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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붕기협전 2 권 검궁인·사마달 공저 차례 제 10 장 제 11 장 제 12 장 제 13 장 제 14 장 제 15 장 제 16 장 제 17 장 제 18 장

속고 속이고 파국(破局) 종(終), 그리고 또다른 기정(起點) 여인(女人)들 금창신보(金槍神堡) 단혈맹(單血盟)의 젊은 맹주(盟主) 재회(再會) 1 재회(再會) 2 굴복(屈伏)의 미학(美學)

제 10 장·속고 속이고 ① 구대선생이 얘기한 내용은 엽고운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들이었다. 그가 모르는 것이라곤 단지 구대선생이 왜 엉뚱하게 고대의 역사를 들추어 내는지에 대해서일 뿐이었다. "당시 남해에는 금마도(禁魔島)라는 섬이 있었소. 그 섬의 도주는 위지주천(尉遲朱天)이라는 자였소." 구대선생의 얘기는 계속 되었다. 금마도주 위지주천. 그는 금마도 뿐 아니라 남해의 섬 이백여 개를 다스렸다. 그러므로 그 일대에서는 가히 군왕이나 다름이 없었다. 섬의 주민들은 그를 중심으로 소국가를 형성했으니 일명 금마국(禁魔國)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어업과 소금 생산 등을 주업으로 삼은 채 풍족한 생활을 영위했다. 개중에서도 금마도가 유독 부유했는데 그 이유는 보화가 무진장으로 널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금은 물론 산호, 비취, 진주, 어룡주, 야명주, 칠채보광석 등 중원 전체를 사고도 남을만큼 엄청난 보물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개가 도주인 위지주천이 관장했다. 철저한 보안 조치와 더불어 외부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아야 했으니 이는 금마국 내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당의 태종(太宗)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다만 우연이 빚은 결과였다. 하지만 천하패업이라는 원대한 야망을 품은 그는 그 보물들을 절실히 필요로 했고 종내 금마국을 속국(屬國)으로 거두겠다는 서한을 전하기에 이르렀다. 금마도주 위지주천은 이러한 당태종의 제의를 단호히 거절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에서 보낸 사신마저 참수해 버렸다. 이 사실은 당태종을 대로하게 만들었다. 급기야 그는 일만의 수군(水軍)을 출동시켜 금마도를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본시 무서운 파도와 물의 소용돌이, 그리고 날카로운 암초들로 둘러싸인 금마도는 이른바 천연의 요새였다. 너무도 험악한 방어벽을 가지고 있어 쉽사리 배를 댈 수조차 없었다. 따라서 일만의 수군은 무려 수십 번이나 금마도를 치려고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물러서야 했다. 이렇게 되자 결국 당태종은 군사를 철수시키고 말았다. 또한 이는 당시의 상황 때문에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때마침 북쪽 새외민족과의 싸움이 격화되어 있는지라 힘을 분산시키면 그만큼 위험이 가중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금마도주 위지주천은 사태가 진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놓지 못했다. 태종의 집요한


성격으로 미루어 종국에는 금마도가 그의 수중에 떨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고심 끝에 위지주천은 마침내 한 가지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고 은밀히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먼저 보물을 미끼로 각처로부터 열한 명의 고수들을 초빙했다. 그들은 각기 그 당시에 중원 및 묘강, 천축 등지에서 사상 최강으로 알려진 인물들로서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무존(武尊) 공손무기(公孫武奇). 이름하여 그는 중원성협(中原聖俠)으로도 불리워졌으며 당대 무림에서 정파 최강의 고수로 알려져 있었다. 혼세천존(混世天尊) 흑고(黑古). 그는 중원성협과 쌍벽을 이루는 흑도의 거마로서 희대의 대마두인 혼세팔마(混世八魔)의 스승이기도 했다. 천심불(天心佛) 고륵하(枯勒河). 천축 황교(黃敎)의 제일대 교주다. 아울러 그는 천 년 전 천축 제일고수였던 포융찰의 스승이었다. 마로불(摩路佛) 극리간(克里干). 그는 황교와 더불어 천축 이대마교로 불리웠던 홍교(紅敎)의 교주이다. 또한 훗날 황교를 멸망시킨 홍교 제일고수 천혼불(天混佛)의 스승이다. 만독사천(萬毒邪天) 음구유(陰九幽). 음산 일대의 대마두로서 이른바 천하제일 독성(毒聖)이다. 그는 도합 팔만사천 가지의 독술에 능통한 인물이었다. 환객(幻客) 무영종(無影宗). 그는 십보를 걷는 동안 열 개의 얼굴로 변한다고 했다. 소위 변장과 역용의 제일인자인 동시에 암기술의 명인이었다. 그가 쓰는 암기는 그 종류만도 무려 칠백 가지에 이른다고 전해진다. 혈의음제(血衣音帝) 천무음(天無音). 그는 절혼산백삼멸음(絶魂散魄三滅音)이라는 가공할 음공의 창시자로 도합 이백오십이 종류의 악기를 다룬다고 했다. 즉 악기음만으로 인간을 살상하는 괴공의 소유자였다. 천외천유자(天外天遊子). 남해의 천붕도(天鵬島)라는 섬에서 은거하던 기인으로 그의 무공은 거의 측정할 길이 없었다. 그는 이외에도 그림과 진법, 기관지학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해천사왕(海天死王) 전부통(全府通). 해천교의 일대 교주로서 수공및 각종 장법이 가히 무적이다. 비천무제(飛天武帝) 나후강(羅候剛). 소림과 무당, 양문의 절예에 통달한 인물이었다. 그는 불과 삼십이라는 젊은 나이에 무려 천 번을 싸웠으나 개중 단 한 번도 패한 일이 없다는 실전(實戰)의 대가였다. 무명무아신승(無名無我神僧). 그는 앞서 열거한 십 인과는 달리 신비에 싸여 있는 고수였다. 출신도, 이름도, 심지어 무공까지도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술을 마시고 고기도 먹지만 유독 여자만은 취하지 않는다는 괴승(怪僧)이다. 그러나 일신에 지닌 절학만은 비할 수 없이 기오막측했으니 그야말로 천하제일의 기인이었다. 아무튼 위지주천은 그들 십일 명의 고수들을 금마도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는 또한 사람을 풀어 만천하에 흩어져 있는 각종의 무공비급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개중에는 하오문이나 삼류의 것도 있었으나 명문대파, 혹은 대마두들의 비전지기가 그의 수중으로 속속 흘러 들어왔다.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그가 가진 보물의 위력이었다. 결국 위지주천은 놀랍게도 일개인이 삼천육백이십칠 권이나 되는 무공비급을 손에 넣는 불후의 괴사를 창출해내고 말았다.


그런 연후, 위지주천은 십일 명의 고인들을 모아 놓고 설득 작전을 폈다. 금마도에 있는 보물 전부를 넘겨준다는 조건으로 두 가지의 요구사항을 내놓은 것이었다. 첫째로 그는 금마도의 전 주민을 수용할 수 있는 견고한 지하별부를 지어 달라고 했다. 그것은 물론 언젠가 있을 당태종의 습격을 피하기 위한 대비책이었다. 두번째로는 예의 삼천육백이십칠 권의 무공비급을 모두 천고의 기학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즉 십일 명의 능력으로 평범한 무공을 완벽한 개세신학으로 고쳐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저마다 천하제일을 자부하는 십일 명 고인들은 이 놀라운 요구들을 의외로 쉽게 수락했다. 애초 보물에 뜻을 두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삼천육백이십칠 권이나 되는 비급의 유혹이 그들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린 것이었다. 비록 개별적으로 보면 거개가 성에 차지 않는 것들이었지만 그렇듯 방대한 물량이고 보니 문제가 또 달랐다. 그들이 노린 것은 바로 비교분석 내지는 종합에서 거두어지는 극단의 효과였다. 아울러 그들 십일 인은 이 훌륭한 무공 연구의 기회를 두고 양보할 수 있는 심정이 결코 못 되었다. 그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최소한 자신보다 뛰어나게 되는 것은 절대로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금마도에는 먼저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근 사십 년 간에 걸친 그 공사 끝에 마침내 금마별부는 완성을 보았다. 천지간의 조화와 더불어 각종 기관, 진법, 함정 등으로 인한 불가침의 철옹성이 탄생한 것이었다. 또한 그 사십 년 동안 삼천육백이십칠 권의 비급도 십일 명의 고인을 통해 모두 천고기학으로 둔갑되어 있었다. 물론 그들 자신의 무공 역시 획기적인 진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그들은 정녕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 이면에 무시무시한 음모가 깔려 있다는 사실을....... 금마별부가 완성되던 날이었다. 금마도주인 위지주천은 감격한 나머지 성대한 축하잔치를 벌였다. 물론 십일 명의 고인들을 비롯하여 천 명에 이르는 장인(匠人)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잔치에 초대되었다. 천하에서 가장 이름난 요리사가 음식을 담당했다. 게다가 천하에서 가장 오래 묵었다는 천일향(千日香)이 오랫 동안 수고한 자들을 위해 술잔을 채워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훌륭한 음식과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간 순간, 십일 명의 고인들은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전신이 목석처럼 굳어지더니 순식간에 내공이 분산되고 만 것이었다. 독의 성군(聖君)이라던 만독사천도 예외 없었다. 그는 치를 떨며 부르짖었다. "이런 경을 칠! 인혼주(引混珠)로구나." 인혼주. 그것은 금마도 내에서도 가장 귀중한 보물로써 한 알로 능히 수십 개 성(城)을 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소위 천하를 다 뒤져도 단 두 개 밖에 없다는 구슬이었다. 광채가 너무도 아름다와 사람의 혼을 뺏는다는 이름의 인혼주, 그것은 크기라야 고작 고양이 눈알 정도였다. 그러나 이 인혼주를 가루로 만들어 다시 삼십육 가지의 약물과 섞으면 지극히 괴이한 성질을 갖게 된다. 여하한 인물도 이처럼 꼼짝없이 당하고 마는 것이었다. 더우기 그것은 독이 아니므로 음식물과 섞여도 전혀 발견이 불가능했다. 만독사천 같은 독성도 당했는데야 어쩌겠는가? "크으으... 네 놈이 이럴 수가!" 십일 명의 고인들은 한결같이 격분을 금치 못했다. 그들을 향하는 위지주천의 얼굴도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그는 무거운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오. 정녕....... 내 당신들께는 진심으로 사과하리다. 이 금마별부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소." 한 가닥 남은 양심의 발로였을까? 어쨌든 위지주천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런 부류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자신의 운명에 관해서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크악--!" 위지주천은 그곳으로부터 십 보도 채 못 가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을 터뜨렸다. 놀랍게도 그의 전신이 녹색 불꽃으로 뒤덮히더니 순식간에 한 줌의 재로 화하고 말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타면서 내뿜은 녹색 연기는 곧바로 금마별부 안을 가득 메워 버렸다. 그로 인해 금마도의 인물들까지 포함된 삼천여 명의 인원은 그야말로 떼죽음을 당했다. 남을 해한 자는 필경 자신도 꼭 그만큼을 겪게 된다. 이는 인과응보의 법칙으로써 위지주천도 결국은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렇게 허망하게 죽어갔다. 더불어 천려일실(千慮一失)이랄까? 위지주천은 만독사천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생애 최대의 실수를 저질렀다. 일시지간에 금마도를 멸망시킨 그 끔찍한 난변은 다름 아닌 독성(毒聖) 만독사천 최후의 업적(?)이었다. 그 후로 금마도는 남해에서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당태종이 다시 일만의 수군을 이끌고 그곳을 쳤으나 사람은 물론 보물까지도 온데간데 없었다. 그는 단지 폐허가 된 빈 섬만을 구경하고 돌아왔을 뿐이었다. ② "으음......." 뜻하지 않게 비화(秘話)를 접하게 된 엽고운은 길게 신음을 불어냈다. 아울러 그는 그 뒷일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당시 십일 명의 고인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소이다. 전부 다......." "역시 그랬군요." 구대선생은 곧 안색을 바로잡으며 덧붙였다. "그들은 삼천육백이십칠 권의 무공비급을 개조해 놓았지만 그로 인해 눈부시게 증진된 자신들의 무공절기는 따로 작성해 놓았소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바로 이곳에서 무려 천이백 년 간을 잠자고 있었소이다." "아!" 엽고운은 절로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 십일 명의 무공비급을 얻을 수만 있다면 고금제일인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것은 현재 어디에 있습니까?" 그의 질문에 구대선생은 탄식과 함께 답변했다. "물론 금마무고입니다. 그러나 삼천육백이십칠 권의 비급들은 발견되자마자 이곳의 인물들에게 나누어졌고 열한 권의 비급은 신공과 영제, 두 사람이 합하여 그 중 여덟 개를 차지했소이다." "으음! 그래서 그들 두 사람의 무공이......." 엽고운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구대선생 역시 심히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솔직히 말씀드려 주군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각기 네 권의 비급을 얻은 그 두 사람은 가히 무적이외다. 천하의 어떤 고수도 그들의 십 초를 견디지 못할 것이오." 엽고운은 그 말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옳겠습니까?" 구대선생은 힘이 깃든 어조로 말했다. "그들을 꺾기 위해서는 계략도 계략이지만 시급히 그들이 찾아내지 못한 세 권의 비급을 취해야 합니다." 엽고운은 난색을 지었다. "하지만 그들도 모르는 것을 어디 가서 찾겠습니까?" 구대선생은 종전과는 달리 기이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사실상 그 세 개의 비학은 모두 눈에 보이는 곳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단지 신공과 영제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따름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금마도의 비화는 소신을 포함한 우리 세 늙은이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소신도 이전에 상고기서(上古奇書)에서 읽은 것으로 신공과 영제에게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습니다." "구대선생의 성품으로 보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엽고운이 빙긋 웃자 구대선생은 쓴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위로 모시는 주군이라 하나 점차 탐욕에 눈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그들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말씀, 가슴에 깊이 새겨 두겠습니다." 구대선생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말했다. "그 세 권의 비급은 혈의음제와 천외천유자, 그리고 무명무아신승의 것이외다." "으음!" "신공부의 좌측 벽에는 한 개의 그림이 걸려 있소이다." "그럼......?" 엽고운의 검미가 불쑥 치켜 올라갔다. "그것이 이름하여 암천유성도(暗天流星圖)입니다. 바로 천외천유자가 남긴 비학이외다." 구대선생은 계속 말을 이었다. "영제는 얼마 전까지 조그마한 고불(古佛)을 하나 갖고 있었소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것을 천갈부인에게 선물했소이다." "그것은 무명무아신승의 것이겠군요?" 엽고운의 말에 구대선생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고 나머지 혈의음제의 비공은 이것이외다."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품 속에서 한 권의 비급을 꺼냈다. "받으십시오. 우선 이 한 권 만이라도 익히셔야 합니다. 남은 두 권도 기회를 보아 빠른 시일 내에......." "이것을 왜 제게 주십니까?" "사양치 마십시오. 당연히 주군께서 취하셔야 합니다." 엽고운은 딱 잘라 말했다. "싫습니다. 본인은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구대선생이 그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실상 이 늙은이는 이것을 이미 익혔소이다. 다만 자질이 둔하여 절반 밖에 익히지 못했을 뿐....... 부디 주군께서는 보다 큰 성취를 이루어 신, 영을 견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 세 늙은이의 마지막 소망이외다." 일지선옹과 장천노수도 곁에서 무언의 촉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이 구대선생과 똑같은 염원을 담은 채 엽고운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침내 엽고운은 책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본인은 앞으로 세 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그는 혈의음제의 비급을 잠시 내려본 다음 품 속에 집어 넣었다. 구대선생이 미소와 더불어 입을 열었다. "주군께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소이다." "경청하겠습니다." "주군께서는 천갈부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엽고운은 뜻밖의 질문에 흠칫 했다. "갑자기 그것은 왜......?" "천갈부인은 음탕한 여인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직도 순결을 간직한 처녀의 몸이외다." 그 말에 엽고운은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설마?' 그 동안 시도 때도 없이 자신에게 추파를 던진 것만 해도 어디 한 두 번 일인가? 그는 새삼 천갈부인의 눈웃음과 교태를 떠올리며 입가에 고소를 지었다. 엽고운의 그런 반응에 구대선생의 입가에도 웃음이 담겼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말은 사뭇 심각한 것이었다. "원래 만독사천이 남긴 사천독경(邪天毒經)은 모두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엽고운도 웃음기를 걷고 진지하게 응했다. "그 중 상권에 해당하는 독술(毒術) 편은 과거 해천사신의 한 명인 독수절의 상견불이 얻었소이다. 그리고 중권인 독공(毒功)은 사십 년 전 신공이, 나머지 하권은 이십 년 전 천갈부인의 정혼자가 각각 얻었습니다." 구대선생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천갈부인은 그로 인해 어이없게도 정혼자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신공에게 협박을 당하던 끝에 결국 살해되었소이다." "그럴 수가!" 엽고운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구대선생은 침중한 음성으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천갈부인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변한 것은 바로 그 이후부터의 일입니다. 신공의 무서움을 익히 알고 있는 그녀는 그런 식으로나마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야 했던 것입니다." 엽고운은 눈썹을 꿈틀 했다. "또한 천갈부인은 그 사이 사력을 다해 정혼자가 남긴 무공을 익혔습니다. 그렇게 하여 이십 년이 지나자 복수의 집념은 결국 그녀를 독의 명인으로 만들어 놓았소이다." "으음!" 엽고운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불어냈다. 더없이 요염하고 색정적으로 보이던 천갈부인 화옥향(花玉香), 그녀에게 그렇듯 굳은 마음이 내재해 있는 것을 그가 어찌 알았겠는가? 이때, 구대선생이 자못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녀가 주군을 본 이후로는 크게 흔들리고 있소이다." 엽고운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반문했다. "무슨 뜻입니까?" 구대선생이 그답지 않게 기이한 웃음을 보였다. "허허...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주군의 모습은 지난 날 천갈부인의 정혼자와 무척이나 흡사합니다." 엽고운의 안면이 순간적으로 묘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그의 머리는 쉬지 않았다. 잠시의 침묵을 거친 뒤, 그는 신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본인에게 굳이 그 사실을 알려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구대선생은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를 이용하십시오. 금마별부에서 그녀만이 유일하게 신공과 영제의 세력균형을 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본인이 미남계(美男計)를......?" 엽고운은 부르짖음과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반면에 구대선생과 일지선옹, 장천노수 등은 잔뜩 기대가 담긴 눈으로 이 젊은 기재를 주시하고 있었다. ③


동쪽의 가산(假山). 신공부에 속해 있는 두 개의 가산 중 하나다. 엽고운이 지금 그곳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데 가산의 정자에는 한 명의 노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전신에 오색의 옷을 걸친 괴이한 늙은이로써 난간에 걸터앉은 채 긴 곰방대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얼굴은 붉고 동그랬다. 키는 작았으며 무척이나 뚱뚱했다. '오행수(五行 ) 독고천!' 엽고운은 걸음을 늦추었다. '이 자가 바로 신공의 수하들 중 가장 강한 자다.' 이때, 오행수가 담배 연기를 앞으로 훅 뿜으며 무릎을 쳤다. "허어! 이게 누군가? 엽공자가 이곳에 왠일이오?" 엽고운은 경쾌하게 웃었다.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 단지 신공과 함께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을 따름입니다." "음, 부주님과?" "그렇습니다." 오행수의 눈은 그 색깔이 항상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노란가 하면 붉은 색일 때도 있었고, 그러다가도 금세 푸른 색이나 검은 색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그것은 그가 오행마공(五行魔功)을 익혔기 때문이었다. 지금에만도 오행수의 눈은 황색에서 홍색으로, 그리고 검은 색으로 세 번이나 변했다. 엽고운을 바라보는 그 짧은 순간에 이렇듯 다양한 변화를 보인 것이었다. "헛헛... 엽공자는 요즘 대단히 염문을 뿌리고 있더군." 엽고운은 짐짓 딱 잡아떼는 시늉을 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헛헛헛... 자네, 보기보다 꽤 능청스럽군. 이미 금마별부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일이네." 엽고운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치도 않습니다. 소생과 구양낭자는 결코 노선배가 말하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파렴치한 난봉꾼의 그것이었다. 오행수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더니 히죽 웃었다. 그러자 그의 눈은 다시 홍색으로 변하는 기현상을 보였다. 그는 이어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여(呂) 노제의 신안(神眼)도 이제는 한물 갔나 보군. 거듭 두 번이나 자네를 잘못 보았어." 엽고운은 내심 흠칫했으나 태연을 가장하며 물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오행수는 담뱃대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 아닐세. 어서 들어가 보게. 이 늙은이가 공연히 헛소리를 한 것 뿐이야. 핫핫핫......." 스팟! 오행수는 말을 마치자 앉은 자세 그대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 신법은 너무도 기쾌무비하여 도저히 종적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엽고운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오행수가 사라져 간 방향을 응시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으음, 어쩌면 저 자야말로 신안 여후량보다 더 심기가 깊은 자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겠구나.' 엽고운은 무거운 발걸음을 신공부로 향했다. 신공부(神公府). 안내를 담당했던 인물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말았다. 엽고운은 습관인 양 제일 먼저 태사의를 올려다 보았다. 역시 늘 그랬듯 신공도 그곳에 있었다. 다만 우연인지 오늘만큼은 그가 특별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신공은 태사의에 단정히 앉은 채 운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연출해내는 광경이란 실로 놀랍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는 두 손을 단전(丹田)에 대고 있었는데 숨을 들이쉬고 내쉼에 따라 그의 몸은 거의 두 배나 커졌다 줄어들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주위에는 짙은 운무와도 같은 허연 기체가 덮혀 있었다. 그것은 천령개(天靈蓋) 부위에서 떠돌며 코로 깊숙히 들어갔다 토해지곤 했는데 갈수록 그 분량이 많아지는 것이었다. 그 기체는 엽고운이 보고 있는 사이에 벌써 근 삼 장까지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엽고운은 부지중 가벼운 전율을 일으켰다. '저것은!' 이어 최대한으로 팽창되었던 기체는 허공에서 급격히 뭉쳐지더니 신공의 이마 한가운데로 응집되었다. 한 덩이의 단단한 내단(內丹)을 형성해냈던 것이다. 그 내단은 눈부신 백광을 발산하며 신공의 이마로부터 콧등, 그리고 입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엽고운의 안색은 놀라움을 지나쳐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후우!" 신공은 입을 벌리더니 내단을 불었다. 그러자 내단은 떼밀리듯 일 장 가량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이어 숨을 들이마시자 내단은 그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후--!" 그가 다시 숨을 내쉬니 내단은 도로 튀어나왔다. 엽고운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우우... 내가 정녕 전설로만 듣던 등봉조극(騰逢造極), 천극조양(天極造陽)의 경지를 이 자리에서 보게 되는구나.' 엽고운의 안색은 더할 나위 없이 침중하게 굳어버렸다. '설마 했건만 저 자의 무공은 이미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극점에 이르러 있단 말인가?' 신공. 그는 여전히 토납법을 계속하고 있었다. 한 순간, 그를 지켜보던 엽고운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렇다! 어쩌면 내게 있어 이것은 다시 없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지금 저 자를 치면.......' 엽고운은 손에 땀을 쥐었다. '나의 제마어린참(制魔魚鱗斬)은 이제 십이성에 도달해 있다. 따라서 전력으로 격발시키면 저 자의 몸이 제아무리 금강불괴 일지라도 단숨에 제거할 수 있다.' 그의 가슴이 무섭게 쿵쾅거렸다. 이렇다 할 표정 변화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그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엽고운은 멈칫 했다. 왠지 석연치 않은 기분이 그가 취하려던 동작을 제지시킨 것이었다. 우선 오행수 독고천의 읊조림이 그러했고, 여느 때와는 달리 신공부의 석문을 열어준 후 휭하니 사라져 버린 소동(少童)의 행동이 또한 의문스러웠다. 게다가 가장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신공의 운공 장소였다. 무인으로서 제일 중요하달 수 있는 운공을 그는 왜 굳이 신공부의 대전, 그것도 태사의에서 시행하느냐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내단이 뻗어나가는 거리는 점점 단축되었다. 이제는 신공의 입으로부터 약 한 자 정도를 들락날락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엽고운은 자신도 모르게 한쪽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울러 그는 마치 본능인 양 전신에 제마어린참의 공력을 포화상태로 끌어올린 후, 그것을 양손에 주입시켰다. 하지만 곧 냉철한 이성이 그 자신을 묶어 버렸다. '필경 이것은 함정이다!' 엽고운은 마침내 스스로를 타이르기에 이르렀다.


