을 했다. 허나 공세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어느 사이엔가 그 기다란 병기는 혼자서 살아 움직 이는 뱀 처럼 뒤틀리며 갈고리같은 끝을 전옥심의 이마쪽으로 덮쳐오고 있었다. 회의사내는 무림에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그리고 그의 괴상한 병기는 아무도 듣도 보도 못한 기이한 것이었다. 헌데 그의 무공은 가히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괴이절륜한 것이었다. 전옥심은 계속 피하기만 하다가는 점점 더 위험에 지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긴 병기를 휘두르는 상대에게는 접근해서 싸우는 것이 유리했다. 무기는 일촌장, 일촌강, 일촌단, 일촌험이란 말이 있다. 그만큼 무기가 길수록 유리하다는 말이었다. 더구나 회의 사내의 기병을 휘두르는 솜씨는 가히 무림일절이라 할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전옥심의 헌칠한 신형이 연기처럼 움직여 엄밀한 편영을 뚫고 회의인에게로 돌진해 갔다.


그것은 가히 환상이라 할 만큼 신묘한 몸놀림이었다. 전옥심의 눈앞으로 회의인의 몸이 바짝 쏘아들어왔다. 전옥심은 허리에서 철검을 뽑아들고 그를 향해 내리치려 했다. 그때 회의인의 얼굴이 그를 향해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놀랍게도 회의인의 얼굴에는 사악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 순간, 번쩍! 회의인의 왼쪽 소매춤에서 무언가 희끗한 것이 전옥심의 미간으로 날아들었 다. 그것은 실로 너무도 창졸간의 일인지라 천하의 전옥심으로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지금 회의인을 향해 섬전처럼 몸을 날리고 있는 중이었다. 더구나 그에게 쏘아져 오는 암기는 너무도 빠르고 시기가 적절했던지라 알았더라도 피할 수 있을 지 의문이었다. 전옥심의 미간이 그 광채에 꿰뚫리기 직전, 갑자기 그의 몸이 거의 불가사의할 정도로 뒤 로 꺾였 다. 달려오던 탄력으로 몸을 멈추기도 불가능할텐데 그의 허리가 뒤로 쭉 꺾여진 것이다. 인간의 몸이 어찌 이렇게 자유자재로 꺾일 수 있단 말인가? 회의인의 얼굴에 경의 빛이 물들었다. 그 순간 전옥심의 검은 사정없이 그의 목을 꿰뚫었다. "으악!" 처절한 비명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아무도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몰라 눈을 부릅떴다. 회의인은 눈을 크게 뜬 채 목에 피를 철철 흘리며 전옥심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털썩! 그의 몸은 대 위에 나뒹굴었다. 그의 괴상한 병기도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전옥심은 천천히 철검을 허리춤에 꽂으며 오른손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의 오른손 손바닥에는 괴상한 모양의 암기가 세 개 놓여 있었다. 쇠털 모양의 암기로 가장자리에 털같은 것이 사방으로 달려 있어 흉악해 보였다. 조금 전의 찰나적인 순간 전옥은 몸을 뒤로 젖히며 오른손으로 이 암기들을 받아냈던 것이 다. 암기를 보는 전옥심의 무심한 눈이 반짝 빛났다. 이 암기는 천하오대금용암기중의 하나인 귀왕침이었다. 이것은 너무도 그 위력이 잔인하고 한 번 격중되면 해약이 없기 때문에 무림에서는 사용하 지 못하 도록 금지된 것이었다. 헌데 이것이 이름도 모르는 회의인의 손에 펼쳐졌다니......회의인의 의도는 명백했다. 그는 괴상한 병기를 사용해 전옥심을 자신의 곁으로 접근하게 끔 유인한 다음, 그가 다가 왔을 때 귀왕침으로 살해하려 한 것이다. 이것은 실로 간악하기 이를데 없는 수단으로 전옥심이 감각도를 익혀 초인적인 반사신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벌써 귀왕침 아래 고혼이 되었을 것이다. 회의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는 단순히 비무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전옥심에게 귀왕침을 사용했던 것일까? 회의인이 귀왕침을 써서 전옥심을 암습하려 했다는 것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격전이 한창 벌어질 때였고 또 귀왕침이 발출된 속도와 시간이 절묘하여 누구의 눈에도 보 이지 않 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군웅들은 전옥심이 회의인의 편영을 뚫고 그에게 접근하여 그를 죽인것으 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회의의 시신은 곧 치워졌다. 모두들 전옥심의 놀라운 무공을 다시 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도전자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헌데 또 다시 한 인물이 비무대위로 올라왔다. 기이하게도 그 역시 조금전의 인물과 마찬가지로 짙은 회의를 입고 있었다. 단지 틀린 것이 있다면 조금 전의 사내와는 달리 이번의 인물은 체구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 뿐이 었다. 그의 손에는 무지막지해 보이는 두개의 철추가 쥐어져 있었다. 철추는 단단하기 그지없는 만년한철로 만든 것으로서 하나의 무게만도 족히 오육십근은 되 어 보였 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것을 사용하기는 커녕 제대로 들고 있지도 못할 것이다. 허나 회의인은 마치 공깃돌처럼 가볍게 그 철추를 들고 있었다. 텁석부리 회의인은 살기어린 눈으로 전옥심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양손에 든 철추를 무시무시하게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휘이잉! 가공할 파공음이 들리며 그의 양손에 들린 철추들이 풍차처럼 회전했다. 그 바람소리는 듣는 사람이 마음을 섬칫하게 만드는 강력한 것이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이 회의인도 자신의 이름이나 신분을 말하지 않고 그냥 공격해 왔다는 것 이다. 마치 벙어리인 것처럼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휘이잉!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두 개의 철추는 가공할 속도로 몰아쳐 왔 다. 그 철추의 위력은 엄청나 스치기만 해도 뼈가 박살날 판이었다. 전옥심의 몸이 번개같이 이장 옆으로 물러갔다. 그 순간 회의인은 거구를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유연하게 움직이면서 다시 덮쳐왔다. 그의 몸놀림은 거의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철추는 풍차처럼 휘두르는 두 손의 움직임도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마치 전옥심이 미리 그곳으로 피할 것은 예상하기라도 했던 듯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덤벼드는 것이다. 회의인은 무림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군웅들 중 아무도 그의 이름이나 내력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헌데도 그의 무공은 강호의 초절정고수들의 그것을 오히려 뛰어넘는 것이여서 이정도 무공 을 가지 고 있는 자가 아직까지 무림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전옥심은 풍차처럼 회전하며 덮쳐오는 두 개의 철추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손이 번개같이 휘둘러졌다. 쐐액! 환영인가? 마치 한 가닥 뇌전처럼 그의 녹슨 철검이 뽑아지며 철추와 철추가 휘둘러 지는 그 촌간의 사이를 파고 들어갔다. 그것은 상상을 초월한 속도로 철추들을 뚫고 회의인의 얼굴 로 폭사 되었다. 회의인은 휘두르던 기세 그대로 두 개의 철추를 전옥심을 향해 던졌다. 쐐액! 쾌검을 날리던 전옥심의 몸이 그대로 허공에 반쯤 뜨며 철추들을 피해 버렸다. 허나 쾌검은 조금도 속도가 늦춰지지 않고 폭사되어왔다.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거대한 체구의 회의인이 전옥심의 녹슨 철검을 그대로 두 손으로 움켜잡은 것이다. 콰악! 그의 커다란 두 손이 꼬치처럼 꿰뚫리며 피분수가 뿜어나왔다. 허나 그 때문에 전옥심의 몸은 허공에서 고정되어 버렸다. 그 순간 회의인은 전옥심을 바라보며 입을 쩍 벌렸다. 쐐액! 그 입속에서 시뻘건 혈전이 가공할 속도로 전옥심을 향해 쏘아들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천하오대금용암기중에서도 위력이 악독한 인혼전이었다. 검을 손으로 받아내고 설마 입속에 암기를 감췄을 줄이야......이것은 천하의 어느 누구도 예 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군웅들의 눈 전옥심의 얼굴이 인혼전에 꿰뚫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악!" 피분수가 허공을 수놓으며 수급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전옥심의 수급일까? 허나 수급은 회의장한의 것이었다. 군웅들의 눈을 까뒤집고 보니 전옥심은 여전히 철검을 찬 채 우뚝 서 있었다. 누구도 그가 어떻게 악독한 인혼전의 살수를 피하고 회의인의 머리를 베어냈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전옥심은 천천히 입속에서 무엇을 뱉어냈다. 놀랍게도 그것은 혼전이었다. 그것을 보고 몇몇 눈치 빠른 중인들은 탄성을 질러댔다. "아!" 전옥심은 자신의 얼굴로 쏘아오는 인혼전을 이빨로 받아낸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회의인의 손에 꽂혀있던 검을 그대로 쑤셔넣고 휘둘러 그의 두 손과 머리를 동시에 잘라버린 것이다. 이것은 오직 전옥심의 초인적인 임기응변과 검강을 운용한 쇄검의 위력 때문이 었다. 거듭된 두 번의 치명적인 살수! 무림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두 무림인들의 살수는 과연 단순한 비무가 목적이었을까? 전옥심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여전히 대위에 우뚝 서 있었다. 그는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흑발 사이로 두 눈을 무심히 빛내고 있었다. 조금전의 그 가공할 살수들도 그에게 두려움을 주지못한 것 같았다. 스윽! 회의장한의 시체가 치워지기도 전 다시 한 인물이 나타났다. 이번에도 역시 회의를 입은 사내였다. 군웅들도 그제야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감지하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전옥심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연이어 나타나는 회의인들.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번의 회의인은 얼굴이 마치 용광로에 그을린 것 처럼 추악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구토를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의 양쪽 손은 이상하리만큼 부드럽고 유연했으며 열손가락 모두가 가늘고 길었다. 회의사내는 아무런 무기도 꺼내들지 않았다. 무작정 주먹을 휘두르며 전옥심에게 덤벼들었다. 그도 역시 앞의 두 인물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휘잉! 그의 주먹은 느릿느릿 해보였으나 이상하게도 빠르고 위력이 강했다. 분명 천천히 펼치는것 같은데도 피하기가 힘이 들었다. 전옥심은 철검을 뽑 생각도 하지 않고 권풍속으로 뛰어들었다. 파아악! 그의 흑의가 찢어질 듯 펄럭거리며 그는 회의사내의 권풍속으로 뚫고 들어가며 일지를 날렸 다. 쫘아악! 비단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이 들리며 회의사내의 이마에 구멍이 뻥 뚫렸다. 헌데 피가 뿜어나오지 않았다. 가공스럽게도 회의사내는 이마에 구멍이 뚫린채 그대로 전옥심을 향해 덮쳐 오는 것이다. "아앗?" 군웅들은 물론이고 그때까지 냉정을 유지하던 이한상을 비롯한 세 명의 참관인들도 경악하 고 자리 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회의사내는 두팔을 벌려 전옥심의 몸을 바짝 껴안다. 우두둑! 뼈마디가 부서는 음향이 들리며 그의 두 팔이 괴이하게 뒤틀리며 전옥심의 몸을 칭칭 감 아 버렸다. 그것은 거의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전옥심은 피부가 금시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회의사내는 마치 한 마리 거대한 문어처럼 전신을 사용해 전옥심의 몸을 괴이하게 죄는 것 이다. 이것은 절전된 것으로 알려진 사도의 최고수법인 포천대마력이었다. 포천대마력에 갇힌 사람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수가 없다. 체내의 모든 잠력을 격발시켜 초인적인 신력을 내는 것이기 때문에 황소라도 뼈가 으스러 지고 만 다. 툭! 전옥심의 몸에서도 기이한 음향이 들리며 그의 몸의 힘줄이 툭툭 불거져 왔다. 힘과 힘의 대결! 회의사내의 얼굴이 피로 물든 듯 새빨개지며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벌써 그의 팔안에서 뼈가 가루로 변해 버렸을 것이다. 허나 전옥심은 여전히 무표정다. 그는 두 팔을 회의사내에게 잡힌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우두둑! 회의사내의 몸에서는 연신 뼈마디가 부서지는 듯한 음향이 터져나왔다. 허나 전옥심은 조금도 고통스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갑자기 전옥심은 천천히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뿌드득! 회의사내의 팔이 오히려 뒤틀리며 그의 얼굴이 조금씩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악마의 힘이라는 포천대마력으로도 전옥심의 체내에 잠재된 감각도의 힘을 꺾지 못하는 것이다. 회의사내의 두 팔이 점점 벌려졌다. 전옥심은 서서히 팔을 들어올릴수록 회의사내는 점점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두 팔이 벌려지는 것이다. 그의 팔이 마치 허깨비를 안고 있는 듯 엉거주춤한 상태가 되었다. 이제는 그가 전옥심을 안고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전옥심이 그를 안은 꼴이 되었다. 그때였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회의사내의 얼굴이 천천히 전옥심을 향했다. 회의사내의 얼굴에는 사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동시에 그의 눈알이 시뻘개졌다. 눈동자가 화염에 타오르는 듯 붉은 색이 되었고 하얀 반점이 점점히 나타났다. 마치 피로 물든듯 시뻘개지는 눈동자. 그 끔찍한 혈안으 보자 전옥심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것......!) 이 순간 그가 붙잡고 있던 회의사내의 몸이 그대로 터져 버렸다. 콰앙! 동시에 피비가 하늘을 뒤덮었다. 사람의 몸이 터져버리며 핏물로 변해 버리다니...... 이것을 보고 있던 이언년이 자신도 모르게 놀라 부르짖었다. "아! 폭혈비다!" 폭혈비! 천하오대금용암기중 가장 기이하며 악독하다는 폭혈비! 폭혈비는 사람의 체내에 잠재되어 있다가 순식간에 그 사람의 몸을 피로 만들어 버리는 것 이었다. 폭혈비를 가진 사람은 하나의 핏물이 되어 사라지지만 그의 몸이 터지면서 뿜어지는 핏물 은 천하 에서 가장 악독한 흉기가 된다. 그 핏물에 몸을 슬쩍 스치기만 해도 전신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이다. 비무대위가 피비린내로 진동을 하며 여기저기가 움푹움푹 썩어 들어갔다. 허나 전옥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거친 흑의도, 허리춤에 차고 있던 녹 슨 철검 도, 그리고 쓸쓸해 눈빛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설마 폭혈비에 녹아버렸단 말인가? 이를 보고 있던 일비의 입에서 울음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혀...... 형님!" 그 순간 무심코 허공을 올려보던 한 사람이 부르짖었다. "앗? 하늘이다." 그 말에 군웅들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아아! 어느 사이에 올라 갔는가? 까마득한 하늘위로 하나의 흑영이 떨어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바로 전옥심이었다. 폭혈비가 터지는 순간,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검을 뽑아 하늘로 던졌다. 그리고 그 검의 여세를 빌어 허공으로 몸을 솟구친 것이다. 이것은 비록 말로 설명하기는 쉽지만, 그의 검이 가공스러울 정도로 빠르고 그의 신법이 검세에 탈 수 있을 만큼 가볍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그의 흑의는 여기저기에 작은 구멍이 나 있어 조금전의 그것이 얼마나 흉험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전옥심의 헌칠한 몸은 천천히 비무대로 날아 내려왔다. 놀랍게도 그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무심하고 차가웠다. 중인들은 환호를 보내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회의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째서 전옥심에게 이런 가공할 살수를 쓰는가? 그들 중 단 한 사람의 공격이라고 피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군웅들 중 있겠는가? 허나 그것들을 모두 물리친 전옥심의 무공은 또 얼마나 강한 것일까? 회의인들의 공격은 계속될 것인가? 이런 의문들이 중인들의 머리에 계속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때 다시 한 명의 회의인이 대위로 올라왔다.

