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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천추] 금시조 ♡ 작가의 말 인간이 잃어버린 것이 어디 신화뿐이랴? 은하(銀河)를 건너는 꿈도! 창공을 가르는 야망(野望)도! 눈 속에 시리던 사랑까지도! 이기(利己)와 위악(僞惡) 속에 낙원은 무너지고 태양은 빛을 잃었다. 그러나 실락원(失樂園)의 검은 재 속에서 오연히 솟아오르는 진홍의 날갯짓을 보 라. 재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불새! 금시조(金翅鳥)! ♡ 들어가면서... 야구는 무척 재미있는 경기다. 지금 여러분이 야구장에 있다고 가정하자. 시합은 흥분을 더하여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다. 이 대회는 가장 중요한 대회이며 게다가 지금은 결승시합이다. 구 회 말, 투 아웃에 점수는 일 점 차에 불과하다. 주자는 당연히 만루의 상황이며 이쯤 되면 짐작하시겠지만 볼 카운트는 투 스트라이크에 쓰리 볼이고, 투수는 상 당히 지쳤지만 대단한 실력의 에이스다. 물론 타자가 사번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쯤 되면 손에 땀을 쥐게 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이면서 상투적인 상황 설정이 모 두 끝난 셈인가? 두 팀 중 어느 편을 응원해도 좋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느 편의 긴장인들 다소(多少)가 있겠는가? 마침내 투수는 발을 치켜 든다. 그리고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은 0.4 초도 채 되지 않아 타자의 앞에 다다르고, 타자 의 배트는 번개보다 빠르게 공을 향해 휘둘러진다. 그리하여 공과 배트가 하나의 점에서 만나기 직전! 시간을 정지시켜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의 긴장과 흥분을 최고조로 올려라. 찰나보다도 짧지만 영원과도 같은 결판의 순간. 신조차 숨을 죽일 심판의 순간을 주목하도록 하라.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선수들은 피와 땀을 아끼지 않았다. 구 회 말까지의 힘들었던 시합도 오직 이 한 순간을 위해 존재했다. 현실의 시합은 일 초의 백분지 일에 불과한 시간에 공과 배트가 만나고 말지만 지 금의 시합은 다르다. 영원히 지속하는 긴장과 흥분! 원하는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 여러분은 스스로의 뜻에 따라 시간을 흐르게 만들 어도 좋다. 배트는 공과 만나고...


이어지는 환호! 안타였을까? 아니면 삼진이었나? 선택은 마음대로 해도 좋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므로. 머릿속에서 시합이 정지되었던 그 순간! 그 순간의 흥분과 스릴만이 중요한 것이다. 무협은 오로지 그 긴장의 순간만을 여러분에게 전해 주고자 한다. 하지만 긴장의 마지막을 향한 오르막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수순이리라. 추신. 인간의 능력이 극대화되면 모든 상황을 통찰하여 계획을 세우고 한치의 오차도 없 이 그 계획을 실천해 나갈 수 있는 천재가 태어나게 될까? 뛰어난 모사(謀士)가 음모를 꾸며 강호를 조종하는 것이 가능할까? 손자병법에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란 말이 나온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크게 지는 일은 없을 것이란 의미일 텐데, 이 말을 백전백승이란 말로 해석하는 현대인의 생각은 너무 위험하지 않는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결국 중요한 부분에는 하늘이 정한 우연이 필연적으로 끼 여든다는 것이 본 저자의 생각이다. 진소백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스스로의 노력이 없는 문파는 큰 위험을 당한다. 그러나 자구(自救)하는 노력을 경주한다면 누구라도 구원(救援)을 얻을 수 있는 것 이 또한 세상 아닌가? 이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여김은 나만의 환상일까? 세상을 기만(欺瞞)하는 자들의 정체가 언젠가는 밝혀지고야 마는 이 맑고 맑은 하 늘의 도리!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순간은 속일 수 있더라도 영원히 속일 수는 없 는 법이라고 어느 위인이 말을 했던가? 신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때로는 저절로 생성되고, 음양의 이치를 모르는 만물도 저절로 형성되며, 광음의 이치를 몰라도 해와 달은 여전히 밝은 법이니, 신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도(道)가 천지에는 가득하다고 일찍이 우(禹)임금이 말하셨다. 하물며 사람의 일임에랴! 선(善)은 가만히 두어도 저절로 흥(興)하며 악(惡)은 스스로 화(禍)를 부르는 법이 니, 소설의 결말을 굳이 상투적이며 의도적인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 보지 말아 주셨으면 하는 것이 본 저자의 작은 바람이다. 금시조(金翅鳥) 배상(拜上). ♡ 서장(序章). 1. 천년흥륭기(千年興隆期) 동굴도 아니고 석실은 더 더욱 아니었다. 벽은 돌로 이루어졌고, 돌의 표면은 의미 모를 붉은 글씨들로 가득하다는 것만이 겨우 보였다. 위도 어둡고 아래도 어두웠다. 상하(上下)와 사방(四方), 육방(六方)이 모두 어두웠다. 돌로 이루어진 둥근 천장이 외부의 빛을 모두 차단해 어둠만이 존재하는 천외(天 外)의 공간! 굵디굵은 다섯 개의 기둥이 중앙의 제단을 옹위(擁衛)하듯 서 있었다. 어둠은 둥근 천장의 선을 타고 기둥을 감돌아 제단을 향해 넘실대며 흘렀다.


제단(祭壇) 위! 은은한 금빛을 발하는 거울이 하나 있었다. 어두운 와중에도 그나마 사물을 분간할 수 있는 것은 금경(金鏡)이 발하는 금광 (金光) 덕이었다. 천상의 빛인 양, 보는 이의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주는 기이한 광채! 금경(金鏡) 하 나로 인해 실내의 괴괴한 어둠이 귀기로워 보이지 않고, 오히려 상서로워 보였다. 거울이 놓인 제단의 앞! 미미한 밝음이지만 자세히 본다면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음을 발견하게 되리라. 그리고, 지금 그의 머리가 서서히 들리고 있음도. 청아(淸雅)한 한 줄기 음성이 어둠을 갈랐다. "삼가 신조문의 팔 대 제자 제갈수(諸葛修)가 선조들의 덕을 빌고자 합니다." 말과 동시에 실내가 환하게 밝아졌다. 부적(符籍)! 그리고 부적이 타오르며 발하는 신화(神火)! 천지간에서 가장 순수(純粹)한 불인 삼매진화(三昧眞火)에 의해 열여덟 장의 부적 이 동시에 빛을 발했다. 빛이 일어나자 곧 실내의 정경이 확연히 드러났다. 좌우에 각각 아홉 개씩의 부적을 들고 있는 사람! 불타는 부적의 빛이 그가 음양(陰陽)의 문(紋)이 새겨진 도포(道袍)를 걸친 사십 가량의 중년인임을 알게 했다. 그의 두 팔이 좌우로 엇갈리며 부적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불타는 열여덟 개의 부적! 열여덟 개의 광구(光球)는 살아 있는 생명인 양 허공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떠가는 광구가 향하는 곳은 제단 주위에 늘어선 일곱 개의 신상들! 빛이 그 신상 들의 머리 위로 올라가더니 빙빙 돌기 시작했다. "윤광회명(輪光回命)!" 중년인의 낭랑한 외침이 일더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빙글! 일곱 신상의 눈이 살아 있는 듯 열리며, 실내의 중앙에 앉아 있는 중년인을 향해 몸을 돌렸던 것이다. 동시에, 열네 개의 눈에서 눈을 멀게 할 듯한 밝은 빛이 새어나왔다. 번쩍! 중년인은 양손을 들어 열네 줄기의 빛을 맞이했다. "신조문(神照門) 일천년의 도력(道力)을 모아 천조금경(天照金鏡)의 뜻을 묻고자 하니, 금경은 나의 물음에 부디 답을 내리시라!" 모든 빛을 모은 양, 그의 두 눈에서 열네 줄기의 무한광휘(無限光輝)가 금경을 향 해 뻗었다. 웅-! 금경은 빛을 받자 스스로 울기 시작했다. 진동(振動)하는 것이다. 중년인은 격동한 듯 금경을 보며 말했다. "이제 천년 만에 하늘의 옥추문(玉樞門)이 열리며 천상(天上)의 온갖 강한 기운들 이 동시에 땅으로 내려온다."


금경에서 나오는 빛과 진동이 점점 증폭(增幅)되었다. 우웅! "천년마다 찾아오는 천년 흥륭기(興隆期)! 천하 곳곳에 기재와 영웅들이 구름처럼 일어날 것이다." 이제 중년인의 눈에서 나가는 빛은 중지되었다. 하지만 금경은 더 이상 외부의 도움은 필요없다는 듯, 스스로 빛을 더욱 강하게 발하며 소리질렀다. 웅-우우웅! "어떤 기운이 먼저 내려올 것인가? 마기(魔氣)가 강하다면 천하는 도탄에 빠지고, 정기(正氣)가 강하다면 천하는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맞으리라." 중년인은 초조한 빛으로 금경을 지켜보았다. 금경의 색이 점점 변해 갔다. 천지의 기운(氣運)에 감응해 색을 바꾸는 것이다. 금 경은 이제 금빛이 아니었다. 은은한 혈광! 중년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혈왕혈기(血王血氣)! 겁난(劫亂)이 재현된다는 말인가?" 천조금경(天照金鏡)! 때로는 신마경(神魔鏡)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도가(道家)의 무가지보(無價之 寶)! 하늘에서 인세로 전해지는 기운에 감응(感應)해 스스로 반향(反響)한다는 보 물이었다. 그 보물이 지금 점점 강한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웅웅웅! "핏빛은 마기(魔氣)를 뜻하고, 소리의 세기는 마기의 강력함을 의미한다. 어떻게 된 걸까? 분명 점괘에서는 정기(正氣)가 마기를 이기고 승(勝)함을 보았었는데..." 신마경(神魔鏡)에서 나오는 혈광은 이제 마치 진짜처럼 선명하게 붉은빛을 띠었다. 소리는 커질 대로 커져 돌로 사방을 막은 실내의 공간을 가득 채우며 나갈 곳을 찾아 몸부림쳤다. 왕! 왕! 광-! "혈기의 힘만 강해진다. 이럴 수가! 어찌 옥추문(玉樞門)을 통해 내려오는 기운이 마기(魔氣)뿐이란 말인가?" 이제 신마경은 곧 터질 것 같았다. 울림은 실내(室內)의 곳곳을 마구 흔들고 있어 그것이 작은 거울에서 나는 소리라 곤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한데, "혈광(血光)만이 아니다!" 중년인, 제갈수의 눈에 기쁨이 어렸다. 보라! 혈광의 중앙! 두 줄기의 기운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푸르고 누런 두 줄기 빛! "청광(靑光)과 금광(金光)은 모두 정기(正氣)의 두 갈래이니, 혈광은 성하지 못하겠 구나!" 구앙! 구왕! 신마경의 진동이 더 커지며 삼 색의 광채들이 서로 엉켜 돌기 시작했다.


"삼태극(三太極)을 이루며 정립(鼎立)한다!" 제갈수의 말은 정확했다. 삼 색 광채들이 서로를 견제하며 허공을 감도니 형상이 마치 세 개의 태극(太極) 이라! 회전이 점점 빨라졌다. 종내는 세 가지의 색이 하나로 섞여 본디의 색을 알아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우웃, 신마경이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제갈수의 외침에 호응이라도 하는 듯! 꽈꽝!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신마경이 깨졌다. 세 개로 갈라져 세 방향으로 날아가는 신마경 조각들! 그 중 핏빛을 띤 하나가 제 갈수를 스치며 그의 뺨에 핏줄기를 길게 그었다. 그러나 그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사문(師門)의 무가지보(無價之寶)가 망가졌건만, 아쉬움조차 느끼지 못했다. 다만 망연해져 중얼거릴 뿐! "삼정지세(三鼎之勢)! 가장 큰 난세(亂世)가 다가오는가?" 벽에 박힌 세 개의 신마경 조각들은 서서히 빛을 잃어 갔다. 하지만 아직 미미하게 남은 거울들의 울림은 장차 다가올 난세를 비추고 있었다. 세 개의 빛! 세 갈래의 기운! 지금으로부터 약 이십여 년 전! 천도봉(天道峰) 한구석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리는 이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조문의 팔 대 문주 제갈수(諸葛修)가 겪었던 이 일을! 2. 소주의 천추학림 아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소주를 구경 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소주에서는 어느 곳이 가장 유명할까?' 멀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호기심이 동한 그는 급히 사람들 틈을 비집고 그곳으로 나아갔다. 노인 하나가 손녀로 보이는 여아를 품에 안고서 그녀와 말을 나누고 있었다. 하지 만 그 얘기는 결코 손녀와 나누는 대화가 아니었다. 주위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시 키기 위해 손녀와 대화하는 형식을 취했을 뿐!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이야기를 파 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강호인은 만설자(萬舌子)라 불렀다. 지금 사람들은 그의 입담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손녀가 물었다. "그럼, 천외성주께서 천추학림을 만들 것을 제안하셨군요?" 할아버지의 대답이다. "그렇지! 옛날 천외성을 세우신 무적대제 사무적(獅無敵)께서는 혈왕교를 물리치신 후 다시는 강호에 겁난이 없도록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씀하셨지." 혈왕교란 말이 나오자 강호인이 아닌 자들까지도 모두 두 눈에 두려움의 빛을 띠 었다. 그만큼 혈왕교란 이름은 모두의 가슴속에 공포로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여아는 그런 것도 모르는 듯 순진한 말투로 물었다. "그럼, 천추학림(千秋學林)을 통해 강호의 힘이 길러졌나요?"


"당연하지. 천추학림은 삼십 년마다 강호의 기재들을 모아서 교육시켰단다. 이미 네 번째 학림 수료자(修了者)들이 나왔지." "그 중에서 유명한 사람도 있나요?" "당연히 모두 유명하지. 예를 들자면 신승(神僧) 초의(草衣) 선사(禪師)가 계시지. 너도 그분을 잘 알 게다." "아! 저 그분 알아요. 금포승(金捕繩)을 무기로 사용하신다는 분이시죠?" 여아(女兒)뿐 아니라 모인 군중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체를 했다. 그만큼 초의 선사는 유명했다. 아는 이름이 나오자 군중들의 관심은 더욱 고조되었다. 앞 부분을 듣지 못한 아호 도 이야기에 빠져 들고 있었다. 그런데 만설자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게 아닌가? "자, 오늘은 그만 합시다. 더 듣고 싶으신 분은 내일 여기로 모이기 바라오." "내일 또 오세요. 할아버지께서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실 거예요." 여아도 깜직하게 인사를 했다. 군중 속에 섞여 있던 아호(阿昊)는 이야기가 끝이 나서 섭섭하기는 했지만, 문득 여아(女兒)가 무척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쩍 여아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는 깜짝 놀랐다. 어린 소녀의 몸이 왜 이리 차고 딱딱한 것인가? 만설자 노인이 그의 손을 제지하며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괜히 가슴이 떨려 왔다. '젠장! 내 차림이 아무리 더러워도 머리 한번 쓰다듬지 못하나, 원!' 멀어져 가는 만설자 노인과 손녀를 보며 아호는 한 가지를 위안으로 삼는 수밖에 없었다. "좋다. 어쨌든 소주(蘇州)에서 무엇이 가장 유명한지는 알았다. 이제 돌아다니며 구경해야지." 소주에서 가장 유명한 곳! 다음날 시체 하나가 으슥한 동네 구석에서 발견되었다. 얼굴이 짓이겨져 관부에서도 신원을 밝혀 내지 못했다. 3. 풍림(風林)의 변(變)! 천추학림의 후원에 위치한 풍림(風林)의 풍취는 유명했다. 하지만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가을이 깊어 단풍이 더욱 고운 가을밤! 밤이 깊어 휘영청 달 밝고... 그 달빛을 받고 있는 어느 누각에 지금 녹의(綠衣)의 청년이 홀로 앉아 술을 기울 이고 있었다. 그는 친구를 기다렸다. 이윽고 청의와 흑의를 입은 청년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들어왔다. "월야(月夜)에 독작(獨酌)이라... 흥취가 남다르구먼. 할말이 있다더니, 무엇인가?" 녹의가 고소(苦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별로 현실성이 없어 자네는 믿지 않을 ���세." 흑의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나? 어서 말해 보게." 녹의가 쓰게 웃으며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에 무엇이 쓰여 있을까? 흑의(黑衣)는 한참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대신 청의(靑 衣)가 웃었다. "하하, 자네는 어쩌다 이런 황당한 생각을 하였는가?" "...지금 학림의 힘은 너무 팽창했네. 만일 불순한 기도(企圖)를 지닌 세력이 생겨 난다면, 어쩌면..." 그제서야 흑의청년이 약간의 웃음을 다시 찾고 말했다. "좋아, 어쨌든 추측일 뿐이로군... 자, 우리 술이나 마시세." 흑의가 술을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나 이번엔 오히려 청의(靑衣)가 얼굴을 굳히며 녹의에게 물었다. "자문! 자네는 어쩔 건가? 만일 그러한 일이 실제로 생긴다면?" 흑의가 마시던 술을 내뿜고는 얼굴을 굳혔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자네..." 외치던 흑의는 청의가 손을 들어 제지하자 입을 다물었다. 녹의(綠衣)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이라면 누구라도 용서할 수 없음이 내 주관이네." 그는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큰일이네." 그랬다. 엄청난 일이었다. 이것은... 당연히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청의는 생각에 잠겼고 흑의는 초조하게 술만 마셨다. 이윽고 청의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녹의에게 조용히 물었다. "자네에게는 아들이 둘 있지 않나?" "맞네. 혼아(魂兒)와 평아(枰兒)가 있네. 평아는 아직 어린애에 불과하다네." 청의가 한숨을 내쉬었다. 흑의는 마구 술만 들이켰다. 청의는 녹의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자, 한잔하세." 녹의가 얼떨결에 술잔을 받자, 청의가 말했다. "자네 말대로 정말 큰일일세. 대책을 세워야겠네." 그는 문득 생각이 난 듯 물었다. "그런데 이 말을 다른 누구에게 했는가?" 녹의가 술을 마시고는 대답했다. "종수(鐘秀)에게... 그 외는 자네들이 처음이네." 또 다른 한 명은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서찰을 남겼으니, 말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청의가 한 잔을 더 따랐다. 녹의는 술을 마시다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흑의가 술을 더 이상 마시지 않음을 보았던 까닭이었다. 더불어 청의도 아직 한잔도 마시지 않았던 것을 주목했다. "자네들은 왜 마시지 않는가?" 흑의가 한숨을 쉬었다. "이제 그 술은 더 이상 마실 수가 없다네. 자문, 미안하이." 녹의가 술잔을 떨어뜨렸다.


내부의 힘이 한 올도 남지 않고 사라져 갔다. "이, 이것은...?" 청의는 미소 지었다. "맞아. 천하에서 가장 무거운 물이 자네 몸에 들어갔으니... 자넨 공력을 모두 상실 했네." "도, 도대체 이게 어찌 된..." 녹의는 서서히 정신을 잃었다. 그가 최후로 떠올린 감정은 분노가 아니었다. 녹의인 엽자문의 눈에는 자식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만이 떠올랐다. 다만 그리움. '혼아! 평아!' 녹의는 마침내 완전히 쓰러졌다. 청의는 미소 지었고, 흑의는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은 또다시 마실 수 있게 변했다. * * * 새로운 명문으로 발돋움하던 엽가의 가주(家主) 엽자문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 소식은 강호를 뒤흔들었다. 회풍무류검 엽자문! 그가 주검으로 발견되다니!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의 죽음 자체보다도 그의 시체가 발견된 장소였다. 기루(妓樓)!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기녀의 배 위! 엽자문은 복상사(腹上死)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천추학림은 발칵 뒤집혔다. 기녀의 증언으로 엽자문이 강제로 겁탈하려 했음이 강호에 알려졌다. 아무리 기녀 라고 하나 강제로 범하다니. 그녀의 몸은 한 곳도 성한 곳이 없어 스스로의 말을 증명해 주었으며, 사인을 조 사한 위원들도 그녀의 말이 옳다고 발표했다. 게다가 엽자문 혼자가 아니었다. 당대 천추학림의 임주인 종사원의 독자(獨子) 종수도 함께 있었다. 그들이 겁탈했던 기녀는 당대의 명기로 이름난 천상화(天上花)! 그녀의 증언은 엄 청난 반응을 불러 왔다. 임주(林主) 종사원(鐘思元)이 책임을 통감하며 물러났다. 엽자문의 부인과 두 아들 은 명예를 실추시킨 엽자문의 죄를 대신 지고 쫓겨났다. 기녀가 증언했던 또 한 명의 손님이었던 종수(鐘秀)는 실종되었다. 임주가 바뀌고 종사원의 출신 문파인 장춘곡(長春谷)이 천추학림에서 물러나 봉문 (封門)했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십팔 년 전의 일이다. 기억하라. 세 가지의 일들을. 무림의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끊이지 않고 면면히 이어지니... 봄에 씨 뿌린 곡식을 가을에 거두듯 강호에 뿌린 인연은 반드시 그 보답이 있다. 하늘은 선과 악에 대한 보답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무림천추(武林千秋)는 시작된다. ♡ 제 1 장 매화 사이로 푸른 안개 흐르다. 1 사방의 장식은 더할 나위 없이 화려했다. 방의 중앙에 놓인 탁자에는 옥(玉)으로 조각된 용(龍) 한 마리가 비상(飛翔)할 듯 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청록옥(靑綠玉)! 은은한 물빛을 띠는 극상품(極上品)의 옥이었다. 그 옥룡(玉龍)을 받치고 있는 것은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든 탁자였다. 탁자 위에 놓인 것은 옥룡뿐이 아니었다. 푸른빛으로 장정(裝幀)된 서찰 하나도 탁자 위에 있었다. 탁자 위의 옥룡을 향해 흰 손이 뻗쳐졌다. 손은 실핏줄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희고 가늘면서도, 강인해 보여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을 동시에 주었다. 느릿하게 다가온 손은 잠시 옥룡을 매만지더니 이윽고 서찰을 집어 들었다. 손의 임자는 전신에 흰 옷을 걸친 중년인. 하지만 백의가 너무 깨끗한 탓일까? 그의 흰 옷은 이상하게도 푸르러 보였다.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이들 다섯 명이 마지막으로 남은 적임자냐?" 그는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일단 그가 묻자 허공은 더 이상 허공이기를 거부했다. 곧 뿌연 수증기가 일어나더니 그것이 한군데로 모이며 점점 하나의 형상(形象)을 갖춰 나갔다. 순식간에 수증기의 밀도는 점점 짙어졌고 완전한 모양이 드러났다. 전신을 푸른 옷으로 감싼 인영! 사술(邪術)인가? 푸른 수증기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궁주(宮主)!" 그의, 아니,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맑아 듣기 좋았다. 푸른 수증기는 여인이었다. 중년인은 다시 서찰을 보았다. 그곳에는 모두 다섯 명의 이름과 그에 따른 상세(詳細)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었다. <기일(其一). 성명:쾌삼(快三). 별호:섬전도(閃電刀). 무공등급:을(乙). 성격:극도의 다혈질(多血質). 정의감:갑(甲). 가족:부모 모두 생존. 소속:무(無).


기이(其二). 성명:연옥천(燕玉天). 별호:화검(花劍). 무공등급:병(丙). 성격:충후. 약속을 목숨보다 중히 여김! 정의감:갑(甲). 가족:부인과 아들 하나. 양친 사(死)! 소속:현 취보(鷲堡)의 보주.> 그 외에도 세 명의 이름과 신상이 적혀 있었지만 중년인의 눈은 연옥천의 신상 명 세에 고정되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중년인은 여인을 보며 말했다. "가족이 있음이 걸리긴 하지만 이자가 가장 마음에 든다, 벽하(碧霞)!" 푸른 수증기, 아니, 푸른 안개라 불린 여인이 허리를 숙였다. "낙점(落點)하신 것입니까?" "그렇다. 나머지 셋은 무공 수위가 모두 갑(甲)에 해당하니 적당하지 않다." 벽하(碧霞)가 공손히 말했다. "궁주의 선택에 경의를! 벽수(碧水)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푸른 안개가 서서히 흩어졌다. 이윽고 잠시 후 안개가 모조리 사라지면서 허공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제 모습을 되 찾았다. 중년인은 다시 손을 뻗어 옥룡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옥룡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바람과 구름을 부를 듯했다. 바람, 그리고 구름. 풍운(風雲)을! * * * 낙양! 신년을 맞는 낙양의 분위기는 들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모여들어 인사를 나누며 담소했다. 즐거운 기운이 거리에 넘쳐 흘렀다. 따따닥! 무슨 소리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폭죽(爆竹)이 터지는 소리. 축제에서는 결코 폭죽이 빠지면 안 된다. 새해가 밝았 으니 사람들이 서로의 발재(發財)와 발복(發福)을 빌며 여기저기서 폭죽을 터뜨리 는 것은 당연했다. 빠질 수 없는 것은 또 있었다. 사자무(獅子舞)! 저마다 가문에서 전해지는 특이한 형태의 사자탈을 쓰고 악귀를 물리치는 춤을 춘 다. 덩실, 덩실. 흥겨운 가락을 타고 하늘에라도 오를 듯 돌아가는 춤사위! 신년(新年)을 맞는 평민 들의 즐거운 가락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축제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군무(群舞)가 한창인 거리의 오른쪽 끝에는 이층으로 솟은 객잔(客棧)이 있었다.


일층(一層)은 주점이었고, 이층(二層)은 숙박을 위한 시설이었는데, 객잔 이층의 한 창가에서 신년 축제를 내려다보는 맑은 눈이 한 쌍 보였다. "벌써 일 년이 지났구나." 눈의 주인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한숨에 담긴 것은 진한 그리움이었다. 백의를 단정히 차려입은 청년! 이 청년이 깨끗한 백의를 입은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일 년 전만 하여도 그는 폐의(弊衣)를 입었는지라 비록 낡은 삼베옷이나마 깨끗이 차려입은 것은 의외라 할 수 있었다. 청년의 뒤에는 개방( 幇) 특유의 오의(汚衣)를 걸친, 조금 어린 청년이 침구를 정 리하고 있었다. 개방 제자가 고개를 들어 백의청년을 보았다. "진 공자님! 그분... 엽혼(葉魂)이란 분을 생각하십니까요?" 백의청년, 진소백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수심(愁心)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올라 있다. "안복(雁福)! 어느새 자네가 내 마음까지 읽게 되었구먼." 안복이라 불린 개방의 백의개(白衣 )가 허리를 숙였다. "아닙니다. 다만 일 년 전쯤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어서..."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그를 본 적이 없지?" "예. 하지만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진소백은 죽은 친우를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는 비록 힘들고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참으로 의미있는 인생을 살다 갔다. 평생 동생을 위해 살았으며 죽음에 이르러서는 더없이 용감했다. 엽혼은 단 한 오라기의 빚도 세상에 남기지 않았다. 남아(男兒)의 삶으로서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다고 진소백은 항상 생각했다. 엽혼을 생각하던 진소백은 혼잣말인 양 중얼거렸다. "그의 동생은 그와 많이 닮았지. 많이 닮았어..." 안복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엽혼이란 분에게 동생이 있었습니까요?" "있네. 내 사제(師弟)가 되지!" 안복이 알았다는 듯 머리를 쳤다. "아, 그럼, 지금 공자님께서 기다리신다는 분이 바로..." 진소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는 지금 그를 기다리고 있네." "그분의 이름은 어찌 됩니까요?" 진소백이 웃었다. "내 훌륭한 사제의 이름은 바로 엽평(葉枰)이지! 지난 일 년간의 연무(鍊武)를 마 치고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다네." * * * 아무리 흥겨운 잔치라도 끼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있었다. 인간 세상엔 고민과 걱정이 항상 끊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 신명나는 놀이판 옆에서 굳은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사람에게 는 고민(苦悶)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소년! 채 열 살도 되지 않아 보였다. 해맑은 피부에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무척이나 영리해 보이는데, 지나가는 사람마 다 붙들고서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었고, 소년은 실망한 얼굴로 돌아서곤 했다. 사자무는 더욱 흥겹게 돌아가고 소년은 초조한 얼굴로 계속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 잡고 물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난 모르겠다.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데... 소년은 누구를 찾는 걸까? * * * 여인은 길을 서둘렀다. 장옷을 둘러 얼굴을 가렸는데 키는 매우 커, 누구라도 한 번은 주목할 만한 여인 이었다. 주위는 축제가 벌어져 모두가 흥에 겨워 있었지만, 여인은 관심없다는 듯 길을 서 두르고 있었다. 이윽고 여인이 사람들의 벽을 뚫고서 도착한 곳은 바로 진소백이 묵고 있는 객잔 앞!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려던 여인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급해 보이던 여인이 멈춘 이유는 별다르지 않았다. 소년! 둥근 얼굴이 어린애답지 않게 준수했지만 어딘지 어둠이 서려 있는 소년을 보았던 까닭이었다. 주위의 흥겨움에 어울리지 못하고, 버려진 아이처럼 혼자만의 어둠에 감싸여 있는 소년! 어린 나이에 무슨 근심이 그리 많은 걸까? 여인은 소년을 잠시 바라보았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도 저 소년처럼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남들이 즐거울 때 그는 더욱더 고독했다. 한창 또래와 어울릴 나이에 그러지 못하는 고독은 사람을 쉽게 기진(氣盡)시킨다. 소년도 여인을 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년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윽고 여인 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인사를 꾸벅 하지 않는가? "안녕하세요. 전 연충(燕忠)이라고 해요." 여인은 당황했다. 얼떨결에 인사를 받다니. 소년이 말을 이었다. "전 진소백이란 분을 찾고 있어요. 혹시 알고 계세요?" 여인은 놀라 물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묻는 거지?" 소년은 여인이 반문하자 풀이 죽어 대답했다. "사람들에게 물어 보려 했지만 절 상대해 주는 어른이 별로 없어서... 게다가 대답 하는 사람들 모두 모른다는 말만 해요. 하지만 전 진소백이란 분을 꼭 만나야 해 요." 여인은 그제서야 소년이 특별한 의도 없이, 그저 자신이 계속 쳐다보니까 물었던 것임을 깨달았다.


"왜 진소백... 을 만나려는 게냐?"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그런데 그분을 아세요?" 여인은 한참 동안 소년 연충을 보더니 이윽고 말했다. "알고 있다. 그런데 넌 어디서 그 이름을 들었느냐?" "저희 집에 가끔씩 드나드시는 만설자(萬舌子) 할아버지께 들었어요. 그분이 하시 는 강호 이야기 중에 진소백이란 분의 이름이 나왔어요." 연충은 기쁨에 들떠 말했다. "전 그분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 주신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여인은 연충을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물었다. "그에게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게냐?" 연충이 고개를 떨구더니 힘없이 말했다. "아버지께서 집을 떠나신 지 오래예요. 돌아오신다고 말씀하신 때가 이미 지나서... 전 아버지를 찾고자 해요." 키 큰 여인은 연충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년과 같은 나이에 가장 큰 슬픔은 가족과 떨어지게 되는 일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오늘밤 성(城)에서 오(五) 리(里) 떨어진 곳에 있는 관(關) 공(公)의 묘로 나오거 라. 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연충은 기쁨��� 겨워 수십 번 절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은인의 이름을 알고 싶어요..." 키 큰 여인이 빙긋 웃었다. "난 그냥 네 정성에 감동한 하늘이 보낸 사람이라고 해두자꾸나." 다시 수번 절하고 뛰어가는 연충의 뒷모습을 보며 여인은 나직이 말했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총명하고 근골도 좋다. 잘 다듬으면 좋은 재목이 될 아이로 구나." 2 진소백은 밖을 보았다. 시끄럽게 쏘아지던 폭죽과 사자무의 행렬이 이제 조금씩 잠잠해졌다. 소란스러움 은 나름대로 사람의 신경을 건드리지만, 소란 뒤의 고요 또한 사람의 마음에 까닭 없는 슬픔을 일으킴을 진소백은 알았다. 잔치 뒤의 공허라고나 할까? 진소백은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는 소리없이 흐르는 고요 속으로 침잠(沈潛)해 들어갔다. 이때였다. 진소백이 앉아 있는 곳 뒤쪽의 방문이 소리없이 열린 것은! 여인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키가 훤칠한 여인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손을 소리없이 내젓자 장옷이 벗겨져 바닥에 떨어졌다. 손에는 기이한 모양의 검이 들려 있었다. 믿기 힘든 것은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한 점의 소리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 이다. 여인이 날아올랐다. 더불어 여인이 든 검도 날았다. 일컬어 신검합일(身劍合一)!


검과 정기신(精氣神)이 하나가 된다는 전설의 검공 조예가 키 큰 여인의 손에서 펼쳐졌다. 검이 진소백의 뒤통수를 불과 한 치 남겨 둔 순간, 휘류류비로소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듯한 파공음(破空音)이 방을 채웠다. 그만큼 검은 빨랐다. 절명(絶命)의 위기! 진소백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소리가 들리다니, 날 믿지 못하는 게로구나." 단지 한숨을 쉬었을 뿐이지만 검의 주인은 진소백의 몸이 어느새 옆으로 한 자 반 을 미끄러져 나가 있음을 보았다. 검끝을 적당하게 피할 수 있는 거리! 검을 쥔 여인의 눈에 감탄이 떠올랐다. "과연!" 그녀는 여인답지 않은 목소리로 외치며 손목을 기이하게 변화시켜 돌렸다. 순간, 꿈틀! 검의 끝이 고무인 양 쭉 늘어나더니 살아 있는 뱀의 머리처럼 방향을 트는 것이 아닌가? 검끝은 여전히 진소백의 머리를 노리고 있었다. 이전보다 놀라운 점은 변화가 다양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다는 것이다. 진소백 또한 감탄했다. "좋구나! 드디어 대성(大成)했구나." 그는 몸을 낮춰 의자를 따라 전신을 미끄러뜨렸다. 주룩! 이것은 임기응변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매우 적절하여 여인의 검은 다시 허공만을 감았다. 하지만 여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찻!" 여인은 왼발을 축으로 하여 왼쪽으로 몸을 비틀며 뛰어올랐다. 그러자 검로(劍路) 는 그대로인데 검로를 시전하는 주체(主體)가 땅 대신 허공에 몸을 두는 형상이 되지 않는가? 휘둘러 가던 검을 가진 손이 땅 대신 허공에 있다면 검의 방향도 바뀌는 것이 당 연했다. 처음 발출될 때 뒤통수를 노렸던 검은 지금 진소백의 얼굴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 다. 진소백은 당황했다. 이런 변화는 그가 강호에 나온 이래 당한 적이 없는 빠른 것이었고, 일시지간 피 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검은 진소백의 머리를 찰거머리처럼 노렸다. 이미 두 번에 걸친 섬전(閃電) 같은 변화가 있었음에도 그 기세(氣勢)는 조금도 흔 들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무서워졌다. 검이 얼굴을 노리며 떨어지기 직전! 진소백이 몸에 힘을 주고 뒤로 쓰러졌다. 와그작! 그의 등을 받치던 의자가 그대로 부서져 나갔다.


나무의 파편(破片)이 사방으로 비산(飛散)할 때 진소백은 검과의 거리를 약간 넓힐 수 있었다. 보라! 진소백의 손이 오므라들어서 양쪽으로 쭉 뻗어 감을. 나무의 파편은 내공의 힘에 의해 매우 잘게 조각났고, 그 중 몇 개를 진소백이 손 가락으로 튕겨 내며 쳐내었다. 투투- 퉁! 거의 동시에 튕겨진 나뭇조각은 좌삼우사(左三右四), 합(合)이 일곱 개였다. 놀라운 점은 창졸간에 튕겨진 나뭇조각이 일정한 격식을 이루며 진소백의 얼굴을 향해 찔러 오는 검을 압박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검을 쥔 여인은 진정으로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오. 순식간에 칠성(七星)의 진(陣)을 형성하다니!" 여인이 어지럽게 검을 휘둘러 일곱 개의 나뭇조각을 사방으로 쳐냈다. 그가 모든 목편(木片)을 쳐내고 검을 거두었을 때는, 틈을 얻은 진소백이 이미 몸 을 바로 세운 뒤였다. 진소백은 조용히 말했다. "여인의 손속이 이리도 험악하니 시집가기 힘들겠구나!" 여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무림에는 많은 방파가 있다. 소림, 무당 등의 구파 외에도 많은 문파들이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모두가 다 그 렇지는 못했다. 강호인들이 알지도 못하는 작은 문파들도 강호 곳곳에 있었다. 취보(鷲堡) 역시 그런 군소방파 중 하나였다. 비록 무림에 속했지만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보주인 연옥천(燕玉天)은 사람됨이 너무 강직하여 친구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무공은 지극히 평범하다고 알려졌으며 장원도 그리 크지 않았다. 다만 아담한 화 원(花園)은 매우 잘 가꾸어져 있는 게 주인의 성품(性品)을 알게 했다. 연옥천이 명성을 얻고 있는 유일한 분야가 바로 수목(樹木)을 기르고 가꾸는 일이 었다. 화원 한쪽에는 인상적인 매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는 나무를 짚고 고개를 숙인 채 수심(愁心)에 잠겨 있는 여인이 있 었다. 궁장하여 단정히 머리를 올린 여인은 한눈에 보아도 명문가 출신임이 확연했다. 그녀가 바로 취보의 연(燕) 부인(婦人)이었다. "휴! 오랫동안 그이 소식이 없어 걱정인데, 이 아이는 또 어딜 가서 이리도 늦는단 말인가?" 그녀의 한숨엔 걱정과 염려가 가득했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서천(西天)이 붉은빛으로 물들며, 광구(光球)는 마지막 햇살을 힘겹게 뿜어 냈다. 지금 지고 있는 저 해는 새해의 첫 태양이었다. "동지(冬至)를 넘기시지 않으리라 하셨던 분이 새해가 되었건만 소식이 없으니... 휴!" 그녀는 취보를 떠나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 보주이자 그녀의 남편 연옥천을 걱정


했다. 연(燕) 부인(婦人)은 매화나무를 바라보았다. 연옥천이 애지중지하며 매우 아꼈던 나무! 나무를 만지자 조금 안도가 되는지, 그녀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이는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으리라. 하지만..." 연 부인은 다시 안색을 굳혔다. "새해 첫날부터 이렇게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다니, 아버지가 오래 집을 비우시니 애가 버릇이 없어졌구나. 내 오늘은 단단히 혼을 내리라." 연 부인은 말을 하며 다시 한 번 매화나무를 매만졌다. 매화(梅花)!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나무는 연옥천이 무척이나 아끼던 것이다. 매화의 그림자 가 노을을 반사하며 연 부인을 덮었다. 그 그림자는 노을에 물든 탓인지 무척이나 붉게 보였다. 마치 핏빛과도 같았다. * * * 객잔의 방에는 키 큰 여인과 진소백이 서 있었다. 여인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사형마저도 저를 놀리시니 앞으로는 이런 차림을 두 번 다시 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굵은 남자의 것이었다. 행동이나 큰 키로 보아 여인은 당연히 여인이 아니었다. 진소백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 잠시 농을 했다. 어쨌거나 네 무류검(舞流劍)은 이미 대성(大成)의 경지로구 나, 평아(枰兒)!" '평아'라고 진소백이 부를 사람은 천하에 한 명뿐이다. 그의 사제인 엽평(葉枰)! "하지만 사형의 옷깃조차 건드리지 못했으니... 그간 편히 지내셨습니까?" 엽평의 말에 진소백이 고개를 흔들었다. "어딜 가나 항상 나를 감시하는 자들이 있으니, 어찌 편하겠느냐?" 엽평이 웃었다. "자초하신 일이죠. 천하가 주목할 만한 일을 하셨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진소백은 일 년 전, 비응방의 방주 금사진이 암살당하는 사건을 의뢰받고 비응방 의 반도를 찾아 낸 적이 있었다. 겉으로 간단하게 보였던 그 일은 의외로 복잡하여 난마(亂麻)처럼 음모들이 얽혀 있었지만 진소백은 그것을 훌륭히 해결했다. 음마문(陰魔門)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사공두의 음모를 밝혀 낸 것도 진소백이었다. 또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의 후원을 받아 비응방의 장악을 획책(劃策)했던 심 화절의 음모도 분쇄했다. 강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당연했다. 그 후로 수많은 곳에서 진소백에게 어려운 일을 부탁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 다. 그러나 진소백은 그것들을 모두 거절했다. 비록 숨지는 않았지만 의뢰는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화절의 배후 세력 때 문이었다. 진소백이 그러한 세력이 있음을 천하에 알리자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힘이 정말 대단함을 의미했


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강호 활동을 중단했어도 진소백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 다. 언제 그들이 암수(暗手)를 펼칠지 모르므로. "분명 어딘가에서 천하를 장악할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것이다." 진소백의 말에 엽평은 걱정스레 대꾸했다. "하지만 사형이 일부러 그들의 표적이 된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발상이십니다." "후후, 하지만 계속 어둠 속에 숨어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그들이 드러나지 않 는다면 나라도 먼저 밝은 곳으로 나와 그들을 유인해야지." "그들은 비응방의 일에 대한 복수의 일환으로써 사형의 목숨을 노릴지도 모릅니 다. 너무 행적을 드러내는 것은..." 진소백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내가 중인들의 주목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들은 나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 다." 엽평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자 진소백이 다시 말했다. "그들은 가능한 한 자신들을 숨기려 하니 나를 노려서 세간의 주목을 받는 모험 (冒險)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일리가 있는 생각이라고 엽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사형 혼자서 밝은 곳에 노출이 되어 있으니 전 항상 죄송합니다." "그럴 것 없다. 숨어서 일을 해 나가는 너의 입장도 쉽지 않음을 안다. 게다가 내 가 의뢰를 받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자 함이니 안심하거라." 진소백이 화제를 돌렸다. "어쨌거나... 유사부님의 전갈은 무엇이냐?" 엽평이 감탄했다. "제가 유사부님의 전갈을 가져 왔음을 어찌 아셨습니까?" 진소백이 웃으며 나직이 말했다. "하하, 여인의 변장을 하고서야 겨우 나를 만날 수 있는데 특별한 전갈이 없다면 어찌 네가 이런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나를 찾았겠느냐?" 엽평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를 낮췄다. "사형에게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전음이었다. "용선풍(龍旋風)을 시작한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진소백은 침묵했다. 용선풍(龍旋風)! 무슨 뜻인가? 3 엽평이 침묵을 깼다. "이제 사형께서는 더욱 위험해지게 되었습니다." 진소백은 웃었다. "아니, 지금까지는 풍림서(風林誓)의 견제를 피하느라 조용히 숨어 살았었는데, 오 히려 잘되었다. 이제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느냐? 그건 그렇고..." 진소백이 토를 달았다. "어서 물어 보거라."


엽평이 반문했다. "무얼 말입니까?" "하하, 만일 그 전갈뿐이라면 왜 네가 직접 왔겠느냐? 나에게 개인적으로 물을 것 이 있지 않느냐?" "사형을 속이는 것보다 귀신을 속이는 게 쉽다는 말이 맞군요. 사실은..." 엽평이 말하지 않아도 진소백은 이미 그가 무엇을 물으려 하는지 알고 있었다. 엽평의 아버지 얘기. 또 그 속에 얽혔던 전대의 비사(秘事)를 알고자 함을. 진소백은 품에서 봉투를 하나 꺼냈다. 노란색의 봉투는 오래된 것인 듯, 색이 조금 바래 있었다. "나는 네 형과 약속을 했었다. 네가 스스로를 지킬 충분한 힘을 얻은 뒤 이것을 보여 주겠노라고." 엽평은 말없이 봉투를 받았다. 진소백이 말을 이었다. "너는 지금 스스로 힘을 얻었다고 자부(自負)하느냐?" 엽평은 말없이 진소백을 보았다. 진소백이 엄숙히 말했다. "약속하거라. 네가 대사부(大師父)님의 보리천승공(菩提天 功)을 모두 익히는 날까 지는 절대로 열어 보지 않겠다고." 엽평은 서찰이 든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죽고 없는 그의 형, 엽혼(葉魂)이 남긴 것! 그는 자신의 형을 아직도 똑똑 히 기억하고 있었다. 형은 오직 동생인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 엽평에게는 형의 뜻을 거역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약속하겠습니다, 사형!" 엽평은 봉투를 품에 갈무리했다. "이제 물러가겠습니다. 참, 그런데..." 포권하며 나가려던 엽평이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사형께서는 다시 강호 활동을 시작하실 거죠?" "물론이다. 이제 용선풍(龍旋風)이 불게 되었으니 내가 조금이라도 더 풍림서(風林 誓)의 주의를 끌어야 네 활동이 편해지지 않겠느냐?"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하실 것인지 정해 두신 게 있으십니까?" 진소백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다. 뭐, 의뢰가 들어오면 아무거나 맡지. 되도록 큰일로 말야. 혹시 일러줄 말 이라도 있느냐?" 엽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실은 제가 여기 들어오기 전에..." * * * 연(燕) 부인(婦人)은 나뭇가지를 통해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푸른 비단옷을 온몸에 두르고 있어 마치 물의 요정처럼 보였다. 언제 나타 난 걸까? 연 부인이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이미 건너편에 서 있었다. 게다가 자세가 너무나 자연스러워 마치 아주 오래 전부터 그곳에 계속 서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연 부인은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없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도대체 누구이며, 왜 여기에 나타난 것인가? 마지막 노을은 푸른 옷의 여


인을 비췄다. 붉은 노을에 섞인 푸른 옷은 마치 피를 묻힌 것 같다고 연 부인은 생각했다. "연 부인께서는 부군(夫君)이 많이 걱정되시나요?" 푸른 옷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부군이란 당연히 취보의 보주인 연옥천을 말함이다. 그녀가 어찌 연옥천의 일을 아는가? "당신은 누군가요?" 연 부인은 강호인이 아니었다. 한 초식의 무공도 익혔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말은 매우 담담하여 격동(激動)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것은 경험이 많은 강호인으로서도 별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푸른 옷의 여인은 감탄했다. 물론 속으로만. "전 벽하(碧霞)라고 해요. 부군(夫君)에 관해 부인께 여쭤 볼 말이 있어 왔어요." 연 부인은 긴장했다. 실종된 연옥천의 일을 물어 보려고 왔다니? 연옥천은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나갔다가 실종되었다. 그럼, 이 벽하란 여인은 남편의 실종(失踪)과 어떤 관련이 있는 걸���? "그분의 실종과 당신이 관계가 있나요?" 벽하는 한숨을 쉬었다. 이 여인은 왜 이처럼 눈치가 빠른 걸까? "휴, 그에게 책을 날라 줄 것을 부탁한 사람이 바로 저예요. 본래 이 일은 처음부 터 잘 계획된 것이라 빗나갈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어요." "빗나가다니...? 그렇다면 그이의 신변(身邊)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아직까지는요. 저희는 그의 무공이 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그를 이용하려 했어요. 그런데..." "무공이 약하다는 사실을 이용한다구요? 무슨... 설마 일을 부탁한 뒤 그분을...!" 어떤 일이든 능력이 없는 자보다 능력있는 자에게 부탁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 지만 굳이 무공이 떨어지는 사람을 원하는 경우가 있었다. 일을 끝낸 후 그 사람을 제거해야만 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연 부인의 짐작 이 맞았는가? 벽하의 어조는 모질어졌다. "그가 우리의 살수(殺手)를 피해 달아난 것이 벌써 십 일 이상이에요. 우리의 분석 에 의한 그의 무공은 병(丙)에 불과했으니, 무언가 다른 비밀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연 부인은 충격을 받았다. 살수라니? 이들은 왜 연옥천을 죽이려 하는 것인가? 게다가 벽하는 왜 연 부인 앞 에 나타났는가? 연 부인은 또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들은 왜 그분을 음해(陰害)하려는 거죠? 그분은 살아 오면서 남에게 죄를 지 은 적이 없어요." 벽하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는 아무 죄가 없으나 운이 나빴어요.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을 알았으니..." 연 부인은 생각했다. 비밀이라! 연옥천이 어떻게 상대의 비밀을 알았다는 말인가? "당신이 부탁한 것인가요? 그 일로 인해 비밀을 알게 된 건가요?" 벽하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인께서는 매우 총명하시군요." 연 부인의 어조가 높아졌다. 분노한 것이다. "부탁을 해놓고서, 그 부탁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어찌 인 간의 탈을 쓰고서." 벽하가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미 수십이 넘는 살수들을 풀어 연옥천을 쫓고 있으니 그는 이제 살 수 없어요." 부탁한 일에 관한 비밀을 지키려고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이들은 얼마나 악독한 집단인가? 연 부인은 냉소(冷笑)했다. "흥! 어디 당신들 마음대로 될 것 같은가요?" 벽하가 눈을 빛냈다. 연 부인의 자신만만한 태도.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부인께서는 전혀 겁을 내지 않는군요. 믿는 구석이 있으 신가요?" 연 부인이 입을 다물었다. 이제서야 벽하가 무엇 때문에 자신 앞에 나타났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벽하(碧霞) 는 보다 자세히 물었다. "연옥천 보주는 벌써 열흘 이상을 도망다니고 있어요. 우리 편의 손실이 이만저만 이 아니에요. 한데, 중요한 것은 평소의 연(燕) 보주(堡主)의 능력으로는 이런 일이 전혀 불가능(不可能)하다는 점이에요." 벽하는 눈을 빛내며 연 부인을 보았다. "자, 말해 주세요. 연 보주에게 어떤 비밀이 있나요? 그의 진정한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죠?" 연 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타는 듯한 눈으로 벽하를 노려보았을 뿐이다. 벽하는 무공도 익히지 않은 여인의 눈에 이처럼 강한 의지가 나타날 수 있음을 오 늘 처음으로 알았다. 그녀는 평소 많은 사람을 다루고 겪어 보았다. 그리고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의 의지는 아무도 꺾을 수 없음도 알았다. 벽하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항상 침착한 손길로 옥룡(玉龍)을 쓰다듬는 중년인! 그녀의 궁주(宮主)를. -이처럼 중요한 일에 실수(失手)가 있다니... 한 올의 증거도 남기지 말고 인멸(湮 滅)하라. 결코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안 될 것이다. '인멸하라!'는 말의 뜻을 벽하가 모를 리 없었다. 원래 취보(鷲堡)의 식구들은 연옥천의 제거가 끝나는 즉시 살인멸구(殺人滅口)될 예정이었다. 어떤 비밀 때문인지는 모르나 연옥천의 능력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바람에 취보 가 여태까지 무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순서가 뒤바뀌면 또 어떠랴? 어차피 연옥천은 제거될 것이다. 벽하는 궁주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한 올의 실수라도 있다면 너 또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벽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궁주가 비록 자신을 총애하고 있으나 그는 한번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었다. 벽하는 고개를 들어 연 부인을 보았다.


총명한 여인이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몸으로 결코 쉽지 않은 기개(氣槪)를 보여 주는 것으로 보아 용기 또한 있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어. 당신들의 운이 나빴음을 탓하시오.' 벽하의 몸이 흔들렸다. 스스스기이한 독문(獨門)의 신법이 펼쳐지며 벽하의 몸이 안개인 양 흐릿해졌다. 푸른 안개! 벽하의 몸이 서서히 흩어지며 흘렀다. 흐르는 방향은 매화나무를 넘어 연 부인이 있는 곳! 연 부인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 벽하가 자신에게 다가오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 그녀는 손을 뻗어 남편 이 그처럼 애지중지하던 매화나무를 꼭 잡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안개는 연 부인을 노리며 흘렀고 연 부인은 이것을 피하지 못했다. 그녀는 무공을 몰랐다. 전혀 몰랐다. 화끈한 통증! 멀어지는 그녀의 의식 아득히 좀 전에 보았던 노을이 떠올랐다. 오늘따라 유난히 붉게 보였던 노을! 그 핏빛은 이 일을 예고하는 색이었을까? 연충이 일찍 돌아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떠올리며 연 부인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충아! 내 아들. 어미는 널 다시는 볼 수가 없구나.' ♡ 제 2 장 신(神)이 추천한 사람. 1 신을 모시는 사당(祠堂)이라도 밤이 되어 어두워지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신조차 어쩔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 있는가? 사방이 어둠에 잠기자 멀리서 들짐승들의 울음 소리가 들려 와 공포를 자아냈다. 왜 사람은 어둠을 무서워하는가? 혹자가 말하기로는 어둠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라는데, 그 말이 맞는 것일까? 관제묘(關帝廟)도 밤이 되니 무서웠다. 복마대제(伏魔大帝) 관운장이 귀졸을 물리치니, 잡귀(雜鬼)가 얼씬거리지도 못할 장소이건만, 어두워지자 무서워짐은 어쩔 수 없었다. 마(魔)를 물리친다는 신상(神像)들이 오히려 더 무서워 보이는 것은 인간이면 누구 나 마음속에 죄의 근원이 있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관제묘 구석에 앉아 있는 소년은 무척 용감하다 할 수 있었 다. 동그란 얼굴에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소년! 연충(燕忠)이었다. 어린 소년이 밤중에 관제묘에 남아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키가 크고 장옷을 입은 여인의 말! 진소백을 만나려면... 연충은 그 말은 믿고 관제묘로 온 것이다. 그는 진소백을 기다리고 있었다. 휘잉! 겨울바람은 매서웠다. 이제 겨우 정월인 것이다.


덜컹, 덜컹! 추위보다도 더 매서운 것은 이런 소리들이었다. 누군가가 금세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 듯한 소리. 바람은 계속 문을 두드렸고, 연충은 몸을 더욱 움츠렸다. 추위에 무서움이 더해지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때였다. 끼익-! 누군가 문을 여는 듯한 소리! 연충은 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환청이었을까?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고, 바람만 무심히 불어댔다. 관제묘 안은 더욱 어두워졌다. 점점 무서움이 더해 가서 소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소년 연충은 무언가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덜컹! 덜컹! 문과 창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와는 달랐다. 분명히 아주 가까운 데서 들리는 소리! 나무와 나무가 흔들리며 마주치는 소리였 다. 연충(燕忠)은 사방을 둘러보며 소리가 나는 곳을 찾다가 그만 소리를 지를 뻔했다. 끼익! 덜컹, 덜컹! 보라! 관운장을 모셔 놓은 신상이 흔들리는 것을. 신상은 귀신이라도 들린 듯 마구 흔들렸다. 연충은 비로소 지금이 자시(子時) 무렵임을 알았다. 언젠가 옆집의 할멈에게서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밤이 깊으면 신들이 모두 신상(神像)에 내려와서 우리들이 차려 드린 음식을 드 신답니다. 할멈은 늙어서 주름투성이인 입을 몹시도 빨리 놀리며 말했었다. -신들은 자신이 내려오는 모습을 본 인간이 있으면 결코 살려 두시질 않지요. 할멈은 그렇게 말하며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연충은 할멈 얼굴의 주름이 이상한 모양으로 접히는 것을 보며 웃었다. 낮에 는 무서움이 아니라 웃음이 어린 연충을 쉽게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연충은 웃지 못했다. 행여 자신이 소리를 지를까 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숨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밤 에 신상으로 내려오는 신들! 결코 들켜서는 안 된다. 신은 자신의 모습을 본 인간은 살려 두지 않는다. 끼이잉! 신(神)이 완전히 깃들였는가? 신상의 흔들림이 멈추었다. 그리고 서서히 돌기 시작하는데, 아마도 주위를 둘러보 는 듯했다. 더불어 허공을 울리는 음성! "인간의 냄새가 나다니! 누가 감히 나의 영역을 침범했는가?" 소리는 어디에서도 났고, 어디에서도 나지 않았다. 도대체 발원지가 어딘지를 알 수 없는 소리! 공간(空間) 곳곳을 울리는 소리가 연충의 몸을 진동시키며 들려 왔 다. 신은 배로 말을 한다던데, 정말 그런 걸까? 연충은 가슴을 졸이며 몸을 수그렸다. -들키면 살려 두질 않습니다요.


할멈의 소리가 또다시 귓가에 울렸다. 신상은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연충을 보지는 못한 것 같았 다. "이상하군! 내가 냄새를 잘못 맡았는가?" 신상이 중얼거리며 회전(回轉)을 멈추자 연충을 속으로 긴 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표시! 한데, 삐꺽! 긴장이 풀린 탓일까? 연충이 기대어 있던 낡은 나무벽이 우는 소리를 냈다. 소년의 무게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낡은 모양이다. 그다지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사위가 조용한 밤이었다. 게다가 긴장된 상 태! 연충의 귀에는 천둥 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신상은 소리가 난 곳으로 몸을 돌렸다. 아니, 몸 전체가 빙그르르 돌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누가 감히 숨어 있느냐?" 우렁찬 소리가 울리며 거대한 신상이 허공을 날아오는 모습을 연충은 똑똑히 보았 다. 거대한 나무 덩어리가 날아오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 앞의 소년은 얼마나 놀라 겠는가! 쿠웅! 신상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자신의 앞에 내려앉자 연충은 놀라 심장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신상은 몸을 좌우로 약간 흔들었다. 연충의 존재를 알아본 것이다. "어린애가 아니냐? 감히 어린것이 숨어서 나를 지켜보다니." 음성이 사당 안을 온통 흔들며 울렸다. 불을 뿜는 듯 붉은 신상의 두 눈을 보자 연충은 입을 열기조차 어려웠다. 기절하 지 않는 것만 해도 어린아이로서 대단한 용기라 할 것이다. "저, 전 연충이라고 해요." 시간이 지나 가까스로 입을 연 것만 해도 연충이 충분히 용기있는 소년임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 신상은 노했다. 아니, 노했나 보다. 어조가 높아졌으며 좌우로 흔들리는 몸의 움직임도 격렬해진 것을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감히 내가 내려오는 모습을 훔쳐보다니, 네가 살기가 싫은 게로구나!" 연충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전 다만 누군가를 기다리느라고..." "밤중에 사람을 기다린다니? 거짓말하지 말거라." "정말이에요, 복마대제(伏魔大帝)님! 전 실종되신 아버지를 찾아 주실 분을 기다리 고 있어요." "아버지를...?" 신상의 음성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아버지를 찾는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린 걸까? "자세히 말해 보아라." 연충은 신상의 어조가 누그러지자 조금 안심하며 얼른 설명을 시작했다. "아버지께서는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나가셨어요. 책 몇 권만 전해 주면 된다시며, 지난 동지(冬至)까지는 돌아오시겠다고 했었는데... 아직 돌아오시지 않아 어머니께


서 무척 걱정하고 계세요." 연충의 말을 들은 신상은 묵묵히 소년의 미간(眉間)을 바라보았다. 아니, 얼굴이 연충을 향했다. 미미하게 어린 검은 기운! '현무살(玄武殺)이다. 가까운 친족(親族)에게 곧 위해(危害)가 가해지겠구나.' 그는 연충의 자질이 뛰어남과 더불어 미간에 살기가 끼여 가까운 일가가 해를 입 을 상(相)임을 알아보았다. 관상(觀相)을 보는 신상! 정말 신이 하강한 것일까? "네 가족은 모두 몇이냐?"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저뿐이에요. 그리고 집에서 일하는 늙은 할멈 하나는 옆 동네에 살아요." 연충은 이제 떨지 않았다. 신상의 어조에서 노했던 기색이 사라졌음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까닭이다. 신상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물었다. 그사이 생각에 잠겼었나 보다. "넌 아버지 찾는 일에 도움을 줄 사람을 찾고 있느냐?" 연충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요. 대제님, 도와 주세요!" 그는 신상이 진짜 복마대제라 믿고 있었다. 복마대제가 연충에게 말했다. 그의 어조는 이제 더 이상 무섭지 않고 어딘가 성스 러운 구석이 있다고 연충은 느꼈다. "좋다. 악(惡)을 제거(除去)하고, 선(善)을 권장(勸奬)하며, 어려운 처지의 약자를 도움이 신의 본분(本分)이니, 내 너를 도울 사람을 내려보내마." 말을 마친 복마대제의 신상이 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마치 무게가 없는 양! 허공을 날아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면서, 복마대제가 사당 안을 울리며 말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거라, 아이야! 너를 도울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음성은 지극히 장중하여 흡사 진짜 복마대제가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음성의 주인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진짜 복마대제는 들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감히 신상에 손대어서.' 이런 소리를 들으면 진짜 신은 화를 낼까? 아닐 것이다. 신은 인간의 자질구레한 일들 곳곳에 스며 있기는 하되, 참견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의 마음만 스스로 움직이며 천도(天道)에 따른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있 을 뿐이다. 어쨌든, 끼잉! 관제묘의 문이 소리를 지르며 열렸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별빛만이 가득했다. 초하루의 밤이니 하늘에는 달도 없어 별빛은 더욱 밝아 보였다. 어두울수록 별빛 은 밝아지나 보다. 바람은 차게 불어대는데... 연충은 한 청년이 바닥에 앉아 바람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별을 보고 있음을 발견 했다. 청년은 백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매우 얇아 보였으나 전혀 추위를 느끼지 않는 듯


했다. 연충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서 있은 지 얼마 후, 청년은 고개를 돌려 연충을 보았다. 그는 손을 내밀어 연충을 불렀다. "이리 오너라! 네가 연���이냐?" 연충은 그때서야 이 사람이 바로 복마대제께서 보내신 사람임을 확신할 수 있었 다. 그는 급히 달려가 꾸벅 절했다. "예, 전 연충이라고 해요. 그런데 대협의 성함(姓銜)은 어찌 되시나요?" 청년은 껄껄 웃었다. 연충이 존칭을 쓰는 모습이 어린애답지 않아서 어색했던 것 이다. 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하, 나는 진소백이라고 한다. 너는 나를 진(鎭) 숙부(叔父)라고 부르거라. 하하 하!" 청년은 진소백이었다. 일람무의(一覽無疑) 진소백! 2 "저곳이에요." 연충은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그의 손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취보(鷲堡)였 다. 시각은 이미 사경에 접어들었고 밤의 한기(寒氣)는 절정(絶頂)에 달했다. 무척 추울 터인데도 연충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어린아이치고 무척 성숙(成熟)한 태도였다. 교육을 잘 받고 자란 아이일 것이다. 훌륭한 부모 밑에서 훌륭한 아이가 나온다. 연충을 교육시킨 부모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연 부인을 보자 진소백은 곧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매우 현숙(賢淑)하여 연충에 대한 집안 교육을 훌륭하게 시켰을 것이다. 연충과 진소백이 취보로 들어가자 내실(內室)에서 나온 그녀는 무척 놀란 듯했다. 진소백이 같이 들어왔기 때문일까? "진소백이라고 합니다. 실례가 된다면 사과드립니다." 진소백이 포권할 때, 연충은 옆에서 설명했다. "복마대제께서 아버지를 찾는 일을 돕도록 보내 주신 분이세요. 전 진 숙부라 부 르기로 했어요." 연 부인은 무척 놀라워했다. 놀라는 태도를 숨기려 했지만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 을 진소백은 느낄 수 있었다. 이미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나 보다. 연 부인은 복마대제가 보낸 사람이란 말은 물론 믿지 않고 흘려 들었다. 하지만 진소백이라는 이름은 흘려 듣지 않았다. "높으신 이름 많이 들었습니다. 행여 충아(忠兒)가 무례를 범하지는 않았는지요?" "아닙니다, 전혀. 아주 똑똑한 아이더군요." 연 부인은 연충을 힐끔 보더니 진소백을 안으로 안내했다. "밤바람이 찹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대청(大廳)의 장식은 소박하면서도 단아(端雅)하여 장식한 사람의 성품(性品)을 그


대로 말해 주고 있었다. 특히 이름 모를 꽃들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활짝 피어 있어 특이했다. 방에는 화초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단지 한 개의 등잔만 피워 놓아 조금 어두웠다. 진소백은 제철이 아닌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불빛을 조절해 주어야 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화초를 기르시는 데 특별한 조예가 있으시군요?" 진소백의 말에 연 부인은 미소했다. "바깥분께서 그런 방면에 재주가 뛰어나시답니다."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연 보주께서는 어떤 꽃을 가장 좋아하십니까?" "그건..." 연 부인이 잠시 망설일 때, 연충이 끼여들었다. "매화예요. 바깥에 있는 매화나무를 아버지는 가장 아끼셔요."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옥천은 꽃을 좋아하니 심성이 매우 온유(溫柔)할 것이다. 또 그 중에서 매화를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보아 필시 굳센 의지의 소유자이리라. 온유하면서도 굳센 사람! 진소백은 굳이 보지 않아도 연옥천의 사람됨을 알 것 같았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그만 주무시지요. 내일부터 일을 시작하시는 게 나을 것입 니다." 연 부인은 진소백에게 잠자리를 권했다. 자신의 일이 아무리 다급하더라도 손님 대접(待接)에는 충분히 신경을 쓴다는 마음가짐인가? "충아! 어서 손님을 침실로 안내해 드리거라." 그녀의 말이 옳다고 진소백은 생각했다. 지금은 매우 늦었으니, 자고 일어나서 새로운 날부터 시작함이 좋을 것이다. 진소백은 대청에서 물러나와 연충을 따라 침실로 향했다. 그를 안내하는 연충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휴! 진 숙부가 계셔서 살았어요. 만일 저 혼자 이렇게 늦게 들어왔다면 단단히 혼 이 났을 거예요." 연충은 혀를 내밀며 말하다가 배를 움켜쥐었다. 꾸루룩! 배에서 나는 소리는 연충의 속이 비어 있음을 알려 주었다. "이런, 너 아직도 밥을 먹지 못했느냐?" 진소백이 묻자 연충이 헤헤거리며 대답했다. "예, 관제묘에서 저녁나절부터 기다렸거든요. 사실 오늘은 밥을 세끼 모두 꼬박 굶 었어요." 밥까지 굶으며 무서움을 참고 관제묘에서 진소백을 기다렸던 이유는 아버지를 찾 겠다는 일념(一念)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소백은 귀신장난을 쳤던 것이 후회되었다. 그는 연충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소년은 영리할 뿐 아니라 아주 착했다. 또한 효성도 지극했다. 왜 하늘은 착한 사람에게 때로는 견디기 힘든 불행을 내리는 것일까? 왜 이처럼 착한 소년의 친족이 불행한 일을 당해야만 하는 걸까?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당하다니... 불쌍한 녀석!'


진소백은 연충의 머리를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나랑 약속을 하자. 부엌에 가서 밥을 먹고 자기로. 알겠느냐? 어머니는 피곤하실 것이니 깨우지 않도록 해라." 연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지 않아도 혼자서 밥을 찾아 먹을 생각이었어요. 늦게 들어와 밥까지 차 려 달라고 할 염치는 없어요." 진소백은 미소했다. 어쩌면 억지로 짓는 웃음처럼 어색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래, 그렇게 하거라. 항상 웃음을 잃지 말고." 연충은 왜 진소백이 이런 말을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진 숙부!" * * *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앞으로 내달리는 자신의 다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둠은 쫓는 자와 쫓기는 자, 누구에게 유리할까? 당연히 쫓기는 자에게 유리할 것이다. 어둠은 종적(踪跡)을 숨겨 줄 것이므로. 그러나, 지금 쫓기고 있는 연옥천(燕玉天)의 사정은 달랐다. 그에게 있어 어둠은 조금도 유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불리하기조차 했다. 어둠을 뚫고 들려 오는 늑대의 울부짖음! 하지만 늑대는 아니었다. 혹독한 훈련을 통해 원래의 야수성(野獸性)을 되찾은 개 의 울음 소리. 암흑견(暗黑犬)이 짖고 있었다. 전신을 칠흑같이 검은 털로 뒤덮은 개들은 쉬지 않고 그의 행적을 추적해 오고 있 었다. 개는 냄새를 잘 맡는다. 그리고 암흑견들의 후각(嗅覺)은 특히 발달(發達)했다. 태 어난 순간부터 어둠 속에 가둔 채로 창으로 그들을 찌른다. 개들이 자라면서 공격의 강도를 점차 높여 가면 후각과 청각이 더욱 발달하게 된 다. 감각만으로 창을 피하지 못하는 개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이윽고 다 자랄 때까지 어둠에 익숙해진 개들은 태양빛을 싫어해, 낮에는 활동하 지 못하는 약점이 생긴다. 그렇지만 밤이 되면 이야기는 다르다. 암흑견은 밤이 되면 어린 시절부터 받았던 교육으로 인해 극도로 발달된 후각과 청각을 이용해 빠르게 반응한다. 컹! 컹! 개의 울음은 늑대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똑같았다. 하지만 암흑견의 능력은 늑대보다 뛰어났다. 적어도 밤에는. 연옥천은 암흑견이 또다시 자신의 종적을 찾았음을 깨달았다. 쫓기기 시작한 지 벌써 열흘이나 지났다. 낮에는 복면인들에게 쫓기고, 밤만 되면 어디선가 암흑견이 풀려나 또다시 개들에 게 쫓겼다. 사람이 잠을 자지 않을 수 있는 한계는 며칠일까? 연옥천은 몽롱해지려는 정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했다.


살아야 했다. 그는 자신의 현숙한 부인과 영리한 아들 충아를 생각했다. '살아야 한다.' 연옥천이 두 발에 다시 힘을 주입하며 산길을 질주해 갔다. 날카로운 호각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그를 따라왔다. 몇 명이나 될지 모르는 사람들. 추격과 도주는 또다시 계속되며 열하루를 넘기고 있었다. * * * 누구라도 잠자리가 바뀌면 쉽게 잠들지 못한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탓 일 게다. 하지만 진소백에게 이 말은 예외인 듯했다. 드르렁, 쿨! 머리가 침상에 닿자마자 진소백은 곯아떨어졌으며 몸조차 한 번 뒤척이지 않았다. 그의 코고는 소리가 한창 높아질 때, 방문 앞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무십니까? 진 공자, 주무십니까?" 나직한 목소리의 주인은 연 부인이었다. 손에는 소반(小盤)을 들었고, 소반 위에는 물과 술, 그리고 약간의 음식이 놓여 있 었다.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자 연 부인은 방문을 살며시 열었다. "주무시나!" 소리없이 방문이 열리며 연 부인이 들어왔다. 남자가 자고 있는 방에 여자가 혼자 들어가다니! 이 무슨 해괴한 짓인가? 연 부인 은 소반을 침실 왼편에 놓인 탁자 위에 놓았다. 그때까지도 진소백은 계속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쿨! 드릉! 연 부인은 잠든 진소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이 술병과 잔을 잡았다. 쪼르륵! 술병을 잡아 기울이자 술잔에 하늘을 닮은 푸른 술이 가득 찼다. 반쯤 따른 연 부 인은 손을 멈추었다. 연 부인은 차츰 진소백에게 다가갔다. 손에는 술로 가득 찬 술잔이 하나 들려 있었다. 맑은 술은 아무런 빛깔이 없었다. 굳이 말한다면 은은한 푸르름이 감돈다고 할까? 거의 물과 구별이 되지 않았다. 연 부인은 천천히 진소백의 입에 잔을 갖다 대었다. 잠자는 사람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려는 것인가? 진소백의 붉은 입술로 다가가는 잔에 담긴 술은 가을 하늘을 보는 듯한 푸른빛이 었다. 술잔의 푸른빛을 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빛은 진소백의 입술과 묘하게 대조가 되었다. 입 앞까지 바싹 다가간 술잔의 술이 진소백이 내뿜는 콧김에 의해 흔들리며 물결 을 일으켰다. * * * 연충(燕忠)은 소리를 죽여 부엌으로 갔다. 사실 배가 너무 고파 저녁부터 서 있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이제 진 숙부가 도와 주기로 했으니 연충은 아버지를 곧 찾을 수 있을 것임을 확


신했다. 만설자(萬舌子) 노인에게서도 들었고, 복마대제께서도 보장하셨으니 진 숙부는 꼭 아버지를 찾아 주실 것이다. "정말 잘되었다." 마음이 안정되자 배는 더욱 고팠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것을 연충은 잘 알고 있었다. 피곤하신 몸을 또 움직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조심해야지. 조심!' 혼자 중얼거리던 연충은 급히 몸을 숙였다. 어머니가 소반을 들고서 어디론가 급히 가는 모습을 본 것이다. 소반 위에 놓인 것이 술병 하나와 물병임을 알아보는 것은 그로서도 가능했다. "이상하네." 연충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지 않아 평소 취보에는 술이 없었다. 그런데 이 밤에 술이 어디서 났는가? 또 어머니는 술을 들고서 어디로 가는 것인 가? 연충은 궁금했지만 따라가는 것은 일단 보류했다. 너무나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일단 배부터 채우고 생각하자.' 연충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나직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어머니는 부엌에 없으므로 조심할 필요도 없었다. 부엌에는 음식이 많았다. 연충이 가장 좋아하는 완자전도 만들어져 있었다. 비록 식긴 했지만 틀림없이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 놓았던 거라고 연충은 생각했다. 그런데 왜 자신에게 음식을 주지 않았던 것일까? '내가 너무 늦어 어머니께서 무척 화가 나셨나 보다.' 3 술잔은 마침내 입술에 닿았다. 술잔을 든 연 부인의 얼굴에는 표독한 표정이 어렸다. '흥! 이것을 마신다면 천하에 다시없는 자라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진소백, 아 무리 너라도 말이다.' 그녀의 내면(內面)을 읽어 본 사람은 놀라고 말리라. 현숙한 연 부인이 어찌 이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술잔이 닿았던 입술이 번쩍 열렸다. 하지만 술을 마시기 위함은 아니었다. "에취!" 진소백이 심한 재채기를 하며 눈을 번쩍 떴다. 바람에 밀린 술이 술잔에서 빠져 나와 연 부인을 덮쳤다. '앗!' 놀란 연 부인, 아니, 가짜 연 부인은 속으로만 다급성을 지르며 급히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연 부인은 무공을 몰랐지만 가짜는 무공을 알았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재채기 로 떠올라 자신을 덮치는 술을 한 방울도 맞지 않고 피할 수 있을까? 스륵!


그녀의 몸이 옆으로 세 자 가량 미끄러져 술을 피했고, 술 방울은 헛되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제서야 무슨 기척을 느꼈는지 진소백이 눈을 번쩍 떴다. "부인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비록 일어났다고는 하나 눈에는 잠기운이 완연했다. 몸은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신도 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연 부인은 몸을 돌려 급히 술잔을 감추었다. "밤에 목이 마르실까 봐 물이랑 술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배고프시다면 약간의 다 과(茶菓)도 있으니 드십시오." "술이란 말입니까?" 진소백의 눈에서 졸음기가 완전히 가셨다. 그는 벌떡 일어나 탁자 앞에 앉았다. "어서 오시지요. 마침 한잔 생각나던 참이었는데." 연 부인은 당황했다. 외간남자가 술좌석을 권하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떻게 같이 앉을 수 있습니까?" "자, 괜찮습니다. 어서 앉으시지요. 세상에 혼자 술 마시는 것보다 적적한 것이 없 습니다." 병 두 개, 잔도 두 개, 마주앉은 사람도 둘이었다. 병 하나에는 술이 들었고 나머지 하나에는 물이 들어 있었다. "하하, 주전자에 담지 않고 이처럼 병에 담으니 특이합니다." 진소백이 웃으며 술과 물을 동시에 따랐다. 잔 또한 모양이 같았다. 흘러내리는 술의 빛깔과 물의 빛깔마저 같으니 어느것이 물이고 어느것이 술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다만 가짜는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이 물잔이라는 것만을 기억했다. 자신이 가져 온 물은 먹을 수 있지만 술은 먹을 수 없는 것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양이 워낙 비슷하니 착각할지도 모른다. 술과 물을 구별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가짜는 손을 뻗어 잔을 잡았다. 툭! 비록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연 부인의 손톱이 잡은 잔 가장자리가 작게 떨어져 나갔다. 흙을 수천 도의 불속에 구워서 만들어지는 잔이었다. 결코 힘없는 여인의 손톱에 떨어져 나갈 수는 없는 일이다. '됐다. 표시를 했으니 헷갈리지 않을 것이다.' 가짜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어쨌든 표시를 했으니 되었다. 그녀는 비로소 안심하고 진소백을 마주보며 웃을 수 있었다. "어서 드시지요. 전 술을 못 하니 물만 마시겠습니다." 진소백도 웃으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술잔의 술은 술이 아니었다. 마실 수 없는 것이며 또한 마셔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진소백의 손이 술잔을 잡아 입술에 걸었다. '어서 마셔라. 어서!' 가짜는 손에 땀이 뱀을 느꼈다. 긴장된 순간! 애초의 목표를 진소백 스스로 이루어 주려는 순간이었다.


이때였다. 방의 문이 왈칵 열렸다. 들어온 아이는 연충이었으며, 그의 눈에는 의혹이 잔뜩 묻어 있었다. "어머니, 주무시지 않으셨어요?" 그는 부엌에서 속을 채우고 돌아오다 진소백이 묵고 있는 손님방에서 대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연 부인은 당황했다. 진소백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술은 마시지 못하게 되었음을 한탄하는 것일까? 어 쨌든 그는 반색하며 연충을 맞았다. "아, 어서 오너라. 너도 잠이 오지 않는 게냐?" 진소백이 연충에게 말을 하느라 술잔을 내려놓자 연 부인은 초조했다. '이런 성공하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저놈 때문에...' 부모가 자식에게 이와 같은 말을 할 리가 없었다. 하여튼 그녀가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연충을 노려보았다면 아마 연충의 등짝에 구멍이 났으리라. 진소백은 연충에게 의자를 권하며 말했다. "자, 앉거라, 충아! 넌 술을 마시지 못하니 물을 마시도록 하려무나." 진소백은 연충에게 물을 따랐다. 이로써 잔은 모두 셋이 되었다. 모양이 같고 내용물도 같아 보이는 세 개의 잔! 하 지만 그 중 하나의 내용물은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가짜 연 부인은 알고 있었 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손톱에 의해 이가 빠진 잔을 주시(注視)했다. 물이 담긴 자신의 잔! 손톱으로 한 귀퉁이를 떼어 내 표시(表示)해 둔 자신의 잔 을. 진소백은 웃으며 연충을 보았다. "충아! 넌 세상에서 가장 빠른 손이 무엇인지 혹시 들어 보았느냐?"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연충은 고개를 저었다. 진소백은 고개를 돌려 연 부인에게 물었다. "부인께서는 혹시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연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무공에 대해서는 문외한인지라..."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연충을 보며 말했다. "석년에 뇌문(雷門)의 일맥에서 분뢰수(奔雷手)란 절학이 출현하여 그 빠르기가 천 하에 당할 자가 없던 시절이 있었지." 연충이 호기심이 이는 듯 눈을 빛냈다. "뇌전을 쪼갠다는 뜻이니 굉장히 빨랐겠군요." "그렇지. 분뢰수를 처음 창시했던 분은 뇌공(雷公)이란 분이셨지. 그분께서 어느 날 음마문(陰魔門)이란 마도 문파의 괴수를 상대하게 되었는데..." 진소백은 목이 타는 듯 술잔을 들었다. 하지만... "그래서요? 어서 얘기해 주세요." 연충의 재촉에 마시지도 못하고 술잔을 다시 내려놓은 진소백은 말을 이었다. "그때 강호인들은 분뢰수의 위력을 처음 보았지. 음마문의 마마좌검식(魔魔左劍式) 역시 굉장한 쾌검식이었는데... 뇌공은 분뢰수를 시전하여 적이 사 초의 검식을 휘 두르는 동안 무려 십이 초를 연이어 공격해 내었단다." 연충은 흥분했다. "음마문이라면 저도 들은 적이 있어요. 진 숙부가 일 년 전 상대하셨던 사공두란 자가 음마문의 후손이라면서요?"


진소백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맞다. 뇌공에 의해 후손이 끊겼던 음마문을 부활시키려 했던 자였지!" "그런 자도 진 숙부를 당하지 못했으니 진 숙부의 무공은 정말 굉장하겠군요?" 진소백은 담담히 웃으며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쨌든 강호인 중에서는 뇌공께서 창안하신 분뢰수의 가공할 속도 앞에 감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단다. 분뢰수는 그 위력 또한 매우 뛰어났지." 옆에서 얘기를 듣던 연 부인이 끼여들었다. "그럼, 분뢰수가 가장 빠른 무공인가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연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이세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니..." 진소백이 소리내어 웃었다. "분뢰수의 속도에 조금도 못지않은 무학이 그 후로 하나 더 강호에 출현했답니다." 연충은 강호 이야기를 듣자 신이 났다. 그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게 뭐죠? 어서 말해 주세요, 진 숙부!" 연충의 말에는 어리광이 섞여 있었는지라 진소백은 미소 짓는 한편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공공문(空空門)이란 문파에 관해 들어 보았느냐?" 연 부인이 끼여들었다. "혹시 신투(神偸)들의 문파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맞습니다. 부인께서도 아시는군요." "하지만 그들이 분뢰수에 버금가는 무학을 지니고 있다는 말은 좀... 믿기가 어렵 군요." 진소백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들의 공공신수(空空神手)는 비단 빠르기가 분뢰수에 조금도 못지않을 뿐 만 아니라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분뢰수를 능가하는 이점도 있습니다." 연충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떤 점이 분뢰수보다 좋은가요, 진 숙부?" "제어(制御) 능력이지. 분뢰수는 빠른 데다가 가공할 속도가 덧붙여져 마음대로 제 어할 수가 없었단다. 하지만 공공신수는 달랐다. 엄청난 속도에다가 힘을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지." 연충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전 잘 모르겠어요.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진소백은 미소했다. 그는 젓가락 한 쌍을 들어 연충에게 주었다. "이것을 잡거라." 그리고 머리카락 하나를 빼내 공중으로 날렸다. 머리카락은 허공 중에서 흔들리며 내려왔다. "자, 이제 젓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잡아 보거라." "좋아요. 뭐, 쉬울 것 같은데요." 연충은 젓가락을 놀려 머리카락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짐작만큼 쉽지는 않았다. 머리카락은 너무 가벼운 탓에 젓가락이 일으키는 미세한 공기의 흐름에도 반응하 며 젓가락의 공격을 피했다.


진소백이 연충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말했다. "쉽지 않지? 이유를 알겠느냐?" 연충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답했다. "글쎄요. 제가 젓가락을 가져 갈 때마다 움직이는 머리카락을 보니 아마 젓가락이 일으킨 바람에 날리는 탓이 아닐까요?" "정확이 맞추었다. 다시 말하자면 네 힘이 머리카락의 무게에 비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연충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힘의 세기가 아니군요. 빠르면서도 적당한 힘의 사용이 중 요하다는 거죠?" "그렇다. 정말 가르칠 만한 아이구나. 자, 다시 한 번 해보겠느냐?" 연충은 이번에는 머리카락을 잡을 수 있었다. 그는 머리카락이 내려오길 기다려 젓가락을 오히려 천천히 움직였는데도 성공할 수 있었다. "잘했다." "헤헤, 진 숙부의 가르침대로 했을 뿐인데요, 뭘!" 진소백은 칭찬에 기분이 좋아져 헤헤거리는 연충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 다. "혈왕교(血王敎)의 난이 있었을 때 분뢰수는 그다지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혈왕교에는 혈왕표(血王飄)란 경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무 공은 몸을 극단적으로 가볍게 하여 미세한 공기의 흐름에 따라 떠다니는 신법(身 法)이었다. 분뢰수는 혈왕교의 일반 고수들에게는 먹혔지만 혈왕표를 극성으로 익 힌 자들에게는 타격을 줄 수 없었지." 연충이 눈을 빛냈다. "알겠어요. 분뢰수의 힘이 너무 강했군요. 그들은 좀 전에 머리카락이 제 젓가락을 피한 것과 같은 원리로 분뢰수를 피했구요." "그렇다. 분뢰수가 날아올 때마다 혈왕교의 고수들은 저절로 피할 수가 있었지. 너 무 강한 것도 때때로 약함만 못한 경우가 있는 법이다." 다시 연 부인이 물었다. "그럼, 공공신수는 빠른 속도에도 불구하고 그런 약점이 없나요?" 진소백은 그녀를 깊은 눈으로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속도와 힘의 배분(配分)을 절묘(絶妙)하게 조화시킨 무공이죠." 연충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 무공이라면 한 번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진소백이 빙긋이 웃었다. "너는 볼 수 있단다." ♡ 제 3 장 주검 위에 매화 피니, 태원으로 돌아가는구나. 1 사방에 가득한 것은 개 짖는 소리와 날카로운 호각 소리뿐이었다. 아니, 하나 더! 어둠 또한 어디를 가더라도 깔려 있었다. 호각 소리의 고음(高音)이 쫓기는 자를 얼마나 초조하게 만드는지는 도망자의 입 장이 되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연옥천 또한 예전에는 그러한 느낌을 알지 못했다. 그는 조금의 죄도 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목숨을 노리는 자들을 어찌 당할 것인가? 그리하 여 비로소 지금에 이르러서야 호각 소리가 불러일으키는 초조함을 알 수 있게 되 었다. '좋지 않은 곳으로 들어왔다.' 사방을 훑어보던 연옥천은 신음했다. 지세(地勢)가 급격히 약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필히 천험의 절벽(絶壁)과 만나게 되리라. 쫓기는 자가 무슨 여가(餘暇)가 있어 원하는 길로 들어설 수 있을까마는, 절벽에 면(面)한다면 더 이상 추적자들을 피할 도리가 없지 않는가? '다른 도주로는 없을까?'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고, 잠시 망설인 사이에 뒤에서 쫓아 오는 암흑견(暗黑犬)의 짖는 소리만 가까워졌을 뿐이다. 연옥천은 이를 악물고 몸을 날렸다. '도리가 없다. 가는 데까지 가보는 수밖에.' 그가 몸을 날리고 얼마 되지 않아, 컹! 컹! 컹! 암흑견 세 마리가 어둠을 가르며 달려왔다. 어둠 속에서 암흑견의 후각을 피할 수 있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지는 천라지망을 뚫고 열흘 이상이나 암흑견을 따돌릴 수 있는 자는 더 더욱 드물었다. 취보의 보주 연옥천! 강호에 알려진 그의 능력은 결코 이 정도가 아니었다. 숨겨진 연옥천의 비밀은 도대체 무엇일까? 연옥천은 땅을 박찼다. 멀지 않은 곳까지 암흑견과 추적자들이 쫓아왔음을 아는 그는 매우 초조했다. 그 와중에도 발에 밟히는 땅의 감촉이 뭔가 다름을 느낀 것은 행운이었다. 연옥천은 몸을 돌려 세웠다. 아마 겨울 동안 굶어 죽은 족제비의 시체인 모양이었다. 주위의 풀은 겨울 동안 마를 대로 말라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겨울엔 유난히 눈이 적었다.' 연옥천은 지체없이 족제비의 마른 시체와 풀부스러기를 품에 담았다. 어디에 쓰려 는 것일까? 그가 몸을 날려 사라짐과 거의 동시에 암흑견이 나타났다. 이제 추적자들은 지척(咫尺)으로 다가왔다. 숲이 끝나 가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절벽이 나타났다. 연옥천은 몸을 멈추었다. 절벽 멀리로 낙양(洛陽)의 모습이 보였다. 열흘간이나 쫓기는 와중에 악착같이 달려서 겨우 취보(鷲堡)가 있는 곳까지 돌아 왔는데 여기서 잡힌다는 말인가? 그는 몸을 돌렸다. 앞은 깎아지른 절벽이니 더 갈 곳이 없었다. 뒤에는 숲! 지금 그 숲속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서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악착같이 추격해 오던 추적자들이 이처럼 여유를 부리는 것은 오직 하나를 의미했다. 연옥천이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다는 것! 컹컹 짖어대는 암흑견 세 마리는 앞에 있었다. 푸른 옷을 입은 추적자들이 십여 명 있었고 그 수는 점점 늘어났다. 사람과 개들이 만든 벽의 틈이 갈라지며 한 여인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청의를 걸친 여인! 걷는 모습이 흡사 안개가 흐르는 듯 유유롭다. 벽하(碧霞)! 연옥천은 그녀를 전에 본 적이 있었다. 자신에게 서책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던 사내! 그 사내 곁에 서 있던 여인이 이 여자임을 연옥천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벽하! 당신이 여기 있다는 것은 나를 쫓는 자들의 배후가 역시 그라는 뜻이로군." 벽하는 절벽 너머를 바라보더니 나직이 한숨쉬었다. "낙양이 저기 보이건만 잡히게 되다니... 하지만 취보에 남은 식구들을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당신은 곧 만나게 될 거예요." 연옥천의 눈이 흔들렸다. 벽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곧 만나게 되다니? 자신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설마! "무슨 말을 하는 게냐? 너희는..." 벽하가 그의 말을 잘랐다. "연 부인을 이미 만났어요. 무척이나 현숙한 분이더군요." 연옥천은 노갈했다. 부탁을 들어준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이다. 그런 여인이 취보에 서 아내를 만났으니... 결과가 어떠한지는 뻔하지 않은가! "네가... 감히 그녀를 어떻게 하였다면 난... 결코 용서 않겠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서." 벽하는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말했다. "미안해요. 당신은 잘못이 없는 사람인데... 하지만 궁(宮)의 명은 지엄(至嚴)하니, 당신은 운이 없다고 여기세요." 연옥천의 몸은 상처가 없는 곳이 없었다. 전신이 피투성이라 서 있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때문에 지금 그의 입에서 큰 외침이 나오는 것은 순전히 의지의 힘이었다. "대답해라. 그녀를 어찌한 것이냐?" 벽하는 낮은 어조로 다시 한 번 말했다. "당신은 곧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연옥천은 몸을 비틀거렸다. 또다시 이런 말이라니. 그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분노와 허탈 때문이었다. "설마, 설마 충아(忠兒)에게도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지? 그 아이는 아직 어린아 이에 불과한데..." "휴! 제가 아끼는 수하 하나를 남겨 두고 왔으니 아마 지금쯤은..." 벽하의 말투는 진심으로 미안한 것 같기도 했고, 또 한편으론 자신의 일처리를 은 근히 자랑하는 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매우 무섭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녀 배후에 있는 '그'는 더욱 무서울 것이다. 연옥천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적들의 잔인함은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무공을 모르는 연충이 어찌 당해 내겠는 가? 지금 시각은 묘시! 이제 조금만 있으면 하늘이 밝아 오리라. 하지만 연옥천의 마음은 영원히 밝아지지 못할 것이다. * * * 연충은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아버지, 어머니에게 닥친 변(變)을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의 고난(苦難)도 조금 짐작만 할 뿐, 지금 당장 연충이 가장 관심을 갖고 있 는 것은 진소백이 말했던 공공신수(空空神手)였다. "제가 어떻게 공공신수를 볼 수 있나요?" 진소백의 대답은 간단했다. "내가 보여 주기 때문이지." "정말 진 숙부께서 공공신수를 익혔나요?" "공공문의 진전(眞專)은 세월이 흐르면서 개방의 태상장로였던 철혈개(鐵血 )란 분 에게 들어갔단다. 난 운이 좋아 그분에게 공공신수를 배울 수 있었단다." 연 부인이 감탄하여 말했다. "그렇더라도 공공신수가 그토록 빠른 무공이라면 익히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요?" "맞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전 운이 좋았습니다. 덕분에 제 손은 무척 빨라졌죠." 연충은 궁금증을 참을 수 없는지 채근했다. "어서 보여 주세요. 어서요." "그래, 잘 보거라." 진소백은 자신의 잔과 연충의 잔을 잡더니, 손을 빨리 움직여 두 잔을 서로 섞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처음엔 천천히 섞어서 손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더니, 휘웅! 조금 지나자 두 잔을 잡고 있는 손이 허공 중에서 띠로 변한 듯 뿌연 그림자로 화 (化)했다. "와, 어느것이 어느건지 전혀 구별할 수가 없어���." 연충은 진심으로 감탄했고, 가짜 연 부인도 어느 정도 감탄했다. 그녀도 넋을 잃고 진소백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띠로 변했던 진소백의 두 손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지금 보니 당연 히 두 개의 떨어진 손인데 어떻게 좀 전에는 하나의 막(幕)으로 보였는지 신기했 다. "자, 어느것이 네 잔인지 알겠느냐?" 구별이 안 되도록 섞었던 잔들이니 구별이 될 리가 없었다. 원래 모양조차 같았던 잔들이었고, 들어 있는 내용물도 보기에는 똑같아 보였다. 연충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하나를 골랐다. "이거 같아요!" 진소백을 위해 따른 술은 물과 똑같은 형태이니 내용물로 구별이 될 리도 없었다. 그는 그냥 아무거나 손 닿는 대로 골랐던 것이다. 진소백이 껄껄 웃었다. "하하, 마셔 보면 알겠지. 만일 잘못 골랐다면 술을 고른 것이니, 벌주(罰酒)를 마 시는 셈이 되겠구나."


연충은 단숨에 잔을 들이켰다.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던 그는 곧 명랑하게 웃었다. "하하, 이것은 물이에요. 제가 맞게 골랐군요." 연 부인은, 아니, 가짜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녀로서는 누가 술을 마시건 상관이 없었으나 기왕이면 진소백이 마셨으면 했다. 진소백이 술을 섞을 때 쏟지 않을까 염려도 했으나 그토록 빨리 술잔을 섞고서도 한 방울도 쏟지 않고 잔을 다시 내려놓자 그녀는 감탄했다. 공공신수가 천하제일쾌란 이름을 듣는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님도 느꼈다. 게다가 연충이 운 좋게도 물이 든 잔을 골라 마시자, 그녀는 더욱 안심했다. 이제 진소백에게 술을 권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진 공자께서 졌군요. 그 벌주는 진 공자께서 마셔야 하겠어요." 진소백은 쓰게 웃었다. 그는 자신의 잔을 아직 오른손으로 잡고 있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혼자서 술 마시는 건 취미없는데. 연 부인께서 같이 마셔 주시 겠습니까?" "하지만 전 술을..." "그럼, 앞에 놓인 것이라도 함께 드시지요." 물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가짜는 이빨이 빠진 자신의 잔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좋아요. 그럼!" "자, 한번에 마시는 겁니다." 진소백이 호기있게 말했다. 가짜 연 부인도 잔을 들었다. 그녀는 진소백이 술잔을 비우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단숨에 잔을 비웠다. 내심으로 매우 통쾌해 하면서. 그녀는 이 진소백이란 청년이 상대하기가 매우 어려운 자라고 들었는데, 오늘 자 신이 이처럼 쉽게 제압하는 것이다. 연충이 진소백에게 술병을 들고 와서 물었다. "한잔 더 하시겠어요, 진 숙부?" 진소백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난 그만 되었다. 옆의 병에 든 물이나 한잔 다오." "왜요? 지금도 술을 마셨잖아요?" "아니, 아니란다. 내가 마신 건 그냥..." 진소백은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손을 뻗어 연충의 수혈을 짚었다. 연충이 잠에 빠지자 그는 가짜 연 부인을 돌아보았다. 가짜 연 부인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진소백이 담담하게 한 가지를 물어 왔기 때문이 다. "당신은 벌써 쓰러질 때가 되었거늘 왜 아직 멀쩡한 게요?" 그녀가 자신이 마신 것이 물이 아니고 술임을 깨닫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술! 게다가 이 술은 보통 술이 아니었다. 중수(重水)를 섞은 술! 마신 자는 그 누구라도 오장육부가 성하지 못하는 술이었다. 그녀는 강한 불신(不信)이 담긴 표정으로 자신이 내려놓은 잔을 한번 더 확인했다. 이가 빠진, 자신의 술잔이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진소백이 나직이 한숨쉬었다. "누군가에게 움직임이 보인다면 공공신수를 천하제일쾌(天下第一快)의 반열에 올 린 사람들이 스스로의 안목을 비웃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잡고 있던 잔에서 오른손을 떼었다. 가짜가 표시한 것과 똑같은 위치에서 이가 빠져 있는 잔의 가장자리가 드러났다. 가짜 연 부인은 피가 싸늘해짐을 느꼈다. 연충의 술잔과 섞을 때도 대단한 속도라 생각했었는데 언제 자신의 술잔과도 교환 했다는 말인가? 온몸의 힘이 사라짐을 느끼면서 그녀는 천천히 옆으로 쓰러졌다. 정신은 있는데 내공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공공신수! 빠른 손은 빠른 눈에서 나온다. 진소백의 눈은 가짜가 손톱으로 잔에 표시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연충의 잔과 자신의 잔을 섞는 척하면서 사실은 자신의 잔과 가짜 연 부인 의 잔을 바꿨던 것이다. 당연히 손톱으로 표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연충은 아직도 그녀가 가짜임을 몰랐다. 힘없이 어머니가 쓰러진다면 연충은 달려들리라. 진소백이 연충을 잠재운 것은 그런 이유였다. 원래 진소백은 혼자서 그녀를 제압 하려 했으나 연충이 오는 바람에 일이 늦어졌다. 연충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가짜 또한 눈치를 못 채도록 일을 처리하기 위해 이 처럼 복잡한 일을 행했던 것이다. 진소백은 가짜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문질렀다. 역용(易容)이 지워지면서 눈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간 표독해 보이는 여인의 본모 습이 나타났다. "밤늦게 아들이 돌아왔는데도 걱정도 않고 집안에 있었고, 저녁을 먹었는지조차 물어 보지 않았다. 남편이 가장 좋아한 화초(花草)조차 모르는 데다가 손으로 술잔 을 잡아뜯는 무공마저 지니고 있다니... 네 주인은 어떻게 해서 너처럼 멍청한 수 하를 뒤에 남겨 둔 것이냐?" 여인이 고함을 질렀다. "네놈에게 당하다니... 흥, 하지만 너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여인이 고함을 질러 가며 위협했으나 진소백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여인을 바라 보았다. "난 그저 연 부인에게 아무런 일도 없었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넌 지상 에서 지옥이 뭔지를 알게 되리라." 여인은 진소백의 눈빛을 보았다. 투명하여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는 눈! 어쩌면 이것이 그의 진짜 눈인지도 모른다. 서서히 그녀의 전신으로 공포가 스며들었다. 2 조금만 있으면 날이 밝을 것이다. 연옥천은 새로운 태양을 볼 수 있을까?


그는 새해의 태양조차 보지 못했다. 숲속에 숨어 도망 다니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고초를 겪으면서도 이곳으로 달려온 까닭은 자신의 부인과 아들을 보기 위함 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이미 죽었다고 벽하(碧霞)란 여인은 말한다. 이제 무엇을 위해서 더 살 것인가? 연옥천은 자신을 추적해 온 벽하 일행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참을 수 없는 적개심 이 서리서리 피어올랐다. 어떻게 그냥 죽을 수 있을까? 만일 앞으로 자신이 살아 간다면 그건 복수심 때문일 것이라고 연옥천은 생각했 다. 문득 그는 사부의 얼굴을 떠올렸다. 매화나무 아래! 항상 온화한 얼굴로 화초를 가꾸셨던 자신의 사부! 연옥천이 어릴 때, 어느 날 사 부가 난초의 뿌리를 보여 주셨다. 둥근 원구 모양의 물체! 어떻게 저런 뿌리에서 난초의 우아한 자태가 발현될 수 있는지 정말 신기했다. 사부는 웃으며 말했었다. "난초의 잎은 부드럽기 그지없지만 이 뿌리는 굳세며 튼튼하다. 만일 난초가 뿌리 의 형태로 겨울의 고난을 이겨 내지 않는다면 어찌 세상의 난초들이 살아남겠느 냐? 넌 왜 난초의 뿌리가, 아니, 세상 모든 식물의 씨앗이 그토록 튼튼할 수 있는 지 아느냐?" 연옥천은 그때 어렸으니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한참 생각한 후 그는 겨우 대답했었다. "스스로에게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사부이신 매화노인(梅花老人)이 껄껄 웃었다. "허허, 비슷하구나. 항상 스스로의 내면을 보는 자만이 더할 나위 없는 강함을 얻 을 것이다. 허허허!" 그렇게 사부는 웃으셨다. 컹! 컹! 연옥천의 회상은 암흑견이 짖는 소리로 인해 깨어졌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오너라, 이놈들!" 처음 연옥천을 추격할 때, 암흑견은 열 마리였다. 연옥천은 지난 열흘간 쫓기면서 일곱 마리의 암흑견을 죽였다. 동료를 죽인 것을 아는지 남은 세 마리가 살기를 드러내며 으르릉 댔다. 하지만 공격은 연옥천이 먼저 했다. 그는 허리에 맨 검을 빼내어 개를 잡고 있는 자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너무 지친 탓인가? 속도는 있었지만 힘이 전혀 없었다. "흥, 자신의 처지도 모르고 공격하다니." 주위의 청의인들이 냉혹히 외치며 공격을 위해 날아올랐다. 하지만 공격당한, 개를 잡고 있던 세 명은 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옥천의 검끝에서 피어난 세 송이의 검화(劍花)가 가슴을 노리고 날아왔으므로. 어쨌든 이 정도면 열흘간의 모진 추격을 당한 사람의 대항이라고는 믿기 힘든 위


세(威勢)였다. 하지만, 연옥천의 이 공격은 그 자신에게 전혀 이롭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암흑견을 쥐고 있는 자들을 공격했으니 개들이 어찌 되겠는가? 손을 놓자 개들은 풀려났다. 풀려난 암흑견들은 맹렬히 짖으며 연옥천을 물어뜯으려고 달려들었다. 흔히 인간은 개를 가까이 두고 기르는 탓에 개의 무서움을 간과(看過)하기 쉽다. 그러나 굳이 분류하자면 개는 맹수(猛獸)에 들어간다. 같은 몸집이라면 개를 당할 수 있는 짐승은 그리 많지 않다. 작은 아이만한 몸집의 개가 마음먹고 달려든다면 무사할 수 있는 성인(成人)이 그 리 많지 않음이 진실이었다. 두세 마리의 늑대조차도 한 마리의 훈련받은 사냥개를 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 다. 어쨌든 지금 연옥천에게 달려드는 것은 개뿐만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분분히 뛰어오른 청의괴한들도 그에게 검과 도를 휘둘러 오고 있었다. 연옥천은 물러났다. 지쳤음에도 물러나는 속도만은 매우 빨라 적들의 공격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뒤에 절벽이 있다는 사실이 그의 불행(不幸)이었다. 툭! 그가 절벽 끝에서 가까스로 멈추면서 굴린 돌멩이가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졌 다. 달려들던 적들도 멈추었다. 섣불리 연옥천에게 덤볐다가 같이 절벽아래로 동반할 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하지만 개들에게는 이런 지능이 없었다. 컹! 절벽의 위험성을 알지 못하는 암흑견 세 마리는 어둠을 가르며 뛰어왔다. 개의 뒤 쪽으로 무기를 든 청의인들이 대기했고, 연옥천은 절벽에 가로막혀 물러날 수 없 었다. 그는 급히 검을 던져 내었다. 휘류류-! 검은 허공을 선회(旋回)하며 날아갔지만 암흑견을 맞추지는 못했다. 대신, 챙! 채 챙! 뒤쪽의 청의인들을 잠시 주춤거리도록 하는 일은 겨우 성공했다. 연옥천의 원래 의도는 이것이었나? 암흑견은 다시 도약(跳躍)했다. 단숨에 연옥천의 목을 노릴 수 있는 거리로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연옥천의 수중에는 이제 검이 없었다. 대항할 무기를 던져 버린 연옥천은 급히 품을 더듬었다. 그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었다. * * * 연충은 잠이 들었다. 진소백은 가능하면 연충(燕忠)이 강호의 험한 모습을 보지 않기를 바랐다. 연충의 미간에 서렸던 현무살(玄武殺)! 부모 중 하나를 잃을 상이었으니 자신이 고문할 여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연 부 인의 죽음이 될 수도 있었다. 어린아이가 어찌 감당할 것인가?


"넌 중수(重水)로 인해 내장이 잠식당하고 있을 터이니 긴말은 하지 않겠다. 연 부 인은 어디 있느냐?" "흥, 만나고 싶다면 저 술을 마시거라." 술은 중수였다. 마시면 당연히 죽는다. 죽어야 만날 수 있다면 뜻은 하나였다. 연 부인이 이미 죽었다는 것이다. 진소백은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연충은 착한 소년인데, 왜 그에게 이런 시련이 닥치는 것일까? 하늘의 마음 씀씀 이는 때때로 왜 이처럼 잔인한 것일까? 고개를 다시 들 때, 진소백의 눈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너를 부리는 자가 누구냐?" "흥! 누가 나를 부린다는 거냐? 모든 일은 나 혼자 했다." "넌 제법 충성심이 있다고 자부하는구나." 진소백이 담담히 말했다. 아무런 감정이 깃들이지 않은 어조(語調)가 때때로 더 무서울 때가 있는 법이었다. 진소백이 손을 들어 여인의 일곱 개 대혈을 짚었다. 여인의 눈이 흔들렸다. 전신에 힘이 돌아옴을 느꼈던 것이다. "어떻게 한 거냐? 중수에 당하면 반드시 죽는 법인데..." 여인이 진소백의 물음에 당당히 맞섰던 것은 자신이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다면 왜 상대의 질문에 대답해 변절(變節)하겠는가? 중수에 당해 죽는 순간의 고통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기에 그 녀는 진소백을 화나게 해서 빨리 죽기를 바랐다. 하지만 믿기 힘든 일이다. 진소백이 대혈을 몇 개 짚자 사라지던 힘이 다시 살아나다니! 설마 이자가 중수로 인한 내상(內傷)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인가? 하지만 그런 능력을 지닌 사람은 세 상에 몇 없었다. 진소백은 절대 그 정도의 의술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 진소백은 차갑게 말했다. "중수에 당하면 극도의 고통 속에서 죽게 된다. 중수가 내장을 모두 녹여 버리기 때문이다. 난 네가 나를 격노(激怒)하게 하여 빨리 죽고자 함을 안다." 여인의 눈이 흔들림을 보며 진소백이 말을 이었다. "본래 중수에 당하면 세 시진을 넘기기 힘들다. 하나... 너는 불문에 칠일속명결(七 日續命訣)이란 비결이 있음을 아느냐?" 여인은 눈을 빛냈다. 불문에 그런 신묘한 술법이 있음을 그녀도 들은 적이 있었다. 혈도를 연결해 짚음으로써 칠 일간은 무조건 상처가 덧나거나 진행되지 않도록 한 다는 묘방(妙方)이었다. "그것을... 익혔느냐?"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사부가 신승(神僧) 초의 선사이심을 알 게 아니냐?" 여인을 물론 알고 있었다. 강호의 많은 사람들, 일 년 전 있었던 비응방(飛鷹幇)의 일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여인은 혹시나 하는 기대로 눈을 빛냈다. "그럼, 나를 살려 줄 것이냐?" 진소백은 고개를 흔들었다. "중수로 인한 내상을 치료할 수는 없다." "그, 그럼?" "칠일속명결은 네 생명을 칠 일간 연장시킨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느냐?" 여인은 진소백의 의도를 알고 몸을 떨었다. 생명이 연장된다는 말은 고통이 연장된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중수로 인해 죽어 가는 사람 몇몇을 보았다. 모두 그녀의 손에 의해 중수를 마셨다. 그 고통! 그 괴로움! 그녀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진소백이 지상의 지옥(地獄)을 느끼게 해주겠다는 말의 뜻을 비로소 알았다. 그녀는 애원하듯 말했다. "제발 나를 죽여라. 제발!" 가슴 아래가 끊어질 듯 아파 왔다. 중수로 인한 고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소백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여인은 그때서야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무슨 짓이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자���이 이 남자에게 맞서려 했 던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고통의 강도가 점점 강해졌다. "으아악!" 이런 상태로 칠 일이라니! 끔찍했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으로 여인은 울부짖기 시작했다. 단지 눈썹 몇 번 깜빡일 시간의 고통으로 목이 쉬어 버렸다. 여인은 가까스로 입을 열어 외쳤다. "아악! 무엇이나 물어라, 무엇이나! 이 고통만 끝낼 수 있다면... 아흑!" 진소백은 아무리 여인이 고통을 호소해도 손을 쓰지 않았다. 그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가장 화가 났을 때 진소백이 짓는 표정! 진소백이 비로소 여인의 혈도를 또다시 짚었을 때엔 그녀의 눈에서는 빛이 사라져 있었다. 극도의 고통으로 정신의 힘이 극도로 피폐(疲弊)해진 것이다. 3 여인의 고통은 진소백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그는 여자를 잘 돌봐 주지만 모든 여자를 돌봐 주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살인을 일삼는 여인, 무공이 없는 여자와 어린아이를 죽이려 한 여인의 사정 을 돌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 진소백의 생각이었다. 진소백은 천천히 물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진소백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인이 대답했다. "난 초초(草草)라고... 아악!"


