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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천십지제일신마 제 1 권 제 1 장 대폭풍(大暴風) - 그 시작은 소림사(少林寺)! ━━━━━━━━━━━━━━━━━━━━━━━━━━━━━━━━━━━ 숭산(嵩山) 소실봉(小室峯). 중원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少林寺)가 존재함으로 인해 이 무 림 최고의 성역(聖域)이자 영원한 정의(正義)의 가람으로 손꼽히는 곳. 어두컴컴한 실내를 유등(油燈)이었다.

흐릿하게나마

밝혀

주는

것은

한쪽

벽에

걸린

기름이 다했음인지 가물가물 타오르는 유등(油登)의 불꽃은 금세 라도 꺼질 듯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곳은 지난 백 년 이래 그 누구의 발길도 막아 왔던 소림제일의 금역(禁域) 조사동(祖師洞)에 있는 한 밀실이었다. 일과(日課)의 시작을 조사동 참배로 일관해 온 소림사는 무엇 때 문에 조사동을 절대금역(絶對禁域)으로 선포했을까? 그 이유를 알리는 말은 백

년 이래 단 한 마디도 강호에 흘러 나오지 않았다.

다만 소림이 조사동(祖師洞)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건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림의 생명(生命)! 그것은 곧 소림사의 모든 힘을 의미한다. 정신이 나갔거나 미친 자가 아닌 다음에야 그 힘에 맞서려는 자는 이 무림에 아무도 없었다.

유등의 불꽃이 갑자기 환하게 피어오르면서 실내가 아까보다 훨씬 밝아졌다. 밝아진 불빛을 빌어 한쪽 구석의 돌 침상 위에 뼈에 껍질을 발라 놓은 듯한 앙상한 체구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한 노승의 모습이 보였다. 일신에는 낡아빠진 마의승포(麻衣僧袍)를 걸쳤고 특이하게 자색 (紫色)을 띤 눈썹은 관자놀이까지 늘어져 있어 나이를 추측하기 어려웠다. 아마도 장님인 듯 자미노승(紫眉老僧)의 두 눈은 기이하게도 허연 흰자위로만 가득 채워져 있었다.

작은


그 돌 침상 아래 한 장발(長髮)의 중년인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물처럼 고요하고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다. 대략 서른두세 살 남짓 보이는 청수하고도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 는 인상이었다. 그의 전신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기(瑞氣)처럼 배어 있었다.

않는 인자하고 장엄한 기운이 서

어쩐지 음울하고도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치지직...... 치직...... 조용한 침묵 속으로 심지가 타 들어가는 소리가 스며들면서 실내 가 한층 환하게 밝아졌다. 저 빛이 사그라지면 유등은 곧 꺼질 것이 분명했다. 갑작스레 밝아진 불빛 탓인지 밀납처럼 창백한 자미노승의 얼굴에 도 한 줄기 불그레한 홍조가 피어 올랐다. 자미노승의 그런 변화를 살펴보던 중년인의 두 눈에는 짙은 슬픔 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저 홍조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나무껍질처럼 말라비틀어진 자미노승의 입술이 힘겹게 떼어졌다. "혜인(慧人)...... 네 손을 다오......." 이미 죽음의 냄새가 짙게 배인 황량한 음성이었다. 유등의 불꽃이 흔들렸고 덩달아 한 흔들림을 보였다.

중년인의 어깨도 짧은 순간 경미

중년인은 그러나 이내 흔들림을 가라앉히고 두 손을 천천히 자미 노승의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자미노승은 뼈마디가 툭툭 불거진 앙상한 손으로 그의 두 손을 감 싸쥐며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따뜻하구나... 너의 손... 너무 따뜻해......."


"......!" 자미노승은 두 눈을 스르르 감으며 감회 서린 음성을 흘려냈다. "혜인...... 네가 소림에 입문(入門)할 때 세 살이었으니 지금 너 의 나이가 꼭 서른셋이겠구나!" 중년인 혜인의 눈꼬리에 가는 경련이 파문처럼 일어났다. 이어 무슨 말인가를 하기 위해 입술을 떼려는 순간. "혜인...... 듣기만 해라." "......!" 자미노승은 혜인의 말문을 막으며 엄숙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꼭 백 년 전(百年前)...... 구천십지만마전의 대마종 (大魔宗)인 구천십지제일신마(九天十地第一神魔)는 정도무림의 태 산(泰山) 소림에게 일천 년을 두고도 씻을 수 없는 최대의 모욕을 안겨 주었다. 아느냐?" "압니다." "그 모욕을 견디다 못해 장문사형은 조사동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 었고 일천 제자 중 절반이 통분을 못 이겨 스스로의 혀를 깨물었다. 아느냐?" "압니다." 자미노승의 자색눈썹이 바람도 없는데 파르르 떨렸다. "붉은 피(血)가 소림을 적시던 그 날...... 노납은 결심했다. 구 천십지제일신마...... 그에게 도전하겠노라고......!" "......!" "그로부터 칠십 년...... 노납은 천 년 이래로 그 누구도 연성할 엄두조차 못 (達魔易筋洗髓經)의 가장 심오한 무공인 來神功)을 익히기 위해 모든 피와 땀을 나고 말았다......."

전의 달마조사(達魔祖師) 내었다는 달마역근세수경 수미타여래신공(須彌陀如 쏟았지만 결국 실패로 끝

자미노승은 씁쓸한 고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수미타여래신공을 익히기 위한 연성 조건이 무척 까다롭다는 것 은 너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세 살을 넘어서 시작하면 안 되고...... 세 살 이전에 백 년 수 위의 내공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그후로는 최소한 백 년 이상의 공력을 지닌 십팔 인(十八人)의 도움을 필수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수미타여래신공이지......." 달마조사 이래 아무도 연성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는 수미타여래 신공이다. 그 이유가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 노납은 그래서 혜인 너를 택했고 네가 세 살이 되던 해...... 너에게 노납의 사 갑자 내공을 모두 물려주었다. 그리고 지난 삼십 년 동안 백년 공력을 지닌 십팔나한(十八羅漢)이 모두 희생됨으로써 수미타여래신공을 극성(極盛)까지 연마하는 데 성공했다." "......." "혜인,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자미노승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두 눈은 무섭도록 텅 비어 있었다. 자미노승은 혜인을 향해 텅 빈 눈에 초점을 모았다. "소림의 복수...... 부질 없는 것이다." "......!" "천하 억조창생을 위해...... 너 혜인은 노력해야 한다......." 치지직...... 심지가 타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실내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자미노승은 문득 두 눈에서 하얀 광채를 뿜어내며 엄숙하게 말했다. "네가 갈 곳은 구천십지만마전! 너는 소림을 나가는 그 순간부터


천하의 대마황(大魔皇)으로 변신해야 한다......!" "......!" "잔인 무도한...... 그리하여 구천십지제일신마조차도 치를 떨 만 큼 흉악한 대마황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구천십지만마전에 들 수 있 고...... 그 목적의 달성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 "지난 삼십 년간...... 너를 위해 소림제자 일 백인(一百人)은 모든 준비를 완료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혜인의 손을 움켜 쥔 자미노승의 두 손이 부르르 경련했다. 혜인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를 정시했다. 자미노승은 다시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이어 그는 말할 수 없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혜인...... 너는...... 누구냐......?" 실내가 어두워졌다. 춤추던 유등의 불꽃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먹물처럼 번져 오는 어둠 속에서 혜인의 두 뺨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다. "사백조님...... 소실봉을 벗어나는 그 순간부터...... 소림제자 혜인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미노승은 웃었다. "헛허...... 나 자미성불(紫眉聖佛)...... 이백 년 이상을 살았으 나...... 오늘...... 가장 보람되도다......." 혜인은 자미성불의 손에 힘이 풀려 나가는 것을 느끼자 가슴이 철렁했다. "사백조님......!"


"석존(釋尊)께서 말씀하셨느니...... 내가 지옥에...... 들어가 지...... 않으면...... 누가...... 들어가리......." 갑자기 노승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혜인은 가슴이 철렁했다. "사백조님!" "......." 아무 대답이 없다. 침묵은 죽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므로. 순간 한 소리 격렬한 울부짖음이 혜인의 입술을 꿰뚫고 터져 나왔다. "사백조님―!"

그 날 이후 자미성불과 혜인을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소림의 조사동에 있었던 이 한 토막의 이야기가 장차 무림천 하에 얼마나 무서운 피의 폭풍을 가져올지 짐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 1 권 제 2 장 대폭풍(大暴風) - 전설(傳說)의 도문(道門) 전진(全眞) ━━━━━━━━━━━━━━━━━━━━━━━━━━━━━━━━━━━ 전진파(全眞派)를 아는가? ― 율법(律法)에 있어 정통도문(正統道門)과 그 맥(脈)을 달리하 며, 중원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는 신비도문(神秘道門).

이것이 무림인들이 전진파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다. 일설에 의하면 천이백 년 전(千二百年前) 천축(天竺)의 기인(奇 人) 달탄(達呑)이 천산(天山)에서 수도할 무렵 그의 밑에서 수련 하던 황엽풍(黃葉風)이란 도인(道人)이 깨달은 바가 있어 세운 것 이라고 전해 오나 그 역시 확인된 바 없다.


문파내력(門派來歷)이나 무학근원(無學根源) 등이 일체 신비에 싸 여 있는 전설(傳說)의 도문(道門), 전진(全眞). 그 이름을 중원에 처음으로 터뜨린 사람은 무당대조사(武當大祖 師) 장삼봉(張三峯)이었다. 장삼봉은 운명 직전에 수제자 십 인(十人)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 제자들이여! 언제라도 도학(道學)과 무공수련에 허(虛)를 보이지 말라! 전설의 전진(全眞)은 언제 등장할 지 모른다. 전진 도가의 학문은 무당보다 높으니 너희들이 수련을 게을리하여 그 힘을 후대(後代)서 퇴락 시킨다면 언젠가는 전진도가에게 크게 당하게 되리라! ― 대사존이시여, 전진은 대체 무엇을 일컬음입니까? ― 전진은 대저 도(道)와 사(邪)와 신(神)의 최고봉을 일컬음일지니...!

장삼봉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전진의 이름은 이렇게 강호에 알려졌다. 도(道)와 사(邪)와 신(神)의 최고봉― 전진도가(全眞道家)! 과연 그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어느 황폐한 산봉우리. 정상에는 말라 비틀어져 고사(枯死)한 나무들이 둥글게 돌려서 있었다. 그 중앙에는 커다랗고 둥근 분지가 움푹 파여 있었다. 과거에는 호수였던 것 같으나 지금은 물이 바짝 말라 바닥이 거북 이 등처럼 갈라져 있었다. 그 분지 중앙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갓 마흔이나 되었을까? 극히 청수한 얼굴에

짧게 자란 검은 수염이

무척 고귀한 느낌을 자아내는


모습이었다. 중년인은 오른손에 쥐어진 섭선을 유유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흔들며 바닥을 지그시

무엇을 생각하는지 미간에는 어두운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중년인의 입 밖으로 나직한 음성이 새어 나온 것은 그로부터 거의 한 식경이 지나서였다.

"일천이백 년(一千二百年)의 전진도가(全眞道家)와 함께 하던 이 청심호(靑心湖)가 이렇듯 순식간에 말라 버리다니......." 그는 허공으로 눈길을 옮기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가뭄이 심하다고 하나 천이백 년 동안 이보다 심한 가뭄에도 청심호는 마르지 않았었다."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깨끗했다. "그 푸르던 나무들도 모두 말라죽었으니...... 이제 함인가......?"

전진의 맥(脈)이 끊기려

이게 무슨 말인가? 전진의 맥(脈)이라니! 중년인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 기이한 광채가 흘러 나왔다. "전진은 그 동안 너무 폐쇄적이었다......." 섭선을 모으며 그는 결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대사형(大師兄), 용서하십시오! 백년지약(百年之約)에는 아직도 삼 년(三年)이 더 남았지만 나 추풍소요자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그는 시선을 다시 바닥으로 향했다. "전진의 뿌리를 중원에 내리겠습니다. 대사형!" 중년인 추풍소요자의 동공에는 굴강한 의지의 빛이 불꽃처럼 일렁 이고 있었다.


"이미 천인합일신공(天人合一神功)과 이의이기비천어검(以意以氣 飛天馭劍)도 극성까지 연마했습니다. 당금무림에 소제의 적수가 있으리라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거의 광언(狂言)이나 다름없다. 이 무림에 누가 있어 감히 이같은 말을 서슴없이 내뱉을 수 있을까? 추풍소요자는 우수(右手)를 가슴 앞에 수직으로 세우고 바닥을 향 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량수불......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도호(道號)입니다." 자세를 바로 하며 허리를 쭉 폈다. 그러는 순간 그의 두 눈에서는 벼락불같은 관망이 무섭게 일렁이 고 있었다. "이제...... 추풍소요자라는 이름은 이 청심호처럼 영원히 이 땅 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럼 이만......." 순간 그의 모습이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놀랍게도 그는 이미 광음(光陰)보다 빠른 곳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속도로 허공 까마득한

추풍소요자가 하늘과 땅사이에서 사라진 것은 실로 눈 한 번 깜박 거리기도 전이었다. 그런데 추풍소요자가 사라진 직후였다. 뭉클...... 뭉클...... 핏빛보다 붉은 운무가 바닥의 틈사이로 꾸역꾸역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핏빛 혈무 속에 한 인영의 형체가 흐릿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드러난 그 모습이란 섬뜩하기 그지 없었다. 붉은 도포에 도관(道冠)......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썹...... 붉은 두 눈...... 따지고 자실 것도 없이 모조리 핏빛 일색(一色)이었다. 마치 방금 핏구덩이에서 건져올린 듯한

그 소름끼치는 모습이며


숨막히는 사기(邪氣)를 무슨 말로 형용하랴! 혈인(血人)은 무서운 혈광(血光)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추풍소요자 가 사라진 방향을 보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무량수불...... 훌륭하다. 셋째 사제, 너의 완성을 축하한다." 무량수불? 이렇게 가슴 떨리게

하는 혈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 나와도 되는 것일까?

"대사형은 도문(道門)을...... 나 적혈자(赤血子)는 사문(邪 門)...... 너는 신문(神門)을 이루었으니...... 이제 전진(全眞) 은 선대(先代)의 염원을 완벽하게 달성한 것이다......." 도문(道門)! 사문(邪門)! 신문(神門)! 장삼봉의 말을 되새기게 하는 순간이 아닌가? 자신을 적혈자라고 중얼거렸다.

밝힌

괴인은

혈안(血眼)을

바닥으로

향하며

침중하게

"대사형, 나는 사문(邪門)의 종주(宗主)로서 당금천하를 장악하고 있는 구천십지제일신마와 대결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천하제일 위(天下第一位)를 노리는 헛된 야욕이 아니외다. 나는 단지 진정 한 마종(魔宗)이 누군지 가려내고 싶을 뿐입니다." 선렬한 핏빛 혈무는 더욱 두텁게 적혈자의 전신을 휘감아 갔다. "대사형, 백년지약의 삼 년을

채우지 못하고 떠나는 저를 용서하십시오......."

번― 쩍! 놀랍게도 그 토록 음산하게 일렁이던 핏빛 혈무가 거짓말처럼 말끔히 사라졌다. 그리고 적혈자의 모습도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다. 추풍소요자! 적혈자!


전진도문의 대사형! 대체 그들은 누구인가? 또한 백년지약이란 무슨 말인가? 확실한 건 하나도 없다. 단지 전설의 도문 전진이 천이백 년의 긴 침묵을 깨고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밖에는......!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 1 권 제 3 장 대폭풍(大暴風) - 대막(大漠)의 영광(榮光)이여! 다시한번 ━━━━━━━━━━━━━━━━━━━━━━━━━━━━━━━━━━━ 사막(砂漠). 태고 이래 철저히 생체(生體)를 거부해 온 천형(天形)의 땅. 앞 뒤 어디를 봐도 수목 한 그루 풀 한 포기조차 찾아볼 수 없는 이곳은 영겁(永劫)의 형상을 보여주듯 사구(砂丘)의 구릉 또한 끝 이 없었다. 헌데 그 중 한 커다란 모래언덕 위에 바위처럼 우뚝 서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한 사나이가

가마솥처럼 끓어오르는 열사(熱砂)의 땅을 밟고 뼛속까지 태워 버 릴 듯한 폭양(暴陽)을 고스란히 맞고 서 있으면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이 사나이. 어깨는 하늘을 받치고 철탑같은 두 다리는 온 땅을 짓누르고 있는 듯한 그 당당한 웅풍(雄風)이며 낡은 파의(破衣) 사이로 드러난 딱 벌어진 구리빛 체구는 말 그대로 철인(鐵人)을 연상케 했다. 만약 이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사람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냐고 묻 는다면 서슴없이 이 사나이를 지적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평생 한 마디도 하지 않을 것처럼 꽉 다문 입술에 불길처럼 이글 거리는 부리부리한 호목(虎目), 거기다 우측 뺨에 비스듬히 새겨 진 한 줄기 검흔(劍痕)은 이 사나이의 강렬한 인상에 또 하나의 매력을 더해 주고 있었다.


사나이는 오른손에 한 자루의 부러진 도(刀)를 움켜쥔 채 타는 듯 한 시선으로 사막 저쪽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휘이이잉....... 날이 어두워지면서 조금씩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밤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바람이다. 사막의 밤은 춥다. 얼마나 추운지 겪어 보지 않는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휘우우우웅! 후우웅! 바람이 드세어지면서 싯누런 황사(黃砂)가 살갗을 파고들 듯 휘날렸다. 그러나 사나이는 눈

한 번 끔벅거리지도 않고 태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

어찌 보자니 마치 그 상태 그대로 숨이 끊어진 게 아닌가 의심이 갈 만큼 사나이는 도대체 미동도 할 줄 몰랐다. 그 부리부리한 한 쌍의 호목에 불현듯 한 줄기 횃불같은 광채가 번쩍 피어오른 것은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콰우우우우....... 사나이의 시선이 끝닿은 저쪽에서 말할 수 없이 거대한 돌개바람 이 무서운 속도로 밀려오고 있지 않은가! 콰우우우우웅! 가슴 떨리게 하는 굉음과 더불어 천지를 집어삼킬 듯 밀려오는 그 사납고 엄청난 기세는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평생 웃는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사나이의 얼굴에 는 언뜻 흐릿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용권풍(龍卷風)...... 드디어 나타났구나......." 용권풍.


그것은 사막의 대상(大商)들이 가장 만나기 두려워하는 것으로 인 간의 육신을 흔적도 없이 분해해 버리는 건 물론이고 사막의 지형 까지 뒤바꿔 버린다는 죽음의 돌개바람을 일컬음이다. 또한 천지(天地)를 온통 박살낼 듯한 기세로 무섭게 휘몰아쳐 오 는 이 거대한 바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콰아아아아! 용권풍이 가까워지면서 사나이의 옷자락은 거센 바람에 휩쓸려 찢 어질 듯 펄럭였다. 사나이는 부러진 도를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구천십지제일신마...... 네가 설마하니 용권풍보다 강하겠는가?" 사나이는 돌연 부러진 도를 번쩍 치켜들면서 한 소리 천둥같은 외 침을 토해냈다. "벽력일섬단혼도(霹靂一閃斷魂刀)―!" 그것이 마지막 음성이었다. 콰콰콰콰콰콰―! 용권풍이 무지막지한 기세로 사나이의 전신을 휘감아 버린 것이었 다. 순식간에 사나이를 집어 삼킨 용권풍은 그 기세를 몰아 하늘까지 집어 삼키려는 듯 수십 장 높이로 치솟아 올랐다. 그것은 실로 장관이었다. 이때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오오, 보라! 놀랍게도 그 거대한 용권풍이 마치 선(線)을 그어 개로 쫙 나누어지는 것이 아닌가?

놓는 듯이 두

헌데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두 개로 나뉘어진 용권풍 사이에 그 사나이가 우뚝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콰콰콰콰콰콰!


물살처럼 갈라지는 두 쪽의 용권풍과 그 사이에 부러진 도를 비스 듬히 치켜든 채 천신(天神)처럼 우뚝 서 있는 사나이! 그 모습은 억겁의 세월을 풍우와 싸워 이겨온 태산(泰山)의 그것 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옷은 걸레처럼 갈가리 찢겨져 나갔고 전신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나이의 얼굴에는 용권풍을 처음 보았을 때보 다 더욱 짙은 미소가 가득 번져 있었다. 승자(勝者)만이 가질 수 있는 환희의 미소였다. 웃으면서 사나이는 중얼거렸다. "대막(大漠)의 영광이여! 다시 한 번......."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 1 권 제 4 장 대폭풍(大暴風) 잠마(潛魔)는 섬전(閃電)속에 재현(再現)하고 ━━━━━━━━━━━━━━━━━━━━━━━━━━━━━━━━━━━ 이 하늘 아래 가장 오만한 인물이 있으니 그는 하늘조차 거부하고 딛고 선 중원십팔만리조차 비좁다고 입버릇처럼 떠들어댔다. 또한 이 땅이 만들어 낸 가장 잔인한 인물이 있으니 그는 자신을 받드는 자에겐 천귀영화(天貴榮華)를 주었으나 거역하는 자는 육 신을 갈라 그 피를 들이켰다. 이렇듯 오만하고 잔인했던 인물이 백이십 년 전의 무림에 존재했다.

단천양(端天亮). 이 사람은 구천십지만마전의 제 칠대(第七代) 제일신마(第一神魔) 로 구천십지만마전의 수백 년 역사가 탄생시킨 제일신마 중 가장 무서운 인물로 평가된다. 하늘과 땅 사이에 단 한 명의 적수가 존재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던 인물이 바로 단천양이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어느 날 추상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 구천십지만마전에 대한 거역이나 불경(不敬)은 곧 역천(逆天)의 뜻! 지난 육백삼십 년 동안 본전(本殿)을

거역한 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광오하게도 본좌에게 그 역천의 뜻을

비친 자가 있다.

당연히 구천십지만마전은 발칵 뒤집혔다.

― 구천마제(九天魔帝)와 십지마황(十地魔黃) 및 전 고수에게 명(命)하노니, 잠마혈문(潛魔血門)의 삼족구문(三族九門)을 멸하고 조상 십대의 묘지를 파헤쳐 역천에 대한 대가를 지불토록 하라!―

절대로 거역할 수 없는 지상 명령과 함께 단천양은 한 장의 서찰 을 꺼내 수하들에게 펼쳐 보였다. 서찰의 내용인 즉 이러했다.

<구천(九天)이 넓다 하나 하늘을 모두 덮지 못하고 십지(十地)가 크다 하나 대지의 전부는 아니다. 만마전의 고수가 아무리 많다 하나 천하마종(天下魔宗)의 전체를 관장할 수는 없는 것이니...... 본 잠마혈문(潛魔血門)은 구천십 지만마전의 권위를 부정하며 참배 또한 거부할 것을 만천하에 공 표하노라!>

명백한 도전(挑戰)! 만마전의 전 고수들이 서릿발같은 분노를

안고 모조리 만마전을 박차고 나갔다.

그후 십 년에 걸쳐 구천십지만마전과 잠마혈문의 싸움은 하루도 거름 없이 계속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무림천년사혈전록(武林千年 史血戰錄)의 첫 장을 기록하는 역천(逆天)의 혈전(血戰)이었다.

잠마혈문. 스스로 삼천 년 역사를 이룬 마교(魔敎)의 단맥(斷脈)임을 주장하


는 신비마문(神秘魔門)이며 오 만(五萬)의 일급 고수와 수많은 대 마황(大魔皇)을 끌어들여 그 세력을 비밀리에 확장해 온 죽음의 문파! 그 힘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영원한 마도(魔道)의 불멸혼을 기원하며 세워진 지 상 최강의 단체 구천십지만마전이었다. 십 년에 걸친 역천대혈전은 끝내 잠마혈문이 붕괴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문주(門主)인 잠형천존(潛刑天尊) 사도무기(司道武琦)는 단천양에 의해 황산의 고혼(孤魂)이 되었고 그 수하들은 모조리 씨가 말랐다. 완벽한 패배였다. 단 한 번 하늘을 기웃거린 대가치곤 너무 엄청난 것이었다. 그후 세월이 흘러 단천양은 제 팔대 제일신마를 그의 아들에게 계 승하고 이승을 떠났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무림인들은 누구나 잊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구천십지만마전에 대항했던 유일한 문파! 죽어 가는 순간까지 오 만의 수하 중 단 한 명도 구천십지만마전 에 그 오만한 허리를 굽히지 않았던 그 잠마혈문을......!

서릉협(西陵峽). 저 유명한 무산삼협(巫山三峽) 중의 하나이며 천길 낭떠러지로 둘 러싸인 그 험준절악함은 나는 새조차 지나칠 생각을 버려야 한다 는 죽음의 험협(險峽). 쏴아아아...... 억수같은 장대비가 서릉협을 온통 희뿌연 우막(雨幕)으로 뒤덮고 있었다. 우기(雨期)도 아닌데 연 사흘째 커녕 갈수록 기승을 더해갔다. 사위는 먹물을 풀어놓은 듯 려 미친 듯이 광란한다.

계속되는 이 폭우는 멈출 기미는

어둡고 서릉협의 물결은 폭우와 어울


콰르르릉― 쿠콰콰콰― 뇌성같은 굉음을 울리며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급류(急流)와 폭발 하듯 퉁겨 오르는 엄청난 물보라! 그 모든 자연의 조화는 섬뜩하기보다는 차라리 장엄했다. 번쩍! 돌연 몸서리쳐지도록 시퍼런 뇌광(雷光) 한 줄기가 어둠을 찢었다. 꽈르르르... 콰콰쾅! 곧이어 대기를 찢어발기는 천둥소리에 온 산하가 뒤흔들렸다. 폭우는 광란하는 천둥과 번개를 타고 더욱 미친 듯이 쏟아져 내렸다. 헌데 저게 무엇일까? 백사(白蛇)같이 새하얀 섬광(閃光)이 러나는 그것은 글씨였다.

작렬한 때마다 희끗희끗 드

풍상에 씻겨 알아보기도 힘들지만 그것은 분명히 글씨였고 그 글 씨가 새겨진 곳은 마치 도끼로 내려친 듯 양쪽으로 쩍 갈라져 있 는 단애(斷涯)의 중턱 부근이었다.

<잠마(潛魔).> 글씨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무슨 뜻일까? 그리고 어떤 할 일 없는 위인이 저런 곳에 글씨를 새겨 놓았을까? 번― 쩍! 희다 못해 처절하도록 새파란 섬전 한 줄기가 서릉협으로 내리 꽂 혔다. 그 위치는 공교롭게도 글씨가 새겨진 바로 그 단애였다. 콰콰쾅!


요란한 폭음이 터지면서 글씨가 새겨졌던 휩싸여 산산조각 박살났다.

석벽이 시퍼런 불꽃에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부서져 나간 석벽 속에서 또 것이 아닌가!

한 줄기 섬광이 하늘로 번쩍 치솟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번개는 있어도 땅에서 하늘로 솟구치는 번개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번개는 분명히 땅에서 하늘로 솟구쳐오르고 있었으며 놀랍게도 백여 장 높이에 이르러선 우뚝 멈추는 불가사 의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곧이어 그 정체도 드러났다. 놀랍게도 그것은 사람이었다. 머리는 제멋대로 풀어헤쳐져 있어서 용모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 것은 분명히 사람이었다. 쪼개진 절벽 속에서 사람이 솟구쳐 나오다니.... 실로 괴사(怪事) 중의 괴사가 아닐 수 없었다. 허공을 평지처럼 밟고 우뚝 선 괴인의 입에서 돌연 천둥을 방불케 하는 쩌렁쩌렁한 광소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핫...... 드디어 터득했다! 마교최대(魔敎最大)의 비예(秘 藝), 천섬마형뢰(天閃魔形雷)를...... 크하하핫......." 한바탕 떠들썩하게 웃어제낀 괴인은 광란하는 암천(暗天)을 향해 미친 듯이 부르짖기 시작했다. "아버님! 당신은 잠마혈문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나를 이곳에 가두어 내 생명을 보존시켰소!" 이게 무슨 말인가? 잠마혈문이라니...... "천섬(天閃)의 뜻을 알기 전까지 이곳을 나오지 말라 하신 당신의 뜻을 나는 충실히 지켰소!"


하늘을 무너뜨릴 듯한 굉렬한 외침에 짓눌리기라도 한 듯 그 토록 광란하던 천둥과 번개가 멎고 폭우마저 그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이 아들...... 백이십 년 전 당신이 나를 이곳에 남겨두고 떠날 때 흘린 그 뜨거운 피눈물의 의미를 똑똑히 기억합니다!" 백이십 년 세월을 운운한다는 건 이 괴인의 나이가 이미 백이십 살을 훨씬 넘었다는 얘기다. 독백은 피냄새가 물씬 풍기며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잠마혈문은 다시 세워집니다! 그런 다음 단천양의 묘를 파헤쳐 그 시신을 당신 앞에 무릎 꿇리고 구천십지만마전을 지상에서 영 원히 없애 버릴 것입니다!" 엄청난 말이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구천십지만마전을 지상에서 영원히 없애 버린다니! 누군가 옆에서 이 말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 했으리라. "와하하핫핫......." 또 한 번의 광소(狂笑)를 끝으로 괴인의 신형은 섬전보다 빠른 속 도로 서릉협을 향해 내리 꽂혔다. 그리고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콰르르릉! 쏴아아아.... 서릉협은 그저 미친 듯이 광란하고 폭우는 원래의 힘을 되찾고 있었다.

소림(少林)의 혜인(慧人). 전진도문(全眞道門)의 삼 인(三人). 대막(大漠)의 괴인. 잠마혈문(潛魔血門)의 마인(魔人).


대폭풍의 불씨를 안고 일제히 준동한 이들 네 명이 훗날 어떤 모 습으로 다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이 노리는 목표는 한결같이 구천십지만 마전이라는 사실이다. 위대한 마도의 불멸혼을 추구해 온 구천십지만마전의 절대 권위를 넘보는 네 명의 이단자가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가운데 시각에 발생한 일들이었다.

천하의 네 군데에서 거의 비슷한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 1 권 제 5 장 귀곡천류하(鬼哭天流河)의 잠룡(潛龍) ━━━━━━━━━━━━━━━━━━━━━━━━━━━━━━━━━━━ 천간산(天干山). 수백의 봉우리가 마치 하늘을 떠받치는 방패 모양을 하고 있다 하 여 명명된 하북성(河北省) 북방의 명산(名山). 그 깊숙한 곳에 들어가면 거센 급류가 무섭게 굽이쳐 흐르는 하나 의 물줄기가 있다. 물결이 거세기로는 저 유명한 무산삼협(巫山三峽)의 그것에 버금 갈 정도이며 그 흐름의 소리가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 하다 하 여 사람들은 이곳을 가리켜 귀곡천류하(鬼哭天流河)라 불렀다.

초봄의 훈훈한 양광(陽光)이 잘게 부서져 내리는 오후 무렵. 한 소년(少年)이 귀곡천류하의 상류로 이어진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거의 흠잡을 곳이 없는 절세의 미소년이었다. 넓고 반듯한 이마에는 성스러운 정기(正氣)가 은은히 서려 있고 콧날은 깎아 빚은 듯 높지도 않게 우뚝 솟아 있었다. 거기다 단아하게 맞물린 주사빛 입술, 차라리 여인의 그것과도 흡사했다. 소년은 푸른빛이 감도는 낚싯대 하나를 어깨에 걸친 채 유유히 걷고 있었다. 금상첨화(錦上添花)라 할까?


깨끗한 백의(白衣)를 표표히 휘날리며 내딛는 걸음 하나 하나가 그렇게 품위있고 멋들어지게 보일 수가 없었다. 콰콰콰콰...... 귀곡천류하의 상류에는 뇌성같은 굉음을 울리며 거대한 물기둥을 무섭게 내리꽂는 거대한 폭포가 있었다. 폭포 아래에는 넓고 맑은 소(沼)가 이루어져 있었다. 바닥이 환히 들여다 보일 정도의 맑은 소(沼)였다. 소년은 소(沼) 근처에 이르러 주위를 대충 한 차례 둘러본 다음 옆의 한 바위 위에 턱 걸터앉았다. 그리곤 능숙한 동작으로 낚싯대를 귀곡소에 드리웠다. 미끼도 없이 낚시를 하려는 자세다. 소년은 가을 호수처럼 맑고 켰다.

잔잔한 눈빛을 낚싯대의 끝에 고정시

그리곤 더 이상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시간이 물처럼 흘러갔다. 소년은 그때까지도 털끝만큼의 미동도 없었다. 그저 물같이 고요한 눈빛을 낚싯대의 끝에 못박고 있을 뿐이었다. 휘익! 돌연 하늘에서 한 줄기 흑영(黑影)이 아무런 파공음도 없이 소년 의 등 뒤에 환영(幻影)처럼 나타났다. 대략 칠순이나 되었을까? 깡마른 체구에 먹물같은 흑포를 헐렁하게 걸쳤고 쭉 찢어진 사목 (蛇目)에 예리한 콧날을 가진 강팍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소년은 그의 출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담담한 표정 그대로였다.


흑의 노인은 그 자리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겁천독후(劫天毒侯) 천예사(千芮査)가 께 인사드리옵니다......."

만독(萬毒)의 제왕(帝王)

마치 천자(天子)라도 대하듯 지극히 공손하고 경건한 태도다. 헌데 만독의 제왕이란 또 무슨 말인가? 만독은 제쳐 두더라도 이제 기껏 십오륙 세 남짓한 소년에게 제왕 이란 거창한 명호를 함부로 갖다 붙혀도 되는 걸까? 소년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없었거니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겁천독후 천예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떼었다. "태상(太上)......." "천예사." 그제야 소년의 입술이 떼어지며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천예사는 순간 콧등이 휘어지도록 얼굴을 바닥에 파묻었다. "말씀하십시오. 태상!" 소년은 여전히 낚싯대 끝을 응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당신도 낚시가 하고 싶은 거요?" "예?" 천예사는 자신도 모르게 약간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지금 낚시를 즐기고 있소." "......!" "낚시란 매우 즐거운 것이오. 여가를 보내기에도 더할 수 없이 적합하고......." 그 말에 천예사의 눈빛이 가벼운 흔들림을 보였다. 천예사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문득 조심스런 음성을 흘려 냈다.


"태상, 당금의 천하는 지금

엄청난 격동의 회오리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 "태상, 지금이야말로 천하를 움켜쥘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거늘 어찌 그러한 낚시의 한가로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 "만약 노태상(老太上)께서

이 일을 아신다면 지하에서나마 크게 개탄......."

천예사는 말을 잇다 말고 안색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느새 소년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못박혀 있었다. 소년은 천예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천예사." 천예사는 황급히 얼굴을 바닥에 처박았다. "말씀하십시오, 태상!" "차후 내 앞에서 노태상의 이야기를 두 번 다시 거론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천예사의 몸이 바람도 없는데 부르르 떨렸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이마와 콧등에서 배어 나오는 건 식은땀이다. 소년은 다시 낚싯대 끝을 바라보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강태공처럼 고기나 세월을 낚는 것도 아니고 전성공처럼 운 명을 낚는 것도 아니오. 나는 다만 이 낚시를 통해 바로 나 자신 을 낚으려는 것뿐이오." "......?" 천예사의 얼굴에 곤혹스런 빛이 스쳐 갔다. 나 자신을 낚는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일까?


생각을 이어갈 겨를도 없다. 소년의 음성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므로. "과거 백 년 전 노태상이 서두르지만 않았다면 최소한 천하의 삼 분지 일은 얻었을 것이오." "......." "천예사." "말씀하십시오. 태상!" "당신은 즉시 독형제신궁(毒形帝神宮)으로 돌아가시오." "예?" 천예사는 하마터면 또 고개를 쳐들 뻔했다. "천하의 패권(覇權)을 얻고자 도모함에 있어 십 년 세월도 짧은 것... 당신은 독형제신궁의 궁주인 만큼 내 말의 의미를 생각하오."

파악하였으리라

천예사의 표정이 엄숙하게 변했다. "이 천예사의 우둔함을 나무라십시오. 아직 태상의 심중을 파악하 지 못했습니다. 허나 태상은 곧 저의 하늘! 목숨으로 받들겠습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천예사는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소년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 워낙 잘생기다 보니 찌푸린 얼굴조차 아름답다. "천하제일독(天下第一毒)...... 독공(毒功)으로는 천하 최강이나. 저 급한 성격으로 언젠가는 크게 당할 날이 있으리라......." 천하제일독(天下第一毒)은 지금 막 사라진 겁천독후 천예사를 일 컫는 말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천하제일독으로부터 만독의 제왕으로 불리는 소년의 정 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소년은 천천히 하늘을 응시했다.

명(命)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쾌청했다. 소년의 두 눈에 기이한 광채가 떠올랐다. "짚어 본 천기(天機)에 의하면 오늘밤 해시(亥時) 경 나는 이곳에 서 일 년간 기다린 보람을 찾는다."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소년은 그 나이에 벌써 천기를 헤아리는 능력까지 지녔단 말인가? "그렇게 되면 천하의 운명(運命)은 나 혁련소천(赫蓮 天)에 의해 완전히 뒤바뀌게 되리라......!" 문득 소년 혁련소천의 두 눈에 실낱같은 섬광(閃光)이 스쳐 갔다. 동시에 낚싯대를 쥔 그의 손이 미세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워낙 찰나지간이었기에 처음부터 아예 그런 일이 있은 것 같지도 않았다. 거의 때를 같이해서 혁련소천의 바로 옆에 한 인영이 불쑥 나타났다. 그가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그저 불쑥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던 것처럼....... 일신에 허름한 마의(麻衣)를 걸친 중년인이었다.

꽤 준수한 삼십대 중반 가량의

전체적으로 무정(無情)한 분위기를 지녔으면서도 왼쪽 뺨에 비스 듬히 그어진 검상(劍傷)이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모습이었다. 헌데 그냥 서 있는 게 아니다. 놀랍게도 중년인의 손에는 날이 시퍼렇게 선 검이 쥐어져 있었으 며 그 검은 혁련소천의 목덜미에 바짝 들이대어져 있었다. 중년인의 모습도 놀랍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혁련소천이다. 검이 목덜미에 닿아 있다면 당연히 안색이 변한다거나 놀라는 기


색이 떠올라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소년은 털끝만치의 변화 도 없었다. 낚싯대 끝을 응시하던 처음의 었다.

자세를 그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중년인은 그의 목에 검을 들이댄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혁련소천이 조용히 말했다. "빠르군. 일 년 전보다 최소한 두 배는 빨라졌어." 중년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스쳐 갔다. "이것이 바로 초형일섬(超形一閃)의

최고 경지입니다, 대영주(大令主)님."

