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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운지, 두 사람을 부르다 운지, 세 사람을 먼저 부르다운지, 다섯을 모으다한 사람의 죽음. 새로운 시작월곡에서고통 속에서 기억하다천하는 한곳으로 모이고 천수옹의 유산, 그리고 전쟁 종말을 향한 질주 종말, 그리고... 終. 기다리는 사람기 1. 운지, 두 사람을 부르다 천라성. 전에는 강호에서 이 이름을 아는 이가 드물었다. 하지만 이제 강호에 적을 두고, 또 '겁난유세'란 책을 읽은 자라면 누구나 천라성이란 세 글자를 뇌리에 새기고 있다. 근심수사 종기와 혈혈수라 광무혼 사이에 있었던 끔찍스런 음모와 그 와중에 일어난 강호 혈풍에 대해서 적어 놓은 두 권의 책은 강호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뇌불과 염도의 공동 성명으로 혹세 무민(惑世誣民)하는 두 권의 책을 금서로 정한다고 발표한 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났다. 하지만 '겁난유세'는 더욱 널리 퍼져 나갈 뿐이었다. 천라성! 강호인들이 '겁난유세'의 내용에 깊은 의혹을 갖는 것은 바로 이 이름이 가지는 신비함 때문이었다. 정말 오성(五聖)의 뒤에 배후가 있었단 말인가? 천라성은 왜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고 오성을 지배해 왔는가? 강호인들은 저마다 천라성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무혼지겁 이후 강호의 힘은 이전의 삼분지 일에 불과한 상황! 게다가 남은 힘마저 대부분이 오성련(五聖聯)의 휘하에 속해 있었으니... 해가 떠오른다. 넘실대는 아지랑이 같은 것이 검붉게 지평선 둘레를 감싸안더니, 이윽고 붉은 혀가 한 치 위로 올라온다. 넓은 평야! 야트막한 야산에서 바라다보이는 일출의 풍경은 언제나 장관이었다. 희망과 새로운 의욕을 상징하는 해돋이! 때문에 운지는 일출을 좋아했다. 마음 아픈 일이나 걱정거리가 생기면 언제나 이곳에 앉아 일출을 보곤했다. 지금도 그렇다. '겁난유세'가 강호에 나돌기 시작한 이래 여섯 달 동안 운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출을 보아 왔다. 이제 해가 지평선과 연결되었던 작은 아지랑이의 고리를 끊고 완전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금빛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햇살이 운지의 시선을 어지럽혔다. 그 휘광 속에서 운지는 언제나 한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광무혼! '사형! 과연 당신은 살아 있었군요. 하긴 절대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셨죠, 당신은...' 그랬다. 광무혼이 쉽게 죽을 사람이었다면 절대 근심수사 종기가 음모의 중심인물로 정해 놓았을 리 없으니까. 생각해 보면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은가? 능력이 있어 음모의 중심자로 선택되지만, 또한 그 능력 때문에 끝내 죽여야만 한다는 것은. 운지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여러 장의 보고서를 쳐다보았다. 그 중 위에 있는 것이 가장 최근에 올라온 것이다. <성주 친전. 천라(天羅) 순찰당주(巡察堂主) 배상.> 운지는 그렇게 쓰여 있는 보고서를 펼쳤다. <철담마도 황무와 만박, 그리고 춘추서원(春秋書院)에 대한 제십구차 보고. 순찰당과 천기당, 그리고 신산각의 모든 인원이 동원된 조사에도 불구하고 춘추서원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들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미 조사를 마친 인근 마을의 주민 외에도 범위를 더욱 넓혀 조사한 자들의 증언도 한결같습니다. 지난 십팔차 보고에서 말씀올렸던 황무, 만박, 그리고 부총관이던 단심서생(丹心書生) 최오(崔五)를 비롯한 춘추서원의 모든 인물들에 대한 초상 이만 칠천 부를 강호 전역에 배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보았다는 보고는 전무한 상태입니다. 속하의 무능으로 성주의 심려가 더욱 커짐을 사죄드리오며... 순찰당주 습호리(濕狐狸) 배상.> 운지는 서찰을 덮었다. 짐작하던 대로였다. 만일 추적에 걸려들 염려가 있었다면 절대 철담마도란 이름으로 숨어 있던 것을 밝힐 광무혼이 아니었다. '자신이 없다면 나섰을 리가 없다. 사형! 도대체 지난 구 년간 어떤 준비를 한 것인가요?' 운지는 광무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제껏 나타나지 않았던 광무혼과 지금 이렇게 스스로 나타난 광무혼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는 것이다. 도대체 지금 그는 어디에 있을까? 어디 숨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드러난 자와 숨어 있는 자의 대결에서 드러난 자가 더욱 초조해짐은 당연한 일이었다. 운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이제 해가 지평선 위로 꽤 올라섰다. 하늘을 되돌리듯, 정해진 음모를 한 번에 뒤집을 만한 회천지계(回天之計)라고 한다. 광무혼의 회천지계는 어떤 것일까? 운지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걸친 긴 비단옷에 새겨진 금룡이 살아 있는 듯 선명했다.

계획을

흔히들

'사형의 계획이 무엇이건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형을 찾는 일이다. 그가 숨어 있는 곳!' 운지가 손을 치켜 들자 그녀의 등뒤로 마치 허깨비처럼 두 사람이 나타났다. 나타나자마자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 그들! "순찰당주 습호리과 천기당주(天機堂主) 새노반(塞魯般), 대령하였습니다." 운지가 고개를 돌렸다. 세월은 어느 누구라도 비켜 가지 않는가? 아름다움은 여전했지만 눈가의 주름은 그녀도 어쩔 수 없는 듯했다. "강호에서 사람 찾는 일을 가장 잘하는 자라면 누가 있을까요? 그런 일을 하는 단체도 좋아요." "습호리 보고드립니다. 산서 곡하 출신의 삼안추종(三眼追從) 곽창휴(郭敞休)가 뛰어납니다. 그에게는 눈이 세 개 있어 어떤 흔적이라도 찾아 낸다 합니다." "새노반 보고드립니다. 광명전의 총관 쌍안만리(雙眼萬里)를 들 수 있습니다. 광명전주인 추대(秋坮)의 실력 또한 만만치 않으나... 그는 신분이 신분인지라 일을 하지 않은 지 삼 년이 넘었다 합니다." 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당장 그들 둘에게 청부하세요. 찾을 사람은 둘, 춘추서원의 원주 만박과 총관 황무예요. 대가는 무제한. 기한은 빠를수록 좋아요." "존명!" 습호리와 새노반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일개 당주의 무공이 이 정도라면 그 문파의 힘은 보지 않아도 알 정도가 아니겠는가? 운지는 다시 하늘을 보았다. 이제 해는 높이 떠올랐다. 좀 전까지 따스하게 느껴지던 해가 이제는 오히려 불쾌감을 주는 것은 자연의 변덕인가, 아니면 인간의 변덕인가? 그녀는 한숨처럼 말했다. "사형, 당신이 살아 있어 기뻐요.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겠군요." 그녀는 광무혼이 겪었던 그 지옥 같은 경험을 알고 있었다. 왜 또다시 살아 왔단 말인가? 다시 그 지옥을 경험하고 싶단 말인가? 이제 그녀는 구 년 전의 젊은 묘선낭 운지가 아니었다. 천라성의 제이대 성주인 것이다. *

*

*


"으음!" 추대(秋坮)의 신음 소리는 벌써 세 번째였다. 이윽고 결심한 듯 그는 왼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총관! 거기 있소?" 순간 왼쪽에 난 작은 문이 열리면서 광명전의 총관 쌍안만리(雙眼萬里)가 즉시 대답했다. "대령하고 있습니다." 추대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서탁 위에 놓인 책은 두 권이었다. 겁난유세.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오. 또한 나는 이 서찰도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소." 추대는 두 권의 책 '겁난유세'를 들춘 뒤, 그 아래에 깔린 두 통의 봉서를 집어 들었다. 겉봉 한켠에는 보낸 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놀랍게도 뇌불과 염도가 아닌가? "하지만 서찰은 이미 왔소. 무림 오성의 두 사람이 동시에 보내 온 것이오. 또한 그 내용도 대동소이(大同小異)." 쌍안만리도 물론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한 가지를 청부하는 내용이었으니까. "전주, 그것이 형식적으로는 뇌불과 염도의 서신이지만 실은 천라성에서 보내 온 것임을 저도 짐작하고 있습니다." "서신을 갖고 온 그... 습호리(濕狐狸)라 하였소? 그는 지금 어디에 있소?" "객방을 하나 배정해 주었습니다. 소전주께서 지금 전 내에 계시지 않으니까요." 추대가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어찌하시겠소? 가시려오, 총관?" 쌍안만리도 웃었다.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소전주께선 구(丘) 노인의 일을 처리하러 나가셨기 때문에 오늘 저녁에나 오실 겁니다. 내일 아침이면 넉넉하게 떠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총관은 같이 가시지 않을 거요?" "전 필요없습니다. 소전주께선 이미 제 기술을 모두 익히셨으니까요. 전 소전주가 자랑스럽습니다." 추대는 웃을 뿐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속내는 쌍안만리보다 열 배는 더 자신의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지난 육 개월 간 자신의 모든 무공과 쌍안만리의 추적술을 익힌 것도 물론 자랑스러웠다. 게다가 천라성에서 이런 종류의 연락이 올 것임을 아들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점이 더욱 자랑스러웠다. 추대는 웃으며 말했다.


"총관, 부탁하겠소. 운행을 좀더 빨리 불러와 주시겠소?" 구 노인은 무척 억울했다. 비단 억울할 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저주가 눈빛에서마저 뻗어 나올 정도로 원한에 차 있었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지금 구 노인이 바라보는 전각(殿閣)은 더없이 화려했다. 호위각(虎威閣)! 호위각을 바라보는 사람은 구 노인 외에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추운행, 광명전의 소전주 추운행! "이곳이오? 삼광호와 그의 세 수하가 살고 있는 곳이?" 날이 조금씩 더워지긴 했지만 부채를 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니던 추운행이 아닌가? 지금도 여전히 그의 손에는 부채가 들려 있었다. 추운행의 말에 구 노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바로 이곳입죠. 내 손녀를 빼앗아 간 놈들이 이곳에 있습니다." 노인의 얼굴은 주름으로 가득 뒤덮였다. 게다가 겉으로 드러난 팔목은 마를 대로 말라 뼈 위에 가죽이 제대로 붙어 있는지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앙상한 두 다리는 또 어떤가? 젊은 시절 돈을 모으느라 고생한 덕분에 이런 몰골이 되었다고 했다. 때문에 늙은 구 노인에게 남은 것은 앙상한 뼈와 열심히 모은 돈, 그리고 죽은 딸이 남긴 하나뿐인 손녀이다. 한데 가진 것이 적은 사람일수록 남에게 빼앗기기가 쉬운 것이 바로 인생의 비극이다. 삼광호(三狂虎) 부광회(富狂會)! 재물과 살인과 여자에 미쳤다는 호랑이로, 매우 부자였다. 하지만 그는 구 노인이 평생 이루어 놓은 것을 빼앗아, 노인에게는 겨우 앙상한 뼈만 남게 되었다.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이 인생의 비극이라지만, 그렇다고 사람에게 비극만 있으란 법은 없다. 마침 구 노인은 광명전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또한 광명전을 찾아온 구 노인을 추운행이 보았다. 추운행은 비극을 당하는 사람을 보는 일이 싫었지만, 남에게 비극을 가져다 주는 자의 얼굴은 무척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해서 추운행은 삼광호란 자를 만나러 구 노인과 함께 여기로 온 것이다. 추운행은 반월선-천수옹의 물건은 반년 전 망가진 탓에 새로 구입한 것이긴 하지만-을 접었다. "손녀는 해가 지기 전 노인의 품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 * * 해는 아직 지지 않았다. 대낮의 햇살이 밝음에도 불구하고 질펀한 술판이 벌어지는 곳이 있었다.


술판에 이어 육(肉)판도 벌어지고... 호위각의 내부였다. "흥! 흐흥!" 끈적거리는 신음 소리. 그리고 역시 끈적거리는 두 알몸. 여인이 아래에 있고 사내는 위에 있었다. 여인의 몸 위에 앉은 사내의 몸뚱어리는 근육으로 매끄러웠다.

뒤덮여

있었으며

등판은

번들거리는 피부와 땀! 그 땀 한 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쫓아가면 여인의 젖무덤이 눈에 시리게 들어온다. 그 여인 역시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쾌락으로 자지러지고 있었다. 사내가 웃었다. "흐흐, 과연 영악하구나! 네 말대로 했더니 그 늙은 것이 숨겨 둔 재산마저 모두 내놓더구나." 여인도 따라 웃었다. "호호, 당신은 웃음과 사내가 밀착이

제가 아니었더라도 당신은 충분히 그의 재산을 후려낼 수 있으셨을 거예요. 천하의 삼광호가 아닌가요?" 함께 젖무덤이 들썩였다. 다시 몸을 굽혔다. 짙어지자 여인의 허리가 활처럼 뒤로 굽었다.

"네가 아니었다면 그 궁색한 늙은 놈의 재산이 그렇게 많은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느냐? 흐흐흐, 솔직히 처음에는 너를 내 돈이나 노리는 꽃뱀쯤으로 생각했었다." "하아, 그런데 결과는 어땠나요?" "내게 돈을 벌어다 주는 고마운 선녀이지. 흐흐흐, 돈뿐 아니라 이런 것도..." 사내의 몸이 다시 요동쳤다. 새로운 움직임을 시작하는 것이다. 여인의 입가에 미소가 달콤해지면서 그녀의 몸도 더욱 달아올랐다. 밖에는 아직도 해가 지지 않아 더웠으나 이곳은 더욱 뜨거웠다. 열락의 순간에 여인은 눈을 감게 남자의 경우도 비슷하다. 하지만 그는 강호인이며 또한 적이 아주 많은 적을 가지고도 아직 살아 열락의 순간에도 눈을 감을 만큼

마련이다. 삼광호는 눈을 감지 않는다. 많았다. 있다는 건 그만큼 조심성이 깊다는 뜻이며, 또한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으으음..." 비명이 아니다. 고비에 다다르는 소리였다. 그 순간 천장 위에서 뭔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똑! 똑! 똑! 붉은 액체.


붉은 피! 삼광호 부광회에게는 세 명의 수하가 있다. 호위삼흉(虎威三凶)이라 불리는 그들은 하나같이 용맹하며 잔혹스러웠다. 때문에 남에게 죽임을 당하기보다는 남을 죽이기가 훨씬 쉬웠다. 삼광호는 눈을 비빈 후 다시 천장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은 수하 세 명의 머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머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피! '호위삼흉, 너희들이...!' 삼광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 아래의 물건이 긴장을 유지하고 있을 리가 없다. 당연히 여자 위에 엎드릴 여유도 없다. 여인은 삼광호의 몸이 빠져 나가자 허탈함을 느낀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도 위험이 다가옴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곧 여인의 표정은 만족스러워졌다. 말할 수 있는가! 몸을 일으키는가 싶자 어느새 뒤쪽 벽에 걸려 있던 철방망이를 집어 들고, 곧장 천장으로 몸을 날릴 수 있는 고수가 천하에 몇 명이나 있을지를. 삼광호의 높은 무공은 여인의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그가 고수일수록 자신의 미래가 편해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에 있는 방망이가 여인과 함께 사용하는 것이라면, 지금 손에 들고 휘두르는 거대한 철방망이는 싸움에서 사용하는 독문병기였다. 그가 무려 칠십두 근이나 나가는 철방망이를 휘둘러 적의 머리통을 깨부수려 들면 감히 막고자 하는 자가 드물었다. 대개는 엎드려 빌거나 도망갔다. 그 외의 자들은 어김없이 뇌수를 바닥에 쏟아 내야만 했다. 지금 천장을 향해 도약하는 삼광호의 가슴에 차 올라 있는 자신감은 그러한 경험의 결과였다. "죽인다, 이놈!" 누군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분명히 천장에서 낯선 호흡 소리를 들었다. 뿌지직! 천장이 그의 철방망이에 의해 팽팽히 당겨진 비단 조각처럼 찢겨 나갔다. 자연 매달렸던 세 개의 머리도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악!" 벌거벗은 여인은 놀라 외치면서 떨어지는 머리를 피했다. 그 옆으로 삼광호가 내려서면서 여인을 감쌌다. "천장에는 아무도 없다. 놀라지 마라."


투두둑! 그제서야 부서진 천장의 파편들이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세 수하의 머리 위에도 흙부스러기와 작은 돌들이 먼지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삼광호는 한 손으로 여인을 감싼 채 다른 손으로 철방망이를 휘두르며 고함질렀다.

크게

"웬 놈이냐? 숨어 있지 말고 썩 나서라. 네놈은 감히..." 그러나 삼광호는 더 이상 고함지를 필요가 없었다. 이내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다. "삼광호 부광회! 틀림없는가?" 놀란 삼광호가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는 소리가 들려 온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잘린 머리 세 개가 동시에 눈을 번쩍 떴다. "이제 너는 죽는다, 부광회!" 잘려져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 그런 머리가 한 개도 아니고 세 개나 한꺼번에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상황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꺄아악!" 여인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삼광호는 달아날 여유가 없었다. 세 개의 머리가 그의 왼팔 곡지혈과 오른쪽 다리 연곡혈과 목의 승장혈을 물고늘어졌기 때문이다. 전신의 혈맥이 급격히 굳어 왔다. 쿠웅! 힘이 빠지며 떨어진 철방망이가 삼광호의 왼쪽 다리를 찍으면서 가루로 만들었지만 삼광호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심지어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이미 혈도가 짚였기 때문이다. 흰 옷, 손에 부채를 든 추운행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진기를 흘려보내 부채를 조종하는 일이나 머리 세 개를 조종해 입을 벌리게 하는 일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 일은 어린 시절부터 연습해 온 일이니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다. 어려운 일은 삼광호를 어떻게 처리하느냔 것이었다. 게다가 더욱 어려운 점은 뒤쪽에서 눈이 찢어져라 뜬 채로 부들거리며 서 있는 여인의 처리 문제였다. 추운행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삼광호, 구 노인의 평생 재산과 그의 손녀를 강제로 빼앗았으니 넌... 이제 죽는다." 그의 부채가 위로 들려졌다. 이제 부채가 아래로 내려지는 순간, 삼광호의 머리는 몸뚱이와 떨어질 것이다. 그의


세 부하들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추운행은 그 전에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여인! 삼광호와 함께 구 노인의 재산을 빼앗은 그녀부터 심판해야 할 것이다. 그의 손에 들린 부채가 여인의 목을 노리며 날아가는 순간, 여인이 크게 고함을 질렀다. 고함을 듣는 순간, 추운행은 반월선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 전 구 노인의 손녀예요!" 추운행은 마음 한구석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짐을 느꼈다. 인간이란 참으로 악독하다. 구 노인은 손녀를 위해 평생 동안 뼈만 남도록 일했지만, 그렇게 모은 재산을 바로 자신의 손녀가 가로챈 것이다. "전 참을 수 없었어요. 할아버지는 그렇게 많은 재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제게 좋은 옷 하나 사주지 않았어요. 흥, 어차피 곧 죽을 늙은이 아닌가요? 그에게 재산이란 없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요." 손녀의 이 말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 노인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아끼면서 살았을까? 추운행은 문득 치미는 살기를 느꼈다. 그러나 아무리 악독한 손녀라 할지라도 구 노인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만일 지금 손녀가 죽는다면... 그 뼈만 남은 노인이 무슨 희망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 갈 수 있을까? 칼! 아주 날카로워 무엇이라도 벨 듯한 날을 소유한 비수였다. 추운행은 긴 한숨을 토해 낸 후 비수를 구 노인의 손녀 구옥정에게 건네 주었다. 그리곤 천천히 삼광호 부광회의 왼쪽 가슴을 가리켰다. 구옥정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저, 정말인가요? 이것으로 저... 삼광호를 죽이면 전 용서해 주시는 건가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구옥정이 다시 물었다. 추운행은 짜증이 났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공모(共謀)해 구 노인의 재산을 가로챈 것도 문제삼지 않겠다. 넌 그냥 계속해서 구 노인의 착한 손녀딸로 남게 되고, 재산도 모두 상속받을 것이다." 구옥정은 억지로 웃음을 참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비수를 높이 치켜 들었다. 목표는 삼광호의 심장. 혈도가 짚여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내쯤은 죽이기 너무나 쉬워 보였다. 삼광호의 눈빛이 처절한 분노를 담고 흔들렸다. 이런 종류의 악한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비록 자신은 남을 배신해도 남은 자신을 배신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구옥정의 비수가 아래로 떨어지고, 그 날카로운 날이 삼광호의 심장을 막 뚫으려 했다. 바로 그 순간, 삼광호의 세 군데 혈도를 입으로 제압하고 있던 머리 세 개가 힘을 잃었다. 혈도가 풀린 삼광호의 왼손이 철방망이를 힘껏 움켜잡았다. 쉬우웅! 허공을 가르는 쇠방망이의 소리는 섬뜩했다. 삼광호는 원래 구옥정의 머리통을 박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실패하고 말았다. 어디선가 전해 온 진기 한 줄기가 자신의 방망이를 조종하며 구옥정의 머리에 가하는 힘을 약화시키는 바람에 그의 방망이는 방향을 바꾸었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구옥정의 뇌호혈이 부서졌다. 입과 코에서 피를 뿜으며 그녀는 바닥에 쓰러졌다. 추운행은 답답한 마음을 금하지 못해 고갯짓을 하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두 줄기의 지풍이 일어나 삼광호와 구옥정을 향해 날아갔다. 다시 혈도를 짚인 삼광호가 딱딱하게 굳어 갈 때,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피도 멈추었다. 추운행은 한숨을 내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부서진 천장에서 흘러 들어오는 빛의 양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이제 곧 해가 지겠구나.' 추운행은 가만히 자리에 앉았다. 해가 지면 이곳으로 들어올 구 노인을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이제 해가 졌다. 구 노인은 추운행의 말대로 손녀를 품에 안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전혀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의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구 노인은 두 손으로 피투성이인 손녀의 머리를 잡고 있었다. 손녀는 가까스로 눈을 떴지만 말을 하지는 못했다. "으어... 으어..." 그녀는 뇌호혈이 파괴되었고 평생을 백치인 상태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구 노인은 비록 무공은 모르지만 그녀의 머리를 친 것이 삼광호의 쇠방망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서둘러 왔지만... 조금 늦었소. 그자는 당신의 손녀를 겁탈하려 했고, 그녀는 이 비수로 반항했던 것 같소. 그러다가 그만..." 추운행이 안타까운 음성으로 말했다.


구 노인은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뻗어 바닥에 떨어진 비수를 잡았다. 날카로운 검! 이것이라면 삼광호의 심장 정도는 아주 쉽게 뚫을 수 있을 것이다. 삼광호에게는 아마도 할말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안타깝게도 혈도가 풀리지 않았다. 그의 가슴으로 비수가 자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이 박혀들었다. 삼광호의 눈이 찢어질 정도로 커졌다. 그의 숨은 곧 끊어졌다. 이제 다시는 누구의 재산도 탐낼 수 없을 것이다. 구 노인은 몇 번이나 추운행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백치가 된 손녀 구옥정의 손을 잡고 멀리 걸어갔다. 추운행은 그들 조손이 사라질 때까지 눈도 한번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이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게 되자 그는 한숨처럼 길게 말했다. "세상일이란 참으로 복잡합니다. 얽히고설켜 있어 어떤 것이 최선인지 알기 어려울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의 이 말은 혼자말 같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추운행의 뒤쪽에 한 사람의 모습이 스슥 나타났기 때문이다. "소전주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오늘 일은 더 이상의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광명전의 총관 쌍안만리는 소전주 추운행을 자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사실 오늘의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상의 처리 방법이 없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십시오, 소전주. 구 노인으로서는 손녀를 잃지 않았고, 또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손녀의 악독함에 불행해지지도 않을 테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백치인 손녀를 평생 돌보아야 할 것이오. 이때까지도 그렇게 힘들게 살아 왔건만..." "소전주께서도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세상일이란 실로 복잡하여 어떤 경우에는 결과가 나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행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정말 그랬다. 추운행은 내심 생각했다. 광무혼의 경우도 그랬던 것이다. 그는 처음 길을 잘못 선택했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나쁜 결과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전주께서 찾으십니다." "아버님께서? 무슨 일입니까?" "소림의 뇌불과 무당의 염도, 그들에게서 서찰이 전해져 왔습니다. 소전주께서 예상하셨던 대로입니다." 추운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기다리던 순간이 온 것이다. 자신은 얼마나 뇌불과 염도의 연락을 기다렸던가?


"천라성!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하는구나." 이제 천라성은 추운행의 앞에 자신의 숨겨져 있던 모습을 스스로 드러내기 시작할 것이다. 추운행은 문득 광무혼을 생각했다. 그도 천라성에 접근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는 어떤 방법을 택할까?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으리라. 광무혼에게는 만박이 있었다. 또한 광무혼 그만 해도 결코 지혜가 떨어지는 위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구 노인이 사라진 어둠 속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 어둠은 마치 아무것도 모른 채 살고 있는 강호인들의 어리석음처럼 보였다. 하지만 곧 해가 다시 떠오를 것이다. 강호는 진실을 찾게 되리라. 2. 운지, 세 사람을 먼저 부르다 곽창휴와 쌍안만리를 데리러 보낸 운지는 쉴 시간이 없었다. 세 사람을 먼저 불러 놓았기 때문이다. 습호리(濕狐狸)와 새노반(塞魯般)을 보내야만 했던 두 사람과는 달리 지금 한창 달려오고 있을 세 사람은 훨씬 다루기가 쉬웠다. 그들은 자신이 연락만 하면 달려온다. 원래는 다섯 마리의 전서구를 날리고, 그 뒤 다섯 사람이 달려오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 명은 이미 죽고 없었으며, 한 명은 실종되었다. 나머지 세 명뿐이라 해도 운지는 만족스러웠다. 그녀의 할아버지, 다시 말해 근심수사 종기가 강호를 철저하게 파괴해 이제는 그 세 명을 당할 만한 자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운지는 문득 창 쪽을 쳐다보았다. 햇살이 만들어 낸 서광이 창으로부터 풍성하게 흘러나와 방안을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쯤 때가 되었는데..." "그들이 당도하였습니다." 어디선가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운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 도착한 세 사람에게는 약간의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술에 찌든 거지가 들어오고, 머리가 파르께한 중이 들어오고, 마지막으로 얼굴이 대추처럼 붉은 도사가 한 명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군요." 운지는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하지만 세 사람의 고개는 운지보다 세 배는 더 숙여져 있었다. "뇌불이 성주를 뵈오." "염도가 성주를 알현합니다."


"취개가 성주님께 인사드리오." 오성련의 핵심 우두머리이며 강호를 이끌고 있는 오성(五聖) 중의 셋. 운지는 이미 죽은 만유(慢儒)와 실종된 선향(仙香)을 제외한 모두를 불렀던 것이다. * * * 최일명(催一命)은 덩치가 크고 힘도 세다. 그리고 검법 역시 어디 가서든지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갖춘 자였다. 또한 그는 제법 많은 책을 읽었으며 그 중의 일부분은 암기할 수도 있었다. 그는 지금 가슴속에 이백칠십 냥을 품고 있었다. 성이 오(吳)라는 학사를 아홉 달간 경호한 대가였다. 멀리 누삼령의 험준한 모습이 보였다. 너무 험한 탓에 세 번 눈물 흘리며 넘는다는 누삼령(淚三嶺)! 그 고개를 바라보노라면 대다수의 나그네는 수심에 잠기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최일명은 달랐다. 그는 걱정스럽기보다는 아주 기쁜 표정이었다. "학자들은 불학 무식하기만 한 놈들을 경호원으로 두고 싶어하지 않는다. 때문에 나처럼 배운 게 있으면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지." 사실이었다. 보통의 경우 경호료는 한 달에 스무 냥에 불과했다. 그것을 삼십 냥으로 올려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최일명이 논어의 몇 줄을 암기할 수 있는 덕분이었다. "학자라 자처하는 놈들은 대개 그러한 공통점이 있단 말이야."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품속을 더듬어 은자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그는 다시금 중얼거렸다. "이걸로 뭘 할 수 있을까? 우선... 음!" 고개를 갸웃거린 최일명은 돈을 다시 품에 갈무리했다. 누군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돈이란 남에게 보여 주지 않는 편이 이득임을 최일명은 잘 알고 있었다. "험! 험!" 그는 헛기침을 한 후 누삼령으로 통하는 좁은 길로 들어섰다. 최일명을 지나친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최일명은 느긋하게 발을 옮겼다. 길은 험했지만 주머니가 든든했고, 일을 끝낸 후의 안도감으로 마음이 가뿐해 그의 발걸음은 더없이 가벼웠다.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을 느긋한 마음으로 감상하면서 최일명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경치 좋다. 시원하게 한잔 들이키면 그만이겠구나!" 하지만 이 깊은 산속 어디에서 술을 구한단 말인가? <천하제일주루(天下第一酒樓) 희열주루(喜悅酒樓)>


이런 글이 쓰여진 깃발을 보았을 때 최일명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곳은 누삼령 중에서도 가장 험한 고개가 아닌가?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런 곳에다가 주루(酒樓)를 세울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원하던 술을 한잔 들이킬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최일명은 한번 시험해 보기로 했다. "희열주루라... 주인장은 어디 있소?" 순간 귀가 떠나갈 듯 우렁찬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 왔다. "여기에 있습니다." 최일명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이런! 도대체 누가 말을 했다는...?" "아래입니다, 손님!" 이번의 목소리도 무척 우렁찼는지라 최일명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정말로 사람이 서 있었다. 아니, 서 있다기보다는 붙어 있다는 것이 더욱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희열주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제 이름은 아태(阿太)라고 합니다." 최일명은 피식 웃고 말았다. 삼 척이나 될까 싶은 키! 너무나 작아 땅에 붙어 있는 듯한, 이 나이를 알기 힘든 괴인의 이름이 '태(太:크다.)'란 말인가! 그는 웃으며 물었다. "당신이 아태(阿太)라면 아소(阿小)도 있겠구려?" "물론 있습니다." 아태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는 아주 짧은 목을 위쪽으로 향하더니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아소야, 손님께서 널 보고 싶어하니 어서 나오거라." 순간 빽빽히 솟은 나무들이 가득 찬 숲속에서 누군가의 대답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예, 형님!" 가느다란 목소리. 마치 수줍어하는 새색시처럼 숫기가 없는 목소리였다. 최일명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태가 이처럼 작다면 저렇게 목소리가 가냘픈 아소란 자는 도대체 얼마나 작을까?' 쿵! 쿵! 쿵! 마치 작은 산이 걸어오는 것 같았다. 다섯 그루의 나무를 쓰러뜨리고 세 개의 바윗덩이를 뒤집으면서 걸어오는 아소의 키는 거의 구 척에 가까웠다.