진소백이 초초의 목 부분을 몇 번 두드렸다. 초초는 고통의 강도가 훨씬 줄어듦을 느꼈다. 초초는 비로소 행복이란 게 고통이 사라진 상태임을 알았다. "고통을 느끼는 신경을 잠시 마비(痲痺)시켰다. 솔직한 대답에 대한 상(償)이다." 진소백의 말은 지금의 초초에게는 하늘에서 들리는 듯했다. 자신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고 그 고통을 제거할 수도 있는 절대 권력을 지닌 사 람! "네게 이런 일을 명령한 자는 누구냐?" "벽하(碧霞)! 궁의 모든 명령은 그녀가 집행해요." "궁? 무슨 궁이냐?" "몰라요. 그냥 궁(宮)이라는 이름을 쓴다는 것밖에는..." "궁주는 누구냐? 중수(重水)는 궁의 물건인가?" "궁주도 몰라요! 중수는 벽하가 가져다가 저에게...!" 초초는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진소백이 혈도를 다시 풀었던 것이다. 잠시 사그라 졌던 고통이 다시금 밀려왔다. 진소백의 눈빛이 강해졌다. "궁의 이름도, 게다가 궁주 또한 모르다니. 아직도 고통이 부족한가?" 초초의 눈에는 공포가 서렸다. "아니, 난, 난 정말 몰라요. 정말! 아악! 제발." 진소백은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느꼈다. 자신이 속한 문파의 이름도 모르고 다만 궁(宮)이란 이름을 쓴다는 것만 알다니? 또 궁주의 이름마저 모르다니? 하지만 가능한 일일 수도 있었다. 비밀리에 음모를 꾀하는 자들은 궁도(宮徒)에게도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경우가 많았다. 진소백은 몇 가지를 더 물었지만 초초가 아는 것이 별로 없음을 확인했을 뿐이다. 벽하라는 초초의 상관을 만날 방법을 물은 뒤, 최후로 진소백이 물은 것은 연 부 인의 행방이었다. 아니, 연 부인 시체의 행방이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 * * 암흑견이 달려들었다. 어느 놈이 먼저인지 모를 정도로 거의 똑같이 달려드는 세 마리의 개! 연옥천은 급히 품에서 바짝 마른 족제비의 시체와 마른풀 부스러기를 꺼냈다. 마른 시체는 습기가 없이 건조된다면 불에 매우 잘 탄다. 연옥천이 최후의 힘을 다해 일으킨 삼매진화는 마른풀에 옮겨 붙더니 곧 족제비의 시체로 옮겨 갔다. 그 직전 암흑견 세 마리가 연옥천의 전신을 물었다. 더불어, "찻!" 연옥천은 땅을 박차고 뒤로 날았다. 그의 목과 허리와 엉덩이를 각각 물었던 암흑견 세 마리도 덩달아 날았다. 연옥천의 손에 들린 족제비의 몸이 횃불이 되어 타올랐다. 어둠을 찢는 밝은 빛! 낮이라면 모르겠으나 밤에 보는 이 불은 매우 밝게 빛났다. 암흑견은 순간적으로 빛을 보면 충격을 받아 기절한다. 시각을 극도로 발달시키기 위해 어릴 때부터 암흑 속에서 키우기 때문이다. 너무 강한 빛을 보면 일시적인 마비를 일으키는 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연옥천을 쫓던 자들이 잠시 당황하는 사이, 연옥천의 몸은 절벽으로 떨어지기 시


작했다. 그의 주위에는 불빛에 놀란 암흑견들이 놀라서 기절해 있었다. 하지만 기절한 와 중(渦中)에도 연옥천을 문 이빨을 놓지 않음은 개들이 얼마나 독한 훈련을 거쳤는 지를 말해 주었다. 연옥천의 신형이 어둠 속에 까마득해질 때! 안개가 흐르듯 벽하가 미끄러져 왔다. "그의 부인도 오늘 죽었으니, 그 또한 죽는 것이 마땅하겠구나! 같은 날 죽겠다고 맹서(盟誓)한 부부들이었으니..." 여인의 말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아 도대체 그녀가 연옥천의 죽음을 애 도하는 건지, 기뻐하는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수하 중 하나가 다가와서 그녀에게 물었다. "아래를 수색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벽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곧 날이 밝을 테니 그 후에 시작하자꾸나!" 벽하는 절벽 아래를 보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날 원망하지 말아요! 당신은 아무 죄 없이 죽지만, 이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 으니.' 이런 생각은 연옥천의 죽음을 애도(哀悼)하는 태도일까? 그녀는 수하들인 청의인 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일부는 날이 밝는 대로 아래를 수색하고, 일부는 취보에 남은 초초(草草)의 소식 을 확인해라." 청의인들이 복명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절벽 아래에서는 바람만이 어둠을 뚫고 올라왔다. 그곳엔 연옥천의 몸은 이미 흔적도 없었다. * * * 매화나무 아래! 진소백은 연 부인의 시체를 다시 그곳에다가 그대로 묻었다. 연충이 이 나무가 자신의 아버지가 가장 아꼈던 나무라 말했던 까닭이었다. 정식(正式) 장례는 연옥천이 돌아오면 치러야 하리라.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초초의 배후가 얼마나 강한 세력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소식을 확인하러 돌 아온다면 골치 아파진다. 연충은 울고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진소백이 나무를 깎아 비(碑)를 만드는 순간에 도 연충의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이윽고 진소백이 비를 내밀자 연충은 억지로 눈물을 멈추고 나무에 글을 적었다. <불효자(不孝子) 연충(燕忠) 읍립(泣立).> 글이 떨렸다. 글을 쓰는 손과 마음은 더욱 떨렸다. "어머니께서는 분명 천당으로 가셨을 거예요. 그분은, 흑흑... 진 숙부!" 연충은 진소백에게 기대어 울었다. 하지만 진소백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린 나이로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기에 길게 울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왜 하늘은 이런 일을 사람에게 내리는 것일까? 왜 이들은 이런 만행을 저질렀단 말인가?


진소백은 주먹을 쥐었다. 천하에는 약자들을 괴롭히는 자들이 항상 있었다. 연충이 흘리는 서러운 눈물! 그의 눈물 하나하나는 악인(惡人)들의 피가 되어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진소백은 생각했다. 굳게 쥔 손에 피가 감돌았다. 천하에는 인체의 피와 같은 역할(役割)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 을 협객이라 부른다. 약자를 돕고 악인을 징벌하는 사람들! 아무런 보답이 없어도 그들의 협객행(俠客行)은 오늘도 멈추지 않는다. 피가 끊임없이 영양을 공급함으로 해서 생명이 유지되듯이, 강호라는 이 거대한 대지는 협객들의 끊임없는 협객행을 영양(營養)으로 살아 가는 것이다. 연 부인의 몸은 매화나무로 흘러가리라. 그녀의 몸은 매화의 자양(滋養)이 될 것이다. 이윽고 봄이 되어 매화가 활짝 피어나면 어여쁜 매화는 어머니와 아내를 잃고 실 의(失意)에 빠진 연충과 연옥천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도 할 것이다. * * * 연옥천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귀를 스치는 공기의 파열음(破裂音)은 굉렬했다. 퉁! 튀어나온 바위에라도 스친 것일까? 그의 얼굴로 피가 튀었다. 비릿한 내음이 얼굴을 덮는데, 어디가 다쳤는지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가물거 리는 의식! 연옥천은 사부 매화노인을 또다시 생각했다. 난초의 둥근 뿌리! 그리고 식물의 씨앗들의 굳센 생명력을! -허허, 스스로의 내면 에 충일(忠一)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강함을 얻을 것이니. 연옥천은 귓가에 스치는 공기의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가슴에 흐르는 혈류의 쉭쉭거리는 소리! 심장이 고동치며 전신에 힘을 흘리는 소리! 연옥천은 서서히 내부 세계에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의 몸이 둥글게 말리며 알 수 없는 기세(氣勢)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천아! 본 문의 조사(祖師)이신 왕허(王許) 어른께서는 이러한 식물의 생명력의 비 밀을 깨달으시고 하나의 기공을 창안하셨다. 줄기와 잎과 꽃을 버리고 씨앗으로, 뿌리로 돌아가는 방법이니 많은 것을 익힌 도 인이 모든 사(邪)함을 버리고 근원으로 돌아가는 이치와 상통(相通)한다. 외부를 초월하여 자신의 내적 생명력에 충일하는 무공을 일러서 태원신공(太元神 功)이라 부른다. 태원은 태청(太淸)이니, 곧 태극(太極)이요, 근원(根源)이다. 모든 혼란이 일어나기 전의 충일한 근원의 힘이니, 또한 어떠한 변화라도 생겨날 수 있다. 이 태원신공은 여태껏 아무도 십이 성을 깨달은 이가 없었다. 연옥천의 사부인 매화노인조차도 단지 삼 성의 깨달음을 얻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연옥천이 절명의 순간에 이르러 태원신공의 묘리가 머릿속에 떠오르 고 있는 일! 단순한 우연일까? 하늘이 정한 기연일까?


어쨌든 절벽에서 떨어지는 아주 짧은 순간! 연옥천은 순간적으로 태원신공의 수위가 사부를 능가하는 오 성의 수위(水位)에 올랐다. 상승의 무학은 익히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인 까닭이었다. 이 깨달음은 연옥천을 절명의 위기에서 구할 것인가? 연옥천의 몸 주위로 꽃이 피 어나는 듯했다. 깨달음의 결과로 자연스레 발산되는 기운이었다. 근원의 생명력을 담고 있는 꽃. 모란 같기도 했고, 국화 같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연옥천이 가장 좋아하는 매화(梅花) 같기도 했다. ♡ 제 4 장 물속의 검은 바위는 바위가 아니다. 1 진소백은 취보(鷲堡)의 이름을 들어 봤던 소수의 강호인 중 하나였다. 그의 활동 무대가 낙양(洛陽) 근처였던 탓이다. 하지만 보주였던 연옥천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왜 벽하(碧霞)라는 여인은 초초(草草)에게 연충을 노리도록 명령했던 것 일까? 진소백이 끼여드는 바람에 무산되기는 했지만 초초가 애초에 노렸던 사람은 연충이 확실했다. 연충은 무공을 모르니 진소백을 제거한 후 연충을 죽이려고 계획했을 것이다. 이유가 뭘까? 연옥천은 돌아온다고 아들과 약속했던 날을 아흐레나 넘겼다고 했다. 그 또한 연 부인과 마찬가지로 살해당했을까? 원한 관계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원한이 있는 자라면 수하를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했을 것이다. 최근에 있었던 특별한 일! 연옥천이 부탁받았다는 어떤 일에 진소백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 받으셨다는 부탁이 무엇인지 혹시 알고 있느냐?" 연충이 알 리 없었다. "몰라요. 전 그냥 친한 친구의 부탁이라고만 들었어요." "그럼, 혹시 일기(日記)를 쓰시지는 않느냐?" "아뇨... 참, 아버지께서 비밀로 사용하시는 방이 있어요." 비밀로 사용하는 방! 어쩌면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서 가보자꾸나!" 연충이 안내한 곳은 서재(書齋)였다. 책이 온 방을 가득 메운 것이 연옥천은 무인(武人)이라기보다는 문사(文士)에 보다 가까웠음을 말해 주었다. "정말 굉장하구나. 이곳이 네가 말한 비밀 방이냐?" "아뇨! 여기서 더 들어가야 돼요." 연충은 구석으로 달려가더니 책 세 권을 뽑았다. 순간 기관이 돌아가는 음향이 나며 한쪽 벽이 서서히 돌기 시작했다. 서가에서 정해진 책을 뽑자 벽이 돌아가다니!


"매우 정밀한 기관이로구나." 벽이 완전히 돌자 긴 복도가 나타났다. 연충이 말했다. "굉장하죠? 아버지께서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어머니와 같이 이곳으로 피하라 고..." 부모 생각이 났는지 연충이 말을 흐렸다. 진소백은 그의 등을 두드렸다. "어서 들어가 보자.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구나." 복도는 굽이져 있어 길어 보였지만 곧 끝이 났다. 끝에는 둥근 석실이 있었고, 석실에서 다시 작은 석실 두 개가 이어져 있었다. 땅을 파 동굴을 만들 때 흔히 취하는 형식을 그대로 답습한 석실의 모양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석실 입구에 붙은 편액은 진소백으로 하여금 비로소 연옥천의 비밀을 알게 해주었다. 세 석실에 붙은 이름에서 그는 겨우 짐작했다. '무절(武絶), 기절(機絶), 의절(醫絶).' 무, 기, 의로 나누어지는 삼절(三絶)! 바로 귀곡자의 진전을 이었다는 장춘곡(長春谷)의 후손이 연옥천(燕玉天)이었던 것 이다. 귀곡자! 소진(蘇秦)과 장의(張儀)가 찾아가서 배웠다는 전설 속의 선인(仙人)! 일찍이 운몽 산(雲夢山)에서 득도하였으며 귀곡(鬼谷)에 은거했다고 한다. 그의 진전은 장춘곡(長春谷)과 매화곡으로 나뉘어 전해졌는데 장춘곡은 혈왕교와 의 일전에 나타나 활약한 바가 있었다. "귀곡자의 세 가지 절기는 각각 다른 사람에게 전해졌지! 그 중 무절은 매화노인 (梅花老人)이란 분에게 전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진소백은 세 개의 석실을 둘러보고는 연옥천이 삼절 중 바로 무절(武絶)을 이었음 을 알 수 있었다. 매화노인의 매화곡 후손인 것이다. 세 개의 석실 중 무절이라 쓰여진 석실만이 제대로 물건을 갖추고 있었고, 나머지 둘은 그림 한 점씩만이 걸려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림은 모두 인물화였는데 매우 훌륭했다. 모양을 그림은 하품(下品)이고, 뜻을 그림은 중품(中品)이며, 기(氣)를 그림은 상품 (上品)이라 했는데, 그림은 모두 기를 잘 나타내는 상품이었다. 아마도 삼절을 이은 주인을 그린 그림이리라. 그 중 의절(醫絶)이라 쓰여진 그림을 진소백은 자세히 보았다. "저런 기도(氣度)를 어디선가 본 듯한데... 어디서 보았더라?" 모양이 아닌 기(氣)로써 사람을 기억함이니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하는 진소백에게 연충이 서책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이걸 제일 큰 석실에서 찾았어요." 진소백은 서책을 받아 훑어보았다. "일기장이 맞구나. 어디서 찾았느냐?" 연충은 진소백을 안내했다. 처음에 있었던 가장 큰 석실의 벽 구석에 드리워진 천을 걷자 벽에 걸린 신선풍의


노인 그림이 나타나며 책들이 꽂힌 작은 서가(書架)도 보였다. 찾기가 어렵지 않았으나 진소백은 의절의 그림에 정신이 팔려 간과했던 것이다. 노인은 부채를 들고 매화나무 옆에 서 있었다. 진소백은 한눈에 그 노인이 매화노인임을 알았다. 더불어 연옥천이 무절(武絶) 일맥을 이었음을 확신했다. 그렇다면 그가 살아 있을 확률이 높아진다. 연옥천에게 뭔가 부탁을 하고 그를 죽여 살인멸구(殺人滅口)하려 했던 자들! 그들 이 연옥천을 골랐던 이유는 뭘까? 그의 무공이 낮았기 때문이다. 무공이 낮으니 강호의 주목도 받지 않을 테고 제거하기도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실수는 연옥천이 장춘곡의 진전을 이은, 실력을 숨긴 절정고수라는 것을 몰랐다는 점이다. 강호에 알려진 취보 보주 연옥천을 위해 준비했던 함정(陷穽)을 장춘곡의 무절인 그는 무사히 빠져 나갔을 것이다. 아무리 적들이 충분히 준비했다 하더라도 취보 보주를 잡기 위해 무절을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준비를 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진소백은 자신의 예상이 빗나갔음을 몰랐다. 적들은 생각보다 훨씬 대응이 빨랐고, 연옥천이 비록 도망은 쳤으나, 끝내 절벽에 서 떨어지고 말았음을. 진소백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서책, 즉 연옥천의 일기를 펼쳤다. 혹시나 단서(端緖)가 될 만한 것이 있는지 찾기 위함이었다. 연충은 옆에서 부지런히 석실을 뒤지고 있었다. "충아, 혹시 아버지께서 떠나시기 전에 손님이 찾아온 적은 없었느냐?" "있었어요. 아주 예쁜 누나였는데, 마침 어머니와 일하는 할멈이 외출하셨을 때 오 셔서 제가 차를 대접하였지요." 진소백은 흠칫했다. 초초(草草)가 말했던 벽하란 이름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런 이 름을 남자가 쓸 리는 없지 않는가? 그는 급히 연충이 말한 '예쁜 누나'가 온 날의 일기를 폈다. <사부님의 말씀이 너무나 옳으셨다. 강호의 풍파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자연에 묻혀 살아야 함이 당연했다. 난 왜 강호에 적(籍)을 두었는가? 벽하(碧霞)란 여인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고, 승낙하기는 싫다. 그녀는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알아 냈을까?> 진소백은 벽하란 이름을 읽고 몸을 떨었다. 틀림없이 그녀의 부탁이 사건의 중요한 관건이리라. <벽하가 다시 찾아왔다. 사적인 부탁이니 공적으로 처리하기가 쉽지 않다 한다. 그녀가 또다시 부탁했다. 이처럼 끈질기니 물리칠 방도가 없다. 따져 보면 나쁠 것 은 없으리라. 천외성(天外城)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이후 강호 생활을 함에 있어 내 정체를 들킬 염려가 더욱 줄어들지 않겠는가?> "천외성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천외성! 백여 년 전부터 무림의 맹주 문파 역할을 하고 있는 천외성이 이 일에 개 입되었다는 말인가?


진소백은 글을 계속 읽어 나갔다. <벽하가 전해 달라는 책은 단단히 포장이 되어 있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개인적으로 전하는 책이라면 신변잡기(身邊雜記)일 것이니, 읽는 것이 도리 는 아니리라. 그런데 그는 왜 이처럼 비밀리에 흑혈산에 이 책들은 전하려는 것일까? 흑혈산(黑血山)!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 문파가 혹시 그의 출신 문파가 아닐 까? 아서라. 쓸데없는 호기심이다. 내 수양은 아직도 너무나 부족하구나. 충아에게 동지(冬至)까지는 돌아오마 약속했다. 갔다 오는 데 나흘의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일기는 거기서 끝나 있었다. 진소백은 두 가지 의문이 생겼다. 흑혈산이란 어떤 문파인가? 또 '그'란 누구인가? '그'란 사람이 벽하를 시켜 책을 운반하는 부탁을 했다면 초초가 말한 이름 모를 궁의 궁주인가? 아니면...? '흠, 요놈을 뭐라 부를까? 옳지!' 진소백은 한참 고민 끝에 '그'라 불린 자의 이름을 나름대로 붙였다. 흑수(黑手)! 암중에 숨은 검은 손의 정체를 흑수라 부르기로 진소백은 결심했다. 어쨌든 몇 가지는 확실했다. 흑수는 흑혈산과 관련이 있고, 또 천외성의 인물이란 점! 또 벽하란 여인이 속해 있는 무슨 궁과 연관이 있으며, 그 궁은 중수(重水)를 사용한다는 점! "중수라...!" 진소백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문득 여섯 사부들 중 한 분이 생각났던 것이다. "엽 숙부, 남궁(南宮) 사부에 이어 또다시 중수가 강호에 나타났는가?" 생각에 잠겨 있던 진소백을 연충이 흔들었다. "진 숙부, 이리 와보세요. 밖에서 소리가 들려요. 많은 사람들이 와서 초초란 사람 을 찾고 있어요." 이곳은 지하의 석실 안이었다. 연충은 어디서 밖의 소리를 들었는가? 진소백은 급히 연충의 뒤를 따랐다. 2 푸른 관(管)이 여섯 개 있었다. 모두 마개가 씌워져 있었으나 그 중 하나의 뚜껑은 열려 있었다. "네가 연 게냐?" 진소백의 질문에 연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 쓰는 것인지 궁금해서요. 그런데... 들어 보세요." 진소백은 관에 귀를 댔다. 방에서 떠드는 소리가 똑똑히 들려 왔다. "초초는 어디로 간 거지?"


"영주(令主)께서 화를 내실 텐데..." "빨리 찾아라. 어서..." 진소백은 다른 청색 관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초초의 시신을 발견한 자들이 저마다 떠들어대고 있었다. 다른 방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초초가 죽어 있다니... 일에 차질이 생겼다." "영주께 알려야 한다. 영주는 어디 계시냐?" "절혼애(折魂涯)에서 연옥천의 시신을 찾고 계십니다." "빨리 알려라. 서둘러라." 진소백은 귀를 뗐다. 이 관은 무척 잘 만들어져 밖의 소리를 이곳으로 전달해 주 고 있었다. 연옥천이 다른 목적으로 만든 것일 테지만 지금 그 관을 통해 자신의 처지가 진소백의 귀로 들어갈 것은 짐작도 못 했으리라. 영주란 아마도 벽하(碧霞)란 여인을 이름일 것이다. 진소백은 마음이 급했다. 절혼애란 낙양 북쪽의 망산(邙山)에 있는 단애의 이름이니,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 다. 시신을 찾는다는 소리가 연충의 귀에 들어가지 않은 것도 다행이었다. 어쨌거나 진소백은 이 일의 배후가 매우 거대함을 느꼈다. 흑수-아직은 알지 못하는 진실한 배후의 이름을 이렇게 부르기로 진소백은 결심했 다-는 자신이 직접 나서지도 않고 이만한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또한 천외성과도 관련이 있는 일이니 어찌 배후가 작을 수 있겠는가? 이처럼 큰일 을 꾸미는 세력이 강호에 많을 수는 없었다. 진소백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풍림서(風林誓)! 설마 이 뒤에도 그들의 입김이 있는 걸까? 아니면 또 다른 세력 이..." 진소백은 연충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겁에 질렸는지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이 아이를 돕고 싶었다. 그리고 이 정도의 일이라면 용선풍에서의 자신의 역할에도 맞을 것이다. 진소백은 망산으로 달려갈 결심을 했다. 연옥천이 이미 죽었다면 그의 시체(屍體)라도 찾아 연충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만에 하나, 운이 좋아 연옥천이 살아 있다면 진소백은 이 일 뒤에 숨은 비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충아! 숙부랑 약속을 하자.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 가만히 앉아서 밖으로 나오면 안 된다." 연충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소백이 가장 왼편의 파란 관을 가리켰다. "이 통이 정원의 소리가 들리는 곳이니, 잘 듣고 있거라. 내가 돌아오면 너를 정원 에서 부르겠다. 그때까지는 나오지 말아라. 알겠지?" "알겠어요, 진 숙부! 빨리 돌아오실 거지요?" "오늘밤이 되기 전에 꼭 돌아오마!" 연충은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진소백이 떠나간 후 찾아온 고독과 슬픔은 아이로서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 다.


* * * 망산(邙山)! 성의 북쪽에 있는 탓에 북망산(北邙山)이라고도 부른다. 그 동쪽 기슭에 있는 깎아지른 듯한 천애의 절벽! 세인들은 그곳을 절혼애(折魂涯)라 부른다. 군데군데 돌이 못처럼 튀어나와 있어 이곳으로 떨어지는 사람은 살아나기 힘들 것 이다. 절혼애의 아래는 계곡물이 급한 경사를 타고 급류가 되어 흘러가고 있었다. 콰콰-! 물 흐르는 소리가 흡사 수많은 악귀(惡鬼)들이 혼을 끊으려 달려드는 것 같았다. 그 험한 산세 속을 지금 열댓 명의 청의인(靑衣人)들이 헤집고 다녔다. 그 중 청의를 입은 여인 하나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영주님!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급류에 씻겨 내려간 것이 아닌가 합니다." 벽하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도 더 찾아 봐라. 어딘가 피 흘린 흔적이라도 있을지 모르니..." 그녀는 꼭 연옥천의 시신을 찾아야 했다. 아니면 궁주의 질책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수하 중 하나가 까마득한 절벽 위를 가리키며 외친 것은 그때였다. "저기를 좀 보십시오." 절벽의 상당한 위쪽 부분! 뿔처럼 튀어나온 절벽의 돌 위에 무언가 검붉은 것이 걸려 있음을 벽하는 보았다. "시체냐? 아니면..." 그녀는 내공을 끌어올려 안력을 최대로 돋웠다. 먼 거리가 시선 속에서 가까워지면서 검붉은 물체의 정체가 보였다. 피로 얼룩진 거대한 고깃덩어리! "피범벅이 된 살과 뼈가 엉켜 있다. 저 정도면..." 저런 엄청난 양의 육골이 떨어져 나가고도 살아 있을 수는 없을 것이라 벽하는 생 각했다. 그녀는 방향을 가늠해 보았다. '절벽 위에서 떨어져 저 바위에 부딪혔다면 떨어질 곳은...' 아무리 생각해도 한 곳밖에 없었다. 세차게 흐르는 급류 속! 연옥천의 시체는 급류에 휘말려 간 것일까? 그녀는 한참을 고민했다. "어쨌든 찾는 데까지 찾아 보거라." 벽하는 고민 끝에 조금 더 찾아 보기로 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수하들은 다시 한 번 계곡과 주위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이 우연히 급류(急流) 속의 바위 하나가 색깔이 이상함을 발견했다. 보 통은 이끼가 끼어 푸르거나, 이끼가 없다면 검거나 갈색 빛깔이 바위의 일반적인 색이었다. 한데 이 바위는 어딘가 붉은색을 띠고 있지 않는가? '이상한걸?' 그는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막 바위를 뒤집어 보려 할 때, 우우-!


강한 장소성이 절혼애를 흔들었다. 보라! 급류가 흘러나가는 계곡의 하류 쪽을. 하늘까지 뻗칠 듯한 장소성을 지르며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백의를 입은 인영 을! 그의 뒤에는 십여 명의 인물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아무리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오의(汚衣)! 개방의 인물들이 꼭 입어야 하는 누더기옷을 걸쳤으므로. 벽하는 당황했다. 앞서 달려오는 인영의 내공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지금 개방과 충돌할 수는 없 었다. 그녀는 길게 생각하지 못하고 말했다. "퇴각한다. 하나의 흔적도 남기지 말아라." 자신들은 폭포 위에서 바라본 것이니 개방의 인물들은 자신들을 보지 못했을 것이 다. 벽하와 청의인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이상한 빛깔의 돌을 들어 보려던 청의인도 돌을 잠시 밀다가 급히 달아났다. 그래서 진소백과 개방의 방도들이 절혼애 아래의 계곡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청의 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난 후였다. "늦었는가?" 진소백은 신음했다. 이처럼 흔적도 없다면 그들은 이미 연옥천의 시체를 발견하여 가져 갔을지도 몰랐 다. 그는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마저 잃는다면 연충은 어찌 충격을 견딜 것인가? 그의 가슴앓이는 방도 한 명이 물속을 보며 외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공자, 저것 보십시오." 진소백은 그의 손길을 따라 물속을 보았다. 바위! 아니, 처음에는 바위로 보였던 물체 하나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시체였다. 아니, 시체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어서 건져 내라! 어서." 떠오른 물체가 급류에 휘말려 떠내려가려 하자 진소백은 급히 외쳤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이 할 때까지 참지 못했다. "차!" 낭랑히 외치며 떠오른 그의 몸이 계곡물을 박차며 날았다. 이런 답수(踏水)의 경공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동시에 품에서 기다란 끈이 뿜어 나오며 물속으로 뻗었다. 촤악! 어느새 끈은 물체를 묶어 끌어 내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습니다." 개방 방도의 말은 진소백으로 하여금 한숨을 돌리게 만들었다. 어쩌면 연충은 완전한 고아(孤兒)는 되지 않을 것이다.


3 연옥천의 몸을 뒤덮고 있는 살덩이들은 다름 아닌 암흑견의 견육(犬肉)과 털이었 다. 연옥천의 몸을 물었던 암흑견 세 마리는 연옥천이 삼매진화를 이용해 불을 피 우자 밝은 빛에 잠시 기절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오랜 훈련에 의해 연옥천을 문 이빨만은 그대로였고 개들의 이빨은 강한 힘으로 연옥천의 근육을 눌러 갔다. 이것이 연옥천에게 오히려 복이 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허리를 문 개의 몸이 연옥천 대신 튀어나온 바 위에 찢겨 나갔다. 뒤이어 연옥천이 스스로의 자아를 성찰하며 태원신공(太元神功)의 기초를 익혀 나 갔다. 그러자 항상 밖으로만 뻗어 나가던 모든 힘들이 서서히 역전하며 원신(原身)의 청 정한 상태로 돌아가려 했다. 이때 개들이 깨어났다. 본능적인 위기를 느낀 개들은 이빨을 빼려 했으나 연옥천의 몸 내부에서 기이한 흡력(吸力)이 일어났다. 태초의 형태로 돌아가려는 진기의 신묘한 흐름이 흡력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윽고 연옥천의 몸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의 포란지세(胞卵之勢)를 이루자 흡 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흡사 연옥천의 몸을 양쪽에서 감싸는 형국이 되어 그들은 곧바로 물속으로 떨어졌 다. 물! 물이라곤 하지만 이런 엄청난 속도로 부딪치는 물은 더 이상 물이라고 할 수 없었 다. 그것은 흡사 하나의 바위였고 금속이었다. 꽝! 벼락이 내리치는 충격이 전신으로 전해져 왔다. 하지만 그 충격은 연옥천을 감싸고 있던 개들이 받았던 충격에 비하면 약소한 것 이라 할 수 있었다. 개들은 전신이 갈가리 찢어졌다. 그나마 연옥천은 그보다 적게 충격을 받았던 것 이다. 다행히 그의 자세가 외부(外部)의 충격을 최대로 분산(分散)시킬 수 있는 태초의 자세였기 때문에 미미하나마 숨이 붙어 있을 수 있었다. 만일 절벽에서 떨어지는 실낱보다 짧은 순간, 태원신공의 깨달음이 연옥천에게 다 가오지 않았다면 연옥천의 몸 역시 갈가리 찢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의 몸은 물을 뚫고 아래의 바위 틈에 박혔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물살이 그의 주위를 싸고 있는 개들의 살과 뼈에서 나오는 피 를 모두 씻어 내렸다. 하지만 연옥천의 몸은 바위에 끼여 움직이지 않았다. 꼼짝도 않고 등을 둥글게 만 채 바위에 끼인 연옥천의 몸을 청의인이 바위로 착각 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더구나 그의 몸 주위는 흡력으로 인해 견육(犬肉)이 달라붙어 있었으니 말이다. 비 록 연옥천이 기절하긴 했으나 일단 깨우친 태원신공(太元神功)의 기초 내공은 그


가 기절해 있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그의 몸을 타고 흘렀다. 그리하여 연옥천은 한줌의 숨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만일 진소백이 조금이라도 늦게 왔다면 어찌 되었을까? 연옥천의 숨은 끊 어지고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엄청난 비밀은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엄청난 일에 대한 강호의 대응은 늦어졌을 것이고, 강호는 또 한 번의 시산혈하(屍山血河)를 맞았으리라. 이런 일들을 모두 우연으로만 돌리겠는가? 물론 진소백의 빠른 대응과 연옥천의 순간적인 재질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취보에 온 청의인들이 무의식(無意識)중에 벽하(碧霞)의 위치를 흘리고, 운 좋게도 진소백이 그것을 들었으며, 절벽에서 떨어지는 절명의 순간에 연옥천이 사 문(師門)의 태원신공의 오의(奧意)를 깨우친 것 모두가 단순히 우연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자는 말한다. 악은 결코 선을 이기지 못한다고. 이런 우연들은 악의 창궐을 막기 위한 하늘의 안배(按配)는 아니었을까? 하지만 인간들은 알아야 한다. 하늘의 도움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다. 오직 스스로 노력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다. 하늘의 베품은 인간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니, 노력하지 않는다면 어찌 악이 선을 이기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장하겠는가? 흔히 인간의 안배가 세상의 일을 좌우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다. 물론 똑똑한 인간은 많은 일들을 자신의 의도대로 이루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는 일! 천지를 지배하는 법도는 때로 신마저도 거스르지 못하는 힘이 있는데, 하물며 인 간이 어떻게 모든 것을 안배하겠는가? * * * "아버지께서는 정말 깨어나실 수 있는 거지요, 진 숙부?" 연충이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진소백은 그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그럼! 꼭 깨어나실 것이다." 이 아이는 하루 만에 너무 많은 불행을 겪었다. 연옥천은 아들을 위해서도 꼭 깨어나야 했다. 하지만 주위의 이런 염원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옥천은 혼수 상태에 빠진 채 눈을 뜰 줄 몰랐다. 진소백은 의술에도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연옥천을 치료해 보려던 그는 연옥천의 몸 속에 기이한 공력이 감돌고 있 음을 느꼈다. 만일 이것이 연옥천의 심맥(心脈)을 이어 주고 있는 것이라면, 외부에서 힘을 가하 는 것은 오히려 위험했다. 지금 연옥천의 전신은 모든 주맥과 세맥이 끊어져 있는 상태였으니 이것은 심히 이상했다. 맥이 끊어졌다면 기가 흐를 곳이 없어야 함이 정상이었다. 그런데도 끊이지 않고 연옥천의 몸을 흐르는 이 기는 도대체 무엇일까? 사실 이런


몸으로 연옥천이 살아 있음도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진소백은 잠시 지켜보기만 했다. 가끔씩 연옥천의 몸 곳곳이 미미하게 뛰놀고 있음을 진소백은 보았다. 그는 확신 할 수 있었다. 연옥천의 몸 내부에서 기이한 공력이 전신을 돌며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된 것일까? 이미 연옥천은 전신의 맥과 경혈이 끊어지고 막혔으며 근육조차도 성한 곳이 없었 다. 아마 살아난다 하더라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태 (狀態)에서도 몸 속에서 움직이는 진기(眞氣)가 있을 수 있다니. "선천진기(先天眞氣)의 일종인가?" 이것은 가능성이 낮은 상상이었다. 자신도 무공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자부하고 있었지만 아직 선천의 순수한 진기의 흐름과는 많은 격차(隔差)가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천하제일인으로 일컬어지는 초의 선사조차도 아직 선천진기의 입문에 겨우 들어섰노라는 말을 했었는데... 그러나...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었다. 장춘곡은 귀곡자의 진전을 이었으니까! 귀곡자(鬼谷子)는 선인(仙人)이었으며 선계(仙界)의 맥을 이었던 분이니 선천의 도 에 관련되는 무학이 장춘곡에 전해질 수도 있었다. 깨달음이란 순간적으로 인간을 찾아오며 죽음에 이르러서야 깨닫기가 더욱 쉬웠 다. 연옥천은 죽음의 순간 무언가 깨달음을 얻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마지막 깨우침 으로 인해 연옥천은 엉망이 된 몸으로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닐까? '정말 이 사람의 무공이 나를 능가한다는 말인가?' 진소백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생각에 놀라 머리를 흔들었다. 연옥천의 무공이 자신보다 못하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어느 틈엔가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은 교만(驕慢)! 자신의 무공을 스스로 매 우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교만에 놀랐던 것이다. 그는 유사부(儒師父)에게 들었던 말을 기억해 냈다. -소백아, 네 성취는 정녕 고금에 드물다고 할 만하다. 하나 명심해야 한다. 당금은 무림에 천년 만에 나타나는 흥륭기(興隆期)이다. 십 년, 백년 만의 기재는 말할 것 도 없고, 천년 만에 나타나는 믿기 힘들 정도의 절정기재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 날 것이다. 아니, 많은 자들이 이미 나타났을 것이다. 이 천년흥륭기(千年興隆期)는 이미 백여 년 전부터 그 징조가 보였으니, 너는 결코 교만하지 말아라.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진소백은 이미 사제 엽평의 무공이 거의 자신의 수준에 이르렀던 것을 기억했다. 비록 어린 시절의 기초가 있었다 하나 어찌 쉬운 일인가? '난 아직 멀었구나. 벌써 이런 교만한 마음에 빠지다니...' 진소백은 부끄러웠다. 이런 마음가짐을 결코 쉽지 않았다. 뛰어난 사람이 교만해지기는 무척 쉽다.


하지만 그 교만을 거울삼아 스스로의 마음을 다지기란 무척 어렵다. 이렇게 다지고 또 다진 마음만이 어려운 세상에 굳건히 서는 영웅의 마음가짐인 것이다. 진소백은 연옥천을 보았다. 비록 말로 가르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연옥천 덕분에 스스로의 교만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연옥천의 눈꺼풀이 미미하게 떨린 것은 그때였다. 그가 천천히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 * * 하루가 지났다. 연충은 누워 있는 아버지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곁에 진소백이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아버지는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나요, 진 숙부?" 진소백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연옥천을 보았다. 연옥천은 눈을 떴다. 하지만 눈만 깜박일 뿐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전신의 맥뿐 아니라 얼굴의 신경도 모두 상하신 듯하다. 눈만 깜박이시니..." 진소백의 말에 연충은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는 눈만 깜박일 뿐 시체나 다름없는 아버지의 몸을 흔들며 말했다. "흑흑... 아버지, 저 충아예요. 말 좀 해보세요." 진소백은 연충을 다독거렸다. 그도 이런 슬픔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그나마 낫지 않는가? 적어도 완전히 죽은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살아 있는 아버지가 연충에게는 얼마나 위로가 되겠는가? 연충이 울자 누워 있던 연옥천의 눈꺼풀 또한 부르르 떨리는 듯한 느낌을 진소백 은 받았다. 착각이었는가? ♡ 제 5 장 용선풍 속에 혈풍(血風)의 꼬리 드러나니. 1 황산(黃山)! 원래 이 산의 이름은 이산( 山)이었다. 그러나 전설 중의 황제(黃帝)가 이곳에 은거하다가 도(道)를 깨우쳐 신선(神仙)이 되어 하늘로 오른 후부터 그 이름이 황산(黃山)으로 바뀌었다. 황산의 도화계곡에는 지금도 황제가 사용했던 약절구와 단정(丹井)이 남아 있다 전해진다. 도화계곡에서 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는 산속답지 않게 평평한 분지가 있었다. 자 그마한 곳이지만 언제인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스스로 이곳을 단심평(丹心坪)이라 부르고 있었다. 겨울은 봄을 준비하는 계절이니 비록 모든 생명이 죽고 없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치열한 생명의 움틈이 있는 계절이다. 때문에 모든 농사 준비는 겨울이 중요했다. 단심평에 지어진 작은 집, 그리고 그 앞!


중년인 하나가 흙을 주워 들고 살펴보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노인 둘이 서 있었다. "벌써 흙에 온기(溫氣)가 서서히 돌고 있는 게, 올해는 봄이 유난히 빨리 올 모양 입니다." 중년인의 말에 뒤에 선 노인 중 낡은 옷을 입은 노인이 말했다. "봄이 빨리 온다면 좋은 일이지." 그들이 계절에 대한 한담을 나누고 있을 때, 뒤로 늙고, 젊은 남자 둘이 나타났다. 그들의 나타남은 매우 급작스러워 결코 일반인의 몸놀림이 아니었다. 중년인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의선(醫仙)! 약초는 모두 캐셨습니까?" 의선이라 불린 노인이 고개를 끄덕일 때, 함께 온 청년이 공손히 일행에게 절했다. "사부님들, 평안하셨습니까?" 신기한 일이었다. 밖에서 본 모습대로라면 분명 실내가 좁아야 정상이 아닌가? 어떻게 그런 작은 외 관(外觀)의 집 내부가 이처럼 넓을 수 있는가? 노인 셋과 중년인 셋. 그리고 그 앞에 청년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흙을 주워 들었던 중년인이 물었다. "모든 일을 계획대로 처리했느냐?" "예! 사형에게도 용선풍이 일 것임을 알렸습니다." 청년은 다름 아닌 엽평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이 어딘지는 확실하다. 단심맹(丹心盟)! 용선풍은 이들이 은밀히 수행하려는 작전의 이름이었다. 이들은 누구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가? 풍림서(風林誓)! 단심맹이 풍림서를 상대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데 이들은 왜 풍림서란 집단을 노리는가? 풍림서는 강호에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이 어떤 악행을 저질렀다는 증거도 없었으며 강호인들이 공적(共敵)으로 미워 하는 집단은 더 더욱 아니었다. 단심맹은 진소백과 엽평의 사부인 초의 선사가 주도하는 문파였다. 초의 선사가 강호를 위해 협행함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용선풍 작전도 천하를 위한 일인가? 중년인이 엄숙하게 말했다. "풍림서의 무서운 점은 그들의 행위가 강호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엽평이 말을 받았다. "이번에 용선풍이 불고 나면 그들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네 말이 맞다. 강호는 우선 풍림서(風林誓)란 집단이 은밀히 활동하고 있음을 알 아야 한다." 중년인은 비록 나이는 적었지만 좌중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의 지혜를 누가 의심하랴? "가거라. 이제 용선풍이 불 것이니 바람 속에 풍림(風林)의 정체가 드러나게 하라." 바람이 분다. 용선풍!


이 바람은 모든 것을 뒤집는 바람이었다. 평화로운 강호! 한바탕의 바람은 어떤 풍운을 부를 것인가? * * * 무당(武當)! 호북성(湖北省) 악성의 서북쪽에 자리잡은 산. 그러나 이곳이 도가의 제일지(第一地)이며 도문의 제일검문임을 누가 모르랴? 천 무(天武) 진인(眞人)의 개파 이래 도문의 선두 문파로 군림해 온 무당. 무당의 태극혜검(太極慧劍)은 지혜검(智慧劍)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진다. 그곳에선 오늘도 도를 닦고 무공을 높이고자 하는 치열한 수련의 일과가 멈추지 않는다. 밤이 찾아왔다. 도문(道門)의 밤은 쉬는 시간이 아니었다. 끊임없는 정진과 수련. 한시도 쉬는 사람이 없는 무당은 그래서 도문 제일이었다. 무당의 장문인인 무엽(無葉) 진인(眞人)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진무전(眞武 殿)에 나타났다. 그의 품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서찰 하나가 있었다. 그 서찰이 무엽 진인을 이처럼 은밀하게 움직이도록 한 것이다. 서찰은 무엽 진인의 거처(居處)에 아무도 모르게 놓여 있었고, 그 장소는 침대의 머리맡이라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누군가 은밀히 자신의 침소에 침입해 와 서찰을 두고 갔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내용은 더욱 놀라웠다. <금일 밤! 진무전(眞武殿)으로 오시오. 일회자(一回子)가 무당의 반도임을 알게 될 것이오.> 서찰과 더불어 검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갑주(甲胄)가 하나 놓여 있었다. 진무전 으로 갈 때 몸에 두르라는 뜻 같았다. 일회자는 무당삼자(武當三子) 중 한 명으로, 무당의 중요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 반도라니! 무슨 말인가? 무엽 진인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진무전 앞의 노송 위로 뛰어올랐다. 공기조차 움직이지 않는다는 암향표(暗香飄)가 익숙하게 시전되며 무엽 진인의 몸 은 소나무 가지 사이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 * * 일회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 명령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행(武行)을 제거하라. 그가 너의 정체를 눈치챘다. 어찌해야 할지는 알 것이 다.> 무행은 무엽 진인의 대제자(大弟子)의 도명(道名)이었다. 그는 평소 언행이 바르고 진중하여 차기 무당 장문으로 유력시되고 있었다. 그런 그를 제거하라니? 정말 무행이 자신의 정체를 눈치챘다는 말인가? 일회자는 다시 한 번 서찰 끝에 찍힌 문양을 보았다. 끝이 다섯 갈래로 갈라져 있는 단풍잎! 틀림없이 위에서 전해진 명령이었다.


이때까지 한 번도 서(誓)의 명령이 잘못된 적은 없었다. 일회자는 몸을 일으켰다. 무행은 밤이면 항상 진무전에서 수련을 한다. 밤에 하는 수련이란 주로 호흡법이니 운기행공 등이니, 방은 공격하기에 가장 좋 은 때가 아니겠는가? 일회자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풍엽(楓葉)의 직인(職印)이 찍힌 서찰은 그의 삼매진화에 의해 곧 한줌의 재로 화 했다. 재가 허공에 날림과 동시에 일회자의 몸도 사라졌다. * * * 무엽 진인은 분명히 그림자를 보았다. 신법은 틀림없는 무당의 것이었고, 멀리서 보이는 체형만으로도 그 그림자가 일회 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왜 이 밤에 진무전으로 숨어든단 말인가? 무엽 진인은 서찰의 글을 되새겼다. <일회자가 무당의 반도임을...> 무엽 진인은 진무전이 자신의 대제자인 무행이 수련을 하는 곳임을 생각해 냈다. '안 돼!' 마음속으로 외친 무엽 진인은 즉시 몸을 날렸다. 흡사 한 줄의 긴 줄이 그의 뒤를 따라 달리는 듯한 환상이 일어나며 무엽 진인의 몸이 진무전을 향해 뻗었다. 너무나 빠른 신법인지라 그의 몸이 지나간 뒤에도 환영이 남은 것이다. * * * 넓은 마루에는 태극이 우주를 상징하며 그려져 있었다. 그 태극의 소용돌이 중앙에 한 인영이 앉아 있었다. 범인의 두 배에 달할 듯 넓은 등이 인영의 체격이 매우 건장함을 말하고 있었다. 운기행공(運氣行功)! 인영은 바로 진무전에서 수련하는 무행이었다. 운기행공하는 도중에 외부의 공격에 대한 방어 능력이 없어짐은 상식이었다. 무행의 등을 향해 급작스런 일격이 날아왔을 때! 그가 방어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격에 실린 공력은 다름 아닌 무당의 면장(綿掌)! 무당의 문하라면 누구나 가장 먼저 익히는 장력이었다. 하지만 지금 무행의 등을 노리는 면장의 위세는 가히 절대적인지라 결코 만만히 볼 수 없었다. 분명 면장을 입성(入聖)의 경지까지 익힌 사람이 발출한 공력인 것이다. 게다가 무행은 운기행공 중이니 방어할 수도 없지 않은가? 빙글! 무행은 행공 중이 아니었던가? 그의 몸이 반 바퀴 회전하며 면장을 양손으로 마주 쳤다. 펑! 삼양신공(三陽神功)을 실은 삼양장이었으니 분명 면장에 우위를 차지함이 정상이 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우욱!"


삼양신공을 극성으로 전개했던 무행이 신음을 내뱉으며 뒤로 쭉 밀려나지 않는가? 하나 면장을 발출했던 인영도 놀란 것 같았다. 운기행공 중이던 자가 방어를 하다니! 놀람은 잠시. 곧 그의 몸이 다시 땅을 박차며 날았다. 암습자의 전신이 마치 열두 폭의 비단을 두른 듯한 기운에 휩싸이며 날아들 때! 비로소 무행은 암습자의 얼굴을 보았다. "일회 사숙! 어찌 당신이...!" 일회자는 흠칫했지만 그의 대라강기(大羅 氣)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벽까지 물러난 무행의 가슴을 노리며 하얀 비단폭 같은 강기( 氣)가 번개처럼 뻗 어났다. 2 무행은 아직 완전히 익히지 못한 자하강기(紫霞 氣)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전신에 은은한 자색(紫色)이 차 올랐지만 완성이 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듯, 군데 군데 색의 농담(濃淡)이 보였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삼양신공(三陽神功)으로는 대라강기(大羅 氣)를 막을 수 없는 것을. 자색의 강기와 흰색 비단의 강기가 충돌하자 막대한 충격이 무행에게 전해져 왔 다. 삼 성에 불과한 자하강기로 일회자의 대라강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사형이 네게 이미 자하강기를 전했다는 건 몰랐구나! 하나 삼 성 정도로는 나의 대라강기를 막을 수 없다." 일회자의 대라강기는 쉴 틈 없이 자하강기를 핍박하며 무행의 가슴으로 다가왔다. 무행은 두 눈을 감아 버렸다. '끝인가?' 더욱 힘을 발하는 대라강기가 점점 접근하여 마침내 무행의 가슴을 막 치려고 할 때! "멈추어라!" 사방을 쩌렁 울리는 위엄이 담긴 음성과 더불어 찬란한 자색의 강기가 일회자의 양손을 노리고 옆에서 날아왔다. 이것이야말로 십이 성 완성된 자하강기! 일회자는 손을 거두어야만 했다. 부득이 자하강기를 받아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퍼펑! "우우욱!" 힘에서 밀린 일회자가 뒤로 마구 물러날 때, 한 도인이 도포를 펄럭이며 무행(武 行)의 옆에 내려섰다. 가슴에 수놓아진 문양은 살아 숨쉬는 듯한 자죽(紫竹)! 자죽은 장문인(掌門人)을 상징하고 있으니 바로 무엽 진인이었다. 일회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형...!" 그랬다. 무엽 진인은 일회자의 사형이었다. 죽음 같은 침묵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믿었던 사제는 배신(背信)을 했고, 장문인인 사형은 마침내 그 사실을 알았다. "네가 아직도 나를 사형이라 부를 수 있겠느냐?" 일회자의 눈이 아래로 떨어졌다. "미안하오. 사형, 정말 미안하오. 하나 어쩔 수 없소." "무엇이 어쩔 수 없단 말이냐? 어서 스스로 공력을 폐하고 무릎을 꿇어라. 내 즉 시 장로회의(長老會議)를 소집하여 너의 처분을 결정하겠다." 일회자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오, 사형! 하지만 사형은 그럴 기회가 없을 것이오." 무엽 진인의 눈이 흔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네가 감히 불복하겠다는 말이냐?" 그의 전신에 자하강기가 더욱 짙어졌다. 자하강기! 대청강기를 제외하고는 무당의 최고 무공이니 이것을 십이 성 익힌 무엽 진인에게 일회자가 무력(武力)으로 대항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우욱! 이, 이럴 수가?" 무엽 진인의 전신을 감고 있던 자하강기가 일순간 마구 흔들렸다. 비수(匕首)! 날카로운 비수 하나가 그의 등을 찌른 채 흔들리고 있었다. "무행(武行)... 너도냐!" 믿을 수 없었다. 좀 전에 일회자에게 죽음의 위기까지 몰렸던 무행이 사부의 등에 비수를 꽂다니. 위기는 위기가 아니었던가? 무행이 냉혹하게 말했다. "미안하오, 사부! 당신이 우리 풍림서의 존재를 눈치챈 이상 제거할 수밖에 없었 소." 무엽 진인의 눈이 흔들렸다. "무슨 소리냐? 풍림서(風林誓)라니. 너희들에게 배후(背後)가 있었더냐?" 당황한 것은 일회자와 무행이었다. "그럼, 당신은...?" 당황한 무행의 말이 끊나기도 전에 웅장한 도호 소리 두 줄기가 진무전을 감쌌다. "무량수불! 일회 사제, 자네와 무행이 문파를 배신하다니... 정녕 믿을 수가 없군!" 나타난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일회자가 어찌 그들의 목소리를 모르겠는가? 일학자(一鶴子)와 일진자(一塵子)! 무당삼자(武當三子) 중 남은 둘이었다. 또한 그들은 일회자의 사형들이었다. 일회자와 무행은 느낄 수 있었다. 함정에 빠진 것은 무엽 진인이 아니라 자신들임을. 순간, 무행의 눈이 악독하게 변했다. 그의 눈에 등에 비수를 꽂은 채로 있는 무엽 진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비수가 깊숙이 꽂혔으니 주로 독맥(督脈)으로 진기를 유통(流通)시키는 자하강기는 이미 파괴되었으리라.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


하물며 자하강기가 파괴된 무엽 진인임에랴. "모두 움직이지 마라." 무행의 오른손이 꼿꼿이 펴져 무엽 진인의 목을 노렸다. 왼손은 무엽 진인의 가슴을 부여잡고 있으니, 인질을 잡고 있는 형상(形象)이었다. 슬픔과 분노가 동시에 무엽 진인을 찾아왔다. 아무리 배신한 자라고 하나 무행은 그의 제자였다. 사부를 인질로 잡아 위협하다 니! 일회자가 놀라 외쳤다. 그로서도 뜻밖의 상황이었나 보다. "무슨 짓이냐, 무행! 우리가 비록 사문을 배신하고 풍림서(風林誓)에 들었지만, 그 건 강호의 평화를 위해서였지, 도의(道義)를 잊어서가 아니었다. 한데 이런 패륜 (悖倫)을 범하다니. 어서 장문 사형을 풀어 드리지 못하겠느냐?" 무행이 냉소했다. "흥! 강호 도의라고? 무슨 잡소리냐! 난 다만 힘을 갖고 싶었을 뿐이다. 치워라. 이 렇게 된 마당에도 설교를 하다니." 무행이 손칼에 실린 공력을 돋우었다. "어서 비켜라. 그렇지 않으며 무엽 진인의 목숨은 없다." 일회자는 하늘이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럴 수가 있는가? 처음의 순수한 뜻은 모두 어디로 사라지고 풍림서가 저런 패륜의 집단으로 변했는 가? 자신이 믿어 왔던 신념이 모두 사라짐을 느끼며 일회자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 었다. 손에는 공력이 실렸고 노리는 것은 자신의 머리이니 자결하려는 자세였다. 무엽 진인의 눈에서 뻗어 나오는 노화는 극에 달했다. "네가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 무행은 냉소(冷笑)했다. "흥! 고리타분한 도를 닦으면 무슨 낙이 주어지느냐? 곧 풍림서가 천하를 지배할 것이니, 난 그때가 되면 무당의 지존이 될 것이다. 넌..."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엷어졌던 무엽 진인의 자하강기가 진해져 감을 보았던 까닭! 자하강기가 강한 자 색을 띠며 무엽 진인의 전신을 다시 지배했다. 동시에 갑주에 박혀 있던 비수는 내공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밀려서 뒤로 빠졌 다. 핑! 튕기듯이 날아간 비수는 무행의 왼쪽 어깨를 깊숙이 찔렀다. 하지만 무엽 진인의 손은 무행을 노리지 않았다. "멈춰라, 사제!" 무엽 진인이 외치는 순간, 늦게 뻗어 간 그의 오른손이 빨리 움직인 일회자의 오 른손보다 오히려 빨리 일회자의 머리에 도착했다. 일회자가 힘을 잃고 서서히 옆으로 쓰러지는 순간! 무행도 모든 힘이 사라짐을 느 꼈다. 주위로 무당이자가 굳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끝! 무행에게 있어 이 순간은 정말로 끝이었다. * * * "누가 내게 서찰을 보내고 갑주를 준비하게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급한 것은


풍림서(風林誓)라는 음모집단이다. 그들이 이처럼 본 파에 깊이 암약하고 있었음에 도 우리가 몰랐다는 것은 다른 문파 역시 마찬가지라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무엽 진인은 나직이 말했다. 그의 앞에는 일학자와 일진자가 앉아 있었다. 사안(事案)의 중요성을 생각해 다른 문도들에게는 아직 알리지 않았다. "어떡하면 좋겠나, 사제들?" 일학자가 말했다. "일단 입이 무거운 제자들을 몇 명 뽑아서 나머지 구파의 장문인들과 천추학림, 그리고 천외성(天外城)에 알려야 합니다. 공동 대처함이 옳을 것 같습니다." 무엽 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회자가 무당뿐 아니라 나머지의 구파, 심지어는 천외성까지 풍림서의 간세가 뻗 쳐 있음을 시사한 바 있으니 이런 조치는 당연했다. "우선 날랜 제자 열한 명을 어서 뽑도록 하게. 어쩌면 이 일은 무림 전체의 위기 일 수도 있으니." 무당! 도가제일지 무당에서 이렇게 풍림서의 꼬리가 처음 드러나고 있었다. 누가 서찰을 갖다 놓았는가? 바람! 풍림서의 꼬리를 드러내는 용선풍(龍旋風)! 3 혈풍(血風)은 무당에서만 불었던 것이 아니었다. 소림과 아미, 화산에도 불었다. 소림에서는 공(空) 자 항렬의 개공(皆空) 대사가 반도임이 밝혀졌다. 그는 지공의 위이고 현공의 아래이니 장문인의 사제라는 신분이며 또한 장로직에 있었다. 아미도 마찬가지였다. 장로급에 속하는 태을사태가 장문인 금정 신니를 암습했다. 비록 사로잡히기는 하 였으나, 만일 미리 알려 준 서찰이 없었다면 위험한 사태가 생겼을지도 몰랐다. 화산의 피해가 가장 심각했다. 전대의 장로였던 옥룡자가 반도였음이 드러나며 그의 암습에 화산검성이 치명상을 당했던 것이다. 화산검성은 옥룡자를 조심하라는 서찰을 보았음에도 믿지 않고서 오히려 그와 상 의를 하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다행히 무림이옥(武林二玉)의 하나인 화산옥기린(華山玉麒麟) 매일도의 빠른 대처 로 인해 난은 진압이 되었다. 어쨌든 구파를 대표하는 네 개의 문파에 동시에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큰 반향을 무림에 불러 왔다. 온 강호가 들썩거렸다. 사 개 파에서 나온 전갈들이 구파와 천추학림 그리고 천외성을 향했음을 듣고서 강호인들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강호인들의 머리를 누르는 질문은 하나였다. 풍림서(風林誓)! 과연 그들은 누구인가? 은밀했던 풍림서의 움직임을 서찰로 알려 준 자들의 정체에 대한 의문은 그 와중


에 묻혀 갔다. 그러나 그 의문만을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다. 누구겠는가? 꼬리를 마침내 강호에 드러내게 된 자들! * * * "마침내 우리가 알려지고 말았다." 말은 나직했지만 옥룡을 잡은 손은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 과연 누가 우리의 정체를 이처럼 쉽게 강호에 알릴 능력이 있는가?" 말을 하는 청의인의 전신은 흡사 한 겹의 서리가 내린 듯 파란 얼음같은 경기(勁 氣)로 감싸여 있었다. 그의 말을 받은 자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전신이 불에 휩싸인 듯 홍의가 이글거리 는 중년인이었다. "역시 초의(草衣)겠지. 그의 제자인 진소백이 비응방의 일에서도 우리의 일을 방해 했으니..." 나무처럼 딱딱한 녹색의 피부를 가진 복면인이 말을 받았다. "초의가 단심맹이란 조직을 결성했음을 들었다." 장내에는 황색과 흑색의 경기로 싸인 중년인도 둘 있었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 지 않고 나머지 셋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청의인이 옥룡을 매만지며 결정을 내리듯 말했다. "우리가 드러난다면 결정은 두 가지 중 하나다. 드러난 꼬리를 자르든지, 아니면 전면전으로 나서든지." 그는 선언하듯 말했다. "각자 의중을 밝혀라. 싸우든지, 물러서든지."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세 방향에서 세 가지 색의 강기가 뻗어 나와 바닥을 때렸 다. 퍼엉! 흙먼지가 하늘을 가렸다가 가라앉자 흡사 도공이 수년간 정성들여 판 것 같은 거 대한 삼(三) 색(色)의 글씨 셋이 바닥에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전(戰)' 청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黃)과 흑(黑)이 기권하였으나, 셋의 의견이 모아졌으니 결론(結論)은 난 셈이 다."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싸운다. 강호의 평화를 위해 나섰으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의 이상향을 만들어 내고 만다." 청의인의 말을 받아 그들이 동시에 외쳤다. "오룡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풍림의 맹서가 영원하기를!" 마침내 정체가 드러난 자들! 강호(江湖) 전체와 싸우더라도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고 다짐하는 자들! 풍림에서의 맹서! 풍림서인가? * * * 천외성(天外城)! 그대가 강호인이라면 눈을 바로 뜨고 이 경외의 성을 쳐다봐서는 안 된다. 혈왕교의 혈황(血皇)을 물리쳤던 신화 속의 무인 천외무황(天外武皇) 사무적을 낳


았으며, 지금은 당당히 군림하며 강호의 안녕을 지켜 주고 있는 살아 있는 강호의 성지! 그러나 천외성의 세력은 당금에 이르러 서서히 약해지고 있었다. 성주인 천무(天武) 사경천(獅敬天)이 이름 모를 병에 걸려 병석에 누운 지 벌써 삼 년! 다행히 그의 아들 광명협(光明俠) 사도명(獅道明)이 천외성의 일을 맡고, 옆에 서 병서생 좌고학이 도우니 곧 옛날의 성세를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사람들은 믿 었다. 무엇보다 강호인들이 천외성에 갖고 있는 강한 신뢰가 천외성의 가장 큰 자본이었 다. 병서생 좌고학(左孤鶴)! 천외성의 제삼인자이며 무림의 동향에 대한 정보 수집과 기찰을 담당하는 만리탐 (萬里探)의 주인이기도 한 사람! 몸에 절맥이 있는 탓에 항상 안색이 누랬으며 무공을 익히지 못한다 한다. 그러나 두뇌만은 가히 따라갈 사람이 없는 천재이니 그가 무공이 없는 몸으로 천 외성의 삼인자의 자리에 올랐음은 강호의 살아 있는 신화였다. 좌고학이 천외성의 인물들 중 무림의 사(四) 파(派)에서 있었던 변고를 가장 먼저 알게 됨은 당연했다. 천외성으로 들어오는 모든 보고는 만리탐을 거쳐야 하므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좌고학은 앞에 소림과 무당, 아미, 화산에서 들어온 전갈을 두고서도 그는 한참을 고민했다. "풍림서(風林誓)라...! 과연 성주께 보고를 해야 하는가?" 좌고학은 망설였다. 요즈음 성주(城主)의 몸이 더 악화되었음을 아는 까닭이었다. 그는 망설이다 역시 사도명과 먼저 상의함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 * *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광휘(光輝)와 같은 기도. 만일 그를 직접 만나 본다면 누구라도 그의 별호가 정말 잘 지은 것임에 동감할 것이다. 광명협(光明俠)! 우뚝 솟은 천외성 안에서 새로이 솟은 거목! 병석에 누운 아버지를 대신하여 천외성의 일을 처리해 나가고 있는 천외성의 제이 인자! 그는 지금 병서생이 보여 준 자료를 보며 신음하고 있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오." 병서생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렇���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풍림서란 집단이 이처럼 치밀하니 우리 천외 성 역시 간세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그랬다. 구파에 그처럼 은밀히 암약한 풍림서(風林誓)였으니 어찌 천외성을 소홀히 했겠는 가? 사도명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탐주(探主)께서는 혹시 아버님께 은밀히 쓰인 독(毒)... 그것이 풍림서란 자들의 짓이라 의심하는 게요?" 병서생이 조심스레 말했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있습니다."


사도명은 신음했다. 만일 성내에 있는 풍림서의 간세가 사경천에게 독을 쓴 것이라면 분명 지위가 높 은 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함부로 이런 짐작들을 발설할 수도 없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마침내 말했다. "일단은, 이런 가능성은 우리 둘만 알고 있고..." 마지막 말은 전음이었다. "혹시 이런 일, 간세를 조사할 만한 인물로 믿을 수 있는 자가 없겠소?" 병서생이 잠시 생각하더니 종이에 썼다. <일람무의(一覽無疑) 진소백(鎭小栢)!> 무공이 없어 전음을 전개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사도명이 다시 전음으로 물었다. "그가 작년 비응방의 일을 해결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소! 혹시 그때 잠시 말 이 나왔었던 풍림서(風林誓)란 것이 지금 이것과 같은 세력인 것이오?" 질문은 하긴 했지만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런 희귀한 이름의 문파가 강호에 둘일 가능성은 희박하지 않은가? 병서생도 이 런 점을 알기에 그저 머리만 끄덕였다. 다시 사도명의 전음이 들렸다. "하지만 그 진소백이란 자는 믿을 수 있소?" 병서생이 말없이 붓을 들어 다시 바닥에 썼다. <신승지맥(神僧之脈)!> 신승은 초의 선사를 말함이니 그의 제자란 뜻이다. 사도명이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에게 부탁하시오. 가능한 한 빨리!" 말은 열심히 뛰었다. 그러나 말 위에 탄 전령의 마음은 더욱 급했다. 그렇지만 서두르기는 했으나, 무슨 일로 낙양에 가야 하는지는 전령도 알지 못했 다. 그저 한 사람을 찾아 백지 한 장을 전해 주라는 황당한 명령이 내려졌을 뿐이다. 어쨌든 전령이 이처럼 급히 찾아가는 사람은 누구일까? 당연하지 않는가? 일람무의(一覽無疑) 진소백! * * * 단심평(丹心坪)!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중년인은 다리에 묶인 전신통 안에서 나온 종이를 펼쳤다. 낡은 옷의 노인이 궁금한 듯 물었다. "뭐라고 적혀 있는가?" 중년인이 말없이 종이를 보여 주었다. 종이에 쓰인 것은 단지 세 마디였다. <풍락풍(楓落風).> 단풍을 떨어뜨리는 바람! 노인은 알 수 있었다. 용선풍이 무사히 불었음을. 노인이 손을 흔드는 듯하자 움직임이 보이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종이가 중년인의 손으로 넘어가 있었다.


중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 "과연 공공신수(空空神手)의 빠르기는 대단합니다." 그의 칭찬은 노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노인은 그저 걱정이 될 뿐이었다. "우리가 세상에 남긴 끈은 그 아이뿐이네. 휴! 이제 풍림서의 반격이 있을 것이 니..." 만일 풍림서가 갑작스럽게 자신들이 세상에 드러난 것에 의구심을 가진다면 당연 히 그들의 이목은 진소백의 행동에 집중될 것이다. 이것은 일 년 전 비응방의 일에 풍림서가 개입되어 있음을 알고 난 후부터 계획되 었던 것이다. 단심맹은 일부러 진소백이란 끈을 남겼었다. 풍림서의 이목이 그쪽으로 쏠린다면 다른 사람의 활동은 얼마나 수월해지겠는가? 하지만 풍림서의 모든 견제와 공격을 받을 진소백, 그는 어찌 되는가? 노인 철혈 개는 한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네 임무가 정녕 막중하구나, 소백아." 그는 아무도 없는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중년인도 다만 앉아 있을 뿐이었다. ♡ 제 6 장 바람은 진소백을 천외(天外)로 내몰고. 1 파르스름한 안개가 흘렀다. 안개는 안개가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흩어지는 것 같은 신법을 지닌 여인, 벽하였다. 그녀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자 냉엄한 음성이 가득 울려 퍼졌다. "이번의 실패가 얼마나 중대한 의미인 줄 아느냐? 만일 연옥천이 말을 하게 된다 면... 우리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벽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음성이 증오를 담고 허공에 나타났다. "진소백, 그놈이 천외성으로 올 것이다. 벽하(碧霞)! 네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 마." 음성, 옥룡을 만지는 중년인의 음성이 거역할 수 없는 힘을 담고 흘렀다. "그를 처치하라. 무슨 수를 쓰더라고 천외성에 도착하는 것을 막아라." 벽하가 고개를 숙였다. "존명! 벽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그녀는 다시 안개로 흩어졌다. 벽하가 사라지자마자 그녀가 있었던 자리, 그 빈 공간에 회색의 그림자가 다시 나 타나지 않는가? 음성이 다시 울렸다. "회랑(灰狼)! 초의를 추적하라. 모든 방법을 동원하라. 전면적인 지원이 있을 것이 다." 회색 그림자의 입 부분이 떨리며 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알겠소. 하지만 명심하시오. 그의 목숨은 내 몫이오." "...알았다. 가거라."


회영(灰影)은 나타날 때보다 더 빠르게 사라졌다. 빈 공간! 죽음의 냄새만이 피어올랐다. * * * "하, 이것 참 신기하단 말야?" 진소백은 머리를 툭툭 치며 서찰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옆에는 천외성의 전령이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보며 서 있었다. 이곳은 취보(鷲堡). 우여곡절 끝에 그는 마침내 진소백을 찾는 일에 성공한 것이다. 천외성의 전령이 란 신분이 막강한 도움을 줬음은 물론이었다. "소성주(小城主)께서는 한시라도 빠른 답장을 원하셨습니다." 전령은 옆에서 재촉하지만 서찰에 무슨 내용이 있어야 답장을 쓸 게 아닌가? "좋아, 뭐 무슨 뜻인지는 대충 알겠으니까!" 진소백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백지를 들더니 접어서 죽 찢었다. 한 번만이 아니다. 네 번을 반복하여 찢으니 종이는 모두 열여섯 개의 조각이 되어 버렸다. "이걸 갖고 가시오. 그리고 난 사흘 내로 가겠다고 전해 주시고." 전령은 고개를 갸웃하며 종이 조각을 받았다. 무슨 짓인지는 모르지만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연충이 멀리서 이 모습을 보고 있다가 다가와서 물었다. "진 숙부, 아까 그게 무슨 뜻이에요?" "별로, 아무런 뜻도 없다. 그 백지 편지를 보낸 병서생(病書生)을 좀 고생시키려는 뜻 외엔!" 그는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 그가 머리 쓰는 일을 너무 좋아하니 그냥 장난 한번 쳐봤을 뿐이다. 하하 하!" 잠시 후 웃음을 멈춘 진소백이 연충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차도(差度)가 있으시냐?" 연충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눈만 깜박이실 뿐." "그분 몸 속에 선천의 진기가 서서히 움직이고 있으니 언젠가 다 나으실 것이다. 다만..." 진소백이 나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번 일에 숨은 의미가 매우 중요한 듯하니 빨리 깨어나셔서 말을 할 수 있으시 면 좋겠는데..." 강호에서는 때때로 죽은 사람조차 말을 하기도 한다. 연옥천은 죽지 않았으며 이미 깨어났는데 입을 열지 못하니 진소백은 답답하기만 했다. 그가 말을 할 방법은 없는 걸까? 진소백이 하늘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천외성에서 나를 초대했으니 난 내일 아침 떠나겠다. 휴! 그 전에 연 보주께서 말 을 하실 수 있게 되면 좋으련만." 하늘에 구름이 흘러갔다. 그 모양은 천하를 닮았으니, 어떤 것도 동일한 것은 없으되 서로 닮았고, 맑게만


보이되 뇌성폭우(雷聲暴雨)가 내장(內藏)돼 있었다. 천하! 평화롭게만 보이는 속에 이미 먹구름은 잔뜩 끼어 있었다. * * * 전령으론 이틀이 꼬박 걸리는 거리(距離)였지만 전서구로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천외성이 있었다. 태산(泰山) 산중! 천외성은 두 개의 봉우리를 감싸며 건설되어 있었다. 전서구(傳書鷗) 다리에 달린 전신통은 곧바로 좌고학에게 전해졌고 좌고학은 또한 사도명을 즉시 찾아갔다. "연락이 왔습니다." 사도명이 반색했다. "어서 열어 봅시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합니다." 전신통에서 나온 것은 매우 얇고 작은 전신(電信)과 열여섯 개로 찢어진, 병서생이 보냈던 백지가 나왔다. "무슨 뜻이오, 이것이?" 병서생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답했다. "과연! 과연 진소백이란 자는 믿을 만하겠군요." 사도명은 답답했다. "설명해 주시오. 무슨 뜻이 있는 게요?" 병서생이 설명을 시작했다. "제가 처음에 서신을 백지로 보낸 것은 그만큼 사정이 급함과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병서생의 행동은 남달랐다. 아마 진소백이란 자가 이러한 것들을 유추해 낼 만한 그릇인지의 시험도 의도 중 하나였으리라. "그런데 그는 우리가 불렀다는 말을 듣지도 않고서 사흘 안에 오겠다는 전갈을 보 냈습니다. 낙양에서 태산까지 사흘이라면 빠듯한 거리이니 최대한 서둘겠다는 의 미." "급하다는 뜻을 이해한 것이로구먼." "그렇습니다. 또한 이 열여섯 개의 조각을 보십시오." 사도명이 궁금한 듯 물었다. "그건 또 무슨 뜻이오?" "소성주께서도 아시다시피 본(本) 성(城)의 주요 세력은 모두 열여섯 명의 수장(首 長)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명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아하, 그렇다면 종이를 열여섯으로 나누어 보낸 까닭은...!" "그렇습니다. 적어도 열여섯 상위의 인물들 중에 배반자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 지요." "그렇다면 그는 백지 서찰이 가진 두 번째 뜻도 이해한 것이로군요." 병서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쩌면 진소백의 능력은 우리 예상보다 훨씬 뛰어날지 모릅니다. 아마도 그는 우 리를 대신해 배반자를 잡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휴! 천하제일성에서 외부의 도움을 받아 반도를 잡아야 한다니...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병서생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지금 믿을 사람은 저희 둘뿐인 데다가, 만일 우리가 함부 로 움직인다면 성주의 생명이 위험합니다. 다행히 진소백이 비밀리에 적의 정체를 밝혀 준다면... 그렇게 되길 바랄 뿐입니다." 말을 마친 병서생은 벽에 걸린 중원 전도(全圖)를 바라보았다. 중앙에 우뚝 솟은 태산 위에 다시 솟아 있는 천하제일성 천외성(天外城)! 백여 년 간 강호의 수호자로, 정신적인 지주로 군림했던 천외성에 이제 서서히 바람이 불 려 하나? 천무 사경천! 천하의 수호자인 그가 독에 당해 쓰러졌다니. 하지만 이 일은 강호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천외성에서 의도적으로 숨긴 것 일까? 천외성으로 부는 바람. 그 바람을 따라 진소백은 길을 떠났다. 2 먼 길을 가는 데 마차만큼 편한 게 또 있을까? 안락한 침상만 하나 준비한다면 편안히 누워 자는 사이에 어느 틈엔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으니. 하지만 때때로 마차조차도 편안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삐걱, 삐거덕! 마차바퀴가 소리를 내는 것은 결코 낡아서가 아니었다. 아무리 잘 만든 마차라도 계속 이런 속도로 달린다면 소리를 낼 수밖에 없을 것이 다. 태산까지 사흘이라니! 마차를 끄는 말이 무슨 적토마라도 되는 줄 아나? 마부가 툴툴거리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처럼 서두는 것은 당연히 손님이 내민 돈 때문 이었다. 은자 열 냥! 마차를 몰아 은자 열 냥을 벌려면 꼬박 열 달 이상을 일해야 한다. 한데, 마차 안 에서 편안히 잠을 자고 있는 저 빌어먹을 청년은 그 열 냥을 착수금(着手金) 조로 내밀지 않는가? 게다가 사흘 안에 도착한다면 스무 냥을 더 준다 하는데, '눈 뒤집어지지 않을 놈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가다가 말이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좋았다. 그래도 열 냥은 건지고 운이 좋으면 스무 냥 더 벌게 되는 것 아닌가? 마부는 뒤 를 흘낏 돌아보았다. 흔들리는 마차라 결코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건만 쿨쿨 잠들어 있는 청년! '빌어먹을 놈, 편하게 잘도 자는구먼. 돈만 많아 가지고...' 마부는 자신만 고생하는 게 못마땅했지만, 돈이면 귀신도 굽실거린다지 않는가? 그는 마음을 추스르며 말을 재촉했다. "하! 어서 가자. 태산은 먼 길이다. 핫!" 우두두두!


삐걱, 삐걱! 말은 달렸고 마차 바퀴는 삐걱거렸다. 뿌연 모래먼지를 피워올리며 달리는 마차! 뒤에 탄 채 계속 잠만 자고 있는 청년은 과연 누구인가? * * * 같은 시간! 역시 낙양에서 출발하여 마차와는 다른 길을 통해 무서운 속도로 태산을 향해 달 려가는 신형이 있었다. 강호고수들이 경신법을 사용한다면 물론 말보다 빠르다. 하지만 계속 사용한다면 지치게 되므로 가능하면 말을 사용하는 것이 무림인에게는 일반적이었다. 하나 이 신형은 한참을 달려도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 때로는 황하 줄기를 타고, 때로는 경신술로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청년! 이 청년은 또 누구인가? * * * 두두두두! 말은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틀 전의 그 말들이 아니었다. '기적이다. 스무 냥이 보이는구나!' 마부는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그는 여기까지 오면서 말을 세 번 바꾸었다. 그때마다 돈은 뒤에 탄 청년이 냈으니 자신은 전혀 손해날 것이 없었다. 이제 남은 길은 구백여 리 남짓. 하루의 여유가 있으니 시간은 충분했다. '야, 이거 돈이 걸려 있으니까 사흘 만에 태산에 올 수가 있구나. 돌아가면 자랑해 야지.' 마부가 돈 벌 생각과 모험담을 늘어놓을 생각에 싱글거리며 말을 몰 때 청년은 비 로소 낮잠에서 깨어난 듯 보였다. "깨어나셨습니까?" 마부가 기분이 좋아져 묻자 청년이 대답했다. "예. 그런데 이제 얼마나 남았습니까?" "한 구백여 리 남았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요. 내일까진 충분히 도착할 것입니 다." 그 말을 듣자 청년도 기분이 좋은지 싱글거렸다. 그는 뒤로 벌렁 누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랄랄라 낙양에서 태산까지 랄라라 사흘 만에 도착하네 랄라라 내일이면 도착하니 랄라라 나는 돈을 벌게 되네 랄라라 광풍이 운이 좋아 랄라라 낙양에 있었으니 나는 편하네, 랄라라 내일이면 랄라라 나는 돈을 벌고 돌아가겠네. 마부는 속으로 웃었다. 그는 청년의 노래가 자신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달리던 마차는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큰 나무 한 그루가 땅에 쓰러져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을 멈춘 마부는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목에 검을 댄 청의인들의 표정에서 무서운 살기(殺氣)를 읽었기 때문이다. 이십여 명의 청의인들은 모두 허리춤에서 칼을 빼어 들고 살기 등등하게 서 ���었 다. 그 사이로 스르르 유령(幽靈)처럼 내려앉는 푸른 안개와 같은 여인! 벽하(碧霞)였다. 벽하는 마차를 향해 서서는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소백! 당신의 이름은 이제 강호상에 제법 알려졌어요. 계속 그렇게 나오지 않는 다면 겁쟁이로 소문이 날 거예요. 두렵지 않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해서 흡사 연인을 불러 내는 것 같았다. 하나 그녀가 진소백을 연인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음은 모두가 안다. 벽하는 진소 백을 죽이기 위해 여기 왔을 뿐이다. 잠시 후, 문이 삐걱 열리더니 엉거주춤한 자세의 청년이 나왔다. "사, 살려 주십시오." 청년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순간 벽하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그녀는 진소백을 보지는 못했지만 알고는 있었다. 그가 초의 선사의 제자이며 지닌 바 무공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 당연히 기도가 남다를 것이 아니겠는가? "넌 누구냐?" 벽하가 냉랭하게 물었다. 청년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 전 안복(雁福)이라고 합니다요. 여협께서는 왜...?" 벽하가 두 눈 가득 노기를 담으며 물었다. "넌 진소백이란 놈을 아느냐?" "예, 압니다요. 그분이 저에게 사흘 안에 마차를 타고 태산에 도착하면 은자 오십 냥을 준다고 했습니다요." 벽하의 눈에 낭패의 빛이 어렸다. 그녀 옆에 서 있던 청의인 한 명이 차게 외치며 청년에게 검을 겨누었다. "이놈의 자식, 거짓말하지 마라! 영주(令主), 이놈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이 분명합 니다." 하지만 벽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자의 기도는 전해 들은 진소백의 기도와는 너무 다르다. 다른 것도 아 니고 무의식중에 풍겨 나오는 기도(氣度)가 어찌 달라질 수 있겠느냐?" 청의인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청년의 눈은 흐릿한 게, 도저히 신승(神僧)의 제자라고 볼 수 없었다. 하면 자신들 이 속은 것인가? 이때 어디선가 청의인 한 명이 급히 뛰어오며 말했다. "전갈입니다, 영주(令主)! 한 명이 가공할 신법으로 제삼선(第三線)을 돌파했다 합 니다." "삼선이라면, 제남(濟南) 방면이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쪽으로 전력이 몰리면서 약해진 저지선(沮止線)이 뚫리고 말았습니


다. 황하(黃河)를 타고 올라온 듯합니다." 벽하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런! 당했다. 어서 뒤의 제칠, 제팔 저지선에 연락을 보내라. 진소백을 태산으로 보내서는 안 된다." 너무도 급한 나머지 벽하의 신형이 흩어지지도 않고 날아오를 때, 청의인 한 명이 그녀에게 급히 물었다. "이자들은 어찌할까요, 영주(令主)?" 벽하(碧霞)의 회성음(回聲音)이 들려 왔다. "내버려둬라. 어차피 그들도 이용당했을 뿐이니." 청의인들은 떠나갔다. 마부는 다른 건 몰랐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자신들이 죽었다 살아났다는 사실! 그는 청년에게 슬그머니 화가 났다. 죽을힘을 다해 말을 달린 건 자신인데, 청년은 오십 냥을 받고 자신은 삼십 냥만 을 받다니! 마부는 따지려고 청년에게 다가갔다. 순간 그는 청년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저 여인은 의외로 성정(性情)이 곱구나." 목소리는 낭랑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절대 좀 전까지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아니 었다. 청년이 고개를 돌리자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마부는 도저히 화를 낼 수가 없음을 알았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氣運)이 전신을 감싸 와서 감히 말조차 꺼내기 힘들었다. 청년이 물었다. "많이 놀랐겠구려. 다친 곳은 없소?" 마부는 자신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예? 예!"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와 말을 보았다. "말과 마차는 무사하니 어서 갑시다. 내일까지 태산에 도착해야만 하지 않겠소?" 청년은 말을 하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길을 막고 있던 아름드리 나무가 무언가에 밀린 듯 굉음을 내며 뒤로 물러 나지 않는가? 마부는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청년은 힘을 숨긴 신인(神人)이었던가? 마부는 얼떨떨한 정신을 가누지 못하고 마차에 타고 말채찍을 들었다. "야하!" 마부의 출발음을 들은 말들은 다시 태산을 향해 달렸다. 아직은 조금 남은 오후의 햇살 아래로 청년의 노래가 다시 울려 퍼졌다. 랄라라 제자가 노자에게 물었네 랄라라 인간의 기도(氣度)란 어떤 모양입니까? 노자가 대답하기를 랄라라 물과 같으니 어찌 보이겠는가? 모든 것이 흘러가는 물과 같으니 어찌하여 보이는 것만 믿겠는가?


랄라라 랄라라 나는 이렇게 편안히 가지만 광풍개는 얼마나 힘이 들 건가? 그가 사천을 떠나 랄라라 낙양에 온 것 또한 운명이려니 멍청한 푸른 안개는 랄라라 광풍만 쫓아가네 랄라라 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착하니 광풍이 위험하진 않겠네 랄라라 랄라라 자욱이 일어나는 모래먼지! 저녁이 가까워지는 시간에 청년의 노랫소리에 맞춰 마차는 멀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정월 초나흘이니 새해가 들어 노래 부르는 청년에게는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3 흑혈산(黑血山)! 산이지만 산이 아니었다. 기이하게도 한 문파의 이름이었다. 흑혈산은 심지어 산중에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이 문파는 산(山)이란 호칭으로 불리는 것일까? 어둠 속! 혈포인이 입을 열어 말했다. "구결(口訣)이 우리 손에 들어왔습니다." 음성은 주위의 어둠조차 얼어붙게 만들 지경으로 차가웠다. 말을 받는 흑포인의 음성 또한 결코 따뜻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이제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 얼어붙었던 어둠을, 공포로 산산이 깨지게 하는 음성이 들려 왔다. "준비하라. 이제 강호는 지난 세월의 보상을 받게 되리라. 어둠 속에 감금되었던 우리들의 한을 보게 되리라. 크흐흐! 이제 마지막 남은 하나의 구결만 구해진다 면... 크하하, 기다리거라 천하여! 네 죽음을 기필코 보리라. 크하하하..." 괴소에 어둠이 깨졌지만 속에서 나타난 것은 밝음이 아니었다. 섬뜩한 피의 기운! 더불어 참기 어려운 공포만이 줄줄 흘렀다. 어둠 속! 이곳은 흑혈산(黑血山)이었다. 흑혈산은 결코 산이 아니었다. * * * 벽하는 이미 제남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녀가 도착해서 수하들에게 들은 보고는 광풍처럼 자신들의 삼선(三線)을 돌파한 자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무슨 말이냐?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녀의 노갈에 삼선을 맡았던 삼대장(三隊長)이 고개를 숙였다. "칠, 팔 저지선에서는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 합니다. 제남 안에서 몸을 숨긴 것이 분명합니다." "무슨 소리냐? 그는 천외성으로 향하고 있다. 칠, 팔 저지선을 뚫지 않고는 천외성 으로 갈 수가 없지 않느냐?"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백의인이 칠, 팔 저지선(沮止線)을 통과하지 않았다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벽하는 문득 뭔가 생각이 난 듯 급히 삼대장에게 물었다. "송태령(松台嶺)에서 천외성으로 가는 길목에는 누가 있느냐?" "오대장과 육대장이 있습니다." 벽하는 서둘러 명령했다. "어서 그들에게 전신을 보내라. 마차를 타고 가는 청년을 꼭 막으라고. 여의치 않 다면 죽여도 좋다." 삼대장도 영문을 알 수는 없었지만 벽하의 서두름이 전염되어 급히 전서구를 준비 했다. 하나 그들은 서둘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이미 오대장과 육대장이 보낸 전서구가 도착해 있었으므로. 전신에 적힌 글은 간단했다. 하지만 벽하는 뒷머리를 흐르던 피가 모두 아래로 몰리는 듯한 느낌을 피할 수 없 었다. <제오, 제육 저지선 돌파! 마부와 청년이 탄 마차 한 대가 저지선을 뚫고 천외성 (天外城)으로 향했음.> * * * 광명전(光明殿)! 천외성 중에서도 특별한 곳으로 꼽히는 장소였다. 이곳은 항상 밝았다. 그리고 지금은 광명협(光明俠) 사도명이 앉아 있음으로 인해 더욱 밝았다. 사도명의 앞에는 술병과 잔 세 개가 놓여 있었다. 그가 술을 마시는 일은 드물었다. 하물며 대낮에 술을 마시는 일은 정말로 찾아 보기 힘들었다. 지금 술병을 두고 앉아 있는 것은 누구를 기다림이지 혼자 마시기 위함이 결코 아 니었다. 잔은 세 개! 그가 두 명을 기다림은 확실했다. 첫 번째 사람은 곧 왔다. 얼굴은 병자(病者)의 기색이 완연한 황색(黃色)이며, 천외성 사람답지 않게 경신술 도 전개하지 못하는 서생! 병서생 좌고학(左孤鶴)이었다. 그의 곁에는 항상 만리탐(萬里探)의 가장 뛰어난 두 고수인 만리쌍위(萬里雙衛)가 있었지만 지금만은 예외였다. 소성주이며, 또한 성주가 아픈 지금 성의 업무를 총괄하는 사도명을 만나러 왔기 때문이었다. 좌고학을 본 사도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아직 오지 않았소. 그의 행로에 관한 첩보(諜報)가 있으시오?" "몇 가지가 만리탐의 촉각에 잡혔습니다. 보시겠습니까?" 좌고학이 소매 사이에서 종이 조각 몇 개를 꺼냈다. 이런 작은 기름종이는 전서구를 이용한 전신에 사용하는 것이니 만리탐의 탐객(探 客)들이 보내 온 전신을 그대로 가져 왔음이 분명했다. 사도명은 세 장의 종이를 읽어 보았다.


<탐객번(探客番) 일백이십삼호 전(傳). 천외성 구백사십 리 전(前), 송태령(松台嶺). 십칠 명의 청의인이 마차를 세움! 청의인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것은 영주라 불린 여인. 마차의 출발지는 낙양으로 보임. 마부와 청년 하나가 타고 있었음. 청년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여인과 얘기를 했고, 대화 도중 다른 곳에서 청의인이 연락을 가져 오자 바로 물러났음. 물러난 방향은 제남(濟南) 방면. 청의인들이 사라지자 청년과 마부는 다시 마차를 타고 태산으로 향함! 주(註). 청년의 무공은 아름드리 나무를 장력으로 밀어 낼 정도로 뛰어났음. 영주란 여인 은 청년의 무공을 보지 못했음.> 첫 번째 서신은 청년이 마부와 함께 당했던 소식을 세밀히 전해 주었다. 천외성의 눈과 귀라는 만리탐의 이목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알 수 있는 순간이었 다. 사도명의 눈길이 두 번째 전신지(電信紙)로 향했다. <탐객번 일백십오호 전(傳). 황하(黃河)의 지류(支流), 제남(濟南) 남서쪽 오십 리. 청의인들이 매복하며 암격을 준비하고 있었음. 한 명의 백의인이 무서운 속도로 청의인들의 매복을 돌파! 천외성 방면으로 향하 던 백의인은 제남 안에서 사라졌음. 청의인들도 그의 행적을 찾는 듯!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음. 주(註). 백의인은 제남의 어딘가에 숨은 것으로 보임. 그는 원래 천외성을 향한 것이 아니었거나, 청의인들을 피해 잠시 숨은 것으로 사 료됨.> 사도명은 고개를 들어 좌고학을 보았다. "이들 청의인은 도대체 누구요?" "진소백을 움직임으로써 얻은 첫 번째 성과입니다. 그들은 진소백이 본 성에 들어 옴을 막으려 함이 분명하니 본 성 내에 있는 첩자(諜者)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짐 작됩니다." 사도명이 굳은 어조로 물었다. "이들의 정체를 알아 내지는 못하셨소?" "아직은! 하지만 곧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금호탐객(金號探客) 세 명을 이 일에 배치했습니다." 만리탐의 탐객들은 모두 삼 등급으로 나뉜다. 가장 위가 금호탐객이며 그 아래로 은호(銀號)들과 옥호(玉號)들이 있었다. 금호탐객 한 명이 다섯 명의 은호를 거느리며 은호 한 명은 또 다섯 명의 옥호를 거느리니 세 명의 금호탐객은 곧 칠십오 명의 옥호탐객들이 배당되었음을 뜻한다. 사도명은 청의인들의 정체가 곧 드러날 것임을 믿었다. 그는 세 번째 전신을 읽기 시작했다. <탐객번 오십사호 전(傳).


천외성 서쪽 칠십오 리. 십여 명으로 이루어진 청의인들의 포위망 두 무리를 마차 하나가 뚫고 갔음. 마차 안에는 한 청년이 타고 있었고, 그는 놀라운 무위(武威)로 앞을 막은 청의인 들을 상대했음. 마차가 향하는 방향은 천외성! 주(註). 거리와 마차의 속도로 미루어 추측컨대 반 시진 이내에 천외성에 도착할 수 있을 듯.> 사도명이 껄껄 웃었다. "하하, 처음의 마차에 탔던 겁쟁이 청년이 진짜 진소백이었다는 말이지. 하하, 대 단하군." 좌고학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 앞을 막는 세력이 있음을 그는 미리 짐작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세력 의 정체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작년에 비응방에서 풍림서란 세력과 부딪친 일이 있으니까요." 사도명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쨌든 그의 능력을 시험할 필요는 없어진 듯하군." 사도명은 주위를 둘러보며 허공에게 말을 거는 듯 명령했다. "이제 물러가라. 너희의 할 일이 없어졌구나." 그의 말이 떨어지자 믿기 힘들게도 광명전 주위의 숲이 미미하게 우는 소리를 내 지 않는가? 어찌 숲이 울겠는가? 비밀리에 움직이는 무인들에 의한 미성(微聲)이 모여 들리는 소리였다. 좌고학은 내심 감탄했다. 숲에서 움직이는 자들에 대해 알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자신조차 모르는 무인들을 사도명이 개인적인 수하로 갖고 있다니. 숨겨진 사씨가 문의 개인적인 수하들의 수는 도대체 얼마나 될 것인가? 어쨌든... "어쨌든 그의 능력으로 미루어 곧 이곳에 당도할 것 같습니다." 사도명도 동의했다. 진소백은 영주란 여인을 상대하여 겁쟁이로 기도를 바꿔 보임으로써 한 번은 싸우 지 않고 청의인들을 따돌렸다. 이것은 말이 쉽지, 상대방이 무형중의 기도(氣度)를 알아볼 정도로 뛰어나야 하는 것이니 그 실행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런 고도의 심계를 쓸 수 있는 인물이라면 아마 천외성의 방어도 쉽게 뚫을 수 있을 터였다. 사도명이 좌고학에게 동의했던 것도 이와 같은 분석의 맥락! 그들의 생각에 동의 한 걸까? 숲이 흔들리며 한 청년이 나타났다. "안녕들 하시오. 약속 시간에 맞춰 오느라 무척 바빴소이다." 백의에 웃는 입술 사이로 드러나는 이 또한 하얗다. 진소백! 자신이 약속한 시간에 맞춰 그가 나타난 것이다. ♡ 제 7 장 눈을 보면 뜻 또한 전해진다.


1 쪼르륵! 술잔으로 흘러드는 술 소리가 무척 듣기 좋았다. 이런 청아한 소리는 두 가지가 배합되어야 울릴 수 있다. 우선 잔이 아주 얇게 구워 낸 극상품의 사기(砂器)여야 하며, 둘째로는 따르는 사 람의 손이 안정되어 흐르는 술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지금 바닥에 놓인 술잔은 명공이 만든 청옥자기(靑玉瓷器)였으며, 술을 따르는 손 은 광명협 사도명이 그 주인이니, 이 두 가지가 훌륭하게 만족되어 있지 않는가! 해서 술잔을 드는 진소백은 흡사 좋은 음악을 듣고 난 후처럼 매우 기분이 좋았 다. 술잔을 내려놓을 때는 더욱 흡족했다. 좋은 술이건 나쁜 술이건 위장으로 들어가면 취하기는 마찬가지이건만 그래도 역 시 좋은 술을 마시는 것이 더 좋았다. 사도명이 다시 한잔을 더 따랐다. "이거, 오자마자 술만 들입다 권하시니... 하하." 진소백은 사양 않고 다시 한 잔을 더 마셨다. 그의 태도는 어딘가 예의를 잃은 듯했다. 하지만 사도명과 좌고학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들은 부탁을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었다. 진소백이 입을 열었다. "일 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의뢰를 받았습니다. 비응방의 심화절이란 자에게서요. 결과는..." 다시 한잔을 더 따라서 세 잔째 비운 진소백이 말을 이었다. "의뢰를 했던 심화절이 숨은 원흉 중 한 명이었습니다." 지금 이런 말은 한다는 것은 엄청난 무례였다. 의뢰를 하는 사람은 지금 사도명과 좌고학이니 '당신들이 범인일지도 모른다'고 말함과 다름이 없었으므로. 하지만 사도명과 좌고학의 얼굴에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좌고학이 조용히 말했다.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소. 결과가 어떻게 나오건 문제삼지 않 을 테니 의뢰를 받아 주시오." 사도명도 같은 뜻으로 말했다. "만일, 정말 믿을 수 없는 결과가 나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당신을 믿겠소." 진소백은 비로소 웃었다. "좋습니다. 한번 천외성에 숨은 외부의 간세를 잡아 보겠습니다. 한데... 이번에 제 가 천외성으로 온다는 것을 안 사람은 몇 사람이나 있었습니까?" 사도명이 대답했다. "아무도. 우리 둘만 알았던 일이오. 사안의 성질상 서열이 높은 십육웅(十六雄)의 다른 사람들에게조차 알리지 않았소." "그렇습니까? 하면 절 공격했던 자들은 어떻게 제 행로를 안 것일까요? 설령 제가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 하더라도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할 매복이었습니 다." 그랬다. 정말 이상했다. 어떻게 청의인들은 진소백이 천외성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았을까?


진소백이 말머리를 돌려 물었다. "그런데 혹시 청의인들의 정체를 알고 계십니까?" 사도명과 좌고학 모두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은. 그들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는 상황이라서..." "제게 몇 가지 정보가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궁(宮)이란 명칭을 사용합니다. 둘 째, 대외적인 청의인들의 활동은 영주라 불리는 벽하란 여인의 의해 통제(統制)됩 니다." 진소백이 침을 삼키고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셋째로 그들은 중수(重水)를 즐겨 사용합니다. 혹시 짐작이 가는 문파가 없으십니까?" 진소백과 사도명의 눈은 좌고학을 향했다. 세 가지의 정보가 들어왔으니 중원제일의 정보망을 자랑하는 만리탐의 탐주(探主) 인 좌고학이라면 청의인들이 정체를 알 수 있을지도 몰랐으므로. 생각에 잠겼던 좌고학이 고개를 들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중수(重水)를 독으로 사용하는 문파라면 전설의 신수궁(神水宮) 을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수궁은 도사(盜師)라 불렸던 협도(俠盜) 초류향에 의 해 이미 멸문당한 지가 오래임을 두 분 모두 아실 것입니다." 진소백은 알고 있었다. 아니, 강호의 모든 사람이 아는 사실이리라. 하지만 좌고학이 이어 말하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내용이었다. "신수궁의 멸문과 더불어 중수 역시 강호에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강호(江湖)에 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이 삼십 년 전 있었습니다. 신수궁(神水宮)이 멸문당한 지 삼십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삼십 년 전. 십 년마다 한 번씩 모이는 구파와 사대세가의 회합이 천외성에서 있었다. 검절로 유명한 남궁세가에서도 가주인 남궁호(南宮昊)가 왔었는데, 그가 묵었던 숙소에서 얼굴이 사라진 시신이 발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천외성이 발칵 뒤집어졌다. 시신이 발견된 것도 문제였지만 가주인 남궁호마저도 독에 당하여 일신의 공력이 모두 사라졌던 것이다. 어떻게 강호제일지 천외성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곧 정보 조직인 만 리탐(萬里探)이 나섰다. 하지만 한 달을 끌었던 조사에서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발견된 시신은 얼굴이 없었을 뿐 아니라 내장 또한 아무것도 없었다. 전신에 특징(特徵)이랄 게 하나도 없으니 어찌 신분을 짐작하겠는가? 만리탐이 생 긴 이래 최대의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만리탐을 이끌던 대륙안(大陸眼) 육효(陸曉)가 책임을 통감하며 물러났고, 그 뒤를 이어 만리탐주의 직위에 오른 사람이 당시 약관에 불과했던 병서생이었다. "내장이 모두 없어졌다는 건 중수(重水)에 당했을 때의 특징이군요." 진소백의 참견에 좌고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신수궁의 멸문 이래 강호에서 사라졌던 중수가 다시 나타난 것이오." "그럼, 남궁호, 남궁 가주께서 당하신 독도 중수였습니까?" "틀림없이. 남궁 가주의 공력이 워낙 심후했고 또한 먹은 양이 워낙 극소량이라 목숨은 건졌으나 대부분의 공력을 상실하여 폐인이 되시고 말았소."


진소백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때 독을 쓴 사람이 바로 지금까지도 천외성 내부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군요." "그렇소. 아마 성주께 쓰여진 독도... 우리는 그 독이 중수일 가능성은 전혀 생각하 지 않았었소. 하지만... 내 곧 알아 보겠소." 만일 성주인 사경천이 당한 독이 중수라면 천외성 내부의 첩자가 진소백을 공격했 던 청의인들과 관련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진소백이 생각난 듯 물었다. "그 뒤에 남궁 가주께서는 어찌 되셨습니까?" "그분은 남궁가로 돌아갔소. 비록 폐인이 되었지만 전통은 무시할 수 없었던지 그 의 아들딸은 매우 훌륭하게 자랐소. 천추학림의 신오룡(新五龍) 중의 한 명인 남궁 중(南宮重) 대협이 바로 그분의 아들이오." 진소백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남궁중의 누이동생이며 남궁호의 딸인 남궁정(南宮晶)이 다름 아닌 엽평의 어머니 였으므로.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하군요. 중수를 사용할 줄 아는 자가 바로 흉수라는 점!" 진소백의 말에 모두가 공감했다. 아직 확인은 안 되었으나 성주가 당한 독의 정체 도 중수일 가능성이 높았다. 천무(天武) 사경천의 무공 수위로 보아 어찌 일반적인 독에 당하겠는가? 그리고 이런 점들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연옥천에게 얽힌 일은 결코 단순한 일이 될 수 없 었다. 진소백은 연옥천의 일을 말하였다. 연옥천이 벽하란 여인에게서 흑혈산(黑血山)이란 문파에 어떤 서책을 전해 주기를 부탁받았고, 그 서책을 부탁한 사람이 천외성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연옥천은 심각한 내상을 당해 쓰러졌지만 언젠가는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 말했다. 다만 연옥천이 지금 벌써 깨어나 눈만 깜박일 수 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연 옥천이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사도명이 비로소 말했다. "그럼, 연옥천에게 서책을 전해 줄 것을 부탁한 사람이 우리 천외성에 숨은 반도 (叛徒)라는 말이 되는구려."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한시 바삐 연 보주가 깨어나서 말을 할 수 있다면 이 사건 은 의외로 쉽게 풀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일에는 신기한 면이 있었다. 만일 진소백이 연옥천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천외성으로 왔다면 어떻게 중수(重 水)가 이 일에 쓰였음을 알았겠는가? 암중에 진행되고 있는 무언가 거대한 음모를 막으려는 하늘의 안배인가? 진소백이 몸을 일으키며 포권했다. "먼 길을 달려왔더니 피곤합니다. 오늘은 이만 쉬고 싶습니다." 사도명이 마주 포권하며 말했다. "그러시오. 좌 탐주, 좋은 숙소를 안내해 주시구려." 일어서는 좌고학을 보며 진소백이 말했다.


"내일은 몇 가지 정보를 얻고자 합니다. 만리탐의 정보실(情報室)을 열람(閱覽)할 수 있겠습니까?" 좌고학이 난처한 듯 잠시 주저하더니 말했다. "곤란한 말입니다만... 만일 저와 동행하신다면 가능하겠습니다." 진소백은 쾌히 웃었다. "하하, 당연하지요. 만리탐의 정보실은 넓기로 이름이 나 있으니 길을 모르는 제가 혼자 들어간다면 길 잃기가 십상이지 않겠습니까?" 2 낙양의 취보! 연옥천은 아직도 말을 하지 못했다. 연충은 살그머니 아버지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책이 잔뜩 쌓여 있었다. 눈만 뜨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책을 읽겠는가? 모두 진소백이 떠나기 전 갖다 놓은 책들이었다. 그는 책을 가져다 무슨 일을 했을까? 연충은 몇 권의 책이 펴져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몇 개의 글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음도. 진소백은 여기서 무슨 일을 하다 간 것일까? 연충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해 보았으나 알 수가 없었다. 옆에 누운 연옥천은 눈만 끔벅이며 아직도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눈은 점점 맑아지고 있었다. 태원신공(太元神功)! * * * 날이 밝았다. 좌고학은 무척 일찍 일어난다. 그가 일어나서 간단한 업무를 보고 찾아왔을 때도 진소백은 자고 있었다. 기다리던 좌고학이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고 나서야 진소백은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워낙 피곤해서... 어서 가시죠. 정보실(情報室)의 모습이 무 척 궁금합니다." 진소백은 나오자마자 서둘렀다. 그 바람에 진소백의 몫으로 남겨 둔 차 한잔만이 동그마니 탁자 위에서 자리를 지 켰다. 삼엄한 경계였다. 신패(信牌)가 없다면 들어오려는 생각을 애초에 포기하는 편이 훨씬 나으리라. "휘유, 정말 대단하군요." 좌고학의 뒤를 바짝 붙어 따라가며 진소백이 연신 감탄했다. 천외성은 백년이 넘는 시간을 무림에 군림하며 은연중에 맹주의 역할을 수행해 왔 다. 정보실의 위용이 대단함은 당연했다. 긴 통로와 굽이 몇 개를 거쳐 마침내 도착한 석실! 백여 년 간 수백 명의 탐객(探 客)들이 강호를 돌며 모아 둔 정보가 모두 모인 곳이다. 석실 안에는 이미 한 사람이 있었다. 임의로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좌고학을 제외한다면 천외성에서도 두 명에


불과했다. 그 중의 한 명은 병상에 있으니 이곳에 있을 사람은 당연히 나머지 한 명일 것이 다. "소성주! 어떻게 먼저 와 계시오?" 좌고학이 놀라 물었다. 사도명이 먼저 정보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하하, 제가 모셨습니다. 아무래도 세 명이 같이 있는 편이 나을 듯하여..." 웃으며 말하는 진소백을 보고 좌고학은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아침에 일어 날 때부터 같이 이곳까지 왔는데 어떻게 연락을 취했다는 말일까? 사도명이 좌고학을 보며 말했다. "어젯밤 진 공자가 내 처소로 왔었소. 밤새 술을 마시며 말을 나누었는데, 그때 나 도 이리로 오라더군. 우리는 이미 무슨 말이든지 들어 주기로 약속했지 않소?" 환히 웃으며 사도명이 말하자 좌고학의 의문이 풀렸다. 왜 진소백이 아침에 그처럼 늦게 일어났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는 진소백을 보며 말했다. "자, 무엇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시오? 필요한 것을 말하면 내가 꺼내 드리리다." 진소백은 재빨리 말했다.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흑혈산(黑血山)이란 집단에 관한 상세한 내용! 둘째, 삼십 년 전 남궁 가주의 사건을 전후하여 강호에서 실종된 강호인의 명단! 셋째, 현재 천외성에 보관 중인 서책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의 명단." 물이 흐르듯 빠른 말,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해 놓은 것이 있는 듯했다. 좌고학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소.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앉아서 기다려 주시오. 아, 그 동안 차라도 한잔 들고 계시는 게 좋겠소." 좌고학은 그렇게 말하고는 중앙의 큰 석실에 붙은 수십 개의 작은 석실들 중 하나 로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 그가 천장에 달린 끈 중 하나를 두 번 흔들었는데, 이는 무슨 신호였 을까? 진소백의 의문은 금방 풀렸다. 곧 돌로 된 벽의 한쪽이 열리며 쟁반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이곳은 외부와는 철저히 차단된 곳이니, 줄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면 필요한 물건 들을 외부(外部)에서 저러한 방법으로 전해 주나 보다. 중대한 정보의 분석에는 한 번에 며칠의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많으니, 이런 방식 의 음식 보급이 꼭 필요할 터였다. 음식을 나를 때마다 사람이 들어온다면 정보가 새나갈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게 되 므로. "아직 따뜻하다니, 신기하군요." 진소백은 차가 어떤 경로로 들어왔는지 몰랐다. 하지만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이, 식지 않았으니 맛이 있을 것 같았다. 진소백과 사도명은 차를 들었다. 사도명이 먼저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고, 진소백도 찻잔을 입에 대었다. 수증기(水蒸氣)가 눈에 들어갔는가? 진소백은 눈을 연신 끔벅거렸다. 말없이 눈만 끔벅거리는 모습은 어디선가 본 듯한데... 그렇다.


