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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무뢰한(상) - 용대운 저

서 장 풍진천하(風塵天下)에 미친 놈(狂子)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과연 누구인가?

제 1 장 천하광자(天下狂子) 1. 봉일평(鳳一平)이 그를 처음 본 것은 소주(蘇州)에서 제일 번화한 취선루(醉仙樓)의 이층누각이었다. * * * 무척 더운 날이었다. 그날도 봉일평은 더위를 피해 취선루의 이층누각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취선루의 이층누각에 오르기만 해도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와 더운 줄을 몰랐으나 오늘의 날씨는 그야말로 폭염(暴炎)에 가까워 봉일평은 창가에 있으면서도 소매로 연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야 했다. "제길...지독하게 덥군. 이 놈의 날씨가 아예 사람을 찌어 죽이려고 작정했나." 그는 약간 왜소한 체구에 단정한 용모를 하고 있었고 태도 또한 항상 깔끔했지만 오늘은 더워도 너무 더웠다. 오죽했으면 봉일평은 당장에라도 웃통을 훌훌 벗어던지고 시원한 그늘에 누워 낮잠이라도 자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만일 그랬다가는 온 소주성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와 그의 벌거벗은 몸을 구경하느라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게 뻔한지라 그저 창가에 턱을 고인 채 흐르는 땀을 씻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이층 밖을 무심코 내다보던 봉일평은 저 멀리서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보기만 해도 숨이 막혀 버릴 것 같은 흑의를 입고 있었는데 금시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용케도 취선루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도저히 용모를 알아볼 수가 없었으나 언뜻 보기에도 키가 엄청나게 컸다. 봉일평은 아직 그 흑의사내처럼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흑의를 입어서 더 커보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의 허리춤에 달려 있는 녹이 잔뜩 슬은 칼이 마치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로 무지무지하게 큰 사람이었다. "술...술..." 흑의사내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흐느적흐느적 다가와서는 취선루의 입구에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쿵! 황소가 쓰러져도 그것보다는 소리가 작았을 것이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가 쓰러지자 입구 쪽에 서 있던 점소이 하나가 깜짝 놀라 그에게로 다가갔다. "여보시오...여보시오..." 점소이는 흑의사내의 몸을 흔들었다. 봉일평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체구가 작은 점소이가 거대한 그의 몸을 흔드는 모습이 꼭 고목나무에 매미가 달라붙어 꼼지락거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흑의사내의 갈라진 입술 사이로 미약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술...술 좀 줘..." 봉일평은 그 사람이 더위를 먹어서 물대신 술을 찾는 것으로 생각했다. 어쨌든 술이든 물이든 시원한 것이라면 누구라도 한 잔 마시고 싶을 것이다. 그때 갑자기 흑의사내가 벌떡 일어났다. "술...술이다...술 냄새가 난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코를 킁킁거리더니 눈을 번뜩이며 취선루의 뒤쪽 뜰로 마구 달려갔다. 점소이는 화들짝 놀라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안돼요! 이봐요...그곳은 술창고란 말이오..." 하나 흑의사내는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 나왔는지 점소이를 확 밀치고는 미친 듯이 후원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꽥?" 어마어마한 체구의 그가 집어던지자 작고 왜소한 점소이는 그야말로 태풍을 만난 가랑잎처럼 사 오장 밖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앗? 저 놈 봐라!" "막아라!" 안에 있던 취선루의 점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으나 그때는 이미 흑의사내는 후원 쪽으로 사라진 후 였다. 점원들은 저마다 몽둥이나 나무막대를 들고 벌떼같이 흑의사내가 사라진 곳으로 달려갔다. 봉일평은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이층에서 내려와 후원 쪽으로 다가갔다. 취선루의 술창고는 후원의 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봉일평이 막 후원으로 나왔을 때 흑의사내는 이미 술창고를 향해서 맹렬한 기세로 돌진하고 있었다. 쾅!


벼락치는 소리가 터지며 두꺼운 술창고의 문이 사람 형상으로 구멍이 뻥 뚫려 버렸다. "저...저럴 수가..." 막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흑의사내를 뒤쫓아오던 점원들이 그 광경을 보자 입을 딱 벌리며 들고 있던 몽둥이들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그 술창고의 문은 특수주문한 철심목(鐵心木)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강철 만큼이나 단단한 것이었다. 그 단단한 문을 흑의사내는 자신의 형체를 생생하게 남긴 채 그대로 뚫고 들어간 것이다. 흑의사내의 몸은 벌써 술창고 속으로 사라져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봉일평 또한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굉장한 내가공력(內家功力)이구나...저 정도의 공력이라면 소주 제일의 고수(高手)라는 대신권(大神拳) 하충광(河沖廣)보다도 강하겠는데...' 점원들은 구멍이 뻥 뚫린 술창고 앞에서 감히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크...큰일났다...더운 공기가 들어가면 술이 금새 상하는데..." 점원들이 안절부절못하자 그들 중 그래도 가장 체구가 크고 힘이 센 주방장이 용기를 내서 커다란 식칼을 들고 술창고로 다가갔다. 이상하게도 술창고 속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방장은 식칼을 힘주어 잡으며 술창고 안으로 한 발 들여 놓았다. 서늘한 공기가 더위를 씻어 주었고 냄새만 맡아도 취기를 느낄 만큼 독한 술향기가 풍겨나왔다. 주방장은 어두컴컴한 술창고 속을 두리번거리다가 안쪽에 있는 밀실의 문이 박살난 채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그곳은 아주 특별한 장소로서 취선루가 천하에 자랑하는 옥빙주(玉氷酒)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옥빙주는 그 맛과 향기가 가히 천하일품이라 할 만큼 뛰어났으나 그 만큼 제조하고 보관하기가 까다로워서 취선루에서는 특별히 술창고속에 따로 밀실을 만들어 보관해 두었던 것이다. 주방장은 떨리는 걸음으로 밀실로 다가갔다. 밀실의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콸콸콸콸... 그것은 마치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 같기도 했고 작은 폭포에서 물방울 튕기는 소리 같기도 했다. 아무튼 무언가 물줄기가 어딘가로 흐르는 듯한 음향이었다. 주방장은 삐끔 고개를 내밀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 순간 주방장은 눈이 툭 불거져 나온 채 입에 게거품을 물고 사지를 바르르 떨었다. 밀실 안의 옥빙주는 모두 열다섯 동아리였다.


그 동아리들은 장정 한 사람이 하나를 간신히 들 만큼 컸는데 그 큰 동아리들이 모두 마개가 열려진 채 사방에 나뒹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옥빙주는 술이 워낙 독해서 웬만한 술꾼이라도 작은 술병으로 하나만 마셔도 취기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인데 그 짧은 순간에 커다란 열다섯 개의 동아리가 모두 동이 나 버린 것이다. 주방장은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넋을 잃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홀린 듯 밀실의 중앙으로 향했다. 밀실의 중앙. 조금전의 흑의사내가 바닥에 누운 채 입을 딱 벌리고 마지막 남은 동아리를 처박고 있었다. 좔좔좔좔... 그 이상한 음향은 그 자의 목에서 나는 소리였다. 목젖이 꿈틀거릴 때마다 커다란 옥빙주의 동아리에서 폭포수 같은 술이 그의 목 안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주방장은 이곳 취선루에서 이십여 년을 생활해오면서 별의별 주당(酒黨)들을 다 보았지만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술을 처먹는 인간은 생전 처음 보았다. 이건 완전히 인간 세상의 하마였다. 주방장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마지막 옥빙주의 동아리마저 순식간에 바닥이 나 버렸다. "꺼억..." 흑의사내는 커다란 트림을 토한 후 빈 동아리를 바닥에 휙 던졌다. 콰창! 파편이 사방으로 튀기자 그제서야 흑의사내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목을 타고 흘러내린 술들로 인해 그의 전신에서는 진한 술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그가 일어서자 술창고가 온통 꽉 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말 무지무지하게 큰 사람이었다. 주방장도 작은 체구는 아닌데 그와 비교하면 자라다 만 난쟁이처럼 왜소해 보였다. 거대한 체구의 흑의사내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오자 주방장은 자신도 모르게 식칼을 내던지며 벽에 몸을 찰싹 붙여 길을 비켜 주었다. 흑의사내는 고맙다는 듯 주방장의 통통한 뺨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고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크!" 밖에서 안의 눈치를 보고 있던 점원들이 앞을 다투어 사방으로 피했다. 흑의사내는 두 팔을 휘적거리며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지날 때 우연인지 흑의사내는 봉일평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가까이 옴에 따라 봉일평은 코를 찌르는 술냄새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가까이서 보니 봉일평은 그야말로 그의 얼굴 보기만도 아득할 정도였다. 고개를 들고 한참을 올려다 보아야 겨우 얼굴이 보일동말동했다. 흑의사내는 휘청거리며 봉일평의 곁을 지나다가 문득 고개를 떨구어 그를 내려다 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그 자의 하얀 이가 살짝 비쳤다. "귀여운 놈이로군..." 그러더니 솥뚜껑같이 엄청난 손을 들어 봉일평의 뺨을 꼬집는 것이 아닌가? 봉일평은 아연해져서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 흑의사내는 봉일평의 뺨을 살짝 쥐고 몇 번 흔들더니 다시 휘적휘적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봉일평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그가 저 만큼 걸어나갈 때서야 봉일평은 간신히 정신이 들었다. 그의 곱상한 얼굴에는 아직도 흑의사내의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봉일평은 너무도 화가 나고 약이 올라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 한참동안이나 씩씩거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봉일평이 그 놈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결심하고 주위를 둘러 보았을 때는 그 자의 모습은 어디론가로 사라진 후였다. 봉일평은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의 눈빛이 점차 가라앉더니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흑의사내가 꼬집은 자신의 뺨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세상에 그런 미친 놈이 있다니...내가 감히 누구인지 알고..." 봉일평은 피식피식 웃으며 다시 취선루의 이층누각으로 올라갔다. 2. 그날 저녁. 봉일평은 심심하기도 하고 오후의 기분나쁜 일에 대한 화풀이도 할 겸해서 고노대(高老大)의 도박장을 찾아갔다. 고노대의 도박장은 소주 일대에서는 가장 크고 번창한 곳으로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봉일평은 두번째로 그를 보았다.


* * * 그 망할 자식이 온 것은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는 저녁무렵이었다. 한낮의 무더위도 한결 가셔서 낙칠(洛七)은 즐거운 마음으로 도박장으로 갔었다. 오늘따라 끗발이 잘 붙어서 낙칠은 제법 주머니가 두둑해질 정도로 돈을 땄다. 그런데 그때 바로 그 망할 놈의 자식이 나타난 것이다. 그 자식의 상통만 생각해도 낙칠은 한 달동안 재수가 없었다. 그 자식은 이 무더운 여름날에 멋대가리도 없는 거무죽죽한 흑삼을 입고 허리에는 두부도 못 자를 것 같은 녹이 잔뜩 슬은 칼 하나를 달랑 매단 채 흐느적거리며 도박장의 안으로 들어왔다. 얼마나 키가 컸는지 그 자식이 들어오자 그 시끄럽던 도박장이 한순간이나마 조용해 졌다. 모두들 그 자식의 커다란 키와 엄청난 몸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기 때문이다. 낙칠은 그 자식을 처음 볼 때부터 기분이 나빴다. 그 자식이 나타나기 전만 해도 낙칠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자기가 남들보다 작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 망할 놈은 그보다 적어도 머리통 두 개는 더 큰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자식은 하고 많은 자리 중에 하필이면 낙칠이 한창 끗발을 올리고 있는 탁자로 와서 털썩 주저앉은 것이다. 의자가 뽀개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나도 한 판 낍시다." 그 자식이 입을 열 때마다 그 입에서는 도저히 인간의 몸에서 나는 냄새라고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악취가 풍겨나왔다. (아니 이 자식은 술집 하수구에서 기어나왔나...무슨 냄새가 이 따위냐?) 낙칠은 그때부터 재수가 없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 뒤로 벌어진 일은 낙칠의 삼십 생애 중 가장 처참한 것이었다. 그 인간하수구가 낙칠의 앞자리에 앉은 뒤로 낙칠은 손에 무슨 망령이 들렸는지 주사위를 던지기만 하면 일(一)아니면 이(二)가 나왔다. 아마 낮은 숫자로 승부를 겨루는 도박이었으면 낙칠은 전무후무한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도박은 높은 숫자를 겨루는 것이었기 때문에 낙칠은 졸지에 알거지가 되었다. 더욱 울화통이 치미는 것은 그 인간하수구는 처음 시작할 때 달랑 한 냥만 가지고 했는데 도박장에서 돈 잃고 죽은 귀신이라도 씌웠는지 걸기만 하면 족족 이기는지라 차츰 그 돈이 불어나더니 나중에는


낙칠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판돈을 몽땅 휩쓸어 버렸다. 그 갈쿠리같이 큰 손으로 도박대위의 은전을 긁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마음속의 심통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단지 그것뿐이면 낙칠은 '별 재수없는 놈 다 보겠네'하고 침이나 탁 뱉으며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 인간하수구가 낙칠을 쳐다보며 말을 건내왔던 것이다. "돈이 떨어진 것 같은데 내가 좀 빌려줘도 되겠소?" 낙칠은 처음에는 애ㄲ은 자신의 귓구멍만 의심했다. 세상에 어떤 할 일없는 미친 놈이 도박장에 와서 생전 처음보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려고 하겠는가? 그것도 자기가 먼저 나서서 말이다. 그때 아마 천지신명께서 낙칠을 돌봐주셨다면 그의 귀를 순간적으로 멀게 했거나 아니면 그 인간하수구의 아가리를 잠깐 봉해버리셨을 것이다. 하지만 천지신명조차도 그 순간만은 선량한 낙칠을 저버리셨다. "바...방금 뭐라고 하셨소?" 낙칠이 귀를 후비며 더듬거리자 그 인간하수구는 씨익 웃더니 시궁창같은 술냄새를 확확 풍기며 말했다. "내가 돈을 대줄테니 몇 판 더 놀아보라고 했소. 왜 싫소?" 그제서야 비로소 낙칠은 자신의 귓구멍이 완벽한 성능을 가지고 있다는걸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정신없이 고개를 내둘렀다. "시...싫다니...무슨 그런 섭한 말을...나...난 좋소." 얼마나 빨리 고개를 내둘렀는지 반대쪽으로 갔던 눈동자가 미처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해서 잠깐동안이나마 낙칠은 사팔이 되었다. 그래서 낙칠은 그 인간하수구가 주는 돈으로 다시 한 판 벌리게 되었다. 그때 낙칠에게 선견지명(先見之明)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왜 처음보는 낮선 사람이 자신에게 이런 친절을 베풀까하고 의심했겠지만 아쉽게도 낙칠의 사전에 선견지명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뒤로 이상하게도 낙칠의 손에 아까와는 반대의 마법이 붙었다. 던지기만 하면 오(五)아니면 육(六)이 나오는 것이다. 낙칠은 하도 신통해서 여섯 판을 연거푸 이긴 다음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스스로 깨물어 보기까지 했다. 물론 손가락만 아팠다. 낙칠은 그 밤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하고 간절히


바랬다. 새벽 동이 훤히 터오를 무렵 낙칠의 탁자위에는 은화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나중에 낙칠은 자기가 그때 왜 그 은화들을 가지고 내빼지 않았는지 정말 저주스러울 정도로 후회를 했으나 그때의 심정은 이 기세를 계속 밀고나가 후대(後代)에 길이 남을 위대한 벼락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낙칠이 기세를 올리는 동안 그 인간하수구는 재수가 달아났는지 별로 신통치 않게 끄적거리다가 겨우 수중에 은자 몇 푼만 달랑 남게 되었다. 그때 그 빌어먹을 인간하수구가 다시 낙칠을 바라보며 악취를 풍겨내었다. "아까 빌려갔던 돈 좀 다시 돌려주겠소?" 낙칠은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아까 그가 빌려주었던 돈에다가 다시 열 냥가량 더 얹어 주었다. "옛소." 그것은 낙칠의 앞에 쌓였던 은자더미에서 아예 표도 나지 않을만한 액수였으나 낙칠은 지금까지 남에게 이런 선심을 베푼 적이 없었다. 인간하수구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고개만 까닥거리더니 그 돈으로 다시 노름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바람에 재수에 옴이 붙었는지 낙칠의 손은 다시 희한한 재주를 부리기 시작했다. 바로 던지기만 하면 일(一)이 나오는 것이다. 아까와 다른 것은 이(二)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어...하는 사이에 낙칠의 앞에 쌓였던 수북한 은자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불과 반시진도 되지 않아 낙칠은 다시 홀라당 모두 털리고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정말 부처님 가운데토막같은 심성을 지닌 자라해도 열통이 끓어오를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더 낙칠로 하여금 이성(理性)을 잃게 만든 것은 그 인간하수구가 자신이 준 돈으로 야금야금 돈을 따더니 마침내는 탁자에 수북하게 은자를 쌓아 놓았다는 사실이었다. 그 은자는 거의 전부가 낙칠이 잃어버렸던 것들이었다. 낙칠은 얼굴이 욹으락붉으락한 채 한참동안이나 그 악취가 풍겨나오는 인간하수구의 상판을 노려보고 있다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아까 그 돈 다시 돌려주시오." 그 인간하수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돈이라니? 무슨 돈 말이오?" 낙칠은 자기가 돌아버리지 않는 것이 신통했다. 그는 떨지 말자...이럴때 일수록 침착하자...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지 않느냐며 자신을 위로한 후 더듬거렸다.


"그...왜 아까 내가 당신에게 줄때 더 얹어준...그 왜 있잖아요...그 돈..." 인간하수구는 멍청한 얼굴로 낙칠을 빤히 바라보다가 돌연 히죽 웃었다. "아. 그 돈." 아마 죽은 애비가 살아돌아와도 이렇게 기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낙칠은 손뼉을 탁 치며 얼굴가죽이 찢어지도록 웃어댔다. "하하...그...그렇소. 이제 생각이 난 모양이구려..." 인간하수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앞에 수북히 쌓인 은자중에서 가장 꾀죄죄한 걸로 열 냥을 집어내더니 그에게 주었다. "여기 있소." 낙칠은 그 돈을 받으면서도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다...당신은 더 얹어 주지 않소?" 낙칠이 수북히 쌓인 은자를 쳐다보며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데도 인간하수구는 매정하게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낙칠은 정말 인간적으로 울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분명 빌려갔던 돈을 돌려주면서 열 냥이라는 거금을 얹어주었는데 이 빌어먹을 녀석은 매정하게도 달랑 원금만 상환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정말 뜨거운 심장을 가진 인간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매정한 일로 낙씨문중(洛氏門中)에서는 상상도 못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돈 가진 놈이 돈 줄 생각이 없다는데야... 게다가 덩치라도 작으면 험악하게 인상이라도 써 볼텐데 이건 아무리 봐도 눈이라도 한 번 흘겼다가는 저 무쇠방망이같은 커다란 주먹에 한 방 얻어맞을 것만 같았다. 그 주먹에 한 대 맞았다가는 낙칠이 아니라 낙칠의 할아버지가 와도 살아남지 못할게 뻔했다. 낙칠은 그 열냥을 가지고 다시 도박대 앞에 앉으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오냐..어디 두고 보자. 내가 다시 돈을 따기만 하면 네 놈은 그날부로 나왔던 하수구로 다시 돌아가게 될것이다..) 낙칠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다시 도박에 열중했다. 과연...지성이면 감천이랄까? 아니면 천지신명께선 분명 하늘 어딘가에서 낙칠을 돌보고 계시는지...그 뒤로 낙칠의 손에는 다시 마법이 붙기 시작했다. 던졌다 하면 계속적으로 육(六)이 나오는 것이다. 아까와 다른 점은 오(五)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 다는 것 뿐이었다.


낙칠은 절로 신이 나서 콧노래가 나올 지경이었다. 벌써 한나절을 계속 도박대에 매달려 있자 아랫배가 살살 아프며 소변이 마려웠으나 낙칠은 끗발이 오를때 따자 하고 나오려는 소변을 억지로 참고 계속적으로 주사위를 굴렸다. 정말 신나는 밤이었다. 낙칠의 앞에는 차곡차곡 은자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낙칠의 오줌통에도 차츰차츰 소변이 고이기 시작했다. 낙칠은 돈을 따는 재미에 희희낙락했으나 언제부턴가 조금씩 다리를 꼬며 괜히 눈을 부릅뜨곤 했다. 옆에 있던 인간하수구가 그를 보며 물었다. "소변 마려우시오? 그럼 다녀오구려. 내가 대신 봐줄테니." 낙칠은 인정사정없는 눈으로 그를 꼬나보았다. 그 인간하수구녀석은 천벌을 받았는지 그 뒤로 돈을 계속 잃고 있었는데 낙칠이 자리를 비우면 그새 끗발이 그 놈에게 갈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별 시덥잖은 소리! 난 맘만 먹으면 하루 왠종일 오줌 한 방울 안나오는 사람이오." 낙칠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다시 도박에 열중했다. 하지만 한 번 입으로 오줌이라는 단어를 내뱉고 나자 이상하게도 더욱 소변이 마려웠다. 낙칠은 끙끙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주사위를 굴리기 시작했다. 떼구르르... 그가 던진 주사위가 처음으로 오(五)를 가리켰다. 그 순간 낙칠은 찔끔하고 오줌 한 방울을 저렸다. 낙칠은 차츰 정신이 오락가락해졌다. 싸고 오느냐...참고 버티느냐... 주사위가 변기통으로 보이면서 그의 머리속에는 온통 소변과 그에 따른 부속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정신이 산만해지는데도 끗발은 신나게 올라서 점차 은자가 수북해졌다. (참자...이 일생일대의 기회를 소변으로 날려보낼 수는 없다. 소변은 지금 안해도 앞으로 평생 신나게 쌀 수 있다.) 낙칠은 이를 악물며 사나이의 기개로 소변을 참았다. 마침 이번의 내기는 아주 커다란 것이 걸렸다. 물주측에서 낙칠에게 단판승부를 제안한 것이다. 지금 낙칠의 앞에 있는 은자는 대략 보아도 이십 만냥에 가까웠다. 물주는 단판에 이십만냥씩 걸고 대결을 벌이자고 했다. 낙칠이 이를 거절할리가 없었다. (이번만 이기면...)


그때는 더 이상 도박을 하지 않아도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그리고 소변도 마음껏 볼 수가 있다. 낙칠은 어서 빨리 승부가 결정되기를 고대했다. 물주가 먼저 주사위를 던졌다. 물주의 얼굴이 우거지상이 되며 낙칠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물주는 겨우 이(二)를 던져낸 것이다. (으흐흐...) 낙칠은 절로 회심의 미소를 짓다가 하마터면 그대로 쌀 뻔 했다. 이번에야말로 그는 일생일대의 벼락부자가 될 것이다. 사십 만냥...! 실로 어마어마한 거금이 아닌가? 낙칠은 터질 듯한 아랫배를 필사적으로 움켜쥐며 힘차게 주사위를 던졌다. 떼구르르... 바닥을 구르는 주사위가 점차 멈춰지기 시작했다. "아...육이다!" 중인들 틈에서 환성이 터져나왔다. 주사위가 멈춰지면서 윗면에 드러나는 숫자는 바로 육(六)이었던 것이다. 낙칠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바로 그때, 툭! 금시라도 멈춰질 듯 하던 주사위가 무엇에 걸렸는지 발랑 뒤집어 지면서 반대편 숫자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꽥?" 낙칠은 눈을 새하얗게 까뒤집었다. 뒤집혀진 주사위는 바로 일(一)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거의 손아귀에 들어왔던 거금 사십만냥이 그대로 날라가며 벼락부자의 꿈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 순간 낙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대로 싸버리고 말았다. 흑의사내는 천천히 도박장을 벗어났다. 그런다음 도박장의 뒤쪽 골목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한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화복을 입은 중년인이었는데 흑의사내를 보자 얼굴에 쓴웃음을 날렸다. 그는 이 도박장의 주인인 고노대(高老大)였다. 흑의사내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고노대는 얼굴에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내기는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는데...설마 멀쩡한 어른이 남들앞에서 바지에 오줌을 쌀 줄은


몰랐소. 정말 세상에는 별의별 놈이 다 있군." 그는 품속에서 전표다발을 꺼냈다. "이것은 천하에서 가장 신용이 좋은 산서은호(山西銀號)에서 발행한 백 만냥짜리 전표요. 확인해 보시오." 흑의사내는 확인해 보지도 않고 그것을 받아 자신의 품속으로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그런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휑하니 몸을 돌려 걸어갔다. 고노대가 멍하니 보고 있는 동안 그의 커다란 몸은 골목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는 덩치답지 않게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요리조리 돌아갔다. 고노대의 시야를 벗어난 다음에도 흑의사내의 걸음은 멈추지를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빨라지는 것 같았다. 마치 누가 자신의 뒤를 ㅉ아와 돈을 빼앗아 가기라도 하는듯 빠르게 걷던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간 곳은 하필이면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때 흑의사내는 몸을 홱 돌리더니 돌연 껄껄 웃기 시작했다. "따라 오느라고 수고 많았다. 귀염둥이야." 한 사람이 쓴웃음을 지으며 골목뒤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는 물론 봉일평이었다. 봉일평은 고노대의 도박장에서 흑의사내를 발견하고 지금까지 줄곧 그의 뒤를 몰래 따라왔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흑의사내는 이미 그가 뒤따르는 것을 알고 일부러 막다른 골목으로 온 게 분명했다. 봉일평은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흠...흠...지금 누구한테 하는 소리요?" 흑의사내는 거구를 흔들면서 웃었다. "하하...누구긴 누구냐? 귀여운 네 녀석이지." 그러더니 그 커다란 손을 내밀어 다시 봉일평의 뺨을 만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봉일평은 질겁을 하고 뒤로 몸을 날렸다. 그 몸놀림은 가히 번개가 무색할 정도로 신속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봉일평이 방금 펼친 신법(身法)은 강호무림에서도 초일류에 속하는 것인데 느리게 다가오는 흑의사내의 손은 어느새 그의 뺨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닌가? "네 놈의 뺨은 정말 말랑말랑하구나." 흑의사내는 낄낄거리며 아까처럼 그의 뺨을 꼬집어 몇번 비틀었다. "이...이런 미친..." 봉일평은 너무도 화가 치밀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번개같이 비호무영퇴(飛虎無影腿)의 수법으로 흑의사내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하나 그의 발이 채 뻗어나오기도 전에 흑의사내의


거구는 이미 저 만큼 뒤로 물러나 있었다. "하하...귀염둥이야. 다음에 다시 만나자." 봉일평이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서 있는 동안 흑의사내의 몸은 소리없이 허공을 날아가기 시작했다. 봉일평은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이보시오! 당신은 대체 누구요?" 흑의사내의 몸은 이미 골목 저편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단지 나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하나의 음성이 저 멀리서 들려올 뿐이었다. "엽단풍(葉丹楓)..." 그 음성의 마지막 말은 거의 백여 장밖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인간의 신법이 어찌 이리도 빠를 수 있단 말인가? 봉일평은 그의 가공할 신법에 놀란 듯 쫓아갈 생각도 내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엽단풍이라...강호무림에 정말 괴짜가 나타났구나. 내 무유신보(無遊神步)를 따라잡을 수 있는 무공은 당금 무림에서 다섯 가지뿐인데 그 자의 수법(手法)이 무엇인지 모르겠군."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 자의 정체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다음에 다시 만나면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주겠다." 황혼의 햇살을 받은 그의 두 눈은 유달리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흑의사내가 사라진 곳을 응시하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제 2 장 서천봉희(西天鳳姬) 1 향향(香香)은 방긋 미소를 지으며 사내품에 얼굴을 묻었다. 향향은 기녀(妓女)다. 소주제일(蘇州第一)의 명기 향향. 그녀는 이름처럼 향긋한 내음이 풍기는 부드러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남자를 볼 때마다 늘 솜사탕처럼 달콤하게 웃는다. 지금도 그녀는 그를 보면서 달콤하게 웃었다. 이 사람은 특별했다. 우선 아주 강(强)했다. 그리고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아주 부드러웠다. 단지 그뿐이라면 그녀가 과거 만났던 몇 사람의


남자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주 욕심이 많았다. 욕심이 많다는 것은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좋은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방면으로 욕심이 많다는 것은 여자들에게는 무척 관심이 가는 일이었다. 특히 그녀와 같은 여자로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호감이 가는 부분이었다. 지금도 이 사람은 그녀의 몸을 다섯번째로 욕심내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 지치고 피곤해서 이대로 그냥 쓰러져 잠들고 싶었으나 그의 욕심어린 손길에 닿은 그녀의 몸은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적극적인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다섯번째 욕심을 충족시켜주자 그녀는 이제는 정말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예 축 늘어져서 영원히 잠만 자고 싶었다. 허리 아래는 얼마나 시달렸는지 아예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 그 사내가 다시 커다란 몸을 일으켜 그녀의 배 위로 올라오며 중얼거리는 게 아닌가? "그럼 준비운동은 그만하고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몸을 풀도록 하지." 향향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 멀거니 그 사람 얼굴만 올려다 보았다. 그 사람은 벌써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일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허리 아래로 느껴지는 감촉으로 보아 이 사람은 정말로 아직도 싱싱했다. 그녀는 있는 힘껏 그를 뿌리치며 소리쳤다. "아...안돼요...나는 이젠 정말 못하겠어요..." 사내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진지한 음성으로 물었다. "난 이제 조금씩 흥분되려고 하는데 당신이 벌써 이러면 난 어떡하란 말이오?" 그녀는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망설이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 보다가 힘없이 웃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정말 처음 보았어요...정 못견디겠다면 내가 다른 아이를 불러 오겠어요. 난 정말 더 이상 못해요..."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여자는 싫소. 난 적어도 당신 정도의 미인(美人)이 아니면 품에 안을 기분이 나지 않는단 말이오." "이홍(怡紅)을 불러 올게요. 그녀도 저만큼 예뻐요." "그녀는 벌써 열흘 전에 실컷 안아 보았소. 그녀는 아마 지금도 앓아 누어 있을걸?" "취앵(翠鸚)은...?." 사내는 오히려 물었다. "당신은 그녀를 못만난 지 며칠 되었지?" 향향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그런데..." "그녀는 이틀 전에 나하고 잤는데 밤새 꼬박 설치더니 뻗어 버렸소. 의식이나 돌아 왔는지 모르겠군."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그를 올려다 보았다. 소주일대에서는 이들 세 사람이 제일 아름다운 기녀들이었다. 보아하니 이 사내는 정말 그녀보다 아름답지 않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 같았다. 하나 그녀들만큼 아름다운 기녀가 어디 흔하겠는가? 그렇다고 여기서 한 번 더 그의 욕심을 채워주다가는 그녀도 다른 두 사람과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사내는 이미 그녀의 몸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급히 그의 손을 밀어내며 물었다. "당신은 꼭 기녀만 안아야 돼요?"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니오. 당신보다 예쁘다면 직업이 무슨 상관 있겠소?" 그녀는 웃을 기운도 없었다. "당신은 혹시 공손단경(公孫旦瓊)이란 여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요?" 사내의 눈이 번쩍 빛났다. "물론이오. 그녀는 듣자하니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네 명의 미녀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하던데 그 여자 맞소?" "맞아요. 바로 사대미인(四大美人)중의 서봉(西鳳)이라는 그 공손단경이에요. 그녀 정도면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겠어요?" 사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나는 진작부터 사대미인을 몽땅 안아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사내가 입맛을 쩍쩍 다시자 그녀는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공손단경이 있는 곳을 알려드릴테니 나를 그만 놔줘요." "그야 이를말인가? 그녀가 지금 어디 있소?" "그녀는 며칠 전에 소주로 유람을 왔는데 지금은 현묘관(玄妙觀)에 있을 거예요." 사내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재빠른 동작으로 아랫도리를 걸친 후 웃도리는 손에 든 채로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그의 돌연한 행동에 놀라 급히 물었다. "당신은 어디로 가려고요?" 사내는 흑의를 걸치며 씨익 웃었다. "어디긴? 현묘관에 가서 그녀를 빨리 안아야지." "하지만..."


"난 아직 몸도 잘 풀지 못했다구. 그녀가 앓아 누웠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다 당신덕인 줄 알고 있으시오." 이어 그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세상에 이토록 급하고 제멋대로인 사람은 보다보다 처음 보았다. 천하에 공손단경을 마치 주머니 속의 물건처럼 쉽게 가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존재한다니... 도대체 그 사내는 공손단경이 어떠한 신분의 여인인지 알고나 있는 것일까? 그녀는 멍하니 누워 있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물었다. "그런데 대체 당신 이름은 뭐예요?" 그의 몸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 멀리서 아련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엽단풍..." 2 봉일평은 운이 좋았다. 이번에 보기만 하면 반드시 본때를 보여줘야지 하고 이를 갈며 돌아다닌지 하루도 되지 않아 그는 다시 그 자식을 만나게 되었다. 봉일평은 자신이 생각해도 이건 정말 운이 좋은 것 같았다. 봉일평이 아침부터 하루종일 소주성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목이 말라 주루에 들어가려 할 때 거리 저편에서 막 모퉁이를 돌아가는 하나의 인영을 보았다. 봉일평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한 번 슬쩍 보기만 해도 그 인영이 누구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그 장대같이 커다란 키하며 거무틱틱한 흑의...흐트러진 흑발에 주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광오한 모습...그리고 고철덩어리를 연상케 하는 그 녹이 잔뜩 슬은 칼... (이 놈! 정말 잘 만났다.) 봉일평은 눈을 번뜩이며 급히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 흑의사내 녀석은 특유의 휘적휘적하는 걸음으로 저만큼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봉일평은 먼저 도박장에서 그의 뒤를 밟다가 들킨 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한결 조심스런 동작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하나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그 흑의사내는 누가 자신을 따라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는지 느긋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고만 있었다. 봉일평은 이 자식을 어떻게 혼내줄까 하고 고민하면서 그의 뒤를 밟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저곳은 현묘관으로 가는 길인데...) 그 흑의사내는 소주성의 북문(北門)을 나와 왼쪽 모퉁이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곳은 인적이 드물고 한산한 길로서 오백여 장쯤 쭉 나아가면 현묘관이 나온다. 현묘관은 여도사(女道士)들만이 수양하는 곳으로 남자들은 출입을 할 수가 없는 곳이었다. (저 자식이 또 무슨 행패를 부리려고 저곳으로 가는 거지?) 봉일평이 자신의 뒤를 따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흑의사내는 성큼성큼 현묘관의 앞으로 다가갔다. 현묘관은 소주의 북쪽에 위치한 오래된 도관(道觀)으로 역사가 유구할 뿐만 아니라 무림에서 명성을 떨친 여고수들을 여러 명 배출하여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현묘관의 고색창연한 대문(大門)은 굳게 닫혀 있었다. 흑의사내는 현묘관의 닫혀진 문앞으로 가더니 그 솥뚜껑만한 손으로 냅다 문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쾅! 마른 하늘에 천둥벼락이 치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두꺼운 문짝이 그대로 박살나 버렸다. 그의 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따라오던 봉일평은 이 광경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저...저 미친 자식이...) 흑의사내는 부서진 대문 안으로 성큼 들어서더니 내당(內堂)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봉일평은 막 그쪽으로 몸을 날리려다 무엇을 보았는지 황급히 길옆의 돌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런 다음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고 전면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 * * 엽단풍(葉丹楓)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상하군...정말 이상해." 그의 손은 다른 사람의 손보다 적어도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손가락 하나 하나가 비단 굵고 억셀 뿐만 아니라 굳은 살이 잔뜩 박혀 있어 웬만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그런데도 거칠고 투박한 느낌보다는 섬세하고 부드럽게 느껴지는 건 손의 마디마디가 유난히 길고 피부가 하얗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현묘관의 안에서 세 줄기 인영이 나타났다. 그들은 도포를 걸친 세 명의 여도사(女道士)들이었다.