아는 사이였던 모양이다. 헌데 대영주란 호칭은 또 웬 것인가? 중년인은 회심의 미소를 떠올리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이번엔 제가 이긴 것 같습니다. 대영주님!" 혁련소천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확실히 나는 피할 틈이 없었다." 중년인은 씩 웃었다. "그렇다면 이제 검주령(劍主令)을 건네주시는 것이......." "아니." "예?" 혁련소천은 나직하게 웃었다. "후후후...... 그대가 아직 나를 이겼다고 말할 수는 없지." "무, 무슨 말씀이신......?" "안 보이는 모양이군. 그대의 검과 내 목 사이에 가로막힌 물체 가......."


"......!" 중년인은 흠칫 그의 목언저리를 쳐다보았다. 순간 중년인의 안색이 순식간에 밀납처럼 창백해졌다. "이... 이것은......!" 검(劍)과 목 사이가 하나의 낚싯줄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중년인의 검은 혁련소천의 목덜미가 아닌 낚 싯줄에 닿아 있는 것이었다. 혁련소천의 조용한 음성이 중년인의 고막을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또 한 가지...... 그대의 거궐혈(巨闕穴)에는 나의 낚시바늘 하 나가 꽂혀 있을 것이네." "......!" 중년인은 크게 놀라 황급히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거궐혈(巨闕穴)은 약간의 충격에도 그 즉시 숨통을 끊어주는 치명 적 사혈(死穴)이다. 그 거궐혈에 낚시바늘 하나가 꽂혀 있는 걸 보는 순간 중년인은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그는 불신과 회의에 찬 눈빛으로 가슴과 혁련소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혁련소천의 시선이 처음으로 중년인의 얼굴을 향했다. "검주령에 대한 세 번의 도전 자격을 그대는 이번으로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 "이제 그대를 비롯한 검천(劍天)의 오 인(五人)은 무조건 내 명 (命)에 따라야 한다. 맞나?"


중년인의 전신이 폭풍을 만난 듯 격렬한 진동을 일으켰다. 그는 혁련소천에게 들이댔던 검을 맥없이 늘어뜨리며 탄식하듯 중 얼거렸다. "맞습니다." "그대는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 검(劍)으로만 논한다면 확 실히 나보다 한 수 위다." "......!" 중년인은 씁쓸한 고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혁련소천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나직하게 말했다. "냉유성(冷流星), 일 년 후 그대는 사형제와 더불어 황산(黃山)에 서 나를 만나도록 하라." 음성는 나직했지만 거기에는 태산처럼 장중하고도 항거키 어려운 위엄이 실려 있었다. 중년인 냉유성은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털썩 무릎을 꿇었다. "대영주님의 명(命), 어김없이 받드오리다......!" 번쩍! 하늘로 솟았는가 땅으로 꺼졌는가? 말끝의 여운은 아직도 공간을 맴돌건만 냉유성의 모습은 어디에서 도 찾아볼 수 없었다. "좋군. 그 정도 검법이라면 무림사를 통틀어 오 인(五人) 이상 없 을 것이고 쾌검(快劍)으로 치면 단연 으뜸으로 손꼽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 혁련소천은 만족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나직이 중얼거렸다. 진심에서 우러난 감탄이다. 그러나 그 말을 있다.

자세히 음미하면 실로 엄청난 의미를 발견할 수


까막눈이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을 수 없고 벙어리가 시(時)를 읊을 수는 없는 법이다. 바꿔 말해서 혁련소천이 천하의 모든 검법에 두루 통달해 있지 않 고는 절대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고기를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이 고기 맛을 논할 수는 없는 노릇 아 닌가. 이때 허공 어딘가에서 한 줄기 창노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만약 냉유성이 대종사(大宗師)님께 더 이상 무례를 범했다면 노 부가 그를 죽였을 것입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안 보이는데 이 음성은 어디서 흘러 나온 것일까? 거기다 대종사란 호칭은 또 무슨 말인가? 혁련소천은 이미 그의 존재를 를 지었다.

감지하고 있었다는 듯 빙그레 미소

"환사유풍(幻邪幽風), 그런 말은 마음 속으로만 접어 두는 것이라 오." "그, 그렇습니까?" 혁련소천은 낚싯대를 거두어 들였다. "환사유풍!" "말씀하십시오, 대종사님......!" "제갈천뇌(諸葛天腦)는 어찌 되었는가?" 그 말에 환사유풍이라 불리운 암중인(暗中人)은 지체없이 대꾸했다.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아무 염려 말라는 소식이 조금 전 일곱째에게 전해 왔습니다." "좋아." 혁련소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환사유풍, 그대의 칠 형제는 지금부터 내 곁에서 사라지도록 하시오." "지, 지금 무슨 말씀을......?" "지금 즉시 모두 내 곁에서 떠나라 하였소." "아니됩니다! 저희 칠 형제는......." "이제 나 혁련소천은 그대들의 도움이 없어도 모든 일을 충분히 처리할 능력이 있소. 내 말을 믿지 못하겠소?" 환사유풍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듯했다. "어, 어찌 감히......!" 혁련소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기억하시오." 그는 낚싯대를 어깨에 걸치며 무겁게 말했다. "지금부터 내 이름은 영호풍(令豪風)이오. 무공을 모르는 백면서 생이며 신분은 금릉(金陵) 대장군부(大將軍府)의 셋째 아들이오." "명심하겠습니다!" 스스스슷! 혁련소천의 바로 옆에 있던

바위가 갑자기 기체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렇다면 그 바위가 곧 환사유풍이었다는 얘기 아닌가! 환사유풍이 사라지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이번에는 귀곡소의 수면 이 소리없이 갈라지며 그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번뜩 솟구쳤다. 아니, 솟구쳤다 싶은 순간 그 빛은 이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 었다. 혁련소천은 허공의 어느 한 방향을 응시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수라마영(修羅魔影)......." 이번에는 뒤쪽의 땅 속에서도 경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한단지마(寒斷地魔)도 떠났군." 혁련소천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폭포를 바라보았다. 쿠쿠쿠쿠쿠! 육중한 물기둥을 쏟아내는 폭포의 물안개가 바람에 실려 혁련소천 의 얼굴에 와 닿았다. 산뜻한 감촉이다. 어쩐지 오늘은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 1 권 제 6 장 거대한 운명(運命) ━━━━━━━━━━━━━━━━━━━━━━━━━━━━━━━━━━━ 술시(戌時). 해시(亥時)까지는 아직 한 시진이 남아 있었다. 삼월(三月) 십오야(十五夜) 해시 정각! 천하무림의 흐름을 송두리째 뒤바꾸게 되는 그 시각의 의미를 알 고 있는 사람은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다.

두두두두두! 천간산에서 얼마 멀어지지 않은 관도(官道) 위를 자욱한 먼지 구 름을 일으키며 질풍처럼 치달리는 십기(十騎)의 인마(人馬)가 있었다. 마상(馬上)에는 모두 건장한 체구의 산뜻한 경장 차림의 무사들이 타고 있었다. 그 중 한 무사의 손에는 금빛 찬란한 깃발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깃발에는 금박의 글씨가 힘찬 필체로 수놓여 있었다.

<장군부(將軍府).> 이 하늘 아래 사는 사람치고 그것이 금릉 대장군부를 상징하는 깃 발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들은 바로 금릉 대장군부의 무사들이었다. 맨 앞에는 전신에 흑포를 걸치고 우람한 체구에 구레나룻을 무성 하게 기른 중년인이 타고 있었다. 일견키에도 일기당천(一騎當千)의 용맹한 기운을 전신으로 뿜어내 는 호걸풍의 모습이었다. 사도진악(司徒震嶽). 장군부 주인인 영호대인(令狐大人)이 가장 신임하는 심복 중 한 사람이며 어려서부터 무가(武家)에서 자란 전형적인 무인(武人)이 지만 그의 무공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은 영호대인을 제 외하곤 아무도 없다. 사도진악은 지금 영호대인의 셋째 아들인 영호풍을 맞이하러 가는 중이었다. 원래 영호풍은 타고난 체질이 병약하며 태어난 이래 하루도 질병 이 떠날 날이 없는 선천적인 약골이었다. 그러한 사실은 영호대인에게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영호풍이 세 살 때의 어느 날 영호대인은 한 명의 중(僧) 이 장군부 근처를 지나치는 것을 목격했다. 현자(賢者)는 현자(賢者)를 알아본다고 한 눈에 예사 중이 아님을 감지한 영호대인은 즉시 그 중을 장군부로 불러들였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눠 본 결과 영호대인은 그 중이 자신이 생각했 던 것 이상의 능력을 갖춘 고승(高僧)임을 확신했다. 영호대인은 그에게 영호풍을 맡아 줄 것을 정중히 요청했다. 고승의 뛰어난 불력(佛力)을 빌어 영호풍의 체질을 바꿔 보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다행히 중은 영호대인의 부탁을 받아들였으며 스스로 천계(天戒) 라 칭한 그는 영호풍을 데려가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 십삼 년 후, 천간산 불영암(佛影庵)으로 오셔서 영식(令息)을 데려가도록 하시오.


두두두두두...... 사도진악 등 십기(十騎)는 어둠을 가르며 쉴새없이 질주해 갔다. 달리면서 사도진악은 힐끗 하늘을 쳐다보았다. 휘황한 만월이 하늘 한복판을 덩그라니 차지한 채 은가루같은 달 빛을 온 누리에 뿌려 내고 있었다. "한 시진 전이다! 좀더 서둘도록 하라!" 사도진악과 수하들은 말의 복부를 더욱 힘차게 걷어찼다. 두두두두두두......

바로 그 시각. 만월을 응시하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었다. 선비 기질이 엿보이는 매우 준수한 용모의 은의(銀衣)중년인 이었다.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칼과 세 치 가량이나 뻗쳐 간 은빛 눈썹이 그의 인상을 매우 독특한 분위기로 특징 짓고 있었다. 그는 만월을 응시하며 계속 오른손을 흔들고 있었다. 짤랑...... 짤랑...... 그가 손을 흔들 때마다 쇳조각 부딪치는 음향이 규칙적으로 흘러 나왔다. "한 시진 후면 해시다." 오나가나 해시 타령이다. 도대체 오늘밤 해시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려나? "단 한 치의 허점도 용납될 수 없다!" 자신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중얼거리는 중년인의 두 눈은 확고한 신념의 빛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 제갈천뇌(諸葛天腦)는 제 이(第二)의 영호풍을 탄생시키기 위 한 이번 일에 모든 총력을 기울였다."


제갈천뇌라면 혁련소천의 입에서도 한 번 거론되었던 이름이다. 중년인 제갈천뇌는 문득 흔들던 바닥을 펼쳤다.

손을 멈추고 신중한 표정으로 손

손바닥에는 일곱 개의 동전이 기이한 형상을 이루며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제갈천뇌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하늘이 돕는다! 그렇다면 실패는 없다!" 그는 다시 주먹을 꽉 쥐며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남은 것은 여섯째 형 백변귀천(百變鬼天)의 능력 여부에 달려 있다."

사찰(寺刹). 말이 사찰이지 그것은 조그만 암자에 불과했다. 아마도 무척 오래 전에 지어진 듯 기왓장 하나 담을 쌓은 벽돌 하 나 하나에서도 짙은 고풍(古風)이 느껴진다. 나이를 짐작키 어려운 노승(老僧) 한 명만이 살고 있는 이곳의 입 구에 세워진 바위에는 세 치 깊이의 글씨가 뚜렷이 음각되어 있었다. 불영암(佛影庵). 스스로 천계(天戒)라 칭한 고승이 살고 다.

있다는 문제의 그곳이었

향냄새가 짙게 풍겨나는 그리 크지 않은 선방에는 지금 잿빛 가사 를 걸친 한 노승이 묵묵히 차를 마시며 방 중앙의 포단 위에 앉아 있었다. 눈썹은 서리같이 희어 귀 밑까지 늘어뜨렸고 허연 수염이 가슴을 완전히 뒤덮고 있어 전체적으로 인자하면서도 중후한 기품이 느껴 지는 노승이었다. 이 노승이 바로 천계선사(天戒禪師)였다. "오늘쯤이면 장군부의 사람이 오겠군."


천계선사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노안에 문득 우울한 그림자가 깔렸다. "헛허...... 풍아 그 녀석과도 꽤 정(情)이 들었거늘......."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미타불...... 아직도 수양이 모자라는 도다." 천계선사는 탄식 어린 불호를 읊조리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때 문 밖에서 맑고 낭랑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선사님!" 천계선사는 번쩍 눈을 떴다. "풍아냐?" "그렇습니다." 천계선사는 빙그레 반색의 미소를 떠올렸다. "들어오너라."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리며 한 소년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일견키에도 무척 준수한 미소년(美少年)이었다. 다만 안색이 지나치게 창백하고 다.

어쩐지 병약해 보이는 게 흠이었

바로 장군부 영호대인의 셋째 아들인 영호풍이었다. 영호풍은 문을 닫고 천계선사의 맞은편에 가서 조용히 앉았다. 천계선사는 한동안 영호풍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씁쓸한 고소를 떠올렸다. '쯧쯧... 십삼 년 동안 노력했지만 저 미간 사이의 검은 그늘만은 없애지 못했으니.......' 아닌 게 아니라 영호풍의 미간에는 거무스름한 그늘이 깔려 있었다.


'허나 어쨌든 고질병은 치료했으니 최소한 칠십 세까지는 살수 있 을 것.......' 헛고생을 한 건 아니다. 나름 대로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래 무엇을 하고 왔느냐?" 영호풍은 씩 웃었다. "책을 좀 읽었습니다." "녀석...... 몸이 허약할진대 매사에 무리가 없도록 하여라." "명심하겠습니다." 천계사는 웃음띤 얼굴로 자상하게 말했다. "손을 다오." "......!" 영호풍은 그런 일이 몸에 밴 른손을 내밀었다.

듯 지체없이 소매를 걷어 붙이고 오

천계사는 묵묵히 그의 맥문을 짚어 보았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진맥을 시작했다. 잠시 후 천계선사는 영호풍의 손을 놓으며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허(虛)한 기운은 여전히 남아 있구나. 앞으로 풍아는 내가 가르 쳐 준 불문토납진기(佛門吐納眞氣)를 매일같이 수련토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천계선사는 거기까지 말한 뒤 찻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바닥에 글 씨를 쓰기 시작했다. <풍아야,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글씨만 보아라.>


"......?" 영호풍은 의혹 어린 눈으로 천계선사를 쳐다본 뒤 다시 바닥을 응시했다. 천계선사의 손가락은 빠르게 움직였다. <천기를 짚어 본 즉, 오늘 밤 네 신변에 극히 위험한 사태가 벌어질 것을 감지했다.> 영호풍은 흠칫했다. "노선......." 천계선사의 손가락 하나가 번개같이 영호풍의 입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글씨를 쓰던 그의 손가락이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네 뒤쪽 벽의 족자를 밀치면 통로가 나타난다. 그곳에 가면 옷과 인피면구가 있을 것이니 그것으로 네 모습을 변장하고 직접 혼자 장군부로 가거라.> 천계선사는 영호풍의 표정을 힐끗 살펴본 후 다시 글을 이어갔다. <아무 것도 묻지 말고 즉시 실행토록 해라. 이것은 천기에 따르는 대응책인 즉, 네게 닥칠 화를 미연에 방지코자 함이니라.> 천계선사는 거기까지 쓰고 바닥에서 손가락을 떼었다. 영호풍은 심각한 표정으로 천계선사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러더니 돌연 영호풍의 얼굴에 갑자기 괴이한 미소가 씨익 피어올랐다. "일곱 째의 말대로 제법 하는 중놈이었군." 천계선사의 눈이 아연 휘둥그래졌다. "푸...... 풍아야, 너 지금......." "풍아? 제법 똑똑한 중놈인 줄 알았더니 형편없는 돌대가리군 그래!" 순간 천계선사는 퉁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호풍의 신형이 앉은 자세 그대로 붕 떠오름과 동시에 그의 우장


이 벼락치듯 허공을 갈랐다. 천계선사의 동작도

빨랐지만 영호풍의 동작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

"헉!" 천계선사는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반사적으로 일장을 뻗어 냈다. 꽝! 두 사람의 장력이 부딪치면서 엄청난 폭음이 터졌다. "욱!" 천계선사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뒤로 주르륵 밀려 나갔다. 그러나 그는 미처 신형을 가다듬기도 전에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영호풍의 손이 그의 완맥을 갈고리처럼 움켜쥔 것이었다. 영호풍은 그의 코 앞에 우뚝 선 채 차갑게 내뱉았다. "항마금강력(抗魔金剛力)인가? 이제 보니 아미(蛾嵋) 출신의 중놈 이었군." 천계선사의 눈은 더할 수 없이 확대되었다. "시...... 시주는 누구시오?" "백변귀천(百變鬼天), 그렇게만 알아라." "백변...... 그렇다면 풍아는......." "잘 모셔 두었다. 그리고 너와 영호풍은 이 시각부터 오 년 동안 이 세상에서 사라져 줘야만 되겠다." 천계선사의 얼굴이 온통 경악과 불신으로 뒤덮였다. "도대체 당신이 영호풍의 모습을 어찌 그렇게......." 그 말에 백변귀천은 신비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어리석은 중놈아, 자고로 진정한 변장의 대가들은 외


면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심지어는 관상까지도 똑같이 하는 법이니라." "......!" "천하에서 그런 없지."

능력을 가진 사람은 나

백변귀천을 제외하곤 단 한 분밖에

영호풍, 아니 백변귀천은 신비스런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비록 네가 천기는 바로 짚었으나 그것까지 짚은 사람이 있으리라 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천계선사는 그 말에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짚은 천기를 누군가 역으로 다시 짚었다고......?'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다급히 물었다. "누, 누가 천하에 누가 그런 능력을 지녔단 말이오?" 백변귀천은 괴소를 발했다. "후후...... 나의 아우 천우신기(天羽神機) 제갈천뇌와 또다른 한 분이시지." "또 다른......?" "나 백변귀천과 같은, 아니 나보다도 한 수위의 변장 능력을 지닌 그 분." 이때였다. "천계대사 계시오?" 문 밖에서 돌연 찌렁찌렁한 음성이 들려왔다. 천계선사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장군부에서 왔구나!' 백변귀천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비웃듯이 말했다. "흥분되는 모양이군, 땡초!" 천계선사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인가? 놀랍게도 백변귀천은 온데간데 없고 그의 앞에는 또 한 명의 천계 선사가 우뚝 서 있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다른 점은 털끝만치 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설사 쌍둥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똑같을 수는 없다. 갑자기 섬뜩한 예감이 천계선사의 머리 속을 스쳐 갔다. '음모(陰謀)! 이건 무서운 음모다!' 내심 부르짖는 그 순간 그는 목덜미와 허리 부근이 뜨끔해짐을 느꼈다. 아혈(啞穴)과 마혈(痲穴)이 동시에 제압된 것이다. "죽기 싫으면 숨도 크게 내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땡초!" 백변귀천은 속삭이듯 으름장을 놓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곤 문 밖을 향해 조용히 말하는 데 목소리며 그 모습이란 천 계선사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아미타불...... 누구시오?" 천계선사는 아예 넋을 잃고 말았다.

문 밖에는 십 기(騎)의 인마가 달빛 아래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늘 어서 있었다. 바로 사도진악을 위시한 장군부의 무사들이었다. 천계선사가 문 밖을 나서자 사도진악 등은 일제히 말에서 내려섰다. 사도진악은 천계선사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장군부 사도진악, 선사께 인사드리오." 백변귀천은 합장하며 인자스런 웃음을 흘려냈다.


"허허...... 어서 오시오. 사도시주!" "제가 온 것은......." "허허허...... 알고 있소이다. 풍아는 귀곡천류하에서 밤낚시를 즐기고 있으니 그곳으로 가 보시오." "선사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리오." 사도진악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훌쩍 말 등에 올라탔다. 백변귀천은 웃음띤 얼굴로 말을 건넸다. "영호대인께 전해 주시오." "무슨......?" "빈승은 곧 불영암을 떠나 천하를 주유할 예정이니 훗날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잊지 않고 전해 드리겠소. 그럼......." 사도진악은 다시 포권을 취한 뒤 말고삐를 힘껏 거머쥐었다. 이어 막 말머리를 돌리려는 순간. "사도시주!" "......?" 사도진악은 멈칫하며 천계선사를 돌아보았다. 사도진악을 바라보는 천계선사의 두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해시까지는 풍아를 만나게 될 것이니 밤길에 너무 서두르지 말고 조심해서 가도록 하시오." 사도진악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스쳐 갔다. 백변귀천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참, 사도시주께서는 풍아의 모습을 알고 계시오?" "그건......."


"인중용봉의 소년이 푸른 낚싯대를 들고 있으니 그가 바로 풍아외다." "거듭 감사드리오." 사도진악은 짤막한 대답과 함께 힘껏 말고삐를 잡아 당겼다. 말들은 자지러지는 듯한 울음을 토하며 힘차게 앞발을 내딛었다. 두두두두두...... 사도진악을 비롯한 십 기의 인마는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 신태비범한 한 황의노인(黃衣老人)이 우뚝 서 있었다. 송충이처럼 짙고 시꺼먼 눈썹에 횃불같이 타오르는 한 쌍의 호목 (虎目)에서 항거할 수 없는 위엄과 냉오한 기질이 엿보이는 인물 이었다. 일견키에도 절대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모습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옷은 걸레처럼 찢어지고 전신은 온통 피투성이었다. 첫눈에도 악전고투를 치렀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주위는 전신을 먹물같은 흑포로 휘감은 십 명의 복면인들에 의해 둥그렇게 에워싸여 있었다. 전광(電光)처럼 번뜩이는 눈빛과 유연하게 빠진 몸매들이 결코 예 사 고수들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끔찍한 광경인가? 놀랍게도 사방에는 최소한 백오십여 구는 됨직한 시신들이 산처럼 쌓여 있지 않은가? 보이느니 시체의 산이요 밟히느니 피의 강이라! 지옥(地獄)이 따로 없었다.


비릿한 피냄새로 가득 찬 려 퍼졌다.

공간 속으로 황의노인의 웃음소리가 울

"흐흐흐...... 이 무림에 나 철장마제(鐵掌魔帝) 감천곡을 이렇듯 함정에 빠뜨릴 수 있는 자가 있었다니......." 피냄새만큼이나 비릿한 음성이었다. 철장마제 감천곡은 소름끼치도록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며 주위를 쓸어 보았다. "대체 네놈들의 정체는 무엇이냐? 누구의 사주를 받고 나 감천곡 을......." 파파파팟! 위이이잉―!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십 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명의 복면인들이 아무 소리도 없이 일

검(劒), 도(刀), 편(鞭), 장(掌) 등의 공세가 폭풍처럼 휘몰아쳤 다. 감천곡의 눈에서 시퍼런 불똥이 피어 올랐다. "크흐흐흐...... 좋아 좋아! 나 감천곡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보여주마!" 다음 순간 그는 오른손을 번쩍 쳐들며 천둥같은 대갈을 터뜨렸다. "내관(內官), 외관(外觀), 소부(少付), 합곡(合谷), 철(鐵)의 기 운을 오지(五指)로 모은다!" 그의 다섯 손가락이 찰나지간에 시꺼먼 쇳빛으로 변했다. 찌르르르릉! 괴이하게도 고막을 찢을 듯한 져 나왔다.

쇳소리가 그의 손에서 뇌성처럼 터

한창 기세 좋게 덮쳐 들던 복면인들은 갑자기 귀청을 감싸쥐며 일 제히 멈칫했다.


감천곡의 입 밖으로 날벼락같은 광소가 터져 나온 것도 그때다. "와하하하...... 구철마수(九鐵魔手)의 제 일식(第一式) 철륜풍 (鐵輪風)!" 츠파파파팟! 쉬아아앙! 고막을 찢는 파공성과 함께 철편(鐵片)같은 강기( 氣)가 사방으 로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광섬(光閃)을 방불케 하는 그 엄청난 속도! 피하고 말고 할 생각조차 할 겨를도 없이 철편같은 강기는 복면인 들의 머리, 목, 배 등을 사정없이 앞뒤로 관통시켜 버렸다. 열 명의 복면인이 바닥에 나동그라진 것은 완전히 한순간이었다. 구철마수(九鐵魔手)! 공포(恐怖)의 신기(神技)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열 명의 복면인은 죽는 순간에도 비명을 내지른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한 사실은 감천곡에게도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이놈들은 대체......." 그는 한 시신에게 다가가 복면을 홱 낚아챘다. 감천곡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복면 속에 나타난 그것은 도저히 사람의 얼굴이 아니다. 제멋대로 짓뭉개진 그 얼굴은 잘 다져진 푸줏간의 고깃덩어리와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감천곡은 눈살을 찡그리며 시신의 입을 벌렸다. 입 안에는 마땅히 있어야할 혀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 이런 짓을......."


"바로 나다!" "......!" 감천곡은 대경하여 빙글 돌아섰다. 언뜻 만월 속에 하나의 금빛 그림자가 둥실 떠 있는 것 같았다. 본 것은 그것뿐이었다. 꽝! 감천곡은 미처 영문도 알기 전에 전신이 부서지는 듯한 충격을 받 았다. "우― 욱!" 그는 피분수를 내뿜으며 뒤로 거세게 퉁겨 나갔다. 그 순간 이루 말할 수 없이 음산한 한 파고들었다.

줄기 음성이 고막 속으로

"잘 가라, 감천곡! 구천십지만마전의 구천마제(九天魔帝) 중 제일 먼저 죽는 것이다!" 번― 쩍! 눈이 멀어 버릴 듯한 금광(金光)이 무서운 속도로 감천곡을 덮쳐 왔다. 막 신형을 가다듬던 감천곡은 찢어져라 눈을 부릅떴다. "대력금황기(大力金皇氣)!" 놀라는 바람에 그는 피할 여유를 놓치고 말았다. 꽝―! "크아아악!" 감천곡의 앞가슴이 종잇장처럼 터지면서 낙엽처럼 휘날려 갔다. 멀찌감치 날려 가는 그의 발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밑으로 끝을 알 수 없는 천길단애가


"으아아아아......." 단애는 감천곡의 몸과 비명을 순식간에 삼켜 버렸다. 스윽! 한 인영이 흡사 환영처럼 절벽 끝단에 떨어져 내렸다. 일신에는 화려한 금의(錦衣)를 걸쳤고 얼굴에는 같은 색의 복면을 목덜미까지 덮어쓰고 있었다. 그는 잠시 절벽 아래를 응시하더니 문득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와하하하...... 두고보라! 구천십지만마전! 늦어도 오 년 이내에 너는 내 것이 되고 말리라!" 그리곤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해시(亥時)를 정확하게 일각 남겨 둔 시각이었다.

"해시다......." 보름달이 폭포의 한쪽 절벽 이 날카로운 빛을 뿌렸다.

끝에 걸쳐지는 순간 혁련소천의 눈빛

그는 여전히 귀곡소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관심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있었지만 낚시는 이미

시꺼먼 물체 하나가 물기둥에 휩쓸려 폭포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저것이다!" 쉬이익! 낚싯줄이 형용할 수 없는 속도로 떨어지는 물체를 향해 쏘아졌다. 낚시바늘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물체의 끄트머리를 꿰 뚫었다. 휙! 물체는 낚시바늘에 걸려 정확하게 혁련소천의 옆에 떨어져 내렸


다. 놀랍게도 그것은 한 구의 시신(屍身)이었다. 혁련소천은 시신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더니 만족한 미소를 머금었 다. '됐어!' 바로 그때, "삼공자(三公子)님!" 한 소리 웅후한 외침과 더불어 십 명의 인물이 혁련소천의 뒤쪽에 바람처럼 나타났다. 그들은 사도진악을 비롯한 장군부의 무사들이었다. 그 순간 혁련소천의 눈가로 한 줄기 실낱같은 광채가 스쳐 갔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좋아.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 1 권 제 7 장 대야망(大野望) ━━━━━━━━━━━━━━━━━━━━━━━━━━━━━━━━━━━ 삼월(三月) 십오야(十五夜). 이곳은 천계선사가 쓰던 불영암 내의 선방이었다. 방 중앙에는 한 피투성이의 노인이 처참한 모습으로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안색은 완전히 잿빛으로 죽어 있고 숨은 쉬는지 안 쉬는지조차 분 간하기 어려워 생사지경(生死之境)을 헤매고 있음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헌데 이 노인이 누군가? 가슴은 속뼈가 들여다보일 정도로 깊이 파헤쳐져 있고 두 다리와 왼쪽 팔은 무엇엔가 걸려 찢겨 나가고 없었지만 그는 분명히 감천 곡이 아닌가!


감천곡의 옆에는 푸른 낚싯대 하나가 놓여 있고 낚싯대 옆에는 혁 련소천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결론은 하나다. 혁련소천이 낚싯줄로 잡아당겼던 시신은 바로 감천곡이었던 것이다. 혁련소천은 감천곡을 쳐다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놀랍군, 놀라워...... 이런 상태에서도 인간의 목숨이 붙어 있을 수 있다니....' 그 말은 아직도 감천곡이 완전한 시신이 아니라는 말과도 같았다. '노인장, 당신은 살아야 하오.' 천하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당신은 반드시 살아나야만 하오!' 나는 당신의 상처를 치료할 수도, 회생(回生)시킬 수도 있소. 그 러나 그것은 아니되오. 그렇게 되면 훗날 귀찮은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오.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백면서생이라야만 하오. 그러니까 당신은 반드시 스스로 살아나야만 하는 거요. 혁련소천은 감천곡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살아나시오. 당신은 구천십지만마전 구천마제 중 군마천(君魔天)의 천주(天主) 인 철장마제(鐵掌魔帝) 감천곡! 구천십지제일신마를 제외하고 그 누구보다도 강함을 자부하던 당신이 아니오? 그런 당신이 이렇게 허망하게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지나가던 개 가 들어도 배꼽을 쥐고 웃을 거요. 일어나시오, 제발! 혁련소천은 거의 간절한 마음으로 내심 부르짖었다.


그 정성(?)이 워낙 지극했기 때문일까? "으으음......." 미약한 신음 소리와 함께 죽은 듯이 늘어져 있던 감천곡의 몸이 미세한 움직임을 보였다. '됐어!' 혁련소천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것은 한 치의 오차라도 없애려는 내 계획을 하늘이 돕는 것이다!' 기적(奇蹟)! 감천곡의 회생은 확실히 기적이었다. 회생의 확률이 백분지 일도 안 되는 그 처절한 생사의 도박을 감 천곡은 승리로써 끝낸 것이었다. 하늘이 도왔는가? 아니면 감천곡의 뇌리 깊숙한 곳에 응어리진 처절한 복수심이 꺼 져 가던 생(生)의 불꽃에 기름이 되었는가? 아무튼 감천곡은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아나서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본 것은 평생 처음 보는 미소년, 혁련소천이었다. 그후 감천곡은 자신을 영호풍이라 소개한 이 미소년의 극진한 간 호를 받기 시작했다. 그에 힘입어 감천곡은 차츰 건강을 되찾아갔다. 그러나 웅후한 본신 내공 탓에 내상치료는 가능했으나 없어진 두 다리와 한 손만은 회복이 불가능했다.

어느덧 감천곡이 불영암에 머무른 지도 한 달이 지났다. 그러는 사이에 감천곡은 영호풍이라는 미소년 혁련소천에게 급격 한 애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백이십 평생은 홀홀 단신 제자도 없이 고독한 생을 누려 온 감천


곡이다. 일단 마음이 기울기 시작하자 둑터진 봇물이었다. 그 동안

혁련소천은 감천곡에게 의족(義足)을 만들어 달아 주었다.

유월(六月) 초닷새. 그 날은 감천곡이 혁련소천을 만난 지 꼭 팔십 일째 되는 날이었다.

초하(初夏). 이른 아침 산중의 공기는 맑고 신선했다. 혁련소천은 낚싯대를 둘러맨 채 유유히 산길을 걷고 있었다. 잔뜩 우거진 신록(新綠)에 흥이 돋워졌는지 그는 연신 콧노래를 흥얼대며 걷고 있었다. 이때 등 뒤에서 컬컬한 음성이 들려왔다. "허허...... 무척 기분이 좋은 모양이군. 영호공자!" "어?" 혁련소천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저만치에서 감천곡이 웃는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활짝 웃으며 돌아섰다. "어르신...!" 감천곡은 언뜻 보기엔 보통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걸어오는 것 같 았지만 자세히 보면 상체가 좌우로 약간 뒤뚱거리는 걸 알 수 있 었다. 원래 감천곡의 의족은 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워낙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장삼에 덮여 있어 누가 보면 다 리가 약간 불편한 사람이 걷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단지 왼쪽 소맷자락만은 걸음을

떼어 놓을 적마다 공허롭게 펄럭


거렸다. 혁련소천은 다가온 다.

감천곡의 몸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살펴 보았

"오늘은 좀 어떠십니까?" 감천곡은 기분 좋게 웃었다. "허허...... 영호공자 덕분에 무척 좋아졌네." "하지만 이렇게 무리를 하시면......." "걱정 말게. 이젠 거의 완쾌된 것 같으니까......." 혁련소천은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천운입니다. 처음만 해도 전혀 회생이 불가능한 줄 알았더니만......." 감천곡의 동공 깊숙한 곳에 순간 시퍼런 불길이 피어 올랐다. 그는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독백처럼 뇌까렸다. "노부는 절대 죽을

수 없다네. 최소한 이번 일을 규명하기 전에는......."

혁련소천은 밝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그만 하시기에 천만다행입니다. 소생은 그 동안 얼마나 걱정을 하였는지 모릅니다." 혁련소천을 바라보는 감천곡의 눈이 따스하고 부드럽게 빛났다. "영호공자는 언제쯤 장군부로 돌아갈 생각인가?" 혁련소천은 잠시 머뭇거리고 나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능하다면 내일쯤 떠나고 싶은 생각입니다만 노인 어른의 건강이......." 감천곡은 하나뿐인 손을 황망히 내저었다. "노부에 대해선 걱정 말게. 그렇지 않아도 노부가 자네의 갈 길을 막고 있는 듯하여 늘 미안한 생각뿐이었네." "별 말씀을......."


감천곡은 인자한 눈길로 혁련소천을 응시하더니 문득 은근한 음성을 발했다. "영호공자, 한 가지 물어 볼 말이 있는데......." "무슨 말씀이신지......." "영호공자의 가문은

장군부이니 만큼 무(武)를 지극히 숭상하겠지?"

혁련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호공자는 문(文)을 원하는가 무(武)를 원하는가?" 혁련소천은 싱그럽게 웃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장차 문(文)으로 성공해

볼 생각입니다."

감천곡의 눈가에 아쉬운 기색이 스쳤다. "그럼 무(武)에는 전혀 뜻이 없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쯧쯧...... 안타깝군." 감천곡은 나직이 혀를 차며 머리를 내둘렀다. "영호공자의 체질은 무예를 익히기에 더할 수 없이 특출한 것이라 네. 장담하건대 만약 자네가 무예를 익힌다면 몇 년 이내에 뛰어 난 절정 고수가 될 것이네." 혁련소천은 씁쓸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선천적인 약골에 영락없는 서생......." 감천곡은 그 말을 다급히 가로챘다. "아닐세. 노부는 노부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네."

혁련소천은 씁쓸하게 웃어 보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부는 자네에게 한 가지 선물을 하겠네."


"......?" "잘 들어보게." 감천곡은 혁련소천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천음지양(天陰地陽)... 건곤일체(乾坤一體)...... 극원흡기(極元吸氣)......." 그것은 일종의 내공심법(內攻心法)의 구결(口訣)이었다. 혁련소천은 자못 신중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구결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거의 한 식경에 걸쳐 구결을 끝낸 감천곡은 기대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혁련소천은 잠시 생각하더니 자신 없는 투로 대답했다. "글쎄요...... 뜻을 새겨 보건대 도가(道家)의 토납법(吐納法)인 듯 한데......." 그 말에 감천곡은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역시 문(文)에

통달하니 무(武)의 이치도 금방 깨닫는구나."

혁련소천의 얼굴이 가볍게 붉어졌다. "과찬이십니다." "흠......." 감천곡은 대견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다시 한 번 들려줄 테니 잘 새겨들었다가 기억하지 못하면 물어 보도록 하게." 이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혁련소천이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감천곡은 흠칫했다.


"무슨 말인가?" "조금 전에 들려주신 말...... 모두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 감천곡의 눈이 커졌다. '그럴 리가......? 아무리 기초 토납진결이라도 그 긴 구절을 한 번 듣고 모두 기억한다는 건가?' 혁련소천은 씩 웃으며 말했다. "제가 한 번 읊어볼 테니 틀렸으면 교정해 주십시오." 이어 그는 조금 전 감천곡이 들려준 구결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청산유수(靑山流水)! 도무지 막힘이나 거리낌도 없이 그 긴 구절들이 거침없이 흘러 나왔다. 감천곡은 입이 딱 벌어졌다. 백이십 평생을 살면서 지금처럼 놀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 그는 아예 넋을 잃고 말았다. '이 녀석은 신(神)이 내린 귀재다!' 불현듯 감천곡은 가슴 깊은 곳에서 거대한 욕망이 불끈 치솟는 것을 느꼈다. '절대로 이 녀석을 놓칠 수 없다!' 그의 그런 심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혁련소천은 맑은 하늘을 유유 히 감상하고 있었다. 그날 밤 감천곡은 정확하게 열여덟 번을 까무러칠 듯 놀라야만 했다. 이유인 즉, 감천곡은 그날 아홉 가지의 무공 초식을 혁련소천에게 전수했다.


그런데 이건 어찌된 판인지 혁련소천은 가르치기 무섭게 모조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한 번 본 것을 모조리 기억하는 건 고사하고 직접 시전함에 있어 서는 감천곡은 티끌만큼의 틈도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혁련소천이 초식을 전개함에 있어 내공이 없는 것이 흠이었 으나 감천곡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맙소사! 천하에 이런 신골(神骨)이 있었다니...!' 이놈은 용(龍)이다! 그것도 수백 년 만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감천곡은 완전히 혼(魂)을 빼앗긴 느낌이었다. '구천십지제일신마 단우비...... 저 아이는 절대 그의 아래가 아 니다! 아니 어쩌면 그의 자질마저 능가할지도 모른다!' 감천곡은 걷잡을 수

없는 흥분이 혈관 속을 미친 듯이 뛰노는걸 느꼈다.

'그렇다! 저 아이의 자질이라면 능히 제일신마의 보좌에 오를 가 능성도 있다!' 그날 감천곡은 자신에게 수십수백 번을 다짐하고 맹세했다. 그 다짐과 맹세가 무엇인지는 오직 그 자신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이별은 슬픈 법이다. 특히 감천곡에게 있어선 백이십 평생을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기 에 더욱 큰 슬픔으로 와 닿았다. 혁련소천을 태운 가마는 장군부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감천곡은 가마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선 자리에서 꼼 짝도 하지 않았다. 그가 허공으로 눈길을 옮긴 "맹세하리라......!"