제 13 장.

첫 번 째

살 인

이제 군웅들은 환호를 보내는 것도, 이곳이 무예를 겨루는 영웅대회라는 것도 잊었다. 오직 회의인들의 악독한 살수와 그것을 전옥심이 어떻게 피해낼 것인가 하는 것에 온 정신 이 집중 되어 있었다. 이번에 올라온 회의인은 아주 뚱뚱했다. 천하에서 이렇게 뚱뚱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체구가 다른 사람의 두배만 했다. 통상적으로 이렇게 뚱뚱한 사람은 몸이 느린 법이었다. 허나, 창! 일언반구 말이 없이 칼을 뽑아들고 몸을 날리는 뚱보장한의 몸은 그야말로 번개가 무 색할 정 도로 빨랐다. 쐐애액! 천지가 온통 칼바람에 휩싸인 것 같았다. 뚱보장한의 손에 들린 것은 주방에서나 쓸 수 있을 성 싶은 짤막한 칼이었다. 헌데 그것이 어찌나 빠르고 원활하게 움직이는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전옥심은 피하지도 않고 몸을 날려 정면으로 부딪쳐갔다. 처음으로 그의 철검과 뚱보장한의 짤막한 칼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뚱보장한의 거구가 주르르 뒤로 밀려갔다. 전옥심은 단 번에 결판을 내기로 작정한 듯 쉬지않고 번개같이 그에게 다시 덮쳐갔다. 뚱보장한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다시 칼을 들어 전옥심의 철검을 막았다. 째앵! 불똥이 사방으로 튀기며 뚱보장한의 몸이 비틀거렸다. 허나 그가 전옥심의 검을 연거푸 막아낸 것으로 보아 그의 도법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알 수 있 었다. 전옥심은 출도 후 아직까지 한 번도 그의 검을 두 번이나 막은 사람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전옥심은 여전히 눈빛을 무심히 빛낸 채 비틀거리는 뚱보장한에게 덮쳐갔다. 스윽! 비무대 위가 온통 흑영으로 뒤덮인 것 같았다. 지금까지의 회의인들에게는 수세로 대하던 전옥심이 이 뚱보장한에게만은 먼저 선공을 계속 했다. 이���에 그는 처음으로 검강을 운용해 검을 떨쳤다. 쐐액! 녹슨 철검이 푸르스름하게 변하며 기이한 파공음이 울려퍼졌다. 뚱보장한은 이를 악물고 다시 칼을 들어 맞받아쳤다. 쩌어엉! 마치 돌산이 둘로 갈라지는 듯한 음향이 들리며 뚱보장한의 짤막한 칼이 반으로 잘라졌 다. 전옥심의 철검은 여세를 몰아 가공할 속도로 그대로 뚱보장한의 가슴에 꽂혔다. 푹! 피가 하늘높이 솟구쳤다. 허나 그 순간 중인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검이 가슴에 꽂히는 순간 회의뚱보장한이 그의 검을 두 손으로 꼭 움켜쥐었던 것이다. 이제보니 그의 손가락에는 빨판같은 것이 달려 있어 그것으 로 검을 쥐자 도저히 검을 뽑을 수가 없었다. 동시에, 파앗! 뚱보장한의 등가죽이 터지며 그곳에서 한 인영이 번개같이 폭사되어왔다. 그것은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뚱보장한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던 것이다. 몸이 마른 한 사람이 등에 작은 사람을 업고 한 사람 행세를 한 것이었다. 등에서 날아오른 인영은 가공할 기세로 전옥심에게 내리꽂혔다. 그의 양손에는 누런 금빛을 뿌리는 기이한 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금마인!" 중인들 틈에서 경악어린 탄성이 터져 나왔다. 천하오대금용암기 중에서도 가장 지독하다는 금마인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에 한번 격중되기만 하면 전신이 모두 불에 탄 듯 녹아버린다는 전설적인 마물이었다. 금마인이 전옥심의 머리를 두 개로 나누어버릴 듯 찍어내렸다. 누구도 전옥심이 이번 살수를 피해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이번 공격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전옥심의 몸이 바닥에 길게 뉘이며 가슴에 검을 꽂고 있던 뚱보장한의 가랑이 사 이로 빠 져나갔다. "으악!" 처절한 비명이 대위로 울려퍼졌다. 금마인은 그대로 뚱보장한의 배를 갈라버렸다. 금마인을 휘두른 자는 전옥심이 설마 그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 날갈 줄은 몰랐던지라 미 처 손을 멈추지 못하고 자기 편을 베어버린 것이다. 그 순간 전옥심이 다시 가랑이 사이로 되돌아 나오며 금마인을 든 인영에게 번개같이 발길 질을 했 다. 퍽! 비명도 없이 그 인영의 머리가 피곤죽이 되어 날아갔다. 실로 눈 깜박할 사이에 두 명의 살수가 고혼이 된 것이다. 그제야 전옥심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의 살수는 가히 천하무쌍이라 할만큼 악독하고 치밀한 것이었다.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것은 가히 초인적이 지혜와 임기응변이 아니었다면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전옥심은 배가 갈라진 뚱보장한, 아니 이제는 말라깽이가 된 장한의 가슴에서 녹슨 철검을 빼내었 다. 그는 천천히 철검에 묻은 피를 장한의 옷에 문질러 닦아 내었다. 거듭된 네 번의 살수! 그것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한동안 죽음같은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참관인석에 있던 이한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짝짝! 그녀의 박수는 곧 커다란 환호와 갈채를 불러 일으켰다. "와아아......!" "최고다!" "과연 검마다!" 군웅들은 모두 발을 구르며 환호를 했다. 전옥심이 보여주었던 그 초인적인 임기응변과 놀 라운 무 공은 가히 군웅들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심지어는 그의 가장 큰 숙적이라 할 수 있는 좌백까지도 일어나서 박수를 보냈다. 제일비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전옥심이 이렇듯 엄청난 환호를 받자 마치 그 자신이 받는 듯 감격 이 복받 쳐 올랐다. "와아아......!" 천지가 진동될 듯한 함성은 끝도 없이 계속될 것 같았다. 전옥심은 천천히 철검을 허리춤에 찬 채 비무대를 내려왔다. 그가 내려간 뒤에도 박수소리는 계속되었다.

한 장의 혈첩이 커다란 손에 들려 있었다. 마디가 굵고 힘이 있어 보이는 손가락에는 갈색 지네 모양의 반지가 끼어져 있었다. 갈오 반지의 주인은 천천히 혈첩을 읽었다. <안건에 대한 보고 보신 것처럼 사령은 그에 대한 척살을 실패했음. 허나 그것으로써 그 에 대한 무공내력을 거의 파악할 수 있음.1. 귀령의 귀왕참을 피한 그의 무공으로 보아 그는 주자 앙이 창 안한 감각도를 완성했음. 2. 패령의 인혼전을 막아내고 그의 수급을 끊은 것은 쇄검의 일종 임. 아 마 천룡대라삼검이 아닌가 사료됨. 3. 혈령의 폭혈비를 피한 신법은 쾌검에서 유래됨 것 임. 그것 은 능광검 한우령의 것이 확실함. 4. 분령의 금마인을 피한 것으로 보아 그는 임기응변에 능하고 검강을 완성했음. 이상으로 볼 때 그는 모두 육종의 검법을 익혔으며 감각도를 완성해 초식으로 상대하기는 불가능함. 그를 처치하기 위해서는 초식보다는 내공의 힘으로 눌러야 할 것임. 갈자호 님께 충성을.> 혈첩을 쥔 손은 그것 가만히 두 개로 포갰다. 그 음성은 조용히 뇌까렸다. "내공의 힘이라......" 음성의 주인의 손에 있던 혈첩이 저절로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손의 주인은 그 재를 털기 위해서 손바닥을 슬쩍 뒤집었다. 그때 처음으로 그의 손바닥이 나타났다. 드러난 손바닥은 다른 사람의 것보다 약간 컸다. 그리고 한 가운데, 마치 동전많나 하얀 반점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은전 하나를 손바닥에 올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손바닥에 동전만한 하얀 반점을 가지고 있는 사나이.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취화청! 취화청은 구주제일자의 후원에 있는 커다란 대청이었다. 그날 저녁, 이곳에서는 영웅대회의 일차관문을 통과한 사람들을 위한 연회가 벌어졌다. 이번에 일차관문을 통과한 고수들은 모두 서른 한 명이었다. 취화청의 커다란 대청에는 수십명의 사람들이 둘러 앉은 채 주연을 벌이고 있었다. 가장 상석에는 이번 대회의 참관인인 이한상과 문천옥, 육덕명이 앉아 있다. 이언년과 금성위등도 전옥심과 제일비의 뒤를 따라 이곳 취화청에 와 있었다. 문득 이언년이 전옥심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군. 섭풍송이 모습이 안 보이는데......" 금성위도 주위를 둘러보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 그러고 보니 그는 이번 영웅대회에서 모습을 보인 적이 별로 없군 그래." 바로 그때였다. "장주님께서 나오십니다." 장홍의 긴 외침이 들려오며 대청의 뒤에서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오른 쪽의 인물은 홍포를 입고 있는 체구가 건장한 중년인이었다. 눈빛이 별빛처럼 맑고 차가웠으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청수한 인상이었다. 왼쪽의 인물은 나이가 얼마인지 알 수가 없을만큼 늙은 노인이었다. 얼굴이 계피학발처럼 쭈글쭈글 했는데 얼굴색 전체가 노란 색이어서 병자같은 인상을 풍겼 다. 홍포중년인이 나타나자 이언년은 눈을 빛냈다. "호랑이도 제말 하면 온다더니...... 저 자가 바로 섭풍송일세." 전옥심은 눈을 들어 홍포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섭풍송에 대한 소문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 온 터였 다. 헌데 이제 막상 이렇게보니 그는 의외로 차분하면서도 청수한 인물이었다. 천하제일의 도객! 도를 배우는 모든 무림인들의 우상이자 현 구주제일장의 장주인 천룡도 섭풍송! 문득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전옥심의 눈에 이상한 빛이 번쩍였다. 허나 그 눈빛은 곧 사라져 아무도 알아차리는 사람이 없었다. 섭풍송은 참관인석으로 가서 세 명의 참관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때 이철심이 섭풍송의 옆에 있는 계피학발의 노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헌데 저 늙은이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안나는군." 이언년이 피식 웃었다. "자네도 기억력이 나빠졌군. 저 늙은이는 섭풍송의 사숙이라네." 그 말에 이철심은 자기 머리를 탁 쳤다. "이런 제길! 이제보니 풍도라 불리우는 여불명이었군. 나도 이젠 늙었군. 저 칼귀신을 몰 라보다 니......" 이철심은 탄성을 지르면서도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저 늙은 귀신이 아직까지 살아 있을 줄은 몰랐는걸." 풍도 여불명! 그는 이제는 전설이 된 과거의 천하제일도였다. 마음이 예측할 수 없을만큼 괴퍅하고 손속이 날카로워서 과거 무림에서는 그를 사신보다 도 더 무 서워 했다. 이곳에 있는 군웅들 중에서 그와 동년배의 인물은 정파의 대명숙인 장선생 육 덕명 밖 에는 없었다. 섭풍송과 여불명이 참관인들과 같이 석상에 앉자 다시 연회가 계속 되었다. 술자리가 돌아가고 연거푸 잔이 오갔다. 그때 제일비는 누군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 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백의소녀 한명이 자신을 보고 웃고 있었 다. 눈이 초생달처럼 요염하고 피부가 눈처럼 하얀 미녀였다. 그녀의 웃음은 야릇하면서도 자릿할만큼 달콤했다. 제일비는 그녀가 바로 천향비자의 제자인 유소파임을 알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 여자가 날보고 자꾸 웃지?) 그가 순진한 모습으로 고개를 갸웃갸웃거리자 그 모습이 우스운 듯 유소파가 햐얀 손으로 입을 가 리고 킥킥거렸다. 제일비는 괜히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때 유소파가 입가에 미소를 띄면서 그에게 다가왔다. 제일비는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서 엉뚱한 곳을 바라보며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다. 그때 그윽한 사향냄새와 함께 옥이 구르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여봐요. 잠깐 이야기를 좀 할 수 없어요?" 제일비는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 듯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유소파가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별빛같은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 다. 제일비는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더듬거렸다. "무...... 무슨 일이시오?" 유소파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훗훗...... 먼저번에 당신이 보여준 무공은 정말 멋있었어요. 나이도 어린데 언제 그런 무 공을 배웠어요?" 제일비는 그녀가 마치 어린 동생을 대하듯 말하자 내심 아니꼬왔다. (제길......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말버릇이 없군.) 그는 약간 퉁명스런 얼굴로 말했다. "소저의 무공도 나이답지 않게 고강하시더군요." 유소파는 입가에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훗훗...... 당신은 제 나이가 얼마인지나 알고 그런 말을 하세요?" 제일비는 아무리 보아도 그녀의 나이가 자신보다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는 고개 를 저었다. "모르오. 하지만 별로 많지는 않겠지요?" 그때 그녀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말했다. "당신은 어서 내게 누님이라고 부르세요." 제일비는 멍청해졌다. "왜 내가 당신을 누님이라고 불러야 한단 말이오?" 유소파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 듯한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더 많으니까 그렇지요." "소저의 나이는 몇 살이오?" 그녀는 약간 싸늘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여인의 나이는 함부로 물어보는게 아니예요. 그보다 당신은 몇 살이지요?" 제일비는 순진해서 바른대로 말했다. "나는 올해로 열 여덟이요." 유소파의 입가에 득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봐요. 나는 열 아홉이란 말이예요. 그러니 어서 누님이라고 불러요." 제일비는 그녀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않아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그는 어쩔 줄 몰라서 얼굴이 다시 새빨개졌다. 유소파는 그의 그런 모습이 귀여운 듯 입가에 짓궂은 미소를 떠올리며 재미있다는듯 싱글 벙글거렸


