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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지사] 금시조 ♡ 추천사 요즘 들어 새로 무협을 쓰는 작가들이 많이 나오고, 또 그들 대부분이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들로 출발하는 것을 보며 내심 즐거워하고 있다. '동종업계 종사자'가 많아져서 좋다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삶을 살아 온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시각으로 보는 세상 이야기, 무협의 틀 속에서 재구성된 우리 네 이야기가 많이 나오니 좋다는 것이다. 말은 여러 사람 것을 들어 보면 좋고, 의견을 다양하게 들으면 오류 가능성도 적 어진다. 세상 사람 모두가 똑같은 미남 미녀라면 얼마나 숨막히고 지루한 세상이 되겠는가! <난지사>는 그런 면에서 좋다. 이 작품은, 그리고 작가는 예전에 우리가 많이 보 았던 80 년대 무협의 필체와 80 년대 무협의 구성에 따라 이야기를 엮어 가고 있으 면서도 세상을 보는 접근법에 따라 얼마나 다른 식의 이야기가 표현되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좌백 드림. ♡ 초대하면서…… 계곡(溪谷)에 앉아 본 적이 있는가? 태양 뜨거운 여름, 모든 열기(熱氣)를 무력화시키는 시원한 계곡에 발을 담근 채, 발끝에서 전해져 오는 냉기가 폐부를 청량(淸凉)하게 감아 오는 것을 느낀 적이 있는가? 한 번이라도 계곡의 맑고 푸름을 느껴 보신 적이 있는 독자라면 지금 나 와 함께 계곡으로 가자. 나는 가지 않는다. 수많은 피서객으로 발 디딜 틈도 없고, 계곡물은 오히려 수돗물보다 더 뜨거운, 우 리가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의 계곡! 나는 그곳으로 가지 않는다. 다만 우리들의 계곡, 우리들만이 시원한 물로 발등을 적실 수 있는 상상(想像) 속 의 그곳으로 나는 간다. 바람은 향기롭다. 성하(盛夏)의 폭양(暴陽)조차 녹음(綠陰) 아래 힘을 잃고, 차가운 녹수(綠水)는 당 신의 발가락 사이에서 유희한다. 눈을 감으면 졸졸 흐르는 계수(溪水) 소리와 요란하게 자신을 뽐내는 매미의 울음 만이 들릴 뿐. 차량의 소음도, 세속의 번잡함도 우리의 계곡에서는 먼 나라의 얘기가 된다. 자연과 더불어 한가로운 마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오후 네 시가 되었다. 여러분과 나는 조금씩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조용한 하루는 거의 지나려 하고, 우리는 한인(閑人)이 느끼는 안온(安穩)한 지리 함에 휩싸인다. 뭔가 특별한 일이 없을까?


계곡 아래를 내려다본다. 세월의 흐름에 씻긴 바위가 자태를 뽐내며 앉아 있는 사이를, 둥그런 호선(弧線)을 이루며 푸른 계류(溪流)가 흘러간다. 때로는 굽이치고 때로는 떨어지며, 끝없이 흘러가는 물을 보며 뭔지 모를 설움에 여러분이 한숨 질 때…… 보고 느끼라. 어디선가 미미한 진동이 전해지고 있음을. 바위가 들썩이며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려 함을. 멀리서 들려 오던 아주 작은 소리는 이윽고 천지를 흔드는 뇌성(雷聲)으로 변해 여러분의 귀를 막아 버린다. 소리는 저 멀리 하류에서부터 들려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가까이 다가오고 어느새 소리의 정체(正體)가 보이기 시작한다. 눈을 크게 뜨라. 그리고 똑똑히 보라. 전신에 장엄한 서기(瑞氣)를 두르고 두 다리를 꼿꼿이 세운 사내 하나가 계곡을 따라 올라오는 것을! 그의 몸은 물위 한 치 상공(上空)에 떠 있고, 공기를 찢는 그의 빠른 경공(輕功)은 온 계곡을 뇌성(雷聲)으로 가득 채운다. 이윽고 그가 일으킨 폭풍(暴風)이 당신의 곁을 스치며 지나가자, 찢어졌던 공기가 다시 모이며 일으킨 물보라가 천(千) 장(丈) 하늘로 오른다. 느끼라! 그 힘을…… 그 속도를…… 또한 그 감동을! 그리하여 당신은 마침내 무협(武俠)의 세계에 들리라. 금시조(金翅鳥) 배상(拜上). ♡ 서장(序章) 1. 비응방주(飛鷹幇主) 금사진(金査震) 사람들에겐 저마다의 재능(才能)이 따로 있는 법이다. 글에 재능이 있는 이는 문인 (文人)이 되며, 권력(權力)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견한 이는 관직에 오르고, 검에 재 능이 있는 이들은 무인이 되어 강호(江湖)에 든다. 비응방주 금사진의 경우는 어떤가? 그에게는 물론 재능이 있다. 십칠 년 전, 그가 약관의 나이로 비응방의 방주위에 올랐을 때 비응방은 사천(四 川)의 이름없는 방파에 불과했다. 하나 지금은 가히 구대문파에 비견될 만큼 그 성 세(盛勢)가 높다. 그것은 그의 재능에 힘입은 바 크다. 비응혈조(飛鷹血爪)란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금사진의 천응비(天鷹飛) 신법(身法) 과 파천혈조(破天血爪)는 각기 무림의 일절로 불린다. 하나 그의 진정한 재능은 무학에 있지 않았다. 살인! 금사진의 재능은 바로 살인에 있었다. 비응방을 키워 오면서 치를 수밖에 없었던 대소(大小) 칠십여 회의 싸움에서, 그는 자신의 적뿐 아니라 그 인척들마저 하나도 살려 두지 않는 잔인함을 보였다. 어쩌


면 치밀(緻密)함이라 할 수도 있으리라. 인간에게 공포심을 심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은 바로 죽음이었고, 금사진의 잔인함을 본 사람들은 그의 적이 되기를 포기했다. 인생이란, 아니, 세상의 모든 일들이란 산을 오르는 것과 흡사하다. 처음 산을 오 를 때는 무척 힘이 든다. 하나 정상(頂上)에 일단 도달한다면 내려가는 일은 그다 지 어렵지 않은 법이다. 금사진에게 있어 살인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잔혹마도(殘酷魔刀)와의 싸움에서 그는 잔혹마도의 죽음에 대한 대가로 이십 칠 개의 도상을 입었었다. 그러나 십여 년이 지나자 그는 더 이상 적을 죽이기 위해 상처를 입을 필요가 없 었다. 그에 대한 두려움에 적이 되기를 포기한 자들은 그의 수하가 되었고, 모든 싸움은 수하들이 대신하였다. 나름대로의 정상에 오른 것이다. 금사진이 새로운 모습으로 기존의 비응방을 정비하여 오늘날의 모습으로 갖춘 것 은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 그가 무림에 발을 디딘 지 십이 년 만의 일이었다. 그 러나 모든 일에는 항상 그 인과가 따르는 법이다. 금사진이 비응방을 키우기 위해 뿌린 수많은 피의 씨앗들이 언제까지나 열매 맺지 않은 채 남겨질 수 있을 것인 가! 하루도 피가 끊일 날이 없는 강호, 언제나 은원(恩怨)과 복수(復讐)가 교차하는 이 강호(江湖)에서! 2. 살수(殺手) 엽혼(葉魂) 돈을 받고 다른 이의 생명을 끊어 주는 직업이 강호에는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들을 살수(殺手)라고 부른다. 살수에겐 중요한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암살 대상(對象)을 죽이는 것이고, 둘째는 암살 현장에서 무사히 벗어나는 것이다. 물론 살수의 임무는 살인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두 번째가 더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자신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면 청부금이 아무리 많다 한들 무슨 소용 이 있겠는가? 때문에 모든 살수들은 청부를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 신중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능력(能力)에 맞는 청부를 잘 선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살수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인 것이다. 엽혼도 물론 청부 대상을 신중히 선택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밖 에서 보면 초라한 오두막이지만 안에 들어서면 의외로 훈훈함을 느낄 수 있는 집 이었다. 이런 겨울에도 방안에서 훈기가 느껴진다는 것은 그만큼 잘 지어진 집이 란 뜻이기도 했다. 방안 구석엔 화로가 온기를 피워올리고 있었고, 맞은편 벽에 놓인 침상(寢狀) 위에 는 소년이 잠들어 있었다. 희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얼굴, 핏기없는 입술. 한눈에 병(病)이 깊음을 알 수 있 으리라. 그러나 이 소년도 활달하게 뛰어 놀며 꿈을 키워 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 리고 그 꿈을 다시 꾸게 해주고 싶은 사람이 여기에 있다. 병색(病色)이 완연한 소년의 맞은편 창가에 두 눈 가득 고뇌(苦惱)의 빛을 담고 서 있는 사내!


엽혼(葉魂)이었다. 손에 쥔 푸른색의 서찰과 침상에 누운 소년을 번갈아 바라보던 엽혼은 속으로 동 생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평아(枰兒)!' 어릴 때는 남들보다 훨씬 건강했던 자신의 동생. 그가 지금은 조금만 힘을 주어도 숨쉬기조차 힘들어 하는 몸이 되어 여기 누워 있었다. 그의 동생은 영약과 특별한 치료가 없다면, 이제 일 년을 넘길 수가 없었다. 절맥 을 치유하는 데 필요한 영약을 살 수 있는 돈은 황금 십만 냥! 살수업으로는 백년 이 지난다 하여도 만지기가 불가능한 돈이었다. 그러나…… 엽혼은 서찰(書札)을 다시 펼쳤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처음에 붉은 글씨로 쓰여진 천(天) 자. 그리고 밑으로 가득한 것은 암호(暗號)인 듯 알아볼 수 없는 표식들뿐이었다. 암호를 다시 한 번 해독해 본 엽혼은 나직이 신음했다. 천 자가 뜻하는 것은 암살 대상이 천자급(天字級)의 고수라는 것! 구대문파(九大門派)의 장문인이나, 그에 준하는 거대문파의 주인, 또 는 한 지역을 풍미하는 절대고수에게 붙여지는 등급인 것이다. 이런 고수들은 대 개 살수들의 청부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들을 살해한다는 것도 지난(至難)한 일이 지만, 설령 운이 좋아 살업(殺業)을 완수했다 하더라도, 생명을 유지한 채 현장을 벗어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한 방파의 주인 된 자에 대한 청부라면 더욱 그러했다. 천자급(天字級) 고수 에 대한 청부! 다른 살수들이라면, 또한 엽혼이라도 평소였다면 일고(一考)의 가치도 두지 않고 거절해야 할 청부(請負)였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이러한 청부는 어려운 만큼 돈이 되는 것이다. 황금 십만 냥! 동생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돈! 한참 동안을 엽혼은 그렇게 서 있었다. 어제 초저녁부터 잠이 들었던 엽평은 약 기운에 취해 새벽이 되도록 깨어나지도 않고 있었다. 불쌍한 녀석! 엽혼은 어릴 때 너무나 총명하여 항상 자신을 제치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평아의 활달했던 모습을 기억해 보려 애썼다. 그러나 이 얼굴, 이 약해진 팔뚝 어디에 과거의 기억(記憶)이 남아 있단 말인가! 동생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던 엽혼의 눈빛이 점점 강한 빛을 띠어 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몸을 돌리는 엽혼의 눈빛은 굳은 결심으로 충만했다. 문을 열고 나서자 하늘에서는 눈이 날리고 있었다. 새벽 눈! 고개를 들어 바라보던 엽혼이 손을 들어올리자 삼매진화(三昧眞火)가 일어나며 푸 른빛 서찰이 한줌의 재로 화했다. 강한 내공(內功)! 엽혼은 단순한 살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청부는…… 아마도 엽혼, 그는 이 일로 인해 살아남지 못할지 모른다. 항상 따뜻한 눈으로 자 신을 바라보았던 사부(師父)의 모습이 흐릿한 하늘 가에서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아버지! 지금은 저 먼 하늘에 계신, 자신과 엽평의 아버지여! 만약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다 면…… "저희를 보살피소서." 3. 화선(花仙) 조삼은 지금 비참했다. 사흘 앞으로 다가온 원단(元旦)의 기분에 모두가 들떠 있는 시기에 자신은 주루 (酒樓)의 초라한 점소이 신세라니…… 하지만 마음속이야 어떠하건 조삼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실 줄을 몰랐다. 술과 여 자를 파는 곳, 청루(靑樓)의 점원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이 아니겠는가! "아이구! 어서 오십시오, 이 대인." 형식적인 인사와 웃음을 흘리던 조삼의 목이 처음으로 마음껏 굽어졌다. 이 대인 (大人)이라 불린 사람! 코 아래 기른 수염이 단아해 보이는 사십대 초반의 사내로서, 옷차림새는 영락없 는 상인이었다. 조삼의 목이 유달리 많이 굽어지는 이유는 달리 있지 않았다. "늘 수고가 많구나. 자, 나중에 요기라도 하거라." 늘상 빌리는 이층의 끝 방으로 이 대인을 안내해 준 조삼에게, 이 대인이 요기나 하라며 던진 은자는 줄잡아도 열 냥 이상은 되어 보인다. 조삼의 한 달 수입에 해당하는 돈! 돈 앞에서는 허리가 더욱 유연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바로 조삼이었다. "감사합니다요, 나으리. 조금만 앉아 계시면 제가 곧 화선 낭자를 모셔 오겠습니다 요." 화선(花仙)은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꽃의 요정(妖精)처럼 아름다웠다. 남자라면 그녀를 보고 참을 수 없는 욕정(欲情)을 느끼게 되리라. 하지만 누구나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지금 화선을 보고 있는 이 대인의 눈빛은 어두웠으므로. 말을 먼저 시작한 것은 화선이었다. "이번엔 오시지 않을 줄 알았는데……" "……" "응낙하신 건가요?" "……조건이 둘 있소." "말씀하시지요." "첫째, 모든 금액을 선불로 해달라는 것이오." 흠칫하던 화선의 얼굴이 아래로 숙여졌다. 생각에 잠긴 듯하지만 기실은 얼굴을 숙인 채 누군가에게 지시를 받고 있음을 이 대인, 아니, 엽혼은 느낄 수 있었다. 잠깐 귀가 움직이는 것 같더니, 이윽고 화선이 고개를 들었다. "좋아요. 이십만 냥, 전액 선불로 하겠어요." 이십만 냥!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그러나 천자급 고수에 대한 청부금으로는 많은 것도 아


니었다. 게다가 청부업에서는 전액을 선불(先拂)로 주지 않는다. 돈을 받은 뒤 달 아나 버릴 수가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선불을 주는 입장에서는 그 누구라도 안전 장치를 원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화선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당신이 돈을 먼저 받은 뒤 달아나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장하지 요?" 물론 보장이 없었다. 엽혼이 지금 필요한 것은 돈이지, 목숨이 아니므로. 이때까지 적지 않은 일을 같이했던 엽혼과 화선이지만, 돈 문제만은 달랐다. 돈이 화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닌 까닭이었다. 화선이 말을 마치며 품에서 꺼낸 것은 검은빛이 감도는 환약(丸藥)이었다. "백일소 혼단(百日消魂丹)은 복용 후 석 달간은 아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지만, 석 달 열 흘이 지나 일단 약효가 발휘되기 시작하면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죠." 백일소혼단. 검은색의 환약 하나! 엽혼은 소혼단을 보며 동생 엽평을 떠올렸다. 동생이 매일 먹던 그 많은 환약들. 그리고 떠오른 것은 동생을 진맥했던 노의원의 주름 잡힌 얼굴이었다. ─`동생을 치유한다는 것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불가능함을 말하던 노의원. 동생의 절맥(絶脈)을 치유하는 것과 이 소혼단의 해약을 만드는 것 중 어느것이 더 쉬울까? 또한 이번의 청부(請 負)를 성공하는 것과는? 어차피 모두가 어려운 일, 특히 청부의 완수는 더 어려웠다. 운이 좋아 성공한다 하더라도, 살아서 그곳을 빠져 나오기는 더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어차피 돈과, 아니, 자신의 목숨과 엽평의 목숨을 바꾸기로 한 청부였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자신이 먹지 않는다면 돈도 받지 못할 것이다. 돈을 받지 못한다면 동생의 생명은 어떻게 구할 것인가? 생각은 길었으되, 동작은 간단했다. 엽혼은 소혼단을 삼켰다. "좋아요. 청부금은 은하전장에 이엽의 이름으로 예치시키겠어요." 이엽(李葉)은 바로 엽혼이 분한 이 대인의 이름이다. 이로써 청부는 정식으로 접수 된 것이다. 엽혼은 품에서 하나의 서찰을 꺼내어 화선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이것을 조사해 주시오." 화선은 서찰을 펴보았다. "열흘 후에 다시 들르세요." 그러나 엽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닷새 후. 더 이상의 시간은 안 되오." "이것 봐요. 닷새는 너무……" "이게 바로 두 번째 조건이오. 불가능하다면 청부는 받아들일 수가 없소." 화선의 말이 옳았다. 닷새란 기간은 너무 짧았다. 그러나 엽혼에게는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높은 상황을 이끌어 내야만 했던 것이 다. 화선이 붉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좋아요. 닷새 후." "안녕히 가십시오, 대인. 또 들르십시오." 조삼의 환송(歡送)을 뒤로한 채 소하루( `霞樓)를 나오는 엽혼의 마음은 무거웠다. 엽혼이 살수업을 시작한 것은 삼 년 전이었다. 동생의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엽혼에게, 어떻게 알았는지 소하루의 화선이 손을 뻗었다. 화선(花仙)! 이 아름다운 여인의 또 다른 얼굴은 바로 살인 청부의 중개인(仲介人)이었다. 삼 년간 엽혼은 서른아홉 차례의 청부를 완벽히 수행했다. 언제나 절차는 동일했다. 화선이 서찰을 보내 청부 대상을 알려 주면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 의사(意思) 를 물어 오면, 엽혼은 이엽의 신분으로 소하루에 나타나 화선을 만났던 것이다. 그러면 청부는 받아들여진 것이 되고 대금은 언제나 은하전장에 맡겨졌다. 하지만 오늘의 일은……? 선불이란 조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너무 큰 금액인 탓이었을까? 화선이 다른 사 람의 지시를 받다니! 화선이 하고 있는 살인 청부 중개업에는 배후가 있는 것일까? 또한, 이런 거액의 청부를 한 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많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지만, 엽 혼으로서는 어느것도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엽혼은 머리를 흔들었다. 너무 많은 의문은 살수업에 있어 좋지 않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게다가 남은 며칠의 기간 동안 그에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리고 청부의 배후 에 관해서는 앞으로 생각할 시간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황금 이십만 냥은 매 우 큰 돈이었다. 엽평의 절맥을 고치는 데 십만 냥이 든다 해도 남은 십만 냥이면 엽평이 여생을 행복하게 보내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문제는 그를 돌보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고뇌하던 엽혼은 문득 옛 친구 하나를 생각해 내고는 미소(微笑)를 지었다. 어린 시절, 아직은 행복했었던 무렵, 수업(修業)을 같이했던 친구! '그라면 평아도 믿고 따를 것이다.' 엽혼은 서둘러 그에게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제 1 장 보보만재(步步萬財) 1 낙양은 큰 도시이다. 사람들도 많다. 따라서 다툼도 많았다. 다툼의 결과는 항상 약자들이 손해를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럴 때면 사람들 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있었다. 북문 밖에 있는 관운장의 사당! 죽어 복마대제(伏魔大帝)란 신위(神位)에 오른 관공(關公)의 영험함을 빌기 위함이 아니었다. 사당 옆에는 조그만 숲길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서 걷다 보면, 나무로 엉성하게 지어진 정자 하나가 나온다. 이름하여 '선유정(仙遊亭)'. 신선(神仙)이 노는 정자란 뜻을 가진 이 정자에는 신선이 노닐지 않았다. 신선 대


신 거지 꼴의 청년이 항상 누워 있었는데, 사람들이 찾는 것은 바로 이 청년이었 다. 진소백(鎭小栢)! 일람무의(一覽無疑) 진소백! "정말 전 억울합니다." 말하고 있는 자(者)는 갓 이십을 넘긴 듯한, 순해 보이는 인상의 청년이었다. 하지 만 어딘가에서 몹시 맞은 듯, 얼굴 곳곳에 시퍼런 멍 자국이 있었다. 청년이 말하 는 억울함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청년은 삼 년 전, 삼 년이 지나면 은자 백 냥을 받기로 하고 장흥(張興)의 집에 하 인으로 들어갔었다고 한다. 그리고 삼 년이 지난 오늘 돈을 요구했는데…… 장흥은 약속한 돈을 주기는커녕, 삼 년간 먹고 잔 돈이 백 냥을 넘어선다며 빚을 갚으라고 오히려 큰소리치며 나섰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냐며 따지고 들었다가, 매만 맞고 쫓겨난 청년은 진소백 을 찾아온 것이었다. "거, 듣고 보니…… 정말 억울하겠구려. 좋소! 그 일, 접수하겠소. 하지만 규칙은 알고 있겠지요?" 진소백의 직업은 일종의 해결사였다. 남의 일을 대신 해결해 주고서, 약간의 돈을 대가로 받았다. 그가 받는 액수는 항 상 정해져 있었다. 의뢰인의 전재산의 반. 그리고 이런 일은 성격상 외상이란 것이 있을 수 없었다. "하, 하지만 제가 지금 가진 돈이 없어서……" "이런! 그럼 곤란한데…… 만일 외상이라면 값이 두 배로 뛰는 게 규칙이라서…… " 진소백이 얼굴을 찡그렸다. "저, 제가 만일 백 냥을 받게 되면 그 돈 모두를 드리겠으니…… 제발 제 억울한 마음이라도 풀어 주십시오." 청년의 말에 진소백의 눈이 번쩍 커졌다. 두 곱 장사가 아닌가! "정말이오? 그럼, 볼 것 없지. 당장 갑시다." 돈 문제가 해결되자, 힘이 난 듯 휘적휘적 걸어가는 진소백의 뒤를 청년 안복(雁 福)은 힘없이 따라가기 시작했다. * * * 장흥은 낙양에서 제법 알아주는 부자였다. 가까운 친척이 꽤 괜찮은 벼슬 자리에 앉아 있는 데다가, 무림과도 끈이 닿아 있 어 제법 많은 무인들이 식객(食客)으로 머물고 있었다. 목숨보다 돈을 아낀다는 장흥이 무림인들에겐 아낌없이 돈을 쓰는 이유는 단 하 나. 그들은 만에 하나 자신을 노리는 사람이 있다면 보호해 줄 힘을 갖고 있는 자 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장흥은 자신이 그토록 믿어 오던 무림인 식객들이 얼마나 약한 자들 인지를 알게 되었다. 폐의청년! 누더기 옷을 걸친 청년 하나가 장흥의 장원(莊園) 앞에 서 있던 것은 아 침 나절부터였다. 문제는 청년이 든 깃발에 써 있는 글이었다.


탐재귀(貪財鬼) 장흥(張興)! 깃발에 쓰인, 장흥이 재물을 탐하는 귀신이란 글귀는 누가 보아도 시비를 걸자는 뜻이 확연했다. 장흥은 노발대발했고, 당연스레 식객당의 무사들이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당연하게도 장흥은 시비를 건 젊은 놈이 박살이 나는 모습을 은근히 기대했던 것 인데…… 그런데 웬걸. 도진천(一刀震天) 도방(途防), 번천장(飜天掌) 구일소(邱一疎), 마조 참혼(魔釣斬魂) 육사독(陸射禿)…… 가히 공포스런 별호를 주워섬기며 자신의 피땀 어린 돈을 축내 왔던 그 식충이 무 사들이 글쎄, 자신의 장원을 막고 선 폐의청년의 단 일 초를 감당하지 못하고 나 동그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나마 청년은 단 한 걸음도 떼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런 식충이 같은 놈들!' 장흥은 눈이 뒤집어짐을 느꼈다. 하지만 이 청년, 정말 대단한 무공이 아닌가? '만일 이 청년을 우리 장원에 살게 한다면……!' 볼 것도 없었다. 어중이떠중이 먹이느라 돈을 쓰느니, 이런 고수 한 명만 장원에 둔다면…… '누가 감히 나, 장흥을 업신여길 것인가?' 마음을 굳힌 장흥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청년에게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하하, 저…… 대협(大俠). 이거 무슨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자, 이러시지 말고 일단 안으로 드셔서 얘길 하십시다." 폐의청년`─` 그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소백이다 그는 흘끗 장흥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정말로 내가 안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이오?" "물론입니다." "좋소. 내, 들어가겠소. 하지만 명심할 것은 당신의 부탁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오." "예, 예! 어서 들어가시지요." 장흥은 자신이 있었다. 일단 장원에 들어가면 자신의 부를 자랑한 뒤, 잘 구슬러서 장원을 지키는 호위무사(護衛武士)로 쓰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 겁나겠는가? 이때, 막 들어가려던 진소백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여봐라, 너도 어서 따라오거라."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 청년이 나타나 진소백을 따라 장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 다. 그리고 그 청년이 안복임을 안 장흥의 얼굴은 구겨졌다. 실내는 넓었다. 장흥이 주로 손님을 접대하는 이곳, 영웅청(英雄廳)에는 지금 진소백이 앉아 있었 다. 진소백의 옆에는 안복이 깃발을 하나 잡은 채로 서 있었고, 장흥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가운데 놓인 탁자 위에는 산해진미(山海珍味)가 그득했는데, 그윽한 향기(香氣)를 풍기는 술마저 곁들여져 풍미(風味)를 한층 더해 주고 있었다. 이미 많은 양을 먹고 마신 듯 여기저기 빈 그릇이 보였고, 탁자 주위에는 시중을 드는 시녀도 여럿 서 있었다. "자 한잔 더 드십시오."


장흥의 손짓에 따라 진소백 옆에 서 있던 시녀가 진소백의 잔에 술을 다시 채웠 다. 진소백은 몽롱한 눈으로 장흥을 바라보았다. "당신 말이오. 내가 이걸 마시길 원하는 게요?" 또 이런 질문이었다. 장원에 들어와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부터 계속 이렇게 물 었던 것이다. '이거, 어디가 이상한 놈 아니야?' 마음속에는 욕설이 넘치지만, 어디 밖으로 드러낼 수야 있겠는가? 다만 어조를 더 욱 공손히 하며 웃을 뿐이다. 이미 진소백의 무공을 보았으므로. "네. 대협께서는 마음껏 드십시오." "좋소. 그럼, 내 마시지!" 한 잔을 더 비운 진소백의 눈이 점점 더 풀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점잖게 앉아 있 더니, 차츰 자세가 풀어지며 주위의 시녀들에게 말을 걸기도 했던 것이다. "아하, 너는 이름이 무어냐? 참 예쁘게 생겼구나." 술 시중을 들던 초록색 옷을 입은 시녀! 수줍게 녹아(綠兒)라고 말하는 소녀는 나이가 열서넛인 듯 아직 어린 티가 역력했 다. 진소백이 시녀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자, 장흥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무슨 내용이건 남자끼리의 이야기는 여자 얘기로 말을 꺼내는 것이 최고 아니겠는 가? "대협, 그 아이가 마음에 드십니까? 원하신다면……" 진소백이 흐려진 눈으로 장흥을 돌아보았다. "원한다면……?" "오늘밤 대협을 시중들게 해드릴 수도……" 원래 장흥은 여자 얘기로 물꼬를 터서 진소백이 장원의 호위무사로 있는 문제를 꺼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진소백으로 인해 잘리고 말았다. 진소백이 장흥의 말을 손을 흔들어 자르며 녹아에게 물었던 것이다. "녹아(綠兒), 네 나이가 지금 몇이냐?" "열넷이옵니다." '올커니! 나이 좋고. 물이 파릇파릇 오른 나이에다가 깨물면 톡 터질 것 같은 피부 니……' 장흥은 진소백이 자신에게 고개를 돌려서, 점잔을 빼며 녹아 얘기를 꺼내리라 생 각하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이윽고 진소백은 다시 장흥에게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장주에게는 딸이 있지요?" "예, 그렇습니다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올해 몇이오?" "열다섯이 됩니다만." '아니, 이 미친놈이 내 딸애한테 관심이 있는 거 아냐?' 나름대로 열심히 돌아가던 장흥의 머리는 진소백으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다. 폭갈! 갑자기 진소백이 폭갈한 것이다.


"에라, 이놈아! 그럼 네놈은 네 딸년도 딴 남자와 재우느냐?" 장흥의 얼굴이 굳어졌다. 장흥이 지금 진소백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하나, 그 자신 엄연한 일장(一莊)의 주인이었다. 언제 욕을 먹고 모욕을 받아 보았겠는가? 갑작스런 욕설에 당황하고 모욕감(侮辱感)으로 얼굴마저 굳어진 장흥, 그런 장흥을 보며 진소백이 말을 이었다. "에이, 기분 잡쳤으니 이제 그만 돈이나 받고 일어나야겠다. 어서 내놓아라." 장흥은 어안이 벙벙했다. 무슨 돈 말인가? 오늘 처음 보는 놈이 잘 얻어먹고 나서 돈을 달라니. 장흥은 속이 끓어올라 당장 소리치고 싶었지만, 아직은 그의 이성(理性)이 남아 있 었다. 호위무사도 믿을 수 없는 지금, 이런 불한당 놈에게 잘못 소리쳤다가 자신의 목숨 은 어찌 보장한단 말인가? 억지로 미소를 지어 가며 공손히 말하는 장흥. "무슨 돈 말씀이신지……?" "어라! 네놈이 내게 빚진 게 있지 않느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오늘 대협을 처음 보는데……" 진소백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빛이 떠올랐다. "여봐라, 안복. 내가 오늘 이 장원에 들어오며 걸은 걸음이 몇 보(步)더냐?" 그때까지 조용히 서 있던 안복이 즉시 대답했다. 이미 정확한 계산을 끝내 놓은 듯. "정확히 삼백이십사 보입니다." "귀찮으니 우수리는 빼고 삼백 보로 하여라." "주인님은 역시 통이 크십니다." 안복의 칭찬에 기분좋게 고개를 끄덕인 진소백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술은 모두 몇 잔을 마셨는가?" "모두 마흔세 잔입니다만, 이 역시 우수리를 빼고 사십으로 할까요?" "너도 나를 닮아 점점 통이 커지는구나. 좋다, 내 오늘은 인심을 많이 쓰도록 하 지. 그러면 내가 받을 돈이 모두 얼마냐?" 잠시 손을 짚어 가던 안복이 말했다. "사십만 냥에 다시 삼십만 냥을 더하니 모두 칠십만 냥입니다." 장흥은 기가 막혔다. 이게 모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아무리 상대방에게 겁을 먹고 있더라도, 이쯤 되면 나서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 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지금?" 도리어 어이없다는 눈으로 장흥을 바라보는 진소백! 진소백이 눈짓을 하자 안복이 나섰다. 설명을 위해 나선 것인데……이 가슴에 품고 있던 기를 펼치자 '일(一) 보(步) 천 냥, 일(一) 배(盃) 만 냥'이란 글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안복의 친절한 설 명! "지금부터 우리 주인님의 집안 내력을 말할 테니 잘 들으시오. 주인님의 선친께서 는 너무 부지런하신 데다가 또한 친구가 너무 많으셨소. 해서 너무 많이 걷고 또


술을 많이 마신 나머지 병을 얻어 돌아가셨소. 임종 시에 남기신 말은 부디 적게 걷고 술을 마시지 말란 것이었소. 하지만 세상사란 것이 어찌 자신의 뜻대로만 되 겠소. 살다 보면 부득이하게 걷고 술을 마시기도 해야 하지 않겠소. 해서 주인님께 서는 자신을 부득이하게 걷게 하고 술을 마시게 하는 사람에게 생명을 갉아먹는 대가로 약간씩의 돈을 거두기로 하셨으니, 장 대인도 협조하시기 바라오." ─`장 대인도 협조하시기 바라오! 장 대인, 장흥은 협조는커녕 기가 막혀 죽을 노릇이었다. 이 안복이란 놈은 며칠 전 자신이 쫓아 낸 하인 놈이 틀림없는데, 언제 저런 미친놈의 종이 됐단 말인가. 또 술을 많이 마셔 죽었다는 건 그렇다 치고, 많이 걸어 죽었다니…… 말이 되는 가? 게다가 한걸음 걷는 데 천 냥! 술 한 잔 마시는 데는 만 냥이라니! 장흥이 기가 막혀 하건 말건 진소백의 독촉은 계속되었다. "자, 이제 알았으면 어서 칠십만 냥 내놓으시오. 나 또한 바쁜 몸이니." 진소백의 이 말은 장흥이 그나마 마지막 잡고 있던 이성 한 가닥마저 완전히 끊어 버렸다. "이 미친놈아! 칠십만 냥이라니. 때려 죽여도 못 내놓는다`─`아." 죽어도 무어무어라는 말을 장흥은 되도록 쓰지 말았어야 했다. 진소백의 호기심은 너무나 왕성(旺盛)해서 꼭 해봐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이었다. 장흥이 정말 맞아 죽어도 돈을 내놓지 않을 것인지 궁금했었는데…… 결과는 너무 도 실망스러웠다. "장주는 신용이 없는 편이구려." 그렇다. 장흥은 정말 신용이 없었다. 채 반(半)도 죽지 않아서 돈이며 패물(貝物)을 꺼내 놓기 시작한 것이다. 장흥의 얼굴은 이미 많이 망가져서, 원래의 기름기 흐르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 었다. "모두 칠십만 냥입니다. 어서 가지고……" 떠나란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말을 맺는 장흥이었다. 그러나 진소백의 말은 더 욱 장흥의 기를 막히게 했다. "아니, 왜 이것뿐이야? 이봐, 안복! 이 계산이 맞는 것이냐?" 안복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닙니다요. 그러니까 아까 패실 때 주먹이 이십여 회 발길질이 십여 회였으니 도합 이십만 냥의 빚이 더 있습니다요." 장흥은 할말을 잃었다.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 "아니, 그럼……?" "당연하지. 안복, 또 설명해 주거라." 또다시 안복이 나서서 깃발에 씌어진 다른 글귀를 보여 주었다. '일(一) 권(拳) 오 천, 일(一) 퇴(腿) 일만.' "주인님의 선모께서는 일찍이 남을 너무 많이 때리시다 몸살을 얻어 돌아가셨소. 해서 임종 시에 남기신 말씀이……" 장흥은 경악했다. "그, 그만!" 듣지 않아도 뻔하지 않은가. 저 미친놈은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어 한 주먹에 오천 냥, 한 번 발길질에 만 냥의 돈을 받기로 했을 게고.


정말 특이한 집안 내력! 장흥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발…… 이제 더 이상은 없소." 그러나 장흥의 애원에도 진소백은 담담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집안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하지만 우리 할머니가 유언(遺言)으로 남기시기를 받을 돈은 그때 그때 받으라 하셨으니, 난 부득이……" 진소백이 다시 멱살을 잡으며 때릴 자세를 취하자, 장흥은 눈앞이 노래짐을 느꼈 다. 아까 맞았던 고통(苦痛)이 아직도 생생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니지. 내가 때리면 때릴수록 받을 돈이 늘어나잖아. 이거 곤란한걸." 장흥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살았구나.' 노랗게 되었던 하늘빛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장흥의 이런 기대는 진소백의 다음 말로 여지없이 깨어졌다. "이봐 안복, 자네는 집안에 나와 같은 별난 조상들이 없겠지. 자네가 때리도록!" 장흥은 다시 하늘이 노래지고 있음을 느꼈다. 2 은화 팔십만 냥이라면 금화로는 팔천 냥에 해당되는 돈이었다. 장흥은 안복의 주 먹 세례에 다시 한 번 절반쯤 죽고 난 뒤에 어디선가 십만 냥 어치의 보화(寶貨) 를 더 만들어 내었다. 이런 큰돈에 해당하는 재물(財物)을 등에 졌음에도 불구하고 안복은 전혀 힘이 들지 않았다. 자신의 억울함을 속시원히 풀어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그 과정은 또 얼마나 통쾌 했던가? 그는 앞서가는 진소백을 바라보았다. "공자님, 아까 말입니다. 그 장흥네 무사들을 모두 일초식에…… 정말 대단하십니 다." 진소백이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공자님의 무공은 당할 자가 없겠습니다." 진소백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결코! 그자들이 약했을 뿐이지. 만일 진정한 고수를 만났다면 아마 결과 는…… 달랐겠지." "하지만 그들의 별호는……" 진소백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일도(一刀)로 하늘을 가른다든지, 혼(魂)을 빼놓는다든지 하는 별호는 남들 이 지어 준 것일 때만 비로소 의미가 있을 뿐. 스스로가 높인다고 고수가 되는 건 아냐." 안복은 뭔가를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둘의 신형은 어느새 낙양 시내를 벗어나 변두리를 지나고 있었다. * * *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것이 진리이다. 낙양은 번화(繁華)한 곳이었지만, 이곳에도 빈민가(貧民街)는 어김없이 존재했다. 빈민가의 한쪽 구석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거적 위에 앉아 졸고 있는 거지 노인이


있었다. 오십은 족히 되어 보였지만, 얼굴에 낀 때로 인해 정확한 나이는 알 수가 없었다. 항상 웃음을 달고 다니는 거지 노인! 뼈대가 없다 하여 사람들이 모두 무골개(無骨 )라 부르는 거지였다. 진소백이 안복에게 보화가 든 포대를 내려놓도록 한 곳은, 다름 아닌 무골개의 앞 이었다. "사람들에게 보내는 새해의 선물이니, 알아서 골고루 나눠 주십시오." 진소백의 말투는 장흥에게 하던 것에 비해 그야말로 천양지차(天壤之差)! 매우 공손했다. 말없이 앉아 있던 무골개의 눈빛이 잠깐 반짝이더니, 다시 원래의 흐릿한 빛으로 돌아갔다. "히히, 공자께서 이 거지에게 선물을 다 주시다니. 간밤의 꿈에 소똥을 밟았는데, 그게 횡재할 꿈일 줄이야." 무골개가 뭐라고 하건 진소백은 공손히 인사하며, 그 자리를 물러나왔다. 안복은 뭐라 말하려 했으나 할말이 없었다. 오히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진소백이 었다. "자네는 내가 왜 그에게 재물을 모두 주었는지 궁금한가?" "그렇습니다요." "혹시 자네 무공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없는가?" 왜 없겠는가. 힘이 없어 억울한 일을 당하고 난 후, 안복은 빌어서라도 무공을 익 히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네가 무공을 익히고 싶다면 아까 그분께 가서 사흘만 빌어 보게." "그 거지, 아니, 그…… 분이 무림인이란 말씀입니까?" 진소백은 빙그레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자네는 이미 나이가 들어 근골(筋骨)이 굳었으니 상승의 무공에는 적합하지 않으 나, 열심히 노력한다면 어느 정도의 성과는 있을 걸세. 하하!" 말을 마친 진소백의 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특별히 다르게 걷는 것이 아닌데도, 안복으로서는 따라가지 못할 속도가 되어 버 렸던 것이다. 이윽고 진소백의 신형이 멀찍이 사라지더니, 홀연 은자 꾸러미 하나가 날아왔다. 툭! 안복의 발 아래 떨어진 은자! 안복이 대충 세어 보니 백 냥 정도였다. 그리고 안복의 귀에 들려 오는, 이제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어진 진소백의 말소 리! "아까 다 주고 남은 건 그거뿐이네. 내가 자네에게 받기로 한 백 냥은 이미 장흥 에게서 초과하여 받았으니…… 하하!" 안복은 비로소 진소백이 청부자의 재산의 반을 요구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 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위한 것! 많이 가진 이들은 자신의 재산이 아까워서라도 진소백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할 것 아니겠는가. * * * 정월 초사흗날, 낙양의 빈민가(貧民街) 주민들은 개방( 幇)의 이름으로 된 은자를 몇 냥씩 나누어 받았다. 그들의 상원(上元) 명절이 조금은 풍요로워졌으리라. 하지만, 그 일을 주도한 것이


개방의 장로, 무골개 송인임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또한 그 뒤에 진소백이란 청년이 있었음을 아는 이는 더 더욱 없었다. 사람들은 다만 명절에 따뜻한 고기 국물이라도 먹을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그저 고맙게 여겼을 뿐이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 가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다만 눈앞에 놓인 은자 몇 냥씩이 그지없이 고마울 뿐이었다. 바로 이날! 집으로 돌아온 진소백은 인편을 통해 전달되어 온 하나의 서찰을 받았다. 오랜 기간 떨어져 지내 온, 친우(親友)의 서찰! 또한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서는, 엽혼이 화선에게 부탁했던 자료를 건네 받고 있 었다. 그리고 이것은 여담(餘談)이지만, 장흥은 그 후로 누구를 만나더라도 집안 내력을 물은 후에 비로소 말을 시작했다고 한다. ─`혹시 조상님들 중에…… 또 모르지 않는가?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죽은 조상이 있다면…… 말 한마디 할 때 마다 돈을 달라고 하면……? ♡ 제 2 장 미소희망(微小希望) 밀실(密室) 안! 바닥은 펼쳐 놓은 문서(文書)들로 어지러웠다. 엽혼이 화선에게 부탁했던 정보들이 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된, 모두 십칠 장에 달하는 문서들을 엽혼은 벌써 세 번째 읽고 있었다. 어떤 일이든 철저한 사전 준비(準備)와 조사(調査)는 그 일이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을 높여 주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처음에 엽혼은 이 일이 성공할 확률이 오 푼 이하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대하지도 않았던 한 장의 문서가 성공의 확률(確率)을 단숨에 이 할 이 상으로 올려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었다. <비응방(飛鷹幇) 정규 출입자의 명단, 금사진(金査震)의 하루 일과, 비응방의 설립 (設立) 내력(來歷), 비응방주 호위무사들의 신상 일람(一覽).> 문서의 표제(表題)는 모두 비응방주 금사진에 관한 것이어서, 이번 청부 대상이 누 구인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비응방주, 비응혈조 금사진! 그라면 천자급의 고수로 분류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적들에 대한 철저한 섬멸(殲 滅)과 치밀한 잔인함으로 오늘날의 비응방을 있게 한 금사진을 향한 원한의 열매 가 마침내 익었다는 말인가? 문서들 중에서 지금 엽혼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비응방의 설립 내력에 관한 것 이었다. 특히 비응방의 건축물(建築物)에 대한 설명이, 엽혼으로 하여금 눈을 떼지 못하게 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지리를 잘 안다는 것은 살수행(殺手行)에 있어 더없이 중요한 문제였다. 어느 곳이 엄폐(掩蔽)지로서 적당하고, 어느 곳을 피해야 할 것인지, 어느 곳의 매복이 취약 하고 어느 곳의 매복이 삼엄한지…… 살수행에 실제로 나서기 전에, 엽혼은 이런 모든 것들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득할 때까지 연습해야만 했다. 연습을 한 번이라도 더 하면 그만큼 자신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므로. 하 나 지금 엽혼이 읽고 있는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전체적인 구도는 양쪽으로 전각(殿閣)이 학의 날개처럼 펼쳐지고, 뒤편에는


천험 절벽이 호응하며 가운데의 천응각을 품고 있는 형태. 원래 전대의 지방 호족 (豪族)이었던 호암군(湖巖君)의 장원이었으나, 오 년 전 비응방 정비 시에 몰락한 호암군의 후손으로부터 사들임. 그 뒤 문상(文相) 천기수사(天機秀士) 심화절(深化絶)의 주도하에 기관장치를 설치 하고 경비에 적절하게 건축을 재배치하여 지금의 비응방을 형성하게 됨. 밝혀 낸 기관장치의 위치와 목록은 아래와 같음……> '전국 시대 호암군의 장원을 개조한 것이라……' 새로이 설립한 장원이 아니라 기존의 장원을 개축(改築)한 것이라면 엽혼에게 유 리한 점이 있었다. 바로 중심 건물들의 위치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건축에 살을 더 붙인다 해도, 중심 건물의 위치는 바뀔 리가 없는 법이었 다. 세월이 흘러 몇 가지의 풍수에 대한 지식이 늘어났다 하여도 최상(最上)의 풍 수적 위치란 변할 수가 없는 법! 그렇다면…… 호암군에 관해서는 전해 내려오는 일화가 있다. 전국 시대를 마감하며 진(秦)의 군대가 지방 호족들을 쓸어 버리고 있을 무렵, 호 암군의 장원도 진의 군대에 포위되었다. 절명(絶命)의 순간, 호암군은 화살에 서찰을 달아 쏘고는 장원 안으로 숨어 버렸 다. ─`신(神)의 힘을 빌려 하늘에 오르니, 인간으로서는 나를 범하지 못하리라. 코웃음을 치며 군사를 몰아 장원에 들어간 군대가 발견한 것은 호암군의 가족과 종복들뿐이었다. 호암군은 자신의 말대로 하늘에 올랐는지 정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붓을 들어 암호로 된 글을 촘촘히 써 나간 엽혼은 전서구(傳書鷗) 한 마리를 꺼내 들었다. 아침 나절에 조삼이 서찰과 함께 가져 온 것이다. 원래는 엽혼이 자료를 가지러 소하루( 霞樓)에 갈 예정이었으나, 화선 측에서 먼저 조삼을 시켜 자료와 전서구를 보내 왔던 것이다. 엽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범한 점소이로 알았던 조삼이 강호의 인물인 것을 알아서가 아니었다. 그는 자 신의 집을 아무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던 것이다. 집에 들어올 때도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일부러 먼 거리를 우회했었는데……!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엽혼의 행동이 그들의 감시(監視) 선상에 있다는 것! 그리고 엽평 또한 그들의 감 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무서운 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자들이라면 하나의 실수도 용납(容納)하지 않고 일을 처리해 나갈 것이다. 엽혼은 옆 방에 있는 동생을 생각했다. 자신이 실패한다면 그들, 이러한 청부를 한 자들이 엽평을 그냥 둘 것인가? 비밀 유지를 위해서,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면……? 아니, 설혹 엽혼이 성공한다고 해도 그들이 평아를 노릴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 었다. 원래 살수가 청부자에게 관심을 갖는 일은 금기(禁忌)였다. 하나 지금은…… "평아(枰兒)의 안전이 달린 일이다. 그들에 대해 더 알아야 한다."


그러나 무슨 방법으로…… 청부자가 정한 암살 시한은 상원(上元)절. 이제 십이 일이 남았을 뿐이었다. 다만 살업(殺業)에 집중하기에도 짧은 시간이 아닌 자신의 일을 누군가에게 미루는 것 을 엽혼은 정말 싫어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에게 모든 일을 부탁하는 수밖에.' 생각을 돌린 엽혼은 마침내 암호 편지를 전서구(傳書鷗)에 묶어 날렸다. 청부를 받 고 돈을 받은 이상, 금사진의 암살 역시 중요한 일! 화선(花仙)은 전서구를 받으면 곧 조사해서 엽혼이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여 주리 라. 과연 그녀는 얼마나 짧은 시간에 엽혼이 원하는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엽혼은 다시 한 번 자료들을 읽기 시작했다. '이런 방대한 자료(資料)를 그 짧은 시간에 모으다니……' 엽혼은 다시 한 번 화선의 정보 수집 능력에 대해 감탄했다. 그녀는 어디에서 이 런 정보를 수집한 것일까? 자신의 능력일까…… 아니면……? 화선(花仙)! 2 금사진(金査震)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다만 전 부인에게서 태어난 딸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금사진의 유일한 딸, 금청청(金靑靑)! 그녀가 화산(華山)에서 무예를 닦고 있음은 모든 비응방도들이 아는 사실이었다. 금사진의 현재의 부인인 적염(狄艶)과 사이가 좋지 않아 멀리 떠나 있으며, 일 년 에 한 번 친모의 기일에만 비응방에 돌아올 뿐이라는 것도 대다수의 비응방도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금청청의 친모 방응향의 기일은 정월 십사일이었다. 관도(官道)라곤 하지만 모두 흙을 다져 놓은 길이니, 급히 말을 달린다면 흙먼지가 자욱이 날리는 것은 피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두두두…… 말 한 필이 급히 지나가며 피워올린 흙먼지를 진소백은 고스란히 덮어쓸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먼지를 털어 내며 툴툴거리는 진소백에게 있어서 그나마 유일한 위로 거리는 말을 달리는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여인인가?' 날렵한 홍의경장(紅衣輕裝) 차림의 뒷모습. 실룩거리는 말의 궁둥이와 그 위에 앉은 여인을 연관(聯關)시켜 잠시 이상한 생각 을 떠올리며 킥킥거리던 진소백은 하늘을 보았다. 낙양을 떠나온 지 이제 사흘, 내일이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진소백은 다음에 나타나는 객잔(客棧)에서 잠시 쉬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소백이 객잔을 찾았을 때는 이미 미시가 다되어 있었다. 점소이의 안내를 받으 며 들어가던 진소백의 눈에 낯익은 말 한 마리가 들어왔다. 조금 전 자신에게 흙먼지를 단단히 씌우고 간 놈! '이것 봐라?'


아니나다를까, 객잔(客棧) 안을 훑어보던 진소백은 객잔의 한구석에 앉아 홀로 술 잔을 기울이고 있는 홍의소녀를 찾을 수 있었다. '여인 혼자서 대낮부터 술이라니…… 무슨 근심이라도 있는 걸까?' 얼굴에 얼음이라도 씌운 듯, 너무 차가운 것이 흠이었지만 정말 빼어난 미인이었 다. '아까의 일, 먼지 뒤집어쓴 일을 가지고 말을 한번 걸어 봐?' 하지만 장내를 한번 둘러본 진소백은 잠시 그 생각을 보류(保留)하기로 했다. 홍의 소녀의 뒤쪽, 두 털보장한이 자꾸만 홍의녀를 돌아보며 실실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곧 재미있는 일이 생기겠군.' 진소백의 입가에도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자고로 술집에서 여자가 혼자 술을 마신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항 상 이런 놈들이 있으므로. "소저, 무슨 괴로운 일이라도 있나 본데, 어디 털어 놔 보시오. 우리 파산이호(巴山 二虎)가 도와 드리겠소." 파산이호, 아니, 파산이흉(巴山二凶)은 근처에서 알아주는 불량배들이었다. 말을 걸 면서 은근 슬쩍 홍의소녀의 옆에 앉는 놈이 손위뻘인 대흉(大凶)이었고, 음침하게 웃으며 맞은편에 앉는 놈은 소흉(小凶)이었다. 하는 짓거리나, 은근히 홍의소녀의 어깨로 올라가는 손이 마치 잘 알고 지내던 여 자를 대하는 품인데…… 하지만 강호(江湖)에서는 혼자 있는 여자를 함부로 건드리는 것도 그다지 좋은 일 은 아니었다. 가끔씩은 다음과 같은 일이 발생하였으므로. "케엑!" 그나마 비명이라도 지르며 쓰러진 것은 홍의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소흉(小凶) 이었다. 옆에 앉았던 대흉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즉사(卽死)했다. 그리고 보 라! 소흉의 이마와 대흉의 목에 박힌 채 흔들리고 있는 것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홍의 녀가 음식을 집을 때 사용했던 젓가락이었고, 바닥에 떨어져 퍼덕이고 있는 것은 홍의녀의 어깨에 올리려 했던 대흉의 오른손이었다. 잔인(殘忍)한 손속! 그러나 홍의녀는 눈썹조차 찡그리지 않았다. "젓가락을 다시 가져 오너라." 아름다운 미모(美貌)에 믿기지 않는 독심(毒心)이었다. 진소백은 말을 거는 것을 잠시 보류하기로 했던 조금 전의 결정에 대해 진심으로 하늘에 감사해했다. 이흉의 일이 있기 전까진 홍의녀를 힐끔거리던 주루 내의 사내들이, 이젠 홍의녀 와 혹시라도 눈이 마주칠세라 감히 눈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자신들의 앞에 놓인 술잔만을 죽어라고 바라볼 뿐. 하지만 진소백만은 홍의 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미모(美貌)와 독심(毒心), 게다가 무공을 겸비한 여인을 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흉의 시신을 보라. 계속해서 뿜어지고 있는 피가, 한 점도 홍의녀에게 닿지 않고 있지 않은가! 쓰러지 는 각도(角度)와 피가 뿜어질 방향(方向)을 계산해 정확히 힘을 안배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파산이흉이 비록 하류배에 불과하다 하나 어찌 쉬운 일이겠는 가?


주루 안은 쥐죽은듯 고요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눈치를 살피며 밖으로 나갈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갑작스레 주루의 문이 열리며 일단의 무사들이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가슴에 새겨진, 금세라도 튀어나올 듯 선명한 비응(飛鷹)은 그들이 비응방의 무사임을 알 수 있게 했고, 검끝의 청색 수실은 숭무당(崇武堂) 소속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들어온 무 사들은 지체없이 홍의녀에게로 가더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우두머리 로 보이는, 도를 찬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숭무당 제삼당주 조관(曹串)이 소방주를 뵈오. 영접(迎接)이 늦었음을 용서하십시 오." 비응방도들이 소방주라고 부를 여인은 하나뿐이었다. 날수냉심( 手冷心) 금청청, 그녀가 친모(親母) 방응향의 기일에 맞추어 비응방에 돌아온 것이었다. "방주가 보낸 것이냐?" 비응방의 방주라면 금사진을 말함인데, 아버지를 일러 방주라 부르다니…… 말투가 기이하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방주님의 뜻을 받아 고(暠) 당주께서 제게 분부하셨습니다." 고 당주라 하면 숭무당주 고숭무(暠崇武)를 말하는 것! 비응방의 이인자로 일컬어 지는 인물이다. 그러나 금청청의 얼굴은 여전히 냉랭(冷冷)했다. "가서 전하라. 제사를 모시기 전에는 들어갈 것이지만, 그 전엔 찾지 말라고." 조관의 얼굴에 곤혹의 빛이 떠올랐다. "고 당주님의 명이 지엄한지라…… 목숨을 걸고라도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금청청의 아미가 역 팔 자로 곤두섰다. "네놈이 감히……! 내 말은 우습다는 것이냐?" '냐'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관의 얼굴이 움찔했다. 조관의 뒤편 벽에는 어느새 나무젓가락 하나가 반쯤 박힌 채 흔들리고 있었다. 쌔액`─`! 그러나 중인들이 파공음(破空音)을 들은 것은 그 이후였다. 가공할 쾌(快)가 아닐 수 없는데……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조관의 뺨에 흘러내리는 핏줄기 하나! 그는 급히 무릎을 꿇 었다. "속하가 어찌……" "돌아가거라." 금청청은 냉랭히 말하고 일어나, 주루를 나가 버렸다. 그러나 조관과 그 수하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다만 석상처럼 굳어져 있을 뿐이었다. 조관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너무 굳게 쥔 탓이었을까? 손톱이 파고 들 어가 피가 흘러나와도 조관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꽉 다문 그의 입술이 뜻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정월의 넷째날 금사진의 유일한 딸, 금청청이 비응방에서 백 리 떨어진 한 주루에 나타났다. 그리고 금사진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으며, 숭무당주의 접응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녀가 젓가락을 날려, 수하들 앞에서 모욕을 준 조관! 그리고 그의 떨리는 손! 총총히 사라지는 금청청. 이러한 것들은 장차 어떤 의미(意味)를 가질 것인가?


3 <금 방주의 운이 다했나 봅니다. 부탁하신 대로 수소문은 했으나 가능성(可能性) 은 없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화선에게서 연락이 생각보다 일찍 왔다. 엽혼 역시 실낱 같은 희망을 걸었을 뿐, 그다지 기대하진 않았던 일이었는데, 이렇 게 쉽게 되다니! <호암군의 장원을 처음 지은 이는 귀곡자(鬼谷子)의 진전을 이은 지대명(志大明) 이란 자입니다. 한데 우연히도 그의 후손(後孫) 하나가 집안에 전해지던 도해집(圖解集)을 팔러 내 놓은 것이 우리에게 입수(入手)되었습니다. 지대명은 자신이 지은 장원마다 비밀 통로를 설치하고는 그것을 도해집에 암호로 남겨 놓았습니다. 전문가(專門家)의 힘 을 빌려 풀어 본 바에 따르면 지대명의 도해집에 있는 기록(記錄)에는 호암군의 장원에 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번 서찰에 쓰여진 글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컸다. 암살(暗殺)을 위해서는 반드시 비응방에 숨어들어야 했다. 금사진의 무공이 비록 무서웠으나, 엽혼은 숨어서 암격 하는 것이라면 금사진의 목숨을 끊는 것에 반반(半半)의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금사진을 호위하는 자들이 있다면 일초에 금사진을 노리는 것도 힘들 뿐만 아니 라, 그 이후에 빠져 나오는 것이 더욱 큰 문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금사진을 암격(暗擊)할 장소는 반드시 그가 혼자 있는 곳이라야 했다. 엽혼 은 금사진에 대한 자료를 수십 번 되풀이해 읽은 끝에 마침내 한 장소를 정할 수 가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그 장소에 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일 호암군의 비밀 통로가 존재한다면, 엽혼은 길을 찾은 것이었다. 천기수사 심화절(深化絶)은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장원(莊園)의 개조(改造)를 지휘했다면, 어쩌면 비밀 통로를 발견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없애거나, 다시 개 조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심화절이 발견하지 못했다면…… 가능성이 있는 가정이었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엽혼은 어쩌면 이번 살행(殺行)을 성공시킬 수도 있을 것이 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이 자신을 도와 주고 있다고 엽혼은 생각했다. 과연, 하늘이 있다면 자신을 도와 줄 것인가? 엽혼은 자신의 지난날을 돌이켜 보았다. 아버지의 치욕스런 죽음과 어머니의 자살! 그리고 그들 형제를 냉정히 쫓아 냈던 아버지 사문의 사람들. 뒤이어 찾아왔던 어린 날의 그 힘들었던 고난들! 그리고…… 뒤이어 찾아온 기억은 어린 날의 유일한 따스함의 추억이었다. '사부님……!' 그들 형제에게 인간의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해주었고, 자신에게는 무공의 새로운 오의(奧意)를 깨우쳐 주었던 자신의 사부! 그의 온화한 얼굴이 생각나자, 엽혼은 가슴이 저려 왔다. 그런 사부를 배신하고 살 수의 길에 접어든 것이 이미 삼 년. 만일 사부께서 이 일을 아신다면 자신을 용서 하실까?


엽혼은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하늘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내 착한 동생 평아는……' 그는 자격이 있었다. 항상 착하기만 했던 소년! 이번 일은 그를 위한 것이었다. 만일 하늘이 자신을 도 울 뜻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엽평을 위해서일 것이다. 호암군의 비밀 통로에 대한 지도(地圖)가 우연히 손에 들어온 일! 엽혼은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이제 남은 것은 이 통로를 숙지하는 것뿐! 만일 천운(天運)이 닿아, 호암군의 통로가 발견이 되지 않고 있었다면 엽혼은 성공 할 수 있을 것이다. * * * 머릿속으로 수십 번 연습(練習)하여, 휘어지는 구비 사이의 거리까지 훤히 꿰뚫고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엽혼은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은 연습(練習)과는 같지 않았다. 항상 예상치 못했던 변수들이 나타나서는, 그때마다 임기응변을 강요하는 것이 현 실! 당연히 엽혼은 조심해야만 했다. 지금 침투해 가고 있는 이 길, 호암군의 비밀 통로! 비록 엽혼이 도해(圖解)를 손 에 넣었다고는 하나,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어떤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길지는 아 무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대명(志大明)이 만들어 놓은 비밀 지하도(地下道)는 비응방의 지하 곳곳을 누비 며 마치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다. 지은 지 이미 수백 년이 지난 터라 허물어져 막힌 곳도 많았지만, 다행히 엽혼이 가고자 하는 통로는 막혀 있지 않았다. 비록 군데군데 허물어진 흔적이 보였지만, 엽혼의 진로에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이렇듯 세월이 흘렀음에도 막히지 않은 통로. 그것은 통로를 처음 만들었던 자의 능력이 뛰어났음을 말하는 것이었고…… 아직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이 통로. 그것은 엽혼이 두 번째의 천행(天幸)을 맞이함을 의미했다. 첫 번째 난관은 목표 지점을 이백여 장 남겨 둔 곳에서 느닷없이 나타났다. 쇠창살! 어른 팔뚝만한 쇠창살이 통로를 가로막으며 나타났던 것이다. 언제, 누가 장치한 것일까? 엽혼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만일 내공을 돋운 채 검을 사용하여 수십 번 내리친다면 끓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 다. 그러나 이곳은 지하(地下)였다. 밀폐(密閉)된 곳에서 발생한 소리는 응집(凝集)되어 지상(地上)으로 퍼져 나가게 될 것이다. 지상에서는 소리가 허공으로 퍼져 나가므로, 조심만 한다면 감시자들에 게까지는 미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하는 달랐다. 이런 밀폐된 곳에서의 울림은 지상에서 바로 감지될 수 있 었던 것이다. 지하에서 기이한 울림이 들려 온다면, 비응방에서 지하를 주목하게 되고, 어쩌면 이 통로가 발견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통로가 발견된다는 것은 엽혼의 계획이 모두 무산(霧散)되어 버림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에 와서 다른 계획을 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엽혼은 계속 생각에 잠겨 있 었다. 통로 안은 어두웠다. 눈앞에는 마치 괴물의 이빨처럼 늘어선 쇠창살! 그 쇠창살을 바라보다 엽혼은 눈을 빛냈다. 어둠 속인지라 쇠창살의 모습이 흐릿하게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설치(設置)한 것일까?' 엽혼은 문득 심화절을 생각했다. 천기수사(天機秀士) 심화절! 그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설치한 것일까? 엽혼은 자신이 여기까지 오면 서 거쳤던 통로 모두가 오랜 기간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없었음을 기억해 내었 다. 만일 천기수사가 쇠창살을 설치한 것이라면, 여기 이곳에만 설치했겠는가? 천기수 사는 세심한 인물로 세간(世間)에 알려져 있었다. 그가 이 통로를 발견하고 새로이 쇠창살을 설치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다른 곳도 손질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다른 곳에는 없었던 쇠창살이 유독 여기에만 있다는 것은……? 엽혼의 두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두 손에 힘을 모은 채, 그는 서서히 쇠창살 앞으로 다가섰다. 쇠창살을 두 손으로 잡고 선 엽혼! 서서히 힘을 주기 시작하는 듯, 그의 팔에는 점차 핏줄이 불거지고 있었다. 강인한 팔뚝! 그리고 더욱 강인하게 다물어진 엽혼의 입! 사람의 힘으로 이러한 두께의 쇠창살을 휜다는 것은 불가능(不可能)했다. 또한 끊 어 버리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손으로 쇠를 끊어 버리는 고수자들의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이야기 속에 등 장한다. 강호상에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내공이 삼 갑자에 이르게 되면 손으로 수강(手 )을 뿜어 내어 쇠도 으스러뜨릴 수 있다 하였으나…… 그런 고수의 이야 기는 전설에서나 나오는 것이었을 뿐, 아직은 한 번도 실제로 강호상에 출연한 적 이 없었다. 또한 지금 엽혼의 경지로는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만일 가는 쇠창살 이라면 엽혼의 힘만으로도 어떻게 해보겠으나, 이것의 굵기는…… 이런 사실을 모 르는 것일까? 엽혼은 두 손으로 쇠창살을 잡고 힘을 주어 고집스럽게 밀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 도 미련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러나 자세히 보라! 자세히 본다면, 그가 단순히 밀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밀 고[推], 당기고[引], 또다시 밀어가는 동작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런 엽혼의 동작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두 시진이나 지났을까? 처음엔 천천히 밀고 당기던 엽혼의 손이 점점 빨라지고 있 었다. 그러자 아무 변화도 보일 것 같지 않았던 쇠창살이 '우웅`─`!' 하는 미약한 소리를 내며 진동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기를 또 얼마였을까?


엽혼의 얼굴엔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얼굴 또한 붉게 달아올라, 지금 그가 얼마나 큰 힘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 고 있었는데…… 이때,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팍' 하는 미세음과 함께 쇠창 살의 위쪽 부분이 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된 일일까? 엽혼! 설마 그가 정말로 삼 갑자의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는 말일까? 강호상에 전설로나 알려진, 그런 경지의 고수였다는 말일까? 엽혼은 지금 부서져 나간 쇠창살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깨어진 쇠창살의 단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어둠 속이라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겉과 속이 다른 빛깔로 되어 있음을 확인한 엽혼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속의 쇠는 검은 광택을 띠고 있으나, 밖의 빛깔은 붉은 것이리라. 붉은빛을 띤 쇠는 더 이상 쇠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녹! 쇠창살의 겉 부분은 녹이 슬어 있었던 것이다. 심화절(深化絶)이 비밀 통로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평소 심화절의 능력으로 미루어 볼 때는 이상한 일이었지만, 때때로 똑똑한 사람도 하나쯤은 실 수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던? 그리고 그 실수가 크나큰 재앙으로 이어지는 사례들도 그다지 찾기 어려운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쨌든, 심화절이 만일 알았다면 이런 낡은 쇠창살은 진작에 교체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의 쇠창살은 누가 설치한 것일까? 아마도 지난날, 호암군이나 지대명에 의해 건설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보통 이런 곳의 쇠는 가장 강한 것을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강한 쇠에는 한 가지 약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세월(歲月)이었다. 강한 쇠는 강한 만큼 녹이 슬기 쉬웠던 것이다. 일단 한번 녹이 슬기 시작한 쇠는 원래의 강도를 급격히 잃어버리게 된다. 무림인들이 자신이 쓰는 애검을 매일 기름으로 닦으며 애지중지하는 것에는 이렇 게 녹이 스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이 쇠창살도 오랜 세월 방치(放置)되어 녹이 슬었다. 그것도, 쇠가 강한 것이었던 만큼 더욱 많이 녹슬었다. 녹이 슬어 약해진 쇠창살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 엽혼이 계속해서 흔들며 충격을 주자 스스로 깨어져 나갔던 것이다. 금속은 단순히 누르거나 당기는 힘보다도, 반복되어 주어지는 압력에 오히려 약한 법이니까. 그리고 엽혼이 깨뜨린 것은 팔뚝만한 굵기의 쇠창살이 아니라 그 속에 아직까지 녹이 슬지 않고 남아 있던 가느다란 부분에 불과했던 것이다. 처음 엽혼이 천천히 쇠창살을 흔든 것은 주변의 녹을 떼어 내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해서 엽혼은 통로에서 맞았던 장애(障碍)를 훌륭하게 극복해 내었다. * * * 비응방의 곳곳에는 칠층의 거대한 탑들이 서 있었고, 그 위에는 날아오를 듯한 비 응상(飛鷹像)이 있었다. 이것은 비응방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런 탑들은 비응방에서 만든 것은 아니었다. 호암군의 시절부터 전해지는 탑들. 그리고 그 위의 비응상들! 기실 금사진이 이곳에 비응방의 새로운 근거지를 세운 이유는 바로 이 비응탑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몇 개의 가능성이 있는 위치를 검토(檢討)하던 금사진은 이 탑을 보고 나서, 이곳 을 새로운 비응방의 근거지로 삼았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비응방의 이름에 꼭 들어맞는 조형물들! 지세(地勢)의 힘을 최대한 끌 어 내기 위한 조형물이라고, 심화절(深化絶)도 설명한 바가 있는 탑들이었다. 풍수(風水)의 대가(大家)가 세운 것이라나…… 많은 석탑들이 방 내 곳곳에 위치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비응각의 후원에 위치 해 있는 석탑은 오늘밤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 석탑 아래에서 지금 무언가가 올라오고 있었으므로. 작은 막대! 매우 작은 막대 하나가 석탑 아래에서 서서히 올라오고 있지 않은가? 수정을 절묘 히 배치(配置)하여, 앞으로 들어온 빛이 뒤로 전달될 수 있도록 한 기이한 물건! 마치 현대의 잠망경과 같은 이 물건은 서서히 올라오더니, 이윽고 머리 부분을 드 러내고 주위의 동정을 살피듯이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위를 살피고 있는 것은 막대가 아니었다. 막대의 끝에 위치한 깊은 눈! 막대를 잡은 굳강한 손! 엽혼, 그가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엽혼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곳은 방주의 거처인 천응각(天鷹閣)이 아니었다. 처음 에는 천응각을 응시하던 막대의 머리가 어느새 반대 방향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나의 석실이 위치해 있었다. 천응각 반대쪽에 위치한 절벽의 아래를 파서 만든 인조 동굴! 금사진이 가끔씩 들 러 무공을 연마하는 연무실(練武室)이 위치한 동굴을 엽혼은 지금 보고 있었다. 별빛을 빌려 바라보는 동굴의 입구는 마치 한껏 벌어진,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와 도 같았다. 사람을 통째로 삼킬 수 있는 괴물의 아가리! 지금은 그다지 많은 경비가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금사진이 연무를 행할 예정이 생긴다면, 주위는 그야말로 철옹성(鐵瓮城)으로 변하리라. 그리고 엽혼은 침투할 기회를 찾지 못하게 될 것이다. 엽혼은 하늘의 별을 이용하여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이제 삼 각 정도의 시간만 지나면 교대 시간! 그때가 기회였다. 교대 시간이 되면…… '기회가 생길 것이다.' 교대자들이 서로 인사를 한다든가 하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 만 이 세상에 모든 일의 원칙을 정확히 지키며 살아 가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까? 항상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는 조금씩 원칙을 무시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 이 세상이 아니겠는가? 금사진의 연무실을 지키는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서로간의 사담(私談)을 방 규(幇規)에서 금하고 있었으나, 어찌 그것이 정확이 지켜지겠는가! 얼굴이 익은 동료끼리 어떻게 한마디의 말도 없을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과 같은 새해의 명절 기간에 말이다. 물론 이런 일은 지금 금사진의 연무 계획이 없기에 가능한 것이기는 했다. 어쨌든 …… 서로의 안부를 묻는 짧은 순간, 그들은 야음(夜陰)을 가르며 동굴로 들어가는 그림자를 놓쳐 버렸다.


허공을 가르는 그림자! 두말할 필요 없이 엽혼이었다. 동굴에 들어온 엽혼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만일 금사진이 연무를 결심하고 순찰당(巡察堂)에 통고한 상황이었다면 경계자들 이 십 배 증원되는 것은 물론 일급(一級) 고수들도 수배 더 늘려 배치된다. 그때는 아무리 엽혼의 잠행술(潛行術)이 훌륭하다 해도 성공할 수 없으리라. 또한 재배치되는 무사들은 정예일 것이고, 지금의 그 경비들처럼 서로 사담(私談)을 나 누어 적에게 잠입할 틈을 만들어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엽혼이 미리 이곳에 들어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금사진의 연무 계획이 잡히기 전 이곳에 들어와서 금사진을 기다리려는 것이었다. 적이 방비하고 있지 않을 때 먼저 들어와 적을 기다리는 것! 이것은 어떻게 보면 고도의 병법(兵法)과도 통하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모든 지식은 궁극적으로 공통점 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닐 엽혼은 허리춤의 건량(乾糧)을 만져 보았다. 열흘치에 해당하는 건량. 시간은 넉넉했다. 이제 남은 일은 어딘가에 숨어 금사진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어느 곳에 숨을까? 실내를 둘러본 엽혼의 눈에 마침 적당한 곳이 들어왔다. 하지만, 과연 열흘 안에 금사진은 이곳에 올 것인가. 엽혼은 확신이 있었다. 열흘, 아니, 그 전에 금사진은 꼭 이곳에 올 것이다. 그리고 온다면 그는…… '여기에서 죽는다.' 엽혼은 어떻게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 제 3 장 유유괴사(幽幽怪事) 1 진소백은 정월 팔일에 엽혼의 집에 도착했다. 엽혼은 집에 없었다. 중간에 들른 곳이 있어 엽혼과 시간을 맞추지 못했던 것이다. 엽혼이 떠난 집에서는 엽평의 창백한 얼굴이 그를 맞이하였다. "소백 형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힘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나이답지 않은 의젓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진소백은 엽평의 파리한 얼굴에서 어린 시절의 모습을 찾기가 힘듦을 깨닫곤 당황 했다. 어린 날의 엽평! 그는 얼마나 활달했던가! 십이 세에 이미 기초의 권장과 검술을 익혔으며, 이후 엽가 가전(家傳)의 무류검 (舞流劍)마저 일부 깨우침으로써 주위의 찬탄과 시샘을 한 몸에 받았던 기재(奇 才), 엽평! 그러나 지금은 지니고 있던 무공마저 모두 상실해 버린 듯 힘없는 일개 소년에 지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절맥(絶脈)의 탓이었다. 더 이상의 무공 수련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기존(旣存)의 내공 기초마저도 하루가 다르게 갉아먹히고 있었던 것이다. "형님께서 소백 형님에게 전하라 하신 것입니다." 진소백이 잠시 감상(感傷)에 젖어 있는 사이, 엽평은 어느새 하나의 짐 꾸러미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봉서(封書) 하나와 특이하게 생긴 명패(名牌) 하나, 진소백이 꾸러미 속에서 발견 한 전부였다. 어디에 쓰일 물건일까? "대체 무슨 말이 씌어 있습니까?" 엽평의 물음에 진소백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읽어 보지 않았느냐?" "형님께서 직접 전하라 하셔서……" 진소백의 눈에 이채(異彩)가 떠올랐다. 엽평은 이제 갓 스물이 되어 가는 나이였다. 한창 호기심이 왕성(旺盛)한 때이기도 했다. 자신의 형이 어디 가는지도 알리지 않고 사라지며 남긴 봉서를, 단지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는 것이란 이유만으로 뜯어 보지 않을 수 있는 소년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진소 백은 문득 엽평의 눈을 바라보았다. 비록 병으로 인해 육체적인 힘은 잃었지만 아직 그 눈빛만은 지난 날과 같았다. 살아 있는 눈! 그리고 살아 있는 마음! 눈이 살아 있다는 것은 마음이 살아 있다는 것이기에. 한참을 말없이 엽평을 보고만 있던 진소백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모든 일은 네 절맥이 치유된 후에 설명해 주마." "제…… 병이 고쳐질 수 있단 말씀입니까?" 엽평의 놀람은 당연했다. "그렇다." "그, 그럼, 형은……?" 엽평은 어리석은 소년이 아니었다. 자신의 병을 고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형이 사라지고 나서야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 는 것일까? 형이 사라진 이유는 자신의 병을 고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형이 만약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무슨 일을 하러 간 것이라면, 그 일은 도대체 얼마나 어려운 것일까? 이런 복잡한 생각들이 지금 엽평의 마음을 꽉채우고 있었다. 굳은 어조로 진소백이 말하며, 이런 엽평의 혼란한 마음을 깨어 버렸다. "지금 네 형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네가 지금 해야 할 일, 형의 뜻을 이어받아 네 절맥을 치유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 엽혼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엽평의 절맥을 치유하기 위 함이었다. 만일 엽평이 자신의 형을 걱정하여 엽혼의 뜻을 거스른다면, 그것이야말 로 더없이 어리석은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엔 이런 단순한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스스로의 기분 에 취해 기회를 잃어버리고 자신을 망친다. 자식을 위해 밤늦도록 희생하는 부모들! 벗의 장래를 걱정하며, 충고(忠告)를 아끼지 않는 친우들! 당신은 이런 고마운 이 들에게 다만 몇 마디 겉치레의 말에 섭섭하여 울컥 화를 낸 적이 없었는가? 또는 상대방의 진실을 알면서도 스스로의 기분에 겨워 상대방에게 상처 준 일은 없었는가? 만일 엽평이 지금 엽혼을 걱정하여 딴 일을 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보고 정이 많다[多情] 할 것이다. 하나…… 그의 형 엽혼은? 그의 희생은 아무런 대가를 얻지 못한 채 버려지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 은 일인가! 다행히 엽평은 정이 많으나 어리석지는 않았다. 자신의 절맥이 치유될 때까지 진소백의 말을 따르기로 한 것이었다. 진소백(鎭小 栢)은 자신이 어릴 때부터 믿고 따랐던 사람! 또한 형이 믿고 모든 일을 부탁한 형의 붕우(朋友)였던 것이다. * * * 대파산(大巴山)! 사천과 섬서를 경계 짓는 이 산맥은, 따로이 구룡(九龍) 산맥이라고도 부른다. 아! 험하고도 높구나 촉나라 길 어려움이, 하늘에 오름보다 더하구나 고대에 잠총과 어부가 나라를 연 것이 어찌 그리 아득한가 噫 危乎高哉 蜀道之難 難於上靑天 蠶叢及魚鳧 開國何茫然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 묘사되어 있듯이, 하늘에 오를 것 같은 높은 사다 리[天梯]와 돌로 엮은 다리[石棧]들이 이어진 잔도(棧道)가 있는 산맥! 그 깊은 곳 어딘가에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계곡이 존재한 다. 유유곡(幽幽谷)! 사시 사철 안개가 끼어 있어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곳이다. 설혹 지리를 잘 아 는 사람도 안개 때문에 접근을 꺼려 거의 인간의 종적(縱的)이 끊긴 곳. 정월 십일에 진소백이 유유곡의 입구에 나타났다. 엽혼의 봉서를 뜯어 보고는 즉시 말을 한 필 구하여 밤을 새워 달려온 것이다. 진 소백은 엽혼의 글을 다시 기억해 보았다. <오랜 기간 연락도 없이 지내 온 나의 무정(無情)을 용서하게……中略…… 해서 오랜 기간의 탐문 끝에, 드디어 평아(枰兒)의 절맥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내었다네. 생사의괴(生死醫怪) 종도(鐘塗)! 내가 알아 낸 정보에 의하면, 그는 대파산(大巴山) 깊숙한 유유곡(幽幽谷)에 숨어 살고 있다 하네. 희대(稀代)의 의술을 지니고는 있으되 인물됨이 워낙 괴팍하여 두 가지 조건이 없 으면 결코 환자를 치유해 주지 않는다고 하네. 의괴의 첫째 조건인 신물(信物)은 내가 어렵사리 구했네만, 둘째 조건이 어떤 것인 지는 알려진 것이 없어, 염치 없으나 자네에게 맡길 수밖에 없게 되었네. 평아를 치유할 약재를 살 돈은 은하전장에 이엽(李葉)이란 이름으로 예치되어 있 네. 찾는 방법은 후술(後述)하는 바와 같다네……中略…… 평아는 내 모든 것이네. 이 못난 친구의 유언(遺言)이라 생각하고 부디 그애를 보살펴 주게. 그리고 우리 엽가 집안의 일에 관해서는 그 아이가 절맥을 치유하고 자신을 호신(護身)할 수 있는 무공을 다시 되찾은 뒤에 말해 주길 바라네.> 그 외에, 자신이 그간 살인 청부업을 행한 일이며 마지막으로 청부받은 일에 대한


얘기들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 청부의 대상은 금사진! 비응방주 금사진에 대해서는 진소백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착한 인물은 아 니었지만, 또한 악(惡)에 물든 인물도 아니어서 금전을 대가로 살인을 할 대상이 되기엔 아까운 사람이었다. 또한 결코 쉬운 상대도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 특별한 기우(奇遇)가 없다면, 엽혼은 이번의 일에서 살아 돌아오기 어려울 것 이다. '이 글을 유서(遺書)라 생각하고……'란 엽혼의 말은 자신도 어느 정도 짐작 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친구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구하려고 한 동생의 생명. 진소백은 무슨 일이 있더 라도 구해 주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 유유곡에 선 것이다. 유유곡은 안개로 뒤덮여 그 이름에 걸맞게 유부(幽府)를 보는 듯 괴기스러웠다. 이 런 곳에 평생을 묻혀 사는 인물이라면 자연 그 성정이 범인(凡人)과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치 앞 보기를 허용하지 않는 안개를 뚫고 들어가려던 진소백은 문득 괴이한 생 각이 들었다. 지금 시각은 오시! 하늘의 기운이 왕성(旺盛)하고, 특히 오늘의 날씨는 더없이 맑아 구름 한 점도 없 는 날이었다. 무릇 안개란 대지의 음양(陰陽)이 바뀜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 아래에 있어야 할 대지의 음기(坤陰)가 하늘로 오르고, 하늘에 있어야 할 양기(乾陽)가 땅으로 내려 와서 서로의 위치가 바뀌게 되면 제자리를 이탈한 기운들은 원래의 자리를 찾으려 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 이런 기운들이 서로 맞부딪쳐 발생하는 것이 안개인 것이다. 대표적인 양기인 화 (火) 위에 대표적인 음기의 수(水)가 놓이면 수증기가 발생하는 것도 이런 이치(理 致)였다. 밤새 땅의 음기(陰氣)가 성(盛)해져서 하늘의 양기(陽氣)를 침범하게 되어 발생하 는 것이 바로 안개인 것이다. 때문에 만물의 근원(根源)이며, 양기의 보고(寶庫)인 태양이 떠오르면 음양(陰陽)이 바로 잡히게 되어 안개가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는데…… '해가 중천(中天)에 떴음에도 불구하고 안개의 기세(氣勢)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 는다는 것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진소백은 다시 뒤로 물러나, 주위의 지세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모든 산맥이 그렇듯이 산의 등성이를 따라 지기가 용맥(龍脈)을 따라 흐르고, 이는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수맥(水脈)의 음기와 조화되어 음양(陰陽)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 유유곡(幽幽谷)에서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기운의 흐름을 바꾸었다.' 의도적으로 우주(宇宙)에 존재하는 기운의 흐름을 바꾸어 자신의 의도에 맞게 사 용하는 기술(技術). 그러한 기술이 물질적인 힘을 빌려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을 진법(陳法)이라 불렀 다. 제갈량의 팔진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로 세상의 기인이사와 도학자들은


저마다 독특한 방법의 진을 연구,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오늘 진소백은 그러한 진법의 정수(精髓) 중 하나를 여기에서 만난 것이다. '수화운무진(水火雲霧陳)이라 부르면 적당할까?' 지세를 따라 흘러가는 수기와 화 기의 흐름을 역행(逆行)하여 서로의 위치를 바뀌게 함으로써, 사계(四季) 내내 안 개가 끼어 있도록 만드는 고도의 술법! 이런 진법을 설치한 이는 과연 누구일까? 만일 그가 생사의괴(生死醫怪) 종도(鐘塗)라면……? 생사의괴는 치료를 부탁하는 사람에게 항상 두 가지를 요구한다고 했다. 하나는 자신이 천하에 퍼뜨린 십오 개 의 신물 중 하나를 회수해 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신물을 가져 온 사람에게 문제를 내어 만족스러운 해답을 제시 받아야만 자신의 의술(醫術)을 발휘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진법을 설치한 것이 생사의괴(生死醫怪) 본인이라면? 그의 능 력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생사의괴의 부탁 또한 간단한 것이 아닐 것을 의미하는데 …… 진소백은 이번 일이 결코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엽평의 절맥을 고치 는 일은 의괴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좋아, 한번 부딪쳐 보는 거다." 그렇다. 난관이 닥칠 때, 때때로 가장 좋은 방법은 무작정 부딪쳐 보는 것일 수도 있었다. 특히 지금의 경우처럼 고민하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2 "종 선배! 어디 계십니까?" 진소백의 외침은 내공(內功)을 실은 것이라 기운차게 유유곡을 울렸다. 안개를 피 워 내는 진법을, 자신이 지닌 지식을 모두 동원하여 뚫는 데 걸린 시간은 약 반 시진! 진소백의 진법에 관한 지식도 일반의 한계(限界)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아직은 하늘이 훤할 시간인데도 곡 안은 어두웠다. 진법에 의해 생긴 안개가 양광 (暘光)을 가로막고 있어 생기는 일이었다. 전방으로 목옥 하나가 보였지만,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들어가는 것이 실례라 생각한 진소백은 소리쳐 주인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종 선배! 후배 진소백(鎭小栢)이 감히 뵙길 원합니다. 어디 계십니까?" 아무리 불러 봐도 대답이 없는 데야, 그로서도 재간이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목 옥(木屋) 하나뿐! 들어가 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비록 예의에 어긋난다 하나, 이미 진소백이 종도(鐘塗)를 부른 지 시간이 꽤 많이 지났던 것이다. 끼이익! 흡사 귀신의 호곡성 같은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유부(幽府)'란 핏빛 글씨가 입구에 크게 씌어 있던 목옥! 문이 열리는 소리가 귀 호성(鬼呼聲) 같았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문을 열자 나타난 풍경은 '유부' 란 글씨가 장난이 아님을 알려 주려는 듯, 설사 귀신이라 할지라도 줄행랑을 칠 정도였다.


보라! 목옥의 지붕엔 검은색 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그 끝에는 저마다 하나씩의 갈고리가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갈고리에 걸린 것은…… 개, 닭, 돼지, 곰, 소, 표범…… 갈고리에 걸린 고깃덩이를 보며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상상력이 아주 풍부 한 사람만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다행히 진소백의 상상력은 충분히 풍부했고, 그는 갈고리에 매달린 고깃덩이들이 그 동물들의 시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목은 잘려지고, 내장은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끝에서 바닥을 향해 끊임없이 떨어 지는 피! 그 피 아래 다시 다섯 개의 관이 있었고, 거기에는 다시 다섯 개의 고깃 덩이가 놓여 있었다. 상상력이 아주 풍부한 진소백조차도 관에 든 고깃덩이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린 것 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였다. 머리 상부(上部)의 반이 잘라져 나가고, 두개골(頭蓋骨)은 떼어져서 뇌수(腦髓)가 밖으로 흘러나와 있었다. 얼굴 가죽은 벗겨져서 눈알만이 대롱거리고 있었고, 전신의 피부는 모두 잘 발라 져서 흡사 종이를 펴놓은 듯이 바닥에 펴져 있었는데…… 그 위에 놓인 채로 모락모락 김을 피워올리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내장들이었다. 이번의 것은 결코 개나 소가 아니었다. 바로 사람의 것이었다. 각종 시체들에서 흘러나온 피로 바닥은 질퍽거리며 끈적거리고 있어, 진소백은 갑 자기 여기가 어디인지조차 기억할 수가 없었다. 설마 이곳이 정말로 유부(幽府)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피어오르는 피 냄새, 섬뜩한 죽음에 대한 공포에 진소백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자, 진 소백은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여기에 온 이유를 생각해 내 었다. 생사의괴를 찾는 일! 진소백은 다시 한 번 시신들을 돌아보았다. 흘러내리는 피는 아직도 따뜻하고 내 장에서는 김이 피어올랐다. 시체의 체온은 빨리 식는다. 하지만 이렇게 피에서 김이 올라온다는 것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다섯이나 되는 시체에서 김이 계속 나오는 것을 보아, 짧은 동안에 이렇게 만든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이 일을 행한 사람의 기술(技術)이 이미 신의 경지에 올랐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은 어떠한가? 진소백의 미간에 은은한 살기가 떠올랐다. 아무리 높은 의술을 지니고 있다 하여도 이런 잔인한 심보를 가진 사람이 과연 살 아 있을 자격(資格)이 있을까? 이런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이, 과연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일까? 진소백은 혼란 스러웠다. 자신에게서 일어났던 살기를 가다듬고 있던 진소백이 눈에 의혹의 빛을 띠고 다시 시체를 쳐다본 것은 잠시 후였다. 무언가 이상한 점이라도 발견한 것일까?


시체를 다시 살펴보던 진소백은 갑자기 그 중의 한 구(軀)에 다가가더니 뇌수를 집어 올렸다. 팍! 진소백의 손에서 뇌수가 터져 나가는 소리였다. 끔찍한 모습! 그러나 진소백은 눈도 찌푸리지 않고, 손에 묻은 뇌수의 조각을 입으로 가져가 삼 켜 버렸다. 그가 실성이라도 해버린 것인가?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두부로 만들어진 뇌수라니!" 그렇다. 진소백이 먹었던 뇌수는 바로 두부로 만들어진 가짜였던 것이다. 진소백이 처음 인피(人皮)라 생각했던 것은 나무 껍질을 무두질하여 만든 것이었고, 그 위에 김을 피워올리던 내장들은 모두 먹음직스러운 음식인 것이다. 귀기스러운 분위기 에 압도당하여,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당연하게 사람의 시신(屍身)이라 단정한 것이다. 물론 가짜 시신의 뒤에 수북이 쌓여진 뼈들도 그런 진소백의 단정에 도움을 주었 지만. 일단 바닥에 놓인 것이 사람의 시체가 아닌 것을 알게 되자 진소백은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슬며시 생사의괴 종도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났다. 음식물을 이용하여 이런 광경을 연출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 시체를 이용하는 것보다 배는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종도의 능력은 진소백의 생각보다 훨씬 높은 것이었다. 하지 만 진소백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장난기! 진소백 자신도 장난치는 것을 좋아했다. 장난을 좋아하는 사람의 삶에는 항상 여유가 있었다. 자신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종도의 능력보다도, 이런 장면을 연출해 낼 수 있는 여유가 더욱 진소백의 흥미를 돋우었다. 그런데…… 장난…… 이라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런 뜻도 없이 이런 것을 꾸미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뜻이 숨어 있을까?' 무언가 숨은 뜻이 있나 하고 시신, 아니, 음식들을 살피고 있던 진소백은 시신 뒤 에 쌓인 뼈들의 모양이 특이한 것에 주목했다. 다섯 개의 뼈 무더기를 합해 보면, 하나의 글자 모양과 비슷하지 않은가? 식(食)! "먹으란 뜻인가?" 아무리 바닥의 시신이 음식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임을 알았다 해도, 그것을 먹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뒤의 갈고리에 달린 동물들의 시체는 진짜였던 것이다. 또한 아직도 떨어 지고 있는 동물들의 피 또한 결코 가짜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의 뇌수와 내장과 눈알을 닮은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 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보통의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왕왕 남들이라면 불가능할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 수 있는 사 람을 만나기도 한다. 다행히도, 진소백은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와득! 쩝! 후르륵!


음식의 모양이 섬뜩해서일까? 진소백의 입에서 나는 소리가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진소백은 아주 맛있 게 시신(屍身), 아니, 음식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음식은 매우 맛이 있었다. 의괴(醫怪)는 진법과 의술뿐만 아니라, 요리에도 일가견을 가진 것 같았다. 특히, 눈알이 특이한 풍미(風味)가 있음을 안 진소백은 다른 것을 젖혀 두고 눈알부터 먹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가 막 마지막 시체의 눈알을 입에 넣고 씹으려 할 때였다. '이게 뭐지?' 음식을 다 먹어 치우자 바닥엔 인피(人皮) 아닌 인피가 드러나 있었는데, 그곳에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글자가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공기와 닿으면 글이 나타나도록 되어 있는 듯하였다. <자네는 이미 두 개의 관문을 돌파했네. 첫 번째 관문은 밖의 운무진이며, 두 번째 관문은 바로 이 목옥 안의 생사혼관(生 死混關)일세. 바닥의 피에서 올라오고 있는 냄새에는 미혼향(米魂香)이 포함되어 있어, 해독제가 포함되어 있는 이 음식을 먹지 않았다면 자네는 이미 쓰러졌을 것이네. 또한 이 글도 볼 수 없었을 테지. 이제 목옥 뒤의 동굴로 오게. 마지막의 지혜관만 통과한다면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네.> * * * 의괴가 지혜관(智慧關)이라 말한 곳은 단순한 동굴이었다. 당연히 무언가 함정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긴장하며 조심스럽게 전진(前進)하던 진소백은 갑자기 동굴이 막히며 벽이 나타나자 당황했다. '이게 뭐야?' 아무런 표식도 없이 끝나는 단순한 사 장여 길이의 동굴. 이게 무슨 지혜관이란 말인가? '분명 무슨 장치가 있을 것이다.' 안력(眼力)을 모아 주위를 살피던 진소백은 천장에 둥그런 홈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홈의 크기와 문양이 어디선가 많이 본 것임도 발견했다. "의괴의 신물(信物)과 크기가 흡사하다." 품안에서 엽혼이 구했다는 신물을 꺼내어 살펴보니, 비단 크기가 비슷할 뿐 아니 라 속에 새겨진 문양(文樣)까지 똑같아서 둘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무얼 망설이겠는가? 찻! 맑은 음성과 함께 뛰어오른 진소백이 신물을 홈에 끼워 넣자, 우르릉`─ 굉음과 함께 동굴의 벽이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와 함께…… "어서 오게. 통관을 축하하네." 창노한 음성이 들려 왔다. '이런, 이거 지혜관이라더니, 뭐 이리 쉬워?' 진소백은 내심 의아해하며 열린 동굴의 벽으로 들어갔다.


3 동굴 안의 벽이 열리며 나타난 석실로 들어간 진소백은 너무 어이가 없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서 오게, 환영하네." 눈을 감고 듣고 있자면, 세속을 초탈한 노인이 입가에 가득 미소를 띠며 환영의 인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구라도 이런 목소리를 들으면 가슴속이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 나 진소백은 가슴이 편안하기는커녕 울화가 치밀어 하마터면 괴성을 지를 뻔하였 다. "선배를 뵙습니다." 노인의 음성에, 당연히 예의를 차리고 고개를 든 진소백의 눈에 보이는 것은 두 마리의 구관조(九官鳥)였던 것이다. "어서 오게, 환영하네." 구관조 중의 한 마리가 뾰족한 입을 열어, 다시 노인의 음성으로 말을 하자 진소 백은 화가 나기에 앞서 신기함을 느꼈다. 두 마리의 구관조는 사람의 말을 할 뿐 아니라 사람처럼 옷도 입고 있었는데, 한 마리는 푸른 옷을 입었고 다른 한 마리는 붉은 옷을 입었다. "누가 아까 나에게 인사말을 했느냐?" 진소백의 물음에 두 새는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청조(靑鳥)가 했네." 청조의 말이었다. "홍조(紅鳥)가 했네." 홍조의 말이었다. 옷의 색이 그대로 새의 이름이기도 한 모양이었다. 귀여운 모습의 새가 늙은 노인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것이 신기하고도 재미있어서, 몇 마디 더 물어 보려던 진소백의 얼굴이 굳어졌다. 새들이 앉아 있는 뒤편의 벽에 씌어진 글을 본 것이다. <생사지간(生死之間).> 그리고 그 밑에 보다 작은 글씨로 적혀져 있는 글을. <홍조와 청조는 다만 두 번의 질문에 대답할 뿐이네. 자네는 그 둘에게 물어 올바 른 길을 찾아오게. 둘 중 올바른 길에는 내가 있네만, 다른 길에는 다만 죽음만이 있네. 명심하게! 홍조(紅鳥)와 청조(靑鳥) 중 한 마리는 오직 거짓말만 하여 진실을 말할 줄 모르 며, 나머지 한 마리는 다만 진실만을 말할 뿐 거짓은 말하지 않네.> 글이 적힌 벽에는 과연 두 개의 문이 있었는데, 모양이 똑같아 눈으로는 결코 어 느쪽이 옳은 길인지를 판단할 방법이 없었다. 남은 방법은 하나뿐, 새들에게 물어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는 거짓말만 하고, 하나는 진실을 말한다고 했으니 도대체 어느 새에 게 물어 보아야 할 것인가? 게다가 자신은 이미 하나의 질문을 했으니 이젠 한 번의 기회만이 남아 있을 뿐이 었다. 진소백은 아까 자신이 한 질문에 대한 새들의 대답을 되새겨 보았다. 두 새는 서 로 자신이 처음 말을 걸었다고 대답했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어떻게 둘 중 어느 새가 참만을 말하는 새인지 가려 낼 수 있겠는가?


'만일 처음 인사말을 한 것이 청조(靑鳥)라면 청조가 진실을 말한 것이겠지만 반 대로 처음 인사를 한 것이 홍조(紅鳥)라면 홍조가 진실을 말한 것이 된다. 문제는 어느 새가 나에게 인사말을 했냐는 것인데……' 생각을 이어나가던 진소백은 골치가 아프기 시작함을 느꼈다. 두 새의 음색(音色)은 너무나 같아, 도저히 구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 슨 방법으로 처음 인사를 했던 새를 구별해 낼 수 있단 말인가? 의괴의 지혜관은 과연 쉽지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머리털이 빠져라 고민하던 진소백은 돌연 하나의 생각을 떠올렸다. 새는 두 마리가 있다. 둘 중 하나의 말은 참이고 나머지 하나의 말은 거짓이다. 어느 새가 참을 말하는 지는 모른다. 하지만…… 꼭 둘 중 참을 말하는 새와 거짓을 말하는 새를 구별해야 할까? 두 마리의 새를 한 번에 묶어 생각할 수는 없을까? '만일 두 새의 말을 한 번에 묶어 생각할 수 있는 질문을 한다면……' 그랬다. 진소백은 머릿속이 훤히 밝아지는 것 같았다. 해답은 두 새 중 진실조(眞實鳥)를 구별해 내는 데 있지 않았다. 구별하지 않고 두 새를 하나의 틀 속에 두는 질문을 생각해 내는 것! 바로 그것이 이 관문의 해답이었던 것이다. 진소백은 청조(靑鳥)에게로 가서 물었다. "만일 내가 홍조에게 물으면 어느 문이 옳은 것이라 대답하겠느냐?" 청조는 대답을 했고, 진소백은 청조가 대답한 반대쪽의 문으로 망설이지 않고 들 어갔다. 둘 중 어느 새가 진실을 말하는지의 구분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진소백의 질문은 교묘해서 두 마리 새의 대답을 모두 담고 있었기에 그 대답은 항상 거짓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음과 양의 두 수를 곱하면 항상 음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어느 수가 음이고 어느 수가 양인지는 몰라도 그 결과가 음이란 것은 변하지 않는 이치였다. 만일 청조가 진실을 말하는 새였다면 홍조가 답할 거짓된 길을 진소백에게 그대로 말했을 것이고, 청조가 거짓을 말하는 새였다면 홍조가 말할 진실된 길을 거짓으 로 바꾸어 알려 주었을 것이다. 비록 결과를 놓고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이런 생각을 처음 생각해 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짓을 음이라 하고 참을 양이라 한다면, 음과 양의 이기(理氣)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의 틀 속에 두는 생각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음양 이전에 존재하는 일원(一元)이 아니겠는가? 진리와 도는 거대하 고 추상적이었지만, 현실의 응용은 또한 의외로 간단했다. 청조는 우측을 대답했고, 진소백이 들어온 곳은 좌측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다시 이어지는 석조의 통로! 십 장 정도를 걸어가자 다시 문이 나타났다. 역시 돌로 지어진 거대한 문. 굳게 닫힌 문 위에는 다시 하나의 글이 씌어 있었다. '무엇이 충분한가?' 그 아래에는 천(天), 지(地), 현(玄), 황(黃)으로 이어지는 천자문(千字文)이 적혀 있 었다.


천자문의 글은 주로 숫자를 나타내는 데에 사용된다. 천(天) 자는 일(一)에, 지(地) 자는 이(二)에, 하는 식으로 대응되는 것이었 진소백은 지체없이 천 자를 눌렀다. 통로를 통과하기 위한 질문은 하나로 충분했던 것이다. 우릉`─` 문이 열리고 있었다. 사방에는 계절에 맞지 않게 기묘한 형태의 꽃들이 피어나 있었는데, 그 꽃들의 향 기를 누르며 담담히 떠도는 것은 다름 아닌 약향(藥香)이었다. 한 노인, 키가 작은 듯하지만 전신에 피어나는 자연스러운 기도(氣度)가 전체적으 로 작다는 생각을 들게 하지 않는다. 진소백으로서는 뜻밖이었다. 세간(世間)에 괴인으로 알려진 생사의괴가 이런 초탈한 기도의 노인이었다니! "어서 오게. 내가 종도일세." 진소백은 공손히 답하였다. "진소백이 종 선배님을 뵙습니다." 종도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내가 여기에 관(關)을 설치하고 사람을 기다린 지 벌써 십 년이 지났지만 세 가 지의 관문을 만족스럽게 돌파한 것은 자네가 처음일세." 진소백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자 종도는 말을 이어나갔 "처음의 진법은 오히려 통과하기가 쉬웠을 것이네. 진법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 면, 시간을 두고 연구한다면 통과할 수 있겠지. 보다 어려운 것은 두 번째의 관문 이라네. 바로 유부관이지! 만일 들어온 사람의 의도가 불순한 것이라면 그는 결코 그 관문을 통과할 수 없을 것이네." 과연 그렇다고 진소백은 생각했다. 불순한 의도, 다시 말해 살의(殺意)를 품고 들어온 사람이라면 유부관의 시신들이 가짜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살기(殺氣)를 품은 자라면 그 살기가 정확한 판단을 방해할 것이 기 때문이었다. 또한 시신(?)을 먹지도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미혼향을 벗어날 수도 없었을 것이 다. "세 번째 관문은 더욱 어렵지. 만약 잘못된 길을 선택한다면 그 즉시 기관이 발동 하여 누구든 생명을 부지하지 못할 것일세. 만일 통로 내의 질문에 잘못 대답했을 때도 마찬가지네."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찌 됩니까?" 종도는 진소백의 질문이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아까 그 시신을 보지 못했는가?" 진소백은 종도의 장난기 섞인 말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보았습니다. 무척 맛이 있더군요." "그럼 되었지 않은가?" "……미혼향에 쓰러진 사람들은 밖으로 보내집니까?" 종도는 문득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노부는 이곳에 은거하며 생사의괴의 소문을 내어 인재를 구해 보고자 했네!" 뜻밖의 말이다. 생사의괴의 소문이 생사의괴 자신이 퍼뜨린 것이었다니! 종도의 말은 계속 이어진 다.


"모두 십오 개의 신물을 만들어 강호에 퍼뜨렸네. 자네는 열다섯 번째, 즉 마지막 으로 온 사람이고 관문을 통과한 세 번째 인물이네. 하지만 날 본 사람을 자네가 처음이지." "관문을 통과한 사람이 저 이전에 두 명이나 있었다면…… 그들은 왜 선배님을 만 나지 못했습니까?" 종도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옆에 서 있는 나무의 한 부분을 살짝 쳤다. 그러자 어디선가 창노한 노인의 음성이 들려 오는 것이다. "어서 오게, 환영하네." 누구의 소리인지 진소백은 바로 알아 낼 수가 있었다. "이 소리는……" "그렇네. 구관조가 내는 소리지. 사실 아래의 두 통로는 어느쪽이 바른 길인지 정 해져 있지 않네. 만일 지혜관에 도달한 사람이 올바른 질문을 한다면 내가 여기서 전음통을 통해 듣고서 관문을 조절하지. 그 두 사람은 다만 운(運)으로 길을 택했 을 뿐, 올바른 질문을 하지 못했지." 진소백은 그제서야 왜 자신이 처음으로 종도를 보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아직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 말인가? 당연히 그들은 밖으 로 내보내지지. 물론 이곳의 기억을 하지 못하도록 망신단(忘神丹)을 복용한 채 로." "망신단을 복용한다면 백치가 되는 것 아닙니까?" 종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자네는 의학에도 제법 일가견이 있군. 물론 망신단에는 그런 폐해가 있네. 하지만 약효의 정도를 잘 조절한다면 최근의 일만을 기억 속에서 지울 수도 있다네." 진소백은 이 종도란 인물의 능력이 상상을 훨씬 뛰어넘음을 절감(切感)할 수 있었 다. 그리고 그 인물됨이 결코 강호의 소문과 같지 않으며 오히려 매우 정대(正大) 하다는 것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진소백이 이윽고 고개를 들더니 물었. "선배께서는 제게 당부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고충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 오. 제가 성심(誠心)으로 받들겠습니다." 이건 무슨 소리인가? 진소백은 엽평의 치료를 부탁하러 여기에 온 것인데 오히려 종도의 부탁을 들어주 겠다니. 종도의 얼굴엔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자네는 이미 알았는가?"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진소백은 엽평의 치료를 위해 여기에 왔고 또 그 부탁을 종도에게 해야 할 입장이 다. 그런데 느닷없이 부탁을 들어준다니. 주객이 전도된 말들이 아닌가? * * * 종도의 관문(關門)은 모두 세 가지였지만, 그 속을 흐르는 것은 단 하나였다. 바로 통관자(通關者)의 지식(知識)과 지혜(智慧)를 시험(試驗)하는 것! 첫 번째는 그 지 식을 시험했고, 두 번째는 지식과 지혜가 당황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발휘되는지를 시험했고, 세 번째는 종합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시험했던 것이다. 종도 정도의 능력을 지닌 기인(奇人)이 이런 복잡한 일을 꾸며 능력이 있는 인재 를 구하는 이유라면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제자감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겠고, 다른 하나는 무언가 자신의 힘으로는 곤란한 일이 있다는 것. 그러나 분위기로 보아서는`─`종도가 계속 자신에게 반경칭(半敬稱)을 쓰고 있지 않은가?`─`첫 번째 이유는 당연히 아닌 것 같으니…… 해서 진소백은 종도에게 자신에게 부탁할 일이 있는지를 정중히 물었던 것이다. 자신 또한 종도에게 엽평 의 일을 부탁해야 하지 않는가? 진소백은 다른 사람에게 신세를 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만일 종도(鐘塗)가 자신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면 서로가 돕는 것 이니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셈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진소백이 잊고 있는 것이 있으니…… 자신의 행동 또한 엽혼과의 우정을 위한 무조건적인 것이 아닌가? 놀람의 빛을 가라앉힌 종도가 말했다. "좋군, 정말 좋아. 자네의 환자는 내가 책임지겠네. 자네…… 진소백이라 했나? 한 가지만 약속해 주게. 지금부터 일 년 후, 여기에 표시된 곳으로 꼭 와주게. 자네가 무슨 일을 도와야 할지는 그때가 되면 알게 될 걸세." 말과 함께 종도가 품에서 꺼낸 것은 지도 하나와 작은 금낭(錦囊)이었다. 진소백은 말없이 지도와 금낭을 받아 품안에 갈무리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진소백은 이 일로 인해, 엽혼과의 우정과 종도와의 인연으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큰 격변에 휩 싸이게 될지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어떤 일이건 과거(過去)의 조그마한 선택이 후에 가서는 엄청난 일이 되어 자신의 앞에 나타나기 마련이 아닌가? * * * 진소백은 다시 엽평에게로 떠났다. 얼마 후면 엽평은 이곳으로 옮겨져서 종도에게 치료를 받게 되리라. 치료에 필요 한 약재(藥材)를 구할 수 있는 돈은 이미 종도에게 주었으니, 종도의 능력(能力)이 라면 엽평이 완쾌할 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종도,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누구이기에 이렇게 많은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또 그런 능력을 가진 인물이 부탁(付託)할 일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 까? 그러나 이런 것은 아직 밝혀질 일이 아니었다. 일 년 후. 그때 가서야 비로소 밝혀질 일인 것이다. 어쨌든 하나는 확실했다. 종도(鐘塗)! 그의 운(運)이 매우 좋다는 것. 어떤 부탁이든 진소백이 맡는다면 안심해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 제 4 장 절명위기(絶命危機) 엽혼의 집, 아니, 지금은 엽평이 혼자 있는 집은 인가(人家)와 조금 떨어진,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엽평이 병이 있어 번잡(煩雜)한 것이 좋지 않음을 안 엽혼이 안배한 장소였던 것 이다. 인가와 떨어져 있어 오히려 남의 눈에 띄기 쉬움을 알기에 항상 먼 곳으로 돌아 집으로 돌아오는 수고로움을 엽혼은 감수했 무공을 익힌 사람의 이목(耳目)은 범인에 비해 훨씬 영민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엽평은 아마 지닌 바 무공을 거의 잃었음이 틀림없었다. 지금 밖에서 기척을 죽이며 움직이고 있는 네 그림자! 비록 조심스레 움직인다고 는 하나 무림인이라면 약간의 낌새는 챌 수 있어야 정상이었다. 엽평은 큰 솥을 불위에 걸었다. 형이 없는 지금, 하지만 저녁은 먹어야 하지 않는


가? "후우`─`" 비록 크다고는 하나 솥에 불과했다. 무공을 지니고 있을 때는 그 무게조차 별로 느껴지지 않을 물건인데…… '겨우 이런 것을 들고서도 숨을 몰아쉬어야 하다니……' 엽평은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이윽고 솥 안의 물이 끓기 시작하자 엽평은 집 안에 남아 있던 잡다한 음식물들을 잘라 솥 안에 넣기 시작했다. 음식은 곧 끓어올라 누런 죽이 되어 갔다. 그는 어린 시절 형과 함께 집집을 떠돌며 구걸하다시피 하여 끼니를 때우던 때를 생각했다. 그때 먹었던 음식과 이것은 닮아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자 이상하게도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이런 음식을 먹는다 는 것이 엽혼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엽 평은 엽혼의 고생(苦生)을 나누어 가지는 느낌이 되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 지의 사문(師門)에서 영문도 모르고 쫓겨난 후 그들 형제의 고생은 정말 극심했다. 자신도 가전(家傳)의 무공을 어느 정도 익혔고, 형 엽혼의 무공은 이미 높았지만, 형은 결코 무공을 돈을 버는 데는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러다 형은 사부(師父)를 만났다. 항상 인자했던 노승(老僧)! 그분의 밑에 있을 때 형이 얼마나 행복해했었는지를 엽평은 기억해 냈다. 그랬던 형이 사부를 배신한 것은 바로 자신 때문이었다. 이 몸! 이젠 솥 하나 들어올리는 것조차 힘이 부칠 정도로 연약해진 자신의 몸! 이 몸을 지키기 위해 형은 너무도 많은 희생을 했다. 엽평은 불을 껐다. 기포를 일으키며 끓던 소리가 점점 조용해졌다. 이윽고 죽의 표면이 잔잔해지자 엽평은 국자를 들어 죽을 뜨려 했다. 먹어야 했다. 자신의 몸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형의 희생(犧牲) 위에 서 있는 것인 까닭이다. 막 죽을 뜨려던 엽평의 몸이 흠칫했다. 죽 위로 퍼져 나가는 작은 동그라미들! 어디에선가 움직임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이런 것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엽평의 몸이 솥 옆으로 넘어질 듯 비켜서는 것과 등뒤의 문이 열리며 복면인 하나가 달려 든 것은 동시였다. 손에 든 것은 검! 그러나 그 검은 엽평의 몸에 닿지 못했다. 대신 복면인이 뒤집어쓴 것은 뜨거운 죽이었다. 엽평이 비켜서며 죽그릇을 던져 버린 것이다. "으악, 뜨거워!" 물에 데는 것보다 죽에 데는 것이 훨씬 뜨거우며 아프다. 복면인은 괴로워했다. 그 러나 엽평이 안도(安堵)의 숨을 내쉬기도 전에 다시 양쪽의 창문이 부서지며 다른 복면인 둘이 더 날아왔다. 이번엔 모두 맨손!


그러나 이것이 더욱 무섭다. 무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무공에 자신이 있다는 의미이므로. 비켜섰던 엽평의 몸이 다시 뒤로 넘어지며 탁자의 아래 부분을 걷어 찼다. 주르르` ─ 뒤로 밀려나는 몸! 달려든 두 복면인이 헛손질을 하고, 밀려난 엽평의 몸이 처음 나타난 복면인이 떨 어뜨린 검을 잡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츠팟! 엽평의 손에 들린 검이 검화를 피워올리며 맨손의 두 복면인 중 한 명의 천돌혈 (天突穴)에 꽂혔다. 죽어 가는 복면인의 눈에 경악의 빛이 드러났다. 그는 자신이 잡으러 온 이 소년 이 무공을 지니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공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엽평의 임기응변(臨機應變)과 빠른 반응만은 여 전했다. 순간적으로 한 명의 적을 처치한 엽평, 그러나 방심할 수가 없었다. 죽을 뒤집어쓰고 화상(火傷)을 입었던 복면인이 정신을 차려 다시 엽평에게 달려들며 머리를 향해 발길질을 가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죽을 뒤집어쓰고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거의 동시(同時)였지만, 장내의 변화 는 그보다 훨씬 빨랐다. 그리고 엽평은 지금 누워 있었다. 머리를 향해 달려드는 적의 일퇴(一腿)! 급히 옆으로 몸을 굴려 그 일퇴를 피하는 엽평! 적의 발은 허공을 갈랐고, 그 바람에 몸의 중심을 잃었다. 엽평이 지금 비록 내공 을 상실했다고는 하나, 한때 기재라 칭송받던 소년이었다. 이자의 무공이 그리 높 지 않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나중에 나타난 복 면인들 중 아직 살아 있는 자였다. 엽평이 옆으로 구르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엽평의 명문(命門)을 향해 찔러 오는 복면인의 손! 이런 자 중의 하나를 먼저 처치한 것은 천행(天幸)이라 할 수 있었다. '피할 수 없다!' 엽평의 뇌리를 스쳐 간 생각! 이건 정말 피할 수 없어 보였다. 피할 수 없다면 다른 길을 택해야 한다는 생각이 일어남과 동시에 엽평의 다리가 가슴께로 오무려졌다. 펑! 적의 장세(掌勢)가 다리를 두드리자 엽평은 전해져 오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아마도 오른쪽 다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왼쪽의 다리뼈가 부러진 듯했다. 그러나 장세에 의해 밀려가면서, 엽평은 죽을 뒤집어쓴 복면인을 공격할 수가 있 었다. 스걱! 장세(掌勢)에 의해 밀려나는 힘과 엽평이 사력(死力)을 다한 힘이 합쳐져 휘둘러지 는 검이 복면인의 허리를 이등분(二等分)하는 소리였다. 남아 있는 한 명은 눈이 뒤집혔다. 분명 자신들을 보낸 사람은 엽평이 무공을 못 한다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이 상 황은…… 양분된 허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막(幕)을 형성하여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엽평이 자신의 일장을 받고 미끄러져 나가며 검을 휘두르고 벽에 부딪혔 으므로, 혈막(血幕)이 생긴 곳과


복면인이 서 있는 곳, 그리고 엽평이 밀려난 곳은 일직선(一直線)을 이루고 있었 다. 혈막(血幕)이 서로의 시선을 가릴 것은 당연한 이치! 그러나 이미 놀람과 분노로 눈이 뒤집힌 복면인은 시야(視野)가 가려진 것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이 새끼`─ 죽엇!" 노갈하며 혈막 속으로 뛰어드는 복면인. 양장(兩掌)에는 공력이 실린 경풍(勁風)이 피어오르는데…… 꽈꽝`─ 복면인의 손이 벽을 부수며 나는 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복면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무언가 잘못됐다.' 그렇다. 분명히 잘못되었다. 복면인이 쌍장을 날린 곳에는 이미 엽평이 없었다. 엽평은 벽에 닿기 무섭게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다시 옆으로 굴러 나갔던 것이다. 허리에서 뿌려지는 혈막 에 서로를 보지 못하는 것을 무시한 복면인의 치명적인 실수(失手)! 그리고 목숨을 건 싸움에 있어서 실수의 끝은 죽음이었다. 실수했다고 느끼며 얼굴을 돌리는 복 면인의 동공(瞳孔) 가득히 확대되어 오는 것이 있었다. 검날의 각이 진 앞 부분! 복면인은 전신(全身)이 검날에 빨려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푹! 검이 마지막 복면인의 얼굴에 박히는 소리는 섬뜩했다. 그러나 엽평에게 있어 그 소리는 자신이 위기를 넘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엽평은 비로소 왼쪽 다리의 골절 (骨折)이 생각보다 심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가슴속에서는 비릿한 기운이 올 라오고 있었다. "쿨룩, 쿨룩!" 무리를 했다. 이미 절맥이 발병하기 시작하여 조금도 무리를 해서는 안 되는 상황인데 조금 전 의 일전은, 설혹 건강한 사람이었다 해도 타개하기 힘든 것이 아니었던가? 가슴이 끊어져 나가는 통증! 그러나 묘하게도 지금 엽평의 가슴속에 스멀스멀 스며드는 것은 일종의 쾌감(快 感)이었다. 이런 긴장감! 그리고 생사를 건 격투! 엽평은 자신이 무공을, 또한 비무를 얼마나 좋아했던지를 기억해 냈던 것이다. 의 식이 흐려져 왔다. 그러나 이 방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누군지는 몰라 도 적은 자신이 있는 곳을 알고 있었다. 처음 보낸 자들이 실패한 것을 알게 되면 다시 사람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이자들이 자신을 노리는 이유를 엽평은 아무리 생각해도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을 노리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은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면 이유는 오직 하나. 엽혼과의 일일 것이다. 엽혼을 노리는 자가 있다면 엽평은 그야말로 효과적인 인 질(人質)이 될 것이므로…… '형에게 짐이 될 수는 없다. 어서 여기를 피해야 한 다.' 그러나 부러진 다리와 가슴의 통증(痛症)은 움직임을 방해했고, 엽평은 거의 기다시피 하여 집을 빠져 나왔다.