것은 가마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 였다.


그의 호목에선 횃불같은 신광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영호풍...... 자네를 제구대(第九代) 군마천의 천주로 삼은 이후 기필코 제일신마의 보좌에 앉히고 말리라! 그리하여 내가 못다 이 룬 야망(野望)을 자네를 통해 완성하고야 말리라!" 뜻을 세우면 그 즉시 행동으로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체질이 감천 곡이다. 그는 갑자기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지난 칠십 년 동안 잊고 있었던 친구들을 찾아가리라! 그들의 능 력이라면 내게, 아니 영호풍에게 커다란 힘이 될 수 있을 것......!"

혁련소천은 흔들리는 가마 속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지금 한 권의 책자가 쥐어져 있었다. 혁련소천은 눈을 뜨고 수중의 책자를 응시했다. 그는 천천히 책자의 겉장을 넘겼다. 거기에는 한 장의 서찰이 끼워져 있었다.

<이 책자에는 장군부에 관한 모든 것이 적혀 있습니다. 다 읽으신 후 태우도록 하십시오.>

발신인도 적혀 있지 않은 서찰이다. 혁련소천의 입가에 씩 미소가 번졌다. '이 책자의 내용은 이미 내 머리 속에 완벽하게 기억되어 있다!' 푸스스스...... 책자는 순식간에 가루로 변해 떨어져 내렸다. 극상승(極上乘)의 양수공(揚手功)으로 책자를 없애 버린 것이다.


혁련소천은 다시 눈을 감았다. '내 예감이 맞는다면 감천곡은 한 줄기 거대한 불꽃이 가슴

늦어도 석 달 이내에 장군부로 나를 찾아 온다!' 속 저 깊은 속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구천십지만마전! 영원한 마도의 불멸혼을 기원한다는 지상 최강의 단체...!' 거기에 도전해 보리라! 구천십지만마전을 상대로 나의 능력을 시험해 보리라! 거대한 야망이 십육 세 소년의 가슴에서 맹렬히 소용돌이치고 있 었다. 이때 소용돌이치는 상념의 와중으로 한 귓전에 스며들었다.

줄기 전음이 혁련소천의

(백변귀천입니다.) 혁련소천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어찌 되었소?) (대종사님의 예상대로 감천곡은 동쪽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 (그의 친구인 천궁문(天弓文)의 무형천궁(無形天弓) 공손무외(公 孫武畏)와 홍의교(紅衣敎)의 홍포구마성(紅佈九魔聖)을 찾아가는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혁련소천은 조용히 눈을 떴다. 별빛같은 신광이 동공 깊숙한 곳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행적을 절대로 놓치지 않도록 하시오.) (흐흐흐...... 염려 마십시오. 당금천하에 넷째형 수라마영의 이 목을 벗어날 자는 오직 대종사님뿐이니까요.) 혁련소천은 빙긋이 웃을 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럼 속하는 이만.......) 백변귀천의 전음은 거기에서 끊어졌다. 혁련소천은 의자 깊숙이 상체를 파묻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장군부에 가면 한 가지가 문제로군. 옥산랑...... 영호풍의 약혼녀라 했던가?'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그 문제에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어쩔 수 없군. 일단 부딪쳐 보는 수밖에...!'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 1 권 제 8 장 천문-천하최강(天下最强)의 칠인 ━━━━━━━━━━━━━━━━━━━━━━━━━━━━━━━━━━━ 두두두두두...... 산동성(山東省)의 어느 관도 위를 일진의 기마대가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질주하고 있었다. 비록 십여 기(騎)에 불과했으나 그 위용은 아마 천군만마(千軍萬 馬)가 질주하듯 위풍당당하기 이를데 없었다. 또한 그들 십 기의 중앙에는 정교하고도 화려한 순금색 팔두마차 (純金色八頭馬車)가 미끄러지듯 질주하고 있었다. 마차에는 금빛 깃발이 양쪽으로 찢어질 듯 펄럭거렸다. 장군부(將軍府)를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이들은 다름 아닌 천간산을 떠나 온 장군부의 무사들이었다. 사도진악은 붉은 적토마에 몸을 싣고 마차 옆에 바짝 붙어 달리고 있었다. 때는 석양 무렵이라 붉게 타오르는 황혼 속에 천지간은 온통 핏빛 으로 채색되고 있었다. 사도진악은 문득 눈을 들어 전방을 응시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거대한 산악


이 시야에 쏘아져 들어왔다. 사도진악의 두 눈 깊은 곳에 한 줄기 기이한 광채가 솟아올랐다. '태산(泰山) 천극봉(天極峯)...!' 이 무렵 마차 안의 혁련소천은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은 상념에 잠 겨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의 미간에는 어쩐지 착잡한 기운이 어려 있 었다. 이때 그의 귀로 누군가의 전음이 들려 왔다. (대종사님, 태산의 천극봉입니다.) (알고 있소.) (어떡하시겠습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 갔다 올 생각이오.) 혁련소천은 혼자 말로 중얼거렸다. (나의 목적이 모두 이루어질 때까지는 천문(天門)을 철저히 봉쇄 시켜야 하니까.......) 그는 좌측으로 난 창(窓)으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지금은 유시(酉時), 한

시진 후 무진현(武進縣) 대성루(大成樓)에서 봅시다.)

한 쌍의 부리부리한 눈이 창 밖에서 크게 끔벅거렸다. (알겠습니다.) (한 시진 내에 무진현에 당도하려면 말의 속도를 한 푼 정도 더해 야 될 것이오.) (알고 있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도록 하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눈은 창 밖에서 사라졌다. 뒤이어 우렁찬 외침이 천둥처럼 터져 나왔다.


"모두 말의 속도를 한푼 정도 더하도록 하라!" 놀랍게도 그 목소리의 주인은 사도진악이었다. 혁련소천은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기이체현현도(以氣離體玄玄道).......' 내심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는 순간 그의 감은 두 눈을 통해 한 노 인의 모습이 영상처럼 떠올랐다. 그것은 양 손, 양 다리와 두 눈마저 없는 마치 뭉퉁한 고깃덩어리 와 같은 노인의 모습이었다. '사후(邪侯) 금자생(琴子生)...... 마음만 먹으면 천하를 단숨에 혈해(血海) 속에 처넣을 수 있는 어른.......' 비록 돌아가셨지만 그 분 금노야(琴老爺)의 모든 것이 내 몸 속에 깃들어 있다! 부르르...... 혁련소천의 전신이 순간 폭풍을 만난 듯 거센 경련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 토록 준미하던 얼굴이 졸지에 시체처럼 잿빛을 띠었다. 호흡의 수를 줄인다....... 전신을 공(空)으로 만들어 이체(離體)의 공(攻)을 돕는다....... 스스스스...... 혁련소천의 백회혈(百會穴)에서 한 가닥 희뿌연 기체가 스며 나왔 다. 그 희뿌연 기체는 스며 나오기 무섭게 하나의 사람의 형상으로 뭉 쳐지기 시작했다. 차츰 완연한 형상을 드러내는 그것은 바로 혁련소천의 모습이었 다. 이 무슨 통천경악할 괴사(怪事)인가? 믿을 수 없게도 인간의 몸

속에서 또 하나의 인간이 탄생된 것이


었다. 분리되어 나온 혁련소천은 앉아 보며 빙긋 웃었다.

있는 또 하나의 혁련소천을 쳐다

'이기이체현현도...... 이것을 익힌 나는 두 개의 목숨을 갖고 있다.' 내가 죽는다 해도 또 하나의 신체가 있는 이상 나는 재생한다. 단지 그렇게 되면

두 번 다시 이기이체현현도를 사용할 수 없을 뿐이다.

혁련소천은 문득 창가를 쳐다보았다. 창가의 미세한 틈을 통해 그의 신형은 이내 연기처럼 빠져나갔다.

태산 천극봉. 막 드리워지는 어둠이 그 운자를 조금씩 뒤덮어 가고 있었다. 그 어둠을 뚫고 비조처럼 천극봉을 향해 날아오르는 한 인영이 있었다. 유성(流星)이 흐르듯 놀라운 속도로 공간을 압축해 온 인영은 순 식간에 천극봉 정상을 밟고 우뚝 몸을 세웠다. 그는 다름 아닌 혁련소천이었다. "사 년 만에 돌아왔군." 혁련소천은 감회 서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극봉 정상에 있는 기이한 분위기의 커다란 호수는 푸르다 못해 검게까지 보이는 벽수(碧水)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 순간 호수의 수면에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파문이 수없이 일고 있었다. "녀석들......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군." 혁련소천은 호수를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리더니 문득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때마침 두 마리의 거대한 독수리가 어둠을 가르며 힘차게 비행하 고 있었다.


"잘됐어." 번― 쩍! 순간 혁련소천의 소맷자락에서 가느다란 혈선(血線)이 섬전처럼 쏘아져 나갔다. 끄아악! 기세 좋게 날아가던 두 마리의 독수리는 혈선에 몸이 관통되면서 처절한 괴성과 함께 선후로 호수 속으로 빠졌다. 다음 순간 독수리가 떨어진 곳에서 시뻘건 핏물이 쫙 번지는가 싶 더니 이어 허연 뼈만 드러낸 독수리가 수면 위로 둥실 떠올랐다. 설명은 길지만 이 모든 일은 었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이뤄진 것이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혁련소천의 입가에 다.

잔잔한 미소가 어려웠

"사망혈리(死亡血鯉)...... 저 놈들에게 걸리면 무쇠 덩어리도 남 아나지 못한다." 그의 눈에 문득 차디찬 한광(寒光)이 솟구쳤다. "두고봐라! 그 일만 규명되면 하토궁(蝦土宮)의 놈들은 모조리 사 망혈리의 밥으로 만들어 주리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혁련소천은 대뜸 호수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이 녀석들...... 나 혁련소천의 몸은 너희가 먹기에 너무 질기니 단념하도록 해라......." 동시에 그의 신형은 물방울 하나 퉁겨 내지 않고 빨려들 듯 호수 속으로 사라져 갔다.

석실(石室). 사방 넓이가 족히 백여 장은 됨직한 그곳은 차라리 하나의 광장이 었다.


석실의 한 쪽에는 일곱 개의 관(棺)이 나란히 놓여져 있었다. 관 앞에는 각기 하나의 제단이 세워져 있었고, 그 제단 위에는 위 패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혁련소천은 그 중 맨 우측의 위패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첫번째 위패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혈뢰사야(血腦邪爺) 혁련후(赫輦候) 신위(神位).>

위패에는 그런 글이 쓰여 있었다. "사 년 만에 뵙습니다, 혁련노야......." 혁련소천은 위패를 바라보며 감회 서린 음성을 말했다. "지난 사 년 동안 소천은 무척 바빴습니다. 그 결과 끝내 귀곡천 류하에서 멋진 고기 한 마리를 건졌습니다." 그의 두 눈에 문득 영활한 빛이 솟아났다. "소천...... 아직도 혁련노야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순간 혈뢰사야 혁련후가 입버릇처럼 떠들어 대던 말들이 주마등처 럼 혁련소천의 뇌리를 스쳐 갔다.

― 교활하라. ― 잔인할 정도로 영리하라. 허나 남에게 드러내지는 마라. ― 네가 적으로 간주하거나 너를 배신할 자는 두 번 다시 네 앞에 세우지 마라.

"그리고...... 노야께서 주신 십팔천혈뢰마서(十八天血腦魔書) 에...... 거기에 수록된 신계(神計), 귀계(鬼計), 마계(魔計), 악 계(惡計), 혈계(血計), 살계(殺計) 등의 마도십팔계(魔道十八計) 도 모두 이 소천의 몸에 스며 있습니다." "노야...... 당신과 내가

비록 피는 다를지언정...... 노야는 성


도 없는 내게 혁련의 성을 주신 분......." 혁련소천은 잠시 무거운 시선으로 혈뢰사야 혁련후의 위패를 바라 보았다. "노야, 걱정 마십시오. 구천십지제일신마 단우비...... 무림사상 가장 뛰어나다는 그에게 저는 도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이 일순 태양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이것은 나 혁련소천의 이름과 전부를 걸 고 약속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실로 하늘을 허물어뜨리고자 하는 위대한 야망(野望)이 아 닐 수 없었다. 혁련소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발길은 곧 두 번째의 위패 앞으로 향해졌다.

<앙천묵제(仰天墨帝) 희여송(希如松) 신위.>

"희노야...... 당신은 말했습니다."

― 소천, 너는 나의 무공을 이어 받았으나 나의 제자는 아니다. ― 네가 단우비를 꺾기 위해 마음 먹은 이상 무공이나 배분으로 네 위에 존재할 사람은 천하에 아무도 없다. ― 누구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마라. 아니, 고개조차 숙이지 마 라.

"당신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소천이 당신 앞에 무릎 꿇는 것을 용납치 않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지금도 소천은 무릎 꿇지 않겠습 니다." 앙천묵제 희여송의 위패를 바라보는 소천의 얼굴에 은은한 흠모의 기색이 떠올랐다.


"희노야, 당신의 기도(氣度)는 제가 가장 존경하는 것, 허나...솔 직히 약간 두렵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그는 문득 고소를 지었다. "후후...... 만약 제가 단우비를 꺾지 못하면 죽어서 어찌 당신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허나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저를 위해 전신 내공과 심지어 생명까지 버렸거늘...... 그런데도 실패한다면 당신이 제 게 물려준 천하제일강기(天下第一 氣) 살인마벽 천하제일강기 살 인마벽."

세 번째 위패!

<사후(邪侯) 금자생(金子生) 신위.>

털썩! 혁련소천은 그 위패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금노야...... 희노야께서는 제가 천하의 누구 앞에서도 무릎 꿇 지 말라 했으나 오직 두 분 혁련노야와 금노야 앞에서만은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위패를 쳐다보는 그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은...... 혁련노야는 제게 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을 주셨고 금노야는 바로 생명

문득 그의 두 눈에 뽀얀 물안개가 어렸다. "오늘...... 이기이체현현도를 전개하며 금노야를 생각했었습니 다." 소천의 망울진 눈물 속에 잠시 모습의 괴인이 투영되었다.

사지가 없고 두 눈이 없는 참혹한


순간 그의 입가가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켰다. "금노야께서 저술하신 사환천(邪幻天)의 일백팔기비공록(一百八技 秘功錄)이 비록 이 세상에서 소멸되긴 했지만...... 그 내용은 이 소천의 머리 속에서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했습니다." "금노야, 욕하실 지 모르겠으나...... 이제 일백팔기비공록에 관 한 한 금노야보다 한 수 위의 성취를 이루었다고 감히 자부합니 다." 혁련소천은 천천히 일어섰다. 이어 그는 세 번째 위패를 향해 마지막 눈길을 던졌다. "손녀를 찾아내라 하신 금노야의 마지막 부탁...... 전 중원을 모 조리 뒤져서라도 반드시 완수해 드리겠습니다."

<무풍마간(無風魔竿) 쌍비람(雙飛藍) 신위.>

혁련소천은 네 번째 위패를 보며 한 인물을 회상했다. 쌍비람...... 항상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노인...... 두 눈이 언 제나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던 그는 항상 술병과 낚싯대를 쥐고 다 녔었다. 그것도 정해진 듯 언제나 왼손에는 술병, 오른손엔 낚싯 대를...... 그는 혁련소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혀꼬부라진 음성으로 늘 이렇 게 말했었다.

― 이놈아, 나 쌍비람이 주정꾼이라고 얕보지 마라. ― 내 무쌍마영(無雙魔影)의 경공으로 말할 것 같으면 구천십지제 일신마 단가놈에게 두어 수 접어주고도 이길 수 있고....... ― 이 낚싯대 하나면 구주팔황(九州八荒)을 통째로 낚을 수 있다, 이놈아.......

"한 가지 사무치는 한(恨) 때문에 평생을 술과 살아야 했고 무림 에 조금의 이름도 남기지 못한 분......."


혁련소천의 눈빛이 음울하게 변해 갔다. "쌍노야...... 염려 마십시오. 하토궁의 세력이 아무리 크다 하나 소천은 반드시 그 일을 규명해 내고야 말겠습니다."

<만독천세(萬毒天歲) 신위.>

다섯번째 위패 앞이었다. 혁련소천의 입가에 문득 야릇한 미소가 서렸다. "독형제신궁(毒形帝神宮)의 노태상(老太上)어른...... 아직 동정 호는 독호(毒湖)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노태상의 염원은 이 루어지지 않을 것 갔습니다!"

만독천세 위지태로! 그는 혁련소천에게 자신의 모든 독공(毒功)을 전수했고, 독형제신 궁의 태상(太上) 자리를 물려주어 만독의 제왕이 되게 만들었다.

― 동정호가 모두 독(毒)이라면 인생의 진미를 깨닫겠거늘....... 늘 그렇게 말하며 한숨 쉬던 인물이 바로 위지태로였다. 그러나 혁련소천이 위지태로에게서 배운 요한 것이 있었다.

것 중엔 독공보다 더 중

그것은 태산이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을 초인적(超人的)인 정력(定 力)이었다.

혁련소천은 여섯번째 위패 앞에 섰다.

<태양검제(太陽劍帝) 용천승(龍天乘) 신위.>

태양검제 용천승...... 그는 한 마디로 검(劍)에 미친 사람이었 다.


― 갈대잎 하나면 천 명의 고수를 베고, 썩은 검이라도 한 자루 쥐어 준다면 내일 아침 태양이 둘로 쪼개져 뜨는 것을 볼 수 있으 리라!

그렇게 외치고는 호호탕탕하게 웃던 인물. 그는 혁련소천에게 천하의 모든 검법을 전수해 줬을 뿐만 아니라, 검주령(劍主令)을 주어 검천(劍天)의 대영주 자리를 계승하게 하 였다. 또한 그는 혁련소천의 성격 형성에 가장 영향을 끼친 인물 이기도 했다.

― 소천, 너는 천하인이 존경하는 약자(弱者)가 되고 싶으냐, 천 하인이 질시하는 강자(强者)가 되고 싶으냐? ― 소천, 천하의 그 누구도 네 위에 있는 것을 용납하지 마라. 만 약 그런 자가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죽여라! ― 소천, 네가 얻을 수 없는 것은 천하의 그 누구도 얻지 못하게 하라! ― 만약 네가 얻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취하 라! 그것으로 인해 천하인이 너를 욕한다면 너 역시 천하인을 욕 하라!

소천에게 수시로 한 이 말들처럼 태양검제 용천승은 평생을 그렇 게 살다 간 인물이었다. 혁련소천은 또렷이 위패를 응시하며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용노야...... 나는 천하인이 존경하는 약자도, 천하인이 멸시하 는 강자도 싫습니다. 나는 그저 위대한 강자가 되고 싶을 뿐입니다." 위대한 강자 - 참으로 멋진 말이 아닌가! "용노야, 당신의 다섯 제자 검천의 오 형제는 모두 초일급검수 들...... 능히 검천을 빛낼 것입니다." 혁련소천은 그 말을 끝으로 여섯번째 위패 앞에서 떠났다.


마지막 위패, 거기에 적힌 인물은 천하에 못하는 것이 없는 천하 잡기(天下雜技)의 달인(達人)이었으며,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천하만사무불통지자(天下萬事無不通知者)이기도 했다.

<천기개천(千技蓋天) 사사무(史査武) 신위.>

그는 하루에도 똑같은 말을 수없이 되풀이하는 버릇이 있었다. ― 만약 천하가 잡기(雜技)로 통하는 세상이라면 나는 일만 명의 황제를 종으로 부릴 수 있다! ― 내가 못하는 것은 하늘도 른다.

못하고 내가 모르는 것은 하늘도 모

사 년 전, 사사무는 운명 직전 혁련소천에게 물었다. ― 소천, 너는 나를 얼마만큼이나 알았느냐? 혁련소천의 대답은 너무도 엉뚱했다. ― 사노야, 만약 당신이 살아난다면 나의 것입니다.

다섯번째 수하로 삼을

그 말에 사사무는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 와하하핫...... 결국 내가 소천의 다섯 단계 아래라는 말! 네 놈의 수하가 되기 싫어서라도 죽고 말 것이다!

그렇게 가장 통쾌하게 웃다가 죽어간 노인...... 천기개천 사사무 는 그런 사람이었다.

"허나 사노야...... 솔직히 나는 아직도 당신에 대해 잘 모르고 있습니다. 사노야는 일곱 노야 중 가장 신비한 분이셨으니까요." 돌연 혁련소천이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나는 당신의 이름이 사사무라는 것도 의심하고 있 습니다!" 한참 동안 사사무의 위패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소천은 무거운 한 숨을 내쉬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혁련소천은 일곱 개의 위패를 말했다.

한꺼번에 쓸어 보며 강한 표정으로

"당신들 일곱 분의 노야는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 우리는 한 인간을 상상도 못할 괴물로 만들었다! 저 혁련소천 이란 이름의 괴물을!

"이 괴물은 마지막으로 이곳에 들렀습니다. 이곳의 입구인 천문 (天門)을 봉쇄하기 위해서......." 두 번째 나온 말 - 천문! "이곳의 위치와 이 안의 기관 장치는 너무나 훌륭합니다. 훗 날...... 저는 이 노야의 시신을 이용해서 천하를 상대로 한 번 멋지게 써먹을 것입니다." 혁련소천은 씩 웃었다. "하지만 욕하지 고......."

마십시오.

무덤까지 써먹는

나쁜 놈이라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 끝을 가리키며 짓궂게 미소지었다. "후후...... 그러니까 제가 괴물이 아닙니까?" 짓궂은 표정과는 달리 위패들을 쓸어 보는 소천의 두 눈에 애잔한 그리움이 감돌았다. 그는 슬슬 뒷걸음질치며 두 손을 장난스럽게 흔들어 보였다. "일곱 노야, 이제 괴물은 물러갑니다. 그럼......." 인사말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어느새 소천의 신형이 섬광처럼 허공으로 솟구쳤다.


"후후...... 두고 지......."

보십시오. 이 괴물이 천하를 어떻게 요리하는

섬뜩할 정도의 자신감이 서린 웃음이 일곱 개의 말없는 위패 위로 메아리쳤다 사라지는 괴물...... 그의 이름은 혁련소천이었다.

대성루(大成樓). 무진현 내에서 유일한 것이며 객점과 주루를 겸한 곳이었다. 사도진악이 호위하는 순금색 팔두마차는 요란한 소음과 함께 그 대성루 앞에 멈춰 섰다. 사도진악은 천천히 하늘을 응시했다. '꼭 한 시진이 걸렸다!' 다음 순간 사도진악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말에서 내려섰다. 이어 그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마차를 응시하며 말했다. "하룻밤 쉬어갈 곳에 당도하였습니다, 삼공자님." 사도진악의 말이 열려졌다.

끝나기가 무섭게 순금색

팔두마차의 문이 활짝

이어 말할 수 없이 준미한 절세미소년이 천천히 마차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혁련소천...... 바로 그였다. 그는 천천히 마차 밖으로 내려서며 공손히 시립해 있는 사도진악 을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수고했소, 사도총관!" 순간 허리를 숙인 사도진악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스 쳐 지나갔다. '역시......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 1 권 제 9 장 천우신기(天羽神機) ━━━━━━━━━━━━━━━━━━━━━━━━━━━━━━━━━━━ 밤은 이미 삼라만상을 짙은 어둠의 장막으로 뒤덮은 지 오래였다. 화려하진 않지만 단아한 분위기의 객실 안이 황촛불에 의해 조용 히 밝혀지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탁자에 잠겨 있었다.

앉은 채로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며칠 후면 장군부에 들어가게 된다.......' 불빛을 받은 소천의 얼굴이 윤기있게 빛났다. '장군부...... 당금 황실에서 가장 신임하고 있는 천위대장군(天 衛大將軍) 영호대인이 가주(家主)로 있는 곳. 그의 말 한 마디면 수백의 맹장(猛將)과 백만(百萬)의 군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문득 그의 두 눈이 신비로운 광채에 휩싸여 갔다. '후후...... 나 혁련소천이 신분을 위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굳이 장군부를 택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 위대한 야망(野望)의 성취를 위한 첫번째 포석(布石)! 허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오직 혁련소천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대종사님!" 천장 어느 구석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 나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혁련소천은 미동 없이 여전히 찻잔만을 응시한 채 말했다. "내려오시오, 제갈천뇌!" 순간 천장 한 귀퉁이의 미세한 틈이 스르르 갈라지더니 귀신처럼 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길게 자란 은빛 눈썹이 유난히 돋보이는 은의(銀衣) 중년인...그 는 바로 천우신기 제갈천뇌였다. 그는 내려서자마자 혁련소천을 향해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대종사님을 뵙습니다." 혁련소천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내밀어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이리 와 앉으시오." "감사합니다." 제갈천뇌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혁련소천과 마주 앉았다. 혁련소천은 조용히 물었다. "어찌 되었소?" 제갈천뇌는 잔잔한 미소를 떠올리며 공손히 대답했다. "모든 일은 완벽합니다. 굳이 흠이 있다면 너무 철저하게 완벽한 것이 흠입니다." "흠......!"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천천히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천뇌, 이제 내가 주의해야 할 점을 말해 주시오." "대종사님께서 주의하실 점은 없습니다. 단지 장군부의 몇몇 인물 에 대해선 확실히 알고 계셔야 할 필요가 있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장군부의 인물에 대해서라면 영호대인 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 정도로는 안 됩니다." 혁련소천은 흠칫한 표정으로 제갈천뇌를 바라보았다. . "그렇다면...... 무엇인가가 또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혁련소천은 검미를 약간 찌푸리며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제갈천뇌의 진중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먼저 영호대인의 출신 내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음......!" "면밀히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영호대인은 열두 살 때 당시 황궁의 대법사(大法師)로 있던 천축(天竺)의 기인 천룡대법사(天 龍大法師)의 천거를 받아 황궁무고(皇宮武庫)에 들어갔던 자로 밝 혀졌습니다." 찻잔을 들어가던 소천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황궁무고......?" "그렇습니다." "음......!" 혁련소천은 자신도 모르게 묵직한 침음성을 흘렸다.

황궁무고(皇宮武庫)! 감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일명 천추무상별부(千秋武相別府)라고도 불리는 그곳에는 천하의 무학이란 무학은 모조리 비장(秘藏)되어 있다고 한다. 허나 어떤 무학이 얼마만큼이나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천하무학 전체의 최소한 삼분지 일은 황궁무 고에 쌓여 있는 것이라고 하나 그 또한 확인된 바 없다. 황궁무고는 그저 신비(神秘) 그 자체가 되어 갖가지 소문과 전설 만 풍성하게 전해져 내려올 뿐이었다. '황궁무고가 만들어진 것은 이백 년 전이고 그 동안 그곳에 들어 갔다 나온 사람은 단 세 명뿐이라고 했다. 헌데 그 중 한 명이 바 로 영호대인이었다니......!' 혁련소천은 지금까지 생각해 온 영호대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번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갈천뇌는 계속해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뜻밖인 것은 영호대인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를 아는 사람이 아


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무공을 사용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혁련소천은 묵묵히 식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일 년 전, 딱 한 번 그를 보았을 때 저는 그의 심기나 재질 등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갈천뇌는 눈을 번쩍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또 한 가지...... 영호대인이 자신과 황궁의 안전을 위해 극비리 에 세 가지 조직을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순간 찻잔이 소리를 내며 탁자 위로 내려졌다. 혁련소천은 눈썹을 힐끗 들어올리며 제갈천뇌를 바라보았다. "조직을 만들어 놓았다고?" "그 중 두 가지는 아직 미확인 중이오나 한 가지는 알아냈습니다." 혁련소천은 의혹을 느꼈다. "어떤 조직이오?" "조직의 명칭은 '도감책'이라고 합니다." "도감책?" "그 조직의 주임무는 황실에 대한 모반(謀反)이나 역모(逆謀)를 감시하는 것이며 모두 열두 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도 감책의 수령(首領)은 영호대인의 첫째 아들인 영호환도(令狐煥道) 가 맡고 있습니다." 낮은 신음을 흘리며 혁련소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호환도는 영호대인이 가장 아끼는 아들입니다. 그는 겉보기엔 강직하고 성품이 대쪽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머리가 지극히 비상 하고 무공 또한 대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삼 년 전 호북성에서 일어난 취옥성 반란 때 당시 거사의 주모자였던 장비탁탑(長臂濁塔) 요월성(妖月


星)이 영호환도의 삼 초(三招) 공격에 목이 날아갔다고 합니다." 혁련소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요월성은 흑월교(黑月敎)의 일맥(一脈)으로 그 무공 수위가 능히 일문의 종사 격이지......." "그렇습니다." "헌데 이상하지 않소?" 혁련소천의 불쑥 내뱉는 질문에 제갈천뇌는 의혹 어린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혁련소천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영호대인의 능력이 그 정도라면 어째서 셋째 아들인 영호풍을 구 태여 천계선사에게 맡겼단 말이오?" 제갈천뇌는 빙그레 웃었다. "천하에서 벌어지는 일을 어찌 무공으로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영호대인이 천계선사를 택한 이유는 천계가 아미파의 의승(醫僧) 으로 무공보다는 의술에 더욱 정통함을 알아냈기 때문입니다." "음......!" 제갈천뇌는 정색하며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대종사께서 장군부의 일을 완벽하고 무사하게 끝내시려면 다음 두 명에게 각별한 주의를 하셔야만 합니다." 혁련소천은 흠칫했다. "영호대인과 영호환도 외에 또 있단 말이오?" 제갈천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중 한 명은 영호대인의 딸인 영호수아(令狐秀雅)입니다." "......!" "그녀는 무공의 무자(武子)도 모르는 전형적인 명문세족의 딸입니


다. 허나 그녀에겐 남에게 없는 특이한 능력이 있습니다." 혁련소천의 두 눈에 순간적으로 기광이 스쳐 갔다. "능력이라면......?" "영호수아 그녀는 천하의 어떤 짐승과도 대화가 통할 뿐 아니라 그것들에게 명령을 내리기까지 합니다." "......!" 혁련소천은 또다시 흠칫 했다. 그는 가볍게 검미를 찌푸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믿기 어렵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놀라운 일이군." "......." "또 한 명은 누구요?" 순간 제갈천뇌의 낯빛이 신중하게 굳어졌다. "석대선생(石大先生), 그는 영호수아의 글선생으로 이름은 알아내 지 못했습니다." "하면 어째서 그를 주의하란 말이오?" 그 말에 제갈천뇌는 씁쓸한 고소를 떠올렸다. "모르겠습니다." "응?" "어떻게 생각하면 좀 우스운 일이나 석대선생은 마치 안개와도 같 은 사람입니다. 출신 내력은 고사하고 이름조차도 신비에 싸여 있으니까요......." 혁련소천은 눈살을 가늘게 찌푸렸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인물을 주의하라니...... 마치 뜬 구름을 잡으라는 이야기 같군." 제갈천뇌는 잠시 침묵하더니 두 눈을 기이하게 빛내며 말했다.


"직감입니다. 석대선생을 처음 보았을 때 제가 받은 느낌은 차라 리 공포스러울 정도였습니다." "......!" "지나친 상상일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생각하기에 석대선생은 어떤 면에서도 결코 영호대인의 아래가 아닐 것입니다." 혁련소천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허나 그는 곧 평정을 회복하며 무겁게 입을 떼었다. "천뇌, 그대의 느낌이 그러하다면 믿겠소. 내 반드시 그를 염두에 두리다." 제갈천뇌는 혁련소천을 응시하며 소리없이 웃어 보였다. "아마...... 이번 일은 매우 잘될 것입니다." "......?" "왜냐하면 이번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대종사이기 때문입니다. 대종사께서는 장군부의 그 누구보다도 신비스럽고 무서운 분이시 니까요!" 그는 두 번의 대종사라는 말에 특히 힘을 주었다. 혁련소천은 나직이 웃었다. "후후...... 천뇌는 나를 너무 높이 평가하였소." 제갈천뇌는 그의 말에 눈빛을 기이하게 빛냈다. "결코 과찬이 아닙니다. 나 제갈천뇌가 비록 혈뇌사야 혁련후 어 른의 기명 제자에 불과하지만 결코 그 분의 아래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제갈천뇌는 강하게 눈빛을 발하며 혁련소천에게 말했다. "사 년 전 대종사님을 처음 뵈었을 때, 만약 저보다 밑이라 여겼 다면 아무리 혁련어른의 지엄한 분부가 있었다 해도 결코 대종사 를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갈천뇌는 문득 푸르스름한 안광을 쏟아 내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대종사님을 해치고 저 스스로의 야망을 위해 일했 을지도 모릅니다." 혁련소천은 담담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저 듣기만 했다. "대종사님, 명검(名劍)은 언제나 광채를 발하나 신검(神劍)은 때 가 이르러서야만이 그 빛을 발합니다." 제갈천뇌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대종사님의 기(氣)는 어느 정도 겉으로 드러나 있어 다른 사람의 눈길을 끌 염려가 있습니다. 비록 영호대인이 영호풍의 얼굴은 잘 모르고 있다 하나 타고난 기(氣)만은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갈천뇌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종사께서는 영호풍의 기와 맞추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혁련소천은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소." 순간 제갈천뇌의 얼굴에 감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때에 따라 적당히 굽힐 줄도 휘어질 줄도 아는 사람...... 과연 인물은 인물이구나......!'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깊은 신뢰와 감탄을 담은 채 일순간 부드럽게

이윽고 제갈천뇌는 혁련소천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갈천뇌의 신형은 연기처럼 흐려지더니 순 식간에 방 안에서 그 모습을 감췄다. 다시 혼자가 된 혁련소천은 천천히 찻잔을 들어가며 흡족한 미소 를 머금었다. "제갈천뇌...... 십만고수(十萬高手)와도 바꿀 수 없는 사람! 내 가 그를 얻은 것은 확실히 행운이다!"


그는 찻잔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만약 그가 나의 적이었다면...... 나는 행동을 함에 있어 지금보 다 백 배는 더 신중을 기해야 했을 것이다." 이미 식어 버린 차를 마시는 혁련소천의 입가엔 여전히 흡족한 미 소가 흐르고 있었다.

<장군부(將軍府).> 이 하늘 아래 살면서 이곳을 이 아니다.

모르는 자가 있다면 아예 그는 사람

최고(最高)의 부(富)와, 왕족(王族) 이상의 권세(權勢)와 영화를 자랑하는 대명(大明) 최고의 명문(名門)! 금릉(金陵)에서 천궁산(天弓山)을 뒤에 두고 수백 채의 고루거각 (高褸巨閣)이 육십만 평의 대지 위에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있는 그곳이 바로 장군부인 것이다. 땅거미가 짙어지는 유월(六月) 스무여드렛 날의 석양 무렵, 순금 색 팔두마차를 위시로 십 기의 기마대가 장군부의 육중한 대문 안 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마차의 창문을 통해 담담히 장군부의 내부를 감상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마차 밖을 응시하던 혁련소천은 천천히 창에서 눈을 떼 며 의자 깊숙이 상체를 파묻었다. 그 순간 뜻밖에도 그의 얼굴에 한 줄기 신비스런 미소가 은은히 피어올랐다. '후후후...... 드디어 군......!'

장군부에 거센

회오리가 휘몰아치겠

장군부의 회오리! 이것이 장차 전 무림에 파급될 일대 폭풍의 서곡(序曲)임을 그 누 구도 알지 못했으니.......


혁련소천을 태운 채로 십여 기의 기마대는 힘차게 장군 부안을 치 달리고 있었다.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 1 권 제 10 장 대장군부(大將軍府) ━━━━━━━━━━━━━━━━━━━━━━━━━━━━━━━━━━━ 장군부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며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장군부 는 물론 금릉 전체를 굽어보는 십팔 층(十八層)의 고루거탑(高樓 巨塔)! 그 전체 모습은 마치 한 마리 용(龍)이 승천하는 듯 웅장하고도 장엄했다. 뿐인가? 편액(扁額)에 씌인 글씨만으로도 보는 이를 압도시키고 있었으니 가히 사사로운 설명이 필요 없음이었다.

<승룡무후전(昇龍武侯殿).> 이곳은 바로 천위대장군 영호대인이 기라성같은 장군들과 더불어 대명(大明)의 정사(政事)를 의논하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일단 이곳에서 결정되는 사항은 황제의 황명(皇命)과도 같은 권위를 발휘하게 되니, 이곳은 부(富)와 명예와 권위의 상징 인 동시에 또 하나의 자금성(紫禁城)이기도 했다. 영호대인은 사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국사(國事)만을 의논했다. 허나 사 년 전 부인(婦人)이 세상을 떠난 뒤 그는 거의 모든 생활 을 이곳에서 하고 있었다.

갖가지 기화이초(奇花異草)가 한껏 만발해 있는 장군부 내 넓은 화원(花園)은 짙은 향기 속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사도진악은 혁련소천과 함께 를 묵묵히 걷고 있었다.

화원 사이로 난 청석대로(靑石大路)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저만큼 환상처럼 우뚝 서 있는 승룡무후 전이 두 사람의 시야를 가득 메우며 들어왔다. 문득 사도진악의 나직한 전음성이 혁련소천의 귓전에 잔잔히 들려 왔다.


(대종사, 오늘 절대 한 푼의 허점도 드러내선 안 됩니다.) 전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련소천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사도진악은 두 눈 가득 은은한 긴장된 빛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입 술을 달싹였다. "사 년 전 제가 사도진악으로 변신하여 이곳에 잠입한 이후 영호 대인을 볼 때마다 항상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습니다." "......!" "조심하십시오. 그는 설혹 하늘이 두 쪽 난다 해도 일점의 기색조 차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위인입니다." 혁련소천은 묵묵히 사도진악을 돌아보았다. 때마침 사도진악 역시 그에게 눈길을 던졌다. 순간 혁련소천은 사도진악의 두 감을 엿볼 수 있었다.

눈 깊숙한 곳에서 일렁이는 불안

허나 여전히 혁련소천의 눈빛은 신비스러울 정도로 깊숙이 가라앉 아 있을 뿐이었다. 문득 혁련소천의 입가에 눈빛만큼이나 신비한 미소가 피어 올랐 다. "그대는...... 비바람에 흔들리는 태산을 본 적이 있소?" 혁련소천의 입에서 흘러 나온 충격을 느꼈다.

이 한 마디에 사도진악은 움찔하는

전방을 쳐다보며 유유히 걸음을 옮겨가는 혁련소천의 뒷모습을 바 라보는 사도진악의 두 눈엔 그의 모습이 태산보다 더욱 커다란 산 으로 비쳐 들었다.

― 비바람에 흔들리는 태산을 본적이 있소?