여도사들은 굉음소리에 놀라 급히 달려나왔다가 대문이 부서진 것을 보고 안색이 대변했다. 엽단풍은 그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의 그 커다란 손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계속해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것 참...이렇게 이상한 일이 있나..." 세 명의 여도사들중 가장 나이가 많은 여도사 하나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엇이 이상하다는게요?" 엽단풍은 그녀를 힐끗 돌아보더니 그 커다란 손을 그녀의 눈앞에 흔들었다. "이것 좀 보시오. 내 손은 분명 쇠로 만들어진 것도 아닌데 사람 좀 나오라고 문을 두드렸더니 이렇게 부서져 버리고 말았소." 그는 정색을 하며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천하에 이름이 알려진 현묘관에서 일부러 대문을 부실하게 만들리는 없을텐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구료." 여도사들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멍하니 부서진 문짝과 엽단풍을 번갈아 쳐다보고 서 있었다. 그녀들은 그의 장대 같은 키와 태산 같은 몸집, 무쇠솥 같은 주먹을 쳐다보며 입을 반쯤 벌렸다. 세상에 이렇게 큰 사람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방금 전에 입을 열었던 중년여도사가 합장을 하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량수불...현묘관이 생긴지 백 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본 관(觀)에 시비를 건 사람은 없었습니다. 시주께서 본관에 와서 이런 짓을 한 것은 무슨 이유인지요?" "글쎄 고의가 아니라니까. 이건 아무리 봐도 저 문짝이 너무 오래되어 ㅆ은 게 분명하오." 엽단풍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널려져 있는 부서진 문의 파편(破片)중 한 조각을 집어들었다. "보시오. 문이 이렇게 푸석푸석하지 않소?" 그가 문조각을 양 손가락 사이에 넣고 비비자 과연 그 조각이 가루처럼 맥없이 부서지는 것이었다. 이것을 본 중년여도사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녀는 물론 현묘관의 대문이 썩은 나무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썩기는 커녕 단단한 참나무에 특수한 옷칠을 해서 비바람에도 부식되지 않는 단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단단한 나무조각을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손가락 두 개로 부벼서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은 공력이 출신입화(出神入火)의 경지에 다다르지 않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무...무량수불...시주께서 본 관에 무슨 용무가 있으신지 는 모르지만 오늘 본 관에는 급한 일이


생겨서 외인(外人)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오도록 하시지요." "급한 일이라니 그게 뭐요? 어느 놈이 이곳에 와서 행패를 부리기라도 했단 말이오?" 중년여도사의 얼굴에 고소(苦笑)가 떠올랐다. "아닙니다." 엽단풍은 눈을 부라리며 자신의 가슴을 탕탕쳤다. "괜찮소. 말해 보시오. 그런 놈이 있으면 내가 아주 따끔한 맛을 보여 줄테니..." 중년여도사는 웃을 수도 없고 울을 수도 없는 야릇한 표정이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현묘관에 와서 행패를 부리고 있는 것은 바로 엽단풍 자신이 아닌가? 그가 아무 염려말라는 듯 큰 소리를 칠수록 중년여도사는 어이가 없어 쓴웃음만 흘러 나올 뿐이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사실은 본 관에 오늘 귀중한 손님이 오셔서..." 엽단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귀한 손님이란 게 혹시 공손단경인가 하는 여자 아니오?" 중년여도사는 깜짝 놀라 더듬거렸다. "시...시주께서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긴. 내가 이곳에 온 게 다 그녀 때문인데." 중년여도사는 급히 되물었다. "시주는 공손소저를 만나러 오셨습니까?"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엽단풍의 하얗고 싱싱한 이빨이 살짝 내보였다. "과연 도(道)를 닦는 분답게 눈치가 빠르시군. 바로 그렇소. 그녀는 안에 있소?" 중년여도사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떠올랐다. "계...계시긴 한데..." "왜 안된단 말이오?" 엽단풍이 그 커다란 몸으로 성큼 다가오자 중년여도사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그게 아니라...사실은 공손소저에게 이미 손님이 와 계셔서 아마도...시주를 만나시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거 잘 됐소. 손님을 만나고 있다면 한 사람쯤 더 있어도 상관이 없겠군." 엽단풍은 오히려 반색을 하며 그녀의 곁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스윽! 막고 자시고 할 사이도 없었다. 그의 동작이 어찌나 빨랐던지 중년여도사가 자신의 코 앞에 무언가 희끗거린 것을 본 순간 그의 몸은 어느새 그녀의 뒤 십여 장 밖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중년여도사는 놀라고 당황해서 어쭐 줄을 모르다가 그의 몸이 벌써 내당(內堂)으로 향하는 것을 보자 다른 두 명의 여도사들과 함께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엽단풍은 보무도 당당하게 현묘관의 내당으로 들어서며 종이 울리듯 큰 소리로 외쳤다. "단경! 내가 왔소! 어서 나오시오!" 그는 공손단경의 이름을 아무 꺼리낌없이 부르며 내당안을 여기저기 휘젓고 다녔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그가 오랫동안 헤어졌던 마누라를 만나러 온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그때 갑자기 내당의 문이 벌컥 열리며 싸늘한 폭갈이 터져나왔다. "어떤 미친 놈이 감히 이곳에 와서 허튼 수작을 부리는 게냐?" 언제 나타났는지 내당의 문 앞에 괴이한 몰골의 노파가 우뚝 서서 신광(神光)이 번뜩이는 눈으로 엽단풍을 노려보고 있었다. 노파의 키는 오 척(五尺)이 될까말까 했는데 전신에 알록달록한 색깔의 옷을 걸치고 있었고 손에는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용두괴장(龍頭拐杖)을 들고 있었다. 허리는 구부정했고 백설같이 흰 머리는 뒤로 아무렇게나 대충 묶었다. 얼굴 전체에는 도저히 나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무성한 주름살이 가득했는데 주름살 투성이의 얼굴 한 복판에 박힌 두 개의 눈에서는 쇠라도 녹일 듯한 무시무시한 안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보기만 해도 섬뜩해 질 정도로 냉막한 인상의 노파였다. 그런데 그 노파를 본 엽단풍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그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백발노파의 전신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아니...세상에 이렇게 나이많은 할망구가 무슨 목청이 그리도 크단 말인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 자신의 음성은 백발노파보다 몇 배나 더 우렁찬 것이었다. 그의 음성이 어찌나 컸던지 그를 뒤따라 왔던 여도사들은 고막이 진동하고 귀가 윙윙거려서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백발노파의 안색이 철갑을 씌운 듯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 개뼉다귀 같은 놈이 감히 노신(老身)이 누구인 줄 알고 함부로 아가리를 놀리는 거냐?" 엽단풍은 화를 내기는 커녕 오히려 피식 웃었다. "나같이 큰 개뼉다귀라면 아무리 집채만한 개라도 물어뜯기가 쉽지 않을거요. 게다가 내 뼈다귀는 워낙 단단해서 왠만한 이빨로는 어림도 없지." 이어 엽단풍은 백발노파의 작달막한 몸을 쭈욱 ㅎ어 보더니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그렇군. 크기로 보나 뼈다귀의 오래된 정도로 보나 나보다는 할망구가 더 어울릴거요. 아암...할망구의 뼈다귀는 크기도 아담한데다 연하고 부드러워서 틀림없이 온 천하 개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을거요." "뭐...뭐라고?" 백발노파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이 더 이상 일그러질 수 없을 만큼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팔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남에게서 이런 모욕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아니 이런 말을 들으리라고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이...이런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 백발노파가 화를 내고 안색이 불그락푸르락 해질수록 엽단풍은 히죽히죽 웃으며 그녀를 놀려댔다. "이보시오, 할망구. 자꾸 화를 내면 뼈다구가 질겨져서 맛이 없게 되오. 이왕이면 개들에게 맛좋은 뼈다귀를 주는 게 좋지 않겠소?" "이...이..." 백발노파는 너무도 화가 치밀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가 수중에 들고 있던 용두괴장을 번개같이 쳐들어 불문곡직하고 엽단풍의 머리통을 후려갈겨 왔다. 쿠와앙! 마치 해일이 덮쳐 오는 것 같았다. 백발노파의 성격이 어떻든 그녀의 공력이 가히 절정(絶頂)에 다다른 것은 너무도 분명해 보였다. 무시무시한 파공음과 함께 어른의 키만한 용두괴장이 빛살 같은 속도로 날아드는 광경은 천하의 누구라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쇠로 만든 금강동인(金剛銅人)이라 해도 그 용두괴장에 정면으로 맞았다가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웬걸? 엽단풍은 피할 생각이 없는지 아니면 피할 능력이 없는지 두 눈을 멀뚱멀뚱하게 뜬 채 용두괴장이 자신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오는 광경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쾅! 벼락치는 듯한 굉음이 울리며 용두괴장은 한 치의 사정도 없이 엽단풍의 머리통을 정면으로 강타해 버렸다. 엽단풍의 커다란 몸이 태풍을 만난 가랑잎처럼 오 장여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밖이 소란스러워서 나와 보았던 여도사들이 이 끔찍한 광경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개중에는 엽단풍의 머리가 박살이 나서 사방으로 시뻘건 선혈과 뇌수를 뿌리는 광경이 눈에 선한지 눈을 질끈 감아버린 사람도 있었다.


백발노파는 아직도 분을 참지 못하는지 씩씩거리며 엽단풍이 나가떨어진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용두괴장에 정통으로 격중당해 머리통이 박살난 줄 알았던 엽단풍이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앗?" 백발노파는 물론이고 주위에 늘어서 있던 현묘관의 여도사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일제히 경악성을 질러냈다. 특히 용두괴장의 주인인 백발노파의 놀라움은 경악을 넘어 기절초풍에 가까웠다. (이...이럴수가...내 두 갑자(甲子) 공력이 실린 용두괴장을 정면으로 맞고도 일어나다니...) 노파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빛을 띄고 멍하니 엽단풍을 쳐다보았다. 엽단풍은 그때 봉두난발한 머리를 손으로 마구 비비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장난 좀 한 걸 가지고 그 무지막지한 몽둥이로 사람 머리를 후려 갈기다니... 내 머리가 쇠처럼 단단했길래 망정이지 큰일날 뻔 했잖소, 할망구!" 아무리 눈을 씻고 살펴 보아도 그의 전신에는 털끝만한 상처 하나 나 있지 않았다. 백발노파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도 나오지 않았다. 이 체구가 태산(泰山)만한 놈은 비단 간덩이도 그 만큼 클 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만년한철(萬年寒鐵)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특이한 한목(寒木)으로 만들어서 단단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용두괴장을 맨몸으로 받아내고도 멀쩡하겠는가? 더구나 그것도 두 갑자의 공력이 실린 것을 말이다. 엽단풍은 용두괴장에 강타당했던 부분을 쓰다듬으며 히죽히죽 웃었다. "할망구치곤 팔힘이 상당하군. 하마터면 내 머리통이 박살날 뻔 했으니까 말이오. 아마 할망구의 뼈다귀는 보기보단 연하지 않을 것 같소. 개들도 좋아하지 않겠는걸." 자세히 보니 맞은 자리가 조금 붉으스름해지기는 했다. 엽단풍은 커다란 걸음으로 성큼성큼 노파앞으로 다가오더니 노파를 내려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빚지고는 못사는 성미지만 할망구의 나이를 봐서 특별히 기회를 주지. 나를 공손단경인가 뭔가 하는 여자에게 데려다주면 조금 전 일을 잊도록 하겠소." 백발노파는 이 녀석이 과연 제정신인가 하고 그의 얼굴을 우두커니 쳐다 보았다.


그녀가 엽단풍의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바짝 쳐들고 한참이나 올려다 보아야 했다.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어서 용모를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흑발 사이로 언뜻 내비치는 눈빛은 티끌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해서 정신이 이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엽단풍은 노파를 내려보며 하얀 이빨을 살짝 드러내며 말했다. "할망구. 내 말이 들리지 않소? 아니면 너무 늙어서 귀까지 먼 거요?" 백발노파는 너무도 분노가 치밀어 오히려 화도 나오지 않았다. 백발노파는 한참동안이나 그를 노려보더니 한 자 한 자 씹어 뱉듯이 말했다. "너는 노신이 누구인지 알고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는거냐?" 엽단풍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할망구는 젊은 여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히 예쁘지도 않은데 내가 어찌 알겠소?" "네 놈은 두여랑(杜如娘)이란 이름을 들어보았느냐?" 엽단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여랑? 그게 할망구의 이름이오?" "그렇다." "이름은 그런데로 괜찮군. 하지만 난 할망구의 이름 따위는 관심없소." 엽단풍의 퉁명스러운 말에 백발노파는 어이가 없는지 더 이상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멍하니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 주위에 늘어서 있던 현묘관의 여도사들의 얼굴에도 아연한 기색이 가득했다. (세상에... 칠살파파(七煞婆婆) 두여랑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다 있다니...) 그녀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백발노파의 정체를 다른 무림인들이 알았다면 아마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칠살파파 두여랑! 그녀는 수십 년 전부터 한 자루 용두괴장으로 무림천하를 주름잡았던 절세의 고수였다. 그녀가 주로 활동한 지역은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사천(四川)지방과 서장(西藏)이었지만 그녀의 명성은 중원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말년에 이르러 그녀는 서역의 패자(覇者)인 벽요궁(碧瑤宮)에 몸을 두어 무림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그런 그녀가 수십 년만에 불쑥 현묘관에 나타났던 것이다.


두여랑은 안색이 수십 차례 변하더니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친 놈이로구나. 오늘 노신이 네 놈의 못된 버릇을 고쳐놓지 못한다면 성을 갈아 버리겠다." 엽단풍은 껄껄 웃었다. "하하...할망구가 성을 갈던 이름을 갈던 그건 내 알 바 아니오. 나는 안으로 들어가서 공손단경을 만날테니 할망구 마음대로 하구려." 엽단풍은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고 내당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자신은 아예 무시를 하고 내당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두여랑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갈을 터뜨리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 놈! 죽어라!" 쾌애액! 벼락 같은 노호성과 함께 그녀의 용두괴장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들었다. 그 속도와 용두괴장에 실린 힘의 무게는 조금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바로 그 순간, "두파파(杜婆婆)! 그를 안으로 들여보내세요." 내당 안에서 맑고 그윽한 한 줄기 음성이 들려왔다. 그 음성은 마치 깊은 계곡 속을 흘러가는 ㅁ은 시냇물처럼 듣는 사람의 마음을 청량하게 하는 신비한 힘이 담겨 있었다. 그 음성을 듣자 그토록 가공할 기세로 덤벼들던 두여랑의 몸이 허공에서 빙글돌며 다시 원래의 자리로 내려섰다. 그녀의 수중에 들린 용두괴장은 처음의 자세 그대로 위치해 있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 같았다. 원래 공력이란 펼치기보다 거두기가 더 어려운 법인데 그녀의 공력을 수발(收發)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절정고수다웠다. 덤벼들었다가 물러나는 동작이 어찌나 빠르던지 한 차례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두여랑은 싸늘한 눈으로 엽단풍을 노려보더니 천천히 몸을 비켜섰다. "이 놈! 오늘은 운이 좋은 줄 알아라. 다음에 다시 만나면 반드시 네 놈의 못된 버르장머리를 뜯어고쳐 주고야 말겠다." 엽단풍은 히죽히죽 웃으며 커다란 몸을 어슬렁 움직였다. "제발 부탁이오. 나도 이 버릇을 고치려고 밤마다 고민중이라오. 하지만 할망구 실력으로 그게 될까?" 그가 내당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다시 한 번 두여랑의 울화통을 북돋우는 말을 내뱉었으나 두여랑이 무어라고 쏘아붙이기 전에 그의 몸은 어느새 내당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두여랑은 한동안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본 채 씩씩거리고 서 있다가 솟구치는 노화를 억제하지 못하고 들고있던 용두괴장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쾅! 엄청난 굉음이 지축을 뒤흔들 듯이 크게 일어나며 바닥이 움푹 꺼져들어갔다. 현묘관의 여도사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현묘관의 바닥은 굳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었다. 비록 강철만큼 단단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몇 천근의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결코 쪼개지거나 부서지지는 않는 것이었다. 그 화강암 바닥이 두여랑의 간단한 손짓에 움푹 커다란 구멍이 파인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두여랑의 공력이 얼마나 초절한지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두여랑은 그래도 노화가 풀리지 않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문득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떠올렸다. "세상에서 그 냉가(冷家)놈이 가장 버르장머리가 없는 줄 알았더니 저 놈은 한 술 더 뜨는군. 두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이 서로 만나면 어떤 광경이 벌어질지 궁금해 지는군."

제 3 장 절정공자(絶情公子) 1. 내당 안은 정결하게 꾸며진 넓은 대청이었다. 대청의 중앙에는 몇 명의 인물들이 좌우로 앉은 채 걸어들어오는 엽단풍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좌측에는 회색 도포를 걸친 육십 가량의 여도사 하나가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여도사의 얼굴은 나이답지 않게 깨끗했는데 눈빛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어 깊이를 알 수 없게 했다. 그녀가 바로 이곳 현묘관의 관주이며 강남일대에서 혁혁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묘우사태(妙雨師太)였다. 그녀의 옆에는 화려한 궁장(宮裝)을 하고 머리를 틀어올린 여인이 앉아 있었는데 아쉽게도 얼굴에는 검은 망사를 하고 있어 용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나 궁장 사이로 은은히 드러나는 그녀의 몸매와 자태는 그야말로 사내라면 누구나가 침을 흘릴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그녀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한 명의 귀공자가 앉아 있었고 귀공자의 뒤에는 쌍둥이로 보이는 두 명의 청의중년인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귀공자의 용모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뛰어난 것이었으나 눈빛이 차갑고 냉랭해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들은 엽단풍의 엄청난 체구에 모두들 놀란 듯했다. 엽단풍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그의 장대같이 큰 키와 우람한 체구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를 만나본 후에 품게 되는 놀라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엽단풍은 다른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고 중앙에 앉아 있는 궁장망사녀에게로 향했다. 그는 특유의 휘적휘적하는 걸음걸이로 그녀의 앞에 다가와서는 빙그레 웃었다. "안녕하시오?" 궁장망사녀의 망사 사이로 두 줄기 눈빛이 반짝거렸다. "당신은 나를 아시나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듣기만 해도 절로 시원한 감을 느낄 정도로 맑고 깨끗한 것이었다. 엽단풍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고 있소. 당신은 사대미인 중에서 서봉(西鳳)이라고 알려진 서천봉희(西天鳳姬) 공손단경이 아니오?" 궁장망사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내가 공손단경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누구지요?" 엽단풍은 굵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나를 모르오?" 이것은 참으로 물어보나마나한 질문이었다. 공손단경이 생면부지의 그를 알 리가 없지 않은가? 당연히 공손단경은 고개를 저었다. "난 당신을 몰라요. 당신은 누군가요?" 엽단풍은 친절하게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엽단풍이란 사람이오. 고향은 산서성(山西省) 분양(汾陽)이며 나이는 이십육세이고 아직 미혼(未婚)이오. 신체는 보다시피 건강해서 충분히 여자를 먹여 살릴 수 있고 그렇게 게으른 편도 아니오." 엽단풍은 입가에 침도 바르지 않고 주절주절 잘도 지껄여댔다. "게다가 잠을 잘 때 코를 고는 버릇도 없고 남들처럼 술버릇이 나쁘지도 않소. 손재주가 좋아서 아무 거나 다 잘 만들고 어린 아이를 싫어하지도 않소.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는 아주 믿음직하고 성실하며 자상한 남편감이란 이야기요." 그의 일사천리 같은 말에 공손단경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들 멍한 표정이었다. 난데없이 불쑥 찾아와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자기 자랑을 늘어놓으며 자칭 훌륭한 남편감이라고 떠벌이고 있으니 누가 보기에도 제정신을 가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공손단경은 한동안 멍하니 그를 지켜보고 있다가 망사사이로 나직하게 웃었다. "풋! 재미있는 분이군요. 그 말을 하려고 나를 만나자고 했나요?" 다른 건 몰라도 엽단풍의 낮짝은 철판보다 두꺼운 게 틀림없었다. 그는 조금도 부끄러워 하거나 꺼리끼는 기색도 없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나는 원래 말주변이 없어서 남들하고 대화하는 걸 별로 바라지 않소. 내가 당신을 만나려고 한건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리려고 한 게 아니라 당신이 과연 소문처럼 대단한 미인인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오." 공손단경의 눈빛이 망사 사이로 별빛처럼 반짝거렸다. "내가 만일 소문과 달리 별로 예쁜 미인이 아니라면?" 엽단풍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나는 잘 있으란 말을 하고 이대로 술집에 가서 술이나 진탕 퍼마실거요." "만일 내가 소문처럼 미인이라면?" "그때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엽단풍을 주시했다. 엽단풍은 히죽 웃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을 꼬셔서 술을 한 잔 같이 마신 다음 데리고 잘 생각이오." 사람들은 아연해져서 입을 딱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눈앞의 이 장대한 체구의 사나이가 정상적인 정신상태를 가진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공손단경을 술집에서 몸을 파는 기녀(妓女)처럼 손쉽게 데리고 잘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작자가 존재하다니... 설사 그런 마음을 품었다 해도 어찌 그걸 당사자 앞에서 직접 말할 수 있겠는가? 혹시 이 자는 공손단경이 어떤 신분의 여자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게 아닐까? 아니면 자신의 커다란 체구만 믿고 천하의 누구도 감히 자신을 건드리지 못할거라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닐까? 공손단경도 일시지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너무나 화가 나서 말을 못하고 있는건지, 아니면 어이가 없어서 대답할 필요성을 못느끼는 것인지는 정확치 않지만 아무튼 그녀의 심정이 지금 어떠하리라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엽단풍만은 제외였다. 그는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넉살좋게 몇 마디를 덧붙였다.


"당신은 물론 싫다고 하겠지만 나하고 조금 지내다보면 생각이 달라질거요. 나는 이런 일에 경험이 많으니 당신은 그저 내게 모든 일을 맡기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오." 대체 이런 일에 경험이 많다는 건 무슨 말이고 모든 일을 맡기라는 건 또 무슨 말인가? 공손단경의 얼굴은 망사에 가려 있어서 보이지 않았으나 그녀는 여전히 그린 듯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히려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녀의 앞에 앉아 있던 냉막한 인상의 귀공자였다. 귀공자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시선은 엽단풍이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그의 얼굴에 고정된 채 날카로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의 얄팍한 입술이 살짝 벌려지며 얼굴에 떠오른 표정 만큼이나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죽고 싶어 환장을 한 작자로군. 소궁주(小宮主)는 이런 자와 이야기를 계속할 필요성을 느끼시오?" 공손단경은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 "냉공자(冷公子)님의 생각은 어떠세요?" 냉공자라 불리운 귀공자의 음성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소궁주만 괜찮다면 나는 이 자를 물리치고 소궁주와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소. 소궁주의 의향은 어떻소?" 공손단경은 망사 속에서 조용하게 웃었다. "냉공자님이 하시려는 일을 누가 막을 수가 있겠어요? 냉공자님 좋으실 대로 하세요." 그녀의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상대를 치켜 세우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조금 미묘한 뜻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냉공자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지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표정이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냉공자는 짤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정운(程雲)! 이 자를 밖으로 내보내라." 그의 뒤에 말없이 시립해 있던 두 명의 청의중년인 중 입가에 깨알만한 점이 찍혀 있는 인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정운이라 불리운 청의중년인은 즉시 엽단풍의 앞으로 다가왔다. "귀하. 따라오시오." 엽단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따라오라니? 내가 왜 당신을 따라가야 한단 말이오?" 정운은 입가에 냉랭한 비웃음을 떠올렸다. "이곳은 귀하가 더 있을 자리가 아니오. 괜한 수작 부리지 말고 어서 밖으로 나오시오." 엽단풍은 봉두난발한 머리를 긁적거렸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아직 공손단경의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냥 갈 수 있겠소?" "좋은 말 할 때 순순히 나를 따라 오시오." "난 이곳에 있는 게 더 좋소. 그러니 정 나가고 싶으면 당신이나 나가구려." 정운의 눈가에 싸늘한 살기가 감돌았다. "정말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소?"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난 철이 든 이후로 뭘 보고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번도 없소.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용건이 없으니 당신 혼자서 밖을 싸돌아 다니든 관을 보고 눈물을 질질 짜든 마음대로 하구려." 정운의 얼굴이 철갑을 씌운 듯 딱딱하게 굳어졌다. "말로 해서는 안 될 작자로군." 그는 엽단풍의 앞으로 성큼 다가오더니 우수를 갈고리처럼 구부려 엽단풍의 어깨를 잡아왔다. 스읏! 정운의 손은 마치 매의 발톱처럼 강인하고 빨랐다. 누구라도 그 강철 같은 손아귀에 걸린 다면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갈라질 것 같았다. 더구나 그 속도는 그야말로 번개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과연 엽단풍은 피하지 못하고 정운의 갈쿠리 같은 손에 그대로 어깨를 잡히고 말았다. "내 손이 독하다고 탓하지 마라!" 정운은 악독하게 외치며 엽단풍의 어깨를 움켜잡은 손에 잔뜩 공력을 돋구었다. 뚝! 뼈가 으스러지는 음향이 들려오며 한 사람이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크으윽...!" 냉공자는 냉랭한 웃음을 지으며 그쪽을 돌아보다 안색이 홱 변했다.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나고 있는 인물은 놀랍게도 정운이 아닌가? 그는 오른 손가락이 모두 부러졌는지 손가락이 기이하게 뒤틀린 채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모...몸뚱아리가 이렇게 단단하다니..." 엽단풍은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내 몸이 단단한 게 아니라 당신 손가락이 너무 약한거요. 그래가지고야 어디 닭목아지라도 비틀 수 있겠소?" 정운은 이마에 식은 땀을 흘린 채 그를 노려보았다. "미...미친 놈! 어디 내 검을 맞고도 멀쩡할 수 있는지 한 번 보자!" 그는 버럭 호통을 내지르며 왼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쾌액! 검을 뽑는 모습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그의


손이 허리춤에 닿았다고 느낀 순간 섬ㅉ한 검광(劍光) 한 가닥이 엽단풍의 가슴팍을 향해 폭사해 나오고 있었다. 실로 가공스러운 쾌검(快劍)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엽단풍은 이번에도 피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덥석 오른 손을 내밀어 그 무시무시한 검광을 잡으려 했다. "이 놈! 정말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검광 속에서 정운의 폭갈소리가 터져나오며 검광이 더욱 빠르게 다가왔다. 팟! 검광은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엽단풍의 오른손을 그대로 궤뚫어 버렸다. 아니, 궤뚫었다고 느꼈다. 검광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난 광경이란... 그토록 가공할 기세로 날아들던 정운의 검이 엽단풍의 커다란 손아귀에 그대로 잡혀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이...이럴 수가..." 정운은 검을 뿌리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경악어린 표정으로 멍하니 엽단풍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검이 어떻게 상대방의 수중에 들어가 버렸는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모습이었다. 놀란 것은 비단 정운 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의 주인인 묘우사태는 물론이고 좀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던 공손단경의 눈가에 마저 희미한 놀람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냉공자였다. 냉공자만이 정운의 검술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뢰쌍검(奔雷雙劍)의 검을 맨 손으로 잡아내다니... 절대로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군.) 그는 엽단풍에 대한 생각을 달리한 듯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의 전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정운과 그의 쌍둥이 형인 정풍(程風)은 과거 하남(河南)일대를 석권했던 절정의 검객들이었다. 십여 년 전만 해도 분뢰쌍검 정씨형제(程氏兄弟)의 명성은 강남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들의 검법은 비단 빠르고 날카로울 뿐 아니라 강맹하기 그지없어 별호 그대로 마치 뇌전(雷電)이 치는 듯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람의 검을 마치 어린 아이의 장난인 양 쉽사리 빼앗아 버리다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엽단풍은 중인들의 이런 놀라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른손에 움켜잡은 정운의 검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상하군. 저 자는 이게 굉장히 무서운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큰소리를 쳤는데 어째서 이렇게 변변치 못한 것일까?" 그가 검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검의 한 부분이 뚝뚝 부러졌다. "이것 좀 봐! 이건 유리로 만든 게 분명하군. 손가락도 그렇고 차고 있는 검도 이 지경이니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로군." 그는 쯧쯧하고 혀까지 차는 것이엇다. 정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그의 검은 비록 절세의 신병(神兵)은 아닐지라도 단단하기 그지없는 청강검(靑剛劍)으로서 분뢰쌍검의 명성을 천하에 날리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청강검이 엽단풍의 수중에 들어가자 정말 유리로 만든 것인양 맥없이 부러지고 있으니 그의 심정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는 상대가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인물임을 알았으나 지금까지 쌓아올린 명성을 생각하자 도저히 그대로 물러날 수가 없었다. "이...이 미친 놈...!" 그가 막 노성을 지르며 엽단풍에게 달려들려 하는 순간, "정운. 물러나라." 냉공자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정운은 이를 악문 채 엽단풍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다가 검을 놓으며 뒤로 물러났다. 냉공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엽단풍을 돌아보았다. "내가 귀하를 잘못 보았군. 귀하는 확실히 이곳에 와서 큰 소리를 칠 실력이 있소." 엽단풍은 여전히 장검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알아 주는군. 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건 당신의 얼음덩어리 같은 얼굴이 아니라 저기 앉아 있는 저 여자요." 그는 턱으로 한쪽에 말없이 앉아 있는 공손단경을 가리켰다. 냉공자의 눈가에 스산한 빛이 감돌았다. "흐흐... 광오(狂傲)하군. 내가 누구인지 알고 하는 소리요?" 엽단풍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소. 나는 원래 남자에게는 별로 관심없소." 냉공자의 낮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군. 나 절정공자(絶情公子) 냉우빙(冷宇氷)앞에서 이런 태도를 보인 자는 아직 없었소." "그거야 당신이 견문이 좁은 탓이지. 그런데 참...당신 이름이 냉우빙이라 했소?"


엽단풍이 묻자 냉공자의 짙은 검미가 꿈틀거렸다. "그렇소. 왜 이제 생각이 달라졌소?" 엽단풍은 피식 웃었다. "그게 아니라 당신 이름이 생긴 것하고 아주 잘 어울린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소. 과연 당신은 내 짐작대로 얼음(氷)하고 아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구료." 한쪽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공손단경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망사 속에서 나직하게 웃었다. 심지어 근엄한 표정의 묘우사태마저 웃음을 참느라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냉우빙의 안색이 더 이상 차가울 수 없을 정도로 냉막하게 변했다. 그의 일생(一生)에 이와 같은 모욕을 받은 적은 일찌기 없었다. 절정공자 냉우빙은 강남무림(江南武林)에서 누구나가 첫손가락에 손꼽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비단 용모가 출중하고 공력이 초절할 뿐 아니라 검법에 있어서는 젊은 층의 고수들중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놀라운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강남제일공자(江南第一公子)라고 부르고 있었다. 냉우빙은 별호 만큼이나 냉혹하고 차가운 성격이라 모두들 그를 두려워 해서 누구도 그의 앞에서 그를 무시하거나 비위를 상하게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그가 언제 엽단풍 같은 사람을 만나 보았겠는가? 2 엽단풍은 냉우빙의 안색이야 어떻게 변하건 신경쓰지 않고 계속 지껄여댔다. "그럼 용무가 끝났으면 얼음공자께선 이만 비켜주시지 않겠소? 난 오늘 할 일이 아주 많은 사람이오." 이어 성큼성큼 냉우빙의 옆을 지나 공손단경에게 다가가려 했다. 냉우빙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친 작자로군." 그의 오른쪽 소매가 바람도 없는데 펄럭거렸다. 파아아... 그와 함께 무언가 노도와 같은 암경(暗勁)이 엽단풍의 상체를 향해 밀려왔다. 이것은 금강무영수(金剛無影袖)라는 초절정의 상승무공(上乘武功)으로서 보이지 않는 가운데 금강동인이라도 박살내는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금강무영수는 그야말로 은밀하면서도 강력하기 그지없어 엽단풍은 우두커니 서 있다가 그대로 가슴을


강타당하고 말았다. 쾅! 굉음이 터지며 엽단풍의 커다란 몸이 한 차례 휘청거렸다. 하나 오히려 인상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나는 사람은 냉우빙 자신이었다. "으음..." 그는 주춤 뒤로 두 걸음 물러난 뒤 얄팍한 입술에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켰다. "호신강기의 위력이 이 정도라니..." 엽단풍은 물끄러미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가슴팍 부근 옷자락은 완전히 먼지로 화해 맨 가슴살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조금전 그가 당한 일격이 얼마나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엽단풍은 별다른 충격을 입은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투덜대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이건 산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옷인데 벌써 못쓰게 되었으니... 나는 마음이 너무 좋은 사람이지만 이건 도저히 참지 못하겠군." 그는 냉우빙을 돌아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내 옷 값을 물어내던지 아니면 새 옷을 하나 사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 옷을 홀라당 벗겨 버리고 말겠소." 냉우빙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내 검을 피할 수 있다면 물론 그렇게 하지." 엽단풍은 팔짱을 낀 채 히죽 웃었다. "그렇게 하다니...옷을 물어주겠다는 거요? 아니면 홀라당 벗겠다는거요?" 냉우빙의 얼굴은 차갑다 못해 무표정하게 굳어졌다. 그는 냉정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 경천삼검(驚天三劍)을 모두 받아낸다면 당신이 원하는데로 하겠소." 경천삼검이란 말에 공손단경과 묘우사태의 눈에 경악어린 빛이 떠올랐다. 하나 엽단풍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껄껄 웃었다. "하하...좋소, 좋아! 당신의 벗은 몸을 보는 것도 재미있겠군. 당신의 알몸도 얼굴처럼 그렇게 차가운지 알아봐야 겠소." 냉우빙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오른손을 자신의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얼음장같이 냉막한 그의 얼굴 한가운데 박힌 두 개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광(殺光)이 이글이글 피어올랐다. 순간, "경천뢰(驚天雷)!" 그의 얄팍한 입술을 뚫고 싸늘한 폭갈이 터져나왔다. 파파팟!


