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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무뢰한(중) - 용대운 저

제 11 장 塞外三大門派 1 흑상문신은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네... 네 놈은 대체 누구냐? 어떻게 혈악의 일을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느냐?" "아니 귀는 두었다 뭘하는 거요? 조금 전에 백상문신이 말하지 않았소? 나는 엽단풍이라는 사람이오." 흑상문신은 그가 계속 엉뚱한 소리만 하자 안색이 여러 차례 변했다. 그는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눈앞의 이 미치광이 녀석을 때려 눕히고 싶었지만 자신이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이미 뼈저리게 절감했는지라 감히 덤벼들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엽단풍이 목소리를 낮추어 소근거렸다. "당신이 이대로 돌아가도 목불에게 추궁을 당하지 않을 방법을 알려줄 테니 그대로 해 보겠소?" 흑상문신은 그의 난데없는 말에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로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정말 몰라서 묻는다면 당신은 무림사상 최고의 멍텅구리요. 당신이 곤경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알려 주겠다는 말이오." 물론 흑상문신이 엽단풍의 말뜻을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너무도 의외의 말에 반신반의했을 뿐이다. 혈악의 규칙은 엄하고도 무서워서 절대로 조금의 실패나 잘못도 용서하지 않았다. 흑상문신이 설사 엽단풍의 손에서 무사히 빠져나온다 해도 그는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엽단풍이 자기가 먼저 나서서 흑상문신이 무사히 돌아갈 방법을 알려 주겠다니 어찌 놀랍지 않은가?


엽단풍은 제법 심각한 안색으로 말을 계속했다. "사실 당신이 이런 곤궁에 처하게 된 것은 모두 내가 갑자기 끼어들어 당신들의 일을 방해했기 때문이오. 그러니 내가 어찌 도의적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겠소?" 흑상문신은 그의 말에 웃을 수도 없고 울을 수도 없어 표정이 이상야릇하게 변했다. 엽단풍은 이제는 아주 다정한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당신은 제법 인상이 중후하고 위풍이 당당하여 백상문신보다 한결 사람다운데가 있소.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듣고 그대로 따라 한다면 당신에게는 아무런 해도 없다는 것을 내가 보장하겠소." 흑상문신은 이 자식이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나 한 번 들어나 보자는 심산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엽단풍의 음성은 어디까지나 진지했다. "당신이 이대로 돌아간다면 당신의 상전인 목불은 반드시 당신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흑상문신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당신이 살려면 목불이 없어져야 하는 것이오." 흑상문신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말한 그대로요. 목불이 존재해 있는 한 당신은 도저히 그의 손을 벗어날 수 없소. 하지만 그가 사라져 준다면 누구도 당신이 일을 실패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오." 흑상문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거냐?" 엽단풍은 도리어 정색을 했다. "왜 그렇게 앞뒤가 꽉 막혔소? 내 말대로 하는 길만이 당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 거요?" 흑상문신의 안색이 여러 차례 변했다. 엽단풍은 다시 타이르는 듯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그저 나에게 지금 목불이 있는 곳만 알려주면 되오. 그러면 내가 당신을 위태롭게 하는 모든 것을 제거해 주겠소. 이것은 당신에게는 전혀 해가 되지 않은 바람직한 일이니 당신은 심사숙고해서 결정하기 바라오." 흑상문신의 얼굴에 망설임의 표정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 같더니 생각해 볼수록 엽단풍의 제안은 확실히 그로서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을 담고 있었다. 그는 재빠르게 생각을 굴렸다. '이 놈은 자신이 목불을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이걸 이용해도 되지 않을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일 이 놈이 목불을 죽이면 나는 모르는 척 혈악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고 예상대로 이 놈이 목불의 손에 죽으면....이 놈을 유인했다고 말하면 될 것이 아닌가?' 엽단풍은 그의 눈이 이리저리 구르는 것을 보고 눈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나쁜 놈들은 저게 문제야. 꼭 혼자서만 약은 척을 한다니까.' 흑상문신은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마음을 굳힌 듯 엽단풍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하지만 네 놈은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한다."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염려 마시오. 당신이 목불의 행방을 알려주기만 하면 반드시 그 목불을 사불(死佛)로 만들어 버리겠소." 흑상문신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목불이 어떤 인물인데 너 같은 애송이가 그를 없앨 수 있겠느냐? 목불을 우리와 비슷한 고수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거야말로 스스로 화약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냐?' 흑상문신은 속으로는 냉소가 흘러나왔으나 겉으로는 짐짓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노부의 신분으로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는다만... 네 말을 한 번 믿어 보기로 하겠다." 엽단풍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 끄덕거렸다. "어련하시겠소. 당신의 애통한 마음은 내가 깊이깊이 새겨 두겠으니 어서 말해 주시구려." 흑상문신은 조금 망설이는 표정을 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불은 사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거야 아무리 멍청한 인간도 짐작할 수 있는 일 아니오?" "하지만 그곳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얼레? 그건 또 무슨 말이오?" "목불은 성격이 괴팍해서 절대로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엽단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당신도 그 자의 거처를 모른다는 뜻이오?" "그렇다." "그런데 어떻게 나에게 목불이 있는 곳을 가리켜 준다고 했소?" 흑상문신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비록 목불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디로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지는 알고 있다."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당신의 말은 이번 일을 해결하면 어떤 장소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는 말이오?" 흑상문신의 몸이 움찔했다. '이 놈은 덩치하고는 어울리지 않게 눈치가 무척 빠르구나.' 그는 문득 엽단풍이 겉으로 드러난 인상과는 달리 그렇게 우둔한 인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렇다." "그곳이 어디요?" 흑상문신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혹시 자신의 이 자의 꼬임에 빠져 커다란 실수를 하는 것이 아닐까 잠깐 불안해 졌다. 하나 이제 와서 뒤로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금릉의 우화대(雨花臺)다. 우리는 이 달 그믐까지 영호해상을 사로잡아 우화대로 오라는 밀명을 받았다." "우화대라...." 엽단풍은 속으로 뇌까리며 잠시 침음하다가 이내 흑상문신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과연 생긴 것대로 앞뒤가 탁 트인 대장부구려. 나도 약속을 지킬 테니 당신은 그만 가 보시오." 흑상문신은 막상 그가 이토록 쉽게 자신을 놓아주자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 "정말 가도 되겠느냐?" "그야 이를 말이오? 당신은 여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이 많은 것 같지도 않은데 당신을 붙잡고 있어 봤자 무슨 이득이 있겠소? 그러니 어서 갈 길로 가 보시오." 흑상문신은 한동안 그를 응시하고 있다가 바닥에 있는 백상문신의 시체를 들쳐 메더니 휭하니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곧 그의 신형은 저 멀리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영호해상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아무래도 불안한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저 자를 저렇게 마음대로 가도록 내버려두어도 괜찮아요?" 엽단풍은 그녀를 내려보며 피식 웃었다. "네가 설마 그런 노인네를 좋아할 줄은 몰랐구나. 그렇게 그 자가 마음에 있다면 쫓아가서 붙잡지 그러느냐?" 영호해상의 입꼬리가 삐쭉하더니 샐쭉한 표정이 떠올랐다. "당신은 정말 사람 속을 벅벅 긁는 소리를 잘하는군요. 항상 그렇게 남을 약올리는 악취미를 가지고 있나요?" "취미랄 것까지는 없고 그냥 습관이지. 그건 그렇고 너는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들에게 쫓기는 것이냐? 보아하니 네게 청혼을 하려고 쫓아온 것 같지는 않던데." 영호해상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듯 뾰로통한 표정이었으나 그의 물음을 듣자 눈가에 희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녀는 갑자기 한숨을 폭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당신이 틀렸어요." 엽단풍은 흠칫 놀랐다. "아니 그럼 그 노인네들이 너와 결혼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쫓아다녔단 말이냐? 원 노인네들도 주책이군. 그 나이에 손녀뻘되는 여자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다니." 영호해상은 소리를 빽 질렀다. "누가 그들이 나와 결혼하기 위해서라고 했어요?" 엽단풍은 커다란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벼팠다. "거참 목청 하나는 끝내 주는군. 방금 네 입으로 그들이 청혼하기 위해서 쫓아왔다고 말했지 않았느냐?" "그들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청혼하러 온 거란 말이에요." 엽단풍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빙그레 웃었다. "그럼 그들을 시켜 너에게 청혼한 자는 누구냐?" 영호해상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유동립(兪冬笠)이란 사람이에요." 엽단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동립? 그는 어떤 사람이냐?" "나도 잘 몰라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결혼하려고 했단


말이냐?" 영호해상은 고운 아미를 치켜 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누가 그 사람하고 결혼한다고 했어요? 그냥 그 자가 일방적으로 사람을 보내 청혼한 거란 말이에요!" "내 귀는 그런 대로 쓸 만하니 너는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결혼하기 싫으면 거절하면 될텐데 왜 이 먼 곳까지 쫓겨왔단 말이냐?" 영호해상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더욱 짙어졌다. 영호해상은 발랄한 생기가 감돌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원래 안된다고 딱부러지게 말하려고 했지만 할아버지께서 찾아온 흑백상문신의 체면을 생각해서 선뜻 거절하지 못하셨어요." "그럼 네 할아버지가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시키려고 했단 말이냐?" "할아버지는 거절하지는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승낙도 하지 않으셨어요. 할아버지는 그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지요." "그럼 네 할아버지의 위세로도 그들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했단 말이냐?" 영호해상은 풀이 잔뜩 죽은 모습이었다. "할아버지는 생전 누구를 두려워한 적이 없으셨는데....웬일인지 그들만은 몹시 꺼려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어 엽단풍을 응시했다. "그런데 당신은 내 할아버지를 알아요?"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네 할아버지는 동해요인도(東海妖人島)의 도주(島主)인 영호덕조(令狐德操)가 아니냐?" 영호해상의 눈에 모처럼 생기가 감돌았다. "그래요. 당신은 참 견문이 해박하군요." 엽단풍은 껄껄 웃었다. "하하....무림인 중에서 어찌 동해노사(東海老邪) 영호덕조를 모르는 사람이 있겠느냐?" 영호해상은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유명한 분이신가요?" "너는 동해요인도에서만 살아서 잘 모르는 모양이다만 네 할아버지는 새외삼대문파(塞外三大門派)중 하나의 주인이니 당연히 당금무림에서 위명이 자자한 인물이지." 영호해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도(本島)가 새외삼대문파 중의 하나라면 다른 두 문파는 무엇이지요?"


"그건 서천의 벽요궁과 북산(北山) 신녀문(神女門)이다." "그렇군요." 영호해상은 요인도가 그렇게 쟁쟁한 이름을 날리고 있다는데 고무된 듯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하나 사실 요인도의 명성은 그녀의 생각보다 한층 더 대단한 것이었다. 요인도와 벽요궁, 신녀문의 새외삼대문파는 비록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나 천하의 어느 누구도 무시 못할 막강한 세력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요인도는 기이한 사술(邪術)과 암기(暗器), 용독(用毒)의 고수들이 즐비해 요인도라는 이름만 들어도 무림인들의 안색이 변할 정도로 두려운 존재들이었다. 더구나 요인도주인 동해노사 영호덕조는 그야말로 사파(邪派)의 일대종사(一大宗師)라 할 수 있는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 동해노사가 내키지 않는 청혼조차 거절하지 못하다니... 영호해상은 아직도 할아버지가 청혼을 거절하지 못한 이유를 알지 못해 언짢은 마음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할아버지 몰래 요인도를 빠져나와 중원으로 건너온 것도 할아버지가 청혼을 선뜻 거절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오는 도중 그녀는 요인도를 찾아왔던 흑백상문신이 자신을 뒤쫓고 있는 것을 알고 알고 있는 온갖 사술과 기지를 동원하여 간신히 그들의 추적을 피해 여기까지 도망쳐 왔던 것이다. 엽단풍은 그녀의 할아버지가 그 청혼을 거절하지 못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영호덕조의 실력으로 흑백상문신이 무서워서 청혼을 거절하지 못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단지 영호덕조는 흑백상문신의 뒤에 있는 배경이 두려웠던 것이다. 흑백상문신의 뒤에는 하나의 거대무비한 세력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혈악이었다. 혈악! 그 정체가 대체 무엇이기에 강호무림에서 누구도 두려워 마지않는 동해노사 영호덕조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사랑하는 손녀의 혼사(婚事)마저 마음대로 하지 못했던 것일까? 2


'이거 기이하군. 벽요궁에서도 공손단경이 냉우빙의 억지 청혼을 받았는데 요인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다니....과연 이 자들이 슬슬 무림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일까?' 엽단풍은 혼자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영호해상을 쳐다보았다. 영호해상은 두 눈을 초랑초랑하게 빛낸 채 엽단풍을 빤히 주시하고 있다가 그와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치자 얼굴이 빨개지며 급히 고개를 돌렸다. 엽단풍은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무얼 그렇게 쳐다보고 있었느냐? 내 얼굴이 그렇게 잘생겼느냐?" 영호해상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당신이 잘생겼다고 한다면 지나가던 개도 웃을 거예요." 확실히 엽단풍은 자신이 생각해도 그렇게 미남은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느냐?" 영호해상은 잠시 눈을 뗑구르르 굴리다가 샐쭉한 표���을 지었다. "말하고 싶지 않아요." 엽단풍은 빙그레 웃을 뿐 더 이상 그녀를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전혀 다른 것을 물어 보았다. "그런데 너는 정말 섬으로 돌아가지 않을 셈이냐?" 영호해상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그것 참 잘 생각했다. 사실 너같이 예쁘고 생기발랄한 아가씨가 그렇게 좁고 답답한 섬에서만 지낸다는 것은 너무도 아까운 일이지." 엽단풍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를 잔뜩 치켜세워 주었다. 그녀는 아직도 새침한 표정이었으나 눈가에는 벌써 흐뭇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엽단풍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긴 네 할아버지야 조금 어려운 지경에 빠지겠지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쓸 필요는 없겠지...." 영호해상은 귀가 번쩍 뜨여 날카롭게 그를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요?" 엽단풍은 일부러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말이냐?" 영호해상은 다시 표독한 성질이 발동했는지 눈썹을 있는 대로 치켜 뜨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방금 할아버지가 어려운 지경에 빠지겠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아! 그거. 그냥 나 혼자 중얼거린 거니까 신경 쓰지 말아라." 엽단풍이 능청을 떨자 영호해상은 더욱 성질이 나서 소리쳤다. "빨리 말하지 못하겠어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예요?" 엽단풍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으쓱거렸다. "네가 그렇게 할아버지를 끔찍이 생각하는 줄 몰랐구나. 별로 대단한 건 아니고 지금쯤 네 할아버지가 그 자들에게 호된 꼴을 당하고 있지 않을까 해서 그냥 해본 소리다." 영호해상의 안색이 싹 변했다. "할...할아버지가 호된 꼴을 당하다니요?" "너도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 아니냐? 그 자들이 너에게 청혼을 했는데 당사자인 네가 도망쳐 버렸으니 틀림없이 네 할아버지를 다그칠게 아니냐?" "......" "네 할아버지는 그들이 두려워 청혼을 거절하지도 못했는데 너마저 없어져 버렸으니 무슨 수로 그들의 성화를 감당하겠느냐?" 영호해상의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저...정말 그럴까요?" 엽단풍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암. 그거야 삼척 동자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 모르긴 해도 그들이 화가 나서 네 할아버지에게 분풀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그럼 어쩌지요?" 영호해상은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한 게 금세라도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엽단풍은 더 있다가는 그녀가 다시 울음보를 터뜨릴게 두려웠던지 급히 그녀를 달랬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아무리 그래도 그들은 청혼을 하러 온 자들인데 설마 할아버지를 심하게 다루기야 하겠느냐? 기껏해야 팔다리나 하나씩 자르고 말겠지." 그 말에 영호해상이 까무러치게 놀랐다.


"파....팔다리를 자르다니요?" 엽단풍은 자신이 말을 잘못했음을 깨닫고 재빨리 다시 말했다. "내 말은 네 할아버지가 죽지는 않을 거란 얘기다. 팔다리가 하나 정도 없는 병신이 된다고 해도 죽은 시체보다야 낫지 않겠느냐?" 영호해상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벼...병신..? 시...시체?" 엽단풍은 다시 자기가 실언(失言)을 했음을 깨닫고 황급히 말을 고쳤다. "병신이 아니라...그렇지! 반신불수다. 반신불수! 어차피 네 할아버지 연배 정도 되면 죽는 건 시간문제인데 반신불수로 그친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영호해상은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떤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엽단풍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제법 자상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리 네 할아버지가 반신불수가 되어 거동을 못해도 너는 여자니까 시집을 가 버리면 그 수발을 들지 않아도 된다. 만약 네가 며느리라면 그건 정말 불행한 일이지만 손녀이니 이것도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느냐?" 영호해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엽단풍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니 무슨 여자가 갈수록 목청이 커지냐? 보고도 모르느냐? 나는 지금 너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지 않느냐?" 영호해상은 있는 대로 악을 썼다. "그게 지금 걱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당신은 정말 내가 심장이 터져 죽는 꼴을 봐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엽단풍은 억울하다는 듯 양손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것 참. 나는 좋은 뜻에서 말한 건데...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할아버지가 어쩌냐고 물어봤을 때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 건데." 영호해상은 정말 이 자식이 때려 주고 싶도록 얄미웠다. 하지만 또한 할아버지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화도 나고 속상해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자 그제서야 엽단풍은 진짜로 다급해졌다. '이거 내가 장난이 너무 지나쳤나? 아까처럼 또 울고불고하면 어쩌지?' 하나 걱정과는 달리 그녀는 잠깐 눈물을 흘렸을 뿐 곧 눈물을 그치고 힘없는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엽단풍은 급히 그녀를 불렀다. "어디를 가는 거냐?" 그녀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할아버지에게 돌아가겠어요." 엽단풍은 그녀의 심정을 환히 꿰뚫어 본 듯 웃었다. "하지만 네가 돌아간다고 무슨 뾰쪽한 수가 생기겠느냐? 잘못하면 그 유동립인가 하는 녀석과 정말로 결혼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 말에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쩌지....어쩌면 좋지....?" 돌아가자니 내키지도 않는 결혼을 하게 생겼고 그렇다고 돌아가지 않자니 엽단풍의 말마따나 할아버지가 걱정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계속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채 어쩌지 어쩌지 하고 중얼거리고 있을 때 밉살스런 엽단풍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그런데 나는 참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구나." 그녀는 이 자식이 또 무슨 소리를 하나하고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 엽단풍은 고개를 갸우뚱거린 채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는 바로 옆에 시냇물이 흘러가는데도 목이 마르다고 투덜거리고 있구나. 대체 고민할게 뭐가 있느냐?" 그 말에 영호해상은 귀가 번쩍 뜨이는지 급히 그에게 다가왔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엽단풍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내 말뜻을 잘 생각해 보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영호해상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당신 말은 당신이 그 자들을 물리쳐 주겠다는 것인가요?"


엽단풍은 껄껄 웃었다. "이제야 그 생각이 나다니 너답지 않구나." 영호해상은 구세주를 만난 듯 안색이 활짝 펴졌다. "정말 당신이 그 자들을 물리칠 수 있단 말이에요?" 엽단풍은 짐짓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부탁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무어라고 말할 수는 없구나." 영호해상은 표정이 풀어지며 입가에 다시 앙증맞은 웃음이 떠올랐다. "내가 부탁하겠어요. 그러니 빨리 대답해 주세요. 정말 그들을 물리칠 자신이 있어요?" 엽단풍은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음...그 자들은 흉신악살보다 더욱 무서운 사람들인데...내가 아무 관계도 없는 여자를 위해 그런 무시무시한 고수들을 건드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그녀는 급히 말했다. "당신은 그렇게 비겁한 소리를 하면 안돼요. 옳지 못한 일을 보고도 그냥 지나친다면 어찌 당당한 사내 대장부라고 할 수가 있겠어요?" 엽단풍은 시큰둥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내 대장부도 좋지만 나는 아직 장가도 못간 상태에서 죽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그런다고 나에게 무슨 이득이 되는 것도 아니고..." 영호해상의 얼굴에 다급한 표정이 떠올랐다. "당신은 이런 일에도 이득을 따진단 말이에요?" "나도 그러고 싶지 않다만 이게 내 천성(天性)인걸 어쩌겠느냐? 나는 예전부터 술이 없으면 제사상에도 가지 않는 성미다." 영호해상은 자신도 모르게 재빨리 말했다. "그럼 내가 당신에게 술을 실컷 사주겠어요." 엽단풍은 정색을 했다. "어허! 사내 대장부가 어찌 술 몇 잔에 이런 중대한 일을 결정하겠느냐?" 영호해상은 마음이 급해져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면 당신은 원하는 것을 말하세요. 내가 무엇이든 들어드릴게요." 그 말에 엽단풍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게 정말이냐?" 영호해상은 그의 얼굴 표정이 이상함을 깨닫고 몸을 움찔하다가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원래 그런 말은 여자가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과연 엽단풍은 입가에 음산한 미소를 떠올리며 한 발 한 발 그녀에게 다가왔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준다고 했지?" "다...당신은...." 영호해상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엽단풍은 입가에 괴이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너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느냐?" 그녀의 얼굴에 두려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다....당신은 설마...." "흐흐....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엽단풍은 그녀의 코앞으로 다가오며 그녀의 전신을 쓰윽 훑어보았다. 그녀는 와들와들 떨며 그 다음 일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아...! 내가 말 한 마디를 잘못해서 까딱하면 천추(千秋)의 한(恨)을 남기게 되었구나...' 그녀는 후회막급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있어도 엽단풍의 손길이 닿는 느낌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이상해서 한쪽 눈을 살짝 떠보았다. 엽단풍은 저만큼 떨어진 채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너는 왜 그렇게 떨고 있는 거냐?" 영호해상은 영문을 몰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엽단풍은 빙긋 웃었다. "나는 네게 술 한 잔 얻어먹기로 하고 네 할아버지를 도와주러 가기로 했는데 너는 빨리 갈 생각은 하지 않고 왜 그곳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거냐?" 영호해상은 그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든 듯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엽단풍은 히죽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술이 있어야 제사상에도 가고 힘도 나는 사람이다. 네가 술 한잔만 사준다면 그깟 놈들을 때려눕히는 일쯤이야 못하겠느냐?" 영호해상은 그제서야 그가 조금 전 자신을 놀렸다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삐쭉거렸다. 하나 다음 순간 그녀는 까르르 웃으며 그에게로 뛰어왔다.


"호호....그렇군요. 과연 당신은 내 짐작대로 정신이 올바로 박힌 사람이었어요." 엽단풍은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너는 이제야 그걸 알았느냐?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세상에서 가장 올바른 정신을 가진 비범한 사람이다." 영호해상은 혀를 낼름거렸다. "피.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너는 아직도 모르는구나. 원래 나는 얼굴 가죽이 두꺼워 그보다 더한 말도 잘한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자기 입으로 얼굴 가죽이 두껍다고 하다니...당신은 정말 괴팍한 사람이에요." "이런 제길. 내가 괴팍하다는 것까지 알아내다니...이러다가는 내 비밀이 송두리째 드러나겠군." 엽단풍은 중얼중얼거리더니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자." 영호해상은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그에게 손을 잡힌 채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가 멍하니 있는 사이 그는 그녀의 몸을 반 강제로 끌다시피 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급히 물었다. "어딜 가는 거예요?" 엽단풍은 그녀를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어디긴. 일을 해결하러 가야지." 그녀의 눈이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그러면 요인도로 가자는 말이에요?" "하하....일에는 선후(先後)가 있는 법이다. 요인도로 가기 전에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소리쳤다. "알았어요. 그 목불인지 금불(金佛)인지 하는 자를 만나러 가는군요." 엽단풍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자를 만나는 것은 그리 급하지 않다." 그녀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럼 대체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거예요?" "천하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그가 대체 누군가요?" 엽단풍은 한동안 묵묵히 앞을 바라본 채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답지 않게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고월헌."

제 12 장 주루의 風雲 1 금릉(金陵)의 거리는 번화하기만 했다. 금릉은 강소성의 서쪽에 위치한 천하의 고도(古都)였다. 옛 이름은 강녕(江寧), 건업(建業). 초(楚)나라 때부터의 도읍으로, 남조(南朝)시대에는 건강(建康)이라고도 불렸다. 그후 많은 변천을 거쳐 명(明)나라 초기의 제도였으나 영락제(永樂帝)가 도읍을 북평(北平)으로 옮겼으므로 이 지방을 남경(南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해가 뉘엿뉘엿 서쪽 하늘로 기울어 가고 있을 무렵. 금릉에서 제일 번화한 주루인 열빈루(悅賓樓)의 입구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꾀죄죄한 회색 장포를 입은 앙상한 체구의 노인이었다. 회포 노인은 코밑에 두 가닥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 마치 염소를 연상시키듯 약간 우스꽝스런 몰골을 하고 있었다. 회포 노인은 열빈루로 들어와서 빠른 눈길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눈을 번쩍 빛내며 급히 한 곳으로 다가갔다. 그가 향한 곳은 창가에 있는 탁자였다. 그곳에는 한 명의 금의인이 탁자에 턱을 고인 채 멍하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금의인은 사십대 중반쯤 되어 보였는데 이목이 남달리 청수하고 전신에 은은한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금의중년인은 시선을 허공에 고정한 채 무언가 사색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 카랑카랑한 음성 하나가 그의 머리 위에서 들려 왔다. "삼제(三弟). 오래 기다렸나." 금의중년인이 고개를 들어보니 염소를 닮은 회포노인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히죽 웃고 있었다. 금포중년인은 반갑게 웃으며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큰형님이셨군요. 어서 오십시오." 회포 노인은 금포중년인의 앞에 앉으며 물었다. "이제(二弟)는 아직 오지 않았나?" "예. 이제 곧 오실 겁니다." "음. 그럼 내가 조금 빨리 온 모양이군." 그때 마침 점소이 하나가 그들 곁을 지나가자 회포노인이 점소이를 불렀다. "여보게. 여기 죽엽청 한 병하고 잘 구운 오리 구이 한 마리만 갖다 주게." "금방 대령하겠습니다. 손님." 젊은 점소이는 허리를 굽신거리며 급히 주방 쪽으로 달려갔다. 회포 노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늘은 평일인데도 손님이 상당히 많군 그래." 금포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무더우니까 집안에 있지 않고 밖에 나와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봅니다." 그들의 말마따나 오늘 열빈루는 유달리 붐볐다. 열빈루는 단층으로 되었으나 무척 넓어서 한꺼번에 거의 백 명에 달하는 손님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음식도 맛이 있을 뿐 아니라 점원들도 하나같이 친절해서 금릉에서는 손꼽히는 주루였다. 항상 붐비는 열빈루였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한결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려 거의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개중에는 벌써부터 술에 취해 한쪽 구석에 코를 처박고 잠들어 있는 인물도 있었다. 회포 노인과 금포중년인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다시 몇 사람이 열빈루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봇짐을 진 서너 명의 장사꾼들이었다. 장사꾼들은 무슨 즐거운 일이 있는지 자기네들끼리 낄낄거리며 열빈루 안으로 들어왔다. 하나 그들은 이내 눈살을 찌푸려야만 했다. 주위가 워낙 붐비는지라 마땅히 앉을 자리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장사꾼들은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가려다 마침 창가에 면한 커다란 탁자에 동그마니 두 사람만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서로 손가락질을 하더니 지나가던 점원을 불렀다. 그들이 점원에게 무어라고 쑤군거리자 그 점원이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회포 노인과 금포중년인이 앉아 있는 탁자로 다가왔다. "저...손님."


회포 노인은 이미 장사꾼들이 점원을 부를 때부터 쭉 지켜보고 있었는지라 점원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리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상관없으니 저 분들을 합석(合席)시키세." 점원은 반색을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점원은 즉시 장사꾼들을 불렀다. 장사꾼들은 회포 노인에게 다가와 고개를 수그렸다. "노인장. 고맙소." 회포 노인은 비쩍 마른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별말씀을. 오늘같이 붐비는 날에는 서로 조금씩 양보를 해야 하지 않겠소?" 장사꾼들은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하며 탁자에 앉았다. 장사꾼들의 수는 세 명이었는데 금포중년인 옆에 두 사람, 회포 노인 옆에 한 사람이 앉게 되었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시오?" 회포 노인이 옆에 앉은 장사꾼에게 엽차를 권하며 물었다. 그 장사꾼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산동(山東)에서 오는 길입니다." "허...먼데서 오시는구려." "뭘요. 우리들이야 늘상 하는 일인데요. 노인장께선 이 고장 분이십니까?" 회포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곳에서 친하게 지내는 아우를 만나기로 했는데 아직 오시지 않는구려." 장사꾼은 금포중년인을 가리켰다. "저 분도 일행이십니까?" "그렇소." "저 분은 어디선가 뵌 듯한데....혹시 산동 분 아니십니까?" 금포중년인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대대로 강소성에서 살고 있소." 장사꾼은 싱겁게 히죽 웃었다. "그렇군요. 내가 잠시 다른 사람하고 착각을 했나 봅니다." 그때 마침 아까의 그 점소이가 회포 노인이 주문한 오리 구이와 죽엽청을 들고 왔다. 점소이는 음식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회포 노인에게 공손하게 절을 했다. "맛있게 드십시오." 그 깔끔한 태도와 예의바른 모습은 과연 친절하기로


소문난 열빈루의 점원다웠다. "허허...그러지." 회포 노인은 껄껄 웃으며 죽엽청을 들어 금포중년인과 자신의 술잔에 한 잔씩 따른 다음 장사꾼들에게도 권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한 잔씩들 하시오." "어이구...고맙습니다." 장사꾼들은 앞을 다투어 인사를 하며 술잔을 받았다. 술이 한 순배 돌고 나자 장내의 분위기는 한결 화기애애해 졌다. 회포 노인은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장사꾼에게 말을 걸었다. "요새 장사는 잘 되시오?" "웬걸요. 근래는 경기가 시원치 않아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정도입니다." 회포 노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소? 노부가 듣기로는 괜찮다고 하던데?" 장사꾼은 히죽 웃었다. "가까운 분 중에 장사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회포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오기로 한 둘째 아우가 장사를 한다오. 얼마 전에 만났을 때 말을 들어보니까 요새 경기가 한창 물이 올라 하는 일마다 상당한 재미를 보는 모양이오." "아우분이 무슨 장사를 하시는데요?" "뭐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한다오. 얼핏 들으니까 목화에도 손을 대었다고 하는 것 같던데...." 장사꾼은 나직한 탄성을 터뜨렸다. "목화를 하신다면 상당한 거상(巨商)인 것 같습니다." "뭐 이쪽 지방에선 그런 대로 이름이 알려진 것 같소이다." "실례가 안된다면 그 아우분의 성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거야 어렵지 않지." 회포 노인은 장사꾼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조금 미묘했다. 무어라 딱 꼬집어 표현할 수 없는 야릇한 빛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장사꾼이 그 웃음을 보고 몸을 움찔할 때 회의 노인이 장사꾼에게 몸을 기대 오며 소곤거렸다. "내 아우의 성은 신이고 이름은 부귀일세. 자네들은 소주에서부터 우리 뒤를 졸졸 따라왔으면서도 여태


그걸 몰랐나?" 장사꾼이 그의 행동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몸을 피하려 했을 때는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어느 새 회의 노인의 손이 갈쿠리처럼 변한 채 그의 늑골을 세차게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갈쿠리처럼 변한 손은 거무틱틱한 빛을 띠고 있었다. 팍! 회의 노인의 주름진 손이 옆구리에 박힌 순간 장사꾼은 엄청난 통증을 느끼고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크악!" 다른 두 명의 장사꾼은 대경실색하여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나 그 순간, "이미 늦었다!" 금포중년인이 벼락같은 폭갈을 터뜨리며 열 손가락을 질풍처럼 튕겼다. 파파파팍! 두 명의 장사꾼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다. 금포중년인이 장난처럼 열 손가락을 퉁겨 내자 그들의 주위 사방이 온통 지영(指影)에 휘감겨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 손가락의 수는 무려 백여 개가 훨씬 넘었다. 천하에서 이처럼 단 한 순간에 백여 개의 지영을 그려내는 지법은 오직 하나밖에는 없다. "벼...병풍구첩지!" 장사꾼 중 한 사람의 입에서 신음 같은 외침이 터져나왔다. 하나 그 외침은 채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비명 소리로 바뀌어 버렸다. "아아악!" "케에엑!" 피가 하늘 높이 솟구치며 두 가닥의 외마디 비명 소리가 터져나왔다. 놀랍게도 두 명의 장사꾼은 전신이 벌집처럼 변한 채 칠공(七孔)으로 피를 쏟으며 바닥에 쓰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실로 가공스런 지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 사람이 끔찍한 시체로 변해 버리자 주위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사....살인(殺人)이다!" 그들의 근처에 있던 손님들이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앞을 다투어 주루를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그렇게 붐비던 주루가 몇 사람 남지 않고


텅비어 버렸다. 회포 노인은 장사꾼의 옆구리에 박혀 있던 손을 빼내며 나직이 혀를 찼다. "쯧... 이 단철조(丹鐵爪)는 비록 위력이 막강하지만 너무 악독해 다시는 사용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는 장사꾼이 흘린 피로 잔뜩 물들어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보더니 그 손을 장사꾼의 옷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그런 다음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내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십 여명에 불과했다. 한쪽에서 술에 취해 자고 있는 노인은 이런 소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없이 잠에 취해 있었다. 그 외에 서로 다른 옷을 입은 팔 구명의 장한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제일 구석에 흑의를 입은 거한과 홍의 소녀가 말없이 앉아 있었다. 회포 노인은 구석의 흑의거한과 홍의 소녀를 힐끗 보다가 팔 구명의 장한들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자네들은 동료가 죽었는데도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을 셈인가?" 그 말에 아홉 명의 장한들의 낯빛이 일제히 변했다. 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가 천천히 회포 노인과 금포중년인에게로 다가왔다. 스읏! 별다른 움직임을 보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어느 새 회포 노인과 금포중년인을 에워싼 형태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동작의 신속함은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 회포 노인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그들 중 가장 중앙에 있는 장한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자네가 십이마응중의 우두머리인 대응(大鷹) 임구한(任九寒)인가?" 중앙의 장한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다가 두 눈에 표독스런 안광을 번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놀라운 안목이군. 내가 바로 임구한이오." 임구한의 얼굴에는 한 줄기 의혹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우리의 변장은 완벽했다고 자부했는데 어떻게 우리 정체를 알았소?" 회포 노인은 담담하게 웃었다. "자네들은 이미 삼 백여 리나 우리 뒤를 쫓아왔는데


그걸 못 알아차린다면 삼대거두란 이름도 공염불에 불과한 게 아닌가?" 임구한은 냉소를 날렸다. "흥! 삼대거두란 이름으로 우리를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오." "알고 있네. 혈악에서 나온 자네들이 설마 우리 세 늙은이를 두려워하겠는가?" 임구한의 낯빛이 차가워졌다. "내 아우들을 세 명씩이나 살해하고도 무사하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자네는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가?" "흐흐....핏빛은 피로 갚는 게 바로 혈악의 철칙이오. 당신도 모르지는 않을텐데?" 회포 노인은 문득 껄껄 웃었다. "허허...자네들은 필시 우리 뒤를 쫓아 고월헌의 행방을 찾아내라는 임무를 받았을 텐데 지금 우리들을 살해하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임구한은 움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회포 노인은 그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날렸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가혹한 처벌을 당하는 것도 혈악의 철칙이지. 자네도 그걸 잊지는 않았겠지?" 임구한의 냉막한 얼굴에 한 줄기 두려운 빛이 떠올랐다. 혈악의 철칙을 어긴다는 것은 죽음, 그 자체보다 오히려 무서운 것이었다. 회포 노인은 그의 안색을 살피면서 다시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결국 우리는 자네들을 죽일 수 있지만 자네들은 우리를 죽일 수 없네. 그러니 자네들은 지금 자신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잘 알겠지?" 임구한을 비롯한 십이마응들의 안색이 여러 차례 변했다. 임구한은 두 눈을 흉악하게 번뜩이다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양만리. 과연 듣던 대로 잔꾀가 대단하군. 하지만 한 가지를 잘못 생각했다." 회포 노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노부가 잘못 생각한 게 있다고?" "그렇다." "그게 무엇인가?" 임구한의 얼굴은 냉혹한 살기로 가득 뒤덮여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형상이었다.