그 한 마디는 사도진악의 불안감을 쓸데없는 노파심으로 일축해 버리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 난 지금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종 사...... 그는 정녕 태산이 아니었던가?' 그는 안색을 활짝 피며 황급히 혁련소천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혁련소천과 사도진악은 화원을 벗어나 승룡무후전의 문 앞에 당도했다. 맨 아래 층 입구의 육중한 철문(鐵門)은 활짝 열려 있었다. '문을 열어 놓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뜻...!'

매사에 자신이 있다는

혁련소천은 내심 생각하며 느릿하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말이 십팔 층이지 밑에서는 아예 그 끝도 보이지 않았다. 뿐이랴? 만년흑오강석(萬年黑烏剛石)을 통째로 깎아 세운 듯한 각 층의 벽면에는 수십 마리의 용(龍)이 한꺼번에 승천하는 문양이 생생하게 양각되어 있어 그 위엄을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 다. 여느 사람이라면 그 모습만 봐도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과연 대단하구나......!' 혁련소천은 내심 감탄하며 고개를 바로했다. 혁련소천과 사도진악이 막 문 앞에 들어서려는 순간. "천성(天性)!" 돌연 냉막하기 이를데 없는 음성이 안에서 불쑥 터져 나왔다. 순간 사도진악의 입에서도 지체없이 한 마디의 대꾸가 터졌다. "절적(節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예의 냉막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대인께서는 지금 휴식 중이오. 술시(戌時)까지는 외인(外人)을 배견치 않으시니 그때 다시 오도록 하시오."


사도진악은 그 말에 위엄 있게 대꾸했다. "나는 사도진악이다. 천간산의 삼공자께서 지금 막 도착하셨다." "......!" 안으로부터 잠시 응답이 없었다. "통과하시오." 잠시 후 예의 냉막한 음성이 한층 누그러진 채 흘러 나왔다. 사도진악은 혁련소천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이어 그는 성큼 앞장서 철문 안으로 들어섰다.

일 층(一層)은 탁트인 하나의 대전으로써 매우 넓고 화려했다. 이상스러운 건 넓고 화려함과는 달리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의 그림자라곤 도무지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상 그러할 뿐, 혁련소천은 대전 안으 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대전에 숨어 있는 고수들의 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모두 삼십육 명(三十六名)...... 한결같이 어느 수준을 넘어선 고수들이다......!' 단장을 뚫어 보는 눈(眼)이라도 가졌는가? 혁련소천은 사도진악의 뒤를 따라 이 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유유 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팔 층(八層)까지 올라오는 동안 도 없었다.

두 사람을 막아서는 사람은 아무

사도진악은 좌우를 한 차례 쓸어 본 뒤 다시 계단을 향해 다가갔다. 그 순간 검은 그림자같은 한 인영이 돌연 사도진악의 오른쪽에 불 쑥 나타났다.


사도진악은 일순 흠칫했으나 이내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나타난 인물은 양 손을 소매 중년인이었다.

깊숙이 넣고 서 있는 한 백의(白衣)

목상(木像)인들 이러할까? 마치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백의인의 얼굴은 거짓말처럼 무표정했다. 어떠한 감정도 나타내지 않은 채 백의인은 사도진악의 얼굴을 똑 바로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사도총관이시오?" 억양도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지독한 무심(無心)의 음성이었다. 순간 백의인을 바라보는 사도진악의 얼굴에 한 가지 의혹이 일었 다. "그대는 누구인가?" 백의인은 무감동하게 대꾸했다. "이름은 피요궁( 搖穹), 보름 전 대인의 부름으로 이곳에서 일하 게 되었소." "......!" "사도총관, 당신에 대해선 대인께 많이 들었소. 차후 많은 가르침을 바라오." 백의인 피요궁은 마치 글을 읽듯 빠르게 말을 마치더니 혁련소천 을 향해 가벼운 목례를 올렸다. "피요궁, 삼공자께 인사드리오." 혁련소천은 미간만 약간 찌푸렸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어 피요궁은 천천히 뒤로 했다.

물러나더니 예의 무심한 음성으로 말

"대인께서는 구 층(九層)에 계시니 올라가 보시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피요궁의 신형은 벽 속으로 스며들 듯 신비 하게 사라져 버렸다.


피요궁이 사라진 벽을 잠시 응시하던 혁련소천은 이내 미미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삼공자님, 구 층으로 오르시지요." 이때 사도진악의 공손한 음성이 혁련소천의 정신을 일깨웠다. "음......!" 혁련소천은 급히

벽에서 시선을 떼고는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올라가면서 그는 전음으로 물었다. (그가 누군지 알겠소?)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기로 무림에 피요궁이라는 고수는 없습니다.) 혁련소천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허나 그를 보니 연상되는 사람이 한 명 있소.) 사도진악은 움찔 했으나 묻지는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어느새 구 층 입구를 막아선 문 앞 에 당도해 있었던 것이다. 사도진악은 그 자리에 공손히 부복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인, 분부하신 대로 천간산의 삼공자님을 모셔 왔습니다." "들여 보내라." 곧장 안으로부터 조용한 음성이 들려 나왔다. 사도진악은 혁련소천에게 눈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이어 그는 문을 향해 다시 한 번 머리를 읊조렸다.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수고했다." 조용한 대답이 흘러 나오자 사도진악은 연기가 흩어지듯 그 자리


에서 떠나갔다. 홀로 문 앞에 서 있던 혁련소천은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이어 그는 마음을 다진 듯 천천히 문쪽으로 손을 뻗혀갔다. 헌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혁련소천의 손이 채 닿기도 전에 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려지는 것 이 아닌가. '음......!' 혁련소천은 실내 광경이 한꺼번에 시야에 않을 수 없었다.

들어오자 내심 놀라지

겉모습이나 팔 층까지의 화려한 내부와는 달리 그가 본 실내는 매 우 소박하고 단정하게 꾸며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닥의 자줏빛 자단피(紫檀皮), 호피(虎皮)를 씌운 푹신한 태사의 가 그나마 화려한 물건으로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태사의에는 전신을 깊숙이 파묻은 채 한 노인이 문 쪽 은 쳐다보지도 않고 묵묵히 책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눈보다 더 흰 백의(白衣), 반백의 머리는 뒤로 단정하게 빗어 넘 겼고 불그스레한 얼굴에 짧은 수염이 보기 좋게 자란 청수한 인상 의 노인...... 대명(大明) 최고의 명문 장군부를 이끌어 가는 천 위대장군 영호대인이 바로 이 노인이었다. 놀랍게도 천위대장군이라는 당당한 명호에도 아랑곳없이 그에게선 눈곱만큼의 무인(武人)다운 기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갔으나 영호대인은 이미 실내에 들어선 혁련 소천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여전히 책 위로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 다. 혁련소천은 한동안 영호대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이어 천천히 바닥에 엎드렸다. "소자 풍아, 아버님께 인사드립니다." 혁련소천은 공손히 세 번 절한 후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영호대인은 그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음, 십 년 만이구나." 그의 음성은 그저 담담했고 눈길은 여전히 책을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혁련소천은 조용히 말했다. "십삼 년...... 무척 오랜 세월이었습니다." "음, 고생이 많았겠다." 영호대인은 대답과 함께 책장 한 장을 넘겼다. 이게 바로 십삼 년 만에 만난 부자지간의 대화라고 어느 누가 믿 겠는가. "아버님은 여전하시군요." 담담히 흘러 나온 혁련소천의 말은 냉담할 정도로 감정이 없었다. "뭐가 말이냐?" "아버님은 지난 십삼 년 동안 소자에게 단 한 통의 서찰조차 주시 지 않았습니다." "......!" "사 년 전 어머님께서 돌아가셨을 때에도...... 천계 선사에게만 서찰을 주셨을 뿐 제게는 기별조차 안 하셨습니다." 영호대인은 묵묵히 또 한 장의 책장을 넘겼다. "아버님은 무(武)를 숭상하시는 분, 그렇기에 선천적으로 허약하 고 보잘 것 없는 체질의 소자를 못마땅하게 생각해 오셨습니다." 혁련소천의 음성은 차츰 고조되어 갔다. "해서 소자의 장래가 장군부의 명예에 오점을 남길 것을 염려하신 아버님은 저의 병을 치료한다는 명복 아래 세 살밖에 안 된 저를 천계선사에게 떠맡기셨던 것입니다." 이때 영호대인은 책을 덮고 느릿하게 혁련소천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말이 많아졌구나." 혁련소천은 냉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버님 덕분이죠." "소견이 좁다." "아버님만큼이나 좁을 것입니다." "......!" 영호대인은 문득 혁련소천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돌연 시종 물처럼 고요하던 영호대인의 예리하게 번뜩였다.

눈빛이 일순 독수리처럼

허나 그것은 찰나였을 뿐, 영호대인은 예의 그 잔잔한 눈빛을 회 복하며 조용히 말했다. "십삼 년 전과 달라졌구나, 너는." 혁련소천은 내심 뜨끔했다. 허나 전혀 내색치는 않았다. 영호대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느끼지 못했었는데...... 자세히 보니 예랑을 많이 닮았어." 예랑... 그것은 이미 타계(他界)한 부인의 이름이었다. "풍, 너는 알아야 한다. 이 아비가 장군부의 주인임을......!" "......!" "듣기로는 천계가 네게 무공을 전수했다고 하던데......!" 혁련소천은 고개를 저었다. "소자는 익히지 않았습니다." 영호대인의 얼굴에 언뜻 의혹이 기색이 스쳤다.


허나 묻지는 않았다. 그는 혁련소천을 잠시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이어 조용히 말했다. "강(强)해져라." "장군부의 명예를 위해서 말씁입니까?" "너를 위해서." 혁련소천은 영호대인을 똑바로 마주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강해질 것입니다, 소자는. 그리고...... 강해지기 위해 이미 한 분의 사부를 모셨습니다." "사부?" 영호대인의 눈에 언뜻 이채가 스쳤다. 그는 의혹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냐? 네 사부는......?" 혁련소천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감천곡이란 분입니다." 순간 영호대인의 안색이 확 변했다. "...... 구천십지만마전의 군마천주 감천곡이 네 사부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영호대인은 일순 복잡한 눈빛으로 혁련소천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곧 느릿하게 창문 쪽으로 시선을 옮겨갔다. 한 조각 편월(片月)의 잔광이

은은하게 창문 안으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다시 옆으로 시선을 돌린 영호대인은 수중의 책자로 천천히 시선을 옮겨갔다. 그는 책자를 천천히 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될 수만 있다면......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 혁련소천은 영호대인의 두 눈 깊숙한 곳에 어떤 우수의 그늘이 스 쳐 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는 갑자기 마음 한 구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왜일까? 이 마음은.......' 기억하기에 혁련소천이 성장하면서 지금처럼 갑작스럽고 묘한 감 동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책을 읽고 있는 영호대인을 묘한 감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혁 련소천은 곧 그런 생각을 지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물러가도록 해라." 혁련소천은 영호대인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어 그는 천천히 문 밖으로 물러 나왔다.

불씨를 안고 시작된 운명(運命)의 만남...... 그들의 첫 대면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 1 권 제 11 장 천하제일(天下第一)의 재녀(才女) ━━━━━━━━━━━━━━━━━━━━━━━━━━━━━━━━━━━ 천우헌(千宇軒). 천우헌은 장군부의 좌측에 위치한 아담한 소축(小築)으로써 이전 까지는 누구의 거처였는지 모르나 지금은 혁련소천의 거처로 정해 진 곳이었다. 혁련소천이 장군부에 들어온 지 사흘이 지났다. 천우헌 주위를 감싼 온갖 기화이초들이 만발한 정원(庭園)은 그야 말로 또 하나의 별천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중앙에는 꽤 넓은 인공(人工) 연못이 있고, 그 옆에는 하나의 팔 각정자(八角亭子)가 운치 있게 지어져 있었다.

하나의 흑오목 탁자 앞에 한 소년이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관옥(冠玉)같은 얼굴에 햇살같은 이마가 돋보이는 그 소년은 바로 혁련소천이었다. 초하(初夏)의 양광(陽光)이 따사롭게 쏟아져 내리는 오후, 그는 책에 온통 혼을 빼앗긴 듯 잠시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흠, 서천책략(瑞天策略)을 좋아하는가?"

읽고

있군.

아우는

진성공의

웅지(雄志)를

이때 매끄러운 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혁련소천이 깜짝 놀라 뒤돌아보자 어느새 나타났는지 경장 차림의 한 청년이 우뚝 서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준수한 용모에 안색이 창백한 이십팔구 세 가량의 그 청년은 일견 키에도 강직, 대쪽같은 성품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딱 벌어진 어깨와 잘록한 허리가 멋진 조화를 이룬 그의 체구는 마치 화강암으로 빚은 듯 무척이나 단단해 보였다. 그를 보는 순간 뜻밖에도 혁련소천의 얼굴에 반가운 빛이 가득 떠올랐다. "혀...... 형님!" "핫핫...... 아우, 사흘 전 얼굴만 내비치고 훌쩍 사라졌던 이 우 형을 용서해라." 혁련소천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무슨 말씀을...... 소제는 형님이 다사다망한 것을 알고 있기에 그 일은 벌써 잊은 지 오래입니다." "후후후...... 녀석!" 청년은 혁련소천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거린 후 맞은편 의자에 가서 앉았다. 바로 이 청년이 영호대인의 첫째 아들인 환우공자 영호환도였다.


도감책 수령(首領)을 맡고 있다는 신비(神秘)의 고수! 혁련소천은 사흘 전 그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었다. 당시 그는 영호환도의 기상이 으기 놀랐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남에 저

"장군부에 사람은 많으나 우형은 그 동안 무척 쓸쓸했었다." "......." "허나 네가 돌아왔고 곧 있으면 둘째도 돌아온다 하니 이제야 집 안에 활기가 넘치겠구나." 영호환도는 연신 껄껄 웃으며 기쁨을 금치 못했다. 혁련소천은 그의 느꼈다.

그런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유쾌해짐을

"헌데...... 둘째 형님은 대체 어디에 계시는 겁니까?" 혁련소천의 웃음띤 말했다.

질문에 답하듯 영호환도 역시 빙그레 웃으며

"오 년 전에 둘째는 해남검유문(海南劍儒門)의 제자로 들어갔단 다." "아......!" 혁련소천은 짐짓 탄성을 발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기실 이 순간 혁련소천이 받은 충격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해남검유문......!' 노랫가락처럼 전해 내려오는 하나의 전설이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도 바로 이때였다.

강북(江北)에는 검천(劍天)이...... 강남(江南)에는 검유(劍儒)가 있으니...... 그대여!


함부로 빠름을 자부하지 말라. 검천의 검영(劍影)은 귀신도 쫓아내고...... 그대여! 함부로 강함을 장담하지 말라. 검유(劍儒)가 하늘에서 웃고 있지 않는가!

강북의 검천(劍天)! 강남의 해남검유문(海南劍儒門)! 검(劍)에 관한한 사상 최강(史上最强)으로 손꼽히는 체.

두 개의 단

검천. 쾌(快)와 살(殺)과 동(動)을 주맥으로 삼으며, 문하생을 거둠에 있어 출신 내력이나 숫자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해남검유문. 변(變)과 유(柔)와 정(靜)을 위조로 하며, 철저히 일 인(一人) 직 계를 고수해 오기 때문에 문파라고는 하나 실상 일대(一代)에 한 명이 문맥(文脈)을 계승하고 있었다.

영호환도는 혁련소천의 얼굴에 서린 감탄의

기색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아우, 장군부가 비록 무림세가(武林世家)는 아니나 해남검유문보 다는 훨씬 뛰어난 정통 무가(正統武家)임을 잊지마라." 그 말에 혁련소천의 낯빛이 가볍게 붉어졌다. "명심하겠습니다." "결국에는 너도 무(武)에 뜻을 세워야 함도 잊지 말고......." "알고...... 있습니다."


영호환도는 문득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우는 어떤 무학을 배우길 원하느냐?" 혁련소천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윽고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문제에 대해선 조만간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핫핫핫...... 좋다! 아우의 그 기상이 마음에 들었다!" 영호환도는 엄지를 곧추 세우며 호탕하게 말을 이었다. "타인은 너를 보고 유약하다고 말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다. 너는 장차 크게 될 인물이다." "무슨 말씀을......." "아버님께 보여 드려라. 네가 이 우형보다 뛰어난 무인(武人)임을......!" "......노력하겠습니다." 영호환도는 문득 혁련소천의 양 어깨에 손을 올리며 힘주어 말했다. "아무튼 반갑다, 아우!" "마찬가지입니다, 형님!" 일순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 중에서 뜨겁게 뒤얽혔다. 잠시 후 영호환도는 잔잔한 미소와 함께 혁련소천의 어깨에서 손 을 떼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다시 오마. 그리고...... 잠시 후면 옥소저가 너를 찾아올 것이다." "......!" "비록 이번이 첫대면이겠지만 그녀는 분명한 네 약혼녀다." "음......." 혁련소천은 무겁게 신음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영호환도는 그의 그런 표정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기억해라. 천하에 쌓인 것이 여인이다. 또한 영웅은 결코 여인의 환심을 사려 하지 않는다." 혁련소천은 흠칫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영호환도는 두 눈을 야릇하게 빛내며 입을 꾹 다물었다. 허나 그의 음성은 분명히 혁련소천의 귓 속으로 스며들었다. (비록 그녀가 네 약혼녀이고 뛰어난 미인일지언정 애정이 나오지 않으면 그만두어도 무방하다는 말이다.) "파...... 파혼(破婚)을......?" (뒷일은 이 우형이 책임진다.) 혁련소천은 멍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영호환도는 싱긋 웃었다. "아우, 장군부의 후예는 모두 호랑이와 용(龍)이다. 넌...... 위대한 영웅이 되어라." 말이 끝나는 순간 번쩍 하는 빛과 함께 영호환도는 이미 작은 점 이 되어 까마득히 사라지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영호환도가 사라진 방향에서 한동안 시선을 뗄 줄 몰랐다. '영호환도...... 예상 밖의 걸물, 아니 거목(巨木)이다......!' '영호대인이 도감책의 수령을 맡긴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구나......!' 혁련소천은 내심 중얼거리며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순간 혁련소천의 눈빛이 파도치듯 흔들렸다. 정자 밖에 한 여인(女人)이 아니었다.

그림같이 서 있음을 보았기 때문만은

원래 그는 여인이 정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나타날 때부터 그녀 의 출현을 감지했었고, 영호환도 역시 그것을 눈치챘기에 불쑥 전 음을 펼쳤던 것이다. 그가 지금 이토록 놀라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햇살같은 광휘(光輝)를 휘몰고 나타난 여인의 얼굴! 도저히 속세의 사람이라곤 여길 얼굴 때문이었다.

수 없는 고귀하고도 아름다운 그

천만 명의 여인에게 나누어 줄 미(美)를 모조리 한 몸에 간직하고 나타난 듯한 이 여인. 혁련소천은 일시에 숨이 꽉 막히는 느낌이었다. '만약...... 저 여인을 한 번 보고 외면할 수 있는 남자가 있다 면...... 내 그를 결단코 첫번째 수하로 삼으리라!' 웃을 텐가? 천하의 천기개천 사사무같은 인물도 다섯째 수하로 삼으려 했던 그가 아닌가! 그 정도로 눈 앞의 이 여인은 아름다웠던 것이다. 눈, 코, 입 등의 부분을 꼬집어 흔해 빠진 미사여구를 갖다 붙인 다면 오히려 그녀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그녀의 그 어느 부분에서 흠을 찾아내느니 차라리 백사장의 모래 알을 헤아리는 것이 훨씬 쉬우리라. 이 하늘 아래 어찌 미녀(美女)가 한둘이겠냐만은 이토록 완벽한 미(美)의 조화를 이룬 사람은 오직 이 여인뿐일 것이다. 옥산랑이라 불리는 이 여인...... 그녀는 바로 혁련소천, 아니 영 호풍의 약혼녀였다. 대명(大明)의 정계(政界)에서 막강한 권력을 쥐고 흔들며 과거 영 상까지 지냈던 무관천자(無冠天子)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인물. 어사대부(御史大夫) 옥부상을 부친으로 모시고, 당금 황제의 누이 동생인 혜운군주(慧雲君主)를 모친으로 모신 더 이상 오를 수 없 는 명예와 부(富)와 미모를 한 몸에 지닌 최고의 재녀(才女)! 옥산랑은 그런 여인이었다. 지금 옥산랑은 정자를 향해 천천히 옥보를 내딛고 있었다. 흰 고양이를 품에 안고 머리에는 붉은 작약 한 송이를 꽂은 채로


찬란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구름을 밟듯 사뿐사뿐 내딛어 오 는 신비스럽고도 화려한 매력이여....... '흠.......' 혁련소천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태산이 무너져도 꿈쩍도 않을

초인적인 정력을 지닌 그가 아니었던가?

이윽고 옥산랑은 혁련소천과 다섯 걸음 정도의 간격을 두고 옥보 를 멈추었다. 이른 새벽 이슬 맞은 난초의 향기를 맡아본 적이 있는가! 천박하지도 는.......

고귀하지도

않은, 그래서

옥산랑의 몸에서 풍겨 나온 은히 스며들었다.

더욱

신선하게

느껴지

육향(肉香)이 혁련소천의 콧 속에 은

일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조용히 맞닿았다. 옥산랑은 몇 차례 봉목(鳳目)을 깜벅거리더니 무언가 말하려는 듯 붉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곳은 천우헌...... 당신이 영호삼공자이신가요?" 짤랑짤랑 흘러 나오는 이런 (玉音)같다 하던가!

류(類)의 음성을 일컬어 천상의 옥음

혁련소천은 담담히 말했다. "제대로 찾아왔소, 옥소저!" 순간 옥산랑의 봉목이 커졌다. "어머! 어떻게 소녀를......?" 혁련소천은 짓궂게 히죽 웃었다. "소저가 나를 알고

있으니 나 또한 소저를 알 수밖에 없지 않겠소?"

옥산랑은 일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허나 그녀는 곧 그런 표정을 지우며 화사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재미있는 말씀이시군요." 만약 방금의 미소를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대번에 사고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리라! 그녀가 무의식 중으로 짓는 그 미소는 그

토록 아름답고 황홀한 것이었다.

옥산랑은 문득 봉목에 이채를 떠올렸다. "그 분이 뭐라 하시던가요?" "천하에 소저보다 아름다운 미인은 없다 하셨소." 옥산랑은 입술을 앙증맞게 삐쭉거렸다. "피...... 영호대공자님은 그런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니에요." 혁련소천은 문득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천하에 쌓인 게 여자이니 구태여 옥소저의 환심을 사 기 위해 노력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소." 옥산랑은 갑자기 엄숙해진 혁련소천의 표정이 우스웠던지 옥수로 입을 가리며 나직이 웃었다. "후훗! 과연 영호대공자님다운 말씀이에요. 그래서...... 삼공자 께서는 그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혁련소천은 여전히 엄숙하게 말했다. "환심을 살 필요는 없으나 구태여 무심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오." 속이 허옇게 들여다보이는 말이 아닌가! 다시 말하자면 '네가 좋으면 나도 좋고, 네가 싫으면 나도 싫다' 그런 뜻이 담긴 말이었다. '후훗...... 생각보다 재미있는 사람이야.......' 옥산랑은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문득 탁자에 놓인 책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 책은 진성공이 연 나라에

연금 됐을 때 사방의 모든 적에 대


처하기 위해 저술한 것으로 아는데...... 소녀가 틀렸나요?" "맞았소." 옥산랑은 생긋 웃었다. "저 책을 읽는 목적을 여쭤 봐도 실례가 아닐는지......?" 혁련소천은 의식적으로 그녀의

눈길을 피하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생(生)이란 형극(荊棘)을 뚫는 게 아니겠소?" "그럴까요?" "아마 그럴 것이오." 옥산랑은 문득 야릇한 시선을 혁련소천의 왼쪽 어깨에 던졌다. 그 순간, 우연이었는가? 문득 바람에 실린 꽃잎 하나가 혁련소천의 왼쪽 어깨에 살랑 내려앉았다.

바로 그 시각, 천우헌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한 나무 위에 한 인영이 굵은 나뭇가지에 비스듬히 누운 채 오래 전부터 혁련소 천에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의 일신에 걸친 옷은 허름한 마의(麻衣), 뚜렷한 오관(五官)에 옷 밖으로 드러난 살결은 희다 못해 투명해 보일 정도였다. 나이는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인영의 가슴에는 한 자루의 목검(木劍)이 비스듬히 품어져 있었 다. "저 녀석이 셋째인 모양이군." 멀리 혁련소천을 응시하는 그의

두 눈에는 뜻밖에도 장난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후후...... 재미있군. 아주 재미있는 녀석이야...... 천하의 옥 산랑이 누군지도 모르고 나오는 대로 지껄이다니......." 그러면서 그는 고개를 약간 갸우뚱했다.


"헌데...... 옥산랑이 언제부터 저렇게 얌전해졌지? 아니야...... 저러다가 불끈 본성을 드러내면 셋째의 갈빗대 하나는 쉽게 부러질 걸?" 그는 씨익 웃었다. "허나 그렇게 되면 이 영호검제(令狐劍帝)가 저 옥산랑 엉덩이의 살점을 두 근은 도려내고 말 것이다." 그는 상상만 해도 즐거운 듯 미친 사람처럼 키득거렸다. "셋째 저 녀석...... 장군부의 자식으로 부끄럽지 않은 놈이다." 그는 문득 콧구멍을 후벼파며 두 눈을 야릇하게 빛냈다. "흐흐흣...... 어쨌든 기분 좋군. 집에 오자마자 저런 아우를 보게 되다니......." 그 말...... 자칭 영호검제라 말한 이 청년......! 한순간 영호검제의 신형이 누운 자세 그대로 허공으로 솟구쳤다. "흐흐흣...... 이 꼴을 아버님께서 보시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 지 궁금하군......." 그는 멀리 보이는 승륭무후전을 향해 비스듬히 쏘아져 갔다. 허나 그 순간 영호검제가 미처 알지 못한 시선이 있었다. 바로 한 쌍의 눈이 사라져 가는 그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시선의 주인이 바로 혁련소천이었음을.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 1 권 제 12 장 찾아온 군마천주(君魔天主) ━━━━━━━━━━━━━━━━━━━━━━━━━━━━━━━━━━━ 폭염이 내리 퍼붓는 성하(盛夏), 혁련소천이 장군부에 든 지도 어 언 한 달이 지났다.

정실(靜室). 아담하고 고아한 풍치가 서린 방 안이었다. 방의 한쪽에 언제부터인지 두 명의 노소(老少)가 마주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소년은 바로 혁련소천이었다. 지금 그의 맞은편엔 극히 청순하고 흰 백발이 몹시 인자스럽게 보 이는 칠순 가량의 노인이 대좌해 있었다. 그리고 바둑판 옆에는 한 명의 소녀(少女)가 귀엽게 쪼그리고 앉 아 바둑판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략 십사오 세나 되었을까? 실로 눈이 번쩍 떠질 만큼 현란한 절색(絶色)이었다. 만지면 분가루라도 묻어 날 듯 희고 고운 피부에 보석을 받아 놓 은 듯한 두 눈, 화편(花片)을 문 듯한 입술은 나이답지 않게 요염 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옥같은 뺨에 쏙 들어간 볼우물은 특이하면서도 야릇한 매력을 풍겨 내고 있었다. 허나 머리에 나비 모양의 장식을 달고 있는 전체적인 인상은 여전 히 치기를 벗어나지 못한 소녀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귀여운 소녀가 바로 영호대인의 금지옥엽인 영호수아였다. 그리고 혁련소천과 마주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 노인은 바로 영호 수아의 글선생을 맡고 있는 석대선생(石大先生)이었다.

흘러가는 시간을 무시한 채 두 노소는 일언반구도 없이 바둑에 열 중하고 있었다. 바둑판은 이미 흑백의 돌로 가득 메워져 있어 대국은 바야흐로 막 판에 들어섰음을 알 수 있었다. 석대선생은 바둑판을 들여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백돌을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보아 묘수(妙 手)를 생각하는 것이 역력했다. 반면 혁련소천은 자못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이윽고 석대선생은 신중하게 백돌을 바둑판에 놓았다.


신중을 말해 주듯 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묵직했다. 순간 혁력소천은 기다렸다는 듯 지체없이 좌상변(左上邊)에 흑돌 을 떨구었다. 석대선생의 안색이 더욱 침중해졌다. 그는 수염 끝을 비비꼬며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묘수로다......! 이것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역습이야......!" 그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이놈을 막자니 대마가 위험하고...... 포기하자니 너무 빠르 고...... 허허! 완전히 진퇴유곡이로구나......!" 누가 봐도 패색(敗色)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석대선생은 감탄 어린 눈빛으로 혁련소천의 얼굴을 응시했다. "정말 삼공자의 기예(技藝)는 대단하오!" 혁련소천은 빙그레 미소했다. "양보해 주시는 덕분이지요." 석대선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오. 삼공자는 내 평생 처음 보는 차원 높은 예기(藝技)를 구 사하고 있소." "......." "게다가 칼날같은 예리함과 끈질긴 근성까지 있으니 노부는 도무 지 당해낼 재간이 없소이다." 이때 옆에서 잠자코 있던 영호수아가 옥같은 치아를 드러내며 생 긋 웃었다. "그럼 사부님이 오빠에게 지신 건가요?" 석대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확실히 삼공자의 기예는 노부보다 한 수 위다." 이어 그는 혁련소천을 향해 묵직한 경탄성을 발했다.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모르겠으나 삼공자의 기예는 정말 대단하 오. 이 정도라면 왕년에 국수(國手)로 불렸던 천기개천 사사무에 도 절대 뒤지지 않을 것이오." 혁련소천은 담담히 웃어 보일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석대선생. 그는 열번 죽었다 깨어나도 상상조차 할 수 없으리라! 지금 눈 앞의 소년이 바로 그 천기개천 사사무를 다섯째 수하로 거느리고자 했던 인물임을! 문득 석대선생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삼공자, 시간 있다면 한 판만 더 두지......." "이미 끝난 바둑이오!" 순간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말이 석대선생의 말을 중단시켰다. 동시에 바둑판을 가득 메웠던 바둑알들이 어지럽게 사방으로 흩어 졌다. 찰나 석대선생의 눈에 야릇한 빛이 번쩍 스쳐갔다. 허나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혁련소천과 영호수아가 이미 석대선생의 뒤에 불쑥 나타난 인물에 게 시선을 옮겼기 때문이었다. 석대선생은 천천히 시선을 뒤로 향했다. 그의 등 뒤엔 예의 낡고 허름한 마의차림의 영호검제가 특유의 짓 궂은 웃음을 흘리며 우뚝 서 있었다. 석대선생은 조용히 입을 떼었다. "이공자께서 오신 것을 몰랐구려." 영호검제는 석대선생의 말에 들은 척도 안하고 돌연 엉뚱한 말을 지껄였다.


"대체로 늙은 사람들은 그저 그냥 지기는 싫어서 징그럽게 승부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지. 그래도 안 되면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엉 뚱한 변명만 늘어놓고......." 석대선생을 빗대 놓고 하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허나 석대선생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빙그레 웃음을 떠올렸다. "하지만 늙은이들은 만사를 너무 쉽게 생각하지 않는 신중함도 있 다오." 순간 영호검제의 입가가 묘하게 씰룩거렸다. "이상해, 인간들은...... 가끔 되지도 않을 일에 무서운 집착을 보인단 말이야. 포기할 줄 아는 것도 중요하다는 건 까맣게 모르 면서......." 이어 그는 영호수아를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안 그러느냐? 우리 귀여운 꼬마 아가씨야." 영호수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피이! 둘째 오빠는 언제나 궤변만 늘어놓는군요." "궤변?" 영호검제는 되묻더니 돌연 호탕한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너는 모르는구나. 세사(世事)의 절반은 궤변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이어 그는 영호수아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순간 영호수아는 코를 감싸쥐며 영호검제를 흘겨보았다. "아휴! 냄새...... 도대체 오빠는 목욕을 하시는 거예요, 안 하시 는 거예요?" 영호검제는 능글맞게 히죽 웃었다. "흐흣...... 네가 닦아준다면 하지."


"어머머! 별꼴이야. 아휴...... 기가 막혀......!" 영호수아는 목덜미까지 새빨개지며 영호검제에게서 고개를 홱 돌 렸다. 영호검제는 그런 그녀의 엉덩이를 툭치며 미소를 발했다. "흐흐흣...... 역시 수아는 순진하단 말이야." "어머낫!" 영호수아는 질겁을 하며 재빨리 옆으로 비켜 앉았다. "으핫핫핫...... 좋아, 좋아! 너 수아는 늙어 죽을 때까지 그렇게 순진해야 한다." 영호검제는 또다시 입이 찢어져라 광소를 터뜨렸다. 영호수아는 너무 기가 막혀 말문이 꽉 막혔다. '도대체 둘째 오빠라는 사람은.......' 그녀는 아예 질렸다는 표정으로 설레설레 고개를 내둘렀다. 이윽고 영호검제는 웃음을 그치며 혁련소천에게 시선을 던졌다. "셋째, 요즘 옥소저와의 일은 잘 되가나?" 혁련소천은 싱긋 웃었다. "가끔 만나고 있습니다." "흐흐...... 옥산랑은 천하제일 미인이기는 하지만 성격이 변화막 측하고 종잡을 수 없어 사귀기가 무척 힘들 것이다. 허나......." 영호검제는 문득 야릇한 안광을 쏟아 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여인도 쉽게 수중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영호수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어떤 방법인데요?" 영호검제는 그녀를 쳐다보며 음충맞게 키득거렸다.


"ㅋㅋ...... 별 거 아니다. 그런 여자는 그저...... 위에서 한 번 꾹 눌러 주면 된다. ㅋㅋ...... 그렇게 되면 어떤 여자라도 순한 양이 되어 매달리기 마련이지." 영호수아의 눈에 의혹이 솟았다. "위에서 한 번 꾹 눌러주다니요? 그게 무슨 뜻이죠?" "ㅋㅋ...... 이 멍청아...... 그것은 바로......." "험......! 이공자, 말이 너무 과한 듯 하오." 석대선생이 헛기침을 터뜨리며 영호검제의 말을 가로막았다. 영호검제는 그에게 힐끗 시선을 던졌다. "석대선생, 너무 점잖은 체 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보아하니 석 대선생도 젊었을 때는 그 짓을 꽤...... ㅋㅋㅋ......." 도무지 거리낌이 없는 말이고 행동이었다. 석대선생은 담담히 말했다. "이공자, 매사는 순행(順行)이 가장 좋은 법이라오." 그 말에 영호검제는 피식 조소했다. "순행? ㅋㅋ...... 웃기는 말이오. 순행을 하자면 만 가지 일을 하는 데 만 년(萬年)이 걸리오. 허나 역행은 만 가지 일을 단 하 루에 해치울 수도 있소." 석대선생의 안색이 처음으로 경미한 변화를 일으켰다. "이공자, 그 말...... 누구에게서 들었소?" 영호검제의 눈빛이 일순 깊숙이 가라앉았다. 입꼬리에 순간적으로 스쳐 간 이 일으킨 착각이었을까?

음침한 미소를 본 것은 석대선생만

영호검제는 석대선생을 똑바로 응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검유문의 늙은 영감이 오 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가르친 말이오."


석대선생은 어느새

원래의 담담한 안색을

회복하고 차분히 말했다.

"노부가 아는 검유자(劍儒子)는 절대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오." "그래서......?" "아무튼...... 이공자는 매사에 좀 더 신중해져야 하오. 아니면 언젠가는 크게 후회할 날이 닥칠 것이오." 표정과 음성은 부드러웠다. 허나 석대선생의 짧은 말 이고 있었다.

속에는 날카로운 비수의 예리함이 번득

영호검제는 툴툴 웃었다. "ㅋㅋ...... 정녕 몰랐구려. 석대선생이 관상까지 보는 사람일 줄은." 이어 영호검제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졸린 눈으로 혁련소천을 바라보았다. "셋째, 아까 한 말...... 기억해라. 여차하면 그냥 꾹 눌러 주면 끝나는 것이다." "후후...... 단단히 기억하겠습니다, 형님!" "ㅋㅋ...... 좋아, 좋아! 넌 역시 마음에 드는 녀석이다." 영호검제는 두어 차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열린 창 밖으로 훌 쩍 몸을 날려 사라졌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영호수아는 쪼르르 코 밑에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기어 나와 혁련소천의

"셋째오빠, 꾹 눌러 주는 게 뭐예요?" 혁련소천은 석대선생을 힐끗 쳐다본 뒤 쓰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글쎄......? 솔직히 나도 그 뜻은 잘 모르고 있단다." 영호수아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 피! 알고 있으면서 안 가르쳐 주는 거지?― 영호수아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무릎을 탁 치며 크게 소리쳤다. "그렇구나! 나중에 옥언니가 오면 물어 봐야지!" 혁련소천은 그 말에 아연 멍청해지고 말았다. '맙소사!'

금릉성(金陵城). 자금성을 끼고 있는 황도(黃道)인 만큼 그 성벽의 높이만도 여느 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두 명의 호성무사(護城武士)가 나른한 모습으로 성벽 위에 서 있 었다. 살을 태울 듯이 쏟아져 내리는 폭양(暴陽) 때문인지 까맣게 그을 린 그들의 얼굴에는 연신 비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문득 한 무사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이 땡볕에서 이게 무슨 고생이냐? 몇 시진만 더 있으면 고스란히 통구이로 변해 버리겠다!" 옆의 무사가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흐흐...... 옹가야. 조금만 참아라. 저녁 때가 되면 신나게 마작 이나 한판 돌리자." "흥! 나는 마작이고 개나발이고 다 필요 없으니 왕(王)가 네놈이 나 실컷 해라! 나는 술이나 실컷 퍼마시고 희랑 그 계집년이나 열 심히......." 말을 하다 말고 그의 눈이 아연 휘둥그레졌다. 금릉성으로 이어진 관도의 저편, 싯누런 황진이 마치 구름처럼 피 어오르고 있지 않는가?


두두두두둑...... 두두두...... 뿐이랴? 수백 기의 기마대가 지축을 뒤흔들며 질풍처럼 달려오지 않는가? 옹씨 성의 무사는 눈을 찢어지게 부릅뜨며 넋나간 듯 중얼거렸다. "와...... 왕가야! 저...... 저게 뭐지?" "술이겠지." 왕가는 쳐다보지도 않고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화소 계집년이나 끌어안고......." "이...... 임마......! 그...... 그런 게 아니다!" 옹가는 몸까지 부들부들 떨며 왕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야! 이 빌어먹을 놈이 왜 남의......." 왕가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홱 찢어졌다.