그의 허리춤에서 십 여 가닥의 번갯불 같은 검광이 폭사해 나왔다. 그것은 마치 마른 하늘에 수십 개의 뇌전이 치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 수십 개의 뇌전은 허공을 갈가리 찢어 놓으며 엽단풍의 전신을 송두리째 뒤덮어 버렸다. 그야말로 보기만해도 절로 오금이 저릴 정도로 가공스러운 위력이었다. 경천삼검은 강호무림에서 오랫동안 전설처럼 전해내려오는 상고절학(上古絶學)으로서 한 번 펼치면 능히 산을 가르고 바다를 뒤엎는 다고 알려진 절세의 검법이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검법에 대한 소문만 무성할 뿐 어느 누구도 익혔다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늘 냉우빙의 손에 의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엽단풍의 전신은 그 폭발치듯 퍼부어지는 수십 개의 검광 속에서 금시라도 산산히 잘려질 것만 같았다. 폭죽처럼 피어오르던 검광이 사라지고 장내의 광경이 나타났다. "아!" 누군가의 입에서 나직한 경탄성이 흘러나왔다. 엽단풍은 여전히 처음의 자세 그대로 우뚝 서 있었다. 입고 있는 흑의도 그대로였고 흐트러진 흑발 또한 변함이 없었다. 얼굴에 떠오른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중인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그토록 무시무시한 검광이 그의 전신을 수십 차례나 지나갔을텐데 아무런 상처조차 남지 않았다니... 냉우빙은 엽단풍의 일 장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수중에는 언제 뽑아 들었는지 우유빛 검광이 번뜩이는 연검(軟劍)이 쥐어져 있었다. 냉우빙은 엽단풍을 뚫어지게 노려본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엽단풍은 문득 고개를 떨구어 자신의 옷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왼쪽 소매 한귀퉁이가 조금 잘려져 나가 있었다. 엽단풍은 잠시 잘려나간 자신의 옷소매를 내려보다가 냉우빙을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참으로 멋진 초식이오. 과연 경천삼검의 이름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군." 냉우빙은 여전히 석상처럼 우뚝 선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엽단풍은 별반 표정없는 음성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빠른 것에 비해서 어째 변화의 묘미는 좀 떨어지는 것 같군." 냉우빙의 몸이 움찔거렸다. 엽단풍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그 말은 사실은


경천삼검중 제일초식인 경천뢰의 가장 커다란 약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짧은 순간에 그 자리에 선 채로 경천뢰의 가공할 쾌검을 피하면서 언제 그 초식의 약점을 알아차릴 수 있단 말인가? 냉우빙의 눈빛이 섬광처럼 빛났다. 다음 순간 그는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재차 엽단풍을 향해 날아들었다. 스으으... 그의 연검에서 뿌연 안개 같은 검기(劍氣)가 피어올랐다. 바로 경천삼검의 두번째 초식인 경천무(驚天霧)가 전개된 것이다. 경천무는 비단 빠르기도 빠를 뿐 아니라 검이 떨쳐나가는 범위와 변화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엽단풍의 몸은 순식간에 그 검의 안개속에 휩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앗?" 안개 속에서 짤막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한 사람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중인들이 놀라 보니 그는 바로 냉우빙이 아닌가? 엄청난 기세로 공격해 들어갔던 냉우빙이 너무도 간단하게 뒤로 물러나 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도무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장내를 주시하고 있었다. 냉우빙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나더니 두 손으로 연검을 잡은 채 커다랗게 휘둘렀다. "이야압!" 주위를 쩌렁하게 울리는 외침소리가 터져나오며 그의 검에서 마치 그물 같은 검광이 줄기줄기 뻗어나왔다. 파파파파파... 주위 사방이 온통 그 그물 같은 검광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버렸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그 그물 속에서는 살아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경천삼검의 마지막 초식인 경천망(驚天網)이었다. 경천망의 위력은 그야말로 가공(可恐)스러운 것이었다. 이것은 경천뢰의 빠르기에 경천무의 변화무쌍함을 가미한 것으로서 절대로 맨손으로는 견뎌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 갑자기 엽단풍은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오른 주먹을 불쑥 내밀었다. 그의 주먹은 그렇게 빠르지도 않았고 별다른 변화도 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답답할 정도로 느릿느릿하게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하나 그 다른 사람의 주먹보다 두 배는 더 클 듯한 주먹이 천천히 움직이자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파스스... 그 느리게 다가오는 주먹에 닿는 순간 냉우빙이 펼쳐낸 막강한 검광의 그물이 맥없이 사그라드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마치 예리한 도끼에 닿은 그물이 가닥가닥 끊어져 버리는 것과 같은 광경이었다. 냉우빙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사력(死力)을 다해 검을 휘둘렀으나 자신의 검세속을 천천히 뚫고 들어오는 그 커다란 주먹을 막을 수가 없었다. 쾅! 주먹과 검이 정면으로 격돌하며 어이없게도 폭음이 터져나왔다. "크윽!" 냉우빙은 답답한 신음을 토하며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그는 술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더니 마침내 참지 못하고 왈칵 피를 토하고 말았다. "우웩!" 냉우빙은 한 차례 시뻘건 피를 토하고 나서야 겨우 정신이 든듯 경악과 불신어린 표정으로 엽단풍을 바라보았다. "천하에 이렇게 무거운 권법(拳法)이 있다니..." 엽단풍은 여전히 처음의 자세 그대로 우뚝 서 있었다. 그를 보고 있자니 마치 천하의 무엇으로도 꿈쩍하지 않을 거대한 철탑(鐵塔)을 보는 것 같았다. 거친 흑의를 장대한 체구에 감추고 우뚝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말못할 중압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엽단풍은 언제 손을 썼느냐는 듯 담담한 눈으로 냉우빙을 응시했다. "당신의 검을 피하면 당신의 알몸을 구경시켜준다고 한 것 같은데..." 냉우빙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가늘게 떨렸다.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엽단풍은 빙긋 웃으며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별로 보고 싶지는 않지만 약속이 약속이니 만큼 특별히 봐주도록 하지." 그의 커다란 손이 흡사 거대한 문어발처럼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자 냉우빙은 급히 몸을 날려 피하려 했다. 하나 이상하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날아오는 그 손그림자의 위세가 실로 기이하여 도저히 피할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찌익!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냉우빙의 어깨부분 옷자락이


길게 찢어졌다. "어허. 옷벗는걸 내가 좀 도와주려고 하는데 왜 피하는거요? 당신은 그럼 스스로 벗겠단 말이오?" 엽단풍은 오른손에 찢어진 냉우빙의 옷자락을 든 채로 히죽히죽 웃었다. 냉우빙은 멍하니 찢어진 자신의 옷자락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 치욕은 반드시 갚고야 말겠다." "옷 좀 찢어진 걸 가지고 치욕은 무슨... 약속 안 지키고 도망가면 그게 진짜 치욕이지." 엽단풍은 껄껄 웃으며 다시 손을 내밀어 냉우빙의 옷자락을 잡아왔다. 냉우빙은 다시 전력을 다해 몸을 피하려 했으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도무지 엽단풍의 그 커다란 손그림자를 피할 수가 없었다. 찌찌찍!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냉우빙의 허리부분 옷자락이 찢어져 그의 속살이 살짝 드러나 보였다. 냉우빙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날아갔다. "하하...그냥 가면 어떡하오? 약속을 지켜야지." 엽단풍이 그를 향해 몸을 날리려 할 때 돌연 그의 양쪽에서 섬뜩한 검광이 폭사해 왔다. 파앗! 팟! 정운과 정풍이 냉우빙을 쫓아가는 엽단풍을 막기 위해 검을 휘두른 것이다. 엽단풍은 수중에 들고 있던 냉우빙의 찢겨진 옷자락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내가 보고 싶은 건 당신네들 알몸이 아니라니까. 난 저 얼음공자의 알몸이 보고 싶단 말이오." 까까깡! 불똥이 튀기며 정운과 정풍의 몸이 뒤로 주르르 격퇴되었다. "크윽!" "큭!" 놀랍게도 옷자락이 닿은 순간 그들의 검은 그대로 박살이 나버렸던 것이다. 하나 그 순간 냉우빙의 몸은 어느 새 창문을 뚫고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엽단풍...! 이 복수는 반드시 해 주겠다!" 멀리서 냉우빙의 분노에 찬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엽단풍은 찢어진 옷자락을 든 채 입맛을 쩍쩍 다셨다. "이것 참. 저 자는 속살이 뽀얗고 보들보들해서 여자 알몸 보는 기분이 날 것 같았는데..." 그가 혼자 주절거리고 있는 동안에 정운과 정풍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냅다 냉우빙이 사라진 창문쪽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신없이 도망쳐 버렸다. 실로 천하가 경동(驚動)할 일이었다.


강호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절정공자와 분뢰쌍검이 한 사람이 무서워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고 한다면 아마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엽단풍은 그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명색이 강남제일의 공자라는 작자가 자신이 내뱉은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다니...그까짓 알몸 좀 보여주는게 그렇게 큰 일인가? 그냥 목욕하러 왔다고 생각하면 될텐데 말이야..." 그는 연신 히죽히죽 웃더니 고개를 돌려 공손단경을 바라보았다.

제 4 장 세가지 조건 1. "자. 이제 훼방꾼이 모두 사라졌으니 본격적으로 일을 추진해 볼까." 엽단풍은 기세좋게 말하며 공손단경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공손단경은 여전히 처음의 그 자세대로 앉은 채 침착한 눈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엽단풍을 바라보고 있었다. 엽단풍은 그녀의 일 장 앞에 와서 우뚝 섰다. "어떻소? 이제 망사를 벗고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좋지 않겠소?" 공손단경은 잠시 눈을 반짝인 채 엽단풍을 빤히 주시했다. 그러다가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나와 술을 마시고 싶은가요?" 엽단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무래도 먼저 분위기를 잡아야 하지 않겠소?" 그의 말투나 표정으로 보아 오늘 반드시 그녀와 술을 마시고 그녀를 안고 자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공손단경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하고나 같이 술을 마시지는 않아요."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여자라면 물론 그래야지." "하지만 당신이 정 원한다면 할 수는 있어요." "그거 참 바람직한 생각을 했구료." "그런데..." 공손단경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엽단풍은 그녀가 의외로 고분고분하게 나오자 기분이 좋은 듯 입가에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해보시오." "나는 취향이 독특해서 결코 아무 술이나 마시지


않아요." 엽단풍은 손뼉을 탁 쳤다. "정말 신통하군. 나도 바로 그렇소." "나는 술은 혈리홍(血裡紅)밖에는 마시지 않아요." 엽단풍은 술을 광적(狂的)으로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혈리홍이란 술이름은 오늘 처음 들어보았다. 그러나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 당장 가서 그 술을 구해 오겠소." 공손단경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혈리홍은 워낙 예민한 술이라 보통 술잔에 따르면 그 독특한 맛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차게 보관한 취옥배(翠玉杯)에 따라 마셔야만 그 진미를 만끽할 수가 있어요." "그럼 그 취옥배란 것도 구해 오지." 엽단풍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으나 공손단경의 요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나는 입맛도 조금 까다로운 편이에요."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예쁜 여자들은 대개 그렇지." "나는 생선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잉어요리만 먹어요." "최고의 잉어요리 전문가를 데리고 오겠소. 그러면 나와 함께 술을 마시겠소?" 그제서야 공손단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술 한 잔 마시기 힘들군. 하지만 이렇게 격식을 차려 마시는 술도 괜찮을 것 같은데..." 엽단풍은 혼자 중얼거리더니 공손단경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런데 나하고 술을 마실 때는 그 보기싫은 망사는 벗어버리는 거요." 공손단경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순순히 승락을 했다. "그렇게 하겠어요." 엽단풍은 호탕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하하...그럼 기다리고 있으시오. 내 벼락같이 갔다 오리다." 그러더니 그대로 몸을 날려 밖으로 사라져갔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야말로 폭풍처럼 시끄럽게 나타났다가 일진 바람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의 몸이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도 장내에는 아직도 그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실내에는 공손단경과 묘우사태만이 달랑 남아 있었다. 그때 문득 공손단경이 한쪽을 돌아보며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나오거라." 그러자 허공에서 하나의 인영이 뚝 떨어져 내렸다. "하하...이제야 말로 그 자식이 보기 좋게 당했군."


낭랑한 음성과 함께 지붕에서 떨어져 내린 인영은 다름아닌 봉일평이었다. 봉일평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연신 입가에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공손단경의 앞으로 걸어왔다. 공손단경은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일러준대로 그 자에게 그런 조건을 내걸었다마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이냐? 혈리홍은 뭐고 취옥배란 또 무엇이냐?" 봉일평은 이미 그녀와 친분이 두터운 듯 조금도 꺼리낌없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의자에 앉으며 활짝 웃었다. "하하...그야 혈리홍은 술이고 취옥배는 술잔이지 뭡니까?" "그런 물건들이 진짜 있기는 있는 거냐?" 봉일평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물론이지요. 분명히 혈리홍이란 술이 있고 취옥배란 술잔도 있습니다." 공손단경의 얼굴이 망사 속에서 살짝 찌푸려졌다. "그렇다면 만일 그 자가 그것들을 구해온다면 정말 그와 술자리를 같이 해야 되는게 아니냐?" 봉일평은 장난스럽게 한 쪽 눈을 찡긋거렸다. "하하...그 자와 술 한 잔 같이 마신다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닌데 무얼 그리 두려워 하십니까?" 공손단경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너 정말..." "하하...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없을테니..." 봉일평은 그녀의 걱정을 덜어주려는 듯 급히 말했다. "비록 혈리홍과 취옥배가 존재하긴 하지만 그 자가 그걸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려울 겁니다. 게다가 솜씨좋은 잉어전문 요리사는 결코 흔하게 구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걱정마시라니까요. 설사 만에 하나 그 자가 그걸 구해온다해도 그때는 그 작자는 아마 누님과 술을 마실 시간도 없을 겁니다." 공손단경은 귀가 솔깃한 듯 눈이 반짝 빛났다. "그게 무슨 말이냐?" 봉일평은 득의만면한 웃음을 머금었다. "누님은 혈리홍과 취옥배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그곳이 어디냐?" 봉일평은 공손단경의 귀에 대고 무어라고 조그맣게 소근거렸다. 두 사람의 사이는 무척 친밀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지체높고 고고하기로 유명한 공손단경이 어찌 외간남자가 자신의 몸에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하여 귀속말을 하는데도 가만히


있겠는가? 봉일평의 말을 듣고난 공손단경의 아름다운 봉목(鳳目)이 활짝 커졌다. "그게 정말이냐?" "그렇다니까요. 그 자가 만일 혈리홍과 취옥배의 행방을 찾아 그곳으로 간다면 그 자는 호랑이수염을 건드린 꼴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언제 누님에게 엉뚱한 수작을 부릴 경황이 있겠습니까? 하하..." 봉일평은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웃음을 금치 못했다. 그제서야 공손단경의 안색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봉일평을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제보니 너는 진작부터 그 자를 잘 알고 있었구나." 봉일평은 웃다 말고 얼굴을 찡그렸다. "잘 알기는요. 제가 그런 천하의 불한당 같은 놈을 알리가 있습니까?" "그런데 왜 그를 골탕먹이지 못해 그렇게 안달이냐?" "글쎄 그 미친 자식이..." 봉일평은 자신이 엽단풍에게 봉변을 당한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항상 침착했던 공손단경도 봉일평이 그에게 두번씩이나 뺨을 꼬집혔다는 말을 듣고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허리를 붙잡고 웃었다. 심지어 근엄한 표정으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묘우사태마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호호호..." 공손단경이 큰 소리로 웃자 봉일평은 입이 잔뜩 부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웃지 마세요. 아무튼 전 태어나서 그런 꼴은 처음 당해봤다니까요. 그래서 그 놈을 만나기만 하면 본때를 보여주려고 했는데..." "호호...그가 이곳으로 오는 걸 보고 네 그 약아빠진 꾀가 발동을 한 게로구나." "난 단번에 그 미친 놈이 누님에게 엉뚱한 수작을 부리려고 한다는 걸 알았지요. 그래서 어떻게 그 자식을 골탕먹일까 하고 생각하다가 그 자식이 술을 좋아한다는 게 생각나서 누님에게 전음(傳音)을 보낸 겁니다." "호호...아무튼...대단한 사람이야." 봉일평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단하긴요. 이런 건 약과입니다. 다음에는 그 작자에게 좀 더 쓴맛을 보여줄 생각이에요." 공손단경은 아직도 눈가에 웃음기를 지우지 않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네가 아니라 그 엽단풍이란 사람말이다." 봉일평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그런 작자가 뭐가 대단해요?" 공손단경은 그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단 하루만에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던 너를 두 번씩이나 낭패스럽게 하고 명성이 무림을 진동하고 있는 절정공자와 분뢰쌍검을 놀라서 도망치게 했으니 어찌 대단한 사람이 아니겠느냐?" 봉일평은 툴툴거렸다. "그 자의 무공은 그런데로 쓸만하지만...내가 당한 건 다 그 자가 설마 그런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방심했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에요." "호호...누가 뭐라더냐?" 공손단경은 여전히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봉일평은 공연히 멋쩍어져서 머리를 긁적거리다 문득 생각이 난 듯 급히 물었다. "참. 그런데 그 절정공자 냉우빙이 무엇 때문에 누님을 만나러 왔습니까?" 그 물음에 공손단경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걷히며 눈가에 일말의 수심(愁心)이 떠올랐다. 그녀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봉일평은 누가 밤에 자신의 이불속으로 기어들어 오기라도 한 듯 펄쩍 뛰며 놀랐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그 자가 무슨 커다란 걱정거리라도 됩니까?" 공손단경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다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은...내가 갑자기 궁(宮)을 떠나 이곳에 온 것도 다 그 일 때문이다." "그 일 때문이라니요?" "한 달 전에 궁으로 몇 사람이 찾아왔다. 그들은 절정공자와 나의 혼사(婚事)를 추진했으면 한다며 아버님께 의향을 물어보러 왔다." "누님은 그 전에 절정공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공손단경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들이 올 때까지만 해도 단 한 번도 절정공자를 만난 일이 없다." "그러면 그냥 거절해 버리면 되는 일 아닙니까?" 공손단경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궁을 나와 이곳까지 왔겠느냐?" 봉일평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렷다. "아니 왜 거절을 못합니까?" 공손단경은 잠시 침음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궁을 찾아온 사람들의 체면을 생각해서 아버지께서 차마 거절의 말씀을 하실 수가 없었다." "아니 그들이 누구이길래 서천(西天)의


패자(覇者)이신 공손숙부(公孫叔父)께서 거절하지 못하셨단 말입니까 ?" "찾아온 사람은 쌍수전원(雙手纏猿) 교원(喬原)과 귀영자(鬼影子) 당대붕(唐大鵬), 그리고 독효(毒梟) 고홍(固洪)이다." 그 세 사람의 이름을 듣자 봉일평은 안색이 변하며 입을 다물었다. 공손단경은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무림에서 차지하는 명성이나 비중으로 보아 아무리 아버님이라도 그들의 제안을 무작정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하셨고 그들은 한 달이라는 시간을 제시했다." 봉일평은 어지간히 놀란 듯 한참동안이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대체 절정공자의 내력이 무엇이길래 그런 인물들이 그를 위해서 중매를 서려고 하는 겁니까?" "나도 처음에는 몰랐다가 며칠 전에야 겨우 알게 되었다. 절정공자의 뒤에는 막강한 배경이 있다는 것을..." 봉일평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급히 물었다. "그 배경이 대체 무엇입니까?" 공손단경은 그녀답지 않게 약간 머뭇거리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나직한 탄식을 토하며 입을 열었다. "그들은 바로..." 2. 천석평(千石坪). 천석평은 소주의 동쪽 외곽에 있는 거대한 암반으로 이루어진 공터였다. 서쪽 하늘이 온통 붉은 노을로 물들어오는 천석평의 공지에는 오직 팽팽한 긴장감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두 명의 인물이 천석평의 중앙에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은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상대를 응시한 채 금세라도 무시무시한 격투를 벌일 듯했다. 우측의 인물은 수중에 커다란 감배산도(坎背山刀)를 든 중년인이었다. 그는 소주일대에서는 가장 큰 표국(票局)인 대하표국(大河票局)의 국주인 팔괘만승도(八卦萬勝刀) 범여립(范汝立)이었다. 좌측의 인물은 시뻘건 혈검(血劍)을 들고 있는 비쩍 마른 초로의 인물이었는데 소주혈검문(蘇州血劍門)의 문주인 혈검추혼(血劍追魂) 궁일지(宮逸志)였다. 범여립과 궁일지는 소주일대에서는 가장 명성이 자자한 고수들이었다. 그런데 얼마전 대하표국에서 표물을 운송하다가 혈검문의 수하들과 시비가 붙어 싸움이 일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두 집단의 우두머리들이 사생결단을 각오하고 결투에 임하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휘잉... 한 줄기 세찬 바람이 장내를 휩쓸고 지나가자 두 사람은 드디어 손을 쓰기 시작했다. 아니, 손을 쓰려고 막 병기를 뽑으려했다. 바로 그때, 슷! 어디선가 하나의 인영이 그들사이로 뚝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정말 마치 한 줄기 허깨비와도 같았다. 범여립과 궁일지는 물론이고 그들의 결전을 참관(參觀)하기 위해서 와있던 강남삼호(江南三狐)조차도 그 인영이 어떻게 장내에 나타났는지 알아본 사람이 없었다. 그는 칙칙한 흑의를 입고 허리춤에는 녹이 잔뜩 슬은 칼 한 자루를 달랑 매어단 봉두난발의 사내였다. 얼마나 체구가 컸는지 그가 범여립과 궁일지의 가운데에 우뚝 서 있자 마치 종달새들 무리에 황새 한 마리가 끼어든 것 같았다. 흑의사내는 멍청히 서 있는 범여립과 궁일지를 돌아보더니 돌연 불쑥 물었다. "당신들 싸우려고 그러시오?" 범여립은 난데없이 나타난 집채만한 크기의 흑의사내가 자신을 향해 묻자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흑의사내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나와 한 판 붙어봅시다." 그러더니 그는 불문곡직하고 범여립을 향해 덤벼드는 것이 아닌가? 범여립은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어처구니가 없어 우두커니 서 있다가 하마터면 흑의사내가 휘두른 주먹에 정통으로 턱주가리를 맞을 뻔 했다. 휙! 범여립은 안색이 대변해 간신히 흑의사내의 그 커다란 주먹을 피했다. "아니 이런 미친 놈이 있나?" 범여립은 발연대노해 흑의사내를 향해 수중에 들고 있던 감배산도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쾌액! 그가 내리친 일도는 팔괘만승도라는 외호답게 무시무시한 위력이 깃들어 있었다. 하나 그의 일도가 채 내리쳐 지기도 전에 범여립의 턱을 비껴갔던 흑의사내의 주먹이 허공에서 뚝 꺾여지더니 그대로 그의 이마를 가격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너무도 갑작스럽고 신속했기 때문에


강호경험이 풍부한 범여립으로서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쾅! "크윽!" 순식간에 무쇠솥 같은 주먹에 이마를 정통으로 가격당한 범여립은 눈앞에 별똥이 아른거렸다. 그의 이마는 금세 퉁퉁 부어올라 마치 커다란 혹을 매달은 것 같은 형상이 되었다. 그것을 보고 앞에 서 있던 궁일지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날렸다. 이마가 퉁퉁 부은 범여립의 모습이 몹시 우스꽝스럽게 보였던 것이다. 하나 그의 웃음은 채 반도 계속되지 못했다. 넌 뭐가 잘나 웃고 있느냐는 듯 흑의사내가 돌연 그를 향해 발차기를 해왔던 것이다. 흑의사내가 휘두른 발은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궁일지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옆구리를 강타당했다. 퍽! "우욱!" 그는 허리가 반으로 뚝 꺽인 채 창자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그대로 바닥에 엎드렸다. 얼마나 통증이 심했는지 궁일지는 오십 평생 처음으로 슬프지도 않은데 눈물이 다 나왔다. 흑의사내는 두 사람의 가운데 서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 당신들은 이런 실력으로 서로 싸우려고 했단 말이오? 그것 참...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그의 말은 범여립과 궁일지의 가슴을 박박 긁는 것이었다. "이 놈!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범여립이 분기탱천하여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순간, 휘익! 다시 흑의사내의 주먹이 그의 입을 향해 날아왔다. 범여립은 급히 입을 다물고 수중의 감배산도를 번개같이 휘둘렀다. 파앗! 섬뜩한 도광이 번뜩이며 흑의사내의 주먹이 별안간 없어져 버렸다. 범여립이 어리둥절하여 칼을 멈추려는 순간, 빠악! 돌연 그의 코앞에서 바위덩어리만한 주먹이 불쑥 나타나더니 퉁퉁 불거져 나온 그의 이마를 냅다 후려갈기는 것이 아닌가? "아이쿠!" 범여립은 너무도 아파서 머리를 싸매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이마는 퉁퉁 부어오르다 못해 아예 부어터질 지경이 되었다. 궁일지는 간신히 아픈 배를 움켜쥐고 비실비실


바닥에서 일어나다가 얼굴이 샛노랗게 변했다. 그의 눈앞으로 하나의 발이 다가들고 있었던 것이다. 콱! 피하고 자시고 할 사이도 없었다. 궁일지는 정통으로 뺨을 강타당하고 그대로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벌려진 그의 입술 사이로 옥수수 같은 이빨이 우수수 흘러나왔다. "끄으응..." 궁일지는 바닥을 바둥거린 채 한손으로는 배를, 한 손으로는 얼굴을 감싸안은 채 끙끙거렸다. 흑의사내는 번개같이 두 사람을 쓰러뜨리고는 한쪽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강남삼호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이거야 원 너무 싱거워서 재미가 없군. 어디 당신들 실력은 어떤지 한 번 볼까?" 강남삼호는 이 일대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무공실력도 뛰어나지만 특히 두뇌가 비상하고 견식이 풍부해서 세 사람이 합쳐서 모르는 일은 적어도 강남(江南)일대에서는 없다고 까지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원래 이번 대결의 참관인을 의뢰받고 느긋한 마음으로 범여립과 궁일지의 대결을 구경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어마어마한 체구의 흑의사내가 나타나 그들을 단숨에 때려눕히자 어안이 벙벙해 있다가 그의 말을 듣자 그야말로 대경실색했다. 그들은 방금전 흑의사내의 놀라운 실력을 보았는지라 절로 안색이 대변해 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나 그때 흑의사내의 몸은 어느 새 허공을 날아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으헛?" 그들은 다급한 경호성을 내지르며 제각기 손을 휘둘러 흑의사내에 맞서가려 했다. 흑의사내의 주먹이 별안간 수십 개로 변했다. 파파파팍! 마치 천지사방이 온통 주먹의 그물로 덮어 씌운 것 같았다. 강남삼호의 둘째인 병호(病狐) 하수인(何守仁)이 질겁을 하고 피하려 했으나 사방이 온통 권영(拳影)에 휩싸여 피할 곳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격중당하고 말았다. 파팍! "케엑!" 그는 옆구리와 가슴팍을 다섯 번이나 가격당한 채 바닥에 엎어졌다. 흑의사내는 쉬지 않고 빙글 몸을 돌리며 발길질을


해댔다. 파라라락! 허공이 온통 발그림자로 뒤덮혔다. 강남삼호의 나머지 두 사람은 안색이 새파랗게 되어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들은 발길질 한 번에 마흔여덟 개의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퍽! 퍽! 퍽! "크윽!" "헉!" 그들은 제작기 다섯 번의 발길질을 당하고 사방에 널부러졌다. 그제서야 흑의사내는 공격을 멈추고 장내를 둘러 보았다. 장내는 그야말로 한바탕 세찬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여기저기에 다섯 명의 고수들이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광경이 마치 폭풍우에 뿌리가 뽑혀진 채 널려진 나무들 같았다. "쳇! 무시무시한 싸움이 있을거라고 해서 잔뜩 기대를 하고 왔더니 이거 너무 싱겁군. 신나게 몸좀 풀어보려고 했는데..." 흑의사내는 무엇이 그리도 불만인지 연신 툴툴거리고 있었다. 강남삼호의 우두머리인 비호(飛狐) 하수광(何守廣)은 바닥에서 바둥거리며 간신히 일어났다. "대...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손을 쓴 거요?" 그는 가슴이 빠개지는 듯 아픈 것을 억누르며 물었다. 흑의사내는 그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별건 아니고 당신들한테 뭣 좀 물어볼게 있어서..." "무...물어볼 거라니..." "간단한 거요. 당신들이 내 질문에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해 준다면 나도 기분좋게 이 자리를 떠날거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을 때는..." 흑의사내는 아직도 바닥에 개구리처럼 뻗어 있는 범여립과 궁일지를 가리켰다. "당신들도 저 자들 꼴이 되지 말라는 보장을 도저히 할 수가 없구려." 하수광은 자신도 모르게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물어보시오. 아는대로 대답해 드리겠소." 흑의사내는 입을 벌리고 활짝 웃었다. "참으로 자상한 마음씨로군. 당신은 틀림없이 복(福)을 듬뿍 받을거요. 내가 알고 싶은 건 딱 세 가지인데..." 그는 강남삼호 세 사람을 쓰윽 ㅎ어 보았다. "마침 당신들도 세 사람이니 한 사람이 하나씩


대답하면 되겠구료. 이런 공평한 일은 아마 다시 없을거요. 그렇지 않소?" 강남삼호는 완전히 벌레씹은 듯한 얼굴이었으나 흑의사내가 커다란 주먹을 들어올리자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그...그렇소. 아주 공평하오." 흑의사내는 히죽 웃으며 들어올린 손으로 봉두난발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음...며칠동안 머리를 감지 않았더니 영 간지럽군." 그는 보기에도 시원하리만치 박박 머리를 긁더니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단지 혈리홍인가 뭔가 하는 술과 취옥배인지 뭔지 하는 술잔이 지금 어디 있는 것인가 하고 이 일대에서 잉어요리를 제일 잘하는 요리사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아주 간단한 것이오." 이어 그는 무시무시한 안광을 번뜩이며 강남삼호를 돌아보았다. "당신들은 물론 이것을 잘 알고 있겠지?" 강남삼호는 서로 앞을 다투어 고개를 끄덕였다. "무...물론이오. 물론 알고 있소이다." 엽단풍은 안광을 거두며 다시 히죽 웃었다. "그럼 차례로 한 사람씩 대답해 보시오. 먼저 낮두꺼비같이 생긴 당신부터 말해보실까." 그의 커다란 손은 강남삼호의 첫째인 하수광을 가리켰다. 하수광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3. 십이비붕방(十二飛鵬幇)! 십이비붕방은 강남무림을 석권한 강남의 제일문파(第一門派)였다. 매년 칠월 이십일은 그들의 문파가 창립한 날이기 때문에 성대한 연회가 벌어지곤 했다. 그 연회는 강남의 패자(覇者)인 십이비붕방의 위용에 걸맞게 가히 호화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어서 십이비붕방의 인물들 뿐만 아니라 천하의 모든 무림인들이 이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올해는 특히 십이비붕방의 대방주(大幇主)인 대붕왕(大鵬王) 의 육순과 겹치기 때문에 더욱 성대한 연회가 베풀어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칠월 십구일.


연회를 담당하는 실무책임자인 옥척수사(玉尺秀士) 조일홍(曹一虹)은 막 잠자리에 들었다가 급보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황급히 수하들을 데리고 후원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주방의 뒤쪽에 있는 술창고의 문이 박살난 것을 목격하고 안색이 대변했다. 그 문은 특별히 주문한 묵철목(墨鐵木)으로 만든 것이어서 단단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일홍은 즉시 무사들을 대동하고 술창고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 자는 거무틱틱한 흑의를 입고 머리를 산발한 어마어마한 체구의 괴인이었는데 술창고의 구석에서 커다란 술통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온통 빈 술통들이 아무렇게나 널려져 있었다. 조일홍은 분기탱천하여 즉시 그 흑의괴인을 잡아 들이라고 명령했다. 하나 그때 잠에 취해 있던 흑의괴인이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을 조일홍은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무사들이 막 달려들려 할 때 그 흑의괴인은 옆에 있는 붉은 빛이 나는 술통 두 개를 옆구리에 하나씩 끼더니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쾅! 벼락치는 굉음이 터져나오며 흑의괴인의 몸은 술창고의 두꺼운 석벽을 뚫고 그대로 밖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저...저럴 수가..." 조일홍을 비롯한 무사들은 입을 딱 벌린 채 몸을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멀어져가는 흑의괴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조일홍이 알기로 술창고의 석벽은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서 거의 일 장에 달하는 엄청난 두께로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으로 어찌 일 장의 석벽을 뚫고 나갈 수 있단 말인가? 석벽은 붉은 색 술통을 양쪽 옆구리에 낀 흑의괴인의 모습이 그대로 새겨진 채 뻥하니 구멍이 뚫려 보기 흉한 모습을 내보이고 있었다. 휘잉! 그 구멍 사이로 한 줄기 밤바람이 불어와 넋을 잃고 서 있는 조일홍과 무사들의 전신을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그것으로 십이비붕방이 대붕왕의 육순잔치를 위해서 몇 달동안 어렵게 어렵게 구입한 혈리홍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


* * * 무쌍대루(無雙大樓). 무쌍대루는 천하에 산재한 수 천개의 도박장 중에서 가장 거대한 것이었다. 무쌍대루의 주인은 강호무림에서 도왕(賭王)으로 널리 알려진 좌구태야(左九太爺)였는데 그는 천하에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 중 하나였다. 유달리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칠월 중순의 어느 날 저녁. 오층으로된 무쌍대루의 도박장에 흑의괴인 하나가 나타났다. 흑의괴인은 무쌍대루로 들어오더니 그중에서도 제일 번잡하고 소란한 이층의 주사위노름판에 끼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이상한 소문이 강남 일대에 자자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소문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자네 어제 무쌍대루에서 벌어진 일을 들었나?" "아니 듣지 못했네." "이런 쯧쯧...아직 그 소식도 듣지 못했다니...지금 그 일로 무쌍대루가 발칵 뒤집혔는데 아직도 그걸 몰랐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오늘 유달리 무쌍대루의 고수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이곳 저곳을 쑤시고 다니던데 대체 무슨 일인가?" "어제 밤에 한 사람이 무쌍대루에 나타나 한 건(件) 크게 벌렸다네." "그거야 무쌍대루 같은 천하제일의 도박장에서라면 날마다 벌어지는 일 아닌가?" "그런데 어제 일은 조금 색달랐네." "어떻게 색달랐는가?" "그 사람은 처음에 달랑 수중에 은자 몇 푼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네." "그런데?" "그런데 한 시진도 되지 않아 그의 탁자 위에는 은자 오십 만냥이 쌓여 있게 되었네." "아니 오십 만냥이나 말인가?" "그렇다네." "그렇다면 그 자는 그야말로 몸에 재신(財神)이 붙은 게로군." "재신(財神)이 아니라 재신(災神)일세." "그게 무슨 말인가?" "그 자가 그냥 그 돈만 따가지고 조용히 사라졌으면 그야말로 평생 떵떵거리며 살았을텐데..." "그런데 그러지 않았단 말인가?" "그 자는 무슨 속셈에서인지 유십랑(劉十娘)에게 한 판 벌이자고 했다네." "유십랑이라면 좌구태야 어른이 애지중지하는


애첩아닌가?" "그렇지. 좌구태야께선 사실 연세도 지긋하시고 지위도 지위이신지라 무쌍대루의 왠만한 일은 유십랑에게 맡긴 지 오래라네. 그녀가 어제 우연히 도박장에 나왔다가 그 자가 오십만 냥을 따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자가 돌연 유십랑을 돌아보더니 히죽 웃으며 의향이 있으면 한 판 붙어보지 않겠냐고 했지 뭔가?" "그 자가 누군지 몰라도 호랑이 수염을 건드렸군 그래. 유십랑은 비록 여자지만 성질은 웬만한 호걸들 보다 훨씬 괄괄한 여장부가 아닌가?" "아무리 유십랑이라 해도 그 자의 실력을 쭉 보았기 때문에 사실 처음에는 그 자와 붙지 않으려고 했지. 그런데 그 자가 유십랑에게 내기를 제안했네." "어떤 것인가?" "자신이 주사위를 계속 열 번을 던져 열 번 모두 육표(六票:여섯 점)가 나오면 자신이 이긴 것이고 한 번이라도 육표가 나오지 않으면 유십랑이 이긴 것으로 하자고 말일세." "그게 정말인가?" "그렇다네." "그런 내기라면 나라도 응했을 걸세. 이 세상에서 육표를 열 번이나 연거푸 던져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 그래서 유십랑도 당연히 그 내기를 승락했지. 그 자는 단판에 탁자 위에 있던 은자를 몽땅 걸었네." "한 판에 오십만 냥이라니...정말 통 한번 큰 사람이로군 그래. 유십랑도 물론 오십 만냥을 걸었겠지?" "그게 아닐세." "아니라니?" "그 자는 돈은 이제 더 필요없고 자신은 골동품을 모으는 게 취미니까 쓸만한 도자기 같은 걸 걸라고 했다네. 유십랑은 비록 돈은 많지만 그때 마땅히 가지고 있는 물건이 없었는데 그 자는 옥(玉)으로 만든 술잔이 있으면 그거라도 좋다고 했지. 그때 마침 유십랑은 얼마 전에 좌구태야어른께 선물로 받은 옥배 하나가 있어서 그걸 내기로 걸었다네." "물론 유십랑이 이겼겠지?" "그랬다면 이런 소동이 일어났겠나?" "그럼 그 자가 이겼단 말인가?" "그렇다네. 그 자는 손에 무슨 마법(魔法)이 붙었는지 주사위를 던지기만 하면 여섯 점이 나오더군. 열 번 던졌는데 열 번 모두 육표가 나왔네." "정말 믿어지지 않는군. 그래서 어떻게 됐나?" "어떻게 되긴. 그 자는 오십만 냥하고 옥배를 가지고 유유히 사라졌지."