"우리들의 임무는 고월헌을 찾아내는 것이지 너희들을 살려 두는 게 아니다." 이번에는 회의 노인이 몸을 움찔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임구한은 득의한 웃음을 날렸다. "흐흐...너희들을 죽이건 말건 고월헌의 행방을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다. 너희들이 우리를 이곳으로 유인한 것은 곧 이 근처에 고월헌이 있다는 말이 된다." "......." "그러니 너희들이 만약 생사(生死)의 위기에 처한다면 그 자는 필시 너희들을 구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회의 노인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는 뚫어지게 임구한을 응시하고 있다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날카로운 생각이군. 십이마응 중에서 자네가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이라고 하더니 허언이 아니었군." 임구한은 살기 등등한 얼굴로 조금씩 회포 노인과 금의중년인에게 다가왔다. "흐흐...그럼 각오는 되어 있겠지?" 그의 말과 거의 동시에 나머지 여덟 명이 마응(魔鷹)들도 어느 새 회포 노인과 금의중년인을 바짝 에워싼 채 금시라도 몸을 날려 덤빌 기세였다. 임구한은 천천히 양손에 공력을 끌어올리며 회포 노인을 노려보았다. "우리 아홉 형제면 너희 두 사람 정도는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다. 아직도 할 말이 있느냐, 양만리?" 회포 노인은 의외로 여전히 침착한 모습이었다. "노부는 이제 오직 한 마디만 하고 싶네." "그게 무엇이냐?" 회포 노인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는 우리가 왜 세 사람이 아니고 두 사람뿐인지를 진작에 생각했어야 하네." 그 말에 임구한의 안색이 홱 변했다. "뭐라고?" 바로 그 순간, 쉬쉬쉬쉭! 한쪽에서 탁자에 코를 처박고 잠들어 있던 술 취한 노인이 벌떡 일어나며 그들을 향해 십여 개의 암기를 날렸다. 2


암기들은 소의 눈알 만한 둥그런 철환(鐵丸)이었다. 느리게, 혹은 빠르게 날아오는 열 여덟 개의 철환! 그것을 보는 순간 임구한의 낯빛이 흙색으로 변했다. "십팔과모니주기풍! 네 놈은 신구음이로구나!" 그와 동시에 회포 노인과 금포중년인도 제각기 양손을 휘두르며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쾌애액! 회포 노인의 갈쿠리처럼 모여진 양 손가락은 거무틱틱한 쇳빛을 띄고 있었고, 금포중년인은 허공을 온통 자신의 손가락 그림자로 뒤덮어 버렸다. 앞에는 가공할 위력의 단철조와 병풍구첩지! 그리고 뒤에는 공포의 암기술인 십팔과모니주기풍! 세 가지 절세의 무공에 에워싸인 임구한 등은 사력을 다해 그 엄청난 공세에 맞서 갔다. 하나 그것은 이미 기세를 제압 당한 자들의 허무한 몸부림에 불과할 뿐이었다. 파팍! "크아악!" "케엑!" 아홉 명의 마응 중 세 사람이 각기 대 여섯 개씩의 철환에 격중되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콰콰쾅! "끄아아악!" 거의 동시에 다른 두 명의 마응들이 단혈조에 가슴이 뻥 뚫린 채 나자빠졌고, 세 명은 전신에 수십 개의 핏줄기를 뿜어내며 힘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장내가 온통 시뻘건 선혈과 처절한 비명 소리로 뒤덮여 버렸다. 그 순간 임구한의 모습이 장내에서 사라져 버렸다. "속았구나!" 회포 노인은 탄성을 내지르며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사이엔가 임구한은 몸을 날려 열빈루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조금전의 격돌 때 다른 마응들은 전력을 다해 대항한 반면 임구한은 약삭빠르게 몸을 돌려 입구 쪽으로 내뺐던 것이다. 회포 노인 등이 그것을 알았을 때는 임구한의 몸은 이미 거의 주루를 벗어나고 있었다. "약아빠진 놈!" 회포 노인은 안타까운 ���침을 토하며 늦게나마 그의 뒤를 따라가려 했다.


그때 갑자기 막 주루를 나가려는 임구한의 앞을 한 사람이 가로막았다. 임구한이 깜짝 놀라 멈칫하는 순간 그 사람이 양손을 휘둘러 임구한의 목덜미를 그대로 강타해 버렸다. 그 속도는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았다. 쾅! "크악!" 폭음이 터지며 임구한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정면으로 목덜미를 강타 당한 채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입으로 폭포수 같은 선혈을 내뿜은 채 자신을 가로막은 인영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쿵! 그의 몸은 채 땅에 닿기도 전에 숨이 끊어져 버렸다. 회포 노인 임구한 같은 절정고수를 단 일격에 주살한 그 인물이 누구인가 놀라서 급히 바라보다가 짤막한 탄성을 토해 냈다. "자네로군." 임구한을 살해한 인물은 놀랍게도 그의 탁자에 음식을 날라주었던 젊은 점소이가 아닌가? 일개 주루의 점소이가 어찌 강호의 절정고수인 임구한을 단 일수(一手)만에 격살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 회포 노인 별로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오히려 반색을 하며 급히 점소이에게 다가왔다. "자네 마침 잘 왔네.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찾고 있었네." 점소이는 조금전의 초라하고 볼품없는 모습이 아니었다. 어깨를 딱 편 점소이의 몸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비범한 신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회포 노인 급히 물었다. "자네 사부는 지금 어디 계신가?" 점소이는 말없이 품속에 손을 넣어 한 장의 편지를 꺼냈다. 점소이가 편지를 내밀자 회포 노인 급히 편지를 받아 펼쳐 보았다. 편지에는 단정하면서도 수려한 필체의 글이 적혀 있었다. <이곳은 이미 그들에게 노출되어 급히 거처를 옮기네.


이번에 혈악에서 나온 자들은 십대고수 중의 목불과 신랑(神狼)일세. 그러니 자네들도 당분간은 몸을 숨기도록 하게. 내가 열흘 내로 다시 연락을 하겠네. 그리고 엽단풍이란 자의 내력에 대해서는 나에게 일임하도록 하게.> 서신 아래에는 초생달(月)아래 비치는 고풍스런 누각의 그림이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회포 노인 그 글을 읽자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과연 만리무영(萬里無影)답군..." 그때 술에 취해 탁자에 엎드려 있다가 열 여덟 개의 철환을 날렸던 노인이 그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무어라고 적혀 있소?" 그 노인은 물론 황금왕 신부귀였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의 본명은 신구음이었다. 신부귀는 그가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 임시로 사용하던 이름일 뿐이었다. 회포 노인 말없이 편지를 내밀었다. 신구음은 편지를 다 읽은 다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의 행적은 정말로 신비하군. 도대체 어떻게 이런 사실들을 다 알고 있지?" 이어 그는 그 편지를 금의중년인에게 내밀었다. "당신도 읽어 보겠소?" 금의중년인은 한 손으로 슬쩍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자 매미 날개처럼 얇은 인피면구(人皮面俱)가 벗겨지며 드러나는 얼굴은 바로 무쌍대루의 주인인 좌구태야였다. 그의 이름은 좌빙심이었다. 좌구태야란 그가 좌씨 집안의 아홉째라는 뜻에 불과했다. 좌빙심은 편지를 읽더니 눈살을 살짝 찡그렸다. "목불과 신랑이 나왔다고? 그렇다면 그 자들이 정말로 무림에 등장하려는 게 아닌가?" 회포 노인 고개를 끄덕였다. "십대고수는 아직 단 한번도 무림에 나타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두 사람씩이나 나왔다는 것은 그 의도가 심상치 않다 는걸 말해 주네." 회포 노인 대붕왕의 변장이었다. 그의 이름은 당금 강호에서는 아직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성은 양(楊)이었고 이름은 만리(萬里)였다. 양만리는 잠시 침음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무림에 진출하기로 작정했다면 우리의 계획도 원래보다 훨씬 앞당겨져야 하네. 다행히 이 편지를 보니 그는 이런 일에 대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해논 것 같군. 그러니 우리는 그의 말대로 그가 다시 연락을 해 올 때까지 잠시 피해 있는 게 좋을 것 같네." 다른 두 사람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양만리는 다시 점소이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자네 덕분에 저 자들의 정체를 알고 늦지 않게 없앨 수 있었네. 늦게나마 고마움을 표하네." 양만리가 십이마응의 정체를 안 것은 바로 이 점소이의 도움이었다. 점소이가 조금전에 탁자로 음식을 날라주면서 그에게 전음성으로 장사꾼들의 정체를 알려주었던 것이다. 점소이는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저에게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사부님의 분부대로 했을 뿐입니다." 양만리는 빙그레 웃었다. "자네 이름이 소결(蘇缺)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듣자 하니 그 이름은 자네가 직접 지은 것이라고 하던데?" "그렇습니다." "노부는 그 말을 들을 때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자네는 왜 하필이면 이름을 모자랄 결(缺)자로 했는가?" 점소이는 그를 바라보다가 입가에 빙긋 미소를 떠올렸다. 새하얀 이가 반짝거리는 모습이 아주 인상깊었다. "저는 항상 모든 면에서 사부님에 비해 너무나 많이 모자라 다는걸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양만리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그렇군. 하지만 자네 사부에 비해 모자람을 느끼는 사람이 어디 자네 한 사람뿐인가? 노부들도 모두 그렇게 느끼고 있다네." 소결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양만리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점잖은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 사부같이 특출난 사람은 고금(古今) 무림을 통틀어도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다네. 그러니 사부에 비해 모자란 것에 너무 부담을 느끼지 말게."


"저도 그런 분을 사부님으로 모시게 된 것을 일생(一生)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양만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한쪽 구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커다란 몸집의 흑의 사내가 홍의 소녀와 함께 앉아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데도 두 사람은 태연히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양만리는 천천히 그 흑의 사내 앞으로 다가갔다. "과연 자네는 이곳에 왔군 그래." 흑의 사내는 맛있게 음식을 먹다 말고 그를 올려다보고는 히죽 웃었다. "이곳의 음식 솜씨가 하도 유명하다고 해서 지나가다 들렸소." 양만리는 기이한 빛이 일렁거리는 눈으로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자네가 무슨 일로 그를 찾는지는 모르지만 더이상 그에게 접근하려 했다간 살신지화(殺身之禍)를 면치 못할 걸세." 흑의 사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이곳에 식사를 하러 왔다니까." 양만리는 냉소를 날렸다. "좌구태야에게서 고월헌이 이곳 열빈루의 주인으로 있다는 말을 들었을지 않나? 그래서 찾아온 것이 아닌가?" 흑의 사내 천연덕스런 얼굴로 말했다. "앞으로 나는 식사를 하러 다닐 때도 꼭 그곳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을 해봐야 겠군. 만일 그 주인의 성이 고(古)씨라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곳에서 음식을 먹지 않겠소. 이제 됐소?" 양만리는 그의 얼굴을 빤히 주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젠가는 밖으로 삐져 나오기 마련이네." 그는 다시 한번 흑의 사내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잘 있게." 흑의 사내 히죽 웃으며 그의 등을 향해 소리쳤다. "잘 가시오, 노인장. 앞으로 당신 말대로 주머니 속에 송곳이 있으면 반드시 꺼내 놓고 다니겠소." 양만리는 더이상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소결은 이미 어디론가로 사라져 있었다. 좌빙심과 신구음은 날카로운 눈으로 흑의 사내 노려보다가 양만리와 함께 주루를 빠져나갔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자 그제서야 흑의 사내 얼굴의 웃음을 거두고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홍의 소녀는 그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자 생글생글 웃으면서 턱을 고인 채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흑의 사내 물론 엽단풍이었고 홍의 소녀는 영호해상이었다. 엽단풍이 눈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웃느냐?" 영호해상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그치지 않고 종알거렸다. "당신같이 천방지축인 사람도 심각해질 때가 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서 그래요." 엽단풍은 피식 웃었다. "공자(孔子)님도 자식을 낳을 때가 있는 법이다." 영호해상은 까르르 웃었다. "호호...당신 말은 언제 들어도 재미있어요." "나는 지금 생각중이니까 방해하지 말아라." "그러면 당신은 생각해요. 나는 그냥 가만히 있을 테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영호해상은 엽단풍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 채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엽단풍은 눈썹을 찌푸렸다. "다른 곳을 좀 보면 안되느냐?" "왜요?" "네가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까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구나." 영호해상은 입을 삐쭉거렸다. "생각에 잠기건 말건 그건 당신 마음이고 어딜 쳐다보건 그건 내 마음인데 왠 참견이에요?" "네가 쳐다보면서 웃고 있는 게 꼭 나를 비웃는 것 같이 보여서 그런다." "당신은 매사에 그렇게 비관적이에요?" 엽단풍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나는 굉장히 낙관적인 사람이었는데..." 영호해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요?" "그런데 너를 만난 다음부터는 점점 비관적인 성격으로 바뀌게 되었다."


영호해상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으나 입가에는 벌써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럼 나 때문에 성격이 바뀌었단 말이에요?" 엽단풍은 투덜거렸다. "성격만 바뀐 줄 아느냐? 이건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있나, 음식을 마음대로 먹을 수가 있나, 게다가...." 엽단풍이 말을 하다 말고 중지하자 영호해상이 급히 물었다. "게다가 또 뭐죠?" 엽단풍은 시큰둥한 얼굴로 되물었다. "정말 다음 말을 듣고 싶으냐?" "그래요. 빨리 말하지 않으면 나는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서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그렇게 듣고 싶다면 말해 주지. 게다가 여자를 마음대로 안을 수가 있나..." 엽단풍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영호해상은 들고 있던 술잔을 그에게 집어 던졌다. "이런 색골..." 엽단풍은 술잔을 피하며 히죽 웃었다. "네가 분명히 말하라고 해 놓고 왜 성질을 부리느냐?" "누가 그따위 말을 하라고 했어요?" "그 말이 어때서?" 영호해상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엽단풍은 더 있다가는 그녀가 다시 발작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제 고월헌도 사라져 버렸으니 할 수 없이 그곳에나 가 봐야겠군." 영호해상은 막 소리를 지르려다 말고 그 말을 듣자 급히 물었다. "어디요? 요인도에요?" 엽단풍은 피식 웃었다. "이 아가씨야. 거긴 제일 나중이라니까." 영호해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어딜 간단 말이에요?" 엽단풍은 커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앙증맞은 코를 살짝 눌렀다. "어디긴. 우화대에 가서 목불인지 금불인지 하는 놈을 만나 봐야지."

제 13 장 木佛


1 금릉성 밖의 취보산(聚寶山)에 가면 유달리 매화 나무숲이 우거진 언덕이 나온다. 이곳의 이름은 매강(梅岡)이라고 하는데 우화대는 바로 이 매강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우화대란 이름이 붙게 된 것에는 재미있는 내력이 있었다. 양무제(梁武帝)때 운광법사(雲光法師)가 이곳에서 경(經)을 읽을 때 하늘로부터 꽃비(花雨)가 가득 떨어졌다고 하여 우화대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우화대 주변의 경치는 절경(絶景)이 많은 금릉에서도 특히 아름다워 예로부터 천하의 명승(名勝)으로 이름이 높았다. 주위가 어둑어둑해질 초경(初更)무렵. 우화대 앞에 두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크고 작은 두 개의 인영. 다름 아닌 엽단풍과 영호해상이었다. 영호해상은 막상 엽단풍을 따라 오기에는 했으나 우화대에 가까워 올 수록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떠올랐다. "혹시 그 흑상문신이란 늙은이가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은 아닐까요?" 영호해상이 약간 겁먹은 얼굴로 쳐다보자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두려우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저 아래 객잔에 가서 기다리고 있거라. 내가 그놈들을 혼내 주고 그리로 갈 테니." 영호해상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었다. "아니에요. 이곳에 있겠어요." "왜 그러느냐? 내가 너를 떼어버리고 도망이라도 갈까 봐 그러느냐?" 영호해상은 쌍심지를 돋우며 그를 흘겨보았다. "꼭 그런 식으로밖에는 말을 못해요?" 엽단풍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난 원래 이렇게 생겨 먹어서 그런 생각밖에는 안 드는걸 어떻게 하느냐?" 영호해상은 쌀쌀맞은 음성으로 말했다. "언젠간 꼭 당신의 그 버르장머리를 뜯어 고쳐 주고 말 거예요." "제길. 일전의 그 할망구하고 똑같은 말을 하는군." 엽단풍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영호해상은 급히 물었다. "할망구라니요? 어떤 할망구요?"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키는 난쟁이 똥자루 만하고 성질이 더러운 할망구가 있다." "누군데요?" "칠살파파인지 팔살파파인지 하는 할망구인데 처음 보는 사람 머리통 후려갈기는걸 유일한 낙으로 삼고 있지." 영호해상이 킥킥거렸다. "그 할망구가 당신 머리통을 후려갈겼군요?" 엽단풍은 쓴 입맛을 다셨다. "그 할망구가 십 년만 더 젊었으면 아주 쓴맛을 보여주는 건데....너무 늙어서 건드릴 데가 있어야지. 툭 치기만 해도 무덤 속으로 직행할 것 같아서 내가 참았다." "호호...보나마나 당신이 그 할망구의 성질을 있는 대로 긁었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왜 처음 보는 사람의 머리통을 후려갈겼겠어요?" 엽단풍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 "왜 몰라요? 나도 가끔은 당신 머리통을 후려갈겨 주고 싶을 때가 있는데..." "이런 제기랄....내 머리통이 무슨 동네북인 줄 아나? 보는 사람마다 후려갈겨 주고 싶게." 엽단풍이 이렇게 소리지를 때였다. "웬 놈이냐?" 갑자기 싸늘한 폭갈과 함께 너 댓 줄기의 인영이 그들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그들이 나타난 신법은 표홀하기 그지없었다. 나타난 인영들은 모두 다섯 사람이었는데 하나같이 바닥에 질질 끌리는 치렁치렁한 흑포(黑袍)를 걸친 앙상하게 마른 괴인들이었다. 폭갈을 내지른 인물은 그중 가운데 있는 흑포괴인이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그는 엽단풍과 영호해상을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는 처음에는 엽단풍의 어마어���한 체구에 약간 놀라는 듯했다. 그러다가 시선이 영호해상에게 향하자 전신이 한 차례 움찔거렸다. "너는 혹시..." 그때 엽단풍이 주위가 쩌렁하게 울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고 이 여자를 여기에 데려다 주기 위해 왔소." 흑포괴인은 다시 한 차례 영호해상을 살펴보다가 엽단풍을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의 부탁이라니? 그게 누구냐?" 엽단풍은 머리를 박박 긁었다. "글쎄....그 사람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맞아. 당신처럼 새카만 옷을 입었어. 흑귀신(黑鬼神)이던가...?" 흑포괴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흑상문신을 말하는 거냐?" 엽단풍은 입을 쩍 벌리며 손뼉을 쳤다. "맞아. 흑상문신. 바로 그런 해괴망칙한 이름이었소. 그 사람이 이 여자를 여기에 데려다 주라고 했소." 흑포괴인은 급히 물었다. "흑상문신은 어디에 갔느냐? 그리고 왜 너에게 그런 부탁을 했단 말이냐?" "흑상문신이 어디로 갔는지는 내가 천지신명이 아니라서 도저히 모르겠소. 그리고 왜 나에게 그런 부탁을 했느냐 하면 그건 내가 흑상문신이 아니라서 도저히 모르겠구려." 흑포괴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지금 내게 농담을 하는 거냐?" 엽단풍은 정색을 했다. "농담을 하다니? 내가 농담할 데가 없어서 이 백리를 달려와 이곳까지 와서 하겠소? 당신 눈에는 내가 미친 놈으로 보이오?" "그럼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그런 부탁을 받았단 말이냐?" "바로 그렇소." 흑포괴인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너는 흑상문신과 어떤 사이이기에 그의 부탁을 승락했느냐?" "그와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오. 굳이 말하면 전혀 모르는 사이라고나 할까." 흑포괴인의 눈꼬리가 사나워졌다. "그런데 왜 그의 부탁을 승낙했단 말이냐?"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그건 내가 너무나 양심적이고 선량한 인간이기 때문이오. 나는 아무리 낮선 사람이라도 타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오." 흑포괴인은 잠시 그의 말의 진위를 확인하려는 듯


그를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하나 엽단풍의 안색은 천연덕스럽기 그지없어서 그가 지금 무슨 꿍꿍이속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가 없었다. 흑포괴인은 잠시 인상을 찡그리다가 힐끗 영호해상을 바라보았다. "너는 저 여자가 누구인지 아느냐?" 엽단풍은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글쎄....동해 뭐라고 하던데...잘 기억이 안나는군. 아무튼 아주 특이하고 예쁘면서도 귀여운 이름이었소." 흑포괴인은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 여자는 동해인요 영호해상이라고 한다." "맞아! 바로 그런 이름이었소." "우리는 지금까지 저 여자를 찾고 있었다." "아! 그렇소? 그거 정말 잘되었구려." 흑포괴인은 싸늘한 눈으로 엽단풍을 쏘아보다가 잘라 말했다. "너는 용무가 끝났으면 그녀를 놔두고 가거라."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그야 가지 말라 고해도 나는 갈 거요. 그런데..." 흑포괴인의 눈빛이 오한이 들 정도로 차가워졌다. "그런데 뭐냐?" 엽단풍은 공연히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 흑상문신이라는 자가 그녀를 이곳에 데려다 주면 당신들이 사례를 할 거라고 했는데...." 흑포괴인은 잠시 침음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가 얼마를 준다고 했느냐?" 엽단풍은 고개를 저었다. "돈이 아니오." "돈이 아니라고?" "나는 원래 돈 같은 신외지물(身外之物)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오. 돈이라면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한들 내가 그런 해괴한 인상을 한 작자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것 같소?" 흑포괴인은 점차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럼 대체 무엇으로 사례를 하겠다고 했느냐?"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이곳에 그녀를 데려다 주면 무슨 불상(佛像)을 준다고 했소." 흑포괴인은 어리둥절한 빛을 띠었다. "불상이라고?" "그렇소. 나는 원래 부처님을 공경하는 독실한 신자요. 그가 이곳에 오면 금불상(金佛像)을 준다고 했소. 하지만 나는 단호히 거절했지."


흑포괴인은 그가 무슨 말을 하나 하고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엽단풍은 사방으로 침을 튀기며 열띤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돈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인데 하물며 금을 탐하겠소? 그래서 안된다고 했더니 그 자가 그러면 금 대신에 나무로 만든 불상이라도 가져가라고 했소." "나무로 만든 불상...?" 흑포괴인의 얼굴에 이상한 빛이 떠올랐다. 엽단풍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목불상(木佛像)말이오. 그러니 빨리 내게 목불을 주시오." 흑포괴인은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음성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냉혹한 살기로 뒤덮여 있었다. "네 놈은 누구냐?" 엽단풍은 피식 웃었다. "아니 방금까지 얘기하고도 모르겠소? 나는 흑상문신의 부탁을 받고 저 여자를 ...." 그의 말이 채 반도 나오기 전에 흑포괴인의 눈에서 줄기줄기 끔찍한 살광(殺光)이 흘러나왔다. "이곳에 와서 허튼 수작을 부리다니 죽으려고 작정을 한 놈이로군." 그가 아무런 신호를 보내지도 않았는데 그의 좌우에 있던 두 명의 흑포괴인이 허깨비처럼 허공을 날아 엽단풍에게 쏘아져 왔다. 스으으... 그들은 그야말로 미끄러지듯 유연하게 접근해 왔다. 그 신법은 지잠조월(地蠶操越)이라는 것으로 마도(魔道)의 최상승신법중 하나였다. 동시에 그들의 쌍수에서 칼날 같은 경력이 엽단풍의 전신을 향해 퍼부어졌다. 쐐쐐쐐쐐.... 장력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마치 수십 개의 칼이 날아오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엽단풍의 몸이 그 예리한 장력에 갈가리 찢기려는 찰나, 돌연 엽단풍은 껄껄 웃으며 오른손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하하...그까짓 나무 불상 하나 주는 게 아까워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내가 부처님을 대신해 당신들을 응징해 주지."


다른 사람보다 두 배는 큰 것 같은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활짝 펼쳐졌다. 그 순간, 콰콰콰콰콰... 그의 손바닥이 수십, 수백 개가 되어 장내를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그야말로 거대한 폭풍 노도가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막 엽단풍의 몸을 가격하려던 두 명의 흑포괴인은 그 엄청난 광경을 보고 입을 딱 벌린 채 몸이 굳어졌다. 콰콰쾅! 북치는 듯한 음향이 터져나오며 두 명의 흑포괴인들이 내갈긴 장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와 함께 그들의 몸은 태풍을 만난 가랑잎처럼 십 여장 밖으로 퉁겨져 나갔다. "크아악!" "으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어두워 오는 하늘을 뚫고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두 흑포괴인의 몸은 피분수를 뿌리며 십 여장 밖을 날아가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그들이 절명(絶命)해 버린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참혹한 모습이었다. 남아 있는 세 명의 흑포괴인의 안색은 완전히 시커멓게 변해 버렸다. "네...네 놈은 대체 누구냐?" 우두머리 흑포괴인이 떨리는 눈으로 엽단풍을 바라보며 물었다. 엽단풍은 담담하게 웃었다. "방금 말했지 않소? 부탁을 받고 여자를 데려온 사람이라고." 흑포괴인의 입꼬리가 실룩실룩거렸다. "이름이 무엇이냐?" 엽단풍은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어째 보는 놈마다 내 이름을 알고 싶어 안달을 하는 거지? 그러면서도 자기들 이름은 안 밝히니 버르장머리 한 번 고약하군." 말이 혼잣말이지 주위가 워낙 조용해서 흑포괴인은 자신의 귀에다 대고 소리친 것처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흑포괴인의 얼굴에 분노에 가득 찬 빛이 떠올랐다. "미친 놈! 제법 한 수가 있다고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엽단풍은 히죽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럼 당신은 하늘 높은 줄 안단 말인가? 이것 참. 강호무림에 또 한 명의 천재가 나타나셨군." 흑포괴인의 안색이 여러 차례 변했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더니 남은 두 명의 괴인들에게 눈짓을 했다. "미친 놈!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를 건드린 이상 오늘 살아 돌아갈 생각을 마라!" 이어 그들 세 명의 괴인들이 엽단풍을 향해 덤벼들려고 하는 순간, "갈홍(葛洪)! 그 자를 들여보내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괴이한 음성이 들려 왔다.

2 그 음성은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음성에 고저(高低)와 장단(長短)의 변화가 전혀 없이 일정했던 것이다. 대개 사람의 음성은 그 말하는 내용이나 상황에 따라서 높고 낮음과 길고 짧은 굴곡이 있기 마련인데 지금 들려 온 음성은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기계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음의 높이도 일정했고 말과 말 사이의 간격도 똑같았다. 인간의 음성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아무런 변화도 없는 그 음성은 왠지 듣는 이의 마음을 섬ㅉ하게 하는 기이한 마력(魔力)이 담겨 있었다. 그 음성을 듣자 금시라도 엽단풍을 향해 달려들려 하던 흑포괴인들의 안색의 몸이 그대로 멈춰 섰다. 동시에 그들은 일제히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명(命)을 받들겠습니다." 그들의 음성에는 공포와 경복(敬伏)의 빛이 가득했다. 그들은 감히 그 자리에서 고개를 쳐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엽단풍은 그것을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이 자들은 염라대왕이라도 본 것 같이 얼어붙었구나. 하지만 염라대왕이 나타났을 리는 없고 가짜 부처님이라도 나타났단 말인가?" 세 명의 흑포괴인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엎드려 있었다. 엽단풍은 돌연 영호해상의 손목을 잡더니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도저히 궁금해서 안되겠다. 안에 들어가서 직접 내 눈으로 확인을 해야지." 엽단풍은 영호해상을 끌다시피 하고 우화대로 올라갔다. 우화대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우화대는 매강의 중앙에 돌로 쌓아 만든 높고 커다란 대(臺)였다. 돌들은 오랜 풍상(風霜)에 시달렸으면서도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우화대의 풍경을 한층 더 고풍(古風)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엽단풍이 영호해상을 이끌고 우화대의 가운데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니 이상한 것이 두 개가 눈에 띄었다. 하나는 청의를 입은 사람이었는데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청의인은 간편한 무복(武服)을 걸치고 있었는데 나이는 대략 삼십 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표정이 극도로 무심(無心)한 것 외에는 별로 특이한 구석이 보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다른 하나는 우화대의 가장 큰 위치에 서 있는 하나의 불상이었다. 불상은 얼핏 보기에 나무로 조각한 것 같았는데 우화대 아래를 굽어보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엽단풍은 청의인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 나무 불상으로 다가가더니 공손하게 합장을 했다. "나무관세음보살. 이런 곳에서 부처님을 보게 되다니 이건 바로 나의 홍복(洪福)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영호해상과 청의인이 바라보는 가운데 정중하게 불상을 향해 합장을 하고는 히죽 웃었다. "이 나무상은 정말로 정교하게 만들어 졌군. 살아 있는 사람처럼 생생하니 말이야. 그 흑상문신인가 하는 노인네는 역시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그는 불상의 바로 아래까지 다가오더니 불상을 올려보며 연신 감탄성을 발하는 것이었다. "저것 좀 봐. 저 입술하며 콧등...목 아래 있는 주름까지 정말 살아 있는 사람 같군. 대단치도 않은


부탁을 들어주고 저런 불상을 얻을 수 있다니 나는 정말 운도 좋아." 그는 금시라도 훌쩍 뛰어올라 나무 불상을 끌어내릴 태세였다. 바로 그때였다. 지금까지 말이 없이 서 있던 청의인의 입술이 살짝 열리며 냉랭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귀하는 천하광자 엽단풍이로군." 엽단풍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나를 아시오?" 청의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천석평에서 당신을 보았지. 당신이 이곳까지 온 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것 참. 당신은 나를 아는데 나는 당신을 모르니 당최 대답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구려." 청의인은 의외로 순순히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나는 담중업이오."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이 제보니 담형(譚兄)이었구려. 반갑소." 담중업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제는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를 밝히시지." 엽단풍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글쎄 오늘에만 벌써 서너 번 똑같은 말을 하는데....나는 흑상문신이란 노인네의 부탁을 받고 이 여자를 데려다 주러 온 거요." 담중업은 영호해상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엽단풍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살짝 입을 열었다. "사실 당신이 바른 대로 말하든 말하지 않든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지." 엽단풍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뭐가 중요하오?" 담중업의 무심한 눈에 차가운 안광이 피어올랐다. "당신이 무슨 목적을 가졌든 일단 이곳에 온 이상 살아서 돌아가지는 못한다는 것이지." 엽단풍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피식 웃었다. "조금전에 흑의인도 그런 말을 하던데 당신네들은 어떻게 입을 열 때마다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하는 거요?" 담중업의 얼굴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단지 두 눈에 어린 안광만이 더욱 섬ㅉ한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전에 보니 당신은 광도번천수(狂濤飜天手)를 익혔더군."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대단한 안목이오." "단봉무영신법에 난화지, 거기에 광도번천수마저 익혔다면 능히 당금 무림에서는 최정상의 고수라 할 만하지." 엽단풍은 그답지 않게 겸손을 부렸다. "과찬의 말씀이시오." "하지만...." 담중업의 얼굴에 문득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사이(邪異)하고 음독하기 짝이 없는 무시무시한 미소였다. "그 정도로는 절대로 내 적수가 되지 못해." 동시에 그는 번개같이 우수를 내밀어 엽단풍의 목덜미를 잡아왔다. 그의 손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단지 빠를 뿐이었다. 엽단풍이 눈앞에 무언가 희끗한 것이 어른거렸다고 느낀 순간 어느 새 담중업의 우수는 엽단풍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 속도는 도저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엽단풍은 순식간에 목덜미를 제압 당한 채 어이가 없는지 눈을 멀뚱멀뚱 뜨고 담중업을 바라보고 있었다. 담중업은 우수로 엽단풍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뼈골이 시릴 듯 냉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무공은 그런 대로 쓸 만하지만 내 추뢰수(追雷手)를 당할 수는 없지. 엽단풍. 너는 이곳에 오는 게 아니었어." 담중업은 엽단풍의 목덜미를 움켜쥔 손에 공력을 돋구었다. 한데 그가 막 엽단풍의 목뼈를 부러뜨리려��� 순간, 돌연 목이 붙잡힌 채 멍하니 서 있던 엽단풍이 그를 바라보며 히죽 웃는 것이 아닌가? "당신도 이렇게 쉽게 나를 제압할 수 있다고 믿는 게 아니었어." 말과 동시에 엽단풍의 오른 손이 담중업의 아랫배를 그대로 가격했다. 쾅! 폭음이 터지며 담중업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그러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엽단풍은 쓰러진 그를 내려보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의 추뢰수는 정말 빠르지만 오늘은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군." 그때 바닥에 쓰러졌던 담중업이 천천히 일어났다. 엽단풍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자신의 일격을 맞고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담중업의 낯빛은 시체처럼 창백해 있었다. 더구나 입가로는 연신 시커먼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필사적으로 일어난 채 엽단풍을 노려보았다. "엽단풍....과연 대단하군....내가 잘못 생각했어." 입을 열 때마다 그의 입에서는 시커먼 선혈이 흘러나왔으나 그는 추호도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나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나를 쓰러뜨리려면 적어도 이 정도로는 안된다." 담중업은 한 손으로 아랫배를 부여잡으면서도 다른 한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우우웅... 그의 손이 조금씩 쳐들릴 때마다 벌떼가 몰려오는 듯한 음향이 들려 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다. 엽단풍은 그의 손이 피처럼 붉게 물들어 가는 광경을 보고 나직한 탄성을 토해 냈다. "혈옥수(血玉手)로군." 담중업은 창백한 얼굴에 한 줄기 비장한 표정을 떠올렸다. "한 눈에 혈옥수를 알아보는군. 그렇다면 이것의 위력도 알고 있겠지?" 엽단풍은 잠시 그를 응시하다가 문득 희미하게 웃었다. "혈옥수라면 어쩌면 나를 다치게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당신은 혈옥수를 시전하고 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거요." 담중업은 무표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건 상관없다. 혈악의 고수들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담중업." 어디선가 하나의 괴이한 음성이 들려 왔다. 그것은 음정의 고저장단이 전혀 없는 바로 그 음성이었다. 그 음성을 듣자 담중업의 몸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괴이한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담중업. 물러서라. 너는 그 자의 적수가 아니다." 담중업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한 차례 기이한 눈으로 엽단풍을 노려보고 있다가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그에 따라 그의 손에 떠올라 있던 붉은 기운도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영호해상은 그 음성이 어디서 들려 온 것인지 알아보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무엇을 보았는지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어머? 저 불상이에요. 저 불상이 말을 했어요." 그녀는 손으로 우화대 위에 있는 나무 불상을 가리키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엽단풍은 그녀가 가리키는 대로 나무 불상을 바라보았다. 나무 불상은 여전히 처음의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하나 조금만 더 안력을 돋구어 살펴본다면 아무런 빛도 없던 나무 불상의 눈에서 한 줄기 기이한 신광(神光)이 이글거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무로 만든 불상의 눈에서 어찌 신광이 흘러나올 수 있겠는가? 엽단풍은 잠시 그 불상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러다가 히죽 웃었다. "말하는 나무 불상이라....부처님의 영험함이 드디어 이곳까지 미쳤군 그래." 그때 나무 불상의 입술이 거의 느낄 수 없을 만큼 살짝 열리며 예의 그 괴이무쌍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목을 제압 당하고도 공력을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은 천하에서 오직 하나밖에는 없지. 너는 경하기(傾河氣)를 익혔느냐?" 엽단풍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레? 과연 신통한 불상이로군. 그걸 어떻게 알았지?" 나무 불상은 얼굴 표정이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다만 눈에서 흘러나오는 신광이 조금 더 짙어졌을 뿐이다. "본불(本佛)이 알기로 경하기를 익힌 자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 그리고 그 자는 이십 년 전에 죽었지." 엽단풍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소? 그럼 나는 그걸 어떻게 익혔지?" "본 불도 그게 의아스럽다. 그래서 지금부터 너의 내력을 알아볼 생각이다." "어떻게 말이오?"