돌리다 말고 눈이 귀뿌리까지 쭉

두두두두...... 두두두......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는가? 금의인들을 태운 수백의 기마대! 그것들은 만산오악(萬山五嶽)을 그대로 허물어뜨릴 듯한 무서운 기세로 질주해 오고 있었다. "저, 저게 어디 군사냐?" "모...... 모르겠다!" 두 무사가 말을 주고받는 사이 뿌연 먼지 시원스레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구천십지(九天十地) 군마천(君魔天).>

속에서 하나의 깃발이


"구...... 군마천......!" "구천십지만마전이다!" 이 더운 여름날, 왕가와 옹가 그 두 되고 말았다.

사람은 졸지에 학질 환자가

그러는 사이에 이미 수백 기의 기마대는 그대로 성문을 통과해 가 고 있었다. 그들이 입성하자마자 성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두두두...... 두두두둑...... "뭐, 뭐냐?" "피...... 피해라!" 수백 기의 기마대는 성내의 들어서고서도 거침없이 중앙 대로를 질주해 갔다. 참으로 하늘이라도 뒤엎을 듯한 호호탕탕한 기세가 아닐 수 없었다. 성내의 백성들은 정란이라도 닥친 듯 대경실색을 금치 못했다. 그 뿐인가? 관부(官府)의 관병들도 아예 관아까지 닫아 걸고 있었으니......

구천십지(九天十地)! 그 넉자의 위력은 그 토록 가공한 것이었다. 옹가와 왕가, 그들이 정신을 차린 것은 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기마대가 금릉성을 통과

"저들이...... 가는 곳은......?" "장군부가 있는 곳이다!" "헌데...... 얼핏 같았는데......?"

보니까

그들의

중앙에는

"마차에도 깃발이 하나 꽂혀 있었어......!"

마차도

있는


전체가 흑단목으로 된 화려한 마차...... 거기에는 확실히 거대한 깃발 하나가 걸려 있었다. <군마천위(君魔天威) 만웅앙복(萬雄仰伏).> ― 군마천의 위세에는 마웅이 부복한다! 지금 그 깃발이 걸린 마차는 장군부의 육중한 대문 앞에 정지해 있었다. 마차의 좌우에는 수백 기의 기마대가 질서 있게 늘어서 있었다. 어느 한순간 둔중한 음향이 울리며 장군부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이어 위풍당당하기 이를데 없는 한 중년인이 대문 안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대문 앞에 당당히 버티고 서더니 좌우를 쓸어 보며 웅혼한 음성으로 외쳤다. "본인은 장군부의 총관 사도진악이라 하오. 영호대인의 영을 받아 귀하들의 방문 의사를 접수코자 하오." 순간 한 금의인이 그의 앞에 떨어져 내리더니 길게 장읍을 취했다. "구천십지만마전 군마천의 천주이신 철장마제 감천곡 어른께서 장 군부의 영호대인을 접견코자 오셨소." 그는 한 통의 첩지를 사도진악에게 정중히 건넸다. 사도진악은 첩지를 받으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달해 드리겠소." 그 말과 함께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순간 사도진악의 두 갔다.

눈에 한 줄기 야릇한

광채가 섬광처럼 스쳐

'이번에도...... 대종사의 예견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그 날은 천장마제 감천곡이 혁련소천과 헤어진 지 꼭 석 달이 되는 날이었다.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 1 권 제 13 장 두 거인(巨人)의 만남


━━━━━━━━━━━━━━━━━━━━━━━━━━━━━━━━━━━ 승룡무후전의 구 층(九層).

영호대인은 태사의에 몸을 파묻은 채 담담한 눈길로 전면을 응시 하고 있었다. 이때 문이 열리며 신태비범한 한 황의노인이 들어섰다. 왼쪽 소매가 헐렁한 것으로 보아 외팔이인 듯 했으나 그의 전신에 서 풍겨 나오는 위엄이나 냉오한 기도는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철장마제 감천곡, 바로 그였다. 일순 영호대인과 감천곡의 시선이 허공에서 조용히 뒤엉켰다. 두 사람의 눈빛은 그저 물처럼 고요할 뿐 실려 있지 않았다.

아무런 빛이나 감정도

잠시 기이한 침묵이 흐른 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감천곡이었다. "본인은 감천곡이오. 한 가지 일로 영호대인을 찾아 뵈었소이다." 우뚝 버티고 선 채 내뱉는 형식적인 인사말...... 그것은 상대가 천하의 천위대장군임을 조금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듯한 감천 곡의 태도였다. 영호대인은 의자에 깊숙이 앉은 채 조용히 말했다. "감천주의 명성은 익히 들어 왔소. 어서 오시오." 감천곡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의자에 가서 앉았다.

영호대인의 맞은편에 준비된

두 사람 사이에 마련된 탁자 위에는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두 개의 찻잔이 놓여 있었다. 영호대인은 감천곡을 똑바로 보며 입을 떼었다. "감천주께서 이 장군부를 찾아오신 이유는......?" 감천곡은 담담히 말했다.


"감모는 영호대인의 슬하에 세 명의 호자(虎子)가 있음을 알고 있소." "......." "본인은 그 중 한 명을 후계자로 삼고자 이곳을 찾았소이다." 영호대인은 짐작대로라는 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기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감천주는 잘못 찾아오신 것 같소." "......?" "장군부는 천하의 어떤 무가(武家)보다 뛰어난 가문이오. 그리 고...... 장군부의 자식은 결코 남의 아래에 서지 않소. 내가 용납치 않기 때문이오." "......!" "또 한 가지...... 외람된 말씀이나 나는 감천주의 무공이 장군부 의 그것을 능가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소." 감천곡의 눈썹 끝이 미세한 움직임을 보였다. 허나 그는 곧 평정을 되찾고 태연하게 말했다. "본인은 영식을 제자로 맞이하려는 것이 아니오. 당당한 군마천의 구대천주(九代天主)로 삼고자 하는 것이오." 영호대인의 입가에 일순 기이한 미소가 번졌다. "군마천주라...... 정말 엄청난 지위구료. 구천십지만마전에서 두 번째로 강한 조직이니까." "첫번째가 될 것이오." 감천곡은 두 눈을 빛내며 단언하듯 말했다. 영호대인은 미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과신은 금물이오." "확신이오."


그 순간 영호대인은 감천곡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 강렬한 신념의 불꽃이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영호대인은 문득 낮게 물었다. "감천주...... 세 아들 중 어떤 녀석을 원하시오.?" 감천곡은 서슴없이 말했다. "셋째 영호풍이오." 순간 영호대인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나 그는 곧 웃음을 그치고 기이한 표정으로 물었다. "감천주, 내가 왜 웃었는지 아시오?" 감천곡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또한 알고 싶지도 않소.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대인의 승낙 여부일 뿐이오." 영호대인의 입언저리에 일순 엷은 미소가 감돌았다. "만약...... 내가 거절한다면 어떡하시겠소?" 그 말에 감천곡은 기광을 번득이며 되물었다. "설마하니...... 대인은 이 감모가 대인께 무릎이라도 꿇기를 원하는 것이오?" 영호대인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는 감천곡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영호대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감천주!" "......." "그대는 생각보다 무서운 인물이구료." 영호대인은 문득 탁자 위의 찻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차가 식고 있소." "......!" "드시오. 월명국(月明國) 특산품이라 맛이 괜찮을 것이오." 순간 감천곡의 얼굴에 한 줄기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말씀......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여도 괜찮겠소?" 영호대인은 담담히 미소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언(無言)의 승낙이 아니고 무엇이랴? 감천곡은 싱긋이 웃었다. "고맙소." 이어 그는 손뼉을 탁탁 쳤다. 그러자 묘한 기음이 일며 곧이어 천장에서 세 명의 금의인이 떨어 져 내렸다.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의 삼십대 가량의 중년인들로서 가슴에는 각기<비(匕)>, 엽<(葉)>, <추(鎚)> 등의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들은 내려서자마자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부르셨습니까, 천주님?" 감천곡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 물건들을 내려놓아라." 세 금의인은 각기 하나의 금갑을 등에 메고 있었다. 그들은 즉시 금갑을 벗어 바닥에 내려 놓았다. 이때 영호대인의 나직하고도 담담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뜻밖이군. 검천주 이외에 세 었다니......."

명씩이나 승룡무후전에 들어 와 있


말은 그렇게 했으나 의외롭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감천곡은 문득 나직한 웃음을 발했다. "허허허...... 이해하시오. 본인의 몸이 약간 불편하기 때문에 이 들은 늘 본인의 곁에 따라 다니는지라......." 이어 그는 비(匕)자가 수놓아진 금의인에게 눈길을 던졌다. "열어라." "알겠습니다." 비자(匕子) 금의인은 즉시 금갑의 뚜껑을 열었다. 순간 갖가지 화려한 광채가 금갑 속에서 뻗쳐 나왔다. 금갑 속엔 오색찬란한 기광을 뿜어내는 주먹만한 보석들이 가득 차 있었다. 영호대인은 금갑을 쳐다보며 담담히 중얼거렸다. "신강(新疆)의 묘안석(猫眼石)이로군." "모두 백 개, 황금 십만 냥의 가치가 있소. 영호대인께 드리는 첫 번째 미비한 선물이오." 감천곡은 그렇게 말하며 엽자(葉字)가 새겨진 금의인을 향해 가볍 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두 번째 금갑의 뚜껑이 열렸다. 거기에는 전체가 은빛을 띤 하나의 소검(小劍)이 담겨져 있었다. 영호대인의 눈빛이 소검을 향하며 일순 미미하게 흔들렸다. 감천곡은 담담히 말했다. "고금신기백병(古今神器百兵)...... 고금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일백병기 중 서열 여섯번째에 올라 있는 은형마인(銀形魔人)이외다." "......!" "영식에 대한 선물이오."


그 말과 함께 감천곡은 마지막 금갑에 시선을 던졌다. 세 번째 금의인은 그 즉시 뚜껑을 열었다. 순간 영호대인의 안색이 눈에 띄게 변했다. 놀랍게도 마지막 금갑 속에는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인두 하 나가 들어 있지 않은가? 영호대인은 대뜸 그 인두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오승창......!" "그렇소. 몇 년 전 모반을 일으켰던 취옥성주 오승창이오." "이 자를 어떻게......?" "장군부에서 이 자를 줄곧 찾아다닌다고 들었소." 영호대인은 문득 감천곡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감천곡도 때마침 영호대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금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으며 일순 야릇한 눈빛이 오고갔다. 이윽고 영호대인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감천곡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태사의 깊숙이 상체를 묻으며 조용히 입을 떼었다. "피요궁." "부르셨습니까?" 극히 무감동한 음성과 함께 럼 나타났다.

한 인영이 영호대인의 뒤에 그림자처

영호대인은 전면을 응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감천주의 선물을 모두 접수토록 하라." "알겠습니다." "피요궁."


"말씀하십시오." "장군부에 들어온 군마천의 고수가 모두 몇 명이나 되는가?" 피요궁은 지체없이 대답했다. "승룡무후전에 저들 사 인(四人)을 포함해서 아홉 명(九命), 밖의 이백구십삼 명을 합쳐 모두 삼백두 명입니다." "사도총단에 알려

그들 각자에게 황금 일천 냥씩을 전달토록 하라."

황금 일천 냥! 언뜻 계산해서 십만 냥이 넘는, 그것은 감천곡이 가져온 묘안석 백 개의 가치보다 훨씬 웃도는 막대한 액수가 아닌가? 피요궁은 즉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영호대인은 여전히 전면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피요궁!" "말씀하십시오." "지금부터 네 죄를 묻겠다." 피요궁은 그 자리에서 즉각 무릎을 꿇었다. "죄가 있다면 달게 책벌을 받을 것입니다." 영호대인은 문득 차갑게 말했다. "너는 어째서 승룡무후전에 감천주 이외의 인물이 침입했어도 눈 치채지 못했는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허나 아는 것만으로 될 것 같아 그냥 있 었습니다. 그것이 죄라면 책벌하여 주십시오." 영호대인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번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위엄 있게 말했다.


"좋아...... 물러가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피요궁은 무릎 꿇은 그 자리에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순간 바닥으로 스며들었는가? 피요궁의 모습은 꺼지듯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영호대인은 천천히 감천곡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감천곡은 시종 담담한 미소를 머금은 채 조금도 동요됨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의 앞에 부복해

있던 세 명의 금의인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감천곡은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영식을 만나고 싶소이다." "안내해 드리겠소." 영호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느릿하게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켰다.

노웅(老雄), 늙었기에 더 무서운 두 거인(巨人)의 만남이었다.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 1 권 제 14 장 무형천궁(無形天弓) ━━━━━━━━━━━━━━━━━━━━━━━━━━━━━━━━━━━ 지난 삼 일 간은 줄곧 폭우가 쏟아졌다. 찌는 듯한 무더위를 말끔히 씻어 주는 비...... 이 비가 그치면 가을(秋)이 시작되려나? 천우헌의 정원 내에 있는 꽤 넓은 인공 연못, 그 옆의 우아한 정 취를 풍겨 내는 팔각 정자에 한 소년이 걸터앉아 푸른빛 낚싯대를 연못에 드리우고 있었다. 집안의 연못에서 낚시질이라니...... 누가 봐도 우스운 일이 아닌가? 허나 그 우스운 일을 하고

있는 혁련소천의 표정은 이 순간 그야


말로 진지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낚싯대 끝을 쏘아보며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는 그의 모습은 마 치 소중한 보물이라도 낚으려는 듯 몹시 신중했다. 그러나 그가 쏘아보는 낚싯대의

끝은 언제까지도 움직일 줄을 몰랐다.

타는 듯한 노을을 받아서인지 혁련소천의 눈빛은 더욱 진지하게 불타올랐다. 낚싯대를 드리운 채 그는 꼬박 세 시진을 그러고 있었다. "영호공자,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때 혁련소천의 등 뒤에서 컬컬한 음성이 울렸다. 바로 그 순간, 혁련소천은 낚싯대의 끝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걸렸다!" 혁련소천은 탄성을 내지르며 낚싯대를 힘껏 잡아챘다. 그러자 팔뚝만한 비단잉어 한 마리가 낚싯줄에 걸려 따라왔다. "하하...... 요놈! 드디어 걸렸구나!" 혁련소천은 퍼덕거리는 비단잉어를 옆의 바구니에 집어 넣으며 유 쾌한 웃음을 발했다. 이때 한 황의노인이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너털웃음을 쳤다. "허헛...... 정원의 연못에서 낚시질이라...... 이 늙은이가 이해 하기 힘든 일을 하고 있군." "아, 노인장께서 오셨군요." 혁련소천은 그때서야 반색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황의를 걸친 그 노인은 다름 아닌 감천곡이었다. 감천곡이 장군부에 온 지도 어언 닷새, 그간 감천곡은 영호대인의 배려로 혁련소천과 매일 같이 있다시피 하고 있었다. 감천곡은 웃음띤 얼굴로 혁련소천을 바라보았다.


"영호공자, 낚시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는가?" 혁련소천은 눈에 이채를 담고 되물었다. "노인장께서도 어제 한 시진 동안 이곳에서 낚시를 해보셨지요?" 이 무림에 군마천주 감천곡을 노인장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단 언컨데 혁련소천 한 명뿐이리라! 허나 감천곡은 왠지 그런 칭호가 그다지 싫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감천곡은 껄껄 웃었다. "헛헛...... 공자의 권유대로 하긴 했었지만 한 마리도 잡히지 않더군." 혁련소천은 씩 웃었다. "맨 처음...... 저는 한 시진에 열 마리를 잡았었죠." 그는 바구니 속의 비단잉어를 다시 연못으로 내던지며 말을 이었다. "허나 지금은 세 시진에 한 마리도 낚기 어렵습니다." 감천곡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런가?" "저는 잡은 고기를 모두 다시 놔줬는데 한 번 혼이 난 놈들은 다 시는 미끼를 물지 않는가 보더군요." "흠...... 일리가 있는 말이로군." "어쩌면 그놈들은 다른 놈들에게 주의를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무슨 주의를......?" "밖에서 낚시하는 인간의 유혹에 절대 넘어가지 말라고 말입니 다." 감천곡은 그 말에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재미있는 말이군."


허나 혁련소천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낚시질할 때보다 더욱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재미있지요. 어쩌면 인간의 삶도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는 것인지 도 모르고요." 감천곡의 얼굴에서 일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연못...... 물고기...... 세상...... 인생.......' 그는 갑자기 머리 속이 혼란해짐을 느꼈다. '뭔가 깊은 뜻이 담겨 있는 듯한데......?' 그는 혁련소천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마치 그에 대한 해답을 혁련소천의 표정에서 찾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이때 혁련소천은 천천히 낚싯대를 거두어 들였다. 감천곡은 흠칫 물었다. "왜...... 그만두려나?" 혁련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떤 낚시꾼이 와도 이곳의 물고기만은 낚지 못할 것입니다." "그...... 그럴 테지." 감천곡은 얼떨결에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알 만하군. 어째서 감형이 공자에게 그토록 반했는지......." 이때 허공 어디선가 카랑카랑한 웃음이 울려 퍼졌다. 혁련소천과 감천곡은 약속이나 한 듯 거의 동시에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그 순간 한잎 낙엽이 떨어져 내리면서 두 개로 나뉘어지는 모습이 두 사람의 시야에 맺혀졌다. 헌데 이 무슨 조화인가!


둘로 떨어지던 낙엽이 다시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네 개로...... 또다시 여덟 조각으로

그리고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에

그것들은 이미 가루로 화해 있었다.

헌데 바로 그 순간 가루가 떨어져내린 바로 그곳에 한 인영이 환 영처럼 신비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특징 따위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너무도 평범해 보이는 마의(麻衣)의 촌로(村老)였다. 허나 그가 나타날 때 보여준 신법은 이미 그가 평범한 촌로가 아 님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가장 평범한 것은 가장 뛰어난 것과도 통하는 법!' 혁련소천은 마의노인을 보는 순간 대번에 그렇게 느꼈다. 마의노인는 왼손에 손바닥만한 활(弓) 하나를 쥐고 있었다. 그것은 장난감처럼 예쁜 은빛 활이었다. 그가 나타나자 감천곡은 반색하며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어떤가, 공손형(公孫兄)? 노부의 말이 마의노인은 혁련소천의 얼굴을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할 테지?"

뚫어지게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노부가 너무 평범하게 생겨서 그런지 모르지만 영호공자는 너무 미남이야. 그게 마음에 들어." 감천곡은 그 말에 기대 어린 눈빛을 번쩍였다. "그렇다면 공손형은......?" "찬성이네. 노부는 전날 자네가 제안했던

의견에 무조건 찬성이네......!"

감천곡의 얼굴에 일순 만족스런 미소가 흘렀다. "후후...... 내 그럴 줄 알았네." 이어 그는 혁련소천을 쳐다보며 말했다.


"영호공자, 이 친구는 노부와 각별한 사이이며, 섬서성 천궁문(天 弓文)의 문주 무형천궁(無形天弓) 공손무외라는 위인일세." 혁력소천은 낚싯대를 내려놓고 정중히 포권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공손무외는 수중의 활을 만지작거리며 설레설레 고개를 내둘렀다. "별로 가르칠 것도 없소. 노부의 특기래 봐야 고작 활줄을 퉁겨 계집의 치마끈이나 끊어 그곳이나 구경하는 재주밖에 없으니까." 혁련소천은 빙긋 웃었다. "언제 시간이 나면 그것도 배워 보고 싶습니다." "헛헛...... 공자의 외모면 그런 재주를 안 부려도 계집들이 스스로 치마를 보여줄 게 요. 그렇게 따져 보면 공자가 오히려 나보다 한수 위라고 말할 수 있지." 공손무외는 조금도

내려

거리낌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마구 지껄여 댔다.

'무형천궁 공손무외...... 생각보다 재미있는 위인이군!' 혁련소천은 내심 생각하며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때 감천곡이 혁련소천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영호공자, 잠시 자리에 앉게. 내 할 이야기가 있네." 순간 공손무외가 혀를 차며 급히 손을 내둘렀다. "쯧쯧...... 이곳은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이야기할 장소가 못 되네." 감천곡은 빙긋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자네가 떨어지는 낙엽을 모두 가루로 만들면 되지 않나?" 공손무외는 땅이 꺼져라 탄식했다. "휴...... 그것은 너무 피곤한 일이야. 차라리 낙엽을 한꺼번에 떨어뜨려 아예 소리를 없애 버리는 게 낫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는 활줄을 벼락같이 퉁겼다. 순간 요란한 진동음이 사위를 떨어 울렸다. "...... 억......!" 뭔가 부러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다급한 신음성이 근처의 한 나무 위에서 동시에 터졌다. 공손무외는 눈을 이상하게 뜨며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얼씨구...... 비명 지르는 낙엽이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일인 걸?" 혁련소천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마 낙엽이 오래 묵어 영통한 모양입니다." "허허...... 그런 것 같소. 아마 한 만 년은 묵은 낙엽인가 보오." 공손무외는 자못 감탄을 짓더니 재차 활줄을 퉁겼다. 허나 이번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공손무외의 눈에 언뜻 기광이 스쳤다. "흠, 질긴 낙엽이군. 이런 낙엽은 좀 골치 아픈 것이지......!" 이어 또다시 활줄을 퉁기려는 순간 돌연 감천곡이 빠르게 제지했다. "그만두게. 우리가 천우헌으로 들어가면 그 뿐이니까." 공손무외는 활에서 손을 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일세! 아주 동감이야. 이곳에 더 있다가는 낙엽 귀신이 노부 에게 철천지 원한을 품을 것 같네." 이어 그는 지체없이 천우헌을 향해 신형을 쏘아 갔다. 감천곡은 혁련소천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며 말했다. "우리도 들어가세." "좋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감천곡은 혁련소천과 더불어 꺼지듯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바로 그 시각, 정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 나 무 위에 한 인영이 나뭇가지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영호검제였다. 그는 감천곡이 들어간 천우헌을 응시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과연 만마전의 고수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 이어 그는 엉덩이를 슬슬 쓰다듬으며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이구...... 엉덩이야! 빌어먹을 셋째놈...... 어디서 저런 괴 물들을 끌고와서 이 형님의 귀하신 엉덩이에 피멍이 들도록 하다니......!" 영호검제는 문득 어느 한쪽을 불만스런 눈으로 째려봤다. "빌어먹을...... 이 귀여운 동생이 당하는 걸 첫째 형이란 위인은 구경만 하고 있다니...... 쯧 쯧! 형제간의 의리가 이렇게 없어서야 이거 정말 못해 먹겠군!" 그는 엉거주춤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건 그렇고...... 여기에 더 앉아 있다간 엉덩이가 남아나질 못하겠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비스듬히 미끄러지듯 허공을 갈랐다. 영호검제의 신형이 막 사라진 순간 동시에 그가 누워 있던 나뭇가 지가 다섯 토막이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그렇다면 그는 잘라진 나뭇가지 위에 누워 있었단 말이 아닌가? 이때 정자와는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꽃밭에서 한 인영이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영호환도였다. 그는 영호검제가 있던 나무를 쳐다보며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둘째 녀석, 의외인 걸......? 자칫 잘못했다간 이 큰형님의 체면이 말씀이 아닐 뻔했어......!" 그는 다시 천우헌으로 시선을 옮겼다.


"헌데...... 셋째 가......?"

녀석은 진정

구천십지만마전에 뛰어들 생각인

그의 입가에 문득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잘해 봐라, 셋째! 기왕 뜻을 세웠으면 초지일관(初志一貫)! 끝까 지 밀고 나가는 것도...... 엇!" 중얼거리다 말고 그의 눈이 아연 커졌다. 갑자기 온몸이 근질근질해졌던 것이다. "이...... 이제 보니 둘째 그놈이...... 내 몸에 이를......!" 그는 느닷없이 머리와 온몸을 마구 긁기 시작했다. "내 당장 둘째 놈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목욕탕에 처넣어 버리겠다!" 영호환도는 신경질적으로 지면을 박찼다. 그가 쏘아 가는 방향은 영호검제가 사라져 간 바로 그 방향이었다.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 1 권 제 15 장 천겁현오밀경(天劫玄奧密經) ━━━━━━━━━━━━━━━━━━━━━━━━━━━━━━━━━━━ 천우헌의 한 정실에 혁련소천과 감천곡, 공손무외 등 세 사람이 넓은 탁자를 중심으로 둘러 앉아 있었다. 이 순간 혁련소천을 바라보는 감천곡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영호공자, 그 동안 생각해 보았는가?" 혁련소천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정도 내렸는가?" "그렇습니다." "어떤...... 결정인가?" 그렇게 묻는 감천곡의 두 눈엔 어떤 절망이 어리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노인장을 따라 만마전으로 가겠습니다." 나직하지만 확고한 결심이 서린 음성이었다. 감천곡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고...... 고맙네! 영호공자!" 그는 하나뿐인 손으로 혁련소천의 손을 힘있게 움켜쥐었다.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었다. "고맙다는 말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감천곡은 기쁨에 찬 표정으로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영호공자, 노부는 백이십 평생을 험난한 강호에서 살아왔네. 그 동안 죽을 고비만도 수십 번을 넘겼고...... 온갖 음모를 타개하며 오늘의 위치를 굳혀 왔다네." 그는 두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말을 이었다. "이제 나 감천곡에게 남은 것은 사람을 볼 줄 아는 이목밖에 없다 네." "......." "자네의 눈은 살아 있어. 겉으로는 차분해 보이지만 그 두 눈 깊 숙한 곳에서 번뜩이는 그 눈빛은 분명히 무섭게 살아 있어!" "......." "확신하네. 자네는 절대 노부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란 걸!" 쇠를 자르듯 단호하고도 신념에 찬 음성이었다. 이때 잠자코 있던 공손무외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암, 암! 그것은 노부도 장담하네. 영호공자는 너무 미남이기 때 문에 타인보다 최소한 한 수는 이기고 들어가는 셈이니까."


그는 입에 침을 튀기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미남계(美男計)! 장차 만마전의 계집들은 공자의 눈길 앞에서 그 저 추풍낙엽처럼 와스스 무너질 것이네." 그는 두 손을 부르르 떨며 괴상한 몸짓까지 연출해 보였다. 혁련소천과 감천곡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다음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입에선 상쾌한 대소성이 터져 나왔다. 허나 누가 알았겠는가? 그 웃음은 곧 또 하나의 음모(陰謀) 그 자체라는 것을......! 문득 감천곡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영호공자, 노부가 왜 자네를 군마천의 구대천주로 삼으려 하면서 도 제자로는 인정치 않으려는지 아는가?" "저의 우매한 머리로는......." "그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네." "......?" "첫째로는 자네에게 배분으로 인한 제약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고, 둘째는 노부에게 그러한 자격이 없기 때문이네." 그 말을 하는 순간 감천곡의 두 눈이 횃불처럼 무섭게 불타올랐다. 혁련소천은 그 눈빛에 약간 섬뜩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감천곡...... 어쩌면 이

사람도 예상보다 훨씬 무서운 인물일지 모른다......!'

감천곡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노부의 무공은 천하에서 단 한 명을 제외하곤 가장 강하다고 자부하네." 혁련소천은 그 말에 퍼뜩 생각난 듯 반문했다. "구천십지제일신마?" "바로 그렇네."


감천곡은 진지한 표정으로 혁련소천을 응시했다. "영호공자,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듣도록 하게." "......?" "지난 팔백 년 동안 구천십지만마전의 주인은 백 년을 주기로 여덟 번 바뀌었네." 혁련소천은 궁금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감천곡은 얘기를 계속했다. "만마전의 첫번째 규율...... 그것은 바로 만마전의 주인은 반드 시 제일신마의 직계 후손이라야 한다는 것이네. 허나...... 만에 하나 제일신마의 후손이 없다면 중원의 누구라도 제일신마가 될 수 있다네." "......." "현 제일신마 단우비 전주의 나이가 올해로 백여덟, 만마전주로 즉위한 지 꼭 구십 년이 되었지." 감천곡은 문득 두 눈을 기이하게 빛내며 말을 이었다. "허나...... 그에게는 아직 후손이 없다네." 혁련소천은 그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구십 년 동안이나 단 한 명의 후손도 얻지 못했단 말입니까?" "아니지. 한 명의 아들이 있긴 있었네." "그렇다면......?" "허나 그 아들은 오십 년 전 장강(長江)에서 돌연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네." "......!" "또한 그 아들이 남긴 혈육...... 즉 단우비 전주의 손자 역시 십 육 년 전에 병사(病死)했다네." "병사......?" 혁련소천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감천곡의 얼굴에 은은히 긴장된 기색이 떠올랐다. "만마전에서는 그 두 가지 사건이 모종의 음모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으나 아직 아무런 단서나 증거도 찾아내지 못했다네." 이것은 실로 거대한 음모가 아닐 수 없었다. 혁련소천은 눈을 지혜롭게 반짝이며 말했다. "어쩌면...... 만마전 자체 내의 분쟁일 수도 있겠군요?" "음! 불행한 일이지만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감천곡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덧붙였다. "지금 단우비 전주에게는 손자가 남긴 다섯 명의 증손녀가 있다 네. 허나 그들은 모두 여인인지라 제일신마가 될 자격이 없지." 감천곡은 문득 야릇한 눈으로 혁련소천을 응시했다. "영호공자, 이제 노부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겠나?" 혁련소천은 잠시 생각하더니 침착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구천십지제일신마의 보좌......?" 감천곡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맞추었네!" 혁련소천의 눈빛이 어둡게 그늘졌다. "어쩐지...... 어려울 것 같군요." "그렇네. 노부는 천하에서 두 번째 고수라고 자부하지만...... 만 마전 내에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최소한 십팔 명(十八名)은 더 있으니까." "구천마제와 십지마황으로 불린다는......?" "바로 그들이네. 구천마제와 십지마황은 팔백 년 전부터 만마전에 서 내려오는 직위이며 그것 역시 거의 백 년을 주기로 후계자를 즉위시킨다네."


감천곡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열아홉 단체의 주인들은 자신들의 후예들이 가장 특출하기를 바란다네. 그렇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상상도 못할 고련(苦鍊)을 혹독하고 무자비하게 시키지." "......." "지난 팔백 년 동안 전(全) 무림의 마도 고수들은 누구 여하를 막 론하고 구천십지만마전에 참배했고 또 그들의 마공절기(魔功絶技)를 바쳐 왔다네." 감천곡은 목이 마르는지 침을 삼키며 말을 계속했다. "허나 오직 구천(九天)과 십지(十地)의 주인들은 거기에 해당되지 않았네. 지난 팔백 년 동안...... 구천과 십지의 주인들은 수많은 무공을 창안했고 지금에 와서는 제일신마조차도 그 들의 무공 수위를 측정할 수 없을 지경이라네." "......!" "또한 그들 열아홉 단체의 힘은 가히 미증유(未曾有)의 것으로 성 장해 있다네. 그들 중 하나의 단체만 총력으로 움직이면 중원십삼 성(中原十三省) 중의 하나 정도는 단 한 달 사이에 모조리 초토화 시킬 수 있을 정도이니까......." 혁련소천은 내심 적잖게 놀랐다. '구천마제와 십지마황의 힘(力)이

정도까지 커졌단 말인가......?'

감천곡은 침중하게 말했다. "만약 앞으로 십 년 이내에 단우비 전주의 후계자가 결정되지 않 으면...... 제일신마의 보좌로 인해 전 무림은 피의 폭풍에 휩쓸리고 마네." "......!" "그것은 만마전의 첫번째 규율인 만큼 제일신마도 간섭할 수 없다네." 그랬다. 지금 감천곡은 앞으로 십 년 후에 불어닥칠 엄청난 피의 폭풍(暴 風)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그는 기이한 눈빛을 쏟아내며 혁련소천을 정시했다. "비록 영호공자가 노부의 무공을 모두 익힌다 해도...... 자네는 나머지 열여덟 단체의 후계자들의 실력밖에 안 되네." "......!" "다시 말해서 현 구천마제와 십지마황과는 결코 상대가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지." 혁련소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이란 서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아직도 십 년 세월이 남았으니......." "그 십 년 사이에 자네는 영문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어." 혁련소천은 움찔했다. "그럼...... 어떻게......?" "편법을 써야 하네." "편법?" 감천곡의 눈에 일순 기광이 솟았다. "그럼으로써 자네의 무공을 일

년 만에 노부와 동수로 만들어 놓을 것이네."

혁련소천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 단 일 년 사이에 철장마제 감천곡과 동수......!

"편법...... 그것은 모두 세 가지라네." "......?" "첫번째는 황궁무고 즉 천추무상별부(千秋武相別府)의 무학을 얻는 것이네."

― 천추무상별부의 무공을 얻는다!


"노부가 있다네."

알기로는

천추무상별부에는

천하무학의

삼분지

정도가

비장되어

"......!" "모두 천고기학(千古奇學)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그 중에서 는 노부의 무학과 비슷하거나 약간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셋을 넘지 못한다네." 실로 엄청난 자존심(自尊心)이 아닐 수 없었다. 신비의 금역(禁域)인 황궁무고에 비장된 무학 중 자신의 그것을 능가하는 무학이 고작 셋도 안 된다니......! 감천곡은 진중하게 말했다. "황궁무고에서 노부가 필요로 하는 무공은 단 한 가지." "......?" "천이백 년 전(千二百年前)...... 천축의 북방에 위치한 서하국에 서는 대대로 국왕(國王)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하나의 경전(經典)이 있었네." 이때 공손무외가 불쑥 끼어들었다. "천겁현오밀경(天劫玄奧密經)......?" 감천곡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것이네."

천겁현오밀경―! 그 말을 듣는 순간 혁련소천은 천기개천 사사무에게서 들었던 말을 퍼뜩 상기했다.

― 혹자는 천축무학의 근원을 대뢰음사(大雷音寺)와 소뢰음사(小雷音寺)에서 찾고, 혹자는 홍황이교(紅黃二敎)가 천축무림의 양대 산맥이라고 떠들어대지만 말짱 개수작이다. ― 실상 천축무학의 최고 정수는 서하국의 비전경전(秘傳經典)인 천겁현오밀경에서 찾아야 한다. ― 허나 서하국의 돌대가리 국왕 놈들은 그 무공을 심신단련에만


사용했으니 돼지에게 진주 목걸이를 걸어 준 격이 아니겠는가?

자신이 모르는 것은 하늘조차 모른다고 떠들어댔던 천하만사무불 통지 천기개천 사사무의 그 말! "천겁현오밀경에 어떤 무공이 실려 있는지는 노부도 모르네. 허 나, 그 무공이 가공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 "......!" "이백 년 전 서하국의 멸망과 함께 천겁현오밀경은 황궁무고로 흘 러 들어갔지. 이 비밀은 천하에 오직 노부만이 알고 있을 것이네." "......!" "바로 그 천겁현오밀경을 자네가 얻어야 하는 것이 편법의 첫번째라네." 혁련소천은 어쩐지 가슴이 섬뜩해짐을 금치 못했다.

― 천겁현오밀경을 취하라!

허나 그것이 비장되어 있는 곳은 바로 황궁무고가 아닌가! 혁련소천은 불안한 기색을 떠올리며 물었다. "헌데 제가 무슨 재주로 황궁무고에......." "걱정 말게." 감천곡은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황자에게 어린 공주가 한 명 있네. 바로 자하공주(紫霞公主)라고 하지." "......!" "그녀를 이용하면 되네. 그리고...... 그에 따른 모든 준비는 노 부의 친구인 홍포구마성(紅佈九魔聖)이 모두 해 놓았을 것이네." "아......!" 혁련소천은 절로 탄성을 발했다.


'설마하니 공주까지 이용할 계획을 꾸몄다니.......' 그는 실로 감천곡이란 인물을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천곡은 느긋한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러다 문득 감천곡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순간 그의 신형이 앉은 자세 그대로 창문을 향해 폭사되었다. 아니, 폭사되었다고 느낀 순간 그는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번개(閃)를 무색케 하는 실로 눈부신 빠름이 아닐 수 없었다. 헌데 지금 감천곡의 손아귀에는 한 마리의 야조(夜鳥)가 쥐어져 있었다. 감천곡의 두 눈이 일순 무섭게 빛났다. 야조의 발목에 붉은 고리 하나가 채워져 있는 것을 본 것이다. "훈련된 새다......!" "뭣이?" 공손무외는 흠칫 놀라며 야조의 몸뚱이를 재빠르게 훑어보았다. 순간 공손무외의 눈빛이 깊숙이 가라앉았다. "그렇구나...... 이 새는 분명 보통 새와 눈빛이 다르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감천곡을 응시했다. "그렇다면...... 누군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단 말인가?" 감천곡은 눈에 이채를 담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음...... 동물을 이용하는 수법은 전설로 내려오는 전진(全眞)의 비기(秘技)인데...... 설마......?" 감천곡의 얼굴에 문득 살기가 떠올랐다. "죽여야겠군!"


이어 막 손아귀에 힘을 주려는 순간, 혁련소천이 불쑥 제지했다. "잠깐만......!" 감천곡은 의아한 눈으로 혁련소천을 쳐다보았다. 혁련소천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 새를 죽이면...... 새의 주인이 의심을 품게 됩니다." 감천곡은 미간을 찌푸리며 난색을 띠었다. "그럼...... 어떡해야 되겠나?" 이때 공손무외가 나직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그렇군. 이 새를 아예 바보 새로 만들어야 되겠어." 이어 그는 가볍게 활줄을 퉁겼다. 순간 야조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뒤이어 야조의 눈빛이 돌연 안개가 서린 듯 뿌옇게 흐려지는 게 아닌가! "흐흐...... 됐어. 저 새는 절대 우리를 보지 못했고 아무말도 듣지 않았던 것이야." 공손무외의 말에 감천곡은 빙긋 웃었다. 이어 그는 야조를 창 밖으로 훌쩍 내던졌다. 자유를 되찾은 야조는 어둠을

가르며 힘차게 야천으로 솟구쳐 날아갔다.

감천곡과 공손무외는 서로를 마주보며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허나 혁련소천의 눈에는 어쩐지 음울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영호수아, 그녀가 설마......?' 영호수아, 귀엽고 깜찍하기 이를데 없는 천진난만한 소녀...... 잠시 잊고 있던 천우신기 제갈천뇌의 말이 뇌리에 떠오른 것도 바로 이때였다.


― 영호수아...... 모든 동물과 의사 소통이 가능한 신비한 능력 을 가진 소녀입니다. 조심하십시오.

마치 은싸라기같은 달빛이 소나기처럼 퍼부어 내리는 밤이었다.

■ 구천십지제일신마제 1 권제 16 장자하공주紫霞公主)와 봉황금시(鳳凰禁 ) ━━━━━━━━━━━━━━━━━━━━━━━━━━━━━━━━━━━ 대광사(大廣寺). 금릉성 외곽에 위치한 방대한 규모의 대찰(大刹)로써 근 일천 년 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곳은 향화(香火)하러 오는 참배객들이 항상 줄을 잇고 있었다. 대광사로 이어진 곱게 뻗은 있었다.