꼼작도 못하고 누워 있는 연옥천의 눈! 지금 진소백의 모습은 그의 눈처럼 보였다. * * * 깜박 깜박! 연충은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항상 자신을 안아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주위에는 책들이 많이 놓여 있었으나 아버지는 책을 집어 읽을 수가 없었다. 연충은 아버지가 무척이나 심심하실 것이라 생각했다. 혼잣말하듯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버지, 책 읽어 드릴까요?" 순간이었다. 연옥천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림을 연충이 느낀 것은! "설마... 아버지 책... 읽어 드려... 요?" 눈동자가 움직인다고 느꼈던 것은 착각이 맞았다. 눈꺼풀이 빨리 깜박이는 바람에 느낀 착각이었다. 하지만 연충의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움직이는 것마저 착각이었을까? 연충은 조 심스레 물었다. "아버지... 제 말 알아들으시는 거예요?" 연옥천의 눈꺼풀이 또다시 급하게 깜박였다. 틀림없었다. "제 말을 알아들으시는군요. 깨어 계셨군요, 아버지!" 연충은 어린아이였다.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마저 말도 못 하고 누워 있었으니 그 충격이 오죽했겠는가? 이제 아버지가 깨어나니 연충의 기쁨은 어디에다도 비길 곳이 없었다. "아버지! 말은요? 말은 못 하세요?" 연옥천의 눈이 천천히 한 번 깜박였다. 연충은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한 번이면 아니다, 여러 번은 그렇다는 뜻이군요? 맞죠, 아버지?" 그렇다는 뜻인가? 연옥천의 눈이 여러 번 깜박임을 보며 연충은 자신의 생각을 확 신했다. 연충은 방안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책들을 둘러보았다. 무슨 생각이 난 걸까? 연충은 아무 책이나 주워 들었다. "아버지! 하시고 싶은 말씀 하실 수 있어요. 제가 책을 넘길 테니까 원하시는 글자 가 나오면 눈을 깜박이세요." 연충이 집어 든 책은 다름 아닌 시경(詩經)! 시가 들었으니 다양한 뜻을 가진 글이 나옴은 당연했다. 나이답지 않은 총명이었다. 눈으로 글을 짚어 뜻을 전하게 하려는 의도 자체가 무척이나 기발하지 않는가? 책 장이 넘어갔다. 연옥천이 눈을 깜박이면 손을 멈추고 천천히 글을 하나하나 짚어 나갔다. 연옥천이 지적한 글자는 모두 셋이었다. 연충은 눈물이 흐름을 막을 수 없었다. 세 글자가 모여 이룬 글은 어린 연충을 울지 않을 수 없게 했다. 我愛汝.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그랬다. 온몸의 경혈이 부서지고 근육이 조각나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연충은 울었다. 가슴이 벅차 올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연옥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 뿐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립고, 자신의 신세가 서러웠다. 또한 아버지의 사랑에는 가슴이 시리니... 눈물은 끊일 줄 모르고 계속 흘러나왔다. 한참을 운 후에 생각난 것은 진소백이었다. "진 숙부는 천외성으로 가셨으니... 만일 나쁜 놈들의 정체도 모르고 가셨다면 큰 일이다." 그는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 아버지는 알고 계시죠? 아버지께 이런 나쁜 짓을 한 놈들을." 연옥천의 눈이 깜박였다. 연충은 급히 책장을 넘기며 아버지가 지적하는 글자를 찾기 시작했다. 3 좌고학(左孤鶴)은 한참이 지난 후 원래의 석실로 돌아왔다. 그는 진소백이 부탁했던 문서들을 찾으러 들어갔으나 손에는 아무것도 들고 나오 지 않았다. 원래부터 그는 아무것도 들고 나올 생각이 없었다. 그의 행동에 대해 진소백은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으며, 사도명 또한 일언 도 없었다. 이런 일은 매우 이상했지만 지금은 매우 당연했다. 잠들어 있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한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앞에 뒹구는 것은 두 개의 찻잔이었다. 자신을 기다리던 사람이 잠이 들었는데도 좌고학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다만 나직이 한숨을 쉬었을 뿐이다. "휴! 소성주(小城主)는 왜 오시어서 이처럼 일을 번거롭게 만드시는가?" 그의 말을 받는 음성이 있었다. 옥이 굴러가는 듯한 미성(美聲),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한 신법! 벽하(碧霞)였다. "궁주의 성공을 경하(敬賀)드립니다." 좌고학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네 공격을 지혜로써 피했다고 안심하고 있었으니, 당연하다." 그랬던가? 진소백이 벽하의 매복을 쉽게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뜻이 있었던가? "진소백은 우리에게 중요한 인물이다. 그를 통해 초의(草衣)와 초의가 만들어 놓은 세력을 밝혀야 하므로... 그를 꼭 사로잡아야 한다." 좌고학은 벽하에게 명령했다. "아직 취보의 연옥천이 숨이 붙어 있다 한다. 네 실수였으니 스스로 만회(挽回)하 거라." 숨은 뜻은 그를 죽이라는 살인 명령!


벽하가 허리를 숙였다. "존명!" 간단한 말끝에 그녀의 신형이 서서히 흐려졌다. 이윽고 안개처럼 벽하가 스러지자, 좌고학은 바닥에 쓰러진 진소백과 사도명을 보 았다. "흥! 백 가지의 병기가 한 번의 머리 씀만 못하니 너희가 어찌 그 뜻을 알겠느냐? 나의 근거지인 이곳에 자진(自進)해서 들어온 너희의 어리석음을 탓하거라." 좌고학은 자리에 앉았다. 그의 눈에는 득의의 빛이 완연했다. 진소백을 제압했으니 그의 뒤에 숨은 자들의 신상을 아는 것은 시간문제이리라. 그의 손에는 검은색의 알약 하나가 뛰놀았다. 일컬어 자백환(自白丸)! 복용한 자에게 환각을 불러일으켜 묻는 자의 말에 무엇이나 대답하는 정신 상태가 되도록 하는 약이었다. 어느 틈에 밖에 명령을 보냈는가?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며 좌고학은 앞으로의 진행 상황을 느긋하게 그려 보았다. "너무나 어리석은 것은 너희 사씨 부자(父子)였다. 진소백이야 어제 처음 왔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쯧쯧, 어찌 내부의 방해 없이 만리탐이 배반자를 잡아 내지 못 할 수 있더란 말이냐?" 향긋한 다향(茶香)! 한 모금을 삼키던 좌고학이 찻물을 뱉어 내었다. 쓰면서도 향긋한 이 맛! 그러나 그 뒤에 감도는 이 달면서도 비릿한 맛은...! "어찌 이 맛이 내 찻잔에서 날 수가 있느냐?" 좌고학은 노하여 입을 열었다. 고함 소리는 끝이 났지만 그는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외치며 그가 찻물을 뱉어 낸 사이! 찻물이 순식간에 증기로 화할 정도의 열기(熱氣)를 뿜으며 날아오는 손을 좌고학 은 똑똑히 보았다. * * * 시경(詩經)을 뒤지며 글을 찾던 연충은 문득 몇 개의 글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음 을 알아차렸다. "진 숙부가 쳐놓으신 건가?" 연옥천이 눈을 깜빡이며 아들의 말에 긍정(肯定)을 표했다. 연충은 고개를 끄덕이며 환히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 낸 일을 신이 보내신 진 숙부가 생각하지 못했을 리 있는가? "과연 진 숙부시다. 하하!" 그는 군데군데 진소백이 쳐놓은 동그라미를 짚어 나갔다. 모두 여섯 개의 글자들이 한데 모이며 하나의 이름을 만들었다. 글자들이 만든 이름은 다음과 같았다. 병서생 좌고학! * * * 흡사 중천의 태양이 그대로 떨어지는 듯한 극양수(極陽手)! 어찌 이것을 몰라보랴? 태양수(太陽手)!


천지를 불태우는 사도명의 태양수. 좌고학은 무공을 모른다고 알려져 있다. 한데 어찌 된 일인가? 가공할 내공을 실은 사도명의 태양수를 유영(遊泳)하듯 떠오르며 좌고학의 몸이 비켜 나갔다. 사도명의 음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삼십 년을 무공조차 숨기고 있었다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다. 차핫!" 이번의 태양수의 위력은 전과는 비교도 안 되었다. 분노 끝에 십이 성 전력의 내공이 쏟아졌으니 꽤 넓은 석실 내부는 피부를 태울 듯한 열기로 가득 찼다. 옆에서 느끼는 열기로도 전신이 탈 것 같으니 막상 극양강기(極陽 氣)를 맞아 가 는 좌고학의 입장은 어떻겠는가? 도저히 막을 수 없어 보이는 경기와 마주선 좌고학! 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항상 누런 병색만 깊었던 안색이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온몸에 이어 얼굴마저도 덮어 가는 경기의 색깔은 깊은 물빛을 연상시키는 담청색 (淡靑色)! 더불어 좌고학의 전신에서는 살을 에는 한기가 일어났다. "천지간에 오직 벽수의 뜻만이 존귀하다. 차앗!" 좌고학의 양손에서 파란 경기가 뿜어 나오며 더불어 한기(寒氣) 또한 같이 일어나 사도명의 태양수를 맞이했다. 그 기세가 마치 성난 해일이 섬을 덮치는 듯했고 장력이 담고 있는 한기는 북풍한 설(北風寒雪)이 전혀 두렵지 않을 지경이었다. 능히 태양수와 자웅을 결할 만한 무공! 사도명의 입에서 놀란 음성이 흘러나왔다. "벽수장(碧水掌)! 정녕 신수궁의 무리들은 멸망되지 않았다는 말이냐?" 그의 호통 소리가 곧 장력이 부딪치는 폭발음에 파묻히며 장내는 어지럽게 돌아갔 다. 태양수가 천하를 놀라게 하는 절학이었으나 벽수장 또한 한때 온 강호를 어지럽혔 던 무공이었으니... 둘의 대전은 그야말로 백중지세(伯仲之勢)!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진소백의 태도였다. 그는 좌고학이 마시던 찻잔만을 만지작거릴 뿐, 사도명와 좌고학의 결전이 이미 백여 초를 넘기고 있는데도 끼여들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밖의 경호무사들이야 정보실이 워낙 방음이 잘 되는 탓에 듣지 못한 것으로 생각 할 수 있지만 진소백의 이런 태도는 왜일까? 진소백은 아무런 행동도 없이 단지 한마디만을 했다. "이상하다. 이런 강력한 최심산을 마셨는데 저자는 어떻게 저처럼 펄펄 난단 말인 가?" 그의 말에 좌고학의 눈에 일순 다급한 빛이 떠올랐다. 떠오르는 것보다 빠르게 사라지기는 했지만 좌고학은 진소백의 중얼거림에서 비로 소 자신의 처지를 느꼈다. 서두르지 않는다면 사도명의 태양수(太陽手)에 당하기 전에 몸 속에 들어가 서서 히 발동하려 하는 최심산(催心散)의 기운에 먼저 당하게 될 것이다. 좌고학의 기세가 맹렬해졌다.


빨리 결판을 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고수들의 싸움은 또한 침착함의 싸움이기도 한 것! 맹렬하게 휘두르는 자가 오히려 밀리게 됨은 고수들 간 싸움의 기이함이 아닐까? 사도명의 뒤에도 진소백이 있음을 깨달은 좌고학은 초조해졌다. 그런 그의 귓전으로 진소백의 강한 전음이 들려 온 것은 바로 그때! "이런, 쯧쯧, 왼쪽 허리가 완전히 비었지 않는가?" 좌고학이 흠칫했다. 그가 막 전개하려던 초식은 우로 미끄러지며 오른손으론 휘감고 왼손은 강한 힘으 로 밀어붙이는 초식이었다. 왼쪽 허리가 빔은 당연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함부로 왼쪽을 공격할 수도 없었다. 이유는 잘못하면 내뿜은 왼 손의 장력에 몸을 상하게 되며 또한 오른손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모르는 까 닭! 빈 왼쪽을 강한 공격으로 방어하니 공격과 방어가 일치된 완전한 자세였다. 그런데 진소백의 전음에 놀란 좌고학이 은연중에 왼쪽 허리를 신경 쓰게 되자 그 자세가 흐트러졌다. 펑! 장력이 좌고학의 오른쪽 허리를 두드리며 살이 타는 냄새가 석실을 채웠다.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물러나는 좌고학의 귓가에 다시 진소백의 전음이 들 렸다. "쯧쯧, 적의 말을 그대로 믿다니, 꽤나 순진하구려." 좌고학은 속에서 불길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태양수가 다시 전신을 압박해 왔고 내상을 당하자 최심산이 풀려나 전신을 점령하 려고 날뛰기 시작했다. 게다가 진소백의 전음은 계속되었다. "오른쪽 어깨가 비었소... 이런, 왼쪽 다리가 허점이 너무 많구려..." 왼쪽을 말하면 반드시 오른쪽이 다치고, 오른쪽을 말하면 반드시 왼쪽이 다쳤다. 진소백이 전음을 보내는 순간은 너무나 절묘(絶妙)하여, 좌고학이 완전하게 초식을 전개하기 직전을 기가 막히게 맞추고 있었다. 정해진 형태가 전개되기 직전 귓가에 들려 오는 진소백의 좌고학의 초식 곳곳에 허점을 만들어 내며 사도명의 태양수를 피할 수 없게 했다. 이윽고, "우욱!" 계속되는 타격과 내부의 최심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한 좌고학이 바닥으로 쓰러졌 다. 멀어지는 의식 속으로 진소백의 마지막 전음이 들려 왔다. "쯧쯧, 한 번의 머리 씀이 백 번의 병기질보다 나음을 당신이 어찌 알겠소! 쯧 쯧..." 좌고학이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으니 분통이 터지지 않을 리 없었다. 상처와 분노가 겹치며 좌고학은 더욱 빨리 정신을 잃었다. 그는 매우 뛰어났고 영리했으나 진소백의 만난 지 하루 만에 바닥에 쓰러지고 말 았다. 진소백! 일람무의(一覽無疑) 진소백! 한 번을 보면 아무 의혹이 없다.


♡ 제 8 장 광소! 악인은 지옥으로 떨어지는가? 1 천외성! 거대문파의 수장(首長)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만일 그 문파가 천 외성과 같이 강호에 홀로 선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천무 사경천! 아버지인 사무적의 뒤를 이어 천외성의 성주에 오른 것이 오십 년 전이었다. 마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로 성주에 오른 사경천! 그가 천외성 성주로 있었던 시기의 강호는 비록 한 번의 환란이 있었으나 큰 혼란 없이 수습되어 천외성은 가 장 안정된 시기를 구가했다. 비록 당금에 이르러 그 성세가 약해지는 경향을 보이고는 있지만, 그 원인은 너무 오랜 기간을 강호에 간섭하지 않은 점에 둘 수도 있었다. 어쨌든 세인들은 사경천이 독에 당해 병석에 누워 있음을 모르고 있다. 짐작이나 하겠는가? 강호의 당당한 수장이며 은연중에 맹주로 받들어지는 사경천이 독에 당하다니! 진 소백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짐작도 하지 못했다. 사경천을 직접 만나기 전에는 어린 시절부터 들어 온 전설 속의 무인(武人)이 이 처럼 쇠약한 모습의 노인이라고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대가 도와 주었는가? 믿을 수 없구먼. 좌고학(左孤鶴)이 그런 자였다니..." 사경천의 말에는 힘은 없었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기세가 실려 있어 듣고 있는 진소백의 마음을 압박했다. 한때 천하를 경륜(經綸)했던 사람이 지니는 위엄일까? 병석에 있으면 작은 심적 충격도 크게 키워 말하기 마련이었다. 좌고학은 사경천 자신이 직접 임명했고 삼 십 년간을 천외성의 삼인자로 있었던 자였다. 그런 자가 배반자라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일 텐데도 사경천은 의외로 담담히 받아 들였다. 병석에 누워 마음이 약해졌을 점을 고려한다면, 실로 대단한 일! 오랜 수양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는 경지가 아니라 면 있을 수 없는 반응이었다. 사경천이 나직이 한숨쉬었다. "그가 불충한 마음을 삼십 년이나 갖고 있었다면... 천외성의 나머지 곳도 썩고 있 을 가능성이 있구나." 당연한 짐작이었다. 벌레가 먹기 시작한 지 이미 삼십 년,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르니 어떻게 한곳만 썩었겠는가? 사경천은 아들 사도명을 바라보았다. "지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는 모르겠다. 휴! 내가 일어날 수 없으니 네 책임이 너무나 중하구나." 사도명은 아버지의 말에 허리를 숙였다. 어쨌든 그는 천외성을 이어야 할 자! 이번 일은 그에 대한 시험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사씨가문(獅氏家門)은 후손이 무척 귀했다. 사경천은 사무적이 오십이 되어서야 가졌던 아들이었고, 사도명도 사경천의 나이 마흔을 넘겨 천외성의 성주에 오르고서야 겨우 생겼다. 천외성의 성주 자리는 당연히 사씨 집안의 장손에게 계승된다. 강호 문파는 혈연이 아닌 능력과 문파에 대한 공헌도에 따라 대권(大權)이 전해지 는 경우도 많았지만 천외성은 달랐다. 원래 발생 초기부터 사씨가문 자체의 기반(基盤) 위에 사씨가문의 업적을 흠모(欽 慕)한 강호인들이 모여 이루어진 문파였던 까닭이었다. 때문에 성(城)이란 칭호를 사용함에도 성격은 세가(勢家)의 경향이 강했다. 사씨가문의 후손은 귀한 만큼 항상 뛰어나 결코 선조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사경천은 아들을 보며 말했다. "이제 내가 가졌던 모든 권한을 네게 넘겨주마!" 말의 의미는 컸다. 비록 사도명이 지금까지 천외성의 이인자로서 제반의 대소사를 처리해 왔지만, 그 것은 대행(代行)의 형태였지 결코 권력을 행사하는 의미가 아니었다. 한데 권한을 모두 넘긴다는 말은 곧 성주의 자리를 넘김을 의미하지 않는가? 사도명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아니 됩니다, 결코! 아버님은 아직 정정하시니 곧 일어나실 겁니다." 아들을 보며 사경천이 미미하게 웃었다. 비록 입으로는 정정하��� 하나, 저토록 강력하게 성주 자리의 이양(移讓)을 반대하 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성주 직위마저 내놓은 사경천이 의욕을 잃고 급격히 쇠약해질 것을 염려함이었다. 사경천은 성주 자리에서 물러나지 못했다. 사도명이 한사코 수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경천은 아들의 효심에 웃으며,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신세에 한숨쉬며 침대 밑 을 더듬었다. 그의 손에 들려 침대 밑에서 나타난 것은 하나의 옥패! 전면에는 웅장한 기세로 솟은 산위에 서리서리 피어나는 구름이 흡사 용을 부르는 듯했다. 사도명이 놀랐다. "그 옥패는...!" "그렇다. 천외옥패(天外玉牌)다." 사경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옥패를 사도명에게 던졌다. 천외옥패! 천외성은 사씨가문의 세가의 성격을 지닌다. 해서 성내에는 두 가지의 세력이 공존했다. 하나는 성주로서 부릴 수 있는 천외성의 세력들이었고, 나머지는 사씨가문의 가주 (家主)로서 명령할 수 있는 가신(家臣)들의 세력이었다. 따라서 천외옥패를 넘긴다는 것은 가주의 직위를 넘긴다는 의미이니 사경천은 자 신이 가진 두 개의 신분 중 하나를 아들에게 주려 함이었다. 사도명도 이번만은 거절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눈! 그 눈이 굳은 의지로 투명하게 변함을 보았던 까닭이었다. 게다가 천외성의 썩은 곳은 도려 내려면 힘이 필요했다. 결코 배신을 꿈꾸지 않는 믿을 수 있는 힘이.


가신들의 힘이 가장 적절하지 않겠는가? * * * 숭천각(崇天閣)을 물러나오는 사도명의 안색은 침울했다. 진소백 또한 아무 말도 않고 그의 옆에 붙어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사도명이 나직이 한숨을 쉬더니 진소백을 돌아보았다. "진 아우! 무슨 방도가 없겠는가?" 사도명의 나이가 이미 오십이 되어 가니 진소백은 말을 낮출 것을 극력 권했다. 사도명이 제안한 형제의 의(義)도 나이 차가 많아 어려웠으나 사도명이 굳이 우기 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수락했다. 그 이후 사도명은 진소백을 아우라 부르는 것이었다. "아버님이 당하신 중수를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분명 천하에는 있을 것인데..." 의술! 뛰어난 의술을 지닌 사람. 진소백은 연옥천을 생각했다. 그는 비록 귀곡자의 진전 중 무절을 익혔지만 천하 어딘가에는 의절(醫絶)을 이어 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그림! 작은 키에 현현(玄玄)한 기도를 풍기던 그 노인! 노인을 찾으면 될 것이지만 넓디넓은 천하 어디에서 그 노인을 찾는단 말인가? '후! 사 성주의 병세가 중수(重水)에 의한 것이라 고통이 매우 심하고 나날이 악화 되니...' 일반적으로 중수에 당한다면 곧 목숨을 잃게 되는데, 이미 다섯 달 가까운 시간을 사경천이 버틴 것은 일신상의 내공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의미였다. 어쨌든 지금 천하를 뒤져 귀곡자의 의절의 전인(傳人)을 찾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다른 방도가 없을까?' 진소백은 문득 어느새 오늘이 정월의 일곱째 날임을 생각해 냈다. 일 년 전에 했 던 약속이 불과 하루 남았지 않는가? 생사의괴 종도와의 약속! 엽평의 절맥을 치유했던 그이니 어쩌면 사 성주 몸 속의 중수 또한 제거할 수 있 을는지도 모른다. 2 석실! 이처럼 넓은 석실은 천하에 많지 않았다. 그리고 천외성에서 이렇게 넓고 폐쇄된 석실은 한 곳뿐이었다. 만리탐의 모든 정 보를 모아 두는 정보실(情報室)! 진소백은 또다시 정보실로 들어왔다. 그가 원래 좌고학에게 부탁했던 것은 세 가지였다. 흑혈산에 대한 것과 삼십 년 전 남궁호의 사건이 있을 때를 전후하여 실종된 강호 인의 명단, 마지막으로 천외성에서 보관 중인 주요 서책들의 명단이었다. 시간 관계로 진소백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흑혈산에 대한 정보와 천외성 서고에 보관된 중요한 서책들의 명단뿐이었다. 진소백은 우선 흑혈산에 관한 기록을 읽기 시작했다.


각지의 수많은 탐객들이 보내 온 정보를 모아 분석하여 기록한 강호 정보의 보고! 만리탐을 이처럼 능률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던 좌고학이 반도로 밝혀진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었다. <흑혈산! 위치는 동정호 부근으로 짐작! 인원 불명, 목적 불명의 집단. 산주(山主)로 알려진 암흑호(暗黑虎) 조탐(趙耽)은 출신 문파 불명이나 가공할 무 예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음. 무공 등급:갑(甲) 오 년 전 동정호 부근에서 발생했던 동녀동남(童女童男)의 실종 사건에 관계가 있 을 가능성이 있음. 계속하여 조사 중이나, 극도의 비밀에 싸인 조직인지라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많 음!> 기록은 거기서 끝이었다. 진소백은 궁금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이런 집단에게 좌고학이 건네 준 서책은 어떤 내용일까? 연옥천을 보내 은 밀히 전달하려 했다면 천외성의 비밀이 담긴 서책일지도 모른다. 진소백이 천외성에서 보관 중인 서책들의 명단을 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 다. 워낙 방대한 보관량 탓인지 이름만을 적은 명단 또한 하나의 책으로 묶여 있었다. <천도 기관 총요. 태극혜검 사본. 무극검 참오록...> 수많은 책들의 서명(書名)이 각 장을 빽빽히 채우고 있었다. 이미 강호에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무공에 대한 책도 있었고, 다른 문파의 비전 (秘傳)도 여러 권 있었다. 이런 정보를 외부인인 진소백에게 열람할 수 있도록 한 사도명의 배포는 매우 크 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훑어본 진소백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중요한 서책이 많았으나 좌고학이 그처럼 비밀을 기해 운반하고 살인멸구하 려 할 만한 책들은 없었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었을까? '혹시 여기에 기록되지 않은 책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의문을 느끼면 바로 풀어 보려고 애쓰는 것이 진소백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그는 지체없이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사도명을 찾아가는 것이다. * * * "대답해 주십시오." 진소백은 당당히 말하며 사도명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으음!" 천하의 사도명도 이번만은 신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소백의 이번 질문은 그 대답에 천외성의 중대한 비밀이 담겨 있었던 까닭이었 다. 한참 동안 눈을 통한 기세의 싸움이 있었다. 단지 눈빛의 마주침이건만 그 속에 오고 가는 수많은 고뇌와 설득의 염(念)들의 부딪침은 어떤 싸움보다도 치열했다.


이윽고 사도명이 눈을 감았다. 한참을 감고 있던 눈이 다시 떠졌을 때, 진소백은 그가 결심했음을 알았다. 하지만 진소백은 굳이 재촉하지 않았다. 이미 결심한 사람을 채근하면 오히려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은 법이므로. "이 일은 결코 강호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일이네." 사도명은 굳은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진소백은 알 수 있었다. 말을 시작하자마자 사도명의 몸에서 일어난 내공이 주위 일 장 공간을 공처럼 감 싼 것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호위하고 있는 무사에게조차 음성이 미치지 못하게 하려 함이 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진소백은 그 말을 듣고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십 년 전 혈왕교의 두 번째 난이 있을 때, 그들이 그처럼 쉽게 패했음에는 이 유가 있네." 오십 년 전, 혈왕교가 다시 개파를 선언하자 천하인들은 공포에 떨었다. 백이십 년 전 혈왕교가 천하를 피로 씻었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까닭이었 다. 그러나 두 번째 난은 의외로 쉽게 끝을 맺었다. 두 번째의 혈왕교는 혈왕교가 아니었다. 그들은 비전(秘傳)의 마공(魔功)을 모두 잃어버린 단순한 사도 집단에 지나지 않았 다. 저주스러운 혈왕교의 오대사마존(五大邪魔尊)을 탄생시켰으며 혈황(血皇)의 전설을 잉태하게 했던 저주의 마경! 혈경(血經)! 인간이 썼으되 인간의 것이 아니며, 마계의 수라들이 강림하여 서술했다는 전설 속의 마공 경서였다. 그 혈경을 얻지 못한 혈왕교의 무공은 칠십 년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때문에 천추학림의 힘과 신승 초의의 활약만으로도 혈왕교는 다시 무너졌다. 진소백은 놀랐다. 그는 사부이신 초의 선사에게 무너졌던 혈왕교가 그런 숨은 이유가 있는 줄을 몰 랐었다. 만일 혈경이란 것이 다시 강호에 나온다면 그 혈겁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진소백 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원래 혈왕교의 힘은 모두 혈경이란 것에서 나온 것이었습니까?" 사도명 또한 표정을 굳히고 대답했다. "그렇다네. 단지 한 권의 경서(經書)로 인해 천하가 피에 잠겼음이 어이없지만, 사 실이라네." "그럼, 다시 혈경이 강호에 나타난다면 엄청난 혈겁이 뒤따르겠군요." 사도명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네." "어떻게 확신을 하십니까?" "본 천외성에서 혈경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지." 꽝!


뇌정이 친다고 진소백은 생각했다. 혈경! 저주의 마경! 그는 지체없이 일어났다. "어디를 가려는가?" 사도명의 물음은 멀어진 진소백의 전음을 답으로 들었다. "좌고학을 만나러 갑니다. 어서 따라오십시오." * * * 절망옥(絶望獄)! 이곳이 지어진 지는 이미 백여 년이 넘었다. 백이십 년 전 혈왕교의 오대사마존 중 살아남은 둘은 이곳에 갇혔다. 귀곡 진전 중 기절(機絶)과 무절을 모두 이었던 장춘옹이 당시 이 기관을 건설하 였다 한다. 가공할 능력을 지녔던 오대사마존조차 탈출하지 못했다 하는 천외성의 절지이며 뇌옥! 좌고학은 절망옥에 갇혀 있었다. 지하 이백 장 아래에 있으며 미로(迷路)가 거미줄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 중의 한 동굴! 아니, 벽에 약간 패어진 구덩이 속에 좌고학이 들어 있었다. 자결하지 못하도록 입엔 재갈을 물렸고, 온몸을 쇠사슬로 친친 감아 허공에 달아 놓았다. 이름 그대로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절망옥에 매달린 좌고학의 모습이었다. 그는 천하제일문파의 당당한 삼인자였다. 어떤 욕심이 그를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하였는가? 도대체 얼마나 더 올라갈 수 있기에 이런 고초를 자초했다는 말인가? 깅! 끼이잉! 어둠으로 덮인 까마득한 위쪽에서 기관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좌고학(左孤鶴)은 정신이 있었으므로 그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소리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미미한 불빛 하나를 든 두 명이 좌고학 앞에 나타났다. 좌고학은 클클 웃었다. 어떻게 그 얼굴을 잊겠는가? 그는 스스로 천재임을 자신하던 자였으니 결코 자신이 머리싸움에서 패했음을 인 정할 수 없었다. '천하의 좌고학을 잡다니, 어서 내려오너라! 놈...' 그가 놈이라 부르는 자는 일람무의(一覽無疑) 진소백이었다. 절망옥 깊은 곳으로 진소백과 사도명이 좌고학을 만나러 내려왔다. 3 강호에는 매일 무수한 문파들이 문을 열고 닫는다. 주로 문주 개인의 영웅적인 지도력으로 운영되는 군소문파들은 우두머리가 죽거나 다른 강호인에게 패하게 되면 뿔뿔이 흩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개중에는 처음부터 엄청난 기세로 일어나는 문파들도 분명히 있었다. 당금 강호에 혜성처럼 나타난 문파 하나가 그런 예였다. 대륙오행련(大陸五行聯)! 이름조차 낯선 이 문파는 개파대전(開派大典) 당시 강호 군웅들의 이목을 전혀 끌


지 못했다. 말 그대로 연맹(聯盟)의 형태로 이루어진 문파! 구성원 중 한 명의 신분이 우연히 밝혀지면서 비로소 강호인들은 이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신분이 너무나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천추학림(千秋學林)이 생긴 이래 삼십 년 안에서는 가장 뛰어난 배출자라는 다섯 명! 세간에서 흔히 오룡(五龍)이라 불리는 다섯 명 중에서도 특히 걸출하다는 남궁 세가의 금검(金劍) 남궁중이 다섯 명의 연주(聯主)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천추학림에서 물러난 사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의 당금 가주 남궁중. 그런 남궁중이 일원이니만큼 나머지 오행련주(五行聯主)의 네 명 또한 분명 남궁 중(南宮重)만큼 뛰어날 것임이 당연하지 않는가? 강호인들은 놀랐다. 지금 강호에서 단일 문파로 가장 강한 곳을 뽑으라면 단연 천외성이었다. 천추학림은 성격상 여러 문파의 협조 체제 위에 있었으니, 문파라 보기는 어려웠 다. 한데 천외성을 능가하는 문파가 드디어 강호에 등장하는 것인가? 강호인들의 무수 한 추측을 낳으며 대륙오행련은 개파 대전을 정월 보름의 상원절로 선언했다. 상원(上元)은 지난 일 년의 마(魔)를 끊고 새로운 일 년을 연다는 의미가 있는 명 절이었으니... 굳이 이날을 개파일로 잡은 것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일까? * * * 절망옥은 어두웠다. 진소백의 손에 들린 작은 횃불만이 유일한 밝음이었지만 그나마 사방에서 불어오 는 바람에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래는 까마득한 무저(無底)의 공동(空洞)! 원래 절망옥(絶望獄)은 천연적으로 뚫린 지하를 이용하여 만들어졌다. 우물처럼 패어진 공동의 깊이가 얼마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절망옥은 그런 공동의 윗부분에 쇠사슬을 길게 연결하여 만들어졌으니, 그곳에 갇 힌 사람은 쇠사슬에 묶인 채 허공에 떠 있는 셈이었다. 만일 탈출을 위해 자신을 묶어 놓은 쇠사슬을 끊으면 기관이 작동하여 모든 쇠사 슬이 위로 빨려 올라가 버리니, 허공 중에서 힘을 받지 못하게 된 탈출자는 무저 의 지옥으로 떨어짐을 피할 수 없으리라. 지금 진소백과 사도명도 쇠사슬 끝에 달린 원판 위에 서서 또 다른 쇠사슬로 허공 에 매달린 좌고학을 보았다. 좌고학의 눈은 똑바로 진소백을 향하고 있었다. 진소백이 쓰게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뭔가 불복하기 싫은 부분이 있구려." 좌고학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진소백을 쏘아보기만 하던 그가 돌연 미친 듯한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재미있군. 정말 재미있어." 사도명이 폭갈했다. "이놈! 무엇이 그리 재미있단 말이냐?" 사도명의 말을 무시한 채 좌고학은 진소백만을 보며 말했다.


"혈(血), 청(靑), 금(金), 이 세 가지의 기운이 마침내 세상에 모두 드러났구나." 무슨 소리인가? "백년도 넘는 시공의 격차를 두고 세 가지 기운이 모두 나타났으니 이제 강호는 겁난에 휩싸일 일만 남았구나!" 사도명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몰라 의아했지만 진소백은 알고 있었다. 그는 유사부(儒師父)에게 이미 들은 말이 있었던 것이다. 유사부! 그가 강호에서 활동하던 시기의 이름은 제갈수(諸葛修)였다. 신조문(神照門)의 팔 대 문주 제갈수! "내가 금광(金光)을 타고났음을 한눈에 알아보다니, 대단하구려." 진소백은 담담히 말을 받았다. 그는 이미 자신이 타고난 기운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좌고학이 다시 웃으며 진소백을 보았다. 그는 무공이 폐지된 채 쇠사슬에 매달려 있었으므로 고통이 대단할 텐데도 진소백 을 보자 웃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우하하, 네가 금광을 타고났음을 스스로 알고 있다니, 가장 늦게 태어난 네가 가 장 똑똑한 것은 정녕 하늘의 안배인가? 후하하..." 좌고학이 웃음을 멈추더니 물었다. "내가 혈광(血光)을 타고났음도 알아보겠느냐?" "이제 막 알 수 있었소." "좋다. 넌 정말 솔직하구나. 하하하, 천하에 적수가 둘이나 생기다니, 정말 즐겁군. 정말 즐거워." 진소백이 그의 말을 끊었다. "당신은 조금도 즐거워해서는 안 되오. 당신은 죄를 지었으니 마땅히 괴로워해야 하오." 좌고학이 웃음을 멈추고 진소백을 바라보았다. "내가 스스로 즐거운데 누가 나를 괴롭히겠느냐?" 그의 말에 진소백은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좌고학은 분명 악인이었다. 그러나 이런 도리까지 알고 있는 악인이라면 단순한 악인에 비해 천배 이상 무섭 다는 점을 진소백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읽은 듯 좌고학이 물었다. "내가 두려운가?" 진소백을 또 솔직히 답했다. "그렇소. 약간은 두렵소." "그렇다면 왜 지금 나를 죽이지 않는 겐가? 만일 살려 둔다면 나중에 후환이 있을 지도 모르는데..." 진소백은 알고 있었다. 좌고학이 비록 지금 절망옥에 갇혀 있으나 이런 사람은 설 사 죽었다 해도 조심해야 하는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하지만 진소백은 고개를 저었다. "난 당신을 죽이지 않겠소." "왜? 왜 날 죽이지 않겠다는 것이지?" "그냥 싫기 때문이오." 진소백은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이렇게 뛰어난 적수를 묶어 놓고 죽인다는 것은 너무 비겁한 일이 라고 느낀 탓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어쨌든 좌고학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정말 유쾌하다. 평생 처음으로 이처럼 통쾌한 패배를 당했으니... 자, 이제 묻거라. 적수를 만난 기념으로 무엇이든 솔직히 대답할 것을 약속하겠다." 좌고학은 과연 좌고학! 그는 이미 진소백 등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묻고자 온 것임을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오." 진소백의 굳은 표정에서 좌고학은 이미 느꼈나 보다. "내가 연옥천을 통해 전달한 서책의 내용 말이냐?" 옆에 있던 사도명이 고함쳤다. "그 내용은 도대체 무엇이었느냐, 좌고학?" "이런 이런, 소성주의 당황한 표정을 보니 이미 짐작하고 있으신 것 같소만..." 사도명은 온몸이 얼음에 싸이는 듯한 불안을 느끼며 다시 물었다. "무어라 했느냐? 설마, 정말로 그것이... 말해라, 좌고학!" 좌고학이 웃으며 말을 돌렸다. "하하, 이미 알고 있으신 것 같거늘 왜 굳이 말로 들으려 하시오? 말로 하지 않는 말이 더욱 진실됨을 모르신단 말이오?" 사도명이 떨리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런 것이냐? 정녕 그것이 혈경이었느냐?" 혈경(血經)! 이 가공할 이름 앞에서도 좌고학은 너무나 태연했다. "틀림없이... 내가 흑혈산에 넘긴 것은 틀림없는 혈경이었소." 하늘이 무너지는가? 사도명은 비틀거리다 하마터면 원반 위에서 떨어질 뻔하였다. "그,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면서 외부에 넘기다니... 너는 그 일이 어떤 결과를 가 져 올지 모르는 게냐?" "물론 알고 있소. 하하하, 애초에 혈왕교의 것이었으니 혈왕교로 돌아가는 것이 당 연하지 않소? 난 주인에게 돌려주었을 뿐이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흑혈산의 정체는 혈왕교였다는 말. 저주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진소백도 신음하며 말했다. "당신은 왜 천하에 혈겁(血劫)을 일으키려 하는 것이오? 무슨 도움이 된다고." 좌고학이 또다시 진소백을 보며 웃었다. "모두가 버러지보다 못한 인간들, 살아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피로 깨끗이 씻 는다면, 강호(江湖)가 정화될 것이니 좋은 일 아닌가?" 진소백의 전신에서 살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도저히 이런 생각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런, 드디어 날 죽이려는 결심을 했단 말인가? 너무 늦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 좌고학은 자신을 묶은 쇠사슬을 흘낏 보았다. "신수궁의 절기에는 무공이 폐지된 상황에서도 잠력을 짜내어 한 번의 힘을 가할 수 있는 기공(奇功)이 있다네. 한번 보지 않으려는가?"


쇠사슬. 이백여 장의 상공에서 내려와 허공 중에 그들을 지탱시켜 주고 있는 쇠사 슬. 좌고학이 의도하는 것을 진소백은 단숨에 알아차렸다. "어서 뛰십시오." 진소백이 벼락같이 외치며 뛰어오르는 순간, 십여 장의 공간을 단숨에 가르며 쇠 사슬의 끝을 잡아 가는 순간! 무공을 폐지당했다는 좌고학의 몸에서 기이한 기세가 일었다. 매일 조금씩 극미량의 중수(重水)로 체내를 자극함으로써 잠력(潛力)을 길러 위기 의 순간 한 번의 힘을 발휘하는 신수궁의 기공(奇功), 신수잠(神水潛)! 그 위력 앞에 좌고학을 묶고 있던 쇠사슬이 썩은 동아줄처럼 끊어져 나갔다. 우르릉! 백여 년이 지났다 하나 천하제일의 기관지학을 이어 온 귀곡자의 비전으로 지어진 기관이었다. 곧바로 기관이 발동하며 무서운 기세로 주위의 모든 쇠사슬이 허공으로 빨려 올라 갔다. 진소백은 빠른 대응 덕분에 가까스로 쇠사슬의 끝을 잡을 수 있었고, 그의 다리를 붙잡은 사도명도 겨우 무저의 바닥으로 떨어짐을 피했다. 그러나, "크하하, 잘 가거라. 다시 보자꾸나, 크하하하!" 지탱할 곳을 모두 잃은 좌고학은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닥으로 추락해 가고 있었다. 쇠사슬이 무서운 기세로 허공에 떠 위로 말려 올라가고, 그 끝에 진소백이 매달려 있었다. 반대쪽, 지구 중심을 향해 떨어지는 좌고학의 신형! 저곳은 지옥인가? 악인(惡人)은 정녕 지옥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인가? 하지만 진소백은 어쩐지 불안 했다. 좌고학은 비록 죽었으나 진소백은 안심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남겼던 광소(狂笑)가 여전히 귓가에 선명했다. ♡ 제 9 장 사라진 피! 천하의 피를 부른다. 1 만보고(萬寶庫)! 천외성의 군림은 백여 년 간 지속(持續)되었으므로 온갖 보물들이 선물로 들어왔 다. 그러한 보화들을 모아 놓은 장소가 바로 만보전이었다. 명목상 고(庫)라 불리기는 했지만, 그 내부는 세인(世人)의 상상을 절할 만큼 넓고 방대했다. 또한 주위의 경계(警戒)도 매우 엄중하여 침투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넓은 만보고의 안! 지금 진소백과 사도명이 찾는 물건은 이 안에도 없었다. 하늘의 성좌(星座)를 본떠 놓은 듯, 온갖 별자리를 닮은 문양들이 벽면에 어지러이 펼쳐져 있었다. 사도명이 벽면을 주시하며 진소백에게 설명했다. "원래 이곳은 천외성을 세우셨던 조부께서 가문에 전해지는 비전무학의 경전을 비


밀리에 보관하기 위해 세우셨던 곳이네." 사도명의 조부라면 사무적(獅無敵)을 말함이다. 무적대제(無敵大帝)라 추앙받았던 그는 혈왕교의 혈황(血皇)을 나흘간의 대결전 끝 에 물리침으로써 모든 강호인들의 추앙(推仰) 속에 강호에 천외성의 시대를 열었 다. 오십 년 전 아들 사경천에게 천외성주의 자리를 물려준 뒤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 진 전설 속의 인물! "오십 년 전 조부님이 사라지시면서 이곳의 무학경서 또한 가지고 가셨는데, 그 이후로 이곳은 보화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들만 보관하는 곳으로 변했다네." 사도명은 진소백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듯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속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인물됨을 알 수 있는 부 분이었다. 물론 단점도 있겠지만 사도명의 이런 점은 가문의 영광을 잇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사도명이 말을 이으며 천천히 두 손을 가슴으로 들어올렸다. "우리 사씨가문의 사람 외에는 들어가는 방법을 알아도 시전할 수 없는 것이지. 보게나!"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양장이 앞으로 뻗어 나가며 무수한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동그라미가 그의 양손 끝에서 만들어졌다. 기이한 것은 손이 동그라미를 그리고 난 뒤에도 잔상(殘像)이라 느꼈던 둥근 모양 이 전혀 스러지지 않는 점이었다. '진기가 유형화(有形化)되어 허공 중에 서려 있다.' 진소백의 분석은 틀림없었다. 아마도 사도명의 무공은 태양수가 끝이 아니었나 보다. 이번의 재간만 하여도 태 양수의 위력을 능가하는 수법이었으니... "사씨가문에는 규칙이 있다네.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라면 가문비전의 사자기(獅子 氣)를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 자네에게 이것을 보임은 내가 자네를 특별 히 여긴다는 의미임을 알아주게." 무수한 동그라미를, 아니, 무수한 강기의 구슬을 허공에 띄운 사도명이 두 손을 신 중하게 앞으로 내밀었다. 서서히 전진하는 손, 그러나 이어지는 것은 하늘까지 울릴 듯 쩌렁쩌렁한 기합! "차앗!" 강기 구슬들은 일제히 앞으로 뻗어 나갔다. 이어 열여덟 갈래로 모이더니, 벽면의 성좌 열여덟 군데를 동시에 쳤다. 황도 십팔숙(十八宿)이 위치한 자리! 퍼퍼엉! 눈부신 무예이며 아름다운 장관이었다. 그야말로 하늘을 모조리 가르는 듯한 모습이 아닌가? 사도명의 일수 십팔 번의 공 격이 벽면의 천성도(天星圖)를 치자마자 사방에서 기관음이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우웅-! 처음엔 미약했던 기관음이 서서히 강해지며 넓디넓은 만보고 전체가 흔들리기 시 작했다. 그리고,


우르르-릉! 우렛소리가 사방을 감싸며 천성도가 새겨져 있던 벽면 한쪽이 통째로 열리기 시작 했다. "낙성단천(落星斷天)이라는 이름일세! 가문의 사자기(獅子氣)로 시전되는 이 초식 만이 천성벽(天星壁)을 들어올릴 수 있지." 떨어지는 별이 하늘을 가른다는 이름이 초식의 모양에 잘 어울린다고 진소백은 생 각했다. 쿠쿠꿍! 이윽고 문이, 아니, 벽이 완전히 올라가고 밝은 빛이 속에서 새어나왔다. 이곳이 바로 비보고(秘寶庫)! 외인(外人)으로서는 진소백이 처음으로 들어오는 천 외성의 절대금지였다. * * * "절망옥(絶望獄)을 설계한 귀곡의 진전에는 비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 가문에 전해지는 기관에 대한 지식도 제법 뛰어나다네." 사도명의 말은 결코 헛말이 아니었다. 거대한 벽면이 통째로 들리는 기관이라든가 비보고 곳곳에 설치된 함정들은 모르 고 들어온 사람이라면 다만 필사(必死)의 결과만이 있을 가공할 것이었다. "이 정도라면 귀곡지학과도 능히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수준입니다." 진소백은 진심으로 말했다. 귀곡자의 기관지학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절망옥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지만 사씨가문의 기관도 정말 대단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도명이 말을 받았다. "나 또한 가문의 기관지학을 믿네. 조부님께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일세." 그의 말은 담담한 것 같으면서도 은연중 초조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음속에 걱정이 있는 사람이 가지는 초조의 기운! 사도명은 마음의 격동이 심해 지는지 떨리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그것을 여기 남겼던 것이네. 난 도저히 이러한 결과를 믿을 수가 없다네. 어떻게 좌고학이 여기에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인가?" 진소백은 사도명의 말이 의미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좌고학이 흑혈산에 넘겨주었다는 혈경(血經)! 사도명은 좌고학이 비보고에서 혈경을 가져 갔음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보고는 넓지는 않았으나 위험했다. 사도명과 진소백은 최대한 조심하며 기관을 통과했다. 마침내 혈경을 보관해 둔 곳에 도착했을 때는 긴장이 고조되어 둘 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 * * 절망옥(絶望獄)이 위험한 중죄인(重罪人)을 탈출하지 못하도록 가둬 두는 곳이라 면, 화골옥(化骨獄)은 죄인(罪人)을 심문하는 곳이었다. 천외성의 반도와 죄인을 모두 다루는 형당에 속한 세 개의 옥 중 하나였다. 하나같이 중죄인의 신분이니 모두가 흉악했으며 몰골 또한 더럽기 그지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화골옥주(化骨獄主) 구한(具汗)의 인상을 찡그리게 하는 이 여 인은 이곳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다. "우아악!" 멀리서 모골을 송연케 하는 비명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 왔다.


구한은 최대한 얼굴을 찡그리며 여인을 향해 말했다. "들리는가? 곧 네가 지르게 될 비명은 더욱 강렬할 것이다." 오른손에 든 비수(匕首)를 여인의 이마에 살며시 대고 그으며 말하는 구한! 다른 이의 비명이 들리는 가운데 느끼는 비수의 차가움은 고문당하는 사람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 여인. 비수가 이마를 그으며 핏방울을 줄기줄기 떨어뜨리는데도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 는다. 구한은 속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여인은 결코 흔하지 않다. 또한 그만큼 쉽게 다룰 수도 없다. 구한은 작전을 바꾸었다. 반드시 극도(極度)의 고통이 가해진 뒤에야 이런 여자는 입을 열 것이다. "고통을 원하다면 나 또한 환영(歡迎)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몸을 상하게 한다는 건 무척 섭섭하긴 하지만..." 그러나 섭섭하다는 자의 표정이 어찌 이럴까? 여인의 전신을 덮고 있던 청의를 거칠게 찢어발긴 구한의 눈이 벌겋게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고문을 가하는 자의 심리(心理)! 비록 정파에 몸담고 있다고는 하나, 가학의 심리에 익숙해져 버린 자라고나 할까? 어느새 구한의 눈은 잘 익은 고깃덩이를 바라보는 탐식가의 눈으로 변해 있었다. 그의 음성 또한 눈앞에 닥친 가학(加虐)의 상황을 즐기려는 기대로 들떠 있었다. "크흐흐, 네 이름은 이미 알고 있다. 벽하! 너처럼 아름다운 몸을 고문하는 것은 처음이니 나 또한 기대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날카로운 비수가 희다 못해 푸른 벽하의 등줄기에 닿아 올 때, 그녀는 눈을 감고 말았다. '아직은, 아직은 기다려야 한다.' 벽하(碧霞)! 취보(鷲堡)로 가라는 명령을 좌고학에게서 받았던 그녀는 그곳에 가지 못했다. 대기하던 천외성의 무사들에 의해 잡혔던 것이다. 그리고 끌려온 것이 바로 이 화골옥! 전신에 붙은 살점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뼈로 만들어 버린다는 악명 높은 고문이 이제 막 그녀에게 베풀어지려는 것이다. 한데 기다린다니? 잡힌 그녀가 무엇을 기다린다는 말인가? 2 진소백은 긴장된 얼굴로 사도명의 동작을 바라보았다. 사도명은 더욱 긴장된 얼굴로 혈경을 보관한 기관을 푸는 동작을 신중하게 수행하 고 있었다. 사방의 복잡한 기관을 더욱 복잡한 방법으로 가격하고 일 각 동안 사자기(獅子氣) 를 정해진 순서에 따라 주입하고 나서야 기관은 해체되었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벽이 열리며 나타난 자그마한 틈! 그 틈을 타고 서서히 기 관에 의해 밀려오는 석함(石含)을 보며 진소백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좌고학의 말이 거짓이기만을 바랐다. 만일 정말로 혈경(血經)이 유출된 것이라면 장차 천하를 휩쓸 겁난(劫亂)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긴장감으로 말하자면 사도명이 훨씬 더했다. 혈경이 유출되었다면 사씨가문은 천하의 지탄(指彈)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원래 혈경은 혈왕교의 난이 끝난 직후 폐기(廢棄)되었다고 알려졌었다. 너무나 가 공할 마학(魔學)이 담겨져 있었는지라 무적대제 사무적의 손 아래 한줌의 재로 화 했다는 것이 강호인들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 사무적은 혈경을 폐기하지 않았다. 무공(武功)에 대한 욕심이었을까? 아니면 천하의 절학에 대한 무인으로서의 미련 이었을까? 어쨌든 사무적은 혈경을 차마 없애지 못하고, 대신 이러한 절고(絶高)의 기관을 이용해 혈경을 유기(遺棄)했다. 그러나 그가 비록 순수한 무학에 대한 의무감으로 차마 혈경을 없애지 못했다 하 더라도, 이 사실이 강호에 새어나간다면 천하의 그 누가 이 말을 믿어 줄까? 또한 의도가 순수했다고 해서 장차 혈경으로 인해 야기될 혈겁을 피할 수 있는 것 은 결코 아니었다. 강호인들이 혈경에 대한 것을 알게 된다면 천외성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보지 않 아도 뻔했다. 석함을 앞에 둔 채로 사도명은 한 번 더 침을 삼켰다. 그 소리가 귓전에 들릴 만큼 장내의 긴장은 극에 달했다. 심지어 진소백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긴장했다 하더라도 확인할 것은 확인해야만 하는 법! 터질 듯한 침묵을 갈가리 찢으며 석함의 뚜껑이 열렸다. 끼이이익! 석함의 내부가 드러나며 긴장은 고조되었다. 그리고 터질 듯한 긴장은 한 순간에 해소(解消)되었다. <혈경(血經).> 곧 흘러내릴 듯한 핏빛 글씨로 쓰여진 한 권의 책은 얌전하게 석함 속에 누워 있 었다. 팽팽했던 긴장이 한 순간에 풀어지며 사도명의 입에서는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결국 좌고학(左孤鶴)은 거짓말을 한 셈이로군." 사도명은 얼굴에 웃음기마저 띤 채 안도했다. 그러나 진소백은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좌고학의 마지막 웃음, 그 웃음이 지닌 기이한 두려움이 자꾸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특이한 냄새가 그의 코를 자극한 것은 그때였다. 어린 시절. 진소백이 가장 먼저 배운 것은 검(劍)도, 도(刀)도 아니었다. 가문 전래(傳來)의 비법! 신주 제일의 화기법을 자랑한다는 벽력세가(霹靂勢家)의 마지막 계승자가 바로 진 소백이었다. 검보다 화기에 먼저 익숙해졌던 것은 그러한 가문의 피의 영향이었을까? 어쨌든 진소백은 화기를 매우 일찍 알았고, 화기에 대한 지식은 진소백의 강호 행도에 많


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이 순간, 진소백은 화기를 다루는 기술 중에서 가장 어렵고도 신기한 기술 중 하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냄새! 지금 진소백의 코를 간지럽히는 냄새가 바로 그 기술에 쓰이는 특이한 화약의 냄 새였으므로. 벽린화(霹燐火)! 공기가 갑자기 바뀐다면 곧 불타 오르게 된다. 밀폐된 곳에 이것을 두었다가 외기(外氣)에 접촉시키면 가공할 열기를 뿜어 내며 타오르고, 일순간을 어떠한 것으로도 그 불을 끄지 못한다. 지금 석함을 열자마자 벽린화의 냄새가 진하게 풍겨 왔음은 단순한 우연일까? 아 니면... 진소백은 오래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이미 석함은 완전히 열렸고, 사도명이 기쁨의 미소를 가득 담고 보고 있는 혈경이 란 책은 외기에 노출된 상태였으므로. 설명은 무척 길었다. 하나 이것은 머릿속을 오고 간 생각에 불과했고, 사도명이 석함을 열어 책이 들었 음을 확인하고 미소를 띠자마자, 혈경이 붉게 변하며 화염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벽린화! 천하에서 가장 강한 불 중의 하나가 무서운 기세로 석함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다. "우웃!" "위험하오!" 사도명이 놀라 물러서는 순간, 진소백이 거의 동시에 장력을 강하게 쏟아 내었다. 벽린화(霹燐火)를 상대할 때 장력은 결코 불을 정면으로 향해서는 안 된다. 장력에 흔들린 불이 사방으로 흩어진다면 오히려 더 큰 위험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진소백의 장력은 벽린화가 솟아오르려는 석함 위의 허공을 가르며 일시지간 공간 을 진공(眞空) 상태로 만들었다. 이것이 벽린화가 솟아 퍼져 나가는 것을 잠시나마 방지(防止)하는 유일한 방법! 불이 탈 수 있는 여건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잠시 흔들린 벽린화의 기세는 곧 다시금 맹렬하게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후루룩! 불이 허공을 잠식하는 소리가 석실 안을 가득 메웠고, 사도명은 비록 엄청난 속도 로 피하기는 했으나 가슴 일부에 푸른 벽린화가 옮겨 붙음은 어쩔 수 없었다. 씨우웅! 옆에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 이런 소리를 들었으리라. 진소백의 등이 활처럼 휘어졌다가 펴지자 그의 몸이 공기를 쏜살같은 기세로 가르 며 벽린화를 피해 후퇴했다. 그의 오른손에는 사도명이 잡혀 있었다. 사도명은 가슴에 불이 붙은 것도 모르는 듯 계속 뭐라 중얼거리고만 있었다. 일렁이는 불꽃과 열기를 남겨 두고 진소백과 사도명의 신형은 긴 석조의 통로를 돌아 비보고(秘寶庫)를 빠져 나갔다. 단지 눈을 몇 번 깜박일 동안에 일어난 변화! 그만큼 벽린화가 일어나는 기세는 무서웠고, 진소백의 신형은 빨랐다. 뒤로 날아가던 진소백은 십여 장을 단숨에 가로지르며 왼손의 검지와 중지로 지풍


을 날렸다. 칠성 방위로 늘어선 돌들의 머리가 지풍에 명중하자, 끼리릭! 기관(機關)이 돌아 통로를 막으며 벽린화의 길을 봉쇄했다. 머리를 태울 듯하던 열기가 서서히 가라앉음을 느끼며 진소백은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그는 드디어 사도명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사 형님, 괜찮으십..." 진소백은 말을 이을 여유가 없었다. 사도명의 가슴을 아직 불태우고 있는 푸른 마화(魔火)! 벽린화가 그의 가슴에서 아직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정신차리십시오!" 진소백의 손은 외침보다 훨씬 빨랐다. 그의 양손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움직이며 사도명의 가슴을 덮어 나갔다. 공공신수(空空神手)! 천하에서 가장 빠른 손이 공기를 번갈아 가르며 가슴 주위의 공기를 밀어 내기 시 작했다. 얼마나 계속했을까? 이윽고 불꽃이 기세를 잃고 사그라질 때, 진소백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 다. 불이 꺼지고 올라오는 연기 속에는 인간의 살을 굽는 메스꺼운 냄새가 실려 있었 다. 이런 고통! 참기 힘들 만큼 클 텐데도 사도명은 느끼지 못하는 걸까? 그는 멍한 눈으로 아직 중얼거리고만 있었다. "안 돼! 이건 안 돼!" 진소백은 귀를 가까이 대서야 겨우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뭐가 안 된다는 것일까? 혈경! 저주의 혈경이 세상에 다시 나가며 필연적으로 다가올 혈겁. * * * 구한(具汗)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러나 그의 손이 닿아 있는 벽하의 아름다운 가슴에 맺힌 것은 붉디붉은 핏방울! "흐흐, 좋다. 천천히 대답할수록 네 고통은 커져 가고 내 즐거움은 늘어 간다." 그의 손톱이 아름다운 젖가슴 끝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벽하의 눈에는 오직 분노와 살기만이 흘렀고, 그녀의 두 손은 자신이 묶인 나무의 자를 부서져라 잡았다. 우둑! 다른 이에게 들리기에는 미약한 소리를 내며 그녀의 손에 잡힌 의자의 나뭇조각이 떨어졌다. 이곳은 화골옥이었다. 3 곧바로 떨어지며 정수리를 노리는 손! 손의 임자는 진소백이었고 그 손이 향하는 정수리는 사도명의 것이었다.


그러나 손에는 추호의 살기도 없었다. "우웩!" 진소백의 일장에 사도명은 한 주먹의 피를 토했다. 너무 큰 심력을 쓴 탓에 막혔던 심맥이 터지며 그는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어떻게 된 건가? 충격으로 내가 잠시 정신을 잃었었나?"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더 멍하니 있던 사도명은 이윽고 혈경에 다시 생각이 미친 듯 물었다. "혈경은? 불... 그래, 불이 났으니 모두 타버렸겠군. 잘됐어. 정말 잘됐어. 이로써 강호는 혈겁을 면하겠군!" 사도명의 말은 그가 얼마나 혈경의 유출을 걱정했었는지를 시사하고 있었다. 또한 불과 함께 타버린 것에 안도하는 마음을 잘 나타냈다. 그러나 진소백은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다만 가만히 한숨을 쉴 뿐이었다. "처음부터 벽린화를 넣어 둔 것입니까?" "응? 뭐라고 했나?" "벽린화(霹燐火)를 처음부터 혈경과 함께 넣어 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사도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머리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머리카락 한줌이 손가락에 걸려 빠져 나왔 다. "아니, 난, 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네." 진소백이 고개를 흔들며 침중히 말했다. "벽린화는 화문에서도 웬만한 고수는 섣불리 다루지 못할 정도로 위험한 화기입니 다. 사 형님께서는 혹시 조부께서 화기에 조예가 깊었다는 말을 들으신 적이 있으 십니까?"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네." 진소백 또한 마지막 기대가 무너짐을 느꼈다. 그의 기대와 더불어 강호가 혈겁을 피할 마지막 희망도 산산이 부서졌다. 이런 상황에서 진소백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적대제가 또는 천무 사경천이 넣어 둔 벽린화가 아니라면 또 다른 사람이 넣어 두었을 것이다. 좌고학!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나 좌고학이 혈경을 가져 간 것은 거의 확실해졌군요. 뒤의 상황에 대비하여 벽린화까지 넣어 둔 채로." 사도명도 사정을 깨달았다. 아니, 이전부터 짐작은 했었지만 인정하기가 싫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머리를 감싸고 털썩 주저앉았다. "끝이다. 이로써 우리 사씨가문은 강호에 씻을 수 없는 죄인(罪人)이 되고 강호는 또다시 피로 뒤덮이리라. 끝이다, 끝!" 그는 정신없이 중얼거리고 있지만, 결코 과장은 아니었다. 혈경, 그리고 혈왕교! 강호는 진실로 피를 피하지 못하리라. 문득 사도명이 고개를 들어 말했다. "아니, 아직 희망이 하나 남아 있네." 진소백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만에 하나 강호에 닥칠 대란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지 않는가? "무슨 희망입니까?"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들었던 얘기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조부님께서 혈경 에 조작을 가하셨다 들었네." "조작(操作)이라면?" "정확히는 모르네만 가장 중요한 부분을 삭제하셨다는 말을 들었네." 진소백은 가슴이 뜀을 느꼈다. 사실이라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요. 빨리 확인을 하러 가시죠." 사도명의 어렴풋한 기억을 확인해 줄 사람은 천하에 오직 한 명뿐이었다. 천무 사경천. 지금 중수(重水)에 의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천외성의 성주뿐이지 않는가? * * * 사경천! 오랜 세월 병상을 지켰음에도 낮은 말에 위엄이 저절로 실리는 인물! 사도명의 아버지이며 무적대제(無敵大帝)의 아들이었던 그의 말은 진소백의 가슴 을 쓸어 내리게 했다. "들은 적이 있네. 분명 기억하지." 그의 말은 강호가 피의 운명을 겨우 피했음을 뜻했다. "대제께서는 혈경의 마지막 구결을 없애 버리셨네." 혈경의 마지막 구결이란 혈황을 탄생시킬 수 있는 무학인 마마혈강(魔魔血 )에 대 한 부분이었다. 무적대제 사무적이 그 부분이 없앴다면 혈경에는 오대사마존(五大邪魔尊)의 무공 만이 실려 있을 것이고, 혈황은 탄생하지 못할 것이다. 혈황이 없는 혈왕교는 진정한 의미의 혈왕교가 아니었다. 백이십 년 전. 강호의 결집된 힘은 천외성의 등장 없이도 혈황이 빠진 혈왕교와 동수를 이루었 다. 사도명이 반색을 하며 말했다. "다행입니다. 혈경을 보관했다는 강호인들의 지탄은 피할 수 없다 해도 혈황이 빠 진 혈왕교라면 승산(勝算)이 있습니다." 진소백도 다행이라는 점에서는 동감이었다. 그러나 비록 혈황이 없는 혈왕교라 하나 강호가 크나큰 위기에 처하게 될 것임은 명약관화(明若觀火)! "시간이 촉박합니다. 혈경의 유출이 확인된 이상, 한시라도 강호에 이 사실을 알리 고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진소백의 허리가 꼿꼿이 세워지고 눈에 정광이 어렸다. "새로 등장할 혈왕교, 흑혈산의 세력이 어떠할지는 모르나, 강호인들이 모두 힘을 모으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랬다. 백이십 년 전 강호를 하루아침에 장악했던 혈왕교의 공포는 강호인들에게 있어 가 공(可恐), 그 자체였다. 하지만 혈경이 흑혈산(黑血山)이란 문파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린다는 것 자체가


천외성이 신망을 잃음을 의미했다. 사경천은 자신의 가문을 무너뜨리는 발표를 스스로 해야만 하는 것이다. 진소백이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자 사경천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 했다. 아들 사도명을 보는 그의 표정은 비장했다. "강호에 알려라. 비록 우리가 어떤 지탄을 받는다 해도 혈왕교의 재출현으로 인한 피해를 줄일 수 있다면 감당해야 할 것이니..." 그의 고뇌에 찬 결단을 듣고 진소백도 마음이 착잡했다. 하나 지금에 와서 혈경을 없애지 않은 것에 대해 질책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혈경은 이미 강호로 나갔고, 피의 시대는 예고되었다. 다만 사경천이 가문의 피해를 무릅쓰고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한시라도 빨리 강호에 발표한다는 사실만이 기꺼웠다. 또한 마지막 구결은 불태워 버렸다 하니 불행중다행이 아닌가? * * * "백이십 년 전에도 천외성은 혈왕교를 막아 냈습니다. 이번에도 가능할 것입니다." 진소백은 기운을 잃은 사도명을 보며 말했다. 힘을 찾아 주기 위한 말이었다. 진소백은 사도명을 짧게 겪었지만 그에게서 여러 가지의 장점을 보았다. 그의 마 음가짐이 광명협이란 칭호에 결코 손색이 없음을 안 진소백은 가능한 한 그를 돕 고 싶었다. 하지만 사도명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천외성의 힘은 지난날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네. 무적대제 조부님께서 어디 론가 떠나시면서 가문의 비학이 상당 부분 사라졌다네." 그는 마음이 답답한지 한숨을 길게 쉬었다. "아버님만 건강���시다면 이처럼 걱정을 하지는 않을 텐데... 내 성취는 아직도 너 무 일천하다네." 천무 사경천만 건강하다면...! 그가 당한 중수를 해독할 수 있어 보이는 의술가를 진소백은 두 명 알고 있었다. 자신을 어린 시절부터 가르친 사부들 중 한 분이신 성수의선(聖手醫仙)! 그분이라면 어쩌면 중수를 해독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또 한 사람은 진소백이 일 년 전 약속을 했던 생사의괴(生死醫怪) 종도(鐘塗)였다. 특히 생사의괴는 성수의선도 어려워했던 엽평의 절맥을 쉽게 고쳐 낸 인물이니 어 쩌면 그가 더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진소백은 그와 했던 일 년의 약조를 기억했다. 오늘이 저물어 가니 이제 불과 하룻밤의 여유가 있었다. 진소백은 품에서 종도가 전해 주었던 금낭과 지도를 꺼냈다. 이미 몇 번을 확인했던 지도(地圖)! 지도가 가리키는 곳은 천외성에서 멀지 않은, 역시 같은 태산 줄기의 앙천봉(仰天 峰). 진소백은 곧바로 출발할 결심을 굳혔다. "정말 조금도 쉬지 않고 떠나려는가?" 사도명이 가슴이 아픈 듯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예, 여유가 없습니다. 앙천봉에서 생사의괴를 만난다면 성주의 내상을 치유할 가 능성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진소백은 모르고 있었다. 종도가 왜 일 년의 약조를 했었는지. 일 년 후 자신을 만나기 직전에 열어 보라던 금낭 안에 든 내용은 도대체 무엇인 지를. 어쨌든 진소백은 밤을 도와 떠났다. 그는 천외성에 온 이래 한시도 쉬지 못했지만 피로를 느낄 여가가 없었다. 한시 바삐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 제 10 장 앙천봉(仰天峰)의 사연, 강호는 나락으로. 1 태산의 험준함을 모르는 이는 없다. 앙천봉이 비록 최고봉(最高峰)은 아니라 하나 역시 높고 험했다. 하지만 무공을 익힌 고수를 막을 수 있는 산은 거의 없었다. 진소백은 약간 밝아진 상현(上弦)달에 눈을 의지하며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이제 서서히 미명이 움터 오고 있었다. "이곳 근처가 틀림없는데." 두리번거리던 진소백은 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표식이 되는 소나무를 발견했다. 거대한 노송의 오른쪽 가지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일직선으로 절벽 높은 면에 검 은 동굴이 보였다. 주위가 나무로 뒤덮여 노송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입구가 절묘하게 가려지는 위치 였다. "정말 묘한 위치를 알고 계시는군!" 진소백은 서둘러 절벽 아래로 향했다. 그의 몸은 벽호공(壁虎功)을 시전하며 벽면에 달라붙었고, 곧 꿈틀거리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절벽의 중간에 뚫린 동굴까지의 높이는 줄잡아 오십여 장! 그리 높은 건 아니었지만 진소백이 동굴까지 올라왔을 때는 이미 태양이 산 너머 로 전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산에서는 미명부터 일출까지의 순간이 매우 짧았다. 어두운 동굴. 입구에서 서서히 들어간 빛은 진소백을 안내했다. 약 이십여 장을 걷고 막 하나의 모퉁이를 돌았을 때, 진소백은 두 개의 화톳불이 타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그 사이에 조용히 웃음을 띠고 서 있는 노인! 작은 키지만 얼굴은 선풍(仙風)이 가득하여 전혀 속돼 보이지 않았다. 일 년 만의 만남인 탓일까? 진소백은 그의 기도(氣度)가 어딘지 모르게 생경(生硬) 했지만 공손히 인사했다. "일 년 만에 뵙습니다. 먼저 엽평의 치료에 감사드립니다." 종도가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니야! 그의 운이 좋았던 것일 뿐이지. 자, 우선 어디에 좀 앉게." 진소백(鎭小栢)은 왼편에 의자 모양으로 다듬어진 바위를 찾아 앉았다. "동굴로 올라오느라 힘이 들었을 테니 내가 뭐 마실 거라도 좀 내오지." 종도가 동굴의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진소백은 품에서 일 년 전 종도가 주었던


금낭을 꺼내었다. '이 속에 무엇이 들었기에 꼭 읽어 보라 하셨을까?' 금낭 안에서는 다만 한 줄기의 글귀만이 나왔다. 종도가 돌아왔을 때는 진소백이 한참 금낭을 열어 나온 글을 읽고 있을 때였다. 방해하기 싫었는지 종도는 아무 말 없이 찻잔을 들고 진소백에게 다가갔다. 진소백과의 거리는 이제 겨우 네 자 정도에 불과했고, 종도가 찻잔 아래에서 붉게 빛나는 비수를 꺼냈을 때는 그나마 세 자로 좁혀져 있었다. 비수! 푸른 날이 섬뜩한 비수가 소리도 없이 진소백의 머리 위로 들렸지만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무엇을 그리 읽을 게 많은지 오직 아래만 주시했다. 비수가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릴 때조차 진소백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가 비수를 피할 방법은 뒤로 물러나는 것뿐이었지만 지금 진소백이 앉아 있는 의자는 무거운 바위의자! 게다가 진소백이 어찌 종도가 자신을 공격할 것을 짐작이나 할까? 종이에 적힌 글 을 읽느라 정신이 없는 진소백과 그 위로 소리없이 달려드는 비수의 푸른 날! 이곳은 앙천봉(仰天峯)이었다. * * * 화골옥(化骨獄)! 천외성의 죄인만을 가두는 곳! 그곳의 고문은 누구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고 여인은 더욱 힘들었다. 벽하의 온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하지만, 악독한 구한(具汗)도 그녀의 미모만은 건드리기 아까웠는지 얼굴만은 전혀 상처가 없었다. 전신을 붉은 피로 두른 미녀! 고문은 당하는 자뿐 아니라 가해자(加害者)의 정신마저도 이상하게 만든다. 한참 동안을 지독한 고문과 가학으로 일관하던 구한은 광기(狂氣)가 극에 달하는지, 자 신의 옷을 발기발기 찢고 있었다. "흐흐, 좋다! 아직 입조차 한번 열지 않다니. 어디, 이런 건 어떠냐?" 그의 검붉은 몸이 모두 드러나자 벽하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녀의 숨겨진 눈동자는 갈등으로 떨고 있었다. 구한의 몸 일부가 그녀의 몸에 와 닿았다. 견디기 힘든 상황! 벽하의 손에 힘의 출입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녀는 갈등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화골옥 전체가 미미하게 흔들린 것은! 이곳의 위치는 무저 지옥이라는 절망옥(絶望獄)의 바로 위. 흔들림은 그곳에서 나왔음이 틀림없다. 벽하의 눈이 기광으로 물들며 힘주어 손을 쥐었다. 구한의 몸 일부분이 그녀에게 들어서기 바로 직전! 벽하의 오른손이 밧줄을 종이 처럼 찢고 구한의 목을 잡았다. "캐액, 어, 어떻게...?" 전혀 의외의 상황에 노출된 구한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목줄기를 잡아 오는 이 강한 힘이 어떻게 무공이 폐지된 자의 능력일 수 있는가? 우득! 구한(具汗)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의 목뼈가 기음과 함께 끊어졌다. 부릅뜬 그의 동공(瞳孔)엔 차가운 냉소를 날리며 안개처럼 흩어지는 벽하의 모습 이 새겨졌다. 하지만 그는 지금 벽하가 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즉사! 구한은 이미 죽어 있었다. * * * 떨어지는 비수! 절명의 위기에 처한 진소백의 몸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의자에 앉은 자세 그대로 앞으로 쭉 미끄러지는 몸! 스걱! 비수는 그의 등을 약간 스쳤을 뿐, 다른 상처를 만들지는 못했다. 그다지 큰 상처는 아니었다. 대신, 진소백의 머리가 종도의 가슴을 들입다 받으며 망치로 찍는 소리가 동굴에 울렸다. 쩡! 얼마나 빠른 속도였기에 이처럼 강한 소리가 인간의 머리와 가슴의 충돌로 일어날 까? "우우웩!" 일격에 피를 토한 종도가 허공을 훌훌 날 때, 진소백의 몸도 그를 따라 미끄러져 갔다. 날아가는 종도를 거의 동시에 따라가는 빠른 신법! 땅에 떨어지기 전 종도의 마혈 세 군데를 한 번에 찍어 버리는 천하제일쾌수 공공신수(空空神手)! 진소백의 손길이 종도의 몸 주위를 환상인 양 감았다 물러설 때, 종도의 몸이 비 로소 바닥으로 떨어졌다. 풀썩! 그는 이미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진소백이 읽고 있었던 종이는 그제서야 팔랑이며 바닥에 내려앉았다. <내가 금낭에 대해 언급(言及) 않거든 나를 죽이게.> 자신을 죽이라니? 진소백이 얼음장 같은 어조로 물었다. "넌 누구냐?" 그는 종도가 아니었던가? 가짜란 말인가? 가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힘있게 어금니를 깨물었을 뿐. 진소백이 무언가에 생각이 미쳐 급히 그의 아혈을 짚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가짜는 괴로운 듯 몸을 뒤틀었고, 그의 몸은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고통을 가득 담고 진소백을 노려보았다. "왜 이렇게 쉽게 목숨을 끊는단 말이냐? 솔직히 대답만 해준다면 죽일 마음은 없 었다." 진소백이 놀라 외쳤지만 가짜는 입을 일그러뜨리며 냉소했다. "흐흐, 너 또한 곧 내 뒤를 따라올 것이다. 안심하지 말아라. 흐흐흐!"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진소백은 벌써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 성수의선으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단련된 그의 몸은 웬만한 독에는 내성(耐性)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스친 것에 불과한 독이 벌써 이런 위력을 발휘하다니! 그의 뇌리에 무서운 이름이 하나 떠올랐다. 악마혈(惡魔血)! 그 독이 아니라면 가짜가 그처럼 쉽게 녹아 버릴 수 있는가? 그 독이 아니라며 스 친 것만으로 진소백이 이처럼 중독될 수 있는가? 어지러움이 심해짐을 느끼며 그 는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멀리서 누군가 다가옴이 느껴졌다. 적인가? 정신이 흐려졌다. '너무 방심했다. 동굴로 들어오기 전에 금낭을 열었어야...'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그리고 치명적인 결과는 어떤 후회로도 결코 바꾸지 못하는 법이다. 2 사방이 막혀 있는 벽은 온통 백색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들리는 소리도 하나 없었다. 절대의 무(無)! 문득 진소백은 자신의 처지가 기억났다. 독에 당해 기절했던 순간! '나는 죽었는가?' 그러나 이 순간은 생사가 그리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진소백은 자신의 몸이 허공을 날고 있음을 알았다. 인간이 허공을 나는 일이 그리 어렵게 여겨지지 않았다. 무위(無爲)의 세계, 또한 태극(太極) 속을 노니는 자신의 몸과 정신이 너무나 자연 스럽게 느껴졌다. 몸 속의 진기가 어떻게 돌고 있는지는 전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어쩌면 몸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환상인 듯했다. 훌훌 날아다니는 몸, 아니, 정신! '이런 당연한 도리를 어떻게 전에는 몰랐을까?' 마음이 명령하면 몸은 충실히 따랐다. 원하는 행동 모든 것이 그의 뜻에 충실하며 이룩되었다. 도를 깨우칠 때 느낀다는 법열(法悅)이 바로 이런 것일까? 진소백은 눈물이 흐름 을 느꼈다. 가슴이 벅차 올랐다. 문득 혈경의 일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한구석에서 솟아난 피에 대한 두려움이 그의 온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사방 흰 벽의 곳곳이 갈라지며 시뻘건 핏물이 흘러내렸다. 괴물의 울음 같기도 하고 귀신의 호곡 같기도 한 소리가 진소백의 귀를 마구 두드 렸다. 그는 몸이 천근 만근 무거워짐을 느꼈다. 추락! 아래는 끝이 없는 검은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었고,


"으아악! 떨어진다." 떨어진다! 자신의 굉렬한 외침에 놀라 진소백은 깨어났다. 몸은 여전히 동굴 바닥에 누운 채였다. 날아다니던 기억은 모두 꿈이었던가? 그때는 그처럼 자연스러웠던 것들이 깨어나니 더할 나위 없이 신기했다. '내가 살아났나? 어떻게 해서...?' 의문은 해답을 곧 제시했다. 진소백의 옆! 또 다른 종도가 가부좌를 한 채로 앉아 있지 않는가? 당연히 그가 진짜 생사의괴 종도일 것이다. 종도의 발 앞에는 서찰 하나가 놓여 있었다. 꼼작도 않고 있는 종도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진소백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진소백의 몸은 아직 자유스럽게 움직이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자유스러웠다. 그는 생사의괴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죽었음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런 경우 일어나는 가슴속의 격동을 인간으로서 어찌 피할 수 있을까? 그와 종도는 겨우 두 번째 만났을 뿐이다. 그럼에도 종도는 왜 자신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렸는가? 그는 겨우 팔을 움직여 종도가 남긴 서찰을 집어 들었다. 서찰은 두 장이었다. 급하게 쓴 글씨로 미루어 하나는 종도가 죽기 직전에 남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오래 전부터 준비한 것인 듯, 단정한 글씨체가 눈을 시원하게 했다. 진소백은 급히 써놓은 듯한 글부터 읽기 시작했다. <난 이미 치명적인 내상을 입어 그냥 있어도 살기 힘든 몸이 되었네. 하니 자네는 너무 부담을 갖지 말게.> 급한 순간에도 진소백의 마음을 배려한 글이 종도의 인물됨을 말해 주었다. <어떻게 혈왕교의 무리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지 모르겠네. 또한 내 거처를 어떻 게 알았는지도. 부디 자네는 내 염원을 이루어 주게. 혈왕교와 암중에 천하를 도모하는 검은손에서 천하를 구해 주게. 이는 나와 내 아 들의 염원을 이루는 길이니... 자네의 악마혈(惡魔血)은 완전히 해독하지는 못했네. 단지 내 진기(眞氣)로써 일부 의 독만을 빼냈을 뿐이네. 아래의 방법으로 진기 운행을 계속한다면 악마혈(惡魔血)을 해독할 수 있을 뿐 아 니라 악마혈에 대한 어느 정도의 내성이 생길 것이네.> 급히 날려 쓴 글은 거기서 끝났다. 진소백은 다른 서찰을 읽기 시작했다. 그 서찰엔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 쓰여 있었다. * * * <노부의 이름은 종사원(鐘思元)! 한때 천추학림의 임주(林主)를 역임했으나 아들의 비리에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평소 내 아들 종수의 성품으로 어떻게 그런 패륜(悖倫)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믿


기 어렵다. 그러나 종수(鐘秀)가 실종되고 없었으니 난 의문을 품고 강호를 물러날 수밖에 없 었다. 강호에 나와 아무도 모르게 생사의괴 종도란 이름으로 바꾸고 종수의 행방 을 수소문하기 칠 년여. 하늘의 도움인지 어느 날 종수가 스스로 나를 찾아왔다. 어디서 당한 것인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서. 그는 얼마 살지 못했다. 다만 몇 마디의 말을 남기고 곧 정신을 잃었으며 몸에 성한 곳이 하나 없는 그를 나는 내 의술로도 되살리지 못했다. 다만 식물인간이 되어 살아 가게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난 가만있을 수 없었다. 아들의 회생에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를 알아 보기 시 작했다. 아들이 마지막 남긴 몇 마디와 오랜 조사를 합하여 난 엄청난 사실을 알아 낼 수 있었다. 원래 나의 사부이신 장춘옹께서는 귀곡의 삼절 중 무절을 제외한 두 갈래의 공부 를 이으신 분이셨다. 내가 의도에만 재능이 있고 기관에는 재능이 천박하여 사부께서는 기절(機絶)을 내 아들 종수에게 전수하셨다. 종수는 기관에 정통하게 되자 사부께서 지으신 천외성의 절망옥(絶望獄)을 맡게 되었다. 원래 그곳은 혈왕교의 오대사마존 중 사로잡힌 둘을 ���두기 위한 곳! 그곳에서 종수는 무서운 사실은 알게 되었다. 혈마수라결(血魔修羅訣)! 혈황 탄생의 비밀이 담긴 구결이라고 알려졌으며, 혈황의 가공할 무공의 원류가 된다는 혈경상의 최후 비전! 그 구결이 사마존들에 의해 절망옥 아득한 바닥에 남겨져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 이다. 종수는 놀랐다. 옛날의 혈겁을 또다시 강호가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디서 이런 말이 새어나간 것일까? 그가 이 사실을 알렸던 두 사람, 그와 가장 친했던 두 사람과 더불어 그는 혈왕교 의 암습을 받고 말았다. 혈왕교는 사라졌다고 알려졌지만 그 잔당들은 어디에나 남아 있었다. 문제는 종수를 나포(拿捕)하고 그의 두 친우인 엽자문과 진무외(鎭無畏)를 암습한 혈왕교의 잔당들이 분명 천외성 내부에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암중에 천하제패를 도모하고 있는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 아무도 없다. 천하는 어찌 되는가? 부디 강호를 혈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 주기 바란다. 나의 유유곡 삼관을 돌파한 사람만이 이 글을 보게 될 것이니, 그대는 능력을 갖 추었으리라. 강호 어딘가에 귀곡삼절 중에서 무절을 이으셨던 사백 매화노인의 진전을 이은 사 람이 있을 것이니 그를 찾는다면 큰 도움이 되리라.>


* * * 종도가 사실은 장춘옹의 의절(醫絶)을 이은 종사원(鐘思元)이었다는 사실도 놀라웠 지만, 서찰 곳곳에 나오는 이름들은 더욱 놀라웠다. 이것은 우연이라기엔 너무 공교롭지 않는가? 엽자문과 진무외! 그리고 귀곡의 무절을 이은 전인! 무절을 이은 전인은 연옥천(燕 玉天)이었으며, 엽자문(葉子文)은 바로 엽혼과 엽평의 아버지가 아닌가? 그리고 진무외는 진소백 자신을 세상에 있게 하신 분이셨으니... '이렇게 일이 엮이다니, 정말 하늘은 내게 혈왕교를 상대하게 하시려는구나!' 진소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으르릉! 귓가에 들리는 소리는 미약했다. 하지만 몸을 통해 느껴지는 진동은 분명하면서도 뚜렷했다. 천외성은 비록 산속에 지어졌지만 매우 튼튼했다. 게다가 이 지역은 지진이 많은 곳이 아니었다. 때문에 미약한 울림과 더불어 땅이 흔들림을 느꼈을 때, 사도명은 원인을 알아 보 지 않을 수 없었다. "빨리 무슨 일인지를 알아 보거라. 혹여 어디에서 화약이라도 터진 것이 아니냐?" 소성주의 명령을 받은 무사 하나가 심부름꾼이 되어 급히 밖으로 달려갔다. 그런 데 그가 채 나가기도 전에 다른 순찰무사가 먼저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다. "지급(至急)입니다. 화골옥에 가두었던 벽하가 탈출했습니다. 화골옥주 구한은 목 뼈가 부러져 즉사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모든 혈도를 제압하여 무공을 폐지시켜 가두었던 벽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구한(具汗)의 목을 부러뜨릴 수 있다는 말인가? 사도명은 문득 좌 고학을 떠올렸다. 그도 무공이 폐지된 상황에서 쇠사슬을 끊었었다. 벽하가 그의 수하였으니... '설마?' 만에 하나 벽하도 좌고학과 같은 기공을 익히고 있었다면... 사도명은 고함치듯 외쳤다. "어서 찾아라. 성의 모든 인원을 동원해서라도 그녀를 찾아라. 죽여도 좋으니 어 서!" 그의 음성은 무척 당황한 듯했다. 어쩌면 사도명은 본능적으로 위기의 냄새를 맡 았는지도 몰랐다. * * * 진소백은 몸을 움직일 수는 없어도 정신만은 맑았다. 그는 천천히 상황을 정리했다. 종수를 암격했던 자들은 틀림없이 흑혈곡이나 좌고학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좌고학...! 그가 떨어졌던 절망옥(絶望獄)의 그 까마득한 공간! '그곳에 혈마수라결(血魔修羅訣)이 남겨져 있다는 말이지?' 순간 진소백은 눈을 부릅떴다.


웃음! 항상 마음에 걸리던 좌고학의 마지막 광소! 그는 왜 스스로 절망옥에 떨어졌던 걸까? 그곳은 한번 빠지면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다시 올라오지 못한다. 밖에서 누군가 도와 주기 전까지는. '도와 준다! 누가 돕는 걸까?' 드디어 진소백의 생각이 벽하에게 미쳤다. 그녀도 역시 신수궁의 무공을 알 것이다. 신수잠(神水潛)! 무공이 폐지된 상황에서도 잠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이 기공을 좌고학만 익혔을 까? 벽하 역시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진소백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러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체내에 남아 있는 악마혈은 그의 몸은 마비시키고 있었고, 적어도 이틀은 지 나야 내성(耐性)을 길러 해독할 수 있을 터였다. '그때는 이미 늦다. 어서 천외성으로 돌아가야만...' 몸을 움직이지 못하니 마음은 더욱 안타까웠다. 그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좌고학이 정말 일부러 절망옥 바닥으로 빠진 것이라면... 벽하가 어떤 뜻을 가지고 일부러 붙잡힌 것이라면... 좌고학의 의도는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혈경에서 사라진 마지막 구결을 찾으려는 것! 모종의 경로를 통해 그가 절망옥 바닥에 혈마수라결이 있음을 알았다면 자발적으 로 쇠사슬을 끊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구결을 찾은 뒤였다. 절망옥의 구조상 외부의 조력자가 없다면 밖으로 나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끈이나 사슬을 내려 그를 끌어올려 줄 조력자! 조력자의 역할을 위해 벽하는 천외성에 잡혔던 것이다. 그것도 절망옥 아래의 신호가 가장 잘 들리는 화골옥에! 일종의 신호로 좌고학이 연락을 보내면 그녀는 화골옥을 탈출하여 좌고학을 구할 것이다. * * * 돌이 깨어져 나갔다. 엄청난 핏빛의 소용돌이는 천외성의 무사들을 가랑잎처럼 가볍게 허공으로 불어 올렸다. 가슴을 울리는 광소! 피보다 붉은 강기를 전신에 가득 두른 인영이 허공 오 장 위에 떠 있었다. "크하하하! 드디어 혈마수라결(血魔修羅訣)을 얻었다. 이제 나는 혈황으로 다시 탄 생하였다. 크하하." 혈영(血影)은 단숨에 화골옥을 부수며 날아올랐다. 사십여 명의 무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지만 누구도 그의 몸 일 장 가까이까지는 가지 못했다. "크하하, 내 앞을 막는 자는 나의 힘을 보게 될 것이다!" 지극한 살기(殺氣)에 물든 음성이 사방을 울리며 혈영(血影)의 손이 앞으로 밀려 나오자, 꽈드득!


혈광은 돌로 된 바닥마저 길게 패며, 쭉 뻗어 나가 천외성의 무사들을 핏덩어리로 만들었다. 순간이었다. "멈추어라!" 사방에서 쩌렁쩌렁한 울림이 들려 온 것은. 열다섯 갈래의 다른 경기가 한 점으로 집중되며 혈영의 일장을 막아 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뻥뻐벙! 혈영은 조금 밀린 듯 어깨를 움찔거리더니 십여 장 허공으로 치솟았다. 합력하여 그를 공격했던 열다섯의 절정고수들은 분분히 물러났다. "크하하하, 과연 천외성의 힘은 대단하다. 하나 내가 다시 돌아올 때 천외성은 한 줌의 재로 남고 말리라. 크흐하하!" 멀어지는 혈영! 그리고 그 모습을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열다섯 명의 사람들! 천외성 을 이끌어 가는 십육웅(十六雄) 중 좌고학이 빠진 열다섯 명이 동시에 나타났던 것이다. 개개인이 강호에 나가면 능히 한 지역의 패주로 군림할 수 있다는 천하의 고수들! 그 중 가장 눈이 좋다는 신안(神眼) 마추(馬追)가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사도명에 게 물었다. "정말 저자가 좌고학이 분명합니까, 소성주?" 믿기 힘들었다. 지병으로 인해 무공을 익히지 못한다는 좌고학의 일장과 열다섯 명의 합공이 거의 동수(同手)를 이루다니. 사도명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저었다. "분명히...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좌고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사도명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하고 싶었던 말! 그 말은 분명히 이런 것이리라. 그는 혈황입니다! 강호를 피로 물들이려고 태어난다는 저주의 혈왕교 교주! 절망옥(絶望獄) 바닥에서 드디어 그가 탄생했다. 장차 닥쳐 올 혈겁을 예언하듯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 사도명의 옷깃을 날렸다. 맑았던 하늘에 광풍이 일며 비구름이 사방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진다고 느꼈다. 지금 사위를 어둡게 물들이며 몰려오는 비구름은 검은빛이 아니었다. 적어도 사도명에게 있어 그 구름은 핏빛이었다. ♡ 제 1 장 살수는 헛되이 허공을 가른다 1 세상은 언제 아무 달라짐 있어 사람을 히 느끼기도 바로 지금! 세상이 변해

변하는가? 없이 항상 그 모습을 유지하는 것 같은 세상은 어느 순간 문득 변해 당황하게 만든다. 그러나 어떤 때는 모든 사람이 세상의 변화를 똑똑 한다. 가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벌써 사흘째 태산 주위를 뽀얀 우막(雨幕)으로 감싸는 빗속을 뚫고 퍼져 나가는 소문(所聞)! 강호는 때아닌 겨울비에 떨며 공포에 몸을 움츠렸다. * * * 쏴아아! 비는 여름에도 보기 힘든 폭우였다. 겨울이 이제 거의 끝나 간다고는 하나 아직도 쌀쌀한 날씨! 바깥은 때때로 광풍마 저 일어 주루의 문을 두드리며 차가운 입김을 불어넣었다. 제왕루(帝王樓)! 이름은 거창하지만 어느 구석에서도 제왕의 위엄은 찾아볼 수 없는, 산골 주루였 다. 때로 산길을 따라 천외성으로 향하는 강호 인물들의 발길 덕분에 그럭저럭 연명하 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휘잉! 덜컹덜컹! 또다시 입구의 문을 헤집고 들어온 바람에 몸을 떨며 주루의 주인인 호팔(湖八)은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이제 그나마 몇 안 되는 손님마저 끊기게 되었으니... 나, 호팔은 먹고 살길이 아득하구나." 주루라고는 하지만 탁자가 네 개밖에 안 되는 협소한 공간에 점원도 두지 않고 혼 자서 근근이 버텨 왔던 곳이다. 손님의 대부분은 천외성으로 향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나마 대로(大路)가 아닌 산길 로 향하는 무림인 몇몇이 그의 유일한 손님이었는데... "젠장할, 천외성이 그렇게 쓰러지다니... 이젠 손님도 없어질 텐데 어떡하지." 호팔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입구를 바라보았다. 지난 사흘간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문을 보며 그는 다시 한 번 욕설을 뱉었다. "젠장할! 부처님, 만일 내 주루의 네 개 탁자가 꽉차게만 해준다면 이 호팔 곧 죽 어도 원망이 없겠습니다요." 여태껏 운수행(雲水行)하는 승려에게 보시 한 번 한 적이 없었지만 이런 순간에 그는 꼭 부처님을 찾았다. 그때였다. 문이 비명을 지르며 열리고 미친 바람이 주루의 내부로 몰아친 것은! 분명 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노인 하나와 꼬마 여자 아이 하나. 언뜻 보아 조손(祖孫)으로 보였지만 호팔은 삼십 년 주루 경력으로 단숨에 그들의 직업을 알 수 있었다. 만설자(萬舌子)! 달리는 매화자(買話者)로도 불리는 사람들로서 강호에 떠도는 이야기를 팔아먹고 사는 자들이었다. 손녀로 보이는 여아는 틀림없이 이야기의 감칠맛을 더하기 위해 추김을 해주는 아 이일 것이다. '우리 집 같은 조그만 주루에 저런 놈들이 들어오다니... 빌어먹을, 누구에게 이야 기를 팔 것인가? 손님도 없는데...' 호팔의 인상은 펴지지 않았다.


만설자들은 주루에서 음식을 시키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그러나 이들은 빗속에서 매우 추웠던 듯! 자리에 앉자마자 따끈한 국물과 술 한 병을 주문했고, 비로소 호팔(湖八)은 손님을 받았다는 즐거움에 얼굴을 폈다. 호팔이 샐샐거리며 국물을 탁자에 놓을 때! 문이 또다시 열리며 세 사람의 무사가 들어왔다. 얼굴이 가늘고 눈동자마저 가늘게 생긴 그들은 모두 형제인 듯, 서로 무척이나 생 김새가 닮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본 호팔이 급히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마치 세 마리의 뱀이 자신을 쳐다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크! 이자들은 악명이 자자한 냉혈삼사(冷血三蛇)로구나. 빌어먹을, 이런 살인귀 들이 여기에 오다니.' 이런 말을 소리내어 냉혈삼사 앞에서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는 능히 영웅(英雄)의 칭호를 들을 수 있으리라. 호팔은 당연히 영웅이 아니며 지금 그의 말은 공손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어서 앉으십시오, 세 분 영웅들! 뭐든지 시키시기만 하면 그대로 대령합죠!" 부지런히 탁자를 훔치는 그를 보며 가장 좌측에 앉은 뱀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술 세 병과 닭 세 마리. 닭은 금방 잡은 싱싱한 것으로 가져 오거라." "예, 알겠습니다요. 그런데 닭은 어떻게...? 구울까요, 아니면 삶은 것으로...?" 우측의 뱀이 더욱 차갑게 말했다. "날것으로. 만일 피가 싱싱하지 못하다면 난 네 피를 보고 싶어질 것이다." 호팔은 기겁을 하며 물러났다. 한참이 지난 후 그가 속으로 구역질을 참으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닭 세 마리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 그는 한 청년이 더 나타나 세 번째 탁자를 점하고 있음을 보았다. 때가 잔뜩 낀 흰 옷을 걸치고 있는 청년! 만일 평소에 이런 손님이 들어온다면 호팔은 결코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돈도 없어 보이는 청년이 탁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니. 하지만 지금 호팔은 청년이 더없이 달가웠다. 냉혈삼사(冷血三蛇)가 실내에 있으니 사람 하나가 더 있는 것이 무서움을 많이 덜 어 주었다. 생닭을 냉혈삼사 앞에 공손히 놓은 호팔은 좋은 핑곗거리인 청년을 눈짓으로 가리 키면서 헤헤거리며 섬뜩한 분위기의 탁자를 물러났다. "뭘 드릴까요?" 청년은 뭔가 걱정이 있는 듯 수척한 얼굴로 대답했다. "간단한 요기 거리와 술 한 병 주시겠소?" 청년이 막 주문을 끝냈을 때, 또다시 주루의 출입문이 열렸다.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서 나타난 사람들은 상인 차림의 네 중년인이었다. 각각 키가 크고, 작고, 뚱뚱하고, 바짝 마른 네 명이 마지막 탁자를 차지하고 앉자 주루는 드디어 꽉찼다. 호팔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부처님에게 투덜거렸던 말이 생각났다. '아이고, 손님이 많아져 좋긴 하지만 공연히 쓸데없는 투정을 부처님께 부려 가지 고... 이거 혹시...' 호팔은 불안한 생각을 애써 누르며 급히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가 마지막 손님에게서 주문받았던 요리를 대령했을 때, 또다시 문이 열렸다. 오늘 제왕루로 왜 이처럼 많은 손님이 오는 것인가? 냉막한 안색의 황의청년과 더 욱 냉막한 인상의 홍의소녀였다. 비바람 속에서 걸어온 두 젊은이들의 옷은 놀랍게도 그다지 젖어 있지 않았다. 어디를 보아도 우산이나 비가리개가 보이지 않음에도 옷이 젖지 않았다는 의미는 명확했다. 그들이 뛰어난 무공을 지닌 강호고수라는 사실! 미간을 찡그리고 장내를 둘러본 청년의 눈이 냉혹해졌다. 호팔이 급히 뛰어가 손을 모으고 말했을 때는 미미한 살기마저 띠었다. "헤헤, 대협! 보시다시피 오늘은 손님이 꽉차서 마땅한 자리가 없으니 저기에 끼여 앉으신다면... 헤헤헤." 호팔이 가리키는 곳에는 백의청년이 혼자 앉아 술을 기울이며 생각에 잠겨 있었 다. 홍의소녀가 고개를 흔들더니 다른 곳을 가리켰다. "아니. 난 남과 동석할 생각이 전혀 없다. 저곳에 앉고 싶다." 그녀의 손을 바라본 호팔의 얼굴이 노래졌다.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 위치한 탁자에서는 지금 세 명의 뱀이 생닭을 뜯어먹고 있 었던 것이다. 이 여자는 냉혈삼사가 얼마나 잔악한 자들인지 모른단 말인가? 냉혈삼사(冷血三 蛇)가 이 말을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감히 자신들이 앉은 자리를 탐내다니! 세 마리의 뱀들이 입가에 묻은 닭의 피조차 제대로 닦지 않고 얼굴을 들었다. '아이고,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겠구나. 큰일이다.' 호팔은 조금 전 자신이 부처께 떨었던 입방정을 탓하며 겁을 먹고 슬금슬금 물러 났다. 강호인들이 싸울 땐 옆에 가만히 있다가도 크게 다침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살기를 풀풀 날리며 일어날 때는 기세가 자못 당당했던 냉혈삼사가 황의청년과 홍 의소녀를 보자 그만 꼬리를 말았던 것이다. 그들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급히 탁자를 치우기 시작했다. "마침 저희들도 이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옮기려고 했습니다. 어서 앉으시지 요." 냉혈삼사가 꼬리 내린 강아지 꼴로 변하다니! 과연 이들 남녀는 어떤 신분이란 말인가? 어쨌든 호팔은 싸움이 일어나지 않음을 하늘에 감사하며 급히 탁자를 치웠다. 냉혈삼사도 두려워하는 두 남녀를 감히 호팔이 무례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냉혈삼사는 실내를 둘러보았다. 그들의 체면은 이미 구겨졌으니 조금이라도 체면을 만회할 상대가 필요했다. 백의청년 하나와 노인과 손녀로 보이는 여아, 네 명의 상인 차림의 중년인! 누가 가장 적당할까? 2 냉혈삼사가 상인 넷을 상대로 고른 것은 매우 적절했다. 적어도 스스로는 잘된 선택이라고 세 마리의 뱀은 생각했다.


백의청년은 단신이니 체면이 말이 아니고, 노인 역시 위협하기에는 너무 늙었다. 황의청년 때문에 당한 망신을 만회하기엔 숫자도 많은 네 명의 상인이 가장 적당 했다. 하지만 그들이 어찌 짐작이나 했으랴? 상인들이 감히 그들의 말을 무시할 줄은. "우리가 앉을 자리가 필요하다. 어서 비켜라." 당연히 일어나서 자리를 피할 것으로 알았던 네 명의 상인들은 큰 뱀의 위협 섞인 어조에도 태연했다. 상인 중 가장 뚱뚱한 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어조로 물었다. "아니, 좀 전에는 막 일어나려 했다고 저쪽 공자에게 말하지 않았소?" 큰 뱀의 눈썹이 크게 요동쳤다. 극도로 화가 났지만 열심히 자제하는 모습. 세 마리의 뱀은 황의청년이 보는 앞에서 함부로 검을 뽑을 수가 없었다. "좀 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다. 어서 일어나거라." 그는 위협적으로 검 손잡이를 슬쩍 잡으며 황의청년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황의청년이 이쪽은 신경 쓰지 않음을 안 그는 일단 안도하며 네 상인을 쏘아보았 다. 네 상인 중 큰 뱀에게서 가장 멀리 앉아 있는 상인은 무척이나 키가 작았다. 그는 큰 뱀의 위협에 눈을 점점 크게 뜨더니 이윽고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저렇게 눈썹을 찡그리니까 정말 뱀처럼 생겼네. 이보시오, 혀도 한 번 내 밀어 보시오. 뱀처럼 갈라졌는지 보게. 하하하!" 그의 말에 다른 세 상인도 일제히 웃기 시작했다. 그들의 웃음 소리가 점점 커져 갈 때, 세 마리의 뱀은 혀를 낼름거리는 대신 팔뚝 의 혈관만 점점 튀어나왔다. 뚱뚱한 상인이 배꼽을 쥐며 입을 열었다. "으하하, 뱀은 말로 해서는 결코 입을 열지 않는다오. 먹을 것을 줘야지. 자, 보시 오." 그가 음식 하나를 집어 위로 던졌다. 음식은 허공을 가르고 큰 뱀의 얼굴에 정확히 명중했고 과연 뚱뚱한 상인의 예언 대로 큰 뱀의 입이 열렸다. "이 새끼들, 죽엇!" 큰 뱀의 입뿐만 아니라 검도 열렸다. 작은 뱀과 중간 뱀의 검날도 거의 동시에 뽑히면서 상인 넷의 목을 노렸다. 검신(劍身)이 매우 얇은 그들의 검이 공간을 가르자 정말로 뱀이 혀를 내미는 소 리가 나면서 세 가닥의 회색 검기가 피어올랐다. 호팔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 몸을 잃고 뒹구는 네 상인의 목이 그려졌다. '저들은 행동을 조심했어야 했다.' 이윽고 그가 눈을 떴을 때, 과연 바닥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피는 상인들의 목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입! 보다 정확히 말하면 냉혈삼사의 혀에서 흘러내렸다. 믿을 수 없게도 세 마리의 뱀은 모조리 혀가 잘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누가 손을 썼는지도 잘 보지 못했다.


다만 혀가 세로로 길게 잘리어 이제는 혀마저 뱀처럼 되어 버렸다는 것만을 알았 다. "세 마리의 뱀이 감히 우리에게 자리를 비키라고 했으니... 흥!" 키가 큰 상인이 냉소하며 검은색의 주판을 흔들자 비로소 냉혈삼사는 이들의 신분 을 알 수 있었다. 혈사상(血四商)! 겉으로는 온화해 보이지만 손속은 지극히 잔인하다는 인물들. 강호에는 모두 여덟 명의 상인이 있었다. 그 중에서 네 명은 공정했고, 네 명은 악독했다. 상대방의 피까지 빨아먹는다는 악독한 네 명의 상인이 바로 혈사상이라 불리며 검 은 주판을 신표로 했다. 웃음기 가득한 작은 상인이 만면에 미소를 담고 물었다. "너희는 우리에게 시간적인 손해를 입혔다. 어찌 보상할 것이냐?" 그들은 말을 할 수 없었다. 아직도 흘러나오는 혀끝의 피는 그들이 왜 말을 못 하고 있는지 알려 주었지만 혈 사상은 그런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어어버..."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는 입을 급히 놀리며 변명하고자 하던 냉혈삼사는 혈사상 (血四商)이 다가오자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공교롭게도 그 위치는 백의청년이 앉아 있는 탁자였다. 세 마리의 뱀이 탁자에 걸려 뒤로 넘어질 때, "이놈들, 감히 우리 앞에서 도망갈 생각이냐?" 냉혹한 음성이 상인들의 입을 가르며 그들이 쥔 검은 주판이 공간을 까맣게 덮었 다. 냉혈삼사의 뒤에 앉아 있던 백의청년! 진소백은 내심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뱀을 공격한 주판의 공세 아래 그 또한 위험에 처하고 말았던 것이다. 검은 주판알이 자신의 가슴을 노림을 본 냉혈삼사들이 눈을 부릅떴다. 그들 뒤쪽의 진소백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두 발을 살짝 들어올렸다. 휘리링! 의외의 결과가 일어났다. 주판알들이 방향을 살짝 바꾸더니 그대로 진소백의 전신 요혈을 노리고 날아왔다. 냉혈삼사의 몸도 회전하더니 검날을 휘둘러 진소백이 피할 곳을 차단했다. 너무나 예상밖의 살수(殺手)였는지라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의청년과 홍의여인마 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진소백의 대응은 더욱 감탄할 만했다. 주판알은 아무 소득도 없이 허공을 갈랐다. 세 마리 뱀의 검이 주판알의 뒤를 이어 덮쳤을 때는 진소백은 심지어 그곳에 있지 도 않았다. 이미 탁자 아래를 통과하여 냉혈삼사(冷血三蛇)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 나왔다. 몸을 뒤로 눕히며 그 탄력을 이용해 바닥을 미끄러지는 진소백의 신법은 지금 순 간 절묘한 임기응변이 되어 혈사상의 주판알과 냉혈삼사의 검을 모두 무위(無爲) 로 만들었다. 혈사상은 사력을 다한 기습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당황했으나, 곧 고수답게 다


음 공격을 행했다. 그들이 일제히 검은 주판을 흔들자 또 다른 주판알들이 일제히 큰 뱀의 사타구니 아래를 향해 날았다. 빠르기는 검은 빛과 같아 큰 뱀의 다리 사이로 미끄러지고 있는 진소백은 피할 곳 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진소백이 막 큰 뱀의 다리 아래를 통과하며 오른 주먹을 들어 엉치뼈 부위 를 힘있게 밀어 치자 큰 뱀의 몸이 두 자 가량 떠오르며 그의 목에서는 나온 비명 이 주루 안에 크게 울렸다. 진소백의 몸 또한 더욱 빨리 미끄러지며, 파바박! 검은 주판알은 그가 이미 지나간 바닥에 검은 점을 허무하게 만들고 있었다. 두 번이나 빨리 움직여 혈사상의 주판알 공격을 피한 진소백의 몸이 혈사상 중에 가장 키가 작은 상인을 향해 번개처럼 다가왔다. 순간 진소백이 오른쪽으로 몸을 살짝 뒤집나 싶더니 오른발과 왼발이 번갈아 가며 키 작은 상인의 배를 박찼다. 뻐벙! 가죽 두드리는 소리가 배와 발 사이에서 울리고, 키 작은 자가 피분수를 뿜어 내 는 순간! 이미 나머지 셋의 손에 들린 주판에서는 남아 있는 알들이 모조리 다 떨 어져 나와 진소백의 몸 근처까지 날아오고 있었다. 바위 덩어리도 깨버릴 기세였으니 만일 맞게 된다면 진소백의 몸이 무사할 리 없 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진소백의 몸은 재빨랐다. 미끄러져 올 때와는 반대로 배를 땅으로 향한 채 진소백이 키 작은 상인의 배를 찬 반탄력을 이용해 되돌아 날아갈 때, 주판알들은 이번에도 아무런 효과도 거두 지 못한 채 진소백이 지나간 공간만을 잘랐다. "어흑!" "욱!" 놀라고 당황한 음성이 절로 나왔다. 중앙으로 들어왔던 진소백을 향해 전력으로 전개했던 주판알들이 진소백을 맞추지 못하고 지나치자 혈사상(血四商)들끼리 동료를 공격하는 형세가 되어 버렸던 것이 다. 그들이 놀라 분분히 주판알을 피하기에만 급급할 때, 진소백의 손에선 은은한 용 의 신음 소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3 설명은 길다 하나 모든 변화는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지 않았다. 진소백의 손에서 용음십이수(龍音十二手) 중에서도 공격의 절초인 용음파산(龍吟 破山)이 일어나며 냉혈삼사를 공격할 때! 그들은 그제서야 겨우 몸을 돌리고 있었고, 엉덩이를 두들겨 맞고 기절한 상태로 두 자 가량 떠올랐던 큰 뱀의 몸은 아직 땅에 떨어지지도 못했다. 꾸아앙! 진소백의 손바닥이 용 울음 소리를 내며 허공에 세 점을 찍었다. "우웩!" "케헥!"