또한 그 덩치는 어떠한가! 최일명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저 사람이 아소란 말이오?" 아태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지요. 아소는 무척 작답니다. 손님께서도 동의하시지요?" 최일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크고 작음을 나타내는 것이 키가 아니라 바로 목청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화... 환영합니다, 손님." 아소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 * * 최일명은 스스로를 희열주루의 주인장이라고 밝힌 아태와 아소 형제를 보고 놀랐었다. 하나, 그들의 안내를 받고 들어간 산속의 빈 공터에서 그는 더욱 놀라고 말았다. 도대체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만 놓인 주루가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 최일명은 어리둥절해진 채 그 중 하나의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곧 기다렸다는 듯이 음식들이 날라져 왔다. 상다리가 휘어진다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로 많은 음식들. 게다가 풍기는 향기마저 질탕하여 저절로 식욕을 돋워 놓았다. "북경 열빈원의 만석상을 그대로 모방했습니다. 비록 산속이지만 손님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이 저희의 경영 신조입니다. 부디 맛있게 드시기를." 아태가 말했다. 하지만 최일명은 함부로 젓가락을 들 수가 없었다. 돈은 있었지만 함부로 쓰는 성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짐작했는지 아태가 씩 웃었다. 그는 다섯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음식값은 단돈 다섯 푼에 불과합니다." 최일명은 정말 열심히 먹었다. 배가 올챙이처럼 부풀어올랐지만 음식은 반의 반도 채 없어지지 않았다. "꺼윽!" 배를 두드리며 최일명은 통쾌한 웃음을 지었다. 이런 공기 맑은 산속에서 술과 음식을 배불리 먹는다는 건 확실히 기분좋은 일이었다. "하하, 이거 정말 잘 먹었소. 정말..." 최일명이 웃자 아태도 따라 웃었다. "하하, 손님께서 기뻐하시니 저도 기쁘군요. 이제... 계산을 하시겠습니까?"


술과 음식을 잘 먹었으니 이제 남은 일은 길을 떠나는 것밖에 없었다. 최일명은 뿌듯한 마음으로 동전 다섯 문을 내밀었다. 하지만 아태와 아소는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저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계산은 저분이 하십니다." 손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니 중간 정도 되는 체격에 머리에는 띠를 두른, 마흔 가량의 사내가 회색 옷을 입고 서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요?" 최일명의 물음에 아태가 대답했다. "그분은 점원입니다." "점원? 한데 왜 점원에게 '그분'이라 부르는 게요?" "점원께서 계산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인인 저희들은 손님을 접대하지만 점원은 돈을 받으니 당연히 저분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그래요. 이 아소도 돈을 가진 사람이 제일이라는 것쯤은 아, 알고 있으니까요." 최일명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하긴 이런 산속에 주루를 차리고, 또한 진수성찬을 단돈 다섯 문에 파는 자들이라면 어떤 짓을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소. 그럼 나는 저 사람에게 돈을 지불하면 되는 것이군." "그렇소. 내게 돈을 내면 되오." 점원의 목소리는 매우 무뚝뚝하고 차가웠다. 문득 최일명은 이 점원의 모습이 매우 낯익다고 생각했다. 쨍그랑! 소리가 정확히 네 번 들렸다. 첫 번째 동전은 손바닥 위로 떨어졌기 때문에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나머지 네 개가 첫 번째 동전의 위로 떨어졌기 때문에 소리가 들린 것이다. 점원은 아무런 표정 없이 말했다. "다섯 문! 음식값을 정확히 받았소." "좋소. 그럼 나는 이제 가보겠소." 최일명은 걸어가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산속의 길은 무척 좁아 단 한 명이 가로막아도 지나가기가 힘들었다. 최일명은 눈초리를 치켜 올리며 점원을 노려보았다. "왜 나의 길을 막는 것이냐?" "당신이 아직 지불하지 않은 것이 남았기 때문이오." "난 이미 음식값을 지불했다. 감히... 시비를 걸고 싶은가?" 점원은 묵묵히 손을 들어 빈 술병을 가리켰다. 아태가 그 모습을 보더니 손뼉을 치며 말했다.


"맞소, 맞아! 손님은 아직 술값을 치르지 않았소." 점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일은 돈을 받는 것이오. 난 이 일을 매우 오랫동안 해왔으며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소." 최일명은 화가 났지만 참기로 했다. 그는 많은 음식과 술을 먹었기 때문에 약간의 돈쯤은 더 지불할 의향이 있었다. "그래, 술값은 얼마냐?" "은자 한 냥이오." 그리 과한 것도 아니다 싶어 최일명은 은자를 꺼냈다. 점원에게 은자를 던지며 최일명은 차갑게 웃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더니, 이러다 또 다른 핑계를 대 바가지를 씌우려 들지 모르겠구나." 점원은 은자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보았소. 당신이 계산할 돈은 아직 남아 있소. 의자 사용료가 오십 냥에다가 젓가락 사용료 백 냥이 추가되오. 그리고 친절히 봉사한 주인장 둘의 수고료가 백 냥 하고도 열아홉 냥이니, 아마 당신은 전재산을 털어야 할 것이오." 최일명의 양쪽 눈이 매우 가늘어졌다. 용맹군자검(勇猛君子劍)이란 별호를 갖고 있는 최일명의 이런 표정은 매우 화가 났다는 의미였다. 그는 비로소 점원을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해 냈다. 누삼령을 오르기 전 자신이 은자 꾸러미를 흔들고 있을 때 지나갔던 자가 아니던가? 그의 오른손이 등뒤로 가더니 청패검의 손잡이를 굳게 잡았다. '이놈들이 감히 내게...!' 최일명의 전신에서 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는 이미 이들을 죽일 결심을 굳힌 듯했다. 슈아앙! 최일명의 검은 검집을 빠져 나오자마자 곧장 반호를 그리면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마치 도처럼 휘둘러진 최일명의 검은, 그러나 점원을 상하게 만들지 못했다. 점원은 뒤로 한 보 반을 움직였으며, 그 거리는 매우 적당해서 최일명의 검은 머리카락 하나보다도 더 작은 차이를 두고 허공만 가르고 말았다. "네놈! 단순한 도적이 아니로구나." 크게 외치며 최일명은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는 강호 경험이 많은 자였다. 방금 점원이 보인 한 수가 비록 피하는 동작이었지만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던 것이다. 점원이 이마에 두른 띠에 가느다란 선이 생겼다. 최일명의 검에 의해 갈라진 것이다.


나풀! 머리띠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처음부터 머리띠만 갈라지도록 정교한 계산하에 몸을 피한 것이다!' 하지만 최일명이 놀란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점원의 머리띠가 벗겨지면서 그곳에 또 다른 눈이 하나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최일명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세 번째의 눈! 당신은 삼안추종 곽창휴!" 점원, 아니 곽창휴의 양손이 위로 들려졌다. 최일명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곽창휴가 입을 열었다. "용케 날 알아보는구나. 하지만 네놈이 죽을 것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넌 순순히 돈을 내어 놓고 갔어야 했다." "곽창휴, 당신과 같은 명성을 갖고 있는 자가 왜 이런 도적들과 어울려 다니는 거요?" 곽창휴의 눈에 잠깐 아픈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내뱉듯이 말했다. "명성이 돈을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 무혼지겁 이후 찾아온 구 년간의 강호 침체는 내 일자리를 모두 앗아가 버렸다." 최일명은 이해할 수 있었다. 명성은 때때로 개인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기도 한다. 천하의 삼안추종 곽창휴가 최일명처럼 학사의 호위나 하며 한 달에 삼십 냥의 보수에 만족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도적과 어울리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최일명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무척 힘들었겠구려." "그렇다, 나는 힘이 들었다. 하지만!" 파앗, 하며 그의 양손이 교차되었다. 순간 최일명은 똑똑히 보았다. 그의 양 소매 안에서 환상처럼 뻗어 나오는 두 줄기의 은빛을. 그리고 목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두 명의 크고 작은 형제를. "동정받고 싶지는 않았다!" 최일명은 큰 소리로 고함질렀다. "당신은 자신의 동료마저 죽이는군!" 최일명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분노가 어려 있었다. 그러나 곽창휴는 냉소했다. "그들은 내 동료가 아니다. 그들은 주인장이며 나는 점원이었다. 이제 점원의 정체를 안 주인장은 죽어야 한다."


그의 양손이 다시 들려졌다. 이번에 노리는 대상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최일명이 분명했다. 최일명의 두 손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순간 곽창휴의 두 손이 다시 내려졌다. 이번의 은빛은 더욱 빠르며 악독했다. 최일명의 눈 속에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은빛 사슬 두 줄기가 새겨졌다. 은빛 사슬의 끝에 매달린 낚싯바늘 모양의 갈고리가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었다. * * * 새노반은 길을 서둘렀다. 광명전으로 간 습호리는 이미 임무를 끝냈을 것이다. '너무 늦어졌다. 서둘러 삼안추종 곽창휴를 만나야만 한다.' 그의 마음은 무척 급했지만 발길까지 빠르지는 못했다. 경신술을 전개해 먼 길을 달려온 데다가 좀 전에 두더지굴에 빠져 무릎이 부러졌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이런 재수없는 경우를 당하다니!' 그랬다. 하필이면 왜 성주의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말에게 사고가 일어난단 말인가? '족히 세 시진 가량은 지체했다.' 세 시진!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멀리 누삼령의 모습이 보였다. 새노반은 발에 더욱 힘을 주었다. * * * '위험해!' 그러나 그 생각이 미처 말이 되어 나오기도 전에 갈고리는 최일명의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다. 팍! '찔렀다!' 곽창휴는 자신의 통두은사(通頭銀絲)가 최일명의 두 눈을 꿰뚫고 지나가는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 최일명의 몸이 흐릿해질 줄이야.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아예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결론은 하나! '무서운 빠르기로 피했다. 잔상(殘像)이 남아 착각할 정도로 쾌속한 신법이라니!' 양손을 다섯 번 재빨리 휘감으며 통두은사를 회수하는 곽창휴의 세 번째 눈이 빛을 뿜기 시작했다. 이것은 눈처럼 보이지만 결코 눈이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생겨난 큰 점에 불과한 그것은, 그러나 놀라운 묘용을 갖고 있었다. 대개의 인간이 볼 수 있는 빛의 영역을 벗어나 온도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원래 인간이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퇴화되어 버린 기능. 곽창휴는 그 기능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 오랫동안 단련시킨 끝에 마침내


삼안추종이란 별호를 얻었던 것이다. '위로 올라갔다!'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감각이 그의 이마에 있는 점에서 전해져 왔다. 곽창휴는 얼른 머리를 위로 들었다. 허공에 떠 있는 최일명의 모습이 눈에 시리게 들어왔다. 그의 점은 최일명의 전신이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음을 전해 주었다. "높은 온도! 내공을 극성으로 올렸구나!" 곽창휴도 크게 외치면서 양 소매를 위로 쏘아 냈다. 순간 그는 볼 수 있었다. 최일명의 검이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옮겨지는 것을. 그것은 남자의 것이라고 믿기엔 힘들 정도로 흰 옥수였다. 온도를 느끼는 곽창휴의 점은 최일명의 왼손에 들려진 검은 물체를 감지해 냈다. 그리고 그 물체가 형언하기 힘든 속도로 떨어져 내리는 것도. 스컥! 그것이 곽창휴가 느낀 마지막 감각이었다. 섬뜩하도록 차가운 그 무엇이 이마를 꿰뚫는 것을 느끼며 곽창휴는 헛되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신음 같은 마지막 한마디가 그의 입을 뚫고 나왔다. "오, 옥수검...!" 옥수검 광무혼! 광무혼은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조금 있으면 새노반이라는 천라성의 전령이 올 것이다. 그는 바닥에 누워 있는 세 명의 시체를 쳐다보았다. 아소와 아태의 죽음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들은 곽창휴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죽고 말았다. 하지만 곽창휴의 죽음은! "당신은 안타까울 것이 없소.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이 못마땅했다면 마땅히 좀더 일찍 목숨을 끊어야만 했소." 광무혼은 누삼령의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저 좁은 길로 곧 새노반이 달려올 것이다. 말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으로 끌 수 있는 시간은 세 시진을 넘지 못할 것이다. 광무혼은 조심스럽게 곽창휴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리곤 자신도 옷을 벗어 그것을 곽창휴에게 입혔다. 죽은 자의 몸이 굳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 일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광무혼에게는 시간이 없었고, 그는 매우 재빠른 동작으로 그 일을 해냈다. 미간에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상처만을 남기고 상대의 목숨을 끊는 일점홍(一點紅) 수법은 구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성공하면 피를 튀기지 않고도 상대를 죽음에 들게 만들 수가 있었다. 옷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며 피가 묻지 않았음을 확인한 광무혼은 즉시 짧지만 아주


날카로운 반월 모양의 단검을 품에서 꺼내 들었다. 스걱! 스걱! 죽은 자의 얼굴 피부를 벗겨 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마침내 그것을 모두 벗겨 낸 광무혼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품에서 두 개의 약병을 꺼내 들었다. 붉은색의 약병을 기울여 몇 방울의 액체를 떨어뜨리자 아소와 아태, 그리고 곽창휴의 시체가 한줌의 핏물로 화해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노란색 약병 안에 든 액체는 벗겨 낸 피부 뒷면에 정성스럽게 발랐다. 노란색 액체는 잠시 후 굳더니 끈적거리는 아교와 같은 물질로 변했다. 광무혼은 그것을 얼굴에 뒤집어썼다. * * * 누삼령을 모두 올라왔을 때 새노반은 매우 지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천하제일루 희열주루'라 쓰여진 깃발을 보고 미소 지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깃발이 있는 곳을 약간 돌아가자 나무들을 베어 만든 공터에 마련된 탁자 하나와 의자 둘이 보였다. 지금 의자에는 점소이 차림을 한 사내 한 명이 뒷모습만 보인 채 앉아 있었다. 새노반은 미소를 지었다. 모든 일은 미리 알아본 것과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다만 두 명의 바보 형제가 보이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지금 새노반에게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무림인이지 두 사람의 바보도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노반은 양손을 모으고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나는 천라성(天羅城)의 새노반이라고 하오. 삼안추종 곽창휴를 찾아왔소." 점원의 뒷등이 약간 흔들렸다.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이곳에 숨어 있는 것을 들킨다면 그의 명예에 큰 오점을 남기는 것일 테니까. 새노반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앞으로 잊어버릴 생각이오. 다만 우릴 위해 한 가지 일을 해주기만 한다면..." 점원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등만 보인 채 말했다. "일! 어떤 일 말이오?" "사람을 찾는 일이오." "누구?" "혈혈수라 광무혼과 춘추서원의 원주 만박!" 점원의 등이 더욱 많이 흔들렸다.


"그들을 도대체 누가 찾는단 말이오?" "천라성주!" 비로소 점원은 고개를 돌렸다. 이마에 뚜렷한 제삼의 눈, 아니 점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새노반은 자신이 마침내 곽창휴를 찾았음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곽창휴! 이제 당신은 천라성으로 가야만 하오. 이건 천라성주의 지엄한 뜻이외다." * * * 곽창휴와 새노반이 천라성으로 떠난 다음날 아침 누삼령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의 품에는 이백칠십 냥 하고도 오십 냥이 더 있었다. "후후, 기분좋구먼. 어디 해장술 한잔 걸칠 데 없나?" 정말 그는 기분이 좋았다. 하룻밤 머물고 술을 거하게 얻어먹은 대가로 오십 냥을 벌 수 있었으니 어찌 기분좋지 않겠는가? 문득 걸음을 멈춘 사내는 간밤에 술을 계속 사주던 노인을 떠올렸다. 자신이 어려서 죽은 아들과 꼭 닮았다던가? 계속 술을 권하며 눈시울을 적시던 노인이었다. 사내는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으흠! 날 닮았으면 무척 잘생겼겠군. 노인의 아들이 죽은 것은 무척 불행한 일이었겠어." 하나 다음 순간 사내는 곧 미소를 지었다. 품에 든 오십 냥의 공돈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는 가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것이 모두 잘생긴 복이로구나. 최일명아, 최일명, 너는 실로 복도 많은 놈이구나!" 최일명은 중얼거리며 누삼령을 넘어갔다. * * * "그래서 어쩌자는 거요? 그들 둘을 부르면 숨어 있는 광무혼을 찾아 낼 것 같소?" 불만에 찬 음성으로 취개가 말했다. 그는 천라성에 들어와서도 술 마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운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광무혼은 황무(黃武)라는 이름으로 강호에 숨어 있었어요. 취개께선 그를 만난 적이 있지 않았나요?" "있었소. 하지만 전혀 알아보지 못했지." 취개가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사실 그는 너무 많이 변해 있었소. 때문에 어떤 자들을 불러오더라도 광무혼이 숨어 있는 곳을 찾기란 불가능할 것이오." "글쎄요... 뇌불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운지가 뜻 모를 웃음을 지으며 뇌불 쪽으로 말을 돌렸다. "아미타불, 소승의 생각으로도 회의적이오. 아무리 추종술에 뛰어난 능력을 지닌 자들을 모으더라도... 아미타불, 차라리 오성련이나 천라성에서 나섬만 못할 것이오." "호호호, 그런가요? 염도(炎道)께서도 같은 의견이신가요." "무량수불, 그러하오이다." 운지는 입을 다물고 천천히 이들 셋을 둘러보았다. 이들은 지난 십 년간 강호에 군림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군림은 사실상 모래 위에 지은 누각에 불과했다. '힘있는 자들이 모두 사라지고 빈 성에 무혈 입성한 것과 다름이 없는 자들. 사형... 아니 광무혼이 이들과 겨룬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그녀는 진심으로 알아보고 싶었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그녀는 느긋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운지는 자신이 앉아 있는 화려한 의자를 약간 뒤로 밀었다. 그그긍의자의 아랫부분에 달린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더니 등받침대를 움직여 뒤로 비스듬히 누울 수 있게 변했다. 그 속으로 몸을 깊숙이 묻으며 운지는 말했다. "어쨌든 나는 확신해요. 두 명을 부르면 당연히 광무혼을 찾아 내게 될 거예요." 정말 운지는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광무혼과 함께 자라 왔다. 때문에 광무혼이 어디에 숨어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나서서 그를 찾는 일은 모양새가 좋지 않을 것이다. 이미 '겁난유세'란 책은 강호를 몇 번이고 돌아다녔다. 오성 역시 나서게 할 수는 없는 입장. '이런 방법이 가장 좋다. 쌍안만리와 삼안추종! 이 둘을 부르는 방법이!' 등 쪽에 느껴지는 의자의 감촉이 신선했다. 편안하면서도 약간 당겨지는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마치 권력의 감촉 같았다. 3. 운지, 다섯을 모으다 다섯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가장 나이 어린 추운행은 이런 침묵이 매우 싫었다. 하지만 자신이 나서서 입을 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뇌불과 염도, 그리고 취개는 고사하고 세 개의 눈을 달고 앉아 있는 곽창휴마저 강호 배분이 자신을 능가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입 꾹 다물고 앉아 저 자리가 차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구나!' 추운행이 바라보는 의자는 지금 비어 있었다. 직사각형 모양의 좁은 변에 위치하여 주인이 앉는 자리임을 나타내는 의자는 무척


화려했다. 어떤 비단으로 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앉으면 아주 푸근한 감촉을 전해 줄 것만 같았다. 천라성주의 자리인 것이다. 운지가 나타나 그 의자에 앉자 추운행은 매우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비록 삼십을 넘긴 나이지만 이십대 초반처럼 아름다운 여인. 게다가 풍기는 기품이 가히 세속의 인간이 아닌 것만 같았다. "외람되게 천라성을 맡고 있지요. 두 분! 먼 길을 이렇게 오신 것에 감사드려요." 추운행은 이 말이 자신과 곽창휴를 향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두 손을 모으고 말했다. "성주! 무례를 "아니, 운지는

총관이신 쌍안만리께서 일이 바쁘셔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뜻을 거역하여 범하지는 않았는지... 사죄드립니다." 절대 아니에요." 매혹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원한 건 능력이 있는 분이지 꼭 정해진 특정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다행한 일입니다, 성주." 운지는 웃음을 머금고 이 똑똑해 보이는 청년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추운행이 광무혼과 더불어 '겁난유세'를 퍼뜨린 장본인임을 몰랐다. 만일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전 소협이 매우 마음에 들어요. 꼭 광무혼을 찾아 내주실 것이라 믿어요." 이렇게 말한 후 그녀는 시선을 곽창휴에게로 돌렸다. 곽창휴는 아직 이렇다 할 말 없이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운지가 말했다. "삼안추종 곽창휴! 듣자 하니 당신은 특별한 능력이 있어 온도를 볼 수가 있다더군요. 그 기공(奇功)을 이용해 어떠한 것도 추적해 낼 수 있다구요." "알려진 대로요." 곽창휴의 말투는 무척 딱딱했다. 하지만 운지는 미간을 찌푸리지 않았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곽창휴의 능력이지 고분고분한 말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광무혼을 찾아 낼 수도 있겠군요." "그럴 것이오." 운지가 뇌불을 비롯한 세 명을 가리키며 미소 지었다. "여기 계신 세 분께선 추운행 소협과 당신이 절대 광무혼을 찾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전 할 수 있다고 말했죠. 누가 맞고 누가 틀렸나요?" "성주가 맞고 세 사람이 틀렸소." "호호호호, 고마워요. 무척 만족스럽군요, 호호호호..." 아름다운 여인은 웃음 소리마저 아름다운 법인가 보다.


운지의 웃음 소리는 잔잔한 메아리로 방안에 울려 퍼졌다. 돌연 그녀는 웃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곽창휴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제 광무혼을 찾아 주세요, 당장!" * * * "휴우!" 만박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앞에는 아직도 치우지 않은 술병과 안주접시가 가득 쌓인 큰 상이 놓여 있었다. 며칠 전 최일명이란 자를 하루 동안 잡아 두기 위해 벌인 술상이었다. 만박은 꼬박 사흘이 지나도록 그 상을 치우지 않았다. 누군가 아랫사람을 불러 치우도록 시키면 그뿐이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지금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일단 적의 힘을 알아야 합니다. 천라성의 힘을 모른다면 어떤 대책도 소용없습니다. 전 이미 근심수사 종기의 주도 면밀함을 몇 번이고 경험했습니다. 광무혼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휴우, 자네의 말은 옳네. 하지만 자진해서 그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만박은 무척 걱정이 되었다. 광무혼과 같은 자는 절대 일찍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물론 특수한 약품을 건네 주어 인피면구를 손쉽게 만드는 법을 일러주기는 했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가 밀랍인형을 만드는 일에 일가견이 있지 않았다면... 면구가 있으니 그래도...' 이때 하녀 한 명이 들어왔다. 그녀는 무척 놀란 듯했다. "나으리, 아직까지 이것을... 죄송합니다. 급히 치우겠습니다." 만박은 그 말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으음, 다른 생각을 하녀는 서둘러 남은 그리곤 빈 접시들을 와장창! 소리를 내며 접시가

하고 있었다. 그래, 냄새가 심해지는구나. 어서 치우거라." 음식과 술 등을 한곳에 모았다. 포개더니 손에 들었다. 순간, 땅으로 떨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나으리. 접시가 미끄러져서 그만...!" 만박은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굳어 있었다. 접시가 깨지는 것은 무척 불길한 징조였기 때문이다. 물론 만박은 미신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왜 급박한 상황에 처하면 사소한 일에도 신경이 쓰이게 되는 것일까? * * * "시간이 필요합니다. 물론 확약을 드릴 수는 없지만, 가능한 한 짧은 시간 안에 그를 찾아보겠습니다." 추운행이 말했다. 하지만 운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는 지금 당장 그를 찾아 주기를 원해요, 당장!" 이 말은 확실히 억지였다. 때문에 취개가 술을 두 잔 마신 후 혼자말처럼 중얼거린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젠장, 저자들이 무슨 신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군. 성주는 저 둘을 너무 믿는 듯 보이는데...?" 운지는 취개의 그 말을 무시했다. 이미 몇 번이고 빈정거리면서 천라성의 권위에 도전했던 취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빈정거림은 곧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럴 수 있죠, 곽창휴?" 운지의 말에 곽창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오. 하지만 그 대가로 성주께선 무엇을 주실 생각이오?" "아주 깜짝 놀랄 만한 것을 보여 드리죠. 아주 놀랄 만한 것을." 그녀는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러자 한쪽 문이 열리더니 천라성의 무사 두 명이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 사람을 보자 곽창휴의 손이 탁자 아래에 숨겨진 채 부르르 떨렸다. 바로 최일명이었다. 최일명은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운지가 물었다. "당신은 기분이 매우 좋아 보이는군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나요?" "물론 있소. 오늘 이곳까지 따라오는 대가로 이백 냥을 더 준다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소?" 최일명의 싱글벙글하는 웃음에 감염되었는지 운지도 웃음을 지었다. "그렇군요. 확실히 기쁠 만하겠어요." "너무 기쁘다오." "당신의 이름은 최일명(崔一命)! 맞나요?" "맞소. 아버지께서 오직 한 가지의 길을 걸어가는 장부가 되라고 지어 주신 이름이지." "당신은 아홉 달간 오(吳) 학사의 집에서 경호를 해주고 그 대가로 이백칠십 냥을 받았죠, 맞나요?" "틀림없소." "그리고 어떤 노인과 하룻밤 술을 마셔 주는 대가로 오십 냥을 받았구요."


"나 원 참, 이미 말했던 내용 아니오? 그 노인네의 얼굴 생김새까지도 모두 얘기했었잖소?" 운지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에 따라 곽창휴의 몸도 점점 딱딱해져 갔다. 운지가 고개를 돌려 다섯 명을 보며 말했다. "광무혼은 영리하죠. 일단 숨으면 찾기가 어려워요. 방법은 하나뿐이죠. 스스로 찾아오게 하는 것." 곽창휴의 몸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전 천라성의 성주예요. 제가 나설 순 없죠. 때문에 강호에서 추적술에 능한 사람을 불러들이려는 계획을 퍼뜨리면 광무혼은 기회를 포착할 거예요." "어떤 기회 말이오?" 취개의 질문이었다. 운지는 그쪽을 슬쩍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천라성으로 들어와 허실을 탐지할 기회!" 운지는 손을 들어 천장에서 아래로 한 뼘 정도 나와 있는, 밝게 빛나는 쇠막대를 가리켰다. "곽창휴! 저것이 보이나요?" "보이오." "저 물체는 무척 밝아요. 때문에 진짜 곽창휴라면 이마의 눈은 저것 때문에 눈부시겠죠. 한데 당신은 조금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어요." 곽창휴는 도저히 답할 말을 찾을 길이 없었다. 운지가 웃으며 드디어 최후의 쐐기를 박았다. "광무혼! 이곳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뇌불과 염도, 그리고 취개의 놀라움은 컸다. 하지만 곽창휴가 느끼는 놀라움에는 비기지 못할 것이다.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던 곽창휴는 마침내 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면구를 잡았다. 찌직! 접착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곽창휴의 얼굴 가죽이 벗겨져 나갔다. 그리고 드러나는 얼굴은 틀림없는 광무혼이었다. 운지가 생긋 웃었다. "사형께서는 수염을 깎으셨군요." "아직도 사형이라 불러 주는구나, 운지. 언제부터 내 정체를 알고 있었지?" "전 사형을 잘 알아요. 사형께선 어떤 식으로든 본 성에 들어오려 할 거라 짐작했죠. 쌍안만리와 삼안추종 두 사람을 부른 뒤, 저는 생각했죠. 어느쪽을 택해 들어올까?" 운지는 무척 만족스러워 보였다. 누구든 자신의 계획을 성공적으로 결말짓는다면 이런 표정을 짓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쌍안만리는 광명전이라는 세력권에 속해 있어요. 반면 삼안추종 곽창휴는 혼자죠. 당연한 결론이 아닐까요? 전 곽창휴의 주변을 감시시켰죠." 그 뒤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광무혼이 최일명으로 변장하여 나타나 곽창휴를 죽인 후 또다시 곽창휴로 변장해 천라성으로 침입한 것이다. "전 하루 정도를 더 기다리도록 했죠. 그러자 진짜 최일명이 나타났어요. 그에게 물어 본 후 저는 알 수 있었죠. 그를 하루 동안 잡아 둔 노인이 바로 만박이라는 것을." 광무혼은 할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미타불, 정말 대단하오! 우리는 성주의 혜안을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었소이다." 뇌불의 말에 운지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감사해요. 그리고 이곳은 방음이 매우 잘 되는 곳이죠." "무슨 말씀이신지?" "십 년... 아니 정확히 구 년 전을 기억하시나요?" "아미타불, 물론이오. 그때 혈혈수라의 만행은..." "대단했었죠. 때문에 마음껏 싸워 보지 못하셨을 거예요." 뇌불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부끄럽게도, 광무혼이...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은 실로 뜻밖이외다." "그렇소. 하지만 아직도 늦지는 않았소. 무량수불, 희대의 마왕인 혈혈수라 광무혼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강호의 평화는 실로 요원하오." 염도가 도호를 외며 말을 받았다. 광무혼의 안색이 굳어 갔다. 이곳은 천라성이다. 우군은 적고 오직 적들만 많은 상황이었다. 돌연 귓전으로 추운행의 전음이 들려 왔다. "무혼 선배, 어찌하실 겁니까? 너무 갑작스러워서 어떤 대책을 세우기가..." 광무혼도 전음으로 답했다. "가만히 있게. 싸움이 벌어진다면 날 외면하게. 그편이 최선일세." 추운행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광무혼은 지금 호구(虎口)에 뛰어들고 말았다고. 뇌불의 양손이 가슴 어름에서 모아졌다. 빠지직거리는 뇌전지기가 양손에서 일어났다. 그 위세만으로도 광무혼은 알 수 있었다. '무공이 더욱 진전됐구나. 예전과는 판이하다.' 염도의 열화지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글거리는 뜨거운 기운에 주위의 사물들은 금세라도 녹아 내릴 듯했다. 취개는 계속해서 술만 마셔대고 있었다. 저렇게 들어간 술은 주전(酒箭)으로 변해 쏘아져 올 것이다. 광무혼은 신경을 더욱 날카롭게 세웠다. 그의 특기는 검법이었지만 지금 그에게는 반 동강난 검조차 없었다. 곽창휴로 변장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추운행은 자신의 허리에 찬 검에 몇 번이고 손을 댔다가 떼었다. 그는 검을 광무혼에게 건네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나선다면 자신마저 죽고 말 것이다. 광무혼이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지녔다고 하나, 상대는 오성 중의 셋이다. 게다가 그들을 이긴다 하더라도 천라성이라는 무시무시한 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추운행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마침내 그의 손이 검을 꽉 움켜쥐었다. 당장 죽는 한이 있더라도 광무혼을 도와 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는 평생을 후회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문득 어린 시절 단 한 번 보았던 숙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숙부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었다. -인생에는 하나의 고개[一嶺]가 있다. 그것을 넘는 것이 바로 인생에 주어진 유일한 명[一命]이다. 하나 명심할 것은 절대 비겁하게 그것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추운행의 앞에 주어진 고개는 선택의 고개였다. 광무혼을 내버려두고 자신은 사느냐, 아니면 같이 죽느냐? 일단 결심하고 나자 추운행은 마음이 더없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그의 두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교차했다. 오른손은 발보다도 더욱 빨리 움직이면서 검을 광무혼을 향해 쏘아 냈다. 추운행은 속으로 생각했다. '검을 가져 오길 잘했다.' 그랬다. 광무혼은 추운행에게 충천검(衝天劍)을 맡기면서 항상 지니고 다니기를 신신당부했었다. 광무혼을 찔러 가는 검! 그러나 그것은 손잡이부터였다. 뇌불이 놀란 외침을 토해 냈다. "한패였구나, 추운행!" 그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충천검은 광무혼의 손에 들어갔고, 푸른빛의 서광을 서리서리 피워올리기 시작했다. 창궁검법(蒼穹劍法)!