'어찌 되었건 서두를 필요 없다. 아직 시간은 많지 않은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는 급속도로 공력을 풀어 버렸다. 그리고는 몸을 빙글 돌려 지극히 한가한 자세로 돌입했다. 과연 뒷짐을 진 채 허공을 기웃거리는 그의 모양새는 참으로 그럴 듯 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틀림없이 지루함을 꾹꾹 눌러 참으며 신공이 운공에서 깨기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엽고운은 그런 식으로 대전의 사면 벽을 모두 둘러 보았다. 이어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멈춘 곳은 그 중 좌측의 벽이었다. 그곳에는 세 폭의 그림이 나란히 그려져 있는 한 장의 비단 족자가 걸려 있었다. 엽고운은 내심 부르짖었다. '오오! 암천유성도(暗天流星圖).......' 그는 바로 천이백 년 전 천외천유자가 남긴 개세의 비학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흉중에서 일어나는 격동은 눈꼽만치도 외부로 표출되지 않았다. ④ 엽고운은 짐짓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그림 앞에 가 섰다. 세 폭으로 나누어진 만큼 그 그림들은 각기 내용이 달랐다. 하나는 백색유삼을 입은 한 젊은이가 검을 잡은 채 우뚝 서 있는 그림이었다. 그의 머리 위로는 검은 하늘이었는데 때를 맞춘듯 한 개의 유성이 낙하하고 있었다. 또 한 폭에도 역시 그 청년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멋진 자세로 밤하늘을 날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유성도 앞서와는 달리 그의 발밑을 흐르고 있었다. 마지막 한 폭 내에서의 청년은 정좌하고 있었는데 그 기도가 말할 수 없이 고요하고 엄숙해 보였다. 그의 등 뒤, 밤하늘에는 세 개의 유성이 날고 있었다. 엽고운은 그림에 빠져드는 자신을 느끼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말 멋진 솜씨다!" 이는 또한 그의 진심이었다. 엽고운은 본래 그림에 깊은 취미를 가졌던 위인이다. 저 먼 북쪽, 등격리 사막의 탑리지(塔里地)에서도 그는 곧잘 숯으로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곤 했었다. 따라서 암천유성도는 그야말로 엽고운을 흠뻑 취하게 했다. '아! 다른 것은 제껴 두고 이 그림 솜씨만 해도 천외천유자의 능력을 가히 짐작할 만하구나.' 그러던 한 순간이었다. "엽소협은 그 그림이 마음에 드는가?" 한 가닥 착 가라앉은 음성에 엽고운은 흠칫 놀랐다. 이어 황급히 돌아서자 그는 신공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신공은 어느새 그의 등 뒤에 와 있었던 것이다. 엽고운은 얼굴을 활짝 폈다. "아! 벌써 운공을 마치신 모양이군요." 그 말에 신공의 가느다란 눈에서 괴이한 빛이 찰나적으로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는 곧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헛헛헛... 자리에 앉게나. 오늘은 할 얘기가 많네." 엽고운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이윽고 두 사람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엽고운이 앉자마자 궁금한 듯 물었다. "저 그림은 누가 그린 것입니까?" 신공은 미간을 좁혔다. "실은 나도 잘 모르네." 엽고운은 씨익 웃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원래 소생은 그림에 대해 매우 흥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공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이더니 이내 기분 좋게 말했다. "그렇다면 내 저 그림을 자네에게 주겠네." '윽!' 엽고운은 그 순간 하마터면 입 밖으로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로서는 암천유성도를 이렇듯 쉽게 수중에 넣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보아하니 저 그림은 상당히 귀중한 것 같은데 소생에게 쾌히 하사를......." 엽고운은 이번만큼은 사양도 생략했다. 대신 황송해서 어쩔 줄 모르는 태도를 보이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어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귀한 물건이란 본시 주인을 잘 만나야 하는 법이 아닌가? 노부는 그림에 문외한이므로 그간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네." 신공은 빙그레 웃으며 우수를 슬쩍 치켜 들었다. 휘익--! 십여 장 밖의 석벽에 ���려 있던 암천유성도는 흡사 보이지 않는 끈에라도 당겨진 듯 날아왔다. 아울러 그것은 탁자 위에 이르자 둘둘 말리더니 곧 두루마리의 형태로 화했다. 탁! 신공은 그것을 잡더니 엽고운에게 선뜻 내밀었다. "자! 받게나. 이것은 그림에 대해 잘 모르는 노부조차도 감탄하는 것일세. 그러니 자네에게야 천금보다도 더 귀중하겠지." 엽고운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이 그림은 기법상으로 보아 당금 명조의 것이 아니라......." 길게 이어질 듯한 그의 변(辯)을 신공이 도중에서 끊었다. "되었네! 그보다 내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었네." "부탁이라시면......?" 엽고운의 멀뚱한 얼굴에 대고 신공은 담담히 말했다. "자네가 독수절의의 독술을 익혔다면 의술 역시 고명할 걸세. 노부의 진맥을 좀 부탁하네."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엽고운은 비로소 안색을 바로했다. "최근 들어 운공을 할 때마다 마지막 경지에 가서 늘상 팔경락(八經絡) 부근에서 기(氣)가 막히곤 하네. 자네라면 그 원인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네만......?" 엽고운은 무덤덤한 시선으로 신공의 손목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내심은 크게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그럼 불민한 소생이 한 번 맥을 짚어 보겠습니다." 그는 말과 함께 신공의 맥문을 잡았다. 본시 무공을 소지한 자들에게 있어 맥문을 상대에게 내준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맥문을 통해 약간이라도 진기를 불어넣으면 아무리 절세고수라 해도 곧장 온몸이 마비되거나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공은 스스럼없이 맥문을 내놓았다. 그것은 그만큼 엽고운을 믿는다는 의미일까? 어쨌든 엽고운의 기색에서는 여전히 일점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문자 그대로의 진맥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잠시 후. 엽고운은 신공의 손을 놓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군요? 별 이상은 없는 것 같은데......."


이와 더불어 그는 자신의 손을 슬쩍 무릎 아래로 감추었다. 손바닥에 물기가 축축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물론 땀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다시 수많은 갈등을 겪었던 것이다. 신공의 눈빛이 야릇하게 흔들렸다. "허허, 이상하군. 내가 과민해진 건가?" 그는 어깨를 으쓱였을 뿐 더는 뭐라고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전혀 다른 화제를 가졌다. 몹시 화기애애한 가운데 이것저것 경쾌한 대화들이 오갔다. 그로부터 약 삼 각 후. 엽고운은 신공부를 물러나왔다. 그런데 그가 막 석문 밖으로 나간 순간, 신공의 눈살이 가볍게 찌푸러졌다. 신공은 허공을 향해 물었다. "노부가 운공할 때 그의 표정이 어떠했느냐?" 천장으로부터 음산한 음성이 그의 말을 받았다. "뒷모습인지라 잘은 모르겠으나 이렇다 할 동요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공은 고개를 흔들었다. "으음, 나나 오행수가 잘못 짚었단 말인가?" 한편. 신공부를 나온 엽고운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두 번씩이나 나를 시험하다니.......' 그는 바닥을 내려다 보며 천천히 걸었다. '결코 반가운 현상이 아니다. 이는 그들이 이미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뜻이 된다.' 엽고운의 뇌리에는 한 인물의 영상이 떠올랐다. '오행수다! 틀림없이 그 자가 신공에게 나에 대한 의혹을 불어넣었을 것이다. 우선 그 자부터 제거해야 한다.' 그는 통로를 돌아 천갈부인 화옥향의 거처로 향했다. 한 석문 앞. 천갈부인의 시비가 엽고운을 알아보고는 허리를 굽혔다. 안면이 있는지라 엽고운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 "부인은 안에 계신가?" "네, 그런데 엽공자님께서 어인 일로 오셨나요?" 엽고운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부인께 내가 좀 뵙잔다고 전해 주시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석문이 활짝 열리더니 천갈부인 화옥향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녀는 엽고운을 보자마자 호들갑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반색을 했다. "어머나! 이게 누구야? 웬 바람이 불었기에 동생이 직접 여기까지 왔을까?" 엽고운은 빙긋 웃으며 포권했다. "벌써 잊으셨습니까? 누님께서 소제더러 언제 한 번 놀러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렇지." 천갈부인은 그제야 생각난 듯 탄성을 발했다. 그 바람에 풍만한 가슴이 출렁 하고 흔들림을 보였다. "이 누나로서는 정말 뜻밖이야. 그저 지나치는 말이었는데 이렇게 잊지 않고 찾아 주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준비라도 할 걸 그랬군?" 그녀는 교소를 터뜨리며 옆으로 비켜 길을 터주었다. "호호호... 좌우간 어서 들어 와요." "그럼......."


엽고운은 사양하지 않고 석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여인의 자극적이고도 유혹적인 체취를 물씬 느꼈다. 제 11 장·파국(破局) ① 천갈부인의 처소. 실내는 의외로 검박하게 꾸며져 있었다. 여인 특유의 방향과 지분냄새만은 어쩔 수 없었으나 전체적으로 단촐했다. 사면의 석벽에도 평범한 산수도가 몇 점 걸려있을 뿐이었다. 방 한가운데는 석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화병이 있었는데 활짝 개화한 화문란(華文蘭)이 한 아름 꽂혀 있었다. 이렇듯 간결한 실내 분위기가 엽고운의 안색을 흔들어 놓았다. 더구나 구대선생에게 이미 얘기를 들은 후였으므로 천갈부인에 대한 인식은 더욱 새로울 수 밖에 없었다. 반면에 천갈부인 화옥향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것이 자못 들뜬 기색이었다. 그녀는 그 상태로 꽤 분망하게 움직이더니 결국 석탁에 그럴 듯한 술상을 차려 놓았다. "앉아요, 동생." 이윽고 두 남녀는 조용한 실내에서 단 둘이 마주앉게 되었다. 천갈부인은 삼십 살이 넘었으나 외견상으로는 이십대로 보였고 미모 또한 뛰어난 여인이었다. 그녀는 섬섬옥수를 들어 잔에 술을 넘치도록 따랐다. "자! 동생, 누나의 술 한 잔 받아요." 엽고운은 사양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는 단숨에 잔을 비운 다음 그녀에게로 넘겼다. "누님도 한 잔 하십시오." 천갈부인은 생긋 웃었다. 그러자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눈부시게 흰 치아가 살짝 드러났다. 그 모습은 실로 고혹적이었다. 이어 그녀는 두 손으로 잔을 받쳐 든 채 조심스럽게 술을 마셨다. 호박빛의 액체는 그녀의 입술을 적시며 입 안으로 모두 흘러 들어갔다. "쓰군." 잔을 내려놓자 곧 천갈부인의 옥용은 발그스름하게 피어났다.엽고운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내심 탄식처럼 읊조렸다. '인생을 아는 여인....... 하지만 그에 반해 나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젊고 아름답구나.' 엽고운은 한 송이의 붉은 장미를 연상케 하는 천갈부인의 얼굴에서 일종의 원숙미를 발견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그가 전혀 느껴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상이었다. 엽고운은 잠시 천갈부인 화옥향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눈길을 의식하자 화옥향은 더욱 얼굴을 붉혔다. "동생은 무얼 그렇게 보는 거지?" "아!" 엽고운은 그제서야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는 멋적게 웃었다. "누님이 너무도 아름다와서 그랬나 봅니다." 그 말에 화옥향은 눈을 곱게 흘겼다. "호호... 무슨 농담을......?" 엽고운은 다시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소제, 한 가지 의문나는 점이 있소이다." "무슨?" 화옥향의 큰 눈이 상큼 치켜 올라갔다.


"어째서 누님같은 미인이 아직도 혼자 사시는 겁니까?" 일순 화옥향의 미간으로 어두운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깐 동안의 일일 뿐이었다. 그녀는 곧 손을 들어 풍성한 머리결을 뒤로 쓸어 넘기더니 빙긋 웃었다. "나는 누구에게든 구속 받기를 싫어해요. 혼자서 자유롭게 사는 것을 훨씬 좋아하지." 분명한 어조였으나 왠지 그 여운은 쓸쓸하기만 했다. 아니, 적어도 엽고운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자, 그런 시시한 소리는 그만 하고 술이나 더 들어요. 설마 하니 동생이 나를 추궁하려고 온 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하하하......." 엽고운은 짐짓 호쾌하게 웃으며 술을 마셨다. 술잔이 부지런히 오가자 두 사람도 어느 정도 취기가 올랐다.화옥향이 달아오른 뺨을 손으로 문지르며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많은 술은 이십 년 만에 처음이에요." 엽고운이 어찌 그 의미를 모르겠는가? 그는 자못 호기롭게 맞장구쳐 주었다. "하하하... 영광입니다. 그 상대가 소제라서......." 그러나 그 순간, 화옥향의 눈빛이 갑자기 야릇하게 변했다. "동생." "예?" 눈 가장자리가 불그스름하게 물든 그녀의 얼굴은 실로 강렬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동생은 내가 아직도 봐 줄 만하다고 생각하나요?" 엽고운은 가볍게 실소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소제는 누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줄곧 감탄하고 있는 중이었소이다." 화옥향은 묘하게도 기쁨과 서글픔을 동시에 떠올렸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음성도 마찬가지였다. "고마와요. 역시 늙어 보인다는 말보다는 듣기 좋군요. 하지만 세월이란... 참으로 무상한 것이지." 문득 그녀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여 올랐다. 그것을 본 엽고운은 어쩔 수 없이 콧등이 시큰해지고 말았다. 화옥향은 소매 끝으로 눈물을 찍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공연한 말을....... 동생, 술 한 잔 받아요." "감사합니다." 엽고운은 그녀가 따라주는 술을 훌쩍 들이켰다. 감정을 은폐하자니 무슨 행동이건 취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술이 목구멍을 지나는 그 찰나, 그는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갈산홍(渴酸紅)!" 쿵! 엽고운은 그만 안색이 흑빛이 된 채 탁자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천갈부인 화옥향이 그의 모습을 내려다 보며 탄식했다. "독수절의로부터 전수받은 독술이 있다 해도 어림 없어요. 동생이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가는 데는......." 이때, 침실 쪽에서 한 가닥 음험한 음성이 들려왔다. "흐흐흐... 과연 부인의 솜씨는 천하제일이오. 그 여우같은 놈을 제압하다니." 과연 침실로부터 혈의를 입은 한 인물이 걸어나왔다. 혈불(血佛). 바로 영제의 수하 중에서 제일인자라는 혈불 공화승(空火昇)이었다. 단단한 체격에 머리가 중처럼 완전히 벗겨져 있었다. 눈에는 섬뜩한 혈광이 어려 있었으며 입술은 한 일자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한 마디로 잔인한 인상이었다.


그를 향해 천갈부인 화옥향은 싸늘하게 코웃음쳤다. "흥! 나 천갈부인은 다른 방면은 몰라도 이 방면만은 자신이 있어요." "흐흐흐... 그걸 누가 모른댔소?" 혈불은 괴이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러더니 발끝으로 엽고운을 냅다 걷어찼다. 퍽! 엽고운은 그의 발길에 채여 그만 석실의 한 구석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리고는 이내 잠잠해져 버렸다. 그 광경에 화옥향의 눈빛이 일순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혈불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의기양양이었다. "ㅋㅋ... 이 놈 때문에 영제가 꽤나 골치를 썩었지. 이 놈이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나도 꼬리를 잡지 못했을 게요. 흐흐흐... 이 놈의 흉계를 신공이나 영제가 안다면......." 그 말에 화옥향은 느닷없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공화승! 우습군요. 어차피 당신도 모반을 꿈꾸면서 남을 비난하다니." 그러자 혈불의 눈이 무섭게 번뜩였다. "흐흐흐... 꿈이 아니라 그것은 이제 현실이지. 이미 사십 년 전부터 노부는 신, 영을 견제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눈빛이 야릇해지더니 화옥향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옥향, 내 한 팔이 되어 주시오.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충분히 영제를 죽이고 영제전을 장악할 수 있소. 더 나아가서는 금마별부 전체까지도 말이오." 그러나 화옥향의 대답은 역시 싸늘했다. "흥! 망상이에요." "망상? 흐흐흐......." 혈불은 괴이한 웃음 소리를 흘렸다. "호호호호......." 화옥향은 교소를 터뜨림과 동시에 무슨 생각에서인지 젖가슴을 출렁해 보였다. 그것을 본 혈불의 얼굴이 갑작스레 확 달아 올랐다. 그는 마치 이끌리기라도 하듯 두 손을 내밀었다. "진정 아름답소! 그대는......." 화옥향은 생긋 웃었다. "갖고 싶나요?" 혈불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나 혈불 공화승이 그대를 행복하게 해 주겠소." 그 말에 화옥향은 얼굴을 잔뜩 굳힌 채 냉소를 날렸다. "흥! 그런 상태로 말인가요?" 혈불이 흠칫하여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화옥향은 사뭇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냉랭하게 덧붙였다. "당신은 여자를 안을 때도 공력을 사용하나요? 왜 이런 순간조차 전신에 혈불마영공(血佛魔影功)을 끌어올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군요." 혈불은 그제서야 말뜻을 깨닫고는 멋적게 웃었다. "미안하오. 내가 큰 실수를 했구려. 이것은 단지 습관일 뿐이오. 사십 년 간 한 번도 공력을 풀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다음 순간, 혈불의 눈에서 혈광이 스러졌다. 화옥향을 안심시켜야 했으므로 즉각 혈불마영공을 풀어 버린 것이었다. "호호호......." 화옥향은 만족스러운 웃음과 더불어 뒤로 물러났다. 가는 허리와 둔부를 묘하게 비틀며 침실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스르르....... 우연인지 그녀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홍색유의가 흘러내렸다.그 바람에 눈부신 어깨가 불쑥 드러나고 말았다. 그야말로 백옥같이 고운 피부를 지닌....... 혈불의 눈이 일순 크게 떠졌다. 새빨간 홍의자락을 젖히고 밖으로 노출된 그 어깨의 유혹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혈불 공화승, 그는 급기야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그녀에게 바짝 다가갔다. "옥향!" 그는 앞뒤 가릴 것 없이 화옥향을 덥썩 끌어안고 말았다. "아이, 참......." 화옥향은 몸을 비틀었으나 그렇다고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아니, 그녀는 곧 신음을 발하며 두 팔로 혈불의 목을 휘감았다. "으음......." "헉!" 혈불은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도 그럴 것이, 코를 찌르는 육향과 더불어 만지면 묻어날 듯 부드러운 여인의 살결을 대하고 보니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었다. 그는 대뜸 화옥향의 목덜미에 입술을 찍었다. 그리고는 이성을 잃은 듯 마구 핥기 시작했다. "흐... 흐......." 화옥향 역시 숨이 넘어갈 듯한 신음을 흘려냈다. "으으음......!" 하지만 그것은 단지 부분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그녀의 얼굴이 무섭도록 싸늘하게 굳어지는 것을 혈불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천갈부인 화옥향의 매끄러운 손이 혈불의 목덜미에서 점차 등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목을 빨고 있는 혈불은 이 또한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한 순간, 화옥향의 눈에서 살기가 번쩍 일었다. "컥!" 처절한 ���명과 함께 혈불은 튕겨지듯 뒤로 날아갔다. 그의 안색은 삽시에 잿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등 뒤 영대혈(靈臺穴), 화옥향에게 찔린 그곳은 그의 유일한 급소였던 것이다. 혈불은 회의에 찬 눈으로 화옥향을 노려 보았다. "네, 네가 나를......?" 그의 입술 사이로 검은 선혈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반면에 화옥향은 그 말에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먼저 흐트러진 옷매무새부터 가다듬더니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호호호호... 공화승, 당신은 영제를 배반했어요. 그러니 죽어 마땅하지 않은가요?" 혈불은 무섭게 눈을 치떴다. "그것은 네 년도 마찬가지가 아니냐?" 화옥향은 가엾다는 듯 그를 응시했다. "여전히 어리석군요. 여기저기 증거를 흘리더니....... 호호호... 하지만 나는 당신과 달라요. 그저 잡아떼면 그뿐인 걸요?" "이... 이 괘씸한!" 혈불은 부르짖음과 더불어 양손을 번쩍 치켜 올렸다. 그러자 그의 양손바닥에서는 즉시 핏빛 기류가 발출되었다. 츠츠츠--! 두 줄기 혈광류가 무섭게 화옥향을 몰아쳤다.