나무 불상은 아무 말없이 그 자리에 앉은 채 불쑥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상하게 아무런 파공음도 일지 않았다. 그런데 엽단풍은 무언가 괴이한 기운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자신의 가슴팍을 향해 쏘아져 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황급히 일장(一掌)을 내갈겼다. 꽝!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 폭발음이 들렸다. 엽단풍은 한 줄기 괴이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나무 불상은 한 차례 몸을 휘청했을 뿐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그의 내공이 엽단풍보다 정심(精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무 불상의 표정 없는 얼굴에 희미한 놀람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네 경하기는 구성(九成)수준이로구나. 당년의 그 자도 겨우 십성(十成)밖에는 오르지 못했거늘 그 나이에 구성이라니 과연 대단하다." 엽단풍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의 절정에 달한 목표음장(木杓陰掌)보다는 못하오." 나무 불상의 눈에 괴이한 광망이 이글거렸다. "네가 어찌 본 불의 목표음장을 아느냐?" 엽단풍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그게 무어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시오? 목표음장이 목음지(木陰指)와 고목산수(枯木散手)와 함께 당신의 삼대절학중 하나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소?" 하나 그 말을 듣자 나무 불상의 얼굴에 처음으로 한 가지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보기만 해도 몸서리 처질 정도로 끔찍한 살기, 바로 그것이었다. 나무 불상은 한동안 엽단풍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예의 무감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본 불에 대해서 알고 있군." "당신이 목불이라는 건 장님이 아닌 다음에야 척 보면 알 수 있는 일 아니오?" "본 불의 삼대절학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극히 적은데 너는 어떻게 알았느냐?" "부처님의 영험함이 나의 머리를 일깨워 주셨소.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어찌 그런걸 알겠소?" 목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하나 다시 엽단풍을 쳐다보았을 때 그의 얼굴은 처음처럼 무표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 정체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이십 년 전의 그 자와 관련이 있든 없든 너를 없애 버리면 그만이다." 엽단풍은 껄껄 웃었다. "하하...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게 되겠소?" "너는 경하기를 철석같이 믿고 있나 본데 구 성의 경하기로는 본 불의 손을 피하지 못한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목불의 몸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3 그의 움직임은 몹시 특이했다. 여전히 두 다리를 결가부좌한 채로 몸이 허공으로 붕 뜨며 엽단풍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영대좌가(靈臺坐伽)로군." 엽단풍은 탄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날아오는 목불을 향해 두 주먹을 번개처럼 내질렀다. 쾌애액! 두 가닥 뇌전이 번뜩이는 것 같았다. 그의 주먹은 무서운 위력을 동반한 채 목불의 몸을


금시라도 박살낼 듯 다가들었다. 목불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는 아무 말없이 깡마른 오른손을 장난처럼 흔들었다. 수수수.... 그의 주름진 손이 마치 수십 그루의 나무로 변한 듯 푸르스름한 광영(光影)이 장내를 뒤덮었다. "고목산수로구나!" 엽단풍은 짤막하게 중얼거리며 내뻗었던 두 개의 주먹을 번개같이 회수하며 다시 아홉 권(拳)을 갈겨댔다. 첩첩이 날아오는 아홉 개의 주먹을 본 목불의 입에서 무감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구벽신권마저 익혔군..." 그는 피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자신의 수영(手影)을 엽단풍의 권풍(拳風)과 격돌시켰다. 콰콰콰쾅! 그의 손과 엽단풍의 주먹은 연달아 허공에서 아홉 번이나 부딪쳤다. 엄청난 경기가 주위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엽단풍의 거구가 휘청거리며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목불의 신형 또한 허공에서 멈춰진 채 한 차례 비틀거렸다. 하나 다음 순간 목불은 더욱 빠른 속도로 엽단풍의 머리 위를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파파파파....! 그의 비쩍 마른 열 개의 손가락에서 열 가닥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형(無形)의 지력(指力)이 우박처럼 퍼부어졌다. 바로 목불의 삼대절학중 하나인 목음지가 펼쳐진 것이다. 엽단풍은 물러서던 몸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오른 손을 기이하게 구부려 세 개의 작은 고리를 만들어 냈다. 우우웅! 철비파수의 가공할 공력이 목음지력에 마주쳐 갔다. 까까깡! 목음지가 철비파수에 부딪치자 귀청이 찢어질 듯한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엽단풍은 목음지에 격중된 오른손에 마치 예리한 송곳으로 찔린 듯 격심한 통증을 느끼고 안색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목불은 엽단풍의 코앞으로 다가들며


괴이무쌍한 일장을 갈겨댔다. "이제 마지막이다!" 우우웅.... 무언가 형체도 보이지 않는 노도와 같은 압력이 엽단풍의 전신을 향해 물밀듯이 몰아닥쳤다. 그것은 바로 목표음장이었다. 지금의 목표음장의 위력은 조금전 목불이 엽단풍에게 시전했던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엽단풍은 사방에서 엄청난 압력이 자신을 금시라도 짓누를 듯 밀어닥침을 느꼈다. 그 압력이 얼마나 막중하던지 그의 흑의가 여기저기 갈라 터지기 시작했다. 엽단풍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목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오른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깊은 물 속에서 움직이듯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하나 그에 따라 기이한 광경이 벌어졌다. 고오오... 그가 느릿느릿 내민 손바닥에서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신비한 기운이 쏟아졌다.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목불이 갈겨 낸 목표음장의 공세와 정면으로 격돌하고 말았다. 콰콰콰.... 너무도 엄청난 굉음에 차라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악!" 멀찌감치 떨어져서 조마조마한 눈으로 이들의 격돌을 구경하고 있던 영호해상이 충돌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십 여장 밖으로 날아갔다. 사방이 온통 움푹 파이고 돌덩이가 미친 듯이 허공을 비산(飛散)했다. 먼지가 가라앉자 장내의 광경이 드러났다. 십 여장 밖으로 날아갔던 영호해상은 통증도 잊은 채 허겁지겁 장내를 주시했다. "아....!" 그녀의 입에서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장내는 그야말로 완전한 폐허를 이루고 있었다. 중앙에는 깊이가 거의 삼장에 달하는 엄청난 웅덩이가 파여 있었다. 그 웅덩이의 중앙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결가부좌를 풀지 않았던 목불은 앙상한 다리로 위태롭게 선 채 엽단풍을


응시하고 있었다. 엽단풍은 가뜩이나 봉두난발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곤두서서 그야말로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몰골이었다. 게다가 입가로는 가느다란 실핏줄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입고 있는 흑의는 여기저기가 아예 먼지처럼 사그라져 피멍이 든 살갗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었다. 그야말로 낭패스런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금시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면서도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목불은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아무런 상처도 나 있지 않았다. 입고 있는 빛 바랜 누런 가사(袈裟)도 그대로이고 얼굴 또한 처음과 마찬가지로 무표정하게 굳어 있었다. 한 가지 다른 것은 그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괴이한 광망이었다. 목불은 기광(奇光)이 번쩍이는 눈으로 엽단풍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복마곤룡장마저 익혔을 줄은 몰랐다. 너는 그의 제자냐?" 엽단풍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제자가 아니라....아들이오." 목불의 몸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가늘게 떨렸다. "아들이라고...? 그럼 그가 살아 있었단 말이냐?" 엽단풍은 입가에 흐르는 핏줄기를 쓰윽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년 전까지만 해도 그 분은 분명히 살아 계셨소." 목불의 떨리는 몸이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네 성이 엽(葉)이라서 혹시나 했는데 그의 아들이었다니...그가 어찌 이십 년 전에 죽지 않았을까?" "낸들 그걸 알겠소?" 목불은 한동안 우두커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돌연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엽철흔(葉鐵痕)의 자식 손에 죽는다면 결코 억울한 일이 아니지...! 엽철흔...너는 과연 대단한 인물이다!" 목불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다가 천천히 바닥에 쓰러졌다. 쿵! 쓰러진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광소를 터뜨리던


표정이 생생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는 비록 외상은 전혀 입지 않았으나 그의 내부는 이미 복마곤룡장의 엄청난 위력에 산산이 짓이겨진 상태였다. 엽단풍은 묵묵히 목불의 싸늘하게 식어 가는 시신을 바라보고 있다가 돌연 허리를 굽히며 피를 토했다. "우욱!" 영호해상이 깜짝 놀라 그에게로 쏜살같이 달려왔다. "당신..괜찮아요?" 엽단풍은 한 차례 몸을 휘청거리다가 맥없이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영호해상은 다급하여 황급히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엽단풍....정신 차리세요." 엽단풍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힘없이 그녀의 품속에 누워 있었다. 영호해상은 철탑같이 강인하기만 했던 그가 이토록 비참한 모습으로 변하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해졌다. "단풍...당신 정말...."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품속에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엽단풍이 한쪽 눈을 살며시 뜨더니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 놈은 갔느냐?" 영호해상은 그가 정신을 차리자 기뻐서 활짝 웃다가 급히 물었다. "그 놈이라니요?"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왜 그 있잖느냐? 담중업인가 뭔가 하는 녀석." 그 말에 영호해상은 퍼뜩 정신이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과연 담중업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갔나 봐요." "보기 보단 약삭빠른 녀석이군." 엽단풍은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그녀의 품속에서 벌떡 일어났다. 영호해상은 깜짝 놀라 급히 그를 불렀다. "안돼요. 당신은 더 누워 있어요." 엽단풍은 그녀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아프지도 않은데 누워 있으란 말이냐? 하긴...네 품속은 생각보다 한결 따뜻하더군." 영호해상은 얼굴이 새빨개졌으나 화를 낼 겨를도 없이 다시 말했다.


"당신은 지금 내상(內傷)��� 심할 텐데 그런 농담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엽단풍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상이라니? 다치긴 내가 왜 다쳐?" 영호해상은 어이가 없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과연 그의 안색은 혈기가 감돌고 탄력이 있는 것이 언제 피를 토하며 그녀의 품속에서 혼절(昏絶)했느냐 싶게 멀쩡하지 않은가? 그녀는 놀랍고도 의아스러워 자신도 모르게 불쑥 소리를 질렀다. "이제 보니 당신은 조금도 부상을 입지 않았군요?" 엽단풍은 싱겁게 웃었다. "아니 그럼 내가 그런 나무로 만든 불상 하나도 이기지 못할 줄 알았느냐?" "하지만 아까는..." "하하...그거야 담중업이란 놈이 눈을 빤히 뜨고 지켜보고 있으니까 잠깐 엄살을 부린 거지." 그제서야 영호해상은 그가 일부러 자신의 실력을 숨겼었다는 것을 깨닫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조금전 그와 목불의 대결은 그녀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가공할 격전이었다. 엽단풍의 무공이야 그전부터 봐 와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목불의 무공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천하제일의 고수로 알고 있던 그녀의 할아버지조차 목불에게는 약간 뒤진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고수와 싸우면서도 자신의 실력을 모두 발휘하지 않았다니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영호해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다시 물었다. "당신은 대체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했지요? 그러다가 만일 정말 목불의 손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엽단풍은 별거 아니라는 듯 피식 웃었다. "아까 목불이 내 내력을 알아보기 위해서 손을 썼을 때 나도 그 자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 두었지. 그래서 그 자를 간신히 이길 수 있을 만큼만 실력발휘를 한 거란다. 조금도 위험한 게 아니다." "하지만...왜 그런 짓을..." "그거야 내 실력이 이 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을 그 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지." 엽단풍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생각해 보아라. 내가 목불을 단숨에 해치워 버리면


다음에는 저 자들이 벌떼같이 덤벼들게 아니냐? 내가 비록 천하에 둘도 없는 고수라고 해도 목불 같은 고수가 서너 명만 덤빈다면 횡사(橫死)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데 저 자식들은 목불 만한 고수가 아직도 십 여명이나 있단 말이야." 영호해상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정말 그들에게 목불 만한 고수가 그렇게 많이 있어요?" 그녀는 목불 같은 고수는 천하를 통틀어도 몇 손가락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엽단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불은 혈악의 십대고수 중에서 가장 말석(末席)인 자다. 말 그대로 볼품없지." "그러면 십대고수의 나머지 사람들은 목불보다 강하단 말이에요?" "최소한 그보다 뒤쳐지지는 않지. 게다가 혈악에 십대고수만 있는 게 아니거든." 영호해상은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대체 혈악이란 곳이 어떤 곳이길래 그렇게 절정고수들이 많아요?" 엽단풍의 얼굴이 조금 진지해졌다. 그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혈악은 무림사상 최강의 무인(武人)들로만 이루어진 집단(集團)을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백여 년 전에 결성되었는데 그들 중 이류급에 속하는 인물들도 무림에 나오면 초절정고수로 군림하며 천하를 주름잡을 수 있을 정도지." 영호해상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왜 무림에는 그런 곳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지요?" "알려지지 않긴. 지금부터 이십여 년 전만 해도 강호의 명숙(名宿)들은 모두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하지만 혈악은 무림을 제패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던 거지." 영호해상은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부림을 제패할 생각이 없다면 왜 지금 그들이 다시 나타나는 거지요?" "이십 년 전에 혈악에 한 가지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지. 그 뒤로 혈악도 변질되고 말았다." 영호해상은 귀여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청난 사건이라니요?"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그 말을 하자면 하루 밤새 지껄여도 안된다.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내가 자세히 말해 주지."


영호해상은 잠시 알쏭달쏭한 표정이다가 그를 응시했다. "그런데 당신은 혈악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알아요?" "하하...그거야 부처님의 영험함이 내 머리를 일깨워 주셨으니까 그렇지." 영호해상은 입을 삐쭉거렸다. "그 말은 아까 써먹었잖아요." 엽단풍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런가? 그러면 산신령께서 정령을 보내 알려주셨다고 할까?" "피. 그건 나한테 제일 처음에 쓴 말이잖아요." "그럼 뭐라고 하지?" 엽단풍은 궁리를 하다가 손뼉을 탁 쳤다. "그렇지. 그건 바로 천지신명께서 나를 어여삐 보셨기 때문일 거야. 틀림없어. 바로 그거다." 영호해상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다가 피식 웃었다. "또 당신의 그 못된 버릇이 발동했군요. 말해 주기 싫으면 그렇다고 말하면 되잖아요?" 엽단풍은 억울하다는 듯 두 팔을 쩍 벌렸다. "내가 왜 말을 안하느냐? 방금 말했지 않느냐. 천지신명께서 나를 어여삐 보았다고." 영호해상은 참지 못하고 그의 품으로 달려들며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마구 때렸다. "이런 거짓말쟁이." 엽단풍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너는 드디어 나의 가장 큰 비밀마저 알아 버렸구나. 이제 나는 무슨 수로 남을 속이지?" 그는 껄껄 웃으며 영호해상의 작고 귀여운 몸을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제 14 장 본때를 보여 주마 1 가뜩이나 바람잘 날 없던 강호무림이 한 사람 때문에 마치 팔팔 끓는 주전자 뚜껑처럼 온통 시끌벅적해졌다. 그 자에 대한 소문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번째 들을 때는 피식 웃게 되고 세 번째로 들을 때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네 번 이상 듣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사람들은 그에 대한 소문이라면 귀를 쫑긋 새우고 하나라도 더 들으려고 했으며, 무림인이고 일반인이고 간에 누구나가 그를 한 번만이라도 만나 보기를 원했다. 도대체 그 자가 정말 그처럼 엄청난 미치광이인가를 직접 눈으로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 천하광자(天下狂子) 엽단풍! 당금 무림에서 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는 없었다. 일진광풍(一陣狂風)처럼 나타나 강호무림을 온통 뒤흔들어 놓은 희대의 미치광이! 그는 출도한 지 하루만에 소주성(蘇州省) 제일의 명물이 되었고, 출도한 지 이틀만에 강남제일공자(江南第一公子)를 알몸뚱이로 쫓겨가게 만들었다. 뿐이랴? 출도 사 일만에 강남의 삼대거두와 시비를 벌였고, 천하의 사대미인을 모두 품에 안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하나 그의 이름을 결정적으로 알려지게 한 것은 한 가지 소문이 알려지고 나서부터다. - 강호의 전설(傳說)인 혈악의 십대고수 중 한 사람이 천하광자에게 죽었다! 밑도 끝도 없이 퍼진 이 소문은 무림인들을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대체 혈악이 무엇인가? 이미 오래 전부터 전설 속으로만 전해 내려오는 신화적인 이름이 아닌가? 고금제일(古今第一)의 무인집단(武人集團)!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절대의 성역(聖域)! 그 혈악에서도 십대고수 중의 한 사람을 주살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혈악이 송두리째 뒤집혔으며, 그를 살해하기 위해서 무시무시한 고수들이 출동했다고 한다. 모두들 그는 이제 염라대왕의 최명부(催名簿)에 이름을 올려놓고 죽기만을 기다리는 신세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나 또 어떤 사람들은 그와 같이 완벽하게 미친


인물은 염라대왕이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신비한 내력이 있어서 혈악도 그를 어쩌지 못할 거라고 떠들어대기도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느 누구도 그의 정확한 내력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광(狂)'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에 불을 켜고 미친 듯이 몰려들었다. 오직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전 강호가 벌집 쑤신 듯이 시끌벅적해진 것이다.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단 한 번만이라도 보기를 원하는 사나이, 엽단풍!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 * * 태호(太湖)의 물살은 푸르기만 했다. 엽단풍은 넘실거리는 태호의 푸른 물살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태호는 강소성과 절강(浙江省)의 경계에 있는 커다란 호수였다. 옛 이름은 진택(震澤)이며 섬이 많고 주변이 산들로 에워싸여 있어 경치가 수려했다. 때는 여름의 정점(頂点)을 지나고 있었다. 하늘은 끝없이 맑고 물은 한없이 푸르다. 사방을 돌아보아도 온통 푸른 신록(新綠)뿐이니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태호의 푸른 물에 두둥실 배를 띄우고 누워 미녀가 따라 주는 술잔을 마시며 찬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가히 신선이 부럽지 않을 것이다. 엽단풍이 지금 그러했다. 그는 거푸 술잔을 들이킨 다음 배 위에 벌렁 드러누운 채 느긋한 표정으로 아무렇게나 시구를 지껄이고 있었다. "아! 좋군...산침수욕일취색(山枕水褥一醉色)이라...산을 베개 삼고 물을 요로 삼으니 세상이 온통 취한 빛이더라..." 옆에서 다소곳이 앉아 그의 술잔에 술을 따르고 있던 영호해상이 까르르 웃었다. "그런 엉터리 시가 어디 있어요? 당신은 그저 모뜬걸 술에만 연관시켜서 생각하는군요." 엽단풍은 팔베개를 한 채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왜 뭐가 어때서 넌 또 트집이냐? 내가 보기엔 멋있기만 한데." "그게 멋있는 시구예요? "내 수준에는 이게 딱 맞다." 영호해상이 어련하겠냐는 듯 배시시 웃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남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거예요." 엽단풍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손가락질을 받다니....어떤 놈들이 감히 내게 손가락질을 한단 말이냐?" 엽단풍은 팔베개를 풀고 반쯤 몸을 일으킨 채 종이 울리듯 커다란 소리로 떠들어댔다. "어느 놈이던지 내게 손가락질을 한다면 그 놈의 손가락은 물론이고 발가락까지 모조리 분질러 버릴 테다." "그렇게 화만 내지 말고 내 말을 들어봐요." "말해 봐라. 작은 여우야." 영호해상은 아미를 살짝 찡그렸다. "당신은 먼저 그 말버릇부터 고쳐야 해요. 당신은 입을 열 때마다 사람들 화를 돋구는 천부적인 소질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당신 첫인상이 안 좋게 느껴지는 거예요." "아니 그런 소질을 가진 것도 잘못이란 말이냐?" "소질도 소질 나름이지요. 그런 건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요." 엽단풍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싫다. 난 어떤 소질이든 개발하면 개발했지 없애지는 못하겠다. 영호해상은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면 당신은 평생 가도 남들 손가락질이나 받으며 살 거예요."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그래도 그게 낫다. 아까운 소질 없애면서 기가 죽어 사느니 남들 손가락 부러뜨리는 게 훨씬 내 적성에 맞는다." 영호해상은 입을 삐쭉거렸다. "그랬다간 세상 사람들 중에서 멀쩡한 손가락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거예요." "그거야 그들 사정이지." "아이 참. 정말 당신하고는 말이 안 통해요." 영호해상은 뾰로통해져서 고개를 홱 돌렸다. "말이 안 통한다면서 왜 매번 네가 먼저 말을 거는 것이냐?" 영호해상은 입이 퉁퉁 나온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엽단풍은 다시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너는 항상 할 말이 없으면 성질을 부리거나 심술보를 터뜨리는데 정작 뜯어고쳐야 할건 바로 너의 그 성질이다." "......." "그리고 그 것도 통하지 않을 때 상습적으로 울고불고 하는 버릇은 더욱 나쁜 것이다. 알겠느냐?" 이번에도 역시 영호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엽단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이때쯤이면 길길이 날뛰던지 생떼를 부릴텐데...' 엽단풍이 가만히 샛눈으로 영호해상을 훔쳐보니 그녀는 멍하니 한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엽단풍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가 바라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탄 배에서 이십 여장 떨어진 곳에 한 채의 호화로운 화방(畵房)이 떠 있었다. 화방이란 유객(遊客)들을 위해 술과 노래를 파는 지붕 있는 배를 말한다. 지붕과 배의 옆면에 형형색색으로 채색(彩色)을 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화방은 원래 금릉의 진회하(秦淮河)에서 처음 나타났는데 인기를 끌자 근자에는 강남의 호수나 강에서 곧잘 볼 수 있을 정도로 그 수가 많아졌다. 이 화방은 다른 화방보다도 유달리 크고 화려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아무런 인기척이 보이지 않았다. 화방이라면 의례 떠들썩한 유객들의 웃음소리와 기녀(妓女)들의 노랫자락 소리가 들려 와야 할 텐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더욱 특이한 것은 화방의 한쪽에 내 걸린 홍등(紅燈)이었다. 여타 화방의 홍등은 단순히 붉은 색을 칠한 것인데 이 화방의 홍등은 진홍빛 장미를 수놓은 것이었다. 그 장미의 문양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흡사 커다란 장미꽃이 활짝 피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영호해상은 멍하니 이 장미 모양의 홍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엽단풍은 자신도 덩달아 그녀처럼 턱을 고인 채 우두커니 장미 모양의 홍등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런 자세로 있자 영호해상이 힐끔 그를 돌아보았다. 엽단풍은 모르는 척 홍등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입을 삐쭉거리며 자신도 다시 홍등을


바라보았다. 하나 얼 마되지 않아 그녀는 더 참지 못하고 엽단풍을 돌아보며 쌀쌀맞은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대체 뭘 그리 넋놓고 바라보고 있는 거에요?" 엽단풍은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앞을 주시한 채 짤막하게 말했다. "홍등." 영호해상의 쌍심지가 곤두섰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요? 대체 무엇 때문에 저 홍등을 그렇게 열심히 쳐다보고 있냔 말이에요?" "그냥." 영호해상은 아미를 치켜 뜨며 앙칼진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냥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엽단풍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말했다. "너는 그냥이란 말뜻도 모르냐? 그냥이란 말뜻은 곧 그냥 가만히 본다는 말이다." "왜 그걸 그냥 보고 있는 거에요?" 영호해상이 억지를 부리자 엽단풍은 피식 웃었다. "그러면 그냥 보지 춤을 추면서 보란 말이냐?" 영호해상은 화가 나는지 숨결이 점차 가빠졌다. "내 말을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왜 갑자기 홍등을 볼 생각을 했냐는 말이에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신 정말 이럴 ���예요?" 영호해상은 그의 옆구리를 꼬집으려 했다. 하나 그때 엽단풍은 껄껄 웃으며 이미 배의 반대쪽으로 가 있었다. "하하...이것 보아라. 나는 가만히 있는데 네가 먼저 시비를 걸지 않았느냐?" "흥!" 영호해상은 찬바람이 나도록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엽단풍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자. 이제 네가 말해 보아라. 왜 저 홍등을 그렇게 쳐다보고 있었지?" 영호해상은 입을 삐쭉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다가 쌀쌀맞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냥요." 엽단풍은 일부러 눈썹을 찡그렸다. "그냥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영호해상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신은 그냥이란 말뜻도 몰라요? 그냥보고 있단


말이에요." "얼레? 그건 아까 내가 써먹은 말인데..." "나는 그냥 저 홍등을 보고 있다는 말을 했을 뿐이에요." 엽단풍은 갑자기 히죽 웃었다. "내가 왜 저 홍등을 그냥 보고 있느냐고 물어보면 너는 그럼 그냥 보지 춤을 추면서 보느냐고 대답하겠지? 그래서 그건 묻지 않겠다." 영호해상은 약이 바짝 오른 모습이었다. 사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엽단풍은 그녀가 무어라고 쏘아붙이기도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대신 나는 내 생각을 말해 주겠다. 네가 저 홍등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걸 보고 나는 그 이유가 다음 네 가지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지." 영호해상은 그가 또 무슨 말을 하나 하고 그를 돌아보았다. 엽단풍은 태연히 말했다. "네가 장미를 엄청나게 좋아하든지, 아니면 홍등을 엄청나게 좋아하든지, 아니면 화방을 엄청나게 좋아하든지....그것도 아니면 나를 골탕먹이는걸 엄청나게 좋아하든지. 이 네 가지 중의 한 가지 아니냐?" 영호해상은 그를 노려보았으나 마침내 참지 못하고 피식 웃고 말았다. "당신은 혼자 잘난 척을 다 하는군요. 그게 아니에요." 엽단풍은 그녀의 화가 조금 풀어진 것 같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즉시 물었다. "그럼 뭐냐?" "저 홍등의 장미 문장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아서 그래요." "어디서 보았는데?" 영호해상은 아미를 찌푸렸다. 화가 난 게 아니라 무언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글쎄 그걸 잘 모르겠어요. 기억이 날듯 하면서도 나지를 않아서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엽단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지금까지 계속 동해에서만 살았다면서 언제 저런 화방을 볼 수가 있었겠느냐?" "화방이 아니라 홍등에 새겨진 장미를 말하는 거예요." "글쎄 그런 장미를 어디서 보았겠느냐? 동해에 장미가 자라지도 않을텐데..."


그때 문득 영호해상의 눈이 영롱하게 반짝였다. "아...혹시...!" "생각이 났느냐?" 엽단풍이 묻자 영호해상은 얼굴이 환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제 알겠어요. 저 장미 문양을 어디서 보았는지 이제 생각이 났어요." "확실히 너는 나를 만난 뒤로 몰라보게 똑똑해 졌구나. 저걸 어디서 봤느냐?" 영호해상은 엽단풍의 놀리는 말에도 화를 내지 않고 재빠르게 말했다. "내게 청혼을 하러 왔던 흑백상문신의 일행 중 한 명이 가슴에 저런 장미 문양을 새긴 옷을 입고 있었어요." 엽단풍의 눈에 기광이 번쩍거렸다. "그게 사실이냐?" 영호해상은 자신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장미 문양은 아주 특이해서 한 번 보면 절대로 잊혀지지 않아요." "그 자는 누구냐?" "그 자가 아니라 그 여자예요." 엽단풍은 흠칫 놀랐다. "여자라고?" 영호해상은 그를 힐끗 올려보았다. "왜요? 여자라니까 귀가 번쩍 뜨이나요?" "하하...지금은 질투할 때가 아니다. 그 여자는 누구냐?" "나도 이름은 몰라요. 단지 다른 사람들이 그 여자를 대할 때 몹시 공손한 것으로 보아 신분이 상당히 높은 여자구나 하고 짐작했을 뿐이에요." 엽단풍은 잠시 침음하다가 다시 물었다. "요인도에 온 흑백상문신의 일행이 모두 몇 사람이었느냐?" "흑백상문신을 제외하고 남자 셋과 그 여자예요." "그 여자가 그들 중 우두머리냐?" 영호해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았어요. 남자들 중 늑대 가면을 쓴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제일 우두머리 같았어요." 엽단풍의 눈에서 번쩍 하는 빛이 흘러나왔다. "늑대 가면을 쓴 사람이라고?" "그래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 자의 말 한마디에 벌벌 떠는 것 같았어요. 흑백상문신조차도 그 자 앞에서는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했어요. 그리고..." 영호해상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도 그 자를 얼마쯤은 두려워하는 것같이 보였어요." "흐음....늑대 가면이라.." 엽단풍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동해노사 영호덕조조차 두려워하는 늑대 가면의 사나이! 그 자는 과연 누구일까?

2 엽단풍이 상념에 잠겨 있을 때였다. 문득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영호해상이 깜짝 놀란 듯 뾰쪽한 음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화방에서 누가 나와요." 엽단풍은 힐끗 화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과연, 방금 전만 해도 아무런 인기척조차 없었던 화방의 한쪽 휘장이 걷히며 한 사람이 걸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화방에서 나온 사람을 본 엽단풍의 눈가에 희미한 미소의 빛이 떠올랐다. "저 자식이 여긴 웬일이지?" 영호해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는 사람이에요?" 엽단풍은 퉁명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저런 기생오라비 같은 녀석을 알 리가 있느냐? 그냥 한 번 만났을 뿐이다." 그의 음성이 상당히 컸는지라 막 화방에서 나오던 인물은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엽단풍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 자의 입이 반쯤 벌어지며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엽단풍은 그 자를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하하...얼음공자. 여기서 다시 만나다니 과연 우리는 전생(前生)에 참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모양이구려." 화방에서 나온 인물은 다름 아닌 절정공자 냉우빙이었던 것이다. 냉우빙은 설마 이런 곳에서 엽단풍을 만날 줄은 몰랐던 듯 안색이 여러 차례 변했다. 하나 그는 이내 이를 우드득 갈며 냉랭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엽단풍! 그렇지 않아도 네 놈을 만나길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하하...과연 당신은 그때 약속을 지키지 못한걸 몹시 후회했던 모양이구려. 그렇다면 안심하시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훌훌 벗도록 하시오." 엽단풍은 배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여기 앉아서 당신의 옷 벗는 모습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감상해 주겠소." 냉우빙의 안색이 철갑을 씌운 듯 딱딱하게 굳어졌다. "미친 놈..." 그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으로 엽단풍을 노려보고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때는 본 공자가 네 놈을 얕보다가 조금 손해를 보았다만 오늘은 사정이 다를 것이다." "사정이 다르다니...그 사이에 당신이 무슨 경천동지할 무공이라도 익혔단 말이오?" "네 놈이 멋대로 지껄이는 것도 오늘로서 마지막이다." 냉우빙이 냉랭한 웃음을 날렸다. "세 분은 나오시지요." 그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치자 다시 휘장이 걷히며 몇 명의 인물이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모두 육순에게 칠순 가량 되는 노인들이었다.


가장 우측의 노인은 두 팔이 유난히 길고 얼굴에 털이 많은 갈의노인이었다. 갈의노인은 얼굴도 거무스름해서 얼핏 보기에는 원숭이를 연상시켰다. 중앙의 노인은 푸른 청의를 입고 제법 이목이 청수한 인물인데 턱밑으로 검은 수염을 탐스럽게 기르고 있어 비범한 인상이었다. 하나 눈빛이 고르지 못하고 눈꼬리가 약간 찢어져 어딘지 음악(陰惡)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제일 왼쪽의 노인은 비쩍 마르고 전신에는 고동색 장포를 걸쳤는데 눈빛에 연신 악독한 기운이 번뜩거리고 있어 보기만 해도 절로 냉기가 감도는 인상이었다. 냉우빙은 세 명의 노인을 돌아보며 엽단풍을 가리켰다. "저 놈이 바로 천하광자 엽단풍이란 놈입니다." 그 말에 세 노인의 시선이 모두 엽단풍에게로 고정되었다. 그들의 시선은 어딘지 모르게 사이하면서도 음침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문득 왼쪽에 있는 고동색 장포의 노인이 살짝 입을 열었다. "남들이 하도 천하광자라고 떠들기에 어떤 놈인가 했더니 덩치만 커다란 곰 같은 놈이었군." 그의 음성은 외모만큼이나 냉혹한 것이었다. 엽단풍은 별로 화도 내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네들은 혹시 중주삼사라는 별 볼 일없는 노인네들 아니오?" 그 말에 고동색장포의 노인이 몸을 움찔했다. "네 놈이 어떻게 노부들을 아느냐?" 엽단풍은 싱겁게 웃었다. "저 얼음공자가 당신들하고 어울려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소. 당신들은 참으로 취향도 고상하시오. 저 얼음공자하고 어울릴 생각을 다 하다니...." 고동색장포의 노인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한동안 멍하니 엽단풍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설마 자신들의 정체를 알면서도 이와 같은 말을 지껄이는 인간이 존재하리라고는 결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중주삼사! 중주삼사는 물론 세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들 세 사람은 결코 평범하지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강호무림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성격이 괴팍하고 잔인해서 무림인들은 중주삼사라는 이름만 들어도 눈살을 찌푸리고 멀찌감치 피하기 일쑤였다. 고동색 장포의 노인은 한참 동안 말없이 엽단풍을 쳐다보다가 두 눈에 진득한 살광(殺光)을 뿜어냈다. "과연 듣던 대로 완전히 미친놈이로군. 노부들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함부로 아가리를 놀리다니..." 엽단풍은 히죽 웃으며 그의 전신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당신은 외모나 풍기는 분위기로 보아 귀신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것 같은데 당신이 귀영자 당대붕이오?" 노인의 냉막한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죽일 놈." 그는 과연 귀영자 당대붕이었다. 당대붕은 별호 그대로 신법(身法)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를 귀신 닮은 늙은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감히 없었다. 엽단풍의 시선은 이어 그의 옆에 서 있는 청수한 인상의 청의노인을 향했다. 청의노인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고 침착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청의노인의 눈빛은 수정처럼 맑았는데 그러면서도 왠지 섬ㅉ한 느낌이 들게 했다.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당신이 중주삼사의 꾀주머니라는 독효 고홍이겠구려?" 청의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가 바로 고홍이다." 고홍은 심기(心機)가 깊고 독계(毒計)가 많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비단 무공이 고강할 뿐 아니라 머리 속에 온갖 기계가 가득해서 강호무림에서는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엽단풍은 마지막으로 제일 왼쪽에 서 있는 두 팔이 유달리 긴 갈의노인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꼭 원숭이를 닮았구려. 당신이 바로 쌍수전원 교원이오?" 갈의노인은 말없이 엽단풍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그는 누가 자신을 원숭이에 비유하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그는 중주삼사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흉폭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웬일인지 지금은 발작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하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처럼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있을 때가 교원이 진정으로 무서울 때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을 것이다. 엽단풍은 천하에 흉명(兇名)이 자자한 중주삼사를 앞에 두고도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당신들은 과연 생긴 건 그럴 듯 하오. 아마 얼음공자가 당신들의 그 위풍당당한 외모를 믿고 나에게 큰 소리를 친 모양인데 외모라면 나도 자신 있소." 그때 허공 중에 그림자가 히끗거렸다. 엽단풍이 고개를 올려보니 당대붕이 무려 이십 여장을 날아 그들이 탄 배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그 신법은 그야말로 귀영(鬼影), 바로 그것이었다. 엽단풍은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짝 쳤다. "정말 신법 하나는 끝내 주는군. 당신은 과연 귀신같은 늙은이요." 이십 여장을 단숨에 날아왔는데도 당대붕은 숨결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배 위로 내려서자마자 불문곡직하고 엽단풍을 향해 달려들었다. 스읏! 그의 고목처럼 마른 오른손이 허깨비처럼 허공을 육박해 엽단풍의 코앞으로 날아왔다. 무영귀수(無影鬼手)라는 무시무시한 마도의 절정수법이었다. "성질도 더럽게 급하군. 그렇게 나에게 쓴맛을 보고 싶소?" 엽단풍은 빙긋 웃으며 앉은 자세에서 오른손을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그가 내민 손은 그렇게 빠르지는 않았으나 시기가 적절하여 당대붕의 무영귀수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쾅! 굉음과 함께 당대붕의 비쩍 마른 몸이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우욱!" 당대붕은 휘청거리며 계속 물러나다가 하마터면 그대로 배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엽단풍은 상체가 잠시 흔들렸으나 이내 몸을 멈추며 빙그레 웃었다. "당신의 공력도 그런 대로 쓸 만하군. 하지만 이 정도로 나를 어쩔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당신이 노망이 들었다는 증거요." 당대붕의 안색이 홱 변했다.