둘은 강한 힘을 실어 가슴을 찍어 버렸고, 나머지 하나는 흡력(吸力)을 발휘하여 오른손에 감았다. 기절했던 큰 뱀의 몸이 진소백의 오른손에 감겨 몇 바퀴 돌더니, 그가 오른손을 뒤로 펼치자 허공 중에서 빙빙 돌며 혈사상을 향해 날아갔다. 자기 편이 날아오자 차마 손을 과하게 쓰지 못하고 혈사상들이 당황하며 손속을 전개하여 큰 뱀을 내려놓고 보니, 이미 진소백의 양손이 작은 뱀과 중간 뱀의 목 뒤 뇌호혈 아래를 잡은 후였다. 혈사상(血四商)은 분노와 당황으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들이 명예를 버리고 암습을 가했건만 진소백의 옷깃 하나 찢어 내지 못하다니. 게다가 같은 편 둘마저 진소백의 손에 인질로 들어가 있지 않는가? 키가 큰 상인 의 눈에 흉폭한 표정이 떠올랐다. "크하하, 과연 대단하구나. 인정하지. 그러나... 네놈을 꼭 제거하라는 명령이 있었 으니..." 그의 눈빛에 결의(決意)가 어림을 보자 나머지 두 명의 상인들 눈에도 결심의 빛 이 떠올랐다. 다만 처음에 진소백의 발길질에 배를 얻어맞았던 키가 작은 자만이 급히 뒤로 물 러났을 뿐이었다. 이제 주판알이 모두 없어져 버린 주판을 위험한 물건인 양 바닥으로 내던지고 뒤 로 물러나는 그의 태도는 어딘가 이상했다. 키 큰 상인이 노기를 띠며 그를 돌아보았다. "넷째, 네가 감히..." 말보다 빠르게 노기를 띤 진기가 그의 주판 속으로 흘러갔고, 나머지 두 명의 상 인들 역시 같은 방식으로 진기를 주판에 주입시켰다. 드드드드! 주판이 진기를 받아 진동하기 시작하자 진소백은 비로소 그들이 무슨 짓을 하려 하는지를 알았다. "조심해라." 차가운 음성이 진소백의 귓전에 닿았다. 황의청년이 원래의 차가운 표정을 조금도 풀지 않은 채 외치며 두 손을 빠르게 펼 쳐 냈다. 옆에 앉아 있던 홍의소녀도 양손을 저었는데, 그들이 손에서 각기 두 개씩의 암기 가 빠른 속도로 혈사상을 향해 날아가지 않는가? 쉿! 암기의 속도는 엄청나 그들이 손을 완전히 폈을 때는 이미 혈사상 네 명의 몸이 그 암기에 뚫리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암기의 속도가 아니었다. 부웅! 자그마한 암기에 실린 강한 힘에 의해 혈사상의 몸이 뜨더니 창문을 가르며 밖으 로 날아갔다. 휘우웅! 꽈꽝! 처음 창문이 열리며 들어온 건 단지 비바람에 불과했지만 곧 이어서 폭발음이 들 려 왔다. 진소백이 몸을 돌려 황의청년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덕분에 뇌폭공(雷爆功)에 당하지 않았소." 그러나 황의청년은 여전히 냉막했다. "고마울 것 없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나까지 피해를 입었을 테니까!" 그는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밥은 한 번도 먹지 않고 얼음만 먹고 살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말끝마다 이렇게 한기를 풀풀 날릴 수 있겠는가? 황의청년 이 홍의소녀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나가자." 그는 할말만을 하고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향했다. 역시 차가운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일어서서 나가는 홍의여인을 보며 진소백은 또 다시 생각했다. '남자 녀석이 얼음만 먹고 살았다면 이 여자는 필시 눈만 먹고 살았을 것이다. 그 렇지 않다면 어찌 저렇게 하얀 피부를 가질 수 있겠는가?' 두 남녀는 이미 나갔다. 잠깐 딴생각을 하던 진소백이 아차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다를까, 냉혈삼사의 몸은 이미 붉은 고름으로 화해 녹아 내리고 있었다. "똑같다. 앙천봉에 나타났던 자와 같은 모습. 이것 역시 악마혈(惡魔血)이란 말인 가?" 종도를 노리던 자들이 이제 진소백을 쫓는다는 것은 혈왕교가 진소백을 노린다는 의미이다. 당금에서 혈왕교가 숨어 있는 곳으로 가장 의심이 되는, 아니, 거의 확 신할 수 있는 곳은 바로 흑혈산(黑血山)! 흑혈산은 어디에 있는가? "악마혈이라면 옛날 혈왕교가 사용했다는 독이 아닌가요?" 또렷한 여아(女兒)의 목소리가 들리자 진소백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여아는 노인의 품에 안겨 눈을 초롱히 빛내며 진소백을 보고 있었다. 노인이 여아를 급히 제지했다. "진아(珍兒)! 그런 것을 묻다니. 네가 알 바 아니다." "왜요, 할아버지? 강호의 일을 많이 알수록 사람들은 우리 얘기를 재미있어할 것 이고 그래야 우리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거잖아요." "허허, 그래두." 진소백이 웃으며 노인에게 물었다. "만설자(萬舌子)이십니까?"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오. 얘기를 팔고 다니는 육가(陸家)라오. 지금 천외성에서 많은 강호인의 모임이 있어, 그 모임에 이야기를 팔러 가는 길이외다." 잠깐 망설이던 노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성함을 물어도 되겠소?" "오늘의 일을 이야기로 꾸며 파시려고 하십니까?" 진소백이 정곡을 찌르자 노인은 움찔했다. "만일 소협에게 실례만 되지 않는다면..." 진소백은 잠깐 생각했다. 어쩌면 이것도 좋은 방법일 수가 있었다. 혈왕교가 다시 강호에 나올 징조가 보임을 강호인들이 알고 있는 게 나으리라. "전 진소백이라 합니다. 이들은 아마도 혈왕교의 무리인 것 같습니다." 노인이 크게 놀라 물었다.


"혈왕교가 벌써 나타났다는 말이오?" "벌써... 라니요? 강호에 혈왕교(血王敎)와 관련된 소문이 이미 났습니까?" 노인이 생각하더니 진소백에게 말했다. "그 일 때문에 천외성 자리에서 모임이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그리로 오시오." 이때 바닥에서 신음이 들렸다. 돌아보니 주루의 주인인 호팔(湖八)이 바닥에 엎어져 신음하고 있는지라 진소백은 급히 달려갔다. "괜찮으시오?" 끙끙거리며 호팔이 대답했다. "아이구, 겨우 목숨만 붙어 있습니다요. 이게 다 제가 입방정을 떤 대가이니 앞으 론 무조건 입조심을 해야겠습니다. 에구구." 진소백은 쓰게 웃으며 그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타박상만 몇 군데 입었을 뿐 크게 다친 곳이 없음을 알아차렸던 까닭이다.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니 엄살부리지 마시오." 그는 웃으며 말하고는 만설자 노인을 찾았다. 하지만 만설자 육가와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손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기척도 없었는데.' 결론은 하나였다. 진소백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사라졌다는 것은... '그도 무림인이었던가?' 싸움으로 난장판이 된 제왕루 안에선 호팔의 신음 소리만이 들려 올 뿐이었다. ♡ 제 2 장 회한에서 깨어나니 절망이더라 1 진소백은 서둘러 천외성(天外城)으로 향하던 발길을 늦추었다. 원래 그는 앙천봉에서 당했던 악마혈(惡魔血)을 진기로써 사흘 만에 치료했다. 시간은 소모했지만 나름대로 이득(利得)은 있었다. 악마혈에 대한 내성(耐性)이 생겨 앞으로는 악마혈에 쉽사리 당하지 않게 된 것이 다. 귀곡의 의절은 대단하여 종도, 아니, 종사원이 남긴 내공을 이용한 치독(治毒)의 효과는 매우 탁월했다. 내공이 살아나고 몸을 자유스럽게 움직일 수 있게 된 진소백은 서둘러 천외성으로 향했다. 절망옥 깊은 곳에 혈마수라결(血魔修羅訣)이 남겨져 있음을 알려야 했기 때문이었 다. 그러나 도중에 천외성에서 이미 혈황이 나타났음을 들은 그는 발걸음을 늦추었다. 지난 사흘간 강호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아 보고자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던 것이 다. 진소백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사이 강호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큰 변화를 겪었던 것이다. * * * 천외성은 와해되었다. 사씨가문은 강호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혈경! 이 가공할 마서(魔書)를 자신들이 강호인 몰래 보관했음과 그것이 흑혈산이란 집 단에 유출되었다는 것! 또한 흑혈산(黑血山)이 아마도 정체를 숨긴 혈왕교일 것이라는 점. 마지막으로, 천외성의 만리탐(萬里探) 탐주였으며 천외성의 제삼인자였던 좌고학이 혈마수라결을 얻어 천외십육웅의 합공을 따돌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사실. 강호 전체가 들끓었다.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다. -천외성이 혈경을 이용해 강호를 지배할 음모를 꾸몄다더라. -이미 천외성주는 혈경을 익혀 무공을 당할 자가 천하에 없다던데... 아무리 강호의 인심이 표변한다고 하나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항상 최고의 위치 에 군림했던 천외성에 대한 시기의 염이 보태어진 강호의 여론(輿論)은 천외성주 천무 사경천의 결단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천외성은 강호에서 영원히 은거한다. 날벼락 같은 선언에 이어 십육웅(十六雄) 중에서 사씨가문의 가신(家臣)이 아닌 강 호 제파 출신의 인물 열 명이 천외성 탈퇴를 천명했다. 혈경을 사적으로 보관하여 강호를 위기에 빠뜨린 사씨가문을 더 이상 종주로 섬길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소식에 충격을 받은 천무 사경천이 쓰러지고 마니, 광명협 사도명은 사씨가문 의 강호 은퇴를 최종적으로 강호에 알리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천외성의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 강호제일의 문파가 어디에 있었냐는 듯 하루아침에 사씨가문은 강호에서 잊혀졌 다. 그러나 강호는 너무 쉽게 잊고 있었다. 옛날 강호를 겁난에서 구해 줬던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를. 그들이 사라진다면 누가 제일 기뻐할 것인지를. 정신적으로 백여 년 간 강호의 종주였으며 실질적으로 맹주 역할을 수행했던 천외 성의 와해. 강호인들은 그들을 대신해 줄 사람과 문파를 원했다. 만일 혈왕교가 나타난다면 그들을 막아야 하니 강호의 힘을 결집시킬 필요성도 있 었다. 그래서 소집된 것이 천외성 자리에서의 무림성회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몇 달의 여유를 두고 거행될 이런 거대 행사가 이처럼 서둘러 열 리는 것은 강호가 얼마나 혈왕교를 중시하는지를 시사하고 있었다. 물론 임시 대회라는 단서가 붙기는 했으나. * * * 하늘의 달은 둥글었다. 보름을 불과 이틀 남긴 정월 십삼일! 지금은 아무도 막는 이가 없는 예전의 천외성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는 청년이 있었다. 걸친 옷은 낡을 대로 낡아 원래의 흰빛이 보이지도 않았지만 결코 비천해 보이지 않았다. 눈빛!


마음의 창을 통해 보이는 그의 눈빛이 맑았기 때문이다. "오늘이 무림성회가 열린다는 날이니 가보면 좀더 많을 걸 알게 되리라." 중얼거리며 걷는 청년은 진소백이었다. 그는 주위의 변화를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천외성의 그 위용이 불과 며칠 만에 사라져 버리다니. 천외성은 누구나 함부로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정광(精光)을 번뜩이는 무사들이 항상 사위(四位)를 경계하며 일반인의 난입을 막 았던 곳! 그러나 지금은 그런 무사들을 눈 씻고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무림 곳곳의 문파에서 나온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저마다 소리 높여 주장을 펴는 바람에 마치 시장통인 양 주위가 시끄러웠지만 어느 한 사람 제지하는 이가 없었 다. 강호의 살아 있는 전설! 백이십 년간이나 천하에 군림하며 강호의 평화를 지켜 온 성역이었던 천외성이 이 렇게 변하다니... 누구도 이들을 통제하여 질서를 잡으려 하지 않았다. 누가 강호의 맹주가 되어 곧 닥칠 혈왕교의 난에 대처할 것인지를 정하기 위해 오 늘 전무림인이 파(派)를 막론하고 모인 것이다. 지금의 혼란으로 보아 이 일은 꼭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 * * "성회(盛會)는 달이 가장 높이 뜨는 자정에 거행된다." "그 전에 술이나 한잔하자고." "아니, 난 저쪽에 가서 강호 이야기나 들을래. 듣자 하니 가장 뛰어난 만설자라는 육가(陸家)가 왔다는군!" 무사 몇 명이 걸어가며 나온 대화에 섞여 들린 육가라는 말이 진소백의 귀에 들어 왔다. 만설자들은 강호의 세세한 동정을 잘 들어 두었다가 재미있는 만담과 섞어 풀어 내니 어쩌면 뜻밖의 정보도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게다가 주루(酒樓)에서 기척도 없이 사라졌기에 호기심(好奇心)도 생겼다.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진소백은 만설자(萬舌子)가 이처럼 인기가 있음을 미처 몰랐었다. 그가 다가갔을 때 육가의 얘기는 한창 절정으로 치달리는지 청중들은 숨소리도 내 지 않고 있었다. "상황이 그렇게 변하자 혈사상(血四商)은 최후의 결심을 한 듯 악독한 표정을 지 었지." 그는 품에 안긴 진아(珍兒)에게 들려 주는 옛날얘기인 듯 구수한 어조로 말을 잇 고 있었고 청중들은 잠시도 귀를 떼지 못했다. "암중에 공력을 올려 뇌폭공(雷爆功)을 주판에 주입하기 시작했단다." "할아버지, 뇌폭공이 도대체 뭐예요?" "말도 말거라. 어찌나 악독한 무공인지 시전자조차 살아남을 수가 없는 공부란다. 우선 전신의 기를 자신의 병기에 주입시킨 뒤, 그것을 한 번에 터뜨려 산산이 갈 라진 파편으로 주위의 모든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이지." "우와, 그런 무공이었다면 진소백이란 청년은 대단한 위험에 처했겠군요?" 진소백은 쓰게 웃었다. 육가가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듣지 않고 떠나려는 그의 발길을 진아의 질문이 잡았다. "그럼, 그 찬바람이 풀풀 날리는 두 남녀는 누구예요?" "허허, 네가 이 할아비의 밑천을 모조리 거덜내려 하는구나. 하지만 할아빈 지금 목이 몹시 칼칼하니 술이라도 한잔하고 계속하자꾸나." 잔뜩 기대를 하며 듣던 군중들 속에서 계속하라는 성원과 함께 동전들이 쏟아져 육가의 발 밑으로 떨어졌다. 급기야 한 병의 술도 날라져 오니 그제서야 육가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 남녀들이 누구였는고 하니..." 2 "그들은 바로 사대세가 중의 하나인 당가(唐家) 출신 두 명이란다. 암기와 독의 대 가라는 당문(唐門) 말이다." "아하, 그래서 암기를 그토록 뛰어나게 사용했군요." "그렇지. 남자는 당가의 소가주인 당충(唐沖)이었고, 여자는 그의 동생인 당옥(唐 玉)이었단다." 군중들 사이에 감탄이 일었다. 사대세가 역시 백이십 년 전 혈왕교와 맞섰던 문파! 그 중 당문의 소가주 당충이 라면 무공과 냉심이 누구도 당할 자가 없다는 인물이 아닌가? "할아버지, 이제 진 소백이란 청년을 공격했던 자들의 정체를 말씀하실 차례예요." 진아의 말에 육가가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놀라지 말거라. 청년이 일러준 바에 따르면 그들이 바로 혈왕교의 주구들이라는 구나." 혈! 왕! 교! 군중들이 놀람에 차서 짧게 감탄할 때 그 틈을 뚫고 굉렬한 음성이 들려 왔다. "정말 확신하는 게냐?" 군중들은 귀를 막고 고함을 지른 자를 바라보았다. 능히 보통 남자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키에 전신을 근육의 덩어리로 감싼 장년인! "대력신(大力神) 패가(覇苛)다!" 군중이 둘로 갈라지며 패가가 지날 길을 열어 주었다. 천외성의 십육웅(十六雄) 중에서 사씨가문을 떠날 것을 천명한 열 명의 인물들은 지금 대륙십웅(大陸十雄)이라 불린다. 대력신도 그 중 하나였다. 점창파의 속가제자이면서 패왕문(覇王門)이란 문파를 이끄는 자! 그가 입을 열 때 끼여들 자는 없었다. 사람들은 육가의 입만 보았다. 그가 대답하길 기다리는 것이다. 육가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확신하오." "만일 잘못된 것이라면 넌 성치 못함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가뜩이나 강호가 어 수선한데 벌써 혈왕교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다니..." 진아가 뾰족한 소리로 끼여들었다. "거짓이 아니에요. 증인도 있어요." "누가 증인이란 말이냐?" 이번엔 육가가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이 바로 증인이오."


그가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닌 진소백이 서 있는 곳! 진소백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 었다. 그의 내심을 아느지 모르는지, 육가는 신이 나서 말했다. "여러분, 소개하겠소. 신승 초의 선사의 제자이며 내가 조금 전에 말한 활극의 주 인공인 일람무의 진소백 대협이시오." 군중들의 시선이 모두 진소백에게로 쏠렸다. 다른 것은 젖혀 두더라도 초의 선사의 제자라는 사실만으로도 군중들은 진소백에 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대력신 패가도 달라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니... 강호의 주목을 받는 청년영웅이 지금 한 명 탄생하고 있었다. 육가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거리며 진소백이 군중에 의해 둘러싸이는 모습을 보 고 있었다. * * * 이윽고 달이 높이 솟자 무림이 생긴 이래 최초로 밤중에 열리는 성회(盛會)가 개 막되었다. "오늘의 성회에서 결정되는 사항은 강호인들에게 강제성을 지니지는 못하겠지만, 의사 결정에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는 있을 것이오." 대력신 패가의 우렁찬 목소리가 좌중에 울려 퍼졌다. "어떤 의견이라도 좋소. 누구라도 좋으니 장차 강호의 지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사람이나 문파를 추천해 주시오. 이번에 추천된 문파들로 한 달 후 정식으로 성회를 개최하여 무림맹을 만들 것이오." 이번 성회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었다. 어떤 결정을 내리고자 함이 아니라 한 달 후 만반의 준비를 갖춰 개최될 성회의 예비 맹주 후보를 추천받자는 것! 때문에 모인 사람들이 이처럼 정예가 아님도 이해되었다. 여기저기서 추천하는 외침이 터졌다. "당연히 사대세가의 가주들은 후보가 될 수 있을 게요." "신승 초의 선사가 가장 적당하오." "구파의 영수인 소림의 장문인 현공 대사를 추천하겠소." "개방 방주 인의신개가 적임자라 생각하오." 저마다 자신의 주장을 말하자 장내는 곧 소란스러워졌다. 이때 모든 소란을 잠재우는 강한 내공이 담긴 외침이 있어 중인들은 그쪽을 쳐다 보았다. "대륙오행련(大陸五行聯)을 들어 보았소?" 군웅들은 내공에도 놀랐지만 그 음성에 실린 한기에도 놀랐다. 누군가가 외쳤다. "당문(唐門)의 소가주인 당충과 당옥이다." 진소백도 그들을 볼 수 있었다. 황의와 홍의를 여전히 입고 있는 냉막한 두 남녀. 제왕루에서 암기를 던져 혈사 상(血四商)을 밖으로 날렸던 그들이었다. 대력신이 당충을 보며 물었다. "이름은 들어 보았네. 자네는 그 문파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당충의 대답은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아버님께서 그곳의 다섯 문주직 중 하나를 맡고 계시오." 그의 아버지라면 당연히 당문의 당대 가주인 당자평(唐子平)을 말함이다. 이미 알려진 남궁세가의 남궁중과 더불어 그 또한 천추학림이 배출한 오룡의 하나 로 꼽히는 인물이었으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대력신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럼, 혹여 대륙오행련이란 문파의 오행이 뜻하는 것은..." 당충은 이미 그의 질문 의도를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소. 오행련을 만드신 분들은 바로 오룡에 속한 다섯 분이시오. 물론 실종되신 분들의 자리는 다른 분들께서 채우셨소만." 누가 감히 놀라지 않는가? 오룡(五龍)! 그들이 만든 대륙오행련(大陸五行聯)! 천추학림은 삼십 년 정도마다 한 번씩 인재를 뽑아 교육시킨다. 그때마다 가장 걸출한 인재로 뽑히는 사람에게 용이란 칭호를 붙여 명예를 높여 주었다. 이때까지 천추학림이 낳은 가장 걸출한 영웅이 초의 선사임은 이미 천하가 모두 인정하고 있는 바였다. 그런데 약 이십 년 전 그에 버금갈 만한 인재들 다섯이 동시에 천추학림에 입림했 다. 초의 선사가 일(一) 기(期) 졸업이었으니 삼(三) 기(期)에 해당하는 인물들. 남궁세가의 남궁중. 당문의 당자평. 엽씨세가의 엽자문. 벽력세가의 진무외. 그리고 천일독이었다. 이 중에서도 천일독은 아무런 기반도 없이 입신한 인물로서, 많은 무사들의 존경 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거의 동시에 이들 중 세 명이 실종되었다. 남궁중과 당자평을 제외한 세 명은 이십 년 가까이 실종된 상태로써 강호인들의 궁금증이 더하고 있었는데. 오늘 대륙오행련이란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다니. 대력신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강호로서는 혈왕교에 대항할 큰 힘을 얻었음이니, 차기의 맹주 역할에 가장 강력한 후보가 될 게요." 지금 대력신은 열 명의 고수를 대표하고 있으니 그의 이런 말은 강호인들의 가슴 에 큰 낙인을 남겼다. 대륙오행련은 이렇게 해서 중인들의 마음속에 큰 자리를 차지했다. 또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군웅들을 향해 당충은 내공을 돋우어 말했다. "본 련의 개파대전이 상원에 있으니 서두른다면 참가하실 수 있을 게요. 원하시는 분은 상원까지 개봉의 본 련 총단으로 오시오." 개봉까지 이틀이라면 넉넉한 시간이 아니었다. 많은 강호인들은 당충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서둘러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 뒤로 대력신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번의 임시 모임은 워낙 촉박했던 탓에 각파의 수장(首長)들이 참석하지 못했음 을 알고 있소. 여러분께서는 오늘 추천된 문파들 중에서 잘 상의하시어 한 달 후 의 무림대회에서는 꼭 수장들이 참석하시도록 해주시오."


군중들이 많이 빠져 나가자 쉬려는 것인지 대력신도 단 위에서 내려와 어디론가 가버렸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사람들은 더욱 많이 사라졌고, 몇 안 되는 사람만 남아 술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진소백도 떠나지 않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의 곁으로 육가가 다가왔다. "자네는 남았군! 왜 대륙오행련(大陸五行聯)을 보러 가지 않는가?" 진소백은 그를 힐끔 보고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주위를 둘러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쉬었을 뿐이다. 육가가 그를 유심히 보더니 다시 물었다. "자네는 웬 한숨을 그리 쉬는가?" 진소백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세상에서 강호의 인심보다 박한 것은 없을 게요.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이곳은 강 호의 중심(中心)이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구려." "가장 무상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니... 다만 우리를 속이지 않는 위장을 위해 술 몇 잔을 마실 뿐이지." 진소백은 항상 그가 안고 다니는 진아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했지만 묻지 는 않았다. 술병이 이미 눈앞에 놓였으니 그는 실컷 취하고 싶었다. 인생과 세상의 덧없음을 느낄 때 우리는 왜 술을 마시고 싶어지는 걸까? 취하면 인생이 꿈이 되고 꿈이 인생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3 취하여 바닥에 누우니 싸늘한 기운이 등을 엄습했다. 하늘에 뜬 둥근 것이 해인지 달인지조차 구분하고 싶지 않았다. 육가도 이미 취하여 잠들었고, 사방에는 술에 취해 널브러진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왜 개봉(開封)으로 가지 않고 여기 남아 술에 취해 잠들었는가? 정이 많은 사람만이 술에 취한다는데, 이들은 무슨 정이 그리 많은가? 천외성의 허무한 종말 에 미련을 가진 사람들일 것이다. 나름대로 천외성에 애정을 가진 자들일 게다. 진소백 자신만 하더라도 짧은 만남이었으나 사도명에게 감명을 받지 않았는가? 가 문의 위험을 무릅쓰고 강호를 위해 혈경에 대한 것을 알린 사람이다. 어찌 영웅이 아니겠는가? 진소백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 술에 취해 온몸이 나른해졌다. 진기를 끌어올려 주기(酒氣)에 대항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인생은 본디 고달프니, 때로는 술에 취해 시름을 잊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라..." 그는 마침내 잠이 들었다. 만일 조금만 늦게 잠들었다면 그는 숲속에서 움직이는 그림자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가슴에 오색의 단풍이 그려져 있음과 손은 날이 시퍼런 검들로 무 장했음도 보았을 것이다. 오색의 단풍! 단풍(丹楓)숲에서의 맹서(盟誓). * * * 꿈속에서 진소백은 엽혼을 만났다.


그는 홀로 매화나무 아래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서 오게!" 진소백은 엽혼이 권하는 자리에 앉아 같이 술을 마셨다. "자네는 이미 죽었는데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나다니... 생전의 자네는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진소백의 말에 엽혼이 빙긋이 웃었다. "한시라도 긴장이 끊어질까 해서 자제했었지. 죽고 난 뒤에는 조금 바뀌었네." 진소백은 다시 한잔을 더 마시면서 가슴속에서 솟아나는 애틋한 정을 느꼈다. 죽은 친구를 다시 만나다니, 진소백은 이것이 꿈일지도 모른다고 느꼈지만 무시하 기로 했다. 아무려면 어떤가? "술맛이 좋아. 자네와 같이 있으니 더욱 좋구먼." 진소백의 말에 엽혼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 난 이미 죽었지만 자네는 살아 있다네. 자넨 적이 많으니 한시도 방 심해선 안 될 것이야." 진소백은 그의 말이 옳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렇게 느낀 순간, 앞이 흐릿해지면서 시선조차 잘 모이지 않음을 깨달았 다. '술! 내가 술에 취했구나.' 주기가 전신을 지배하며 정신을 흩뜨렸다. 진소백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떠올렸다. 의도적이긴 했지만 그는 지금 풍림서에 노출된 상태였고, 혈왕교로 보이는 자들도 그를 노리는 상황이었다. 만약 입장을 바꿔 생각한다면... 자신은 적이 어떤 상태일 때 노리려 할까? 두말할 나위 없이 방심할 때일 게다. 그리고 오늘 진소백은 충분히 방심했다. 술에 만취했으니 말이다. 이런 생각이 스친 순간 그의 눈앞의 광경은 순식간에 변했다. 엽혼은 어느새 사라지고 땅에서 올라온 가시덩굴이 전신을 휘어 감기 시작했다. 놀란 진소백이 눈을 부릅떴을 때! 그는 자신이 온몸을 결박당한 채 마차에 실려 어디론가 가고 있음을 알았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음은 혈도를 짚혔다는 증거! 한 번의 방심에 대한 대가는 엄청났다. 강호에 나온 이래 처음으로 적에게 사로잡힌 그는 방심을 한탄(恨歎)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진소백은 실눈을 뜨고 마차를 모는 자의 등을 살펴보았다. 단지 검은 옷만 눈에 들어올 뿐! 그 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진소백은 눈을 감았다. 깨어났다는 것을 가능한 한 들키지 않음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내가 그토록 빨리 술에 취할 수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답을 알 수가 없었다. * * * 이틀 정도가 지났을까?


마차는 마침내 정지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진소백은 한 무사의 어깨에 실려 지하도를 통해 옮겨졌다. 어두운 방안에 그는 짐짝처럼 던져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며 누군가 들어왔다. 혈도가 짚혀 내공을 끌어올리지 못하는 지금의 진소백은 어둠을 꿰뚫어볼 능력이 없었다. 팟! 등불이 밝혀지고 나서야 비로소 진소백은 상대방을 보았다. 놀랍게도 십칠팔 세에 불과해 보이는 어린 소녀였다. 그녀는 진소백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가 손을 들어 몇 번 목을 치자 진소백은 아혈이 뚫리는 것을 느꼈다. "넌 누구냐? 그리고 여기는 어디지? 날 어떻게 하려는 게냐?" 소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생각보다 똑똑하지 못하군요. 세 가지를 한 번에 묻다니. 좋아요. 내가 차 근차근 대답해 드리지요." 그녀는 낮은 어조로 말했다. 진소백은 그녀의 목소리가 어디서 들은 듯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 다. "우선 내 이름은 심아진(深雅珍)이에요. 그리고 여기는 제 집이고요, 당신은 내 마 음대로 할 예정이에요." 진소백은 고소(苦笑)했다. 심아진은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답하지 않았던 것이다. 답했지만 또한 답하지 않 았으니 진소백은 그녀의 화술이 어린 소녀답지 않음을 느꼈다. 진소백은 심아진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이봐, 예쁜 소녀! 아저씨는 너무 오래 묶여 있어서 온몸이 매우 가렵구나. 몸을 좀 긁도록 온몸을 묶은 줄을 잠시만 풀어 주지 않겠나?" 심아진은 예쁘게 웃었다. "어느 곳이 그렇게 가려우신가요? 제가 대신 긁어 드리죠." "아, 사타구니가 매우 가려워서 말야? 네가 긁어 주기가 좀 뭐한 곳이니 그냥 잠 시 줄을 풀어 주면 안 될까?" 진소백이 일부러 소녀에게 곤란한 곳을 지적했지만 심아진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 었다. "괜찮아요. 도구를 사용하면 되니까요. 가려우신 곳이 여기인가요?" 그녀가 넓적다리의 살집이 많은 곳을 가리키자 진소백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 다. "응, 맞아. 하지만 도대체 뭘로..." 진소백은 심아진의 뒤에서 뭔가가 나옴을 보았다. 여아였다. 아니, 자세히 보니 인형이었다. 너무나 정교해서 사람으로 보이는 여아(女兒)의 인형! 하지만 이 모습이 어찌 인형 이 될 수 있을까? 그는 이 여아를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웃고 말하고 심지어는 다른 사람과 대화도 했었다.


인형이 진소백에게 손을 흔들며 물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저 진아(珍兒)예요. 우리 할아버지 못 보셨나요?" 심아진의 입이 열리며 육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할아비는 여기 있다. 부탁이 있단다. 네가 진소백의 다리를 좀 긁어 주겠니?" "아이, 제가 어떻게..." "도구를 쓰면 되지 않느냐?" 종내에는 입도 열지 않은 상태로 심아진의 배에서 울려 나오는 육가와 진아의 목 소리를 들으며 진소백은 비로소 왜 육가가 한 번도 손녀를 바닥에 내려놓지 않았 는지를 깨달았다. 또한 왜 자신이 그처럼 쉽게 술에 취했는지도 알았다. 육가, 아니, 심아진이 건넨 술에 약이 들었던 탓이다. 그러나 진소백이 조금도 눈치를 채지 못하였다니, 육가의, 아니, 심아진의 연기는 너무나 감쪽같았던 것이다. 심아진이 쉬고 있는 오른손으로 왼손에 끼워진 진아에게 비도 한 자루를 건넸다. 그녀의 목소리는 지금 원래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자, 이걸 사용하렴." 진아는 맑은 소리로 말했다. "정말 이걸로 긁으면 무척 시원하겠군요." 육가가 말했다. "이런! 그런 건 사람이 다친다. 너무 심하지 않느냐?" 심아진이 말했다. "이게 심하다구요? 흥, 진소백이 한 짓에 비하면 전혀 심하지 않아요. 진아, 어서 가서 다리를 긁어 주려무나." 인형은 눈을 깜빡이며 앙증맞은 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요, 언니." 정말로 인형은 살아 있는 여아 같았다. 비도(飛刀)를 손에 쥔 진아가 심아진의 품에 안겨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녀는 진소백의 넓적다리를 향해 손을 내리그었다. 손에 들린 것은 날카로운 비도! 그 비도의 모양은 무척 낯이 익었다. 진소백은 어디서 이것을 보았는가? 그는 고통에 떨며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방울지며 떨어지는 핏자국의 선연함! 그 피를 보며 냉혹하게 미소 짓는 어린 소녀. 그녀는 복화술(腹話術)을 사용하며 인형을 조종하는 심아진! 그리고 비도 한 자루. ♡ 제 3 장 오행이 떠오르니 곧 오룡이다 1 개봉은 평소에도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 상원을 맞아 명절을 즐기는 사람들과 한 강호문파의 개파대전에 참석 하려는 사람들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을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개파대전에 이처럼 많은 강호 거물들이 참석했던 적이 일찍이 강호에 있었던가? 감히 말하건대 없었다.


오룡이 모여 만든 대륙오행련이 단연코 처음이었다. 개봉에서 십여 리 떨어진 태화평(泰和坪)에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거대한 건물이 우뚝 솟아 있었다. 모두 청(靑), 적(赤), 녹(綠), 황(黃), 흑(黑)의 다섯 색깔로 이루어진 다섯 개의 건 물이 오행의 배치로 늘어섰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비슷한 크기의 대형 건물들. 사람들은 그들이 개파대전을 선언하고 나서야 그것이 어떤 용도로 쓰일 건물인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대륙오행련의 총단! 오늘은 상원절이었으니 바로 오행련이 개파대전을 거행하는 날이 아닌가? 둥! 둥! 둥! 가락에 맞춰 긴장을 고조시키는 북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넓은 평원에 갖춰진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무림에서 어느 정도 대접을 받는 자들이었다. 명성을 얻지 못한 자들은 부득이 뒤쪽의 공간에 서서 개파대전을 볼 수밖에 없었 다. 이름만 대도 알 수 있는 거대방파의 거물들은 앞쪽에 특별히 마련된 가죽의자에 앉았다. 구대문파의 장문인도 있었고, 사정상 장문인이 참석하지 못하는 문파는 명망있는 노장로를 보내 개파를 축하했다. 그만큼 오룡(五龍)에 거는 강호의 기대는 컸다. 북 소리가 절정에 달했다. 스스로 총관이라 밝힌 사람의 신분을 안 군웅들은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환서생(幻書生) 환허(幻許)! 그 역시 젊은 시절을 천추학림(千秋學林)에서 수학한 기재가 아니던가? 오룡과 마 찬가지로 천추학림의 네 번째 졸업자였다. "먼 길을 오신 여러 동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우선 저희 오행련을 이끄시 는 다섯 연주를 소개하겠소." 환서생의 뒤쪽으로 붉은색의 의자 다섯이 주인석에 마련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빈 상태였다. 그런데 환허의 말이 떨어지자 어디선가 다섯 명의 중년인이 번개와 같이 나타나 의자 앞에 서지 않는가? 눈이 빠른 무림인조차 그들이 나타나는 모습을 잘 보지 못했을 정도의 쾌속한 신 법이었다. "소개드리오. 금검문(金劍門)을 맡으시는 남궁중(南宮重) 대협이십니다." 황의인물이 포권하며 고개를 숙이자 우레 같은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남궁세가의 가주이기도 한 그는 너무나 유명했다. "당문을 거느리신 당자평 대협께서는 을목회(乙木會)를 맡으셨습니다." 녹의(綠衣)인물이 포권할 때 쏟아진 박수갈채는 남궁중 때에 비해 조금도 못하지 않았다. 당자평 역시 천추학림의 삼(三) 기(期) 졸업자들 중에서 오룡에 속했으므로. "신토부(申土府)를 다스리시는 호대철(湖大鐵) 대협을 소개해 드립니다." 박수가 나왔으나 아까보다는 약했다. 흑의를 걸친 위맹한 모습의 중년인.


실종된 세 명의 오룡을 대신해서 보강된 사람이리라. 그러나 천추학림의 졸업자 중에서 오룡에 조금도 못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그임 을,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알았다. "이화보(離火堡)의 보주이신 진경산(鎭傾山) 대협이십니다. 옛날 실종되신 진무외 대협의 동생 되십니다." 사람들이 감탄하며 박수를 보냈다. 벽력세가주의 직위에 있었던 진무외의 동생이라면 대단한 능력을 가졌을 것이므 로. 그는 적의를 입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벽수궁을 맡으신 분을 소개해 드립니다.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천 일독(天一獨) 대협이십니다." 가장 큰 박수가 그에게 쏟아졌다. 그가 지난 이십 년 넘는 세월을 실종되어 있음을 아는 까닭이었다. 청의를 입고 나선 그의 인기는 가장 높았다. 일신의 능력만으로 강호에서 이름을 얻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그는 강호 청 년들의 살아 있는 우상이었다. 모두 소개가 끝난 대륙오행련의 위용은 대단했다. 이 정도의 세력과 능력자가 모인 문파라면 결코 천외성의 실력에 못지않을 것이 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대륙오행련이 새로운 무림의 종주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모두의 소개가 끝나자 소림의 장경각주인 지공(知空) 대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소림의 대표 자격일 뿐 아니라 다른 문파를 모두 대표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장문인이 화를 당하여 대신 참석하였으니 해량 바라오. 전무림의 동도 를 대표하여 부탁드리니, 부디 무림의 정기를 바로 세움에 일조하여 주시길 바라 겠소." 벽수궁주 천일독이 나서서 답했다. "저희가 오행련을 만든 참뜻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음성은 또렷하고 이목구비 또한 중년의 중후함을 풍겨 주는 바가 있었다. "저희는 이미 천외성이 본질의 뜻을 잃고 사익(私益)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흐를 것을 염려했으며, 천추학림 역시 인재의 교육만을 담당할 뿐 강호에서 중요한 힘 의 근원이 되지 못함을 걱정했습니다." 그는 오행련에 속한 다른 네 명에 비해 강호 기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은연중에 수장의 역할을 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의 염려는 불행히도 적중하여 천외성에서 강호를 속이고 보관한 혈경이 유출 되고 혈왕교의 겁난이 재현될 조짐이 보이니, 감히 우리 오행련은 강호의 평화를 위해 선봉에 설 것임을 천명합니다." 군웅들은 열광했다. 드러내 말은 하지 않지만 지금 혈왕교에 대한 공포로 인해 강호인들의 가슴을 흐 르는 불안은 대단했다. 천외성이 사라지자 기댈 곳을 잃은 강호인들은 새로운 언덕을 원했다. 그런데 오늘 대륙오행련의 위용은 충분히 자신들이 기댈 힘이 있어 보이지 않는 가? 약자들이 원하는 것은 때때로 강력한 지도자였다. 그들은 불안을 견디지 못하기에 자신이 가진 일부를 희생하더라도 누군가가 자신


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원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군웅들의 열광은 그런 심리의 반영이었다. "누구든 오행련의 정식 발족에 반대하거나 의문이 있는 분을 나서시오." 환서생의 말이 내공을 타고 퍼졌다. 하지만 누가 반대하겠는가? 구성원은 오룡(五龍)이나 그에 버금가는 영웅들이며 목적은 강호 평화의 수호라는 데. 그래서 누군가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을 때 군웅들은 놀라고 말았다. "나는 의문이 있소!" 검은 옷을 두르고 뒤에는 관을 멘 자였다. 머리는 봉두난발이라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청년이 감히 이의를 제기하다니. 군웅들은 험악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자네는 누군가?" 환서생이 약간 당황한 어조로 물었다. 그에 반해 청년의 대답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내 이름은 엽평이오. 엽자문께서는 나의 부친이 되시오." "아!" 감탄사가 군웅들 사이에서 나왔다. 사라졌다는 오룡 중의 한 명! 천일독의 눈빛이 강해지고 호대철은 고개를 약간 숙였다. * * 칼로 살집을 헤집는 것이 시원할 리 없었다. 진소백은 비도를 보았을 때부터 심아진을 말리지 않았다. 아니, 말려 봤자 소용이 없음을 알았다. 심아진이 입을 열었을 때,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때, 진소백 시원한가?" 천기수사 심화절의 음성! 그리고 그의 천심비도(穿心飛刀)! 심아진은 그와 어떤 관 계인가? 또 그녀는 어찌 이처럼 다른 사람의 목소리 흉내를 잘 내는가? 진소백은 문득 심 아진이 목소리가 바뀔 뿐 아니라 행동마저 목소리에 따라 변함을 느꼈다. 갈가리 찢어진 넓적다리를 따라 흘러내리는 피! 진소백은 이를 악물어 고통을 참으며 겨우 외쳤다. "육가! 만설자 육가. 빨리 이리 나오시오." 심아진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늙은 음성이 흘렀다. "나는 여기 있네. 이런, 자네 상처가 너무 심하구먼." 심아진이 육가의 음성으로 말하며 인형을 나무랐다. "진아! 무슨 짓이냐? 어서 이리 오거라." 인형 진아가 입을 삐죽였다. "쳇, 좀 전에 할아버지가 다리를 긁으라 하셨잖아요. 심아진 언니가 이걸 사용하라 했단 말이에요." 육가가 나무랐다. "심아진, 무슨 짓이냐? 사람을 이토록 괴롭히다니." 같은 입에서 이번에는 심아진의 목소리가 나왔다. "흥, 간섭하지 말아요, 할아범! 이자는 아버지의 원수란 말야!" 진소백은 비로소 사태를 알았다.


원래부터 육가는 그를 속이지 않았다. 만일 육가에게 진소백을 속이려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는 눈치를 챘을 것이다. 술에 약을 탄 것은 심아진이었고 육가는 그것을 모른 채 진소백에게 술을 권했다. 한 사람에게 이처럼 여러 명의 인격이 들어 있는 증상을 진소백은 말로만 들었었 다. 그런데 지금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다니... 진소백은 허벅지에서 전해지는 고통을 참으며 육가를 불렀다. "육가, 내 당신에게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소." 심아진, 아니, 지금은 육가(陸家)가 말했다. "물어 보게. 자네는 내게 좋은 이야기 재료를 제공했으니 특별히 공짜로 답하겠 네." 진소백은 서둘러 물었다. 혹시나 심아진이 나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심아진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소? 그녀가 어렸을 때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 소?" "글쎄, 난 그녀가 좀 커서부터 때때로 내 옆에 나타나곤 함을 알았는데... 모르겠 네. 아! 한 가지 들은 게 있는데, 그녀의 아버지 심화절은 그녀를 매우 혹독하게 가르친 것 같네." "혹독하게! 무엇을 말이오?" "글쎄, 나도 잘은..." 육가의 말이 끊어졌다. 다시 심아진이 나섰다. "흥! 육가를 통해 나의 약점을 찾으려는 건가요? 어림없어요.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는 밖으로 나오지 못해요." 진소백이 되물었다. "마음먹으면이라고? 그럼, 육가는...?" "그래요. 그는 내가 만들어 낸 인격이죠. 흥, 내 연기가 너무 뛰어나 그 스스로 인 격을 갖게 되기는 했지만... 어림없죠. 내가 원하지 않는 이상, 그는 밖으로 나오지 못해요." 진소백은 비로소 심화절이 가리켰던 혹독한 교육이 무엇에 관해서인지를 알았다. 연기! 다른 사람이 되고 다른 행동을 흉내내는 연기는 첩자 활동을 하는 데 필수적이었 다. 너무 몰입하여 연기를 하는 자는 때때로 극중의 인물과 현실의 자신을 혼동하는 경우가 생긴다고 한다. 심아진도 그런 경우일까? 육가는 그녀가 만들어 낸 인물이었지만 스스로 인격을 갖고 있었다. 그는 살아 있는 걸까? 죽은 걸까? 아니면 태어나지도 않은 것일까? 알 수 있는 건 심아진의 이와 같은 정신이상(精神異常)만이 진소백을 속일 수 있 다는 것이다. 속이는 순간 자신조차 결백함을 믿고 있는데 어찌 상대방이 속지 않겠는가? 아마 심화절은 자신의 적수로서 나타날 천재(天才)를 대비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꼭 진소백은 아니더라도.


2 심아진의 손에서 비도가 빛을 발했다. "당신은 내 아버지 심화절에게 고통을 주었으니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해요." 진소백은 그녀의 싸늘한 눈을 보며 나직이 한숨쉬었다. "난 그를 죽이지 않았단다. 그는 자살했어." "흥! 결국은 당신이 강요한 일이죠. 각오하시는 게 좋아요." 심아진이 비도가 여럿 묶인 가죽을 꺼냈다. 만일 저것이 모두 진소백의 몸에 꽂힌다면... "육가를 불러 다오. 난 그에게 할말이 있어. 육가, 어디 있소. 이리 나오시오." 진소백의 다급한 부름에도 육가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심아진의 싸늘한 냉소만 울렸을 뿐이다. "흥! 내 의지가 없이는 그는 나오지 않아요. 아깐 내가 너무 흥분해서 통제를 못 했지만." 비도가 진소백의 전신 관절에 꽂히기 시작했다. 극도의 고통에 진소백은 몸을 떨었지만 비명(悲鳴)을 지르지는 않았다. 대신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심아진은 여태껏 만난 어떤 적보다 무섭고 영리하며 잔인했다. "호호, 당신 팔의 관절은 이미 파괴되었으니 이제 무공을 사용하지 못해요. 호호, 당신의 사부라면 불문의 요상술로 고칠 수도 있겠지만... 흥! 어림없지. 당신은 여 기서 죽어요." 그랬다. 초의 선사가 시전하는 불문의 대운공요상술은 근맥(筋脈)을 움직여 끊어진 관절을 낫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어떻게 탈출한다는 말인가? 이제 심아진의 비도가 다리를 노렸다. 다리마저 망가진다면 걸을 수도 없으니 탈출은 더욱 요원(遙遠)해질 것이다. 이들 은 진소백을 단지 죽이기 위해 납치했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왜 태산에서 죽이지 않았는가? * * * 대륙오행련(大陸五行聯)! 엽평의 말에 환서생의 뭐라 말하려 하자 천일독이 제지했다. 그가 대신 나선 것이다. "자네는 무슨 의문이 있는가? 무엇이든 물어 보게." 엽평은 질문하지 않았다. 대신 메고 있던 관의 뚜껑을 먼저 열었다. 관 속에 든 것은 시체! 하지만 그 시체는 기이하게도 그다지 부패되지 않았다. 엽평이 굳은 어조로 말했다. "이분은 내 아버님이시오. 궁주가 보시기에 돌아가신 원인이 무엇인 것 같소?" 천일독과 엽평의 거리는 줄잡아 삼십여 장! 하나 천일독이 어깨를 흔들자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엽평의 앞에 나타났다. 흡사 땅을 줄여 걷는 듯한 이런 경공(輕功)만으로도 중인들은 그의 무공 수위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엽자문의 시체를 한참 내려다보더니 이윽고 말했다.


"이럴 수가!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는 중수(重水)에 의한 중독으로 숨이 끊어 졌네. 그럼, 우리가 알았던 사실은 모두... 그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말인 가?" 그는 망연한 듯 중얼거렸다. 모든 군웅이 술렁였다. 천추학림(千秋學林)과 관련이 된 무림인들은 엽자문이 기녀를 겁탈하다가 죽은 것 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중수에 의한 죽음이라니... 아무도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이십 년 전의 비사를 모르는 일반 무림인들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단지 실종 된 것으로 알았던 엽자문이 살해되었다니. 그는 오룡(五龍)의 일 인이었는데 누가 감히 그를 죽였단 말인가? 웅성거리는 소 음 속에 엽평의 차가운 말이 울렸다. 그는 군웅 전체를 향해 외쳤다. "엽씨세가의 가주셨던 아버님께서는 결코 불명예스럽게 돌아가시지 않으셨소. 여 러분이 천추학림에 대해 이 사실의 증인이 되어 주실 수 있으시오?" 군웅들 몇몇이 외쳤다. 특히 남궁중은 진기를 돋우어 엽평에게 답했다. "당연하다, 엽평! 네가 그의 아들이니 나의 조카가 되는구나. 훌륭하게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켰구나. 정말 장하다." 엽평은 남궁중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굳은 어조로 천일독에게 물었다. "듣자 하니 벽수궁에도 중수를 다루는 재주가 있다 하던데, 인정하십니까?" 놀라운 말에 군중들이 동요하며 소란이 일었다. 그러나 천일독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하지만 우리만 중수를 다룰 수 있는 건 아니라네." 중수를 다루는 재주! 원래 중수란 특이해 다른 물질과는 잘 섞이지도 않으며 극도로 위험하여 다루기도 힘들었다. 엽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천외성에서 사라진 좌고학이란 자 또한 중수를 다룰 줄 안다는 말을 들었소." 그러나 엽평은 더욱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지금 오행련을 대표하시는 다섯 분은 모두 내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사인(死 因)을 조사할 당시 천추학림에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소. 그때 조사를 담당했던 사 람이 누구였는지 혹시 기억하시오?" 남궁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기억하지. 분명 만리탐의 좌고학이었다." 엽평의 눈이 빛났다. 그뿐 아니라 많은 군웅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 좌고학이 중수를 사용할 줄 아는데도 잘못된 사인을 발표했다면 분명 음모가 있을 것이다. 혹시 그가 중수를 사용한 범인이 아닐까? 엽평이 다시 물었다.


"지금 오행련을 대표하시는 다섯 연주들께서도 당시 모두 천추학림에 계셨으며 아 버님과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셨던 걸로 알고 있소. 맞소?" "맞네. 우리는 가까운 사이였지." "보시다시피 중수의 중독 증상은 내장이 녹아 내리지만 외관은 멀쩡하여 쉽사리 알 수가 있소. 맞소?" "그 말 역시 옳네. 자네가 말하는 바는...?" "그런데도 아버님의 시신을 아무도 검안해 보지 않았다는 말씀이시오? 아니면 검 안하고도 중수에 의한 죽음임을 몰랐단 말씀이시오?" 엽평이 말하는 바가 분명해졌다. 다섯 연주의 미간이 꿈틀거리며 분노를 나타냈다. 그러나 엽평의 말은 지극히 논리적이었다. 군웅들의 눈에도 약간 의혹이 떠오름을 본 천일독이 분노를 늦추며 엽평에게 말 했다. "거기에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네. 우리는 당시 기녀... 의 말만을 너무 믿었고, 엽 자문의 죽음은 백년 천추학림의 명예를 실추시켰던 것인지라... 어쨌든 지금에 와 서는 면목이 없네." 엽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관 뚜껑을 닫고 다시 메더니 내공을 돋워 외쳤다. "내가 아버지의 친구셨던 여러 어른들께 이런 태도를 취함이 무례임을 알고는 있 소." 그는 수많은 군웅의 시선 속에서도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중수의 중독 증상은 이처럼 명백한 외증이 있는데도 아무도 몰랐다는 점 은 의심의 여지가 많소. 이런 의혹들이 명백히 밝혀지기 전에는 엽평은 아무도 어 른으로 인정하지 못하니 부디 용서 바라오." 떠나려는 그를 남궁중이 불러 세웠다. "잠깐만! 네가 자신의 신분을 안다면 이 남궁 모가 네 숙부가 됨도 알 것이다. 부 디 나를 찾아오너라." 엽평이 망설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모든 일이 명백해진 다음에 꼭 숙부를 찾겠습니다." 엽평은 총총히 떠났다. 그는 갑작스럽게 나타나 단지 몇 마디의 말만 던지고 갔지만 은연중에 큰 영향을 남겼다. 무림의 거성(巨星)으로 떠오르는 대륙오행련에 대한 일말의 미심쩍음을 무림인들 의 가슴에 남긴 것이다. 왜 그들은 동료의 죽음에도 사인조차 제대로 알아 보지 않았을까? 엽평은 또 천일 독에게 좌고학과��� 관계를 물어 보지도 않았다. 어쩌면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아 더욱 미심쩍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어 쨌든 치솟아 가던 오행련의 신망(信望)에 엽평의 갑작스런 질문이 찬물을 약간 끼 얹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 * <제이계(第二計) 완성! 풍림서(風林誓)의 발호로 가장 의심되는 오행련은 군중들의 암중 의혹을 피하지 못할 것임. 제일계(第一計)는 예정대로 수행되고 있음.>


전신(電信)을 읽는 사람은 제갈수였다. 황산의 단심맹 총단에서 보고를 읽는 그의 표정은 그다지 흡족하지 못했다. 계획이 성공하고 있는데도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총 여섯 명의 인물들 중 한마디의 말도 못 하고 입조차 제대로 열지 못하는 두 사 람이 있었다. 저들 두 사람의 한을 풀어 주는 길은 다름 아닌 풍림서의 와해(瓦解)! 제갈수도 자 신이 느꼈던 혈기(血氣)의 근원이 풍림서라 보고 최선을 다해 풍림서를 상대할 계 획을 세웠다. 그런데 느닷없이 혈왕교가 나타난 것이다. 아직 강호에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혈경상의 무공을 사용하는 자들도 심심치 않게 포착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풍림서를 공격하는 것은 혈왕교를 도와 주는 꼴이 되는 게 아닐까?" 어쨌든 엽평이 개파대전에 나타난 오행련의 도덕성에 흠집을 남기는 계획은 일단 락되었다. 이 일은 엽평 개인의 신세에 대한 의문도 푸는 뜻이 있으니 당연히 끝내야만 했 다. 문제는 일계(一計)!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긴 했지만 제갈수는 그 일로 일어날 결과를 두고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이 계획이 결과적으로 숨어 있는 혈왕교를 돕게 되는 것이라면 그는 천하를 바라볼 면목이 없어지는 것이다. "갈등되는가?" 거지 차림의 노인이 뒤에서 물었다. 공공문의 진전을 이은 철혈개(鐵血 )였다. 제갈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만일 잘못된 결과가 나온다면..." "그럼, 제일계는 시행하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그러기에는 지금 강호가 돌아가는 모습 속에 너무 많은 의문이 생깁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을 말하는 겐가?" "첫 번째는 천외성에서 발표한 혈경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 소식이 어떻게 단 이 틀 만에 온 강호에 퍼지겠습니까?" "아무리 강호의 소문이 빨라도 그건 불가능하지. 또 다른 것은?" "하필 때맞추어 혈경이 유출되었음이 수상합니다. 천외성이 해체되고 오행련이 급 부상합니다. 가장 이득을 보는 자들은 누굴까요?" "자신의 가장 큰 적수 중 하나인 사씨가문을 몰아 낸 혈왕교와 무림 맹주 자리를 앉아서 차지하게 될 대륙오행련이로구먼! 또 다른 의문은 뭔가?" "오행련이 개파대전을 거행한 날짜입니다." "그게 뭐 이상한가? 상원절은 명절이니 좋지 않는가?" "하지만 날짜가 너무 잘 들어맞습니다. 급하게 소집된 태산의 임시 무림대회에 참 석했던 사람들은 그곳에서 곳곳에서 일어나는 혈왕교의 전조를 들었습니다." "흠, 그러고 나서는...?" "당충이 나서서 제안하니 그들은 거의 모두가 시간에 맞춰 개파대전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의 강호인들이 기댈 곳을 찾고 있을 때 자신들이 가진 힘 을 보여 준다면 무림인들의 마음속에 오행련에 대한 기대가 더욱 증폭되겠죠." "일리가 있구먼. 듣고 보니 시기가 너무 공교롭군. 마치 태산집회에 모인 사람들을 참석시키기 위해 처음부터 날짜를 맞춘 것 같군그래." 제갈수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모든 상황이 너무 오행련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강호의 인심 을 모두 오행련이 얻게 되고 그들이 정말 풍림서라면 추후에 만회하기가 힘듭니 다." 철혈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자네는 일부러 엽평을 보냈구먼. 그가 자신의 신세도 알아 보도록 할 겸 해서." "그렇습니다. 이 일로 무림인들이 대륙오행련에 가지는 신망이 어느 정도 떨어졌 겠지만, 그들도 손을 놓고 있지만은 않을 겝니다." "인기를 되얻기 위해 다른 수를 쓸 거란 얘긴가?" 제갈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어떤 방법일지는 모르겠지만 강호의 여론을 한 번에 휘어잡을 만한 수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확신에 찬 제갈수의 말! 진정 오행련은 풍림서(風林誓)의 변신인가? 철혈개가 문득 생각이 미친 듯 물었다. "참, 엽자문의 시신은 어디서 구했는가? 설마 그의 무덤을 파헤친 것은..." 제갈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3 어둠 속에 진소백이 누워 있었다. 그의 다리는 멀쩡했다. 비록 팔은 쓸 수 없게 되었으나 다리는 이상이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 심아진이 손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진소백이 기절해 버렸고, 애초부터 그녀가 원한 것은 진소백의 고통이었지 다리가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심아진은 짐작도 하지 못하리라. 어떤 수를 써도 기절에서 깨어나지 않던 진소백이 자신이 나가자마자 번쩍 눈을 떴다는 사실을.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있으면 뭐 하는가? 몸은 혈도가 짚혀 움직일 수 없는 것을. '다른 방법은 없을까? 내공이 거의 없어도 시전할 수 있는 것은...!' 진소백은 눈앞 에 번개가 침을 느꼈다. 얼마 전에도 그는 내공을 잃고 바닥에 누웠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독에 당했었지만 내공을 끌어올리지 못한다는 것은 지금과 다름이 없었다. 종도가 남긴 악마혈에 대한 내성을 기르는 호흡법! 이것은 내공과는 달랐다. 체내에 잠재한 힘을 조금씩 끌어 내어 독과 싸우는 방법이니 어쩌면 내공이 없는 지금 혈도를 푸는 데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일단 해보자.'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엔 약하던, 내공과는 전혀 다른 힘이 조금씩 강해지더니 종내는 매우 강한 기 세를 지님을 진소백은 느꼈다. '전에 독에 대항했던 기운이 아직 남아 있었구나.' 진소백은 종도가 남긴 방법이 단순한 의술의 차원을 넘어 매우 큰 효용이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앞으로는 이것을 회천결(回天訣)이라 부르도록 하자.' 진소백은 급히 잠력을 몰아 혈도를 뚫기 시작했다. 평소의 진기와는 다른 기운에 접한 혈맥들은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곧 순응하기 시 작했다. 하나둘 혈도가 뚫림을 느끼며 진소백은 은밀히 미소했다. 벗어날 방도를 겨우 찾은 것이다. '기다리거라, 심아진! 네 독함은 꼭 보상을 해주마.' 회천결이 여타의 격잠지술(激 潛之術)과 다른 것은 잠력을 조금씩 뽑아 내어 개인의 천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다는 점에 있었다. 잠력의 특징은 일반 내공과는 달리 어떤 기운으로도 쉽게 적응한다는 점에 있었 다. 이것이 원래부터 체내의 잠력을 이용한다고 전해지는 선천신공(先天神功)들이 일 반 무공보다 격이 다르게 강한 이유 중 하나였다. * * * 태화평(泰和坪)! 대륙오행련의 개파대전(開派大典)에 모인 군웅들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많은 사람이 강호의 위기에 가장 확실한 언덕이 될 것으로 믿었던 대륙오행련에 대해 의혹을 갖게 되었다. 엽평의 몇 마디 말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만일 확실한 전환점이 없다면 오행련의 개파대전은 찜찜한 기분을 간직한 채 막을 내리게 될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대표자를 뽑을 때 꼭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 께름칙한 구석이 있는 자는 피하기 마련이므로. 환서생이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분위기를 쇄신하려 할 때, 또다시 우렁찬 고함이 들렸다. "내가 몇 마디 하겠소." 이 말에 실린 공력도 매우 대단하여 좌중의 소란을 압도(壓倒)했다. 군웅들은 외친 자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대력신(大力神) 패가(覇苛)! 예전에는 천외십육웅의 일 인이었으며, 지금은 탈퇴하여 대륙십웅(大陸十雄)으로 불리는 열 명 중 수좌 격인 거물이 아닌가? "십구 년 전 나 또한 천외성의 대표로서 천추학림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었는지 라, 그 일에 대해서 약간은 알고 있소." 대력신의 말에 군웅이 귀를 기울였다. "그때 진상 조사는 모두 만리탐에 일임되었는지라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당시 탐주 였던 그에게 속았을 것이오. 만리탐주였던 좌고학이 혈왕교의 잔당이었을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소. 오죽하면 천외성 전체가 삼십 년간이나 속았겠소." 천일독이 포권하며 말했다. "혹시 있을지 모를 강호동도들의 오해를 풀어 주시어 감사합니다. 또한 본 련의 개파대전에 참석해 주시니 감읍합니다."


대력신이 그의 포권지례를 옆으로 물러나 피했다. "궁주의 예를 제가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저희 열 명은 다만 한 가지 부탁을 드 리고자 합니다." 천일독의 눈이 의문으로 커졌다. "부탁이라니, 무슨 분부이신지...?" 대력신이 양손을 앞으로 모아 세웠다. 동시에 그의 좌우로 아홉 명의 고수가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개개인이 일개 문파의 수장들과 맞먹는 무공을 지녔다는 열 명의 인물, 대륙십웅 (大陸十雄)! 과연 나타나는 신법이 그림자조차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쾌속했다. 그들의 입에서 하나와 같은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오행련에 들고자 하니 부디 받아 주시오." 대력신이 나서서 자신들의 말을 보충했다. "천외성에 몸담았었으나 그들이 강호와의 신의를 저버리고 혈경을 무단으로 간직 하여 천하를 도탄에 빠뜨리게 됨을 보고 탈퇴했소." 두 눈에 어린 정광은 대력신이 얼마나 굳은 결심을 했는지를 말해 주듯 형형했다. "하나 혈경으로 일어날 혈겁에는 우리 또한 책임을 회피하지 못할 것! 혈왕교가 다시 일어난다면 강호에서 유일하게 그들을 막을 힘을 가진 곳이 바로 대륙오행련 임을 오늘 알게 되었소. 이군지장(二君之將)이라 배척하지 마시고 부디 우리를 받 아 주시오." 군웅들은 모두 놀랐다. 구파와 일방을 대표해 참석했던 여러 장로들도 매우 놀랐다. 대륙십웅은 대부분 구파의 속가 출신들이었다. 당연히 구파일방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오행련에 들다니. 지금의 구성으로 본다면 오행련은 사대세가에서 붕권의 종리가만 빠진 형색이 아 닌가? 게다가 강호인 모두가 주목하는 열 명의 절정고수가 합세한다면 강호 초유 의 거대문파로 다시 태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천일독이 감격한 듯 말했다. "무슨 말씀이시오. 영웅들이 천외성을 탈퇴한 것은 천하를 위한 결단이었음을 천 하가 모두 알고 있으니, 영웅들의 입련은 우리의 영광이오." 받아들이겠다는 의미! 천외성의 기둥이었던 천외십육웅 중에서 사씨가문을 따라 어디론가 은거한 다섯 명과 좌고학을 제외한 열 명이 모두 오행련에 든다는 것! 그것은 강호의 대들보가 천외성에서 대륙오행련으로 옮겨 세워짐을 의미했다. 또한 지켜보는 군웅들의 가슴에는 한결같이 각인(刻印)되는 생각이 있었다. 대륙오행련이 있다는 것! 만일 혈왕교의 혈겁이 일어나도 강호는 오행련이란 거대한 언덕에 기댈 수 있다는 생각! 많은 강호인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의 의미는 무척 거대한 것이었 다. 지금은 아직 평화롭지만 혈경으로 인해 언젠가는 강호에 풍운이 일리라. 그때가 되면 강호인들은 누구를 찾겠는가? 대륙오행련(大陸五行聯)! 사상 초유의 힘을 지닌 강호의 새로운 거목! 천일독은 내공을 돋워 말했다.


"아직은 혈겁의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소. 하나 만일 혈겁이 일어난다면 강호는 힘 을 하나로 모아 협심해야 할 것이오." 그의 외침은 내공을 타고 태화평 곳곳으로 울려 퍼졌다. "오행련의 발족(發足)은 그때를 대비함이오. 또한 우리의 문호는 언제나 열려 있으 니 강호의 동도라면 누구나 입련할 수 있소." 우레 같은 박수와 함성이 그의 말에 답했다. 태화평에 모인 군웅들의 마음속엔 조금 전 엽평이 만들었던 의혹은 이제 그림자조 차 없었다. 대륙십웅의 입련 결정에 따라 강호를 지켜 줄 든든한 거목을 얻었음이 기쁠 따름 이었다. 이렇게 대륙오행련은 그 문호를 열었다. 이제 강호는 이 이름은 기억하리라. 그리고 언젠가 위기가 닥치면 죽음에서 구해 줄 강력한 힘을 가진 지도자를 원하 게 되리라. 백이십 년 전 천외성이 그랬던 것처럼. * * * 어둠 속에 있다가 갑자기 밝은 불을 본다면 반가움이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고문실에서 보는 불빛을 반가워할 사람이 있을까? 문이 열리며 불빛과 함 께 심아진이 다시 들어왔을 때, 진소백이 보인 반응은 심아진을 당황스럽게 하기 에 충분했다. "어이! 어서 오거라. 자, 다시 시작하자꾸나!" 그녀는 잠시 자신이 그를 고문하러 들어왔음을 잊어버렸다. 진소백의 태도가 마치 즐거운 장난을 위한 친구를 맞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딱지가 앉은 진소백의 팔과 허벅지를 본 그녀는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흥! 이제 보니 피학적인 취향이 있었나요? 고문하러 들어온 사람을 반기다니." 진소백은 여전히 웃음을 거두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네 고문은 상당히 재미가 있긴 했지만 난 이미 충분하다. 더 이상은 생각이 없단 다." "호호, 무척 우습군요. 당신은 혈도가 짚혀 무공이 폐쇄당하고 팔의 관절에는 비도 가 박혔어요. 무척이나 잔인한 수법이에요." 물론 비도는 그녀가 박았다. 그렇지만 지금 자신의 잔인함을 말하는 소녀답지 않은 쾌감이 서려 있었다. "아 마 당신은 영원히 두 팔을 쓰지 못할 거예요." "네가 불문에는 이런 상처를 낫게 할 신공이 있다 하지 않았느냐? 다행히 내 사부 님은 불문 출신이 아니시더냐?" "호호! 하지만 당신은 사부를 만나지 못할 거예요. 이곳 감옥에서 나가지 못하는 이상, 영원히." 진소백은 그제서야 한숨을 쉬었다. "네 말이 맞다. 그래서 난 이곳을 나가기로 결심했다." 심아진의 눈이 흔들리더니 이윽고 물었다. "당신은... 혈도를 풀었나요?" 진소백이 소리 높여 웃었다. "넌 겁이 무척 많은 아이니 어서 소리질러 도움을 청하도록 하려무나." 심아진은 망설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흥, 믿지 않아요. 설사 당신이 혈도를 풀었다 해도 이미 두 팔을 쓸 수 없는데 내 가 당해 내지 못하겠어요?" "넌 한 가지 잊고 있다. 내게는 도와 줄 사람이 있단다." 심아진의 눈에 당혹이 어렸다. "누가 있다는 거죠?" "육가! 육가가 나를 도와 줄 게다." 심아진은 비로소 소리 높여 웃었다. "호호호, 정말 우습군요. 그는 내게 통제되고 있어요. 내가 필요할 때만 그를 끄집 어 낼 수 있어요." 진소백은 고개를 흔들었다. "비록 네가 만든 인격이지만 그 또한 살아 있다. 네 속에서뿐 아니라 내 속에서도 육가를 끄���어 낼 수 있지." 무슨 말인가? 심아진은 의혹으로 눈을 크게 떴고 진소백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못 믿겠다면 어디 한번 시험해 보겠느냐?" 진소백의 말은 효과가 있었다. 심아진은 의혹과 함께 알 수 없는 불안이 전신을 덮침을 느꼈다. 어쩌면 이 남자의 말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진소백에게 경이감을 갖고 있었다. 비도가 전신을 찢는 고통에도 비명을 단 한 번도 지르지 않았던 사내! 진소백이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던 목적이 서서히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만일 그대가 누군가와 싸워 필승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가 당신을 무서워하도록 하 라. 공포와 불안은 사람으로 하여금 의외로 많은 실수를 범하도록 만든다. 해서 진소백은 피고문자로서 고문자에게 겁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불안을 벗어 던지려는 듯, 심아진이 크게 외치며 달려들었다. "믿지 못하겠다. 시험해 보마!"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비도가 들렸고, 달려드는 기세는 그녀의 장담대로 강호의 일류고수에 결코 못지않았다. ♡ 제 4 장 탈출! 그러나 뒤를 따르는 그림자 1 진소백은 물론 내공을 회복했다. 하지만 그가 회복한 진기의 양은 극히 미약해 겨우 삼사 성 수준에 불과했으며 팔 은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다리를 들어 심아진의 공격을 막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 진소백 은 오른다리를 들었다. 무예를 익힌 자라면 발 또한 손 못지않게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어야 했다. 그의 발끝이 향하는 곳은 심아진의 마혈(痲穴)이었고, 그녀의 손에 들린 비도를 막 을 방법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진소백은 방법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도 나름대로는 매우 자신이 있었다. 그의 입이 벌어졌다.


흘러나온 쩌렁한 음성! 그런데 그 음성은 진소백의 평소 목소리가 아니었다. "네가 이 아비를 공격하다니! 어서 무릎을 꿇지 못하느냐?" 심화절의 음성이 아닌가? 어린 시절 그토록 엄하게 자신을 다루었던 심화절의 음성을 들은 심아진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이성과는 상관이 없었다. 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된 어린 시절의 권위가 일으키는 조건반사적 반응이었다. 하지만 순간적인 망설임의 결과는 그녀에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했다. 그녀가 멈칫한, 머리칼보다도 짧은 순간! 진소백의 오른발은 그녀의 마혈에 명중했다. 심아진의 몸이 굳어질 때, 되질러 온 오른발은 아혈(啞穴)마저 짚어 버렸다. 그때서야 심아진은 알 수 있었다. 어떤 종류의 사람은 결코 시험해 보지 말아야 함을! 그리고 진소백이 바로 그런 종류의 사람임을. 진소백이 잡힌 지 나흘이 지난 정월의 열일곱째 날이었다. * * * 강호에는 대륙오행련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 천하에 존재하는 정도(正道)는 구파를 제외한 거의 모든 힘을 오행련으로 모았다. 지금은 망설이고 있지만 구파도 강호의 위기가 닥친다면 오행련에 들 수밖에 없으 리라는 것이 강호인들 대부분의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이 팽배한 가운데, 구파는 아직까지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었 다. 아직 혈왕교가 정식으로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강호가 너무 호들갑을 떤다는 것이 구파의 생각일까? 어쨌든 전통의 명문인 구파와 개방은 아직도 느긋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협서성 화음현의 화산(華山) 서북쪽! 무림에 몸담은 자라면 이 위치가 무얼 뜻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화산파(華山派)! 소림, 무당, 아미, 곤륜과 더불어 구파 중에서도 영수 격인 사 파 중의 하나인 화 산파가 여기에 존재했다. 장문인인 화산검성이 전대 장로인 옥룡자의 배신으로 암습을 당해 지금은 거의 봉 문 지경에 이른 천하의 거파! 지금은 화산옥기린(華山玉麒麟) 매일도가 장문인을 대행하여 대소의 업무를 보고 있다던가. 화산의 편액이 올려다보이는 숲 사이에 검은 옷을 입은 청년이 나타났다. 뒤에 멘 관은 그가 엽평임을 가르쳐 주었고, 걸음의 방향은 화산파로 향하고 있음 을 시사했다. 화산의 분위기는 평소 매우 밝았다. 명문의 제자들이 명산의 정기를 받으며 교육을 받았으니 우울한 기질을 갖게 됨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하지만 장문인이 병석에 있는 탓인가? 알 수 없는 우울함이 지금 화산을 잔뜩 감고 있음을 엽평은 느낄 수 있었다.


화산파에 도착한 엽평은 정문으로 가지 않았다. 우회하여 그가 도착한 곳은 삼 장 높이의 벽이 내부의 전각들을 싸고 있는 후원의 어느 담장 아래! 엽평은 망설이지 않고 담장을 뛰어넘었다. 그가 화산에 침입한 것이다. 이 정도의 침입도 감지 못 한다면 어떻게 험난한 강호의 풍파 속에서 화산이 명문 의 이름을 유지할 수 있었으랴? 하지만 기이하게도 화산의 내부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장문인의 부상으로 인해 화산의 기강이 이처럼 무너졌는가? * * * 연화봉(蓮花峯) 정상에 위치한 상청궁(上淸宮)! 화산의 발원지로, 문파 내에서는 신성시(神聖視)되는 곳이었다. 상청은 또한 태청(太淸)을 뜻하며 태상노군(太上老君)을 나타내고 있으니 화산이 강호 도문의 신성지임을 증거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곳! 화산의 제자들이 출입을 삼가는 성지(聖地)에 외인(外人)이 서 있었다. 평소라면 난리가 날 일이었지만 지금 외인 앞에 서 있는 화산의 제자는 미동도 없 었다. 화산인이 장문인 화산검성의 대제자 매일도(梅逸度)임을 감안할 때 이는 매우 파 격적인 처세였다. 매일도는 비단 성지에 침입한 외인에게 화를 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은밀히 대화 까지 나누었다. "이대로만 하면 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번거로운 일을 모두 옥기린께만 맡겨 죄송스러우나 제 주위에는 감 시의 눈이 따라붙었는지라." 매일도와 대화하는 사람은 바로 엽평! 주위에 진기의 막(幕)을 쳤는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도 음향이 일체 들리지 않았다. 엽평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귀파와 소림, 무당, 그리고 아미의 사 개 파라면 능히 구파를 대표할 수 있으니... 꼭 부탁드립니다." 그가 포권하자 매일도도 급히 답했다. "부탁이라니 무슨! 난 개인적으로 진소백에게 빚이 있으니... 그런데 진 형은 지금 어디 있는 게요?" 엽평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것이... 항상 연락이 닿았었는데, 벌써 연락이 끊어진 지 나흘째입니다." 매일도는 매우 놀랐다. 그는 이미 일 년 전 진소백의 능력을 직접 보았었다. 그런데 연락이 끊기다니... 설마 실종된 것인가? 엽평이 매일도에게 뭔가를 부탁한 네 개 문파는, 구파의 수장 역할을 하는 동시에 일전에 용선풍(龍旋風)이란 작전으로 인해 풍림서에 대한 반감을 깊이 갖게 된 문 파들이다. 또한 세작(細作)들이 제거되었으니 풍림서로 비밀이 새어나갈 염려가 가장 적은 곳이기도 했다. 엽평은 무슨 부탁을 하러 왔는가? 이곳은 화산!


화산의 장문인 화산검성은 용선풍(龍旋風)이 발효되면서 유일하게 풍림서의 첩자 에게 부상(負傷)을 당했었다. 아마 풍림서에 가지는 반감(反感)이 구파 중에서 가장 크리라. 풍림서의 일이라면 가장 열심히 뛰어 줄 문파가 바로 화산인 것이다. * * * 심아진은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몸은 나이답지 않게 굴곡(屈曲)이 완연하여 여인의 체취(體臭)를 짙게 풍겼 다. 진소백은 급히 그녀의 가슴을 헤집기 시작했다. 며칠간 갇혀 있으니 여자의 가슴이 그리워진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는 봉곳이 솟은 그녀의 젖가슴은 쳐다보지도 않고 낡은 옷꾸러미를 꺼내 들었 다. "있었구나. 없으면 어떡하나 걱정을 많이 했다." 서둘러 펼친 꾸러미 안에 든 것은 육가(陸家)가 평소에 입었던 옷과 그의 얼굴로 변하기 위한 면구(面具)! 진소백은 심아진이 수시로 육가로 변장했으니 그로 분하기 위해 틀림없이 도구를 항상 갖고 다닐 것이라 예상했다. 육가의 면구를 쓰고 자신 안에 있는 그의 인격을 불러 내기만 하면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은 여반장(如返掌)이었을 테니까. 진소백이 심아진의 품을 확인하지 않고 일단 그녀를 제압한 일은 일종의 도박이었 다. 진소백은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 탈출할 수가 없었다. 삼사 성에 불과한 내공(內功)에다가 관절이 파괴되어 쓰지도 못하는 팔! 보이지는 않지만 밖으로 나가면 수많은 감시자들이 지키고 있을 것이다. 육가(陸家)의 힘을 빌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나가겠는가? 그는 서둘러 육가로 변장 했다. 육가는 분명 심아진이 만들어 낸 인격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육가는 진소백의 작품이었다. 운이 좋은 것은 밖을 지키고 있는 자들이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리라는 점이었다. 보초들에게 육가는 다만 심아진일 뿐이었으므로. 진소백은 문을 열고 사라졌다. 심아진은 여전히 누워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혈도를 짚은 진소백의 수법이 불문의 불혈 수법을 포함하고 있음과 어린 시절부터 단련된 숙달된 솜씨였음을 감안할 때 지극히 당연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밖에서는 아무런 호통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는 진소백이, 아니, 육가가 무사히 빠져 나갔음을 의미한다. 심아진의 눈에서 기광(奇光)이 일었다. 동시에 그녀의 옆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사십 정도 되어 보이는 중년인! "네가 수고가 많았구나." 그는 말과 함께 손을 들어 심아진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심아진은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벌떡 일어나며 부복했다. "총단주(總壇主)께서 지시하신 대로 행했을 뿐입니다." 중년인은 가득 미소를 띠었다.


그의 미소는 지극한 만족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얼굴은 매우 낯이 익었다. "어쨌든 그 녀석은 정말 대단하다. 오늘 내로 탈출하지 못한다면 일부러 틈을 만 들어서라도 보내 주려 했는데..."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탈출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자입니다." 심아진은 허리를 숙인 채 얼굴을 문질렀다. 그녀의 얼굴에서 역용이 떨어져 나가며 원래의 얼굴이 드러났다. 진소백이 보았던 심아진의 얼굴은 결코 본모습이 아니었다. "네 수고가 너무 많았다." 여인은 송구한 듯 대답했다. "별말씀을. 하지만... 진소백의 처리는 꼭 저에게 맡기셔야 합니다." "염려하지 말아라. 아울러 네 공이 매우 크니 곧 네 아버지가 맡았던 제오단(第五 壇)의 단주는 네가 맡게 될 것이다." 여인의 눈에 놀람의 빛이 어렸다. 그녀는 지금 제오단을 맡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제오단의 단주가 된다면 그는 어찌 되는가? 숙청(肅淸)이란 단어가 뇌리에 떠올랐지만 심아진은 그것을 함부로 입 밖에 낼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녀의 몸이 스르르 사라졌다. 진소백에게 보였던 무공도 결코 심아진의 원래 실력이 아니었음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심화절은 평생을 독신(獨身)으로 살았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인연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니, 그에게 딸이 있음을 인정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왜 하필이면 심화절의 딸마저도 진소백과 맞선단 말인가?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 중년인이 혼자 서 있었다. 그의 눈은 매우 차가웠다. 또한 전신에서 올라오는 기운도 점점 차가워져 종내는 어두운 감옥 전체를 얼려 버릴 정도였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더욱 차가웠다. "진소백, 넌 대단한 적수(敵手)지만 아직은 어리다. 어쨌든 이미 팔의 혈맥이 파괴 되었으니 무공을 회복하기 어려우리라."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초의를 만난다면 팔을 치료할 수도 있겠지만..." 청의인을 입을 뚫고 나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후후! 네가 초의를 만나는 순간 초의는 죽는다. 이미 네 종적을 추적하기 위한 천 라지망은 완성이 되어 있다. 넌 다만 초의(草衣)의 행적을 찾기 위한 미끼에 지나 지 않는다. 우하하하..." 웃음 소리가 커졌다. 소리가 커질수록 그에 실린 비릿한 기운 또한 강해졌다. 그 기운은 다름 아닌 야망의 기운! 중년인은 도대체 누구인가? 2 육가(陸家)는 길을 서둘렀다. 그의 팔은 이미 망가졌지만 두 발만은 여전히 생생했 다.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이 어디겠는가?


망가진 팔 관절을 고칠 수 있는 곳. 아니, 고칠 사람이 살고 있는 곳! 진소백의 목 적지는 황산(黃山) 아래에 있는 작은 목옥이었다. 그곳에는 초의 선사가 살고 계시니. 그의 뇌리에는 초의 선사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를 따르는 검은 그림자는 도처에 포진(布陣)하며 그의 위치를 어디론가 연락하 고 있으니... 전력을 다해 달려가는 진소백! 너는 이 사실을 알고나 있는 것이냐? * * * '천외성의 터에서 잡혀 마차를 타고 한참 달렸다고 생각했었는데...' 보지 못했다면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차에 태워져 잡혀간 곳이 같은 태산(泰山)인 데다가, 원래 위치에서 삼사 리 정 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니. 이틀을 이동했던 것은 위치를 속이기 위한 함정에 지나지 않았는가? 쉬지 않고 달 리면서도 진소백은 자신이 이처럼 비참한 지경에 빠진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너무 자만(自慢)했을까? 팔에서 전해지는 고통보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반성의 감정(感情)이 더 강했다. 닷새를 꼬박 굶은 위장이 보내는 신호도 만만치 않았다. 잠시 쉬며 음식을 밀어 넣고 싶은 유혹! 아니, 차라리 이대로 주저앉아 영원히 잠들어 버리고 싶은 유혹을 이겨 내기가 결 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쉴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늦어진다면 적들이 추적해 올 것이다. 그들에게 추적당해 황산의 단심평(丹心坪)이 드러난다면 큰일이었다. 심아진은 심화절의 딸이었고 심화절은 풍림서의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그녀는 풍 림서에 속할 것이다. 작전명 용선풍(龍旋風)에 의해 마각(馬脚)이 드러난 풍림서는 어디론가 잠적했다가 이제 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이미 용선풍이 단심맹에 의해 주도된 것임을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당연히 이를 갈고 있으리라. 이런 상황에 단심평이 드러난다면... '매우 위험하다.' 진소백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두 분을 생각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신법을 배가(倍加)했다. 흡사 바람이리라. 닷새를 굶은 데다가 내공조차 삼분지 일에 불과한 청년의 신법이 이처럼 빠르다 면 누가 믿겠는가? 그러나 이토록 빠른 경공 소유자의 뒤를 소리도 없이 뒤쫓는 자들이 있음을 믿을 사람은 더욱 드물 것이다. * * * <벽령(璧靈) 삼호 전! 진소백은 계속 남하 중! 결사적인 빠르기라 뒤따르기가 무척 힘이 듦! 남쪽 감시망의 인원을 충원함이 좋을 듯.> <벽령(璧靈) 십사호 전! 진소백의 목적���는 황산임이 거의 확실함.


극도로 지쳐 보이는 상황이지만 속력은 여전. 황산 주위에 더욱 인원을 늘려 주시길.> 끊임없이 날아오는 전서구가 전하는 소식은 모두 진소백에 관한 것이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진소백은 이들의 추적을 피할 수 없었다. 속도로 따라가지 못한다면 넓은 지역에 많은 인원을 풀어 미리 기다리도록 하면 된다. 하지만 누가 이렇게 많은 인원을 한 번에 동원할 수 있는가? 또한 풍부한 경험이 없다면 어떻게 엄청난 인원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 계속해서 들어오는 전신을 예리한 눈으로 훑어보는 중년인! 그는 이런 일들을 무척이나 오래 했었다. 그 와중에 얻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포섭한 수많은 탐객까지도 자신의 편으 로 만들어 새로이 엮은 조직! 벽령안(璧靈眼)의 첫 번째 임무 수행은 무척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중년인은 나직한 명령을 내렸다. "황산으로 그 근처의 무력을 총동원하라. 가능하다면 화기(火器)도 많이 가지고 가 도록. 상대해야 할 자가 천하제일인 초의(草衣)임을 명심하거라." 그의 말은 비록 낮았지만 수하들의 반응은 지극히 빠르고 엄격했다. "존명!" 어디선가 복명 소리가 들리고 부산한 움직임이 일었다. 수많은 전서구가 황산 주위로 날아가리라. 중년인은 푹신한 가죽의자에 깊숙이 기대며 미소했다. "이번 일에 본 풍림서(風林誓) 전체 전력(戰力)의 삼분지 일이 동원된다. 제아무리 초의(草衣)라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그의 눈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초의와 그가 만든 암중 대항(對抗) 세력(勢力)만 분쇄한다면 아무도 우리 풍림서 가 천하를 장악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없다. 크하하하!" 아무도 방해가 되지 못한다! 그의 자신에 찬 말투를 뒤이어 실내는 어두워졌다. 그가 기댄 가죽의자가 바닥을 뚫고 내려앉았다. 의자는 기관에 의해 어디론가 운반된다. 의자 위에 앉은 중년인 역시 같이 이동하는 것이다. 도대체 어디로? * * * 단심평! 겉으로 보아서는 농사꾼이 모여 사는 곳인 듯한 목옥이 사실은 단심맹의 주요 인 물이 모두 모인 총단임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 별로 없었다. 진소백의 신형은 모래먼지를 위로 피워올리며 쏜살같이 목옥을 향해 달렸다. 모래가 많이 솟아오름은 그가 많이 지쳤다는 증거! 그럼에도 속도가 대단함은 극 도(極度)의 무리를 행한다는 의미(意味)였다. 목옥이 가까워지자 그는 최후의 힘을 짜낸 듯, 지친 와중에도 속력만은 더욱 빨라 졌다.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는 데에서 오는 안도인가? 빨라진 신형에 반해 흔들림도 더욱 커진 것은. 단심평에서 삼백여 장 이상 떨어진 언덕! 일단의 벽의인(碧衣人)들이 서 있었다.


그 중 앞에 선 자의 안력은 매우 뛰어난 듯 까마득히 보이는 목옥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야효(夜梟)가 그의 별호였으니 당연히 눈은 좋으리라. 그의 눈은 삼백여 장을 격하여 진소백의 모습을 쫓았다. 진소백이 목옥에 겨우 당도한 뒤 비틀거리다 쓰러지고, 목옥의 문이 열리며 한 사 람이 나와 진소백을 데리고 들어간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푸른 풀빛 옷에 맨발이다. 게다가 그의 머리는... 틀림없다. 틀림없이 초의다!" 야효의 확인이 떨어지자마자 동경(銅鏡)을 이용한 은밀한 통신이 황산 주위로 퍼 져 나갔다. 빛이 어지럽게 반사되며 서로의 뜻을 전했다. 더불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무사들이 황산 주위, 정확히 말한다면 단심평 주 위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모두 완전 무장을 하였으며 얼굴에는 결전의 의지가 역력하다는 것! 황산의 단심 평! 진소백은 마침내 도착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혼자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뒤를 따라온 무수히 많은 벽령안(璧靈眼)의 고수들도 함께 도착했다. 게다가 어디에서 동원된 것인지 알 수 없는 무인들도 계속해서 황산으로 몰려들었 다. 저마다 나름대로 모습을 숨겼지만 황산을 자욱이 감싸는 죽음의 기운은 시간이 갈 수록 점점 짙어졌다. "언제까지 기다리는 겁니까?" 벽령(璧靈) 칠호가 야효에게 물었다. 야효의 신분은 벽령 일호로서 영주급을 제외하고는 여기서 가장 높으니 그의 의견 을 구함이다. 야효가 머리를 저었다. "나라고 알 리 없지 않은가? 다만 위의 명령을 기다릴 뿐이네. 신호는 푸른 폭죽 으로 되어 있으니..." 칠호는 고개를 끄덕이다 뒤편에서 다섯 명의 절정고수가 경공을 전개해 다가옴을 보았다. 저러한 고수라면 당연히 영주급 이상의 인물일 것이다. 야효가 중얼거렸다. "제사영주님과 오영주님! 맙소사, 저분은 삼(三) 기(旗) 중 하나인 군림기(君臨旗) 의 대장이구나. 오늘 얼마나 많은 고수가 동원된단 말인가?" 그의 말이 시사하는 바는 하나였다. 황산 주위에 모이는 고수들의 면모가 대단하다는 것! 다시 말하면 오늘 단심평에 닥칠 위기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 * * <제이영주 혼령(魂令) 전(傳)! 진소백 목적지에 도착. 목옥(木屋)에서 나와 진소백을 데리고 들어간 인물은 초의가 분명한 듯. 다섯 겹의 포위망과 삼중의 공격망 배치 완료. 명령을 기다립니다.>


중년인의 입가에 감도는 미소는 만족의 기운이 가득했다. "마침내 초의의 종적을 찾았구나. 그는 결코 오늘의 포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 다." 혼령주(魂令主) 최혼은 오늘 단심평의 공격을 지휘하는 자였다. 그가 기다린다는 명령은 당연히 공격 명령이었다. 남은 일은 중년인의 결심, 공격 시간 결정뿐이었다. 그는 열흘 밤낮을 쫓은 사냥감을 마침내 사살하는 사냥꾼의 느긋한 심정이 되었 다. 이윽고 그는 명령을 내렸다. "불꽃을 올려라. 폭죽(爆竹)이 오랜 기간의 인내(忍耐)를 축복하도록! 으하하하!" 벽령호(璧靈號)들에게 전해지는 명령은 한결같았다. 전원 공격! 그가 승리를 예감하며 이처럼 웃고 있건만 초의 선사와 진소백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주변에는 벽령안(璧靈眼)이란 집단의 고수들인 벽령호(璧靈號)들이 몰려드 는데, 단심평의 목옥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바깥에서 벌어지는 이런 위기를 알고는 있는 것인지? 3 '젠장, 이게 뭐야. 체면 구겨지게.' 전응삼(全應三)은 소리내어 말하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쉬지 않고 투덜거렸다. 그가 숨어 있는 곳은 항주에 위치한 수호방(水湖幇)의 정문이 잘 내려다보이는 나 무 위였다. '사내가 처음 맡은 임무가 이렇게 숨어서 남이나 감시하는 것이라니... 나, 참!' 전 응삼은 이름 탓에 어린 시절 매우 놀림을 받았었다. 워낙 정력(精力)이 약했던 그의 아버지는 한 번도 여자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지나가던 도사로부터 배운 구결 하나! 집안의 돈을 싹싹 긁어 모아 바친 대가로 방중술에 대한 구결을 하나 얻고 난 뒤, 그는 달라졌다. 남성으로서 자신감을 회복한 전응삼의 아버지는 당장 부인에게 달려갔으니. 태어나 최초로 하룻밤새 부인을 세 번이나 절정에 다다르게 했던 그는 태어난 자 식에게 자신의 위업(?)을 기념할 이름을 지어 주었다. 세 번 응한다는 뜻을 가진 전응삼(全應三)이란 이름은 그렇게 태어났던 것이다. 해서 어린 시절부터 놀림에 익숙해졌었는데... 전응삼의 인생은 그가 열네 살 되던 해 급격히 바뀌었다. 약간 늦었지만 백도의 거파, 화산에 입문한 것이다. 그 뒤, 그를 놀렸던 친구들은 모두가 사라지고 오직 그를 존경하는 친구들만 그의 주위에 남았다. 대화산파의 제자를 놀릴 간담을 가진 자는 없었다. 주위에 일어난 변화! 항상 자신이 화산의 제자임을 자랑스러워했던 전응삼은 오늘 아침 장문인을 대행 하고 있는 매일도의 부름을 받았다. 화산에 입문하고 처음으로 맡겨진 임무. 그런데 이런 졸렬한 임무라니! 수호방 정도의 방파에 하루에 몇 명의 사람이 언제 들락거리든, 그게 화산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전응삼은 툴툴거리면서 지금 수호방의 밖으로 나가는 열두 명을 기록했다. 수호방의 이름에 비해서는 오늘밤에 출입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자식들, 노름이라도 하나? 계속 들락거리는구먼. 숫자도 꽤 되고 말이야.' 혼자 킥 킥거리던 그는 그만 균형을 잃고 말았다. 몸을 지탱하던 나뭇가지가 툭 부러지며 전응삼의 몸을 땅에 떨어뜨렸다. 순간 사방에서 서너 명의 수호방 무사들이 달려왔다. 정문의 나무 위에서 떨어진 자를 잡기 위함. "누구냐?" 그들의 날카로운 외침에 전응삼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안녕들 하시오. 난 전응삼이라고 하오만..." 말하면서도 그는 생각했다. '젠장, 또 웃겠군.'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들은 웃지 않았다. 특별히 예의가 바른 것이 아니었다. 살인할 때 웃는 사람은 그다지 없었던 까닭이었다. 상대의 검이 목젖에 꽂혔을 때, 전응삼은 비로소 매일도가 했던 말의 의미를 이해 했다. -혹시 다른 이목을 조심하여 너를 보내지만, 부디 조심하거라. 이 일은 매우 중대 한 것이니. 하지만 전응삼은 경솔했고, 실수를 저질렀다. 실수의 대가는 죽음이었다. 인생의 실수는 때로는 만회할 수 있지만 어떤 경우의 실수는 치명적이다. 그리고 무사의 실수는 결코 만회할 수가 없는 편에 속했다. 오로지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이 일은 물론 청의인에게 보고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급한 보고가 너무나 많은 시기. 당연히 전응삼이란 멍청한 화산 제자에 대한 보고는 뒤로 미루어졌다. 전응삼은 원래부터 주목(注目)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어쨌든 알아 두길 바란다. 때로 실수의 대가는 오로지 죽음뿐이라는 것을. * * * 꽈광! 천둥 소리가 났지만 번개는 치지 않았다. 대신 푸른빛의 아름다운 폭죽이 어두운 밤을 수놓았다. 폭죽이 지금 부르고 있는 것은 즐거운 환호성이 아니었다. 죽음과 피! 폭죽의 의미를 따라 혼령주(魂令主) 최혼(崔渾)은 가장 먼저 폭우시(暴雨矢)의 시 위를 놓았다. 지금 공격을 지휘하는 사람이 최혼이니, 그가 쏘아 낸 폭뢰시를 따라 수많은 화기 와 폭약이 허공을 가름은 정한 이치! 사방에서 날아온 화기가 거의 동시에 폭발하는 소리는 하루 종일 칠 천둥이 한 번 에 모여 터지는 듯했다. 꽈드드! 불과 연기가 돌가루와 함께 솟았다.


목옥은 순식간에 가루로 화했다. 최혼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작전은 정말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은 무인(武人)이었지, 병사(兵士)가 아니었다. 화약을 사용하는 때는 국가간의 전쟁으로 족했다. 무인은 실력으로 겨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명령은 명령! 스스로의 의견이 용납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아무리 못마땅해도 묵묵히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따다닥! 나무가 타오르는 소리는 마치 무인들이 검을 부딪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과 같았다. 화탄으로 인한 불은 오래 타오르지 않았다. 최혼은 앞장서서 불길이 잡히는 단심평으로 다가갔다. 연기의 양이 급격히 줄어들자 시야가 점점 넓어졌다. '비명도 없었고, 시체조차 없다니... 모두 산산조각났는가? 아니면...?' 그의 의문은 당연했다. 만일 초의 선사의 무리들이 이처럼 맥없이 당한다면 왜 자신까지 동원되어 이처럼 치사한 방법을 사용했겠는가? 아니나다를까! 불길 사이를 훑어보던 최혼의 눈이 빛났다. 불길 사이! 돌로 된 큰 문이 놓여 있음이 보였다. 바닥에 붙어 있으니 문이라 부르기는 어색했다. 어디로 통하는 비밀 출입구인가? 최혼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아도 이런 나무집 하나 믿고 근거지를 마련하지는 않았으리 라. 내심 화탄의 사용이 마음에 걸렸던 그는 앞장서서 바닥에 놓인 돌문을 들었다. 끼익! 검게 입을 벌린 지하로의 통로. 위험이 도사리겠지만, 무인의 마음은 편하리라. 혼령주 최혼의 뒤를 사령주와 오령주가 따르고, 군림기 대장마저 안으로 들어갔다. 많은 고수들도 그들의 뒤를 쫓았다. 검은빛의 옷으로 통일한 군림기의 고수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주위를 경계 했다. 지하 통로! 무엇이 있을 것이며, 진소백과 초의 선사는 어찌 되었는가? * * * 읽어야 할 전신이 산더미 같은 하루였다. 초의 선사를 상대하는 일이 어찌 쉬울까? 그 와중에 급하지도 않는 보고서(報告書)들을 일일이 읽을 여유는 없었다. 중년인이 수호방(水湖幇)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집어 든 것은 공격 명령을 내리고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를 찾은 뒤였다. <전응삼이란 자가 수호방을 감시하다 붙잡힘.


화산의 제자로 알려짐. 즉시 척살했으며 흔적은 지워졌음. 수호방 벽령 백삼십호 전.> 내용은 별게 아니었다. 화산파의 제자 하나가 수호방을 얼씬거렸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명문의 제자답지 않게 멍청하기도 했던 모양. 그런데 왜 하필 화산(華山)일까? 화산! 구파 중 사 개 파는 단심맹의 수작으로 인해 중요 첩자가 모두 제거된 상태였다. 화산은 그나마 장문인인 화산검성에게 중상을 입혀 안심하던 문파였는데... 청의인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른 보고서를 열심히 뒤졌다. 있었다. 몇몇의 풍림서 산하 문파에서도 소림이나 아미, 무당의 제자들이 염탐하다 잡혔다 는 보고가 올라와 있었다. 하나하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에 늦어졌던 보고! 그러나 모아 놓은 정보의 중 요성은 조각과는 다른 의미를 가졌다. 왜 하필 첩자가 제거된 사 파의 제자들인가? 게다가 무공이 떨어지는 자들까지 동원된 이유는? 아마 되도록 많은 제자를 동원했던 까닭이리라. 많은 제자라... 되도록 많은 제자! 그는 문득 진소백을 쫓기 위해 그가 동원했던 엄청난 인원에 생각이 미쳤다. '감시(監視)다. 무작위로 넓은 지역을 감시하기 위한!' 청의인은 심장이 마구 뛰는 것을 느꼈다. 대규모의 감시는 언제 쓰는가? 무슨 동향을 잡기 위한 것일지 청의인은 짐작할 수 있었다. 붉은빛의 지급(至急) 전신이 들어온 것은 그때! 지금 들어올 지급 전신은 단심평에 관한 것밖에 없었다. <지하 통로 발견! 혼령주 이하 사령주, 오령주와 군림기 대장 통로로 진입! 군림기 기수(旗手)들은 주위를 경계하고 있음. 추가 하명을 기다림. 칠령주 배상(拜上).> 중년인은 손을 떨었다. 입을 비집고 나오는 말조차 떨려 나왔다. "돌아오라 이르 라. 돌아오라고." 혼잣말인 듯 중얼거리던 그의 외침이 곧바로 온 건물을 울릴 듯 커졌다. "들어가서는 안 된다. 돌아오라 이르라. 어서!" 많은 고수들이 날았다. 중년인의 말에 복명하는 고수들! 명을 전달하러 분분히 사라지는 모습이 오늘따라 중년인의 눈에는 더없이 느리게 보였다. "준비해라! 내가 직접 갈 테니! 어서 서두르란 말이다." 경공을 이용해 최대한 달린다면 두 시진 이내에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정보를 늦게 보고한 자들의 징계(徵戒)는 그 이후의 문제! 그는 황산의 일 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는 중년인 하나가 있었다. 얼마 전까지 그의 얼굴에 가득했던 득의(得意)의 빛은 지금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은 오직 초조와 불안뿐! 시간을 다투는 일인지라 말조차 타지 않고 달려가는 그의 심중은 지금 어떠할까? ♡ 제 5 장 이어지는 계략! 결과는 어떠한가? 1 그림자는 길게 바닥을 기었다. 횃불이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그림자는, 긴장한 최혼에게는 적이 습격하려는 자 세처럼 보이기도 했다. 통로는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릎걸음으로 겨우 지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일어서서 걸을 수도 있었 다. 하지만 최혼은 걷는 속도를 빨리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상대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신승 초의! 게다가 단심맹에는 매우 뛰어난 모사(謀士)가 있음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 아닌가? 본거지 아래 인공 통로를 만들었다면 분명 곳곳에 기관을 설치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일! 꽤 걸어왔는데도 기관이 발동하는 기미는 전혀 없었다. 뒤를 따르는 네 명의 수뇌 인물 중 성미가 급한 군림기 대장이 불평을 하기 시작 했다. "적들은 피하기 급급했을 것이니, 별다른 방어 수단을 강구하지 못했을 것이오. 너 무 조심스러운 것 아닙니까?" 최혼의 신중(愼重)함이 소심(小心)으로 보이는 모양! 사령주(四令主)와 오령주(五令 主)도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로는 답답해 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최혼이 그들을 타일렀다. "자중(自重)하라.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이 누구임을 잊었는가? 오십 년 전 단신으 로 혈왕교의 잔당과 상대했던 천하제일의 고수가 아닌가?" 그의 말은 옳았지만 곧 효력을 상실했다. 계속해서 굽이지며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하는 통로. 긴장은 있었지만 위험은 없는 긴 시간은 곧 사령주와 오령주의 권태를 불렀다. 성질이 급한 군림기(君臨旗) 대장(大將)은 이보다 심했다. "내가 앞질러 가보겠소. 너무 신중한 것은 적들에게 숨돌릴 여유를 줄 수도 있지 않겠소?" 한편으로는 일리도 있는 소리였기에 최혼은 군림기 대장의 의견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군림기 대장이 경공을 전개하며 빠른 속도로 앞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최혼은 뒤를 돌아보았다. "수하들은 얼마나 안으로 들어왔는가?" 사령주가 대답했다. "황산(黃山)에 온 사백팔십삼 명 중에서 주위의 경계를 위한 이백여 명을 제외한


전원이 들어왔습니다." 최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좁아 보였던 통로는 점차 넓어지고 있었고, 거의 두 시진 가까이 걸어 들 어왔는데 길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이 정도면 절대 인간이 만든 곳은 아니다. 아마 천연적으로 형성된 지하 지형에 약간의 손질을 가한 곳이리라." 어쨌든 기관이 없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수하들은 하나도 희생될 일이 없으리라. 또다시 통로가 우상 방향으로 굽었다. 마치 미로(迷路) 같은 곳. 어찌나 많이 돌았는지 방향조차 찾기 어려웠다. 이때였다. 멀리서 소리가 메아리치며 들려 온 것은. 처음엔 벽면을 따라 울려서 알아듣지 못했다가 두 번째 가서야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서둘러 오시오!" 고함의 임자가 누군지를 알아챈 사령주가 말했다. "군림기(君臨旗) 대장의 목소리입니다. 뭔가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최혼이 고개를 끄덕이고 신형을 날렸다. 군림기 대장이 먼저 갔으니 위험은 없을 것 아닌가? 경신술을 아낄 이유가 없었 다. * * * 통로가 끝나고 넓은 공터가 드러났다. 지하에 이처럼 넓은 공간이 있다니, 다시 한 번 자연의 경이로움이 느껴지는 순간 이 아닌가? 인위적인 조작이 가해진 듯 보이는 물건은 중앙에 놓인 나무탁자밖에 없었다. "사람이 머문 흔적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군림기 대장은 나름대로 수색(搜索)을 이미 끝낸 듯, 확신을 갖고 말했다. 최혼은 중앙의 나무탁자로 다가섰다. 매우 넓어 어른 대여섯 정도는 올라가 설 수도 있어 보였다. 그 표면에 이상한 무늬가 있음을 최혼은 비로소 보았다. 그가 말없이 한참을 탁자 표면을 주시하자 사령주가 다가와 물었다. "뭘 그리 유심히 보십니까?" 사령주는 최혼의 손길을 따라 무늬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것은...?" 그가 기관이나 토목지학에 약간의 재주가 있음을 아는 최혼은 기대를 갖고 물었 다. "뭔지 알겠나? 무슨 뜻이 있는가?" 잠시 생각하던 사령주는 자신없는 어조(語調)로 무늬 중앙부를 가리켰다. 달팽이의 집 모양으로 나선형을 이루며 서로 중복되면서 돌아 중앙으로 모이는 삼 색의 무늬! "확신은 없지만 홍색(紅色)의 선(線)이 통로의 모양을 나타내는 것 같 습니다. 나타난 대로라면 특별한 기관은 없는 것 같군요. 아니, 그런데... 이런!" "무슨 특이한 점이 있는가?" 사령주가 얼굴이 하얗게 되어 대답했다. "이 모양대로라면 우리는 넓은 광장을 돌고 돌아 중앙으로 모인 셈입니다."


최혼이 재촉했다. "무슨 뜻인가? 자세히 말하라." "다시 말해 뒤를 따르는 수하들이 한곳에 모인 채 빙빙 돌고 있는 형세란 말입니 다." 최혼은 알아들었다. 길게 늘어서서 적을 쫓고 있다고 느꼈던 자신들이 실상은 둥글게 한 곳에 모여 있 었던 것이다. 통로의 형태가 절묘해 들어온 자는 방향 감각을 잃게 되니 자신들은 느끼지 못했 을 뿐! 이런 모양이라면 공격을 받았을 때 대응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단심맹에서 자신들이 처음 했던 대로 화탄을 이용한다면, 한군데로 모인 자신들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수하들에게 빨리 물러나라고 전달하라. 어서!" 최혼이 급하게 외치자 사령주는 고개를 흔들며 홍선을 따라 손을 놀렸다. "이 모양을 보십시오. 우리가 처음 들어왔던 입구가 좁은 것도 역시 계산된 것이 었음이 분명합니다." 그의 손을 따라가 본 최혼은 왜 사령주가 고개를 흔드는지 알았다. 입구와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은 거리상으로는 멀지 않았지만 명령이 전달되려면 긴 선을 따라서만 가능했다. 게다가 좁은 입구로는 한 명씩 나가야만 하니... "함정이로구나. 역(逆)으로 우리가 당한 셈인가?" 최혼이 중얼거릴 때, 사령주가 손으로 탁자 위 어느 곳을 눌렀나 보다. 기이잉! 탁자의 중앙이 서서히 열리며 작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속에 얌전히 앉아 있는 것은 붉은색으로 '단심(丹心)'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 게 쓰여진 서찰 봉투! 최혼은 겉봉에 적힌 글씨를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풍림서 황산 지서(支誓)의 책임자는 보라.> 지금 황산 근처를 책임지는 사람은 분명히 최혼이었다. 서찰은 그에게 보내진 것이었다. * * * 단심평의 주위는 지금 정체 불명의 고수들로 덮여 있었다. 그들을 지휘하는 자는 벽령안(璧靈眼)의 칠령주(七令主)였다. "사방을 철저히 관찰하라. 숨어들었던 적들이 어디에 비밀 출구를 만들어 두었을 지 모르니." 그는 너구리 사냥을 하는 기분이었다. 모르면 몰라도 처음의 화탄 공격에 적들이 부상을 입었을 거라고 그는 믿었다. 지하 통로로 도망간 모양이지만 사령주와 오령주, 군림기 대장, 게다가 이령주마저 쫓아갔으니 틀림없이 적들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임무는 쫓긴 적들이 굴 속에서 도망나오면 처치하는 '연기 때문에 굴 속에 서 뛰쳐 나오는 너구리를 사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크크크!' 칠령주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웃었다. 그러나, 때때로 너무 영리한 너구리를 쫓다 보면 사냥꾼이 낭패를 당하는 수도 있는 것이 세상사였다. 첫 번째 보고는 남쪽에 대해서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단의 고수들이 다가옵니다. 눈빛과 경공으로 보아 대단한 고수들입니다. 어찌하올지? 싸우게 된다면 남쪽 경계를 맡은 저희 삼십 명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벽령 제사십삼호 배상(拜上).> 곧 이어 같은 의미의 보고가 동시에 서쪽과 동쪽, 그리고 북쪽에서도 들어왔다. 모두가 뛰어난 고수들이 나타났음과 자신들의 현재 전력으로는 맞서 싸우기 힘듦 을 보고했다. '어떡하지?' 칠령주는 갈등했다. 사방(四方)의 인원으로 막을 수 없다면 중앙에 남은 팔십여 명을 이십 명씩 나누 어 증원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하나 그리 된다면 지하로 들어간 무사들의 뒤는 누가 받쳐 줄까? 아니, 우선은 사 방에서 다가오는 고수들이 어떤 세력인지도 모르지 않는가? 칠령주는 명령받는 일 에 익숙한 자였다. 순간적으로 그는 선택을 망설였다. 그러나 결론은 이미 나 있음과 다름없었다. 단심평 안으로 다가오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막는 것이 그의 임무였으므로. "막아라. 우선은 정중한 말로써 막아 보되, 안 된다면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말로써 우선 막아 보라!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가오는 자들의 목표는 애초부터 단심평으로 진입하는 것! 아니, 어쩌면 풍림서와 싸우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방에서 몰려온 네 개의 세력! 그들은 누구인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단심평에서 두어 리 떨어진 곳에 청의인의 천응이 내려앉은 순간은 바로 이때였 다. 칠령주가 이끄는 풍림서의 힘과 갑자기 나타난 네 개의 힘이 격돌하려는 일촉즉발 의 상황. 청의인은 땅에 내리자마자 전력을 다해 달렸다. 그가 향하는 방향도 단심평이었다. 2 "뉘신지는 모르나 본 파의 사정이 있어 이 길을 잠시 폐쇄했으니, 부디 양해하시 오." 서쪽의 감시망을 맡고 있는 벽령(璧靈) 삼십삼호가 예를 다해 말했다. 다가오는 삼십여 명의 인원은 모두 신분을 알 수 없는 검은 무복을 걸치고 있었 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앞에 선 사람이 냉소했다. 그의 냉소에는 분노가 은근히 녹아 있었다. "흥! 무슨 사정? 네놈들이 속한 문파가 풍림서(風林誓)란 이단(異端)의 곳이냐?" 이미 풍림서란 이름을 알고 있는 데다가 말투조차 퉁명했다. 벽령(璧靈) 삼십삼호는 불안을 느꼈다. 이들은 애초부터 어떤 목적을 갖고 다가왔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싸움은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선공(先攻)하는 것이 병법의 기본! 평소에 받았던 교육 (敎育)대로 삼십삼호는 눈짓으로 공격을 지시했다. 나타난 검은 무복들과 자신들의 인원이 비슷했으니 일 대 일로 선공을 한다면 물 리칠 가능성도 있었다. 풍림서의 삼십 명 인원은 검은 무복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서서히 이동했다. 싸움에 앞서 되도록 유리한 위치를 잡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삼십삼호가 공격 신호를 막 내리려는 순간, 맨 앞의 검은 무복이 날벼락처럼 그에 게 달려들 줄 누가 알았겠는가? 동시에 검은 무복들이 사방으로 꽃이 피듯 날아오르며 풍림서의 벽령호(璧靈號)들 을 덮쳐 왔다. 각기 한 명씩의 벽령호를 맡기로 미리 정한 듯 검은 무복들의 공격은 절도가 있었 다. 절도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경풍(勁風)! 검은 무복들은 삼십삼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고수들이었다. "빌어먹을, 오히려 선공당하다니!" 다급하게 외치며 적의 공격을 막아 가는 삼십삼호! 놀랍게도 그의 손에서 발출된 무공은 구파의 절학이었다. 기이한 모양으로 말린 손이 상당히 효과적으로 자신의 공격을 막아 감을 본 검은 무복은 놀라 외쳤다. "금정산수(金頂散手)! 변화되기는 했지만 아미의 절학이 틀림없다. 네놈들의 진정 한 정체는 무엇이냐?" 그의 손에서 일어나는 장력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며 삼십삼호의 변화된 금정산수 를 압박해 갔다. 비록 삼십삼호의 수련이 깊지는 않으나 금정산수는 구파의 절학이었다. 그런데도 이처럼 쉽게 밀린다는 의미는? 검은 무복의 손에서 은은한 비단폭 같은 강기( 氣)가 일어남을 본 삼십삼호는 놀 라 손이 어지러워졌다. "대라강기(大羅 氣)로구나! 무당삼자(武當三子) 중의 하나인가?" 비단이 자신을 감싸는 듯한 환상을 피해 삼십삼호의 발이 땅에서 미끄러졌다. 검은 무복이 신음했다. "암향표(暗香飄)! 네놈들이 본 파의 무공마저 알고 있다니." 그의 신음은 나직했지만 손속은 오히려 무서워졌다. 휘두르는 일진자(一塵子)의 손을 따라 대라강기가 극성으로 일어나며 삼십삼호의 전신을 감쌌다. '오 성에 불과한 암향표로 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삼십삼호가 이처럼 생각 한 순간, 그는 등이 뜨끔함을 느끼며 제압당했다. 단 삼 초 만에 수뇌가 제압당함을 본 벽령호들의 손속이 어지러워졌다. 아직까지 중앙에서 가만히 서 있던 검은 무복, 우두머리로 보이는 그의 입이 비로 소 열렸다. "제자들은 가능하면 혈도를 제압하라. 그러나 반항한다면 오늘만은 살인(殺人)도 허(許)한다."