"흥!" 화옥향은 가볍게 교족을 놀려 그의 공격을 피했다. 동시에 그녀는 소맷자락을 날려 다섯 가닥의 청광을 발사시켰다. 쉬쉭--! 그것은 자모귀문정(子母鬼門釘)이라는, 독이 발린 암기였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혈불은 그것을 무시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파팍! 팍! 과연 자모귀문정은 그의 몸에 닿자마자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모조리 튕겨나가 버렸다. ② "이럴 수가!" 화옥향은 안색이 일변했다. '이 자가 벌써 금강지체를 이루었단 말인가?' 그녀의 놀라움을 비웃기라도 하듯 혈불이 음산하게 덧붙였다. "크ㅋ! 화옥향, 내 네 년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리라." 화옥향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이 자는 영대혈을 제외하고는 무쇠같은 몸을 이루었구나.' 그녀에게는 그 이상 더 생각할 틈이 없었다. 격분한 혈불이 마침내 맹렬한 공격을 개시했기 때문이었다. 츠츳! 위이-- 잉--! 그는 한 손으로는 붉은 기류를, 다른 한 손으로 푸른 빛 경기를 동시에 뿜어냈다. 화옥향이 이를 급급히 피하며 다시 소매를 휘둘렀다. 슉! 슈슉--! 십여 줄기의 검은 광채가 뻗어 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혈불에게 적중되자마자 금속성을 울리며 모두 튕겨나가고 말았다. 일명 흑우전(黑雨箭)이라는 암기였다. "크흐흐... 화옥향, 내 네 년을 붙잡아 가랑이부터 찢어 놓겠다. 감히 노부를 암습하다니." 혈불은 양손을 휘두르며 화옥향을 구석으로 몰아갔다. 덕분에 그의 경력이 부딪친 석벽은 움푹움푹 패이고 있었다. "아아......!" 화옥향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연신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어느덧 삼십여 초가 숨가쁘게 전개되었다. 그 동안 화옥향은 식은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어 버렸다. 그녀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음을 느꼈다. 그러자 품 속에서 금갑을 하나 꺼내 재빨리 열었다. 우웅--! 괴음향과 함께 한 마리 곤충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것은 일종의 거미였는데 기이하게도 날개가 달려 있었다. 거미는 방 안을 좌우로 휘젓더니 곧바로 화옥향의 앞에다 줄을 치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화옥향은 거미줄로 몸을 가릴 수가 있게 되었다. 그것을 본 혈불이 놀라 부르짖었다. "은라지주(銀羅蜘蛛)!" 화옥향은 거미줄 안에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공화승! 당신도 은라지주의 무서움은 알고 있겠죠? 천하의 어떤 고수라 할지라도 이 거미줄에 닿으면 한 줌의 독수로 화하고 마니까요." 혈불은 잠시 안면을 씰룩거리더니 이를 부드득 갈았다. "내 설사 한 줌의 독수가 되는 한이 있어도 네 년만은 절대로 그냥 둘 수 없다."


그는 눈에서 살광을 폭사해내며 다가들었다. 이어 그의 손이 거미줄에 닿자 기이한 음향과 함께 푸른 연기가 솟아올랐다. 푸시시식--! "으으......." 혈불은 지극히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손은 금세 시커멓게 변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화옥향의 말처럼 녹아들지는 않았다. 그 광경에 질겁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천갈부인 화옥향이었다. '맙소사! 은라지주의 극독마저 통하지 않다니. 그렇다면 이 노괴의 무공은 결국 신, 영과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단 말인가?' 그녀는 만면에 공포감을 떠올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턱! 화옥향은 등이 석벽에 닿는 것을 느끼고는 그만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꼼짝없이 죽기만을 기다려야 할 판국인 것이었다. 혈불의 잔혹한 외침이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크흐흐.... 죽어라! 화옥향." 화옥향이 체념으로 인해 스르르 눈을 내리감을 때였다. "안되었지만 그것은 당신이 먼저요." 혈불의 등 뒤로부터 싸늘한 일성이 터졌다. "제마어린참(制魔漁鱗斬)!" 파파파팟--! 고막을 찢는 듯한 파열음이 사위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흡사 물고기의 비늘과도 같은 수천 개의 섬광이 작렬했다. 그러나 혈불은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는지라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는 냉소를 날리더니 그대로 손을 뻗어 화옥향의 목을 움켜쥐었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 놀랍게도 그것은 혈불의 입에서 터져나온 것이었다. 비늘조각 같은 섬광이 등에 격중된 순간 그의 호신강기는 여지없이 파괴되고 말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 강맹한 경기는 혈불의 등을 꿰뚫고 가슴까지 관통해 버렸다. 퍽! 혈불의 신체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박살난 심장과 오장육부가 순간적으로 외피를 뚫고 밖으로 쏟아져나온 것이었다. "크으....... 네 놈이......." 혈불은 그때까지도 쓰러지지 않고는 비틀거리며 뒤로 돌아섰다. 그의 앞에는 엽고운이 담담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우옹--! 때마침 허공을 날던 은라지주가 급선회하더니 혈불의 목 부근을 물었다. "컥!" 혈불은 일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무인으로서의 본능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는 즉각 손을 뻗어 은라지주를 잡더니 어떻게도 할 수가 없자 입 속으로 집어 넣었다. 빠지직! 은라지주는 혈불의 이빨에 의해 무참하게 죽어갔다. 그런 연후에야 그의 생존 능력은 비로소 한계를 드러냈다. "크윽!" 참담한 비명과 함께 혈불의 입에서 시커먼 피화살이 솟구쳤다.


쿵! 마침내 그는 썩은 고목처럼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푸시식! 푸식....... 쓰러진 혈불의 몸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 올랐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정말로 한 줌의 시커먼 독수로 화해 버렸다. 영제 휘하의 제일고수인 혈불 공화승, 그의 죽음이 이렇듯 뜻하지 않은 곳에서 허망하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아아!" 벽에 기대있던 화옥향은 안도하는 한편, 장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멍한 시선으로 엽고운을 바라보았다. "동생은... 독에 당하지 않았나요......?" 엽고운은 빙긋 웃더니 낭랑한 음성을 쏟아냈다. "누님께서 걱정하시듯 세상을 헤쳐나갈 지혜까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인생 경험은 꽤 가지고 있는 편입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어두운 과거와 함께 쓰라린 기억들이 많은 반면, 그는 그것을 딛고 일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누님께선 앞으로 소제에게 독을 쓰시려면 최소한 가책을 배제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까지 심성을 망가뜨릴 자신이 있습니까?" 엽고운의 말에는 자못 함축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화옥향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점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는 안색이 변하더니 이렇게 반문했다. "동생은 대체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지?" 엽고운은 어깨를 으쓱 했다. "뭐 별로....... 소제가 이곳으로 들어왔을 때 누님 외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는 것, 겨우 이 정도일 뿐입니다." 말꼬리를 돌리는 그를 향해 화옥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동생은 신, 영의 최대 적수로군." 그러다 문득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 동생에게 한 가지를 더 알려 주지." 화옥향은 엽고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순간, 그녀의 커다랗고 아름다운 눈에는 왠일인지 눈물이 고여 올랐다. "동생, 먼저 나를 용서해 줘요." 의외의 말에 엽고운은 어리둥절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화옥향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나는 동생을 제압하기 위해 심계와 독 말고도 어쩌면 더 끔찍한 것을 사용했어요. 거기까지는 물론 몰랐겠지?" "네에?"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동생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악독해요." 그러는 사이, 엽고운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단전 부근에서 갑자기 뜨거운 열기가 폭발하듯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헉! 내게 무슨 짓을......?" 화옥향은 고통스러운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음양춘혼산(陰陽春混散), 갈산홍과 함께 풀어 넣었지."


"맙소사!" 음양춘혼산. 이것은 춘약(春藥)의 일종으로 남녀가 교접하는 것 말고는 해약이 따로 없었다. 엽고운은 곧 자신의 내부로부터 강렬하게 치밀어 오르는 기운이 욕정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는 여체에 대한 갈망으로 전신을 부르르 떨어야 했다. 화옥향이 그를 향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동생을 처음 본 순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 지난 이십 년 동안 나를 그토록 미치게 했던 하나의 영상이 바로 동생에게서 발견되었으니까." 그녀는 이어 자신의 손으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후후... 그는 죽었지만 내 가슴 속에 복수심 외에 다른 감정이 침범하는 것을 결코 허락해 주지 않았어." 스르륵... 사락! 상의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며 화옥향의 눈부신 어깨와 등, 그리고 팔을 노출시켰다. "나도 한 동안은 착각을 했었지. 단지 동생이 그와 닮았기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 것이라고. 하지만 결국 나는 깨달았어. 시작은 그랬을지 모르나 현재의 나는......." 스르륵....... 치마가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이제 남은 것이라곤 오직 젖가슴과 아랫배의 은밀한 부분을 가린 두 장의 얇은 천 뿐이었다. 화옥향은 현란한 육체를 미묘하게 흔들며 말을 이었다. "동생을 귀찮게 하려는 건 아니야. 단지... 한 번의 인연으로 평생의 추억을 삼고 싶을 뿐......." 급기야 그녀의 뺨 위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러나 엽고운은 화옥향의 뼈저린 고백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흡사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잔뜩 충혈된 눈으로 그녀의 육체만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화옥향의 손이 자신의 가슴에 덮힌 천을 떼어냈다. "얼마 전, 혈불은 내게 동생에 관해 의심나는 점들을 들려 주었지. 그때에 이미 나는 그 자를 제거할 결심을 했어. 동생과 함께. 후후......." 풍요롭게 솟아있는 두 개의 젖가슴, 그것은 더 이상 부풀 수 없을 만큼 부풀어 올라 마치 잘 익은 과육을 연상시켰다. 그 정상에 살포시 얹힌 두 개의 유두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나를 새로운 번민에 빠뜨린 사람....... 결과적으로 내 계산은 전부 어긋나 버리고 내겐 이제 그대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열망만이 남았군."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그녀의 몸에 붙어 있던 마지막 한 장의 천이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무성하게 발달한 삼림이 지금껏 숨겨왔던 광포한 열정을 비로소 표출하는 찰나였다. 농염하게 무르익은 여체는 차라리 하나의 거대한 늪이었다. 선연한 굴곡도 그렇거니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피부는 그대로 사내의 영혼마저 집어 삼켜 버릴 것 같았다. "누... 누님!" 엽고운은 아득한 침몰을 향해 그야말로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화옥향이 이성을 상실한 그를 끌고 침실로 들어갔다. 화려한 금침이 깔린 침상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준비된 것이리라. 곧바로 두 남녀의 거친 호흡소리가 방 안 공기를 후끈하게 했다. 침상 위에서 몇 번을 뒹구는 동안 엽고운도 알몸이 되었다. 천갈부인 화옥향. 오랫동안 식어 있던, 아니 미처 피어 보지도 못한 채 스러질 뻔했던 그녀의 욕망이 마침내 엽고운의 공략에 의해 최초로 발화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 입술, 혀가 스칠 때마다 그녀의 몸은 여지없이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아... 하아......." 엽고운은 지글지글 타오르는 여체를 끌어안은 채 실로 무시무시한 질주를 거듭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그의 남성은 하늘과 땅을 한꺼번에 무너뜨릴 듯 맹렬한 정염을 뿜어내고 있었다. "헉헉......!" 침상은 그들 두 남녀로 인해 일대 격전장으로 화하고 말았다. 그러한 혼미의 순간에 놀랍게도 천갈부인 화옥향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환희와 더불어 불현듯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설움이 북받쳐 오른 것이었다. 화옥향은 폭풍같은 엽고운의 호흡을 전신으로 느끼며 내심 피를 토하듯 부르짖었다. '동생, 아니 운(雲)....... 그대는 아는가? 내 심정이 왜 이토록 절박한지를. 우리는 지금 이 금마별부가 붕괴되기 전, 마지막으로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야.' 아무튼 격렬한 정사(情事), 그것은 몇 번이나 계속되었다. ③ 엽고운. 그는 깨어났다. 그리고 의복이 단정하게 정비된 채 침상에 얌전히 누워 있는 자신을 느꼈다. 실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공허감이 그로 하여금 곧 두 개의 육체가 벌였던 뜨거운 향연을 떠올리게 했다. 엽고운은 그만 안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그녀가 왜.....?'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침상 옆의 탁자 위에 놓인 두 가지 물건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한 장의 편지와 조그마한 고불상(古佛像)이었다. "으음......." 엽고운은 침중한 신음을 흘리며 먼저 편지를 집어들었다. 그러자 그의 눈에 섬세하면서도 일면 열정이 느껴지는 여인의 필체가 들어왔다. <동생, 나는 처음부터 동생이 구대선생의 권유에 의해 나를 찾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동생이 필요로 했던 것은 단지 무명무아신승(無名無我神僧)이 남긴 고불(古佛)이었겠지요. 그 점은 나를 심히 분노케 했어요. 왜냐하면... 동생을 사랑했으니까....... 이제 와서 감히 이런 말을 하는 내게 뻔뻔스럽다고 욕할지는 모르지만.......> 편지는 그 부분에서 잘 읽혀지지 않았다. 눈물로 흐려져 있어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앞으로 십 일 후면 금마별부는 완전히 붕괴되고 말아요. 이 사실은 아무도 몰라요. 또한 동생이 깨어났을 때는 그 열흘이 지난 후일 것이고, 벌써 기관은 작동되어 있을 거예요. 금마별부는 영원히 신, 영과 함께 가라앉아 버리는 거지요. 그러니 동생은 속히 고불을 열고 그곳��� 적힌 무명무아신승의 유시대로 이곳을 빠져 나가세요. 고불의 목을 오른쪽으로 두 번, 왼쪽으로 세 번 돌린 후에 다시 이마를 누르면 그 유시가 나올 거예요. 그리고 동생, 마지막으로 이 불행한 누나의 부탁을 들어줘요. 언제라도 쓸쓸한 생각이 들면... 한 번쯤은 이 화옥향(花玉香)을 생각해 주기를... 부탁.......> 편지는 거기에서 끊어져 있었다. "아! 이럴 수가......." 엽고운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너무나 큰 충격을 입고 보니머리가 온통 혼란스러워져 버린 것이었다. 잠시 후. 엽고운은 편지를 와락 움켜쥐었다. 그의 준미한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화옥향! 그녀의 진정한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엽고운의 심경은 왠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그러나 곧 그는 탁자 위의


고불(古佛)을 노려보았다. <......고불의 목을 오른쪽으로 두 번, 왼쪽으로 세 번 돌린 후, 다시 이마를 누르면.......> 엽고운은 고불을 덥썩 움켜쥐고는 그대로 실행했다. 크륵--! 괴이한 소리와 함께 고불의 밑이 빠지며 조그만 양피 두루마리가 나왔다. 또한 한 장의 피묻은 천조각도 함께 나왔다. 엽고운은 먼저 양피 두루마리를 폈다. <무명무아신승(無名無我神僧) 무아신보(無我神譜). 인연이 있는 자에게 남긴다.> "아! 이것이 바로 그가 남긴 비학(秘學)인가?" 엽고운의 가슴에서 세찬 진동이 일었다. 마침내 그는 혈의음제, 천외천유자, 무명무아신승의 세 가지 비학을 모두 얻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것을 익힐 시간만은 없었다. 엽고운은 두루마리를 도로 말아 품에 넣은 다음 피묻은 천조각을 폈다. 그곳에는 황망히 써내려간 듯한 글씨가 빽빽히 담겨 있었으나 대부분 피에 젖어 잘 보이지 않았다. 엽고운은 알아 볼 수 있는 글씨들을 붙여 읽어갔다. <...... 위지주천(尉遲朱天)의 음모를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다. ......와 노납은...... 그가 모르게 두 개의 비도(秘道)를 설치......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일시에 붕괴된다. 사관(四關)을 통과하지 않고도 생문(生門)...... 좌로 사(四), 우로 칠(七)...... 금마별부의 비밀을 푸는 자가 있다면...... 부디 좋은 일에.......> 엽고운의 안면에서 적지 아니 경련이 일어났다. 비록 드문드문 끊겨져 있었으나 편지의 내용은 그에게 매우 중대한 사실들을 전달하고 있었다. 엽고운은 미간을 가늘게 좁혔다. '이곳에 두 개의 비도가 있다면 그 중 하나는 물론 내가 들어왔던 통로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개는?' 그는 여기까지 생각하다 문득 안색이 일변했다. 한 가지 커다란 의혹에 봉착한 것이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무명무아신승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일대 기인이다. 그런데 왜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듯 생문을 두 개나 만들었단 말인가?' 엽고운의 시선이 한 글귀에 뚝 멎었다. <......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일시에 붕괴된다.......> 그러자 그는 비로소 의문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그렇다! 이 글로 보아 그 두 개 중 한 개는 사문(死門)이다.' 엽고운은 자신의 생각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틀림 없다, 그 사문에는 금마별부 전체를 붕괴시킬 만큼 엄청난 기관이 장치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튕겨지듯 벌떡 일어났다. '어서 돌아가서 구대선생 등과 상의하자. 벌써 열흘이 흘렀다고 했지 않은가?' 엽고운은 급박한 심정이 되어 신형을 날렸다. 휙--! 구대선생의 처소. 엽고운은 그답지 않게 매우 당황했다. 서둘러 달려온 것과는 달리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어디로 갔을까?' 휙--! 그는 다시 이번에는 장천노수의 거처를 향해 쏘아져갔다.


금마별부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석실은 중도파의 인물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장천노수의 거처는 그리 멀지 않았다. 단지 두 번의 통로를 지나면 곧바로 당도할 수 있었다. 쿠르르릉--! 석문이 열렸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몹시도 썰렁한 가운데 탁자 위에 바둑판만이 덩그렇게 놓여져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엽고운의 눈에서 기광이 번쩍 일었다. 바둑판에는 바둑돌들이 흑백의 형세를 이룬 채 두던 이들의 손길을 고스란히 입증해 주고 있었다. '혹시......?' 엽고운은 불안해오는 심경을 억누르며 탁자로 다가갔다. 그가 바닥에서 한 줄기 검흔(劍痕)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이것은.......' 엽고운이 눈을 부릅뜨는 찰나, 그의 머리 위 천장 부근에 괴이한 변화가 생겼다. 천장의 면이 움직였다. 아니, 실은 그곳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두 개의 인영이 꿈틀 움직임을 보였다. 귀검(鬼劍)과 환도(幻刀), 즉 신공의 주위를 그림자같이 따르는 네 중년인들 중 두 명이었다. 귀검 사마각과 환도 사마수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스쳤다. 그들은 사지를 벌려 마치 거미처럼 천장에 붙어 있었는데 각기 오른손에 검과 도를 꼬나쥐고 있었다. "죽어라--!" 폭갈과 함께 그들은 동시에 아래로 내리꽂혔다. 츠츠츠츳--! 검광과 도기가 수천만 섬의 폭광을 일으키며 장내를 뒤덮었다. 펑--! 바둑알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돌로 된 바둑판과 탁자, 의자 등도 수십 조각으로 갈라져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엽고운이 어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사이에 그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종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이, 이런!" 귀검과 환도는 낭패한 기색으로 즉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때, 조금 전까지도 그들이 붙어 있던 천장에서 무수한 은빛비늘이 폭사되었다. 파파파팟--! "헉!" 환도는 기겁을 했다. 그는 다급히 신형을 돌리며 도를 어지럽게 휘둘렀다. 그러나 은빛 비늘이 뿜어내는 섬광과 부딪친 순간, 그의 도는 여지없이 박살이 나고 말았다. 동시에 환도는 가슴이 화끈함을 느꼈다. "으악--!" 단말마의 비명 뒤로 그는 가슴이 가로로 양단된 채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두 덩어리로 분리된 그의 상체와 하체가 각기 피보라를 쏟아냈다. "으으! 이럴 수가......." 귀검은 자신도 모르게 한 차례 전율을 일으켰다. 느닷없는 참변을 목도하고 보니 당혹에 이르기도 했지만 문제는 환도가 그와는 피를 나눈 친형제라는 사실이었다. 이어 귀검의 눈에 엽고운의 무심한 모습이 들어왔다. "네, 네 놈이 감히 이 따위 짓을!" 이를 가는 그에게 엽고운은 담담히 대꾸했다. "나도 당해줄 수만은 없지 않소? 암격의 제일인자라는 그대들에게는 그런 후한 대접이 어울리오." "놈! 우리가 와 있는 것은 어찌 알았느냐?"