"네 놈의 내공이 두 갑자(甲子)를 넘는구나... 목불이 당했다는 것도 헛소문이 아니었구나." 그의 음성에는 경악과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하하...그깟 나무 불상 하나 없앤걸 가지고 무얼 그리 호들갑을 떠는 거요? 당신은 설마 나무 불상보다도 변변치 않은 인물이란 말이오?" 당대붕의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지금까지 혈악의 십대고수 중 하나인 목불이 엽단풍에게 살해되었다는 소문을 믿지 않았는데 막상 그와 한 차례 격돌하고 보니 그의 무공이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임을 깨닫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목불을 물리친 게 사실이라면 자신 혼자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엽단풍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하나 그때 때마침 쌍수전원 교원이 배 위로 날아왔다. 교원의 신법은 몹시 특이했다. 두 다리 대신에 길다란 양팔로 슬쩍 슬쩍 물을 박차며 순식간에 이십 여장을 건너온 것이다. 마치 성성이처럼 두 팔을 이용해 물을 건너는 광경은 괴이하면서도 흥미 어린 것이었다. 엽단풍은 그것을 보고 입을 쩍 벌리며 손뼉을 짝짝 쳤다. "하하...정말 재미있군. 두 팔을 이용해 등평도수(登平渡水)를 펼치다니 이거야말로 비원도수(飛猿渡水)라 할 만하지 않은가?" 교원은 아무런 말도 없이 엽단풍을 향해 달려들었다. 스르르... 그의 양손은 두 개의 거대한 촉수처럼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당대붕 또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벼락같이 달려들며 십삼장(十三掌)을 연거푸 갈겨댔다. 파파파파파.... 두 명의 절���고수가 합공을 하자 실로 막강한 경기가 일어났다. 그 때문에 그들이 타고 있는 배가 금시라도 무너질 듯 심하게 요동을 쳤다. 엽단풍은 껄껄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하...정말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는 작자들이로군. 그렇게 쓴맛을 보고 싶다면 소원대로 해 주지." 그는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교원과 당대붕이 휘두르는 경기 속으로 몸을 던지며 양손을 질풍처럼 휘둘렀다.


콰콰콰콰.... 마치 해일이 몰아치듯 무지막지한 장영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바로 절세무적의 광도번천수가 펼쳐진 것이다. 교원과 당대붕은 기세 등등하게 덤벼들다가 그 엄청난 위세를 보자 안색이 시체처럼 굳어졌다. 그 노도처럼 다가오는 장력의 공세는 그들로서도 일찍이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있는 곳은 좁은 배 위인지라 달리 피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이를 악문 채 사력을 다해 맞서갔다. 콰쾅! 굉량한 폭음이 터지며 그들이 타고 있던 배가 엄청난 격돌의 여파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동강이 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주위의 물이 경력의 소용돌이로 허공으로 치솟아 거대한 물기둥을 형성했다. 교원과 당대붕은 비명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허공을 날아 십 여장 밖의 물 속으로 떨어졌다. 풍덩! 엽단풍도 몸을 한차례 휘청이며 허공에서 멈칫거렸다. "아앗?" 바로 그때 부서진 배 위에서 바둥거리고 있던 영호해상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물위로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스윽! 엽단풍은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하더니 영호해상의 손목을 덥석 잡자마자 그대로 이십 여장의 허공을 가로질러 화방으로 날아가는 신기(神技)를 발휘했다. 그 모든 상황이 눈 깜짝할 새 일어났기 때문에 고홍과 냉우빙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엽단풍은 어느 새 영호해상의 손목을 잡고 그들의 앞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고홍의 침착하던 표정이 가볍게 흔들렸다. 엽단풍은 교원과 당대붕이 떨어진 곳을 둘러보더니 투덜거렸다. "이거 뭐 이래? 한 번 신나게 몸 좀 풀어 보려고 했더니 그냥 물 속으로 들어가서 나오지를 않다니...이래 가지고야 어디 기분이 나겠나?" 이어 그는 고홍과 냉우빙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쓴맛은 당신들에게 보여줄 수밖에 없겠군."


냉우빙은 안색이 변한 채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고홍 또한 표정이 굳어졌으나 이내 냉정한 모습을 되찾았다. "자네의 솜씨는 과연 듣던 대로 탁월하군." 그는 마도의 제일 두뇌라는 별호답게 금새 흔들리는 마음을 가다듬은 모양이었다. 엽단풍은 그의 전신을 쭈욱 훑어보다가 히죽 웃었다. "당신은 그들 두 늙은이들에 비하면 한결 고상한 분위기가 풍기는군. 당신하고는 말이 조금 통할 것 같소." 엽단풍은 돌연 정색을 했다. "사실 나는 당신들과 초면이어서 이렇게 소란 법석을 일으키고 싶지가 않았소. 나는 단지 저 얼음공자에게 잠깐의 볼일이 있을 뿐이었소." 그의 음성이 한층 더 커졌다. "저 얼음공자는 나하고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소. 나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어기는 자를 제일 싫어하기 때문에 저 자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 하는 거요." 이어 그는 냉우빙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자. 이제 순순히 벗을 테냐? 아니면 내가 벗겨 줄까?" 3 절정공자라는 외호답지 않게 냉우빙의 안색이 여러 차례 변했다. 그는 설마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중주삼사이 엽단풍을 당하지 못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쌍수 전원 교원과 귀영자 당대붕이 설마 그의 일 장조차 받지 못하고 맥없이 쓰러지고 말다니... 그는 다급한 김에 한 가닥의 기대를 품고 고홍을 바라보았다. 고홍의 얼굴은 여전히 차갑게 가라앉아 있어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게 했다. "고대협...." 냉우빙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으나 고홍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우연인지 그의 시선은 엽단풍이 아닌 그의 뒤에 서 있는 영호해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엽단풍은 성큼성큼 냉우빙에게 다가오며 껄껄 웃었다. "하하...냉우빙. 고노인을 불러봤자 소용없다.


고노인같이 사리분별이 밝고 이해타산이 빠른 양반이 너를 도와줄 리가 있느냐? 좋은 말 할때 순순히 벗어라." 냉우빙은 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나 별로 넓지 않은 화방 위에서 물러날 곳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안색이 해쓱해 진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엽단풍을 응시하고 있다가 버럭 폭갈을 터뜨렸다. "엽단풍! 사람을 너무 핍박하지 마라. 나 냉우빙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 인줄 아느냐?" 엽단풍은 빙글빙글 웃으며 계속 다가왔다. "글쎄 누가 뭐라더냐? 그저 나는 너의 벗은 몸을 보기만 하면 그 후에는 네가 아무리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사정을 해도 너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저....정말 네 놈이 끝까지..." "그렇다. 끝까지 나는 너를 벗길 것이다." 엽단풍은 이렇게 말해 놓고는 히죽 웃더니 중얼거렸다. "이건 원래 여자들한테 써먹어야 더 어울리는 대사인데..." 엽단풍은 천천히 양손을 들어올렸다. 냉우빙은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에서인지 두 눈에 악독한 빛을 번뜩인 채 허리춤에 찬 연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한데 엽단풍이 막 커다란 손을 들어올리며 냉우빙의 옷을 벗겨 가려 할 때였다. "아가씨는 혹시 동해요인도에서 오지 않았나?" 한쪽에서 말없이 서 있던 고홍이 영호해상을 바라보며 불쑥 입을 여는 것이 아닌가? 엽단풍은 막 냉우빙에게 덤비려다 주춤하여 손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냉우빙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영호해상은 고홍이 자신을 아는 척 하자 고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요. 그런데 노인장이 그걸 어떻게 알지요?" 고홍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그렇군. 아가씨는 요인도의 여우라는 영호해상이 아닌가?" "내가 바로 영호해상이에요." "과연....그런데...." 고홍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영호해상의 아미가 자신도 모르게 살짝 찌푸려졌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에요?" 고홍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아니네. 그냥 아가씨를 보니까 한 가지 생각이 나서 속으로 중얼거렸을 뿐이네." 그가 이렇게 시치미를 떼자 영호해상은 더욱 궁금해졌다. "무슨 생각이 났는데요?" "글쎄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 "방금 나를 보니까 무슨 생각이 났다고 했잖아요." 영호해상이 안달을 할수록 고홍은 더욱 느물거렸다. "정말 별 거 아니네. 아가씨는 신경 쓰지 말게." 이러니 사람 속이 뒤집혀지지 않겠는가? 영호해상이 성질이 나서 막 쌍심지를 돋우려 할 때 마침 엽단풍이 재빨리 끼여들었다. "너는 무얼 그리 알려고 하느냐?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지 않느냐?" 영호해상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럼 당신은 궁금하지 않단 말이에요?" "나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영호해상은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건 당신에 관한 일이 아니라서 그렇지요!" 엽단풍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왜 나에게 신경질을 부리느냐? 말을 안한 사람은 내가 아닌데." "그럼 당신은 입을 닥치고 조용히 있어요!" 영호해상은 쌀쌀맞게 말했다. 막상 말을 해 놓고 나니 그녀는 자기가 그에게 너무 심하지 않았나 싶어 슬쩍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웬걸? 그는 화를 내기는커녕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지 연신 입가에 히죽히죽 웃음을 띄고 있는 게 아닌가? 그녀는 영문을 몰라 불쑥 물었다. "왜 그렇게 웃는 거예요?" "하하...너는 별명이 작은 여우이고 사람 중의 요괴(人妖)라면서 누가 조금만 얕은 수를 부려도 쉽게 넘어가니 어찌 우습지 않겠느냐?" 그녀는 몸을 움찔했다. "얕은 수를 부리다니요? 누가요?" 엽단풍은 기이한 웃음을 머금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그녀는 물론 모르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아차 하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급히 고홍을 돌아보았다.


고홍은 여전히 처음의 표정 그대로 말없이 서 있었다. 영호해상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당신은 과연 강호의 늙은 너구리답게 수작이 보통이 아니군요. 하지만 나도 이젠 당신이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 고홍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 "수작을 부리다니...노부가 어찌 아가씨에게 수작을 부리겠는가?" "흥! 당신은 마치 당신이 나에 대한 중대한 사항을 알고나 있는 것처럼 꾀를 냈지만 내가 그런 것에 넘어갈 것으로 알았다면 당신이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허허...노부가 어찌 그런 마음을 먹었겠는가?" 고홍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르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알고 싶지 않다면 노부로서는 잘된 일이지. 하지만 이것으로 이제 요인도도 끝장이 나겠구나..." 그의 말은 비록 나직했으나 지척에 있는 영호해상이 어찌 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그녀는 비록 고홍이 계속 자신을 충동질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이 말을 듣자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 요인도가 끝장이 난다는 거지요?" 고홍은 그녀를 돌아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가씨는 신경 쓰지 말게. 그냥 노부 혼자 해 본 소리니까." 영호해상은 아미가 절로 치켜 떠졌다. "그렇게 사람 들으라고 떠들어 놓고 혼자 해 본 소리라니 말이나 되는 소리예요? 빨리 말해요. 그게 무슨 뜻이지요?" "허허참! 노부보고 수작을 부린다고 하면서 어찌 자꾸 노부를 채근하는가? 노부는 정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네." 영호해상이 제아무리 영악한 여자라 해도 이제 겨우 십 칠팔 세에 불과한 강호경험이 일천한 소녀였다. 어찌 강호에서 수십 년을 늙어 온 고홍에게 당하겠는가? 더구나 고홍은 간계가 많기로 강호무림에서도 손꼽히는 인물이 아닌가? 영호해상이 숨을 씩씩거리며 서 있을 때 엽단풍이 앞으로 나섰다.


"고노인. 고노인의 수는 정말 높으시오. 나는 정말 감탄했소." 고홍은 그를 돌아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자네도 그런 말을 하는가?"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나는 지금까지 남들이 독효 고홍의 세 치 혀는 세상의 그 어떤 신병이기(神兵利器)보다도 무섭다고 해도 믿지 않았는데 오늘보니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구려." "노부가 무슨 짓을 했기에 자네들이 이러는가? 정말 영문을 모르겠군."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고노인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주면 나도 더 이상 당신들을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물러나겠소." 고홍은 여전히 시치미를 떼었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니?" 엽단풍은 조금도 짜증을 부리거나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빙그레 웃었다. "고노인이 요인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실 말이오." "노부는 동해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 어찌 요인도에 대해서 알겠나?" "입을 열든 열지 않든 그건 전적으로 고 노인의 마음이니 더는 무어라고 말하지 않겠소." "그거 고맙군." "그리고 내가 오늘 몇 사람을 죽이든 그것도 내 마음이니 고 노인도 신경 쓰지 마시오." 엽단풍은 이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고홍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엽단풍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고홍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자네는 냉공자를 죽이려는가?" 엽단풍은 짤막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입을 열지 않는 사람은 그가 아닌데 내가 왜 그를 죽이겠소?" 고홍은 흠칫 놀랐다. "그럼 노부를 죽이겠단 말인가?" 엽단풍은 그를 힐끗 보았다. "그건 알아서 무엇하려고 하시오?" "노부의 생사(生死)가 달린 일인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나?" "내가 누굴 죽이든 고 노인은 조금도 신경 쓰지 말고 입이나 잘 간수하시오. 그렇게 목숨을 바치며


지키려고 하는 비밀인데 잘못하여 누설된다면 큰 일 아니겠소?" 고홍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노부가 언제 목숨을 바친다고 했나?" "글쎄 신경 쓰지 말라니까. 나는 그저 내 일이나 할 테니 고 노인도 고 노인 일에나 신경 쓰시오." 엽단풍은 말과 함께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우우웅.... 그와 함께 그의 커다란 손에서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지막지한 기운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고홍은 안색이 약간 변한 채 그의 손에서 구름 같은 경기가 일어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기운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아직 채 펼쳐지지도 않았는데 화방이 태풍을 만난 듯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시전 되지도 않은 상태가 이럴 진데 만약 그의 손이 휘둘러진다면 어떠한 광경이 벌어질지는 불을 보듯 빤한 노릇이 아닌가? 엽단풍은 오른손에 가득 공력을 돋구운 채 고홍을 바라보았다. "고 노인. 만나서 즐거웠소. 부디 지하에 가서라도 나를 잊지 마시구려." 이어 그가 막 오른손을 휘두르려 고하는 순간, "알았네. 노부가 졌네." 고홍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엽단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가 무슨 내기를 했다고 고 노인이 졌단 말이오?" 고홍의 얼굴에 고소가 떠올랐다. "자네의 수가 노부보다 한 단계 위라는 것을 인정하지. 요인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할 테니 손을 거두게." "그게 정말이오?" "노부의 신분으로 어찌 일구이언을 하겠나?" 엽단풍은 히죽 웃으며 오른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와 함께 그토록 무서운 기세로 피어올랐던 기운들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고홍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자네가 끌어올렸던 공력은 대체 무엇인가? 노부 평생 그렇게 대단한 기세를 풍기는 무공은 일찌기 본 적이 없었네." 엽단풍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별거 아니오. 경하기라는 건데 너구리를 잡을 때나 쓸 수 있는 무공이오." "경하기?"


고홍의 눈에 번쩍 하는 빛이 떠올랐다. 하나 그것은 나타날 때보다 더욱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고 노인이 아까 하려던 말은 무엇이었소?" 고홍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사실은....요인도의 고수들이 중원으로 왔네." 그 말에 영호해상이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그게 정말이에요? 언제요? 어디로 왔지요?" 고홍은 힐끗 그녀를 돌아보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삼 일전일세. 그들은 항주(抗州)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전당강(錢塘江)의 입구에 배를 정박한 채 머물고 있네." 영호해상은 요인도의 고수들이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항주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팔짝팔짝 뛰며 ���아했다. "그게 정말이에요? 아! 신나라! 할아버지도 오셨나요?" "물론 영호노사(令狐老邪)도 오셨지. 하지만...." 웬일인지 고홍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영호해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급히 물었다. "하지만 뭔가요?" 고홍은 머뭇거리다가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들은 내일이면 강호상에서 두 번 다시 모습을 볼 수 없을지 모르네." 영호해상은 그야말로 대경실색하여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그게 무슨 말이에요? 두 번 다시 모습을 볼 수가 없다니..." "그건..." 고홍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계속했다. "그들이 내일 혈악의 고수들과 결전을 벌이기로 했기 때문일세." "뭐라고요?" 영호해상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왜....할아버지가 그들과...." "그건 모두 아가씨 때문일세." 고홍은 그녀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나 때문이라니요?" "아가씨가 중원으로 도망친 후 요인도에 있던 혈악의 인물들과 요인도의 고수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지. 그래서 그들은 내일 오시에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서 자웅을 겨루기로 했네." 고홍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요인도가 비록 새외의 삼대문파중 하나라고 하지만 어찌 혈악의 고수들을 당할 수 있겠나? 더구나 이번에 혈악에서 파견된 인물은 십대 고수 중의 서열 팔위인 신랑(神狼)이니 요인도가 그들을 이긴다는 것은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길 바라는 격이지." 영호해상은 안색이 변해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늑대가면....그 자가 바로 신랑이로군요...." 영호해상은 다급하고 초조하여 발을 동동 굴렀다. "어쩌죠? 이를 어쩌죠?" 그녀는 엽단풍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매달렸다. "어쩌면 좋아요?" 엽단풍은 의외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는 불안에 떠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린 후 고홍을 바라보았다. "고노인이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낙타도 바늘구멍에 들어갈 수가 있소." 고홍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그건 바늘구멍을 있는 대로 벌린 다음 낙타를 그 안에 집어 넣으면 되는거요. 그러니 내일 요인도가 혈악에 멸망당한다고 생각할 수만도 없지." 그는 영호해상의 손목을 덥썩 움켜잡더니 한쪽에 서 있는 냉우빙을 돌아보았다. "냉우빙. 당신은 비록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만 나는 약속을 지켜 당신을 그냥 놓아주겠소. 다음에 다시 만날 때는 꼭 당신의 알몸을 구경하고 말테니 그동안 목욕이나 잘 하고 있으시오." 동시에 그의 육중한 몸이 바닥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고노인. 다음에 다시 봅시다...." 그의 말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의 몸은 영호해상과 함께 수면위를 날아 아득히 멀리로 사라지고 있었다. 냉우빙과 고홍은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그들이 멀어져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엽단풍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정말 가공스런 신법이군..." 고홍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냉우빙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고홍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군. 저런 무공을 지니고도 단명(短命)해야할 운명이니..." 바로 그때였다.


푸우! 화방이 떠 있는 바로 옆의 물 속에서 두 줄기 인영이 솟구쳐 올랐다. 그 인영들은 고홍과 냉우빙의 바로 앞에 떨어져 내리며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크흐흐..." 그런데도 고홍과 냉우빙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입가에도 나타난 인영들과 비슷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하하..." 물속에서 뛰어 올라온 인물들은 놀랍게도 쌍수전원 교원과 귀영자 당대붕이 아닌가? 그들은 오랫동안 물속에 숨어 있느라 안색이 약간 창백했으나 별다른 상처를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당대붕이 고홍을 바라보며 음흉한 웃음을 날렸다. "흐흐...과연 고형의 계책대로 그 미친 놈이 꼼짝없이 걸려들었구려. 과연 고형의 머리는 알아줘야 하오." 고홍은 담담하게 웃었다. "나야 힘을 쓴 게 있나? 그보다 자네들이 고생이 많았네." "흐흐...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그 망할 놈과 사생결단을 내고 싶었으나 고형의 당부를 생각해서 간신히 억눌러 참았소." 고홍은 빙그레 웃으며 그의 옆에 말없이 서 있는 쌍수전원 교원을 돌아보았다. "자네도 다친 곳은 없는가?" 교원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당노제보다는 자네가 화를 참지 못하고 일을 그르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었는데 용케도 참았군. 하지만 내일이면 그 놈에게 통쾌하게 복수할 수 있으니 그때 마음껏 화를 풀도록 하게." 교원은 두 눈을 무섭게 번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홍은 다시 냉우빙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네도 잘 연기해 주었네." 냉우빙은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일전에 그 놈에게 당한 것을 갚지 못한다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을거요. 고노인이 그 놈에게 복수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말을 믿지 않았으면 오늘도 그와 같은 치욕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거요." 고홍은 담담하게 웃었다. "노부를 믿게. 틀림없이 그렇게 될테니."


고홍은 돌연 허공을 올려보며 불쑥 물었다. "부인(婦人). 당신의 생각은 어떻소?" 이곳에는 여인이라고는 없는데 그는 대체 누구에게 물은 것일까? 그때 화방안에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호호...당신의 솜씨는 과연 절륜하군요. 사람들이 왜 당신을 늙은 너구리라고 부르는지 이제야 알겠어요." 그 음성은 묘한 마력(魔力)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아교처럼 끈적끈적하면서도 꿀같은 달콤함을 지니고 있었다. 얼핏 들으면 십 대 소녀의 청순한 웃음소리 같은데 또 얼핏들으면 삼십 대 여인의 농염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순결과 관능, 청순과 요염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음성이었다. 고홍의 입가에는 미소가 그치지 않았다. "허허....장미부인(薔薇婦人)에게 그런 칭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결코 흔하지 않을텐데...오늘 노부에게 복이 굴러 떨어졌구료." 화방 속에서 다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엽단풍이란 자는 소문보다 더욱 광오한 것 같더군요. 하지만 단신으로 혈악에 대항하려 하려다니 너무나 무모하고 어리석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쓸만한 사내였을텐데..." "허허...그 자가 부인의 눈안에 든 모양이구료. 그 사실이 알려지면 아마 모두들 질투심에 불타 몸부림을 칠거요. 하지만 어쩌겠소? 내일이 그 자의 제삿날이 될테니..." 그때 냉우빙이 고홍을 보며 물었다. "정말 그 놈이 내일 그곳에 가서 살아오지 못하겠소?" 고홍은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하게. 내일 그곳에는 신랑 뿐만 아니라 취사(醉邪)와 비마(飛魔)도 합세할 걸세. 그 자가 제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어찌 십대고수 중의 세 사람을 당할 수 있겠나?" 냉우빙은 깜짝 놀랐다. "그게 정말이오?" "그렇네. 자네의 큰 아버님께서 자네를 위해서라도 그 자를 용서하지 말라는 특별지시를 내리셨네." 냉우빙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큰 아버님께서 출관(出關)하셨소?" 고홍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그렇네. 그러니 자네는 내일 그 자가 처참한 꼴을


당하는 모습을 구경하기만 하면 되는걸세." 냉우빙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냉혹한 웃음을 날렸다. "흐흐...엽단풍! 이제야말로 네 놈도 끝장이다. 본 공자를 건드린 대가가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주겠다." 그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강물위를 잔잔하게 울리고 있었다.

제 15 장 恐怖의 손가락 1 -상유천당(上有天堂), 하유소항(下有蘇抗)...!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蘇州)와 항주(抗州)가 있다...! 항주(抗州)는 천당에 비유될 만큼 아름다운 도시였다. 원래 호림(虎林)이라 불리웠던 항주는 오월전무숙(吳越錢武肅)의 오대국의 서울이 되면서 급속도로 발전되었다. 그곳에는 전당강이 굽이쳐 흐르고, 남으로는 수양제(隋揚帝)때 개설한 운하(運河)가 통하고 있었다. 또한 물자가 풍부했고 산수(山水)가 빼어나서 뛰어난 인물들이 속출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항주성 서쪽에 있는 서호(西湖)는 청산(靑山)이 병풍처럼 둘러섰으며 호숫물이 어찌나 맑은지 십여장이나 되는 밑바닥이 환히 드러다 보일 정도였다. 그 경치의 아름다움이란 류(類)를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때문에 항상 유람객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아 진정 극락이라 할 만 했다. 서호의 북쪽에는 고산(孤山)이란 섬이 있는데 이 섬에서 동쪽으로 약 십 여리에 걸쳐 호수를 가로지르는 산책길이 나 있었다. 이것의 이름은 백제(白堤)라 했다. 당(唐)의 명시인인 백거이(白居易)가 이 지방의 자사(刺史)로 있을 때 쌓은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한낮의 해가 따사롭게 뇌리쬐일 무렵. 서호의 호반을 따라 백제의 오솔길을 한가롭게 걷고 있는 한 인영이 있었다. 그는 누런 황의를 입고 머리가 허옇게 센 반백(半白)의 노인이었다. 황의노인은 한 손에 술병을 들고 있었는데 이미 거나하게 취했는지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황의노인은 주위의 절경에 시흥(詩興)이 고조된 듯 무어라고 흥얼흥얼거리며 휘청거리는 모습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무엇을 발견했는지 노인은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걷고 있는 오솔길의 한쪽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그 느티나무의 기둥 아래 하나의 발이 삐죽 나와 있는 것이다. 황의노인은 술김에도 의아한 생각이 들었는지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느티나무로 다가갔다. 그 발은 흑의를 입은 사람의 것이었다. 황의노인이 느티나무 아래로 가서 살펴보니 누군가가 느티나무의 시원한 그늘 아래 길게 누운 채 팔베게를 하고 잠들어 있었다. 그는 무척 체구가 큰 흑의인이었다. 황의노인은 아직까지 이 흑의인처럼 기골이 장대하고 체구가 우람한 사람을 본 적이 없는지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얼마나 체구가 크던지 그 자가 잠을 자면서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거리는 모습이 꼭 땅거죽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허. 세상에...이렇게 큰 사람도 다 있구나..." 황의노인이 아직도 취기가 몽롱한 가운데 감탄성을 발하고 있을 때 마침 흑의인이 커다란 기지개를 켜더니 천천히 바닥에서 일어났다. "아함...잘 잤다...!" 그는 아가리가 찢어지도록 하품을 하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런...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흑의인은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난 모습을 보니 누워 있을 때보다 훨씬 큰 모습이었다. 황의노인은 그의 일어선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마치 다시 엄마의 뱃속으로 기어들어간 태아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허허참...정말 허우대 하나는 엄청나게 크구나..."


노인이 연신 입을 딱 벌리고 있을 때 흑의인이 노인을 내려다 보더니 그의 손에 술병이 있는 것을 보고는 히죽 웃었다. "노인장. 술 좀 남았소?" 보아하니 이 체구가 태산만한 녀석은 버르장머리는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처음 보는 노인에게 대뜸 술을 달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노인은 그의 기골이 장대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몇 모금은 남았을 걸세. 한 모금 마시겠는가?" 노인이 약간 아쉬운 듯 망설이다가 들고 있던 술병을 내밀자 흑의사내는 거절하지도 않고 넙죽 그것을 받아 들었다. "고맙소. 노인장." 흑의사내는 술병을 닦지도 않고 노인이 방금전 까지만 해도 입을 대고 마셨던 술주둥아리를 자신의 그 하마 같은 목구멍속으로 쳐넣었다. 꿀꺽...꿀꺽.... 그 자의 목젖이 몇 차례 움직이자 순식간에 술병은 바닥이 나버렸다. 황의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아이고 아까워라...그걸 몽땅 마셔버리다니..." 흑의사내는 술병을 목구멍속에서 꺼내더니 입을 쓱 훔치며 입을 벌리고 웃었다. "이 술은 그런데로 먹을 만하군. 그런데 노인장. 한 가지 말좀 물읍시다." 황의노인은 비어 있는 술병을 이리저리 흔들어보며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이고...오늘 하루종일 마실건데 벌써 없어지다니...이제 무슨 낙으로 이 긴긴 낮을 지낸단 말인가?" 흑의사내는 껄껄 웃으며 노인의 어깨를 툭 쳤다. "하하...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해 주면 내가 몇 날 며칠 동안 원없이 술을 마실 수 있도록 해주겠소." 황의노인은 귀가 번쩍 뜨이는지 급히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게 정말인가?" "내가 노인장을 속여서 무엇 하겠소?" 황의노인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무얼 물어보고 싶은가?" 흑의사내는 까치집같이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곳에 고산이 어디 있소?"


황의노인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멍하니 그를 올려다 보다가 한 손으로 앞에 있는 작은 섬을 가리켰다. "저곳이 고산이지 않는가?" 흑의사내는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머리를 탁 쳤다. "이런 제길. 코 앞에 있는 걸 모르고 이리저리 돌아다녔군. 아무튼 이 머리통은 갈수록 쓸모가 없어진다니까." 그는 그 커다란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통을 쾅쾅 내리찍었다. 황의노인은 마치 자신이 그 솥뚜껑만한 주먹으로 머리를 맞는 듯 괜히 몸이 움찔거렸다. 흑의사내는 자신의 머리통을 대여섯 번 때린 다음에야 손을 멈추며 히죽 웃었다. "난 또 고산이라고 해서 열심히 산(山)만 찾았지 뭐요." "산은 산이지. 그런데 저 섬 전체가 바로 산이라네." "그렇구려." 흑의사내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노인을 바라보며 정색을 했다. "그럼 이제 내가 원없이 술을 먹는 방법을 알려줄테니 잘 들으시오." 황의노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입을 주시했다. 그는 혀로 한 번 입술을 축인 다음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동쪽 대로를 쭉 따라가면 하나의 주루가 나온다오. 이름이 강남제일루(江南第一樓)인가 하는데 제법 크고 호화로운 술집이오." 황의노인은 엉겹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건 안다네. 강남제일루는 이 일대에서는 가장 크고 유명한 술집일세." 흑의사내는 손뼉을 탁 쳤다. "그럼 잘 됐군. 노인장은 지금 당장 그 강남제일루로 가시오. 그 강남제일루의 왼쪽 모퉁이를 돌아가면 하나의 고색창연한 건물이 나올거요." 황의노인은 열심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건물은 지붕이 얕고 돌벽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강남제일루의 뒷뜰과 거의 닿아 있소." "......." "지금부터가 중요하니 잘 들으시오. 노인장은 모퉁이를 돌자 마자 자세를 낮추어 바닥에 엎드리시오. 그런다음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으면 재빨리 두 팔과 두 다리를


움직여 그 건물로 접근하시오." "......?" "그런 다음 그 건물의 문을 살짝 밀어보시오. 내가 어젯밤에 자물쇠를 부숴 놓았으니 아마 쉽게 열릴 거요. 그 안에 들어가면 엄청나게 많은 술통들이 노인장을 기다리고 있을 거요." 황의노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올려보며 물었다. "그곳이 어디인가?" 흑의사내는 히죽 웃었다. "어디긴. 강남제일루의 술창고지." 황의노인은 자지러질 듯 놀라서 펄쩍 뛰었다. "뭐라고? 자네는 지금 나보고 강남제일루의 술 창고로 몰래 들어가라는 말인가?" "무얼 그리 놀라는 거요? 해보면 알지만 생각보다는 굉장히 쉽소. 나도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그곳에 들어가서 실컷 마시고 이곳에 와서 한잠 자는 중이었소." 흑의사내는 입맛을 쩍쩍 다셨다. "그곳에 있는 술 중에서도 특히 누런빛이 나고 붉은 색 봉지로 밀봉한 술통에 있는 술이 맛이 기가 막히오. 입에 쩍쩍 달라붙어서 나는 그런 술통만 골라 마셨지. 하지만 스무 통인가밖에 없었는데 내가 모두 마셨으니 노인장은 아쉽게도 먹을 수가 없겠구려." 황의 노인은 입을 딱 벌리고 멍청한 눈으로 흑의사내를 쳐다보았다. 흑의사내는 노인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럼 가서 맛있게 드시구려. 잘 알겠지만 너무 과음하면 몸에 좋지 않으니까 적당히 드시오." 그러더니 휑하니 몸을 날려 고산 쪽으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그의 커다란 몸은 노인의 시야에서 아득히 멀어져 갔다. 그야말로 가공스럽다고 할 수밖에 없는 신법이었다. 황의노인은 멍하니 그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자신이 손에 들고 있는 텅빈 술병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입가에 괴이한 미소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 미소는 처음에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미했는데 점차 짙어지더니 종래에는 사악한 광소로 변해 버렸다. "크흐흐...엽단풍! 네 놈은 과연 이곳에 왔구나. 일단 고산에 온 이상 이곳이 바로 네 놈의 무덤이 될 것이다."


황의노인은 흑의사내가 사라진 곳을 응시하고 있다가 자신도 몸을 날렸다. 스읏! 그의 신형은 그야말로 빛살과 같은 속도로 멀어져 갔다. 그것은 흑의사내의 신법에 비해 조금도 못하지 않은 것이었다. * * * 고산은 작고 아담한 산이었다. 서호의 북쪽에 떠있어 섬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전체가 언덕으로 형성된 산이었다. 고산은 북쪽이 조금 가파르고 남쪽은 완만한 구릉을 형성하고 있었다. 산 전체는 울창한 수림에 덮여 있었고 기암괴석이 많아 천하의 절경으로 이름이 높았다. 육지와 고산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는 백제였다. 서호의 푸른 물살을 가로지르는 백제를 따라 기암괴석과 수림으로 절경을 이루는 고산으로 접어들면 그야말로 자신이 천당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고산의 남쪽 구릉 가운데는 제법 널따란 공터가 있었다. 엽단풍이 그 공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장내에는 두 부류의 인물들이 팽팽하게 대치한 채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엽단풍은 공지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나무 위로 날아올라 가 아래를 주시했다. 우측의 인물들은 거의 사 오십 명이나 되었는데 대부분이 짙은 남색 무복을 걸친 젊은이들이었다. 남의청년들 앞에는 다섯 명의 젊고 늙은 남녀들이 서 있었다. 엽단풍은 그들 중에서 영호해상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같이 오자고 하니까 마음이 급하다며 어제 밤에 부랴부랴 달려가더니 결국 할아버지를 만난 모양이군.' 영호해상의 좌측에는 단단한 인상의 청년이 눈을 빛낸 채 전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청년은 남의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짙은 남색 무복을 입었는데 한 가지 다른 것은 그들과는 달리 무복 위에 붉은 피폭을 걸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영호해상의 우측에는 회색 창포를 입고키가 훤칠한


노인이 우뚝 서 있었다. 노인의 얼굴은 유달리 길었는데 눈빛이 아주 차고 맑아서 멀리 떨어진 엽단풍이 보기에도 그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저 노인이 바로 동해의 괴물이라는 영호덕조로군.' 엽단풍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회포노인의 바로 옆에는 각기 붉은 색 장포와 흰색 장포를 걸친 두 명의 노인이 나란히 서 있었다. 엽단풍은 그들이 동해노사 영호덕조의 의동생이며 요인도의 둘째, 세째 도주(島主)들인 용왕신(龍王神) 두복양(杜復陽)과 장하일절(長河一絶) 서장천(徐長天)일 거라고 생각했다. 요인도의 인물들에게서 십 여장 떨어진 앞에는 단지 네 명의 인물들만이 동그마니 서 있을 뿐이었다. 하나 그들 네 사람을 보는 요인도의 고수들의 얼굴에는 말못할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네 명의 인물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중앙에 우뚝 서 있는 늑대가면을 쓴 인물이었다. 그 자는 키가 무척 컸는데 얼굴에는 마치 살아 숨쉬는 듯한 생생한 늑대가면을 뒤집어썼고, 입고 있는 의복도 늑대의 털로 짠 것이었다. 그 늑대가면의 중앙에 뚫려 있는 두 개의 구멍으로 흘러나오는 안광은 가히 살인적(殺人的)인 것이었다. 늑대가면의 좌우에는 머리를 특이하게 묶은 두 명의 청년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은 양쪽의 머리를 박박 깎은 다음 가운데에 늘어뜨린 머리를 흰색 두건으로 묶어서 뒤로 늘어뜨렸는데 그 모습은 마치 멀리 동영(東瀛)의 고수들을 연상케 했다. 동영의 고수들과 다른 점은 그들의 손에 칼 대신에 길다란 장창(長槍)이 쥐어져 있다는 점뿐이었다. 그들에게서 한 발자국쯤 떨어진 곳에는 화려한 꽃무늬가 수놓아진 채의(彩衣)를 걸친 절세의 미녀가 서 있었다. 그 채의미녀의 나이는 대략 이십대 초반쯤 되어 보였는데 얼굴에 한 줄기 음탕한 기색이 흘러 있어 돋보이는 미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엽단풍은 날카로운 안력으로 그 채의미녀의 가슴 부근에 일전에 태호에서 보았던 홍등의 장미 문양이 선명하게 수놓아져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 장미문양은 정말로 특이해서 쉽게 눈에 들어왔다. 장내에는 수십 명의 인물들이 있건만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요인도의 고수들과 네 명의 인물들은 서로 마주본 채 누구도 먼저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그들 중 상대방을 응시하지 않고 있는 인물은 오직 영호해상뿐이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누군가를 찾는 듯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영호덕조가 힐끗 그녀를 쳐다보았다. "상아(孀兒)야. 대체 누굴 찾는 거냐?" 영호해상은 퍼뜩 놀라 급히 고개를 저었다. "예? 아니에요...." 하나 말과는 달리 그녀의 얼굴은 약간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영호덕조의 눈에 한 줄기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저 애가 집을 나갔다 돌아온 이후 조금 이상해진 것 같구나. 어젯밤에도 불쑥 찾아와서는 아무 것도 묻지 말아 달라니...대체 그 한 달 사이에 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영호덕조는 내심 그녀가 걱정스러워 견딜 수 없었으나 지금은 더욱 더 중대한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마침 늑대가면의 사나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영호노사. 정녕 우리의 제안을 거절할 셈이오?" 그 음성은 몹시 카랑카랑해서 듣는 이의 마음을 괴이하게 후벼팠다. 마치 쇠와 쇠가 긁히는 듯 거칠면서도 그 음성 자체 내에 음독한 살기가 배어 있어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질 지경이었다.