* * * 종기는 술을 시켰다. 그의 신분으로서 이런 허름한 시장터의 주점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은 사실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이런 곳보다 적당한 곳은 없었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 말이 많아진다. 생각하는 바를 여과없이 털어놓게 마련이었다. 탁! 점소이가 와서 술병과 잔이 놓인 소반을 던지듯 놓고 갔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종기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가 미워하는 것은 강자(强者)이지, 점소이와 같은 약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 종기가 들어올 땐 한산했던 주점이 곧 장에서 물건을 사고 팔아 기분이 좋아진 사람들로 차기 시작했다. 그들 중 문득 두 사내의 대화가 종기의 청각에 잡혔다. "추칠, 자네 의견은 어떤가? 그 책 내용 말일세. 사실일까?" "글쎄... 난 별로 믿기지가 않아. 혈혈수라 광무혼! 그 악마 같은 놈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꾸며댄 얘기일지도 모르지. 구엽, 자네 생각은 어때?" "나도... 책의 내용을 전적으로 믿진 않지만 약간의 의심은 드네. 무엇보다 천지회의 일이라든지 만유 어른의 죽음, 그리고 선향 궁주의 실종을 생각한다면 조금..." 한참 동안 쉬었다가 구엽이란 사내가 덧붙였다. "그런 일들을 꾸며 내어 말하기란 쉽지 않을 걸세." "으음, 일리가 있구먼. 하긴 나도 의심 가는 점이 없는 건 아닐세. 우선 왜 오성께선 천라성이란 존재를 세간에 알리지 않았는지 의혹이 드네." "내 말이 그 말이야. 어딘가 구린 부분이 없다면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올바른 군자의 태도일세. 숨기는 건 곧 치부가 있다는 의미이지." 종기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오랜 계획 끝에 강자들을 제거하고 약자들의 세상을 만들었다. 오성련과 천라성은 그런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런데... '광무혼! 너의 출현으로 내가 만든 세상이 다시 흔들리고 있구나. 간과하지 않겠다!' 흔들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질 것이다. 좋지 않은 싹이 트려 하면 빨리 제거할수록 도움이 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운지의 이번 계획은 종기의 마음에 쏙 들었다. 종기는 푸근한 마음으로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워 버렸다. 싼 술은 비록 독하긴 하지만 뱃속을 짜르르하게 울리는 맛이 있다. 이때 추칠이라는 사내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근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딜 갔나?" * * * "용을 잡아 가두니 천지가 그 속에 들어오리라. 천불제룡(千佛制龍)!"


십이금룡수 중의 절초를 펼치며 뇌불의 손이 가장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그의 손그림자가 수없는 잔상을 만들어 내며 광무혼의 전신을 압박해들어왔다. 그것들은 대부분 허상(虛像)에 불과했지만 광무혼이 방심한다면 즉시 실상(實像)으로 변해 그의 전신 뼈를 으깰 것이다. 염도(炎道) 역시 쉬고 있지만은 않았다. 극염자하진기의 보랏빛 서광이 전신을 덮으면서, 비단줄기처럼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장력이 양손에서 번갈아 뻗어 나왔다. 면장(綿掌)이 일단 염도의 손에서 펼쳐지자 그것은 곧 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일 만한 절기가 되는 것이다. 어지럽게 날아오는 손그림자! 그 속을 뚫고 가슴과 배를 노리는 비단줄기 같은 장력! 광무혼의 충천검에 어린 푸른빛 서광이 더욱 진해졌다. 우우웅! 그의 검이 진동하는 듯하더니 급기야 하늘빛의 경력을 사방으로 토해 내기 시작했다. "파랑이 일어나매 사해가 덮이는도다. 파랑만리세(波浪萬里勢)!" 콰아아아!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연이어지는 하늘빛 경력이 십이금룡수와 면장에 대항해 가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파도가 달려가는 모습 같았다. "우욱! 천불제룡이 부서진다..." 뇌불의 놀란 음성이 들렸다. 그가 만들어 낸 일천 개의 손그림자는 모두 광무혼이 쏘아 낸 파랑 속에서 스러지고 있었다. 염도의 면장 역시 그 연결이 가닥가닥 끊어짐을 느꼈다. "이럴 수가! 저, 정말로 오성은 십절(十絶)을 능가하지 못하는가?" 염도는 탄식을 내뱉으며 극염자하진기의 기운을 더욱 강하게 끌어올렸다. 극성의 기운이 전신으로 유포되자 그의 전신은 마치 자색의 노을 속에서 불타고 있는 듯 보였다. 무당의 장기는 역시 검이다. 하지만 염도는 검을 쓰지 않았으며 무당의 자랑이라는 태극혜검도 보여 주지 않았다. 염도의 전신에 어린 극염자하진기가 점차 오른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른손에 어린 보랏빛 서기가 점점 짙어지더니 어느새 유형의 형상을 갖추어 가는 것이 아닌가? 광무혼이 검을 뒤집으며 외쳤다. "이기성강(以氣成)! 무형의 진기를 유형의 물체로 형상화시키다니!" 그랬다.


염도가 지금 만들어 낸 것은 극염자하진기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검이었던 것이다. 그 위력을 잘 알고 있는 광무혼은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충천검을 곧바로 앞으로 찔러 가면서 염도의 오른쪽 어깨를 노렸다. 그것을 보고도 막기 힘들 정도로 빠른 공격이었다. "뇌전은 곧 빛살이니 혼조차 피하지 못하리라. 뇌전경혼세!" 파아아! 번개가 내달리듯 뻗어 나가는 쾌속한 검기! 금세라도 염도의 가슴을 찔러 피를 솟구치게 만들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여기에도 있다, 광무혼!" 뇌불의 우렁찬 음성이 귓속에 울렸다. 말과 동시에 막대한 경력의 폭풍이 광무혼의 충천검을 부러뜨릴 듯 밀어닥쳤다. 소매! 뇌불의 치렁한 소매가 마치 실내의 모든 것을 먼지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듯 휘둘러 오고 있었다. "우주는 법리를 따라 돌되, 한 쌍의 소매가 법리마저 가두는구나. 반선수!" 파바바박! 소매라기보다는 한 쌍의 거대한 쇠망과 같았다. 광무혼은 검세의 끝이 그 엄청난 힘의 공세 앞에 옆으로 틀어짐을 보면서 크게 외쳤다. "방해하지 마라, 뇌불!" 광무혼의 오른손이 옆으로 뻗었다. 옥수검 특유의 무령장(武靈掌)이 뻗어 나가며 뇌불의 반선수를 막아 갔다. 파지지직! 뇌불의 반선수가 갈 길이 막히자 몸부림치면서 뇌전을 쏘아 내고 있었다. 그 순간 광무혼의 충천검은 마침내 염도의 오른쪽 어깨를 찔렀다. 푹! '애초에 의도했던 위치는 아니지만 그래도 많이 벗어나지는 않았다.' 광무혼의 생각은 정확했다. 보라! 염도가 만들어 낸 진기의 검이 흔들리고 있지 않는가? 염도는 타격을 받은 것이다. "악적, 광무혼! 강호의 도의를 위해 널 살려 둘 수가 없다. 아미타불!" 뇌불이 다시 진기를 휘감으며 외쳤다. 그의 전신에는 반야뇌정력이 극성으로 어리며 정전기와 같은 불꽃을 만들어 냈다. 뇌불의 눈은 굳은 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미 광무혼이 염도의 극염자하진기를 깨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살려 둘 수 없다. 또다시 무혼지겁과 같은 겁난이 일어나게 할 수는 없다.' 내심 외치며 뇌불은 몸을 띄웠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아홉으로 갈라지는 연대구품을 형상화시켰다. 그리고 앞으로 뻗어지는 장력! '여기서 죽어도 좋다. 그러나 두 번 다시 강호가 피로 물들게 하지는 않겠다.' 전신의 진기가 모두 솟구치고, 단전마저 진동하면서 진원지기가 함께 빠져 나갔다. 이 일장이 성공해도 뇌불은 폐인이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이 악의 씨를 제거한다면 강호에서 얼마나 많은 목숨이 살아남겠는가? 콰아아아! 마치 태양과 같은 서광이 뇌불의 양손에서 일어나며 광무혼을 향해 치달렸다. "수미태양력!" 그것은 정말로 태양이었다. 앞을 막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모두 파괴해 버리려는 죽음의 태양! 광무혼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본능은 끊임없이 위험하니 피하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理性)은 도피를 거부했다. 뇌불은 지금 자신을 살인자로, 겁난의 원흉으로 알고 있다. 게다가 뇌불 자신은 스스로를 강호의 정의를 수호하는 협인이라 생각할 것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솟구쳤다. 뇌불과 자신은 뭐가 다르단 말인가? 둘 다 정의를 위한다는 신념으로 이제껏 살아 왔으되, 그들에게 남은 것은 처절한 살인과 죄악에 불과했다. 충천검을 쥔 왼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는 가슴 앞에 바로 세운 검을 곧장 앞으로 내찔렀다. 터질 듯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던 창궁진기가 검이라는 통로를 제공받자 물밀듯 밀려 나갔다. "뇌성이 울리매 혼마저 스러지리라. 벽력쇄혼세!" 꽈르르릉! 창궁검법 중 위력 면에서는 가장 강하다는 벽력쇄혼세가 순간이었다. 두 줄기의 뇌전 같은 경력은 그렇게 허공에서 충돌했다.

극성으로

전개되는

콰르르회오리가 미친 듯 일어났다. 경력에 스친 바닥이 푹푹 파이면서 일어난 흙먼지가 시야를 자욱이 막아 버렸다. "우웃!" "가, 가공하다!" 저절로 놀란 외침을 토해 내면서 추운행은 다섯 걸음 뒤로 물러났다.


운지의 안색도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앞으로 내밀어진 그녀의 한 손에서는 둥근 공 모양의 진기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광무혼과 뇌불이 일으키는 흙바람과 경력의 회오리에서 그녀를 보호해 주고 있긴 했지만, 조금씩 새어 들어오는 압력만으로도 그녀의 얼굴에 가느다란 핏줄기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흙먼지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운지의 걷히는 한눈에 그러나 먼지가 뇌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먼지 사이로 검은 피를 마구 토해 내는 광무혼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알 수 있는 중상. 운지의 미소는 점점 희미해졌다. 완전히 걷힌 곳.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벽! 운남의 대리석으로 만들어 쇠보다도 단단하다는 벽! 그곳을 한 치 가까이 뚫고 뇌불의 몸이 박혀 있었다. 입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오는 채... "아미타불... 아미..." 뇌불의 눈빛은 안타까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무능을 원망했다. 가까스로 오른손을 뻗어 광무혼을 가리키면서 뇌불은 말했다. "너, 널 살려 둔 게... 천하의 안녕이 위협... 아, 아미타불..." 뇌불은 눈을 감았다. 그의 표정은 천하를 위해 악을 제거하지 못한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누가 진정한 악인인가? 어쩌면 광무혼과 뇌불, 둘 다 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광무혼은 구토가 일어남을 느꼈다. 끝없는 구토. 자신의 모든 것을 토해 낼 것 같은 그런 구토. "뇌불... 뇌불 도우..." 염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십 년 가까이 함께 지내 온 그. 비록 걷는 길은 달랐지만 그는... '나의 벗이었다!' 분노! 마음을 태우고 끝내는 몸마저 활활 태워 버릴 분노가 염도의 몸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극염자하진기의 결집으로 만들어지는 진기의 검, 열화자하검! 타격을 받아 희미해진 검의 형상이 다시 또렷해지고 있었다. 염도는 단전 부위가 미친 듯이 진동함을 느꼈다. 그렇다. 그 또한 진원지기를 끌어올린 것이다. 사용하고 나면 설사 이기더라도 폐인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수법이었다.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염도는 오히려 쾌감을 느꼈다. 자신의 고통과 죽음은 벗을 위함이요, 천하를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화르르르! 불로 이루어진 검이 드디어 본 위용을 드러냈다. 목적은 오직 광무혼을 죽이기 위함. "검이 움직이매 하늘과 땅이 갈라지리라. 일검건곤분!" 염도의 외침. 그리고 내리쳐 오는 열화자하검. 그러나 광무혼은 움직이지 않았다.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는 것인가? 그는 허리를 숙인 채 피만 토해 낼 뿐이었다. 그리하여 염도의 진기검이 곧 머리를 가를 바로 그 순간! 광무혼은 담담히 외쳤다. "축영단공!" 공간을 가르는 신법, 축영단공! "헛!" 눈앞의 광무혼이 허깨비처럼 꺼진다 싶은 순간, 염도는 바로 옆쪽에서 뭔가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충천검! 믿을 수 없게도 그건 광무혼의 충천검이었다. 섬뜩한 통증. 허리 부분에 느낀 그 통증이 염도가 살아 느낀 마지막 감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에 광무혼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거기 새겨진 형언할 수 없는 고뇌와 고통, 그리고 원한. 무얼까? 저건 또 무어란 말인가? 4. 한 사람의 죽음. 새로운 시작 "하아, 이거 참!" 운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원지기까지 쏟아 내며 싸운 뇌불과 염도를 광무혼은 혼자서 이겨 낸 것이 아닌가? "대단해요, 정말! 어쨌든 감탄하지 않을 수 없군요."


순간 광무혼의 몸이 휘청했다. 사실 여태껏 서 있던 것만 해도 기적이라 해야 할 것이다. 뇌불의 수미태양력과 맞부딪치면서 이미 내장들이 갈가리 찢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추운행이 급히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아직은... 견딜 만하지. 이런 중상도... 많이 당하면 습관이 된다네." 광무혼의 말은 쓸쓸한 자조가 섞여 있어 듣는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흔들었다. 운지의 눈빛도 조금 흔들렸다. 그러나 곧 다시 차가워졌다. "좋소. 나 천라성주는 경의를 표하는 바요. 하지만 오성은 아직 한 사람이 남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오." 모든 사람의 눈이 취개에게로 쏠렸다. 심지어는 구석에 머리를 박고 숨어 있던 최일명도 취개를 쳐다보고 있었다. 술 마시는 취개. "취개!" 운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저들을 죽이세요." 광무혼은 눈을 감고 말았다. 추운행의 몸도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그 역시 취개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광무혼이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지금, 취개의 공격을 받는다면 자신들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임도. "안 들리나요? 저들을 죽여요, 취개!" 운지의 앙칼진 말에 광무혼은 다시 눈을 떴다. 취개는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오직 술만 마실 뿐이었다. 취개의 눈이 문득 광무혼에게로 향했다. "자네가 고황과 벌인 한판의 도박은 참 재미있었어." 취개의 눈은 몽롱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는 취개의 소문은 과장이었던가? "고황은 자네의 적수가 아니었지. 한데도 자넨 정당하게 싸움을 걸었었네. 좋았어, 참 좋았다구." 그는 품에서 두 권의 책을 꺼냈다. 운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은 '겁난유세'였기 때문이다. "난 나름대로 여기저기 조사를 해보았네. 해서 나는... 믿는다네. 이 내용을 말일세." 추운행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스칠 때 운지의 얼굴은 그와 반대로 차가워졌다.


그녀는 날카롭게 외쳤다. "취개, 당신은 금제(禁制)를 잊었나요?" "잊지 않고 있소. 한시도 잊은 날이 없었지." 취개는 절대 잊지 않았다. 어린 시절, 무공을 가려쳐 주던 종기의 모습을... -너희는 악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 만일 이러한 무공을 익힌 너희들이 악에 물든다면 천하는 피에 적셔지기 때문이다. 해서 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 금제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때 우린 기꺼이 받아들였었지.' 다시 한 모금의 술을 더 마셨다. 뱃속이 불에 타는 듯 뜨거웠다. 알 수 있었다. 금제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임을. "취개, 벗어나지 못해요. 말을 듣지 않으면 당신은 죽게 될 거라구요!" 운지의 목소리가 한층 더 차가워졌다. 그녀의 눈에서는 표현하기 힘든 기이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수라마교의 비전이 시전되는 모습이었다. 취개의 뱃속에는 심령의 통제로 활성화되는 파열고(破裂鼓)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취개는 이빨을 악 다물고 있었다. 뚝! 뚜뚝! 뼈마디 부러지는 소리가 그의 몸 곳곳에서 들렸다.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취개가 술의 힘을 빌려 고통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광무혼! 내... 말을 듣고 있소, 광무혼?" 취개의 음성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 떨리고 있었다. 광무혼은 한숨을 금할 길이 없었다. "듣고 있소." "나는... 참으로 유감으로 생각하오. 다, 당신과 우리 오절들은... 좋은 친구가 되, 될 수..." "다음 번에는, 다음 번에는 꼭 그러기를 바라오. 그때 한 번 통쾌하게 마셔 봅시다." 취개의 입술이 약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웃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은 듯 부들거리기만 했다. 그리고, 그리고... 퍽! 흡사 잘 익은 수박이 깨어져 나가듯 취개의 몸이 터져 나갔다. 육편이 마구 날렸다.


피와 범벅이 된 내장이 광무혼의 전신을 덮쳤다. 그러나 광무혼은 더럽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푸근했다. 취개의 땟물에 젖은 얼굴이 또렷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회의를 느껴 평생을 술과 더불어 살았다. '십 년간 잠들려 했던 나와 같다. 취개, 그대는...' 취개가 항상 마시고 다니던 술호로의 주향이 아직도 코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이... 이, 죽인다! 모두 죽이겠어...!" 한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운지. 취개를 죽인 건 그녀였지만 충격을 받은 사람도 그녀인 것 같았다. 타오르듯 붉은 얼굴로 그녀는 부들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분노였으며 또한 살기였다. "아직 내가 남아 있다. 나 또한 너희 모두를 죽일 수 있다." 사실이었다. 광무혼도 충분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운지!" "부르지 마라! 운지는 고함을 그녀의 손에서 광무혼이 놀란

난 지금 네 사매가 아니다, 광무혼. 내 이름을 부르지 마라!" 지르며 양손을 앞으로 올렸다. 검붉은 강기가 일어나 회오리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외침을 토해 냈다.

"수라강기! 혈마수라결을..." "흥, 위력도 들었겠지? 비록 오 성에 불과하지만 너흰 살아남지 못한다, 절대로!" 검붉은 강기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광무혼은 눈을 감아 버렸다. 자신과 운지는 서로 나름대로의 안배를 꾸몄다. 그 안배들은 서로 엉켜들어 지금과 같은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이제 모든 것의 끝을 정할 때가 온 것이다. 콰아아눈을 감은 광무혼을 향해 운지의 장력이 맹렬히 쏘아 나갔다. 그 위력은 가공스러웠다. 하지만 광무혼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고, 그를 부축하고 있는 추운행은 움직이지 않았다. 운지의 수라강기! * * * 이곳은 허름한 주루였다. 종기는 아직도 앉아 있었다. 비록 술을 시키긴 했지만 딱 두 잔을 마셨을 뿐이다.


그의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술꾼 주칠이 했던 질문.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갔지? 종기는 문득 시간의 위력을 실감했다. '내가 어떻게 그들을 잊고 있었단 말인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자. 그럼에도 여태껏 강호에 나타나지 않고 있는 추일령을 생각하는 것이다. 실종된 선향 온옥교는 걱정할 게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할 테니까. 뱃속에 든 파열고(破裂鼓)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손톱보다 작은 북인 파열고는 일단 몸 속에 들어가면 배출되지 않고 계속 남는다. 그리고 시전자의 심령 제어에 따라 언제든 울리거나 터질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추일령은 다르다. 내겐 그를 금제할 수단이 아무것도 없다.' 구 년의 세월이다. 그 동안 계속 추적했건만 종적이 발견되지 않자 그만 무심히 잊고 살아 왔던 것이다. 어쩌면 광무혼이란 존재에만 너무 큰 신경을 쓴 탓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실수는 실수. 이때 종기는 문득 운지가 떠올랐다. 그녀는 광무혼을 천라성으로 끌어들일 안배를 했고, 또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계산에서 빠뜨린 변수가 있다면 아무리 치밀한 준비도 물거품이 될 것이다. 종기의 손발이 차가워졌다. 그는 가만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천라성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천 길의 절벽 위에 선 듯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운지는 하지만 말았던 운지는 그녀의

광무혼을 죽이기 위해 강기를 쏘아 보냈다. 광무혼은 죽지 않았다. 운지의 경력은 광무혼의 바로 앞에서 사그라지고 것이다. 눈을 부릅떴다. 손끝이 떨리는 것은 멀리서도 확연히 보였다.

검! 날카로운 검이 운지의 왼쪽 허리를 꿰뚫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그녀는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검을 찌른 사람은 바로 최일명(崔一命)이었다. "네... 네가, 네놈 따위가 어떻게 감히 날..."


운지는 불신의 눈빛으로 최일명을 쳐다보았다. 최일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던 모습은 지금의 그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매우 안정되어 있었으며 눈빛의 흔들림도 전혀 없었다. 고수만이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법이다. 운지는 비로소 그가 누군지를 알게 되었다. 추운행은 최일명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푸근한 마음으로 숙부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최일명(崔一命)의 '일명'이란 바로 추일령(秋一嶺)의 '일령'임을 그는 조금 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무지막지한 싸움의 와중에도 최일명이 밖으로 달아나지 않는 것을 보고서. "고개는 넘으셨습니까?" 추일령은 얼굴에 붙어 있던 면구를 잡아떼면서 대답했다. "넘고 있다. 내 생에서 가장 힘든 고개는 바로 무혼지겁이었다. 친구가 친구를 죽게 했으니..." 힐끔, 추일령의 시선이 광무혼에게로 향했다. 그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하지만 난 이미 무혼을 용서했다. 보다 큰 분노는 천라성으로 향한 것이었다. 난 그 분노를 삭이며 지난 구 년간 고개를 올라갔었다." "이젠 정상에 선 셈이로군요." 추일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참혼귀검은 웅웅거리며 오 성에 불과한 운지의 혈마수라결을 부숴 나가고 있었다. "이젠 고개 위에 서 있다. 하지만 내려가는 일이 남았다. 그것은 더욱 힘들 것이다." 추일령은 검을 뽑았다. 여인을 뒤에서 공격한 비겁한 행동이었지만 그는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 동안 그는 나이를 먹었고 또한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비겁하지 못해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본다면 조금 비겁한 것도 결국 옳은 것이란 점을. 운지가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허리에서는 아직도 쉴새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추일령이 시전한 검기가 남아 살이 아무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운지의 얼굴은 갈수록 창백해졌다. 우습게도 그럴수록 운지의 아름다움은 점점 더해졌다. 죽기 전 여인은 가장 아름답다던가? 그래서 미인은 일찍 죽음을 택한다던가?


운지는 광무혼을 쳐다보았다. 광무혼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왜 그랬어? 광무혼의 눈빛은 그렇게 소리쳐 묻는 듯했다. 운지는 얼른 눈을 감아 버렸다. 그녀는 광무혼의 질문을 받고 싶지 않았으며, 심지어 어떤 변명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그녀는 말했다. "고개를 내려가는 것. 할아버지... 근심수사 종기를 상대하는 건 힘든 정도가 아닐 거예요." "알고 있다. 하지만 난 꼭 해낼 것이다." 광무혼의 어조는 매우 굳건했다. '그라면 어쩌면 해낼지도 모르지.' 피가 더욱 많이 빠져 나갔다. 힘도 덩달아 빠져 앉아 있을 기력마저 사라지고 있었다. 운지는 천천히 옆으로 누웠다. 편안했다. '생각하면 참 힘들게 살아 왔구나, 나는...' 어둠 속에서 광무혼과 함께 뛰어 놀던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가 참 좋았다는 생각을 했다. 점점 정신이 흐려졌다. 하지만 그 추억 속의 모습만은 오히려 또렷해졌다. "어쩌면... 어쩌면요..." 운지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너무 피곤했고, 너무 지쳐 있었다. 운지의 고개가 옆으로 숙여졌다. '어쩌면 말예요, 사형에게 약혼자만 생기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할아버지를 꼭 말렸을는지도...' 마지막 말은 마음속에만 새겨졌다. 운지. 어린 시절 이름은 행아(杏兒). 동정호반에서 뛰놀던 발랄한 소녀였으나 도적들에게 겁탈을 당한 후 세상에 복수를 맹서했던 소녀. 제이대 천라성주가 죽었다. 꽈르릉!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이 울기 시작했다.


비가 천지를 뒤덮을 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희뿌연 우연(雨煙)이 온 누리를 메웠다. 모두의 마음속에도 그 우연이 스며드는 듯했다. * * * 슈아앙! 달려가는, 아니 날아가는 그림자. 종기의 신형은 흡사 비의 장막을 가르는 큰 칼날과도 같았다. 내리는 비는 그의 몸 석 자 밖에서 튕겨 나가 버렸으며, 그가 지나간 자리는 일시지간 진공이 생겨 버렸다. 모여드는 빗방울이 만들어 내는 소용돌이. 그것을 뒤로하며 종기는 달렸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행아!' 그녀야말로 종기에겐 유일한 친인의 이름인 것이다. "멈춰라, 감히!" 외치며 새노반과 습호리가 날아올랐다. 운지의 처소 밖을 지키고 있던 둘은 막강한 공력을 쏟아 부으며 다짜고짜 밀고 들어오는 그림자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한심한 놈들!" 노한 음성과 함께 그림자의 오른손이 슬쩍 한 뼘 정도 움직이자 그토록 강맹했던 둘의 공격이 모래에 스며드는 물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우웃!" "이, 이럴 수가...!" 경악하며 허공에서 쭈욱 이삼 장씩 물러난 둘은 겨우 몸을 세울 수 있었다. 그제서야 그림자의 신분을 알 수 있었다. "태, 태상성주, 어인 일로...?" 종기는 대답 대신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휘우웅회오리처럼 맴도는 불꽃이 성주 집무실의 문을 향해 뻗어 나갔다. 염도의 극염자하진기. 하지만 놀랄 것은 없었다. 오절의 모든 무공은 종기가 가르친 것이므로. 펑! 문짝이 박살이 나 날아갔다. 파편은 바닥에 떨어지기 전 이미 불타 올라 사라지고 있었다. 염도의 그것보다 오히려 몇 배 뛰어난 위력이었다.


한바탕의 바람이 가라앉으면서 실내의 상황이 드러났다. 운지는 성주의 자리인 태사의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있던 습호리와 새노반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종기의 안색은 풀어지지 않았다. 운지의 몸에서 한 점의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기는 바닥을 미끄러져 실내로 들어갔다. 뇌불과 염도는 단정히 가부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마찬가지로 시체. 세 시체가 품 자를 이루며 앉아 있는 것이다. 그 삼각형의 중앙 부분, 바닥에 새겨져 있는 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광무혼(廣武魂)> 몰아치는 비바람. 일백 기의 기마대가 한 장원을 공격했다. 비와 바람, 그리고 천둥 번개 속에 장원의 담장은 무너지고 기름이 뿌려진 건물들은 불타 올랐다. 그러나 아무도 죽지는 않았다. 장원에 숨어 지내던 만박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고, 다른 사람들 역시 종적이 보이지 않았다. 불길에 반사되어 얼굴이 붉게 물든 자들. 기마대를 지휘하는 두 사람의 얼굴은 딱딱했다. 새노반과 습호리. 그들은 태상성주 종기의 분노를 잘 알고 있었다. -죽여라!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찾아 죽여 버려라! 종기의 분노는 강호 전체를 뒤엎고도 남음이 있었다. 천라성의 힘은 거대했다. 그러나 이미 구 년 전 무혼지겁으로 멸절된 강호의 힘은 결코 천라성의 그것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휘우우웅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어와 불길을 휘감았다. 비를 쏟아 내는 먹구름은 미친 듯이 흐르고... 겁난(劫亂), 새로운 겁난을 예언하는 듯했다. * * * "천라성은 세 개의 전(殿)과 네 개의 각(閣), 그리고 두 개의 특수한 기(旗)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은 만박이었다. 듣는 사람은 아주 많았다. 광무혼과 추운행, 추대, 추일령, 북쾌, 북취명, 그리고 춘추서원의 단심서생 최오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의 분위기는 매우 무거웠다. 추대가 물었다.


"삼전과 사각, 한곳의 힘을 말한다면 어느 정도입니까?" "삼전과 사각의 힘은 비슷합니다. 성주 직속인 영웅기(英雄旗)와 충혼기(忠魂旗)는 오히려 높다 할 수 있습니다. 그들 각각의 힘을 말하자면..." 만박이 조금 망설이더니 추대를 보았다. "죄송하지만 곧바로 광명전과 비교하여 말해도 괜찮겠습니까?" 만박이 양해를 구하자 추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삼전의 하나인 추명전(追命殿)은 천라성의 적으로 간주되는 자들을 추적, 살해하는 임무를 띠고 있습니다. 전주는 추명혈왕(追命血王)이라는 자입니다. 이들의 힘이라면 현재의 광명전과 능히 칠 주야를 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일개 전을 멸망시키기 위해 우리 광명전의 전력이 필요하단 말씀입니까? 게다가 칠 일이란 시간마저!" "잘못 이해하셨습니다." 만박이 고개를 흔들었다. "칠 주야만에 패하는 쪽은 광명전입니다." 믿기 힘든 분석이 아닌가? 광명전은 현재 강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힘을 갖고 있는 문파였다. 한데 그 힘으로 천라성의 일개 하부조직인 추명전(追命殿)조차 당해 낼 수 없단 말인가? 경악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믿을 수 없군, 실로 믿을 수 없어!" 하지만 믿어야만 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만박의 분석이었기 때문이다. 중인들은 지난 시간 동안 만박의 능력에 감탄하여 그를 극도로 신뢰하고 있었다. 지배적인 감정이 좌중을 압도했다. 그건 천라성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런 조직이 일곱 개. 게다가 영웅기와 충혼기는 오히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 숨겨진 고수들을 감안한다면 실로 엄청나군, 엄청나!" 추일명이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마음이 무거운 것이다. "구파일방은 사실상 천라성의 하부조직이었소. 게다가 오성이 죽고 없는 지금 그 힘은 매우 약하오. 따라서 결론은..." 눈을 번쩍 뜬 추일명이 말을 이었다. "천라성을 당해 낼 수 있는 세력이 강호에 없단 말씀이로군요." "단일 세력으로선 그렇습니다." "모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지금 강호에서 힘을 쓰고 있는 월곡, 금룡궁, 유령전 등을 모두 모아도 천라성을 당해 내기란 요원하잖습니까?"