관도엔 따사로운 햇살이 눈부실 정도로 내리비치고

오가는 행인과 대광사로 향하는

참배객들의 몸은 온통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혁련소천 역시 참배객들의 틈에 섞여 대광사로 향하고 있었다. 일신에는 산뜻한 백의, 머리에는 같은 색의 문사 건을 단아하게 둘러맨 채 섭선을 유유히 흔들며 걷고 있는 그 모습이 그렇게 멋 지고 귀풍(貴風)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를 한 번 본 사람은 예외 없이 입을

딱 벌리고 걸음을 멈추었다.

모두 넋을 잃은 것이다. 개중에 꽃다운 나이의 처녀들은 꿈을 꾸듯 눈빛이 몽롱해졌고, 남 편과 같이 가던 중년 여인들은 아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기까지 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아니, 이 여편네가 미쳤나?" 이런 때아닌 난리가 도처에서 발생했다. 허나 정작 혁련소천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휘적휘적 걸음을 떼어놓고 있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영락없이 무공을 모르는 일개 서생의 걸음걸이였다. 뒤쪽으로부터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아이쿠......!" "저, 저런 망할 년......!" 동시에 여기저기서 갖가지 다급성과 욕설이 줄지어 터져 나왔다. 혁련소천은 흠칫 걸음을 멈추고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야에 한 필의 연지마( 脂馬)가 관도 상을 무서운 속도로 치달려 오는 것이 보였다. '허...... 사람이 많은 이곳으로 저렇게 빨리 달려오다니.......' 혁련소천의 눈썹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돌연 그의 눈에 언뜻 이채가 솟구쳤다. '여자......?' 이제 십칠팔 세나 되었을까?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절색(絶色)의 소녀가 마상(馬上)에 올라 있는 것이었다. 그 소녀의 일신에는 몸이 꽉 끼는 홍의(紅衣)가 걸쳐져 있었고, 가슴에는 금빛 제비 한 마리가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머리에 는 가운데가 뚫린 둥근 테모양의 모자, 어깨에는 백색 피풍(皮風) 을 걸치고 있었다. 헌데 지금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고 눈은 전면을 향해 잔뜩 부릅 뜬 채 말의 복부를 미친 듯이 걷어차고 있었다. 그녀를 태운 연지마는 순식간에 혁련소천의 옆을 지나쳐 갔다. 뿌옇게 피어오르는 황진 속에서 다시 행인들의 욕지거리가 줄지어 터져 나왔다. "미친 년!" "그래가지고 시집가기는 다 틀렸다!"


"빌어먹을...... 쿨룩! 쿨룩! 아이고, 이놈의 먼지......." 혁련소천은 홍의 소녀를 태운 말이 곧장 대광사 안으로 질주해 가 는 것을 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금빛

제비를 보아하니 금연방(金燕幇) 소속의 여자인 듯 한데.......'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울고 있었어. 무엇 때문일까?' 그는 스쳐 지나가던 홍의소녀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고여 있 는 것을 언뜻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혁련소천은 곧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떨쳐 내 버렸다. '이러다간 운학대사(雲鶴大師)와의 약속 시간에 늦겠구나!' 그는 대광사를 향해 다시 빠른 걸음을 떼 놓기 시작했다.

운학대사. 불력(佛力) 깊기로 유명한 대광사 주지의 법호(法號), 오늘 혁련 소천이 만나러 온 사람이기도 했다.

온갖 기화이초가 흐드러지게 만발해 있는 대광사의 후원(後園)은 그윽하고도 신선한 꽃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혁련소천은 이곳에 이르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뒷짐을 지며 느긋한 눈길로 유유히 주위를 살펴보았다. 마치 꽃밭을 감상이라도 하는 그러다 문득 그는

것처럼 지극히 한가롭고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가까이 있는

꽃 한 송이를 꺾었다.

얼굴에 가져다 대고 깊히 숨을 들이쉬자 싱그럽고 청초한 꽃내음 이 순식간에 콧속 깊숙이 스며 들어왔다. '좋구나.......' 그는 마치 꽃향기에 도취라도 된 듯 스르르 눈을 감았다.


"대종사님, 무척 한가로와 보이십니다." 이때 땅 속 어디선가 한 줄기 가느다란 음성이 스며 나왔다. '한단지마......!' 혁련소천은 여전히 꽃향기를 음미하여 미미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알아낸 것이 있소?) (있습니다.) 땅 속에서의 전음이 빠르게 이어져 나왔다. (감천곡이 자하공주를 점찍은 것은 정말 잘한 것입니다.) (이유는?) (조사해 본 즉, 황제는 수많은 공주들 중 유난히 자하공주를 총애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 니다. 자하공주가 잠시라도 안 보이면 황제가 안절부절을 금치 못한다고 하니까요.) (흠.......) (석달 전 자하공주는 황제가 갖고 있는 봉황금시(鳳凰禁 )를 달 라고 떼를 쓴 적이 있었습니다.) 순간 혁련소천의 눈썹이 찡긋 움직였다. (봉화금시라면...... 천추무상별부를

열 수 있다는 열쇠가 아니오?)

(그렇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처음엔 어이가 없었으나 자하공주가 막무가내로 떼를 쓰 고 우기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봉황금시를 건네주었답니다.) 혁련소천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수중에 있던 꽃송이를 내던지며 또 한 송이의 꽃을 꺾어 들었다. (대체 자하공주는 올해 몇 살이오?)


(십이 세입니다.) '어쩐지.......' 혁련소천은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문득 한단지마의 전음이 조심스런 어조로 이어져 나왔다. (대종사님, 일곱 째의 말에 의하면 우리 칠 형제는 이번 일에 끼 어들 필요가 없는 듯합니다.) (제갈천뇌가 무슨 말을 했기에......?) (그는 감천곡의 계략이 대단히 출중하고 치밀하다고 감탄했습니 다. 아울러 대종사께서도 더욱 주의하시라는 말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음.) (그럼.......) 혁련소천은 또 다시 한 송이의 꽃을 꺾으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한단지마, 그대는 꽃을 무척 좋아하는 것으로 아는데...... 어떻 소? 대광사의 꽃은 무척 아름다운데.......) (흐흐흐...... 나중에 시간 나면 이곳의 꽃을 몽땅 뽑아 갈 생각입니다.) 끝말은 먼 곳으로부터 희미하게 들려 왔다. '갔군!' 혁련소천은 쥐고 있던 꽃을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그의 발 밑엔 세 송이의 꽃이 버려져 있었다. '후후...... 이 금작약(金芍藥)은 운학대사가 무척 아끼는 꽃이거 늘...... 이걸 보면 얼굴 꽤나 일그러지겠군!' 혁련소천은 내심 고소를 흘리며 천천히 걸음을 떼 놓았다. 그러나 미처 두 걸음을 떼 놓기도 전에 돌연 그의 안색은 크게 변했다. 막 후원의 문으로 들어서는 한 인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몹시 준수하고 차가운 얼굴의 중년인...... 분명히 혁련소천에게는 낯익은 얼굴이 아니었다. 또한 혁련소천이 다른 사람에게서 이토록 강렬한 인상을 받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제 나이는 서른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칠흑같은 머리칼은 묶지도 않은 채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렸고, 이 마에는 검은 끈은 질끈 동여맨 모습, 일신에는 먹물같은 흑포에 옆구리에는 넉자 가량의 검은 장검을 비스듬히 꽂고 있다. 신발 또한 검은 가죽신으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먹빛 일색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 의 안색은 더욱 희고 창백해 보였다. 실같이 가느다란 눈에 코는 날카롭게 우뚝 솟아 있었 고 입술은 얄팍했다. 특히 가느다란 눈에서 간간이 번뜩이는 그의 눈빛은 소름끼치는 전율 이 일 정도로 차가웠다. '늑대의 눈빛이다!' 혁련소천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의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어 감을 느꼈다.

흑의인은 겨울의 삭풍처럼 차갑고 잔혹한 기운을 뿜어내며 서서히 혁련소천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흑의인의 유연하게 뻗어 내린 몸매, 내딛는 걸음 하나 하나가 그 렇게 여유 있고 가벼워보일 수가 없었다. '어떤 고도의 특수 훈련이 아니고는 저런 몸가짐이나 분위기를 풍길 수 없다!' 혁련소천은 더 이상 긴장하지 않았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흑의인에게서 자신에 대한 적의가 없음을

직감으로 간파한 것이다.

'이쪽을 긴장시켜 공연히 상대의 주위를 끌 필요는 없으니까.......' 이윽고 흑의인은 혁련소천의 바로 앞에까지 다가왔다. 흑의인은 혁련소천을 힐끗 응시했다.


순간 흑의인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갑게 번뜩였다. 허나 그것은 극히 찰나였을 뿐, 그는 곧 혁련소천의 옆을 그대로 지나쳐 갔다. '이 자...... 한 번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한 적이 있음직한 인물이다!'

지나치는 순간 혁련소천은 또 한 번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도전!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무서운지 혁련소천은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혁련소천은 흑의인이 후원 밖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하늘도 모르고 땅도 몰랐다. 오늘의 이 짧은 만남! 이것이야말로 장차 무림의 운명을 크게 뒤바뀌게 하는 숙명(宿命)의 만남이었음을!

혁련소천은 후원에서 벗어나 내당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미 흑의인에 대한 생각을 접어 둔 그는 어느새 또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운학대사...... 아무도 문성왕(文聖王)임을.......'

모르고

있다.

그가

황제의

'그가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출가하여 소림에서 무공을 수 련...... 대광사의 주지를 맡은 것이 어언 사십 년 전!' 문득 그의 입가에 신비스런 미소가 흘렀다. '자하공주는 백부인 운학대사를 무척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 는 한 달에 한두 번은 황제도 모르게 이 대광사를 찾는다!' 그는 한 채의 불전을 돌아가며 생각을 이었다. '문제는 자하공주가 갖고 있을 봉황금시인데......!' 그의 눈에 언뜻 기광이 스쳤다.

사촌형인


'황제는 마지못해 그것을 주었지만...... 분실을 염려, 공주 주위 에 다섯 명의 비밀 고수를 붙여 놓았다!' '제갈천뇌의 추측에 의하면 그들 오 인(五人)은 영호대인이 조직 한 삼대 극비세력 중 도감책을 제외한 나머지 두 세력에 속해 있을 것이라 했다!' 그의 입가에 문득 득의의 미소가 번졌다. '허나...... 후후...... 그렇다고 이번 계획을 벗어날 수는 없지. 봉황금시는 이미 내 손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 없다!' 멀쩡한 대낮에 개꿈을 꾼다고 비웃을 텐가? 허나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괴물이라 불리는 혁련소천이었다.

청향이 감도는 선방(禪房) 안에 눈썹이 희고 안색이 불그레한 팔 순 가량의 노승이 바둑판을 사이에 둔 채 혁련소천과 대좌해 있었다. 노승은 바로 운학대사였다. 운학대사는 득도한 고승다운 품위와 타고난 듯한 위엄이 전신에 배어 있는 모습이었다. 혁련소천은 감천곡과 상의한 이후 의도적으로 그에게 접근하였고 어느새 이번이 다섯번째의 만남이었다. 운학대사는 득도한 고승답지 않게 바둑에 광적(狂的)인 취미를 갖고 있었다. 누구의 입에서 흘러 나왔는지 모르겠으나, 장군부의 셋째 공자가 국수 급인 석대선생을 바둑으로 눌렀다는 말이 운학대사에게도 전해졌다. 운학대사는 강한 호기심과 함께 꼭 한 번 셋째 공자와 만날 수 있 게 되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혁련소천이 불쑥 대광사를 찾아왔던 것이다. 만나서 약간의 얘기를 해본 결과 운학대사는 혁련소천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금기서화(琴碁書畵)...... 도대체 무엇을 물어도 막힘이 없었던 것이다. 장군부의 자제답지 않게 온화하고 겸손한 셋째 공자의 인품은 순 식간에 운학대사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야 말았다.


운학대사는 지금 아예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혁련소천의 우상변(右上邊) 대마(大馬)를 기웃거리다 보니 수비세 로 굳혀 놓았던 우하변을 반 이상 뺏겨 버리고, 반격으로 나선 좌 상변의 대접전에서는 아예 디딜 곳을 잃고 말았다. 대참패! 더 이상 두고 볼 것도 없었다. 운학대사는 마침내 백돌을 내던지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허! 이것 참......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구려. 석대선생이 두 손 든 이유를 알고도 남겠소." 혁련소천은 가볍게 미소지었다. "과찬이십니다. 대사님의 기예는 웅혼하고 정통한 반면 소생은 극 히 변칙적인 것이라 견줄 바가 아닌 줄 압니다." 운학대사는 너털웃음을 쳤다. "허허허...... 그런 말씀 마시오. 변칙은 무엇이고 정통은 또 무엇이오? 만약 빈승의 기예가 진정 정통의 정수라면 결코 시주에게 패하지 않았을 것이오." 혁련소천은 담담히 웃으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했다. 그때 문 밖에서 소사미의 음성이 들려왔다 "주지님, 작은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순간 혁련소천은 흠칫했다. '작은아가씨! 자하공주다......!' 원래 대광사에서 자하공주의 신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운학대사와 친척이라고만 알고 있었기에 작은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이다. 운학대사는 반색의 기색을 떠올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철부지 아가씨께서 또 오셨구먼......."


이때 선방의 문이 열리며 한 소녀가 모습을 나타냈다. 열두셋 가량의 나이에 아름답고 귀엽기가 마치 천상옥녀(天上玉 女)와도 같은 깜찍한 모습의 미소녀였다. 발그레한 뺨과 크고 서글서글한 두 눈이 유난히 돋보이는 그 어린 소녀가 바로 자하공주였다.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 1 권 제 17 장 귀신같은 솜씨 ━━━━━━━━━━━━━━━━━━━━━━━━━━━━━━━━━━━ 자하공주는 선방에 들어서자마자 쪼르르 달려와 운학대사의 등에 매달렸다. "백부선사님, 안녕!" 운학대사는 짐짓 눈살을 찌푸리며 나직이 혀를 찼다. "쯧쯧...... 다 큰 녀석이! 손님 앞에서......." 자하공주는 그제야 혁련소천을 발견한 듯 급히 운학대사의 등에서 떨어졌다. 다음 순간 그녀는 큰 눈을 깜박거리며 혁련소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그렇게 귀엽고 깜찍할 수가 없었다.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군!' 혁련소천은 담담히 미소하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러자 자하공주 역시 생긋 웃어 보이더니 운학대사의 등을 쿡쿡 찌르며 물었다. "백부선사님, 저 잘생긴 오빠는 누구야?" 운학대사는 껄껄 웃었다. "허허허...... 녀석 말버릇하고는. 백부선사님은 또 뭐냐? 백부면 백부고 선사면 선사지......." 이어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사드려라. 이 분은 장군부의 영호삼공자이시다." 자하공주는 깜짝 놀랐다.


"어머! 그럼 옥언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외치다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옥언니......? 옥산랑을 말하려 했던 모양이군!' 혁련소천은 대뜸 눈치챘으나 내색치는 않았다. 자하공주는 어떤 호기심에 찬 눈으로 혁련소천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저 공자가 바로 옥산랑 언니의 약혼자였구나......! 어쩐지 옥언 니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더니만.......' 문득 자하공주는 마음이 야릇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때 운학대사가 웃으며 말했다. "허허...... 이 아이는 빈승의 조카 소연(少娟)이오. 아직 철이 없어 제멋대로이니 영호시주께서 이해하시오."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으며 정중히 포권했다. "영호풍이라 하오, 소낭자." 자하공주는 문득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킥! 저는 소씨가 아니에요. 그리고 무슨 인사를 그렇게 엄숙하게 해요?" 이어 그녀는 혁련소천의 행동을 흉내내며 괴상한 목소리를 흘려냈다. "나는 영호풍이오, 소낭자." 그러더니 배를 움켜쥐며 까르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 아이 재미있어. 나는 영호풍이오, 소낭자. 까르르르......." 이때 운학대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꾸짖듯 말했다. "이 녀석! 백부의 손님에게 이렇듯 버릇 없이 굴다니......!" 그러자 자하공주는 웃음을 뚝 그쳤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불안한 표정으로 혁련소천을 쳐다보았다.


"영호오빠, 제가 버릇없이 굴어 화났어요?"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오. 조금도 화나지 않았소." 그 말에 자하공주의 안색이 활짝 밝아졌다. 그녀는 운학대사를 향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것 봐요. 영호오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데 백부님은 괜히 야단이셔?" "쯧쯧......." 운학대사는 질렸다는 듯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이때 문득 자하공주는 바둑판을 응시하며 손뼉을 탁 쳤다. "어머! 이제 보니 바둑을 두고 계셨군요?" 운학대사는 짐짓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너 때문에 더 이상 두지 못하겠다." "피! 제 핑계를 대는 걸 보니 백부님이 지셨군요?" 일순 운학대사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험! 험! 글쎄 그게......." "호호호...... 말씀 안 해도 알겠어요. 백부님이 지셨던 거예요. 그렇죠?" 운학대사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그래 백부가 졌다. 이제 속이 시원하느냐?" 자하공주는 감탄한 표정으로 혁련소천을 바라보았다. "어쩜......! 백부님의 바둑 솜씨는 천하가 인정하는 것인데......." "허허...... 허나 이 백부는 미처 손도 써 보지 못하고 대패(大 敗)했다. 영호공자의 기예는 이미 신(神)의 경지에 도달해 있단다."


"그렇군요......!" 자하공주는 연신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자하공주는 두 눈을 야릇하게 빛내며 말했다. "영호오빠, 그럼 저하고 한 번 둬 볼래요?" 운학대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만둬라. 작정이냐?"

녀석,

궁지에

몰리면

이번에는

영호공자께

떼거지를

자하공주는 곱게 눈을 흘겼다. "치! 백부님은 소연이의 바둑 실력이 옛날하고 똑같은 줄 아시나 봐?" "똑같지 않고 백 배가 늘었어도 영호공자께는 안돼." 자하공주는 야멸차게 내저었다. "저는 영호공자님의 실력이 그렇게까지 뛰어나다고는 믿을 수 없어요." 혁련소천은 그녀의 그런 모습에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후후...... 격장지계까지......? 제법 영리한 공주님이시군!' 그렇게 생각한 뒤 그는 짐짓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핫핫...... 좋소. 내 소연 아가씨의 실력을 한

번 견식해 보겠소."

순식간에 자하공주의 얼굴에 활짝 웃음이 피어났다. 그녀는 양 손을 허리에 턱 걸치며 자못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봐요, 백부 스님. 영호오빠는 소연과 한 판 겨뤄 보겠다고 하잖아요." 운학대사는 짐짓 눈을 부라렸다. "이 녀석! 백부 스님은 또 뭐냐?" "킥킥...... 제 실력을 무시한 대가예요." 자하공주는 혓바닥을 낼름 내밀더니 바둑판 앞에 쪼르르 다가와 앉았다.


운학대사는 씁쓸한 고소를 지으며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자하공주, 그녀의 기예는 절대 석대선생이나 운학대사의 아래가 아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난해하고 장대한 포석(布石)과 행마술(行馬術)을 펼쳐 공세를 퍼부었다. 뿐인가? 그녀는 혁련소천조차도 금세 읽어 낼 수 없는 수를 네 번이나 놓았다. '대단하군! 운학대사의 기예가 웅혼하고 장중하다면 이 공주는 칼 날처럼 날카롭고 집요하다!' 그럭저럭 접전을 벌인 지 한 시진이 지나고 드디어 승패가 결정났다. 결과는 혁련소천의 패(敗)로써 두 집 반의 아주 근소한 차이였다. "야! 소연이 이겼다!" 자하공주는 기쁨에 겨워 선방 안을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운학대사는 그런 모습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혁련소천이 그녀에게 고의로 져 주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자하공주는 운학대사의 바로 앞에 폴짝 내려앉았다. "이제 백부님도 내 아래야. 그렇죠? 영호오빠......."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봐! 영호오빠도 인정하잖아요. 호호호......." 자하공주는 생각할수록 즐거운 듯 연신 짤랑짤랑한 교소를 터뜨렸다. 운학대사는 문득 탄식같은 불호를 읊조렸다. "아미타불...... 부처님이 웃으시도다." 자하공주는 교소를 그치고 붉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피! 부처님이야 언제나 웃는데 뭐?"


"허허허......." 운학대사는 어이가 없어 껄껄 웃기만 했다. 이때 혁련소천의 조용한 음성이 자하공주의 귓전을 울렸다. "소연 아가씨는 무척 예쁜 팔찌를 차고 있군." 자하공주는 생긋 웃으며 오른손을 쳐들었다. "이거 말인가요?" 그녀의 팔목엔 금광(金光)이 휘황하게 번쩍이는 금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팔찌의 겉면에는 한 쌍의 봉황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고 두 봉황 사이의 표면은 마치 열쇠 모양으로 양각되어 있었다. 혁련소천의 눈에 언뜻 감탄의 빛이 어렸다. "무척 귀한 것 같군요." 자하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버님이 제게 선물한 거예요." "소연의 아버님은 무척 부자이신 모양이지?" "응, 굉장히 부자예요." 이어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한 번 구경해 볼래요?" "아니야. 그 귀한 것을 함부로 만질 수는 없지." "피! 걱정 마세요. 아버님은 이걸 잘 간수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소 연이 보기엔 별로 대단한 물건같지도 않아요." 그러면서 그녀는 대뜸 팔찌를 벗어 혁련소천에게 내던졌다. "음! 정말 아름답군......!" 혁련소천은 팔찌를 받아 이리저리 살펴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그때였다. 혁련소천은 갑자기 뼈를 깎는 듯한 날카로운 예기(銳氣)가 등뒤로 쏘아 오는 것을 느꼈다. '자하공주를 뒤따른다는 오 인의 비밀 고수......!' "잘 구경했소." 그는 태연하게 팔찌를 자하공주에게 돌려주었다. 그 순간 등 뒤를 찔러 오던 예기 또한 말끔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 다. 자하공주는 팔찌를 다시 손목에 차며 자랑스런 표정으로 재잘거렸다. "우리 집에는 이런 게 많이 있어요." 혁련소천은 낮게 웃었다. "후후...... 그렇다면 언제 한 번 소연 아가씨의 집에나 놀러 가볼까?" "네?" "왜 곤란하오?" "그...... 그건......." 자하공주는 당황한 기색으로 일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허나 곧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나......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초청할께요." 알아듣기 힘들 만큼 기어 들어가는 듯한 음성이었다. 허나 혁련소천은 똑똑히 들었다. '후후...... 황궁으로의 초청이라...... 그것도 괜찮겠군!'

혁련소천이 대광사를 나선 것은 날이 거의 저물어 갈 무렵이었다. 그는 천천히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후의 하늘은 타는 듯한 노을을 받아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때 한 줄기 가느다란 전음성이 그의 귓전으로 들려 왔다. (한단지마입니다, 대종사.) (음.) (어찌 되었습니까?) (성공이오.) (흐흐...... 역시 대종사이십니다. 축하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한단지마의 전음은 더 이상 들려 오지 않았다. 혁련소천은 문득 왼손을 슬그머니 펼쳤다. 그의 손바닥에는 네모진 쇳덩어리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생고무보다 부드럽고 무엇이든 달기만 하면 그 자국이 뚜렷이 남 는 이 은형사철(銀型死鐵).......' 혁련소천의 얼굴에 문득 만족스런 미소가 어렸다. '후후후...... 여기엔 봉화금시의 모양이 뚜렷하게 찍혀 있다......!' 네모진 쇳덩이, 은형사철의 한 단면을 보라! 거기에는 자하공주의 금빛 팔찌에 새겨져 있는 것과 똑같은 문양 이 선명하게 찍혀 있지 않는가! 대체 어느 순간에 이런 수작(?)을 부렸단 말인가? 알 수도 또한 알 필요도 없다.

봉황금시! 어찌됐든 이 땅에 또 하나의 봉황금시가 괴물의 귀신같은 솜씨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될 뿐이다.

유난히 붉게 타오르는 오늘의 석양이었다.


■ 구천십지제일신마제 1 권제 18 장 귀검사랑(鬼劍邪狼) 잔혹한 살수(殺手) ━━━━━━━━━━━━━━━━━━━━━━━━━━━━━━━━━━━ 달마저 구름에 가려진 이 밤, 먹물같은 어둠이 삼라만상을 파도처럼 뒤덮고 있었다. 아름드리 거목(巨木)들이 빽빽하게 들어

찬 수림 속을 한 흑의인이 걷고 있었다.

전체가 어둠보다 짙은 먹빛 일색의 흑의인, 치렁치렁한 흑발(黑 髮)을 허리까지 늘어뜨렸고 숯덩이와 같은 묵검(墨劍)이 옆구리에 비스듬히 꽂혀 있는...... 그는 바로 혁련소천이 대광사에서 보았 던 흑의인이었다. 흑의인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일정한 보폭의 걸음걸이로 걷고 있었다. 허나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사위로 퍼져 나가는 저 차갑고 무 정(無情)한 기운은 가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흑의인은 깊고 짙은 어둠 속으로 자꾸만 걸어가고 있었다. 흑의인이 어느 한 거목을 지나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람 한 점 분 적이 없거늘 돌연 한 무더기의 낙엽들이 전방에 어 지럽게 휘날리며 떨어져 내렸다. 흑의인은 조용히 걸음을 멈추었다. 전면, 낙엽이 사람으로 변했는가? 어느새 세 줄기의 흐릿한 그림자(影)가 소리없이 나타나 있었다. 죽립을 깊숙이 눌러 쓴 삼 인(三人)의 혈포인(血布人), 그들의 전 신에선 피를 말릴 것 같은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겨 나왔다. 흑의인은 무심한 시선으로 그들을 한 을 떼 놓았다.

차례 쓸어 본 뒤 다시 걸음

이때 한 죽립객의 입에서 살벌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서라, 귀검사랑(鬼劍邪狼)!" 흑의인은 걸음을 멈추고 방금 말한 죽립객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나를 알고 있군." 더없이 짧고 무심한 한 마디의 음성이 흑의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그것은 듣는 이에게 섬칫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허나 예의 죽립객은 태연하고도 메마른 괴소를 발했다. "흐흐흣...... 천하의 귀검사랑을 모른대서야 말이 안 되지." 귀검사랑이라 불린 흑의인은 무표정하게 입술을 떼었다. "용건은......?" "간단히 말해서...... 혈궁천(血穹天)의 일에서 손을 떼라." 혈궁천! 바로 구천십지만마전 휘하의 열아홉 단체 중 하나를 칭함이었다. 귀검사랑은 조용히 말했다. "쓸데없는 말을 하러 왔군." "황금 일만 관을 대가로 지불하겠다." 황금 일만 관이라면

웬만한 성(城) 두 개를 사고도 남을 막대한 금액이 아닌가!

문득 귀검사랑의 눈가에 짧은 섬광이 스쳐갔다. "누구냐? 너희들은......." "승낙 여부만 대답해라." "만약...... 거절한다면?" 순간 세 죽립객의 눈에서 소름끼치도록 시퍼런 안광이 뻗쳐 나왔다. 뒤이어 예의 앞에 말한 죽립객이 살기 진득한 음성을 내뱉었다. "죽인다. 너와 네가 거느린 백 마리의 늑대까지 모조리......!" 돌연 귀검사랑의 입가에 한 가닥 비릿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후후후...... 나의 사랑대(邪狼隊)는 피를 두려워하지 않지." "결정한 것인가?" "바보구나. 너는 똑같은 대답을 두 번 들으려 하다니." "죽여라!" 순간 냉혹한 일갈과 함께 세 죽립객의 신형이 허공으로 번쩍 솟구쳤다. 아니, 솟구쳤다 싶은 순간 이미 그들의 소매 속에서는 끝이 세 갈 래로 갈라진 기형도(奇形刀)가 빠져 나왔고, 빠져 나왔다고 느낀 순간 그것들은 이미 귀검사랑의 몸을 품자(品字) 형으로 쑤셔 가고 있었다. 지독한 빠름이었다. 순간 위급함에도 아랑곳없이 귀검사랑은 흰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그러나 귀검사랑의 그 웃음은 너무나 서럽도록 창백하여 가슴이 찡할 정도였다. 츄아아아앗......! 찰나, 세 줄기 묵광이 귀검사랑의 옆구리를 떠나 유성(流星)처럼 공간을 내찢었다. 까까깡...... 깡......! 동시에 치떨리는 금속성과 함께

시퍼런 불꽃이 허공을 가득 뒤덮었다.

"억!" "이런......!" 세 죽립객들은 졸지에 자신들의 기형도가 두동강으로 끊어진 것을 보았다. 헌데 바로 그 순간 세 죽립객은 또 보았다. 묵섬(墨閃)! 시꺼먼 번갯불이 자신들의

몸을 환상처럼

뒤덮어 오는 것을......!

미처 어찌 해볼 생각도 하기 전에 그들은 허공 중에 떠 있는 자신 들의 몸이 무척 가벼워졌다고 느꼈다.


어지럽게 떠오르는 여섯 개의 팔과 여섯 개의 다리! 어둠 속을 수놓은 선렬한 피보라! "악!" "으― 아!" 폐부를 도려내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찰나, 비명을 내지르던 죽립객들의 머리통조차 몸뚱이를 떠나 일 제히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때를 같이 해서 귀검사랑이 옆구리의 장검에서 손을 떼는 것이 보였다. 언제 그가 검을 뽑았던가? 쾌(快)! 대체 이런 빠름을 무슨 말로 형용해야 되는 것인가? 팔과 다리, 몸뚱이와 머리통이 그제야 순서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숨막힐 듯한 정적이 그 자리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귀검사랑은 극히 무정한 눈길로 아래를 쳐다보았다. 눈을 허옇게 까뒤집은 머리통 하나가 그의 발 밑을 구르고 있었다. 순간 귀검사랑의 입에서 무감동한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생사천(生死天)의 밥버러지들이었군......." 그러면서 그는 머리통을 지그시 발로 밟았다. 산산이 으깨어지는 소리는 참으로 끔찍했다. 허나 정작 그 일을 하고 있는 귀검사랑의 얼굴은 무서우리만큼 무 표정했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발을 떼며 고개를 바로했다. 다음 순간 귀검사랑의 몸이 갑자기 우측의 한 거목을 향해 전광 (電光)처럼 날아갔다.


동시에 그의 묵검이

형용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검집을 벗어났다.

번개빛과 함께 묵광은 거목을 풀잎처럼 가르며 곧장 뻗쳐 나갔다. 허나 묵광은 거목의 뒤쪽에서 한 자를 더 뻗어 나가지 못하고 우뚝 정지했다. 한 절색의 홍의 소녀가 나무 뒤에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소녀는 바로

연지마를 타고 대광사로 미친 듯이 질주해 갔던 소녀였다.

귀검사랑의 묵검은 그녀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두려움인가? 아니면 또 다른 격정 때문인가......? 그녀의 전신은 눈에 뜨일 만큼 거센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귀검사랑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며 한 마디 내뱉었다. "이제 보니...... 너였군." 홍의 소녀는 그를 똑바로 쏘아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잔인한...... 사람!" 귀검사랑은 예의 무심냉막한 표정을 되찾으며 조용히 말했다. "나는...... 피를 사랑한다." "무서운 사람!" "나는 죽음을 사랑한다." 홍의 소녀는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깨물었다. "당신...... 언젠가는 비참한 말로에 처할 날이 있을 거예요!"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아마 내게 그런 날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순간 홍의 소녀의 눈빛이 시퍼렇게 불타 올랐다. "당신...... 언니를 왜 죽였나요?" "그녀가 먼저 나를 공격했어."


"언니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나는 사랑을 증오한다." "악마......!" 새하얗게 질린 그녀의 뺨에 구슬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명심해라, 홍연(紅燕). 또다시 내 비위를 거스르면 너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말에 홍의 소녀 홍연의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겼다. 그녀는 전신을 부르르 떨며 미친 듯이 악을 썼다. "죽여라! 죽여! 이 악마......." 허나 그녀는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목덜미에 닿아 있던 묵검이 그녀의 왼쪽 뺨으로 옮겨지면서 긴 검 흔(劍痕)을 그렸기 때문이다. 홍연은 사색이 되어 황급히 왼쪽 뺨을 만졌다. 순간 따뜻하고 진득한 핏물이 손바닥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귀검사랑은 묵검을 거두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날 밤...... 한 차례의 인연 때문에 이 정도로 그친다." 귀검사랑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홍연의 얼굴은 일순 처절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애처러울 만큼 전신을

부들부들 떨더니 돌연 발악적인 흉소를 터뜨렸다.

"오호호호홋...... 호호호홋......!" 피를 토하는가? 하늘을 울릴 듯 한(恨) 서린 흉소가 어둠 속으로 미친 듯이 퍼져 나갔다. 그녀는 흉소를 멎고 귀검사랑의 등 뒤를 쏘아보며 절규하듯 말했다.


"기억해라! 나 홍연...... 이 순간부터 너를 증오하리라!" 새파란 독기를 뿜어내는 홍연의 그 눈빛! "죽이리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리라! 너를 죽일 수 있다 면...... 네놈을 지옥검화 속에 처넣을 수만 있다면...... 내 영 혼이 갈가리 찢어져도 그렇게 할 것이다!" 죽음을 노리는 여인의 저주! 허나 귀검사랑은 아무런 대꾸 없이 묵묵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것을 쏘아보는 홍연의 눈에서는 무서운 광기(狂氣)가 이글거렸다. 한순간 그녀는 전신을 흔들며 미친 듯한 흉소를 터뜨렸다. "오호호호홋...... 죽이리라! 내 너를 죽이지 못한다면 하늘마저 거역하리라! 호호호홋......." 통곡보다 더 서러운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는 어둠 속을 미친 듯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둠은 이내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을 삼켜 버렸다. 서럽도록 처절한 그 한(恨)마저도...... 여인이 한(恨)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찬서리가 내린다고 했다. 허나, 모르리라! 이 한 여인의 한(恨)! 이것이 훗날 얼마나 큰 비극(悲劇)을 잉태시킬 것인가를! 홍연(紅燕), 기억해야 될 이름이다. 이때 홍연이 서 있던 그 자리에 한 인영이 흡사 유령처럼 나타났다. 바로 혁련소천이었다. 그는 귀검사랑이 사라져 간 방향을 한동안 또렷이 응시하더니 문 득 눈 앞의 거목을 슬쩍 떼밀었다. 그러자 아름드리 거목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앞으로 베어져 넘어갔다.

거목은 귀검사랑의 묵검이 스쳐 갔을 때 이미 베어져 있었던 것이다.


"틀림없구나. 저 자의 검법...... 이백 년 전 무림의 공적으로 몰 려 죽은 지옥도(地獄島)의 도주(島主) 지옥마제(地獄魔帝)의 지옥사검(地獄死劍)이다!" 베어져 나간 거목의 단면을 응시하던 혁련소천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만마전 구천(九天) 중의 혈궁천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생사천의 고수들을 살해한 저 사나이......." 그는 가늘게 눈살을 찌푸렸다. "한단지마는 저 자가 운학대사와 대화하는 것을 언뜻 보았다고 했 다. 그렇다면 운학대사와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란 말인데......?" 득도한 고승 운학대사와 무정한 검수(劍手) 귀검사랑! 혁련소천은 그 두 사람을 묶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추측해 보았다. 허나 그가 얻어낼 수 있는 결론은 아무 것도 없었다. "왠지 심상치가 않다." 막연히 그렇게만 느낄 뿐이었다. 문득 그는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며 씁쓸한 고소를 지었다. "이 괴물의 머리도 점점 돌(石)을 닮아 가는 모양이군."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마치 공기가 흩어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기다렸다는 듯 피비린내를 실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베어 넘어 간 거목 주위를 공허하게 맴돌았다. 심상치 않은 밤(夜)이었다.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 1 권 제 19 장 천추무상별부(千秋武相別府) ━━━━━━━━━━━━━━━━━━━━━━━━━━━━━━━━━━━ 자금성(紫禁城). 천하주인(天下主人)인 대명천자(大明天子)가 기거하는 황궁(皇


宮), 그 규모의 방대함과 화려함 등은 극(極)을 넘어 단연 천하의 으뜸이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유난히 고요하고 적막한 밤이었다.

이곳은 자금성에서 약간 떨어진 한 객점(客店)으로 칠흑같은 어둠 이 객점 전체를 무섭게 짓누르고 있었다. 헌데 유독 이 층의 방만은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탁자 위의 굵은 촉불이 촛농을 뚝뚝 떨어뜨리며 신나게 타오르고 있었다. 탁자 옆엔 백옥 덩이를 깎아 빚은 듯한 채 타오르는 황촉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절세미소년이 뒷짐을 진

혁련소천은 파랗게 피어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 천곡의 말에 의하면...... 홍포구마성 반태서(盤太瑞)는 황궁에 서의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내가 황궁무고로 들어가는 데 일말의 허점도 없게 한다고 했다!' 문득 그의 두 눈이 불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 포구마성...... 과거 혁련소야가 손꼽은 지자(智者) 중의 한 명 이며 홍의교(紅衣敎)의 교주! 추악한 모습에 꼽추이나 삼국 시대 (三國時代)의 봉추선생을 무색케 할 만큼 대단한 두뇌(頭腦)의 소 유자라고 들었다!' 그의 입가에 문득 괴이한 미소가 감돌았다. ' 후후...... 궁금하군. 무공의 무(武)자도 모르는 줄 아는 나를 어떤 방법으로 황궁무고에 잠입시킬지.......' 혁련소천은 손 하나 까딱 않고 누워서 떡먹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때 날카롭고 짤막한 한 소리 파공성이 일어났다. 동시에 한 장의 종이가 탁자 위에 깊숙이 쑤셔 박혔다.


'드디어......!' 혁련소천은 눈을 빛내며 선뜻 종이를 집어 가다 돌연 동작을 멈췄다. '아니지! 나는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책버러지이니까.......' 그는 빠르게 염두를 굴린 후 자못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이 단단한 나무에 종이가 꽂히다니......." 그러면서 그는 힘들게 종이를 뽑아 들었다. 종이에는 급하게 쓴 듯한 필치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시간은 자시(子時)를 알리는 북소리가

난 후부터 축시(丑時)까지!

방향은 열두 개의 후문 중 자경문을 택하시오. 그곳에서 태화루를 돌아 십삼중문(十三中門)을 거쳐 곧장 가면 황 궁무고에 당도하게 될 것이오. 황궁무고 내의 모든 기관 장치는 정지되어 있고 십팔중천문(十八 中天門) 또한 모두 열려 있으니 안심하시오. 무고(武庫)에 당도하면 아홉 개의 석문(石門)이 있으니 그 중 건 문을 택해 봉황금시를 사용하시오. 천겁현오밀경이 그 못했소.