2 엽평이 밖으로 나와서 본 것은 불행히도 또 다른 복면인이었다. 침입한 네 명 중 에서 남은 하나. '대단한 고수!' 엽평이 그를 보고 처음 느낀 것은, 상대방이 대단한 고수라는 것이었다. 방에 뛰어 들어온 세 명처럼 임기응변으로 상대할 수 있는 수준(水準)이 아니었다. '결국 잡히고 마는가?' 엽평의 눈빛이 흐려졌다. 자신이 잡히는 것보다도 이자들이 자신을 미끼로 형을 위협할까 봐 걱정이었다. 그럼에도 엽평이 복면인을 공격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상대방이 지금 자신 의 몸으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능력의 소유자임을 느낀 탓이었다. 능력이 없으면서도 억지로 시도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만 못함을 알기 때문이었 다. 복면인은 말없이 엽평의 앞에 서 있었다.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기도(氣度)에 주위의 공기마저 눌린 듯, 질식할 듯한 침묵 (沈默)의 무게에 눌린 분위기(雰圍氣)를 엽평은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고수가 왜 아까의 습격에는 가담하지 않았을까? 또 왜 말없이 자신을 보고 만 있는 것인가? 한참 엽평을 바라보던 복면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네가 엽평이냐?" 질문을 던진 복면인은, 그러나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 엽평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난 구천(仇賤)이라 한다. 너는 나와 함께 가야겠다." "가지 않겠다면 어쩔 생각이오?" 복면인 구천의 눈빛이 강해졌다. "넌 힘이 없으니 선택할 권리도 없다. 가야만 한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힘이 없지는 않을 것이오." "그렇다. 네 눈빛은 아직 죽지 않았으니 언젠가는 힘을 얻게 되겠지." "그때는 내가 당신을 가만두지 않겠소." 구천의 눈빛은 더욱 강해졌다. "기다리고 있으마." 엽평은 구천의 행동에서 어딘가 기이(奇異)함을 느꼈다. 아무리 보아도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일까? 어쨌든 하나는 확실해 보였다. 오늘 자신이 구천의 손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불가능하리란 사실…… 그러나 세상 일이 어찌 짐작대로만 될 것인가? * * * 사람에게 다가오는 일들. 예측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을 우리는 운명(運命)이라 부른 다. 지금 이 순간, 금청청이 여기에 나타난다면 그것은 운명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정한 필연일까? 어쨌든 금청청은 여기에 나타났고, 엽평이 당하고 있는 곤란(困難)을 보았다.


금청청은 그녀의 아버지 금사진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계모와의 일 때문인 듯했지만, 사실 그 이유는 먼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어머니 방응향(芳凝香)이 세상을 뜨던 날! 그날도 자신의 처(妻)의 죽음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아버지, 금사진의 무정(無情)이 금청청에게 한(恨)을 갖게 했던 것이다. 그날 이후 금청청은 아버지를, 아니, 강하다 자부하는 세상의 모든 남자를 증오하 기 시작했다. 무공에 미친 듯이 탐닉해든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이러한 금청청이 여기에 나타난 것은 엽평으로서는 행운이었다. 엽평을 핍박하고 있는 구천! 강한 남자에 대해 무의식(無意識)적인 거부감을 지닌 금청청이 그냥 넘길 광경이 아니었다. "소년과 너는 무슨 관계냐?" 다짜고짜 나오는 것은 하대(下待)! 그러나 구천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는 소저(少姐)가 관여할 바가 아니오." "흥!" 코웃음을 친 금청청이 이번엔 엽평에게 물었다. "너는 이자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엽평으로선 물에 빠져 있다 큼직한 통나무 하나를 주운 격이었다.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다만……" "다만 무엇이냐?" "다만 낭랑(娘郞)께서 화를 당하실까 두려우니 어서 피하십시오." 엽평의 걱정하는 듯한 이 말은 오히려 금청청의 자존심(自尊心)에 불을 붙였다. "흥, 누가 감히 내게 화를 끼친다는 말이냐. 나는 꼭 참견을 해야겠다." 엽평은 과연 금청청이 고수자(高手者)임을 몰라보고서 이런 말을 한 것일까? 아니 면……? 금청청은 실행(實行)이 결코 말에 뒤쳐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참견을 해야겠다'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품에서도 비도가 쏘아 져 나왔다. 이전에는 젓가락을 이용해 선보인 바 있는 절기! 그러나 지금은 젓가락이 아닌 진짜 소도(小刀)를 이용한 것인지라 그 속도가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쌔액!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비도가 날아가는 것을 본 사람의 상상 속에서만 들리는 소 리였다. 날아가는 속도가 워낙 빨라, 비도(飛刀)가 구천의 눈앞에 도착할 때까지 아직 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있었다. 금청청은 비도(飛刀)를 좋아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적의 피를 묻히지 않을 수 있 으므로! 그리고 지금까지 비도를 날려 별로 실패해 본 경험이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목 에 비도를 꽂은 채 쓰러지는 구천의 모습을 상상했었다. 하나…… 결과는 달랐다. 캉! 어느새 뽑아 든 구천의 검날이 비도를 하늘로 쳐내면서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호선(弧線)을 그리며 하늘로 날려가는 비도(飛刀)! 그리고 비도를 막아 낸 구천의 휘어진, 마치 이리의 이빨 모양과도 같은 낭아도(狼牙刀)! 비도가 날아오른 것과 다시 두 개의 비도가 금청청의 품에서 벗어난 것은 거의 동시였다. 금청청으로서 는 구천이 비도를 막아 냄을 보고 던져 낸 것이었지만, 옆에서 관전하는 사람이 보기에는 금청청이 거의 동시에 세 개의 비도를 이어서 던진 것으로 보였을 것이 다. 두 개의 비도(飛刀)! 하나는 다시 구천의 가슴께로 향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 떠오른 처음의 비도를 노리며 날아갔다. 이 중에서 무서운 것은 하늘로 향하는 비도였다. 구천은 물론 자신의 가슴을 향하는 비도를 쳐낼 수 있을 것이다. 처음의 비도 역 시 쳐냈으므로. 그러나 구천이 비도를 쳐내기 직전, 하늘에서는 두 개의 비도가 충돌하게 될 것 이다. 하여 방향을 바꾼 비도는 자신에게로 떨어져 내리리라! 짐작하기가 거의 불 가능할 방향으로. 그리 되면…… '그렇다면 피하기 어렵다.' 생각과 동시에 구천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처음의 비도를 쳐내고, 날아오르는 두 동작의 연결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마치 처음부터 비도를 쳐내는 힘을 빌어 뛰어오르기로 정한 듯이 보였다. 금청청의 비도가 아슬아슬하게 구천의 발 아래를 스치며 지나갔고, 그와 동시에 구천의 낭아도는 처음 하늘로 올랐던 비도(飛刀)를 다시 한 번 쳐내고 있었다. 이미 속도를 잃어 천천히 떨어지는 칼을 쳐내는 것은 구천 정도의 고수에게는 그 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캉! 쌔액! 처음의 소리는 구천이 비도를 쳐내며 나는 소리였고 두 번째의 소리는 구천이 쳐 낸 비도가 금청청을 향해 날아가면서 내는 소리였다. 칼로 비도를 쳐내어 방향을 조절한다는 것은 아무리 고수라 할지라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 그러나 힘을 잃고 공중에 떠 있는 것을 쳐내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 랐다. 금청청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어렸다. 그녀는 여태까지 이 정도의 고수를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비도! 그리고 쾌속(快速)의 비도를 보며 느끼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 비도가 바람을 가 르는 소리는 지금 구천의 귓가에서도 들려 오고 있었다. 구천이 쳐낸 비도를 노리 며 날아오던 비도가 있지 않았는가? 구천이 자신의 목표물을 쳐내며 공중에 떠오르자, 그 비도는 마치 처음부터 구천을 노리고 쏘아진 것처럼 보여졌다. "흡!" 한 소리 급박한 호흡과 함께 구천의 몸이 허공에 뜬 채로 옆으로 뉘어졌다. 허공 에서는 힘을 받을 곳이 없기 때문에 구천의 이러한 신법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 다. 쉭! 비도(飛刀)는 아슬아슬하게 구천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며 그의 뺨에 한 줄기의 피 띠[血線]를 길게 만들었다. 그리고 구천의 몸은 다시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금청청의 허리가 휘어지며 등에 매어 두었던 검이 환상(幻像)처럼 뻗어 나와 구천


이 쳐낸 비도를 다시 감아 나간 것은 이와 동시였다. 환상인 양 금청청의 검끝에 서 피어오른 매화 형태의 검화(劍花)는 비도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소리조차 내 지 않은 채 비도의 기세를 무력화시켰다. "매화검(梅花劍)! 화산(華山)의 제자더냐?" 땅을 박찬 구천이 폭풍처럼 금청청을 향해 덮쳐 갔다. 매화검! 이십사수(二十四手) 의 매화검법(梅花劍法)! 화산파(華山派)가 자랑하고 있는 검법의 하나였다. 금청청 은 화산에서 무공을 익혔다고 하지 않았는가? 구천이 금청청에게 달려드는 기세는 흡사 굶주린 이리가 먹이를 노리고 질주하는 것 같아, 손에 쥐고 있는 낭아도(狼 牙刀)와 잘 어울렸다. "낭아도와 천랑도법(天狼刀法)! 네놈은 천랑파와 무슨 관계냐?" 외치고 있는 금청청의 검끝에서는 다시 매화 문양(文樣)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엔 아까와는 판이(判異)한 기세! 부드럽게 감싸 가던 좀 전의 기세와는 다르게 매화꽃이 폭풍 같은 기세로 쏘아 가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매화검의 절기인 매화노방(梅花怒放)이었다. 기세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구천이 도를 뒤집어 옆으로 쓸어 가자, 매화검의 기세를 슬쩍 비켜서며 구천 의 몸이 횡(橫)으로 날아갔다. 야랑횡비(野狼橫飛)!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정해진 것인 양 금청청의 측면(側面)을 노리며 짓쳐 드는 구천의 도(刀)가 싣고 있는 기세는 다름 아닌 신랑토설(神狼吐舌)이었다. 오직 한 점을 향해 짓쳐 드는 쾌도! 힘과 빠름을 겸비한 이 일초를 금청청은 변(變)을 이용하여 맞아 나갔다. 검끝에 서만 피어나던 매화 형태의 검화(劍花)가 이번엔 허공 가득 날리기 시작했다. 허공에 무수히 낙화하는 매화는 구천의 도를 효과적으로 막아 내고 있었다. 매화 분분(梅花粉奮)! 매화 가루가 허공에 휘날리며 상대의 공세를 휘감아 가는 변(變)의 초식! 구천은 분분히 날리는 매화꽃 곳곳에 강한 경기(勁氣)가 숨어 있어 검을 진행시키기가 어 려움을 느꼈다. 속으로 감탄의 마음이 든 것도 이와 동시였다. '여자의 몸으로 이와 같은 무공을 구사하다니!' 그러나 마음속의 감탄은 지금의 싸움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구천의 낭아도가 잇달아 세 번 회전하여 회전력(回轉力)을 일으키며, 금청청의 매 화분분 일초를 와해(渦解)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세 번 회전으로 상대의 경기를 흩뜨리는 이 초식이야말로 천랑도법(天狼刀法)의 낭검삼선(狼劍三旋)이 아닌가! 자신의 매화분분이 소리없이 흩뜨려지는 것을 보자, 금청청도 초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매화토염(梅花吐艶)! 구천의 신랑토설(神狼吐舌)과 일견 비슷해 보이는 이것은 역시 공격만을 위한 초 식이었다. 내공을 동반하고서 짓쳐 나가는 검날이 공기를 가르는 섬뜩한 소리! 구 천도 급히 도를 천랑추뢰(天狼追雷)의 식으로 변경하여 마주쳐 나갔다. 꽈릉!


검과 도가 부딪치는 소리이다. 고수끼리의 싸움에서는 서로의 병기가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경우가 드물었다. 상 대방의 공격을 흘려 보내는 것을 무가(武家)에서는 권(圈)이라 하는데, 고수라면 이에 통달해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다만 사삭, 하는 미약한 소리가 있을 뿐, 이런 종류의 굉음(轟音)이 일어나 지는 않는데, 직접적인 충돌에는 양패구상(兩敗俱傷)의 위험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 이다. "웃!" "음!" 서로가 비슷한 실력의 고수들이 직접적인 대결을 벌인 결과는 항상 비슷하다. 구 천과 금청청은 가슴을 비집고 올라오려는 핏줄기를 억지로 삼켰다. 이런 대결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금청청의 눈빛이 놀람으로 은은히 떨렸다. 대단한 자! '어린 소년을 핍박하던 자의 무공이 이리도 높다니!' 그러나 어찌 구천의 뇌리에 흐르는 놀람에 비하겠는가. 자신과 당당히 맞대결할 수 있는 인물이 일개 여인이라니! 둘의 싸움은 놀랍기 그 지없어 엽평은 가슴의 통증마저 잊을 지경(地境)이었다. 가슴을 부여잡고 앉아 있 는 한 소년과 서로를 마주보며 선 남녀 두 고수! 그리고 둘 사이를 스쳐 가는 겨 울 바람 한 줄기! 바람도 차가웠지만 검도 차가웠다. 검을 쥐고 있는 자들의 마음은 더욱더 차가웠다. 그리고 이들의 대치(對峙)는 어이없게도 갑자기 나타난 일단의 거지들로 인해 깨 졌다. "엽평 소형제, 괜찮으신가?" 먼 거리에서 외치는 소리인데도 귓가에 뚜렷이 들려 왔다. 무공을 지니고 있는 거 지! 바로 개방의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지닌 바 무공 또한 약하지 않은 듯 달려오는 속도들이 매우 빠른데…… 구천의 두 눈에 당혹함이 스쳤다. 이런 상황에서 개방의 인물들이 가세한다면 결과는 뻔한 것이 되리라. 상황을 판 단한 구천은 지체없이 금청청에게 일도를 쏟아 내었다. 교랑과월(巧狼過月)! 금청청이 마주 일검을 쏘아 내자, 정말로 교활한 이리가 달을 지나치듯 구천은 금청청의 옆을 비스듬히 스쳐 물러났다. "흥!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노해 외치는 금청청이 다시 내뿜은 일초, 그러나 정교하지 못하여 오히려 구천의 도주를 도와 준 꼴이 되고 말았다. 퍼펑! 검과 도가 부딪치는 소리가 이리도 둔탁한 것은 구천의 일초가 힘을 빌어 달아나 기 위한 허초(虛招)임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승부는 다음으로 미룹시다, 소저!"


구천은 사라졌다. 겉으로 보기에 동수(同手)로 보였던 좀 전의 승부는 사실 구천의 우세였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금청청이 내상(內傷)을 입은 데 반해 구천은 피육(皮肉)의 상처일 뿐, 내상은 없었으므로. 진실로 동수를 이루었다면 어찌 구천이 그리 쉽게 떠나갈 수 있었겠는가? 구천이 떠난 것과 사종쾌가 도착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개방의 사천분타주 광풍 개(狂風 ) 사종쾌(司綜快)! 그리고 사천분타 소속의 개방 고수 너댓 명. 그들이 도착하며 본 것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그러나 또한 얼음같이 차가운 여인이 입가에 한 줄기 피를 흘리며 서 있는 모습과, 비로소 안심하며 정신을 잃 어 가는 엽평의 모습이었다. "엽 소형제!" 외치며 달려오는 사종쾌를 보며 엽평은 비로소 안심하고 의식의 끈을 놓을 수 있 었다. 3 엽평은 아직 의식을 잃고 있었다. 흉험했던 싸움! 절맥으로 이미 지닌 바 무공을 거의 잃어 가는 한 소년이 감당하기엔 힘에 부친 일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진소백의 음성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이제 돌아왔고, 와서 처음 들은 것은 엽평이 습격을 당했다는 것이다. 진소 백의 질책을 받은 사종쾌의 고개가 더욱 수그러들었다. "제 잘못이 큽니다. 적도 (敵徒)들의 유인에 넘어갔습니다." 사종쾌의 말은 간단했지만 진소백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원래 그는 유유곡으 로 떠나기 전, 개방의 사천분타를 총괄하는 사종쾌에게 부탁하여 엽평의 거처를 지키도록 했었다. 그런데 엽평을 습격했던 자들은 사종쾌와 개방 고수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고, 그사이에 엽평을 습격했던 것이다. 사종쾌의 나이는 젊다. 그러나 이런 나이에 개방의 분타주에 올랐다는 것은 그에게 능력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인데…… 그런 사종쾌가 그렇게 쉽게 유인을 당하다니. "아무리 그래도 엽평 주위에 한 명도 남겨 두지 않았단 말이냐?" 사종쾌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용(阿勇)과 아칠(阿七)을 남겨 두었습니다만, 그만 적도들에게……" 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다. 진소백의 얼굴 또한 어두워져 갔다. 아용과 아칠은 결코 무능하지 않았다. 그들은 복면인이 침입함을 알았고 대항하려 하였으나, 뒤이어 덮쳐 오는 항거 불 능의 도기(刀氣)를 느꼈었다. 구천의 낭아도(狼牙刀)! 하지만 그들의 대항으로 생긴 미미한 진동이 엽평의 죽그릇을 흔들리게 했고 결


과적으로는 엽평을 구하게 된 셈이었다. 사람들의 인생에 이와 비슷한 일은 비일비재하다. 우리는 다만 눈앞에 다가온 행 운을 즐기지만 그런 행운이 나에게 오기까지 다른 사람의 희생이 있었음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그들의 장례는…… 최대한 정중히 하도록!" 한참을 생각에 잠겼던 진소백이 비로소 말을 다시 이었다. "복면인들이 어떤 자들 인지는 알아 보았나?" "집 안에 죽어 있는 자들에게서 알아 낸 것은, 죄송하게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허 리가 양단된 자는 오흉(烏凶)이란 자이고 각각 얼굴과 목젖이 뚫려 죽은 자들은 미창, 미충이란 자들인데, 이들은 몰려 다니 며 돈을 받고 나쁜 일을 하던 자들이라 합니다." 잠시 말을 쉰 사종쾌가 말을 이었다. "아마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일을 한 듯한데, 누가 그런 일을 시킨 것인지는 수 소문해 보고 있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용과 아칠의 몸에 난 상처입니 다." 진소백의 눈이 빛났다. "상처? 적의 무공 연원이라도 추측해 내었단 말인가?" "예. 아마도…… 그 상처는 마치 짐승의 이빨에 물어뜯긴 듯한데…… 무림의 무기 중에서 그런 상처를 낼 무기는 많지 않습니다. 또한 그런 무기를 사용하는 문파도 많지 않습니다." 진소백이 신음하며 말했다. "낭아도(狼牙刀)…… 천랑파(天狼派)?" 천랑파! 정사(正邪) 중간에 속하는 문파! 그러나 결코 그 문도들이 사악하지는 않았다. 다만 성정(性情)들이 모두 괴팍하여 남과 어울리기를 싫어할 뿐. 단 한 명의 제자만을 두어 일맥단전(一脈單傳)한다는 문파! "맞아요. 그 누나도 천 랑파라 얘기했더랬어요." 이 말소리는 예상치 않은 곳에서 들려 와 진소백과 사종쾌를 놀라게 했다. "엽평, 깨어났느냐?" "소형제!" 엽평은 조금 전에 이미 깨어났으며, 진소백과 했던 것이다. "예. 조금 전에요."

사종쾌의 말을 듣고 있다가 참견을

"어떤 누나 말이냐? 사 분타주가 달려왔을 때 한 여인이 네 곁에 서 있다 사라졌


다 했는데, 그 여인을 말하는 것이냐?" 진소백의 물음에 엽평은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엽평의 설명을 다 듣고 난 진소백의 콧등이 찡그려졌다. 항상 무언가 이상한 것을 대할 때면 나타나는 그의 버릇! 무엇이 그리 이상한 것일까? '금청청. 그녀인가?' 진소백은 엽평의 설명에서, 엽평을 도와 복면인과 싸운 여인이 금청청임을 짐작해 낼 수 있었다. 검끝에 피어났다는 영롱한 매화는 화산파의 매화이십사검이 틀림없었고, 이는 그 녀가 바로 금청청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소백이 콧등을 찡그린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날 수 있었단 말인가?' 누구인지 모르나 엽평을 노린 자들의 능력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사종쾌를 그리도 쉽게 유인해 갈 수 있 었던 자들이었 그런데…… '금청청이 접근하는 것을 방비하지 못했단 말인가?' 의문은 더 있었다. 하지만 진 소백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으음……" 신음과 함께 엽평이 다시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평아(枰兒)!" "소형제!" 진소백과 사종쾌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 * * 사종쾌가 광풍개라 불리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일진광풍(一陣狂風)! 그가 엽평을 업고 떠나는 모습은 그야말로 미친 바람 같았다. 사종쾌의 특기는 경공이었던 것이다. 사종쾌는 유유곡으로 떠났다. 종도를 만나게 되면 엽평은 다시 옛날의 활달한 소 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떠나가던 사종쾌의 모습을 생각하자, 진소백은 피식, 웃음이 나옴을 참을 수 없었 다. 그토록 허둥대던 모습! 그리고 평소의 그의 신법보다 가히 배(培)는 빨라 보이던 발걸음. 진소백이 미소를 지음은 사종쾌의 인간됨의 일면(一面)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량을 넘어가는 신법의 전개는 종종 원기(元氣)를 상하게 하기도 했다. 이런 것을 잘 아는 사종쾌가 왜 그리 서두른 것일까? 엽평의 부상과 혼절에 책임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책임질 잘못이 있는 이 상, 자신을 일부 희생하더라도 그 잘못을 만회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은 진정 장부 의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었고, 진소백은 이러한 대장부를 정말 좋아했다. 불행히도 지금 시대에는 이러한 사람이 너무나 드물지 않은가! 사종쾌가 자신의 일을 찾아 떠난 지금 진소백도 자신의 일을 하기로 했다. 천랑파(天狼派)!


복면인들이 남기고 간 유일한 흔적이었다. 비록 하나의 단서에 불과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 하나로도 충분하다. 적들은 …… "단서를 너무 쉽게 남겼다." 제 5 장 검광유유(劍光流流) 어두운 석실 안, 엽혼(葉魂)은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다. 금사진이 들어오기를…… 그리하여 마침내 정월 십사일의 날이 밝았다. 1 정월. 새해의 첫 달. 원단(元旦)에 시작된 축제의 분위기는 조금씩 사그라지는 듯하다가, 상원(上元)이 되면 다시 절정에 다다른다. 하나, 모든 사람들이 명절의 마지막을 축하하며 행복해하고 있을 때에도 결코 행 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아패(阿覇) 역시 그런 사람들에 속했다. 그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차라리 불행하다고 하는 편이 나으리라. 그것도 매우 불행하다고…… 당신은 윗사람에게서 두 가지의 명령을 동시에 받아 본 일이 있는가? 그것도 완전 히 다른 명령을 말이다. 퍽! "우욱!" 두 소리는 모두 아패(阿覇)에게서 난 소리였다. 하나는 그의 얼굴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의 입에서. "이놈, 방주님의 행차에 대비하여 정문을 티 하나 없이 청소하라고 말하지 않았더 냐?" 핏대를 세우며 아패의 얼굴을 쥐어박고 있는 자는 바로 이곳 비응방 하인들의 우 두머리인 장육삼이었다. 오늘은 정월 십사일, 내일의 상원절을 즐기기 위해 인근의 명숙들이 비응방으로 모이는 날이었다. 정문은 그 집의 얼굴이니, 손님을 맞이하는 자는 먼저 정문을 정결히 청소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겠는가? 하여 장육삼이 정문을 티 하나 없이 치우라고 아패에게 명령한 것이 바로 오늘 아 침의 일이었는데…… "이것 봐라, 이놈아! 예가 어디라고 이런 부적(符籍) 나부랭이가 날아다니도록 두 는 것이냐!" 말을 하다 다시 화가 치민 장육삼은 또 아패에게 화풀이를 해대기 시작했다. "아 고고, 장 노대(老大)님. 소인 잘못이 아닙니다요. 글쎄, 밖을 좀 보십시오." 결코 크지도, 늙지도 않았지만 지닌 바 지위 때문에 노대라 불린 장육삼은 그제서 야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왜 아패가 제대로 청소를 하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한 여인. 울고 있는 한 여인!


산발한 머리, 바람에 날려 귀기(鬼氣)롭다. 죽은 자의 넋을 달래려 휘휘 날리는 부적은 바람에 감겨 하늘로 오르고, 단촐한 제상(祭床) 위로 위패(位牌) 하나가 외로운데…… 방응향(芳凝香)! 머리를 산발한 채 고개 숙이고 있던 여인이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문을 열고 빼꼼히 내다보던 장육삼과 아패의 목이 쏙 들어가 버렸다. "제가 왜 청소를 제대로 못 했는지 아시겠지요?" 머리통의 혹을 만지면서, 아패가 입이 한 자나 나와 말했다. 장육삼은 머쓱했지만 여기서 약하게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냐, 이놈아! 하지만 이런 일이 생겼으면 빨리 어른들께 보고해야지, 왜 그냥 있 었던 게냐?" 다시 한 대를 더 때리는 장육삼! 공교롭게도 이미 맞아 혹이 났던 곳이라, 아패의 얼굴이 두 배로 찡그려졌다. "아야야, 이미 사공(司空) 당주님께서 알고 가셨으니 방주님도 아실겝니다요." 더욱 머쓱해진 장육삼이 막 뭐라 하려던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일신에 두른 혈포보다도, 가슴에 수놓여 막 하늘로 오를 듯한 금응(金鷹)보다도, 저절로 풍겨 나오는 기도가 더욱더 보는 사람을 억누르는 한 중년인! 비응방주 금사진(金査震)! 사천 땅 이름없던 소방파에 불과하던 비응방을 그의 장인에게서 물려받은 후 오늘 날의 대방파로 만들기까지 크고 작은 싸움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는 전설 적인 인물! 비응혈조(飛鷹血爪) 금사진! 당금 강호에서 가장 무서운 인물 중 하나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노대나으리. 방주님께서 친히 납시었습니다요." "나도 안다, 이놈아." "방주님이 화가 무척 나신 것 같은데, 작은 주인님은 괜찮으시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모두 윗분들의 일인데. 우린 그저 조용히 앉아서 지켜보 기나 하는 것이 만수무강에 도움이 되는 길이다." "하지만 작은 주인님이……" "아, 글쎄 이놈이!" 이번의 한 방이 또다시 혹 위였기 때문에, 아패는 일찍이 겪지 못했던 아픔에 떨 어야 했다. 금사진은 혼자 오지 않았다. 두 명의 장년인이 금사진의 뒤에 서고, 다시 세 명의 무표정한 무사는 금사진을 호위하듯 서 있다. 수신삼위(守身三衛)! 항상 금사진 주위를 맴돌며 경호를 맡는 무사들이다. 두 명의 중년인 중 왼쪽의 인물은 문사건을 쓴 학자 차림의 인물이었는데, 이 사 람이 바로 비응방의 광문당(廣文堂)을 총괄하는 천기수사 심화절이었다.


따로이 비응방의 문상(文相)으로 불리기도 하는 비응방의 제삼인자! 오른쪽의 인 물은 중년답지 않은 날렵한 허리와 머리카락 한 올 없는 독두(禿頭)가 인상적이었 다. 바로 이 사람이 순찰당(巡察堂)을 맡고 있는 박룡도(搏龍刀) 사공두(司空斗)였다. 굳게 다문 입술이 그의 성정을 잘 말해 주고 있는, 비응방의 제사인자! 지금 여기 비응방의 수뇌 인물 세 사람이 서 있었던 것이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울고 있는 여인이 누구이기에…… 노한 눈으로 산발(散髮) 여인을 바라보던 금사진이 장육삼 을 돌아 보았다. 찔끔하며 고개를 움츠리는 장육삼. 하인들 앞에서는 노대(老大)였던 그가 금사진의 앞에 서자 그야말로 소소(少小)가 되어 버렸다. "오늘 귀하신 분들이 많이 오실 것이니, 정문을 치워야 할 것이 아니더냐?" 소소(少小) 장육삼이 감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고개를 수그린 채 처 분만 바라는 수밖에. '이제 죽었구나' 하고 기다리는 장육삼의 구원자는 언제나처럼 심화절이었다. "방주님. 장육삼을 나무라실 일이 아닙니다.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 니다." '고마우신 문상 어르신. 항상 아랫것들을 위급함에서 구해 주신단 말이야.' 심화절 이 끼여들어 겨우 위기를 넘긴 소소(少小) 장육삼은 계속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났 다. 금사진은 비록 그 성질이 불 같았으나, 세 명의 말만은 새겨들었다. 심화절과 사공 두. 그리고 이 자리에는 없는 숭무당 당주인 철권(鐵拳) 고숭무(暠崇武)! 문상과 무 상의 능력이 뛰어남을 알기 때문이었고, 사공두의 충성심을 알기 때문이었다. 특히 문상(文相) 심화절의 말은 더욱 새겨들었는데, 자신의 급한 성질을 잘 잡아 줄 수 있는 이임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심화절의 말에 노화(怒火)를 접어 둔 금사진의 시선이 산발 여인에게로 향했다. " 이게 무슨 짓이냐? 일전에 고 당주를 통해 사람을 보냈을 때는 듣지도 않더니, 갑 작스럽게 나타나……" 금사진의 말에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방주!" 금사진의 두 눈에 노화가 다시 차 오름을 보고, 또다시 심화절이 나섰다. "소방주, 아버님께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시오." 소방주! 금사진(金査震)을 아버지로 둔 여인, 누가 있겠는가? 산발 여인은 금청청(金靑靑) 이었다. 날수냉심 금청청! 정월 십사일, 그녀가 비응방에 나타났다. 2 "물론 오늘이 돌아가신 전 마님의 기일(忌日)인 것은 알고 있지만은요, 이전에는 전 마님의 제사는 항상 후원에서 조촐하게 지내고 말았잖습니까요?" 아패의 질문에, 이젠 다시 아패의 앞에서 노대(老大)로 돌아온 장육삼이 말을 받는


다. "글쎄 말이다. 저렇게 작은 주인님이 방(幇)의 정문에서 손님들이 오시는 것을 막 고 있다는 걸 아시면 방주님의 진노(震怒)가 대단하실 텐데……" 금청청의 친모 방응향의 제사는 항상 후원에서 조촐히 지내 왔었다. 어쩐 일인지 는 모르나 금사진은 방응향의 제사에 불참할 뿐만 아니라, 크게 제사를 모시는 것 조차 허락하질 않았다. 사람들은 그것이 현재의 부인 적염(狄艶)을 의식해서라고 말하고 있었으나…… " 소방주, 이러지 말고 어서 자리를 옮깁시다. 내 이미 아랫것들에게 추호의 소홀함 도 없이 준비하라고 일러 놓았소." 금사진의 노화가 커지기 전에 일을 무마코자 심화절이 나섰다. 그러나 오늘만은 금청청이 심화절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이미 일을 크게 만들 려고 처음부터 작심(作心)을 하고 나선 터였으므로. "왜 옮겨야 하는 거죠? 이 위패는 제 어머니 것이에요. 그리고 이곳은 제 어머니 의 아버지께서 세우신 비응방의 정문이구요." 금청청의 말소리가 점점 커지며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는 눈빛 또한 더욱 날카로 워져 갔다. "그런데 왜 후원에 숨어 제사를 지내야 하나요? 그것이 올바른 일입니까? 심 당주 님도 그리 생각하시고 있나요?" "그, 그건……" 거의 말이 막히지 않는 심화절이었다. 그러나 이때만은 말이 막혔다. 그는 물론 이 속에 숨은 비화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는 자신 의 앞에 선 금사진의 불끈 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소방주는 오늘 왜 이러는 것일까? 손님들이 오는 것을 알고서, 일부러 소란(騷亂)을 부려 금사진을 망신 주고자 하는 의도일까? 금사진은 떨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의 노화는 이미 머리를 뚫고 올라가고 있었 다. 자신의 딸! 유일한 딸, 금청청의 말이 커져 갔지만 그는 금청청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귓 가에 들려 오는 여인의 목소리! ─`당신은 그의 발끝에도 못 따라가요. 환청(幻聽)이었다. 그러나 금사진이 어찌 이 목소리를 잊을 수 있을까? 금청청의 말소리가 커질수록 귓가에 들려 오는 환청도 커져 갔 화를 참고자, 또 자꾸만 귀를 파고드는 환청을 억누르고자 금사진은 두 주먹을 더욱 굳게 쥐었다. 노화(怒火)를 억지로 참은 탓에 오는 어지럼증을 또한 억누르며 금사진이 겨우 말 했다. "사공 당주, 어서 저년을 내 눈앞에서 치우시오." 이런 명령을 심화절이 받았든가 또는 고숭무가 받았다면 한 번쯤은 다시 물었을 것이다. 금사진이 말한 저년(?)이란, 다름 아닌 비응방의 소방주! 그러나 사공두는


다르다. 일종의 군인 정신에 사로잡힌 인물. 명령을 받으면 다만 그 명령에 충실한 인물이 바로 사공두(司空斗)였던 것이다. " 소방주, 어서 이걸 치우시고 나를 따라가십시다." 공손한 말. 마주잡고 앞으로 모은 손! 그러나 범 같은 허리가 곧게 펴지고 두툼한 입술이 굳게 다물어져 그의 의지를 말 해 주고 있었다. 사공두의 일 처리는 항상 이러했다. 금사진의 명령이 있다면 어떤 수를 쓰더라도 해내고 말았다. 일신의 무학이 다른 두 당주에게 못 미침에도 불구하고, 그가 순찰당을 맡은 이유 는 바로 사공두의 이런 면을 금사진이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금청청도 사공두를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그는 무력이라도 불사(不辭)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왜 올해에 이르러서야 이런 일을 벌인 것이겠는 오 년. 오 년이나 참아서 말이다. "당주께서는 제가 말을 듣지 않으면, 무력(武力)이라도 사용하시겠단 건가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소." 비록 돌려서 한 말이지만 뜻은 확연하다. 무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 "흥! 능 력이 있다면 어디 한번 해보시죠." 노골적인 무시(無視)의 말이 아닌가? 사공두가 비록 금사진의 밑에 있다고는 하나 금청청과는 거의 이십년의 나이 차이 가 났다. 그리고 그가 금청청에게 예(禮)를 지킴은 방주의 딸에 대한 예의 때문이지, 직접적 인 상하 관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따라서 금청청의 이런 말투야말로 정말 무례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사공두의 굵은 눈썹이 꿈틀대며 입에서 노갈이 터져 나왔다. "말을 조심하시오." 한 번 정도 외친 뒤 자중(自重)하는 것이 일반이나, 사공두의 신형은 이미 금청청 을 덮치고 있었다. 명령이라면 무조건 복종하는 단순한 성격! 또한 화가 나면 참지 못하는 폭급(爆急)한 성격! 이것이 바로 사공두, 비응방의 순찰당주였다. 사공두의 오른손이 금청청의 어깨를 노리며 찔러 왔다. 하나 이미 사공두의 성격 을 익히 알고, 준비를 하고 있던 금청청이 옆으로 몸을 틀어 사공두의 일격을 피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흥! 맨손으로 해낼 수 있으신가요?" 사공두의 특기가 도법(刀法)임을 의식해서 금청청이 한 말이었. 자신의 공격이 너무나 쉽게 무위로 돌아가자, 사공두의 두 눈에는 당황의 빛이 떠 올랐다. 게다가 어느새 옆으로 돌아선 금청청의 손이 기이한 형태로 자신의 손목을 노리고


오는데, 손이 닿기도 전에 손목이 저려 오는 것이 아닌가? 대단한 수법이며 응변이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심화절의 입에서 먼저 감탄성이 나왔다. "난화수(亂花手)! 소방주의 무예가 전과 비할 바가 아니군요!" 심화절의 감탄성에도 불구하고, 금사진이 얼굴에는 복잡한 빛이 어렸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노여움인지 분간하지 못할 표정. 그리고 금사진의 귓가를 다시금 두드리는 여인의 목소리. 환청(幻聽)! ─`흥, 남의 방파(幇派)를 탐내 들어온 데릴사위 주제에…… 금청청과 마주 싸우고 있는 사공두는 감탄할 여유가 없었다. 소방주의 무예가 실로 많이 변하였음을 그는 몸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오 년 전에도, 금청청은 전원(前園)의 대청에서 방응향의 제사를 지내겠다고 고집 을 부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금사진의 명을 받은 사공두는 단 이 초 만에 금청청을 제압하여 후원으로 데려갔었다. 그때 금청청이 이를 악물고 말한 바가 있었다. ─`두고 보세요. 내가 무공을 더 익혀서 꼭…… 그 길로 화산으로 떠난 금청청은 화산성모(華山聖母)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오 년이 지난 오늘, 다시 한 번 이러한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쉭! 먹이를 발견하고 달려드는 뱀이 내는 듯한 소리. 그러나 그 모양만은 더없이 아름다운 이것은 화산성모의 절학(絶學) 중 하나인 난 화수! 여인의 섬섬옥수가 허공을 휘감으며 꽃을 피워 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이 꽃을 눈앞에서 보는 상대는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없었다. 손끝에서 뻗어 나온 경력(勁力)에 손이 저림을 느낀 사공두는 급히 왼손을 회수하며, 오른손으로 원(圓)을 그려 상대의 경력을 해소하려 했다. "흥. 어림없지!" 하나 냉소(冷笑)한 금청청이 손목을 뒤집는가 싶자, 어지럽게 피어 올랐던 꽃송이 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듯하더니 사공두의 오른팔을 휘감으며 그대로 가슴으로 내닫는 것이 아닌가? 펑! 당황한 사공두가 급히 독문(獨門)의 호표력(虎豹力)을 끌어올려 대항하였으나, 뒤 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세 걸음! 그에 반해 금청청은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고 있었다. 한 수에 둘의 차이가 명확히 드러난 것인데…… 사공두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오 년 전에 일초(一招)의 적 이 못 되었던 소녀가, 오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자신을 일수(一手)에 물리치다 니! 비록 사공두의 장기가 도(刀)라 하나, 이 어찌 믿기는 일이겠는 사공두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땅을 박차고 일 장이나 도약해 올랐다. 창`─` 청아한 소리와 함께 등뒤의 도가 뽑혀 나왔다. 그리고 떨어지는 기세를 빌어 그대로 도를 내리그으니. 용을 잡는 칼, 박룡도(搏龍刀)!


드디어 사공두가 자신의 절기인 도법을 시전하려는 것이다. 떨어지는 칼날 아래 미모의 여인이 오연히 서 있었다. 겨울 바람은 여인의 머리를 마구 흩날리게 했고, 다만 도끝을 올려다보고 있는 여 인의 아름다운 눈동자! 이 아름다운 그림은 관전자의 머릿속에서만 그려질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안력 (眼力)이 발달한 고수라야만 비로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일반인의 눈에는 다만 사공두가 떠오르기 무섭게 어느새 뒤로 물러나 있는 금청청 의 모습만이 보였을 뿐이었다. 금청청이 떨어지는 도를 보며 머리를 휘날리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가 했더니, 어 느새 뒤로 물러나 사공두의 박룡도를 두 손으로 좌우(左右)에서 감아 가고 있었다. 두 손에서 경력이 뿜어져 나와 도의 움직임을 압박해 가고 있었다. 조금 다른 각도로 휘어 가는 금 청청의 양손. 거기에서 나온 경력에 휩쓸리면 도를 놀리기가 어려워질 것임을 직감으로 느낀 사 공두가 도를 누이며 횡(橫)으로 그어 간 것도 거의 동시였다. 이제 사공두가 도를 베어 가고 금청청이 그 도에 스스로의 손을 갖다 대는 형국 이 된 것인데. 하나, 마치 이런 변화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금청청이 손을 뒤집어 용호공(龍虎功) 의 자세로 모으자 다시 전세(戰勢)는 전과 다름이 없게 되었다. 처음의 형태에서 좌우(左右)가 상하(上下)로 바뀐 차이일 뿐! "감히!" 굉렬히 외친 사공두의 몸이 반칠성(反七星)의 방위(方位)를 밟아 가며 왼발을 차고 올라왔다. 휘웅! 만일 금청청이 계속해서 사공두의 도를 제압하려 하다가는 사공두의 각법(脚法)에 허리가 남아나지 못할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는 금청청은 두 손의 경력을 이용해 제압하고 있던 사공 두의 도를 회선력(回旋力)을 주어 돌렸다. 그리고 자신은 뒤로 빠지며 건곤(乾坤)의 방위를 밟아 나갔다. 이리 되면 금청청의 허리를 노리던 사공두의 왼발과 금청청에 의해 방향이 틀어진 도가 서로 부딪칠 위기에 처하게 됨은 명확한 일! 남의 힘을 빌려 공격하는 이러한 수법을 강호에서는 이화접목(移花接木)이라 부르 지 않는가? "헉!" 헛바람을 들이킨 사공두가 허리의 힘을 돋우며 겨우 자살(?)의 위험을 면했다. 본래 무인이 일수, 일도를 뻗어 낼 때는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뻗어 내기 마련이 었다. 따라서 그런 일격을 다시 회수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인데…… 사공두가 자신의 초식(招式)을 창졸간에도 회수할 수 있음은 그만큼 고수란 의미 였다. 의미였지만…… 초식을 거둔 뒤 완벽히 균형을 잡지는 못하고 비틀거리는 사공두 에게 다시 뻗어 온 금청청의 일수! 펑!


"사공 당주는 이제 나의 적수가 되지 못해요!"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사공두를 보며 금청청이 내뱉은 말이다. 사공두가 비록 비응방 서열 사 위의 순찰당주직을 맡고 있으나 그 무공도 사 위에 달하는 것은 아니다. 금사진에 대한 충성심을 감안하여 순찰당을 맡고 있을 뿐.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사공두를 이렇게 몰아칠 수 있는 금청청의 능력은 대단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자식의 이런 성취에 금사진은 기뻐해야 했지만…… 그러나 금사진은 기뻐하지 않 았다. 다만 그의 귓가에는 금청청이 던진 말만이 맴돌고 있을 뿐이었 아니, 그 옛날, 어 느 여인의 말만이! 금청청의 말과 아까부터 금사진의 귓가를 맴돌던 환청이 겹쳐 오기 시작하는 것이 다. ─`당신은 결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해요! 잔랑(殘郞)의 적수가…… 잔랑(殘郞)! 낭 군이라 부르다니…… 엄연히 남편이 있는 여인의 입에서 어찌 그런 말이 나온단 말인가? 금사진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자신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네가 감히!" 주위를 쩌렁 울리는 거대한 외침! 마치 하늘의 새인 양 날아오르는 신법 천응비(天鷹飛)! 그리고 두 손 끝에 은은히 어리는 혈광(血光)! 이것이 바로 하늘도 가른다는 금사진의 파천혈조(破天血爪)였다. 금청청의 두 눈 에 경악의 빛이 서리며 급히 난화수(亂花手)의 수법으로 마주쳐 나갔다. 까강! 손이 마주쳤음에도 금속성의 마찰음이 터져 나오며 금청청은 일곱 걸음이나 물러 났다. "우욱!" 단 한 수! 단 한 번의 마주침만으로 금청청을 패퇴(敗退)시킨 금사진이 더욱 강한 기세로 금청청을 다시 덮쳐 갔다. 흉폭한 기세! 조금의 사정도 봐주지 않는다. 그는 설마 앞의 여인이 자신의 딸임을 잊고 있는 것인가? 금청청이 더욱 강한 이 번의 공격을 막기는 어렵다는 것을, 그는 모른단 말인가? 또한 공격을 감당하지 못한 금청청이 큰 상처를 입을 것임도. "방주, 손에 사정을 두십시오." 보다 못한 심화절이 날아올라 전권(戰圈)에 뛰어들고, 막 몸의 중심을 추스른 금청 청이 이를 악물며 다시금 군화난분(群花亂奮)의 식으로 금사진의 혈조를 막아 간 것은 어느것이 먼저인지를 가릴 수 없을 정도였다. 펑`─ 펑! "웃!"


"우웁!" 믿기 힘든 일! 또다시 금사진의 일격을 받는다면 큰일이 일어남을 직감한 심화절이 금청청을 도 와 금사진의 혈조 일격을 막아 갔음에도 불구하고…… 보라! 지금 신음 소리를 흘리며 심화절과 금청청이 물러나고 있음에 반해 금사진은 조 금의 타격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다만 허공을 두 번 맴도는 것으로 두 손으로 전해져 오는 상대의 힘을 분산시켰을 뿐! 허공을 두 번 맴돈 금사진이 다시금 금청청을 공격하려 하는 것을 본 심화절 은 급히 내공을 돋우어 외쳤다. "방주, 그녀는 방주의 딸입니다." 금사진이 갑자기 벼락을 맞은 듯 전신을 떨더니 다시 한 번 허공을 감돌아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멍하니 서 있는 금사진! 그의 얼굴에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금청청이 방응향의 위패를 챙겨서 사라질 때까지도 꼼짝도 않은 채 서 있 기만 했다.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그리고 금사진!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금사진의 생각은 심화절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심화절은 금사진이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지만은 알고 있었다. 그는 사공두에게 미미한 눈짓을 보냈다. 비응방주 금사진! 그가 비록 무림의 혁혁한 인물이었지만 그에게도 나름대로의 비애(悲哀)가 있었다. 사람의 외형이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속에는 저마다의 슬픔과 분노를 안고 살아 가는 것이니…… 인간은 왜 남의 삶을 부러워하는 것일까? 심화절은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났다. 그리고 사공두도 물러났다.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 * * "심 당주님께서는 어딜 저리 급히 가시는 겁니까요?" 아패의 물음에 장육삼이 말했다. "이놈아, 보면 모르겠느냐? 지금 방주님이 화가 머리 끝까지 나시지 않았느냐?" 그제서야 아패는 깨달았다. "아아, 그래서……" "이제 알겠느냐?" 아패는 알았다.


왜 심화절이 사공두와 함께 물러간 것인지를. 하지만 그런 일을 아는 것이 아패에게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는 다만 정문을 다시 청소하는 것이 아득할 뿐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서 있는 그의 머리로 다시 장육삼의 일격이 날아왔다. "아, 이놈이, 빨리 치우지 않고 뭘 해!" 이번 것은 더 더욱 아팠다. 3 엽혼은 지금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그리고 화선의 자료에서 읽었던 한 구절을 다시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금사진의 무공 수련에 관한 구절을. <금사진은 오 년 전부터 정기적인 무공 수련을 중단했음. 다만 극도로 화가 나거 나 심적인 부담이 있을 때에만 연공실에서 무공을 연마함. 심적인 긴장을 무공 연 마로 푸는 듯……> 지금 비응방도들이 급히 석실 안을 치우는 소리는 엽혼의 계획이 맞아들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끼이잉! 석실 문이 닫히는 소리. 안에서 누군가 수련할 때에만 석실 문은 닫힌다. 그리고 이곳은 방주의 전용 수련실이니. 오늘은 정월 십사일. 금사진! 그가 마침내 여기에 왔다. * * * 금사진의 무공은 그의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신법과 조법(爪法)에 특기가 있었다. 하나, 지금 그가 수련하고 있는 것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금사진이 권법이나 검술 에 있어서도 일가(一家)를 이루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쉭`─ 쿵! 일격, 일격에 힘이 서려 있긴 하지만 내공이 실리지는 않아 주위의 물건들에 큰 영향을 주진 않고 있었다. 만일 내공이 실린 일격이라면 석실의 여기저기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정신과 몸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정신이 괴로울 때 몸을 피로하게 하면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낀 적이 있 는가? 지금 금사진이 느끼고 싶은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전력을 다해 몸을 학대한 지 이미 두 시진. 땀이 비 오듯 했다. 무림고수가 이렇듯 땀을 흘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강호인이 쓰는 힘은 거의가 내 공(內攻)을 사용한 것이므로. 또한 땀을 흘리는 것은 그다지 좋지도 않았다. 자칫하면 원기(元氣)를 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금사진은 전혀 내공을 쓰지 않은 채 자신을 학대하고 있었다. 마음속의 번뇌(煩惱)를 제거하고자 함이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뚜렷해지는 한 여인 의 모습. 그리고 환청!


─`당신은 결코 그의 발끝도 못 따라가요. 그의 발끝. 잔랑(殘郞)의 발끝. 자신의 아내 된 여자가 낭군(郞君)이라 부르던 그자의 발끝! 금사진의 손이 더욱 거칠어져 갔다. 마음속의 격동을 주체하지 못하여 손끝에 공력이 실리고 있는 듯, 주위에 돌가루 가 자욱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쉭! 쉬쉭! 피어오르는 돌가루와 함께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 그날의 그 처절했던 격전(激 戰)! 금사진은 그의 발끝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의 목덜미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피를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가을 하늘을 수놓던 선연한 핏줄기! 아침에 시작된 일전(一戰)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잔혹마도 잔소(殘逍)를 쓰러뜨리고 하늘을 향해 미친 듯이 웃어대던 자신의 모습 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했다. 이제 감히 그년은 이자를 잔랑(殘郞)이라 부르지 못하리라. 하늘에는 핏빛 노을! 아내의 정부(情夫)의 목줄기에서 솟아오르는 핏줄기도 더없이 붉고, 자신의 파천 혈조 또한 핏빛으로 붉어지던 그날. 하늘을 가득 메웠던 자신의 광소(狂笑)! 그리고 피, 붉은 피! 금사진의 손이 붉은빛을 강하게 띠어 갔다. 휘둘러지는 손이 닿는 석벽들이 맹수가 할퀸 나뭇등걸처럼 마구 찢겨져 나갔다. 혈조! 파천혈조(破天血爪)! 잔혹마도를 죽이고 돌아온 그는 미친 듯이 방응향을 찾았다. 그리고 이어진 겁탈! 그것을 겁탈이라 해야 할까? 자신의 아내, 그러나 한 번도 잠자리를 같이하지 못한 잔혹마도의 정부(情婦)를! 울고 있는 방응향을 보며 금사진은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 그가 본 것은 자신의 아랫도리에서 흘러내리던 피였 다. 방응향(芳凝香)! 그러나 그녀의 삶은 이름과는 달리 결코 향기나는 것이 아니었다. 한 남자의 아내 로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끝내는 남편을 불구로 만든 여자. 이런 여자의 사랑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금사진의 혈조가 더욱 강해졌다. 두붓장인 양 찢겨져 가는 석벽! 피어오르는 돌가루! 모든 것이 핏빛이었다. 그날도, 그리고 이미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도. 이 피는 누가 만든 것인가? 금사진이기도 하고 방응향이기도 하고, 또는 잔혹마도이기도 했다. 어쨌든 자신이 이 피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금사진은 느끼고 있었다.


'죽는 그날까지 나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이렇게 미친 듯이 손 을 휘두르고 있을 뿐! 얼마의 시간이 지난 것일까? 미친 듯이 뿜어 나오던 금사진의 힘도 점차 한계(限界)에 달하더니 이윽고…… 쿠 앙! 최후의 일격을 쏟아 낸 금사진이 서서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피로한 몸, 그러나 그만큼의 번뇌는 줄어드는가? 금사진은 그 후 한 번도 방응향을 찾아보지 않았다. 한 번의 관계로 임신한 그녀가 금청청을 낳았을 때도. 철부지 딸이 왜 엄마가 죽어 가는데도 오지 않냐고 울부짖을 때도. 그는 한 번도 방응향을 찾아가지 않았다. 다만 미친 듯이 싸우고 미친 듯이 죽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비응방은 강호에서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거방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찾아온 짙은 허무와 견디기 힘든 자괴감(自愧感)! 방파를 키워 갈 때는 몰 랐다. 그러다가 오 년 전부터 방파가 거대해지자 그에게는 싸울 일이 없어졌다. 싸울 일이 없다는 것! 이미 강호거방으로 자리잡은 비응방에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없어진 것은 그에게 는 어쩌면 불행이었다. 허무와 함께 그를 찾아온 번뇌(煩惱)! 밤마다 그를 찾아오는 것은 방응향의 기억이었다. 잊을 수 없는 번뇌! 기억! 회한!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여기였다. 석실. 미친 듯이 힘을 쓰고 나면 조금은 번뇌(煩惱)가 덜어졌다. 누구나 선망하는 강호(江湖)의 거물(巨物)!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비응혈조 금사진. 그런 인물 뒤에 이런 숨은 비애(悲哀)가 있음을 누가 알겠는 우리는 다만 화려한 겉모습에 감탄할 뿐, 누가 숨은 비극에 눈을 돌리겠는가? * * * 지금 금사진은 좌대(座臺)에 앉아 있었다. 항상 지쳐 쓰러질 지경까지 자신의 힘을 빼고 나서 시행하는 운공조식! 진기가 전 신을 일주(一走)하자 빠져 나갔던 힘들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처럼 온몸의 힘을 다 빼버리고 다시 채워 나가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지만 한편 으론 좋은 점도 있었다. 근육이 힘을 무리하게 쓰면 당장은 지치게 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적응하게 되어 더욱 강인한 근육으로 길러지듯이, 지금 금사진의 온몸에 차오는 진기의 흐름도 언젠가는 더욱 도도(濤濤)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진기의 근원인 진원지기(眞元之氣)가 상하지 않았을 경우에만 해당하 는 말이다. 진원지기가 상할 정도의 무리를 한다면 이는 오히려 진기를 키우기보 다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격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금사진이 자신의 진기를 키우고자 무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난 오 년간 계속된 이런 연공에 의해 금사진의 공력이 오 년 전에 비해 비할 바 없이 높아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하지만 금사진이 스스로 이런 연공(練功)의 위험을 깊이 인식하고 그에 대한 대비 를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 이상 어찌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이때까지 금사진은 운이 좋았으나 계속하여 운이 좋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만일 운이 나쁘다면? 만일 진원지기라도 상한다면? 그리고 또 만일 이러한 연공 도중 살수(殺手)라도 만난다면? 금사진은 지금 연공 중이었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운공조식이 막 고비를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이 있는 석실 어딘가에서 미약하나마 계속해서 들려 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연공 중이었으므로. 또 온몸을 맴돈 진기가 다시 척수를 따라 항문을 통해 단전으로 돌아오고 있는 상 황이었으므로. 금사진은 항문 어름이 따끔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기의 흐름이 강해지고 있어서일까? 어쨌든 금사진이 지금 눈을 떠서 앞을 볼 수가 없는 것은 어쩌면 그의 운이 다해 서일지도 몰랐다. 우두둑! 자세히 들으면 뼈마디가 부서져 나가는 소리인 듯한 이것은 오히려 뼈마디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며 난 소리였다. 엽혼은 좁은 공간에 숨어 있기 위해 의도적으로 탈골(脫骨)시켰던 뼈를 복원시키 고 있었다. 그리고 뼈를 맞추자마자 자신도 급히 진기를 일주시키기 시작했다. 엽혼의 일주천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금사진의 경우는 진기를 완전히 소진(消盡)하고 다시 되찾으려는 의미의 대주천이 지만 엽혼은 단지 오랜 시간 뼈를 탈골된 상태로 둔 것을 만회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금사진이 혈조를 휘두를 때에 엽혼은 소리를 죽이며 석실의 한곳에 숨어 이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금사진이 조식에 들어가 주위에서 눈을 돌려 자신의 내면(內面)을 주시하는 지금에서야 암살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었다. 만일 금사진이 지금 눈을 뜬다면, 탈골된 뼈를 맞춤으로 인해 원래의 몸 크기로 돌아온 엽혼의 몸이 조금 밖으로 삐져 나온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금사진은 엽혼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좌대 위에 앉아 자신을 향해 한 발씩 다가오는 운명을 외면하고 있을 뿐이었 다. 진기를 한번 돌리고 나자 전신의 혈관 곳곳에 활기가 살아나는 것을 엽혼은 느낄 수 있었다. 좁은 곳에 웅크리고 있은 덕분에 원활하지 못했던 혈행(血行)이 다시 행해지며, 처음엔 마치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간지러운 느낌이 들더니 그 느낌이 차차 사라져 갔다. 그리고 얼마 후 혈행(血行)이 제대로 이어지자 엽혼은 이제 때 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때, 금사진에 대한 암살을 수행할 때!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엽혼은 허리에서 작은 쇠 뭉치를 꺼내 들었다. 기이한 모양 의 쇠 뭉치! 그리고 쇠 뭉치의 끝을 잡고 조금씩 당기자 끝이 딸려 나오며 점차 길이가 길어지 는 것이 아닌가?


이윽고 접힌 곳이 완전히 펴진 쇠 뭉치는 무엇인가를 닮아 있었다. 검! 곳곳에 마디가 있는 기이한 모양의 검! 이름하여 구절검(九節劍)이었다. 잠입(潛入)과 탈출(脫出) 시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엽혼이 스스로 고안하여 만든 검이었다. 그리고 이번 잠행에 이 검은 정말 도움이 되었다. 이윽고 엽혼은 검을 가슴께로 서서히 곧추세웠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금사진의 가슴에 이 검을 꽂는 것! 다만 일격필살(一擊必 殺)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엽혼은 날았다. 그리고 엽혼의 검도 함께 날았다. 목표는 금사진의 가슴이었다. 흐르는 광채! 흐르는 검날! 흐르는 사람! 엽혼의 검은 금사진의 가슴을 향해 직격(直擊)해 갔다. 눈이 부신 광채(光彩)! 그리고 오늘은 정월 십사일! 제 6 장 절체절명(絶體絶命) 1 진소백은 엽혼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옆의 화로에서는 불길이 솟아오르며 방안의 공기를 훈훈하게 데워 주고 있었다. 의자는 편안했다. 그러나 엽혼은 이 의자에 편안한 마음으로 앉아 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원래 그 의 무공이나 능력이라면 평생을 편히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엽혼은 그러 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동생의 병을 위해 자신의 전생(全生)을 희생하는 삶은 그가 바랐던 것이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편안한 삶, 건강한 동생을 원했을 테지만, 운명은 그에게 다만 힘들고 괴로운 삶을 주었을 뿐이다. 그 긴 세월 동안 엽혼은 얼마나 힘들고 지쳤을까? 자신의 운명이 건네 준 쓴 잔을 묵묵히 들이키며 몇 번이나 절망했을까? 진소백은 그런 생각을 하며 서서히 엽혼이 남긴 서찰을 펼쳤. 두 번째 읽는 것이었다. <……해서 나는 이 청부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네. 다만 걱정되는 것은 평아(枰 兒)의 장래이네만, 이는 자네를 믿고 맡기기로 하겠네……中略…… 그래서 나는 청부자에 관해 더 알아 보고자 하였네. 비록 시간이 촉박하여 깊이 파고들지는 못했지만, 자네에게 나머지 일을 맡길 수 있어서 다행이네. 내가 구한 모든 자료는 집에 남겨 놓았네. 만일 그들이 평아를 노리지 않는다면 자네가 자료 들을 모두 불태워 주게. 그리고 만에 하나 그들이 약속을 어기고 평아를 노린다면 그것은 이 청부에 다른 뜻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니……中略…… 남겨 둔 자료가 있는 곳은 다음과 같네. 그리고 찾는 방법은……> 그렇게 엽혼의 편지는 말하고 있었다. 또한 정월 십오일이 되어, 모든 것이 결정된 이후에야 자료를 꺼내 볼 것도 아울 러 부탁하고 있었다. 엽혼은 청부자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했다.


만일 그들이 엽평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진소백도 엽혼의 뜻에 따라 자료를 모두 태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엽평을 공격했다. 혹여 엽혼이 사로잡히게 될 경우, 비밀 유지를 위 한 안전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오히려 스스로 자신들의 목줄을 쥐는 격이 될 줄 어찌 짐작 이나 했겠는가? 이곳은 부엌이었다. 며칠간을 불기[火氣]가 없이 지낸 탓으로 공기는 싸늘했다. 불기도 없는 부엌에서 진소백은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계속해서 불타 올랐을 아 궁이는, 지금은 다만 싸늘히 식은 채 재로 덮여 있었다. 진소백은 손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재를 쓸어 내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쌓인 재를 모두 쓸어 내자 바닥에 하나의 문이 드러났다. 돌로 된 문! 이 집을 세운 엽혼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돌인 탓에 불에 타지도 않을 것이고, 누구라도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진소백은 말없이 그 석문을 들어올렸다. 끼이익`─` 비명을 지르며 석문이 열렸다. 두꺼운 문! 두 자는 족히 넘어 보이는 돌문이었다. 이 정도라면 아궁이에 불이 타오르더라도 그 열이 전해져 아래를 훼손시키는 것 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석문을 열자마자 진소백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휙`─`! 무언가 진소백의 머리 위를 스쳐 가며 뒤편의 벽에 박히는 것이 있었다. 삼각형의 형태로 벽에 박힌 것은 세 개의 암기! 서찰에서 미리 경고받지 못했다면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공격이 었다. 엽혼은 만에 하나 자신이 남긴 자료가 남의 손에 들어가 청부자에게 피해를 입힐 것을 염려하여 용수철을 이용한, 일종의 기관을 장치했던 것이다. 엽혼이 이같이 해놓은 것은 가능하면 청부자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했음이지만, 청 부자의 행동은……! 석문의 아래는 어두웠다. 하지만 석문의 바로 아래 부분은 밝은 곳으로 나와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곳에는 쇠사슬이 매달려 있었다. 진소백은 망설이지 않고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쩔렁! 쩔렁! 이윽고 쇠사슬이 모두 당겨 오자 그 끝에 매인 석함(石含)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석함 속에 든 것은 여러 가지의 문서들! 바로 화선이 엽혼에게 건네 주었던 문서들이었다. 그곳에는 엽혼이 남긴 서찰이 하나 더 있었다. <……청부 내용에서 이상한 낌새를 챈 나는 일부러 정보를 구하는 기한을 촉박하 게 잡았네. 하지만……中略…… 그런 정보를 이토록 쉽게 구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네. 이 것은 단지 한 가지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서찰을 읽어 가던 진소백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누군가가 비응방(飛鷹幇)의 내부에서 도울 때만 가능한 일이지!" <……비응방 내부에 조력자가 있다면 그는 자신이 이 일과 관계 있음을 알리지 않기 위해 살인멸구를 꾀할 가능성이 높네. 또한 내가 생포될 경우를 대비하여 엽평을 납치하고자 할 가능성도……中略…… 내가 이 일을 맡은 이상 살 아날 가능성은 백에 하나도 없네. 난 평아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무엇을 희생 하더라도 아깝지 않네. 만에 하나 내가 금사진을 살해한다 하더라도 비응방 내부 의 조력자가 나를 살려 둘 리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명확한 일이지……後略……> 진소백은 끝까지 읽은 후에 서찰을 움켜쥐었다. 엽혼은 이 청부를 맡은 이래로 자신의 앞길에 놓인 것이 다만 죽음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명과 동생의 생명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자료를 남겨 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남긴 자료를 이용하여 엽평의 생명을 노리는 자들을 막아 줄 것을 부탁했지,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줄 것을 부탁하지 않았다. 비응방 내부의 누군가가 이 청부에 관계되어 있었고, 그자는 만일을 위해 엽혼뿐 아니라 엽평마저 노릴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누굴까? 누가 한 일일까? 비응방 내의 누가 엽혼을 시켜 금사진을 노렸단 말인가? 그리고 엽평을 노렸단 말 인가? 현재로서 진소백이 가지고 있는 단서는 세 가지였다. 이 문서들. 지난번에 엽평을 습격했던 구천(仇賤)이란 사내, 그리고 엽혼에게 청부 를 중개한 화선(花仙)! 엽혼은 비록 이 자료들을 단지 엽평을 보호하기 위해 써줄 것을 부탁했으나, 진소 백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런 일을 어찌 진소백이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그는 청부자를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이런 진소백의 결심은 청부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불리한 일이 될 것이 다. * * * 엽혼이 아무리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하나, 금사진의 운공이 절정에 이르러 있지 않았다면 눈치채였을 것이다. 아니, 평소의 금사진이라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평소라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 금사진은 알지 못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흐르던 광채는, 흐르던 검날 은 마침내 금사진의 왼쪽 가슴에 박혀 버렸 푹! 손끝에 전해지는 둔중(鈍重)한 느낌. 검이 서로 다른 형질인 살가죽과 근육과 혈관을, 그리고 마침내는 심장을 찢어 가 는 이 느낌! 엽혼은 자신의 검이 금사진의 심장을 갈랐음을 느꼈다. 그리고…… 환청(幻聽)이었을까?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울리는 것도 같았다. 그는 성공한 것이다. 이 성공은 다만 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이 희열(喜悅)! 엽혼은 가슴이 떨려 옴을 느꼈다. * * * 금청청(金靑靑)은 혼자 앉아 있었다. 이곳은 산속! 주위에는 산짐승의 울음만이 검은 하늘로 올라가고, 하늘에는 별빛만이 어둠을 내려다보는 산속의 밤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일은 자신의 의도대로 되었고, 금사진은 몰려온 빈객(賓客)들에게 어느 정도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 일이었나? 어쨌든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었던가? 금청청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은하수(銀河水)가 흘러가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저 은하수를 건너면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녀가 만일 은하수 가에 선다면, 별들의 강을 건너 누구를 만나게 될까? 어머니 ……? 방응향에 대한 기억은 여윈 몸에 끊임없이 기침을 해대던 모습과 항상 자신을 바 라보며 짓곤 하던 애잔한 눈빛뿐이었다. 그녀는 항상 말하곤 했었다. ─`죄는 내게 있으니, 아버지를 원망하지 말아라. 오히려 어머니의 그 말 때문에 금청청은 더욱 금사진을 원망하게 되었는지 모른 다. 너무나 약하여 바람에도 쓰러져 버릴 것 같았던 어머니! 어머니를 단 한 번도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 하늘에는 별이 많았다. 별은 저마다 한 사람의 목숨이라던가? 멍하니 별을 바라보던 금청청은 문득 유성(流星) 하나가 서천(西天)을 가로지르는 것을 보았다. 누구의 별이 지는가? 금청청은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아직은 이른 시간! 동쪽 하늘에는 여명(黎明)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곳은 깊은 산중이었다. 금청청은 혼자 앉아 있었다. * * * 지금은 새벽이었다. 아직은 해가 떠오르지 않은 시간, 그러나 이미 많은 사람이 일어나 일을 하고 있 었다. 하지만 그렇게 일어나는 것과 다른 의미의 깨어남이 있었다. 비응방이 놀라 일어나고 있었다. 사공두는 금청청에게 입었던 상처 때문에 누워 있던 자리에서 놀라서 일어났고, 심화절은 광문각에서 집무를 보다 놀라 일어났고, 밖에서의 일을 마치고


돌아와 그간 방(幇)에 있었던 일들을 보고받고 있던 고숭무(暠崇武)는 의자에서 벌 떡 일어났다. 날카로운 호각 소리! 비응방 전체가 호각 소리에 일어났고, 호각 소리가 들려 온 방향을 알자 더욱 빨 리 일어났다. 일어난 자들은 일제히 호각 소리가 들려 온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다 일어났지만, 가장 빨리 호각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려간 것은 순찰당(巡察堂) 의 부당주 인소(引蔬)였다. 그리고 그런 인소를, 금사진의 연공실은 자신의 석문을 굳게 닫은 채 맞이했을 뿐 이다. 호각 소리는 위급(危急) 신호! 바로 비응방의 방주 금사진이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신호였던 것이다. "무얼 하는 게냐! 어서, 어서!" 닫혀진 석실을 열도록 재촉하는 인소의 얼굴엔 초조함이 가득했다. 방주가 연공실 에서 연공하는 동안 주위를 경계하는 것이 순찰당의 의무! 그리고 당주인 사공두 가 자리를 비운 지금, 만일 방주의 신상에 무슨 변고라도 생긴다면……? 급히 달려오는 고숭무와 심화절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인소의 고함 소리는 더욱 커져 갔다. 그리고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비응방 전체가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호각 소리! 이 호각 소리는 도대체 누가 낸 것일까? 2 엽혼은 금사진의 심장에 박힌 검을 급히 다시 빼 들었다. 금사진은 천하인이 인정하는 고수이므로, 비록 심장을 찔리더라도 최후의 일격을 가할 수 있을는지 몰랐다. 그가 급히 검을 빼 든 것은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공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무인(武人)이 어떤 일을 함에 있어 다음 장면을 상상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었다. 문인(文人)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견해 보고 대비하는 것이 올바른 문인의 자세일 것이다. 하지만 무인은 어떤가? 그들은 상상하지 말아야 했다. 다만 그때그때 최상의 응변을 할 수 있도록 대비 해야 하는 것이다. 상상에 의해 다음에 일어날 일을 마음속으로 미리 정해 버린다면 의외의 사태가 일어났을 때 대비하기가 어려워진다. 미리 예상을 하면 무의식중에 몸은 그 예상에 맞추어 반응할 준비를 갖추게 되므 로…… 그래서 만일 예상외(豫想外)의 일이 일어나더라도 몸은 이미 기억하고 있 는 무의식적인 반응(反應)을 먼저 실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반응이 느려지게 될 것임은 당연지사(當然之事)! 이것은 때로 무사에게 는 치명적인 것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엽혼은 지금 머릿속에서 다음 장면을 그리고 있었다. 금사진의 가슴 깊숙이 박혀 든 검을 빼 들며.


검날을 빼어 들면 분수처럼 솟구칠 핏줄기! 당연히 엽혼은 핏줄기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피는 솟구치지 않았다. 인간의 심장이 피를 보내는 압력은 상상보다 훨씬 세다. 엽혼은 혈관이 터지면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게 됨을 지난 세월의 살수행(殺手行) 을 통해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금사진의 가슴에서는 피가 솟구치지 않았다. 다만 흘러나왔을 뿐이다. 피가 뿜어지 지 않고 흘러나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당연히 심장이 이미 뛰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뛰지 않는 심장. 자신이 일검을 찌르기 전에 이미 금사진의 심장은 멎어 있었던 것이다. 누구일까? 누가 자신보다 먼저 금사진을 죽게 한 것일까? 아니면 금사진은 운기 도중 입마(入魔)에라도 빠졌단 말인가? 그도 아니라면……? 엽혼은 전신의 피가 싸늘히 식어 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어렴풋이 느낀 불안이 사실이 되어 감을 깨달았던 것이. 이 일은 너무 쉬웠다. 원래 이 일은 불가능(不可能)에 가까웠던 것이었는데…… 호암군의 비밀 통로가 발견되고 또 금사진의 연공법이 알려지고, 그리고 금청청이 방응향의 기일에 맞추어 돌아오는 것이 알려져 가능한 일이 되었던 것이다. 금사진과 금청청이 만나면 말다툼이 있게 될 것이고, 금사진은 노화를 달래고자 이곳에 올 것이 거의 확실하므로. 하지만 그런 일들이 어쩌면 이렇게 이가 물린 듯 맞아떨어질 수 있었던 것일까? 엽혼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동시에 밖이 매우 소란스러워짐과 조금 전 귓가를 두드린 휘파람 소리가 환청이 아니었음도 깨달았다. 누군가 경고로 호각 소리를 내었고, 그 호각 소리를 들은 비응방도들이 석실에 들 어오려고 밖에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누구일까? 누가 호각 소리를 낸 것일까? 엽혼이 금사진의 가슴에 일격을 가함과 동시에 호각 소리는 들려 왔다. 누군가 숨 어 엽혼의 일을 지켜본 뒤 호각 소리를 낸 것일까? 어쨌든 이 청부는, 금사진에 대한 이 살인 청부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엽혼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이제 자신이 결코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지금 밖에는 비응방 의 전세력이 모여 있을 것이므로. 그리고 이러한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한 명뿐이라는 것도 역시 깨달았 다. 진소백! 일람무의(一覽無疑) 진소백(鎭小栢)! '이제 내가 믿을 사람을 너밖에 없구나.' 엽평의 일도, 그리고 이젠 자신의 일까지도 모두 한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 엽혼은 마음에 걸렸다. 진소백에게 그는 아무것도 주지 못하고 다만 받기만 하고 있는 것이다. * * *


석실은 마침내 열렸다. 밝은 횃불이 안을 비추자 석실 안의 경물들은 서서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 작했다. 그리고…… 좌대 위에 정좌한 금사진의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가슴에서 미미하게 흘러나오는 피! 그 피가 금사진이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님 을 알려 주고 있었다. 가장 먼저 경호성(驚呼聲)을 터뜨리며 달려간 것은 인소였다. "방주!" 그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의 경호성이 좌중(座中)의 인물들 중 가장 무공이 고강(高强)하다고 할 수 있는 고숭무의 입에서 터져 나왔. "감히!" 동시에, 뛰어오르는 철권(鐵拳) 고숭무! 그의 오른 주먹이 검은빛으로 물들며 허공을 쏘아 갔다. 그리고 좌중의 사람들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허공을 허깨비인 양 흘러가는 흐릿한 그림자. 그리고 고숭무(暠崇武)의 철권이 그 그림자를 따라가며 내질러지는 광경을. 퍼펑! 고숭무의 파황권(破荒拳)이 그림자에 부딪치며 나는 음향! 하나 평소의 파황권의 힘에 비해서는 이 음향은 너무 경미했다. 그림자가 비록 타격을 받기는 하였으나 고숭무의 파황권을 받아 넘기며 허공에서 물러난 것이다. 놀람을 나타내던 고숭무의 눈빛이 이어 분노의 빛으로 바뀌며, 그가 일권을 다시 뻗어 내었다. 일권붕악(一拳崩岳)의 엄청난 기세가 일어나며 그림자를 덮쳐 갔다. 좀 전과는 비 교도 안 될 만큼 강한 기세! 일견하기에도 그림자가 피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슈 슉`─` 허공을 격하는 고숭무의 일권붕악! 그림자의 정체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엽혼이었다. 그는 석실의 문이 열리는 순간, 천장에 붙어 있었다. 그러다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금사진의 시체로 쏠리는 틈을 타서 최대한의 신법 을 전개해 밖으로 뛰쳐 나왔다. 하지만 고숭무의 눈만은 피하지 못했고 지금 이런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엽혼의 두 눈이 갈등으로 떨렸다. 이런 강맹(强猛)한 기세의 권력(拳力)을 힘으로 맞서 정면에서 맞이해 가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옆으로 비스듬히 쓸어 가며 힘을 비켜 가는 것이 상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엽혼의 자세로는…… 만일 엽혼이 고숭무의 권세(拳勢)를 피해서 이동한다면 허공에 띄우고 있는 몸을 땅으로 내려야만 했다. 그러한 변화를 고숭무가 예상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기이하게도 지금의 엽혼에게는 아래 방향이 유일한 퇴로인 것인데…… 엽혼은 이를 악물었다. 지금 땅에 내려선다면 자신은 비응방을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를 악문 엽혼은 쌍장에 힘을 모아 앞으로 내질렀다. 고숭무의 붕악의 일초를 정 면으로 맞이하는 자세였던 것이다. 엽혼의 자세를 본 고숭무가 냉소했다. "흥!" 그리고 두 사람의 손은 곧바로 마주쳐 갔다. 꽝`─` 아까와는 다른 음향이 들림은 곧 둘의 경력이 정면으로 부딪쳤다는 것을 의미했 다. 드러난 둘의 우열(優劣)은 명백했다. 고숭무가 어깨를 들썩이며 단 한 걸음 물러난 것에 비해 엽혼은 입에서 나오는 피 분수를 허공에 뿌리며 훌훌 날려가고 있었 누가 보아도 명백한 고숭무의 우세! 그러나 그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심화절이 다급하게 외쳤다. "저, 저…… 쫓아라, 어서!" 허공으로 훌훌 날려가던 엽혼의 그림자. 그 그림자가 갑자기 몸을 뒤집어 중심을 잡으며 땅을 박차 오르는 것을 보았던 것 이다. * * * 엽혼은 약자(弱者)가 아니었다. 비록 고숭무의 철권(鐵拳)이 천하가 인정하는 것이라고는 하나 엽혼 또한 약하지 않았다. 단순한 살수 무예만을 익힌 일반 살수와 엽혼이 다른 점은 그 무예의 바탕에 정종 (正宗)의 단단한 기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단 한 번의 맞부딪침으로 엽혼이 나가떨어진다는 것은 기실 불가능한 일이 라 할 수 있었다. 엽혼이 내뿜은 피는 내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혀를 깨물어 내뿜은 것 이었다.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자들은 비응방의 고수 전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 신이 이들 모두를 당해 낼 수 없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 고숭무 혼자라면 자 신의 몸 하나 빼내는 것쯤 어렵지 않겠지만, 문제는 고숭무의 공격 뒤에 기다리고 있는 다른 사람들인 것이다. 그래서 발휘된 엽혼의 임기응변(臨機應變)! 고숭무와 일장을 부딪치며 일부러 입 안에서 피를 내뿜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내상을 입었다고 착각하게 한 뒤, 그들이 안심하고 잠깐 마음을 놓았을 때, 달아나는 것이 엽혼의 계획이었 비록 약간의 상처(傷處)를 입기는 했지만 엽혼의 이 한 수는 성공하여, 엽혼의 계 략(計略)을 깨달은 심화절이 수하들에게 쫓을 것을 외쳤을 때 이미 그의 신형은 삼십 장 밖을 달리고 있었다. 엽혼의 경공(輕功)은 빨랐다.


임시응변으로 벌어들인 삼십 장은, 엽혼과 같은 경공의 소유자에게는 아주 큰 것 이었다. 엽혼은 세 번째 도약(跳躍)으로 비응방 내원의 담장을 넘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세어 보는 숫자! '셋!' 그러자 엽혼의 이 마음속의 숫자 셈에 답이라도 하듯, 엽혼의 삼 면을 노리고 푸 른 검날 세 개가 쏘아져 왔다. '화선(花仙)이 제공한 정보는 정확했다.' 생각과 함께 이미 대기하고 있던 엽혼의 일초가 펼쳐졌다. 왼손으로 조(爪)의 형을 지어 좌측 매복자(埋伏者)의 견정혈을 누르고 오른손은 일 지선(一指線)의 형태로 세워 우측 매복자의 승장혈을 찔러 갔다. "케엑!" 두 매복 무사(武士)가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엽혼의 몸이 재도약하면서 마지막 하 나 남은 매복자의 머리를 넘었다. 놀란 마지막 매복자가 머리를 돌리기도 전, 엽혼의 발뒤꿈치가 그의 머리 뒤통수 후정혈을 걷어차니…… 세 명의 매복 무사가 엽혼의 일초 삼변(三變)에 박살이 났다. 지금 여기 매복하고 있는 무사들은 비응방의 일반 무사들로서 엽혼의 일초도 감당 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또다시 이어지는 엽혼의 다른 생각, 다른 숫자! '둘!' 이번에도 어김없이 좌우에서 두 명의 인영(人影)이 덮쳐 왔다. 엽혼이 마음속으로 세고 있는 숫자! 그것은 화선이 구해 준 정보 속에 들어 있던 비응방 내부의 매복자들에 관한 숫자 였다. 다행히도 그 정보는 매우 정확했고, 엽혼은 매복하고 있던 적이 덮쳐 오기에 앞서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좌측과 우측의 모든 방위를 차단하며 덮쳐 오는 두 인영! 이럴 경우, 그대가 오른 손잡이라면 당연히 왼쪽의 인영부터 노려야 한다. 그리고 엽혼 역시 왼쪽의 인영 부터 찔러 가고 있었다. 손에 든 것은 검! 엽혼은 어느새 구절검(九節劍)을 다시 꺼내 든 것이다. 치잉`─ 푹! 엽혼의 구절검이 좌측(左側) 매복자의 검을 옆으로 쳐내고는 천돌혈(天突穴)에 박 혔다. 즉사(卽死)! 비록 좀 전의 세 명보다는 고수라 하나, 역시 일반 무사로서는 엽혼의 일검을 견 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적의 목젖을 반 치 정도 찌르고 들어간 엽혼의 구절검이 이번엔 엽혼의 몸이 회 전함에 따라 옆으로 휘둘러졌다. 찌익`─` 그 바람에 목젖을 찢긴 좌측 매복인의 목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 나왔다. 왜 엽혼이 좌측부터 공격한 것인지는 지금 엽혼의 행동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


다. 좌측 매복인의 목젖을 찢자마자 몸을 우측으로 돌리며 손 또한 밖으로 돌리자, 몸 의 회전에 손을 따라 움직이는 검날의 회전이 더해져 우측 매복을 향해 쏘아 가는 검의 속도는 가 히 전광(電光)이라 할 만했다. 인간의 팔은 안으로 굽힐 때보다 밖으로 펼 때가 더 욱 빠른 법이다. 만일 큰 힘이 필요하다면 굽히는 근육이 중요하고, 빠른 속도가 필요하다면 펴는 근육이 중요하다. 그리고 지금 엽혼에게 필요한 것은 힘[力]이 아니라 빠름[快]이었다. 엽혼이 우측의 매복을 먼저 노리지 않고 좌측을 먼저 공격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에서였다. 칭! "크`─`윽!" 구절검의 가공할 속도를 견디지 못한 매복자의 검날이 부러지며 가슴이 그대로 베 어져 나갔다. 그리고 엽혼은 다시 도약을 했다. 비응방을 벗어나기까지는 아직 먼 길! 과연 엽혼은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3 고수들 거의가 엽혼을 쫓아갔다. 고숭무도, 인소도, 그리고 그 외 여타 고수들도. 그러나 모든 고수들이 엽혼을 쫓아간 것은 아니었다. 단 한 명, 심화절만은 몇몇 수하(手下)를 대동하고 여기 연공실(練功室)에 남아 있 었다. 악적(惡敵)을 쫓아가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뒤를 정리하는 일도 중요하다. 침입해 들어온 살수가 더 있을지도 모르고, 또 그렇지 않더라도 현장을 보존하는 일은 매 우 중요한 것이다. 만일 살수(殺手) 개인의 원한에 의한 암살이라면 모르되, 다른 제삼의 인물에 의한 청부(請負) 살인이라면 그 사람까지 밝혀 내야 하는 것이다. 심화절은 재지(才知)가 출중한 인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천기수사(天機秀 士)란 명호를 감당하겠는가? 석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금사진의 가슴! 가슴에 뚫린 검 상(劍傷)! 그리고 그곳에서 흘러나와 바닥에 흥건한 피! 방주의 시신을 수습하려는 수하들을 제지하며 심화절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자의 무공이 이렇게 높단 말인가? 아무리 운공(運功) 중이었다고 하나 방주가 전혀 반항을 못 하고 당하다니. 게다가 이 피들은? 살아 있는 사람의 가슴을 검이 찔렀건만 어떻게 피가 아래로만 흘러내려 있단 말 인가? 왜 피가 앞으로 튀어나오지 않은 것일까? 혹시 이 살수의 뒤에 누군가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심화절의 눈빛이 다급해졌다. 만일 누군가가 있어 이 살인을 암중(暗中) 지원했다면…… 그렇다면…… "여봐라, 어서 고 당주 등을 쫓아가거라. 그리고…… 아니, 아니다……"


암중에 살수를 지원한 자가 있다면 그는 살수의 입을 막아 자신을 숨기려 할 것이 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심화절은 수하 몇에게 살수를 반드시 생포하라고 고 당 주 등에게 전할 것을 명령하려다 생각을 바꾸었다. "아니, 내가 직접 갈 테니 너희들은 내가 올 때까지 현장을 반드시 이 상태 그대 로 보존하고 있어야 한다." 고개를 조아리며 답하는 광문당의 수하들을 뒤로하고 심화절의 몸이 질풍처럼 밖 으로 쏘아 갔다. 가공 경지(境地)의 신법! 이러한 고수가 얼마 전 금사진의 일격을 당하기 힘들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 가? 천기수사 심화절(深化絶)! 여기 또 한 명의 고수가 있었다. * * * 엽혼을 다시 앞에서 덮쳐 오는 그림자들은 원래부터 있던 매복자가 아니었다. 엽혼이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기도 전에 달려들고 있었으므로. 게다가 그 기세 역시 기존의 매복자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먹이를 발견한 표범이 달려들듯, 그 속도와 힘은 그야말로 가공지세! 각각 검과 도 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두 인물. 가슴에 새겨진 글귀가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게 했다. 좌위(左衛), 그리고 우위(右衛)! 금사진을 분신처럼 따르며 호위해야 하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의 경우, 즉 금사진이 무공 수련에 들었을 때만은 물러나 쉴 수 있었다. 그리하여 전원(前園)에서 쉬고 있다가, 호각 소리에 달려나온 그들이 엽혼과 마주 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호각 소리와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방도들의 외침에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 는지 알아 낸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인 금사진의 호위를 완벽히 하지 못했다는 자 책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 자책은 곧 분노로 변해 그들의 검을 더욱 위력적이게 하고 있었다. "고 수(高手)!" 엽혼의 입에서 놀란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뒤이어 그들이 금사진을 호위하는 수신삼위 중 둘임을 알아보았다. 전면에서 달려들던 그들이 어느새 좌우로 나뉘어 내리쳐 오고 있었다. 앞측의 좌 우에서 내리쳐 오는 검과 도! 하지만 엽혼은 뒤로 피할 수 없었다. 뒤에는 비응방의 전력(全力)이 오고 있지 않 은가? 설명은 매우 길었다. 그러나 이곳은 비응방의 전원, 금사진이 죽은 석실에서 단지 삼백 장(:지금의 약 1 ㎞) 떨어진 곳일 뿐이다. 고수들이 내공을 다해 달린다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좁혀질 거리! 엽혼이 석실에서 나와 고숭무와 일장을 교환하고 이곳에 이른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 다. 또한 이 순간이 심화절이 금사진의 시신에서 이상함을 느끼고 달려오고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전면에서 좌우로 나누어 달려드는 두 고수! 약점을 찾는다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두 사람이 한편이 되어 어떤 일을 해본 일이 있는가? 하나의 일을 서로 상대방이 해주겠지, 하고 미루다가 큰 손해를 본 일이 있는가? 만일 그런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엽혼의 선택을 이해하리라. 동등한 능력을 지닌 두 고수의 합공(合攻)! 그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이야말로 가장 위험하면서 동시에 가장 안전한 곳이기도 했다. 상대방에게 미루느라 공격 시간을 못 맞출 수도 있고, 또한 공격을 하더라도 자기 편이 다칠까 봐 심한 공격을 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휘리릭`─` 엽혼의 구절검이 맴돌며 공기를 가르는 소리였다. 좌위와 우위의 정중앙을 향해 달려들며 구절검을 휘둘러 좌우 양위(兩衛)의 사이 를 벌린 엽혼은 마침내 둘의 방어를 돌파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엽혼은 급히 몸을 세웠다가 역방위(逆方位)를 밟으며 뒤로 번개같이 물러났다. 이들은 수신삼위(守身三衛)! 모두 세 명이란 것을 엽혼은 갑자기 생각해 냈던 것이다. 이 둘 외의 나머지 한 명은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인가? 여기에 생각이 미친 엽혼은 급히 뒤로 물러났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엽혼의 생각을 뒷받침이나 하듯 앞에서 번개같이 날아오는 하나의 창! 창끝을 잡고 있는 자의 복장은 앞서 나타난 둘과 똑같다. 다만 가슴에 씌어진 글귀만이 달랐다. 이자가 바로 수신삼위의 우두머리이며 가장 강한 고수라는 중위(仲衛)였다. 쏘아 오는 창! 비록 늦게나마 깨닫고 몸을 돌린 까닭에 죽음은 면했으나, 온전할 수는 없었다. 피 하거나 막기엔 이미 늦었음을 깨달은 엽혼은 오히려 왼쪽 어깨를 갖다 대며 오른 손의 구절검을 휘둘러 자신의 우측에 있던 좌위를 공격해 갔다. 푹`─` 엽혼의 어깨에 중위의 창이 깊이 박히는 소리였다. 이와 동시에 엽혼이 휘두른 오 른손의 구절검도 좌위를 핍박해 가고 있었 좌위는 대경(大驚)하며 도를 급히 끌어올려 엽혼의 검을 막아 나갔다. 창! 검과 도가 부딪치는 소리. 엽혼이 항상 노리고 찔러 가는 목젖 바로 앞에서 구절검과 좌위의 도가 부딪쳤다. '막았다!' 좌위의 순간적인 생각이었다. 엽혼이 지닌 구절검은 아홉 개의 독립된 마디가 이어져 검을 이루는 것이었고, 그 아홉 개 각각을 내부의 용수철이 당겨 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엽혼은 손잡이의 단추를 눌러 용수철의 당기는 힘을 풀어 버렸다. 휙! 진로(進路)가 막힌 엽혼의 구절검이 마치 뱀처럼 머리를 꺾으며 좌위의 도(刀)를 휘감더니 그대로 좌위의 목젖에 꽂히는 것이 아닌가! "끅`─`!" 구절검의 또 다른 묘용!


원래 이런 변화는 포승(捕繩)을 자주 쓰는 신포(神捕)들 사이에서 전해지던 절기 (絶技)로서, 검으로 구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소림 출신의 한 승려는 이 절기를 극한(極限)까지 연마하여 단지 한 가닥의 끈만 으로 당할 자가 없었다 한다. 어쨌든, 엽혼은 왼쪽 어깨를 희생시킴으로써 절명(絶命)의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 냈을 뿐 아니라 좌위까지 해치울 수가 있었다. 구절검(九節劍)의 절묘한 변화에 우위와 중위가 잠시 멈칫하는 순간, 엽혼은 몸을 돌려 자신의 왼쪽 어깨에 박힌 중위의 연자창에서 벗어났다. 찌`─`익! 마치 팽팽한 천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엽혼의 어깨에서 피가 솟아올랐다. 크게 한 점 찢겨져 나간 살덩이! 그리고 고통을 참느라 악물어진 엽혼의 이! 창이나 활 등, 찌르고 들어가는 무기들은 모두 날끝에 역린(逆鱗)을 가지고 있어 안으로 밀어 넣기는 쉬우나 밖으로 빼내기는 무척 어렵다. 만일 억지로 빼낸다면 역린(逆鱗)에 의해 찔릴 때보다 더욱 큰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전쟁에서 적의 활을 맞은 장수들이 화살을 빼지 않은 채, 끝까지 싸우는 것은 바 로 이 때문! 하지만 지금 엽혼이 맞은 것은 활이 아닌 창이니 그대로 둘 수도 없 는 노릇 아니겠는가? 해서 무리하여 어깨에서 창을 빼냈던 것이다. 어깨에서 전해지는 고통으로 아득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을 틈도 주지 않고 중위가 다시 공격해 들어왔다. 연자창의 날이 없는 부분이 선풍곤(旋風棍)의 수법으로 휘둘러져 왔던 것이다. 엽 혼의 허리를 노리며 달려드는 봉의 기세는 그야말로 용이 달려드는 듯했다. 혹자(或者)가 창을 가리켜 꼬리를 감춘 독룡(毒龍)에 비견하였는데, 이는 창의 날 을 꼬리에 붙은 독침에 비유하고 창의 봉(棒) 부분을 용의 몸통에 비유한 것이었다. 휘두르는 이에 따라서 창으로도, 봉으로도 쓰일 수 있는 것이 창인 것이고, 또한 창에는 그만큼 변화가 많다는 의미도 포함하는 격언(格言)인데…… 지금 엽혼의 허리로 휘둘러져 오는 창(槍)의 기세와 변화를 그야말로 잘 표현해 주고 있는 말이 아닌가! 엽혼의 몸이 그대로 뒤로 밀려났다. 옆으로 휘두르는 공격에는 이와 같이 뒤로 물러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응이 아니겠는가? 하나 거의 동시에 우위의 검이 물러난 엽혼의 머리를 노리고 짓쳐 들 고 있었다. 그리고 헛손질을 한 중위의 창도 다시 꼬리(:칼끝)를 앞세우고 엽혼의 가슴으로 날아왔다. 같은 싸움에서 우위 가 단지 일초의 공격을 가하는 동안 중위가 이초식을 공격하고 있음은 중위의 무 공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러한 중위의 일격을 왼쪽 어깨만을 희생한 채 피해 내며 좌위를 죽일 수 있는 엽혼의 무공 또한…… 엽혼의 몸이 뒤로 휘어지며 등이 거의 땅에 닿는 형국이 되었다. 우위의 검이 허


공을 가르고 중위의 창이 빈 공간을 찌른 것은 거의 선후(先後)를 가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엽혼의 왼발이 차 올려지며 중위의 창을 쥔 손목을 노리는 것도 단지 일수 유에 일어난 일이었다. "헉!" 중위가 헛바람을 들이키며 부득불(不得不) 몸을 옆으로 피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 오른발 하나로 몸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던 엽혼이 오른발을 튕겼다. 차 올리던 왼 발의 힘과 막 튕긴 오른발의 힘, 그리고 찔러 가는 오른손의 속도가 합쳐져 속도 를 얻은 구절검이 노리는 것은 다름 아닌 우위의 목줄기! 막 다시 공격을 펼치려 던 우위는 몸을 급히 옆으로 움직여 피했다. 아까 좌위가 당하던 때의 구절검의 변화를 본 까닭이었다. 잘못 막았다가는 좌위와 같은 꼴이 될까 염려한 것이었으나…… 뻗어 가던 채찍을 잡아채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알고 있는 지금 엽혼이 손목 을 잡아채자 구절검이 일으킨 변화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뱀이 허공에 서 허리를 틀어 먹이를 노리듯 구절검의 끝이 허공을 감으며 회전하는 것이다. "피해!" "욱!" 외침과 비명은 동시에 나왔다. 하나는 중위의 입에서 나머지는 우위의 입에서. "이 놈!" 우위마저 엽혼에게 당하자 분노가 극에 달한 중위가 필생의 힘으로 창을 질러 왔 다. 하지만 일 대 삼의 대결을 끌어 온 엽혼이었다. 비록 중위의 무공이 높다 하나 엽혼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었 질러 오는 창을, 용 수철이 다시 당겨져 팽팽해진 구절검이 마주쳐 나갔다. 차`─ 창`─`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연이어 나며 잇달아 삼 초 칠 식이 서로 부딪치며 중위를 물러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우열은 명백했다. 아까의 허를 찌르는 기습 공격이 아니라면 엽혼이 어깨를 다칠 리도 없는 차이. 이윽고 막 사 초째를 쳐내는 엽혼의 검이 중위의 목을 노리는 순간, "물러나!" 굉렬한 외침과 함께 뒤에서 강한 권풍이 날아들었다. 엽혼이 수신삼위(守身三衛)와 싸운 것을 설명하기는 비록 길었으나, 그것은 숨 몇 번 들이쉴 사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짧은 사이에 비응방의 주력들은 그를 쫓아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엽혼은 중위를 노리던 검을 되돌려, 쏘아 오는 고숭무의 권세(拳勢)를 막아 갔다. 펑`─ 기습적인 권세를 막아 낸 엽혼이 뒤로 밀려나며 자세를 가다듬는, 그 짧은 순간! 엽혼의 주위로 인영들이 분분히 떨어져 내렸다. 하나같이 눈빛이 형형한 인물들! 이들이야말로 비응방의 핵심 인물이었고, 엽혼은 자신이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순간적인 임기응변으로 만들었던 바늘 같은 기회! 그러나 엽혼은 수신삼위라는 의외의 인물 때문에 그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리고 이제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제 7 장 용봉초현(龍鳳初現) 1 바닥으로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피! 엽혼의 어깨에서 흐르는 것이다. 지혈할 시간이 없었던 관계로 엽혼은 지금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엽혼은 점차 온몸의 힘이 빠져 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엽혼이 중위와의 대결에서 서둘러 승부를 내고자 무리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너무 늦었다. 일성 노호(怒號)와 함께 가장 먼저 고숭무가 달려들었다. 그는 엽혼에게 빚이 있지 않은가? 조금 전 그는 엽혼이 달아나도록 도운 셈이 되었던 것이다. 콰콰`─ 펑! "우욱!" 엽혼의 몸이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파황권의 삼권(三拳) 중 하나를 막지 못하고 가슴에 격중당하고 만 것이다. 어깨의 상처는, 중위 정도라면 모르되 고숭무 같은 고수를 상대함에 있어서는 치 명적이었다. 입가에 흘러나오는 핏줄기는, 이번엔 진짜였다. 하지만…… "교활한!" 보라! 물러서던 엽혼이 구절검을 휘둘러 주위의 비응방도를 베어 가는 것을! 비록 내상 을 입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와중에서도 엽혼은 일말의 생로를 트고자 하는 것 이다. 엽혼의 일초에 비응방도 둘이 그대로 죽어 갔다. 그리고 그들의 시체를 밟고 뛰어오르며 포위망을 뚫으려 하는 엽혼! "물러나라!" 그러나 엽혼의 기도(企圖)는 바로 옆에서 터져 나온 이 외침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정수리를 향해 똑바로 날아오는 강한 경기! "조공(爪功)! 귀조(鬼爪) 독소명(獨蘇冥)?" 이대로 뛰어오르다간 독소명의 조공에 머리가 성치 못할 것을 안 엽혼이 검으로 기세를 막으며 할 수 없이 땅에 내려섰다. 펑! 순간, 고숭무의 일권이 엽혼의 등을 두드렸다. 엽혼의 입에서는 그야말로 폭포수처 럼 선혈이 뿜어 나왔다. "이놈, 검을 놓아라!" 독소명의 혈령귀조(血靈鬼爪)가 엽혼의 손목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엽혼은 정신이 아득한 상황에서도 무의식중에 손을 휘둘러 막으려 하였다. "욱`─`"


그러나 엽혼의 검은 허공을 가르고 독소명의 조공은 정확히 엽혼의 손목을 베어 내어 엽혼이 더 이상 검을 잡지 못하도록 하였. 떨어진 검! 그리고 그와 함께 엽혼의 생명도 떨어지는 것 같았다. 심화절이 멀리서 나타난 것도 이 순간이었다. 그가 절정의 경공을 발휘하여 날아왔음에도 이렇듯 시간이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설명이 장황했던 까닭이고, 또한 그만큼 장내의 변화가 빨랐던 때문이 다. "멈추시오!" 심화절이 외친 소리는, 비록 멀리서 들려 온 것이었으나 중인의 귀에 똑똑히 들렸 다. 공력이 깃들인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화절의 외침도 사공두의 행동을 막진 못했다. 순찰당주 사공두! 무공 방면으로 다른 당주들에 비해 조금 떨어지나 금사진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인정받아 순찰당주가 된 인물! 그런 그가 금사진을 살해한 엽혼을 보고 눈이 뒤집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지도 몰랐다. 엽혼이 쓰러지자 사공두는 자신의 박룡도를 휘둘러 엽혼의 심장을 쪼개 갔다. "멈추라니까!" 심화절이 다급히 외치며 수중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져 내었다. 슉`─`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는 이것이 바로 심화절의 필생 절기인 천심비도(穿心飛 刀)! 항상 비도는 상대의 심장을 노리며 날아갔다. 하나 이번의 천심비도가 노린 것은 심장이 아닌 손,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그 손 이 잡고 있는 도였다. 그러나 천심비도가 제 위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을? 쨍! 비도는 정확히 사공두의 도를 쳤지만 그 방향만 조금 틀었을 뿐 도를 제지시키지 는 못했다. 심화절이 비도를 던진 것에 대해 모두의 눈에 의혹의 빛이 떠오를 때, 사공두의 도는 엽혼의 가슴에 박혔다. 푹!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하늘이 미친 듯이 돌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떠오른 것은 이름 둘! '평아(枰兒), 그리고 소백! 이제는 너희들만……'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바닥에는 자신이 흘린 흥건한 핏물! 자신이 살아 온 인생을 나타내는 것인가? 엽혼은 서서히 핏물 위로 쓰러져 갔다. 엽혼은 청부를 완수했지만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금사진은 죽었지만 엽혼이 죽인 것은 아니었다. 비록 침입은 성공했으나 탈출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심장에 도가 박힌 채 쓰러진 엽혼은 서서히 정신을 잃어 갔다. 하늘이 밝아 오고 있었다.


오늘은 정월 십오일, 중원인이라면 누구나 즐거워하는 상원(上元)인 것이다. 그러 나 여기 즐거워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 * 대청 안. 비응방의 대소사를 처리하며 금사진이 업무를 보던 이곳에 지금 금사진은 없다. 다만 비응방의 주요 인물들이 침중한 표정으로 모여 있을 뿐이었다. 끝없이 흐르는 침묵. 그 끝에 고숭무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문상의 말은 정녕 확실한 것이오?" 문상, 심화절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그리고 좌중에 다시 감도는 침묵. 심화절은 오늘 방 내의 중요 인물들을 모두 모이라 한 뒤 폭탄 같은 한마디를 한 것이다. ─`방 내에 배신자가 있소! 그리고 중인들은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하고 침묵에 잠겨 있게 되었다. 다시 고숭무가 입을 열었다. "증거라도 있으시오?" 다른 사람들이 조용히 있을 때 고숭무가 입을 열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지위가 높 음을 말해 준다. 기실 비응방 내에서 무상 고숭무와 문상 심화절의 위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바 가 있었다. 비록 사공두가 서열 사 위라 하나 이, 삼 위의 두 인물과는 많은 차이 가 나는 것이다. 무공이든 다른 능력이든. 그리고 방 내에서의 대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고숭무의 물음에 심화절은 말없이 고개를 들어 뒤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광문당 소속의 무사가 목함 하나를 들고 의원 차림의 노인을 대동한 채 들 어왔다. 심화절이 좌중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방주의 무공으로 보아 일초의 반격도 없이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겝니다. 게다가 만일 자객의 검이 치명적인 사인 (死因)이라면 어찌 피가 사방으로 튀지 않고 좌대 아래로만 떨어졌겠습니까?" 말을 마친 심화절의 눈짓에 따라 무사가 목함을 열어 속에 든 물건을 꺼내었다. 침(針)! 길고 뾰족한 침이 아닌가? "방주가 앉았던 좌대를 부수어 찾아 낸 것입니다." 이어 의원 차림의 노인이 심화절의 눈짓에 따라 나서며 말했 "에, 방주님의 사인 (死因)은 무엇보다 회음혈에 난 상처와 그곳을 통해 침투한 독이라고 해야 할 것 입니다." 좌중의 시선이 모두 침의 끝 부분으로 모아졌다. 침의 끝은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독! 독(毒)이 아니라면 저런 빛이 나겠는가? "방주께서는 운기하시는 도중 이 침(針)에 의해 이미 숨이 끊기신 것입니다."


심화절의 말에 좌중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럼, 심 당주의 말은 여기의 누군가가…… 아……!" 청아하고 기품이 깃들인 목소리. 여인의 몸으로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하나뿐 이었다. 비응방 내에 서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여인! 바로 금사진의 부인. 이제는 미망인(未亡人)이 된 적염(狄艶)이었다. 금사진의 암살 소식을 듣고 기절하였다가 깨어나 겨우 이 자리에 참석한 적염이, 방 내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혼절하고 있는 것이다. * * * 사방으로 말이 치달았다. 숭산으로, 금정으로, 또는 공동으로…… 말이 향하는 곳은 달랐지만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천하무림을 좌우하는 거대문파들이 있는 곳! 그리고 알게 모르게 비응방과 이해(利害)가 연결되는 문파들이 위치한 곳! 그리고 그 말들이 싣고 가는 소식도 한결같았다. 바로 방주인 금사진의 사망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 한 곳. 개방으로 달리는 말이 갖고 가는 소식만은 조금 다른 것이었다. * * * "이로써 방 내에 배신자가 있음은 확실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번 살수의 배후를 캐 는 일도 중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심화절의 말은 항상 조리가 있어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였 다. 반도(叛徒)의 색출을 외부의 인사에게 맡긴다는 것은 비응방으로서는 매우 자존심 이 상하는 일이었다. "누가 반도(叛徒)일지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색출을 맡을 사람을 지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심화절조차도 중인들이 믿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면이 전통적인 거대문파와 신진(新進)의 대문파의 차이였다. 구대문파 등에서는 이 런 일이 일어난다면 전대(前代)의 장로들이 나서서 일을 맡게 되나, 신진문파의 경 우에는 그런 일이 불가능한 것이다. 전통이 있고 없음의 차이가 이처럼 큰 것이었다. 일을 부탁할 문파가 결정된 것은 기나긴 회의가 끝난 후였다. 하지만 사실상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개방( 幇)과 소림(小林), 그리고 아미(峨嵋)! 그 중에서 소림과 아미가 모종의 이유로 제외되니 남는 것은 개방뿐이었다. 개방! 일신의 명예와 재물을 헌신짝 알듯 하며, 제대로 된 화의(華衣)를 걸침조차 방규 에 어긋나는 천하제일방(天下第一幇)! 당금 개방의 용두방주인 인의신개(仁義神 )의 명성을 뉘라서 모르겠는가? 각파의 이득이 서로 엇갈리는 복잡한 무림에서 개방만큼 이 일에 적당한 방파는 없었다.


그리하여 개방으로 가는 말만은 특별히 심화절의 친서(親書)를 싣게 되었다. 살인 을 청부한 배후와 방 내의 반도(叛徒)를 색출하는 일을 도와 줄 것을 부탁하는 친 서가! 2 금청청(金靑靑)은 아직 비극(悲劇)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답답한 심정을 추스르며 화산(華山)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솟아 나는 것은 표현하기 힘든 회한(悔恨)! 인적이 없는 산에서 경공도 펼치지 않고 걸 어가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산속에서 며칠이나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인가(人家)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화산으로 가는 비응방의 파발마가 그녀를 앞질러 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인생에서는 이런 일들이 허다했다. 우리가 과거의 회한에 힘겨워하고 방황하고 있는 순간, 정작 중요한 일들이 우리 의 곁을 스치며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 자신에게 중요한 순간들은 이미 지나갔고, 그런 순간들을 흘려 보낸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곤 하는 것이다. 만일 금청청이 산 아래에서 요란스럽게 지나가는 말에 조금만 주의(注意)를 기울 였어도, 그녀는 금사진의 죽음을 일찍 알게 되었으리라. 이러한 자신의 감정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 정도면 자신의 의도대로 금사진은 톡톡히 망신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마땅 히 통쾌해야 할 일이었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가라앉지 않고 있는 이 답답함은 무 엇일까? 모를 일이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금청청은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산속에서 여러 날을 헤매었다. 그리고 마음을 어 느 정도 다진 뒤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녀는 공교롭게도 자신의 사형(師兄)을 만 났다. "야하!" 누가 이렇듯 말을 서둘러 달리나 했더니…… 말은 잡털 하나 섞이지 않은 설백총! 그리고 그 위에 타고 있는 것은 훤한 기상의 남의청년! 청년을 발견하자마자 금 청청은 반가이 그를 불렀다. "매 사형!" 청년은 바로 화산옥기린(華山玉麒麟) 매일도(梅逸度)였다. 당금 화산장문인인 화산검성(華山劍聖)의 대제자이며, 금청청에게는 사형뻘이 되는 인물이다. 언제나 금청청에게 웃음을 아끼지 않았던 그였지만, 지금 금청청을 보는 그의 안 색은 어두웠다. "네가 여기에 있다니……"


금청청은 순간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사형!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왜……" 그리고 금청청은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매일도는 비응방의 전갈을 받고 문상(問喪)차 보내지던 화산파의 대표 중 하나였 던 것이다. "현천(玄天) 사숙께서도 일을 마치시는 대로 곧장 오시기로 하였으니, 너도 어서 가자꾸나." 금사진이 금청청의 아버지임을 아는 매일도가 조심스럽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금청청은 이미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그렇게 강한 분을 누가……? 너무나 강해서 자신이 그렇게 매몰차게 대할 수 있었는데…… 금청청은 미친 듯이 말을 달렸다. 한시라도 빨리 비응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녀의 심중에 몰아치 는 폭풍을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금사진은 금청청에게 한 번도 따뜻하게 대해 준 적이 없었다. 그것은 금청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런 다툼과 미움은 언젠가는 서로에 대해 이해할 날이 있을 것이라는 전 제(前提)에서 출발했던 것이었다. 적어도 금청청에게는 그러했다. 그러나 만일 아버지가 죽는다면…… 모든 것은 과거가 되고, 그녀와 아버지의 미움은 다시는 돌릴 길이 없게 되는 것 이다. 과거(過去)! 이것만큼 무서운 것이 또 있을까? 아무도 과거는 고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금청청과 매일도가 말을 달려 길을 재촉하고 있는 이 시간, 중원의 곳곳에 서는 비응방으로 급히 달려가는 말들의 흐름이 끊이지 않았다. * * * 개방으로 간 서신은 매우 빠르게 용두방주 인의신개의 손에 들어갔다. 개방은 특 성상 총타가 한 곳에 정해져 있지 않았다. 방주가 머무르는 곳이 그때그때 개방의 총타가 되었던 것이다. 비응방의 서찰은 가까운 사천지부로 전해졌고, 개방 특유의 빠른 연락선(連絡線)을 타고 인의신개에게로 날아온 것이다. 인의신개는 마침 낙양에 머물러 있었고, 비응방의 서찰은 몇 그에게 전달되었다. 인의신개가 지금 읽고 있는 것이 바로 심화절의 서찰이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그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장로는 어찌 생각하시오?" 방주의 옆 자리에 앉아 있는 인물! 낯이 익었다.

사람의 손을 거쳐


송인! 무골개 송인이 아닌가! 질문을 받은 무골개는 망설이지 않았다. "적합한 사람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마침 그 근처에 있기도 하니……" 평소의 송인(宋仁)만을 알고 있는 사람이 지금 그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자신의 눈을 의심할 것이다. 그만큼 뿜어 내는 기도(氣度)가 달랐다. "역시 장로의 의견도 그러시지요? 하지만 그는 엄밀히 말하여 본 방의 인물이 아 니니……"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에게 의뢰를 하면 되지요. 의뢰비를 지불하고서." 인의신개는 껄껄 웃었다. "좋군요.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대답에 매우 만족한 듯 인의신개가 말했다. 그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이런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도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개방이 무슨 돈이 있어 의뢰비를 지불한다는 것일까? 어쨌든 인의신개는 망설이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개방에서 동시에 두 곳으로 연락이 취해졌다. 개방 전통의 연락망을 타고 전해진 두 가지의 전갈! 그 중 하나는 비응방으로 갔 다. 심화절의 요청이 수락(受諾)되었음을 알리는 연락! 다른 하나 역시 비응방의 근처 로 가기는 했지만 다른 곳이었다. 바로 송인이 말한 적합한 인물에게 가는 의뢰서 인 것이었다. 그런데 적합한 인물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의뢰를 받는다고 했는데, 혹시……? * * * 심화절은 개방의 답장을 받고 지극히 만족했다. 개방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인의신개의 명망은 모두가 알아주는 바이니, 결코 비응방의 치부(恥部)를 남에게 알리지 않으리라. 다만 그가 궁금한 것은, 도대체 개방이 보낸다는 인물이 누구일까 하는 것이었다. 인의신개의 의제(儀弟)라는 이 인물에 관해, 그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그가 누구인지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지닌 바 능력이 뛰어나 꼭 반 도를 색출해 주기만을 심화절은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하나의 연락은 당연히 진소백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진소백은 그 연락이 인의신개에게서 온 것임을 알자 뭐 씹은 표정을 지었 다. 자신이 의뢰를 받는 대가는 항상 의뢰인 재산의 절반이었는데, 거지에게 무슨 재산이 있겠는가? "이런, 또 공짜 청부라니……" 툴툴거리던 진소백의 표정은 내용을 읽어 가며 점차 진지하게 변했다. 비응방의 일이라면 엽혼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일을 청부한 배후자를 찾는 일은 어쩌면 비응방 내부에서 더 쉬울 수 있을 것이 다.