"한 가지 길이 있습니다." 만박이 확신하는 듯 말했다. "구파일방을 끌어들이는 겁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은 광무혼을 믿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겁난유세'가 강호에 퍼졌다더라도. 게다가 뇌불과 염도의 죽음은 우리의 짓이기도 하니..." "하지만 달라질 걸세." 갑작스런 말에 모두가 그쪽을 돌아보았다. 광무혼이 입을 연 것이다. "그들은 달라질 거야. 그것이 이번 계획의 요체이기도 하지." 중인들의 눈에 의문의 빛이 떠올랐다. 무슨 소리일까? * * * 갑작스럽게 불타 버린 장원. 그 장원은 대대로 황실에서 벼슬을 지낸 유(劉)씨 집안의 소유였다. 때문에 관가에서 조사를 나온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생사감찰(生死監察)이란 별호를 지닌 곽추엽 포두(捕頭)는 면밀한 조사 끝에 무림인의 소행이란 결론을 내렸다. 대체적으로 황실은 무림의 일에 간섭하기를 싫어한다. 인명 피해도 없었고, 장원 역시 오랜 세월 동안 비워 둔 것이어서 유(劉)씨 집안에서는 모두 없었던 일로 하고 잊어버리기로 결론을 내렸다. 조사를 끝내고 철수가 예정된 바로 전날. 소피를 보러 뒷간을 찾던 생사감찰 곽추엽은 누군가에게 피습을 당했다. 세 번의 부딪침 끝에 상대는 곽추엽의 왼팔에 긴 검흔을 남겨 놓고 도주하고... 곽추엽은 상처 입은 왼팔을 붕대로 감으며 분노에 몸을 떨었다. 비록 황실에 몸담고 있으나 원래가 무림인 출신인 곽추엽. 그는 황궁으로 돌아가기 전, 주변 무림세가와 문파에게 이 일에 대한 도움을 의뢰했다. 마침 화산파와 공동파가 그곳에서 가까워 그 일에 대한 조사를 맡을 것을 수락했다. 열흘 후. 화산의 장로 죽매화검(竹梅花劍) 이능운(李能雲)이 단서를 발견했다. 장원의 방화에 천라성의 개입이 있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다음날 이능운은 시체로 발견되고, 그의 제자 일곱 역시 목이 잘린 채 거리에 효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천라성의 이러한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이능운의 연락은 화산 특유의 전신법을 거쳐 이미 본산(本山)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죽고 소식만 남은 셈이다. 화산이 분노한 것은 당연한 일. 천라성에 정식으로 항의하기 위한 사자가 그날 저녁 화산장문인의 친서를 갖고 바로


출발했다. 그러나 그는 천라성에 도착하지 못했다. 백 명의 기마대. 추명혈왕이 이끄는 추명전의 주력군과 마주친 그의 목은 미처 말을 꺼내 보지도 못한 채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화산은 멸망했다. 전각들은 불에 타올랐고, 심지어 단 한 사람도 생존하지 못한 듯했다. 다음날 일찍 화산파와 혈맹의 관계를 맺고 있던 비응방(飛鷹幇)이 달려왔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비응방주 금무성이 발견한 것은 불에 타고 남은 재뿐이었다. 그 재 속에서 미약한 신음성을 울리는 단 한 사람. 화산의 대제자 매엽도는 금무성에게 단 한 마디만을 남긴 후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천라성. 은거했던 화산의 전대 장로들이 곳곳에서 달려왔다. 또한 천하 각지에 퍼져 있던 속가제자들도 저마다 제자를 이끌로 몰려왔다. 비응방주 금무성은 그들과 함께 공동( )으로 달려갔다. 하나... 망연자실(茫然自失)! 달리 어떤 표현이 있을까? 공동의 장문인 신풍일월장(神風日月掌) 두맹군(斗猛君)은 천라성 추명전의 부전주인 쌍겸랑(雙鎌郞)과 동귀어진한 시체로 싸늘한 바닥에 누워 있었다. 공동 역시 멸망한 것이다. 넋을 잃고 서 있는 일행의 머리 위로 철시가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 추명전의 공격이었다. 이어지는 공격과 도주. 끊임없는 죽음과 죽음의 행렬. 화산 전대 장로들의 놀라운 무공과 살신성인의 죽음으로 일행은 길을 뚫었다. 하지만 도주가 쉽지만은 않았다. 추명전의 힘은 알려진 것보다 열 배는 더 가공스러웠다. 하늘이여, 어찌 천라성이 이런 짓을...! 당대의 비응방주인 혈조무적(血爪無敵) 금무성(金舞聖)은 자신의 눈을 믿고 싶지 않았다. 칠 주야를 이은 도주와 추격! 그 끝에 숭산 소림사에 도착한 사람은 오직 금무성 하나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놀란 소림 고수들이 금무성의 주위에 분분히 떨어져 내리는 모습.


그들이 호통을 치면서 사방을 경계하고, 추격전 동안 자신들도 상당한 피해를 입은 추명전주 추명혈왕이 어쩔 수 없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금무성은 혼절했다. 그는 오른팔이 잘려 나가 있었고, 당시까지도 피가 멈추지 않았었다 한다. 금무성은 이틀 후에 죽었다. 그러나 죽기 전 소림 약왕전(藥王殿)의 의술로 인해 단 한 번 정신을 차렸고 천라성의 일을 말해 주었다. 소림은 당황하고 분노했다. 천라성주와 뇌불의 관계를 알기 때문에... 오후 늦게 토의에 들어간 소림이 결론을 내렸을 때는 이미 날이 훤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 * * "종기의 정신 상태는 극히 불안합니다. 그는 오랜 세월 혈마수라결의 마기에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운지의 죽음은 그의 이성(理性)을 마비시킬 것입니다." 광무혼의 말에 일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이십여 일 동안 강호 상황을 지켜본 그들은 이제 광무혼이 말하는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광무혼이 막 뭐라고 말을 이으려는 순간, 전갈이 들려 왔다. "아룁니다. 소림과 무당에서 동맹을 청해 왔습니다. 천라성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합치자 합니다." 광무혼은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임을 모두가 알고 있으므로. 5. 월곡에서 최근 광무혼의 표정은 대개 둘 중 하나였다. 매우 자신만만하거나 아니면 무표정했다. 걱정 같은 것은 절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의 얼굴은 아주 무겁고 침중했다. 앞에 보이는 침상, 그 위에 누운 사람이 온옥교였기 때문이다. 광무혼은 손을 들어 자신의 왼쪽 눈 아래를 만졌다. 그곳에 검흔이 그어지던 순간이 어제의 일처럼 떠올랐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라도 그랬으리라. 온옥교가 보기에 광무혼은 어머니를 죽인 원수이기도 했으니까. 실내는 따듯했다. 옆쪽의 창에서 햇살이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그 햇살은 시간의 흐름을 알려 주면서 조금씩 움직였다. 정오가 되었다가 다시 저녁이 될 때까지 광무혼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햇살이 사라지고 달빛이 비춰지고 나서야 광무혼이 기다리던 사람이 들어왔다. 만박이었다. "알아 냈습니까?" "그래, 알아 냈네." "가능성이 있습니까?" "아주 희박하지만 가능하네."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해보는 편이 낫다고 광무혼은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이 하고 있는 복수 역시 성공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너무 위험하네. 자칫하면 자넨 죽을지도 몰라." "...상관없습니다." 뾰족한 관. 양끝이 뾰족하긴 했지만 중간이 비어 있는 대롱을 보고 있는 만박의 손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만에 하나 실패한다면 광무혼은 죽게 되리라. 그는 절대 죽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광무혼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대롱을 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만박은 고개를 저었다. "자넨 할 일이 너무 많네. 내가 하겠어." "말도 안 됩니다. 제가 합니다." "아니, 내가 하네." 광무혼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것이 마치 화가 난 사람 같았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그는 감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박에게, 자신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려는 만박에게 광무혼은 감격하고 있었다. * * * 광무혼은 살아야 한다. 살아서 종기에게 복수해야 한다. 자신의 인생을 망친 그를 죽이지 못한다면 광무혼의 인생은 도대체 어디에 의미가 있겠는가? 때문에 만박은 이 일을 광무혼에게 맡길 수가 없었다. 온옥교의 하얀 배가 드러났다. 하지만 만박은 전혀 두근거림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손에 든 대롱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끝이 뾰족하게 깎여 있어 어디든지 잘 파고들 것이다.


파열고(破裂鼓)! 이 북은 시전자의 심령에 반응하며 폭발을 일으키지만 억지로 제거하려다 보면 터지는 수도 있었다. 위력도 가공스러웠다. 만일 파열고가 몸 밖으로 나온 상태에서 터진다면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 역시 화를 면하기 어려웠다. 만박의 손이 떨리는 것도 당연했다. 밖에서 광무혼의 말이 들려 왔다. "지금이라도 괜찮습니다. 그만두십시오. 무공을 모르시는 원주보다 제가 낫습니다. 손이 떨린다면... 끝장입니다." 알고 있다. 그처럼 위험하기에 자신이 직접 하려는 것이다. 만박은 광무혼의 말을 무시하고 대롱을 꽂았다. 푹! 온옥교의 흰 피부를 뚫고 뱃속으로 들어간 대롱을 타고 피가 솟구쳤다. 그 피를 타고 파열고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흔들려도 폭발한다. 조심해야 한다!' 폭발은 곧 두 사람의 죽음을 의미했다. 온옥교와 만박 자신. 뚝! 한 방울의 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이 피로 흥건해지면서 온옥교의 몸도 빠른 속도로 차가워졌다. 그러나 파열고는 아직도 나올 생각을 않고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다면 온옥교는 죽을 것이다. 순간, 대롱을 타고 흘러나오는 피 가운데 뭔가 반짝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파열고!' 하지만 알아채는 것이 너무 늦었는가. 피를 타고 떨어지는 이 깨알 같은 북은 벌써 바닥에 닿기 직전이었다. 무공이 있는 자라면 잡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만박은 학자였다. 무공을 익힌 사람이 아니었다. 만박의 손은 얼마나 빨리 움직일 수 있을까. 기적은 어떤 곳에서 일어날까? 기적은 항상 간절한 소망을 비는 사람에게 일어난다. 다급한 순간 숨겨진 인체의 힘이 발현된 것일까? 만박의 손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로 움직이며 파열고를 받아 냈다. 그의 손은 땅바닥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떠 있어 얼마나 상황이 위험했는지를 웅변했다.


북은 폭발하지 않았다. 그리고 온옥교는 살아났다. "성공하셨습니까?" 문밖에서 광무혼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어 왔다. 만박은 미소를 지었다. 성공했기 때문이다.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무사히 한 가지 어려운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고비를 넘긴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밝은 미소를 띠고 만박은 밖으로 나갔다. "조심하게. 조심해서 받아." 파열고를 넘겨주면서 만박은 몇 번씩이나 광무혼에게 주의를 줬다. 광무혼은 깨알만한 파열고를 받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믿기 힘들군요. 이런 크기의 물건이 그처럼 위력적인 폭발을 일으킨다니..." "세상엔 신기한 일들이 많지. 자, 이제 그 물건은 던져 버리게. 멀리, 아주 멀리 말일세." 광무혼은 파열고를 힘껏 던져 올렸다. 이십여 장 멀리 올라가는 파열고! 이윽고 큰 폭발을 일으켰다. 콰과광! 불꽃과 폭음, 그건 마치 앞날을 축복하는 축포 같았다. * * * 두 번째 치료는 사흘 후 행해졌다. 의도적인 방법으로 잠재워져 있던 온옥교를 깨어나게 하는 치료였다. 이건 시전자에게는 위험하지 않았지만 피시술자인 온옥교에게는 파열고를 제거하는 일보다 오히려 더 위험했다. 항상 그렇듯이 정신의 치료는 육체의 치료보다 더욱 험난하기 때문이다. 온옥교의 몸은 지금 태초의 모습 그대로였고, 그 앞에서 광무혼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문밖에서 만박의 호명 소리가 들려 왔다. 그가 부르는 혈도의 이름을 따라 광무혼의 손이 때로는 부드러운 바람처럼, 때로는 날뛰는 번개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침(金針)은 그때마다 하나씩 줄어들었고, 줄어든 금침은 물론 온옥교의 몸에 꽂혔다. 온옥교의 흰 나신은 곧 금침으로 빽빽히 감싸였다. 마지막으로 뇌호혈을 따라 두 개의 금침이 대칭으로 꽂힌 후, 시술은 끝이 났다. 광무혼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방에서 물러 나왔다. 만박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술 방법을 구술(口述)로 불러 준 만박 역시 광무혼만큼이나 지쳐 보였다. 광무혼은 그에 대해 표현하기 힘든 감사를 느꼈다. 입을 열어 뭔가 말하려 했으나 만박의 손이 막았다. "나중에 하세. 그런 건 모두 나중으로 미루세. 온 소저가 깨어난 후에, 그리고 강호가 평안해진 후에..." 광무혼은 힐끔 뒤쪽의 방을 돌아보았다. 금침은 여섯 시진이 지나면 체내의 독기와 함께 빠져 나올 것이다. 그때 온옥교가 깨어나리라. 그러나 귀녀(鬼女)가 사라지고 온전한 온옥교만 깨어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야만 했다. 온옥교는 광무혼이 사랑하는 여인. 하지만 지금 그녀의 중요성은 단순히 그것뿐만이 아닌 것이다. 깨어난 후 닷새 동안 온옥교는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그녀는 새벽이면 말없이 뒷산으로 올라갔고, 밤이 되면 다시 내려왔다. 하루 종일 온옥교가 하는 일이라곤 산에 멍하니 앉아 먼 곳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광무혼 역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끼니때마다 음식을 챙겨 산에 올랐지만 단 한 번도 온옥교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음식이 담긴 소쿠리를 온옥교의 뒤에 말없이 내려놓고 산을 내려왔다. 닷새 동안 온옥교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상 그녀가 기다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침이면 밤을 기다렸고, 밤이 되면 다시 다음날 아침을 기다리는 것을 제외한다면... 닷새째의 해가 저물 무렵, 노을을 보면서 온옥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마침 저녁을 갖다 놓던 광무혼이 그 말을 들었다. 그는 몸이 석상처럼 굳어져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이윽고 해가 완전히 지고 사방이 깜깜해진 후에야 광무혼은 몸을 움직였다. 그의 입도 천천히 열렸다. "미안하오." 순간 온옥교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이들은 단 한 마디만을 주고받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얽히고설킨 은원과 갈등, 그리고 사랑은 단 한 마디의 말로써 충분히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연인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이러한 기적. 온옥교의 머리가 움직였다. 그녀의 눈이 광무혼의 눈과 마주쳤다.


흘러내리는 두 줄기의 눈물. 온옥교의 얼굴을 본 광무혼은 비로소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잊고 지내 왔던 따스한 감정이 살아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인류가 태어난 이래 가장 위대한 감정, 사랑만이 모든 걸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온옥교가 나비처럼 날아와 자신의 품에 안길 때 광무혼은 확신했다. 온옥교는 본디의 온전한 정신을 차린 것이다. * * * 다음날 광무혼과 온옥교는 아침 일찍 광명전을 떠났다. 꼬박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더 걸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구마산(九馬山)이었다. 아홉 개의 봉우리가 마치 말이 뛰노는 듯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중 한 봉우리를 두 사람이 올랐을 때 이미 주위는 암흑으로 덮여 있었다. 오직 하늘의 달빛만 희미하게 갈 길을 비출 뿐이었다. 달빛이 교교했다. 은빛이 잔잔히 부서지는 듯 신비롭게 빛나는 달빛은 광무혼이 산길을 돌아서자 더욱 아름답게 빛나기 시작했다. 뒤따라오던 온옥교가 말했다. "아름다워요, 달빛이. 전... 전... 벌써 십 년이나 달을 함부로 쳐다보지 못했어요." 그건 광무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한 쌍의 사랑하는 이들은 이전에는 날마다 달을 보았으나 최근 십 년간은 보름달조차 보지 못하고 살아 왔던 것이다. 누구의 잘못일까? 이 순간만은 광무혼도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멈칫거리다가 이윽고 용기를 내어 온옥교의 어깨를 감쌌다. "이젠 매일 달을 보게 될 것이오. 보름이면 우린 항상 함께 달을 보게 될 것이오." "그러고 보니 보름은 이제 겨우 닷새가 남았을 뿐이군요." "그렇소. 우리는..." 순간 어디선가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 왔다. 광무혼의 몸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온옥교를 감싸더니, 재빨리 오른쪽으로 세 걸음 물러났다. 팍! 팍! 팍! 그가 물러난 자리 뒤편의 나무에 단창 세 개가 깊숙이 꽂혔다. 끝에 달린 수실에 초승달이 시리게 새겨져 있는 단창. 움직이지 않았다면 찔렸으리라. 온옥교는 깊은 눈빛으로 광무혼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런 말이 하고 싶었다. '당신은 절 아직도 무공을 모르는 옛날의 온옥교로 생각하시는군요.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그러나 말할 수가 없었다. 광무혼의 눈에는 온옥교를 보호해야 한다는 굳은 결심이 가득했고, 그것이 곧 사랑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옥교는 다른 말을 했다. "누굴까요?"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들렸다. "우린 월곡(月谷)의 입곡사자(入谷使者)다." 돌아보는 온옥교의 눈에 늙고 깡마른 두 노파(老婆)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두 쌍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도저히 늙은 노파의 것이라곤 믿기 어려웠다. "네놈들은 누구냐?" "함부로 월곡(月谷)에 침입하였으니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면 뼈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두 노파는 거의 동시에 말했기 때문에 주의가 산만한 사람은 알아듣기 힘들 것 같았다. "난 황무라 하오... 당신들의 곡주를 만나고 싶어 왔소." 광무혼의 말에 노파들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켈켈켈, 네놈 따위가 함부로 만날 곡주님이 아니시다. 켈켈켈..." "혹시 모르지. 네놈이 우리가 깜짝 놀랄 만한 실력을 보인다면 말이다." 이번에도 두 노파의 말은 거의 동시에 들려 왔다. 광무혼은 내심 고개를 흔들었다. "어떤 실력 말이오?" "우리의 관문을 뚫는다면 당연히 곡주님을 뵐 수 있다, 켈켈켈..." "우릴 이길 수 있는 실력 말이다." "좋소, 보여 주겠소." 광무혼의 왼손이 검자루에 닿았다. 그의 검집에서 폭발할 듯한 광채가 일어나면서 충천검이 쭈욱 앞으로 뻗어 나갔다. 그건 무척 빠른 검이긴 했지만 노파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켈켈, 이 정도론 어림없다." "제법이다만 더 배워야겠구나." 검광은 왼쪽으로 날아왔으므로 두 명의 입곡사자는 모두 오른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더 이상 움직이는 건 좋지 않소." 광무혼의 말소리가 들려 왔을 때 두 노파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감히 움직일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어느새 광무혼의 검이 오른쪽에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다. 넌 분명 왼쪽으로 갔었는데..." "조, 조금만 우리가 더 움직였다면 목이 떨어졌으리라." 그들의 칭찬에 광무혼은 말없이 고개만 숙여 보였다. 여태껏 구경만 하고 있던 온옥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제 우릴 곡주에게 안내해 주실 수 있죠?" 두 노파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녀들은 이번에도 동시에 말했다. "물론이오." "물론이오." 다행히도 이번엔 같은 말이었기 때문에 귀는 어지럽지 않았다. * * * "조금만 기다리시면 곡주께서 드실 것이오, 켈켈." "기다리시오. 곡주께서는 잠시 후 드실 것이니." 광무혼은 두 노파에게 얼른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녀들이 물러가자 온옥교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정말 대단하군요. 전 시끄러운 것이 젊은 여자들의 특징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인간의 천성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 법이오." "그래요. 그렇군요..." 온옥교는 말꼬리를 흐렸다. 정말 그랬다. 사람의 천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녀는 광무혼이 자신의 어머니인 능라선자 유옥하를 죽인 것에 대해 한 번쯤 의문을 품어 봤어야 했다. 온옥교는 슬쩍 광무혼을 쳐다보았다. 광무혼의 시선은 한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뭘 보세요?" "문턱을 보고 있소." 광무혼의 대답에 온옥교도 문턱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상할 게 없는데요. 한데 가가께선 뭔가 찾으셨나요?" "그렇소." "뭐가 이상하죠?" "월곡의 모든 문과 건물의 경계에는 문턱이 하나도 없소."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월곡은 왜 문턱 없는 문을 만들었을까?


드르르르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였다. 온옥교는 놀라 그쪽을 보곤 더욱 놀랐다. 의자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철보다 강하다는 오목임을 알아보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의자 양옆에는 바퀴가 달려 어디든 굴러갈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온옥교는 그 의자 위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유생을 보고 놀랐다. 학창의를 걸치고 유생건을 쓴 그의 두 다리는 허벅지에서부터 잘려져 나갔기 때문이다. 누굴까? 유생이 탄 의자는 두 명의 여인이 밀고 들어왔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풍만함과 늘씬함이 겸비된 몸매를 하고 있었으며 얼굴에는 면사가 씌워져 진면목을 볼 수가 없었다. 유생이 양손을 맞잡고 위로 들었다. "제가 바로 월곡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광무혼과 온옥교는 크게 놀랐다. 설마 하니 무림 신진 세력 중 광명전과 더불어 가장 강하다는 월곡의 곡주가 불구자일 줄이야...! 산속의 아침은 항상 마음을 상쾌하게 만든다. 햇살이 피부에 닿기 전 새들의 명랑한 울음 소리가 먼저 귓가에 닿고, 그 전에 청량한 공기가 코를 간지럽힌다. 광무혼은 상쾌한 느낌 속에 잠에서 깨어났다. 햇살을 맞으러 정원으로 나가자 온옥교가 먼저 나와 있었다. "잘 잤소?" "잘 주무셨나요?" 둘은 서로 마주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하나 광무혼의 마음은 사실 무거웠다. 그는 간밤에 월곡의 곡주에게 강호 정세를 설명했다. 월곡은 지난 오 년간 강호와 담을 쌓고 지냈었기 때문에 '겁난유세'라는 책으로 인해 빚어진 혼란을 알지 못했다. 알면서도 모른 체했을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광무혼은 월곡의 도움을 요청했고, 곡주는 날이 밝으면 가부간의 결론을 말해 주겠노라 했었다. 멀리서 초록색 옷을 입은 소녀 하나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심부름을 오나 보오. 곡주가 우릴 부르나 보지." 광무혼의 예측은 정확했다. 소녀는 광무혼 앞으로 다가오더니 살짝 무릎을 굽혀 보였다. "제 이름은 취아(翠兒)입니다. 곡주님이 청하셨어요. 절 따라오시겠어요?" "곡주께선 무척 부지런하시구나. 이제 겨우 해가 떠올랐거늘 벌써 널 보내시다니."


광무혼은 웃으며 취아의 뒤를 따랐다. 온옥교도 별다른 생각 없이 그 뒤를 따르는데 취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죄송하오나 곡주께서 부르신 분은 공자님 한 분입니다." 온옥교의 아미가 살포시 찌푸려졌다. "지금 날 오지 말라 막는 것이냐?" "막고 아니 막고는 소녀가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다만 곡주님의 청함이 아니 계셔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취아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하나 그녀가 서 있는 위치는 온옥교의 진로를 막고 있어 말하지 않아도 명백한 뜻을 전달해 주었다. 온옥교는 화가 났지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자신들은 이곳에 부탁을 하러 왔고, 그런 입장에서는 함부로 행동할 수 없으므로. "나 혼자만 가겠소. 하니 당신은..." 광무혼이 온옥교와 시녀 사이로 한 발을 들여놓으며 말했다. 온옥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광무혼은 온옥교는 십 년 전 그때마다 닥쳤다.

시녀를 따라갔다. 여태껏 광무혼을 여러 번 혼자 보냈던 적이 있었다. 무혼보에서 그랬고, 구 년 전에도 한 번 더 그런 일이 있었다. 자신과 광무혼의 사이는 틀어졌고, 그때마다 광무혼에게는 큰 불행이

'하지만 이젠 두 번 다시 그런 불행은 없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그렇게 외치는 온옥교였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하늘, 한 점의 구름도 없었다. 그녀의 마음도 곧 밝아졌다. 굳이 걱정을 만들어 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 마음을 고쳐 먹고 객사로 돌아가려던 온옥교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였다. "이런!" 몸을 숙여 치맛단을 보았다. 치맛단이 뜯어져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다시 그녀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 또박, 또박...

*

*

시녀는 걸어가면서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뒤에서 따라오는 광무혼의 발걸음 소리는 끝내 들리지 않았다.


'과연... 두 분 마님께서 조심하시는 것도 한갓 조바심만은 아니었구나.' 취아는 내심 그렇게 중얼거리며 길을 재촉했다. 길이 멀었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어젯밤에는 이렇게 멀지 않았던 것 같은데..." 다섯 번째 굽은 길을 돌아갈 때 광무혼이 지나가는 말처럼 입을 열었다. 취아는 급히 몸을 돌려 천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곡주님께선 낮엔 밤과는 다른 곳에 거하신답니다. 이건 저희 월곡만의 전통이지요." 그녀는 걸음을 서둘러 재빨리 여섯 번째 모퉁이를 돌았다. 그리곤 앞을 가리키며 조잘거렸다. "저기예요. 저 붉은 건물 안에서 곡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월곡(月谷). 달의 계곡에 피처럼 붉은 건물은 어울리지 않았다. 건물 안에 들어와 광무혼은 다시 조금 더 걸었다. 그는 마음이 급해 할 수만 있다면 뛰고 싶었지만 앞서가는 취아의 걸음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이때 멀리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 왔다. 칫! 으음! 칫! 으으음! 어찌 들으면 운우의 쾌락 속에 빠진 남녀의 신음성 같기도 한 그런 소리가 낭하를 메아리치며 들려 오는 것이다. 점점 가까이 다가가자 그 소리는 명확해졌다. '채찍 소리. 그리고 고통을 참는 신음 소리다. 여인의 것. 여인이 둘이다.' 걸어갈수록 그 소리는 또렷해졌고, 마침내 어떤 방의 문앞에 도착했을 때 가장 크게 들렸다. "이 방이에요. 들어가세요, 공자님." 취아가 문고리를 잡고 말했다. 문이 열리고 광무혼은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보이는 광경을 광무혼은 믿을 수가 없었다. 채찍! 마디마다 철편(鐵片)을 채워 넣어 맞는 자로 하여금 고통을 극대화시키도록 만들어진 채찍을 든 자는 모두 둘이었다. 그들의 가슴은 불거져 나왔고 온 전신은 붉은 근육들로 덮여 있었다. 그런 자들이 휘두르는 채찍질은 설사 쇠뭉치라 해도 견뎌 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두 사내가 휘두르는 채찍을 맞고 있는 사람은 두 명의 여인이었다. '저들은!' 광무혼은 단번에 그 두 여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월곡주를 양옆에서 호위하던 면사여인들, 바로 그들이 아닌가! "소개해 드리죠. 왼쪽 분이 앵무새마님이에요. 그리고 사마귀마님이에요." 취아가 다시 조잘거렸다. 그녀에게는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 전혀 끔찍스럽지 않은 듯했다.

오른쪽

분은

"두 분은 모두 곡주님의 마나님들이세요." 채찍질이 멈췄다. 사내들은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다음 뒷걸음질쳐서 밖으로 나갔다. 앵무새마님과 사마귀마님, 두 여인의 등은 채찍에 의해 만들어진 혈선으로 징그럽기 그지없었다. 뚝뚝 떨어지는 핏물. 하지만 두 여인은 이를 악물고 고함을 질렀다. "소금을 뿌려라!" 취아가 쪼르르 달려가 한 움큼의 소금을 쥐었다. 그리곤 망설임없이 두 여인의 등에 소금을 흩뿌렸다. "으음!" "으으윽!" 이를 악 다문 여인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오자 자신에게도 전해지는 것 같아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광무혼은

그녀들의

고통이

"멈추거라!" 광무혼은 크게 외치며 몸을 날렸다. 그의 오른손은 취아의 몸을 잡아 뒤로 두 걸음 물러나게 만들고, 왼손에서 일어난 부드러운 경력은 두 여인의 등에서 소금을 털어 냈다. 두 여인의 몸이 흠칫 떨렸다. 고통이 덜어졌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 상처에 발려진 소금이 얼마나 큰 고통을 야기하는지 모른단 말이냐?" 광무혼은 취아를 보고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취아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모르고 있소." 답은 앵무새마님이 했다. "그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아 왔고, 항상 소금을 뿌리는 일을 했소. 때문에 취아는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소." 광무혼은 더욱 화가 났다. "당신들은 또 무슨 짓이란 말이오? 스스로를 괴롭히고 고통을 증가시키는 것이 무슨 이득이 된단 말이오?"


"이득이 돼요. 분명한 이득이 있죠." 이번에는 사마귀마님이 말했다. "무슨 이득? 난 이해할 수 없소." "우린 매일 열 대의 채찍을 맞고 상처에 소금을 뿌려요. 두 가지의 고통은 우리에게 두 가지의 일을 잊지 않도록 해주죠." 광무혼의 눈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어떤 일이기에 이 두 여인들은 스스로를 그런 고통 속에 빠뜨리는가? 앵무새마님의 면사가 약간 흔들렸다. 그녀는 웃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호기심을 느끼고 있군요." "그렇소. 누구라도 그럴 것이오." "좋아요, 말씀드리죠. 채찍은 우리의 죄를 잊지 않게 만들어 주죠." "죄? 어떤 죄를 지었소? 그리고 누구에게?" "우린 우리의 부군(夫君)에게 죄를 지었어요. 그분이 다리를 잘라야 했던 것은 모두 저희의 죄죠. 죄를 따지자면 하루 열 대의 채찍으로도 모자랄 지경이에요." 광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자신 때문에 사랑하는 이의 두 발이 잘려 나갔다면 누구라도 열 대의 채찍을 맞고자 할 것이라고 광무혼은 생각했다. 그는 앵무새마님과 사마귀마님, 그리고 취아를 번갈아 보며 마침내 물었다. "그럼 소금의 고통은 또 무엇이오?" 6. 고통 속에서 기억하다 침묵이 흘렀다. 소금의 고통은 무엇을 기억하고자 함인지 광무혼이 물었건만 두 여인 모두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후 그녀들은 대답했다. "원한을 기억하려는 거예요." 이번에도 광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뼈를 깎고 살을 찌르는 고통은 비단 원한을 잊지 않게 만들 뿐만 아니라 더욱 깊어지게도 함으로. 그러자 또다시 그 내용이 궁금해졌다. "어떤 원한을 기억하려 합니까?" 이번에는 한참 시간이 지나도 두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후 앵무새마님이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취아에게 말했다. "나와 동생이 입을 새옷을 어서 내오너라." 취아는 쪼르르 달려갔고 이윽고 두 벌의 새옷을 가져 왔다. 앵무새마님은 새옷을 받아 들고는 광무혼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우리의 원한이 궁금한가요?" "그렇소. 매우 궁금하오." "그렇다면 지금부터 우리를 똑똑히 보세요." 그녀들은 입고 있던 피에 젖은 옷을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훌렁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무... 무슨!" "우리는 옷을 갈아입는 거예요. 원한이 뭔지 알고 싶다면 당신은 꼭 우리를 지켜보세요." 그러나 광무혼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시선을 돌렸고 급기야 몸마저 돌려 버렸다. 이 두 사람은 남의 아내, 그것도 자신이 도움을 청하러 온 월곡곡주의 부인들인 것이다. 두 여인이 옷을 완전히 벗은 채 새옷을 받아 들고, 광무혼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취아(翠兒)가 가져 온 새옷 안에서 날카로운 비수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 비수들은 앵무새마님과 사마귀마님의 손에 들린 채 곧장 광무혼의 허리로 향했다. 푸욱! 살 속을 파고드는 비수가 근육과 혈관을 끊은 뒤 뼈를 가르는 감촉은 섬뜩했다. 그러나 두 여인의 눈에는 극도의 희열이 어려 있었다. "무... 무슨 짓!" 광무혼의 몸이 번갯불 같은 반응을 보이며 움직였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그의 허리에는 두 개의 큰 구멍이 펑펑 피를 쏟아 내고 있었다. 타다닥! 급히 혈도를 짚어 임시로 지혈시킨 광무혼은 두 여인을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오? 왜 날 암습한 거요?" 두 여인의 대답은 간단했다. "네가 우리의 고통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앵무새마님이 차갑게 말했다. "너는 우리로 하여금 원한을 잊게 만들려 했기 때문에 우리는 널 죽여야만 한다." 사마귀마님의 목소리도 차갑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의 얼굴은 차가웠으며 살기 또한 점점 짙어 가고 있었다. 두 여인의 눈동자는 반드시 그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듬뿍 채워진 상태였다. 광무혼의 전신에 푸른빛 서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창궁진기가 일어나며 장중한 기세를 사방으로 뿜어 내는 모습이었다.