안에 있을 것이오만 정확한 위치는 알아내지

그곳을 나오는 시기는 반드시 사흘 후 자시(子時)를 택하시오. 그럼 행운이 함께 하길......! 홍포구마성 반태서.>

혁련소천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만약 이 서찰대로 아무런 저지 없이 황궁무고에 잠입할 수 있다면......!' 그의 눈썹이 일순 묘하게 꿈틀거렸다. '홍포구마성...... 이 자의 능력이야말로 무서운 것이다......!'


혁련소천은 두 눈을 야릇하게 빛내며 서찰을 황촉불에 가져갔다. 서찰이 재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건 확실히 괴변 중의 괴변이었다. 천라지망(天羅之網)의 철통같은 경계망을 자랑하는 황궁(皇宮)이 요, 쥐벼룩 한 마리의 통과조차 허용치 않는 황궁호위무사(皇宮護 衛武士)들이 아니었던가? 헌데 오늘은 허허벌판도 이런 벌판이 없었다. 도무지 거칠 것이 없었다. 술시(戌時)가 되면 물샐틈 없이 봉쇄되는 자경문이 자시가 넘어도 활짝 열려 있는가 하면, 태화루를 거쳐 십이중문을 모조리 통과할 때까지 단 한 명의 호위 무사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실로 괴변 중의 괴변이 아니겠는가?

황궁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밀전(密殿)의 밤은 유난히 적막하다. 혁련소천은 한 채의 웅장 거대한 전각 앞에 당도해 있었다. 그는 담담한 눈길로 전각 입구에 걸린 편액을 쳐다보았다.

<천추무상별부(千秋武相別府).> 금세라도 살아 꿈틀거릴 듯한 용비봉무(龍飛鳳無)의 웅휘한 필치! 아아! 바로 황궁무고의 또 다른 별칭임을 뉘라서 모르겠는가? '황궁무고...... 이곳에는 늘 금위부의 고수 이십 인(二十人)이 지키고 있다고 들었거늘.......' 혁련소천은 천천히 주위를 훑어보았다. 대내 일급 고수 일백 명으로 구성된 황실 친위대(皇室親衛隊)로 서, 황족(皇族)이나 왕가(王家)의 친족들을 죽음으로써 호위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그러한 그들이 무려 이십 명이나 호위를 한다면 대내에서 천추무 상별부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가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헌데 어찌된 판인지 오늘은 혁련소천이라는 외인(外人)이 천추무 상별부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한 명의 금위부 무사도 보이지 않았다. 괴변의 연속이었다.

십팔중천문(十八中天門). 황궁무고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죽음의 관문! 그 관문 하나 하나에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아는 무림인 은 아무도 없었다. 무림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은 오직 하나, 지난 이백 년 동안 도합 구십칠 명(九十七名)의 초강고수가 황궁무고에 잠입했으나 살아 나온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헌데 혁련소천 그는 그 죽음의 관문이라는 십팔중천문마저도 그저 일사천리로 통과해 버렸다. 마치 제집 안방을 거닐 듯 그렇게 유유히......! '홍포구마성의 능력이 제아무리 뛰어나도 도무지 이럴 수는 없다!' 십팔중천문을 모두 통과한 후 혁련소천이 떠올린 첫번째 생각이었다. '내가 알기로...... 황궁의 경계를 풀기 위해선 반드시 금위부 대 영반의 명령이 있어야 한다!' 혁련소천은 문득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렇다면...... 설마 금위부 대영반이 홍포구마성과 어떤 관계를......?' 그런 생각과 함께 또 다른 추측이 뇌리를 스쳐 갔다. '혹시 감천곡이 오늘같은 날을 위해 금위부 대영반을 미리 포섭해 놓았던 것은 아닐까?' 모두 그럴 듯한 추측이었다.


혁련소천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찬찬히 주위를 살펴보았다.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원형을 이룬 하나의 거대한 석실 안이었다. 둥근 석벽에는 도합 아홉 개의 석문이 있었다. 혁련소천은 맨 오른쪽 석문에 시선을 멎으며 두 눈을 이채롭게 빛냈다.

<건문(乾門).> 석문에는 지력으로 그렇게 새겨져 있었다. 또한 석문의 중앙에는 열쇠

모양의 문형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바로 저곳이군!' 혁련소천은 건문 앞에 다가섰다. 이어 은형사철로 만든 또 하나의 봉황금시를 석문 중앙에 맞춰 보았다. 순간 육중한 굉음이 일며 석문이 양쪽으로 쫙 갈라졌다.

그곳은 그야말로 엄청난 크기의 서고였다. 사방의 벽면에는 작게 잡아도 백 개는 됨짓한 서가(書架)가 들어 서 있었고, 각 서가마다는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만큼 엄청난 분량 의 책자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마치 온 천하의 책이란 책은 모두 수집해 놓은 것 같구나......!' 혁련소천은 경악과 함께 전신의 힘이 쭉 빠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숫자만 세는 데도 하루종일 걸리겠다. 여기서 무슨 재주로 천겁 현오밀경을 찾아낸단 말인가?' 그의 입에서 절로 묵직한 한숨이 흘러 나왔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최소한 내가 만마전에서 활동 하기 위해선 일곱 노야의 무공 외의 다른 것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방도가 있을 것이다. 우직하게 이것을 모두 뒤진다면 절대 찾지 못할 것이다. 주어진 시간은 단 삼 일(三日)뿐이니 까.......' 그는 문득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어 두 눈을 감으며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철겁현오밀경...... 천이백 년 전 서하국의 국왕에게 전해 내려 온 비전무학...... 서하국 멸망 이후 떠돌아다니다가 황궁무고로 흘러 들어온 것은 불과 이백 년 전.......' 그는 눈썹을 모았다. '천겁현오밀경...... 분명히 범어(梵語)로 돼있을 것이다. 그리 고...... 천이백 년 전이면 종이가 없었을 테니 양피지나 죽편(竹 片) 따위에 쓰여져 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말이 떠올랐다.

그의 뇌리에 문득 천기개천 사사무의

― 그 서하국의 돌대가리 국왕들은 천겁현오밀경을 고작 선심 단 련 하는 데만 사용했지. 그러면서 주제에 그것의 분실이나 남이 보는 것을 두려워해서 남이 모르는 방법으로 천겁현오밀경을 보존 했단다. 때문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설사 그것을 다른 사람이 얻 어도 절대 해독할 수 없다고 한다! ― 아마 천겁현오밀경은 황궁무고로 들어간 모양이다만 아무도 그 것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설사 얻었다 해도 비밀을 풀 수 없을 테니 얻지 못한 것과 진배없지. 클클...... 허나 이 사사무 어른이라면 코딱지 한쪽 뽑아 내기 전에 간단히 해독할 자신이 있다!

'만약 내가 서하국의 국왕이었다면......?' 혁련소천은 눈을 떴다. '특수한 약물을 쓴다......?' 그는 고개를 이내 내둘렀다. '안 된다. 볼

때마다 다시 약물을 써야

하는 번거로움이 귀찮을 테니까.......'


그는 은근히 짜증이 났다. '빌어먹을...... 아무 것도 아닌 무공비급 하나가 이 혁련소천의 머리를 이토록 어지럽히다니.......' 그는 벌떡 일어났다. 이어 천천히 거닐며 서가를 두루 살펴보기 시작했다. 각 서가는 대단히 희귀한 무공비급들이 유(儒), 불(佛), 선(仙), 도(道), 속(俗) 및 유파(流派)별로 분리되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또한 각 서가에는 서가명(書架名)을

적은 팻말이 각각 하나씩 붙어 있었다.

'쯧쯧! 정말 아깝군. 이 출중한 무공들을 이렇게 썩히다니.......' 혁련소천은 각 서가를 둘러보며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만약...... 이것들 중 삼분지 일만 풀어놔도 천하의 무학수준이 크게 달라질.......' 내심 중얼거리다가 말고 돌연 그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했다. 우측의 여덟 번째 서가, 거기에 붙어 있는 팻말이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천축오지무전서가(天竺奧地武典書架).>

'이곳의 서가가 천축 무공......?' 그는 서가 전체를 쭉 훑어보았다. 어림 잡아 일만 권은 됨짓했다. '여기서 종이로 된 책자를 뺀다면......?' 혁련소천의 시선이 전체를 빠르게 훑었다. '남는 것은 천여 권 정도! 이렇게 되면 의외로 쉬워진다!' 문득 그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어렸다. '사흘...... 천여 권의 책자를 모두 읽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이어 혁련소천은 맨 상단에서 양피지와 죽편으로 된 책자만 뽑아 살피기 시작했다.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는 무섭게 빨랐다. 그는 마치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장의 수를 세고 있는 것 같았다. 허나, 뉘라서 상상이나 하겠는가? 지금 눈으로 스치는 책자의 내용이 모조리 혁련소천의 뇌리에 새 겨지고 있음을.

심천독경광상술(心天讀經廣想術)! 책을 눈이 아닌 마음으로 읽는다는 천기개천 사사무만의 독문비공 (獨門秘功), 바로 그것이 혁련소천에 의해 재현되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새 이틀이 지났다. 혁련소천은 점차 초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권만 남기고 모두 못했기 때문이었다.

읽었어도 천겁현오밀경을 찾아내지

'이거...... 헛다리만 짚다가 끝나는 게 아닐까?' 혁련소천은 눈살을 찌푸리며 맨 하단 구석에 꽂힌 마지막 한 권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두께가 거의 한 자에 가까운 가장 두꺼운 책이었다. '속 썩이는군. 겉모양을 보니 천겁현오밀경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은 멀겠다!' 허나 혁련소천은 드디어 그 책을 뽑았다.

<천방옥요비전결람(天房玉要秘傳訣覽).>

겉장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이거...... 혹시?'


혁련소천은 언뜻 이상한 예감을 느끼며 서둘러 첫 장을 넘겼다. 아니나 다를까? 책장엔 전라(全裸)의 남녀가 묘한 자세로 뒤엉켜 있는 춘화도(春 花圖)가 그려져 있지 않은가? '비...... 빌어먹을......!' 혁련소천은 절망감을 느끼면 빠르게 다음 장을 넘겨 보았다. 장이 넘어갈수록 점점 더 진한 내용의 그림이 혁련소천의 눈을 아 프게 자극시켰다. 천방옥요비전결람, 그것은 한 마디로 천축에 전해 내려오는 모든 방중비술(房中秘術)이 기록된 희대의 음서(淫書)였던 것이다. 마지막 장을 덮는 혁련소천은 전신의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천겁현오밀경...... 과연 황궁무고에 있긴 있는 것일까?' 불현듯 그런 의구심마저 치솟았다. 허나 그는 이내 탄식했다. '틀렸어......! 설령 있다고 해도 이젠 찾을 시간이 없다. 남은 시간은 겨우 하루뿐이거늘.......' 혁련소천은 가져갔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천방옥요비전결람을

원래의

자리에

이어 막 꽂으려는 순간 돌연 혁련소천은 멈칫하며 코 끝을 괴이하게 씰룩였다. 천방옥요비전결람에서 문득 기이한 향기가 풍겨 나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이 냄새...... 분명히 사라용뇌향(沙羅龍腦香)!' 문득 그의 눈에서 한 줄기 기광이 흘러 나왔다. '가뢰산...... 분명히 서하국의 영토 내에 있던 산이다! 또한 서 하국에서는 사라용뇌향으로 책이나 왕족의 시체가 부패되는 것을 방지했다고 들었다!'


그 말을 했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천기개천 사사무였다. 혁련소천은 천방옥요비전결람을 두 손으로 힘껏 쥐었다. '바로 이거다! 분명히 이 책에 문제가 있다!' 그는 문득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어 그는 천방옥요비전결람의 겉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만져 보았다. '책 자체에는 어떤 문제도 없다. 그렇다면......?' 그는 눈을 감았다. 이어 책자에 적혀 있는 글자를 모조리 되뇌기 시작했다.

혁련소천이 감았던 눈을 번쩍 뜬 것은 그로부터 꼭 두 시진이 지나서였다. '몰랐다!' 문득 그의 입언저리에 신비스런 미소가 배어 나왔다. "후후후...... 줄이야......!"

설마하니

서하국의

국왕들은

이렇게

기묘한

방법을

사용했을

혁련소천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괴이한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천방옥요비전결람...... 그 첫 머리 글자는 곧 천(天)!" 천(天)! "현록위박(玄鹿爲膊) 현(玄)!"

식지수오백세정력충천(食之壽五百歲精力沖天)의......

현(玄)! "네 번째줄...... 오묘천기잉(奧妙天氣孕) 환락일체(歡樂一切)의 오(奧)!" 오(奧)! "밀운불우(密雲不雨) 백아불능(百我不能)의...... 밀(密)!"


밀(密)! "경락혈기(經絡血氣) 유십이경(有十二徑) 영십오격(永十五格)의 경(經)......!" 경(經)! "첫 머리 글자를 밀...... 경!"

모두

조합하면

천...... 겁......

현...... 오......

천겁현오밀경―!

"이 책...... 완벽한 천겁현오밀경의 진본(眞本)이다......!" 혁련소천의 눈에서 신비스런 광채가 흘러 나왔다. "지금 이백 년 이래...... 이 책에는 누구의 손길도 묻지 않았다. 즉, 천하에 천겁현오밀경을 익힌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결 론......!" 그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어렸다. "전에도 없었지만 후에도 이 천겁현오밀경을 익힌 사람은 나타나 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이미 내가 얻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나의 허락 없 이는 그 누구도 천겁현오밀경을 익히지 못할 테니까......." 혁련소천은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책자를 품 속에 넣었다. 바로 그때 밖으로부터 아련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시를 알리는 북소리......!' 그때가 바로 혁련소천이 황궁무고에 들어온 지 꼭 삼 일째 되는 때였다. 그는 조금도 서두름 없이 밖으로 걸음을 떼 놓았다.

<자경문.> 한 인영이 달빛을 받으며 유유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혁련소천이었다. 황궁무고를 벗어나 자경문 밖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은 들어갈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혁련소천은 너무도 한가롭게 자금성을 빠져나온 것이다. 혁련소천은 잠시 하늘을 쳐다본 뒤 서서히 걸음을 떼 놓았다. 헌데 그때 한 줄기 전음이 그의 귓전에 불쑥 스며들었다. (수라마영입니다.) 혁련소천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수라마영의 전음이 빠르게 이어졌다. (조사해 본즉...... 금위부 대영반 금철성(金鐵成)은 홍포구마성 반태서의 동문사제(同門師弟)임을 알아냈습니다. 허나 황궁에서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혁련소천의 눈에 짧은 섬광이 스쳐 갔다. '역시 짐작이 맞았군!' 수라마영의 전음이 은근한 어조를 띠고 들려 왔다. (대종사님. 천겁현오밀경은......?) 혁련소천은 씨익 웃기만 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수라마영은 괴소를 흘렸다. (후후후...... 역시 대종사님이십니다. 하기야...... 대종사님의 능력으로 얻지 못할 것이 지상에 존재할 리가 있겠습니까?) (.......) (그리고 참...... 대종사님께서는 이제부터 행동에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 (구천 중의 자소천(紫 天)에서 감천곡이 대종사님을 거두었다는 것을 알고 대종사님을 노리기 시작했습니다.)


혁련소천의 눈썹 끝이 가벼운 움직임을 보였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저희 형제들이 있는 이상 그 누구도 대종사 님의 곁에 접근할 수 없을 테니까요.) 혁련소천은 그제야 처음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나는 그것을 생각하는 게 아니오.) (......?) (황궁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예?) (그 귀한 곳을 드나들면서 잠 한숨 자지

못하고 나온 것이 못내 아쉽구려.)

"......!" 수라마영은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 자소천 따위에 신경 쓸 시간이 있으면 잠이나 자겠다.

혁련소천의 말에 바로 그러한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수라마영의 괴소를 흘렸다. "후후후...... 언제든 말씀만 놓겠습니다."

하십시오. 원하신다면 황제의 침소라도 비워

"황...... 제?" 혁련소천은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다음 순간 그는 하늘을 우러르며 상쾌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것은 쏟아져 내리는 달빛만큼이나 밝고 환한 웃음이었다.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 1 권 제 20 장 살인(殺人)...... 그 첫번째! ━━━━━━━━━━━━━━━━━━━━━━━━━━━━━━━━━━━ 십일월(十一月) 초여드레(八日). 이 날은 혁련소천이 장군부에 든 지 꼭 다섯 달이 되는 날이었고, 감천곡은 두 달이 채워지는 날이었다. 그리고 감천곡이 혁련소천과 더불어 장군부를 떠난 것도 바로 이 날이었다. 뿌연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질풍처럼 질주해 가는 일진의 기마대, 그들의 가운데에는 흑단목으로 된 화려한 마차 한 대가 쾌속하게 치달려 가고 있었다. 마차에 걸려 찢어질 듯 펄럭이는 하나의 깃발엔 <군마천위(君魔天 威) 만웅앙복(萬雄仰伏)>이란 글귀가 쓰여져 있다. 바로 감천곡이 타고 왔던 그 마차였다. 마차와 삼백여 기의 인마(人馬)떼는 무서운 속도로 천궁산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장군부의 정문 앞에는 영호대인을 위시한 석대선생 등 많은 사람 들이 모여 멀어져 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차가 시야에서 벗어난 지 이미 일각이 지났지만 영호대인은 웬 일인지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저 물같이 잔잔한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더 흐른 후에야 이윽고 영호대인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그리곤 담담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괜찮겠지." 그 말뿐, 영호대인은 서서히 대문 안으로 멀어져 갔다. 그가 들어가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남은 사람은 석대선생 그 혼자뿐이었다. 석대선생은 마차가 사라져 간 방향을 쳐다보며 굳은 듯이 우뚝 서 있었다.


문득 꽉 다물렸던 입술이 떼어지며 한 줄기 조용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감천곡...... 셈이지......."

너는

실수했다.

능력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인간을

거둔

문득 그의 두 눈 깊숙한 곳에 괴이한 광채가 피어올랐다. "앞날이 보인다. 구천십지만마전...... 머지 않아 미증유의 대폭 풍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석대선생은 천천히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순간 베면 푸른 물이라도 뚝뚝 떨어질 듯한 푸른 하늘이 그의 동공을 가득 메워 왔다. 헌데 무의식 중인가? "무량수불......." 느닷없이 한 소리 도호가 그의 입술을 비집고 불쑥 새어 나온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소리는

그 자신조차 알아듣기 힘들 만큼 극히 미약한 것이었다.

석대선생은 은빛 수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나직이 웃었다. "허허...... 아직도 도호를 잊지는 않았군." 도호만큼이나 미약한 중얼거림이었다. 석대선생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곤 대문 근처의 수림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시선을 바로 하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너무 강해...... 그것이 흠이야."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석대선생은 대문 안으로 휘적휘적 멀어져 갔다.


이때 수림 속의 바위 뒤에서 한 인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마의에 목검(木劍) 한 자루를 품에 안고 있는 영호검제 바로 그였다. 영호검제는 대문 안으로 멀어져가는 석대선생을 응시하며 나직이 읊조렸다. "너무 강하다고? 흐흐흐...... 물론 강하면 부러지기도 쉽겠지. 허나 강이 극(極)에 이르면 절대 부러지지 않는 법이야, 석대선생!" 그는 끝말에 가장 확실한 억양을 주었다. "셋째 아우, 너는 만마전...... 나 영호검제는 너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어!" 순간 영호검제의 눈빛이 섬뜩하리만큼 차갑게 굳어졌다. "흐흐흣...... 머지않아 진정한 마종(魔宗)이 누군지 가려진다!" 차가운 괴소와 함께 영호검제의 몸이 연기처럼 흐려지더니 이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두두두두...... 두두두...... 타오르는 석양 속에서 일진의 기마대가 질풍처럼 치닫고 있었다. 바로 장군부를 떠나온 군마천의 고수들이었다.

마차 안엔 네 명의 인물이 타고 있었다. 감천곡과 혁련소천, 무형천궁 공손무외와 또 다른 한 명이었다. 그 또 다른 한 명은 일신에는 피보다 붉은 홍의를 걸치고 있었고, 유난히 긴팔에 등이 낙타처럼 툭 불거진 꼽추 노인이었다. 헌데 그 노인의 얼굴을 어찌 인간의 얼굴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벌레가 기어가듯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상처로 뒤덮인 얼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어디가 눈이고 코인지 도무지 분간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무참하게 짓뭉개진, 진정 꿈에 볼까 두려운 끔찍스러운 모습이었다.


홍포구마성 반태서―!

사천(四川)에서 이 이름은 곧 죽음으로 통한다. 한 번 내뱉은 말은 절대 거두어들이는 법이 없고 또한 한 치의 오 차도 허용치 않는 치밀하고도 냉혹한 성격의 소유자! 팔십 년 전, 당시 사천제일(四川第一)의 귀공자로 일컬어지던 그 는 불과 이십육 세의 나이로 홍의교의 교주(敎主) 자리에 올라섰다. 그후 십 년이 지났을 때, 그는 준수했던 용모를 스스로 무참하게 망가뜨렸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사천제일뇌(四川第一腦)! 일을 처리함에 있어 이성만 찾되 절대적으로 감정을 배제하는 냉 혹하고 치밀한 성격이 가져다 준 또 하나의 별호였다.

마차 안에는 오랫동안 기이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장군부를 떠난 이후 그들 중 입을 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득 감천곡이 침중한 음성으로 침묵을 깨뜨렸다. "반노제, 자네는 이번 계획이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는가?" 홍포구마성 반태서에게 묻는 말이었다. 반태서는 눈알을 한

차례 빠르게 굴린 후 냉혹한 어조로 대꾸했다.

"만마전의 열아홉 단체는 그 실력이 모두 백중지세요. 또한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 왔을 터인즉......." "결론은?" "실로 어려운 일이오." 반태서는 문득 싸늘한 눈빛을 혁련소천의 얼굴에 꽂았다.


"문제는...... 오직 영호공자의 능력 여하에 달려 있소이다." 그 말에 감천곡은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점은 안심하게. 영호공자의 능력은 나 감천곡이 이미 인정하고 있으니까." 반태서는 혁련소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직...... 세 가지 편법 중 한 가지만 성공했을 뿐이오. 나머지 두 가지가 모두 끝난 후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감천곡은 나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역시 홍포구마성다운 말이야." 그들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났다. 이 순간 혁련소천은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두 가지 편법...... 또 어떠한 것들일까?' 그는 일종의 호기심마저 느꼈다. 헌데 그때 느닷없이 한 줄기 전음이 혁련소천의 귓 속으로 파고들었다. (한단지마입니다.) 혁련소천은 내심 흠칫했으나 표정에는 티끌만큼의 변화도 없었다. (귀찮은 일이 생겼습니다.) (.......) (자소천의 서열 육위고수(六位高手)인 철환(鐵丸) 소남붕(蘇南朋) 이 대종사님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 (문제는 놈의 무공이 아니라 놈이 영호풍의 진면목을 아는 유일한 놈이라는 것입니다.) (.......) (일곱 째의 말에 의하면 놈은 오 년 전 천간산에서 영호풍과 마주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혁련소천의 표정은 시종 담담했다. 한단지마의 전음이 침중하게 이어졌다. (대종사님의 명령을 바랍니다.) 혁련소천은 잠시 생각하더니 불쑥 물었다. (소담붕은 누가 쫓고 있소?) 그렇게 묻는 그의 입은 여전히 꽉 다물린 상태였다.

심기어전(心氣語傳).

최소한 이백 년 공력 없이는 시전이 불가능한 전음술의 최고봉(最 高峰)이 너무도 쉽게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한단지마는 즉시 대답했다. (삼생다라(三生多羅)가 뒤쫓고 있습니다. 그들 삼 인의 능력이면 소담붕 정도는 충분히.....) (추격을 중지하라 전하시오.) (......!) (내가 직접 처리하겠소.) (알겠습니다!) (어서

가시오. 마차의 밑바닥이라 오래 있기가 불편할 테니까.......)

(흐흐흐...... 역시 대종사님은......!) 그 말을 끝으로 한단지마의 전음은 더 이상 들려 오지 않았다. 혁련소천은 문득 당혹한 기색을 떠올리며 감천곡을 쳐다보았다. "노인장."


"......?" "잠시 마차를 세워야 되겠습니다." 감천곡의 눈에 의혹이 솟았다. "무엇 때문에......?" 혁련소천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든 일은 완벽하게 끝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헌데?"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이 한 가지 남았습니다." "......?" "대광사에서 옥산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감천곡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때 공손무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허허...... 자고로 청춘은 즐거운 법. 영호공자, 그런 문제라면 조금도 망설일 필요가 없다네." 그러자 감천곡도 빙긋 웃으며 말했다. "갔다 오게. 허나 너무 늦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곧이어 마차가 멈추고 혁련소천이 밖으로 나갔다. 이때 문득 반태서가 두 눈을 야릇하게 빛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뭐가 말인가?" 감천곡의 반문에 반태서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 아무 것도 아니오."


감천곡은 그 순간 보았다. 반태서의 눈빛이 기이할 정도로 차갑게 굳어지는 것을......!

산신묘(山神廟). 말이 좋아 산신 묘지 흉가(凶家)도 이런 흉가가 없었다. 허물어진 담과 깨어진 기와, 거의 어른 키만큼이나 자라난 무성한 잡초가 어우러져 금세라도 뭔가 뛰쳐나올 듯 황량하고도 음산한 정경이었다. 불어 대는 이 바람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차고 매서운지...... 이때 잡초 스치는 스산한 음향이 일며 열 줄기 인영이 산신묘 안으로 들어섰다. 일신에 자의(紫衣)를 걸친 그들의 전신에서 풍기는 인상은 한결같 이 음산하고 사악(邪惡)했다. 그들의 맨 앞엔 푸르죽죽한 안색에 은은한 자광이 감도는 눈을 가 진 육순 가량의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왼손에 검은 쇠구슬 두 개를 습관처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철환(鐵丸) 소남붕!

자소천의 서열 구위(九位)에 올라 있는 고수, 그의 손에서 발출되 는 서른여섯 개의 철환은 아직까지도 실패한 적이 없다는 무적 병기로 평가된다.

문득 철환 소남붕은 곤혹스런 어조로 중얼거렸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아니었는데......."

분명

영호풍의

모습이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 년 동안 그렇게 많은 변화가 있을 수 있을까......?" 그의 눈빛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깊숙이 가라앉았다.

그렇게까지

훌륭한

것은


"뭔가 이상해...... 내가 본 영호풍은 비록 기재이기는 하나 감천 곡의 마음까지 단번에 사로잡을 정도는 아니었어......!" 중얼거림이 끝나는 그 순간, "킬킬킬...... 별놈 다 보겠군. 이상하게 생긴 놈이 이상하게 웃긴단 말이야." 느닷없이 산신묘 밖에서 괴이한 말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떤 놈이냐?" 살기 돋친 냉갈과 함께 소남붕의 왼쪽 손이 벼락같이 번뜩였다. 슈― 욱! 순간 파공음과 함께 한 개의

철환이 뇌전처럼 벽을 뚫고 쏘아 갔다.

"아이쿠! 인간 살려......!" 꽝―! 짤막한 폭음과 숨넘어가는 듯한 다급성이 동시에 터졌다. 그 순간 소남붕과 아홉 명의 자의인은 어느새 소리가 터져 나온 곳에 나타나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전신에 땟국물이 기름기처럼 번들거리는 거지차림 의 소년이 바닥에 퍼져앉아 울상을 짓고 있었다. 소년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박살난 밥그릇을 바라보 고 있었다. 이때 소년은 소남붕을 보자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벌떡 일어섰다. "이 영감탱이야! 도대체 나하고 전생에 무슨 철천지 원한이 있다 고 내 밥그릇을 요꼴로 만들었느냐?" 다짜고짜 내뱉는 반말은 문제가 아니었다. 소년은 마치 소남붕의 콧구멍을 질을 해대는 것이 아닌가. 소남붕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찌르기라도 할 듯 정신없이 삿대


그의 기억에 이토록 남에게서 호된 꾸지람(?)을 들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소남붕의 얼굴에 무서운 살기가 떠올랐다. "네놈...... 지금 누구한테 뭐라고 씨부렁...... 억!" 그는 말을 하다 말고 흠칫 고개를 쳐들었다. 하마터면 소년의 손가락이 콧구멍을 찌를 뻔했던 것이다. "이 영감탱이야! 내 죄라면 요 짐승보고 이상하다고 말한 죄 밖에 없다. 헌데 무슨 이유로 남의 밥그릇은 깨뜨렸냔 말이다!" 소남붕은 또 한 번 멍청해지고 말았다. 소년의 발 밑에 쥐처럼 작고 눈이 새파란 흰색 털의 묘한 짐승 한 마리가 깨진 밥그릇을 열심히 핥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고개를 아래로 홱 꺾었다. "야! 이 심통 많은 놈아! 나는 밥그릇이 깨져 죽을 지경인데 네놈 은 뭐가 좋다고 처먹기만 하냐?" 그러면서 그는 짐승을 발길로 냅다 걷어찼다. "끼아아... 악!" 짐승은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쏟살같이 숲쪽으로 달아 났다. "통째 구워 먹어도 시원찮을 놈 같으니......!" 소년은 거친 숨을 토하며 씩씩거리더니 이내 소남붕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소남붕이 흠칫한 순간 소년은

그의 멱살을 냅다 움켜쥐며 이빨을 우두둑 갈았다.

"이 영감탱이야! 이 밥그릇으로 말하자면 지난 십구 년 동안 나를 먹여 살렸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장장 백 년은 더 먹여 살릴 생명 줄로써 값을 따질 수도 없는 것이다!" "......!" "물어내라! 물어내―!"


길길이 날뛰며 바락바락 악을

쓰는 소년의 모습은 진정 가관이었다.

뿐인가? 소남붕의 얼굴에는 이미 구린내를 풍기는 침방울이 수도 없이 튀어 있었으니...... 자의인들은 어이가 없어도 한참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미친 놈! 어디 붙잡을 게 없어

염라대왕의 멱살을

쥐고 흔들어......?'

'삶에 염증을 느낀 놈이라면 임자는 제대로 찾은 셈이야!' 그들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남붕의 참고 참았던 분통이 드디어 터지고 말았다. "이 새끼!" 그는 한 소리 대갈을 터뜨리며 소년의 복부를 사정없이 내질렀다. 퍼억―! "어구구구......!" 소년은 죽는다고 비명을 내지르며 멀찌감치 나가 떨어졌다. 허나 다음 순간 소년은 벌떡 일어서더니 배를 움켜쥐고 더욱더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아이고, 배야! 아이고, 궁둥이야! 인간 살려라! 이 영감탱이가 남의 쪽박 깨고 인간까지 죽인다! 아이고......!" 눈을 반쯤 그대로였다.

까뒤집고

게거품까지

부글부글

뿜어내는

이때 문득 소남붕의 눈에 번쩍 기광이 솟구쳤다. '나의 발길질을 맞고도 저렇게 멀쩡하게 일어서다니......!'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살기찬 음성을 내뱉었다. "이제 보니 숨은 고수였군!" 동시에 또 하나의 철환이 유성처럼 허공을 갈랐다.

폼이

영판

아귀모습


"아이쿠!" 돌연 소년은 철환을 맞기도 전에 바닥을 뒹굴며 다 죽어가는 비명을 내질렀다. 철환은 소년이 서 있는 자리에 그대로 쑤셔 박혔다. 다음 순간 소년은 기다렸다는 듯이 퉁기듯 몸을 일으켜 옆쪽에 있 는 바위 위에 폴짝 올라섰다. 이어 소년은 싯누런 이빨을 시원스레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헤헤헷...... 늙은 놈! 생각 같아선 당장 네놈의 모가지를 비틀 고 싶다만 우리 어른이 오셨으니 나는 이만 가 보시겠다." 말이 끝나면서 소년의 신형은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소남붕의 눈에 시뻘건 불길이 화락 치솟았다. "이, 이놈! 서라!" 소남붕이 막 몸을 날리려는 순간 돌연 조용한 음성이 그의 등뒤에서 일었다. "그대가 철환 소남붕인가?" 흠칫 놀란 소남붕은 지체없이 몸을 홱 돌렸다. 그의 뒤에는 준수한 외모의 혁련소천이 태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 소남붕은 말할 것도 없고 자의인들 중에서도 혁련소천이 언제 어 디서 나타났는지 알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수다......!' 소남붕은 대뜸 직감하며 안색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너는...... 누구냐?" 혁련소천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지금까지 그대는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았던가?" 소남붕의 눈에 번쩍 괴강이 스쳤다.


"이제 보니 너는......?" "영호풍." 소남붕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허나 그는 곧 평정을 되찾으며 음침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는...... 영호풍이 아니다. 영호풍은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혁련소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서 내가 왔다. 바로 그대를 죽이기 위해서." 소남붕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 죽이기 위해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치 예리한 비수가 목에 와 닿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허나 소남붕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괴소를 발했다. "흐흐흐...... 이상한 일이군. 네놈은 대체 누구이기에 영호풍으 로 위장해서 군마천에 잠입하려는 것이냐?" 혁련소천은 조용히 말했다. "이유는 알 것 없어. 단지 너는 죽어 주기만 하면 될 뿐이야." 살인 예고! 허나 그 음성은 너무도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소남붕의 안면이 괴이하게 씰룩거렸다. "흐흐흣...... 네놈은 나 소남붕을 허수아비로 착각한 모양이구나." "사실이 그러니까." "미친 놈!" 순간 한꺼번에 대여섯 개의

철환이 소남붕의 손에서 벼락치듯 폭사되었다.


"바보.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혁련소천은 태연하게 중얼거리며 오른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그러자 쏘아 오던 대여섯 개의 철환은 자연스럽게 그의 수중으로 빨려 들어갔다. "헉......!" 소남붕은 대경하며 급히 뒤로 물러섰다.

"후후후...... 놀란 모양이군." 혁련소천은 기소를 흘리며 오른손을 슬쩍 폈다. 순간 한 웅큼의 검은 쇳가루가 우스스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처...... 철환이 쇳가루로......?' 소남붕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뒈져랏!" 더 기다릴 것도 없이 소남붕은 발악적으로 양 소매를 앞으로 떨쳐 냈다. 순간 검은 파도와 같은 철환들이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혁련소천 의 전신을 폭우처럼 덮어 갔다. 소남붕이 자랑하는 최후의 절명초식(絶命招式)이 전개된 것이다. "부질없는 것." 냉소적인 한 마디가 들려나오는 순간 혁련소천의 신형이 곧장 앞으로 쏘아졌다. 이 얼마나 무모한 행동인가? 피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검은

비(雨)처럼 쏘아 오는 철환 속으로 몸을 날리다니.

아니다 다를까? 퍼퍽― 퍼퍼퍽! 서른여섯 개의 철환은 혁련소천의 전신에

바늘 끝처럼 고스란히 쑤셔 박혔다.


순간 소남붕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흐흐흐...... 미친......." 허나 그의 말은 나오다가 말았고 희색은 나타날 때보다 수 배의 빠르기로 사라져 버렸다. 당연히 피떡이 되어 나가 떨어질 줄 알았던 혁련소천이 그대로 쏘 아 오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문제가 아니었다. 환상이었던가? 소남붕은 활짝 펼쳐진 혁련소천의 장심에서 또하나의 손이 불쑥 뻗어 나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슈아아앙―! 그 손은 마치 혈옥(血玉)을 깎아 만든 듯 지극히 정교하고 아름다 운 핏빛의 손이었다. 슈― 욱! "으윽......!" 한순간 소남붕은 심장 부위가 불에 데인 듯 화끈해짐을 느꼈다. 핏빛 혈옥수(血玉手)가 그의 가슴을 앞뒤로 관통해 버린 것이다. 시뻘건 핏물이 이내 기세 좋게 가슴의 앞뒤로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소남붕은 비명 대신 불신과 경악에 찬 음성을 힘겹게 내뱉을 뿐이었다. "이...... 이것은...... 미리혈옥수(彌離血玉手)......!"

전설......

마황궁(魔皇宮)의......

"진짜 바보는 아니었군." 어느새 혁련소천은 소남붕의 면전에 우뚝 서 있었다. 마치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소남붕의 안면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미...... 믿을 수...... 어찌 사람의

몸 속에서...... 그것이......."


혁련소천은 담담히 웃었다. "과거 나는...... 인간의 한계에 넣었다."

대한 도전으로 몸 속에 여섯 개의 무기를 박아

"모...... 몸 속에?" "그 첫번째가 미리혈옥수, 그리고......." 순간 혁련소천의 시선이 좌우에 넋을 잃고 서 있는 자의인들을 빠르게 훑어 지나갔다. 번― 쩍! 동시에 한 줄기 시뻘건 광채가 그의 오른쪽 소매에서 뻗쳐 나와 자의인들의 앞을 섬광처럼 스쳐 갔다. 파팍― 파파팍! 단지 스쳤을 뿐이건만 정확하게 아홉 개의 수급이 순식간에 핏물 에 휩싸인 채 허공 높이 떠올랐다. 자의인들 중 자신이 어떻게 무엇에 당해 죽어 가는지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니, 심지어는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이것이 그 두 번째 무기이다." 혁련소천은 소매를 걷어 오른쪽 팔뚝을 내밀었다. 그의 팔뚝에는 실같이 가느다란 핏빛 혈선(血線)이 나선형으로 칭 칭 감겨져 있었다. 순간 소남붕의 전신에 격렬한 진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망혈사(死亡血絲)......?" "뻗치면 백 장 이내의 생명체를 모조리 죽일 수 있다는 죽음의 마사(魔絲)이지." "어...... 어찌...... 인간의...... 몸 속에...... 무기를......?"


소남붕은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감천곡...... 무서운...... 인간을...... 만...... 마전으로......." 철환 소남붕, 그는 혁련소천에 의해 살해된 구천십지만마전의 첫 번째 희생자였다. 혁련소천은 소남붕의 시신을 향해 오른속을 확 펼쳤다. 슈아아― 앙! 미리혈옥수가 소남붕의 심장 부위에서 빠져나와 그의 장심으로 흔 적도 없이 사라졌다. 때를 같이 해서 혁련소천의 전신에 박혀 있던 서른여섯 개의 철환 이 모조리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어 혁련소천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전신을 툭툭 털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영호풍의 진면목을 안 것이 죽을 죄였다." "헤헤헤...... 소인의 배를 찬 것도 죄라면 죄이지요." 그때 짓궂은 괴소와 함께 한 인영이 혁련소천의 면전에 가볍게 내려섰다. 그는 바로 조금 전에 훌쩍 사라졌던 거지 소년이었다. 혁련소천은 담담히 미소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어찌 되었느냐?" 소년은 히죽 웃었다. "헷헷...... 삼생다라의 첫째인 이 천수다라(千手多羅)의 두 손이 천하에 무엇인들 훔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면서 품에서 두툼한 서찰 한 뭉텅이를 꺼냈다. 만약 소남붕의 영혼이 아직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외쳤으리라.