다. 그때 누군가가 유소파에게 불쑥 말했다. "그럼 당신은 나를 언니라고 불러야겠네요." 유소파와 제일비는 흠칫 놀라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일비가 구세주를 만난 듯 반색을 했다. "아, 비취야! 잘왔다." 이비취는 큰 눈을 반짝이며 시시 웃었다. 유소파는 눈만 커다란 소녀가 갑자기 말을 걸자 고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내가 왜 너를 언니라고 불러야 한단 말이냐?" 이비취는 눈에 총명한 빛을 가득 담고 말했다. "내가 당신보다 한 살이 더 많으니 당연히 언니라고 불러야지요." 유소파는 이제 십 오세도 되어보이지 않는 그녀가 그런 말을 하자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이비취를 쏘아보았다. "네가 어찌 나보다 한 살이 더 많단 말이냐?" "그럼 당신은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다는 말을 믿지 않는군요?" "그렇다." 이비취는 큰 눈을 깜박이며 쉬지않고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요?" 유소파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건...... 누가 보아도 너는 나보다 어리게 보이기 때문이지." "어리게 보인다고 나이가 적은 건 아니예요." 유소파는 약도 오르고 화도 치밀어 싸늘하게 소리쳤다. "그렇진 않아! 남보다 어리게 보이는 여자는 나이도 적은 거야." 이비취는 배시시 웃었다. "그럼 누가 보아도 당신은 일비오빠보다 어리게 보이니 당연히 일비오빠가 나이가 더 많겠 군요?" "그...... 그건......!" 그제야 유소파는 자신이 이 눈만 큰 소녀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일비는 유소파가 쩔쩔매는 것을 보고 신이 났다. 그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고개르 크게 끄덕였다. "맞소. 당신은 당연히 나를 보고 오라버니라고 불러야 하오." 유소파는 표독한 눈으로 이비취를 쏘아보았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요염 하게 웃 으며 제일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제일비를 향해 가슴이 떨리도록 눈웃음을 쳤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오라버니라고 부르기를 원하세요?" 제일비는 그녀가 갑자기 아양을 떨자 괜히 불안해졌으나 그렇다고 아니라고 할 순 없어 고 개를 끄 덕였다. "그...... 그렇소." 유소파는 요염하게 웃었다. "당신이 그렇게 원한다면 오라버니라고 불러드리지요. 일비오라버니! 앞으로 이 동생을 어 여삐 보 아주세요. 호호......" 그녀는 이비취에게 보란 듯이 제일비의 팔짱을 끼며 교태를 부렸다. 제일비는 그녀가 설마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는지라 아까보다 더 당황했다. "소...... 소저...... 나....... 나는......." 그때 이비취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나섰다. "일비오빠. 축하해요. 새 동생을 얻으셨군요." 제일비는 울상을 하며 구원의 눈초리로 이비취를 바라보았다. "비취야......."


이비취는 귀여운 웃음을 입가에 매달았다. "그럼 이제 식을 올려볼까요?" 유소파는 어리둥절해 물었다. "식이라니?" 이비취는 큰 눈을 깜박거리지도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정식으로 두 분의 의남매 사이라는 걸 세상에 공표하는 의식을 해야지요. 큰 절도 올리고 제물도 바쳐 두 사람의 남매지정이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것을 언약해야지요." 그녀의 거창한 말에 유소파는 잔뜩 약이 올라 이비취를 노려보았다. (요 눈만 큰 계집애가......?) 허나 그렇다고 다 큰 처녀가 어찌 남자에게 대례를 올린단 말인가? 더구나 평생 남매지정이 변치 않을 걸 언약하라니 그것은 그녀 자신의 의도와 너무나 틀 린 것이 아닌가? 이 자리는 천하의 모든 고수들이 운집한 곳이었다. 자칫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평생 올가미를 쓰게 되는 것이다. 이언년 등은 아까부터 이 광경을 보고 있다가 유소파의 어쩔줄 몰라하는 얼굴을 보자 참았 던 웃음 을 터뜨렸다. "푸하하......" "비취야. 요계집애야. 넌 또 왜 그곳에 가서 남의 좋은 일을 방해하느냐? 낄낄낄......" 유소파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채 이비취를 싸늘하게 노려보다가 몸을 홱 돌려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갔다. 제일비는 귀여운 듯 이비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취야. 고맙다." 이비취는 갑자기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도리질했다. "일비오빠. 머리에서 손을 치워줘요." 제일비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왜?" "자꾸 머리를 스다듬면 키가 빨리 안 자란단 말이예요." 제일비는 멍청히 서있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너는 어차피 나이를 더 먹으면 키가 자랄텐데 벌서부터 그런 걸 걱정하니?" 이비취는 큰눈을 깜박거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난 좀더 빨리 자라고 싶단 말이예요." "왜?" 이비취는 제일비의 멍청한 물음에 내심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그런 순진한 모습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고 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때 금성위가 알겠다는 듯 낄낄거렸다. "흐흐.... 요 깍쟁이 같은 계집애야, 연적 하나를 떨쳐버리더니 그를 데리고 놀려고 하는구 나." 이비취는 큰눈이 흰자위로 가득 차도록 금성위를 째려 보았다. 허나 그때 금성위는 술잔을 들이키며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카...... 술맛이 좋군." 군웅들은 이미 거나하게 취기가 돌아 장내는 매우 시끌벅적했다. 그때 한 인영이 좌중에서 조용히 일어나 슬쩍 취화청의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달빛이 환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그 인영은 잠시 달을 올려다보며 무인가 생각하 고 있었 다. 은의가 달빛을 받아 더욱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이한상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녀의 냉정하고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이 별빛보다고 더욱 반짝였


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좌백이었다. "무슨 일로 나오셨읍니까?" 이한상은 고개를 돌려 그의 준수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좌백은 유성과 같이 빛나는 눈을 들어 그녀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았다.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되었다. 좌백의 시선이 점점 뜨거워지는 반면 이한상의 눈은 여전히 냉정했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위가 너무 소란스러워서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다시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좌백은 눈을 빛내고 있다가 그녀 를 따라 허공을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문득 좌백의 음성이 나직하게 울려퍼졌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한상의 얼굴이 그를 향했다. 좌백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번 영웅대회에서 누가 우승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한상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들을 비쳐주고 있는 달을 응시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입을 열었다. "어려운 질문이군요. 이번 대회는 막강한 고수들이 많이 출전해 승부를 예측하기가 힘이 들 어요." "하지만 그 중에도 특히 강한 고수들은 있는 법이지요." 이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굳이 고르자면, 형비란 자의 무공이 특출하더군요." "그 자의 검은 정말 빠르지요." 좌백은 수긍을 했다. 그는 다시 물어보는 시선을 던졌다. 이한상은 또 한 사람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권왕 황보일악도 형비에 못지않은 고수더군요." 좌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권은 아주 무겁지요." 무겁다는 것은 위력이 강하다는 뜻이었다. 좌백 정도의 고수의 입에서 무겁다는 말을 들을 정도면 가히 천하제일의 주먹이라 할 수 있을 것 이다. "당신의 무공도 뛰어나요. 먼저번의 그 산검은 정말 훌륭했어요." 좌백은 그녀의 칭찬에도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그녀가 다시 입을 다물자 차분한 어조 로 말했 다. "한 사람은 말하지 않으셨군요." 이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굳이 입을 열지는 않았다. 좌백은 빛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오의광생 전옥심 말입니다. 그의 검은 제가 난생 처음 보는 것입니다." 이한상이 계속 입을 열지 않자 좌백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검술만으로 따진다면 그는 저나 형비와 비숫한 수준일겁니다. 하지만 그의 반사신경과 임기응변 은 천하제일이라 할 만 하더군요." 이한상은여전히 말이 없었다. 좌백은 그녀의 모습을 힐끗 보다가 갑자기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자의 검을 꺾을 자신이 있읍니다." 그 목소리가 너무 강경했기 때문에 이한상은 눈을 들어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좌백은 준수한 얼굴을 굳힌 채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 한 자 한자 힘주어 말했다. "나는 그 자를 꺾을 것입니다. 그리고 형비도...... 그때가 되면 당신은 내 부탁을 한 가지


만 들 어주시겠읍니까?" 이한상은 별빛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좌백의 준수한 얼굴은 기이한 열기로 뒤덮여 있었다. 허나 그의 눈은 여전히 유성처럼 맑고 깨끗했다. 이한상이 아무런 말이 없자 좌백은 다시 말했다. "대답이 없으신 것은 승낙의 뜻으로 알겠읍니다." 그는 정중한 태도로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다시 취화청으로 사라졌다. 이한상은 그의 헌칠한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백의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때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를 이길 수 없어요." 연회가 끝날즈음 추첨이 있었다. 서른 한 명의 고수가 서로 일대 일로 승부를 겨루어 열여섯 명의 이차 진출자를 가리게 되 는 것이 다. 강서 제일의 고수인 신창무적 마운은 운이 좋게 부전승올 올라갔다. 그외의 다른 서른 명의 고수들은 서로 한 명씩 상대와 싸우게 되었다. 추첨이 끝난 후 곧 연회는 파했다. 이제 휴식은 끝났다. 내일부터는 더욱 치열한 혈전만이 남아 있을 분이었다.

화서지방의 일류고수인 섬전도 나령은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오랜만에 마음껏 들이킨 술이 전신에 퍼져 짜르르한 전율을 일으켰다. 그 기분은 뭐라 말할 수 없을만큼 야릇하면서도 기분좋은 것이었다. 그는 휘청이는 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방문을 열고 짙은 어둠속으로 한 발 들여놓는 순간, 그는 자신외에 누군가가 방안에 있는 것을 감 지했다. 그것은 절대고수들이 느낄 수 있는 직감같은 것이었다. 그는 술이 확 깨는 것을 느끼고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탁자에 있는 불을 켰다. 한 사람이 조용히 침상 옆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 바짝 긴장되었던 나령의 몸이 서서히 풀어졌다. "난 또 누구시라고...... 헌데 이렇게 늦은 밤에 웬 일이시오?" 앉아있던 인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나령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무슨 말이오?" 인영은 그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자네는 내일 오의광생과 싸우기로 되어 있나?" "그렇소." "그를 이길 자신이 있나?" 나령은 눈살을 찌푸렸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필승의 자신은 없지만 그를 두려워하지는 않소." 그 인영은 나직하게 웃었다. "그거 안됐군. 결전을 앞둔 자가 필승의 신념이 없다니...... 나에게 그 자를 꺾을 비책이 있 네." 나령은 정신이 번쩍 들어 자신도 모르게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그게 무엇이오?" 인영은 웃었다. 하얀 이가 빛나며 서늘한 빛을 뿌렸다. "바로 자네가 죽는 것일세."


"뭐라고?" 나령은 깜짝 놀라 몸을 피하려 했다. 그 순간 그 인영의 커다란 손이 휘둘러졌다. 파앗! 나령은 자신의 몸이 불구덩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착가을 느꼈다. (앗! 뜨거......) 그는 비명을 지르려고 했으나 이미 자신의 혼이 녹아버린 듯한 감각을 느꼈다. 나령은 그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14 장 다음날 아침. 나령의 시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나령과 가장 친한 친구 사이였던 화북의 제일고수인 벽력부왕 조광이었다. 해가 중천에 뜨도록 나령이 일어나지 않자 그를 깨우러 왔던 왕조광은 나령이 자신의 방안에 길게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는 이미 나령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후였다. 왕조광의 외침소리에 달려나온 군웅들은 나령의 시신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쩍 벌리고 죽어있는 나령의 모습은 왠지 섬뜩한 것이었다. 한동안 죽음같은 침묵이 계속되었다. "누가 죽였을까?" 중인들 중 누군가가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렸다. 둘러서 있던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모두 그런 의 문이 떠올랐다. 참관인 중의 한 사람인 문천옥이 왕조광에게 말했다. "사인이 무엇인지 조사해 보았나?" 시체를 부둥켜 안고 멍하니 있던 왕조광은 그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든 듯 나령의 몸을 조사 했다. 허나 이상하게도 그의 몸에는 별다른 상처가 나 있지 않았다. 나령같은 고수가 물론 저절로 죽었을리는 없다. 필경 누군가의 손에 살해당했을 텐데 어디에도 그 흔적이 보이지 않는것이다. 왕조광은 심지어 나령의 옷을 벗기고 몸 전체를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허나 어디에도 작은 상처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 이상하군." 왕조광은 고개를 갸우둥거렸다. "혹시 독에 중독된 것이 아닐까?" 신창무적 마운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허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중독이 되었다면 아무리 흔적이 없고 위력이 강 한 독이 라도 증세가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가장 흔한 증세는 동공이 축소되는 것이었다. 또 혓바닥에 하얀 반점 같은 것이 생기지도 않았다. 몸은 멀쩡하건만 사람만 죽어 있는 것이다. 중인들은 마음속으로 의아심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나령을 죽인 흉수는 누구일까? 그를 죽인 이유는 무엇이며 흉기는 어떤 것을 사용했을까? 과연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공이 있을까? 모두들 그런 의문에 잠겨 있을 때 문득 섭붕이 생각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대협은 오늘 누구와 우게 되어 있었소?" 중인들은 무언가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어 눈을 빛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모두의 시선이 천천히 어느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거친 흑의를 입고 허리에는 녹슨 철검을 찬 채 한쪽 구석에 조용히 서 있었다.