비록 중상을 입긴 했지만 여전히 가공할 위세였다. "이유를 대지 못한다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광무혼은 매우 화가 났다. 그는 두 번 다시 남에게 속고 싶지 않았으며, 두 번 다시 남에게 해코지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살기가 회오리처럼 방안을 휘감았다. 하나 두 여인은 코웃음을 칠 따름이었다. "좋아. 만일 네가 우릴 죽일 수 있다면 죽여 보거라." 그녀들은 거의 동시에 면사를 걷어 냈다. 순간 광무혼의 창궁진기가 폭풍을 만난 듯 흔들리더니 이윽고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혈앵무(血鸚鵡), 그리고 혈당랑(血螳螂)!" 광무혼이 어찌 그녀들을 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손으로 죽인 능라선자 유옥하의 두 제자인 그들을! "너는 벌써 잊었겠지, 광무혼? 하지만 우린 아직 잊지 않고 있다. 우린 매일, 매일 널 죽이겠다는 신념을 다지며 살아 왔다." 혈앵무가 피 묻은 비수를 앞으로 세우며 말했다. "사부님이 네 칼에 돌아가신 후 한시도 널 잊지 않았다. 비록 네 얼굴에서 수염이 사라졌지만 우린 널 똑똑히 기억한다." 혈당랑의 비수 역시 광망을 뿜어 내고 있었다. 두 자루의 비수는 금세라도 광무혼의 심장을 도려 낼 듯 흉흉한 빛을 뿜으며 사방으로 움직였다. 광무혼은 다만 피하기만 할 뿐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죄는 자신의 업보였고, 그 대가는 자신이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훙! 휘웅비수가 휘둘려지는 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날카로운 검기에 베인 귓불이 뜨뜻했다. 광무혼은 몸을 한 번 숙이고 옆으로 두 걸음 걸은 뒤, 위로 한 번 뛰었다가 다시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혈앵무와 혈당랑의 연이어지는 공격은 매우 날카로웠으나 광무혼의 피부에 혈흔만을 남겼을 뿐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턱! 광무혼의 등이 벽에 닿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벽의 차가운 감촉이 등에 전해질 때, 광무혼의 눈앞으로 다시 혈앵무의 비수가 달려들었다. '옆으로 피해야 한다!' 빠른 판단과 대응!


하지만 광무혼은 옆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콰직! 그의 등이 벽에 닿는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뒤편의 벽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 곳이 부서지면서 네 개의 우락부락한 팔이 솟구쳤다. 그 팔들은 광무혼의 양다리를 굳게 잡아 그로 하여금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날아오는 비수. 그러나 움직이지 못하는 발. "이익!" 광무혼의 가공할 내력을 담은 발이 움직이려는 힘은 엄청났다. 두 쌍의 팔은 우두둑 소리를 내며 부러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손을 풀지 않았다. 위기의 순간, 광무혼의 허리가 옆으로 휘어지면서 머리가 오른쪽으로 빠른 이동을 보였다. 혈앵무의 비수는 광무혼의 왼쪽 관자놀이에 깊은 검흔을 남긴 채 벽에 꽂혔다. 머리만을 옆으로 움직여 피한 것이다. 그 순간 혈앵무의 몸이 광무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벽에 꽂힌 비수를 빼내려면 시간이 걸림을 안 혈앵무는 아예 비수를 놓아 버리고 위로 훌쩍 뛰어올랐던 것이다. 광무혼의 눈에 다급한 빛이 떠올랐다. 혈앵무가 사라진 그곳에서 또다시 혈당랑이 비수를 쏘아 오고 있지 않는가? '피할 수 없다!' 정말 그랬다. 광무혼에게는 이제 단 한 가지의 선택밖에 없었다. 손을 휘둘러 충천검을 빼내는 것. 벽력쇄혼세라면 능히 상대의 비수를 부수고 자신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이들을 죽일 수 있는가? 죄를 지은 건 나인데...' 그는 망설였다. 그 와중에 비수는 벌써 광무혼의 이마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본능적으로 일어난 진기가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아우성을 쳐댔다. 그 진기를 뻗는다면 혈당랑이 죽을 것이다. 하나 가만히 있는다면 광무혼이 죽으리라. "욱!" 가슴 한쪽이 끊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 추일령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지금 광명전에서도 가장 높은 봉천루(俸天樓) 위에 올라와 있었다. 공기는 선선했고 하늘을 맑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만은 맑지 않았다. 가슴의 통증은 지난 구 년 동안 쉬지 않고 그를 괴롭혔다. 의원의 말이 생각났다.


-지나치게 긴장을 한 탓입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심장에 무리가 간다면... 아무리 건강하신 몸이라 하나... 그렇게 말하면서 의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답답한 세월이었다. 원한과 증오, 그리고 분노가 가슴속에서 쉬지 않고 들끓었지만 그것을 풀 대상을 찾지 못한, 힘들게 보낸 세월이었다. 이제 그 증오는 발출될 기회를 찾았다. 천라성과의 전쟁. 모든 비극의 배후인 근심수사 종기와의 싸움. "바람을 쐬고 계십니까?" 뒤에서 들려 온 말소리의 주인공을 추일령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금룡궁의 궁주였다. 추일령은 웃음을 띠고 몸을 돌렸다. 그는 자상한 눈빛으로 금룡궁의 궁주를 바라보았다. "자넨 자네의 아버지 북쾌보다도 오히려 뛰어난 점이 많았지. 하지만 금룡궁의 궁주가 되어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네." 금룡궁주 북취명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하지만 옛날처럼 깊이 숙이지는 않았다. 복수맹이 은거해 지내는 구 년의 세월 동안 그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금룡궁의 전대 궁주인 욱일금룡신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고, 다시 금룡궁을 물려받고... 한 문파의 지존이 된 지금은 아무리 옛 상전이라 해도 고개를 숙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광... 무혼... 옥수검은 잘하고 있을까요?" 북취명의 말에 추일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월곡을 끌어들여야만 하니까. 월곡만 힘을 더해 준다면 이젠 유령전 하나만 남게 되는 셈이니까." 그들을 모두 끌어들이는 일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힘도 힘이려니와 전강호인들에게 자신들의 조직이 무림맹이며, 천라성은 대항해 싸워야 할 적이라는 인식을 심어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므로. 문득 바람이 불어와 추일령의 머리를 날렸다. 그의 심장도 두근대기 시작했다. 광무혼이 월곡과 유령전의 힘을 얻는 일만 성공해 낸다면 자신은 비로소 죽어 간 거령(巨靈)과 옥청(玉靑)의 원한을 갚을 수 있는 것이다. 음모로써 그들을 죽인 직접적인 원흉은 바로 종기가 아니겠는가? '욱!'


흥분하게 되자 또다시 왼쪽 가슴이 뜨끔거렸다. 그러나 추일령은 애써 고통을 감추었다. 광무혼은 손의 힘을 풀어 버렸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들을 죽일 순 없다. 그는 모든 내공을 얼굴로 끌어올리며 입을 크게 벌렸다. 캉! 비수가 이빨에 부딪히자 날카로운 금속성이 났다. 앞니 두 대가 부러졌지만 비수는 정지했고, 광무혼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순간 혈당랑이 냉소했다. "대단하구나!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넌 끝이다." 그 냉소 소리와 함께 광무혼의 입과 코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비수에는 독이 발려져 있었던 것이다. 순간 혈당랑의 신형이 혈앵무처럼 위로 떠오르며 사라졌다. 독에 당해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 광무혼은 겨우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작은 체구의 사람이 자신을 향해 두 손을 쭉 뻗고 있고, 그 손에서부터 날카로운 파공음을 만들어 내는 쇠침들이 날아오고 있다는 것을. 수전통으로 우모독침을 쏘아 내는 소녀. 취아였다. "죽어라, 광무혼! 호호호...!" 혈앵무의 웃음 소리일까, 혈당랑의 웃음 소리일까? 아니면 취아일까? 발을 잡은 두 손은 이제 풀렸지만, 광무혼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미 전신에 독이 퍼진 것이다. '여기서 죽는 걸까? 난... 해야 할 일이 더 있는데. 죽더라도... 지금 죽어서는 안 되는데...' 흐릿한 정신으로 광무혼은 고함질렀다. 희망! 지금 어떤 희망이 있단 말인가? 콰릉! 무언가 엄청난 위력을 담은 힘이 단숨에 벽을 뚫고 달려들어오는 소리가 광무혼의 귀에 들렸다. 흐릿한 가운데 그 물체의 빛이 흰색임을 알고는 광무혼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쾌... 쾌백화(快白花)!' 가장 빠른 성질을 지녔다는 흰색의 꽃은 벽을 부수고 날아오더니 곧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마음대로 허공에서 움직여지는 회청화(回靑花)는 광무혼의 바로 앞으로 날아오더니 곧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펑!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져 터지는 강기의 이름은 산흑화(散黑花)! 우모독침들은 그 엄밀한 방어막을 하나도 뚫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제서야 이 놀라운 기공을 선보인 주인공이 나타났다. "걱정이 됐어요. 당신이 위험에 빠질까 봐 걱정했죠." 급히 달려오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섬섬옥수로 쓸어 올리며 이렇게 말하는 여인. 광무혼의 유일한 희망이 나타난 것이다. 온옥교! 타다닥! 내공을 담은 온옥교의 손가락이 광무혼의 전신을 세 번째 두드리자 모공 곳곳에서 검은 독이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혈앵무와 혈당랑은 마치 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이윽고 광무혼이 고비를 넘겼음을 본 온옥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몸을 돌리는 짧은 순간, 온옥교의 전신에서는 오색의 꽃과 같은 광채가 일어났다. 곧 다섯 가지 색깔의 광채는 눈부신 오색채화를 이루며 전신을 감싸고 회전하기 시작했다. 혈앵무는 만감(萬感)이 깃들인 표정으로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색채화강(五色彩花 )! 그래, 그것이로구나." "이유를 제대로 대지 못한다면...!" 온옥교의 오른손이 천천히 들려졌다. 오색 광채가 그 손으로 밀려들더니 곧 눈부신 태양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아니, 이유를 대더라도 너흰 내 손에 죽는다. 이 사람을 해치는 자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는다!" 오색채화강의 정수인 오색태극강이 앞으로 쭈욱 뻗었다. 혈당랑과 혈앵무의 죽음을 예고하면서. "안 돼!" 외침은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광무혼의 움직임은 그보다도 훨씬 더 갑작스러웠다. 그는 사력을 다해 몸을 날려 온옥교의 앞을 막았다. "무슨...!" 외치면서 온옥교는 급히 장력의 방향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휘르르콰광! 방향을 바꾸며 날아간 오색태극강이 벽을 치자, 벽은 산산조각이 되어 날아가는가 싶더니 그것도 잠시, 곧 허공 중에서 먼지로 변해 스러졌다.


"왜 이러죠? 이들은 당신을 죽이려 했어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온옥교가 소리쳤다. 광무혼은 한 손으로 뻐근한 가슴을 부여잡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러나 당신은 이들을 죽여선 안 되오. 나 또한 이들을 죽일 순 없소." "왜죠?" "이들은 당신의 사저들이기 때문이오. 또한..." 광무혼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같은 천화성모의 후인이며, 엄밀히 말한다면 오색채화강을 익혀 천화궁의 궁주가 된 당신의 수하가 되기 때문이오." 온옥교는 깜짝 놀랐다.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어머니에게서 두 제자가 있음을 들었던 적이 있는 그녀였다. "그... 그럼, 두 분이 바로 혈앵무와 혈당랑이라는 이름을 쓰신다는..." 두 여인의 몸이 허물어지듯 무너졌다. 혈앵무와 혈당랑은 지금 울고 있었다. "시조의 오색채화강이 다시 강호에 나타나게 될 줄은..." "흑흑흑, 살아 계셨군요. 사부께서 돌아가신 후 그토록 찾아도 뵈지 않으시더니... 살아 계셨군요." 그녀들은 울고 있었다. 온옥교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그 모습을 보는 광무혼 역시 눈시울이 뜨거웠다. "잘되었다, 정말 잘되었어!" 본디 이곳에서는 살기가 난무했고, 한 명이든지 또는 두 명이든지 반드시 죽어야만 할 장소였지만 다행히 아무도 죽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광무혼은 서서히 옆으로 쓰러졌다. 놀란 온옥교의 외침을 들으면서 그는 의식을 잃었다. * * * 광무혼은 의식을 잃은 채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월곡주가 그런 그를 진찰하고 있었다. 그는 문득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뒤에 서 있는 두 명의 여인, 혈앵무와 혈당랑을 쳐다보았다. 그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토록 말했으나 아직도 은원을 잊지 못하다니... 당신들이 강요당했던 것처럼 이 사람 역시 강요당했던 것이니, 무슨 염치로 죄를 묻는단 말이오?" 그의 음성은 조용했으나 혈앵무와 혈당랑은 무척 겁에 질린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곡주가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난 당신들에게 실망했소. 아무래도... 내가 떠나야 할 때가 된 모양이오." 순간 혈앵무와 혈당랑의 눈에 어린 공포의 빛이 열 배는 더 짙어졌다. 그녀들은 마치 겁에 질린 어린아이들처럼 곡주의 발 밑에 매달렸다. "소첩들이 잘못했어요, 상공. 제발 떠나시지 마세요. 저희가 잘못했어요." 온옥교는 월곡주가 무공을 모름을 알 수 있었다. 한데 두 여인은 왜 그에게 매달리는가? 한참을 생각한 온옥교는 그 이유가 사랑임을 깨달았다. '기이하군. 곡주는 무공을 모를 뿐만 아니라 두 발이 잘린 불구자다. 한데도 두 여인의 사랑은 참으로 지극하구나.' 온옥교는 문득 광무혼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을 생각한 그녀는 드디어 결론을 내렸다. 만일 광무혼이 사고를 당해 무공을 잃고 두 발과 다리마저 잃는다 해도 자신은 그를 사랑할 것이다. 곡주의 손이 광무혼의 전신을 더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혈앵무가 울먹이는 어조로 온옥교에게 말했다. "저흰 곡주를 공부(孔府)에서 처음 뵈었어요. 그분은 학자셨고, 저흰 알아 낼 것이 있어 그를 고문했죠. 두 발을 자르신 것도 모두 그때 저희들 때문에 생긴 상처가 덧나서였어요." 월곡의 곡주는 바로 공회였던 것이다. 혈앵무와 혈당랑은 공회의 꿋꿋한 모습에 진심으로 감동했고, 그를 사랑하게 되어 마침내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공회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혈앵무의 얼굴에는 슬픔과 더불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저흰 저분을 너무 사랑해요. 저분이 떠나신다면... 저희 모두 목숨을 끊을 거예요." 온옥교는 진심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다. 그러자면 광무혼이 깨어나야만 한다. 광무혼이 내일 아침까지 깨어나지 않는다면 공회는 떠나겠다 말했기에. "믿을 수 없군. 내장은 성한 곳이 없고, 전신의 혈맥은 곳곳이 엉켜 있소. 이런 지경이라면 내공은커녕 움직이기도 힘들 터인데..." 사실이었다. 광무혼은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고, 그때마다 큰 중상을 입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살아 가게 만드는 것은 자연의 생명력을 넘어서는 의지였다. 광무혼 자신의 의지, 피를 토하면서도 내공을 남긴 옥청의 의지, 그리고 종기의 음모에 희생된 수많은 죽은 이들의 의지... 햇살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 무렵, 광무혼은 눈을 떴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혈앵무와 혈당랑은 눈물을 흘렸다. 공회가 자신들을 떠나지 않게 되었으므로. 공회는 굳은 표정으로 두 여인을 돌아보았다.


"약속대로 나는 떠나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당신들은 떠나야만 하오." 두 여인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변했다. "떠나시오. 가서 무림회천맹(武林回天盟)을 도와 주시오. 난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겠소." 7. 천하는 한곳으로 모이고 서찰을 모두 읽은 추일령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서 있는 온 옥교를 쳐다보았다. 온옥교의 뒤쪽으로 월곡의 정예고수들과 혈앵무, 혈당랑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해서... 무혼은 조금도 쉬지 않고 유령전으로 향했습니까?" "그래요. 같이 가자 해도 말을 듣지 않았어요.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 추일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온옥교의 말마저 듣지 않았다면 다른 어떤 사람이 말했어도 소용없었을 것이다. "걱정돼요. 전 너무 걱정이 돼요." 온옥교가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그녀 또한 유령전(幽靈殿)에 대해 알고 있었다. 무림의 금지(禁地)! 여태껏 아무도 살아 돌아온 자가 없다는 전설적인 장소. 그런 것들이 유령전의 인물이 강호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강한 문파를 꼽을 때 유령전이 한 번도 빠지지 않는 이유였던 것이다. 추일령은 온옥교를 위로했다. "걱정 마십시오. 무혼은 강합니다.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그는 돌아올 것입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이제 유령전만 아우른다면 강호에 알려진 거파는 모두 무림회천맹에 가입하게 되는 것이다. 구파일방 또한 암중에 가입을 확약한 상태였다. 그 위력은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작은 문파와 혼자 움직이는 고수들도 속속 가입 의사를 밝혀 왔던 것이다. '한데 왜 천라성이 조용할까?' 추일령은 그것도 걱정이 되었다. * * * 아홉 명이 천라성의 대청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각각 삼전(三殿)과 사각(四閣), 그리고 이기(二旗)의 내에서는 구천왕(九天王)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였다. 청룡각의 각주인 청룡천왕의 얼굴은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대표로서

천라성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하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성질이 급한 청룡천왕은 한 번 더 고함을 질렀다. "언제까지 이렇게 팔짱만 끼고 있어야 하냐고? 구파일방의 놈들, 그리고 광명전 그들은 우릴 마치 무림에 있어서는 안 될 악인으로 몰아붙이고 있는데, 우린 침묵만 지켜야 하는 건가?" 이번에도 역시 대답은 없었다. 모두들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불만의 기색만은 역력했다. 천라성의 주요 인물인 그들로서는 태상성주인 종기의 이런 처사가 누구보다 큰 불만이었다. 한동안의 침묵이 지난 후 추명전의 전주 추명혈왕이 헛기침을 했다. "험험, 난 화산과 공동을 상대해 보았소. 비록 부전주를 잃긴 했지만 그들의 힘은... 예상치의 반에도 못 미쳤소."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솔직히 강호의 힘이 이 정도에 불과하다면... 즉 본 전(殿) 혼자의 힘으로 능히 구파 중의 두 개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라면 굳이 대응을 서두르지 않아도 될 것 같소." 순간 천라성 전체를 울리는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지진? 그들은 근자에 들어 잦아지는 지진이 이상하다 생각하며 추명혈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광명전, 그리고 월곡, 금룡궁. 그들이 제법 강하다 하나 내 생각으론 본 성의 삼전과 사각 어느 하나와 일 대 일의 승부 이상은 불가능할 것이오." "으음... 그렇다면 광명전, 월곡, 금룡궁을 삼전이 맡고, 사각이 힘을 합해 구파일방, 아니 참, 칠파일방을 맡는다면 그들이 힘을 합해도 걱정할 것이 없단 결론이 나오는군." 청룡천왕이 말했다. 추명혈왕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렇소. 문제는 그들의 합심과 망할 놈의 '겁난유세'로 인해 등을 돌린 강호의 인심이오. 하나 그것 역시 마찬가지. 남은 강호인들이 모두 모여들더라도... 본 성의 남은 영웅기(英雄旗)와 충혼기(忠魂旗)를 당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오." 그제서야 구천왕들의 안색이 풀어졌다. 만일 강호의 모든 힘이 모이더라도 천라성을 당해 낼 수 없다면 굳이 애써 힘들여 각개 격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순간 또다시 천라성이 흔들렸다. "이거... 근자 들어 지진이 너무 잦은 것 같소이다." 백호각을 맡고 있는 백호천왕의 말에 여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영웅기의 기주 무적금강권(無敵金剛拳)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것은 지진이 아니오." "그럼 무엇이란 말이오?" 백호천왕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무적금강권(無敵金剛拳) 극일도(極一道)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일어나자 충혼기의 기주인 한성철검(寒星鐵劍) 양자성(陽子聖)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우리 충혼기와 극 기주의 영웅기가 태상성주의 직속임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이오. 덕분에 우린 태상성주님의 행방을 알고 있었지만 여태껏 여러분에게 말하지 못하고 있었소." 웅성거리는 소요가 일곱 명의 우두머리들 속에서 일어났다. 그 소요를 억누르기라도 하듯 양자성의 음성이 높아졌다. "모두 태상성주님의 뜻이셨소. 하지만 이제는 말씀드릴 수 있소." "태상성주께선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역시 성질이 가장 급한 청룡천왕의 질문이었다. "지하에 계시오." "지하? 이 밑은 화산의 맥이 지나는 곳이라 용암으로 뜨거운데 도대체 왜...?" "바로 그 용암 때문이오. 그분께선 혈마수라결의 마지막 십이 성의 단계를 한 걸음 더 초월하시기 위해 그곳으로 내려가셨소. 간간이 느껴지는 울림은 바로... " 순간! 웅-우우웅기묘한 울림이 다시 방안을 채우더니 점점 더 그 힘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돌이 흔들리고 천장이 내려앉을 듯한 큰 소리로 변하더니 구천왕들이 중심을 잡기가 힘들 정도의 큰 울림으로 변했다. 후두두둑! 천장에서 저절로 돌무더기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바닥이 마치 가뭄을 만난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홉 명의 천왕들은 거의 동시에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우웃! 이, 이런 기운이..." "올라온다! 뭔가가 올라온다." "피, 피해! 터져 나간다-" 꽈르르릉! 바닥이 만 근의 화약이라도 터진 듯 그대로 위로 솟구쳐 올라 거대한 바위들이 화살보다도 빠르게 사방으로 비산했다. 구천왕들은 분분히 뒤로 날아오르며 그 폭발을 피했다. 저마다 강기를 피부 밖으로 내뿜어 보호막을 펼 수 있을 정도의 고수 아홉 명. 그러나 그들의 눈에 어린 것은 공포의 빛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올라오기에...? "하하하, 크하하하...!" 웃음 소리는 폭발음보다 더 강렬하게 사방을 흔들었다.


구천왕들은 기혈이 저절로 끓어오름을 느끼며 귀를 막았다. 웃음과 함께 지저의 무저지옥으로부터 올라오는 듯한 한 개의 그림자가 까마득한 허공으로 치솟았다. 영웅기주 무적금강권이 그것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는 경악스런 한마디를 내뱉었다. "태... 태상성주, 진정 태상성주시옵니까?" "크하하하, 그래 나다! 드디어 혈마수라결의 마지막 단계를 넘어 심신이 마기에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올랐다." 혈마수라결을 십이 성 익히면 저절로 피를 그리워하는 마인이 된다. 해서 이백 년 전 희대의 마인이던 좌고학마저 십이 성 익히기를 두려워했었다. 한데 종기는 오늘 그 무공을 대성하고 다시 한고비를 더 넘도록 그것을 익혀 낸 것이다. 종기의 몸을 감돌며 몸서리쳐지는 기운을 흘려 내는 마기. "용암으로 이루어진 극열지옥, 난 그 힘을 빌려 나의 마기를 태우고 다시 형성시키기를 반복했다. 해서... 드디어 나는 마기에 지배당하지 않고 새로운 나만의 무학을 창시해 냈다." 그의 몸 둘레의 마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대신 은빛의 서기가 담담하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신마은하광(神魔銀河光)!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혈마수라결의 마기를 내가 잠재우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하하하..." 웃음짓는 그의 얼굴에는 이제 어떤 마기도 없었다. 순간이었다. 땅이 한 번 더 흔들리더니 종기가 뚫고 나온 구멍으로부터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열기가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저... 저것, 지심열화가 밖으로 솟구친다! 용암이 흘러나온다!" 누가 외쳤을까? 콰아아이글거리는 지옥의 불길. 돌을 녹이고 금속마저 물로 만들어 버리는 지심열화의 붉은 빛은 구천왕의 마음마저 공포로 잠기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돌아가라." 담담하게 말한 종기의 손이 앞으로 내밀어지자, 그 손에서 은빛 서광이 찬란하게 피어올라 용암을 비추는 것이 아닌가? "저... 저럴 수가! 믿을 수 없구나!" 서광을 받은 용암은, 믿기 힘들게도, 급격히 열을 잃더니 돌로 변하고 말았다. "신마은하광은 극도의 음양이 한곳에 모인 무공. 이 속에는 만압층층공, 오색채화강, 반야뇌정력과 만변주정공, 그리고 극염자하진기의 정화가 모두 녹아 있다. 또한 혈마수라결마저 결합된 것이니... " 구천왕은 저마다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강호가 모두 모여 설령 삼전과 사각, 그리고 이기를 당해 낸다 하더라도 태상성주 종기를 당해 낼 자는 천하에 없을 것이다. 이제 천라성만이 홀로 강호에 남으리라. 온옥교는 얼른 얼굴의 수심을 지웠다. 혈앵무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궁주, 그... 옥수검을 걱정하십니까?" 옥수검 광무혼의 이름을 부르기가 민망한 것이리라. 혈앵무의 말에 온옥교는 힘든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배분을 따지자면 제 사저가 되셔요. 하니 편하게 말씀하시길." "그럴 순 없습니다, 궁주. 오색채화강을 익힌 사람이 궁주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의 입장으로 어찌 궁주께 말을 놓겠습니까?"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혈앵무가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걱정 마십시오, 궁주. 그분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하늘이 돌보는 것이니... 아무리 유령전의 위험이 비밀 속에 있다고 하나 그분을 어쩌진 못할 겁니다." "그렇겠죠? 정말 그렇겠죠?" 온옥교는 힘없이 말했다. 혈앵무는 고개를 숙인 후 물러가려 했다. 자신이 있어 보았자 도움이 될 수 없음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저..." 순간 온옥교가 물었다. "...혹 숭산의 방향이 어느쪽인지 아시나요?" "저쪽입니다, 궁주." 온옥교는 혈앵무의 손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의 하늘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의 색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온옥교의 눈에는 특별하게 보였다. 유령전이 숭산에 있기 때문이다. 광무혼도 저쪽에 있을 것이다. * * * 월곡을 떠난 것은 열흘 전이었다. 광무혼은 팔 일 전에 숭산에 도착했다. 하루 동안 그는 경공술을 극성으로 발휘하여 모든 봉우리와 골짜기를 헤메고 다녔다. 심지어 소림사가 위치한 소실봉과 그 근처도 빼놓지 않고 뒤졌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유령전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령전은 말 그대로 유령인 듯했다.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하지만 꼭 존재한다. 강호의 소문은 뜬구름이지만... 존재하지도 않는 곳이 그처럼 유명해질 리는 없을 것이다." 용기를 스스로 북돋우기 위해 광무혼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다시 열흘이 더 지났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욱 샅샅이 숭산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정말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광무혼은 힘이 빠져 중얼거렸다. 목이 말랐다. 콰아아아폭포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 온 것은 그때였다. 높이 십 장의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 소리가 하도 커 귀가 멀 듯했다. 광무혼은 폭포 아래의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로 목을 축인 후 곧 폭포의 장관에 빠져 들었다. "아름답구나, 정말..." 물보라가 일어나면서 마치 안개 같은 물알갱이들이 허공 중에 둥둥 떠다녔다. 햇빛을 받은 물방울은 칠색의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며 자태를 자랑했다. 광무혼은 다리에서 힘이 빠져 나감을 느꼈다. 그는 벌써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했던 것이다. 일단 자리에 눕고 싶었다. 무지개를 보며 광무혼은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무지개! 일곱 색깔 무지개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한 사람의 몸. 혈옥인 옥청의 단홍진기(端虹眞氣)가 아니라면 이런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오랜만이군, 무혼!" 옥청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광무혼은 눈물이 나올 듯해 얼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살아 있었군, 응? 살아 있었어..." "난 여기에 있었네, 항상. 하지만 자넨 지금 어디에 있는 건가?" "나? 난... 나는..." "자넨 왜 이곳에 왔나? 이곳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광무혼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유령전을 찾으러 여기에 왔다. 하지만 지금 무얼 하고 있나? 벌떡 일어난 광무혼은 고함을 지르며 물속으로 달려들어갔다.


차가웠지만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물. 물속을 둥둥 떠다니면서 광무혼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고맙네, 옥청. 자넨 꿈속에서마저 내 잘못을 깨우쳐 주는군. 기다리게. 일이 끝난 후 나도 곧 자넬 따라갈 것이니..." 물이 흘렀다. 광무혼의 몸도 물을 따라 흘러갔다. '한데 이상하구나. 저렇게 많은 물이 떨어지는데도 이곳의 흐름은 잔잔하다니...' 갑자기 광무혼의 몸이 벼락맞은 물고기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그는 몸을 돌려 폭포를 보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폭포 아래를 쳐다보았다. 돌아가는 소용돌이. 물에 의해 파여진 깊숙한 구멍을 따라 돌아가는 소용돌이는 분명 어느 폭포에나 있는 것이지만 지금 이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구멍이다! 폭포 아래에 구멍이 있어!' 아무리 돌아다녀도 찾을 수 없다면 숨겨진 장소가 있다는 얘기. 광무혼은 지체없이 폭포 밑으로 몸을 날렸다. 쏴아아아폭포수의 물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우르르릉마치 뇌성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귓속을 가득 메웠다. 물은 광무혼의 전신에 엄청난 압력을 쏟아 부었다. 광무혼은 소용돌이를 따라 끝없이 맴돌기만 했다. 몇 번이나 맴돌았을까? 처음에는 그저 휙휙 지나가는, 희고 검은 잔상으로만 보이던 주위 정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래쪽 물이 소용돌이의 끈을 이루며 빠져 나가고 있는 검은 구멍이 보였다. '저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 말려든 이 소용돌이를 벗어나야만 한다.' 광무혼은 전신의 모든 진기를 양손에 담아 앞으로 쏟아 부었다. 꾸르륵! 뇌령장이 헛되이 물을 밀어 낼 때 그 반탄력을 받은 광무혼의 몸은 마침내 소용돌이를 벗어났다. '우웃! 어, 엄청난 압력이로구나!' 벗어나자마자 광무혼의 몸은 사정없이 검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검은 구멍은 길고도 깊었다. 물은 끝없이 아래로만 떨어졌고, 떨어질수록 압력은 더욱 거세만 갔다.