엽고운은 씨익 웃었다. "과연 그대들은 완전무결했소. 다만 불운하게도 바둑판에 그대들의 모습이 비쳤을 뿐이오." "으음!" 귀검의 안색이 삽시에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이를 보며 이번에는 엽고운이 물었다. "신공이 어째서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이오?" 귀검 사마각은 다시금 이를 부드득 갈았다. "네 놈은 단지 필요한 수단에 불과했던 놈이다. 그런데 주제를 모르고 중립을 지키던 고수들을 꼬드겨 신공을 배신하게 하지 않았느냐? 신공께서 과연 그것을 용서하실 것 같으냐?" 엽고운은 그야말로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아뿔싸! 그 일이 탄로가 났었구나.' 이어 그는 안색을 싸늘하게 굳히며 물었다. "그런데 그것은 대체 어떻게 알아냈소?" 귀검은 그를 향해 검을 폭사시켰다. "지옥에나 가서 물어 봐라!" 쐐애액--! 눈부신 쾌검이었다. 번쩍하자 벌써 수십 갈래의 광채가 허공을 뒤덮어 버렸다. 하지만 그를 향해 엽고운은 냉소를 날렸다. "후후! 그대는 자신을 신공으로 착각하는구려." ④ 스스슥....... 어깨를 한 차례 으쓱하자 그의 종적은 그 자리에서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잠종무영보의 최절정 절기였다. "헉!" 귀검은 대상을 놓치자 헛바람을 들이키며 검을 사방으로 몰아쳤다. 팔방풍우혈비(八方風雨血飛)라는 무서운 살초였다. 파파파팟--! 무수한 검광이 난비했다. 그러나 흐릿한 인영이 눈 앞을 스쳐가는 순간, 귀검은 그만 손아귀가 허전해지고 말았다. 검은 어느새 그의 손을 벗어나 엽고운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으헉!" 귀검은 그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그보다 더욱 믿지 못할 일을 당해야 했다. 그는 다만 검광이 번뜩 일어나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의식하자마자 그는 눈으로부터 엄청난 통증을 느꼈다. "으악!" 귀검의 양쪽 눈에서 피화살이 솟구쳤다. 그의 목에도 어느덧 동전만한 구멍이 뻥 뚫려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엽고운. 그는 오랜만에 지난 날 천무독으로부터 배운 괴검일초(愧劍一招)를 구사해 보았다. 아울러 동시에 삼검을 찌를 수 있게 된 자신에 대해 스스로도 매우 놀라고 있었다. 귀검은 두 손으로 허공을 저으며 허우적거렸다. "끄윽! 네... 네놈이......." 쿵! 그것이 그의 최후였다. 그가 넘어지자 바닥은 곧 핏물로 흠씬 젖어버렸다. 환도와 더불어 신공의 왼팔 격인 두 절세고수의 죽음 치곤 너무도 순간적인 현상들이었다.


그만치 엽고운의 무공 수위는 이제 추측이 불가할 정도였다. 화진성을 통해 무해(武海)에 뛰어든 지가 얼마 되지 않았건만 혈불, 귀검, 환도 등의 세 마두를 이렇듯 간단히 처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엽고운은 지금 성취감 따위에 취해 있을 겨를이 없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내심 중얼거렸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째서 비밀이 새어나갔단 말인가? 또한 구대선생, 일지선옹, 장천노수, 이 세 노인의 향방은?' 엽고운은 이어 실마리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 보았다. 방해자가 없어져서일까? 그는 곧 오른쪽 벽면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는 손으로 만져 보았다. '횟가루......!' 엽고운은 회칠이 되어있는 부위를 손가락 끝으로 문질러 보았다. 그러자 횟가루가 떨어지며 그의 손끝에 무엇인가 묻어나오는 것이 있었다. '피다!' 엽고운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오오! 벽에서 피가 묻어 나왔다면.......'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놀기 시작했다. '제발 내 생각이 현실이 아니기를!' 엽고운은 무섭게 벽을 노려보았다. 벽면에 나 있는 가느다란 흠은 어렵지 않게 눈에 띄었다.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벽 속에 공간이 있었구나.' 엽고운은 지체없이 양 손바닥을 석벽에 붙였다. 그리고는 전 공력을 다해 밀어부쳤다. 쩍-- 쩌적--! 석벽은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금세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아!" 벽 속의 공간, 그곳에 벌어져 있는 광경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피투성이인 한 구의 시신이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절망에 찬 엽고운의 눈은 바로 그 시신의 얼굴에 못박혀 있었다. "노... 노수......." 그 시신은 다름 아닌 장천노수였다. 그나마도 처참하기 그지없는 주검이었다. 오른쪽 어깨로부터 허리 밑까지 검으로 길게 그어져 내장이 밖으로 쏟아져 나와 있었다. "어찌 이런 변이......." 엽고운은 충격으로 인해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곧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그의 정신을 회복시켰다. 그는 안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나름대로 추리에 들어갔다. '귀검이나 환도의 실력으로는 절대 장천노수를 죽이지 못한다. 그렇다면......?' 한 구석, 피로 쓴 글씨가 눈에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주군...... 죄송...... 비밀이 탄로...... 구양현이 밀고(密告)...... 구양가(歐陽家)...... 좌측 세번째 석실...... 팔황천마(八荒天魔)와 혈섬(血閃)이.......> 엽고운은 또 한 번 정신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구양현이 배신을? 설마.......' 그는 격동을 억누르며 연기처럼 환신했다. 스스스....... 이어 그는 구양가를 향해 빛살같은 속도로 날아갔다. 석문은 열려 있었다. 그런데 문 앞에 당도하자마자 엽고운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발했다. "아!" 한 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 그것은 놀랍게도 구양인이었다. 평소 그다지도 온화하던 그의 얼굴은 회의와 함께 처절한 분노를 드리운 채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가슴에 뚫린 커다란 구멍이 엽고운을 극도로 흥분시켰다. "이건 말도 안 된다!" 휙--! 엽고운은 날듯이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헉!" 그의 놀라움은 거듭 이어졌다. 이번에는 상유랑의 시체가 바닥에 누워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우기 끔찍한 것은 그녀가 윤간을 당한 채 알몸으로 피살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온통 산발이 된 머리카락과 짓뭉개진 하복부가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구양현이 넋을 잃고 멍하니 있었다. 엽고운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구양현!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오?" 그러나 구양현의 눈에는 이미 촛점이 없었다. 아내인 상유랑의 시신을 내려다 보고는 있었으나 어떠한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마치 남의 말을 하듯 이렇게 읊조리고 있었다.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소. 모두 다 털어 놓으면... 우리들만은 살려 준다고 해 놓고선......." 엽고운은 대로했다. "멍청한! 당신은 아직도 신공을 몰랐단 말이오?" 구양현은 눈을 껌벅거리며 그를 응시했다. "신공도... 결국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리라 생각했소. 그러나 그는 인면수심인 자였소." 이쯤 되자 엽고운은 못내 비통한 심경이 되어 부르짖었다.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그것을 너무 늦게 알았구려!" 그 말에 이어 구양현은 느닷없이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내 어리석음의 대가는 정녕 처참했다. 가족을 살리려다 오히려 개죽음을 당하게 하다니! 으하하... 내 이 죄과를 어찌 다 갚으리오? 크하하하... 컥!" 그의 입에서 핏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이어 그는 한 차례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엽고운이 깜짝 놀라 외쳤다. "구양현!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요?" 동시에 재빨리 구양현의 맥문을 잡아본 그는 절망적인 부르짖음을 발했다. "아뿔싸! 스스로 심맥을 끊었구나." 이때, 구양현이 비로소 솔직한 심정을 털어 놓았다. "엽소협... 부디 용서를......." "당신은 끝까지 어리석구려.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소?" 엽고운은 참담하게 읊조리며 구양현의 맥문에 공력을 집어 넣었다. 구양현은 다소나마 힘을 되찾자 다시 입을 열었다. "실은... 어젯밤... 우연히 석탁을 움직였다가... 그곳에서... 비밀통로를 발견......." "으음." 엽고운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런 가운데 구양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팔황천마가 그것을 보았....... 바로 그가 나를 협박... 소협과의 관계... 가족의 목숨으로 위협......." "그렇게 되었었구려." 엽고운의 눈가에 일말의 연민이 스쳤다. 그것을 보며 구양현은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떠올렸다. "고맙... 엽소협이 이해해주는 것 같아... 하지만 모든 것 끝장... 신공과 신공부.... 전부 통로로 나갔......." 구양현의 고개가 옆으로 떨구어졌다. 천추의 한을 안고 그는 생을 마감해 버린 것이었다. "잘 가시오. 구양현......."


엽고운은 장탄식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는 머릿속이 말할 수 없이 혼란스러지고 말았다. 긴 시간에 걸친 노력도 헛되이 상황은 거의 파국으로 치닫고 있지 않은가? 엽고운은 끓어오르는 심경을 억누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애초에 내가 나왔던 출구는 월미의 방으로 통해져 있었다. 물론 그것은 생문이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출구란 결국.......' 그는 급히 구양가의 좌측 세 번째 석실로 달려갔다. "여기도......!" 방문 앞에 또다른 세 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신공부의 고수로 가슴에 각기 손가락 크기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엽고운의 안색이 처음으로 밝아졌다. '일지선옹(一指仙翁)의 솜씨로군!' 그는 지체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벽 쪽으로 시선이 간 그는 눈을 크게 부릅떠야 했다. 그곳에는 실로 놀라운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마부(魔斧) 사마통과 구양월미가 한데 어우러져 있었는데 그의 독문무기인 핏빛 도끼가 그녀의 머리에 막 내리 꽂히려는 찰나였다. 구양월미는 가녀린 목을 그의 손에 붙잡힌 채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사마통이라면 공히 신공 휘하의 사대고수 중 한 명이다. 그 곁에서 일지선옹이 피투성이가 된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구양월미의 위기를 바라보며 그는 무력감으로 인해 그야말로 치를 떨고 있는 중이었다. "멈춰라--!" 엽고운의 외침이 석실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자 마부 사마통이 공격을 멈추며 고개를 홱 돌렸다. "웬 놈이냐?" "지옥에서 온 사신(死神)이다." 엽고운의 신형이 그를 향해 최대 속도로 쏘아져갔다. 파파파팟--! 수천 개의 은빛 섬광이 폭사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크악--!" 사마통은 단번에 머리와 몸이 송두리째 부서져 날아가고 말았다. 제마어린참의 위력이 그로 하여금 혈육을 분간할 수 없는 육괴로 변하게 한 것이었다. 잠시 후. "오... 오빠......!" 넋이 나가 있던 구양월미가 그제서야 엽고운을 알아본 듯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주군!" 일지선옹도 격동에 찬 외침을 발했다. 제 12 장·종(終), 그리고 또다른 기점(起點) ① 엽고운은 구양월미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 동시에 그는 일지선옹을 향해 탄식처럼 말했다. "선옹께선 크게 다치신 것 같구려." 마치 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 일지선옹은 검붉은 핏덩이를 울컥 토해냈다. 이와 더불어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주군이 안 계신 사이에 일이....... 놀랍게도 천이백 년 동안 움직이지 않던 금마별부의 전 기관이 바로 어제부터 작동하기 시작 했소이다." 일지선옹은 힘겹게 손을 들더니 한 쪽 벽을 가리켰다. 그 벽은 좌우로 갈라져 있었으며 그 속으로 하나의 통로가 보였다. "저곳으로 신공과 그의 수하들이 빠져 나갔소이다. 그는 영제가 도착하기 전에 서둘러......."


통로를 바라보던 엽고운의 안색이 무섭게 굳어졌다. '저곳이 문제의 사문(死門)!' 그의 전신에서 세찬 경련이 일었다. "큰일이오! 만약 신공이 기관을 잘못 건드린다면 금마별부는 완전히 붕괴될지도 모르오." "넷?" "흐음!"" 일지선옹과 구양월미의 얼굴 역시도 흑빛이 되었다. 엽고운은 황급히 말했다. "본인은 시급히 저곳으로 가 보아야 하오. 설명은 후에......." 그러나 구양월미가 그를 불러세웠다. "오, 오빠! 부모님과 할아버지는......?" 엽고운은 금세 참담한 심경이 되고 말았다. '도저히 내 입으로는 말할 수가 없구나. 이런 상황에서 부친의 배신으로 일가가 몰살했다는 것을 어찌.......' 그는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려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분들은 아직 보지 못했다. 우선 신공을 제지한 후에 다시 찾아 보도록 하자." "알겠어요." 구양월미는 안타까운 얼굴이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엽고운이 일지선옹을 향해 물었다. "구대선생은 어디 계시오?" 일지선옹은 통로를 가리켰다. "그는... 신공이 출구를 나간 후 여기를 다시 봉쇄해 버릴까 봐 중립의 고수들을 끌고 추격해 갔소이다." 엽고운은 힐끗 그의 신색을 살피며 물었다. "거동하실 수 있겠소이까?" 일지선옹은 씁쓸히 웃었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소이다만......."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오. 어차피 저 통로는 출구가 아니외다. 그러니 본인도 이곳으로 다시 나오게 될 것이오." 엽고운은 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통로로 몸을 날렸다. 휙--! "오빠! 소녀도 같이 가요--!" 구양월미가 황망히 그의 뒤를 따랐다. 거대한 광장. 그곳에서는 대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신공부의 고수들과 중립을 지키는 고수 수백 명이 그야말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차차차-- 창--! 콰쾅--! "크으으악!" 요란한 병기 부딪치는 소리, 장풍과 경풍의 폭음, 그리고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 등이 광장을 지옥도로 만들고 있었다. 바닥에는 이미 오십여 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으며 숫적으로 열세인 중립의 고수들은 거의 처참한 국면에 몰려 있었다. 신공은 구대선생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구대선생은 신공의 적수가 못 되었다. 덕분에 그는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연신 뒤로 몰리고 있었다. 휘익--!


엽고운이 장내에 당도했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본 그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이게 무슨 꼴인가? 오랜 세월을 동고동락해 왔던 자들이 이런 상잔(相殘)을 벌이다니!' 엽고운은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길이 없었다. "우우우우--!" 그의 입에서 내공이 실린 웅후한 장소성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가 광장을 쩌렁쩌렁 울리자 장내의 인물들은 자신도 모르게 싸움을 멈추었다. 구대선생이 그를 발견하고 격동의 외침을 발했다. "주군!" 신공의 날카로운 부르짖음이 그 말을 받았다. "주군이라고? 정녕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그 사이, 엽고운은 몸을 번뜩여 신공의 앞에 떨어졌다. "신공! 이게 무슨 경거망동한 행위요?" 신공은 그를 향해 일진광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엽고운! 네 놈이 이곳에 나타날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네 힘이 필요없게 되었다. 사관(四關)을 통과하지 않고도 노부는 이 금마별부를 나갈 수 있는 출구를 발견했단 말이다. 핫핫핫......." 엽고운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안되었지만 이곳은 출구가 아니라 사문(死門)이오." 그 말에 대한 신공의 답은 조소였다. "여우같은 놈! 끝까지 노부를 기만하려 드는구나. 내 더 이상 네 놈에게 속아줄 것 같으냐?" 기어이 엽고운의 분노가 폭발했다. "정신 차리시오! 당신의 신뢰라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그 가치기준이 엉망이 되어 있었소. 내 말을 믿어야 하오. 금마별부 내의 모든 생명을 덧없이 사라져 버리게 만들지 않으려면." 신공은 가느다란 눈에서 불을 뿜었다. "애송이 놈! 네가 감히 훈계를 하겠다는 거냐?" 그의 살기 띤 음성이 이어졌다. "이용가치가 없어진 이상 내 네 놈을 살려두지 않으리라. 그리고 이곳을 나간 뒤 기관을 작동시켜 출구를 봉쇄해 버릴 것이다. 오직 신공부만이 무림에 나가야 하므로." 신공은 만면에 득의의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되면 중원무림, 아니 온 천하가 오직 나 신공의 것이 된다." 엽고운은 답답한 심정이 되어 버럭 외쳤다. "이곳은 출구가 아니라지 않았소?" "그럴 리가 없다! 구양현, 그 놈은 노부를 속일 정도의 인물이 못 된다. 비록 중도파에 가담하고 있었으나 지난 팔십 년 간 노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놈이다." 다음 순간, 신공은 손을 뻗어 한 쪽 석벽에 돌출되어 있는 용상(龍像)의 이마를 쳤다. 파팍! 그의 손을 떠난 무형의 경기가 부딪치자 곧 격변이 일어났다. 우르르르릉--! 굉음이 울리며 광장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중심부분이 아래로 꺼지는 것이 아닌가? "아!" 중인들은 모두 눈을 크게 뜨고 이 기현상을 지켜 보았다. 쏴아--! 콸콸콸....... 푹 꺼진 중심부로부터 물이 솟아오른 것은 그때였다. 크르르르.......


마찰음이 울리며 이번에는 물의 한 가운데에서 하나의 석대가 올라왔다. 그것을 바라본 중인들은 일제히 안색이 변했다. 뜻밖에도 석대 위에는 한 개의 오색찬란한 구슬이 놓여져 있었다. "으하하하... 저 구슬이야말로 금마별부를 빠져나갈 열쇠다." 신공의 광소에 이어 엽고운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니오! 저것은 단지 죽음으로 인도하는 마물일 뿐이오." "으하하... 마물이라고?" 신공은 비웃음과 동시에 한 중년인에게 명령했다. "혈섬(血閃)! 즉시 저 구슬을 가져와라. 내 친히 출구를 열어보이겠다." 그를 항상 그림자처럼 따르던 혈섬 사마군이 몸을 날렸다. 휙--! "안된다! 절대로." 엽고운이 재빨리 나서 혈섬의 앞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느덧 신공의 소매가 무섭게 떨쳐진 것이었다. "네 놈이 감히 나 신공의 일을 방해하려느냐?" 그 순간,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경기가 노도같이 짓쳐 들어왔다.엽고운은 온몸이 터질 듯한 압박을 느끼며 급히 쌍장을 뻗었다. 콰르르릉--! 두 줄기 암경이 부딪치자 폭음과 함께 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폭풍이 일었다. 그 속에서 엽고운이 답답한 신음을 발하며 뒤로 네 걸음 물러났다. "으음......." 신공도 두 걸음이나 밀려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내심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럴 수가? 어린 놈이 노부와 맞먹다니.' '과연 신공답다!' 와중에서 혈섬 사마군은 벌써 석대로 내려가 구슬을 막 움켜쥐어가고 있었다. "크아악--!"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더니 피보라와 더불어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아... 아니......!" 중인들이 대경하는 찰나, 한 가닥 음침한 음성이 들려왔다. "크흐흐흐... 신공, 네 놈이 감히 나를 두고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아뿔싸! 영제가......." 신공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발했다. 통로로부터 광장 안으로 이백여 명의 인물이 들이닥쳤다. 과연그들의 선두에는 영제의 모습이 보였다. 혈섬 사마군은 바로 그가 발출한 무형살강(無形殺薑)에 의해 날아간 것이었다. 신공을 비롯하여 신공부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안색을 굳혔다.그러나 곧 신공의 싸늘한 외침이 떨어졌다. "팔황천마(八荒天魔)! 오행수(五行 )! 너희들은 무조건 저 구슬을 취해라." 이와 동시에 영제도 똑같은 명령을 내렸다. "얘들아! 절대로 저 구슬을 빼앗겨서는 안된다. 탈취해라." 콰쾅! 펑--! 차차차창--! "크아아악--!" 순식간에 장내는 아수라장으로 화하고 말았다. 실로 처참무비한 혈투가 재개된 것이었다. 약 삼사백 명에 달하는 인원이 드넓은 광장 전체에서 각기 생사를 건 악투를 벌였다. 피가 튀고, 수급이 날았으며, 팔다리가 끊어지는 참경이 여기저기에서 발생했다. 이는 금마별부의 최대 참사라 아니할 수 없었다. 사십 년 전 금마무고가 발견되었을 때의 상황과 거의


엇비슷한 정도였다. 신공과 영제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복(異腹)이라고는 하지만 피를 나눈 형제가 상호간에 대치상태에 이른 것이었다. "신공, 내 오늘로써 너를 제거해 버리겠다." "무슨 헛소리! 그 동안 참아왔던 것은 나다. 받아라!" 꽈르르릉--! 일대 격돌! 신공과 영제의 싸움은 그야말로 용호상박(龍虎相搏)이었다. 그들은 삽시에 반경 십 장여를 가루로 만들고 있었다. 바닥이 쩍쩍 갈라졌으며 천장에서는 돌가루가 무수히 떨어져 내렸다. 그 자욱한 돌먼지의 회오리 속에서 두 줄기 흉맹한 강기가 일대 폭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엽고운. 그는 이 엄청난 사태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세상에! 어찌 이렇듯 터무니없는 일이......." 구대선생이 비틀거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주군! 저 구슬이 진정 출구를 여는 열쇠가 맞소이까?" 엽고운은 참담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그렇기를 바라오. 하지만 아니오." "아아!" 구대선생의 장탄식은 이내 곳곳에서 터지는 비명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크아아아악--!" 피! 피가 난무하고 있었다. 초절한 무위를 자랑하는 무시무시한 칼부림 속에서 연신 피보라가 일며 악마의 신음과도 같은 비명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상대를 죽여야 했다. 단지 그것 뿐이었다. 따라서 살인귀들의 난무와도 같은 그 치열한 혈전은 광장을 마침내 아비지옥으로 화하게 했다. 흥건하게 고였던 피가 내를 이루더니 광장의 중심부에 있는 인공 연못 속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그로 인해 연못의 물은 이미 시뻘겋게 변해 혈지(血池)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엽고운은 자못 비감에 젖어 중얼거렸다. "차라리 슬프구려! 이런 비극이 도래할 줄은 정말 몰랐소." ② 이때, 그의 시야에 팔황천마와 교전을 벌이고 있는 천갈부인 화옥향의 모습이 들어왔다. 숨막히는 접전이었으되 그들은 막상막하의 전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엽고운은 천갈부인을 보자 안색이 일변했다. 얼마 전 그녀와 벌였던 육체의 향연과 더불어 강한 의혹이 떠올랐던 것이다. '분명 천갈부인은 이곳이 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일순 그의 안면이 무섭게 굳어졌다. '그렇다! 그녀는 일부러 영제를 몰고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그렇게 하여 신공을 죽이려는 계책이었겠지.' 엽고운은 새삼 전율이 이는 것을 금치 못했다. '실로 무서운 여인이다. 나와 관계를 맺고도 끝내 약혼자의 복수를 위해 이런 짓을 벌이다니!' 그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막아야 한다! 신, 영은 그렇다 치고 한낱 개인의 원한과 죄없는 오백 인의 생명을 맞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팔황천마의 무지막지한 공격이 그의 생각을 멈추게 했 다. 천갈부인은 연속 뒤로 밀리고 있었다. 펑! 퍼펑--!