2 영호덕조는 그를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전에도 말했다시피 혼인이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인데 어찌 한 쪽의 일방적인 구애(求愛)로 성사될 수 있겠소? 더구나 혼인을 시키지 않으면 본도(本島)를 귀속시키겠다는 것은 너무나 우리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오?" 늑대가면은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귀속이란 말은 영호노사가 스스로를 너무 비하한 것이고 본좌가 말한 것은 혈악과 요인도의 동맹(同盟)이오." "동맹이란 동등한 입장에서 하는 것인데 지금


당신들의 행태를 보면 우리를 너무도 업신여기고 있소." "흐흐...사소한 일로 대세를 그르치려 하다니 영호노사답지 않군. 그렇다면 정녕 우리와 대적할 셈이오?" 영호덕조의 눈에서도 차가운 한광이 흘러나왔다. "못할 것도 없지. 아무리 혈악이라고 해도 본 도를 우습게 여겼다가는 커다란 낭패를 면치 못할 거요." 늑대가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광소가 점차 커졌다. "크하하...감히 좁아 빠진 요인도 정도로 우리들에게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영호노사. 당신은 보기보다 어리석군." 영호덕조의 곁에 서 있던 홍의노인이 마침내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며 버럭 노호성을 터뜨렸다. "막동(莫童)! 아무리 네가 혈악의 십대고수 중 하나라고 하지만 감히 본 도를 업신여기다니 그러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으냐" 늑대가면의 눈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빛이 흘러나왔다. "두복양. 별 볼 일 없는 요인도의 둘째 도주가 되더니 광오해 졌군. 감히 본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요인도 정도는 본좌 혼자의 힘으로도 충분히 없애 버릴 수 있다 는걸 믿지 못하겠느냐?" 그 말을 듣자 요인도의 고수들의 얼굴에 일제히 분노의 기색이 떠올랐다. 홍의노인은 요인도의 둘째 도주인 용왕신 두복양이었다. 두복양은 늑대가면을 노려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막가야. 잘난 척 하지 마라. 남들은 너희를 두려워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네 놈들을 발가락의 때만큼도 여기고 있지 않다 는걸 알아둬라." "크크크...두복양. 그 말을 지껄임으로서 네 놈은 오늘 본좌의 손에 가장 먼저 죽게 될 것이다." "죽일 놈...!" 두복양은 솟구치는 노화를 참지 못하고 앞으로 성큼 나섰다. "막가야. 겁쟁이가 아니라면 입으로만 떠벌리지 말고 앞으로 나와라. 노부가 오늘 네 놈에게 요인도의 무서움을 여실히 보여주겠다." 늑대가면은 못이 박힌 듯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선 채 냉랭한 조소를 날렸다. "흐흐...너 따위를 상대하는데 본좌가 직접 나설 수는 없지." 그는 슬쩍 오른손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그의 우측에 시립해 있던 청년이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스읏! 청년은 거의 십 여장을 단숨에 날아 두복양의 면전으로 쏘아져 갔다. 하나 그의 몸이 채 두복양에게 닿기도 전에 갑자기 어디선가 예리한 도기(刀氣)가 폭발치듯 청년에게 날아왔다. 청년은 막 장창으로 두복양을 공격하려다 날카로운 도기가 날아들자 슬쩍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옆으로 내려섰다. 어느 틈엔지 두복양의 앞에는 한 명의 붉은 피풍을 한 젊은 무사가 우뚝 서 있었다. "닭잡는데 소잡는 칼을 사용할 수는 없지. 너는 내가 상대해 주겠다." 그는 영호해상의 옆에 서 있던 단단한 인상의 청의무사였다. 그 청의무사는 영호덕조의 수제자로 동해쾌도(東海快刀) 임동영(林銅影)이라는 인물이었다. 임동영은 이십년 내 동해에서 배출된 도객(刀客)들 중 최고로 손꼽히는 절정고수였다. 머리 모양이 괴이한 청년은 싸늘한 눈으로 임동영을 응시하더니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중의 장창을 휘두르며 임동영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두복양이 급히 소리를 질렀다. "동영아. 조심해라. 그 자는 신랑의 수하 중 제일 가는 고수들인 쌍쌍인랑(雙雙人狼)중의 한 명이다." 임동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중의 칼자루를 힘차게 움켜잡았다. 그 순간 어느 새 괴청년의 장창은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그의 목덜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괴청년은 쌍쌍인랑 중의 이랑(二狼)이었다. 쌍쌍인랑은 혈악내에서도 잔인하고 음독하기로 유명한 인물들이었다. 이랑의 창술(槍術)은 확실히 괴이 악랄했다. 쐐액! 분명 일직선으로 곧장 날아오는 것 같은데 유심히 보면 창끝이 끊임없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흔들리는 창끝은 상대로 하여금 도중에 어떻게 변해 어디를 찔러 올 지 도저히 예측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임동영은 무거운 안색으로 그 창끝을 노려보고 있다가 번개같이 수중의 도를 후려갈겼다. "차압!"


까깡! 그가 내갈긴 벼락같은 일도(一刀)는 정확하게 이랑의 창끝에 격중되었다. 한데 도에 격중당해 멈춰질 줄 알았던 창이 부르르 떨리더니 더욱 빠르게 쏘아져 오는 것이 아닌가? "앗?" 임동영은 짤막한 경호성을 터뜨리며 황급히 옆으로 이 장이나 움직였다. 하나, 찌익! 어느 사이엔가 그의 옆구리가 길게 찢기며 한 줄기 선혈이 뿜어나왔다. 임동영이 피하는 순간에 쏘아져 오던 창이 크게 회전하며 그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임동영은 신음을 흘릴 사이도 없이 다시 안색이 변한 채 뒤로 물러났다. 그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창이 다시 선회하며 어느 사이엔가 그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 속도와 변화의 무쌍함은 가히 가공스러울 정도였다. 임동영은 간신히 허리를 굽혀 상대의 창끝을 피했다. 하나 피했다고 느낀 순간 그는 안색이 시퍼렇게 변해 버렸다. 스읏! 분명히 그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던 창끝이 부르르 떨리더니 그대로 아래로 뚝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앗?" "동영아!"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요인도의 고수들이 다급한 경악성을 터뜨렸다. 임동영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전력을 다해 머리 위로 도를 휘둘렀다. 깡! 한 차례의 불똥이 튀겼다. 그와 함께 임동영은 손목과 어깨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신음을 토해냈다. "윽!" 그는 휘청거리며 다섯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의 도는 이미 삼장여 밖으로 떨어진 후였다. 중인들이 놀라 보니 그의 어깨가 뻥 뚫린 채 시뻘건 선혈을 뿜어내고 있지 않은가? "저...정말 무시무시한 창법이구나..!" 두복양이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동해제일의 쾌도라는 임동영이 삼 초도 버티지


못하고 어깨를 꿰뚫리고 말았던 것이다. 단숨에 임동영을 물리친 이랑은 어느 사이에 두복양을 향해 다가들고 있었다. 파파파팍...! 창끝이 조금전보다 더욱 세차게 떨리며 십여 개로 늘어난 듯이 보였다. 두복양은 안색이 변해 황급히 열 두번이나 위치를 바꾸었다. 하나 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간 창은 한 차례 떨리더니 더욱 집요하게 그의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그 떨림이 멈추기 전에는 창도 결코 멈출 것 같지가 않았다. "이....이제 보니 이것은 환영신마창법(幻影神魔槍法)이로구나!" 두복양이 경악성을 터뜨리며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양손을 질풍처럼 휘둘렀다. 꽈르르릉! 십 팔장(十八掌)이 구슬을 엮듯 줄기줄기 쏟아져 나오며 하나의 거대한 장벽을 형성했다. 이랑의 창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그 장벽을 뚫고 들어갔다. 파르르.... 열 여덟 개의장력이 모여서 형성된 장벽을 뚫을 때마다 창끝이 격하게 떨렸다. 하나 비록 속도가 느려지긴 했으나 창은 끊임없이 떨리면서도 조금씩 장벽을 뚫고 두복양의 목을 향해 다가들고 있었다. 천하의 무엇으로도 그 창의 기이한 떨림을 멈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파아아... 마침내 창은 장벽을 뚫고 섬전 같은 속도로 두복양의 목덜미를 향해 폭사해 갔다. 두복양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절대절명의 순간, 쾌액! 돌연 어디선가 하나의 지력(指力)이 날아와 두복양의 목덜미를 관통하려던 창끝에 격중되었다. 쾅! 지력과 창이 부딪쳤는데 어이없게도 폭음이 터져나왔다. 처음으로 그토록 멈출 줄 몰랐던 창의 떨림이 멈춰졌다. 이랑은 창을 거두고 지공이 날아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영호덕조가 침중한 안색으로 서 있었다.


방금전 지공을 날려 두복양을 구한 사람은 바로 영호덕조였던 것이다. 단 일지(一指)만에 이랑의 공격을 격퇴시켰음에도 영호덕조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떠올라 있었다. '내 쇄벽지(碎劈指)에 격중되고도 창을 놓치지 않다니...수하들이 이럴 진데 신랑의 무공은 또 얼마나 고강하겠는가? 보아하니 오늘은 아무래도 길(吉)보다는 흉(凶)이 많겠구나' 그때 늑대가면의 소름끼치는 음성이 들려왔다. "과연 영호노사의 실력은 대단하군. 이랑의 환영신마창법을 멈추게 하다니....하지만 이랑과 대랑(大狼)의 쌍마합격창(雙魔合擊槍)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좌측에 서 있던 청년이 그림자처럼 날아올랐다. 그의 수중에는 어느새 섬ㅉ한 광망을 뿌리는 창이 들려 있었다. 동시에 이랑의 창도 다시 허공을 날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을 본 요인도의 고수들이 벌떼같이 그들에게 덤벼들었다. "이 놈들!" 방금전 이랑에게 단단히 쓴맛을 보았던 두복양이 성난 외침을 토하며 재차 이랑에게 달려 들었고, 삼도주(三島主)인 장하일절 서장천은 대랑의 앞길을 막아섰다. 임동영 또한 떨어뜨렸던 칼을 집어들고 이랑을 향해 날아왔다. 그들은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결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영호덕조는 그들의 격전을 구경하고 있다가 점차 표정이 무거워졌다. 두복양과 임동영이 합세한 쪽은 이랑의 공격을 그럭저럭 막고 있었다. 하지만 단신으로 대랑과 맞선 서장천은 금세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대랑은 이랑보다 더욱 무공이 고강한데다 손에 조금도 사정을 보지 않아 서장천의 전신에는 벌써 몇 군데의 상처가 나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불과 몇 초 되지 않아 서장천이 시체로 변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영호덕조는 급히 뒤를 돌아보며 짤막하게 소리쳤다. "십영(十英)은 삼도주를 도와라." "예!" 낭랑한 외침과 함께 뒤에 서 있던 남의청년들 중 열


명이 뛰어나와 대랑을 향해 덤벼들었다. 그들이 가세하자 서장천은 간신히 급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나 대랑의 무공은 과연 놀라웠다. 열 명이 가세를 했는데도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오히려 우세를 잡아가고 있었다. 영호덕조는 그 광경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과연 대단하다. 혈악에는 저런 고수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 그때 문득 그는 한 쌍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늑대가면이 그를 향해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었다. "영호노사. 이제 본좌가 허언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지? 이래도 고집을 피울 셈인가?" 영호덕조는 결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요인도는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남의 아래로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오." 늑대가면의 두 눈에 번뜩이는 광망이 더욱 짙어졌다. 그는 한동안 무서운 눈으로 영호덕조를 응시하고 있다가 그의 결심이 확고한 것을 깨달았는지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권주(勸酒)를 마다하고 벌주(罰酒)를 받겠다면 할 수 없지. 영호노사. 당신의 잘못된 생각으로 요인도는 오늘로서 무림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 거요." 그와 함께 그의 몸이 순식간에 허공을 압축해 영호덕조의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영호덕조는 이미 그가 손을 쓸 것을 예측하고 있었는지 안광을 빛내며 다섯 손가락을 질풍처럼 휘갈겼다. 파파파파...! 다섯 줄기의 청선(靑線)이 빛살 같은 속도로 늑대가면의 가슴팍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쇄벽지 따위로 본좌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늑대가면은 음산하게 중얼거리며 오른손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그의 손가락이 마치 늑대의 발톱처럼 구부려진 채 다섯 줄기의 쇄벽지력(碎劈指力)에 맞서갔다. 까까깡! 쇠를 갉아먹는 듯한 음향과 함께 영호덕조가 갈겨 낸 다섯 개의 쇄벽지력이 돌기둥에 부딪친 물방울처럼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와 함께 늑대가면의 구부려진 오른손은 영호덕조의 옆구리를 매섭게 찍어 왔다. "신랑조(神狼爪)로구나!" 영호덕조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며 번개같이 이 장옆으로 미끄러지며 쌍장(雙掌)을 휘둘렀다. 파파파팍! 그의 쌍장이 거의 보이지도 않게 휘둘러지며 폭포수와 같은 장력이 줄기줄기 쏟아져 나왔다. "흐흐...삽십육복랑장(三十六覆浪掌)이로군." 늑대가면은 음소를 터뜨리며 주저 없이 그 폭포수처럼 퍼부어지는 장력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오른손이 세차게 휘둘러지는 순간, 콰쾅! 폭음이 터지며 영호덕조의 몸이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으음...." 영호덕조는 자신의 삼십육복랑장이 신랑조에 닿는 순간 맥없이 격퇴되는 것을 느끼고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가 채 숨을 돌릴 겨를도 없이 다시 신랑조가 날아들었다. 그 늑대 발톱처럼 오므라진 다섯 개의 손가락은 그야말로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영호덕조는 황급히 옆으로 비스듬히 몸을 뉘였다. 찌찍! 그의 어깨부근 옷자락이 길게 찢어지며 희미한 핏줄기가 생겨났다. 하나 그 순간 영호덕조는 번개같이 몸을 회전시키며 늑대가면의 관자놀이를 맹렬하게 내리쳤다. 그의 손은 푸르스름한 빛을 띄고 있었다. "청강수(靑剛手)인가?" 늑대가면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냉소를 날리며 영호덕조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던 오른손을 기이하게 뒤틀었다. 그러자 오른손의 팔꿈치 관절이 꺾이며 날아갔던 오른손이 반대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팔꿈치가 어찌 반대 방향으로 꺾여질 수 있단 말인가? 영호덕조가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그의 청강수는 그대로 되돌아온 늑대가면의 신랑조와 격돌하고 말았다. 우둑! 뼈가 부서지는 음향과 함께 신랑조에 부딪친 영호덕조의 왼손이 맥없이 튕겨져 나갔다.


"음...." 영호덕조는 짤막한 신음을 토하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 순간 늑대가면은 비호처럼 달려들며 그의 가슴팍을 향해 오른손을 그어댔다. 파팟! 영호덕조는 사력을 다해 간신히 그 손을 피했으나 어느 새 그의 가슴팍 부근 옷자락이 갈가리 찢겨지며 네댓 가닥의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나 그가 채 신형을 안정시키기도 전에 다시 신랑조가 날아들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멈출 수 없는 죽음의 수레바퀴 마냥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영호덕조의 관자놀이를 향해 쏘아져 왔다. 영호덕조도 이번만은 더 이상 피할 여유가 없는지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한쪽에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영호해상이 사색이 된 채 비명을 질러 댔다. "엽단풍! 당신은 정말 할아버지가 죽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거예요?" 바로 그 순간, "하하...그랬다간 너에게 술을 얻어먹지 못할게 아니냐?" 낭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하나의 돌멩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늑대가면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들었다.

제 16 장 무서운 陷穽 1 쾌액! 그 돌멩이가 날아드는 속도는 실로 가공할 정도였다. 늑대가면은 자신의 뒤통수를 향해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다가서고 있음을 깨닫고 눈빛이 약간 변했다. 자신의 신랑조로 비록 영호덕조의 관자놀이를 으스러뜨릴 수 있으나 그랬다가는 자신도 그것에 뒤통수를 강타 당하고 말 것이 분명했다. 할 수 없이 늑대가면은 번개같이 오른손을 거두며 옆으로 이장을 이동했다. 그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들던 돌멩이는 그가 피하자 그대로 그의 앞에 있던 영호덕조를 향해 쏘아져 갔다.


"앗?" 영호덕조의 얼굴이 해쓱하게 질렸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파아아... 그토록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져 오던 돌멩이가 영호덕조의 머리에 격중되기 직전 저절로 부서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부서진 돌멩이는 먼지가 되어 영호덕조의 발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영호덕조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미 가루로 만든 돌멩이를 이와 같은 속도로 날려보내다니...대체 누가 이토록 엄청난 무공을 지녔단 말인가?' 그 돌멩이는 이미 날아오기도 전에 가루가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을 던진 사람은 교묘하게 거리와 시기를 측정하여 그것이 영호덕조의 코앞까지 오면 자연히 부서지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그 공력과 심기(心機)는 가히 놀라운 것이었다. 늑대가면은 돌멩이가 영호덕조의 앞에서 가루로 변하자 안광에 한 줄기 경악의 빛을 떠올렸다. 그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왠 놈이냐?" 하나 그는 소리를 지를 것도 없었다. 이미 한 사람이 저쪽의 나무 위에서 장내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하하...술 한 잔 얻어먹으려고 천리 길을 달려온 주정뱅이요." 광오한 웃음소리와 함께 거대한 체구의 흑의사내가 늑대가면의 앞에 내려섰다. 그가 나타나자 영호해상이 번개같이 달려와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왜 이제야 나타나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요?" 그녀는 그의 품속에 얼굴을 묻은 채 도리질을 하며 그의 가슴을 마구 때렸다. 흑의사내는 물론 엽단풍이었다. 엽단풍은 그녀가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이와 같은 행동을 할 줄은 몰랐는지라 껄껄 웃었다. "하하...네가 나를 이처럼 반길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자꾸 때리면 나는 아파서 도저히 힘을 쓰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영호해상은 그제야 그의 가슴을 때리던 손을 멈추고 그를 흘겨보았다.


"당신 같은 목석이 내가 때린다고 아픈걸 느끼기나 하겠어요?" "하하...맞는데 안 아픈 사람도 있느냐? 그런데 네가 안겨서 기분은 좋다만 다들 나를 집어삼키려는 듯이 노려보고 있으니 이를 어쩌면 좋으냐?" 이 말에 영호해상은 퍼뜩 정신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다가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한 채 잽싸게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영호덕조는 엽단풍이 나타날 때부터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영호해상이 대뜸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자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는 도대체 영악하고 남자 알기를 우습게 알던 영호해상이 이 어마어마한 체구의 흑의인과 어떤 사이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흑의인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그토록 가공할 무공을 지니고 있는지도 의문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급히 영호해상을 불렀다. "상아야. 이리 오너라." 영호해상은 그에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예. 할아버지." 영호덕조는 엽단풍을 가리켰다. "저 자는 대체 누구냐? 너와는 어떤 사이냐?" 영호해상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하나 그녀가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엽단풍이 성큼성큼 다가오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엽단풍이란 사람이고 당신 손녀와는 술 한잔 얻어먹기로 약속한 사이요." 영호덕조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엽단풍? 그렇다면 자네가 요즘 강호를 온통 뒤흔들어 놓는다는 그 천하광자 엽단풍이란 말인가?"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뒤흔들어 놓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나는 엽씨 성에 단풍이라는 좋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오." 영호덕조는 새삼스런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과연 소문대로 광오하군. 그런데 술 한 잔 얻어먹기로 약속한 사이라니...그게 무슨 말인가?" "별 거 아니오. 당신들을 추근덕거리는 놈들을 혼내주면 그녀가 내게 술을 한 잔 사주기로 약속했다는 말이오." 영호덕조는 어이가 없는지 한동안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의 어떤 미친놈이 술 한 잔 얻어먹으려고 고금독보(古今獨步)한다는 혈악의


고수들을 상대로 싸우려 하겠는가? 영호덕조는 아무래도 믿어지지가 않는지 영호해상을 돌아보았다. "상아야. 이 자의 말이 사실이냐?" 영호해상은 방글방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확실히 그러기로 했어요." "허허참..." 영호덕조는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다시 엽단풍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는 저 자들이 어떤 인물들인지 알고 있나?" 엽단풍은 아무렇지도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혈악인지 뭔지에서 나온 작자들 아니오?" 영호덕조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혈악에서도 어떤 신분의 고수들인지 알고 있나?" 엽단풍은 늑대가면을 힐끗 돌아보더니 다시 싱겁게 웃었다. "저기 늑대가면을 쓴 자는 보아하니 신랑(神狼)이라는 작자이겠고...나머지 떨거지들은 관심이 없어 도무지 모르겠구려." 영호덕조는 이 자가 과연 제정신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랑이 누구인가? 혈악에서도 십대고수의 서열 팔 위에 올라 있는 초절정의 고수가 아닌가? 요인도의 도주이며 동해무림(東海武林)사상 최강의 고수인 자신조차도 쩔쩔매는 가공할 신랑조의 주인을 어찌 강호의 무명소졸 대하듯 한단 말인가? 영호덕조가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서 있을 때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 왔다. "네 놈이 엽단풍이란 놈이냐?" 엽단풍은 신랑을 돌아보았다. "그렇소. 신랑 나으리." 늑대가면, 신랑은 두 눈에 괴이한 광망을 번뜩거렸다. "네 놈은 어떻게 본좌의 정체를 알고 있느냐?"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그것 뿐인 줄 아시오? 당신이 십대 고수 중의 서열 팔위지만 무공실���으로만 놓고 보면 칠위인 독파(毒婆)보다 높고 육위인 비마(飛魔)에 버금간다는 것도 알고 있소." 신랑의 눈에서 뿜어 나오는 광망이 더욱 짙어졌다. "또 무엇을 알고 있느냐?" "당신의 절학은 신랑조지만 그 외에도 구철마수(九鐵魔手)와 귀망인(鬼網印)이란 절예에도


능통하다는 것 정도요." 신랑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놈이 혈악의 일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있다는 말을 듣고 믿지 않았는데 과연 사실이로구나. 하지만 네 놈도 한 가지는 모를 것이다." 엽단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엇이오?" 신랑의 눈가에 음산한 살기가 감돌았다. "오늘 이 자리가 네 놈의 무덤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엽단풍은 껄껄 웃었다. "하하...내 무덤까지 정해 주다니 정말 고맙소. 하지만 당신 혼자 그럴 수 있을까?" "네 놈이 목불을 죽였다는 말을 들었다. 목불과 싸워 간신히 양패구상(兩敗俱傷)을 면할 정도면 본좌와도 엇비슷한 실력이라고 할 수 있지." "정확하게도 아는구려." 신랑의 입가에 괴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하지만 본좌만한 고수가 두 명이 멋있다면 네 놈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을 수 있다." 엽단풍은 입가에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설마 저들을 가리키는 건 아니겠지?" 엽단풍은 턱으로 쌍쌍인랑을 가리켰다. 신랑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흐흐...물론 아니다." "그럼 누구요?" 순간, 어디선가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바로 노부들이지." 그와 함께 장내에는 어느 새 두 명의 인물이 나타나 있었다. 누구도 그들이 언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알 지 못했다. 심지어 영호덕조조차도 그들이 언제 장내에 나타났는지를 몰라 안색이 굳어졌다. 엽단풍은 홀연히 나타난 두 인물을 돌아보다가 눈을 번쩍 빛냈다. "당신은 아까 그 노인장이구려." 나타난 인물 중 좌측에 서 있는 사람은 엽단풍이 방금전 백제의 오솔길에서 보았던 황의노인이었던 것이다. 황의노인은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케도 노부를 기억하고 있군 그래. 자네에게 술


한 병을 강탈당한 사람일세." 황의노인의 얼굴은 아직도 취기가 가시지 않은 듯 했다. 하나 그의 두 눈만은 조금전과는 다른 사악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 취기 어린 얼굴과 사기(邪氣)에 가득찬 눈을 보자 엽단풍은 문득 한 사람의 이름이 뇌리에 퍼뜩 떠올랐다.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끼고 급히 물었다. "당신은 혹시 취사(醉邪)가 아니오?" 황의노인은 주독이 오른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노부가 바로 취사 해장청(海腸淸)일세. 노부를 즉각 알아보다니 과연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통하는 게 있나보군." 황의노인의 얼굴 표정이나 음성은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엽단풍은 이제는 그의 겉모습에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취사 해장청은 혈악의 십대고수 중에서 서열 오위(五位)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때 취사의 옆에 서 있던 인물이 불쑥 입을 열었다. "노부도 알아 보겠느냐?" 엽단풍은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사람은 앙상할 정도로 마른 노인이었다. 얼마나 말랐는지 전신에는 그야말로 뼈와 가죽밖에는 붙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게다가 푸른 힘줄이 얼굴과 손에 그대로 드러나 보여 끔찍스럽기조차 했다. 이렇게 마른 사람은 천하에 두 번 다시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노인의 두 눈에는 푸르스름한 광망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 모양은 영락없이 인광(燐光)이 번뜩이는 해골 같았다. 하나 엽단풍은 그의 전신을 살피자 안색이 경직되었다. "당신은 비마?" 해골같이 마른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단하군. 노부가 비마 소왕손(蕭王孫)이다." 비마 소왕손. 이 금시라도 무덤 속으로 들어갈 듯한 앙상하게 마른 노인이 놀랍게도 혈악의 십대고수 중 서열 육위인 비마였던 것이다.


취사 해장청! 비마 소왕손! 신랑 막동! 혈악의 십대고수중 세 사람이 동시에 나타나자 천하의 엽단풍도 안색이 변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한 사람도 모습을 구경하기가 힘들다는 혈악의 십대고수 중 세 사람이 동시에 모습을 나타냈다! 이것은 결단코 우연일 수가 없었다. 신랑 막동이 굳어진 엽단풍의 얼굴을 바라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이제야 알아차린 모양이군. 우리들은 이미 네가 이곳에 올 줄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엽단풍은 한동안 그들을 둘러보다가 문득 나직하게 탄식을 토해 냈다. "보아하니 내가 고홍, 그 늙은 너구리에게 꼼짝없이 당한 모양이구나." "흐흐...지금까지 그 늙은 너구리에게 당한 사람은 비단 너뿐만이 아니니 자책할 필요는 없다." 막동과 해장청, 소왕손의 세 사람은 천천히 엽단풍을 에워쌌다. "네가 엽철흔의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우리 세 사람이 합치면 당년의 엽철흔이라 해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눈에서 끔찍스러운 살기가 뿜어 나왔다. "너는 오늘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될 것이다." 혈악의 십대고수중 세 사람이 엽단풍을 에워싸자 영호덕조는 물론이고 영호해상의 안색도 대변했다. 하나 그들이 채 엽단풍을 향해 다가가기도 전에 어디선가 한때의 고수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공력이 초절한절정고수들이었다. 그들은 불문곡직하고 요인도의 인물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쌍쌍인랑 두 사람도 영호덕조를 가로막았다. 막동은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엽단풍을 돌아보며 웃었다. "요인도의 피래미들이 너를 도와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말아라. 지금 나타난 자들은 천잔칠마(天殘七魔)인데 저 자들이라면 이곳에 있는 무리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쌍쌍인랑에게 포위되어 있는 영호덕조를 힐끗 바라보았다.


"영호덕조는 절대로 쌍쌍인랑의 쌍마합격창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결국 너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엽단풍은 자신이 완벽한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의 함정은 치밀하고도 무서워 그로서는 헤어나올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혈악의 십대고수중 세 사람이 나타난 것이 그에게는 결정적인 치명타였다. 그의 무공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단신으로는 도저히 그들 세 사람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엽단풍은 이곳에서 쓰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막동과 해장청, 소왕손은 엽단풍을 에워싼 채 조금씩 다가왔다. 그들이 다가옴에 따라 실로 거대무비한 압력이 엽단풍의 전신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엽단풍은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안광을 번뜩이며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하나 그의 양손에서는 구름 같은 경기가 회오리치며 일어나고 있었다. 막동은 그것을 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엽철흔의 경하기를 익혔군. 하지만 구성의 경하기로는 우리 중 한 사람도 당해 내지 못한다." 동시에 그의 오른손이 독특하게 구부러진 채 엽단풍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었다. 쾌액! 신랑조 특유의 괴이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엽단풍은 피하지 않고 오른손을 슬쩍 휘둘렀다. 쿠아앙! 그의 오른손에 끌려져 있던 경하기의 공력이 노도와 같이 신랑조를 향해 쏘아져갔다. 쾅!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폭음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막동의 몸이 휘청거리더니 뒤로 주춤 두 걸음 물러났다. 그에 반해 엽단풍은 몸을 한 차례 휘청거렸을 뿐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막동의 안광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엽단풍을 응시하고 있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경하기가 거의 십성(十成)수준이구나...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엽단풍은 담담하게 웃었다. "아마 바깥바람을 좀 쐬었더니 공력이 불어난 모양이오." 막동은 한 차례 몸을 떨다가 무언가를 느낀 듯 안광이 무섭게 번득거렸다. "그렇다면 네 놈은 목불과 싸울 때 전력을 다하지 않았단 말이냐?" 엽단풍은 히죽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무불상 하나 때려눕히면서 있는 힘을 다한다면 사람들이 비웃을 거 아니오?" 막동은 어이가 없는지 멍하니 엽단풍을 바라보았다. 하나 이내 그는 악독한 음성을 흘렸다. "네 놈이 일부러 무공을 숨기고 있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십 성이 아니라 십이성(十二成)의 경하기를 익혔다 해도 우리 세 사람을 당할 수는 없다." 엽단풍은 조금도 겁먹거나 두려운 표정이 없었다. "당신은 항상 싸우기 전에 그렇게 수다를 떠는 버릇이 있소?" "죽일 놈!" 막동은 이를 부드득 갈더니 신랑조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그는 단숨에 엽단풍을 죽이기로 작정을 했는지 처음부터 무시무시한 살초(殺招)를 펼쳐 냈다. 파파파팍! 허공이 온통 늑대의 발톱 같은 신랑조의 조영(爪影)에 휩싸여 버렸다. 엽단풍은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며 아홉 번이나 연거푸 주먹을 내질렀다. 바로 구벽신권이었다. 구벽신권과 신랑조는 허공에서 눈 깜빡할 새 수십 번이나 부딪쳤다. 콰콰쾅! 격렬한 폭발음이 연거푸 터지며 막동과 엽단풍의 몸이 거의동시에 뒤로 주춤 물러났다. 막동이 네 걸음 물러난 반면에 엽단풍은 두 걸음을 후퇴했다. 하나 엽단풍이 채 신형을 가다듬기도 전에 하나의 주름진 손이 날아들었다. 그 손은 어찌나 말랐던지 힘줄과 핏줄이 피부 위로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런데 그 손을 본 엽단풍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백골소혼수(白骨消魂手)구나!" 그는 한 눈에 그것이 비마 소왕손의 백골수혼수임을


알아보았다. 소왕손의 백골소혼수는 마도사상 가장 강력한 열 가지 장공(掌功)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 손에 일단 스치기만 해도 상대는 전신이 썩어 들어간 채 그대로 절명해 버리는 무시무시한 무공이었던 것이다. 엽단풍은 정면으로 맞받지 않고 옆으로 두 걸음 비켜섰다. 백골소혼수가 아슬아슬하게 그의 어깨를 스쳐 갔다. 단순히 스치기만 했는데도 어깨 부근 옷자락이 먼지로 화해 버렸다. 하나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 "여기도 있다." 백골수혼수가 엽단풍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에 무언가 강력한 강기가 그의 등판을 사정없이 가격했다. 그것은 너무도 갑작스럽고 빨랐는지라 천하의 엽단풍으로서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쾅! 벼락치는 듯한 폭음이 터지며 그의 등판이 너덜너덜해졌다. 엽단풍은 속에서 울컥 핏물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강기의 위력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엽단풍은 출도 후 처음으로 막대한 고통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렸다. 그의 등뒤에서 희미한 놀람의 음성이 들려 왔다. "호신강기가 극(極)에 이르렀구나. 노부의 대뢰인(大雷印)을 맞고도 쓰러지지 않다니..." 방금 그의 등을 가격한 사람은 취사 해장청이었다. 해장청은 엽단풍이 자신의 공격에 정면으로 강타 당하고도 몸을 휘청거린 채 버티고 서 있자 의외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의 무공은 세 사람 중에서도 가장 강해서 결코 무방비 상태로 견뎌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나 연환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쾌액! 엽단풍이 간신히 치밀어 오는 핏물을 억눌러 삼키는 순간에 다시 막동의 신랑조가 날아들었다. 그때 엽단풍은 해장청의 대뢰인에 격중당한 충격으로 들끓는 기혈을 가다듬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피하지 못하고 양손을 세차게 휘둘렀다. 쿠아아앙! 광도번천수의 노도와 같은 경력이 휘몰아쳤다. 하나 광도번천수와 신랑조가 부딪치려는 순간에


그의 옆구리로 다시 무언가 차가운 기운이 다가들었다. 그것은 소왕손의 백골소혼수였다. 앞에는 신랑조, 옆으로는 백골소혼수! 두 절대 공력이 밀어닥치자 엽단풍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오른손으로는 계속 광도번천수를 날린 채 왼손으로는 경하기의 공력을 끌어올려 백골소혼수를 향해 번개같은 일장(一掌)을 갈겨댔다. 콰쾅! 두 가닥의 굉음이 터져나왔다. 엽단풍의 신형이 술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비록 신랑조와 백골소혼수를 동시에 받아냈으나 그 가공할 경력을 완전히 감당하지 못해낸 것이다. 막동과 소왕손도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들은 설마 엽단풍이 맨 손으로 그들의 합공을 견뎌낼 줄은 몰랐는지 낮빛이 약간 변했다. 하나 그때 엽단풍은 무언가 괴이한 기운이 자신의 뒷통수를 향해서 쏘아져 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는 그대로 바닥으로 몸을 날리며 두 바퀴를 굴렀다. 콰쾅! 방금전 까지만 해도 그가 서 있던 자리가 완전히 폐허처럼 변해 버렸다. 엽단풍은 절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느 새 해장청의 대뢰인이 날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놀랄 마음을 추스릴 사이도 없었다. 자신의 대뢰인이 빗나간 것을 안 해장청이 두 눈에 살광을 번뜩이며 정면으로 엽단풍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숨돌릴 틈도 없는 순간이었다. 번쩍! 해장청의 손에서 번갯불이 피어올랐다. 인간의 손에서 어찌 번갯불이 피어오를 수 있단 말인가? 하나 이것이 바로 해장청이 천하를 주름잡았던 대뢰인이라는 초상승의 내가장력(內家掌力)이었던 것이다. 해장청은 오직 이 한 쌍의 대뢰인만으로 혈악의 십대고수중 다섯번째 위치를 차지했던 것이다. 엽단풍은 이미 전신의 기혈이 들끓고 약간의 내상을 입어 안색이 창백해 있었다. 그는 무시무시한 번갯불이 자신의 코앞으로 날아들자 눈빛이 침중해지며 천천히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찌보면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나아가는 오른손. 그와 함께 무언가 괴이한 기운이 그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왔다. 고오오.... 주위의 공기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마구 요동을 쳤다. 번갯불은 사정없이 그 압력의 중심을 강타해 버렸다. 쿠콰콰콰.... 엄청난 굉음이 터지며 주위 사방이 폭풍과 같은 경기에 휩쓸려 버렸다. 그 격돌의 여파가 어찌나 강력했던지 이십 여장 밖에서 싸우고 있던 천잔칠마 중 한 명과 요인도의 고수 두 사람이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먼지가 걷히며 장내의 광경이 드러났다. "아....!" 누군가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엽단풍은 끊임없이 몸을 휘청거린 채 금시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의 가슴팍 부근 옷자락은 마치 불에 타버린 듯 새카만 자국만을 남긴 채 사라져 맨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가뜩이나 헝클어졌던 머리는 완전히 뒤엉켜져 버렸고 입가로는 실핏줄 같은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해장청 또한 무사하지는 못했다. 항상 주독이 올라 불그스름하던 그의 낯빛은 평상시와는 달리 해쓱하게 변해 있었다. 누런 황의는 여기저기가 찢어졌고 눈빛도 탁하게 흐려져 있었다. 그의 낯빛이 시체처럼 창백해지더니 돌연 한 모금의 핏덩이를 토해냈다. "우육...!" 해장청은 한바탕 피를 토한 후에야 겨우 정신이 드는 듯 고개를 들어 엽단풍을 바라보았다. "보...복마곤룡장을 극성(極性)에 이르도록 연마했군...그러지 않고서는 노부의 대뢰인을 받아내지 못했을텐데..." 그의 눈빛이 점차 번뜩이면서 끔찍한 사기가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네 무공은 나이를 초월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너의 밑천이 바닥난 이상 죽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는 천천히 엽단풍을 향해 다가갔다. 그와 함께 막동과 소왕손도 살광을 뿌리며


엽단풍에게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너는 일대일(一對一)이라면 우리 개개인보다 강할지 모르지만 시기를 잘못 선택했다. 혈악은 결코 혼자의 힘으로 상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단번에 엽단풍을 없애기로 결심했는지 전신에서 풍겨나오는 기운이 지금까지와는 판이하게 그야말로 살인적이었다. 누가 보기에도 엽단풍의 모습은 바람 앞의 등불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멀쩡할 때도 그들을 당해내지 못했는데 심각한 내상까지 입은 지금 어떻게 그들의 합공(合攻)을 견뎌 낼 수 있겠는가? 엽단풍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 보았다. 요인도의 고수들은 벌써 삼분의 일 이상이나 천잔칠마의 손에 쓰러져 있었다. 살아남은 고수들은 사력을 다해 천잔칠마에 대항하고 있었으나 잠시 후면 그들이 모두 쓰러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영호덕조 또한 쌍쌍인랑의 합공을 받고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었다. 그는 비록 쌍쌍인랑보다 뛰어난 고수였으나 쌍쌍인랑이 펼치는 독특한 합격창술(合擊槍術)을 뚫지 못하고 고전하고 있었다. 영호해상은 한쪽에서 불안과 걱정 어린 표정으로 엽단풍을 응시하고 있었으나 그를 도울 힘은 있지 않았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를 도와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엽단풍! 그는 정녕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한단 말인가?