"그거 아주 횡재로군.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 "좌구태야 어른께서 그날 밤에 유십랑의 거처로 오셨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노발대발하셨네." "왜?" "좌구태야 어른께서 유십랑에게 준 옥배는 사실은 취옥배라고 하는 무림의 보물로서 그 가치가 가히 수백만 냥이나 된다는 것일세." "저런..." "그런데 유십랑은 그것이 평범한 옥배인 줄 알고 내기를 걸었던 걸세. 결국 그 자는 오십 만냥으로 그 열 배가 넘는 물건을 따간 거지. 좌구태야께서는 사람을 풀어 당장 그 자를 데려오라고 호통을 치셨네." "그래서 무쌍대루의 인물들이 그렇게 사방에 퍼져 있는 게로군." "그렇지." "하지만 아무리 좌구태야라 해도 그 자는 엄연히 정당한 내기를 해서 취옥배를 따간 것인데 그 자를 잡아서 어쩌려고 그러시나?" "듣자하니 좌구태야께선 친히 나서서 그 자와 다시 도박을 벌여 물건을 회수하실 생각이시라고 하네." "아! 좌구태야께선 벌써 십 년 가까이 도박을 하지 않으셨지만 그 분의 실력은 그야말로 천하제일이 아닌가? 그 자가 이번에 아주 벌집을 건드렸군 그래." "그렇지." "그런데 대체 좌구태야의 그 보물을 따간 작자는 대체 누구인가?" "나는 마침 그 자리에 있어서 자세히 보았는데 그 작자는 누가 보기에도 찾기가 수월할 걸세." "어떤 작자인데?" "아뭏든 자네가 길을 가다가 평생 처음 보는 엄청난 체구를 지닌 거한(巨漢)을 만나게 되면 그 거한이 검은 옷을 입고 허리춤에 녹이 잔뜩 슬은 칼 한 자루를 차고 있는지 잘 보게. 만일 그렇다면 그 거한이 바로 그 작자일세." "그 자가 정말 그렇게 크나?" "자네 우철(于喆)알지?" "그럼. 우철은 소주성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덩치가 큰 사람아닌가?" "그 작자는 우철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클걸세." "그게 정말인가?" "아무튼 나는 그 자를 처음 보고 내 눈이 잘못된 줄 알았다니까. 고개를 쳐올리지 않으면 그 자의 배꼽밖에 볼 수 없을걸세." "그 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혹시 아나?" "엽단풍이라고 하더군." * * *


-강남제일의 거부(巨富)는 누구냐?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이렇게 물으면 열이면 열 모두 합창을 하듯 대답할 것이다. -그야 물론 황금왕(黃金王) 신부귀(申富貴)지! 신부귀의 본명은 아무도 모른다. 단지 그의 성이 신(申)이며 이름 그대로 천하에서 가장 부귀한 사람이라는 것밖에는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가 얼마나 부자인지는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단지 강남의 십대거부(十大巨富)중 다른 아홉 사람의 재산을 모두 합쳐도 그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한다는 말이 자자할 뿐이었다. 지금 신부귀는 느긋하게 자리에 앉아서 용정(龍井)에서 나는 귀한 천지차(天池茶)를 마시고 있었다. 이제 잠시 후면 저녁상이 들어올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식사 후에 차를 즐기지만 신부귀만은 식전(食前)에 차를 마시곤 했다. 그 이유는 천지차의 그윽하고 담백한 향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잉어요리의 맛을 더욱 돋구어 주기 때문이었다. 신부귀는 사실 다른 거부들처럼 그렇게 사치를 좋아하거나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지 않았다. 입고 있는 옷도 단출했고 거처에도 별다른 장식이나 수집품이 없었다. 단지 식도락(食道樂)만은 무척 즐겼다. 그는 맛이 있다고 알려진 음식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구입을 했고, 한 번 마음에 들면 천만금을 주고서라도 그 음식을 만드는 비법을 구입했다. 그가 특히 좋아하는 것은 그 중에서도 잉어요리였다. 하지만 잉어요리 만큼은 아무리 진귀하고 맛이 뛰어난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비법이 없었다. 오직 만드는 사람은 손끝에 의해서만 그 맛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때문에 그는 거금(巨金)을 들여 천하제일의 잉어전문 요리사를 황궁(皇宮)에서 특별히 데려올 정도였다. 그 요리사를 데려오기 위해서 그는 열다섯 알의 묘안석(猫眼石)과 정원이 딸린 호화로운 저택 두 개, 그리고 황금 십 만관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신부귀는 조금도 무리한 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황궁제일의 잉어전문 요리사를 데려온 후에는 그의 식성은 더욱 좋아져 그는 식사 때만 되면 정말 사는 보람을 느꼈다. 그것은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으로, 어느 새 날마다 다른 방법으로 요리한 잉어요리를 먹는 것이 그의 가장 큰 기쁨 중 하나가 되었다. 천지차를 모두 마시고 나자 때맞추어 저녁상이 들어왔다. 신부귀는 점잖게 고개를 들어 오늘은 어떤 잉어요리가 올라왔나 상을 ㅎ어 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눈쌀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상 위에는 별의별 음식이 수도 없이 늘어서 있지만 기이하게도 잉어요리만은 하나도 올라와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항상 올라오던 녹두활어(綠豆活魚)도 보이지 않았고 별미 중의 별미인 활리삼흘(活鯉三吃), 즉 잉어 한 마리를 가지고 세 가지로 요리를 하는 건조기문(乾祚奇門)이나 홍소마안교(紅燒馬鞍橋), 연두대분(軟斗代粉) 등 어느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신부귀는 들고 있는 젓가락을 소리가 나게 상에 올려 놓으며 성난 눈을 들어 상을 들고 온 시비를 노려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왜 잉어요리가 없느냐?" 시비는 어쩔 줄 몰라 당황해 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저..." "대체 무슨 일이냐?" 시비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사실은 종패(宗貝)나으리가 없어지셨습니다." 종패는 그가 거금을 주고 황궁에서 데려온 잉어전문 요리사였다. 신부귀는 고리눈을 부릅뜨며 소리를 질렀다. "종패가 어디를 갔느냐?" "그...그게..." 시비가 더듬거리자 신부귀의 호통 소리가 더욱 커졌다. "어서 빨리 말하지 못하겠느냐?" 시비는 움찔 놀라 급히 입을 열었다. "누...누군가가 종패나으리를 납치해 갔습니다." "납치?" 신부귀의 얼굴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떠올랐다. "납치라니...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사실은...오늘 저녁에 주인어른의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데..." 시비의 말은 이러했다. 저녁에 신부귀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분주히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방의 문이 덜컥 열리며 키가 태산만한 흑의인 하나가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체구가 얼마나 크던지 그가 드어오자 그 넓던 주방이 꽉 찬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가 종패냐?" 그의 호통이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모두 겁이 나서 부들부들 떨었다. 종패는 아주 작고 왜소한 사나이로 성격도 그의 요리솜씨 만큼이나 예민한 인물이었다. 종패는 흑의인이 자신을 찾자 한쪽 구석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회뜨는 칼을 들고 더듬거렸다. "내...내가 종패이오만..." 그러자 그 흑의사내는 불문곡직하고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번쩍 어깨에 들쳐맸다. "나하고 잠깐 가자." 종패는 손에 들고 있는 칼을 사용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졸지에 흑의인의 어깨에 대롱대롱 매어달려 있었다. 그 자의 덩치는 정말 엄청나서 종패는 그야말로 고목나무에 매달린 매미꼴이 되고 말았다. 흑의인은 봉두난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두 눈을 무시무시하게 번뜩이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종(鍾)처럼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종패는 내가 하루만 빌리고 돌려주겠다. 너희들 주인에게 그렇게 말해라." 그러더니 종패를 감자자루 매듯 들쳐업고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나가는 것이다. 그때 주방에는 남자와 여자를 합쳐 십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흑의인의 엄청난 체구와 위세에 질려 누구도 그를 제지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중 주방장이 용기를 내어 멀리 사라지려는 흑의인의 등에 대고 조그맣게 물었다. "저...누구시라고..." 그때 흑의인의 몸은 벌써 종패와 함께 저 멀리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 자는 자신의 이름을 엽단풍이라고 했습니다." "엽단풍?" 신부귀는 나직히 중얼거리며 세 가닥으로 늘어뜨린 교룡의 수염을 습관적으로 꼬았다. 그는 잠시 무언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시비를 돌아보았다. "알았다. 그만 물러가 있거라." 시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급히 물러갔다. 신부귀는 잠시 허공을 노려보고 있다가 어처구니없는지 너털웃음을 날렸다. "허허...세상에 감히 내 요리사를 훔쳐가는 놈이 다 있다니..." 허나 웃음소리와는 달리 그의 두 눈에는 매서운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유일한 즐거움인 식도락을


방해받은 신부귀의 분노는 엄청난 것이었다. 신부귀는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붙잡아 호된 맛을 보여주기로 작정했다. 그는 밖을 향해 싸늘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방각(方角)을 불러라." "알겠습니다." 밖에서 길게 대답하는 소리를 들으며 신부귀는 번쩍거리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엽단풍이라고 했던가? 네 놈은 이제 곧 나를 화나게 한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뼈저리게 알게 될 것이다."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제 5 장 不請客들 1. 술은 피(血)처럼 붉었다.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자면 이것이 술인지 피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붉었다. 하나 코를 대고 냄새를 맡으면 특유의 감미로우면서도 톡 쏘는 듯한 향기가 느껴진다. 이것이 바로 사천(四川)에서만 나는 적령과(赤靈果)로 담근 혈리홍이었다. 혈리홍은 중원(中原)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사천지방에서는 천하의 어떤 술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명주(名酒)로 손꼽히는 것이었다. 혈리홍을 담고 있는 술잔은 은은한 푸른 빛이 나는 한옥(寒玉)으로 만든 것이었다. 한옥은 본래 차가운 기운을 담고 있는 것으로, 한옥으로 만든 술잔은 한 번 차게 보관해 놓으면 좀처럼 더워지지 않아 술잔으로는 천하에 다시 없는 귀중한 것이었다. 특히 더운 여름날에 한옥으로 만든 술잔에 술을 따라서 마시면 비단 술이 차고 시원할 뿐 아니라 술 자체의 풍취마저 더욱 그윽하게 해주어 술 맛이 한결 감칠맛이 나게 된다. 더구나 이 술잔은 비취빛이 번뜩이는 것으로 보아 한옥중에서도 가장 귀한 취옥(翠玉)으로 만든 것이 분명했다. 취옥은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욱 어려운 것으로, 여인이 지니고 있으면 주안(駐顔)의 효과가 있고, 무림인이라면 공력을 증강시키는 효능이 있어 가히 무가지보(無價之寶)라 할 만 했다. 이렇게 귀하디 귀한 취옥으로 만든 술잔은 천하에 오직 하나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이 취옥배인 것이다. 취옥배에 담긴 혈리홍과 함께 놓여져 있는 것은


천하의 일미(一味)라고 알려진 활리삼흘이었다. 크고 싱싱한 잉어를 각 부위마다 기름에 살짝 튀기고, 굽고, 찜한 활리삼흘은 그 맛 만큼이나 요리하기가 까다로워 당금 천하에서도 이 요리를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활리삼흘은 그 감미로운 향기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모양으로 보아 대가(大家)의 솜씨로 만든 것이 분명했다. 무더운 여름날 저녁에 차가운 취옥배에 달콤한 혈리홍을 담아 연하고 부드러운 활리삼흘을 안주삼아 마시는 기분은 가히 신선(神仙)이 부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손단경은 누가 뭐라해도 행운아였다. 그녀의 앞에는 천하의 술꾼들이라면 누구나가 부러워마지 않을 기가 막힌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천하의 명주인 혈리홍에 천하의 보물인 취옥배, 그리고 천하의 일품안주인 활리삼흘이 그야말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그녀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자. 어서 쭈욱 드시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아 견딜 수 없구료." 엽단풍은 술상을 마주하고 공손단경의 앞에 넙죽 앉은 채 그녀에게 술을 권했다. 이곳은 현묘관의 뒤쪽에 있는 그녀의 임시거처였다. 황혼이 뉘엿뉘엿 기울어 갈 무렵 한 사람이 불쑥 그녀의 거처로 찾아왔다. 그는 불문곡직하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오더니 그녀의 앞에 술상과 술잔, 그리고 술병을 꺼내 놓은 것이다. 찾아온 사람은 물론 엽단풍이었다. 엽단풍 외에 어느 누가 그런 무뢰한 행동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공손단경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오늘 그 여우를 믿고 있다가 호된 꼴을 당하게 되었구나. 이 자가 설마 이토록 빨리 돌아왔을 줄이야...' 그녀는 엽단풍이 이렇게 빠른 시간내에 그녀가 제시한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킬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약속은 약속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아녀자라 해도 당당한 일궁(一宮)의 소궁주의 신분으로 한 번 내뱉은 말을 줏어담을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뱅어 같은 손을 내밀어 취옥배를 잡으려 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스윽! 돌연 방문이 열리며 두 개의 인영이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공손단경은 흠칫 놀라 막 취옥배를 잡으려던 손을 거두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짙은 남색 무복(武服)을 입고 이마에 백색 두건을 맨 중년인들이었다. 특이하게도 두 사람 모두 장포위에 검은 피풍을 둘렀는데 피풍에는 거대한 붕새 모양의 자수(刺繡)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런데 그 자수가 어찌나 정교하던지 금세라도 피풍 속의 새가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피풍이 펄럭거릴 때마다 붕새도 또한 함께 움직이는 것 같은 묘한 착각이 일어났다. 공손단경은 그 검은 피풍을 보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자들은 혹시...) 그때 남의인들 중 우측의 키가 훌쩍하게 큰 중년인이 날카로운 눈으로 엽단풍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엽단풍이오?" 엽단풍은 그들이 나타날 때부터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시큰둥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알면서 왜 묻는거요?" 남의인의 짙은 눈꼬리가 쭈욱 올라가며 눈에서 번갯불 같은 신광(神光)이 폭사해 나왔다. "과연 듣던대로 광오한 자로군. 당신은 우리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소?" 엽단풍의 대답은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나는 신(神)도 아닌데 당신들을 일일이 어떻게 알겠소?" "우리는 십이비붕방에서 왔소." "십이비붕방?" "그렇소. 내가 바로 십이비붕중의 혈붕(血鵬) 악굉(岳宏)이오." 혈붕 악굉이라는 말에 공손단경은 내심 흠칫 놀랐다. '과연 이들은 십이비붕방의 인물들이군. 그런데 십이비붕 중의 한 사람이 직접 오다니 정말 뜻밖이로구나.' 십이비붕방은 강남무림을 석권한 제일의 문파였다. 그들의 방주는 물론 불가일세(不可一世)의 고수로 알려진 대붕왕이지만 대붕왕을 도와 십이비붕방을 세우고 그들을 오늘날의 지위로 이끌어 올린 것은 바로 열두 명의 비붕(飛鵬)들이었다. 혈붕 악굉은 그 십이비붕 중의 아홉 번째 고수로, 냉혹하고 살기가 많은 인물로 명성이 자자했다. 엽단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들이 전에 만난 적이 있소?" 악굉은 엽단풍이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조금도 두려워 하는 빛을 보이지 않자 가슴속에 노화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자연히 그의 음성이 냉랭해질 수밖에 없었다.


"없다." "그럼 당신은 나를 아시오?" "모른다."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나도 당신을 모르오. 그러니 우리는 서로 볼 일이 없는 셈이구료." 악굉의 얼굴에 스산한 살기가 감돌았다. "너는 볼 일이 없을지 몰라도 나는 볼 일이 있다." "무슨 볼 일이오?" 엽단풍이 계속 아무 것도 모르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대꾸를 하자 악굉의 음성이 한층 더 거칠어졌다. "정말 몰라서 묻는거냐?" 엽단풍은 돌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럼 몰라서 묻지 알면서 묻는줄 아시오? 그리고 나는 너에게 존댓말을 쓰는데 네가 나에게 반말을 하면 되느냐? 이 자식아! 안 그렇소?" 악굉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멍한 표정이 떠올랐다. 공손단경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죽여 웃었다. 악굉의 얼굴이 점차 흉악하게 일그러지더니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이...이 미친 놈이..." 그가 막 발작하려 하는 순간 그와 같이 왔던 약간 통통한 체격의 남의인이 그를 제지했다. "아홉째. 물러서라." 악굉은 무서운 안광을 번뜩이며 엽단풍을 노려보았으나 감히 그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악굉을 제지한 남의인은 엽단풍을 돌아보며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십이비붕 중의 여섯째인 일붕(日鵬) 하후초(何候焦)라 하오. 아홉째의 성격이 급해 귀하에게 실례를 범했으니 이해해 주시오." 엽단풍은 점잖게 대꾸했다. "이해는 무슨...조금이라도 더 배운 사람이 참는게 당연한 일 아니오?" 악굉의 얼굴이 휴지조각처럼 일그러졌다. 하나 하후초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우리가 오늘 귀하를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것 때문이오." 그는 엽단풍의 앞에 놓여 있는 붉은 색의 술병을 가리켰다. 그것은 혈리홍이 담겨 있는 술병이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시치미를 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엽단풍은 달랐다. 그는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하후초를 올려보더니 갑자기 무릎을 치며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세상에 이 술이 마시고 싶어서 이 늦은 밤에


나를 찾아왔단 말이오? 나 같은 술꾼이 여기 또 있었군." 그는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술병을 내밀었다. "좋소. 내 따라 줄테니 이리 와서 마음껏 마시도록 하시오." 하후초의 얼굴에 일순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잠시 엽단풍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피식 웃었다. "입심이 대단하군.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당신과 술을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오." "사양하지 말고 이리 앉으시오. 이 술은 정말 입에 쩍쩍 달라붙도록 맛이 좋단 말이오." 엽단풍은 비어있는 술잔에 혈리홍을 넘치도록 따랐다. 하후초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 술은 당신이나 마시도록 하시오. 우리가 이곳에 온 건 당신을 데려가기 위해서요." "이렇게 좋은 술을 마다하다니 당신도 좋은 술꾼이 되긴 틀렸군." 엽단풍은 그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중얼거리더니 자신이 따른 술잔을 들어 단숨에 그 안에 있는 혈리홍을 마셨다. "크...정말 기가 막히군." 이어 그는 젓가락을 집어 들고 잉어요리 한 점을 집어 먹었다. "정말 연하군. 역시 술안주에는 잉어요리가 최고라니까." 그가 얼마나 술과 안주를 맛있게 먹는지 하후초와 악굉의 입안에 침이 고일 정도였다. 하후초는 쓴웃음을 짓더니 악굉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아홉째. 네가 나서야 되겠다." 악굉은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재빨리 엽단풍을 향해 다가들었다. "염려마십시오. 소제(小弟)가 이 미친 놈에게 십이비붕방의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습니다." 악굉의 기세가 너무도 흉흉하자 하후초는 조금 걱정스러운 지 한마디를 덧붙였다. "너무 심하게 다루지는 마라." 악굉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엽단풍의 앞에 가서 우뚝 섰다. "일어나라." 아무리 악굉의 성질이 화급하고 냉혹하다 해도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십이비붕중의 하나답게 차마 앉아 있는 상대에게 손을 쓰지는 못했다. 엽단풍은 그를 올려보며 히죽 웃었다. "왜 당신도 한 잔 마시고 싶소?"


악굉의 입가에 살기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군. 하지만 이제 곧 내게 그 따위 말을 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야말로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군. 보아하니 당신은 나보다 나이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입을 열 때마다 반말이니 어째서 그렇게 버르장머리가 없소?" 악굉은 더 이상 말로는 그의 상대가 안 된다고 느꼈는지 두 눈에 싸늘한 빛을 떠올린 채 소리쳤다. "네 놈이 남자라면 일어나라! 혈붕 악굉이 앉아 있는 상대를 공격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 엽단풍은 피식 웃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일어나서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길 바란다면 할 수 없지." 마치 태산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의 거구가 일어나 우뚝 서자 방안이 갑자기 좁아 보였다. 악굉은 그의 덩치가 이렇게 클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그가 자신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것 같자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 '이 미친 놈이 키는 더럽게 크군.' 악굉도 남들에 비하면 훤칠한 키인데 그와 비교하면 아주 왜소해 보였다. 하후초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자. 일어났소.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소?" 엽단풍이 팔짱을 낀 채 해볼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우뚝 서 있자 악굉은 음산한 웃음을 날렸다. "흐흐...이제 보니 덩치를 믿고 큰 소리를 쳤군. 하지만 무림에서의 일은 무엇보다도 무공이 우선하는 법이다." "그거 아주 멋진 말이로군. 꼭 기억해 두었다가 나도 나중에 써먹겠소." 그가 일어나자 악굉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는지 두 눈에 떠올라 있던 분노의 기색이 사라졌다. 대신에 날카로운 안광이 줄기줄기 폭사해 나왔다. "네 놈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느냐?" "내가 무슨 죄를 지었소?" 악굉은 냉혹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첫째로 본 방에 몰래 잠입해서 기물을 파괴한 죄. 둘째는 혈리홍을 훔쳐 달아남으로써 대붕왕 어르신의 회갑연을 망쳐 놓은 죄. 그리고 셋째는..."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세번째는 뭐요?" 악굉의 눈가에 진득한 살기가 떠올랐다. "감히 본좌의 성질을 건드려 놓은 죄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악굉의 몸이 섬전처럼 허공을 날아 엽단풍에게로 쏘아져갔다. 붕새가 그려진 검은 피풍이 허공에 펄럭이자 피풍속의 붕새가 날아가는 듯해 말그대로 진짜


비붕(飛鵬)처럼 보였다. 악굉의 두 주먹이 십자(十字)모양으로 교차되며 엽단풍의 양쪽 어깨를 동시에 노리고 들어왔다. 이것은 십자교전권(十字交電拳)이라는 것으로 일단 격중되면 무쇠라도 박살내버리는 무서운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쾌액! 마치 두 가닥의 뇌전(雷電)이 번뜩이는 것 같았다. 엽단풍은 팔짱을 풀 사이도 없이 그대로 양 어깨를 그 뇌전에 강타당하고 말았다. 꽈꽝! 귀청이 떨어질 듯한 폭음이 연달아 터져나왔다. 동시에 한 사람의 몸이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우욱!" 뒤로 물러난 인영은 몇 차례 몸을 휘청거리다가 참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피를 토하고 말았다. "아...아홉째!" 하후초가 놀란 외침을 토하며 그 인영에게로 다가왔다. 놀랍게도 그 인영은 무서운 기세로 공격을 했던 악굉이었던 것이다. 악굉의 양 손은 탈골(脫骨)이 되었는지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이...이런 호신강기를 지닌 자가 있다니..." 악굉은 자신이 격퇴당한 것이 믿어지지 않는 듯 입가의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엽단풍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철탑처럼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양 어깨를 내려보더니 돌연 악굉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멋진 주먹이었소. 당신의 무공은 당신의 버르장머리보다는 그래도 좀 괜찮은 것 같군." 악굉은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하나 엽단풍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계속했다. "분뢰쌍검인지 지렁이검인지 하는 작자보다 훨씬 위력이 있었소. 아마 냉공자인지 하는 졸장부와 비슷하거나 더 셀지 모르겠는데..." 그의 말을 듣자 하후초가 움찔하여 급히 물었다. "분뢰쌍검이라면...그 정씨형제를 말하는거요? 그리고 냉공자라면 혹시 그..." "내가 그런 작자들의 이름을 어떻게 알겠소? 그리고 냉공자 얘긴 하지도 마시오. 그런 약속도 안 지키는 기생오라비 같은 녀석은 아주 질색이니까. 하긴 벗겨봐야 볼 것도 없었겠지만." 엽단풍이 손을 휘휘 내젓자 하후초는 입을 다물었다. 하나 그의 마음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자가 말하는 냉공자가 절정공자 냉우빙이라면 그 소문이 과연 사실이란 말인가? 절정공자가 어떤 무서운 고수에게 쫓겨 반 벌거숭이가 된 채로 간신히 도망쳤다는 소문이...?' 엽단풍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술 몇 병 가지고 온 게 무어 그리 대단하다고 이곳까지 찾아와서 야단법석을 피우는거요? 더구나 나는 지금 한창 일생일대의 중대사를 치루려고 하는 마당인데..." 하후초의 낮빛이 냉엄하게 굳어졌다. "귀하의 무공이 과연 보통이 아님을 알겠소. 하지만 우리 십이비붕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알았다면 오산이오." 말과 함께 그는 허리춤에서 하나의 강도(剛刀)를 뽑아 들었다. 창! 낭패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던 악굉도 어느 틈엔가 양 손에 날이 시퍼렇게 선 핏빛 혈륜(血輪)을 뽑아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결연한 표정이 가득했다. "오늘 귀하가 우리와 함께 본 방으로 가지 않으려면 우리를 죽여야 할거요." 하후초의 음성에는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각오의 빛이 뚜렸했다.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겨우 술 몇 병 때문에 내 손에 죽겠단 말이오? 당신들이 그렇게 죽도록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인줄 알았으면 진작에 몇 병 사들고 찾아가는건데..." 하후초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귀하의 무공이 비록 대단하다 해도 십이비붕방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소. 오늘 우리가 귀하의 손에 죽을지라도 멀지 않은 장래에 반드시 귀하도 우리의 뒤를 따르게 될 것이오." 엽단풍은 돌연 껄껄 웃었다. "하하...정말 대단한 기개(氣槪)로군. 하지만 그렇게 죽어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소. 내일 오시(午時)에 천석평으로 갈테니 귀방의 고수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나오시오." 하후초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게 정말이오?" "당신이 내 성질을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오." 엽단풍이 호쾌하게 말하자 하후초는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내일 오시에 천석평으로 가겠소. 하지만 만약 귀하가 약속을 어길 시에는..." 엽단풍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시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나는 천하에 다시 없는 개후레자식이오." 하후초는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악굉을 돌아보았다. "아홉째. 가자." 그들은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나가려 했다. 그때 엽단풍이 그들을 불렀다. "잠깐만." 하후초는 재빨리 그를 돌아보며 약간 긴장된 안색으로 물었다. "뭐요?" "별다른 건 아니고...내가 이곳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소?" 하후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품속으로 손을 집어 넣어 하나의 종이쪽지를 꺼냈다. "귀하의 행방을 찾고 있는데 조금 전에 이게 우리들 앞으로 날아왔소." 이어 그는 종이쪽지를 엽단풍에게 건네주었다. 엽단풍은 종이쪽지를 펼쳐보았다. 꼬깃꼬깃하게 접힌 종이쪽지에는 서명도 없이 간략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당신들이 찾고 있는 그 천하의 주정꾼은 지금 현묘관의 후원에서 당신네들에게서 훔쳐온 혈리홍을 퍼마시고 있을거요.> 2. 하후초와 악굉이 밖으로 사라지자 엽단풍은 다시 공손단경의 앞에 와서 털썩 주저앉았다. "이상하군...이상해..." 그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공손단경은 망사 사이로 두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무엇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엽단풍은 그녀에게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보시오. 이 쪽지를 보낸 사람은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상세히 파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내가 천하의 주정꾼이라는 세상에 둘도 없는 비밀마저 알고 있소. 나에 대해 이처럼 자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을 정작 나는 모르고 있으니 실로 이상한 일이 아니오?" 공손단경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나직하게 웃었다. "과연 그렇군요." "더구나 신통한 건 십이비붕방의 인물들에게 나의 행방을 알려준 이 자의 자상함이오. 이 자는 아마도 내가 무림의 유명인사들과 교분을 맺기를 바라고 있나본데 나는 당신도 알다시피 조용하게 사는 걸 더 좋아하는 소박한 사람이오." 공손단경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녀는 물론 그 쪽지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봉일평외에 이런 일을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봉일평이 계획대로 일을 추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그녀는 한결 마음이 안정되어 침착함을 되찾았다. 엽단풍은 계속 주절거렸다. "이제 이 자의 소원대로 나는 십이비붕방의 인물들과 영원히 변치 않을 깊은 교분을 쌓게 되었으니 이렇게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소? 혹시 당신이 이 자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내가 이 자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지 않겠소?" 공손단경은 내심 엽단풍의 말에 흠칫 놀랐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혹시 보기보다는 훨씬 예리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알고 있는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알려 드릴 수는 없어요." 엽단풍은 입맛을 다시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구료. 우리는 하던 일이나 마저 합시다." 그는 다시 혈리홍을 가득 채운 취옥배를 내밀었다. "자. 시원하게 한 잔 쭈욱 드시오." 공손단경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내밀어 취옥배를 잡았다. 바로 그때였다. "네가 바로 엽단풍이란 놈이냐?" 싸늘한 음성과 함께 한 줄기 인영이 창문을 뚫고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엽단풍은 투덜거렸다. "아니 이 놈의 동네는 술 한 잔 조용히 마실 수 없단 말인가?" 그는 성난 눈으로 돌연히 나타난 방해자를 돌아보았다. 장내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칙칙한 갈의(葛衣)를 입은 앙상한 체구의 사나이가 우뚝 서 있었다. 갈의사나이의 몸은 비록 그리 크지 않았으나 그의 전신에서는 칼날같이 예리한 기운이 풍겨나오고 있었다. 얼굴 또한 군살 한 점 없이 깡마른 피부에 두 개의 눈만이 유성처럼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날카로우면서도 강인한 인상의 사나이였다. 갈의사나이의 비수 같은 시선은 엽단풍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엽단풍은 봉두난발의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제기랄. 내가 바로 엽단풍인데 당신은 누구요?" 갈의사나이의 백지장처럼 얇은 입술이 거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살짝 열리며 뼈골이 시릴 듯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방각(方角)." 엽단풍은 그 이름을 듣고도 아무 것도 모르는 듯 두 눈을 껌벅거리고 있었으나 공손단경은 망사 속으로 경악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사람이 바로 천하제일의 추종술(追從術)을 지녔다는 매응(魅鷹) 방각이란 말인가?' 매응 방각은 강호무림에서 두 가지면에서는 독보적(獨步的)인 인물이었다. 바로 사람의 뒤를 쫓는 추종술과 고문(拷問)이었다. 알려진 바로는 그가 일단 뒤를 밟기만 하면 제아무리 신통한 변장술을 지닌 자라 해도 그의 눈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일단 그의 손에 걸려든 자는 제아무리 강인한 인내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숨기고 있는 비밀을 술술 불어내고야 만다고 했다. 오죽하면 '귀신붙은(魅) 매(鷹)'라는 별호가 붙었겠는가? 아직까지 방각의 손에 걸려서 제대로 신체를 보존한 사람이 없었다. 엽단풍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갈의사나이가 이토록 무서운 인물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자약한 신색으로 넉살좋게 입을 열었다. "당신 이름은 참으로 외모와 그럴 듯하게 어울리는구려. 그런데 이 야심한 밤에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 거요? 당신도 술이 한 잔 마시고 싶소?" 방각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의 음성 또한 얼굴표정과 마찬가지로 한 점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무심한 것이었다. "너를 잡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엽단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것 참. 보는 사람마다 나를 못 데려가서 안달이라니... 당신도 십이비붕방에서 나왔소?" 방각의 음성은 짤막했다. "부귀장(富貴莊)," 부귀장은 황금왕으로 알려진 신부귀의 거처였다. 신부귀는 천하의 제일가는 부자이니 만큼 그의 거처에는 각지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모래알처럼 즐비했다. 신부귀의 재산 만큼이나 그의 수하에 어떤 고수들이 있는지 아무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부귀장이 강호무림에서 가장 무서운 용담호혈(龍潭虎穴)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엽단풍은 부귀장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여전히 별반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신노괴(申老怪)가 갑자기 나를 보고 싶어한다니


반갑긴 한데... 보다시피 나는 지금 미녀와 대작(對酌)중이니 다음에 간다고 전하시오." 공손단경은 부귀장의 신부귀를 신노괴라고 부르는 사람을 오늘 처음 보았다. 방각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으로 무표정하던 방각의 얼굴에 한 줄기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하나 그것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눈깜짝할 새 사라져 버렸다. 대신 그의 얄팍한 입술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너를 죽이지만 말고 알아서 끌고 오라는 분부가 계셨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가야한다." 말과 함께 그의 비쩍 마른 손이 갈쿠리처럼 구부러지며 엽단풍의 목덜미를 노려왔다. 쓰윽! 공기가 갈라지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매의 발톱 같은 방각의 손이 엽단풍의 목밑에 있는 목젖을 파고 들었다. 목젖은 인체의 주요 급소 중 하나로 이곳을 제압당하면 천하에 다시 없는 고수라 해도 도저히 힘을 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다. 엽단풍은 피식 웃으며 오른손을 슬쩍 들어 자신의 목을 막았다. 그의 동작은 아주 간단했는데 기이하게도 시기가 적절하여 방각의 일수(一手)는 중도에서 멈춰지고 말았다. "과연 한 수가 있군." 방각은 탄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양손을 질풍처럼 휘둘렀다. 파파팍! 십여 가닥의 수영(手影)이 허공을 뒤덮으며 엽단풍의 상체 십 이개 대혈(大穴)을 노리고 짓쳐들었다. 그 속도는 가히 섬전과 같았다. 엽단풍은 목을 가렸던 오른손을 활짝 펴며 장난처럼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방각이 쳐낸 열 두 개의 수영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으음..." 방각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하나 방각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더욱 빠르게 앞으로 다가서며 양 손가락을 곧추세워 엽단풍의 양쪽 눈을 찔러왔다. 동시에 오른발로 번개같이 그의 턱을 걷어찼다. 그야말로 고문의 명수(名手)답게 펼치는 초식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급소만을 노리는 살인적인 위력을 지닌 것들이었다. 엽단풍은 껄껄 웃으며 오른손을 앞으로 쑤욱 내밀었다. "하하...훌륭한 연환삼절기(連環三絶技)로군.


하지만 오늘 상대를 잘못 만났다." 그가 내뻗은 주먹은 기이하게도 약간의 거무틱틱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쾅! 방각이 내찌른 양 손가락이 엽단풍의 주먹에 정면으로 부딛치자 그대로 부러지고 말았다. "큭!" 그와 함께 엽단풍은 왼손으로 방각의 걷어차오는 오른발을 가볍게 잡더니 그대로 집어 던졌다. 쾅! 방각은 양 손가락이 부러지는 통증에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그가 내던지는대로 반대쪽 벽에 보기 흉하게 부딪치고 말았다. 설명은 길지만 이것은 실로 숨 한 번 내쉴 동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들의 격돌이 얼마나 빠른 시간에 진행되었는지 공손단경이 그저 눈앞에 희끗한 인영이 서너 번 어른거렸다고 느낀 순간 상황은 이미 끝나 버렸다. "으음..." 방 한 구석에 처박혔던 방각은 힘겨운 신음소리를 내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엽단풍은 여전히 바닥에 앉은 채로 빙글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가서 신노괴에게 전하시오. 이 몸은 지금 미녀와 술을 마셔야 하기 때문에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고 내일 오시에 천석평으로 갈테니 정 나를 만나고 싶으면 그리로 오라고 하시오." 방각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무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하나 이미 양 손의 손가락이 부러 진데다 조금전의 격돌로 자신은 도저히 엽단풍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절감했는지라 감히 덤벼들지는 못했다. 그는 한차례 매서운 눈으로 엽단풍을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때 엽단풍이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소." 방각은 몸을 돌리며 무슨 일이냐는 듯 턱을 치켜 들었다. 엽단풍의 물음은 간단했다. "내가 이곳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소?" 방각은 아무 말도 없이 오른쪽 소매에서 종이쪽지 하나를 꺼내 그에게 던져 주었다. 그런 다음 휑하니 몸을 돌려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엽단풍은 방각이 던져준 종이쪽지를 읽더니 빙그레 웃었다. 종이쪽지에 적힌 글은 이러했다. <당신이 찾고 있는 그 천하의 불한당은 지금 현묘관의 후원에서 당신네 요리사가 요리한


활리삼흘을 쳐먹고 있을거요.> 엽단풍은 종이쪽지를 공손단경에게 내밀었다. "읽어볼테요?" 공손단경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하하...이 자는 갈수록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구려. 내가 천하의 불한당이라는 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이 자는 그걸 알고 있을까?" 공손단경은 여전히 말없이 웃기만 했다. 엽단풍은 종이쪽지를 흔들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내가 음식을 그냥 먹지 않고 쳐먹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니...이 쪽지를 보낸 자의 해박한 지식과 놀라운 식견에 그저 감탄을 금치 못하겠군." 공손단경은 웃음을 참느라고 힘이 드는 모양이었다. 엽단풍은 한동안 뭐라고 투덜투덜하더니 이윽고 다시 취옥배를 들고 공손단경에게 내밀었다. "자. 골치아픈 건 다 잊어 버리고 우리는 즐겁게 술이나 마십시다." 공손단경은 망사사이로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그를 바라보다가 취옥배를 받아 들었다. 엽단풍은 자신도 남은 술잔에 혈리홍을 따랐다. "쭈욱 드시오. 자. 건배!" 하나 바로 그때였다. 덜컹! 다시 방문이 열리며 세 개의 인영이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엽단풍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에게 술 한 잔 먹이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이번에 나타난 사람들은 회색 장삼을 걸친 세 명의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회색 옷에 회색 두건을 쓰고 회색 신발을 신고 있었다. 심지어 허리춤에 차고 있는 장검의 검집마저 회색을 띄고 있었다. 그야말로 광적(狂的)으로 회색을 좋아하는 인물들이었다. 그중 가운데 있는 매부리코의 청년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싸늘한 눈으로 엽단풍을 쏘아보고 있었다. "엽단풍. 네 놈이 어제 본 루(本樓)에서 취옥배를 사기쳐간 엽단풍이란 놈이 분명하렸다." 엽단풍은 피식 웃었다. "사기란 단어의 뜻도 모르는 자로군. 사기란 거짓말로 현혹해서 상대를 속임수에 빠뜨리는 걸 말하는거요." 매부리코의 청년은 냉랭하게 웃었다. "흐흐...겨우 오십 만냥을 걸고 취옥배를 가져갔다면 그게 사기가 아니고 무엇이냐? "당신들은 무쌍대루에서 왔소?"