안색이 핼쓱하게 질린 것으로 보아 그녀는 이미 크게 내상을 입은 듯 했다. 아니, 어쩌면 어느 순간부터인가 맞서기를 포기했는지도 몰랐다. 휙--! 팔황천마가 불현듯 지쳐 있는 그녀를 뛰어넘어 연못 속의 석대로 몸을 날렸다. 엽고운이 대경하여 외쳤다. "누님! 막으시오." 하지만 천갈부인 화옥향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힐끗 시선을 돌려 엽고운을 응시했다. 그 순간, 엽고운은 보았다. 천갈부인 화옥향��� 눈에 스르르 번지는 애틋한 기운을....... 그녀의 전음이 뒤를 이었다. (미안해요. 동생.......) 엽고운의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런! 바보같으니.......' 그러는 사이, 팔황천마는 마침내 석대 위에서 오색 찬란한 구슬을 집어들었다. "크하하하... 구슬을 얻었다--!" 환희에 찬 그의 대소에 중인들은 일제히 싸움을 멈추었다. 그들의 표정이 각각 희비로 엇갈릴 즈음, 정녕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기변이 일어났다. "으악!" 퍽! 팔황천마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가 들고 있던 구슬에서 녹색불꽃이 터지더니 눈깜빡할 사이에 그를 덮친 것이었다. 그의 육신은 삽시간에 재가 되고 말았다. "아! 저, 저럴 수가......."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했다. 쿠르르르륵....... 연못의 중심부에서 느닷없이 소용돌이가 이는 것이 아닌가? 꽝! 꽈르르-- 릉--! 뒤미처 중인들이 접한 것은 고막이 터질 듯한 폭발음이었다. 동시에 금마별부는 그 전체가 무너질 듯 진동을 일으켰다. 우르르-- 우르르-천장이, 석벽이, 바닥이 쩍쩍 금이 가며 와해되기 시작했다. 쿵! 꽈르르--! 폭발음과 굉음이 연이어 울리는 가운데 집채만한 바위덩이와 돌무더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엽고운은 탄식을 금치 못하는 한편, 급한 대로 우선 멍청히 서 있던 구양월미의 허리를 낚아채며 외쳤다. "구대선생! 탈출합시다." 휙--! 그가 애초에 들어왔던 곳, 즉 일지선옹이 기다리고 있는 석실을 향해 막 몸을 날리는 그 순간이었다. 우르르릉---! 쿵! 천장이 그대로 무너지며 통로가 봉쇄되고 말았다. 쏴아--! 콸콸콸....... 물벼락이 그들을 덮친 것도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이런!" 엽고운은 쏟아져내린 물로 인해 전신이 흠뻑 젖은 채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광장 안은 이미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다. 수백 명의 인원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엄청난 물과 돌더미의 세례를 피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서 바닥의 물은 급격히 불어나고 있었으며 돌더미에 깔려 죽은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그의 곁에 있던 구대선생의 모습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또한 광장 중심부에는 어마어마한 소용돌이가 일어 수십 명이 한꺼번에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지옥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엽고운은 곧바로 헤엄을 쳐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수공(水功)에 있어 가히 무적의 경지에 달해 있는 그는 물론 소용돌이에 휩쓸릴 염려 따위는 없었다. 다만 천장에서 계속 바윗덩이와 돌무더기가 떨어져 내려 수공을 펼치기가 그다지 만만치는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우르릉--! "윽!" 결국 엽고운도 오른쪽 어깨를 바위에 얻어맞고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지도 않았던 불행을 야기시켰다. 안고 있던 구양월미를 그만 놓쳐 버리고 만 것이었다. "오... 오빠! 아악--!" 구양월미의 비명은 그로 하여금 거의 이성을 잃게 했다. "월미! 가만 있거라. 움직이면 안된다." 엽고운은 크게 외치며 그녀가 있는 곳으로 급히 헤엄쳐 갔다. 촤아아--! 거센 물살이 구양월미를 휩쓸어 버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월미--!" 엽고운은 대경하는 한편 이를 악물고 물살을 갈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거대한 바위가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꽈르릉--! "아! 월미......." 엽고운의 창망한 부르짖음마저도 이내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굉음에 파묻히고 말았다. 우르르르르-금마별부가 통째로 들썩이는 것을 느끼며 그는 마침내 절망에 사로잡히는 것 외에 아무런 방도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아! 기어이.......' 엽고운은 경황 중에도 본능적으로 헤엄을 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간신히 자신이 들어왔던 통로에 이르렀다. 꽈꽝--! 일장을 내치니 막혔던 통로가 약간 벌어졌다. 엽고운은 재빨리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다행히도 그곳에는 아직 물이 별로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기대하는 일지선옹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중상을 입고 있었는데 어디로 간 것일까?' 쿠르르르릉--! 진동음은 그 사이에도 계속 끊이지 않았다. 아니, 점차 그 위력을 더해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군. 나라도 일단 이곳을 벗어날 밖에.......' 그는 못내 안타까움을 떨치지 못한 채 전력으로 내달렸다. 잠시 후. 엽고운이 당도한 곳은 구양월미의 방이었다. 그는 즉시 맞은 편의 석벽을 향해 쌍장을 뻗었다. 콰쾅!


그러나 석벽은 한 차례 진동을 보였을 뿐 끄덕도 하지 않았다. '자전혈겁륜(紫電血劫輪)을!' 엽고운은 부르짖음과 동시에 양손을 좌우로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양손을 따라 막강한 흡인력이 파생하여 가공할 기류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우우우웅--! 이어 그가 양손을 쭉 뻗자 두 개의 핏빛 륜(輪)이 날아갔다. 콰쾅! 콰르르릉--! 석벽은 그제서야 무너져 내렸다. "되었다!" 엽고운은 지체없이 붕괴된 그 틈으로 뛰어 들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그곳은 그가 처음 들어왔던 유일한 생문(生門)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 사이 세 개의 석벽을 부순 엽고운은 비로소 한 통로로 나오게 되었다. 다름 아닌 귀문(鬼門)이 있는 곳이었다. 우르르르-더욱 더 고조되어가는 진동음을 느끼며 엽고운은 귀문의 철벽을 노려보았다. 지금 그가 마주한 것은 후면이었지만 전면과 마찬가지로 십팔악마상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극일태양신공(極日太陽神功)!" 파파파팟--! 열여덟 갈래의 백광이 날아가 일시에 악마상의 입을 때렸다. 꽈르르르릉! 철벽은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엽고운의 전력을 다한 극일태양신공에 의해 마(魔)의 관문인 귀문은 마침내 세상에서 그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었다. 엽고운은 묘하게 뒤틀린 심정이 된 채 다시 몸을 날렸다. 멀리서 폭음이 연달아 울리며 통로가 마구 진동하고 있었다. 마정(魔井)으로 통하는 연못. 망설이고 뭐고 할 겨를이 없었다. 풍덩! 엽고운은 막바로 연못으로 뛰어들어 화살처럼 수중을 쏘아져 나갔다. 이어 그가 동굴을 벗어나 위로 상승하는 그 순간이었다. 꽈르르르릉--! 콰쾅!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폭음이 일었다. 그에 따라 물은 뒤집히고, 솟구쳐 오르며 혼돈에 이르는 대폭발을 일으켰다. "크윽!" 미친 듯한 물살이 엽고운의 육신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아아! 금마도가 기어코 폭발하고 마는구나.' 그는 고통도 잊은 채 내심 허탈하게 부르짖었다. 과연 금마도는 그 전체가 바다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콰르르르-- 쿠르르릉--! 노호한 물결은 수공도 통하지 않을 만큼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엽고운의 전신을 휘감아 왔다. 그 속에서 그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사력을 다해 치솟아 올랐다. 촤아아--! 마침내 엽고운이 수면을 가르며 불쑥 몸을 솟구쳤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발했다.


"아! 이, 이럴 수가......." 검푸른 바다 위.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오색찬란한 태양이 내리비치는 가운데 거대한 물기둥과 소용돌이, 그리고 파도만이 엉켜들고 있을 뿐 금마도는 그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우우......." 엽고운은 종내 극도의 허무감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이것이 끝인가?" 좌절이나 비탄을 좀체로 인정하지 않는 그로서도 이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엽고운은 눈을 들어 창천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푸른 하늘이 그의 심경을 더욱 막막함으로 몰고 갔다. 그런데 이때였다. 하늘의 한 귀퉁이에 불현듯 까만 점이 나타난 것은. 아울러 그 점은 엽고운을 향해 급속도로 확대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끄악! 끄아악--! "오오!" 엽고운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뜻밖에도 그것은 천붕(天鵬)이었다. "붕아!" 끄악! 반가움을 표하는 천붕의 몸짓에 엽고운은 그만 콧등이 시큰해지고 말았다. 영성이 통하는 이 친구(?)의 출현이야말로 그에게 있어 이 순간 다시 없는 위안이었다. 휙--! 엽고운은 몸을 날려 천붕의 등에 올라탔다. 휘이잉--! 천붕은 힘차게 날개를 저어 허공으로 높이 솟아올랐다. 엽고운은 천붕의 목을 껴안은 채 바다를 내려다 보았다. 그의 시선은 바다가 일으키는 소용돌이의 중심을 향하고 있었다. "붕아야! 너는 모르겠지? 바로 저곳에 금마별부가 있었단다." 엽고운은 이렇게 읊조리더니 곧 고통스러운 얼굴이 되어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발생했던 비극이 뇌리에 생생하게 되살아난 때문이었다. 끄악--! 그의 말을 받는 천붕의 울음도 왠지 비감을 품은 듯했다. 그들 일인일수(一人一獸)는 그렇게 창천 깊은 곳으로 사라져갔다. ③ 천봉진(天鳳鎭). 천년고도인 낙양(落陽)에서 십리 정도 떨어진 곳으로 풍치가 수려하며 특히 계림(桂林)이 우거진 평화로운 마을이다. 봄이었다. 그리고 중원의 가절인 봄의 기운은 이곳에도 온갖 향기와 훈풍을 몰고 왔다. <천봉장(天鳳莊).> 천봉진의 언덕 중턱에 아담한 한 채의 장원이 생겼다. 이 장원이 지어진 것은 불과 일년 전으로 이십이, 삼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서생이 홀로 살고 있었다. 이른바 선풍옥골(仙風玉骨)이랄까? 서생의 용모는 송옥이나 반안을 능가할 정도였다. 전신에서 고아한 기품이 풍겼으며 백옥같은 피부와 더불어 맑고 고요한 눈에서는 늘상 형언키 어려운 매력이 발산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특별한 것은 그의 두 손이었다. 여인의 손보다 오히려 섬세해 보이는 손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얼굴과 마찬가지로 희었고 손가락 마디는 마치 빙어같이 매끈했다. 아무튼 이 청년서생은 이곳에 온 지 일년 만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그 이유는 그가 천하에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박학다식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학문은 도시 끝이 없었으며 그림 솜씨 또한 가히 천하일품이었다. 화필을 쥐었다 하면 의례 멋진 산수화나 천년고목이 화선지 위에 실제의 그것처럼 생생히 살아나곤 했다. 서생은 악기도 못 다루는 것이 없었다. 금적(琴笛)을 주로 즐겼으나 그 밖에도 수십가지의 악기를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서생이 유명한 까닭은 또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무에게서나 느낄 수 없는 온화한 성품이었다. 언제나 웃는 얼굴이어서일까? 도통 화를 낼 줄 모르는 그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밝은 기분을 갖게 해 주었다. 따라서 천봉진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흠모하고 존경했다. 그가 얼마 전부터 마을의 소동들을 모아 서당을 열었는데 자식이 있는 부모들은 너도나도 자식을 보내 글을 배우게 했다. 천봉장 내. 울타리 대신 계림이 자연스럽게 둘러서 호위해 주는 듯 했다. 어디 그 뿐인가? 봄내음이 깃든 훈풍에 계목의 잎사귀가 일렁이며 운치마저 가져다 주고 있었다. 서당에서는 아이들의 글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따금씩 낭랑한 청년의 음성이 섞여 들려오기도 했는데 그것은 물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소리였다. 이 향기 그윽한 장원에 햇살이 기울었을 때였다. "자! 오늘은 모두 끝났다. 내일 또 오너라." 청년의 음성이 떨어지자 곧바로 아이들의 환성이 뒤를 이었다. "와아--!" 동시에 한 채의 건물, 즉 서당의 문이 활짝 열리더니 이십여 명의 소동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백의를 입고 있는 한 청년서생을 둘러싸고 있었다. "스승님! 그럼 내일 또 오겠습니다." 소동들은 다투듯 인사를 마치고는 다시 함성을 울리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것은 매우 활기찬 풍경이었다. 무겁고 딱딱한 책읽기에서 풀려난 아이들은 이제부터 아마도 천봉진의 앞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소류(小流)에서 고기를 잡고 놀 것이다. 청년서생은 빙그레 웃으며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개중에서 유독 한 아이만이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십이, 삼 세 가량의 청의소동으로써 언뜻 보기에도 매우 귀엽고 총명한 인상이었다. 청년서생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청(淸)아야, 너는 왜 가지 않느냐?" 청아라 불린 소동은 씩 웃었다. "스승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무슨......?" "아버님께서 백로춘화주(白露春花酒)가 잘 익었다고 전해 드리랬어요. 오늘 꼭 함께 한 잔 하시자고요." 청년서생은 소동의 말에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상관(上官) 어른께 너무 신세를 지는구나." 그러나 그는 막상 가겠다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동이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그의 승낙을 촉구했다. "오늘 꼭 오시는 거죠?" "글쎄다." 청년서생이 말을 얼버무리자 소동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에이 참! 오늘 안 오시면 제가 누나에게 혼쭐이 나요. 꼭 오시도록 간청하라고 제게......." 소동은 말하다 말고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것은 입 밖으로 꺼내 놓을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얼굴을 붉히더니 멋적은 듯 덧붙였다.


"어쨌든 꼭 오셔야 해요." 그리고 나서는 대답도 듣지 않고 마구 달려가 버렸다. "흐음." 청년서생은 다시금 만면에 미소를 떠올렸다. '귀여운 녀석.......' 상관지청(上官志淸). 이것이 바로 그 소동의 이름이었다. 그는 이십여 명의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총명한 아이로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영특함으로 인해 서생으로부터 각별히 관심을 끌고 있기도 했다. 상관지청은 신분상으로도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의 부친이 내노라 하는 무림의 명숙(名宿)인 것이었다. 금창인혼무적(金槍引混無敵) 상관태(上官泰). 이런 이름을 가진 소동의 부친은 무림 사대세가(四大世家) 중 하나인 금창신보(金槍神堡)의 보주였다. 또한 금창신보를 이르자면 무림에서 창술로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어쨌든 그가 청년서생을 만난 것은 반 년 전, 이곳에서였다. 그리고 그는 청년서생의 인품과 학문에 반해 자신의 외아들인 상관지청을 선뜻 맡기게 된 것이었다. 이후로도 금창인혼무적 상관태는 여러 가지로 호의를 전했다. 이 청년서생을 낙양에 있는 금창신보로 초청하기도 하고 자신이 직접 귀한 선물을 들고 찾아오기도 했다. 그런데 그에게는 한 명의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상관지연(上官志娟). 이것이 그녀의 이름이었으며 아름다운 미모와는 달리 매우 앙칼지고 화급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무림에서 그녀의 별호는 날수홍낭자(捺手紅娘子)였다. 상관지연은 애초 문약하다고 하여 청년서생을 무척이나 박대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 생각은 바뀌었고 요즘 들어서는 거의 의식적으로 접근을 시도하고 있었다. 청년서생. 그는 상관지청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이어 뒷짐을 진 채 천천히 자신의 서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수천 권에 이르는 고서(古書)들이 빽빽히 장서되어 있었다. 또한 그가 그린 수십 점의 서화가 벽마다 빈틈없이 걸려있어 특이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청년서생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묵묵히 창을 통해 푸른 하늘을 응시했다. 그의 맑은 눈빛이 점차 우울하게 변해갔다. '금마별부에서 살아 나온 지도 벌써 일 년이 지났구나.' 이어지는 중얼거림....... '그 동안 나는 이곳에 잠적한 채 줄곧 신공과 영제의 동태를 알아 보았다.' 그는 바로 엽고운(葉古雲)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문도 들은 바가 없다. 그 두 사람은 과연 어찌 되었을까?' 엽고운의 얼굴에는 짙은 의혹이 덮혔다. '그들은 이미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 절대고수(絶代高手)들이다. 당시 금마별부 내의 상황이 위급했다고는 하지만 그대로 죽었을 리는 없다.' 그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러나 살았다면 무슨 소문이라도 들려야 하지 않는가?' 엽고운은 침착한 시선으로 서실 안을 둘러보았다. '이제 이곳도 떠날 때가 되었다.' 그는 잠시 감회에 빠진 듯 미간에 감상적인 기운을 드리웠다. 그런 연후, 그는 품 속에 손을 집어 넣더니 세 가지의 각기 다른 물건을 꺼내 서탁에 올려 놓았다. 한 권의 책자, 두루마리, 그리고 세


폭의 그림이 담긴 족자였다. 바로 혈의음제(血衣音帝)의 혈천음경(血天音經), 무명무아신승(無名無我神僧)이 남긴 무아신보(無我神譜), 천외천유자의 암천유성도(暗天流星圖) 등이었던 것이다. 엽고운은 천고기학이 담긴 그 물건들을 내려다 보며 내심 이렇게 중얼거렸다. '지난 일 년 간 나는 이 안의 무공을 단지 몇 가지만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연성했다. 따라서 이제는 필요가 없어졌다.' 다음 순간, 그는 손을 슬쩍 들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세 가지 물건은 허공으로 삼 척 정도 떠오르더니 가루로 화해 버렸다. 스르르....... 엽고운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 광경을 응시했다. 이어 그는 볼 일을 다 마친 듯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지막으로 상관보주를 만나보고 떠나야겠다.' 엽고운. 그는 벌써부터 천봉장을 떠날 채비가 다 되어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그는 언제라도 훌쩍 떠날 수 있는 몸이었다. ④ 관도(官道). 이곳은 천봉진에서 낙양으로 통하는 대로였다. 한 백의서생이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그 위를 걷고 있었다.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이 관도에 뿌려지며 내내 옥골선풍인 그의 모습을 뒤쫓고 있었다. 엽고운이었다. 그런데 관도 저쪽 끝으로부터 뽀얗게 황사가 일어나더니 곧 말발굽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다섯 기의 인마(人馬)였다. 마상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삿갓을 깊숙히 눌러쓰고 있어 용모를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가 사뭇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맨 앞의 인물은 백의, 나머지 네 명은 흑의를 입고 있어 대조만큼은 뚜렷했다. 히히히힝--! 두두두두--! 다섯 기의 인마는 엽고운 곁을 번개같이 스쳐 지나갔다. 바로 그 짧은 찰나, 앞장선 백의의 삿갓괴인이 삿갓 사이로 엽고운을 힐끗 쳐다보았다. 엽고운 역시도 그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눈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왠지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으음, 저 가느다란 눈에서는 인정(人情)이 조금도 엿보이지 않는다. 흡사 독사의 눈을 대하는 것 같구나.' 그런데 이때, 엽고운은 백의괴인의 왼쪽 소매 속에서 무엇인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 빛을 발하는 것을 보았다. '으음?' 엽고운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뚝 멈추었다. 이미 다섯 기의 인마는 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간 후였다. '저 자의 손목에 끼워져 있는 것은 팔찌같은데......." 그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그것은 분명 몇 년 전 등격리 사막의 탑리지에서 마수광(馬水光)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동팔찌와 같은 모양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단지 저 팔찌의 색깔이 은색이라는 것뿐.' 엽고운의 이마에는 곧 주름살이 잡혔다. 그는 걸음을 옮기며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두두두두--! 등 뒤에서 다시금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뒤를 돌아본 엽고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뜻밖에도


다섯 기의 인마가 다시 되돌아 오고 있었던 것이다. '저들이 왜 다시 오는 걸까?' 그의 담담한 눈빛이 일순 번쩍 빛을 뿌려냈다. '일단 자리를 피하자. 두렵지는 않으나 귀찮은 일이 초래되는 것 또한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니까.' 엽고운의 신형은 이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근처의 숲속에 재빨리 몸을 감춘 것이었다. 잠시 후. 다섯 기의 인마는 그 자리에 당도하더니 급격히 멈추어섰다. 선두엔 선 백의인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그 짧은 순간에 놈이 사라져 버리다니....." 그러자 그의 뒤에 있던 흑의인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관세형(關世兄)! 무엇 때문에 닭잡을 힘조차 없는 책벌레 놈 따위에게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까?" 백의인은 그 말을 차갑게 일축시켰다. "마노삼(馬老三)!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내 추측은 틀림없다. 그 자는 보통 인물이 아니다." 마노삼은 금세 기가 꺾여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해도 우리와는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흐흐... 그렇지가 않다. 당금 무림에서 우리들의 정체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 자는 틀림없이 내 팔찌를 알아보는 눈치였다. 그러니 어찌 수상쩍게 여겨지지 않겠느냐?" "아!" 네 흑의인은 한결같이 놀라는 한편 감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백의인이 그들을 향해 다시 말했다. "오 년 전, 삼십육동환(三十六銅環)중 한 명인 삼십이호 마수광이 대막(大漠)의 북쪽 탑리지라는 부락에서 피살되었다." "으음......." "그 당시 우리의 정보에 의하면 천무독(天武獨)이 그곳을 지나 갔다고 했다." 백의인은 살기 띤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에 대해 아는 놈은 천하에서 천무독 밖에 없지 않느냐?" 마노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관세형께선 그 서생놈이 천무독과 관계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그것까지는... 너무 속단이 아닐까요?" "속단과 직감은 다르다. 나는 언제나 내 직감을 믿는다." 네 흑의인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아 수긍의 뜻을 표했다. 그 사이, 백의인은 말채찍을 세차게 휘둘렀다. "더 늦기 전에 놈을 추격해 보자!" 히히힝-- 두두두두두--! 다섯 필의 말은 네 발굽을 놓으며 무섭게 달려나갔다. 이윽고 그들이 일으켜 놓은 황사가 가라앉자 그 자리에는 엽고운의 모습이 나타났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였다. 하지만 엽고운의 얼굴은 약간 굳어져 있었다. 그는 멀리 치닫고 있는 다섯 기의 인마를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천무독과 동환(銅環), 이 사이에는 과연 어떤 관계가 있을까? 후후... 내가 되려 궁금하군. 한 번 따라가 보자.' 휘익--! 엽고운의 신형은 한 줄기 연기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남천신문의 절정경공인 잔영비마술이었다.