그의 전신에 은은히 어리는 노을빛! 무당의 장문인만이 익힌다는 자하강기(紫霞 氣)가 아닌가? "무당의 무엽(無葉) 진 인(眞人)이다." 그를 알아본 벽령호(璧靈號) 몇몇이 검을 던지며 투항했다. 무당의 힘과 전통! 삼십여 명의 벽령호들이 반항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벽령호들을 사로잡은 무엽 진인이 침중히 말했다. "일회자(一回子)를 반도로 포섭했고, 이런 동원 능력을 보이는 풍림서! 게다가 그 들이 펼치는 무공은..." 그의 말을 일진자가 받았다. "틀림없이 구파의 무학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풍림서가 그들과 관련이 있음을 의 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엽 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이 말한 '그들'은 누구를 뜻하는가? * * * <난 진소백이오. 날 쫓아오느라 수고가 무척 많으셨소. 별도의 여유를 주어서 당신들이 머리 쓸 여유를 주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힘이 들 었소. 난 최선을 다해 달렸으니, 당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은 나보다 앞서서 황산 근처에 상주하는 세력뿐이겠지. 아마 당신은 그 중 수뇌에 해당할 것이오. 황산 일대에 존재하는 풍림서의 세력 중에서 당신의 신분이 가장 높겠지. 현재로는 당신이 누군지 내가 알 길이 없으나 이 서찰을 당신이 보는 순간에는 이 미 알게 될 거요. 개방의 전력(全力)과 소림, 무당 등의 사 파의 힘이 모두 동원(動員)되었소. 이 일대의 무림 방파라면 대소를 가리지 않고 감���하에 들어갔으니 날 노리기 위 해 움직인 문파들은 모두 풍림서의 주구 세력으로 규정될 것이오. 이 계획(計劃)은 나 자신에게 매우 큰 위험이 따르는 것이라 많은 반대가 있었소. 하지만 내가 굳이 위험을 무릅쓴 뜻은 당신들의 세력이 너무 깊이 숨어 있어 세상 에 드러내기 어려움을 느낀 까닭이오. 날 쫓기 위해 연락을 취하는 와중에서 당신들의 연락망도 어느 정도 드러났으니, 이번 부딪침의 끝도 우리의 승리로 끝났음을 부디 믿어 주시오. 당신은 이 서찰을 보는 즉시 통로를 돌아 나오시오. 밖에는 아마 사 파의 고수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명심할 사항은 스스로 무공을 금제하지 않는 자들은 즉시 제거될 것이란 점이오. 입구는 매우 좁으니 한 번에 한 명밖에는 나오지 못할 게요. 어리석은 생각은 접어 두는 게 좋소. 또한 지하 통로는 두 시진 후면 폭발하게 되니, 그 속에서 망설이다 헛된 죽음을 당하는 일이 부디 없기를. 난 두 팔을 희생하며 이 계획을 성사시켰으니 당신들도 큰 불만은 없으리라 믿 소.> * * * 푸르면서도 흰 묘한 기운. 역근(易筋)의 묘용이 있는 불문의 요상술(療傷術)이 시전되면서 초의의 온몸에서 일어나는 기운이었다.


전신을 감싸 도는 진기의 흐름은 초의 선사의 무공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기운이 두 팔로 흘러 들어오자 진소백은 고통에 눈썹을 떨었다. 상처를 낫게 하는 기운은 극도의 고통을 함께 전하고 있었다. 항상 복과 화가 같이 들어오는 세상의 이치(理致)처럼. 사부가 제자를 치료하는 자리 옆에 서 있는 중년인은 진소백의 또 다른 사부였다. 제갈수! 그는 한숨을 내쉬며 진소백을 보았다. "비록 내가 세우기는 했으되 너무 위험하여 보류했는데, 이런 대담한 계획을 정말 실행에 옮기다니! 넌 이번의 일계가 실패했다면 어쩔 셈이었느냐?"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진소백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들이 제자를 그냥 죽일까 봐 걱정하셨습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제자를 살려 두었습니다. 초의 사부를 찾아가지 못할까 봐 일부러 다리는 멀쩡히 내버려뒀구요." 제갈수가 한숨을 쉬었다. "네놈보다 뒤에 계시는 신승(神僧)의 존재가 훨씬 컸던 까닭이지." 진소백이 고통에 눈을 떨면서도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좋은 사부님을 뒀으니 생명도 구하는군요." 풍림서가 진소백을 죽이지 않을 것임은 짐작한 바였다. 초의 선사를 찾을 유일한 끈이 그였으므로. 만일 앙천봉(仰天峯)에서의 종사원과의 일 이후로 계속 진소백을 노리는 흑혈산, 그곳의 살수로 보이는 자들이라면 이야기는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풍림서는 결코 진소백을 쉽게 죽이지 않을 것임을 전제로 하고 이 계획은 시작되었다. 애초부터 용선풍으로 사 파의 풍림서 첩자를 제거하고, 원한을 품은 풍림서가 꾸 밀 음모를 계산하여 그 명령선과 협조 문파를 색출하는 작업은 하나의 계획에 속 했다. 하지만 자신의 생명을 건 이런 계책은, 알아도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었다. 초의 선사의 진기(眞氣)가 강해졌다. 치료가 막바지로 접어드는 것이다. "사부들을 걱정시키고 다녔으니 혼 좀 나야겠구나!" 신승은 운기하는 와중에서도 입을 열어 천하제일인의 면모를 보이며 담담히 웃었 다. 진소백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물론 초의 선사가 고의로 고통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치료의 막바지에 당연히 나타나는 고통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더 이상은 입을 열지 못하는 진소백의 귓속으로 제갈수의 말이 들려 왔다. "사(四) 파(派)의 고수들이 집결했다. 풍림서의 중요 인물들도 많이 사로잡았다. 그 들을 문초한다면 오랜 기간 비밀로 감춰 온 풍림서의 실상이 많이 드러나리라." 제갈수의 말은 담담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매우 큰 기쁨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네가 가져 온 종도, 아니, 종사원(鐘思元)의 귀곡의서를 보고 성수의선(聖 手醫仙)께서 많은 것을 깨달으셨다. 두 분이 깨어나시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에 불 과하다." 고통 속에서도 진소백은 이 말만을 알아들었나 보다.


그의 몸이 부르르 격동함을 제갈수는 볼 수 있었다. * * * <시간에 맞추어 인원을 움직인 문파들에 관한 보고! 이하 대소 사십칠 개 문파에 서 문인들을 움직였으며, 그 중 삼 개 방파만이 황산의 일과 관련이 없는 자파의 업무로 움직였음이 확인됨! 나머지 사십사 개는 풍림서의 명령을 받아 움직였음이 확실시되며 아래에 명단을 보고 올림. 수호방(水湖幇), 독호채(獨豪寨), 수라궁(修羅宮)...> 3 최혼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지금 자신들이 지닌 무력으로는 반항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구파 중 네 개 문파의 고수가 동원되고 천하제일방 개방마저 합세한 힘은 그가 상 대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이 반항한다면 수하들 모두가 무사하지 못할 것 아니겠는가? 최혼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검을 버리고 투항하는 것!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혼은 변절(變節)하지 않았다. "날 잡았다고는 하나 내 입에서는 아무것도 듣지 못할 것이오." 이미 혈도가 제압된 최혼은 차갑게 말했다. 소림의 현공(玄空) 대사가 앞으로 나섰다. 대소림사의 당대 장문인! 지닌 바 무공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사숙인 초의 선사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는 고승(高僧)이었다. 그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잔뜩 서려 있었다. "난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 없다. 어찌 당신이 이런 일을 행한다는 말인가? 이 십 년 세월 동안 얻었던 당신의 영명(英名)이 모두 거짓이었는가?" 생사판관(生死判官) 최혼! 소림의 속가(俗家) 출신이며 당당한 정도의 원로(元老)! 무림의 악인들이 그의 이 름만 듣고도 두려움에 몸을 떤다는 무림십정(武林十正)의 일 인이었다. 그런 최혼이 오늘날 풍림서의 주구(走狗)로서 모습을 보이다니! "난 할말이 별로 없소.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풍림서가 비록 약간 변질되기는 했지만 그 뜻은 지극히 순순하다는 것, 하나뿐이오!" 최혼은 그 말을 끝으로 정말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 보아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현공 대사는 포기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이렇게 많은 자들은 모두 한 번에 잡아서 이동할 수는 없으 니..." 군웅들의 의견을 묻는 그의 말에 매일도가 나섰다. "외람되나 제가 몇 말씀 올리겠습니다." 화산옥기린(華山玉麒麟) 매일도는 이번 일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그의 신속한 연락으로 사 파는 풍림서가 암중에 초의 선사를 노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계책에 따라 황산 근처에 근거하는 풍림서의 하부 조직을 완전히 파 악할 수 있었으니... "이미 각 문파를 감시했던 제자들이 보내 온 정보에 의해 풍림서 명령 체계의 상 당 부분과 황산 주위 하부 조직의 분석은 완전히 끝났습니다."


그는 최혼을 다시 한 번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때문에 몇 명의 수뇌 인물을 제외한 나머지는 무공을 폐하여 석방함이 나을 듯합 니다. 어차피 이처럼 많은 인원을 한 번에 감시하며 움직인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아미(峨嵋)의 금정 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빈니는 동의하오. 그런데 수뇌 인물 외에 모두 풀어 준다면 그들이 다시 풍림서 에 붙어 대항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어찌하겠는가?" 매일도가 잠시 생각에 잠겼을 때, 어디선가 웅장한 장소성(長嘯聲)이 들려 왔다. 장소성(長嘯聲)은 모두 두 줄기였으며 각각 동쪽과 서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군웅들이 의아해 할 때, 이미 장소성은 지척으로 다가와 있었다. 두 명의 중년인이 양쪽에서 다가오고 있음을 군웅들은 보았다. 사(四) 파(派)의 제자들이 분분히 날아올라 두 명의 중년인을 막으려 하자, 그들을 가장 먼저 알아본 현공(玄空) 대사가 급히 제자들을 만류했다. "아미타불, 제자들은 무례(無禮)를 범하지 말라. 적이 아니다." 사 파의 고수들이 허공을 감돌며 물러나고, 달려오던 두 중년인도 거의 동시에 네 명의 장문인들 앞에 섰다. 비로소 그들을 알아본 군웅들은 반색했다. "종리단(鐘離亶) 가주께서 오셨군요." "신검(神劍) 추림(秋臨) 장주시군요." 각각 사대세가의 하나인 종리세가의 가주 종리단과 새로이 급부상한 강호의 명문 인 신검산장의 장주였던 것이다. 종리단이 포권하여 예를 갖추고 난 뒤 물었다. "근처에서 폭음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혹여 무슨 일이라도..." 추림 또한 인사하며 말했다. "저 역시 폭음을 들었습니다. 급히 달려왔는데..." 그는 말을 하다가 제압당해 있는 많은 무사와 특히 최혼을 보고서는 놀라 말했다. "최혼(崔渾), 당신이 왜 여기에..." 최혼이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자 그는 현공 대사에게 질문을 돌렸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전 도대체..." 현공은 길게 대답하지 못했다. 시간이 없었던 까닭! 일단 그는 대답을 미루어 둔 매일도를 돌아보았다. 이 일을 처음부터 추진한 사람이 그이니 그의 의견을 듣고자 했던 까닭이었다. 매일도는 깊은 눈으로 종리단과 추림을 본 후 말했다. "인원을 다섯으로 나누어 근처에 있는 정도의 거파들에 부탁함이 어떻겠는지요? 가까운 곳에 대륙오행련(大陸五行聯)의 신토부(申土府)와 이화보(離火堡)가 위치해 있으며, 신도보(神刀堡)가 있습니다." 무엽 진인이 말을 받았다. "신검산장(神劍山莊)과 종리세가(鐘離勢家)를 합한다면 모두 다섯이 있군그래. 그 러고 보니 다섯으로 나눈다는 말은 이미 모든 것을 염두에 둔 말이로군." 신검산장과 신도보는 무림십정(武林十正) 중에서도 일이 위를 다투는 신검 추림과 신도(神刀) 무일패(無壹敗)의 거처였다. 은연중에 구파의 영수 지위를 겸하는 소림의 현공 대사가 말했다. "좋습니다. 일단 우리가 데려갈 몇 명 외의 생포자는 다섯 조로 나누어서 부탁합 시다. 아미타불!"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모두의 의견이 모아진 결과였으므로. "옥기린, 자네가 조를 나누는 일을 맡아 주시겠는가?" 매일도에게 현공 대사는 생포자(生捕者)를 다섯으로 나누는 일을 부탁했다. 추림과 종리단을 보며 현공 대사가 합장하자 그 뜻을 알아들은 둘이 마주 예를 표 하며 말했다. "당연히 받아들여야죠. 그런데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무엽(無葉) 진인(眞人)이 나서서 그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 * * "저도 돕겠습니다." 아미파에서 한 사람이 생포자를 나누는 일을 돕겠다고 나섰다. 매일도는 고운 목 소리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아미옥녀(峨嵋玉女) 섭수진(攝守眞)임을 알아보고는 반 색했다. 비응방(飛鷹幇)에서의 일 이래 일 년 만에 보는 셈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섭 소저." 섭수진도 마주 인사하고는 뭔가 할말이 있는 듯 망설였다. 매일도는 그녀가 묻고자 하는 것이 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와 같은 여걸을 망설이도록 하는 건 역시... 정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그는 나 직이 한숨쉬며 그녀에게 말했다. "이 일을 배후에서 진행시킨 사람은 그가 맞습니다." 섭수진의 눈이 격동으로 흔들렸다. "그... 진 공자는 무사한가요?" 매일도가 고개를 끄덕이자 섭수진의 눈에는 안도의 빛이 역력했다. '이 여인은 진 형을 진심으로 생각하는구나!' 매일도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진정으로 생각하더라도 운명은 그들을 같이 있지 못하도록 한 다. 진소백과 섭수진이 설혹 서로를 그리워하더라도 섭수진이 속한 문파는 아미 (峨嵋)! 불문의 성지가 아닌가? '아무리 섭수진이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매일도는 자신의 사매(師妹) 를 생각했다. 지금은 비응방의 방주가 된 강호의 여걸(女傑)! 한때 그들은 혼인(婚姻)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무림 거방의 방주가 비응방을 버리고 그에게 시집올 수도 없었고, 당당한 화산의 차기 장문감이 문파를 버리고 여인에게 장가를 들 수도 없었다. 인간은 아무 잘못이 없건만 하늘이 정한 운명의 길은 그들은 헤어지지 않을 수 없 도록 만들었으니... 왜 그녀는 비응방의 방주가 되어야만 했는가? 때로 하늘은 인간을 시기(猜忌)하기도 한다. 그 처사(處事)가 왜 이리 원망스러운 지... 매일도도 섭수진도 자신들만의 회한에 잠겨 있었다. 그들은 멀리서 금정 신니가 기광을 띠고 자신들을 보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특히 섭수진은 몰랐다. 사부의 눈길이 점점 변해 감을. * * * <보고(報告). 사백여 명 벽령호(璧靈號), 거의 전원이 생포되었음. 영주급 다섯 명은 소림으로 압송되었음.


나머지는 오 개 조로 나누어져 각각 이화보, 신토부, 신검산장, 신도보, 그리고 종 리세가로 보내졌음. 황산 인근의 서(誓) 내부 문파 대부분에서 구파의 흔적이 발견되었음. 진소백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동원된 명령선(命令線)도 상당 부분 드러난 듯! 하명 (下命)을 기다림.> 중년인은 보고서를 와락 구겨 버렸다. 그는 또다시 진소백에게 당하고 말았다. 자신이 도착했을 때는 너무 늦어 전원이 잡히는 것을 막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화만 내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노출된 명령선은 모두 폐기하라. 아울러 황산 인근의 하부 조직도 오늘로 모두 철수한다." 그는 이를 악물고 명령을 내렸다. '결코, 결코 오늘의 뼈아픔을 잊지 않는다. 꼭 되돌려주겠다. 꼭 되돌려줄 것이다.' 주변 공기가 청의인의 공력을 견디지 못하고 진동(震動)했다. 이러한 그의 무공은 어쩌면 초의(草衣) 선사(禪師)에 거의 필적하는 듯 보였다. * * * 초의 선사가 서서히 공력을 거두었다. 진소백의 고통도 서서히 사라졌다. "이십 일 정도만 요양한다면 팔은 회복될 것이다." 사부의 말에 진소백이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됩니다. 이십 일간이나 누워 있어야 하다니! 그럼, 제가 해야 할 많은 일들은 모두 어찌합니까?" 옆에 있던 제갈수가 손을 흔들었다. 부적 두 개가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진소백의 얼굴 앞에서 불꽃을 내며 타올랐다. 조금 있으니 불꽃 속에서 하얀 해파리 모양의 물체 두 마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 가? 그 해파리가 얼굴에 달라붙자, 진소백의 눈이 저절로 감겼다. "한숨 푹 자거라. 네 역할은 엽평이 대신할 터이니." 이 모습을 지켜보던 초의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수마(睡魔)로군. 자네의 초혼술(招魂術)은 더욱 높아졌는가?" 제갈수가 겸연쩍게 웃었다. "이상하게 요즘은 사술(邪術)만 늘어 갑니다. 제 마음이 밝지 않은 탓입니다." 초의가 나직하게 말했다. "조심하게. 사���은 편하기는 하지만 도(道)의 올바른 뜻을 해칠 수도 있으니. 아미 타불!" 장중한 불호! 제갈수는 가끔씩 끓어오르는 그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음을 느꼈다. ♡ 제 6 장 이어지는 꼬리, 잊지 않는 자 1 황산(黃山)의 단심평에서 있었던 일을 아는 강호인은 몇 되지 않았다. 풍림서의 음 모와 그를 와해시킨 진소백의 활약은 몇몇만이 아는 비밀로 감추어졌다. 속으로는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혈왕교로 인해 겁에 질려 있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강호는 평화로웠다.


그런데 돌연 한 줄기의 혈풍(血風)이 일기 시작했다. 한 명의 살인자(殺人者)! 그는 항상 한마디 말만을 남기고 사라졌는데, 그 말을 따서 이렇게 불렸다. 잊지 않는 자[勿忘人]! * * * 인도부(人屠夫) 적혈(狄血)! 별호답게 그의 잔인함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상대의 목을 비틀어 죽인 뒤 목을 뚫어 긴 장대 위에 단다. 한참이 지나 피가 완전히 빠진 시체를 승리의 표식인 양 허리춤에 사흘을 달고 다 니니, 함부로 그와 싸우려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강호에서 싸우고 죽임은 흔한 일이며 그것은 그들 간의 개인적인 은원(恩 怨)이었다. 정파의 협사들은 그의 잔인성에 공분(公憤)하면서도 나서지 못했다. 적혈은 지금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가 베고 있는 것은 미녀의 하얀 허벅지였고, 왼손으로 쓰다듬고 있는 것은 다른 미녀의 희디흰 엉덩이였다. 주위는 화려한 주단과 보석이 박힌 각종 장식물로 화려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보호하는, 아니, 다스리는 제남(濟南)의 일곱 기루(妓樓)에서 상 납된 것이다. 그가 기루의 뒤를 봐주고 돈을 상납받는 일을 한 지 벌써 삼십 년이 흘렀다. 처음엔 심심찮게 일어났던 말썽도 인도부가 몇 번 잔인함을 과시하고 나자 완전히 사라졌다. 적혈은 다만 편안히 누워 기루에서 상납(上納)하는 돈으로 생활하게 되었다. 적혈은 괴소를 지으며 기녀(妓女)의 엉덩이를 쓰다듬던 손을 어디엔가에 넣었다. "어멋!" 기녀의 두 눈에는 분노가 어렸지만 감히 반항하지는 못했다. 아니, 혹시나 자신의 감정을 적혈이 눈치챌까 봐 급히 눈을 내리깔았을 뿐이었다. "흐흐, 요즘 산화루(散花樓)에서 들어오는 상납이 적어 한번 혼을 내주려 했는데 네년의 속살을 보아 특별히 용서하마!" 적혈의 말속에 숨은 의미. 처음엔 귀찮음을 쫓기 위해 인도부 적혈을 고용했던 기루들은 그야말로 늑대를 쫓 으려고 호랑이를 들인 격이 되었다. 모조리 인도부의 손안에 들어가 매달 상납을 바치게 되었던 것이다. 밤이 깊었다. 그러나 인도부의 방은 밝게 타오르는 촛불의 붉은 빛으로 인해 낮처럼 밝았고, 동 시에 다섯 기녀의 시중을 받는 적혈의 눈도 붉게 달아올랐다. "흐흐, 네년들 모두를 즐겁게 해주마!" 인도부(人屠夫)가 괴소(怪笑)하며 기녀들에게 다가설 때였다. 그는 자신이 잡은 기녀의 손이 축 늘어짐을 느꼈다. 비록 몇 년을 주지육림(酒池肉林)에서 놀았다고 하나 한때는 무림에서 이름 높았 던 인도부였다. 기녀가 혈도가 짚혀 잠이 든 것임을 깨닫자, 그의 몸은 믿기 어려운 속도로 반응 했다. "누구냐?"


말과 동시에 그의 오른손이 침대 아래에 놓인 참도(斬刀)를 잡아 갔다. 그러나... 빛살이 무색할 지경이었던 그의 반응은 너무나 소득이 없었다. 쨍! 어디서 날아온 지풍(指風)인가? 두 줄기의 지풍이 날아왔다. 오른손이 닿기 직전, 지풍 하나가 참도를 튕겨 올리고, 나머지 지풍이 날아오른 참 도의 손잡이에 명중하니! 핑그르르! 전설상의 이기어검술(以氣御劍術)처럼 참도가 허공 중에서 돌아가는 게 아닌가? " 헉!" 헛바람을 들이키며 인도부는 급히 물러났지만, 스걱! 이미 참도의 날카로운 날은 오른손 검지(劍指)를 허공으로 날려 버리고, 중지(中 指)마저 반쯤 벤 뒤였다. 그러나 인도부는 아픔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물러나던 자신의 몸이 어디엔가 부딪혔음을 느꼈으므로. "인도부 적혈! 틀림없겠지?" 냉혹한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의 등을 막았음을 느끼는 순간, 쇠뭉치가 내리치는 듯한 통증이 허리춤으로부터 올라왔다. "으헉!" 숨막히는 고통보다도 막연한 공포가 인도부의 뇌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상대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이런 지경에 처하다니! 그러나 때로 호기를 눌러야 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 억지로라도 상대방을 보고자 머리를 들었을 때, 그의 눈을 채운 것은 검은 야행의 를 입은 청년! 찰나보다 짧은 순간, 망막에 잡혔던 청년의 모습은 곧 주먹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이유는 하나! 청년의 주먹이 인도부의 얼굴로 직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켁!" 인도부의 몸은 볼썽사나운 꼴로 구석에 처박혔고, 그의 칠공(七孔)에서는 쉬지 않 고 핏물이 흘러나왔다. 청년의 얼음장 같은 말이 인도부가 흘리는 핏물을 식히며 들려 왔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네게 물어 볼 것이 많다." 본격적(本格的)이라니! 인도부는 목구멍을 넘어 쉴새없이 흘러나오는 자신의 핏물은 보며 치를 떨었다. 이러다가 몸에 있는 피가 다 빠져 나오는 건 아닐까? 그는 자신이 차고 다니던 피 가 빠진 시체들을 생각했다. 그는 하늘이 노래짐을 느꼈지만 기절하지는 않았다. 기절할 듯한 순간, 청년의 일격이 다시 날아오며 온몸의 통각(痛覺) 세포를 격렬하 게 일깨웠기에. 청년의 주먹 하나하나는 세밀히 계산된 것인 듯, 극도의 고통을 주면서도 결코 인 도부를 기절시키지 않았다. 인세의 지옥! 살아서 경험할 수 있다는 죽음의 공포가 비로소 자신의 것임을 느낀 순간, 인도부 는 정신없이 고함을 질렀다.


"무엇이든 물어 보십시오. 무엇이든!" 그러나 청년은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인도부에겐 영원처럼 느껴지던 반 시진의 타작(打作)이 끝난 후, 청년은 비로소 말 을 꺼냈다. "난 정확히 일 각을 쉬겠다. 넌 내가 다시 주먹을 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지껄 여 보거라." 그때부터 인도부는 자신이 지껄이는 말을 스스로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속도로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말을 멈춘다면 청년의 주먹이 다시 날아올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주먹질은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 * * 인도부의 시체는 이틀 후에야 발견되었다. 보낸 기녀가 돌아오지 않자, 살그머니 동정을 살피러 왔던 산화루(散花樓)의 총관 이 그를 발견했다. 기녀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고, 인도부는 안도의 표정으로 죽어 있었다. 죽음에 이르러 안도의 표정을 지은 이유는 뭘까?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인도부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이러했다. '그만 됐다. 이제는 널 편안히 죽여 주마!' 인도부의 시신은 땅에 묻히지 못했다. 원한을 산 사람이 너무 많아 갈가리 찢겨진 채 여러 사람의 손에 배분되었다. 그 조각들마저도 철저히 짓이겨지니, 이런 최후를 안다면 누가 악행을 하려 들까? 인도부가 누운 바로 위의 벽면에는 핏물로 선명하게 쓰여진 글씨가 있었다. <아불망(我不亡)!> 나는 잊지 않는다. 누가 무엇을 잊지 않는다는 말일까? * * * 항주(杭州)! 소주와 더불어 지상의 천당(天堂)으로 비견되는 아름다운 도시! 수의 양제가 대운 하를 만든 이래,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왔다. 그 항주의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오(五) 리(里) 정도를 가면 아름다운 호수 하나가 나온다. 서호(西湖)였다. 그 서호가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언젠가 하나의 장원(莊園)이 들어섰다. 대략 삼십 년 정도나 되었다던가? 장원의 주인은 운중학(雲中鶴) 고일창(古溢倉)이었다. 멀리 청해성(靑海省)의 곤륜파(崑崙派) 출신이라던가? 소주(蘇州) 인근 천추학림 (千秋學林)에 다니러 왔다가 이 부근의 절경에 빠져 정착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천추학림의 일을 도와 후학(後學)을 가르치다가 십오 년 전부터는 완전 히 손을 놓았다는 소문이 있었다. 해가 진다. 서호의 지는 해는 서호십경(西湖十景)의 하나로서, 굳이 뇌봉(雷峰)이 아니더라도 장엄함은 마찬가지였다. 흰 머리를 길게 기르고 턱 아래 백염(白髥)이 단아한 노인 한 사람이 노을을 보며 길게 한숨쉬고 있었다.


무슨 근심이 있는 것일까? "인간이 평생을 조심하며 살아도 부족하다더니, 한 번의 실수가 평생의 한(恨)으로 남을 줄 알았다면 내 어찌 그런 일을 행했겠는가?" 근심으로 암울하던 노인의 눈에 잠시 후 일말의 광채가 피어났다. "다행히 그의 후손(後孫)이 얼마 전 나타났다고 하니..." 노을이 점점 짙어지더니 일순 광휘를 내뿜었다. "태양은 다시 떠오르겠지만 내 마음속의 번뇌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구나." 노인의 한숨은 뒤에서 들려 온 차가운 음성으로 인해 끊어졌다. "사라질 거요. 당신이 죽는다면." 그 음성은 매우 가까운 곳에서 들려 노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이목을 피해 이처럼 접근하다니. "누구신가?" 노인은 비록 천천히 외쳤지만 몸은 지극히 빨리 돌아 대단한 고수임을 몸으로 웅 변했다. 무인은 몸보다 눈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 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몸도 빨랐지만 눈은 더욱 빨라 상대의 음성이 들려 온 순간, 이미 뒤로 돌아가 상 대방의 모습을 보았다. 십여 장 떨어진 나무 사이로 나타난 검은 야행의를 걸친 청년! 하지만 놀랍게도 노인이 완전히 몸을 돌렸을 때, 청년의 몸은 이미 노인 이 장 밖에 서 있었다. 노인과 같은 고수가 몸을 돌리는 짧은 순간에 청년의 몸은 이미 여덟 장을 갈랐던 것이다. 노인은 내심 놀라며 재차 물었다. "누군가, 자네는?" 청년은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어 왔다. "운중학 고일창! 맞소?" 노인의 눈썹이 꿈틀했다. 자신의 신분을 알면서도 이처럼 대하다니, 이 청년은 너무나 무례하지 않는가? 그 러나 고일창은 분노하지 않았다. 아니, 분노할 수가 없었다. 청년의 얼굴을 본 그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겨우 입을 열어 한마디만을 했을 뿐이다. "너, 너는?" 청년은 이번에도 고일창의 말을 무시했다. "당신은 물을 필요가 없소. 질문은 내가 하겠소. 물을 것이 참으로 많이 있으니." 청년의 손이 마혈을 잡아 와도 고일창은 움직이지 않았다. 번뇌! 한 번의 잘못으로 평생을 후회 속에 살았던 고일창의 번뇌가 어쩌면 씻겨질 수 있 을지도 모르겠다. 2 초가(草家) 하나가 강변에 있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평범한 띠집! 줄에 걸린 빨래는 바람에 하늘거리고, 건조대(乾燥臺) 위에 널린 생선은 아마 강에 서 잡아온 것이리라.


햇빛 아래서 말려지는 생선은 강가에서 사는 어부들의 좋은 요깃거리였다. 누구도 이 초가집에서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너무나 평범하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강변의 풍경(風景). 하지만 누군가 초가집 주위의 수풀을 샅샅이 훑어본다면 이곳이 결코 평범하다 말 하지 못할 것이다. 형형한 안광의 고수들로 보호되는 초가집! 게다가 초가집 안에 모인 네 명의 사람을 본다면 아예 입을 다물고 말리라. 무림 정파를 대표하는 사(四) 파(派)의 장문인들이 지금 한곳에 모였다. 소림의 현공 대사가 화산의 화산검성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아미타불! 검성(劍聖)께서 변을 당하셨다는 말은 들었소. 이제는 괜찮으시오?" 아미의 금정 신니와 무당의 무엽 진인 또한 병문안을 서둘렀는지라 화산검성(華山 劍聖)은 답례(答禮)에 바빴다. "염려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가 이처럼 모임은 혈왕교(血王敎)의 난이 벌어지기 전에 풍림서(風林誓)를 견제할 계책(計策)을 세워 어지러움을 대비하고자 함이니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그의 말은 당금 사태의 심각성을 말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 가지의 의미가 있었 다. 반도로 밝혀진 문파의 존장에게 당한 불의의 기습! 이십여 일의 기간 동안 자신을 병상에서 보내게 한 풍림서에 대한 그의 분노도 포함하고 있었다. 어쨌든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밖을 철저히 감시하는 사 파의 고수들은 자신들의 비밀 회동을 지켜 주는 의미도 있지만, 역(逆)으로 다른 자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킬 소지도 있었다. "시작합시다. 빈도의 생각에는 벽령호(璧靈號)라 불리던 자들이 사용했던 무공이 가장 중요할 것 같소." 현공의 말에 무엽 진인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와 부딪쳤던 자가 구사(驅使)한 것은, 변형되긴 했지만 분명히 아 미의 금정산수(金頂散手)와 본 파의 암향표(暗香飄)였습니다. 그자의 성취가 낮은 탓에 쉽게 물리쳤지만... 보통 일이 아닙니다." 금정 신니가 놀라 말했다. "빈니도 벽령호들의 무공에서 구파 무학의 흔적을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고 금정 산수... 라면 일 년 전 섭수진에게서도 보고를 들었었는데, 그때는 그 아이가 잘못 본 것이라 생각하고서..." 아미옥녀 섭수진은 일 년 전 진소백과 함께 풍림서의 힘과 부딪친 적이 있었다. 그때 상대방이 사용했던 무공이 금정산수인지라 사부께 보고드렸던 것이다. 화산검성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이미 밝혀진 대로 각파에서 장로급 이상되는 인물들이 풍림서를 돕고 있었습니다. 그들에 의해 무공이 유출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의 말은 분명히 옳았다. 하지만... 현공 대사가 한참을 생각한 후 말했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또 있습니다. 그들이 시전한 무공은 하나도 원래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화산검성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열심히 현공 대사가 말한 의미를 곱씹는 중이었다. "장문인의 뜻은...?"


"구파(九派)의 반도(叛徒)에 의해 무학이 유출되었다는 생각은 옳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정제(精製)되어 오는 가운데 나름대로 완성된 형태를 갖게 된 구파 절학입니다. 이처럼 변형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천하에 많지 않습 니다." 나머지 세 사람은 비로소 현공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현공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절학이란 나름의 운기 방법이 정해져 있어, 오의(奧意)를 완전히 깨닫지 못한 자 가 다른 형식으로 사용하게 되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음을 아실 겁니다." 그의 말은 틀림없는 것이었다. 억지로 자연스러운 흐름을 깨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무리가 따르게 된다. 구파의 절학은 하나같이 뛰어난 것인지라 하류의 무술과는 달랐다. 하나의 경지(境地)에 나름대로 도달한 절학들은 원래의 흐름을 임의로 바꾸면 원 래의 위력을 잃게 된다. 만일 ���지로 위력을 높이려다가는 필연적으로 무리가 뒤따라 주화입마(走火入魔) 에 들게 된다. 현공은 드디어 애초에 하고자 했던 본론을 말했다. "하지만 강호에는 벌써 백여 년의 기간이 넘도록 구파의 절학을 변화, 보완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 집단(集團)이 있습니다." 현공의 말이 주는 충격은 컸다. 무엽 진인이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대사의 말이 무엇인지 알겠소이다. 지금 천추학림을 말하시는 게지요?" 천추학림! 이 이름에서 어떻게 반역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까? 구파의 정영들과 사대세가의 힘이 모여 만들어지고, 무림을 위해 산화했던 수많은 영걸들을 배출한 장소. 비록 독립된 문파는 아니지만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천하에 없었다. 금정 신니가 고개를 흔들었다. "믿기 힘들군요. 이십 년 전 무당의 일송 도인께서 임주(林主)로 취임하신 후, 천 추학림의 모든 활동은 저희들 구파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어 왔는데..." 무엽 진인도 고개를 흔들었다. "일송 사숙의 성품은 제가 잘 압니다. 그분은 무림에 해를 끼칠 일을 하실 분이 절대 아닙니다." 현공 대사가 두 눈을 내리감았다. "나도 그분의 성품을 믿고 있소. 또한 천추학림에서 일하시는 모든 분들의 성품도. 하지만 한 가지 가능성(可能性)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소." "무슨... 가능성을?" "일송 진인마저도 모르는 일이 천추학림 내부에서 일어날 수 있지 않습니까?" 화산검성이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비밀 결사! 장문인께서는 천추학림 내부에 제오열(第五列)이 생겼음을 우려하시는 겝니까?" 현공이 한 손을 가슴 위로 올렸다. 합장하며 불호를 한바탕 외운 그가 말했다. "지금의 강호는 너무도 어지러워, 안타깝게도 어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소이다. 하여 빈승은 이 일에 한 사람을 추천하고자 하는데, 들어주시겠소?" 그가 추천할 사람이 누군지는 이미 다른 장문인들도 알고 있었다. 금정(金頂) 신니(神尼)가 물었다.


"그의 몸은 이미 나았나요?" 대답은 밖에서 들려 왔다. "낫다마다요. 너무 많이 나아서 좀이 쑤실 지경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청년은 이제 사 파의 장문인들 사이에서는 너무나 유명해져 있 었다. 일람무의 진소백! * * * -염려해 주신 덕분에 이제는 튼튼해졌습니다. -저 혼자는 너무 벅찹니다. 몇 사람의 지원을 받고 싶습니다. -생각해 둔 사람들은 물론 있습니다. 젊고 능력과 의기가 있는 사람들. -구파(九派)의 차기(次期)를 이끌어 갈 사람들입니다. -글쎄요, 이름은... 음, 군영회(群英會)가 어떻습니까? -맞습니다. 어쩌면 풍림서의 첩자가 더 있을지도 모르고...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혈왕교의 변신일 가능성이 높은 흑혈산(黑血山)의 첩자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방법은 장문인들께 감히 맡기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좋은 계책을 세워 주시길! * * *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피! 자신의 피를 보며 죽음을 맞는 사람은 누구나 분노하게 되리라. 하지만 그는 달랐 다. 운중학(雲中鶴) 고일창(古溢倉)의 눈은 분노를 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안색은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죽음에 이르러 이처럼 평안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대단한 성공작이었 으리라. 흑의청년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곧 죽을 것이오. 왜 나한테 화를 내지 않는 게요?" 운중학의 가슴에 뚫린 구멍은 청년의 검에 의한 것이었다. 아홉 개의 마디가 특이한 검! 엽혼의 구절검(九節劍)을 사용하는 청년은 당연히 엽평이었다. 운중학은 고개를 저었다. "난 자격이 없네. 자네를 보는 순간, 그의 아들임을 알았지. 어떻게 내가 반격할 수 있겠는가?" 운중학의 무공이라면 자신과 능히 백 초 이상을 겨룰 수 있음을 엽평은 알고 있었 다. 그런데 단 일(一) 초(招) 만에 운중학은 스스로 가슴을 내어 주었던 것이다. 운중학은 숨이 차는 듯 마른기침을 하고서는 말을 이었다. "자네가 시전한 무류검(舞流劍)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이지. 난... 다시는 무류검 을 보지 못하리라 여겼지!" 기침과 더불어 바닥으로 점점이 떨어지는 검붉은 피! 엽평은 마음이 흔들렸지만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 "인도부 적혈이 당시 아버님을 모함한 천상화(天上花)의 뒤를 봐주고 있었음을 힘 들게 알아 내었소. 적혈을 하룻밤 고문하여 알아 낸 이름이 당신이오." 운중학은 옛일이 생각났다. 엽자문이 모함을 당하여 불명예스런 죽음을 당하고, 쫓겨났던 세

모자(母子)의 모


습! "난 자네 모자들에게 큰 죄를 지었지.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네. 만 일 천추학림에 그대로 있었다면 자네는 아마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야." 엽평은 냉정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길게 말하고 싶지 않소! 내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운중학은 알고 있었다. 엽평의 행동은 모두 아버지 엽자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한 것! 누가 원 흉인가? 3 바람이 불어왔다. 운중학은 바람에 실려 흐르는 구름을 잠깐 올려다보았다. 검은 하늘에 희끗희끗 보이는 구름은 회색이었다. "낮이었다면, 그래서 구름을 보고 죽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 내 죄가 컸음인가? 하늘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는군." 다시 마른기침과 더불어 피를 토한 운중학은 엽평을 보았다. "내가 자네 집안에 지은 죄는 씻을 길이 없네. 평생 내 마음을 괴롭혀 왔지. 품속 을 뒤지면 책자가 하나 나올 걸세. 이십 년 전의 사정을 적어 놓았으니... 부디 내 죄를 용서하시게." 운중학은 눈을 감았다. 사방은 밤의 어둠으로 덮여 있었다. 그가 원했던 푸른 하늘과 구름은 이 밤이 지나야만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해가 지면 반드시 밤의 어둠과 맞서야 한다. 다시 날이 밝기 위해서는 어둠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이 살아 가는 것도 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일단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죄책감 을 안고 살아야 한다. 다시 밝은 광명을 보려면 길고 긴 회한의 세월을 피할 수 없는 법이다. 운중학은 죽음으로써 비로소 자신 마음을 덮고 있던 어둠을 걷어 낼 수 있었다. 아마 숨을 거두는 순간, 그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죄책감이 씻겨져 밝아진 스스로의 마음이었으리라. 하늘에는 비록 푸르름과 구름이 없었지만 스스로의 마음만은 더없이 맑았을 것이 다. * * * <나 운중학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죄를 두 가지 지었다. 하나는 일세의 영웅 엽자문(葉子文)을 모함했음이요, 둘은 그들의 가족을 문파에서 내쫓았음이다. 회풍무류검(廻風舞流劍) 엽자문! 그가 천추학림(千秋學林)에 들어온 경로는 다른 사람과는 많이 달랐다. 남궁세가의 남궁정(南宮晶)과 사랑에 빠진 엽자문은 집안의 뒤를 이어 문사가 되 기를 포기했다. 그는 때늦은 무공 입문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재능으로 남궁세가의 회풍무류검을 더욱 발전시켰다. 남궁호(南宮昊)는 처음에는 엽자문을 별로 탐탁히 여기지 않았으나, 사위의 뛰어난 재능을 본 후 아낌없이 무공을 전수해 주었고 엽자문은 학문으로 쌓은 새로운 시 각으로 무공을 해석하여 전혀 다른 경지의 무공을 이룩하기에 이르렀다. 엽가(葉家)가 강호의 새로운 명문으로 발돋움하고 그 발원지가 천추학림이었음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서로의 무학을 솔직하게 내어 놓고 비교하며 발전시키는 학림의 분위기가 아니었 다면 엽가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기에, 천추학림은 엽자문의 사문으로 인식되었 다. 그러나 그의 무인답지 않은 박식(博識)은 어떤 면에서는 그에게 불행이었다. 모종의 경로를 통해 엽자문은 천추학림 내부에서 학림의 원래 취지에 반하는 움직 임이 일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아하! 왜 하필이면 엽자문은 그 말을 그들에게 했단 말인가? 또한 왜 불순한 움직 임과 싸울 뜻을 밝혔단 말인가? 불행히도 그의 친구들은 내부의 음모 세력과 결탁되어 있었고, 엽자문은 영문도 모른 채 친구에 의해 제거되었다. 난 엽자문의 사인(死因)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사인은 명백했다. 중수(重水)로 인한 죽음은 누가 보아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므로. 사인을 발표하기 위한 회의가 있던 날 아침! 침상 머리 위에 상자 하나와 서찰이 놓여 있었다. 상자에는 약지(藥指) 손가락 하나가 들어 있었고, 난 단번에 그것이 누구의 것인 지를 알 수 있었다. 그 손에 끼여 있는 반지는 생일선물로 내가 손녀에게 주었던 것인데 내가 어찌 몰 라볼 수 있을까? 여기 정착한 것은 자식 내외가 일찍 죽어 풍광이 좋은 곳에서 하나뿐인 손녀의 외 로움을 조금이나마 달래고자 했던 것인데... 서찰에 적힌 글은 간단했다. '엽자문은 기녀를 탐하다 죽었다. 이 말에 이 손가락 주인의 목숨을 걸겠다.' 어쩔 수 없었다. 정말로 어쩔 수가 없었다. 난 알면서도 엽자문의 사인을 복상사(腹上死)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나 외의 네 명도 같은 사인을 말했다는 점이다. 그들 하나하 나는 구파의 원로로서 천추학림을 이끄는 신분이었는데, 누가 이들 모두에게 손을 쓸 만큼 재간이 있는 걸까? 내가 엽자문이 죽음을 당한 이유를 안 것이 바로 이 시점에서였다. 그들은 맹서를 했다 한다. 단풍숲에서 그들은 천하의 분란을 종식시키고자 맹서했고, 그 방법으로 자신들이 강호를 장악하여 올바르게 다스림을 결정했다 말했다. 그들의 세력은 천추학림의 곳곳에 숨어 있었으며, 이 말은 천추학림의 근간(根幹) 이 되었던 천외성과 사대세가, 그리고 구파 또한 풍림서란 집단에서 자유롭지 못 함을 의미했다. 이런 세력은 하루아침에 출현할 수 없다. 언제부터 천추학림 안에서 강호를 장악하려는 움직임이 일었을까? 난 죄를 알면 서도 그들의 행동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엽자문의 죽음이 기녀를 탐한 파렴치한 행동의 결과로 알려지자 천추학림은 수치 에 떨었다. 그의 아내 남궁정과 어린 두 아들은 학림에서 쫓겨났다. 난 사건의 전모를 알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천추학림과 강호 정협들의 질타가 그들 모자에게 향함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난 숨죽여 앉아만 있었다. 그들을 비난하는 수많은 음성 속에 숨어 있는 풍림서의 세력은 도대체 어떤 것일


까? 난 떨었다. 정도의 허울을 쓰고 강호의 분란을 종식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운 채, 이런 추잡한 일을 행하는 풍림서가 어찌 올바른 문파일 수 있을까? 그들에 대한 분노와 스스로의 비겁(卑怯)에 대한 수치로 난 이십 년을 괴로워했다. 손녀는 이미 십 년 전에 죽었다. 어린 날에 당한 공포 때문에 항상 악몽(惡夢)에 시달리던 그 아이는 양심에 할퀴 어진 내 영혼처럼 말라 죽고 말았다. 여기 내가 최선을 다해 알아 낸 두 이름을 적어 둔다. 엽자문이 자신이 알아 낸 비밀을 말했던 두 친구! 엽자문을 배신했던 두 친구의 이름이다. 종수(鐘秀)와 그리고 호대철(湖大鐵)! 종수는 실종되었지만 호대철은 아직 살아 있다. 그가 신토부(申土府)란 문파를 이끌고 있음도 내가 힘들게 알아 낸 사실이다.> * * * 엽평은 두 손을 꽉 쥐었다. 고일창(古溢倉)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임을 짐작한 것일까? 어쩌면 엽평이 태 화평(泰和坪)에 출현했다는 말을 들었던 날부터 글을 적어 이 순간을 준비해 뒀는 지도 모른다. 엽평의 이빨 사이로 한 이름이 흘러나왔다. "호! 대! 철!" 한 자 한 자 끊어 부름은 그만큼 분노가 컸던 탓이다. 종수(鐘秀)는 이미 죽었음을 엽평은 알고 있었다. 그는 혈왕교의 잔당으로 보이는 자들에 의해 제거되었으며, 그의 심장은 지금 엽 평의 가슴에서 뛰고 있었다. 풍림서와 혈왕교는 관련이 있는 것일까? 지금 엽평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전체적인 분석이 아니었다. 그의 눈에는 다만 태화평에서 보았던 호대철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자신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던 호대철! 한 가닥 양심이 있었던 걸까? 어쨌든 이제 엽평의 행로는 하나로 정해졌다. "신토부! 그곳으로 간다." * * * 강호에는 바야흐로 풍운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막연히 짐작만 할 뿐, 구체적으로 체감(體感)하는 사람은 무척 드물 었다. 강하게 풍운의 조짐을 느끼는 몇 명의 사람 중에는 초의 선사 문하의 두 사형제도 포함되었다. 엽평은 아버지 엽자문의 원한을 찾아 신토부로 떠났다. 풍림서와 신토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또 새로 발족한 대륙오행련과의 관계는? 진소백은 군영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천추학림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들은 너무 오래 잊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혈마수라결을 찾아 내어 떠났던 좌고학! 혈경을 입수한 흑혈산(黑血山)! 설마 이 무서운 힘들이 나타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아니었다.


결코 아니었다. 진소백이 아직 완쾌되지 않은 몸으로 활동하고 있음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말은 완쾌되었다고 했으나, 그처럼 심했던 상처가 어떻게 쉽게 나을까? 이들이, 단 심맹(丹心盟)이 의도하는 바는 다름이 아니었다. 가능한 빨리 풍림서란 강호의 이단 세력을 제거하여 강호의 힘을 하나로 결집시키 자는 것! 그래서 장차 나타날 혈왕교를 상대할 힘을 기르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결코 세상은 인간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진소백과 엽평이 아무리 빨리 움직이려 해도, 아무리 제갈수가 운명을 되돌리려 계책을 세워도, 하늘은 자신이 정한 운명의 수레를 멈추지 않는다. 천추학림의 구성이 일반인에게 드러나고, 대륙오행련이란 초거대 세력에 속한 신 토부가 본격적인 형태를 선보이면서 무림천추는 드디어 본격적인 풍운에 휩싸인 다. 더불어 무림의 악몽(惡夢)이라 불리기에 마땅한 혈경의 가공할 힘을 이은 흑혈산 (黑血山)은 서서히 그 추악한 머리를 들기 시작하는데... 그에 대항하는 진소백과 엽평! 그리고 단심맹. 구파의 후기지수(後期之秀)들로 이루어지게 될 군영회의 활약! 지금은 어디론가 은거했지만 여전히 강호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씨가문의 행방! 무림천추(武林千秋)! ♡ 제 7 장 파문! 모이는 젊은 영웅들 1 相送臨高臺 川原杳何極 日暮飛鳥環 行人去不息 그대를 보내고 높은 곳에 올라 보니 천원 가는 길 아득하여 끝간데없다 해 저물면 새들도 돌아오는데 떠난 그대는 다만 갈 뿐, 쉬지 않는다. 아미산! 아미파가 위치한 이곳에도 봄의 기운이 조금씩 묻어나기 시작했다.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울었는데 어디선가 영롱한 여인의 음성이 읊는 노랫가락이 들린다. 노 래를 마치며 한숨짓는 여인! 흰 무명옷이지만 초라해 보이지 않음은 전신에서 풍기는 고고한 기도의 영향인가? 정갈한 자태가 마치 무명옷이 아닌 금의(錦衣)를 두른 듯한 환영을 낳는다. 노을 아래 읊었던 왕유의 시가 담고 있는 뜻은 떠난 이를 그리워함이었다. 황산의 단심평에서 있었던 풍림서 토벌(討伐)에 다녀온 이래, 그녀는 이처럼 노을을 보며 한숨짓는 일이 많아졌다. "휴! 어쩐 일일까? 한번 소식을 듣고 나니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구나." 한숨짓는 여인의 이름은 섭수진! 금정 신니의 제자이며 아미옥녀로 불리는 일대의 재녀! 그녀의 뒤로, 이제는 어두워진 언덕 아래서부터 삼십 가량으로 보이는 여승


한 명이 올라왔다. "사매!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사부님께서 찾으셔." 금정 신니와 동배인 멸절(滅絶) 신니(神尼)의 제자이며 섭수진에게는 사저(師姐)뻘 이 되는 여승, 오명(悟明)이 어두운 안색으로 섭수진에게 말했다. "무슨 일로...?" 섭수진이 물었으나 오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만 흔들고 있는 그녀를 보며 섭수진은 고개를 숙였다. "여하튼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저!" 섭수진이 내려간 뒤 오명은 혼자 남았다. 언덕 위에 바람은 불어오는데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사방이 보이지 않았다. 섭수진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오명은 고개를 숙였다. "정(情)이란 도대체 무엇 일까? 일대의 재녀(才女)도 그 그물에서 헤어나지 못하니... 언제 정을 끊고 해탈에 이를 것인가?" 오명은 두 손을 합장하며 나직이 읊조렸다. 불문에 든 지 벌써 이십 년이건만 아직도 잊지 않고 자신을 찾아오는 번뇌(煩惱) 가 오늘따라 더욱 심함을 느꼈던 까닭이다. * * *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법당(法堂)에서 타오르는 촛불에 의해 생긴 사부의 그림자는 자꾸만 움직이고 있 었다. 여성답지 않게 굳건해 보이는 등은 사부의 평소 성정을 말해 주며 섭수진을 맞이 했다. 한참을 금정 신니는 그렇게 앉아 있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들어왔는가? 촛불이 흔들리며 불꽃이 작아지자 사부의 그림자는 반비례하여 늘어났다. 그림자가 자신마저 덮어 버리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힐 때, 사부의 입이 천천히 열 렸다. 아니, 등이 움직였다고 하는 편이 나으리라. 지금 섭수진이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부의 등뿐이었으므로. "요즘 네가 전과 달라졌음을 안다." 섭수진은 입을 열지 못했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이란 불가의 금기. 넌 내 가르침을 참으로 쉽게도 저버리는구나." 금정 신니의 느릿느릿한 말속에는 형용하기 어려운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남녀간의 사사로운 정임을 섭수진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섭수진이 머리를 바닥에 대었다. 음성(音聲)은 벌써부터 젖어 있었다. "사부님, 소녀는..." 무슨 말을 더 이을 수 있을까? 섭수진은 사부의 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도 면벽(面壁)이나 금식(禁食)의 벌이 내려지리라. 하지만 어떤 것으로도 마음의 흐름은 잡을 수 없으니... 금정 신니의 몸이 서서히 뒤로 돌았다. 섭수진이 법당으로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얼굴을 보이는 중이었다.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리자, 섭수진은 벼락같은 한마디를 들을 수 있었다.


"마음속에 남자를 담아 사부를 기만하고, 날마다 언덕에 올라 연시(戀詩)를 읊어대 다니... 넌 내가 무엇을 가장 싫어하는지 어느새 잊었느냐?" 섭수진은 얼굴만 숙인 채 말이 없었다. 그녀는 아무에게나 얘기를 하고 싶었다. 자신의 가슴에 깃들인 답답함을 아무나 붙잡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부에게만은 할말이 없었다. 그녀가 왜 남자를 그처럼 미워하는지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금정 신니는 한 참 동안 말을 쉬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갈라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어느새 나타났 는가? 주위는 아미파의 장로들로 꽉차 있었다. 섭수진은 그들이 경공을 구사해 사뿐히 실내에 내려앉음을 알면서도 고개조차 들 지 못했다. 사부의 꾸짖음 앞에서도 마음속의 번뇌를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기 때 문이었다. 멸절(滅絶) 신니(神尼)가 가장 분노한 음성을 말했다. "망설이실 것이 아닙니다, 장문사저! 아무리 섭수진의 공이 많다 하나, 그녀는 계 를 범했습니다." 섭수진의 몸이 떨렸다. 그녀의 귀가 꿈틀 움직이며 고개를 들고자 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멸절 신니가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섭수진은 파문되어 마땅합니다." 여기저기서 찬성과 반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섭수진은 그제서야 얼굴을 들어 사부 금정 신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항상 자신을 아껴 주시던 사부! 그 사부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오늘로 아미 십칠 대 제자 섭수진은 더 이상 본 파의 제자가 아님을 천명한다." 벼락이 떨어진다. 어찌 저 말이 사부의 입에서 나오는가? 멸절 신니가 추상과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섭수진은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면 스스로 나와 벌을 받으라. 아미에서 배운 무공 은 이후로 두 번 다시 사용하지 못할지니, 근골과 주맥을 모두 끊어 그녀가 아미 의 제자였음이 결코 드러나지 않게 하라." 섭수진은 자신의 주위로 호법(護法)들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이대로 무공을 박탈(剝奪)당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녀의 눈앞으로 누군가의 환영(幻影)이 떠올랐 다. 또한 귓가로는 환청인 듯한 음성이 들렸다. 급한 음성! "도망가! 어서 도망 가!" 섭수진은 일 년 전 풍림서와 싸우다가 나름대로 무공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 후로 일 년이 지난 그녀의 무공은 이전과는 또 다른 경지(境地)에 이르러 있었 다. 아미의 무공 중 가장 강한 것 중 하나라는 금강선공(金剛禪功)의 기세를 실은 복호금강권(伏虎金剛拳)이 사방에서 밀려왔다. 살짝 떠오르며 밀려오는 금강권을 맞아 가는 섭수진의 무공은 금정산수(金頂散手)! 동일 문파가 내부의 무공으로 싸우는 이런 싸움은 일종의 비극이었다. 섭수진의 무공 성취는 아미의 역사상 가장 빠른 편에 속해 모두가 놀라고 있었다. 이것은 비단 아미파의 현상만은 아니었다. 구파 모두 후기지수들의 성취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으므로. 때는 천년흥륭기(千年興隆期)! 기재들이 수없이 나타나고 있는 때인 것이다. 어쨌든 아무리 섭수진의 성취가 빨랐다 하나 지금 그녀를 잡으려는 네 명의 호법


은 그녀보다 한 배분이 높은 신분! 무공 또한 삽십 년 이상이나 익혔던 아미의 고수들이었다. '섭수진은 피할 수 없다.' 멸절 신니는 나름대로 판단했지만 곧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금정산수가 여태 껏 보지 못했던 오묘한 변화를 일으키며 사방의 복호금강권을 휘감았던 것이다. 느린 듯하면서도 언제나 한 박자 먼저 공격을 막아 버리는 섭수진의 손! 네 명의 호법들은 섭수진의 손에 미끄러진 서로의 권력들이 서로를 밀쳐 내는 것을 느끼며 격퇴되었다. 멸절 신니의 입에서 참을 수 없는 외침이 나왔다. "유로써 강을 제압하니, 이것이 바로 금정산수의 참 오의(奧意)! 네 무공이 벌써 이 정도에 이르렀느냐?" 말로써 감탄했지만 손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멸절 신니는 아미파의 법도를 지키는 호법각주(護法閣主)! 그녀의 몸이 앉은 채로 뛰어올랐다. 가부좌(跏趺坐)했던 몸이 허공에서 펴지며 맑은 기운이 전신에서 일어났다. 장로급 이상이 되어야 익힐 수 있다는 대정신공(大靜神功)이 멸절 신니의 전신에 유포(流 布)되었다가 그녀가 내미는 손을 따라 앞으로 뻗었다. 호법들과 같은 복호금강권(伏虎金剛拳)이라고는 하나 실린 공력이 다르니 위력도 달랐다. 섭수진은 네 명의 호법을 상대할 때보다 더욱 손을 빨리 감아 갔지만 멸절 신니의 공력을 채 해소하지 못했다. "우욱!" 섭수진이 뒤로 두 걸음 물러날 때 멸절 신니가 냉소하며 다시 일권을 가해 왔다. "흥, 방어(防禦)만으로 감히 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공기를 찢는 기세가 전신을 덮쳐 오며 피부가 찢어질 듯할 때, 섭수진은 다시 한 번 전음을 들었다. "어서 도망가라니까!" 결코 환청이 아니었다. 2 대정신공을 가득 담은 복호금강권이 전신을 찢어 버릴 듯한 기세를 담고 달려왔 다. 섭수진은 부득이 금정산수(金頂散手)를 공격의 형태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멸 절 신니가 펼친 맑은 빛의 경기막(勁氣幕)을 뚫고 섭수진이 일으킨 또 하나의 대 정신공이 불거져 나왔다. 두 가지의 동일한 내공(內功)이 각기 다른 복호금강권과 금정산수라는 상이(相異) 한 형태로 표출되면서 무섭게 얽혀들었다. 파파팍! 몇 번이나 찌르고 막고 부딪쳤을까? 섭수진의 몸이 뒤로 일 장 정도 쭉 미끄러질 때, 세 걸음 물러난 멸절 신니의 눈 에 불신의 빛이 뚜렷이 나타났다. 비록 섭수진이 일(一) 장(丈)을 물러서기는 했으나, 단지 도주(逃走)를 위한 것일 뿐, 실지로 타격(打擊)을 받은 사람은 자신임을 알기 때문이다. "인정하지 못하겠다!" 그녀는 노기가 머리 끝까지 솟구친 듯, 대정신공의 기세를 더욱 뻗었다. 설마 이곳


이 법당 안임을 잊고 있다는 말인가? 강한 경기(勁氣)의 폭풍에 밀려 공기가 움직이자 갖가지 법구들이 진동하고 있었 다. 금정 신니는 급히 내공을 끌어올려 실내를 보호하며 외쳤다. "자중하라! 여기는 법당이다." 멸절 신니의 무공은 당연히 호법들보다 높았다. 그녀와 섭수진이 두 번의 부딪침 끝에 순간적으로 떨어지고, 멸절 신니가 공력을 더욱 끌어올려 다시 덮쳐 갈 때, 처음 격퇴되었던 네 명의 호법들은 그제서야 다 시 섭수진을 공격하고 있었다. 호법들이 늦다기보다는 멸절 신니가 빨랐다는 표현이 옳았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을 모두 막아 내는 섭수진의 반응은 또 얼마나 빠른 것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직도 섭수진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는 점이다. 종전보다 많은 공격을 막아 낸다는 것은 손을 더욱 빨리 움직임이 확실한데도 옆 에서 보기에는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지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멸절 신니가 노호를 지르며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고 사방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네 명의 고수들이 덮쳐 왔다. 하지만 섭수진의 손은 유영(遊泳)이라도 하듯 지극히 느리게 움직였는데... 파팍! 펑! 어떻게 된 일일까? 느린 손이 오히려 빠른 다섯 줄기의 공격을 모두 막아 내며 뒤 로 물러서고 있는 것이다. 물론 완전히 무사하지는 못했던 듯, 섭수진의 안색은 순간적으로 창백하게 변했다. 멸절 신니의 말이 옳았다. 방어만으로는 막아 낼 수가 없었다. 창백해진 섭수진은 정신없이 물러나며 이윽고 법당의 문지방을 넘어 밖으로 나갔 다. "쫓아라!" 멸절 신니의 노한 음성이 들리며 네 명의 호법들이 자세를 바로해 섭수진을 따라 나갔다. 밖에서도 멸절 신니의 말에 호응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대기하던 자들이 있었나 보다. 금정 신니는 법당 안을 둘러보았다. 법보와 기물들은 무사했다. 섭수진이 자신의 내상까지 무릅쓰고 밖으로 나갔던 까닭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장내의 양상은 불이 붙은 듯 급했지만 금정 신니의 수양을 무너뜨리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넓은 곳으로 나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섭수진의 무공은 그야말로 독보 (獨步)적이었다. 수많은 아미 제자들이 그녀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녀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은 아직 하나도 없었다. 멸절 신니의 가공할 신공도 섭수진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처럼 젊은 나이에 이런 성취를 이룬 여고수! 문파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는 기 재를 파문하다니! 아미파는 왜 이런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는가?


섭수진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의 벌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차라 리 그냥 잡혀 버릴까? 그녀가 망설이는 순간 다시 귓전에 들려 오는 전음! "뭘 하는 게냐! 어서 달아나라 니까." 이번에야 섭수진은 전음의 주인이 누군지를 알 수 있었다. 천천히 법당에서 걸어나오는 여승! 자신의 사부이며 아미의 장문인인 금정 신니. '무슨 뜻이 있나 보다!' 섭수진은 순간적으로 오늘의 파문이 단순히 자신의 죄를 묻기 위함이 아님을 느꼈 다. 아무리 사제간의 정이 돈독하다고 하나 사부는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실 분 이 아니었다. 자신감을 얻은 섭수진의 대정신공의 기세가 좀 전과 달라지며 동문들의 공격을 압 도해 나갔다. 십 성에 불과한 그녀의 대정신공이 거의 대성의 경지에 이른 멸절 신니를 압도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의 차이였다. 음식을 많이 먹는다고 해서 많은 영양을 얻는 것은 아니었다. 멸절 신니는 무공을 익혔지만 섭수진은 이미 깨달음으로 무공을 소화시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던 까 닭이었다. "대단하구나!" 멸절 신니의 눈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 어린 제자를 파문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의 임무를 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때였다. 멀리서 우렁찬 외침이 들려 온 것은! "무슨 일로 문파가 이리 시끄러운 게냐?" 모든 싸움을 멈추게 만드는 장중한 음성! 아미의 제자들은 두 명의 고수가 공중을 떠서 날아오는 환상을 보았다. 하지만 환상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엄청난 속도로 미끄러지고 있건만 두 발은 꼿꼿이 서 있으니 그 렇게 보였던 것뿐이었다. 아미팔경(峨嵋八景)의 하나인 대평제운(大坪齊雲)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신법! 제운 행(齊雲行)을 구사하는 남과 여, 두 사람! 나타났나 싶더니 어느새 장내에 두 사람이 내려앉자 금정 신니는 급히 예를 취했 다. "운몽(雲夢) 법사(法師)와 심몽(心夢) 사태(沙汰)를 뵙습니다." 정도의 십정(十正)에 속하며 아미의 전대 선배이기도 한 두 노고수가 나타나자 모 든 아미 제자들은 싸움을 멈추었다. 섭수진마저도 예를 표했다. "장문인은 예를 거두시오. 싸움 소리가 들려 내려오게 되었소. 무슨 일이 있는 게 요?" 본래 구로동(九老洞)에 기거하며 청수를 닦던 이들은 아마 섭수진으로 인한 소란 을 들었나 보다. 금정 신니가 막 대답하려고 입을 떼려는 순간!


멸절 신니의 외침이 있었다. "어딜 움직이는 게냐?" 말과 함께 이미 그녀의 몸은 섭수진과 엇갈리고 있었다. 섭수진은 다만 귓전에 다시 들리는 금정 신니의 전음에만 정신을 쏟고 있었다. "피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멸절 신니의 공격을 받은 가슴 부근이 뻐근해졌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입을 통해 넘어간 환약이 만들어 내는 열기가 더욱 무서웠다. '도대체 이게 무엇이기에.' 정신이 흐려졌다. 설마 이렇게 죽는 것은 아닐 테지! 마지막으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항상 장난기 가득하던 청년의 얼굴! 결국은 사부의 은혜보다도 정에 연 연하다니, 사부의 파문 조치는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섭수진은 쓰러졌다. 쓰러지는 그녀의 귓전으로 또다시 사부의 말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전음(傳音)이 아니었다. "저애를 지뢰(地牢)에 감금하라. 사문의 영에 거역하였으니 별도의 영이 있을 때까 지는 일체의 음식도 금한다." 탈출하라고 전음한 것은 당신이 아니었습니까? 사부여! 섭수진은 금정 신니의 처 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그러기에는 이미 그녀의 신지는 얼마 남 아 있지 않았다. 가물거리는 의식 사이로 떠오르는 진소백의 얼굴은 사부에 대한 원망을 오히려 흐 려 놓았다. 금정 신니는 섭수진이 완전히 의식을 잃음을 보고 몸을 돌렸다. 두 명의 사숙에게 합장하며 그녀는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설명 올리겠습니다." 아미파의 아미옥녀! 이월 초닷새! 파문 결정. 3 검고 붉은 옷을 각각 걸친 두 명! 이곳은 그들의 옷 색깔에 어울리는 기운이 뭉실 피어오르는 대전(大殿)이었다. 능히 한 곳의 패주가 되고도 남을 기도를 풍기는, 두 명의 나이를 알 수 없는 복 면인은 지금 무릎을 꿇고 극경의 예를 표하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붉은 태사의 위로 서서히 핏방울이 한두 방울 나타나기 시작했 다. 핏방울은 나타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인간의 형체를 만들었고, 곧 태사의 위에 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두 복면인은 극경의 어조로 말했다. "산주(山主)를 뵙습니다." 산주라! 당금 무림에서 산(山)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문파는 단 하나뿐이다. 흑혈산(黑血山)! 산주(山主)는 입을 열었다. 인간의 형태라 하지만 뼈와 살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 다. 붉은 진흙이 뭉쳐진 것 같은 그의 입은 열렸다기보다는 일그러졌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혈경(血經)에서 얻은 모든 마학(魔學)은 이제 완성되었다." 그의 음성도 흡사 흙그릇을 비비는 것 같았다. "백여 년 간 숨죽여 왔던 우리의 힘을 이제 천하에 보인다. 흑산(黑山)!" 그의 부름에 검은 복면인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넌 각 문파에 속한 첩자들을 움직여 혼란을 극대화시킨다. 그리고 혈산(血山)!" 붉은 옷의 복면인이 복명하자 산주가 예의 질그릇 소리로 명령했다. "악마혈(惡魔血)과 비폭산(飛暴散)은 이미 완성되었다. 혈마대(血魔隊)를 이끌고 중 원을 피로 씻어라." "존명!" 피를 부르는 명령이 내려졌다. 흑혈산주의 웃음 소리는 그 피가 무섭도록 진할 것 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피! 혼란! 강호가 피에 미쳐 날뛰도록 하라! 죽음과 공포만이 살아남도록 하여라. 크하하하!" 흑혈산(黑血山)! 어둠과 피로 물든 산이 서서히 태동하고 있었다. 강호는 피를 피하지 못할 운명인가? 오늘은 이월 하고도 초엿새! 혈왕교(血王敎)를 대비하려는 대규모의 무림대전(武林大典)이 열흘 남아 있는 시점 이었다. * * * 아미와 같은 불문에 지뢰(地牢)가 있음은 어떻게 설명할까? 이 뇌옥은 본래 문파 에 위기가 닥쳤을 때, 무공을 모르는 불법승(佛法僧)들을 피신시키고자 만들어졌다 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외진 곳에 위치했다는 점 때문에 반도(叛徒)를 감금하는 장소로 이용되면서 지뢰라는 이름이 붙었다. 섭수진은 어둠 속에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가슴의 기복(起伏)이 불규칙하여 그녀를 지뢰에다 던져 넣은 아미의 다른 제자들 은 섭수진이 매우 큰 내상을 입었다고 생각했다. 멸절 신니의 금강권을 바로 맞았으니 오죽할까? 정신을 잃고서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는 아미옥녀! 한참의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 한 일이 일어났다. 점차로 섭수진의 호흡이 정상을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 이상한 일은 그토록 엄중한 내상을 입은 듯 보였던 섭수진이 눈을 번쩍 떴다 는 것이다. 눈에서는 전혀 상처 입지 않은 사람 같은 신광이 뻗어 나오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 하지 않는가? "이곳은...?" 그녀는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 들었던 사부의 외침을 기억해 내었다. "지뢰(地牢)로구나! 난 갇힌 것인가?"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아미의 차기를 책임질 기재로 촉망받던 자신이 이런 처지에 빠지게 되다니! 장문 인의 말! 사부 금정 신니가 처음 전했던 전음은 거짓이었던가? 왜 사부는 자신을 제압했을까? 섭수진은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았다. 동굴 속에 무슨 다른 통로가 있겠는가? 하지만 자신의 몸이 이처럼 멀쩡한 것은 금정 신니가 탈출할 여력(餘力)을 주기 위해 안배한 것이라 섭수진은 믿었다. 툭! 툭! 벽의 구석구석을 쳐보고 다니는 섭수진! 둔탁한 반향(反響)을 내던 벽이 어느 한곳


에 이르자 다른 곳과 틀린 울림을 보였다. 통! 통! 분명히 비어 있는 공간이었다. 소리는 돌로, 흙으로 차 있는 다른 벽과 많이 틀렸다. 섭수진은 어둠을 더듬으며 무언가를 열심히 찾았다. 벽이 비어 있다는 것은 너머에 공간이 있다는 것이고, 이런 곳에 공간이 있다면 당연히 건너갈 장치가 준비되어 있을 것이 아닌가?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아무리 찾아봐도 기관장치로 보이는 건 없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금정 신니가 전음과 함께 이상한 단약을 먹여 중상을 입은 것처럼 보이게 하고서 는 지뢰에 가둔 일을 연관(聯關)시켜 생각한 것이 잘못된 판단일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들었다. 섭수진은 힘껏 벽을 두들기며 외쳤다. "아니! 내 생각이 맞을 거야. 분명히 통로가 있을 거라구." 퉁 하고 울리는 소리만 내야 하는 벽이 다른 응답을 했다. 놀랍게도 말을 하는 것이다. "당신 말이 맞소! 길은 분명히 있소." 섭수진은 놀라 다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 벽이 말을 하다니! 하지만 그 말이 벽 뒤에 있던 사람이 한 것임을 아는 데는 그 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기이잉! 벽은 소리를 지르며 열리고 있었다. "통로는 있지만 그쪽에서 열 수는 없소. 이쪽에서만 작동시킬 수 있도록 한 것은 불법승들이 일단 숨은 뒤,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의도였을 게요." 벽이 열리면서 나타난 청년! 그의 설명은 섭수진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이 사람이 왜 여기에서 나오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겐 아무것도 의미가 없었다. 섭수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 청년이 무척이나 미웠다. 지난 일 년! 처음에는 알지도 못했던 사람이 왜 이 일 년간 쉬지 않고 떠올라 자 신을 괴롭혔는가? 심지어 파문을 선고받고 정신을 잃는 순간까지 그가 떠올랐었다. 어쨌든 섭수진은 이런 오랜 기간의 미움에도 불구하고 그를 때리거나 치지 않았 다. 다만 한 마리 비 맞은 새처럼 잽싸게 그의 품으로 날아들었을 뿐이다. "난! 나는..." 섭수진은 감정이 북받쳐 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말 많은 청년의 입은 조금도 쉬지 않았다. 섭수진이 느끼는 감회가 어떻건 그는 상관없는 듯! 자신의 품으로 뛰어든 여인을 안은 채로 쉴새없이 조잘거리는 사내의 입이 섭수진은 또다시 미워졌다. "...아무래도 혈왕교 측이나 풍림서의 첩자가 남아 있을지도 몰라서 말이오." "..." "...금정 신니께서 참 힘든 방법을 사용하셔서 당신을 우리 측에 보내 주신 듯하


오." 뭘 이렇게 길게 떠드나? 섭수진은 그의 입을 막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두 손은 그의 등을 껴안고 있으 니 뭘 사용한단 말인가? "아야!" 사내가 입술을 잡고 뒤로 물러났다. 섭수진이 깨물어 버린 탓이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려도 사내는 계속 떠들어댔다. "아고고! 아프긴 하지만 기분은 좋군. 어쨌든 오랜만에 만나니까 입맞춤도 해주는 구려. 옛날엔 실패했었는데..." 섭수진이 화들짝 놀라며 대꾸했다. "내가 언제... 지금은 깨문 것이지 입맞춤은 무슨..." 하지만 그녀는 말을 멈춰야만 했다. 진소백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막아 버렸기 때 문이었다. 긴 시간! 오랜 추억들이 머릿속을 유영하며 지나갔다. * * * -이제 군영회의 구성원들은 거의가 모였소. 보안을 위해 이런 방법을 택했던 것이 니 이해하시구려. 일은 모두 두 가지로 진행하겠소. 흑혈산의 일과 천추학림의 의 문! -아야야, 아직 팔이 다 낫질 않았으니 조심해 주시오. 팔은 잡지 말고 여기 입술은 잡아도 되는데, 아얏! 제 8 장 일어나는 피보라 1 서열(序列)이라는 것! 강호문파에서 위와 아래는 뚜렷이 정해지며 어떤 경우라도 아랫사람이 어른을 범 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하극상(下剋上)을 범한 자들은 무림 도의(道義)를 위배한 책임을 물어 배척하는 것 이 강호의 오랜 전통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강호는 어떤가? 아니,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지금 강호 밥을 먹고 사는 태화보(泰華堡)의 사정은 어떠한가? * * * "크흑!" 피가 분수처럼 뿜어지는 자신의 가슴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노인 은 태화보의 보주 용호권(龍虎拳) 번횡(番宖)이었다. 그의 앞에 서서 검자루에 묻은 피를 닦아 내는 청년! 번횡이 늦게 받아들인 제자 이며 평소 사부에 대한 효성이 가장 지극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자였다. "네, 네가 왜...?" 가슴이 찔린 상태에서 말하기가 쉽지 않았나 보다. 번횡의 말은 계속 끊어졌다. 어쩌면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한 분노와 불신이 너무 컸는지도 몰랐다. 믿고 대했던 제자에게 암습을 당하다니! 청년은 피를 다 닦아 낸 칼을 앞뒤로 뒤집어 확인하더니 칼집에 넣으며 지나가듯 이 말했다. "늙었으니 죽을 때가 되지도 않았소? 어차피 몇 년 차이가 아니니 날 위해 조금


앞당겨 가시오." 번횡은 분노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가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리고서도 아직 서 있는 것은 무공의 고강함뿐 아니라 눈을 감기 힘든 원한의 영향이 컸다. "이, 이놈! 세 명 사형들이 널 그냥 두지..." 청년말고도 번횡에게는 세 명의 제자가 더 있었다. 그 중 대제자는 인품이 후덕하지만 인간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더없이 잔인하여 혈판관(血判官)이란 칭호를 받고 있는 자였다. 번횡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대제자 혈판관이 얼굴이 벌겋게 변한 채 들어왔다. "이놈아! 이게 어찌 된 게냐!" 믿음직한 제자의 음성을 들은 번횡은 죽어 가는 상황에서도 일말의 안도를 얻었 다. 하지만 번횡의 양손을 보는 순간 그의 눈빛은 절망으로 빛이 급격히 꺼져 갔 다. 혈판관은 피를 콸콸 쏟고 있는 사부를 본 척도 하지 않고 넷째에게 다가갔는데, 그의 양손에는 두 개의 수급이 들려 있었다. 둘째와 셋째 제자의 수급이었다. "어찌 된 게냐? 아직도 시간을 끌고 있다니. 만일 늙은 놈들이 보게 된다면 귀찮 아지지 않느냐?" 넷째는 찔끔하며 다시 검을 뽑아 번횡을 찔렀다. 일검이 더해졌으니 보다 확실히, 보다 빨리 사부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넷째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젠장, 다 닦아 놓았었는데...' 다시 검에 묻은 피를 보며 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 * * 진무표국(震武標局)의 국주(局主)인 공손후(公孫厚)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대금만 해도 은자 백 냥이 넘는 대형(大型) 의뢰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보통의 자잘한 의뢰라면 은자 열 냥이 넘지 않는 것이 일반이었으니, 한 번으로 열 번이 넘는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에 공손후의 입은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며칠 전에 시녀(侍女) 하나가 실종되는 일이 벌어져서 표국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 었는데, 이런 큰 건수가 들어오니 모두 흥겨워했다. '모두가 항상 부처님께 기원드리는 마누라 덕분이다. 내가 마누라는 참 잘 얻었단 말이야.' 아내의 일과는 후원에 지어 놓은 법당에서 부처님께 비는 것이었다. 며칠 전 뒤숭숭한 표국을 위해 빌어 본다고 법당으로 들어가 두문불출(杜門不出) 하고 있는 그의 아내! '내가 법당으로 가면 무척 싫어하지만 오늘같이 기분좋은 일은 꼭 알려 줘야지! 마누라가 모시는 부처님 덕인지도 모르니까 말야.' 공손후는 옷소매 속에서 거금을 들여 구입한 금으로 된 머리 장식을 다시 꺼내 보 았다. 그의 아내는 기도하는 동안 누가 방해하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으므로 무마용으로 구입한 물건이었다. "크크, 이 정도면 마누라도 화를 풀겠지." 법당 앞은 조용했다. 하지만 공손후는 설명하지 못할 불안함을 느꼈다. 풍겨 오는 향 냄새 사이로 이 상한 비린내가 섞여 온 탓일까? '혹시!'


공손후는 달려갔다. 혹시 안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했을까 걱정이 되었던 까닭이다. "여보! 무슨 일..." 왈칵 문을 열어제친 공손후는 말을 잃었다. 실종되었던 시녀 앵앵(鸚鸚)이 자신을 노려보았던 까닭이다. 하지만 이것은 공손후만의 생각이었고, 앵앵은 결코 그를 노려보지 못한다. 천장에서 내려온 끈에 목을 매달고 있는 자는 그 누구도 노려보지 못할 것이다. 앵앵의 시체 가랑이 사이에서는 끊이지 않고 피가 한 점 한 점 떨어지는데... 그 피가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부처의 정수리였다. 이 무슨 불경(不敬)인가? 공손후는 자신의 아내가 평소 얼마나 부처님을 공경했었 는지를 알고 있었다. 만일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법당 안이 이런 모습이 될 것인 가? 하지만 공손후의 짐작은 또다시 틀리고 말았다. 그의 아내는 멀쩡한 모습으로 법당의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한올의 옷가지도 걸치지 않은 전라(全裸)의 모습으로. 아내가 방긋 웃었다. "당신이 왔군요. 참 불행한 일이에요. 미리 연락을 주셨다면 이런 모습을 보여 드 리지 않았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웃음이 나온단 말인가? 그는 눈앞의 여인이 진실로 자신의 아내인지 궁금해졌다. 공손후가 말문이 막혀 서 있자 아내가 다시 웃으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풍만한 가슴이 출렁이고 다리 사이의 검은 부분이 꿈틀거렸다. 붉은 기운이 자르 르 흐르는 여인의 나신(裸身)이 성욕(性慾)보다는 오히려 공포(恐怖)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공손후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당신은... 당신은 도대체!" 아내는 달콤한 미소를 띤 채, 공손후의 목에 매달렸다. "그러기��� 말하지 않았던가요. 함부로 이곳에 오지 말라고..." 목소리만은 더없이 부드럽다. 하지만 이것은 공손후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목을 일 각 동안이나 계속 조르던 아내는 공손후가 완전히 죽었음을 확인한 후에 야 손을 풀었다. 딸랑! 공손후의 소매 사이에서 머리 장식이 하나 떨어졌다. "어머, 참 예쁘네. 교주(敎主)님을 맞을 때 해야겠다." 아내는 머리 장식을 집어 들며 말했다. 그녀가 손을 휘두르자 바닥에 놓였던 옷들 이 저절로 날아왔다. 왜 공손후가 한 번의 반항도 못 하고 목이 졸렸는지 이해가 되는 내공(內功)이었 다. 그녀가 한바퀴 돌고 나자 옷은 어느새 그녀의 전신을 감싸 또다시 마녀를 정숙(貞 淑)한 공손후의 아내로 변신시켰다. 정숙한 여인 한 명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법당을 빠져 나갔다. 두 눈을 부릅뜬 채로 굳어 버린 공손후의 시체! 멀리서 들려 오는 아내의 목소리가 그 위를 흘렀다. "그이가 어딜 가셨나? 한동안 기도에만 전념했더니 혹시 나를 잊으신 건 아닌가?"


* * * 곳곳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 어떤 것은 세상에 알려지고 어떤 일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제자가 스승을 죽이고, 아내가 남편을 죽이며, 친구가 친구를 죽이는 일들이 천하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이런 패륜이 일어나는 걸까? 인륜(人倫)과 도덕(道德)을 무시하며 오로지 힘과 피만을 추구하는 무리들. 이들은 백여 년 전에도 한 번 모습을 드러냈었다. 워낙 잔인했던 그들을 강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혈왕교(血王敎)! * * * 이월 열하루. 강호 각파의 영수들은 봉서를 한 통씩 받았다. 금방이라도 피를 쏟을 것 같은 적색의 봉투는 실로 백여 년 만에 강호에 모습을 드러냈다. 혈루지(血淚紙) 위에 검게 쓰여진 글! 하지만 그 글을 보기 전에 이미 웬만한 강호인은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적색의 종이를 사용하는 문파는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혈왕교! 백여 년 만에 다시 나타난 이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시위라도 하는 듯 강호 전역에 단 하루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봉서를 전달했다. 중원 십팔만 리라고 했다. 게다가 하늘의 별과 같이 수많은 강호의 문파들을 동일한 시간에 방문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인원이 혈왕교에 속해 있을까? 강호인들 마음속에서 공포가 자신의 존재를 서서히 확인하고 있었다. 2 이월 보름! 이날은 강호인들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태산에서 있었던 예비 모임을 거쳐 본격적인 강호인들의 회동이 있는 날인 것이 다. 모임 장소인 신주평(神州坪)은 백여 년 전 두 번에 걸친 혈왕교와의 대전이 있었 던 장소였다. 백이십 년 전! 누구도 잊지 못할 혈마지겁(血魔之劫)이 있었다. 악에 대한 추종으로 뭉친 마인들의 집단, 혈왕교(血王敎)! 그들은 악했고 독했으며, 또한 너무나 무서웠다. 그들 독문의 절독(絶毒)인 악마혈(惡魔血)과 암기 형태의 폭약인 비폭산(飛暴散)의 위력은 그야말로 가공(可恐)! 게다가 싸움의 주력이었던 혈마대(血魔隊)의 무공은 강호의 기존 무공과는 등급 (等級)을 달리했다. 강호에 나타난 지 두 달 만에 열아홉 개의 방파가 무너지고 열두 개의 방파가 흡 수되었다. 모두 대방파만을 지칭한 것이니 군소문파까지 합한다면 그 수가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의 횡포가 석 달째 접어들 때! 혈왕교의 만행을 참지 못한 구파(九派)가 마침내 일어섰다. 필연적으로 이어진 신주평(神州坪)에서의 대회전(大回戰)! 혈왕교의 주력과 구파의 연합 세력이 맞붙었다. 그러나, 결과는 믿기 싫을 정도로 참담했다. 구파의 정영(精英)들로 이루어진 영웅대(英雄隊)는 몰사(沒死)당하고, 일부 방파는 장문인마저 잃는 비극을 맛보았다. 악마혈(惡魔血)! 구파 내부에 숨었던 혈왕교의 간세들이 풀었던 악마혈독은 모든 구파 고수들의 공 력을 마비시켰다. 뒤이어 쏟아진 비폭산(飛暴散)의 가공할 위력 앞에 구파의 정예들은 지리멸렬(支 離滅裂)하고 말았다. 자신의 내공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한 구파의 정영들은 혈마대의 마도 앞에 목이 달아났다. 이어 중원 곳곳에서 자행된 만행을 어찌 말로 다하랴? 도의(道義)는 땅 에 짓밟혔고, 인륜(人倫)은 혈왕교의 혈수 아래에서 노리개가 되었다. 구파마저 패퇴시킨 혈왕교의 기세는 극에 다다랐으며 어디에도 그들을 막을 힘은 보이지 않았다. 천하는 암흑에 잠기는 듯했다. 하나, 강호의 넓음과 깊음을 어찌 범인의 척도로 재랴? 천하 곳곳에 숨어 있던 잠 력(潛力)들이 서서히 세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혈왕교의 좌절은 변방(邊方)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중원에 만족하지 못한 혈왕교는 마침내 변방에까지 그 야욕의 손길을 뻗었다. 당연히 변방이세(邊方二勢)로 일컬어지던 천룡사(天龍寺)와 설산(雪山)의 성모궁 (聖母宮)과 격돌하기에 이르렀다. 혈왕교의 십팔로(十八路) 혈군(血軍)이 천룡사와 성모궁의 강한 반발에 막혀 교착 상태를 유지하자 중원인들의 놀람은 컸다. 평소 변방의 문파로 무시(無視)하던 변방이세의 무력(武力)에 새삼 스스로의 힘을 돌이켜 보았던 때문이다. 혈왕교에 짓밟힌 중원! 또다시 짓밟힌 자존심! 그리고 마침내 중원의 자존심을 지키는 숨은 기인과 세력들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 작했다. 벽력(霹靂)과 천검(天劍), 붕권(崩拳)과 독절(毒絶)의 사대세가(四大勢家)가 천하 각 지에서 일어나 혈왕교를 몰아쳐 갔다. 더불어 개선( 仙)이란 출중한 인물에 의해 종전의 거지 집단에서 강호의 강자로 떠오른 개방이 천하제일방(天下第一幇)을 표방하며 혈왕교 타도(打倒)를 선언했다. 이어 전설로 내려오는 귀곡자의 의(醫), 기(機), 무(武) 삼절(三絶)을 이었다는 장춘 곡(長春谷)마저 출현하자 중원의 전세는 급변! 혈왕교의 마세(魔勢)와 백중지세(伯仲之勢)의 대결을 벌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혈왕교와 사대세가, 개방, 장춘곡 그리고 중원 정파의 잔존 세력이 모여 맹 을 결성했다. 다시 벌어진 신주평(神州坪)에서의 이차(二次) 회전! 하늘과 땅을 흔드는 놀라운 격돌은 사흘 밤낮 동안 계속되었다. 악마혈(惡魔血)을 장춘곡의 귀곡의절(鬼谷醫絶)로 해독한 중원 백도는 이번만은 쉽


게 밀리지 않았다. 혈왕교의 오대사마존(五大邪魔尊)을 맞아 각 문의 고수들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개선의 용음십이수(龍音十二手)가 허공을 갈랐고, 붕권(崩拳)은 매권마다 바닥을 가르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였다. 벽력세가의 뇌정구(雷霆球) 역시 혈왕교의 비폭산을 능가하는 가공할 위력이 있었 다. 그러나, 싸움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전신에 핏빛 기운을 후광(後光)처럼 두르 고 나타난 괴인! 어찌 인간의 이름으로 부르랴? 혈황(血皇)! 혈왕교의 교주가 등장하며 싸움은 다시 중원 백도의 절대적 불리(不利)로 돌아섰 다. 전멸의 위기감(危機感)에 모든 백도가 몸서리치던 그 순간! 마침내 그들이 나타났 다. 전신에는 눈보다 흰 백의, 가슴에는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성(城)을 그려 넣은 일 단의 무사들! 천외성(天外城)과 무적대제(無敵大帝) 사무적(獅無敵)의 화려한 등장이었다. 모든 강호인들이 오직 감탄을 발하는 일밖에 할 수 없었던 사무적(獅無敵)과 혈황 (血皇)의 가공할 대결! 나흘 밤낮을 끌어 온 대결은 일만 초를 넘긴 후에 천외성주 사무적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땅에 떨어진 혈황의 목을 보며 중인(衆人)들은 잠시 말을 잊었다. 그러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아아-" 얼마 있자 승리를 확인하는 우렁찬 환호가 하늘을 울렸고, 사무적은 곧바로 중원 맹주로 추대되었다. 무림의 인재들은 앞다투어 천외성의 편입을 원했고, 사씨가문의 개인적인 문파였 던 천외성은 강호의 맹주 방파로 다시 탄생하였다. 이 부분이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사씨가문의 화려한 등장이었다. * * * "이곳에 서니 더욱 그들이 생각나는군요." 무골개(無骨 ) 송인(宋仁)이 옆에 서 있는 인의신개(仁義神 )에게 말했다. 천외성이 사라진 지금 혈왕교를 대비하기 위한 강호의 큰 대회를 주관할 능력이 있는 문파는 개방 외에는 없었다. 해서 준비 상황을 둘러보기 위해 개방의 용두방주(龍頭幇主) 인의신개와 장로인 무골개가 여기 나왔던 것이다. 송인이 말한 그들이란 천외성을 세웠던 사씨가문의 사람들을 말함이었다. 인의신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천외성이 그처럼 갑작스럽게 해체되다니. 아무리 강호의 여론이 나빠졌다고는 하 나..." 송인도 인의신개의 말에 동감이었다. 비록 혈경을 개인적으로 보관했던 잘못은 인정되었지만, 옛날의 혈겁에서 혈황을 맞아 싸웠던 것은 사무적이었다. 만일 그들이 없었다면 강호는 아직도 혈왕교의 통치 아래 있을는지도 몰랐다. 한데 강호는 솥 안의 기름처럼 들끓으며 천외성을 비방했고, 결국 그들이 강호를 떠나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이득을 볼 자들은 혈왕교 무리밖에는 없다는 것이 송인의 생각이었다. "진소백 공자의 말을 들어 보니 사씨가문에서도 사정이 있었다 합니다. 사경천 성 주가 중수(重水) 중독으로 인한 내환(內患)이 상당히 깊었었다고." 인의신개가 침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나도 들었네. 어쨌든 서둘러야겠어. 천외성이 사라지니 강호의 잡일은 우 리가 맡게 되었구먼." "모임에 찬동한 각파에서 돈과 자재들은 보내 왔습니다. 우리 문파는 거지들의 집 단이니 돈은 없고 인력(人力)만 대라는 뜻인 듯합니다." 송인은 침을 한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 "문제는 혈왕교가 이미 움직이고 있는 듯한 움직임이 곳곳에서 포착되었다는 겁니 다." "보고를 들었네. 여러 문파에서 인륜(人倫)을 거스르는 반란이 있었다고." "아마 포착되지 않은 사건까지 합한다면 더욱 많을 것입니다. 모든 형태가 백여 년 전 혈왕교의 혈마지겁(血魔之劫) 때와 비슷한 형태인지라..." 인의신개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휴! 최대한 서둘렀는데도 이 지경이니... 천외성이 있었다면 보다 대응이 신속했을 것인데." 그랬다. 천외성이 없음으로 인해 강호의 대응은 몇 배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다. 천외성에서 혈경(血經)이 유출되었다는 소문은 너무나 빨리 강호에 퍼졌다. 그로 인해 강호는 분노했고 급기야 사태는 천외성의 해체까지 연결되었다. 누가 가장 이득을 보았는가? 혈경의 문제는 당연히 혈왕교, 아니, 현재는 흑혈산이라 불리는 쪽에서도 알고 있 었다. 그들은 두 가지의 이득을 동시에 노렸던 게 아닐까? 혈경을 빼내 오면서 강호의 여론이 천외성을 등지도록 만들어 가장 큰 적을 없앰과 동시에 강호의 대응도 늦 도록 만든 것이 아닐까? 인의신개는 내심 심증이 갔지만 강호에 대고 확언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나흘 후면 열리게 될 강호대회!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더라도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이미 곳곳에서 일 어나는 많은 징후들. 게다가 혈왕교의 혈루지(血淚紙)는 이미 각파에 전달이 되어 투항과 멸망 중에 양 자 택일할 것을 강요해 놓은 상태가 아닌가? 아직 투항한 문파는 없었다. 강호인들은 아직 피를 맛보지 않았다. 하지만 혈왕교의 피보라가 본격적으로 일어난다면 혈왕교 밑에 엎드려 목숨을 구 걸하는 문파가 속출할 것이다. 역사가, 백여 년 전의 선례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 전에 강호는 힘을 모아야만 했다. 하나의 구심점(求心點)을 가지고 혈왕교에 대항해야만 했다. 무골개 송인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며 비구름이 시커멓게 몰려왔다. 겨울이 거의 지났으니, 어쩌면 한 번의 비가 지나간다면 봄이 성큼 다가올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강호의 봄은 오지 않을 것이다.


비가 갑자기 쏟아지자 대회장을 마련하고 있던 개방 제자들은 갑자기 바빠졌다. 도구와 숙사를 만드는 데 쓰일 목재들을 덮고 치우느라 분주한 모습을 보며 사람 좋은 무골개는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쏟아 붓듯 내리는 저 비처럼 혈왕교는 너무 갑자기 다가왔다. 개방도들이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자재가 비에 젖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강호가 아무리 분주하게 대비해도 이미 때는 늦어 피 비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은 아닐까? 3 비는 소주(蘇州)에도,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천추학림에도 내리고 있었다. 기름을 먹인 종이를 머리에 쓴 공자 한 명이 천추학림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귀한 신분인가 보다. 그의 뒤에는 시종 한 명이 따르고 있었다. 원래 학림은 중원 각파의 무공을 연구, 보완하면서 동시에 삼십 년 마다 한 번씩 정파의 기재를 모아 교육시키고 있었다. 당연히 철통 같은 보안과 경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걸어가는 공자(公子)는 어떤 신분일까? 경비(警備)와 마주칠 때마다 뭔가를 품에서 꺼내어 보여 주는데, 그때마다 무사 통 과였다. 일곱 번의 관문을 지나서야 공자와 시종은 겨우 천추학림의 본림(本林)에 들어설 수 있었다. 뒤에 선 시종이 공자에게 물었다. 입은 달싹였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으니 당연히 전음이었다. "진 공자! 도대체 아까부터 경비들에게 보여 주는 게 뭐기에 항상 통과 신호가 나 오는 것이죠?" 목소리는 가늘면서도 아름다웠다. 섭수진의 목소리! 그렇다면 앞의 공자는 당연히 진소백일 것이다. 진소백 역시 전음으로 섭수진에게 응답했다. "무엽 진인의 도움을 얻었어. 현재의 임주인 일송자(一松子)가 무당 출신이잖아. 난 그에게 심부름 가는 중이거든. 나야 지금 신분을 숨길 필요가 없잖아. 초의 선 사의 제자 진소백이 무당 장문인의 심부름을 가는데 누가 막겠어?" 그래도 이상한 점이 남는지 섭수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어떻게 길을 아는 것처럼 척척 찾아가요?" "비밀이 있지. 음, 오늘밤에 말해 줄 테니까 좀 참으라구. 에구, 빨리 가자. 빗줄기 가 더 굵어진다." 진소백은 신분을 숨기지 않아도 되지만 섭수진은 현재 아미의 지뢰에 갇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변장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진소백이 짐작하는 대로 풍림서(風林誓)가 천추학림 안에서 자생한 조직이 라면, 신분을 밝히는 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본래의 신분으로 가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진소백의 생각은 달랐다. 풍림서는 자신을 극도로 미워하고 있으니 천추학림 내부에 세력이 있다면 당연히 공격해 올 것이다. 자신이 조금 위험해질 수도 있겠지만 허점 또한 찾기 쉬울 거라는 게 진소백의 생 각이었다. 시종으로 분장한 섭수진도 옆에서 도울 것이니 그리 큰 위험은 없을 것 이라고 그는 큰소리를 치고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불안해 했다.


팔의 관절이 빠졌다 나은 지 아직 이십 일도 채 되지 않았으니 불의의 기습을 당 한다면 위험에 빠질지도 몰랐으므로. 다만 진소백이 위험을 무릅쓰는 이유가 급박한 강호의 상황 탓임을 모두 잘 알고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 * * "이름에 비해 내부의 구조는 지극히 검소하군요." 아무런 장식도 없이 다만 몇 권의 책만 서가에 꽂힌 방안을 둘러보며 섭수진이 말 했다. 책의 내용도 무공에 관한 것이 아닌 마음을 닦는 수양의 글로 채워져 있어, 강호 방파의 방이 아니라 유가(儒家)의 서원(書院)에 온 것 같았다.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천추학림의 구성원은 무공을 연마한 무인보다 학문적으로 무학을 공부하는 학사 (學士)들이 더 많으니 당연해. 게다가 교육 시간의 많은 부분은 마음을 가다듬고 정의감을 기르는 데 할당되지." 진소백은 계속해서 반말을 사용하고 있건만 섭수진은 조금의 거부감고 느끼지 않 고 있었다. "일송자가 내일이나 돼야 시간이 난다니... 오늘밤부터 당장 학림 내부를 염탐할 생각이신가요?" 진소백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거야. 그냥 얘기나 하면서 지내자구. 우리보다 마음이 급 한 사람이 있을 터이니... 뭔가 움직임이 있겠지." 진소백은 풍림서와 천추학림의 관계를 알아 내러 이곳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가 먼저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만일 학림이 풍림서와 관련이 없다면 굳이 진소백이 염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 관련이 있다면 진소백이 온 것을 이미 알았을 터이니 뭔가 움직임을 보일 것이 다. 진소백이 기지개를 켜며 느긋한 표정으로 침상에 눕자 섭수진은 턱을 괸 채 의자 에 앉았다. "그냥 잘 건가요?" "자지 않음?" "말해 주기로 했잖아요?" "뭘 말야?" "천추학림에 대해서 당신은 상당히 잘 아는 것 같아요. 이유를 말해 주기로 했잖 아요." 진소백은 몸을 일으켜 침상 위에 앉았다. 이어 옆 자리를 탁탁 치며 말했다. "이리 오라구! 내가 아주 상세히 설명할 테니." 섭수진은 의자에서 일어나 진소백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옆 자리에 앉았건만 진소백은 미소를 짓지 않고 비명만 질러대었다. "아구구! 팔 아직 아프단 말야. 좀 조심해서, 아윽!" 비록 공력을 이용해 음파를 차단하고 있기는 했지만 너무 소리가 크다고 생각한 섭수진은 진소백의 팔을 누르던 손을 거뒀다. "명심하라구요. 지금은 나보다 약하다는걸! 한 번만 더 엉큼한 소리를 시작한다


면... 각오하세요." 진소백은 팔을 쓰다듬으며 구시렁거렸다. "젠장! 무공을 배운 여자를 사귄다는 놈이 있으면 애초에 말려야지. 힘 좀 있다고 이렇게 남자를 구박하다니." 진소백은 섭수진이 실소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구시렁대는 걸 멈추었다. "좋아. 내 말하지. 내 어린 시절 얘기랑 천추학림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도." 처음으로 진소백의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의 어린 시절! 아직 한 번도 밝혀지지 않았던 얘기들이. 섭수진의 몸이 점점 진소백에게로 다가왔다. 진소백의 말을 보다 자세히 듣기 위함이었지만 섭수진은 아직 몰랐다. 진소백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달리고 그의 손이 은근 슬쩍 섭수진의 머리를 넘 어 등뒤로 돌아가고 있음을. 아니, 어쩌면 그녀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 * * 신주평으로 향하는 관도변에 위치한 주루와 객잔들은 때아닌 호황(好況)에 환호성 을 지르고 있었다. 보름날에 있을 무림대회에 참가하려는 많은 강호인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저마다 자긍심(自矜心)이 가득한 눈을 하고서 무용담을 지껄여대며 삼삼오오(三三 五五) 모여 술을 마시는 강호의 호한들! 하지만 이렇게 시끄럽게 모여드는 자들 중 진정한 강자(强者)는 드물었다. 강호의 대세(大勢)를 좌우하는 강자들은 이렇게 떠들썩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모 르되 지금은 위험한 때였다. 이미 혈왕교의 혈루지(血淚紙)가 곳곳에 배달되었으니 강자들은 스스로의 행동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혈왕교에서 이런 모임에 참석하려는 무림인들의 암살을 시도할 가능성도 있었으므 로. 어쩌면 강자들은 이미 신주평 근처에 도착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신분을 숨기고 있을 때, 강호의 정세를 알지 못하는 피라미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떠들어대고 있었다. 피라미들에게는 무림대회를 구경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자랑거리였던 것이다. 개방( 幇)이 만드는 무림대회 막사(幕舍)는 완성되었다. 드디어 무림대회가 모레로 다가온 날! 인의신개는 남모르게 하늘에 빌고 있었다. 제발 내일의 대회가 무사히 끝날 수 있기를. 혈왕교의 힘이 아직 완성(完成)되지 않아 무림대회에서 별다른 도발을 보이지 않 기를. 그는 이틀이 모자라 한 귀퉁이가 약간 찌부러진 보름달에 빌고 또 빌었다. 이윽고 달이 넘어갈 때가 되어서야 그는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인간의 기원을 하늘이 모두 들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늘에 비친 달빛처럼 세 상 구석구석에 올바른 정의가 실현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 제 9 장 끊임없는 살수 1 "..."


진소백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말이 끝났으니 진소백은 당연히 입을 다물었고 섭 수진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용히 앉아 맑은 눈으로 진소백을 바라보기만 했다. 섭수진은 진소백이 왜 자주 장난기를 발동시키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또래들 과 즐겁게 뛰어 노는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한 그가 이처럼 유쾌한 성격으로 자랄 수 있었던 것도 가끔씩 발동하는 장난기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감추기 위해 더욱 밝은 모습을 보이려는지도 몰랐 다. 진소백은 겸연쩍게 웃으며 바닥에 자리를 만들었다. "이거 참, 그래서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지금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허리를 안아도 섭수진은 반항하지 않았는데 진소백이 먼저 바닥에 잠자리를 만드 는 것이다. 아무리 겉으로 짓궂음을 가장하더라도 본연의 자세는 결정적일 때 나오는 법이었 다. 눕자마자 코를 고는 진소백을 보며 섭수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남자와 같 은 방을 쓰면서도 믿기 힘들 정도로 편안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조금 후 방안에는 남과 여의 고른 숨소리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래도 되는 것인가? 만일 천추학림 내부에 풍림서의 세력이 남아 있다 면... 적의 중심에 들어와 이처럼 편안히 잠들어도 되는 것인가? * * * 섭수진은 꿈을 꾸었다. 진소백의 살아 온 이야기가 너무 기억에 남아서일까? 꿈속에서도 그녀는 참 이상 하다는 생각을 했다. 때때로 꿈인 것을 알면서 꾸게 되는 꿈이 있다. 꿈을 꾸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천추학림의 한 방안에서 잠들어 있음을 알고 있었 고, 이렇게 편안히 잠들면 안 된다는 사실도 생각이 났다. 아마도 진소백과 함께 있는 탓일 것이다. 그를 믿으니 공격에 대비한 긴장이 단박에 풀리며 잠든 것이리라. 그녀의 눈앞에 진소백의 살아 온 모습들이 영상으로 나타났다. 단풍이 우거진 풍림(風林)! 천추학림의 후원에 잘 조성된 숲에서 어린 소년 둘이 뛰어 놀고 있었다. 소년 진소백과 엽혼! 엽자문이 걸어와 엽혼을 얼싸안을 때, 진소백도 근엄한 표정의 삼십 정도의 남자 에게 안기고 있었다. 그가 진소백의 아버지이며 벽력세가의 가주이기도 한 진무외(鎭無畏)임을 섭수진 은 꿈속에서 바로 느낄 수 있었다. 폭약이 무서운 굉음을 내며 터져 나갔다. 아름다운 부인의 몸이 폭발 속에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진소백의 어머니였다. 그 와중에 진무외는 어린 아들을 가슴에 안고 폭발을 자신의 등으로 감당하며 날아갔 다. 수많은 파편(破片)에 휩쓸린 진무외가 죽은 듯 쓰러질 때, 팔뚝 사이로 기어나온 진소백은 아버지를 부르며 울부짖었다. 그 옆으로 구름이 내려오는 듯, 신승 초의의 맨발이 서서히 내려왔다.