"그렇다. 우리는 색명삼랑(索命三狼)이다. 우리들 이름은 들어보았겠지?" 색명삼랑은 비록 강남일대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고수들이지만 십이비붕이나 매응 방각에 비하면 조금 격이 떨어지는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엽단풍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들어보았소. 당신들은 좌구태야를 모시는 사람들 아니오?" 매부리코의 청년이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제법 아는 것이 많군." 엽단풍은 피식 웃었다. "내가 아는 것이 그것뿐인줄 아시오? 나는 당신들이 어떻게 이곳에서 나를 찾았는지도 알고 있소." 매부리코의 청년은 흠칫 놀랐다. "그게 정말이냐?" "그렇소. 당신들은 하나의 쪽지를 받았지 않소?" 매부리코의 청년은 움찔했다. 엽단풍은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 쪽지에는 <당신들이 찾는 천하의 도박꾼이 현묘관 후원에서 취옥배에 술을 따라 마시고 있다>고 적혀 있지 않았소? 그래서 그 쪽지를 읽고 반신반의해서 이곳에 왔다가 나를 만난 게 아니오?" 매부리코의 청년은 정말 깜짝 놀랐다. "네가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아느냐?" 엽단풍은 진지한 안색으로 말했다. "당신들은 아직 내 이름을 듣지 못한 모양이군. 나는 산서성(山西省)에서 제일가는 점쟁이었소. 나의 신통력은 그야말로 대단해서 위로는 천문(天文)에서 아래로는 지리(地理)까지 모르는 것이 없소." 매부리코의 청년은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좋을지 몰라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엽단풍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무언가를 외우는 시늉을 하더니 갑자기 손뼉을 탁 쳤다. "이거 큰일났군." 매부리코 청년은 흠칫 놀라 급히 물었다. "무엇이 큰일났다는거냐?" "방금 내가 점괘를 보니 당신들이 오늘 모두 이빨이 몇 개씩 부러진 채 상가집 개마냥 쫓겨간다고 나와 있소. 내 점괘는 아직 단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으니 이를 어쩌면 좋소?" 그제서야 매부리코 청년은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음을 깨닫고 안색이 살기등등해졌다. "이런 때려죽일 놈이...감히 나를 놀리다니..." 매부리코 청년을 비롯한 색명삼랑 세 사람은 일제히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차창! 날카로운 검명과 함께 방안이 온통 시퍼런 검광으로 뒤덮혔다.


"이 놈! 좌구태야께서는 네 놈을 산 채로 잡아 오라고 하셨지만 우선 네 놈의 사지(四肢)를 자른 다음 취옥배를 회수해 가겠다. 각오해라!" 매부리코 청년이 싸늘하게 외치며 수중의 장검을 휘둘렀다. 다른 두 명의 회의인들도 일제히 엽단풍의 양 쪽을 공격해 들어왔다. 엽단풍은 빙긋 웃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 손을 마구 휘둘렀다. 꽈르릉! 그의 길다란 양 팔이 풍차처럼 휘둘러지며 한 줄기 가공할 경력(勁力)이 노도처럼 색명삼랑을 향해 몰아쳐갔다. 색명삼랑은 그 엄청난 위세에 놀라 안색이 대변했다. 파파팡! 그 경력에 닿는 순간 그들이 내밀었던 장검이 산산히 박살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그 순간 엽단풍의 커다란 몸은 그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고 있었다. 퍼퍼퍽! 그의 커다란 주먹이 흔들린다 싶자 색명삼랑 세 사람은 각기 그 주먹에 턱을 강타당한 채 사방으로 널부러졌다. "크윽!" "우욱!" 색명삼랑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가볍게 한 대씩 맞은 것 같은데 얼마나 아픈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퉤!" 침을 뱉어보자 시뻘건 선혈에 섞여서 부러진 이빨이 서너 개나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엽단풍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어떠냐? 내 점괘가 틀림없지? 이번에는 상갓집 개처럼 쫓겨날 차례다!" 엽단풍이 엄청난 거구를 날려 그들에게 날아왔다. 쑤아앙! 마치 허공이 온통 그의 그림자에 뒤덮힌 것 같았다. "피...피해라!" 색명삼랑은 안색이 시커멓게 변한 채 제각기 몸을 날려 밖으로 달아났다. 그들의 달아나는 속도는 강호의 어떤 고수에도 뒤지지 않는 놀라운 것이었다. 정신없이 달려가는 그들의 귓전으로 엽단풍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내가 마지막 점괘를 알려주지. 내일 오시에 천석평으로 오면 나를 만날 수 있다고 좌구태야에게 전해라."


제 6 장 중주삼사(中州三邪) 1. 엽단풍은 손을 툭툭 털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야 비로소 오붓하게 술 한 잔 마실 수 있겠군." 공손단경은 망사 사이로 두 눈을 반짝이며 그를 찬찬히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지금 자신이 강남(江南)일대에서 가장 무서운 세 사람을 모두 건드렸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내가 말이오?" "그래요. 게다가 그 세 사람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상대하려 하다니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군요." "하하...하나씩 일일이 대응하려다간 너무 귀찮을 것 같아서 한꺼번에 모두 모이게 한거요. 아무래도 이런 일은 한꺼번에 처리하는 게 더 수월하지 않겠소?" 공손단경은 무어라고 입을 열려다 한숨을 내쉬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엽단풍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의 지금 모습을 보니 마치 나를 걱정하고 있는 것 같구려." 공손단경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녀는 사실 지금 일이 너무 크게 벌어졌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봉일평이 그를 골려주기 위해 간단하게 벌렸던 것인데 이제는 강남의 가장 거대한 세 개의 집단과 모두 분쟁이 벌어졌으니 자신도 모르게 엽단풍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엽단풍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이 왜 그를 위해 걱정하는 마음이 일었는지 몹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원래 그는 그녀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이가 아닌가? 오히려 난데없이 불쑥 찾아와 그녀에게 번거로움을 선사한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왜 그녀가 그를 위해 걱정을 한단 말인가? 그때 다시 들려온 엽단풍의 음성이 그녀의 상념을 가로막았다. "이제는 정말 누구도 방해할 사람이 없을거요. 자. 한 잔 합시다." 그는 오늘에서만 벌써 네번째 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그가 취옥배를 내밀자 공손단경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취옥배를 받아들었다. 이어 그녀가 그것을 마시려고 하는 순간, 엽단풍이 불쑥 그녀를 제지했다. "잠깐." 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지요?" 엽단풍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다른 게 아니라...일전에 약속하기로는 술을 마실 때는 망사를 벗기로 하지 않았소? 난 당신이 그걸 기억하는 줄로 알았는데..." 공손단경은 빙긋 웃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녀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망사를 잡아갔다. 엽단풍은 눈을 빛낸 채 그녀의 얼굴을 주시했다. 망사가 내려지며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엽단풍은 주위가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가히 천하의 사대미인 중 하나라는 형용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오똑한 콧날과 호수같이 맑은 눈동자...도톰한 입술...무엇보다도 시원하게 트인 이마와 백설처럼 고운 피부가 엽단풍의 마음에 들었다. 엽단풍은 한동안 뚫어지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돌연 혈리홍을 병째로 자신의 목구멍 속에 쳐 넣었다. 꿀꺽...꿀꺽... 공손단경은 그윽한 눈으로 엽단풍을 지켜보고 있었다. 엽단풍의 목젖이 몇 차례 움직이자 혈리홍 한 병이 순식간에 바닥이 났다. 그제서야 엽단풍은 술병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보고 씨익 웃었다. "정말 술맛이 나는군." 그 음성을 듣자 공손단경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말이 꼭 자신의 용모를 칭찬해 주는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그녀는 엽단풍을 만나지 비록 얼마되지 않았지만 그와 같은 성격의 사람은 이런 말로밖에는 다른 사람을 칭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당신은 마시지 않을 셈이오?" 엽단풍의 말에 공손단경은 취옥배를 들어 술잔을 입에 대었다. 취옥배 특유의 차고 청량한 기운이 손끝에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혈리홍의 진한 내음이 후각을


자극했다. 취옥배에 담겨진 혈리홍은 차고 신선했다. 그리고 감미로웠다. 공손단경은 혈리홍을 모두 마시고 나서 혀로 살짝 붉은 입술을 축였다. "맛있군요." 엽단풍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물론이지. 그래서 당신은 이 술밖에는 마시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소?" "사실은 이 술을 마시고 싶다고 한 건 다른 사람이었어요." 엽단풍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가 누구요?" 그때 방문이 열리며 오늘 밤의 마지막 불청객이 들어왔다. "바로 나요." 엽단풍은 들어온 사람을 보더니 껄껄 웃었다. "하하...이제 보니 귀염둥이, 바로 너였구나." 들어온 사람은 물론 봉일평이었다. 봉일평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는 어째서 이 망할 자식이 자신만 보면 귀염둥이라고 부르는지 당체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엽단풍은 그를 보고 사정을 짐작한 듯 피식 웃었다. "그러고보니 그 자들에게 그 쪽지를 전한 건 바로 너, 귀염둥이였구나." "그렇소. 그런데 나는 당신의 귀염둥이가 아니니 그렇게 부르지 마시오." 봉일평이 무어라고 하건 엽단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니까 너 귀염둥이가 공손단경에게 그런 지시를 내린 거로구나. 그런 다음 그 자들에게 내 행방을 알려준 거지?" 봉일평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글쎄 나는 귀염둥이가 아니라니까." "너 귀염둥이가 그런 짓을 한 것은 혹시 내가 네 뺨을 몇 번 꼬집었다고 나를 골탕먹이려고 한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너는 정말 계집아이처럼 소심하기 짝이 없구나." 엽단풍이 계속 자신을 귀염둥이라고 부르자 봉일평의 준수한 얼굴이 불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엽단풍을 노려보았다. "한 번만 더 나를 귀염둥이라고 부르면 가만두지 않겠다!" "하하...세상에 너 같은 귀염둥이를 어찌 귀염둥이라고 부르지 않겠느냐? 너는 자신이 별로 귀엽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사실 너는 무척 귀여운 귀염둥이다." 공손단경이 참지 못하고 나직하게 웃었다.


"호호호..." 봉일평은 더욱 화가 나서 얼굴이 아주 홍시처럼 붉어지더니 엽단풍을 향해서 비호같이 달려들며 주먹을 휘둘렀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그의 주먹은 정말 눈부실 정도로 빨랐다. 하나 엽단풍은 커다란 손을 불쑥 내밀어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주먹을 덥썩 움켜잡는 것이 아닌가? "어어...?" 봉일평은 당황하여 급히 주먹을 빼려 했으나 그의 주먹은 철갑 속에 갇힌 듯 요지부동이었다. 엽단풍은 갈쿠리같이 큰 손으로 봉일평의 주먹을 움켜쥔 채 다른 손으로 그의 주먹을 쓰다듬었다. "너는 정말 어쩌면 이렇게 피부가 고으냐? 내가 지금까지 안 어떤 여자도 너처럼 보들보들한 살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봉일평의 안색은 보기에도 안타까울 정도였다. "이...이 나쁜 놈이..." 그는 사력을 다해 주먹을 빼내려 했으나 여의치않자 다급하여 두 눈에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하나 엽단풍은 그의 손을 떡주무르듯 신나게 주물럭거리더니 나중에는 고개를 숙여 봉일평의 손에 입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놔...놔라!" 봉일평이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질렀으나 엽단풍은 천연덕스럽게 그의 손을 붙잡고 쪼옥하고 입을 맞추었다. "흠...정말 기분좋군." 엽단풍은 히죽 웃으며 그의 손을 끌어당겨 그를 반강제적으로 자신의 앞에 앉혔다. "자. 이 혈리홍이 마시고 싶다고 했지? 실컷 마셔라." 그는 하나 남은 혈리홍의 술병을 들고 봉일평의 입으로 가져갔다. "세상에 나같이 자상한 술꾼도 없을 것이다. 어떤 술꾼이 이 귀한 혈리홍을 남에게 주려고 하겠느냐? 이게 다 네가 너무나 귀엽기 때문이다." "시...싫다...싫어...우...웁..." 봉일평은 악을 바락바락쓰며 도리질을 했으나 엽단풍의 힘에 못이겨 혈리홍의 술병을 입에 물고 말았다. 엽단풍은 술병을 기울여 혈리홍을 거의 반 병이나 봉일평의 목구멍 속으로 넣은 다음에야 겨우 술병을 그의 목에서 빼내주었다. "케엑...켁..." 봉일평은 너무 많은 술을 한꺼번에 마신지라 사래가 들려 얼굴이 새빨게진 채 기침을 토했다. "어떠냐? 과연 별미(別味)지? 그럼 이번엔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잉어요리를 먹어야지."


엽단풍은 젓가락을 집어 잉어의 살점을 한움큼 집더니 봉일평의 입으로 가져갔다. 봉일평은 더 피할 힘도 없어서 울며 겨자먹기로 잉어요리를 받아 먹었다. "옳지. 착하구나. 그래야 귀염둥이지. 자. 이번엔 이 형님께 술 한잔 따라야지." 봉일평은 잉어요리를 씹다 말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순순히 엽단풍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엽단풍은 흐뭇하게 웃으며 그가 따른 술잔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한데 엽단풍이 술을 마시느라 고개가 쳐들린 순간 봉일평이 입을 오무리며 입 속에서 무언가를 세차게 내뱉었다. 쐐액! 무언가 희끗한 것이 거의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엽단풍의 목젖을 향해 폭사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생선의 가시였다. 봉일평은 엽단풍이 주는 잉어요리를 먹다가 그 속에 가시 하나가 있음을 알고 그것을 혓바닥 밑에 숨겨두었다가 입으로 날려보낸 것이다. 엽단풍의 목이 그 생선의 가시에 꿰뚫리기 직전, 갑자기 엽단풍은 세차게 재채기를 했다. "에취!" 그 바람에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던 생선의 가시가 반대로 봉일평 쪽으로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앗?" 봉일평은 깜짝놀라 엉겁결에 그 생선가시를 입으로 받아냈다. 뱉었던 생선가시가 다시 입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봉일평은 모골이 송연해져서 감히 가시를 뱉어내지도 못하고 한동안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있었다. 하나 엽단풍은 이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술잔을 내려놓으며 히죽 웃는 것이었다. "귀염둥이가 따른 술이라 그런지 맛이 더욱 각별하구나. 재치기만 나오지 않았으면 더욱 맛있었을텐데." 그는 젓가락을 들어 잉어요리를 집어 먹더니 갑자기 봉일평을 바라보며 진지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잉어요리는 아주 맛이 있지만 너는 이걸 먹을 때 조심할 게 있다. 잉어의 가시는 아주 질기고 단단해서 간혹 입 안에 박히게 되면 몇 날 며칠을 고생해야 하니까 반드시 가시는 가려서 먹도록 해야 한다." 봉일평은 웃을 수도 없고 울을 수도 없어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다. 엽단풍은 젓가락을 내려 놓은 다음에야 잡고 있던 봉일평의 손을 놓아주었다. 하나 손을 놓기 전에 봉일평의 뺨을 지그시 꼬집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봉일평은 세번째로 그에게 뺨을 꼬집히자 그대로 졸도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가 그러지 않은 것은 순전히 이 자식 앞에서 정신을 잃었다간 자신의 수명이 엄청나게 단축될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다행히 엽단풍은 더 이상 그의 몸을 만지거나 이상한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 대신 점잖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제 네가 엉뚱한 심부름을 시켜 나를 골탕먹인 일은 용서해 주겠다. 하지만 한 번만 더 나를 골탕먹이려 했다간 네 옷을 홀랑 벗겨 너를 소주성문에 매달아 놓을테니 그리 알아라." 봉일평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자신이 알몸으로 성문 밖에 매달려 있다는 광경을 상상하기만 해도 그는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다. 봉일평이 속으로 진저리를 치고 있을 때 엽단풍은 공손단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술도 한 잔 마시고 분위기도 무르익은 것 같은데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소?" 공손단경의 봉목(鳳目)에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다. "본론이라니요?" "아니 당신은 그새 내가 한 말을 잊었단 말이오?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생고생해서 당신과 술을 마시려고 했는지를 정녕 모른단 말이오?" 엽단풍이 큰 소리로 되묻자 그제서야 공손단경은 그가 말하려는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었다. 어제 엽단풍은 술 한잔 마시고 그녀를 꼬셔서 안고 자겠다는 말을 했는데 지금 술을 마셨으니 그 다음 일을 진행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당시 그가 허풍을 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의 표정이나 어조로 보아 진짜로 그렇게 할 심산인 것 같았다. 그녀는 절로 마음이 다급해졌다. "자...잠깐..." 엽단풍은 벌써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오려 하고 있었다. "왜 그러는 거요? 이 귀염둥이 때문에 그러시오?" 엽단풍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봉일평의 어깨를 툭툭 쳤다. "걱정하지 마시오. 이 귀염둥이는 알아서 때가 되면 사라질 거요. 그렇지 않나, 귀염둥이야?" 봉일평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나 그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나며 이리 저리 굴러다니는 것으로 보아 머리 속으로 무언가를 궁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엽단풍이 막 공손단경의 앞으로 걸어올 순간 봉일평이 급히 소리를 질렀다. "잠깐."


엽단풍은 그를 돌아보았다. "귀염둥이야. 왜 그러느냐?" "당신은 유부녀를 건드리는 못된 습성이 있소?" 봉일평의 뜻밖의 말에 엽단풍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유부녀라고?" "그렇소." "나는 원래 한 가지 신조(信條)가 있는데 세 부류의 여자는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게 뭐요?" 엽단풍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승(女僧)과 나이먹은 할망구, 그리고 남편있는 유부녀다." 봉일평은 짐짓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그것 참 바람직한 신조구려. 당신은 물론 자신의 신조는 끝까지 지키는 대장부이겠지요?" 엽단풍은 봉일평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려는지 흥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마침내 나의 가장 큰 비밀마저 알아냈구나. 확실히 나는 신조를 지키는 대장부라 할 수 있지." 봉일평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여기서 공손소저를 붙잡고 승강이할 게 아니라 밖에 나가서 다른 여자라도 건져보는 게 어떻겠소?" 엽단풍은 아직도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공손소저가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기라도 한단 말이냐?" 봉일평의 얼굴에 냉랭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지는 않소." "그럼 그녀가 내일 당장 파파 할망구가 된단 말이냐?" "물론 아니오." "그럼 대체 뭐냐? 그녀가 유부녀라도 된단 말이냐?" 엽단풍은 별다른 생각없이 이 말을 했다. 한데 의외로 봉일평이 냉큼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렇소." 그 말에 엽단풍은 물론이고 한쪽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공손단경마저 깜짝 놀랐다. 2. 엽단풍은 멍하니 봉일평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믿지 못하겠다. 그녀가 언제 결혼을 했단 말이냐?" 봉일평은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내가 언제 그녀가 결혼했다고 했소?"


"그런데 그녀가 유부녀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유부녀가 아니라 이제 곧 유부녀가 될 거라 이 말이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그녀는 얼마 전에 어떤 사람에게서 청혼(請婚)을 받았소. 내가 알기로는 그녀는 이제 곧 그 청혼을 수락하고 그 사람과 혼인을 하기로 되어 있는데 당신이 자꾸 그녀에게 추근거린다면 스스로의 신조를 깨버리는 것이 아니오?" 엽단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사실이냐?" 봉일평은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탁탁 쳤다. "나 봉일평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는 걸 유일한 자랑거리로 알고 있는 사람이오." 엽단풍은 피식 웃었다. "자랑할 게 어지간히 없나보군." 봉일평의 얼굴이 종이조각처럼 구겨졌다. 그가 화가 나서 한마디 쏘아붙이려고 할 때 엽단풍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알겠다. 귀염둥이야. 네 말이 맞다고 해두자. 그런데 그 운수대통한 작자가 대체 누구냐?" 봉일평은 화를 낼까말까 망설이다가 한 번만 더 참기로 했다. "당신은 어제 그를 만났지 않소?" 엽단풍은 움찔 놀랐다. "아니 그렇다면 그 약속도 지키지 않고 꽁지가 빠지게 달아난 냉공자인지 빙공자인지 하는 녀석이 공손소저와 혼인을 할 녀석이란 말이냐?" "그렇소." 엽단풍은 입을 반쯤 벌린 채 멍하니 봉일평을 바라보고 있다가 돌연 배를 잡고 대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하하하..." 봉일평은 그가 왜 웃는지를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었다. 엽단풍은 눈물까지 찔끔찔끔 흘리며 한참동안이나 웃고 있다가 차츰 웃음을 멈추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고...몇 년 동안 이렇게 웃어본 건 처음이군. 세상에 그런 기생오라비 같은 녀석을 신랑으로 맞이하려 하다니...그거야 말로 돼지에게 진주목걸이를 준 격이 아닌가?" 봉일평은 그의 웃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차가운 음성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는 당신보다 몇 배나 뛰어난 신랑감이오. 용모는 말할 것도 없고 가문(家門)이나 배경, 학문과 부귀에 이르기 까지 어느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인물이오. 당신 같은 내력도 모르는 떠돌이하고는 차원이 다르단 말이오."


엽단풍은 빙글빙글 웃었다. "어디 실컷 말해보아라.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으면 말하겠다." "그의 가문인 절강냉씨세가(浙江冷氏世家)는 강남의 전통있는 명문(名門)이며 그의 부친인 냉와운(冷臥雲), 냉대협은 강호무림의 십대명인(十大名人)중 하나에 꼽힐만큼 초절정의 검객이시오. 게다가 냉공자의 사부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당신 같은 무지렁이는 한 다발이 덤벼도 상대할 수 없는 놀라운 분이시오." "그 대단한 분의 명호(名號)라도 좀 알 수 없겠나?" 봉일평은 쌀쌀맞게 고개를 저었다. "당신 같은 무명소배가 그 분의 명호를 알아서 무엇하겠소? 정 알고 싶다면 내가 그 분의 시종 세 사람을 알려줄테니 한 번 추측해 보시오." "그 대단한 분의 시종이 되는 영광을 누린 세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 엽단풍이 계속 비꼬는 듯한 어조로 물었으나 봉일평은 조금전과는 달리 한결 침착해진 모습이었다. "귀를 후비고 잘 들으시오. 그들은 바로 쌍수전원 교원과 귀영자 당대붕, 그리고 독효 고홍이오. 당신도 이들의 이름을 들었겠지요?" 봉일평은 그들의 이름을 말하며 슬쩍 엽단풍의 안색을 살폈다. 하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엽단풍의 얼굴에는 조금도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빛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 망할 놈의 자식은 그저 고개만 까닥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름만 들어보면 무시무시한 사람들 같군 그래." 봉일평은 어이가 없어 허탈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세상에 교원과 당대붕, 고홍의 이름을 듣고도 놀라지 않는 사람이 있다니... 혹시 이 자는 강호경험이 전무(全無)하여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어찌 중주삼사(中州三邪)를 모른단 말인가? 봉일평은 수십 년 동안 강호무림에 공포(恐怖)의 대명사격인 존재로 군림해 오던 중주삼사의 이름을 듣고도 태연자약한 눈앞의 이 사내가 도저히 정상적인 정신상태를 지녔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건 말이 통해야 얘기를 해 먹던지 하지...' 봉일평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조금 풀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런 모든 점에서 볼 때 이 세상에서 냉공자만한 신랑감은 없을 거요. 공손소저와 그가 결혼한다면 두 사람은 천하에서 가장 어울리는 한 쌍의 배필이 될거요." 그런데 별로 기대도 하지 않은 이 말에 엽단풍이


반응을 보였다. "그 자식과 공손소저가 어울리는 배필이라니...귀염둥이야. 네 눈은 그냥 장식품으로만 달고 있는거냐?" 엽단풍이 퉁명스런 음성으로 쏘아붙이자 봉일평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하나 겉으로는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틀린 말을 했소?" "그 냉공자인지 뭔지 하는 녀석은 스스로 내뱉은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졸장부다. 게다가 오만하고 뻐기며 무공도 별로 대단치 않고 수하들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도 그 자식은 피부가 너무 하애서 남자다운 매력이 없다. 남자라면 모름지기..." 엽단풍은 소매를 걷으며 자신의 우람한 팔뚝을 드러냈다. "이 정도 피부에 단련된 근육을 지녀야 잠자리에서 여자를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다. 알겠느냐?" 봉일평은 그의 말이 이상한 곳으로 빠지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이 자는 어째서 꼭 이렇게 지저분한 일에만 정통한 것일까?' 엽단풍은 자신이 마치 공손단경의 친척이라도 되는 양 우렁찬 음성으로 떠들어댔다. "나는 도저히 그 빌어먹을 자식과 공손소저의 결혼을 승락할 수 없다. 이것은 나의 신념(信念)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봉일평은 자신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당신의 신념이란 게 대체 뭐요?" "나는 이미 천하의 사대미인을 모두 아내로 맞이하기로 결심한 지 오래다. 일단 결심한 일은 반드시 지키는 게 내 신념이다." 봉일평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만 딱 벌린 채 그를 쳐다보았다. 공손단경 또한 아무 소리 못하고 멀거니 엽단풍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히 천하의 사대미인을 모두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큰 소리를 치다니...엽단풍이 아니고서야 천하의 어느 누가 이런 당찬 꿈을 꾸겠으며 또 당사자 앞에서 이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겠는가? 봉일평은 한 가지 진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 진짜 제정신이오?" 엽단풍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철이 든 이후로 항상 정신만은 똑바로 가지고 있다. 귀염둥이야. 너는 별 걱정을 다 하는구나." 이어 그는 공손단경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갑자기 그녀의 손을 덥썩 움켜 잡았다. 공손단경은 아연해져서 손을 잡아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공손소저. 소저를 그런 놈에게 줄 수는 없소. 내가


당장 가서 그 냉가 놈과 그 놈의 사부가 보낸 하인인지 뭔지 하는 놈들을 혼내주고 오겠소. 우선 이번 혼사(婚事)를 없었던 일로 한 다음 다시 우리 문제를 의논하기로 합시다." 그는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인(情人)이라도 되는 양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공손단경은 한참동안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퍼뜩 생각이 들어 그의 손에 잡힌 자신의 손을 잡아 빼려 했다. 그때는 이미 엽단풍은 그녀의 손을 놓고 휑하니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한쪽 옆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봉일평의 어깨를 툭 쳤다. "귀염둥이야. 안내해라." 봉일평은 멍하니 물었다. "어디로 안내하라는거요?" 엽단풍은 봉두난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싱긋 웃었다. "어디긴. 그 냉가놈과 세 명의 하인녀석이 있는 곳이지. 너는 그 놈들이 어디 있는지 알거 아니냐?" 봉일평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그들을 찾아갈 셈이오?" "이제보니 너는 눈뿐만 아니라 귀마저 장식용으로 달고 있구나. 방금 내가 말하는 소리를 듣지 않았느냐? 공손소저를 그런 놈에게 보낼 수 없으니 그 놈들을 몽땅 쫓아버리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네가 무얼 걱정하고 있는지 안다. 내가 홧김에 그 냉가녀석을 죽이지나 않을까 불안한 모양인데 비록 혼은 내주겠지만 죽이기야 하겠느냐? 그러니 어서 안내하거라." 봉일평은 정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 망할 녀석은 덩치만 큰 것이 아니라 성질도 엄청나게 급했다. 봉일평은 비록 그의 힘을 빌어 공손단경의 억지혼사를 막으려는 의향이 있기는 했으나 그가 대뜸 중주삼사를 찾아가자고 하자 놀라고 당황했다. 그는 엽단풍의 무공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신비막측한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으나 중주삼사의 위명은 그 정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서천의 패자인 벽요궁의 궁주도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해 쩔쩔 매겠는가? 엽단풍이 제아무리 막강한 공력을 지닌 고수라 해도 그 혼자의 힘으로 중주삼사를 당한 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최소한 봉일평이 생각하기에는 그러했다. '내가 괜히 이 자를 이 일에 끌어들인 것이 아닐까?' 봉일평은 내심 후회막급이었다. 하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오, 저질러진 일이었다.


엽단풍은 계속 그를 채근하며 어서 가자고 성화를 부리고 있었다. "귀염둥이야. 설마 너는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단 말이냐?" "그건 아니오." "그럼 어서 가자니까." "하지만..." 봉일평은 머뭇거리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오늘은 갈 수가 없소." 엽단풍은 눈을 크게 떴다. "왜 오늘은 안된단 말이냐?" 봉일평은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은 지금 절강냉씨세가에 있는데 이곳에서 냉씨세가까지 가려면 아무리 빨라도 삼 일은 소요되오." "그래서?" "그런데 당신은 내일 천석평에서 약속이 있지 않소? 그것도 세 군데나 말이오." "음...그렇지." 엽단풍은 수긍하는 빛을 보였다. 봉일평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스스로의 입으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천하의 개후레자식이라고 했는데 설마 개후레자식이 되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물론 아니지." 엽단풍은 냉큼 말하며 봉일평을 돌아보았다. "이제보니 귀염둥이 너는 밖에서 줄곧 이야기를 듣고 있었구나." 봉일평은 멋쩍게 웃었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공손소저와 단 둘이 있게 하겠소? 그래서 밖에서 잠시 지켜섰던 것이오." "내가 무슨 짓을 하는데?" "그건...아무튼 당신은 믿을 수가 없어서..." "하하...그래서 내가 혹시 강제로 공손소저를 어떻게 할 줄 알았단 말이냐?" 봉일평은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엽단풍은 화를 내기는 커녕 껄껄 웃었다. "하하...그건 네가 나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나는 강제로 여자를 안는 걸 질색하는 성미다." 봉일평은 머쓱해져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쨌든 네 말대로 그 녀석을 찾아가는 건 내일 이후로 미루어야겠다." 이어 그는 휘적휘적 밖으로 걸어나갔다. 봉일평은 멍하니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어딜 가는거요?" 엽단풍은 막 방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그를 돌아보고 씨익 웃었다. "오늘은 어차피 그녀를 안지도 못할텐데 더 있어서


무엇하겠느냐? 가서 늘어지게 한 잠 자고 난 다음에 천석평으로 갈 생각이다." 그는 그대로 몸을 돌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사라졌다. 봉일평과 공손단경은 멍하니 멀어져 가는 그의 뒷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어둠 속에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서야 봉일평은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저토록 무지막지한 자식이 다 있다니..." 그는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는데 그의 음성은 어딘지 맥이 빠진 것이었다. 공손단경은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에게 내 혼사의 이야기를 꺼낸 건 그의 힘을 빌려 보려는 것 아니었느냐?" 봉일평은 힐끗 그녀를 돌아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공손단경은 나직한 탄식을 토해냈다. "하지만 공연히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닐지..." "저 자의 무공은 깊이를 알 수 없도록 괴이막측하니까 쉽게 당하지 않을 겁니다." "그가 설사 중주삼사를 물리친다 해도 만약 그렇게 되면 중주삼사의 뒤에 있는 자들이 나올텐데 그때는 무슨 수로 감당을 하려고 하느냐?" 봉일평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는 얼굴이 창백해지다가 억지로 웃음을 떠올렸다. "설마 그럴리가요. 그들은 지금까지 수십 년동안 나오지 않았는데 이런 일로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겠습니까?" 공손단경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번 혼사는 어딘지 음모의 냄새가 난다." "음모라고요?" "그들이 불쑥 나타나 생면부지인 냉공자와의 결혼을 추진하는 것도 그렇고...중주삼사가 아버님께 전에 없이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것도 그렇고...나는 혹시 이 일이 그들이 무림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구실이 되지나 않을까 걱정스럽구나." 봉일평의 표정도 무거워졌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되든 그들이 무림에 나오는건 시간문제일텐데 걱정한다 한들 어쩌겠습니까?" "하지만 그 때문에 괜히 애꿎은 사람만 희생되지 않겠느냐?" 봉일평은 돌연 히죽 웃었다. "누님은 혹시 조금 전의 그 자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공손단경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나 그녀의 안색은 자신도 모르게 약간 붉어져 있었다. 봉일평은 그녀의 얼굴 표정을 살피다가 다시 웃었다. "그렇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자는 워낙 뼈다귀가 단단해서 여간해서는 쓰러지지 않을 겁니다. 또 만약 쓰러진다면..." 공손단경은 그를 돌아보았다. 봉일평은 싱겁게 웃었다. "그 자도 그때에는 비로소 하늘높은 줄 알고 그 미친 듯한 기세가 한 풀 꺾이겠지요." 공손단경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정도로 일이 마무리되면 얼마나 좋겠냐만...만에 하나 그들을 경동(驚動)시켜서 그들이 본격적으로 무림에 나타난다면 천하가 핏빛으로 잠길텐데...그게 걱정스럽구나."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봉일평 또한 무거운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한 채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제 7 장 千石坪에서 1. 그것은 정말 기이하기 이를데 없는 일이었다. 이른 아침. 아직 먼동이 트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건만 천석평으로 향하는 도로에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중에는 몇몇 일반인들도 눈에 띄었으나 거의 대부분이 병장기를 휴대한 무림인들이었다. 소주는 원래 명승지로 유명할 뿐 무림에서의 위치는 사실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소주 제일의 고수라는 대신권 하충광만 해도 강호의 절정고수라고 부르기는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 이곳 천석평에는 비단 소주일대의 고수들 뿐만 아니라 좀처럼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강남무림의 절정고수들도 상당수 모습을 드러냈다. 날이 완전히 밝자 천석평으로 향하는 인파의 행렬은 더욱 많아져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것이 대체 어찌된 일인가? 천석평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길래 강남의 고수들이 이렇듯 구름떼처럼 몰려들고 있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한 가지 소문 때문이었다. -오늘 정오에 천석평에서 강남의 삼대거두(三大巨頭)인 대붕왕과 도왕 좌구태야,


황금왕 신부귀가 한 사람을 상대로 싸움을 벌인다! 그들이 상대하는 인물은 바로 무림최고의 미치광이, 엽단풍이다...! 어제 저녁부터 밑도 끝도 없는 이런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적어도 강남에서는 이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 소문을 처음 들은 사람들은 누구나가 코웃음을 쳤다. 대붕왕이 누구인가? 자타가 공인하는 강남의 제일세력인 십이비붕방의 방주가 아니신가? 게다가 좌구태야는 천하제일의 도박장인 무쌍대루의 주인이며 강호에서 제일가는 도박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뿐이랴? 부귀장의 신부귀는 그야말로 신화적인 부(富)를 축적한 전설 속의 인물 아닌가? 그들 세 사람은 각기 그 명성만큼이나 행적이 신비해 어느 누구도 일면식하기조차 어려웠는데 그들 세 사람이 동시에 한 장소에 나타난다니 말만 들어도 흥분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일개 한 사람을 상대로 싸움을 벌인다니... 어찌 이 소문이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더욱 더 의아한 것은 그 삼대거두와 겨루기로 한 엽단풍이라는 인물이었다. 무림인들 중 어느 누구도 그가 어떤 사람이며 언제 강호에 나타났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갑작스럽게 나타나 불과 이틀도 되지 않아 소주성 일대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신비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하나 처음에는 이 소문을 듣고 반신반의했던 사람들도 연이어 들려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려진 바로는 그는 천하에서 가장 덩치가 큰 인물이라고 한다. 왠만한 사람은 그의 어깨에도 오지 않을 정도라는 것이다. 게다가 성격이 광오하고 난폭할 뿐 아니라 무공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고강해서 아무도 감히 당해내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고고하고 냉막하기로 천하에서 첫 손가락에 손꼽히는 절정공자 냉우빙이 그 자에 의해 반 벌거숭이가 되어 꼬리를 말고 도망쳤겠는가? 그 자에게 당한 것은 비단 냉우빙 뿐만이 아니었다. 십이비붕 중의 두 사람과 천하제일의 추종술의 달인인 매응 방각도 낭패를 당했을 뿐 아니라 흉명(兇名)이 자자했던 색명삼랑은 이빨이 부러진 채 상갓집 개처럼 쫓겨났다고 한다.