천 근, 아니, 만 근의 힘이 몸 곳곳을 눌러 광무혼은 자신의 몸이 곧 찌그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너무 서둘렀다. 준비를 했어야... 우욱! 압력을 견딜 수가...' 더욱 힘든 것은 숨을 쉬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귀식대법을 사용하면 오랫동안 숨을 멈출 수는 있겠지만 몸을 눌러 오는 가공할 압력에 저항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때였다. 광무혼은 자신의 옆으로 어떤 식물의 씨앗이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그 씨앗은 내공은커녕 아무런 방비도 없었지만 수압에 눌리지 않는 듯했다. 숨이 턱에까지 차 왔다. 광무혼은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그래, 어차피 숨이 막혀 죽으나 몸이 터져 죽으나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니...' 그는 몸을 최대한 구부렸다. 전신을 둥글게 말아 바깥의 압력을 최소화시켰다. 그 상태로 광무혼은 귀식대법에 들어갔다. 정신이 희미해지면서 수압이 온몸의 신경 세포 하나하나를 눌러 왔다. 광무혼은 자신의 몸이 터져 버렸다 여기면서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린 곳은 지하의 빈 공간이었다. 광무혼은 그 안의 연못 가장자리에 누워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난 광무혼은 자신의 몸을 물에 비춰 보았다. 없었다. 어디고 터져 나간 곳은 없었다. '어떻게 내가 그 압력을 견딘 것일까? 혼절한 후에도 꽤 많은 거리를 떨어져 내린 것 같은데...'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혹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떤 신공을 깨달은 건 아니었을까?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태어난다는 선천의 잠력을 격발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광무혼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사방을 둘러본 광무혼은 장탄식을 터뜨렸다. 연못만 덩그러니 있을 뿐 어느 곳도 뚫린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깎아지른 듯한 벽에는 손 대고 오를 만한 요철도 찾을 수 없었다. "이럴 수가! 마치 유리벽같이 깨끗하다." 그는 머리를 들어 위쪽을 보았다. 설명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까마득히 높은 곳에 바늘구멍 같은 것이 보였다. 그곳에서 들어오는 빛이 이 지하에 존재하는 유일한 밝음이었다.


"저곳이 유일한 출구로구나. 한데 이곳을 어떻게 벗어난단 말인가? 올라갈 방도가 전혀 없으니..." 그는 연못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곳을 통해 폭포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쏟아져 들어오는 물의 가공할 압력을 무슨 수로 감당하겠는가? "빌어먹을! 정말 빌어먹을!" 욕설을 토해 내면서 광무혼은 벽을 쳤다. 쾅! 쾅! 손등이 갈라져 피가 흘렀지만 광무혼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은 강호에 꼭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절대 없었다. 순간, 지하의 공간이 환하게 밝아졌다. 눈을 위로 든 광무혼은 햇살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하루에 꼭 한 번 이 수직의 지하 공간에 햇살이 들어오는 것이다. 눈이 부셔 고개를 내리던 광무혼은 매끄러운 줄로만 알았던 벽에서 글자를 보게 되었다. 여태껏 어두운 탓에 보이지 않았던 글. 무언가에 대한 설명인 듯 깨알같은 글씨 밑에 큰 글씨 세 글자가 또렷이 박혀 있었다. <유령전(幽靈殿)-불귀지처(不歸之處)> 광무혼은 자신이 읽은 글씨들을 되새겨 보고 있었다. 그곳에 적힌 것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이었다. 방법이 있는데 왜 불귀지처, 돌아갈 수 없는 땅이라 이름붙였을까? <먼저 이곳까지 살아 들어온 그대를 치하한다. 그대는 필시 압력에 저항하기 위해 스스로의 잠력을 이끌어 냈을 터, 그것이 바로 귀곡자께서 남기신 태원신공(太元神功)의 요체이다. 하나 그대에게 전해질 것은 결코 무절(武絶)의 인연이 아니니 그대와 태원신공은 인연이 없다. 다만 약간은 깨달음을 얻었으니 절망벽(絶望壁)을 오르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다. 노부가 이곳에 유령전을 남긴 의미는 귀곡의 삼절이 실전되지 않도록 함이었으나, 또한 세상의 그 누구도 얻지 못하게 만듦이기도 하다. 유령전은 말 그대로 유령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곳. 인간은 한번 들어오면 절대 다시 나갈 수 없다. 다만 청옥석으로 이루어진 절망벽을 뚫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금옥수의 비결을 이곳에 남기니 연자(緣子)는 스스로의 운을 시험해 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금옥수가 청옥석을 뚫을 수 있는 유일한 수법이긴 하나 그 운용에는 막대한 내력이 소모되니, 그대가 오 갑자 이상의 내공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포기함이 나으리라는 점이다.> 광무혼은 머리를 내저었다. 자신의 내공은, 원래의 이 갑자 정도에 보태어진 옥청의 내공을 합해도 삼 갑자에 불과한 것이다. 폐인이 됨을 무릅쓰고서 진원지기까지 모조리 끌어올리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금옥수의 구결을 읽어 본 광무혼은 단박에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금옥수는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는 금강석조차 잘라 낼 수 있는 극강의 강기무공이었다. 하나 그만큼 내공의 소모도 엄청나 실로 삼 갑자 이하의 내공을 소유한 사람은 시전해 볼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것을 계속 시전해야만 올라갈 수 있단 말인가? 그 외에는 이 절망벽에 손을 박아 넣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단 말인가?" 화가 난 광무혼은 크게 외치면서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절세의 무령장(武靈掌)이 뇌성을 지르면서 솟구쳤다. 콰앙그러나 결과는 손목이 끊어질 듯한 고통뿐이었다. "그럼 이것도 있다. 벽력쇄혼세!" 파츠츠검세가 번갯불처럼 사방의 벽을 긋고 지나갔다. 하나 벽에는 희미한 흔적만이 남았을 뿐, 절세의 신병이라는 충천검의 검날만 상하고 말았다. 그제서야 광무혼은 알 수 있었다. 이 벽은 단순한 청옥석이 아니며 청옥석 본래의 강함에다가 귀곡 독문의 특수한 제련을 거쳐 가히 금강석보다 강하게 만들어진 것임을. 왜 절망벽이라 이름붙였는지 알 것 같았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 보이는 유일한 바늘구멍. 광무혼은 그곳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쳐다보았다. 주변은 어른 이십여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이런 공간이 저렇게 작게 보이려면 대체 얼마나 길어야 할 것인가?' 광무혼은 이를 악물었다. 올라가다 보면 쉴 곳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힘을 잃게 되면 천 길 높이에서 바닥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떨어져 머리가 박살나고 전신의 뼈가 으깨진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올라가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광무혼은 창궁진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전신이 장엄한 서기에 휩싸이더니 그 서기는 충천검을 향해 몰려갔다. 웅웅우웅! 검이 용틀임을 하기 시작했다. 창궁검법의 마지막 초식이며 펼쳐지려는 것이다.

이기어검술에

해당하는

의형회혼세(意形廻魂勢)가


광무혼의 눈은 자신이 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을 향했다. 그리고 충천검이 그의 손을 떠났다. 슈우우우악! 날아간 검은 까마득한 높이의 벽에 깊숙이 박혔고, 손잡이가 아래위로 흔들렸다. 좀 전 검기로도 자르지 못했던 벽에 검을 찔러 넣었으니, 얼마나 큰 진기가 소모되었는지 알 것이다. 광무혼은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운기조식! 진기를 일곱 번 전신으로 돌리고 나자 광무혼은 활력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연못의 물로 목을 축였다. 차후 자신의 옷을 모두 벗었다. 상의는 적의 검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내피가 가죽으로 받쳐져 있었다. 광무혼은 망설임없이 옷을 찢었다. 옷을 둥글게 만 그는 천을 찢어 만든 줄을 이용해 입구를 묶었다. 훌륭한 가죽주머니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후 가죽주머니에 물을 가득 담아 배에 두르고, 끈으로 다시 묶었다. "단단한 벽에 발 디딜 곳을 만들기 위해 금옥수로 돌을 자르는 곳에만 공력이 소모된다. 짐이 무거운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광무혼은 벽 앞에 섰다. 오 갑자 이상의 내공을 지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말했지만 그는 자신이 있었다. 머리를 쓰면 되는 것이다. 광무혼은 벽호공의 구결을 외웠다. 우선 벽호공으로 벽에 붙어 올라가다가 힘이 부치면 손으로 벽을 뚫은 뒤 휴식을 취하려는 것이다. 하나 이런 생각이 너무 안이했음이 곧 드러났다. 절망벽은 기이하게도 광무혼의 손을 밀쳐 냈던 것이다. "마치 뇌전과도 같은 기이한 힘이 안에서 흐르고 있다. 빌어먹을! 이 벽을 오르기 위해선 내공을 물먹듯이 소모하는 금옥수를 사용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광무혼은 이를 악물고 금옥수의 구결을 외웠다. 손끝이 황금빛으로 빛나면서 날카로운 강기가 그 끝에 만들어졌다. 슈욱! 손이 벽을 파고드는 순간, 광무혼은 자신의 진기가 마치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물처럼 급격히 사라짐을 느꼈다.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야만 했다. 한 번 손을 뻗어 벽 속에 넣은 후 금옥수를 풀면, 매달려서 쉴 수는 있을 거란 생각을 광무혼은 십 장 정도를 올라가자 버려야 했다.


일단 금옥수를 풀고 나면 내공의 소모는 사라졌지만, 벽에서 밀쳐 내는 반탄력으로 붙어 있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빌어먹을! 정말 이곳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관문이란 말인가? 오르는 게 불가능하단 말인가?" 광무혼은 재빨리 다시 금옥수를 일으키면서 위로 올라갔다. 내공은 불붙은 기름처럼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다. 지칠 대로 지쳤을 즈음, 전신에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차라리 손을 놓고 떨어지는 게 낫다 싶을 즈음에 광무혼의 손이 충천검에 닿았다. '검을 던져 두길 잘했다. 쉴 곳이 생긴 것이니.' 충천검의 힘을 빌어 처음으로 휴식을 취하면서 광무혼은 생각했다. 주머니를 끌러 물을 마셨다. 운기조식을 마치자 힘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제 겨우 삼분지 일을 왔을 뿐이다. 갈 길은 온 길보다 배는 멀었다. 다시 금옥수를 돋우면서 광무혼은 문득 어린 시절 무공을 처음 배울 때를 생각했다. 너무 힘이 들어 차라리 포기하고 싶어지는 순간 종기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한 발만 더 옮겨라. 넌 산속에서 조난당한 사람이다. 한 발만 더 옮긴다면 저 모퉁이 너머의 인가를 볼 것이지만, 포기한다면 죽고 만다. 광무혼은 그때 이를 악물고 한 발을 더 옮겼고, 마침내 십절 중의 하나라는 명성도 얻었다. 지금도 그랬다. 광무혼은 이를 악물고 한 발, 한 발, 아니 한 뼘, 한 뼘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삼분지 이를 올라갔을 때 광무혼은 전신의 힘이 급격히 빠짐을 느꼈다. 순간 단전이 진동하면서 옥청이 남긴 진기가 전신으로 유포되었다. 그리고 다시 움직여 가는 광무혼. 이제 입구로 보이는 구멍은 백 장 정도 위로 보였다.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판단하건대 벌써 나흘이 지났다. 물은 떨어진 지 이미 오래라, 광무혼의 갈라 터진 입술에는 피가 말라 붙어 있었다. 그러나 광무혼은 포기하지 않았다. 우습게도, 어린 날과 마찬가지로 이 순간 광무혼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 또한 종기였다. '올라가야 한다! 한 번 더, 다시 한 번 더! 나는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단전의 진기 또한 고갈된 지 오래였다. 광무혼의 입과 코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단전에 간직되고 있던 진원지기가 손상되면서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광무혼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여러 번에 걸친 내상으로 찢어졌다 다시 이어졌던 그의 혈맥들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눈과 귀로도 시꺼멓게 썩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광무혼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죽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절대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8. 천수옹의 유산, 그리고 전쟁 마지막 한 손. 광무혼의 손이 드디어 입구에 닿았다. 그의 몸은 이미 죽어 가고 있었지만 살아 꿈틀거리는 마지막 정신력이 그를 여기까지 이끌고 온 것이다. 그러나 입구는 입구가 아니었다. 그곳은 반투명한 수정으로 막혀 있었다. 쾅! 쾅! 아무리 두들겨 보아도 이미 힘을 잃은 광무혼에 의해 열려질 수정창이 아니었다. 절망! 아득한 절망이 전신을 감쌌다. 오직 한 가지 희망으로 지탱되던 광무혼은 머리 끝부터 허물어지면서 손을 놓고 말았다. 천 장, 아니 몇천 장, 어쩌면 몇만 장이나 될 듯한 공간을 광무혼은 추락했다. 추락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우르르릉! 사방의 벽이 뇌성을 떨쳐 내며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흔들리더니 푸르기도 하고 희기도 한 기이한 기세를 밖으로 토해 내기 시작했다. 파직! 파지직! 그것은 흡사 천상의 뇌정 같았다. 태초에 존재했으나 인류가 악에 물들며 사라졌다는 전설을 간직한 가장 정의롭고 순수한 기운. 그 뇌정이 광무혼의 몸을 감싸자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더니 어느 순간 허공에 가만히 멈추었다. 광무혼은 전신의 모든 힘이 소모됐고 또한 절망으로 마음마저 공허하게 빈 상태였다. 그 틈을 뚫고 뇌정지기가 마구 침입해 들어가는 것이다. 퍽! 퍼퍽! 끊어졌던 혈맥이 다시 이어지고, 단전이 다시 차 올랐다. 바로 뇌정지기의 힘이 광무혼을 다시금 살아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것도 모른 채 광무혼은 여전히 혼절한 상태였다. 이윽고 광무혼의 몸이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시간이 갈수록 엄청나져 급기야 마치 한 줄기의 번개가 거꾸로 달리는 것 같았다. * * * 정신을 차렸을 때 광무혼은 산봉우리 위에 누워 있었다. 그 봉우리 주위에는 산이 둘러싸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런 지형이라면 아무리 밖에서 둘러보아도 이곳을 찾아올 수 없을 것이다. 주위의 산들이 선천적으로 기진(奇陣)을 형성하고 있구나!' 광무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원래 자신이 가졌던 공력이 돌아와 있었고 기력은 오히려 전보다 더욱 충만한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키던 광무혼은 문득 앞쪽에 작은 집이 한 채 지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앞쪽에 작은 석비가 있었고, 그곳에는 글이 쓰여져 있었다. 광무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귀원봉(歸元峰)에 내 무덤을 만든다. 태고의 힘을 이어받은 파황뇌전철의 기운을 빼내어 만들어진 절망벽을 타고 오른 사람은 나와 인연이 닿은 사람이다. 그대가 광무혼이라면 다행한 일일 것이나 설혹 그렇지 못하다면 부디 부탁한다. 석옥 안에 있는 천뢰검(天雷劍)을 수습해 주오. 그건 천지에서 가장 날카로운 검이니 어떤 자라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임종하기 전 하늘은 내게 잠시, 누구도 감당 못 할 능력을 지닌 자가 강호에 종말을 가져 오리라는 천기를 보여 주었다. 이미 그대의 몸 속에 들어간 뇌정지기는 단 한 번 천뢰검(天雷劍)을 통해 시전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부탁한다. 검으로 종기를 제거해 주오. 그런 연후 내 무덤으로 만들어진 이 석옥을 영구히 폐쇄시켜 주길 바라오. 천고의 죄인 천수옹이 참회하며 이 글을 남긴다.> 광무혼은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유령전이란 바로 귀곡의 진전을 묻어 둔 곳이었던 것이다. 천수옹은 이곳을 이용해 자신이 안배한 최후의 한 수인 천뢰검과 뇌정지기를 광무혼에게 넘겼다. 모든 힘이 빠지고 마음마저 빈 상태가 아니라면 들어가는 상대에게 힘을 주기는커녕 한줌의 재로 만들고 마는 것이 뇌정지기임을 알기에 만든 안배였다. 광무혼은 손을 불끈 쥐었다. 이제 준비의 시기는 끝났다. 전쟁은... 막 시작된 것이다. * * * <무림에 고한다. 천라성은 아래와 같은 자들을 본 성의 적으로 간주한다.


기일(其一). 자. 기이(其二). 기삼(其三). 이상의 모든

무림회천맹을 돕거나 또는 그들의 활동을 방관하는 자, 또는 그에 준하는 본 성에 불리한 행동을 하는 자, 또는 그러한 마음을 가진 자. 본 공고를 본 지 열흘 이내로 본 성에 투항하지 않는 자. 자들을 본 성은 적으로 간주한다.

천라성 태상성주 근심수사 종기 백(白).> 이 공고는 결코 엄포가 아니었다. 강서의 명숙이던 철필선생 설백로가 공고를 보고 비웃었다가 다음날 목이 잘리고 전신의 옷이 발가벗겨진 시체로 발견되었다. 두 번째 사항을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하 도처에서 피보라가 일어났고, 그 때문에 오히려 무림회천맹에 가입하는 문파의 수는 늘어만 갔다. 서서히 더워지는 오월 이십삼일. 첫 번째 큰 사건이 일어났다. 낙양에 세워졌던 천라성의 게시판이 불에 탄 채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 보복으로 천라성의 추명전이 출동해 낙양 근처의 문파 일곱 개를 무림의 명단에서 지워 버렸다. 그러나 낙양은 무림회천맹의 주 문파인 광명전과 가까운 곳이다. 살륙을 마치고 돌아가던 추명전과 추명혈왕은 분노한 광명전과 무림회천맹의 공격을 받게 된다. 무림회천맹의 고수는 칠백 명이 넘었지만 그들은 불과 일백 명에 불과한 추명전을 맞이해 하루 밤낮을 싸운다. 해가 뜨고 지고 다시 뜰 때, 무림회천맹은 삼백여 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낸 채 힘겨운 승리를 맞는다. 승리! 백여 명을 죽이기 위해 삼백여 명이 희생된 승리. 어떤 의미가 있는가? 콰르릉! 무심한 죽음을 하늘도 슬퍼하는가? 비가 한치 앞도 보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내리고 있었다. 추대는 어깨와 허벅지에 각각 심한 부상을 입었고, 추운행의 왼쪽 다리에서도 계속해서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추명혈왕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그의 오른쪽 허리는 거의 뼈가 다 드러날 정도인 것이다. 자신의 상처를 내려다보면서 추명혈왕은 툴툴 웃었다. "한낱 부채에 이런 상처라니, 정말 우습군.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우스워." 추운행은 새로 만든 반월선을 접으며 말했다.


"항복해라, 추명혈왕. 네 부하들은 이제 하나도 남지 않았다. 너 혼자 헛된 반항을 하는 건... 의미가 없다." "크하하, 의미가 없다고? 합공하여 겨우 날 이긴 주제에, 크하하...!" 그의 웃음은 여전히 크고 굉렬했다. "흥! 너희들의 힘은 겨우 이 정도다. 봐라, 우리 추명전 하나를 상대하면서 너희 측이 입은 피해를! 항복해라. 추명전은 본 성이 가진 아홉 개의 하부조직 중 하나일 뿐이다." "아니, 그 반대다, 추명혈왕!" 추대가 검을 다시 고쳐 잡으면서 말했다. "우린 너희의 힘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너흰... 단합하지 않고 혼자 움직였다. 널 상대하기 위해 우리가 합공한 것처럼 다른 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이 나서면 된다. 오히려 오늘의 싸움은... 우리에게 희망이다." "크하하, 희망! 그래, 죽음뿐인 희망일 것이다." 추명혈왕의 손이 다시 앞으로 내밀어졌다. 그의 손이 두 배 정도로 커지면서 핏빛의 회오리가 그 속에서 뻗어 나왔다. "사해가 핏속에 잠기리라. 혈몰광천하!" 그러나 미리부터 준비하고 있던 추대는 왼발을 오른발의 뒤로 재빨리 이동시키면서 검을 비스듬히 휘둘렀다. "휘어져라!" 그러자 검에서 뻗어 나온 백색의 광채가 눈부시게 일어나면서 추명혈왕의 혈장을 압박해 가는 것이 아닌가? 강한 힘을 맞받아 치는 것은 어렵지만 옆으로 밀쳐 내는 건 비교적 쉬운 이치. 추명혈왕은 인상을 쓰면서 초식을 바꾸었다. 몸을 위로 띄우며 천선각의 초식으로 옆으로 피한 추대의 옆구리를 차려는 동작. 그러나 그 순간 추명혈왕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추운행의 반월선이 그의 왼쪽 심장에 깊숙이 꽂혀 있는 것이다. "미, 믿을 수 없군. 허공에서 방향을 틀다니..." 그의 눈빛이 꺼져 갔다. "넌... 어린 나이에 날 죽일 수 있었으니 장차... 강호에 큰 인물이 될 것... 그러나 그때까지 강호가 남아 있을는지는..." 추명혈왕은 죽었다. 그리고 무림회천맹은 첫 번째 승리를 얻었다. 죽음과 허탈뿐인 그런 승리를. 천라성의 구천왕은 이제 여덟 명 남았다. 그들 중 영웅기와 충혼기를 맡고 있는 두 명을 제외한 여섯 명은 지금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쾅! 원탁을 치면서 가장 먼저 나선 사람은 이번에도 역시 청룡천왕이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오. 만일 추명혈왕이 혼자 나가도록 두지 않고 우리 모두가 함께 강호에 나섰다면 이런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오." "맞습니다. 왜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택하는 것이오?" 무극전(無極殿)의 무극신왕(無極神王)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강호는 우리가 한 번에 나선다면 절대 대항할 힘이 없소이다." 침묵이 흘렀다. 무극신왕의 말은 한치의 어김도 없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천라성에서 판단하기에는 말이다. 한데 왜 태상성주인 종기는 하나씩 강호에 내보내려 한다는 말인가? 한참 동안 침묵이 좌중을 떠다닌 후에야 조용히 앉아 있던 영웅기주 무적금강권이 입을 열었다. "하나 태상성주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소." "으음-" 신음 소리는 불만을 의미했다. 하지만 불만을 입으로 토로하는 자는 좌중에 아무도 없었다. 종기의 가공할 능력을 본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태상성주님께선 말씀하셨소." 충혼기주 한성철검이 입을 열었다. "추명전과 추명혈왕의 복수를 위해 무극전과 지광전이 나서서 각각 소림과 무당을 멸하라시는 분부시오." "명을 받듭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무극신왕과 지광전(地廣殿)의 지광권왕(地廣拳王)이 두 손을 위로 올리고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러나 고개 숙인 그들의 얼굴에 떠오르는 불만의 빛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 * * 추일령이 광명전의 고수들과 함께 소림에 도착했을 때, 그를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이 있었다. 대지(大智)였다. 광명전주 추대(秋坮)와 소림 장문인인 수현(修賢) 대사가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 그들은 뒤뜰로 슬쩍 물러 나왔다. "오래되었군요." "그렇소. 벌써 일 년이 넘었으니..." 그들의 감회는 남달랐다. 하지만 지금은 감회를 나눌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천라성에서는 추일령의 말에 추명전이 보여 하지만 대지는

무극전을 이곳으로 보내 큰 싸움을 일으킬 것이라 하오." 대지는 길게 신음했다. 줬던 위세를 이미 소문으로 들었던 까닭이다. 걱정만 하고 있는 졸장부가 절대 아니었다.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할 겁니다. 광명전에서... 이렇게 원군이 와 주신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것은 모두 만박 군사의 덕분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미한 정보만을 이용해 무극전이 소림을 노릴 것을 예견하셨습니다. 무당 쪽으로는 월곡과 금룡궁이 갔으니... 안심해도 좋으실 겁니다." "아미와 청성, 그리고 개방에서도 미리 와주셨으니... 오늘 무극전의 악도들은 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 * * 두두두두 일천 기의 기마. 모두 정예지만 그 중 일백 기는 최정예였다. 무극전의 고수들인 것이다. 가장 앞서 말을 달리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무극신왕이었다. 그는 지금 추명혈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최정예 일백만 데리고 갔다가 변을 당했다. 한 손이 여러 손을 당할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일천 기 모두를 데려간다.' 그는 뒤쪽을 힐끔 보았다. 비록 진군 속도가 느리기는 했지만 든든했다. 문득 아침나절 영웅기주가 보여 준 태도가 생각났다. '그놈들은 태상성주의 직속이란 것만 믿고서 너무 거만하게 군다. 젠장, 놈들이 마치 우리의 상관인 것처럼 행동하다니!'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건 태상성주의 명령이었다. 왜 강한 힘을 나누어 약하게 만드는 것인가? 무극신왕은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멀리 숭산 소실봉이 보였다. 그는 자신의 부아를 소림사에게 풀기로 했다. "천년 소림! 너는 오늘 내 손에 종말을 고할 것이다." 두두두두말이 달려갔다. 일천 기의 기마는 위풍이 당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소림에 전무림의 힘이 반 가까이 모여 있음을 몰랐다. 자신들의 공격 정보가 이미 어딘가에서 새나갔음도 전혀 몰랐다. * 콰르릉!

*

*


"우욱!" 자신이 내뿜은 무극신공력이 산산이 부서지는 충격 속에서 무극신왕은 또다시 다섯 걸음을 물러났다. 그는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데려온 일천 기의 기마 대부분이 죽고, 산 자는 이미 항복하고 만 것이다. 불신의 빛으로 고개를 저을 때 소림장문인 수현(修賢)의 외침 소리가 들려 왔다. "불타의 권능으로 사악을 잠재운다. 불광보도!" 황금빛 서광이 일어나며 무극신왕의 전신을 덮었다. 무극신왕은 이를 악물었다. '겨우 저 정도에... 내가... 내가...' 그의 무극신공장이 천회장법(闡悔掌法)의 불광보도를 막았다.

구결에

따라

뻗어

나가면서

수현의

꽈르릉! 굉음이 들리며 수현이 뒤로 연달아 일곱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에 반해 무극신왕은 겨우 세 걸음. 개개인의 대결에서는 무극신왕이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득의(得意)하지 마라, 무극 잡졸!" 휘이이잉! 추일령의 반월선이 호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사마는 잠들라. 만주일통(萬珠一通)!" 대지의 쩌렁한 외침 소리도 들렸다. 그의 세심주 역시 번갯불 같은 빠르기로 무극신왕의 눈을 노렸다. 뿐인가? "여기까지다, 무극신왕!" 추대의 검도 영롱한 빛을 뿜으며 하늘에서부터 떨어지고 있었으니... 무극신왕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이... 이렇게 떼거지로 덤벼들다니. 틀렸다! 아무리 개개인의 능력으로는 우위에 있다 하나 이들 넷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다. 빌어먹을!' 어깨가 화끈했다. 눈을 노리던 세심주가 어느새 왼쪽 어깨를 꿰뚫은 것이다. "빌어먹을!" 무극신왕은 크게 외치면서 모든 내력을 쌍장을 통해 쏟아 부었다. 퍼펑! "우욱!" 대지가 입에서 피를 뿜으며 뒤로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이 끝이었다. 다른 세 명의 공격이 한순간에 무극신왕의 전신으로 쇄도해 왔던 것이다.