어쨌든 일이 묘하게 꼬이고 있었다. 진소백은 개방의 협사들을 시켜 천랑파(天狼派)와 화선(花仙)의 종적을 찾는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을 명령했다. 개방의 방도가 아니면서도 이렇게 개방의 인물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또한 인의 신개와 의형제를 맺을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개방의 의뢰를 무료로 많이 들어준 덕분이었던 것이다. 분분히 흩어져 가는 개방의 인물들을 보며, 진소백은 비응방으로 갈 채비를 서둘 렀다. 3 지금 비응방 주위로 천하 곳곳의 고수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강호인들은 성격이 급한 만큼, 비록 문상을 온 자들이라고 하나 고수들이 모여든다면 다툼이 있기 쉬 웠다. 따라서 웬만큼 눈치가 있는 자라면 행동을 조심해야 함을 당연히 알 것이다. 하지만 두천화(杜天華)는 불행히도 눈치가 빠르지 못했다. 그리고 그 밑의 똘마니 들 역시 눈치가 없었다. 이것은 그들에게는 매우 불행한 일이었지만 그들은 아직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 이 눈치없는 자들은 객점의 뒤뜰에 모여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것 이었다. "이봐, 알겠느냐?" 두천화가 자신의 똘마니 셋을 모아 놓고 신신당부를 하고 있었 비응방으로부터 멀 지 않은 이 객점은, 언젠가 금청청이 파산이흉을 죽였던 그곳이 아닌가? 두천화가 있는 두가장(杜家莊)은 그다지 크거나 유명하진 않았다. 다만 소장주인 두천화가 여자 탐하기를 밥 먹기보다 좋아하는, 다시없는 한량으로 유명할 뿐이었다. 한량인 두천화가 여태껏 아무 탈 없이 살아 온 것은 우습게도 이곳이 비응방의 영 역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비응방과 어떤 관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아는 사람 중의 하나가 비응방 소속이어서, 비응방과 관계있는 사람은 건드 리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가 건드렸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일반(一般)의 힘없는 백성들이었으니… … 하늘이 한 번쯤은 화가 나지 않을 리 없지 않은가? 어쨌든 그런 두천화가 지금 주루 안에 앉아 있는 아리따운 여인을 보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그 여인이 비응방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확인까지 하고 난 상태이 니 말이다. 해서 수하들을 모아 미녀 하나를 말아 먹으려는 작전을 시행하려 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이윽고 지시를 마친 두천화가 수하들의 어깨를 툭툭 쳤다. " 자, 알아들었으면 어서들 가보거라." 두천화의 말에 따라 수하 세 명이 주루로 먼저 들어갔다. 여인의 나이는 이제 스물을 갓 넘긴 듯했다. 곱게 빗어 올린 머리 아래에 맑은 이마가 여인의 심성을 말해 주고 있었다. 몇 가지 담백한 야채만을 시킨 채 조용히 앉아 있는 여인! 돈이 없는 것일까? 몸 에 걸친 옷도 수수한 포의였다. 한 번씩 고개를 들어 밖을 보곤 하는 모습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오늘 두천화가 노리는 목표는 바로 이 여인인 것이다.


두천화가 들여 보낸 수하들은 여인을 향해 곧바로 다가갔다. "흐흐! 이렇게 예쁜 소저가 홀로 앉아 있다니…… 흐흐!" 한 놈이 농을 걸기 시작하자 이에 질세라 다른 놈이 말을 받아 이어 간다. "흐흐, 예쁜 소저가 이런 음식이나 먹고 있다니…… 어때, 어르신들이 좋은 것으로 사줄 테니……" 여인이 아미(蛾眉)를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주루의 구석에 앉아 있던 진소백의 검미(劍眉) 역시 미미하게 올라갔다. '저놈들은 뭐야?' 진소백뿐만이 아니다. 주루 내의 많은 사람들의 인상이 미미하게 지푸려지고 있었지만, 세 명의 무뢰한 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후!' 진소백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여인을 걱정하는 한숨이 아니라, 농을 거는 불량배들을 걱정하는 한숨이었다. 그 리고 지금 밖에서 막 들어오고 있는 눈치없는 놈이 한심하게 여겨져서 나오는 한 숨이었다. 진소백은 구석에 앉아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삐적 마른 노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분위기 파악도 못 하는 놈들이군!' 어쨌든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놈들이 여인을 괴롭히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 아, 밖에서 드디어 최고로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놈이 나타나며 우렁차게 외쳤다. "이놈들! 무엇 하는 짓이냐? 감히 백주에 여인을 희롱하다니." '우렁찬 음성에 늠름한 기상이다!'`라고 두천화(杜天華)는 스스로 생각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이런 등장에 만족했다. 위기에 빠진 여인을 구하는 멋진 사내로서의 등장, 그리고 더욱 멋진 활약상이 이 어지는 것이다. 여인을 희롱하던 무뢰한 셋이 갑자기(?) 나타난 이 방해꾼을 없애기 위해 달려드 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수순(手順)이었다. "흐흐! 네놈은 뭐냐?" 괴소를 흘리며 달려드는 무뢰한과 그런 놈들 셋을 한 수에 멋지게 무찌르는 자신 의 멋진 모습! "어이쿠, 못 당하겠다. 도망가자." 엉금엉금 기듯이 도망치는 자신의 수하를 보면서 두천화의 얼굴에는 은은한 만족 의 표정이 어렸다. 뒤를 보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여인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떠올라 있을 것임 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면 자신은 더욱 멋지게 어깨를 펴고서는 여인의 앞 자리에 앉으며 말을 건네 는 것이다. "소저, 이제 안심하시오."


'대사 좋고!' 이 정도 되면 다음은 뻔하지 않은가? 뭐 구해 주셔서 감사하다느니, 은인이라느니, 하는 말이 오고 가며 분위기가 무르 익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분명히 그것이 정상인 것인데…… '엥, 이거 뭐 이래?' 자신이 목숨을 걸고 구해 준(?) 여인은 가끔씩 고개를 들어 밖을 내다볼 뿐 두천 화에게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 하는 수 없이 다시 한 번 말을 꺼내 보는 두천화! "헴, 헴! 그 뭐 이런 일은 남자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니……" 공연히 계면쩍어 헛기침을 하는 두천화에게 여인은 조용히 손을 들어 한 곳을 가 리켰다. 그리고 여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리던 두천화의 안색이 변했다. 세 명의 무뢰한, 아니, 자신의 수하 세 명에게 일이 생긴 것이 자신들의 임무(?)를 다한 채 밖으로 나가던 그들을 한 노인이 막아선 것이었다. 삐적 마른 몸에다가, 붉게 물들인 삼베 옷을 걸친 노인! 손에 든 것은 기이하게도 붉은빛이 감도는 대나무였는데, 아마도 너무나 마른 탓에 설 힘도 없어 몸을 받치 기 위한 것인 듯했다. 자신들의 앞을 막아 선 사람이 이런 약한 노인임을 보고 그대로 밀치고 나가려고 했던 세 대한은, 노인의 한마디에 그대로 뻣뻣이 굳어버렸다. 공포(恐怖) 때문에 말이다. "노부(老夫)는 냉설(冷雪)이라고 한다. 들어 보았느냐?" 목소리조차 차가운 눈이 펄펄 날리는 것 같았다. 혈고죽(血枯竹) 냉설의 이름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는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남자를 특히 많이 죽였다. 그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딸 냉상아(冷祥娥)가 유명한 음적이었던 채화랑(採花郞)의 손에 걸려 순결을 잃고 자결한 후, 여자를 희롱하는 자는 그의 손에 걸려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강호의 절정고수로 알려졌던 채화랑도 열흘간의 추격 끝에 냉설의 손에 잡혀 오분 시(五分屍)되어 죽었다던가? 대한들이 이렇게 떨고 있는 것은 이런 일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공포를 이기 며 가장 먼저 냉설을 알고 있다고 고개를 끄덕인 것은 좌측의 대한이었다. "좋다. 네놈은 노부를 알아보았으니 시신만은 남겨 주겠다. 어쨌든 네놈들의 개 같 은 목숨은 내가 끊어 주마." 여인을 희롱하는 것을 보았으니 냉설이 목숨을 살려 둘 리는 없었다. 시신을 남겨 준다는 것만도 그로서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제안이었던 것이다. '주마'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냉설이 쥐고 있던 대나무로 만든 창(槍)이 발동하 여 세 명의 목젖을 따 나갔다. 기세가 일어나자마자 어느새 죽창이 목젖을 찌르고 있는 가공할 쾌(快)! "헉!" 누군가의 헛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손속에 사정을 두십시오."


"아미타불!" 타`─ 탕! 각기 다른 두 곳에서 날아온 젓가락과 돌멩이가 냉설의 죽창을 밀어 내며 두 대한 의 목숨을 살렸다. 냉설의 기세가 워낙 빠른 탓에 이미 한 대한의 목에서는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 돌중! 감히 방해할 생각이냐!" 냉설의 냉랭한 외침에 이어 손에 들린 혈죽창이 핏빛을 뿌리며 주루를 막 들어서 고 있는 승려를 덮쳐 들었다. "아미타불!" 웅장한 불호와 더불어 승려의 승포가 펄럭이더니 소맷자락이 혈죽창의 기세를 맞 아 나갔다. 그러자 부드러운 소맷자락이 냉설의 창을 감싸면서 공세를 완화시키는 것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 "반선수(盤禪袖)! 소림의 사람인가?" 놀람에 찬 외침을 터뜨리며 냉설이 물러났다. 소림이라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다. 역시 사람은 이름이 나고 볼 일이 아닌가? 냉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 대답이 되는 말은 각기 다른 두 곳에서 들려 왔 다. "지공(知空) 대사를 뵙습니다." "지공 사숙을 뵙습니다." 남의(藍衣)를 걸친 청년 하나가 일어나 승려에게 포권의 예를 취하고, 여태껏 앉아 있었던 포의여인 역시 일어서서 공손히 예를 취하고 있었다. 지공(知空)! 소림의 장경각(臧經閣)을 책임지고 있는 고승! 그리고 당금 소림방장인 현공(玄空) 대사의 사제이기도 한 그가 이곳에 온 것이 었다. 과연 금사진의 이름은 강호에서 컸다. "오랜만일세. 장문인께서는 건녕(健寧)하신가?" 지공은 자신에게 인사한 두 남녀 중 먼저 남의청년에게 인사를 건넸다. 일견하기 에 포의여인을 무시하는 듯한 이 행동은 오히려 지공 대사가 포의여인과의 친분 (親分)이 더 두터움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가 누구이기에? 자신을 무시한 채 지공 등이 서로 인사를 나누자, 냉설이 폭갈을 터뜨렸다. "애송이! 아까의 젓가락은 네가 던진 것이냐?"


"죄송스럽게도 냉 노선배님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예의바르되 비굴하지 않은 청년의 태도에 냉설도 잠시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다만 과거의 일로 난폭한 성질이 가끔 나타날 뿐, 원래 그의 성격이 나쁜 것은 아 닌 까닭이었다. "너는 누구냐?" 한동안 강호에 나오지 않은 탓에 현재(現在)의 강호 인물에 대한 견문이 무뎌진 냉설이 물었다. 공교롭게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 또한 다른 곳에서 들려 왔다. 지공 대사를 뒤이어 막 객점으로 들어오던 홍의여인의 입에서. "제 사형의 이름은 매일도예요." 화산옥기린 매일도(梅逸度)! 당금 화산장문인인 화산검성의 대제자이며, 화산의 차기(次期)를 이끌어 나갈 청년 고수! 따로이 화산제일수(華山第一秀)로도 불리는 그도 여기에 온 것이었다. 매일도를 소개한 것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주루를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는 홍의여인! 진소백도 본 적이 있는 여인이었다. 두천화 역시 물론 여인을 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사색(死色)이 되어 갔다. 바로 금청청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것은 비응방의 각 당에 속한 무사들. 그 중에서도 가 장 앞에 나와 있는 조관(曹串)의 얼굴이 낯익었다. 사형인 매일도에 앞서 먼저 비응방에 들어간 그녀는, 비응방의 소방주의 자격으로 비응방도들을 이끌고 나온 것이었다. 문상(問喪)을 위해 오는 군웅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얼굴에는 수심(愁心)이 가득했다. 냉설의 말이 이어졌다. "흥! 검성(劍聖)의 제자로군. 그러나……" 다시 지공을 돌아보며 말을 이어 가는 냉설의 태도는 매일도를 무시한 것이라기보 다는 배분의 문제였다. 매일도(梅逸度)보다 지공이 한 배분 위의 사람이며, 자신과 동배임을 아는 까닭이 었다. 냉랭히 이어진 냉설의 한마디는 아직 살아남은 두 대한의 아랫도리를 적시게 하고 도 남음이 있었다. 공포로 인해! "……어떤 일이 있어도 난 이놈들을 찢어 죽여야겠소!" 냉설의 살기(殺氣)에 지공(知空) 대사는 다시 한 번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물론 냉 시주의 마음을 이해는 하오나……" 지공이 다시 한 번 더 만류하고, 이어 냉설이 코웃음을 치며 다시 뭐라고 하려는 순간이었다. 이때까지 구석 자리에서 조용히 앉아 술을 마시던 누더기 옷의 청년이 갑자기 일


어나 끼여드는 것이 아닌가! "예(禮)가 아님을 알지만 소생이 한마디하겠습니다." '이건 또 뭐야?' 대한들의 생각이다. "이 대한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니 큰 잘못이 없습니다." '살았다. 생명의 은인이로구나.' 역시 대한들의 생각. "이들에게 이런 일을 시킨 자는 따로 있으니, 그자에게 죄를 묻는 것이 옳을 듯합 니다." 냉설이 냉소했다. "네 말은 무슨 뜻이냐?" 거의 목숨이 떨어질 위기에 놓였던 대한들이 이런 기회를 놓친다면 한이 아니겠는가? 대한들이 이 기회를 놓칠세라 앞다투어 말을 했다. "소인들은 그저 공자가 시키는 대로……"

어찌 천추의

"살려만 주십시오." "두천화 공자가 시킨 일인지라…… 소인들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요." 그리고 대한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중인들의 시선이 서서히 두천화에게로 옮 겨 갔다. 이때까지 그야말로 뭐 씹은 표정으로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두천화의 안색이 더욱 검어졌다. 일러, 사색(死色)! '난 죽었다.' 두천화의 생각이었다. "좋소, 지공 대사. 당신도 내가 이놈을 죽이는 것만은 간섭하지 않으시겠지?" 냉설의 말에 마음씨 순후한 지공(知空)이 다시 한 번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한 번만 인정을 베푸실 수는 없으신지요." 냉설이 네 명을 모두 죽이지 않고 한 명만 죽이는 것은 지공의 체면을 보아 최대 한의 인내(忍耐)로 인정을 베푼 것이었는데, 또다시 지공이 반대를 하자 그는 참을 수가 없었다. 냉설이 막 뭐라 외치려는 순간 또다시 폐의청년이 끼여들었다. "그럴실 것이 아니오라, 그녀에게 이자의 처리 방법을 물어 보심이 공평하지 않겠 습니까?" 그녀란 두천화가 수작을 걸던 포의여인을 말함이다. 중인들은 모두 동의했다. 이것이 가장 적당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두천화의 수작으로 봉변(?)을 당할 뻔한 장본인이니 말이다. 이제 중인들의 눈이 모두 포의여인에게 쏠렸다. "그래,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냉설이 얼굴에 기대의 빛(?)을 가득 담은 채 물어 보고…… "아미타불, 섭(攝) 사


질녀의 뜻을 말해 보게." 지공이 나지막이 물어 보았다. 곤란한 질문에 포의여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그 정도의 일로 목숨을 앗아 간다는 것은 너무 심하군요." 냉설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두천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사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잘못은 있으니 눈알 한 개와 팔 하나 뽑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군요." 냉설의 두 눈에 기쁨의 빛이 떠오르고, 두천화는 흡사 천당(天堂)에서 지옥(地獄) 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냉설은 지공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냉큼 두천화를 끼고 주루 밖으로 나가 버렸다. 지공의 방해를 받지 않으려는 듯. 밖에서 들려 오는 찢어지는 비명 소리. "으아악!" 지공(知空)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던지 다만 눈을 감고 불호만을 외울 뿐이었다. "후, 사질녀의 일 처리는 갈수록 매서워지는구먼!" 포의여인은 조용히 머리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사숙님." 한편, 그녀의 이러한 일 처리에 약간 놀란 매일도가 조심스레 물었다. "소저가 뉘신지 물어도 실례가 되지 않을는지요." 여인의 이름을 묻는 것은 사실 매우 무례한 것이었으나, 너무나 궁금한지라 참지 못했던 것이다.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자신의 결례를 감추려 하는 매일도! 그러나 이러한 질문의 대답도 또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닌 아까 끼여들었던 청년이 또 나서서 말했 다. "형장께서는 아미(峨嵋)에 옥녀(玉女)가 계시다는 말씀을 들어 보셨소이까?" 이 말에 매일도는 금방 깨달았다. 더불어 조금 전의 일도 이해했다. 아미옥녀(峨嵋玉女)! 모든 일에 있어 그 선후(先後)를 정확히 따지며, 행동 하나하나에 있어 상벌(賞 罰) 또한 명확하기로 소문이 난 아미의 젊은 여걸(女傑)! 아마도 그녀는 두천화의 행동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리라. "아미옥녀! 그럼, 소저가 아미옥녀 섭수진(攝守眞)이시오?" 섭수진이 매일도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아미의 섭수진이 인사가 늦었습니다. 매 사형께서는 부디 탓하지 마시길……" 이어 그녀는 금청청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구 파 중 오 파는 가까웠는데, 소림과 아미는 특히 가까웠다. 때문에 아미의 섭수 진은 소림의 지공에게 사숙이란 칭호를 사용하였고, 화산의 매일도는 지공에게 대사란 명칭을 사용한 것이었 따라 서 지금 섭수진이 매일도에게 사형이라 칭(稱)함은 매우 예의를 차린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모든 일이 해결되고 나자, 장내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히 한 사람에게로 옮겨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가장 늦게 나섰으나, 장내의 분란(紛亂)을 가장 빨리 해결한 사람! 참을성이 없는 비응방의 조관(曹串)이 마침내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그리고 이번에야 비로소 물음을 받은 당사자에게서 대답이 나왔다. "진소백, 내 이름은 진소백이라 하오." 제 8 장 의운중중(疑雲重重) 1 비응방의 대청 안은 시끄러웠다. 심화절이 문상객을 맞을 준비를 서두르긴 했으나 다른 일로도 바빴던지라 완벽한 준비를 못 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일을 광문당(廣文堂) 부당주인 오명(烏明)에게 맡긴 채, 자신은 나름대로 금사진의 암살에 대한 단서(端緖)를 찾느라고 분주했던 탓이다. 지금 심화절은 오명에게 문상객들의 도착 상황을 물어 보고 있었다. "오신다고 통보한 분들은 모두 오셨는가?" 도착한 문상객들의 명단이 적힌 서책(書冊)을 심화절에게 건네며 오명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예, 그게……" 오명은 대답을 명확히 하지 못했다. 심화절은 그 이유를 묻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문상객의 명단을 읽어 보고서 바 로 깨달았던 것이다. 문상객들 중, 한 문파의 장문(掌門)이나 지역의 패주(覇主)라 칭(稱)할 수 있는 사 람들은 거의 없었다. 특히, 거대문파에서는 공동의 풍운(風雲) 진인(眞人) 적일수(狄逸秀)만이 유일한 장 문인일 뿐, 나머지는 거의 이대제자들을 문상(問喪)의 대표로 보내 왔던 것이다. 적일수는 적염의 부친이니 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문상객 중에는 거대방파에서 온 장문인이 하나도 없다는 뜻! 다만 소림 (小林)과 화산, 그리고 개방에서 장로급의 인물을 파견하여 그들의 체면을 그나마 세워 주었을 뿐이다. "후! 강호의 인심(人心)이 이와 같다니……" 이것 역시 신생문파의 약점 중의 하나였다. 문파를 이끌어 가던 우두머리가 없어지면 그 뒤를 받쳐 줄 또 다른 인재가 없기 때문에 주위의 문파들이 이렇듯 비응방에 소홀해질 수가 있는 것이었다. 금사진이 살아 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재상 집 개의 문상은 가도, 재상이 죽으면 문상을 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작년 금사진의 생일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지 않 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이와 같으니, 강호의 인심(人心)이 각박(刻薄)하다 어찌 말 하지 않겠는가! 명단을 오명에게 다시 건네 주는 심화절의 얼굴은 침통(沈痛)했다. "어쨌든 오신 손님들의 대접에는 추호의 소홀함도 없도록 하라." "존명(尊命)!" 명단을 받아 들고 물러나는 오명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방주가 죽자마자 비응방의 위세(威勢)가 급격히 떨어짐을 느끼는 까닭이었다. 그런 오명을 심화절이 다시 불러 세웠다. "오명, 힘을 내라. 비응방이 이대로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소방주가 계 시질 않느냐! 그리고 무상(武相)이신 철권 대협도 계시니, 앞으로도 비응방을 쉽게 보진 못할 것이다." 심화절의 말을 듣고 나자 오명은 조금 힘이 나는 것 같았다. 그렇다. 아직도 비응방에는 많은 인재(人才)가 있었다. 그들이 있는 한 결코 비응방은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오명은 생각했다. 오연히 서 있는 심화절의 모습을 보며…… '그리고 당주(堂 主), 당신도 있으니까요.' 심화절을 떠나온 오명(烏明)은 마지막으로 도착한 군웅들에게 숙소(宿所)를 배정해 주고, 그 중 몇 명을 은밀히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주루에서 금청청의 안내를 받아 비응방으로 들어온 지공 대사 일행이 가장 나중 에 도착한 문상객이었던 것이다. 오명이 안내해 간 군웅들 중에는 지공 대사와 섭수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명 의 안내에 따라 영문도 모르고 따라간 군협(群俠)들은 다른 문상객들이 모인 대청 과는 반대편에 위치한 은밀한 밀실(密室)로 안내되었다. 그곳에는 이미 몇 명의 인물들이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임을 주지(主旨)한 심화절은 정면에 서서 군웅들을 맞이하였다.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일일이 포권을 취하며 군웅을 맞이한 심화절이 앉을 자리를 권하였다. 이번에 온 사람들이 앉자 자리가 모두 차는 것으로 보아, 심화절이 초대한 사람들은 모두 온 듯했다. 이윽고 심화절이 입을 열었다. "먼 길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이 심 모, 여러분께 충심으로 감사드립니 다." 문상을 와준 것에 대한 인사의 말! 심화절의 말에 좌중에서도 가장 상석(上席)에 해당하는 위치에 앉아 있던 장년인 이 입을 열었다. "심 방주는 예를 거두고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시는 게 어떻겠소?" 누가 이리도 예의가 없나 하고 고개를 들어 보던 군웅들은 모두 속으로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검은 머릿결에 붉은 혈색이 이제 겨우 사십대로 보이지만 실제의 나이는 이미 육 십을 넘긴 사람.


긴 수염이 유난히 아름다운 이 사람이 바로 풍운 진인 적일수(狄逸秀)였던 것이다. 따로이 미염(美髥) 진인(眞人)이라고도 불리는 당대의 공동장문인. 그라면 자격이 있었다. 이제는 미망인이 된, 금사진의 부인 적염이 바로 그의 딸이었으므로. "적 장문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우선, 이 자리에는 음으로 양으로 본 방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신 분들만을 모신 것임을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심화절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었다. 소림의 지공 대사였다. "심 시주의 말에는 빈승도 포함되는 것이오?" 지공 대사의 의문은 당연했다. 좌중을 둘러보라. 공동의 적일수는 당연히 금사진의 장인에 해당하므로 관계가 있는 것이고, 화산만 하여도 금청청의 사문이므로 관계가 깊다 할 수 있었다. 또한 여타 문파의 대표들 도 모두 비응방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 인물만이 모여 있었으니…… 하지만 소림이 비응방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또한 섭수진의 아미파 역시 비응방과는, 단지 안면 이상의 연관은 없지 않은가? 그러니 지공 대사의 의문은 당연했다. 무림의 배분이 그에게 조금도 못지않은 개방의 장로 무골개가 여기에 없는 것만 보아도, 지공이 초대받은 것은 확실히 의외(意外)였던 것이다. 심화절은 지공의 질문에 대한 답을 조금 미루었다. "대사님! 죄송하오나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심화절의 태도는 지공의 신분을 감안할 때 매우 무례한 것이었으나, 지공은 수양 이 깊은지라 아무 말 않고 넘어갔다. "먼저 저희가 이번 폐방 방주님의 암살을 시도한 살수(殺手)에 관해 조사한 내용 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심화절은 좌중을 둘러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 살수는 저희가 연공실의 경계에 소홀한 틈을 노려서, 그러니까…… 제 짐작이 지만, 방주가 연공실에 들어가기 훨씬 이전에 이미 침투하여 잠복(潛伏)하고 있었 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심화절의 추리는 매우 적절하여 엽혼이 침투한 상황을 대충 짐작해 내고 있었다. 다만 비밀 통로를 통하여 침투한 것을 알지 못하여, 침투 경로를 짐작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의문이 남는 것은 그가 연공실 내의 어디에 숨어서 기다렸나 하는 것 이었습니다." 말을 잠시 쉰 심화절이 눈짓을 하자 독두(禿頭)에 위맹해 보이는 장년인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순찰당의 사공두가 여러분께 인사올립니다."


사공두 역시 형식적인 인사로 말을 꺼내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비록 그날의 연공은 선(先)…… 방주께서 갑작스럽게 결정을 하신 것이었지만, 연 공에 들어가시기 전에 저희 순찰당 고수는 내부를 샅샅이 뒤져 보았습니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살수를 발견하 지 못했습니다." 다시 심화절이 나섰다. "그래서 저희는 이 일이 일어난 직후, 다시 한 번 석실 내부를 수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됐던 거요?" 한 인물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마른 몸에 두 눈 가득 핏발이 선 인물! "귀왕곡(鬼王谷)의 갈 곡주시군요. 말씀드리지요. 살수가 숨어 있던 곳을 마침내 찾았습니다." 심화절이 잠시 마른침을 삼키더니 말을 이었다. "아니, 살수가 숨어 있었음이 확실시되는 작은 틈을 바닥에서 찾았습니다." "그럼, 왜 처음엔 찾지 못했던 거요?" 또 귀왕곡주인 갈현(葛鉉)이었다. 참을성이 매우 없는 인물인 "그 위치가 절묘하기 도 하였거니와…… 중요한 것은 틈이 너무나 좁아 도저히 인간이 몸을 숨겼으리라 짐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실, 연공관의 그 틈은 이미 무사들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인위적으로 뚫어 두어 탁한 공기가 잘 빠지도록 해 숨쉬기 편하도록 한, 사방 한 치 반 정도의 틈! 하지만 너무 좁아서 인간이 숨을 수는 없기에 보통의 조사에서는 소홀이 넘어가는 곳이기도 했다. 그 틈에 살수가 숨어 있었으리라고 추리해 낸 사람은, 다름 아닌 심화절이었다. 심화절의 말이 이어졌다. "비록 그 틈이 매우 좁기는 하지만, 저는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낼 수 있었습 니다." 잠시 여유를 둔 심화절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무림에는 많은 기이한 공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매우 작은 틈이라도 들어갈 수 있도록, 인간의 관절을 빼내어 몸의 크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공(奇 功)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중인들에게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그런 무공은 확실히 있었다. 보통 축골공(縮骨功)이란 이름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기공들은 그 뿌리를 중원이 아닌 천축의 유가공에 두고 있기는 했으나, 분명히 중원에 전해지고 있었다. 천축의 유가신공(瑜伽神功)! 이 무공에는 특이한 묘용이 있어 절정까지 익히게 되면 자유롭게 몸의 관절을 빼


고 근육을 늘이거나 수축(收縮)시킬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종내에는 몸에서 관절(關節)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어진다 하였던가? 그 러한 유가신공을 이용하여 천축인들은 나름대로 심신(心身)을 닦는다고 전해지고 있었는데…… 중인(衆人)들의 생각은 지공 대사의 창노한 불호 소리에 깨어졌다. "아미타불! 그럼, 심 시주가 빈승을 이곳에 부른 까닭은?" "그렇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기 죄송스러우나 여쭈어 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서 ……" 심화절은 도대체 지공에게 무엇을 물어 보고자 한다는 말인가? 좌중의 인물들 중, 강호의 지식이 해박한 몇몇만이 이런 대화 속의 숨은 뜻을 이해했다. 대소림사! 지금 중원의 영수 격이라 할 수 있는 이 문파의 무공 중 일부(一部)는 그 뿌리를 천축(天竺)에 두고 있었다. 그 와중(渦中)에 천축의 유가신공 역시 소림에 전해져서 보완(補完), 수정(修正)되 어 전해지고 있었다. 그 중에는 몸의 관절을 빼내어 좁은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축골공에 대한 공부 (功夫)도 분명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공부의 흔적이 살수에게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오늘 심화절 이 묻고자 하는 것은 그에 따른 몇 가지의 의문이었다. "심 시주의 말은 그 살수가 소림 출신이라도 된다는…… 것이오?" 수양이 깊은 지공의 말에, 이때만은 은은한 노기(怒氣)가 배어 있었다. "그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소림 무공의 흔적이 발견되어서…… 죄송합니다. 일단은 알려 드림이 도리라 생각되어서……" 말은 지극히 공손하지만, 뜻은 살수가 소림 출신임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다만 심화절의 표현이 지극히 공손하고 우회(迂廻)적일 뿐! 지공이 어찌 우둔한 인 물일 수 있겠는가? 이미 심화절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것은 소림에 대한 크나큰 모독이 아닐 수 없었다. 보통의 인물이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노화에 못 이겨 당장 증거를 내놓으라 고 난리를 칠 일이었다. 그러나 지공은 일대의 고승, 나지막이 경을 외워 일단은 마음을 가다듬고자 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소림의 저력이었다. 무공을 닦기 전에 마음을 닦는 것이 소림이었기에, 그토록 오랜 세월을 구파(九派) 의 영수(領首)로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 "심 당주님께서는 그 살수가 사용한 무공이 소림과 관계가 있음을 확신하고 계신 가요?" 지공이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사이, 심화절의 말을 받으며 나선 것은 포의를 걸친 젊은 여인이었다. 그러나 비록 여인이라 할지라도, 심화절은 이 여인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녀가 바로 아미옥녀 섭수진이었으므로! "유감스럽게도, 살수의 무공 근원(根源)은 소림임이 거의 확실합니다." 심화절의 말에 섭수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심화절이 비록 군웅을 맞아 예의를 다해 말을 하고 있으나, 그는 결코 만만한 인 물이 아니다. 특히 그가 확실한 자신이 없는 일이라면 결코 함부로 발설하지 않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분명 살수가 사용한 무공이 소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중인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만큼 무림에서 소림이 차지하는 비중은 큰 것이었다. 마음을 어느 정도 가다듬은 지공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심 시주께서는 살수의 배후에 혹여라도…… 소림(小林)이 있음을 의심하는 것이 오?" 심화절이 펄쩍 뛰었다. "천만의 말씀을! 제가 어찌 감히……" 당황이 역력한 빛으로, 결코 소림에 대해 의심을 갖고 있지는 않음을 명확히 한 심화절이 공손히 말했다. "다만 그 살수의 무공 연원(淵源)을 찾아 나감에 있어 대사의 도움을 구하고자 하 는 것입니다. 어쩌면 소림에서 파문당한 자…… 에게서 유출되었을 가능성도 크니 말입니다." 심화절이 이렇게 나오자 지공으로서는 할말이 없었다. 살수의 무공이 소림과 관계 있다면, 소림으로서도 일말의 책임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심화절의 협조 요청에 대해 따라야 할 어느 정도의 의무감마저 느끼고 있 었다. 그러나 지공은 난처했다. 자신은 장경각의 일을 맡은 몸. 오랜 기간 문파를 비울 수는 없지 않은가? 지공 의 마음속의 갈등을 짐작한 것인지, 섭수진이 소리를 죽여 지공을 불렀다. "사숙님!" 다만 불렀을 뿐이었으나, 지공은 단번에 섭수진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미타불, 심 시주의 부탁을 빈승이 직접 이행하지는 못하오나……" 말에 이어서 지공이 가리키는 사람은 바로 섭수진이었다. "섭 사질녀라면 오히려 빈승보다 더욱 훌륭히 해낼 수 있을 것이오." 지공의 말에 심화절의 입가에는 은근한 미소가 어렸다. 이것은 바로 심화절이 노린 것! 그가 지공 외에 섭수진까지 초대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 강호에 널리 알려 진 아미옥녀의 지혜를 이용해 보고자 한 것이 바로 애초 심화절의 의도(意圖)였다. 하지만 직접적인 부탁이 아니라 소림과 아미와의 관계를 이용하여 우회적인 방법 을 택해, 섭수진이 자발적(自發的)으로 나서게 한 것에 대해서는 심화절의 능력이 뛰어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심화절의 몸이 섭수진을 향했다. 이어지는 공손한 포권! "아미옥녀께서 도와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지요." 2


심화절이 양해를 구하고 섭수진과 함께 나가 버린 직후, 지공 대사도 침중한 얼굴 로 밖으로 나갔다. 남은 군웅들 역시 저마다 친한 사람들끼리 삼삼오오(三三五五) 짝을 지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귀왕곡주인 갈현(葛鉉)만은 무언가 못마땅한 듯 자리에 앉아 계속 툴툴거 리고 있었다. 그러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 하던 흑수동(黑水洞)의 동주인 도곡(陶曲)을 붙 잡고서는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도곡은 언제나처럼 음침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엇 말인가?" "아니, 사람을 불러다 놓고, 자기들끼리만 몇 마디 하고 나서 그 섭 뭐시긴가 하는 계집애랑 나가 버리다니……" 계집애라는 말에 도곡의 눈속에 당황이 어렸다. "이봐, 자네는 아미옥녀에 대한 소문도 못 들었나? 금정(金頂) 신니(神尼)의 고제 자로서……" "혹시 아무도 풀지 못했던 아미의 불가지비(不可知秘)를 풀어 내었다는……?" "그렇지. 좀 전에 나간 섭 소저가 바로 그녀라네." 아미의 불가지비! 아미파의 복호사(伏虎寺) 옆에 위치한 계곡에 존재하는, 아니, 존재했었던 의문이 었다. 이 계곡에서는 신기하게도 여름만 되면 얼음이 얼었다. 아무리 깊은 산중이라 하나 폭염(暴炎)의 더위에 얼음이 얼다니…… 이에 얽힌 수 수께끼를 풀고자 많은 석학(碩學)들이 노력하였으나, 끝내 풀지 못하여 말 많은 세 인들이 붙인 이름이 바로 아미(峨嵋)의 비밀이란 것이었다. 비록 이름만큼 거창한 것은 아니었으나 정말 신기한 일인지라, 강호에서 매우 유 명한 수수께끼였었다. 그런데 이제 약관에 불과한 섭수진이 이 비밀을 풀어 내어 아미옥녀란 칭호와 함 께 금정제일지(金頂第一知)란 칭호도 함께 얻었던 것이다. 갈현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심 당주가 그 섭 소저를 데려간 것은 이해가 되는군. 살수의 정체를 밝 히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좋아, 자네 이해했군." "하지만 우리는 왜 불러모은 것이지? 그냥 처음부터 섭 소저만 찾아 도움을 청하 면 되었을 텐데." 도곡은 한숨을 내쉬었다. "심 당주가 말하길, 여기는 비응방과 이해 관계가 있는 네는 비응방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사람만 모였다 하였네. 자


"그야 당연히 자네와 같지. 그 광산(鑛山)……" 갈현의 목소리가 커지자 도곡이 급히 제지하며 말했다. "그 이권은 거대해. 그리고 비응방주의 암살에는 아마도 이런 문제가 숨어 있겠지."

이권(利權)에 대한

갈현이 소리를 죽여 물었다. "그럼, 이번 일은 단순히 원한에 의한 살인이 아니란 말인가?" 도곡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크지." 도곡은 갈현에 비한다면 무공이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머리의 회전(回轉)에 서는 갈현(葛鉉)에 비할 바가 아니어서 이미 사태의 추이(推移)를 어느 정도 짐작 하고 있는 것이었. 도곡의 말은 이어졌다. "때문에 심화절은 모든 사람을 모이게 하여 아미파의 섭수진과 소림의 지공 대사 가 이 일을 중히 여기게 되었음을 알게 하려 한 거야." 갈현이 머리를 쳤다. "이를테면 소림과 아미가 이 일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으니, 누군지는 모르지만 암 살의 배후자는 함부로 설치지 말라는 경고를 한 것이군." "그렇지. 정말 잘 맞추었네." 도곡은 갈현의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갈현이 이렇게 정확하게 머리를 쓴 것이 실로 얼마 만의 일인? "그렇지만 심화절 은 이번 살수(殺手)가 소림과 연관이 있다고 말했지, 아미파와 연관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왜 아미파의 섭수진이 나선 것이지?" 도곡은 자신이 아까 갈현이 기특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모두 도로 무르고 싶었다. '이놈의 돌대가리! 어쩔 수가 없군.' 그리고 이어지는 고함! "젠장할! 자네는 그런 것마저 모른단 말인가?" * * * 긴 회랑(回廊)! 심화절은 섭수진을 안내하고 조용히 뒤따라가던 섭수진이 "심 당주님의 마음 씀씀이는 심화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무슨 뜻이신지……"

있었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강호의 소문보다도 훨씬 대단하시군요." 얼굴로 대답했다.


"처음부터 저를 지공 사숙과 같이 부른 것이 의도된 것이었음을 부인하시는 건가 요?" 심화절이 잠시 여유를 두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폐방으로서는 너무나 중요한 일이어서……" 처음부터 섭수진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음을 시인한 것이 "하지만 능력이라 면 심 당주께서 저보다도 월등(越等)하신데……" "과찬의 말씀을…… 어쨌든, 이번 일은 특성상 제가 나서서 일을 처리하기가 어렵 습니다." 섭수진의 눈이 약간 커졌다. 당황한 것이 아니었다. 상대편에게 어서 다음 말을 할 것을 재촉하는 뜻이었다. "만일, 이번 일이 단순한 원한 관계가 아니라면, 저희 비응방과 이해 관계를 가지 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공정한 수사가 어렵게 됩니다." "심 당주께서도 방 내의 분이시니…… 심 당주께서 조사한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사람이 많을 것이란 뜻인가요?" 심화절의 눈에 '과연'이라는 빛이 어렸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사건은 강호의 권위있는 명문대파의 도움을 빌리고 싶었습 니다." 섭수진이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제가 선택된 것이구요?" 섭수진은 해맑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하얀 피부와 눈빛이 인상적일 뿐, 뛰어난 미인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짓자, 입가에 매달린 미소가 얼굴 전체의 인상 을 바꾸어 심화절조차도 가슴이 뛰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심화절은 당황의 기색을 숨기며 말했다. "선택이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도와 주신다니 영광일 뿐이지요." 그는 소리를 조금 낮추어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그 살수의 무공에서 소림의 흔적이 발견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 엽혼의 무공에서, 심화절이 소림의 흔적을 찾은 것은 정말로 사실이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지공 대사의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요." 그러다가 심화절은 소림과 아미가 이십 년 전의 한 가지 사건 이후, 원래 친밀하 던 관계가 더욱 급속히 친밀해져서 지금은 마치 한 문파처럼 지내고 있음에 착안했다. 물론 지공 이 도와 준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겠으나, 현실적으로 장경각(臧經閣)을 책임지 고 있는 지공이 직접 나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하여 의도적으로 지공과 섭수진을 같이 부른 것이었다.


심화절이 지공 대사에게 소림 무공의 흔적이 보임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하면, 섭 수진도 덩달아 반응을 보일 것은 이미 심화절의 예상에 있던 일이었다. 일은 그의 예상대로 흘러갔고, 그 결과 지금 섭수진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미옥녀의 지혜야말로 강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이 아니었던가? 이렇게 다른 문파의 힘을 빌리는 것은 비응방의 문상(文相)이라 불리는 심화절로서는 자 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만일 심화절이 수사(搜査)를 하여 아무개가 범인이라고 말을 하게 되면, 범인이라 지목받은 자가 순순히 승복을 할까? 충분히 반발이 예상되는 바였다. 아니, 애초에 심화절 또한 의심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심화 절이 수사를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반발을 살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저라고 해서 의심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는 없기에…… 소저의 도움을 요청한 것 이외다." 심화절의 말에 섭수진이 고개를 미미하게 저었다. "후`─ 어찌 심 당주님을 의심할 수 있겠어요." "저는 다만 섭 소저께서 하루 빨리 이 일을 매듭지어 주셔서, 방 내에서 서로에 대한 의심이 풀리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이제 회랑은 끝이 보이고 있었다. 심화절은 애초에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고 섭수진을 이곳으로 안내한 것이었다. " 다 왔습니다. 이리로 드시지요." 심화절의 안내로 들어간 작은 방! 사방이 모두 벽으로만 되어 있어 공기가 통하지 않는지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 다. 그리고 어두운 방안에는 어둠에 동화되기라도 한 것처럼, 한 남자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인사하시지요, 섭 소저." 심화절이 그 남자에게 섭수진을 소개하려는 듯 말을 꺼냈다. "이 공자는 개방에서 저희를 도와 주러 오신……" 그러나 심화절의 말은 그 남자가 촐싹대며 나서는 바람에 잘리고 말았다. "어이구, 이런. 또 만났구려." 말을 안 하고 조용히 앉아 있을 때는 방의 어둠에 동화된 듯 침울해 보이더니, 입 을 열자 환한 미소(微笑)가 어둠마저 몰아 낼 듯 환하다. 조금은 경솔한 분위기마저 풍기는 남자. "구면(舊面)이셨습니까?" 심화절은 둘이 서로 아는 사이인 것을 몰랐는지라,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이 청년을 오늘 처음 보았고, 이름조차 처음 들었던 것이다. 개방의 이름으로 소개받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마 쳐다보지도 않았을 무명인(無


名人)인 터인데…… 심화절의 말에 섭수진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나절에 객점(客店)에서……" 이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개방의 분이셨군요? 몰라뵈어 죄송해요." 청년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 아니. 이 진소백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오." 자신을 몰라본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단 것인지, 개방의 인물인 것을 신경 쓰지 않 는다는 것인지, 손을 내젓고 있는 폐포청년! 그는 진소백이었다. 3 지금 대청에 모인 것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진소백과 섭수진, 심화절과 고숭무 그리고 금청청! 진소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적 부인께서는……" 적 부인이란 두말할 나위 없이 적염(狄艶)을 말하는 것이었다. 진소백이 부른 것은 적염까지 모두 네 명이었는데, 그녀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 다. 심화절이 대신 대답했다. "부인께서는 몸이 편찮으셔서……"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습니다. 이 정도로 시작하기로 하죠."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진소백. "에, 그러니까…… 모든 살인에는 세 가지의 구성 요소(要素)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들어 하나하나 접으며 말을 이어 갔다. "첫째는 시간입니다. 언제 살인이 일어났느냐는 것이지요. 그리고 둘째는 방법입니 다. 어떻게 죽었냐는 것이죠. 그리고 셋째는……" 말과 함께 손을 번쩍 들어 손가락 셋을 세워 보이는 진소백!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에…… 그러니까, 참 셋째가 뭐죠, 섭 소저?" 느닷없는 질문에 잠시 당황했던 섭수진이 대답했다. "동기(動機)예요." "아, 그렇습니다. 동기!" 고숭무의 인상이 점점 찌그러졌다. '이놈의 자식이, 웬 헛소리가 이렇게 길어!' 그는 진소백을 오늘 처음 보았다. 물론 이전에 이름을 들은 적도 없었다. 강호는 사람의 이름을 먹고 사는 곳!


무명소배가 자신들을 소집(召集)한 것도 열불이 나는데, 앞에 나와 헛소리나 지껄 이고 있다니…… 만일 심화절에게서 이 까불어대는 청년이 개방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란 언질만 받 지 않았다면, 그의 성격에 벌써 난리가 났을 것이었다. 화를 억지로 참고 앉아 있는 고숭무의 속을 짐작도 하지 못하는 진소백은 점점 신 이 나서 말이 빨라지고 있었다. "이 동기란 것은 정말 중요하지요. 저로 말하자면, 아침에도 동기가 있어야 일어난 답니다." '이놈의 자식이 정말!' 고숭무(暠崇武)였다. "제 기상(起床)의 동기는 두말할 나위 없이 밥이지요. 만일 밥이 없는 날이라면… … 저는 저녁까지도 자보았습니다. 그럴 때의 기분은 뭐랄까…… 아! 물론 여러분 은 이런 걱정을 안 하실 테니까…… 사실 저처럼 강호상에 이름이 없는 사람들은 하루하루 먹고 살기가 워낙 어려워서……" 고숭무뿐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화가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심화절은 수양이 깊어 참고 있는 상황이었고, 금청청은 아버지의 죽음에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 별다르게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섭수진은 화가 나기보다는 진소백의 태도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고숭무가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는지도 몰랐다. "소협은 언제까지 떠들 셈인가?" 고숭무의 냉담(冷淡)한 어조에 진소백이 정색(正色)을 하였다. "철권(鐵拳) 고 대협이시군요. 대협께서는 이번 살인의 동기가 무엇이라고 보십니 까?" 의외의 질문에 움찔한 고숭무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살수는 당연히 돈이 동기일 것이나…… 만일 배후 인물이 있다면……" 진소백의 어조가 조금씩 날카로워져 갔다. "만일이 아니라 확실히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배후 인물의 동기는 무엇일까요?" 고숭무는 머리를 쓰는 일에는 약한 듯이 보였다. 진소백의 질문에 조금씩 더듬거리는 것이다. "아마도 지난날의 원한(怨恨)이라든가…… 또……" "또요?" "그 광산에 관한 이권(利權) 문제라든가……" "그리고 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 고숭무가 입을 다물고 말을 못

하자, 심화절이 약하게 한숨을 내쉬더니 대신 답


(答)을 했다. "비응방의 방주위에 관해 말씀하시는 게요?" 진소백은 여전히 고숭무를 바라보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는 방주의 유고(有故) 시에 비응방을 물려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지신 세 분이 모두 모여 계십니다." 섭수진을 제외한 세 명의 얼굴에 은근한 긴장이 감돌았다. 그렇다. 살인에 있어 가장 중요한 동기를 이 세 사람은 모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사건(事件)을 누가 일으켰는지를 알고 싶다면 그 사건으로 가장 많은 이익을 본 사람부터 의심하라는 것은 만고(萬古)의 진리(眞理)였다. 진소백은 여전히 고숭무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고 대협. 만일 사건의 흉수와 아닌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면 누가 더 초조하 겠습니까?" 고숭무는 진소백이 자신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을 하자 화가 났지만 이상하 게 발작을 하지는 못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자신이 진소백의 기세(氣勢)에 눌려 가는 느낌을 받고 있 었던 것이다. 이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는 섭수진의 눈에도 이채(異彩)가 떠올랐다. "내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흉수(凶手)가 더 초조할 것으로……" 고숭무의 말이 끝나자마자 진소백이 바로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만일 좀 전의 저처럼 엉뚱한 말만을 계속 늘어놓는다면 참지 못하겠지요?" 그제서야 고숭무는 자신이 진소백의 말에 빠져 들었음을 깨달았다. "하, 하지만……" 이때 보다 못한 심화절이 끼여들었다. "아니, 그 정도 가지고 그렇게 단정적(斷定的)으로 말한다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 소?" 진소백이 이번에는 시선을 돌려 심화절(深化絶)의 얼굴을 쳐다보기 시작하였다. "물론입니다. 저는 아직까지 고 당주가 범인이라는 생각은 추호(秋毫)도 가지고 있 지 않습니다." 고숭무의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어렸다. "제 생각에는 고 당주보다는……" 잠시 말을 쉰 진소백이 다시 심화절을 쳐다보며 말을 계속했. "여러 가지로 미루어 보아, 흉수는 비응방 내의 기밀 사항을 매우 쉽게 손에 넣었 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머리 씀씀이도 매우 치밀(緻密)하구요." 심화절을 쳐다보는 진소백의 눈빛이 강해져 갔다.


"여러 가지를 고려(考慮)해 보자면, 가장 가능성이 큰 사람은 바로 심 당주십니다." 날벼락 같은 소리였지만 심화절은 과연 심화절! 미동(微動)도 없었던 것이다. "과연 공정하군요. 내게도 확실히 혐의가 있습니다." 심화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여인의 앙칼진 소리가 들려 왔다. "흥, 그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비응방의 모든 인물에게 혐의가 씌워지겠군!" 금청청이었다. 비록 금사진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조용히 있었으나, 그 지닌 바 성격(性格)이야 어디로 가겠는가? 진소백이 좌충우돌하며 되는 대로 말을 하자, 화를 내며 나선 것이었다. 진소백의 시선이 드디어 금청청에게로 돌아갔다. "옳소! 그리고 낭자야말로 가장 혐의(嫌疑)가 짙지!" 금청청이 막 뭐라 외치려는 순간에, 진소백이 오히려 말을 더 빨리했다. "낭자는 항상 금 방주를 미워하여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지 않았소? 게다가 그 사건(事件)이 있던 날 낮에는 한바탕 싸우기까지 했지." 금청청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도 진소백의 말은 이어졌다. "그리고 금 방주가 연공실에 들어간 것은 그 일로 일어난 노화(怒火)를 삭이기 위 함이었고……" 진소백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금청청이 찢어질 듯 외치며 일장을 날려왔기 때문! "이 자식, 죽엇!" 창졸간에 쏘아 낸 공력이라서 초식(招式)의 전개가 비록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누 구도 이 일장의 위력을 무시(無視)할 수는 없으리라. 바로 화산의 절학인 난화수(亂花手)였으므로! 번개처럼 진소백의 사혈을 노리며 짓쳐 드는 손길! 진소백은 다만 마주쳐야 할 뿐, 피할 수 있는 여지(餘地)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펑! 그러나 이 소리는 진소백과 금청청 사이에서 난 것이 아니었 보라! 금청청이 이마를 찡그리며 물러나고, 그 앞에는 섭수진이 조용히 서 있는 것이 아 닌가? 진소백은 어느 틈인지 섭수진의 뒤로 돌아가 있었다. 하나같이 훌륭한 무공! 섭수진의 일장도 훌륭했지만, 진소백의 경공은 더욱 훌륭했다. 누구도 물러날 틈이 없다고 생각한 방위에서 섭수진의 뒤로 돌아가 금청청의 공격 을 피했던 것이다. 진소백이 뒤로 돌아서자, 졸지에 금청청의 공세에 노출된 섭수진은 부랴부랴 금정 산수(金頂散手)의 절학을 펼칠 수밖에 없었고, 섭수진의 손에 의해 난화수의 공력이 해소되며, 금청청은 뒤로 물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변화였다. "휘유, 십년감수했네. 고맙소, 섭 소저." 그러한 진소백을 쳐다보는 섭수진(攝守眞)의 고운 아미도 찡그려져 있었다.


"조금 전의 말씀은 진 공자께서 심하셨던 것 같군요." 진소백도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지요?" 다시 세 명의 비응방 인물들을 둘러보는 진소백! 정중히 올려 모은 두 손과 진지한 눈빛이 전과 달라,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하 였다. "제 장난이 지나쳐 죄송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어지는 힘있는 한마디. "흉수(凶手)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꼭 잡아 내겠습니다." 세 명의 눈에 감탄인 것 같기도 하고 두려움인 것 같기도 한 빛이 어렸다. 섭수진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기실 진소백의 행동들은 하나하나가 장난인 듯 보였으나, 모두 뜻이 있었던 것이 다. 고숭무 등은 내심 진소백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에 진소백은 누구라도 흉수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하여, 감히 무시하지 못 하게 한 것이었다. 또한 진소백의 권한(權限)이 큼을 모두에게 인식(認識)시킴으로써, 앞으로의 수사 에 편리를 도모한다는 의미(意味)도 있었다. 만일 협조를 잘 하지 않는다면 흉수로 몰릴 가능성이 있기에! 이러한 일련의 머리 씀씀이는 섭수진조차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말은 쉬우나, 이러한 일들을 순간적으로 해낸다는 것은 아미옥녀라 불리는 자신도 쉽지 않은 일이기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섭수진은 상념(想念)에서 깨어났다. "어이, 뭘 하시오? 어서 적염, 적 부인을 뵈러 갑시다." 진소백의 말이었다. 말과 함께 진소백은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섭수진은 급히 진소백의 뒤를 따라가려다가, 문득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는 실소 (失笑)했다. 허둥대며 남자의 뒤를 따라가는 모습! 아미옥녀에게는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질 않은가? 제 9 장 신주낭객(神州狼客) 1 적염의 거처는 비응방의 좌측에 따로 마련돼 있었다. 원래 비응방에는 삼당 외에도 따로이 이전(二展)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인 집형전(執刑展)은 화골장(化骨掌)이라 불리는 노굉(魯宏)이 맡고 있었고, 나머지 하나인 천화전(天花展)이 바로 적염(狄艶)의 거처였던 것이다. 진소백과 섭수진이 천화전에 도착하였을 때, 적염은 자신의 거처에서 몸을 누인 채였다. "충격이 크셨겠어요." 진소백이 또 뭐라 말을 할까 봐 지레 겁이 난 섭수진은 얼른 인사말을 먼저 꺼냈 다. 적염은 대청에서 심화절이 문파 내에 반도(叛徒)가 있다고 말한 것을 듣고서는, 여


러 가지 충격이 겹쳐 자리에 눕고 만 것이었다.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저희 비응방을 위해 애를 써주신다고요." 인사치레가 서로 오가고 있을 때 진소백이 또 느닷없이 끼여들었다. "선(先) 방주를 사랑하셨습니까?" 선 방주란 말이 적염에게 충격을 준 듯,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는…… 당연히……" 섭수진이 진소백을 가로막았다. "진 공자께서는 또……" 섭수진은 눈을 흘기며 진소백이 또 뭐라 이상한 말을 하기 전에 급히 자리를 물러 나오려 했다. 그러나 코를 킁킁거리며 한사코 물러나지 않으려는 진소백! "어어,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니깐요." 그런 진소백을 억지로 방에서 데리고 나가는 섭수진이었다. 진소백은 계속 투덜거리고 있었다. "에이, 천화전은 꽃도 많고, 향기(香氣)도 좋았는데……" 섭수진이 눈을 곱게 흘겼다. 그녀는 이 남자가 말은 많았지만, 꽤 재미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적 부인에게 그렇게 무례한 말을 하니 물러나오지 않을 도리(道理)가 있나요?" "좋소, 좋아. 난 무례하고 당신은 예의를 갖추었으니, 우리는 죽이 잘 맞는 한 쌍 (雙)이구려." 진소백의 말에 섭수진은 내심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이런 일에는 무례하게 사건을 파고드는 일면(一面)도 필요했다. 진소백이 다시 코를 킁킁거리더니 말했다. "섭 소저가 보기에도 적염, 적 부인이 충격을 받은 것 같소?" "글쎄요. 어딘가 이상한 점도 있지만……" 갑자기 진소백이 딴소리를 했다. "우리 집의 황아(黃兒)는 말이오, 냄새를 아주 잘 맡소." "황아라면……?" "아! 내가 기르는 개요. 어쨌든 나는 그놈에게서 중요한 것을 많이 배웠소." 갑자기 개 이야기라니…… 섭수진은 어리둥절했다. "그놈이 내게 가르쳐 주기를, 냄새만 잘 맡아도 평생 남에게 속을 일이 없다는 거 였소." "무슨…… 뜻인가요?" 진소백이 길가의 꽃을 꺾어 냄새를 맡더니 섭수진에게 내밀었 "이 꽃은 향기가 매 우 좋군요. 섭 낭자에게 매우 잘 어울리겠소."


섭수진은 무심결에 그 꽃을 받아 향기를 맡아 보았다. "정말 좋군요." 진소백은 사방에 만발한 꽃을 둘러보았다. "이런 곳에 산다면 집 안 곳곳에 꽃 향기가 배게 될 거요. 그렇지 않소?"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진소백은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걸까? "아까 말이오. 적 부인의 방에서 무슨 냄새 맡지 못하였소?" 그러고 보니 무슨 냄새가 났던 것 같기도 한데…… "꽃 향기에 섞인 그것은…… 우육탕(牛肉湯) 냄새였소. 이건 황아에게서 배운 절기이니 믿어도 좋소." 음식의 냄새였나? 환자의 방에서 음식 냄새가 났었나? 섭수진은 어리석은 여인이 아니다. 아파서 누워 있는 환자에게 영양가 높은 음식을 가져다 주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 "왜 음식은 없고 냄새만 그렇게 진하게 남아 있었겠소?" "우리가 들어가자 급히 음식을 치웠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진소백이 이번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멀거니 섭수진을 쳐다보았다. 섭수진은 조금 당황했다. "왜 그러시죠?" "음, 더 이상 말을 하는 것은 아미제일지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생각해서요." 섭수진은 웃었다. 그것도 매우 유쾌하게. "당신은 매우 재미있는 사람이군요." 진소백도 따라 웃었다. "좋소. 매우 좋소." "뭐가 좋다는 것이지요?" "나는 처음 이곳에 올 때 시커먼 남자들만 상대하게 될 줄 알았었소. 그런데……" "그런데요?" "이런 아름다운 동료를 만났으니 내 운(運)이 어찌 아니 좋다 할 수 있겠소." 섭수진은 더욱 크게 웃었다. 만일 당신이 그다지 웃기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여자가 크게 웃는다면 그 이유는 둘 중의 하나이다. 여자가 당신을 무서워하거나, 당신을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사람의 말은 특히 재 미있게 들리는 것이므로. 섭수진은 진소백을 무서워하는 것인가? 아마 이것도 더 이상 말하면 누군가의 머리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것이 아닐까? 둘 은 유쾌하게 웃으며 걸어갔다. 진소백은 아까 적염의 거처에서 음식물의 냄새를 맡았다. 적염의 병은 마음의 병! 음식이 입에 들어갈까? 만일 시비들이 적염을 걱정하여 음식물을 준비한 것이라면 왜 급히 음식을 치운


것일까?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노이(老二)가 하는 일은 천화전에서 화원(花園)을 돌보는 것이었다. 오늘도 화원을 손질하기 위해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던 그가, 화사하게 웃으며 걸어오는 두 젊은 남녀를 본 것은 오후 느지막한 시간이었다. 비록 차림새는 둘 다 수수했으나, 저렇게 당당하게 걸어다닌다는 것은 둘의 신분 이 자신과는 다르다는 의미(意味)임을 노이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중의 남자가 자신을 향해 손짓을 하자, 노이는 재빠르게 달려갔다. "수고가 많구려. 이 넓은 화원을 노인장이 혼자서 가꾸시는 게요?" "수고라닙쇼. 저는 다만 열심히 일할 뿐입죠." 고개를 숙이는 노이에게 청년은 품에서 두 냥 가량의 은자를 꺼내어 건네 주었다. "적 부인께서 몸이 좋지 않으시니 당신이 화원을 잘 가꾸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 도록 해주구려." 노이는 그저 기분이 좋아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 와중에 청년의 말은 이어졌다. "그리고 나도 뭔가를 해드리고 싶은데, 혹시 적 부인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아시오?" "알구말굽쇼. 적 부인은 우육탕(牛肉湯)을 가장 좋아하십지요. 고기 국물이 없으면 한끼 식사도 안 하신답니다." 지금과는 달리 쇠고기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항상 쇠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상당히 고급스러운 입맛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충 짐작이 가지요?" 계속해서 인사를 해대는 노이를 두고 떠나온 진소백과 섭수진이 지금 서로 말을 나누고 있었다. "예." 고개를 끄덕이던 섭수진이 분위기를 바꾸어 진소백을 바라보았. "그런데…… 공자에게 한 가지 물어 볼 게 있어요." 섭수진의 말에 진소백도 섭수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엇이든지 좋소. 난 아직 총각이고, 사귀는 여자도 없고, 또…… 내가 좋아하는 여인상은…… 음…… 뭐, 무엇이나 물어 보시오." 섭수진이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요, 공자가 아까 주신 그 은자…… 공자는 개방의 인물이 아니신가 요?" 개방은 무소유(無所有)를 실천하고자 하는 문파! 품에 돈을 가지고 다닐 리가 없는 것이니, 이런 섭수진의 의문은 당연했다. 진소백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눈으로 섭수진을 보았다. "내가 개방도로 보인다는 말이시오?" 그러고 보니 진소백이 입고 있는 옷은 낡기는 하였으나 개방 문하(門下)들의 특징


(特徵)인 오의(汚衣)가 아니었다. 개방은 특성상 누더기와 조각 천을 기워 짠 오의를 입었는데, 이것은 방주 이하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규칙이었다. "난 단지 개방주이신 인의신개님의 부탁으로 여기 왔을 뿐, 개방에 속한 사람은 아니라오." 섭수진의 눈에 의혹이 서렸다. 당연히 개방의 인물이라 여겼었는데,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 출신이란 말인가? 섭 수진의 의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소백은 설쳐대고 있었. "자, 이럴 게 아니라 오늘은 이만 수사를 끝내고,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 합시다. 물론 술은 마실 줄 아시겠죠?" 섭수진의 아미가 살포시 찡그려졌다. '이 사람은 내가 아미 출신인 것을 잊었단 말인가?' 아미는 불문(佛門)의 성지(聖 地)! 아미의 제자인 섭수진이 술을 마시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진소백은 막무가내였다 평소의 섭수진이라면 화를 내도 몇 번은 냈을 상황이지만 이상하게 진소백에게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당신이 아미의 제자라곤 하지만 머리를 기른 것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단 뜻이니 ……" 진소백의 억지에 섭수진은 마침내 화를 내고 말았다. "공자의 억지는 정말 심하군요!" 2 진소백의 억지는 심했다. 그래서 섭수진은 마침내 주루까지 따라오고 말았다. 비응방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이 주루에 둘은 마주앉아 있게 된 것이다. 자신이 화를 내자, 풀이 팍 죽어 있던 진소백이 너무 안돼 보인 것이 화근(禍根)이 었다. 따라는 가되, 자신만 마시지 않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주루에 같이 온 것 은 너무 안이한 생각이었음이 곧 밝혀졌다. 단순히 주루라면 이미 몇 번 가본 적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자, 한 잔 더 마시자구요." 벌써 세 잔째였다. 사람의 마음이란 한번 양보(讓步)하면 계속 양보를 하게 되는 것일까? 처음엔 따 라만 와서 진소백이 술 마시는 것을 구경만 하고자 했던 섭수진이, 진소백이 계속 술을 마셔 볼 것을 권하자 딱 한 잔만 하고 마신 것이 이미 세 잔째였다. 그런데도 한 잔 더 하자니…… '이 사람이 나를 어찌 보고!' 그런데 화가 치미는 마음 한구석에 슬금슬금 올라오는 이 쾌감(快感)은 무엇일까? 그 정체(正體)를 알아 보고자, 섭수진은 한 잔만 더 마셔 보기로 결심했다.


"좋소, 좋아. 잘 마시는구려." 다시 진소백이 한 잔을 따르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그래서 섭수진은 또 한 잔을 더 마셔 보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한 잔이 다시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다시 세 잔이 되는 술의 경지 (境地)를 그녀는 처음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우당탕`─ 술집에서 싸움이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밖에서 일어난 싸움이 술집 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그다지 흔하지 않다. 지금 들려 온 소리는 밖에서 한 인물이 술집 안으로 뛰어들다 탁자를 넘어뜨려서 난 소리였다. 이런 일은 확실히 드문 경우였지만 진소백과 섭수진의 눈길을 끌지는 못했다. 지금은 술의 경지에 들어 있어 정신이 혼몽(混夢)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조금 술이 센 진소백의 눈도 게슴츠레해서 난입(亂入)한 자가 사십대 정도에 보통 의 체구를 지니고 턱밑에 염소 수염을 기른 자라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을 뿐이 다. 섭수진은 난생 처음 마셔 보는 술에 취해, 그것조차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염소 수염이 입구에서부터 단숨에 삼 장을 뛰어올라 진소백 등이 앉아 있 는 바로 옆의 탁자를 차고 다시 도약(跳躍)해 나가자 진소백의 눈빛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쿵! 염소 수염이 탁자를 차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는 그 바람에 넘어진 자루에 서 빗들이 즐비하게 쏟아졌다. 아마도 옆 자리의 자그마한 체구에 검은 모자를 쓴 중년인이 빗을 파는 사람인 듯했다. 그러나 진소백이 주목(注目)한 것은 바닥의 빗이 아니라, 염소 수염이 구사한 신법 이었다. 그가 전개한 신법은 마치 한 마리의 이리가 뛰어오르듯 날렵했는데, 놀랍게도 다 름 아닌 천랑파(天狼派)의 경랑충천(驚狼沖天)이 아닌가! 천랑파! 그가 개방의 인물들에게 말하여 열심히 찾고 있는 자들이다. 어쨌든 염소 수염의 두 번째 도약과 동시에 주루의 문과 창이 각각 터져 나가며 두 복면인이 날아들었다. 각기 도끼[斧]와 도(刀)를 든 그들의 무공은 매서웠다. 염소 수염이 두 번째 도약 에서 착지하기도 전에 이미 그의 발과 가슴을 노리며 짓쳐 들고 있었다. 그러나 염소 수염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왼발과 오른발을 섞어 찍으며 횡(橫)으로 날았다. 야랑횡비(野狼橫飛)의 일식! 천랑파(天狼派)는 제자의 수가 적었지만, 대신에 각 제자들의 무공은 약하지 않았 다. 하나 공격해 오는 두 복면인 역시 고수인 듯, 일초가 실패하자 이초의 변식이 바 로 뒤를 따라 쏟아져 나왔다.


와창`─`! 반대쪽에 있는 문이 터져 나가며 염소 수염이 밖으로 다시 빠져 나가고, 뒤를 이 어 복면인들이 쫓아가기까지 그들은 총 일곱 번을 변초(變招)하였고, 다섯 번 몸을 뒤집었다. 너무 감탄한 것일까? 진소백의 입술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리고 구석에 앉아 졸고 있던 거지 한 명이 서서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그는 싸움 소리에 놀란 것일까? 바닥에 쏟아진 빗을 다시 보따리 속에 쓸어 담으며 중얼거리던 검은 모자를 쓴 빗 장수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진소백 또한 일어나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이봐요, 섭 소저. 이제 그만 일어납시다." 그러나 섭수진은 마지막 한 방울의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으며 한사코 일어나지 않 으려 했다. "우웅…… 이건 저, 정말…… 맛이 있군요. 나는 기분이 너무……" 말을 잇지 못하고 쓰러져 버리는 섭수진! 진소백은 황당하였다. 이 여자는 무림의 고수인데 설마 진기(眞氣)를 일으켜 주기(酒氣)에 대항하는 간단 한 방법을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 망설이던 진소백은 빗장수인, 검은 모자가 나가는 것을 보고는 섭수진을 업었다. 등에 닿아 오는 따뜻하고도 부드러운 감촉! '이거 정말 좋구먼!' * * * 때는 겨울 밤이다. 하지만 진소백은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추위를 느낀다면 이미 남자가 아니지 않을까? 등뒤에는 술 취한 미 인(美人)의 가슴이 살포시 닿아 오는데…… 하늘엔 별이 많았다. 밤이 깊어 가며 사위가 어두워질수록 별은 오히려 더욱 빛을 발했다. 근심이 깊어질수록 희망(希望)이 더욱 밝아지는 인간사(人間事)와 비슷하지 않은 가? 분위기에 취한 것일까? 아니면 술에 취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등뒤에서 풍겨 오는 여인의 향기에 취한 것일까? 진소백은 혼자서 뭔 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었다. 진소백은 술에 취한 듯 비틀대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고, 앞서가는 검은 모자의 빗장수는 갈 길을 서두르며 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간격(間隔)은 조금도 늘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 아 닌가? 한참을 걸어가던 진소백이 혼잣말인 듯, 섭수진에게 하는 말인 듯 중얼거렸 다. "오늘은 섭 소저가 처음으로 술을 마신 날이니, 무언가 기념할 것을 사주어야겠 다." 진소백의 시선(視線)이 앞서가고 있는 빗장수에게 닿았다. "그렇지! 이보시오, 앞에 가는 빗장수!"


걸음을 더욱 빨리 하여 빗장수를 쫓아간 진소백은 마침내 그를 불러 세웠다. 빗장수는 이런 밤에, 그것도 길 위에서 손님이 있는 것이 의외인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장사꾼의 기질을 드러내기까지는 단 일 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 다. "헤헤, 어느것으로 드릴까요?" 빗은 많았다. 둥근 것, 길쭉한 것에서부터 손잡이가 있는 것과 손잡이가 없는 것, 날이 엉성하 여 긴 머리를 빗기에 좋은 것과 날이 촘촘하여 짧고 가는 머리를 빗기에 좋은 것까지. "하하! 이것은 무기로 쓰기에도 좋겠구려." 진소백이 들고 있는 빗은 길쭉하고 긴 날을 달고 있어, 어떻게 보면 쇠스랑을 줄 여 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등뒤에는 섭수진을 엎은 채, 중얼거리며 빗을 고르던 진소백은 마침내 하나를 선 택했다. "이것이 좋겠구려." 만일 등뒤의 섭수진이 깨어나서 이 빗을 본다면 질겁을 하였으리라. 뭉툭한 끝에, 빗날마저 몇 개가 빠져 나가, 최악의 형상을 하고 있는 나무로 만든 빗! 게다가 손 잡이는 너무 두꺼워 빗이라고 하기보다는, 그냥 나무토막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리리라. 이런 진소백의 선택에 빗장수도 기가 막히는지, 눈에 기광(奇光)을 번뜩였다. "헤헤, 나으리. 그건 잘못 만들어서 다시 만들려고 하는 것인데……" "아니, 나는 이 빗이 마음에 드오. 빗이 아닌 듯하면서도 빗인 것이, 자신을 드러 내지 않는 선비의 풍도이니…… 하하, 꼭 나 같지 않소이까?" 진소백의 말에 빗장수는 미미하게 얼굴을 찡그리더니, 곧 웃음을 회복하며 다른 빗을 건넸다. "헤헤, 그것말고 이런 것이 어떻습니까요?" 빗장수가 건네 주는 빗은 조금 전 진소백이 들고 무기로 쓰기에 좋다고 말했던 바 로 그것이었다. "뒤에 계신 아리따운 소저에게는 이런 튼튼한 빗이……" 말과 함께 빗을 건네 주던 빗장수의 몸이 조금 왼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진소백은 놓치지 않았다. "뭐, 그것도 괜찮겠구려. 하지만 나는 역시 이것이……" 여전히 처음의 허름한 빗을 고집하던 진소백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빗을 건네 주던 빗장수의 손길이 빨라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빗장수의 발이 빗 뭉치를 걷어차자 여섯 개의 빗이 동시에 허공에 떠올라 진소백을 노리며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상, 중, 하의 세 부위를 노리며 각각 두 개씩 날아드는 여섯 개의 빗은 그야말로 완벽한 무기! 게다가 그것들을 모두 합한 것보다 배(倍)는 더 무서운, 빗장수의 오른손에 들린


빗이 진소백의 가슴을 노리며 짓쳐 드는 것이었다. 과연 진소백의 눈은 예리했다. 빗들은 정말 무기로도 쓸모가 있었다. 게다가 지금 진소백은 등에 섭수진을 업고 있지 않은가? 한 손으로 섭수진을 감당 (堪當)한다면, 오직 한 손만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빗장수가 공세(攻勢)를 발하 기 전에 왼쪽으로 돌아간 것은 바로 그 때문! 지금 위치에서, 진소백은 오직 왼손 으로 날카로운 빗을 상대하는 수 밖에 없었다. 오른손보다 왼손의 힘이 약할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한 번의 공세를 가하기 위해, 이렇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였다는 것은 빗장수가 고수(高手)란 뜻이었다. 고수만이 이렇게 많이 생각하고, 또 직접 실행에 옮길 수가 있는 것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공세(攻勢)! 빗장수는 진소백이 피할 수 없을 것임을 확신했다. 그러나 더욱 예상하기 어려웠던 결과(結果)가 일어났다. 진소백이 왼손을 쳐들며 머리로 날아오는 두 개의 빗을 쳐내고, 다시 가슴을 노리 는 빗 한 개를 쳐내자마자 기이하게도 빗장수의 빗을 든 오른손이 진소백의 왼손 에 잡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 나머지의 세 개의 빗은 어떻게 된 것일까? 당연히 남아 있는 또 다른 손이 쳐내었다. 섭수진은 어떻게 되었냐고? 당연히 두 발로 바닥에 서 있었다. 진소백은 빗장수의 완맥( 脈)을 잡고, 한편으로는 섭수진을 돌아 보았다. "다행히 시간에 맞추어 깨어났구려." 좀 전에 섭수진을 업고 걸을 때 했던 진소백의 중얼거림은 바로 주기(酒氣)를 해 소시키는 방법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었다. 혼몽한 상태였던지라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주독(酒毒)을 몰아 낸 섭수진이 깨어 난 것이다. 한데 시간이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어쨌든 진소백은 다시 빗장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강권(强勸)하니 어쩔 수가 없군. 좋소! 내 두 개 다 사도록 하지." 담담히 말하는 진소백을 보고 빗장수는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그의 빗을 찔러 가는 재간(才幹)을 이리도 쉽게 파해한 자는 처음 보았던 것이다. 게다가 다른 여섯 개의 빗까지 장난하듯이 쳐내다니. 너무 놀란 빗장수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3 으슥한 숲속. 진소백은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빗장수는 혈도가 짚힌 채 그 옆의 나무에 기대어 있었다. 그 나무 위 가 지에 앉아 망을 보고 있는 것은 섭수진이었다. 섭수진은 진소백이 불러 준 방법으로 체내(體內)의 주독은 말끔히 몰아 내었지만, 가슴의 콩닥거림만은 가시지 않았다.


처음으로 업혀 본 사내의 등이었다. 좀 전에는 이미 정신이 깨어난 후에도 어쩔 줄을 몰라 업혀 있다가, 하마터면 위 험에 빠질 뻔하지 않았는가? 진소백은 자신이 처음 골랐던 허름한 빗을 손에 들었다. 빗의 손잡이를 잡고 몇 번 돌리자, 손잡이가 빠져 나가며 자그마하게 접은 종이 쪽지 하나가 바닥에 떨어 졌다. "난 말이오. 눈만은 무척 좋은 편이라서 당신의 동료 염소 수염이 이 빗을 떨어 뜨리는 걸 똑똑히 볼 수가 있었소." 진소백은 태연히 말하고 있었지만, 빗장수의 얼굴은 노화로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진소백은 아랑곳하지 않고, 종이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한참 종이를 들여다보던 진소백이 정색(正色)을 하며 빗장수에게 물었다. "이 편지는 혹시 구천(仇賤)에게 전해지는 것이 아니오?" 빗장수의 눈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가, 이내 분노(忿怒)로 바뀌어 갔다. "역시 네놈도……" "네놈도…… 라니? 무슨……? 아하! 이 편지를 보니 신주낭객(神州狼客)이 정체 불 명의 적들에게 잡혀 있다고 했는데…… 나를 그들과 한패로 생각하시는 게요?" 그러나 진소백의 질문에도 빗장수는 대답이 없었다. 이미 대답을 하지 않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이것 보시오. 나로 말하자면 진소백인데, 또한 진소백이란 사람은 나인데…… 또 한 나로 말하자면…… 에이, 이거 안 되겠네. 섭 낭자, 좀 도와 주시오." 횡설수설하던 진소백이 도움을 요청하자마자, 섭수진은 냉큼 나무에서 내려왔다. 술이 취해 등에 업혔던 일 때문에 말을 먼저 걸기가 쑥스러워 망설이고 있었던 그 녀였다. 그런데 이렇게 일을 도와 주며 은근 슬쩍 넘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좋 은 기회인가? "전 아미의 섭수진이라고 해요. 어떤 자들에게 쫓기고 계신지 모르나 저희는 결코 그들과 한패가 아니에요." 역시 사람은 이름이 나고 볼 일인가? 아미옥녀(峨嵋玉女)의 이름은 그 위력이 대단하여, 빗장수는 대번에 의심을 풀었 다. 그리고 빗장수는 자신들, 천랑파의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장문인이었던 신주낭객 구곡인(九曲刃)이 정체 불명의 자들에게 납치(拉致)를 당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 정체 불명의 인물들은 구곡인의 생명을 미끼로 천랑파의 전제자(全弟子)들에게 무 리한 요구를 해오기 시작했다. 살인과 약탈, 그리고 납치 등…… "처음엔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천랑파의 문도들은 과연 사악하지 않았다. 그들은 장문인의 목숨을 미끼로 악행(惡行)을 사주(使嗾)하는 자들의 요구를 일언 지하(一言之下)에 거절했다. 그러나…… 거절한 바로 다음날 구곡인의 왼쪽 팔이 상자에 담긴 채 전해졌다. 긴말이 필요없다는 뜻! 한 번 혼이 난 이후로, 더 이상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구천이 주축(主軸)이 되어 구곡인이 억류(抑留)되어 있는 곳을 찾은 지 삼 년! 드디어 염소 수염이 그 장소를 알아 내어 전해 온 것이다. 아까 종이에 적힌 것이 바로 그 장소(場所)였고, 빗장수의 임무는 그것을 구곡인의 유일한 제자이며, 현재 천랑파를 이끌어 가는 마랑(魔狼) 구천에게 전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낌새를 채고 뒤따라온 진소백에게 그만 종이를 뺏기고 말았던 것이 다. "당신은 지금 나를 구천(仇賤)과 만나게 해줄 수 있소?" 진소백의 뜻밖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빗장수는 머리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소. 당신들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구 도령마저 적들의 손 에 넘어간다면…… 죄송하오." 특이하게도 그들은 소문주를 도령이라 불렀다. "이해하오. 무리도 아니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진소백이 눈을 빛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내가 신주낭객을 구해 주면…… 당신은 나를 구천에게 안내 해 주는 거요!" 빗장수는 어리둥절했으나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심중(心中)에 담아 두기 힘든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졌을 뿐이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 * * 비응방에도 밤이 깊어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고숭무와 심화절, 금청청과 적염! 그 외에 사공두와 삼당의 부당주와 삼당주급 이상의 인물들! 모두 선 채로 누군가 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지공 대사님이 오셨습니다." 이윽고, 수하의 외침과 함께 지공 대사와 그를 수행한 집형전주 노굉이 안으로 들 어왔다. "아미타불!" 불호로 인사를 대신하는 지공에게 중인들이 분분히 답하고 나자 심화절이 말했다.


"이제 모두 왔으니 안으로 들어갑시다." 그들의 앞에는 석실로 통하는 문이 있었던 것이다. 석실 안은 어두웠다. 온통 약향(藥香)만이 가득한 곳! 빛 한 줄기 들어올 창문이 없어, 주위에서 은은히 반사되어 들어오는 횃불의 빛 만이 사물의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공 등은 안력이 어둠에 적응되자 자신들의 앞에 하나의 석대가 놓여 있고, 그 석대 위에 흰 천으로 씌워진 무엇인가가 놓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의원 차림의 노인 하나가 급히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달려온 의원(醫員)은 심화절이 눈짓을 하자 석대 위의 흰 천을 걷었다. 뒤이어 횃 불을 켜자, 석대 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전신이 푸르게 변색된 채, 간신히 중요한 곳만을 가리고 누워 있는 시신 하나. 특 히 왼쪽 팔의 변색이 심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시신(屍身)의 가슴이 미미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가 있으 리라. "아미타불. 아직 살아 있소?" 불심 깊은 지공 대사가 장중히 불호를 외며 물었다. 의원이 눈길을 돌리며 대답했다. "아직까지는 살아 있습니다만, 거의 죽은 시체나 다름이 없습니다." 심화절이 보충 설명을 하였다. "사공 당주의 도가 바늘만한 차이로 심장을 비껴 갔습니다. 비록 목숨이 붙어 있 기는 하나…… 언제 변화(變化)가 일어날지 모르는 일인지라……" "살아 있을 때 근골을 살펴 달란 말씀이시구려." 지공 대사의 온화하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아무리 살수라 하나 아직은 살아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비응방의 입장 또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 지공은 석대 위에 누운 반시신의 근골을 살피기 시작했다. 각파의 초식들이 비슷해 보이는 것이 많지만 그 위력이나 쓰임새가 모두 다른 것 은 지닌 바 독문(獨門)의 내력(內力)이 다르기 때문이다. 외공(外功)을 주(主)로 하여 익힌 경우라면 다르겠으나 내가(內家)의 무예를 익힌 자라면 내공의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외적 징후(徵候)가 나타난다. 소림의 무예들도 마찬가지이다. 수련 방법이 각파마다 다르고 익힌 바를 발전시키는 방법은 더욱 다르므로 내가공 이 상승의 경지에 이른 고수일수록 더욱 쉽게 무공의 류(類)를 파악(把握)할 수 있 는 것이다. 반시신의 몸을 때로는 만져 보고 때로는 주물러 보곤 하던 지공이 드디어 뒤로 물 러났다. 그의 미간에 어린 것은 은근한 곤혹(困惑)의 빛! 참다못해 고숭무가 물었다. "대사! 소림의 제자가 맞습니까?"


"그것이……" 지공이 대답을 망설이자 고숭무는 초조해졌다. 만일 살수가 소림 출신이 아니라면 그들은 지공에게 큰 실례를 범한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럼, 소림 출신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이번엔 심화절이 물었다. 지공은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윽고 말을 꺼냈다. "아니, 소림 출신임이 거의 틀림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무엇입니까?" 살수가 소림 출신이라는 데에서 힘을 얻은 고숭무가 지공의 말을 재촉했다. "소림이 많은 분파로 갈라졌음은 아실 것입니다. 빈승은 이 아이의 몸에서 그 중 한 분파(分派)의 흔적을 분명히 발견했습니다만……" "어느 분파입니까? 대사, 이 일은 저희에게는 무척 중요한 것입니다." 심화절의 말에 망설이던 지공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마도 이 공력은 천승공(天 功)인 것 같습니다." 중인들의 입에서 일제히 놀람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천승공! 다르게는 보리천승공이라고 한다. 한 줄의 끈으로 불타(佛陀)가 사마(邪魔)를 제압하는 형상을 본떠서 창조된 무공! 이 무공으로 초의(草衣) 선사는 무림을 독보했었다. "그렇다면 초의 선사의……" 심화절의 놀람에 찬 말에 지공이 침중히 답했다. "그렇습니다. 초의 사숙의 제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말을 잠시 끊어 긴장감을 고조시킨 지공이 힘있게 말을 이었 "만일 초의 사숙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면 소림도 방관할 수는 없으니…… 빈승이 장문방장의 지시를 다시 받아 오겠습니다." 초의 선사는 지공의 사숙이니 당금 소림의 장문인인 현공(玄空) 대사의 사숙이기 도 하다. 만일 살수가 그의 제자라면 일은 커지는 것이다. "속에 숨은 인과(因果)를 알 길이 없어 답답하나, 이 살수가 깨어난다면 모두 알게 될 일! 아무쪼록 살수…… 의 몸이 회복되어 신지(神智)가 돌아올 수 있도록 최선 을 다해 주십시오." 지공 대사가 말을 마친 뒤 한시가 급한 듯 총총히 떠나가 버리자 일행은 한동안 조용히 있었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금청청이었다. "흥! 아버님을 죽인 자를 우리보고 살려 내라는 것인가? 저 중은 아무래도 양심이 없군." 금청청은 화산의 제자이기도 하니 이런 말을 할 신분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금


사진이 죽은 후로 자신을 잘 제어(制御)하지 못했다. 심화절이 그런 그녀를 보았다. "소방주께서는 이제야 방주를 아버님이라 부르시는군요." 금청청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 자신의 실언을 느낀 심화절은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자, 감정에 치우칠 일이 아니오. 따지고 들자면 이자는 방주의 사후(死後)에 단지 한 번의 칼질을 하였을 뿐이니, 엄밀히 말해 불구지수(不俱之讐)는 아닌 셈이오." 말을 이어 가는 심화절의 목소리는 엄숙하여 어느 틈에 좌중을 주도해 나가고 있 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를 사주(使嗾)하여 방주를 암산하게 하고, 뒤에 숨어 방주에 게 직접 암수(暗手)를 가한 인물이오. 때문에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이자를 살려 내어 배후를 알아 내도록 해야 할 것이오." 사공두가 이의를 제기했다. "심 당주는 이자를 살려 내자는 말씀이시오? 난 반대요. 그가 방주를 죽였건 아니 건, 난 용서할 수가 없소." "저도 마찬가지예요. 어떻게 아버님을 암산한 자를 살려 둘 수가 있나요?" 금청청도 거들고 나섰다. "소방주! 만일 이자를 죽이신다면 당장의 분함은 풀겠으나, 그 배후는 어찌 밝혀 내시려오?" 심화절은 생각을 굳힌 듯 좌중을 둘러보며 힘있게 말했다. "이 심화절이 명예(名譽)를 걸고 확실히 말하겠소. 살수의 배후자는 당장이라도 이 자를 죽여 그 입을 막고자 할 것이오." 그리고 이어지는 폭탄 같은 선언. "만일 여러분 중에서 계속해서 살수를 죽일 것을 주장하시는 분이 있다면, 이 심 모는 그 사람이 살수의 배후임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소." 고숭무와 금청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반발을 하지 않는 것은 심화절의 말이 옳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심화절은 의원 차림의 노인을 돌아보더니 우렁차게 말했다. "최선을 다해 이자가 정신을 차리도록 하라." 노인이 무슨 토를 달겠는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할 뿐이었다. "존명(尊命)!" 제 10 장 위기엽혼(危機葉魂) 진소백의 거처는 심화절이 특별히 마련한 곳이라 섭수진이 있는 곳에서 그다지 멀 지 않았다. 둘이 함께 살수와 그 배후에 대한 수사를 하는 터라 의견 교류를 쉽게 할 수 있도 록 심화절이 안배(按配)한 것이었다.


덕분에 섭수진은 진소백의 거처로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고 갈수 있었다. "왜 천랑파의 일을 심 당주에게 말하지 못하게 한 거죠?" 섭수진이 밖을 살펴 주위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뒤 진소백에게 물었다. 그들은 빗장수와 이틀 후에 만나기로 약속한 뒤 비응방으로 돌아왔었다. 섭수진은 천랑파의 변고(變故)와 비응방의 일이 관련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빗장수의 일 을 심화절에게 말하려고 했었다. 이때 진소백이 섭수진을 극구 만류하였는데, 지금 섭수진은 그 이유를 묻고 있다. 진소백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말했다. "섭 소저의 지혜는 강호상에 유명하지만 아직 강호 경험이 부족한 것 같소." '무슨……' 하며 눈을 치뜨는 섭수진을 보며 진소백이 말을 이었다. "비록 천기수사가 우리에게 일을 부탁하긴 하였으나, 일이 돌아가는 상황(狀況)으 로 보자면 그 또한 의심 대상에서 벗어나기 어렵소. 만에 하나라도 그가 흉수일 가능성도 생각해야 되지 않겠소?" 섭수진은 확실히 총기(聰氣)가 있었으나, 너무 서적적(書籍的)인 지식에 국한(局限) 되어 있었다. 글 속에서라면 어떻게 사건을 의뢰한 심화절이 범인이 될 수 있으랴마는, 현실은 다른 것이었다. 섭수진이 뭐라 말을 하려는 것을 진소백이 손을 들어 제지했. 거의 동시에 섭수진 또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 방 내의 중요 인물들은 두루 만났습니까?" 심화절이었다. 처음 그가 금사진의 변고가 일어난 경위와 방 내에 반도(叛徒)가 있음을 의심하게 된 경위를 말하고 반도를 찾아 줄 것을 부탁하였을 때, 진소백은 자세한 사항은 중요 인물들을 한번 만나 본 후에 듣겠노라고 했었다. 선입견(先入見)을 가진 채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 진소백의 그런 선택 에 섭수진도 공감(共感)을 표한 바가 있었. "예, 대충은." "그럼, 이제 일전에 대략적으로 말씀드린 것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드리겠습 니다." 수사를 하자면 전체적인 윤곽을 잡기 위해 관련된 제반 사항을 알아두는 일은 불 가피하다. 관련 사항이란 어떤 것이겠는가? 그 중에는 비응방이 외부로 흘려서는 안 되는 극비(極秘) 사항도 있다. 만일 이런 비밀들이 외부로 흘러나간다면 비응방은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었다. 심화절이 주위의 거파들을 두고서 개방과 소림, 그리고 아미파에 도움을 청한 것 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모두 이름 높은 명문들이니 수사(搜査) 도중 알게 된 비응방의 비밀을 자신들의 사익(私益)을 위해 사용할 가능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심화절이 설명한, 비응방을 싸고 있는 상황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첫째, 방주위의 계승(繼承) 문제.


원칙적으로 방주위의 계승권은 금청청과 고숭무, 그리고 심화절이 동등(同等)하게 가지고 있었다. 금사진의 유고 시, 셋 중 방도들의 지지가 가장 높은 사람을 택해 금사진의 지위 를 계승하게 하는 것이었고, 그 와중에 방주의 부인인 적염의 발언권(發言權)이 가장 클 것임은 명약 관화(明若觀火)! 그리고 그 결정은 늦어도 금사진의 장례가 치러지기 전까지는 내려져야 했다. 금사진의 장례가 나흘 남았으니 이제 결정의 날은 사흘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이 다. 둘째, 원한 관계. 이 문제가 가장 아리송했다. 금사진은 자신의 적에게서 한 명의 피붙이를 남기는 것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치 밀했던지라, 원한을 가질 일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과연 그 원한을 갚을 만한 자가 살아 있을지 의문(疑問)인 것이었다. 셋째, 광산에 얽힌 이권의 문제. 이 부분이 심화절이 개인적으로 가장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 부분이었고, 직접 광산의 일을 맡았던 고숭무가 설명하기로 하였 심화절의 설명을 듣고 나서 생각에 잠겨 있는 섭수진에게 진소백이 의견을 물었 다. "어떤 것이 흉수의 동기(動機) 같소?" "제가 보기에도 역시 광산의 이권 문제가 가장 타당해 보이는데요." 진소백은 빙그레 웃었다. "역시 그렇죠? 하지만 복잡한 사건(事件)에서는 여러 가지의 이유가 섞일 수도 있 으니 한 번에 단정하기도 어렵군요." 섭수진이 다시 뭐라 말하려는 순간, 심화절이 일어나며 말했다. "아, 저기 고 당주께서 오시는구려." 고숭무의 설명은 심화절만큼 조리있지는 않았다. 하나, 광산(鑛山)의 일을 직접 지휘하며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그였는지라 생동감 (生動感)이 있어 그런대로 지루하지 않게 들어 줄 만했다. "……하여간 이 광산(鑛山)의 일은 비응방이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후 기이한 허 탈감에 빠져 있던 방주의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에 충분했소. 다만 한 가지,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 고숭무는 알려진 무공에 비해 의외로 다혈질의 인물인 듯, 광산의 일을 자신의 의 견까지 섞어 가며 말하기 시작했다. '방 내의 일을 필요없이 자세히 얘기하다니……' 뒤에 선 심화절의 얼굴은 조금씩 굳어 갔지만, 고숭무는 점차 열이 오르는 듯 말이 빨라져 갔다. 그의 얘기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처음 무산(巫山)에서 광맥(鑛脈)을 발견한 것은 색도광(色賭狂) 가도(賈屠)였다. 어느 날 그가 흙투성이의 몸으로 비응방을 찾아와 합작할 것을 제안했을 때, 금사


진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었다. 여자나 밝히고 도박하는 것밖에 모르는 색도광 같은 자의 말을 어찌 믿는단 말인 가? 하나 색도광이 내놓는 철광석(鐵鑛石)을 보자 금사진의 마음은 달라졌다. 철광석에 함유(含有)된 철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양질(良質)이었고, 이런 광맥을 광 산으로 개발(開發)한다면 큰돈이 될 수 있었 방세를 확장하기 위해 큰돈이 필요했던 금사진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 다. 문제는 색도광의 인물됨이었다. 그가 술집이나 기루를 돌며 곳곳에서 입을 놀린 덕분에 귀왕곡이나 흑수동 같은 사파의 세력들도 이 광산의 일에 끼여들게 되었고, 급기야는 적염의 아버지인 공동의 풍운 진인마저 이 일을 알게 된 것이다. 닥치는 대로 계약을 맺어 돈을 챙기려는 색도광의 욕심 때문에 너무나 많은 문파 들이 모여들게 된 것이다. 노한 금사진이 색도광에게 위약(違約)의 책임을 물으며 그를 처리(?)하고 났을 때 는 이미 비응방과 공동을 위시하여 군소 칠 개의 방파가 일에 참가하고 난 다음! 문제는 서로의 지 분에 관한 것이었다. 비응방은 먼저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했다는 선점권(先占權)을 들어 당연히 가장 큰 지분을 요구하였고, 나머지 방파들도 저마다의 이유를 들어 지분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호가 비록 실리(實利)보다는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인물들의 집단이라고는 하나, 돈은 귀신도 움직인다고 하지 않는가? 광산의 권리를 사이에 두고 여러 문파들이 서로 합치고 갈리면서 팽팽히 대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숭무가 새해 초부터 비응방을 떠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각 방파의 대표자들이 모여 계속 의견을 절충하며 결국에는 타협을 이루고 고숭무가 돌아온 것이 바로 정월 십사일이었던 것이다. "이상하군요." 고숭무의 설명을 듣고 있던 진소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갈등이 있었는데도 어떻게 강호에서는 조금의 소문도 나지 않았습니까?" 강호의 소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 일곱 개의 문파가 연루된 갈등이 아무 소문 없이 진행되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고숭무의 대답은 간단했다. "각파들끼리의 갈등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문파를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었소. 사천에는 비응방이나 공동뿐 아니라 점창 같은 대문파도 있으니 까." 진소백은 이해하고 다음 질문을 하였다. "그 절충의 결과는 어찌 되었습니까?" "사실 일곱 개의 문파라곤 하나, 우리 비응방 외에는 공동만이 거대파벌일 뿐, 나 머지는 손색이 있는 문파들이었소."


고숭무의 눈에 자랑스러워하는 빛이 역력하게 떠올랐다. "내가 공동의 풍운(風雲) 진인(眞人)에게 두 파의 관계를 내세워 합작을 제의하고, 우리 두 파가 합작을 하자, 나머지는 더 이상 분쟁을 벌일 수 없었소." 그렇다. 귀왕곡(鬼王谷)이나 흑수동(黑水洞) 등도 결코 작은 세력은 아니었으나, 거대문파 인 비응방과는 차이가 있었다. 비응방과 공동이 합심(合心)하자, 다른 문파들이 싸울 기세를 잃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결국은 타협을 보고야 말았지."과는 비응방과 공동이 사(四) 할(割)씩 가 져 가고, 남은 이 할을 다섯 개의 문파가 가지게 되었으니, 비응방과 공동 외의 다 른 문파들은 그야말로 껍질만 가지는 꼴이 된 셈이었다. "알맹이는 다 챙기시고 껍질만 조금 던져 주셨구려." 이 말이 자신의 협상술을 칭찬하는 것인 줄 알고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웃던 고숭무는, 이어지는 진소백의 말을 듣고 얼굴이 구겨졌다. "사 할이라…… 욕심이 많군!" 비록 혼잣말인 듯하였으나 고숭무에게는 똑똑히 들렸다. 발작을 하려던 고숭무는 억지로 자신을 눌러 참았다. 이놈에게 괜히 잘못 보여, 예전처럼 자신을 범인이라고 지목하면 어찌하겠는가? ' 빌어먹을 놈의 자식, 내 이번 일만 끝나면……' 화를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는 고 숭무였다. "자, 이제 저희는 비응방 문제의 대략을 알았으니 본격적으로 수사에 나서겠습니 다." '왜 저놈의 자식은 심 당주에게는 고분고분하면서 내게는 버릇없이 구는 거지?' 진소백이 심화절에게 말하는 것을 보고 고숭무는 생각했다. 그리고 고숭무의 생각 이 어떻건 진소백은 더욱 공손하게 심화절에게 말했다. "심 당주께서는 나흘 후의 장례 준비로 바쁘시겠군요? 하지만 따로 조사한 곳에서 새로운 단서라도 발견이 되면 즉시 알려 주십시오." "당연한 말씀이시오. 그럼 이만……" 인사하며 나가는 심화절을 급히 뒤따라가며 고숭무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이상하단 말이야!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거지?' 2 금사진의 장례(葬禮)까지는 이제 사흘이 남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진소백은 오늘 금청청을 방문해 보기로 했다. "왜 하필 그녀인가요?"


섭수진이 진소백에게 물었지만, 이어지는 진소백의 말에 그녀는 입을 다물어야 했 다. "미인이지 않소! 혹시…… 질투(嫉妬)라도 하는 것이오?" 섭수진은 한가하게 유람 나온 사람처럼 행동하는 진소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계속 투덜거리면서도 끝까지 진소백을 따라오는 것이 수상하지 않은가? "하하! 이것 보시오, 이 오솔길은 정말 아름답구려." 섭수진은 비록 대답하지는 않았으나, 속으로는 공감(共感)했다. 적당히 어우러진 나무와 공간(空間)이 자아내는 고아한 풍취! 그 아름다운 오솔길 이 끝나는 곳에 금청청의 처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섭수진에게 던진 진소백의 한마디에 섭수진은 다시 화가 났 다. "저 여인이 술에 취하면 어찌 될지 궁금하지 않소?" "뭐예요?" 자신이 취하여 한때 정신을 잃은 것을 두고 하는 말임을 아는 섭수진이었다. * * * 금청청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니, 이미 많이 마셨다. 어떻게 하면 가슴에 응어리진 것을 풀어 버릴 수 있을까? 하나 술을 마실수록 정 신은 오히려 또렷해질 뿐. '누가 술을 근심을 쓰는 빗자루라 했지?' 그때 금청청의 눈에 진소백과 섭수진이 들어왔다. '저 둘의 사이가 언제 저렇게 가까워진 걸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둘이 가까워졌다는 점이 아니었다. 진소백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 금청청은 마음이 울적하여 감정(感情)을 풀어 버릴 대상을 찾고 있는 상태였 다. 게다가 자신은 이미 술에 취했으니, 이 정도면 시비를 걸기에 충분하지 않은 가? "너, 이 자식, 잘 만났다."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금청청의 손에 들려 있던 술 호로가 직선으로 날았다. 목표는 진소백의 머리! 그러나…… "당신 옆에 있다가는 항상 뒤처리만 해야겠군요." 청아한 음성과 함께 술 호로는 어느새 섭수진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전과 동일한 변화(變化)! 진소백이 뒤로 숨자, 섭수진이 대신 금청청의 공격을 처리한 것이었다. "흥, 항상 여자 뒤에만 숨다니…… 그러고도 네가 남자냐?" 금청청은 또 진소백이 숨으며 자신의 공세를 피하자, 냉소(冷笑)하며 날아올랐다. 홍의(紅衣)의 붉은빛이 하늘을 덮는 듯싶더니, 어느새 섭수진의 머리를 넘어 진소 백을 향해 금청청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연꽃 같기도 하고 모란 같기도 한 꽃들이 어지러이 피어올랐다. "어이쿠, 난화수(亂花手)로구나!"


그러나 언제 또다시 앞으로 돌아간 것일까? 놀란 듯 비틀대던 진소백의 몸은 어느새 다시 섭수진의 앞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진(鎭) 공자, 당신 정말!" 어느새 섭수진이 짤막히 외치며 또다시 금청청을 상대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이번에는 장(掌)과 장이 부딪치는 소리가 일어나지 않았다. 금청청이 섭수진과 부 딪기 전에 손을 거두었고, 섭수진 또한 그것을 보고서 손을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섭수진이 손을 거두는 자세는 지극히 자연스러워 마치 처음부터 공력을 일으키지 않은 듯하였다. 진소백의 눈에 이채(異彩)가 일었다. 하지만 그것은 섭수진의 뛰어난 무공을 봐서가 아니었다. 보라! 거두어지는가 했던 금청청의 손이 다시 뒤집어지는 것을, 어지러이 펼쳐지던 꽃 그림자가 손으로 모이는가 했더니 다시 난초의 어지러운 줄기처럼 경기(勁氣)가 분분히 일어나며 섭수진의 몸을 돌아가는 것을! 섭수진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뒤쪽의 진소백만을 공격하는 기이한 공력이었 다. 진소백은 물론, 이번엔 섭수진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손끝에서 뻗어지는 경력(勁力)이 마치 생명을 가진 존재처럼 휘어져 가다니…… 이것이야말로 난화수(亂花手) 최강(最强)의 절초 중 하나이며, 금청청이 채 완성하 지 못하여 시전을 꺼리는 난화회류(蘭花廻流)인 것이었다. 믿기 힘든 공격에 노출된 진소백! 하나 믿기 힘든 일은 한번 일어나기 시작하면 계속 일어나는 것일까? "아이구, 나 죽겠네!" 당황한 듯 다시 비틀거리는 진소백의 몸이 믿을 수 없게도 난화회류의 바늘 같은 틈새를 밟으며 경력의 해일(海溢) 속에서 빠져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 여인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동시에 터졌다. "취선보(醉仙步)!" 개방의 취선보! 취한 듯 비틀거리는 가운데 어떠한 공격이라도 흘려 보낼 수 있다는 개선( 仙)의 절학이었다. "정식 명칭은 취팔선과천(醉八仙過天)이라고 하지!" 낭랑히 외친 진소백이 정말로 하늘을 건널 듯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땅으로 다시 내려섰을 때에는 금청청의 완맥은 이미 진소백의 수중(手中) 에 들어간 후였다. "네, 네놈이……" 당황한 금청청은 진소백을 쳐내려 하였으나, 이미 완맥을 잡힌 터라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금청청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진소백, 그런데 그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지 않는가? "이럴 수가?"


진소백이 매우 놀란 듯이 말하자, 섭수진은 물론 금청청조차도 가슴이 철렁하여 그의 입만을 바라보았다. "이럴 수가……? 섭 낭자, 죄송하나 잠시만 손을 이리 줘보시겠소?" 강호인이 손을 타인(他人)에게 맡기는 것은 목숨을 맡김과도 같다. 그러나 섭수진 은 어떻게 된 것인지 조금의 불안함도 없이 진소백에게 손을 내밀었다. 물론 얼굴은 약간 붉어졌지만…… "어찌 이럴 수가……" 섭수진의 맥을 짚어 보던 진소백은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반복하며 잡고 있던 금 청청의 손마저 놓아 버렸다. 완맥이 풀림과 함께 공력이 회복된 금청청! 그러나 무언지 모를 불안한 느낌이 음습해 오는 것을 느낀 그녀는 감히 다시 덤비 지 못하고, 진소백의 다음 말만을 기다렸다. 참다못해 섭수진이 먼저 물었다. "진 공자,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진소백이 침중히 대답했다. "놀라지 마시오, 섭 소저. 좀 전의 금 낭자는 마치 미친 살쾡이처럼 날뛰지 않았소 이까. 그런데 내가 맥을 짚어 보니……" '미친 살쾡이'란 말에 막 발작하려던 금청청은 진소백의 다음 말, '내가 맥을 짚어 보니'란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내게 무슨 병이라도……?' "짚어 보니요?" 섭수진의 독촉에 진소백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글쎄, 섭 소저랑 맥박(脈搏)이 똑같지 않겠소. 이게 말이나 되오? 섭 소저같이 현 숙(賢淑)한 여인과 미친 살쾡이가 맥박이 같다니. 이 무슨 해괴한……" 진소백은 당연히 그 뒤의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이 자식아`─`" 금청청이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에. 분노를 더하여 폭풍 같은 경기(勁氣)를 동반했던 금청청의 이번 공격도, 너무나 쉽 게 제압되고 말았다. 진소백이 두 손을 치켜 들자, 금청청의 두 손은 마치 처음부터 약정(約定)이라도 한 듯이 진소백의 손아귀에 쥐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이것 보시오. 어떻게 이런 살쾡이와 당신의 맥박이 같을 수 있겠소?" 금청청은 분노로 인해 얼굴로 피가 몰려 거의 기절할 지경에 이르렀다. 섭수진 또한 한편으론 우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심한 것 같아 어찌할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다만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 하나. '이 사람은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이때였다. "형장, 그 손을 놓으시오." 어디선가 젊은 청년의 것인 듯한 목소리가 들려 오며, 한 줄기 경력(勁力)이 진소 백과 금청청의 사이를 갈라 오는 것이 아닌가? 만일 진소백이 계속해서 금청청을 잡고 있는다면 밀려오는 경력에 자신이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형세! 진소백은 급히 한소리 외치며 금청청에게서 손을 떼고 물러났 진소백이 물러나자 금청청과의 사이에 생긴 빈 공간으로 표표히 떨어져 내리는 신형이 있었다. 굳이 그가 펼치는 신법을 보지 않아도 화산의 제자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매일도(梅逸度)! 당신이구려." 진소백은 침중히 말했다. 마치 한 수에 금청청을 넘겨주게 된 것이 불만이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만나게 되었소." 명가의 풍도를 잃지 않으며 진소백에게 인사하는 매일도에게 금청청이 말했다. "사형, 저자가…… 저를 모욕했어요." 그러나 매일도는 오히려 금청청을 꾸짖었다. "청아! 그만 하거라." 이어 진소백에게 말했다. "진 형이라 하셨소? 청아가 무례히 군 점에 대해서는 내가 대신 사과하리다." 섭수진은 당연히 진소백이 웃으며 일을 넘길 것이라 예상을 했었는데 그의 행동은 의외였다. "호오, 살쾡이의 사형께서 대신 사과를 하다니, 왜 겁이라도 나신 게요?" 매일도의 눈썹이 역 팔 자로 올라가며, 주먹이 쥐어졌다. 진소백은 왜 이리도 무례하게 구는 것일까? 3 "하긴, 나랑 싸워 좋을 게 없지. 자칫 잘못하면 망신당하기 십상일 테니!" 매일도의 꽉 쥔 두 손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진소백의 도발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무례하다니, 내가 형장을 잘못 보았소." "사람을 잘못 보았는지 모르지만 무공은 잘 보았소. 당신 정도로는 내게 덤비지 않는 게 좋아!" 이 정도가 되면 매일도로서도 참을 수 없는 일! "좋소, 내 시험해 보리다. 조심하시오." 화가 난 와중에도 경고의 말을 하는 매일도를 보는 진소백의 눈에 감탄의 빛이 어 렸다. 그러나 마음속의 감탄과 가슴을 질러 오는 매일도의 좌수(左手) 일권(一拳)과는 서 로 관계가 없었다. 진소백은 급히 일보(一步) 후퇴하며, 오른쪽 손바닥을 추산(推山)의 일식으로 쓸어


가서 매일도의 일권을 제지(制止)하고자 하였다. 그 와중에도 입은 쉬지 않았다. "하하, 역시 당신 정도로는 되질 않는다니까." 진소백의 반응은 매우 빨라 매일도가 일권을 쏟아 내자마자, 이미 손바닥으로 일 권을 봉쇄(封鎖)하고 있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흥!" 싸늘한 웃음과 더불어, 믿을 수 없게도 매일도의 좌수가 손바닥을 피해 진소백을 계속 핍박하는 것이 아닌가? 원래 매일도의 일권은 진소백을 정면으로 질러 가고 있어 손바닥을 피할 수 없었 는데, 기이하게도 지금 매일도의 일권은 진소백의 우측(右側)에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헛!" 진소백이 놀라 뒤로 두 걸음을 빠르게 물러났다. 그러나 매일도의 좌수가 거둬지고, 다시 우수가 기이하게 말려진 형태로 찔러 오 는데, 그것은 더욱 빨랐다. "이형권(移形拳)이로구나!" 진소백이 놀라 외치며 다시 다섯 걸음을 물러났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권세(拳勢)의 범위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매일 도의 권(拳)은 계속해서 진소백의 면전을 압박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매일도의 발을 자세히 보라! 전혀 걸음을 옮기는 것 같지 않은데도 발이 땅위를 미끄러지며 신형(身形)을 이동 시키고 있지 않은가? 원래 권법의 힘은 안정된 하체(下體)에서 나오는 것! 이렇게 이동하면서 쏟아 내는 권법은, 중심이 흔들려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는 법이었다. 그러나 지금 매일도의 일권 일권은 그야말로 산을 쪼갤 듯하여 조금도 중심이 흔 들리는 기색이 없었다. 만일 중심이 흔들리지 않고 발을 이동시킬 수가 있다면 그 변화는 그야말로 천변 만화(千變萬化)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매일도가 전개하고 있는 이형권(移形拳)의 본질(本質)이었다. 권세를 피해 잇달아 물러섰음에도 불구하고, 매일도의 공격을 피할 수가 없자 진 소백은 어쩔 수 없이 허공(虛空)으로 몸을 띄웠다. 그러나…… "어림없지!" 매일도의 신형도 곧장 떠올라 오며, 허공 가득히 손 그림자를 그려 내는 것이 아 닌가? 마치 꽃이 피듯이 만개하는 주먹의 그림자는 매일도가 권법의 속도를 배가 (倍加)하였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화형권(花形拳)까지!" 이형권법의 전개 속도가 어느

단계를 넘어서서, 꽃 그림자를 피워 내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난무하는 주먹 꽃(?) 속에서 자신의 보법(步法)이 어지러워짐을 느낀 진소백은 마 침내 가슴에 일장을 맞고 말았다. 펑! "우욱!" 가죽북 터지는 소리가 나며 진소백의 신형이 일 장 떨어진 곳으로 곧장 날려갔다. "진 공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에서 튀어나온 큰 소리는 섭수진의 얼굴을 붉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며 진소백에게 달려가는 섭수진. "어떻게 된 거예요? 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섭수진은 하려던 말을 끝맺지 못하였다. 진소백은 급히 섭수진의 손을 잡아, 말을 잘랐던 것이다. "과연 화산옥기린은 못 당하겠소. 어서 피합시다." 섭수진이 뭔가를 말하려 하였으나, 진소백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남기는 한마디. "다음에 볼 때 다시 한 번 겨뤄 봅시다." 진소백과 섭수진은 떠나갔다. 남은 것은 매일도와 금청청! 매일도를 보는 금청청의 눈에는 정감(情感)이 가득하였다. "흥, 지가 그래 봤자지! 사형, 고마워요!" 금청청이 쾌활하게 매일도에게 말했다. "응? 으응!" 하지만 매일도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하였다. 기실은 좀 전에 진소백의 가슴을 쳤을 때, 마치 고무공을 치는 듯하여 별다른 느 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일 장이나 밀려가다니……?' 생각에 잠겨 있던 매일도는 문득 금청청을 보았다. 금사진의 죽음에 자신의 책임이 크다며 항상 술만 마시고 우울해 있던 자신의 사 매 금청청! 그러나 지금은 매일도가 진소백을 물리친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하고 있지 않은가? 그의 눈에 이채(異彩)가 떠올랐다. 진소백, 그는 왜 그렇게 무례하게 군 것일까? '그가 설마……?' * * * "자, 이제 말해 주세요." 금청청의 처소에서 멀어지자 섭수진이 물었다. "뭘 말이오?"


"몰라서 물어요? 좀 전의 일 말이에요." 진소백이 빙긋이 웃었다. "매일도의 성취는 상상 밖이라 감당하기 힘들더군! 아야!" 섭수진이 진소백을 꼬집어 난 소리이다. 섭수진은 무의식중에 진소백을 꼬집고 난 뒤, 자신도 당황하여 얼굴이 또다시 붉 어졌다. "아아, 여자가 남자를 꼬집는 것은 그 남자에게 마음이 있단 뜻이라던데……?" "뭐예요?" 섭수진이 아미를 날카롭게 세웠다. 계속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했으므로 진소백은 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금청청은 금사진의 죽음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느껴, 풀이 많이 죽어 있었소!" "그래서요?" "내가 두 가지 치유약을 주었지!" 섭수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하! 하나는 당신을 미워하게 하여 생의 의욕이 나게 만들어 준 것이군요?" "옳소. 그런 성격의 여인은 분노(憤怒)를 통해서 생의 의욕을 얻기도 하는 법이니 까?" "그럼, 두 번째 약(藥)은요?" "매일도는 우리가 처음 그곳에 갔을 때부터 나무 그늘 아래에 숨어 있었소. 사매 의 모습을 보고 있었겠지만 명가(名家)의 훈도(薰陶)를 받으며 자란 그로서는 어찌할 바를 몰랐겠지!" "그럼 당신이 일부러 그를 끌어 낸 것인가요?" "미움이나 분노도 살아 가는 의욕을 북돋우기는 하지만, 역시 사랑이 가장 확실한 방법 아니겠소?" 진소백은 웃었다. "그들 사형제는 원래 사이가 좋았으니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가까워질 수 있을 거요." 섭수진도 따라 웃다가 갑자기 얼굴을 굳히더니 물었다. "그런데 아까 일권을 맞은 가슴은 괜찮은 거예요?" 진소백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고 보니…… 이거 아무래도……" 섭수진이 놀라 물었다. "아무래도요?" "그냥 나을 것 같지가 않소. 아무래도 당신이……"


진소백은 섭수진이 지나치게 걱정을 하는 것 같자, 얼굴을 펴며 빙긋이 웃었다. "당신이 술을 한잔 사야만 나을 것 같소." "뭐예요!"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꼬집혔는지 진소백은 숨이 넘어갈 듯 비명을 질러대었다. "아고고! 이거 한 잔으로는 안 되겠소. 서너 잔은 사주어야…… 아고고……" 사랑은 여기에도 있었다. 인간은 때로는 미워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며 살아 가지만, 그래도 역시 가 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 아닐까? 삶의 의욕을 북돋우고, 지나간 날의 상처를 잊게 하는 가장 좋은 약(藥)! 무엇보다 사랑이었다. * * * 심화절의 연락은 밤늦은 시간에 왔다. 진소백은 급히 달려갔고,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는 섭수진의 모습을 보았다. 그를 보자 인상이 구겨지는 고숭무의 얼굴도! 그러나 진소백을 놀라게 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니었다. 심화절이 폭탄과도 같이 내뱉은 말이 그를 놀라게 하였다. 아니, 폭탄이 터지더라도 이렇게 놀랍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상의 이유로 방주의 장례식 때, 방주의 원혼(怨魂)을 달랠 제물로 살수(殺 手)의 심장(心腸)을 바칠 것을 건의하오!" 이 무슨 소리인가? 살수라면 엽혼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엽혼을 살릴 것을 주장하던 심화절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다 니, 대체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진소백은 마음이 급해졌다. 살수를…… 엽혼을 죽게 놔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제 11 장 여명칠일(餘命七 日) 1 "제가 강호에 풀었던 열 명의 탐문객 중에서 삼호(三號)가 알아 내어 보내 온 정 보입니다." 수하(手下) 하나가 큰 천을 말아 들고 심화절의 옆에 서 있었다. 심화절이 눈짓을 하자,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천 뭉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엽혼의 신상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성명:엽혼(葉魂). 나이:이십사 세 가량. 가족:동생 하나. 이름은 엽평. 무공:알려지지 않았으나, 그간의 살수행 중 실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매우 높은 듯. 비고:동생의 약값을 구하기 위해 살수행을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이어지 는 것은 엽혼과 엽평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었고, 진소백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


이었다. 놀랍게도 심화절은 마침내 엽혼에 대해서 알아 냈던 것이다. 거기엔 화선에 대한 것도 있었다. "지금으로서 중요한 단서의 끈은, 사라진 화선(花仙)이란 여인이 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심화절의 말은 어김이 없었다. 때문에 진소백도 이미 화선을 찾을 것을 개방에 말해 놓고 있는 상태였다. 만일 일이 꼬이지 않아 비응방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자신이라도 직접 나서서 열심히 찾 아 다니고 있을 터였지만…… "모든 청부는 그녀를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그녀만 찾는다면 청부가 들어온 경로 (經路)와 청부자의 신분을 밝혀 내는 것이 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심화절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역시 행방이 묘연한, 엽평이란 아이를 찾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습 니다." 진소백이 사종쾌를 통해 유유곡(幽幽谷)으로 보낸 엽평의 행방을 심화절이 알아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사종쾌는 이미 엽평을 생사의괴 종도에게 넘겼고, 돌아와서 보고를 마친 상태였다. 엽평은 지금 유유곡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것이다. 치료를 위해 몸을 보호하느라 직접적인 치료는 며칠 있다가 시작될 것이란 전갈 (傳喝)이었다. "모든 힘을 기울여 찾고 있으니, 곧 무슨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심화절이 말을 잠시 쉬자, 사공두가 입을 열었다. "하면, 이제까지 반대해 오셨던 살수의 처형 문제를 찬성하기로 마음을 바꾸신 까 닭은……?" 심화절이 힘있게 말했다. "내가 방주를 암산한 살수를 처형함에 반대했던 것은, 배후를 알아 내고자 함이었 소. 그러나 살수가 배후를 알고 있을 리는 없는 것! 다만 청부가 들어온 경로와 중개인을 살수를 통해 알아 내고자 함이었는데, 그에 관한 정보를 얻었으니……" 강호에서 어느 청부자가 살수에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겠는가? 살수는 살행 중에 언제라도 죽거나, 잡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데 말이다. 심화절의 판단은 이치에 맞았다. "살수를 통해 알아 낼 수 있는 정보는 이미 알았으니, 더 이상 살수에게 약(藥)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일!" 진소백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뒷말은 보나마나 심장을 제물(祭物)로 바친다 는 이야기! '어떻게 할까? 무슨 이유를 들어 살수를 살려 두자고 하지?' 그는 열심히 그럴듯 한 이유를 찾아 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 그때, 진소백의 귀로 누군가의 전음(傳 音)이 들려 왔다.