사람들은 단 이틀동안에 엽단풍이란 한 인간이 벌여놓은 일을 전해듣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자는 그야말로 좌충우돌에 예측불허의 인간으로 가히 '천하의 미친 놈(天下狂子)'라는 말이 제격인 인물이라는 것이다. 삽시간에 '천하광자 엽단풍'이라는 이름은 적어도 소주일대에서는 가장 유명한 이름이 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은 제아무리 천하광자라 해도 강남의 삼대거두를 모두 상대하다니 죽으려고 작정을 했다고 쑤근거렸다. 그들은 이 기회에 그 유명한 삼대거두를 직접 볼 뿐 만 아니라 엽단풍이라는 희대(稀代)의 광인(狂人)을 볼 수 있다는 설레임에 너도 나도 천석평으로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천석평은 커다란 바위로 이루어진 공터였다. 평상시에는 이 근처에 인적도 드물었는데 오늘은 아직 채 사시(巳時)가 되기도 전에 발디딜 틈도 없을 만큼 온통 사람들도 뒤덮여 버렸다. 그들은 모두 어서 빨리 오시가 되어 삼대거두와 천하광자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길 바랬다. 그런데 원래 시간(時間)이란 놈은 묘해서 기다릴수록 더디게 가는 법이었다. 중인들은 아침 일찍부터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천석평으로 나왔기 때문에 오전 해가 지나가는 것이 그렇게 지루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그런 마음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오징어와 땅콩, 꽈배기를 파는 장삿꾼들이 하나 둘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마침 인파 속을 뚫고 천석평을 잘 볼 수 있는 자리를 잡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던 청의무사(靑衣武士) 하나가 지나가던 땅콩 장수를 불렀다. "여보시오. 땅콩 한 봉지 주시오." "예. 나으리." 땅콩장수는 큰 소리로 대답하며 고소한 땅콩을 수북이 담은 봉지를 내밀었다. 청의무사는 땅콩을 까먹으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제기랄...정말 더럽게도 많이 모였구나. 도대체 엽단풍이란 자가 어떤 자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러 모여들었단 말인가?" 땅콩장수는 히죽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이 사람들이 다 그를 보기 위해 모였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은 그 삼대거두를 보기 위해 왔을 겁니다." 청의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엽단풍이란 자가 아니면 삼대거두가 어디 이렇게 한 장소에 모일 수 있었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때 근처에 있던 비쩍 마른 노인 하나가 땅콩장수를 불렀다. "여보시오. 나도 한 봉지 주구려." "예. 예." 땅콩장수는 얼른 그 노인에게 가서 땅콩을 내밀었다. 노인은 땅콩봉지를 받으려다 물었다. "요즘은 땅콩이 얼마씩이나 하오?" "닷푼입니다." "허. 많이 올랐군. 전에는 두 푼이면 실컷 먹었는데..." 땅콩장수는 노인을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그때와 지금은 세월이 많이 달라졌습죠." 노인은 비쩍 마른 얼굴에 씁쓸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렇군." 노인은 들고 있던 곰방대를 반대쪽 손으로 옮기며 허리춤을 뒤져 누런 동전을 꺼냈다. "옛소." "감사합니다." 땅콩장수는 넙죽 인사를 하고 다시 다음 손님을 찾으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곰방대를 든 노인은 땅콩을 까먹으며 청의무사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어디서 왔는가?" 청의무사는 마침 지루하던 참이라 즉시 말을 받았다. "저는 태원(太原)에서 왔습니다." 노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원이라면 여기서 족히 한 달은 걸리는 거리인데...정말 멀리에서 용케도 왔군." 청의무사는 별것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웃었다. "마침 이 근처에 볼 일이 있어 왔다가 소문을 듣고 들렸습니다. 노인장께선 이 근처에 사십니까?"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대로 강소성(江蘇省)일대를 벗어난 적이 없지." "이렇게 경치좋은 고장에서 사시니 정말 부럽습니다." "허허...그때문에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네. 나는 양(楊)이네만 자네는..." 노인이 자신의 성을 밝히자 청의무사는 공손하게 포권을 했다. "이제보니 양노인(楊老人)이셨군요. 저는 담중업(譚重業)이라 합니다." "담대협이셨군." "대협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그저 가전무예(家傳武藝)를 약간 배운 신출내기입니다." "허허..."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 담소를 나누었다.


그때 누군가가 양노인의 어깨를 툭 쳤다. "자네도 왔군 그래." 양노인은 고개를 돌렸다가 자신을 친 사람을 바라보고는 얼굴에 환한 웃음을 떠올렸다. "하하...이게 얼마만인가?" 양노인의 등뒤에 서 있는 사람은 키가 훤칠하고 풍채가 좋은 화의노인이었다. 화의노인은 수중에 옥골섭선을 들고 있었는데 위엄어린 모습과 몹시 잘 어울려 보였다. "자네는 여전히 건강하군 그래." 양노인이 화의노인의 전신을 ㅎ어보며 새삼스러운 듯 말하자 화의노인은 코를 찡긋거렸다. "자네도 여전하군. 얼마전에 회갑을 했다는데 못가봐서 미안하이. 워낙 바빠서..." 양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미안하긴. 요즘같이 어수선한 세상에 그런 걸 일일이 챙기는 사람이 어디있나? 자네 일은 잘 되는가?" "그럭저럭." 그때 마침 화의노인은 지나가던 땅콩장수를 발견하고 그를 불렀다. "나도 한 봉지 주시오." 땅콩장수는 연신 입가에 미소를 그치지 않으며 화의노인에게 땅콩을 담아 주었다. 화의노인은 땅콩을 까먹으며 물었다. "장사는 잘 되시오?" 땅콩장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덕분에." "오늘 같은 날에 장사할 생각을 다하다니 참으로 대단한 안목이오." "먹고 살려면 별 수가 있어야지요. 다행히 오늘은 그럭저럭 벌이가 되는군요." 그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던 담중업이 무엇을 보았는지 커다랗게 소리쳤다. "왔다!" 그 소리에 중인들은 일제히 담중업이 가리키는 곳을 돌아보았다. 구름처럼 모여있던 군웅들의 한쪽 구석이 소란스러워지며 바닷물이 갈라지듯 사람들이 쫙 갈라졌다. 갈라진 사이로 여섯 명의 남의인들이 일렬 횡대로 나란히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짙은 남의를 입고 검은 피풍을 두른 중년인들이었다. 그들을 보자 장내가 한바탕 소란스러워졌다. "아! 저 사람들은 십이비붕이다!" "십이비붕중의 여섯 명이나 나타날 줄이야!" 붕새가 수놓아진 검은 피풍을 두른 여섯 명의 비붕들은 구름처럼 모여있는 중인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천석평의 중앙에 가서 우뚝 섰다. "저기 왼쪽의 얼굴이 네모난 사람이 십이비붕중에서 가장 사납다는 뇌붕(雷鵬) 마천거(馬天擧)로군." "그 옆의 몸이 호리호리한 사람이 십이비붕중의 셋째 고수인 정붕(情鵬) 위향풍(韋香風)일세." "천하광자에게 낭패를 당했다는 악굉과 하후초도 왔군 그래." 장내가 온통 그들에 의해 술렁거렸다. 하나 여섯 명의 비붕은 그런 소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내에 우뚝 선 채 오연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다시 서쪽에서 한 차례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쌍대루의 인물들이 왔다!" 중인들의 일각이 무너지며 그곳에서 십 여명의 인물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천석평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푸른 청삼을 걸친 인물들이었는데 늙고 젊은 연령이 다양하게 섞여 있었다. 그들 중의 가장 앞에는 키가 훤칠하고 체구가 당당한 중년인이 부리부리한 호목을 번뜩이며 걸어오고 있었다. "저 사람이 바로 무쌍대루의 둘째 주인인 도패(賭覇) 황보당(皇甫堂)이로군 그래." "그렇지. 그 뒤에 있는 일곱 명의 젊은이들이 좌구태야 어르신네의 제자들인 칠수(七手)이고 제일 마지막에 따라오는 세 명의 노인들이 바로 무쌍대루의 실질적인 책임자들인 세 총관(總官)들일세." "보아하니 무쌍대루는 오늘 정예들이 거의 다 참석을 했군." 무쌍대루의 인물들은 천석평의 중앙에 들어서자 십이비붕방의 인물들과 가벼운 눈인사를 하고는 다른쪽에 가서 서 있었다. 십이비붕방에 이어 무쌍대루의 인물들마저 나타나자 장내는 아연 활기에 넘쳐 점차 흥분이 고조되었다. 시간은 이제 거의 정오에 다달아 있었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네 줄기의 인영이 중인들의 머리를 넘어 장내로 날아왔다. 그들의 신법은 그야말로 경쾌하고 날렵해서 경탄의 소리가 장내를 온통 뒤흔들었다. "아! 대단하다!" 중인들이 놀라 보니 장내에는 어느 새 네 명의 인물들이 더 늘어나 있었다. 그들을 보자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부귀장의 고수들이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나타난 네 명의 고수들은 하나같이 신태(神態)가 비범하고 안광이 잘 갈무리되어 있어 내외공(內外功)이 절정에 달한 인물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중에는 매응 방각의 싸늘한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이제 드디어 부귀장의 고수들까지 모습을 드러내자 장내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상 엽단풍의 모습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장내의 소란스러움이 점점 커졌다. 누군가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어떻게 된거야? 그 천하광자는 왜 안 나타나는거냐?" 그 소리에 고무된 듯 몇 사람이 거의 동시에 떠들어댔다. "혹시 겁이 나서 도망가 버린 거 아냐?" "천하광자가 아니라 천하겁자(天下怯子)다!" 여기저기서 나타나지 않는 천하광자를 욕하는 소리가 연거푸 터져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아함! 이거 시끄러워서 도저히 잘 수가 없구만!" 돌연 어디선가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그토록 소란스럽던 장내가 일순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중인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가 들려온 곳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기다!"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2. 그것은 하나의 오래된 나무였다. 그 나무는 천석평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가에 있었다. 그 나무는 밑둥이 장정 두 사람이 팔을 안아야 겨우 닿을 수 있을 만큼 컸는데 그 위로는 가지가 우거져 멋진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지금 한 사람이 그 나무 꼭대기에 걸터 안은 채 아래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 나무의 꼭대기 가지는 겨우 어린 아이의 손목보다 가늘었는데도 그 사나이는 용케도 떨어지지 않고 그 나무가지에 편안한 자세로 앉은 채 몸을 흔들거리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엄청난 체구의 사나이였다. 이 무더운 날에 거무틱틱한 흑의를 입고 있는데다 머리는 까치집처럼 헝클어져 있어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 흑의인을 보자 누군가가 소리쳤다. "앗? 저 자다! 저자가 천하광자 엽단풍이다!"


그 말에 장내가 벌집 쑤신 듯이 시끄러워졌다. "엽단풍...!" "저 자가 바로 천하광자구나!" 모두들 목을 길게 뺀 채 그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에 불을 켰다. 엽단풍은 나무가지에 앉은 채 아래를 내려보고 있다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아하함... 하도 나른해서 잠깐 눈좀 붙였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그는 보는 사람이 다 뻑쩍지근할 만큼 기지개를 켜더니 천천히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무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조마조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일어서니 그의 체구는 그야말로 엄청나게 컸다. 그 커다란 체구로 연신 기지개를 켠 채 가느다란 나무가지위에 서 있으니 밑에 있는 사람이 어찌 불안하지 않겠는가? 남들이야 불안에 떨건 말건 엽단풍은 신나게 기지개를 켠 다음 뻗뻗해진 목을 몇 차례 주무르고 허리를 빙빙 돌렸다. "잠자는 자세가 안 좋았나? 영 몸이 무겁군." 그는 수많은 중인들이 빤히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태연히 몸을 풀었다. 중인들은 어이가 없어 멀거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건만 빨리 내려올 생각은 안하고 오히려 몸을 풀고 있다니 이렇게 뻔뻔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 그때 구경하고 있던 담중업은 나직하게 경탄성을 발했다. "정말 훌륭한 공력이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노인장?" 양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토록 가느다란 나무가지 위에서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건 내외공이 절정에 달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그건 그렇고 한 눈에 그걸 알아본 자네도 보통이 아니군." 담중업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보통이 아니긴요. 저보다는 오히려 노인장의 안목이 더 놀랍군요." 그때 옆에 있던 화의노인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내려올 모양이군." 담중업과 양노인이 보니 과연 엽단풍은 몸을 다 풀었는지 나무 아래로 몸을 날릴 기세였다. 중인들의 시선이 온통 엽단풍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런데 웬걸? 금시라도 나무에서 뛰어내릴 듯 하던 엽단풍이 몸을 멈추더니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은 것이 아닌가? 엽단풍은 원래의 자세대로 앉으며 종이 울리듯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힘들게 내려갈 필요가 없지. 나한테 용무가 있는 사람들이 직접 올라오면 될 게 아닌가."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천석평의 중앙에서 우뚝 선 채 그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세 집단의 고수들은 분노의 기색이 가득 떠올랐다. 그들 중 가장 성격이 급한 십이비붕중의 뇌붕 마천거가 앞으로 나서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엽단풍! 빨리 내려오지 못하겠느냐?" 하나 엽단풍은 나무꼭대기에 앉은 채 두 다리를 까닥거리며 히죽 웃었다. "이곳의 경치는 정말 일품이오. 당신도 취향이 있으면 올라와서 같이 감상합시다." 마천거의 안색이 시뻘겋게 변했다. "이런 쳐 죽일 놈! 그런다고 내가 못올라 갈 줄 아느냐?" 마천거는 폭갈을 터뜨리며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쉬익! 그의 신형은 빛살 같은 속도로 엽단풍이 앉아 있는 나무꼭대기를 향해서 쏘아져갔다. 붕새가 그려진 검은 색 피풍이 그의 몸과 함께 펄럭거리니 그야말로 비붕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나무의 높이는 거의 십 장에 달하는 것이었다. 마천거의 몸은 순식간에 그 거리를 육박해 올라가더니 마침내 엽단풍이 앉아 있는 곳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초절한 신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엽단풍은 손뼉을 치며 어린 아이처럼 환호성을 올렸다. "와! 정말 굉장한 신법이오. 당신은 어서 이리로 오시오. 내가 술 한 잔 따라줄테니." 그는 품 속에 손을 집어 넣더니 정말로 술을 한 병 꺼내들었다. "이건 죽산홍(竹山紅)이란 것인데 비록 혈리홍보다는 못하지만 그런데로 먹을 만하오." 마천거는 비록 단숨에 십여 장을 날아왔으나 약간 숨이 가쁜 것은 사실이었다. 하나 엽단풍의 작태를 보자 그는 숨을 고를 겨를도 없이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이런 미친 놈! 네 놈이 언제까지 그렇게 지껄일 수 있나 보자!" 마천거는 그대로 엽단풍을 향해 돌진하며 쌍장(雙掌)을 휘둘렀다. 꽈르릉! 뇌성이 치는 듯한 음향이 들리며 그의 독보적인 절기인 천뢰장(天雷掌) 공력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 기운은 폭풍노도처럼 엽단풍의 전신을 향해 그대로


짓쳐들었다. 엽단풍은 웃으며 수중에 들고 있던 술병을 흔들었다. "원 성질도 급하긴. 술이나 한 잔 마신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텐데..." 그런데 그가 장난처럼 흔든 술병에서 한 줄기 막강한 경력이 일어나 마천거의 천뢰장에 맞서가는 것이었다. 두 경력은 그대로 허공에서 정면으로 격돌하고 말았다. 꽝! 고막이 터져나갈 듯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마천거의 몸이 태풍을 만난 가랑잎처럼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나무 아래로 떨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윽!"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바닥에 내려선 마천거는 답답한 신음을 토해냈다. 그는 간신히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선혈을 억눌러 삼켰으나 자신이 적지 않은 내상(內傷)을 입은 것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놈의 공력은 소문보다 더욱 무섭구나!'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엽단풍을 올려다 보았다. 엽단풍은 처음의 자세 그대로 나무가지에 걸터 앉은 채 술병을 목구멍에 처박고 있었다. 꿀꺽...꿀꺽... 술이 엽단풍의 목젖을 통과하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수많은 중인들이 보는 가운데 혼자서 얄밉도록 맛있게 술을 마신 엽단풍은 손으로 입가를 쓰윽 훔치며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이렇게 맛있는 술을 같이 마시자고 해도 싫다는 사람이 다 있으니..." 말이 중얼거리는 것이지 그의 목소리는 워낙 커서 천석평의 반대쪽 끝에 있는 사람의 귀에까지 똑똑이 들릴 정도였다. 마천거의 얼굴이 푸르뎅뎅하게 변했다. 하나 그는 방금전의 일격으로 자신이 상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에 감히 다시 나무 위로 올라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선 채로 공격을 했는데 상대는 가느다란 나무가지에 걸터앉은 채로 가볍게 자신을 격퇴했지 않은가? 상대가 손에 사정을 봐주지 않았으면 마천거는 더욱 험한 꼴을 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공력이 고강하기로 유명한 마천거가 단 일수(一手)만에 맥없이 격퇴당하자 나머지 두 집단의 고수들도 섣불리 나무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엽단풍은 그네를 타듯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채 발을 까닥까닥거리고 있었다. "당신들 나를 보자고 아우성을 친 것 같은데 왜 그러고들 있는거요? 어서 올라와서 용무를 보도록 하시오." 무쌍대루의 둘째주인인 도패 황보당이 슬쩍 자신의 뒤에 늘어서 있는 일곱 명의 젊은이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짓을 받자 일곱 명의 젊은이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제히 엽단풍을 향해 날아 올랐다. "차앗!" 낭랑한 호통소리와 함께 그들은 서로 손을 깍지낀 채 빙글빙글 회전하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와함께 기이한 광경이 벌어졌다. 가장 우측에 있는 첫번째 청년이 옆의 청년의 발등을 박차고 허공을 오르자 그 옆의 청년이 다시 두 사람의 발등을 연거푸 밟으며 날아 오르고 세번째 청년은 다시 그 세 사람의 발등을 차례로 밟으며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곱 명의 청년들은 돌아가면서 서로 상대의 발등을 밟으며 위로 상승했다. 일곱 명의 청년들이 커다란 원을 그린 채 상승하는 광경을 본 중인들 중 누군가가 놀란 외침을 토해냈다. "저것은 청운제(靑雲梯) 신법이다!" 그 말에 중인들은 경악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청운제란 마치 사다리를 밟듯 서로의 발등을 밟으며 허공을 날으는 초절정의 상승무공(上乘武功)이었다. 이것은 필히 세 사람 이상의 고수가 펼쳐야 하며 인원이 많을수록 그만큼 시전하기도 힘들도 그 위력도 막강해진다. 무쌍대루의 일곱 명의 청년들은 하나같이 신태가 비범하고 용모가 준수하여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그들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런 놀라운 수법마저 보여주자 모두들 손뼉을 치며 고함을 질렀다. "잘한다!" "그 건방진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어라!" 일곱 명의 청년들은 서로의 발등을 밟으며 엽단풍이 앉아 있는 위치까지 날아올랐다. 엽단풍은 여전히 술병을 홀짝 거린 채 그들이 올라오는 광경을 보고 있다가 자신도 소리를 질렀다. "조금만 더 힘내라! 잘 하면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들 올라오겠구나." 중인들은 이 광경을 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엽단풍은 분명히 그 청년들이 자신을 해치러 올라오는 것임을 뻔히 알텐데도 오히려 그들을 성원하고 있으니 어찌 기이하지 않겠는가? 과연 엽단풍의 응원(?)탓인지 일곱 명의 청년들은 거의 동시에 엽단풍이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 일곱


명은 여전히 원을 형성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엽단풍은 그들에 의해 에워싸여진 형상이었다. 엽단풍은 흥이 나는지 손뼉을 치며 발을 굴렀다. "정말 대단들 하다. 그 나이에 그 정도 실력이면 환갑 전후해서는 능히 강호제일의 경공대가(輕功大家)들이 될 것이다." 일곱 명의 청년들은 냉정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엽단풍을 쏘아보더니 일제히 깍지낀 손을 풀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벼락 같은 호통을 내지르며 양 손을 세차게 휘둘렀다. "받아라!" 슈슈슈슈! 그들의 손에서 각기 두 개씩의 유엽비도(柳葉飛刀)에 폭사되어 나왔다. 열네 개의 유엽비도는 허공을 가득 수놓으며 엽단풍의 전신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몸을 피할 곳도 없는 나무꼭대기에서 사방에서 유엽비도가 날아드니 누가 보기에도 엽단풍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중인들은 이제야 말로 엽단풍이 유엽비도에 의해 쓰러지거나 운이 좋으면 간신히 비도를 피해 바닥에 내려설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 중인들의 예상은 이번에도 보기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엽단풍은 여전히 나무가지 위에 걸터앉은 채로 술병을 무릎위에 내려놓더니 양 손을 질풍처럼 휘둘렀다. 파파파... 그의 손이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와 함께 유엽비도의 섬ㅉ한 빛이 모두 사라졌다. 중인들이 놀라 보니 열네 개의 유엽비도는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엽단풍의 수중에 들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엽단풍은 양 손을 휘둘러 사방에서 날아오는 열 네개의 유엽비도를 모두 잡아 버렸던 것이다. "아...대단하다!" 너나 할 것 없이 일제히 내지르는 탄성소리가 주위를 뒤흔들었다. 개중에는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치는 작자들도 있었다. 무림인들이란 원래 무공을 밥먹기보다 좋아하는 족속들이었다. 그들은 상대가 누구이건 상상을 초월하는 무공을 지니고 있으면 피아(彼我)를 불문하고 상대에게 경외지심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일곱 명의 청년들은 유엽비도를 발(發)한 여파를 감당하지 못하고 나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바닥에 내려서서도 엽단풍이 도대체 어떻게 자신들이 던진 유엽비도를 그토록 정확하게 받을 수 있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들이었다. 엽단풍은 양 손에 일곱 개씩의 유엽비도를 움켜쥔 채 히죽 웃었다. "이거 정말 횡재로군. 이렇게 좋은 칼을 열네 개씩이나 선사받다니..." 그는 신이 나서 무릎 위에 내려놓았던 술병을 들고 다시 한 모금을 들이켰다. "크...좋군. 좋아. 천고지광인두다(天高地廣人頭多)라. 하늘은 높고 땅은 넓고 사람들 대가리도 많으니 이 아니 즐거울소냐." 엽단풍은 혼자 중얼중얼거리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때 다시 네 개의 그림자가 허공을 날아 그가 있는 나뭇가지 위로 뛰어올랐다. 그들은 바로 부귀장에서 온 고수들이었다. 엽단풍은 그들을 둘러보다가 방각과 시선이 마주치자 반갑다다는 듯 손을 마구 휘둘렀다. "방형! 당신도 왔구려. 어서 오시오. 아직 술이 한 모금은 남았을 거요." 방각의 얼굴은 철갑을 씌운 듯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미친 놈!"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침을 탁 뱉었다. 이번에 올라온 부귀장의 고수들은 먼저 번의 인물들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우선 그들은 십여 장이나 되는 나무 위를 아주 가볍게 뛰어올라왔을 뿐 아니라 엽단풍과 마찬가지로 가느다란 나무가지에 신형을 고정시킨 채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엽단풍을 에워싼 방위는 완벽해서 엽단풍이 어디로 몸을 날려도 그들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의 신법과 방위를 선택한 안목으로 보아 지금까지 올라왔던 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놀라운 고수들임이 분명했다. 방각의 옆에 서 있는 자는 키가 위태로울 정도로 크고 몸이 비쩍 마른 황의인이었다. 키에 비해서 몸이 너무 말라서 그가 나뭇가지를 밟고 서 있는 모습은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불안해 보였다. 황의인의 수중에는 길다란 검은 채찍이 쥐어져 있었다. "엽단풍. 순순히 내려갈텐가? 아니면 우리 손에 끌려서 내려가겠나?" 그는 독사 같은 눈으로 엽단풍을 응시하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자의 음성은 무척 특이해서 낮게 가라앉아 있는 것 같으면서도 듣기 거북한 쇳소리가 섞여 있어 왠지 섬뜩하게 들렸다.


엽단풍은 그 황의인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갑자기 커다란 탄식을 토하는 것이 아닌가? "아깝구나. 아까워...!" 황의인은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무엇이 아깝다는 것이냐?" "당신은 조금만 더 살이 찌고 몸이 옆으로 퍼졌으면 나하고 견줄 만한 체구가 될텐데 위로만 삐쭉하게 솟았으니 어찌 아깝지 않겠소? 아마 어렸을 때 누가 당신 머리를 잡아 뺀 모양인데 어째서 그 사람은 옆으로도 늘어뜨릴 생각을 못했을까?" 나무 아래에서 웃음을 참지 못한 사람들이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의인의 낮빛은 그야말로 얼음 굴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냉막하게 굳어졌다. 그는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엽단풍을 응시했다. "정말 미친 놈이로군..." 황의인의 반대편에 서 있던 피처럼 붉은 홍의를 입은 뚱뚱한 체구의 장한이 커다란 소리를 질렀다. "조형(趙兄)! 더 사정볼 것 없이 이 건방진 놈을 단번에 묵사발로 만들어 버립시다." 황의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중의 검은 채찍을 힘주어 움켜 잡았다. 황의인은 할심독편(割心毒鞭) 조일림(趙一霖)이란 자로 채찍솜씨로만 따지면 능히 강남의 일인자라 할 만했다. 그와 함게 올라온 인물은 매응 방각외에 벽력태세(霹靂太歲) 위광(威光)과 회선검(廻旋劍) 막립(莫立)이었다. 홍의를 입은 뚱뚱한 인물이 위광이었고 말없이 서 있는 훤칠한 키에 수려한 용모를 지닌 중년인이 막립이었다. 위광은 벽력신장(霹靂神掌)이라는 가공할 장력으로 대강남북을 진동시킨 고수였고, 막립은 관서(關西)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날리던 절세의 검객이었다. 이들 네 사람은 각기 무림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이 한 사람을 합공하기 위해서 몰려들었다고 한다면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하나 그 믿지 못할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었다. 조일림 등은 이미 방각이 엽단풍에게 낭패를 당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개개인으로는 결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깨닫고 처음부터 일제히 공격을 했다. "이놈! 죽어라!" 날카로운 호통소리와 제일 먼저 조일림이 독편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는 자신이 자랑하는 색혼편법(索魂鞭法)중의 절초인 염라색혼(閻羅索魂)수법으로 엽단풍의 목덜미를


후려쳐왔다. 아무리 천하의 엽단풍이라도 조일림 같은 절정고수의 공격을 앉아서 피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조일림의 독편은 길이가 일 장에 달하는 것으로 전신에 치명적인 극독(劇毒)이 칠해져 있어 스치기만 해도 그대로 목숨이 끊어지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엽단풍은 앉은 자세에서 허공으로 몸을 붕 솟구치며 오른손을 슬쩍 휘둘렀다. 팟! 그의 수중에 있던 유엽비도 중 하나가 빛살 같은 속도로 날아갔다. 유엽비도는 무서운 기세로 다가들던 조일림의 독편끝에 정확하게 격중되었다. "엇?" 조일림은 유엽비도에 격중된 순간 손목이 찌르르 울림을 느끼고 안색이 대변해 뒤로 주춤 물러났다. 바로 그 순간, 쾌액! 두번째 유엽비도가 우두커니 서 있는 조일림의 목덜미를 향해 쏘아져 오는 것이 아닌가? 조일림은 깜짝 놀라 황급하게 옆으로 몸을 피하려 했다. 하나 그때 그는 다시 세번째 유엽비도가 자신이 막 피하려는 곳으로 날아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안색이 시커멓게 변해 버렸다. 두 개의 비도가 날아오는 속도와 배치가 그야말로 완벽하여 그는 도저히 피할 곳을 찾지 못했다. "이런 제기랄..." 다급해진 조일림은 거칠게 말을 내뱉으며 나무 아래로 훌쩍 뛰어내리고 말았다. 간발의 차이로 두 개의 유엽비도는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일림은 바닥에 내려선 뒤에도 모골이 송연해 졌는지 식은 땀을 흘린 채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엽단풍이 장난처럼 내던진 세 개의 유엽비도가 절정의 고수인 조일림을 나무아래로 쫓아 버리자 중인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나 그때 벽력태세 위광이 노호성을 지르며 날아들었다. "받아라!" 그는 비호같이 달려들며 자신의 성명절기(成名絶技)인 벽력신장을 다섯 대나 갈겨댔다. 꽈르릉! 사방이 후끈한 열기에 휩싸이며 태풍을 만난 듯 뒤흔들렸다. 벽력신장의 위력은 그야말로 막강했다. 하나 그의 상대는 아쉽게도 엽단풍이었다. "하하...대단한 장력(掌力)이군!"


엽단풍은 껄껄 웃으며 왼쪽 소매를 세차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소매에서 한 줄기 노도 같은 경력이 위광을 향해 몰아쳤다. 위광이 갈겨낸 다섯 개의 벽력장과 엽단풍의 소매에서 나온 경력은 허공에서 정면으로 격돌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귀청이 떨어질 듯한 폭음이 울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그토록 가공할 위세로 다가들던 벽력장이 엽단풍의 소매에서 나온 경력에 부딪치는 순간 바닷물에 빠진 조약돌처럼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실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어찌 벽력장이 그대로 맥없이 사라져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이...이럴수가..." 위광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뜬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것이 바로 절전(絶傳)된지 백여 년이 넘은 대산수(大散袖)임을 그가 어찌 알겠는가? 위광이 멍하니 서 있을 때 난데없이 차가운 섬광 하나가 그의 가슴팍으로 날아들었다. 쾌액! 그것은 하나의 날이 시퍼렇게 선 유엽비도였다. 가슴이라는 부위는 노리기도 쉽지만 그만큼 피하기도 수월했다. 과연 위광은 촉망중에도 몸을 날려 그 유엽비도를 피해냈다. 하나 그 바람에 그의 몸은 나무 위에서 떨어져 바닥에 내려서야만 했다. 위광은 바닥에 내려선 후에도 어이가 없는지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조일림과 위광의 두 절정고수가 맥없이 격퇴당하자 방각과 막립은 안색이 대변했다. 그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일제히 몸을 날려 엽단풍에게 날아갔다. 아니 날아가려 했다. 하나 그 순간, "하하...당신들에게도 줄 것이 있소." 한 발 먼저 엽단풍이 대소를 터뜨리며 그들을 향해 양손을 휘둘렀다. 쐐쐐! 두 개의 유엽비도가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그들에게 날아갔다. 방각과 막립은 막 몸을 날리려다 유엽비도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자 할 수 없이 제각기 검을 휘둘러 유엽비도를 후려쳤다. 까깡!


과연 방각과 막립은 절세의 검객들답게 유엽비도를 수중의 장검으로 막아냈다. 한데, "으음..." 유엽비도를 장검으로 퉁겨낸 두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신형이 한 차례 휘청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 유엽비도에 실린 역도(力道)가 어찌나 강력하던지 그것을 쳐낸 순간 하마터면 수중에 쥐고 있던 장검을 놓쳐버릴 뻔 했던 것이다. '조그만 유엽비도에 이처럼 엄청난 힘을 실어 보내다니...' 그들이 경악어린 눈길을 서로 주고 받을 때, "정말 잘 하는군. 그럼 하나씩 더 받아보시오." 엽단풍의 음성이 들리며 다시 두 개의 유엽비도가 빛살 같은 속도로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방각과 막립은 정신이 번쩍 들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 날아오는 유엽비도는 조금전보다 오히려 느린 것이었다. 하나 그것을 본 방각과 막립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두 사람은 정상의 고수들답게 그 유엽비도에 실린 힘이 조금전보다 훨씬 더 막중함을 알아본 것이다. 더구나 날아드는 속도가 느려졌다고 해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빠르기였다. 두 사람은 전력을 다해 수중의 장검으로 날아오는 유엽비도를 후려쳤다. 깡!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음향이 들리며 두 개의 유엽비도는 그들의 장검에 의해 다시 한 번 격퇴 되었다. 하나 방각과 막립의 몸은 더욱 심하게 흔들려 하마터면 그대로 바닥에 떨어질 뻔했다. 그들의 이마에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이번의 비도에 실린 힘은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력해서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팠던 것이다. 그들의 검이 천중선일(千中選一)의 보검이 아니었다면 아마 유엽비도에 의해 박살이 나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채 신형을 안정시키기도 전에 다시 두 개의 유엽비도가 그들의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이번의 것은 먼저 것보다 더욱 속도가 느렸다. 그런데도 그것을 보자 방각과 막립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들은 이를 악문 채 사력을 다해 장검을 내려쳤다. 쩌어엉! 고막이 아득해지고 속에서 핏물이 울컥 솟아 올랐다. 그들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보았다. 어찌나 충격이 컸던지 손의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손아귀가 찢겨져 핏물이 내보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통증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들이 아직도 장검을 놓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수십 년 동안 검을 단련한 검객으로서의 본능 때문이었다. 하나 다시 고개를 쳐든 두 사람의 안색에 암담한 절망감이 떠올랐다. 어느 사이에 다시 두 개의 유엽비도가 그들의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날아드는 것은 그야말로 속도가 엄청나게 느렸다. 마치 기어오듯 다가오는 두 개의 유엽비도는 금세라도 바닥으로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어찌 비도가 이처럼 느린 속도로 날아올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그것을 본 방각과 막립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뛰어내리고 말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도저히 그 유엽비도에 실린 힘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방각과 막립마저 스스로 나무에서 뛰어내리자 구경하고 있던 중인들은 그야말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네 명의 고수들이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하고 모두 한 사람에 의해서 간단하게 격퇴당하고 만 것이다. 더구나 엽단풍은 여전히 나무 위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이제는 아무도 그를 천하의 미친 놈이라고 욕하지 않았다. 이 자는 단순한 미친 놈이 아니라 무공이 엄청나게 강한 미친 놈인 것이다.

제 8 장 나타난 三王 1. 한동안 주위에는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이번에도 엽단풍이었다. 엽단풍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보고 싶은 우두머리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하루살이 같은 작자들만 얼쩡거린단 말이냐?" 그 말에 중인들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러보고니 과연 대붕왕과 도왕, 황금왕의 삼대거두들은 모두 모습을 보이지 않고 그 밑의 수하들만 오늘 나타난 것이 아닌가? 소문으로는 분명히 삼대거두가 모두 나타나 저 천하의 미친 놈을 혼찌검 내준다고 했는데 삼대거두는 커녕 그들 중 한 사람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다. 엽단풍은 쌍심지를 돋우며 투덜거렸다. "제기랄...그 작자들이 나를 우습게 봐도 단단히 우습게 봤군. 이거 성질나서 살겠나?" 그는 연신 술병을 들이켰다. 그가 들고 있는 술병은 아까부터 마셨기 때문에 몇 모금 마시지도 않아 금세 바닥이 나 버렸다. 엽단풍은 술마저 떨어지자 더욱 기분이 언짢은 것 같았다. 그는 입맛을 쩍쩍 다시다가 아래를 내려보더니 마침 땅콩장수를 발견하고 손짓해 불렀다. "이보시오, 노인장. 땅콩 한봉지만 던져 주시오." 땅콩장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으리. 그렇게 높은 곳까지 어떻게 땅콩을 던집니까?"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노인장은 그저 던지기나 하시오. 먹는 건 내가 책임질테니까." 땅콩장수가 어찌할 줄을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근처에 있던 양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던져보시구려. 모처럼 당신 땅콩 던지는 솜씨 좀 구경합시다." 땅콩장수는 겸연쩍게 웃었다. "솜씨는 무슨...별로 내세울 거리도 못됩니다." 양노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땅콩장수는 할 수 없다는 듯 나무 아래로 다가오더니 엽단풍을 올려보며 소리질렀다. "그러면 던질테니 잘 받으시오." 엽단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마시오." 땅콩장수가 밑에서 엽단풍이 있는 나무꼭대기를 바라보니 그저 아득하기만 했다. 땅콩장수는 땅콩을 주름진 손에 한아름 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자가 대체 무슨 꿍꿍이속으로 저러는지 모르겠군." 땅콩장수는 엽단풍이 있는 곳을 잘 가늠하더니 냅다 땅콩을 위로 던졌다. "받으시오!" 십여 개의 땅콩이 엽단풍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땅콩장수의 팔 힘이 그렇게 세지 않아서인지 땅콩은 금세라도 떨어질 듯 비실비실 올라왔다. 한데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엽단풍이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형형한 눈빛으로 땅콩을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수많은 고수들이 그토록 매서운 공격을 해도 꿈쩍도 하지 않던 엽단풍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땅콩장수가 던진 십 여개의 땅콩을 보더니 강적을 만난 사람처럼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더욱 기이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반도 못올라가고 떨어질 줄 알았던 십여 개의 땅콩이 어찌된 일인지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계속 엽단풍에게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어찌 땅콩이 이렇게 느릿느릿하게 올라갈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마치 조금전에 엽단풍이 방각과 막립을 향해 던진 마지막 두 개의 유엽비도와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까는 유엽비도이고 지금은 땅콩이라는 것과 그때 유엽비도는 앞으로 날아왔고 지금 땅콩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천천히 올라가는 열여덟 개의 땅콩! 그것은 더 이상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더욱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올라가는 땅콩의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야말로 굼뱅이처럼 올라가더니 엽단풍에게 다가갈수록 그 속도가 점차 빨라지더니 나중에는 열여덟 개의 흑선(黑線)으로 변해 버렸다. 쐐애애액! 열 여덟개의 땅콩은 열여덟 개의 흑선을 그리며 엽단풍의 전신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었다. "아앗?" 중인들은 너무도 놀라 자신들도 모르게 경악성을 내질렀다. 엽단풍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진지한 안색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열여덟 개의 땅콩을 바라보다가 별안간 수중에 남아 있던 두 개의 유엽비도를 양 손에 집어 들더니 이리저리 휘두르기 시작했다. 파파팍! 싸늘한 유엽비도의 도광(刀光)이 허공을 가득하게 수놓았다. 그 도광은 무서운 속도로 날아드는 열 여덟 개의 흑선을 순식간에 휘감아 버렸다. 갑자기 도광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와 함께 열여덟 개의 흑선 또한 보이지 않았다. 중인들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눈을 크게 뜬 채 장내를 주시했다. "아아...!" 군웅들 틈에서 한 줄기 답답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엽단풍은 여전히 양 손에 유엽비도를 하나씩 든 채 우뚝 서 있었다. 그런데 그의 손에 들린 유엽비도의 끝에 각각 아홉 개의 땅콩이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토록 가공할 속도로 날아드는 땅콩을 막는 것도 대단한 일인데 그 땅콩들을 모두 칼끝에 꽂을 수 있다니 실로 경악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엽단풍은 유엽비도에 꽂힌 땅콩들을 내려보더니 천천히 그것들을 빼내어 하나씩 먹기 시작했다.