온몸에 약을 바르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 있는 진무외를 바라보는 진소백은 이제 상당히 자랐다. 단 한 시간도 쉬지 못하고 끊임없는 연무와 학습에 시달리는 진소백의 모습도 쉬 지 않고 섭수진의 눈앞을 맴돌았다. 하루도 빠지지 않은 과도한 수련으로 상처가 끊이질 않았던 불쌍한 소년의 모습이 섭수진을 괴롭히고 있었다. 초의 선사가 근엄한 얼굴로 말한다. "네 임무는 강호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품고 네 아버지를 해한 자들을 제거하는 것 이다. 그들은 이전의 어떤 세력과도 다르다. 정의를 위해 설립된 천추학림에서 독 버섯처럼 솟아난 그들은 풍림에서 맹서를 했다 하여 풍림서(風林誓)라 부른다." 진소백은 단정한 자세로 앉아 고개를 숙이고 초의 선사의 말을 듣고 있었다. 초의 선사의 말이 끝나자 진소백은 머리를 들었다. 그 눈이 꼭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 같다고 섭수진은 느꼈다. 이때였다. 진소백이 앉아 있던 바닥이 갈라지며 피로 물든 단풍나무들이 마구 솟아올랐다. 잎들은 뾰족한 가시로 변했다가 이윽고 수만 개의 검으로 화(化)하며 진소백을 공 격했고, 어느새 초의 선사는 사라지고 없었다. 섭수진은 자신도 무수한 검들의 공격 속에 노출되는 것을 느끼면서 진소백을 찾아 소리를 지르고자 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아 몸부림칠 때, 진소백의 뒤쪽으로 검이 박혀 온통 피로 뒤덮인 가시넝쿨이 달려드는 모습을 보았다. 피하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녀의 입은 열리지 않았고, 대신 진소백의 입이 크게 벌 어졌다. "피햇!" 놀라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자신의 뒤에도 칼로 이루어진 가시넝쿨이 다가오지 않 았는가? 꿈속임에도 불구하고 가시넝쿨 위에 달린 검에서 전해지는 살기(殺氣)를 섭수진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 * * "피해!" 섭수진은 눈을 번쩍 떴다. 다른 것은 꿈이었지만 진소백이 외친 이 소리는 결코 꿈이 아니었다. 일생처럼 긴 꿈도 단지 눈 몇 번 깜박일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던가? 깨어나 서 섭수진이 본 것은 자신의 머리로 다가오는 검날과 왼쪽에서 검날을 막아 내고 자 차 온 진소백의 발이었다. 꿈속에서 느꼈던 살기는 이것이었는가? 섭수진의 몸이 누운 채로 미끄러져 침상을 내려갔다. 이미 진소백의 발차기에 의해 방향이 약간 틀어진 살수의 검은 헛되이 침상만 찔 렀다. 섭수진은 무사했다. 그러나 그녀를 돕기 위해 자신에게 덤볐던 살수(殺手)를 등한 시(等閑視)했던 진소백은 무사하지 못했다. 손을 놀릴 수 없으니 허벅지를 스치는 검상(劍傷) 정도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섭수진에게는 한 명의 살수만 달려들었지만 진소백에게는 동시에 네 명이 검을 휘 둘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다지 큰 상처는 아니었다. 취한 듯 비틀거리며 공격을 피하는 개방의 절학이 없었다면 더 큰 상처를 입었을


지도 몰랐다. 개선비학 취팔선과천(醉八仙過天)! 살수들의 가장 큰 실수는 섭수진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시종을 상대하도록 한 명의 살수만을 보냈으나, 팔을 못 쓰는 진소백보다는 섭수진이 지 금은 더 큰 상대임을 알았어야 했다. 진소백이 허벅지의 상처를 돌볼 새도 없이 양다리를 연환각(連還脚)의 기세로 정 신없이 차올려 칠 초 만에 살수 중 한 명의 턱을 부수었을 때! 섭수진은 이미 셋을 제압(制壓)하고 있었다. 진소백은 그녀의 무공이 일 년 전과 많이 달라졌음을 느끼며 남은 한 살수의 검을 쳐다보았다. 내리긋는 검을 우측으로 피했다가 다시 기묘한 자세로 돌아가자 진소백의 등이 살 수의 가슴을 향하는 형태가 되지 않는가? 진소백의 동작이 매우 빨라 아직 살수가 내리쳤던 검을 회수하지도 못하는 짧은 순간! 철산고의 수법으로 진소백의 등이 살수를 받아 버렸다. 꿍!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살수의 몸이 허공을 가르고 벽에 부딪혔다. 순식간에 다섯 명의 살수를 제압해 버린 섭수진과 진소백! 이들을 보낸 자들은 대 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이 정도의 무공을 지닌 살수를 보내면서 진소백을 제거할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 터인데... 진소백은 손을, 아니, 손을 쓰지 않았으니 발을 털며 섭수진을 쳐다보았다. "엄청 난 성취군! 내가 손이 다 낫더라도 힘들겠는데?" 섭수진은 생긋 웃더니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아까 했던 얘기 중에서 빠졌던 게 있어요. 지금 시전한 무공 말예요." "또 무슨...?" "개방의 제자도 아니면서 어떻게 개선의 절학들을 그처럼 잘 아는 거죠? 작년부터 궁금했던 건데, 용음십이수도 능숙하게 사용하고... 아마 인의신개(仁義神 )조차 당 신만큼 개선비학( 仙秘學)에 능숙하진 못할 거예요." 진소백은 또다시 빙그레 웃었다. "난 또 뭐라고. 한바탕 싸웠더니 목이 마르군! 물 한잔 마시고 나서 말하지." 의자에 앉아 물을 시원하게 들이킨 진소백은 얘기를 시작했다. 섭수진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진소백을 보았다. "나, 참! 이놈들을 심문해야 되는데 이런 얘기나 먼저 해야 하다니." 섭수진은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웃지 않으면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일단 웃게 되 면 더없이 화사한 표정으로 변해 진소백을 당황스럽게 했다. "이 정도의 실력이라면 결코 중요 인물이 아녜요. 아마 돈에 의해 고용된 삼류 살 수들일 테니... 심문(審問)해 봤자 별소득이 없을 건 벌써 아실 것 아녜요?" 진소백은 내심 미소했다. 섭수진은 아미제일지로 불렸던 총명한 여인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만난 이후로 별다른 총명함을 보이지 못했었다. 그것이 모두 뜻밖에 느낀 남녀간의 감정과 불문의 제자라는 신분 사이의 갈등 탓 이라고 진소백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자 섭수진의 총명함이 슬슬 드러나 기 시작하는 것이다. "좋아, 말하지. 날 가르치신 분들 중에 개방의 전대 고수이신 철혈개란 분이 계시


다고 말했었지? 어느 날 그분의 부탁을 받았더랬어. 개선께서 남기신 그림의 비밀 을 풀어 달라는 개방의 부탁이었지." 진소백이 말하는 동안 섭수진은 물을 따랐다. 그녀도 갈증을 느꼈던 것이다. 진소백은 말하다 말고 섭수진의 손에 들린 잔을 보았다. "그 잔 모양이 전에 어디서 본 것 같아. 그렇지, 작년 비응방에서 앵아(鶯兒)란 시 녀가 차를 따라 준 잔이랑 닮았는데 그래!" 섭수진은 잔을 한번 보더니 물을 들이키고는 진소백을 다시 보았다. "말머리 돌리지 말고 어서 개방의 이야기나 계속하세요. 그림의 비밀은 풀었나요?" "어떤 것 같아? 풀었으니까 내가 익혔지. 용음십이수랑 취팔선보는 모두 거기서 얻은 것이었어." 섭수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이상하다는 눈으로 진소백을 보았다. 그의 얼 굴에 뭐가 묻기라도 한 양. "왜 그래? 내 얼굴이 어디 이상한가?" "아니, 그게 아니라, 좀 어지러워서." 진소백도 뭔가 느꼈다는 듯 머리를 짚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상한걸... 어어!" 섭수진이 먼저 쓰러지고 진소백도 따라서 쓰러졌다. 그의 시선은 좀 전에 마셨던 물에 집중되어 있었다. 물! 그 속에 뭐가 들었었는가? 2 천추학림! 이 거대한 조직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는 신무원(神武院)! 천추학림에 후세(後世)를 보내 교육을 부탁하는 문파가 제출한 무공을 연구하여 보완, 발전시키는 일을 담당한다. 피교육자들의 무공 교육도 맡고 있다. 둘째로 신기원(神機院)! 천하 곳곳의 정보를 수집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일을 하는 곳이다. 또한 인성 교육과 기재들의 자질 검증도 이들의 임무이다. 셋째는 수호원(守護院)! 천추학림을 지키는 모든 경비무사들과 수호전사라 불리는 절정고수들이 여기 속 한다. 그 외 피교육생들이 모여 있는 양생각(養生閣)은 천추학림 중앙에 위치하여 언제 든지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천추학림의 업무는 상주하는 사람이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각파의 인사들이 돌아 가며 보고 있었고, 수호원의 수호전사(守護戰士)들은 그들의 행위가 강호 공익에 맞는지를 감시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천외성과 사대세가에서도 파견 나온 고수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구파의 인물들이었다. 그나마도 천추학림이 세워진 지 백년이 넘어가다 보니 학림에서 교육받았던 천추 학림 출신자들이 대부분의 요직(要職)은 다 차지하고 있었다. 임주인 일송자를 제외한다면 천추학림을 이끌어 가는 모든 거물(巨物)들은 거의 천추학림 출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삼원(三院)의 원주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신무원주와 수호원주는 초의 선사 바로 아래의 제이기(第二期) 수료자(修了者)들이


었으며 신기원주는 다시 한 배분 아래의 삼(三) 기(期) 수료자였다. 비록 한 배분 아래라고는 하지만 가장 주목받는 사람은 신기원주였다. 그의 젊은 나이는 평가에 있어 오히려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젊은 나이에 막중한 지 위에 오르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능력이 뛰어난 경우 하나밖에는. * * * 진소백과 섭수진이 함께 쓰러진 지 얼마나 지났을까? 방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한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라기보다는 소녀에 가까운 얼굴! 십칠팔 세에 불과한 소녀였다. 하지만 아무도 이 소녀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심 아진(深雅珍)은 무시당하기에는 너무나 무서운 아이였다. 그녀가 이곳에 나타나다 니! 과연 천추학림의 내부(內部)에 풍림서가 존재하는가? 그녀가 들어와 진소백의 몸을 뒤진 후 바로 서자 한 명의 중년인이 들어왔다. 일전에 진소백의 추격을 지 휘했던 중년인과 닮았지만 어딘가 다른 구석이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의(紫衣)를 입고 있었다. "이놈이 드디어 잡혔구나. 내가 생각해도 괜찮은 계책이었다." 미약(迷藥)은 진소백의 방에 있던 물에 들어 있었다. 진소백은 이미 천추학림 내부에 풍림서가 존재함을 짐작하고 들어왔을 것이니 매 우 세밀하게 대비할 것이다. 따라서 살수를 보내지 않는다면 당연히 매사에 의심할 것이다. 그래서 중년인은 살수를 보냈다. 별로 기대는 않았지만 굳이 살수를 보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진소백의 예상대로 살수를 보내 주어 긴장을 풀도록 함이 그 첫째였고, 싸움 뒤에 갈증으로 물을 마시도록 함이 그 둘째였다. 계획이 정확히 맞아떨어져 진소백은 지금 바닥에 누워 있다. 자의중년인은 자신의 형조차 농락했던 진소백을 마침내 사로잡았던 것이다. "이놈이 일전에 형님을 그토록 화나게 했던 장본인이냐?" 심아진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두 팔의 관절을 상하게 했었는데, 초의가 비록 치료를 해줬다 지만 아직은 낫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살수를 상대하면서 손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과연 심아진은 심화절의 딸로서 손색이 없었다. 짧은 시간에 장내에서 싸웠던 흔적으로 형세까지 분석해 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 이 아니었다. 자의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소백과 섭수진을 가리켰다. "어서 이들을 옮겨라. 형님께서 이를 갈고 계시니 직접 신문(訊問)하도록 해야겠 다." 심아진은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근처에 와 계시니 즉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후 진소백과 섭수진은 마차 안에 실렸다. 진소백은 마차에 실려 어디론가 옮겨지는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 처음은 의도된 계책에 의해 잡혀갔었지만 지금은 어떤가? 진소백은 지금 의식이 있는가? * * * 비는 이틀째 쉬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비가 억수같이 퍼부어도 절대 멈춰서는 안 되는 마차가 있었다. 음식물을 실은 마차와 오물을 실은 마차! 천추학림에 들어올 때는 음식물을 싣고 오고, 밖으로 나갈 때는 오물(汚物)을 싣고 나가는 마차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원래 오물은 음식이 인간의 몸을 통과하면서 변화된 것이니 결국은 같은 근원이 아닌가? 근원(根源)이 같은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오물 근처에서 음식을 먹지 않 는다. 어떤 차이가 있어서인가? 오늘 음식 마차에는 이전과는 다른 짐꾼이 하나 앉아 있었다. 몸은 다른 짐꾼들 못지않게 건장한데 일하는 모습은 영 서툴렀다. 비를 맞으면서 도 열심히 음식물을 끌어내리는 짐꾼들 옆으로 한 대의 마차가 지나갔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지나가는 마차는 지붕도 없으니 안에 탄 사람은 비를 흠뻑 맞 지 않겠는가?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마차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으므로. 다만 누런 천으로 덮인 물체가 놓여 있었는데, 투시 능력을 갖춘 사람은 없으니 그 안에 든 물체가 사람이라는 것을 알 리 없었다. 새로 온 짐꾼만이 귀를 쫑긋하며 마차 쪽을 유심히 쳐다봤을 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마차는 곧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 * * 천추학림은 삼십 년마다 한 번씩 수료자들을 배출했다. 칠십 년 전 있었던 제일기 수료자들 중에서 단연 뛰어났던 인물은 초의 선사였다. 초의 선사 외에도 수료자 중에서 여섯 명의 뛰어난 인물을 묶어 천추학림에서는 칠걸(七傑)이란 칭호를 주었다. 제이기 수료자 중에는 특별히 뛰어난 인물이 없었다. 열 명이 그 중 돋보였지만 초의와 같이 걸출한 인재는 없었다. 이들 열 명을 강호 에서 부르는 이름이 무림십정(武林十正)이었다. 하지만 명심할 것은 걸출(傑出)하 지 못하다는 말이 결코 이들의 능력이 얕다는 의미가 아니란 점이다. 적어도 이들은 추리고 추린 인재들 중에서도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던 사람들이 었으므로. 제삼기 수료자들은 가장 화려했고 불운했다. 개개인이 초의 선사와 맞먹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던 다섯 명이 동시에 제삼기에 속했다. 천추학림은 이들에게 특별히 오룡(五龍)이란 칭호를 부여했으며 화려한 평화 무림 을 꽃피울 기대를 크게 걸었다. 그러나... 엽자문은 불행한 일을 당하여 돌연사했으며, 진무외는 알 수 없는 폭발 사고로 일가족이 몰살당하였다. 남은 천일독과 남궁중, 호대철도 지난 이십 년간 충격으로 강호 활동을 전혀 하지 않다가, 당금에 이르러서야 대륙오행련(大陸五行聯)이란 단체를 만들어 나타났다. 심화절은 최후까지 오룡(五龍)의 자리를 놓고 다섯 명과 경합(競合)하다가 떨어진 사람에 속했다. 역시 마찬가지로 오룡의 자리에 아깝게 오르지 못했던 인물로는 종수(鐘秀)를 들 수 있었다. 그 외 갈무생(鞨無生) 등도 능히 제이기(第二期)의 십정(十正)에는 비견될 만하였 으나 오룡이 워낙 뛰어났던 탓에 소외되었다는 표현이 알맞을 것이다. 어쨌든 이들 중에서 심화절이 풍림서의 인물이라는 사실은 진소백에게 천추학림


을 확실하게 의심하도록 만드는 근거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현재는 제사기 수료 예정자인 기재들이 천추학림에 모여 수련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세 명의 기재들이 돋보였는데, 천추학림에서는 그들에게 삼군(三君)이란 칭 호를 부여하고자 검토 중이라 한다. 오룡(五龍)과 비견될 만큼 뛰어나다는 의미였다. 이남 일녀로 구성된 세 명의 성취는 그들의 나이를 감안한다면 거의 오룡과 맞먹 는다고 했다. 어린 시절 실종되고 쫓겨난 두 명이 더 있었다면 오군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인데. 일부의 사람들만 어린 시절 실종되었던 천추학림의 기재 둘을 기억하고 있었다. 엽혼과 진옥백(鎭鈺栢)! 진소백의 어린 시절 이름이 바로 진옥백이었으며, 그는 진무외의 아들이었다. 그들 이 천추학림을 떠난 후, 천하를 뒤져 찾아 낸 세 명의 기재가 바로 삼군이었다. 두 명의 지나간 인재를 기억하면서 때때로 인재를 잃었음을 아쉬워하는 사람도 이 제는 거의 사라져 가고 있었다. * * * "형님은 언제 오신다더냐?" 자의중년인은 한시라도 빨리 진소백을 넘겨주고 싶다는 어조로 심아진에게 물었 다. "곧 돌아오실 것입니다. 귀찮은 일을 맡게 되셔서 한 번씩 돌아보셔야 하는 모양 입니다." 바닥에는 진소백과 섭수진이 누워 있었다. 장소는 바뀌었지만 그들의 처지는 바뀌지 않았다. 자의중년인은 마음이 조급(躁急)한 듯 왔다갔다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를 쳐다보는 심아진의 입꼬리에 경멸의 미소가 살짝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흥! 형의 힘으로 먹고 사는 식충이... 언젠가는 너도 내 발 아래 엎드리게 될 것이 다.' 자의중년인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참, 이놈들의 혈도는 짚었느냐?" 심아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하나 미약(迷藥)을 먹었으니 당분간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멍청한 것 같으니. 그러다가 깨어나기라도 하면 어쩌려는 게냐. 듣자 하니 여자의 무공도 상당하다던데... 어서 혈도를 눌러서 내공을 끌어올리지 못하도록 해야지!" "알겠습니다.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심아진은 자의중년인이 보는 눈앞에서는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뒤돌아 선 그녀의 눈에 어린 것은 표독한 살기(殺氣)였다. '흥! 큰소리치다니. 조금만 기다려라. 감히 내 눈조차 똑바로 보지 못하도록 만들 어 주마.' 심아진은 손을 들었다. 그녀는 지금 매우 화가 났다. 하지만 당분간은 화를 삭여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 이었다. 지금 방안에서 그녀가 화풀이를 할 상대는 정확히 두 명이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이미 구원(舊怨)도 있는 사이이니... 당연히 심아진의 손은 내공을 끌어올려 혈도를 짚고자 들렸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에 어느새 반짝이는 비도! "이것이 혈도를 짚는 것보다는 더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심아진은 독한 구석이 있었다. 혈도를 짚기보다는 비도로 근육을 끊어 버리는 확 실한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진소백은 이미 그녀의 비도에 관절이 찢긴 적이 있었으니, 어찌 생각하면 악연(惡 緣)도 보통 악연이 아니었다. 심아진의 비도가 아래로 내려왔다. 향하는 곳은 진소백의 무릎! 만일 무릎뼈가 부서진다면 진소백은 다시는 제대로 걷지 못할 것이다. 절명의 순간! 섭수진의 손끝이 꿈틀거림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특히 심아진의 과한 행동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자의중년인은 전혀 보지 못했 다. 3 앵아(鶯兒)의 찻잔! 일 년 전 비응방에서 앵아란 시녀는 차에 오보산(五步散)이란 독을 넣어 금사진의 딸 금청청을 납치했던 일이 있었다. 섭수진이 마시려던 물잔은 앵아가 가져 왔던 찻잔과 비슷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진소백은 왜 앵아의 얘기를 했던 것일까? 잔의 모양은 비슷하지 않았으 니, 비슷한 것은 속에 든 내용물이 아닐까? 마시는 듯 입에 넣었다 물을 뱉는 동 작은 그다지 어려운 게 아니었다. 정작 어려운 것은 오랜 시간을 기절 가장한 채 누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인(情人)의 무릎을 향해 비도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도 가만히 있는 것 이 역시 가장 어려웠다. 섭수진은 마지막 순간에 참지 못하고 움직이고 말았다. * * * 비도는 땅을 찌르며 소리를 질렀다. 쨍! 다시 튀어오르는 비도의 손잡이를 잡고 있던 심아진의 손은 이미 놓여 있었다. 오른손을 부여잡은 심아진의 왼손은 그녀가 매우 큰 고통을 느끼고 있음을 말하고 있었으며, 고통의 근원은 진소백의 두 발이었다. 진소백의 왼발이 심아진의 손목을 쳐 비도를 떨어뜨림과 때를 같이하여, 오른발은 그녀의 팔꿈치를 차올렸던 것이다. "저, 저...!" 자의중년인은 갑작스러운 변화를 보며 입을 제대로 놀리지 못했다. 아니, 입을 놀 릴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 오히려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진소백을 도우려 움직인 섭수진이 곧 상황을 보고 방향을 바꿔 그에게 달려들었으 므로. 이미 경지에 오른 섭수진의 무공이었다. 느린 듯 보였지만 당하는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쾌속한 섭수진의 금정산수 는 흰 손으로 그림자를 가득 일으키며 자의중년인의 몸을 순식간에 덮어 버렸다. 그러나 당황한 듯이 보이던 자의중년인의 반응은 신기하게 신속했다. 마음은 빈틈 을 보였으나 오랜 기간에 걸쳐 반복 수행한 몸은 전혀 당황하지 않은 듯! 그의 두 손에서는 믿을 수 없게도 구파(九派)의 각종 절학들이 변형된 형태로 물 밀듯이 피어났다. 소림의 백보신권(百步神拳)을 비롯하여 곤륜의 육양수(六陽手) 등이 점창의 유운신


법(流雲身法)을 따라 움직이는 그의 손에서 기세를 올렸다. 한 사람의 몸에서 다른 문파의 절기들이 동시에 폭발할 것임을 짐작이나 했을까? 이런 경험은 오직 천추학림 내부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진소백은 이미 일어나 서 있었다. 단순히 서 있는 게 아니라 그의 두 발은 번갈아 가며 허공을 가르고 있어 마치 몸이 공중에 떠 있는 듯 보였다. 왼발인가 하면 어느새 오른발이 눈앞을 스치며 지나가자 심아진은 반격을 가할 틈 도 없이 물러서기에만 급급했다. 그러나 언젠가 기회는 반드시 오는 법! 진소백이 섭수진의 싸움을 보느라 잠시 한눈을 팔자 약간의 여유를 얻은 그녀의 왼손에서도 무서운 굉음(轟音)과 함께 절기(絶技)가 몸을 일으켰다. 원래 비도(飛刀)로 전개하기는 매우 어려워야 할 해남파(海南派)의 남해삼십육검 (南海三十六劍)이 그녀의 비도에서 솟구치자 일어나는 굉음은, 심아진이 전개하는 남해검이 원래의 형태와 다르게 변형된 것임을 뜻했다. 불꽃이 한 번 튀는 순간보다 짧은 여유를 통해 반격을 가하는 심아진의 무공은 매 우 놀라웠다. 일전에 그녀가 진소백에게 일격에 제압당했던 것은 아마 그를 탈출시키기 위한 의 도적인 패배가 틀림없을 것이리라. 고개를 급히 숙인 섭수진의 머리 위로 자의중년인의 백보신권이 지나갔다. 머리카락들은 미처 섭수진의 머리를 따라가지 못했던 탓에 잘려져 공중에 날림을 피할 수 없었다. 섭수진의 전신에서 맑은 빛과 더불어 대정신공(大靜神功)이 유포되며 구름을 잡는 다는 나운장(拿雲掌)이 왼손에 실려 자의중년인의 가슴을 노렸다. 오른손으로 일권을 찌르고 회수하지 못한 탓에 비어 있는 가슴을 중년인은 남은 왼손으로 급히 막을 수밖에 없었다. 팡! 처음으로 장력과 장력이 부딪치면서 섭수진과 자의중년인은 몸을 움찔거렸다. 하 지만 섭수진의 다음 대응은 자의중년인보다는 훨씬 신속했다. 복호금강권(伏虎金剛拳)! 섭수진의 오른손에서 뻗어 나가는 금강권의 기세는 멸절 신니가 전개했을 때보다 오히려 강력해 보였다. 파파팡! 단숨에 날아온 오(五) 권(拳)을 자의중년인은 모두 막으려 했지만 마지막 권만은 막지 못했다. "우욱!" 그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날 때, 섭수진의 몸은 자의중년인이 만든 반탄력에 뒤 로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앞으로 전진했다. 몸을 좌우로 비틀며 상대방의 반탄력(反彈力)을 흘려 보내는 섭수진의 신법! 바다 에서 노련한 사공이 돛을 조정하여 맞바람을 받고서도 좌우로 움직여 앞으로 전진 할 수 있는 원리와도 같았다. 이런 움직임은 알고 있더라도 깨달음을 통해 체득(體得)하지 못한다면 실전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황의 빛이 역력한 자의중년인의 전신을 다시 섭수진의 왼손에서 나온 금정산수 가 덮어 버렸다. 심아진의 검을 피해 진소백은 뒤로 벌렁 누웠다.


손은 아래로 가고 발이 위로 쳐들린 자세였지만 지금 그에게는 이런 자세가 오히 려 편했다. 그의 두 발은 마치 손처럼 영활하게 움직이며 심아진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이 싸움은 진소백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심아진이 비록 나이에 비해 무공이 매우 뛰어났지만 처음부터 오른손을 쓸 수 없게 된 상태였다. 불의의 기습에 당해 왼손만을 쓸 수 있게 된 십칠 세 소녀와 두 발을 사용하는 진 소백 간의 대결은 십여 초가 지나지 않아 결판이 났다. 삭! 심아진의 비도가 진소백의 신발을 자르는 소리였다. 진소백이 신발을 벗으며 힘껏 던졌던, 아니, 차냈던 것이다. 비화(飛靴)라고 불러야 하나? 얼굴로 날아오는 진소백의 냄새나는 신발을 심아진이 잘라 냈을 때는 진소 백의 더욱 냄새나는 발가락이 그녀의 마혈을 짚기 직전이었다. "웃!" 전신이 마비되어 쓰러지면서 심아진이 표독한 눈길로 자신을 쏘아보자 진소백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미안! 신발을 신고 혈도를 짚기가 어려워서 말야. 손가락이 안 되면 발가락이라도 써야지." 따지고 보면 심아진은 억울해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녀로 인해 지금 진소백이 아직 손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이미 자의중 년인을 제압하고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섭수진은 실소(失笑)했다. 분명 긴박한 싸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웃음을 자아내는 구석이 있었던 까 닭이었다. 이 사내! 진소백은 팔을 쓰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적을 대함에 여유가 있었다.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닐까? 혹시 팔은 이미 나아 있지는 않을까? 섭수진 은 일단 이런 생각들을 접어 두었다. 지금 급한 일은 자신들을 위해하려 한 이들 둘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었다. * * * 중년인! 진소백의 추격을 총지휘했던 중년인은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자신의 동생! 그가 모종(某種)의 일을 당하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백여 명에 달하는 눈앞의 포로들을 보았다. '빌어먹을, 시간이 모자라니 옥석(玉石)을 가릴 수도 없지 않는가?' 멍청한 놈, 하 필이면 왜 이런 때에 위기를 맞는단 말인가? 중년인은 내심 노화가 솟구침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돌아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모든 일의 진행은 동생이 없으면 하기 힘들었던 까닭이었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공손히 묻는 총관에게 그는 매우 곤혹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음속의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 자리는 함부로 격한 감정을 드러내기 어려운 자리였다. 어쨌거나 지금 자신은 저들에게 매우 인후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으니. 조금 고민하는 태도를 보였던 중년인은 이윽고 결심한 듯 굳센 목소리로 대답했 다. "어쩔 수 없지요. 당금의 정세가 매우 어려우니 협조하지 않는 자들은 가차없이


목을 베십시오." 명을 받들고 물러나는 총관을 뒤로하고 몸을 돌리는 중년인의 마음속에는 쉴새없 이 노화가 솟구치고 있었다. '이따위로 일이 돌아가다니! 계획을 바꾸어야만 하겠다.' 어쨌든 아까운 일이었다. 사람 하나를 교육시키는 데에도 엄청난 노력이 드는데, 하물며 백여 명이라니! * * * "심아진은 나와 구면(舊面)이지만, 당신은 처음 보는 것 같군!" 자의중년인의 뺨을 툭툭 치며 진소백이 말했다. 뺨을 때리는 행위는 지극한 모독(冒瀆)이었으니 자의중년인의 얼굴은 금세 벌게졌 다. 진소백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 가지고 얼굴색이 변하는 것으로 보아 수양이 깊은 자 같지도 않고... 신 기원주 갈무생(鞨無生)이 이처럼 용렬하다는 사실은 오늘에서야 깨달았는걸." 자의중년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심아진의 눈 또한 분노(忿怒)한 와중에서도 은근한 감탄(感歎)을 나타냈다. 진소백이 자의중년인의 신분을 알고 있다는 투로 말했기 때문이었다. 신기원주 갈 무생! 천추학림 제삼기 수료자 중의 한 명으로, 비록 오룡(五龍)에 들지는 못했지만 그 능력을 천하가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섭수진에게 제압당한 이자가 갈무생이란 말인가? 진소백의 말을 증명 이라도 하듯, 자의중년인은 얼굴을 더욱 붉게 물들이며 되물었다. "네놈이 그걸 어떻게...?" 심아진의 눈에 다시 독기(毒氣)가 어렸다. 하지만 이번의 독기는 진소백을 향한 것 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이 향하는 곳! 독기가 표출(表出)되고 있는 방향에 위치한 사람은 자의중년인이었다. 이번의 독 기는 살의보다는 경멸의 뜻이 강하게 담겨 있었다. 아혈(啞穴)이 짚혀 말을 못 하는 그녀는 심중의 울화를 이렇게 쏟아 낼 수밖에 없 었다. 갈무생의 반문(反問)은 스스로의 신분을 밝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던 까닭이다. 갈무생은 진소백이 대답하지 않자 다시 언성을 높여 물었다. "어떻게 나를 알고 있는지 대답해라." 그는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일 까? 진소백은 한 번 더 미소를 지으며 갈무생을 보았다. "넌 매우 자신감이 있구나. 내가 널 어쩌지 못할 것 같으냐?" "흥! 네가 감히 날 어찌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난 말이다..." "계속해 보라!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는 듯한데." 갈무생은 입을 다물었다. 진소백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널 구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흥, 어림없는 얘기지." 갈무생은 크게 외치며 부정했다. "헛소리하지 마라. 형은 무엇이나 할 수 있..." 심아진이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드는 것을 보면서 아차 싶었던 갈무생은 입을 다물 었다.


그러나 입을 다무는 일은 성공하지 못했다. 짜짜작! 경쾌한 소리가 세 번 울리자 갈무생의 뺨이 벌겋게 부풀어오르면서 입과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손이 아닌 발로 따귀를 맞은 기분은 느껴 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표현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진소백은 네 대째의 발을 올릴 필요가 없었다. 갈무생은 그 정도의 고통으로도 겁에 질려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으므로. 공포를 느낀 후에야 비로소 거짓 대답을 하지 않음을 진소백은 잘 알고 있었다.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진소백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넌 누구냐?" "난, 난 갈무생... 욱!" 겁에 질려 말을 더듬던 자의중년인은 양 볼을 감싸 쥐었다. 짜작! 진소백의 발따귀가 다시 날아왔던 것이다. 그의 겁에 질린 모습을 보며 진소백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아니야. 넌 결코 아니야!" 무엇이 아니란 걸까? 머리를 흔드는 진소백을 보는 갈무생의 눈빛은 매에 대한 공포로 죽어 있었다. 하지만 심아진의 눈은 오히려 빛났다. 더욱 큰 감탄으로 빛나는 그녀의 눈은 여태까지와는 다른 빛으로 진소백을 쳐다보 았다. 그녀는 진소백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았다. 눈앞에 스스로를 갈무생이라 밝힌 중년인을 두고 고개를 흔드는 진소백! 일람무의 (一覽無疑) 진소백! 제 10 장 절세호웅 갈만생. 그러나 결과는? 1 수호전사(守護戰士) 칠호(七號)의 신분은 상당히 높았다. 때문에 그는 지금 급히 들어오는 중년인을 보면서도 허리를 숙이지 않았다. 하지만 주위의 모든 수호령(守護靈)들은 비록 소속은 달랐지만 신분의 차이가 컸 으므로 모두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원주님을 뵈옵니다." "원주님을..." 중년인은 분주히 답례(答禮)하며 수호 칠호에게 물었다. "혹시 삼군(三君)을 보시지 못하셨소?" 비록 절을 할 필요는 없으나 중년인은 그의 윗사람임에는 틀림없으므로 수호 칠호 는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했다. 물론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아침나절에 원주님과 함께 산책을 하셨잖습니까? 저는 그 이후에는 본 적이 없습 니다." 중년인은 초조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기 중에 흐르 는 끈적거리는 기운! 천추학림을 지키는 수호령들이 흘리는 기세임을 아는 그는 수호전사 칠호에게 부 탁했다.


"내가 몸이 좋지 않아 잠시 휴식을 취하려 하오... 주위의 수호령들을 좀 물리쳐 주시지 않겠소?" 수호 칠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의 손짓에 따라 주변 곳곳에 숨어 있던 수호원 소속의 수호령들이 썰물처럼 사 라졌다. 이 정도의 일은 그다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자신의 거처를 지키는 사람들은 철수시켜 달라는 것이므로. 모든 원주들에게 그 정도의 권한은 있었다. "저도 물러갔다가 나중에 오겠습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십시오." 스르르! 포권했다가 고개를 드는 그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천추학림의 백여 년 역사 동안 가장 힘이 강해진 곳은 어쩌면 딴 곳이 아니라 수 호원일지도 몰랐다. 수호사자 칠호의 무공과 그의 수하들 수호령들의 무공은 다른 어떤 문파에서도 보 기 힘든 가공할 것이었다. 원주(院主)라 불렸던 중년인은 문득 수호원주인 천화령(天火羚)을 생각했다. 수호 칠호 같은 수하를 수족처럼 부리고 있는 그는 확실히 천추학림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었다. 중년인은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의 상황이 한가(閑暇)하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님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급히 몸을 돌려 신기원(神機院) 안으로 달려갔다. 어리석은 그의 동생은 아마 몰래 이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심아진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삼 색의 손수건이 나무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그 손수건이 묶인 모양은 자신이 지금 있는 곳을 알려 주는 비밀 신호였다. 몸을 돌린 중년인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의 옷은 그대로인데 얼굴은 어느새 바뀌지 않았는 가? 어느것이 진짜일까? 지금 중년인의 얼굴은 진소백과 섭수진이 제압하고 있는 자의중년인과 똑같았다. 다만 풍기는 기도가 매우 달랐을 뿐이었다. * * * 비밀 장소에 경호가 있을 리 없었다. 출발 당시 강호의 발전을 위해 서로의 무공을 공개하고 토론한다는, 열린 생각으 로 출발했던 천추학림! 그러나 백년이 넘는 세월은 어느새 학림 내부에마저 비밀을 만들어 놓았다. 지금 중년인이 급히 달려가는 통로나 벽을 더듬어 나타나는 문들은 다른 이원에서 는 전혀 모르는 곳이었다. 신기원(神機院)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을 맡은 곳! 처음에는 학림을 세우 는 일에 동참(同參)했던 각파에서 정보(情報)를 보내 주었으나 점차 스스로의 힘으 로 정보를 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비밀스런 곳이 신기원에는 몇 군데 더 있었다. 어쩌면 다른 이원도 마찬가지 일는지 모른다. * * *


우웅! 기관음을 극도(極度)로 죽여 최소한의 소음만을 발생시키며 열리는 돌문! 그 사이 로 실내의 모습이 점차로 중년인의 시야에 들어왔다. 바닥에는 진소백과 섭수진이 쓰러져 있었고, 그 시체를 내려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자의중년인과 심아진이 보였다. 중년인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자의중년인은 반갑게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형님! 여기를 좀 보십시오." 중년인은 바닥의 진소백을 힐끔 내려다보더니 자의중년인을 다시 보았다. "몸은 괜찮은 게냐? 우리는 쌍둥이이니 네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느낌을 받고 급 히 달려왔다." "예, 헤헤, 조금 위기가 있었지만 잘 넘겼습니다. 심아진이... 잘 해줘서." 갈무생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말했다. 중년인 갈만생(鞨滿生)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심아진을 쳐다보며 치하(致賀)했다. "수고 많았다." "당연한 일인걸요. 어쨌든 원주님께서 빨리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중년인 갈만생은 천장을 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무생아! 너는 이 형이 품은 뜻을 알 것이다. 난 무공으로서 감히 초의 선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다." 갈무생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만일 그의 무공이 매우 뛰어남을 몰랐다면 이처럼 번거롭게 변장까지 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잘 알고 있습니다, 형님!" 갈만생은 일어나 실내를 왔다갔다하더니 바닥의 진소백을 보며 말했다. "아무리 초의의 제자라 하나 두 팔을 쓰기 힘든 상황에서는 무리겠지. 그리고 이 여아는 누군지 알아 냈느냐?" 심아진이 공손하게 말했다. "예, 아미파의 섭수진이었습니다." "아미옥녀 섭수진!" 갈만생은 놀랍다는 투로 말했다. "그녀는 남자와의 정에 빠지는 바람에 금정 신니의 분노를 사서 옥에 갇혔다고 들 었는데... 이런, 그것이 외부의 눈을 속이기 위한 계략이었구나." 그는 갈무생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구파가 평생 어리석게 살 줄 알았더니, 요즘에 와서는 점점 머리를 심하게 쓰는 구나! 그렇지 않느냐, 아우야?" "하지만 형님께는 결코 적수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갈만생은 크게 웃었다. "하하! 옳은 소리다. 정말 옳아. 넌 내가 왜 굳이 너를 내세우고 난 어둠 속에 숨 어 있는지 알고 있겠지?" "예, 그야 당연히..."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나 갈만생의 존재를 모른다. 세상이 아는 것은 오직 갈무 생(鞨無生) 한 명뿐이겠지. 심아진! 넌 내가 이렇게 한 이유를 아느냐?" 아미옥녀란 이름이 그냥 붙은 것은 절대 아니다. 심아진이 공손히 머리를 숙이는 동안 그녀로 변장한 섭수진의 머릿속은 끝없이 움 직이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세상은 오직 갈무생 하나만을 안다. 그의 능력은 매우 뛰어나 오룡과도 비견되었는데, 지금 보니 갈무생의 모든 능력 은 오로지 쌍둥이 형인 갈만생에게서 나온 것인 듯했다. 갈만생은 왜 이런 능력을 지니고도 강호에서의 모든 명예와 영광을 동생에게 넘겨 준 것일까? 형제간의 우애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갈만생의 태도를 보면 삽시간에 사라질 것이다. 결국 결론은 하나! 갈만생은 계속하여 신기원주로 있을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닐까? 만일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도 강호에는 갈무생이 계속 존재하고 있다면 어 떤 일을 행하더라도 자신을 의심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수시로 자리를 비워야 한다면 쌍둥이 동생만큼 자신으로 변장시키기 쉬운 자가 또 누가 있을까? 이런 생각은 순식간에 섭수진의 머릿속을 오고 가서 그녀가 심아진의 모습으로 얼 굴을 들었을 때, 이미 완전히 정리가 되어 입으로 흘러 나왔다. "당연히 원주님께서 강호에서 다른 신분(身分)으로 행동하실 때의 편의(便宜)를 위 함이지 않습니까?" 원주(院主)! 결국 천기원주 갈무생은 껍데기였고, 진정한 천기원주는 갈만생이었던 것이다. 갈만생은 심아진의 총명(聰明)한 대답에 만족했는지 대소(大笑)를 터뜨렸다. "으하 하! 맞다. 과연 너는 심화절의 딸로서 조금의 부족함도 없구나. 어리석은 갈무생이 내게 널 소개해 준 것은 최초의 성공이었다. 으하하!" 갈무생이 심아진을 갈만생에게 소개시켜 줬다는 말인가? 갈만생은 고개를 돌려 동생을 보았다. "나머지 두 명에 대한 포섭은 어찌 되어 가느냐? 이군들은 아직도 말을 듣지 않는 게냐?" 이번에는 갈무생으로 변장한 진소백이 머리를 써야 할 때였다. 갈만생의 질문은 무엇에 관한 것인가? 이군(二君)이란 단어가 유일한 단서였다. 천추학림에서 군이란 어휘를 붙이는 두 명이라면...! 나머지 두 명이라 했으며 심아진에 대한 얘기에 바로 이어서 나왔다. 아마 심아진 을 통해서 연상된 것일 텐데... 사람의 생각이란 일정한 법칙을 통해 계속 이어서 발상(發想)이 이루어지는 것으 로 아무리 심한 비약이라도 잘 생각해 본다면 논리적인 근거가 있게 마련이었다. 갈무생은 두어 번 눈을 깜박이더니 고개를 조아렸다. "아직은... 하지만 곧 포섭할 수 있을 겝니다." 갈만생이 노갈했다. "아직이라니! 두 놈 중 어느 놈이 더 말을 듣지 않는 게냐?" 이런 질문은 진소백에겐 위기였다. 하지만 이미 상황 판단을 끝낸 진소백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광무(光武)보다는 치도(痴刀)를 다루기가 힘듭니다." 광무와 치도는 막내인 비화혼(飛火魂)과 더불어 천추학림이 키우고 있는 삼군에 속하는 자들이었다. 진소백은 비화혼이 바로 심아진이라 판단하여 이군이란 광무와 치도를 가리키는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갈만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흥, 그놈이 조금 더 음흉스럽지. 어쨌든 열흘의 시간을 더 줄 테니 꼭 두 놈을 끌 어들여라. 알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형님!" 갈무생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속에 든 것은 다름 아닌 진소백! 심아진도 고개를 숙였지만 그녀 역시 섭수진의 변신(變身)이었다. 비록 갈무생을 신문(訊問)하여 많은 것을 알아 내기는 했지만 갈만생이 급하게 들 이닥쳐 시시각각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답변을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2 군웅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이곳은 신주평(神州坪)! 내일의 무림대회를 위해 까맣게 몰려드는 군웅들을 보며 인의신개는 걱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무림대회에 참가하는 자들은 우리를 적대하는 것으로 보아 살려 두질 않겠다.> 혈왕교의 혈루지(血淚紙)가 이런 뜻을 담아 중원 각지에 전해졌음을 아는 까닭이 었다. 혈경의 유출은 아직 두 달이 지나지 않았으니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혈왕교 가 시간을 벌기 위해 꾸민 일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으나, 인의신개는 여전히 불안했다. 지금 무림대회에 참석하러 온 강호인의 면면을 보라! 강자들은 은밀히 오는 탓에 눈에 띄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하루 남았는데... 모여든 고수들은 거의 대부분이 삼류들이었다. 물론 구파와 대륙오행련, 무림십정 등등의 정파 명문에서는 고수들이 참가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강호의 모든 힘이 모아져야 백여 년 전의 혈마지겁(血魔之劫) 이 재현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백여 년 전 구파의 연합이 신주평에서의 일차 회전에서 그처럼 쉽게 무너졌던 가 장 큰 이유! 악마혈이란 혈왕교의 독 때문이 아니었던가? 당시엔 장춘곡의 귀곡의절(鬼谷醫絶)을 이용하여 독을 해소했건만 지금은 장춘곡 의 진전을 이었던 종사원(鐘思元)조차 어디론가 사라졌다. 천외성이 사라지고 장춘곡이 사라지고... 인의신개는 불안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의 불안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대회장 곳곳에서 은밀한 움직임이 일었다. 음식에 그리고 여흥을 위한 술에, 그리고 식수에 무언가를 넣는 손이 있었다. 설마 독약을 타는 것인가? 붉은색을 띠었다가 물에 녹자 아무런 향기도, 맛도 없 이 사라지는 저 가루는 혹시... 백여 년 전의 혈겁이 재현되려는 것은 아닌지! * * * 황산에서 멀지 않은 협곡! 사방에서 험하게 흘러온 지세(地勢)가 서로 부딪쳤다가 신기하게도 사라지는 형태 였다. 그래서 절벽이 위치할 것 같은 곳에 이러한 평지가 생기는 것이다. 신토부(申土 府)! 오행련 중의 하나이며 오룡의 한 명인 호대철의 신토부는 바로 이곳에 근거를 두 었다. 태화평(泰和坪)의 오행련 총단과 이곳을 오가며 호대철은 강호의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검붉은 색의 흙은 잘 무너져 높이 올릴 수 없음이 상식이건만, 그런 상식을 무시 하는 건축 양식으로 이루어진 신토부의 건물이 멀리 보였다. 아침나절, 신토부주 호대철(湖大鐵)은 수하 삼십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신주평(神 州坪)으로 떠났다. 무림대회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그간 대륙오행련의 행동으로 미루어 이번 무림대회에서 종주 문파의 지위에 오르 려 함이 분명했다. 누가 맹주가 될지는 차후에 정해지겠지만 강호를 오행련 중심을 재편(再編)한다면, 당연히 오행련의 다섯 공동대표 중의 한 명이 맹주가 될 것이 아니겠는가? 호대철이 사라지자마자 길가에 흑의를 걸친 청년 하나가 유령과 같이 나타났다. 굳게 다문 입, 분노를 가득 담은 눈동자! 갓스물이 되어 보이는 청년은 엽평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호대철을 쫓아가 담판(談判)을 짓고 싶었지만 그처럼 어리석은 생각을 실행에 옮길 만큼 충동적이지는 않았다. "사흘을 기다려서야 겨우 네가 나가는구나!" 고일충의 서찰을 통해 아버지의 죽음과 호대철이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안 엽평은 신토부 아래에서 꼬박 사흘을 기다렸다. 그가 호대철이 밖으로 나가기를 기다린 이유는 부주가 있다면 아무래도 경계가 삼 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행련은 야심이 있으니 호대철이 무림대회에 참석하고자 나갈 때에는 당연히 많 은 고수를 대동할 것이다. 엽평의 예상은 어김이 없었고, 호대철은 마침내 나갔다. 호대철이 데려간 고수들이 빠진 만큼 엽평은 수월하게 신토부로 잠입할 수 있을 게 아니겠는가? 엽평은 왜 신토부로 들어가려 하는가? 그는 아버지 엽자문이 알았던 비밀이 무엇이었을지 생각해 보았다. 천추학림 내부 에서 태동한 비밀은 풍림서(風林誓)에 관한 것이 틀림없다는 게 엽평의 결론이었 다. 이어지는 판단은 틀림없이 호대철도 풍림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으며, 또한 그 가 속한 오행련 역시 풍림서와 연관된다는 비약(飛躍)도 가능했다. 유사부 제갈수의 짐작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가정만으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었다. 신토부를 자세히 조사해 보면 보다 많은 걸 알 수 있으리라는 게 엽평의 판단이었 다. 그런 판단은 당장이라도 뛰쳐 나가 호대철과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원한을 해결하 고 싶은 엽평을 사흘 동안이나 웅크리고 있도록 만들었다. 다행히 무림대회가 사흘 남았다는 사실을 엽평이 알고 있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밤이 되기를 기다린 엽평은 이윽고 몸을 움직였다. 보름이 하루 남은 탓에 몸을 숨기기는 어려웠으나, 때때로 달을 가려주는 구름이 그나마 도움이 되었다. 그의 신형이 공공문(空空門)의 신법을 따라 움직이며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움 직임을 보였다. 야음(夜陰)을 틈타 움직이는 엽평! 지금 천하에서 은밀한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은 이곳만은 아니었다.


무림대회가 벌어지는 신주평에서! 그리고 진소백이 들어간 천추학림의 신기원(神機院)에서! 이야기는 다시 신기원으 로 돌아간다. * * *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진소백의 얼굴은 지금 갈무생의 그것이었다. 그를 쳐다보는 갈만생은 갑자기 가슴을 쥐었다. 통증이 느껴지나 보다. 가슴을 쥔 갈만생의 손에 땀이 흘렀다. 갈무생(鞨無生)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걱정스런 눈빛으로 말했다. "형님! 가슴이 아프신 겝니까?" 깊은 눈으로 자신의 아우를 바라보던 갈만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내 걱정을 해주는거냐? 그럴 것 없다. 모든 일은 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 다. 신주평의 대회에 참석하는 자들에 관한 정보를 이미 흑혈산 측에 흘렸으니..." 눈은 갈무생을 주시하며 흔들리지 않았다. "무림대회에 참석하는 자들은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갈만생은 갈무생의 눈 깊은 곳에 흔들림이 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갈만생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시 방안을 오가며 그는 문득 생각이 난 듯 심아진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진소백의 무공은 초의 선사의 것에다 다른 방면까지 참수하여 대단하다던 데 어떻게 그리 쉽게 제압할 수 있었느냐?" 심아진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모두 일전에 팔의 관절을 파괴시켰던 덕입니다. 초의 선사가 치료는 했으되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았었나 봅니다." "호오, 그래! 여하튼 대단하구나." 갈만생은 심아진에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치하의 뜻! 하지만 심아진, 아니, 섭수진은 갈만생의 다음 말을 듣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한데, 네가 언제부터 초의란 이름 뒤에 선사(禪師)란 칭호를 붙이게 되었느냐?" 담담한 갈만생의 질문과 더불어 어깨를 두드리는 그의 손에서 막대한 경력(勁力) 이 전해져 옴을 섭수진은 느꼈다. 그녀의 무공은 매우 뛰어났지만 지금의 상황은, 굳이 따지자면 갈만생에게 기습 (奇襲)을 당하는 형태였다. "악!" 급히 내공을 끌어올리고 뒤로 물러나며 대응(對應)했지만, 어깨에 강한 타격을 피 하지 못한 그녀가 비명을 지를 때! "눈치채다니!" 진소백은 갈무생의 탈을 벗어 던지며 단숨에 삼퇴(三腿)를 갈만생의 등을 향해 날 렸다. 오른쪽 어깨를 당한 탓에 왼손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섭수진도 정면에서 금정산수 (金頂散手)를 일으키며 공격하니, 갈만생은 그야말로 앞뒤로 고수의 공격을 맞이하 는 형세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고수도 멀쩡할 때의 얘기! 진소백은 두 팔이 자유스럽지 못했고, 섭수진은 이미 오른쪽 어깨를 다쳤다. 상황은 어찌 될 것인가?


* * * 누군가를 열심히 찾아 다니는 멍청한 표정의 짐꾼! 그의 앞으로 흡사 유령이 나타 나듯 갑자기 한 명의 무인이 출현했다. 가슴에 쓰인 글씨는 전사 칠호! 수호전사(守護戰士) 칠호가 학림을 뒤지고 다니는 자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혼비백산한 짐꾼이 뒤로 벌렁 나자빠지자 수호전사는 실소(失笑)하면서 물었다. "어딜 그렇게 두리번거리며 가는가?" 짐꾼이 겁에 질려 떨며 말했다. "저, 저는 음식물 나르는 사람인뎁쇼, 새로 들어온 일꾼 한 놈이 없어져서..." 일꾼이 없어졌다! 그것도 새로 들어온 놈이란 말인가? "새로 들어왔다...? 자진해서 일꾼이 된 놈인가?" "네. 그것이 꼭 천추학림 내부를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말입죠. 돈을 쥐여 주면서 일하게 해달라고 하더라구요." 수호 칠호가 안광을 강하게 내뿜고 있을 때, 수호령(守護靈) 하나가 급히 뛰어왔 다. "수신각(修身閣)의 하인 하나가 사라졌다 합니다. 별일은 아니지만 모든 변화를 알 리라고 말씀하셨기에..." 스스로 들어온 일꾼 하나와 하인 하나가 사라졌다. 별일이 아닌 듯도 했지만 수호 칠호는 예감이 이상했다. "경계를 한층 강화하고 수상한 자는 즉시 체포하라!" 명령을 내린 그는 천기원 쪽을 돌아보았다. 아까 천기원주 갈무생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했었다. 혹시 저쪽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굳이 수호령들을 물리치던 천기원주의 행동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 * * 갈만생의 몸이 바람개비처럼 맴돌았다. 그의 몸이 바람개비와 다른 점은 맴도는 그의 주위로 칼끝 같은 경기(勁氣)가 마 구 피어오른다는 것이었다. 그가 스스로의 무공이 초의 선사와도 자신(自信)이 있다고 선언(宣言)했던 것은 결 코 거짓이 아니었다. 일단 갈만생의 몸 주위를 경력의 회오리가 감아 가게 되자 진소백은 쉽게 접근할 수 없음을 절감했다. 회회강(回回 )! 게다가 회오리의 어딘가, 짐작도 할 수 없는 곳에서 뻗어 나온 권과 장은 순식간 에 진소백과 섭수진의 온몸에 상처를 만들고 있었다. "빌어먹을! 내가 팔만 나았더라도..." 진소백은 외치며 급히 몸을 흔들었다. 취팔선보가 시전되면서 그의 몸은 절묘하��� 갈만생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섭수진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오른쪽 어깨를 통해 들어온 음산한 기운이 몸의 활동을 방해하는 움직임을 보이 는 것이다. 원활하지 못한 그녀의 움직임을 보며 당황해 하는 진소백의 귀에 갈만생의 음소 (陰笑)가 들려 왔다. "후후, 음혈진살(陰血眞殺)은 오랜 기간을 거쳐 새로 창안(創案)된 무공이다. 위력


은 나조차 놀랄 지경이니... 몸이 말을 듣지 않을 것임은 당연하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걸까? 몸을 비틀거리던 섭수진은 갈만생의 일격을 정통으로 맞고 말았다. "악!" 그녀의 뾰족한 비명을 듣고서 당황한 진소백의 눈 속으로 갈만생의 몸이 커다랗게 확대되었다. 어느새 섭수진의 혈도를 제압한 갈만생이 몸을 돌려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것이 다. 놀란 진소백이 몸을 굽혔다 쭉 뻗으며 활을 벗어난 살처럼 뒤로 미끄러졌지만, 갈 만생의 몸은 조금도 멀어지지 않고 그를 따라붙었다. "후후! 벽력세가의 궁신폭 또한 비밀리에 신무원에서 연구된 적이 있었지. 너만 알 고 있는 신법이 아니다." 놀란 진소백의 발이 어지러워졌다. 순간, 허리 부근이 뜨끔했다. 손을 쓰지 못하는데 발마저 흐트러지니, 제압당하는 걸 피할 수 없었다. 온몸이 굳어 가던 진소백은 곧 이어 허공으로 자신의 몸이 번쩍 들림을 느꼈다. 목 부분의 통증은 갈만생이 그의 멱살을 쥐고 있는 탓이었다. "내 동생은 어디 있느냐?" 바닥에 혈도를 제압당해 누워 있는 두 명의 얼굴을 갈만생은 이미 확인한 후였다. 마혈(痲穴)을 제압당한 진소백이 쓰러지기 전에 바닥을 훑어 두 명의 얼굴을 확인 하고 다시 진소백의 멱살을 잡은 것이니 그의 동작이 빠름을 더 이상 설명할 필요 는 없을 터였다. "으헉!" 진소백은 숨이 막혀 왔다. 섭수진도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도와 줄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일람무의란 이름 으로 강호를 떠돈 진소백이 언제 이런 경우를 당해 본 적이 있었던가? 갈만생의 심계는 무서웠지만 그의 무공은 더 더욱 무서웠다. 3 섭수진으로 가장되었던 자는 당연히 심아진이었다. 하지만 진소백으로 가장되었던 자는 결코 갈무생이 아니었다. 아예 무공도 모르는 듯 보이는 자였다. 갈무생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동생에 대한 걱정인가? 갈만생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진소백을 닦달했다. 진소백의 숨막혀 하는 고통을 보다 못한 섭수진이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만 해요. 내가 말해 주겠어요." 섭수진의 손이 향하는 곳! 평소 극비의 자료를 저장하는 곳이었다. 항상 휘장을 내려놓아 내부의 모습을 감추어 두는 장소였으므로 안의 모습이 밖에 서는 보이지 않았다. 갈만생은 진소백의 멱살을 놓았다. "콜록! 콜록!" 하나, 막혔던 숨이 트이자 정신없이 기침을 해대는 진소백을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휘장(揮帳)을 걷으러 다가가는 갈만생의 걸음은 어쩐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어떤 예감을 느낀 탓일까? 휘장이 걷히면서 갈만생은 또 하나의 자신을 보았다. 이처럼 거울을 보듯 닮은 얼굴은 갈무생의 얼굴뿐이었다. 비로소 그는 왜 자신의 심장(心腸)이 자꾸만 두근거렸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와 갈무생은 쌍둥이였다. 동생이 당하는 고통은 그에게도 느낌이 전해져 왔다. 지금 갈무생은 목에 끈이 걸 려 허공에 매달린 채 죽었으니, 당연히 심장이 두근거렸을 것이다. 갈만생의 눈은 서서히 분노에 사로잡혀 갔다. 형제간의 우애 때문일까? 갈만생과 같은 인간에게도 우애(友愛)가 의미있었다는 말인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형재란 한 움큼의 먼지만도 못했다. 하지만 그의 계획! 그 계획에 갈무생이 꼭 필요했다. "내 계획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혈왕교(血王敎)가 승리하건 아니면 정파 의 강호인들이 승리하건 아무래도 좋았다. 다만 마지막에 최후의 승자를 없앨 악 역(惡役)은 꼭 필요했다. 나만을 남기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제거할 악역이... 그 리하여 나의 화려한 등장을 보장해 줄 악역이 필요했었다." 그는 극도의 충격을 받은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계속되는 그의 말은 왜 충격을 받았는지를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우애는 결코 아니었다. 다만 야망이었다. "갈무생은 그런 역할에서 가장 적임(適任)이었다. 일단 강호에 피바람이 지나간 뒤 나를 대신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죽기에 그가 가장 알맞았다." 그의 말, 갈무생은 그에게 있어 동생이기 이전에 자신이 악행(惡行)을 저지르는 동 안 다른 사람 앞에 나서서 의심을 풀도록 해주고, 최후의 순간에는 모든 죄를 뒤 집어쓰고 죽을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도구가 벌써 사라져 버리자 갈만생은 심혈을 기울인 자신의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修正)해야 함을 깨닫고는 허탈에 빠진 것이다. 갈만생의 혼잣말은 계속되었다. "이번만 해도 그렇다. 무림대전(武林大典)에서 흑혈산의 음모가 성공하건 무림인들 이 방어에 성공하건 관계없이 남은 자들은 우리 풍림서(風林誓)에서 모두 없애 버 리는 계획에는 그가 꼭 필요했다." 허탈이 점점 분노로 바뀌는지 갈만생의 말은 점점 거칠어졌다. 어쨌든 그의 말은 듣고 있는 모두의 몸을 부르르 떨게 만드는 내용을 담고 있었 다. "그 계획을 내가 지휘(指揮)하려면 그 동안 갈무생은 어딘가에 모습을 드러내어 날 의심(疑心)하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하는데... 찢어 죽여도 시원하지 않을 놈! 네놈이 모든 걸 망쳐 버리다니!" 갈만생은 진소백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몸 주위에선 저절로 올라온 진기(眞氣)가 공기를 마구 밀어 냈고, 등뒤에서는 경력(勁力)에 밀린 갈무생의 시체가 저절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네놈을 죽이는 것으로 일단 이번 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게 돼버렸구나!" 갈만생의 눈빛이 더욱 강해졌다. 누구라도 그 빛을 정면으로 받는다면 두려움에 떨게 되리라. 그러나, 진소백은 지극히 담담하게 그의 눈을 마주보았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두


려운 기색은 이제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하였는가? 하지만 진소백의 말은 그런 것이 아님을 알게 했다. "날 죽이고 싶겠지만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게요." 분노한 와중에서도 갈만생은 흠칫했다. 일전의 머리 싸움에서 그에게 패했던 일이 생각났던 것이다. 초의 선사를 제거하 기 위한 계획에서 그는 진소백에게 완전히 당해 풍림서 힘의 삼분지 일이나 잃고 말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 무슨 변화가 더 일어날 수 있을까? "네놈은 날 속여 보려는 것이..." 갈만생은 입을 다물었다. 뒤에서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검기(劍氣)를 느꼈던 까닭이다. 그의 뒤에는 갈무생의 시체뿐이었다. 한데 어떻게 검기가 일어날 수 있겠는가? 예 측하지 못했던 공격이었건만 갈만생의 몸은 궁신폭(弓身爆)으로 번개같이 미끄러 졌다. 그렇지만 일검 또한 무섭도록 빨라 그는 등을 길게 그임을 피하지 못했다. 불신으로 두 눈을 부릅뜬 갈만생! 어느새 뒤로 돈 그의 신형은 갈무생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갈무생의 무릎! 그곳을 뚫고 검이 솟아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릎을 굽혀 차올리면 솟아나도록 장치된 검이었다. 갈무생의 시체가 눈을 뜨는가 싶더니 무릎의 검은 어느새 손에 쥐여져 있었다. 그의 목을 묶었던 끈은 처음부터 거짓이었던 듯! 일단 시체가 움직이자 끈은 힘없이 사라져 버렸고, 검에서 피어오르는 검기(劍氣) 만이 온 방안을 가득 메웠다. 놀라운 속도로 갈만생을 노리며 날아오는 갈무생의 시체! 일검을 맞았던 갈만생은 일시지간 반격하지 못했다. 예측하지 못했던 사태에 서둘러 물러서기만 했다. 진소백을 공격하기 위해 다가가던 갈만생은 지금은 오히려 진소백에게 등을 보인 채 후퇴(後退)하는 형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시체의 검은 더욱 맹렬히 휘둘러졌다. 그 검에서 피어나는 검기(劍氣)의 모양은 일종의 꽃을 매우 닮았다. 절개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꽃! "매화검(梅花劍)! 화산파(華山派)의 매화검이로구나. 넌 매일도(梅逸度)?" 과연 갈만생은 신기원의 원주답게 매일도의 검세(劍勢)를 단숨에 알아본 것이다. 매화검 또한 천추학림의 신무원에 남겨졌으니 검세를 알아본다면 대응책(對應策) 도 세울 수 있는 것이 갈만생이었다. 그의 양손이 기이한 모양으로 엇갈리면서 허공의 다섯 점을 단숨에 찍어 갔다. 이런 방법은 신무원에서 삼십 년 이상의 시간을 들여 연구(硏究)해 낸 매화검(梅 花劍)의 가장 효과적인 방어법이며, 또한 공격술이었다. 그러나 갈만생은 양손을 끝까지 앞으로 뻗어 내지 못했다. 미처 초식을 완료하기도 전에 등에 강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용음(龍音)으로 방안을 가득 채우는 두 손이 그에게 충격을 가한 범인이었고, 그 손들은... 믿을 수 없게도 진소백의 것이었다. 아무런 방비도 못 한 갈만생의 등에 그대로 작렬하는 손! "우웩!" 피를 한 사발이나 쏟으며 앞으로 튕겨 나간 그의 오른쪽 가슴으로 매일도의 매화


검이 다시 꽂혔다. 치명적인 상처! 극도의 고통이 따랐을 것이지만 갈만생의 눈은 매일도를 보지 않았다. 치명상을 입는 원인이 된 것은 뒤에서 날려온 두 개의 장력이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손! 용음십이수(龍音十二手)라니. 네 팔은 이미 나았었느냐?" 분노에 떨며 외치는 갈만생에게 진소백은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휘휘 휘둘렀다. 그의 팔 동작에 따라 다른 구석에 제압되어 세워져 있던 갈무생의 몸이 딸려 나왔 다. 진소백은 갈만생의 눈빛이 패배의 쓴맛으로 꺼져 가는 것을 무시했다. 섭수진까지 속였으니 변명을 해야지 않는가? "적을 속이느라 어쩔 수 없었으니 한 번만 봐주구려. 풍림서의 총단주(總壇主)를 사로잡으려면 이 정도의 머리는 써야지!" 섭수진은 매일도가 짐꾼으로 변장하여 다른 경로로 숨어들었던 것은 알았다. 하지만 진소백의 두 손이 이미 나았음은 꿈에도 몰랐다. 갈만생은 아득해졌다. 자신의 신분을 진소백이 이미 알고 있음을 들었던 탓이었다. 풍림서의 총단주! 그 사실을 이놈이 어찌 아는가? 쓸데없는 소리를 너무 많이 한 자신의 행동이 후 회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이런 의문에 대해 오래 생각할 수 없었다. 바닥에 쓰러진 그의 눈으로 천장의 기관(機關)이 열리는 모습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당연히 그것이 어디에 쓰이는 기관인지를 알고 있었다. 콰콰콰! 소나기가 내리는가? 수백 개의 폭우정(暴雨釘)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피햇!" 진소백과 섭수진, 매일도는 순식간에 절정의 신법으로 폭우정의 범위를 벗어났다. 그러나 제압되어 쓰러졌던 갈만생과 갈무생, 심아진, 그리고 죄없는 하인 하나는 꼼짝없이 폭우정의 밥이 되었다. 하인은 진소백의 전음을 받고 매일도가 혈도를 짚어 데려갔던 자였다. 그의 죽음은 실로 운이 없었다 할 것이다. 진소백은 지극히 미안하고 실망스러웠다. 미안한 마음은 하인의 죽음에 대한 것이었고, 실망은 갈만생의 죽음 탓이었다. 풍림서의 총단주를 사로잡아 풍림서의 내부 비밀까지 알아 내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고 말다니! 누가 기관(機關)을 작동시켜 갈만생을 죽인 것일까? 당연한 의문이 셋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만일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도 그들은 의문을 풀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유(餘裕)가 없었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내공을 실은 외침이 들려 왔던 것이다. "신기원주, 어디 계시오. 일이 생겼으니 어서 나오십시오." 수호전사 칠호의 음성이었다. 아마 뭔가 이상하다는 눈치를 채고서 급히 달려오는 것이 아닐까? 다른 곳의 수색 은 수하에게 맡기고 신기원(神機院)을 수색하러 온 칠호였다. 진소백 등은 망설일 시간이 전혀 없었다. 만일 저들과 마주친다면 어떤 말을 해야만 하는가? 갈만생 등이 풍림서란 강호의 이단 단체를 결성하여 천추학림 본연의 뜻을 위반했다는 자신들의 말을 믿어 줄


까? 아니, 어쩌면 달려오는 자들 역시 풍림서와 뜻을 같이하는 자들인지도 몰랐다. 진소백 등은 신주평의 무림대회에서 변(變)이 일어날 것이란 것을 갈만생의 말에 서 이미 알았다. 지금은 다른 사람들과 마주쳐 시간을 끌 때가 아니었다. 셋 중엔 어리석은 자들이 하나도 없었다. 눈짓으로 서로의 판단을 확인한 그들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 * * 쏜살같이 무림대회장으로 달려가는 세 명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섭수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상당히 빠른 속력임에도 숨을 고르게 내쉬고 있다는 것은 그녀의 무공에 대한 표 증(票證)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갈만생이 풍림서의 총단주란 사실은 도대체 어떻게 알았죠?" "제보가 있었소. 천추학림의 수뇌(首腦) 중 한 명이 총단주라는. 일전에 날 추격했 던 솜씨로 미루어 아무래도 정보를 담당하는 신기원주가 가장 의심스러웠던 것뿐 이오." 매일도가 끼여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군요. 도대체 누가...? 아까 기관을 작동시킨 자가 누군지도 의문스 럽고." 그 역시 조금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일 년간 그도 매우 열심히 무공을 익혔던 것이다. 누구를 위한 수련이었을까? 진 소백은 대답이 없었다. 그의 콧잔등에 생긴 깊은 주름은 이미 그가 자신의 생각 속으로 빠져 들어갔음을 말해 주었다. 어쨌든 여러 가지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촉박한 시간은 속력을 잠시라도 늦출 여 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신주평으로 날아가는 그들의 신형은 빛살 같았다. 군영회(群英會)! 지금은 세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곧 그 인원은 크게 늘어날 것이다. 언제나 미래를 책임지는 것은 청춘들인 것이다. * * * '신기원에 이런 장소가 있었다니!' 마침내 비밀 장소를 발견한 수호전사 칠호는 내심 중얼거렸다. 계속 걷고는 있었 지만 수호원에서도 모르는 비밀 장소를 신기원이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이 놀라웠 다. 이윽고 마지막 문을 발견한 그가 개문(開門)을 위한 기관을 한참 찾고 있을 때, 기 잉! 기관음을 울리며 문이 저절로 열렸다. 물론 기관이 혼자서 저절로 움직일 리는 없었다. 이것은 갈만생을 공격했던 폭우정의 기관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만든 도구(道具)는 아무리 위력이 크거나 무섭더라도, 결국 인간의 손에 의 하지 않고는 작동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인간의 잘못을 기계나 도구에 전가시키려는 인간이 많은 것


은 결국 인간의 이기심(利己心)이 잉태한 결���가 아닐까? 기관을 작동시켰던 사람들은 문이 완전히 열리자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들은... 다 름 아닌 갈무생과 심아진이 아닌가?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폭우정(暴雨釘)의 비 속에서 고슴도치가 되어 죽었던 그들이 아니던가? 갈무생은 노한 어조로 칠호를 책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아무리 수호원의 무사라고는 하나 우리 신기원의 극비정보 보관 장소에 함부로 침입을 하다니." 그의 노기는 대단해 수호령들은 자신들이 큰 잘못을 진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수호 칠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스스로 당당하다고 여겨지더라도 웬만한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어쩐지 잘못 했다는 기분을 느끼게 마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수호전사 칠호의 인물됨은 결코 범상하지 않았다. "불순한 자들이 신기원을 침입한 흔적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별다른 일은 없으십 니까?" 심아진은 입을 삐죽거렸다. "흥! 그 말은 꼭 무슨 일이 있기를 바라는 투 같군요." 수호 칠호의 눈썹이 꿈틀했다. "말조심하라! 감히 수련생 주제에 분수를 모르고. 네가 수련을 마치기 전에는 아직 삼군의 칭호는 정식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모르느냐?" 무서운 기운이 그의 전신에서 흘러 심아진을 압박했다. 심아진은 칠호의 진면목 (眞面目)에 심령(心靈)이 짓눌리는 착각을 느꼈다. 이때 갈무생이 끼여들었다. "자, 그만두시오. 어쨌든 난 조용히 있고 싶으니 어서들 물러가시오. 보시다시피 신기원(神機院)에는 아무런 탈도 없으니 말이오." 수호 칠호는 물러나지 않고 갈무생의 뒤를 보며 다시 물었다. "저 안쪽은...? 들어가서 조사할 필요가 있지 않을는지요." 갈무생의 전신에서도 노기를 동반한 기도가 솟아올랐다. 그 기세는 칠호의 것보다 오히려 강해 갈무생이 지닌 힘을 대변(代辯)하고 있었다. "극비의 정보를 보관한 곳이라 이미 말했는데도 그런 말이라니. 칠호, 신기원의 일 까지 수호원에서 모두 집행하고 싶다는 것이오? 어서 물러나고 내가 부르기 전에 는 귀찮게 하지 말아 주시오. 어서!" 신기원주 갈무생이 마침내 화를 내자 칠호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수호전사와 수호령들은 모두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수호 칠호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갈무생은 심아진에게 말했다. "위험한 자다.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가 위험하다는 의미는 하나였다. 결코 수호 칠호가 같은 편이 아니라는 것! 갈무 생과 심아진도 다시 밀실로 돌아왔다. 바닥에는 갈만생과 하인의 시체뿐만 아니라 갈무생의 시신도 여전히 뒹굴고 있었 다. 살아 있는 갈무생과 이미 죽은 갈무생과 갈만생! 살아 있는 갈무생은 혀를 찼다. 죽은 갈만생을 보며 한탄하는 것이다. "쯧쯧, 너도 상당한 자였는데 결국 진소백에게 당해 내지 못하는구나! 그 녀석은 정말 괜찮은 적수란 말야!"


그의 어조는 이미 바뀌었으며 얼굴 또한 조금 전과 달라져 있었다. 우리의 눈에 이미 상당히 친숙한 이 얼굴은, 이제 옛날의 병색(病色)을 찾아볼 수 없었다. 병서생 좌고학! 아니, 지금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좌고학은 갈만생의 품을 뒤져 하나의 인피면구(人皮面具)를 찾아 내었다. 매우 유명한 강호 명숙의 것이었다. 잠시 인피면구를 들여다보던 그는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벽하(碧霞)! 어서 시체를 치워라." 심아진의 얼굴 또한 전혀 다르게 변했다. 두 시체를 안고 허공에서 서서히 흩어져 가는 그녀의 신법! 이런 신법! 벽하란 이름! "갈만생! 어차피 네가 이용해 먹다 죽이려 한 동생이었으니 내가 죽였다고 큰 불 만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게다." 지금 혼잣말을 하는 갈무생은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좌고학이 힘들게 풍림서의 제오단주(第五壇主) 자리에 앉았는데, 감히 날 제거 (除去)하려 하다니. 안 되지, 절대 안 되지! 크하하하!" 웃음과 더불어 좌고학의 전신에서는 감당하기 힘든 마기(魔氣)가 피어올랐다. 그는 오늘의 결과에 지극히 만족하고 있었다. "이제 싸워라. 흑혈산도 좋고 풍림서도 좋다. 단심맹도 벗어나지 못하는 싸움이다. 크하하하, 죽고 또 죽어서 최후에는 나만이 남게 하거라." 웃음은 신기원 지하를 메아리쳤다. 한참을 웃어 젖힌 그는 문득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제보한 조그만 정보 하나로 갈만생을 없애다니, 정말 대단한 녀석이다. 하지 만 진소백! 넌 이번 일 또한 나의 승리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넌 아직 모르고 있다 하더라도. 크하하하!" 좌고학은 혈마수라결을 어느 정도 터득한 후 강호에서 자신이 휴식할 곳을 찾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위장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와중에 찾아 낸 것이 풍림서 총단주인 갈만생과 그의 꼭두각시이며 천추학림의 신기원주인 갈무생 형제였다. 갈만생이 진소백을 노림을 안 그는 우선 진소백 측에 갈만생의 정체를 암시하는 제보를 넘겼다. 이 제보는 극히 단편적인 것이라 의도적인 정보로 의심받을 근거는 없었다. 누구라는 정확한 정보가 아니라 천추학림 수뇌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불확 실한 정보 하나! 그럼에도 진소백은 그것을 이용하여 갈만생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하지만 갈만생은 사로잡혀서는 안 되었다. 풍림서 총단주인 그가 알고 있는 많은 정보라면 단심맹이 풍림서에 비해 절대적 인 우위(優位)에 서게 될지도 몰랐다. 때문에 숨어 있던 그는 기관을 작동시켜 갈만생을 죽였던 것이다. 그때 이미 좌고 학은 밖에서 수호 칠호가 신기원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진소백은 의문을 느낄 것이나 시간에 쫓겨 달아나고 말 것임은 이미 그의 계산 속 에 있었다. 진소백 등이 사라진 후 좌고학은 밖으로 나와 갈무생이 되었다. 어쨌든 진소백은 갈무생을 제압(制壓)만 해놓았을 뿐 위해(危害)는 가하지 않았으니, 결국 갈무생은


좌고학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닌가? 벽하가 다시 스르르 나타났다. 그녀는 극경(極敬)의 예로 좌고학을 대하고 있었다. 좌고학은 그녀를 보며 웃었다. "네 수고가 정말 컸다. 너희를 본다면 누가 누구인지 모르겠구나. 연기는 항상 완 벽하다." 벽하는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 자매는 항상 그런 식으로 교육을 받아 왔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는 건 가장 쉬운 일입니다." 좌고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는 풍림서의 제오단주가 되었다. 갈무생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진소백밖에 없었고 그는 이용가치가 사라지 면 곧 제거될 것이다. 회심의 미소를 마음속으로 흘리는 좌고학의 뒤로 벽하가 고개를 천천히 들고 있었 다. 이 여인은 어떤 여인일까? 때로 그녀는 매우 감상적이기도 하며 때로는 아주 독한 면을 보이기도 한다. 지금 그녀는 벽하였으며 조금 전에는 완벽한 심아진이었다. 진짜 심아진은 어디로 갔는가? 바닥의 시체 중에서 심아진은 없었다. 그리고 벽하의 등뒤를 감싼, 얇지만 튼튼한 갑피는 폭우정을 맞았던 심아진은 애 초부터 벽하였음을 느끼게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심아진과 벽하는 어떤 관계일까? 지금 어디로 가서 그의 상관인 갈만생의 죽음도 상관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 * * 풍림서 제오단주! 원래의 단주였던 심화절이 죽고 나자 총단주였던 갈만생이 자신의 꼭두각시 동생 을 앉혀 두었던 그 자리! 지금 갈무생을 가장(假裝)한 자는 좌고학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를 보좌하는 기이한 신법의 여인 벽하! 엽평은 호대철이 없는 틈을 타 신토부의 비밀을 캐러 숨어들고, 진소백은 음모가 난무하는 무림대회를 향하여 전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혈왕교의 변신으로 보이는 흑혈산과 그에 동조하여 하극상을 일으키는 천하에 숨 은 악인들! 그들을 막아 가며 또한 풍림서란 기이한 적도 상대해야 하는 단심맹의 제갈수와 초의 선사! 그리고 아직은 군영회로 들어오지 않은 비응방의 금청청! 사 씨가문의 광명협(光明俠) 사도명은 어디에서 아직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가? 무림 천추! < 제2권 끝 > ♡ 제 1 장 옛일은 아무리 지나도 잊을 수가 없다 1 바람이 스쳐 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현재의 신토부(申土府) 경비무사의 변변하지 못한 실력으로는 바람보다도 더


미세(微細)한 움직임밖에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원래 이 자리를 지키던 경비(警備)는 다른 곳의 경계(警戒)를 위해 자리를 옮겼다. 호대철(湖大鐵)을 따라 고수 이십여 명이 떠났으며, 그 중에서 오늘밤의 경계를 책 임져야 할 당번(當番)에 속했던 자는 모두 일곱 명이었다. 그 일곱 명이 빠진 자리는 모두가 중요한 곳인지라 조금 덜 중요한 곳의 일곱 명 을 데려다가 임시(臨時)로 충당(充當)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덜 중요한 곳의 경비는 다시 조금 덜 중요한 곳의 경비병(警備兵)을 전용(轉 用)하게 되어 결국은 외부의 침입 가능성이 가장 낮은 이런 절벽의 경계는 하급 (下級) 무사들에게 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설명상(說明上) 덜 중요하단 말을 쓰기는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현 상의 얘기! 덜 중요한 곳으로 침입하는 적(敵)들은 어디 적이 아니던가? 다만 절벽 같은 곳은 지키기가 쉽다는 뜻이었을 뿐이다. '신토부의 순찰(巡察)을 감독(監督)하는 자는 누굴까? 어리석기 이를 데 없구나!' 방금 경계병의 뒤를 스쳐 가며 미약한 바람조차 느끼지 못하도록 했던 엽평의 내 심이었다. 그는 당연히 절벽을 이용해 올라왔다. 적들이 올라오기 힘든 이런 절벽 가는 경계(警戒)가 허술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 병사(兵士)들이 수행하는 병가의 전쟁 때나 해당 (該當)되는 말이었다. 나름대로 병법(兵法)을 공부한 자들이 강호에서 군사직을 맡게 되는데, 일부 뛰어 난 병법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서적적인 지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 이었다. 단적인 예가 지금 신토부의 경계였다. 보통(普通)의 군인(軍人)들이 절벽을 기어오른다면 당연히 소리가 나게 될 것이고, 지키는 자들의 이목(耳目)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때문에 방어(防禦)하는 자들이 당연히 유리(有利)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강호인들은 개개인의 능력이 비슷한, 무공이 없는 군인들과 같은 형태(形態)로 싸 우지 않는다. 내가고수들의 싸움은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뛰어난 능력(能力)을 가진 내가고수(內家高手)들은 절벽을 손쉽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강호의 싸움에서는, 이렇게 깎아지른 천험의 절벽을 오르려는 자는 매우 뛰어난 고수임을 감안(勘案)해야만 한다. 해서 보통의 경우 경계병을 줄일 수 있는 이런 장소에 오히려 능력이 뛰어난 경계 병(警戒兵)을 배치(配置)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이 바로 일반 병법과 강호 병법의 차이가 드러나는 가장 단적인 예(例)였 다. 신토부의 경계 총감(總監)은 이런 점에 착안(着眼)하지 못했나 보다. 엽평의 움직 임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하수(下手)를 경비병으로 배치시켰던 무지(無知)! 그 무지의 결과는 신토부에 대해 악감(惡感)을 지니고 있는 한 무서운 청년무사를 아 무런 제지(制止) 없이 통과(通過)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로 인해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 가혹한 것이지 않을까? * * *


엽평으로서도 약간의 의외성(意外性)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이십여 명이 빠져 나갔다 하나 신토부(申土府)는 강호 전통이 매우 깊은 황토문(黃土門)에 근거를 둔 문파! 게다가 지금 신토부를 맡은 사람은 오룡(五龍)의 하나인 호대철(湖大鐵)이 아닌가? 아무리 부친의 원수라 하나 능력은 어디까지나 능력으로 인정하는 엽평이었다. 호대철의 능력에 황토문의 전통이 더해져 탄생된 신토부! 그런데 겨우 이십여 명 의 고수를 대동(大同)한 부주(府主)의 출타로 인해 이렇듯 경계가 허술해질 수가 있는가? 호대철의 거처(居處)인 황토각(黃土閣)이 눈앞에 보였다. 흙으로 지어진 황토각의 모습은 매우 단출하여 호대철이 화려한 생활을 좋아하는 자가 아님을 말해 주었다. 황토문은 근원(根源)을 민중에게 두고 있었다. 토호(土豪)들의 압박에 대항하던 소작인(小作人)들이 모여 자연스레 하나의 집단 (集團)을 형성하게 되고, 신분 구조상 능력을 펼 수 있는 길이 막힌 인재들이 그곳 에 가입(加入)했다. 이름하여 형평당(衡平黨). 그 중에는 뜻있고 능력있는 강호인(江湖人)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인재(人才)와 무공(武功)이 결합된 소작인들의 모임은 그 세력이 급격히 확산되어 급기야는 귀족들마저도 위협을 느낄 지경에 이르렀다. 송(宋) 말엽(末葉)! 반역의 누명을 쓰고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고 당주마저 처형당하자, 뜻이 있는 형 평당의 인재들은 강호로 숨어들었다. 그래서 탄생된 것이 바로 황토문(黃土門)!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황토문은 당당히 강호 주류 중 하나를 차지하게 되었다. 당금에 이르러서는 호대철의 능력이 더해지면서 신토부란 문파로 재탄생하기에 이 르렀으니... 당연히 부주 호대철의 거처가 화려할 리 없었다. 원래의 취지는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 한다는 뜻만은 아 직도 전해지고 있었으므로. 방안은 어두웠다. 등을 켤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지금의 엽평에게는 어둠이 오히려 이롭게 작용했다. 공공문(空空門)에서 가장 뛰어난 절기 두 가지는 공공신수(空空神手)와 신풍류(神 風流)란 신법이었다. 신투(神偸)의 집단이니 투도술(偸盜術)을 위한 빠른 손과 발이 필요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소백은 그 중에서 공공신수를 주로 익힌 데 비해 엽평은 신풍류를 극성(極成)으 로 연마했다. 애초의 계획이 진소백은 풍림서 앞에 모습을 드러내 활동하면서 그들의 이목을 끌 고, 엽평은 숨어서 그들의 실체(實體)로 파고드는 것이었으니. 각자의 임무에 맞는 수법을 주로 익힘은 당연했다. 지금 호대철의 집무실(執務室)로 엽평이 숨어든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어딘가 서류들을 남겼을 텐데..." 호대철의 책상을 뒤지면서 엽평은 중얼거렸다.


집무실에서 신토부 전체 업무에 관한 서류(書類)들이 처리될 터였다. 그것들을 찾 는다면 조그만 단서라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단서라도 좋았다. 엽평은 신토부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알아 내고 싶었다. 한참 동안 방안을 뒤지던 엽평이 벽에 걸린 그림 한 점에 주목(注目)���다. 희미한 어둠 사이로 겨우 그림의 윤곽(輪廓)과 음영(陰影)만이 드러나 있는 그림! 지금은 겨울이 막 끝나고 봄이 시작되는 계절이었다. 그런데 그림은 조락(凋落)하는 낙엽 을 진한 색채로 그린 것으로 계절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만약 이 그림이 화려한 치장으로 일관한 졸부의 방에 걸려 있었다면 주목할 필요 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검소(儉素)하지만 정결(淨潔)한 느낌을 주는 집무실에, 그것도 생동(生動)의 봄을 맞는 때에 죽음을 상징(象徵)하는 그림이 걸려 있다는 건 어딘가 이상하지 않는가? 이상한 일도 잘 생각해 보면 이유가 있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림 뒤에는 물론 금고(金庫)가 있었다. 벽에 붙은 금고를 숨기기 위해 그림을 이용하는 방법은 사실 매우 흔한 일이었기 에 엽평은 신토부에 대해 다시 한 번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단순하게 금고를 숨겨 놓다니!'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있는 금고! 열쇠가 없다면 결코 열리지 않을 것처럼 완고한 표정을 가장(假裝)하고 있었지만 엽평의 눈에는 장난감처럼 보였다. 공공문! 신투의 성지라는 이 문파의 무공은 철혈개(鐵血 )를 통해 자신에게 전해져 있지 않던가? * * * 한때 공공신투는 황궁의 봉황시(鳳凰 ) 없이 천하에서 가장 튼튼하다는 천화보고 (天華寶庫)의 문을 열었었다. 물론 보고 안에 갇힌 황자(皇子)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 일로 공공신투는 화(禍)를 맞게 되었다. 때때로 선(善)을 행한 보답으로 악(惡)이 돌아오는 경우도 많은 것이 세상(世上)인 가 보다. 그의 가공할 능력에 황제(皇帝)와 대신(大臣)들은 은연중에 위협(威脅)을 느꼈다. 해서 황자를 구한 그의 공도 무시한 채, 도적의 누명(陋名)을 씌워 그를 제거하려 했다. 자신이 심처(深處)에 감춰 둔 보물이 도난(盜難)당하거나, 알려져서는 안 되는 치 부(恥部)가 드러날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소인(小人)들의 행동은 이처럼 치졸(稚拙)하고 옹졸한 경우가 대부분이니, 사람은 소인 앞에서는 자신의 능력(能力)을 함부로 드러내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해서 공자(孔子)님께서는 소인들을 애초에 가까이하지 말라는 말씀을 남기셨던가? 소인과 군자는 신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천하에 신분이 가장 높다는 황제와 그 신하들이 오히려 소인배(小人輩)였으니, 오 직 행하는 행동(行動)에 의하여 인간됨의 크고 작음을 가려야 할 것이다. 어쨌든 신풍류(神風流)의 이점과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고 공적을 치하하는 몇몇 황궁의 인사(人士)들 덕분에 공공신투는 가까스로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천하 어느 곳에 황궁의 힘이 미치질 않겠는가? 평생을 숨어 다니며 거지 행세를 하던 공공신투는 자신의 비학(秘學)을 개방 장로인 철혈개에게 전하고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도둑은 황자(皇子)를 구했건만 황제(皇帝)는 그를 죽이려 했으니, 세상에는 도둑이 황제이고 황제가 도둑인 경우가 결코 적지 않다. 일세의 영웅이 평생을 어둠 속에서 도망 다니다 숨졌으니 어찌 애달프지 않은가? 만일 공공신투가 도왔던 상대가 평범한 백성이었다면 그는 후한 사례와 더불어 평 생의 감사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권력(權力)있는 자를 도운 죄로 그는 평생 생명을 위협받으며 숨어 살았다. 위에 선 자의 선택은 이처럼 다른 이의 인생을 망치기도 하니, 권력있고 힘있는 자에게 빌붙어 사는 이들은 부디 명심하라. 오늘 당신이 권력자(權力者)를 위해 해준 일로 인해 내일 당신이 패망(敗亡)의 화 를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리라. 어쨌든 오랜 세월이 흐른 당금에 와서 마침내 그의 비학은 진소백과 엽평의 손에 서 꽃을 피웠으니, 공공신투는 비로소 지하에서나마 눈을 편히 감았으리라. * * * 금고 속에 든 것은 종이 쪽지 하나뿐이었다. 이렇게 금고 속에 보관한 것이라면 매우 중요한 내용이 적혀 있음이 분명할 텐 데... 사방은 어두웠다. 흐린 날씨인지라 구름에 가려져,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은 매우 희미(稀微)했 다. 윤곽(輪廓)과 명암만 겨우 볼 수 있었을 뿐, 자잘하게 적힌 글이 보이기에는 무리 였다. 엽평은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이걸 가지고 나갈까, 아니면...' 좀더 주위를 뒤진다면 더 많은 것을 얻을 가능성(可能性)도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머무는 것은 위험할지도 모르니 잠시 갈등하는 것이다. 그러나 엽평의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팍! 인(燐)과 유황(硫黃)이 어울려 타오르는 신화통(神火統)의 불길이 아니라면 밤이 이토록 밝아질 까닭이 없었다. 엽평의 뒤에서 갑자기 일어난 빛! 금고의 문이 열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도록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신화통이 저절로 밝혀지도록 장치된 기관(機關)! 정밀한 기관에 의해 발생(發生)한 빛이었다. 갑자기 생겨난 것은 빛만이 아니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신법으로 그의 뒤에 한 인영이 내려앉음을 엽평은 빛이 밝 혀짐과 동시에 알아챘다. 설명이 길었다 하나 모든 것은 수유보다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둠 속에서 갑자기 생긴 빛에 당황하여 몸을 움직이지 못함이 정상(正常)이었다. 그러나 엽평은 달랐다.


아니, 그가 지난 일 년간 초의 선사에게서 받았던 훈련(訓練)이 남달랐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검! 언제 뽑혔는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지경으로 쾌속하건만, 소리도 없고 그 흔한 경풍(勁風)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십이 성의 회풍무류검(廻風舞流劍)! 빛과 동시에 엽평의 뒤로 내려선 건장(健壯)한 체구의 중년인(中年人)! 그의 눈에 는 엽평의 뒷모습과 검끝이 동시에 보이고 있었다. 엽평의 반응이 얼마나 빨랐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뻗어 가던 엽평의 검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순식간(瞬息 間)에 사라졌다. 다시 검집으로 돌아간 검! 워낙 쾌속한 변화 탓에 좀 전에 일었던 검기가 차라리 환상이었던 듯! 몸을 돌리 며 검을 뽑고 다시 그 검을 회수한 여러 동작이 각각 독립(獨立)된 형상처럼 한 번에 보였던 것은 엽평의 몸동작이 너무 빨랐던 탓이었다. 그토록 빠른 엽평의 검이 다시 거두어진 이유는 간단했다. 나타난 중년인이 조금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찔러 오는 검날을 묵묵 히 바라본다는 건 적의가 없음으로 해석해도 좋지 않을까? 엽평은 살의가 없는 적 을 향해서는 검을 날리지 않는다. 처음부터 검을 발출하지도 않았던 듯 조용한 신색으로 엽평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왜 반격하지 않는 것이오, 호대철?" 2 엽평은 분명 호대철이라 불렀다. 그는 호대철이 떠나가기를 사흘이나 기다려 신토부로 잠입(潛入)했다. 한데 떠났던 호대철이 다시 나타나다니. 호대철은 애초부터 떠나지 않았다는 말인가? 호대철은 엽평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멍한 눈으로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무슨 생각이 그의 뇌리(腦裏)를 휩 싼 것일까? 한참 동안이나 추억(追憶)에 잠겨 있던 호대철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회풍무류! 실로 이십 년 만에 나는 완숙(完熟)한 회풍무류검(廻風舞流劍)을 보는 구나." 엽평은 그의 말에 어떤 회한(悔恨)이 배어 있음을 느꼈다. 한(恨)은 어디에서 오는 가? 정(情)에서 온다. 정이 없는 자라면 한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호대철에게는 어떤 정이 있는 걸까? 엽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로는 질문(質問)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효과적(效果的)일 때도 있는 법이었다. 질문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려 준다. 또 상대방은 변명(辨明)만을 잔뜩 늘어놓는 여유(餘裕)를 갖게 될 우려(憂慮)도 있 었다. 엽평이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호대철은 또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물망인(勿忘人), 기억하는 자인가?" "또한 엽가 성을 쓰는 자이기도 하오." 호대철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일창(古溢倉)의 소식을 듣고 알았지. 엽자문(葉子文)의 후예가 나를 찾아오리란 것을." "한번 지은 죄는 얼마의 시간이 흐르더라도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오." "그렇네. 원인이 있다면 결과 또한 피할 수 없지." 호대철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도 그의 표정은 매우 만족스러워 보였다. "자넨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나? 너무 쉽게 들어왔다고 느끼지 않았냐는 말이세." 엽평은 인정(認定)했다. "충분히 느끼고 있소. 이제 보니 미리 알고 있었구려. 언제부터 내 존재(存在)를 눈치챘던 거요?" "사흘 정도 되었네." 사흘이라면 엽평이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다. 결국 신토부에서는 처음부터 엽평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얘기! "자네의 신법이 라든가 능력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네. 다만 이 주위의 생리를 너무 몰랐던 게 문 제였지." 엽평은 돌이켜 생각했다. 그가 이곳으로 오는 동안 사람들과 접촉(接觸)했던 것은 단 한 번밖에 없었다. 오십여 리 밖에서 식량(食糧)을 사기 위해 들렀던 농가(農家)! 그것도 매우 조심하 여 상점이 아닌 일반 농가를 이용했던 것인데... 엽평이 생각에 잠겨 있자 호대철은 미소를 띠었다. "신토부의 뿌리는 황토문에 있고, 다시 그 근원은 소작농과 일반 농사꾼들로 거슬 러 올라가지. 자넨 충분히 조심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실수(失手)였네." 엽평은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알았다. 자신 또한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살아 있는 병법(兵法)은 상대에 따라 수시로 모습을 바꿔야 한다. 신토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다른 계획을 세웠어야 마땅했다. 엽평은 신토부에서 경계병 세우는 법을 탓했었지만 자신 또한 그런 오류(誤謬)에서 자유스럽지 못했 음을 비로소 느꼈다. 잘못에는 당연히 대가(對價)가 따른다. 강호에서 그것은 종종 죽음이기도 했다. 엽평은 앞에 선 호대철이 풍기는 기도를 느끼고 있었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니, 비단 만만(滿滿)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주 까다로운 상대일 것이다. 게다가 그의 뒤에는 신토부란 막강한 집단이 있지 않는가?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 지만 호대철이 나타난 이상 고수들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으리라. 그리고 그의 말 한마디면 벌떼같이 나타날 것이다. 엽평은 머리를 써서 매우 조심스럽게 신토부에 잠입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함정이 었을 줄이야! 어쨌든 패배는 즉시 인정해야만 한다. 패배를 인정할 수 있어야지 언젠가는 새로운 발전(發展)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난 패했소. 이미 함정에 빠졌으니... 뭘 망설이시오? 어서 다른 사람들을 부르시 오." 호대철은 방수(邦手)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한숨을 길게 쉬더니 엽평에게 말했다. "자네는 금고 속에서 지편을 훔쳤을 걸세. 어서 읽어 보지 않고 무얼 망설이는 것


인가?" 엽평은 의아했다. 하지만 지금의 태도로 보아 호대철은 그가 종이를 들여다보는 빈틈을 노려 공격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엽평이 종이에 적힌 글을 읽어 보는 사이, 호대철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앞에는 이십 년 전, 보다 정확히 말해 십칠 년 전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 럼 펼쳐지고 있었다. * * * "호 부주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까?" 천일독(天一獨)은 인의신개를 보고 말했다. 인의신개는 오늘의 모임을 임시로 주지(主旨)했고, 모임이 끝나 중원맹의 맹주(盟 主)가 결정된다면 그 직위는 당연히 맹주에게 넘어갈 것이다. 지금 호대철의 도착 여부를 물어 오는 천일독도 매우 가능성이 큰 후보라고 인의 신개는 생각했다. 강호의 명망 높은 신승(神僧) 초의 선사는 참여하지도 않았고, 소림의 현공(玄空) 대사도 자파의 사정으로 맹주 자리를 고사(固辭)하고 있었다. 지금은 정파의 힘이 가장 거대한 시기였다. 그리고 천외성이 해체된 지금 가장 큰 힘을 자랑하는 것은 당연히 대륙오행련(大 陸五行聯)이었다. 오행련의 다섯 연주 중에서 은연중에 천일독이 대표(代表) 행세를 하고 있음을 인 의신개는 놓치지 않았다. "곧 도착하시겠지요. 아직 여유가 많습니다." 이제 날이 밝았다. 동천이 훤했으니 오시(午時)에 시작하는 무림대회는 두 시진 정도가 남은 셈이었 다. 다섯 명의 공동 연주 중에서 하나가 빠진 탓일까? 그만큼 힘이 줄어듦을 의식하고 있는 건지 천일독의 태도는 어쩐지 초조해 보였 다. * * * <자네에게 후사를 맡기네. 나로서는 죽음을 피할 수 없어 보이니, 부디 자네는 스 스로를 숙여 나중을 대비해 주게.> 엽평은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후사를 부탁한다면서 스스로를 숙이라는 말은? 어쨌든 엽평은 글씨 쓴 사람을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 엽자문! 물론 엽평은 아버지의 필체(筆體)를 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필체를 알아 볼 수 없음은 당연했다. 다만 엽평이 알아본 것은 필법(筆法)이 담고 있는 변화였다. 용사비등(龍蛇沸騰)하는 글씨체는 회풍무류검의 변화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검의 변화가 글씨에까지 나타난다는 것은 쓴 사람의 조예가 이미 화경(化境)에 달했다 는 의미였다. 이전에 회풍무류검(廻風舞流劍)을 화경까지 익힌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남


궁세가의 무류검(舞流劍)을 변형, 보완하여 회풍(廻風)이란 이름을 그 앞에 달도록 만든 사람! 엽자문이 쓴 이 쪽지를 호대철이 가지고 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래 생각하 지 않아도 그 속에 담긴 어조로 보아, 엽자문이 호대철에게 뭔가를 부탁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의도적(意圖的)으로 이것을 보도록 한 게요?" 엽평은 굳은 어조로 물었다. 호대철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오늘밤 너무나 쉽게 부 내로 들어올 수 있었음이 자네도 이상하다 말하 지 않았던가?" 엽평은 인정했다. 그 또한 신토부의 경계가 허술한 것을 이상히 여겼으므로. 모든 것이 그로 하여금 이 종이에 적힌 엽자문의 글을 보게 하기 위함이었다면 이해(理 解)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벌써 강호의 생리(生理)에 눈을 뜬 청년! 만일 이것 또한 음모라면 어 찌할 것인가? "난 아직은 믿기 어렵소... 이유는 이해하실 것이오." 호대철은 물론 이해할 수 있었다. 엽평은 나름대로 노력을 경주하여 천상화(天上花)라는 가느다란 실마리로부터 출 발하여 호대철(湖大鐵)을 찾아왔다. 그로서는 갑자기 변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장이 바뀐다면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난 자넬 이해하네. 하지만 생각해 보게. 내가 이처럼 심혈을 기울여 자네를 이곳 으로 부른 이유를." "날 불렀다니! 그건 무슨 뜻이오?" 엽평은 분명 고일창이 남긴 편지를 읽고 이곳으로 왔다. 그런데도 호대철은 자신이 엽평을 불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넨 고일창의 서찰(書札)에서 마지막으로 자문을 만난 사람이 나와 종수라고 읽 었을 것이네." 호대철이 그 사실을 어찌 아는가? 이자가 고일창의 서찰을 읽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오직 엽평 혼자만이 읽었으며 바로 태워 버린 서찰이었다. 엽평은 그제서야 짐작이 갔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에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가장 최선임을 엽평은 알고 있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더욱 열심히 설명을 시작하도록 만드는 최선의 방법은 침묵인 것이다. "난 물망인(勿忘人)이란 사람이 천상화란 단서를 따라 끝내는 고일창(古溢倉)까지 알아 낼 것임을 알고 있었지. 그러나 생각해 보게! 고일창은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 자문의 부검(剖檢)에 참여했던 다른 사람들은 이미 모두 제거 (除去)되었는데." 이 말은 틀림없었다. 엽평이 굳이 고일창을 찾은 것은 다른 자들은 모두 사고로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 기 때문이다. 사고로 알려진 그들의 죽음은 사고가 아니었던가? "자네가 찾은 끈은 고일창에서 끊기도록 되어 있었네. 그가 뭔가를 알고 있었다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걸세. 모르고 있었으므로 운 좋게 살아남았지. 그에게서 더 이상 끈이 연결될 방법은 원래 없었네." 엽평은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고일창은 그를 협박하는 인질이던 손녀가 죽은 후에도 아무런 목숨의 위협을 받지 않고 살아남았다. 일처리가 항상 완벽하던 풍림서의 행사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던 부분이었다. 하지 만 고일창이 진정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실지로 고일창은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야 겨우 두 사람의 이름만을 알아 냈다고 들었다. 몰랐던 사람이 갑자기 알게 된 배후(背後)에는 호대철의 영향이 있었던 것이다. 호대철은 엽평에게 잠시 생각할 여유를 주었다. 엽평은 생각을 정리하더니 고개를 들어 호대철을 보았다. "고일창이 얻었던 정보는 거짓 정보였소?" 호대철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그가 지난날을 후회하면서 자문의 암살에 대한 배후를 찾고 있음을 난 알게 되었 네. 그래서 그에게 나와 종수의 이름을 슬쩍 흘렸지." 엽평은 그제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호대철은 종수의 이름을 말했다. 고일창의 서신을 그가 보았을 리가 없으니, 그가 정보를 흘렸다는 말은 옳을 가 능성이 매우 컸다. 3 침묵이 흘렀다. 신토부의 부주를 위한 집무실에 조용히 서 있는 두 사람! 엽평은 한참이 지난 후,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의 말은 앞뒤가 잘 들어맞아 신빙성이 있소. 하지만 여전히 난 의심을 풀 수 없소." "맞네. 자네 입장으로서는 당연하지. 난 그런 점까지 생각해서 종수의 이름을 그곳 에 넣었던 걸세." 호대철은 눈을 빛내며 설명했다. "그는 이미 실종되었고, 자문과 가장 친했던 사람 중 하나지. 조금만 생각해 본다 면 그가 결코 자네 아버지의 죽음과 연관될 수 없음을 알 것이네." 엽평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유유곡에서 자신에게 심장을 넣어 준 후 죽어 간 종수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 엽자문을 암살한 사람 중의 하나일 수 있겠는가? 종수 또한 절 망옥의 비밀을 알아 낸 관계로 누군가에게 암습당하지 않았던가? 호대철은 물론 그런 관계까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는 가장 가능성이 없는, 실종된 종수를 끌어들임으로써 엽평이 최후의 의심(疑心)마저도 풀 수 있도록 안배(按配)했던 것이다. 결코 의심받을 수 없는 사람을 넣어 혹시나 남을지 모르는 자신에 대한 의심마저 풀도록 하는 것! 실로 오룡의 이름에 걸맞는 처세였다. 엽평은 더 이상 호대철을 의심할 수 없었다. 다시 입을 여는 그의 어투는 변해 있었다.


"한 가지만 더 물어 봐도 되겠습니까?" 평어(評語)에서 경어(敬語)로 변한 그의 말투는 엽평이 호대철의 말을 인정함을 뜻 했다. 호대철은 아버지의 벗이었으니, 엽평으로서는 결코 평어(評語)로 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무례(無禮)히 굴어서도 안 되었다. 그의 진심(眞心)을 알게 된 지금 경어로 바꿈은 당연했다. 호대철도 그 점을 느꼈는지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무엇이나 물어 보게." "아버지... 의 부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분은... 어떤 부탁을 하신 겁니까?" 호대철의 눈에 습막(濕幕)이 피어올랐다. 지난 십칠 년간 그는 오직 이 순간만을 상상하면서 살아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었다. "난 자네의 형, 엽혼이 초의 선사의 문하로 들어갔음을 알고는 안심했네. 해서 자 네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일도 그만두었지. 그러다가 뜻밖에도 엽혼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었네." 옛일을 회상(回想)하는 듯, 위를 올려다보며 호대철을 말을 잇고 있었다. 엽평도 그 시절이 생각났다. 초의 선사 문하로 들어간 형은 무공을 배웠고, 밤마다 그에게 가문의 회풍무류검 을 지도해 주었었다. 그러다가 자신에게 절맥증이 나타났고... 형은...! "난, 내 경솔함으로 자문의 부탁을 끝내 이행하지 못하게 되는 줄 알았네." 호대철은 엽자문의 부탁에 대해 말해 주기 이전에 지난 세월에 대한 설명을 우선 했다. 오랜 시간의 기다림을 스스로 회상하는 것인가? "말해 주겠네. 그러나 결코 짧은 얘기가 아니니 자리에 앉아서 말하는 게 어떤 가?" 엽평은 자리에 앉았다. 그가 앉을 곳을 찾자 어느새 실내에는 의자가 나타나 있어, 이 허름해 보이는 집 무실에 만만치 않은 기관(機關)이 장치되어 있음을 알게 했다. "난 자네가 아주 어린 소년이었을 때 봤지. 벌써 십칠 년이 지났구먼. 하지만 한눈 에 알아볼 수 있었어. 자넨 자문을 아주 많이 닮았거든." 엽평은 가만있을 수 없었다. 그는 호대철이 아버지를 배신한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지기였음을 느낄 수 있었 다. 의자에서 일어난 엽평의 몸이 바닥으로 숙여졌다. 엽평은 비록 어린 시절을 고아로 자랐지만 예의는 알고 있었다. 그의 형 엽혼은 동생이 예의와 인간의 도리를 아는 자로 커주기를 바래 한시도 교육을 소홀히 하 지 않았다. 바닥에 머리를 대는 엽평! 그의 머릿속에는 지난 세월의 고난이 연결되어 펼쳐졌다. 그리고 얼굴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부모의 모습과 항상 엄하면서도 다정한 눈 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형이 떠올랐다. 엽혼!


그의 형은 왜 먼저 세상을 떠나야 했던가? "호 숙부께서는 소질의 절을 받으십시오." 너무 오랜 기간 보지 못했던 친우의 아들! 엽평의 절을 받는 호대철의 눈에 어렸던 습막은 이제 방울로 맺혀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호대철은 결혼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죽음을 대비하며 살았고, 먼저 죽은 친 우를 생각하며 살아 왔다. * * * "그가 천추학림 내부의 이단(異端) 세력을 느낀 건 마지막 연무를 앞두고 천기원 에 들어갔을 때였지. 출발은 어이없게도 몇몇의 객기(客氣) 때문이었어." 호대철은 옛일을 회상(回想)했다. 그의 몸은 어느덧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십칠 년 전의 그 아름답던 단풍숲으로 돌 아갔다. 앞에 모여 있는 다섯 명의 청년! 젊음을 잃지 않았던 자신과 엽자문! 진무외와 남궁중, 그리고 천일독의 모습! 모두 가 정기와 우정이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우정과 정의로 충일하던 오룡의 모습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세월은 소리없이 젊 음을 가져 가고, 순수(純粹)는 사라지며, 음모(陰謀)만이 남은 강호! 세월이 흐른 지금 옛일을 되새기는 호대철의 눈은 촉촉이 젖어들었다. -재미있지 않겠나? 마지막으로 한번 연구해 보자고! 이 말은 누가 먼저 꺼냈던가? 그래! 남궁중이었어. 그는 항상 명랑하지만 엉뚱해서 이상한 화제(話題)를 꺼내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 들었지. -우린 강호의 평화를 보호하도록 교육받았어. -맞네. 말도 안 되는 얘기지. 강호 점령법(占領法)을 연구하다니. 가장 신중(愼重)한 천일독(天一獨)과 농담을 싫어하는 진무외(鎭無畏)는 물론 반대 했지. 하지만 전혀 의외인 것은 문사 출신으로 우리 사이에서도 고리타분하다는 평판을 얻고 있었던 엽자문의 반응이었지. -아니, 난 좋은 의견이라고 생각해! 아마 남궁중의 여동생 남궁정과의 혼약(婚約) 때문이 아니었을까? 손위 처남인 남 궁중의 의견에 엽자문이 동조했던 것은. -강호 정복에 대한 연구를 한다면 대비책도 알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 옳은 소리 였지. 나도 그들의 의견에 동조했으니까. 그리고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가? 호대철은 그 시간들을 기억했다. 무수히 반복되는 학습과 수련! 가장 철저했던 것은 인성에 대한 끊임없는 교육이었다. 모든 천추학림의 수련생들을 강호의 정파를 짊어질 인재로 만들기 위한 인간성 교 육! 나뭇잎은 단풍이 들었다 떨어짐을 반복했다. 그리고 십 년, 아니면 구 년 정도가 흘렀던가? 오룡은 모두 훌륭한 인재로 자라나 그들을 교육시켰던 학림의 모든 사람을 기쁘 게 했다.