― 내 거다!


혁련소천은 물었다. "읽어 보았느냐?" "대충 읽어 본 즉, 모두 대종사님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손은 썼느냐?" "내용을 모조리 뒤바꿨습니다." 혁련소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시 소남붕의 품에 넣어 두어라." "알겠습니다. 헌데 이들의 시체는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습니까?" 혁련소천의 입가에 신비스런 미소가 번졌다. "그대 막내아우의 능력이면 이 시체들을 환락천(歡樂天)의 놈들에 게 당한 것처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천수다라의 눈에 반짝 기광이 솟았다. "환락...... 천입니까?" "재미있지 않겠느냐? 환락천과 자소천이 반목하여 피터지게 싸운다면......." 그것은 분명 또 하나의 음모였다. 혁련소천이 소남붕을 제거하기 위해 직접 나타난 것도 미리 이 음 모를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혁련소천은 천수다라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너희 삼 형제는 이번 일을 마치고 군산 제왕성으로 돌아오도록 해라." 군산 제왕성―! 당금 무림에 그런 이름의 문파는 없었다. 천수다라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참......!"


"무엇이냐?" "한단지마 육사숙을 만나시면 저희들을 그만 괴롭히라고 전해 주십시오." "음......?" "그 분은 땅만 있으면 아무 곳에서나 불쑥불쑥 나타나 저희들의 머리를 쥐어박는 바람에......." 말을 하다 말고 천수다라의 눈이 돌연 커졌다. 바로 코 앞에 서 있었던 혁련소천이 어느새 연기처럼 증발한 것이다. 천수다라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씁쓸한 고소를 지었다. (제기랄...... 괜히 혼자 씨부렁.......) "제기랄 이란 말까지 한단지마에게 전해 주마." 이때 한 줄기 전음이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아련히 들려 왔다. 천수다라는 대경하며 황급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이어 그는 코가 터지도록 바닥에 얼굴을 처박으며 울부짖듯 외쳤다. "대종사님! 제발 그 말만은......!"

금릉성 외곽, 한 황량한 산신묘 앞에서 벌어졌던 사건이었다.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 1 권 제 21 장 야릇한 여심(女心) ━━━━━━━━━━━━━━━━━━━━━━━━━━━━━━━━━━━ 대광사에서 멀지 않은 한 야트막한 언덕 위, 수령(樹齡)을 짐작키 어려운 한 그루 거목(巨木)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었다. 그 거목 옆에는 한 며 서 있었다.

여인(女人)이 미풍에 옷자락을 가볍게 살랑이

헌데,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미(美)가

이렇게까지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인가?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티끌만큼의 흠집도 찾아낼 수 없는 십전완 미(十全完美)의 실로 인세(人世)에 다시 있기 힘든 미녀(美女) 중의 미녀!


옥산랑...... 바로 그녀였다. 붉디붉은 휘장처럼 드리워진 서천(西天)을 바라보며 그녀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서 있었다. 타오르는 석양을 고스란히 받고 서 있기 때문인가? 이 순간 그녀의 모습은 차라리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때 옥산랑의 등 뒤에서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일었다. 옥산랑의 얼굴에 언뜻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발자국 소리는 그녀의 바로 등 뒤에 와서 멎었다. 곧이어 한 줄기 부드러운 음성이 옥산랑의 귓전을 간지럽혔다. "아름답소. 붉은 아름답소."

노을 속의 소저는

그림에서만 보았던 선녀처럼 너무도

옥산랑은 그제야 천천히 돌아섰다. 그녀의 시선에 노을 빛을 등진 준수한 혁련소천의 웃음띤 얼굴이 들어왔다. 한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뒤엉키며 야릇한 눈빛이 교환되었다.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기껏해야 한 자 남짓, 상대방의 숨소리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어느 사이 옥산랑의 눈가에 가벼운 웃음기가 감돌았다. "그 동안 말솜씨가 많이 느셨군요." 혁련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부적으로 타고난 모양이오. 미녀만 보면 생각지도 안았던 말이 술술 흘러나오는 걸 보니......." 옥산랑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질투가 나는군요. 천하에 쌓인 것이 미녀이니...... 당신의 입술 에서는 잠시도 침이 마를 때가 없겠군요."


혁련소천은 짐짓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틀렸소. 천하에 미녀는 많겠지만 내가 칭찬할 정도의 미녀는 별로 없을 것이오." 옥산랑은 방긋 웃었다. "듣기 싫은 말은 아니군요."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니까." 옥산랑은 피식 웃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나는 오늘 당신이 그냥 갈 줄 알았어요." 혁련소천은 문득 기소를 발했다. "후후후...... 아름다운 약혼녀와의 약속을 잊고 어찌 그냥 갈 수 있겠소." 그 말에 옥산랑은 입술을 가볍게 삐죽거렸다. "피...... 비록 양가가 합의는 했을지언정 나에게 있어 약혼이란 아무런 의미나 구속도 될 수 없어요." 순간 혁련소천은 눈을 크게 뜨며 의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호! 파혼 선언이오?" "그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당신은......." 옥산랑은 말꼬리를 흐리더니 문득 발그레한 홍조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천하에서 나 옥산랑의 남편될 자격이 있는...... 유일한 분이에요." 그것은 너무도 솔직한 연보랏빛 사랑의 고백이었다. 혁련소천은 빙그레 미소했다. "광오한 말이군. 허나...... 맞기는 맞는 말이오."


옥산랑은 얼굴을 도화빛으로 물들이며 생긋 웃었다. 반짝 드러나는 치아! 웃음과 어울려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이때 문득 혁련소천의 양손이 옥산랑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휘어 감았다. 난생 처음 남자의 손길을 접했기 때문인가? 옥산랑의 눈빛이 일순 초점을 잃고 심하게 흔들렸다. 허나 다음 순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옥산랑은 목덜미까지 새빨갛 게 붉히며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화편처럼 붉고 육감적인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달짝지근한 향기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화려한 유혹이었다. 유난히 길게 자란 그녀의 속눈썹은 어떤 미지의 흥분을 담은 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헌데, 어찌된 일인가? 그 토록 어떤 기대와 설레임을 억누르며 기다렸건만 도무지 소식(?)이 없었다. 옥산랑은 의아한 마음에 살포시 눈을 떴다. 혁련소천은 야릇한 미소를 띤 채 응시하고 있을 뿐 도무지 움직일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옥산랑은 마치 찬물을 덮어쓴 기분이었다. "다...... 당신은......."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이 그녀의 전신을 태풍처럼 휘감아왔다. "이 손...... 당장 풀어요!" 허나 혁련소천의 두 손은 오히려 그녀의 허리를 더욱 바짝 끌어당길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너무 완벽한 아름다움이야. 산랑...... 당신은 너무 예뻐......."


"흥! 놔요. 이젠 늦었...... 읍!" 순간 꽃잎같은 입술 위로 뜨거운 또 하나의 입술이 덮어졌다. "으음...... 읍......!" 본능이었으리라. 짧은 순간이나마 옥산랑이 거부의 몸짓을 보인 것은. 혁련소천은 천기개천 사사무에 의해 인간 열 가지 관문을 거친 적이 있다.

한계에 대한 도전으로

그 중 가장 쉬운 듯 하면서도 견디기 어려웠던 관문이 바로 색관(色關)이었다. 혁련소천의 입맞춤 솜씨는 능란하기 짝이 없었다. 뜨겁고 달작지근한 있었으니......

그것은

다른

공간을

마음껏

뛰놀며

춤을

추고

"으음...... 음......." 옥산랑같은 초보자가 완전히 입술의 포로로 변한 것은 어쩌면 당 연한 일이었다. 황홀함이여...... 감미로움이여......

"산랑." "응......?" 거목에 기대선 두 남녀, 여인은 아직도 꿈을 꾸듯 몽롱하고 황홀한 표정이었다. 혁련소천은 옥산랑의 뺨을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말했다. "내 약속하리라." "무슨......?" "누가 뭐래도 정실 자리는 그대 것이오." 옥산랑은 배시시 웃으며 아무 생각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말을 듣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처럼.


허나 그녀는 그 순간 깨닫지 못했다.

― 정실은 네 것이나 처첩(凄妾)은 얼마든지 두겠다― 혁련소천의 말속에는 이런 뜻이 내포되어 있었음을. 어쨌든 타오르는 오늘의 석양은 유난히 붉고 아름다웠다.

여기 마도(魔道)의 영원한 불멸혼(不滅魂)을 기원하며 세워진 악 마(惡魔)의 대성전(大聖殿)이 있다. 지난 팔백 년 동안 마도 출신의 모든 고수들은 그 앞에 피로써 충 성을 맹세해야 했고, 모든 고수들은 그들의 무학 중 가장 뛰어난 하나를 그 아전에 바쳐야만 했다. 그 마도 고수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 조차 없었고 또한 그들이 바 친 절예(絶藝)는 하나의 산(山)을 이루었다. 마도의 전(全) 고수들이 속해 있고, 마도무학의 절예가 산처럼 쌓 여 있는 이 하늘 아래 가장 위대한 마전!

<구천십지만마전(九天十地萬魔殿).> 아홉 하늘(九天)과 열 개의 땅(十地)을 통틀어 이 세상에 존재하 는 지상최강(地上最强)이자 절대무이(絶代無二)의 대성전! 서천목산(西天木山) 일천이백봉(一千二百 )을 종횡으로 에워싸 고, 그 가운데 오천여만 평의 지상 위에 위용 당당히 세워진 하늘 아래 가장 큰 대전......! 그곳이 바로 구천십지만마전이다.

가을이 터질 듯 여물어 있던 만추(晩秋)의 어느 날, 혁련소천은 드디어 감천곡과 더불어 구천십지만마전에 도착했다. 십일월(十一月) 일이었다.

십오일(十五日),

탐스런

만월(滿月)이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 1 권 제 22 장 시작된 운명(運命)

휘영청

떠오른

날의


━━━━━━━━━━━━━━━━━━━━━━━━━━━━━━━━━━━ 서천목산(西天木山) 일천이백봉(一千二百 ) 동북방(東北方). 그 곳에는 마치 하늘을 꿰뚫을 듯한 일흔여섯 개의 칼날같은 봉우리 가 둥그렇게 원진(圓陣)을 이루며 솟아 있었다. 그 가운데는 백이십여만 평의 분지가 천험의 요새를 이루며 광대 하게 펼쳐져 있었고, 그 분지에는 일천여 개의 고루거각(高褸巨 閣)이 마치 웅대한 성(城)인 양 우뚝 솟아 있었다. 이곳이 어디인가?

군마천(君魔天). 당세(黨勢)를 주름잡는 일백 명의 초강거마(超强巨魔)와 기라성같 은 일만(一萬)의 초절정고수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혁련소천이 군마천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그 동안 그는 감천곡에게서 구천십지만마전의 내부 구조와 모든 고수들의 명단 및 특징 등을 자세히 설명 들었다. 그 내용은 천하의 혁련소천조차 기가 질릴 만큼 너무나 엄청난 것 이었다. 그리고 감천곡은 자신의 독문 무공(獨門武功) 두 가지를 혁련소천 에게 전수했다.

구철마수(九鐵魔手)! 사자철권(獅子鐵拳)!

감천곡은 그 두 가지 무공의 유래를 이렇게 덧붙여 설명했다.

― 의 는 한

팔백 년 전 제 일대 군마천주 번대해께서 남해 철신도(鐵神島) 만년철동(萬年鐵洞)에서 천년온지를 먹고 만년철동 속을 흐르 철마기류(鐵魔氣流)를 흡수, 장장 사십 년간 철의 기운을 연구 끝에 창안된 광세절학(曠世絶學)이다.


구철마수(九鐵魔手). 군마천의 천주(天主)에게만 전해지는 비전기공(秘傳奇功)! 단전에 철(鐵)의 기운을 흡수, 그 힘(刀)을 오지(五指)로 쏟아내 는 것으로써, 제 일식(第一式) 철륜풍(鐵輪風)에서 마지막 구식 (九式) 철탄극(鐵彈極)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살인 위주의 패도지 학(覇道之學)이다. 특히 철장살음(鐵掌殺音)! 구천마수의 초식이 전개되면서 발생되는 가공한 쇳소리는 웬만한 고수라면 듣기만 해도 칠공에서 핏줄기를 내뿜고 절명케 되는 죽 음(死)의 소리이다.

사자철권(獅子鐵拳). 천하에 이보다 패도적이고 위력적인 권공(拳功)은 없다. 일단 시전되면 능히 산을 허물고 바다를 뒤엎을 듯한 권강(拳 ) 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것에 맞고 살아 남을 생명체는 아무 것도 없다. 또한 이것에 격중된 사람의 몸에는 티끌만큼의 흔적도 없다. 생각해 보라! 피떡처럼 짓뭉개진 고깃덩어리에서 무슨 흔적을 찾아낸단 말인가? 박살내지 못할 것이 없는 천하 으뜸의 권공(拳功)! 그것이 바로 사자철권이었다. ― 천추무상별부의 무공이 아무리 많아도 나의 무공과 비슷하거나 능가하는 것은 결코 세 개를 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혁련소천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감천곡의 자존심이었 다. 헌데 감천곡은 이런 말을 함으로써 혁련소천에게 상당한 아쉬움을 남겼다.


― 현재 구철마수와 사자철권은 완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체내 에 잠재된 철의 기운, 즉 철마기(鐵魔氣)의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 만약 철신도(鐵神島)를 찾아 만년철동 속에 흐르는 천마기류의 기운을 단전에 모을 수만 있다면 능히 천하제일공(天下第一功)으 로 군림할 수 있으리라!

굵고 탐스런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는 지금, 서천목산 전체는 온통 은백(銀百)의 설경(雪景)을 이루고 있었다.

군마천의 뒷산의 한 소롯길에 한 인영이 눈을 맞으며 거닐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을 그렇게 거닐은 듯 그의 머리와 어깨에는 함박눈이 제법 수북이 쌓여 있었다. 심사가 어지러운지 그가 밟고 지나온 이십여 평 남짓한 공지에는 수많은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문득 혁련소천은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목화송이같은 눈송이가 잿빛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굵은 눈송이 하나가 그의 눈 속에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얼마전 제갈천뇌와 은밀히 나누었던 대화를 되새겨보는 것이었다. 그는 물었었다. ― 군마천 내에서 감천곡을 제외하고 가장 강한 고수는 누구요? ― 군마천은 모두 일전(一殿), 이각(二閣), 팔당(八堂), 삼십육세 가(三十六世家)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강한 고수를 꼽 으라면 일전(一殿) 즉 백신전(百神殿)의 전주 백신제종(百神制宗) 사도광(司徒光)이 될 것입니다. ...... ― 허나 이각(二閣)의 각주(閣主) 천패도(天覇刀) 부철룡(扶鐵龍) 이나 쌍지빙탄(雙指氷彈) 도위강도 절대 백신제종의 하수는 아닙 니다. ― 강(强)함은 좋으나 너무 겉으로 드러나오. 드러나는 고수는 반 드시 적에게 주의를 주는 법, 무공은 좀 떨어져도 드러나지 않는 자는 없소?


― 군마천에는 삼 인(三人)의 잠룡(潛龍)이 있습니다. 짐작컨 대...... 그들은 대종사께서 바라시는 그런 인물들일 것 같습니다. ― 그들의 이름은?

혁련소천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중 한 명이 적용사문(狄容史文)...... 군마천 천무봉(天舞峯) 에 있는 적용세가(狄容世家)의 가주(家主)이다!' 그는 다시 거닐기 시작했다. '적용사문...... 나이는 스물두 살 특기는 혈편마검(血鞭魔劍)을 사용하지만 그의 무공수위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그는 거듭 생각했다. '적용세가는 군마천의 소속이면서도 이미 사백 년 전부터 군마천 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있다!' 문득 그의 입가로 괴이한 미소가 번져 나왔다. '그리고 적용사문, 그에게는 아름답고 순진한 여동생이 한 명있 지. 이름이...... 적용희산이라고 했던가?' 거센 바람이 불어 포근한 함박눈이 금세 거친 눈보라로 변했다. 마치 머지않아 풍운(風雲)이 일 것을 예감하듯......!

간결하면서 단아하게 꾸며진 이곳 정실에 두 명의 인물이 마주보 며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바로 혁련소천과 일신에 학창의(鶴 衣)를 걸친 이십 이삼 세 가량의 준수한 청년이었다. 단정히 앉아 있는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일신에서 풍 기는 기우(氣宇)가 결코 범상치 않은 학자풍의 청년! 그가 바로 적용세가의 가주인 적용사문이었다. 적용사문은 담담한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입을 떼었다.


"뜻밖입니다. 영호공자께서 저의 집을 방문하실 줄은......." 혁련소천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본인이 귀공을 방문한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적용사문은 눈에 이채를 담았다. "혹시 물어도 실례가 안 된다면......." "귀공께는 적용희산이라는 한 명의 아름다운 누이동생이 있다고 들었소." "......!" "본인은 그 적용소저를 보고 싶어 온 것이외다." "......!" 적용사문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허나 그는 빠르게 평정을 되찾으며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조금 전의 그 말씀...... 못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음......." 혁련소천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가 보긴 제대로 보았구나!' 혁련소천은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원래 혁련소천은 적용사문을 처음 보는 순간 마치 심산을 노니는 한 마리 백학(白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받았었다. 적용사문의 전신에 흐르는 기도(氣度)는 그 토록 고고하고 수려한 것이었다. '이런 친구를 혼탁한 세계로 끌어들인다......?'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꺼림칙해짐을 금치 못했다. 허나 어찌하랴? 이미 내친 걸음이고 시작된 굿거리인 것을.


문득 혁련소천은 표정을 진지하게 가다듬고 말했다. "사실...... 본인이 적용세가를 찾은 이유는 바로 귀공의 도움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오." "그럴 줄 알았습니다. 허나......." 적용사문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아실 테지만 않았습니다."

적용세가는

이미

사백

전부터

군마천의

일에

"......!" "지금 이 적용세가에는 저와 누이동생 둘만 살고 있을 뿐, 도움을 드릴 말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정중하면서도 상대의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는 점잖은 거절이었다. 헌데 혁련소천은 그 말에 의외로 쉽게 포기의 뜻을 내비쳤다. "귀공의 뜻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군요. 역시 없었던 말로 하겠습니다." "허허...... 이거 날도 궂은 데 애써 찾아오신 분을......." "오라버니, 술상을 준비해왔습니다." 그때 문 밖에서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옥음(玉音)이 들려왔다. 적용사문은 반색하며 말했다. "오! 어서 들어오너라." 그러자 곧장 문이 열리며 바닥을 밟는 사뿐한 발자국 소리가 일었다. 혁련소천은 천천히 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흠......!' 순간 혁련소천의 얼굴에 적이 감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기껏해야 열일곱 살은 넘지 않은

소녀(少女)에 지나지 않았으리라.

일신에는 평범한 청의(靑衣), 구름결처럼 부드럽고 윤이 나는 흑

관여치


발은 아무런 장식도 없이 허리께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렸고, 화장 기 하나 없는 얼굴이 그렇게 신선하고 청초해 보일 수가 없었다. 심산유곡에 남몰래 핀 수선화의 아름다움이 이러할까? 적용희산은 그렇듯 고고하고 청초한 아름다움을 지닌 소녀였다. '역시 그 오빠에 그 동생이구나......!' 혁련소천은 내심 감탄하며 적용사문에게 시선을 옮겼다. 적용사문은 그윽한 눈길로 적용희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그런 그의 표정에서 그가 사랑하는지 직감할 수 있었다.

얼마나 누이동생을 아끼고

'이 자 적용사문...... 이대로 썩히기엔 너무도 아까운 인물이다......!' 혁련소천은 내심 중얼거리면서 제갈천뇌가 들려준 말을 떠올렸다. ― 적용사문은 십이 년 전 만박천옹(萬博天翁) 노자량의 문하로 입문, 수학(修學)했습니다. ― 만박천옹...... 그는 이천 년 무림사상 가장 위대한 하도낙서 (河圖洛書)의 대가(大家)로 평가되며, 그가 죽은 지금 기관진법 (機關陣法)이나 토목건축(土木建築) 등의 분야에서 적용사문을 능 가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만박천옹...... 천개기천 사사무 노야도 그에 관해 말한 적이 있었지......!'

― 만박천웅, 조약돌 다섯 개면 하늘과 땅의 경계를 지을 수 있 고, 젓가락 한 짝이면 능히 천 명의 고수를 가둘 수 있는 위인이지.

문득 혁련소천의 동공 두 눈 깊숙한 곳에 굳은 의지의 빛이 번쩍 스쳤다. '반드시...... 나의 인물이다......!'

한쪽

팔로

삼는다!

누구에게도

이것은 적용사문의 운명이 타인에 의해 결정된 순간이었다. 이때 적용희산이 혁련소천의 앞에 곱게 술상을 내려놓았다.

빼앗길

없는


고개는 다소곳이 숙였고 시선은 술상에 고정시킨 모습이었다.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귀공의 누이는 하늘 아래 둘도 없을 미인이오. 본인 은 솔직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미녀만 보면 생각치도 않았던 말이 술술 흘러 나온다는 혁련소천. 허나 그 말은 진심이었다. 적용사문은 담담히 미소하며 적용희산에게 말을 건넸다. "영호공자이시다. 인사드려라." 그러자 적용희산의 얼굴이 사르르 붉어졌다. 그녀는 혁련소천을 돌아보며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적용희산이옵니다." 혁련소천은 정중히 포권했다. "영호풍이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마주쳤다. 바로 그 순간 혁련소천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 소름끼치도록 푸른 빛이 번쩍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적용사문은 술병을

집어가고 있었는지라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다.

허나 적용희산은 일순 동공이 칼 끝으로 찔리우는 듯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다만 고통이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졌기에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이었다.

'내가...... 현기증을?' 적용희산은 섬섬옥수로 이마를 짚으며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보았다. 어찌 그녀가 알겠는가? 혁련소천이 겪었던 인간한계에 대한 십관(十關)의 도전(挑戰)!


그 중 하나가 색관(色關)이었고, 색관의 최후대법(最後大法)이 바 로 미령심광(迷靈心光)이었음을......! 천기개천 사사무는 바로 그 최후대법을 혁련소천에게 심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 소천, 너는 차후 미령심광(迷靈心光)을 함부로 사용하지 마라. 이 대법을 실시하면 어 떤 여인이라도 사련(邪戀)에 빠진다. 애정의 그물에 걸려 너 외에는 그 어떤 인물도 사랑하 지 않는다. 네가 받아주지 않으면...... 그 여인은 죽는다!

아아...... 그랬던가? 그런 것이 미령심광이었던가? 천개기천 사사무는 또 한 마디 덧붙였다. ― 태양검제 용늙은이는 네가 마음에 들면 어떤 여인이라도 취하 라 했으나 말짱 개소리다. 허나...... 네가 그 여인을 받아들일 각오가 됐다면 시전해도 좋다. 단 그런 각오 없이는 절대 사용하지 않도록 하라.

이때 명상에 잠겨 있던 혁련소천의 코 앞에 한 잔의 술이 내밀어졌다. "받으시겠소? 영호공자." 혁련소천은 흠칫 정신을 되찾았다. 이어 그는 씩 웃으며 술잔을 받아 들었다. 받아들면서 그는 말했다. "미안하오. 하지만 각오는 했소. 받아들이면 될거 아뇨?" 적용사문은 느닷없는 그의 말에 일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알겠는가? 혁련소천의 그 말은 곧 죽은 사람을 향해 다짐한 말임을. 이로써 적용희산은 평생토록 신랑감 구할 일이 없어지고 말았다.


혁련소천과 적용사문은 그후 한 시진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주제는 주로 학문에 관한 것이었고, 대화가 거듭될수록 두 사람은 상대의 깊은 문예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학문에 관한한 셈이었다.

천하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그들,

제대로

적수를

만난

헌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은 잘나가다가도 하도낙서에 관한 말만 나 오면 의식적으로 적용사문이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린다는 것이었다. 혁련소천은 그때마다 의혹을 느꼈으나 굳이 묻지는 않았다. 이윽고 혁련소천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제 가봐야 되겠소. 너무 오랫동안 지체했던 모양이오." 적용사문은 덩달아 몸을 일으키며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모처럼 유쾌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혁련소천은 천천히 문을 향해 걸음을 떼놓았다. "공연히 시간을 빼앗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소." "별 말씀을......."

문 밖은 눈보라 때문인지 벌써 어둠이 짙게 깔려가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잠시 하늘을 쳐다보더니 문득 의미심장한 눈길을 적용사문에게 돌렸다. "차후라도 마음이 바뀐다면 좋겠소만......." 적용사문은 담담히 대꾸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혁련소천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인생사란 누구도 앞일을 예측할 수 없는 법,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해 주시오." "그렇게 하겠소이다."


적용사문은 아무런 생각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허나, 정말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사였으니...... 혁련소천은 떠났다. 적용사문은 멀리 떠나가는 혁련소천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훌륭한 자다...... 감천곡은 정말 대단한 후계자를 맞아 들였어......." 문득 그의 얼굴에 짙은 음영(陰影)이 드러워졌다. "오 년 전...... 그 맹세만 아니라면 한 번쯤......." 중얼거리다 말고 그는 제풀에 놀라 흠칫 입을 다물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자조어린 탄식을 내뿜었다. "후후...... 내가 무슨 생각을...... 다 부질없는 생각이야......." 그러면서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순간 적용사문의 눈이 커졌다. 적용희산이 문설주에 기대어 넋나간 듯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청순하게 빛나던 눈이 마치 꿈을 꾸듯 몽롱한 상 태로 변해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저 아이가......?' 적용사문은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끼며 그녀를 가만히 불러 보았다. "희산아......." 적용희산은 대답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적용사문은 긴장된 표정을 지으며 조금 크게 불렀다. "희산아......!" 그러자 적용희산은 여전히 하늘을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오라버니......." "......?" "그 분...... 영호풍이라...... 했던가요?" 적용사문은 일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이 아이가...... 사랑을......?' 시작된 운명(運命)은 이미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서서히 성숙하고 있었다.

■ 구천십지제일신마제 1 권제 23 장편법(便法)그두번째와천금병마(天禁病魔) ━━━━━━━━━━━━━━━━━━━━━━━━━━━━━━━━━━━ 눈보라는 어둠을 가득 실은 채 더욱 사납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며 유유히 천무봉을 내려가고 있었다. '적용희산...... 미령심광에 걸린 이상 적용사문 그대는 백 일 이내에 나를 찾아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적용희산은 죽는다!' 어둠이 짙어지기 때문인가? 혁련소천의 걸음이 문득 빨라졌다. 그가 천무봉을 거의 벗어날 즈음 돌연 탁한 기침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혁련소천은 흠칫하며 기침이 터져 나온 곳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그는 눈이 한 자나 쌓인 거대한 바위 옆에 한 노인이 초 라하게 쭈그리고 앉아 있음을 볼 수 있었다. 혁련소천의 눈썹이 약간 찌푸러졌다. 기침조차 하지 않고 있으면 노인이었다.

영락없이 송장이라 여길 만큼 처참한 몰골의

뼈에 껍질을 발라 놓은 듯한 얼굴은 이미 완연한 해골의 형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끝없이 움푹 꺼져들어간 휑한 두 눈, 안 색은 마치 죽을 날짜라도 잡아 놓은 듯 핏기 한점 찾아볼 수 없었다.


헌데 노인의 옆구리에는 검(劍)도 아니고 도(刀)도 아닌 괴상한 무기 하나가 비스듬히 매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길이는 넉 자 가 량, 굵기래야 기껏 손가락 하나만큼의 가느다란 것이었다. 혁련소천은 지난 한 달 동안 이런 모습의 노인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노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걸음을 떼놓았다. "이봐 젊은 친구, 쿨룩...... 쿨룩......." 순간 가래가 끓는 탁한 음성이 혁련소천을 불러 세웠다. 혁련소천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 이리 좀...... 쿨룩......." 노인은 뼈마디가 앙상한 손을 힘겹게 치켜들며 연신 쿨럭거렸다. 혁련소천은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노인은 흐릿한 눈으로 바위를 가리켰다. "나를 좀 부축해서...... 쿨룩...... 앉혀 주지 않겠나?" 혁련소천은 그렇게 했다. "고맙네. 쿨룩......." "별 말씀을...... 헌데 병이 심하신 모양이군요." 노인은 고개를 내두르며 탄식조로 말했다. "천형(天形)이야, 지난 백 년 동안 하루도...... 쿨룩...... 이 놈의 기침이 멈춘 적이 없으니까, 쿨룩...... 쿨룩......." 한꺼번에 많은 말을 했기 때문인지 그는 여러 차례 고통스런 기침을 토해냈다. 다음 순간 노인은 문득 괴이한 표정으로 혁련소천의 얼굴을 응시했다.


"자네가...... 영호풍인가?" 혁련소천은 일순 가슴이 뜨끔했다. "저를 어떻게......?" "조금 전에 감천주를 만나고 오는 길이네. 그에게서...... 쿨 룩...... 자네 이야기를 들었지. 쿨룩......." 혁련소천은 가볍게 검미를 찌푸렸다. '예사 노인이 아니었군......!' 이때 노인의 흐릿한

두 눈에 문득 일점의

기이한 광채가 떠올랐다.

"영호공자!" "......?" "자네는 장군부에서 잘못 나왔어. 쿨룩...... 쿨룩......." 노인은 금세라도 숨이 넘어갈 듯 심한 기침을 하면서 안색이 더욱 핼쑥해졌다. 그는 손등으로 입언저리를 쑥 훔치면서 무기력하게 중얼거렸다. "자네는...... 부귀와 명예를 목숨과 바꾼 거야." 혁련소천은 신중하게 말했다. "노인장께서 어떤 분인지 묻지는 않겠습니다. 허나 그 말씀은 잘못된 것입니다." "잘못되었다고?" "야망 없는 인간은 하나의 허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야...... 망......!" 노인의 눈에 언뜻 괴광이 스쳤다. "허허허...... 야망이라...... 쿨룩...... 쿨룩......." 노인은 웃다 말고 다시 몇 차례 기침을 해댔다.


이어 노인은 혁련소천의 어깨를 툭툭 치며 두 눈을 야릇하게 빛냈다. "어쩌면 감천주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군." "......!" "잘해보게. 허나...... 모든 것이 성숙되기 전에는...... 쿨 룩...... 스스로 몸을 숨기는 게 좋아." "......!" "나중에 시간이 나면 하북(河北)의 천금부(天禁府)에도 한 번 들러 주게." 노인은 그 말을 하면서 어깨를 약간 흔들었다. 순간 노인의 몸은 앉은 자세 그대로 옆으로 미끄러져 갔다. 물이 흐르듯 유연하고도 기쾌절륜한 극상승의 신법(身法)! 노인은 눈 깜짝할 사이에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천...... 금...... 부!" 혁련소천의 안색이 굳어진 것도 바로 그때였다. "천금부라면...... 십지(十地)의 단체 중 천금마지(天禁魔地)......!" 문득 혁련소천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렇구나! 그 노인은 바로 천금부의 주인이자 십지마황(十地魔皇)이구나.'

지상(地上)의 십지(十地)를 관장하는 사도(邪道)의 제황(帝皇)들. 원래 구천(九天)이 서천목산 만마전에 모여 있는 것과 달리 십지 (十地)는 중원 십팔만 리 도처에 흩어져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그 중 천금마지(天禁魔地) ― 천금부는 하북땅 형산을 중심으로 주위 수천 리를 관장하고 있는 세력이었다.

혁련소천은 굳은 표정으로 걸음을 떼놓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의 뇌리에는 천기개천 사사무에게서 들었던 말이 맴돌


고 있었다. ― 천금병마 담대우리, 그가 병자(病者)라고 무시하지 마라. 그가 왜 병에 걸렸는지 그 이유를 안다면 천하에서 제아무리 대담한 자 라도 그 자리에서 까무라치고 말 것이다--

"그를 만났다고?" "그렇습니다." 감천곡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침중하게 굳어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던가?" 혁련소천은 천금병마 담대우리와 있었던 일을 상세히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감천곡의 표정은 수시로 변화를 일으켰다. 이윽고 감천곡은 어두운 표정으로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담대우리...... 도무지 그 늙은이의 속셈을 짐작할 수가 없단 말이야......." 이때 잠자코 있던 홍포구마성 반태서가 특유의 냉막한 음성을 발했다. "상대가 누구든지 이쪽의 심중(心中)을 드러내지 않는 한 상대의 심정 또한 알 수 없는 법." 이어 그는 혁련소천의 얼굴에 시선을 꽂으며 말을 이었다. "당면문제는 담대우리가 아니라 영호공자요." 감천곡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제 두 번째 편법을 쓸 차례인가?" 반태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혁련소천을 최단시일 내에 최강자(最强者)로 만들기 번째 계획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감천곡은 잠시 생각하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위한 그 두


"영호공자, 두 번째 편법이란......." 문득 그는 말꼬리를 흘리며 주위를 예리한 눈빛으로 쓸어 보았다. 그런 모습을 본 반태서의 입가에 음침한 미소가 묻어 나왔다. "염려 마시오. 이곳 주위는 이백 명의 고수가 물샐틈없이 에워싸 고 있소. 또한 공손형이 무형의 강막( 幕)으로 내외부를 차단하 고 있으니 한 마디 말도 새어 나가지 않을 것이오." 감천곡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스쳐갔다. 허나 그는 곧 침중한 안색을 가다듬고 말문을 열었다. "영호공자, 자네는 테지?"

단우비 전주에게 다섯

명의 증손녀가 있음을 알고 있을

혁련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헌데......." "두 번째 편법, 그것은 바로

다섯 손녀 중 막내인 단옥교를 이용하는 것이네."

혁련소천은 흠칫했다. '단옥교.......' 그는 감천곡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다섯 명의 손녀 중 가장 총명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바로 단옥교임을. 혁련소천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어떻게 이용한단 말입니까?" 감천곡은 야릇한 눈빛을 번쩍였다. "단옥교의 나이가 올해로 열여섯, 허나 그녀는 태어난 이래 지금 까지 단 한 톨의 음식도 먹은 적이 없다네." 혁련소천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그는 황망히 물었다.


"그녀는 인간일진대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감천곡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자네 폐혈천맥(閉血天脈)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폐혈...... 천맥?" "단옥교가 바로 그 폐혈천맥이란 체질이라네. 몸 속의 피가 조금 이라도 혼탁해지면 즉시 기혈이 막혀 죽게 되지." "......!" "그렇기 때문에 단옥교는 어려서부터 천년생(千年生) 금란(金蘭) 의 이슬만 먹으며 커 왔다네." "......!" "천년금란의 이슬은 천하에서 가장 깨끗한 액체로써 그녀의 피가 혼탁해짐을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네." "아......!" 혁련소천은 탄성을 발했다. 감천곡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만나보면 나온다네."

알겠지만

그녀의

몸에선

그윽한

난향(蘭香)이

풍겨

"바로 천년금란의 향기인 모양이군요." "그렇다네." 혁련소천은 문득 의혹 어린 표정을 지었다. "헌데 두 번째 편법과 그것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감천곡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감돌았다. "원래 천년금란은 엄청난 희귀종(稀貴種)으로서 생애 한 번 보기도 힘든 것이지. 허나 놀 랍게도 단우비 전주는 그 귀한 것을 무려 수백 개나 끌어모았다네. 허나......."


그는 마른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문제는 그 천년금란 자체가 아니라 금란의 꽃에 맺히는 이슬이라 네. 천하의 그 어떤 영양과도 비교할 바가 아니지." "......!" "단옥교는 그 이슬을 장장 십육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복용했 네. 만약 그녀가 무공을 익힐 수 있는 체질이라면 가공할 내력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지." "그렇군요." "허나 그녀는 무공을 익힐 수 없는 폐혈천맥의 체질인지라 금란의 정화(精華)는 그녀의 단전에 고스란히 뭉쳐져 있을 뿐이라네." "......!" "만약......." 감천곡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어떤 특수한 비법을 익힌 그 누군가 그녀와 열 번만 관계를 맺는 다면...... 그녀의 단전에 뭉쳐져 있는 천년금란의 정화를 모조리 흡수할 수 있을 것이네." 혁련소천은 비로소 확연히 깨달았다. 편법! 그 두 번째...... 실로 엄청난 일이 아닌가? 혁련소천은 야릇한

흥분이 전신으로 전율처럼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허나 그는 짐짓 당혹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특수한 비법을 익힌 그 누군가라면......?" 감천곡은 씨익 웃었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혁련소천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감천곡은 애매모호한 미소를 머금었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라네." "설마...... 그녀를 강제로......?" 감천곡은 단호하게 머리를 내저었다.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면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네." 혁련소천은 알쏭달쏭한 대답에 더욱 짙은 의혹을 떠올렸다. 감천곡은 희미하게 미소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네. 문제는 간단하니까." "그럼......?" "자네가 그녀를 처로 맞이하면 되는 것이네." "......!" "그리고...... 우리는 그 계획을 달성시키기 위해 이미 열두 가지 의 방법을 모색해 놓았네." 감천곡은 말을 마치고 반태서를 힐끗 쳐다보았다. 반태서는 기다렸다는 듯 냉혹하게 잘라 말했다. "실패하면 나의 두 눈을 뽑아 바치겠소." "음......!" 감천곡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감천곡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순간 문이 열리며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한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십팔구 세나 되었을까? 화용월태(花容月態)!


그런 표현이 잘 어울리는 절색의 미녀였다. 특히 팔등신(八等身)의 미끈하고 풍만한 몸매를 타고 흐르는 미태 는 사내의 피를 끓게 하고도 남을 만큼 뇌쇄적이었다. '아름답구나!' 혁련소천이 그녀를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와닿는 느낌이었다.

이때 감천곡의 전음이 혁련소천의 귓전에 스며들었다. (일천 명의 미녀 중에서 고르고 고른 미녀라네.) "......!" (자네는 저 여인을

통해서 열흘 동안 채음보양(採陰 陽)의 비법을 익혀야 하네.)

혁련소천은 경이의 눈빛으로 감천곡을 쳐다보았다. 감천곡은 담담히 미소하며 힘주어 말했다. (두 번째 편법의 완벽한 목적달성을 위해서.......)

편법 ― 그 두 번째! 그것은 이상한 방향에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b25-1  

이곳은 지난 백 년 이래 그 누구의 발길도 막아 왔던 소림제일의 금역(禁域) 조사동(祖師洞)에 있는 한 밀실이었다. 일과(日課)의 시작을 조사동 참배로 일관해 온 소림사는 무엇 때 문에 조사동을 절대금역(絶對禁域)으로 선포했을까? 밝아진 불빛을 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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