어제의 추첨에서 나령과 싸우기로 되어 있던 사람은 바로 오의광생 전옥심이었던 것이다. 중인들의 시선이 온통 자신에게 쏠렸건만 전옥심은 여전히 무심하게 서 있었다. 중인들의 마음에 하나같이 의심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혹시 그가 나령을 살해한 것이 아닐까? 허나 그가 무엇 때문에 나령을 살해한단 말인가? 객관적으로 보아 나령은 전옥심의 적수가 아니었다. 전옥심이 나령과의 대결을 피하려고 그를 암습했다고는 생각할 수 가 없는 것이다. 나령의 죽음은 많은 의혹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모두들 눈에 불을 켜고 작은 증거라도 찾기 위해 돌아다녔다. 허나 결국 범인을 색출하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우선 그의 정확한 사인조차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천하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절정고수들이 가득 모여 있는데도 그의 사인을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허나 왕조광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절친한 친구였던 나령의 사인과 그를 죽인 흉수를 꼭 밝혀내고야 말리라고 결심했다. 이차관문의 첫 번 째 대결은 사천에서 제일 큰 무장을 경영하는 철장 동방천파와 형산파의 제일고 수인 통비수 원량이었다.철장 동방천파는 동방무장을 경영하며 사천지방에서는 거앳제왕처 럼 군림 하는 일대의 고수였다. 그는 일차관문에서 도전자가 나타나지 않아 단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이차전에 진출한 사람 이었다. 그러니만큼 이번의 일전은 그가 영웅대회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무공을 선보이게 되는 기회 인 것이 다. 동방천파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체구가 당당한 삼십대 후반의 인물이었다. 사람됨이 장중하고 태도가 무거우면서도 사리에 밝았다. 그의 동방무장에서 배출된 제자들은 모두 기초가 잘 잡히고 헌앙한 기재들이란 평판이 자자 했다. 그에 비해 통비수 원량은 비록 형산파의 제일고수였지만 체구가 왜소하고 몸이 비쩍 마른 볼품없 는 중년인이었다. 그의 두 팔은 다른 사람에 비해서 훨씬 더 길었다. 그는 이 신체적인 특징을 최대한 이용해서, 형산파 전래의 철비십이수를 더욱 발전시켜 통비신수 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절기를 만들어냈다. 그의 통비신수는 팔의 길이가 자유자재로 조절되어 상대를 공격하기 때문에 방비하기가 어 렵고 무 엇보다도 처음 대하는 사람은 당황해서 손도 제대로 써보기 전에 쓰러지고 만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섰을 때 동방천파는 자신보다 십 여살 연상인 원량에 대해 깍듯 한 예의 를 차렸다. 그는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대협께서 먼저 손을 쓰시지요." 원량은 동방천파의 명성이 자신을 훨씬 능가하고 있음을 잘 아는지라 이번 대전에서 자신 은 물론 문파의 사활마저 걸고 있을만큼 절박했다. 그래서 그는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말이 끝기도 전에 그의 기다란 팔은 벌써 동방천파의 목과 어깨를 노리고 덮쳐왔다. 두 팔이 마치 기형처럼 쭈욱 늘어나며 섬전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대 아래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자 안색이 대변했다.


허나 동방천파는 마치 이를 예상하기라도 하고 있던 양 슬쩍 어깨를 움츠려 원량의 불의의 일격을 간단하게 피하고 말았다. 원량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두 팔을 마구 휘둘렀다. 파파파! 요란한 바람소리가 터지며 비무대 위가 온통 그의 기다란 팔에 휩싸인 것 같았다. 허나 동방천파는 요지부동. 두 팔을 비무대 위에 단단히 고정시킨 채 두눈을 별빛같이 반짝이며 원량의 눈만을 보고 있을 뿐 이었다. 그 태도는 장중한데가 있어 일파의 종사와 같은 기도를 풍겼다. 구경을 하고 있던 군웅들은 동방천파의 침착한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동방천파답군! 무림의 고수라면 저처럼 의연해야 하는 법이지. 아쉽게도 요 근래는 저런 자 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드물단 말이야." 원량의 통비신수가 자신의 몸을 스치듯 지나가자 동방천파는 천천히 두 팔을 들어 자신의 유명한 철장을 휘둘렀다. 그의 장력은 비록 빠르지는 않았으나 힘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중압감을 느끼게 했다. 우르르!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요란스런 음향과 함께 동방천파의 손은 원량의 통비신수 를 뚫고 들어왔다. 원량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이를 악물고 두 손을 기이하게 뒤틀었다. 스애액! 오른손을 기다랗게 그대로 있는데 왼팔이 갑자기 짧아졌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만큼 기이한 광경이었다. 두 팔의 길이가 자유자재로 변하다니......길고 짧은 두 팔은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교 차되 며 그물처럼 덮쳐왔다. 이것이 바로 원량의 자랑하는 통비신수중의 단망인이라는 절기였다. 누구든지 이 단망인를 만나게 되면 두팔의 길이가 갑자기 달라진 것을 보고 당황하여 얼떨 결에 당 하고 만다. 더구나 짧고 긴 두 팔에서 뿜어나오는 변화는 예측하기가 힘들어 알고도 막지를 막했다. 허나 동방천파는 경험이 풍부하고 무공이 탁월한 일대의 고수였다. 그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슬쩍 몸을 돌리며 두 손을 세차게 휘둘렀다. 콰아앙! 벼락치는 듯한 음향과 함께 원량의 비쩍 마른 몸이 비무대의 끝까지 주르르 날려갔 다. "우욱!" 원량은 두 팔이 부서진 듯한 통증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질러냈다. 동방천파는 언제 손을 썼느냐 싶게 차분한 태도로 두 손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는 원량에게 포권을 했다. "원대협께서 반대하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결전은 이쯤에서 끝내는 것 좋겠읍니다." 원량은 얼굴이 푸르락붉으락해져 그를 바라보았다. 허나 그와 동방천파의 무공은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 누구라도 우열을 쉽게 구분할 수 있었 다. 그로서는 오히려 더 이상 과하게 손을 쓰지 않은 동방천파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형편이었 다. 원량은 한숨을 내쉬며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패했네." 그는 비쩍 마른 몸을 날려 중인들 틈으로 사라졌다. 동방천파는 묵묵히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참관인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비무대의 아래 로 내려 갔다.


"이번 싸움은 철장 동방대협의 승리요!" 개비수 장홍의 긴 외침이 들리자 군웅들이 함성을 질렀다. "와아!" 그 요란한 환호의 박수소리를 들으며 제일비는 심호흡을 길게했다. "이제 준비는 되었느냐?" 이언년은 긴장된 안색으로 서 있는 제일비를 바라보며 어깨를 다독거렸다. 제일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만 합니다." 그때 장홍의 외침이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하북의 오호단문도 팽립대협과 해남검파의 선풍검 제일비 소협의 대결이오!" 제일비는 그 외침을 들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슬쩍 옆에 있는 전옥심을 바라보았다. 허나 전옥심은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앞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언년은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불쑥 말했다. "자네는 저 애에게 달리 해줄 말이 없는가?" 전옥심은 고개를 저었다. 이언년은 입맛을 다시며 제일비를 불렀다. "할 수 없군. 일비!" "예." 제일비가 눈을 들어 자신을 바라보자 이언년은 차분하게 말했다. "팽립의 오호단문도는 무거운 것을 장기로 한다. 그러니 함부로 맞받지 마라." "알겠읍니다." 제일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비무대로 걸어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이언년은 천천히 전옥심을 돌아보았다. "자네는 왜 그에게 한마디 말이라도 해 주지 않나?" 문득 전옥심은 무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일비에게 필요한 것은 충분한 대적경험이오. 그것은 가르쳐 준다고 익혀지는 것이 아니오." 이언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일리가 있네. 하지만 상대 따라 싸우는 방법이라도 지시해 주는 게 좋지않은가?" "상대가 너무 강하면 아무리 싸우는 방법을 알려 주어도 패하고 마오. 또 상대가 약하다 면 굳이 싸우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아도 혼자 물리칠 수 있을 것이오." 이언년은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면 자네는 생전 그에게 싸우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을 셈인가?" 전옥심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가지 경우에는 그에게 싸우는 방법을 지시해 줄 것이오." "그게 어떤 경우인가?" 전옥심은 두 눈을 무심하게 반짝였다. "그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고수를 만났을 때요." 이언년은 그의 말이 일리가 있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승부의 열쇠는 완전히 무공에 달렸다고 할 수는 없다. 운 지리적인 이점, 당시의 기분과 체 력, 이 모든 것이 승부를 결정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허나 만일 상대와 무공의 격차가 크다면 아무리 운이 좋고 지리적이 이점을 갖는다 해도 결국은 패하고 말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와 다 큰 어른의 싸움과 같을 것이기 때문에. 어린아기가 제 아무리 운이 좋고 손 재주가 뛰어나도 어른을 이길 수는 없다. 그리고 무공의 격차는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보다 더욱 심한 것이었다. 이언년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강가에 나가 놀게 내버려 두는 부모의 마음처럼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그것은 그가 제일비를 마치 친아들처럼 아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무엇을 하든, 누구와 싸우든 항상 가슴을 졸이게 되는 것이다. 팽립은 몸이 길쭉하고 마른 중년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상대가 자신의 아들뻘 밖에 되지 않은 홍안소년임을 알고 내심 기분이 언짢았 다. 허나 상대가 패도 섭붕을 꺾은 고수인 이상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그는 등 뒤에서 커다란 칼을 빼들고 제일비를 바라보았다. "먼저 손을 쓰게." 제일비는 사양하려 했으나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먼저 검을 뽑았다. 스르릉! 특유의 용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용천검이 눈부신 검광을 뿌리며 뽑혀 나왔다. "좋은 검이군." 팽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손을 쓰겠읍니다." 제일비는 왼발을 앞으로 내밀더니 검을 즉시 휘둘렀다. 이 일검은 겉으로 보아서는 매우 신속하고 날카로웠지만 사실은 팽립의 몸 일 척 밖을 공격한 것이었다. 제일비는 이렇게 해서 검으로 예를 취한 것이다. 팽립은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자. 그럼 시작하세." 이어 두 신형이 즉시 움직이더니 칼빛과 검영이 서로 교차되며 종횡왕복하여 비무대를 온 통 에워 쌌다. 휘이잉! 두 사람의 무공은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 팽립의 오호단문도는 도로 유명한 하북팽가의 비전도법이었다. 이것은 위력이 강맹하고 무거운 반면 빠르고 날카로운 데서는 약간 뒤떨어졌다. 제일비의 검은 남해삼십육검으로 빠르고 변화가 많았다. 나이도 차이가 많이 나는 두 사람이 서로 검과 도를 들고 판이한 무공을 펼치자 아주 흥 미진진한 대결이 되었다. 군웅들은 정신없이 두 사람의 격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파파! 검풍과 도기가 제각기 비무대를 날려 버릴듯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검법에서는 제일비가 약간 뛰어났다. 허나 팽립은 강호에서 축적한 노련미와 뛰어난 내공의 힘으로 견디어내고 있었다. 제일비는 계속 팽립을 궁지에 몰면서도 결정적인 우세을 점하지 못하자 마음이 조금씩 초조해졌 다. 그때 문득 그의 뇌리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제일비는 즉시 남해삼십육검의 절초인 해풍복해를 펼쳐 팽립의 가슴팍 화개혈을 노려갔다. 이 초식은 강맹하고 빠른 반면 일직선으로 뻗어간다는 단점이 있었다. 팽립은 칼날같은 검세가 자신의 가슴으로 다가오자 커다란 도를 휘둘러 추문배산의 초식으 로 맞서 갔다. 까깡! 불통이 튀기며 제일비의 용천검과 팽립의 단문도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제일비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두 발 뒤로 물러섰다. 내공에서 아무래도 차이가 있는지라 정면으로 부딪치자 제일비가 약간 밀리는 것이다. 팽립같은 백전노장이 한 번 잡은 승기를 놓칠리가 없었다. 즉시 횡단금걍과 영풍일참의 절초를 연거푸 펼쳐 제일비를 압박해갔다. 휘이잉! 매서운 도풍이 제일비의 몸을 산산이 찢을 듯 덮쳐갔다. 그때 제일비는 다시 검을 들어 오호단문도에 맞서갔다. (옳지!) 팽립은 내공에는 자신이 있는지라 제일비가 검을 또 맞서오자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는 더욱 공력을 돋우어 제일비의 용천검을 박살낼 듯 도를 휘둘렀다.


헌데 검과 도가 막 부딪치려는 순간, 빙글! 제일비의 용천검이 슬쩍 비켜서며 단문도를 타고 흘러내려오듯 떨어지는 것이 아닌 가? "엇?" 팽립은 설마 나이도 어린 제일비가 이런 수법을 쓸 줄은 몰랐는지라 대경실색하여 급히 도 를 회수 했다. 그 순간 용천검이 노도처럼 밀려왔다. 차창! "으윽!" 팽립의 입에서 신음이 터지며 그의 몸이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제일비는 용천검을 든 채 우뚝 섰다. 팽립은 낭패스런 표정으로 왼팔을 부여 잡은 채 서 있었다. 그의 왼팔은 용천검이 스친 탓으로 피로 얼룩져 있었다. 팽립은 착잡한 시선으로 제일비를 바라보았다. 아들 뻘도 되지 않는 그에게 진 것이 몹시 허탈한 모양이었다. 허나 그는 곧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칼을 거두었다. "내가 졌네. 자네가 사정을 봐주어 고맙네." 사실 조금전 제일비는 더 독하게 손을 쓸수 있었으나 승부만을 가리려는 생각에서 손을 늦추었던 것이다. 그는 설마 팽립이 체면불구하고 군웅들 앞에서 그 일을 말할 줄 몰랐는지라 그의 대범함 에 크게 감탄했다. "미안합니다." "하하....... 아닐세. 장강후랑추전랑이라고 하더니 앞으로 세상은 자네처럼 젊은 사람들의 것이 될 걸세." 팽립은 선배다운 아량을 보이며 비무대에서 물러갔다. "이번 대결은 선풍검 제소협의 승리요!" 대 아래에서 장홍이 길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아아......" 다시 우렁찬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 함성은 귓전으로 들으며 제일비는 천천히 비무대 아 래로 내 려왔다. 이차관문은 이틀동안 계속되었다. 서른 한 명의 고수 중에서 열 여섯명이 남게 되었다. 그들은 다시 추첨을 하여 다음 상대를 고르게 되었다. 추첨을 끝내고 나올 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언년은 제일비를 불렀다. "일비. 자네의 다음 상대는 누구인가?" 제일비는 웬일이지 씁쓸한 웃음을 띄었다. "이것 참. 이상하게 됐어요." 이언년은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왜? 설마 옥심과 붙게 되었단 말인가?" "아니오. 하지만 참 난처하게 됐어요." 금성위가 옆에 있다가 제일비를 툭 쳤다. "녀석아, 답답하구나. 어서 말해봐라. 상대가 누구냐?" 제일비는 할 수 없다는 듯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유소파 소저예요." "뭐?" 이언년은 눈을 크게 뜨다가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게 뭐가 난처하느냐?"