다시 모인 풍림(風林)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천일독은 더욱 신중하고 영리해졌으며, 엽자문은 회풍무류검을 창안하여 독보적인 검술을 연마했다. 진무외는 더욱 진중해졌으며, 남궁중은 지난날의 장난기를 많이 잃어버렸지만 여 전히 명랑했다. 그리고 자신 호대철은 여전히 무뚝뚝한 사내로 그들에게 보였을 것이다. -하늘을 보고 맹서하오니, 우리 다섯은 뜻을 하나로 하여 강호의 안녕을 지킬 것 입니다. -지켜보소서. 오늘 저희의 맹서를! 풍림에서의 맹서! 일러 풍림서(風林誓)였다. 그날 밤, 엽자문이 자신의 거처로 찾아왔다. 호대철은 그의 곤혹(困惑)스러워하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난 진지하게 강호 정복에 대한 연구를 해보았었지. 그의 눈빛! 뭔가 절망(絶望)스러운 것을 본 듯하던 엽자문의 눈빛!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오늘과 같은 모임일세. 풍림서 같은! 무슨 소리일까? 우린 강호의 평안(平安)을 위해 맹서(盟誓)하였건만 뜬금없이 강호 정복이라니. -뛰어난 인재들은 강호를 위해서는 마땅히 분산(分散)되어 있어야 하네. 힘의 분산 만이 헛된 야욕을 막을 수 있지. 천추학림의 원래 취지는 그런 것! 힘을 공유함으 로써 분란의 여지를 막자는 것! 엽자문은 그때 누구를 의심했을까? -만일 우리와 같은 모임에서 뜻이 변질(變質)된다면 강호는 어떻게 되겠는가? 난 그제서야 그의 뜻을 알 수 있었어. -하지만 너무 심한 걱정이 아닌가?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아! -아니, 일어 날 수도 있다네. 해서 자네에게 한 가지를 부탁하겠네.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 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누가 우리 오룡 중의 일부를 제거한단 말인가? 오룡 개개인의 능력은 이미 최고에 달해 있었는데, 우리를 제거할 능력을 가진 자 들이 과연 있을까? 게다가 더욱 말이 안 되는 것은 강호의 제패를 제안해 올 사람이 있다는 소리였 다. -어쨌든 이건 만에 하나의 대비(對備)라네. 난 이미 이런 말들을 떠들고 다녔으 니... 만일 불순 세력이 존재한다면 날 회유하려 들지는 않을 걸세! 하지만 자네는 달라! 그래, 만일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니고 그저 착각에 불과하더라도, 대답해 주는 편이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이겠지. 엽자문이 이런 말을 하고 간 뒤 며칠이나 지났을까? 설마 정말 날 찾아온 사람이 있을 줄이야. -강호는 썩었네. 모두 자파의 이익만을 위해 음모와 시기 속에서 살아 가네. 글쎄, 어쩌면 그의 말대로 정말 강호는 썩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왜 그런 말을 나에게 하는 걸까? 이 녀석! 항상 창천의 푸른빛을 담고자 입고 다닌다는 그의 푸른 옷이 오늘따라 왜 이처럼 차게 보이는가?


-해서 우린 결심했네. 강호를 정화시키기로. 그것이 우리가 풍림에서 했던 맹서를 보다 정확히 실현시키는 길이라 여겨지네. 엽자문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난 피가 싸늘히 식어 가는 충격 속에서 그의 말에 동조(同調)했다. 이것은 엽자문의 부탁이었던 것이다. 그가 말했던 것은 '우리'. 결코 한두 명으로 결성된 세력이 아니었다. -엽자문도 회유하도록 노력하겠네. 하지만 자네도 알겠지. 그의 강직(强直)함이 때 론 흠이 된다는 것을. 청의를 입은 그가 돌아갔을 때, 호대철은 그가 채 닫지 않은 문틈 사이로 단풍나 무를 몇 그루 보았다. 붉고 노란 단풍은... 그때 절정을 치닫고 있었다. 풍림서! 무림의 평화를 지키자던 그 맹서는 이렇게 변질되었다. * * * "아버지께서는 끝내 거절하셨군요." 엽평의 물음에 호대철은 침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죽임을 당할 때, 중수(重水)가 든 술을 마실 때 난 같이 있었지만 막을 수가 없었네. 아니, 자문의 표현대로라면 막아서는 안 되었지." 엽평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별다르게 할말이 없었다. 다만 그는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호대철의 말대로 아버지의 부탁이 그러했다면 살 아남은 호대철이 오히려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강호에서는 때때로 죽음이 삶보다 쉬운 경우가 많은 법이었다. "매우... 힘이 드셨을 겁니다. 어쩌면..." 호대철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의 말은 엽평에게 매우 큰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난 행동이 전혀 자유롭지 못했네. 해서 몰래 천하제일고수로 인정받는 신승 초의 께 풍림서의 정보를 흘렸네." 이것은 뜻밖의 사실이었다. 엽평은 사부께서 어떻게 아무도 모르는 풍림서의 존재를 눈치채었는지 깨닫게 되 었다. "난 그분이 신조문(神照門)의 제갈수와 회동(會同)했다는 것까지는 알아 내었으나 더 이상은 모르겠네. 하지만 결과는 내 의도보다도 더 훌륭한 듯하네." 그랬다. 초의 선사가 풍림서의 야망에 대항하여 만들어 낸 단심맹(丹心盟)의 활약은 지금 매우 돋보이지 않는가? 어린 시절 엽혼과 엽평을 돌보아 주셨던 사부의 행동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 다. 다만 자신의 절맥으로 인해 먼 길을 우회했을 뿐이었다. 엽평은 표현하기 힘든 감회(感懷)를 느꼈다. 아버지의 숨결! 풍림서의 발단을 예견하고 호대철로 하여금 자신을 대신해 풍림서의 내부에 남도 록 부탁했다.


호대철��� 암중에 풍림서에 관한 정보를 유출시켜 초의 선사가 단심맹을 만들게 되 었으니 비로소 진소백이란 인물이 탄생하게 된 것 아닌가? 또한 진소백의 활약이 없었다면 엽평은 종사원에게서 치료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 니... 엽평은 아버지의 숨결을 느꼈다.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후에도 그의 아버지가 세상에 남겼던 숨결은 돌고 돌아서 자신을 감쌌음을 알게 되었다. 깨달음과 함께 밀려오는 건 참기 힘든 감사(感謝)였다. 누구에게라고 딱히 집어 말하기는 힘들었다. 아버지라도 좋고 그의 형 엽혼이라도 좋았으며 호대철, 아니면 사부님이나 진소백 그 누구라도 좋았다. 어쩌면 그들 모두에 대한 감사의 염이리라. 자신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행했지만 그 생활 하나하나에는 형 엽혼과 아버지가 남겼던 안배가 존재했었던 것이다. 엽평은 때때로 원망했던 하늘이 결코 무정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 았다. "이젠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야겠습니다." 호대철은 엽평이 물어 볼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당연히 풍림서를 조직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겠는가? ♡ 제 2 장 피어나는 군영회 1 엽평은 신법을 유운행(流雲行)으로 바꾸었다. 신풍류는 비록 쾌속하기는 했지만 내공의 소모가 유운행보다 많았다. 엽평의 목적지는 금검문(金劍門)이었다. 그다지 먼 곳은 아니더라도 신풍류(神風流)로 가기에는 무리(無理)가 있었다. 어쨌 든 남궁중 역시 무림대전(武林大典)에 참가했을 것이니, 여유는 있었다. 엽평은 왜 금검문으로 가려는 것인가? 누군가 엽평의 마음속을 들여다본다면 바로 알게 될 것이다. 호대철의 말은 거대한 충격으로 자리잡아 아직도 그의 뇌리(腦裏)를 지배(支配)하 고 있었으므로. -풍림서(風林誓)는 우리 오룡(五龍)이 했던 단풍숲의 맹서가 변질(變質)된 집단이 네. 따라서 애초에는 오룡 전체를 참여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지. 하지만, 그는 성공하지 못했네. 엽자문과 진무외는 너무 강직하여 제거(除去)되었네. 이런 모든 일을 암중에 진행 시키고 최후에 중수(重水)로써 자네 아버지를 해친 원흉은 바로... 천일독일세. 유사부 제갈수의 예감은 적중했다. 천일독이 주가 되고 오룡이 포함된 집단! 강호에는 제거된 두 명 대신 그에 못지않은 능력을 가진 자들을 포함시킨 집단이 있었다. 엽평은 벌써 그들의 수뇌를 모두 만나 보았다. 태화평에서! 대륙오행련이 바로 그들이 아닌가?


-대륙오행련이 바로 풍림서라네. 천일독은 오 개 서(誓)의 제일서주이며 풍림서의 서주(誓主)를 겸하고 있지. 내가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자문의 처남이기도 한 남궁중이 어떻게 자문을 그 처럼 쉽게 배반할 수 있었느냔 점일세. 세인이 알지 못하는 다른 사연이 있었는가? 남궁중은 엽자문의 좋은 친구였을 뿐 아니라 처남이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처럼 쉽게 엽자문을 배신(背信)하고 등을 돌렸을까? 이런 의문 을 풀고자 엽평은 쏜살같은 신법으로 금검문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가고자 하는 이유! 신토부에서 호대철의 외출을 기다린 것과 같은 이유였다. 신주평(神州坪)의 무림대회에 참석한 남궁중이 돌아오기 전에 금검문에 들어가 보 려는 것이다. 그곳에서 알아 낼 수 있는 게 또 있지 않겠는가? 엽평은 물론 연락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모종의 곳에 있는 제갈수에게 보내는 전서구(傳書鷗)가 하늘로 올라갔다. 각기 다른 곳에서 풍림서에 접근하는 진소백과 엽평 사형제는 이처럼 알아 낸 정 보를 즉시 제갈수에게 알림으로써 최대의 효과를 얻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비둘기! 왜 사람들은 전신에 비둘기를 이용하는가? 훈련시키기 쉬운 탓이겠지만 약한 비둘기는 맹금의 공격에 다칠 위험이 있지 않겠 는가? 차라리 독수리를 훈련시켜 사용하는 게 어떨까? 매를 훈련시켜서 사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던데... * * * 진소백과 섭수진, 매일도는 최상(最上)의 경공으로 달려가던 몸을 멈춰 세웠다.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으니 무림대회는 시작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아무리 급하더라도 지친 몸으로 음모(陰謀)의 중앙으로 뛰어드 는 어리석음은 없었다. 반나절의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천천히 가면서 호흡을 고르는 것이 당연한 수순 (手順)이었다. 지금 진소백의 뇌리를 감도는 이름은 네 가지였다. 악마혈, 장춘곡, 좌고학, 그리고 혈왕교! 장춘곡이란 이름을 강호인들은 모두 기억한다. 그곳이 귀곡자(鬼谷子)의 진전을 이었음보다도 귀곡의절(鬼谷醫絶)이란 탁월한 의 술로써 악마혈(惡魔血)이란 혈왕교(血王敎)의 가공할 절독을 해독(解毒)시켰음을 강호는 아직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강호에는 장춘곡이란 이름이 없었다. 귀곡의절을 마지막으로 이었던 천추학림의 전대 임주 종사원(鐘思元)은 이미 앙천 봉에서 숨을 거두었다. 어쩌면 그의 아들 종수(鐘秀)가 실종되었을 때부터 장춘곡은 강호에서 사라졌다고 봄이 옳았다. 귀곡무절을 이었던 연옥천마저 식물 인간이 되었으니...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 어려움은 누구나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보라. 진소백은 비록 좌고학의 음모를 항상 밝혀 내었지만 결과적으로 좌고학은 원했던


것을 모두 얻었다. 천외성에서의 승부 결과를 보라. 진소백은 그를 잡았지만 좌고학은 혈마수라결을 얻고 말았다. 천추학림에서도 진소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좌고학의 음모를 돕게 되었다. 지금껏 보인 진소백의 승리는 너무나 피상적(皮相的)인 승리라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진소백의 머릿속에는 지금 갈만생이 죽어 가면서 말했던 무림대회의 변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때문에 바쁜 와중에서도 황산(黃山)으로 전신(電信)을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진소백은 짐작도 못 하고 있었다. 좌고학! 그가 진정으로 의도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왜 혈왕교의 교주 신분을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는 그가 굳이 번거로움을 무릅쓰 고 풍림서 외단의 제오단주(第五壇主)로 변신했었는지를. 아무리 진소백이라도 모든 사실을 알아 낼 수는 없는 까닭이었다. 매일도 역시 한참을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는지 진소백을 보고 말했다. "진 형! 아니, 회주(會主), 만일 혈왕교의 암습이 있다면 당연히 악마혈이 우선할 텐데... 대비책은 있소?" 진소백은 회주란 칭호(稱號)가 어색하여 얼굴을 조금 붉히며 대답했다. "종사원 선배께서 남기셨던 귀곡의서를 제갈 사부께서 분석하셨소. 결과는 나로서 는 아직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의 성과는 있었던 듯하오." 섭수진도 끼여들었다. "아까 보낸 전신은 그럼...?" "맞소. 악마혈의 해독약을 제갈 사부께 요청했소." 진소백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백이십 년 전, 악마혈을 해독했던 귀곡의절은 또다시 효력을 발휘할 것인가? 진소 백은 최선을 다해 안배했다. 그런데도 이처럼 불안한 이유는 뭘까? 사태는 정녕 옛날과 동일하게 움직일 것인가? 이미 백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후였 다. * * * 해는 중천에서 서쪽으로 조금 비껴났지만, 무림대회의 열기는 최고조(最高潮)에 달 했다. 귀빈석의 중앙(中央)에는 오늘의 대회를 주지하는 개방의 용두방주(龍頭幇主) 인의 신개가 자리했다. 그 주위로 같은 서열임을 나타내는 동일한 모양의 의자에 구파 장문인들이 앉아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륙오행련(大陸五行聯)의 다섯 연주들도 한 자리, 호대철의 자리만 비워 둔 채 앉 아 있었고, 무림십정(武林十正)도 최혼 외에는 모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신검, 신도, 신창을 필두로 하는 그들은 천추학림 제이기(第二期) 출신의 기둥들이 었다. 오늘의 모임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역시 누가 맹주로 선출되느냐는 것이었 다.


중원맹(中源盟)이란 간단한 이름은 이미 결정이 되었다. 남은 순서는 당연히 맹주 선출이었다. 직제나 여타 구성은 맹주의 결정 이후에 하는 것이 순례가 아니겠는가? 정도 문파 들답게 겉으로는 사양(辭讓)하면서도, 각자 암중(暗中)에는 저마다 자신에게 조금 이라도 유리한 인물을 맹주로 뽑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시 한 번 오늘 맹주 후보로 추대되신 분들의 명단을 발표합니다." 무골개(無骨 ) 송인은 오늘 행사의 진행을 맡아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대 회장을 울리고 있었다. "먼저 가장 많은 추천을 받으신 소림의 현공 대사이십니다." 소림의 현공 대사는 구파의 영수 소림의 장문인이란 점 외에도 개인적인 덕행이 강호에 알려져 있어, 최다(最多)의 추천을 받았다. "아미타불! 소림의 현공이 강호동도들을 뵙소." 그가 일어나 군웅들에게 인사하자 우레 같은 호응이 뒤따랐다. "다음은 현 강호에서 가장 큰 무력을 지닌 문파임이 확실한 대륙오행련의 수석련 주(首席聯主)이신 천일독 대협입니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수도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오룡의 일 인이라 하나, 강호에 재출도(再出道)한 지 겨우 한 달밖에 안 된 그가 이처럼 많은 지지자(支持者)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의외(意外)였다. 아마도 천외성을 탈퇴한 대륙십웅(大陸十雄)이 오행련에 가담한 것이 큰 작용을 하지 않았을까? "오행련의 천일독이 인사드립니다." 현공 대사에 조금도 못지않는 박수 소리가 그를 맞았다. 아무래도 오행련의 모든 인원이 응원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세 번째는 무림십정의 수위이시며 현재 신검산장을 맡고 계시는 추림 대협입니 다." 그에 대한 추천이 적었던 이유는 그의 명성이 약했던 탓이 결코 아니었다. 신검산장(神劍山莊)의 근간(近間)의 활동이 뜸했음을 의미할 뿐이었다. 그러나 추림의 의지가 굳고 십정 모두가 강호의 의협임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지 지했다. "추림입니다. 여러 가지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강호를 위해 일하겠습니다." 무림십정은 환호했다. 최혼(崔渾)이 정도(正道)를 벗어나 소림으로 압송된 이후, 무림십정의 이름은 약간 퇴색하는 기미가 있었다. 하지만 최혼과 상위 세 명인 신검, 신도, 신창과는 천양지차가 있는 것이 무림십정 의 구성! 추림이 맹주의 대표로 나선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어쨌든, 후보 중 두 명이 천추학림 출신이라는 것은 천추학림의 영향력을 알려 주 는 것이기도 했다. "마지막 후보입니다. 저희 개방의 용두방주이신 인의신개 방주십니다." 그가 후보로 추천받은 것은 오늘의 모임을 주지(主旨)하는 사람인 영향이 컸다. 아무래도 큰일을 주관하는 사람은 인지도(認知度)를 높일 수 있는 법이었고, 사람 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얼굴에게 투표를 하고 싶어하는 것이 일반이었다. "저는 무림맹주직을 맡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습니다. 따라서 저는 사퇴(辭退) 하겠습니다." 이런 간단한 말로써 인의신개는 가장 많은 박수와 한탄을 받을 수 있었다.


박수는 인의신개의 욕심없음에 대한 강호인들의 탄복이었고, 한탄이 많았던 것은 대회 주관 문파인 탓에 개방도들이 자리를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세 분만을 모시고 최종적인 결선을 치르겠습니다." 환호하는 군중들 속을 뚫고 무골개의 공력이 가득 실린 음성이 힘있게 퍼져 나갔 다. 그리고 그 음성이 겨우 닿는 먼 곳에, 세 명의 젊은이들이 은밀히 나타났다. 진소백을 비롯한 두 명의 기재들! 그들은 이제서야 대회장에 당도한 것이다. "우선 흩어져서 혈왕교의 손이 닿을 만한 곳을 점검합시다." 그는 매일도를 보면서 말했다. "매 형께서는 음식과 술이 있는 곳을 둘러봐 주십시오. 독을 넣는다면 역시 그쪽 이 가장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섭 소저께서는 식수를 점검해 주시오." 공적인 자리인지라 경어를 썼지만 진소백과 섭수진은 둘 다 어색해 했다. "난 수상한 사람이 없는지를 점검하고 유사부님의 해독약이 당도했는지를 알아 보 겠습니다." 이제서야 겨우 군영회는 당도했다. 2 인의신개가 사퇴함으로써 양상은 세 명 후보들의 각축으로 변했다. 그러나 마지막 결선에 이르자, 소림의 현공 대사마저 자파의 상황을 들어 맹주직 후보를 사퇴했 다. 문파 내의 모종의 문제로 도저히 전면에 나서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중인들 대부 분은 최근 소림에서 장로급 인물이 풍림서란 단체의 첩자로 밝혀진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 일의 책임을 지고 몇몇 유망하던 후기지수(後期之秀)들과 장로들이 스스 로 징계를 받았음도 알고 일이었으므로, 누구도 심한 반대는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천일독과 신검 추림, 둘만의 결선이 치러졌다! 백중세의 지지 속에서 어 느 누구도 우위에 서지 못했다. "결과를 발표합니다." 투표 결과를 중인에게 알리는 무골개의 음성은 상기되어 있었다. "총 삼백이십여 방파의 대표로 선발된 십오 인의 대리인 투표 결과는 추림 신검산 장주 측이 일곱, 천일독 수석련주 측이 일곱, 기권 하나로써, 동수(同數)로 나타났 습니다." 웅성거림이 뒤따른 것은 당연했다. 천일독은 추림의 한 배분 아래 사람이었지만, 천추학림 사상 초의 선사를 제외하 고는 가장 뛰어나다는 이점에 힘입어 분전했던 것이다. 어쨌든 강호에 재출도한 지 겨우 한 달여밖에 안 된 인물이 무림맹주의 결정에서 오랜 기간 신망을 쌓았던 추림과 동수의 득표를 하다니... 천일독의 뛰어남을 알려 주는 상황이었다. "무림의 불문율(不文律)에 따라 내일의 결선은 당연히 이들 두 분의 비무(比武)로 치러집니다." 아무리 신망과 덕이 중요한 중원맹주의 자리라지만, 이곳이 무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마지막 귀착(歸着)점은 역시 무력(武力)이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군웅들의 신망이 비슷한 인물이라면 강한 무력을 지닌 사람이 맹주가 됨이 강호의 논리에 지극히 맞지 않는가? 어쨌든 맹주를 선출하기 위한 결선은 하루 연기되었다. 따라서 맹의 결성 후 있을 연회도 하루 연기되었다. 진소백 등이 혈왕교의 음모를 조사할 십이 시진의 시간을 벌었음은 물론이었다. 혈왕교의 인물이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떤 음모를 발동시키더라도 군웅들의 긴장이 고조되어 있는 맹주 선발대회보다는 마음을 풀게 되는 연회를 이용할 것이 당연하 지 않는가. 중인들은 누가 맹주가 될 건지를 점쳐 보는 와중에서 단순한 흥미 때문에 시간이 더디다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간 휴식 한번 제대로 취하지 못한 채,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혈왕교의 흔적을 찾는 섭수진과 매일도는 오히려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져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 * * 많은 젊은이들이 모였다. 매우 준수한 자가 있는가 하면 수수한 얼굴도 있고, 추괴하다 말해도 좋을 만한 인물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에게 공통된 점은 각각 하나의 꽃을 옷 어딘가에다 그려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미와 화산을 제외한 구파의 일곱 명의 청년고수들! 개방에서는 삼결(三結)의 사 천분타주에서 사결(四結)의 낙양분타주로 승격되었던 광풍개(狂風 ) 사종쾌가 왔 다. 그는 진소백을 잘 알고 있는지라 앞으로 나서서 물었다. "하하, 역시 회주는 공자님께서 맡으셨군요." 회는 당연히 군영회를 말함이었다. 구파일방의 후기지수로 이루어진 군영회(群英會)의 나머지 사람들이 많은 군중들 이 모이는 무림대회를 기회로 모두 모였던 것이다. 진소백은 그들을 보고 조용히 물었다. "모두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할 방법으로 왔겠지요?" 사종쾌가 먼저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저만 해도 갑자기 사재(私財)를 모았다는 누명을 쓰고 잡혀갔다가 이 곳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내와 정을 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파문당한 것으로 되어 있는 섭수진처럼 이들 모두 종류는 다르지만 누명을 쓴 채로 문파에서 파문당한 제자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누구도 자신이 누명을 썼음을 억울해 하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이 일의 중요성을 장문인을 통해 직접 들었고, 자신들이 가장 믿을 수 있 는 제자이기에 뽑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두의 형형한 결의로 눈빛이 빛남을 바라보던 진소백은 문득 낯익은 얼굴 하나를 보았다. 공동일룡( 一龍) 파일청(巴一靑)! 일 년 전 공동파에서 만났던 그였다. 문파의 반도로 인해 불속에서 원래의 영준했던 얼굴을 잃어버린 파일청! 하지만 그의 성격은 오랜 고난 속에서도 변하지 않았나 보다.


명랑한 어조로 자신과 눈이 마주친 진소백을 보며 말했다. "사부께서는 회주의 일이라면 목숨을 내어 놓을 것을 명했습니다. 이 말은 또한 전적으로 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의 어조 곳곳에는 진소백을 향한 감사가 배어 있었다. 진소백이 아니었다면 일 년 전 공동파는 멸문당했을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했을 것 이다. 진소백이 풍운(風雲) 진인(眞人)을 구출하지 못했다면 지금 공동의 상황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진소백도 고개를 숙여 파일청의 말에 감사를 표하며 입을 열었다. "난 비록 회주란 칭호로 불리고 있지만 결코 여러분보다 지위가 높다는 의미는 아 니오." 그는 진심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풍림서 역시 우리와 같이 강호의 평안을 구하고자 하는 의도로 출발했으되, 수직 적(垂直的)인 구조로 말미암아 몇몇 우두머리의 의도대로 강호를 제패하려는 집단 으로 변질되었음을 명심하시오." 모두는 타당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온갖 악행을 저지른 패륜집단(悖倫集團) 중에서도 그 출발은 매우 정의로웠던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런 집단이라도 권력이 한곳으로 모이게 되면, 원래의 곧은 의지는 왜곡 (歪曲)되고 변질(變質)되어 곧 타락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許多)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리 능률이 떨어지고, 가까운 곳을 멀리 돌아가는 일이 발생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힘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던가? 그러나 한 번만 더 곰곰이 되새겨 보라.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일이 뭐가 그리 두려운가? 산으로도 갈 수 있는 배가 만일 바다를 항해한다면 어떤 험한 항로(航路)도 두려 워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진소백이 이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일이 었다. 시간이 없으니 그가 인원을 나누었다. 섭수진과 매일도의 일을 돕도록 각각 세 명씩 나누었고, 파일청과 사종쾌는 자신 과 함께 일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군영회의 활약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3 아무리 무림인들이 모두 모이는 큰 잔치에 쓰일 음식이라고 하나 결국은 개방에 의해 준비된 것들이었다. 매일도(梅逸度)는 그래도 진중(珍重)한 성격인지라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나타내지 않았지만 점창의 양회(梁回)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하하! 이거, 술은 제일 값싼 화주(火酒) 일색이며, 음식은 온통 콩으로 만든 두부 와 비지뿐이니... 만일 이런 걸 내놓는다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웃고 말 겠군요." 그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음식과 술은 아직 내놓지를 않았으니 군웅(群雄)들이 웃을지 울지는 아직 확인되 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웃고 있는 사람은 양회뿐이었다. 매일도는 검미를 살짝 찌푸렸다. "술과 음식이 그 사람을 평가(評價)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소. 양 형은 오늘의 모 임은 놀기 위함이 아님을 잊으신 게요? 개방이 미식(美食)과 미주(美酒)를 탐했다 면 어찌 오늘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겠소?" 양회는 내심 찔끔했다. 그는 천성이 덜렁거리는 탓에 말을 함부로 내뱉는 일이 많았지만 나쁜 성격은 아 니었던 것이다. 양회(梁回)의 얼굴이 붉어지자 곤륜(崑崙)의 홍유창(洪柳昌)이 나섰다. "양 형은 천성이 밝아 마음속의 말을 담아 두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소. 하지 만 오로지 즐거운 분위기를 위함일 뿐이니 너무 괘념(掛念)치 마시구려. 어쨌든 오 늘 보니 양 형은 정말 명랑한 분이시외다." 양회는 홍유창이 자신의 실수를 돕기 위해 나섰음을 알고, 감사의 눈빛을 그에게 보냈다. 이어 매일도를 보며 정중히 사과했다. "이 양회는 심히 어리석어 남들이 강호를 위해 땀흘릴 때, 앉아서 그들의 노고로 얻어진 호강을 누리고도 고마움을 몰랐소. 오늘 감히 내가 그들의 청백(淸白)을 비 웃고 말았으니 나를 용서하시오. 악의(惡意)는 결코 없었소." 매일도는 감탄했다. 그는 이처럼 호쾌(豪快)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양회와 홍유창 그리고 아직은 말이 없는 해남의 이세흠. 매일도는 모두가 대단한 인재들임을 느꼈다. * * * 퐁당! 매우 얇은 조개껍질 하나가 술 속으로 빠져 들었다. 독한 술에는 물론 껍질이 녹아들며 기포를 발생시키지만 독이 섞인다면 보다 빨리 조개가 녹게 된다. 은수저로 독을 검사하는 방법도 물론 있었지만 악마혈은 은수저를 변색시키지 않 아 백여 년 전 많은 피해가 있었다. 오직 조개가 녹는 모습의 차이로 악마혈을 검사하는 방법은 장춘곡(長春谷)에서 만들어 널리 보급시킨 것이었다. 양회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단숨에 한잔을 들이켰다. 한참 입맛을 다시던 그가 이윽고 말했다. "흐흠, 일단 이 술은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양회는 지금 원래의 화복(華服)을 버리고 요리사의 지저분한 마의로 갈아입고 있 었다. 자신의 잘못을 반성한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기름진 음식과 부드러운 옷을 일 년간 입지 않겠다는 맹서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천성만은 버리지 못하는지 행동은 여전히 분방하여 절로 웃음을 자아냈다. 그는 뒤에 서 있는 냉막한 안색의 청년을 돌아보았다. 해남의 이세흠! 술과 음식은 두 곳으로 나누어 보관되고 있었으므로, 매일도와 홍유창은 다른 보 관소로 갔다.


이세흠와 둘이 남자 양회는 그의 냉막한 분위기 탓에 어색해지는 공기를 바꾸려는 듯 스스로의 옷을 가리키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떠시오, 이 형! 이런 차림이라면 마의신검(麻衣神劍)이란 별호가 어울리지 않겠 소?" 하지만 그는 말하기 전보다 더 무안해졌다. 냉막한 안색의 이세흠는 한마디의 대꾸도 없었을 뿐더러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젠장! 거 참, 차가운 놈이네.' 속으로 투덜거리는 양회의 귀로 처음으로 이세흠의 음성이 흘러들었다. "다음은 음식이오." 목소리는 더욱 차가워 양회는 음식을 조사하러 걸어가면서 내심 투덜거렸다. '흐흥! 해남파가 북해(北海)로 이사를 갔나? 언제부터 이렇게 차가워진 거지.' * * * "식수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어요." "술과 음식 역시 하독(下毒)의 기미는 전혀... 혹시 다른 경로로 독이 들어오는 것 은 아니겠소?" 섭수진과 매일도는 한결같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들은 매우 샅샅이 뒤졌음에도 독의 흔적(痕迹)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진소백은 독이 없다는 사실에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불안해졌다. 독을 발견한다면 해독제를 살포하는 것으로써 상황을 끝낼 수 있지만 발견되지 않 는 독은 해독할 수 없었으므로. 매일도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갈만생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을까요?" 진소백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는 자신이 우리를 완전히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었 으니 거짓말할 이유가 없었지요." 진소백의 말은 타당했다. 하지만 매일도는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난 아직도 폭우정(暴雨釘)의 기관이 저절로 작동되었던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분 명 다른 제삼자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진소백과 섭수진도 물론 그의 뜻에 공감했다. 다만 무림대회에 혈왕교의 음모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여파는 매우 클 것 이므로 이곳으로 서둘러 왔던 것뿐이다. 제삼자는 진소백 등이 자신의 존재를 추리(推理)해 내지 못할 거라고 믿었던 것일 까? 그럴 리 없다. 이렇게 분석할 것임을 알면서도 일부러 폭우정을 쏟았던 것은 갈만생의 입을 막기 위함이라고 진소백은 생각했다. 왜 갈만생의 입을 막아야 했을까? 그는 무림대회에 혈왕교의 음모가 있음을 알고 자신들 풍림서가 어부지리를 얻으 려 함을 말했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제삼자는 왜 위험을 무릅쓰고 기관을 발동시켰던 것일 까? "갈만생의 입을 막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굳이 기관을 작동(作動)시킬 필요가 없었겠죠. 전 오히려 이것이 갈만생의 말을 증명해 준다고 생각해요." 섭수진의 말은 모두의 공감(共感)을 얻었다.


"제가 한마디할 수 있겠습니까?" 소림의 지우 대사가 입을 열었다. 현공 대사의 내제자로서 장래가 지극히 촉망받았던 젊은 승려! 그러나 외부의 첩 자를 색출하는 도중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참회동(懺悔洞)에 갇혔었다. 매우 억울해 했던 그는 막상 이곳에 당도(當到)하여 강호를 위해 애쓰는 또래들을 보면서 상당한 자부심(自負心)을 느끼고 있었다. 장문사부가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은 크나큰 믿음이 작용한 것임을 깨달았던 까 닭이었다. 그의 말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황으로 미루어 틀림없이 혈왕교의 암중 음모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너무 악마혈(惡魔血)에만 생각을 집중시킨 것이 아닐까요? 혹시 다른 방식의 음모 도 있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 아무리 기재들만이 모여 있다고 하나 순간적으로 알아들은 사람은 몇몇에 불과했 다. 진소백은 머릿속이 밝아짐을 느끼며 대소(大笑)했다. "하하! 이런, 정말 난 어리석었소. 정말 어리석었어. 어리석음을 아는 대사야말로 오히려 매우 똑똑하시오. 하하하!" 지우(知愚) 대사는 사실 머리가 똑똑하다기보다는 우직한 성격이었다. 그는 영문을 모른 채 눈만 깜박거렸고, 똑똑한 몇몇 사람들은 진소백이 웃는 뜻을 나름대로 짐작했다. 하지만 올바르게 짐작한 사람들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그들이 생각하는 음모, 혈왕교 음모의 전모는 너무 가능성이 희박했던 것이다. 하지만 또한 그만큼 무서운 결과를 내포하고 있었다. 주변의 공기를 싸늘히 냉각시킬 만큼 진소백이 생각해 낸 음모는 무서운 것이었 다. * * * 깊은 어둠! 아무것도 보이지 않도록 일체의 빛이 제거된 밀실에 목소리만이 흐르고 있었다. "예측하신 대로입니다. 진소백을 필두로 하여 음식과 식수에 독이 풀렸는지의 여 부를 조사하고 다니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어두운 목소리가 먼저 설명하자 맑은 목소리가 그 말을 받았다. "진소백! 과연 초의 선사의 제자답지. 그런데 그에게 수하가 있었던가?" "...그것이, 기이합니다. 하나같이 무공이 매우 뛰어난 젊은 녀석들입니다. 얼굴은... 모두 역용을 한 듯 알아볼 수 없는 자들뿐이었습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목소리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아무튼 드디어 내일로 중원맹의 맹주가 결정되리라. 이번 일을 전기(轉機)로 우리 의 힘은 한 단계 도약을 이루어야 함을 명심하라!" "존명!" 복명한 목소리는 멀리 사라졌다. 그의 신법은 대단하여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수들만이 느낄 수 있는 기의 흐름도 절제되어 있었다. 이러한 고수를 부리는 목소리는 더욱 뛰어난 고수일 것이다.


명령을 내린 목소리는 남아 있었다. 한참이 지나자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이라고는 하지만 마음을 정리하기 위한 것일 뿐 결코 비탄이나 회의가 담긴 것은 아니었다. "자, 이제는 오시오. 난 이곳에서 모든 결말을 지을 것을 결심했으니..."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어조로 말했다. 이곳은 신주평! 그는 누구이며 도대체 누구를 기다리는 것인가? 어쨌든 지금은 밤이 깊었다. 밤이 깊었으니 자연 어둠도 깊었다. 그리고 이 어둠이 밝는다면 중원맹주를 정하는 비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둠 이 너무 깊은 탓에 음모는 아직도 그 형체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 제 3 장 별과 달이 대결한다 1 악마혈의 무서움은 어디에 있는가? 보통의 독은 은(銀)을 변색시킴으로써 자신의 존재(存在)를 드러낸다. 하지만 악마 혈은 그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냄새도 맛도 없으며, 중독된 후 일정 시간이 지나지 않으면 일체의 자각 증세(自覺症勢)가 일어나는 법도 없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지만 악마혈을 판별해 내는 방법은 장춘곡(長春谷)에서 보급 한 조개껍질의 기포(氣泡)를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이처럼 구별해 내기 어려운 악마혈, 게다가 그것의 위력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강호는 음모와 귀계가 난무하는 곳인만큼 독에 저항하는 갖가지 방법이 개발되었 다. 그러나 악마혈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악마혈에 의한 중독 증상은 크게 두 가지였다. 내공이 급격히 소실되면서 종국엔 피가 극독(極毒)으로 바뀌게 된다. 전신을 흘러 다니는 피가 극독이 된다면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 다. 장기(腸器)와 피부를 녹인 피는 점차 밖으로 흘러나오고, 결국 남는 것은 피고름뿐 인 것이다. 혈왕교의 마세가 극에 달했던 백이십 년 전에는 길거리마다 악마혈로 인한 피고름 을 볼 수 있었다 한다. * * * 양회(梁回)는 진소백의 설명을 듣고 나서 두려운 탓인지 몸을 약간 떨었다. "악마혈에 당하면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말인데... 이거 무서워서 원! 빨리 해독약 을 만들었던 장춘곡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진소백은 그의 너스레에 웃으며 말했다. "해독약은 이미 완성이 되었소. 약재가 부족한 부분이 일부 있었지만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약사부께서 보장하셨으니 믿어도 좋을 것이오." 곤륜의 홍유창이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그분... 약사부란 분의 의술은...?" 섭수진이 설명했다.


"믿으셔도 좋아요. 제가 듣기로 약사부께서 강호에서 쓰시던 명호는 성수의선(聖手 醫仙)이라 하셨으니까요." 그 명호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성수의선의 명성을 모르는 강호인들은 별로 없었다. 이때, 멀리서 비무의 시작을 알리는 징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양회는 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급하군요. 이런 역사적인 대결을 보지 못한다면 대대손손(代代孫孫) 비웃음 거리가 될 것이니... 빨리 나갑시다." 하지만 그는 가지 못했다. 이세흠이 냉막한 안색으로 진소백이 수령(受領)해 온 해독재를 가리켰던 것이다. 양회의 인상이 일그러지고, 그가 급한 듯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빨리 나눕시다. 한시가 급하니 어서..." 그의 행동은 마치 뒤가 급한 사람 같았다. 진소백과 매일도, 섭수진은 양회의 익살에 웃으며 해독재를 배분했다. 그들의 수색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악마혈! 하지만 의외의 곳에서 용독되어 군웅들을 중독시킬 가능성은 여전히 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군영회의 인물들이 해독약을 갖고 있는 편이 좋으리라는 게 진소백의 판단이었다. 양회는 가장 선두에서 해독재를 받아 등에 매었다. "자, 이제 약을 받았으니 나가서 비무를 구경해도 되는 것이지요?" 그는 아직도 요리사 복장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등에는 해독재가 든 봇짐을 지었으니, 마치 밀전병이라도 팔러 다니는 시골 장사꾼의 모습 같았다. 도시 구경을 나가자고 보채는 행동을 보는 것 같아 군영회의 젊은이들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고, 항상 냉막하던 이세흠(伊世欽)마저 약간 미소를 짓고 말았다. 웃음이 그다지도 익숙하지 않은가? 진소백은 그의 웃는 얼굴이 어딘지 어색하다고 느꼈다. * * * 징 소리는 구경꾼들의 마음속의 긴장을 극대화시키려는 듯 끊이지 않고 울렸다. 단순한 쇠의 울림이 인간 마음속의 호기(豪氣)를 끌어 낼 수 있음은 쇠의 본성(本 性)에 파괴(破壞)의 기운이 숨어 있는 까닭이 아닐까? 징 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관중을 흥분(興奮)시켰지만, 비무 당사자인 둘의 마음은 오히려 차분히 가라앉고 있었다. 징 소리가 한 번 울릴 때마다 추림과 천일독의 기는 점점 더 집중되면서 충일(充 溢)해졌다. 이윽고 마지막 징 소리가 울렸을 때, 그들의 기세는 최고조(最高潮)에 다다랐다. 무골개 송인은 징 소리가 끝나자마자 그들의 등장을 선언했으며, 그들은 서서히 비무대 위로 걸어나왔다. 대다수의 고수들은 그들의 전신에서 보일 듯 말 듯한 기운이 피어오름을 볼 수가 있었다. 충일한 진기가 주변의 공기를 진동시켜 미세한 아지랑이가 올라가는 것이었다. 기가 만들어 내는 아지랑이였으니, 간접적이나마 둘의 무공을 시사(示唆)하는 광경 이었다.


"선배님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천일독이 무림에서 한 배분 높은 추림에게 먼저 포권했고, 추림 또한 예를 받았다. "자고로, 가장 두려운 것은 후생(後生)이라 했으니 오히려 내가 많은 것을 배우길 바라겠네." 예의를 다한 말을 하면서도 둘의 기도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전신을 가득 채운 웅장(雄壯)한 기운은 점점 공격적인 기로 변해 가면서 상대방의 전신을 휘감으며 기선(機先)을 잡으려 했다. 둘은 모두 검을 잡았는데, 각자의 등에 매여진 두 자루의 신검은 모두 주인의 기 에 감응(感應)한 듯 웅웅거렸다. 금시라도 뽑히기만 한다면 자신의 검기(劍氣)로써 사위를 모두 베어 버릴 듯이. 천추학림 교육의 수료 자격(資格)은 간단했다. 학림 내부에 존재하는 각파의 무공을 참오한 뒤 자신만의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완료되었다. 그러나 말이 간단하지 실천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창안된 무공은 학림 내의 어떤 무공보다 뛰어나야만 했다. 그렇지 않다면 천추학림 출신은 타문파의 무공을 강호에서 사용하게 될 것이 아닌 가? 천추학림은 어떤 문파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기관이니 이것은 문제가 컸 다. 생각해 보라. 만일 천추학림 출신의 한 무인이 강호에 나와 대력금강권을 사용한다면 어떻게 되 겠는가? 아무리 신무원(神武院)에서 변형(變形)시킨 무공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 안목이 있는 사람들은 곧 대력금강권(大力金剛拳)이 소림의 것임을 알아볼 수 있 을 것이다. 또한 그를 소림의 제자라 여길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소림의 입장은 매우 곤란해질 것이다. 문파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 저지른 일을 소림이 책임지게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따라서 천추학림의 수료자들은 반드시 스스로 새로운 무공을 창안해야만 했다. 창안(創案)한 무공이 학림 내부에서 배운 어떤 무공보다도 뛰어나다면 그런 문제 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소림에서 학림으로 보낸, 위탁 교육생 형식으로 수학했던 초의 선사는 보리금승공 (菩提金繩功)을 창안했고, 엽자문은 회풍무류검을 창안했다. 비응방의 문상(文相)이었던 심화절은 천심비도(穿心飛刀)로써 인정을 받았었다. 그리고 강호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신검 추림의 창안 무학은 월광검(月光 劍)이었다. 검은 서서히 뽑혔다. 먼저 뽑은 것은 추림(秋臨)이었지만, 먼저 예를 갖춘 것은 천일독이었다. 예를 표하기 위해 동자배불(童子拜佛)의 형태로 세워졌던 천일독의 흑성검(黑星劍) 은 허공을 감돌아 오른쪽 어깨 위에 곧바로 세워졌다. 당연히 매우 불안정(不安定)한 자세가 되어야 했지만 기이하게도 그가 자세를 취 하자 더없이 안정(安定)돼 보이는 것이 아닌가? 공격과 수비가 완비된 형태로 보였다. 어떤 자세에서도 공수(攻守)가 완비된다는 것은 그의 무공이 이미 조화경(造化境) 에 들었다는 의미였으니, 군웅들의 탄성(歎聲)을 받을 자격이 그에게는 확실히 있 었다.


추림의 검은 서서히 회전(回轉)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전면(前面)을 하나의 동그라미로 덮으려는 듯, 추림의 검은 거대한 원(圓) 을 그리며 돌아갔다. 서서히 돌던 검의 속도가 빨라지자, 검신에서 반사되는 빛의 모양도 연결되기 시 작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빛은 곧 거대(巨大)한 만월(滿月)의 모습을 닮아 갔다. 이것이 바로 월광검(月光劍)! 검의 회전으로 생겨난 월광(月光) 속에서 공격과 수비가 하나로 연결된다는 신검 추림의 독문검법이었다. 그런데 기이한 점이 있었다. 검의 회전으로 인해 생긴 만월이라면 중간 부위는 비어 있어야 정상(正常)이 아니 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 전체가 쟁반과 같이 은은한 은색의 광채로 빛나고 있다는 것은 하나를 의미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쾌속한 검! 추림의 검은 비단 빠르게 돌고 있을 뿐 아니라 원 전체 곳곳 어디에나 미치고 있 었던 것이다. 천일독의 입이 열렸다. "제 검법에는 나름대로 군성검(群星劍)이란 이름을 붙여 보았습니다." 추림의 월광검(月光劍)은 모든 강호인들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군성검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으니, 설명하자는 의도였으리라. 하지만 진기(眞氣)가 극도로 치솟은 순간에도 입을 열어 말을 하고, 그 와중에 자 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음은 자신의 무공에 대한 시위(示威)로도 보였다. 추림도 질세라 입을 열었다. "천 연주는 너무 겸손하오. 난 지난 세월 허명만 얻었으니 오늘 최선을 다해 진짜 이름을 얻어 보겠소." 그 또한 입이 열렸지만 월광검(月光劍)의 변화는 조금의 이상도 없었다. 실로 강호에서 이런 경지의 고수들이 동시에 배출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 지만 지금은 천년흥륭기(千年興隆期)! 무수한 인재와 기재가 출현하는 시기였다. 누구의 검이 먼저 움직였을까? 아마 동시였을 것이다. 천일독의 흑성검이 미미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검첨(劍尖)에서 일어난 무수한 검은색 광망(光芒)이 유성으로 화해 추림에게로 전진(前進)했다. 천일독에 필적하는 고수만이 그 유성(流星)의 수가 정확히 팔십일 개임을 알아볼 것이다. 실로 군성검(群星劍)이란 칭호에 어울리는 변화였다. 추림의 검도 쉬지 않았다. 큰 만월이 아홉 개의 작은 달로 쪼개지면서 소용돌이쳤다. 아홉 개의 달이 회오리를 만들며 날아가는 모습은 실로 아름다웠다. 아홉 개의 별들이 각각 한 개씩의 만월과 어우러지면서 굉음(轟音)을 토해 냈다. 꽝! 꽈꽝! 밤하늘을 수놓아야 할 존재들이 지상으로 내려와 싸우고 있었다. 날은 이미 밝았건만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달과 별들의 싸움에 군웅들은 숨 을 죽였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싸움이 아닌가! 2 매! 어떤 짐승도 흉내낼 수 없는 눈으로 사냥감을 파악한다. 마침내 사냥감을 잡으러 내리꽂힐 때의 속도는 또한 어떠한가? 비둘기가 피할 수 있는 속도는 결코 아니었다. 하물며 지금 비둘기를 잡아채는 매는 사냥을 위해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놈인 것이 다. 매는 푸덕이며 사냥꾼에게로 돌아왔다. 고기 한 조각을 대가로 비둘기를 사냥꾼에게 건네 준 매는 입 속의 고기를 우물거 리며 사냥꾼의 어깨에 앉았다. 건장한 체구의 사냥꾼은 비둘기 다리에 달린 통을 떼어 냈다. 속에서 나온 종이를 슬쩍 읽어 본 그는 냉소하며 양손에 힘을 모았다. 푸시시! 붉은 열기(熱氣)가 양손에 가득 일어나면서 종이와 비둘기가 동시에 재로 변했다. 놀라운 열양공(熱陽功)을 선보인 사냥꾼은 차가운 눈으로 냉소(冷笑)했다. "호대철! 그자의 속은 이미 총련주가 생각하고 계시던 일! 오늘의 일은 누구도 방 해할 수 없을 것이다." 총련주는 누구를 말하는가? 그리고 지금 제거된 전서구는 누가 어디로 보내려던 것일까? * * * 금검 남궁중의 금검문(金劍門)! 그가 굳이 남궁세가를 버리고 새로운 문파를 창립한 뜻은 무엇일까? 오연히 솟아 있는 금검문의 거각들을 보면서 엽평이 가장 처음 느꼈던 의문이었다. 엽평은 금검문의 침입은 신토부의 경우와는 다른 방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행동을 호대철이 알고 있었다면 당연히 금검문에서도 눈치챘을 가능성이 컸다. 해서 엽평은 벌써 백여 리 밖에서부터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늙고 힘이 없어 보이는 거지가 엽평이라면 이해가 가리라. 또는 여인을 탐하는 색기가 눈가에 주르르 흐르는 파락호가 엽평이라도 이해가 갈 것이다. 하지만 늘씬한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아름다운 여인이 엽평임은 아무도 짐작하 지 못할 것이다. 지금 엽평은 언젠가 진소백을 만나기 위해 변했던 여인 차림으로 금검문에 다가가 고 있었다. 그때와 같이 지금도 엽평의 모습은 조금 어색했지만 내키지 않았을 때와 스스로 원해서 할 때가 같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의 원수를 찾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하자 절실해진 엽평의 변장은 점차 완벽 해져 갔다. 해서 금검문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지나가는 행인(行人)들이 짐을 머리에 인 아름 다운 여인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있었다. 머리에 소쿠리를 짊어진 아름다운 방물장수 엽상아! 그녀가 팔고 다니는 방물은 싸고 아름답다고 온 시내에 금방 소문이 났다. 또한 값비싼 노리개도 취급하는데, 이것의 아름다움은 무엇에도 비할 바가 아니라 는 소문도 덩달아 떠돌았다.


그녀는 장사를 시작한 지 이틀 만에 아주 신분이 높은 부인으로부터 부름을 받았 다. 엽상아는 자신을 호위하러 온 무사들의 가슴을 보고 단숨에 그 부인의 신분을 짐 작했다. 가슴에 그려진 금빛 단검! 방물장수를 부르기 위해 금검문의 단검무사(短劍武士)를 보낼 수 있는 여인! 금검 문의 대부인(大婦人), 남궁중의 부인인 예산산(芮珊珊)이 아니라면 누구겠는가? * * * 신주평에 자리잡은 비무대 위! 별과 달의 격돌은 누구도 우위(優位)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추림이 발출했던 중간 크기의 아홉 개 달에서 한 개씩의 소월(小月)이 생겨났다. 팔십일 개의 별을 상대하는 아홉의 중월(中月) 외의 남은 아홉 개가 천일독의 전 신(全身)을 노리며 날아오자, 천일독은 흠칫했다. 하지만 곧 그도 흑성검을 더욱 빨리 움직였다. 단순히 속도만 늘리는 것이 아니라 검에 실리는 공력도 늘어났다. 순간 그의 흑성검에서는 이십칠 개의 흑성(黑星)이 더 솟아올라 아홉 소월을 맞아 갔다. 모두 처음의 달과 별보다 크기가 작고 숫자도 적었지만, 아주 일부의 고수들은 손 에 저절로 땀이 흐름을 느껴야 했다. 그 속에 숨은 힘을 알아볼 수 있는 고수들만은! 격돌하는 달과 별! 콰광-! 영문을 모르는 군웅들은 이전보다 훨씬 큰 폭음(爆音)을 듣고 놀라서 귀를 막았다. 상황(狀況)을 알아차린 일부의 고수들은 자신도 모르게 놀라 외쳤다. "검강(劍 )... 검강이로구나!" 검강(劍 )이니 도강(刀 )이니 수강(手 )이니 하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으 랴! 저마다 무공을 자부하는 강호의 무사들은 검과 도와 장에 스스로 강기( 氣)라 는 이름을 붙였지만, 진실한 의미의 강기는 결코 아니었다. 그저 좀 강한 경력(勁力)에 강기라는 이름을 붙인 것일 뿐! 그러나 지금처럼 유형 화(有形化)된 참된 의미의 강기는 여태껏 강호에 나타난 적이 별로 없었다. 나중에 나타난 달과 별은 처음 것에 비해 보잘것없어 보였지만, 이토록 큰 위력을 나타내는 것은 단순한 경력(勁力)과 그것이 응집(凝集)된 강기의 차이를 설명해 주 었다. 무림에 실로 백여 년 만에 나타나는 검강이었다. 일단 검강을 선보이기 시작한 두 절정고수(絶頂高手)의 비무는 더욱 기세를 더해 갔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은 오히려 줄어들어 일반 고수들의 눈에는 좀 전보 다 재미없게 보였다. 만일 지금 비무의 무서움을 진실로 느낄 수 있는 사���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고 수라 불릴 자격이 있을 것이다. 천일독이 검을 더욱 빠르게 흔들자 다시 이십칠 개의 흑성이 더 나타나 추림이 만 들어 놓은 달을 쏘아 갔다. 꽝! 우위를 차지한 흑성(黑星)은 굉음을 울리며 중월(中月)을 찢어 나갔고, 경기에 불


과한 중월은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중월의 압박(壓迫)에서 풀려난 처음의 팔십일 개의 흑성에 더하여져 일백삼십 개 가 넘는 흑성들이 지금 추림과 천일독 사이의 공간을 가득 메웠다. 때로는 합해지고 때로는 갈라지면서 아홉 개의 강기월( 氣月)을 공격해 가는 흑성 들! 이것은 실로 중과부적의 형세였다. 하지만 추림은 당황하지 않았다. 안색이 조금 더 신중해졌을 뿐이었다. 그의 달 하나는 당연히 천일독의 별 하나보다 내공의 소모가 월등(越等)하므로, 천 일독처럼 많이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지금 추림의 검이 만들어 내는 달은 단순한 검기(劍氣)가 아니었으므로. 추림은 검을 가슴으로 올려 힘껏 감아 돌렸다. 검이 만든 원에서 강한 흡력(吸力)이 일어나며 흩어졌던 소월(小月)들을 빨아들이 기 시작했다. 소월들은 순식간에 추림이 만들어 낸 거대한 만월(滿月) 속으로 모두 들어갔고, 공격 목표를 상실(喪失)한 별들도 천일독의 손짓에 따라 만월을 향해 날았다. 설명은 길었다. 하지만 이 모두는 단지 두 절정고수들이 검을 세 번 휘두르는 사 이에 일어난 변화! 흑성(黑星)이 추림의 만월을 가르려 할 때, 만월의 중간 부분이 입을 벌렸다. 그 입에서 일렬로 나란히 서서 뛰쳐 나오는 추림의 검강이 만들어 낸 소월들의 모 습! 이처럼 한 줄로 이어진 검강은 비록 좁은 부분에밖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 겠지만 그만큼 강한 힘을 낼 것이다. 학익진(鶴翼陣)은 넓은 지역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런 공격 에 가장 효과적인 대응은 한 점을 집중적으로 노리는 저돌적(猪突的)인 공격! 허공 곳곳을 빈틈이 없이 메우는 학익진에 비견해, 소월강(小月 )을 이처럼 일렬로 발사 하는 추림의 월광검(月光劍)의 기세는 저돌진과 꼭 닮았다. 치리링! 아홉 개의 소월강 중에서 앞의 다섯 개가 흑성강 스무 개와 맞바꾸어지며 부서져 나갔다. 하지만 네 개의 소월강은 여전히 위력적인 기세로 천일독을 향해 날았다. 이것이 저돌진의 이점(利點)인 동시에 무서운 점이었다. 이번에는 천일독이 당황할 차례였다. 부서지지 않고 남은 다수의 흑성강(黑星 )은 여전히 추림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추림의 앞에는 만월(滿月)이 은회색의 방어막을 형성하며 돌고 있었다. 비록 모이면 큰 힘이겠으나 하나하나는 작은 강기에 불과한 흑성들은 그 회전에 걸려 부서진 강편( 片)만이 겨우 추림을 노릴 뿐이었다. 추림은 검강을 일으킬 수 있는 절정고수였다. 내가고수들은 무공이 경지에 오르면 호신강기(護身 氣)가 저절로 형성되는 법이었 다. 강편 정도로는 결코 큰 상처를 입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천일독의 경우는 달랐다. 남은 네 개의 소월강은 강편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막대한 부상을 당할 수도 있었 다. 천일독은 네 개의 열십자를 급히 그었다. 창졸간이라 공력이 제대로 실리지 못한 것을 알고 있는 천일독은 네 개의 십자성


(十字星) 모양의 검강이 달을 쏘아 갈 때 두 발로 땅을 구르며 허공으로 뛰어올랐 다. 삼 장 위로 솟구친 그의 몸이 아무런 힘을 받을 수 없는 허공(虛空)임에도 불구하 고 앞으로 쭉 꺾여 가는 모습은 실로 아름다웠다. 이런 모습이 실로 유성과월(流星過月) 신법의 정수(精髓)가 아니겠는가? 아래에서 십자성강과 부딪친 월강의 기세가 약해질 때 천일독의 몸은 그들을 타고 넘었다. 천일독의 흑성검이 추림이 일으키고 있는 만월 앞을 맴돌았다. 그의 검에서도 흡력이 일어나며 아직 추림의 만월과 부딪치지 않고 남아 있는 흑 성강들이 그의 검신을 따라 몸 안으로 다시 회수되었다. 강기는 하나하나가 공력의 결집체(結集體)이니 흑성강을 회수(回收)하자 상당한 힘 이 되돌아왔다. 천일독은 발출했다가 회수한 공력을 다시 돌렸다. 다시 내미는 그의 검첨에서는 일곱 개의 별이 국자 모양을 이루며 뻗어 가고 있었 는데 이것이 바로 군성검의 정화인 칠성검강(七星劍 )이었다. 3 "어머, 정말 눈이 높으시군요." 간드러지게 말하면서도 여인은 속으로 스스로가 메스꺼움을 느끼고 있었다. 엽평이 이런 목소리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도 짐작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엽평 앞에 앉은 예산산은 이 목소리가 거짓임을 모르고 있었다. 화려한 노리개와 방물에 시선이 빼앗겨 있었던 까닭이었다. 지금 예산산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것은, 일곱 개의 보석이 박히고 오채로 수놓아진 비단함 안에 얌전히 들어 있는 일곱 개의 크고 작고 길고 짧은 옥바늘이 었다. "곤륜(崑崙)에서만 난다는 곤옥(崑玉)을 손으로 오 년간 다듬어 만들어 낸 물건이 랍니다." 예산산(芮珊珊)은 곤옥의 담담한 빛에 시선을 한참이나 고정하고 있더니 나직이 한숨을 쉬며 다른 물건을 찾았다. 그녀의 손이 머문 곳엔 의외의 물건이 있었다. "자넨 은장도(銀粧刀)도 파는구먼!" 엽평은 예산산이 쳐다보는 장도를 집어 올렸다. 너무 작은 탓에 오직 노리개의 역할만을 할 수 있는 장식용 칼이었지만 지금 엽 평, 아니, 엽상아가 갖고 온 것들은 종류가 달랐다. 모두 매우 뾰족하여 큰 상처를 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예산산은 그 중에서도 가장 날이 날카로운, 도신이 긴 장도를 골라 정신을 잃고 바라보았다. 예산산은 홀린 듯한 눈으로 검날을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살짝 만졌다. 슥! 별다른 소리 없이 피부가 갈라지면서 붉은 핏방울이 바닥에 무늬를 만들었다. 예산산은 전혀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듯 여전히 홀린 눈으로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녀의 안색에는 이처럼 수심(愁心)이 가득한 것일까? "이 검은 무척이나 날카 롭구먼. 가슴을 찌른다면 반드시 죽고 말겠지?" 엽평(葉枰)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습니다. 한데 대부인의 얼굴에는 왜 그리 수심이 많으신지요?"


유림(儒林)에서 이름 높은 예가의 후손으로서 강호의 명문 남궁가(南宮家)로 시집 을 왔던 여인!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조금의 근심도 가질 필요가 없는 신분이었다. 또한 그녀와 남궁중의 금슬(琴瑟)은 강호에서도 소문난 것이 아니었던가? 강호의 신분과 소문은 확실히 사실과 다른 경우가 많았다. 엽평의 질문에 예산산은 힘없이 웃으며 오히려 되물었다. "자네는 혼인을 약조한 남정네가 있는가?" 엽평의 차림이 처녀(處女)의 차림이었으므로 혼인했는지 여부를 묻지 않고 단숨에 이처럼 묻는 것이다. 엽평이 고개를 흔들자 예산산은 다시 말했다. "만일 자네가 혼인(婚姻)을 하게 된다면 꼭 자넬 사랑하는 사람과 하게. 아무리 좋 더라도 자네를 싫어한다면 절대 결혼하지 말게!" 예산산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그녀에게는 어떤 마음의 상처가 있는가? 회전력(回轉力)을 극대화시킨 만월검막(滿月劍幕)이었지만 칠성검강(七星劍 )을 막 기에는 무리였다. 추림도 초식을 변경하여 일곱 개의 소월을 피워올렸다. 하지만 이번의 소월강은 이전보다 더욱 커서 마치 칠성 일곱 개를 단숨에 깨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절정고수들은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일으킨 큰 모양은 검강에 공력의 집중이 덜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을 뿐, 오 히려 위력은 약하다는 것을. 콰릉! 검강과 검강의 부딪침에서 추림은 다섯 걸음을 물러났지만 천일독은 이 장 이상이 나 밀려났다. 하지만 그것은 땅에 내려선 자와 허공 중에 떠 있는 자의 차이(差異)에 지나지 않 았다. 오히려 충격은 추림 쪽이 훨씬 컸고, 그 사실은 멀리 물러났던 천일독의 신형이 더욱 빠른 신법으로 추림을 향해 돌아가고 있음으로 증명이 되었다. 그에 비해 추림은 아직 제대로 신형도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으니... 천일독의 검첨(劍尖)에서 다시 한 번 칠성검강이 피어올랐다. 멀리서 이 비무를 지켜보던 현공 대사는 자신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안 돼! 멈추시오!" 현공 대사는 이미 추림이 막대한 타격을 받아 제대로 공력을 끌어올리지 못하는 상태임을 알아보았다. 둘의 무공은 실로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강기와 강기가 정면으로 부딪치자 단숨에 결판(決判)이 났다. 절정고수의 승부는 단초로 가려지기가 쉬웠다. 따라서 추림은 지금 도저히 천일독의 검강을 막을 힘이 없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듯, 천일독은 또다시 칠성검강을 전개했고 위험하다 느낀 현공 (玄空) 대사는 자신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던 것이다. 현공 대사의 외침으로 천일독 역시 상황을 알아차렸던 모양이다. 그의 몸이 삼사 차례 허공에서 돌아 검에서 발출된 검강을 회수하려 했다. 이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대저 모든 일에는 고저장단이 있는 법이었다. 올라갈 때 내려오려 한다면 위험에 처하기 마련이었다. 조금 전 천일독이 거두었던 흑성검강은 이미 완전히 발출되어 오르막을 지났던 것 이기에 별무리가 없었지만 지금의 칠성검강은 달랐다. 천일독은 검강이 상승기에 있을 때 억지로 저지하고 있었으니 검강의 위력이 다시 자신에게로 쏟아지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검강을 막기 위해 추림이 억지로 일으킨 공력 역시 천일독을 향해 쏘아지니... "우욱!" 놀란 외침과 함께 허파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신음이 천일독의 입술 사이를 비 집고 나왔다. 보라! 허공을 삼십여 차례나 감돌았던 천일독의 몸이 삼사 장이나 물러나 비무대 아래로 떨어지고 있지 않는가? 그의 입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흘러나오고 현공의 입에서는 불호 소리가 나직이 울 렸다. 현공 대사는 천일독의 인간됨을 느꼈던 것이다. 스스로의 위험을 무릅쓰고 공력을 거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아미타불... 선재로다!" 그러나 그의 불호는 군웅이 지르는 환호에 묻혀 버렸다. 몇몇 절정고수(絶頂高手)를 제외한 사람들의 눈에는 멀리 물러났던 천일독이 불리 해 보였고, 추림의 압도(壓倒)적인 승리로 보였던 것이다. 추림이 손을 들었다 내려 환호를 중지시켰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고 눈은 더욱 떨렸다. 아마 보이지 않는 마음이 가장 떨고 있었을 것이다. 쉬지 않고 피를 토하고 있는 천일독을 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 " 나, 추림은..." 그가 입을 열자 좌중이 조용해졌다. 현공 대사도 숨을 죽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깨끗이 오늘의 패배를 인정하며 천일독 대협을 무림맹주로 추대하오. 그는 진정 맹주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오." 영문을 몰라 조용한 군웅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인의신개의 명을 받은 무골개 송인 이 비무대로 뛰어올랐다. 그의 입을 통해 자세한 상황이 설명되기 시작했다. * * * 엽평, 아니, 엽상아는 벌써 오랜 동안 예산산의 넋두리를 듣고 있었다. 그 내용은 도저히 짐작도 하지 못했던 것인지라 엽평은 스스로의 귀를 믿기 어려 웠다. 하지만 예산산이 사실이 아닌 말로 넋두리를 할 리는 없었다. "난 그렇게 살았지. 자넨 짐작도 하지 못할 걸세. 평생 다른 여자만 생각하는 남편 과 살아 가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실연의 상처로 인해 완전히 미쳐 버린 악마(惡 魔)와 살아 가는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예산산의 넋두리는 마지막으로 치달았다. 지금 그녀의 공허한 눈동자는 허공을 향해 있었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


은 결코 엽평에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한을 참지 못해 내뿜고 있을 뿐이었다. "더욱 무서운 일은 세상이 그를 인의군자로 알고 있다는 점이지. 세상에 대해서 난 그의 현숙한 부인이 되어야 했었지... 그의 신분에 걸맞는 아내! 하지만 사람들 은 아무도 몰라. 그가 얼마나 악독한 자인지. 남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일 을 하면 모든 걸 적어 놓고 언젠가 죽음으로 보답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예산산은 이제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말한 '그'란 누구일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엽평은 근자에 많은 방물장수가 금검문으로 불려 갔다는 정보를 갖고 있었다. 그것이 엽평이 여자로 분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예산산은 감추기엔 너무 답답한 비밀을 말하고자 방물장수를 불렀다. 그렇지만 그 비밀은 결코 남이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예산산은 비밀을 어떻게 유지했던 것일까? "미안하네 정말! 난..." 예산산은 눈물 어린 눈동자로 엽평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엽평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뒤에서 소리없이 찔러 온 지풍은 무공을 모르는 엽상아의 혈도를 눌러 잠들도록 했다. 엽상아는 비록 잠들었지만 엽평은 잠들지 않았다. 주위에 네 명이 고수가 잠복(潛伏)해 있음을 노린 그는 기다리기로 했다. 이들은 비밀을 알게 된 엽상아를 어떤 식으로든 처리할 것이다. 무공을 모르는 여 인 하나를 처리할 때는 네 명이 아닌 한 명이 남을 게 아니겠는가? 엽평은 그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뒤에서 예산산의 울음이 들려 왔다. 그녀는 실로 불쌍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넋두리를 들었던 죄로 죽어 갔던 방물장수들의 목숨은 어떤가? 자 신의 불행을 보상하기 위해 남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가 남궁중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 제 4 장 악마혈(惡魔血)! 그 가공(可恐)할 이름 1 군웅들은 여태껏 그 누구도 받지 못했던 환호를 천일독에게 보내 주고 있었다. 상대방을 염려하여, 자신이 상처 입는 것을 생각 않음은 진정 대인(大人)의 마음가 짐이었으며 결코 쉽게 행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추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이 말하기 전에 먼저 패배를 자인하는 일도 쉽지 않은 태도였기 때문이 다. 인의신개는 마침내 일어나서 선언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임시로 맡았던 주지인(主旨人)의 역할을 넘기고자 했다. "이로써 가칭 중원맹의 맹주는 결정이 났으니, 바로 대륙오행련의 수석련주이신 천일독 대협입니다." 쏟아지는 함성! 모두 환영하고, 모두 존경하는 가운데 천일독은 어느새 마련된 태사의로 천천히


올랐다. 맹주의 지위를 상징하는 자리였다. 청의를 즐기는 그의 기품과 붉은 태사의는 매우 잘 어울렸다.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해 무림의 안녕에 기여하겠습니다. 그리고 외람되오나 추림 대협께 부맹주의 직책을 부탁드려 제 부족���을 채워 주시길 원하옵는데, 여러분의 의향은 어떠신지요?" 반대가 있을 리 없었다. 검강을 뿜으며 비무했던 두 고수의 인상은 너무나 강렬했다. 천일독은 각 직책과 그 책임자들을 마치 생각이라도 해둔 듯 일사천리로 임명했 다. 그리고 밤이 깊자 준비했던 음식과 술로 한바탕의 여흥이 벌어졌다. 비록 화주(火酒)에 두부안주뿐이었지만 누구도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제 강호의 구심점(求心點)이 생겼다는 것 아니겠는가? 진소백 등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혈왕교의 움직임이 없자 점차 마음을 놓아 가고 있었 다. * * * 산봉우리에서는 밤에 꽤 먼 곳의 불빛까지 보이기 마련이었다. 지금 멀리 언뜻거리는 불빛의 뜻이 무언지 좌고학(左孤鶴)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매우 흥겨운 잔치 마당이 벌어지고 있겠군!" 어느새 안개가 모이듯 나타난 벽하가 말을 받았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 결코 오래가지는 않겠지..." 말꼬리를 흐리는 좌고학의 눈빛은 뭔가가 빠진 것 같았다. 축제 마당을 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벽하(碧霞)! 저들은 무척 즐 거워 보이는구나. 한때 나도 저 틈에 끼여 있었지." "저들은 인생을 스스로 개척할 힘이 없는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궁주(宮主)를 상대 할 자격조차 없는 자들입니다." 궁주? 교주가 아니라 궁주란 말인가? 좌고학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오직 몇 놈만이 자격이 있지. 천일독과 제갈수, 암흑호 조탐, 그리고 진소 백! 그 정도만 나를 상대할 자격이 있지!" 벽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리고 신승 초의도 있습니다." "글쎄... 어쨌든 지금으로선 흑산(黑山)의 활약이 기대되는구먼!" 흑산! 흑혈산의 양대 수하 중 하나의 이름이 아닌가? 첩자를 이용해 천하를 혼란시키는 것이 임무인 그가 무림대회 어딘가에 숨어 있다 는 말인가? 벽하가 말을 받았다. "잘할 것입니다. 흑혈산주 조탐은 이 일을 위해 이미 십 년 이상을 공들여 왔으니 까요." 십 년 이상 공을 들여 온 첩자! 흑산은 도대체 누구일까? 좌고학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이미 갈만생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벽하는 물었다. "가실 겁니까?" "당연히 가야지. 죽은 갈만생이 나를 위해 마련한 자리가 아닌가." * * * 잔치는 흥을 더해 갔다. 무의식중에 느꼈던 혈왕교에 대한 공포는 강호인의 마음을 의외로 강렬하게 억누 르고 있었다. 오늘! 마침내 구심점을 마련한 강호는 어느 정도 안심했고, 그런 안도(安堵)가 군웅들로 하여금 더욱더 흥취를 느끼게 했던 것이다. 신도(神刀) 무일패(無壹敗)는 술기운이 거나하여 측간을 찾아 나섰다. 워낙 넓은 신주평인지라 꽤 걸어나왔던 그는 한 사람이 자신의 앞을 막아 섬을 느꼈다. "어느 놈이 감히..." 목청을 돋우며 고개를 들었던 그는 자신과 모습이 같은 또 한 사람을 보고 말았 다. 머리까지 치솟았던 노기(怒氣)가 싹 식으며 그의 몸은 바닥으로 엎어졌다. "총단주(總壇主)님을 뵙습니다." 풍림서의 총단주 갈만생(鞨滿生)! 그의 인피면구가 뜻하던 또 다른 무림의 신분은 바로 신도 무일패였던 것이다. 갈만생이 아닌 좌고학은 속으로 미소했다. 이처럼 자신의 앞에 납작 엎드린 자를 내려다본다는 것은 무척이나 기분좋은 일이 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손가락 두 개를 그의 등에 밀어 넣었을 때는 서운함을 느끼 지 않을 수 없었다. "끅! 총단주... 왜 나를...?" 갈만생의 오른팔이며, 갈만생이 천추학림에서 갈무생이 되는 동안 신도의 역할을 하는 자는 갈만생이 자신을 죽이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갈만생 역시 이미 죽었음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쯤은 알았는지 모르겠다. 그의 숨은 이미 끊어져 있었으므로. * * * 천일독은 지극히 만족하고 있었다. 이로써 그는 스스로의 목표를 반 이상 달성(達成)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시간도 많으니 걱정이 없었다. 그는 힐끔 신검 추림을 쳐다보았다. 무림십정의 수좌인 그!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천일독만은 무림십정이란 이름의 허구성(虛構性)을 알고 있었 다. 풍림서를 조직하고 나서 그가 가장 먼저 했던 작업은 아무도 모르게 천추학림 내 부에서 세력을 넓히는 일이었다. 가장 먼저 그 대상이 된 것이 바로 무림십정이었다. 초의 선사를 배출했던 제일기와는 달리 제이기는 인재가 너무나 드물었다. 열 명이나 되는 사람을 십정이란 이름으로 묶어 놓은 것은 양으로써 질을 이겨 보


자는 생각이었을까? 천일독의 눈에 무림십정은 오합지졸(烏合之卒)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선배인 그들은 불과 오 년 사이에 회유(回遊) 내지는 제거되었다. 제거된 인물은 곧 다른 자로 대체되었다. 신도 무일패는 외오단의 단주였고, 신창(神槍) 이가득(伊可得) 역시 외사단의 단주 였던 것이다. 문제는 신검 추림이었다. 십정(十正)을 쉽게 생각했던 천일독도 추림만은 다름을 느꼈다. 쉽게 회유할 수도 없었으며 제거할 기회를 찾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 추림을 쳐다보는 천일독의 얼굴에 어린 빛은 뭔가 깊은 생각이 있는 듯하지 않은가? 지금 추림을 쳐다보는 천일독의 입가에 순간적으로 스쳐 가는 조소는 무엇을 뜻하 는 것일까? 2 단검 사호는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전에도 많은 여자를 죽여 봤지만 이처럼 앞날이 창창한 여자를 죽이는 일은 도 저히 내키지 않았다. 어젯밤 꿈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타나 부디 착하게 살라고 당부했던 일 때문이었 을까? 그는 당당한 남궁세가의 무사에서 이런 꼴로 타락한 자신의 모습이 못마땅 해져 도저히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이처럼 젊은 여인을 죽이는 일은 결코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크흐흐! 네가 싫다면 내가 하지." 단검 육호가 대신 나섰다. 이 녀석은 아무래도 변태(變態) 기질이 다분했다. 어쩌다가 조금 인물이 반반한 여자를 죽여야 하는 일만 생기면 꼭 나서니 말이다. "죽이기 전에 흐흐... 한번 잡아먹으면, 크흐흐!" 그러나 단검 육호는 짐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선택으로 여자를 잡아먹기는커녕 자신이 잡아먹히게 될 줄은. 찜찜한 얼굴로 그에게 여자를 인도한 단검 사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젠장할, 기회 봐서 도망이라도 가버려야지! 언제까지 이따위 짓이나 하면서 살아 야 되나...' 그 역시 짐작하지 못했다. 자신이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 겨우 살아남 았음을. * * * 단검무사(短劍武士)들 전체가 이런 일을 알고 있을 리는 없었다. 어쨌든 남궁중은 소문난 정도(正道)의 군자였다. 남궁중이 남궁세가의 자부심으로 가득 찬 무사들 전체에게 자신의 정체를 광고할 만큼 어리석은 자였다면 벌써 정체가 탄로나도 났으리라. 또한 예산산을 함부로 돌아다니게 둘 까닭도 없을 것이다. 때문에 엽평은 예산산의 거처가 남궁중의 거처와 가까울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가까이 두고 감시해야 적은 수의 무사들에게만 자신의 정체를 알게 할 수 있으므 로. 엽평의 예측은 정확했다. 예산산의 거처는 남궁중의 거처와 바로 붙어 있었으며 운 좋게도 지금 엽평을 어 깨에 멘 단검 육호는 몰래 남궁중의 방으로 숨어들기까지 했다. "흐흐! 문주가 출타 중일 때는 이곳이야말로 가장 안전하지. 자신의 비밀이 들통날


까 봐 아무도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해두었거든. 하여간 난 운이 매우 좋아. 때마침 문주가 없을 때 이런 호박이 떨어지다니!" 그의 말대로 운(運)은 물론 좋았다. 하지만 그 운은 엽평의 것이었지 결코 단검 육호의 것이 아니었다. 털썩! 엽상아를 침대로 던진 단검 육호는 서둘러 아랫도리를 내렸다. "크흐! 시간이 없으니 어서 일을 치르자꾸나!" 옷을 벗어 던지자마자 침대로 달려들었던 단검 육호! 그러나 그의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경직되었다. 마혈(痲穴)이 제압되고 동시에 여섯 개의 대혈도 점혈됨을 느낀 육호의 눈에 서서 히 일어나는 엽상아가 보였다. 일어서는가 싶더니 어느새 엽상아는 사라지고 낯선 남자가 눈에 노화(怒火)를 담 고 그를 노려보는 게 아닌가? 엽평(葉枰)! 단언하건대 지금 육호를 노려보는 엽평은 결코 손속에 사정을 둘 만큼 편한 인생 을 살아 온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손에 걸린 자는 순순히 모든 것을 말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편이 훨씬 나았 다. 불행(不幸)한 것은, 단검 육호는 아직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것을 깨닫기 위해 단검 육호가 치러야 할 대가는 매우 무서운 것이었다. 비명은 없었다. 하지만 아혈을 짚었음에도 불구하고 헛바람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고통이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전신의 근육은 제자리를 벗어났고, 팔과 다리의 뼈들은 신경과 혈관에 겨우 매달 려 덜렁거렸다. 그럼에도 단검 육호가 죽지 않고 있는 것은 엽평이 적절(適切)하게 지혈(止血)하여 피를 너무 많이 흘리지 않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지혈의 이유는 과도한 출혈로 인한 죽음을 막기 위한 것! 고통은 아무리 극심하더 라도 죽음과 더불어 끝이 나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고문의 능률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피고문자에게 고통이 매우 큼을 알려 주어야 할 뿐 아니라 그 고통이 영원히 끊나지 않을 것임을 알려 주어야 했다. 결코 죽을 수 없음을 알려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엽평은 알고 있었다. 단검 육호의 두 눈은 초점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엽평이 드디어 차갑게 말했다. "순순히 말한다면 고통없이 죽여 주겠다." 엽평이 단검 육호의 두 눈에 기쁨이 떠올랐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단검 육호는 지금, 차라리 죽음이 행복하다 생각되는 고통이 세상에 존재함을 비 로소 믿게 된 것이다. 육호의 입이 열리고 그는 쉴새없이 말했다. 없는 사실이라도 지어서 그는 말할 것이다. 지금 육호의 마음은 고통없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 * 신주평!

*


여흥(餘興)이 극에 달할 무렵, 천일독은 부맹주직을 맡은 추림에게 한마디 연설을 부탁하였다. 선배인 그보다 자신의 지위가 높다는 것이 부담이 되어서였을까? 아니면 은근히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을까? 부맹주에게 먼저 연설을 권하는 그의 얼굴에는 미미한 홍조(紅潮)가 떠올라 있었 다. 추림은 연단에 올랐다. 그의 안색이 약간 일그러져 있는 원인을 사람들은 좀 전의 비무에서 입은 내상 때 문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태화보의 혈판관도 그 중 하나였다. 그의 안색도 추림과 비슷하게 조금씩 일그러져 갔다. 사부였던 번횡(番宖)이 급사(急死)하여 보주위에 오른 것이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 것인가? 진무표국을 대신하여 참석한 공손낭(公孫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남편이었던 국주가 행방불명 되자 거의 실성(失性)하다시피 하여 그를 찾 고 있었다. 그들 외에도 추림의 등장과 더불어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사람은 많았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극히 최근에 장문인의 급사로 인해 문파를 물려받았다 는 것! 또 하나의 공통점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내가 삼십일 세의 나이로 천추학림을 나선 것이 벌써 오십 년이 지났소. 그때 나에게는 십정의 일 인이라는 허명뿐, 진정한 실력은 없었소." 그의 말은 어김이 없었다. 천추학림 제이기는 매우 성과가 적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신검 추림을 제외하고는 신도와 신창이 제법 이름이 있을 뿐이었다. 나머지는 그저 이름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이것은 다른 기 출신인 신승과 오룡 등에 비해 그렇다는 것일뿐! 여전히 다 른 강호의 고수들에 비해서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군웅들이 내심 인정할 때, 추림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나에겐 신승을 능가할 능력은 물론 없었고, 심지어 후기인 오룡을 능가할 자신도 없었소." 사람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스스로는 부족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그만큼 뛰어난 사람들과 다시 비교가 되는 것이므로. 자신의 치부를 말하는 탓인지 추림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가까이에서 쳐다본 사람은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그의 청수하던 얼굴은 변해 있었다. "난 강해지고 싶었소. 보다 큰 힘을 갖고 싶었지. 오룡보다 크고 심지어 초의 선 사마저도 내 아래에 둘 수 있는 그런 힘을 나는 원했소." 군웅들의 웅성거림이 조금씩 커졌다. 신검 추림! 그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천일독의 얼굴도 점점 굳어 갔다. 과연 신검 추림은...? "강호엔 이미 그런 힘이 존 재했었소. 난 그들과 손을 잡았고 마침내 그런 힘을 얻었소. 흑혈산(黑血山)! 그들 은 나에게 힘을 주었고, 난 흑혈산의 흑산(黑山)이 되어 검강지기까지 익힐 수가 있었소."


일그러진 추림(秋臨)의 얼굴은 금세라도 피를 흘릴 듯이 붉게 변했다. 하지만 그보 다 더욱 일그러진 것은 진소백을 비롯한 군영회와 흑혈산이란 이름을 알고 있는 일부 강호인의 얼굴이었다. 무림인들 중에서는 단지 혈왕교란 이름만을 알고 있는 자들이 더욱 많았던 것이 다. "검강을 익힌 뒤, 난 다시는 지지 않으리라 생각했지. 그런데 오늘..." 추림의 눈은 천일독을 향했다. 천일독 또한 얼굴이 굳을 대로 굳어 딱딱한 가면을 쓴 것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 었다. 풍림서를 이끄는 그였다. 당연히 흑혈산을 알고 있는 것이다. "...네놈! 네놈한테 다시 패하다니. 안 돼! 난 두 번 다시 패하지 않을 것이다. 날 이길 만한 놈들은 오늘 모조리 죽여 주겠다. 크하하! 가라, 암흑의 추종자들아!" 그의 마지막 외침이 있기 전에 진소백의 몸은 허공을 가르며 추림을 덮쳐 가고 있 었다. 마찬가지로 상황을 깨닫고 추림을 덮쳐 가는 고수는 그 외에도 셋이나 더 있었다. 천일독과 현공 대사, 그리고 인의신개! 하지만 그들은 아무도 추림에게 이르지 못했다. 추림, 아니, 지금은 흑혈산의 흑산이 된 그의 앞을 두 명이 막아 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어떻게 막아 섰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추림과 비슷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같은 흑혈산의 주구임을 짐작하게 하는 두 명의 경비무사! 그들 의 신형은 떠오르는가 싶자 그대로 터져 나갔다. 퍼엉! 진소백은 이미 이런 무공에 당할 뻔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예감이 적중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건만 불행히도 예감은 적중하 고 말았다. 마치 암기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육편(肉片)! 뇌폭공(雷爆功)으로 터져 나가는 피와 살에 실린 것은 다름 아닌 악마혈(惡魔血)의 독기였다. 3 지우 대사의 말이 맞았다. 혈왕교(血王敎)가 옛날처럼 꼭 독을 음식에 담을 이유는 없지 않는가? 진소백은 일전에 태산의 제왕루에서 혈사상들이 뇌폭공을 이용해 자신을 공격하려던 일을 생각했었다. 강호 각파에서 일어났던 수상한 움직임! 하지만 너무나 무서운 상상인지라 웃음으로 흘리고 말았던 예상!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다니! * * * "피하십시오!" 진소백은 크게 외치며 전력(全力)을 다하여 육편을 피해 몸을 틀었다. 궁신폭(弓身爆)에는 이런 응용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창졸간의 일이라 몇몇의 핏방울이 피부에 닿는 것은 피하지 못했다. 진소백은 급히 회천결(回天訣)을 운기하여 독에 저항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각기 일가(一家)를 이룬 고수들인지라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뇌폭강으로 터져


나온 피와 살 몇 조각이 몸에 닿고 말았던 것이다. 진소백을 급히 등에 진 해독제를 꺼냈다. "해독제입니다. 어서 복용하십시오." 자신도 해독약를 복용한 진소백은 현공 대사와 인의신개, 그리고 천일독에게도 약 을 나누어 주었다. "고맙네!" "고맙소!" 하지만 약을 받는 천일독의 눈! 그 눈 깊은 곳에 한 줄기 의미 심장한 빛이 반짝 임을 진소백은 보지 못했다. 해독약을 복용하는 모습을 본 추림은 냉소했다. "흥! 심혈(心血)을 기울였건만 아직도 장춘곡의 의술이 강호에 남아있더란 말인가? 어쨌든 좋다. 한번 막아 보거라! 자, 암흑(暗黑)의 종들아, 어서 너의 몸을 태워 혈 황께 공양(供養)하거라." 정말 몸을 공양하고자 하는가? 곳곳에서 여러 명의 몸이 터져 나갔다. 추림의 연설에 따라 얼굴이 일그러졌던 자들! 그들이 가진 또 하나의 공통점은 바 로 흑혈산, 아니, 혈왕교의 제자란 점이었다. 이래서 가장 무서운 힘이 종교라고 하지 않던가? 광신도들은 자신의 몸에 악마혈을 심어 와 죽음으로써 그것을 퍼뜨리고 있는 것이 다. 군영회의 청년들이 열심히 뛰어다니며 해독약을 나누어 주었지만 흑혈산의 기세에 는 어림없었다. 내공이 약한 자는 악마혈이 깃들인 피에 닿자마자 곧 한줌의 피고름으로 화해 버 렸다. 해독약을 전하는 게 조금만 늦어도 일반 강호인은 살아남지 못했다. 오직 고 수만이 약을 먹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빌어먹을! 삶은 즐거운 것이거늘, 왜 이따위 개죽음을... 빌어먹을 혈왕교 자식들!" 명랑하던 양회(梁回)도 지금은 피눈물을 흘리며 곳곳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피고름으로 녹아 내리는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자책감에 흘리는 피눈물이었다. 그는 독에는 끄덕없었지만 뇌폭공의 기세에는 어쩔 수 없어, 몸 곳곳에 상처가 입 을 벌리고 있었다. 하나 그는 조금도 쉬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다른 군영회의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흑산(黑山) 휘하의 첩자들이 모두 터져 나갔을 때! 장내에는 오직 피고름과 독의 고통에 신음하여 흘리는 신음 소리만이 남아 있었다. 혈왕교의 무서움! 말로 듣는 것과 체험으로 느끼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살아남은 군웅들은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침묵과 공포를 뚫고 흑산(黑山) 추림의 광소가 솟아올랐다. "크하하! 보아라. 이것이 나를 무시한 자들의 최후이다. 나를 이길 자는 세상에 아 무도 남겨 두지 않을 것이다. 크하하하!" 진소백은 온몸이 떨렸다. 도대체 인간의 분노란 어느 정도가 한계일까? 이젠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가는 단계를 지나 오히려 냉정해졌다. 다만 몸! 미친 듯이 쏘아 가는 진소백의 몸은 그의 분노를 그대로 싣고 있었다.


빛살이었다. 단언하건대 강호에 나온 이래 진소백은 이때 최초로 자신의 능력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했다. 그의 몸은 너무나 빨라 마치 추림의 몸을 뚫고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도 진소백이 쏘아 낸 용음수는 흑산의 배를 뚫었고, 몸도 그 뒤를 따 라 추림의 몸을 관통(貫通)했다. 비릿한 피내음! 아무리 해독약을 먹었다고 하나, 온통 악마혈의 피로 뒤덮인 진소백은 어지럼증을 느꼈다. 게다가 분노로 인해 과도한 힘을 쓰지 않았는가? 그에게로 달려오는 현공 대사와 인의신개의 모습을 보면서 진소백은 서서히 쓰러 졌다. * * * 금검문은 발칵 뒤집혔다. 문주의 거처에 누군가 침입했다가 달아났던 것이다. 도둑은 나올 때 단검 육호의 복장을 하고 있어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다. 단검 일호에서 칠호까지는 문주가 특별히 대하는 자들임을 모든 경비무사들이 알 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침입은 도대체 어떤 경로로 했던 것일까? 급히 문주의 거처로 달려간 순찰당주는 아무런 도난품(盜難品)도 발견되지 않자 일단은 안심했다. 값비싼 물건들은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침입도 쉽지 않고 도주 또한 쉽지 않은 금검문의 요지(要地)에 침입했던 도둑! 그 는 도대체 무얼 훔쳐 간 것일까? 예산산(芮珊珊)은 현장에 가보지 않았다. 그녀는 대부인(大婦人)의 신분이었지만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했다. 따라서 단검 사호에게서 보고를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도둑이 훔쳐 간 물건이 무엇인지 직감적(直感的)으로 알 수 있었다. 일기(日記)! 남궁중이 강호인답지 않게 일기를 쓰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실로 몇 되지 않았다. * * * 현공 대사와 인의신개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소백의 전신을 덮었던 악혈(惡血)은 모두 닦아 냈지만 그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 지 못한 채 쓰러져 있었다. 그의 체내에서는 당금 강호에서 유일하게 악마혈에 저항할 수 있는 구결(口訣)인 회천결(回天訣)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뒤집어쓴 극독의 양은 너무 많았다. 해독약과 회천결이 급하게 움직였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진소백 주위로 모여들었다. 오천여 명에 달했던 군웅들이었지만 지금은 겨우 구백여 명만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아무런 해도 입지 않는 절정고수는 단지 사십여 명에 불과했다. 천여 명은 해독약을 복용하고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바닥에 누워 신음하고 있었 다.


해독약은 독을 해소시키기는 하지만 이미 독으로 상해 버린 내장을 회복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눈에도 한결같이 흐르는 것은 고마움의 빛이었다. "너희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그나마 우리들 또한 살아남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수 고가 많았구나!" 화산검성(華山劍聖)의 말은 제자 매일도를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실은 군영회 전체에게 하는 말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고마움의 생각은 군웅들 공통의 것이었다. 그들은 위급한 때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면서 해독약을 전해 주었던 군영회의 젊은 이들에게 진정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애초 군영회 설립의 취지(趣旨)는 풍림서를 상대하기 위함이었지만 혈왕교의 음모 에 대항한 활약이 첫 강호 활동이었으니, 우습지 않는가? 천일독은 사위(四位)를 둘러보았다. 혈왕교의 행사가 이처럼 악독(惡毒)할 줄은 그조차 짐작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멀쩡하게 살아남은 자들은 구파일방의 장문들과 오행련의 절정고수들 몇몇에 불과 했다. 악마혈(惡魔血)이란 무서운 극독은 고수만을 걸러 내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 와중에서 무공이 약한 무인들은 모두 죽거나 내상(內傷)을 심하게 입고 말았고, 독액이 묻었던 손과 발이 벌써 썩어 버린 사람들도 많았다. 십정의 많은 사람들도 무사하지 못할 만큼 피해는 심했다. 하지만 천일독에게 다행한 일은 신도와 신창은 무사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외단 단주들이니 자신의 편이 아닌가? 그래도 자기 편이 많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다행이라고 천일독은 안도(安堵)했다. 그때였다. 지네와 같은 다족류(多足類)가 기어가는 것 같은 소리가 그의 귀로 들려 온 것은. 스스슥! 그의 내공은 좌중에서도 최상급이었으므로 아마 가장 먼저 이 소리를 들었으리라. 놀란 그가 사방을 훑어볼 때, 그제서야 소리를 들은 중인들도 놀란 안색으로 고개 를 들었다. 아무런 상해(傷害)를 입지 않고 살아남은 중인들은 모두 뛰어난 고수였으니 천일 독과 거의 시차(時差)없이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보라! 신주평 멀리에서 평야를 감싸고 있는 구릉을 넘어 붉은색 일색의 복장을 한 무리 들이 몰려오고 있는 모습을. 동서남북(東西南北)! 네 장소로 몰려오는 그들의 수효는 줄잡아도 각각 이백여 명씩 하여 총 팔백이 넘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금세라도 피를 흘릴 것 같은 혈포(血布)를 걸치고 등에 한줌의 암기주머니를 지녔다. 누가 먼저 알아보았을까? 신음 같은 소리가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혈마대(血魔隊)! 비폭산(飛暴散)으로 무장한 혈마대다." 혈왕교의 삼대악몽(三大惡夢)이라는 악마혈, 비폭산, 혈마대 세 가지가 모조리 나 타나는 순간이었다.


♡ 제 5 장 숨겨진 무서운 진실 1 싸늘한 한기가 넓디넓은 신주평을 모두 뒤덮었다. 무서운 자폭에 동반된 악마혈의 공세(攻勢)로 군웅들은 혈왕교의 공포를 이미 체 험한 후였다. 그런데 비폭산을 가득 짊어진 혈마대마저 나타나다니! 얼어붙은 공기는 군웅의 얼 어붙은 심리를 반영하고 있었다. 섭수진도 이미 진소백의 옆으로 달려와 있었다. 그녀는 옷 일부분만이 악마혈에 의해 시꺼멓게 변색되었을 뿐, 해독약을 제때에 복용한 터라 무사했다. 일 년 전 무학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후, 지금 그녀의 무공은 사부인 금정(金頂) 신니(神尼)마저 뛰어넘는 경지에 이르러 있는 것이다. 혈마대의 등장에 초긴장 상태에 있던 섭수진은 돌연 진소백의 입술이 꿈틀거림을 보았다. "예? 뭐라구요? 다시 한 번!" 섭수진은 귀를 진소백의 입가로 갖다 대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탓에 너무나 미약한 소리가 진소백의 입에서 흘러나왔 다. "조, 조금만 기다리... 사부... 오실... 그리고, 혈마대는... 매우 어려운... 완전한 것일 리가..." 마디마디 끊어진 말이지만 섭수진은 진소백의 말뜻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조금만 기다리면 신승 초의 선사가 온다는 말을 하고자 했다. 그리고 혈마대 가 결코 완전한 상태일 리가 없음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혈마대는 악마혈이나 비폭산과 같은 물건과는 달랐다. 물건과는 다르게 사람을 제련하여 병기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단기간에 이 처럼 많은 수를 만들어 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섭수진은 서둘러 이 말을 군웅들에게 전했다. "지금 오고 있는 저들은 결코 진짜 혈마대가 아니에요." 스스로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 섭수진은 손에 들고 있는 검을 힘껏 앞을 내던졌다. 고오-! 검에 담긴 검기가 손을 떠난 후에도 약해지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어검술의 초보 단계라고 볼 수 있었다. 혈마대, 중인들이 혈마대라 믿었던 자들은 지금 오십여 장 밖에 도착해 있었다.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닌 오십여 장을 단숨에 가른 섭수진의 검은 그 중 한 명의 가슴을 그대로 관통하지 않는가? 백여 년 전! 혈마지겁에서 선보였던 혈마대는 그야말로 도검으로 상하기가 힘들었던 마물들이 었다. 결코 오십 장의 거리에서 검을 던져 관통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군웅들은 힘을 얻었다. 공포가 사라지가 분노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와아!" 촛불에 불을 밝히자 점에서 주위로 뻗어 나가는 찬란한 광채(光彩)처럼, 진소백의 주위에 모여들었던 군웅들은 사방으로 산개(散開)했다. 네 개의 방위에서 몰려드는 팔백여 명의 혈포인들과 악마혈에서 살아남은 강호 정 영들의 싸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혈왕교를 상대하기 위한 모임을 가졌던 자리가 정식으로 혈왕교와 싸우는 자리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전투 속에 휘말린 군웅들은 모르고 있었다. 혼전의 와중에서도 뒤로 물러나 힘을 비축하는 자들이 있는 것을! 신도 무일패(無 壹敗)는 귀를 파고드는 전음을 들었다. "사태가 이상해졌다. 외총단주(外總壇主), 힘을 아끼고 결코 서둘러 전면으로 나서 지 마라." 천일독의 전음이었다. 갈만생에게 전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은 갈만생이 아닌 좌고학이었다. '물론 지금 나서지는 않지. 네가 혈왕교의 행사에서 어부지리를 얻고자 하는데... 후후, 두고 보자꾸나!' 좌고학은 내심 웃으며 앞으로 다가온 혈포인 하나를 거꾸러뜨렸다. 아직은 중간 정도의 단계(段階)에 불과했지만 혈마수라결의 가공할 기운은 혈포인 의 속을 파고들며 내장을 태워 버렸다. 기이한 점은 혼전 중에도 혈포인들이 결코 비폭산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좌고학은 원인을 알고 있었다. 혈마대뿐만 아니라 비폭산 역시 가짜였던 것이다. 오늘의 음모에는 오직 흑산만이 동원되었다. 비폭산과 혈마대는 혈산에게 주어졌으며 그는 지금 다른 일을 꾸미고 있었다. 이미 죽어 버렸지만 흑산 추림의 계획은 성공하여 군웅들은 막대한 공포에 휩싸였 는데, 또다시 진소백이 숨은 내용을 간파할 줄이야! 좌고학은 속으로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 이 자리에는 그가 적수로 인정하는 두 사람이 동시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닌가? 진소백과 천일독! 비록 진소백이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이런 승부(勝負)는... '매우 재미가 있단 말이야!' 또다시 두 혈포인의 내장을 태워 버리면서 좌고학은 속으로 생각했다. * * * 당자평(唐子平)과 진경산(鎭傾山)은 천일독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각각 이화보(離火堡)와 을목회(乙木會)를 대표하며 대륙오행련의 공동 연주이기도 한 그들이었다. 게다가 풍림서 내단의 오 대 서주(誓主)이기도 했으니... 하지만 왜 자신들이 혈왕교와의 싸움에서 몸을 사려야 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자 신들이 음모로써 강호의 장악을 꾀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호를 위함 이었다. 궁극적으로는 긴 시간의 평화를 위해 짧은 혼란(混亂)을 일으켰던 것에 불과했다. "난 이번 결정에는 도저히 찬성할 수 없소." 진경산은 천일독에게 전음을 보내고는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그의 손에서 우렛소리가 일며 동시에 일곱 명의 혈포인을 날려���내는 가공할 무공 이 펼쳐졌다. 이것이야말로 뇌문(雷門)의 절학 분뢰수(奔雷手)! 그의 가세(加勢)가 군웅들의 전세에 많은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었다. 당자평(唐子平) 역시 가만있지 않았다. 몸의 어느 곳에 그처럼 많은 암기가 숨어 있었던 것일까? 그의 손이 한번 휘둘리 자 셀 수도 없는 암기(暗器)가 허공을 갈랐다. 독절(毒絶)! 사천당문(四天唐門)의 명성은 결코 허명이 아니었다. 범인이라면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암기들이 동시에 날았지만 어느것도 헛되이 허공을 가른 것은 없었다. "켁!" 모든 암기는 정확히 혈포인들을 맞추었고, 정파의 군웅을 맞춘 것은 하나도 없었 다. 당자평은 멍하니 서 있는 남궁중을 보며 급히 외쳤다. "뭘 하시는 게요, 남궁 문주? 혈왕교는 무림의 공적이니 일단 제거해야 할 것 아 니오!" 다시 손을 휘둘러 다섯 명의 혈포인들을 제거했던 당자평은 세 명의 혈포인에 의 해 남궁중이 정신없이 밀려나는 모습을 보았다. 말도 안 되는 광경이 아닌가? 오룡(五龍)의 하나인 남궁중이 겨우 세 명에게 밀리다니. 가능성은 오직 하나였다. 호대철은 아예 오지 않았지만 남궁중은 가짜를 보냈던 것이다. 가짜라...! 진짜 남 궁중은 어디에 있는가? 중원맹의 군웅들 측 피해는 이루 말하기가 힘들었다. 악마혈에 죽진 않았지만 심한 상처를 입었던 천여 명은 변변한 반항 한번 못 해보 고 숨져 갔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구백여 명에게는 그들을 지켜 줄 여유가 없었 다. 섭수진과 매일도를 비롯한 군영회의 십 인은 진소백을 지키느라 여념(餘念)이 없 었다. 다행한 것은 진소백이 거의 회복되어 가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진경산과 당자평 등 절정고수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동수를 유지하는 신주평의 접 전. 만일 천일독과 신도, 신창 등이 적극적으로 뛰어든다면 대세는 순식간에 바뀌기도 하련만... 무슨 생각인지 싸우는 흉내만 내고 있는 천일독을 주목하기에는 전황은 너무 여유 가 없었다. 진경산은 불안해졌다. 불의의 사고로 사촌 형이었던 진무외가 죽은 후, 그의 유업을 잇자는 명목으로 자 신에게 풍림서의 가입을 제안해 왔던 천일독이었다. 한데 혈왕교와 맞서 저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그뿐만 아니라 외단의 단주직을 맞고 있는 신도와 신창, 대력신(大力神) 패가(覇 苛) 등의 대륙십웅의 상위 세 명이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음은 무엇을 뜻하는


가? 늦게 가입했던 그와 당자평만이 이처럼 힘들여 혈왕교(血王敎)와 싸우는 유일한 풍림서(風林誓)의 인물이란 사실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2 중년인은 전서구가 날아 들어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전서구는 처음과 달라졌지만 발에 매달린 전신통에 든 전신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 았다. 어차피 내용은 제갈수에게 전해져야만 했다. 엽평이 보낸 전서구를 중년인이 훈련된 매로 잡았던 이유는 전신을 차단하기 위함 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들이 원하는 시간에 제갈수가 엽평의 전신을 받기를 원했을 뿐이었다. 제갈수는 신조문의 문주이며 제갈량의 와룡진전을 이었다는 자였다. 그의 지혜를 결코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에게 명령을 내린 대사형(大 師兄)의 생각이었다. '대사형에게 붙은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둘째 사형.' 그는 내심 중얼거리며 전서 구가 제갈수의 거처로 들어갔음을 확인했다. 제갈수에게 전해지는 저 정보는 확실히 늦은 감이 있었다. 하지만 똑똑한 자일수록 상대하기 쉽다는 대사형의 말을 그는 무조건 믿었다. 전신의 내용은 이러했다. <풍림서의 내오단(內五壇)이 바로 대륙오행련임을 확인했음. 서주(誓主)는 천일 독!> 엽평이 호대철에게 듣고 보낸 전신(傳信)은 제갈수를 다급하게 만들 것이다. 이미 초의 선사가 단심맹의 주력을 이끌고 신주평으로 떠난 후이므로. 하지만 제갈수는 어떻게든 연락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여유가 있다면 오히려 허점을 눈치챌지도 모른다는 것이 대사형(大師兄)의 생각이 었다. "어쨌든 대사형의 안배는 너무 완벽하며 무섭소. 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당신을 버리는 쪽을 택하겠소, 둘째 사형!" 엽평의 전신은 그의 둘째 사형에게는 치명타가 될 것이다. 둘째 사형도 그 점을 알고 그에게 무림대회에 참여하지 말고 남아서 호대철을 감 시할 것을 명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는 끝내 대사형을 택했다. 중년인이 말하는 대사형과 둘째 사형은 각각 누구인가? 하늘을 바라보는 중년인의 허리에 검이 빛을 발했다. 금색을 빛내는 검! 중년인은 금검(金劍) 남궁중(南宮重)이었다. * * * <-내 신세(身世)를 알게 된 것이 내겐 행운(幸運)이었다. 사랑스런 나의 동생 정아(晶兒)! 그녀를 남에게 뺏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내가 주워 온 아이란 충격을 상쇄하 고도 남음이 있었다. -엽자문이란 놈이 나타났다. 정아는 그에게 한눈에 반한 듯하다. 아버님이 나의 속마음을 눈치채셨는가? 먼 곳으로 수련을 떠날 것을 명하셨다. 말도 되지 않는다. 글이나 읽던 그따위 놈에게 어찌 사랑스런 정아를 뺏긴다는 말


인가? -엽자문이란 놈의 능력은 내 예상보다 십 배나 뛰어나다. 아버지는 이미 그 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정아도 그놈만 보면 웃음을 그치지 않는다. 힘을 기를 길은... 하나밖에 없다. 그의 권유대로 신수궁(神水宮)에 들기로 결심했 다. 대사형보다 둘째 사형의 힘이 뛰어나다니... 구성원(構成員)은 두 명에 불과하지만 힘만은 매우 무서운 문파이다. 난 셋째로 정식으로 등록이 되었다. 그들이 다루는 중수라면 난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심한 충격으로 엽평은 고개를 들었다. 정아란 당연히 그의 어머니인 남궁정(南宮晶)일 것이다. 그런데 이 일기로 본다면 남궁중은 자신의 누이동생을 사랑했던 것이 아닌가? 아무리 양아들인 탓에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는 하나, 불륜(不倫)이다. 게다가 그 때문에 신수궁에 들었다니... 엽자문과 남궁중의 사이가 좋았다는 강호의 소문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충격이 큰 만큼 더욱 급한 마음으로 엽평은 일기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일기 역시 충격의 연속이었다. <-나를 정아(晶兒)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아버지에게 드디어 복수했다. 중수(重水)를 마시고 몸을 부들거리던 모습을 보며 난 묘한 쾌감을 느꼈다. 날 화나게 만드는 자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겠다. 둘째 사형은 무림을 제패할 단체를 만들고자 한다. 그는 엽자문도 포함시키려 했 지만, 어림없는 소리다. 난 엽자문, 그놈이 반대할 것에 목숨이라도 걸 수 있다. 어리석은 놈! 결국 그는 죽게 될 것이다.> 한참을 넘겼다. 정신없이 일기를 넘기던 엽평은 마침내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날의 일기를 볼 수 있었다. <-마침내 그놈이 죽었다. 내 사랑을 뺏고도 감히 내 앞에서 미소를 짓던 그놈! 기녀를 겁탈하다가 죽었다 는 사인(死因)은 나의 구미(口味)에 매우 맞았다. 하지만 정아는 어찌 되는 거지? 그놈의 두 아들은 그녀의 아들이기도 하다. 살려 둬야 하는가? 정아가 학림을 떠났다. 두 아들놈은 엽자문 놈을 생각나게 하여 죽이고도 싶었으나 눈만은 정아를 너무 닮아 차마 손을 쓰지 못했다. 이게 좋을 게다. 강호는 험난하니 어린 녀석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것으로 나도 내 복수를 한 단계 접기로 한다.> 엽평은 한참을 멍한 상태로 있었다. 천외성에서 있었던 남궁가의 전대 가주 남궁호(南宮昊)의 실종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또한 아버지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었다.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하나 누이동생인 여인을 사랑한 남궁중의 불륜이 이런 결과 를 낳게 했던 것이다.


엽평은 거동을 못 하는 두 명의 사부를 생각했다. 한 분은 진소백의 아버지이신 진무외였고, 다른 한 분이 남궁호임을 그는 알고 있 었다. 중수에 중독된 채 양아들의 손에 의해 납치당해 버려졌던 남궁호는 성수의선의 손 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되었던 것이다. 남궁호는 한두 번 정신을 차리더라도 자신을 암산한 자가 누군지 굳게 입을 다물 고 밝히지 않았다. 그 이유를 엽평은 오늘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 사형제라면 사부는 도대체 누구일까? 또 두 사형의 신분은 무엇일까? 엽평은 급히 일기를 다시 펼쳤다. <-사부는 이미 없었다. 대사형조차 사부의 진정한 정체는 모른다고 했다. 다만 어느 정도 배우고 나자 오히려 강호제패의 야망에 방해가 된 사부를 대사형 과 이사형이 힘을 합해 제거했다고 말했다. 그 와중에 대사형은 큰 내상을 입어 무공을 상실했고, 이사형이 대권을 쥐게 되었 다고 한다. 이사형은 대사형을 매우 무례한 태도로 대했지만 난 조금 달리 생각했다. 무공을 모두 상실하고 얼굴에는 병 기운이 가득한 가운데 이처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대사형이라면 평소의 능력은 어떠하겠는가? 예의를 다하면서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하자.> 엽평은 심히 놀랐다. 야망을 위해 사부를 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제거해 버리는 사악한 제자들의 행동 에 놀랐던 것이 아니었다. 무공을 상실한 채, 병 기운이 가득한 얼굴! 병서생(病書生) 좌고학이 생각났던 것이다. <-이사형의 계획은 거의 성공한 듯했다. 풍림서의 힘은 극단(極端)에 이르렀지만 눈치챈 자들이 없었다. 한데 이변이 일어 나다니. 당연히 성공할 것으로 믿었던 비응방(飛鷹幇)의 일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사형은 근년에 들어 가장 노했다. -단심맹이란 자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뒤에는 초의가 있고 전면에는 진소백이란 자가 활동하는 집단이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은 우리의 존재를 알고 대비하는 문파가 틀림없었다. 제갈수까지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 이사형은 더욱 놀랐다.> 엽평은 이사형이란 자 가 틀림없이 천일독임을 확신했다. 대사형 좌고학에다가 이사형 천일독, 다시 그 밑의 셋째는 남궁중(南宮重)이었다. 신수궁은 그 수가 세 명뿐이라고 해도 가히 강호를 덮을 위력을 지니고 있지 않는 가? 그들을 기른 사부는 누구인가? 어떤 자이기에 이런 자들을 제자로 길러 놓고 제자의 암습으로 죽어 갔는가? 어떤 목적이 있었는가? 모든 의문은 일기를 읽어 보는 방법 외에는 풀 길이 없었다. 엽평은 또다시 일기를 읽기 시작했다. <-무서운 사실을 알았다.