"공자! 사종쾌입니다. 화선(花仙)의 종적(縱的)을 찾았습니다." 사종쾌! 그는 유유곡을 다녀온 이후로 화선과 천랑파의 흔적을 찾는 일에 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늘 화선을 찾아 냈던 것이다. 진소백은 급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이거 죄송합니다. 조금 급해서……"

열중하고 있었

* * * "어`─ 시원하다." 오줌발을 힘차게 갈겨대며 뒷간에 서 있는 진소백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볼일을 보고 있는 듯하였으나, 사종쾌만은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진소백에게 전음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놀랍게도, 그녀는 공자께서 미행(尾行)을 명했던 복면인들과 같이 있었습니다. 또 한 신주낭객(神州狼客)이 억류되어 있다는 곳에서도 멀지 않습니다." 주루에서의 일을 기억하는가? 염소 수염이 옆 탁자에서 도약하자 진소백이 입을 달싹거렸던 것을! 동시에 구석 의 거지가 일어서서 나갔던 것을! 그때, 진소백은 염소 수염을 쫓는 복면인들을 미행할 것을 명령했었고, 구석에 앉 아 있던 개방의 고수는 복면인의 뒤를 추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소굴을 알아 냈던 것인데…… 거기에 화선이 같이 있었다니! "화선은 억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수하들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오히려 윗사람 인 양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고……" 그렇다면 화선은 단순한 중개인이 아니라, 청부자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일까? 진 소백은 사건이 재미있게 되어 간다고 생각했다. 사종쾌의 전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자들의 행색이 엽 소형제를 암습한 미창 등이 했던 복면과 같다 하니, 관계가 있는 자들임이 분명합니다." 무언가 일이 풀리는 것 같았다. 화선이 복면인과 함께 있고, 그들이 천랑파의 신주낭객(神州狼客)을 억류하고 있는 자들이라면 이 일은 이치에 맞았다. 무언가 내키지 않는 일을 하는 것 같다는 구천(仇賤)의 태도도 이해가 되었다. 생각을 마친 진소백의 전음이 사종쾌의 귓전에 울렸다. "좋아! 그들의 허실(虛實)을 더 알아 보되, 들키지 않도록 부디 조심하시오!" "예, 공자!" 사종쾌가 사라지는 기색이 숲속에서 느껴졌다. * * * 볼일을 마치고 진소백이 돌아왔을 때는 회의가 끝나 가고 있었

진소백은 어쨌든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수가 깨어난다면 더욱 많은 것을 알 수 있지 않소? 기다려 보는 것이……" 하나 이미 마음을 바꾼 심화절의 의지(意志)는 단호했다. "아니오. 내가 만일 흉수라도 살수에게 정체를 알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가 배 후자를 알고 있을 가능성은 전무하오! 그는 이제 쓸모가 없소." ─`그는 쓸모가 없소! 처음부터 살수를 살려 두지 않고자 했던 금청청과 고숭무, 사공두는 군말없이 동 의했다. 진소백으로서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지금은 밤! 이 밤이 밝으면, 금사진의 장례는 불과 이틀이 남을 뿐이었다. 엽혼의 생명도 역시 이틀이 남게 된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진소백은 다만 마음 속으로 외칠 뿐이었다. '어서 깨어나거라, 엽혼!' 남은 방법은 엽혼이 한시라도 빨리 깨어나는 것! 깨어나서 심화절 등이 자신을 죽이지 못할 조건(條件)의 증언을 하는 것이었다. 흉 수의 정체(正體), 청부의 배후(背後) 증언은 충분히 면사(免死)의 조건이 될 것이 다. 흉수가 누구인지를 밝혀 내는 것은 진소백이 할 일이었다. * * * 때때로 기적은 일어난다. 사람이 간절히 바라는 일에 기적은 일어나기도 하는 것 이니……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기적은 진소백의 간절한 마음에 대한 반향(反響) 인 것일까? 떨어지는 물소리. 물이라고 했으나, 향긋한 약향(藥香)을 풍기는 이것은 단순한 물이 아니었다. 각종 약재가 배합되어 만들어진 약수(藥水)는, 정확히 두 곳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약수가 떨어지는 아래에는 시신(屍身)이 하나 놓여 있었다. 약수는 바로 그 시신의 왼쪽 어깨와 심장 아래를 겨냥하며, 정기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보라! 지금 약수(藥水)를 맞고 있던 시체의 눈이 천천히 열리고 있지 않은가? 기적(奇蹟) 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곳은……?' 엽혼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귓가에 들리는, 물 떨어지는 소리와 그 물이 닿는 부위에서 전해져 오는 지 극한 고통만이 선명(鮮明)할 뿐이었다. 오랜 기간 사용되지 않아 약해진 눈에는 뿌연 안개만이 서려 있었다. 이윽고 안력 이 점점 돌아오기 시작하자, 그는 이곳이 어두운 석실의 내부(內部)임을 알 수 있 었다. 자신이 석대 위에 누워 있다는 것도!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은 아마도 상처를 치료(治療)하는 작용을 하고 있는 듯, 떨어 져 내릴 때마다 아릿한 고통 속에서도 시원한 느낌을 전해 주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엽혼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확연히 깨달았다. 가슴을 찔러 오던 사공두의 도첨(刀尖)이 떠올랐다. 뿜어 낸 피 속으로 천천히 침몰(沈沒)하던 자신의 모습도! 허공을 갈라 와서 사공


두의 도신을 쳐내던 심화절의 비도(飛刀)를 떠올리는 데는 좀더 시간이 걸렸다. 비도(飛刀)가 도신(刀身)의 방향을 미미하게나마 바꾸었고, 방향이 바뀐 도는 심 장의 바로 아래를 뚫었으니…… '내가 살아난 것인가?'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다만 두 눈만을 깜박이며 누워 있을 뿐이었다. 정신의 맑아짐과 흐려짐이 반복되고 있었다. 약봉지를 갈려고 들어왔던 의원이 엽혼이 깨어났음을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두어 시진이 지난 후였다. 그는 부랴부랴 소식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소식은 가장 먼저 심화절의 귀에 들어갔고, 심화절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소식 을 알렸다. 다만, 진소백과 섭수진에게는 날이 밝으면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정확한 의도(意 圖)가 무엇이든 간에 심화절의 이런 생각은 엽혼의 입장에서 본다면 치명적인 것이었다. 엽혼을 암중에 보호할 진소백이 없다면, 누구인지는 모르나 흉수의 살수에서 엽혼 은 매우 위험하게 되는 것이므로. 처소로 돌아가 잠을 청하던 비응방의 사(四) 인(人)이 이 소식을 듣고 엽혼이 있는 석실 앞에 다시 모였을 때의 시각은 이미 사경 무렵! 입구(入口)를 바라보는 사 인의 심정은 저마다 달랐다. 어떤 이는 초조했고 어떤 이는 담담했다. 차기 비응방주가 될지도 모르는 삼 인과 사공두는 긴장하여 아무도 먼저 말을 하 지 않았다. 누가 흉수이고, 누가 반도(叛徒)인지 모르는 상황! 깨어난 엽혼은 사건을 어디로 몰고 갈 것인가? 2 기기잉`─` 돌과 돌이 마찰하는 소리가 커지며, 서서히 석문이 열렸다. 석실로 들어가는 석문 이었다. 이윽고 열려진 문을 통해 사람들은 저마다 복잡한 감정을 가득 지낸 채 들어갔다. "살수는 완전히 정신을 차린 것이냐?" 고숭무의 질문에 의원은 깊이 머리를 숙였다. "예. 하나 신지를 완전히 찾자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고숭무의 옆에 서 있던 심화절이 물었다. "말을…… 대답을 할 수는 있겠소?" 심화절의 말은 반경칭(半敬稱)이라,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고숭무와 다름을 보 여 주고 있었다. "어느 정도 말귀는 알아듣는 듯하나, 아직 말을 하는 것은 무리일 듯싶습니다." 막 깨어난 탓에 아직은 몸의 근육(筋肉)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것이리라.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가 심화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격잠지술(激潛之術)에 대해 알고 계시오?" 의원의 눈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격잠지술이란 말 그대로 체내(體內)의 잠력(潛力)을 격발시키는 방법을 총칭(總稱) 하는 말이었다. 인간의 신체에는, 평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생명의 위기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 처하면 자신도 모르게 나타나곤 하는 숨은 힘이 있다. 그 힘은 잠력이라 불렸는데, 각 의가(醫家)에서는 저마다 이 힘을 이용하는 방법을 개발(開發)하여 전하고 있었다. 흔히 보약(補藥)이라고 부르는 각종 영약들 중에는, 이 잠력을 격발시켜 몸에 활기 를 주는 형태의 약들이 많았다. 그러나 잠력(潛力)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신(神)이 안배한 ! 약이나 다른 힘으 로 잠력을 격발하여 사용한 사람들은, 잠력이 쇠하면 급격히 힘을 잃고 노쇠하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마치 기름이 다한 등잔이 사그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기력(氣力)과는 달리, 잠력은 쓰고 나면 다시 회복시킨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 다. 많은 보약과 영약을 먹은 사람이 임종(臨終)에 이르러,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 는 것은 이런 이유였다. 어쨌든…… 의원은 고개를 숙였다. "알고는 있습니다만……" 심화절은 이미 답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바로 말을 이었다. "살수를 깨어나게 하시오." 의원이 얼굴을 들었다. "그러나 만일 격잠술을 시술한다면……" 그 뒤의 말은 들어 보지 않아도 뻔했다. 살수의 생명을 되살릴 수 없게 된다는 것. 이미 상처가 큰 탓으로 엽혼의 원기는 많이 상해 있었다. 여기에다 격잠술을 베 푼다면, 회생(回生)할 가망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진소백이 있었다면 무슨 이유를 들어서라도 만류했을 것이었지만, 불행히도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의원은 품에서 침통을 꺼내어 엽혼의 머리맡에 가지런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 * * 진소백은 사경이 조금 지나 깨어났다. 소피가 마려운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이 심란하여 잠이 깊게 들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뒷간을 갔다가 돌아오던 그는 이 깊은 밤에도 비응방의 후원이 밝음을 깨닫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지나서야 불이 밝혀진 곳이, 바로 엽혼이 누워 있는 선약실 (仙藥室) 쪽임을 깨달았다. * * *


침은 엽혼의 백회혈(百會穴)을 삼 푼의 깊이로 파고 들어갔다. 지금 그는 가부좌(跏趺坐)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가부좌가 가장 안정된 자세의 하나임에도 어딘가 어색하게 보이는 것은, 다른 사 람에 의해 억지로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이 이미 신정혈(神庭穴)에도 침이 박혀 대롱거리고 있었다. 의원의 이마에는 땀이 흘렀다. 이렇게 침을 이용하여 잠력을 격발시키는 시술은 효력이 금방 나타난다는 장점(長 點)이 있었지만, 또한 그만큼 어려운 것이기도 했다. 백회혈에 이어 양쪽의 관자놀이에도 두 개의 침을 꽂은 의원은, 마지막으로 금빛 으로 빛나는 긴 침을 하나 들어올렸다. 의원의 두 눈이 주시하는 곳은 엽혼의 목 뒷부분! 이것이 이 시술의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마지막 고비였다. 뇌호혈(腦戶穴)! 만일 반 푼의 오차(誤差)만 생겨도 피시술자는 신지(神志)를 상실한 식물 인간이 된다. 사고(思考)의 기능을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의원의 손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는 의원으로선 일류(一流)였다. 그러나 격잠지술에 사용되는 혈도는 거의가 치명 적인 사혈(死穴)인지라, 그가 아무리 의술에 능할지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금침이 엽혼의 뇌호혈에 세 푼 반의 깊이로 박혔다. 긴장의 순간이 지나고, 의원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안도의 숨을 길게 쉬었다. "후, 다행히 성공했습니다." 그 말에 호응(呼應)이라도 하는 듯, 가부좌한 엽혼의 전신(全身)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 * * 진소백의 이어지는 질문에도 석실 앞을 지키고 선 무사 둘은 입을 열지 않았다. "석실 안으로 누가 들어갔는지 모른단 말이냐?" 다시 한 번 물어도 역시 묵묵부답! 만약 진소백을 모르는 자들이라면, 이러한 태도도 가능했다. 그러나 이미 방주 살 해 사건을 조사하는 인물로서 대다수의 비응방 방도들이 그를 알고 있는 상황! 누군가의 지시가 없다면, 이처럼 간덩이 부은 태도를 보일 수는 없으리라. '누구의 지시를 받은 것이지?' 물론 진소백은 이런 질문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당연히 심화절일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비응방 내의 서열상 심화절을 앞서는 고숭무(暠崇武)는 뒷전 으로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까? 어쨌든, 경비무사들의 태도에 진소백은 몹시 화가 났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렇게 툴툴거리며 돌아가겠는가? 팔까지 마구 흔들어대면 서 말이다. 진소백은 돌아갔으며, 남은 두 경비무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 심화절의 명이라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긴장했었던 것이다. 크게 숨을 내쉬고 다시 들이마시는 바람에 진소백이 손을 흔들며 뿌려 낸,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하얀 가루가 코로 들어갔지만 경비무사들은 느끼지 못했다. 잠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 * * 엽혼의 몸이 떨리는 것은 잠력이 서서히 일어나 온몸으로 퍼져 나가고 있기 때문 이었다. 전신을 달리며 곳곳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은 잠력은 마침내 엽혼의 두 눈을 번쩍 뜨이게 하였다. "이…… 곳은……?" 엽혼이 처음 뱉은 말이었다. "악적(惡敵)! 이제 깨어났느냐?" 평소 심화절에 대한 충성이 각별했던 사공두가 악을 쓰자 심화절이 조용히 그를 말렸다. 그리고…… "당연히 비응방(飛鷹幇)이지. 기억하는가?" 심화절의 조용한 말에, 그렇지 않아도 창백했던 엽혼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왜 나를 살린 것이오?" 또 악을 쓰려는 사공두를 제지하며, 다시 심화절이 물었다. "자네는 우리 비응방에 진 빚이 있네. 인정하는가?" 엽혼의 눈에 이채(異彩)가 떠올랐다. 자신은 살수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정중한 말투에 조용한 어조라니! 엽혼은 심화 절이란 인물이 무척 특이(特異)함을 느꼈다. "인정하오!" "좋아! 하면 묻겠네. 자네는 뒤에 있는 청부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엽혼이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보고만 있자, 심화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방주를 살해한 것이 아님은 이미 알고 있네." 심화절은 낮지만 더욱 힘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청부자에 대해 알고 있다면, 아니, 짐작이 가는 자라도 있다면 말해 주게. 자네는 빚이 있지. 따라서 의무도 있지 않은가?" 조용한 말이었다. 여기에는 아무런 위협도 강제도 없었다. 그러나 어떤 고문이나 위협보다도 더욱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음을 엽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내는 비록 고문에는 꿋꿋할 수 있으나, 이렇게 마음의 빚을 공략(攻掠)해 오는 것에는 약한 법이었다. 엽혼의 눈에 복잡한 빛이 어렸다. 미미하게 흔들리던 엽혼의 눈빛이 하나로 모아지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 금 방주에게 일검을 꽂기 전…… 이미 호각 소리를 들었소." 이번에는 금청청과 사공두, 심화절과 고숭무의 눈빛이 모두 흔들렸다.


금청청과 사공두는 '일검을 꽂았다'는 말에, 심화절과 고숭무는 호각 소리가 먼저 났었다는 말에 흔들린 것이었다. 살인이 있기 전에 호각 소리가 났다는 것은……? 호각은 금사진의 연공실에 있는 줄에 연결되어 있었다. 금사진이 위기(危機)를 깨 닫고 줄을 끊으면, 줄에 연결되어 있던 백근 무게의 돌이 떨어지며 기관을 자극하 여, 호각이 비응방 내에 울려 퍼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금사진이 그 줄을 끊은 것이 아니었다니……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호 각을 울렸다는 것인가? 엽혼이 조용히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당신들에게 잡혀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을 것이오." 그렇다. 바로 살인을 청부한 자! 그는 당연히 엽혼이 죽어 증거(證據)가 사라지기 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호각 소리를 울려 비응방의 힘으로 엽혼을 죽이려 하였으나, 심화절의 신 속한 대응(對應)으로 계획이 무산되어 버린 것이리라. "……내가 침투한 경로는 지하에 있는 비밀 통로였소." 비밀 통로라는 말에 중인들이 모두 놀라고 있었지만, 엽혼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한 정보들이 그렇게 쉽게 구해졌다는 것은, 비응방 내부에 조력자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했소." 말을 계속하던 엽혼의 눈빛이 다시 한 번 흔들렸다. 마음속의 갈등(葛藤) 때문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귓가에 전음(傳音)이 들려 왔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매우 잘 알고 있는 친우(親友)의 전음이! "잘했네, 이제 한마디만 더하고 서서히 정신을 잃는 척하게!" 다름 아닌 진소백의 전음! 그는 엽혼이 막 깨어나는 순간에 석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숨어서 전음을 날렸던 것이다. 엽혼은 진소백이 시키는 대로, 자신이 살인의 배후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음 을 비응방의 인물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던 것이 그리고…… "어쨌든 내가 나름대로 조사하여 본 결과, 살인을 청부한 자는 다름 아닌……" 그러나 중인들은 결정적인 말을 듣지 못하였다. 말소리가 점점 미약해지더니, 그가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던 것이다. "이 런!" 의원이 급히 달려와 엽혼의 맥을 짚어 보더니,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생각보다 원기의 손상이 컸던 것 같습니다. 당분간은……" 심화절이 아깝다는 어조로 말했다. "다시 한 번 격잠술을 시전할 수는 없소?" 의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불가능합니다. 이미 잠력이 많이 소진(消盡)되어 버린지라……" "깨어난다는 보장은 있는 것이냐?"


고숭무의 우렁우렁한 말이었다.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운에 맡길 뿐입니다." 중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3 중인들은 말없이 서 있었다. 이제, 두 가지 사실은 확실(確實)해졌다. 하나는, 일반적인 상식에는 어긋나지만, 이 살수가 모종의 이유로 청부자를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을 하려다가 정신을 잃었으니, 다시 깨어난다면 청부자를 알려 줄 것이다. 두 번째, 이제 청부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살수를 해치려 할 것이라는 점! 결 코 좌시(坐視)할 수 없었다. "나는 숭무당(崇武堂)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살수를 보호하겠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수를 죽이자고 주장했던 고숭무가 선수(先手)를 치고 나왔 다. "광문당(廣文堂)도 총력(總力)을 다할 것이오." 심화절도 굳은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사공두만은 독두(禿頭)에 주름을 지은 채 말없이 서 있었다. 이윽고 심화절과 고숭무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자, 그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순찰당도 고수를 동원하여 주변을 감시하겠소." 고개를 끄덕인 심화절이 다시 의원을 보았다. "빠른 시간 내에 살수가 깨어나도록 최선을 다해 주시오." 고숭무를 비롯한 삼당의 당주들은 떠났다. 금청청만이 마지막까지 남아 복잡한 눈으로 기절해 있는 엽혼을 바라보다가 나갔 다. 그 눈에서 가장 강력한 감정은 살의(殺意)였다. 이제 석실에는 엽혼과 의원만이 남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한 사람 더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 * * 지풍은 느닷없이 날아왔다. 무공을 모르는 의원은 영문도 모른 채 쓰러졌다. 지풍이 누른 경혈은 수혈(垂穴)이었으므로! 의원이 쓰러져 잠이 들자마자, 하나의 그림자가 유령(幽靈)과도 같이 엽혼이 누워 있는 석대 옆에 내려섰다. 키가 매우 작아 어린아이가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면 난쟁이인가? 그러 나 이런 추측들은 모두 틀린 것이었으니…… 우득, 우드득! 뼈마디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아니, 빠져 나왔던 뼈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소리였 다. 기음(奇音)과 함께 인영의 키가 점점 커져 갔다. 이윽고 제 모양을 찾은 인영은 키가 훤칠하여, 좀 전의 그 자그마했던 모습은 상 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런 키를 가진 자가 그렇게 몸을 작게 만들 수 있는 무공은 하나, 바로 축골공 (縮骨功)이었다.


인영은 서서히 엽혼의 옆으로 다가서더니 이윽고 손을 번쩍 들었다. 금방이라도 내리칠 듯한 기세! 설마 그는 엽혼을 죽이기라도 하려는 것인가?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기력이 다해 혼절하였던 엽혼이 다시 눈을 떴던 것이다. 엽혼은 나지막이 탄식했다. "축골공(縮骨功)을 시전한 상태에서도 좀 전과 같은 지력(指力)을 구사할 수 있다 니, 자네의 무공 성취(成就)는 믿을 수 없을 지경이로군!" 나타난 인영의 입에서도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잔말하지 말고, 어서 남은 잠력을 내가 인도하는 대로 흐르도록 하게." 인영, 진소백은 들었던 손을 내려 엽혼의 혈맥을 따라 치기 시작하였다. 본래 엽혼에게는 여력이 있었으나, 진소백의 지시에 따라 의도적으로 혼절(昏絶)을 가장했던 것이다. 지금 진소백은 그 남은 잠력을 이용하여 엽혼을 치료하려 하는 것이었다. 엽혼은 눈을 감고 진소백의 인도에 따라 주천(週天)을 시작하였다. 격발된 잠력 중에 몸 속에 남아 있던 부분들이 마치 진기(眞氣)처럼 경락을 따라 돌기 시작했다. 한 시진이나 지났을까? 진소백의 이마에서는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엽혼의 얼굴은 잃었던 화색(和色)을 되찾아 불그레해졌다. 엽혼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선비 삼일별에 괄목상대(刮目相對)라더니, 자네는 의술에서도 믿기 힘든 진보를 보았군!" 그러나 진소백의 얼굴은 침통하였다. "격잠지술 덕분에…… 자네는 힘을 되찾기는 하였으나, 단지 칠 일의 시간이 있을 뿐이네. 그 후가 되면……" 잠력을 격발시켜 깨어난 것이니, 칠 일 후에 잠력(潛力)이 다하게 되면 어떤 방법 으로도 엽혼의 생명을 구할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다만, 남아 있는 잠력을 이용하여 칠 일간의 시간이나마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 게 만든 진소백의 의술이 놀라울 뿐이었다. 친구를 바라보는 엽혼의 눈빛이 뜨거웠다. "고맙네. 나를 위해……" 진소백의 표정은 여전히 침울했다. "만일 내가 좀더 일찍 왔더라면, 격잠지술(激潛之術)을 막을 수도 있었을 터인데… …" 만일 그랬다면, 회복(回復)에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지금과 같은 회생 불능의 상 태는 아니었으리라. 진소백은 이런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엽혼은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만족하네. 어차피 죄가 많아 하늘을 보고 살 면목(面目)이 없으니…… 다만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평아를 보았으면……"


엽혼은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참, 자네는 어떻게 여기에 들어올 수 있었는가?" 진소백은 엽혼에게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개방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비응방에 들어오게 된 일이며, 천랑파(天狼派)의 구천이 엽평을 습격했다가 금청청 때문에 실패했던 일, 생사의괴 종도가 엽평의 치료를 맡기로 한 일에다, 빗장수의 일과 화선의 종적을 찾은 일까지. "생사의괴가 장담했다면 평아의 목숨은 구한 것이나 다름이 없겠군!" 엽혼이 웃음을 머금었다.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다만 자네가……" 엽혼이 진소백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평아(枰兒)를 금청청이 구해 줬다니…… 나로서는……" 자신이 금사진을 암격(暗擊)했던 것을 말함이었다. 금사진이 비록 죽어 있기는 하 였으나, 자신이 그의 가슴에 일검을 꽂은 것만은 사실이 아닌가? "나로서는 그녀를 볼 면목이 없군!" 다시 진소백을 보면서 엽혼이 말을 이었다. "평아에게 이 말을 꼭 전해 주게. 금청청, 그녀에게 무슨 일이 라고." "알았네."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친구가 어린 알고는 기뻐하였다. 누구에게도 빚을 지지 않으려는 엽혼! 그런 그가 자신에게 부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오늘 화선(花仙)과 그 복면인들이 있다는 곳에 신주낭객이 있는 곳도 그 근처이니, 그를 구하게 수 있을 걸세."

시절과

생기면 꼭 도와 주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더욱 기뻤다. 깊은 우정(友情)을 가기로 하였네. 그리고 천랑파의 된다면 구천(仇賤)이란 자를 만날

잠시 쉰 진소백이 엽혼의 손을 잡고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게. 내일은 비응방의 새 방주를 추대하는 날이니, 번잡한 틈을 타서 자네를 탈주시킬 기회를 찾을 수도 있을 걸세." 엽혼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지 말게. 난 죄를 지었으니 여기에 있겠네. 다만, 비응방과 금청청에게 지은 죄를 씻을 길은 청부자를 찾는 것이니…… 자네가 힘을 써주게!" 전문적인 살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살수로서의 교육을 받는다. 그 와중에 정신까 지도 세뇌(洗腦)되어, 청부자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을 스스로 금기시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엽혼은 일반 살수와는 달랐다.


그는 무인에서 살수로 전업(轉業)한 인물! 어떤 의미에서, 청부자에게 의문을 가질 이런 인물을 선택했던 것은 청부자의 실 수인지도 몰랐다.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답답해져 왔으나, 엽혼이 이미 결심한 이상 그의 마음을 바꾸고 싶지는 않 았다. 어차피 아직은 며칠을 더 요양해야 체력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것이므로, 당장 탈 출을 결행하는 것은 무리인지도 몰랐다. 한번 더 엽혼을 바라보고 나서 진소백은 떠나갔다. 엽혼은 다시 석대 위에서 가사 상태를 가장(假裝)했다. 진소백은 떠나기 전에 엽혼의 가슴 주위의 혈맥을 두드려, 혈행이 불규칙(不規則) 해지도록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보통의 경우 이런 조치를 당하는 사람은 혈행(血行)이 방해를 받게 되어 탈이 나 겠지만, 지금의 엽혼은 달랐다. 그는 일반의 힘이 아닌 잠력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니, 혈행을 통해 전달되는 기(氣)를 받지 못하더라도 큰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지금은 두 가지의 이득(利得)이 있었다. 하나는, 기가 천천히 도니 정해진 양(量)의 잠력을 오랜 기간에 걸쳐 나누어 쓸 수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의원이 진맥(診脈)을 하더라도 엽혼의 혼절이 가장 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의원은 진소백이 나가고 일 각이 채 안 되어 정신을 차렸다. "으음…… 어떻게 된 것이지?" 고민하던 의원은 자신이 졸았던 것으로 결론(結論)을 지었다. 사실, 근래 잠이 너무나 부족했었다. 의원은 엽혼에게로 다가가서 다시 한 번 맥을 짚어 보았다. 힘이 없었고, 맥동(脈動)마저 일정하지 않았다. "이런, 혈행(血行)이 더욱 불규칙해지다니…… 과연 깨어날 수 있을까?" 과연 깨어날 수 있을까……? 제 12 장 음부탕여(淫夫蕩女) 1 하늘은 아직 밝지 않았다. 금청청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살수가 아버지를 살해한 것은 아니라 하나, 그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배후의 흉수를 알고 있다면, 당장의 증오를 누르고 기다리는 것 이 당연하리라. 그녀는 지금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이렇게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장소가 마음을 달래기에 좋은 곳임을, 그녀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다 문득 고개를 돌리던 금청청의 눈에 검은 그림자가 정원을 가로지르는 것이 들어왔다. 경공이 뛰어나 보이는 인영(人影)은 남의 눈을 피하려는 듯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 지만, 나무 위에


앉아 있는 금청청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누구지?' 호기심으로 지켜보던 금청청의 눈이, 인영이 향하는 방향을 알고서는 커졌다. 천화전(天花殿)! 그 인영은 금사진의 미망인(未亡人)인 적염의 거처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뒷모습만 보기는 했지만 체격으로 보아 남자임이 틀림없었다. '웬 남자가 저렇게 은밀히 미망인의 거처로 가는 것이지?' 금청청은 조심스럽게 인영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파악하고 따르던 인영의 종적(縱的)이 천화전에 들어서자마자 감쪽같이 사 라져 버렸던 것이다. '눈치를 챈 것인가?' 금청청은 어둠 속에 숨어 주위를 조심스레 둘러봤지만 인영의 흔적은 찾을 수 없 었다. 귀신이 아닌 이상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은 한 가지의 설명밖에 없었 다. 인영은 전각(殿閣)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금청청은 신형을 솟구쳤다. 살며시 지붕 위로 내려서는 금청청의 발끝에서는 먼지 한 올 올라오지 않았다. 그 녀는 최선을 다해 조심하고 있었다. 지붕 끝에 매달린 금청청은 한 마리 박쥐와도 같았다. 원래 이런 류의 무공은 여인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특히 금청청같이 아름다운 여인에게는. 그러나 지금 금청청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무공을 시전한 덕분에 창을 통해 전각 내부를 볼 수 있었다. 발끝이 처마에 걸려 몸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었다. 거꾸로 매달린 금청청은 창을 통해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방 내에 반도가 있다는 말을 듣고 놀라 혼절한 미망인의 방! 금청청은 너무 놀라 하마터면 바닥으로 떨어질 뻔하였다. 미망인, 적염이란 이름을 가진 여인은 지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던 것 이다. 금청청은 자신이 천화전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한시라도 빨리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만이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바람에 금청청은 적염의 풍만한 가슴을 주물럭거리 던 사내의 두 눈에 기광(奇光)이 번뜩였음을 보지 못하였다. * * * 이제 날이 밝았다. 진소백은 해가 어느 정도 힘을 얻고서야 처소로 돌아왔다. 처소에선 뜻밖에도 섭수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후, 이런저런 생각도 들고 궁금한 것이 많아 잠이 와야 말이죠. 아침부터 어딜 다 녀오신 건가요?" 진소백은 섭수진을 보자 피곤한 와중에도 온몸에 새로운 기력이 솟아남을 느끼며 대답했다.


"저도 잠이 오지 않아 잠시 산책을……" "피곤해 보여요. 뭔가 근심이라도 생긴 것인가요?" 진소백은 부인했다. "아니, 아니오.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조금……" "오늘…… 이지요?" 빗장수와 함께 신주낭객을 구하러 가기로 한 날을 뜻함을 안 진소백이 고개를 끄 덕였다. "그렇소.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구려." "그들에겐 천랑파를 그처럼 손쉽게 손에 넣을 능력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우 리 둘이서만……" 섭수진은 '우리'란 말을 무의식중에 사용하고서는 얼굴이 붉어졌다. 진소백이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만일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지체없이 몸을 피해야 할 것이오. 그들은……" 말을 끊은 진소백이 문으로 급히 다가서며 외쳤다. "누구냐?" 말과 함께 진소백이 문을 열어제쳤다. 문밖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녀가 서 있었다. 몹시 놀란 듯하였다. "저, 저는 앵아(鶯兒)라고……" 시녀임을 알고 난 진소백이 어조를 바꾸어 부드럽게 물었다. "무슨 일로 왔느냐?" "금 소방주께서…… 오늘밤에 진 공자님을 뵙고자……" "금 소방주? 금 낭자 말이냐?" "예, 은밀히 오시라고 하셨습니다." 진소백은 의아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고 가서 전하거라." 시녀 앵아가 떠나가자, 섭수진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진 공자 를 은밀히 부른 것일까요?" 진소백이 웃었다. "섭 낭자도 있었으니 은밀히 부른 것은 아니지 않소?" "그건, 시녀가 제가 있음을 몰랐을 뿐이니……" 진소백은 계속 웃었다. "금 낭자도 이제야 비로소 나의 매력을 안 것 같소이다. 해서 은밀히…… 하하! 역 시 내가 매력이 있는 남자인가 보오."


섭수진의 아미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뭐라고요?" 씨웅`─` 경공고수의 신형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였다. 진소백도 못지않은 고수였으나, 감히 앞에 가는 고수를 따라잡거나 추월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앞에 가는 사람이 다름 아닌 섭수진이었기에. '이런!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아미 출신이 아니라, 북해(北海) 빙궁(氷宮) 출신이라 고 하겠는걸.' 아침의 일 이후 섭수진의 태도는 그야말로 얼음과 같았다. 행동 하나하나에 냉기가 풀풀 날려, 진소백은 말 한마디 붙일 수도 없었다. 뒤따라오던 빗장수가 물었다. "진 공자, 도대체 무슨 잘못을 한 것입니까?" 진소백은 빙긋이 웃었다. "잘못이라…… 많이 했지. 내가 너무 멋이 있다 보니까, 하하…… 여자들이 많이 따르는 것이 나의 잘못이라오." 일부러 크게 한 말인지라, 앞서가는 섭수진에게도 이 말은 들렸다. 입술을 꼭 깨무 는 섭수진! 씨웅`─` 섭수진의 신형이 더욱 빨라졌다. 빗장수는 놀라 소리쳤다. "엇! 진 공자, 섭 소저의 걸음이 더 빨라졌습니다. 어서 쫓아가야……" 진소백은 다시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좋소. 자, 어서 갑시다." 진소백의 신형이 빨라졌고, 빗장수도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하였다. 아침에 비응방에서 나온 진소백과 섭수진은 빗장수를 만나 신주낭객(神州狼客)을 구하러 나섰다. 화선이 있다는 곳도 근처였으므로, 이 일은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가 있었다. 진소백은 구천(仇賤)도 함께 갈 것을 원했으나, 빗장수의 말에 의하면 구천은 항상 복면인들의 감시(監視) 안에 있어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다. 만에 하나라도 감시자들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게 되면, 그 즉시 신주낭객에게 피해가 미치게 되므로 함부로 나설 수가 없는 것이다. 무사히 신주낭객을 구출하게 된다면, 신호를 보내어 합류(合流)하기로 이미 약속을 한 터였다. 화선도 복면인과 같이 있었으나, 두 가지의 일을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억류되어 있는 것이 아니니, 강제로 갇혀 있는 신주낭객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라 고 진소백은 생각했다. "저…… 왜 다른 사람들의 힘을 빌리지 않습니까?" 빗장수가 진소백에게 개방 고수들의 조력(助力)을 받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이 일은 당신 개인의 일이고, 나 또한 개인적으로 당신을 돕는 것이니…… 또 이


런 일은 사람이 많으면 오히려 좋지 않소." 진소백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저기 앞서가는 한빙공(寒氷功)의 고수가 계시니…… 하하!" 진소백의 말에 섭수진이 뿜어 내는 한빙공(?)의 공력이 배가(倍加) 되었다. 냉기가 더욱 강해지자 진소백은 입을 다물었지만, 두 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들은 지금 무슨 싸움을 하는가? * * * 이곳은 침실(寢室)이었다. 여인과 사내 하나가 침실에 앉아 있었다. 여인은 발끝까지 내려오는 장삼(長衫)을 입고 있었고, 사내는 하의(下衣)만을 걸치고 있었다. 여인의 손! 희디흰 여인의 손이 입을 가렸다. 웃고 있는 것이다. 상아(象牙) 같은 치아를 살며시 가린 흰 손 사이로 보이는 입술이 붉디붉었다. "걱정되시나요?" 여인은 웃었지만 앞에 앉아 있는 사내는 웃지 못했다. "웃을 때가 아니오. 금청청, 그 계집이 눈치를 채었으니…… 아마 매일도에게도 말 했을 것이고, 또한…… 헉!" 사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가쁜 숨을 토해 냈다. 여인의 손이 다리 사이의 은밀한 곳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었 "걱정할 필요 없어 요. 매일도(梅逸度)가 그년의 사형이라고는 하나, 방의 외인(外人)이니 함부로 간섭 할 수는 없을 거예요." 여인이 말을 하며 손을 은밀히 놀리자 사내의 이마에 핏줄이 솟아 올랐다. 손끝에 쥐어진 사내의 물건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여인이 다시 한 번 달콤하게 웃었다. "호호, 벌써 세 번째인데 아직도 부족하단 말인가요?" 여인의 손이 옷 사이로 들어와 직접 살갗에 닿아 오자 마침내 사내는 참지 못했 다. "차, 참을 수가 없소." 사내가 겼다. 사내의 다. 그녀는 "호호,

달려들자 잠시 밀쳐 내는 시늉을 하던 여인은 이내 사내의 손길에 몸을 맡 손이 거칠게 장삼을 벗겨 내자 여인의 눈부신 동체(胴體)가 그대로 드러났 장삼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좀 살살, 어맛!"

사내의 손이 어디에 닿은 것일까? 여인이 자지러지는 소리를 냈다. 사내가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자신의 하의를 벗어 던지자 방안에는 후끈한 정염(情 炎)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 당신은 너무……"


침실을 가득 채운 땀 냄새 속을 여인의 교성(嬌聲)과 사내의 거친 숨소리만이 헤 엄치고 있었다. 2 앵아(鶯兒)는 잔을 씻고 있었다. 금청청이 차(茶) 심부름을 시켰던 것이다. 찬물이 손에 떨어지며 손끝을 아리게 했다. 겨울에 찬물을 손에 대는 것은 피부에 정말 좋지 않았다. 앵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릴 때부터의 물일과 허드렛일로 인해 거칠어 진 피부와 굵어진 손마디가 눈에 들어왔다. "난 언제나 백설(白雪)과 같은 흰 손을 갖게 될까?" 언젠가는 되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의 노력에 따라 빨리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찻물이 끓었다. 뜨거운 물을 찻잎에 부어 넣자 은은한 다향(茶香)이 가득 피어올랐다. 손끝으로 찻물의 온기(溫氣)가 전해졌다. 온기의 영향이었을까? 어쩌면 자신의 손이 하얗게 될 날이 가까울지도 모른다고 앵아는 생각했다. * * * 매일도는 지금 금청청의 방에 있었다. 그의 사매(師妹)는 지금 그에게 무언가를 말해 주었고, 그는 매우 놀란 상태였다. "그것이 정말이냐?" 매일도가 물었다. 금청청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에요, 사형(師兄). 틀림없이 그녀예요." 금청청이 확신하며 말하자 매일도는 신음을 흘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로구나. 그녀의 심성(心性)은 강호에 여리기로 소문이 났는데… … 몇 번씩 혼절까지 하지 않았느냐?" 금청청은 냉소했다. "흥!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한 연극에 불과했던 거예요. 그녀는……" 말하기 곤란한 듯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탕녀(蕩女)예요." "믿을 수 없구나. 적염(狄艶), 그녀가……" 금청청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녀가 다른 사내놈과 놀아나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요. 아버지를 살해 한 것도 그녀일 거예요." 매일도는 신중했다. "단정적으로 말할 것이 아니다. 그녀가 비록 음탕(淫蕩)하다고 해도 네 부친을 살 해한 흉수라고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우선은 확실한 동기를 찾을 수 없지 않느 냐?"


금청청이 고개를 저었다. "만일 아버지가 눈치를 채셨다면…… 그녀가 아버지를 살해할 이유로 충분하겠지 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매일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한데, 그 남자가 누군지는 보지 못했느냐?" "못 보았어요. 몰래 숨어서 본 터라 남자는 다리만…… 보였어요." 그녀가 적염의 방을 엿보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한데 믿을 수 없게도 금사진의 사망 소식에 기절했다던 적염, 그녀가 웬 사내와 낯뜨거운 정사(情事)를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적염의 포동포동한 다리와 엉켜 있던, 털이 수북한 사내의 검붉은 다리가 떠오르 자 금청청은 말을 멈추었다. 말이 어색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느낀 매일도가 급히 입을 열었다. "어쨌든, 내가 직접 나서서 일을 처리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나는 네 사형으로서 여기 있는 것뿐이니…… 누구, 믿을 만한 사람이 없겠느냐?" "그래서 진소백…… 그를 불렀어요. 방 내의 사람과 상의하고 싶지만 누구도 믿을 수 없어서……" "잘했다. 진 형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 너를 도와 줄 것이다." 이미 매일도는 진소백이 금청청을 위해 악담(惡談)을 했었음을 그녀에게 일깨워 주었었다. "나도 암중(暗中)에서 도울 것이니, 어쩌면 이 일은 생각보다 빨리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금청청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이면 차기(次期) 방주가 정해지고, 그 다음날이 아버지의 장례(葬禮)이니, 부 디 그 전에 흉수(凶手)를 잡아 아버지의 원혼(怨魂)을 달래 드리고 싶어요. 저는……" 말을 끊고 고개를 숙인 금청청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음을 안 매일도는 그녀에게 다가가 등을 다독였다. "너무 자신을 책망(責望)하지 말아라. 너로서도 어쩔 수 없었으니, 금 방주께서도 너를 책하지 않으실 것이다." 매일도가 갑자기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의 몸이 문을 향해 급히 돌려졌다. 몸이 돌았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왼손은 문을 열고 있었다. 신법(身法)이 대단함을 말 해 주는 것이다. "누가 엿듣는 것이냐?" 크게 외치며 매일도가 문을 열어제쳤다. 놀라서 크게 뜬 두 눈이 귀여웠다. 그러나 그녀를 보는 매일도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네가 엿들었느냐?" 매일도의 말에 금청청이 나서 해명을 했다.


"그애는 앵아예요. 제가 차를 내오라고 시켰어요." 그제서야 앵아의 두 손에 쟁반이 들려 있음을 본 매일도의 눈이 부드러워졌다. "놀라지는 않았느냐?" 앵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많이 놀랐음을 숨기지 못했다. 상기된 얼굴로 앵아가 두 손을 내밀었고, 쟁반 위에 놓인 찻잔에서는 김이 모락모 락 피어올랐다. 담백한 다향(茶香)이 풍겨 나오는 것이, 상품(上品)의 차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찻잔을 금청청이 하얀 옥수(玉手)로 받아 들었다. "어쨌든 나는 이만 갔다가 나 중에 다시 오마." 앵아가 들어와서 말을 계속할 수 없음을 안 매일도가 차도 다 마시지 않고 일어서 려 했다. "차나 마저 드시고 가세요, 사형." 금청청의 이 말은 분명히 그를 위한 말이었다. 그러나…… 금청청의 말에 매일도 는 검미(劍眉)를 찡그렸다. "후`─ 근심이 있으니, 차 맛도 느끼질 못하겠구나." 금청청도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앵아에게 물었다. "진 공자가 오시겠다고 하였느냐?" 앵아가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아가씨." 금청청이 한숨을 쉬며 매일도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그를 만나 이 사실을 말하고, 매(梅) 사형께서 힘을 합한다면…… 어쩌면 쉽게 해 결할 수도 있을 거예요." 금청청은 말을 하다가 문득 앵아를 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두 손을 빤히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무얼 그리 보는 게냐?" 앵아는 무엇을 훔치다 들킨 아이처럼 놀라 말했다. "아니…… 아가씨의 손은 정말 희고 곱군요. 제 손은……" 앵아의 손은 나이답지 않게 거칠었다. 한 사람이 얼마나 힘든 인생을 살아 왔는지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은 손. 앵 아의 손은 그녀가 얼마나 어렵게 인생을 꾸려 왔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저는 언제쯤 아가씨처럼 흰 손을 갖게 될까요?" 금청청은 남자에게는 화를 잘 내었으나, 같은 여자에게는 다감했다. "너는 얼굴도 예쁘고 착하니, 꼭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앵아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분도 아가씨처럼 손이 희어요." 금청청이 물었다.


"누구 말이냐?" "오늘밤에 아가씨를 만나기로 한 사람 말이어요." "진 공자 말이냐? 그의 손이 희더냐?" 앵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는 진 공자를 만나지 않아요. 아니, 만나지 못해요." 금청청의 눈이 커졌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앵아가 살포시 웃었다. "아가씨는 밤에 이곳에 없을 테니까요." 이상한 기미는 매일도가 먼저 느꼈다. 몸에서 힘이 급격히 빠지고 있었다. "그…… 차, 차 속에 무엇을 넣었느냐?" 앵아가 생글거렸다. "아무것도요! 다만 오보산(五步散)을 조금 넣었지요." "이, 이런 괘씸한 것!" 금청청이 외치며 일장을 치려 했지만, 전신에 힘이 하나도 남지 않았음을 확인했 을 뿐이었다. "내 너에게 잘 대해 주었거늘……" 쓰러지는 금청청을 보며 앵아가 여전히 웃으며 종알거렸다. "그러나 제 손을 희게 해주지는 못하시죠. 전 흰 손이 갖고 싶답니다." 금청청과 매일도는 동시에 쓰러졌다. * * * 금청청이 정신을 차리며 본 것은 앵아의 말대로 희디흰 손이었다. 허공을 나부끼 며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듯, 휘둘러지고 있는 ! 흰 것은 손만이 아니었다. 흰 손이 달려 있는 곳은 여인의 나신(裸身)! 등을 보인 채, 뒤돌아 앉아 있는 여인의 나신에 그 손은 달려 있었다. 그 손에서 이어지는 날씬한 팔뚝과, 다시 팔뚝이 달려 있는 동그란 어깨와, 그 어 깨에서 휘어지며 뻗어 내린 등의 선마저 모두 희었고, 또한 아름다웠다. 금청청은 여인의 등을 따라 내려가던 눈을 질끈 감았다. 보라! 여인의 허리 아래 붙은 탐스런 둔부(臀部) 아래로, 털로 뒤덮인 굵은 다리 두 개 가 꿈틀거리고 있지 않은가! 검붉은 근육질의 다리는 여인의 흰 피부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 다리의 움직임에 따라 여인의 둔부 또한 묘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으니…… 눈앞에 보이 는 모습과 귓가에 들리는 소리는, 처녀의 몸인 금청청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水準)이었다. 이윽고 열락(悅樂)의 순간이 지나갔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나체를 긴 장삼(長衫)으로 감싸며, 적염이 일어섰다. 아직도 눈


을 감고 얼굴이 상기되어 있는 금청청을 보며 그녀가 말했다. "호호, 너는 왜 그리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게냐? 너는 운우지락(雲雨之樂)의 참뜻을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적염이 자신과 매일도를 번갈아 보며 웃자 금청청이 악을 썼. "탕녀! 내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 적염은 달콤하게 웃었다. "이거 겁나는구나. 호호, 너에게 먹인 오보산(五步散)을 내가 직접 만들지 않았다 면 나는 겁에 질려 죽었을 것이다." 적염의 말은 금청청의 성질을 더욱 돋우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번에는 악을 쓰지 못하였다. 사내! 적염과 방금 몸을 섞은 사내가 장삼을 걸치고 나서 몸을 돌리는 것을 보았던 것이 다. 더불어 사내의 얼굴도 똑똑히 보였다. 건장한 체격에 건장한 얼굴! 그가 어찌 적염과 정을 통한단 말인가? 금청청은 사내를 보고 놀라 말을 더듬었다. "당신이…… 당신이 어찌……" 사내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세상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많은 법이다." 3 옥산(玉山)! 혹은 옥루산(玉壘山)이라고도 한다. 그 산의 한곳에 위치한 사성곡(四聲谷)! 사방이 막혀 있는 탓에, 외침 소리가 곡에 반사되어 사방에서 들려 온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었다. 곡의 위치가 묘하여, 소리가 매우 잘 울렸다. 사성곡에 가까워지자 진소백 등의 신형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최대한 조심하려는 뜻! 복면인들의 근거지가 이곳 사성곡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진소백은 일전에 사종쾌에게 복면인들의 본거지를 염탐하도록 부탁했었고, 사종쾌는 사성곡의 주변 상황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 와 진소백에게 알려 주었다. 지형(地形)에서 매복 상황과 교대 시각에 이르기까지. 바로 그런 정보가 오늘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진소백의 손짓에 따라 몸을 숙였다가 일으킴을 반복하며 나아가고 있는 세 사람! 진소백의 손짓은 의미가 있었다. 사종쾌의 조사를 바탕으로 적의 보초나 매복이 있을 곳을 판단해 내어 하나씩 헤 쳐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적은 세 시진마다 교대를 한다고 하였으니, 세 시진이 지나면 어쩔 수 없이 발각


이 된다. 복면인들이 교대를 하자마자 바로 침투를 해가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 발각이 될 때까지의 시간을 최대로 하기 위함이었다. 복면인들을 해치우는 방법은 간단했다. 두 사람은 우회해서 좌우로 돌아가고 나머지 한 사람은 적당한 시간이 되면 풀을 건드려 적의 주의를 끌었다. 주의가 다른 곳에 쏠린 틈을 타서 우회해 간 두 사람이 좌우에서 보초를 공격하여 해치우는 것이니…… 이런 간단한 방법으로 처리한 초소(哨所)가 이미 둘! 첫 번째 초소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그들의 무공이 고강해서가 아니라, 곡 내의 상황을 물어 보기 纛潔駭裏 진소백은 지금 곡 내에는 천(天), 지(地), 현(玄), 황(荒)의 네 영주 중에서 현과 황의 두 영주만이 있다는 것 을 알아 내었다. 그러나 가장 외곽의 경계는 하루 단위로 교대하는 탓에 자세한 곡 내의 상황에 대 해서는 몰랐다. "좀더 자세한 것은 다른 매복자들을 통해 알아 내기로 합시다." 진소백의 말에 따라 다시 조심스레 침투를 시작한 그들은 마침내 복면인의 본거지 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절벽 아래에 도착했다. 진소백이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아니, 정확히는 하늘 아래의 절벽을 가리켰 다. 진소백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서 풀들이 미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부는 바람과 방향(方向)이 맞지 않아 다른 이유가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매복(埋伏)! "이번에는 섭 소저가 나설 차례구려." 섭수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명문의 제자! 어찌 이런 편법을 좋아하겠는가? 게다가 진소백에게 화가 나 있는 상황이 아닌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두고, 진소백과 빗장수는 절벽을 우회하여 올라 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절벽을 거진 다 오를 때까지 매복자들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매복자들의 전방 아래에서 섭수진이 계속 나무를 흔들며 매복자들의 이목을 집중 시키고 있는 덕분이었다. 매복자들은 이상하다 생각을 했는지 흔들리는 나무에 집중하며, 무엇인가를 찾으 려 노력하고 있었다. '이제 일 장 정도만 더 올라가면 된다.' 빗장수의 생각이었다. 맞은편을 보니, 자신보다 조금 빠른 진소백이 정상을 반 장 정도 남겨 두고 있었 다. '지금입니다, 섭 소저!' 빗장수의 마음을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섭수진은 미리 약속한 때가 되자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산골 처녀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산속에


서 길을 잃은 것처럼! 산속의 미녀(美女)는 언제나 모든 남성들의 시선을 끌기 마련이었다. 매복자들 역 시 사내였고 예외는 아니어서, 섭수진에게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진소백과 빗장수의 몸이 허공을 가르며, 매복자들의 목을 눌 러 갔다. 매복자는 모두 셋. 빗장수가 하나를 잡았고, 진소백이 둘을 제압했다. 이렇게 또 하나의 매복이 제거 되고 있었다. "거 참, 이렇게 찾기 어려운 곳에다가 잘도 본거지를 만들어 놓는단 말이야." 방금까지 보초를 서고 있던 복면인 둘을 소리나지 않게 바닥으로 내려놓으며 진소 백이 말했다. 일전에 유유곡(幽幽谷)에 갔던 경험을 되새기며 한 말이었지만, 다른 사람이 알아 들을 리 없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빗장수의 반문(反問)에 진소백은 웃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오. 그냥…… 여기서 보니 경관이 참 좋구려." 섭수진은 진소백의 손짓을 받고서 조금 후에 올라왔다. 진소백의 말은 조금도 거짓이 아니었다. 경관은 정말 아름다웠다. 다만 그 자연의 아름다움을 깨뜨리는 인간의 건축물이 눈에 들어와 거슬렸다. 절벽 아래에는 자그마한 분지가 조성되어 있었고, 그 분지 위에는 두 개의 목조 (木造) 건물이 있었다. 주위의 나무를 이용하여 지은 듯하였는데, 좌우에 두 개가 서로 대칭(對稱)을 이루 고 있었다. 절벽의 위치는 특이했다. 진소백도 사종쾌의 말을 듣고 미리 알아 두지 않았다면 찾기 힘들었을 정도로 잘 숨겨진 곳이었다. 반면에 아래로 내려다보면 분지(盆地)가 한눈에 들어와서, 누구든지 들어오는 자들 은 이 절벽에 숨은 자들의 이목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진소백들이 이 절벽으로 먼저 오지 않고, 직접 건물로 잠입(潛入)했더라면, 열이면 열, 들키고 말았으리라. "어느 곳에 신주낭객이 있을 것 같소?" 진소백이 누구라고 지정(指定)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섭수진에게 던진 질문이었 다. 그러나 섭수진은 대답을 하지 않았고, 대신 빗장수가 대답하였 "글쎄요. 전해진 밀 서(密書)에는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당신에게 물은 것이 아니고…… 섭 소저, 어디에 신주낭객이 있을 것 같소?" 섭수진은 진소백이 자신을 직접 지정하자,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어떤 면에서는 진소백이 먼저 말을 함으로써 자존심의 대결에서 자신이 이긴 셈이었으므로. "……제 생각으로는 오른편의 건물 안이에요." "내 생각도 그렇소."


진소백의 동의(同意)에 섭수진은 마음이 더욱 풀렸다. 그러나 빗장수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보아도 똑같이 생겼는데 왜 하필 오른편의 건물이란 말인가? "공자, 어떻 게 오른쪽 건물이란 확신을 가지십니까?" 진소백이 웃으며 말했다. "저 뒤의 길을 보시오. 오른쪽으로 돌아서 나 있지 않소?" 진소백이 가리키는 길은, 분지에서 절벽으로 이어지며 나 있었다. 왼쪽의 건물에서 시작하여 오른쪽 건물을 돌아 이어지고 있는 길이었다. "저런 길은 사람이 많이 다녀서 생기는 것이오. 많이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은 당 연히 복면인들일 테니, 자연 왼쪽은 복면인들의 처소로 볼 수가 있을 것이오." 과연 그렇구나, 하고 빗장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왼쪽이 복면인들의 거처(居處)라면, 자연히 오른쪽을 신주낭객을 가두기 위해 사 용하고 있을 것이오."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이 풀어진 섭수진이 보조(補助) 설명을 하였다. "아무래도 누군가를 가두어 둔다면, 그곳을 숙소로 사용하기는 어렵겠죠." 고개를 끄덕이며 진소백이 말을 받았다. "문제는 저들 복면인 중에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있느냐 하는 것이오. 만일 신주 낭객을 억압시켰던 방법이 약(藥)이나 기타의 암수(暗手)가 아닌 진정한 실력이었 다면…… 지금의 우리 힘으로 신주낭객을 구하기는 매우 어렵소." 또다시 말을 받는 섭수진. "하지만, 이때까지의 매복을 봐서는 그다지 무서운 고수가 많을 것 같지는 않아요. 한번 모험을 해볼 만하겠죠." 진소백은 섭수진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녀의 화가 모두 풀어진 것을 알았기 때문 이었다. 섭수진은 화가 풀렸다. 진소백과 말을 주고받으며, 그의 생각이 자신의 생 각과 일치함을 알자 이상하게도 화가 누그러졌던 것이다. 여자가 화가 났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모른 체하고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려 버리면 된다. 만일 여자가 화를 내고 있을 때, 하나하나 따지고 든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를 의 미할 뿐이다. 여자에 대한 당신의 무지(無知)! 어쨌든…… "이제 시간이 얼마 없소. 모두 정해진 대로 행동해 주시오." 말과 함께 진소백이 가장 먼저 몸을 날려 분지로 들어갔다. 이어서 빗장수가 들어갔고, 혼자 남은 섭수진은 주위에 널려 있는 복면인들의 무 기를 주워 모았다. 검과 도 등의 금속 무기들이 모두 모이자, 그녀는 그것들 하나하나를 나무에 매달 기 시작했다.


진소백이 분지의 건물로 접근해 갈 때, 막 왼쪽의 건물에서 나오던 복면인이 그를 보았다. 진소백은 흠칫했으나, 당황하지는 않았다. 복면인도 진소백을 보고 당황하지 않았다. 한마디를 물었을 뿐이었다. "황(荒) 칠호. 지금은 근무 시간이 아닌가?" 복면인이 이렇게 조용히 말한 이유는 간단했다. 진소백이 좀 전에 제압한 복면인 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소백은 자신의 옷 위에 황 자와 칠 자가 적혀 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앞에 있는 복면인의 옷 위에는 현 자와 오 자가 적혀 있는 것도 보았다. "현 오호, 한 번만 눈감아주게. 내가 속이 너무 좋지 않아서……" 일부러 쉰 목소리로 소리 죽여 말하는 진소백을 잠시 쳐다본 현 오호는 고개를 끄 덕였다. "좋아, 자네가 어제 마작판에서 돈을 빌려 준 정리도 있으니…… 어쨌든 영주(領 主)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게." 진소백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운이 좋게도 자신이 옷을 빼앗아 입은 현 칠호란 자는 인간성이 괜찮았던 놈인 듯 했다. "고맙네! 한데, 자네는 지금 비번(非番)인가?" 현 오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것이 실수였다. 진소백의 일격이 명치에 박힌 현 오호는 기절해 버렸다. 현 오호가 정신을 차린 것은 숲속에서였다. 자신의 옷은 모두 벗겨져 있었고, 앞에 는 또 다른 현 오호가 서 있었다. "이, 이게 어찌 된……" 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손가락 하나가 인후를 찔러 왔다. 숨이 막히며 참기 힘든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다. '침입자…… 다.' 동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괴한의 손이 그의 온몸을 휘저었다. 뼈가 갈가리 찢어지는 느낌이 전신을 지배하며, 교육받았던 모든 지식들이 머릿속 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이미 아혈이 제압된 상태! 침입자를 발견하면 어떻게 한 다든지, 고문에는 어떻게 대처한다든지 하는 생각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다만 눈 앞에 서 있는 괴한만이 자신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만 이 뇌리를 지배하였다. 원래 이러한 심리(心理) 변화는 장기간의 고문과 세뇌(洗腦)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 이었다. 하지만 지금 진소백은 상황을 잘 이용하여 가장 빠르게 현 오호의 정신을 공황(恐慌) 상태로 몰아가고 있었다. 다른 사고(思考)를 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빠른 변화 앞에서 현 오호의 정 신은 고통(苦痛)과 공포(恐怖)에 굴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통은 지속적(持續的)이지 않았다. 그 부위조차 일정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고통은 피고문자가 정신적인 방어를 전 혀 할 수 없도록 가해져 오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현 오호의 눈빛이 공허(空虛)해지기 시작하였다. 극도의 공포로 자아를 상실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바라보는 진소백의 눈에 안타까운 빛이 어렸다. 자신이 방금 사용한 수법은 피해자의 정신을 피폐(疲弊)하게 하여, 어떤 육체적인 가해(加害)보다도 더욱 심한 피해를 입히는 것이었다. 시간이 많다면 이런 방법은 자제하고 싶었으나…… '미안하오. 내겐 시간이 없소.' 현 오호의 눈빛은 점점 백치(白痴)의 그것을 닮아 가고 있었다. 제 13 장 옥산풍운(玉山風雲) 1 빗장수는 이미 다섯 개의 나무무덤을 만들었다. 모두 죽은 나뭇가지만을 이용해야 하므로 힘이 들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앞으로 두 개의 무덤만 더 만들면 자신의 임무는 끝나는 것이다. 만들어지는 무덤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완성된 일 곱 번째의 나무무덤! 빗장수는 다른 무덤들처럼 가장 윗부분을 바싹 마른 나뭇잎들로 덮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뭇잎 사이에 진소백이 주었던 것을 하나씩 섞어 두는 것도. 지금은 겨울! 날씨가 건조하여, 마른 나뭇잎을 찾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마무리를 다 하고 적당한 곳에 숨은 빗장수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나무무덤을 내 려다보았다. 고지대(高地帶)로 올라오며 무덤을 만든 탓에 처음에 만들어 놓은 무덤은 한참 아 래에 보였다. '만약 여기서 구르면, 단숨에 저 아래에 닿겠군!' 빗장수의 생각이었다. * * * 현 오호의 눈은 이미 총기를 잃고 있었다. 진소백이 그의 아혈을 풀어 주자 그는 진소백을 신(神)이라도 보는 듯한, 경외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극도의 공포와 고통 속에서 현 오호는 일시지간 자아를 상실한 채 자신에게 고통 을 줄 수도, 주지 않을 수도 있는 진소백을 신과 동일시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고문의 가장 나쁜 점이었다. 고문이 극에 이르면 피고문자는 고문자를 증오하기보다는 오히려 존경하게 된다 …… 피해자(被害者)의 모든 정신 세계가 공포 앞에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너희 방파의 이름이 무어냐? ─`지금 목옥 안에는 누가 있느냐? ─`두 영주(領主)의 무공은 어느 정도냐…… 계속되는 진소백의 물음에 현 오호는 실혼인(失魂人)처럼 천천히 대답하고 있었다. 복면인들은 자신들의 집단을 스스로 '흑회(黑會)'라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회주가


누구인지는 모른다는 말에 진소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비밀 유지(維持)를 중요시하는 방파에서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몇 가 지의 추가 질문을 끝으로 현 오호에게서 얻어 낼 수 있는 정보는 다 얻었다고 판 단한 진소백은 그의 수혈(垂穴)을 짚었다. 천천히 잠에 빠져 드는 현 오호! 다시 깨어난다면, 지금의 일을 꿈속에서 있었던 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느꼈던 공포는 항상 무의식(無意識) 속에 남아, 그의 꿈속으로 시시때때로 찾 아갈 것이다. 진소백은 양심의 가책(呵責)을 느꼈으나, 한숨을 쉬며 그 자리를 떠났다. '강호에서 살아 가는 우리들이니, 이해를 하시오.' * * * 섭수진은 무기들을 튕겨 보았다. 금속 무기들이 부딪쳤으나 소리는 나지 않았다. 섭수진이 끈으로 병기(兵器)들을 묶어 두었기 때문이었다. 절벽 위에는 겨울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고 있었다. 나무에 매달려 흔들리는 병기들을 버려 둔 채, 그녀는 십 장 정도 떨어진 곳으로 내려갔다. 아래로는 현 오호로 분한 진소백이 왼쪽의 나무건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곳에서는 진 공자의 신호가 오면 바로 내려갈 수 있을 거야.' 섭수진의 생각이 었다. 진소백은 마침내 나무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사방에서 퀴퀴한 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다. 밀폐된 곳 특유의 냄새! 진소백은 사방 을 둘러보았다. 많은 복면인들이 있었지만, 그를 주의 깊게 보는 이는 없었다. 오랜 시간 서로 같이 지낸 탓에 현 오호가 지금 비번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 다. 특히 정면의 아래쪽으로 난 통로에서 곰팡이 냄새가 심하게 풍겨 나옴을 느낀 진 소백은 지체없이 그곳으로 내려갔다. 관가(官家)의 옥(獄)을 본떠 만든 그곳을 세 명의 복면인이 지키고 있었다. 둘은 입구를 지키고 있었고, 하나는 옥실(獄室) 앞의 복도를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훈련이 잘된 자들인 듯, 입구를 지키던 두 복면인은 진소백이 들어오는 것을 보곤 벌떡 일어났다. "누구냐?" 진소백은 아주 기분이 나쁜 어조로 대답했다. 두 복면인 중 우측의 인물이 자신과 같은 현 자를 단 육호임을 보면서. "육호! 영주님이 부르시네. 이거 원, 쉬지도 못하다니." 황 칠호로 변장했던 좀 전과는 달리 진소백의 어조는 또렷했다. 현 오호의 음성과 어조를 이미 들었으므로 흉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현 육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지?" "영주님이 하시는 일을 내가 어찌 알겠나? 어서 가보게. 이거 참, 비번인데 쉬지도 못하다니……"


현 육호가 진소백을 다독거렸다. "미안하네. 잠시 대신 근무를 서주게. 내 곧 오겠네." 이제 진소백과 두 명의 복면인이 남았다. "무슨 일인데 그래?" 앞에 서 있던 황 사호가 진소백에게 물었다. "사실은 말야, 그게……" 진소백이 대답하며 목소리를 점점 낮추자 황 사호는 그의 말을 붙여 왔다. "사실은…… 황 사호, 넌 죽었다."

듣고자 점점 몸을

황사호가 놀랄 사이도 없이 진소백의 손이 그의 혈도를 짚어 버렸다.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시신과 다름없이 되어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된 황 사호를, 진소백은 일부러 소리내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소리는 옥실(獄室)의 복도(複道)에까지 들려, 내부에서 근무를 서던 황 일호를 밖으로 나오게 했다. "무슨 일이냐?" 일호는 다른 자들과 신분이 다르다는 것을 현 오호에게 들은 진소백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황 사호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놀란 황 일호가 급히 감옥 안으로 통하는 철문을 열었다. 철컹`─` 육중한 소리를 내며 철문이 열리고, 황 일호가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된 일이냐?" 진소백이 황 사호만을 본 채 대답조차 않고 있자, 황 일호는 바짝 다가서며 물었 다. 그러나 진소백은 그의 질문에 말로 대답하지 않았다. 손으로 대답을 했던 것이다. 황 일호가 놀랐을 때는 이미 그의 왼손 완맥은 진소백의 왼손에 제압되어 있었다. 사태가 어떻게 된 것인지를 깨닫고 고함을 치려 했을 땐 진소백의 오른손이 어느 틈엔가 자신의 목젖을 누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끅!" 숨막혀 하는 소리와 함께 황 일호도 정신을 잃었다. 옥실의 복도는 매우 어둡고 습기가 심했다. 진소백은 열심히 신주낭객을 불렀다. "구곡인(九曲刃), 구곡 선배, 어디 계시오?" 몇 번을 부르자, 오른편 옥실(獄室)에서 미약한 소리가 들려 왔다. 진소백은 급히 옥문을 열었다.


옥실 안 바닥에는 물이 흥건한데, 그 물에 몸을 담근 채 묶여 있는 인물이 있었다. 습기에 침식당한 것일까? 온몸에서 썩어 가는 냄새를 풍기고 있는 외팔이 괴인! 얼마나 이런 상태로 있었던 것일까? "누, 누구시오?" "신주낭객 구곡인이시오?" 외팔이의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그렇소만. 당신은……?" 진소백은 그를 묶고 있는 줄을 끊으며 급히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걸을 수 있습니까?" 삼 년간이나 이런 상태로 보낸 구곡인이 걸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진소백은 그를 업었다. 현(玄) 육호는 영주(領主)에게 가지 못했다. 그가 영주가 있는 왼쪽 건물로 막 들어가려는 순간, 오른쪽의 산 위에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던 것이다. "적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 동시에 건물 안에서 쉬고 있 던 복면인들도 모두 뛰쳐 나와 적을 찾기 시작했다. 현 육호도 그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적의 출현 시에는 모든 것에 우선하여 적을 섬멸한다는 흑회(黑會)의 대원칙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처음에는 한 곳에서만 솟아오르던 불길이 급속도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적들의 수효가 많다." 가슴에 황령(荒領)이라고 수놓여 있는 옷을 입은 인물이 외치는 소리였다. 황령주 의 말대로 불길은 이제 곳곳에서 솟아오르고 있어, 도저히 한 사람이 일으킨 것이 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사실 이 불들은 모두 빗장수 한 사람이 일으킨 것이었 경사를 타고 내려가 면서 불씨를 나무무덤에 던져 넣자, 진소백이 준 폭약이 폭발하면서 마른 나뭇잎 에 불을 붙이고 있는 것이었다. 빗장수의 경공에 경사(傾斜)의 이점(利點)이 보태지자, 마치 동시에 여러 곳에서 불길이 일어난 듯이 보이는 것이다. 황령주뿐만이 아니라, 현령주(玄領主)도 급히 불길이 일어나는 곳으로 몸을 날렸 다. 적의 수효가 많다고 생각한 것이다. 슈슉`─` 진소백의 오른손이 허공(虛空)을 가르며 복면인의 목젖을 눌렀다. 그가 복면인들의 목젖만을 노리는 이유는, 그들이 소리쳐 동료(同僚)를 부를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지금 진소백에게는 짐이 있었다.


신주낭객(神州狼客)을 업고 있는 상황에서 일신의 재간을 다 발휘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건물 안에 남아 있던 복면인 여섯 중, 마지막 한 명을 미처 제압하기 전에 그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적이다!" 그러나, 꽝! 화약이 터지는 소리는 복면인의 생명을 건 외침을 묻어 버리고 말았다. 밖에 있는 복면인들은 빗장수가 터뜨리는 화약 소리와 불길에 정신이 없어 이 소 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끄윽`─`!" 마지막 복면인마저 제압한 진소백은 밖의 동정(動靜)을 살폈다. 섭수진은 두 명의 영주(領主)가 지나가자마자 왼쪽 건물의 문이 열리며 진소백이 누군가를 업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 이제 자신이 일을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녀는 품에서 단도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십여 장 밖을 겨냥하여 던지자, 그녀가 나무에 매달아 놓았던 병기들을 묶고 있던 끈이 끊어져 버렸다. 병기를 매단 끈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병기들이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묶어 두었 던 끈이 끊어졌던 것이다. 겨울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금속의 병기들은 바람을 타고 서로 부딪치며, 흡사 여러 명의 무인(武人)이 병장 기를 들고 싸우는 듯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불길에서 더 이상 폭음 소리가 들리지 않자, 어느 정도 정신을 가다듬은 두 영주 의 이목(耳目)은, 이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로 집중(集中)되었다. 2 지금 진소백과 섭수진, 빗장수 중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 까? 두말할 나위 없이 섭수진이었다. 빗장수는 원래부터 경공이 떨어졌고, 진소백은 신주낭객을 등에 업은 상태였던 것 이다. 그래서 섭수진은 자신이 미끼가 되어 복면인들을 유인하고, 그사이에 진소백 이 달아날 수 있게 해주었다. 진소백이 반대편의 산 위로 올라가고 있음을 본 섭수진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통 나무에 몸을 실었다. 그녀가 서 있는 곳에서 복면인들이 모여 있는 곳까지는 급경사였으니, 이제 손을 놓기만 하면 통나무는 미끄러져 갈 것이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를 들은 복면인들이 올라오자, 그것을 본 섭수진은 손을 놓 았다. 통나무는 굉음(轟音)을 내며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고, 그 위에 몸을 싣고 있는 섭수진도 따라서 내려갔다. 빗장수는 자신에게로 몰려오던 복면인들의 일부가 몸을 돌려, 섭수진이 있는 곳으 로 가는 것을 보았다. 원래부터 정했던 대로이니, 이제 자신은 몸을 피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때 멀리


서 진소백이 누군가를 업고 가는 것이 보였다. 빗장수의 눈에는 기쁨이 떠올랐다. 자신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만, 진소백의 등에 업혀 가고 있는 신주낭객의 모습만이 두 눈을 가득 채워 왔 다. '나는 은혜를 갚았소! 약속을 지켰소!' 이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급히 몸을 돌려 위험한 자리를 피하려던 빗장수의 두 눈에 섭수진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굉음을 내뱉으며 아래로 미끄러지는 통나무 위에서 몸을 세운 섭수진은, 검을 든 오른손으론 난파풍(亂波風) 검법을 펼쳐 냈고, 왼손으론 금정산수(金頂散手)의 기 세를 내뿜고 있었다. 통나무가 내려가는 길 주위의 복면인들은 일장, 일검을 감당하지 못해 날려갔다. 그러나 통나무가 평지(平地)에 이르러 정지하자 섭수진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 을 빗장수는 똑똑히 보았다. 두 가지의 절학을 동시(同時)에 전력으로 펼쳐 내었으니 섭수진이 지친 것도 무리 는 아니리라. 두 명이 노호(怒號)를 터뜨리며 벼락같이 달려든 것은 바로 그! 현령주와 황령주가 수하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 노호하여 섭수진을 덮쳐 간 것이다. 다른 복면인들에 비할 위세가 아니었다. 섭수진은 급히 수중의 검을 팔방풍우(八方風雨)의 식으로 휘두르며, 전방의 좌우 에서 덮쳐 오는 두 영주를 맞아 갔다. 펑! 파바박`─`! 경기(勁氣)와 경기가 부딪치며 발생한 회오리가 흙먼지를 말아 올리며 주위를 감 싸 갔다. 통나무에서 뛰어내린 섭수진이 다섯 걸음을 물러나며 구식(九式)째의 변화를 펼쳐 냈고, 좌우(左右)에서 따라오는 두 영주의 손끝에서는 각각 다섯 번씩의 권(拳), 장 (掌)이 뿜어 나왔다. 섭수진의 무학은 이미 강호가 인정하는 일절(一絶)이었으나, 두 영주의 무공 또한 만만치 않았다. 두 고수가 연합하여 덤비자, 천하의 아미옥녀(峨嵋玉女)도 정신없이 몰리고 있었 던 것이다. 주위의 다른 졸개들까지 합세한다면, 섭수진은 큰 위험에 빠질지도 몰 랐다. 섭수진이 예상치 못했던 영주(領主)들의 절학에 수세(守勢)에 몰리고 있을 때, 진 소백은 이미 뒤쪽의 산을 거의 다 오른 후였다. 이제 복면인들이 눈치를 채더라도 쫓아오기에는 먼 거리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복면인들이 알게 해주는 편이 좋았다.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복면인들은 신주낭객(神州狼客)을 되찾기 위해 쫓아올 것이 므로. 자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섭수진에게 덤벼드는 복면인의 수가 줄어든 다는 의미가 아닌가? 진소백은 목청을 돋우어 크게 외쳤다. "신주낭객이 달아난다`─`"


복면인들의 이목이 뒷산 정상(頂上) 부근에 보이는 진소백의 신형에 집중되었다. 물론, 영주들의 이목 역시 뒷산으로 잠시 쏠렸다. 고수들의 싸움에 있어서 미세한 틈은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비록 이 대 일의 합공(合攻)으로 우세(優勢)를 점하고 있던 두 영주였지만, 잠시 한눈을 판 것은 크 나큰 실수였다. 아주 짧은 순간, 섭수진은 검세(劍勢)를 아미의 절학인 소청검법(小淸劍法)으로 변 화시키며 현, 황의 두 영주를 압박해 가기 시작했다. 파르스름한 검기(劍氣)가 검끝에 어리며 좌우를 감아 가니, 이것이 바로 소청검법 상의 연환영풍(烟幻迎風)이었다. 삽시간에 수세에 몰린 두 영주가 권법의 위력을 더욱 배가(倍加)시키니, 전세는 더 욱 흉험(凶險)해졌다. 끊임없이 들려 오는 병기와 권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호통 소리는 싸움이 얼마 나 치열한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지금은 섭 소저가 유리하다.' 빗장수의 생각이었다. 물론 그들 셋 모두는 자신보다 고수이니 정확히 평가할 수 는 없었지만, 섭수진이 사나운 기세로 몰아가고 있고 영주(領主)들은 스스로를 보 호하기에 급급해 보이니 일단은 섭수진이 유리해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섭 소저가 불리해진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섭수진은 비록 공세를 취하고는 있지만, 검세(劍勢)를 변화시키며 기회를 보아 몸 을 빼내려고 했다. 어차피 이들과의 싸움이 목적은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적을 몰아붙이고 신형 을 빼내려고 시도할 때마다 번번히 두 영주의 손에서 기묘한 권세가 뿜어져 나와 섭수진의 의도를 무산시키는 것이 아닌가? '이들은 차륜전으로 내 힘을 빼려 하고 있다.' 섭수진은 이내 두 영주(領主)의 의도를 깨달았다. 이 대 일의 상황이니 섭수진이 공세를 취하도록 하여 그녀의 힘을 빼려는 것을 알아챘던 것이다. 점점 숨이 가빠 왔다. 내공의 소모가 극심하다는 뜻이다. '어떡하나? 빨리 이 자리를 피해야 하는데……' 섭수진의 생각이야 어떻든 간에 두 영주가 권세를 일변시켰다. 권풍이 몰아치며 섭수진이 다시 수세(守勢)에 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전열을 가 다듬은 졸개들까지 서서히 주위를 감싸 오고 있지 않은가? 섭수진은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빗장수의 눈에도 다급함이 어렸다. 자신을 쫓아온 복 면인 둘을 예의 살인적인 빗으로 쓰러뜨리며 빗장수는 생각했다. '나는 신주낭객에게 입은 은혜를 갚았지만, 저들에게 받은 은혜는 또 어찌 되는 가?' 다시 한 명의 복면인을 해치우며 빗장수는 지체없이 몸을 띄웠 진소백은 마 침내 산을 넘었다. 어딘가에 신주낭객을 숨겨 두고 섭수진을 도우러 가야 했다. 그러나 어디다 숨긴단 말인가? 저 멀리 뒤에서는 복면인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우측(右側) 숲에서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그림자의 등장은 갑작스러웠지만, 진소백의 대응(對應)은 더욱 빨랐다.


"누구냐?" 외치는 순간 이미 그의 우수(右手)가 그림자의 왼쪽 어깨를 겨냥하며 뻗어 나갔다. "적이 아니오. 손을 거두시오." 다급히 외치며 물러나는 그림자를 보고 진소백은 오른손의 경기(勁氣)를 거두었지 만 몇 푼의 경력만은 그대로 그림자의 어깨를 치고 말았다. "우욱!" 그림자가 신음을 냈고, 그의 어깨에서 선혈(鮮血)이 흘러내렸다. 단지 힘을 거두고 남은 여력(餘力)으로 이런 결과가 일어남은 진소백의 내공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그림자는 이미 왼쪽 어깨에 상처를 입고 있었고, 그 상처가 터져서 피가 흘러나왔 던 것이다. "당신은……?" 그의 얼굴을 본 진소백이 깜짝 놀라 외쳤다. 코 밑의 염소 수염! "그렇습니다. 공자께서 저희를 도와 주시니 은혜가 하해(河海)와 같습니다. 존령(尊 領)은 제가 모실 터이니……" 그가 말하는 존령이 신주낭객임을 깨달은 진소백은 얼른 신주낭객을 넘겨주었다. "하지만 괜찮겠소? 당신은 이미 부상이 심한 듯한데……" 그랬다. 염소 수염은 지난날 복면인에게 쫓기며 왼쪽 어깨와 얼굴 등 온몸에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염소 수염은 웃었다. "아직 이 두 다리만은 멀쩡합니다. 제 걱정은 마시고 어서……!" 염소 수염이 품에서 기이하게 생긴 화살 하나를 꺼내 하늘로 던지자 화살이 이십 여 장 상공으로 날아오르며 터졌다. "저것은 무엇이오?" "구(仇) 도령(導領)에게 존령을 구했음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구 도령이 신호를 보 면 곧 이리로 올 것이니, 어서 동료를 구하십시오." 진소백은 지체하지 않고 다시 산을 넘어갔다. 섭수진은 구하러 돌아가는 것이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안심해도 좋을 터인데도…… '이상하게 걱정이 된다.' 진소백은 전력으로 경공을 전개하고 있었다. 섭수진은 등뒤에서 누군가 다가옴을 느꼈다. 간발의 순간을 찾아 등뒤로 일검을 긋자, 복면의 졸개 하나가 피를 뿜으며 쓰러졌 다. 그 짧은 순간, 황령주와 현령주의 권세가 판이하게 변했다. 검은 경기를 은은히 싣


고서 노도(怒濤)와 같이 쏘아 오는 권! 섭수진이 급히 왼손의 금정산수(金頂散手) 로써 황령주의 일권을 흩뜨렸지만 현령주의 일권은 미처 막지 못했다. 펑`─`! 왼쪽 어깨가 떨어지는 듯한 충격에 섭수진은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하였다. 심중 의 놀라움도 컸다. 좀 전까지 펼쳐지던 영주(領主)들의 공세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어야 했다. 영주들이 변화시켜서 뿜어 내고 있는 권법은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빠르 고 강했다. 다섯 걸음을 물러난 섭수진을 향해 다시 짓쳐 들어가는 두 영주는 흡사 철(鐵)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검게 변한 주먹을 휘둘러 왔다. 산이라도 무너뜨릴 듯한 그 주먹을 본 섭수진은 조금 전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오른손의 검을 들어 소청검법으로 적의 권세를 막아 가며 섭수진은 외 쳤다. "파황권(破荒拳)! 파황권이란 말이냐?" 3 사위(四圍)는 조용했다. 심화절은 조용한 모습으로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내심은 격동으로 떨리고 있었다. 심화절 앞에 조용히 서 있는 사람은 기서생(奇書生) 오명(烏明)! 그는 심화절의 다 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금 소방주가 실종(失踪)되다니……! 누구의 짓인가?" 오명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알 수 없습니다만, 시녀 앵아 역시 같은 때에 실종된 것으로 보아, 누군가의 계획 적(計劃的)인 납치로 보입니다. 방안에 남아 있던 찻잔에서 오보산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심화절은 침중하게 말했다. "당장 모든 힘을 동원하여 앵아와 소방주의 행방을 찾아라. 오보산의 약재를 판매 한 곳이 근처의 약방(藥房)에 있는지도 수소문하고!" "존명!" 오명이 고개를 숙였다가 물러났다. 기서생은 항상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인물이니, 조만간에 어느 정도 단 서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오명이 나간 후에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심화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노존(老尊)! 오셨소?" 누구에게 말하는 것일까? 의문은 금세 풀렸다. 허공이 괴소(怪笑)를 흘리며 말했던 것이다. "크크, 이미 왔지." 말과 함께 심화절의 앞으로 유령과 같이 한 인물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심화 절은 이미 그가 나타날 것을 알고 있었는지 미동도 없었 "어떻게 생각하시오. 누


가 금청청을 납치했겠소?" 노존이라 불린 인물은 바로 대답했다. "그 계집이 마각(馬脚)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겠지." 심화절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청청이 자신의 음탕함을 눈치챘으니 당연히 손을 썼겠지요. 앵아는 욕심이 많 은 아이였으니, 매수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게요." 노존이 다시 괴소를 흘렸다. "그렇게 되기까지, 자네의 수고가 컸네!" "무슨 말이시오?" "크크, 자네가 수하를 풀어 금청청을 천화전(天花殿)으로 유인했음을 부인한단 말 인가?" 심화절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우리의 운이 좋았지요." 심화절의 말은 교묘하여 노존이 심화절의 짓으로 몰고 갔던 음모를 공동(共同)의 음모로 만들어 버렸다. 노존은 속으로 '교활한 놈!'을 수없이 외쳤지만 겉으로는 태연히 말했다. "어찌할 셈인가? 내일이면 차기 방주를 결정하는 날인데…… 자신이 있는가?" 심화절이 웃었다. "방의 위원회 구성원인 구(九) 인(人) 중에서 이미 우리 편에 붙은 이가 다섯이니 문제가 없지 않겠소?" 노존이 말했다. "그러나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적염이 저쪽에 속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 심화절은 다시 웃었다. "물론 잊지 않고 있소!" "무슨 복안(腹案)을 세워 두었나?" "다만 노존을 믿을 뿐이지요. 하하!" '도무지 이놈의 속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노존은 속으로 생각했다. * * * 지금 적염의 앞에 선 사내는 옷을 입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적염도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화병의 꽃을 들어 향기를 맡았다. "향기가 좋군요!" 사내는 초조하게 말했다. "이제 방주 결정까지 하루가 남았을 뿐이야. 천기수사 쪽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라고." 적염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가만있지는 않겠죠. 이미 다섯이나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으니……" 사내의 눈에 당혹이 어렸다. "아홉 명 중에 이미 다섯이나 넘어갔다면 대세(大勢)는 기운 것이나 다름이 없잖 아?" 적염이 손은 들어 사내의 뺨을 어르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이쁜 양반. 심화절은 자신이 가장 자신하는 순간에 파멸의 고통을 맛보게 될 테니까!" 사내의 눈에 기쁨이 떠올랐다. "그럼, 무슨 수를 써놓았단 말인가?" "물론이죠. 심화절은 최후의 순간에 가장 맛보게 될 거예요."

믿고 있는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고통을

적염의 미소가 달콤해졌다. "그리고 나서 당신은 방주가 되고,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사천성의 패권(覇權)을 독차지하겠죠." 적염의 아버지는 공동의 장문인이니 두 문파가 힘을 합한다면 당연히 사천의 패자 (覇者)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말을 이어 가는 적염의 얼굴에서 점점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 되면 아버지가 나를 그 남자 구실도 못 하는 고자 놈에게 시집보낸 목적도 달성되겠지." 미소 대신 적염의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표독함이었다. 적염의 말 은 독백을 하듯이 이어졌다. "심화절아, 심화절아! 너는 암중에 금청청을 유인하여 나를 곤경(困境)에 빠뜨렸다 고 생각하겠지만, 흥! 너는 모를 것이다. 네 행동 하나하나가 이미 내 수중에 있음을!" 적염의 표독한 얼굴을 바라보던 사내도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갑자기 이 여인이 무섭다고 느낀 것이다. 적염은 정말 무서웠다. 이런 여인이 세간(世間)에 마음이 약한 숙녀(淑女)로 알려질 수 있었다는 사실은 더욱 무서웠다. 먹이를 앞에 두고 앞다리의 날을 갈고 있는 사마귀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정사(情事)가 끝나면 숫사마귀를 잡아먹는다는 암사마귀! 어쩌면 자신이 숫사마귀 의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 * * 파황권의 위력은 대단했다. 삼십 초가 지나자 이미 섭수진은 절대의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두 명의 영주만이 상대였다면 그녀가 이처럼 빨리 약세로 돌아설 리가 없었다. 문제는 주위를 포위하고 틈만 보이면 달려드는 졸개들에게 있었다. 비록 무공이 높지는 않다고 하나 그들의 병기에 닿아도 상처가 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고수의 대결에서 정신을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런 결과를 초래하고 있었다.


휙! 다시 일권이 그녀의 뺨을 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공기의 압력만으로도 뺨이 얼얼해졌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섭수진은 다시 몸을 풍차같이 돌리며 좌측에서 달려드는 복면인의 검을 피하며 목을 베어 갔다. "큭!" 복면인을 하나 더 해치우긴 했지만 섭수진도 이익만 본 것은 아니었다. 현령주의 일권이 다시 그녀의 등을 노렸기 때문! 원앙각(鴛鴦脚)의 식으로 그녀의 왼발이 들려지며 현령주의 일권을 맞아 갔다. 퍼 펑! 일권과 일퇴가 격돌하며 폭음이 일어났다. 섭수진은 왼쪽에서 다가오는 황령주의 일권을 검으로 차단하려 했지만, 현령주의 일권에 의해 몸의 균형이 조금 이동하는 바람에 완벽하게 경기를 막지는 못하였다. 펑! 다시 가해진 일격이 좀 전에 다쳤던 어깨에 명중되자 섭수진은 정신이 아득해졌 다. 이를 악물로 다시 검을 휘두르는 섭수진의 눈에 저 멀리 산을 내려오고 있는 진소백이 들어왔다. 그는 복면인들을 추풍낙엽처럼 해치우며 달려오고 있었지만…… '너무 멀다. 그가 올 때까지 나는 버틸 수가 없어……' 또다시 밀려오는 두 영주의 파황권을 막아 가며 섭수진은 내심 외치고 있었다. 졸개들의 무공만 보고서 영주의 무공까지 경 시했던 것이 실수였다. 파황권이라니! 섭수진은 강호에 나온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고, 진소백은 이제 겨우 산 중턱을 내려왔을 뿐이었다. 현령주의 권세가 자신이 펼쳐 낸 검막(劍幕)을 찢고 있음을 본 섭수진의 두 눈이 아득해졌다. '끝인가?' 검막을 찢은 파황권은 섭수진의 얼굴로 직격(直擊)하고 있었다. 제 14 장 반도철권(叛徒鐵拳) 1 어두운 곳이다. 때로 어둠은 인간에게 안도감을 준다. 특히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는 자들이라면 어둠 속에서 마음이 편할 것이다. 그러 나 음모의 희생자에게 있어 그 어둠은 다만 공포(恐怖)일 뿐이다. 지금 어두운 실내의 바닥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눈만 깜박이고 있는 모습…… 아마도 마혈(痲穴)을 제압당한 것 같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왔다. 문틈 새로 들어오는 빛에, 어둠에 익숙해졌던 눈이 적응하지 못하고 아려 오는 것 을 느낀 금청청은 눈을 찡그리며 외쳤다. "고숭무! 어찌 네가 이럴 수 있느냐?"


사내는 조용히 말했다. "믿기 힘든 일은 항상 일어날 수 있는 법이지." 말과 함께 그가 등잔에 불을 붙이자 실내가 밝아졌다. 밝아졌다고는 하나 간신히 눈앞만이 보일 정도의 작은 등잔이었을 뿐! "이제 하루만 지나면 비응방에는 새 방주가 탄생한다. 너는 결과가 어찌 될지 궁금하지 않느냐?" 금청청이 이를 갈았다. "이, 이 잡놈…… 네가 아버지를 죽인 흉수였더냐?" 고숭무는 금청청의 욕설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너는 내가 금사진을 죽였다고 생각하느냐?" 이 말은 뜻이 모호하여 그가 한 일인지 아닌지, 판단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 누가 고숭무를 심계가 깊지 못한 인물이라 했던가? 세간에 알려진 고숭무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대단한 참을성에다 심기(心 機)요. 세간에 알려진 당신에 대한 소문은 잘못된 것이 많았구려." 이 말은 이때까지 바닥에서 정신을 잃고 있던 매일도의 입에서 나왔다. 고숭무의 얼굴에 뜻밖이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네 무공을 고려하여 약을 많이 썼거늘…… 화산옥기린의 내공이 예상보다 훨씬 정순(精純)하구나." "과찬이오. 이제 겨우 정신을 차렸으니." 고숭무가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지 않느냐, 금청청? 이런 훌륭한 청년을 동반자로 삼을 수 있게 되었으니." 금청청이 외쳤다. "무슨 뜻이냐? 이 잡놈아!" 금청청의 입에서 계속하여 욕설이 나오자 고숭무의 눈도 음침해졌다. "네년은 살아남지 못한다. 매일도 역시! 기대되지 않느냐? 너희 둘이 어떤 죽음을 맞게 될지? 하하하!" 고숭무의 통쾌한 웃음에 금청청은 피가 식어 감을 느꼈다. 이렇게 죽어야 하다니. 흉수를 알았는데 세상에 알리지도 못하고 죽어야 하다니! " 내가 비록 죽더라도 너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아직 심 당주가 남아 있다. 그는 지혜가 깊으니 기필코 너의 음모를 알아 낼 것이다." 금청청의 말에 고숭무가 묘하게 웃었다. "너는 심화절은 믿느냐?" 금청청의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이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네가 천화 전에 와서 적 부인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느냐?" 매일도가 말을 받았다.


"그 일에 누군가의 의도(意圖)가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오?" 고숭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너는 말이 통하는구나. 심화절(深化絶), 그 죽일놈이 방주를 해치고 나서 너 희를 이용해 나와 적염마저 없애려고 했지. 흥!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음모를 우리가 이미 알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금청청의 몸이 격동으로 흔들렸다. "그, 그럼 아버지를 해친 것이……" "크하하, 그렇다. 금사진은 이었던 것이다. 흥! 그의 무공이 그렇게 높지만 는 심화절의 잔꾀에 당하고 금청청은 고개를 흔들었다. "믿을 수가…… 믿을 수가

그야말로 주위에 동지(同志)가 하나도 않았더라면 이미 말았지만."

없었지. 온통 적

예전에 내가 죽였을 것이다. 결국에

없어!"

매일도가 그녀를 감싸며 물었다. "당신이 우리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무슨 의미요?" 고숭무가 냉랭히 말했다. "너희가 곧 죽는다는 의미이지." 고숭무는 격앙이 된 듯 말의 속도를 높여 갔다. "금사진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불행했던 인간이었지. 그는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다. 그의 아내였던 방응향은 다른 남자를 사랑하여 그를 성불구자로 만들었 다." "……!" 금청청은 눈앞이 하얗게 되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의 수하들은 모두 그를 죽이고자 하였고, 새로 얻은 아내마저 배신하였지! 크하 하, 하나뿐인 딸마저 그를 미워했으니 살아 있어 봐야 무슨 의미가 있으랴?" 고숭무가 말을 이어 감에도 금청청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 그토록 강해 보였고, 그래서 더욱 미웠던 아버지가…… '그렇게 불행했었다니… …!' 금청청은 다만 이 순간 자신의 생명을 누군가 끊어 주기만을 바랐다. 저승에서라 도 금사진을 만나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고 싶었다. 금청청을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보던 매일도가 고숭무에게 말했 "아직은 사공 당주 가 남아 있소. 당신들은 결국 웃지 못할 것이오." 고숭무의 눈이 흔들렸다. "사공두라! 그는…… 흥! 어쨌든 심화절이 제거되고 나면 그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 다."


"심화절을 제거할 방법이 있다는 것이오?" 고숭무가 웃었다. "너희들은 천심비도에 당해 죽은 시체로 발견될 것이니 굳이 내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를 제거할 방법을 찾겠지. 아마 사공두가 찾지 않겠느냐?" 고숭무은 웃으며 방에서 나갔다. "크하하! 내일이면 너희는 죽은 목숨이니, 오늘밤에 꿈이나 잘 꿔 두거라." 그의 웃음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매일도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고숭무는 자신들이 심화절에게 죽은 것으로 꾸민 뒤 심화절과 사공두를 싸움 붙 이려는 것이었다. 사공두는 충심(忠心)이 강하다 하나 지닌 바 무공은 심화절보다 못하니 살아남기 가 어려울 것이다. 그때를 이용하여 고숭무가 심화절마저 제거하면 비응방의 차기 방주는 자연 그의 손에 들어갈 것이 아닌가? 매일도는 치를 떨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아직 체내에 약 기운이 남아 있었고, 게다가 마혈(痲穴)마저 제압된 상태였다. 금청청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떡하나……' 탈출할 방법이라도 찾고 싶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는 더 더욱 없었다. 무언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때때로 깊은 생각은 기적을 만들기도 하므로. * * * 도움의 손길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왔다. 진소백은 아직 이백여 장 밖에 있었으니, 그의 도움은 아니었다. 날카로운 빗! 쇠로 만든 빗 두 개가 공기를 가르며 황령주(荒領主)와 현령주(玄領主)의 손목을 노리고 날아 들어왔다. 이대로 진행된다면 비록 섭수진에게 치명타를 날릴 수는 있지만 자신들의 손목도 무사하지 못함을 안 두 영주가 권(拳)을 거두었다. 동시에 다른 손을 들어올려 빗을 쳐내며 빗장수를 노렸다. 그러나 섭수진 또한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찢겨졌던 검막이 다시 이어지며, 기세가 크게 일었다. 그 바람에 현령주는 빗장수를 노리던 손을 다시 거두어 섭수진을 상대해야 했으니 …… 빗장수는 단지 황령주의 공세만을 감당하면 되었다. 이것이 바로 공격으로써 수비를 대신한다는 말의 의미! "왜 돌아온 거죠?" 섭수진이 다시 현령주를 압박해 가며 물었다. 비록 부상을 입었다고는 하나 현령주 하나라면 그녀가 상대하기 수월하였다. 그러나 빗장수가 황령주를 감당하는 것은 힘에 부치는 일! 이를 악물고 빗을 마구 휘두르며 그가 외쳤다.


"당신들에게 또 다른 은혜를 입었으니, 내 어찌 혼자 갈 수 있단 말이오…… 욱!" 말을 하는 바람에 정신이 산만해져 일권을 가슴에 맞은 빗장수는 신음했다. 섭수진은 공세를 배가하여 현령주를 공격했다. 빨리 현령주를 해치우고 빗장수를 도와 주려는 뜻이었지만, 현령주도 만만한 상 대는 아니었다. 섭수진의 마음만 초조해지고 있을 때, 퍼퍼`─ 펑! 일격을 얻어맞고 몸이 느려졌던 빗장수가 다시 연환삼권을 맞고 뒤로 물러나고 있 었다.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는 그의 부상(負傷)이 심각한 것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때 이제 이십여 장을 남겨 두고 달려오고 있던 진소백의 입에서 쩌렁쩌렁한 외 침이 울렸다. "멈춰라!" 말과 동시에 진소백의 신형이 단숨에 이십여 장을 단축(短縮)하며 황령주를 덮쳐 갔다. 전신을 활과 같이 굽혀 그 탄력을 이용하는 이 무공의 이름은 궁신폭(弓身爆)! 벽 력세가(霹靂勢家)의 독문신법 중 하나였다. 지금은 세인들에게 잊혀진 이 무공을 어찌 진소백이 안단 말인? 황령주가 급히 권 세를 되돌려 진소백의 공격을 막아 가자, 빗장수는 죽음의 위기에서 겨우 벗어났 다. 내상이 큰 탓에 그 자리에서 주저앉으며 그는 믿기 힘든 광경을 보았다. 보라! 황령주의 권세가 마치 물레방아처럼 이어지며 진소백의 전신을 압박해 가는 것을! 연환권(連環拳)의 묘미는 바로 쾌에 있으니, 눈 깜짝할 사이에 오 권이 작렬하고 있었다. 그러나 믿기 힘들었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진소백의 손! 허공을 내리긋는 그의 손길이, 마치 용이 유영(遊泳)하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며 현 령주의 다섯 주먹을 하나로 꿰어 가고 있지 않은가? "오 성에 불과한 파황권으로는 막을 수 없다." 진소백의 외침과 더불어, 일수(一手)에 오 권이 그대로 붕괴되었다. 퍼펑! 굉음이 일어나며 현령주가 격퇴될 때 중인들의 입에서는 놀람에 가득 찬 음성이 튀어나왔다. "용음십이수(龍音十二手)!" 개선( 仙)의 용음십이수! 허공을 노니는 손길을 따라 용의 울음이 들리면 그 앞에 남아나는 것이 없다는 절학이었다. 실전(失傳)되었다는 개방의 절학이 지금 진소백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2 상황은 바뀌었다. 진소백이 가세하자, 불과 셋이지만 복면인들을 밀어붙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섭수진은 지쳐 있었지만, 다시 힘을 내어 복면인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빗장수도 용기 백배하여 철빗을 휘둘러 가니, 복면인들은 스스로의 목숨을 구하기 에도 급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순간, "어서 몸을 전권(戰圈)에서 빼내시오." 섭수진과 빗장수의 귓가에 진소백의 전음이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지금은 비록 두 명의 영주밖에 고수가 없지만 다른 두 명이 온다면 상황이 어찌 될지 모르오. 게다가 이 흑회(黑會)라는 세력은 결코 만만하지 않은 것 같으니 일단 몸을 피하 시오." 진소백의 말에 섭수진 등은 수긍하며 허초를 휘둘러 주위의 공간을 넓힌 뒤, 경신 술을 전개했다. "도망간다. 쫓아라!" 황령주가 수하에게 외치며 섭수진을 막으려 했다. 그의 주먹이 검어지며 일권이 섭수진을 향해 뻗어 나갔지만, "하하…… 어딜!" 낭랑한 웃음 소리와 더불어 진소백의 손 그림자가 그의 주먹을 막아 버렸다. "이놈의 자식!" 다시 황령주가 노호하며 권을 찔러 왔으나 그 역시 진소백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퍼엉! 황령주가 모래먼지를 뒤집어쓰며 물러나는 모습 뒤로, 어느 정도 멀리 간 섭수진 의 모습이 보이자, 진소백도 낭랑히 웃으며 몸을 날렸다. "생각 같아서는 너희 중 한 놈을 잡아 배후를 캐보고 싶으나, 하하, 지금은 상황 (狀況)이 여의치 않으니, 다음에 만나면 꼭 알아 내 주마!" 무인지경을 가듯이 몸을 피하는 진소백을 보며, 현령주가 미친 듯이 외쳤다. "어서 막아라! 어서 매복을 발동하라!" 어른은 물론 아이를 이긴다. 하나 수십 명의 아이가 떼를 지어 달려든다면 어떨까? 비록 개개인의 능력은 진 소백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으나, 달려드는 복면인들의 수효는 너무 많았다. 아무리 빠른 쾌검을 피할 수 있는 고수라도 쏟아지는 빗방울을 피하기는 힘든 것 이었다. 어쩌면 기습 공격에서 바로 후퇴하지 못하였을 때, 이런 위기는 예감되고 있었다 고 할 수 있다. 다시 하나의 화살이 빗장수의 장딴지에 박혔다. 진소백이 빗장수에게 날아드는 화살들을 쳐내며, 그를 독려했 "힘을 내시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숲이니, 화살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오." 빗장수는 이를 물었고, 힘을 짜내어 숲으로 뛰었다. 산 아래의 평지가 끝나고 이어지는 숲으로 들어서며 그는 다시 하나의 화살을 발 뒤꿈치에 맞고 말았다.


"우욱!" 빗장수의 신음에 진소백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런 것이 다수의 적을 상대하며 후퇴할 때에 나타나는 좋지 않은 점이었다. 혼전을 벌인다면 적은 화살이나 암기를 함부로 쓰지 못하리라. 그러나 언제까지 싸우고만 있겠는가? 수백 명의 복면인들을 모두 다 죽이지 못하는 이상은 언젠가는 후퇴를 해야만 하 고, 이런 위기를 각오해야만 했던 것이다. 빗장수를 부축하느라 발걸음이 느려진 진소백을 복면인들이 쫓아 왔다. 어깨를 찔러 오는 복면인의 검을 왼 손바닥으로 밀어 내며 진소백이 말했다. "약속 지점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힘을 내시오." 섭수진은 이미 저 앞에 가고 있었다. 이때였다. 갑자기 양쪽 풀숲이 갈라지며 진소백의 다리를 노리고 한 명의 검수가 일검을 찔 러 오는 것이 아닌가? 빠른 공격이었지만 진소백은 그보다 더 빨랐다. 이미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올라가 그의 일검(一劍)을 무위(無爲)로 만들고 있었으 므로. 그러나 어찌 짐작이나 했을까? 진소백이 피하는 방향을 예상이나 했다는 듯이 좌우(左右)에서 각각 두 명의 복면 인들이 도와 창, 검과 월(鉞)을 찔러 오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들의 공세는 진소백이 몸을 띄우기 전부터 발동하고 있어서, 흡사 진소백 이 그들의 공세 속으로 일부러 들어간 형세가 되고 말았다. 허공이라 힘을 받을 곳도 없으니 진소백으로서는 그야말로 절명의 순간! "찻!" 맑은 호통과 더불어 진소백이 부축하고 있던 빗장수를 앞으로 힘껏 던져 내었다. 빗장수의 몸이 앞으로 뻗어 감과 아울러 진소백의 몸도 반작용(反作用)에 의해 뒤 로 밀려났다. 그로 인해 원래 진소백이 있던 허공은 그야말로 허공(虛空)으로 변했으니. "이럴 수가!" 놀람에 찬 외침이 복면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며 그들의 병기는 서로를 노리게 되었다. 칭! 치잉!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복면인들이 서둘러 공세를 회수할 때! 뒤로 밀려 나던 진소백의 몸이 나뭇등걸에 닿으며 활처럼 휘어졌다. 휘익! 휘어졌던 진소백의 몸이 펴지자, 시위를 벗어난 살과도 같이 그의 신형이 뻗어 가 고 있지 않은가? 궁신폭(弓身爆)! 복면인들이 다시 병기를 회수한 틈을 번개같이 뚫고서 진소백이 날아갔다. 말은 길었으나, 그 변화는 눈부시게 빨라 진소백이 던져 내었던 빗장수의 몸이 땅 에 떨어지기도 전에 다시 진소백이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저, 저!" 그제서야 장내에 나타난 현령주가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진소백이 향하는 방향을 보고서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흥, 저 방향에는 천장단애(千丈斷涯)가 있을 뿐이니 도망칠 수 없다. 어서 쫓아 라!" 아까 자신이 진소백의 적수가 되지 못했던 것을 잊었을까? 현령주가 수하들을 독 려하기 시작했다. 절벽은 정말 있었다. 숲이 끝나자 절벽이 이어졌던 것이다. 진소백이 도착했을 때 섭수진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오는군요." 진소백이 절벽 가에 내려서자 섭수진이 말했다. "조금 늦었소." 섭수진이 재촉했다. "이럴 게 아니라 어서……" 그러나 절벽을 내려다본 진소백이 고개를 흔들었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복면인들을 기다려 봅시다." 진소백의 말을 바로 이어서 숲속에서 괴소를 흘리며 두 영주(領主)가 나타났다. 그들의 뒤로 수효를 셀 수 없는 궁수(弓手)들의 모습이 보였다. 진소백은 암중에 전음으로 섭수진에게 말했다. "만일 화살을 쏜다면 지체없이 빗장수를 데리고 뛰어내리시오." "크흐흐,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느냐?" 현령주의 말에 진소백이 일부러 섭수진에게 소리를 키워 말했 "저 까만 까마귀 놈 은 자신이 나에게 일초에 패퇴했던 것을 벌써 잊어버린 것 같구려." 현령주가 분노로 몸을 떨었다. "이놈의 자식. 아까는 창졸간이라 당했지만…… 우웃!" 현령주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이미 진소백이 덮쳐 오고 있었던 것이다. 신선이 하늘을 건너듯이 오 장 거리를 단숨에 밟으며 진소백이 다가오자, 현령주 는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뒤로 물러났다. "하하! 때리지 않을 테니 안심하거라." 진소백은 낭랑히 웃으며 몸을 틀어 현령주 옆에 서 있던 수하의 검을 잡아 갔다. 타탁! 손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에 이어 현 십사호는 창졸간에 자신의 검을 빼앗기고 말 았다. 이어…… "과거를 기억 못 하는 까마귀를 길들이는 데는 역시 칼이 최고지!" 진소백이 다시 현령주를 덮쳐 가는 것이 아닌가? 한데 그 방향이 묘했다. 진소백이 비틀대듯이 밟아 가는 방향은 묘하게도 현령주와 궁수들의 사이를 갈라 놓고 있어, 활을 쏜다면 현령주가 맞게 되었던 것이다.


"버릇없는 까마귀는 무릎을 꿇어라." 진소백이 외치며 검을 현령주의 머리로 휘둘러 가자 현령주는 부득이 무릎을 굽혀 피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 과연 검을 드니 까마귀의 버릇이 고쳐지는구나! 어디, 이번엔 네가 검을 가 지고 재롱을 부려 보겠느냐?" 말과 함께 진소백이 검을 거꾸로 들어 던졌다. 손잡이가 현령주를 향하도록 던져 내었던 것이다. '무슨 짓을!' 지켜 보고 있던 섭수진은 심장이 튀어나오도록 놀랐다. 아니나다를까, 현령주가 손을 내밀어 검을 잡아 버렸다. 검날이 아닌 다음에야 현령주 또한 고수이니 충분히 잡을 수 있었던 것인데…… " 까마귀가 칼까지 잡을 수 있다니, 참으로 영특한 놈이로구나. 어디 이것도 받아 보 아라." 순간, 진소백의 두 손이 가슴으로 모아졌다가 앞으로 뻗어 나왔다. 은은한 용음! 용음십이수 중의 잠룡출운(潛龍出雲)이었다. '끝났구나!'라고 섭수진은 생각했다. 이전까지의 현령주의 능력을 보아서는 도저히 진소백의 이번 일격을 막을 수가 없 었다. 게다가 손에 들린 검(劍)은 파황권(破荒拳)과 같은 권법을 익힌 권법자에게는 오히 려 방해가 되고 있었으니…… 섭수진은 진소백이 검을 건네 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믿을 수 없게도 현령주의 오른손에 들렸던 검이 비스듬히 뉘어지더니 진소 백의 용음수를 당당히 막아 가고 있지 않은 파팍! 자신이 뿜어 낸 경기(勁氣)가 상대의 검기에 막히자 진소백은 다시 낭랑히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동시에 몸을 돌려 섭수진 등이 서 있는 절벽으로 향했다. "하하! 좋군, 아주 좋아! 섭 소저, 이제 갑시다." 뜻 모를 소리를 외치며 진소백이 절벽을 향해 몸을 띄웠다. 이때까지 멍하니 서 있던 황령주의 눈에 다급함이 어렸다. 그리고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쏴라, 어서 쏴!" 화살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사이로 진소백을 비롯한 삼 인의 신형은 절벽을 향해 떨어져 갔다. 쏟아지는 화살 비! 그리고 낭랑히 웃으며 그 빗속을 떨어져 내리고 있는 진소백의 모습! 멀리서 본다 면 빗속에 떨어지는 낙화(落花)를 보는 것 같으리라. "하하, 우중낙화(雨中落花)라! 이렇게 운치(韻致)가 있으니, 까마귀, 네 건망증은 일단 용서하마! 하하하!" 웃으며 진소백은 떨어져 갔다.


자살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3 다시 밤이 되었다. 이 밤의 의미는 특별했다. 특히 적염에게는. 그녀 앞에는 지금 앵아가 있었다. 또한 앵아의 앞에 놓인 것은 비단과 패물(貝物), 그리고 금화(金貨)들이 아닌가? "너는 이번의 일을 잘 처리해 주었다. 내일 일도 믿을 수 있겠지?" 앵아는 막 진주로 만들어진 목걸이 하나를 목에 걸어 보며 대답했다. "예, 마님! 문제없어요." 앵아는 서역에서 들어온 진주 가루가 든 분(粉)을 보며, 생글거리고 있었다. 이 가 루를 바른다면 자신의 손도 희게 될까? "좋아, 앵아. 이제 그만 물러가거라." 앵아는 물러갔다. 손에는 보화들을 가득 들고서. 앵아가 나가자, 적염의 등뒤로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그녀와 정염을 태웠던 사내! "내일이면 이제 내가 방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인가?" 적염이 달콤하게 웃었다. "우리 둘이 비응방을, 나아가서는 사천(四川) 무림을 마음대로 다스리게 된다는 뜻 이죠. 그러나!" 그녀가 얼굴을 굳혔다. "추호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돼요. 심화절은 결코 만만히 볼 인물이 아니니!" 사내가 음침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당신에 대해 모르고 있어. 당신이 천기수사를 능가하는 모사(謀 士)임을 모르는 이상, 승리는 우리 것이 되겠지." 사내도 웃고 여인도 웃었다. 밤이 깊어 갔다. * * * 밤이 깊어서야 진소백 들은 비응방으로 돌아왔다. 약속대로 금청청을 찾아갔으나, 진소백이 만난 것은 광문당의 부당주인 오명(烏 明)과 순찰당의 부당주 인소(引蔬)였다. 진소백은 신음했다. "도대체 누구의 짓인지도 모른단 말이오?" 오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흔적이…… 다만 같이 실종된 앵아란 시녀를 찾는다면 단서(端緖)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들으나마나 한 소리였다. 금청청은 내일 비응방의 방주 선출에서 유력한 후보 중의 하나였다. 그녀의 실종 으로 이득을 얻는 자들을 생각해 본다면 당연히 심화절이나 고숭무 중의 하나가


범인이리라. 그러나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은밀히 만나자고 했던 것은 무언가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된 탓이었 을 가능성이 컸다. 누구의 비밀을 알아 냈던 것일까? 앵아에게 심부름을 시킨 것이 실수였을 것이다. 진소백이 문득 오명에게 물었다. "찻잔에서 오보산(五步散)이 검출되었다고 했지요? 주변의 약포를 알아 보았소?" 오명이 고개를 흔들었다. "누구도 오보산의 재료가 되는 약재를 사 갔던 일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방 내의 약실(藥室)`─`엽혼이 누워 있는 곳을 말함이었다`─`에서도 사라진 약재가 없습니 다. 다만……" "다만 무엇이오?" 오명이 나직이 말했다. "혼절했던 적(狄) 부인의 천화전에서 다량의 약재를 사 갔습니다만, 몸이 허약하신 적 부인의 치료를 위한 것이라 사료되니……" 내심 고개를 끄덕이는 진소백이었다. 누가 금청청을 납치했건 그만한 곳에서 흔적을 남긴다면, 매우 어리석은 자이리라. 이때까지 조용히 있던 인소가 끼여들었다. "치밀한 자들입니다. 아무리 조사해도 미세한 흔적조차 없습니다." 진소백이 비로소 인소를 보았다. "당신이 신안추종(神眼追從)이라 불리는 인소(引蔬)요?" 인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허명(虛名)만 얻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다니!" 진소백이 문득 오명에게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심 당주에게 내가 한 시진 이내로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시겠소? 급한 일이오." 오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는 심화절에게 말을 전하러 물러갔다. 인소와 둘만이 남게 된 진소백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금사진에 대한 충성이 지극했던 인물로 들었소. 가장 먼저 방주의 시신을 발견했던 것도 당신이지 않소?" 인소는 그때를 떠올리기라도 한 듯 몸을 떨었다. "제가 조금만 더 일 처리를 잘했더라면 금 방주는, 그분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오. 설혹 당신이 잘못했다 생각한다면 그분이 남기신 유일한 혈육인 금청청 낭자를 잘 보살피는 것으로 만회할 수 있지 않겠소." "진 공자께서는 제게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의 혐의는 모두 세 명에게 둘 수 있소."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우선 내일 비응방의 방주 자리를 두고 금청청과 겨루게 될 고숭무와 심화절의 혐 의가 짙소." "믿고 싶지는 않지만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진소백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역시 나도 믿고 싶지는 않지만 마지막 혐의는 약재를 사 갔다는 적 부인에게 둘 수밖에 없소!" 인소가 즉시 이의(異意)를 제기했다. "하지만 그분은……" "나도 알고 있소. 그렇지만 아주 희박한 가능성 하나라도 놓칠 수 없는 것 아니겠 소?" 적염은 비응방의 대부분 인물에게서 신망을 얻고 있었다. 항상 현숙하게 방주 부인의 역할을 수행해 왔던 그녀가 이런 평가를 받는 것은 당 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일 그런 인물이 악인(惡人)이라면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 "심 당주에 관 해서는 내가 탐문을 할 터이니, 고 당주의 거처인 숭무당(崇武堂)은 당신이 수고를 해주시오." 인소는 비로소 진소백이 오명을 먼저 보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만일 심화절이 범인(犯人)이라면 오명 또한 같은 편일 확률이 컸으므로. 하나 인소에겐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그럼, 적 부인에 대해서는……?" "내가 따로 생각한 바가 있으니, 염려 마시오." 인소 또한 밖으로 나갔다. 진소백은 적염(狄艶)을 누구에게 탐문시키려는 것일까?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만일 적염이 범인이라면 가장 무서운 일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다만 몇 개의 별만이 반짝일 뿐, 어둠에 덮여 있었다. "만일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을 속여 온 것이라면, 누가 그처럼 무서운 여인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 * * 심화절은 진소백을 환대했다. 진소백 또한 원래 그에게 호감을 가졌던지라 환대에 반갑게 응수하였다. 형식적인 인사가 오간 후, 진소백이 말했다. "주위를 물리쳐 주시겠습니까? 상의(相議)드릴 일이 있습니다."