"하지만 상대는 여자가 아닙니까?" 제일비는 아직 여자와 싸워본 경험이 없는지라 몹시 당혹해 했다. 금성위가 어이가 없다는 듯 낄낄거렸다. "에라. 이 녀석아! 여자와 싸우는 게 그렇게 겁이 나거든 아예 여자로 태어나지 그랬느냐?" 제일비는 얼굴이 벌개졌다. "에이 선배님도...... 하지만 여자에게 어떻게 검을 겨누겠어요?" 금성위는 뭐가 우스운지 연신 낄낄거렸다. "크흐흐흐....... 고 계집애가 너에게 앙심을 품고 있을텐데 재미있게 됐군. 흐흐...... 녀석아. 잘난게 죄다." 제일비는 다시 얼굴이 벌겋게 되었다. 이언년은 고소를 금치 못하고 있다가 제일비의 뒤에 있는 전옥심을 바라보았다. "헌데 자네는 누구와 싸우게 되었나?" 제일비가 먼저 말했다. "형님은 화산파의 귀검 악무방과 대전하게 되었어요." 이언년은 눈을 크게 떴다. "악무방과......? 허.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다더니......" 그들이 이야기를 주고 받는 동안 전옥심은 아무 말도 않고 묵묵히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의 눈빛은 유달리 반짝이고 있었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악무방은 침상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들어오시오." 벌컥! 문이 열리며 한 사나이가 들어왔다. 악무방은 그의 얼굴을 보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어서 오시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소?" 들어온 인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허...... 아직까지 잠을 자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내일 결전이 걱정되는 모양이군." 악무방의 차가운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별로 그렇지는 않소. 어차피 한 번은 싸워야 할 상대이니까 빨리 만날수록 잘된 일이오." 인영은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그렇게 생각하니 대견스럽군. 헌데 자네는 오의광생에게 한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걸 아 나?" 악무방은 눈을 빛냈다. "당신이 그걸 알고 있소?" "그렇다네." 헌데 의외로 악무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알고 싶지 않소." 인영은 뜻밖인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왜 그런가?" "화산파의 제자는 어떤 상태에서도 비겁하지 않소." 인영은 악무방의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했다가 껄껄 웃었다. "하하...... 이거 내가 한 방 먹었군. 과연 매화검존이 사람들을 잘 가르쳤군." 인영은 웃으면서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나직하게 해서 속삭였다. "헌데 자네는 한 가지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아는가?" 악무방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내가 무슨 실수를 저질렀소?" 인영은 웃었다. 차가운 이가 불빛을 받아 더욱 매섭게 반짝였다. "자네는 나를 너무 가까이 오게 했네."


악무방은 그의 말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최대한 빨리 뽑았다. 허나 그 순간 인영의 손바닥이 그를 향했다. 손바닥을 보는 순간 악무방은 전신이 용광로속에 빠지는 듯한 엄청난 고통을 느꼈다. 그 손바닥은 얼마나 빠르고 강했던지 악무방은 한순간에 암흑의 나락으로 빠지는 것 같았 다. (이....... 이런 무공이.......)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악무방은 그 커다란 손바닥의 가운데 하얀 반점이 있는 것을 보았다. 허나 더 이상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악무방은 차디찬 방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제 15 장. 신 기 제 갈 한 사람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조군평이었다. 그는 이를 갈아붙이며 부르짖었다. "이건 그 놈 짓이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두 번째 살인. 악무방은 나령이 죽었던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죽어 있는 것이다. 몸에는 손톱만한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좌백은 유성같은 눈을 빛내며 그의 시체를 샅샅이 살펴���았다. 허나 어디 한 군데 뚜렷한 사인이라고 밝힐만한 것이 없었다. 그 광경을 내려다 보며 조군평은 다시 뼈골이 실릴 정도로 차갑게 내뱉었다. "더 조사해 볼 것도 없다. 이건 그 전옥심이란 놈의 짓이 분명하다. 그의 상대로 결정된 놈들이 하나씩 죽어가는 것을 보면 모르느냐?" 허나 좌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침착함 얼굴로 눈을 빛내며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주위에는 많은 군웅들이 몰려와 있건만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조군평은 답답한 듯 매같이 사나운 얼굴을 찌푸렸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 놈을 추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때 한 사람이 불쑥 들어왔다. 쓸쓸한 눈빛이 잠시 방안에 늘어선 군웅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전옥심이 거친 흑의를 펄럭이며 들어오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고정되었다. 그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전옥심은 천천히 악무방의 시체 엎으로 다가갔다. 문득 그의 앞을 조군평이 가로 막았다. "흐흐...... 가증스러운 놈? 뻔뻔스럽게도 이곳에 나타나다니......" 전옥심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으나 무어라 말하지는 않았다. 조군평의 눈빛이 한층 싸늘해졌다. 그의 손이 천천히 자신의 검으로 다가갔다. 일촉즉발의 순간, 하나의 손이 다가와 조군평의 주름진 손을 잡았다. 조군평은 눈을 돌려 자신을 막은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슨 짓이냐?" 좌백은 냉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가 흉수라는 증거는 하나도 없읍니다." 조군평은 눈살을 찌푸리며 무어라고 말하려 했다. 허나 좌백은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사백님. 이일은 감정에 치우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악무방을 해친 흉수는 꼭 잡 고야 말 것입니다. 허나 그렇다고 아무나 범인으로 몰 수는 없읍니다." 조군평은 내심 불만이 가득했으나 그의 말이 일리가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전옥심을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만일 네놈이 흉수로 밝혀진다면 네 놈의 살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말리라!" 그는 차갑게 내뱉은 후 뒤로 물러났다. 좌백은 잠시 별빛같은 눈으로 전옥심을 바라보았다. 전옥심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사실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있을 때 참관이들 중 한 사람 인 문천 옥이 앞으로 나섰다. "이 사건은 신중히 생각해야 하네. 벌서 두 번째의 살인이 벌어졌으니 앞으로 더 일어나지 않으리 란 보장이 없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흉수는 꼭 잡아야 하네." 중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무슨 수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흉수를 잡아낸단 말인가? 문천옥은 차분한 음성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무엇보다도 각자가 조심을 하는 수 밖에 없네. 특별히 친한 사이가 아닌 이상 의심스러운 사람이 주위에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도록 하게. 덧붙여 말한다면 특히 저녁부터 아침 사이에 조 심하는게 좋겠지." 그의 말은 모두의 공감을 샀다. 그때 조군평이 퉁명스런 목소리로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럼 전옥심, 저자는 그대로 방치해 둔단 말인가?" 문천옥은 쓴웃음을 지었다. "조대협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무작정 그를 범인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 일 아니오?" "나는 그 이외의 다른 사람을 범인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네." 조군평이 차게 말했을 때 이제껏 말이 없던 장선생 육덕명이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끝내는게 좋을 것 같군. 앞으로 변을 당하는 사람은 모두 자신들의 조심이 부족 한 탓으 로 돌릴 수 밖에 없네." 그는 정파의 최고 배분인지라 성격이 괄괄한 조군평으로서도 더 이상반발을 할 수가 없었 다. 나령의 죽음에 이은 악무방의 변사는 많은 무림인들에게 충격과 함께 공포를 불러 일으켰 다. 두 사람이 동일인에 의해 살해 되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대체 흉수는 누구일까? 과연 그는 무슨 의도에서 그와 같은 일을 저지르는 것일까? 조군평의 말대로 전옥심이 그들을 살해했을까? 그리고 살인은 계속될 것인가? 숱한 의문들이 중인들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지나갔지만 어느 누구도 올바른 해답을 찾지 못 했다. 다시 시체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시작되었다. 의심이 갈만한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집중적인 심문도 있었다. 허나 결국 밝혀진 것은 아무 것 없었다. 악무방의 정확한 사인도, 범인에 대한 물증도 나타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전옥심을 의심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이었다. 그 심증이란 것도 어찌보면 억지스러운 것에 불과했다. 이언년과 제일비등은 전옥심의 무죄를 믿었지만 그것은 증명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전옥심 자신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주위에서 어떤 말을 하든, 어떤 눈초리로 자신을 보든 항상 무 관심하게 행동을 했다. 그의 그런 점이 더욱 의심을 부채질하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삼차관문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가장 먼저 대결한 사람은 신창무적 마운과 관서의 호걸인 철혈검 전평이었다. 삼차관문까지 올라온 고수들은 제각기 한 방면에 대해서는 거의 명인의 경지에 올라있는 절대의 고수들이었다. 때문에 격전도 한층 치열해지고 승부를 예측하기 더욱 어려웠다. 마운과 전평의 대전은 거의 삼백 초 동안 계속된 끝에 마운의 신창이 전평의 왼쪽 어깨를 꿰뚫음 으로써 마운의 승리로 끝났다. "와아아......." 하늘을 찌를 듯한 군웅들의 함성소리를 들으며 다음에 등장한 고수들은 권왕 황보일악과 운남성의 제일고수인 철선공자 위천민이었다. 철선공자 위천민은 운남지방에서 왕자처럼 군림하는 풍류남아로, 그의 배기화동에는 실제 로 백 명 의 꽃다운 미녀들이 득실하다고 한다. 그는 항상 깔끔하고 여인에 대한 정이 많아 이번 영웅대회 에 참가할 때도 많은 미녀들이 그를 따라왔다. 그의 임풍옥수같은 모습이 대 위로 나타나자 즉시 미녀들의 교성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야호...... 위공자님 만세!" "힘내세요!" 군웅들은 많은 미녀들이 그를위해 함성을 지르는 것을 보고 부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위천민은 비단옷에 머리를 단정하게 빗었으며 얼굴은 백옥과 같이 희었다. 그의 자태는 매우 유연해서 전형적 풍류공자 같았으며 명성이 천하를 진동하는 무림고수 같지가 않았다. 그는 미녀들의 환성을 듣자 준수한 얼굴에 씁쓸한 고소를 지으며 자신의 앞에 우 뚝 서 있 는 황보일악을 바라보았다. "황보대협과 겨루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무쪼록 한 수 잘 부탁 드립니다." 황보일악은 평범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별말씀을....... 그보다 위공자가 만약 지기라도 한다면 저 미녀들이 몰려들어 나를 잡아 죽 이려 고 달려들 것이니 그것이 걱정이구려." 위천민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설마 그럴리가 있겠읍니까? 만일 그렇다면 황보대협께 덤벼드는 여인들은 모두 대협 께 선사해 드리겠읍니다." 황보일악은 씁쓸 고소를 머금었다. "말씀은 고맙소만 이 황보일악은 위공자와 같이 풍류를 즐겨하지 않으니 사양하겠소."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요." 위천민은 품속에서 천천히 철골선을 꺼냈다. 그의 이 철골선은 비록 평범하게 생겼지만 운남성에서만 구할 수 있는 희귀한 온옥으로 만 든 것으 로, 질기면서도 단단했다. 그는 이 한 자루 부채로 거의 십년 동안을 운남제일고수로 명성 을 떨쳐 온 것이다. 위천민은 철골선을 꺼내들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손을 쓰겠읍니다." 스으으......그의 손이 가볍게 흔들더니 대 위가 마치 수백 개의 부채로 뒤덮인 듯한 착각이 들었


다. 어떻게 보면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운 느낌을 주었지만 어떻게 보면 천상의 선녀들이 뿌려주는 꽃의 행렬같기도 했다. 이 강호에서 명성을 떨치는 젊은 맹협은 짧은 부채위에 연속적으로 판관필, 점혈궤, 분수 자, 점강 모, 어장검, 선칠수등 여섯 가지 무기중 가장 절묘한 초식을 전개했을 뿐 아니라 조금도 손에 사 정을 두지 않았다. 황보일악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자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반쯤 말은 주먹을 휘둘렀다. 우웅! 선영과 권풍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황보일악은 아직까지 이번 영웅대회에서 한 번 이상 주먹을 떨친 적이 없었다. 그만큼 그의 주먹은 위력이 강했고 막기가 힘들었다. 허나 이 운남제일의 풍류공자는 철골선의 절묘한 초식으로 황보일악의 패도무쌍한 주먹을 잘 막아 내고 있었다. 이언년은 흥미있는 눈길로 두 사람의 격전을 보고 있다가 이비취를 돌아보았 다. "비취야. 어떠냐? 두사람의 무공은 백중지세로구나." 이비취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을 걸요." 금성위가 의아한 듯 물었다. "요 꼬마아가씨야. 두 사람의 실력은 엇비슷한 것 같 데 그게 무슨 말이냐?" 이비취는 큰 눈을 깜박이며 지혜어린 빛을 떠올랐다. "얼핏 보기에는 그렇지만 사실은 약간 달라요. 위천민의 무공은 비록 쾌속하고 변화무쌍하 지만 황 보일악의 권도 그에 못지 않게 변화가 많아요." 금성위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지. 그건 노부도 알고 있다. 헌데 왜 그런 말을 했느냐?" "그건 눈에 보이는 것이지요. 사실을 말하자면 황보일악의 장기는 권이 무거워 상대가 제 대로 받 아내지 못한다는데 있어요. 헌데 지금 황보일악은 공력을 별로 일으키지 않고 오직 권의 변화로만 상대하고 있지요. 그래도 두 사람이 막상막하이니 황보일악이 자신의 장기를 발휘한다면 쉽게 승 리를 거둘 수 있을 거예요." 금성위는 녀의 조리있는 말에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렇겠군. 헌데 왜 황보일악은 일부러 전력을 다하지 않는걸까?" 이비취는 큰 눈을 깜박거리며 다시 웃었다. "앞으로 더욱 무서운 고수들과 겨루어야할 그가 어찌 자신의 절기를 함부로 보여주겠어 요? 아마 황보일악은 오십 초쯤 시간을 끌다가 슬쩍 위천민을 물리칠 거예요." 금성위는 반신반의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순식간에 오십 초가 흘러갔다. 그동안 누구의 눈에도 우열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황보일악의 커다란 손이 슬쩍 위천민의 철골선을 스쳤다. 그것은 얼핏 보기에는 우인 듯해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헌데 위천민은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비틀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으윽?" 황보일악의 커다란 손이 스치는 순간 위천민은 강한 압력을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그로서는 난생 처음 받아보는 강력한 힘이었다. 위천민은 뒤로 물러난 채 황보일악을 바라보다가 부채를 거두고 정중히 포권을 했다.