제 17 장 恐怖의 刀法 1 엽단풍은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헝클어진 흑발에 가려 있어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해장청등 세 사람은 엽단풍의 지척으로 다가왔다. "엽단풍! 이제 각오는 되어 있겠지?" 엽단풍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해장청은 두 눈에 진득한 사기를 내뿜은 채 천천히 양 손을 들어올렸다.


찌리릿! 그의 들어올려진 양손에서 작은 번갯불이 연신 피어올랐다. 단순히 공력을 끌어올리기만 해도 이 정도이니 그 손이 휘둘러지면 실로 어마어마한 내전(雷電)이 뿜어 나올 것이 분명했다. 막동의 손가락은 어느 새 기이하게 구부러진 채 거무튀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그는 자신의 독보적인 신랑조에 구철마수마저 함께 끌어올린 것 같았다. 소왕손의 주름진 양 손 또한 이미 백골소혼수의 공력을 가득 담고 있었다. 삼 인(三人)의 초강고수가 공력을 가득 끌어올리자 장내는 그야말로 숨도 쉬기 어려운 압력으로 가득 찼다. 실로 가슴이 터질 듯한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돌연 엽단풍이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오른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할 수 없군. 이 도법(刀法)은 안 쓰려고 했는데..." 그의 음성은 너무도 나직해서 아무도 알아들은 사람이 없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무라도 벨 수 없을 것 같은 녹이 잔뜩 슬은 칼 한 자루가 매어져 있었다. 엽단풍은 느릿느릿 그 고철덩어리 같은 녹슨 칼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순간, "죽어랏!" 섬뜩한 폭갈과 함께 해장청이 양 손을 세차게 휘둘렀다. 버 - 언 - 쩍! 그의 양손에서 눈을 멀게 하는 듯한 강렬한 번갯불이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막동은 전력을 다해 신랑조로 엽단풍의 목덜미를 찍어왔고, 소왕손의 백골소혼수 또한 미끄러지듯 날아들었다. 콰콰콰콰콰.... 번천지복(飜天地覆)할 엄청난 경기가 엽단풍의 사방을 완전히 에워싸 버렸다. 설사 대라신선이라 해도 그 가공할 경기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형체조차 남아 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단풍!" 영호해상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구슬픈 비명을 질렀다.


엽단풍의 전신이 갈가리 찢겨질 순간, 스릉! 그의 손은 천천히 녹슨 칼을 뽑아 들었다. 그의 칼이 뽑혀 나오면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끼이이이.... 돌연 사람의 고막을 후벼파는 듯한 괴이한 소음이 터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 소음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주위에 있던 몇 명의 고수들이 귀를 틀어막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와 함께 시커먼 도기(刀氣)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츠츠츠츳...! 그 검은 도기는 마치 악마의 먹구름처럼 순식간에 장내를 뒤덮어 버렸다. 막 엽단풍의 전신을 짓쳐들어오던 해장청등은 난데없이 터져나오는 괴이한 소음에 흠칫했다가 엽단풍이 휘두른 칼에서 시커먼 도기가 뿜어 나오자 안색이 대변했다. "이....이것은...." 그 순간 그들이 펼쳐 낸 막강한 경기와 검은 도기가 허공에서 정면으로 마주쳤다. 츠아아악! 마치 거대한 비단폭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이 들려왔다. 동시에 그토록 막강한 위세로 닥쳐들던 경기들이 쭈욱 갈라지며 그 사이로 경악에 가득찬 해장청 등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들의 옷은 여기저기가 잘려진 채 가느다란 핏줄기를 내보이고 있었다. 엽단풍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향해 몸을 날리며 칼을 좌에서 우로 그어댔다. 치치치칙... 듣기만 해도 소름이 오싹 끼치는 음향이 울리며 시커먼 도기가 비틀거리고 있던 막동의 몸을 그대로 가르고 지나갔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막동의 머리통이 그대로 잘려나갔다. 엽단풍은 다시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소왕손을 향해 날아갔다. 소왕손은 안색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진 채 뒤로 물러났다. 하나 그때 엽단풍의 도에서 뿜어 나오는 검은 도기가 급속도로 확장되며 삽시간에 소왕손의 몸을 휘감아 버렸다.


소왕손은 사색이 된 채 백골소혼수를 휘둘렀다. 츠악! 마치 악마의 이빨처럼 시커먼 도광(刀光)이 번뜩인 순간 소왕손이 펼쳐 낸 백골소혼수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와 함께 그의 가슴이 쩍 갈라지며 시뻘건 피분수가 솟구쳐 올라왔다. "크윽!" 소왕손의 비쩍 마른 신형이 크게 흔들리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엽단풍은 눈 깜짝할 사이에 막동과 소왕손의 몸을 베어 넘기고 바닥에 내려서지도 않은 채 허공에서 빙글 돌더니 그대로 해장청을 향해 쏘아져 갔다. 츠츠츠츳! 예의 그 끔찍한 소성이 울려퍼지며 먹물 같은 도기가 구름처럼 해장청을 향해 몰아 쳐갔다. 해장청은 이를 악문 채 대뢰인을 다섯 번이나 연거푸 갈겨댔다. 파파팟! 바로 대뢰인수법 중에서 가장 무서운 오뢰결인(五雷缺印)이었다. 하나 오뢰결인은 먹물 같은 도기에 닿은 순간 그대로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해장청은 자신이 펼쳐낸 독보적인 오뢰결인이 도기에 닿은 순간 맥없이 튕겨져 나가는 것을 깨닫고 안색이 해쓱해진 채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 순간 그는 가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해장청은 몸을 멈춘 채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가슴은 턱밑에서 아랫배까지 길게 잘라진 채 시뻘건 선혈을 뿜어내고 있었다. 해장청은 멍하니 잘려진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엽단풍은 수중에 녹슨 칼을 든 채 그의 이 장 앞에 서 있었다. 해장청은 그 칼에서 한 방울 한 방울씩 핏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다가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이건 염왕도법(閻王刀法)이구나." 엽단풍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염왕도법마저 익히다니...넌...정말 엽철흔의 자식이구나..." 엽단풍은 여전히 말없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엽철흔은 이십 년 전에 죽었는 줄 알았는데....그래서 네가 엽철흔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는데..." 엽단풍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나를 너무 경시했소." 해장청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여...엽철흔의 염왕도법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건 정말 무섭군..." 문득 해장청은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염왕도법이 다시 나타나다니...냉취독(冷聚獨)! 이제는 별 수 없이 당신이 나서야겠군...!" 해장청은 미친 듯이 웃다가 가슴을 부여잡은 채 천천히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삐져나오려는 내장을 억지로 집어넣다가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엽단풍은 한동안 싸늘하게 식어 가는 해장청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다가 칼을 거두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장내의 격전은 어느 새 그쳐 있었다. 모두의 시선은 공포와 경악에 젖은 채 그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실로 천하가 경동할 것이다. 혈악의 십대고수중 세 사람이 단 한 사람의 손에 의해 모두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어버렸으니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엽단풍은 그들을 쭈욱 훑어 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자는 모두들 고개를 떨구거나 눈을 돌렸다. 혈악의 십대고수중 세 사람을 단신으로 도륙한 그와 시선을 마주칠 담량을 지닌 사람은 감히 없었다. 그때 하나의 작은 인영이 놀란 참새처럼 날아와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단풍!" 엽단풍은 그 인영을 보지 않아도 그것이 영호해상임을 알 수 있었다. 영호해상은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어와 그의 커다란 몸을 부둥켜 안은 채 눈물을 글썽거렸다. "당신...무사했군요." 엽단풍은 그녀를 내려보며 피식 웃었다. "너는 툭하면 남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구나." 영호해상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도리질을 했다. "몰라요. 나는...당신을 만나면서부터 변했어요." "허허...많은 사람들이 그러지. 나도 좀 변하고


싶은데 아쉽게도 아직 나를 변하게 해줄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엽단풍은 커다란 손을 들어 영호해상의 눈가에 묻은 물기를 닦아 주었다. "너는 참 울기도 잘하는구나. 어째서 이렇게 툭하면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거지?" 영호해상은 입을 삐쭉거리다가 해맑게 웃었다. "보통 때 같으면 당신이 이렇게 나를 놀리면 성질을 부리겠지만 지금은 참겠어요." 엽단풍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러느냐?" "당신이 살아주었기 때문이에요." 영호해상의 눈에는 다시 뿌연 물막이 피어올랐다. "나는 아까 당신이 영락없이 죽는 줄로만 알았단 말이에요." 엽단풍은 그녀를 내려보며 빙그레 웃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 "그래도 당신은 용케 살아났어요." "그래. 나는 목숨이 고래 힘줄보다도 질긴 사람이기 때문이야. 아니면 내가 너무 재수가 없기 때문에 염라대왕이 나를 불러들이는걸 피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영호해상은 그의 말에 입가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요. 당신은 정말 염라대왕보다도 재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하하...그래서 너는 너의 재수가 없다 는걸 증명하려고 이렇게 나를 끌어안고 있는 거냐?" 영호해상의 얼굴이 새빨개지며 급히 그의 품속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샐쭉해져서 귀여운 입을 삐쭉거리다가 문득 영호덕조를 발견하고는 깡총거리며 그에게로 달려갔다. "할아버지." 영호덕조는 의복이 여기저기가 찢겨지고 군데군데 혈흔(血痕)이 내보였으나 다행히도 큰 부상은 입지 않았다. 영호덕조는 우두커니 엽단풍을 바라보고 있다가 돌연 탄식을 했다. "무림역사상 저 자와 같은 나이에 저와 같은 무공을 익힌 사람이 있다는 말을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정말 노부는 그동안 우물 안에 개구리에 불과했구나." 그의 음성에는 착잡한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사실 그는 지금까지 동해요인도에 살면서 자신의


무공이 강호의 최절정수준이라고 은근히 자부하고 있었다. 한데 오늘 나타난 고수들은 하나같이 그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무서운 실력들을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 혈악의 이류급 고수들인 쌍쌍인랑조차도 영호덕조로서는 벅찬 상대였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엽단풍이 보여준 무공은 그야말로 가공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영호덕조는 무공의 세계란 끝없이 광활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2 그때 엽단풍의 앞으로 하나의 인영이 다가왔다. 엽단풍이 보니 그 인영은 놀랍게도 지금까지 아무런 말이 없이 한쪽에 서 있던 채의미녀가 아닌가? 채의미녀의 가슴에 새겨진 진홍색 장미문양이 한층 더 선명하게 보였다. 채의미녀는 고혹적인 모습으로 엽단풍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살며시 눈웃음을 쳤다. 남자라면 누구나가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유혹적인 웃음이었다. "당신이 바로 그 유명한 엽단풍이로군요." 엽단풍은 그녀의 요염한 미소를 보자 괜히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렇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요?" 채의미녀는 길다란 속눈썹을 가늘게 떨며 살짝 웃었다. 양쪽에 볼우물이 깊게 파여 짜릿한 느낌이 들게 했다. "나는 허연(姬燕)이라고 해요. 남들은 나를 환락장미(歡樂薔薇)라고도 부르죠."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환락장미라...당신은 장미부인과 어떤 관계요?" 채의미녀, 희연은 잠시 멈칫거렸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새빨간 혀로 살짝 축인 다음 다시 방긋 웃었다. "장미부인은 나의 사부님이세요. 이제보니 당신의 견문도 대단하군요. 사부님을 알다니..." "하하...장미부인이 혈악의 제일미인(第一美人)이라는 소문을 많이 들었지. 나는 원래 미녀에게 관심이 많아서 그런 소문에는 아주 정통하다오." "그렇군요. 그럼 내 이름은 듣지 못했나요?" 그녀는 도발적으로 물었다.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장미부인에게 세 명의 제자가 있다는건 알고 있는데 아쉽게도 그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듣지 못했소. 당신을 보니 좀 더 자세하게 알아두지 못한 게 후회가 되는구려." 희연은 묘한 미소를 떠올리며 그의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당신이 나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앞으로도 기회는 많이 있어요." "그거 다행이로군." "나는 당신같이 강한 남자를 좋아해요.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제아무리 천만금을 준다 해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나는 정말 운이 좋은 ���나이로군. 당신 같은 미인에게서 인정을 받다니 말이오." 엽단풍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그녀의 말을 넙죽넙죽 받았다. 한쪽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영호해상의 눈빛이 표독스러워지며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이 불한당 같은 녀석과 요염한 계집년을 박박 쥐어뜯어 놓고 싶었으나 어디 이들이 무슨 짓거리를 하나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는 심산에서 솟구치는 화를 간신히 억눌러 참았다. 희연은 엽단풍이 자신의 말에 반응을 보이지 좀 더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오더니 그의 듬직한 어깨에 뱅어같이 하얀 손을 살짝 갖다 대었다. "당신같이 체구가 크고 사내다운 사람은 처음 보았어요. 당신만 원한다면 우리는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어요." 엽단풍은 입을 헤벌레 벌리며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자신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촉감을 즐기고 있었다. "좀 더 가까워지다니....어떻게 말이오?" 희연은 더욱 다가오며 그의 얼굴에 뜨거운 입김을 내 쏟았다. "그건 당신 상상에 맡기겠어요. 강한 양반!" 그녀의 입김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진한 여인의 체취와 향기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적어도 뜨거운 심장을 지닌 사내라면 이와 같이 아름다운 여인의 자극적인 유혹을 받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나긋나긋한 손으로 엽단풍의 어깨를 살며시 주무르고 있지 않은가? 어깨를 주무르던 손은 조금씩 내려와 그의 딱벌어진


가슴 부위에 머물러 있었다. 엽단풍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연신 입가에 미소를 그치지 않으며 우두커니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서 있었다. 희연은 짙은 속눈썹을 떨며 요염한 입술을 살짝 벌렸다. "어때요? 당신은 좀더 호젓한 곳으로 가고 싶지 않나요?" 엽단풍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가고 싶소. 그리고 이왕이면 잠도 한 숨 자면 더욱 좋겠지." 그녀는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입가에 교태로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성질도 급하군요. 하지만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들었어요." 그녀의 손길은 이제 가슴을 지나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장내에는 그들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중인환시리에 이와 같은 행동을 취하다니 정말로 대담한 여인이 아닐 수 없었다. 가관인 것은 엽단풍의 표정이었다. 그는 아가리가 찢어지게 웃으며 금시라도 그녀의 몸을 덥석 안아 들고 그 자리에 나뒹굴 기세였다. 희연은 자신의 허리를 안아오는 그의 손길을 살짝 피하며 눈웃음을 쳤다. "이곳에선 안돼요." 엽단풍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구려." "그렇다면 왜 나를 데리고 이곳을 벗어나지 않지요?"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아직 술을 얻어먹지 못했거든." 희연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뭐라고요?" 그는 한쪽에 서서 쌍심지를 돋운 채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영호해상을 가리켰다. "저기 서 있는 저 아가씨에게 술을 한 잔 얻어먹기로 했는데 아직 먹지 못했소. 술을 한 잔 마신 다음에 가도록 하지." 희연은 살짝 아미를 찌푸렸다. "술이라면 다른 곳에 가서 마실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나는 그녀가 따라 주는 술을 마시고 싶소." "술이라면 나도 따를 줄 알아요."


엽단풍은 문득 껄껄 웃었다. "하하...당신 손은 혈도(穴道)만 제압하는 게 아니라 술도 따를 줄 안단 말이오? 거참 놀랍군." 그의 가슴 부위를 어루만지던 그녀의 손끝이 멈칫거렸다. 그와 함께 그녀의 속눈썹이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부르르 떨렸다. "그게 무슨 말이지요?" 엽단풍은 그녀를 내려보며 빙그레 웃었다. "당신은 지금까지 내 몸을 애무하는 척 하며 상체의 열 두개 대혈(大穴)을 눌렀지 않소?" 희연의 안색이 싹 변했다. 이제까지 요염하고 일견 음탕해 보이던 그녀의 눈빛이 차가워지며 비수같이 예리한 눈빛이 번뜩거렸다. 그녀는 한동안 그를 올려 보다가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았지요?" "하하...그게 무어 그리 대단하다고. 당신의 손이 유달리 새하얀 것을 보고 소녀산수(素女散手)를 익혔구나 생각했지. 아니나 다를까. 당신은 그 나긋나긋한 소녀산수로 내 몸을 정신없이 더듬더군." 희연은 잠시 표독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이내 싸늘하게 웃었다. "흥! 내가 펼친 것이 소녀산수 인줄 알면서도 가만히 있다니...당신은 너무 자만했어요. 소녀산수에 제압 당하면 아무리 대단한 무공을 익히고 있어도 내공을 끌어올릴 수 없다 는걸 몰랐군요." 엽단풍의 고개가 갸우뚱거리더니 안색이 갑자기 굳어졌다. "과연....이상하군." 이 말에 영호해상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녀는 자신이 조금전까지만 해도 그를 죽일 놈...나쁜 놈하며 속으로 갖은 욕을 한 것도 잊어버리고 급히 그에게 달려왔다. "당신...어디가 이상해요?" 엽단풍의 눈빛은 흐리멍덩해졌고 전신에 맥이 탁 풀린 것 같았다. "몸이 이상해..." 영호해상은 답답하고 속상해서 자신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운 음성으로 말했다. "어쩐지 여자를 그렇게 밝힐 때부터 수상하다니...기어코 당신은 여자 때문에 일을 망치게 되었군요." 엽단풍은 그녀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너는 또 앙탈을 부리는구나. 이번엔 뭐가 불만이냐?"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와요?" "그럼 웃지 내가 울어야겠느냐?" 영호해상은 그를 노려보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이제 내공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태연해요?" 엽단풍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내가 내공을 사용할 수 없다고 누가 그러더냐?" 영호해상은 어처구니가 없어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당신이 방금 그랬잖아요. 몸이 이상하다고..." "그런데 그게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영호해상은 정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저 여자가 그랬잖아요. 소녀산수에 당하면 내공을 사용할 수 없다고..."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너는 저 여자 말은 무조건 다 믿느냐?" 이 말에 영호해상은 물론이고 한 쪽에서 싸늘한 눈으로 이들을 바라보고 있던 희연의 얼굴마저 홱 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엽단풍은 영호해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짐짓 엄숙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잘 모르는 모양이다만 강호에서 만나는 여자들의 말은 절대로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된다. 특히 얼굴이 예쁘고 눈빛이 요염한 여자일수록 내뱉은 말 중에 진실이 드문 법이지." 영호해상은 영문을 몰라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그 자리에서 펄쩍 뛰며 소리쳤다. "당신은 내공을 제압 당하지 않았군요?" 엽단풍은 껄껄 웃었다. "하하...이제야 그걸 알았구나." 영호해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올려 보며 물었다. "하지만 아까는 몸이 이상하다고 했잖아요." "그렇지. 분명히 이상했다." "그런데..." 엽단풍은 빙긋 웃으며 턱으로 희연을 가리켰다. "그건 저 여자가 내공을 사용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으니 이상하다고 한 거다." 엽단풍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내가 이상하다고 할건 내공을 제압


당했다는 뜻이 아니라 내공이 멀쩡하다는 뜻이었다." 영호해상은 그제야 안색이 풀어져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은 정말...." 그녀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가 걱정이 되어 노심초사했던 자신이 생각나자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나 약아빠진 엽단풍은 그때 이미 희연에게로 시선을 돌린 채 입을 열고 있었다. "당신은 궁금하나 본데 사실대로 말해 주지." 희연은 아직도 그의 말을 반신반의하는 듯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당신의 소녀산수는 비록 대단하지만 내가 익힌 내공은 전신의 혈도가 제압 당한다고 해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천하에서 유일한 것이오." 희연은 불쑥 물었다. "그게 무엇인가요?" "경하기." 희연의 눈빛이 강렬하게 반짝였다. 그녀는 잠시 엽단풍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 무공을 익힌 사람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고 하던데..."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당신이 모르는 것이 어찌 하나 둘이겠소?" 희연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하...장미부인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미색(美色)이 절륜하고 재지(才智)가 탁월할 뿐 아니라 오만하고 도도해서 왠만한 사람은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고 했는데 나는 오늘 그중 한 사람의 나긋나긋한 애무까지 받았으니 운이 너무 좋은 것 같소." 희연은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으나 이내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보기보단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로군요. 오늘은 내가 졌다는 것을 인정하겠어요." "그렇게 순순히 자신의 패배를 시인한다는 것은 사내대장부라도 하기 어려운 일이지." 희연은 그의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하나의 봉투를 꺼냈다. 그러더니 그 봉투를 엽단풍에게 내밀었다. "받으세요." 엽단풍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엇이오? 설마하니 내게 연애 편지를 보내는 건 아닐테고."


희연은 쌀쌀맞은 음성으로 말했다. "고 노인이 당신에게 보내는 거예요." "고 노인?" "당신은 독효 고홍을 몰라요?" 엽단풍은 흠칫 놀랐다. "아! 그 고 노인. 그가 왜 내게 편지를 보낸단 말이오?" "고 노인은 당신이 오늘 살아서 고산을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했어요. 하지만 만에 하나 당신이 삼대고수의 합공을 받아낸다면 그때 이 편지를 전해 주라고 했어요." 엽단풍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독효 고홍이 간계가 많고 심기가 뛰어나다는 건 이미 직접 겪어서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고홍이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 내심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늙은 너구리가 이토록 내게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군." 엽단풍은 그녀의 손에서 봉투를 받아 열어 보았다. 봉투 안에는 단정한 필체로 쓰여진 한 장의 편지가 들려 있었다. <엽단풍. 자네가 이 글을 읽을 확률은 천 분지 일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만에 하나 자네가 정말로 엽철흔의 아들이라면 그 세 명의 합공 속에서도 죽지 않을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이 글을 남기네. 이 글을 읽었다는 것은 자네가 곧 엽철흔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해주네. 그리고 그것은 자네와 혈악은 결코 양립(兩立)할 수 없다는 뜻이지. 이제 노부는 자네에게 한 가지 정보를 알려주어 다시 한번 자네의 운을 시험해 보고자 하네. 공손단경을 소주의 고소대(姑蘇臺)에 모셔 놓았네. 자네가 이틀 내로 그곳에 오지 않으면 그녀는 냉공자의 여자가 된다 는걸 보증하지. 자네가 과연 늦지 않게 도착해서 그녀를 구출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네.> 제일 밑에는 <고홍>이라는 서명이 있었다. "망할 놈의 늙은이..." 엽단풍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 나왔다. 공손단경은 그가 중주삼사와 냉우빙을 혼내준 후에


접수(?)하기로 약속한 여자가 아닌가? 그런데 이 망할 놈의 늙은이가 산통을 깨려 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으드득 갈며 편지를 힘껏 움켜쥐었다. 파스스... 편지가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먼지로 화해 버렸다. 희연은 힐끗 그를 보고 있다가 몸을 돌렸다. "이제 용무가 끝났으니 나는 돌아가겠어요." 그녀는 쌍쌍인랑과 천잔칠마를 대동하고 장내를 떠나갔다. 엽단풍은 내친 김에 쌍쌍인랑과 천잔칠마를 모두 없애 버리려 했으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들이 떠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자 장내에는 요인도의 인물들만이 남게 되었다. 영호해상이 다가오며 물었다. "편지에 뭐라고 적혀 있어요?" 엽단풍은 고개를 흔들었다. "별거 아니다." 영호해상은 입을 삐쭉거렸다. "얼굴이 마누라라도 빼앗긴 사람처럼 퉁퉁 부어 있는데 별게 아니에요?" 엽단풍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영호해상은 농담으로 한 말에 그가 정색을 하자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 "그럼 정말로 당신 마누라에 관한 말이에요?" 엽단풍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얼어죽을 마누라가 있단 말이냐?" 영호해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으나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정색을 해요?" "마누라는 아니지만 장래 마누라가 될지도 모르는 여자에 관한 거라서 그런다." 영호해상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게 정말이에요?" 엽단풍은 돌연 그녀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너는 지금 나에게 바가지를 긁으려고 하는 거지?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소주까지 이틀 동안에 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네 잔소리를 듣고 있을 시간이 없다." 엽단풍은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술은 다음에 와서 얻어먹겠다. 우리는 이만


헤어지자꾸나." 말과 동시에 그의 커다란 몸은 허공을 날아올랐다. 영호해상은 깜짝 놀라 다급히 소리쳤다. "이봐요!" 하나 그녀가 채 손을 내밀기도 전에 엽단풍의 몸은 벌써 수림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하하...다음에 오면 단단히 얻어 마실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엽단풍의 웃음소리만이 텅빈 허공에서 울려올 뿐이었다. 영호해상은 멍하니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눈가에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나쁜 자식....이대로 그냥 가버리면 나는 어쩌란 말이야?" 그녀의 고운 뺨에는 소리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안았다. 영호해상은 고개를 돌아보다가 그 사람의 품속으로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할아버지...." 영호덕조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기자 영호해상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영호덕조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엽단풍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말아라. 이 할애비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자를 네 앞에 데려다 놓겠다. 저런 자를 그냥 떠나 보내게 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의 나직한 음성이 영호해상의 구슬픈 울음소리에 섞여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제 18 장 세가지 關門 1 구원황대양류신(舊苑荒臺楊柳新), 능가청창부승춘(菱歌淸唱不勝春). 지금유유서강월(只今惟有西江月), 증조오왕궁리인(曾照吳王宮裏人). 옛 정원��� 황폐한 대에 버들만은 새싹이 나고, 마름따며 부르는 노래 봄 흥취 돋군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은 서강에 뜨는 달, 그 달은 오왕 궁전의 미녀를 비추었으리라. 고소대(姑蘇臺). 고소대는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서시(西施)를 위해 세운 누각이었다. 부차는 미녀 서시와 함께 자주 이곳에 올라 주위의 절경을 감상했다고 ㅎ다. 하지만 지금은 누각은 황폐해지고 잡초만이 무성할 뿐이었다. 이끼가 잔뜩 낀 채 여기저기가 부서져 있는 고소대의 바윗돌들은 그야말로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한낮의 무더위도 한결 가시고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저녁 무렵. 석양(夕陽)의 긴 그림자를 밟으며 고소대의 폐허를 어슬렁거리는 하나의 인영이 있었다. 그는 체구가 장대한 흑의사내였는데 아까부터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이렇게 불공평한 일은 유사이래 없을 거야." 흑의사내는 무엇이 그리도 불만인지 연신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틀 밤낮을 잠도 한 숨 못자고 죽어라고 달려왔더니 미녀는 보이지 않고 돌멩이들만 반기고 있으니...설마 고홍, 그 늙은 너구리가 할 일 없어 나에게 장난을 친 건 아닐텐데..." 넋두리를 하고 있는 흑의사내는 물론 엽단풍이었다. 엽단풍은 아무리 고소대 주위를 둘러보아도 공손단경은 커녕 인적(人跡)조차 보이지 않자 슬슬 부아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그는 괜히 애ㄲ은 돌맹이들만 발로 걷어차고 있었다. "나는 부처님 가운데토막같이 화를 낼줄 모르는 사람이지만 이제는 도저히 못참겠다." 그래도 화가 안 풀리는지 엽단풍은 근처에 있는 커다란 바위덩어리 앞에 쭈그리고 앉더니 손가락으로 바위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고홍은 늙은 너구리다. 너구리가 늙었다는 건 노망이 났다는 증거다. 고홍은 노망난 늙은 너구리다. 늙은 너구리가 노망이 났다는건 이제 곧 무덤속으로 기어 들어갈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고홍은 무덤 속으로 기어들어갈 만큼 노망난 늙은 너구리다.