대사형은 무공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날 단숨에 제압할 가공할 실력을 감추고 있었다. 그는 이사형의 계획이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했다. 왜 그는 무공을 숨기고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진행하는 것일까? 굳이 힘들여 천외 성의 만리탐주란 역할을 수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틀림없었다. 대사형이란 자 는 틀림없이 좌고학이었다. 천일독의 벽수궁은 신수궁의 후신이었으니 엽평은 중수란 한 줄기의 물길로 좌고 학과 천일독, 그리고 남궁중이 모여듦을 느꼈다. 이들이 모두 한 문파의 사형제라면 강호는 어떻게 되는가? <-마침내 난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이사형이 무섭다고는 하나 대사형에게 미치지는 못한다. 대사형은 이사형 의 계획에 허점이 너무 많다고 했다. 강호는 알 수 없는 곳이어서 아무리 복잡한 계획을 세우더라도 예측(豫測)하지 못 했던 변수가 어디에선가 튀어나오는 법이라 했다. 대사형 쪽으로 붙기로 한다. 이사형은 대사형만 없다면 강호는 자신의 것이라 여기고 있다. 하지만 대사형은 다르다. 그는 천외성에 대한 대비도 세우고 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대사형은 분명 사부가 살아 있음을 느끼고 있다 한다.> 3 개방의 광음통신(光陰通信)! 거울을 이용한 이 전신은 가장 빠른 연락 방법이었다. 이 광음통신을 이용한 방법으로 천일독이 풍림서의 서주임은 초의 선사에게 전해 졌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초의 선사 일행은 신주평에 도착했다. * * * 싸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강호의 싸움은 피비린내만을 남기고 마침내 끝이 났다. 무림대회에 참여했던 군웅들 중에서 멀쩡한 사람은 겨우 사십을 채 넘기지 못했 다. 모두가 부상을 당했고 상당히 심각한 중상에 허덕이는 사람도 많았다. 그나마 초의 선사가 나타나자 이크, 하며 전력을 다한 천일독 일행의 활약이 컸기 때문에 이 정도의 피해에 그쳤던 것이다. "늦으셨군요, 사부님!" 진소백은 이제 거의 회복됐다. 악마혈에 대해 이 정도의 회복력을 보일 수 있음은 종사원의 장담대로 그의 몸에 독에 대한 내성(耐性)이 생겼음을 뜻했다. "오는 도중 충격적인 연락이 있어 잠시 지체(遲滯)됐다. 네가 고생이 많았구나!" 고생이 많았던 것은 진소백뿐이 아니었다. 그를 둘러싸고 보호했던 섭수진과 매일도, 그리고 파일청 등도 상당한 부상을 입 었다. 실력(實力)의 차이는 분명 있었지만 적들의 수효가 워낙 많았던 탓이었다. 모두를 둘러보며 나직이 불호를 외운 초의 선사는 천천히 몸을 돌려 천일독을 향했다. 천일독을 보는 그의 눈은 은은한 노기로 충혈되고 있었다.


"변명해 보시기 바라오, 천 시주! 당신은 분명 이들의 공격을 방임했소. 그 이유가 무엇이오?" 천일독은 당황했다. 분명 남궁중은 엽평의 전서구를 차단했어야 했다. 그렇다면 지금 초의(草衣) 선사(禪師)는 단순히 천일독이 혈포인들을 상대함에 있 어 최선을 다하지 못했음을 질책(叱責)하고 있는 것일까? 마음속의 당황은 전혀 드러내지 않고 천일독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비무에서 입은 내상이 매우 중(重)했던지라..." 그의 말은 초의 선사의 노갈(怒喝)에 잘려 나갔다. "그 말이 아니오. 난 당신이 무림제패를 노리는 풍림서란 집단의 수뇌란 말을 들 었소! 변명해 보시오." 그제서야 천일독은 진짜로 당황했다. 이런 정보(情報)는 그의 계획대로라면 결코 단심맹 측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어디에서 잘못된 것인가? '금검 남궁중... 그가!' * * * 죽음보다 강한 침묵만이 남아 있었다. 오늘 하루! 신주평(神州坪)의 살아남은 사람들은 너무나 심한 충격을 쉴새없이 받 고 있었다. 맹주 후보 중의 하나로 추대받았던 추림은 흑혈산의 흑산(黑山)이라 자신을 밝혔 다. 이어진 혈왕교도들의 자폭 공세! 겨우 살아남았던 자들은 또다시 혈포인들의 급습을 당했다. 악마혈로 인한 피고름이 주위에 가득했고, 그 위를 다시 군웅들과 혈포인들의 시 체가 산을 이루며 덮고 있었다. 그들이 흘린 피는 내를 이루어 흘러가니 그야말로 시산혈하(屍山血河)의 상황이었 다. 한데 이 시점에서 맹주로 뽑혔던 천일독이 풍림서란 이단집단의 수뇌란 사실이 밝 혀졌으니... 이런 충격을 중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미타불! 그것이 진정입니 까? 정말 천일독 연주가..." 현공 대사는 이미 풍림서에 대해 깊은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천일독이 그 세력을 이끄는 사람이라니! 그가 다시 한 번 반문함도 당연했다. 초의 역시 불호를 나직이 외웠다. "사실이라네, 장문사질! 나로서도 믿고 싶지 않은 일이네만." 믿기 싫은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혈왕교를 대항하는 구심점으로 뽑았던 무림맹주였다. 그런데 그 역시 무림제패를 꿈꾸는 음모의 주역이었다니... 천일독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쉽사리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음은 우선 이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는 까닭 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초의 선사가 이끌고 온 단심맹의 무사들에 비해 자신들의 무력이 약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전 결백합니다. 선사께서는 어디서 그런 낭설(浪說)을 들으신 것인지요?" 낯빛조차 바꾸지 않는 그의 안색을 본 대다수의 사람은 그가 결백하다고 여길 것 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생각은 달랐다. '후후! 그런 엄청난 말을 듣고도 안색조차 변하지 않다니... 사제,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신도(神刀)로 화신한 좌고학의 판단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한명 더 있었다. 이미 몸을 완전히 회복한 진소백이었다. "이런 말을 듣고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으시다니... 그 수양이 심히 존경스럽군요!" 진소백이 입을 열자 좌중이 모두 주목했다. 자신들이 악마혈에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 이 청년영웅의 활약(活躍)이었 음을 아는 까닭이었다. "전 비록 몸을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정신만은 또렷했습니다. 아까 혈포인들이 공 격할 때, 왜 피하기만 하신 겁니까? 천 연주뿐만이 아닙니다." 진소백은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가리키며 호명했다. "남궁 문주! 신도! 신창! 그리고 대륙십웅의 세 분! 모두 혈포인들의 공격을 피하 기만 할 뿐,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명받은 자들은 극구 부인했다. "무슨 소리인가? 우릴 모욕하다니! 우리가 혈왕교와 내통이라도 했다는 뜻인가?" 오히려 화를 내는 사람이 더 많았다. 하지만 진소백은 그들의 반발(反撥)을 무시했다. 그의 눈은 진경산(鎭傾山)을 향하고 있었다. 아버지 진무외의 사촌 동생이며 자신에게는 숙부뻘인 그! 벽력세가(霹靂勢家)의 당 금 가주이며 벽력세가가 변화된 이화보의 보주인 그였다. "소질 진소백(鎭小栢)이 인사드립니다. 어린 시절 진옥백(鎭鈺栢)이라 불렸으니 기 억나실 것입니다." 진소백의 말에 진경산은 크게 놀랐다. 그는 진소백이 진실(眞實)로 자신의 조카인 줄은 짐작도 못 했던 것이다. "정말이냐? 정말 네가 무외 형님의...!" "원래 숙부(叔父)도 의심했었습니다만, 조금 전 천일독 풍림서주의 명령을 무시하 고 혈왕교와 싸움을 보고 의심을 풀었습니다. 아무쪼록 상황을 바로 보십시오. 아 버님은 풍림서에 가입을 거절했다가 저들에 의해 암산당하셨습니다." "무슨 소리냐? 난 형님의 유지(遺志)를 잇기 위해 가입했던 것인데... 그런!" 놀라기는 당자평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림의 안녕을 위한다는 대의(大義)를 가슴에 담고 가입했던 풍림서였다. 그런데 그 조직이 무림을 제패하려는 불순한 집단이었다니! 천일독의 감언이설(甘 言利說)에 여태껏 속았다는 말인가? "솔직히 말씀하여 주십시오. 두 분께서는 좀 전의 상황을 잘 아실 것입니다." 물론 진경산과 당자평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 천일독이 혈포인과 심하게 싸우지 말라 명하는 소리도 들었고, 싸움 을 피하기만 하는 풍림서 소속(所屬) 고수들의 행동도 보았다. 진경산은 굳은 표정으로 천일독을 보았다. "난 지금 신승과 조카의 말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지오. 어서 대답을 해주 시오."


하지만 천일독은 여전히 태연했다. "혹시 또 다른 공격이 있을 것에 대비하고자 했을 따름이오. 그 외에 무슨 의도가 있었겠소!" 그의 어조는 여전히 담담하여 한 올의 파탄(破綻)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과연 천 일독은 천일독이었다. 하지만 급전(急轉)은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법이었다. 아까부터 몸을 부들부들 떨던 대력신 패가(覇苛)가 앞으로 나선 것이다. "난 오늘날까지 하늘에 한 점 부끄럼없이 살았소. 천외성을 탈퇴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소. 하지만 난 오늘 드디어 죄를 짓고 말았소." 그의 뜻밖의 말에 중인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천일독의 얼굴에 드디어 당혹감이 비추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강호동도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난 사욕(私慾)에 눈이 멀어 손 을 쓰지 않았소. 지금 신승의 질책을 들으니... 난, 난 살 가치가 없는 놈이오!" 그는 망설임도 없이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찍어 갔다. 최후로 그는 천일독을 보며 말했다. "풍림서의 뜻이 이미 변질되었으니 서주(誓主), 당신은 스스로의 죄를 어서 참회하 시구려!" 뜻밖의 상황이며 변화였다. 천일독의 얼굴빛은 쉴새없이 변했다. 대력신 패가는 자신이 포섭하여 외단(外團)의 제일단주(第一壇主)를 맡겼던 자였 다. 그런 자를 다시 포섭할 능력을 지닌 사람은 누구일까? 또 지금처럼 목숨마저 버릴 수 있게 세뇌할 수 있는 사람은? 천일독은 조금 전 악마혈을 퍼뜨리기 위해 미련 없이 죽어 가던 혈왕교의 교도(敎徒)들을 생각했다. 종교의 힘만이 죽음을 우습게 보도록 할 수 있는 법이었다. '혈왕교! 설마, 대사형 좌고학?' 그는 주위에서 사라진 사람을 찾아 보았다. 좀 전까지도 보였던 한 사람이 지금은 흔적조차 없었다. 신도 무일패(無壹敗)! 갈만생(鞨滿生)에게 자신을 이처럼 궁지(窮地)로 몰아넣을 실력이 있을 리가 없었 다. 갈만생은 이미 죽고 좌고학이 그를 대신하였던가? 언뜻 보았던 무일패의 뜻 모를 미소가 이제서야 이해됐다. '그 의미는 이런 것이었던가? 과연 당신은... 사형(師兄)!' 이 정도까지 이르러 더 부인한다면 꼴만 우습게 됨을 천일독은 알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스스로 천재라 자부하던 사람들은 난생처음 당하는 패배 앞에서는 웃음을 금치 못 하는 경우가 많았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원래 패배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닌 까닭이 아닐까? 지지 않으려고 조바심 내며 살아 온 지난 시간이 아쉽기 때문은 아닐까? "하하하! 좋소. 내 인정하지. 내가 바 로 풍림서의 서주요. 대륙오행련이 바로 풍림서(風林誓)였소. 하하하!" 모든 것을 간파당한 천일독은 통쾌하게 웃었지만 진소백은 통쾌하기보다는 오히려


착잡했다. 그는 제갈수 사부의 예감이 빗나가기를 진정으로 바랬다. 혈왕교를 상대할 가장 큰 힘인 오행련이 풍림서라면 강호의 힘은 또다시 약해지는 것이기에. ♡ 제 6 장 신주평 위의 파란 불꽃! 1 엽평이 두 번째 날린 전서구(傳書鷗)는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제갈수의 손에 도착했다. 제갈수는 내용을 읽기 전부터 이상한 예감(豫感)을 느끼고 있었다. 앞서 온 전서구 와 시간 차이가 너무 적었다. 불안한 예감을 안고 전신을 읽어 나가던 제갈수는 그만 종이를 떨어뜨리고 말았 다. "좌고학, 그자가 뒤에 있다는 것은... 초의 선사는 천일독과 당연히 싸우게 될 것인 데..." 두 전서구가 당도한 시차(時差)가 너무 적다는 것에서 제갈수는 이미 뭔가를 느꼈 다. 좌고학이 그를 상대하면서 남궁중에게 시간의 여유가 없도록 명령한 것은 실로 적 절한 조치였다. 시간이 촉박한 탓에 제갈수는 그저 초의 선사에게 천일독의 정체를 밝히기만 했던 것이다. 결과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서. "아무리 초의 선사께서 나서시더라도 풍림서는 만만한 집단이 아니니... 잘못하면 양패구상(兩敗俱傷)하여 좌고학만 이롭게 하겠구나!" 제갈수는 초조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시간으로 보아 벌써 신주평에서는 한바탕 싸움이 일어났을 것이다. 다만 믿을 사람은 진소백밖에 없었다. 자신조차도 때때로 놀라는 그의 지혜로 피해가 최소화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 지만 제갈수는 더할 나위 없는 불안함을 느꼈다. 모든 음모의 뒤에 좌고학이 있음 을 알기 때문이었다. 무공을 숨긴 채 천외성의 삼인자 지위까지 올랐던 좌고학이었다. 혈마수라결(血魔修羅訣)을 취득한 지금, 그의 능력은...! * * * 진소백은 착잡한 눈으로 천일독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오로지 풍림서를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수련을 거듭했었다. 오늘, 진소백은 단지 혈왕교(血王敎)의 음모를 막기 위해 달려왔었다. 그런데 엽평의 활약으로 뜻밖에도 풍림서의 음모가 밝혀지고 그 원흉(元兇)인 천 일독이 마침내 자신의 신분을 자인했던 것이다. 뜻밖으로 쉽게 결말이 난 것에 대한 실망일까? 아니면 목표의 끝을 본 허탈함일 까? 진소백은 조용히 천일독을 바라보기만 했다. 일세의 천재였으며 무림의 신망을 얻어 맹주로 뽑히기까지 했던 그! 만일 욕심을 부리지 않고 도의를 지켜 살았다면 그는 중원맹주로서 진정한 의미의 무림제패를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


천일독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눈으로 진경산과 당자평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에겐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선택해 주 길 바라오." 무슨 선택일지는 뻔했다. "풍림서에 계속 남을 것이오? 아니면 탈퇴하겠소?" 물어 보지 않아도 당연한 결론이었다. 진경산과 당자평이 풍림서에 든 것은 강호를 위한 대의의 발로였지, 무림제패란 야욕의 탓이 아니었다. 천일독(天一獨)에 의해 변질된 풍림서는 그들에게 전혀 의미가 없었다. "우린 처음과 달라진 게 없소. 천하를 위하는 쪽을 선택할 뿐이오." 천일독은 이런 말을 처음 듣는 것이 아니었다. 그 옛날, 엽자문과 진무외도 이런 식으로 말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제거되었다. 이십 년 가까운 오늘에 와서 그들의 아들들이 자신의 야망을 막고 있음은 진정 하 늘이 정한 인과응보(因果應報)인가? 하늘의 그물은 엉성하지만 정녕 빠져 나갈 길이 없는 것인가? "난 당신들도 변하 리라 확신하고 있었지. 부귀를 누리고 권력의 맛을 보면 틀림없이 변하게 되리라 고. 하지만 인연이 없었나 보군. 권력을 쥐기도 전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다니!" 허탈하게 말한 천일독은 이어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진소백은 쉬지 않고 웅얼거리는 그 소리가 주문이라는 것을 잠시 후 눈치챘다. 그리고 진소백이 눈치챘을 때는 진경산과 당자평의 몸 속에 든 고독(蠱毒)은 이미 발작을 시작하고 있었다. "우욱!" 진경산과 당자평은 전신의 내공이 빠른 속도로 잠식되어 감을 느꼈다. "도, 도대체 넌 언제 우리에게 고독을...?" "흥! 아직 권력의 달콤함을 모르는 너희들은 언젠가 적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내 가 만약을 대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오늘날까지 살아 남았겠는가?" 고독(蠱毒)의 발작으로 피를 토하는 둘을 보며 천일독은 몸을 날렸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흑성검(黑星劍)이 들려 있었고 검이 노리는 방향에는 초의 선사가 서 있었 다. "날 궁지로 몰아넣었으니 어디 실력이나 구경합시다, 선사!" 그의 검에서는 일곱 개의 검은 별이 찬연하게 뻗어 나왔다. 칠성검강(七星劍 )! 초의 선사도 조금도 방심하지 못하고 두 손을 휘둘렀다. 찬연한 금빛이 뻗어 나오며 사방을 물들였다. 금린사(金麟沙)로 만들어진 금포승(金捕繩)이 어느새 초의 선사 주위에 방어막을 만들고 있었다. 초의 선사를 천하제일인으로 불리게 했던 보리금승공(菩提金繩功)이 드디어 본 모 습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격전으로 어울린 사람은 천일독과 초의 선사뿐만은 아니었다. 천일독이 날아오름과 동시에 대력신 패가(覇苛)를 제외한 아홉 명의 대륙십웅도 구파의 장문인을 노리고 날아올랐다. 중원이 정도의 번성기라고 생각했던 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으며 구파의 장문인들 은 마주 싸워 나갔다.


사도(邪道)의 세력들이 정파를 위장한 채 숨어 있었을 뿐, 결코 사라졌던 것이 아 니었다. 인의신개를 향해서도 벽수궁의 두 노인이 달려들었다. 벽수궁주인 천일독을 호위하기 위해 조용히 서 있을 때는 모르겠더니, 일단 움직 이기 시작하자 놀라운 무위(武威)를 발휘했다. 무골개 송인이 호통을 치며 가세해서야 겨우 이 대 이의 균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무림십정(武林十正)의 남은 여섯도 천일독과 동시에 움직여 군영회를 덮쳤다. 그들마저 이미 풍림서에 넘어간 자들이라는 사실을 진소백은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어울려 돌아가는 군영회의 젊은이들과 무림십정의 싸움! 어떤 싸움 못지않게 치열 했다. 신승 초의와 제갈수가 풍림서를 그토록 두렵다고 진소백에게 누차 강조했던 이유 는 무엇이었을까? 풍림서의 탄생이 기존의 사도집단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풍림서는 정파(正派)의 피를 먹고 자랐으며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정도에서 활약하 던 협사들이었다. 때문에 풍림서의 힘이 하나 커짐은 정도의 힘 둘이 약해짐을 의미했다. 정도의 희망이었던 무림십정이 모두 풍림서의 주구로 변화한 사태를 보라! 눈앞으 로 뻗어 오는 두 손에 대항해 섭수진은 눈물을 흘리며 반격했다. 세 사람이 어울린 초식은 모두 동일한 금정산수(金頂散手)! 같은 문파(門派) 출신 임을 두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지금 섭수진을 덮쳐 왔던 두 늙은 승려는 다름 아닌 운몽(雲夢) 법사(法師)와 심몽 (心夢) 사태(沙汰)! 아미의 전대(前代) 기인(奇人)인 그들마저도 풍림서의 주구였던 것이다. 정녕 무림 십정은 모조리 천일독의 수하로 넘어갔단 말인가? 섭수진은 그제서야 왜 금정 신니가 자신을 파문이란 절차를 통해서 군영회로 보냈 는지 깨달았다. 이처럼 문파 내에서도 서로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다른 구파 의 청년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어떤 이유에서건 문파에서 제명된 상태로 모였던 군영회의 청년들! 때문에 진소백 외에는 항상 변장(變裝)한 모습으로 남의 앞에 나서야 했던 그들이 었다. 만일 풍림서가 정파 내에서 자생(自生)한 조직이 아니었다면 이런 번���함을 겪을 필요가 있었을까? 어쨌든 적은 외부(外部)의 적보다 내부(內部)의 적이 훨씬 무서운 법이다. 풍림서 의 무서움은 다름 아닌 내부의 조직이란 것에 있었다. 몇몇을 제외한 군영회의 구성원으로서는 오늘이 처음 정식 활약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바로 자신들이 스스로를 숨기고 살아야 했던 원인을 제공한 세력 과 맞닥뜨리게 되었던 것이다. "용서하십시오!" 어느새 뽑아 든 섭수진의 검에서 뿜어진 옥허삼십육검(玉虛三十六劍)이 심몽 사태 의 얼굴을 갈랐다.


섭수진의 무공은 이미 금정 최고라는 금정 신니를 능가할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때문에 놀라 물러서던 심몽 사태는 섭수진의 검기가 얼굴을 가름을 피하지 못했 다. 그녀의 얼굴이 두 줄기로 갈라졌다. 하나 피가 흐르지는 않았다. 다만 피부가 갈라졌을 뿐이었다. 그 순간 섭수진은 똑똑히 보았다. '인피면구?' 그랬다. 어떻게 정파의 기둥이었던 무림십정 모두가 포섭당했을 수가 있었을까? 회유(懷 柔)에 실패한 자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代替)하는 풍림서의 행동은 이미 여러 번 관찰된 수법이었다. "대부분이 가짜들입니다. 손에 인정을 두지 마세요." 섭수진은 공력을 실어 외쳤다. 그녀의 외침은 손을 섞는 무림십정이 대부분 문파의 어른인지라 함부로 하지 못하 던 사람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비로소 상황을 깨달은 정파 군웅들의 태도가 수세에서 공세로 본격화(本格化)되 었다. 그 중에서도 오른손으로는 용음십이수를 휘두르고 왼손으로 분뢰수(奔雷手)를 뿜 어 내는 진소백의 활약이 가장 돋보였음은 물론이었다. 칠성검강과 금포승에서 뿜어지는 보리진기(菩提眞氣)의 싸움은 아무도 우위를 점 하지 못하는 가운데 계속되고... 오늘은 이월 열엿새 날! 밤의 여흥을 즐기는 가운데 갑자기 추림의 광소와 더불어 시작되었던 오늘의 혈전 은 아직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직 피와 시신만을 남기며 이어지는 혈전 너머로 날이 밝으려는지 동천은 서서히 맑은 미명을 게워 내기 시작했다. 2 벽하가 조용히 서 있는 언덕 위! 격전지가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다시 좌고학이 나타났다. "후후! 지금쯤 혈투는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벽하는 무표정하게 좌고학에게 물었다. "천일독을 제거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제 넌 내 마음을 아주 잘 아는구나. 맞다. 더 이상 그를 방관했다가는 위험하 게 될 가능성이 있거든." "진소백이 더 상대하기 쉽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좌고학은 고개를 저었다. 결코 그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절대로! 하지만 진소백의 능력이 아직 천일독보다는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 무 공 또한 그러하고." 말하고 있는 좌고학의 면전으로 한 노인이 나타났다. 만설자 육가! 다시 말해 심아진(深雅珍)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내려서자마자 심아진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좌고학에게 고개를 숙였다. "궁주님께 문안드립니다."


좌고학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궁주? 그래, 이제 드디어 내가 신수궁의 유일한 궁주가 되었구나! 하하하! 어서 보고하거라, 심아진." "짐작하신 대로 남궁중은 궁주님의 편으로 돌아섰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남궁중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해 좌고학은 심아진을 보냈던 것이다. 남궁중이 모든 일을 좌고학의 지시대로 처리하는 것을 확인한 심아진이 돌아와 좌고학에게 복명 하고 있었다. "좋다. 예상대로지. 막내는 상당히 능력이 있기는 하나 모험을 하기엔 너무 심약 하지. 이것으로 사부의 유지(遺志)는 이루었다. 크하하하!" 신수궁은 강자존을 원칙으로 했다. 몇 명의 궁주 제자들이 자기들끼리 경쟁하여 살아남는 자만이 진정한 궁주가 되었 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이들 사형제는 이미 사부마저 암산한 후라는 점이었다. 사부 를 죽인 후, 그의 유지를 따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좌고학의 웃음은 계속되었다. "둘째는 곧 죽을 것이고 막내는 내게 복종했으니 드디어 난 투쟁을 통해 진정한 신수궁의 궁주로 탄생되었구나. 하하하!" 한참을 웃어 젖힌 그는 벽하를 쳐다보았다. "너는 사부가 생각나지 않느냐? 그의 밑에 있다가 나를 주군으로 택한 것을 후회 하지 않느냐?" 심아진은 그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로서는 갈만생보다 좌고학이 엄청 뛰어남을 알아보고 소속을 바꾼 것이 최근 이었으므로. 하지만 지금 질문을 통해 자신의 좌고학이 사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의 사부는 도대체 누구였는가? 벽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궁주를 택한 것은 저예요. 후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듣는 듯 마는 듯, 좌고학은 자신만의 만족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문득 심아진을 돌아보았다. 심아진이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보고 있음을 느꼈던 까닭이었다. 좌고학과 눈을 마주친 심아진은 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좌고학은 빙긋 웃었다. "넌 벽하와 자매지간이 된다. 이유를 아느냐?" 모른다는 뜻으로 고개를 흔드는 심아진을 보며 좌고학은 말했다. "너의 아버지 심화절은 내가 만일을 대비하여 풍림서에 심어 둔 사람이었지. 네가 어린 시절 받았던 교육들은 벽하가 받았던 것과 모두 동일한 것이었다." 비로소 심아진은 벽하가 구사하는 신법이나 변장술이 자신보다 월등하지만 비슷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자신과 벽하가 자매지간이란 뜻인가? 심아진의 의문은 벽하 (碧霞)가 나서서 추가 설명을 함으로써 이해되었다. "심화절, 그는 풍림서의 외단으로 들어가기 전 이미 결혼하여 한 명의 딸을 둔 상 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신수궁의 영광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딸을 버렸지." 아버지는 풍림서 내에서 다시 결혼하여 자신을 낳았다는 사실을 심아진은 알고 있 었다.


"그렇다면..." "그렇다. 너와 난 배다른 자매지간이다." 벽하의 말은 심아진의 생각을 확인해 주었다. 결국 어린 시절 그토록 모질게 받았던 훈련은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이었다. 좌고학을, 신수궁을 돕기 위해 심화절은 그토록 어려운 훈련을 자식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좌고학이 웃으며 말했다. "심화절은 내가 가장 믿었던 수하 중 하나였으니... 넌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 돌아 온 것이다." 심아진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가? * * * 이제 동천은 거의 밝았다. 좌고학은 생각이 난 듯 문득 하늘을 보았다. "이제 조금만 더 지체한다면 날이 완전히 밝아 불꽃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것이 다. 이처럼 기회가 좋은데도 설마 암흑호 조탐은 아직도 망설인단 말인가?" 벽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곧 시작할 것입니다." 그녀의 말에 호응이라도 하는 걸까? 신주평의 위로 작은 불꽃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작은 불꽃이라고는 하나 이곳까지의 거리를 생각해 보라. 신주평에서는, 저 불꽃은 작기는커녕 하늘을 뒤덮는 공포스러운 크기일 것이다. 처음엔 흥분된 눈으로 바라보던 좌고학의 얼굴이 점점 침울해졌다. 불꽃 아래 일어나고 있을 피의 잔치를 상상하던 것이 지루해졌는가? 그는 심아진 을 보며 물었다. "넌 내게 궁금한 것이 많은가 보구나. 자꾸만 쳐다보다니!" 심아진은 얼굴을 얼른 숙였지만 궁금함을 감추지는 않았다. 아직 어린 소녀의 호기심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전, 전 궁주님이 혈마수라결... 을 얻었단 소문을 들었어요. 그렇다면 혈왕교의 교 주가 되실 수 있으실 텐데, 왜...?" 좌고학은 그녀의 질문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그 점을 말하고 싶어 일부러 심아진의 질문을 유도했는지도 모른다. "흑혈산은 비록 혈왕교의 후신이지만 혈왕교는 아니지! 산주인 암흑호 조탐 또한 결코 만만한 자는 아니거든." "혈마수라결만으로는 교주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맞아. 하지만 설혹 그가 나에게 교주를 하라고 해도 난 거절할 것이다." "...?" "세력을 이용하여 강호를 장악하는 일이 어떻게 내 흥미를 끌 수 있겠느냐? 난 그 저 동등한 상황에서 승부를 즐기고 싶을 따름이다." "궁주님은 다만 스스로의 능력을 시험하고 싶으신 것이로군요." "맞다. 네 말이 정확하다." 심아진이 자신의 말뜻을 알아들은 사실에 기뻤던 것일까? 좌고학은 혼잣말을 시작 했다. "그런데 난 요즘 들어 몇 가지 생각이 자꾸 든다. 옛날 내가 좋아하던 것은 결코


피가 아니었는데... 다만 다른 사람과의 승부가 즐거웠을 뿐이었는데... 왜 이제는 이렇게 많은 피를 보지 않으면 흥분되지 않는 것일까?" 설마 좌고학이 회의를 느끼기라도 하는 건가? 곁에서 듣고 있던 벽하가 눈에 이채를 띠고 끼여들었다. 그녀로서는 좌고학의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궁주님과 적수(敵手)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은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피 를 보지 않고는 승부(勝負)를 결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승부! 그 한마디가 좌고학에게 가지는 마력은 어떤 것일까? 그는 단숨에 다시 힘을 얻는 듯했다. 신주평 위에서 일어나는 불꽃놀이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불꽃 아래 일어날 피보라에도 더 이상 연연하지 않았다. "맞다. 아직 나의 적수는 많이 남았다. 천일독은 비록 오늘 살아남지 못할 것이지 만... 진소백과 제갈수는 남으리라. 조탐 또한! 그리고 아직 승부를 가르지 못한 우 리의 사부! 그도 아직 있지 않느냐?" 벽하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무슨 말을 듣고 놀랐던 것일까? "사부(師父)가 아직 살아 있다 여기십니까?" 좌고학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다만 굳은 신념을 담은 어조로 신주평을 내려다보며 말했을 뿐이었다. "당연하다. 그가 그처럼 쉽게 죽을 리가 없지 않겠느냐?" 쉽게 죽을 리가 없는 좌고학의 사부! 그는 누굴까? 누구이기에 천하의 좌고학에게서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심아진은 사부(師父)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의 궁금증만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이상해요, 궁주님! 아까부터 왜 초의 선사를 빼고 말씀하시는 거죠? 그의 무공은 만인이 인정하는 것이잖아요?" 좌고학은 심아진을 돌아보았다. 아까와는 달리 강한 힘이 실린 좌고학의 눈을 본 심아진은 매우 놀라고 말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심아진! 초의(草衣)는 오늘 안으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 제 7 장 애사(哀死)! 거성(巨星) 떨어지다 1 일렁이는 검붉은 기운! 해는 떠올랐지만 암흑호 조탐을 감싸고 있는 어두운 기운만은 제거하지 못했다. 붉은 혈포를 걸친 자 하나가 그의 앞에 부복하고 있었다. 혈산(血山)! 지금은 죽어 버린 흑산 추림(秋臨)과 더불어 조탐의 명령을 수행하는 두 명 중의 하나였다.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만들어진 비폭산의 위력은 절대적입니다." 혈산의 보고에 흑혈산주 암흑호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말투 에는 전혀 만족의 빛이 보이지 않았다. "흑산(黑山)의 활약이 컸다. 또 좌고학, 그자는 스스로의 말을 지켰고. 어쨌든 명심


하라. 오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초의가 살아남아서는 안 됨을."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강호인들의 신망은 절대적이며, 그는 단심맹의 무력(武力)을 담당하고 있는 자이니... 가장 위험한 적이다. 꼭 없애야 한다." 검붉은 기운이 암흑호의 전신에서 일렁거렸다. 이어 붉은 진흙과도 같은 그 기운이 안개처럼 스러지자, 그 속에 있던 암흑호도 사라지고 없었다. 혈왕표(血王飄)! 하지만 암흑호가 사라졌어도 혈산은 공경의 예를 풀지 않았다. 조탐이 듣건 말건 그의 허리는 복명의 자세로 굽혀졌다. "존명(尊命)! 초의는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 * * '겨우 벗어났다.' 더 이상 비폭산이 날아오지 않음을 느낀 군웅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살아서 신주평을 벗어난 사람들은 그야말로 절정고수! 하지만 의천검신처럼 운이 나빠 자신의 무공을 채 펴지도 못하고 죽은 경우도 있었다. 양회(梁回)는 어깨에 큰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그런 것보다 사부가 보이지 않음에 놀라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겨우 이십여 명만이 살아서 신주평을 벗어났다. 게다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사람은 단 세 명에 불과했다. 초의 선사와 천일독! 그리고 진소백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좌중에서 이들 셋의 무공이 가장 높다는 의미였다. 소림 방장인 현 공 대사마저 허리에 미미한 혈흔을 묻히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들의 무공은 놀라운 데가 있었다. 하지만 겉이 멀쩡하다고 속까지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이어졌던 격전과 폭발의 힘으로 인해 내부가 진동하여 내상을 입는 일은 누구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소백은 쉬지 못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숲속으로 뛰어갔다. 진소백은 비폭산의 사정거리(射程距離)를 벗어나고서도 쉬지 않고 앞으로 달려갔 다. 천일독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들이 안도하여 혹은 섭수진처럼 너무 지쳐서 바닥에 주저앉을 때, 그들 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둘이 사라진 숲속에서 들려 오는 비명을 듣자 초의 선사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숲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단지 화기만을 발출하기 위해 숨어 있던 자들이었을 것이다. 세 절대고수의 일격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혈포인들은 입에서 피를 뿜었다. 그들의 피가 닿은 곳은 시커멓게 변색되어 갔다. '이미 악마혈을 복용한 자들이다. 우리가 손을 쓰지 않아도 죽을 자들이었단 말인 가?' 무공이 약하니 자연 반격하는 자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죽어 가며 내뿜는 피는 무서운 위협이 되었다. 악마혈로 인해 극독이 된 피는 지난밤 이미 질리도록 경험했던 것이 아닌가. 치이익! 최후의 일 인이 쓰러진 풀 가에서 연기가 피어오름을 보며 진소백은 얼굴을 찡그


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혈왕교! 아니, 지금은 흑혈산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자들. 이들은 하나같이 악마혈을 복용(服用)한 채로 스스로 죽음을 맞았다. 세상에서 가 장 무서운 집단(集團)은 바로 이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집단이다. 도대체 누 가 이들을 지휘하는 것일까? '오늘 강호 정도의 많은 힘이 소실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악독한 자라면 결코 여 기서 멈출 리 없을 것이다.' 불행히도, 정말 불행히도 나쁜 예감은 좋은 예감보다 ��� 들어맞는다. 그리고 그 예 감이 단순한 느낌이 아닌 상황 분석에 의한 것이었을 때에는 더욱 잘 들어맞는다. 소리없이, 그야말로 유령처럼 스물두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나타나는가 싶더니, 지쳐 바닥에 앉아 있는 군웅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전신에 혈포를 걸치고, 피부 또한 붉디붉은 자들. 두 눈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흉광! 이들이야말로 혈마대였다. 진실한 혈마대(血魔隊)! 백이십 년 전, 혈마지겁의 주역이었던 삼대악몽이 드디어 모조리 나타난 것이다. 진소백의 눈이 암담함으로 어두운 빛을 띠었다. 모두들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었다. 마주 싸울 힘도 없었고, 진경산과 당자평이 바닥에 쓰러져 있어 도망갈 수도 없었 다. 누군지는 모르나 오늘의 일을 주지하고 있는 사람의 능력에 대해 은근히 감탄이 일었다. 하지만 현실을 생각하면 남는 것은 절망뿐! '우리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 * * 천일독은 품을 더듬었다. 고독의 해독약은 만일을 대비해 만들어 둔 것이지만 쓰일 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적아를 가릴 때가 아니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고수(高手)가 있어야 혈마대와 싸울 것이 아니겠는가? '대사형! 당신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오. 난 꼭 여길 벗어나 보이겠소.' 그는 좌고학이 모 든 일의 암중 주지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한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좌고학은 다만 몇 가지 도움만 주었을 뿐, 모든 일을 꾸민 사람은 암흑호 조탐이 었다는 사실. 그것을 천일독은 모르고 있었다. 중원의 제패를 꿈꾸던 풍림서의 서주(誓主)에서 단숨에 지금의 영락한 모습으로 바뀌어 버린 그! 천일독이 지금 굳게 결심하는 것은 결코 좌고학의 뜻대로 모든 일이 돌아가도록 두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혈마대는 머릿속을 휙 지나가는 순간적인 생각도 지속할 여유를 주지 않고 덮쳐 왔다. 개개인의 능력이 보통 문파 장문인에 버금간다는 혈왕교의 가공(可恐)할 인간병기! 과연 소문대로 그 무위는 무서웠다.


십여 장의 거리를 단숨에 축지(縮地)하며 다가오는 붉은 그림자! 천일독은 지친 정 신을 추스르며 흑성검에 공력을 주입했다. 그의 검이 찬란한 검기를 뿜어 내며 혈마인(血魔人)을 압박해들었다. 군성검(群星劍)! 하지만 그는 이미 이틀이나 계속해서 내공을 소모하고 있었다. 검의 위력이 평소 같지 못함은 당연했다. * * * 해는 중천(中天)에 떴다. 어제의 태양은 중원맹주의 탄생을 알리는 희망이었는데, 오늘 그 중원맹주는 강호 정복을 꿈꾸는 효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금의 태양은 다만 저주(詛呪)였다. 모두의 피를 부르는 저주! 살아남은 군웅들은 너무 많은 피를 보았고 너무나 많은 죽음을 보았다. 그리고 제대로 쉬지도 못했던 것이다. 쉬지도 못한 군웅들이 혈마대를 상대로 그나마 반나절이나 버틴 것은 가히 기적 이라 할 수 있었다. 초의 선사와 진소백, 천일독 이 셋의 활약이 두드러졌음은 물론이었다. 자리는 이미 처음의 격전지에서 오 리 정도 떨어진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꾸준하게 쫓아오는 혈마인을 상대로 군웅들은 그야말로 열심히 싸웠다. 하지만 지친 군웅들의 기력(氣力)은 급격히 떨어져 갔고, 급기야 사상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욱!" 종남의 대제자인 학인구(鶴仁究)는 군영회의 일원이었다. 그는 젊은이답지 않은 무공으로 여태껏 버텨 왔지만 그만 혈마인(血魔人)의 붉은 두 손이 자신의 가슴을 뚫고 통과하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호, 혼자 죽지는 않는다!" 마지막 힘을 실은 학인구의 검이 자신의 가슴에 손을 넣고 있는 혈마인의 머리를 노렸지만 그것은 헛된 시도에 지나지 않았다. "큭큭! 어림없지." 어느새 뒤로 물러난 혈마인의 손에는 펄떡거리는 학인구의 심장이 들려 있었다. 종남일학(終南一鶴)은 눈이 뒤집혔다. 제자(弟子)의 심장이 산 채로 뽑히는 참상을 목도(目睹)한 그의 얼굴은 불 같은 분 노로 붉게 변했다. "죽일놈들!" 노갈하며 날아가는 그의 자세는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기세를 내포하고 있어 종남 일학이 일대의 검수임을 알려 주었다. 천하삼십육검(天河三十六劍)! 은하수(銀河水)의 도도한 흐름을 닮은 검세(劍勢)가 물밀듯이 일어나며 혈마인을 덮쳐 갔다. 차차창! 하나, 단숨에 칠 검을 찔러 갔던 그의 검은 쇳소리를 내며 튕겨나고 말았다. 혈마인의 무서운 점이 바로 이것! 특이한 제련(製鍊)을 거친 그들의 피부는 도검(刀劍)으로도 상(傷)하기가 어려웠다. 위기는 오히려 종남일학에게 다가왔다. 애초부터 그와 손을 섞고 있었던 혈마인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제자의 죽음으로


이성을 잃었던 종남일학은 그만 뒤를 얻어맞고 말았던 것이다. "우웃!" 입 안 가득 올라오는 비릿한 피를 억지로 참으며 종남일학은 천하도도(天河濤濤) 의 식으로 검을 휘둘렀다. 몸이 돌며 검 또한 따라 돌아갔으니 이번 검초의 위력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 다. 치칭! 종남일학의 검이 스쳐 간 혈마인의 피부가 갈라졌다. 하지만 그뿐! 피조차 흐르지 않으며 괴소를 짓는 혈마인을 보며 종남일학은 아득한 절망을 느 꼈다. "흐흐! 반항해 봤자다. 너희는 오늘 모두 죽는다. 큭큭큭!" 괴소와 더불어 혈마인의 두 손이 종남일학의 머리를 노리며 날아왔다. 피를 흘리자 내상(內傷)이 심해져 공력이 급격히 떨어짐을 느낀 종남일학은 이를 악물고 검을 들어 혈마인의 손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쨍! 막대한 힘을 견디지 못한 검이 부러져 나감을 본 종남일학은 눈을 질끈 감을 수밖 에 없었다. '끝장이로구나!' 환상(幻像)인가? 천하검으로도 잘 베어지지 않던 혈마인의 가슴 부위가 터져 나가는 모습은. 흑성(黑星) 몇 줄기가 혈마인의 가슴에서 솟아나며 종남일학을 향해 날리던 손을 멈추도록 했다. 단숨에 혈마인의 심장을 찢어 놓을 수 있는 무공은 몇 되지 않았다. 그 중 하나가 검강(劍 )이었다.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새벽녘에만 해도 죽음을 걸고 싸웠던 천일독임을 알아본 종남일학은 흠칫했다. 하지만 어떤 말을 나눌 여유도 없었다. 그는 이미 다른 혈마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므로. "차앗!" 또다시 검강이 솟아 다른 혈마인을 노렸지만 이번엔 효과가 없었다. 다시없는 강함을 담고 있어도 피해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아무리 검강이 무섭다 하나 스치는 것 정도로는 혈마인에게 타격을 주지 못했다. 진소백도 다섯 명째의 혈마인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피곤했다. 처음엔 십칠 초 만에 처치했던 혈마인인데 다섯 놈째는 백이십 초가 넘게 걸렸다. 그만큼 지쳤다는 의미! 그러나 조금만 더한다면 모두 처치할 수 있다는 희망이 가슴에 있었다. "차압!" 분뢰수를 쏘아 내며 홍유창(洪柳昌)을 공격하는 혈마인을 노리는 진소백! 지쳐 있 어도 희망은 언제나 또 다른 힘을 주는 법이었다. 그러나, 절망은 언제나 모퉁이에 숨어 기다리는 악마였다. 멀리서 천천히 다가오는 일단의 혈포인을 본 진소백은 그야말로 아득해졌다. 또 다른 혈마대!


이번엔 서른 명이 넘어 보였다. 2 싸움은 중단되었다. 어디선가 들려 온 소성을 따라 혈마인들이 무서운 속도로 물러남에 따라 군웅들은 숨을 돌렸다. 진소백은 볼 수 있었다. 혈마인들이 원을 지어 부복한 중앙! 붉은 안개가 서서히 피어나더니 하나의 인영이 나타나는 것을. 전신을 붉은 진흙 같은 기운으로 감싼 자! 그가 바로 모든 공격의 지휘자였음을 진소백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진흙의 입 부위가 열리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선 축하드리오. 아직 살아 있으니..." 의외의 등장에 군웅들은 놀라고 있었다. 천일독 역시 의외의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좌고학, 그의 하수인이오?" 진흙이 흔들렸다. 웃고 있는 것이다. 한참이 지난 후 진흙 같은 진기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문사(文士)처럼 단아한 인상의 중년인이 그 속에서 나타났다. "내 소개가 늦었구려. 난 암흑호 조탐이라고 하오." 이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나 진소백은 천외성의 만리탐 정보실(情報室)에서 이 이름을 보아 알고 있었다. "흑혈산의 산주(山主)! 당신이 바로..." "흑혈산을 다스리고 있소." 중인들은 모두 알 수 있었다. 오늘 일은 모두 이 사람의 음모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을. 천일독은 여전히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좌고학은, 그는 어디에 있소? 혈마수라결을 익혔으니 그가 당신들 혈왕교의 지존이 되는 게 아니오." 조탐은 껄껄 웃었다. "하하하! 그런 무공 하나 때문에 내 문도들을 모조리 뺏길 만큼 난 어리석지 않소. 좌고학은 오늘 조그만 도움을 내게 주었으니... 공을 인정해 주어야겠지. 하지만 교 주라니! 흥, 어림없는 얘기지." 진소백은 좌고학이 아직 혈왕교의 교주로 서지 못했음을 알았다. 암흑호 조탐 또 한 대단한 인물인지라 그의 기업을 쉽사리 넘겨받지는 못할 것으로 보였다. 진소백은 눈을 빛내며 앞으로 나섰다. "오늘 당신이 우리에게 베푼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소. 한데 또 무슨 더 베풀 것 이 있어 이렇게 나선 게요?" 조탐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보았다. "네가 진소백이로구나. 네 활약에 대해선 많이 들었다. 일 년 전 심화절도 무사하 지 못했지." "당신도 목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으하하! 좋아, 나도 조심하지. 어쨌든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강호를 이끌어 가 는 초고수들이니 그냥 죽음을 당하긴 너무 아깝지 않느냐?" "회유를 해보시겠다?" "그렇지. 이미 내 힘을 알았으니 넘어올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진소백은 냉소했다. "흥! 그럼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소? 이미 너무 많이 당하여 화가 날 대로 났으 니... 한마디로 거절이오." 조탐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신을 덮은 진기를 거두자 그는 영원히 화낼 줄 모르는 사람처럼 온화해 보였다. "처음엔 필요가 없었지. 그 정도에 죽을 하수들은 흑혈산에 들어올 자격이 없으니 까." 말을 주고받는 도중에도 진소백은 느낄 수 있었다. 주위에서 흑혈산의 무리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음을.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군웅들은 아무도 벗어날 생각을 말아야 했다. 절망한 진소백의 귀가 쫑긋 움직인 건 그때였다. 누군가의 전음! 누가 무슨 말을 그에게 하는 것인가? * * * 그처럼 서둘렀지만 제갈수(諸葛修)는 늦었다. 남은 전력(戰力)을 이끌고 달려온 신주평은 불탄 시체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저쪽으로 간 것 같습니다." 예리하게 바닥을 살펴보던 엽평이 동쪽을 가리켰다. 바닥에 어지럽게 난 발자국들. 급히 전열을 정비하며 제갈수는 동쪽으로 달려갔다. * * * "난 투항하겠소." 천일독이 천천히 조탐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군웅들은 분노를 참지 못했 다. 단 한 사람, 진소백을 제외하고는. 그는 계속하여 암중에 전음을 보내고 있었다. 진소백의 전음을 듣는 자들은 모두 군영회에 속했던 젊은이들이었다. 초의 선사도 전음을 보내고 있었다. 각파의 장문인들과 진경산이나 당자평 같은 노고수들에게. 조탐은 미소하며 천일독을 보았다. 그만은 투항할 것이란 자신의 예측은 맞았다. "좋소. 당신이라면 능히 한패가 될 자격이 있지." 조탐은 수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알약 하나를 수하가 들고 나왔다. "혈왕단(血王丹)이니 어서 드시오. 공력이 증강되는 영약(靈藥)이니." 그의 말은 조금도 거짓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빼놓은 것이 있을 뿐이었다. 혈왕단은 공력을 증가시킬 뿐 아니라 일종의 독약이기도 했다. 단숨에 혈왕단을 삼킨 천일독은 몸에 활력이 돌아옴을 느낄 수 있었다. 조탐이 유쾌하게 웃었다. "혈왕단은 비단 영약일 뿐 아니라 독약이기도 하니 앞으로도 계속 복용하는 편이 좋을 것이오. 사흘만 먹지 않아도 온몸이 터져 나갈 테니까!" 왜 흑혈산의 수하들이 망설임없이 모든 명령을 따르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말을 듣지 않는다면 혈왕단을 먹을 수 없게 되고 죽게 되는 것이다.


"하하! 어쨌든 효과는 좋지 않소?" 조탐의 질문에 천일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좋소!" "어느 정도로 좋소?" "이 정도로 좋소!" 천일독의 몸이 쭉 미끄러졌다. '이 정도'라고 말할 때 주위를 포위한 혈마인들의 벽과 삼 장 떨어져 있었지만, ' 좋소'를 말할 때는 이미 검을 뽑아 들고 혈마인을 지척에서 공격하고 있었다. 초의 선사와 노고수들이 그 뒤를 다시 공격하고, 진소백을 비롯한 군영회의 청년 들이 다시 따랐다. 딱! 채쟁! 혈마인들의 포위는 거의 다섯 겹이었다. 하지만 천일독이 둘을 검강으로 자빠뜨리고 날아오르자 그의 뒤에 바로 붙었던 초 의 선사가 다시 둘을 처치했다. 곧바로 초의 선사도 위로 날아오르자 남은 한 명의 혈마인은 노고수들의 협공 아 래 뒤로 날려갔다. 진소백은 두 명의 전음을 동시에 들을 수 있었다. "이때다. 어서 나가거라, 소백아!" "진소백! 내 부탁을 꼭 이행해 주게." 살아남은 군영회의 청년은 모두 일곱! 한 줄에 꿴 기러기처럼 일곱 명이 포위망이 뚫린 한곳으로 날아갔다. 이 모든 변화는 그야말로 전광석화(電光石火)! 놀란 조탐이 소리를 지르며 날아올랐을 때, 이미 매일도를 마지막으로 군영회의 일곱 명은 밖으로 나간 후였다. 낭패한 조탐의 눈앞으로 두 명이 내찌르는 공세가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혈마인을 해치우고 날아올랐던 천일독과 초의 선사가 협공해 오는 것이었다. "감히 네놈들이-!" 어느새 내공을 일으킨 것일까? 붉은 진흙 같은 경기(勁氣)가 전신을 감싸자 조탐은 목소리마저 변해 버렸다. 두 절정고수의 공격에서 일어나는 바람! 무공이 높은 만큼 미약하기 그지없는 바람만 일어났지만 그 기운에도 조탐의 몸은 반응하며 둥실 뒤로 물러났다. 혈왕표(血王飄)! 물러난 조탐의 두 손이 기이한 형태로 맞물리며 다시 펼쳐졌다. 바로 마라혈수(魔羅血手)였다. 쿠광! 세 명의 절대고수들이 허공에서 삼각형의 형태로 멀어졌다. 굳이 따지자면 협공했던 초의 선사와 천일독이 오히려 더 많은 피해를 입은 셈이 었다. 만일 두 사람이 내상을 입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상황은 어땠을까? 아마 이들 셋은 누구도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땅에서는 군영회를 쫓아가려는 혈마인들을 노고수들이 막아 주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결심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제자와 후생들만은 도피시키기로.


공동의 풍운 진인! 탐스러운 수염을 다시 길렀던 그는 지금 몹시 지쳐 있었다. 오랜 감금 생활로 인해 그의 지구력은 너무 약해져 있었다. 두 명의 혈마인까지는 그럭저럭 상대를 했었는데 세 명째 혈마인이 합공해 오자 그만 가슴을 얻어맞고 말았다. "욱!" 밀려 비틀거리던 그는 뒤에서 차가운 기운이 엄습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 이렇 게 당하다니..." 풍운 진인은 자신의 배에서 솟아나온 타인의 손을 보았다. 등을 뚫고 들어간 혈마인의 손이 배로 나왔던 것이다. 피와 내장이 감긴 혈수는 보기에도 끔찍했다. 죽음에 대한 예감과 함께 찾아든 것은 참을 수 없는 분노였다. "으아아-!" 마지막 힘을 다한 개천풍운조(開天風雲爪)가 자신 앞에 선 혈마인의 두개골을 꿰 뚫었을 때! 일세의 영웅 풍운 진인은 그만 숨을 거두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살계를 깬 지 오래인 현공 대사나, 아미의 금정 신니도. 제자들을 밖으로 보내기 위한 구파 장문인들과 진경산, 당자평 등의 희생은 눈물겨웠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남지 못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군영회는 살아남아야 했다. 그들이야말로 강호의 미래! 앞날을 이끌어 갈 희망이었으므로. * * * 저지선을 넘어 군영회를 추격해 가는 혈마인들도 있었다. 이 자리에 동원된 혈마인은 모두 육십여 명! 총 백 명의 혈마인이 제작되었으며 오늘 과반수 이상이 동원되었던 것이다. 모종의 이유로 혈마인은 백 명까지가 한계였다. 한데 혈경이 흑혈산의 손에 들어간 것이 도대체 언제였기에 벌써 모든 준비가 이 처럼 완벽하다는 말인가? 군영회 일곱 명 중에서 무공을 따지자면 진소백이 가장 높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섭수진과 매일도가 비슷한 정도일 테고. 진소백과 매일도가 가장 뒤로 빠진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섭수진은 앞장서서 달리고 있었다. 두 명의 혈마인들이 가까이 왔음을 느낀 진소백의 신형이 번개같이 뒤로 돌았다. 우워엉! 용음이 일며 진소백의 양손에서 용음십이수가 뻗어 나가 혈마인을 노렸다. 매일도의 화형권(花形拳) 역시 만개하며 뒤로 뻗어 가니... 퍼펑! 폭음과 더불어 군영회는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뒤를 쫓아오는 혈마인들의 수는 점점 늘어 갔고, 도망가는 청년들은 너무 지쳐 있 었다. 3 긴 대나무통! 하지만 백이십 년 전 이 대나무통은 무서운 활약을 보였었다.


벽력세가는 뇌정구(雷霆球)와 더불어 이 뇌신통(雷神筒)으로 혈마인을 물리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던 것이다. 지금 급히 달려가는 제갈수와 엽평을 따르는 단심맹의 삼십여 제자들의 손에는 모 두 대나무통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 * * 우워엉! 또다시 뻗어 나간 용음수에 맞은 혈마인(血魔人)은 그다지 타격을 받지 않은 듯했 다. 이유는 하나! 진력이 너무 많이 소모된 것이다. 힘은 떨어지고 적은 늘고... 한 대 맞고서도 끄덕도 없이 달려드는 혈마인의 손을 피해 진소백은 몸을 뒤로 뉘 였다. 얼굴 위를 가르며 지나가는 혈마인의 손! 하지만 위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 놈이 지나가자 뒤에 있던 혈마인이 곧바로 진소백을 덮쳐 왔다. 절대의 위기! 바닥에 누워 움직이기 힘든 진소백을 혈마인이 공격해 오는 것이다. 펑! 이 소리는 진소백이 아니라 혈마인의 가슴에서 일어났다. 검강이 아니면 완전히 뚫리지 않는다는 혈마인의 가슴에는 큰 구멍이 생겨 뒤가 훤히 보였다. 하지만 진소백의 힘은 아니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혈마인의 가슴에서는 아직도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진소백은 놀란 듯 중얼거렸다. "뇌신통(雷神筒)! 제갈 사부님!" 펑! 퍼펑! 연달아 울리는 폭음과 더불어 뇌신통에서 나온 화약이 혈마인의 가슴에 구멍을 만 들었다. 단 이 회밖에 쓸 수 없는 것이 단점이기는 했지만 화약이 폭발하는 기운을 한곳으 로 몰아 쓸 수 있는 뇌신통의 위력은 정말 대단했다. 진소백은 뇌신통을 발사하는 단심맹의 무사들 틈에서 엽평을 보았다. "사형, 괜찮으십니까?" 달려오는 엽평에게 진소백은 말보다 손짓을 먼저 했다. 초의 선사가 남아 있는 방향! "어서, 어서 가야 된다. 사부님이 위험하셔." 제갈수도 그 말을 들었다. 진소백이 가리키는 언덕으로 그가 신형을 날리자 엽평 또한 달려갔다. 신풍류(神風流)! 내공을 아끼지 않고 달려가는 그들의 뒤를 진소백은 지친 걸음으로 따라갔다. 진소백! 그는 너무 오랫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했던 것이다. * * * 언덕 위에 오른 진소백!


까마득히 보이는 먼 곳에서 초의(草衣) 선사(禪師)와 암흑호(暗黑虎) 조탐이 싸우 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천일독은 이미 당했나 보다.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않고 있었다. 중간쯤 되는 위치에서 엽평과 제갈수는 급히 달려가고 있었는데... 너무 힘이 빠진 탓일까? 진소백의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갑자기 저마다 입을 열려 아우성치는 것 같 은 환상을 느꼈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멀리 보이는 사부와 조탐의 싸움에서는 일장박투의 흉험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 다. 진소백은 머릿속이 하얗게 비며 주위의 소리가 끝없이 자신으로부터 멀어져 감을 느꼈다.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또한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고, 또 한편으론 아무 생 각이 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장난처럼 뛰어오른 초의(草衣) 선사(禪師)의 몸을 조탐의 손이 뚫고 지나가고 역시 장난처럼 한 줄기 혈선이 초의 선사 몸 바깥에 그려짐을 보았던 까닭이었다. 설마 저 모습이 사실일까? 소리도 없고 아픔은 더욱 없었다. 사부의 몸이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도 진소백에게는 실감(實感)이 나지 않았다. 언덕 위에 망연히 선 채, 초점 잃은 눈으로 서 있는 진소백에게는 광규를 지르며 달려가는 엽평의 모습도, 멀리 사라지는 조탐의 모습도 전혀 현실감이 없었다. 다만 주변(周邊)의 모든 것이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고, 돌이킬 수 없는 구덩이 속 으로 자신이 빠져 들고 있다는 느낌만이 전해질 뿐... 서서히 정신을 잃어 가는 진소백의 귀로 엽평의 외침이 그제서야 겨우 들려 왔다. "사부님-!" 사부! 그들의 사부이며 일세의 고승이었던 신승 초의 선사! 이월 열일곱째 날! 신주평(神州坪) 부근의 한 평지에서 암흑호 조탐의 손에 죽임을 당하다. 애사(哀死)! 그가 무림에 끼친 공적은 실로 컸으니 온 강호가 슬퍼하도다. * * * 하얀 빛 속! 진소백은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그는 일전에 자신이 이곳을 한번 왔다 간 경험이 있음을 기억해 내었다. 하늘을 나는 이치(理致)도 쉽게 깨쳤었는데 왜 그 동안은 잊고 살았을까? 언제나 처럼 빛을 지나자 놓여 있는 나무 그늘 아래 엽혼이 미소를 띠며 앉아 있었다. "어서 오게. 오랜만이군, 정말." 엽혼이 권하는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 진소백은 자리에 앉았다. "자주 오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했네. 난 깨어나기만 하면 이곳을 잊어버린다네." 엽혼은 이해할 수 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깨어나서도 기억할 수 있을 걸세. 언젠가는 말야!" 진소백은 친구를 만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역시 소화(小花), 아니, 엽 부인의 얘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


각했다. "아이는 매우 튼튼하고 잘 자란다네. 자넬 닮아 좀 음침한 것이 흠이긴 하네만..." 하지만 말해 놓고 나서 보니 진소백은 스스로의 말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살아서의 엽혼은 비록 조금 어둡기는 했지만 지금은 더없이 밝았던 것이다. 지금도 엽혼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고 있었다. "알고 있네. 나도 가끔 만난다네. 소화도 자네처럼 깨어나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날 보면 무척 반가워한다네." 엽혼은 다시 한잔을 더 진소백에게 따라 주었다. 분명 술병은 없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진소백은 의아해졌다. "술병은 없었는데... 어찌 된 일인가?" 엽혼은 다시 빙긋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술병을 다시 내려놓 자 술병이 어느새 사라짐을 진소백은 보았다. "또 사라졌군. 정말 이상하군. 정 말..." 고개를 갸웃거리던 진소백은 자신의 옆에 의자 하나가 생겨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이어진 말! "뭐가 그렇게 이상하냐, 소백아!" 이런 목소리, 이런 말투! 진소백은 어느새 사부 초의 선사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언제 나타난 것일까? 하지만 진소백은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스럽게도 그런 일들이 당연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원하는 것이 저절로 나타나고 원하는 곳은 어디나 갈 수 있는 경지. 마음의 변화 에 따라 우주의 모든 변화가 스스로 일어나는 경지! "소백아, 나도 한잔 다오. 목이 마르구나." 초의 선사의 말에 따라 손을 든 진소백의 오른손에는 어느새 술병이 잡혀 있었다. 당연한 듯 진소백은 아무런 의아심도 생기지 않았으며 나타났던 술병은 술을 따른 후 손을 놓자 또 저절로 사라졌다. 초의 선사는 진소백이 따른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사부님! 술은 드시지 않으셨잖습니까?" 초의 선사도 엽혼처럼 빙긋이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는데 진소백은 사부가 내려놓 은 술잔을 보고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그것은 이미 물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마셨을까? 초의 선사가 조용히 말했다. "이젠 돌아가야지, 소백아!" 진소백 스스로도 돌아가야 할 때임을 알고 있었다. 엽혼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진소백을 재촉했다. 진소백은 눈물이 흐름을 느꼈다. "이제... 간다면 언제 다시 뵈올까요, 사부님?" 초의 선사는 그의 눈물을 닦아 주며 혀를 찼다. "쯧쯧, 소백은 아직도 어린애구나. 언제든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깨닫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전 깨어나면 또 이런 일들을 모조리 잊어버리겠지요?" "아마도 그럴 테지. 하지만 언젠가 넌 다시 모조리 기억하게 될 것이다. 깨닫게 된


다면." 무엇을 깨달으면 된다는 것인지 진소백은 몰랐지만 굳이 물어 보지 않았다. 다만 다시 한 번 사부와 엽혼을 둘러보며 눈물을 흘렸을 뿐이다. 주변은 다시 밝디밝은 빛으로 뒤덮였다. 그 빛 속에 묻혀 사부와 친우는 사라졌고 진소백은 자신이 서서히 깨어남을 느꼈 다. * * * "정신이 드셨습니까, 사형?" 엽평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진소백은 놀라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동화객잔(同和客棧)입니다. 사형이 갑자기 쓰러지셔서 이리로... 저런 무슨 꿈을 꾸신 겝니까? 눈에..." 진소백은 자신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음을 깨달았다. 무슨 꿈을 꾸었을까? 왠지 아주 소중한 일이 꿈속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진소백은 안개처럼 모호한 기억을 억지로 털어 버리며 엽평에게 물었다.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느냐?" "오늘로써 사흘이 지났습니다. 어서 일어나셔서 대사부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십시 오." 엽평의 어조는 침울했다. 대사부(大師父)! 초의 선사의 영결(永訣)이 있는 날이었던 것이다. 제 8 장 마지막 희망은 천추학림 1 <신주평의 뇌전행동(雷電行動)에 대한 결과 보고. 생존자는 모두 열셋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소백, 매일도, 홍유창, 섭수진... 현공, 인의신개, 금정 신니... 총 오천사십삼 명의 무림대회 참가자 중 단 열셋만이 살아남았음. 초의를 죽인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음. 이로써 중원 정도의 힘은 사분지 일이 소실되었음을 보고드리면서, 아래에 명령하 신 대로 전후(前後) 상황을 간단하게 요약 올립니다. 날짜는 역시 명에 따라 지금을 기준으로 하여 간략히 정했습니다. -사십이 년 전, 강호 장악의 장애 요인으로 두 집단을 설정. 천외성과 천추학림. 제거 계획 착수. -사십일 년 전, 좌고학 포섭 성공. 천추학림 내부에 풍림서란 이상 집단이 있음을 알다. -십구 년 전, 천외성의 뇌옥 아래에 혈마수라결이 있음을 알게 되다. 좌고학에게 회수를 요청.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종수(鐘秀)는 치명상을 입고 절벽으로 추락. 시체는 찾지 못했지만 살아났을 가능성은 전무. -십이 년 전, 혈경 입수. 악마혈과 비폭산의 제조에 들어감. 혈마대를 십 년의 계


획으로 준비 시작. -이 개월 전, 혈경의 마지막 구결 입수(入手). 혈마대를 깨울 수 있게 되다. -천외성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어 강호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계획과 우리의 등장을 알리는 이중 계획을 실행. 좌고학의 계획을 받아들이기로 함. 의도적인 사건을 벌여 혈경의 유출 책임을 천외성에 전가시키고 좌고학은 그 순간 을 이용해 절망옥 바닥의 구결을 구해 오기로 한다. -천외성 해체! 그러나 좌고학은 혈마수라결을 가지고 잠적! 본 산의 모든 힘을 동 원하여 찾았으나 종적이 없음. -십칠 일 전! 좌고학이 정도 말살계를 서찰로 보내 옴. 타당성이 높다고 인정되어 협약을 맺음. 흑산과 이백세 명의 첩자를 동원하기로 결정. -사흘 전, 정도말살계 일차 성공. 그들이 안심하고 서로 분열될 수 있도록 이백여 명의 혈포무사를 희생하기로 결 정. -이틀 전, 좌고학의 장담대로 풍림서와 초의가 이끄는 단심맹은 분열. 기진할 때까 지 기다려 비폭산과 혈마대의 동원 결정. -하루 전, 최종 공격으로 초의를 살해! 제갈수의 신속한 대응으로 열세 명은 남겨 둔 채 철수. 결과 최종 보고. 흑산 추림과 이백세 명의 첩자 유실. 혈포무사 이백네 명과 혈마인 십칠 구 유실. 소득. 신승 초의를 비롯한 정파 오천삼십 명 추살! 풍림서는 해체되었으며 정도는 힘의 사분지 일을 잃었음. 좌고학은 또다시 잠적했습니다. 이번의 정도말살계의 대성공으로 우리의 무림 장악에 방해가 될 요인은 둘밖에 남 지 않았습니다. 첫째는 천추학림으로, 살아남은 자들이 그곳을 축으로 뭉칠 가능성이 큽니다. 둘째는 좌고학입니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계략으 로 보아 극도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제거해야 할 것으로 사 료됩니다.> 초안(草案)으로 대충 작성된 보고서를 읽어 본 혈산은 고개를 저었다. "왜 이런 보고서를 만드는 줄 아느냐?" 보고서를 만들었던 혈문사(血文士)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관하여 두었다가 후손들이 계략을 보고 익히게 하고자 함이 아닙니까?" "그렇다. 하면 정확한 정황 분석을 적어 놓을 필요성도 있음을 알 게 아니냐?" "..." 혈문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하느라고 아무 말도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혹시... 좌고학에 대한 평가가... 그를 제거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혈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판단은 아주 적절했다. 좌고학은 마땅히 제거되어야 하지."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혈문사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 갔다. 혈산의 심중 을 알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한참을 지나도 혈문사가 말이 없자 마침내 혈산은 말했다. "한 세력에 대한 보고가 빠졌다." 그제서야 깨달은 혈문사는 고개를 숙였다. "사씨가문(獅氏家門)을 말씀하십니까? 하지만 그들은... 천외성도 이미 해체되지 않 았습니까?" 혈산은 고개를 저었다. "원래부터 무서웠던 것은 사씨가문 개인적인 세력들이었지. 사경천(獅敬天)이 좌고 학의 중수(重水)에 중독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그들은 조심해야 할 적이다." 그랬다. 백이십 년 전 혈왕교와 싸웠던 세력은 천외성이 아닌 사씨가문의 가신들이었던 것이다. 혈문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 부분을 정정하여 다시 보고 올리겠습니다." * * * 초의 선사는 승려 신분이어서 조촐하게 다비식이 치러졌다. 화장(火葬)된 후 남은 뼈 조각은 맷돌에 갈려져 가루로 화했다. 고승의 명성에 걸 맞게 사리가 백여 개나 나와 소림 승려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언덕 위에서 바람에 날려 가는 사부의 뼈 가루를 보면서 진소백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왠지 모르지만 그는 사부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흰 가루는 바람 속에 흩어져 곧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자유롭고자 항시 맨발로 다녔던 그의 사부는 본의 아니게 속세의 일에 얽매여 전 혀 자유롭지 못했다. 이제 바람에 실려 자유롭게 떠다니는 자신의 뼈 가루를 본다면 초의선사의 영혼은 웃을까? 아니면 울까? -맨발 말이냐? 허허, 편하지 않느냐! 항상 인자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고승의 마지막 길을 울지 않고 보내 드림 이 도리라 여겨 진소백은 억지로 눈물을 참고 있었다. 흩날리는 바람, 날리는 먼지. -속세의 찌든 때는 마를 날이 없으나 오직 한 생각 끊는 길이니, 죽음도 삶도 크 게 다를 바가 없는 일이다. 진소백은 사부의 말을 되새기고자 했으나 저절로 꺾이는 무릎은 어쩔 수가 없었 다. "사부님!" 2 슬픔과 기쁨은 한번에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진소백은 사부를 잃는 슬픔을 맛보았지만 그가 단심맹의 본부로 돌아왔을 때는 더 할 나위 없는 기쁨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백아!" 이 부름을 그는 실로 십구 년 만에 들어 보았다. 아주 어린 시절! 그 무서운 폭발 속에서도 자신을 몸으로 감싸 주셨던 분의 음성. 진무외! 진소백의


아버지였다.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앉아 있는 사람은 분명 아버지였다. 진무외뿐 아니라 남궁호도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폭약과 중수에 당해 식물 인간과 다름이 없었던 두 사람이 정신을 차린 일은 초의 선사를 여읜 슬픔에서 단심맹의 사람들을 건져 주었다. "귀곡의서 덕분이다. 종사원이 남기신 의술을 연구하여 겨우 해낼 수 있었다." 성수의선(聖手醫仙)은 미소를 함빡 띠며 말했다. 진무외가 그를 보더니 말했다. "빙장(聘丈) 어르신께서는 너무 겸손하십니다. 어른의 의술이 아니었다면 제가 살 아 있기라도 했겠습니까?" 성수의선이 단심맹에 가입하게 된 이유는 단 하나! 진소백의 외조부였기 때문이었 다. 폭발 사고로 딸을 잃고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진소백을 어린 시절부터 길러 왔던 그였다. 오늘 사위가 정신을 차리자 그의 감회는 남달랐다. 엽평 역시 기쁘기는 마찬가지였다. 남궁호는 그의 어머니 남궁정의 아버지, 즉 외조부가 아닌가? "할아버지. 꼭 제 손 으로 복수해 드리겠습니다. 길러 주신 은혜를 원수로 갚은 인면수심(人面獸心)을... 제가 꼭 복수해 드리겠습니다." 양아버지를 암산한 남궁중의 행동을 이름이었다. 남궁호는 만감(萬感)이 교차하는지 입을 다물고 그저 눈물만 글썽일 뿐이었다. 환자들은 쉬어야 된다고 해서 억지로 방에서 밀려난 진소백과 엽평을 기다리는 사 람이 있었다. 제갈수와 철혈개! 그리고 현공 대사를 비롯한 신주평의 생존자들이었다. * * * "어느 문파나 같은 상황입니다. 모두 우두머리를 잃고 당황하고 있습니다." 인의신개가 말한 건 지금 무림 정파의 상황이었다. 무림대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각파의 우두머리였으니 아무리 힘을 보전하 고 있는 문파들이라도 허둥댈 수밖에 없었다. 제갈수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흑혈산이 혈경을 얻었다는 소문이 난 후 불과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뿐입니다. 그 러나 혈마인을 만드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거의 십 년!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현공 대사가 맞장구를 쳤다. "제 생각으로 혈경의 소문은 흑혈산에 의해 의도적으로 퍼뜨려졌던 것 같습니다." 혈경의 소문으론 인해 천외성이 해체되었다. 결과적으로 중원은 흑혈산을 상대할 구심점(求心點)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것을 위한 무림대회에서 엄청난 타격을 받고 말았지 않은가? "이제 중원은 어느 곳을 중심으로 다시 뭉칠 수 있을까요?" 금정 신니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녀뿐 아니라 모두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진소백이 침묵을 깨며 말을 시작했다. "천외성의 사씨가문이 순순히 강호에서 은퇴한 일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광명


협 사도명은 결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소백!" 제갈수는 이미 생각하고 있었는지, 진소백이 말을 꺼내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사씨가문도 뭔가 눈치를 채고 힘을 보전하기 위해 뒤로 숨었을 것이다. 하 지만 그들에게 돌을 던졌던 강호인들로서는 도와 달라고 말할 면목이 없는 노릇이 구나." 섭수진은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더니 한마디 말했다. "이건 제 생각이지만 이제 강호가 기댈 곳은 한 군데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제갈수는 그녀를 한번 보더니 금정 신니를 쳐다보았다. "신니, 이 아이를 파문시켰다던데... 그건 정식으로 절차를 밟은 것이겠지요?" "무슨...?" 애초부터 진소백의 계획에 의한 가짜 파문이었다고 반발하려던 금정 신니는 진소 백을 쳐다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제갈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파문당했으니 불문의 사람도 아니요, 또한 결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뭐, 어쨌 든..." 이미 얼굴이 붉어진 섭수진을 보며 제갈수는 빙긋이 웃었다. "말해 보거라. 마지막 기댈 곳이 도대체 어디냐?" 섭수진의 얼굴은 비록 사과처럼 변했지만 말만은 여전히 분명했다. "천추학림이에요. 속에 들었던 종양(腫瘍)이었던 풍림서도 이미 해체되었으니 천추 학림이야말로 가장 큰 정파의 힘이 아니던가요?" 그녀의 말은 옳았다. 천추학림! 설립부터가 혈왕교와 관련이 있던 곳이었다. * * * 결론은 내려졌다. 천추학림을 중심으로 정파를 뭉치기로. 은밀한 연락이 각처의 문파로 취해졌고 진소백과 엽평은 먼저 천추학림으로 떠나 기로 했다. 일단 학림주인 일송자(一松子)를 만나려는 것이었다. 모두가 떠났다. 혈겁이 한차례 지나갔지만 더욱 큰 혈겁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피를 막기 위해선 땀을 흘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락을 위한 개방 고수들의 활약이 시작되고 진소백도 소주(蘇州)로 향했다. 천추학림(千秋學林)! 갈만생 때문에 떠나왔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상황은 일단락되고 다시 전개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 하나는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풍림서의 결성 시기! 흑혈산에서는 분명 사십 년 이전에 풍림서란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천일독이 오룡회(五龍會)를 만들었던 것은 불과 삼십 년 전이다. 오룡회가 천일독에 의해 완전히 장악(掌握)된 후 변질되어 만들어진 것이 풍림서라고 본다 면 이 시차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 *


"사형, 아무래도 전 다른 곳으로 가야겠습니다." 엽평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진소백은 그가 갈 곳을 알고 있었다. 남궁중을 찾아가려는 것이다. "혼자서 간다면 위험해질 것이다. 자신은 있느냐?" 엽평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께서 깨어나시지 않았습니까! 문제없습니다." 진소백은 뜻을 이해하고는 마주 웃어 주었다. "좋다. 하지만 네가 남궁세가로 가버린다면 난 어쩐다... 누구와 함께 가란 말이 지?" 엽평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고민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능청을 떨어 보는 겁니까? 당연히 섭 소저와 함 께 가셔야죠." 진소백은 머리를 치며 대답했다. "아아! 그래, 난 그 생각은 전혀 못 했는데... 어쨌든 뭐 사제(師弟)가 시키는 일이 니까 섭 소저와 함께 가도록 하지." 엽평은 웃었다. 통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사부의 죽음을 한시라도 빨리 잊어버리려는 듯 두 사형제는 정말 크게 웃고 있었 다. 3 이월의 마지막 날. 소주(蘇州)는 놀 곳이 매우 많은 곳이다. 또한 볼 거리도 풍성했다. 진소백과 섭수진은 천천히 구경을 다니면서 천추학림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음은 급했지만 오늘 천추학림으로 들어가기에는 이미 늦었기 때문이다. 이미 해 는 졌건만 소주의 밤은 낮보다 오히려 더 밝았다. 어쨌든 다른 문파와 연락이 모두 되는 시한은 삼월 삼일로 잡혀 있었으므로 시간 여유도 충분했다. 연락이 된다고 당장 소주로 몰려오는 것은 아닐 테니까! 먹고 마시는 장사는 망하 는 법이 없다고 한다. 소주에서 제일 흔한 것은 주루와 기루였다. 특히 기루가 많아 밤이 되면 거리는 손님을 유혹하는 화류(花柳)로 넘쳤다. 물론 진소백과 섭수진이 기루(妓樓)에 묵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숙소로 정한 객잔으로 가는 길목에도 주루가 많았다. 탐화루(探花樓) 역시 그 중의 하나였는데 그다지 좁지 않은 길목이 온통 사람들로 막혀 지나갈 여유가 없었다. "무슨 줄이 이렇게 긴 거죠?" 질문하는 사람은 수수한 얼굴을 한 이십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그 속에 숨은 사람은 아주 잘 아는 사람, 섭수진! 섭수진에 게 질문을 받았지만 진소백 또한 알 리 없지 않은가? 다만 남자이기에 용이하게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물을 수는 있었다. 진소백 역시 다른 얼굴로 역용하고 있음은 물론이었다. "잠깐만요! 하나 물읍시다. 웬 줄이 이렇게 긴 거요? 탐화루는 술값이 공짜기라도


한 게요?" 진소백의 질문을 받은 대한은 진소백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타지에서 온 것을 깨 달았는지 설명을 시작했다. 탐화루! 별볼일없던 이 주루는 이 년 전 주인이 바뀌었다 한다. 해어화(解語花)란 기녀는 새 주인이 어디선가 데려왔다는데, 그 인물이 절색일 뿐 만 아니라 기지 또한 당할 사람이 없다 한다. 중요한 것은 매월(每月) 말(末)이 되면 해어화는 경연(競演)을 벌여 승리한 사람에 게 하루 동안 공짜로 모든 편의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년이 지난 아직까지 한 번도 해어화를 이긴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한 다. "그럼, 이 많은 사람들이 다 경연에 참가한단 말이오?" 엄청나게 긴 줄을 보며 진소백이 묻자 대한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니까 이처럼 기다리는 것 아니오! 저길 한번 보시오." 대한이 가리키는 손을 따라가니 두 노인이 탐화루의 입구에 평상을 펼쳐 놓고 바 둑을 두고 있지 않는가? "저 두 노인의 시험을 거쳐 합격해야만 통과할 수 있다오. 그게 싫다면 그 뒤에 선 일곱 명을 때려눕혀도 되고." 그러고 보니 노인의 뒤에는 일곱 명의 건장한 장한들이 서 있었는데 하나같이 태 양혈이 뚜렷했다. 저런 자를 일곱이나 부릴 수 있는 것으로 보아 탐화루의 주인은 보통 인물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진소백은 섭수진 쪽으로 돌아왔다. "저한테까지 다 들렸어요. 그 사람 목청 한번 크더군요." 섭수진은 흥미를 느꼈는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 년 동안 남자들에게 계속 이겨 왔다는 해어화란 기녀에 대한 호기심이 인 것일 게다. "한번 들어가 볼까요?" 진소백은 싱긋 웃었다. "들어가는 건 좋지만... 그럼, 경연에 나가야 할 테고... 경연에 나가게 되면 내가 너 무 똑똑하다 보니 당연히 우승할 텐데... 질투나지 않겠어?" 섭수진은 그를 곱게 째려보더니 성큼성큼 탐화루의 문 앞으로 걸어갔다. "내가 우 승하면 되죠! 당신이 딴짓을 못 하도록 말예요." * * * 바둑판의 형세(形勢)는 흑이 매우 어렵게 되어 있었다. 좌상귀에서 출발했던 흑의 대마는 천원까지 계속해서 몰리며 궁색한 삶을 찾고 있 었다. 하지만 만일 이 돌이 수습된다면 흑의 실리(實利)가 이곳저곳에 많아 승리할 수 있을 듯 보였다. 섭수진은 바둑판을 심각하게 내려다보았다. 관문(關門) 통과 시험이란 다름 아닌 바둑의 훈수였다. 훈수를 두면 그 수의 선악을 두 노인이 판단한 후 통관을 선언하거나 불합격을 선 언했다. 딱! 백돌이 놓였다.


백을 쥐고 있는 노인은 중간 정도의 체구에 옷도 역시 백의를 걸쳤다. 놓인 백돌 은 중앙으로 도망 나온 흑돌이 가지고 있는 좌상귀의 뿌리를 끊겠다고 위협하고 있었다. 흑을 쥔 노인은 노인답지 않은 당당한 체구에 바둑돌의 색깔에 맞추기라도 한 듯 흑의를 입고 있었다. 지금 뿌리를 끊겠다고 위협하는 백돌이 무서웠을까? 흑의노인은 스스로의 머리를 탁탁 치면서 감탄사만을 연발하고 있었다. 백을 무시한다면 끊어질 뿌리가 아까웠고 또 일일이 수를 받아 준다면 대마가 위 험해지기 때문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옆에서 수를 들여다보는 섭수진이 총명해 보였던지 넌지시 눈을 마주쳤다. 은근히 훈수하라는 뜻을 전하는 것이다. "잘라 주세요. 사석으로 버리시고 두시는 편이..." 섭수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다른 세 귀의 실리가 흑에게 많으니 좌상귀의 뿌리를 끊겠다는 백의 위협을 무시 하고 중앙으로 뻗어 간 돌을 키워 중앙의 집을 챙기면 집으로써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모습이 되는 것이다. 백으로서도 만일 당장 뿌리를 끊으면 흑은 두 수를 연속으로 중앙에 보강할 수 있 지 않은가? 흑의노인이 파안대소하며 돌을 놓았다. "하하하, 그렇군. 정말 그래. 끊어 줄 것은 차라리 버리는 편이 낫군그래. 하하!" 백의노인과 흑의노인의 손길이 갑자기 빨라졌다. 놀랍게도 손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돌을 놓아 가는데, 섭수진은 정말 이들이 수를 몰라서 고민하고 있었나 싶은 정도였다. 어쨌든 섭수진으로서��� 바둑을 길게 볼 필요는 없었다. 결과를 보고 싶었지만, 탐화루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흑의노인이 신바람이 난 어조로 외쳤던 것이다. "통과!" 탐화루 안으로 총총히 사라지는 섭수진을 보며 통과는 못 했지만 혹시나 하고 서 성거리던 사내들이 수군거렸다. 여인이 통과한 것은 지난 이 년 동안 처음인 모양이었다. 진소백도 그냥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섭수진은 바둑으로 통관했으니 자신은 일곱 대한을 물리쳐 통관해야겠다고 두 손 을 뚝뚝 꺾으며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진소백은 일곱 대한을 물리칠 수 없었다. 그가 나섰을 때 일곱 명의 대한은 누군가에 의해 이미 바닥에 널브러졌던 것이다. '엉!' 진소백은 일곱 대한을 일초에 쓰러뜨린 청년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당충(唐沖)! 언젠가 태산의 제왕루(帝王樓)에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당자평의 아들이기도 한 그가 여기에 나타나다니! 통관을 하기는 했지만 냉 막한 얼굴은 여전히 풀지 않는 당충이었다. 얼음이 날릴 듯한 차가운 표정을 조금 도 바꾸지 않고 당충은 탐화루 안으로 들어갔다. '거 참, 저 친구와 사귄다면 좋은 점이 딱 하나 있겠군. 여름에도 전혀 덥지 않을 테니 말야!'


진소백은 자신 혼자만의 상상에 큭큭대며 바둑판 쪽으로 걸어갔다. 일곱 대한은 쓰러졌으니 다른 자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기가 지겨웠던 것이다. 바둑의 형세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거의 모든 전투(戰鬪)는 끝나고 단지 몇 개의 자잘한 끝내기가 남았을 뿐인데 아 무리 개가를 해보더라도 흑이 몇 집 우세(優勢)였다. 싸움이 끝났다는 것은 더 이상 전세를 뒤집을 곳도 없어졌음을 뜻했다. 이번엔 백의노인이 곤란한 표정으로 진소백을 바라보았다. 그가 훈수를 두려고 옆에 선 것을 백의노인은 이미 보았나 보다. 진소백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듯 말했다. "던지십시오. 졌군요." 백의노인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대개 훈수라는 것은 이기도록 하기 위해 수를 알려 주는 것인데 다짜고짜 돌을 던 지라니! 이런 훈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돌을 던지라고? 자넨 그걸 훈수라도 하는 겐가?" 백의노인이 인상을 찡그렸지만 진소백은 여전히 태연했다. "한마디 묻겠습니다. 이 한판의 바둑에는 무엇이 걸려 있습니까?" "아무것도. 다만 내 자존심이 걸려 있을 뿐이지." "만일 노인장께서 호쾌히 돌을 던진다면 대범하단 평가를 받을 것이지만 시간을 끈다면 오히려 더욱 자존심 상하는 평가를 주위 사람으로부터 받을 것입니다. 하 니 제 훈수는 매우 좋은 훈수지요." 백의노인은 한참 동안 진소백을 쳐다보았다. 흑의노인도 마찬가지로 진소백을 보았지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다. 진소백은 두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두 분은 도신(賭神) 십구패(十九敗)를 알고 계십니까?" 둘은 물론 알고 있었다. 동시에 두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서 진소백은 말을 이었다. "그는 열 번 도박(賭博)을 하면 반드시 아홉 번을 졌지만 도신으로 불렸습니다. 이 유를 알고 계십니까?" 도신 십구패! 열 번에 아홉 번은 도박에서 패배했다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모든 사람들로부 터 도신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이유가 뭘까? 그는 비록 많이 지기는 했지만 반드시 돈은 땄기 때문이었다. 많이 지지만 돈만은 반드시 따는 사람. "알고 있다네. 그는 한 냥이나 열 냥이 걸린 도박에서는 반드시 졌지만 백 냥이 걸리거나 천 냥이 걸렸을 땐 때때로 이겼지. 그리고 만 냥이 걸린 도박에서 그는 반드시 이겼지." 백의노인은 뭔가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소백도 무릎을 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바로 그거지요. 만일 이 바둑이 큰 내기가 걸린 승부였다면 반드시 승 리해야겠지만... 오히려 지금과 같은 경우라면 빨리 승복하시고 다시 한 판 더 두 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진소백의 이 말은 매우 적절했다.


보통 자잘한 승부에 집착하여 정력을 낭비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하지만 그런 것은 진정한 승부사의 자세가 아니었다. 만일 아주 작은 것에까지 힘을 다해 승부한다면 큰 승부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손 이 떨리며 감정이 격해질 것이다. 초와 한의 싸움에서 초패왕(楚覇王) 항우는 싸움에서 계속 이겼지만 유방에게 단 한 번 패함으로써 대세는 갈리고 말았다. 여러 번 패했던 유방은 항상 다시 일어났지만 항우는 사면초가(四面楚歌) 속에서 스스로를 던지고 말았던 것이다. 승부를 아는 사람은 많은 승리를 원하지 않는다. 도신 십구패가 그러했다. 은하도방에서 그가 당대 제일의 도박사라는 만승도(萬勝賭)와 겨루었을 때 그는 내리 열한 판을 지고 단 두 판을 이겼을 뿐이었다. 하지만 앞의 열한 판에 걸렸던 돈은 금화로 총 백팔십 냥에 불과했고 뒤에 걸렸던 돈은 금화 이만삼천 냥이나 되었다. 만승도는 비록 훌륭한 승부사였지만 작은 승부에 힘을 쏟아 큰 승부에서 파탄을 드러내고 말았다. 백의노인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좋네, 아주 좋네. 난 이 판을 인정하고 서둘러 몇 판을 더 두기로 하겠네." 그는 말과 함께 바둑판을 뒤집어 흑돌과 백돌이 모두 허공으로 떠오르게 했다. 신 기한 것은 떠올랐던 바둑알들이 각각 흑백으로 나눠지며 자신의 통 속으로 들어갔 다는 것이다. 통과를 허락받은 진소백은 탐화루 안으로 걸어갔다. 그의 뒤에서 백의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흑노(黑老), 한판 더하세. 명심하게, 승부는 공정해야 한다는 것을." ♡ 제 9 장 말하는 꽃, 해어화 1 실내는 두 개의 구조로 되어 있었다. 바닥에 다섯 개의 화려한 상이 놓이고, 그 주위에 각각 비단으로 덮인 의자가 네 개씩 놓여 있었다. 이층을 올려다보면 난간이 있었는데, 아마 해어화는 그곳에서 나오게 되어 있는 듯 관문을 통과한 사람은 모두 그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 다섯 명의 사람들! 하루에 이처럼 많은 관문 통과자가 나온 것은 탐화루가 생긴 이래 유래가 없는 일 이었고, 또한 그 중에 여자가 끼여 있는 것도 처음이었다. 진소백은 당충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여 주었지만 여전히 그의 안색은 변화 가 없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듯했다. 당연한 일! 지금 진소백의 얼굴은 역용한 것이 아닌가? "대충 준비가 끝난 듯한 데 왜 아직 해어화(解語花)가 나오지 않는 걸까요?" 섭수진이 진소백에게 나직이 물었다. 진소백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마 구경꾼이 부족한가 보오. 이것도 장사니까 돈을 벌려면 구경꾼이 있어야 하


겠지." 이때 기계음과 함께 사방의 벽들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더불어 나타난 것은 매우 넓은 마당이었고 그곳에는 사람들이 앉을 수 있도록 간 이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진소백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 다. 밖에서 통관을 하지 못해 기다리던 사람들이 모든 절차가 끝난 후 약간의 입장료 를 내고 들어오는 것이다. 약간이라곤 하지만 그 수효가 엄청나 탐화루 측으로서는 큰 돈이 될 것이다. 삽시간에 주위는 시장판으로 변했다. 들어온 구경꾼들은 저마다 술과 안주를 시키느라고 시끄럽게 외쳐대 통관자 다섯 명은 안색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거 꼭 남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한 기분이군요. 이런 행사를 기획한 탐화루주는 매우 머리를 잘 썼어요." 호기심 많은 구경꾼들을 상대로 장사하며 돈을 벌어들이고, 그 구경거리는 이처럼 공짜로 마련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완전한 공짜는 아니지. 난 경연에서 이긴다면 하루 만에 탐화루를 쫄딱 망하게 할 자신이 있소." "후후, 그렇겠죠. 하지만 어림없어요. 내가 그 해어화... 란 기녀와 놀게 내버려둘 것 같아요?" 소란이 진정되었다. 이층 난간에 어느새 나타난 백의여인이 손을 들자 많은 구경꾼들이 약속한 듯 입 을 다무는 것을 진소백은 보았다. "먼저 이처럼 많은 호응을 해주신 점, 감사드려요. 전 탐화루의 총관인 호백랑(好 白娘)이에요." 삼십을 넘긴 나이로 보였는데 여전히 아름다움과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여인이 총관(總管)이라면 탐화루는 단순한 기루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진 소백은 생각했다. "우선 다섯 분의 관문 통과자들 중 누가 먼저 해어화에게 도전하실 건지 결정해 주시겠어요?" 호백랑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화려한 금의(錦衣)를 걸친 청년 하나가 몸을 일으켰 다. "난 동욱(董旭)이오. 당연히 내가 먼저요." 그의 말투는 마치 자신이 먼저 나서는 것이 당연하고, 다른 사람은 그 앞을 막을 자격이 없다는 듯했다. 물론 동욱이라는 이름은 소주 근처에서 상당히 유명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들 중 누군 자격이 없겠는가? 흑의청년 하나가 코웃음을 치며 몸을 일으켰다. "흥! 당신의 말은 마치 아무도 당신 앞에 설 자격이 없다는 투로 들리는군. 내 말 이 맞는가?" 동욱은 꿈틀하며 흑의청년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흑의청년이 허리에 달고 있는 부채를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때때로 거짓 을 말하기도 하지만 물건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때문에 동욱처럼 이렇게 신물(信物)을 잘 알아본다면 생명을 연장하기도 무척 쉬 웠다. 음양선(陰陽扇)! 청년으로 보이는 흑의를 입은 자는 결코 청년이 아니었다. 다만 여인과의 정사를 통해 내공을 갈취하는 특이한 사공을 익힌 탓에 젊어 보이 는 것에 불과했다. 동욱은 말까지 더듬으며 그에게 선을 양보했다. "그, 그럼 당, 당신께서 선을 하십시오. 저, 저는..." 아무리 동욱이 명성이 조금 있다고는 하나 음양선의 주인에 비한다면 새 발의 피 였던 것이다. "저자는 음양괴(陰陽怪) 탁음(卓陰)이 아닌가요? 여인의 정혈을 갈취하는 나쁜 놈 이라는데 오늘 잘 걸렸군요. 어디를 부숴 놓을까요?" 진소백은 섭수진의 말투가 조금씩 자신을 닮아 가는 것 같아 속으로 웃으며 대답 했다. "그럴 필요가 없을 거요. 저기 앉아 있는 얼음 덩어리의 얼굴이 이미 굳어졌으니 까!" 섭수진은 구석에서 당충의 안색이 약간 변해 있는 모습을 보았다. 냉막하기만 하던 그의 표정이 변한다는 것은 뭔가 기분이 상했다는 뜻이 분명했 다. "당충이라면 음양괴로서도 임자를 만난 셈이로군요." 음양괴 탁음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이층의 호백랑을 보며 호기있게 입을 열었다. "자, 어서 시작하자. 해어화의 관문이 어떠하건 내가 꼭 통과하여 으스러지게 품어 주마! 흐흐흐..." 음탕한 말에 호응이 많은 것이 사내들의 습성인가? 음양괴의 말에 구경꾼들은 빽 빽 소리를 질러대며 환호했다. 하지만 수백 명이 내지르는 환호 소리는 단 한 사람의 코웃음에 묻혀 버렸다. 내공이 실린 웃음인 탓이다. "흥! 재수없다." 음양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느 놈이 감히...!" 뒤를 돌아보던 그는 당충이 냉막한 얼굴로 자신을 쏘아봄을 알아챘다. "흥! 동욱이라면 그냥 참아 줄 수도 있지만 색마 따위가 감히 내 앞을 차지하는 것을 보아 줄 만큼 본 공자의 마음은 넓지 못하다." 음양괴의 얼굴은 더욱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색마(色魔) 따위'라는 표현을 자신에게 쓸 수 있는 상대는 기억에 그다지 많지 않 았으므로. "크하하! 색마라고? 크하하하...!" 음양괴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그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때문에 좀더 멋있게 보이기 위해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악인은 여유가 있을 때만 웃고 인정을 약간 베풀 수 있는 것이 다. 음양괴는 아직 당충을 몰랐다.


때문에 웃음으로 그의 생명을 연장해 주는 것이 자신이 베풀 수 있는 인정이라 생 각했다. 물론 웃음이 끝나면 죽인다는 생각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웃음은 원하지 않아도 끝이 났다. 음양괴는 당충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손에 쥐여져 있던 젓가락이 느릿느릿 앞으 로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빠른 암기보다 더욱 시전하기 어려운 것이 이렇게 느린 수법이었다. 이런 원리를 아는 음양괴는 얼굴이 굳어졌지만 구경꾼들은 실망하고 말았다. 무공의 원리를 모르는 그들의 눈에는 당충이 너무 힘이 없다 생각되었던 것이다. 느리게 날아오는 젓가락 하나! 음양괴는 땀을 흘리며 젓가락이 바로 눈앞으로 날아올 때까지 꼼짝도 하지 못했 다. 어느쪽으로 움직이건 젓가락이 그쪽으로 변화할 듯한 느낌을 받았던 까닭이었다. 비록 음양괴가 색마이긴 했으나 그의 무공은 결코 간단하지 않아 지금까지 살아남 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젓가락 속에 숨은 변화를 알아본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무공은 높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익!" 젓가락이 반 치 앞에 와서야 음양괴는 몸을 뒤집어 바닥을 두 번 굴렀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눈에는 느리고 힘도 없는 젓가락을 최선을 다해 피하는 음양괴의 모습이 우스웠던 것이다. 하지만 진소백과 섭수진은 웃지 않았다. "당충의 무공은 어쩌면 그의 아버지 당자평도 능가할 것 같구려." 진소백의 말에 섭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을 구른 음양괴의 얼굴은 대추처럼 변했다. 웃어대는 구경꾼들을 치도곤 내고 싶었지만 여유가 없었다. 쐐액! 이번에 날아오는 두 개의 젓가락은 너무나 빨라, 공기를 찢는 소리가 그야말로 비 단폭을 가르는 듯했다. 하지만 그 큰 파공성(破空聲) 덕분에 음양괴는 겨우 젓가락 공격을 피할 수 있었 다. 그는 불현듯 이처럼 뛰어난 암기술을 지닌 강호 문파 하나가 떠올랐다. '사천당문 (四川唐門)! 저놈은...?' 다시 세 개의 젓가락이 날아왔다. 음양괴에게는 딴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다. 날아오는 젓가락은 오직 한 방향만으로 피할 것을 허락하며 무서운 경력(勁力)을 싣고 그를 위협했다. 왜 당충의 젓가락은 이처럼 큰 파공성을 내는 것인가?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진소 백은 고개를 저었다. 섭수진 역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끝났군요. 당충은 음양괴를 살려 줄 생각이 없나 봐요." "그런 것 같아. 뭐, 상관없는 일이지. 어차피..." 음양괴도 순간적으로 의문을 느꼈다.


가장 처음에 당충이 시전했던 지암기술(止暗器術)은 무형 무성의 암기술과 비등한 경지의 술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뒤의 젓가락들은 이처럼 큰 소리를 내는 것인가? 또한 젓가락이 열어 놓은 방향은 단 하나에 불과해 마치 자신을 특정한 방향으로 밀어 내는 듯했다. '이 방향은...!' 만일 처음의 느린 젓가락의 궤적(軌跡)을 그대로 생각해 본다면 바로 이 방향일 것이다. 그리고 그 속도(速度)로 보아 아직 바닥에 떨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듦과 동시에 뒷골 부위에 더할 나위 없이 강한 경력(勁力)의 흐름 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이것이 음양괴가 세상에 최후로 남긴 말이 되었다. 퍼헉! 뒷머리의 뼈가 깨져 나가면서 골수가 튀어나와 사방으로 퍼졌다. 마치 붉은 두부 같은 골수를 사방으로 튀겨 낸 처음의 느린 젓가락은 아직도 힘을 잃지 않고 허공 에서 돌고 있었다. 쌔액! 다시 두 개의 젓가락이 허공을 날아 느린 젓가락의 앞뒤에 부딪히자 그제서야 겨 우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팅! 젓가락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이처럼 크게 들리는 것은 어느새 구경꾼들은 숨조 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들은 이처럼 무서운 광경을 처음 보았다. 산 사람의 뒷머리를, 돌아가는 젓가락이 쓸어 버리는 광경을. 어느새 나타난 사람들일까? 호백랑의 눈짓에 따라 어느새 나타난 시녀(侍女)와 하인들이 부지런히 실내를 치 우고 있었다. 그들이 피와 뇌수로 더러워진 시체를 치우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않는 것에 진소백 은 주의했다. 만일 죽음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엄격한 훈련을 거쳐도 눈살 정도는 찌푸리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지금 음양괴의 시체를 치우는 자들은! 동욱조차 눈살을 찌푸리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강호인들이란 말인가? 제법 죽음을 경험한!' 2 호백랑(好白娘)은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뒤편으론 주렴이 내려져 있었는데, 그곳에 한 그림자가 어느새 나타난 것 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그 그림자가 해어화일 것이다. 하지만 일개 기녀에게 총관인 호백랑이 허리를 숙인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 었다. "휴!" 한숨 소리. 분명 주렴 뒤에서 나온 한숨은 해어화의 것일 게다. 사람들은 그 한숨 소리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음을 느꼈다.


이처럼 감정(感情)을 절절히 담아 내는 한숨을 진소백은 처음 들었다. 섭수진도 마 음이 동요됨을 깨닫고 조용히 말했다. "미공(美功)이로군요. 그것도 상당한 경지의!"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해어화의 한숨은 보통 한숨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충 공자께서 저희 여인들의 우환(憂患)을 대신 제거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휴! 하지만 음양괴도 저렇게 죽고 나니 불쌍하긴 마찬가지군요." 맑고도 정이 가득한 음성. 하지만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이게 만드는 해어화의 이런 음성도 당충의 냉기(冷氣) 만은 깨뜨리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냉막한 어조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작합시다. 당신의 관문이란 것을." * * * 촛불! 매우 굵은 초에서 타오르는 촛불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이 장이나 떨어진 거리에서 이렇게 굵은 촛불을 끄는 일은 물론 일반인으로서는 무리였다. 하지만 당충은 만인(萬人)이 인정하는 내가의 고수였다. 그에게 이런 일은 사실 관문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 일이 매우 쉽게 보이겠죠! 하지만 이 관문을 통과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 답니다." 말은 위에서 들려 왔다. 이층의 난간 안에 해어화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아래에 선 당충은 계속해서 위를 올려다보는 자세였다. 해어화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자, 촛불을 자세히 보세요. 주위를 감싸는 기운이 보이실 거예요." 그랬다. 자세히 보자 촛불 주위에 서 있는 여러 촛대들이 은연중에 진세를 형성하 여 촛불을 보호하고 있지 않은가? 구궁진(九宮陣)! 만일 진기를 촛불을 향해 날린다면 촛대는 그 힘을 흡수하여 대지로 흩어 버릴 것 이 틀림없었다. 당충은 냉소했다. 그는 위를 올려다보던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좋소! 내 시도해 보지. 그러나 그 전에..." 당충이 냉소하며 위로 떠올랐다. 그의 몸 주위에서 소용돌이가 일어나며 주변을 감아 갔다. 놀란 동욱이 화들짝 일어나 뒤로 물러났고 진소백과 섭수진 또한 자리에서 몸을 띄웠다. 당충이 일으킨 소용돌이! 그것이 모든 것을 부숴 버리는 경기(勁氣)의 흐름임을 알아본 까닭이었다. 우둑! 꽝! 부서지는 소리가 연이어 나며 세 개의 탁자와 아홉 개의 의자가 모두 당충의 소용 돌이의 영향권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서로 부딪치며 깨진 의자와 탁자의 파편들은 마치 일 잘하는 목공이 대패로 밀어


낸 것처럼 편편했다. 허공으로 삼 장 정도를 뛰어오른 당충은 손을 뻗었다가 오므려 소용돌이 속에서 깨진 목재를 자신의 발 아래로 모았다. 이어 다시 오른손을 뻗어 아직 멀쩡한 탁자 하나를 가리켰다. 끼이잉! 강한 힘에 끌린 듯 탁자가 저절로 끌려오더니 당충의 발 아래로 왔다. 이미 끌어 모아진 목재의 파편이 수북이 쌓여 있는 곳이었다. 그 위에 마지막으로 당긴 탁자가 올라서자 편편하고도 훌륭한 단이 되지 않는가? "이 정도면 당신과 같은 높이니 공평하겠군!" 사뿐히 탁자 위에 내려앉으면서 당충은 말했다. 그는 위를 올려다보며 얘기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허공섭물(虛空涉物)! 이 절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좀 전에 당충은 몸을 허공에 띄운 채 허공을 격해 탁자를 끌어당겼던 것이다. 해어화는 감탄했다. 그녀 역시 단순한 기녀가 아니었으므로 단숨에 당충의 절기를 알아보았다. "과연 대단하시군요. 당신의 능력이 오빠를 능가한다는 말은 결코 헛소문이 아니 었군요." 무슨 소리일까? 당충에게 오빠라니! 하지만 당충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슨 소릴 하는 거 요? 내게 오빠가 있다는 말은?" 해어화가 짤랑거리며 웃었다. "호호호! 부인하시나요, 당옥(唐玉) 낭자?" 침묵이 흘렀다. 당충은 아무 말 없이 한동안 앉아 있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과연 당신들이었군요!" 그의, 아니,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여인의 것인지라 스스로 당옥임을 인정하는 모 습이었다. 말과 동시에 들린 당옥의 손은 어느새 주렴을 향해 일장을 날리고 있었다. 펄럭이며 주렴이 날려가자 마침내 해어화(解語花)의 모습이 드러났다. 나타난 그녀의 얼굴을 보자 진소백은 하마터면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저 얼굴 은... '심아진이 아닌가?' 하지만 자세히 보니 심아진이 아니었다. 무척 닮긴 했지만 좀더 나이가 들어 보였고 보다 원숙해 보였다. 한참을 생각한 후 진소백은 비로소 그 얼굴이 벽하(碧霞)의 것임을 생각해 내었다. 천외성에서 언뜻 스쳐 본 좌고학의 심복(心腹)! 해어화는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분명 당옥은 어떤 일에 대해 '당신들이었군요'란 말로 책임을 물었는데 아무런 대 답도 않는 것은 시인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태도 같기도 했 다. 당옥은 어떤 일에 대해 물었던 것일까? 대답이 없자 당옥은 할 수 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날 어떻게 알아보았는지는 묻지 않겠어요. 다만 한 가지, 당신의 관문을 통과하면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일 한 가지를 들어준다는 소문은 틀림이 없겠지요?" 해어화는 비로소 대답했다. "틀림없이. 탐화루는 여태껏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답니다." 이 말은 틀림이 없었다. 물론 여태껏 관문을 통과한 자가 없었음도 사실이었다. 아지랑이가 당옥의 양 어깨에서 피어올랐다. 머리도 이미 풀어헤친 터라 진기의 흐름으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따라 머리카 락 또한 너울거렸다. 극도의 공력을 끌어 모으고 있다는 증거(證據)였다. "차압!" 일성 기합과 함께 당옥의 양손에서는 감당하기 힘든 강한 기운이 뻗어 나갔다. 사천당문은 암기와 독으로 다른 것이 가려지긴 했지만 무공에 있어서도 역시 어떤 문파도 깔볼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강호의 명성이 어찌 한두 가지만으로 이루어지겠는가? 꽈르릉! 구구 팔십일, 아홉 개씩 짝을 이뤄 다시 아홉 개가 나열된 촛대들이 지진을 만난 듯이 어울렸다.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발 밑이 찌릿찌릿해 옴을 느끼고 있었다. 구궁진! 그 흐름에 따라 당옥의 진기가 대지로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위맹하던 장력은 한 점 남김없이 촛대로 스며들고 말아 중앙의 촛불은 불 꽃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당옥의 눈에는 당황의 빛이 어렸다. 그녀는 눈으로 보고도 이런 변화를 믿을 수 없었다. "대단하군요!" 섭수진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누가 말이오? 당옥 아니면 해어화?" "둘 다를 말하는 거예요. 하지만 지금의 상황으로 보아 당옥은 구궁진을 뚫기가 조금 힘들어 보이는데..." 진소백은 흥미를 느끼며 물었다. "호오, 그렇다면 당신이 조금 도와 주지 그러오? 어떤 방법이 있을까?" 섭수진은 생각에 잠겼다. 진소백은 이미 뭔가 생각이 있는 듯하지만 물어 보지 않았다. 혼자 힘으로 알아 낼 자신이 있었다. 당옥은 힘을 배가(倍加)했다. 십이 성 전력으로 밀려 나간 장력은 역시 촛대를 통해 스며들며 촛불을 꺼뜨리지 못했다. 약간 흔들린 불꽃으로 보아 효과가 있는 듯도 하지만 십이 성 전력의 결과가 이렇 다면 당옥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였다. 그녀의 귀로 누군가의 전음이 들려 온 것은! "당황하지 마세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숲속에서 부는 바람을. 어떤 바람이 보다 시원하던가요?"


당옥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남자와 같이 앉아 있는 이십대 초반의 수수한 여인 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바람이라! 숲속의 바람이라! 당옥은 사천당문 뒤의 산속에 있는 숲을 기억했다.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무더운 여름이면 항상 시원한 그늘과 살랑이는 바람이 더위 를 식혀 주었던 숲! 어린 시절, 어느 날 폭풍이 몹시 불던 때였다. 그녀는 그만 집으로 돌아갈 시간을 놓쳐 버리고 숲으로 숨고 말았다. 아버지 당자평에게 야단을 맞고 나왔던 때였다. 무서운 바람에 놀라 숲의 중앙으로 들어갔던 그녀는 한 가지를 느꼈다. 그 무서운 폭풍(暴風)이 숲속에서는 힘이 많이 약해져 있었던 것이다. 나무들이 바람을 막아 기세를 약화시켰다는 사실을 어린 나이임에도 영리했던 그 녀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보통 여름날 맞았던 산들바람은 바깥보다 오히려 숲속에서 더 시원한데... 바람! 산들바람은 나무의 저항을 받지 않는 걸까? 장애가 있을 때는 강함보다는 부드러움이 오히려 더 효과적인 것이 아닐까? '부드 러움이 강함을 이기는 도리구나!' 깨달음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생각은 길었지만 시간은 그야말로 촌각! 당옥(唐玉)은 즉시 공력을 거두고 강함을 부드러운 기운으로 바꾸어 다시 밀어 냈 다. 산들바람처럼 흘러나간 기운은 구궁진(九宮陣)을 살며시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