"황보대협께서 지금까지 사정을 봐주신 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황보일악은 천천히 왼 손을 반쯤 말아쥔 채 빙긋 웃었다. "하하...... 무슨 말씀을...... 오히려 위공자의 부채의 변화무쌍함에 찬사를 보내오." 위천민은 귀공자답게 솔직히 패배를 시인하고 물러갔다. 이언년은 군웅들의 환호를 받으며 내려오는 황보일악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보며 고 개를 끄 덕였다. "과연 비취의 말대로군. 황보일악의 권이 천하제일이라더니 명불허전이네." 제일비는 감탄스런 표정으로 황보일악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렷다. "형님. 저자의 주먹은 무척 이상하군요. 왜 항상 주먹을 쥐고 있을까요?" 전옥심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전옥심뿐만 아니라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그 점을 궁금하게 여겼지만 굳이 황보일악에게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무림인들이라면 누구든 자신만의 비밀을 가질수 있기 때문이다. 네 쌍의 결투가 끝난 후 잠시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그동안 삼차관문을 통과한 사람은 신창무적 마운과 황보일악, 유성검 좌백, 그리고 벽력부 왕조광 이었다. 전옥심등은 식사를 하기 위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어가고 있는 그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시선은 줄곧 전옥심을 향한 채 떠날줄을 몰랐다. 매처럼 날카로운 눈에 백의를 입고 있는 그 노인은 바로 비응추풍검 조군평이었다. "반드시 네 놈의 꼬리를 잡아 악무방을 해친 흉수임을 밝힐 것이다." 조군평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때 한 인물이 불쑥 그의 앞으로 나왔다. "조대협!" 자신의 앞에 나타난 인물을 보자 조군평은 어리둥절해 물었다. "아. 자네로군. 헌데 무슨 일인가?" 그 인물은 빙그레 웃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저 자에 대해 긴히 드릴 말씀이 있읍니다." "오의광생 말인가? 무슨 일인가?" 인영은 주위를 슬쩍 둘러보며 한결 음성을 낮추었다. "이곳에선 말슴드리기가 곤란하군요. 잠시 저쪽으로 가시죠." 조군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 곧 두 사람은 중인들 사이를 뚫고 후원으로 사라졌다. 오후의 첫 대결은 이번 영웅대회에서 가장 명성을 떨치고 있는 신비의 사나이, 폭섬쾌검 형비와 협서의 제일고수인 천성환 조자방의 대결이었다. 조자방은 두 개의 기이한 마환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고수였다. 그는 가볍게 몸을 날려 단번에 비무대위로 올라섰다. 그의 경공은 무림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깃털같이 가벼운 동작은 신의 경지에 가까웠다. "와아아...... 최고다!" 군웅들은 그의 신법을 보자 일제히 우뢰와 같은 박수를 쳤다. 형비는 천천히 걸어서 비무대위로 올라왔다. 조자방은 대위에 서서 충계를 따라 걸어올라오는 형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등끝에서는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형비가 차가운 눈빛을 뿌며 한발 한발 떼어놓을 때마다 그의 가슴은 더욱 뛰었으며 안색 또한 핏 기가 걷혀가고 있었다. 조자방은 자기가 이 대전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한 줄기 은광이 번쩍이더니 두 개의 환이 그의 손바닥에 내려졌다. 이것은 무림에 유명한 천성환이었다. 조자방은 이 무기를 시전할 당시 첫 번째로 희생된 사람이 무림에서도 그 명성이 당당했던 고수라 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고수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던 고통스런 모습이 지금 이 순간에 하나하나 되살아나 그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조자방은 자신이 왕년의 추억을 생각하자 그 자신이 매우 우습다고 생각했다. 조자방은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했지만 자신의 천성환에 쓰러져 간 사람들의 영상이 모두 되살아나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두려움으로 가득 얼굴...... 사방으로 흩뿌려지��� 시뻘건 선혈...... 마지막 숨을 거두고 통 한스러워하던 모습.......조자방은 갑자기 그 사람들이 때 그 심정들이 어떠했을까 하고 생 각했 다. 그 사람들을 죽일 때 자신은 과연 생명의 존엄성을 알았을까? 하지만 이제 공포의 쾌검을 구사하는 형비와 맞부딪치게 된 지금, 이제야 자신은 생명의 존엄성을 깨달았다. 조자방은 뼈저린 후회와 자책감에 눈을 감았다. 그러자 갑자기 눈앞이 텅비는 듯 하더니 아까 그 처럼 무섭게 느껴지던 형비가 매우 작게 보였다. 옛날에 그렇게 크게 보이던 일도 지금은 모두 작게만 보였고 오직 사람의 생명보다 더 귀 한 것은 없다고 느껴졌다. 조자방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형비는 완전히 비무대위에 올라 산악과 같은 기세롤 그의 앞에 버티고 있었다. "손을 쓰시오." 형비의 음성은 심장을 얼어붙게 할 듯 차가왔다. 사람들은 이제 곧 그의 가공할 쾌검을 보게 될 것을 생각하며 침을 삼켰다. 허나 조자방은 물끄러미 형비를 볼 뿐 손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형비의 눈꼬리가 약간 올라갔다. 조자방은 멍청히 그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으하하....... 손을 쓰라구? 그래 내가 무엇 때문에 당신과 손을 써야하오? 또한 무슨 이유 로 당 신과 싸워야 하며 이기면 어떻고 지면 또 어떻소?" 그리고는 몸을 날려 비무대 밑으로 뛰어내려 가더니 중인들 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형비는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 채 묵묵히 서 있었다. 비무대 아래의 군웅들도 한동안 넋을 잃고 있다가 갑자기 비웃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푸하하...... 이제보니 조자방은 이름뿐인 겁장이였군......" "조자방...... 비겁하다!" 심지어는 욕지거리도 시끄럽게 들렸다. 그러나 조자방의 모습은 어디론지 이미 사라져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개비수 장홍은 비웃음인지 애석함인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이번 대결은 형대협께서 승리하셨소!" 형비는 아무 동요도 없이 몸을 돌려 걸어 내려갔다. 그는 이 일전을 조금도 힘도 들이지 않고 승리하였으므로 승리의 기쁨도 맛보지 못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언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하게 탄식을 했다. "이기면 어떻고 지면 또 어떤가? 어차피 인간은 한 번 죽기 마련이며 결국은 빈손으로 가


는 것이 아닌가?" 그가 한숨을 쉬자 금성위가 히죽 웃었다. "자네 제법 인생의 허무에 대해서 아는 것 같군. 하지만 그렇다면 이번 영웅대회에 참가한 고수들 은 모두 인생의 진리에 대해 모른다는 것인가?" 이언년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지는 않겠지. 이들 중에도 영웅이란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아는 사람도 있겠 지. 허나 일단 대회에 참가한 이상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최선을 다해야 할 걸세." 중인들은 잠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어쩌면 인생의 긴 여로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험준하고 고난한 인생의 항로에서 몇 사람이나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뒤에는 항상 채찍이 가해지기 때문이었다. 무림에서의 명성, 자신에 대한 주위의 기대, 문파에 대한 책임, 그리고 명예에 대한 욕 구......모 든 것들이 채찍처럼 뒤에서 맹렬하게 가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중단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 모든 것을 포기한 조자방이야말로 어찌보면 가장 용기있는 사람일지 모르는 일이다.

장홍의 음성이 중인들의 정신을 깨웠다. "다음은 선풍검 제일비 소협과 설연자 유소파 여협의 대결입니다." 제일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비무대로 가려했다. 그때 문득 말없이 앉아 있던 전옥심이 그를 불렀다. "일비!" 제일비는 급히 그를 돌아보았다. "예. 형님!" 전옥심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와 대결할 때는 눈을 감도록 해라." 제일비는 어리둥절했다. 눈을 감고 어찌 강적을 물리칠 수 있단 말인가? 제일비는 멍청히 서 있자 전옥심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청각에 의지하면 상대의 공격을 충분히 피할 수 있다." 제일비는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그를 하늘같이 믿고 있는지라 고개를 끄덕 였다. "알겠읍니다." 그는 곧 몸을 돌려 비무대위로 올라갔다. 이언년은 전옥심을 돌아보며 웃었다. "하하...... 자네의 이번 지시는 아주 적절한 것 같네." 금성위는 의아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니 눈감고 싸우라는게 적절하다니...... 혹시 자네들 머리가 이상해진게 아닌가?" 이비취가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 "아니예요. 할아버지. 유소파의 무공은 변화가 많고 복잡해서 눈을 뜨고 있으면 오히려 그 녀의 수 법에 말려 들어가기가 쉬워요." 금성위는 나이어린 그녀의 말을 듣고 한 방 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겠군...... 제길. 그동안 육십 년을 살았어도 완전히 헛살았군. 열 다섯도 안된 꼬마보다 못


알다니 말이야." 놀라기는 이철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부터 이 눈만 큰 소녀가 다른 사람들의 무공의 장단점을 척척 알아내는 것을 보고 기해 있 던 참에 이번에 그녀의 말을 듣자 이언년에게 물었다. "자네의 딸은 무슨 엄청난 내력이라도 있나? 아니면 날때부터의 천재인가? 나는 저런 나이 에 저처 럼 영리한 아이를 아직 본 적이 없다네." 이언년은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비취는 원 천하에서 제일 지략이 뛰어난 사람에게 사사했다네. 그 때문에 사물을 보 는 눈이 남다르지." "천하에서 제일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이철심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혹시 천기수사 주자앙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언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자앙은 비록 머리가 뛰어난 고금제일의 천재이지만 지략면에서는 그보다 뒤진다네." 금성위가 있다가 궁금한 듯 물었다. "천하에서 그런 사람이 있던가?" "아암, 있지. 딱 한 사람 있을 뿐이네." 이철심과 금성위는 물론이고 말없이 있던 금강야차까지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 "누군가? 그 대단 사람이?" 허나 이언년은 입가에 신비한 미소만 지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금강야차는 못생긴 얼굴을 우거지처럼 찌푸리며 가슴을 탁쳤다. "아이구 속이야! 제길. 사람 속을 잔뜩 태워놓고 말을 하지 않긴가? 비취야. 네가 좀 말해 라. 네 사부가 누구냐?" 허나 이비취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사부님은 자신의 이름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랬어요." 세 노인은 입맛을 쩍쩍 다셨다. "아이고...... 부녀지간에 완전히 사람 병신만드는구나......." 금강야차는 연신 툴툴 거리며 "이제보니 문제는 요 꼬마계집애에게 있었군. 제길 나도 이제부턴 다른 사람에게 내 이름 을 가르 쳐 주지 말아야지." 서문광과 이환은 못생긴 그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그 모습이 너무 우스워 배꼽 을 잡고 웃었다. 허나 전옥심은 눈을 번쩍 빛냈다. (비취은 사는 혹시 그가 아닐까?) 전옥심은 전에 주자앙에게서 천하에서 가장 지략이 뛰어난 사람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당시 주자앙은 이렇게 말했었다. ──천하에서 가장 지략이 뛰어나기로 공인된 사람은 모두 세 사람이 있다. 구천환유 고자군과 나, 그리고 이제 내가 말하려는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신기제갈 공야자도라고 한다.이 이 름은 무 림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다. 그것은 그가 서장 땅에 칩거하고 무림에 잘 모습을 나타내 지 않기 때문이다. 허나 그의 지략은 나와 고자군을 능가하는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이다.서 장땅에


서는 그를 거의 신처럼 숭배하고 있다. 네가 두 번째로 도움을 받아야할 사람은 바로 그 신기제갈 공야자도이다...... 지략에 관한한 주자앙보다 뛰어나다고 공인된 신기제갈 공야자도! 이비취는 혹시 그의 제자가 아닐까? 허나 그것은 단지 그의 의중의 생각일 뿐,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일비는 비무대로 올라오자 유소파가 자신을 보고 빙긋 웃고 있는 것을 보고 씁쓸 미소 를 지었 다. "유소저. 반갑소." 유소파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호호..... 결국 이렇게 만나게 되었군요. 당신은 아직도 내게 오라버니 소리를 듣고 싶으세 요?" "그 일은 사과드리겠소." 제일비는 얼굴이 약간 붉어졌으나 곧 검을 뽑았다. 계속 말 하다가는 아무래도 그녀의 입심에 곤경에 처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스르릉! 용천검이 매서운 검광을 뿌리자 유소파는 눈을 반짝였다. "좋은 검이군요." "고맙소." 유소파는 입을 가리고 나직하게 웃었다. "점잖은 척 하더니 여자에게 함부로 검을 뽑는군요." 제일비는 다시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으나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다부지게 말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비무를 위한 것이니 소저는 양해 하시오. 소저께서는 먼저 손을 쓰시오." 유소파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가에 있던 손을 흔들며 몸을 날렸다. "어디 소문대로 당의 검이 그렇게 강한가 한 번 보겠어요." 휘익! 하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싶은 순간 그녀의 백옥같은 손은 어느새 제일비의 어깨 와 목을 노리고 덮쳐왔다. (눈을 감으라고 했지.) 제일비는 전옥심의 말대로 눈을 감고 몸을 날렸다. 처음에는 그녀가 어느것을 공격하는지 몰라 약간 당황했다. 허나 자세히 청력을 기울이자 과연 그녀가 손을 휘두르는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미약했으나 똑똑히 들을 수 있어 제일비는 그녀가 자신의 어느 곳을 공격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대위를 바라보는 군웅들은 유소파와 제일비의 격전에 눈이 어지러움을 느꼈다. 실질적인 것에 관해서는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에 한해서는 유소파가 훨신 나 왔다. 대위는 온통 유소파의 그림자와 장영 천지였다. 그녀의 신법은 거의 초인적이라 할만큼 가볍고 정교했다. 더구나 그녀의 소녀만화장은 마치 수천 마리의 나비가 춤을 추는 듯 환상적인 변화를 뿌려 누구도 그녀가 어디를 어떻게 공격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벌서 수십 장이나 공 격을 했 다. 그러나 제일비는 그녀가 아무리 변화무쌍하고 신출귀몰한 초식을 전개하여도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정으로 동을 상대하고 있었다. 또한 그의 초식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깨끗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정신통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용천검은 멈추지 않고 노도와 같은 변화를 뿌려대고 있었으나 그의 얼굴표정은 아주 차분하 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사면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유소파의 손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은 채 단지 귀로 바람소 리만 듣 고 막아냄과 동시에 공격도 감행했다. 만일 그가 눈을 뜨고 상대방의 초식을 보았다면 분명히 눈이 어지러워 견뎌내지 못했을 것 이다. 금성위는 그것을 보고 있다가 감탄하여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저 놈 제법인걸. 과연 자네의 말대로 아주 적절하게 상대하는군." 유소파는 몸을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로 떨면서 사력을 다해 공격했으나 도저히 제일비 몸 을 격중 시킬 수가 없었다. 반면에 제일비의 용천검은 갈수록 매서운 빛을 뿌리며 그녀의 몸을 압 박해 왔 다. 유소파는 약이 잔뜩 올라 이를 악물었다. (흥! 내가 질 줄 알고?) 그녀는 갑자기 두 손을 기이하게 휘둘렀다. 스와아앙! 두 손이 천변만화의 변화를 뿌리며 요란한 음향을 냈다. 기이하게도 그 음향은 수십 개의 장풍이 한꺼번에 몰아쳐오듯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것이 아 닌가? 제일비는 음향이 갑자기 커지며 사방에서 들려오자 약간 당황했다. 유소파의 이 수법은 소녀만화장 중에서도 절초인 만화조락이라는 것이었다. 두 손을 격하게 떨어서 그 파장을 이용해 상대를 살상하는 절정의 수법인 것이다. 제일비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 음파의 한 가운데로 뛰어 들었다. 동시에 그의 용천검에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매서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푸른 검광을 반짝이며 가공할 기세로 덮쳐왔다. 그 초식을 보자 이언년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앗? 천룡파미......!" 찌이익! "으음!" 신음소리와 함께 한 인영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중인들이 놀라 바라보니 유소파가 얼굴을 하얗게 물들인 채 팔을 부여잡고 우뚝 서 있었다. 그녀의 왼쪽 팔이 용천검에 그어진 것이다. 허나 제일비가 손에 사정을 보지 않았다면 그녀의 왼팔은 송두리째 잘라졌을 것이다. 그만큼 제일비가 이번에 펼친 일검은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사나운 눈으로 제일비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감히......" 제일비는 어색한 표정으로 포권을 해 보였다. "용서하시오. 유소저." 유소파는 표독스런 눈으로 그를 쏘아보더니 몸을 날려 대아래로 날아가 버렸다. 제일비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검을 검집에 집어 넣었다. "일비야. 이리오너라." 제일비가 비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뜻밖에도 이언년이 정색을 하며 그를 불렀다. 그의 음성에는 왠지 엄격한 빛이 떠올랐다. 제일비는 어리둥절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언년은 심각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조금전에 펼친 것은 천룡대라삼검이 아니냐?" 제일비가 움찔하여 몸을 떨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예."