심화절이 눈짓으로 주위의 무사들을 물러가게 했다. "그것이 정말이오?" "그렇습니다. 믿기는 힘들지만 고 당주의 파황권이 분명했습니다." 진소백은 옥산(玉山)의 사성곡(四聲谷)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심화절에게 말했던 것이다. 물론 신주낭객과 천랑파에 얽힌 일은 빼고, 수상한 복면인들을 쫓다 일어난 일로 꾸며 말하였다. 심화절로서는 충격이었음이 틀림없었다. "아미옥녀도 같이 있었으니 믿으셔도 됩니다. 그녀가 증인이 될 수도 있고요." 심화절은 신음(呻吟)했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고 당주가 외부와 결탁해 다른 세력을 만들었다니. 그 세력은 어디에서 나타난 것일까? "어떻게 그런 세력을 만들었을지 짐작 가시는 곳은 없습니까?" 진소백의 질문에 심화절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고 당주는 광산(鑛山) 개발에 관한 일로 한동안 방을 떠나 있었으니, 혐의를 둔다 면 그때가 가장 짙다고 생각되오." 진소백의 눈에 수긍하는 빛이 어렸다. 이 천기수사의 지혜는 그조차도 놀라울 때 가 있는 것이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축이 되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심화절이 고개를 흔들었다. "알 수 없소! 도대체 누가 있어……" 진소백이 힘있게 말했다. "어쨌든 하나는 확실합니다. 내일 방주 선출에서 그들은 마각을 드러낼 것입니다. 이렇게 치밀하게 준비한 자들이라면 틀림없이 내일의 일에도 깊은 음모를 깔고 있 을 테니……" 진소백이 잠시 쉬었다가 심화절을 바라보았다. "내일의 일은 자신이 있습니까?" 심화절이 당황해 물었다. "무슨 말을 하시는 게요?" "하하, 저는 천하의 천기수사께서 방주 선출에 대비하지 않고 손을 놓고 있었다는 말씀은 도무지 믿을 수 없습니다." 심화절은 한참 동안 진소백을 바라보다가 뜻밖에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하지 않겠소. 이거 근래 들어서는 속마음을 너무 자주 들키는 것 같구려." 진소백이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비응방의 방주가 누가 되든 저완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심화절은 진소백의 입을 주시했다. "고숭무와 같이 남몰래 일을 꾸민 자가 방주위로 올라서는 것만은 막고 싶습니다." 심화절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나 또한 그다지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소. 나 자신도 암중에 사람들을 포섭 하여 내일의 방주 선출에서 이길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진소백은 이 인물이 의외로 솔직하다고 느꼈다. 심화절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고숭무처럼 외부의 세력을 끌어들일 생각은 전혀 없소. 나는 단지 금 방 주가 이룬 비응방의 위용(偉容)을 더욱 높이고 싶은 생각뿐이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진소백은 생각했다. 아마 비응방을 위해서는 이런 인물이 방주가 되는 것이 좋을는지도 몰랐다. "심 당주께서 준비한 계책을 다시 한 번 검토해 보시겠습니까? 어쩌면 저쪽에서 이미 손을 썼을지도 모릅니다." 심화절은 망설이다가 자신이 준비한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는 머리가 좋은 사람. 진소백이 자신을 밀어 주기로 결심한 지금은 솔직히 모든 것을 말하는 편이 좋음 을 알고 있었다. "모두 다섯 명이 당주를 지지하기로 했군요." "그렇소. 하지만 공자의 말대로 고 당주가 그렇게 치밀하게 준비를 했다면, 솔직히 ……" "심 당주를 지지(支持)하기로 한 사람 중에서도 이미 고숭무의 음모에 가담한 자 들이 있을 터이니……" 심화절과 진소백의 대화 소리가 갈수록 작아지더니 이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 진소백은 삼경 무렵에 광문당을 벗어났다. 하늘에 구름이 걷히며 점점 별이 많아지고 있었다. 별을 보던 진소백이 천화전 방향을 돌아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잘하고 있을까?" 제 15 장 급전직하(急轉直下) 1 검은 야행복을 입은 그림자는 칠팔 장은 족히 떨어진 나무 사이를 사뿐히 건너뛰 었다. 소리조차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의 경공은 최상(最上)의 경지에 달해 있 음을 알 수 있었다. 나무 위에서 방향을 가늠한 그림자는 다시 몸을 띄워 더욱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천화전, 그 중에서도 심처(深處)였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잡아 두고 있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면 어느 곳을 택하겠는가? 가장 은밀하고, 자신의 손에서 가까운 곳! 사람들이 흔히 하는, 광 속에 누군가를 가둔다는 것은 얼마나 치졸한 생각인가? 그건 '내가 아무개를 잡아 놓았소' 하고 광고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아닌가! 물 론, 만에 하나의 가능성에 대비하여 그림자는 모든 건물을 샅샅이 훑었다.


예상대로 금청청은 없었고, 마침내 이곳, 적염의 침실에까지 이르렀던 것인데…… '이 일은 어차피 적염이 심계가 뛰어난 흉수임을 가정하고 출발한 것이다. 만일 적염이 흉수라면 그녀의 심계로 보아 당연히 침실에 가까운 곳에 금청청을 숨겼으리라.' 지붕의 기 와를 뚫고 내려가는 일은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공을 모른다고 알 려진 적염이 무공을 알 가능성도 생각해야만 했다. 적의 허실(虛實)을 모르는 상황에서는 적이 가장 강하다고 가정하고 모든 계획을 세우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조심스레 기와를 걷어 낸 인영의 몸이 연기처럼 안으로 들어갔. 적염은 침대 위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침실을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조금 후면 그녀는 반드시 침실을 벗어나게 될 것이다. * * * 매일도는 금청청을 달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단순히 화가 난 것이라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으리라. 그녀는 마음의 충격을 받았 다. 자신의 아버지, 금사진의 불행에 자신이 일조(一助)했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괴로 웠던 것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었다. 금사진은 이미 죽은 사람이니, 그녀는 자신의 죄를 씻을 수도 없었다. 잘못된 과거는 항상 이렇게 인간의 마음에 족쇄(足鎖)를 채우는 것이다. 여러 가지 말로 금청청을 위로하려던 매일도는 그 노력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입을 다물었다. 마음의 상처는 자신의 의지로만 극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 던 것이다. 한참을 지나자 금청청이 얼굴을 들었다. 굳은 얼굴로 그녀는 말했다. "아무도 용서할 수 없어요. 고숭무도 심화절도, 적염은 더욱더! 나 자신마저도." 매일도는 금청청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러나 정말 모든 일이 고숭무가 말했던 대로일까? 다른 사람이야 직접 눈으로 보았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으나 심화절의 경우는? 그가 범인이라는 말을, 그들은 단지 고숭무의 입을 통해 들었을 뿐이다. "사매(師妹)! 심화절에 대해서라면 너무 확신을 가지지 말거라. 단지 고숭무의 말만을 듣고서 그를 범인이라 단정하는 것 은……" 금청청의 고개를 흔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사형께서는 그가, 우리가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짓을 말했다고 생각 하시는 건가요?" 그랬다. 죽음에 이르른 사람에게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정해진 것이니, 죽은 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나 일전에 엽평 (葉枰)은 구천에게 잡혀갈 위기에 이르러 금청청이 나타남으로써 기적을 맛보았었 다.


지금 이 순간 그들에게도 기적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는가? 누군가 그들 을 구하러 오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않을? "아무라도 지금 나를 구해 주어 서, 고숭무와 심화절의 음모를 밝히게 해준다면, 난 설혹 그가 악마(惡魔)라 하더라도 용납하겠어요." 기적은 일어났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머리 위의 문이 열리며 빛이 들 어왔던 것이다. "난 악마가 아니니, 용납하지 않아도 좋소. 다만, 내가 당신에게 진 빚을 갚을 기 회를 찾게 되어 다행이오." 머리 위의 비밀 통로를 열고 들어 온 사람을 보자, 금청청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 너는……?" 그림자는 엽혼(葉魂)이었다. '적염은 어디로 간 것일까?' 엽혼을 따라 밀실(密室)을 나온 매일도는 생각했다. 그들이 갇혀 있던 밀실은 적염의 침대 바로 아래에 출구가 있었다. "아마 진소백의 거처에 있을 것이오." 매일도의 의문을 눈치챈 엽혼이 말했다. 금청청은 자신을 구해 준 것이 엽혼임을 알고는 줄곧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윽고 물었다. "어떻게 네가 여기에 올 수 있었느냐? 또 다른 음모가 있는 거냐?" 엽혼이 금청청을 주시했다. "당신이 내 동생 엽평을 구해 줬다는 말을 들었소!" 잠시 말을 쉰 엽혼이 다시 말했다. "진소백이 나를 보냈소. 내게 빚을 갚을 기회를 준 것이오. 이제 하나의 빚을 갚았 으니…… 금 방주의 일은 나의 죽음으로 사죄(赦罪)하겠소." 엽혼의 굳은 말을 들은 매일도는 내심 감탄했다. 그는 엽혼에게서 진정한 사내의 존재를 느낀 것이다. 다시 뭐라 질문하려는 매일도를 막으며 엽혼이 조용히 말했다. "내가 들어올 때는 경계가 허술했으나, 적염이 없는 지금의 경계는 엄밀(嚴密)해졌 을 것이니…… 조심해서 따르시오." 매일도와 금청청의 공력이 오보산의 약 기운에 의해 약해졌음을 알고서 하는 말이 었다. 그런데 매일도가 머리를 흔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니, 우리는 가지 않겠소!" '무슨 소리?'라고 묻는 듯한 표정이 금청청의 얼굴에 떠올랐 "만일 우리가 지금 탈출한다면 적염은 내일까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자신의 마각(馬脚)을 숨기려 할 것이오. 차라리 여기 남아서 그녀의 음모를 지켜보다가 결정적인 증거를 잡아 내


겠소." 그는 금청청을 돌아보더니 말을 이어 갔다. "우리는 이미 마혈(痲穴)이 풀렸으니 호신(護身)에는 그다지 큰 이다. 괜찮겠느냐?"

어려움이 없을 것

금청청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저도 남겠어요. 그리고 엽혼, 당신의 문제는……" 그녀가 뭔가 갈등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차후에…… 차후에 말하도록 해요." * * * 신안추종 인소(引蔬)는 약속했던 사경을 조금 지나서 진소백의 거처로 왔다. 그는 매우 지쳐 보였다. "고 당주(堂主)님의 거처를 샅샅이 훑었지만, 어디에도 금 소방주의 흔적은 없었습 니다. 그런데……" "그런데 무엇이오?" "비응방의 방도(幇徒)가 아닌 자들의 출입이 눈에 띄었습니다." 진소백은 무릎을 쳤다. "누구인지 혹시 알아 보았소?" 인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지 않아도 그 중 한 명의 뒤를 밟느라 늦었습니다." 진소백이 웃었다. "아주 좋구려. 그래, 누굽디까?" "제가 뒤를 밟아 보니, 그가 문상 온 자들이 묵고 있는 숙소로 가지 않겠습니까?" 인소가 긴 설명 끝에 결국 이름을 말했다. "그자는 다름 아닌 귀왕곡(鬼王谷)의 곡주, 갈현(葛鉉)이었습니다." 진소백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이제야 정말 앞뒤가 맞는구려." 인소는 나갔다. 진소백은 자리에 계속 앉아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정말 잘 맞는군. 정말 잘 맞아." 그의 뒤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무엇이 그리 잘 맞는다는 말인가?" 진소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이번 사건이 의외로 빨리 해결되니 허탈해서 그런다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 그가 물었다.


"참, 금청청은 구했는가?" 엽혼은 한숨을 쉬며 자초지종을 말하기 시작했다. 진소백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매일도가 그처럼 영리하니, 금사진은 저승에서도 자식의 혼례(婚禮) 문제만은 걱 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엽혼이 빙그레 웃었다. "나로서는 자네 덕에 어느 정도 마음이 편안해졌네." 엽혼의 말을 듣자, 진소백의 미간이 어두워졌다. 그의 말이 자신의 생명이 이제 겨우 육 일 남았음을 염두에 둔 것임을 아는 까닭 이었다. 엽혼이 급히 화제를 돌렸다. "참, 자네 도대체 적염을 어떻게 불러 낸 것인가?" 진소백이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불러 낸 것이 아니네. 심화절이 그녀를 불러 갔지." "그럼, 심화절에게 적염에 대해 말했단 말인가?"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한 사람은 우리 편이 있어야 하네. 내 생각으로는 그가 가장 적당해 보였 어. 아마도 음모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적은 사람이 그일 테니." 엽혼은 수긍했다. 어차피 이 일은 비응방 내부의 일이니 최종적인 수습은 비응방의 인물이 해야만 했다. "참!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이 더 있는데……" "뭐든 말해 보게." "화선(花仙)이 있는 곳에 자네가 좀 가주게." 화선을 찾아 살인 청부의 배후를 직접 한참 바라보다가 이윽고 말했다. "고맙네."

추궁해 보라는 말이었다. 엽혼은 진소백을

진소백이 굳이 이 일을 자신에게 시키는 의도가 그의 마음의 빚을 갚을 기회를 주 려는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엽혼은 떠났다. 고숭무가 청부자라면 그는 아마 증거를 가지고 돌아올 것이다. "이제 날이 밝으 면 차기(次期) 방주가 선출되는가?" 진소백은 창 밖을 보았다. 흐르는 별빛! 이미 오경이 가까워진 시간이었으나 조금은 자두어야 했다. 내일, 아니, 오늘의 일을 위해. 그 시각!


졸린 눈을 비비며 엽혼의 약을 갈아 주러 들어갔던 의원이 뒤로 쓰러지고 있었다. 시체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귀, 귀신(鬼神)!" 사라졌던 시체가 유령처럼 자신의 앞에 스르르 나타나자 그는 그만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엽혼이 자신이 누워 있었던 석대 아래 놓인 구절검(九節劍)을 찾으러 다시 나타났 던 것이다. 석실 밖에는 많은 경비무사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를 발견하 지는 못했다. 비밀 통로는 아직 엽혼의 뇌리에만 남아 있었으므로. * * * 적염은 심화절의 광문당(廣文堂)에서 다시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물론 침대 아래 부분에 위치한 비밀 문을 점검해 보는 것이 었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그녀는 심화절이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 ─`금 소방주가 납 치된 것 같습니다. 적 부인께서는 어머니 되시니 알고 계심이 좋을 듯하여…… 자신 혼자만을 불러 놓고 그런 말을 하다니…… "무슨 눈치라도 챈 것인가?" 그러나 눈치를 채었다면 무어 어떠랴? 어차피 내일이면 모든 일이 끝날 터인데…… "심화절아, 심화절! 드디어 내일이면 끝이로구나." 적염의 눈빛이 섬뜩하게 변했다. 2 드디어 날이 밝았다. 이날은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지니고 천응각(天鷹閣)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 수효는 정확히 여덟이었다. 숭무당주 고숭무(暠崇武). 광문당주 심화절(深化絶). 미망인(未亡人)인 적염(狄艶)과 순찰당주 사공두(司空斗). 집형전주 화골장 노굉(魯宏). 이상의 다섯이 주(主)였고, 나머지 셋은 각각 세력의 부당주들이었다. 숭무당의 부당주 귀조(鬼爪) 독소명(獨蘇冥). 광문당의 부당주 기서생 오명(烏明). 순찰당의 부당주 신안추종 인소(引蔬). 원래 이 자리에는 금청청까지 끼어 아홉이 있어야 했으나, 그녀는 지금 없었다. 광문당주인 심화절이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자리의 공증을 위해 다섯 분을 모시겠소." 그의 말과 함께 다섯 인물이 들어왔다. 공동의 장문인 풍운(風雲) 진인(眞人) 적일수(狄逸秀)! 화산의 장로인 현천자(玄天 子)! 이 두 명이 백도를 대표하여 참가했고, 흑수동(黑水洞)의 동주인 도곡(陶曲)이 흑 도를 대표하여 참가했다.


그리고 남은 두 명! "두 분의 신분은 모두가 아실 터이니 말을 줄이겠소." 심화절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진소백과 섭수진! 전대 방주의 사인을 조사하고 있는 두 사람이니 말이다. 공증인들은 당연히 방주의 선출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진행(進行)되는지를 공증(公證)할 뿐이었다. 공증인들이 자리를 정하자 심화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노사(老師)께서 진행을 맡아 주시겠습니까?"

없었다. 다만 공정하게

노사란 다름 아닌 집형전주 노굉이었다. 비응방에서 노굉의 위치는 독특한 데가 있었다. 전대의 방주였던 방곤 때부터 비응방을 지켜 왔던 인물! 그 뒤 비응방의 방세(幇 勢)가 급속도로 커지며 영입(迎入)된 인물 위주로 방의 주요 직책(職責)이 개편되자 집형전주라는 형식적인 자리를 맡고 있었다. 비응방은 기형적(畸形的) 급성장으로 인해 직제에 특이한 면이 있었다. 방의 요직(要職)에 있는 인물들이 길게는 십 년, 짧게는 오 년 정도에 걸쳐 영입된 사람들이었다. 가장 먼저 영입된 사람이 심화절! 그의 지혜와 금사진의 무공을 바탕으로 했던 비응방의 성장은, 칠 년 전 고숭무가 들어오면서 가속(加速)이 붙었던 것이다. 노굉은 이미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한때, 화골장(化骨掌)이란 무공으로 무명(武名)을 얻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나날이 늘어 가는 주름을 걱정하는 노인에 불과했. "나이가 많다는 이유 하나로 방주 선출(選出)의 진행자로 뽑혔소. 아무쪼록 훌륭한 인물이 선출되어 방의 장래를 밝게 이끌기 바라오." 노굉이 나이답지 않은 우렁찬 목소리로 말을 하며 장내의 빈자리를 쳐다보았다. 원래 금청청이 앉았어야 할 자리였으나, 지금은 비어 있었다. "소방주가 불행히도 참석을 하지 못했으니, 지금은 두 명에게만 방주의 후계권이 있소." 중인들의 눈이 모두 비응방의 문상, 무상으로 불리는 심화절과 고숭무에게로 쏠렸 다. "하지만, 언제라도 소방주가 돌아올 수 있으니, 그녀에게 표를 던지는 것도 무관하 오." 노굉이 한마디 덧붙였다. "단, 불행히도 그녀에게 나쁜 일이 생긴 것이라면, 차점자(次點者)가 자동적으로 차기 방주가 될 것이오." 노굉의 선언이 있은 후, 바로 표결이 이어졌다. "지금까지의 방 내 서열에 따라, 먼저 고 당주부터 자신의 의견을 밝혀 주기 바라


오." 고숭무가 중인(衆人)의 눈길 속에서 일어났다. "전 배운 것이 얕고 재주가 졸렬합니다만, 여러분이 믿어 주신다면 선(先) 방주님 의 뜻을 이어받아 비응방이 사천의, 나아가서는 천하의 대방(大幇)으로 자라나도록 이 한 몸을 아끼지 않을 것 을 감히 선언합니다." 후보(候補)로서 출마의 변(辯)에 더불어 자신이 스스로를 지지함을 밝힌 말이었다. 지켜보던 진소백의 눈이 반짝거렸다. '호오. 이것 봐라? 몇 마디의 말로써 의견을 밝혔을 뿐 아니라, 은근히 지지를 호 소하기까지! 고숭무가 힘만 있고 머리가 없다는 말은 완전히 헛소문이었군!' 두 번째로 일어선 사람은 당연히 심화절이었다. "아직 선(先) 방주의 살해범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큰일을 치르게 되어 심란(心亂)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 동도의 후원에 힘입어 방주위에 오르는 광영을 안는다면 모든 힘을 기울여 흉수의 정체를 밝혀 내고 말 것임을 맹서(盟誓)합니다." 그 역시 출마의 변에 덧붙여 지지 연설까지 한 것이다. 이때, 네 번째의 자리에 앉아 있던 사공두가 갑자기 일어섰다. "이것은 안 되오. 나는 찬성할 수 없소." 노굉이 사공두를 돌아보았다. "순찰당주는 무슨 말을 하는 게요?" 사공두가 목청을 높여 말했다. "우리 비응방은 금 방주의 피와 땀을 먹고 이렇게 성장했소이다. 그분의 피를 이 어받은 소방주가 차기 방주가 됨이 당연하거늘 소방주가 실종된 시기에 이런 선거를 치르다니요. 불가(不可)합니다." 사공두의 말에 노굉이 난색을 표했다. "당주의 말에도 일리가 있으나, 내일 방주의 장례식을 신임(新任) 방주가 진행해야 함은 피할 수 없으니……" 난처한 노굉을 거들어 준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사공 당주의 말씀은 백 번 옳아요. 저도 청아가 돌아가신 분의 뒤를 이었으면 한 답니다. 하나……"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지극히 맑고 깨끗하여 중인들의 가슴이 시원해지도록 하는 목소리였다. 적염! 선 방주 금사진의 정숙한 미망인 적염에게로 중인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나 언제까지 방주의 자리를 비워 둘 수는 없는 일! 만일 투표권을 가진 분들이 청아가 방주위에 오름을


원한다면 투표로써 자신의 의견을 말해 주세요." 그녀가 슬픔 가득한 얼굴로 말하자 사공두도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투표는 바로 이어졌다. 방주 후보로 나선 세 명은 권리가 없었으니, 여섯 명만이 차기 방주를 지명할 권 리가 있었다. 금사진의 갑작스런 죽음이 아니었다면 그가 지명한 사람이 차기 방 주가 되었을 것이었지만. "결과를 발표하겠소." 중인들의 모든 정신이 노굉의 입으로 집중되었다. "고 당주를 지지한 사람이 하나! 금 소방주를 지지한 사람이 하나! 끝으로 심 당주 를 지지한 사람이 넷이니, 차기 방주에는 심 당주가 가장 많은 지지를 얻으셨소."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특히 사공두를 보는 적염의 눈에는 이채(異彩)가 반짝였다. 노굉이 중인을 진정시 키며 말했다. "심 당주께서는 앞으로 나오셔서 방주의 위에 오르실 준비를 하시오." 향로에서 향연(香煙)이 하늘로 피어올랐다. 앞에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선 것은 심화절이었다. 노굉이 옆에서 말했다. "이제 천지신명(天地神明)에게 고할 것이니, 천기수사가 방주에 오름에 이의(異意) 가 있는 사람은 지금 말하시오." 세 번에 걸쳐서 이의가 있는 사람을 물어 보는 것은 하나의 관례였다. 첫 번째로 물어 보는 노굉의 말에 적염이 눈을 빛냈다. '조관(曹串)과 앵아(鶯兒)에게서 연락이 올 때가 되었는데……' 그녀는 조관을 금 청청에게로 보냈다. 그녀와 매일도를 죽이고 사인(死因)을 조작하는 일을 맡겼던 것이다. 앵아는 기다리고 있다가 시간에 맞추어 심화절이 금청청을 죽였다고 위증(僞證)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제 심화절이 새로운 방주로 임명되기 직전(直前)이었으므로 그녀가 기다리던 때 가 되었다. '나타나라, 앵아!' 적염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마지막으로 묻겠소. 이의 있으신 분은 지금 나서시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비응방에 새로운 방주가 탄생하였음을 하늘에 고하겠습니다." 노굉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갑자기 대청(大廳)의 문이 왈칵 열리며 피투성이의 인영 하나가 뛰어드는 것이 아 닌가? "크, 큰일났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인영에게로 쏠렸다. 온몸이 피로 범벅이 되어 겁에 잔뜩 질려 떨고 있는 소녀! 바로 앵아였다. 인영의 모습을 본 적염의 눈에 득의(得意)의 빛이 떠오르고 고숭무 또한 입가에


남모르는 미소(微笑)가 맺혔다. 앵아가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말했다. "아가씨가, 소방주 아가씨가 살해되셨습니다." 두려움에 떠는 작은 소녀가 겨우 한 말이었으나, 여파(餘波)는 거대했다. 좌중(座中)이 충격으로 침묵했다. 3 긴장으로 팽팽해진 분위기를 먼저 깨뜨리고 나선 것은 심화절이었다. "너는 소방주의 시녀 앵아(鶯兒)가 아니냐? 어떻게 된 거냐? 흉수는 누구냐?" 그는 답답한 듯 평소의 침착함을 잃고 여러 가지를 한 번에 물어 보고 있었다. 적염의 입가에 남들이 알아보기 힘든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는 지금 심화절을 비웃고 있었다. '그래, 물어라, 심화절아. 네 질문이 너를 나락(那落)으로 떨어뜨릴 것이다.' 앵아는 마침내 입을 열어 대답했다. "휴, 흉수는 여기 있어요." 심화절이 재촉했다. "누구냐? 어서 말해 보거라." 마침내 앵아는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앵아의 손끝을 본 중인들은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 * * 금청청의 가슴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刀) 한 자루가 닿아 있는 곳은 그녀의 목이었지만, 목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았 다. 가슴에서 흘렀다. 피는 신선(新鮮)하고도 붉었지만, 금청청은 조금의 고통(苦痛)도 느끼지 않았다. 자 신의 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통은 도를 쥐고 서 있는 조관이 느꼈다. 삼수도(三手刀) 조관! 그는 일찍이 금청청에게서 모욕을 받은 적이 있었다. 때문에 적염이 금청청을 살해하려는 것을 알자, 자청(自請)했던 것인데…… "어떻 게 혈도를 풀었느냐?" 믿을 수 없다는 듯 조관이 말했다. 매일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악인은 항상 하늘의 뜻을 위배하게 되므로 그 말로(末路)가 비참(悲慘)한 법이 다." 조관의 가슴에 박힌 나무 꼬챙이를 빼내며 매일도가 말했다. 그가 금청청을 베어 가던 조관의 도를 제지(制止)하고 그의 가슴에 검을 대신한 나무 꼬챙이를 꽂았던 것이다. 바닥으로 둔중한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조관을 보며 금청청이 말했다. "믿을 수 없어요. 그는 내 적수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랬다. 사실 금청청은 자신이 조관보다 약자(弱者)라고 생각했던 적이 한 번도 없 었다.


자신들을 죽이러 온 것이 조관임을 알고 나서, 매일도에게 간섭하지 말라고 말하 며 나섰던 것도 그런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그녀의 예상과 너무나 달랐다. 단 오 초 만에 그녀는 조관에게 목을 베일 뻔했다. 매일도가 적시(適時)에 나서서 그의 가슴을 찌르지 않았다면, 지금 바닥에 쓰러진 것은 조관이 아니라 자신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실력을 평소에 반절도 보이지 않았다. 무서운 일이군. 이 자는 언제 비응 방에 들어왔느냐?" 매일도의 질문에 금청청이 조금 생각하다 대답했다. "고숭무와 같이 들어왔어요." 금청청이 신음했다. "만일 고숭무도 이처럼 자신의 실력을 감추고 있는 것이라면, 정말 무서운 일이에 요." "그가 평소에 심계를 드러내지 않았던 예로 보아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고숭무 와 함께 들어온 자들이 모두 몇 명이나 되는지 아느냐?" "어릴 때의 일이라서…… 부당주인 귀조 독소명(獨蘇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숭무당 인물들은 고숭무가 개인적으로 데리고 왔던 자들로 기억해요." 매일도의 눈에 다급함이 어렸다. 적염과 고숭무는 무서운 자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심화절마저 그들의 음모에 제거된다면 아무도 그들을 상대할 사람이 없게 된다. "사매! 빨리 가자." 매일도와 금청청의 신형이 천응각(天鷹閣)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중인들은 자신의 눈을 믿기 힘들었다. 앵아가 흉수라 지적한 당사자는 그 사실이 더 더욱 믿기 힘들었다. 보라!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사람을! 바로 고숭무였다! "무, 무슨 소리냐?" 고숭무가 당황하여 외쳤다. 당황하기는 적염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이 아이는 이 시간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 었다. 그러나 당연히 심화절을 가리켜야 할 손가락이 고숭무를 가리키다니…… 어떻게 된 것인가? "무슨 소리냐? 도대체 네가 나와 무슨 감정이 있어 이런 누명을 씌우는 것이냐?" 그가 소리를 높이자 앵아는 떨며 심화절의 품에 안겼다. "무서워요. 당주님!"


심화절이 그녀를 다독였다. "안심하거라. 지금은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애를 잠시만 보호해 주시 겠습니까?" 심화절이 앵아를 실내에서 같은 여자인 적염에게 넘기고서는 고숭무의 앞을 막아 섰다. "고 당주! 화를 낼 때가 아니오. 어떻게 된 일인지 해명을 하셔야 하오!" 평소 때와 다르게 심화절의 목소리엔 은은한 노기마저 배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숭무를 보는 중인들의 눈에는 모두 의혹이 묻어 있었다. 당황한 것일까? 고숭무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너, 너!" 지금 그의 손은 적염의 품에 안긴 앵아를 가리키고 있었다. 앵아는 그의 손길에 더욱 겁이 났던지 적염의 가슴을 놀란 새처럼 파고들었다. "고 당주!" 심화절이 외친 이번 일갈(一喝)에는 진기가 가득 서려 있어 고숭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정신이 없었다. 원래 앵아는 심화절이 금청청을 죽였다고 증언을 해야만 했 던 것이다.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그러나 길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넘겨야 했다. "심 당주, 이건 음모(陰謀)요. 내가 어찌!" 고숭무의 변명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다시 문이 부서져라 흔들리며 하나의 그림자가 실내로 들이닥쳤으므로. 아니, 정확히는 시체(屍體) 하나가 들어왔다. "당신은 아직도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이오?" 냉랭한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매일도였다. 그리고 시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조관의 것이었다. "당신이 삼수도 조관을 보내 나와 금 사매를 살해하려 했음을 부인하는 것이오?" 이번에는 적염마저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매일도가 살아서 걸어오다니. '그렇다면 금청청도……' 그녀가 미처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痛 症)이 가슴에서 전해져 왔다. "네가 감히!" 앙칼진 음성이 터져 나오며 폭음과 함께 적염의 품에 있던 앵아가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손에는 날카로운 비수(匕首) 하나가 피를 뿌리며 들려 있었다. 중인들은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앵아가 적염을 칼로 찔렀다는 사실에도 놀랐지만, 일반에 연약하다고 알려진 적염 이 칼에 찔리고도 그처럼 강한 장력(掌力)을 쏘아 낼 수 있는 고수였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입으로 피를 뿜어 내면서 외치는 앵아의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 "당신이 고숭무와 음모하여 금청청 아가씨를 해치려 했던 사실이 언제까지나 비밀 로 남을 줄 알았나요?" 중인들은 놀람으로 인해 머릿속이 비어 가는 것을 느꼈다. 당사자인 적염과 고숭무는 이미 아무 생각도 뇌리에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이건 무슨 소리냐? 앵아, 도대체……" 적염의 말에 앵아가 냉소했다. "흥! 당신은 처음에 오보산을 찻잔에 타서 아가씨를 납치하였고, 다음엔 아가씨를 죽인 후, 심 당주님에게 모든 누명을 씌워 권력을 잡으려 했던 것이 아닌가요?" 그토록 절세적이던 적염의 머리도 이 순간만은 주인을 배반하고 있었다. 그녀는 말을 더듬거렸다. "무, 무슨 말을!" "흥, 당신이 만일 약속대로 내게 금화를 주기만 했더라도 나는 어쩔 수 없이 당신 의 말을 들었을 거예요. 하지만…… 욕심 많은 탕녀(蕩女) 같으니. 그깟 돈 몇 푼 이 그렇게 아까웠나요?" 적염이 몸을 떨며 발악적으로 외쳤다. "무슨 말이냐. 너는 분명히 어제 금화를……" 말을 하다 말고 자신의 실언(失言)을 깨달은 적염은 입을 다물었다.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 갔다. 이 정도의 유도(誘導) 심문(審問)에 넘어가다니! 그녀는 계속되는, 예상치 못했던 사태에 당황하여 평소의 냉정함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이어지는 앵아의 말이 쐐기를 박았다. "당신이 고숭무와 야합(野合)하여 방주님을 살해하고, 이어서 심 당주님과 소방주 아가씨마저 제거하려 한 사실을 부인하나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미친 듯이 외치는 절규와 함께 입구에서부터 하나의 인영이 날아왔다. 모든 방어 를 배제한 채 오직 적염을 죽이고자 하는 일념만으로 가득 차 내리긋는 검! 검의 주인은 금청청이었고, 담고 있는 기세(氣勢)는 일도단천(一刀斷天)! 아버지를 죽인 것이 적염(狄艶)이라는 말에 이성을 잃은 그녀가 매일도의 뒤에서부터 날아 올랐던 것이다.


적염을 노리는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금사진의 유일한 충신(忠臣)인 사공두도 날아올랐다. 그의 박룡도(搏龍刀)가 도집에서 빠져 나와 빛을 뿌리며 적염의 목을 노렸다. 앞뒤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게 된 적염이 호통을 지르며 양손을 휘두르니…… 팽팽 한 긴장으로 과열(過熱)되었던 장내는 급기야 폭발하고 있었다. 제 16 장 백회지비(白會之秘) 1 장내의 분위기는 폭발 지경이었지만 진소백은 별로 실감(實感)이 나지 않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지금의 상황을 분석하고 있는 그의 정신은 내부 세계로 침잠(沈 潛)해 가고 있었다. 그가 구해 주었던 신주낭객의 일! 그의 말과 지금의 상황을 연관시켜 보고 있었다. 이야기는 잠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소백과 섭수진, 그리고 빗장수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던 시점으로. 뒤에서 쏟아져 내리는 화살 비 속에서 낙화(落花)되었던 진소백 일행은, 이윽고 푹 신한 짚으로 덮인 배 위에 떨어져 내렸다. 배는 주위의 바위에 끈으로 단단히 고정된 채 공중에 떠 있었다. 끈은 배의 위치 가 변하지 않도록 해줄 뿐만 아니라, 진소백 등이 떨어져 내리는 충격을 완화시키 는 완충 작용까지 해주어, 그야말로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내었다. 배에 내리자마자 진소백은 비수를 날려 끈을 끊으며 외쳤다. "빨리 짚 속으로 들어가시오!" 끈이 끊어지자 배는 급류를 타고 빠른 속도로 흘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화살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지만 그들은 안전했다. 머리 위에 있는 짚의 벽이 화살을 모두 막아 내고 있었으므로. "이것이야말로 공명(孔明) 선생께서 짚 인형을 이용하여 하룻밤에 십만 개의 화살 을 얻었던 고사(古事)를 실전에 활용하는 것이 아니겠소?" 섭수진이 진소백의 말에 소리내어 웃을 때, 절벽 위에서 두 영주의 얼굴은 일그러 지고 있었다. * * * 하류에는 신주낭객과 염소 수염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소백 일행이 도착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청년도 달려왔다. 굵은 턱선이 강한 성 격을 암시하는 청년, 구천(仇賤)이었다. "사부님!" 무릎을 꿇고 오열하는 그를 보며, 진소백은 신주낭객과의 대화를 잠시 미루어야 했다. "내가 흑회(黑會)의 인물들에게 잡혔던 것은 내상(內傷)으로 몸을 가누기 힘들 때 였소." 신주낭객은 자신이 어떻게 흑회의 인물들에게 잡히게 된 것인지를 설명하기 시작 했다. 그는 오 년 전 어느 날 밤 무산(巫山)을 지나다가, 일단의 사람들이 복면을 하고서 은밀히 무엇인가를 운반하는


광경을 우연히 목도했다. 급한 일로 공동의 풍운 진인을 만나러 가던 길이었지만, 그는 궁금함을 참지 못 하는 성격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조심스레 복면인들을 따라갔고, 그들이 운반하던 짐이 철 광석이라는 것을 알아 내었다. 그것도 아주 양질의! 철은 병기를 만드는 기본이 되니, 모든 광산은 조정에서 관리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이 정도의 양이라면 근처 어딘가에 광산이 있음이 틀림없는 일! 신주낭객 은 좀더 자세히 알아 보고자 복면인 중의 한 명과 바꿔치기 하여 그들의 세력에 침투했다. 마침내 복면인들의 거처 깊숙이 들어간 그는, 광산이 무산(巫山)에 있음과 그들의 세력이 아주 은밀하고도 거대함을 알아 내었다. 그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도 알아 냈다. 백회(白會)!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들이 두 명 있었는데, 하나는 복면을 하여 알 수 없었지만… … "한 명은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자였소. 그는 비응방의 금사진(金査震)이었 소!" 우두머리를 보고 나서 신주낭객이 그들에게 들키기까지는 채 한 시진도 걸리지 않 았다. 복면인들은 서로 치밀한 조직력의 과시와 유지를 위해 저마다의 서열에 따 라 서는 위치가 달랐다. 신주낭객이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알 수는 없는 일! 그의 복면이 뜻하는 신 분과 그가 선 위치가 다름을 발견한 복면인들은 곧바로 그가 침입자임을 알아차렸 다. "곧 엄청난 추격이 있었소. 하지만 내 경공은 감히 자랑할 만한 것이었지. 추격이 거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음날 날이 밝을 무렵 무산을 벗어날 수 있었소. 복면인들을 모두 따돌리고 말이오. 그런데……" 자랑스럽게 말하던 신주낭객의 얼굴빛이 어두워지며 은은한 공포가 떠올랐다. 그 의 뇌리에 삼 년 전 그날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던 것이다. 적들의 추격을 따돌렸다고 안심하고 있던 그의 귓가에 강한 내공을 담은 일성이 울렸다. "여기까지다." 소리는 하늘에서 들려 왔고 위를 올려다본 신주낭객은 한 인영이 손을 매의 발톱 과 같이 세워 자신을 압박해 옴을 보고는 기겁을 했다. 금사진! 그리고 그의 파천혈조(破天血爪)! "그의 공격은 무서웠소. 나는 십 초를 넘기지 못하고 팔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지. 원래 천랑도법은 두 손을 함께 사용하는 큰 기세가 특기이니 난 대항할 방법을 잃어버렸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소." 금사진의 혈조에 그의 생명이 끊어지기 직전, 멀리서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울렸 다. 그러자 믿을 수 없게도 금사진의 혈조가 방향을 바꿔 땅을 후려치는 것이 아 닌가?


다시 한 번 호각이 울리자 금사진은 망설이지 않고 몸을 뒤집어 호각 소리가 울린 방향(方向)으로 날아갔다. 신주낭객 구곡인(九曲刃)은 천우신조로 목숨을 건지기는 했지만 내상이 심해 움직 이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흑회(黑會)의 놈들이 나타난 것은 내가 한창 내공으로 요상술을 시행하고 있을 때였네. 그들이 내 옆에 떨어진 천랑패(天狼牌)를 보자 이용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 는지 나를 데려다가 가두어 둔 것이네." 잠자코 말을 듣고 있던 섭수진이 물었다. "그 흑회의 인물들과 금사진과 함께 있던 복면인들은 한패가 아닐까요?" 구곡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 아닐 거요. 일단 복면이라고는 하지만 그 색과 모양이 전혀 달랐고, 또 금사 진의 세력이 크다고는 하나 이 흑회(黑會)의 힘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소. 이들 흑회의 세력(勢力)은……!" 구곡인이 몸을 떨었다. "자네들이 나를 구출해 준 오늘의 일은 무척이나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네. 현령 과 황령이 제법 고수이긴 하나 그 위의 지령이나 천령과의 차이는 엄청나네. 게다 가 회주란 자와 몇몇 정체 불명인들의 무공은……" 그는 아마도 우연한 기회에 그들을 본 듯했다. 신주낭객은 강호에서 결코 약한 인물이 아닐진대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그만 큼 흑회가 무섭다는 뜻이었다. 진소백이 물었다. "혹시 두 세력에 무슨 관계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습니까?" 구곡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 아니오. 나는 비록 갇혀 있었지만, 간수들의 대화나 간간이 밖에 보이는 풍 경에서…… 확신할 수 있소이다." * * *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요?" 옆 자리에 앉은 섭수진의 말에 진소백은 정신을 차렸다. 장내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화약이 폭발하는 상황이라, 경력(勁力)과 호통 소리가 난무하며 검광과 도광이 섞여 돌아가고 있었 하지만 장내의 소란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듯 진소백은 차분한 어조로 섭수진에게 전음을 보냈다. "만일 고숭무가 흑회의 회주라면, 아니, 적어도 그 세력을 등에 업고 있는 자라면 장내에는 반드시 백회(白會)란 세력에 속한 자들도 있을 것이오!" 진소백의 말에 장내를 다시 한 번 둘러보는 그녀에게 또다시 그의 전음이 들려 왔


다. "만일 고숭무가 오늘의 위기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를 해치운 사람이 바로 백회 (白會)의 인물임을 내 보장할 수 있소!" * * * 섭수진은 전날 구천(仇賤)이 했던 말을 기억했다. "제가 흑회의 적도들에게 받았던 명령 중에는 그 백회(白會)란 자들에 대한 공격 도 있었습니다." 구곡인의 말에 보충하여 구천이 끼여들었다.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었지만 흰 복면을 쓴 자들을 공격하여 기이하게 생긴 침(針)과 관(管)으로 이루어진 침통을 빼앗아 온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공격 했던 자들이 백회에 속한 인물들이라면 백회와 흑회는 서로 적대시하는 세력임이 틀림없습니다." '침(針)'이라는 말이 섭수진의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혹시 그 침과 침통의 형태가…… 아닌가요?" 그녀는 금사진을 죽게 한 침의 모양을 구천에게 설명해 주었 "어떻게 아신 겁니 까? 정확히 그런 모양입니다." 그녀가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에 기뻐하고 있을 때, 진소백이 다시 구천에게 물었 다. "당신은 엽평이란 소년을 공격한 일이 있지요?" 구천에 눈에 의혹이 서렸다.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진소백은 답하지 않고 계속 묻기만 했다. "그 일 역시 흑회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소?" 구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어린 소년을 공격하다니, 그건 실로…… 그런데 이상한 일이 하나 있소. 그 들은 엽평을 잡아오기는 하되 만일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적당히 싸우다가 물러나라고 지시했 소!" 진소백이 눈을 빛냈다. "당연한 일이지. 당연히 그래야지!" 무슨 말일까? 2 감춰 두었던 적염의 무공은 의외로 대단했다. 그녀는 금청청의 일검을 맨손으로 받아 내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앵아의 비수 (匕首)로 가슴이 찔린 상태임을 감안할 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러서는 그녀의 귀에 어떤 사내의 전음이 들려 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 자리를 피하시오. 내가 돕겠소." 항상 자신과 정염(情炎)을 불태웠던 사내! 그와의 뜨거웠던 기억에, 위기의 상황에서도 달콤함에 젖어들었던 적염(狄艶)은 등뒤가 화끈해짐을 느꼈다. "염아!" 아버지인 풍운(風雲) 진인(眞人) 적일수(狄逸秀)가 크게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날 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등뒤에는 도(刀) 한 자루가, 도신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이 박혀 있었다. 누굴까? 누가 적염에게 도를? 적염의 몸이 발작적으로 뒤로 돌았다. 그 바람에 도가 뽑혀 나오고 상처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아났지만 적염은 자신을 찌른 자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사공두(司空斗)였다. "어, 어떻게 당신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사공두의 일도가 다시 그녀의 목을 쳐버렸던 것이다. 악녀(惡女)의 머리는 허공을 날아 바닥을 굴렀다. 그 눈은 깊은 불신의 빛을 담고 있었다. "흥, 감히 나 같은 약자(弱者)가 너를 죽일 수 있을 줄은 몰랐겠지. 하지만 방주 의 은혜를 생각하면 나는 비록 없는 힘이라도 내서 너를 죽일 수 있다." 사공두의 눈은 깊은 증오로 떨렸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강한 복수의 염(念)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말을 맺기가 무섭게 생명의 위기를 맞아야 했다. "사공`─ 두! 목을 내놓아라!" 적일수가 분노하여 외치며 그의 가슴을 노려 왔던 것이다. 퍼퍼펑! 적일수의 복마장법(伏魔掌法)에 삼 장을 연속으로 얻어맞은 사공두가 비틀대며 입 으로 피를 토하고 물러섰다. 그래도 마음이 풀리지 않는 듯, 다시 적일수의 손끝에 모아진 개천풍운조(開天風 雲爪)의 위세는 금방이라도 사공두의 가슴을 헤집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무슨 짓이에요?" "손을 멈추시오! 무량수불!" 금청청의 뾰족한 외침과 화산파 현천자의 도호가 연달아 울리며 적일수의 개천풍 운조를 막아 섰다. 퍼펑!


파열음(破裂音) 속에서 금청청과 현천자의 신형이 적일수와 사공두 사이에 내려섰 다.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진 사공두는 바닥에 주저앉아 정신없이 피를 토했다. "현천자! 당신이 감히 방해를 하다니!" 적일수의 눈에 노화가 차 오르며 그의 수염이 바람도 없는데 휘날렸다. 끓어오르는 노화에 저절로 진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현천자는 진중히 말했다. "우리는 단지 참관인일 뿐! 이 일은 모두 비응방 내부의 일이외다." 적일수가 진기를 돋우어 외쳤다. "무슨 소리냐? 방금 내 딸이 내 앞에서 죽어 가는 것을 보지 못했단 말인가?" 그의 외침에 주위의 탁자가 흔들리고, 공력이 약한 자들의 귀가 진동했다. 내공이 얼마나 강한지를 대변하는 현상들! "자중하시오, 적 장문! 이미 적염이 스스로 악행을 저지른 것을 시인하는 것을 보 았지 않소?" 현천자의 일성에도 내공은 담겨 있어, 은연중에 적일수의 정신을 압박해 갔다. 공격의 의미가 아니라 맑은 정신을 찾아 주는 효능이 있는 도가(道家)의 공력! 적 일수의 눈이 갈등으로 흔들렸다. 이윽고 고개를 든 그가 말했다. "좋소. 이 일은 비응방의 일! 그러나 내 딸을 죽인 자만은 용서할 수 없소!" 적일수가 사공두를 노려보았다. "지금은 그냥 간다만 언젠가 너는 이 일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만 할 것이다." 사공두가 핏자욱이 선연한 입을 열어 대답했다. "언제든지. 난 이미 복수를 했으니 더 이상 여한(餘恨)이 없소." 사람들의 눈에 감탄이 어렸다. 금사진이 왜 이처럼 무공이 약한 인물을 순찰당주로 임명했는지 이제야 진정 알 수 있었다. 이미 약세가 증명된 자가 이처럼 당당히 말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깊은 눈으로 사공두를 바라보던 적일수가 몸을 날렸다. "공동의 모든 제자는 이제 산으로 돌아간다." 멀리서 그가 전하는 말이 진기(眞氣)를 타고 퍼져 왔다. "저 사공 당주의 기개(氣槪)는 대단하군요.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서라면 기가 죽을 터인데!" 섭수진의 말에 진소백도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대단하오. 정말 대단하오." 진소백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는 저 두 사람에 조금도 못지않소. 정말 대단하지." 진소백이 쳐다보는 곳! 두 명이 대치하고 있었다. 심화절과 고숭무! 비록 마주보며 불꽃을 튀기고 있었으나, 그들의 처지는 사뭇 달랐다. 한 사람은 차기의 방주로 내정이 되었고, 한 사람은 배반자로 낙인 찍혔다.


고숭무! 장내에는 오직 그만이 고립(孤立)되어 남았다. 그는 몸을 잃고 뒹구는 적염의 머리를 보며 가늘게 떨었다. 핏줄이 불거져 나온 팔뚝은 점점 굵어졌고, 비례하여 주먹은 더욱 검어졌다. 파황권(破荒拳)의 공력이 주먹에 모아지고 있다는 증거! 떨리는 입술 사이로 신음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적염처럼 네놈들도…… 네놈들도 모조리 죽여 준다. 모조리." 심화절이 냉소했다. "흥! 고 당주, 아니, 고숭무! 음모가 모조리 드러난 이상 넌 피할 곳이 없다. 순순 히 죄과의 응보를 받아라." 고숭무는 충혈된 눈으로 심화절과 앵아를 번갈아 보았다. 앵아의 눈은 계속해서 심화절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비록 나이가 들었으나 한편으로는 선비의 고아함과 다른 한편으로는 무사의 강인함이 느껴지는 심화절의 얼굴! 그제서야 고숭무는 어떻게 된 일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앵아와 같은 여자는 보석에도 약했지만 사랑 앞에서는 더욱 약했을 것이다. 깨달은 뒤에 남은 것은 분노와 허탈! "크하하! 과연, 과연 심화절이로구나." 고숭무의 웃음에 진기가 실리기 시작함을 느낀 심화절이 급히 외쳤다. "차기 방주의 자격으로 명령하니, 비응방(飛鷹幇)의 모든 무사들은 반도를 공격하 라!" 쩌렁쩌렁한 외침은 권위(權威)를 담고 있었다. 대청 안에 있던 무사들의 수효는 약 삼십이었다. 모두 검을 들고 있었는데, 그 중 다섯 가량의 무공이 가장 높았다. 그리고 다섯 중 의 셋이 마침 고숭무 가까이에 서 있었다. 심화절의 명령이 떨어지자 몸을 날린 무사들 중에 이 셋이 가장 먼저 고숭무를 덮 친 것은 당연했다. "네놈들이 나에게 덤비다니!" 고숭무가 노갈하며 연달아 삼 권을 뿌리자, 그들은 일 권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뒤 로 밀려났다. 공교롭게도 그 중 한 명의 신형은 마침 달려오던 다른 무사의 앞으로 밀려나 오히 려 고숭무를 공격하는 데 있어 방해가 되었 다른 두 명이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을 때는 이미 이 장이 나 물러난 곳이었다. "괜찮으냐?" 마침 그곳에 있던 심화절이 수하들이 몸을 세우는 것을 도와 주며 물었다. 그러나 밀려나던 두 명이 그 기세를 그대로 빌려 검을 휘둘러 올 줄 어찌 알았으랴? " 헉!"


전혀 예기치 않았던 공격에 당황한 심화절이 급히 물러났지만 왼쪽 어깨와 오른 가슴에 각각 일검이 스쳐 피가 흘렀다. 당황의 외침은 무사들 속에서도 일어났다. 갑자기 열 명 정도의 인물이 주위에 있는 자신의 동료(同僚)들을 베어 버렸던 것 이다. 창졸간에 당한 공격임에도 어느새 품에서 두 개의 비도(飛刀)를 꺼내 던지며 심화 절은 신음했다. "최후의 한 수는 가지고 있었는가?" 그의 말에 답이라도 하는 듯 가슴에 비도가 박힌 두 무사가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 졌다. 고숭무의 권에 서렸던 검은 기운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이런 것은 권법의 변화라고 볼 수 없었다. 무언가 다른 공력으로 인한 것일 게다. 심화절의 눈에 이채(異彩)가 어렸다. "암흑동신(暗黑銅身)……?" 지금 전신에 검은 기운이 퍼진 고숭무의 모습은 정말 구리로 만든 듯, 흑색으로 칠한 동상(銅像)을 닮아 있었다. 하나 이 말의 의미는 그것보다 컸다. 암흑동신! 아니, 암흑동신공(暗黑銅身功)! 외문(外門)의 무공으로서는 금종조나 철포삼을 훨씬 능가한다는 기공(奇功)이었다. 특히 일반의 외공과는 달리 동황기(銅皇氣)라 불리는 내공이 같이 길러져, 대성하 면 적수를 찾기가 어렵다는 무공! "크하하, 과연 천기수사답구나! 제대로 알아보았다. 원래 파황권이란 무공은 없었 지! 다만 동황기(銅皇氣)를 권에 담아 썼을 뿐이다." 자신감에 찬 웃음을 웃는 고숭무의 앞뒤로 그의 적과 아군이 서서히 갈라지고 있 었다. 고숭무의 뒤에 선 자들은 부당주였던 귀조 독소명을 비롯한 숭무당의 인물들이 대 부분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순찰당의 부당주였던 신안추종 인소가 끼어 있지 않은가? 사공두 가 신음했다. "인소(引蔬)! 네가 어찌 이럴 수가……?" 어쨌든 현재로서는 다른 군웅들이 다 모인 심화절 쪽의 세력이 훨씬 강했다. 진소백과 섭수진, 매일도와 현천자, 흑수동주 도곡(陶曲) 등은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 일은 비응방 내부의 일인지라 끼여들기가 애매했다. 만일 강호 공도에 관한 것이라면 그들이 간섭(干涉)할 명분이 생기지만 방 내부의 문호 정리에 관한 것이라면 끼여들 수 없었 그들은 모두 심화절의 입만 바라보았다. 지금은 심화절이 비응방이니 그의 결정을 듣고자 했던 것이다.


이윽고 심화절이 입을 열었다. "강호 동도들의 관심에 감사드리나 지금 이 일은 비응방 내부의 일. 저희끼리 처 리하게 해주십시오." 그의 판단은 일면 옳았다. 반도(叛徒)를 찾았으니 섭수진과 진소백의 도움도 필요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심화절 측의 세력이 훨씬 좋으니, 외부의 인사를 끌어들여 방의 권 위(權威)를 떨어뜨리고 싶어하지 않음은 방주로서 당연한 일! 그러나 이 말은 들은 고숭무의 입가로 비웃음이 스쳐 갔음은 누구도 몰랐다. 3 이곳은 매우 밝았다. 사방이 하얀색으로 칠해져 더욱 밝음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원래 음모(陰謀)는 어두운 곳에나 어울렸다. 어둠이 온갖 추악함을 덮어 주기에. 그러나 이곳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밝음 역시 음모와 아주 잘 어울림을 알게 될 것이다. 너무 흰 색깔도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색깔을 상상하기 어렵게 하는 법이다. 그러기에 음모란 항상 예기치 않았던 곳에 있지 않은가? 순백(純白)의 사람이 어 느 날 붉은빛을 띠고 있음을 보는 것! 그것이 바로 음모였다. "일은 어찌 되어 가는가?" 질문은 하얀 벽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답은 아래쪽의 하얀 대리석 위에 부복한 백의복면인에게서 나왔다. "셋째는 잘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곧 비응방의 모든 권한을 갖게 될 것입니 다." 벽 속의 목소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이윽고 말했다.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다시 한 번 계획을 살피도록!" "명을 받듭니다, 대형(大兄)!" 고개를 숙인 백의복면인을 비추며 방안은 더욱 밝아졌다. * * * 중인들, 특히 비응방의 소속이 아닌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현천자에게로 쏠렸다. 그의 배분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현천자가 말했다. "심 당주, 아니, 방주의 말이 옳소. 우리는 뒤로 물러나도록 합시다. 이 일은 비응 방의 문호 정리에 관한 것이니…… 간섭할 수 없소!" 군웅들, 특히 진소백은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대청에서 물러나왔다. 대청 내에 남은 것은, 이제 심화절과 고숭무,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뿐이었다. 서로간에 흐르는, 폭발할 듯 팽팽한 긴장! 긴장(緊張)은 고숭무가 먼저 깼다. "흐흐, 심화절! 너는 방주의 자리를 두고 나와 한번 붙어 봄이 어떠냐?" 심화절이 침중히 말했다. "어제였다면, 나는 물론 너와 싸울 의향이 있었겠지. 그러나 너는 방주를 시해한


자! 대역 죄인과 어찌 다투겠느냐!" 심화절의 말에 심화절 뒤에 선 인물들이 싸움에 임할 태세(態勢)를 갖춤을 본 고 숭무가 광소했다. "크하하! 좋다. 어쨌든 성공하는 자가 영웅(英雄)이 되는 법이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그러나……" '그러나'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숭무의 몸이 앞으로 미끄러졌다. 고숭무와 가장 가깝게 서 있던 사람은 기서생 오명(烏明)이었다. 비록 절정고수는 아니었지만 한 자루의 풍운선(風雲扇)으로 펼치는 회선선(回旋扇)은 강호에서 제법 이름을 얻은 절기였다. 그런 오명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고숭무가 가만히 있겠는가? 그는 즉시 손에 들었던 풍운선을 펼쳐 대항(對抗)했다. 파팍`─`! 풍운선은 모든 살이 철로 이루어진 것이라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마치 천을 찢듯 날카로웠다. 마룡탐주(魔龍探珠)의 기세로 뻗어 오는 고숭무의 주먹을, 오명의 풍운선(風雲扇) 이 천선회회(天扇回回)의 일식을 전개하며 감아 가는 순간! 쩌저`─ 적! 풍운선이 그대로 찢어지며 오명이 뒤로 날려가는 것이 아닌가? "오명이 일초도 감 당하지 못하다니……!" 심화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신음하였고, 그의 뒤에 선 군웅들의 가슴에도 찬바람 이 스쳤다. 강호의 싸움은 숫자에서 아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이상, 몇몇 고수에 의해 승패 가 결정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심화절은 현천자(玄天子) 등을 나가도록 한 것이 실수였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 는 늦었다. 그들은 비록 숫자에서 조금 우위에 섰지만 고숭무를 당해 낼 절대고수가 없었다. 성질을 참지 못한 금청청이 외쳤다. "흥, 나는 네가 우리 모두를 당해 낼 수 있음을 믿지 못하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원수는 갚고야 말겠다." 금청청의 외침에 군웅들이 동요하자 심화절이 소리를 질러 제지했다. "여러분이 방주로 뽑아 주셨으니, 난 방주로서 최선을 다하겠소! 내가 나서서 저 반도(叛徒)와 가장 먼저 싸울 것인즉, 이 싸움에는 누구도 끼여들지 말 것을 명하오." 심화절이 당당히 앞으로 나서자, 고숭무는 통쾌하게 웃었다. "크하하, 옳다. 너는 당당한 방주(幇主)의 신분이니 죽음도 당당해야지!" 심화절을 보는 중인들의 눈빛이 변했다. 그들은 심화절이 정말로 방주로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 않고 나서는 자만이 영웅이 되고, 영웅만이 비응방의 방주로서 부 끄럽지 않았다. 심화절은 부끄럽지 않은 영웅이었다.


* * * "어찌 되어 가고 있나요?" 섭수진이 진소백에게 물었다. 그들은 모두 밖으로 나와 있으니, 진소백이라고 안의 사정을 알 리가 없지만 답답 한 마음에 물었던 것인데…… "지금 심화절과 고숭무가 막 싸우려 하고 있소!" 옆에 있던 현천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지청술(地聽術)을 전개하여 내부의 사정을 알아 보고 있었지만, 이 젊은 청 년이 자신과 같은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누가 이길 것 같은가요?" 섭수진의 물음에 진소백은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아마도 실력으로 싸운다면 고숭무겠지!" * * * 싸움은 치열했다. 고숭무의 절학은 이미 보았지만 심화절의 숨은 실력 또한 이토록 뛰어날 줄은 짐 작도 못 했다. 알려졌던 심화절의 절학은 천심비도(穿心飛刀)! 그러나 지금 그가 사용하는 무기는 긴 쇠가죽에 사방으로 비도를 꽂아 둔 띠였다. 비도가 띠를 이루었으니 비도대(飛刀帶)란 이름은 어떨까? 그는 이 무기를, 때로는 검으로 때로는 채찍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꼿꼿이 세워 찔러 갈 때는 검(劍)이었고, 힘을 풀어 휘감아 가면 채찍이었다. 때때로 기회를 보아 쇠가죽에 꽂힌 비도를 뽑아 던져 내기도 하니, 마치 동시에 서너 가지의 무기를 사용하는 듯 보였다. 이미 싸움은 백여 초를 넘었다. 위이`─`잉! 쇠가죽이 둥글게 말리며 회전을 시작했다. 사방에 꽂혀 있는 도가 날이 되어 돌아가니, 이것은 바로 륜(輪)의 기세(氣勢)! 가 공할 힘과 속도였지만…… "흥!" 고숭무가 냉소와 함께 일 권 삼 장을 륜의 중심부를 향해 내질렀다. 펑! 퍼펑! 회전축에 경력(勁力)을 맞은 비도(飛刀)의 륜(輪)이 회전을 멈추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흥, 이것도 있다." 심화절이 냉소하며 왼손을 뿌려 냈다. "웃!" 고숭무는 황급히 몸을 비켜설 수밖에 없었다. 유성과 같은 세 개의 빛살이 그를 스쳐 갔던 까닭이다. 하나는 헛되이 흘러갔지만


두 개는 그의 몸을 호신하는 동황기(銅皇氣)를 뚫고 길게 혈선(血線)을 그렸다. "천심비도(穿心飛刀)! 과연 대단한 위력이구나!" 두 개의 혈흔(血痕)을 입었음에도 고숭무의 위세는 조금도 위축(萎縮)되지 않았고, 다시 쳐내는 권의 위력은 오히려 전보다 강해 보였다. "타핫!" 심화절은 다시 륜을 풀어 검으로 만들어 고숭무의 권세(拳勢)를 막아 갔다. 동시에 두 개의 비도를 다시 던져 냄도 잊지 않았다. 칭! 칭! 경기와 경기! 비도와 동황기(銅皇氣)가 충돌하며 싸움은 다시 백중지세(伯仲之勢)로 어울려 갔 다. 싸움은 막상막하(莫上莫下)! 이미 이백여 초를 넘기는데도 누구도 열세를 보이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심화절이 병기의 득(得)을 보며 종종 득수(得手)하고 있었지만, 어 느 공격도 치명적(致命的)이지는 못했다. 오히려 고숭무의 권세는 조금도 약해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아 지켜보는 비응방의 중인들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 * * "어때요? 누가 유리해요?" 귀를 기울이고 있는 진소백에게 섭수진이 물었다. "고숭무의 공격에는 모두 강한 힘이 실려 있어 매우 위협적이기는 하나 쾌(快)가 결여(缺如)되어 있고, 심화절의 공격은 모두 표홀(飄忽)하여 쾌(快)가 있으니 당장은 심화절이 유리한 것 같소!" "심화절이 이길까요?" 진소백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그가 질 것을 알면서도 굳이 일 대 일로 싸웠단 말인가요?" 진소백이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무공은 쾌(快)이고 고숭무의 무공은 강(强)임을 아는 까닭이오. 만일 단둘만 의 비무가 아니라면 고숭무의 강한 힘에 많은 사람이 다칠 것임을 심화절은 알고 있는 것이오." 섭수진의 눈에 염려의 빛이 어렸다. "전 한때 그가 범인이 아닌가 의심도 했었어요. 한데 지금 방의 명예와 다른 사람 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조차 내던지고 싸우는 모습을 보니, 사람이란 정말 겉만 보 고는 알 수 없군요?" 진소백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정말 겉만 보고는 알 수 없는 거요." * * *


장내에서 심화절과 고숭무의 싸움을 보는 자들 중에서는 노굉(魯宏)의 나이가 가 장 많았다. 나이가 많은 만큼 강호 경험도 깊었고, 또한 대세를 보는 눈도 있었다. 겉으로는 심화절에게 유리해 보이는 이 싸움이 사실은 조금도 그렇지 못하다는 점 을 그는 알고 있었다. 간간이 던지는 심화절의 천심비도가 위력적이기는 했으나, 비도의 개수에는 한계 (限界)가 있었다. 게다가 심화절은 공력의 약함을 쾌로써 극복하고 있으니, 고숭무가 한 번 움직일 때 두 번, 세 번 움직여야 했다. 피로가 빨리 올 것은 자명(自明)했다. 노굉의 예상은 정확하여 사백여 초가 가까워지자 심화절의 동작(動作)이 눈에 띄 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크하하…… 지쳤느냐?" 다섯 군데 비도가 스쳤고, 왼쪽 어깨에는 깊숙이 한 개의 비도가 박힌 고숭무의 외침이 더욱 힘이 있는 것은 노굉의 짐작이 정확했다는 의미였다. 일단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심화절은 고숭무의 공세를 완전히는 피해 내지 못했다. 겨우 피하고는 있으나, 상대는 산을 무너뜨린다는 철권(鐵拳) 고숭무였다. 스친 공 격의 여파(餘波)만으로도 살갗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우욱!" 마침내 이십여 초가 더 지나자 심화절은 더 이상 피해 내지 못하고 일권을 가슴에 맞고 말았다. "심 방주!" 마음속으로 감복(感服)한 사람들이 심화절에게 달려왔고, 고숭무는 광소(狂笑)를 터뜨렸다. "크하하, 네가 이 정도의 무공을 지닌 것은 뜻밖이었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현천자 등을 간섭하지 못하게 한 것이 천추(千秋)의 한이 될 것이다." 미친 듯이 웃는 고숭무를 보며 노굉은 앞이 캄캄했다. '정녕 하늘이 비응방을 버린단 말인가?' 제 17 장 중중음모(重重陰謀) 1 섭수진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여인의 이런 모습은 정말 귀엽다고 진소백은 생각했다. "그럼, 심화절은 살아남기가 힘들겠군요?" 진소백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싸움은 힘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지 않소? 생사(生死)의 문제라면 더욱 그렇지." "심화절에게 감춰 둔 수가 있다는 말인가요?" 진소백이 다시 웃었다.


"나는 그와 같은 인물이 최후의 승부수(勝負數)도 없이 싸움에 임했다고는 믿지 않소." 섭수진도 그 말에는 동감했다. 그렇지만 무슨 방법이 있을까? 고숭무의 변절(變節)은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그의 숨겨진 무공은 너무나 가공했 다. 심화절의 심기(心機)가 비록 하늘을 읽는다 하나, 이런 일마저 대비할 수 있었을 까? * * * "네 심기가 아무리 하늘에 닿아도 지금의 위기(危機)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섭수진의 생각과 같은 말을 지금 고숭무가 하고 있었다. 그랬다. 설혹 하늘에 닿는 재주가 있다 해도 지금의 위기를 벗어날 수는 없어 보 였다. 하나 심화절은 담담했다. "네가 나를 이겼다고 너를 죽일 수 있는 자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고숭무가 조금은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당연하지. 여기 누가 있어 내 십 초를 받아 내겠느냐!" 그의 말은 옳았다. 금청청도 자신의 무공에 자부심(自負心)을 가졌으나, 오늘의 격전(激戰)을 보고 기 가 질렸다. 도대체 이런 고수들이 어떻게 한 방파에 모여 있었을까? 심화절은 여전히 차분했 다. "이미 천기(天機)를 읽었다. 하늘이 네 죄업(罪業)을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다." 고숭무는 그의 말을 듣고 대소(大笑)했다. "크하하, 겨우 그따위 소리냐? 하늘이 어떻게 나를 죽인다 하더냐? 네가 죽음에 이르러 실성을 했구나! 크하하!" 심화절이 단호히 말했다. "흥, 네가 감히 하늘을 향해 외쳐 볼 자신이 있느냐?" 고숭무의 웃음 소리가 더욱 커졌다. 하늘이 벼락을 내려 악인을 심판한다는 얘기는 전설에서나 나올 말이다. 실내(室 內)에서 무슨 벼락이 떨어질 것인가? "좋다. 내 몇 번이고 외치마!" 그는 정말로 크게 외쳤다. "누가 나를 죽이겠는가! 하늘이 죽이겠는가?" 모든 음모자들은 항상 초조와 긴장 속에서 산다. 언제 자신의 음모가 발각될지 모르고, 또한 예기치 않았던 변수가 실패로 연결될 수도 있으므로. 긴장이 해결될 길은 오직 하나, 음모가 성공하는 것뿐이었다. 고숭무는 돌아오기는 했으나, 마침내 그의 목적지(目的地)에 도달했고, 음모는 이 루어졌다. 비응방의 주인이 되면 광산(鑛山)에 대한 사 할의 이권(利權)이 보장되 고, 그 후에는 흑회의 인물들과 힘을 합해 무림에서 힘을 키워 나가리라. 모든 긴장이 풀어진 고숭무의 외침은 그래서 더욱 크고 통쾌해 보였다.


"누가 감히 나를 죽이겠는가!" 누가 감히 고숭무를 죽이겠는가! 대답은 느닷없이 뒤에서 날아왔다. "내가 죽인다!" 그리고 핏빛 손톱은 대답보다도 훨씬 빨랐다. 고숭무는 벼락맞은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정말로 하늘이 벼락을 내렸는가? * * * "비록 고숭무의 숭무당(崇武堂)이 오래 전부터 계획을 세워 왔겠지만, 다른 사람들 도 바보는 아니오." 섭수진이 말을 받았다. "분명 첩자(諜者)를 심어 두었을 거란 말이죠?"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가장 가능성이 큰 사람은 역시……" 이번에는 둘이 동시에 외쳤다. "귀조 독소명(獨蘇冥)!" * * * "귀, 귀조! 네가……!" 고숭무의 말은 원활(圓滑)하지 못했다. 목에 박힌 혈조가 혈행(血行)을 방해하여 발음(發音)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화절이 냉랭히 말했다. "선 방주께서는 생전(生前)에 이미 너를 의심하고 계셨다. 다만 방주께서 돌아가시 기 전에 네놈을 처치하지 못했음이 가장 큰 한이다." 심화절이 먼저 생사 대결을 벌여 그의 힘을 뺐고, 다시 말로써 긴장을 풀게 했다. 고숭무가 스스로의 기분에 취해 광소(狂笑)하지 않았다면 독소명이 일격에 치명타 (致命打)를 날릴 수는 없었으리라. 고숭무는 각혈하며 겨우 말했다. 기침을 할 때마다 혈조가 박힌 그의 목에서 끊임없이 선혈이 흘러나왔다. "쿨룩! 과, 과연 너답군. 쿨룩! 그러나 너, 너 또한……!" 그의 '너 또한'이란 말이 떨어질 때! 갑자기 심화절의 등으로 강한 경풍(勁風)이 몰아치는 것이 아닌가? 동시(同時)에… … "위험하오!" 누군가의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도풍(刀風)이 일었다. 고숭무의 눈이 뒤집히며 그가 가까스로 손을 들어 도풍을 일으킨 다.

인물을 가리켰


"너, 너 이노옴!" 독소명이 혈조에 힘을 주었고, 고숭무는 말을 잇지 못하고 상처와 노기로 인해 죽 어 버렸다. 비로소 중인들은 장내의 변화를 살필 여유를 얻었다. 보라! 심화절의 등뒤로 오명의 풍운선(風雲扇)이 닿아 있는 것을! 고숭무의 일초에 내상 을 입고 혼절했던 오명이 몸을 일으켜 심화절의 등을 공격했던 것이다. 예상할 수 없었던 일초였기에 심화절은 절명(絶命)의 위기에 빠졌으나, 때마침 오 명의 행동을 주시하던 사공두가 급히 일도(一刀)를 오명에게 날렸다. 사공두의 도가 가슴에 박히자, 오명이 전개했던 풍운선(風雲扇)의 일초는 진기를 잃은 채 심화절의 등을 쳤고, 심화절은 큰 타격 없이 무사할 수 있었다. 심화절은 사공두를 다시 보았다. 평소 방주에 대한 아부(阿附)로 권력을 얻었던 인물로만 생각하여 경원(敬遠)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을 때 인물됨이 드러나는 법이니, 그는 금사진이 사공두를 아 꼈던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오명이 그처럼 쉽게 당한 것이 이상하다 생각했소. 그래서 유심히 지켜봤던 것뿐 이오." 사공두의 말에 심화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이로써 비응방이 비로소 다시 섰으니, 사공 당주의 공이 가장 컸음을 누구도 부 인하지 못할 것이오. 나는 차후로 사공 당주와 독소명을 중히 쓸 것이니, 누구도 이의가 없을 줄로 믿소!" 남은 자들은 모두 기뻐했다. 그러나 고숭무의 편에 섰던 자들의 눈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생사를 건 강호의 도박은 항상 끝이 같다. 승자(勝者)는 살고 패자(敗者)는 죽는다. 이것만이 강호의 유일한 법칙이었다. * * * 하얀 벽. 다시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어찌 되었느냐?" 백의복면인이 공손히 말했다. "일은 예상대로 되었습니다. 삼형(三兄)이 비응방의 모든 권한을 쥐기까지는 이제 단 하나의 걸림돌이 있을 뿐입니다." 벽의 목소리는 격동한 듯 떨렸다. "좋다. 너는 항상 조심(操心)하여 그분의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라." "명심하겠습니다, 대형(大兄)!" 다시 고개를 수그리는 복면인의 뒷모습은 의외로 왜소했다.


위로는 빛이 흘렀다. 그 밝은 빛에 감추어져 음모(陰謀)가 조용히 흘렀다. 2 비응방의 한곳이 불타고 있었다. 불은 하늘을 삼킬 듯 넘실거렸지만, 정작 하늘로 오르는 것은 연기뿐이었다. 인생처럼! 야망(野望)의 불에 온몸을 태우는 자는 정작 야망을 이루지 못하고, 다만 스스로 타버리고 마는 인생처럼! 흉험했던 싸움에서 죽은 시신들을 화장(火葬)시키는 중이었다. 금청청의 가슴에 감회가 밀려왔다. 그녀는 아버지의 원한(怨恨)을 갚았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을 해야할까? 원한을 갚 았다고 해서 마음속의 응어리가 풀리는 것은 아님을 그녀는 알게 되었다. 게다가 이제 비응방과는 별로 인연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옆에 선 매일도의 손을 더욱 꼭 잡으며,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으려 애썼 다. 심화절이 입을 열었다. "이 불은 우리 비응방을 잠식해 왔던 모든 악을 삼키는 불이며, 방의 앞날을 밝히 는 불이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흑회(黑會)! 고숭무가 속했던 흑회가 남아 있었다. 심화절은 흑회의 일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금청청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게 될지도 몰랐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당장 쳐들어가지 않는 거죠?" 금청청의 분노는 당연했으나 현실(現實)은 감정과는 다른 문제였다. "그들의 진정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없으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소." 심화절의 신중한 이 말이 현실(現實)이었다. 흑회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들이 고숭무와 관련이 있고 천지현황(天地玄荒)의 사 령(四令)이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만일 다른 자들도 고숭무의 파황권, 아니, 암흑동신공(暗黑銅身功)을 연성했다면 문제가 심각해지겠군요." 매일도가 침중히 말하자 모든 이들이 공감했다. 물론 가능성은 희박했다. 암흑동신공(暗黑銅身功)은 그 위력이 큰 만큼 익히는 방법 또한 너무 힘들기 때문 이다. 계속되는 불과 얼음의 수련을 견딜 수 있는 자가 둘이나 있을 가능성은 거 의 없었다. 오랜 숙의 끝에 심화절이 결론을 내렸다. "일단은 내일 치를 전 방주님의 장례를 성대히 마치도록 모든 힘을 다하겠소. 그 러나……" 심화절이 굳은 의지를 담아 말했다. "흑회(黑會)의 인물들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오. 반드시!" 심화절은 굳게 맹서(盟誓)했다. 흑회와 그의 싸움은 피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 싸움이 언제 시작되느냐였다. 어쩌면 곧 시작될 수도 있었다. * * * 어두운 밤을 검은 신형이 가르고 지나갔다. 굳은 맹서를 한 비응방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들보다 빠르게 흑회(黑會) 의 실체로 접근하는 인물! 엽혼(葉魂)이었다. 엽혼의 몸은 검은 피풍의(被風衣)로 싸여져 어둠 속에서도 눈에 쉽게 띄지 않았다. 나뭇가지에 바짝 몸을 붙인 그의 아래로 동초(動哨) 한 명이 그냥 지나갔음은 결 코 운이 아니었다. 동초를 보낸 엽혼의 몸이 다시 움직였다. 술래잡기에서 결코 들키지 않는 방법이 있었다. 술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방법! 만일 술래가 갑자기 뒤로 돌아서는 일만 없다면 술래의 뒤가 가장 안전했다. 한번 찾아본 곳을 다시 둘러볼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이것이 병법에서 말하는, 가 장 위험한 곳이 가장 안전하다는 말의 오의(奧意)가 아닐까? 지금 엽혼이 뒤를 밟 는 동초(動哨)가 갑작스럽게 뒤로 돌아설 까닭은 전혀 없었다. 정해진 구역과 정해진 시간이 있으니, 그는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하고 전진하기 만 했다. 엽혼도 그의 뒤를 따라 전진했다. 뒤쪽의 동초를 경계하지 않아도 되니 더욱 좋았다. 문제는 간간이 만나는 입초(立哨)들이었다. 엽혼은 그들이 구호(口號)를 주고받는 시간을 이용했다. 아주 짧은 시간 작은 소리로 주고받는 구호였지만, 엽혼이 움직이고 그 미세한 소 리를 감추어 주기에 충분했다. 얼마 후, 건물들의 불빛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동초가 자신에게 주어진 야간 순찰의 임무를 무사히 마쳤음에 즐거워할 때, 엽혼 의 눈에도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기쁨이 차 올랐다. 검은색 피풍의는 어두운 밤에 보이는 처마의 검은색과 좋은 보호색(保護色)을 이 루었다. 둥근 창을 통해 방안의 풍경이 엽혼의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화선이 흑회의 인물들과 거처한다는 곳!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할까? 화선은 혼자 있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와 같이 있었다. 엽혼의 눈에 이채(異彩)가 어렸다. 그는 한 번도 화선에게서 음탕한 기운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삼 년이나 봤음에도 그가 느끼지 못했던 분위기를, 지금 화선이 연출하고 있었다. 얼굴 가득 수염을 기른 사내가 화선의 몸 위에서 막 떨어졌다. 그의 등은 땀으로 번들거렸고, 화선의 얼굴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내가 미련이 남았는지 다 시 한 번 그녀의 젖가슴을 더듬으려 하자 화선의 눈빛이 냉혹해졌다. "네가 진정 겁을 모르는구나!"


사내의 눈이 공포로 물들며 급히 손을 거두고는 바닥에 를……!"

엎드렸 "여, 영주, 죽을죄

사내가 떠는 모습을 보자, 화선은 눈빛을 바꿔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설마 널 죽이기라도 하겠느냐? 정리(情理)가 있질 않느냐?" 사내는 비로소 웃음을 되찾았다. "그, 그렇습니다요. 아까의 정염(情炎)은…… 헤헤." 사내가 웃는 것을 보자 화선의 눈이 다시 차가워졌다. "정염(情炎)이라니, 무슨 말이냐? 감히 네가 나를 희롱(戱弄)하는구나!" 사내의 눈이 다시 겁에 질리며 부들부들 떨었다. "아, 아니 좀 전에……"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여인의 손이 휘둘러지자 이미 시체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좀 전까지 여인의 젖가슴을 쥐고 희열에 떨던 사내의 손은 지금 허공만을 움켜쥔 채 굳어 버렸다. 목덜미에서 뿜어지던 피는 화선이 던진 옷자락에 휘감기자 멎었다. 방안에 핏자국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은 그녀가 사내의 목을 자르고 옷가지를 집어던져 목의 상처를 감싸는 행동이 그만큼 빨랐음을 뜻했다. 옷가지가 점점 붉게 물들어 곧 피가 땅에 떨어질 순간이었다. 화선은 급히 침대를 들어 시체를 그 밑으로 굴려 넣었다. 잠시 후, 덜컹! 침대 밑에서 소리가 들림을 확인한 화선이 옷을 입기 시작했 화선은 옷을 모두 입었다. 동경(銅鏡)을 보며 머리 매무새를 정리하던 그녀가 눈썹을 찡그렸다. 침대 자락에 조금 난 핏자국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더러운 자식! 내 침실을 더럽히다니. 내가 그놈을 너무 쉽게 죽였다." 사내는 화선에 의해 목이 잘려 죽었건만 그녀는 침대가 더럽혀진 것에 대해 그에 게 분노하다니! 그녀가 이를 갈고 있을 때 실내에 한 복면인이 나타났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가슴에 선명하게 수놓인 천령(天領)이란 글씨는 그가 흑회의 천령주(天令主)임을 말해 주었다. "당신이 지금까지 잡아먹은 남자들이 모두 살아 있다면 능히 일방을 세워 천하를 지배했을 것이오." 이를 갈던 화선이 그의 말에 몸을 돌렸다. 그녀의 얼굴엔, 어느새 분노는 사라지고 쓸쓸한 슬픔만이 남아 있었다.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령(天領)을 바라보는 그녀.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요? 당신마저 나를 오해(誤解)한다면 내가 어찌 살아 가야 하나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자신의 가슴이 흔들림을 느낀 천령이 급히 화제를 돌렸다. 이 여자를 상대해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지령(地領)은 실패했소." 화선이 그를 조용히 보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조금도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당신은 왜 돕지 않았죠?" "도울 수 없었소. 만약 내가 나섰다면 현천자(玄天子) 등도 나섰을 테고, 결과는 같았을 것이오." 화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쨌든 평소 가장 무공이 강한 지령(地領)을 질투해 온 당신에게는 잘된 일이군요." 천령이 펄쩍 뛰었다. "무슨 말이오! 난……" 화선이 그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아니, 그렇게 뛰실 것 없어요. 난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님을 잘 알고 있으니까 요." 화선이 자신의 얼굴을 천령의 얼굴에 바짝 붙이며 향기로운 숨결을 토했다. "다만, 존령(尊領)께서 부르시니 빨리 가보세요." 존령이란 말에 천령의 눈이 흔들렸다.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왜 빨리 말하지 않았소?" 그는 역정을 내며 유령(幽靈)처럼 사라졌다. 천령이 사라지자 화선의 웃음이 그대로 굳어졌다. "흥! 네놈이 아무리 머리를 쓰더라도 존령의 눈을 피하진 못할 것이다." 이때였다. 화선의 눈빛보다 더욱 차가운 음성이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이 음성은 비단 차가 울 뿐 아니라 너무도 갑작스러워서 화선은 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존령(尊領)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목뒤에 느껴지는 싸늘한 감촉이 검날임을, 화선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곳은 경계가 엄밀한 곳! 함부로 외인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외인이 들어왔다는 것은, 그의 무공이 그만큼 고강하다는 의미! 힘으로 상대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의 피는 이미 식었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뜨거웠다. 그녀는 남자를 상대할 가장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음을 항상 자부했다. "소첩(小妾)이 무얼 알겠습니까? 전 다만, 어맛!" 놀랐는가?


그녀의 손이 그만 쥐고 있던 옷을 놓쳐 버렸다. 하늘빛 화의(華衣)가 흘러내리며 눈부신 화선의 엉덩이가 불빛 아래 그 흰 자태 를 드러냈다. 목뒤를 노리던 검기의 기세가 늦추어짐을 느낀 화선은 미소를 지으며 급히 몸을 돌렸다. 두 손에는 어느새 붉은빛의 바늘이 들려 있어 뒤를 노리고 진기를 실어 갔다. '흥, 사내란 누구나 마찬가지지!' 그러나 몸을 채 돌리지 못해, 곡지혈 부근이 따끔거림을 느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몸은 침대 위로 난폭하게 처박히고 있었다. "네 정체가 설마 탐화침모(探花針母)라고는 생각 못 했다." 탐화침모는 옷을 바느질하는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열 쌍의 바늘로 강호의 영재(英才)들을 꿰매었다. 그녀의 마수에 걸려 수많은 영재들이 원정을 잃고 폐인이 되자, 천추학림(千秋學 林)에서는 그녀를 공적으로 선언했고, 십여 년 전부터 그녀의 이름은 강호상에서 사라졌었다. 그런 탐화침모가 흑회(黑會)에 있었다니! 그녀의 눈에 비로소 사내의 모습이 정면으로 들어왔다. 중년의 상인! 엽혼이 항상 분장했던 이엽(李葉)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앙칼지게 입을 열었다. "넌 누구냐?" 의혹(疑惑)은 화선뿐 아니라 엽혼의 얼굴에도 떠올랐다. 화선이 그를 몰라보다니! 어떻게 된 것일까? 삼 년간이나 거래했던 화선이 자신을 몰라보다니…… "너는 성 내의 소하루( 霞樓)에서 살인 중개업을 했었다. 맞느냐?" 화선이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엽혼은 신음했다. "너는 화선이 분명하냐?" "그렇다." 엽혼의 구절검이 심중의 격동을 이기지 못하고 화선의 목을 파고들어 혈선(血線) 을 만들었다.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앞에 있는 이 여자는 틀림없이 화선이었다. 하지만 그가 알던 화선은 아니었다. 그의 화선은 이처럼 음탕하지도 잔인하지도 않았다. 기녀였지만 항상 기품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난 삼 년간 그에게 청부를 중개했던 화선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 가? 다른 여자가 화선으로 분했던 것일까? 무슨 이유로……?


수많은 의문이 스쳐 갔지만 단서는 없었다. 눈앞에 있는 진짜 화선이 유일한 단서 였다. 엽혼의 눈빛이 강해졌다. "나는 이제 나흘 이상을 살 수 없다. 죽음을 눈앞에 둔 자는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너는 순순히 대답을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화선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남을 느꼈다. 눈앞의 사내와 같은 눈을 그녀는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존령(尊領)의 눈! 이런 눈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한없이 잔인해질 수도 있음을 그녀는 체 험(體驗)으로 알았다. 화선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결코 지금의 위기를 벗어날 수 없음을 느꼈다. 반항은 쓸데없을 것이다. 엽혼에게 미인계가 통하지 않음은 이미 눈빛을 통해 알았다. 하지만 화선은 반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쓸데없음을 알면서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우리 주위엔 많 어쩌면 순순히 모든 것을 묻는 대로 말한다면 살아날지도 모른 지금 화선은 엽혼이 이미 그녀를 죽이 기로 결심했음을 모르고 있었다. 엽혼이 가장 싫어하는 여자가 음탕한 여자였다. 그리고 그녀는 비단 음탕할 뿐 아니라 잔인하기까지 했다. 화선이 살아날 방법은 없었다. 3 비응방에 새날이 밝았다. 오늘은 특별했다. 오전(午前)에는 전 방주인 금사진의 장례가 치러지고, 오후(午後)에는 신임 방주 심화절의 취임식이 예정되었다. 이런 날 가장 바쁜 사람은 뭐니뭐니 해도 아패(阿覇)와 같은 자들이었다. "씨펄, 어떻게 된 것이 요즘은 매일 청소를 해도 표가 안 나는 거야? 젠장, 누구는 치우고 누구는 어지르고……" 쫑알거리는 아패의 머리 위로 언제나처럼 하인들의 우두머리인 노대(老大) 장육삼 의 일격이 떨어졌다. "이놈이 또 일은 하지 않고 쫑알거리고 있어!" '아싸, 피했다.' 아패는 잽싸게 피하고서 이어질 군밤에 대비하여 장육삼의 주먹을 노려보았다. 그 러나 장육삼은 아패를 보지 않았다. 그의 눈은 멀리서, 지금 막 비응방에 들어서는 한 사람을 쫓고 있었다. 지극히 평 범한 새로운 문상객 중의 한 명을! '드디어 그가 왔다.' 손을 부르르 떠는 장육삼의 몸이 바닥을 누르며 자국을 남기고 있었지만 아패는 그런 것을 몰랐다. 다만 노대(老大)의 모습이 평소와는 달리 어딘가 이상하다고만 느꼈을 뿐이었다.


* * * 금사진의 장례는 성대(盛大)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금청청은 쓸쓸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례식보다 는 취임식(就任式)을 염두에 두고 온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죽은 영웅보다 살아 있는 영웅에게 인심이 모임은 당연한 이치지만 그녀는 씁쓸한 감회를 이길 수 없었다. "사형(師兄)! 우리 아버지의 장례식만 끝나면 바로 산으로 돌아가요." 매일도도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꾸나! 아니, 저기……" 금청청은 매일도가 가리키는 곳에서 한 노인을 보았다. "혈고죽(血枯竹)!" 뼈만 남은 듯한 몸의 혈고죽 냉설(冷雪)이었다. '저 사람이 도대체 비응방과 무슨 관련이 있어 여기에 온 것일까?' 혈고죽은 성품 이 괴팍하여, 평소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다만 은혜와 원한만을 기억하는 성품이었다. 그가 금사진과 은원(恩怨)이 있다는 말일까? 죽은 사람은 쉽게 잊혀진다. 금사진도 이제 망각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피어오르는 향연(香煙)과 몇 마디의 조문(弔問), 그리고 떨구는 눈물 서너 방울 아 래서. 살아남은 자만이 기억된다. 심화절은 살아남았으며, 훌륭히 기억되었다. 그만이 비응방(飛鷹幇)을 부흥(復興)시킬 능력이 있음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대표로서 금사진에 대한 조문을 받음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도 없었다. 냉설(冷雪)만이 예외였다. "흥, 딸인 금청청을 두고 왜 네가 상주(喪主)가 되었느냐?" 나이로 본다면 냉설이 월등했으나, 심화절이 이미 비응방의 정통을 물려받은 방주 임을 감안할 때 그의 어조는 심히 불손(不遜)했다. 그러나 심화절은 참았다. "방(幇)의 이름으로 치르는 장례(葬禮)이니 당연히 제가 상주가 됩니다. 금…… 낭 자가 앞으로의 제사를 따로 치를 수는 있습니다만." 그랬다. 강호상의 한 방파에 몸을 담게 되면 그 인연이 혈연에 우선했다. 금사진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냉설은 다시 한 번 냉소하며 향을 살랐다. 재배(再拜)하고 나오는 그에게 심화절이 말했다. "먼 길에 감사합니다. 여기에 성함과 고인(故人)과의 관계를 적어 주십시오!" 심화절이 내미는 방명록(芳名錄)을 보며 냉설은 또 코웃음쳤다. "네가 그러지 않아도 모든 군웅들 앞에서 말할 것이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냉설은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마당 곳곳에는 문상객들을 위한 천막이 있었고, 그 천막을 지탱하기 위해 세워 놓 은 나무기둥이 있었다.


높이가 삼사 장에 달하고 끝은 뾰족한 기둥이었다. 위에 몸을 세우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을진대, 지금 냉설의 신형은 극히 안정돼 보였다. "금 방주는 나를 대신해 한 명을 죽여 주었다." 군웅(群雄)들은 그의 신법에 대한 놀람에다가 궁금함까지 겹쳐 그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금사진이 그를 위해 누구를 죽였단 말일까? 하나 그들의 의문을 풀어 줄 말을 냉설이 이어 가기도 전에, 예상치 못한 욕설이 어디선가 터져 나왔다. "이 개자식아!" 외침은 군웅들 속에서 갑자기 나왔고,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았을 때는 욕설 을 뱉은 자의 몸이 냉설의 석 자 앞으로 이미 접근한 뒤였다. 두잠(杜潛)! 두가장(杜家莊)의 장주로서 인근에 얼굴이 꽤 알려졌다. 용감하기는 했으나 냉설 의 일초 상대도 되지 않는 그가 아들 두천화(杜天華)의 복수를 하고자 뛰어올랐던 것인데…… 두잠의 도약(跳躍)과 더불어 좌우에서 냉설을 향해 몸을 날리는 자들이 더 있었다. 두잠은 만에 하나 냉설을 만날 것을 대비하여 두가장의 전재산에 가까운 돈을 무 사를 사는 데에다 쏟아 부었던 것이다. "흥!" 냉소는 겨울 벌판에 날리는 눈과 같이 차가웠다. 사방을 몰아치는 혈죽(血竹)으로 만든 냉설의 죽창이 사방을 휘감았다. "아비가 자 식 놈 잘못을 사죄할 생각은 않고, 오히려 비호(庇護)하다니…… 자식의 죄를 아비 에게 대신 묻겠다." 혈포(血布)의 붉은빛과 혈죽의 붉은빛이 서로 섞여 돌아가며 냉설이 사방에서 덤 벼드는 다섯 명의 공세를 맞았다. 춧! 추슉! 단 일 초에 다섯 번의 변화(五變)를 일으키며 쏘아진 혈죽창은 네 명의 무사를 단 숨에 바닥으로 떨어뜨렸고, 마지막으로 두잠의 가슴을 찔러 갔다. 순간, "뭐 하는 짓이오!" 심화절의 입에서 쩌렁쩌렁한 외침이 터지며 노리며 허공을 갈랐다. 캉! 자신의 죽창을 찌르는 기세가 조그만 비도의 없다는 듯이 심화절을 보았다. 심화절의 표정은 굳었다. "당신들의 은원(恩怨)은 내 알 바가 아니나, 소." 냉설이 심화절을 자세히 보더니 이윽고 입을 "좋아. 내가 참도록 하지."

절세의 천심비도(穿心飛刀)가 혈죽을

힘과 상쇄됨을 느낀

냉설은 믿을 수

이곳에서 소란을 피운다면 용서 않겠 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혈고죽(血枯竹)이 양보를 하다니. 그의 평소 성품으로 미루어 어림 없는 일이었 다. 냉설은 말하며 바닥에 떨어진 두잠(杜潛)과 그가 돈을 주고 산 유랑 무사들을 노 려보았다. 죽었다 살아난 두잠은 몸을 떨며 바지를 적시고 있었다. 냉설이 더 이상 자신을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안 두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화급 히 자리를 빠져 나갔다. 그의 모습을 보고 차게 웃으며 냉설이 입을 열었다. 비로소 자신이 군웅 앞에 나선 이유를 말하는 것이다. "지난날, 강호의 유명한 채화적 분면음마(扮面淫魔)는 강호상에 모두 세 명의 악종 (惡種)을 제자로 남겼소." 분면음마! 그의 손에 걸려 죽어 간 여인의 수효가 족히 백에 달했다는 음적이었다. 일신에 지닌 무공도 가공하여, 그의 악행에 분노하여 나섰던 많은 협객들도 그의 수하(手下)에 숨이 끊어졌다. 무서울 게 없이 설치고 다니던 그는 어리석게도 아미파의 제자마저 건드리는 실수 를 저질렀다. 분노한 아미와 소림의 인물이 나서게 되어 그는 마침내 공래산(空來山) 한 절봉 (絶峰)에서 소림의 초의 선사의 천승공(天 功)에 사로잡혔고, 분노한 아미의 제자에 의해 목이 잘려 죽었다. 그런 분면음마에게 제자가 있었다니…… 군웅들은 모두 궁금하여 냉설의 다음 말만을 기다렸다. 그 중 한 명의 눈은 특히 빛났다. 진소백도 눈을 빛내며 냉설을 올려다보았다. "분면음마는 비록 채화음적(採花淫敵)이었으나 그의 무공은 음마문(陰魔門)의 지류 (支流)를 이은 것이라, 그가 남긴 악종들의 무공도 가히 상상하기 힘들었소. 그 중 둘째 제자 놈이 바로 채화랑(採花郞)이었소!" 사람들은 비로소 왜 냉설이 분면음마에 관해 그처럼 잘 알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채화랑이라면 냉설의 딸을 죽게 만든 자가 아니었던가? "그놈의 무공은 세 명의 제자 중 가장 약했지만 난 그놈을 죽이기 위해 뇌정구(雷霆球) 세 발을 써서 내상 을 입힌 뒤 십 초 만에야 겨우 그놈을 찢어 죽일 수 있었소." 뇌정구(雷霆球)는 화문(火門)의 화기(火器)였으니, 냉설의 행동은 암기 사용을 금기 시하는 강호의 도의(道義)에 어긋났지만 아무도 그를 탓하지는 않았다. 채화랑과 같은 음적을 상대하는 데 무엇을 망설이랴? "분면음마가 뿌린 악종(惡 種)들의 무서움은 분면음마가 남긴 가공할 음약(淫藥)과 방중술(房中術)에 있소. 그들의 손아귀에 걸려든 여인은, 누구라도 그들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오. 난 아직도 남아 있는 분면음마의 큰 제자와 셋째를 찾아 강호를 헤매고 있소." 냉설은 무수히 많은 날을 강호를 헤맨 끝에 마침내 첫째의 신분을 알아 내었다. 그의 강호상의 별호는 잔혹마도(殘酷魔刀)!


금사진이 죽인 자였다. "채화랑은 그들 셋 중에 가장 무공이 약했지. 그리고 잔혹마도 잔소(殘逍)는 가장 무공이 강한 자였소! 그는……" 냉설은 잠시 말을 쉬며 금사진의 위패를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강호의 한 영웅에 의해 목숨을 잃었소." 사람들은 비로소 잔혹마도가 분면음마의 제자였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잔혹마도를 없앨 수 있었던 금사진의 무공은 또한 얼마나 높았던 것일 까? 금청청은 방응향과 금사진, 그리고 잔혹마도에 얽혔던 인과(因果)를 확연히 이 해했다. 방응향이 그처럼 잔혹마도에게서 헤어나지 못했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가슴이 다시 아려 왔다. 아버지…… 자신의 아버지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러나 무서운 것은 종적이 드러나지 않는 세 번째의 악종이오. 그는 지닌 바 무 공이 잔혹마도에 조금도 못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계(心界)조차 하늘에 달해 가장 무서운 자라고 할 수 있소." 군웅들이 술렁거렸다. 마침내 한 명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셋째는 끝내 찾지 못하신 겁니까?" 냉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끝내 찾지 못했지! 하지만 수확은 있었소." 예의 성질 급한 자가 다시 물었다. "무슨 수확입니까?" 냉설이 입꼬리를 말아 특유의 찬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흔적을 발견했소." 군웅의 시선이 모두 냉설의 입에 집중되었다. 흔적을 알았다면 어떤 것인지를 곧 말할 테니까. 마침내 냉설은 냉랭히 말했다. "오랜 추적 끝에 나는 그가 비응방으로 숨어들었다는 사실을 알아 내었소. 그는 비응방의 인물들 중 하나요!" 꽝! 모두의 머리 위에 벼락이 내리쳤다. 충격! 제 18 장 흑회지비(黑會之秘) 1 천령(天領)은 평소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예외였다. 그의 눈앞에서 보료에 몸을 기대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사람! 존령(尊領)의 앞에 서는 흑회의 누구라도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 았던 회주를 제외하고는. 비록 몸은 호리호리하나 그 무서움을 경험한 자는 누구나 두려움에 무릎을 꿇게 만드는 자! 존령이 낮게 웃었다. "후후, 어쩔 수 없이 지령만을 남겨 두고 몸을 피했다고?" 천령이 머리를 더욱 숙였다. "속하가 나섰더라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만일 제가 나선다면 현천자 등이 나설 명분이 생기게 되니……" 존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생각에 잠긴 것인지 허실(虛實)을 알기가 어려웠다. "좋 다. 하지만 신주낭객의 일은 어찌 된 것이냐?" "그건…… 죄송합니다. 진소백이란 놈의 능력이 생각보다 훨씬 뛰어나…… 설마 현령(玄領)과 황령(荒領)이 지키는데도 사람을 빼갈 자가 있으리라고는……" 존령의 웃음 소리가 커졌다. 천령의 등에서는 땀이 흘렀다. 그는 존령이 기분 나쁠수록 더욱 크게 웃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네 변명은 나날이 늘기만 하는구나! 그만 물러가라." 천령은 암중에 땀을 닦으며 물러났다. 그의 뒤로 존령의 웃음이 다시 울렸다. 존령은 정말 기분이 나빠 보였다. * * * 화선은 땀을 흘렸다. 더불어 피도. 그녀의 모공에서는 땀이 솟았고, 입에서는 비밀(秘密)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이제야 반항을 포기했다. 엽혼은 결코 순탄한 인생을 살아 오지 않았다. 그는 필요하면 얼마든지 잔인(殘忍)해질 수 있는 인생을 살았 화선은 엽혼의 눈 에서 그의 인생 궤적을 읽었던 것이다. 두 시진의 헛된 반항(反抗)이 그녀에게 남긴 것은 찢어진 몸과 공포로 굳어진 정 신뿐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대항하지 말았어야 했다. "회주 밑의 육령 중에서 존령이 모든 일을 대신 해요. 그의 권위는 회주와 맞먹 는 것이라, 아무도 대항을 못 해요." 존령 아래 천지현황(天地玄荒)의 사령이 있었고, 화선은 화령(花領)으로서, 특별한 위치였다. 살인 중개업을 통해 돈을 모으고 강호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화선의 임무였다. 천령은 대외적 활동을 하며 현령과 황령을 통솔했다. 지령은 비응방에 숨어들어 금사진을 해치고 방주가 되려 했다. 고숭무!


그가 바로 지령이었다. 존령의 정체는 화령도 몰랐다. 다만 매우 냉혹하고 치밀하다는 것 외에는. 존령의 정체조차 알지 못하는 화선이 회주의 정체를 알 리 없었다. 엽혼은 마지막 질문을 했다. "천령이 누군지는 아는가?" 화선의 대답은 충격이었다. "그는 적일수! 바로 공동( )의 장문인이에요." * * * 천연의 석회 동굴! 수만 년간 물과 돌이 서로 작용하여 만들어 낸 자연의 신비(神秘)가 곳곳에 숨쉬 며 살아 있었다. 거장(巨匠)의 조각인 양 우아하게 솟아오른 석순(石筍)과 천장에 매달린 종유석(鐘 乳石)은 마냥 아름다웠다. 그러나, "우와`─`악!" 짐승의 울부짖음인가? 이따금씩 들려 오는 모골이 송연한 외침은! 동굴 속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호리호리한 몸에 복면 위로 쓰여진 존(尊) 자가 뚜렷했다. 존령! 그가 나타난 것이다. 더불어 세 개의 그림자가 종유석 뒤에서 유령처럼 나타났다. 자세히 보더라도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기 어려울 만큼 대단한 신법들이었다. 나타난 침입자를 응징하려던 그들은 존령임을 알자 급히 무릎을 꿇었다. 또다시 들려 오는, 동굴을 울리는 괴음! 존령이 차게 말했다. "아무래도 음식을 너무 많이 주는 것 같구나. 오 년이 지난 지금도 저런 힘이 남 아 있다니." 그림자들이 급히 고개를 땅에 파묻었다. "사흘에 한 번씩 물 한 모금과 두부 반 쪽, 사과 반 개를 주고 있습니다." 그 정도의 양이라면 일반인은 살 수도 없다. 그러나 그런 양을 먹고도 오 년을 견뎠다는 괴인은 도대체…… 존령이 고개를 끄 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종유 동굴 안, 천연적으로 형성된 곳을 긴 쇠창살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창살 안에는 쇠사슬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 끝에는 도저히 사람이라고 믿기 힘 든 몰골의 괴인이 묶여 있었다. 괴인의 입에서 다시 짐승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괴음이 나올 때마다 온몸을 덮은 털이 펄럭였는데, 그 털 위로 벌레들이 기어갔다. 존령은 쇠창살 앞에 도착하여 괴인을 보았다. 종유석 동굴 바닥엔 항상 있는 지하수가 흥건했는데, 그 물은 괴인의 무릎까지 차 올라 있었다.


거기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 분명 괴인의 몸이 썩고 있는 것이리라. 눈짓으로 그림자들을 물러가게 한 존령(尊領)이 괴인을 보며 말했다. "당신의 두 다리는 이미 쓸 수 없게 되었군요! 후, 어쩌면 좋아요?" 가는 음성에다 한숨! 설마 존령이 여자였는가? 존령의 음성에는 염려(念慮)의 빛이 가득해, 괴인의 처지를 진심(眞心)으로 안타까 워하는 듯했다. 괴인이 존령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 바람에 그를 덮고 있는 털이 흔들렸다. 아니, 얼굴 주위에 있는 털들이므로 수 염이 흔들렸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고낭(孤娘)! 당신은 또 나를 걱정해 주는군!" 존령이 한숨을 쉬며 다시 말했다. "저는 항상 당신을 걱정해요. 그리고 당신이 게 살 날만을 기다려요."

어서 그곳에서 나와 저와 함께 즐겁

괴인의 봉두난발(蓬頭亂髮)한 수염이 조금 흔들렸다. 분노(忿怒)인가? 아니면 웃 음? "내가 나가려면 옥패(玉牌)를 내놓아야겠지." 존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당신이 옥패만 내놓는다면, 우리는 다시 전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 예요." 괴인이 툴툴 웃었다. "언제처럼 말인가? 어쨌거나 이곳은 지낼 만하니 난 좀더 머무르겠네." 존령의 눈이 표독해졌지만 말투만은 여전히 달콤했다. "후, 당신의 뜻이 정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천첩으로서는 당신이 조금이라 도 더 편안해질 수 있게 해드려야죠." 존령은 품에서 하나의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를 열자 어른 가운데 손가락만한 길이의 빨간 뱀이 머리를 내밀지 않는가? "당신 혼자서 심심하실 것이니, 같이 놀 친구를 제가 하나 구했어요." 온몸이 빨간 홍사(紅蛇)는 작지만 지독한 독사였다. "홍사의 재롱이라면 그다지 심심하지 않을 거예요." 말과 함께 존령은 홍사를 바닥의 물에 풀었다. 바닥의 지하수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뱀은 냉혈 동물이니 주위가 차면 동작이 느려진다. 따뜻한 곳을 찾아가려 할 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 차가운 지하수에 접한 홍사가 찾을 따뜻한 곳이라면, 지금 여 기서는 괴인의 몸밖에 없었다. 괴인의 전신이 푸들거렸다. 홍사가 그의 다리에 난 상처를 헤집으며 들어왔던 것 이다. 그러나 입에서는 한마디의 신음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것이 지금 그가 할 수 있 는 최대의 저항이었다.


그가 비명(悲鳴)을 지르면 눈앞의 이 악녀(惡女)는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존령이 명랑하게 말했다. "당신은 아무리 좋아도 소리를 내지 않는군요. 어쨌든 좋아요. 전 당신이 좋아하는 모습만 봐도 기쁘답니다. 다시 올 때까지 부디 편안하세요." 그녀의 행동은 마치 현숙한 아내가 남편을 대하는 태도 같았. 그러나 그 마음이 사갈(蛇 )보다 무서움을 누가 알까? 이윽고 그녀가 눈앞에서 사 라지자 참고 참았던 비명이 온 동굴을 가득 채웠다. "우아`─`악!"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고통에 찬 비명! 괴인은 벌써 오 년이나 지옥(地獄)에서 살고 있었다. 존령은 동굴을 완전히 나가기 직전에 그의 비명을 들었다. 복면 속에 숨겨진 그녀의 입가로 황홀한 미소가 흘렀다. "비명이 저리 큰 것을 보니 너희들이 준 음식이 너무 과했던 것이로구나. 앞으로 는 오 일에 한 번으로 줄이도록 해라." 세 명의 그림자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존명!" 존령은 소리내어 웃었다. 그녀는 기분이 나쁠 때도 웃었지만 기분이 좋을 때도 웃었다. 지금 그녀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2 밤이 깊었다. 하지만 비응방의 그 누구도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후의 취임식은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냉설이 했던 말의 여파 는 컸다. 냉설은 비응방 내부에 분면음마(扮面淫魔)의 셋째 제자가 숨어들었음만을 말하고, 그의 정체는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하지 못했다. 분면음마의 역용술은 아직도 전설로 남아 있었고, 냉설도 셋째 제자의 정체는 아 직 몰랐다. 의문만을 남긴 채 그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쨌든 장례식과 취임식이 이어졌던 하루는 끝났다. 길고 힘든 하루가. 군웅들은 대부분 돌아갔지만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섭수진과 진소백도 그 중에 속했다. 나머지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은 지금 모두 심화절의 거처에, 다른 비응방의 인물 들과 같이 모여 있었다. 섭수진이 진소백에게 물었다. "도대체 그들은 지금 무얼 토론하는 거죠? 또, 진 공자를 뺀 이유는 무엇이에요?" 진소백이 쓰게 웃으며 그녀를 보았다. "아미옥녀가 그 정도를 몰라서 물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소."


섭수진도 쓰게 웃었다. "후, 아무리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고자 함이라곤 하나, 일을 부탁할 때와 일이 해 결된 지금의 태도가 이렇게 다르다니……" 비응방의 반도가 고숭무로 밝혀진 지금에 와서 진소백과 섭수진이 할 일은 없었 다. 이미 수사를 위해 비응방의 많은 비밀을 알아 버린 그들이기에 심화절 등이 껄끄 러워함은 이해가 되었다. "지금 나누는 대화는 광산의 이권과 비응방의 앞으로의 행동에 관한 것일 테니 우 리가 끼여들 자리는 없겠지요." 진소백의 말이 옳았다. 금청청과 매일도마저 회의에 끼지 않고 화산으로 돌아간 마당에, 그들이 비응방의 일에 더 이상 간섭할 이유가 없었다. 떠나는 금청청의 뒷모습은 쓸쓸했다. 그녀의 입장은 특이했다. 비응방의 소방주라는 신분에서, 심화절의 취임과 더불어 비응방과는 아무 관계 없는 외인(外人)이 되어 버렸다. 심화절이 선(先) 방주의 혈육에 대한 예우를 약속했지만 그녀는 모두 거절하고 매 일도와 같이 화산으로 돌아갔다. 금청청을 생각하며 감회에 젖은 섭수진을 진소백이 불렀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오?" "아, 잠시 금청청에 대해……" 진소백이 웃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다른 생각은 접어 두고 별이나 봅시다. 하늘에 별이 참 많소." 섭수진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말대로 별이 많았다. 모두 조금씩 다른 위치에서 다른 빛으로 빛나는 별의 모습은 인간사와 닮았다. 불어오는 밤바람이 이제 조금씩 냉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아직 봄은 멀었지만, 그녀는 따뜻하다고 느꼈다. * * * 진소백 등이 서 있는 곳의 앞. 심화절의 거처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전혀 온기를 느끼지 못했다. 분위기는 차디 찼다.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이오?" 귀왕곡(鬼王谷)의 갈현(葛鉉)이 대로하여 외쳤다. 장내에 있는 비(非) 비응방 세력은 모두 일곱. 그는 은연중에 그들을 대표하고 있었다. 갈현의 분노는 당연했다. 지금 그들은 완전무장한 비응방의 무사들로 완전히 둘러 싸였기 때문. 심화절이 정중하지만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이렇게 대접하여 대단히 송구하오. 그러나 본 비응방의 고숭무가 반도로서 흑회 (黑會)란 세력과 연관이 있음이


드러난 이상, 광산의 권리 문제를 다시 여러분과 상의해야 함은 당연지사요." 갈현이 냉소했다. "비응방의 배당을 높이기 위해 칼로써 위협하는 것이오?" 심화절이 갈현을 노려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결코! 다만 흑회의 일당이 끼여 있지 않은지를 확인하고자 함이니, 협조해 주시 오." 심화절이 눈짓을 하자 무사 둘이 죄수복을 입은 자를 하나 끌고 왔다. 온몸이 피투성이라 그가 얼마나 큰 고문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얼굴의 윤곽조 차 알아보기 힘든 자! "여러분 중에는 이 사람을 잘 아는 분도 있을 거요." 심화절의 눈이 군웅들의 얼굴을 세세히 살피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희 방의 순찰당의 부당주로 있었던 신안추종 인소(引 蔬)요!"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이 스쳐 갔다. 얼마나 심한 고문을 당했기에 불과 하루 만에 저렇게 변한단 말인가? "그는 당신들 중 누가 흑회의 인물인가를 알고 있으니, 곧 여러분 주위의 포위는 풀릴 것이오." 심화절의 말에 갑자기 갈현(葛鉉)이 외쳤다. "우리를 흑회의 인물로 몰아붙이고 당신들이 모든 이권을 가지려는 것인가?" 그의 말에 일곱 방파의 인물들이 동요했다. 그들 중 머리가 가장 좋다는 흑수동주 도곡(陶曲)이 나서며 말했다. "만일 우리를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우리 일곱은 합력(合力)하여 비응방에 대항할 수밖에 없소." 그의 조리있는 말에 심화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자!" 그가 손짓하자 인소 뒤에 섰던 무사가 인소의 등을 칼집으로 찔렀다. 그러자 인소가 마치 무언가에 놀란 아이처럼 몸을 세우더니 막힘없이 입을 여는 것이 아닌가? "신안추종 인소. 흑회의 지령(地領) 산하의 지령(地令) 일호(一號)! 임무는……" 마치 책을 읽듯 기계적으로 말하는 인소를 보며 모두는 심화절에게 두려움을 느꼈 다. 사람을 저렇게 만든다는 것은 보통 능력이 아니었다. 심화절이 나직이 말했다. "여기에서 흑회의 인물이 누군지 말하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인소는 몸을 떨더니 정신없이 내뱉기 시작했다. "지령 이호는…… 지령 사호는……" 지적받은 자는 모두 네 명. 그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흑회란 놈들과 관련이 있다니!" 외치는 인물들의 면면은, 믿기 힘들게도 도곡의 인물들이었다. 심화절이 그를 쳐다보았다.