"음...과연 절묘한 맛이로군." 땅콩장수는 그가 설마 열여덟 개의 땅콩을 모두 받아낼 줄은 몰랐는지 흠칫 하는 표정이더니 이내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헤헤...나으리의 솜씨는 과연 대단하시군요. 땅콩 값은 닷 푼입니다." 엽단풍은 열 여덟 개의 땅콩을 모두 먹은 다음 유엽비도를 거두고 땅콩장수를 내려보았다. 문득 그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땅콩이 닷 푼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엽단풍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평생 모든 거래를 정당하게 해왔으며 절대로 물건값을 터무니없이 지불하지도 않았소." 중인들은 그가 또 무슨 말을 하나하고 모두들 그의 입을 주시했다. "이 세상에서 땅콩은 비록 무수히 많지만 방금 내가 먹은 땅콩 같은 건 둘도 없을 것이오. 그런데 어찌 그것이 닷 푼밖에 되지 않는단 말이오?" 땅콩장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으리. 그것은 그냥 평범한 땅콩입니다. 절대 다른 땅콩과 다른 점이 없습니다." 엽단풍은 껄껄 웃었다. "하하...천하에 십팔과모니주기풍(十八顆牟尼珠旗風)으로 던져진 땅콩이 어찌 평범하단 말이오?" 십팔과모니주기풍이란 말에 장내에 있던 몇몇 절정고수들의 얼굴에 경악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십팔과모니주기풍은 강호상에서 전설로만 알려진 암기수법으로. 천하에 산재한 무수한 암기수법 중에서도 서열 일 이위를 다투는 신화적인 무공이었다. 이 수법을 익히면 동그랗고 작은 물건이면 어떤 것이든 암기로 사용할 수 있는데 일단 열여덟 개의 암기를 발출하게 되면 천하의 누구라도 그것을 완벽하게 피할 수 없다고 한다. 땅콩장수는 그가 한 눈에 자신의 수법을 알아버리자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나으리의 안목은 대단하군요. 그러면 나으리는 땅콩값을 얼마로 생각하십니까?" 엽단풍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재빨리 말했다. "적어도 땅콩 한 알에 만 냥씩 십 팔만냥은 되어야 하지 않겠소." 이 말에 중인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어떤 미친 놈이 땅콩 한 알에 만냥씩을 내려고 하겠는가? 그런데 이 자는 스스로의 입으로 땅콩을 만냥씩 주겠다니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하나 엽단풍이 다음에 한 말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당신이 땅콩을 던지느라 수고한 값이 십이만 냥, 그리고 당신같이 귀하디 귀한 몸으로 남을 위해 날품팔이를 했으니 그 값이 이십만 냥. 도합 오십만 냥은 되어야 정당한 가격이 될 것이오."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정말로 품 속에서 전표뭉치 한 다발을 꺼내 땅콩장수에게 던져주었다. "자. 여기 오십만 냥이 있소. 당신에겐 보잘 것 없는 액수겠지만 아무튼 나는 땅콩값을 지불했소." 모두들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사람들은 살다 살다 이렇게 완벽하게 미친 놈은 처음 본다는 표정들이었다. 열여덟 개의 땅콩값으로 오십 만냥을 지불했다고 한다면 어느 누가 제정신을 가진 자의 소행이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이상한 것은 땅콩장수의 행동이었다. 분명 난데없는 돈벼락에 펄쩍 뛰며 기뻐해야할 그가 오히려 돈뭉치는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아닌가? 다시 고개를 들어 엽단풍을 올려다 보았을 때는 그의 두 눈에 기이한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자네는 어떻게 내 정체를 알았나?" 그의 어조 또한 변해 있었다. 늙수그레하고 피곤에 지친 음성이 밝고 활기에 차며 위엄어린 것으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뀐 그 음성이 그에게는 몹시도 잘 어울려 보였다. 엽단풍은 그를 내려본 채 빙그레 웃었다. "이 세상에서 열여덟 개의 땅콩으로 나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소. 게다가 땅콩은 당신이 가장 처음으로 투자해서 큰 돈을 번 사업이 아니오?" 땅콩장수는 기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자네는 나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알고 있군 그래." "신부귀가 땅콩으로 부자가 되어서 명주와 비단을 팔아 지금의 부를 쌓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 말에 중인들은 그야말로 대경실색했다. "뭐라고? 저 땅콩을 파는 노인이 바로 부귀장의 황금왕이란 말인가?" 장내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모두들 천하제일의 부자를 보기위해 목을 길게 빼고 앞을 다투어 몰려들었다. 땅콩장수는 어깨를 으쓱거리다가 허리를 쭉 폈다. 그러자 초라한 땅콩장수의 모습이 사라지고 당당하고 귀품(貴品)이 어리는 황금왕의 모습이 나타났다. 황금왕 신부귀!


그 전설적인 거부(巨富)가 설마 땅콩장수로 변장해 있을 줄이야... 담중업 또한 믿어지지가 않는지 입을 반쯤 벌린 채 멍하니 땅콩장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양노인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이제 그만 자네하고 헤어져야 되겠군." 담중업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양노인을 돌아보았다. "아니 지금부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양노인은 담담하게 웃었다. "허허... 더 이상 다른 사람을 기다리게 할 수가 없군 그래." 그는 잘 있으라는 듯 담중업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옆에 서 있던 화의노인을 돌아보았다. "그만 갈까?" 화의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두 사람은 서로 눈짓을 주고 받더니 땅을 박차고 날아 올랐다. 담중업이 놀라서 쳐다보고 있는 동안에 그들은 무려 이십여 장을 날아 엽단풍과 신부귀가 있는 나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중인들은 난데없이 두 명의 노인이 기경(奇驚)할 신법으로 장내에 나타나자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눈을 부릅뗬다. 땅콩장수, 신부귀는 그들이 나타나자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드디어 두 나으리들도 등장하셨군 그래." 두 노인중의 비쩍 마르고 손에 곰방대를 든 노인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이제 정체를 드러내 놓고도 아직도 나으리인가?" 화의노인의 입에도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신부귀. 자네의 한 수는 잘 구경했네. 정말 오래만에 보는 멋진 솜씨였네." 신부귀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중인들은 대체 두 노인이 어떤 신분이길래 천하의 황금왕과 이렇듯 친밀하게 인사를 주고 받을까 궁금하게 생각했다. 바로 그때, "방주(幇主)님을 뵈옵니다!" 십이비붕이 일제히 소리를 치며 곰방대를 든 노인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닌가? 양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만 일어들나라." 십이비붕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바닥에서 일어나 그의 뒤에 조용히 시립해 섰다. 중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무쌍대루의 인물들이


화의노인에게 우르르 달려오더니 일제히 대례를 올리는 것이었다. "주인님!" 화의노인은 귀찮다는 듯 오른손을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그들은 황급히 일어나 그의 뒤에 말없이 도열해 있었다. 그제서야 중인들은 두 노인의 정체를 알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 저 노인들이 바로 대붕왕과 좌구태야로구다!" "드디어 삼대거두가 모두 나타났다!" 장내는 그야말로 흥분과 함성의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삼대거두가 드디어 모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은 설마 그 유명한 삼대거두가 이토록 평범한 인상의 노인들이라고는 추호도 생각치 못했는지 모두 경악어린 표정들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인 게 분명했다. 삼대거두가 서로 면식이 있는 사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2. 대붕왕은 들고 있던 곰방대를 탁탁 털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우리 세 사람이 다시 만난지도 벌써 여러 해만이군. 이렇게 만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저 자 때문이니 저 자에게 화를 내야 할지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군." 화의노인, 좌구태야의 안색은 여전히 냉랭했다. "흥! 감사는 무슨...이번에 그 놈에게 호된 맛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천하인(天下人)들이 모두 우리들을 조롱하게 될 걸세." 대붕왕은 그의 성격이 직선적이고 좀처럼 남을 용서할 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때 그들의 위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이제 오늘의 주인공들이 모두 나타났으니 슬슬 내려가볼까." 고개를 올려보니 엽단풍이 기세좋게 아래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의 내려오는 신법은 기대와는 달리 너무도 평범했다. 그렇게 빠르지도 않았고 또 느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의 내려오는 모습을 본 대붕왕 등 세 사람의 낮빛이 홱 변했다. 황금왕 신부귀가 엽단풍을 바라보며 급히 물었다. "지금 자네가 펼친 신법은 무어라고 하는가?"


엽단풍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글쎄...나는 하도 많은 신법을 익혔기 때문에 일일이 이름을 기억할 수가 없소. 그게 이름이 뭐더라? 대붕전시(大鵬展翅)던가? 유성비월(流星飛月)인가? 아니 금리천파(金鯉穿波)인가?" 엽단풍은 끙끙 머리를 싸매는 모습이었다. "그런 이름이 아닌데...좀 더 고상하고 산뜻하면서도 우아한 이름이었는데...아! 당최 생각이 나지 않는군." 신부귀는 어처구니가 없어 더 입을 열 생각도 없어 보였다. 대신 대붕왕이 불쑥 말했다. "혹시 그것의 이름이 단봉귀소(丹鳳歸巢)가 아닌가?" 그 말에 엽단풍이 손뼉을 탁 쳤다. "맞소. 맞아. 단봉귀소. 바로 그거요." 대붕왕은 물론이고 다른 두 사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좌구태야는 자신도 모르게 짤막하게 부르짖었다. "단봉무영신법(丹鳳無影身法)!" 엽단풍이 그를 돌아보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어? 당신이 어떻게 그 신법의 이름을 아는거요?" 좌구태야는 안색이 대변한 채 오히려 되물었다. "네 놈은 누구냐? 어떻게 단봉무영신법을 알고 있는거냐?" 엽단풍은 나직히 혀를 찼다. "이거야 원. 내가 물어볼 말을 당신이 물어보면 어떡하오?" 좌구태야의 눈빛에서 차가운 한광(寒光)이 줄기줄기 뻗어나왔다. 하나 그가 막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대붕왕이 먼저 나서며 입을 열었다. "노부가 알기로는 천하에서 단봉무영신법을 익힌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 있을 뿐이네." 엽단풍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그게 바로 나요." 대붕왕은 잘라 말했다. "노부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은 여자일세." "어? 그런가?" "그리고 그 여자는 이미 이십여 년 전에 죽었네." "얼레?" 엽단풍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나는 이 신법을 어떻게 익혔단 말이오?" "그러기에 노부가 물어보는 것일세. 자네는 그 신법을 누구에게서 익혔나?" 엽단풍은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내가 익힌 신법을 이미 오래 전에 죽어버린 여자가 익히고 있었다니...그럼 나는


유령에게서 배웠단 말인가? 이것 참..." 대붕왕은 그가 자신의 말에는 대답할 생각도 하지 않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는데도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침착한 눈길로 그를 응시했다. "자네에게 강요해서 미안하네만 그 신법을 누구에게서 익혔는지 반드시 말해주기 바라네. 이 일은 우리에게는 너무도 중대한 것일세." 대체 단봉무영신법이 어떤 것이길래 대붕왕 같은 인물이 이렇게 사정조로 말하는 것일까? 아니 단봉무영신법을 익혔던 그 여자가 대체 누구이기에... 엽단풍은 대붕왕의 진지한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대답해 주겠소. 내가 이 신법을 어떻게 익혔냐하면..." 대붕왕은 물론이고 다른 두 사람마저 마른 침을 삼키며 그를 주시했다. 중인들의 시선들도 덩달아 엽단풍에게로 향했다. 엽단풍은 한 차례 히죽 웃더니 싱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그 초식을 무공비급을 보고 익혔소." 삼대거두의 얼굴에 빠르게 실망어린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대붕왕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엽단풍을 바라보았다. "그게 정말인가?" "내가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하겠소? 나는 그것을 우연히 입수한 무공비급을 보고 익혔단 말이오." 대붕왕은 다시 물었다. "자네는 어디서 그 무공비급을 입수했나?" 웬일인지 엽단풍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순순하게 대답해 주었다. "십여 년 전에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우연히 어떤 동굴에서 뼈만 앙상한 시체를 발견했소. 무공비급은 그 시체의 품안에서 발견한 거요." 대붕왕의 안색이 다시 변했다. 그의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커졌다. "시체라고? 자네는 그 시체를 어디에서 발견했나?" "오대산(五臺山)이오." 대붕왕의 몸이 움찔했다. "오대산? 산서(山西)의 그 오대산 말인가?" "그럼 오대산이 거기 말고 또 있단 말이오?" 엽단풍이 비꼬듯 말했으나 대붕왕은 그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몸을 가늘게 떨며 다시 물었다. "그 시체는...그 시체는 어떤 것인가?" "글쎄...하도 오래 되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는데 입고 있는 옷으로 보아 그리 나이가 많지 않은 여인같았소. 그밖에는 잘 모르겠소." 대붕왕의 이마에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나 그는 긋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항상 태산처럼 침착하던 대붕왕을 이토록 경동시키는 일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대붕왕은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탄식인지 한숨인지 모를 장탄성을 토해냈다. "그렇다면 과연 그녀는 죽었단 말인가...?" 그의 음성은 너무도 미약하여 옆에 있던 좌구태야와 신부귀외에는 아무도 알아들은 사람이 없었다. 신부귀의 표정 또한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이 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혹시나하고 기대했던 모든 일들이 수포로 돌아간 게 아니오?" 대붕왕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이내 침착성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속단할 필요는 없네. 그녀가 참변을 면치 못했다고 해서 그들마저 벗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신부귀가 무어라고 입을 열려하자 대붕왕은 가볍게 손을 내저어 그의 입을 막았다. "그 일은 다음에 다시 의논하도록 하세. 우선은 이 자의 내력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알아야겠네." 그 말에 신부귀와 좌구태야의 시선이 모두 엽단풍에게로 향했다. 엽단풍은 그들이 자신을 바라보며 떠들건말건 혼자서 멀뚱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체구는 과연 듣던 대로 엄청난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소문보다 더욱 큰 것 같았다. 대붕왕은 그의 몸을 세세하게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어려서부터 체계적으로 무공을 수련했군. 몸이 아주 잘 닦여져 있네."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과연 대붕왕다운 안목이오. 체계적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소시적부터 무공을 익힌 건 사실이오." "자네는 그때 입수한 무공비급에서 단봉무영신법만 배웠나?" "한 가지 더 있소." "그게 무엇인가?" "난화지(蘭花指)라는 거요." 대붕왕의 얼굴에 희미한 경악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자네는 정말 운이 좋군. 절세무쌍(絶世無雙)의 단봉무영신법에 난화지마저 익혔다니...난화지는 천하에서 가장 변화무쌍한 지법(指法)이니 그걸 익혀두면 크나큰 도움이 되지." "글쎄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아직 한 번도 써먹어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소." "그럼 자네는 그 두가지 무공만 익혔나?" 엽단풍은 빙긋 웃었다. "그외에 가전무예(家傳武藝)를 몇 가지 더 익혔소."


대붕왕의 눈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번뜩였다.***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겠나?" "별로 대수롭지 않은 무공이라 남들앞에 내세우기 부끄럽소." 그의 입에서 부끄럽다는 말이 다 나오다니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괜찮네. 자네의 실력으로 보아 그 가전무예도 필시 놀라운 절기임이 분명하니 염려말고 알려주게." 엽단풍은 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렇다면 알려줄테니 부디 흉을 보지 마시오." 대붕왕은 빙그레 웃었다. "걱정하지 말게." 엽단풍은 목청을 가다듬은 다음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익힌 가전무예는 모두 네 가지인데 하나는 신공(神功)이고 다른 세 가지는 권법(拳法)과 장법(掌法), 그리고 도법(刀法)이오." 중인들은 모두 호기심을 느끼고 그를 주시했다. 혜성처럼 나타나 고수들을 풍지낙엽처럼 쓰러뜨리는 그의 무공내력이 드디어 알려지게 되는 순간이었다. 엽단풍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것은 바로 가가소소신공(可可笑笑神功)과 포복절도권(抱腹絶倒拳), 박장대소장(拍掌大笑掌), 그리고 대경실색도(大驚失色刀)요." 대붕왕은 그가 무슨 절예를 말하나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이 말을 듣자 멍한 표정이 되었다. 주위에 늘어서 있던 중인들 또한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붕왕은 안색이 변해 눈빛이 냉엄하게 굳어졌다. "지금 노부를 놀리는건가?" 엽단풍은 혀를 찼다. "그것 보시오. 내가 말하면 모두 흉을 볼거라고 하지 않았소. 당신은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치더니 왜 인상을 쓰는거요?" 대붕왕은 웃을 수도 없고 울을 수도 없어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화를 내자니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말이 있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이 자가 뻔히 자신을 놀리는 것을 알면서도 참아야 하는 것이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좌구태야가 싸늘하게 소리치며 앞으로 나섰다. "더 두고 볼 것이 없다니까. 당신은 뒤로 물러나 있으시오. 내가 십 초(十招)안에 이 자식의 내력을 발가벗겨 보이고 말겠소." 대붕왕도 이번에는 그를 제지하지 않고 비켜섰다. 그는 좌구태야의 말대로 직접 손을 써서 엽단풍의 내력을 알아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좌구태야는 엽단풍의 앞으로 다가와서 냉막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 놈. 단봉무영신법과 난화지를 믿고 까부는 모양이다만 그 무공의 원주인도 석년에 우리를 무시하지는 못했다. 순순히 말할 때 내력이 무엇인지 밝혀라." 엽단풍은 그 말에 대답하기는 커녕 오히려 엉뚱한 것을 물어보았다. "소문에 듣기로는 당신의 도박실력이 당대제일(當代第一)이라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좌구태야는 그가 돌연히 이런 걸 물어올 줄은 몰랐는지라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노부는 아직 도박계에 몸을 담은 이후로 단 한번도 남에게 패한 적이 없다." "그것 참 대단하구료. 나도 마침 도박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성미요. 우리같이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서로 만났으니 어찌 그냥 지나갈 수 있겠소." "네 놈의 말뜻은 무엇이냐?" 엽단풍은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한 판 벌입시다." 좌구태야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설마 자신에게 도박을 하자고 덤비는 놈이 아직도 존재할 줄이야... 좌구태야는 대체 이 자식의 머리속이 어떻게 되었는지 들여다 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좋다. 무엇으로 겨룰테냐?" 다른건 몰라도 엽단풍의 배포만큼은 가히 천하제일이라 할 만 했다. "그야물론 나이가 많은 당신이 잘하는걸로 고르시오. 나는 아무거나 다 괜찮소." 좌구태야는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네 놈은 정말 하늘높은줄 모르는구나. 노부는 천하에 산재해 있는 아흔 아홉가지의 도박에 모두 정통하다. 그러니 네 놈이 자신있는 것으로 골라라."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당신이 정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고르겠소. 모름지기 도박중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은 단번에 승부가 결정되는 주사위노름이오." "그럼 네 놈은 주사위로 승부를 겨루겠단 말이냐?" "그렇소." 좌구태야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주사위노름은 도박중에서도 그가 가장 자신있어 하는 것이었다. "네가 어제 노부의 도박장에서 놀라운 주사위솜씨를 보였다는 말은 들었다. 어디 오늘 그 잘난 솜씨를 한 번 구경하자꾸나." 이어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쳤다. "네째야." 그의 뒤에 시립해 있던 일곱 명의 청년들 중에서


이목구비가 가장 수려한 청년이 즉시 달려와 그의 앞에 부복했다. "예. 사부님." "도구는 준비해 왔느냐?" "예." 청년은 공손하게 대답을 하더니 품속에서 세 개의 주사위와 주사위를 던지는 그릇을 꺼내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과연 도왕의 문하(門下)들은 도박기구를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구나.' 좌구태야는 주사위와 그릇을 받아든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그만 가봐라." 청년은 다시 정중하게 절을 하며 그의 뒤에 가서 시립해 있었다. 좌구태야는 주사위와 그릇을 엽단풍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북경(北京)의 보석재(寶石齋)에서 특별히 주문한 물건들로 조금도 함량이 미달되거나 수작을 부리지 않은 것이다. 직접 확인해 보아라." 엽단풍은 좌구태야가 내민 주사위는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남들과 똑같이 평범한 주사위노름을 할 수가 있겠소?" 좌구태야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엽단풍은 빙그레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마침 천석평이란 이름답게 크고 아름다운 바위들이 즐비하지 않소?" "그래서?" "사방에 이렇게 주사위들이 널려 있는데 새삼스럽게 그런 작고 볼품없는 주사위를 굴릴 기분이 들겠소?" 그제서야 좌구태야는 그의 의중을 알아차린 듯 두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너는 주변에 있는 이 바위들을 주사위대용으로 사용하자는 말이냐?" "바로 그렇소. 당신도 아주 먹통은 아니구료." 좌구태야의 안색이 냉엄하게 굳어졌다. 그는 한동안 무서운 안광으로 엽단풍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 놈 말대로 하자." 엽단풍은 그가 승락할 줄 알았다는 듯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만일 내가 진다면 당신에게 나의 구대손(九代孫) 할아버지때부터의 족보(族譜)를 알려줌은 물론 내가 익힌 모든 무공에 대해서 소상히 아뢰겠소. 그런데 당신은 무얼 걸겠소?" 좌구태야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진다면 목을 내놓겠다." 엽단풍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그렇게 잘생기지도 않았는데 잘려진 머리통을 어디다 쓰겠소?" "그럼 네 놈은 무얼 원하는거냐?" "당신이 지면 그냥 내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해 주기만 하면 되오." 좌구태야는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렇게 해서 천하의 미치광이 엽단풍은 천하의 도박왕 좌구태야와 주사위노름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제 9 장 기이한 내기 1. 엽단풍과 좌구태야는 천석평의 암석군(岩石群)앞에 나란히 섰다. "방법은 아주 간단하오. 저 바위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놈을 골라 던지는 거요. 던지는 동안에 바위표면에 더 많은 점수를 새기는 사람이 이기는 거요." 엽단풍의 말과는 달리 그들이 하는 내기는 절대로 간단하지 않았다. 천석평의 암석군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수 천근은 족히 나갈 거석(巨石)들이었다. 그 큰 바위를 드는 것도 힘들텐데 그것을 던지면서 그 와중에 돌의 표면에 주사위처럼 점을 새겨놓는다는 것은 보통 고수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하나 좌구태야는 이 내기방법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 방법은 쓸데없는 잔재주가 통하지 않는 진정한 실력의 대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대결이라면 자신이 질리가 없었다. 특히 그가 가장 자신있어 하는 무공은 지공(指功)이었다. 지법에 관한한 그는 천하의 누구와 겨루어도 두렵지가 않았다. 그러니만큼 바위에 주사위처럼 구멍을 뚫는 내기같은 것은 더더욱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다. "네 놈이 먼저 하겠느냐?" 좌구태야가 엽단풍을 돌아보자 엽단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이로 보나 체격으로 보나 내가 어찌 좌노인보다 먼저 손을 쓸 수 있겠소? 좌노인께서 먼저 하시구려." 좌구태야앞에서 그를 좌노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좌구태야는 불 같은 노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이제 곧 이 놈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다는 일념에 화를 꾹 참고 성큼 앞으로 나섰다. "좋다. 노부가 먼저 손을 쓰겠다." 좌구태야는 사방을 둘러보다 하나의 바위앞으로 다가갔다. 그 바위는 크기가 거의 일 장에 달하는 것으로 들기는 커녕 장정 몇 사람이 팔을 벌려도 안을까 말까했다. 중인들은 좌구태야가 그 엄청난 바위를 어떻게 들 수 있을지 궁금하여 침을 삼킨 채 장내를 주시하고 있었다. 좌구태야는 두 눈에 신광을 번뜩인 채 눈앞의 거석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양 손을 바위에 갖다 대었다. 그의 주름진 손이 바위에 닿는 순간, "차압!" 한 줄기 벼락같은 호통과 함께 좌구태야는 힘껏 양 손을 들어올렸다. 순간, 쿠르릉...! 굉음과 함께 그토록 엄청난 크기의 거석이 그의 양손에 그대로 딸려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와! 대...대단하다!" 중인들 틈에서 우뢰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좌구태야는 조금도 힘들어하는 표정을 짓지 않고 그 거대한 바위를 머리위까지 들어올리더니 냅다 집어 던졌다. 동시에 그의 열 손가락이 눈부신 속도로 튕겨졌다. 파파파팍! 돌먼지가 사방을 날아다녔다. 쿵! 그와 함께 바위가 굉음을 내면서 지면에 떨어졌다. 그 충격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주위가 한동안 마구 뒤흔들릴 정도였다. 중인들은 허겁지겁 바위를 바라보았다. "아!" 사람들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탄성이 흘러나왔다. 거대한 바위의 표면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손자국이 나있는 것이 아닌가? 손자국의 깊이는 일정해서 정확하게 두 치가량 되었다. 두 치나 되는 자국을 바위에 새기려면 아무리 절정고수라 해도 젖먹던 힘까지 모두 내쏟아야 한다. 그런데 바위가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 두 치나 되는 자국을 수십, 수 백개나 바위에 새겨 놓았으니 이것을 어찌 인간의 힘이라고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바위앞면에 새겨진 손자국의 숫자는 물경 백 팔십개에 달했다.


결국 좌구태야는 한 번에 백 팔십 점을 던져낸 것이다. 좌구태야는 언제 손을 썼느냐는 듯 태연한 안색으로 엽단풍을 돌아보았다. "노부는 이 정도밖에 하지 못했다. 이제는 네 차례다." 엽단풍은 좌구태야의 가공할 실력을 보고 기가 죽었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나왔다. 중인들은 이번에야말로 엽단풍이 패배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천하무림에서 단 일수만에 백 팔십 지를 갈겨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좌구태야뿐일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좌구태야의 지법이야말로 무림사상 최강의 지법 중 하나로 불리우는 병풍구첩지(屛風九疊指)였던 것이다. 한 번 지법을 펼치면 마치 구첩짜리 병풍을 치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좌구태야는 냉엄한 눈으로 엽단풍이 바위를 고르느라 두리번거리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난화지가 비록 천하에서 가장 변화무쌍한 지법이라고 하지만 그 변화는 모두 합쳐 칠십이 개에 불과하다. 네가 무슨 수를 쓰던 이번에는 노부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엽단풍은 한동안 주위를 둘러보다가 어슬렁어슬렁 하나의 바위 앞에 다가갔다. 중인들은 그 바위를 보자 모두 마른 침을 삼켰다. 그 바위는 수많은 천석평의 암석군들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것으로 크기가 무려 삼 장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제아무리 천하의 장사(壯士)라 해도 그것을 들기는 커녕 넘어뜨릴 수나 있을지 의문일 정도였다. 도데체 그런 엄청난 바위를 무슨 수로 들어올린단 말인가? 중인들이 의혹에 찬 눈으로 엽단풍을 바라보고 있을 때 엽단풍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내 수준에는 이게 제일 적당한 것 같군." 중인들은 그가 집어올린 물건을 바라보다가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그러면 그렇지." "난 또 정말 저 어마어마한 바위를 들어올리겠다는 것인 줄 알고 깜짝 놀랐지 뭔가." 좌구태야조차도 조금 긴장해 있다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엽단풍이 허리를 굽혀 집어든 것은 그 거대한 바위의 옆에 떨어져 있는 자그마한 돌멩이였던 것이다. 그 돌멩이는 어른의 주먹정도 되었는데 아무데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차돌이었다.


중인들은 이제 승부는 결정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돌멩이에 제아무리 많은 손자국을 새긴다고 해도 잘 해야 칠팔십 개에 불과할 것이다. 조금의 틈도 남기지 않고 모두 손가락자국으로 메운다고 해도 백 개를 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마 이 자는 자포자기한 심정에서 이처럼 작은 돌멩이를 고른 것이리라. 이것이 좌구태야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생각이었다. 엽단풍은 돌멩이를 손에 들고 몇 번 흔들어 보다가 허공으로 냅다 던졌다. 휘익! 돌멩이가 공중에 솟구칠 동안에도 그는 손을 쓸 생각도 없이 멀거니 돌멩이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돌멩이가 거의 바닥에 닿을 때까지도 그는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중인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할 순간, 돌연 엽단풍은 번개같이 일지(一指)를 날렸다. 콰아아악! 무언가 사람의 마음을 후벼파는 듯한 괴이한 파공음이 들리더니 빛살 같은 강기가 거의 바닥에 닿기 직전인 돌멩이를 강타했다. 강기에 격중된 돌멩이는 용케도 부서지지 않고 뒤로 날아갔다. 그런데 돌멩이가 날아간 곳은 공교롭게도 좌구태야가 던졌던 거대한 바위쪽이었다. 꽝! 돌멩이가 바위에 닿는 순간 엄청난 폭음이 터졌다. 그와 동시에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그 조그만한 돌멩이에 격중당한 거대한 바위가 그대로 박살이 나버리는 것이 아닌가? 중인들은 모두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찌 주먹만한 돌멩이가 일 장이 넘는 거대한 바위를 부서버릴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도데체 엽단풍이 갈겨낸 강기가 무엇이길래 조그마한 돌멩이에 실린 힘이 거대한 바위를 박살낼 정도로 가공스럽단 말인가? 좌구태야의 안색 또한 시커멓게 변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엽단풍은 대수롭지 않은 듯 히죽 웃었다. "무슨 짓은...이것으로 내가 이겼다는 말이지." 좌구태야는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급히 바위가 부서진 곳을 돌아보았다. 과연...부서진 바위조각 사이에 엽단풍이 던져낸 돌멩이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돌멩이 위에는 조그마한 손자국 하나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결국 엽단풍이 던져낸 것은 한 점에 불과했다. 하지만 좌구태야가 던진 바위는 산산이 부서졌기 때문에 좌구태야는 한 점도 얻지 못하게 되고 만


것이다. 좌구태야의 얼굴이 여러 차례 변했다. "이건...공평하지 못하다." 엽단풍은 피식 웃었다. "공평하지 못하다니...당신도 한 번 던지고 나도 한 번 던져서 내가 간신히 한 점을 이겼는데 어떻게 공평하지 못하다는 말이오?" "하지만..." 좌구태야는 무어라 입을 열려다 입을 다물었다. 비록 엽단풍이 술수(術數)를 부려 승리를 거두었다 해도 그의 공력이 자신의 예상보다 뛰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자그마한 돌멩이에 경력을 실어담아 천근 거석을 박살낸 것도 그러려니와 그러면서도 자신이 던진 돌멩이는 조금도 상하지 않도록 한 것은 실로 그로서도 선뜻 해낸다고 장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결국 지모(智謀)로 보나 내공력으로 보나 엽단풍이 자신보다 한 수 앞선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좌구태야는 마침내 탄식을 토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알았다. 노부가 패했다." 그는 강호의 거두답게 솔직히 자신의 패배를 자인(自認)했다. 실로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수십 년 동안 수많은 도박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던 신화적인 인물, 도왕 좌구태야가 마침내 내기에서 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도 강호에 나타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정체불명의 미치광이에게 말이다. 엽단풍은 그가 호쾌함이 마음에 드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당신은 시원시원해서 좋소. 나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오래된 나무는 향기도 그윽하다는 말의 뜻을 알겠구려." 좌구태야는 그의 칭찬도 별로 달갑지 않은 듯 여전히 표정이 무거웠다. "물어볼 말이 무엇이냐? 노부가 아는 것이면 대답해 주겠다."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별 거 아니오. 당신이 반드시 알고 있는 것이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소." 이어 그는 전음(傳音)으로 물었다. "고월헌(古月軒)은 지금 어디에 있소?" 순간, "뭐...뭐라고?" 좌구태야는 그야말로 대경실색하여 안색이 창백해졌다. "네...네가 어찌 그를 아느냐?"


그의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옆에서 이들을 보고 있던 대붕왕과 신부귀의 얼굴에 의아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은 좌구태야가 이처럼 놀라는 것을 좀처럼 본 일이 없었다. 대체 엽단풍이 무엇을 물어보았길래 좌구태야가 이토록 기절초풍을 한단 말인가? 그들은 급히 엽단풍을 돌아보았으나 엽단풍의 얼굴에는 조금도 표정의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시오. 그는 지금 어디 있소?" 좌구태야는 식은 땀을 흘리며 망설였다. "그...그는..." 엽단풍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스스로 내뱉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 셈이오?" 좌구태야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성난 눈으로 엽단풍을 노려보다가 다시 탄식을 토해냈다. 그것은 전혀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노부가 오늘 평생 처음으로 못할 짓을 하는구나..." 그는 마음을 작정했는지 다시 처음의 냉정한 모습을 되찾았다. "네가 그의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만 만일 그의 행방을 남에게 발설한다면 노부가 지옥끝이라도 쫓아가 네 놈을 갈가리 찢어 죽이고야 말겠다." "걱정마시오. 그는 지금 어디 있소?" 좌구태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전음성으로 그에게 무어라고 말했다. 엽단풍은 눈을 빛낸 채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당신은 과연 약속을 지키는 대장부요." 좌구태야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허튼 소리는 하지 말고 노부의 말을 명심해라." 갑자기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그렇게 불안하면 당신도 그곳으로 가보면 될 거 아니오?" 좌구태야는 흠칫하는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네 놈은 그를 만나러 가겠단 말이냐?" 엽단풍은 껄껄 웃었다. "하하...그럼 내가 할 일 없어 그의 행방을 알려고 하겠소? 아뭏든 고맙소." 그의 거대한 신형이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다음에 다시 봅시다." 음성이 아직 채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그의 몸은 어느 사이엔가 중인들의 머리를 넘어 저 멀리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가공할 신법이었다.


"단봉무영신법이 절정(絶頂)에 달했군." 좌구태야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때 그의 뒤에서 침중한 음성이 들려왔다. "당년의 그녀보다 더욱 빠른 것 같군 그래." 좌구태야는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 음성이 대붕왕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대붕왕은 그의 옆으로 다가와서 신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 자가 자네에게 행방을 물은 사람은 누구인가? 혹시 고(古)..." 좌구태야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바로 그요." 대붕왕의 항상 냉정을 잃지 않던 눈이 가볍게 흔들렸다. "역시 그렇군. 자네가 그토록 당황하기에 혹시나 했는데..." 신부귀가 옆에서 있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그 자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그를 알고 있단 말이오?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당금 무림에서 우리 세 사람뿐인 줄 알고 있는데..." 대붕왕이 침착함을 되찾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우리 외에도 또 있지." 신부귀가 놀라서 급히 물었다. "우리 외에 누가 있단 말이오?" 하나 그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무언가 생각이 떠오른 듯 안색이 대변했다. 좌구태야 또한 얼굴이 핼쓱하게 변했다. "혹시 그들이...?" "그러면 그 자는 바로 그들이 보낸 자란 말이오?" 두 사람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음성이 쏟아졌다. 대붕왕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건 알 수 없네. 하지만 우리 외에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그들뿐이니 아니라고 속단할 수도 없지." 신부귀는 여러 차례 안색이 변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일 그 자가 그들이 보낸 인물이라면 왜 우리를 가만히 두었겠소?" "낸들 그걸 알겠나? 어쩌면 그 자는 그들과는 전혀 별개의 인물일지도 모르네. 보다 정확한 것을 알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네." 좌구태야와 신부귀는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그게 무엇이오?" 대붕왕의 눈이 유성처럼 반짝거렸다. 그는 잠시 침음하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맺었다. "그 자가 그를 찾아가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를 찾아가는 것일세."