⑤ 세 필의 말(馬). 그것은 모두 보기 드문 천리준마들이었다. 엽고운이 사라진 관도 위에는 다시 이 세 필의 말이 나타났다. 우측은 연지마였고 가운데는 잡털 한 올 섞이지 않은 백마, 좌측 역시 명마인 추풍구였다. 마상에는 각각 세 소녀가 타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들이었다. 그 중 가운데는 이십 세가 될까말까 한 백의여인이었다. 고아하고도 차분한 분위기로 인해 우선 안정감이 느껴졌으며 거기에다 기품까지도 겸비한 미인이었다. 우측의 새빨간 연지마 위에는 타는 듯 붉은 홍의의 여인이 타고 있었다. 나이는 십팔구 세 가량 되어 보였고 무척이나 생기발랄한 인상이었다. 더구나 몸에 찰싹 들러붙은 홍의는 물찬 제비같은 날렵함과 더불어 요염한 몸매의 선을 그대로 드러내어 그녀가 몹시 대담한 성격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얼굴은 백의여인에 못지않은 미모였는데 눈끝이 약간 치켜올라가고 입술이 통통하여 오만하면서도 매우 육감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좌측은 십팔 세 정도의 청의소녀로 두 여인과는 또 다른 인상이었다. 귀엽고 앳되 보여서인지 커다랗고 지순한 눈망울은 작은 사건만 있어도 금세 눈물을 뚝뚝 떨굴 것만 같았다. 이 미녀들은 아마도 지금껏 함께 사냥을 한 모양이었다. 세 필의 말에는 각기 상당수의 야조(野鳥), 그리고 사슴 등의 짐승들이 묶여 있었다. 특히 연지마에 매달린 짐승의 숫자는 개중 압도적이었다. 더구나 연지마의 양 옆구리에는 두 자루의 긴 금창(金槍)이 걸려 있어 홍의소녀의 기상이 어떠한지를 여실히 입증해 주고 있었다. 세 명의 여인은 즐거운 듯 연신 담소하며 말을 몰고 있었다. 그런데 이 방면에서도 역시 홍의소녀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성격 또한 셋 중 가장 활달한 것 같았다. 문득 청의소녀가 그녀에게 물었다. "참! 상관(上官)언니, 대체 오늘 소개시켜 주겠다는 분은 어떤 분이죠? 언니가 하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와서인지 궁금해 죽겠어요." 상관이란 성을 가진 홍의소녀는 양뺨에 은근히 홍조를 드리웠다. 그러나 흑진주같은 그녀의 눈에서는 이채가 반짝였다. "호호... 그 분은 정말 멋진 분이야. 온화하고 부드럽고, 또 모르는 것이 없으며 천하에서 가장 잘 생긴 분이기도 하지."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백의소녀가 가볍게 웃었다. "호호호...... 대체 우리 연매(娟妹)로 하여금 저토록 반하게 만든 사람이 누구일까? 정말이지 상상이 가지 않는군." 청의소녀는 갑자기 배시시 웃더니 이렇게 물었다. "상관언니, 혹시 천화장의 소장주인 금화공자(金華公子) 제갈진성(諸葛進星)이 아니에요?" 홍의소녀는 대뜸 목청을 높여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 용매가 과연 무슨 생각으로 그 자의 이름을 꺼냈는지는 모르지만 아니야. 그 분은 차원이 달라." 그녀는 안면 가득 신비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 분은 무림인이 아니야." "네?" 청의소녀는 물론 백의소녀까지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림인이 아니라고요?" 청의소녀는 이렇게 물어놓고 내심 중얼거렸다. '아름답지만 눈이 높고 사납기로 소문이 나 일명 독한 꽃이라 불리우는 날수홍낭자가 아닌가? 그런데


어찌 무림인도 아닌 자에게 저렇듯 마음을 다 빼앗길 수가 있을까?' 그녀의 의구심은 절대 무리가 아니었다. 이름하여 날수홍낭자 상관지연, 이 홍의소녀가 바로 금창신보의 금지옥엽이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가 지금 꿈꾸는 듯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 분은 무공을 제외하고는 못 하는 것이 없으신 분이야." "풋!" 백의소녀가 웃음을 터뜨려 놓고는 민망한 듯 덧붙였다. "정녕 날수홍낭자답지 않은 얘기구나?" 상관지연은 얼굴을 붉히며 샐쭉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언니는 참!" "호호호... 그건 정말로 그래요. 그간 수많은 미공자와 젊은 협객들의 청혼도 마다한 상관언니가 아닌가요? 그런데 한낱 백면서생에게 푹 빠지다니 사건도 보통 사건이 아니죠." "용매, 너......!" "호호호......." 두 소녀가 악의없이 웃어제끼자 상관지연도 마침내는 그 웃음 속에 가담하고 말았다. 이어 그녀들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명랑하게 재잘거리며 말에 속도를 가했다. 그런데 이때였다. 맞은 편으로부터 다섯 필의 말이 먼지를 일으키며 무서운 기세로 달려왔다. 두두두두두--! 세 소녀는 모두 움찔했다. 하지만 상관지연의 급한 성격이 이를 얌전히 참아낼 리 만무였다. 그녀는 대뜸 눈썹을 치켜올리며 싸늘하게 내뱉았다. "무례한 자들 같으니! 관도상에서 사람이 마주 오는데 저렇게 말을 거칠게 몰다니......." 백의소녀의 고운 눈은 다섯필의 말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으음, 말을 모는 솜씨가 대단하구나. 대체 저들은 누구일까?' 히히히히힝--! 다섯 필의 말은 세 여인의 앞에서 발굽을 치켜올리며 뚝 멎었다. 타고 있는 인물들은 예의 죽립을 눌러쓴 괴인들이었다. 그 바람에 온통 먼지를 뒤집어쓰게 된 상관지연은 울화가 치밀어올라 고함부터 터져 나오려 했다. 그러자 백의소녀가 재빨리 그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연매, 가만히 있어 봐.) 상관지연은 화를 눌러 참느라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다섯 명의 괴인 중 한 흑의인이 그녀들을 향해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 자는 바로 마노삼이었다. "실례하겠소. 낭자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다만 한 가지를 묻기 위해서요." 말 자체는 제법 예를 갖추고 있었으나 그의 태도에서는 미안해 하거나 공손한 기색이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상관지연의 인내가 기어이 한계를 드러냈다. "흥! 심문이 따로 없군." 그러나 다섯 괴인은 그녀의 말에 일체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마노삼이 다시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미 우리는 사과를 드렸소." 그들의 응대는 상관지연을 더욱 화나게 했다. "사과? 본 소저는 그런 것을 받은 기억이 없는데?" 그 말에 이제껏 가만히 있던 백의괴인이 천천히 삿갓을 들어올렸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고 눈은 뱀눈이었다. 그 눈에서는 차디찬 빛이 가늘게 흘러 나오고 있었다. "흐흐흐......." 그의 입에서 나직한 괴소가 흘러 나왔다. 그 음산한 기운에 세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오싹 떨어야


했다. 이윽고 백의괴인은 세 여인을 쓸어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곱게 물을 때 대답해 주는 것이 이로울 게요. 우리는 말을 자주 하는 것을 무척 싫어하오." 상관지연의 눈썹이 홱 치켜올라갔다. 그녀가 뭐라 입을 열려 하는 것을 백의소녀가 얼른 제지시켰다. "연매, 잠깐!" 이어 백의소녀는 특유의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말씀하세요. 무엇을 우리에게 물으려고 했나요?" 백의괴인은 관도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방금 전에 이곳으로 백의를 입은 서생이 지나갔는데, 혹시 그를 보지 못했소?" 상관지연이 참지 못하고 불쑥 끼어들었다. "봤다면?" 백의괴인의 뱀눈이 번쩍 빛을 뿜었다. "어느 쪽으로 갔소?" 그러자 상관지연은 느닷없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아가씨는 네가 어느 백의청년을 말하는지 모르겠다." "뭐, 뭣이?" 백의괴���의 냉막한 얼굴에는 일말의 의혹이 스쳐갔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상관지연의 말인즉 이러했다. "아까 우리는 세 명의 백의서생을 봤다. 그 중 한 명은 꼽추였고, 또 한 명은 곰보였으며, 나머지 한 명은 언챙이였는데?" 이쯤 되자 청의소녀는 물론 신중을 기하려던 백의소녀까지도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백의괴인의 안면에는 즉시 살기가 떠올랐다. 하지만 정작 발작을 한 것은 그가 아니라 흑의인 중 한 명인 마노삼이었다. "이... 이 하늘이 얼마나 높은 줄도 모르는 계집년!" 버럭 외친 그는 일단 백의괴인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관세형! 제가 저 계집년의 껍데기를 벗겨 놓겠습니다. 그래야 만 바른 말이 나올 것 같습니다." 백의괴인이 미처 뭐라 대답하기도 전, 상관지연이 먼저 냉랭하게 코웃음쳤다. "흥! 네가 감히 나, 날수홍낭자를 말이냐?" 그 말에 마노삼은 순간적으로 움찔 했다. "네가 정녕 날수홍낭자 상관지연이냐?" 상관지연은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그렇다면? 호호... 어디 더 놀라게 해 줄까?" 이어 그녀는 백의소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분은 무림 사대세가의 하나인 황룡무성보(黃龍武聖堡)의 무남독녀이신 옥적선음녀(玉笛仙音女) 도백향(陶白香)이시다." 상관지연은 청의소녀도 빼놓지 않았다. "에또, 이 분 여협은 아미(峨嵋)의 여제자로 아미용녀(峨嵋龍女) 주화용(朱花蓉)이라 한다." 백의괴인은 안색이 묘하게 변하더니 중얼거렸다. "이제 보니 명성이 쟁쟁한 중원삼화(中源三花)가 다 모였군." 하지만 곧 그는 이빨 사이로 다시금 나직한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 안되었다만 너희 세 계집들이 오늘만은 사람을 잘못 만났다." 백의괴인은 말을 마치자 즉시 흑의인들을 돌아다 보았다. "마노이, 마노삼! 저 계집들을 잡아라. 꺾고 뽑기 전에는 절대 말을 듣지 않을 것 같구나." 두 명의 흑의인이 음침하게 웃으며 마상에서 신형을 날렸다.


스슷--! 그들은 앉은 자세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으며 그대로 지면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제 13 장·여인(女人)들 ① 세 소녀는 모두 안색이 일변했다. '역시 한 가닥 하는 자들이었구나!' 백의괴인의 스산한 외침이 그 뒤를 이었다. "마노이, 마노삼! 시간이 없다. 어서 그 계집들을 잡아라." 마노삼이 괴소를 흘리며 다가왔다. "흐흐흐... 계집년들, 관세형의 말을 들었느냐? 순순히 굴복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그러나 상관지연은 턱을 치켜들며 앞으로 나섰다. "흥! 어림도 없는 소리다. 이 날수홍낭자가 그렇게 호락호락할 줄 알았느냐?" 마노삼은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러나 기억해 두어라. 나는 미녀를 아낄 줄 모르니까." 쉬익--! 그는 즉각 양손을 갈쿠리처럼 구부려 상관지연의 젖가슴을 움켜쥐어갔다. "이런 비열한!" 상관지연은 분노하면서도 교수를 틀어 피하는 한편, 신속하게 금나수법을 사오 초나 펼쳐냈다. 과연 명가(名家)의 기예였다. 마노삼의 대응 또한 이에 못지 않았다. 휘휙-- 파팍--! 두 사람은 순식간에 몇 번씩이나 위치를 바꿔가며 숨막히는 접전을 벌였다. '보기보다 대단한 놈이로구나!' '과연 듣던 대로 제법 손을 놀릴 줄 아는 계집이다!' 상관지연과 마노삼은 각기 그런 생각을 했다. 어느덧 이십여 초가 물 흐르듯 지나갔으나 아무도 선기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백의괴인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마노삼, 시간이 없다지 않았느냐? 그만 해치워라." "넷!" 대답과 동시에 마노삼은 오른팔을 쭉 뻗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팔목에 감겨 있던 동환이 중인환시리에 노출되는 순간이었다. 쨍--! 금속성과 함께 그의 동환은 한 자루의 예리한 검으로 변했다.검신이 길고 뾰족하며 폭이 넓은 괴형검(怪形劍)이었다. "아니!" 상관지연이 놀란 듯 짧은 외침을 토해냈다. "흐흐... 계집년, 이제부터 본때를 보여주마." 쐐애액--! 실로 신속하고도 독랄한 검법이었다. 일반의 그것과는 크게 틀려 초식의 변용을 전혀 알아볼 수 없는 괴검식이었다. "악!" 일순 상관지연의 옷소매가 싹뚝 잘려 나갔다. 사오 초가 지나는 동안 그녀는 단 한 수도 반격하지 못하고 계속 뒤로 밀리고 있었다.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흡사 그물과도 같은 검막이 그녀의 전신을 뒤덮곤 했다.


옥적선음녀 도백향과 아미용녀 주화용이 손에 땀을 쥔 채 관전하고 있었다. 상관지연의 평소 실력을 잘 알고 있는 이 두 여인으로서는 그녀의 위기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그러던 한 순간, 상관지연은 교수를 살짝 틀어 뒤로 일 장 가량 날아갔다. 물론 의도적인 후퇴였다. 이와 동시에 그녀는 연지마의 옆구리에 꽂혀있던 두 자루의 금창(金槍)을 날쌔게 뽑아 들었다. 그것은 길이가 석 자쯤 되어보이는 쌍창이었다. 쉬식--! 쉭! 금창이 일단 상관지연의 수중에 들어가자 전세는 대번에 달라졌다. 주위가 온통 금광에 휩싸여 버린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녀는 마노삼을 향해 신랄무비하게 덤벼들었다. 차창--! 쨍쨍--! 창과 검이 어우러지며 연신 날카로운 음향과 경풍을 뿜어냈다. 바야흐로 두 남녀의 접전은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치열한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마노이가 전장(戰場)으로 뛰어들었다. 그 역시 오른팔의 동환을 검으로 변신시킨 상태였다. "흐흐... 네 년들도 어디 덤벼 봐라." 마노이는 옥적선음녀 도백향에게 연속 삼 검을 찔러갔다. 도백향도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듯 자신의 무기인 삼 척의 옥적(玉笛)을 든 채 그의 공격을 맞받았다. 차창! 땅--! 두 사람의 싸움도 이내 백중지세를 이루며 불이 붙었다. 관전하던 백의괴인이 또 한 번 눈살을 지푸렸다. 그는 장내의 상황이 좀체로 끝날 것 같지 않자 명을 내렸다. "마노일, 마노사! 너희들도 합세해라. 단, 일각을 넘기지 말고 해치워야 한다." "넷!" 결국 나머지 두 흑의인도 동환검을 발출하며 이 일전에 가세했다. 이렇게 되자 전황은 또 달라지고 말았다. 삼대 사의 대결이 되고 보니 무림삼화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더우기 생전 보도 듣도 못한 흑의인들의 괴검초는 그녀들을 더욱 위급한 지경으로 몰고 갔다. 개중에서도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아미용녀 주화용이었다. 일단 연속 십이 검을 공격해 그녀의 정신을 흐뜨려 놓은 마노일은 다시 왼손으로 슬며시 그녀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앗! 암습을......!" 주화용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터지는 찰나, 마노일의 동환검이 허공에서 급선회 하더니 정확히 그녀의 천돌혈을 찔러갔다. "아......." 주화용은 절망적인 신음을 발했다. 그녀의 몸은 완전히 중심을 잃어 버렸으며 진기도 이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끝장이로구나!' 그녀는 섬뜩한 검풍이 목에 와닿는 것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런데 이때였다. "으악!" 처절한 비명이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으음?" 주화용은 어리둥절하여 눈을 떴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 오른손이 피투성이가 된 채 비틀거리는 마노일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 있던 동환검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으으으......!" 마노일은 쥐어짜듯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냈다. 그 바람에 장내의 싸움은 그야말로 거짓말처럼 중단되었다.


"웬 놈이냐?" 백의괴인이 눈에서 살광을 폭사하며 외쳤다. "어떤 놈이 감히 방해하는 것이냐?" 그의 두번째 외침이 막 떨어졌을 때였다. 스스스....... 장내에 유령처럼 한 인영이 나타났다. 워낙 신출귀몰한 신법으로 인해 마치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는 백의에 백포를 두른 신비의 괴객이었다. 보이는 것이라야 백포 사이로 은은한 빛을 뿌려내는 눈뿐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가 풍겨내는 분위기는 기이하게도 위압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인들은 그가 나타나자 왠지 호흡이 약간 답답해질 만큼 위축감을 느끼게 되었다. '고수다!' 백의괴인을 비롯하여 흑의인들 모두가 안색을 굳혔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역시 우두머리인 백의괴인이었다. "너는 누구냐?" 신비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맑고 담담한 눈으로 백의괴인을 돌아보았다. 그 눈빛을 대한 순간, 백의괴인은 자신도 모르게 숨통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너는... 내 말을 못 들었느냐?" 어쩐지 자신감이 훨씬 줄어든 듯한 음성이었다. "들었소." 비로소 신비인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음성은 몹시도 듣기 거북한 탁성이었다. 강호 경험이 풍부한 백의괴인은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이 놈은 목소리를 감추는구나! 그렇다면......?' 이때, 신비객의 뒤쪽에 있던 마노삼과 마노사가 갑작스럽게 동환검을 휘두르며 그를 덮쳤다. "죽어라--!" 하지만 검광이 채 신비인에게 이르기도 전이었다. 그의 오른손이 아무렇게나 슬쩍 움직여졌다. 이에 따라 그의 수중에 들려진 동환검도 허공 중에 호선을 그렸다. "으악! 캑!" 마노삼과 마노사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그들의 모습은 실로 목불인견이었다. 양 쪽 눈이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마노삼, 그리고 목구멍에 동전만한 구멍이 뚫린 마노사....... 신비객의 검초는 정녕 빠르고도 독랄했다. 그 초식을 알아본 백의괴인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삼극천화홍(三極天花紅)!" 그는 처음으로 기세가 꺾인 채 뒤로 주춤 물러났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삼극천화홍을 사용하다니." "후후......." 신비인은 묘한 웃음을 흘리며 동환검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것은 바로 마노일로부터 탈취한 것이었다. 검신을 따라 핏방울이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이전에도 그는 똑같은 검, 똑같은 초식으로 한 사람을 죽인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그 자도 예의 검초를 알아보았다. 어쨌든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백의괴인은 이를 악물더니 곧 음산하게 내뱉았다. "이제야 네가 누군지 알았다. 천무독, 천하에서 그 초식을 그토록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너밖에 없다." 그 말에도 신비인은 여전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고요한 눈에서 보일 듯 말 듯한 출렁임이 잠깐


일었을 따름이었다. 살인 직후에 이같은 기도를 보일 수 있는 자는 드물다. 따라서 그런 모습은 오히려 타인에게 공포감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② 한편.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중원삼화는 어찌 처신해야 할지를 선뜻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녀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한 후, 일단은 뒤로 물러나 상황을 주시했다. 백의괴인은 느닷없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천무독! 이 배반자, 네가 영호공자(令弧公子)를 해치고도 삼환회(三環會)의 추적을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신비인은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백의괴인의 음험한 음성만이 독백인 양 계속 이어졌다. "회주께서는 이미 세 분의 금환(金環), 십팔 명의 동환(銅環) 고수를 풀어 너를 잡아들이도록 지시하셨다. 그러므로 아무리 발버둥쳐도 너는 조만간 처참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신비인의 침묵에 백의괴인은 급기야 살광을 내뿜으며 외쳤다. "마노일, 마노이! 저 놈을 처치해라." 그러나 두 흑의인은 막바로 덤벼들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마노사의 죽음 광경이 생생히 되살아난 때문이었다. 특히 마노일은 피범벅이 된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시간이 흐르자 그들 두 사람은 어느덧 신형을 움직여가고 있었다. 명령은 어디까지나 절대적인 것이므로. "후후......." 신비인의 낮은 웃음소리에 마노일과 마노삼은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그들의 몸은 이미 허공을 박차오르고 있었다. "죽어라!" 이와 때를 같이하여 백의괴인은 신비인의 배후를 공격했다. 차차창--! 그는 은환을 검으로 변신시켜 순식간에 삼십오 검을 펼쳤다. 신비인은 그 자리에 선 채 삼 인의 합공이 지척에 이르도록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들의 검이 자신의 몸과 꼭 한 치 정도 사이를 두게 되었을 때였다. 그의 신형이 눈부시도록 빠른 반응을 보였다. 츠츳--! 그야말로 섬전일순이었다. 그의 동환검이 먼저 마노일과 마노이를 향해 불을 뿜었다. "으악! 큭--!" 마노일과 마노이가 각기 눈과 목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바로 그 순간, 신비인의 왼손을 빙글 돌리더니 등 뒤의 백의괴인을 향해 다섯 손가락을 쫙 폈다. 슈슈슈슉---! 오색의 광채와 함께 다섯 줄기의 각기 다른 지풍이 화살처럼 뻗어 나갔다. 그것은 실로 찰나지간의 일이었다. "흐윽!" 백의괴인은 가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그는 수중의 은환검이 어이없게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아야만 했다. 바야흐로 백의괴인의 가슴에는 다섯 개의 매화 무늬가 뚫려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마노일, 마노이는 아예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백의괴인은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술에 취한 듯 마구 비틀거렸다. "크윽! 과... 과연....... 천... 무독... 대단......." 쿵!