"가장 의심이 갔던 사람은 당신과 귀왕곡(鬼王谷)의 갈 곡주였소. 결정적인 실수 는, 고숭무를 감시하고 왔던 인소가 고숭무의 처소에 갈 곡주가 나타났다고 말했 던 것이오. 그는 오래 전부터 의심받던 인물이니 당신이 흑회의 인물임을 내가 확신 했던 것은 그때부터였소." 심화절의 어조가 강해지며 선언하듯 말했다. 그랬다. 인소가 갈현이 고숭무와 관계가 있다고 말한 것은 오히려 갈현의 혐의를 벗겨 주었다. 만일 정말 갈현이 흑회에 속한다면 인소가 말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흑회! 너희 들의 세력을 나는 진작부터 의심하고 있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다." 도곡이 마침내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정말 대단하군! 그러나 우리가 쉽게 잡힐 것 같으냐?" 그의 손짓에 따라 흑회의 인물로 지명받은 세 명이 모여들어 네 명이 서로 등을 맞대고 섰다. 도곡이 자신의 옷을 들어 품에서 둥그런 물건 몇 개를 꺼내 들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아무도 움직이지 마라." 사람들은 모두 신음했다. 그가 손에 든 물건을 알아본 사람들 굉천뢰(轟天雷)! 화문(火門)의 무가지보(無價之寶)라는 굉천뢰였다. 하나로 능히 방원 십 장 이상을 폐허(廢墟)로 만들 수 있다는 가공할 화기(火器)! 하지만 심화절은 태연했다. 그의 의연함을 깰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을 듯했다. "자네는 이 심(深) 모(某)를 너무 무시하는군." 그의 담담한 말에 도곡은 은근히 두려웠으나 겉으로는 여전히 당당하게 말했다. " 흥! 아무리 격장해 봤자 넘어가지 않는다. 나 역시 마음 씀씀이에서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음을 알아 두어라." 도곡은 손의 굉천뢰을 휘둘렀다. "어서 길을 비켜라. 막는다면 모두 죽을 것이다." 무사들이 슬금슬금 비켜나며 도곡이 나갈 길을 만들었다. 도곡은 급히 동료들과 도망치려 했다. 그때, 심화절이 갑자기 말했다. "잠깐! 그곳으로 간다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 도곡의 눈에 의아함이 번졌다. "무슨 소리냐. 조금이라도 허튼 짓을 한다면 굉천뢰를 폭파시켜 버릴 것이다." 심화절이 깊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굉천뢰는 무척 위험한 것이라, 진기를 가하고 십 초(秒)가 지나야 터진다는 사실 을 아느냐?" 도곡이 냉소(冷笑)했다. "흥, 너희 모두가 덤벼도 능히 십 초 정도는 버틸 수 있다. 이래봬도 내 일신은 충 분히……"


도곡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의 얼굴은 경악과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빳빳한 손! 귀왕곡주 갈현의 귀왕수(鬼王手)가 그의 인후혈에 박혔던 것이 "어떻게 이런 일 이……!" 도곡이 말을 잇지 못할 때, 갈현이 차갑게 말했다. "너에 대해서는 이미 어제 심 방주를 통해 들었다. 나는 흑도의 인물이지만 신의 (信義)를 배신하는 자는 용서하지 못한다." 갈현의 말과 더불어 도곡 주위에 있던 세 명의 흑회의 인물들의 목도 땅에 떨어졌 다. 그들은 굉천뢰를 써보지도 못했다. 강호에서 힘과 계략(計略)의 차이는 이렇게 무서웠다. 짜짝! 박수는 심화절이 쳤다. "당신들이 보여 준 의리와 신의는 항상 기억될 것이오. 약속대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지분은 모두 당신들 몫이오." 갈현 등의 눈에 기쁨이 스쳤다. 그 거대한 광산(鑛山)의 지분이 두 배로 늘어난다면 엄청난 재산이었으므로. * * * 나무 위에서 별을 보던 섭수진은 심화절의 거처에서 사람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말했다. "들어갈 때보다 사람들이 줄었어요." 진소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심화절이 흑회(黑會)의 인물들을 가만두지 않았겠지." 섭수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비응방과 흑회가 본격적인 싸움에 들어가겠군요." "그렇겠지. 하지만 그들의 일이니까……" "우리도 이제 그만 비응방을 떠나야 하겠군요." 섭수진이 소리를 약간 줄여 말했다. 그녀는 비응방을 떠나다면 진소백과 헤어지게 됨을 떠올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진소백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멀었지. 아직!" 섭수진은 의아했다. "처음 받았던 의뢰는 비응방의 반도(叛徒)를 색출해 달라는 것이었으니, 고숭무가 죽은 지금은 떠나야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요?" 진소백이 외려 반문(反問)했다.


"하지만 반도가 꼭 하나뿐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섭수진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진 공자의 말뜻은……?" 순간 섭수진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진소백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지금 저 한테 반말을 하시는 거예요?" 진소백이 깜짝 놀라 그녀를 보았다. "이런 내가 결례(缺禮)를! 다음부터 주의하도록 하지." 주의(注意)를 한다면서 다시 반말이자, 섭수진의 눈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녀는 화를 낼 여유가 없었다. 진소백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막아 왔기 때문이었다. 파르르 떨며 입술을 맡긴 그녀의 눈으로 별빛이 쏟아졌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하늘이 돌아간다고 느꼈다. 순간 그녀의 뇌리에 사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 뒤를 이어 대아미파를 다스려야 할 네가 감히 남자와……!' 금정(金頂) 신니 (神尼)의 쩌렁쩌렁한 노갈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안 돼!" 섭수진은 힘껏 두 손을 앞으로 밀었다. 3 심화절의 거처! 광문당은 그가 광문당주(廣文堂主)로 있을 때의 숙소라 방주로 격상된 지금은 마 땅히 천응각(天鷹閣)으로 옮겨야 할 터이지만 심화절은 그러지 않았다. ─`선 방주께서 비응방을 일으킨 공훈(功勳)이 심히 크시니, 내가 어찌 감히 그분 의 거처를 사용하겠소? 난 이곳으로 족하오. 그의 말은 겸손하면서도 금사진을 추도(追悼)하는 뜻이 절절했는지라, 많은 방도들 의 환호(歡呼)를 얻었다. 하지만 정말 심화절의 뜻이 그런 것일까? 다른 사람이 모두 나간 지금, 어두운 방에 등(燈)조차 켜지 않은 채 앉아 있는 심 화절은 단순히 금사진을 추도하여 천응각으로 옮기지 않았을까? 이런 의문을 대신 물어 주는 질문이 심화절이 앉아 있는 뒤에서 나왔다. "자네는 왜 천응각으로 옮기지 않는가?" 심화절은 전혀 놀라지 않고 대답했다. 그는 인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은 금사진의 세력이 곳곳에 남아 있소." 뒤에 나타난 인영은 놀란 듯했다. "무슨 말인가? 이제 자네가 방주인데, 누가 거역을 한다는 겐가?" 심화절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아직이오. 사공두가 있고, 노굉이 있소. 게다가 흑회(黑會)뿐 아니라 하나의 세력이 비응방(飛鷹幇) 내에 있음을 난 알 수 있소."


인영은 놀란 듯했다. "하나가 더 있다니, 무슨 소린가?" "분명히 있소. 아마도 금사진의 작품이겠지." "금사진? 그는 이미 죽었는데도……" 심화절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자지. 정말로 대단해. 만일 그가 대단하지 않았다면 왜 우리가 이렇게 어 려운 방법을 택해 비응방을 장악(掌握)하려 했겠소?" "금사진, 설마 그가 우리의 존재(存在)마저 알고서 대비(對備)했다는 뜻인가?" 심화절이 이번에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대비했던 것은 우리가 아니라 흑회(黑會)였을 거요. 다행한 일이었지. 금사 진이 흑회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우리의 존재도 당연히 눈치채였을 거요." 심화절이 몸을 일으켜 뒤에 선 인영을 돌아보았다. "노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당신은 알고 싶지 않소?" 인영, 노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고 싶네. 자네가 설명을 해주겠나?" 심화절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문 쪽을 보았다. "너도 들어오너라. 듣고 싶다면." 방문 밖에 서 있던 여인이 몸을 떨었다. * * * "험험! 지금 내 거처에 따라간다면 의외(意外)의 사람을 만나게 될 거요." 진소백이 무안한 듯 다시 경칭(敬稱)을 사용하자 섭수진은 이상한 아쉬움을 느꼈 다. 그러나 비록 그녀가 아직 출가는 하지 않았지만 불제자! 이성과 사랑에 빠질 수는 없었다. 마침 진소백의 말은 그녀에게 좋은 탈출구가 되었다. "누구 말인가요?" 그녀는 일부러 명랑하게 말을 받았다. "알아맞혀 보시오. 맞힌다면 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상으로 주겠소." 그녀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미 떠나갔던 금청청과 매일도가 돌아와 있을 줄 그녀가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 가? "기다렸소, 진 형!" 매일도가 친근하게 말하며 그를 맞았다. 옆에 앉은 금청청도 진소백과의 오해가 모두 풀려, 미소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둘의 다정한 모습을 보며 진소백이 짓궂게 말했다.


"매 형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오. 때가 되면 내게 꼭 술 석 잔을 대접해야 한다는 것을!" 혼인을 중매한 대가로 술을 받아 먹는 것이니, 속뜻을 알아들은 금청청의 얼굴이 붉어졌다. 매일도 또한 어색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가 올 것을 알고 있었소?" 진소백이 끄덕였다. "매 형이 곧 깨달을 것임을 의심치 않았소!" * * * 문이 열렸다. 심화절이 연 것이 아니라 밖에 있던 자가 연 것이다. 심화절은 웃으며 말했다. "너였구나." 앵아도 웃으며 말했다. "예, 저예요, 방주님." 심화절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너는 이제 엿듣는 것이 습관이 돼버렸구나." 앵아는 허리를 숙였다. "제가 어찌 감히……" 심화절이 다시 얼굴을 폈다. "좋다. 어쨌든 들어오너라. 네게 할말이 있다." 그녀는 심화절의 방에서 노존(老尊)을 봤다. 복면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심화절이 앵아(鶯兒)를 방안으로 데려온 것에 화가 난 듯했다. "노존, 얘기를 계속합시다." 노존의 기분이야 어떻든 심화절은 말을 이었다. * * * 매일도는 의아했다. 진소백이 짐작하고 있었다니…… 비응방을 떠날 당시에는 그조차 자신이 돌아오게 되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었는데. 진소백이 웃었다. "고숭무의 일에 얽힌 의문(疑問)은 매우 확연(確然)해서, 매 형이 비응방을 떠나 조금만 여유를 찾으면 곧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


매일도는 비응방을 떠나 화산(華山)으로 향하다가 곧 잘못된 곳이 있음을 알았다. 당연히 좀더 일찍 알았어야 했지만, 비응방에서는 번잡한 일이 많았는지라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금청청도 이미 알고 있는 듯해 보였고, 섭수진만 몰랐다. "무슨 말씀들을 하시는 거죠?" 궁금하여 그녀가 물었다. 사실 섭수진이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의문을 일으킬 만한 사건을 그녀만 몰랐으므로. "아하, 이런! 섭 소저는 모르시죠? 사실은…… 그게, 음……" 진소백이 망설이자 금청청이 대신 전음으로 섭수진에게 설명했 그녀가 적염의 거 처에 들어가서 보았던 일들을! 특히 적염(狄艶)의 다리와 뒤엉킨 사내의 다리에 무성했던 검은 털에 관한 얘기를 강조해서! 섭수진은 얼굴을 붉혔지만, 무엇이 이상한지는 이내 깨달았다. 금청청이 부연(附椽)하여 말했다. "저는 암흑동신공(暗黑銅身功)에 그런 면이 있음을 몰랐어요. 매 사형이 지적해 주 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죠." 암흑동신(暗黑銅身)을 이루면 여러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 면 전신의 피부가 흡사 금속으로 이루어진 듯 단단하게 되어, 도검(刀劍)으로도 상 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물론 강한 내공이 실린 도검이라면 얘기는 다르겠지만. 한데 특이한 것은 피부가 굳어지는 관계로 전신에 털이 하나도 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머리만은 예외였다. 머리카락 또한 철사처럼 뻣뻣해져서 유사시에 무기로도 사용되는 것이므로. 이것은 수련(修練) 방법의 영향이 컸다. 불과 얼음으로 피부를 얼리고 녹임을 반복하는 가운데 익혀지는 것이 암흑동신(暗 黑銅身)! 전신의 털이 남아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까 적염의 방에서 본 그…… 사람은 고숭무가 아니란 말이로군요?" 섭수진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숭무가 될 수 없소. 난 이미 그의 시신에서 다리의 털을 확인했지. 당연히 털… … 은 없었소." 진소백이 확신을 가지고 말하자 섭수진은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진 공자가 아직 사건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요." 중인이 모두 고개를 끄덕일 때 금청청은 진소백을 보았다. "진 공자, 꼭 도와 주세요. 아직 진범이 잡히지 않은 거라면…… 지하에 계신 아버 님을 어찌 뵙겠습니까?" 진소백은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물론 의뢰(依賴)라면 항상 받지만 대가가 좀 비싸서. 난 항상 의뢰인 재산의 절반 을 받는다오." 금청청은 매일도를 돌아보며 눈으로 구원(救援)을 청했지만 매일도의 안색도 난처


했다. "진 형! 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아니, 그런 것이 아니오." 그가 고지식하게 나오자 진소백도 급히 손을 내저었다. "좋소. 내 이 의뢰(依賴)를 맡을 터이니, 앞으로 내 부탁을 한 가지만 들어주시겠 소?" 매일도가 말했다. "말하시오. 무엇이든지 괜찮소." 매일도와 앞을 다투어 금청청도 말했다. "저도 무엇이나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요." 진소백이 크게 웃었다. "하하! 지금 당장이 아니오. 아마도 일 년은 족히 지난 후. 그때 오늘의 약속을 꼭 기억하시기 바라오." 일 년 후……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매일도와 금청청은 모종의 곳으로 떠났다. 진소백은 그들에게 무언가 지시를 했지만 소리가 작아 들리지 않았다. * * * "너는 과거 비응방에서 누가 가장 무서웠는지 아느냐?" 심화절이 앵아에게 묻자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앵아는 뺨에 보조개가 패여 있 어 미소 짓는 게 무척 귀여웠다. "아마도 고 당주, 아니, 고숭무가 가장……" 앵아가 하루 전의 무서웠던 격전을 떠올리며 말했지만 심화절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아니야. 그는 내게도 미치지 못했지." 앵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역시 심 방주님이……" 심화절은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니지. 다시 맞혀 보거라." 앵아는 비로소 말했다. "그렇다면 역시 금 방주께서 가장……" 심화절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는 가장 무서울 뿐 아니라 아주 무서웠다." 심화절은 방안을 거닐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고숭무가 흑회(黑會)의 인물임을 알고 있었다. 또한 내 못했지만 어느 정도 내가 딴마음을

뒤의 세력을 알지는


먹고 있음은 짐작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 둘을 견제하고자 했지." 제 19 장 옥산탈출(玉山脫出) 1 금사진은 강호상에 무섭다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소문보다도 훨씬 더했다. 지닌 바 무공도 무공이려니와, 그에게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비응방의 두 기둥이랄 수 있는 고숭무와 심화절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음을 알고는, 편제를 정할 때 일부러 오명과 독소명을 서로 섞어 둘을 견제하도록 했다. 오명은 원래 고숭무의 편이었고 독소명은 심화절의 편이었으니, 둘의 정보가 서로 에게 들어가, 그들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려던 금사진의 계략(計略)은 성공했다. "만약 두 마리의 호랑이를 한 번에 잡고자 한다면 두 마리를 싸움 붙이는 것이 가 장 쉬운 방법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금사진의 계략은 매우 훌륭했다." 심화절의 눈에 은은한 감탄마저 어려 있었다. "만일 그가 젊은 시절의 일로 정신이 가끔씩 불안해지는 병(病)이 없었더라면 아 마 우리가 끼여들 틈이 없었을 것이다." 심화절이 말을 이어 갈수록 앵아의 눈도 흥미를 더하는 듯 빛이 났다. 이런 것은 모두가 윗사람들의 일이므로, 이전의 그녀로서는 감히 들어 보지 못했 을 얘기였으므로. "그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게다. 정신없이 비응방을 키우는 데만 주력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위가 온통 적뿐이었으니……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실수를 했다." "무슨 실수였나요?" 앵아가 더욱 흥미를 느끼며 물었다. 심화절은 그녀의 모습이 귀여운 듯,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의 실수는 고숭무의 흑회(黑會)만 알고, 나, 심화절에 대해서는 너무 방심했다는 것이다. 그는 내 뒤에 오히려 흑회보다 무서운 세력이 있음을 몰랐다." 그랬다. 심화절 또한 세력이 있었지만 금사진은 알지 못했다. 만일 그가 알았다면…… 사태는 어떻게 변했을까? "금사진은 흑회(黑會)에 대항하여 백회(白會)란 조직을 만들었지. 그리고 암중에 고숭무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심화절이 자신의 뒤에 굳어졌다. 그는 오늘, 왜 이처럼 노존이 심화절의 말을 "당신은 오늘 왜 그리

숨은 세력이 있음을 말하자 노존과 앵아의 말이 많은 것일까? 막았다. 말이 많소?"

노기가 서려 있었으나 심화절은 노존을 무시했다. 노존은 화를 내려다 문득 무슨 생각이 든 듯 노화를 삭였다.

얼굴이 조금씩


"어쨌든 백회의 등장으로 고숭무와 적염은 위기를 느꼈나 보다. 그가 금사진을 암 기로써 제거했던 일은 너무나 멍청한 짓이었지. 하지만 우리에겐 더할 수 없이 좋은…… 우리 풍림 서(風林誓)에겐……" 그가 자신들이 속한 세력의 이름까지 말하자 노존은 마침내 참지 못했다. 그의 외 침에는 노기가 서렸다. "심화절! 말을 아끼시오." 하지만 심화절은 여전히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시작은 고숭무가 했으나 성공한 것은 나다. 아니, 우리 풍림서(風林誓)다. 하지만 백회도 쉬고 있지만은 않았지." 심화절이 노존을 제지하며 말을 이었다. "백회의 중심 인물인 사공두는 방의 고위직에 그대로 남는 것에 성공했지." 사공두! 그가 바로 백회(白會)의 인물이었단 말인가? "언젠가 나를 제거하고 금사 진의 정통(正統)을 이으려 하겠지만, 흥,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앵아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이 사람은 왜 평소답지 않게 이렇게 말이 많은 걸까? 심화절은 그녀의 굳은 미소 를 보며 다시 말했다. "백회(白會)는 나를 이용해 흑회(黑會)를 제거하고 그 와중에 나마저 제거하려 하 겠지만……" 심화절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려운 일이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이상. 이 심화절(深化絶)이 하찮은 차도살인 지계(此刀殺人之計)에 당할 리 없지 않느냐?" 이제 앵아의 얼굴에는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심화절이 그녀의 뺨에 손을 대며 말했다. "얼굴이 차구나. 어쨌든…… 넌 무척 영리하구나." 앵아는 영리했다. 그녀는 이미 심화절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까지 알았다. 노존도 그의 의도를 알고 조용히 있었다. "넌 항상 흰 손이 갖고 싶다고 했지 않느냐? 이분, 노존께서 그리 만들어 주실 것 이다." 심화절의 말은 담담했지만 앵아는 담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매우 희었다. 핏기가 모두 사라져 파랗기까지 했다. 손 또한 이처럼 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바랐던 손은 결코 이런 흰 손이 아니었다. 노존의 손이 그녀의 목으로 다가왔다. 노존의 손은 검었다.


* * * 엽혼은 어찌 되었을까? 그는 화선(花仙)을 심문했고, 화선을 죽였다. 죽일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녀가 살아 있다면 자신이 죽게 될 것이므로.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자신의 일을 자신의 손으로 매듭 지은 뒤 죽고 싶었 엽가의 빚을 세상 에 남길 수는 없었다. 그가 죽은 후 빚이 남는다면 그것은 모두 엽평(葉枰)의 몫으로 돌아갈 테니까. 게다가 그녀는 엽혼이 극도로 싫어하는 음탕한 여인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엽혼은 음탕한 자들에게 극도의 혐오를 갖고 있었다. 화선의 시체는 다음날 아침 발견되었다. 흑회(黑會)의 대응은 신속했다. 무수한 호각 소리 가운데 사방으로 흑회의 인물들이 퍼져 나가며 추적해 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엽혼은 이미 그들의 추격권(追擊圈)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다. 안전한 거리였다. 이 정도의 위치라면 설사 악마(惡魔)가 쫓아와도 엽혼은 도망갈 자신이 있었다. 평 소 그의 신법으로 보아 흑회가 그의 흔적을 찾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물론 평소라면 말이다. "우욱!" 온몸으로 갑자기 참기 힘든 고통이 밀려왔다. 삼시충(三屍蟲)이 내장을 갉아먹는 고통이 이럴까? 엄청난 고통에 비틀거리던 엽 혼은 문득 진소백의 말이 떠올랐 ─`지금 자네를 지탱시키는 힘은 진기가 아닌 잠 력(潛力)이니, 부디 조심하게. 만일 과도하게 진기를 사용한다면 한동안 격심한 고 통과 함께 무기력(無氣力)에 빠질 걸세. 게다가…… 자네의 생명 또한 점점 짧아지게 되네. 진소백은 엽혼이 일을 한다면 반드시 무리할 것임을 알았다. 그럼에도 엽혼에게 일을 맡긴 것은, 엽혼이 비록 몸이 괴롭더라도 빚을 지고 싶어하지 않음을 알았던 까닭이었다. 엽혼은 그 점이 고마웠다. 더불어 금사진과 그의 딸 금청청에게 진 빚도 반드시 갚고 싶었다. 몸이 부서지 더라도 그는 알아 내야만 했다. '어떻게 화선, 아니, 가짜 화선이 나를 감쪽같이 삼 년이나 속이고 청부를 할 수 있었을까?' 고통을 조금이라도 잊기 위해 엽혼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가짜 화선은 삼 년이나 그에게 청부를 했다. 진짜 화선이 청부 중개업을 하고 있던 바로 그 장소, 소하루에서 어떻게 삼 년이 나 다른 사람의 이목을 속였을까? 또, 왜 하필이면 화선으로 변장을 했던 것일까? 화선을 찾기 위해 그가, 아니, 진소백이 백방으로 수소문하던 중에 흑회(黑會)라는 세력의 종적이 발견되었다. 만일 그들이 화선이란 여인의 대역을 내세우지 않았더라면 흑회는 발견되지 않았


을지도 모른다. 혹 그들은 화선으로 변장함으로써 흑회를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우 욱!" 다시 한 번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고통은 사고(思考)의 기능(機能)마저 범하며 전신을 무기력 속에 빠뜨렸다. 엽혼은 몸을 지탱해 주던 잠력이 급격히 사그라짐을 느꼈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흑회는 추격망(追擊網)을 점점 넓혀 왔고, 만일 조그마한 흔적이라도 발견이 된다 면 한 점을 향해 그 거대한 추격망을 집중시킬 것이다. 그리 되면 지금의 그로서는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었다. 안간힘을 쓰며 걸어가는 엽혼은, 자신이 이미 힘을 상실하여 온몸이 더할 수 없이 무겁다는 것을 미처 계산(計算)에 넣지 못했다. 풀잎 하나 넘어뜨리지 않고 걸어왔던 그의 걸음이 무거워지며 몸에 닿는 나뭇가지 들이 뚝뚝 부러져 나갔다. 흔적은 너무나 뚜렷했다. 하나, 엽혼은 인식하지 못했다.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는 그의 머리에는, 다만 앞으로 가야 한다는 본능(本能)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흔적은 이제 누구라도 찾을 수 있을 지경이 되었다. 천령(天領) 아래에 속한 무사들은 위세(威勢)부터가 현령이나 황령의 무사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둘이 모인다면 능히 현령주나 황령주와 자웅을 결할 수 있는 자들이 천령 휘하에 있었다. 특히 천령 일호(一號)는 개인적으로도 현령주 등에게 무공에서 뒤지지 않았다. 풀잎이 뒤로 누워 있음을 주목한 사람도 그가 처음이었다. "이것을 봐라." 그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본 천령 칠호는 의아했다. "풀잎이 누운 자국은 좀 전에도 많이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유독……" "이 자국은 다르다." 칠호가 영문을 몰라 하자 일호가 자세히 설명했다. "이전(以前)의 자국들은 모두 연속적이었다. 즉,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갔는지를 흔적을 따라가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흔적은……" 칠호는 비로소 흔적이 하늘에서라도 떨어진 것인 듯, 갑자기 나타나고 있음에 주 의했다. "아마도 경공술에 일가견(一家見)이 있는 고수가,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실수(失 手)를 한 듯하다. 아니면…… 모종의 원인으로 내공이 약해졌거나……" 뒤의 말은 가능성이 희박하여 일호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나…… "흔적이 점점 뚜렷해집니다." 칠호가 기쁨에 들떠 말했다. 그의 말은 사실(事實)이었다. 처음에는 풀잎이 약간 누워 있는 정도의, 극히 미세했던 흔적이 이제는 주위의 나 뭇가지마저 마구 부러뜨리며, 흡사 고의(故意)로 유인하고 있는 느낌마저 들게 했 다. 일호는 잠시 생각했다. 이처럼 뚜렷한 흔적이라니…… 어딘가 이상했다. "다른 곳으로 나간 동료들을 어서 불러라. 아무래도 예감(豫感)이 좋지 않다." 엽혼이 고통으로 무의식중에 남긴 흔적을 일호는 잘 따라왔지만, 너무도 의외의 상황 전개에 미심쩍어 동료를 부르는 것이다. 그의 이런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하지만 이 약간의 지체!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지금의 엽혼에게 이 시간은 더없이 소중했다. 엽혼은 자신이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음을 느꼈다. 몸은 힘을 완전히 상실해, 한걸음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잠력이 사라지자 고통도 일단락되어 정신이 맑아짐은 불행중다행이었다. 엽혼은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오자 자신이 흔적을 너무 뚜렷이 남겼음을 깨달았 다. 흑회(黑會)가 멍청이들의 집단이 아닌 이상 재빨리 추적해 오리라.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도망간단 말인가? 이미 손 하나 움직이기도 힘에 부쳤다. 어딘가 숨으려 해도 흔적을 없앨 방법이 없었다. 누군가 도와 주러 올까? 어차피 며칠 안에 죽을 몸이니 당장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았았다. 하나…… '빚을 진 채로 죽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 살아남아 화선에 얽힌 비밀을 밝혀, 금청청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고 싶었 다. 이때, 숲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흑회(黑會)인가? 벌써.' 그러나 아니었다. 둔탁한 이 소리로 미루어 결코 강호인이 아니었다. 풀숲을 헤치고 그의 가까이 다가온 사람은 소녀였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 아마도 근처에 사는 사냥꾼의 딸인 듯했다. 엽혼을 발견한 그녀는 놀라기는 했지만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사냥꾼의 딸이라 면 사람이 다친 것도 많이 보았을 것이므로. 게다가 그녀는 매우 용기있어 보였다. 이것은 엽혼에게 매우 좋은 징조(徵兆)였다. 용기있는 사람만이 위기에 처한 타인을 도울 수 있으므로. "혹시 다쳤나요?"


그녀가 걱정스레 말을 걸어 오자 엽혼은 하늘에 감사하고 싶었 그녀는 용감할 뿐 아니라 인정까지 있었다. 그는 살아날 방법이 생겼다. 또한 빚을 갚을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을 쫓고 있는 흑회의 인물들이 지극히 영리하기만을 바랐다. 영리한 자만이 그를 구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엽혼을 쫓아오는 자는 일호였다. 그는 매우 영리했다. 2 비응방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앵아(鶯兒)! 비록 시녀(侍女)였다고는 하나, 그녀는 비응방에 중대한 공을 세웠다. 금청청은 그녀가 자신과 매일도에게 오보산을 먹였던 일이 자의(自意)가 아닌 강 요에 의했던 것임과, 나중에 심화절에게 자신의 납치를 목숨을 걸고 알렸음을 감안해 용서했었다. 새로 방주가 된 심화절은 그녀의 공을 치하(致賀)하여 노비의 적에서 빼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앵아(鶯兒)의 시신은 하수가 흘러가는 도랑에서 발견되었다. 그녀는 전신의 피가 빠져 나간 채 발견되었다. 온몸을 난자당하고 아랫도리는 피투성이였다. 전신의 피가 빠져 나간 사람의 손은 희다 못해 푸르렀다. 그리고 그녀의 시신을 지켜보는 심화절의 얼굴도 파랬다. 분노로 인해 그의 얼굴에도 피가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처음 발견한 사람이 자네인가?" 그의 질문에 노대 장육삼이 허리를 굽혔다. "예, 제가 아랫것들이 일을 잘 하고 있나 둘러보고 있었사온데…… 어찌나 무서웠 던지……" 노대는 몸을 움츠린 채로 아직도 떨고 있었다. 심화절이 뒤에 선 사공두에게 굳은 어조로 물었다. "누구의 짓으로 생각되오?" 사공두가 지체없이 대답했다. "흑회의 짓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녀 때문에 흑회의 짓거리가 들통났다 할 수 있 으니……" 옆에 선 독소명도 거들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음모가 발각되자 노골적으로 덤벼 오는 것으로 사료됩니 다." 심화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두 눈 가득 분노를 담고 힘있게 말했다. "앵아(鶯兒)의 장례는 성대히 치르도록 하라. 그녀는 일등 공신이었으니 비응방의 기록에도 이름을 남겨 그녀의 충과 절을 오래 기리도록 하라."


심화절의 목소리가 진기를 타고 전 방(幇)을 울렸다. 그의 목소리는 우렁차 며칠 전 생사의 악투(惡鬪)를 치른 사람 같지가 않았다. 설 마 그런 상황에서조차 자신을 숨겼단 말인가? "더불어 악적들의 집단인 흑회(黑會)와는 더 이상 한 하늘을 지고 살지 않으리니, 이 순간부터 비응방의 모든 방도에게는 술과 고기를 금한다. 이 조치는 흑회를 이 세상에서 없 애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니, 이는 전 방주의 원한을 갚음과 동시에 앵아의 원혼 도 풀어 주는 의미이다. 모든 방도는 추호의 흐트러짐도 없어야 하리라." 심화절의 말에 누가 이의를 달겠는가? 주위에 있던 비응방의 방도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존명(尊命)!" 심화절은 그들을 보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앵아는 일등 공신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살아서뿐 아니라 죽어서도 비응방에 공헌 했다. 아니, 어쩌면 심화절에게 공헌했다 함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지도 몰랐다. 심화절은 겉으로는 신중하게 흑회에 대항하는 척했지만, 앵아의 죽음을 빌려 무작 정 싸움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고숭무의 비밀을 밝히고, 다시 흑회와 무작정 전투를 벌이는 일이 모두 앵아의 공 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앵아는 흰 손을 갖게 되었다. 비록 원했던 것과는 다른 형태였지만. * * * 산속. 엽혼의 종적을 쫓던 천령 일호는 동료들이 어느 정도 모이자 다시 추적을 시작했다. 그는 흔적이 너무 갑작스럽게 나타났고, 또한 비상식적(非常識的)으로 뚜렷함이 마 음에 걸렸다. 일호는 매우 신중한 성격이었고, 그런 성격은 언제나 그가 일을 함에 있어 도움을 주었다. 지금의 예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흔적을 찾자마자 허겁지겁 달려들었겠지만 그는 달랐다. "왜 이렇게 신중하십니까? 이렇게 흔적이 뚜렷하니 빨리 추격하여 공을 세워야 했 지 않습니까?" 일호는 설명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우리 흑회의 총단에 들어와 흔적도 없이 화령(花領)을 살해하 고 달아난 자다. 너는 그가 갑자기 무공을 모두 잃어버린 듯 이처럼 뚜렷한 흔적 을 남길 수 있다고 보느냐?" 칠호는 일호의 날카로운 분석에 감탄했다. "그럼, 이것이 함정이란 말씀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크다. 만일 우리를 유인하려는 함정이라면 십분 조심해야 한다."


칠호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일호가 다른 동료들을 불렀던 이유를 수긍했다. 일호는 상황을 보는 눈이 남달랐다. 칠호는 그가 일호의 자격이 있음에 충분히 공감했다. 그러나 살아 가며 겪는 일은 한 면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어쩌면 칠호가 엽혼을 쫓는 우두머리였다면 엽혼은 지금의 위기를 넘길 수 없었으 리라. 세상의 일이 단순한 지식만으로 된다면 어찌 세상사가 그처럼 복잡하겠는가? 때로 지식은 우리의 눈을 흐리게도 하니, 다만 맑디맑은 마음만이 소중할 뿐이다. * * * 흔적이 갑자기 끊어졌다. 뚜렷하던 흔적이 사라져 일행이 당황하고 있을 때, 칠호는 나무 그루터기에 붙어 있는 종이를 보았다. 핏빛으로 쓰여진 글씨도. <多謝從志 滅黑之處. 내 뜻을 따라 주어 대단히 고맙네. 흑회를 멸하는 곳이라네.> 칠호의 손짓에 따라 일호가 글을 읽음과 동시에 사방이 폭발하며 대나무창이 사방에서 날아왔다. "역시 함정이었다. 급히 물러나라." 일호가 다급하게 외치며 물러나고 다른 사람들도 뒤를 따랐다. 화약 연기 속을 빠져 나와 주위를 둘러보며 몇 명이나 다쳤는지를 알아 보는 일 호! 다행히 죽거나 다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함정의 흔적을 찾았다. '아무래도 함정이 약했나 보다.' 숲의 나무 아래, 바닥을 파고 숨은 엽혼은 가슴이 뛰었다. 나뭇잎으로 가린 위장은 훌륭했지만 흑회의 인물들이 발견할지도 몰랐다. 자신이 직접 설치할 수 있었더라면 흑회의 인물들을 없앨 수도 있었겠지만, 그의 지시로 여인이 하기에는 기관이 너무 어려웠다. 몇 개의 대나무를 묶고 진소백이 전한 화약을 놓아 가까스로 함정을 만들었을 뿐 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약한 함정에 적들이 속을까? 만일 함정이 너무 약하다고 의심한다면! 그가 흑회의 인물이 영리하기를 바랐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영리한 자라면 이미 자신의 흔적을 따라오면서 의문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엽혼의 흔적은 너무 뚜렷하여 도저히 무공을 지닌 강호인이 남긴 것이라 볼 수 없 었다. 영리한 자는 그것이 혹시 함정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예상외의 약한 함정은 그런 의심을 가중시킬 것이다. 이것이 엽혼이 노리는 것이었다. 상대편이 주저하기를 그는 바랐다. 어차피 지금 이곳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상대방이 주저하는 동안 운이 좋게 그의 잠력이 돌아와 준다면 그는 이 위기를 넘 길 수 있었다. 엽혼의 등으로 여인의 미미한 호흡이 들렸다. 생면부지의 자신을 위해 여러 가지를 해준 사냥꾼의 딸.


산골에 무슨 향분이 있을까마는 그녀에게선 좋은 냄새가 났다. 여자 나이 열일곱에는 뒷물한 물에서도 향내가 난다 하였으니, 이것은 여인의 순 수한 살 냄새였다. 앞에서는 자신을 잡고자 하는 적들이 돌아다니는데 이런 상황에서 향기에 정신이 동하다니…… 엽혼은 스스로 생각해도 웃음이 났다. 하지만 사람은 그런 것이다. 절벽에 매달려서도 위에서 떨어지는 꿀물의 달콤함에 정신을 잃는다 하지 않는 가? 일호는 더욱 의구심이 들었다. 이건 함정이라고 하기엔 너무 허술했다. 한 명이 죽창에 스쳐 피를 흘렸을 뿐,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화약 또한 소리뿐이었는 듯, 큰 폭발음에 비해 주위의 진동이 약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의구심만 짙어졌다. 이것은 상식에 너무 어긋났다. '어쩌면 고도의 심리적인 함정인지도 모른다.' 망설이는 그에게 한 사람이 말했다. "뭘 그리 망설이시오. 겁내시는 게요?" 항상 자신의 신중함을 못마땅히 여기는 이호임을 안 일호는 인상을 구겼다. 이호 는 아까 자신의 신호를 받고 온 후로 계속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용기가 있다면 자네가 먼저 가보게." 일호의 말에 이호가 냉소하며 들어갔다. '이것이 고비다.' 엽혼은 생각했다. 그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고, 뒤의 여인도 느꼈는지 호흡이 가빠 졌다. 이윽고, 꽈`─ 꽝! 이번에는 소리만이 아니었다. 일호는 이호의 몸이 허공으로 솟아올라 갈가리 찢어지는 것을 보았다. 무서운 위력의 화기(火器)였다. 진소백에게서 받은 단 하나의 폭화탄(爆火彈)! 엽혼이 준비한 최후의 계략이었다. "역시 함정이었다." 일호는 신음하며 물러났다. 덩달아 다른 사람들도 물러났다. 게다가, 하늘이 도운 것일까? 멀리서 흑회의 신호가 올랐다. 수상한 자를 발견했음을 알리는 신호(信號)였다. '모든 일에 우선하여 적을 섬멸하라.' 이것은 흑회의 지상(至上) 명령이었다. 일호를 위시한 모든 흑회의 인물들이 급히 신호가 올라온 곳으로 달려갔다. 누군가 산에 나온 사냥꾼이라도 발견한 걸까?


조금 후 나뭇잎을 헤치고 엽혼이 나왔다. 사냥꾼의 딸도 모습을 나타냈다. 한참을 얼굴도 모르는 사내의 등에 붙어 있던 그 녀는 얼굴을 발그레 물들이고 서 있었다. 엽혼은 그녀로 인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하늘에는 어느새 태양이 중천하여 양광(暘光)을 온 누리에 뿌리고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더라도 한 줄기 희망(希望)이 비추이는 세상의 이치와 같다고 그 는 생각했다. 햇빛 아래 선 여인은 예뻤다. 뽀얀 피부에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배어 있었다. 처음으로 여인 앞에서 가슴이 뛴다고 엽혼은 생각했다. 그의 지금 처지를 생각할 때 이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3 태양이 이글거린다는 표현은 지금과 같은 겨울에는 맞지 않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태양은 이글이글 타올랐다. 하늘의 태양은 비록 겨울 한풍(寒風)에 힘을 잃었지만 지금 심화절의 두 눈에 비 추이는 태양은 타오르고 있었다. "어차피 치를 전쟁이라면 한걸음이라도 앞서는 자가 유리할 것이오. 흑회의 본단 위치를 아는 지금, 난 한시라도 미룰 의향이 없소." 그는 지금 흑회와의 전투를 선언하고 있었다. "싸움은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오. 기세와 사기가 전황(戰況)을 좌우하니 두 분 은 방도들의 사기(士氣)를 진작시킴에 힘을 써주시오." 독소명과 사공두는 동시에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셋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본 방도들이 환호했다. 심화절은 손을 들어 환호에 답하고, 방도들을 진정시켰다. "이제 결전의 날이오. 단지 하루의 준비가 짧다면 짧을 것이나 한시라도 늦추는 것은 적에게 시간을 주는 셈이니, 결전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소." 심화절은 어조를 강하게 했다. "전 방주님을 시해하고, 우리 비응방을 농락한 자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일 기회가 왔소. 적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하지만……" 심화절이 조금 소리를 낮추었다. "여러분의 피와 땀은 곧 나의 것이니, 부디 무사하시오." 심화절의 마지막 말은 방도를 걱정하는 진정(眞情)이 배어 있어 무사들은 감격했 다. 심화절이 일반 무사와 아랫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이미 광문당주 시절부터 알려져 있었으니, 누가 이것이 심화절의 깊은 속셈임을 알랴? '내가 걱정해 줌으로써 무사들은 감격하고, 마음이 동한 무사는 오히려 자신의 생 명을 아끼지 않게 된다.'


돌아서는 심화절은 득의양양(得意揚揚)했다. 이제 흑회(黑會)는 제거될 것이다. 더불어 백회(白會) 또한 살아남지 못하리라.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선봉은 내가 선다." 사공두가 크게 외치며 말을 달렸다. 그의 충정은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앞에 나선 것을 당연시(當然視) 했다. 뒤는 독소명(獨蘇冥)이 받쳤다. 비응방의 일백여 무사들은 먼지를 피워올리며 방을 떠났다. 옥산(玉山)을 향해. 심화절은 그들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누가 보아도 걱정이 가득한 모습이지만, 한 사람만은 알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이 비응방 방도들의 목숨이 아니라는 것을. "자네는 뒤따라갈 생각인가?" 뒤에서 전음(傳音)이 들려 왔다. 심화절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고 있는지라 즉시 전음으로 응답했다. "당연한 일 아니오? 그들의 뒤를 지원하겠다 약속했으니 방주로서 약속을 지켜야 지요." "정말인가? 위험을 무릅쓸 각오를 했는가?" "후후, 그들이 간 곳은 사지(死地)이니 방주인 내가 도와 주기는 해야겠지요. 하지 만 도와 주는 시기는 내가 정하오." "자네는 흑회가 사공두 등과의 싸움에 지친 틈에 나타나려는 것인가?" "사공두는 제거할 수도 없고, 곁에 두자니 거추장스러운 존재요. 흑회가 나를 대신 하여 제거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그러나 비응방의 모든 전력이 손상된 뒤에는 어찌하려는가?" 심화절이 한숨을 쉬었다. 곁에서 그를 보는 사람들은 방주가 근심이 많음으로 생각하고 송구스러워했다. 고숭무와의 흉험(凶險)했던 일전에서 당한 내상(內傷)이 아직 완쾌되지 않아, 싸움 에 나서지도 못하고 방도들만 보낸 방주의 마음이 얼마나 쓰리겠는가? 그러나…… "후후, 어차피 비응방의 가치는 광산(鑛山)의 개발권에 있지, 방(幇) 자체에 있지는 않소. 그들이 모두 죽더라도 흑회와 백회가 공사(共死)한다면 억울한 일은 아니지. 아니, 오히려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소."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비응방의 누구도 모를 걸세." 심화절이 침통(沈痛)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걸으며 전음(傳音)을 보냈다. "그만 하고, 어서 그 사람에 대한 얘기나 하시오. 금사진의 장례식에 모습을 보였 다고 했지요?"


"그렇네. 분명히 그였네. 그런데 잠시 모습을 보인 후 을 수가 없네."

어디론가 사라져 종적을 찾

"하지만 나타났다면 어딘가 있을 게요. 우연히 그의 제자가 걸려든 것은 운이었지 만, 후후…… 이번 기회에 그 또한 제거해 버리고 말 거요." "무리 아닌가? 흑회와 백회 또한 상대하기 쉬운 자들이 아니네. 거기에다가 그까 지……" 이제 심화절은 멀리 사라져 뒷모습만이 보였다. 그러나 전음은 여전히 또렷하여 그가 내상을 핑계로 흑회와의 전쟁에 불참한 것은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어렵겠지요. 하지만 운이 좋다면 제거할 수 있을 거요. 우리 풍림서(風林誓)로서 는 큰 수확이 아니겠소?" 노존의 전음은 동의(同意)를 담았다. "그렇네. 그는 우리 풍림서(風林誓)의 큰 우환(憂患)이지." 이들이 말하는 '그'란 누구인가? 그리고 풍림서란 어떤 집단인가?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그'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이들이 흑회나 백회 같은 하나의 세력과 '그'라는 개인을 동급(同級)으로 올려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그'는 풍림서(風林誓)라 불리는, 심화절이 속해 있는 세력(勢力)과는 적대 관 계에 있다는 점도 확실했다. '그'의 제거가 풍림서로서는 큰 수확이라지 않는가? 멀리 보이는 심화절의 신형 이 비틀거렸다. 주위의 수행원들이 급히 그를 부축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화절이 손을 들며 무어라 말하고 있음도. 아마 이런 말일 게다. "괜찮다. 내상이 잠시 도졌구나." 그리고 수행원들의 눈에는 걱정과 감격이 가득할 것이다. 이렇게 심한 내상을 입고서도 방의 일에 애를 쓰다니…… 멀리서 이 광경을 보는 노존(老尊)의 귀로 심화절의 전음이 다시 들려 왔다. "어떻소, 방주로서 아주 훌륭하지 않소? 수하들은 수족(手足)처럼 나를 따르고 있 고……" 노존은 씁쓸하게 웃었다. 같은 편이지만 심화절은 가끔 너무 무서운 구석이 있었다. * * *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미인과 함께 걷는다면 더욱 기분이 좋으리라. 다만 엽혼의 마음에는 여유가 없어 산행(山行)의 즐거움을 만끽(滿喫)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은 따뜻함을 간직한 겨울 바람이 다시금 여인의 향내를 몰고 왔다. 엽혼은 또다시 가슴이 뜀을 느꼈다. 앞서 걸어가는 여인의 날씬한 종아리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그의 시선으로 들어 왔다. 겨울의 찬 날씨에도 불구하고 맨살을 드러낸 옷을 입었다는 것은, 그녀가 산속의 생활에 매우 단련이 되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흑회의 인물들이 곳곳에 있으니 그는 여인을 집까지 바래다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따져 보면 여인에게 새로운 은혜를 입었으니 그 또한 갚아야 할 빚이 아니던가? " 소화(小花) 낭자, 아직 멀었소?" 여인의 이름은 소화라 했다. 엽혼은 이제 어느 정도 힘이 회복되었지만 소화는 부득불(不得不) 자신의 거처로 같이 갈 것은 주장했다. 소화를 바래다 주는 의미도 있어 엽혼은 두말없이 따라 나섰 "거의 다 왔어요. 아, 저기예요." 그녀의 손이 가리키는 곳은, 낮아지는 산자락이 다시 구릉을 이루며 흘러가는 언 덕이었다. 아름드리 나무 몇 그루 사이로 숨겨진, 나무로 지어진 집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대호(大虎)를 잡으러 가셨으니 아마도 보름 이내에는 돌아오시지 못할 거예요." 엽혼은 머리를 끄덕이며 소화의 뒤를 따라 언덕을 올랐다. 아무 장식도 없었지만 잘 정리된 실내의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엽혼 자신의 담백한 성격과 잘 맞는 집이었다. 소화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너무…… 초라하지요?" 엽혼은 머리를 흔들어 부인했다. "아니오. 정말…… 깔끔하오. 아마도 주인의 성정(性情)을 잘 나타내는……" 엽혼은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 소화란 아가씨에 대해 잘 알지 못함을 깨달았던 까 닭이다. "자, 우선 그곳에 좀 앉으세요. 아니, 누우세요. 이래봬도 사냥꾼의 집이라 원기를 돋울 약재(藥材)가 조금 있답니다." 소화는 엽혼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얼른 부엌으로 나갔다. 잠시 후 들어온 그녀의 손에는 사기로 된 그릇에 검은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저희 집안에서 전해 오는 비전(秘傳)의 처방에 따라 만든 약이에요. 아버지께서 사냥감을 쫓다 지치시면 항상 드시곤 해요." 그릇을 내미는 그녀를 엽혼은 다시 한 번 보았다. 그녀의 눈은 맑아, 속까지 모두 들여다보이는 듯했다.


엽혼의 눈은 깊고 힘이 있었다. 그는 누구와도 눈싸움에서 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지금 힘이 없는 소화의 눈을 엽혼은 바라보지 못했다. 시선(視線)을 피한 엽혼은 소화의 손에 들린 그릇을 얼른 받아 바라보았다. 검은 약물! 먹어도 자신에겐 도움이 되지 않음을 엽혼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화의 눈! 자신이 그릇을 받아 가자 기쁨의 빛을 내던 그녀의 눈을 그는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꿀꺽! 꿀꺽! 약이 엽혼의 목을 넘어가는 모습을, 흡사 자신이 먹는 양 진지하게 바라보던 소화 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엿! "맛이 쓸 거예요." 엿은 달았다. 하지만 입 안에 감도는 감미(甘味)보다도 가슴에서 올라오는 따뜻함 이 더욱 엽혼을 행복하게 했다. 그는 살아 오면서 남에게 이처럼 따뜻한 대접을 받아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부친의 사문에서 축출(逐出)된 이후,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이제 죽음을 며칠 앞둔 지금에 와서, 그것도 처음 본 여인에게서 이런 따뜻함을 맛보다니. 엽혼은 소화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엽혼이 엿을 달게 먹는 것을 보고 두 눈 가득 기쁨의 빛을 담고 그를 보고 있었다. "달죠? 항상 제가 아버지를 위해 엿을 만들어요. 아버지는 제가 만든 엿을 무척이 나 좋아하셔요." 엽혼은 내심 탄식했다. 이런 여인과 평생을 조용히 살아 가는 삶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녀는 항상 자신이 무의식(無意識)중에 꿈꿔 오던 이상형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마음의 바람을 모두 이룰 수는 없었다. 지금 엽혼은 떠나야만 했다. "난 이제 떠나겠소." 엽혼의 말투는 자신조차 놀랄 만큼 무뚝뚝했다. 소화도 엽혼의 말에 놀란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쉬시다가…… 가시면……" 엽혼은 그녀의 말에 약해지는 마음을 추스리며 다시 말했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소. 오늘의 고마움은 잊지 않겠소." 이번의 말은 처음보다 더욱 냉정하여 소화는 고개를 숙였다. 한참이 지난 후, 고개를 드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음을 엽혼은 보았 다. "전, 아버지가 사냥을 가신 후엔, 때로는 한 달 이상을 혼자서 지내요. 제발, 가시 더라도 하룻밤만 보내신 후에…… 산속의 밤은 매우 무서워요."


그녀의 말은 애절했다. 여인의 애절한 말은 남자의 가슴을 무너지게 한다. 그리고 말보다 더욱 가슴을 저며드는 것은 바로 여인의 눈물이었다. 엽혼은 가슴이 철렁했다. 왜 처음 보는 이 여인이 이토록 자신의 마음을 부여잡는 걸까? 왜 자신은 지금 냉 정하게 돌아서지 못하는 걸까? 갈등하던 엽혼이 마침내 말했다. "하룻밤이라면…… 하지만 날이 밝으면 나는 곧 떠나야 하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눈물을 흘려 내던 소화의 눈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으로 뒤덮였다. "좋아요. 잠깐만요, 곧 식사를 준비할게요. 제가 한때는 성내의 거부(巨富) 밑에서 주방 일을 한 적도 있어, 요리 솜씨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답니다." 엽혼은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오자 순간적으로 온 세상이 모두 웃고 있는 환 상(幻想)을 느꼈다. 그의 심장이 떨렸다. 이런 것이 혹시 사랑이 아닐까? 어쨌든 그는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중 단 하루를 자신을 위해 쓰고자 결심 했다. 또한 소화(小花)란 여인을 위해 쓰고자 결심했다. 이 결심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 제 20 장 비중은비(秘中隱秘) 1 심화절이 엽혼의 일에 생각이 미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복잡한 일이 너무 많아 잠시 엽혼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엽혼이 필요했다. 심화절은 엽혼의 치료를 맡은 의원을 불렀다. "엽혼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느냐?" 의원이 대답했다. "며칠 내로 신지를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격잠지술(激潛之術)의 영향이 컸는지라 살아날 가능성은……" 무슨 말인가? 의원은 분명 엽혼이 일어나 사라지는 것을 보았는데…… "이제 흉수를 알았으니 그가 살아나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다. 명심할 것은, 그는 쓰일 곳이 있는 자이니 필히 정신이 돌아오게 해야 한다." 심화절의 준엄한 말에 의원이 허리를 숙였다. "존명(尊命)!" 의원은 천응각을 물러나와 다시 석실로 돌아갔다.


석실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엽혼과 같은 환자에게는 빛이 오히려 좋지 않으므로 일부러 택한 곳이었다. 석대 위에는 여전히 엽혼이 시체와 같은 몰골로 누워 있었다. 그러나 의원은 알지 못했다. 자신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 시체가 석실 안을 걸어다니며 중얼거리고 있었 다는 것을. 또한 시체는 지금도 누워서 속으로 쉴새없이 욕을 퍼붓고 있다는 것을. '빌어먹을! 천하의 복칠(福七)이 이게 무슨 꼴이람! 분타주님이 친히 명령하시기에 중요한 임무인 줄 알았더니…… 애고, 팔자에 없는 송장 행세라니……' 진소백의 명에 의해, 엽혼 을 대신하여 개방의 방도 한 명이 누워 있었던 것이다. 의원의 일시적인 기억은, 진소백이 생사의괴(生死醫怪)에게서 배운 망신단(忘神丹) 을 이용하여 제거했다. 망신단의 양을 조절하여 일시적인 기억만을 제거하는 기법(技法)! 생사의괴의 수법 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의원은 자신이 엽혼을 본 순간을 기억하지 못했으며 일부분의 기억이 사라진 것 에 대해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의원은 엽혼을 대신하여 누워 있는 복칠을 보며 또 혼잣말을 했다. "과연 깨어날 수 있을까?" 엽혼이 깨어나겠느냐고? * * * 새벽이 되자 엽혼은 물론 깨어났다. 우중충한 석실의 석대 위에서가 아니라 소화(小花)의 향긋한 침상에서 그는 깨어 났다. 엽혼에게 이날은 다른 어느 날과도 달랐다. 그는 침상 옆에 잠들어 있는 소화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 병간호를 해주시던 어머 니의 모습을 보았다. 이 여인은 너무 착했고 너무 아름다웠으며 또한 너무 사랑스러웠다. 하나 엽혼이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의 최선의 선택은 가능한 빨리 소화를 떠나는 것일 게다. 엽혼은 최대한 소리를 죽여 침상을 빠져 나와 밖으로 나갔다. 목옥의 문은 잠겨 있으니 열면 소리가 나리라. 그는 부엌을 통해 뒷문으로 나가기로 했다. 엽혼은 체력이 회복돼 잠력(潛力)이 살아났으니, 그의 걸음 소리를 소화가 들을 수 는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그녀는 엽혼을 잡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엽혼은 소화의 집을 떠나지 못했다. 그는 부엌에서 하나의 그림을 보았다. 너무 놀라 그는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림은 인물의 전신을 그린 인물화였다. 그 솜씨가 대단하여 이런 사냥꾼의 집에 걸려 있는 게 어울리지 않기도 했지만, 엽혼을 놀라게 한 것은 그런 점이 아니었다. 그림 속의 인물!


그는 엽혼이 매우 잘 아는 인물이었다. 항상 자신을 화선에게 안내해 주던 소하루( 霞樓)의 점원! 자신이 이엽(李葉)의 신 분으로 건네 주던 은자덩이에 입이 함지박만해지곤 하던 소하루의 조삼! 어찌 그의 인물화가 소화의 집에 걸려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가 입고 있는 옷은 결코 주루의 점원이 입을 수 있는 차림이 아니었다. 웬만한 재력(財力)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화려한 차림이었다. 조삼을 생각하자 비로소 엽혼은 가짜 화선이 어떻게 자신에게 청부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조삼이 관건(關鍵)이었다. 그는 다른 청부 살수는 진짜 화선에게 안내해 주었고 오직 엽혼만을 가짜 화선에 게 안내했다. 엽혼은 항상 조삼의 안내에 따라 소하루로 들어갔으니 충분히 그를 속일 수 있었 을 것이다. 조삼이 한패였다면, 가짜 화선이 엽혼에게만은 진짜 화선이 되는 일이 가능했다. 이런 복잡한 일을 꾸민 목적은 무엇일까? 엽혼은 자신의 잠력이 사라지며 고통에 몸서리치던 순간 떠올렸던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화선을 쫓으며 흑회(黑會)가 세상에 드러났다. 가짜 화선이 굳이 화선으로 행세한 이유는 흑회를 세상에 알리고자 함이었지도 모 른다. 그렇다면…… '진정한 범인은 흑회(黑會)가 아닐 수도 있다.' 그랬다. 이것이 보다 정확한 답에 가까울 것이다. 그에게 가짜 화선을 통해 살인을 청부(請負)했던 자는 일부러 화선이란 끈을 통해 흑회를 비응방에 알리고자 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조삼의 화려한 차림은 그가 이 음모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말해 주었다. 이제 엽혼은 떠날 수 없었다. 그는 떠나는 대신 소화(小花)를 깨웠다. 그림 속의 조삼에 대해 소화에게 물어야 했다. 소화는 두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켰다. 엽혼이 말없이 그녀의 눈앞에 그림을 갖다 대자 소화가 빙긋이 웃었다. "보셨어요? 솜씨가 없어서……" 그녀가 수줍게 말했지만 엽혼은 그녀의 수줍음을 감싸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이 그림의 인물을 알고 있소?" "그럼요. 그가 바로 제가 어제 말씀드렸던 성내의 거부이신 조(曺) 대인(大人)이에 요." 소화가 다시 수줍게 웃었다. "저는 처음에는 주방에서 일했어요.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림 솜씨가 있음이 알려져서…… 인물화를 그리는 일을 맡게 되었어요." 소화가 다시 웃었다. 그림 솜씨가 있다고 스스로 말한 것이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공자께서 잠들어 계시는 동안 밤새 그린 그림인데…… 어때요, 못…… 그렸죠?"


엽혼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니오. 매우 잘 그렸소." 정신없이 말하며 엽혼은 생각했다. 인연이란 어쩌면 이렇게 묘할까? 찾을 가능성(可能性)이 희박(稀薄)했던 단서를 이처럼 우연히 찾게 되다니. 그는 운명(運命)의 힘에 내심 고개를 흔들며 소화에게 물었다. 그녀는 엽혼이 자신의 그림을 칭찬하자 얼굴에 가득 기쁨을 담았다. "이 그림의 주인은 지금 어디 가야 만날 수 있소?" * * * 아침의 산길은 추웠다. 그러나 피부를 잠식해 오는 냉기보다도 더욱 가슴을 쓰리게 하는 것은 이별의 무 정함이었다. 소화는 눈물을 글썽이며 마음 아파했다. 그러나 엽혼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적어도 소화는 그들이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엽혼은 알고 있었다. 지금 헤어지면 다시 보지 못할 것 그는 돌아보고 싶 었다. 산길 멀리서 아직도 그의 등에 쏟아지는 소화의 시선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러나 엽혼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와 소화가 다시 볼 수 없다는 운명은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가 없음을 아는 까 닭이었다. 그의 감정은 흔들렸지만 그의 이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흔들렸지만 그의 발길은 흔들리지 않았다. 엽혼은 다만 꾸준히 산길을 따라 내려갔다. 이윽고 나무 사이로 그의 모습이 완전히 가려지자 소화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 * * 엽혼은 마침내 성내로 들어왔다. 번잡한 거리와 성도의 소음(騷音)은, 엽혼이 마음의 번뇌를 삭이는 데 도움을 주었 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알아 낸 사실을 진소백에게 전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 곳곳에 있는 개방의 연락망을 이용하면 되었다. 엽혼이 성내의 한 거지에게 동전을 던졌고, 거지는 뭐라 중얼거리면서 그 동전을 받았다. 동전은 거지가 가졌지만 동전을 쌌던 종이는 진소백이 받아 보았다. 그 종이엔 엽혼이 만난 진짜 화선과 조삼에 관한 얘기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모든 정보는 하나의 중심축 아래로 모여야 했다. 지금 중심축은 다름 아닌 진소백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의 정보를 모아서 분석하고 누가 가장 뒤에 숨은 음모자인지를 가 려 내고자 했다. 표면적으로는 고숭무와 흑회(黑會) 같았지만, 뒤에 숨은 다른 음모가 있을 가능성 이 컸다. 2


진소백은 옆에 있는 섭수진을 보며 말했다. "가짜 화선을 만든 이유가 뭐겠소?" 섭수진이 답했다. "흑회의 종적은 그 은밀함에 비해 너무 쉽게 드러났어요." 그녀의 말은 대답이 아니면서도 대답이었다. 화선(花仙)이라는 끈과 구천의 천랑파(天狼派)라는 끈을 통해 흑회는 너무 쉽게 실 체를 드러냈다. 흑회가 비응방의 이인자와 방주의 부인을 첩자로 잡을 만큼 은밀한 음모와 힘을 보인 데 비하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론은 누군가가 일부러 흑회를 세간에 알리고자 했다는 것! "그럼, 누가 그랬겠 소?" 진소백의 물음에 섭수진은 잠시 생각했다. "두 곳이 가능성이 있겠군요. 백회(白會)란 집단과 심화절!"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나의 문서를 들었다. 구천(仇賤)이 보내 온 문서! 그는 사부를 구해 준 은혜를 갚고 싶다는 구천에게 백회에 대해 더 조사하라고 지 시했었다. 문서에는 구천이 조사한 백회에 관한 여러 사항이 적혀 있었 "백회의 인물은 누 구라고 생각되오?" "글쎄요…… 일전에 고숭무를 해치우는 자가 백회의 인물이라고 확신하셨잖아요?" "고숭무는 독소명이 해치웠지. 하지만 그는 백회가 아니오." "그럼……?" 진소백이 조용히 말했다. "심화절 또한 백회라고 하기엔 앞뒤가 맞지 않고…… 난 사공두를 의심하고 있소." 섭수진이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사공두는 금사진에 대한 충성심이 지대했던 자예요. 그를 비응방이 아닌 다른 세력에 속한 자로 본다는 것은……" 진소백은 머리를 흔들었다. "백회(白會)는 흑회와 성격이 다르오. 일전에 신주낭객에게서 금사진이 백회의 우 두머리임을 듣지 않았소?" "그럼, 백회란……?" 진소백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난 금사진이 만든 세력이라 믿고 있소." "무슨 목적이었을까요?" "아마도 흑회에 대항하기 위함이었겠지. 금사진의 능력으로 보건대, 그는 흑회의


구성원이 정확히 누군지는 몰랐더라도 비응방의 주요 인물이 포함되어 있음은 알 았을 게요." "때문에 기존의 비응방의 세력과는 다른 세력을 만들었다는 말이군요?" "누구도 믿을 수 없었겠지. 그는 비응방을 키우는 것에만 주력하여 방의 내실을 다지지 못했소. 아마 그는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따로 찾았을 것이오." "이제야 어떻게 사공두가 백회(白會)에 속할 수 있는지가 이해되는군요." "오직 사공두 하나만 믿을 수 있었을 거요. 물론 확실한 건 아니지만!" 섭수진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금사진은…… 매우 외로웠을 거예요." 진소백도 동의했다. "그는 어쩌면 불쌍한 사람이오. 그의 능력이라면 비응방이 아닌 다른 방파에 들어 갔더라도 충분히 두각(頭角)을 나타냈을 거요. 하지만 그는 비응방에 들어갔고, 그의 인생은 고난 (苦難)만이 가득했소." "어쨌든, 공자가 말한 대로 백회의 성격이 그렇다면 그들이 금사진에 대한 청부를 했을 가능성은 없군요." "그렇소. 남는 것은 심화절뿐이지." "그 또한 백회의 인물일 가능성은 없나요?" 진소백이 머리를 흔들어 부인했다. "만일 금사진이 심화절을 백회에 가입시킬 만큼 믿을 수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따 로 백회란 것을 만들었겠소? 가능성이 없는 얘기요." 섭수진이 깨닫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심화절은 흑회의 인물 또한 아니니……" "그가 야심이 있는 자임은 확실하오. 두려운 것은 혹시 그 또한 뒤에 세력을 업고 있지는 않나 하는 점이오." "만일 그마저 세력을 등에 업고 비응방을 노렸던 거라면 정말 무서운 일이에요. 후`─ 금사진 주위에는 적들만 있었군요." "아마 그랬을 거요. 그는 한시도 남에게서 사랑을 받아 와 적의만이 있었소." 섭수진이 갑자기 생각난 듯 화제를 바꾸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에요. 틀림없이 오늘이 기 위해 출정(出征)하는 날이에요."

보지 못했소. 오로지 시기

비응방의 전력(全力)이 흑회를 치


진소백도 그 일을 생각해 냈다. "만일 심화절이 백회의 존재를 알고 사공두의 정체를 안다면……" "사공두는 살아남지 못하겠군요."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비응방의 다른 방도들도 별로 살아남지 못할 거요. 만일 심화절이 다른 세력을 등에 업고 있는 것이라면, 그들이 노리는 것은 비응방이란 강호의 세력이 아니라 광산이라는 구체적인 이권일 테니까 말이오." 섭수진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심화절은 무사들이 가능하면 많이 죽어 비응방의 전력이 줄어들기를 바랄 지도 몰랐다. 사람이 적어지면 그만큼 충신도 적어지는 법이므로. 그들을 죽게 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모든 전투는 선과 후로 나뉜다. 선봉(先鋒)은 사공두가 설 것이니 만일 뒤를 지원하는 심화절이 일부러 늑장이라 도 부린다면 그들은 살아나기 힘들 것이다. 심화절이 흑회와 사공두를 동시에 제거하고 싶다면, 단지 조금 시간을 늦추어서 지원군을 이끌고 나타나는 것만으로 족했다. 사공두가 이끄는 선발대를 모조리 무찌르고 힘이 빠진 흑회를 심화절이 상대하는 방법이었다. 사공두는 죽어 영웅이 되고, 심화절은 살아 칭송을 받으리라. "막을 방법이 없나 요?" 진소백이 머리를 흔들었다. "이것은 세력간의 싸움이오. 개인이 나설 수는 없소. 내가 할 일은, 숨어서 음모를 꾸미는 자를 찾아 내는 것뿐이오." 그랬다. 세력간의 싸움은 강호에서 늘상 있는 일이었다. 이해 당사자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진소백이 끼여들 여지는 없었다. 진소백이 할 일은 금사진을 죽인 진범을 찾는 것이었다. 강호에서 벌어지는 힘의 전쟁은 또 다른 일이었다. "좌우간 곧 금청청과 매일도가 돌아올 거요. 그때가 되면 뭔가 알 수 있을 거요."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나요?" 진소백이 말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갔소, 나를 대신해서." "누구……?" "나와 가장 가까운 분을 만나러 갔지!" 섭수진이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인의신개(仁義神 ) 노선배를 만나러 갔군요. 음, 이상한데……?"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들이 있는 곳이 개방의 사천분타인데 왜 굳이 금청청 등을 보내 인의신개와 연락을 취하겠는가? 진소백이 웃으며 말했다. "그분은 의형이신지라 물론 나와 가깝긴 하지만, 가장 가까운 분은 아니오." "아하, 알겠어요. 진 공자의 부모님을 만나 뵈러 가셨군요?" "하하, 내가 혼인할 섭 소저가 생겼으니 부모님께 물론 아뢰야겠지만, 아쉽게도 난 어린 시절 고아(孤兒)가 되었소." 섭수진은 그가 자신을 가리키며 혼인(婚姻)할 여인이라 하자 화를 내려 했으나, 뒤 이은 고아란 말에 충격을 받고 얼굴이 어두워졌다. "죄송해요. 전……" "괜찮으니 어서 맞춰 보시오. 매 형 등은 도대체 누구를 만나러 간 것이겠소?" 섭수진이 일부러 밝게 말했다. "아아, 알겠어요. 진 공자의 사부님을 뵈러 갔군요?" 진소백은 빙긋이 웃었다. "이제야 겨우 맞추었군." 진소백의 사부는 누구인가? * * * 옥산(玉山)의 천험의 요새(要塞)는 이미 진소백이 경험한 적이 있는 곳이다. 엽혼 또한 옆 계곡에 위치한 흑회의 총단을 잠입했다 나왔으니, 흑회의 경계가 몇 배 강화되지 않았다면 말이 되지 않았다. 경계는 강화되었고 사공두가 이끄는 비응방의 선발대는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이들은 백여 명에 이르는 대부대였다. 아무리 조심해도, 가까운 거리라면 흔적이 발견되지 않을 리 없었다. 그것이 독소명이 이처럼 삼백여 장 거리를 두고 일단 방도들을 정지시킨 이유였 다. 밤하늘은 어두웠다. 지금은 만물이 잠든 이경! 그러나 비응방의 무사들은 잠들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조심해야 하오." 독소명이 사공두에게 말했다. 원래 그의 서열은 숭무당의 부당주였으니 순찰당의 당주를 맡고 있는 사공두보다 낮았었다. 하나 고숭무를 직접적으로 해치운 공과 무공 수위를 참작해 지금 그들의 지위는 동격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작전은 독소명이 계획을 세우고 사공두가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 기로 했다. 사공두가 비록 용감했지만 머리 쓰는 일에 약함을 감안할 때 이런 편제는 지극히 당연했다.


"그냥 당장 쳐들어갑시다. 난 한시도 참을 수가 없소." 독소명이 난색을 표했다. "안 될 말이오. 심 방주께서 후발대를 이끌고 오경에 도착한다 하셨으니 우리는 반 시진 전인 사경 말에 공격해야 하오. 그 시간이 가장 깊게 잠드는 시간이기도 하니 기습이 성공할 확률이 가장 높소." 사공두는 비록 못마땅했지만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성질이 급하기는 해도 바보는 아니었다. 머리를 쓰는 일이라면 독소명이 자신보다 나음을 그도 알고 있었다. 사공두는 뒤를 돌아보며 나직이 군령(軍令)을 내렸다. "지금 시각은 이경. 공격은 두 시진 반 후인 사경 말에 개시한다. 그때까지 모든 무사들은 최대한 휴식을 취하되 결코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사공두의 군령은 조용하지만 빠르게 백여 명의 비응방 무사들에게 전달되었다. 무 사들은 다시 한 번 저마다의 무기를 점검하며 제자리에 앉아 휴식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쉬지 못했다. 이제 얼마 후면 생사를 건 싸움이 시작되므로. * * * 흑회의 밀실(密室)은 모두 어두웠다. 등잔이 있어도 방이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둠은 벽에 칠한 옻의 검은 칠(漆)에서 나왔다. 지금 그 검은 방에서는 존령(尊領)이 홀로 앉아 방금 전서구에서 빼내 온 서신을 읽고 있었다. <간다. 조심하라. 사공두는 이용 가치가 있으니 사로잡도록 하라.> 글은 간단했지 만 충분히 내용을 전달했다. 존령 또한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는, 아니, 그녀는 곧 머리 위의 줄을 잡아당겨 밖에 선 존령 이호를 불렀다. "주위의 경계를 십 배 강화하고 내일 아침의 기습에 대비하라."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굵고도 탁하게 변해 있어 누구도 존령(尊領)이 여인임을 알 수 없었다. "명을 받듭니다." 이호가 복명하고 물러나가자 존령이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흥! 흑회가 힘이 약해 지혜로써 비응방을 손에 쥐려 했던 것이 아님을 보여 주 마!" 그 음성은 다시 앙칼진 여인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잠들었고 깨어 있던 사람들마저 잠자리를 찾을 시간이었지만 흑회 내부에는 은밀한 움직임이 있었다. 흑회 곳곳에서 다른 장소를 향해 이동하는 무사들이 보였고, 철시를 갈고 화탄을 점검하는 무사들도 많았다. 그리고 삼백여 장 떨어진 한 숲에서는 비응방의 무사들이 철시와 화탄, 그리고 검 날을 다시 갈며 결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3


월광(月光)도 힘을 잃었다. 그믐이 가까워 미약해진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지자, 한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 다. 그러나 비응방은 분주했다. 후발대(後發隊)! 사공두와 독소명의 선발대(先發隊)를 지원하기 위한 후발대가 지금 막 출발하려는 것이었다. 무사들의 표정은 비장(悲壯)했다. 심화절의 연설은 모든 무사의 가슴을 격동시킬 만큼 탁월했었 심화절, 비응방의 심 방주가 말에 올랐다. 후발대는 그가 친히 지휘할 예정이었다. 한데, "우웃`─`!" 말에 오르려던 심화절이 또다시 비틀거렸다. 억지로 입을 다물었지만 옆에서 심화절을 보호하던 동패(董覇)는 심화절의 입가로 흐르는 피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즉시 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또다시 내상(內傷)이 도지십니까?" 심화절은 대답을 못 하고 손만 내저었다. 괜찮다는 의미였지만 이런 상황을 괜찮다고 볼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안 되겠습 니다. 저희들만으로도 충분히 흑회와 싸울 수 있습니다. 다행히 화골장 집형전주님 께서 지휘를 하실 수 있으시니……" 동패가 말렸지만 심화절은 완강했다. "방의 모두가 나섰는데 방주의 몸으로 뒤에서 편히 쉰다면 말이 되느냐? 내가 빠 진다면 방의 사기는 땅에 떨어진다. 잔말 말고 어서 나를 말에 태워라." 피를 토했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말에 오르려는 심화절을 본 동패의 눈이 붉어졌 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비응방을 위해 힘쓰는 이런 방주를 모신다는 게 영광으 로 느껴진 것이다. 하지만 그로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심화절을 말에 오르게 할 수는 없었다. "안 됩니다. 정 그러시다면 잠시 의원의 응급(應急) 치료라도 받으신 후에나 오르 십시오. 이 말씀마저 거부하신다면 이 동패(董覇), 설혹 목이 끊어지더라도 방주님 의 내상을 방도들에게 알리겠습니다." 이런 충정을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의원은 속명술(續命術)을 응용하여 심화절의 내상을 미봉(彌縫)했다. "그러나 하루빨리 제대로 된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또 무리하셔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의원의 말이었다. 기실 강호인의 내상은 의원의 치료보다 운기조식을 통한 자체 치유가 우선이었다. 하나 심화절에겐 조용하게 운기조식할 여유가 없었다.


동패가 걱정이 가득하여 말했다. "내상을 숨기시느라 억지로 진기(眞氣)를 끌어올리셔서 내상이 더욱 악화(惡化)되 셨습니다. 방주(幇主)님, 부디 몸을 보중하십시오." 심화절이 동패를 보며 미소 지었다. "고맙다. 네 충정은 잊지 않으마. 방에는 너와 같은 이들이 많으니 몸만을 아끼겠느냐!"

내 어찌 내 한

후발대의 출발은 심화절의 내상으로 인해 조금 지연되었다. 아마 도착하면 약속한 오경이 지나리라. 그러나 독소명은 예정대로 사경 말 공격을 개시할 것이다. 흑회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기습해야 하므로.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후발대가 늦으리라는 것을. 또한 누군가의 전서구를 받고 흑회의 존령이 이미 기습 사실을 알고 대비하고 있 다는 사실을. * * * "이곳인가?" 엽혼은 한 장원(莊園)의 담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 혼잣말이었다. 담장은 어른 키의 두 배가 넘어 장원의 소유주가 대단한 부를 지닌 자임을 알게 했다. 엽혼은 두 번 담장을 따라 돈 끝에 나무가 가장 높이 솟아 있는 곳을 택했다.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엽혼이 몸을 띄웠다. 하늘의 그믐달마저 구름에 잠겨 없으니, 엽혼의 검은 옷은 꽤 가까운 거리에서도 알아보기 힘든 보호색(保護色)이 되었다. 그는 밤까지 숨어 기다렸던 것이다. 장원의 내부는 매우 밝았다. 곳곳에 등을 달아 마치 대낮과 같았다. 가산(假山)과 인공 호수가 군데군데 있어 넓은 천하를 한곳에 모아 놓은 듯한 저 택이었다. 호수를 가로지르며 놓인 운교(雲橋) 위를, 화복(華服)을 단정히 입은 한 사람이 팔 자걸음으로 건너고 있었다. 걸음은 느렸으나 움직이는 속도는 의외로 빨랐다. 이는 한 걸음의 간격이 그만큼 넓다는 것이니, 곧 그가 강호의 고수임을 알게 했 다. 화복인은 운교를 건너 마침내 자신의 거처인 자하원(紫霞院)으로 들어갔다. 둥근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호피의자가 그를 맞았다. 호피의자에 앉으면 창 을 통해 가산(假山)을 볼 수 있어 그는 이곳을 아주 좋아했다. 의자에 앉아 한잔의 술을 독작(獨酌)하며 가산을 바라보다 잠이 오면 그대로 침대 로 가 자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방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는 호피의자에 앉아 술을 따랐다. 그의 명령에 의해 항상 의자 옆의 탁자에는 술과 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영롱한 호박빛의 술이 잔에 가득 채워지자 화복인은 다시 한 개의 술잔을 더 꺼내 어 다시 한 잔을 더 따랐다. 그리고 호피의자를 들어 방향을 돌렸다. 이대로 의자에 앉는다면 가산(假山)이 아니라 방안이 보일 것이다. 그는 개의치 않 고 의자에 앉아 술잔을 들었다. 화복인은 조용히 말했다. "비록 주인이 청하진 않았지만 이미 왔으니 어서 나오시오. 내 주인된 도리로서 술 한잔 권하리다." 화복인이 바라보는 휘장(揮帳)이 흔들렸다. 그 속에서 나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엽혼이었다. 호박주(琥珀酒)는 달고도 향긋했다. 술잔을 내려놓으며 엽혼이 말했다. "무척 단 술이오." 화복인이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단 술도 결국은 취하니 마찬가지 아니겠소. 자, 한 잔 더 하시오. 우린 구 면(舊面)이지 않소, 이엽(李葉) 대인?" 엽혼은 놀랐다. 자신이 숨어 있음을 알아챈 것도 놀랍지만 자신의 본모습을 보고 이엽이란 이름을 단숨에 댄 것에는 더욱 놀랐다. 그는 이자의 앞에 한 번도 본모습으로 나타난 적이 없었다. 엽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 심부름 값이 너무 후했던 모양이오, 조삼!" 화복인은 바로 조삼이었다. 주루의 점원이었던 그가 어떻게 이런 거부(巨富)로 나타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원래 거부가 주루의 점원으로 나타났던 걸까? "하하, 이 대인의 심부름 값은 확실 히 과했지요. 부지런히 모은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게 됐소." 조삼은 엽혼의 옷차림을 보더니 다시 말했다. "이 대인은 너무 손이 컸었나 보오. 사업이 모두 망했나 보구려?" 엽혼은 씁쓸히 웃었다. "옛 친구를 만났으니 회포를 풀고도 싶으나 안타깝게도 내겐 시간이 너무 없소. 조 대인이 부디 협조해 주시오." 말과 함께 그의 손목이 한 번 휘어 감기자 오른손에 기이하게 생긴 검이 나타났 다. 아홉 개의 마디가 한 개의 검을 이루는 이것은 바로 구절검(九節劍)이었다. 치우웅`─` 검이 떠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조삼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화가 나셨구려. 내 정신 좀 보게. 앉을 자리조차 아직 권하지 않았다니…… 자, 우선은 앉으시오. 내 무엇이든 대답하겠소. 사실 이 대인이


베푼 은혜(恩惠)를 생각한다면 무슨 말인들 못 해드리겠소?" 엽혼은 조삼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지만 결코 긴장(緊張)을 늦추지 않았다. 조삼이 그를 보더니 다시 웃었다. "하하, 내가 의자에 독이라도 발랐을까 봐 의심하는 것이오? 이거 정말 섭섭하오." 엽혼의 몸을 보라. 의자에서 반 푼 정도의 거리를 두고 떠 있지 않은가? 무릎을 굽힌 채 온몸의 무 게를 다리로만 지탱하는 것이니 쉬운 자세가 아니었다. "나는 이것이 편하오. 내 질문(質問)에 어서 대답이나 해주시길 바라오." 조삼이 더 크게 웃었다. "하하, 청부자와 가짜 화선의 정체를 알려 주는 일이 무어 그리 힘들겠소. 다만 오 랜만에 만난 옛 벗이니 술이라도 몇 잔 더 한 뒤에……" 조삼이 한 잔의 호박주(琥珀酒)를 다시 따르며 말하자, 엽혼은 언성(言聲)을 높였 다. "시간이 없다 이미 말했소!" 조삼은 태연했다. "시간이란 무엇이겠소? 인간의 하루가 하루살이에겐 평생(平生)이기도 하니, 우리 가 마음먹는다면 늘기도 줄기도 하는 것이 시간이오. 시간의 속성이 이와 같은데, 어찌 시간이 부족 하다 하오?" 조삼은 스스로의 흥에 겨워 눈까지 감은 채 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으니 한번 결심한다면 없는 시간도 만들어 질 수가 있을 게요." 조삼이 손을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처럼 말이오." 순간, 파칭! 쇠와 쇠가 부딪는 파열음(破裂音)이 일며 믿을 수 없게도 엽혼이 앉아 있던 의자 의 양 손잡이에서 쇠줄이 튀어나와 엽혼의 양손을 결박(結縛)하는 것이 아닌가? 엽혼이 놀랐을 때는 이미 발목도 쇠줄에 잡혀 전신을 움직일 수 없었다. 창졸간의 일이라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원래 독(毒)을 조심하여 몸을 의자에 채 붙이지 않았지만, 이것은 예상치 못 했던 공격이었다. 호피(虎皮)로 싸여진 의자의 뒤에 기관이 있었음을 몰랐던 까닭이었다. 조삼이 술잔을 마구 흔들며 통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별수없이 시간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소? 하하하!" "이, 이런 비열한……" 엽혼이 쇠사슬을 끊으려고 힘을 쓰는 모습을 보며 조삼(曹三)이 선언했다.


"안 되지, 안 돼! 당신의 기량(技倆)은 이미 충분히 오랜 기간 연구되었소. 그 사슬 은 당신의 힘으로는 끊을 수 없소." 그가 소리를 낮췄다. "비밀 통로 안의 쇠창살은 아무 의미 없이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소. 만에 하나 당 신이 비응방에서 죽지 않고 돌아올 때를 대비함이었지." 그는 자신에게 어떻게 그처럼 쉽게 비응방의 내부와 비밀 통로에 어왔는지를 깨달았다. 의심하고 있을 때와 직접 확인했을 때의 느낌을 달랐다. 엽혼이 분노하여 외쳤다. "역시 음모(陰謀)였나? 왜 하필 나였지?"

관한 정보가 들

조삼이 말했다. "강호에 살수가 많다 하나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비응방의 내부에 잠입이나 하겠 소? 금사진의…… 암살이야 다른 제이의 방법이 있었지만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 소." 조삼은 엽혼이 분노하면 할수록 더욱 기분이 좋은지 다시 한 잔을 더 마시고는 말 을 이었다. "고숭무와 흑회에 모든 혐의를 씌워야 했지. 그러기 위해선 무공 외에도 당신의 영리한 두뇌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소." 엽혼이 물었다. "가짜 화선을 내세워 청부를 한 것도 그럼……" "옳소. 흑회의 진짜 화선이 소하루에서 살인 중개업을 하고 있었으니 당신에게 화 선이란 이름으로 청부를 한 것이오. 다시 생각해도 좋은 계책이었소." 조삼이 다시 한 잔을 마시며 웃었다. "점소이의 권한이 이처럼 큰 것을 안다면 사람들은 앞으로 주루의 점소이를 함부 로 대하지 못할 것이오. 하하하!" 엽혼은 신음했다. "내가 잡히는 것도 예정된 수순이었는가?" 조삼이 엉뚱한 질문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금사진은 당신이 아니라도 제거(除去)되었을 것이니, 당연한 일 아니오? 당신이 잡혀 배후(背後)의 화선을 말하고, 다시 화선을 통해 흑회의 종적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당신의 의미가 무엇이겠소?" 엽혼의 두 눈에 분노가 어렸다. "그렇다면 내 동생을 납치하려 했던 일도……" "당연하오. 흑회의 명령을 가장해 구천에게 명령을 내렸지. 우리의 간세가 흑회에 도 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소."


엽혼은 드디어 진실을 알 수 있었다. 동생 엽평이 어째서 그처럼 쉽게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화선의 종적도 금방 발견될 수 있었는지를…… 모든 것은 이중(二重)의 음모였다. 금사진을 제거하고, 그 와중에 고숭무와 흑회마저 제거하려는 음모! 엽혼은 원래부 터 비응방에 사로잡혀 배후의 화선과 흑회를 찾아가는 끈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는 분노를 참기 힘들었다. 누굴까? 금사진이 죽고 고숭무가 제거되어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은? 엽혼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사공두의 도를 비도(飛刀)를 날려 제지했던 사람. 그리고 배후의 흑회의 존재를 천하(天下)에 알린 사람. 급기야는 방주의 지위에까지 오른 사람! 조삼은 다시 한 잔을 마셨다. 그는 엽혼이 포박당했음을 믿고 방심(放心)했다. "하하하, 모든 일은 끝맺음 단계(段階)이니 이제 당신은 이용 가치가 없소. 시간도 충분히 줬으니…… 이제 죽어 줘야겠소." 그를 보며 엽혼은 자신의 생각을 확신했다. "심화절이로군!" 조삼은 흠칫하더니 웃었다. "하하, 누가 그렇게 말합디까?" 때로는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것이 긍정(肯定)보다 더욱 강한 확신(確信)을 주기도 한다. 엽혼은 마음이 다급했다. 그는 이 사실을 빨리 진소백에게 알려야 했다. 조삼이 그의 마음을 짐작한 듯 웃었다. "벗어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거요. 그 쇠줄은 당신의 능력을 정확히 평가한 후 에 제작된 것이니까." 조삼은 이미 한 주전자의 호박주를 거의 다 비웠다. 그는 조금은 흐려진 눈으로 엽혼을 보았다. "이제 시간이 다된 것 같소. 당신은 이미 내가 왜 이런 얘기를 모두 했는지 짐작 하고 있을 것이오." 물론 엽혼은 알고 있었다. 비밀을 간직한 자들은 그 비밀을 말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산 자에게 말할 수 있 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 않은가? 비밀은 죽은 자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었 다. 그리고 죽을 자와 죽은 자는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 엽혼은 죽을 자였다. 엽혼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는 지금 죽을 수 없었다. 비록 며칠 안에 그의 목숨은 끊기겠지만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알려야 했다. 심화절에 대해 진소백에게 알려야 했다. 진소백이라면 어쩌면 어느 정도 심화절의 음모를 짐작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 만 증거가 없을 것 아닌가? 이런 확실한 증거를 엽혼 혼자만 알고 죽을 수는 없었다. * * * 사경 말(末)은 지금의 새벽 세 시이니 아직 동천(東天)에는 미명(微明)도 없었다. 만물이 가장 깊이 잠드는 이 시간에 사공두의 손이 소리없이 허공을 갈랐다. 그 손의 의미는 이러했다. "돌격!" 백여 명의 비응방 고수들이 그 손을 보고 야음을 갈랐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가는 탓에 속도(速度)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최고 속력으로 전진할 시기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적의 보초에게 최초(最初)로 발견이 되거나, 효과적(效果的)으로 매복을 제거하지 못하여 적들이 동료에게 신호할 여유를 주게 되면, 그 순간이 바로 전력으로 흑회 의 총단을 향해 달려갈 때였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 흑회 총단을 사십여 장(丈) 아래로 둔 언덕에 도달할 때까지 일곱 개의 매복과 열두 곳의 동초(動哨)가 모두 성공적으로 제거되었다. 백여 명 무사들과 사공두, 그리고 독소명은 흑회의 검은 총단 건물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의 저 건물들은 이제 곧 칼바람[劍風]에 잠기며 혈해(血海)로 화할 것이다. 사공두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허공을 두 번 감고 앞을 가리키며 힘차게 내려가는 손! 그것의 의미는 이러했다. "전속(全速) 돌격!" 다시 한 번 비응방의 고수들이 사공두의 손을 따라 달렸다. 이번에는 전력을 다한 것이라 그 속도가 가히 번개였다. 백여 명의 무사들과 백여 개의 검(劍), 도(刀), 창(槍), 시(矢)가 어둠을 가르며 흑 회(黑會)로 직격(直擊)했다. 제 21 장 화광충천(火光沖天) 1 옥산의 밤은 깊었다. 만물이 잠들고 모두가 조용했지만 여기 사성곡(四聲谷)만은 달랐다. 백여 명이 내지르는 고함 소리가 곡구(谷口)에서 회성(回聲)되어 들려 오며, 흡사 수천 수만의 군사가 부르짖는 착각을 낳게 했다. 비응방의 백여 무사들이 흑회의 총단을 기습하고 있었다. "우와와!" 함성(喊聲)은 왜 지르는 걸까? 혹, 적에게 겁을 주기보다는 자신의 무서움을 떨어버리려고 지르는 것은 아닐까? 사성곡은 외곡(外谷)과 내곡(內谷)으로 되어 있었다.


외곡은 현령과 황령이 맡았고, 내곡엔 존령, 지령, 화령이 거(居)했다. 화령이었던 진짜 화선과 지령이었던 고숭무가 죽었으니, 지금 내곡에는 존령과 그 수하들만 있었다. 천령은 사성곡에 살지 않기 때문이었다. 일전에 진소백과 섭수진은 신주낭객을 구하기 위해 외곡까지 들어왔었고, 그때는 마침 내곡에 아무도 없었다. 외곡엔 현, 황의 이 령이 있어 위기도 있었지만 진소백은 어렵지 않게 신주낭객을 구할 수 있었다. 엽혼은 내곡(內谷)에까지 들어갔었다. 그는 화령을 고문하여 흑회의 비밀을 알아 내었으며 나올 때도 들키지 않았다. 하나 엽혼의 잠입술이 진소백에 비해 월등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건 아니다. 엽혼 은 혼자 들어갔다가 혼자 나왔지만, 진소백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신주낭객을 구출하여 왔으며 그가 달아날 시간을 벌어 주어야 했던 것이다. 어쨌든 지금 비응방이 공격하는 것은 외곡이었다. 단숨에 외곡을 돌파하고 그 기세를 몰아 내곡마저 공격하는 것이 독소명의 계략이 었다. 기습 공격에 놀란 흑회가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이 되면 후발대가 다른 방면에서 공격해 올 것이다. 독소명(獨蘇冥)은 자신의 계획에 자신이 있었다. 전열(戰列)의 가장 앞에서 달려가는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이 사공두였다. 그는 전투에 임해서 결코 겁을 먹거나 꽁무니를 빼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항상 싸움에서 능력 이상을 발휘하는 비결이었다. 먼저 앞으로 돌격한 것은 사공두가 이끄는 검대(劍隊)와 도대(刀隊), 그리고 창대 (槍隊)였다. 그러나 흑회의 외곡 건물을 가장 먼저 공격한 것은 이들이 아니었다. 슈우`─`욱! 휘파람 소리 같은 소성(簫聲)을 꼬리에 달고 암천을 가른 철시대(鐵矢隊)의 화살! 꼬리에 화탄(火彈)을 매단 화살들이 검, 도, 창의 삼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흑회의 건물들을 때리며 폭발(爆發)했다. 꽈`─ 꽝! 흑회의 건물들이 삽시간에 터져 나가며 불길에 휩싸였다. 넘실대는 화마(火魔)의 혓바닥 사이를 뚫고 사공두의 삼대가 도착했다. "불길을 피해 나오는 적을 하나도 남기지 말아라." 적들은 새벽에 기습 공격을 받았으니 아직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정신없이 이어진 화탄의 공격과 불이라면 어지간한 사람이라도, 다만 불길 을 피하기에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합니다. 아무도 나오지 않습니다." 검대(劍隊)의 대장(隊長)을 맡은 안검(安劍)이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고개를 갸웃 거리며 말했다. 사공두도 이미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건물이 불에 타는데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는 건 당연히 사람이 없다는 소리였 다.


기습적인 방화(防火)였음에도 흑회가 이미 피해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아무리 머리 회전이 느린 사공두였지만 기습에 대한 정보가 어디선가 샜다는 의미임을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곡을 따라 난 좁은 길 사이로 보이는 사성곡의 내곡(內谷)을 쳐다보았다. 흑회의 인원은 저곳에 모여 있을까? 만일 내곡에 모여 비응방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만반의 준비 또한 갖추었을 것이 다. 어느 면으로 보나 기습이 실패했다면 물러나 다른 기회를 노리는 것이 정석(定石) 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사공두의 기질(氣質)은 달랐다. '후퇴라니…… 있을 수 없다!' 생각은 빨랐고 행동은 더 빨랐다. "목표는 내곡(內谷)이다. 가장 빠른 경공으로 단숨에 돌파한다." 그의 손이 두 번 허공을 감았다가 내곡을 향해 내려졌다. 신호를 알아들은 삼대의 대장(隊長)들은 각각 명령을 내렸고, 삼대 칠십오 명의 무 사들은 내곡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어갔다. 어쩌면 이것은 부나방 같은 행동일지도 모른다. 이런 일은 사공두(司空斗)이기에 가능했다. 그는 임무를 부여받으면 다만 그 자체(自體)에 충실할 뿐, 다른 생각은 할 줄 몰랐 다. 칠십오 명 무사들의 모습은 썰물과 같았다. 불빛에 반사된 그 썰물은 붉고 또한 검었다. 가장 앞서 달리는 사공두의 손에서 신호전(信號箭) 하나가 하늘로 올랐다. 신호전은 십 장 상공에서 터지며 화려한 오색을 수놓아 독소명에게 사공두의 뜻을 전해 주었다. '내곡을 공격하오. 화탄을 쏘아 주시오.' 신호전이 전하는 말이었다. 독소명은 사공두와 지금 사십 장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내곡(內谷)과의 거리는 이백사십여 장! 화탄을 실은 철시(鐵矢)가 미치지 못할 거리임은 당연했다. "이런 미친!" 신호탄에 담긴 사공두의 뜻을 이해한 독소명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철시의 최대 거리는 기껏해야 백여 장. 하지만 이미 최고 속도로 내곡을 향해 달려가는 사공두와 칠십오 명이의 삼대 무 사들이 보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독소명은 급히 철시대(鐵矢隊)에 신호를 보냈다. "지급(至急)! 전속으로 달려가 삼대(三隊)를 엄호(掩護)한다." 하나 철궁(鐵弓)은 무거웠다. 그들은 삼대의 무사들처럼 빨리 달릴 수 없었다. 아무리 최선을 다하더라도, 무거운 병기를 많이 든 철시대의 기동력이 떨어짐은 당연지사(當然之事)였다. 사공두는 이런 점을 잊었단 말일까?


그의 급한 성격은 어쩌면 전비응방의 무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었다. 한 명의 실수로 엄청난 인원에게 닥쳐 오는 재앙을, 그는 왜 모르는 것일까? 사공 두는 진정 백회(白會)의 인물인가? 그렇다면 백회의 목적은 오로지 흑회를 없앰에 있으니, 급한 마음에 앞뒤 가리지 못하고 달려들었다는 가정이 가장 설득력(說得力)을 가졌다. 어쨌든 사공두의 뒤를 따라 독소명이 이끄는 철시대마저 사성곡으로 들어갔고, 이 로써 비응방의 백여 무사들은 모두 사성곡으로 들어갔다. 독소명은 어지간히 마음이 급했었나 보다. "나는 먼저 가서 사공 당주를 돕겠다. 철시대의 지휘는 네가 다시 맡아라." 철시대(鐵矢隊)의 대장(隊長)으로 임명된 두철심(斗鐵心)에게 이렇게 외치고, 독소 명은 최대한의 경공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쑤앙! 그가 최선을 다하자 신형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었다. 독소명은 비응방의 선발대 최고고수였다. 사공두보다도 강했다. 평소의 사공두보다도. 사성곡(四聲谷)은 사방이 산으로 막혀 소리가 울린다는 뜻! 들어가는 길도, 나오 는 길도 곡구의 좁은 길밖에 없으니, 이것이 병가(兵家)에서 극구 피하는 진퇴양난 (進退兩難)의 지세(地勢)임을 비응방 무사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비응방 무사들이 모두 사라진 곡의 입구, 아니, 주위의 넓디넓은 구역에 걸쳐 소리 없는 움직임이 있었다. 아무도 없던 것처럼 보이던 풀숲 사이, 바위 아래, 나뭇등걸 등에서 검은 옷에 검 은 복면을 한 무사들이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나타난 무사들은 곧 일정한 격식을 지니고 도열(堵列)하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신호도 없었지만 익숙하게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 그들은 바로 흑회 (黑會)의 무사들! 소리도 없이 사공두와 비응방 무사들은 포위(包圍)되고 있었다. 시각은 이제 오경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심화절과 비응방의 후발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심화절의 내상 때문에 지체(遲滯)했다. 잠시의 지체는 싸움의 양상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싸움의 승패(勝敗)가 갈리는 순간은 바늘 틈 하나보다도 작은, 아주 짧은 시간으로 도 족한 것이다. 사공두의 삼대가 내곡에 거의 달했을 때, 철시대는 겨우 외곡(外谷)을 지나 이십여 장을 전진(前進)했을 뿐이다. 아직 내곡(內谷)은 사정 거리 밖이었으므로 철시를 쏠 수는 없었다. 앞서갔던 독소명조차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두철심은 다만 수하들을 독려하며 최고의 속력으로 전진하기를 다그칠 뿐이었다. "어서 움직여라. 하지만 아직은 사정 거리 밖이니 결코 철시(鐵矢)를 쏘아서는 안 된다. 여기서 쏘면 아군(我軍)이 다친다. 어서 움직여라." 그러나 거대한 쇠 덩어리인 철궁(鐵弓)이 쉽게 움직이겠는가? 마음만 초조할 두철심은 불현듯 뒤에서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을 들었다. 철시가 허공을 가르는, 귀에 익은 소리!

때,


"어느 놈의 자식이 내 허락도 없이 철시를……" 눈썹을 역 팔 자로 올리며 몸을 돌린 두철심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 허공 가득, 철시가 비처럼 쏟아져 왔다. 좀 전의 소성(簫聲)이 비응방의 철시와 달랐음을 그제서야 깨달은 두철심의 눈에 절망이 서렸다. 허공을 덮은 철시의 비! '피할 곳이 없다.' 오히려 앞서간 삼대가 유리했다. 그들은 철시의 공격 거리 밖에 있으니까. 두철심은 이를 악물고 품에서 신호전을 꺼내 하늘로 올렸다. 사력을 다해 던진 신호전(信號箭)은 평소보다 삼사 장 높은 곳에서 터졌다. 자신은 어차피 살아남을 수 없지만 다른 비응방의 방도들에게 흑회가 기습을 알고 있음을 알려야 했다. 노란색과 붉은색이 어울린 신호탄은 '위기'를 뜻하고 있었다. 신호탄이 허공으로 오름과 얼마의 시차를 두지 않고, 꽈`─ 꽈`─ 꽝! 땅이 흔들렸다. 새벽이 환하게 밝아지도록 많은 양의 화탄(火彈)이 동시에 폭발했다. 본래 철시대는 화약(火藥)을 가득 싣고 다녔다. 적을 공격할 그 화약이 공격을 받자 오히려 아군을 해쳤다. 흑회의 철시에 붙은 화탄과 비응방의 화탄이 합쳐져 폭발의 힘은 배가(倍加)되었 고, 철시대(鐵矢隊)는 아비규환 속에서 시체조차 남기기 힘든 폭발에 휘말렸다. 살가죽이 하늘로 날고, 튀어오른 핏줄기는 화염 속에서 어느새 증기(蒸氣)로 화 (化)했다. 뼛조각 하나 온전히 남기기 힘들었다. 2 동쪽으로 난 창문이 서서히 밝아 오기 시작했다. 엽혼이 들어왔을 때가 오경 무렵, 다시 말해 인시였으니 줄잡아도 두 시진이 지났 다. 조삼은 취했다. 그는 안심하고 있었다. 음모의 완성 시점에서 긴장이 풀린 걸까? 항상 결말 일보 직전에 음모가 무너지는 일이 많음은 호사가(好事家)들의 말장난 만은 아니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음모를 만들고 그것을 진행하는 주체(主體)가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음모의 진행은 끊임없는 긴장과 주의를 필요로 한다. 실패는 곧 모든 것을 잃음을 의미하므로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된다. 그러다가 완성을 눈앞에 두게 되면 모든 긴장(緊張)이 풀어지고 방심(放心)하게 된 다. 방심은 필연적으로 실수를 낳는다. 궁지에 몰려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게 된 희생자는 그 실수에서 역전의 길 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음모는 실패로 끝이 나는 것이다. 지금 조삼은 이러한 과정을 그대로 밟고 있었다. 심화절이 조삼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심화절은 조삼을 써서 처음에는 성공했지만 지금은 거의 실패했다고 할 수 있었다. 엽혼의 손을 묶은 쇠줄을 그는 너무 과신했다. 마음놓고 술을 마시기엔, 엽혼은 너무 위험한 인물이었다. 조삼이 술에 취해 깜박 잠이 든 순간, 엽혼의 몸에서 뼈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 려 왔다. 쇠줄은 튼튼했다. 엽혼의 능력(能力)을 충분히 감안해 만든 쇠줄을 끊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팔목과 발목을 힘껏 죄고 있어 빼낼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엽혼의 손발이 어린아이처럼 가늘다면 빠져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엽혼은 어린애가 아니었다. 몸도 마음도. 하지만 마음은 비록 어린애로 돌아갈 수 없더라도 몸만은 어린애와 같아질 수 있 었다. 우둑! 우두둑! 엽혼의 몸 곳곳에서 소리가 일며 그의 몸이 어린애 크기로 줄어들었다. 축골공(縮骨功)! 이 신묘한 기공에는 약점이 있었다. 시전하고 있는 동안은 지닌 무공을 채 반도 발휘(發揮)하기 어렵다는 것! 몸의 관 절과 혈관이 다른 형태로 이동한 상태에서 진기의 흐름이 평소와 다르게 되니 당 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만일 조삼이 잠들지 않았다면 엽혼은 축골공을 시전해 쇠줄을 빠져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삼은 잠들었고 엽혼은 탈출했다. 이제 입장이 바뀌어, 잠든 조삼의 목숨은 엽혼의 손에 있었다. '어떡하나……?' 엽혼은 망설였다. 지금 일격을 가한다면 조삼의 목숨을 뺏는 것은 여반장(如返掌) 이었다. 그러나 조삼을 죽일 수는 없다. 그는 살아남아 중요한 증인이 되어야 했다. 엽혼의 망설임은 조삼을 제압하여 데리고 탈출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두고 갈 것인지였다. 최선은 데리고 탈출하는 것이나, 만일 한 명을 등에 업는다면 행동의 제약이 너무 컸다. 그러나 엽혼의 망설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상한 낌새를 챈 걸까? 갑자기 조삼이 눈을 뜨며 일장(一掌)을 가해 왔다. "이런, 이게 어떻게……?" 조삼은 놀란 상태에서 일장을 날렸지만 창졸간에도 힘이 있어, 엽혼은 그를 제압 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것임을 한눈에 알았 망설여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엽혼은 급한 순간에 결론을 빨리 내리지 못했던 자신을 책망하며 오른손을 좌우로 휘둘러 조삼의 장력(掌力)을 막았다. 엽혼의 손에는 어느새 구절검이 완전한 모습을 갖춘 채 들려 있었다. "우욱!" 조삼이 자신이 내밀었던 우장(右掌)이 검세에 싸여 살갗이 터지려 함을 알고 급히 뒤로 물러설 때, 차`─`앙! 엽혼의 신형 또한 뒤로 물러나 창문을 뚫고 사라졌다. "쫓아라!" 깨진 창을 통해 엽혼이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조삼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좌우에서 십여 명의 인영이 솟아올라 엽혼을 추격해 갔지만, 그 속도는 엽혼에 비 해 턱없이 느렸다. 조삼은 알 수 있었다. 엽혼을 잡는 일이 불가능함을! 그는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에 세 군데의 찰과상을 입어 피가 흘러나왔다. "엽혼의 무공이 우리의 판단보다 이렇게 높을 줄이야……" 그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엽혼을 놓친 그의 얼굴은 의외로 담담(淡淡)하여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 었다. 조삼의 등뒤로 흰 옷에 흰 복면을 한 인영이 하나 내려섰다. 인영은 왜소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극히 탁하여 일부러 가성(假聲)을 냄을 짐작케 했다. "상처를 입었습니까, 오라버니?" 오라버니라니? 여인인가? 조삼이 차갑게 말했다. "대형이라 불러라. 난 그분이 내게 주신 이름으로 불리길 원한다." "알겠습니다, 대형!" "엽혼의 무공은 분석했던 것보다 높았다. 어찌 된 일이냐?" "비응방에서 그가 정신을 차리도록 하고자 격잠지술(激潛之術)을 사용했습니다." 조삼의 눈에 기광(奇光)이 어렸다. "격잠술? 잠력(潛力)으로 움직이다니…… 비응방에 그처럼 높은 의술을 지닌 의원 이 있었던가?" "그 점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잠력을 저렇게 사용한다면 그의 생명도 며칠 남지 않았겠군!" 백의복면인이 침묵했다. 조삼이 그를 한참 보더니 말했다. "설마 그에게 애정을 느끼는 게냐?"


"……" 조삼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너는 항상 우리 남매의 목숨을 구해 주신 그분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 백의복면인이 몸을 떨며 허리를 숙였다. "하시(何時)라도 잊지 않습니다." 조삼이 다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모두 했다. 그저 막내의 일이 걱정이로구나." 조삼을 쳐다보는 백의복면인의 눈이 떨렸다. "대형께선 항상 형제들의 걱정만 하시고, 자신은 조금도 돌보시지 않는군요!" 조삼이 미미하게 웃었다. "너는 내가 왜 이름을 조삼(曹三)이라 지었는지 잊었느냐?" "그분이 대형(大兄)이시니 어떻게 한 단계만 차이날 수 있겠느냐며 두 계단을 낮 추어 스스로 삼(三)이라 이름 지으셨었죠." 조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와 내가 비록 대형과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그분의 은혜를 갚지 않을 수 있겠느냐?" 조삼은 머리를 들어 뿌옇게 밝아 오는 동천을 보았다. 머릿속에 자신이 대형(大兄)이란 이름을 물려받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름을 물려주시면서 그분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조삼은 다시 한 번 다짐했다. 한 목숨 바쳐서라도 그분이 남긴 뜻을 이루리라고! '우리 형제 모두의 목숨을 바 쳐서라도.' * * * 금청청과 매일도는 새벽에 돌아왔다. 진소백과 섭수진은 한숨도 자지 않고 그들을 맞이했다. 생각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 심화절이 음모를 꾸민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그의 행동은 완벽했다. 고숭무에 대항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으며 흑회를 없애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 다. 무슨 증거로 그가 음모자임을 의심할 것인가? "가셨던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진소백이 매일도에게 물었다. 매일도가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찰 하나를 내밀었다. "진 형이 말씀하셨던 분을 뵙기는 하였지만, 머리에 큰 갓을 쓰신 탓에 얼굴도 뵙 지 못했소. 그분은 도대체 누구시오?" 진소백은 서찰(書札)을 펴며 웃었다. "나와 가장 가까운 분! 사부님이시라오."


"아!" 매일도와 금청청이 일제히 탄성을 발했다. 그들이 자신들이 만났던 기인(奇人)을 다시 한 번 떠올릴 때, 섭수진은 그보다는 진소백이 읽는 서찰의 내용에 관심이 갔다. 그녀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진소백은 아예 서찰을 통째로 그녀에게 넘겨주 었다. "자, 한번 보시오." 섭수진이 겸연쩍게 웃으며 서찰을 읽었다. 서찰에는 단지 강호 인물들의 명호만이 가득 적혀 있을 뿐이었 자신의 사부인 금 정(金頂) 신니(神尼)의 이름도 있음을 본 섭수진은 진소백에게 물었다. "이 명단(名單)은……?" "지난날 직, 간접적(直間接的)으로 분면음마(扮面淫魔)를 제거하기 위해 나섰던 강 호고수들의 이름이오." 섭수진은 의아했다. "제 사부님도 그때 계셨나요?"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면음마가 감히…… 손을 대었던 아미파의 제자는 바로 금정 신니가 수련(修鍊) 시절 같은 방을 쓰시던 분이셨소. 그분은 수치(羞恥)를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고 말 았소." 섭수진은 그제서야 왜 자신의 사부가 그토록 남자를 싫어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마지막에 분면음마가 금포승(金捕繩)에 사로잡힌 후 초의(草衣) 선사(禪師)의 만 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을 벤 아미의 여걸(女傑)이 바로 금정 신니셨소." "그랬군요. 그래서 그토록……" 섭수진은 의문이 생겼다. 자신은 모르는 전대(前代)의 일을, 어떻게 진소백은 상세하게 아는 것일까? "혹시 진 공자의 사부님께서도 여기 적힌 명단에 계신 분 중 한 분이세요?" 그러나 진소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웃으며 고개를 매일도 등에게로 돌려 물 었다. "매(梅) 형! 혹시 사부님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소?" 매일도는 생각에 잠겼다가 진소백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 있었소. 글로 전하기 어려우니 말로 전하라 하셨소…… 뜻 모를 말씀이셨는 데, '그의 뒤에는 그들이 있다' 분명 그리 전하라 하셨소." ─`그의 뒤에는 그들이 있다. 무슨 말인가? 누가 있다는 말일까? 하지만 진소백은 알아듣는 듯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중얼거렸다. "있었군. 그들이 있었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싶었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다. 진소백의 얼굴이 너무 굳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일도는 결코 호기심을 참지 못하여 예의를 잊어버리는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진 형! 어찌 된 일인지 설명을 좀 해주시오." 진소백이 설명을 시작하려는 순간, 개방 사천지부를 책임지는 광풍개 사종쾌(司綜 快)가 보낸 전갈이 있었다. 백의개(白衣 ) 구정(邱精)이 가져 온 전갈이었다. "엽혼이란 사람이 진 공자님을 찾아왔습니다." 진소백은 당연히 '어서 안으로 들어오게 하라'고 했다. 하지만 금청청의 표정은 굳어 갔다. 그녀와 엽혼의 관계는 미묘했다. 3 화약의 폭발이 일으킨 폭풍(暴風)이 한차례 옥산 사성곡의 외곡(外谷)을 훑고 지 난 뒤, 흑회의 고수들이 나타났다. 잠복해 있다가 화탄으로 비응방의 철시대를 한 번에 전멸시킨 천령 휘하의 일호와 이호! 그들은 내곡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내곡에서도 치열한 싸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철시대가 전멸한 지금, 화탄의 엄호를 받지 못하는 사공두의 삼대(三隊)는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밀려 외곡으로 후퇴한다면 곧 흑회의 화탄 공격을 받게 될 것이 다. 일호는 손을 들어 수하들을 정해진 위치로 전개시켰다. 검은 그림자들이 부챗살처럼 퍼지며 내곡으로 통하는 좁은 길을 봉쇄(封鎖)했다. 사공두도 폭발 소리를 들었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외곡에서 일어난 폭발은 결코 자신들의 철시대(鐵矢隊)가 일으킨 것이 될 수 없었 다. 순간적으로 그는 두철심이 터뜨린 신호탄을 보았다. 비록 곧 폭발에 묻히기는 했지만 두철심이 마지막으로 전한 '위기(危機)'의 신호는 비응방 전무사들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어쩌면 두철심 같은 사람들이 진정한 충신이리라. "당주님……" 검대(劍隊)의 대장 안검(安劍)이 넋을 잃고 사공두를 보았다. 사공두는 이를 악물었다. "적들이 우리의 기습을 역이용했다면 어차피 외곡 쪽도 이미 포위되었을 게다. 전 진한다. 다른 방법은 없다."


비록 사공두 자신의 성미에 맞는 결론을 내린 것이지만 사실 지금으로선 이 방법 밖에 없었다. 후퇴한다면…… 흑회의 화탄이 기다릴 것이다. 화탄 공격을 피하는 방법은 혼전(混戰)밖에 없었다. 적아(敵我)를 구분 못 하는 곳으로 화탄을 쏠 수는 없으므로. "힘을 내라. 곧 방주님의 후발대가 올 것이다." 사공두가 우렁차게 외치며 내곡(內谷)의 흑회 총단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가 입구을 향해 들어섰을 때! 맞추기라도 한 듯 좌우에서 곡 내의 좌우에 있던 숲속에서 흑회의 무사들이 쏟아 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와아`─`" 줄잡아도 각각 육십 명 정도씩은 되어 보였다. "당황하지 마라. 너희는 비응방의 정예(精銳)다. 침착히 적들을 맞아 가라." 도대(刀隊)의 대장인 욱일도(旭日刀)와 창대(槍隊)의 연환창(蓮幻槍)이 각각 외치며 좌우의 흑회를 맞아 갔다. 그사이 사공두는 흑회 총단의 정문을 부수며 난입했다. 그의 뒤를 따라 검대가 지원하기 위해 뒤따라 총단으로 들어갔 장내는 검과 도가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소리만이 가득했다. 사성곡(四聲谷)의 메아리는 온갖 소리를 끊임없이 증폭(增幅)시켜 흡사 이곳이 지 옥인 양 느끼게 했다. 무사들의 싸움은 고수들간의 대결과는 전개 양상(樣相)부터 판이하게 달랐다. 정면 대결을 펼쳐 실력이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결투가 아니었다. 공격은 주로 뒤와 측면에서 행해졌다. 한 명을 베고 나면 어느새 뒤에서 적의 도가 날라든다. 뒤쪽의 살기(殺氣)까지 일반 무사가 느낀다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 아닌가? 등이 갈라지며 쓰러지는 무사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냥 쓰러지든지 아니면 사력을 다해 자신을 공격한 자에게 한 번 더 도를 휘두르 고 쓰러지든지. 둘의 차이가 바로 사기(士氣)의 차이였다. 물론 쓰러지며 휘두른 도가 적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전 방주 금사진의 죽음과 잇따른 앵아의 죽음으로 흑회의 잔악함을 충분 히 맛본 비응방 무사는 이를 악물고 도를 휘둘렀고, 흑회의 무사는 피해야 했다. 어떤 도라도 맞으면 상처를 입는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죽어 가는 자의 도를 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 바람에 그의 뒤에 있던 다른 비응방 무사의 창이 허리를 찌르는 것을 보 지 못했을 뿐이었다. "커억!" 처음 등에 칼을 맞고 도를 휘둘렀던 무사는 이미 눈에서 빛이 꺼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마지막 일도가 만들어 낸 작품(作品)을 기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어차피 살 수 없으나 아깝지는 않았다. 적어도 자신을 죽인 자와 동행할 수는 있었으니까. 작은 차이가 모이면 대세를 좌우하기도 한다. 심화절이 떠날 때 심어 주었던 흑회에 대한 강한 증오와 비응방에 대한 굳은 충성 심은 비응방 무사들의 사기를 높여 흑회는 밀리고 있었다. 숫자에서는 비록 비응방의 무사들이 조금 적었으나 결국 이긴 것은 그들이었다. 중요한 것은 사기(士氣)였다. 비록 살아 있는 무사들이 이십여 명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두 배 가까운 적들을 섬 멸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안심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천령 이호가 이끄는 흑회의 화탄 부대는 어느새 그들의 배후까지 접근해 있었다. 원래 사공두가 총단 안으로 바로 들어간 것은 자신의 급한 성격 탓이었을 게다. 하지만 그를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뒤따라 들어온 검대의 무사들은 그가 얼마나 용감하게 싸우는지 보았다. 결코 물러섬이 없었다. 웬만한 자들은 그의 기세만으로도 기가 질려 주춤거렸다. "크악!" 물러서는 자의 허리에는 예외없이 사공두의 박룡도(搏龍刀)가 작렬했다. "싸움은 기세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아라. 싸움에 임한 이상 오직 전진만이 있 을 뿐이다." 사공두가 외치며 앞서가자 검대 무사들은 용기 백배했다. 그들은 함성을 지르며 사공두의 뒤를 따랐고 흑회의 몇몇 무사들은 살아남지 못했 다. 비응방의 기세(氣勢)는 총단 안의 넓은 광장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실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넓은 곳이었다. 원형의 광장(廣場) 둘레에는 곳곳으로 길이 뻗어 있어 사공두는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였다. 이때 어디선가 갈라지는 듯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좋아! 비응방의 박룡도(搏龍刀)가 싸움에 임하면 그 기세를 당할 자가 없다더니, 과연 그렇군!" 사공두가 놀라서 몸을 돌렸다. 존령! 그가, 아니, 그녀가 세 명의 수하만을 좌우에 이끌고 어느새 광장의 한구석에 서 있었다. "어때, 이곳은 싸우기 좋지 않나? 본래 우리 흑회의 연무장이지. 밖에 소리가 들리 지 않도록 고생하여 만들었던 곳인데, 이런 용도로 쓰이다니." 사공두가 코웃음쳤다. "쓸데없는 소리. 숨어 있지 않고 모습을 나타낸 것이 네 실수다. 차합!" 문답이 필요없었다. 이미 사공두는 허공을 갈랐고 그의 박룡도 또한 내리긋고 있었.