노망난 늙은 너구리가 무덤 속으로 기어들어간다는 건 꼴까닥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고홍은 꼴까닥할 때가 된....> 엽단풍이 여기까지 적고 있을 때 등뒤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엽단풍. 네 놈은 과연 이곳에 왔구나." 엽단풍은 몇 자 더 끄적거리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 이제야 심심하지 않겠군." 엽단풍은 몸을 돌려 나타난 사람을 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당신은 그동안 충분히 목욕을 했소?" 나타난 사람은 절정공자 냉우빙이었다. 냉우빙은 엽단풍의 말을 듣자 눈빛이 더할 나위없이 흉흉해졌다. 냉우빙은 한동안 악독한 눈으로 엽단풍을 노려보더니 냉랭하게 웃었다. "흐흐...엽단풍. 네 놈이 언제까지 본 공자를 능멸할 수 있는지 보자." 이어 그의 손이 슬쩍 쳐들렸다. 그 순간 무성한 잡초 사이에서 몇 개의 인영이 불쑥 나타났다. 그들은 청의를 입은 다섯 명의 중년인들이었다. 청의중년인들은 모두 하나같이 신태가 비범한 모습들이었는데 손에 거무스름한 죽통 같은 것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그들은 엽단풍을 둥그스름하게 에워싼 채 조금씩 그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냉우빙은 싸늘한 폭갈을 터뜨렸다. "엽단풍! 너는 저들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엽단풍은 힐끗 청의중년인들과 그들이 들고 있는 죽통을 바라보다가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뭐긴. 마염묵죽(魔焰墨竹)이지." 엽단풍이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냉우빙은 오히려 어이가 없는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마염묵죽을 앞에 놓고도 이토록 태연자약하게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줄은 정녕 몰랐다. 마염묵죽은 강력한 화력(火力)을 지닌 화통(火筒)으로서 한번 발사되면 반경 십 장이내는 완전히 불바다로 변하고 마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위력이 너무도 악독하기 때문에 무림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다른 네 가지 암기와 함께 무림의 오대금용암기(五大禁用暗器)중 하나로 정해 놓고 있을 정도였다. 냉우빙은 눈꼬리를 실룩거리다가 이내 냉소를 날렸다. "흐흐...엽단풍. 과연 배짱 하나는 인정해 줄만 하다. 하지만 큰 소리를 친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엽단풍은 피식 웃었다. "글쎄 누가 뭐라던가?" "다섯 개의 마염묵죽이라면 네 놈을 충분히 태워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어련하려고." "이제 곧 네 놈이 본 공자를 건드린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를 뼈저리게 알게 될 것이다." "건드리긴. 그저 약속을 지키라고 충고를 좀 했지." 엽단풍이 자꾸 깐죽깐죽거리자 냉우빙의 얼굴에 다시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다섯 명의 청의중년인이 엽단풍을 에워싼 채 완벽한 방위로 자리잡은 것을 보고 두 눈에 살광을 번뜩였다. "엽단풍.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느냐?"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물론 있지. 도대체 공손단경이 이곳이 있기는 있는거요?" 냉우빙은 차갑게 웃었다. "물론이다." 이어 그는 슬쩍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고노인. 나오시오." 그의 뒤에서 오 장여 되는 곳에서 서 너개의 인영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고홍과 공손단경, 봉일평이었다. 공손단경과 봉일평은 혈도를 제압당했는지 어색한 자세로 그들의 앞에 서있었다. 공손단경과 봉일평은 엽단풍과 시선이 마주치자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모두 얼굴이 붉어졌다. 하나 엽단풍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들에게 소리쳤다. "다친 곳은 없소?" 공손단경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엽단풍은 이어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봉일평을 바라보았다. "귀염둥이야. 너까지 끌려왔구나. 너는 좀 어떠냐?" 봉일평은 안색이 약간 초췌했으나 억지로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나는 그런데로 잘 지내고 있소. 당신은 어떻소?" "하하...나야 항상 아무런 걱정없이 잠도 잘 자고 술도 열심히 마시고 있지." 엽단풍은 그에게 염려말라는 듯 믿음직하게 웃어주고는 고홍을 바라보았다. "고노인. 우리는 다시 만났구려." 고홍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내 예상보다 훨씬 끈질기군. 자네같이 예상을 뛰어넘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일종의 재미지." "하하...고노인이 나에게 베풀어주는 각고의 은혜는 결코 잊지 않을거요. 조금 있다 그쪽으로 갈테니 단단히 준비하고 있으시오." 고홍은 늙은 너구리라는 별명답게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노부는 오늘 이곳에 자네를 위해 세 가지 관문(關門)을 준비했네." "그럼 이 마염묵죽진(魔焰墨竹陣)도 고노인의 걸작이시오?" "그중 가장 변변치 않은 것일세. 자네가 그 세 가지 관문을 모두 뚫고 노부에게 온다면 노부는 물론 기꺼이 자네에게 목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네. 하지만 과연 올 수 있을지 의문이군." 엽단풍은 껄껄 웃었다. "하하....고노인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어찌 가지 않을 수 있겠소? 내 후딱 해치우고 곧 갈테니 그동안 목이나 깨끗하게 닦아 놓고 있으시오." 고홍은 탐스럽게 내민 검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느물느물하게 웃었다. "자네는 정말 볼수록 흥미가 당기는 사람일세. 부디 노부의 기대를 저버리지말게." "기대하고 있으시오." 엽단풍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고홍은 뒤로 물러났다. 물론 공손단경과 봉일평도 그의 손에 끌려 함께 따라갔다. 장내에 엽단풍만이 남게 되자 냉우빙의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흐흐....엽단풍! 어디 마염묵죽진 아래서도 살아날 수 있는지 한 번 보자!" 그와함께 다섯 명의 청의중년인이 더욱 빠르게 엽단풍에게로 접근했다. 그들은 각기 수중에 마염묵죽통을 든 채로 신중하게 엽단풍에게서 십 장 떨어진 곳에 오더니 일제히


마염묵죽통을 발사했다. 콰아아아... 다섯 개의 마염묵죽통에서 다섯줄기의 거센 화염이 폭발치듯 뿜어져 나왔다. 그 화염들은 순식간에 엽단풍은 물론이고 그가 있던 반경 십 장의 공지까지 완전히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설사 쇠로 만든 철인(鐵人)이라 해도 그 지옥의 불길 같은 불바다 속에서는 그대로 녹아버리고 말 것이다. 냉우빙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하나의 열화지옥으로 변한 장내를 바라보며 입가에 득의의 미소를 떠올렸다. "흐흐...엽단풍! 이것으로 네 놈의 미친 짓도 끝장이다. 너 같은 고수는 좀처럼 볼 수 없었지만 본 공자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 너의 유일한 실수였다." 한데 냉우빙이 막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갑자기 불길에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장내에서 한 줄기 시커먼 기운이 구름처럼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츠츠츳! 그와 함께 귀신의 호곡성을 연상시키는 듯한 괴이한 소음이 터져나왔다. 그 소음이 어찌나 강력하던지 냉우빙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귀를 틀어 막았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토록 가공할 기세로 타오르던 불길이 급속도로 약화되며 시커먼 기운이 급속도로 확산되어 마염묵죽통을 발사하고 있던 다섯 명의 장한들을 휩쓸어가는 것이었다. 츠츠츠... 장한들은 안색이 변해 마염묵죽통을 집어 던지며 황급히 뒤로 물어나려 했다. 하나 확산되는 도기가 훨씬 더 빨랐다. "크아악!" 마치 합창이라도 하듯 일제히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그들 다섯 명의 장한들은 거의 동시에 피분수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들의 가슴은 완전히 갈라진 채 쩌억 벌어져 있었다. 쿵! 쿵! 그들의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체가 바닥에 나뒹구는 소리가 냉우빙의 가슴을 사정없이 뒤흔들어 놓았다. '저....저것이 대체 무엇이냐?'


냉우빙은 눈을 부릅뜨고 장내를 주시했다. 불길이 완전히 가시며 엽단풍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토록 가공할 불길 속에 있었으면서도 엽단풍의 몸은 별로 그을린 데가 없었다. 단지 양쪽 어깨와 옆구리쪽의 흑의만이 약간 탔을 뿐이었다. 그의 수중에는 금시라도 동강나 버릴 듯 녹이 잔뜩 슬어 있는 칼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엽단풍은 천천히 칼을 거두며 냉우빙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과 마주치자 냉우빙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시선속에 담긴 강렬한 살기의 빛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엽단풍은 천천히 냉우빙에게로 다가왔다. "마염묵죽진은 잘 감상을 했다. 위력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사용하는 자들의 공력이 미약해서 생각보다는 그리 신통하지 못하군." 냉우빙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는 가공할 마염묵죽진아래에서도 태연히 걸어나오는 이 자가 도저히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엽단풍은 이미 마음속에 살심(殺心)이 발동을 했는지 냉우빙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그를 향해 곧장 걸어오고 있었다. 냉우빙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한데 엽단풍이 냉우빙에게로 다가갈 때였다. 스스슷... 갑자기 허공에서 십 여줄기의 인영이 엽단풍의 사방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들의 신형은 그야말로 표홀해서 엽단풍은 냉우빙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그들을 둘러 보았다. 그들은 전신에 칙칙한 회의를 걸친 장한들이었다. 하나같이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갑고 강인한 몸매의 인물들이었는데 손에 맹독(猛毒)이 묻은 강도(剛刀)를 들고 있었다. 그들의 수는 무려 열여덟 명이었다. 냉우빙은 그들이 나타나자 그제서야 안색이 풀어지며 엽단풍을 노려보았다. "엽단풍! 과연 네 놈은 대단하다. 하지만 이들 지옥다라십팔도객(地獄多羅十八刀客)의 손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지옥다라십팔도객이라는 말에 엽단풍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들 열 여덟 명의 회의인들을 둘러 보았다. 지옥다라십팔도객은 혈악에서도 최절정의


살수(殺手)들이었다. 그들은 물론 개개인으로 따지면 십대고수에 뒤떨어졌으나 열 여덟 명이 함께 펼치는 합격술의 위력은 대단해서 십대고수들 중 몇 명 정도는 가볍게 격퇴할 정도였다. 그들은 혈악내에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인데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대체 냉우빙의 지위가 혈악내에서 어느 정도이기에 지옥다라십팔도객까지 그를 구하기 위해서 나타났단 말인가? 하나 생각은 길고 행동은 짧았다. 지옥다라십팔도객은 엽단풍을 에워싸자마자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벌떼같이 그를 향해 덤벼들었다. 2 쾌액! 두 자루의 독도(毒刀)가 엽단풍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엽단풍은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려 독도를 피했다. 그 순간 다시 세 개의 독도가 각기 양쪽 옆구리와 목덜미를 향해 쏘아져 왔다. 그 각도와 초식의 배합은 절로 탄성이 일 만큼 완벽한 것이었다. 엽단풍은 두 다리를 기묘하게 비틀며 세 개의 독도가 휘둘러오는 사이를 뚫고 나갔다. 하나 그것도 잠시 뿐. 쾌애애액! 이번에는 무려 다섯 개의 독도가 그의 전신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짓쳐들고 있었다. 그야말로 풍차처럼 다가서는 이들 독도들은 상대로 하여금 조금도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몰아치는 것이었다. 엽단풍도 이번에는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그는 번개같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휘둘렀다. 츠츳! 염왕도법 특유의 소성과 함께 시커먼 도기가 피어 올랐다. 까까깡! 염왕도는 다섯 개의 독도와 부딪쳐 맹렬한 마찰음을 냈다. 놀랍게도 엽단풍은 단 일도(一刀)를 휘둘러


지옥다라십팔도객 중 다섯 명의 칼을 막아낸 것이다. 하나 그때 엽단풍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쾌쾌쾌쾌! 다섯 개의 칼이 물러나는 순간에 때맞춰 이번에는 무려 여덟 개의 독도가 폭포수처럼 퍼부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그야말로 살인적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가공할 도(刀)의 폭풍이었다. 엽단풍은 두 눈을 빛내며 염왕도법중의 염왕강세(閻王降世)를 펼쳐냈다. 츠츠츠츠츳... 시커먼 도기가 먹물처럼 피어나며 여덟 개의 도광에 맞서갔다. 까깡! 불똥이 튀기며 엽단풍의 몸이 한 차례 휘청거렸다. 아무리 절세무적의 염왕도를 익힌 엽단풍이지만 무려 여덟 개의 도와 정면으로 격돌하자 그 여파를 감당하기 벅찰 정도였다. 그의 몸이 멈칫하는 순간에 다시 두 개의 도가 날아들었다. 엽단풍은 몸을 반쯤 굽히며 칼을 머리위로 휘둘렀다. 카캉! 다시 요란한 마찰음이 퍼지며 그는 두 개의 칼날을 막아낼 수 있었다. 하나 그때 그의 머리 위에서 다시 세 개의 칼날이 떨어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엽단풍은 이대로 가다가는 끊임없이 다가서는 지옥다���십팔도객의 연환공격에 자신이 먼저 지치고 말 것임을 알았다. 그의 눈에 기이한 빛이 일렁거렸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바닥을 굴러 세 개의 칼날을 피했다. 그리고 몸을 벌떡 일으키려는 순간, 쾌애액! 다섯 개의 독도가 그의 얼굴을 향해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짐작대로군.' 엽단풍은 안광을 번뜩인 채 피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다섯 개의 독도속으로 뛰어들었다. 츠츠츳! 염왕도법중에서도 위력이 막강한 염왕격정(閻王擊鼎)의 도세가 폭풍노도처럼 퍼부어졌다.


카카캉! 염왕도기에 부딪친 독도중 두 개가 박살이 나며 피분수가 피어 올랐다. "크악!" 두 명의 지옥다라도객(地獄多羅刀客)이 그 엄청난 도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두동강이 나고 말았다. 엽단풍 또한 옆구리에 독도 하나가 스쳐 피가 흘러 나왔다. 하지만 피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즉시 자신의 칼로 독도가 스치고 간 부근의 살점을 후벼 팠다. 독도가 지나간 자리는 어느 새 시커멓게 살이 ㅆ어 들어가고 있었다. 엽단풍은 썩어들어간 살점을 파내자마자 다시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여덟 개의 독도가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염왕색명(閻王索命)!" 엽단풍의 입에서 호통소리가 들리며 그의 녹슨 칼이 풍차처럼 세차게 휘둘러졌다. 츠츠츠츠.... 마치 악마의 귀곡성같은 소성이 금시라도 고막을 찢을 듯 격렬하게 울려퍼졌다. 파파파파... 여덟 개의 독도중 다섯 개가 퉁겨져 나가고 세 개가 박살이 나서 흩어지며 세 사람의 도객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하나 그 댓가로 엽단풍은 다시 어깨부근과 장딴지에 각기 일도씩을 격중당했다. 엽단풍은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고 독도에 격중된 부분의 살점을 잘라낸 다음 재차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다섯 명의 도객이 쓰러지자 지옥다라십팔도객의 공세가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 엽단풍은 순서대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두 개의 독도를 완전히 무시하고 뒤이어 날아오는 세 개의 독도를 노렸다. 그는 단봉무영신법으로 두 개의 독도 사이를 뚫고 지나가며 그 뒤에서 날아드는 세 명의 도객들을 향해 염왕도를 휘둘러댔다. 세 명의 도객은 막 엽단풍을 향해 날아들려다 시커먼 도기가 허공을 자욱히 수놓으며 밀려오자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다. 츠츠츳! "끄아악!" "케에엑!"


그들은 사력을 다해 독도를 휘둘렀으나 염왕도의 도기는 순식간에 그들을 휩쓸고 지나가 버렸다. 세 구의 시신이 새로 늘어났다. 동시에 엽단풍은 양쪽 옆구리에 또 다시 상처를 입었다. 비록 단봉무영신법으로 치명적인 부위의 상처는 면했으나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지옥다라십팔도객 개개인의 도법은 놀라운 것이었다. 엽단풍은 다시 한 번 살점을 잘라내며 눈을 번뜩였다. 그때 살아남은 일곱 명의 도객들이 일제히 날아들었다. 쾌쾌쾌쾌... 그들은 이 한 수로 사생결단을 내기로 작정을 했는지 자신들의 몸은 아예 돌보지 않은 채 오직 엽단풍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달려들었다. 주위 사방이 온통 시퍼런 독도의 그림자로 뒤덮여 버렸다. 엽단풍은 이를 악문 채 그 독도의 폭풍속으로 뛰어들었다. 파파팟! 그의 옷자락이 엄청난 도기에 마구 잘려나갔다. 엽단풍은 수중의 도를 기이하게 회전시켰다. 콰콰콰콰.... 그에 따라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를 연상시키는 도기가 피어올랐다. 염왕도법중에서도 삼대절초(三大絶招)중 하나인 염왕선전(閻王旋轉)이라는 수법이었다. 그 소용돌이치는 도기는 허공을 자욱히 수놓은 독도의 폭풍속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카카캉! 독도의 파편(破片)이 사방을 날아다니며 시뻘건 선혈이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크아아악...!" 처절을 극한 비명이 연거푸 고막을 찢을 듯 울리며 세찬 도기가 사방을 온통 휩쓸어 버렸다. 도기의 폭풍이 사라진 후 장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일곱 명의 지옥다라도객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들은 팔다리가 잘려지고 전신에 독도의 파편이 박힌 채 사방에 널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엽단풍은.... 그는 용케도 쓰러지지 않은 채 휘청거리는 몸으로 간신히 서 있었다.


그의 몸에는 다시 다섯 개의 핏줄기가 생겨났다. 제일 막중한 것은 그의 옆구리에 독도 하나가 꽂힌 채 흔들거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엽단풍은 자신의 옆구리에 꽂힌 독도를 뽑았다. 팟! 시커먼 선혈이 뿜어나오며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통증이 뒤따랐다. 하나 엽단풍은 눈쌀만 살짝 찌푸린 채 독도가 꽂혔던 부위로 자신의 칼을 가져갔다. 이어 주저하지 않고 다시 살점을 베기 시작했다. 그의 전신은 그야말로 유혈이 낭자했다. 그로서는 실로 강호출도후 처음 당해보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하나 십대고수에 거의 필적한다는 지옥다라십팔도객의 목숨값에 비하면 그리 손해나는 장사는 아니었다. 엽단풍은 자신의 몸에 난 상처를 세어 보았다. "아홉 개라...상처 하나에 지옥다라도객 두 명이면 나쁘지 않군." 그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전신에 경련을 일으킨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냉우빙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냉우빙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다...단신으로 지옥다라십팔도객을 모두 죽이다니...네 놈은 악마(惡魔)의 도법(刀法)을 익혔구나.." 엽단풍은 담담하게 웃었다. "염왕도법이라는 것이지. 염라대왕께서 당신들같은 악당들을 지옥으로 보낼때 사용하라고 특별히 알려주셨지. 쓸만한가?" 냉우빙의 안면이 실룩거렸다. "염왕도법...그것은 무적염왕(無敵閻王) 엽철흔의..." "당신도 그 이름을 어디서 줏어 듣긴 들은 모양이군. 이제 지옥다라십팔도객마저 끝장났으니 이번에는 무엇이 나올 차례인가?" 바로 그때였다. "노부들한테까지 차례가 올 줄은 몰랐군." 어디선가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와 함께 엽단풍의 주위에 다섯 줄기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 인영들은 그야말로 허깨비와도 같이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심지어 엽단풍 조차도 그중 한 두 사람의 신법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엽단풍은 천천히 그들을 둘러보았다. 가장 우측에는 키가 작고 몸이 비대한 청의노인이 연신 곰방대를 들이킨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의노인의 동공은 그야말로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엽단풍은 강호에 출도한 이래 이 노인처럼 완벽하게 무심(無心)한 눈을 가진 인물을 본 적이 없었다. 엽단풍은 한동안 그 노인의 무심한 눈과 그가 빨고 있는 곰방대를 바라보았다. 노인의 곰방대에서는 모락모락 연기가 끊이지 않고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 또한 특이한 일이었다. 어떤 사람이든지 빨면 내쉬어야 한다. 빨때는 연기가 나오지 않고 내쉴 때는 연기가 나온다. 즉 누가 곰방대를 피든 빨고 내쉴때 마다 연기가 나왔다 나오지 않았다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노인이 피는 곰방대는 잠시도 쉬지 않고 가느다란 연기가 계속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것은 이 노인의 내공이 그야말로 신화경(神化境)에 이르러 자신의 숨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이었다. 엽단풍은 곰방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곰방대가 바로 태조곤(太祖棍)이오?" 청의노인은 곰방대를 빨다 말고 힐끗 눈을 들어 엽단풍을 응시했다. 그의 무심한 눈에 섬뜩하는 광망이 한 가닥 스치고 지나갔다. 청의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태조곤이네. 자네는 노부가 누군지 알고 있군." 이번에는 엽단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당신은 곤왕(棍王) 황보뢰(皇甫雷)가 아니오?" "노부가 바로 곤왕일세." 곤왕 황보뢰! 그는 바로 혈악의 십대고수중 서열 사위에 올라있는 초절정고수였던 것이다. 알려진 바로는 황보뢰의 곰방대는 강호무림에 산재한 수 천 가지의 곤(棍)중에서도 가장 무섭고 위력이 대단하다고 한다. 태조곤이란 이름이 붙은 것도 천하의 곤중에서


제일가는 위치에 있다는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엽단풍은 각별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그 옆에 서 있는 인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황보뢰의 옆에 서 있는 인물은 체구가 무척 거대한 홍포노인이었다. 엽단풍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홍포노인은 천하의 누구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만큼 우람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홍포노인의 허리춤에 매달린 도끼는 그의 체구와는 달리 너무도 작고 왜소한 것이었다. 커다란 덩치의 홍포노인이 마치 어린 아이의 장난감같은 작은 도끼를 차고 있으니 몹시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하나 엽단풍은 웃지 않았다. 대신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을 뿐이다. "당신이 혈부(血斧) 악천괴(岳天魁)로군." 홍포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한 눈에 노부를 알아보다니 과연 엽철흔의 자식답구나." 그의 음성은 종이 울리듯 굉량한 것이었다. 혈부 악천괴도 또한 십대고수중의 하나였다. 그의 서열은 십대고수중 구위였다. 하나 그의 서열이 구위에 불과한 것은 그의 공력이 남들보다 뒤지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그가 십대고수 중 가장 늦게 혈악에 가입을 했기 때문이었다. 악천괴는 황보뢰에 못지 않은 실력자였다. 악천괴옆에 서 있는 사람은 치렁치렁한 금색 장포를 걸친 비쩍 마른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은 금색을 광적(狂的)으로 좋아하는지 이마에도 금색 두건을 했고,신발도 금색 단화를 신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도 물론 금색이고, 심지어 허리띠와 차고 있는 검(劍)까지 금색 일색이었다. 엽단풍이 알기로 천하에서 이렇게 금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오직 한 명 밖에는 없었다. 금포중년인은 엽단풍이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 "본좌는 황금신마(黃金神魔) 하일존(夏一尊)이다. 이 이름을 들어보았겠지?" 엽단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강북녹림(江北綠林)의 총표파자(總票巴子)아니오?" "그렇다. 본좌가 강북무림(江北武林)을 책임지고 있다."


하일존은 자타가 공인하는 강북무림의 제일고수였다. 그는 비단 녹림의 총표파자일 뿐 아니라 자신의 말대로 강북무림을 다스리는 실질적인 제일인자였다. 네 번째 인물은 등이 낙타처럼 튀어나온 꼽추노인이었다. 꼽추노인의 얼굴에는 크고 작은 검상(劍傷)이 가득해서 도저히 원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꼽추노인의 손에는 하나의 길다란 채찍이 마치 독사처럼 칭칭 감겨져 있었다. 엽단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인장은 누구요?" 꼽추노인은 그를 응시하다가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독고황(獨孤荒)." 이 말에 엽단풍은 흠칫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노인장이 대막제일고수(大漠第一高手)라는 무영편(無影鞭) 독고황이오?" 꼽추노인은 그가 단숨에 자신을 알아보자 두 눈에 매서운 안광을 번뜩였다. "그렇다. 노부가 바로 무영편이다." 무영편 독고황! 그는 중원에는 이름이 그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막지방에서는 거의 신(神)처럼 군림하고 있는 절대의 고수였다. 그의 채찍솜씨는 대막뿐만 아니라 널리 서역에 까지 알려져 거의 신격화 될 정도였다. 엽단풍은 한동안 독고황을 응시하다가 마지막 인물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마지막 인물은 머리가 눈처럼 새하얗고 허리가 꼿꼿한 남삼노인이었다. 남삼노인은 이목구비가 무척 수려했는데 허리에는 고색창연한 보검을 차고 있었다. 엽단풍은 남삼노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었던 것이다. 남삼노인은 그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노부가 누구인지 궁금하느냐?" 엽단풍은 솔직히 시인을 했다. "그렇소. 귀하는 누구요?" 남삼노인은 멀리 떨어져 있는 냉우빙을 가리켰다. "노부는 저 아이의 애비다." 그제서야 엽단풍은 이 노인의 얼굴이 왜 그렇게 눈에 익은지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이 노인의 이목구비가 냉우빙과 아주 흡사했던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노인은 냉우빙보다 늙고, 또한 눈빛이 아주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렇다면 귀하가 검존(劍尊) 냉와운(冷臥雲)이겠구료." "그렇다." 검존 냉와운은 강남의 제일세가(第一世家)인 냉씨세가(冷氏世家)의 당대가주(當代家主)였다. 그는 무림인들이 검(劍)에 관해서 말할 때면 항상 제일 먼저 거론되는 인물로, 자타가 공인하는 강남제일검객(江南第一劍客)이었다. 곤왕 황보뢰! 혈부 악천괴! 황금신마 하일존! 무영편 독고황! 검존 냉와운!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하는 강호무림의 최절정고수 다섯 사람이 오직 엽단풍, 일인(一人)을 상대하기 위해서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제 19 장 交換條件 1 휘이잉.... 날이 어두어지며 한차례 바람이 불어왔다. 엽단풍은 바람을 맞으면서도 조금도 시원한 줄을 몰랐다. 시원하기는 커녕 그는 오히려 땀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땀조차 나오지 않았다. 문득 곤왕 황보뢰가 그를 바라보며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자네가 엽철흔의 아들이라는 말을 들었네. 그게 사실인가?" 엽단풍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뢰의 눈에서 번쩍하는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당년에 엽철흔이 건재했을 때는 혈악내에서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네. 노부도 마찬가지였지." "......." "그가 사라진 후 우리는 이제는 두 발을 뻗고 잘 수


있겠다고 생각을 했지. 하지만 자네가 나타난 이후 우리는 그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네." 엽단풍은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황보뢰는 곰방대를 탁탁 턴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엽철흔의 경하기와 복마곤룡장, 염왕도법의 삼대절학(三大絶學)은 익히기가 어려워 아무리 엽철흔의 아들이라고 해도 완벽하게 터득하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잘못이었네. 자네는 경하기와 복마곤룡장 뿐만아니라 그 무서운 염왕도법마저 익혀 우리를 경악하게 했다네." 황보뢰는 나직하게 혀를 찼다.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해 아까운 십대고수중 세 사람의 목숨이 없어졌지. 하지만 이제라도 그걸 알았으니 아주 늦지는 않은 게지." 황보뢰의 무심한 동공에 서서히 진득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자네는 이십 년 전의 무적염왕 엽철흔에 필적하는 고수지만 시기를 잘못 타고 났네. 우리 다섯 사람이라면 설사 엽철흔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 해도 능히 그를 쓰러뜨릴 수 있네." 황보뢰는 천천히 곰방대를 오른손에 움켜쥐었다. "과거 엽철흔과의 안면을 생각해서 자네의 숨통을 고통없이 끊어주겠네."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황보뢰는 곰방대로 엽단풍의 목덜미를 찍어왔다. 슷! 마치 유성(流星)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의 곰방대는 그야말로 찰나지간에 공간을 압축해 엽단풍의 목으로 육박해 들어왔다. 이것은 천침인혼(穿針引魂)이라는 수법이었다. 얼마나 많은 강호의 고수들이 이 빠르고 악독한 초식에 영문도 모르고 목이 궤뚫렸는지 모른다. 엽단풍도 하마터면 그런 꼴을 당할 뻔 했다. 그가 그러지 않은 것은 일전에 황보뢰의 이 수법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엽단풍은 간신히 목을 이 치쯤 움직여 황보뢰의 살인적인 공격을 피했다. 황보뢰는 음침하게 웃었다. "고통없이 죽는게 싫다면 지독한 고통을 선사해 주지." 그의 곰방대가 허공에서 거의 보이지도 않게 선회하며 엽단풍의 미간을 향해 날아들었다. 휘리릭! 작고 볼품없는 곰방대가 마치 수십, 수 백개의


거대한 쇠몽둥이로 변한 것 같았다. 그 무섭게 회전하는 곰방대에 맞기만하면 설사 금강동인이라도 그대로 부서지고 말리라. 엽단풍은 그 맹렬하게 회전하며 다가오는 곰방대를 향해 강력한 일장을 갈겨댔다. 쿠르릉! 구름과 같은 기세가 피어오르며 곰방대에 정면으로 부딪쳐갔다. 꽝! 주위가 온통 뒤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폭음이 터졌다. 황보뢰의 신형이 한 차례 휘청거리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주름진 얼굴이 무표정하게 굳어졌다. "경하기가 거의 십일성(十一成)수준이로군. 잘해야 십 성쯤 될거라고 생각했는데..." 엽단풍은 기세를 몰아 벼락같이 황보뢰에게로 돌진해 오며 괴이한 일장을 펼쳐냈다. 고오오.... 주위의 공기가 막대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심하게 파동을 쳤다. "복마곤룡장...." 황보뢰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하나 그 순간, 쾌애액! 하나의 작은 도끼가 엄청난 속도로 엽단풍의 뒷덜미를 향해서 날아왔다. 작은 손도끼인데도 그 위력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엽단풍은 황보뢰를 향해 쳐낸 복마곤룡장을 급히 회수하며 몸을 옆으로 뉘였다. 손도끼가 아슬아슬하게 그의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엽단풍은 다시 몸을 일으키며 복마곤룡장을 내갈기려 했다. 하나 그때 다시 하나의 눈부신 금검(金劍)이 날아들었다. 황금신마 하일존이 출수(出手)를 한 것이다. 하일존의 금검은 금광검(金光劍)이라는 절세의 신병(神兵)으로 절대로 맨손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엽단풍은 마침내 칼을 뽑았다. 츠츠츠츳! 염왕도 특유의 괴이한 소성이 울려퍼지자 황보뢰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조심해라. 염왕도다!" 염왕도의 명성은 가히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당년에 엽철흔이 이 염왕도법을 펼치면 아무도 그의 손에서 삼 초 이상을 버틴 사람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그에게 무적(無敵)의 염왕(閻王)이라는 별호가 붙었겠는가? 까깡! 하일존의 금광검이 염왕도의 도기를 견디지 못하고 튕겨져 오르며 하일존의 몸에 두 줄기 핏줄기가 그어졌다. "윽!" 하일존이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엽단풍은 그에게로 바짝 다가들며 염왕도를 휘두르려 했다. 때마침 독고황의 채찍이 독사의 혓바닥처럼 매섭게 날아들었다. 뿐만 아니라 검존 냉와운도 자신의 경천삼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파파파파.... 쐐쐐쐐! 순식간에 장내가 온통 편영(鞭影)과 검풍(劍風)에 휩싸여버렸다. 엽단풍은 몸을 회전시키며 염왕도법중의 염왕휘수(閻王揮手)를 전개했다. 치치칙... 사람의 마음을 후벼파는 듯한 음향이 들리며 그토록 막강한 기세로 몰아닥치던 편영과 검풍의 한 구석이 뻥 뚫려 버렸다. "과....과연 무섭구나!" 생전 처음으로 염왕도와 맞닥뜨렸던 독고황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해 버렸다. 그는 대막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염왕도를 실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나 놀랄 사이도 없이 시커먼 도기가 구름처럼 그의 전신을 핍박해 들어왔다. 독고황은 이를 악문 채 사력을 다해 무영편을 휘둘렀다. 쭈아악! 무영편이 이름 그대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엽단풍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갔다. 조금 전에 격퇴되었던 하일존도 자신의 독보적인 절기인 신왕검형(神王劍形)의 수법으로 엽단풍의 가슴을 노려왔다.


엽단풍은 막 그들의 공세에 맞서가려다 뒤에서 무언가 서늘한 기운이 다가들자 번개같이 몸을 돌렸다. 하나 한 발 늦고 말았다. 쭉! 그의 등짝이 길게 찢어지며 핏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어느 새 날아들었는지 하나의 손도끼가 그의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악천괴의 혈부였다. 악천괴의 혈부를 다루는 솜씨는 엽단풍이 보기에도 비범하기그지 없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마치 하나의 암기처럼 던졌다가 회수하곤 했는데 그 수발(收發)하는 동작이 어찌나 빠르고 유연하던지 절로 탄성이 일 정도였다. 악천괴는 되돌아오는 혈부를 잡자마자 다시 집어던졌다. 쾌액! 이번의 것은 엽단풍의 미간을 정확히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때 엽단풍은 막 무영편과 하일존의 신왕검형에 맞서 염왕도를 휘두르고 있는 순간이었다. "제기랄...." 엽단풍은 다급한 나머지 욕설을 퍼부으며 재빨리 염왕도를 회수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 바람에 무영편과 신왕검형에 그대로 몸이 노출되어 버렸다. 독고황과 하일존은 이게 무슨 횡재냐 싶어 전력을 다해 그의 몸을 향해 채찍과 금광검을 휘둘러왔다. 바로 그때 황보뢰의 놀란 외침이 들려왔다. "조심하시오. 그건 그 놈의 술책이오!" 독고황과 하일존은 막 엽단풍의 몸을 가격하려다 그 말에 주춤했다. 그 순간 엽단풍의 몸이 그대로 회전하며 번개같은 일도를 그어댔다. 번-쩍! 피하고 자시고 할 사이도 없었다. 무언가 시커먼 것이 눈앞에 희끗거린다고 느낀 순간 독고황은 그대로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크아악!" 그의 몸은 그대로 두동강이난 채 시뻘건 선혈을 질펀하게 흘리고 있었다. 하일존은 다행히 수중의 금광검으로 간신히 그


살인적인 쾌도(快刀)를 막을 수 있었다. 하나 그 바람에 그의 금광검은 끝이 한 치 가량 잘려 나갔다. 하일존은 모골이 송연해져서 한동안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때 독고황의 죽음을 본 황보뢰가 분노에 찬 외침을 토하며 엽단풍에게로 달려들었다. "이 놈! 네 아비보다 더 잔인하구나!" 그는 그동안 독고황과 절친하게 지냈었기 때문에 그가 처참하게 죽은 것을 보자 눈이 뒤집혀 미친 듯이 엽단풍을 향해 곰방대를 휘둘렀다. 파파파팍! 그의 곰방대를 휘두르는 솜씨는 곤왕이란 이름에 절대로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의 손이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던지 엽단풍조차도 일시지간에 빈 틈을 찾지 못하고 뒤로 네 걸음이나 물러나고 말았다. 그 순간에 검존 냉와운이 엽단풍의 뒤쪽으로 날아들었다. 쑤아앙! 그의 고검(古劍)에서 희뿌연 검기가 일 장 가량이나 솟구쳐 올랐다. 엽단풍은 황급히 수중의 칼을 등뒤로 휘둘렀다. 캉! 그는 간신히 냉와운의 검을 막았으나 검기는 완벽하게 막지 못해 등뒤에 두 개의 상처가 새로 생겨났다. 하나 그가 채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다시 악천괴의 혈부가 예리한 파공음을 발하며 날아들었다. 엽단풍은 황급히 몸을 숙였다. 팔랑! 그의 흑발이 거의 한줌이나 혈부에 잘려나갔다. '저 도끼를 못쓰게 하지 않으면 위험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겠군.' 엽단풍은 생각을 굳히자 그대로 악천괴를 향해 날아갔다. 악천괴는 막 혈부를 회수하다가 엽단풍이 무서운 표정을 지은 채 자신에게로 날아오자 안색이 변해 황급히 혈부를 재차 집어 던졌다. 쾌액! 혈부가 섬찢한 광망을 뿌리며 날아갔다. 엽단풍은 피하지 않고 왼손을 불쑥 내밀어 혈부를 잡아 갔다. "저...저런 미친 놈이...!"


악천괴가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딱 벌렸다. 콱! 혈부가 엽단풍의 왼손에 쳐박히며 핏줄기가 뿜어올랐다. 하나 엽단풍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그대로 악천괴를 향해 돌진했다. 츠츠츠츠.... 악마의 호곡성과 함께 시커먼 도기가 악천괴의 전신을 송두리째 뒤덮어 버렸다. 악천괴의 위급함을 알고 황보뢰와 냉와운, 하일존이 벌떼같이 덤벼들었다. 콰콰쾅! "크아악!" "으음..." 요란한 폭음과 비명이 연거푸 터져나왔다. 황보뢰의 눈꼬리가 격렬하게 떨렸다. "이...이런 지독한 놈!" 엽단풍은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황보뢰와 냉와운 등의 공격은 전혀 도외시한 채 오직 악천괴를 향해 염왕도를 휘둘렀던 것이다. 그 결과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악천괴는 가슴에서 아랫배까지가 길게 잘려진 채 피바다 속에 누워 있었다. 엽단풍 자신은 양쪽 옆구리를 냉와운과 하일존의 검에 베인데다 황보뢰의 곰방대에 왼쪽 어깨를 정면으로 강타당했다. 그 바람에 그의 양쪽 옆구리가 쩌억 갈라져 선혈이 뿜어나왔고, 어깨뼈는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다. 엽단풍은 속에서 울컥 핏물이 솟구쳐 올라왔으나 억지로 눌러 삼키고 다시 하일존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일존은 자신의 검에 격중당하고 황보뢰에 의해 어깨뼈가 부서진 상태에서도 엽단풍이 쉬지 않고 자신을 향해 덤벼들자 겁이 덜컥 났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오 장이나 후퇴했다. 하나 엽단풍은 흉신악살처럼 두 눈을 부릅뜬 채 그를 향해 비호처럼 달려들며 염왕도를 휘둘렀다. 근처에 있던 냉와운이 다급히 달려왔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차창! 금광검이 박살나며 하일존의 입에서 처참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크아아악!" 그는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실로 눈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냉와운은 하일존을 구하기 위해서 급히 달려오다가 자신의 코앞에서 그가 처참한 시체로 변해 버리자 불같이 노해 앞뒤를가리지 않고 엽단풍에게로 덤벼 들었다. "이 놈! 죽어라!" 엽단풍은 그때 금광검과 격돌한 여파로 아직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냉와운의 고검이 엽단풍의 가슴을 그대로 관통하려는 찰나, 츠츳! 휘청거리고 있던 엽단풍의 손이 흔들리며 염왕도의 시커먼 도기가 다시 나타났다. 황보뢰가 깜짝 놀라 곰방대를 휘두르며 날아왔다. 쾅! 시커먼 도기에 닿자 냉와운의 장검이 반으로 뚝 부러지며 그의입에서 피분수가 뿜어나왔다. "크악!" 그 순간 황보뢰의 곰방대는 사정없이 엽단풍의 옆구리에 틀어 박혔다. 퍽! 엽단풍의 커다란 몸이 세차게 휘청거렸다. "으음..."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짤막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황보뢰는 곰방대를 그의 옆구리에 깊숙히 꽂은 채 중얼거렸다. "네 놈은 네 아비보다 더 강하다. 하지만 혼자로 우리 모두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득! 비틀거리고 있던 엽단풍이 혈부에 맞아 너덜너덜해진 왼손으로 자신의 옆구리에 꽂혀 있는 곰방대를 움켜잡았다. 황보뢰는 흠칫 놀라 곰방대를 더욱 깊숙히 그의 몸속으로 집어 넣으려 했다. 하나 그때 엽단풍은 피투성이인 왼손으로 곰방대를 잡더니 불끈 힘을 주었다. 뚝! 만년강목(晩年剛木)으로 만든 곰방대가 반으로 부러지며 황보뢰의 몸이 비틀거렸다. "이...이럴 수가..." 그가 안색이 대변해 급히 몸을 날리려하는 순간, 엽단풍의 염왕도는 어느 새 그의 아랫배를 깊숙히


관통하고 있었다. 푹! 황보뢰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는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자신의 아랫배를 비집고 들어온 녹슨 칼을 내려다 보았다. 그 칼은 그의 아랫배를 지나 등뒤로 삐져나와 있었다. 황보뢰는 그 칼을 내려다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엽단풍을 올려보는 그의 얼굴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경악과 불신의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너...너는 경하기가 이미 절정에 달해 있었구나...그러지 않고서는 내 태조곤에 격중된 상태에서 몸을 움직일 수 없었을 텐데..." 엽단풍은 약간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황보뢰의 얼굴에 끊임없는 경련이 일어났다. "그...그럼 지금까지 일부러 경하기가 절정에 달한걸 숨긴 거로구나..." 황보뢰의 몸이 격하게 떨리더니 점차 떨림이 멈추기 시작했다. "너....정말 무섭다...." 황보뢰는 이 말을 끝으로 몸이 축 늘어졌다. 엽단풍은 그의 아랫배를 관통한 칼을 뽑았다. 그러자 황보뢰의 몸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쿵! 그가 쓰러지면서 내는 음향은 마치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종(弔鐘)같았다. 2 엽단풍은 한 차례 몸을 휘청거리다가 입으로 피를 토했다. "우웩!" 시커먼 핏덩이를 한 사발이나 토한 후에야 그는 겨우 낮빛이 제대로 돌아왔다. "정말 대단한 늙은이였다." 그는 자신의 옆구리에 아직도 반이나 박혀있는 곰방대를 내려보며 중얼거렸다. 곤왕 황보뢰의 무공은 그가 강호에서 만난 인물들중 가장 막강한 것이었다. 그의 곰방대는 하마터면 강철보다도 단단한 엽단풍의 호신강기를 뚫고 들어와 그의 몸을 그대로 관통해 버릴 뻔했다.