"너는 그 검법을 어디서 배웠느냐?" 이언년은 생전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허나 지금 그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어조 는 무서 울 정도로 냉랭해졌다. 제일비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다. 그때 전옥심이 천천히 말했다. "일비에게 천룡대라삼검을 가르쳐 준것은 바로 나요." 이언년은 그를 돌아보았다. "과연 자네였군......" 이언년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그 천룡대라삼검이 과거 천룡사에서 분실한 것인지도 잘 알 있겠군?" 전옥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언년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는 내가 이번에 무림에 나온 이유를 알고 있나?" 전옥심은 눈을 빛내며 무심하게 물었다. "바로 그것 때문이오?" "그렇다네. 천룡사의 주지인 아난대불은 나의 절친한 친구라네. 그는 자신의 천룡사의 진산 검보인 천룡대라삼검이 몇 년전 탈취당했다며 무림에 나가 그것을 찾아달라고 부탁을 했지. 나는 마침 소 식이 끊긴 형님의 종적도 알 겸해서 그의 부탁을 수락했다네." 전옥심��� 잠시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품속에서 한 권의 책을 꺼냈다. "이것이 바로 천룡대라삼검의 검보요. 당시 천룡사에서 이것을 훔친 사람은 신풍귀견수 장무기였 소." 이언년은 검보를 받아들고 감개무량한 표정이 되었다. "그일 것이라고 짐작했지. 천하에서 삼엄한 천룡사의 경내를 뚫고 검보를 빼내갈 사람은 둘밖에 없네. 여기있는 육족존과 장무기 뿐이지. 육족존은 나와 친분이 두터우니 그런 일을 할리 가 없다 고 생각했었지. 장무기는 지금 어디에 있나?" 전옥심은 눈을 빛냈다. "아난대불은 나에게 검보를 찾아옴과 동시에 당시 검보를 훔친 사람에게 응분의 댓가를 치 르게 하 라고 했다네." 전옥심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댓가는 내가 치르겠소." 이언년은 어리둥절했다. "왜 자네가 그를 대신하려는가?" "장노인은 이미 죽었소. 그가 천룡사에서 검보를 훔친 이유는 바로 내게 천룡대라삼검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소. 그러니 그 댓가는 마땅히 내가 받아야 하지 않겠소?" "그랬었군." 이언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돌연 전옥심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굳이 그를 대신할 필요는 없네. 아난이 나에게 부탁을 했던 것은 당사자에 대한 복수였 네. 당사자가 죽은 이상 그 일은 없던 걸로 하세." 이언년은 검보를 품속에 집어 넣으며 이비취를 바라보았다. "이제 알겠군. 전에 제일비가 섭붕을 물리칠 때 사용한 것이 바로 천룡대라삼검의 검강이 었지? 그


래서 너는 내가 일비를 추궁할까봐 나에게 숨긴 것이로군?" 이비취는 깜찍하게 눈을 깜박였다. "당시에는 확실히 몰랐어요. 해시신루의 변화가 너무 오묘해 거기에 정신이 팔려서 확신 할 수가 없었지요. 허나 나중에 생각해보고 해시신루와 함께 사용할 정도의 위력을 가진 검강은 천룡대라 삼검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죠." 금성육 옆에 있다가 그녀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았다. "이그...... 요 귀염둥이가 제 아비보다 일비 저 녀석을 더 위하는군." 이비취는 귀엽게 웃었다. "호호...... 할아버지가 일비오빠보다 더 어리고 잘생겼다면 할아버지를 더 위할 수도 있어 요." 그녀의 말에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 "하하하.......!" "끌끌....... 금가야! 한방 먹었군 그래." 전옥심의 상대인 귀검 악무방이 죽어 버렸기 때문에 철장 동방천파와 칠보천극 황풍과의 일곱번 째 격전이 그날의 마지막 대결이 되었다. 그 대결은 십 여초만에 철장 동방천파의 손이 황의 갈비뼈를 부러뜨림으로써 간단하게 끝났 다. 삼차관문은 모두 끝이 났다. 이제는 단 여덟 명의 고수가 남았을 뿐이었다. 그들은 다시 추첨을 하여 상대를 골랐다. 그 결과 모두 네쌍의 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선풍검 제일비 대 유성검 좌백! 폭섬쾌검 형비 대 신창무 마운! 권왕 황보일박 대 벽력부 왕조광! 오의광생 전옥심 대 철장 동방천파! 이 제 쌍의 격전은 누구도 승부를 예측하기 어려워 벌써 부터 세인들의 이목은 온통 이들 의 승자 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에 쏠렸다. 허나 한가지 청천벽력같은 사실이 전해져 상황은 급전직하되어 버렸다. 구주제일장은 혼란에 휩싸여 버렸고 사람들은 경악과 함께 공포를 느꼈다. 구주제일장의 후원에서 비응추풍검 조군평의 시체가 발견된 것이다.

제 16 장.

천 하 제 일 의 열 화 장 력

시체가 발견된 곳은 취화정에서 멀지않은 후미진 담벼락이었다. 그의 시체가 발견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취화정을 청소하고 쓰레기를 버리려던 일꾼 한 명이 담벼락의 구석에서 하얀 옷자락이 삐 죽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일꾼은 의아함을 느끼고 달려갔다가 그것이 백의를 입은 노인의 시체 라는 것 을 알게 된 것이다. 군웅들은 조군평의 시신을 앞에 놓고 입을 다물었다. 좌백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의 전신을 살펴보고는 차갑게 중얼거렸다. "동일인에 의한 범행이군." 조군평의 몸에는 역시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나령과 악무방의 시체에서와 마찬가지로


조그마한 상처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좌백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그 눈 깊숙한 곳에 서는 분 노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화산파의 인물이 벌써 두 명이나 살해되었다. 더구나 한 사람은 동문의 사형제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사백이었다. 헌데도 자신은 흉수에 대한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좌백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오늘 사백님을 본 사람은 없소?" 좌중에서 한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오전에 그를 보았다네." 자백은 눈을 빛내고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권왕 황보일악이었다. 황보일악은 평소 조군평과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황보대협께서는 사백을 어디서 보셨읍니까?" 황보일악은 평범한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띄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대협은 오전내내 오의광생을 감시하고 있었네. 헌데 내가 오후에 비무를 끝내고 내려와 보니 그 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군.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설마 이런 모습이 되어 있을 줄은 몰 랐네." 좌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은 중인들 틈에 섞여 있는 거친 흑의의 사이에게 고정되었다. "당신도 사백님을 보았소?" 전옥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소. 허나 오후에는 나도 그의 모 습을 보 지 못했소." 좌백의 준수한 얼굴에 냉랭한 미소가 떠올랐다. "결국 사백님은 당신의 뒤를 따라다니다가 갑자기 사라졌고 이어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것 이군. 당 신은 일이 너무 공교롭게 되어간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의 말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전옥심은 중인들의 의심을 피할 수 없는 처지 였다. 모든 살인이 어떤 면으로든 그와 연관되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성미 급한 사람들은 벌써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전옥심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천천히 좌백을 바라보았다. "나는 시체를 한 번 보고 싶소." 좌백의 날카로운 검미가 약간 치켜 올라갔다. "그럴수는 없소. 나는 당신이 사백의 시체를 모욕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소." 전옥심은 사인에 대해 내심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다. 그는 전에 악무방의 시체도 조사를 해보고 싶었으나 그때는 조군평에게 제지를 당했었다. 헌데 이제는 좌백이 그를 가로막는 것이다. 그때 하나의 차가운 음성이 중인들 틈에서 들려 왔다. "그에게 시체를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음성의 주인은 검후 이한상이었다. 좌백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소저. 이미 수 십명의 절정고수들이 시체를 샅샅이 검색했소이다. 나는 우리들이 발견 하지 못 한 것을 저 자가 발견하리라고는 믿을 수 없소." 이한상은 냉정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일은 공정하게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그는 지금 가장 의심을 받고 있는 사람이므로 그에게 도 나름대로 자신의 무죄에 대해서 해명할 기회를 주어야 해요." 좌백은 준수한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설마 그녀가 전옥심을 비호할 줄은 몰랐던 것이 다. 허나 이한상의 얼굴은 여전히 냉정하고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할수 없이 좌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당신은 시체를 살펴보시오." 전옥심은 천천히 조군평의 시체 옆으로 다가갔다. 과연 조군평의 시체에서는 조그마한 상처도 나 있지 않았다. 사람이 이렇게 완벽하게 흔적도 없이 죽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는 정상인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허나 눈을 부릅뜨고 죽어있는 조군평의 얼굴에서는 살아 생전의 매같이 날카롭고 강퍅한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묵묵히 시체를 살피고 있던 전옥심은 문득 눈을 빛내며 조군의 맥문을 잡았다. 이미 죽은 사람의 맥문을 잡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허나 전옥심은 잠시 눈을 감고 맥문을 잡았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이것이었군.) 중인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그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전옥심은 주위를 둘러보며 조용히 말했다. "사인을 알아냈소." 중인들 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까지 세 번의 살인은 그 누구도 사인을 알 지 못했 다.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들이 수 십명씩이나 달라붙어 보았지만 아무도 그 들의 정 확한 사망원인을 알아내지 못했었다. 헌데 전옥심은 잠깐 사이에 그들의 사인을 발견했단 말인가? "정말인가요?" 이한상이 나직이 묻자 전옥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사인이 무엇인가요?" "이 시체는 막강한 열양장력에 오장이 모두 녹아 버렸소. 그래서 겉으로는 아무런 외상도 나타나 지 않은 것이오." 그의 말에 모두 대경실색을 했다. 이한상 조차도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오장이 녹아버렸다구요? 그런 무공이 어찌 있을 수 있단 말인가요?" 전옥심은 두 눈을 무심히 빛내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소저는 혹시 격산타우라는 무공수법을 알고 있소?" 이한상은 별빛같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벽공장력 중에서도 최고의 수법이라는 격산타우 말인가요?" "그렇소." 격산타우란 말 그대로 산을 격해서 소를 격살한다는 무공이었다. 이나 나무등 물체를 사이에 두고 자신의 장력을 상대에게 내치는 초절정의 수법이었다. 이 수법의 고수들은 커다란 바위나 사람을 통해 장력을 보내 맞은 편에 있는 인물들을 격살시킬 수 있다. 얼핏 보기에는 불가능한 것 같지만 이것은 내가중부법 중에서도 가장 무섭고 익히기가 힘든 수법이었다.