그 기세에는 존령도 감탄했지만 입을 뚫고 나온 것은 차가운 냉소였다. "감히 그 정도의 힘으로 내게 덤빈단 말이냐?"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 주위에 섰던 세 명이 검을 뽑아 들고 사공두를 막아 갔다. 놀란 안검도 검을 뽑아 사공두를 도와 날아갔고, 부대장인 단함(段含) 또한 검을 휘두르며 가세(加勢)했다. 삼 대 삼의 대결이었지만 사공두가 둘을 맡고, 안검과 단함이 하나를 맡는 형세였 다. 창! 창! 안검과 단함의 이 대 일 대결은 백중지세였고, 사공두는 둘을 상대하여 역시 백중 이었다. 존령은 놀랐다. 그녀는 사공두가 비응방의 삼 당주 중에서 무공이 가장 약함을 알고 있었다. 한데도 일호, 이호 두 명을 상대할 수가 있다니! 하지만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사공두의 무공이 약한 것이 아니라 비응방의 심화절과 고숭무의 무공이 너무 강했 다. 사공두는 상대적으로 약해 보였을 뿐이었다. 그녀는 냉소하며 팔을 들었다. 소매가 말려 올라가면서 하얀 옥수(玉手)가 드러났다. 하지만 안력이 매우 강해야만 그것이 옥수임을 알 수 있었다. 손을 든다 싶자 어느새 검은 경기(勁氣)가 손 주위를 감아 버렸으므로. 경기로 감추어진 그녀의 손이, 일, 이호와 어울리고 있는 사공두를 향해 쏘아졌다. 창! 그녀의 손과 사공두의 도가 부딪쳤는데도 그녀의 손은 말짱했고 오히려 사공두가 뒤로 밀렸다. "헉!" 사공두가 헛바람을 들이키며 호표력(虎豹力)을 최대로 올려 도를 팔방으로 휘둘렀 지만 존령의 손은 그의 도세의 빈틈을 잘 알고 있는 듯, 어느새 목줄기 가까이로 다가왔다. 따당! 사공두의 박룡도가 허공을 날아 벽에 박혔다. 그의 목에는 어느새 존령(尊領)의 손톱이 닿아 있었다. "너를 제압할 자신이 없었다면 왜 너를 이곳까지 들어오도록 가만 두었겠느냐?" 설명이 길었을 뿐, 사공두가 존령을 보고 공격했다가 반격을 받고 다시 사로잡히 기까지의 시간은 그야말로 눈 몇 번 깜박일 시간이었다. 검대의 무사 중에는 그나마 안검이나 단함 정도가 몸을 움직여 흑회와 몇 합을 다 투었을 뿐, 나머지 무사들은 모두 제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변화는 너무 빨랐고, 그 변화에 대처하기에 무사들은 아직 너무 약했다. 그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사공두의 목 앞에 존령의 날카로운 손톱이 닿아 있었다. 존령이 차갑게 말했다.


"모두 싸움을 멈추고 무기를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사공두의 목숨은 없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삼호가 안검과 단함에게 이검을 급히 쏟아 내곤 물러섰다. 무사들은 검을 땅에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짓이냐? 난 죽어도 되니 끝까지……" 사공두가 놀라 외쳤지만 곧 존령에 의해 아혈이 짚혔다. 안검이 검을 땅에 버리며 존령에게 외쳤다. "아까의 초식은 분명 개천풍운조(開天風雲爪)였는데, 너는 공동의 인물이냐?" 존령은 놀랐다. 일개 무사 중에 자신의 풍운조를 알아보는 자가 있다니! 그녀가 목을 까닥이자 뒤 에 서 있던 존령 일호의 검이 어느새 안검의 가슴을 쑤셨다. "존령께 무례한 죄다!" 비응방 무사들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새 사방의 통로에서 흑회의 인물들이 완전 무장을 하고 나와 그들을 포위했으 므로. 존령은 단신으로 나와 사공두를 안심시키고, 그 틈을 노려 사공두를 제압하여 비 응방의 무사들과 싸움 한 번 벌이지 않고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흑회 무사의 수효는 삼십여 명. 만일 심기가 깊은 사람이 이런 상황을 본다면 분명히 어디선가 비응방의 정보가 샜음을 느낄 것이다. 흑회 무사의 숫자는 항상 비응방 무사에 비해 조금씩만 많아, 흑회가 미리 정보를 알고 있었음을 대변했다. "후후,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오늘 들어온 자들 중에는 너희만이 겨우 살아남을 것 이다." 바깥의 도대(刀隊), 창대(槍隊)와의 싸움이 흑회의 패배로 끝날 가능성은 거의 없 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의 경우라도 존령은 대비해 두었다. 쾅, 콰쾅! 멀리서 폭음이 들렸다. 살아남은 비응방의 무사들을, 천령 이호가 화탄을 이용해 죽이는 소리였다. 존령은 감탄한 눈으로 실내의 무사들을 훑어보았다. 그녀는 비응방 무사들이 비록 사로잡혔지만 두 눈 가득 강한 적의를 감추지 않고 있음을 보았다. 그녀는 심화절에게 감탄했다. 바깥의 싸움에서 비응방이 이길 때만 천령 이호가 화탄을 사용한다. 비응방이 수적인 열세(劣勢)에도 불구하고 이겼다면 그들의 정신력이 흑회를 앞섰 다는 의미! 그가 방주위에 오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수하들의 사기를 이렇게 올려 놓을 수 있었을까? 쾅! 폭음이 다시 들려 왔다. 이번의 폭음은 달랐다. 보다 가까운 곳에서 들려 왔다. 존령이 눈썹을 찡그렸다. "아직도 비응방의 잔당이 남았단 말인가?"


콰콰쾅! 그녀의 짜증 섞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폭음이 일며 광장이 미미하게 흔들렸 다. 존령은 곧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이호의 화탄으로 이렇게 광장까지 울릴 리가 없었다. 그녀의 이런 의문을 확인이라도 해주듯, 다시 한 번 폭음이 울렸다. 꽈`─ 꽝! 이번의 폭발은 더욱 강했다. 광장이 흔들리는 정도(程度)를 벗어나 천장에서 돌부스러기마저 떨어졌다. 존령은 사태를 깨달았다. 그녀는 심화절을 너무 무시했다. 그가 이렇게 쉽게 당할 리가 없었다. 존령은 급히 명령했다. "퇴각하라. 총단이 곧 무너질 것 같다!" 그녀를 필두로 흑회의 인물들이 광장 오른쪽의 통로(通路)로 썰물이 빠지듯 사라 졌다. 남은 건 마혈(痲穴)이 제압당해 광장에 서 있는 비응방의 무사들과 사공두뿐이었 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돌의 크기는 폭음이 증가하며 커졌지만 사공두는 다른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미 오경은 지났다. 지금 흑회를 공격하는 것은 심화절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심 방주에 게 다른 여력이 있었을까?' 고숭무의 죽음으로 비응방(飛鷹幇) 힘의 삼분지 일이 와해되었고, 다시 오늘 흑회 와의 싸움에서 남은 힘마저 거의 소진(消盡)되었다. 하지만 지금 흑회를 공격하고 있는 심화절의 힘은 어디에서 구한 것일까? 후발대 의 전력은 선발대의 사분지 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정도의 힘으로 이처럼 흑회를 흔들 수 있는 걸까? 그는 도대체 어디서 또 다른 힘을 구한 것일까? 사공두가 의문에 잠겨 서 있는 사이, 떨어지는 돌덩이는 점점 커져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윽고, 쿠쾅! 자욱이 돌 먼지가 일어나며 집채만한 돌덩이들이 마구 떨어지기 시작했다. 폭발의 힘을 견디지 못한 광장의 기둥이 무너지며 천장이 완전히 가라앉고 있었 다. "우악!" "케엑!" 비명 소리가 잇달아 터지며 광장 살아남지 못하리라.

안은 돌과 먼지에 완전히 묻혀 버렸다. 누구도


비응방의 무사들은 모두 마혈(痲穴)을 제압당해 있었으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자들은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제 22 장 연정애사(戀情哀詞) 1 "어서 오게." 들어오는 엽혼의 검은 옷은 뿌옇게 먼지에 덮여 있었고, 그의 뺨은 핼쑥하여 한시 도 쉬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금청청은 이미 진소백을 통해 엽혼에 대해 들었다. 엽혼이 동생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했었던 것과 그의 생명이 사나흘에 불 과함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 남지 않은 자신의 시간을 빚을 갚고자 뛰어 다니는 엽혼 의 초췌(憔悴)한 얼굴 앞에 그녀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엽혼 또한 음모의 희생자일 뿐이지 않은가? 한때 죽이려 했던 엽혼이 었지만 이제 그녀는 다만 한마디밖에 꺼낼 수 없었다. "앉으세요." 엽혼은 자리에 앉았다. 금청청을 보는 그의 눈에는 감사의 염(念)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용서했음을 안 까닭이었다. 용서를 받더라도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의 생과 사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편안함이었다. 아무런 빚이 없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커다란 복이 아닐까? 이윽고 엽혼이 입을 열었다. 그의 입을 통해 놀라운 음모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진소백과 섭수진의 얼굴은 굳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심화절을 의심하고 있었으므로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금청청이 오히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비응방을 물려받은 심화절마저 그런 음모를 꾸민 자라면 금사진의 기업(基業)은 모두 악한(惡漢)에게 넘어가고 만 것이 아닌 아니, 이것은 비단 비응방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산의 거대한 광산에서 나오는 막대한 이익은 비응방의 힘을 일취월장(日就月將) 시킬 것이고, 심화절이 악한 마음을 갖고 있는 자라면 무림 전체에도 큰 위협(威 脅)이 될 것이다. 더한 놀라움은 흑회 천령(天領)의 정체였다. 이번에는 진소백조차 놀랐다. "그가 정말 풍운(風雲) 진인(眞人)이 틀림없는가?" 엽혼이 고개를 끄덕이자 좌중은 말을 잃었다. 적염(狄艶)이 흑회에 속했다는 사실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설마 구대문파에 속하는 천하대파(天下大派)의 주인이 흑회란 사도(邪道) 방파에 속하다니! 모든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싶었다. "혹시 그녀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은 없는 거요?"


매일도의 말에 엽혼이 고개를 저었다. "죽음에 이르러 거짓말을 할 사람은 많지 않소." 한참 동안을 중인들은 경악 속에 침묵했다. 문득 진소백이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섭수진에게 물었다. "아까 그 명단 속에 분명히 풍운 진인의 이름도 있었지요?" 섭수진은 그의 느닷없는 질문에 당황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그건 왜……?" 진소백이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고개를 들고 힘차게 말했다. "자, 이제 한번 정리를 해봅시다." 진소백이 일어서더니 왔다갔다하며 말을 시작했다. "금 방주는 백회를 만들어 암중에 고숭무의 힘을 견제했었소. 그것을 안 심화절은 오히려 두 세력을 역이용하여 금 방주를 살해하고 그 혐의를 고숭무와 흑회에 뒤집어씌운 뒤 자신은 방주위에 올랐 소." 진소백이 머리를 치며 말했다. "그리고 흑회와의 싸움을 이용해서 비응방 내에 있는, 금 방주가 남겼던 백회의 남은 힘마저 제거하려 하고 있소.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 가정이 있지만." 처음에는 누군가에게 말하는 듯하던 그의 말투가, 점점 몰입하며 혼잣말로 변해 갔다. "금 방주와 흑회, 백회를 모두 없애고 자신은 광산의 부를 이용해 새로운 비응방 의 방주로서 군림한다. 좋은 계략이지만…… 아니야, 뭔가 이상해. 이상하단 말이 야……" 진소백이 계속 자신의 머리를 치며 '이상해'를 연발하자 섭수진이 말했다. "무엇이 이상하단 말인가요? 제 생각에는 앞뒤가 잘 맞는 것 같은데요." "아니, 아니오. 뭐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으니 그만 합시다. 중요한 점은, 어쨌든 심화절이 방주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니 의견들을 내어 보시오." 섭수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만일 흑회가 풍운 진인 적일수까지 포함한다면 오히려 심화절이 그들에게 당하게 되지 않을까요?" 매일도가 동의했다. "섭 소저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오. 비록 비응방이 거대하고 심화절의 능력이 뛰어 남을 알고는 있지만, 구대문파의 저력(底力)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없소. 공동파만도 심화절은 당해 내지 못할 거요." 진소백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공동 전체의 힘이라면 심화절도 어렵겠죠. 하지만……" "다른 변수가 있다는 겁니까?" "글쎄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최근 몇 년간 공동파의 강호 활동이 눈에 띄게 줄어


든 것으로 보아…… 어딘가……" 진소백이 말을 하다 어두(語頭)를 돌렸다. "어쨌든 지금 비응방과 흑회가 한창 공방을 벌이고 있으니 결과를 지켜보도록 합 시다." 나머지 사 인이 동의했다. 이미 진소백은 개방의 정보망을 통해 비응방과 흑회의 싸움 결과를 즉시 알려 올 것을 지시했으니 문제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결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다리는 동안 진소백이 금청청에게 물었다. "심화절이 더 이상 자격이 없음을 알았으니 남는 건 금 낭자뿐이오. 비응방의 방 주로서 방을 이끌어 나갈 의향이 있으시오?" 금청청은 고민했다. 이윽고 그녀는 말했다. "전 생각이 없어요. 다만 적당한 인물은 생각이 났어요." "누구 말인가, 사매(師妹)?" 매일도가 물었다. "바로 사공두예요." 매일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면 비록 부족한 점은 있어도 잘 해낼 것이다. 무엇보다 성실한 사람이니까." 섭수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진소백이 나직이 말했다. "만일 그가 살아남는다면 가능하겠죠." 비응방과 흑회의 일전(一戰) 결과는 오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엽혼을 안내하고 밖으로 나갔던 백의개 구정이 다시 허겁지겁 들어왔다. "광풍개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구정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종쾌가 지친 얼굴로 들어왔다. 광풍개(狂風 )란 별호가 말해 주듯 그의 경공은 일절(一絶)이었지만, 먼 거리를 급 히 달려와 지친 것이다. 먼 거리에서 비응방과 흑회의 싸움을 지켜보다 결과가 나오자 바로 달려온 그였 다. "싸움은 끝이 났습니다. 심 방주가 이끄는 비응방의 무사들이 흑회를 초토화(焦土 化)시켰습니다. 흑회의 존령(尊領)과 몇몇 수하만이 어디론가 달아났을 뿐, 나머지 흑회의 인물들은 모두 죽거나 사로잡혔습니다." 숨이 찬 듯 말을 잠시 쉬었다가 계속하는 사종쾌! "안타까운 일은 심 방주가 뇌정구(雷霆球)를 개량한 화탄을 주로 사용했는지라 사 망자가 너무 많았다는 것입니다. 살아남은 흑회의 고수들도 심화절이 데리고 나타난 세 노인을 당해 내지 못했습니다."


"세 노인…… 이라 했소?" 진소백이 물었다. "예, 공자. 분명 비응방의 인물은 아니었는데 무공이 가공스러웠습니다." "좋소. 계속 말해 보시오." "뭐, 더 이상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사공 당주가 죽고, 심 방주는 그를 비응방 제 일의 충렬지사(忠烈志士)로 치켜세웠습니다." 사공두가 죽었다는 소리에 금청청은 아연했다. 이제 비응방의 장래는 어떻게 될까? 심화절은 자격이 없었다.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할까? 진소백이 사종쾌에게 물었다. "혹시 흑회의 무사들 중 공동파의 무공을 쓰는 자들은 없었소? 아니면 공동파의 제자를 근처에서 봤다든가." 사종쾌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없었습니다." 진소백이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정말 이상해." 풍운 진인이 흑회의 천령이라면 당연히 공동파가 나타나 흑회를 도와야 했다. 하 지만 공동은 결코 나타나지 않았고, 흑회는 멸렬했다. 무슨 다른 사정이 있는 걸까? 아니면 풍운 진인이 마음대로 공동을 움직일 수 없 는 걸까? 모두의 눈이 진소백에게 모였다. 은연중에 진소백이 모든 결정을 내리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흠, 흠, 우선 두 가지 의문을 풀어야 하오. 첫째, 왜 풍운 진인이 움직이지 않았느 냐는 점. 둘째, 심화절이 데려온 세 명의 노고수(老高手)가 누구냐는 점!" 그는 좌중을 둘러보다가 섭수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우선 나와 섭 소저가 공동파로 가겠소. 그리고……" 매일도를 보는 진소백! "매(梅) 형은 금 낭자와 같이 비응방으로 한 번 더 가주시오. 금 방주의 유품(遺 品)을 가지러 왔다는 핑계를 대고 심화절이 끌어들인 세 고수의 정체를 탐문해 주 시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엽혼이 입을 열었다. "난 무엇을 하면 되겠나?" 엽혼은 지금 잠력이 사라지는 주기(週期)가 되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자신이 할 일을 물었다. 진소백의 눈이 흔들렸다. "자네는……"


"당신은 그냥 쉬도록 하세요. 이미 당신이 진 빚은 충분히 갚았어요. 아버지께서도 용서하실 거예요." 금청청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엽혼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처지에 감사했다. 자신은 죄를 지었으되 용서를 받았으니 이제 빚이 없었다. 빚이 없이 죽을 수 있다니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인가? 문득 한 여인이 떠올랐다. 그녀에게도 빚이 있었다. 아니, 빚이 아니라 어쩌면 다른 감정인지도 몰랐다. 엽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아직 하나의 빚이 더 있소. 그 사람에게 가도 좋겠소?" 금청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당신의 삶은 오로지 당신 거예요." 엽혼은 진소백을 보았다. 진소백이 그에게 말했다. "자네는 평아(枰兒)를 한 번 더 보려는 겐가?" 엽혼은 고개를 흔들었다. "난 그애를 다시 볼 생각이 없네. 오히려 그의 마음만 상하게 할 뿐이겠지. 자네가 있으니 난 걱정하지 않겠네."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보지 않는 편이 서로를 위해 나을지도 몰랐다. "평아(枰兒)…… 의 치료는 언제라던가?" 진소백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오늘밤이라 들었네. 치료만 끝난다면 정상인과 다름이 없을 거라 하였네." 엽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전음으로 진소백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그애가 건강을 되찾거든 부디 잘 돌봐 주게. 평아의 재질(才質)은 못난 형보다 뛰 어나니 꼭 부모님의 억울함을 풀 수 있을 것이네. 그리고 무엇보다…… 자네에게 감사하네." 진소백은 눈을 크게 떴다. 눈물이 흐를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급히 전음을 전했다. 시간이 흐르면 말조차 떨리지 않겠는가? "평아는 걱정 말게. 그분이 돌보기로 하셨다네." 엽혼이 몸을 떨었다. "그분이라면……?" 진소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엽혼은 알아들었다. 그는 동생에 대한 걱정마저 모두 잊을 수 있었다. 엽혼은 떠났다. 그가 빚을 지고 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소화(小花)였다.


산속에서 만났던 순순한 여인! 하지만 엽혼이 진 것은 사실 빚이 아니었다. 엽혼은 다만 그녀를 보고 싶었다. 멀리서 얼굴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며 죽을 수 있다면 지금의 그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의 인생은 길고 힘든 경주였다. 그는 너무 지쳤고 너무 피곤했다. 이제 쉬고 싶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옆에 두고 다만 잠들고 싶었다. 그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부디 평아를 돌봐 주거라. 부디…… 어머니의 깊고 맑던 눈동자는 눈물이 가득한 채 서서히 감겼었 그때 어머니의 얼 굴에 감돌던 사자(死者)의 편안함을 엽혼은 느끼고 싶었다. 소화(小花)의 곁에서.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꼭 닮았다. 2 공동파는 물론 공동산에 있었고, 공동산은 감숙성(甘肅省)에 있었다. 그리고 감숙성에 가기 위해 진소백이 거칠 수밖에 없는 길가에 화화루(和和樓)가 서 있었다. 화평(和平)하다는 주루이니 조용히 쉴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진소백과 섭수진은 말 을 멈췄다. "에구,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주루이니 어서 들어갑시다." 노인처럼 말하며 진소백이 먼저 말에서 내렸다. 섭수진도 따라 주루로 들어갔다. 자리를 둘러보기도 전에 어린 점소이 하나가 조르르 달려왔다. 연신 웃으며 그들을 창가 자리로 안내하는 것이 무척 명랑해 보이는 아이였다. "헤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십니다. 뭘로 드릴깝쇼?" 섭수진이 얼굴을 붉혔지만 진소백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그놈, 보는 눈은 있구나. 이 집에서, 그러니까……" 진소백이 잠시 둘러보더니 말했다. "가장 비싼 술 세 가지와 가장 비싼 요리 다섯 가지를……" '아이구, 수지맞았다!' 점소이의 입이 함지박이 되었다. 진소백은 말을 이었다. "……빼버리고 나머지를 모두 가져 오너라." 주루에서 파는 술은 모두 네 가지였고, 요리는 모두 일곱 가지에 불과(不過)했다. 다시 말해 가장 싼 술 하나와 가장 싼 요리 둘을 시킨 셈이었 '이런 빌어먹을!' 점소이가 얼굴을 구기며 속으로 욕을 하자 진소백이 그를 노려보았다. "난 빌어먹지 않는다. 어서 가져 오지 않고 뭘 하는 게냐?" '앗 뜨거! 어떻게 속으로 한 말을 알았지?' 점소이가 급히 물러가자 섭수진이 조용히 말했다. "또 진 공자의 장난기가 발동하는군요. 한동안 조용했는데……" 진소백이 웃으며 말했다. "섭 소저 마음에 들려고 조심했는데 이미 거절을 당했으니, 참을 필요가 없질 않


소?" 섭수진은 눈을 흘기며 입을 다물었다. 툴툴거리며 술과 음식을 들고 오던 어린 점소이는 진소백과 눈이 미소를 지었다. 마음속의 말까지 알아 버리는 귀신(鬼神)임을 알게 되었으므로. 진소백은 음식을 식탁 위에 놓는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어디 보자. 내가 점궤를 봐주마."

마주치자 억지

점소이는 조마조마했다. '이놈, 아니 이분이 무슨 짓, 아니 무슨 행동을 하시려고……' 한번 마음속을 들키 자 속으로 욕하는 짓마저 겁이 나는 점소이였다. 진소백이 손을 짚어 가더니 무릎을 치며 말했다. "이런, 넌 오늘 운세가 매우 나쁘구나. 먼저 술로 목욕을 하고 이어 돈벼락을 맞을 운세다." 이건 무슨 말인가? 술 목욕은 차치(次置)하더라도 돈벼락이 나쁜 운세라니. '만일 진짜라면 횡재 수가 있는 겐가?' 점소이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 한 병의 술을 공짜로 더 갖다 주었다. "헤헤, 이건 복채로 생각하시고……" 진소백이 그를 보더니 말했다. "너는 의외로 인심이 좋구나." 점소이가 머리를 숙였다. "헤헤, 어머니가 아프신 탓에 제가 일을 합니다만, 헤헤, 적어도 성질 나쁘단 소리 는 듣지 않고 삽니다." 진소백이 그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아까 장난을 쳤던 것이 미안했는지 등을 툭툭 쳤다. 점소이는 등이 따뜻해졌다는 것만 느꼈지만, 섭수진 같은 고수(高手)는 알 수 있었 다. 진소백의 손에서 나온 한 줄기의 진기가 점소이의 등을 타고 백회혈로 들어갔음을! 점소이가 물러가자 그녀 는 나지막이 물었다. "왜 그런 거예요?" "아마 그가 아직 죽을 때가 아닌가 보오. 내가 장난기가 들고 그의 점괘를 봐주고 싶어진 것은 우연이지만, 아마 하늘이 그를 살려 주고자 함인 것 같소." 섭수진은 놀랐다. "그를 살리다니요? 진 공자는 역학(易學)까지 배우셨나요?" 진소백은 문득 옛날을 회상하는 듯 눈을 감았다 떴다. "내가 배우지 않았던 분야는 거의 없소. 철이 들고 나서부터…… 하루도 쉬질 않 았지. 그들을 상대해야 했으니까!"


마지막 말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섭수진은 가까이 앉은 탓에 들을 수 있었다. "도대체 그들이란 누구죠?" 진소백이 그녀의 말을 막았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요. 섭 소저도 인연이 있으니 곧 알게 될 거요." 그는 또 말머리를 돌렸다. "자, 한잔합시다! 오늘은 전번에 알려 준, 주기를 배출시키는 구결(口訣)을 기억하 면서." 섭수진은 이것이 생애의 두 번째 술좌석이었으며 두 번 모두 진소백과 마셨다. 첫 번째에 그녀는 몹시 취했고, 또 술집에서 격투가 벌어지는 바람에 무척 시끄러 웠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또다시 술집 입구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 올 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 까? 웅성거리는 소리에 둘러보니 건장한 체구의 중년사내 넷이 입구를 막고 서 있 었다. 그 중 황색 옷을 입은 자가 우렁차게 외쳤다. "우리는 공동의 동심사걸(同心四傑)이라 하오. 결례가 되겠지만 본(本) 파(派)에 침 입했던 도적(盜賊) 하나가 이 술집으로 숨어들었으니 부득이 수색을 해야겠소." 공동의 동심사걸이라면 장문인 풍운 진인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그들이 쫓아올 정도라면 도적이란 자의 중요도가 매우 큰 것인데…… "실례하겠 소." 공동의 위세는 그 때문인지, 손님들이 정말 "이봐! 얼굴을

크다. 말로는 예의를 차리는 동심사걸의 태도는 지극히 오만하여 주루의 죄인이라도 된 듯했다. 들란 말이다."

고개를 수그린 채 술만 마시고 있는 주정뱅이의 목뒤를 난폭하게 잡으며 이걸(二 傑)이 말했다. 그 바람에 주정뱅이가 잡고 있던 술잔이 허공을 날았다. 속에 담겼던 술도 같이 날아 점소이를 젖게 했다. '어, 이것 봐라? 정말 술로 목욕했네!' 점소이가 신기해할 때, 그의 생각이 어떻건 이걸(二傑)은 계속 주정뱅이를 흔들어 댔다. 하지만 주정뱅이는 이미 취한 듯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다. 이걸은 마침내 그를 다시 내려놓았다. 탁자 위에 어지럽게 놓여진 술병과 술잔들은 보았기 때문이다. 섭수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들의 태도는 너무 오만하여 전혀 정파의 제자라 볼 수 없군요."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구려. 어쩌면 풍운 진인의 인물됨이 전혀 정파의 그것이 아닌지도 모르겠소. 수하를 보면 주인을 아는 법이니……"


나직이 말했지만 멀리서 일걸(一傑)이 보고 외쳤다. "이봐, 거기! 뭘 떠드는 거야?" 섭수진이 다시 아미를 찡그렸다. 같은 구파(九派)의 제자라 하나, 그녀는 금정 신니의 직전 제자였으니 동심사걸과 는 배분이 달랐다. 그들은 공동의 삼대 제자이니 따지자면 섭수진에 비해 두 배분이나 아래에 있었는 데…… 섭수진이 노하여 외치려 할 때, 그녀의 귀로 진소백의 전음이 들렸다. "잠깐 나에게 맡겨 주시겠소?" 무슨 숨은 뜻이 있겠거니, 섭수진은 화를 억눌렀다. "아아, 우리 말이오?" 진소백이 일걸(一傑)을 보고 되물었다. "그래! 너희가 수상하구나. 흥! 남자 놈에 비해 여자가 너무 예쁜 것도 이상하고… …" '이놈의 자식이! 넌 죽었다.' 진소백은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겉으로는 웃었다. "의심 마시오. 우린 단지 유람차 지나가던 사람들인데 내 내자(內子)가 귀가 어두 워서 말이오." "그래서 떠들었느냐?" "그렇소. 주루가 시끄러운데 어디서 개가 짖느냐고 묻기에 큰일날 소리 말라고 대 답해 주었소." 개 짖는 소리란 말에 사걸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진소백의 귀에 섭수진의 전음이 들렸다. "시비를 걸어서 허실을 알아 보려는 거예요?" 진소백이 크게 말했다. "그렇소. 큰일날 소리는 처음부터 말아야 하오. 개는 사람을 물기도 하니 피하는 것이 상책 아니겠소?" 사걸은 그제서야 진소백이 시비를 걸고 있음을 눈치채었다. "크흐흐, 네놈이 감히 시비를 거는 게냐?" 그들이 흉흉한 눈으로 다가올 때, 진소백의 귓전에 누군가의 전음이 들려 왔다. "젊은이! 어쩌려고 그러나? 그놈들의 행동은 전혀 정파인의 것이 아니니 조심하 게." 굵고도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진소백이 눈에 이채(異彩)를 띠며 말했다. "아니오. 다만 우리 내자가 시끄러운 걸 싫어하니 강아지 네 마리만 몰아 내면 그


뿐이오." 손마디를 우드득 꺾으며 말하는 품이, 뭔가 있어 보여 사걸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색 옷을 입은 대걸(大傑)이 막내인 삼걸(三傑)에게 조심스레 눈짓을 했 다. "이 자식! 받아 보거라." 삼걸이 외치며 주먹을 뻗어 진소백의 가슴을 찔러 갔고, 진소백은 싸늘히 코웃음 쳤다. 대걸은 어쩐지 그의 웃음 소리를 듣자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펑! 가죽북이 터지는 소리가 나며 누군가의 신형이 정신없이 뒤로 물러나더니 벽면에 부딪혔다. 사람들은 눈을 부릅떴다. 뭔가 보여 줄 것 같았던 진소백이 일격에 격퇴당해 벽에 처박힌 채 기침만 해대고 있었던 것이다. "콜록! 이럴 수가…… 이렇게 강하다니, 콜록!" 섭수진은 그의 모습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이 남자가 또 장난을 시작하는 것인가? "크흐흐, 허풍만 있는 놈이었구나. 크흐, 죽어 봐라." 대걸이 괴소하며 일장을 들어 진소백의 명문을 내리치려 할 때였다. 휘잉! 돌연 바람이 일며 어디선가 술잔 두 개가 허공을 날아 대걸의 손목과 허리를 노리 지 않는가? "누가 암습하느냐?" 동심사걸이 동시에 외치며 술잔을 쳐갔지만 술잔은 믿을 수 없게도 허공에서 방향 을 바꾸며 여전히 대걸의 손목을 노렸다. 휘이잉! 술잔의 회전은 마치 돌개바람 같았다. 3 허공에서 술잔이 회전했다. 대걸은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후방위를 밟아 가며 급히 외쳤다. "도적이 나타났으니 어서 신호를 올려라." 그러나 남은 삼걸은 그럴 수 없었다. 다시 세 개의 회선풍(回旋風)이 그들을 공격하고 있었으므로, 피하는 것이 우선이 었다. 진소백은 술에 취해 뻗었던 주정뱅이의 품에서 동전 세 개가 허공을 가르며 회선 풍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았다. '회풍전(回風錢) 풍호진(風浩眞)!' 회풍전은 그의 동전 암기 이름이기도 했으며 별호이기도 했다. 정사 중간의 인물 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마음이 정대한 군자였다. 진소백은 알고 있었다.


그 또한 분면음마(扮面淫魔)의 제거에 일조했던 사람임을. 물론 사걸은 회풍전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문제는 그들이 신호를 울리면 오게 될 고수들이었다. 풍호진은 마음이 급했다. 이미 내상을 입어 지닌 무공을 십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어찌 세 개의 회풍전을 조종하는 것만으로 진기(眞氣)가 달림을 느끼겠 는가? 하지만 지금 풍호진은 삼걸을 향해 펼쳐진 회풍전 세 개를 동시에 조절함애 도 힘겨움을 느꼈다. 게다가 대걸(大傑)이 남아 있지 않은가? 풍호진은 대걸이 품에서 호각(號角)을 꺼내 불려는 것을 보았다. 그의 마음이 급해 지며 회풍전이 어지러워졌다. 삼걸은 여유를 찾았다. 일단 여유를 찾자 검을 꺼낼 수 있어 한결 대항하기 수월 했다. 그들의 검이 회풍전을 힘차게 쳐냈다. 창! 창! 창! 물론 이 소리는 풍호진이 위기에 빠졌음을 의미했다. 호각은 대걸의 입에 물렸다. 대걸은 힘차게 숨을 내쉬었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어느 틈에 진소백이 손바닥으로 호각을 막고 있었으므로. 뿐만 아니라 힘주어 안으로 밀어 넣자 호각이 이빨을 부수며 들어가 엄청난 고통 을 대걸에게 안겨 줬다. 하지만 대걸은 움직이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이미 아혈(啞穴)과 마혈(痲穴)이 동시에 제압되어 있었으니, 움직이고 싶어도, 비명 을 지르고 싶어도 결코 그럴 수 없었던 것이 이 모습을 보고 놀라 입을 벌렸던 이걸과 삼걸 역시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들도 등이 따끔거리며 전신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그들의 뒤로 섭수진의 모습이 드러났다. 남은 일걸 혼자서 풍호진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는 삼 초가 지나기 전에 제압되었다. 회풍전(回風錢) 풍호진은 놀란 눈으로 진소백과 섭수진을 바라보았다. "자네들은 만용(蠻勇)을 부렸던 것이 아니로군!" 진소백은 동심사걸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어느 놈을 데려다 괴롭혀 줄까?" 그는 지금 공동의 풍운 진인에 대해 물을 사람을 하나 고르는 중이었다. 풍호진이 다급한 신색으로 말했다. "그럴 시간이 없네. 곧 저들의 주력(主力)이 들이닥칠 것이네. 어서!" 그의 재촉에 진소백은 빨리 선택했다. "요놈이 낫겠다. 차근차근 괴롭혀 주어야지." 진소백이 고른 자가 일걸임을 본 섭수진이 말했다. "그보다는 대걸이 낫지 않아요? 아까 일장의 빚도 있으니." 그러나 진소백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요놈이 아까 나와 소저가 어울리지 않는다 했으니 빚을 톡톡히 갚아 주 겠소." 그는 불현듯 대걸을 보았다.


"이놈도 용서할 수는 없지. 이렇게!" 말을 하며 그가 발로 허리를 걷어차자 대걸이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자, 이제 갑시다. 풍 선배님도 어서." 풍호진은 진소백이 자신을 알아보자 놀랐지만 서둘러 뒤를 따라갔다. 바닥에 앉은 점소이는 목을 만져 보았다. 또 머리도 만져 보았다. 동심사걸이 쳐낸 회풍전 중의 하나가 그의 머리 백회혈에 명중했던 것이다. 그는 다른 두 개의 동전이 돌로 된 벽에 그대로 박힌 것을 보며, 다시 한 번 머리 를 만져 보았다. 말짱했다. 사실 진소백이 심어 두었던 진기가 회풍전을 밀어 낸 것이었지만 점소이는 짐작조 차 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목이 붙어 있음을 감사하며 줄행랑치고 있었다. '아이고 엄니, 나 살았어요!' 한참 지난 후 네 명이 주루 안으로 들어왔다. 둘은 늙었고 둘은 젊었다. 둘은 키가 컸고 둘은 키가 작았다. 네 명이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키 큰 노소(老少)가 서로 닮았고, 키 작은 노소(老 少)도 서로 닮아 마치 부자지간 같았다. 그들은 화화루(和和樓)를 둘러보았다. 화화루의 실내는 지금 조금도 화기(和氣)스럽지 않았다. 곳곳에서 부서진 탁자 부 스러기가 보였고 바닥에는 세 명의 대한이 쓰러져 있었다. 동심사걸 중 일걸을 제외한 세 명이었다. 그 중 대걸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멍청한 놈들!" 키 크고 늙은 이가 냉소하며 손을 휘젓자 두 줄기 지풍(指風)이 허공을 격하고 대 걸의 마혈과 아혈을 풀었다. 그러자 별안간 대걸이 미친 듯이 웃어대는 것이 아닌가? "크하하하, 하하하`─`" 노장(老長)이 얼굴을 찡그리며 허공을 격해 손을 좌우로 휘둘렀다. 짜짝! 직접 손이 닿지 않았는데도 대걸의 뺨이 빨개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래도 이놈이!" 노장이 다시 뺨을 치려 하자 작고 늙은 자가 나섰다. "소혈(笑穴)을 짚혔나 보다. 잠깐!" 그가 말하자 노장이 물러서는 것으로 보아 오히려 노단(老短)의 신분이 더 높음을 알 수 있었다. 노단은 대걸(大傑)을 유심히 보더니 갑자기 발을 들어 그의 가슴을 들이찼다.


대걸의 몸이 허공을 한 바퀴 돌더니 다시 땅으로 내려와 정신없이 피를 토했다. 비록 웃음은 멎었지만 지독한 해혈법(解穴法)이었다. 노단(老短)은 냉혹한 눈으로 대걸에게 물었다. "풍가는 어디로 갔느냐?" 대걸은 다시 피를 토하며 동쪽으로 난 창문을 가리켰다. "저, 저리로." 대답도 없이 네 명이 즉시 창문을 통해 동쪽으로 날아갔다. 대걸은 한숨을 쉬었다. 비록 가슴에 통증이 있고 조금씩 핏물이 올라왔지만 그에게 그 정도의 고통은 너 무나 상쾌했다. 고통이 상쾌하다는 건 이전에 비교가 안 되게 큰 고통을 겪었다는 의미. 소혈과 아혈이 동시에 짚혀 웃음이 나와도 웃지 못하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 람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대걸은 좀 전의 폐의청년의 손속이 이처럼 잔인(殘忍)할 줄 몰랐다. "이놈의 자식, 다시 만나기만 하면……" 그는 기어가 다른 두 동료의 혈도를 풀어 주며 이를 갈았다. 대걸의 귓가에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 온 것은 그때였다. "누구를 가만 안 둔다는 거지?" 대걸은 가버린 줄 알았던 진소백과 풍호진 등이 주방에서 나오자 다. "아, 아직 안 갔느냐?"

기절할 듯 놀랐

진소백이 눈을 부라렸다. "반말…… 이라는 건가? 아직 혼이 덜 났다는 말이구나." 대걸은 입이 떨렸다. "아, 아니, 아직 안 가셨습니…… 까?" 그제서야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하는 게냐? 네놈들 때문에 주루의 점원이 모두 도망갔으니 어서 술과 안주를 날라 오너라." 대걸은 최면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만큼 좀 전의 고통은 무서웠다. 일걸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진소백이 대걸의 혈도를 짚는 것을 보았다. 몸을 부들부들 떨었던 것으로 보아 극심한 고통을 당했음도 짐작하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대걸이 저처럼 진소백의 말을 잘 들을까? 일걸은 무서웠다. 고통은 막상 직접 당할 때보다 당하기 전 기다릴 때가 더 무서 운 것이기에. "그러니까 네놈이 우리 둘이 어울리지 않는다 했느냐?"


일걸은 대답이 없었다. 아혈까지 봉쇄되어 있으니 당연한 일! 그러나 진소백은 그 걸 모르는 듯 인상을 썼다. "오호, 감히 이 공자의 질문에 대답하기조차 싫다는 게로구나. 요놈의 자식!" 진소백은 일걸의 소혈(笑穴)을 눌렀다. '빌어먹을! 아혈을 풀어 줘야 말을 하지.' 속으로 백번 천번 외쳐 대던 일걸은 좀 전에 대걸이 당했던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 다. 예상보다 훨씬 심한 고통이었다. 그는 욕할 시간도 없었다. 하나에만 충실하기에도 벅찬 고통이었다. "술은 아직이냐?" 진소백이 외치자 대걸이 급히 달려왔다. 이미 진소백이 기해혈(氣海穴) 주위를 봉쇄하여 내공을 끌어올릴 수 없으니, 도망 은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공자님, 우선 이것이라도……" 그가 비굴하게 웃으며 두 병의 술을 내밀자 진소백은 향내를 맡아 보며 말했다. "좋아, 좋구나. 술값은 두고 가져 왔겠지?" 대걸이 급히 품에서 돈을 꺼내었다. "헤헤! 제가 깜박했습니다." 말하던 그가 일걸을 보았다. 떨고 있는 일걸을 보며 대걸의 등으로 한 줄기 오한 이 스쳐 갔다. '에구, 불쌍한 놈!' 진소백이 노하여 외쳤다. "이 자식아, 안주는 왜 안 나오는 것이냐?" 대걸이 다시 주방으로 달려갔다. 뭉그적거리다 다시 일걸처럼 당하면 어떡해! "자, 이제 천천히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풍 선배!" 풍호진은 이 청년에게 감탄했다. 적절한 손속으로 단숨에 동심사걸을 굴복시키다니. 그는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 젊은이들이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누구에게든 기대야 했다. 몸의 내상이 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청년의 능력으로 보아 반드시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4 이야기는 다시 옥산의 한 목옥으로 옮겨 간다. 작은 오솔길! 엽혼은 비록 두 번째 오는 길이었지만 눈에 익었다.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침나절부터 그는 나무 위에 올라 갈등하고 있었다.


이미 오후의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으니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그로서는 엄청 나게 중요한 시간을 보낸 셈이었다. 소화(小花)가 밖으로 한번 나오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엽혼은 마침내 들어가 보기로 작정했다. "계시오?" 자신의 목소리가 떨려 나올 때도 있음을 엽혼은 처음으로 알았 잠시 후 대답도 없 이 문이 열렸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소화가 아니었다. 사냥꾼 차림의 중년인! "뉘시오?" "소화…… 낭자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녀의 친구입니다. 사냥 가셨다던 그녀 의 부친이십니까?" 사냥꾼은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문을 열었다. "들어오구려. 그녀는 조금 전 잠깐 볼일이 있어 나갔으니, 곧 돌아올 것이오. 난 그애의 아비라오." 사냥꾼은 차를 내왔다. 엽혼은 일전에 소화가 약을 가져 왔던 때를 기억했다. 약은 매우 썼지만 엽혼은 조금도 쓴맛을 느끼지 못했었다. 지금의 차도 향긋하면서 매우 썼지만 엽혼은 다만 향긋함만을 느꼈다. 향기는 코로 들어오고 맛은 혀에서 느끼는 까닭이었다. 차를 마시려다 말고 다시 내려놓는 엽혼을 보고 사냥꾼이 물었 "왜 마시지 않는 건가? 남자가 타주는 차라 싫은가?" 엽혼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혼잣말처럼 조용히 말했을 뿐이다. "난 요즘 참을성이 없어졌소." 사냥꾼의 손이 흠칫했다. "무슨 말인가, 갑자기?" "내 말이 끝날 때까지 소화가 어디 있는지 말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오른팔을 포기 하는 것으로 알아듣겠소." 사냥꾼이 다시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급히 몸을 아래로 낮추었다. 엽혼의 구절검(九節劍)이 어느새 그의 오른쪽 어깨 위를 찔러 왔기 때문이었다. 상상하기 힘든 빠른 속도였지만 사냥꾼은 가까스로 피해 내고 소리 높여 외쳤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미쳤는가? 난 소화의 아비일세." 그러나 엽혼은 싸늘히 말하며 구절검을 회전시켰다. "흥, 사냥꾼이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종이 한 장 차이로 검을 피 할 수 있을 만큼?" 원래 처음의 일초는 사냥꾼이 무공을 지녔는지를 시험해 보기 위한 허초(虛招)였


다. 사냥꾼은 일부러 겨우 피한 듯 보이게 종이 한 장 차이로 어깨를 내렸지만, 그것 이 오히려 엽혼의 의심을 부추겼다. 구절검이 공기를 가르며 이번에는 실초(實招)로써 사냥꾼의 어깨를 노렸다. 사냥꾼은 어쩔 수 없이 허리를 비틀며 구절검을 피했다. 이번의 동작은 좀 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빨랐지만 그는 어깨에 길게 검 상(劍傷)을 입음을 피할 수 없었다. 사냥꾼과 엽혼의 눈에 둘 다 놀라움이 떠올랐다. "이렇게 강하다니, 네놈은 어떻게 알았느냐?" 엽혼이 냉소하며 다시 구절검을 휘둘렀다. "사냥꾼의 몸에서 어찌 노린내가 나지 않을 수 있느냐? 어서 소화의 행방을 말하 라." 구절검이 빛을 뿌리며 사방을 휘감았다. 어부의 몸에서 비린내가 나고 사냥꾼의 손에서는 짐승의 노린내가 나는 것은 당연 한 이치였다. 그러나 엽혼이 눈치를 챌 수 있었던 단서는, 그보다는 사냥꾼이 무심결에 했던 변 명이었다. '소화는 조금 전 나갔네.' 엽혼은 아침부터 문 앞에 있었다. 어찌 소화가 좀 전에 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사냥꾼이 악을 썼다. "네놈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외치며 구절검의 검세에 뛰어들었다. 엽혼이 급히 검을 회수했지만 이미 구절검의 뒤였다. 사냥꾼의 입술이 겨우 열렸다. "후후, 결코 알 수 없을 게다. 우욱!"

검첨(劍尖)이 사냥꾼의 가슴을 찌른

사냥꾼의 신형이 바닥에 쓰러질 때 엽혼의 눈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소화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도대체 이런 강호의 인물들과 소화가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혹시 흑회가 자신 을 추적하는 와중에 소화가 걸려든 걸까? 하지만 옥산(玉山)에는 이미 흑회가 없 다. 존령이 달아났고, 천령은 남아 있다지만 비응방과의 전쟁에서 자신의 종적까지 쫓 을 여유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일은 소화를 찾는 것이었다. 사냥꾼이 죽으면서 단서는 끊어졌지만 여전히 작은 희망이 있었다. 만일 소화를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면 사냥꾼이 여기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피할 시간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어딘가에 비밀 장소라도 있는 것인가?" 엽혼은 기관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알고 있는 원리가 하나 있었다. 비밀 장소의 문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 두 어야 한다. 또한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을 곳이어야 했다. 엽혼은 자신이 옛날 청부 자료를 숨겼던 곳을 기억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엽혼은 서둘고 있었다. 한 번도 이성을 느끼지 못했던 청년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낯선 감정! 만일 서둘지 않았다면 바닥에 누운 가짜 사냥꾼의 손이 꿈틀거리는 것 을 보았을 것이다. 하나 엽혼은 그 모습을 놓쳤다. * * * 끼이익! 문이 열렸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비밀 장소의 출입구는 엽혼이 짐작한 곳 근처에 있었다. 주방의 난로를 치우자 작 은 사각의 문이 드러났던 것이다. 통로는 갈수록 넓어져, 처음엔 겨우 들어설 수 있을 정도이던 것이, 이젠 보통 때 처럼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넓어졌다. 사방의 벽이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져 기이했다. 통로는 길었다. 이런 길을 만드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길이 소화의 집 아래에 있을까?' 그녀도 설마 무림에 속해 있을까? 생각하기도 싫었다. 산속에서 자신을 구해 준 것이 우연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는 자신을 쫓던 천령 일호가 다른 신호를 듣고 달려갔던 일을 기억했다. '설마 그때 다른 자가 나타났던 것이 운이 아니었다는 말일까?' 엽혼의 손에 땀이 났다. 그는 이런 가능성을 생각하기 싫었다. 어쩌면 그는 오지 말았어야 했다. 두 번 다시 소화를 보려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앞에 밝은 곳이 보였다. 물론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밝다는 것이지 환한 빛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엽혼은 어둠을 뚫고 두 명이 쇠사슬에 묶여 있음을 분명히 보았다. 그 중 한 명은 분명히 소화였다. 다른 한 명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엽혼은 주먹을 더욱 굳게 쥐었다. 그의 손에 고인 땀이 물처럼 바닥으로 흘렀다. 이윽고 다른 한 사람이 얼굴을 들었다. 우둑! 더욱 굳게 쥔 엽혼의 손바닥을 손톱이 파고들었다. 엽혼의 머리가 하얗게 비어 갔다. 그는 믿을 수 없었다. 다만 정신없이 속으로 외쳤을 뿐이었다. '나는…… 나는 오지 말았어야 했다.' * * *


진소백은 풍호진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공동의 숨겨진 비밀을 알려 주었다. "오 년 전 난 풍운 진인으로부터 급한 일이 생겼으니 급히 와달라는 전갈을 받았 다네." 오 년 전이라면 신주낭객도 급한 일로 공동파를 향했던 때가 아닌가? 도중에 사건 을 만나 흑회에 갇히기는 했으나…… 생각이 이에 미친 진소백이 물었다. "혹시 신주낭객 또한…… 연락을 받았던 것이 아닙니까?" 풍호진이 놀라며 대답했다. "어찌 알았는가? 틀림없이 그도 연락을 받았을 것이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풍운 진인이 두 분에게만 연락을 취한……" 풍호진이 잠시 망설이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세간에 알려지지는 않았네만, 우리 셋은 형제의 연을 맺었었다네." 왜 이런 말을 신주낭객은 하지 않았을까? 진소백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풍운 진인은 정파의 장문인이니 명성에 누가 될까 신주낭객이 조심했던 것이다. " 계속 말씀해 주십시오." "급히 달려간 나는 의외의 상황에 직면했다네. 용고(鏞姑)가 를 기다리고 있었네."

서슬이 퍼래져서 나

용고라면 풍운 진인이 오 년 전 결혼했다는 새부인이었다. 적염 또한 그녀가 데려 온 전 남편의 자식이라 했다. 엄청난 반대를 물리치고 기어이 자식이 있는 여인과 결혼한 적일수는 자신의 성 (姓)마저 물려주며, 그들 모녀에게 최선을 다했었다. "그녀의 말은 풍운 진인이 누군가에게 암습을 당했다는 것이었네. 그리고 풍운 진 인이 정신을 잃으며 나를 범인으로 지목했다는 것이었네. 난 어이가 없었지." 풍호진은 어이가 없었지만 반항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형수였고, 의형의 공동파에서 소란을 피울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오해야 곧 풀리겠지, 하고 순순히 잡힌 풍호진은 곧 자신의 생각이 안일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난 바로 지하의 감옥으로 끌려갔네. 의형은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심문(審問)조차 없었네. 감옥에서 시간이 지나자 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네." 그는 용고가 외인과 내통하여 적일수를 사경(死境)에 몰아넣고 광성옥패(廣成玉牌) 를 찾아 공동파를 완전히 손에 쥐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미 많은 수의 공동 제자들이 용고의 수중에 들어갔고, 공동파에서 축출당했던 자들이 다시 공동으로 돌아와 실권을 장악했다는 사실도. 가장 놀라운 사실은 지금 강호에서 활동하는 풍운 진인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이었 다.


진짜 풍운 진인은 사태를 눈치채고서 의형제들에게 연락을 취했다가 어디론가 유 배되었다. 이로써 진소백은 확실히 알았다. 왜 최근 공동( )의 강호 활동이 그처럼 뜸했었는지. 또한 어떻게 풍운 진인이 흑회 의 천령이 될 수 있었는지. 용고(鏞姑)! 그녀도 흑회의 인물일까? 제 23 장 형제번명(兄弟飜命) 1 유유곡의 아침은 상쾌했다. 기지개를 켜고 밖으로 나온 소년의 얼굴은 어딘가 둔해 보였다. 얼굴에 비해 턱 아래 살이 많이 붙은 탓이었다. "후후, 이젠 제법 토실토실해져 잡아먹기 좋게 되었구나." 뒤에서 불현듯 노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작은 키에, 만면에 웃음을 띤 노인을 보며 소년 엽평도 미소 지었다. "하하, 온통 비계뿐이어서 맛이 없을 겁니다." 생사의괴 종도(鐘塗)는 그의 치료는 특이하다면서, 이때까지 엽평에게 계속 영약과 기름진 음식만 먹여댔다. 덕분에 엽평은 어느새 턱에 살이 토실토실하게 찐 뚱보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드디어 오늘이다. 준비되었느냐?" "하하, 잡아먹히는 데 준비가 무슨 소용입니까? 잡아먹는 할아버지께서 준비가 필 요하시겠지요." 웃는 엽평을 바라보는 종도의 얼굴에는 정이 가득했다. 그는 엽평과 지내며 손자와 같은 정을 느꼈다. 엽평도 마찬가지였다. 이 노인은 장난기가 많으면서도 마음이 따뜻하여 부모의 정을 느끼지 못한 엽평을 잘 다독여 주었다. 그의 성격은 종도의 영향을 받아 많이 밝아졌다. 종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따라오너라." 후원(後園). 약향이 가득한 후원 안에는 사철 쉬지 않고 한풍(寒風)이 몰아치는 동굴이 있었다. 그 한풍을 맞으며 종도와 엽평은 서 있었다. "이곳이 없었다면 너를 치료할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곳의 한풍은 상처 를 더 이상 썩지 않게 해주는 효능이 있지." 종도는 말하며 옆에 있는 쇠침대 위의 하얀 천을 걷었다. 놀랍게도 그 속에 든 것은 전신이 갈가리 찢어진 사람 하나였. 두개골(頭蓋骨)도 산산이 부서져 뇌수(腦髓)가 흘러나왔지만, 믿을 수 없게도 가슴 에 기복이 지고 있었다.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보는 종도의 눈에 뿌연 습막이 차 올랐다. "또한 내 아들 수(秀)의 생명도 연장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종도(鐘塗)는 엽평을 보며 말했다. "다시 한 번 약속해 다오, 꼭 내 아들 종수의 원한을 갚아 주겠다고!" 엽평이 급히 무릎을 꿇었다. "할아버님의 원한은 곧 제 원한입니다." 종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소백에게 이미 금낭(錦囊)을 전했으니, 네가 힘을 합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자, 이제 누워라!" 엽평은 발가벗은 채 한옥(寒玉)으로 만든 침상에 누웠다. 종도는 굳은 표정으로 옆에 서 있었다.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다. 종도가 그의 전신에 금침을 꽂아 가며 말했다. "네 병은 심장에 혹이 돋아 혈행을 방해하여 생긴 것이다. 발병하면 지닌 내공도 소멸되고 말지만 천행으로 완치된다면 큰 이점이 있다." 다시 전신의 대혈을 때리며 종도가 말을 이었다. "이전의 내공이 피 속 가득 녹아들어 다시 무공을 익힐 때는 내공의 진전(進展)이 범인에 비해 십 배는 빠르다는 것이다. 혈액 공급을 잘 받지 못했던 전신의 기관들이 저마다 잠력을 개발한 덕분이기도 하다." 이어 종도는 호로병에 든 액체를 엽평의 전신에 붓고, 입으로도 흘려 넣었다. 천마산(天痲散)! 전신의 혈행(血行)을 일시지간 정지시킨다. 엽평의 치료를 위해서는 가슴을 갈라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네 치료는 극히 위험하다. 또한 운이 좋아 성공하더라도 당분간은 음식을 섭취할 수 없다. 네가 살이 찌도록 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능히 한 달간은 음식의 섭취 없이 견딜 수 있으리라." 종도의 손이 마침내 날이 잘 선 소도를 들고 엽평의 가슴을 갈랐다. 심장 부위가 갈라졌지만 피는 흐르지 않았다. 천마산의 효험이었다. 종도는 이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무심한 의원의 눈으로 엽혼의 심장을 들어냈다. 사방에 혈관 곳곳으로 연결되는 곳이 거무스름하게 고사(枯死)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도 버틸 수 있음은 무수한 영약의 힘이었으니, 약을 구하기 위한 엽혼 의 고생이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되었다. 종도의 동작은 빨랐다. 어느새 그의 다른 손에는 반시체, 그의 아들 종수의 심장 이 들렸다. 그는 심장을 바꾸려는 것이었다. 종도의 손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며 종수의 심장을 엽평의 가슴에 넣고 봉합(封合)을 시작했다. 그의 눈은 무심했지만 가슴에는 말할 수 없는 회한이 깃들였 종수는 비록 뇌가 부 서져 죽었지만 심장만은 살아 있었다.


이 동굴의 한풍 탓에 가능한 일이었다. 엽평의 가슴을 절개하는 일도 한풍 덕분에 가능했다. '비록 육신은 죽었지만 네 심장은 엽평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니, 엽 평이 너의 원한을 갚는 날, 너도 그의 가슴속에서 같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찢어지는 부정(父情)이었다. 하나 종도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봉합을 끝낸 그는 빨리 다른 병을 들어 흰 액체를 엽평의 전신에 부었다. 천마산의 약효를 중화시키는 약! 너무 오래 혈행이 멈추면 좋지 않다. '이제 하나의 고비만 남았다. 다른 사람의 장기가 몸에 들었으니 거부(拒否) 반응 (反應)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종도는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만일 거부 반응이 일어난다면 그의 염원은 물거품이 되고, 엽평도 살아남을 수 없 었다. '하늘이여, 제발!' * * * 엽혼의 안색은 창백했다. 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이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어떻게 소화가 이자와 같이 있을 수 있을까? 지금 소화는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옆에 선 사내도 똑같이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수의(囚衣)가 아니다. 그들이 같은 조직에 속해 있다는 의미였 소화는 드디어 엽혼 을 보았다. 그녀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놀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다, 당신이 어떻게……" 그녀는 엽혼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보고 싶었지만 볼 면목이 없었다. 그녀는 엽혼을 잘 안다. 그녀는 엽혼을 산속에서 처음 본 것이 아니었다. 삼 년 이 상 엽혼을 지켜봤었다. 그의 고독과 그의 고난과 그의 동생을 위한 정성을, 소화는 모두 보아 왔었다. 때문에 엽혼이 가장 좋아하는 모습으로, 엽혼이 가장 좋아하는 집을 꾸며 나타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소화는 자신이 진정한 소화이길 바랐다. 소하루( 霞樓)의 가짜 화선이 아닌, 진짜 소화이길 바랐다. 어느새 엽혼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기필코 엽 혼을 사지(死地)에 빠뜨려야 했고, 엽혼은 이제 며칠 후 죽게 되리라. 다만 자신이 이런 처지로 엽혼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짐작도 못 했다. "당신마저 나를 속였소? 당신마저!" 신음하듯 말하는 엽혼에게 소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만 고개를 숙이고 그의 처분만을 바랄 뿐이었다. 대신 옆에 있던 사내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정말 미안하오. 하지만 우리도 천벌을 받았소. 최선을 다했건만 최후(最後)의 순 간, 믿었던 셋째가 우리를 배신하다니……" 그 사내를 보고 엽혼이 막 뭐라 말하려는 순간, 통로를 타고 날카로운 외침이 전 해 왔다. "이놈의 자식! 내가 완전히 죽었는지 확인하지 않은 것이 네 실수였다. 어디 죽어 봐라." 사냥꾼의 목소리임을 안 엽혼의 눈이 다급해질 때, 통로가 진동(震動)하기 시작했 다. 쇠사슬에 묶인 사내가 외쳤다. "만일을 대비해 만들었던 자폭(自爆) 기관을 발동시켰나 보오. 어서 피하시오." 엽혼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구절검을 들어 소화를 묶은 쇠사슬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땅! 땅! 그가 겨우 소화를 풀어 주었을 때, 이미 천장에서는 돌 무더기가 떨어져 내렸다. 소화를 안고 있는 엽혼에게 사내는 말했다. "소화는 다만 내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니 아무 죄가 없소. 부디 그애를 구해 주시오. 부디!" 이제 진동은 극에 달해 바로 서 있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엽혼은 서둘러 가려 했지만 바닥의 진동으로 인해 곧 중심을 잃고 말았다. 더불어, 슈악! 공기를 가르며 화살들이 사방에서 쏟아진 것도 그때였다. 하지만 엽혼은 미처 보지 못했다. 그의 팔에 안긴 소화만이 그 화살을 보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자신의 등으로 화살을 막아 엽혼을 보호(保護)하 려는 의도. 그제서야 엽혼도 화살을 보았다. 화살에 대한 위기감보다 마음속에 먼저 닿아 온 생각은 소화(小花)의 진심! 또한, 비록 음모의 와중에 만난 사이였으나, 그녀도 자신을 진심으로 생각했음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우두둥! 땅이 무너졌다. 조금만 주저앉자 화살은 머리 위로 스쳐 갔다. 원래 복도가 무너질 때 몸을 날려 피하지 못하도록 안배(按配)된 화살이었다. 엽혼과 소화는 화살에 맞지는 않았다. 하지만 복도가 무너지며 생긴 빈 어둠 속으로 끝없이 떨어지는 것을 피할 수는 없 었다. 멀리서 사내의 외침이 아련히 들려 왔다. "엽혼! 당신에겐 진정 미안하오. 당신에게 진 빚은 내 내세(來世)에서라도 갚겠소. 이 조삼, 진심으로 맹서하오." 조삼(曹三)의 피 끓는 외침을 뒤로하고 떨어지는 엽혼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의 몸으로 소화의 허리가 당겨져 왔다. 비록 죽음에 이르렀지만 그는 소화를 놓고 싶지 않았다.


머리 위로 집채보다 큰 바위가 따라 내려왔다. 소화도 엽혼의 몸을 더욱 힘주어 안았다. 그들의 삶은 어찌 보면 비슷했다. 결코 자신을 위해 살지 못했고, 남을 위해 살았다. 하지만 죽는 순간만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이니 불행하지만은 않았다. 귓가로 공기가 스쳐 가는 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멀어지는 세상과 닮았는가? 모든 것이 아득히 멀어져 갔다. 정신 또한 가물거리며 멀어졌다. 다만 꼭 껴안은 서로의 체온만이 가까이 있었다. 2 종도의 눈에 다급함이 서렸다. 엽평의 몸이 펄떡거리고 있었다. "거부(拒否) 반응(反應)이다." 그는 급히 엽평의 단전에 손을 대고 진기를 흘리기 시작했다. 도도히 흐르는 진기가 엽평의 가슴에서 일어나는 거부의 기운과 어울려 싸우기 시 작했다. 종도의 내공은 능히 오십 년에 달했다.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엽평의 가슴에서 일어난 잠력이 오십 년 공력을 밀어 내지 않는가? 종도의 얼굴에 땀이 맺혔다. "영약의 기운이 급속도로 흡수된다. 이 아이의 내공이 벌써 나를 능가하고 있다." 마침내, "우웃!" 종도는 놀라 손을 떼내고 말았다. 엽평의 몸에서 일어난 반탄지력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엽평은 여전히 펄떡거리며 거부 반응의 고통을 호소했다. 하지만 이제 종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오직 하나, 기도밖에는. '하늘이여…… 제발!' * * * 소화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앞에서 엽혼이 웃으며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살아 있는 거예요?" 그녀는 가까스로 그 말만을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엽혼이 말했다. "돌 틈 사이에 운좋게 끼었소. 보시오, 빛도 들어오고 있소." 정말이었다. 작은 틈을 따라 희미한 빛도 들어오고 있었다. 떨어진 돌들은 너무 컸다. 큰 돌들이 쌓인 틈 사이는 작은 아이라면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틈에 천우신조로 그들이 들어 있었다. 소화가 고개를 흔들었다. "후`─ 하지만 저 틈으로 어떻게 사람이 나갈 수 있겠어요?" "축골공(縮骨功)은 사람의 신체를 어린아이만하게 줄일 수 있소. 다행히 난 축골공 을 익혔소." 소화의 얼굴에 기쁨이 떠올랐다. "그럼 어서 밖으로 나가세요." 엽혼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당신은 어쩔 거요?" 소화는 고개를 숙였다. "난…… 난, 당신을 볼 면목도 없어요. 다만, 난, 내 마음은……" 엽혼은 그녀를 다독였다. "당신도 어쩔 수 없었을 거요. 내 인생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많았으니 ……" 정말이다. 인생에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다. "소혼단(消魂丹)은…… 그 약은 해독약이 없어요. 우린 처음부터 당신을 죽이고자 했어요. 알고 있었나요?" 엽혼이 한숨을 쉬었다. "나도 어쩔 수 없었지, 동생을 구할 돈이 필요했으니. 난 비응방에서 살아날 수 없 다고 생각했지. 지금의 삶은 어찌 보면 내겐 여분이오." 엽혼은 잠시 쉬며 소화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윽고 목소리에 힘을 담아 말했다. "당신은 내게 빚이 있소. 그러니 나를 위해 세 가지 일을 해줄 것을 맹서하시오." 소화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무슨 일이든지요. 백 가지라도." "첫째, 내 동생 평아를 잘 보살펴 주시오." "둘째, 내 친구 진소백에게 내가 정말 고마워하더라고 전해 주시오." "셋째…… 내 아내가 되어 주시오. 이건 염치없는 말인 줄은 알지만……" 소화는 앞의 두 부탁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만 마지막 말만이 귀에 울릴 뿐이었다. "염치가 없다니요. 다만, 다만 전……!" 소화가 엽혼의 품을 는 여유는 있었다. 둘이 어떻게 사랑을 그들이 최후에 찾은 오직 죽음만을 앞에

파고들었다. 바위 틈은 좁았지만

두 연인이 서로 안을 수 있

나누었는지는 묘사하지 않기로 하자. 사랑은 지순(至純)했고 추호의 사심(邪心)도 없었다. 둔 사랑, 그러나 그들은 행복했다.


이처럼 행복은 찾기 쉬운 것이건만 많은 사람들은 왜 물질에서 행복을 구하는 것 일까? 오늘도 탐욕스런 인간의 음모와 배신은 왜 끊이지 않는 것일? 소화는 정신 이 아득해졌다. 색(色)도, 욕(慾)도 아니었다. 다만 사랑 앞에서 그녀는 서서히 정신을 잃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등을 통해 들어오는 강한 기운의 자극(刺戟) 때문이었다. 그녀는 엽혼의 손이 등에 닿아 있음을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그녀가 놀라 몸을 비틀려 하자, 엽혼의 말이 귓전을 두드렸다. "움직이지 마시오! 둘 다 위험하오." 그녀는 입을 열 수 없었다. 등뒤로 들어오는 것이 엽혼의 마지막 남은 잠력임을 알았지만 말을 한다면 둘 다 죽을 뿐이었다. "내가 말했던 세 가지를 명심해 주시오. 난 어차피 사흘을 넘길 수 없었으니…… 당신은 부디…… 어서 다음 구결을 명심하시오." 엽혼의 입을 통해 축골공의 구결이 흘러나왔다. 소화는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그가 하는 말들을 뇌리에 새겼 마지막 엽혼의 염원 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기에. 엽혼은 몸에 남아 있던 마지막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고통도 더욱 심해져 참기 힘들었다. 아득해지는 정신 한구석에 자신의 마지막만은 운이 좋았다고 느꼈다. 비록 고난으 로 가득 찬 삶이었지만 마지막에나마 소화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평생에 줄 운을 마지막 순간에 모두 주었던 걸까? 두 눈에 동생 엽평의 환영이 보였다. '하늘이여! 만약 내게 줄 행운이 아직 남아 있다면 부디 평아에게 주시오! 부디… …' 엽혼은 정신을 잃었다. 마지막 잠력마저 모조리 빠져 나간 그의 몸이 급격히 풍화하며 먼지로 화했다. 엽혼은 세상에 뼈 조각 하나 남기지 못했다. 다만, 그의 앞에 눈물로 범벅이 된 여인 하나. 소화였다. * * * 엽평의 몸이 다시 꿈틀거렸다. 초조한 와중(渦中)에도 종도는 엽평이 입술을 달싹이는 것을 보았다. "뭐라고 하는 거지?" 입술 가까이 귀를 대어서야 그는 겨우 한마디를 들었다. "혀`─`엉!" 엽평은 엽혼을 부르고 있었다. "기적이다!" 정말 기적이었다. 엽평의 꿈틀거림이 약해지며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믿기 힘들게도 거부 반응이 사라진 것이다. 엽평의 신색이 안정되어 갔다. 종도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의 치료는 성공했다. 이제 강호는, 범인보다 공력 증진이 십 배 빠르고, 신체 각 기관의 발달이 극에 이 른 한 초인(超人)을 보게 될 것이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끝났다. 이제 사흘 후면 평은 정신을 차릴 것이다." 종도는 서찰을 꺼내 엽평의 옆에 두었다. 엽평을 보는 종도의 눈에는 정이 가득했다. "평아! 난 이제 나름대로 종수의 원한을 갚기 위한 준비를 하겠다. 모든 것은 일 년 후 진소백을 통해 네게 물려주마." 종도는 그야말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자신의 일이 끝났음을 알았으므로. 누워 있는 엽평의 숨은 골랐다. 그의 몸 속에서는 진기가 움직이며 상처를 저절로 치유하고 있었다. 새로운 심장은 힘차게 뛰며 피와 양분을 구석구석에 전해 주었다. 종도의 아들인 종수의 심장! 엽평은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 * * 사흘 뒤, 유유곡의 한풍동(寒風洞)에서 걸어나오는 인영이 있었 엽평! 지난날의 파리한 안색은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가슴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어찌 된 걸까? 가슴이 약간 결리기는 하지만 별다른 통증은 없다. 의괴 할아버님 의 의술은 정말 묘하구나. 시간은 얼마나 흐른 걸까?" 엽평이 혼잣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을 받는 사람이 있었다. "너는 사흘이나 누워 있었단다." 엽평은 깜짝 놀라 소리가 들려 온 곳을 보았다. 푸른 옷을 입고 허리에는 금빛의 띠를 동여맨 승려(僧侶)! 맨발이었으나, 전신의 기도(氣度)는 감히 범접(犯接)하기 어려웠다. 일시지간 엽평은 말을 잊었다. 그는 이 인자한 노승을 알고 있었다. 어디 알다 뿐이겠는가? 형의 스승이었으며 어린 날 모진 고난에서 그들 형제를 건져 주었던 분! 불가제일 인이며 또한 천하제일인으로 손꼽히는 초의 선사를 엽평이 어찌 모르겠는가? "잘 지냈느냐? 혈색이 좋아졌구나." 엽평의 무릎이 무너질 듯 땅에 닿았다. "사부님!"


비록 그렇게 불렀지만 자신의 사부는 아니었다. 엽혼의 사부! 초의(草衣) 선사(禪師)가 나타났다. 초의 선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라……? 그래, 앞으로 그리 부르거라." "예? 그건……!" 엽평이 얼굴을 들어 반문했다. 하지만 총명한 엽평이 어찌 초의 선사가 말한 뜻을 모를 것인가?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임을 엽평은 금세 알아챘 초의 선사가 자애롭게 웃었다. "너를 내 두 번째 내제자(內弟子)로 받아들인다, 평아!" 엽평은 그의 형 엽혼이 초의 선사의 문하를 떠나 살수의 길을 걷기 전에 내제자의 반열에 들지 못하고 외제자(外弟子)에 머물렀음을 알고 있었다. 한데 자신이 초의 선사의 내제자가 되다니! "인연이 닿지 않아 혼아는 외제자(外弟子)에 머물다 떠났는데…… 아미타불! 너와 인연이 이어지는구나!" 엽평은 서둘러 배사지례(拜師之禮)를 올렸다. 천천히 이어지는 구배(九拜)는 엽평이 초의 선사의 문하에 들었음을 의미했다. 또한 그의 인생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함을 뜻했고, 오랜 기간 그를 괴롭혔던 지병 (持病)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축복이었다. "네게는 사형이 있다. 너는 그에게서 앞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을 들을 수 있을 게 다. 네 사형은……" 3 찬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하(地下)의 폭발은 땅 거죽의 모양마저 바꾸었다. 그 모습을 보는 소화의 가슴속엔 겨울 바람보다 더욱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풀어 대부분을 잘라 내었다. 공력도 끌어올리지 않고 바닥을 파내니 그녀의 손톱에 금세 핏방울이 맺혔다. 소화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정성껏 바닥에 묻었다. "무덤이 너무 크니 어디에다 절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맹서(盟誓)해요, 혼랑(魂郞)! 배신한 셋째…… 그를 응징한 후 꼭 당신의 뒤를 따르겠어요." 소화는 천천히 이배(二拜)를 올렸다. 짧은 사랑이었지만 그녀는 평생을 그 사랑만을 위해 살아 갈 자신이 있었다. * * * 바위산! 오랜 시간 지각이 풍화(風化) 과정을 겪으며 최후로 살아남은 모습이었다. 만약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바위라면 지하수는 수만년을 두고 기괴한 모양의 동굴 을 형성하리라. 언젠가 지각이 변동하여 지상으로 모습을 드러낸 땅속의 동굴도 생길 것이다.


그 중 하나를 지금 섭수진과 풍호진이 보고 있었다. 동굴에서 백여 장 떨어진 이곳은 큰 바위가 정면을 막고 있는 고지대(高地帶)! 숨 어서 적의 동태를 살피기에는 더없이 좋았다. 앞에는 두 명의 경계병이 서 있었다. 게다가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숲속에도 꽤 많은 수의 무사가 있을 터였다. 섭수진이 전음으로 말했다. "경계가 많긴 하지만 침입은 가능할 것 같군요!" 풍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미 이곳에 오며 두 명의 경계병을 해치웠다. 경계병들은 의외로 무공이 약했다. 아마 강한 무사들은 모두 동굴 안에서 직접 지키고 있을 것이 풍호진이 중얼거렸 다. "문제는 신주낭객과 구천이 제시간을 맞추는 것인데……" 그의 말을 들자 섭수진은 사흘 전의 일이 생각났다. 화화루에서의 일이…… * * * "그런데 어떻게 탈출하신 겁니까?" 진소백은 풍호진에게 오 년이나 갇혀 있다가 탈출한 방법을 물었다. "나도 확실히 모르겠네. 아마 문파 내에서도 용고의 행동이 수상함을 눈치챈 자들 이 있는 것 같네." 그는 말과 함께 품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선배의 무고를 알고 있습니다. 부디 탈출하셔서 장문인을 도와 주십시오. 공동 내부에는 용고의 배파(背派) 행위를 아는 세력이 있으니 우리가 안에서 호응하겠 습니다.> "내게 은밀히 전해진 상자 안에는 서찰과 함께 복마환(伏魔丸) 한 알이 들어 있었 네. 난 겨우 공력의 일부를 찾아 탈출했지."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회풍전 같은 고수가 동심사걸 정도를 피했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지 금 풍호진의 공력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회풍전 셋을 날려 동심사걸을 상대했다는 것은 그가 상당한 고수 임을 뜻했다. 진소백이 풍호진에게 물었다. "아까 선배를 쫓던 네 명 중 두 늙은이들은 장단이괴(長短二怪)가 아니었습니까?" 풍호진이 진소백의 안목에 감탄했다. "그렇네. 그들은 외도(外道)로 빠진 탓에 공동에서 추방당했었는데 지금은 돌아와 호법직을 맡고 있다네. 오래 전의 일이라 아는 사람이 적을 텐데, 젊은 자네가 알 고 있다니……" 말을 하던 풍호진이 곧 한숨을 쉬었다. "큰일이네. 이리 되다가는 공동의 수백년 영명(英名)이 씻기 힘든 도 있겠네."

치욕을 당할 수


진소백도 고개를 끄덕였다. 공동은 전통적인 명문정파! 이대로 음모의 희생물이 되게 할 수는 없었다. 한참을 생각한 진소백이 입을 열었다. "마침 제가 천랑파와 연락이 되니 그들의 힘을 빌립시다. 그리고…… 풍운 진인이 갇혀 있는 곳을 아신다 하셨지요?" 천랑파 사제(師弟)의 힘을 빌린다면 일은 보다 쉬워질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풍운 진인의 구출에 매달릴 수는 없었다. 적일수를 구출하더라도, 만일 용고가 대책을 세운다면 모든 일은 헛수고가 될 수 있었다. 누군가 용고의 주의를 끌어 그녀의 정신을 산란시킬 사람이 필요했다. "제가 공동으로 가겠습니다. 그사이 풍 선배와 섭 소저께서는……" 진소백은 모든 계획을 설명한 뒤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혈도가 짚힌 채로 온몸을 괴롭게 뒤틀고 있는 일걸(一傑)이 있었다. "이봐. 공동으로 들어가는 길을 네가 좀 설명해 주어야겠다. 알겠느냐? 엥? 이놈이 그래도 대답이 없네." 진소백이 다시 고함을 지르자 일걸의 눈에 절망의 빛이 스쳤. 섭수진이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린지 아니면 장난을 치는 것인지. "아혈(啞穴)을 풀어야죠!" 그제서야 생각이 난 듯 진소백은 머리를 쳤다. "아하, 그렇지! 이 자식, 말을 해야 할 게 아니냐? 아혈을 풀어 달라고." 진소백이 오른손으로는 일걸의 뒤통수를 치며 왼손으로는 아혈을 풀었다. 일걸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하하하…… 무슨 말이든지, 하하, 들을 테니, 하하, 제발, 하하하……" 진소백이 인상을 썼다. "넌 뭐가 그리 좋다고 웃는 게냐?" 일걸은 겁에 질려 울상을 하고서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하하하…… 아이고 하하, 제발!" 그제서야 진소백은 빙긋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이제야 네 생각을 말하겠느냐? 어떠냐, 본 공자가 이분 소저와 어울린다고 생각 하느냐?" 섭수진이 피식 웃으며 그때를 떠올리고 있을 때 옆에서 풍호진의 말이 들렸다. "이봐,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는가? 이제 날이 어두워졌으니 어서 시작하세." 풍호진의 말은 섭수진을 현실로 되돌렸다. "소란(騷亂)을 일으키기로 한 시각이 얼마나 남았나요?" "이제 일 각 남았네."


"좋아요. 그럼 가요." 그들의 신형이 작은 개울을 건너뛰고 큰 바위들을 넘으며 동굴로 접근했다. 동굴의 입구를 지키는 자들은 가정(價定)과 감이동(甘伊董), 둘이었다. 그들은 한껏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이런, 밖을 지키는 놈들은 도대체 뭘 하기에 저런 자들이 들어오는 것도 모른단 말인가?" 감이동이 참지 못하고 툴툴거렸다. 저 멀리 이십여 장 떨어진 곳! 두 명의 광인이 자신들을 보며 욕설을 퍼붓고 있지 않은가? 옷은 찢어진 누더기를 대충 걸쳤는데, 속에는 빨지 않았는지 검은 빛깔의 속옷이 비쳤다. 두 미친놈이 가정과 감이동에게 손가락질을 해대는 것이다. "헤헤, 저놈들이 검은 옷을 입고 동굴을 지키는 것으로 보아 말로만 듣던 마귀의 귀졸들이 아닐까? 헤헤." "히, 맞다. 생긴 것도 흉악한 걸 보면 이다."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하는 말이 모두 누라 뺏기고 뒈진 놈일 거다. 생긴 걸 "그럼 나머지는 틀림없이 남의 마누라 사흘 밤낮 얻어터진 것 같잖아? 히."

틀림없구나. 히, 정말 꿈에 볼까 두려운 얼굴 속을 뒤집는 말뿐이었 "아마 왼쪽 놈은 마 보니 틀림없다. 헤헤." 뺏다가 맞아서 뒈졌을 게다. 히, 생긴 게 꼭

글쎄, 어느 놈이 더 나은 걸까? 좌우간 이런 말을 듣고 있는 가정과 감이동의 속에서 불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박살을 내고 싶었다. 하나 근무 중에 장소를 이탈할 수는 없었다. 저곳이라면 숲속에 숨어 밖을 지키는 여덟 명이 해야 할 일임이 당연한 곳인데. '이 자식들은 뭐 하는 거야? 어디 모여서 마작이라도 하나? 좌우간 근무만 끝나면 너희들은 죽었어!' 이미 여덟 무사들은 제거된 지 오래임을 가정은 몰랐다. 그들이 어쩌지 못하고 속만 태우고 있을 때, 기회가 생겼다. "히, 난 가까이 가서 구경할래." 광인 하나가 동굴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 뒤를 따라 나머지도 오는 것이 아닌가? 가정과 감이동은 신이 났다. '옳지, 어서 오너라! 가까이 오기만 하면 내 너희 놈들을 박살내 주고 말겠다.' 이 런 생각을 모르는 광인들은 점점 가까이 왔다. 마침내 일 장 안으로 광인들이 들어오자 가정과 감이동은 손을 치켜 들었다. 단 한 번의 주먹으로 끝장낼 생각이었다. 이때,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까부느냐?" 우렁찬 외침과 함께 자신들과 똑같은 옷을 입은 무사 둘이 허공을 가로질러 광인


(狂人)들을 잡아챔을 가정은 보았다. 검은 옷에 검은 복면! 흑회(黑會)의 복장이 아닌가? 새로 나타나 광인들을 잡은 복면인이 가정을 보며 말했다. "미안하네. 바깥에 급한 일들이 많이 생겨 지체되었네." 가정은 물었다. "급한 일이라는 것은?" "웬 미친놈이 공동 광성전(廣成殿)에 난입하여 풍운 진인 나오라고 난리라네." "엥, 그 미친놈이 도대체 왜 그런다던가?" "하하! 좋은 질문일세.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나만은 그 이유를 안다네!" 그의 목소리가 음산해졌다. "그건 말야…… 바로 나와 같은 이유다!" 나타난 복면인 둘이 벼락같이 외치며 가정과 감이동을 제압했다. 놀랄 새도 없었 다. 둘이 쓰러지자 광인들은 서둘러 옷을 벗었다. 놀랍게도 가정과 감이동과 똑같은 복장이 안에서 나타났다. 복면인 중 하나가 광인(狂人)에게 말했다. "다른 변화가 없도록 잘 지켜 주게. 부탁하네." 광인 하나가 말했다. "염려 마시오, 둘째 형! 내가 빨리만 알았어도 큰형을 구출해 오시구려."

이런 고생을 시키지 않는 건데. 꼭

그는 두말할 나위 없이 신주낭객(神州狼客)이었다. 옆에 선 구천도 말했다. "동굴 안이 오히려 더 흉험(凶險)할 겁니다. 부디 주의하십시오, 사숙!" 풍호진과 섭수진은 동굴로 들어갔다. 바깥은 신주낭객과 구천이 지켜 줄 것이다. 종유 동굴의 내부는 얼마나 험할까? 제 24 장 풍운(風雲) 1 "어서 풍운 진인을 불러오지 않고 뭘 하는 게냐?" 거지가 감히 공동의 광성전(廣成殿)에 앉아 큰소리를 치다니. 그러나 이 거지만은 그것이 가능했다.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개방의 인의신개가 큰소리칠 수 없는 곳이 천하에 어디 있을 공동의 제자들이 난 감해할 때 문이 열리며, 네 명의 옹위(擁衛)를 받으며 한 인물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그가, 아니, 그녀가 나타나자 즉각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인의신개만이 냉소했다. "흥! 언제부터 공동에서 안사람이 장문인의 일을 대신하게 되었소?"


장단이괴(長短二怪)와 그들의 두 제자가 용고를 호위하며 나타난 것이다. 인의신개의 말은 그들의 눈에 살기가 서리게 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용고는 태연히 말을 받았다. "호호, 인의신개께서 여자를 무시하는 성미이심을 내 오늘에야 알았군요." 화가 나기는 했지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천하대방 개방을 함부로 건드릴 문파는 강호에 별로 없었다. "방주께서는 장문인과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혹시 좋지 않은 일이라도……?" 용고가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 같은 시기에 개방과 시비가 붙는다면 전혀 좋을 게 없었다. 인의신개는 평소 화를 내는 법이 거의 없다고 알려졌다. 한데 지금 이처럼 화가 난 이유는 뭘까? 무언가 아주 좋지 않은 사연이 있어 보였다. 만일 그렇다면 용고로서는 큰일이었다. "흥, 이것은 적 장문인과 나와의 개인적인 일이니 어서 장문인께 나오시라 전하시 오." 그는 완강했다. 용고는 잠시 생각하다 방법이 없음을 알았다. 다른 대안이 없는 이상, 오래 생각하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암중에 그녀가 보낸 눈짓을 보자 한 명이 뜻을 알아차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일단 자리를 편하게 하시지요." 용고가 푹신한 모피의자를 다시 권했다. 인의신개는 지체없이 좌석을 바꾸었다. "이게 더 푹신하구먼." 그는 몸을 몇 번 뒤척여 보더니 좌중을 둘러보았다. "공동의 풍운 진인 문하에, 하나는 용(龍)과 같고 하나는 개와 단 말을 들었소. 한데 어째 아무도 보이지 않는구려?"

같은 제자 둘이 있

그랬다. 대제자 파일청(巴一靑)은 그 자질이 용과 같고, 이제자 구자운(邱自雲)은 그 망동 (妄動)이 개와 같다는 소문이 강호에 실지로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잘못 알려졌다. 이제자 구자운의 행동은 결코 개와 같지 않았다. 실제로는 개보다 훨씬 못했다. 용고의 미간에 노기(怒氣)가 일었다. 하지만 이내 노기는 어두운 안색 속으로 사라졌다. "강호의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오히려 파일청의 악행이 심했지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파일청의 만행을 막다가 그만 구자운도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뒤 파일청은 행방이 묘연해졌고…… 어쨌든 이 일은 저희 공동의 비극이라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가 않군요."


용고의 표정은 매우 어두워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완전히 속겠네, 아줌마!' 이 말을 하고 싶어 인의신개는 입이 간질거려 죽을 지경이었 어쨌든 그녀가 말을 마치는 순간, 입구에 도열한 제자들이 일제히 외쳤다. "장문인께서 드십니다." 적일수의 얼굴은 창백했다. "빨리 맞이하지 못했음을 용서하시오." 인의신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직접 보니 몸이 매우 불편하신 것 같소." 당연했다. 흑회의 일로 용고한테 잡혀 심한 고문을 당했으니. 급히 용고가 거들었다. "자식을 갑자기 잃었습니다. 이해하십시오." 인의신개가 속으로 생각했다. '흥, 적염이 어찌 이놈의 자식이더냐? 계부의 사랑보다 친모의 사랑이 더 얕다는 말이지. 그것만 보아도 네가 악녀(惡女)임을 알겠다.' 인의신개가 속으로라도 이런 생각을 할 리가 없다. 그는 변장한 진소백이었다. 인의신개, 아니, 진소백은 두 손을 모았다. "드디어 십년지약(十年之約)이 끝나는 시점이 되었소. 어서 빚을 갚으시오. 당연히 기억하고 있으시겠지?" 기억할 리가 없었다. 설령 진짜 풍운 진인이라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연했다. 진소백이 즉석에서 지어 낸 약속이므로. 풍운 진인, 아니, 가짜는 마른침을 삼켰다. 인의신개와의 사이에 무슨 십년지약이 있었는가? 그는 필사적으로 추측했다. 등골로 땀이 흘러내렸다. * * * 동굴 안은 어두웠다. 곳곳에 위치한 특이한 종유석(鐘乳石)과 석순들은 기묘(奇妙)한 분위기를 연출했 다. 섭수진과 풍호진은 조심스레 그 사이를 돌아 나갔다. 미성(微聲)조차 내지 않는 신법! 그러나 종유석 어딘가에서는 반응이 있었다. 그토록 조심을 했건만 발견되고 만 것이다. 그림자는 진짜 그림자처럼 종유석 사이에서 나타났다. 수효는 모두 셋! 동굴 안을 지키는 자들이었다. 믿을 수 없이 빨랐다. 나타난 즉시 섭수진과 풍호진을 덮쳤지만 일체의 질문도 없었.


예고없이 나타날 수 있는 자는 존령(尊領)에 불과했다. 존령이 아닌 자가 나타난다면 그림자들이 보이는 반응(反應)은 단 하나, 제거뿐이 다. 대화도 죽여 놓고 난 후에 하는 것이 그들이 평소에 받았던 훈련이었다. "흡!" 급히 숨을 들이쉬며 풍호진의 회풍전(回風錢) 두 개가 돌개바람을 일으키며 날았 다. 동시에, 어느새 섭수진의 손에도 검이 들렸다. 미미한 바람! 섭수진의 검이 흔들렸다. 믿기 힘들게도 그녀의 미풍 같은 검세(劍勢)는 회풍전보다 늦게 발동했는데도 더 빨리 세 그림자의 허리를 베어 갔다. 스걱! 한 명의 허리에 긴 상흔(傷痕)이 새겨졌다. 하나 이런 상처에도 신음조차 흘리지 않음은 그들의 평소 훈련이 매우 혹독했음을 뜻한다. 혹독한 훈련을 받은 자들의 무공이 녹록할 리가 없었다. 상처를 무시한 채 그대로 검을 휘두른다는 것도 이런 추리를 뒷받침해 주었다. "차압!" 섭수진의 검이 변화(變化)를 일으켰다. 느린 듯 보였지만 어느새 이동하여 그림자의 검을 막았다. 이때 다른 두 복면인은 한번 쳐냈던 풍호진의 회풍전(回風錢)이 다시 돌아옴을 보 고 경악했다. 휘류루! 회풍전이 공기를 감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귓가에 들려 올 것 같았다. 섭수진은 한 명과 싸우고 두 명이 풍호진을 상대했다. 찰나지간 순간적인 판단으로 그림자들이 암중에 나눈 배치였지만 이것은 분명히 실수였다. 그림자는 고수였다. 한 명이 검을 휘둘러 두 개의 회풍전을 모두 쳐냄과 동시에 다른 그림자는 풍호진 의 가슴 요혈을 노리고 찔러 왔다. 슉! 풍호진의 손에서 다시 하나의 돌개바람이 더 솟아났다. 세 개째의 회풍전! 지금의 풍호진으로서는 최대였다. 동시에 진기를 움직여 튀어오른 회풍전들도 다시 조정했다. 세 동전과, 아니, 세 바람과 두 그림자가 어울렸다. 섭수진의 검은 느린 듯 보였으나, 그림자는 피하기 어려웠다. 어느새 그는 전신에 일곱 개의 검흔을 입었다. 느린 듯 어깨를 노리며 다가오던 검을 몸을 숙여 피했다 싶었던 것은 그의 착각이 었다. 순간, 여전히 섭수진의 검세에 노출된 어깨가 찌릿한 느낌과 더불어 팔이 마비됨 을 복면인은 깨달았다.


영원히 열릴 것 같지 않았던 그의 입이 열렸다. "옥허검(玉虛劍)?" 아미파의 옥허삼십육검(玉虛三十六劍)이 지금 섭수진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림자는 검을 알아볼 안목은 있었으나 피할 실력은 없었다. 섭수진의 검이 그의 오른쪽 어깨를 찔러 팔을 마비시키자 그는 검을 잡지 못했다. 어깨의 상처가 허리의 것과 어울리자 그림자의 동작은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니었 다. 그림자들의 가장 큰 이점이던 경공이 무너지면서 섭수진의 검은 더욱 영활해졌다. "우욱!" 급해진 걸까? 그림자의 입이 계속 열리다니! 섭수진의 검이 그의 왼쪽 어깨와 가슴의 요혈을 제압했다. 그가 쓰러질 때, 섭수진 의 몸은 어느새 삼 장(丈)의 거리를 날아 남은 두 그림자 중 하나를 노리고 있었 다. 풍호진이 고전하는 모습을 보았으므로. 세 개의 회풍전이 눈을 어지럽히며 쏘아 왔다. 그림자는 검을 삼점혈홍(三點血紅)의 식으로 휘둘러 다급히 쳐냈지만, 어찌 짐작이 나 했겠는가? 회풍전의 뒤에서 그의 눈을 노리고 짓쳐 오는 하나의 검을! "우웃!" 그림자가 몸을 철판교(鐵板橋)의 자세로 눕혔다. 씽! 검이 공기를 가르는 섬뜩한 소리가 그의 얼굴 앞에서 들렸다. 검을 쥔 여인의 날렵한 몸이 자신을 건너뜀을 보았다. 자신이 일검을 피하자 그대로 기세를 몰아 뒤의 복면인을 노려 감을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삼영(三影)이 위험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상황을 너무나 모르는 것이었다. 이영(二影)은 철판교 자세에서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허공을 맴돌아 내려오는 세 개의 바람을 볼 수 있었다. 회풍전(回風錢)! 자신의 가슴으로 직격하는 세 개의 바람! '피해야 한다'는 건 마음속의 외침일 뿐이었다. 몸을 우(右)로 돌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풍호진의 외침과 더불어, 이영(二影)은 왼쪽 허리와 등 쪽 세 군데가 불에 덴 듯 화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그가 느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감각이었다. 2 차차창! 어지럽게 사방으로 검광을 뿌리는 마지막 그림자의 검을 섭수진의 느릿느릿한 검


이 여유있게 막아 내는 모습은 확실히 신기했 하지만 허(虛) 속에 실(實)이 숨은 옥허검의 묘의(妙意)를 아는 사람이라면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리라. "검을 놓아라." 섭수진이 날카롭게 외치며 옥허검의 제칠검 옥허회류(玉虛回流)의 식으로 그림자 의 검을 휘감았다. 경기(勁氣)가 회오리를 일으키며 자신의 검을 빼앗으려 함을 느낀 그림자는 최대 한의 내력을 일으켜 대항했다. 두 발도 반칠성(反七星)의 방위를 급히 밟으며 역회전하여 섭수진이 일으킨 인력 (引力)에 맞섰다. 매우 빠른 대응! 하나 이것은 어떤 면에서 그에게는 불행이었다. 섭수진은 결코 싸움에서 상대방을 죽이는 법이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 혈도를 제압하여 쓰러뜨릴 뿐이었다. 그림자가 만일 검을 빼앗겼다면 혈도가 짚히는 것으로 끝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반항한 지금, 사정은 달라졌다. 그를 공격할 수 있는 사람이 섭수진만은 아닌 까닭이었다. 풍호진의 회풍전이 놀고 있을 리 없다. 휘루루! 회풍전이 공기를 감는 특유의 소리가 삼영(三影)의 귀를 두드릴 때는 이미 늦었다. 바람 소리가 너무 가까이 들린다는 생각을 끝으로 그는 땅에 쓰러졌다. 그의 등에는 세 개의 구멍이 나 있었다. 섭수진은 아미를 약간 찡그렸지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어차피 강호란 그런 곳이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곳! 독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 강호였다. 풍호진은 이미 오 년이나 이들에게 잡혀 모진 고난을 겪었으니 그의 손속이 잔인 함을 누가 책망할 수 있으랴? 그림자 셋이 모두 쓰러지자, 병기(兵器) 부딪치는 소리와 호통 소리 가득 찼던 동 굴 안에 다시 적막(寂寞)이 찾아왔다. 한바탕 폭풍이 지난 후의 적막은 사람으로 하여금 기이한 느낌을 갖게 했다. 하지 만 그 적막도 잠시, "우어어, 우어!" 동굴의 어디선가 들려 오는 짐승의 울부짖음! 울부짖음 같았지만 섭수진은 곧 알 수 있었다. 그것이 극도의 분노와 절망을 느낀 인간이 내는 음성임을! 풍호진은 심지어 그 소 리를 내는 사람마저 알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형! 내가 왔소." * * * 풍운 진인 적일수, 아니, 가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인의신개, 아니, 진소백이 십년지약(十年之約)의 내용을 먼저 말했기 때문이다. "하하, 그런 일을 내가 잊었을 리가 있소. 여봐라, 어서 가져 오너라." 호기롭게 외치는 그의 눈이 용고(鏞姑)를 힐끔거렸다. 가짜의 귀에 그녀의 전음의 들려 왔다. "곧 술 열 통을 보내겠다. 흥, 하지만 만일 파탄(破綻)이 드러나 인의신개에게 네 정체를 들킨다면…… 흥!" 가짜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옥산의 흑회 총단이 무너져 용고의 심기가 단단히 틀어졌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시기심을 품고 지령 고숭무의 죽음을 모른 체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흑회의 최고수라 할 수 있었던 고숭무가 있었더라면 어찌 심화절이 그토록 쉽게 흑회를 공략할 수 있었겠는가? 가짜는 금사진이 죽은 이상, 비응방이 쉽게 손에 들어올 것으로 생각했다. 자신이 보다 쉽게 두각을 나타내려면 고숭무는 없는 것이 오히려 나았다. 게다가 그는 고숭무를 질투하고 있었으니…… 고숭무의 위기에 그가 나서지 않았던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어쨌든…… 용고는 가짜에게 전음(傳音)으로 싸늘하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수하들에게 지시하여 빨리 술 열 항아리를 모아야 했다. 인의신개가 말했던 십년지약(十年之約)은 열 항아리의 술을 준다는 것이었다. 인의신개가 술을 매우 좋아함은 공히 알려진 사실이었으니, 그가 서둘러 공동으로 왔음이 이해되었다. '빌어먹을! 하필 인의신개 저 늙은 것이 예전에 적일수(狄逸秀) 놈과 인연이 있었 다니…… 할 수 없지.' 그녀는 가짜의 얼굴을 떠올렸다. '흥, 네놈이 감히 그따위 돼먹지 않은 생각으로 일을 망치다니…… 이용 가치가 없 었다면 벌써 없애 버렸을 것이지만. 일단 지금은 풍운 진인을 대신할 놈이 없으니 살려 둔다.' 용고는 수하들을 급히 불렀다. "여봐라! 어서 준비하여라." 아추(兒醜)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얼굴의 화상(火傷)이 끔찍스러워 아무도 그를 제대로 쳐다보려 하지 않는 하인! 공 동의 잡스런 일들 대부분을 처리하는 부지런함이 없었다면 그는 문파에 하인으로 붙어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는 삼 년 전 어디선가 나타나, 모든 제자들이 피하는 잡일을 도맡아 하기 시작 했다. 지금도 아추는 술 열 항아리를 구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첫 번째 술이 구해진 즉시 그것은 광성전(廣成殿)으로 보내졌 "이건 운남의 묘묘주(苗苗酒)가 아니오? 이 귀한 걸……!" 인의신개의 말에 가짜는 웃음으로 답했다. "천하의 개방 방주께 어찌 이 정도의 대접이 없겠습니까? 약조했던 술이니 어서


드십시오." 진소백이 속으로 냉소하며 술잔을 들었다. '요놈아, 무슨 약조가 있었단 말이냐? 네놈들은 인의신개께서 이 년 전 술을 끊었 음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속이는 기분은 통쾌했고, 술이 흐르는 목줄기는 화끈했다. "하하, 이거 좋구려. 하하!" 드디어 마지막 열 통째의 술이 날라져 왔다. "역시 마지막은 죽엽청(竹葉靑)의 향내로 장식함이 최고가 아니겠습니까?" 그 동안 공동 곳곳에 있었던 모든 과실주(果實酒), 꽃잎주, 뱀술 등등이 모두 소모 되었다. '젠장할, 앞으로 십 년간 괜찮은 술은 맛도 보지 못하겠구나.' 가짜는 구시렁거렸 다. 이 소리가 진소백에게 들릴 리가 없지만 그는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었다. 이때, 진소백의 귀로 섭수진의 전음이 들려 왔다. "준비가 모두 되었어요. 적 장문인은 무사히 구출되었고, 용고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어요." 진소백은 암중에 미소 지으며 마지막 술잔을 비웠다. 대나무 잎의 향내가 입 속을 가득 채웠다. 진소백은 입 안 가득 향기를 머금은 채 술잔을 내려놓았다. 가짜가 입맛을 다시며 그를 보았다. '젠장할, 저 아까운 것을 모두 거지의 뱃속에 넣어 버리다니.' 진소백이 조용히 말 했다. "이제 술도 다 마셨으니,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더 할까 합니다." "무엇이든지 하시오. 방주님의 높으신 말을 경청하겠소." 진소백이 말했다. "진인(眞人)의 제자 중에 구자운(邱自雲)이란 놈이 있었지 않소?" 가짜는 흠칫했다. 이놈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후, 우리 개방에도 구자운(邱自雲)처럼 어른을 몰라보고 존장을 무시하는 개망나 니가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모르겠소." 그제서야 가짜는 왜 인의신개가 구자운 얘기를 꺼냈는지 알았 "방주께서는 잘못 알고 계시오. 구자운은 결코 개망나니가 아니라오. 그는……" 말을 하던 가짜는 움찔했다. 귓가에 용고의 전음(傳音)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잡소리 말고 어서 거지 놈의 물음에나 대답해라. 그를 빨리 보내야 할 게 아니 냐?" 가짜는 놀라 말을 서둘렀다. "어쨌든 그런 놈이 있다면 일벌백계(一罰百戒)하여 문파의 기강(紀綱)을 세워야지 요."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극히 타당한 의견이라는 듯.


"역시 그렇지요? 그렇다면 당신의 의견을 따르겠소." '따르겠소'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소백의 입이 오무려졌다. 힘찬 내공을 타고 그 의 입에서 죽엽청(竹葉靑)의 주기(酒氣)가 앞으로 쏘아졌다. 3 주전(酒箭)이 가짜의 얼굴로 날았다. 독한 술의 정수가 모인 주기(酒氣)는 역용술(易容術)의 기초가 되는 역용약과는 천 적(天敵)이었다. "무슨 짓이오?" 가짜가 크게 외치며 날아올랐을 때는 이미 주기가 그의 얼굴을 덮친 뒤였다. "우욱!" 주기에 눈이 따가움을 느낀 그가 한 손으로는 눈을 비비며 나머지 손을 어지럽게 휘둘렀다. 가짜의 손이 검은 경기(勁氣)를 토했다. 풍운조! 공동의 개천풍운조(開天風雲爪)가 펼쳐지고 있었다. "어쭈! 제법 열심히 익혔구나, 구자운(邱自雲)!" 진소백은 냉랭히 말하며 허리를 흔들었다. 그의 몸은 취한 듯 흔들리며 가짜 풍운조를 피했다. 그가 어깨를 들썩이자, 유성이 은하수를 건너는 듯한 기세로 진소백의 몸은 단숨 에 삼 장(丈)의 거리를 좁혀 버렸다. 진소백의 손이 머리 위로 들렸다 내려오며 허공의 일곱 곳을 동시에 찍었다. 우워엉! 용의 신음이 들리며 진소백의 용음십이수(龍音十二手)는 가짜 풍운조를 여지없이 파괴했다. 창공을 오르는 용의 발톱에 자신의 풍운조가 무력화(無力化)됨을 느낀 가짜가 다 시 대항하려 했지만, "늦었다!" 진소백의 좌수(左手)가 가짜의 목덜미를 잡음과 동시에, 그가 마혈마저 짚어 버렸 다. 진소백은 강호에 나온 이후 처음으로 전력을 다했다. 용고(鏞姑)의 대응은 빨랐다. "은혜를 악(惡)으로 갚다니! 저자는 인의신개를 가장한 살수(殺手)다. 공동의 전제 자는 공격하라." 설명은 길지만 진소백이 주전(酒箭)을 날려 가짜의 얼굴을 덮치고 다시 그의 목덜 미를 잡아챈 것은 거의 동시라고 할 수 있었. 진소백의 행동을 보는 즉시 대응한 용고의 말이 이제야 겨우 공동의 제자들에게 전달이 되었음을 보면 그간의 변화가 얼마나 빨랐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공동에는 네 명의 장로(長老)가 있다. 지금은 그 중의 두 자리를 장단이괴(長短二怪)가 차지했다. 원래는 자룡자(紫龍子)


와 오룡자(烏龍子)의 자리였으나 그들은 눈치가 너무 빨랐다. 그들이 이상한 눈치 를 채자, 용고는 둘을 없애 버리고 그들의 빈자리를 장단이괴로 채웠던 것이다. 용고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자들은 당연히 무공이 높은 네 명의 장 로들이었다. 가장 먼저 장단이괴가 뛰어올랐고, 그 뒤를 적룡자(赤龍子)와 노룡자(怒龍子)가 따 랐다. 이어 십여 명에 달하는 공동의 제자들마저 뛰어오르니, 진소백은 그야말로 사방에 서 적들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멈춰라!" 진소백이 냉랭히 외치자 공동의 제자들은 모두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풍운 진인의 몸을 앞으로 내밀어 위협(威脅)했기 때문이 그런데 장단이괴(長 短二怪)만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풍운 진인의 생명이야 어떻게 되든 안중에 없다는 듯 공격을 계속했고, 손 에는 어느새 쌍겸(雙鎌)이 들려 있었다. 두 개의 낫으로 사람을 찢어 죽이는 무공이 너무 잔인하여, 마침내 공동에서 쫓겨 나는 계기(契機)가 되었던 쌍겸식(雙鎌式)이 펼쳐지려는 것이다. "오호. 네놈들은 장문인의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게냐? 아니면 이자가 보호할 필요 도 없는 가짜 장문인이기라도 하다는 것이냐?" 진소백이 말하며 뻣뻣이 굳어진 가짜의 몸을 잡아 돌렸다. 사람의 몸을 이용해 곤법(棍法)을 펼치는 것이다. 듣도 보도 못 했던 기문(奇聞)이었지만 진소백의 곤법 조예는 매우 높아서 쌍겸을 이용한 공격에도 장단이괴는 득을 보지 못했 휘잉! 낫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귓전을 스쳐 갔다. 진소백의 곤법 조예가 권(圈)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절정에 이른 까닭에 아직 가 짜는 상처를 입지 않았다. 흉험한 듯 보이는 세 명의 대결은 아직 한 번도 병기끼리 부딪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광경을 바라보는 공동의 모든 제자들의 손은 땀으로 축축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초조한 사람은 역시 무기(武器) 대신 사용되고 있는 가짜 풍인 진인이었다. 그는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입을 열어 이괴에게 외쳤다. "나를 죽이려는 것이냐? 어서 물러나라!" 장단이괴는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눈앞의 풍운 진인이 가짜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공동 문인의 눈도 의식해야 했다. 아직은 용고를 따르는 자보다 풍운 진인의 이름을 따르는 자들이 많았다. "하하! 졌느냐?" 진소백이 웃으며 손의 무기, 아니, 가짜를 다시 땅에 세웠다. 빠르게 휘둘린 탓에 보이지 않았던 가짜의 얼굴이 드러나며 공동 문인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용고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기(酒氣) 때문에, 가짜의 얼굴 위에 발랐던 역용(易容)이 모두 녹아 내리고 있었 다. 용고가 얼른 기지(奇智)를 발휘했다. "저자가 장문인께 독(毒)을 썼다. 장문인의 생명이 위험하니 어서 저자를 공격해 라." 그녀의 선동(煽動)에 공동의 문인들이 분분히 날아오르는 순간! "멈춰라!" 힘은 없지만 위엄(威嚴)을 가득 담은 음성이 그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모든 문인 (門人)들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 온 곳을 향했다. 마른 몸을 옆의 여인에게 기대고 선 노인! 비록 쓰러질 듯 위태(危殆)해 보였지만 강한 기도(氣度)만은 감출 수 없었다. 용고의 입술이 굳어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지금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노인이 노여움을 띠고 공동의 문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진정 나를 알아보지 못하느냐?" 장로(長老) 중의 하나인 적룡자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노인과 진소백이 잡고 있는 풍운 진인을 번갈아 보았다. 이제 가짜의 얼굴에 발라져 있던 역용약은 모두 녹아 본모습이 드러나 있었다. 입술은 얇고 가는 눈에, 오른쪽 눈썹 위의 사마귀가 특징적인 인물! 적룡자는 그 사마귀만으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구자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적룡자는 몸을 떨며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장문인(掌門人)! 도대체 이 얼굴이……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하신 게요?" 그의 음성은 떨려서 진심으로 격동(激動)한 듯했다. 노인이 섭수진의 손을 놓고 적룡자를 잡으며 말했다. "난 지난 오 년간 지하에 갇혀 있었소. 이게 모두 다 저 탕녀(蕩女)의 짓이라오." 그가, 진짜 풍운 진인 적일수가 용고를 가리키자 적룡자의 장삼이 절로 펄럭였다. 노여움일까? 진기(眞氣)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구석에 서 있던 아추(兒醜)가 풍운 진인 뒤로 다가왔다. 그는 하인으로서 본분을 다하여 풍운(風雲) 진인(眞人)을 보살피려는 것인가? "호호호! 좋아, 아주 좋군!" 용고가 소리 높여 웃었다. "이처럼 통쾌하게 당하다니…… 요즘은 계속 당하기만 하는구나." 중얼거린 그녀가 진소백을 보며 말했다. "너는 인의신개가 아니로구나. 누구냐?" 진소백이 웃으며 되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용고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조용하자 진소백이 다시 말했다. "흑회의 존령(尊領)임은 알고 있소. 하지만 도대체 언제부터 흑회에 속하게 된 거 요?" 용고의 눈이 이채를 띠고 그를 보았다. "어떻게 알았느냐?" 이 말은 용고가 스스로 자신이 흑회의 존령임을 시인한 말이라 공동의 제자들은 놀라 술렁이기 시작했다. "천령이 풍운 진인을 가장한 가짜임을 알자 곧 깨달았소. 누가 있어 풍운 진인을 암산할 수 있겠소?" 진소백이 진짜 풍운 진인 쪽을 돌아보고 다시 말했다. "묻겠소. 풍운 진인을 암산하고 구자운을 풍운 진인의 생각이었소? 아니면 다른 지시가 있었소."

대리로 세운 것은 당신의

다른 지시라면 당연히 흑회 회주의 지시일 게다. 용고가 의외로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회주(會主)의 지시였다."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천하에 회주와 맞설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들이 이리 많다니. 심화절에다가 또 너! 넌 누구냐?" 진소백이 빙긋이 웃으며 얼굴의 분장을 지웠다. "내 이름은 진소백이오." * * * 장내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침묵이었다. 진소백이 침묵을 깼다. "흑회의 회주는 누구요?" 용고가 소리내어 웃었다. "호호, 내가 말할 것 같으냐?" 진소백이 지체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더라도 곧 말하게 될 거요." 그가 담담히 말하자 용고는 왠지 가슴이 섬뜩했다. 그의 말이 사실인 듯한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듯 그녀가 외쳤다. "흥! 내가 이미 공동을 오 년이나 지배하고 있었다. 내 세력은 이미 곳곳에 심어 두었다."


진소백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휴, 밖의 원조(援助)라면 기다리지 않는 것이 좋소. 흑회의 존령이 그들을 다른 곳으로 데려갔으니까!" "무, 무슨 소리냐? 내가 여기 있는데 어디서……" 진소백이 웃었다. "가짜 존령이 나타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소? 당신 거처에서 복면을 발견하자 일 은 쉬웠소. 회풍전 풍호진 선배(先輩)가 수고하고 계실 거요." 용고는 몸을 떨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보다 진소백이 더 무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은 선택은 하 나! 무조건 자리를 피해 도망치는 것이다. 가짜와의 대결에서 그녀는 진소백의 무공도 보았다. 정면 대결은 전혀 승산이 없었다. "흥, 제법이다만 나 또한 최후(最後)의 수는 있다." 용고의 주위는 장단이괴와 그들의 제자 두 명, 모두 네 명이 호위하고 있었다. 그녀의 '최후의 수'는 이들 누구도 아니었다. 움직임은 의외의 곳에서 일었고, 다른 하나의 움직임도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이게 무슨 짓이냐?" 풍운 진인의 놀란 외침이 터졌다. 그의 눈앞에 쏘아져 오는 경력(勁力)은 오 년간의 고초로 힘을 상실한 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좀 전까지 그를 부축해 주던 적룡자가 음산한 경기를 싣고 음풍조 (陰風爪)를 날려왔다. 너무 가깝고, 너무 의외였던지라 풍운 진인은 절대의 위기에 빠졌다. 멀리 있던 진소백이 놀란 건 말할 나위 없었고, 가까이 있던 섭수진조차 미처 막 을 수 없었다. 그만큼 적룡자의 출수는 빠르고 악독했다. "호호, 오 년간 내가 놀고만 있었겠느냐?" 적룡자의 음풍조가 풍운 진인을 제압해 감을 본 용고가 소리 높여 웃었다. 풍운 진인을 인질(人質)로 잡고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그녀의 입가에 달콤한 만족의 웃음이 달렸다. 적어도 다른 하나의 움직임이 있기 전까지는. 제 25 장 암중동모(暗中動某) 1 "어림없다." 웅장한 외침에 이어 아추(兒醜)의 우수가 권(拳)도 아니고 장(掌)도 아닌 형태로 적룡자의 음풍조에 대항하며 쏘아졌다. 음풍조의 기세에 비해 아추가 뻗은 경력은 매우 미약해 보였. 그러나 당사자인 적룡자(赤龍子)는 바로 알았다.