무인으로서의 존경과 감탄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가슴의 피구멍을 손가락으로 막은 채 뒤로 고목처럼 넘어졌다. 그의 시체를 바라보는 신비인의 눈에 일점 그늘이 어렸다.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씁쓸한 회의 가운데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삼환회(三環會)라....... 대체 천형은 삼환회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신비인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 미녀, 즉 중원삼화가 만면에 경이의 빛을 띤 채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휙--! 신비인은 그녀들의 반대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여, 여보세요!" 도백향과 상관지연이 황급히 외쳤다. 그러나 신비인의 모습은 마치 환영인 듯 그녀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중원삼화는 그렇듯 신비막측한 신법에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상관지연은 그가 사라진 방향과 바닥에 깔린 다섯 구의 시체를 번갈아 바라보며 오싹 몸을 떨었다. "정말 끔찍할 정도로 고강한 무공을 지닌 사람이야." 나머지 두 미녀도 동감인 듯 안색을 굳혔다. 주화용이 백의괴인의 시체를 지켜보며 말했다. "천무독, 나는 한 번도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상관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찬가지야. 언제 무림에 그런 고수가 있었지?" 도백향이 탄식하더니 덧붙였다. "어서 돌아가자. 여기 더 있어 봤자 뭐 하겠어? 그러다가 또 공연히 시비에 말려들면 곤란해." "그래요. 향언니 말이 맞아요." 주화용의 말에 ���관지연도 눈살을 찌푸리며 응수했다. "쳇! 누가 아니야? 괜히 기분만 망쳤어." 세 미녀는 각자의 말에 올랐다. 그리고 그녀들은 곧 자욱한 황진을 일으키며 그 자리에서 멀어져 갔다. 관도에 남아있는 것은 이제 다섯 필의 주인 잃은 말과 시체들뿐이었다. 그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스슥--! 한 명의 인영이 기척도 없이 장내로 떨어져 내렸다. 흡사 유령을 방불케 하는 절묘한 신법이었다. 그 인영은 약 삼십오, 륙 세 정도의 나이에 구릿빛 얼굴을 가진 위인이었다. 전신에는 갈색 마의를, 허리춤에는 끝이 구부러진 한 자루의 흑색 도(刀)를 차고 있었다. 얼굴은 평범해 보였으나 긴 도상(刀傷)이 그어져 있었고 눈썹이 유난히 검었다. 눈에는 흰자위보다 검은 동공이 많았으며 전신으로부터 예리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타고난 살수(殺手)와도 같다고나 할까? 마의의 괴장한은 장내에 쓰러진 다섯 구의 시체를 눈으로 스윽 살폈다. '전부 단 한 수에 절명했다.' 읊조림과 더불어 그의 검은 동공이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대체 누가 있어 이런 가공할 실력을 지녔단 말인가?' 괴장한은 한 쪽에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져 있는 백의괴인의 시체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발끝으로 백의괴인의 가슴에 올려진 손을 치웠다. 그러자 다섯 개의 피구멍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오환매영지(五幻梅影指)......?" 괴장한은 의혹을 보이더니 서둘러 백의괴인의 옷을 벗겼다. 백의괴인은 옷속에 호신용 은갑(銀甲)을 입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두께가 두 치나 되는 그 은갑에도 구멍이 뚫려 있었다.


'지독하군. 백련정강과 천년어갑으로 된 이 호신은갑조차 이토록 무참하게 뚫려 버리다니.' 괴장한의 짙은 눈썹이 일순 무섭게 꿈틀거렸다. 죽은 줄 알았던 백의괴인이 몸을 약간 뒤척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으음?' 괴장한은 즉시 품 속에서 세 알의 홍색 단약을 꺼내더니 그의 입에 넣었다. 곧 두터운 손바닥이 그의 머리, 즉 천령개에 붙여졌다. 일반적으로 요상할 때는 명문(名門)이나 단전(丹田) 등에 내공을 주입하는 것이 상식이건만 그 수법은 실로 괴상했다. 잠시 후. "으으......." 백의괴인은 신음을 발하며 힘겹게 눈꺼풀을 열었다. 이어 그는 괴장한을 발견하고는 더듬더듬 물었다. "누... 누구......?" 괴장한은 억양이 전혀 없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네가 뿌린 십리향(十里香)을 맡고 왔다." 백의괴인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다... 당신은 그럼... 칠령(七靈) 중 누구......?" "초객." 괴장한의 대답은 실로 간단했다. 그러나 그 한 마디에 백의괴인은 안면을 통해 격동을 보였다. 반면에 스스로를 초객이라 밝힌 괴장한의 음성에는 일체의 동요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너는 무슨 일로 십리향을 썼느냐?" "그... 그건... 천무독이......." "천무독이라고 했느냐? 지금?" 초객의 안색이 처음으로 크게 일렁였다. "놈은 지금 어디 있느냐?" 추궁에 가까운 그의 물음에 백의괴인은 고통스러운 듯 간신히 말을 토해냈다. "나도... 모르겠....... 끄으......." 그의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눈동자가 희미하게 풀리는 것으로 미루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는 억지로 눈을 치뜨며 물었다. "나... 나는... 가망이 없겠소......?" "그렇다." 초객의 대답은 여전히 무감동, 그 자체였다. 백의괴인은 입가에 허탈한 미소를 매달았다. "역시......." 초객이 무뚝뚝하게 잘라 말했다. "네 복수는 내가 해 주겠다. 안심해라." 백의괴인은 그 말에 언뜻 감격스러운 표정을 떠올렸다. "고... 고맙... 믿겠....... 우욱!" 그는 한 모금의 피를 토하더니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삽시지간, 그의 눈이 툭 튀어나오고 혈맥은 무섭게 불거졌다. "괴롭소....... 이 미칠 듯한... 고통... 아득함이......." 백의괴인은 손을 내저으며 애원에 가까운 어조로 말했다. "나의... 목숨을... 끊어 주... 단숨에......." 초객은 대답 대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손은 마치 습관인 양 허리에 찬 묵도(墨刀)로 향해졌다. 츠츳! 번뜩 섬광이 일었다. 그뿐이었다. 그의 묵도가 언제 뽑혀졌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니, 그것은


처음부터 아예 뽑혀지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소리없이 잘려진 백의괴인의 목은 벌써 몸체에서 이탈하여 저만치 데굴데굴 굴러가고 있었다. 피도 나오지 않았다. 초객은 시체를 흘깃 보더니 으스스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천무독, 네 놈을 쫓은 지 벌써 팔 년째다. 이제 네 몸에는 십리향이 묻어 있다. 그 향기는 앞으로 백 일 동안 사라지지 않는다. 내 그 전에 반드시 네 놈을 잡고 말 것이다." 다음 순간, 음산한 괴소는 벌써 십 장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흐흐흐흐......." 초객은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③ 낙양(落陽). 이 고도(古都)에도 석양이 지고 있었다. 불타던 태양은 그 잔광만을 남긴 채 쓸쓸하게 낙양을 비추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성루에 비친 잔양은 일면 처량하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성내는 전혀 달랐다. 그 시각이 되자 오히려 활기를 띄기 시작한 것이었다. 엽고운. 그는 마침내 낙양 성내에 들어섰다. 번화한 시가의 풍경이 엽고운에게는 약간 어리둥절하게 다가왔다. 한참을 걷는 동안 그가 느낀 것은 시장기였다. '우선 식사나 하고 금창보를 찾아 가야겠구나.' 엽고운은 이렇게 결정하고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아강춘(餓江春).> 붉은 궁등에 쓰인 글씨가 때마침 그의 마음을 잡아 끌었다. '아강춘....... 좋은 이름이군.' 엽고운은 지체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아강춘은 주루(酒樓)와 객잔(客殘)을 겸한 곳이었다. 이층 누각에는 늘상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구수한 음식냄새와 화기애애한 말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엽고운은 아강춘의 이층으로 올랐다. 계단 위에 서 있던 점원이 재빨리 달려와 그를 맞았다. "어서 옵쇼." 엽고운은 빙그레 웃으며 창가의 한 자리를 잡아 앉았다. 주루 안에는 약 이십여 개의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대부분 차있었다. 점원이 다가오자 그는 간단히 주문했다. "영화로(永和露) 한 병과 소채를 가져오게." "네, 네." 점원은 부리나케 물러갔다. 오랫동안 간단한 식사에 익숙해져 있는 엽고운이었다. 그래서 그는 늘상 소채 종류면 만족했다. 이는 남해의 남령도에서 굳어진 습관이었다. 잠시 후. 탁자에 그가 주문한 음식이 날라져 왔다. 영화로는 낙양 일대에서 나는 술로써 별로 독하지 않고 담백했다. 엽고운은 자음자작(自飮自酌)하며 조용히 음식을 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는 언뜻 의아스러움을 느꼈다. '웬 무림인들이 이렇게 많이 몰려 있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주루 안의 손님들은 대부분 무기를 휴대한 무림인들이었다. 그들의 호탕한 음성과 웃음으로 인해 주루 안은 강호인들 특유의 떠들썩함이 감돌고 있었다.


엽고운은 기이한 기분이 들어 새삼 좌중을 살펴보았다. 무림인들은 거개가 기분이 몹시 좋아 보였으며 각기 기행담이나 무용담을 주고 받으며 입에서 침을 튀겨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엽고운의 눈은 구석진 자리로 향해졌다. 그곳에서는 몹시 우스꽝스럽게 생긴 봉두난발의 거지노인이 마치 아귀처럼 음식을 먹어대고 있었다. 누덕누덕 기운 더러운 옷, 주먹만한 딸기코, 퉁방울 눈, 어디 그뿐인가? 안면은 잔뜩 얽어 있었다. 거지노인의 이렇듯 추한 얼굴은 가히 구역질을 유발시킬 정도였다. 이에 반해 그의 눈만은 달랐다. 뿜어져 나오는 눈빛이 유독 맑고 깨끗해 오히려 생경한 느낌을 전하고 있었다. 물론 몸에서 고약한 악취가 풍겨 그 근처에는 손님이 얼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림인들이건 점원이건 누구도 감히 뭐라 하지 못했다. 그것은 거지노인이 탁자에 주먹만한 금덩이 한 개를 올려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엽고운은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후후... 자신을 괄시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방법이 주효했군.' 그는 거지노인이 먹는 음식에 시선을 주었다. 만두, 국수, 나물, 두부 등 한결같이 싸구려 음식들뿐이었다. 거지노인은 그 음식들을 걸신이라도 들린 양 마구 입 속에다 쑤셔넣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음식을 전부 먹어치운 그는 손가락을 쭉쭉 빨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거지노인의 시선이 어느 순간 엽고운의 시선과 정통으로 부딪쳤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는 대뜸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흐음, 쓸만한 재목이군. 오늘 이 거지가 횡재를 했다. 저런 놈을 발견하다니.' 엽고운이 거지노인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것은 아무 사심 없는, 문자 그대로의 호감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외양이란 인간을 판단하는 가치기준과 전혀 무관했다. 거지노인의 눈에서 이채가 번뜩인 것은 그때였다. '허! 저 놈이 먼저 이 거지에게 추파를 보낸다......?' 한편. 주루의 계단으로 한 명의 인물이 올라섰다. 십팔, 구 세 가량의 준수한 황의소년이었다. 얼굴은 분을 바른 듯 희었으며 눈이 또렷했다. 체구는 약간 가늘었으나 전신에서 정명(正明)하고도 산뜻한 매력이 풍겨 중인들의 시선을 끌었다. 황의소년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엽고운을 발견하고는 시선을 멈추었다. 이어 그는 엽고운에게로 다가와 정중히 포권했다. "실례하오이다. 자리가 마땅치 않아 그러니 합석해도 되겠소이까?" 낭랑한 음성이었다. 엽고운은 한눈에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좋소. 앉으시오." 황의소년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감사하오이다. 소생 설무곡(雪武曲)이라 합니다." "엽고운이오." 황의소년, 즉 설무곡은 미소지었다. "아, 엽형이셨군요." 점원이 그들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공자님,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설무곡은 고개를 돌리더니 점잖게 입을 열었다. "음, 이곳에서 제일 비싸고 맛있는 음식이 무엇무엇이냐?" 점원은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이내 정신없이 읊어댔다. "네, 네. 연자홍어탕(蓮子紅魚湯)에 청수계육반(淸水鷄肉飯), 용봉향근육(龍鳳香筋肉). 게다가 구운 오리를 저며 만든 요리, 녹말가루를 쳐서 부친 녹자반향(綠子飯香), 차게 만든 소면(素麵), 홍상돈육포(紅桑豚肉包). 에 또......."


한없이 이어질 것 같은 그 넋두리를 황의소년이 끊었다. "그만! 알았으니 그것들을 모두 가져와라." 점원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넷?"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반문했다. "지,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설무곡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려 보였다. "네가 말한 음식들을 전부 가져오라고 했다." 점원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비싼 것도 그렇지만 그 많은 요리를 이 공자분이 어찌 다 먹는단 말인가? 체구는 조그마한 분이......?' 설무곡의 담담한 음성이 다시 그의 귓전을 울렸다. "어서!" "네? 네......." 점원은 놀라는 이면에 희색이 만면하여 주방으로 사라졌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엽고운은 다소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상하게 여겨진들 초면에 어쩌겠는가? 그저 묵묵히 바라보는 것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반면에 당사자인 설무곡은 정작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이 구석자리의 거지노인을 보는 순간 미미한 출렁임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곧 쉽게 본래의 표정을 회복하기도 했다. 한참이 지나자 설무곡이 주문한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이 무럭무럭 나며 향기가 진동하는 최상의 요리들이 세 명의 점원에 의해 줄지어 날라져 왔다. 탁자 위는 곧 호화로운 요리들로 인해 빈틈이 없을 정도로 가득 차고 말았다. 그 바람에 엽고운의 조촐한 식사는 한 구석으로 밀려나 버렸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어 쓴웃음을 지었다. '무색해지는 방법도 여러 가지군.' 이와 동시에 엽고운은 한 가지 의문에 봉착했다. '이 친구가 항아리같은 배를 가지지 않고서야 설마하니 이 많은 음식을 다 먹어치울 수 있을까?' 설무곡이 젓가락을 들며 자못 친근하게 권해왔다. "엽형께서도 함께 드시지요." "아니오. 나는 이미 배부르게 먹었소." 엽고운은 사양한 뒤 설무곡의 다음 행동을 기대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이윽고 설무곡은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엽고운의 시선도 보이지 않게 그를 따라 움직였다. 의문은 금세 풀렸다. 과연 설무곡의 뱃속은 항아리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한 가지 요리에 한 번 밖에 젓가락질을 하지 않았다. 그것도 아주 조금씩만 떼어 맛을 보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어 십여 가지의 값비싼 요리는 설무곡의 뱃속에 골고루 들어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먹은 양은 고작해야 반접시나 될까말까 했다. 설무곡은 젓가락을 놓더니 점원을 손짓해 불렀다. 점원이 달려오자 그는 담담히 말했다. "다 먹었으니 이제 치워라." "넷?" 점원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는 납득이 가지 않는 듯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는 요리와 설무곡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엽고운의 눈살이 가볍게 찌푸러진 것도 그때였다. '쯧! 음식물의 필요성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친구로군. 이런 식으로 낭비를 하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니.' 그는 결국 황의소년을 두고 이런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혹시 기회가 닿으면 주의를 주어야겠다.' 숱한 고난을 통해 현재를 이룬 엽고운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사고(思考)는 늘상 검박함과 겸허함에서 멀어질래야 멀어질 수가 없었다. 아니, 무엇보다 그의 인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느닷없이 걸걸한 탁성이 들려와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어이구! 이 아까운 음식을 버리다니, 이 놈들아! 버릴려면 차라리 나나 줘라." 그 음성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늙은 거지였다. 설무곡의 눈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하지만 그는 진작부터 늙은 거지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점원이 난처해져 가지고는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깝쇼? 공자님." 늙은 거지는 냅다 고함을 쳤다. "이 놈아! 만약 그 음식을 나에게 주면 내 지성을 다해 네 짝을 맺게 해 주겠다."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지 그 대상은 명확치 않았다. 단지 기이한 것은 그 순간에 설무곡의 얼굴이 붉어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난감한듯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저 분께 갖다 드려라." "네, 알겠습니다." 점원은 곧 요리들을 거지의 탁자로 날랐다. 늙은 거지는 입이 귀밑까지 쭉 찢어졌다. "헤헤헤... 역시 설(雪)노귀는 기가 막힌 자식을 두었단 ���야." 그는 닥치는 대로 입에다 음식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의 배야말로 커다란 항아리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십여가지가 넘는 요리는 순식간에 깨끗이 비워지고 말았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엽고운의 표정이 정녕 묘했다. 그는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매단 채 줄곧 거지노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눈빛 또한 매우 부드러웠다. 설무곡이 그를 향해 물었다. "엽형께서도 상관(上官) 보주의 회갑을 축하하러 오셨습니까?" '회갑?' 엽고운은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짚히는 바가 있었다. '어쩐지! 청아가 그렇게 오라고 간청하더니.......' 그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소." 그에 반해 설무곡은 꽤 기쁜 표정이었다. "마침 잘 됐군요, 소제 역시 그렇습니다. 또한 강호에는 초출이라 무척 적적하던 참이었는데 엽형께서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엽고운은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자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런데 그것을 승낙으로 알았는지 설무곡은 대뜸 앞자리에 놓인 술잔을 들어올렸다. "자! 엽형,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소제의 술 한 잔 받으십시오." 엽고운은 마지못해 잔을 들었다. "고맙소." 그는 술잔을 비운 다음 다시 한 잔을 따라 내밀었다. "설형도 한 잔 하시오." 설무곡도 망설이지 않고 술을 받아 마셨다. "콜록! 콜록......." 사래가 든 것일까? 그는 갑자기 기침을 해댔다. 그러자 얼굴이 달아오르더니 아예 눈까지 빨개지는 것이었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술을 처음 마시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엽고운은 내심 기가 막혀 혀를 찼다. '쯧! 이래저래 나와는 영판 다른 세계의 사람인가 보군. 식성도 그런데다가 술까지 제대로 못 마시니.......' 그는 골치가 아파오는 것 같아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동행을 관두자고 할까? 필경 귀하게 자란 모양인데 나와 같이 다니면 서로 불편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엽고운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설무곡은 열심이었다. 술잔이 몇 순배 더 오갔으나 더 이상은 기침도 하지 않았으며 얼굴이 붉어지는 자연 현상을 제외하고는 취기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④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대화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무르익어갔다. 아강춘의 밖은 이미 어둠이었다. 그 화기애매(?)한 분위기에서 설무곡이 물었다. "실례지만 엽형께서는 사문(師門)이 어디십니까?" 엽고운은 빙긋 웃으며 담담히 말했다. "설형이 잘못 보았소. 나는 무림인이 아니오." "무림인이 아니라고요?" 설무곡은 의혹을 보이더니 그 뒤로는 약간의 실망을 내비쳤다. 물론 그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가 중단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화제가 자연스럽게 문(文) 쪽으로 기울었을 따름이었다. 설무곡도 나름대로 지니고 있던 학문을 두루 펼쳐냈다. 그러나 그는 담론이 깊어질수록 엽고운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엽고운이라는 이 서생은 무불통지(無不通知), 도대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설무곡은 내심 자신의 학문적 한계를 인정하는 한편 아쉬움을 느꼈다. '정말 아깝구나! 이 분이 무공을 익혔다면 금상첨화일텐데.' 설무곡은 다시 술잔을 비우더니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이번에 상관노보주가 회갑을 이용해 무림의 영웅들을 초청하는 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혹시 그것을 아십니까?" 엽고운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그 분에게는 꽃같은 딸이 있습니다. 중원삼화(中原三花)에 속한 미녀입니다. 날수홍낭자(捺手紅娘子) 상관지연이라고 하는데 노보주는 이 기회에 바로 사윗감을 얻으려는 것이지요." 엽고운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싱긋 웃었다. 설무곡이 그에게 한 쪽 눈을 찡긋하더니 말했다. "날수홍낭자는 미녀인 것은 틀림없으나 성격이 앙칼지고 수단이 맵습니다. 그래서 평소 웬만한 남자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지요. 그러나 그녀도 엽형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지 모르겠습니다. 방심(放心)이 마구 흔들리고 말지도요. 하하......." 엽고운은 고소를 지었다. "후후... 설형께서도 농담을 즐기시오?" 그는 술잔을 들어 쭈욱 들이켰다. 이때, 주루 위로 다시 한 인물이 올라왔다. 깡마른 얼굴에 밀랍같은 피부를 가진 노인이었다. 칠순 가량 되어 보였으나 눈에서 청광(靑光)이 무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 주루 안은 즉시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회색옷을 걸친 그 노괴의 전신에서 음산무비한 한기(寒氣)가 풍겼기 때문이었다. 회의노괴는 입술 꼬리를 말아 올리며 주루 안을 둘러보았다.