2. 무더운 오후였다. 담중업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훔치며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했다. "정말 더운 날씨로군." 저 멀리 하나의 사당(祠堂)이 보이자 담중업의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그 사당은 관도(官道)에서 제법 많이 떨어진 외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거미줄이 쳐 있고 담벼락의 채색도 바랜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끼이익! 담중업은 사당의 금시라도 무너질 듯한 낡은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당안은 잡초가 무성해서 더욱 황량해 보였다. 하나 담중업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잡초를 헤치고 내당(內堂)으로 들어갔다. 내당 안은 그야말로 폐허처럼 쓸쓸했는데 그나마 중앙에 나무으로 만든 듯한 초라한 불상(佛像) 하나가 동그마니 놓여 있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담중업은 내당을 가로질러 불상 앞으로 오더니 돌연 넙죽 엎드리며 불상에게 절을 하는 것이었다. "다녀왔습니다." 불상에게 절을 하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절을 하면서 말을 하다니 몹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데 더욱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중앙에 앉아 있던 불상이 입을 벌려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을 보았느냐?" 그 음성은 마치 나무를 긁는 듯 거칠고 탁하기 그지 없어 왠지 듣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불상은 나무로 만든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하나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을 만큼 피부나 표정이 나무로 깎아 놓은 불상 같았다. 세상에 이렇게 나무와 흡사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은 다시 없을 것이다. 담중업은 불상의 음성을 듣자 더욱 정중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보았습니다." "세 놈 모두 있더냐?" "그렇습니다." 불상은 계속 물었다. "그들은 너를 알아보지 못했느냐?"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담중업은 자신이 직접 본 일을 소상하게 이야기했다. 불상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어느 한 부분에 이르러 갑자기 번쩍하고 안광을 빛냈다. "잠깐만. 분명히 단봉무영신법이라고 했느냐?" 담중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불상의 두 눈에서 실로 횃불보다 찬란한 광망이 이글거렸다. "그럴리가 없는데...분명히 엽단풍이란 놈이 단봉무영신법을 펼쳤느냐?" "좌구태야가 자신의 입으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들도 몹시 놀라는 것 같았습니다." "으음...그럼 사실인 게로군." 불상은 나직히 침음을 하며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담중업은 불상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입을 다물고 바닥을 내려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자 불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느냐?" 담중업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불상은 그의 말이 끝날 때까지 두 번 다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제일 마지막에 엽단풍과 좌구태야가 전음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는 말을 듣자 한 차례 눈을 번뜩였을 뿐 끝까지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담중업은 이야기를 마치자 다시 입을 다물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잠시후 불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들이 혹시 고월헌이란 사람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더냐?" 담중업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름은 듣지 못했습니다." "엽단풍이란 놈이 좌빙심(左氷心)에게 물은 것이 혹시 그 자의 행방이 아니었느냐?" "그때 그들은 전음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저는 듣지 못했습니다." 불상의 음성은 다시 처음과 마찬가지로 무감각해졌다. "만일 엽단풍이란 놈이 좌가 놈에게 물은 것이 그 자의 행방이라면 그 놈들은 엽단풍이란 놈을 제지하기 위해서라도 그 자에게 갈 것이다." "저도 그럴 것에 대비해서 그들의 뒤를 추적하도록 지시를 해놓고 왔습니다." "누구를 시켰느냐?" "십이마응(十二魔鷹)입니다." 불상은 거의 느낄 수 없을 만큼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십이마응이라면 안심할 수 있지."


"그들에게 그 자들의 뒤를 밟되 절대로 그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당부해 두었습니다." "좌빙심과 신구음(申九音)은 무공은 비록 고강하지만 지략은 그리 뛰어나지 못하다. 하지만 양만리(楊萬里)는 꾀가 많고 눈치가 빠르니 조심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이번에 본불(本佛)이 다시 무림에 나온 것은 그 놈들의 행방을 찾아 과거의 일을 매듭지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 세 놈을 없애 보았자 고월헌을 죽이지 않으면 말짱 헛일이다." "......" "다행인지 불행인지 엽단풍이란 놈이 나타나 설치고 다니는 바람에 어쩌면 고월헌의 행방을 의외로 쉽게 알게될지도 모른다." 담중업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때 불상이 다시 그를 향해 물었다. "그리고 너는 그 계집의 행방을 알아냈느냐?" 불상은 정확히 누구를 말하는 지 지칭하지 않았지만 담중업은 짐작한 듯 즉시 입을 열었다.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강소성으로 온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 일은 누구에게 맡겼느냐?" "흑백상문신(黑白喪門神)입니다." 불상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어찌보면 말만 하는 것이 다를 뿐 일반 나무로 만든 불상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요인도(妖人島)의 일이 잘 진행되려는 찰나에 그 계집이 동해(東海)를 빠져나오는 바람에 일이 꼬이게 되었다. 하루속히 그 계집을 잡아 요인도의 일을 마무리지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고월헌의 행방이 알려지면 다시 본불에게 연락을 하거라." 그 말을 끝으로 불상은 눈을 감았다. 담중업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채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그런 다음 몸을 일으켜 조심스럽게 사당을 벗어났다. 그의 몸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도 불상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담중업이 떠난 사당에는 정적(靜寂)만이 감돌고 있었다. 휘잉! 한 차례 더운 바람이 불어와 불상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불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정말 하나의 완벽한 목각불상(木刻佛像)이었다.


제 10 장 동해인요(東海人妖) 1. 그것은 정말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엽단풍은 소주에서 금릉(金陵)으로 향하는 관도 위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다 보았으나 관도 위는 따가운 햇살만 내리쬐고 있을 뿐 아무도 따라오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멀리 지나가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엽단풍은 물론 자신의 청력(聽力)과 반사신경에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누가 자신을 따라온다고 느꼈으면 그건 분명히 누가 따라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사람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으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일이 여러 번 계속되었다. 지금도 엽단풍은 분명 누군가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그곳으로 번개같이 몸을 돌렸다. 허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텅빈 관도와 그 주변의 황량한 벌판 뿐이었다. "이거 점점 기분이 이상해지는군." 엽단풍은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때 갑자기 그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엽단풍은 비호보다도 빨리 그곳을 돌아보았다. 역시 아무 것도 없었다. 이번에 그는 분명히 여인의 웃음소리 같은 것을 들었는데 막상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자 그야말로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나 귀신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엽단풍은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가 돌연 관도에서 멀지 않은 숲속으로 달려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던 방향을 바꾸어 반대쪽으로 달려나갔다. 얼마쯤 가다가 다시 옆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러기를 몇 차례 했을까. 엽단풍은 문득 몸을 멈추더니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것 봐라. 정말 희한하구나." 그는 바닥의 어느 한 부분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누런 황톳길이었는데 그 길 한 가운데 한 방울씩 물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주위에는


시냇물조차 없는데 대체 어디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단 말인가? 엽단풍은 조금씩 그 물이 떨어지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랬더니 어랍쇼? 떨어지던 물방울도 저만큼 멀리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이거 정말 재미있군. 드디어 산신령께서 내 정성을 알아보시고 정령(精靈) 하나를 보내셨구나." 다시 희미한 여인의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엽단풍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다시 껄껄 웃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셋을 셀 동안 나타나지 않으면 그 보기 싫은 은형막(隱形幕)은 물론이고 입고 있는 옷까지 홀라당 벗겨 버리겠다. 하나...!" 하나 그가 미처 숫자를 다 세기도 전에 어디선가 뾰쪽한 음성이 들려왔다. "셋은 너무 짧아요. 최소한 열 까지는 세어야 해요." 그것은 듣기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나올 것 같은 짤랑짤랑한 소녀의 교성(嬌聲)이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란 말인가? 엽단풍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숫자를 세었다. "둘..." 그러자 뾰쪽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아이 참! 그렇게 빨리 은형막을 벗을 수 없단 말이에요. 잠깐 기다려요." 그가 금세라도 셋을 셀 듯 하자 음성에 다급한 기색이 가득했다. 엽단풍은 빙그레 웃으며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마지막이다. 세..." 그가 채 셋이란 단어를 내뱉기도 전에 그의 앞으로 불쑥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것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너무도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그의 주위 백 여장 이내에는 사람은 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도 없었거늘 순식간에 인영이 나타나다니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하나 엽단풍은 이미 그 인영이 나타날 줄을 알고 있었던 듯 조금도 놀라지 않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 인영을 바라보았다. 그 인영은 한 눈에 보기에도 귀염성이 똑똑 떨어지는 영악하게 생긴 소녀였다. 나이는 십 육칠세 쯤 되었을까? 커다란 두 눈에는 영기(靈氣)가 발랄했고, 코는 오똑했으며 입술은 도톰하니 소녀답지 않게 요염했다. 피부는 백설처럼 희고 고왔는데 자그마한 키에는 착


달라붙는 새빨간 홍의를 입고 있었다. 붉은 홍의와 깜찍하고 새침한 얼굴 표정이 너무도 잘 어울려 보였다. 그야말로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모습의 소녀였다. 소녀의 오른손에는 비올 때 입는 우비 같은 모양의 투명한 천이 들려져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은형막이었다. 은형막은 원래 동영(東瀛)의 인자(忍者)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뒤집어 쓰면 밝은 대낮에도 자신의 모습을 감쪽같이 숨길 수 있는 기이한 물건이었다. 홍의소녀는 황급히 은형막을 벗느라고 힘들었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엽단풍을 노려보며 쌀쌀맞은 음성으로 말했다. "흥. 무슨 사람이 그렇게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거예요? 당신을 뒤쫓다가 하마터면 지쳐서 쓰러질 뻔 했잖아요." 그녀는 잔뜩 성난 표정을 지었는데 무섭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앙증맞고 귀여워 보였다. 조금전 엽단풍은 주변에 누군가가 있음을 직감하고 일부러 정신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녀는 그의 뒤를 쫓다가 너무 힘들어서 비오듯 땀을 흘렸고 그 바람에 행적이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엽단풍은 피식 웃었다. "그러길래 누가 너보고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라고 했느냐?" "흥. 남이야 따라다니던 말던 당신이 무슨 상관이죠?" 엽단풍은 어이가 없는지 허허거리며 웃었다. "내가 왜 상관이 없겠느냐? 네가 내 뒤를 따라다님으로서 내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피해를 입었는지 아느냐?" 그녀는 아직도 성이 안풀렸는지 뾰로통한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당신 같은 미치광이가 피해입을 정신이나 있어요?" 다른 사람이 이 말을 했으면 필시 화를 냈을텐데 이상하게도 엽단풍은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껄껄 웃음만 나왔다. "하하...나 같은 미치광이라고 정신이 없겠느냐? 그건 그렇고 너는 대체 누구길래 내 뒤를 따라다니는거냐?" 홍의소녀는 자신의 가느다란 허리에 두 팔을 척 얹은 채로 짐짓 오만하게 말했다. "이 아가씨로 말할 것 같으면 천하가 곧 내 집이고 발길 닿는 곳이 바로 목적지인 사람이에요. 그러니 내가 이 길을 간다한들 당신은 조금도 신경 쓸 게 없어요." "난 그런 건 신경쓰지 않는다. 그저 네 이름이 무어냐고 물은거다."


"이 아가씨의 이름은..." 홍의소녀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빨간 혀를 낼름거렸다. "안 가르쳐 줄래요. 내가 왜 당신에게 이름을 가르쳐 줘야 하지요?" 엽단풍은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 당장 끌어안고 볼에 입이라도 맞춰주고 싶었다. "하하...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 그런데 너는 언제까지 내 뒤를 따라다닐 셈이냐?" "그거야 내 맘이지요." "허허참. 그러면 너는 그 마음이 변하기 전에는 내가 어딜 가든 따라올 생각이냐?" 홍의소녀는 얄밉도록 깜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엽단풍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그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네 마음을 변하게 할 방법은 없느냐?" 홍의소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갑자기 떼구르르 구르며 영롱한 빛이 반짝거렸다. "아주 없는 건 아니에요." 엽단풍은 호기심이 나서 물었다. "어떻게 하면 네 마음이 변하겠느냐?" 홍의소녀는 새빨간 혀로 입술을 살짝 축인 다음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그 좌(左)구태야인지 우(右)구태야인지 하는 노인네하고 무슨 말을 소근거렸는지 말한다면 당신 뒤를 따라다니는 것을 그만 둘 수도 있지요." 그제서야 엽단풍은 이 깜찍한 아가씨의 의도를 짐작했다. 보아하니 그녀는 천석평에서 부터 엽단풍을 주시하고 있다가 그가 좌구태야와 전음을 주고 받는 것을 보고 그 내용이 궁금하여 줄곧 그의 뒤를 따라왔던 것이다. "이제보니 너는 천석평에서부터 내 뒤를 따라왔구나." "그래요. 그런데도 당신은 멍청하게 아무 것도 모르고 혼자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가고 있더군요." "하하...나는 항상 혼자있을 때면 콧노래를 부른다. 그건 내 오래된 습성이니 어쩔 수 없지." 홍의소녀는 갑자기 고운 아미를 치켜뜨며 날카로운 음성으로 소리쳤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말을 할 건지 안 할 건지 밝히세요." 엽단풍은 계속 빙글빙글 웃었다. "만약 말을 한다면 어쩌겠느냐?" "그럼 나는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이대로 조용히 사라져 주겠어요." "만일 내가 말을 하지 않겠다면?" 홍의소녀의 낮빛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흥. 그렇다면 당신이 질려서 제발 살려달라고 빌 때까지 당신을 계속 따라다니며 못살게 굴 거예요." "하지만 나는 너 같은 꼬마아가씨가 따라다닌다고 해서 조금도 불편해 하거나 하지 않는다." 홍의소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며 성난 눈빛이 흘러나왔다. "꼬마아가씨라니...빨리 그 말을 취소하지 못해요?" 엽단풍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네가 꼬마라서 꼬마아가씨라고 부르는건데 뭐가 잘못되었느냐?" 홍의소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씩씩거렸다. "나는 꼬마가 아니란 말이에요. 어엿한 처녀보고 꼬마라니 그런 실례가 어디 있어요?" 홍의소녀가 화를 낼수록 엽단풍은 느긋한 표정이었다. "허허... 그런 걸 억지라고 하는거다. 너는 누가 뭐래도 꼬마아가씨다." 홍의소녀의 얼굴이 새빨개지며 눈빛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다시 한 번 나를 꼬마라고 부르면 가만두지 않을 테예요." "너는 나보다 힘도 약하고 무공도 세지 않은데 나를 가만두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꼬마아가씨?" 홍의소녀는 그를 노려보며 발을 동동 구르더니 갑자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흑흑..." 처음에는 나직하게 흐느끼더니 울음소리가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아예 목을 놓아 큰 소리로 우는 것이다. "엉엉...할아버지...엉엉..." 천하의 엽단풍도 이때만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그가 놀렸기로서니 다 큰 여자아이가 백주에 대로상에서 울음을 터뜨릴 줄이야... 그것도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발버둥을 치면서 대성통곡을 하니 엽단풍으로서도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이봐...내가 잘못했다. 그러니 그만 울음을 그쳐라." 엽단풍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어깨를 두드리며 그녀를 달랬다. 하나 그녀는 울음을 그치기는 커녕 더욱 큰 소리로 우는 것이었다. 엽단풍은 그녀를 달래기에 여념이 없었다. "내가 잘못했다니까. 너는 꼬마가 아니라 아가씨다. 앞으로 너를 꼬마라고 부르는 녀석이 있으면 내가 쫓아가서 다리몽뎅이를 분질러 버릴테다." 엽단풍이 반 사정, 반 달래며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바로 그때, 찰싹! 돌연 그의 손에 어깨를 내맡긴 채로 울던 홍의소녀가 번개같이 그의 뺨을 떼리고는 저만큼 앞으로 달려나가는 것이 아닌가? 엽단풍은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해져서 뺨을 맞은 아픔도 잊고 멀거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언제 울었냐 싶게 얼굴에 생글생글 미소를 띤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호...이제 내가 당신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을 알겠죠?" 그녀의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자국이 있기는 했으나 활짝 웃는 얼굴 표정은 조금도 슬프거나 화난 표정이 아니었다. 엽단풍은 화를 내기는 커녕 한참동안 그녀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울다가 웃을 수 있느냐? 정말 신기하구나." 그녀는 혀를 낼름 거렸다. "이게 뭐가 대단하다고 그래요? 나는 울고 싶으면 언제라도 울 수 있고 웃고 싶으면 언제라도 웃을 수 있어요." 엽단풍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나는 아무리 쥐어짜려해도 눈물 한 방울 안나오는데 그것 참..." 홍의소녀는 허리를 붙잡고 웃었다. "호호...그건 당신이 너무 목석(木石)이라서 그런 거에요. 나는 하루에도 수 백번씩 울고 웃을 수 있어요." 엽단풍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너는 정말 작은 여우로구나." 홍의소녀가 웃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어떻게 내 별명을 알고 있죠?" 엽단풍은 피식 웃었다. "네 별명이 작은 여우냐?" "할아버지만 나를 그렇게 불러요. 다른 사람들이 만약 그렇게 불렀다가는 ...흥...!" 그녀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엽단풍은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너를 무어라고 부르냐?" 홍의소녀는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야 남들은 나를 인요(人妖)라고 부르죠." 그 말에 엽단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요? 그렇다면 너는 혹시 동해(東海)에서 오지 않았느냐?" 홍의소녀는 손뼉을 탁 쳤다. "맞아요. 당신도 내 이름을 들은 적이 있나요?" 엽단풍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네가 바로 사대미인중의 동요(東妖)라는 동해인요(東海人妖) 영호해상(令狐解孀)이로구나." 홍의소녀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내가 바로 영호해상이에요. 이제보니 당신의 안목도 대단하군요." 엽단풍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동해인요 영호해상은 강호무림에서 사대미인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름이었으니 엽단풍이 아니라 무림인이라면 누구라도 그 이름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니 무슨 대단한 안목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홍의소녀는 자신이 그렇게 유명한 존재인 줄을 모르고 그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만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태어난 이후로 줄곧 동해에서만 자라서 강호에는 이번에 처음 나왔던 것이다. 동해인요라는 이름은 그녀의 할아버지가 무림에 퍼뜨린 것으로 그녀는 실제로 자신의 명성이 강호무림에 자자하게 퍼져 있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흐흐...영호해상! 쇠신발이 닳도록 찾아다녔는데 이곳에 있었구나." 어디선가 괴기어린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2. 영호해상은 흠칫 놀라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녀에게서 삼 장 떨어진 곳에 두 명의 괴인(怪人)들이 우뚝 서서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흑의와 백의를 입은 인물들이었다. 우측의 인물은 전신에 치렁치렁한 흑포를 걸치고 이마에는 흑색 두건을 매었다. 입고 있는 옷도 물론 흑의고 신발마저 검은 색이어서 그야말로 흑의정령같았다. 그와는 반대로 좌측의 인물은 백발에 백포, 백건을 매었으며 신발마저 새하얀 것이어서 눈속에서 튀어나온 설인(雪人)을 연상시켰다. 흑과 백의 극히 대조되는 두 괴인을 본 영호해상의 낮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흐...흑백상문신!" 흑포괴인이 음산하게 웃으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흐흐...우리의 손을 피해 한 달동안 잘도 도망다녔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눈에 발각되었으니


순순히 우리를 따라 오거라." 흑포괴인의 신법은 무척 특이했다. 허리 아래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오직 두 팔을 움직여서만 미끄러지듯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 모양은 전신이 칠흑처럼 검은 색 일색인 그 자의 모습과 어울려 한층 더 괴이하고 음산하게 느껴졌다. 흑포괴인의 신법은 유령미종(幽靈迷踪)이라는 마도(魔道)의 최상승신법이었다. 이것은 익히기가 극히 어려워 당금 강호에서는 아무도 익힌 사람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오늘 흑포괴인에 의해 시전되었던 것이다. 흑포괴인이 미끄러지듯 다가오자 영호해상의 눈가에 두려운 빛이 가득 떠올랐다. "가...가까이 오지 마라!" "흐흐...반항해 봐야 소용없다. 너를 구해줄 사람은 천하에 아무도 없다." 흑포괴인은 음충맞게 웃으며 갈쿠리같은 손을 내밀어 영호해상의 맥문을 움켜쥐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돌연 누군가가 흑포괴인과 영호해상의 가운데에 불쑥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누가 그러던가? 구해줄 사람이 없다고?" 흑포괴인은 흠칫 놀라 내밀던 손을 거두며 몸을 멈추었다. 그 동작은 그야말로 유연하여 절로 탄성이 일게 할 정도였다. "네 놈은 누구냐?" 그의 앞을 가로 막고 선 인물은 물론 엽단풍이었다. 엽단풍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공손하게 물어봤으면 가르켜 주려고 했는데 물어보는 태도가 기분나빠 못 가르켜 주겠다." 영호해상은 그가 나타나 자신을 구원해 주자 놀란 가슴을 쓸어안고 있다가 이 말을 듣자 킥킥거리며 웃었다. 나이어린 소녀답게 감정의 변화가 무쌍한 모양이었다. 흑포괴인의 안색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노부가 감히 누구인 줄 알고..." 그는 기껏해야 삼십 대 정도밖에 안되어 보였는데 스스로를 노부라고 칭했다. 하나 사실 그의 나이는 거의 칠십 세에 육박하고 있었다. 단지 공력이 너무도 심후하여 훨씬 더 젊게 보이는 것이다. 엽단풍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기껏해야 흑상문신(黑喪門神) 정도밖에 더 되겠소?" 흑포괴인의 몸이 움찔거렸다. "네 놈이 어떻게 노부를 아느냐?"


"나는 저 자가 백상문신(白喪門神)이라는 것도 알고 있소. 그 뿐인 줄 아시오?" 흑포괴인은 엽단풍이 자신과 동료의 이름을 정확하게 지적하자 흠칫 놀라서 그의 다음말을 주시했다. 엽단풍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들이 세상에 보기드문 흉신악살(兇神惡煞)들이며 이제 머지않아 무덤속으로 사라질 존재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소." 그 말에 그의 뒤에 숨어 있던 영호해상이 참지 못하고 까르르 웃고 말았다. 흑포괴인과 백포괴인의 안색이 휴지장처럼 구겨졌다. 그들은 칠십 평생에 이와같은 모욕은 받아본 일이 없었다. "이런 육시를 낼 놈...!" 흑상문신은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더니 오른손을 번개같이 휘둘렀다. 꽈르릉! 그의 손에서 먹물같은 강기가 구름처럼 일어나 엽단풍을 향해 휘몰아쳐 갔다. 그 강기의 위세는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엽단풍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제자리에 우뚝 서서 슬쩍 오른 소매를 흔들었다. 꽝! 고막이 떨어지는 듯한 음향이 터지며 흑상문신의 몸이 휘청거리다가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그의 안색에 경악어린 빛이 가득했다. "이...이럴 수가...내 흑살장(黑煞掌)을 맨 손으로 받아내다니..." 그는 도무지 자신이 뒤로 격퇴당한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놀라기는 구경하고 있던 영호해상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비록 천석평에서 엽단풍의 놀라운 무공을 목도한 바 있으나 흑백상문신은 엽단풍이 겨루었던 인물들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무시무시한 고수들이었다. 심지어 동해를 석권한 그녀의 할아버지 조차도 그들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했지 않은가? 그런데 엽단풍이 그중 한 사람을 가볍게 격퇴하자 그녀는 놀랍고도 기뻤다. '이 사람은 이럴 때는 정말 멋있다니까.' 그녀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흑상문신이 다시 폭갈을 터뜨리며 엽단풍에게로 달려들었다. "이 놈! 어디 이것도 받아봐라!" 그의 양 손이 검은 색으로 물들었다. 흑상문신은 그 검게 물든 양 손을 질풍처럼 휘둘러 십 여장을 갈겨냈다.


꽈르르릉! 주위가 온통 시커먼 장력(掌力)에 휩싸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 위세는 처음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천하의 무엇도 그 가공할 장력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흑살장이 최고의 경지에 다다랐을 때 나타나는 흑무혈세경(黑霧血洗境)이었다. 엽단풍은 피할 생각도 못하는지 그 자리에 여전히 우두커니 있었다. "피...피해욧!" 보다 못한 영호해상이 뾰쪽한 비명을 질렀으나 엽단풍은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크하하...늦었다!" 흑상문신의 괴소가 울려퍼지며 그 노도와 같은 흑무는 사정없이 엽단풍의 전신을 휩쓸어 버렸다. 하나 그 순간 엽단풍은 번개같이 몸을 날리며 허공을 향해 연이어 아홉 번이나 주먹질을 해대는 것이 아닌가? 쾌액! 마치 칠흑 같은 하늘에 아홉 개의 번개가 치는 듯한 광경이 벌어졌다. 그와 동시에 흑무 속에서 흑상문신의 경악어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구...구벽신권(九劈神拳)...!" 그 음성은 연이어 터져나오는 엄청난 굉음에 가려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콰콰쾅! 무시무시한 강기가 사방을 노도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그 강기의 소용돌이속에서 한 사람이 정신없이 뒤로 물러나는 모습이 희미하게 들어왔다. "크으윽!" 뒤로 삼 장이나 물러난 사람은 다름아닌 흑상문신이었다. 흑상문신은 몸을 부르르 떨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대로 피를 토하고 말았다. "우웩!" 시커먼 피를 한사발이나 토해내고서야 그는 간신히 몸을 추스릴 수 있었다. 하나 그의 안색은 처음과는 달리 핼쓱하게 변해 있었다. "너...너는 누구냐?" 그는 경악과 두려움에 찬 눈으로 엽단풍을 응시하며 물었다. 엽단풍은 여전히 처음의 자세 그대로 우뚝 서 있었다. 그를 보고 있자니 천하의 어떤 것으로도 무너지지


않는 금성철벽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엽단풍은 퉁명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공손하게 묻지 않으면 안 가르쳐 준다고 했지 않소?" "이...이..." 흑상문신은 발연 대노하여 욕설을 퍼부으려 했으나 그의 가공할 무공이 생각나는지 차마 욕을 내뱉지는 못했다. 그때 이제껏 말이 없던 백상문신이 앞으로 불쑥 나서며 소리쳤다. "요즘 강호무림에 미치광이 하나가 나타났다고 하던데 네가 혹시 그 엽단풍인가 하는 놈이 아니냐?" 엽단풍은 그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과연 대단한 안목이오. 당신은 생긴 것도 그렇고 이 자보다는 훨씬 낫구료." 백상문신의 눈빛은 냉정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냉혹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엽단풍을 응시하다가 느릿느릿 다가왔다. "과연 소문대로 광오한 놈이로군. 하지만 감히 알량한 재주를 믿고 우리들에게 덤비다니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그가 다가옴에 따라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우우웅... 나직한 음향이 들려오며 그의 전신에 새하얀 서리가 어리는 것이 아닌가? 마치 무더운 여름날에 그에게만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 하나 그것을 본 엽단풍은 경탄어린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정말 훌륭한 빙백신공(氷魄神功)이오. 당신의 무공은 흑상문신보다 최소한 두 배는 뛰어난 것 같구료." 무표정한 얼굴로 엽단풍을 향해 다가오던 백상문신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네 놈이 어찌 노부의 빙백신공을 아느냐?" 엽단풍은 실없는 사람처럼 히죽 웃었다. "흑백상문신중 백상문신이 실질적인 우두머리이며 백상문신의 빙백신공은 태양조차 얼린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내 어찌 그것을 모르겠소?" 백상문신은 기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엽단풍을 응시했다. "어디서 그런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과연 큰소리칠만큼 안목이 대단하구나. 빙백신공의 이름을 들었다면 이것의 위력도 알고 있겠지?" 엽단풍은 문득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빙백신공이 비록 태양을 얼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를 어쩌지는 못할거요. 나는 원래 추위에 강해서 왠만해서는 이빨도 떨지 않는다오." "큰 소리를 치는군. 하지만 무림에서의 일은 주둥아리가 아니라 무공으로 결판나는 것이다."


"옳은 말이오. 일전에도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하더군. 하지만 그 말을 해놓고는 내 손 아래서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고 말았소." 백상문신의 눈빛이 얼음장보다도 더욱 차가워졌다. "미친 놈." 그는 더이상 엽단풍과 입씨름을 하기 싫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는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로 다가왔다. 다가올수록 그의 몸에 서린 서리가 짙어지더니 나중에는 엷으나마 얼음이 끼기 시작했다. 지금은 칠월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인데 얼음이라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분명히 백상문신의 전신에는 얇은 얼음이 서려 있는 것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지금 백상문신이 끌어올린 빙백신공의 위력이 얼마나 가공스러운 것인지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엽단풍도 지금까지의 경망스러웠던 행동을 거두고 진지한 안색으로 백상문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호해상은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가슴을 조리고 있었다. 찰나, "빙하개동(氷河開凍)!" 백상문신은 싸늘한 호통을 내지르며 엽단풍을 향해 쌍수를 휘둘렀다. 쓰아아악! 그의 손에서 새하얀 얼음기둥이 뻗어나왔다. 인간의 손에서 어찌 얼음이 나올 수 있겠는가? 하지만 분명히 사실이었다. 백상문신의 빙백신공이 너무도 극렬한 한기(寒氣)를 담고 있어서 그것이 뻗어나오는 순간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어 얼음기동을 형성했던 것이다. 엽단풍은 신광을 번뜩인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가 얼음기둥이 눈부신 속도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오른손을 기이하게 구부리며 허공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려냈다. 스윽! 허공에서 세 개의 작은 동그라미가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 세 개의 동그라미는 무서운 속도로 날아드는 얼음기둥과 정면으로 격돌했다. 순간, 파스스... 얼음기둥이 급속도로 와해되며 차가운 경기가 사방으로 비산되는 것이 아닌가? 백상문신의 가뜩이나 창백하던 안색이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철비파수(鐵琵琶手)로구나!" 그는 탄성인지 경악성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그대로 몸을 날려 엽단풍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의 양 손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완전한 백색(白色)으로 뒤덮혀 버렸다. "빙천열지(氷天裂地)--!" 콰아아아! 마치 허공에서 빙하(氷河)가 무너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엄청난 경기가 무시무시한 한기를 동반한 채 폭풍노도처럼 엽단풍의 전신을 향해 밀어닥쳤다. 그 순간 엽단풍은 허리를 쭉 펴더니 느릿느릿 우수를 내밀었다. 고오오... 그가 손을 내밈에 따라 괴이무쌍한 기운이 그의 장심(掌心)에서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 괴이한 기운은 허공을 가득 뒤덮으며 내려오는 빙하와 정면으로 격돌했다. 콰콰쾅! 너무도 커다란 굉음이 주위를 온통 뒤흔들어 버렸다. 동시에 해일과도 같은 경기가 사방을 풍비박산으로 휩쓸고 지나갔다. 경기가 사라진 장내는 하나의 폐허를 방불케 했다.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나가고 여기저기에 구덩이가 움푹움푹 파여 있었다. 그리고 그 폐허의 한가운데 백상문신이 우뚝 서 있었다. 하나 지금의 그에게 우뚝이란 단어는 그리 적절하지 않았다. 그의 새하얀 백의는 갈가리 찢겨져 속살이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고 두건은 어디로 갔는지 백발같은 머리가 풀어 헤쳐서 귀신을 연상케 했다. 뿐이랴? 그의 입가로 한 줄기 검은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백상문신은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엽단풍을 바라보았다. 엽단풍도 처음의 위치에서 두 걸음 물러서 있었다. 소매자락도 두 군데가 찢겨져나가 팔뚝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하나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고 맑아서 별다른 내상을 입은 것 같지 않았다. 백상문신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이게 무슨 장공(掌功)이냐?"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입에서 시커먼 선혈이 잘려진 내장조각과 함께 흘러나왔다. 엽단풍은 짤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복마곤룡장(伏魔困龍掌)." 백상문신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이게 바로 복마곤룡장이구나...이 무공을


익힌 자는 백 년내에 한 사람밖에 없었는데..." 백상문신의 신형이 앞뒤로 흔들렸다. "너...너는 그 사람과 무슨 관계냐?" 엽단풍은 그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분은 나의 선친(先親)이시오." 백상문신의 눈이 부릅떠졌다. "뭐...뭐라고? 그...그럼 네가..." 그는 무어라고 중얼거리려다 미처 말을 맺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쿵! 그의 몸은 바닥에 닿는 순간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혀...형님!" 흑상문신이 떨리는 음성으로 외치며 백상문신의 시신을 끌어안았다. 흑상문신은 이미 숨이 끊어진 백상문신의 몸을 부둥켜 안으면서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천하무적의 빙백신공을 연성한 백상문신을 누가 감히 죽일 수 있단 말인가? 하나 그의 손끝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은 백상문신의 죽음이 엄연한 사실임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한동안 백상문신의 시신을 끌어안고 있던 흑상문신은 문득 고개를 돌려 엽단풍을 노려보았다. "이...이놈! 감히 형님을 살해하다니..." 그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이를 으드득 갈았다. "네 놈은 지금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지를 모를 것이다. 네 놈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아느냐?" 엽단풍은 시큰둥한 얼굴로 물었다. "당신들이 어디에서 왔소?" 흑상문신은 두 눈을 흉악하게 번득이며 괴소를 날렸다. "네 놈은 혈악(血嶽)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았느냐?" "혈악?" "그렇다. 우리들은 바로 혈악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이제 알겠느냐? 네 놈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크하하..." 그의 음성은 우렁찬 광소가 되어 주위를 뒤흔들었다. 하나 엽단풍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혈악이 대체 무어라고 그렇게 큰 소리를 치는거요?" 그 말에 미친 듯이 웃고 있던 흑상문신의 웃음이 딱 그치며 그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네 놈은 혈악이란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단 말이냐?" 엽단풍은 피식 웃었다.


"이름을 들어보았건 안 들어 보았건 그게 무어 그리 중요하단 말이오?" 흑상문신은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지 거듭 물어보았다. "네 놈은 정말 고금절세(古今絶世)의 혈악에 대해서 전혀 듣지 못했단 말이냐?" "글쎄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흑상문신은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럼 도데체 무엇이 중요하단 말이냐?" 엽단풍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무어라고 딱 꼬집어 표현하기 어려운 이상야릇한 미소였다. "혈악이 어떤 곳이든 나는 관심이 없소. 당신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이제 백상문신마저 죽었으니 당신은 어떻게 할 셈이냐는 거요. 그가 죽었으니 당신은 혈악으로 돌아가지도 못할텐데." 그 말에 흑상문신은 그야말로 기절초풍을 할 듯 놀랐다. "무어라고?" 어찌나 놀랐던지 그의 안색은 그야말로 완벽한 흑색이 되어 있었다.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무얼 그리 놀라는 거요? 당신은 함께 나온 사람은 반드시 함께 들어가야 한다는 혈악의 철칙(鐵則)도 잊어 버렸단 말이오?" 흑상문신은 놀라다 못해 아예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네...네가 어찌 그걸 아느냐?" "글쎄 그런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소?" 흑상문신은 놀라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대체 눈앞의 이 사나이가 혈악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르고 있는 것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엽단풍은 안됐다는 듯 나직히 혀를 찼다. "쯧... 당신은 이제 혈악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딱한 신세가 되었구료. 내가 설사 당신을 이대로 돌려보낸다고 해도 동료를 잃고 혼자 살아 돌아온 당신을 목불(木佛)이 용서할 것 같지도 않으니..." 흑상문신은 다시 한 번 기겁을 하고 놀랐다. "너...너는 목불도 안단 말이냐?" 엽단풍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게 무어 그리 대단하다고 아까부터 자꾸 그러는거요? 혈악의 십대고수(十大高手)중에서 목불이 가장 변변치 못한 존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단 말이오?" 흑상문신은 더 놀랄 여력도 없는지 멍하니 엽단풍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알기로 혈악에 십대고수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당금 무림에서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1 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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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진천하(風塵天下)에 미친 놈(狂子)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과연 누구인가? * * * 제1장천하광자(天下狂子) 강호무뢰한(상) - 용대운 저 1. 서 장 그날 저녁. 봉일평은 심심하기도 하고 오후의 기분나쁜 일에 대한 화풀이도 할 겸해서 고노대(高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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