자신이 도저히 아추의 적수가 될 수 없음을. 그는 공동의 장로였으니 아추의 공력을 알아볼 수 있었다. 느린 듯 약한 듯, 은은한 칠채광(七彩光)이 아른거리는 아추의 손바닥! "육합구소 공(六合九 功)……! 너는 누구냐?" 적룡자가 놀라 외치며 아추의 일초에 밀려 정신없이 물러났다. 일장의 교환에 다 섯 걸음! 그는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아추는 풍운 진인을 부축하며 감회 어린 어조로 말했다. "무사하셨습니까, 사부님!" 풍운 진인이 그제야 그를 알아보고 격동(激動)했다. "일청! 정녕 청아(靑兒)가 맞는 게냐?" 아추, 아니, 파일청이 눈에 습막을 치고 말했다. "제자입니다. 용서하십시오, 제자가 무능하여……" 공동일룡( 一龍) 파일청(巴一靑)! 그의 출현이었다. 가짜 풍운 진인, 아니, 구자운이 신음하듯 말했다. "사형! 당신이 살아 있었소?" 파일청이 외쳤다. "닥쳐라. 아직도 사형이란 호칭이 나오더냐? 네놈이 용고, 저 악녀(惡女)와 결탁하 여 사부님을 해치고 나 또한 죽이려 하였지만…… 흥, 하늘이 나를 다시 보내셨다." 파일청은 위기를 가까스로 벗어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비록 불바다 속에서 원래의 영준했던 얼굴은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으나…… 그는 아추란 이름으로 공동에 잠입하여 때를 기다렸다. 암중 조사를 통해 적룡자가 이 미 용고의 편에 섰음을 알고 있던 그가 사부인 풍운 진인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음은 단순히 운만은 아니었다.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나며 그는 우연히 실전되었던 공동 최고의 무학인 육합구소 공을 얻었던 것이다. 그 위력이 엄청나, 따로 신(神) 자를 붙여 육합구소신공이라고도 불리는 절정의 신 공! 남몰래 신공을 연마하며 참고 기다린 그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어느 정도 무공에 자신을 얻은 그는 암중에 풍호진을 탈출시켜 오늘의 결과를 낳았던 것이 다.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태껏 다른 사람들을 몇 번 도와 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도움으로 모든 사람이 좋은 결과를 얻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직 스스 로 노력하고 자구(自救)하는 사람만이 좋은 결과를 얻었다. 지금도 그랬다. 만일 스스로 노력한 파일청이 없었다면 결과는 좋지 못했을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진리임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며 진소백은 입을 열었다. "용고, 아니, 존령(尊領)! 당신은 마지막 패(牌)마저 잃었소. 이제 당신은 회주의 정


체를 말해 줄 준비가 되었소?" 용고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심화절에게 당해 다시 공동을 발판으로 세력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또 네가 나타나다니…… 하늘도 무심하구나." 풍운 진인이 일갈했다. "간부(奸婦)! 어찌 하늘이 무심한 것이냐? 모든 것이 악행을 행한 네 잘못이거늘!" 용고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당신도 꽤 괜찮은 사람이었지. 하지만……" 그녀의 눈이 몽롱해졌다. "회주에 비한다면…… 흥, 누구도 회주에게 해를 끼치지 못한다. 세상 누구라도!" 그녀의 마지막 말은 거의 발작에 가까웠다. 용고가 발악적으로 외치며 풍운 진인을 노리고 날았다. 검은 경기가 손을 휘감으며 날카로운 소성을 질렀다. "풍운조가 대성(大成)의 경지로구나!" 파일청도 놀라 외치며 육합구소신공을 자신이 익힌 최고 수준인 칠(七) 성(成)으로 끌어올렸다. 파일청의 전력이 용고의 십이 성 풍운조와 어울리며 어지럽게 돌아갔다. 팡! 파팡! 우열은 금방 드러났다. 십이 성의 개천풍운조가 칠 성의 육합구소공을 당하지 못하고 밀리고 있었다. 뾰족한 용고의 웃음이 장내에 가득 찼다. "오호호!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했지. 하지만 난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그녀가 외치며 전력을 다해 파일청의 가슴을 노리며 짓쳐 갔 파일청 역시 육합구 소공을 담은 이지(二指), 일장(一掌)으로 그녀의 손톱을 옆으로 쓸어 갔는데, 파팍! 파일청의 지력(指力)이 이번엔 너무 쉽게 용고의 조력이 일으킨 방어막을 뚫어 버 리지 않는가! "우욱!" 파일청의 두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그는 용고가 일부러 내력을 거두며 자신의 지력에 몸을 던짐을 보았던 것이다. 용고가 힘없이 웃었다. "후후, 음모가 들통이 난 이상 내가 살아남는다면 이상하지." 진소백이 급히 달려왔다. "존령! 어서 말해라, 어서! 누가 흑회의 회주인가?" 용고가 그를 보고 힘없이 웃었다. 그녀의 눈에는 득의(得意)의 빛이 있었다. "말했었지. 넌 알아 낼 수 없다고. 넌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눈이 아련해지며 서서히 고개가 아래로 수그러졌다.


진소백은 그녀의 눈빛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더라? 어디서 이런 눈을 보았더라?' 진소백의 의문과는 무관(無關)하게 장내에서는 네 명을 상대로 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단이괴와 그의 두 제자는, 비록 무공이 낮지는 않았지만 공동의 수 많은 제자 들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아니, 파일청 하나도 감당할 수 없었다. 육합구소공을 익힌 지금, 그는 공동의 최고수라 할 수 있었다. 적룡자도 노룡자와 더불어 싸웠다. 어제는 사형제였던 그들은, 이제는 적이 되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런 일들은 어째서 일어나는가? * * * 이곳은 광성전(廣成殿)이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이전과는 확연히 틀려 다른 곳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태사의에는 풍운 진인이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앉아 있었 "이제 미염(美髥) 진인(眞人)이란 이름은 영원히 들을 날이 없겠구나." 옆에 서 있던 파일청이 고개를 저었다. 하인의 옷을 벗고 무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비록 얼굴은 추괴했지만 기도만은 늠 연(凜然)했다. "언젠가는 다시 자랄 것입니다. 언젠가는요!" 그의 말에 동의하는 음성이 있었다. 막 광성전으로 들어오던 폐의청년! "맞습니다. 공동이 입은 상처도 언젠가는 다시 아물 게구요!" 진소백이었다. 그가 들어서자 풍운 진인과 파일청이 동시에 외쳤다. "진 공자!" 그들의 눈에는 감사의 염이 가득해 진소백은 오히려 무안함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풍호진과 구곡인! 풍운 진인의 두 의형제인 그들을 보며 진소백이 말했다.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모두 이분들이 하셨지요." 하지만 그의 말이 겸손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 공자! 은혜를 갚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소." 일동이 입을 맞추어 한 말이었다. 진소백은 미소 지었다. "여러분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제가 언젠가 부탁할 일이 있을 겁니다." 풍운 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진 공자의 일은 곧 우리 공동( )의 일이오." 풍호진이 말했다. "그럼 먼저 진 공자와 섭 소저를 엮어 주는 일부터 시작함이 어떻겠소?" 진소백이 그를 쳐다보았다. "상당히 좋은 생각이긴 합니다만,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제가 스스로의 앞가림도 못


할 것 같습니까? 그보다는 풍 선배에게 좋은 아줌마를 하나 소개시켜 드려야 할 것 같은데…… 오 년이나 갇혀 지냈으니…… 그곳이 이미 썩지 않았겠습…… 읍!" 진소백이 입을 다물었다. 섭수진이 들어옴을 봤던 까닭이었다. "어디가 썩는다는 것이죠, 진 공자?" 섭수진이 알아듣지 못한 것은 행운이었지만, 계속해서 묻자 진소백은 당황했다. 뭐 라 대꾸하지도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로 있을 때! 풍호진이 지원 사격에 나섰다. "목이 썩을 지경이라네. 오 년이나 술 구경도 못 했으니 어찌 목이 썩지 않겠는 가?" 풍운 진인이 이때다 싶어 크게 외쳤다. "어서 술을 가져 오너라. 내 오늘 마음껏 마시겠다." 섭수진이 고개를 끄덕일 때야 비로소 진소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 웃음 소리가 퍼져 나갔다. 공동을 찾아들었던 암운(暗雲)은 걷히고 웃음 꽃이 활짝 피었 고난 끝에 찾아온 평화는 더욱 소중했다. 2 어둠은 음모의 기운(氣運)이다. 지금 그 어둠이 괴인(怪人)의 분노로 굽이치고 있었다. 주위의 어둠만큼이나 어두운 분위기의 인물! "진소백! 그리고…… 심화절!" 괴인의 손이 땅을 치자 땅에서 두 개의 돌이 날아올라 전면의 벽을 향해 날았다. 벽에는 두 사람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진소백과 심화절의 전신(全身)이었다. 돌은 두 그림의 머리 부분에 정확히 부딪쳤다. 퍽! 돌가루가 튀며 그림은 모두 머리 없는 형상으로 변했다. "처음 고숭무와 적염을 이용해 비응방을 손에 쥐려던 계획은 심화절과 진소백, 게 다가 멍청한 구자운(邱自雲)의 질투로 실패하고 말았다." 괴인이 냉소했다. "흥! 적염이 자신의 것이라 여겼다니! 구자운, 그놈이 에 고숭무가 제거되고 말았다."

암중에 정보를 흘리는 바람

그랬었나? 옥산의 흑회 위치와 고숭무의 파황권이 그렇게 쉽게 노출된 배경에는 구자운의 입 김이 있었던가? 원래 구자운과 적염은 깊은 관계에 있었다. 그것을 흑회의 괴인이 갈라 놓고 적염을 비응방으로 들여보냈던 것이다. 적염이 비응방에서 고숭무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자 구자운은 은근히 정보를 흘려 고숭


무의 제거를 시도했던 것이다. "흥, 그러나 난 자신이 있었다. 옥산에 있는 흑회의 힘만으로도 심화절의 비응방을 삼킬 자신이 있었다. 더불어 광산도 내 것으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괴인은 또 실패했다. 심화절의 능력 또한 상상 밖이었기 때문. 옥산의 흑회(黑會) 세력은 심화절에 의해 지리멸렬했다. 무엇보다도 심화절의 배후에 다른 세력이 있음을 몰랐던 것이 가장 큰 패인이었 다. "그 세 늙은이의 무공은 상상 밖이었다. 하지만……" 괴인이 돌을 하나 더 들어 심화절을 향해 던지자 심화절의 몸통이 날아가며 팔과 다리만이 남았다. "난 여전히 자신이 있었다. 옥산의 흑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이 있었지. 나는 존령을 급히 후퇴시켜 후일을 도모케 했다. 공동파를 움직여 심화절과 양패구상(兩敗俱傷)시키는 작전은 최후의 수단이긴 했지만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괴인은 화가 치미는지 좌수(左手)를 날렸다. 우지직! 돌이 두부처럼 부서지며 진소백의 그림이 뭉개졌다. "네놈이 모든 일을 망쳐 버렸다. 진소백!" 어느새 뽑아 든 걸까? 괴인의 좌수에는 어느 틈에 칼이 쥐어져 사방의 벽을 몰아치고 있었다. 돌가루가 날리며 벽에는 그림이 있었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가공할 쾌!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을 게다. 내가 전면(前面)에 나서는 시간이 늦춰졌을 뿐!" 그의 칼이 사방을 휘감으며 날아올랐던 돌부스러기마저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려 갔다. "숨어 있어야 하는 시간이 는다는 얘기는 무공을 익힐 시간도 늘어난다는 뜻! 언 젠가는 내가 모든 걸 가지리라." 괴인은 생각했다. 힘을 가져야 한다. 사문의 원한을 갚을 힘을! 자신이 익히는 무공은 충분한 힘이 될 것이다. 괴인은 또 생각했다. 돈도 가져야 한다. 비응방의 광산! 그보다 돈이 될 일이 또 있으랴? * * * 강호의 소문은 빠르다. 금사진의 죽음은 금방 소문이 나서, 강호에서는 비응방의 금사진이 사망했음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엽혼의 죽음은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강호인들 대부분은 비응방의 비사(秘事)에 엽혼이란 자가 관계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지공(知空) 대사는 물론 엽혼이 금사진과 관련이 있음은 알았다. 하지만 엽혼이 이 미 죽었음은 몰랐다. 그가 매우 편안한 마음으로 생을 마쳤다는 사실을 지공은 전혀 몰랐다. 아니, 짐 작도 못 했다. 만일 알았다면, 그가 지금 심화절과 면대(面對)하고 있을 까닭이 없었다. 지공 대 사가 알고 있는 것은 다만 소림방장 현공(玄空) 대사가 엽혼을 구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했다는 사실! ─`그가 진정 초의 선사의 제자라면…… 초의(草衣) 선사(禪師)께서는 비단 소림의 어른이실 뿐 아니라 전무림의 은인이시기도 하셨소. 그분이 붙잡으신 무림 공적들이 어디 하나둘이었 소……? 지공도 알고 있었다. 해서 그는 급히 돌아왔다. 그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고숭무가 원흉으로 밝혀져 흑회가 심화절에 의해 멸망했 으며, 엽혼은 죽고 없었지만, 지공은 엽혼에 관한 것만은 전혀 듣지 못했다. 아니, 엽혼의 일은 강호 누구도 몰랐다. 안다면 진소백과 섭수진, 금청청과 매일도 정도? 이처럼 사실이 새나가지 않은 이유는 분명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사실의 누설을 막고 있다는 것! 지공은 비응방의 새 방주로 심 화절(深化絶)이 취임했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는 군자이니 엽혼을 살려 줄지도 모른다.' 지공의 생각이었고, 또한 그가 지금 심화절과 면대(面對)한 이유였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엽혼을 살려 줄 수는 없습니다." 심화절이 굳게 말했다. 지공이 그를 설득했다. "물론 방주의 입장은 아오. 하지만 듣기로 고숭무가 이미 원흉으로 밝혀졌다 하였 소. 따져 보면 엽혼 또한 희생자라고 할 수 있으니…… 방주가 인정을 베푸시오. 더구나 초의 선사가 무림에 행하셨던 많은 업적을 고려해 주시오." 지공의 말에 심화절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초의(草衣)! 이 이름의 위력은 그만큼 컸다. 한참을 생각하던 심화절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대사! 그가 초의 선사의 제자라는 확증(確證)은 없지 않소이까? 만일 그를 살려 주려면 명분(名分)이 필요합니다. 그가 진정으로 초의 선사의 의발(衣鉢)을 이었음이 증명된다면……" 심화절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을 빛냈다.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초의 선사께서 직접 나타나 엽혼의 사면(赦免)을 요청하신 다면 제가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심화절이 힘차게 말했다. "이렇게 하겠습니다. 닷새 후, 엽혼의 처형(處刑)을 공개적으로 행하겠습니다. 만일 그때 초의 선사가 나타난다면 엽혼은 사면받을 것입니다."


지공으로서도 더 이상 양보를 종용할 수 없었다. "좋소. 모든 방법을 동원해 초의 선사를 찾아보도록 하지요." 초의 선사는 거처가 없이 천하를 떠도는 사람이었다. 닷새라는 기간은 짧긴 했지만 지공은 반드시 연락을 취해 보리라 결심했다. "대사를 모시거라." 심화절의 지시에 따라 수행인이 지공 대사를 수행해 나감을 보고 심화절이 고개를 돌렸다. "어서 나오시오." 심화절이 말하자 어둠 속에서 한 인물이 걸어나왔다. "자네의 무공은 나날이 늘어 이젠 내가 당할 수가 없네." "과찬이오, 노존(老尊)!" 노존은 어깨에 한 인물을 메고 있었다. 혈도가 짚힌 듯 축 늘어진 자를 노존은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얼굴이 드러났는데…… 이럴 수가, 엽혼이 아닌가? 하지만 불가능했다. 옥산의 목옥에서 소화의 손을 잡고 죽은 엽혼이 어찌 여기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인 가? 그는 엽혼일 수가 없었다. 석실에 누워 엽혼을 가장하고 있던 개방의 복칠(福七)! 그의 정체가 탄로났던 것이 다. "어이쿠!" 노존이 땅에 내려놓으며 아혈을 풀어 주자 하여 엉덩이가 아팠기 때문이다. 심화절이 그를 보더니 말했다. "엽혼! 며칠 후면 네 사부가 오실 게다."

복칠이 외쳤다. 내려놓는 기세가 강렬

복칠이 말했다. "이런 제기, 내가 엽혼이 아님은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소?" 심화절이 고개를 저었다. "안 될 말이지. 자신을 부정하다니. 계속 거짓말만 한다면 네 입을 봉해 버리겠다." 심화절이 정말 아혈을 봉했으므로 복칠은 말을 못 하고 눈만 데구루루 굴렸다. "네가 엽혼이 아니면 또 어떠리. 초의(草衣)는 이미 한 번 비응방에 왔으니 반드시 너를 구하러 올 것이다. 그때는…… 후후!" 노존이 심화절을 보고 물었다. "자네는 정말 초의 선사를 죽이려는 겐가? 그가 이 가짜 엽혼에게 속을까?" "왜 속지 않겠소? 진소백, 그 녀석이 우리를 위해 이렇게 가짜 엽혼을 만들어 주 었으니…… 고마운 일이잖소?" 노존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아직 흑회의 존령이란 자를 없애지도 못했고, 또 회주는 나타나지도 않았


네. 그들도 조심을 해야……" 심화절이 웃으며 말했다. "이미 존령이 공동의 용고(鏞姑)임을 알아 냈소. 내가 여유가 없어 존령을 놓친 줄 아시오?" 노존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을 어찌 대처하려는 건가? 더불어 초의 선사까지 감당한다는 건 너무 무리가 아닐까?" 심화절이 웃으며 말했다. "만일 우리가 초의를 없애는 일에 성공한다면 서(誓)의 요직에 단번에 오를 수 있 을 거요. 서에서 특별히 삼공까지 보내 주질 않았소?" 그래도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노존을 보며 심화절이 말했다. "공동의 일은 걱정하지 마시오. 나 대신 공동에서 흑회의 뿌리를 뽑아 줄 사람이 있으니까!" 노존이 놀라 물었다. "누구 말인가?" 심화절이 말했다. "진소백과 섭수진 말이오. 그들은 틀림없이 공동에 숨은 흑회의 뿌리를 뽑을 수 있을 거요." 노존은 비로소 안심했다. "자네 말을 들으니 마음이 편해지는군! 자네는 참 대단한 사람이네." "후후! 진소백이 나를 의심하는 눈치를 챘음에도 그를 그냥 둔 것은, 그를 이용해 흑회를 상대하고자 함이었소." 심화절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만일 공동의 흑회 제거가 끝이 난다면 진소백은 내가 보낸 암살자들에 의해 제거 될 거요. 후후, 우리 풍림서(風林誓)에서 보낸 삼공(三公) 중 둘이라면 그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무사할 수 없을 거요." 노존은 비로소 알았다. 심화절이 생각보다 더욱 뛰어나고 무섭다는 것을! 노존은 그가 왜 아직 풍림서의 핵심부로 들어가지 못했는지가 궁금할 지경이었다. 3 매일도와 금청청은 지공 대사가 서둘러 비응방을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매우 급한 듯, 주위에 금청청과 매일도가 있음도 알아보지 못했다. "어딜 저렇게 서둘러 가는 걸까요?" 궁금함을 느낀 금청청이 물었지만 매일도라고 알 리 없었다.


"글쎄, 어쨌든 지금은 우선 심화절의 일부터 해결하기로 하지. 우선 어떻게 들어갈 지 생각해 보자구!" "무슨 말이에요? 그냥 들어가서 한바탕 해보면 되지!" 금청청의 말에 매일도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 않아. 심화절이 마각을 드러내어 우리를 공격한다면 매우 위급한 처지에 빠질 수도 있어. 사매는 그의 무공을 잊었나?" 옳은 말이었다. 금청청은 심화절이 고숭무와 싸우던 모습을 생각했다. 만일 그가 본색을 드러내어 덤빈다면 둘이서 당해 낼 자신은 없었다. "좋아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글쎄, 진 형의 말대로 유품(遺品) 핑계를 대고 들어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아무래 도 일단 몰래 들어가서 정탐(偵探)부터 해보는 게 어때?" 자신의 할아버지가 세우고 아버지가 방주로 있던 분파에 숨어들게 되다니…… 금 청청은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았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 * * "제기랄! 어떻게 된 게 꼭 나만 밤에 일을 시켜요. 지들이 하면 어디가 덧나나?" 아패(阿覇)는 하인들 사이에서 서열(序列)이 높지 않았다. 때문에 밤에 할 일이 생기면 거의가 그의 몫이었다. 오늘도 그는 투덜거리며 마당을 쓸고 있었다. 한참 마당을 쓸고 있을 때,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헤에, 또 요놈의 자식들이 장난을 치려는구나.' 이전에도 밤중에 고참들의 장난에 몇 번 당한 적이 있던 아패는 이번에도 누군가 자신을 골리려고 부르는 줄 알았 다. '당할 줄 알고!' 자신에게 걸어오는 그림자를 보지 못한 척하면서 열심히 마당을 쓰는 아패는 곧 몸을 돌려 고함을 질러 오히려 상대방을 놀래 주려고 벼르고 있었다. 이윽고, 상대방이 자신에게 가까이 왔음을 느끼자, "왁! 어이쿠!" 고함을 지르던 아패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상대방이 갑자기 그의 뺨을 때렸기 때문이다. 강호인의 일격을 무공도 모르는 그가 당해 낼 리 없었다. 아패는 정신을 잃었다. "이런! 무공을 모르는 자를 그렇게 세게 때리면 어떡하나, 사매!" 뒤에 오던 매일도가 나직이 금청청을 나무랐다. "이놈이 갑자기 고함을 지르기에……!"


금청청이 입이 나와 말했다. '여긴 어디지?'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아패는 눈앞에 선녀처럼 예쁜 처녀가 앉아 있음을 보았다. '내가 죽은 건가?' 헛생각을 하던 아패(阿覇)는 눈앞의 선녀가 낯이 익음을 알았 "아이구! 아가씨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요?" 정색을 하며 아패는 몸을 일으켰다. 금청청이 나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조용히 해라. 몇 가지 물을 게 있다. 혹시 최근에 새로 들어온 노인 셋이 어디 묵 고 있는지 아느냐?" 아패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저야 잘 모릅지요. 아마 노대, 아니, 장육삼이라면 잘 아실 텐데요. 하인들 을 단속하느라 항시 돌아다니니……" 좋은 생각이라고 금청청은 느꼈다. "어서 장육삼을 데려오너라. 한데…… 명심해라. 절대 딴 사람에게 내가 왔음을 알 려서는 안 된다." 아패가 고개를 숙이며 장육삼을 데리러 나갔다. 금청청은 매일도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하인들과 접촉하는 건 좋은 생각이었죠, 사형? 하인들이야 강호의 인물이 아니니 배신할 리가 없지요." 매일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 아패와 장육삼이 달려왔다. 장육삼은 버선도 제대로 신지 않고 왔다. "아이고, 아가씨! 어서 오십시오. 뭐 하는 게냐? 어서 차라도 내오지 않고. 아니, 아니다. 내가 내올 테니 너는 방에서 아가씨를 잘 모시거라." 그는 호들갑을 떨더니 나갔다. 장육삼이 너무나 반갑게 맞이하자 금청청은 고향에 온 듯한 따뜻함을 느꼈다. 장육삼이 내온 차도 따뜻했다. "물론 그들의 거처를 알고는 있습니다. 한데 왜 그러시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금청청은 심화절에 관해 밝혀진 일들을 모두 얘기해 주었다. 하인들이 우두머리에게 말해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답답한 마음이나마 풀려는 것이었다. 다 듣고 난 장육삼의 표정이 심각했다. "정말 예상도 못 했던 일입니다." 아패가 거들고 나섰다. "정말입니다요. 심 방주가 그런 사람이었다니…… 난 이때까지 방주를 존경했었는


데, 앞으로는 바꾸기로 하겠습니다. 휴, 그런데 앞으로 누굴 존경하지? 이거 고민이네." 장육삼이 아패를 보고 차게 말했다. "넌 고민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 아패가 물었다. "엥! 그게 무슨 말입니까요?" 의문은 곧 풀렸다. 아패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 뿐 아니라 아예 고민할 수조차 없었다. 장육삼의 중지(中指)가 경기를 가득 담고 아패의 가슴팍에 박히자, 아패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손가락 하나로 사람을 죽임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매일도와 금청청은 크게 외치며 공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네놈은 누구냐?" 매일도와 금청청은 장육삼의 일초를 감당하지 못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장육삼이 머리를 흔들었다. "쯧쯧, 네 아비는 우리가 십 년간이나 공을 들였어도 제대로 독을 쓰지 못했다. 적 염(狄艶) 고것이 대신 독을 써주지 않았다면 영원히 성공 못 했을 것이다." 그는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런데 너는 같은 독에 두 번이나 당하다니…… 쯧쯧!" 금청청과 매일도는 치솟는 노화(怒火)를 참기 어려웠다. 오보산(五步散)에 두 번이나 당하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장육삼이 금청청의 뺨을 톡톡 치며 말했다. "잘 알아 두거라, 아가야. 강호상에서 가장 조심할 상대는, 힘없고 착해 보이고 네 게 잘 대해 주는 사람이란다. 명심하거라." 금청청이 노하여 고함치자, 그녀의 아혈(啞穴)마저 막아 버리며 장육삼이 말을 이 었다. "네가 비응방에 있던 것이 얼마나 된다고 내가 그처럼 반갑게 맞았겠느냐?" 방문이 열리고 심화절이 들어왔다. "그만 하시오. 그들은 똑똑하니 충분히 알아들었을 게요." 심화절은 지금 비응방의 방주를 상징하는 금응이 선명(鮮明)한 장삼을 걸치고 있 었다. 금청청의 눈에는 불꽃이 일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혈이 짚힌 상태가 아닌가? 심화절이 매일도를 보더니 물었다. "자네는 왜 입을 열지 않는가?" 매일도가 금청청을 보고 나서 쓰게 웃으며 말했다.


"혈도를 눌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오." 심화절이 껄껄 웃었다. "하하! 정말 아까운 젊은이로군, 이처럼 똑똑하다니. 자넬 죽일 수밖에 없으니 유 감(有感)이로세!" 매일도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우릴 죽이지 않을 거요." 심화절이 놀라서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가? 난 손짓 하나로도 자네들을 죽일 수 있다네." "휴! 당신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어떤 변수(變數)가 일어날 지 모르지. 흑회 의 회주는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고, 진소백의 능력 또한 대단하여 언제 당신의 뒤통수를 칠지도 모르지 않 소?" 매일도가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인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소." 심화절이 유쾌하게 웃었다. "자네는 정말 똑똑해. 난 너무 유쾌하다네. 내가 자네를 어찌하면 좋겠나?" "우선 따뜻한 방과 따뜻한 음식을 주시오. 우린 배가 고파 쓰러질 지경이오. 인질 이 쓰러진다면 가치가 없어지질 않겠소?" 심화절이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말이 옳네. 그럼 우선 급한 대로 그 따뜻한 차나 마저 훈훈해질 걸세."

들도록 하게! 몸이

매일도는 지체없이 마셨다. 금청청도 매일도의 눈짓을 받고 할 수 없이 마셨다. 차를 마시지 않으면 심화절이 안심하지 않을 테고, 심화절이 안심하지 않으면 자 신들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심화절이 껄껄 웃었다. "앞으로 자네가 이끌어 갈 화산의 앞날이 궁금해지는군. 난 똑똑한 젊은이를 좋아 한다네." 그는 소리를 죽여 말하며 매일도를 쳐다보았다. "부디 죽지는 말게. 난 머리 좋은 사람과의 대결을 좋아한다네……" 노존은 비로소 왜 심화절이 아직 풍림서(風林誓)의 핵심부로 들어가지 못했는지를 알았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과신(過信)하여 다른 사람과 지혜 대결을 벌이는 것을 너무 좋아했다. 하지만 강호의 일은 도박이 아니었다. 생존이었다. 아득히 멀어지는 정신의 한쪽 끝을 애써 잡으며 매일도가 가까스로 말을 남겼다.


"그렇다면 진소백을 다시 만나면 더욱 즐거울 것이오." 비단 즐겁기만 하겠는가? 제 26 장 겁겁위기(劫劫危機) 1 태양은 중천(中天)에 떠올랐다. 이제 정오의 햇살은 제법 따스했다. 하지만 길을 서두르는 진소백과 섭수진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비응방을 향해 급히 달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사종쾌가 소식을 전해 온 것은 아침이었다. '매일도와 금청청이 비응방에 들어갔다가 실종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나흘 후 엽혼을 공개 처형한다는 방이 곳곳에 나붙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진소백은 곧 서찰을 보내 사종쾌에게 지시(指示)를 내리는 한편 자신들도 서둘러 출발했다. 둘 다 큰 문제였다. 금청청의 실종도 문제였고 엽혼에 대한 거짓 공고(公告)도 문제였다. 왜 심화절이 이런 일을 꾸민 걸까? 섭수진이 나름대로의 의견을 말했다. "혹시…… 그래요! 틀림없이 초의 선사를 유인하기 위한 계략일 거예요." 섭수진의 말에 진소백은 머리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소?" "지금 엽혼에게 연고가 있는 사람이라곤 엽평…… 이란 동생과 초의 선사밖에는 없어요. 만일 심화절이 냉설(冷雪)이 말했던 분면음마(扮面淫魔)의 후예라면…… 복수를 하기 위해?" 진소백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한 추리였다. 하지만…… "일전에 심화절의 뒤에 큰 세력이 있다는 말 기억나오?" "예, 기억나요." "분면음마의 제자들은 세력을 만들기에는 너무나 사악했소. 누구도 믿지 못했지." "하지만 셋째란 자는 다를 수도 있지 않아요. 전 냉설 선배가 셋째가 가장 무섭다 고 했던 말을 기억해요." 진소백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 어쨌든…… 정말 좋은 일이오." 섭수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좋다는 말이죠?" 진소백이 크게 웃으며 말에 채찍을 가했다. "하하! 당신이 이처럼 똑똑하니 우리들의 이세(二世)는 머리 걱정을 하지 될 게 아니겠소. 하하!" "뭐예요?" 진소백은 이미 멀리 앞서 달렸다.

않아도


섭수진도 얼굴을 붉히며 발끈해서 그의 뒤를 쫓았다. 흙먼지를 가득 피워올리며 멀어지는 두 마리의 말! 진소백은 비응방의 일에 대한 부탁을 받았다. 하지만 섭수진은 왜 따라다니는가? 진소백을 보는 그녀의 눈빛으 로 알 수 있으리라. * * * 상여(喪輿)를 메는 상여꾼! 소복을 입은 남과 여! 그들이 길바닥에 주저앉은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상여는 길 한켠에 버려 두고 앉은 그들의 모습에는 어디에도 상(喪)을 당한 슬픔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를 기다리는 비장한 결심만이 보였다. 이들은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멀리서 소성(簫聲)이 들렸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소성의 의미를 이들은 알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일어섰다. 우두머리인, 요령을 든 요령꾼이 가장 앞에 섰다. 상여꾼은 무거운 상여를 어깨에 멨고 소복(素服)을 입은 남녀들은 뒤에 나란히 섰 다. 일단 자리에 선 그들의 표정은 바뀌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이 얼굴을 가득 메웠다. "어아`─ 어아`─ 북망산천 어데런가! 어이아`─ 어이`─`" 상여꾼들의 구성진 후렴구에 맞춰 요령 소리가 딸랑딸랑 울려 퍼졌다. 곡 소리는 멀리 멀리 울려 나갔다. * * * 상여 행렬에서 오(五) 리(里)쯤 떨어진 곳! 일단의 사람들이 한 명을 쫓고 있었다. 쫓기는 사람은 혈의(血衣)에 비쩍 마른 노인이었다. 노인답지 않은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뒤를 쫓아오는 자들 또한 신법이 대단했다. 일정한 격식을 가진 호각 소리와 연이은 호통 소리가, 노인의 도주 방향을 쫓는 사람들에게 일러주고 있었다. 노인은 어느 방향으로도 추적을 피할 수 없었다. 절망(絶望)의 빛이 그의 눈에 스쳤지만 노인은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한 순간이라도 기적이 일어날 수는 있으므로. 적어도 누군가를 만날 수만 있다면…… 그의 핏빛 죽창이 앞을 막아 서는 두 명의 미간(眉間)을 노리며 뻗었다. 혈고죽(血枯竹)! 냉설(冷雪)의 혈고죽이 좌우의 검사(劍士) 둘을 찌르며 길을 뚫었다. 하지만, 뒤쪽에서 혈고죽을 쫓아오는 이(二) 인(人)의 무공은 결코 냉설에 못지않 았다. 길을 뚫느라 등뒤에 허점이 드러난 바늘 같은 순간! 냉설 또한 무사할 수 없었다. 펑! "우욱!" 처음 일장은 겨우 피했지만 동시에 날아온 다른 자의 일권(一拳)은 그의 등을 갈


겼다. 냉설이 입으로 피를 뿜으며 날아갔다. 하지만 그가 여태껏 이런 자들을 피해 가며 도망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남 다른 신법 조예에 있었다. 비틀거리던 몸이 균형을 잡으며 다시 땅을 박차고 날았다. "지독한…… 어서 쫓아라!" 호각 소리가 다시 냉설이 도주하는 방향을 지시했다. 사방의 숲에서 어지러운 소리가 나며 풀들이 흔들렸다. 사사삭`─` 수많은 자들이 풀숲을 스치며 냉설을 쫓아갔다. 이제 냉설을 쫓기는 훨씬 수월했다. 그가 흘리는 피가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으므로. 이곳은 상여꾼들과 오(五) 리(里) 가량 떨어진 곳! 이제 그 거리가 서서히 좁혀지 고 있었다. * * * 딸랑딸랑! 멀리서는 요령 소리가 먼저 들렸다. 귀기울이고 들어 보니 이윽고 상여꾼들의 호곡 소리가 이어졌 "상여가 나가나 봐 요?" 섭수진이 말하고 이 각 정도의 시간이 지나, 그들은 상여를 볼 수 있었다. 꽃으로 장식한 거대한 상여를 여덟 명의 상여꾼이 메고 걸어왔다. 나무받침대를 힘있게 붙잡은 그들의 손은 매우 굳건해 보였다. 누구나 무거운 상여를 들고 다니 다 보면 굳은 마디의 손을 가지게 되리라. 뒤를 따라오는 소복 차림의 열 명 남짓의 남녀들은 설움을 이기지 못하는 듯, 고 개를 푹 숙인 채 걸음을 옮겼다. 누구의 죽음이건 죽음은 경건하고도 슬펐다. 그들의 조용하던 걸음은 언덕 위에 오르자 깨어졌다. 상여꾼 중 한 명이 돌을 잘못 밟아 비틀거리며 균형을 잃고 있었다. 한 기둥이 무너지자 무거운 상여 전체가 휘청거렸다. 경사가 가파른 언덕 위에서 휘청이는 상여는 확실히 위험해 보였다. 언덕 아래에서 상여 행렬을 쳐다보던 섭수진이 불안한 어조로 진소백에게 말했다. "저거 잘못하면 떨어지겠어요." 만약 상여가 땅에 떨어진다면 언덕을 타고 바로 진소백 등이 서 있는 곳으로 미끄 러져 올 게다. 자신들이야 피하는 게 문제가 아니지만 말들은 문제가 달랐다. 경공술을 모르니 뛰어 피할 수도 없었다. 불안한 예감은 잘 적중한다던가? 섭수진의 예감이 적중했다. "아이고! 이를 어째!"


놀랍고 안타까운 탄성(歎聲)과 더불어 상여꾼들은 그만 상여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사자(死者)의 마지막 걸음을 놓치다니…… 이런 불경(不敬)이 어디 있을까? 몇몇 남자들이 절박하게 외치며 잡으려 했지만, 이미 미끄러지기 시작하는 상여를 멈추 지는 못했다. "잡아! 제발 잡아!" 대개 관의 재료는 가장 좋은 나무를 사용하니 무척 무겁고, 저승 가는 노자로 쇠 붙이를 넣기도 하니 더욱 무겁다. 무거운 상여는 언덕의 급경사를 타고 가속이 붙었다. 상여가 미끄러지는 방향은 진소백이 서 있는 곳과 일직선(一直線)! 말은 상여가 다 가오기도 전, 상여와 바닥 사이의 마찰로 일어나는 굉음(轟音)에 놀라 동요했다. 쿠르릉! 진소백과 섭수진이 급히 몸을 날려 피할 때, 상여가 그들이 타고 있던 말들의 다 리를 쓸어 갔다. 미처 피하지 못한 두 필의 말이 애처롭게 울부짖으며 땅바닥으로 쓰러지고, 상여 가 몰고 온 흙먼지는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진소백과 섭수진이 허공을 한바퀴 맴돌아 바닥으로 내려섰을 놀란 소복(素服)의 남녀노소들이 저마다 울부짖으며 달려왔다. 비탄과 애절한 울음! 진소백의 주위는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2 "불쌍하군요. 도와 주는 것이……" 섭수진이 진소백을 보고 말했다. 소복을 입은 남녀들은 모두 달라붙어 진창에 박힌 상여를 빼내려 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고, 그 모습을 본 섭수진은 이미 자신들의 말이 죽는 피해를 입었음을 까맣게 잊었다. "좋소! 내가 나서 도와 주지." 진소백이 시원스레 말하며 앞으로 나섰다. 소매를 둘둘 걷어붙이고 나선 진소백은 우선 사람들을 일렬로 쭉 서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뒤에 섰다. "자, 어서 힘을 내시오. 내가 영차 하고 외치면 모두 당기시오. 시작합시다. 영차! 영차!" 그는 말로만 외치고 있었다. 일당의 우두머리는 요령을 흔들던 자였다. 그는 속으로 화가 났다. '이런 젠장, 계획대로라면 이놈이 안으로 들어가 상여를 당겨 주어야 우리가 공격 을 할 텐데…… 밖에서만 저러고 있으니.' 하지만 이왕 기다린 것! '조금만 더 기다리자.' 하여튼 그도 열심히 줄을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한 눈치를 채게 해서는 안 되었다. 섭수진은 의아했다. 하지만 진소백의 장난은 항상 뜻이 있었으니 조용히 있기로


했다. 다만, 언덕 위에 막 나타나서 아래로 내려오는 노부부(老夫婦)가 마음에 걸렸다. 걸음 하나하나가 모두 위태위태해 잘못하면 급경사에서 넘어질 것처럼 무척 불안 해 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녀는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왜 운구 행렬에 어린애나 노인은 하나도 없고 이삼십 정도의 장정들만 많은 것이 지? 게다가……' 그녀는 상여를 나르던 일당 중 누구의 눈두덩이도 부어 있지 않음을 비로소 깨달 았다. 과연 진소백의 장난에는 뜻이 있었다. "자, 자, 힘을 내시오. 모두 최선을 다해 당겨 봅시다." 진소백이 말하며 맨 뒤의 사내 등을 툭툭 쳤다. 사내는 몇 번 더 힘을 쓰다가 털 썩 쓰러졌다. "어이, 이런! 당신이 힘을 덜 쓰니까 그런 거 아뇨?" 진소백이 말하며 이번엔 쓰러진 사내의 바로 앞 사내의 등을 쳤다. 진소백이 등을 치는 자세는 너무 자연스러워 요령은 셋이 쓰러지고 나서야 어떻게 된 일인지를 깨달았다. "이런 빌어먹을, 들켰다. 덤벼라!" 요령이 급히 외치며 달려들었지만 이미 진소백은 준비하고 있었다. 줄을 당기던 소복들이 몸을 돌리기도 전에 진소백이 줄을 잡아 돌리자, 줄이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단번에 다섯을 바닥에 쓰러지게 했다. 몸을 왼쪽으로 쓰러질 듯 뉘였다가 곧바로 튕겨 내며, 요령과 대응이 빠른 소복 일당 넷의 공격을 피했다. 동시에 그의 발길에 튕겨난 돌멩이 두 개가 어느새 소복 두 명의 이마를 깨며 피 가 흐르게 했다. 몇 초의 변식도 제대로 일어나지 않아 장내에는 소복 일당 중 그나마 강한 여섯만 이 남았다. 두목 격인 요령이 이를 갈았다. "이놈의 자식! 이처럼 잔인하다니…… 읍!" 그는 말을 다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입 안 가득 주먹을 물고서 말하기는 불편했던가 보다. 주먹이 빠진 후에 도 그는 이빨 예닐곱 개를 다시 뱉어 내고서야 말을 할 수 있었다. "이 아식(:자식), 이거아게 마아느데(:비겁하게 말하는데)……" 그는 이번에도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진소백의 왼손에 감겨진 줄이 영교한 뱀처럼 머리를 들고 주위를 휘감았다. 요령은 급히 머리를 숙여 피했지만 나머지 다섯 명은 뱀의 세력권(勢力圈)을 벗어 나지 못했다. 따따`─ 딱! 손바닥 두들기는 소리 같은 음향이 잇달아 일며 다섯 소복인이 사방으로 튕겨 나 갔다.


믿기 힘들게도 진소백은 한 줄기 끈만을 사용하여 다섯 명의 혈도를 짚었던 것이 다. 채찍의 끝을 사용하여 혈도를 짚는 것은 비록 어려우나 가능했다. 채찍의 끝은 납 덩이나 철편을 넣어 다루기 편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끈은 다르다. 끝의 무게가 특별히 무겁지 않으니 오히려 불편했다. 하지만 지금 진소백은 끈의 끝 부분으로 다섯 명의 혈도를 동시에 점하는 신기(神 技)를 보였던 것이다. "우아아`─`!" 요령이 달아나며 외치는 소리는 분명 뜻이 있는 말이겠으나, 앞니가 다 빠진 그의 말은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진소백이 씁쓸히 웃으며 줄을 던져 그의 발을 묶으려 했는데, 돌연 문제가 생겼다. 고갯길을 위태하게 내려오던 노부부! 그만 그들 쪽으로 요령이 달려가고 있었던 것! 부딪친다면 노인들이 위험하리라. 진소백이 급히 몸을 날리고, 섭수진 또한 동시에 움직였다. 요령이 간발의 차로 스친 노부부가 손을 흔들며 뒤로 넘어졌다. 그들의 손은 허공 을 저으며 균형을 잡아 보려 애썼지만 헛수고였다. 진소백과 섭수진의 손이 선후를 가리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그들의 겨드랑이로 다 가갔다. 산길에서, 먼지를 날리며 뛰어간 젊은이들의 손이 노인 둘의 겨드랑이를 파고드는 모습은 확실히 보기 쉬운 광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넘어질 듯 위태위태하던 노인들의 손이 경기(勁氣)를 동반한 채 자신을 도 와 주려던 젊은이들의 목젖을 노리게 되는 상황은 더욱 보기 어려웠다. 게다가 전혀 방비가 없어 보이던 젊은이들의 손이 속도를 배가(倍加)하여 겨드랑 이 아래의 요혈에 일장을 가함으로써 노인들이 부득불 물러나게 만드는 상황은 평 생에 보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 그 세 가지의 보기 힘든 상황이 모두 일련(一連)하여 일어났다. 파박! 몸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귓전을 스칠 정도로 네 명의 신형이 어지럽게 휘감겼 다가 다시 떨어졌다. 그러나 일시적인 떨어짐이었을 뿐이다. 두 노인의 몸이 젊은 사람보다 더욱 탄력있게 움직였다. "어떻게 알았느냐?" 늙은 남자가 외치며 진소백을 향해 일장을 다시 날려왔다. 진소백이 낭랑하게 웃으며 대응했다. "하하! 노인치고는 손이 너무 곱지 않소?" 늙은 여자의 두 손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거의 동시에 섭수진의 전신(全身) 요혈 (要穴)을 압박했다. 네 곳의 방위(方位)가 모두 한 손 아래 들어가는 착각(錯覺)을 부르는 기이한 손 의 움직임! 섭수진은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며 급히 손을 들어 마주쳤다. 보라!


그녀의 손 변화도 늙은 여자와 비슷하지 않은가! 퍼벙! 서로 일보씩을 물러설 때, 섭수진이 날카롭게 외쳤다. "금정산수(金頂散手)라니…… 당신은 누구요, 도대체!" 그녀는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늙은 여자의 손이 다시 좀 전보다 더욱 강한 변화를 일으키며 다시 다가왔으므로. 음산한 기운이 전신을 노리자 섭수진은 비로소 깨달았다. 늙은 여인이 펼치는 것은 분명 금정산수(金頂散手)이면서도 금정산수가 아니었다. 금정산수의 노수(路數)를 정확히 따라가는 무공이긴 했으나, 어딘가 달랐다. 금정 산수 어느 곳에 이처럼 음산한 변화가 있으랴? 섭수진은 마음속에 의문(疑問)을 담은 채 자신의 금정산수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정통(正統)과 이단(異端)의 두 가지 금정산수가 격돌하며 전무후무한 대결이 펼쳐 졌다. 사정은 진소백도 마찬가지였다. 늙은 남자가 쏟아 내는 장력들을 막아 내던 진소백이 외쳤다.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 그랬다. 늙은 남자의 장법은 대력금강장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나 어찌 소림의 금강장 (金剛掌)에 이런 음산한 기운이 서린단 말인가? 진소백이 무슨 생각인지 스스로 끈을 버렸다. 그리고 낭랑한 외침! "좋아. 어울려 보자꾸나! 나도 간다." 믿을 수 없게 그의 손에서도 늙은 남자와 똑같은 대력금강장이 펼쳐지기 시작했 다. 하지만 웅장한 기세와 장엄한 서기가 서리는 이것이야말로 정통의 금강장! 퍼펑! 여기에 또 다른 정통과 이단의 대결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혈고죽(血枯竹)은 완전히 지쳤다. 편안한 휴식, 죽음에의 유혹이 그를 수시로 찾아왔다. 하나 쉴 수는 없었다. 아무리 무의미한 도주라도 그는 해야 했다. 어쩌면 이 말을 전할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지 않는가? * * * 시간이 갈수록 섭수진은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정통이 이단과 싸워 밀리다니! 원래 모든 무공은 기초부터 하나하나 익히는 것이, 비록 정진(精進)은 늦지만 끝내 는 대성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런데도 상대방이 시전하는 변화된 금정산수에 밀리다니! 섭수진은 마음이 어지 러워지며 더욱 큰 위기로 빠져 들었다. 3 진소백의 전음이 들린 것을 이때였다. "초식에 연연(連延)하지 마시오. 무공 본래의 오의(奧意)를 생각하시오." 진소백도 싸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전음을 보내는 여유를 부릴 수 있다니! 하지만 놀라고만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섭수진은 황급히 정신을 수습했다. 영리한 그녀는 진소백의 말을 듣자 곧 깨달았다. 아미의 옥허검(玉虛劍)을 전개하면서 이미 어느 정도 깨닫고 있었던 무공의 깊은 뜻! 어떤 변화를 통해 이 늙은 여자가 전개하는 이단의 금정산수가 탄생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이 변종(變種)은 확실히 초식 구사 면에서 정통의 것보다는 나았다. 그러나 왜 정통이 잡다한 변화를 버렸겠는가? 섭수진은 곧 알았다. 기이하게도 여태껏 흐릿한 안개 같았던 깨달음들이 지금의 대결에서 하나둘씩 뚜 렷한 형상을 갖추며 지혜로 흡수되었다. 그녀의 손이 오히려 느려졌다. 여태껏 초식에 연연하던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숨은 오의에 눈을 돌렸던 것이다. 이런 것은 어쩌다 찾아오는 하나의 기연(奇緣)이었다. 깨달음은 결코 긴 세월을 두고 천천히 오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한 순간! 우연한 깨달음이 무인을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로 인도하는 것이다. 느린 손은 늙은 여자의 빠른 변화를 오히려 압박했다. 그 손은 단순히 느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무수한 변화의 가능성이 내재(內在)한 손! 외부의 자극을 받으면 산산이 흩어지는 민들레 꽃씨처럼, 무수한 초식이 쏘아져 나올 손이었다. 늙은 여자는 태만하지 못하고 뒷걸음질쳤다. 그녀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짐작도 못 하였다. 늙은 남자는 더 큰 위기에 몰려 있었다. 진소백의 금강장(金剛掌)은 이미 전개 때부터 자신의 금강장을 압박해 왔으므로.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믿기 힘들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손을 마주쳐 나가는 늙은 남자! 펑! 일장의 교환이 있자 다시 뒤로 세 걸음 물러나면서도 그의 눈에 떠오른 불신은 가 시지 않았다. '우리 조직의 두뇌(頭腦)들이 수년간의 검토 끝에 다시 만든 금강장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그가 생각하며 계속 물러나는 사이, 진소백의 두 발은 땅위에서 미끄러지듯 그를 따라붙었다. 그리고 늙은 남자의 귓전을 울리는 전음! "왜, 풍림서의 새 초식이 낡은 초식에 밀려나니 놀랐느냐?" 늙은 남자는 까무러칠 듯 놀라 외쳤다. "너, 너는 도대체……"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리와 양쪽 가슴을 향해 삼점붕괴(三點崩壞)의 식으로 입을 열 만한 고수는 아니었으므로. 퍼퍼펑! "우`─`욱!"

쏘아 오는 삼장을 막으며


세 개의 파열음이 연결되며 늙은 남자는 다시 칠 보를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진소백의 미끄러짐은 더욱 빨랐다. "다른 무공은 없는가? 어서 보여라!" 진소백이 외치며 발을 향해 일장을 가하자 늙은 남자가 몸을 솟구쳤다. 곤륜의 신법이 가미되었음을 본 진소백이 낭랑히 외쳤다. "오늘 많은 소득을 얻는구나. 누워라!" 진소백의 손이 허공을 가르며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늙은 남자를 감았다. 용음이 일었다. 개선비학 용음십이수(龍音十二手)! 늙은 남자는 감당할 수 없었다. 이 무공은 처음 보는 것이기에. 그가 땅으로 쓰러질 때! 늙은 여자 또한 절명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섭수진의 금정산수가 더욱 느려짐에 따라 한층 두려운 기세가 늙은 여자를 압박해 갔다. 섭수진의 싸움을 보는 진소백의 눈이 빛났다. '역시 그녀는 자질이 있다.' 지금 섭수진의 무공은 일순간의 깨달음으로 하나의 경계를 넘었다. 손이 천천히 휘둘러질수록 깨달음이 더욱 완숙해졌다. 이윽고, "우욱!" 거의 아무런 변화도 없이 내밀어진 섭수진의 일수를, 늙은 여자는 감당하지 못하 고 가슴에 얻어맞지 게 아닌가? 늙은 여자는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고, 섭수진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방금 넘었던 무학의 경계(境界)를, 나름대로 가슴속에 정리하고 있는 것이 다. * * * 두 노인은 손이 꽁꽁 묶인 채 꿇어앉아 있었다. 그 앞에 선 젊은 청년은 뒷짐을 진 채 매우 거만한 자세로 그들을 닦달하고 있었 다. 그다지 보기 좋지는 않았지만, 진소백이 사로잡은 노부부를 신문하는 모습이었다. 진소백은 단지 한 가지를 물었다. "심화절의 풍림서(風林誓) 내부 서열(序列)은 어찌 되오?" 늙은 남녀는 극도로 놀랐다. 단지 놀랐을 뿐 아무 대답도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진소백은 만족했다. 비록 대답은 없었지만 한 가지 질문으로 원하는 두 가지를 모두 알았던 것이다. 첫째 이들을 심화절이 보냈음과, 둘째 심화절의 배후가 풍림서란 집단임을! 두 노 인은 무공이 폐지되었다. 하지만 풀려나지는 못했다.


진소백은 신호전을 올린 채 그 자리를 떠났고, 어딘가에서 나타난 사람들이 그들 을 데려갔다. 진소백의 신호를 받고 온 사람들이. 개중에는 개방의 신법을 쓰는 자도 있었고, 다른 신법을 쓰는 자들도 있었다. 심지 어 좀 전에 늙은 남자가 시전했던 것과 비슷한 신법을 쓰는 자들도 있었다. "진 공자! 도대체 그 풍림서(風林誓)란 뭐죠?" "강호 집단의 이름이오!" "하지만 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요?" "당연하오. 그들의 행사는 매우 무섭지만, 또한 매우 은밀히 진행되오." "그럼, 진 공자는 어떻게 그들을 알고 있나요?" "나와 인연, 아니, 악연이 있기 때문이오." "좀더 자세히 말해 주세요." "휴, 아직 때가 아니오. 이 일이 해결된 뒤에……" "심화절의 일 말씀인가요?" "그렇소. 암중으로 숨은 흑회 회주와 분면음마 제자의 일도." "궁금하군요." "아마 곧 알게 될 거요. 섭 소저도 역시 인연이 있으니……" "……" 말[馬]이 없으니 경공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신형이 멀어졌다. * * * 만일 진소백 들이 심화절이 보낸 살수(殺手) 때문에 말을 잃지 않았다면 택하지 않았을 게다. 말은 산길을 달릴 수 없으므로. 하지만 말이 없는 지금, 보다 빨리 가려면 산속의 지름길을 택해 경공을 야 했다. 어쩌면 세상의 일이란 하늘의 안배를 하나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사람이 영리하더라도 곳곳에 돌출하는 운명의 변수들을 어찌 모두 겠는가? 순천자(順天者)만이 흥(興)한다는 진리의 속뜻이 여기 있었다. 때문에 항상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삶이 중요한 것이다. 신음은 바위 사이에서 들렸다. 냉설은 숨어 있었지만 바깥의 사정은 볼 수 있었다. 두 남녀가 다가오고, 둘 다 본 적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게다가 그 중 아미옥녀 섭수진은 결코 자신을 쫓는 이들과 한편이 될 수 알았다.

산길을

전개해

짐작하

없음도


그의 눈에 생기(生氣)가 돌아왔다. 비록 살기는 글렀지만 적어도 자신이 알아 낸 비밀만은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 자신을 쫓는 적들은 포기한 걸까? 그토록 악착같던 자들이 정말 포기하고 돌아선 걸까? 아닐 것이다. 냉설은 급히 섭수진을 부르려 했다. 이 비밀은 한시 바삐 알려야만 한다. 바닥의 흙이 미동(微動)하며 무언가 뾰족한 것이 자신의 가슴을 찔러 온다고 느낀 것은 바로 그때! 냉설의 눈빛이 급격히 꺼져 가면서 머릿속에는 오직 한 생각만이 떠올랐다. '알려야 하는데, 이 일을 알려야……' 신음을 들은 즉시 몸을 날렸지만, 진소백은 냉설이 마지막 숨을 내쉼을 보았을 뿐 이었다. 주변의 풀숲 사이에서 뱀이 기어가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진소백은 망설 이지 않고 몸을 날렸다. "섭 소저, 그를 돌보시오." 진소백의 신형이 튕기듯 앞으로 폭주해 갔다. 궁신폭(弓身爆)! 빠르기로는 천하의 일절이라는 신법이었다. 하지만 진소백이 발견한 것은 한 명의 복면인뿐이었다. 그 복면인은 도망가지 않고 진소백을 덮쳐 왔다. 오른손이 아닌 왼손에 검을 잡고 휘둘러 오는 기세가 매우 악독했다. 진소백이 놀라 고함쳤다. "음마문(陰魔門)! 음마문의 좌수검이로구나!" 제 27 장 천붕뇌정(天崩雷霆) 1 음마문(陰魔門)! 대가 끊기고 무공이 실전된 지 이십 년 이상이나 지난 문파! 특이하게도 그들의 모든 무공은 좌수(左手)가 주(主)가 된다. 검법도, 도법도, 장법도. 복면인은 애초에 진소백과 싸우기보다는 다른 자들에게 도망갈 기회를 만들어 주 기 위해 덤볐다는 사실을 진소백은 곧 알 수 있었다. "비켜라!" 진소백이 외치며 맹렬히 휘두른 용음수에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몸으로 막아 서 는 것으로 보아. 진소백이 최선을 다해 십여 초 만에 그를 쓰러뜨렸을 때는 이미 다른 자들의 흔적 은 보이지 않았다. 땅으로 내려서며 진소백이 침중히 말했다. "설마 음마문의 세력이 나타나고 있다는 말일까?" "냉설 선배는 이미 숨이 끊겼어요." 섭수진의 우울한 말에 진소백은 정신이 들었다. 급히 눈을 돌려 자신이 제압했던 복면인을 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였다. "어떤 자들인지 모르지만 엄격한 훈련을 받았다. 또한 음마문과 관련이 있다." 그의 중얼거림을 듣고 섭수진이 말했다. "하나의 가능성밖에 없군요. 분면음마의 셋째 제자!" 진소백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누굴까? 심화절일까? 냉설은 마지막에 극도의 고통을 당한 듯, 손에 자신의 머리칼 한 움큼을 잡고 있 었다. 머리 한켠이 왕창 빠져 나가 붉은 살이 드러났다. 섭수진이 그의 가슴을 보며 말했다. "검이 심장을 관통했어요. 그는 뭔가 중요한 것을 알고 있었나 봐요." "아마도 음마문의 세 번째 제자의 정체쯤 되겠지. 그는 오로지 분면음마의 제자들 만을 추적했으니, 가능성이 있소." 하지만 때가 늦었다. 진소백 등이 조금만 일찍 왔더라도 셋째 제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러나 그들은 늦었고, 냉설은 이미 죽었다. "휴, 죽은 자도 말을 한다는 옛말이 있지만, 이런 경우는 그 말이 옛말이 아닌 현 실이라면 좋겠어요." 진소백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전서구는 창문을 통해 들어갔다. 하나의 손이 전서구의 발목에 묶인 통을 풀어 그 속에 든 쪽지를 꺼냈다. 씌어진 글은 간단했다. <실패(失敗).> 손이 부르르 떨렸다. 손은 길고 가늘어 무인의 손이 아니라 문사의 손인 듯 보였다. 손의 임자인 심화 절의 눈도 떨렸다. 이 일이 실패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두 노인이 익혔던 무공은 풍림서의 엄밀한 반복 분석을 통해 구파일방의 무공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처되도록 고안된 변형 무공이었다. 어찌 실패할 가능성이 있을까? '진소백, 그리고 섭수진의 무공이 이미 자신들 문파의 수장인 인의신개나 금정(金 頂) 신니(神尼)의 수준에 이르지 않고서는 실패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이었다.' 심화절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진소백이 개방의 문하가 아니라는 점! 또한 섭수진이 싸움 도중 우연히 깨달음을 얻으며 절정고수 반열에 한 발을 들여 놓았다는 사실! 심화절은 노존에게 연락을 취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일이 급하게 되었소. 엽혼의 처형장에 초의가 올 것임은 확실하나, 엽혼이 가짜임을 알고 있는 진소백 과 섭수진을 없애는 일은 실패했소. 서(誓) 내부의 도움을 더 얻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을 막아 주시오. 만일 그들이 우 연이라도 초의를 만난다면 일이 모두 틀어질 것이오.> * * * 진소백이 느닷없이 물었다. "일전에 우리가 옥산에서 도망쳤던 방법을 기억하시오?" 섭수진은 왜 진소백이 이런 말을 하는지 의아했다. "물론 기억해요. 한데 왜……?" "별것 아니오. 단지 이 앞에도 절벽이 하나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을 뿐이오. 한 번 더 그런 기회가 온다면 좋겠소." 섭수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뭐가 좋다는 거죠?" "하하, 손을 꼭 잡고 떨어지지 않았소? 게다가 짚 위에 떨어질 땐 서로의 몸이 겹 치게 되니…… 하하하!" 섭수진은 화가 났다. 그저 시간만 나면 이런 소리라니! "뭐예요?" 그녀가 눈을 치켜 뜰 때! "피하시오!" 진소백이 다급히 말하며 섭수진을 뒤로 밀었다. 섭수진 또한 공기를 찢는 화살 소리를 들었으므로, 급히 공력을 모아 양손을 둥글 게 휘둘러 막(幕)을 만들었다. 차라락`─` 다섯 개의 화살이 그녀가 만든 경기(勁氣)의 막을 뚫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지는 사이 진소백은 일곱 개의 화살을 막아 내며 그 중 세 개를 되쏘았다. 슉! 화살은 강궁(强弓)에서 쏘아진 듯 가공할 빠르기로 공기를 갈라 숲속으로 들어갔 다. "우욱!" 세 개의 화살이었음에도 단지 한 명의 혈의인(血衣人)이 왼쪽 어깨를 부여잡고 일 어섬을 본 진소백의 눈에 은은히 놀람의 빛이 어렸다. "이십사 명 혈의대(血衣隊)가 이 정도 실력이란 말이냐?" 진소백이 크게 외치며 몸을 날렸다. 비록 호기롭게 말했지만 그의 말투엔 평소의 장난기가 조금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가 눈앞의 적들을 중히 여김을 알 수 있는 모습! 섭수진의 귀로 전해지는 전음


또한 진지했다. "좌측을 맡으시오. 조심하시오, 일반 무사들과는 격(格)이 다른 자들이오." 진소백이 우측의 숲을 덮치고 섭수진이 뒤이어 좌측의 숲으로 날아든 것은 거의 동시라, 일반인이 보기엔 마치 처음부터 짜고 한 행동 같았다. 게다가 얼마나 빨랐던지, 처음에 진소백이 받았다가 되던진 세 개의 화살 바로 뒤 쪽에 줄이 묶여 있어 그들이 딸려 오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하지만 숲에 숨은 혈의인들의 반응도 무척 빨랐다. 그 짧은 순간 제이의 화살이 날아올 줄 어찌 짐작했을까? 하지만, "너희의 전술은 익히 알고 있다." 진소백이 외치며 허공에서 발등을 번갈아 찍으며 도약했다. 이처럼 허공을 밟고 도약하는 신법은 웬만한 문파의 수장(首長)도 하기 어려운 것 이었다. 한데 섭수진 또한 비슷한 신법을 전개해 화살을 피하고 있지 않은가? 아미파 천룡 신공(天龍神功)의 응용! 본래 무공이란 어느 정도 경지를 넘어서면 한 순간의 깨달음으로 경계를 넘기도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걷히지 않던 안개가 순식간에 걷히며 새로운 세계가 눈에 보이는 것이다. 지금 섭수진이 보여 준 움직임은 이전의 그녀로서도 가능하기는 하겠지만 꽤 어려웠을 것이다. 하나 지금 섭수진의 동작은 그야말로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이미 무공에서 하나의 경계를 넘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미리 진소백의 경고를 받았다. 해서 몸을 날릴 당시부터 발꿈치의 용천혈에 진기를 모아 허공 중에서 방향을 바 꿀 대비를 했으니. 재도약했던 몸이 내려오는 속도는 이전보다 빨랐다. 따라서 혈의인에 대한 공격도 더욱 빨라짐은 당연한 이치! "우우욱!" 비명을 지르며 진소백 주위의 혈의인 셋이 동시에 튕겨 나갔다. 일 초에 세 명을 처치했건만, 진소백은 만족한 표정이 아니었. 그의 용음수(龍音手)는 다섯 명을 동시에 노리며 쏘아 갔었다. 진소백의 전음이 섭수진의 귀를 울렸다. "최선을 다하고, 손에 인정을 두지 마시오. 적은 이들만이 아닐 거요." 적을 일검에 죽이는 것보다, 상처만 주고 제압하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다. 섭수진도 동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잘 뽑지 않는 검을 뽑았다. 우수의 검에서는 소청검법(小淸劍法)이 위세를 떨치고, 좌수엔 금정산수가 오묘한 기세를 담고 혈의인을 쓸어 갔다. 원래 이십사 혈의대는 열두 명의 궁대(弓隊)와 열두 명의 검대(劍隊)로 나뉘어 있 다. 궁대의 공격을 피한 진소백과 섭수진이 검대를 휘젓자, 궁대 또한 화살을 버리고 궁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이때 진소백은 오 초를 휘둘러 다섯 명을 땅에 눕혔고, 섭수진은 삼초를 뻗어 세 명을 물리쳤다. 단지 네 명이 남아 있었는데, 다시 열두 명이 가세하자 남았던 네 명은 가까스로 생명의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진소백과 섭수진의 기세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으므로. 다시 진소백의 일장이 한 명의 가슴을 짓뭉갰다. 피를 토하고 밀려가는 그를 보며 진소백은 생각했다. 이들은 심화절의 배후인 풍림서(風林誓)의 무사들이었다. 심화절은 왜 이처럼 많은 인원을 동원해서 자신을 막으려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 해도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초의(草衣) 선사(禪師)! 심화절이 공개적으로 엽혼을 처형하겠다고 거짓말을 한 이유를, 초의 선사를 제외 하고는 찾을 수 없었다. 당연히 심화절은 엽혼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자신과 금청청 등을 제거하려 할 것이다. 그는 걱정이 되었다. 금청청이 심화절의 손에 잡혔다면 틀림없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진소백은 잊고 있었다. 지금 가장 위험한 것은 바로 자신과 섭수진이었다. 다시 혈의인의 검이 등을 노리고 다가왔다. 진소백은 몸을 절묘하게 비틀어 피하며, 중지를 꼿꼿이 뻗어 혈의인의 천돌혈을 찔렀다. "켁!" 숨막힌 기침이 혈의인에게서 터져 나왔다. 2 노존은 백여 장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의 앞에는 두 명의 청삼노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비응방의 일 정도 를 당신과 천기수사 둘이서 처리할 수 없었다니, 정말 뜻밖이오." 노존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처음엔 쉬워 보이던 일들이 너무 덩치가 커졌소. 고숭무 정도가 문제가 아니오. 아직 정체를 모르는 흑회 회주란 자와 진소백이란 녀석의 능력은…… 보면 알 것 아니오?" 두 청삼노인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혈의대의 능력이라면 능히 웬만한 강호고수를 상대하는 데 일 각도 소요되지 않을 것이다. 한데 지금 들리는 저 소리는…… 그들은 소리만 듣고도 전황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고수들이었다. "혈의대가 상대가 되지 않는구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심화절과 내가 어찌 다시 서(誓)의 도움을 청했겠소?" 청삼노인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똑같이 생긴 두 청삼노인의 유일한 차이는 미간의 사마귀였다.


한 명은 사마귀가 있고 다른 한 명은 없었다. 사마귀가 있는 자가 형인 듯했다. 사마귀가 무(無)사마귀에게 말했다. "어서 발동하라!" 무사마귀가 즉시 신호를 보내자 어디선가 도화선에 불이 붙어 숲속으로 타 들어갔 다. "마지막!" 진소백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마지막 혈의대 무사를 처치했다. 동시에 섭수진 또한 일검을 날려 그녀에게 덤빈 무사들을 모두 처치했다. 비록 그녀가 처치한 혈의인(血衣人) 수가 진소백에 비하면 반수(半數)에 불과했지 만, 그것 역시 대단한 것임을 진소백은 알았 자신은 혈의대의 무공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야말로 처음 대하는 무공을 맞아 이 정도 싸운 것이다. 생각을 잇던 진소백은 낯익은 냄새를 맡았다. 화기(火器)에 남다른 조예가 있는 진소백이었다. 어찌 이 냄새를 모르랴? "어서 내공을 모으시오." 그의 손은 섭수진의 허리를 감고 발은 땅을 박찼다. "최고의 장력으로 땅을 치시오!" 그들의 장력이 땅을 갈길 때, 그 땅이 갈가리 찢어졌다. 꽝! 꽈광! 어찌 장력의 힘일까? 묻혀 있던 화탄(火彈)이 폭발하고 있었다. 폭발의 여력에 휘말리며 진소백과 섭수진의 신형이 이십여 장 하늘로 높이 솟구쳤 다. 마치 바람을 타고 나는 천신(天神)의 모습 같았다. * * * 비응방 주위는 시끄러웠다.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고자 모여들었지만, 심화절의 엄격한 통제를 통해 출입표를 받은 몇 명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출입표를 주는 기준이 알려지지 않아, 비응방 정문에 모인 군웅들이 웅성댔다. 군웅 중에 누군가가 외쳤다.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출입표를 주고 말고 한단 말이오?" 지금 출입표를 나누어 주는 사람은 총관직(總管職)을 맡은 귀조 독소명(獨蘇冥)이 었다. 그는 유일하게, 옥산(玉山)에서 있었던 흑회(黑會)와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었다. 심화절은 방주가 되자 일부의 직제를 바꾸어 새로 총관이란 직책을 만들어 그에게 주었다.


독소명은 소리가 난 곳을 보았다. "대력호(大力虎), 당신이로군! 스스로 자격이 있다 여기면 가져 가 보시오." 독소명이 출입표 한 장을 흔들어대자 대력호의 검은 얼굴이 붉게 변했다. "흥! 무시하지 말거라." 대력호가 크게 외치며 땅을 박차자 그의 몸이 이 장 위로 떠오르며 독소명을 덮쳐 갔다. 그러나, "흥, 네 정도 실력으로는 비응방의 땅을 밟지 못한다." 독소명이 차게 말하며 땅을 차 올리자, 돌멩이 한 개가 쏜살같이 날아 대력호의 발바닥 용천혈을 노리지 않는가? 대력호는 공중제비를 돌아 그 돌을 피했다. 하지만 어느새 독소명의 발끝에서 돌멩이 두 개가 다시 쏘아졌 하나의 기세는 맹 렬(猛烈)하고 하나는 온건(穩健)했다. 온건한 돌이 먼저 왔고, 맹렬한 돌은 나중에 왔다. 대력호는 부득이 첫 번째의 약한 돌을 밟고 도약(跳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두 번째의 맹렬한 돌을 피하려니 부득이 그 방향도 일정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독소명의 머리 위. 세 번의 도약으로 어쩔 수 없이 독소명의 위로 가게 된 대력호는 힘이 떨어짐을 느꼈다. 공중에서 돌멩이를 짚고 세 번의 도약을 하는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으므로. "어, 어!" 그가 독소명의 머리 위에서 바둥거리며 떨어질 때! 독소명의 우수가 귀신의 발톱 처럼 대력호의 목줄기를 잡아 버렸다. "우`─`우욱!" 원래 대력호의 덩치는 독소명보다 컸다. 하지만 그런 대력호를 독소명의 귀조가 전혀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듯 잡고 있었 다. 목이 잡힌 채 허공에 바둥거리는 대력호를 보며 귀조 독소명이 말했다. "출입표를 주고 말고는 내가 결정한다. 이제 그 뜻을 알겠느냐?" 대력호가 정신없이 눈을 끔벅이자 독소명이 비로소 그를 놓아 주었다. 휙! 그가 내던진 대력호는 오 장 정도를 날아 바닥을 뒹굴더니 정신없이 기침을 해대 었다. 군중들이 조용해졌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대력호는 제법 이름이 있는 자였으나, 독소명의 적수가 전혀 되지 못함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독소명의 입가에 득의의 웃음이 어렸다.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 독소명의 미소가 잦아들었다. 그는 한 사람을 보았다.


푸른 가사를 걸친 승려! 그의 맨발마저 확인하자 독소명은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다만 마음속으로만 외칠 뿐이었다. '그가 왔다.' * * * 노존은 하늘 높이 솟았다 떨어지는 두 신형을 보았다. 청삼노인들도 물론 보았을 게다. "과연 대단하군! 어떻게 저런 고수들이 갑자기 나타날 수 있지?" 사마귀의 말은, 그 또한 진소백과 섭수진이 허공을 날아 폭발의 여력을 해소함을 보았음을 의미했다. 무사마귀가 형의 심중을 짐작하고 앞질러 명령을 내렸다. "오령혈(五靈血)와 삼절진(三絶陣)을 동시에 발동하라." 숲속 어디선가 복명의 소리가 들렸다. 멀어지는 기색이 있더니 일단의 사람들이 숲을 가로지르는 소음도 들렸다. 사마귀가 침중하게 말했다. "어쩌면 그들 외에도 우리까지 나서야 할지 모른다." 노존 장육삼이 놀라 말했다. "그 정도로 강하단 말이오?" 사마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너무 적은 인원을 동원한 건지도 모르겠소." 그의 얼굴이 침중했다. 사마귀는 생각했다. '어떻게 된 걸까? 아무리 강한 자라고 해도 그처럼 쉽게 혈의대(血衣隊)를 제거할 수는 없는데…… 게다가 마치 알고 있다는 듯 폭약마저 피해 버리다니……' * * * 섭수진은 몸에 앉은 먼지를 털어 내었다. "폭약을 사용하다니…… 같은 편마저 돌보지 않는 자들이군요." 진소백도 옷을 털며 말했다. "그런 자들을 상대하는데 우리도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겠지." "무슨……?" 진소백이 빙긋이 웃으며 답했다. "화탄이야말로 내가 숨겨 놓은 가장 큰 장기(長技) 중의 하나지. 시간이 없소. 결 코 이 정도 공격으로 끝나지 않을 거요." 진소백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동서남북(東西南北) 사방에서 검은 옷을 입은 네 명의 무사들이 소리도 없이 달려 든 것은. 멀리 동영 인자(忍者)들의 전형적인 차림을 하고 있었다. 가슴에 새겨진,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선명(鮮明)한 핏방울 문양이 특이했다. "인자들? 오령혈(五靈血)이구나!"


어떻게 진소백은 적들의 이름을 이처럼 잘 아는가? 섭수진은 궁금했지만, 지금은 물을 때가 아니었다. 진소백이 쌍장을 휘둘러 동남의 두 명을 마주쳐 갈 때, 섭수진도 소청검법을 일으 켜 서북의 두 명을 상대했다. 용의 울음이 사방을 진동하며 일어나자, 동남의 두 인자는 뒤로 물러섰다. 섭수진 의 소청검법은 비록 일초에 인자들을 물리치지는 못했으나, 절정의 위력으로 적들 을 비틀거리게 했다. 그녀가 다시 삼 초를 맹렬히 휘둘러 좌우를 쓸어 갈 때 진소백은 오 초 만에 인자 둘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싸움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방심(放心)이었다. 오령혈의 마지막 절정혈(絶頂血)의 공격은 이런 방심의 허를 노리고 계산된 것이 었다. 진소백의 두 인자를 쓰러뜨리는 순간, 남쪽 방향에서 달려들던 인자의 배 부분이 갈라지면서 하나의 검이 쏘아져 왔다. 검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것은 난쟁이! 인자의 배 부분에 숨어 있다가 적이 네 인자를 물리치고 방심할 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동(發動)되는 난쟁이의 공격이 바로 절정혈이라 불리는 오령혈 최후의 공격이었다. 그러나, "너희의 수법은 이미 알고 있다." 진소백은 어찌 알았는지 난쟁이가 자신의 초식을 채 전개하기도 전에 다른 인자에 게서 뺏은 검을 남쪽 인자의 배에 박아 버렸. 배는 곧 난쟁이의 머리였다. "크헉! 어떻게……? 네놈은……" 오령혈은 그 이름조차 비밀이었다. 오(五)라는 숫자가 은연중에 숨은 절정혈의 공격을 예상하게 만들지도 모르므로. 그런데 진소백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들의 공격 형태까지 상세히 알고 있었다. 경악한 난쟁이에게 진소백은 차게 말했다. "난, 너희들을 상대하기 위해 지난 이십 년간을 하루도 편하게 지낸 적이 없었다." 난쟁이가 의혹을 씻지 못한 눈을 마침내 감았다. 섭수진도 인자 둘을 이미 물리쳤음을 보고 진소백이 말했다. "서두릅시다. 이게 끝이 아니오. 더 무서운 공격이 있을 거요." 나쁜 예상은 항상 들어맞는다던가? 삼삼(三三)은 구(九)! 아홉 개의 창(槍)이 삼 면(面)에서 쏘아 왔다. 상, 중, 하를 각각 세 개씩이 노리고 와서 피할 곳이 없었다. 게다가 그 기세의 맹렬함을 어찌 필설로 형용하랴! 섭수진은 이번이야말로 이전과 는 비교가 안 되는 위기(危機)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진소백은 당황하지 않았다. 냉소하며 품에서 밧줄을 꺼내 들었다. 손이 품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동작이 그대


로 이어지며 밧줄은 정면에서 오는 세 개의 창을 휘감았다. 그대로 밧줄을 잡아당기자, 휙! 창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며, 정면의 세 창은 뒤쪽 좌우의 여섯 개 창보다 앞서 진 소백과 섭수진에게 쏘아 왔다. 하지만 세 개의 창, 그것도 정면에서 오는 것을 피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몸을 석 자 정도 띄워 허공에서 유영(遊泳)하듯 눕히자, 창들은 아래위로 바람을 가르며 지나갔다. 변화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진소백이 땅으로 내려오면서 창을 묶은 밧줄을, 손목을 휘둘러 잡아채 가니…… 보라! 창 세 개가 나머지 여섯 개의 창들의 진로(進路)를 막아 기세를 완화시켜 버리는 것을! 따땅! 기세가 완화(緩和)된 창을 섭수진의 검이 자르는 소리였다. 진소백의 끈을 뚫었던 창은 불과 세 개였던 것이다. 힘을 잃고 당연히 땅에 떨어질 것으로 생각되었던 창들이 빠른 속도로 뒤로 물러 났다. 뒤쪽의 여섯 창(槍)은 끈에 묶여 있었다. 그에 비해 앞의 창은 크기가 훨씬 크고 기세가 강했지만 영교하지는 못했다. 이런 큰 창은 끈으로 조종이 힘들 뿐 아니라 효과적이지도 못했으므로 강한 힘으 로 던질 뿐이었다. 오직 적의 이목을 교란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것은 능률의 문제였다. 대응이 느린 적은 전방의 강한 창에 당했고, 대응이 빠른 자들은 후방의 여섯 창 이 펼치는 변화에 당했다. 하지만 오늘 삼절진(三絶陣)은 누구도 쓰러뜨리지 못했다. 삼절진을 구성하는 아홉 무사가 숲에서 걸어나왔다. 3 아홉 명의 청의(靑衣)는 모두 같아 그들이 한 문파에 속해 있음을 일러주었다. 그 중의 한 명, 대창(大槍)을 등뒤에 여러 개 맨 사내가 말했다. "정말 대단하다. 우리 삼절진의 변화를 알고 있었는가?" 진소백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풍림서(風林誓)의 인물들이 적을 맞아 시간을 끌다니, 누구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거냐?" '냐'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소백의 신형이 청의사내들과의 거리를 단숨에 줄였 다. 청의사내는 헛바람을 들이키며 등뒤의 창을 급히 빼내며 외쳤 "즉시 진(陣)을 발 동하라." 그러나 너무 늦었다. 진소백의 오른손에 들린 끈이 진기를 싣고 검과 같이 꼿꼿하게 변해, 뒤쪽의 대 창수(大槍手) 하나를 찔러 감을


청의사내는 보았 그는 청삼노인 사마귀의 말을 생각했다. ─`최선을 다해 일 각의 시간만 끌어라. 우리까지 나설 테니! 어쨌든 일 각이다. 청의사내들은 최선을 다해 진소백과 섭수진을 맞아 싸웠다. 그들의 눈에는 결의가 번뜩였다. 바닥에는 이미 다섯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진(陣)의 가장 큰 약점(弱點)은, 하나가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지는 것이다. 처음 진 소백에게 불의의 기습을 당해 한 명의 대창수를 잃어버린 삼절진은 귀퉁이가 무너 진 형상이 되어, 다만 이 대 팔의 혼전(混戰)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청의사내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청의사내 눈에 서린 그 굳 은 결의(決意) 때문이었을 게다. 진소백은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을 늦게서야 겨우 들었다. 그는 다급하게 섭수진에게 전음을 보냈다. "위험하오." 이때 이미 하늘은 화탄을 실은 철시(鐵矢)들로 가득했다. 어디로 피할까? 숨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 * * "피할 수 없을 거요!" 사마귀가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삼절진의 아홉 수하를 희생하면서 만든 함정이었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더 큰 희생이 생길 수도 있었다. "절대 피하지 못할 겁니다." 무사마귀가 다신 한 번 확신하며 말했지만 장육삼은 불안했다. 노존 장육삼! 그는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 * * 청의사내들도 이미 화탄이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심한 배신감이 떠오르며, 싸움은 일시 중단되었 그 틈을 타서 진소 백은 왼손으로 섭수진의 허리를 감아 갔다. "무슨 짓……!" 섭수진은 놀랐으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다행한 일! 만일 그녀가 거부했다면 남아 있던 시간으로 보아 그들은 살아날 수 없었을 것이 다. 진소백의 오른손에 들린 끈이 장내를 휘감으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청의사내들의 시체 다섯 구를 모두 쓸어 모았다. 이어 그들의 시체가 병풍처럼 주위를 감싸자, "눈을 감아!" 진소백이 외치며 섭수진의 몸을 감싸안았다.


꽈꽈`─ 꽝! 굉음이 고막을 찢을 듯 일어났다. 폭음과 함께 먼지가 지축(地軸)을 흔들며 일어났다. * * * 따닥, 따닥! 불길이 살아 있는 나무를 삼키는 소리였다. 메케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불이 꺼진 곳에 남은 것은 검은 숯과 편들! "이것 봐! 여기는 무더기로 죽었구먼!"

타고 찢어진 육

사마귀가 한 무더기의 육편(肉片)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에 돌아서 육편을 바라보던 노존 장육삼은 놀라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심하시오!" 육편 속에서 푸른 검이 솟아나오며 사마귀를 노렸다. "우욱!" 사마귀는 신속하게 대응하며 피했지만 어깨와 오른 뺨에 검상을 입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암습(暗襲)을 이정도의 상처만으 로 피할 수 있음은 그가 대단한 고수라는 의미였다. 육편을 뚫고 두 명이 일어섰다. 진소백과 섭수진! 진소백의 머리 곳곳은 타고 입가에는 가는 핏줄기가 내비치는 것이 내상이 심해 보였지만, 섭수진은 그다지 큰 상처를 입은 것 같지 않았다. 진소백이 몸을 감싸 보호한 탓에 그녀는 무사했던 것이다. "과연 살아 있었구나!" 노존이 떨리는 어조로 말했다. 그는 비록 진소백을 오래 상대하지는 않았지만 뭔지 모를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 다. "과연 태청쌍수(太靑雙搜)의 손쓰는 법은 대단하구려. 자신의 수하마저 속이다니." 청삼노인 둘의 얼굴에 감탄이 어렸다. "네가 어찌 우리를 그리 잘 아느냐?" 그들 스스로 시인한 셈이었다. 태청쌍수! 곤륜에서 반도로 낙인찍혀 쫓겨났던 인물이다. 그들이 여기 있다니! "내가 아는 것은 더욱 많소. 당신들이 풍림서란 세력에 속함도 알고 있지!" 태청쌍수의 눈에 살기(殺氣)가 떠올랐다. "그 말로써 너는 살길을 잃었다." 진소백이 힘없이 웃었다. 그의 내상(內傷)은 매우 심해 섭수진이 부축하지 않는다면 쓰러질 지경이었던 것


이다. 사마귀가 크게 웃었다. "크하하, 여자에게 기대지 않고는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놈이 큰소리는……" 사마귀는 말을 멈췄다. 진소백의 손에 작고 푸른 공이 들려 있음을 본 까닭이었다. 뇌정구(雷霆球)! 화문의 무가지보(無價之寶)인 뇌정구! "이것의 위력을 안다면 움직이지 말아라." 진소백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사마귀는 이미 조심하고 있었 뇌정구의 위력을 모 르는 무림인이 어디 있으랴? 사마귀가 조용히 말했다. "그것이 터지면 너도 죽는다. 설마 자폭할 셈이냐?" "후후! 그럼, 너희들이 나를 살려 줄 생각을 하고 있었더냐?" 진소백이 냉소하며 섭수진에게 눈짓했다. 섭수진이 진소백을 부축하며 걸어가자 사방을 포위하고 있던 가지각색 옷을 입을 무사들이 비켜났다. 뇌정구를 든 진소백이 섭수진의 부축을 받은 채 서서히 걸어가고, 그 뒤를 태청쌍 수(太靑雙搜)와 수하들이 따라가는 기이한 대치가 계속되었다. 한참 걸어가던 섭수진이 멈칫했다. "절벽이에요." 그랬다. 길이 끊기고 절벽이 나타났던 것이다. 사마귀가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 이제 갈 데가 없으니 그만 항복해라." 진소백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봐, 파란 사마귀! 너는 혹시 재수없는 그 웃음 때문에 곤륜에서 파문당했던 것 이 아니냐?" 사마귀는 노해 달려들려다가 멈췄다. 진소백이 수중의 뇌정구를 좌우로 흔들었기 때문이다. "안 되지, 안 돼! 까불지 말아라. 좌우간, 본 공자는 배가 몹시 고프니 어서 먹을 것을 구해 오너라. 만일 까불었다간 확 터뜨려 버릴 테다." 기이한 형세가 되었다. 포위당한 진소백이 오히려 큰소리를 땅땅 치고 있는 것이다. 이때, 노존은 유심히 진소백이 든 뇌정구를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태청쌍수들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태청쌍수의 얼굴이 기묘한 표정을 띠며 변해 갔다. 사마귀가 진소백을 보며 말했다. "크흐흐, 네놈은 얼마 전 비응방에서 흑수동주 도곡(陶曲)이 뇌정구를 가지고 있었 다는 사실을 아느냐?"


진소백의 눈에 당황이 어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크흐흐, 여기 있는 노존(老尊)이 당시 뇌정구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네가 지금 갖고 있는 것과는 모양이 틀렸다." 진소백은 비로소 노존이 비응방의 하인 우두머리였던 장육삼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급히 대답했다. "원래 뇌정구는 벽력세가(霹靂勢家)의 물건으로서 화문(火門)이 그 모양을 도용했 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사마귀가 흠칫하다가 다시 괴소를 흘렸다. 진소백이 마른침을 삼키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크흐흐, 금시초문(今時初聞)이다. 네놈이 가진 건 가짜가 틀림없다." 진소백의 눈에 당황의 빛이 역력했다. 그는 섭수진의 손을 잡고 말했다. "큰일이오. 저놈의 사마귀는 의심병까지 있으니 이를 어쩌면 좋겠소." 사마귀는 정말 화가 났다. "저놈의 자식을!" 그가 외치며 먼저 덮치자 뒤이어 수많은 무사들이 진소백을 덮쳤다. 진소백이 낭랑히 웃으며 섭수진의 손을 잡고 망설임없이 절벽으로 뛰어내렸다. " 하하, 세상에 믿음이 없으니 살기가 힘들구려." 그를 놓친 사마귀의 손에 뇌정구가 잡혔다. "요런 가짜를 가지고…… 망할 놈의 자식!" 사마귀는 손 안의 뇌정구가 미미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느낀 마지막 감각이었다. 쿠꽝꽝! 벽력세가의 뇌정구가 뇌성(雷聲)을 울리며 폭발했다. 태청쌍수(太靑雙搜) 휘하 삼 십여 명의 풍림서(風林誓) 인물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것은 풍림서가 발족한 이래 최초의 좌절이며, 가장 큰 좌절이었다. 전서구 하나가 심화절을 향해 날았다. 그 새는 발에 이런 전신을 달고 있었다. <대폭발(大爆發)!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음.> 제 28 장 비도광우(飛刀光雨) 1 시간은 흘렀다. 날이 밝고 드디어 엽혼의 처형이 공개적으로 행해질 때가 되었. 엄청난 구경꾼들이 비응방으로 모여들었지만 오직 출입표를 받은 사람들만 입장이 허락되었다. 지금 엽혼의 머리는 짚으로 둘러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무릎을 꿇린 채, 아혈마저 짚혀 말도 못 하고 있는 엽혼. 지금 그의 마음은 끝없이 외치고 있었다.


'아이고, 부처님, 공자님! 이 복칠(福七), 온갖 복을 다 받으라고 부모님이 지어 주 신 이름인데…… 이렇게 죽다니요. 아이고!' 그의 애타는 마음을 무시하고 북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북 소리에 맞춰 심화절이 말했다. "이 북 소리는 금사진 전 비응방주의 명복(冥福)을 기리며 팔백십 번을 울릴 것이 오." 둥, 둥, 둥, 둥`─` "누구든 그사이 이자를 살려야 할 명분이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서시오." 둥, 둥, 둥, 둥`─` "만일 아무도 없다면, 그는 정확히 태양이 중천하는 오시에 죽을 것이오." 둥, 둥, 둥, 둥`─` 북 소리가 울렸다. 심화절이 은밀히 독소명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모든 준비는 완벽한가?" 역시 전음으로 들려 오는 독소명의 대답! "물론입니다. 제가 먼저 말을 꺼내면 모두 호응하여 초의 선사를 성토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둥, 둥, 둥`─` * * * 북 소리는 이곳 지하에도 들렸다. 금청청이 한숨을 쉬었다. "후! 재수가 너무 없군요, 또다시 여기에 갇히다니." 그녀의 말에 매일도가 쓰게 웃었다. "너무 안이했다. 두 번이나 같은 실수를 하다니……" 그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실수를 한다면 나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겠다." 매일도는 일세의 기재(奇才)였다. 위기의 순간 교묘한 말로써 심화절이 자신과 금청청을 살려 놓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때때로 그는 너무 방심(放心)했다. 매일도의 그런 약점이 지금의 결심으로 제거(除去)된다면 아마 화산(華山)의 역사 는 앞으로 매일도에 의해 다시 씌어질 수 있을 것이다. 성공하는 자와 실패하는 자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어떤 사람은 작은 실패에서 배워 큰 성공을 낳고, 어떤 사람은 계속 성공하다가도 작은 실패 하나를 감당하지 못해 쓰러진다. 종국에 누가 웃는 자가 될지는 너무 뻔한 것이 아닌가? "일전의, 엽혼이 왔던 것 같은 기적이 다시 일어나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지금 엽혼은 없다. 분명 기적이 일어날 리가 없건만 금청청은 바라고 있었다. 만일 하늘의 뜻이 있다면 결코 심화절의 음모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므로. 기적의 기미(機微)가 보였다. 천장이 서서히 열리며 빛이 들어오는 것이다. "소방주! 거기 있으시오?"


문을 연 사내가 조용히 물어 보자 금청청은 울음을 터뜨릴 뻔하였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말했다. "설마…… 설마, 사공 당주! 그대인가요?" * * * 심화절은 하늘을 보았다. 해는 어느새 높이 올라 남중(南中)하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둥, 둥, 둥`─` 북 소리도 숨가쁘게 종국(終局)을 향해 달려갔다. 심화절은 눈짓을 보냈다. 그의 신호를 받고 도수부(屠首夫)가 참수대(斬首臺) 위로 뛰어올랐다. "푸`─`우!" 분명 사람을 죽이기 위한 의식이건만, 떨어지는 물방울이 만드는 무지개는 이 순 간, 기이하게 아름다웠다. 이제 최후의 일(一) 회(回)가 남았다. 팔십일 번의 북 소리가 더 울리면 엽혼의 목은 땅에 떨어질 것이다. 심화절은 초조했다. 아직도 그가 나타나지 않다니! 분명 초의(草衣)는 왔다. 한데 왜 아직 나타나지 않는가? 둥, 둥, 둥`─` 북 소리가 막바지에 접어들며 긴장을 고조시켰다. 이윽고 마지막 북 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쳐라!" 심화절의 손짓을 따라 도수부의 도가 빛살을 갈랐다. 쨍! 도수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의 도를 보았다. 도의 중간! 마치 잘린 듯 매끈하게 부러져 있었다. 떼구루루`─ 바닥에 도를 잘라 낸 돌멩이 하나가 굴러 떨어짐을 보자, 심화절은 보지 않아도 누구의 행위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급히 독소명에게 전음을 보냈다. "왔다, 준비해라!" 돌을 던져 도를 끊을 수 있는 사람! 특이한 푸른빛 가사(袈裟)에, 허리에는 금빛 포승을 차고, 맨발로 조용히 서 있는 고승! 누가 또 있을까? 초의 선사의 출현이었다. * * * "정말 사공 당주세요?" 사공두가 부리부리한 눈에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예, 접니다. 구사일생(九死一生)!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금청청은 그의 오른쪽 소매가 힘없이 펄럭임을 보았다. 옷도 군데군데 찢어지고 얼굴도 초췌하여, 그가 얼마나 큰 고초를 겪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금청청은 예전에 자신이 그를 핍박했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사공두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사공 당주! 그 팔은 어떻게……" 사공두의 박룡도는 오른손의 강한 힘으로 전개하는 무공이었으니 오른손이 잘린 지금 그는 무공을 거의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 사공두가 억지로 웃었다. "그까짓 팔 하나 없으면 어떻습니까? 심화절, 그놈을 상대하는 데는……" 사공두가 자신의 독두(禿頭)를 탁, 쳤다. "이 머리도 있지 않습니까? 안 되면 몸통을 써서라도 그냥, 팍!" 금청청은 웃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웃지 못했다. 사공두가 그녀의 마음을 안 듯, 급히 말을 돌렸다. "급합니다. 심화절이 초의 선사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게다가 만에 하나 실패할 때를 대비하여 비응방의 전원(前園) 전체에 화약을 묻었으니…… 어서 막 아야 합니다." 사공두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칫 잘못하면 방주님의 노고(勞苦)가 서린 비응방이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금청청도 마음이 급해졌다. 다급한 상황에 처하자 매일도가 진가를 발휘했다. "어서 서두릅시다. 우선 암중에 화약의 도화선(導火線)들을 제거한 뒤……" 여기, 지하에서 심화절의 계획을 방해하는 첫 움직임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꼭 이것만이 첫 번째 움직임은 아니었다. * * * 심화절의 목소리가 노기로 떨렸다. "그래서, 지금 선사께서는 저희 방의 선(先) 방주님을 암산한 살수를 풀어 주라 하 시는 겝니까?" 그의 따지는 듯한 말에 초의 선사는 곤란한 듯 연신 불호를 외웠다. 그의 입장은 지금 매우 곤란했다. "모든 잘못은 제자를 잘못 가르친 내게 있으니, 차라리 나를 벌해 주시오. 아미타 불!" 초의 선사의 불호는 나지막이 가슴을 파고들어 그의 공력이 절대임을 누구라도 느 낄 수 있었다. 심화절이 암중에 전음을 보냈다. "이때다. 시작해라." 수많은 구경꾼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일어났다. 귀조 독소명이었다.


"무슨 말씀이시오! 아니 막말로, 선사께서 제자를 시켜 금 방주를 니라는 보장도 없지 않소?"

암산한 것이 아

여기저기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렇소. 제자의 잘못은 사부의 잘못이니 당연히 함께 책임을 물어야 하오." "옳소. 만일 선사께서 딴마음을 갖고 제자를 시켜 금 방주를 살해한 것이라면 어 떡하겠소?" "맞다. 초의의 행동은 뭔가 수상하다. 너무 수상하다. 우`─`" 꽁! 누군가의 머리에 혹이 나는 소리였다. 어쨌든 독소명은 득의 양양했다. 그가 출입표를 나눠 준 목적이 바로 이런 분위기 조성이었다. 각지에서 몰려든 풍림서(風林誓)의 인물들만을 모아 초의 선사를 타도하는 분위기 를 만드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다. 용기를 얻은 독소명은 다시 소리를 키워 외쳤다. "만일 책임감을 느낀다면 선사는 스스로 공력을 폐하여 제자의 잘못을 강호에 사 죄하시오." 독소명은 우레와 같은 지지를 예상했다. 어차피 모두 짜고 하는 짓이니까. 그런데…… 장내가 썰렁해졌다. 독소명은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원래 계획은 이것이 아니었다. 아까처럼 지금도 일제히 자신의 발언을 지지하는 외침이 나와야 정상이었다. 당연히 '옳소! 맞소!' 하는 말들이 사방에서 쏟아져야 하는데…… "저놈은 뭔데 저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 "저렇게 예의가 없어도 되는 거냐?" "우우`─`" "뭐 하는 떨거지냐?" 독소명뿐 아니라 심화절도 얼굴이 굳어 버렸다. 뭔가 잘못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구경꾼 중 한 명이 천천히 일 어났다. 큰 갓으로 얼굴을 가린 인물! 그러나 심화절은 얼굴을 보지 않고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미타불!" 장중한 불호 소리! 지공이었다. 심화절은 자신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음을 알았다. "아미타불! 심 시주, 약속이 틀리지 않소?"


지공이 갓을 벗어 본모습을 보이며 말했다. 그러나 심화절을 더욱 놀라게 하는 음성이 있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니 무얼 따지십니까? 아마 지금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를 테니 잠 시 생각할 기회를 주도록 하지요." 심화절은 이제 머릿속이 비어 버렸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의 뇌리에 유일하게 떠오르는 말은 매일도가 남겼던 말이었 ─`당신이 진소백을 다시 만난다면 무척 재밌을 것이오. 이것이 재미있는가? 심화절은 비로소 알았다. 남의 심계에 당하는 것은 전혀 재미있지가 않았다. 여태껏 자신의 꾀에 당해 죽어 갔던 사람들의 심정을, 심화절은 지금 느끼고 있었다. 비단 재미없을 뿐 아니라 아주 비참했다. 초의가 진소백을 보며 말했다. "소백아! 네 일 처리 솜씨가 강호에 나와 꽤 늘었구나!" 진소백이 몸을 숙여 절을 했다. "사부님을 뵙습니다." 강한 충격 속에서 심화절은 비로소 알았다. 진소백이 초의(草衣)의 제자였으니…… 진소백이 살아 있는데 어찌 자신의 음모를 초의 대사가 모를 수 있겠는가? "출입표를 받았던 사람을 모두 개방의 인물들로 바꾸는 일은 정말 힘들었소." 진소백은 한 번 더 앞에 앉은 개방 제자의 머리를 쥐어박고는 말했다. 그는 아까 초의 선사를 야유할 때 반말하다가 진소백에게 군밤을 맞았던 자였다. 진소백의 말에 심화절은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는 다만 아래턱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중인들은 심화절이 저런 모습도 보일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2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간다. 진소백과 섭수진이 부여안고 절벽에서 떨어지던 때로. 귀를 스치는 바람이 칼과 같았다. 섭수진은 진소백이 걱정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가 실성이라도 한 양 빙긋이 웃는 게 아닌가? "그놈들은 좀더 세상을 믿 고 살아야 할 거요. 우리는 앞으로 믿고 살도록 합시다." 말은 좋지만 우선은 살아남아야 남을 믿든 의심하든 할 게 아닌가? 눈앞으로 절벽 중간에 튀어나온 돌출부가 확대되며 다가왔다. 사실은 자신들이 무서운 속도로 떨 어지는 것이지만. 절명의 순간, "꽉 잡으시오!" 진소백이 외치며 손에 쥔 끈을, 멀리 보이는 절벽에서 자라는 나무를 향해 던졌다. 폭발로 인해 바깥의 칠이 벗겨진 포승은 검은 먼지 사이로 은은한 금빛을 토해 내


고 있었다. 순간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짧아서 도저히 나무까지 갈 수 없어 보이던 굵은 포승(捕繩)이 가늘어지면서 나무 를 휘감는 것이 아닌가! "차앗!" 낭랑한 외침과 함께 진소백이 포승을 당기자, 섭수진과 진소백의 몸은 추가 흔들 리듯 움직이며 절벽의 돌출부를 피했다. "사부님의 금포승(金捕繩)은 이런 묘용으로 인해 여의승(如意繩)이라고도 불린다 오!" 진소백의 말에 섭수진은 비로소 그의 사부가 누군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럼, 진 공자의 사부님은……" 그녀는 말을 맺지 못했다. 바닥이 눈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나 그들은 무사했다. 출렁! 등을 타고 푹신한 침대 위로 떨어지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그녀는 왜 진소백이 옥산의 절벽 얘기를 했었는지 알았다. 솜에다 짚, 그리고 밧줄을 엮어 만든 구명구(救命具)의 모양은 옥산에서 본 것과 비슷했다. 또다시 절벽에서 떨어진 진소백과 섭수진을 구한 고마운 물건! "이건 도대체 누가 달아 놓은 거죠?" 진소백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공동을 출발할 때 사종쾌에게 연락을 했소. 몇 군데의 절벽에 조치를 취하라고. 덕분에 목숨을 구했군!" 본래 진소백은 심화절이 음모를 꾸민다면 당연히 자신들이 비응방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해서 사종쾌에게 전해 암습의 가능성이 큰 곳의 주위에 있는 절벽 곳곳에 이런 도 구를 달아 놓도록 했다. 진소백은 좀 전에 섭수진을 정확히 안내하여 도구를 달아 놓은 절벽으로 갔던 것 이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진소백의 안배가 그들을 구한 것이다. "휴, 설마 그들이 그때에 벌써 화탄을 사용하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소. 정말 위험 했소." 섭수진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서로 껴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여유를 얻었다. 그녀는 놀라 진소백을 밀쳐 내었다. "에구, 벌써 알아차렸소? 좋았는데!" 진소백이 힘없이 웃었다. "도대체 당신, 내상을 당하기나 한 거예요?"


그녀는 자신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똑똑히 보았다. "우욱!" 진소백이 검은 피를 한 사발 토해 내며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화탄의 엄청난 폭발로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력을 전개한 탓이었다. 울혈을 내뿜으며 진소백은 쓰러졌다. * * * 진소백이 깨어난 곳은 엽혼의 집이었다. 그가 쓰러지고 얼마 있지 않아 사종쾌가 달려왔다. 폭발 소리를 듣자 자신이 설치했던 짚과 솜으로 만든 거대한 이불이 있는 절벽 아 래로. 우연히도 엽혼의 집이 가까움을 안 사종쾌는 급한 마음에 진소백을 여기로 옮겼던 것이다. 뜻밖에도 엽혼의 집에는 두 명이 있었다. 엽평과 바로…… 진소백이 깨어날 때 그를 내려다보는 네 쌍의 시선이 있었다. 두 쌍은 진소백이 이미 짐작했었지만 나머지 두 쌍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눈이었다. 깨어나자마자 진소백이 고함을 질렀다. "평아(枰兒)! 이 녀석, 건강해졌구나!" 이처럼 우렁찬 소리를, 도대체 누가 막 혼절에서 깨어난 사람의 것으로 믿을까? 그만큼 진소백의 반가움은 큰 것이었다. 섭수진과 사종쾌가 그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보았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의 여인! 그녀를 보고 진소백이 의아해하자 엽평이 먼저 말을 했다. "형수님이십니다. 혼(魂) 형님께서 돌아가실 때 옆에 계셨다 하셨습니다." 바로 소화였다. 진소백은 엽혼과 소화의 얽힌 사연들을 알지 못한다. 그는 조용히 소화를 보았다. 그녀의 눈은 맑고도 맑아 엽혼이 좋아할 여인이었다. "그분…… 께서는 진 공자 님께 항상 고마웠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진소백은 그녀가 엽혼을 부를 때의 눈빛의 변화를 보았다. 그녀가 엽혼을 진정으로 사랑했음을 알았다. 또한 친구가 마지막 길에서 결코 외롭지 않았음도 알았다. 진소백의 눈에 습막(濕幕)이 차 올랐다. "고맙소. 당신이 있었으니 그 친구는 전혀 외롭지 않았을 게요." 소화는 입술을 깨물더니 밖으로 나갔다. 두 손을 꽉 쥔 엽평도 심중의 격동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것으로 되지 않았는가? 한 사람의 인생이 비록 고단했지만 결코 욕되거나 속되지 않았으니…… 이것으로 되지 않았는가? 남은 친구들이 모두 그를 그리워하고 있으니 진정으로 엽혼의 삶은 훌륭했다 말할 수 있지 않은가? * * *


"평아! 사부님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느냐?" 진소백이 엽평에게 물었다. 하늘에는 별이 초롱초롱했다. 그들은 지금 별을 보고 있었다. "예, 사형. 사부님께서는 여기서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만일 사형을 만나게 되면 모든 것은 사형의 지시에 따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부님께서는 먼저 비응방으 로 가시겠다구요."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께서 이미 심화절의 음모을 알고 계시니 큰 위험은 없을 것이다. "좋다. 평아, 너는 지금 맹으로 돌아가거라. 위치는 알 터이니 가는 즉시 무공 수 련에 정진(精進)하라. 네 자질은 최상(最上)이니, 무림에 일 년 안으로 절정고수 하나가 더 탄생함을 내 보장할 수 있다." "지금 즉시 말입니까?" 진소백은 별을 보았다. "하루라도 늦출 이유가 어디 있느냐? 즉시 떠나거라!" 늦은 밤에 길을 떠나라는 것은 모진 말이었지만 엽평은 군소리없이 따랐다. 진소백의 모든 말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아는 까닭이었다. 때를 알면 과감히 움직이는 자만이 진정으로 성공할 수 있는 법이다. 엽평은 떠났다. 진소백은 혼자 앉아 별을 본 것이 이미 한 시진이 넘었다. 그는 문득 뒤를 돌아보더니 아름드리 나무를 보며 말했다. "이리 나오시오.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소화가 나무 그늘에서 나왔다. "알고 계셨나요?"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화는 조용히 말을 시작했다. "꼭 아셔야 할 것이 있어요. 혼랑과 저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백회에 대해!" * * * 별이 떨어졌다. 밤하늘을 가르며 유성이 떨어졌다. 유성이, 사실은 모래 먼지 하나에 불과한 작은 것들이 대부분임을 알고 있는 사람 은 많지 않다. 하지만 유성은 자신의 몸을 태움으로써 세상에 뚜렷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리고 세상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수많은 위인들 또한 유성처럼 미약한 알갱이에 서 자신을 태워 세상에 알려진 사람들임을 우리는 모를 때가 많다. 어쨌든…… 진소백은 침중히 물었다. "그럼, 아직 백회의 총단은 남아 있소?"


"예! 이전까지는 조삼(曹三) 오라버니가 대형으로서 모든 지시를 했지만 지금은 배 신한 셋째가 장악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셋째란 자에게 속고 있는 것이 아니오?" 소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만일 진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기꺼이 제 편이 될 거예요." "문제는 누구도 셋째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이구려." "맞아요. 금 방주님께서는 흑회를 상대할 마지막 인물이라 하여 그의 정체를 모든 회원들에게 숨기셨어요." 진소백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좋소. 내 반드시 그의 정체를 밝혀 이렇게 해주시오."

백회의 총단으로 그를 보낼 테니…… 당신은

한참 동안의 상의(相議) 끝에 소화는 떠났다. 진소백은 그녀로부터 들었던, 백회가 생기게 된 과정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금사진의 본심은 전혀 독하지도, 악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여리고 인정이 많은 성격이었다. 다만 비응방에 들어가 겪었던 모진 일들이 그의 심성(心性)을 삐뚤어지게 했던 것 이다. 방응향과 잔혹마도의 일이 때때로 그를 미치게 하여 항상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 었지만, 간혹 제정신이 돌아오는 날이면 그는 남들이 모르게 많은 선행(善行)을 베풀었다.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날과 이성을 잃으면 찾아오는 잔혹성에 대한 보상이었을까? 그는 많은 사람들을 도왔고, 많은 사람들을 고난에서 구했다. 조삼과 조소화 남매도 그 중 둘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금사진은 자신이 정신없이 키워 왔던 비응방 곳곳이 다른 세력에 잠식당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일세의 기재였다. 고숭무의 뒤에 흑회란 세력이 있고, 심화절 또한 딴생각이 있음을 암중 조사로 알 아 내었다. 그는 고뇌(苦惱)했다. 자신의 유일한 혈육! 한 번도 사랑해 주지 못했던 금청청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남길 것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비응방이 금청청의 외조부의 것이었으니 당연히 그녀에게 주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흑회에 대항하는 백회가 탄생되었다. 백회의 일 중 구체적인 실행 대부분은 조삼이 맡아 하였고, 금사진은 행동 방향와 실행 계획을 제시했다. 백회의 회주로서 금사진의 활약은 대단했다. 고숭무와 심화절의 세력을 섞어 서로를 견제하게 했고, 그 와중에 착실히 힘을 길 렀다. 그러던 어느 날.


금사진은 자신이 중독되었음을 깨달았다. 놀랍게도 용독(用毒)한 자의 정체가 자신의 처인 적염임을 깨달은 금사진은 또다 시 절망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는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추운데 뭘 하세요?" 진소백이 자신의 생각에 취해 밤의 추위도 잊고 있을 때, 뒤에서 섭수진이 그를 불렀다. "당신은 환자(患者)이니 어서 들어가세요. 밤바람은 좋지 않아요." 진소백은 일어서라며 잡아당기는 섭수진의 손을 잡아 끌어 옆에 앉혔다. 조용히 별만을 바라보던 진소백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사랑이 없다면 세상이 어찌 되었을까? 아무리 힘든 일도 사랑이 있다면 할 수 있 지 않겠소?" 진소백의 손이 섭수진의 어깨를 감쌌다. 섭수진은 무엇에 홀린 양 조용히 앉아 있었고, 하늘에는 별이 포도송이처럼 초롱 초롱했다. 향긋한 밤바람만이 그들의 머리 위를 조용히 스쳐 갔다. 3 다시 그날을 생각하자 섭수진의 양 볼이 저절로 붉어졌다. 비록 역용약을 발라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무안해진 그녀는 급히 일어나 역용을 지우고 외쳤다. "난 아미파의 섭수진이에요. 저 사람은 외부와 결탁하여 전 방주이신 금사진을 암 살했을 뿐 아니라 음모를 꾸며 초의 선사를 살해하려 했어요." 비응방의 문인들이 웅성거렸다. 섭수진이 한 말 중 심화절이 금사진을 암살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름을 진소백은 알고 있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상황이 아니므로. 심화절이 즉각 반박하고 나섰다. 그의 얼굴은 이미 평정을 가장하고 있어 과연 뛰어난 인물임을 느끼게 했다. "무슨 소리요, 내가 음모를 꾸미다니! 더구나……" 심화절은 입을 다물었다. 진소백이 몸을 날려 가짜 엽혼의 머리에서 짚모자를 벗기고 그의 아혈을 풀어 주 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입이 트인 복칠은 정신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아이고!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네. 이보시오, 난 엽혼이 아니라 개방의 복칠(福七) 이라고 그렇게 말을 했건만…… 아, 날 이용해 초의 선사를 잡겠다니, 그게 어디 쉬울 줄 알았소?" 한숨과 함께 심화절은 드디어 인정했다. 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소. 내 사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것은 인정하겠소. 하지만 금 방주 를 내가 암살했다니. 난 나름대로 비응방에 충성을 다했소. 이건 모두가 인정할 것이오." 그랬다.


심화절의 처세가 얼마나 뛰어났던지는 비응방 문인(門人)들의 반응으로 알 수 있 었다. 그들은 누구도 심화절이 비응방에 충성을 다한 것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 았다. 적어도 그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난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오른팔이 없는 사내! 그가 나타나자 비응방의 군웅들이 다시 술렁대었다. 이 사내의 충성과 기개를 비응방의 누가 모를까? 사공두였다. 그의 뒤를 따라 금청청까지 들어오자 군웅의 술렁임은 극에 달했다. 사공두가 우렁차게 입을 열었다. "좀 전에 한 섭수진 소저의 말은 모두가 사실이오. 이 사공두가 목을 걸고 증명하 오. 나 또한 심화절의 간계로 이렇게 한 쪽 팔을 잃어버렸소." 죽은 줄 알았던 사공두는 전비응방도의 영웅이었다. 그렇게 되는 것에는 심화절도 일조를 했다. 심화절은 앙천광소(仰天狂笑)했다. 웃을 수밖에 무슨 다른 방법이 있으랴? 한참을 미친 듯이 웃어대던 심화절이 진소백을 보았다. "이들 또한 자네가 불렀는가?" 진소백이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그도 이런 상황에서 사공두가 나타나 금청청과 매일도를 구해 올 줄은 짐 작도 못 했던 것이다. 심화절을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을 보았다. "내가 하는 일이 하늘의 뜻에 합당하지 않았나 보구나. 어쩔 수 없겠지. 그러나!" 심화절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만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을 게다. 이 땅바닥 속엔 십만 근의 화약이 묻혀 있다. 아무도 살아서는 이곳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심화절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공두가 냉소했다. "흥, 이미 모든 화약이 물에 젖었다. 백년이 지나가도 터지지 않을 것이다." 진소백이 나직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포기하시오. 당신의 뜻을 하늘도 막고자 하나 보오. 이미 노존(老尊)과 태청쌍수 (太靑雙搜)도 죽었으니, 이제 당신과 귀조 독소명만 남았소." 심화절은 비틀거렸다. 여기서 실패하다니…… 모든 일이 그의 손아귀에 든 듯했었는데…… "넌 도대체 누구냐? 난 내 생에 단 한 번도 실패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이 같은 비참함을 당하다니."


진소백이 조용히 말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언젠가는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만나게 되는 법이오." 심화절이 허탈하게 말했다. "내가 초의 선사의 암살까지 한 번에 시도한 것이 실수였느냐?" 진소백이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마찬가지였을 게요. 당신의 계략은 이미 알고 있었소." 심화절이 한숨을 쉬며 체념할 때 독소명은 진소백을 보며 악을 썼다. "이대로 당하기만 할 줄 아느냐? 우리들의 원한은 반드시 풍림서(風林誓)에서 갚 아 주……" 그는 외치다 말고 불신(不信)에 찬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천심비도(穿心飛刀)! 심화절의 비도가 자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박혀 있었 "너는 너무 말이 많 았다. 우리는 이미 졌으니…… 시인하도록 하자!" 심화절의 전음이 정신을 잃어 가는 독소명의 귀에 파고들었다. 심화절은 그를 보지도 않고 진소백만을 보았다. "내가 졌다. 완전히 졌다. 그러나 누구도 나를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품에서 삼십삼 개 천심비도를 모두 빼내어 허공으로 던졌 중천(中天)한 태양 의 빛을 반사하며 비도(飛刀)들이 만드는 빛의 비는 아름답기조차 했다. "하하하! 저승에서 다시 한 번 겨루자꾸나!" 심화절이 크게 웃으며 하늘로 날았다. 허공에 내리는 비도가 만드는 빛의 비와 웃으며 그 빗속으로 뛰어드는 심화절! 삼 십삼 개의 천심비도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그의 몸을 꿰뚫었 심화절은 자신의 말 대로 남에게 죽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손에 죽었다. * * * "어쩌면 그는 영웅의 기질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소." 진소백의 말에 섭수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영웅은 음모로써 윗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아요. 그는 음모를 꾸며 금 방주를 암 살했잖아요?" 진소백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금 방주를 암살한 사람은 심화절이 아니오. 심화절은 아마 고숭무가 암 살했다고 믿었을 거요." 섭수진은 의아했다. 진소백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 * * "어서 방주의 자리에 오르십시오." 사공두의 권유에 금청청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무림의 번잡함에 빠지기 싫었다.


망설이던 그녀는 매일도를 보았다. '방주의 권좌가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녀는 신형을 날려 매일도의 곁에 섰다. 방도(幇徒)들의 시선이 모두 모이자 그녀는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난 이분과 곧 혼인을 해요. 따라서 제가 방주가 된다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에요." 사공두가 머리를 흔들었다. "안 됩니다. 소방주께서 사양하신다면 우리 비응방의 장래는 어찌 됩니까?" 금청청이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저보다도 훨씬 훌륭한 분이 계세요. 여러분도 아시잖아요?" 모든 방도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모였다. 가장 연장자이며 비응방의 오랜 충신인 화골장 노굉(魯宏)이 나서서 말했다. "사공 당주! 당신이 맡아 주시오. 당신밖에는 없는 듯하오." 사공두는 놀라 급히 말했다. "무슨 소리들을 하시는 겁니까? 난, 난 이제 한 쪽 팔이 없는 병신에 불과합니다. 난, 난……" 사공두가 아무리 사양을 하더라고 비응방의 방도들은 완강했 진소백은 사공두가 결국 비응방의 방주에 오르고 말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신뢰와 명망(名望)을 쌓는다는 건 결코 쉽지가 않았다. 진소백은 흘끔 바닥에 쓰러진 심화절의 시신을 보았다. '당신은 나와 겨루기 전에 넘어야 할 벽이 또 있었소.' * * * 금청청은 아주 흡족한 얼굴로 비응방을 떠났다. 사공두가 방주가 된 일을 그녀는 진정으로 축복했다. 그는 자신의 부친 금사진의 유일한 충신이었으니, 금청청은 편안한 마음으로 화산 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떠나는 그녀를 보며 섭수진이 진소백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그녀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을 건가요?"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때로는 아픈 진실보다 행복한 거짓이 나을 때가 있는 법이오." 섭수진도 그의 생각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럼 이 일을 그냥 이대로 넘길 건가요?" 진소백이 황급히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제 29 장 혈조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