쉭, 하며 허리를 가르고 지나간 반월선에 이어 추대의 검과 수현 대사의 장력이 각각 등과 가슴에 명중했다. 무극신왕은 쓰러지며 원망스러운 듯 하늘을 보았다. 그 하늘에 지금 떠올라 있는 건 종기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극신왕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신들만 강호에 내보냈을까? 이건 죽으라는 명령과 다름없었다. '설마... 죽이기 위해?' "소림과 무당. 의외로 그들은 완벽한 준비를 하고 있었소. 무극전과 지광전은 실패했소. 무극신왕(無極神王)과 지광권왕(地廣拳王)은 모두... 죽었소." 말하고 있는 충혼기주 한성철검의 안색은 마치 돌처럼 딱딱했다. 영웅기주 무적금강권도 마찬가지였다. 사각의 각주들의 얼굴은 더욱 딱딱했다. "실패. 그렇소, 그들의 실패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소. 한데 왜 태상성주께선...?" 백호천왕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망설였다. 계속하는 건 불경죄에 해당함을 알기 때문이다. 무적금강권이 말했다. "그들의 실패가 완전한 실패는 아니오. 각각 일천 기, 도합 이천 기를 물리치기 위해 무림회천맹은 가히 이천이 넘는 희생을 치렀으니까." "흥! 말도 안 되는..." "또 당신이오, 청룡천왕?" "추명혈왕의 경우 일백의 군사로 가히 삼백과 공멸했소. 한데 이번엔 오히려 본 성 군사의 희생이 많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것 같소?" 무적금강권은 할말이 없었다. 자신도 그 결과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강호의 사기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건... 그건..." 무적금강권이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순간이었다. "너희들이 감히 내 명령을 거부하고 있는가?" 웅웅 울리는 거대한 굉음. 목소리만으로 이 정도의 위력을 보일 고수는 단언하건대 이제 강호에 단 한 명에 불과하다. 종기(宗耆)! 일찍이 삼기(三奇) 중 하나였으며 지금은 천라성의 태상성주. "불만이 있는 자는 나서라." 종기의 음성이 멀리서 들려 오자 여태껏 시끄럽던 좌중이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여섯 명 천왕들의 눈에는 한결같이 공포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한성철검 양자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태상성주시여, 저희는 다만 앞날을 의논했을 뿐입니다." "갈!" 종기의 일성이 들리자 양자성의 몸이 앉은 채 저절로 일 장을 쭈욱 밀려났다. 툭! 툭! 그의 입과 코에서 떨어지는 핏물은 양자성이 내심 받은 충격이 얼마나 큰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나타나지 않은 채 소, 소리만으로도 저 정도라니...!' '으으, 태상성주의 무공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요, 용서하소서. 속하가 무례했습니다." 양자성이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순간 그가 절하는 바로 앞쪽에 둥근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위우웅! 바람은 검어지더니 곧 다시 흰색을 띠고, 이윽고 사람의 모습을 갖추어 갔다. 근심수사 종기! "명을 내린다. 이젠 전면전(全面戰)이다. 충혼기와 기주 한성철검을 제외한 다섯 명의 천왕은 모두 강호로 나가라. 그리고 감히 무림의 평화를 위협한 무림회천맹의 도당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섬멸하라." "존명!" 복명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힘을 보여 주면 복종은 더욱 확실해진다. * * * 신주평(神州坪)! 후세 사가들이 무림제일차대전이라 이름붙인 전쟁이 이백 년 전 이곳에서 일어났다. 재래(再來)한 혈왕교(血王敎)에 맞서 싸운 단심맹(丹心盟)과 군영회의 영웅들. 그들이 흘린 피로 신주평은 신음했었다. 이제 이백 년이 지난 지금 신주평은 또다시 피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소림과 무당, 개방, 그리고 아미와 여타의 문파들. 추대가 이끄는 광명전의 힘. 북취명이 이끄는 금룡궁과 혈앵무, 혈당랑이 함께 이끄는 월곡의 위용이 보였다. 뒤쪽으로는 서둘러 달려온 곡주 공회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겁난유세'를 읽고 천라성의 정체를 안 다음 무림회천맹에 투신한 수많은 고수들. 그들은 수가 많았다. 하지만 천라성의 수는 비록 적었지만 고수들이 즐비했다. 사각의 사천왕과 영웅기주 무적금강권만 해도 무림회천맹 입장에서는 일 대 일로 싸울


사람이 없는 것이다. 대치 상태. 일촉즉발의 대치 상태가 벌써 두 시진째 이어지고 있었다. 공회는 지금 만박과 서둘러 상의를 하고 있었다. "백호각주는 소림과 무당, 두 문파의 장문인께 맡깁시다. 대지 대사와 창허 도인의 무공 또한 높으니 넷이라면 능히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공회의 말에 만박이 서둘러 받았다. "현무각주는 아미와 청성, 종남 등 남은 오(五) 파의 장문들이 힘을 합해 주기로 했소. 결코 불리하지는 않을 것이오." "개방 방주 신풍개께선 저희 월곡과 힘을 합해 주작각주를 맡아 주기로 하셨습니다.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금룡궁주 북취명은 광명전의 소전주인 추운행과 함께 청룡각주를 맡아 주기로 했소. 이들은... 아무래도 고전할 것이오." "광명전주 추대 대협을 비응방주 금성무 대협 등께서 도와 주실 겁니다. 영웅기주인 무적금강권이 비록 사각의 각주보다 강하다지만...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공회와 만박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 일전은 오직 죽음만이 걸려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피할 수는 없었다. 해가 떠올라 중천에 걸린 시각! 마침내 공격 신호가 내려졌다. 우두두두! 말과 말들이 달려가는 평원.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 * * 훗날 뛰어난 사가(史家)였던 수경선생이 남긴 기록은 다음과 같다. <그날의 싸움은 실로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시작된 싸움은 해가 지고 다시 뜨기를 세 번이나 반복했건만 끝날 줄을 몰랐다. 무림제이차대전이라 이름붙여진 이날의 참화는 실로 일차대전 때와는 너무도 달랐다. 그때는 적이 뚜렷했다. 하나 이때, 천라성은 어쨌든 무림의 안정을 외치고 있어 만박이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겁난유세'가 아니었다면 실로 중인들은 흑백을 구별하지 못했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말한다. 한 권의 책이야말로 무엇보다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시체가 산을 이루고 그 골짜기로 피의 물이 흘렀도다. 무림회천맹 일만 삼천여 명, 천라성 오천여 명은 죽고 죽이는 살륙을 거쳐 사흘째 단 삼천 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영웅기주 무적금강권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무림제이차대전은 끝을 맺었다. 무림회천맹의 승리. 그러나 무엇이 남았는가? 피와 죽음, 그리고 허무만이 남았을 뿐이다. 이날의 승리로 무림은 원기를 거의 잃었고, 실로 백여 년 간을 암흑기로 보내게 되는 것이다. 한 가지 의문으로 남는 것은, 이 처절한 전투의 와중 어디에도 광무혼과 추일령에 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림회천맹 측의 가장 뛰어난 두 고수였는데, 어찌하여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만일 그들이 있었다면 이날의 전투는 보다 적은 희생으로 끝이 났으리라. 해서 나는 생각한다. 우두머리 된 자가 스스로 희생하지 않는다면 아래의 희생은 몇 배가 되는 것이라고.> 정말 광무혼은 어디 있었을까? 9. 종말을 향한 질주 지금 신주평에서는 싸움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천라성은 매우 조용하고 안온했다. 천라성의 중앙 왼쪽 건물이 바로 충혼기주 한성철검 양자성의 거처였다. 충혼기주 한성철검의 충성심은 누구라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태상성주의 진노에 의해 내상을 입었다고 해서 천라성에 대한 충성심을 버릴 리는 없었다. 다만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비가 약을 가져 왔을 때, 그는 그것을 단숨에 먹어 버리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천라성! 강호에 평화를 가져 오기 위해 천라성의 태상성주 종기가 택한 것은 힘이라는 방법이었다. 한성철검 양자성 역시 그것에 찬성했다. 사실 힘없이 아무리 덕을 외친다 해도 무림에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천라성은 무림에 평화를 가져 오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의 살륙은 누가 일으킨 것인가? 광무혼! 하지만 천라성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의 광무혼이 생겼겠는가? 그는 발작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밖을 보며 외쳤다. "습호리(濕狐狸)와 새노반(塞魯般). 서둘러 그들을 불러오너라." * * * 주인을 잃으면 하인은 할 일을 잃게 된다.


습호리와 새노반은 성주 운지의 그들은 이전에는 무척 많은 일은 열심히 일하던 사람이 일을 잃는 그들은 항상 할 일이 생기기만을

직속이었다. 했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것만큼 불행한 것이 또 어디에 있는가? 기다렸다.

"자네들은 그 동안 푹 쉬었는가?" 한성철검의 말에 습호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쉬다 못해 곰팡이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하하, 그래? 습지에 사는 여우[濕狐狸]에겐 그럴 법도 하겠구먼, 하하하..." 한성철검이 비록 소리내어 웃었지만 그 눈만은 웃고 있지 않는 것을 습호리와 새노반은 볼 수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갑자기 웃음 소리가 뚝 멎었다. "자네들에게 부탁할 일이 있네." 습호리와 새노반은 긴장했다. 지금 성내에서 한성철검은 무적금강권과 더불어 이, 삼인자의 자리를 다투는 지위임을 아는 까닭이다. "내가 부탁할 것은..." 습호리는 자지러질 듯이 놀랐다. 새노반은 아예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아, 아니 됩니다. 그런 일은... 저, 절대로..." 그러나 한성철검의 얼굴을 진지했다. "새노반, 자네에게 뛰어난 장인 실력이 있음을 아네. 만들기는 어렵지 않을 걸세. 자네들이 만들어 오기만 한다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네." "하, 하지만... 이런 일은..." "내가 책일질 거야. 자네들은 안심하고 있게. 아예 그런 것을 만들었다는 것조차 모조리 잊어버리게." 이어 한성철검은 습호리를 쳐다보았다. "그러한 것을 만들자면 재료가 많이 필요할 것이네. 자네가 구해다 줄 수 있겠지?" "할 수는 있습니다만..." "좋아. 더 이상 말하지 말고 어서 시행하게. 가능한 한 빨리 만들어 주길 바라겠어." 새노반과 습호리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성철검이 눈을 감아 버렸기 때문이다. 물러 나오며 습호리가 새노반에게 귓속말을 했다. "너무 위험해. 그만두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만일 충혼기주의 명을 어긴다면... 우린 살아남지 못해. 위험해도 해야 하네." 그러나 두려웠다.


태상성주의 방 내부를 엿듣는다는 것은 가히 대역의 불경죄이기 때문에. * * * 밤이 깊었다. 신주평에서 한창 일어나고 있을 처참함 때문인지 달조차 구름으로 눈을 가리고 있어 더욱 어두웠다. 천라성의 경비는 삼엄하다. 아무리 천라성의 하급무사라 하나 강호에 나간다면 일류고수란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누구라도 그곳을 침입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침입해 들어가는 인영이 하나 있었다. 구름 사이로 달이 잠깐 모습을 드러내자 그는 급히 나무 그늘에 몸을 숨겼다. 슬쩍 드러난 왼손이 여인의 것보다 흰 사내. 광무혼이었다. 자신이 신주평의 싸움에 낄 것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만박과 공회는 동시에 반대했다. -모든 일은 뿌리를 뽑지 않으면 다시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천라성은 다만 그 가지일 뿐, 종기라는 뿌리를 뽑아 내야만 합니다. 광무혼은 그 의견에 찬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말은 옳았으며 논리적으로도 완벽했다. 사실 밤을 틈타 천라성에 잠입하는 일이 신주평에서 싸우는 일보다 쉽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므로. 동초 한 명이 그의 앞을 지나갔다. 보통의 경우 별다른 이상이 없고 소리나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치는 것이 동초이련만 이 동초는 조금 달랐다. 그는 우뚝 몸을 멈추고는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광무혼이 몸을 숨기기 위해 땅을 힘껏 눌렀던 곳. 그곳에 희미한 발자국이 남아 있는 것이다. 확실히 천라성의 수하들은 그 면면부터가 일반 강호문파와는 전혀 달랐다. 동초가 몸을 숙여 발자국을 확인하려는 바로 그 순간, 광무혼은 속으로 외쳤다. '벽력쇄혼세(霹靂碎魂勢)!' 천뢰검(天雷劍)이 허공을 갈랐다. 동초는 피조차 흘리지 못하고 쓰러졌다. 뒷덜미에 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핏방울 하나가 전부였다. '천뢰검의 좋은 점은 많다. 우선 빛을 흘리지 않고, 뇌정지기를 받지 않으면 소리도 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것은 그 날카로움이다.' 동초의 시체를 얼른 옮겨 치우면서 광무혼은 내심 생각했다.


이제 한 명의 동초가 죽었으니 곧 자신의 침입이 탄로(綻露)날 것이다. 대개 동초가 정해진 구역을 한바퀴 도는 시간은 정해져 있고, 그 시간 안에 동초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비상이 걸리기 때문이다. 광무혼은 서둘렀다. 그의 몸이 빠르게 천라성 안으로 사라졌다. * * * "뭐라구, 침입자?" 한성철검의 놀란 외침에 무릎을 꿇고 있던 경비총감은 더욱 허리를 굽혔다. "그렇습니다. 전원을 순시하던 동초 이십사호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침입한 자가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한성철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의 경계는 일반과는 다르다. 고수의 침입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수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침입을 저지하지 못했다 해도 발견한 것만으로도 칭찬받을 공인 것이다. "알았다. 전역에 경계를 내리고 특히 태상성주님이 계신 곳의 경계를..." 한성철검은 말하다 말고 문득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태상성주님께는 내가 직접 가겠다. 넌 그만 물러가도록." 경비총감이 가고 나자 한성철검은 벽에 붙은 옷장의 문을 열었다. 옷들 사이로 긴 대롱 끝에 나팔 모양이 달린 기이한 물건이 놓여 있었다. 아침나절 새노반이 만들어 온 것이다. 한성철검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품에 갈무리했다. 거울을 보고 별다른 표가 나지 않음을 확인한 한성철검은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정오였다! 간밤에 침입자가 있었다면 지금쯤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 그러나 한성철검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종기의 신마은하광을 보았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절대 당해 낼 수 없는 신의 무공이었다. 때문에 한성철검은 종기를 보호하는 일보다 다른 일을 우선 생각했다. 그는 종기의 생각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왜 삼전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도록 만들었는지, 왜 무림회천맹의 힘이 커지도록 방치한 후 사각으로 하여금 정면으로 싸우도록 명령했는지를. "경계를 강화해라. 보초를 두 배로 늘리고 교대 시간은 반으로 줄여라." 한성철검은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의 품에 있던 기이한 물체는 이미 설치가 끝난 후였다. 이제 한성철검은 종기의 방안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무릇 어떤 곳이든 사람이 있으면 물을 사용한다. 사용한 물은 고여 있으면 썩기 때문에 큰 건축물일수록 배수가 중요시되기 마련이다. 광무혼은 지금 그 배수구 안에 있었다. 그는 흐르는 오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었다. 배수로의 중앙. 그리고 가장 큰 배수 구멍을 찾는다면 광무혼은 종기의 거처를 찾게 되는 셈이었다. 냄새가 지독했다. 그러나 이 냄새를 피하려 든다면 수많은 천라성의 수하를 죽이며 전진해야 할 것이다. 자신은 이미 많은 피 냄새를 맡았으니 한 번쯤 악취에 젖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고 광무혼은 생각했다. 탁탁탁탁! 누군가가 어지럽게 뛰어가는 소리를 광무혼은 들었다. "모두들 정신 바짝 차려라. 만일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책임자는 모두 목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광무혼은 피식 웃었다. '아마 경비를 책임진 자인 모양이구나. 무척 부지런하다.' 그는 웃으며 계속 몸을 움직였다. 순간 또다시 경비총감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한 곳도 빼놓지 마라. 발 밑의 하수구도 모조리 조사해라. 인간이 들어갈 수 있는 곳, 아니 들어가지 못하는 곳까지 샅샅이 뒤져라." 이어지는 발소리들. 멀리서 덜컹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수구에 창을 찔러 보는 소리였다. '빌어먹을!' 광무혼은 더욱 빠르게 전진했다. 땅밑을 조사하는 창이 찔러 오기 전에 종기의 거처에 도착해야만 하는 것이다. * * * 두두두두! 말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위에 앉아 있는 사내는 추일령이었다. 하지만 추일령은 지금 본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만박이 직접 만든 면구로 덮여 있었다. 만박의 면구는 매우 정교해서 숨을 쉬고, 또 웃고 우는 모습을 표현하는 데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천하의 누구도 그런 면구를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여하간 지금 추일령이 쓰고 있는 면구는 매우 유용한 것이었다.


그건 영웅기의 부기주인 관육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지금 신주평에서는 싸움이 한창이었으므로 관육이 싸움터를 벗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관육의 얼굴만은 싸움터를 벗어난 것이다. 추일령은 말의 배를 찼다. 말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지친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어야만 한다. 자신 역시 숨이 가빠야만 한다. 앞쪽 멀리에서 천라성의 모습이 보였다. 추일령은 날이 섬뜩한 비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서슴없이 자신의 왼쪽 어깨를 찔렀다.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고통이 엄습했지만 참을 만했다. 어차피 모험 아닌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살아도 아무 의미가 없는 모험. "누구냐? 서라!" 경비병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 왔다. 추일령, 아니 관육은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모... 모두 전사... 나, 나만 소식을 알리고자 겨우..." 그는 미처 말을 끝맺지 못하고 말에서 떨어졌다. 경비병들이 분분히 달려들었다. 막기 위함이 아니라 영웅기의 부기주인 관육을 성안으로 옮기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들은 관육을 태상성주 종기에게로 데려갈 것이다. 그게 아니면 적어도 그에 준하는 권한을 가진 사람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추일령은 기쁘게 정신을 잃었다. * * * '빌어먹을!' 정말 빌어먹을 일이었다. 뒤쪽에서 일렬로 찔러 오는 창날을 피해 서둘러 전진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앞쪽에도 창날이 있지 않는가? 열 줄의 창날이 일렬로 서서 함께 찌르고 올리고 찌르고를 반복하니, 숨어 있을 만한 공간이 있을 리 없었다. 광무혼은 그들이 찌르고 올리는 동작의 규칙성에 주목했다. '주어진 시간은 짧다. 하나 그 순간에 저 창날의 막을 통과해야만 한다.' 광무혼의 뇌리에 축영단공(縮影斷空)의 구결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단숨에 통과하지 못한다면 창에 찔리게 된다. 슉! 슉! 창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섬뜩했다. 바로 자신의 코앞을 지나 창이 밑으로 내려가는 순간, 광무혼의 몸이 공간을 갈랐다.


마치 환영처럼 다른 공간에 나타나는 광무혼의 몸. 그 순간 그의 등뒤의 옷을 스치며 창이 내리꽂혔다. 슉! 창을 찌르던 자는 약간의 이상한 감촉을 느꼈다. 그러나 창끝에 묻어 나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일을 계속했다. "이봐, 거기 뭔가 찾았느냐?" "아닙니다. 아직 아무것도 없습니다." 광무혼은 가슴을 쓸어 내리며 몸을 앞으로 움직였다. * * * 종기는 지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가 그리는 것은 다름 아닌 운지의 얼굴이었다. 붓이 오가면서 그녀의 갸름한 얼굴선이 나타나고, 붓이 한번 맴돌자 도톰한 입술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려 넣는 종기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툭! 믿기 힘들게도 한 방울의 눈물이 종기의 눈에서 종이 위로 떨어져 내렸다. "운지야, 이 할아비는 정말 널 볼 면목이 없구나." 우는 것이다. 천하를 도탄에 몰아넣은 그가 이렇게 울고 있는 것이다. 울음은 선인(善人)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종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붓이 툭 부러지더니 바닥에 닿기도 전에 가루로 화해 버렸다. 가공할 진기가 마음의 반응에 따라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화르르운지의 모습이 그려졌던 종이에 저절로 불이 일어나면서 허공으로 휘휘 날아올랐다. 불타는 그림은 마치 운지의 시체가 불속에서 사그라지던 장례식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종기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말했다. "왔으면 어서 올라오너라, 광무혼." 그러자 광무혼의 모습이 방안에 나타났다. 침묵! 긴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광무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가야 만족할 것이오? 이런 식으로 나가다간 천하의 존재가 모두 사라질 것이오." "세상 사람들은 운지를 나의 의손녀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난 친아들을 두었고, 운지는 그의 친딸이었다." 이것은 몰랐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 나니 종기의 눈물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모든 일은 당신... 의 잘못된 목적에서 비롯되었소.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어서 천라성의 군사를 거두시오." 종기가 빙긋 웃었다. "넌 이제 날 사부라 부르지도 않는구나." "그러기가 불가능함을 당신도 알 것이오." "그래, 불가능하지. 너무 많은 세월, 너무 많은 질곡(桎梏)이 있었다." 종기의 눈빛이 회상을 하는 듯 몽롱해졌다. "난 혈뇌서원(血腦書院)을 멸망시키고 그곳에서 혼돈경(混沌經)을 얻었다. 혼동경에는 수라마교의 모든 비결이 적혀 있었지. 심지어 혈마수라결(血魔修羅訣)까지. 혼동경의 실체는 전설상의 혈경(血經)이었던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익히지 말았어야 했소." "인정한다. 하지만 산적들에 의해 내 손주가 죽고 손녀가 겁탈을 당하자 난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혼돈경을 익힌 것은 그때였다." "혈마수라결은 인간의 심성을 바꾸어 놓소. 당신은... 확실히 옛날의 당신은 그렇지 않았소." "그래, 네 말이 맞구나. 난 이후 점차 살기에 물들어 갔다. 힘과 살인의 의지를 지닌 내 앞길에 걸릴 만한 상대는 오직 십절(十絶)뿐이었다." "해서 날 이용해 그들을 제거했군요." 종기가 빙긋 웃었다. "넌 내 명을 충실히 따라 주었지. 물론 영겁혼돈안의 제어(制御)를 받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난... 그때의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소." 광무혼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언젠가 자신이 그 일에 대해 죽음으로 사죄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만은 그것을 떠올리기 싫었다. "만일 당신의 마음속에 조금이나마 수치가 남아 있다면 빨리 천라성을 해체하시오. 천라성은 강호를 피의 겁난 속으로 몰아넣을 뿐이오." 종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고 있다. 난 천라성의 모든 자들이 죽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그들을 하나하나씩 강호에 내보냈겠느냐? 무엇 때문에 무림회천맹(武林回天盟)이 결맹되도록 방치했겠느냐?"


광무혼은 문득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종기가 혈마수라결의 마기를 제어하고 원래의 순수했던 마음으로 돌아왔단 말인가? "난 정말 천라성의 삼전과 사각, 그리고 이기가 모두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다." 종기가 다시 한 번 강조하듯 말했다. 광무혼은 눈을 크게 뜨고 종기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매우 해맑아 결코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진심이시오?" "물론이다. 한 점 거짓 없는 진심이다. 죽은 내 손녀의 이름을 걸고 맹서할 수 있다." 비로소 광무혼은 그를 믿을 수 있었다. 그는 문득 마음이 풀림을 느꼈다. 원래 광무혼이 상대하려 했던 종기는 혈마수라결을 익힌 희대의 마인이었지만, 지금의 종기는 마기를 훌륭하게 극복해 낸 후 자신이 만든 천라성을 스스로 해체하려 했다. "다행입니다... 이제라도 그런 결심을 하시니 다행입니다." 광무혼은 말했다. "그래 다행이지, 정말로. 하하하하..." 종기의 웃음이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광무혼은 팽팽하던 긴장이 풀어지자 온몸이 피로로 노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하하하..." 종기의 웃음 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그는 기뻐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광무혼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사라졌다. 그의 옷자락이 가공할 압력에 펄럭이면서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우웃! 웃음을 멈추시오!" 그러나 고함 소리조차 아예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종기의 웃음 소리가 더욱 높아지며 광무혼의 전신을 압박했다. "하하하... 그래, 난 천라성의 모든 자들이 죽기를 바란다. 또한 천하의 모든 인간들도 죽기를 바라고 있다, 크하하하..." 광무혼은 밀려오는 음공의 폭풍우를 맞이해 실눈을 뜨고 종기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는 털끝만한 살기도 없었다. 이것이 더욱 무서웠다. 종기는 마(魔)를 극복해 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마가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너무나 악독하여 오히려 악인처럼 보이지 않는 악인이 있듯, 너무나 극악한 마는 오히려 마기도 살기도 흘리지 않는 법이다. 종기는 혈경(血經)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혈경에 의해 정복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우드드득!


억지로 버티고 선 광무혼의 두 발이 청석으로 된 바닥에 한 자 가량이나 파고들었다. 천뢰검을 빼 든 광무혼은 검을 앞으로 곧게 뻗어 검기를 마구 토해 내고 있었지만, 종기의 웃음 소리를 감당하지 못한 채 뒤로 밀려났다. 바닥으로 파고든 발이 그대로 밀려나자 놀랍게도 청석에는 긴 고랑이 패었다. 실로 놀라운 광경이 아닌가? "크하하, 모두 죽어라! 난 천하를 위해 헌신했으나 내 부모가 죽고, 내 아들이 죽고, 끝내는 손녀마저 죽고 말았다. 천하여, 너 또한 살아남을 필요가 없을 것이니..." 종기의 오른손이 어깨 위로 들려졌다가 앞으로 나왔다. 그 손에 은빛 강기가 공의 형태로 어리더니 손을 떠나 마치 탄환처럼 날아왔다. "만물의 궁극은 파괴라, 그곳엔 신과 마의 구별이 없도다. 신마은하광(神魔銀河光)!" 강기로 이루어진 탄환! 쐐애액! 광무혼의 가슴을 노리는 신마은하광. "뜻이 일면 형상이 저절로 따르니 떠났던 혼마저 되돌아오도다. 의형회혼세(意形廻魂勢)!" 휘르르릉! 광무혼의 오른손에 들렸던 천뢰검이 가공할 굉음을 쏟아 내며 신마은하광으로 이루어진 강기탄을 맞아 나갔다. 광무혼은 신마은하광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선천강기(先天氣)의 일종임을 이미 알아보았다. 이기어검술의 단계를 넘지 않는다면 결코 상대할 수 없는 무공이었다. 쾅! 꽈르르굉음이 일어나며 천뢰검이 무서운 속도로 선회하면서 뒤로 튕겨 나갔고 신마은하광은 산산이 부서지며 흩어져 버렸다. 치이익! 신마은하광의 파편을 맞은 땅거죽이 마치 나무판에 황산이 튄 것처럼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는 모습은 가공스러웠다. 종기의 두 손이 머리 위에서 원을 그렸다. 그 손의 움직임을 따라 신마은하광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고리가 그 머리 위에서 생겨났다. "네놈이 검도선천지예(劍道先天至藝)의 기초인 이기어검술까지 익힌 것은 뜻밖이다. 하나... 광무혼, 넌 오늘 죽으리라!" 그의 양손이 앞으로 내밀어지자, 두 개의 강기환이 맹렬히 회전하면서 허공을 날았다. 이번의 경우는 강기탄과 달랐다. 직선으로 쏘아 오는 강기의 탄환과 달리 강기로 만들어진 고리는 때로는 휘고, 때로는 직선으로 달리며 무쌍한 변화를 보이기 때문이다.


광무혼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왼손으로는 의형회혼세를 한 번 더 시전하면서 오른손에는 금옥수의 기운을 모았다. "선천의 기운이 손에 모이면 금옥(金玉)조차 먼지로 화하리라. 금옥수(金玉手)!" 금빛의 기운이 일어났다. 그 기운은 놀랍게도 종기의 신마은하광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우웃! 이, 이런 무공이..." 종기가 외치며 연달아 물러났다. 그러나 광무혼은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마치 불에 노출된 기름처럼 그의 내공이 무서운 속도로 소실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르릉폭음과 호통. 종기의 신형과 광무혼의 신형은 어지럽게 얽혀들었다. * * * 퍽! 어떤 충격이었을까? 아마 두 고수의 싸움 도중에 일어난 어떤 기운이 소리를 전달하는 통을 부쉈나 보다. 일부분이라도 부서지면 관은 전혀 쓸모가 없게 되는 것이다. 한성철검은 착잡한 얼굴로 새노반이 만들어 온 청음통(廳音筒)에서 귀를 뗐다. 이제 그 장치는 망가졌지만 한성철검 양자성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근심수사 종기의 말을 들었고, 그의 내심을 알았다. 양자성은 자부심이 강한 무사였다. 그는 자신의 천라성이 강호에 평화를 가져 온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평화를 위한 방법으로 종기는 무력(武力)을 택했지만 그건 자신 또한 동의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자부심은 무너지고 오직 치욕만이 남았다. 이제까지의 자신의 모든 행동은 오직 강호 멸망을 위한 수순을 종기 대신 밟아 준 것에 불과했다. 어떡해야 하나? 충격에 휘청거리는 양자성은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순간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경비총감이 뛰어들었다. "태상성주의 거처에서 굉음이 들립니다. 아무래도 싸움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넌 왜 들어가지 않았느냐?" 양자성의 음성은 자신이 들어도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웠다. 경비총감은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너, 너무 강한 강기의 회오리가 일고 있어... 저로서는 감히 들어갈 엄두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동안 양자성은 말없이 경비총감을 쳐다보았다. 이자는 어떤 자부심을 지니고 살까? "넌 스스로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느냐?" "무, 물론입니다. 한데 그것은 왜...?" 순간 또다시 문이 열리면서 경비무사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그는 영웅기의 부기주인 관육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아룁니다. 관육 부기주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신주평의 싸움은 본 성 측의 전멸로 끝났다 하옵니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종기의 말대로라면 어느쪽이 이겼든 그들마저도 모두 죽어야 하는 것이므로. 양자성은 경비무사에게도 물었다. "넌 스스로의 생에 자부심을 갖고 있느냐?" "물론입니다, 충혼기주님. 한데 그것은 왜...?" 양자성은 웃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참으로 크게 웃었다. 이들은 자부심을 갖고 산단다. 어떤 자부심? 남을 죽이고 끝내는 자신마저 죽게 될 그런 음모를 앞장서 실천에 옮기는 어리석은 자부심? 마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양자성은 괴롭기 그지없었다. 그의 오른손이 한바퀴 회전을 보이는가 싶더니 곧장 앞으로 뻗어 나갔다. 어느새 허리에 있던 철검이 뽑혀 검은색의 광채를 앞으로 뿌려 냈다. 검기는 차가운 별처럼 흘러 단번에 경비총감과 나머지 경비무사들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러나 지금 양자성이 죽이려는 자는 그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자부심은 깨어지고 이제 끝없는 자기 혐오만 남았으므로. 10. 종말, 그리고... 금옥수가 신마은하광을 부수고 속으로 파고들면 종기는 새 로운 공력을 일으켜 그 틈을 메웠다. 종기의 공력 속에는 음양이 혼재되어 있어 새로운 진기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선천(先天)의 무예(武藝)가 지닌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무혼은 달랐다. 그는 깨달음없이 다만 금옥수의 구결을 이용해 억지로 그 힘을 끌어다 쓸 따름이었다. 때문에 내공이 급격히 소실되는 것이다.


쾅! 우르릉거리는 굉음을 발하며 종기의 손이 재빠르게 휘둘려졌다. 반달 모양의 강기가 손의 궤적을 따라 일어나 회전하며 광무혼의 머리를 향해 날았다. 허공에 일 장이나 떠 있던 광무혼의 몸이 뚝 떨어지면서 그 강기를 피해 냈다. 그리고 바닥을 박차고 날아오른 그의 몸은 한 번 더 종기의 가슴을 노렸다. 닿기만 하면 무엇이든 가루로 만들 수 있는 절세의 금옥수! '제발 한 번만이라도...!' 마음속으로 외쳐대는 광무혼의 전신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종기는 피했다. 스윽! 종기의 몸이 마치 환상처럼 옆에서 나타났다. 그의 오른손이 자신의 옆구리에 닿는다고 광무혼이 느끼는 순간, 섬광이 일어났다. 번쩍! 꽈르르마치 백 근의 화약이 석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광무혼의 허리와 종기의 손바닥 사이에서 신마은하광의 찬란한 광채가 피어오르더니 광무혼의 신형이 쐐액 소리를 내며 허공을 날아갔다. 쾅! 벽에 부딪힌 광무혼. 그러나 이것을 어찌 부딪힌다는 표현으로 나타내겠는가? 그의 몸은 청석으로 된 석벽에 깊숙이 파고들어 쉴새없이 피를 토해 냈다. 그는 툴툴 웃었다. "이... 이런 것인가? 결국 이런 것이었나?" 종기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또다시 은하숫빛 광채가 휘감기며 돌고 있었다. 이제 손을 내리치면 광무혼은 죽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이기 때문일까? 종기의 눈빛 깊숙한 곳에 아주 미약한 흔들림이 보이는 것은. "남길 말이 있느냐?" 광무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신이 가물거리며 막대한 피로가 몰려왔다. 모든 것을 잊고 잠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은...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는, 엘 듯한 한(恨) 때문이었다. 또한 한 가지를 기다리는 까닭이었다. "기다리십시오, 태상성주." 한성철검 양자성의 음성은 광무혼에게 있어 의외였다. 이 순간 들리는 음성은 당연히 다른 것이어야만 했다. 종기는 고개를 돌렸다.


"양자성, 네가 웬일이냐?" "이자를 데려왔습니다." 양자성은 품에 관육을 안고 있었다. 관육은 혼절한 듯 축 늘어진 상태였다. "그는 영웅기의 부기주 관육이 아니냐? 그가 싸움터를 떠나 이곳으로 돌아왔단 말이냐?" "싸움은 끝났습니다. 본 성의 패배입니다." 종기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후 그는 입을 열었다. "한데 관육은 왜 죽지 않고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냐? 패했다면 마땅히 싸움터에서 죽어야만 한다." 양자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관육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왼손으로 관육의 얼굴을 잡았다. "그건 이자가 관육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자성이 확하고 잡아당기자 면구가 벗겨지면서 추일령의 얼굴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광무혼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하고 말았다. 계획은 이렇게 무산되고 마는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던 종기가 천천히 광무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아직도 그 자세로 있을 참이냐?" 광무혼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났다. 그는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일이 이렇게 되다니, 하늘은 사실 불공평한 것인지도 모르겠소. 나와 추일령은... 최선을 다하였건만." 그의 얼굴은 좀 전까지의 피로를 모두 잊은 듯했다. 종기가 피식 웃었다. "그래, 어쩐지 네가 너무 빨리 지친다 싶었다. 그랬구나. 내가 방심한 틈을 추일령이 노리려 했구나." 추일령과 광무혼은 지금 무림회천맹 측에서는 제일가는 두 고수인 것이다. 그들의 앞뒤 합공만이 종기를 상대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것도 기습이 아니라면 승기를 잡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음모는 들통나고 말았다. 종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혈도가 짚여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추일령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꿈도 꾸지 않는 게 좋다. 그런 것이다. 현실은 악인이 득세하고 선인은 피해만 보는 세상인 것이다."