엽단풍은 이를 악물더니 부러진 채로 박혀 있는 곰방대를 힘껏 잡아 뽑았다. 쭉! 핏줄기가 하늘높이 솟구쳤다. "으음..." 엽단풍의 입에서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자신의 옆구리에서 뽑혀나온 곰방대를 내려보더니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휴우...정말 지독한 싸움이었다. 이 곰방대가 한 치만 더 길었어도 쓰러지는 건 바로 나였을 것이다." 엽단풍은 피로 절은 곰방대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런다음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내에는 그야말로 한 폭의 지옥도(地獄圖)가 펼쳐져 있었다. 사방이 온통 폐허처럼 변해 버렸고, 잘려진 살점과 팔 다리가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다. 바닥에는 시뻘건 선혈이 내를 이루며 흘러가고 있었고 시체의 피비린내가 코를 진동시켰다. 엽단풍은 눈쌀을 찌푸린 채 장내를 돌아보다가 문득 시선을 한 곳에 고정시켰다. 냉우빙이 하나의 시체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시체는 그의 아버지인 검존 냉와운의 것이었다. "아버님..." 냉우빙은 어깨를 가늘게 떨면서 냉와운의 시체를 부여안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엽단풍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물이 가득 고인 눈에는 벌건 핏발이 곤두서 있었다. "엽단풍....이 놈....네 놈은 마침내 내 아버님마저 해쳤구나." 엽단풍은 그답지 않게 침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가 나를 해치려고 하지 않았으면 내가 어찌 그��� 해쳤겠소?" "......" "나는 원래 당신을 용서하지 않으려 했으나 이번 한 번만 더 당신을 그냥 놓아 주겠소. 당신이 앞으로 나와 어떻게 지낼지는 전적으로 당신의 행동에 달렸소." 냉우빙은 얼굴을 실룩거린 채 한동안 엽단풍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이를 악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조...좋다. 이 놈! 나는 반드시 네 놈의 배를 갈라 네 놈의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하고 말 것이다." 냉우빙은 냉와운의 시신을 안아들더니 다시 한 번 살기어린 눈으로 엽단풍을 노려보았다. "잊지 마라. 엽단풍! 결단코 네 놈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냉우빙은 한맺힌 음성을 토한 후 몸을 돌려 사라져갔다. 엽단풍은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선 채 상념에 잠긴 눈으로 냉우빙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몸이 허공을 날아 한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고노인. 당신마저 가면 어떡하오?" 그가 떨어져 내린 곳에는 공손단경과 봉일평을 옆구리에 낀 고홍이 떫은 표정으로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고홍은 일이 불리하게 진행됨을 깨닫고 공손단홍과 봉일평을 옆구리에 끼고 몰래 달아나려 했던 것이다. 고홍은 급히 공손단경과 봉일평을 내려 놓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허허...노부는 가면 안되는가?" 엽단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안 되지. 고노인은 조금전에 내가 했던 말을 벌써 잊었소?" 고홍은 이미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으나 짐짓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전혀 모르겠네. 그게 무슨 말인가?" 엽단풍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고노인은 내 짐작대로 노망이 나기 시작하는 모양이구료. 세 가지 관문을 모두 돌파하면 고노인에게 돌아와 고노인의 목을 베어가겠다고 하지 않았소?" 고홍의 낮빛이 핼쓱하게 변했다. 하나 그는 늙은 너구리답게 곧 안색을 진정시켰다. "노부의 볼 품없는 머리는 어디에 쓰려고 베어가려 하나?"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유리병에 담아서 <무림최초의 인간 너구리>라는 팻말을 붙인 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전시할 예정이오." 고홍은 호탕하게 웃었다. "허허....노부의 머리가 많은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면 기꺼이 베어가게."


엽단풍은 그가 의외로 순순히 물러서자 내심 의구심이 솟았다. 아니나 다를까? 고홍은 눈을 빛내며 즉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정말 안타깝군." 엽단풍은 이 늙은 너구리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나 싶어 물었다. "무엇이 안타깝다는거요?" 고홍은 제법 무거운 탄식마저 토해냈다. "노부가 죽는 거야 안타깝지 않으나 그때문에 자네는 영원히 그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게 되니 그것이 안타깝다는 말일세." 엽단풍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라니...누구 말이오?" 고홍은 짤막하게 말했다. "누대연(婁大衍)." 순간 엽단풍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는 안광을 번뜩이며 고홍을 노려보았다. "누대연이 누구요?" 고홍은 빙그레 웃었다. "자네는 정말 몰라서 묻나? 자네 아버지의 하나뿐인 의동생을 말일세." 엽단풍은 입을 다물었다. 고홍은 그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말을 계속했다. "예전에 무적염왕 엽철흔과 마수(魔手) 누대연은 관포지교(管鮑之交)보다도 더한 우정을 맺었었지. 이십 년전의 혈사(血史)때 누대연은 엽철흔을 돕다가 사로 잡히는 몸이 되었네." 엽단풍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누대연이 아직까지 살아있단 말이오?" 고홍은 히죽 웃었다. "그가 죽었으면 노부가 어찌 말을 했겠나?" 엽단풍의 안색이 여러 차례 변했다. 고홍은 다시 점잖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누대연은 혈악의 십대고수중에서 서열 삼위(三位)에 올라 있었지만 다른 자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엽철흔을 추종했었네. 혈악에서는 그를 잡아 죽이려 했으나 효용가치가 있을지 몰라 아직 은밀한 곳에 가두어 놓고 있네." 엽단풍은 자신도 모르게 급히 물었다. "그곳이 어디요?" 고홍은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했다. "노부는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그걸 알려줘서 무슨 이득이 있겠나?"


엽단풍은 한동안 고홍을 응시하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고노인이 입을 안 열면 나는 강제적인 수단을 쓸 수도 있소." "허허...자네는 늙은 나를 고문(拷問)하겠다는 것이군. 그럼 어서 하게. 하지만 지하의 엽철흔이 이를 알면 무어라고 할지 궁금하군." 엽단풍은 고홍을 노려보다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정말 늙은 너구리처럼 술수(術數)가 많구료." 고홍은 희미하게 웃었다. "과찬의 말이네. 그냥 오래 살다보니 이런저런 요령이 생기더군." 엽단풍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신은 정말 고월헌을 뺨치는 사람이오." 고홍의 눈이 번쩍 빛났다. "만리무영 고월헌 말인가?" "고월헌이 그 말고 천하에 또 누가 있겠소? 당신은 그런 말을 들어보지 못했소?" "허허...확실히 일전에 몇몇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더군. 하지만 자네의 입으로 들으니 아주 색다른 기분이 나는군 그래." 고홍은 점잖게 자신의 턱에 늘어뜨린 검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당년의 만리무영 고월헌은 가히 무림제일재사(武林第一才士)로 많은 사람들의 숭앙을 한 몸에 받았지. 오죽 했으면 그 자와 자네의 아버지를 일컬어 문무쌍절(文武雙絶)이라고 했겠나?" "잘도 아는구료." "허허...혈악 내에서 이들 두 사람을 모른다면 말이 안되지. 고월헌은 그야말로 재주가 많고 머리가 비상해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그를 한 번만이라도 만나봤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네." 엽단풍은 공연히 심술이 났다. "그래서 당신은 지금 당신이 그 만리무영 고월헌과 쌍벽을 이루는 절대의 재사(才士)라고 떠벌이고 있는거요?" 고홍은 늙은 너구리답게 느물느물하게 웃었다. "허허...그거야 어디 노부가 한 말인가? 자네가 자네 입으로 한 게지." 엽단풍은 한숨이 푹푹 나왔다. "내가 어쩌다 이 늙은 너구리를 만나서 이렇게 골머리를 ㅆ는거지?"


"허허...그건 그렇고....자네는 어쩔텐가?" "뭐가 말이오?" "노부가 누대연의 행방을 머리속에만 담은 채 죽기를 바라나? 아니면 노부가 그래도 선심을 베풀어 자네 아버지의 하나뿐인 의제(義弟)가 있는 곳을 알려주길 바라나?" 엽단풍은 고홍을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날렸다. "말을 들어보니 고노인이 나를 엄청나게 봐주는 것 같구료." "허허...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말리지는 않겠네." 엽단풍은 그와 더 이야기 하기도 싫은 듯 손을 내저었다. "누대연의 행방을 알려주면 더 이상 고노인을 건드리지 않겠소." 고홍은 눈을 반짝 빛냈다. "자네는 당당한 엽철흔의 아들이니 자네 말을 믿겠네." 그는 일부러 다짐을 받으려는 듯 자꾸만 엽철흔의 이름을 거들먹거렸다. 엽단풍은 짐짓 눈을 부라렸다. "정말 빨리 말하지 않겠소? 이러다 성질나면 누대연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내 마음대로 하는 수가 있소." 고홍이 질겁을 하고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알겠네. 말해주지. 그는 지금 융중산(隆中山)의 정상에서 멀지 않은 북쪽 계곡속에 갇혀 있네." 엽단풍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정말이오?" 고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뵈도 나 고홍은 한 평생을 신용 하나로 버텨온 사람일세." 엽단풍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퉁명스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그곳에 가면 또 혈악의 똘마니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내가 오기만을 눈알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거 아니오?" 고홍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테니 자네는 안심을 하게." 이어 그는 싱겁게 히죽 웃었다. "자네도 생각을 해보게. 자네의 신법은 적어도 나보다 몇 배는 빠를텐데 지금 자네가 당장 그곳으로 간다면 내가 무슨 수로 자네보다 빨리 그곳에 가서 매복을 할 수가 있겠나?"


"하지만 고노인은 잔꾀가 너무 많아서 도저히 안심이 되지 않는구료." 고홍은 억울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노부의 말은 추호도 틀림없는 사실이네. 믿어주게." "고노인의 말을 믿고 싶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소." 엽단풍은 중얼거리듯 말하며 갑자기 손을 내밀어 고홍의 전신 십이개 대혈(十二個大穴)을 모두 짚어 버렸다. 고홍은 전신의 혈도가 짚힌 채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엽단풍은 히죽 웃으며 그의 몸을 바닥에 뉘어 놓았다. "별거 아니오. 고노인의 혈도는 열두 시진(時辰)후면 저절로 풀릴거요. 그러니 그때가서 고노인 마음대로 정력을 자랑하도록 하시구료." 고홍은 안색이 여러 차례 변하더니 갑자기 허공을 우러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토록 사람을 믿지 못하다니...세상 인심이 어찌 이리도 야박해 졌단 말인가?" 엽단풍은 껄껄 웃었다. "하하...세상 인심이 야박해진게 아니라 고노인의 머리가 너무 비상하게 발달해서 다른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오." 그는 고홍의 주름진 얼굴을 툭툭 두드렸다. "그럼 푹 쉬도록 하시오." 이어 그는 공손단경과 봉일평의 몸을 안아들더니 그대로 몸을 날려 사라져갔다. 고홍은 한숨만 푹푹 내쉰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텅빈 고소대에는 부서진 바윗돌만이 여기저기 널려 있을 뿐이었다. 휘이잉! 한 줄기 세찬 바람이 불어 오면서 주위는 한층 더 어두워졌다. 바로 그때였다. 고홍이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그의 눈에서는 수 백개의 횃불이 번쩍이는 듯한 광망이 번뜩였다. 그 광망은 나타날 때보다도 더욱 빠르게 사라졌다. 그러더니 돌연 그의 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랍게도 십이개대혈을 제압당했던 고홍이 스스로의 힘으로 막혔던 혈도를 푼 것이다.


고홍은 엽단풍이 사라진 곳을 보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무어라고 딱 꼬집어 표현할 수 없는 괴이한 것이었다. 고홍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그대로 몸을 날려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곧 그의 옷자락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제 20 장 禁 魔 谷 1 융중산(隆中山). 융중산은 호북성(湖北省)의 서쪽에 있는 산이었다. 군사요충지로 유명한 양양(襄陽)과 번성(樊城)에서 오십 여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한수(漢水)의 남쪽에 면해 있었다. 융중산이 특히 유명한 것은 삼국시대의 제갈공명(諸葛公明)이 은거했던 곳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복룡산(伏龍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말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장님의 마음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주위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다. 달도 없는 그믐밤. 융중산은 괴괴한 몸을 누인 괴물처럼 어둠속에 누워 있었다. 돌연, 스윽! 짙은 어둠 속을 뚫고 융중산의 중턱을 질풍같이 치올라 가는 한 인영이 있었다. 인영의 신법은 그야말로 야조(夜鳥)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인영은 융중산의 지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 조금도 거침없이 산을 올라갔다. 멀리 어둠 속에서 산의 정상이 희미하게 보이자 인영의 동작이 더욱 빨라졌다. 인영은 마침내 산의 정상에 도착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몸을 멈추기는 커녕 더욱 빠르게 산의 북쪽 능선을 치달려 가는 것이 아닌가? 이제보니 그의 목적지는 산의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융중산의 북쪽은 유달리 산세가 험악하고 계곡이 가파랐다. 기암괴석이 곳곳에 삐죽삐죽 솟아있고, 급격한 낭떠러지가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어서 잠깐만 한 눈을 팔아도 그대로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 같았다. 그런데 인영은 익숙한 동작으로 기암괴석과 계곡을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이토록 짙은 어둠 속에서 능숙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그 인영은 이곳의 지리를 손바닥보다 더욱 자세하게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얼마쯤 달려갔을까? 인영은 하나의 울창한 계곡으로 들어섰다. 계곡은 아찔할 정도로 높은 절벽과 낭떠러지의 틈 사이에 교묘하게 뚫려 있어 그곳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위치에 자리해 있었다. 그때였다. "누구냐?" 계곡안의 어둠 속에서 싸늘한 폭갈소리가 들려왔다. 인영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짤막하게 소리쳤다. "우내독보(宇內獨步)!" 그러자 어둠속의 음성이 말을 받았다. "혈악영세(血嶽永世)! 장형(張兄)이오?" 계곡안으로 들어온 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나요. 허형(許兄)이구료?" 인영앞의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그는 쥐눈을 한 흑의장한이었다. 흑의장한은 계곡으로 들어온 인영을 보며 재빠른 음성으로 말했다. "장형은 왜 그렇게 늦게 오는거요? 장형이 잠시 빠져나간게 발각될까봐 조마조마했소." 계곡안으로 들어온 인영은 어둠속에서 활짝 웃었다. 그는 제법 이목구비가 수려한 청년이었다. 하나 눈빛이 음침하고 입술이 빨간 것이 별로 호감이 가는 인상은 아니었다. "그 계집이 어찌나 달라붙던지 녹초로 만들어 놓고 오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소." 쥐눈의 장한은 부럽다는 듯 혀를 찼다. "그 년은 생긴 것 부터가 밝히게 생겼다니까. 장형은 오늘 단단히 몸을 풀었겠구료." "흐흐...한 사 오일 정도는 넉넉히 견딜만 하오." 쥐눈의 장한은음탕하게 웃었다. "내일은 내가 나갈 테니 장형이 수고 해 주시오." "걱정마시오. 아마 허형의 실력이라면 그 계집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거요." 보아하니 이 작자들은 한 여자를 번갈아가며 만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쥐눈장한은 이름을 허평(許平)이라고 했고, 청년은 장표(張表)였다. 허평은 내일 일을 생각해도 흥분이 되는지 얼굴이 벌게지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형은 누구와 같이 왔소?" 장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물론 나 혼자 왔소. 왜 그러는거요?" 허평의 눈빛이 갑자기 싸늘해지더니 앞의 어둠을 노려보았다. "웬 놈이냐?" 장표도 그제서야 인기척을 느낀 듯 안색이 변해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속에서 한 사람이 어슬렁어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몸을 움찔 떨었다. 나타난 사람은 집채만한 덩치의 흑의인이었던 것이다. 어찌나 체구가 크던지 두 사람을 모두 합쳐 놓은 것만 했다. 어둠속이라 더욱 커보였는지도 모른다. 허평은 두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네 놈은 누구냐?" 나타난 흑의사내는 히죽 웃었다. "어째 이 자식들은 만나는 놈마다 싸가지가 없군. 공손하게 물어보지 않으면 절대로 대답을 못해주겠다." 허평의 생쥐같은 눈꼬리가 쭉 찢어졌다. "죽으려고 환장을 한 놈이군. 네 놈은 여기가 어딘지 ���느냐?" 흑의사내는 그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게 간덩이도 그만큼 큰게 분명했다. "어디긴 어디냐? 혈악인지 개지렁이인지 하는 놈들의 소굴이겠지." 허평은 상대가 혈악이라는 말을 태연히 내뱉자 안색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미친 놈...이곳이 어디인줄 알면서도 함부로 지껄이다니..." 흑의사내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얼레? 네가 내 별명을 어떻게 아느냐?" 이번에는 허평이 어리둥절했다. "네 별명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그때 장표가 눈을 빛내며 급히 말했다. "당신은 혹시...천하광자라는 엽단풍이 아니오?" 흑의사내, 엽단풍은 장표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과연 생긴 것 답게 놀라운 안목에 엄청난 직감력이로군. 내가 바로 엽단풍이다." 엽단풍이라는 말에 두 사람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장표는 혹시나 하고 내뱉은 말이 사실로 변하자 자신도 모르게 음성이 떨려 나왔다. "귀...귀하는 이곳에 무슨 일이오?" 그가 왜 이렇게 두려워 하는 것일까? 그도 그럴것이 혈악의 십대고수중 이미 절반이 그의 손에 쓰러졌을 뿐 아니라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이 미치광이의 손에 비명횡사를 했는가? 당금 무림은 물론이고 혈악 내에서도 천하광자 엽단풍이라는 이름은 외경과 공포의 대명사가 된지 오래였다. 그런 무서운 인물을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달랑 두 사람이 만났으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엽단풍은 그들의 두려워 하는 몰골을 보고 피식 웃었다. "무슨 일이긴. 그냥 지나가다 들렸지." 그의 말에 두 사람의 얼굴에 희미하게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하나 그때 엽단풍이 히죽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이왕 온 길이니 이곳이 어떤 곳인지 자세히 구경 좀 해야 되겠다. 너희들은 이의가 없겠지?" 두 사람은 다시 안색이 변해 어쩔 줄을 몰랐다. "저..그런데...." 엽단풍은 돌연 안광을 무시무시하게 번뜩이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왜? 내가 이곳을 구경 좀 하는게 싫단 말이냐?" "아니...그런게 아니라..." 엽단풍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안광은 어둠을 환히 밝힐 정도로 강력했다. 두 사람도 혈악의 인물들이니만큼 무림에 나가면 능히 일류고수의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었으나 엽단풍의 앞에 서니 그야말로 고양이앞의 쥐꼴이 되었다. 단신으로 십대고수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는 그의 앞에서 어찌 고수 행세를 하겠는가? 장표는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저...엽대협(葉大俠)...사실 우리는..."


한데 그가 무어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엽단풍이 팔짝 뛰며 번개같이 그에게로 달려왔다. "무어라고? 대협이라고?" 장표는 무언가가 눈앞에 희끗거린다고 느낀 순간 목덜미에 엄청난 압력을 느끼고 몸이 허공으로 붕 솟구쳤다. "케엑..." 엽단풍은 어느새 그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자신의 얼굴부근으로 들어올렸다. 장표의 체구도 적은 편은 아닌데 엄청난 몸집의 엽단풍 수중에 들어가자 그야말로 고목나무옆의 매미신세가 되었다. 엽단풍은 장표를 쏘아보며 무시무시한 음성으로 물었다. "네 놈이 내가 대협인 걸 어떻게 알았느냐?" "이...이것 좀 놓고..." "내가 대협인 걸 아는 자는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네 놈이 그 중대한 비밀을 알았느냐? 빨리 말하지 못하겠느냐?" 엽단풍은 그의 목덜미를 더욱 바싹 움켜쥐었다. 장표는 안색이 파랗게 질린 채 대롱대롱 매달렸다. "케엑...." "누구냐? 저 놈이 그랬느냐?" 엽단풍의 시선이 허평에게 향했다. 허평은 열심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저는 그런 건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그럼 누가 그런 중대한 비밀을 발설했단 말이냐?" 장표는 그의 손에서 바둥거리다가 더듬거렸다. "저...저의 직감으로...." 그 순간, "놀라운 직감이도다." 엽단풍이 움켜잡았던 그의 목덜미를 놓아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과연 자네는 조금전에 본대로 초인적인 직감력을 지니고 있군. 그 직감을 ㅆ히지 말고 계속 발전시키도록 하게." 장표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그가 자신의 어깨를 흔드는대로 "네...네.."하면서 멍하니 서 있었다. "자네는 자네의 그 놀라운 직감을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알려주도록 하게. 필시 사람들의 엄청난 존경을 받을걸세." 엽단풍은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는 그의 어깨를 몇 번 두들겨 준 다음 허평을 꼬나보았다.


허평은 한 쪽에서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가만히 있다가 엽단풍의 싸늘한 눈초리를 받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엽단풍은 두 눈에 살기를 가득 담은 채 천천히 허평을 향해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이런 직감력도 하나 없는 쓰레기는 살려둘 필요가 없지." 그는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우우웅... 그의 오른손에서 보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엄청난 경기가 휘몰아쳤다. 허평은 사색이 된 채 황급히 입을 열었다. "엽대협...엽대협....저..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엽단풍은 여전히 오른손을 들어올린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네가 무엇을 알고 있었느냐?" 허평은 그야말로 죽느냐 사느냐하는 심정이 되어 정신없이 주둥아리를 놀렸다. "저는 이미 엽대협을 보는 순간 엽대협께서 당대무림(當代武林)의 최대최고의 대협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아까는 왜 아니라고 했느냐?" "그...그건 제가 순전히 실수로...." 엽단풍은 눈꼬리가 조금 풀어졌다. "흐음...그 말이 정말이렸다?" 허평은 엽단풍이 누그러질 기미가 보이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어느 안전(顔前)이라고 제가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엽대협께서는 그야말로 동서고금(東西古今)에 다시 없을 최대최고최상의 대협이십니다." 허평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입에 침이 마르도록 지껄여댔다. 엽단풍은 들어올렸던 오른손을 내리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보니 자네의 안목도 대단하군. 그 정도 안목에 그 정도 식견이면 능히 강호무림에서 재사(才士) 소리를 듣겠군." "예...헤헤..." 허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간사하게 웃었다. "자네들 두 사람은 모두 놀라운 직감력과 안목을 지닌 놓치기 싫은 인재들일세. 이제 자네들이 내게 이곳에 대해서 소상하게 알려준다면 자네들을 흔쾌히


놓아주도록 하겠네." 그 말에 두 사람의 얼굴이 다시 사색이 되었다. "엽대협....그...그건..." 엽단풍은 다시 눈을 부라렸다. "왜? 자네는 지금 살고 싶지 않으니 어서 죽여달라고 말하고 싶은건가? 그럼 소원대로 해주지." 엽단풍이 가까이에 있는 허평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오른손을 번쩍 쳐들었다. 허평은 질겁을 하며 발버둥을 쳤으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엽단풍의 커다란 손에 목덜미를 잡히자 옴짝달짝을 할 수가 없었다. "여...엽대협." "그렇지 않아도 네 놈의 상판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아하니 저 자는 이미 날카로운 직감력으로 나에게 모든 비밀을 털어놓고 싶은데 네 놈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 모양같구나. 그러니 네 놈이 죽어버리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해결될게 아니겠느냐?" "여...엽대협.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허평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는 이미 엽단풍의 커다란 손이 그의 관자놀이 바로 밑까지 와 있을 때였다. 허평이 이제는 죽었구나하고 눈을 감고 있는데 당체 자신의 머리통이 박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살며시 눈을 뜨자 엽단풍은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자. 이제 모두 해결되었으니 자네는 어서 말하도록 하게." 허평은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다가 바닥에 장표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이....이건...." 엽단풍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아주 온화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 자가 살아있으면 자네가 말을 할 때 아무래도 어색해 할 것 같아 해치워 버렸네. 그러니 자네는 안심하게." 허평은 그야말로 오금이 저릴 정도로 바들바들 떨었다. 눈앞에서 자신의 동료가 눈깜짝할 사이에 죽어 버렸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허평이 아무 말도 못하고 계속 떨고만 있자 엽단풍의 눈빛이 다시 차가워졌다. "왜? 자네도 동료를 따라가고 싶은가?" 허평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아닙니다." "그럼 말해보게." 허평은 안색을 실룩실룩거리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선택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곳은...금마곡(禁魔谷)이라고 합니다." 엽단풍은 피식 웃었다. "원래 별 볼일 없는 곳일수록 이름은 그럴듯 한 법이지." "이곳은....원래 혈악에서 죄를 지은 죄수들을 가두는 곳으로..." 허평은 자포자기한 심정에서 고분고분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해서 엽단풍은 금마곡의 내부사정에 대해서 소상하게 알게 되었던 것이다. 2 금마곡의 내부는 상상 외로 넓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사람 하나가 간신히 지나갈 만큼 좁고 협소했는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져서 종내에는 하나의 거대한 분지(盆地)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분지는 다시 세 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가장 외곽 지역은 금마곡을 수호하는 경호무사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 안의 깊숙한 지역에 수뇌인물들의 거처가 있었다. 그리고 죄인들은 뜻밖에도 수뇌인물들의 거처 바로 밑, 지하감옥(地下監獄)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것은 외인(外人)들의 침입을 막고 죄수들의 탈출을 저지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이었다. 입마동(入魔棟). 수뇌인물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였다. 일반 경호무사들은 이 입마동에서 승락이 떨어진 다음에야 수뇌인물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입마동의 동주(棟主)는 혈수인마(血手人魔) 강구심(姜懼心)이라는 전대(前代)의 오래된 노마두(老魔頭)였다. 지금 강구심은 막 잠자리에 들려하고 있었다. 그때 딸랑딸랑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구심은 자리에서 일어나 눈쌀을 찌푸렸다. "어떤 미친 놈이 이렇게 늦은 시각에


내원(內院)으로 들어가겠다는거야?" 그 종소리는 누군가가 내원으로 들어가는 허락을 얻기 위해 입마동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신호였다. 강구심은 이미 팔십이 훨씬 넘은지라 한 번 누웠던 자리에서다시 일어나는 것이 무척 싫었다. 딸랑!딸랑! 하지만 그 딸랑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도저히 자고 싶어도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를 부득 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느 놈인지 주리를 틀어 주겠다. 감히 노부의 수면을 방해하다니..." 그는 화가 나서 옷을 대충 걸치고 입마동으로 갔다. 입마동은 별로 크지 않은 작은 건물인데 경호무사들이 기거하는 외원(外院)과 내원의 정 중앙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내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강구심은 대청을 지나 입마동으로 들어갔다. 가 보니 웬 체구가 커다란 놈이 발을 까닥거린 채 의자에 앉아 있다가 그를 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강구심은 그 자의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그 체구가 커다란 놈은 강구심의 앞에서도 고개를 뻣뻣이 쳐든 채 입을 열었다. "저는 외곽을 지키는 허평이라고 합니다." 강구심은 외곽의 경호무사따위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런 인물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다만 이 자식이 더럽게 키가 크고 더럽게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늦은 밤에 웬일이냐?" 그는 특별한 일도 아닌데 자신을 불렀다는걸 알기만 하면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에게 아주 따끔한 맛을 보여줄 작정이었다. 허평이라는 녀석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호들갑을 떨었다. "동주님. 큰일났습니다." 강구심은 눈썹을 찌푸렸다. 이런 말을 하는 녀석치고 정말로 큰일이 나서 달려오는 놈은 없는 법이다. "무슨 일이냐?" 그의 음성이 냉랭해졌다. "밖에 왠 놈이 찾아와서 소란을 부리고 있습니다." 강구심은 한숨부터 나왔다. "그러면 쫓아 버리던지 없애버리면 될 게 아니냐?" 허평은 까치집같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강구심을


그것만 보아도 괜히 자기 머리까지 간지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그 놈의 무공이 상당히 고강해서 저희들로서는 도저히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그게 정말이냐?"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강구심의 안색이 조금 굳어졌다. 그는 경호무사들이라고 해도 무림에 나가면 능히 절정고수의 대열에 올라갈 수 있는 자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한 놈을 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은 찾아온 놈의무공이 생각보다 고강하다는 말이었다. "그 놈이 누구냐?" "자칭 대협이라는 놈입니다." 강구심은 짜증스러웠다. "대협이 무림에서 한 두명이냐? 무슨 대협이라고 하더냐?" "글쎄요. 이름이 상당히 길던데...동서고금최대최고최상대협이던가? 그렇습니다." 강구심은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따위 이름이 어디 있느냐?" 허평은 그의 호통을 듣자 움찔하더니 투덜거렸다. "그 작자가 자신의 입으로 그렇게 말해서 그대로 아뢴건데 왜 화를 내고 그러십니까?" 강구심은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허평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이 자식은 단순히 버르장머리만 없는게 아니라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은 것이 분명했다. 감히 자신을 향해 큰소리를 치다니... "네 놈이 지금 무어라고 했느냐?" 허평은 점점 간덩이가 커지는 지 큰소리로 말했다. "왜 화를 내냐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왜 말끝마다 욕을 하십니까? 내가 네 놈한테 그러면 좋겠습니까?" 강구심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뭐라고?놈?" 허평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놈이라니요? 동주는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놈이라고 칭하십니까?" "이...이런 죽일 놈이..." 강구심은 너무도 화가 치밀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를 않았다. 허평은 두려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히죽 웃었다. "거 참 말버릇 한 번 희한하군요. 나는 아직 자기가


자기한테 놈이라고 말하는 놈은 처음 보았습니다." 강구심은 안색이 시퍼렇게 변한 채 부들부들 떨었다. 허평은 천연덕스런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어디 아프십니까? 왜 놈께서는 안색이 그렇게 안 좋으십니까?" "이...이...." 강구심은 이를 부드득 갈더니 오른손을 번개같이 휘둘렀다. "이 놈!" 꽈르릉! 그의 손에서 무지막지한 경기가 노도와 같이 허평을 향해 쏘아져갔다. 허평은 깜짝 놀라 손을 마구 내저었다. "아이구...놈. 살려주���시오....놈이 사람죽인다!" 그는 꽥꽥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토록 막강한 위세로 날아가던 강구심의 장력이 허평의 근처에 닿는 순간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강구심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는 혈악의 절정고수답게 단번에 허평이 장난처럼 휘두른 손짓이 이상하다는걸 알아차린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절전된지 백 년이 넘는 대산수(大散手)라는 절예였다. "이제보니 네놈은 놀라운 무공을 지니고 있었구나." 강구심은 그제서야 무언가를 느낀 듯 허평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허평은 히죽 웃었다. "놀랍다니요. 제가 어찌 귀하신 놈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허평이 말끝마다 자신을 놈이라고 하자 강구심의 안색이 온통 살기로 뒤덮혔다. "감히 몇 가닥 잔재주를 믿고 노부를 희롱하려 하다니...내가 오늘 네 놈을 찢어죽이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그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양 손을 세차게 휘둘렀다. 꽈르르릉! 그에 따라 무시무시한 장력이 허평을 향해 몰아쳐갔다. 허평은 놀라기는 커녕 오히려 껄껄 웃었다. "하하...자신을 놈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다니...과연 당신은 대단한 놈이오."


동시에 그는 오른손을 슬쩍 흔들었다. 광도번천수의 공세가 폭풍노도처럼 일어났다. 꽝!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강구심의 몸이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으웩!" 강구심은 거의 이 장이나 정신없이 물러나더니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으며 시뻘건 선혈을 토했다. 그는 한 바탕 피를 토한 후 믿어지지 않는 다는 눈으로 허평을 바라보았다. 허평은 태산처럼 그 자리에 꿈쩍도 않고 우뚝 선 채로 그를 바라보며 기이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네...네놈은 허평이 아니구나." 가짜 허평은 히죽 웃었다. "그걸 이제야 아셨다니 조금전에 말한 대단한 놈이라는 말은 취소요. 당신은 별 볼일 없는 놈이오." 강구심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그를 노려보았다. "미...미친 놈...네 놈은 대체 누구냐?" "아까 말했지 않소? 동서고금최대최고최상대협이라고." 강구심의 안색이 여러차례 변했다. 그는 팔십 평생 이와같은 모독은 당해본 적이 없었다. "죽일 놈...이곳이 감히 어디인 줄 알고..." "어디긴. 나쁜 놈들이 좋은 사람을 가둬놓은 곳이지." 그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말에 강구심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아...알면서도 단신으로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다니...네 놈은 정말 미친 놈이구나!" 가짜 허평은 돌연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당신은 과연 쪽집게처럼 내 정체를 알아내는구려. 아까 한 말은 취소요. 당신은 과연 대단한 놈이었소." 강구심의 얼굴이 격하게 떨렸다. "이...."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를 느낀 듯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그럼 네가 바로 천하광자 엽단풍이란 말이냐?" 얼마나 놀랐는지 그의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있는대로 커졌다. 엽단풍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소. 대단한 놈 나으리." 강구심은 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는 요즘들어 귀가 따갑도록 들은 몇 가지 소문이 섬전같이 떠올랐다. -십대고수 중의 목불이 엽단풍이라는 애송이에게 살해되었다! -목불을 죽인 엽단풍이 취사와 비마, 신랑마저 쓰러뜨렸다! -곤왕과 혈부마저 그 무서운 엽단풍의 손에 죽고 말았다! 엽단풍! 엽단풍! 몇 날 몇 일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소문의 주인공이 드디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2 권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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