이한상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의 말은 알겠지만 그것과 이번 일과는 약간 상황이 다른 것 같은데요." 전옥심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소. 만약 어떤 사람이 격산타우를 입신의 경지까지 연마했다면 그 사람은 인체의 피부 상하게 하지 않고 그 않의 내장만을 파괴할 수가 있소. 흉수는 가공할 열양장력으로 이들의 내장을 녹여 버린 것이오." 이한상은 물론이고 중인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정말 그럴 수가 있을까요?" 제일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언년에게 작은 목소리로 소근거렸다. 이언년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강호에는 세인들의 상상을 불허하는 기인 이사들이 모래알처럼 많 으니 어 쩌면 그런 무공을 지닌 사람도 있을 수 있지." 그때 좌백이 얼굴을 굳히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귀하의 말은 그럴듯 하지만 귀하의 말이 옳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겠소?" 전옥심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시체의 내장을 확인해 보면 간단히 알 수 있소." 좌백의 눈에서 차가운 불길이 타올랐다. "사백의 시체를 훼손하란 말이오?" 전옥심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그 일은 그 강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이한상이 다시 나섰다. "이 일은 중대하니 좌공자께서는 잠시 양해를 해 주셔야 겠어요. 만일 그의 말이 맞다면 우리는 적어도 흉수에 대한 최초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지 않겠어요?" 황보일악과 문천옥등 군웅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좌소협. 사실을 확인해 봅시다!" 좌백은 할 수 없이 물러났다. "좋소. 허나 저 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나는 물론이고 화산파는 절대로 그를 용서하지 않 을 것이 오!" 곧 조군평의 배가 갈라졌다. 순간, "아....... 저럴 수가.......!" 중인들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는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조군평의 뱃속은 텅빈 채 홍건한 물만 고여 있는 것이다. 모든 내장이 녹아버려 그의 몸은 빈 껍질과 같았다. 권왕 황보일악은 그 광경을 보고 나직이 신음을 했다. "으음....... 설마 인체의 몸을 격해서 내장을 녹여 버릴 정도로 열양장력을 연마한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것은 그 뿐만 아니라 그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원래 열양장력이란 위력이 강한만큼 제대로 제어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격공하여 열기를 전파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헌데 흉수는 사람의 몸을 격해서 강한 열기로 내장을 녹여 버렸으니 그 무공의 무서움이야 말로 가 히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황보일악은 침음하며 전옥심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로 열양장력을 연마한 사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소? 나는 도무지 그런 인물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구료." 문득 전옥심은 눈을 빛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있소. 오직 한 사람이 있을 뿐이오." "그가 누구요?" 황보일악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급히 물었다. 중인들의 시선이 온통 전옥심의 입으로 쏠 렸다. 허나 전옥심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우울해 보이는 눈이 더욱 무심하게 반짝였을 뿐이다. 그때 좌백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귀하의 말대로 사인이 분명하게 밝혀졌지만 그렇다고 당신에 대한 혐의가 줄어든 것은 아 니오." 전옥심은 여전히 입을 다문 채 그를 바라보았다. 좌중의 분위기가 경색됨을 보고 문천옥의 차분하게 나섰다. "이제 흉수가 어떤 방법으로 살인을 했는지 알았으니 머지않아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걸세. 조대협 이 손도 써보지 못하고 당한 것으로 보아 흉수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람임에 틀 림 없네. 그러니 앞으로 더욱 조심해야 할걸세."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 자신들의 거처로 갔다. 허나 그들의 마음에는 어두운 먹구름이 가득해 가실 줄을 몰랐다. 중인들이 흩어질때 전옥심은 이한상을 조용히 불렀다. "이소저." 이한상은 고개를 들어 별빛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옥심은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나령과 악무방의 시체를 한 번 보고 싶은데 이소저의 생각은 어떻소?" 이한상은 약간 어리둥절 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전옥심은 이한상의 뒤를 따라 나령등의 시체가 누워있는 취화청의 별관으로 갔다. 좌백은 눈살을 찌푸리며 두 사람의 뒤를 따라왔다. 나령과 악무방의 시체는 취화청의 뒤에 있는 작은 별관에 안치 되어 있었다. 시체는 냄새를 없애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나무관 속에 누워 있었다. 전옥심을 따라 들어온 좌백은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 "그들도 모두 사백과 같은 상태일텐데 무엇을 더 알고 싶어서 이곳으로 온 것이오?" 전옥심은 의외로 고개를 저었다. "아닐 수도 있소." 좌백이 어리둥절해 할 때 전옥심은 철검을 빼들고 먼저 ���무방의 배를 갈라보았다. "어엇?" 좌백과 이한상의 얼굴이 흠칫 변했다. 악무방의 내장도 조군평과 마찬가지로 녹아있었다. 헌데 조군평의 배에는 맑은 물이 고여 있는데 반해 악무방의 뱃속에는 시뻘건 핏물이 가득 고여 있는 게 아닌가? "이게 어찌된 일이오?" 좌백이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하나 전옥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번에는 나령의 배를 갈 라보았다. 중인들의 표정이 더욱 멍청해졌다. 나령의 배에는 물이 들어 있지 않고 타버린 재가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이었다. 겉으로 보아 똑같은 방법으로 살해된 세 사람의 배에 각기 다른 내용물이 들어 있는 것이 다.


중인들의 마음에 새로운 의문이 더해졌다. 이한상은 티없이 맑은 얼굴을 전옥심에게 돌리며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전옥심 우울해 보이는 눈을 빛냈다.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것은 한가지 새로운 사실을 말해주고 있소." "그것이 무엇인가요?" "흉수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오."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가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흉수는......" 잠시 그녀와 전옥심의 시선이 허공에 교차되었다. 전옥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좌백은 영문을 몰라 그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허나 전옥심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그의 시선은 단지 나령과 악무방의 갈라진 배에 고정되 어 있을 뿐이었다. 조군평의 배에 가득 고여 있는 물....... 나령의 배에 들어차 있는 타버린 재....... 악무방의 뱃 속의 시뻘건 핏물.......세 사람의 피해자의 뱃속에서 나온 각기 다른 내용물은 과연 무엇을 가리 키는 것일까? 철장 동방천파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전옥심의 상대로 결정된 사람은 모두 살해당했다. 이제 자신은 내일 그와 겨루게 되었다. 과연 흉수는 자신까지 살해할 것인가? 그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상상이 현실처럼 생생하게 그려졌다. 불을 토하는 커다란 손바닥! 인체의 몸을 격해서 내장을 녹여 버리는 가공할 열양장력을 담은 손바닥이 눈앞에 사실처 럼 어른 거렸다. 그 무서운 손바닥의 주인공은 광연 누구일까? 그때 동방천파는 무득 예전에 어디에선가 들은 한 가지 말이 떠올랐다.──열양장력을 황 경에 이 르도록 연마하면 손바닥 한가운데 하얀 반점이 나타난다......! 흉수는 혹시 손바닥에 하얀 반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자 동방천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면 흉수를 발견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구주제일장에 모여든 군웅들 중에서 하얀 반점을 가진 인물을 발켜내면 되니까......그때 문 득 동 방천파의 뇌리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말일 손바닥에 하얀 반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있다면 과연 태연히 손바닥을 보이며 다니겠는가? 그가 들은 바로는 누구도 손바닥에 하얀 반점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고수는 없었다. 자신이 흉수라도 일부러 하얀 반점을 보일리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흉수는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손바닥을 가리고 다녔을 것이다. (손바닥을 가리고 다닌다......!) 동방천파는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다! 그 자도 항상 손바닥을 가리고 다녔다. 식사를 하건 대화를 하건, 무엇을 하건간에 남에게 손바닥을 보여 주는 법이 없었다. 항상 반쯤 말아 땅으로 늘어 뜨린 손! 그 손의 바닥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동방천파는 갑자기 몸을 일으켜 옷을 다시 입었다. 그는 그 손의 주인을 만나 직접 확인해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


다. 그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왕조광은 나령이 죽은 후 그를 죽인 흉수를 잡기로 굳은 맹세를 했었다. 나령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므로 자신은 당연히 그의 복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허나 그는 흉수를 잡기위해 동분서주했건만 흉수는 커녕 그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나름대로 한 가지 방법을 찾아냈다. 흉수는 오의광생의 상대자만을 전문적으로 노린다! 나령이 그렇게 당했고 악무방도 비명에 갔다. 조군평이 당한 것은 물론 흉수가 시선을 전옥심에게 집중시키기 위함이었으리라! 물론 전옥심이 범인일 가능성도 아주 컸다. 허나 누가 범인이든 다음번의 피해자는 필시 철장 동방천파일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몰래 동방천파를 지켜보기로 했다. 아무도 모르게 그의 일거일동을 지켜보고 있으면 언젠가 그를 해치러 오는 흉수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동방천파의 방을 밤새 지키고 있었다. 헌데 이경이 되었을즈음, 방문이 열리더니 동방천파가 밖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저 자가 무엇때문에 나올까?) 왕조광은 호기심 반, 의아심 반으로 그의 뒤를 몰래 따라갔다. 동방천파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을 심각하게 굳힌 채 열심히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발이 어떤 사람의 방 앞에 우뚝 멈춰섰다. (저 방은 권왕 황보일악의 방인데......) 왕조광은 눈을 빛내며 동방천파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동방천파는 황보일악의 방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질끈 깨물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왕조광은 왠지 모를 불안을 느끼며 초조한 심정으로 방문을 바라보았다. 안으로 들어간 동방천파는 웬일인지 나올줄을 몰랐다. 왕조광은 심자이 터지는 듯한 긴박감을 느끼며 손에 식은 땀을 주르르 흘렸다. 동방천파는 이미 네 번째 희생자가 된 것이 아닐까? 왕조광은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망설였다. 그때 방문이 다시 열렸다. 왕조광은 심장이 목구명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을 신기하게 여 기며 눈 에 불을 켜고 방문에서 나오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휴우......) 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가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것은안도의 한숨이었다. 방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동방천파였던 것이다. 동방천파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어갈 때보다 더욱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마음속에 큰 고민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동방천파는 고개를 찌푸리며 다시 천천히 걸어갔다. 왕조광은 그의 뒤를 따라갈까말까 하고 망설이다가 계속 따라가기로 했다. 그때 왕조광은 동방천파의 앞에 한 인물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저 사람은......?) 왕조광은 뜻밖인 듯 눈을 크게 뜨며 그 인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동방천파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걸어갔다. "그럴 리가 없을텐데...... 그렇다면 누구지......?"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다가 누군가 자신의 앞에 서 있음을 보았다. 동방천파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나타난 인물의 얼굴을 보자 그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아! 난 또 누구신가 했군요."


그 인물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동방형께서는 무슨 일을 그렇게 열심히 생각하십니까?" 동방천파는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한 가지 해결하지 못한 점이 있어서요." 인영은 천천히 다가왔다. "무슨 점인데요?" 동방천파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먹구름이 가슴속에 피어 올랐다. "개인적인 일이오." 그는 나직하게 말하며 뒤로 뒤로 반 걸음 물러났다. 그에게 다가오던 인영은 그것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동방형께선 왜 그렇게 나를 경계하시오?" 동방천파는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어찌 경계하겠소? 단지 일은 조심할 수록 좋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때 동방천파의 눈이 우연히 그 인물의 손으로 향했다. 그제야 동방천파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까지 그의 손바닥을 본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다는 것이다. (왜 이 사람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동방천파는 가슴이 덜컥함을 느끼며 그의 손바닥에 시선을 집중했다. 인영은 그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이 손박닥이 보고 싶으시오?" 동방천파는 자신의 몸이 팽팽하게 긴장됨을 느꼈다. 그는 양손에 가득 공력을 돋우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주시겠소?" 인영이 다시 웃었다. 하얀 이가 달빛을 받아 으시시한 분위기를 불러 일으켰다. "동방형께 물론 보여드릴 수 있소. 허지만 그 전에 목숨을 내 놓아야 할게요." 동방천파는 이 말을 듣자 몸을 부르르 떨며 두 손을 번개같이 휘둘렀다. "바로 너였군. 흉수가......" 그때 한 줄기 막강한 기운이 그에게 덮쳐왔다. 인영의 커다란 손이 흡사 보이지 않는 손인양 번개보다도 빨리 그의 몸을 덮어오는 것이다. 그 속도는 동방천파가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까지 인간이 이토록 불가사의하게 빨리 손을 움직일수 있다고는 절대로 믿지 않았 다. 자신의 몸이 불구덩이 속으로 빠진 듯한 착각이 드는 순간, 혼미한 정신속에서 동방천파는 그 인 영의 손바닥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커다란 그의 손 가운데에는 동전만한 하얀 반점이 나 있었다. (바로 이 자였어. 흉수는......) 동방천파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왕조광은 몸을 격하게 떨었다. (미...... 믿을 없어...... 그가 흉수였다니......) 왕조광은 무림의 초절정고수인 동방천파가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하고 그 자의 손에 쓰러 지는 광 경을 똑똑히 보았다. 그는 너무도 큰 경악과 두려움으로 전신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는 동방천파같은 고수를 어린아이마냥 간단하게 쓰러뜨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고는 믿지 않았었 다. 그 인물의 무공은 무림에 소문난 것보다 수 십배 뛰어난 것이었다. 왕조광은 담벼락에 몸을 바짝 붙인 채 전신에 식은 땀을 주르르 흘렸다. 그 인영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동방천파의 시체를 잠시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홀연 몸을 날려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휴우.....!" 왕조광은 기다란 숨을 몰아쉬며 딱딱하게 굳었던 몸을 폈다. 전신이 목욕탕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어서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 왕조광은 그가 다시 나타날까봐 두려운 듯 몸을 떨며 그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앞에 한 인물이 우뚝 서 있음을 발견했다. "으헉!" 그는 심장이 멎는 듯 놀라 인물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안도 한숨을 쉬었다. "이제보니 당신이었군요."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노인이었다.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허허...... 왜 그렇게 놀라시오?" 왕조광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으며 급히 말했다. "크....... 큰일났읍니다. 동방천파가 방금 살해되었소." 노인은 흠칫 놀랐다. "그렇소. 흉수가 누구인지는 보시었소?" 왕조광은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게도 나는 간신히 그 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소. 놀랍게도 그 자는......" 문득 정신없이 지껄이던 왕조광은 눈앞의 노인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어린 것을 보았다. 그 미소는 지금가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사악한 것이었. "다...... 당신은......" 왕조광은 왠지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끼고 더듬거렸다. 노인은 기분나쁜 미소를 지으며 주름진 손을 내밀었다. "흐흐..... 얼굴을 보았다니 할 수 없군." 그의 고목처럼 바짝 마른 손은 어느 새 푸르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그 푸르스한 손을 보자 왕조광은 문득 강호에 전설처럼 전해오는 무시무시한 한 인물의 이 름이 떠 올랐다.그는 너무도 무서워 눈을 까뒤집었다. "다...... 당신은..... 독......." 그 순간 노인의 푸른 손은 번개같이 왕조광의 목을 쥐어버렸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만큼 빠르고 간한 동작이었다. "크윽!" 왕조광은 전신이 차가운 얼음 빙굴속에 빠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의 눈은 흰창이 온통 드러날 정도로 부릅떠지더니 곧 축 늘어져 버렸다. 잠시후 가공할 일이 일어났다. 스르르......노인의 주름진 손안에 늘어져 있던 왕조광의 몸이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리는 것 이 아 닌가? 아아...... 단지 닿기만 했는데도 사람의 몸이 재로 변해 버리다니.......노인은 재로 변한 왕 조 광의 몸을 탁탁 털었다. 재가 날라가는 노인의 손가락에 하나의 검은 반지가 끼어져 있는 것이 보 였다. 흑갈반지! 흑갈반지를 낀 노인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흐흐...... 우리의 일을 아는 놈은 살려둘 수가 없지." 노인의 음성은 너무도 차가워 도저히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았 다. 노인은 재가 모두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몸을 날렸다.


곧 노인의 몸은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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