추일령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양자성이 말했다. "위험할 뻔했습니다, 태상성주. 어서 서두르셔야 합니다. 신주평의 싸움에서 본 성이 패했으니 무림회천맹의 벌떼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귀찮음을 당하기 싫다면 피해야겠지. 그러나 그 전에 내 손녀 운지를 해친 광무혼은 없애고 가야겠다." 양자성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종기의 뒤로 걸어왔다. "그러십시오. 그리고 이쪽의 추일령 또한 살려 두면 귀찮아질 것입니다." 종기는 다시 손을 치켜 들었다. 광무혼은 천뢰검을 꾹 움켜쥐었다. 천수옹은 몸 속에 들어온 뇌정지기를 단 한 번, 천뢰검을 사용해 뿜어 낼 수 있다고 했다. '지금이 그때일까? 한 번에 성공할 수 있을까?' 광무혼은 다른 어떤 무공으로도 종기를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게 된 것이다. 종기의 우뚝 솟은 손. 그 손이 떨어진다면 광무혼의 목숨은 사그라지련만... 손은 내려지지 못했다. 종기는 눈을 크게 뜨고 움직임을 멈췄다. 불신의 빛을 잔뜩 머금은 그의 눈이 천천히 뒤쪽의 양자성에게로 향했다. "네... 네가 왜?" 양자성의 철검이 종기의 배에서 보였다. 등을 뚫고 들어가 배로 튀어나와 있었던 것이다. "네... 네가 왜 이런 짓을?" "태상성주, 당신의 말을 모두 들었습니다. 천라성을... 그리고 무림천하를 당신이 어떻게 만들고 싶어하는지를 이제 알았습니다. 난... 나는 무림을 사랑합니다. 아무리 혼탁하고 피에 물든 곳이라지만 무림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부우웅! 양자성의 양손에서 혼신의 힘을 다한 장력이 뻗어 나왔다. "절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쿠아앙! 그 장력에 휘말린 종기의 신형은 이 장의 거리를 단숨에 밀려났다. 벽에 부딪혀 비로소 정지하는 종기의 몸. 그 순간 바닥에 누워 있던 추일령의 전신에서 몸서리쳐지는 귀기(鬼氣)가 일어났다. 귀검(鬼劍)! 그 정수라는 백귀난무(百鬼亂舞)가 추일령이 몸을 일으키는 기세에 더해져 종기의 몸에 쏟아 부어졌다. 꽈드등!


거미줄 같은 금이 벽을 쩍쩍 그으며 달려갔다. 양자성의 철검에 이어진 장력, 그곳에 다시 추일령이 전력을 다해 전개한 참혼귀검을 맞은 종기의 눈은 서서히 빛을 잃어 갔다. 추일령은 땀을 닦았다. 실로 어려운 고비가 아니었는가? 종기의 표정은 어쩐지 매우 허무해 보였다. "그렇단 말인가? 양자성, 너만은 살려 두려 했거늘. 해서... 성안에 남긴 것이거늘." 양자성과 자신을 꿰뚫은 철검을 번갈아 보는 그의 표정에는 짙은 우수가 배어 있었다. "넌 내 아들을 많이 닮았다. 그래서 너만은 살려 두고 싶었지." "난... 선택의 여지가 없었소, 태상성주. 당신이 어떤 야망을 지녔더라도 난 당신을 택했을 거요. 하지만 천하를 말살시킨다는 건... 그것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소, 종기 선배. 당신의 인생은 실로 명예와 오욕(汚辱)이 함께했소. 비록 지은 죄가 크긴 했지만 편히 눈을 감기 바라오." 종기가 맥없이 웃었다. 순간 광무혼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는 벼락같은 소리로 외쳤다. "물러서! 아니다, 아직은 아냐!" 종기의 몸 전체에서 이글거리는 암흑의 불꽃이 폭발하듯 일어났다. "혈마수라결! 극성의 마기가 일어난다!" 너무나 갑작스러워 미처 자세히 살펴볼 시간도 없이 그 암흑의 불꽃은 철검과 참혼귀검을 밀랍처럼 녹여 버렸다. 종기의 두 눈에는 귀화(鬼火)와 같은 광망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 "양자성! 이제 너마저도 살려 두고 싶은 생각이 없구나. 이리 오너라!" 종기의 몸에서 다시 신마은하광이 일어나면서 양자성의 몸을 끌어당겼다. 양자성은 전력을 다해 버텼으나 도저히 종기의 흡력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지지직! 바닥이 움푹 파이도록 저항했지만 그것이 소용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 양자성의 가슴이 마침내 종기의 오른손에 닿았다. "넌... 잘못된 선택을 했다." 퍼엉! 양자성의 등이 터져 나갔다. 종기의 내력이 쏟아진 곳은 양자성의 가슴이었지만 그것이 내부로 들어가 안에서 심장을 쪼개며 폭발했던 것이다. "나는..." 양자성의 눈이 부릅떠졌다.


"잘못된 생을 살았소. 하나 지금 비로소... 옳은 곳으로 돌아온... 것..." 쿵! 양자성의 몸이 쓰러졌다. 이미 그의 몸에서는 한 점의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스스로의 잘못되었던 길을 원망하면서 양자성은 숨을 거두었다. 종기의 손이 이번에는 추일령에게로 향했다. 막강한 잠력. 가공스런 파괴력. 실로 신마은하광을 당할 방도가 없는 듯 보였다. "악독한! 그만둬라!" 창궁진기가 서광을 피워올리며 천뢰검을 따라 쏟아졌다. 꽈르릉! 벽력쇄혼세(霹靂碎魂勢)의 로수를 따라 쏟아진 검강들이 벽을 산산조각내며 먼지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종기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고오오위로 날아오르고 있는 것이다. 콰르르후두두둑! "다시 해보겠느냐, 광무혼?" 종기의 몸이 위로 떠올랐다. 벽을 잃고 흔들리고 있는 건물의 천장을 그대로 뚫으며 올라가는 것이다. 마치 지옥의 악마가 천상을 저주하며 날아오르는 듯했다. 흙과 돌덩이가 마구 떨어졌다. 이를 악문 광무혼이 그 뒤를 따라 떠올랐다. 종기는 천라성 가장 높은 뾰족한 지붕 위에 서 있었다. 광무혼이 건너편 지붕 위로 내려섰지만 종기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 종기는 바닥을 빽빽히 메운 무림회천맹의 고수들을 내려다보았다. "개미 같은 것들! 실로 많이도 왔구나!" 종기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는 듯했다. "당신이 보기엔 개미 같을지 모르겠소. 하지만 아래에 있는 사람이 본다면 당신 역시 한 마리의 개미에 불과할 것이오."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군." 종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광무혼의 말에 대해서만은 옛날부터 자주 동의를 해주곤 했었다. "궁금한 것이 있다. 어떻게 본 성의 내부 상황을 알았느냐? 그것을 모른다면 너흰


결코 승리할 수 없었는데." 광무혼이 가만히 있자 종기는 한 번 더 물었다. "도대체 누가 있어 본 성의 조직과 힘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단 말이냐?" 광무혼은 한 사람을 생각했다. 자신을 구해 주고 자신에게 복수의 방법을 제시해 주었던 사람. 항상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으며 나아가 천하에 많은 도움을 준 천재를 생각했다. "만박(萬博)이오." "만박! 춘추서원의 원주 말이냐?" "그렇소. 그의 지혜가 없었다면 천라성이... 아니 당신이 승리하고 멸망했을지도 모르지." 종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같이 뛰어난 자들은 악인이든 선인이든 호승지심이 있는 법이다.

무림은

"그의 지혜가 그처럼 대단한가? 나를 누를 정도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당신이 이런 지경에 몰렸겠소? 만박이 있기 때문에... 천하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오." 광무혼은 가능하면 종기를 자극하고 싶었다. 약간만 흥분시켜도 허점을 찾기가 쉬울 것이기에. 그러나 종기는 빙긋이 웃는 것이 아닌가? "만박이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무슨 소리요?" "마찬가지로 멸망할 거란 소리다." 그의 두 손이 위로 들렸다. 아래쪽은 무림회천맹의 사람들로 빽빽했다. 천라성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충혼기의 고수들은 양자성의 명령으로 이미 뿔뿔이 흩어지고, 무림회천맹의 맹도들만 허공 위의 까마득한 곳에 대치해 있는 두 사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알고 있었다. 종기가 승리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저들은 네가 이기길 바랄 것이다." "어쩌면 우리 둘 다 공멸(共滅)하기를 더욱 바랄지도 모르오." "그렇겠지. 세상에는 그런 자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영웅이 있어 자신을 곤경에서 구해 주길 바라다가, 막상 구해 주고 나면 그 사람을 부담스러워하지. 심지어 자신의 은인이 죽기를 바라기도 한다." 종기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섬뜩한 미소였다. "하지만 그 전에 자신들의 죽음이 먼저일 것이다." 들려져 있던 종기의 양손이 아래로 향했다.


펑! 퍼퍼펑! 두 손바닥에서 신마은하광의 강기가 탄환처럼 뭉쳐지며 아래를 향해 마구 떨어졌다. 눈싸움에서 던져지는 눈뭉치 같은 흰 덩어리가 빠른 속도로 아래로 내려갔다. 종기는 정말로 눈싸움을 하는 듯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웃을 수가 없었다. 쾅! 콰르릉! 마치 만 근의 화약이라도 폭발하는 듯 지표면이 균열을 일으켰다. 강기탄을 맞은 땅거죽은 반경 일 장의 너비로 움푹 패었다. 폭풍과 회오리가 일어나며 미처 피하지 못한 자들의 몸을 휘감았다. "크윽!" "크아악!" 온몸에 구멍이 나 바닥을 뒹구는 자들. 광무혼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만두시오!" 천뢰검이 벽력쇄혼세를 담고 종기를 향해 쏘아 나갔다. 가공할 힘이 일어났으나 종기에게는 장난처럼 가소로워 보이는 듯했다. 그가 왼손을 내밀어 은빛의 광채를 일으키자 광무혼은 한 걸음도 더 전진할 수 없었던 것이다. 허공에 뜬 채 헛되이 내공만 소모할 뿐이다. "창궁검법 정도론 어림도 없다. 좀 전에 사용한 금옥수(金玉手)가 아니라면 적어도 의형회혼세 정도는 펼쳐야 날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종기의 여유는 허세가 아니었다. 그는 왼손으로 광무혼을 막고 오른손으로는 계속해서 강기탄을 지상으로 쏘아 보냈던 것이다. 꽈르릉! 새로운 폭발이 쉬지 않고 일어났다. 이대로 가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다. 광무혼은 이를 악물었다. 또다시 일어나는 폭발에 휩쓸리는 사람들 중에서 온옥교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오색채화강을 시전해 몸을 보호함에도 불구하고 혈흔을 내비치며 비틀거리는 연인의 모습. 저들이 죽을 것이다. 자신이 막지 못한다면... 모두 죽을 것이다. "저들을 구하고 싶으냐? 간단한 방법이 있다. 이쪽으로 와 네 몸으로 막아 내는 것이다. 하하하, 감히 그럴 수 있겠느냐?" 비웃는 듯한 종기의 웃음 소리.


광무혼은 천뢰검을 고쳐 쥐었다. 결심을 마친 그의 얼굴에 언뜻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종기! 당신은 한 가지를 모르고 있소." "그것이 무엇이냐?" "당신과 나는 다르다는 것이오." 광무혼의 몸이 허공에서 꺼졌다. 공간을 가르는 축영단공의 신법. 종기는 광무혼이 갑자기 자신의 오른쪽에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하나 더욱 놀라운 것은 광무혼의 전신이 찬란한 금광에 휩싸여 있다는 것, 그런 광무혼의 몸이 자신의 신마은하광을 뚫고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지직! 지지직! 마치 날카로운 송곳이 비단천을 가르는 듯한 소리를 내며 광무혼이 다가왔다. "금옥수를 전신에 퍼뜨렸구나!" 종기는 더욱 강하게 강기를 쏟아 부었다. 콰아아아막강한 경력의 폭풍. 그 속에서 광무혼은 입술이 터지고 이마의 혈맥이 툭툭 불거졌다. 어깨의 살점 또한 뜯겨져 나갔다. 그러나 광무혼은 멈추지 않았다. 손에만 사용해도 내공을 갉아먹는 금옥수를 전신에 뿌렸으니, 내공의 소모가 오죽 심할 것인가? 단전이 곧 터져 버릴 듯 고통스러웠지만 절대 멈추지 않았다. '내가 아니면 막지 못한다!' 광무혼의 단전이 진동했다. 전신을 태우는 듯한 뜨거운 양강지기가 온몸을 달렸다. 일순간 앞으로 쭉 내민 천뢰검(天雷劍)으로 몰려가는 그 기운은 가공스러웠다. 콰르르릉! 귀를 멀게 하고 눈을 멀게 하는 폭음과 뇌전이 하늘을 수놓으며 중인들을 놀라게 했다. "이것이 뇌정지기다-!" 콰우우웅! 천뢰검이 괴성을 토해 내며 종기의 심장에 꽂혔다. 그 순간 종기의 마지막 일격이 광무혼의 전신을 휘감았다. 퍼엉! 마지막 한 방울의 진기마저 뿜어 낸 광무혼의 몸에 작렬한 신마은하광은 그의 모든 근육을 짓이기고 뼈를 조각냈으며, 혈맥 하나하나를 끊어 버렸다.


푸우우전신에서 뿜어지는 피! 피의 무지개를 그리면서 광무혼의 신형은 허공을 훌훌 날아 뒤로 밀려났다. "가가!" 놀란 외침을 터뜨리며 날아오른 여인은 온옥교였다. 종기의 몸은 아직도 허공에 떠 있었다. 파직! 파지직! 천뢰검! 태고의 뇌정지기를 간직한 파황뇌전철로 만들어졌다는 희대의 신병! 지금 천뢰검은 끊임없이 빛을 토해 내고 있었다. 종기의 왼쪽 가슴에 깊이 박힌 채로. 종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후후, 이것이라고 다를 것 같으냐? 난 천하무적이다!" 외치며 종기가 손에 힘을 주는 순간, 파츠츠츠츠천뢰검이 무서운 열기를 뿜어 내는 것이 아닌가? 뇌정지기가 종기의 오른손을 파고들면서 순식간에 그 손을 태워 버렸다. "크으악, 이... 이것이... 대체 이것이..." 그의 몸이 마침내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쿠우웅! 지축을 울리는 큰 소리는 마치 악의 최후를 상징하는 음향인 듯했다. "크으윽, 이것이 무엇이기에... 대체 무엇이기에..."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땅속에 다섯 자 가량이나 처박힌 종기는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의 괴로움은 떨어질 때 생긴 상처보다도 천뢰검의 뇌정지기가 전신의 내공을 파괴하는 것에 따른 고통이었다. 광무혼은 온옥교의 부축을 받은 채 비틀거리며 종기의 옆으로 다가갔다. "천뢰검이오. 나의 피로 제련되었지. 천수옹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안배였다오." "처, 천수옹. 그... 그... 놈이... 나를..." "당신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지었소. 그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절대 용서하지 않으려 하니, 당신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겠소." 종기의 눈빛에서 마기가 급격하게 스러졌다. 뇌정지기가 맹렬히 활약하는 것이다. "그래, 그렇구나... 나는 참으로 악한 인생을 살았구나."


"세상은 세상의 것이오. 아무리 당신의 생각이 옳다 여겨지더라도 세상에 대고 그것을 강제로 요구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될 말이오." 종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나의 생이 잘못되었음은 인정한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더라도 나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살겠다. 나는 그렇게 살겠다. 진심으로... 나는..." 그의 목소리가 점점 약해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종기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데... 대체 누군가? 만박! 그가 누구이기에 날...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말인가?" 한숨을 내쉬며 뒤쪽에 서 있던 만박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무척 지쳐 보였다. "만박은 바로 나요." 만박을 보자 종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다, 당신이 바로..." "그렇소. 내가 만박이오. 난 당신의 악행으로 광무혼이 불행해지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소. 지난 십 년은 실로 긴 세월이었지만, 그래도 당신의 악행을 막을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오." 종기는 마치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 알았어야 했는데... 다, 당신이 있었음을 알았어야 했는데..." 만박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천하는 넓소. 아무리 남을 속이려 들어도 언젠가는 누군가가 당신의 계략을 눈치채고 막으려 들 것이오. 당신은 졌소. 그러니 이제 그만 편히 눈을 감으시오, 종기." 그러나 종기는 눈을 감고 죽지 못했다. 그는 무언가 몹시 억울하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죽었다. 모두의 가슴에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무림사에 이처럼 처참한 겁난(劫亂)이 또 어디 있었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모두가 가슴을 쓸어 내릴 때 온옥교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악! 혼랑, 혼랑!" 광무혼이 쓰러진 것이다. 그의 입에서 꾸역꾸역 흘러나오는 피에는 커다란 내장 조각마저 섞여 있었다. 광무혼은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는 매우 편안한 자세로 누워 주위의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쉴새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온옥교, 가슴을 부여잡고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추일령,


눈물이 글썽글썽한 만박. 그리고 추운행과 대지와 창허.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광무혼은 싱긋 웃었다. "난 참... 인생을 잘못 살아 왔다 여겼었지. 한데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은 착각이었군. 이렇게 많은 친구들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보니... 다행이야, 참으로 다행!" 추일령은 인상을 썼다. 요즘 들어 심장이 더 나빠진 것이다. 그는 많은 걱정을 했고, 많은 한을 안고 살아 왔기 때문에 심장이 많이 나빠졌다. 광무혼이 그런 그를 비웃었다. "네놈은 그나마 심장 하나가 쓸 만했었지. 한데 이제는 그것마저 망쳐 버렸구나. 내가 죽거든 염라 대왕에게 부탁해서 꼭 좋은 것으로 바꿔 주도록 하마." 농담이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웃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얼굴이 일그러졌다. 광무혼의 죽음은... 농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온옥교는 입을 열지 못했다. 열면 울음만 터져 나올 것 같았기에. 만박은 한 번 더 광무혼을 진찰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광무혼은 추일령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미 여러 번 망가졌었는데... 그때마다 잘 살아났지. 하지만 이제 할 일을 끝냈으니... 더 이상 필요가 없지."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한 온옥교가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추운행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그는 광무혼이란 이름보다 혈혈수라(血血修羅)라는 이름을 먼저 들었다. 그러다 황무를 만나고 그가 광무혼임을 알게 되었을 때, 약간 다른 느낌을 받았다. 한데 오늘 광무혼의 죽음을 보고 있으니 그의 인생 역경이 가슴속에 스며 들어와 연민과 안타까움으로 마음이 칼로 저미듯 아파 왔다. 추일령이 말했다. "일어나라, 무혼. 넌 미안하지도 않은가? 거령과 옥청의 삶을 네가 대신 살아야 할 것이 아니더냐?" 광무혼은 한 번 더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들을 만나면 먼저 내 뺨을 만 대쯤만 때려 달라 말하겠네. 그렇게 맞고도 내 입이 아직 붙어 있다면... 이승에서 마시지 못한 술을 마저 마셔 볼 참이라네." 마침내 추일령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심장이 더욱 따끔거렸다. 온옥교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 나가 버렸다. 광무혼은 안쓰러운 눈으로 그쪽을 보다가 추일령을 불렀다.


그리곤 추일령의 귀에 대고 말했다. "유일하게 걱정이 되는 것은... 그녀일세. 부디 잘 부탁하네." 추일령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열면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아서였다. 대신 그는 광무혼의 손을 꼭 쥐었다. 광무혼의 손은 벌써 시체처럼 차가웠다. * * * 창 밖으로 떨어져 날아가는 잎이 보였다. 광무혼은 눈을 감았다. 자신의 생명이 며칠 남지 않았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나는 세상에 많은 죄를 지었다. 그래서 죽기 전에 꼭 한 가지의 일을 더 해야만 한다.' 이때 만박이 들어왔다. 그는 걱정스런 눈으로 광무혼의 맥을 짚었다. 광무혼은 만박을 보며 말했다. "제 죽음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습니다. 절 다른 곳으로 데려가 주시겠습니까?" "어디로 말인가?" "천수옹께서 남기신 무덤이 있습니다. 그 석옥이야말로 제가 묻힐 장소입니다." "좋네. 그럼 추일령에게 이 일을 알리겠네." 광무혼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제 최후를 절대 남에게 보이지 않겠습니다. 천수옹의 석옥은 귀곡의 진전이 남아 있는 곳이니... 제가 그곳에 들어가면 아무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광무혼은 어조는 절절했다. "부탁입니다. 원주께서만 알고 계셔 주십시오." 만박은 마침내 긴 탄식을 토해 냈다. "알겠네. 자네 뜻대로 하세." * * * 귀원봉(歸元峰). 근원으로 돌아가는 봉우리란 뜻을 가진 이곳은 숨겨진 장소였다. 만박은 일곱 가지의 기진을 뚫고 겨우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광무혼을 석옥 안의 침상에 내려놓으며 만박은 말했다. "대단한 곳이군. 나로서도 진을 뚫기가 힘들었어. 자네가 일러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네." 광무혼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생기를 거의 잃은 그의 눈은 퀭하니 들어가 죽음의 기운이 가까이 왔음을 일러주었다. 그런 상태로 광무혼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만박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가?" "종기... 사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생각인가?" "그는 어린 시절 혈뇌서원(血腦書院)의 혈뇌군사(血腦軍士)를 만났지요. 만일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어땠을까요?" "종기는 정기(正氣)를 지닌 인물이었네. 만일 그랬다면... 그는 분명 강호의 대협이 되었을 것이네." 광무혼은 씩 웃었다. "저는 어떻습니까? 종기를 만나지 않았다면 혈혈수라가 되었을까요?" "자네 또한 영웅이 될 수 있었겠지." "세상의 일이 참으로 우습습니다. 조그만 인연 하나가 크게 부풀어서 끝내 천하를 망치기도 하니 말입니다." "그래, 그렇구먼." 광무혼은 눈을 감았다. 이제 죽음의 시간이 된 것이다. "전... 혈혈수라의 가면을 써본 적이 있습니다. 그건 무척 정교했습니다." "...?"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혈뇌서원은 강호의 분란을 조성하는 일을 하는데, 도대체 그 이유는 뭘까요? 어떤 보상을 바라고 피와 살륙을 일으키는 걸까요?" 만박은 별로 생각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네. 다만 무지한 인간들이 의도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그러다 죽어 가는 것이 재미있을 뿐이지." "그들이 음모를 꾸미려면 정교한 인피면구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이네, 노제." 만박은 입을 다물었다. 한참 후 그가 물었다. "언제부터 알았는가?" "십 년 전 절 구해 주실 때부터 약간의 의심을 가지다가 이번 싸움에서 확신하게 되었지요. 종기가 당신을 가리키며 놀랄 때 그 확신을 한 번 더 확인했지요." "푸훗, 푸하하하..." 만박은 웃었다. 아주 소리 높여 껄껄껄 웃었다. "재밌군. 모든 사람을 속였지만 그대는 속이지 못했단 말인가? 하하하, 이거 정말 재미있어!"


광무혼은 긴 한숨을 토해 냈다. "혈뇌서원은 아직 남아 있습니까?" "서원은 물론 존재한다네. 사실 혈뇌서원은 한 사람의 전승자에게 이어질 뿐이라네. 나머지 사람은 그저... 이용당하는 데 불과하다네." 만박은 잠시 숨을 고른 후 말했다. "나 혈뇌군사가 살아 있는 이상... 혈뇌서원은 건재한 것이지." 광무혼의 감은 눈이 부르르 떨렸다. "삼기의 힘을 모은 종기의 위세는 엄청났지. 그 힘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네. 난 모습을 감추고 혈경을 남겨 두었지. 어리석은 종기는 그걸 주워 갔다네." "동정호반의 사건도 당신의 계획입니까?" "그 계획은 지금 생각해도 훌륭한 것이었네.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탓으로 혈육에게 비정상적인 집착을 보이는 종기를 자극하는 일은 의외로 쉬웠지. 부랑자 두 명을 사 남자애는 죽이고 여자애는 욕을 보였네." "운지를 살려 둔 것은 처참함을 가중시키기 위함이었군요." "물론이네. 나중에 또 다른 계획을 쓰기 위한 안배도 되는 게고... 어쨌든 종기는 내 의도대로 행동했네. 혼돈경... 사실은 혈경인 그것을 익히기 시작했지." "왜... 날 택했습니까?" "이봐,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는 경기가 무슨 재미가 있겠나? 종기의 자질은 의외로 뛰어나 그를 상대할 자를 고르는 데 애를 먹었네." 잠시 숨을 고른 만박은 말을 이었다. "해서 혈혈수라의 면구를 은근히 전해 줌과 동시에 그런 계획을 간접적으로 종기가 알도록 만들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일이 가장 힘든 것이었네." "내게 보여 준 측자(測字), 그런 점괘 같은 것으로 암시를 줬겠군요." "맞았어." 광무혼은 긴 한숨을 토해 냈다. 모든 강호가 종기 한 사람으로 인해 황폐화된 것 같지만 현실은 이러했다. 혈뇌군사야말로 진정한 배후였던 것이다. 그의 조종 아래 강호 전체가 꼭두각시처럼 움직여 왔던 것이다. 광무혼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이제 어쩔 셈이십니까?" 만박을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 어찌할 계획은 없네. 난 이미 평생을 건 한바탕의 놀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어. 당분간은 쉴 작정이네, 후후..." 그는 기분이 좋은지 실실 웃었다. "후후, 만박이란 이름으로 강호에 만들어 놓은 내 직위는 아주 확고한 것이네. 세상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지. 난 당분간 만족하며 지낼 수 있을 것일세." 광무혼은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정신이 아득히 흐려 왔다. 이제 죽음이 다가오는구나 싶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광무혼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말했다. "당신은..."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자 만박이 그의 입에 귀를 바짝 갖다 대었다. "당신은... 그럴 수 없을 것이오." 만박은 싱긋이 웃었다. "난 무공을 갖고 있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종기 못지않다네. 누가 있어 날 막는단 말인가?" 광무혼은 마지막 말,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의 말을 내뱉었다. "...천수옹의... 유령(幽靈)!" 순간 석옥의 사방 창문이 쾅쾅 소리를 내며 닫히는 것을 만박은 보았다. 광무혼의 입가에 웃음이 떠오르는 것도 같았다. "이... 이런!" 만박의 전신에서 폭발하는 듯한 강기가 우박처럼 쏟아지며 벽을 쳤지만 벽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벽이야말로 귀곡의 기절(機絶)을 이어받은 천수옹의 최후 역작이기 때문이다. 이곳의 이름은 유령전이었다. "아, 안 돼! 이런 일은... 안 돼-!" 바닥이 진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많은 태양이 벽과 바닥, 그리고 천장에서 터져 나왔다. 꽈르르릉! 귀원봉 꼭대기의 석옥은 대폭발을 일으켰다. 그 위력은 너무도 엄청나 봉우리 하나가 완전히 사라질 정도였다. 까맣게 하늘을 가리며 올라가는 연기. 그 연기의 모습이 일순간 광무혼의 모습으로 화하는 것 같았다. 하늘에 떠오는 구름은 거령이고 또한 옥청이었다. -우린 오래 기다렸네. 아주 오래... 그들은 화를 내고 있지 않았으며 광무혼의 뺨을 때리려 들지도 않았다. 웃으며 한잔의 술을 권했을 뿐이다. 술은 곧 비가 되어 천하를 덮었다. 폭우가 아닌 단비였다. 지친 가슴을 한껏 적셔 주는 맑고 영롱한 단비였다.


終. 기다리는 사람 추일령은 알고 있었다. 어딘가 은밀한 곳으로 광무혼이 숨었음을. 광무혼은 자신의 죽음을 온옥교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마음을 추일령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광무혼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슬픔에 괴로워하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온옥교는 그런 것을 모르는 듯했다. 그녀는 날마다 언덕에 올랐다. 그리고 보름달이 뜨는 밤만 되면 항상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밖을 내다보았다. 그럴 때 그녀의 창가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온옥교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놀라곤 했다. 때때로 날이 밝으면 온옥교는 광무혼을 만났다고 사람들에게 자랑하곤 했다고도 한다. 다섯 달 만에 온옥교는 숨이 끊어졌다. 그날도 보름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이 되자 시녀는 온옥교의 방을 정리하기 위해 들어갔다. 하나, 그녀는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채 아주 편안한 얼굴로 침상 위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고 한다. 마치 신랑을 맞이하는 새색시의 웃음을 띠고. 온옥교가 양지바른 곳에 묻힌 지 일곱째 날 밤에 추일령은 꿈을 꾸었다. 그곳에는 광무혼과 온옥교가 다정히 손을 잡고 있었고, 거령과 옥청이 그 옆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손을 흔들며 추일령을 불렀다. 추일령이 다가가 그들 옆에 앉자 어디선가 운지가 음식을 잔뜩 마련해서 나타났다. 그녀는 잔뜩 튀어나온 입술로 말했다. "절 용서해 주는 대신에 부엌일은 모두 저에게 맡긴 거예요. 전 단 한시도 쉴 틈이 없답니다. 심지어 이 손에서 한 번도 물기가 마른 적이 없다구요." 모두들 유쾌하게 웃고 유쾌하게 술을 마셨다. "나도 오고 싶네. 이곳으로 와 자네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어." 하지만 광무혼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았어. 내 말하지 않았나? 자네의 심장을 새것으로 바꾸어 주겠다고." 다음날 아침, 추일령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심장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지만 대신 그의 마음이 무척 아팠다. 친구들을 만나러 가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음을 알게 된 까닭이었다. * * * 무림회천맹 초대맹주인 추일령은 그 위(位)를 제이대 맹주 추운행에게 물려주기


전까지 삼십사 년간 무림을 다스렸다. 그 시기의 무림은 아주 평화스러웠다 전한다. 추일령이 눈을 감을 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이런 것이었다고 전한다. -이제서야 난... 그들을 만나러 가는군. 단심서생(丹心書生) 최오(崔五)는 꼬박 삼 년간 원주인 만박을 기다렸다. 그러나 만박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삼 년째 되던 날 최오는 춘추서원을 해체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아끼는 제자 한 명만을 데리고 태산의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갔다. 닷새에 걸쳐 마주앉았다.

나무를

깎고

목옥을

세워

곳을

마련한

그는

마침내

제자와

"학문을 닦는 이유를 아느냐?" 최오가 물었다. 제자가 즉시 대답했다. "지식을 얻기 위함입니다." "지식은 왜 얻는 것이냐?"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그럼 어디에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으냐?" 잠시 망설인 제자가 대답했다. "세상에 사용합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세상의 모든 어리석은 자들에게, 그들을 마음대로 움직이며 조종하는 것이 지식을 활용하는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단심서생 최오는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그래, 훌륭하다! 만박 원주께서 수명이 혈뇌군사다." "군사를 뵙습니다!" "그래, 너는 항상 명심하도록 해라. 유고(有故)시에는 네가 새로운 혈뇌군사가 제자가 눈을 반짝였다. 그는 벌써부터 천하를 무대로 벌일 한판의

다하셨으니 이제 내가 새로운 혈뇌서원의

항상 열심히 공부할 것을. 되어야 하는 것이니..."

만일

내가

놀이에 대해 궁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 大 尾 > 후 기 세상에 끼치는 해악(害惡) 중에 가장 큰 것은 지식이라고 장자(長子)가 말했다. 그 말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때때로 뉴스에 나오는 갖가지 비리를 듣고 볼 때마다 어쩌면 그 말이 옳은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곳에서 살고 싶다. 金翅鳥 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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