"흐흐흐......." 중인들 중 누구도 그 눈빛을 맞받지 못했다. 굳이 마주치지 않아도 벌써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얼어붙어 버렸으므로. 회의노괴는 구석자리에 앉아있는 거지노인에게서 시선을 뚝 멈추었다. 그의 눈에서 살광이 폭사되었다. "흐흐흐... 육지추신개(陸地醜神 ), 오랜만이다.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격이구나." 그 말에 거지노인, 즉 육지추신개는 놀란 빛을 띄웠다. "엉? 아직도 살아 있었느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겁먹은 투는 아니었다. 회의노괴가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스산하게 말을 이었다. "패을룡(貝乙龍), 이십 년 전의 일을 잊지는 않았겠지? 내 너를 본 이상 이대로 물러갈 수는 없다." 육지추신개 패을룡은 그런 협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태연자약이었다. 잔뜩 헝클어진 몰골로 탁자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느긋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회의노괴는 주위를 스윽 둘러 보더니 덧붙였다. "크흐흐... 네 놈도 배알이 있는 놈이라면 지금 즉시 도성 북쪽 십리 밖의 토지묘로 나와라. 기다리겠다. 흐흐흐......." 그는 섬뜩한 웃음을 뿌리며 돌아섰다. 그 순간, 그의 목에 걸려있던 은빛 사슬이 동작을 따라 휙 돌았다. 그러자 사슬 끝에 매달려 있는 주먹만한 인두(人頭)가 보였다. 그것은 눈, 코, 귀 등이 선명한 해골상이었다. 그 해골상을 본 누군가가 공포에 질린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저, 저것은 백골사령(白骨邪令)--!" "흐흐흐흐........" 회의노괴는 소리가 들린 곳을 힐끗 돌아보더니 즉시 주루 아래로 내려갔다. 그가 사라지자 얼어 붙었던 주루 내의 공기가 비로소 풀렸다. 육지추신개 패을룡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 상태로 그는 엽고운과 설무곡이 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패을룡은 설무곡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히쭉 웃었다. "꼬마야, 네 애비는 편안하시냐?" 설무곡은 웬일인지 기어들어가는 음성이 되어 대꾸했다. "무, 물론입니다." 패을룡은 이번에는 엽고운을 보더니 낄낄 웃었다. "애송아, 조심해라. 잘못하다간 크게 물린다." 엽고운은 밑도 끝도 없는 그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패을룡이 하마처럼 부른 배를 툭툭 두들기며 다시 말했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자. 아까 그 늙은 뼉다귀가 이 거지를 초청했지 않느냐? 가서 한바탕 소화를 시켜야지." 그는 사뭇 둔한 몸짓으로 등을 돌렸다. "꼬마야, 내일 금창에서 보자." 다음 순간, 신형을 흔들 하는가 싶더니 패을룡의 모습은 이미 그 자리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 기쾌무비한 신법에 엽고운은 내심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훌륭한 취팔선답파허도술(醉八仙踏坡虛渡術)이구나!' 취팔선답파허도술. 이는 개방 내에서도 벌써 백 년 전에 실전된 절정의 경공술이었다. 즉 취팔선답파보(醉八仙踏破步)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개방의 비전비기가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공력이 이갑자에는 이르러야 전개할 수 있으며 일단 전개하면 상대는 오리무중을 헤매듯


뿌연 인막(人幕)에 갇히게 되는 것이었다. 엽고운은 왠지 멍해져 있는 설무곡에게 또 물었다. "설형, 백골사령이란 것을 목에 걸고 있던 자는 누구요?" 설무곡은 멈칫하더니 곧 대답했다. "그는 백골사마(白骨邪魔)라는 흑도의 거마로서 흉악하고도 잔인무도한 자입니다. 나이가 백 세가 넘었는데 아마도 이십 년 전에 육지추신개에게 패했던 전력이 있나 봅니다." 그는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그 자가 어찌하여 다시 출도했는지는 모르지만 개방의 선대(先代) 장노이신 패노선배와는 결코 적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엽형께선 염려하지 마십시오." "으음." 엽고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백골사마의 눈빛이었다 '그 자의 눈에서는 청광이 흐르고 있었다. 분명 사도(邪道)의 괴공(怪功)을 익혔을 것이다.' 엽고운은 곧 머릿속을 비워 버렸다. '어쨌든 육지추신개는 강호의 노기인(老奇人)이니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다시 무심한 표정이 되어 계속 술을 마셨다. 설무곡. 그도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엽고운과 마찬가지로 술만을 들이킬 따름이었다. 마침내 설무곡은 꼭지가 돌았는지 자제력을 잃기 시작했다. 얼굴은 도화빛이요, 흑백이 선명하던 그의 눈은 완전히 풀어진 채 엽고운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 엽형! 소제는... 정말... 기쁩니다. 딸꾹! 엽형같은 벗을 만나... 지... 진정으로... 끄윽!" '이 친구, 잘 버티는가 싶더니 기어이 만취해 버렸군.' 엽고운은 절로 고소가 머금어졌다. "설형, 술은 이제 그만 마시......." 그는 중도에서 말을 끊어야 했다. 쿵! 설무곡이 급기야 이마를 탁자에 박고 만 것이었다. 엽고운은 입맛을 다시고는 점원을 불렀다. "방 하나만 준비하게. 이 친구와 들테니." "네, 네." 점원은 설무곡을 힐끗 쳐다보더니 안면을 잔뜩 구겼다. '한심한 공자 양반! 잘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겨우 그 정도 술에 곯아 떨어졌군.' 그는 고까운 듯 이렇게 읊조리고는 몸을 돌렸다. 객방(客房). 엽고운은 설무곡을 부축한 채 방으로 들어섰다. 그는 축 늘어진 설무곡의 몸을 침대 위에 눕혔다. "이 친구 때문에 시간이 너무 늦었군. 천상 금창보에 가는 일은 내일로 미루는 수 밖에 없겠구나." 엽고운은 고소를 지으며 침상 위에 퍼져 누워 있는 설무곡을 바라 보았다. 그는 손을 허우적거리며 잠꼬대까지 하고 있었다. "하... 한 잔, 더 합시다? 끄윽! 엽형... 끄으윽!" 그러다 설무곡은 그만 머리맡에 놓인 물병을 엎지르고 말았다. 덕분에 그는 물벼락을 맞아 얼굴과 가슴이 흠뻑 젖었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조차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엽고운의 미간이 가볍게 찌푸러들었다. "쯧! 대체 이 무슨 꼴인가? 곱상하게 생긴 위인이......." 설상가상으로 설무곡은 그 상태에서 다리를 쭉 뻗더니 곧바로 곯아 떨어졌다. 세상 모르고 잠이 들어버린 것이었다.


엽고운은 기가 막혀 어깨를 으쓱 했다. 그러나 젖은 설무곡의 옷으로 시선이 가자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기왕 잘 바에야 푹 자는 게 낫지, 저래서야 어디 축축해서 제대로 잘 수가 있나? 아무래도 겉옷을 벗겨야겠군.' 엽고운은 설무곡에게 다가가 옷을 벗겨 내렸다. 그런데 겉옷이 제거되자 그의 손은 더 이상 움직여지지 않았다. "으음?" 가슴 부분이 천으로 단단히 여며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엽고운은 짐작되는 바가 없지 않았으나 그 천을 풀러내기 시작했다. 일종의 확인 작업인 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웁!" 엽고운은 얼른 손을 떼며 뒤로 물러났다. 천을 끌러내자 불쑥 튀어나온 여인의 젖가슴이 그를 당혹에 이르게 한 것이었다. 백옥같이 뽀얀 살결을 지닌 통통한 젖가슴이 부끄러움도 없이 그의 시야에 담겼다. 그 위에 얹힌 연분홍빛 돌기도 마찬가지였다. 엽고운은 화끈해진 나머지 고개를 돌렸다. '역시 남장여인이었구나.' 그는 난감해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쩐다? 주루에서부터 알았었다면 최소한 이런 낭패를 겪지는 않았을텐데, 내가 너무 멍청했나 보군.' 일단은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러다 만일 공연한 오해의 소지로 비약된다면......?' 그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엽고운은 마침내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 수 없다! 귀찮아지지 않으려면 도로 천을 묶어 놓을 수밖에. 어차피 고의가 아니었으니 시치미라도 떼어 봐야겠지.' 엽고운은 다시 설무곡에게로 다가가 끌러진 천을 조심스럽게 묶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신중을 기하려 해도 그의 손끝은 자꾸만 봉긋한 젖가슴을 스쳤다. 이는 물론 엽고운의 손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의 얼굴은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쯧! 죄 짓고는 못 살겠군.' 결국 엽고운은 근 이 각이나 걸려서야 설무곡의 가슴을 묶고 원래대로 상의를 입혀놓을 수가 있었다. 다만 그는 워낙 경황 중이다 보니 평소와는 달리 한 가지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천을 뒤집어서 묶었다는, 매우 중대한 사실이었다. 제 14 장·금창신보(金槍神堡) ① "이제 겨우 되었군!" 엽고운은 설무곡을 침대에 똑바로 뉘인 다음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마에 흐르는 진땀을 훔쳐낸 뒤, 위에서 설무곡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약간 역용을 가하기는 했지만 뛰어난 미모였다. 전체적으로 갸름한 얼굴에 눈은 깊고 컸으며 눈썹이 반달형이었다. 게다가 콧날은 마늘을 모로 세운 듯했고 입술은 도톰했다. 그야말로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단지 역용술과 남장으로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엽고운은 마침내 스스로를 책(?)하기에 이르렀다. '후후... 내 실수로군. 이런 미인을 남자로 오인했으니.' 이어 그는 새삼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이제 와서 방을 새로 또 얻기도 그렇고, 꼼짝없이 오늘은 앉아서 자야겠구나.' 엽고운은 의자를 하나 당겨 앉고는 눈을 내리감았다. 내공 경지가 거의 극에 이르다 보니 자세 따위에 구애받지 않고도 그는얼마든지 잠을 잘 수가 있었다. 그런데 막 잠이 들려는 그 순간이었다. '응?' 그의 눈썹이 움찔 했다. '누군가 이리로 오고 있다!' 과연 한껏 곤두세워진 엽고운의 청각에 누군가가 객방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이 감지되었다. 그의 판단은 즉각적이었다. '발걸음이 불규칙하고 호흡이 가쁜 것으로 보아 상처를 입은 사람이 분명하구나.' 쿵! 바로 방문 밖이었다. 무엇인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린 것은. 엽고운은 전신에 내공을 일으킨 후 성큼성큼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짧게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엇!" 문 앞에 쓰러져 있는 자의 모습은 그가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전신이 온통 피투성이로써 정체를 알 수 없는 복면인이었다. 남삼을 입고 있었으며 ���면도 역시 남색이었다. "여보시오!" 엽고운이 급히 다가가 그를 흔들었다. "으음......." 복면인은 가느다란 숨결을 토해내긴 했으나 의식불명 상태였 다. 엽고운은 우선 그를 방 안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복면인은 가슴에 커다란 자색의 장인(掌印)이 찍혀 있었다. 그것도 정확히 명문혈에 찍혀 있어 더욱 치명적이었다. 엽고운은 의술과 독술에 관해서라면 이미 대가급 수준이었다. 따라서 그는 한눈에 상세를 알아보았다. '이것은 독장(毒掌)이다.' 엽고운의 눈살이 크게 찌푸러졌다. '지독하군. 더구나 이 자령나후독장(紫靈羅侯毒掌)의 독기가 심장까지 침투해 버렸으니....... 손을 쓰기엔 너무 늦었다.' 그는 탄식하며 복면인의 얼굴을 가린 복면을 벗겼다. 다음 순간, 엽고운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복면 속에서 나타난 얼굴은 더없이 영준하고도 비범하게 생긴 청년의 그것이었다. 나이는 대략 이십이, 삼 세 정도. 눈썹이 곧게 뻗어올라가 강직하고 굳건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한일자로 굳게 다물어진 입술에서도 역시 대쪽같은 성품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엽고운은 안타까운 심정이 되어 재빨리 남삼청년의 혈도를 몇 군데 짚었다. 그러자 청년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눈을 떴다. 하지만 그는 엽고운을 알아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누... 누군지는... 모르지만... 고맙소이다....... 끄르... 륵......." 청년의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심하게 났다. 그는 안간힘으로 말을 계속했다. "죄... 죄송하지만... 한 가지... 부탁......." 엽고운은 그의 귀에 들리도록 음성을 높여 말했다. "말해 보시오! 형장." 과연 청년은 그 소리를 알아들은 듯 감격스런 표정을 지었다. "강서성(江西省)... 경안... 현(京安縣)... 객점... 영락루(永樂樓)... 한 사람을... 찾아서......." "누구를 말이오?"


"삿갓인... 그... 이름은... 천(千)... 무(武)... 독(獨)......." "천무독! 지금 분명 천무독이라 했소?" 엽고운으로서는 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해... 주시오......." "말하시오! 무엇인지." 남삼청년의 얼굴에는 회색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 그 사람은... 살아... 있다고....... 낙영탑(洛英塔)에......." 엽고운은 남삼청년의 귀에 입을 바짝 대고 물었다. "형장! 당신은 누구요?" "나... 나... 감(甘)... 천(天)... 학(鶴)....... 부탁... 그 분에게... 조심하라고....... 꼭......." 그것이 종언(終言)이었다. 남삼청년 감천학은 그 말을 마치고나자 얼굴이 흑색으로 변해 버렸다. 죽은 것이었다. 그런데 감천학의 주검은 문자 그대로 괴현상을 일으켰다. 그의 전신이 흑색에서 다시 자색(紫色)으로 변하더니 곧 푸시식 하고 자색연기를 피워올리는 것이었다. 잠시 후. 감천학의 시신은 차츰 녹아들어 종내에는 한 벌의 남삼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아! 무서운 독이다.' 엽고운은 탄식을 발하는 한편, 감천학의 옷과 그가 남기고 간 소지품들을 챙겼다. 약간의 은자, 그리고 한 자루의 벽옥빛 퉁소와 한 권의 책자가 유물의 전부였다. 엽고운은 비감이 어린 표정으로 벽옥소를 쓰다듬었다. 거기에는 아직도 망자(亡者)의 것인 듯한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감천학, 그대의 충정은 필히 천세형(千世兄)에게 전달하겠소.' 그는 벽옥소와 책자를 품 속에 소중히 갈무리 했다. 그러다 문득 엽고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다시 인기척을 느낀 것이었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이 객점으로부터 이백여 장 밖이다. 모두 칠 인, 그것도 고수급이구나.' 엽고운은 눈썹을 찌푸리며 염두를 굴렸다. '분명 감천학을 쫓던 무리들일 것이다.' 그는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설무곡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대로 휘말리면 저 낭자에게도 위험이 미친다. 그렇다면?' 엽고운이 모종의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의 눈은 벌써 감천학의 남삼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감천학, 아니 감형(甘兄). 당신은 아직 죽지 않았소. 이 엽고운을 통해 영원히 살게 될 것이오.' 엽고운은 곧 남삼을 걸치고 얼굴에 남색건을 둘렀다. 그렇게 되고 보니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남삼복면인 감천학이었다. 마침 체격까지도 비슷한지라 옷은 몸에 꼭 맞았다. 엽고운은 창문을 반쯤 열더니 지체없이 몸을 날렸다. 휙--! 잔영비마술을 펼치자 그의 신형은 한 가닥 연기로 화해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어 그가 멈춘 곳은 객점의 지붕 위였다. 그의 모습이 환한 달빛 아래 선명하게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② "저쪽이다!" 어디선가 거칠게 외치는 음성이 들려왔다. '되었다!' 엽고운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신형을 날렸다. 상대를 성 밖으로 유인해 내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뒤로 일곱 줄기의 인영이 쏜살같이 추격해왔다. 엽고운은 달리는 동안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되는 기분이었다. '천형과의 인연은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비록 짧은 만남에 그쳤지만 그에게서 배운 일초 검식 덕분에 나는 여러번 목숨을 건졌지 않은가?' 그의 뇌리에 천무독의 영상이 뚜렷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게다가 천형의 기질이나 풍모 등 한 가지도 잊지 않았다. 그만치 영향을 받았으니. 후후... 따라서 천형의 적이라면 내가 대신 상대 못할 것도 없다.' 성문 밖. 십여 리쯤 나가자 황량한 들판이 나왔다. 엽고운은 그곳에서 신형을 세웠다. 휙! 휘휙--! 일곱 개의 인영이 번개같이 그를 포위했다. 그들은 모두 삿갓을 깊숙히 눌러쓰고 있었는데 한결같이 전신에서 신비한 기운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엽고운의 신경을 자극하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역시 그들의 오른손에 채워진 팔찌였다. 그것들은 은환(銀環)이 둘, 동환(銅環)이 다섯이었다. '삼환회(三環會)의 인물들이군.' 엽고운이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은환인 한 명이 음침하게 외쳤다. "흐흐흐... 감천학, 과연 옥면승풍(玉面昇風)답구나." '옥면승풍!' 엽고운은 그 별호를 심중에서 되뇌어 보았다. 사후(死後)에야 신분을 알게 된 한 인물에 대해 애틋함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은환인의 음산한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흐흐... 하지만 네가 산백(刪伯) 어르신네의 눈을 속이고도 무사할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산백!' 엽고운의 눈썹이 홱 치켜 올라갔다. 이로써 그는 감천학을 해한 인물이 누구인가를 알게 된 것이었다. 은환인이 눈빛을 싸늘하게 빛내며 외쳤다. "자! 감천학, 죽기 전에 어서 천무독의 거처를 대라." 엽고운은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변성은 얼마든지 가능했으나 감천학의 평소 음성을 모르니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은환인의 얼굴이 점차 살기를 띄어갔다. "말하지 못하겠다, 그 뜻인가?" 응답이 나올 리 만무였다. "크흐흐... 어리석은 놈!" 은환인은 어깨를 묘하게 흔들었다. "어차피 천무독은 산백 어르신네가 알아서 제거하실 것이다. 우리는 네 놈만 죽이면 된다." 다음 순간, 그는 오른손을 뻗었다. "쳐라--!" 쨍! 채앵--! 일곱 줄기의 검광이 두 은환인과 다섯 동환인의 손목에서 일제히 발출되었다. 그들은 마치 엄격하게 훈련된 검수들의 전형을 보여주듯 곧장 엽고운을 칠성(七星)의 방위로 덮쳤다. 쉬쉭! 쐐애액--! 일곱 갈래의 검기는 그물처럼 면밀하게 엽고운을 조여들었다. 금방이라도 그의 육신을 분시(分屍)해 버릴 듯한 완벽한 합벽살인검초(合劈殺人劍招)였다. 파팟!


엽고운의 신형이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꺼져 버렸다. 그리고 섬전일순, 한 동환인의 가슴에 다섯 개의 피구멍이 뚫렸다. "으악!" 비명과 동시에 그의 손을 벗어난 동환검은 동료들의 검 사이를 교묘히 파고 들며 눈부신 검화(劍花)를 피워냈다. 정확한 목표지점은 다섯 명의 목과 눈이었다. 츳! 츠츳--! 다섯 삿갓인들은 단지 눈 앞에서 번갯불이 번뜩이는 것만을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크아악--!" 그들은 일시에 광명을, 그리고 목숨을 잃었다. 눈에서 핏줄기가 뻗는 순간 그들은 목에 동전만한 구멍이 뚫린 채 황천으로 빠르게 직행해야 했다. 실로 가공할 검법이었다. 엽고운은 빙그르르 돌며 다시 동환검을 앞으로 뻗었다. 동환검에서 핏줄기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마지막 남은 은환인은 이 광경에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어느새 동환검은 벌써 그의 목 한치 앞까지 찔러들고 있었다. "헉! 이, 이건 아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잘못......." 엽고운은 냉랭하게 웃었다. "후후... 무엇이 잘못 되었다는 말이냐?" 은환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며 뇌까렸다. "네가 쓴 검초는 삼극천(三極天)... 화홍(花紅)......!" 엽고운이 그의 말을 잘랐다. "후후... 알았으면 되었다." "이, 이럴 수가! 네가 그것을 어떻게......?" 엽고운의 음성은 냉막하기 그지 없었다. "거기까지는 몰라도 된다." 번쩍 섬광이 일었다. "큭!" 은환인은 허우적거렸다. 그의 눈과 목에서도 예외없이 피화살이 솟구쳤다. 삼극천화홍의 검초가 다시 펼쳐진 것이었다. 그의 죽음을 끝으로 장내에는 어둠과 고요만이 남았다. 엽고운은 무심한 눈으로 일곱 구의 시체를 둘러보았다. 그의 나직한 중얼거림이 밤의 적막을 깨뜨렸다. "천세형, 당신의 적이 일곱 명 줄어 들었소이다." 이어 그의 신형은 흐릿해지는 듯 하더니 그 자리에서 팍 꺼져 버렸다. 그런데 그가 사라진 지 반 식경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자리에 홀연히 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허리춤에 묵도(墨刀)를 꽂은 괴장한, 즉 초객이었다. 초객은 내려서자마자 시체들을 스윽 훑어보았다. 여전히 무표정 일색이었으나 얼굴에 난 도상(刀傷)이 실룩거리며 현재 그의 심리를 대변해 주었다. 그는 침중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들의 몸에서 풍기는 십리향(十里香)....... 이로 보아 역시 관은환(關銀還)과 마가(馬家) 사형제를 죽인 놈의 짓이 틀림없다." 그러다 문득 초객은 무엇을 발견했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의 검은 동자에서 기괴한 안광이 번뜩였다. 초객의 눈길은 한 은환인의 시체를 주시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죽은 은환인, 바로 그가 손가락으로 바닥에 무엇인가를 남겨놓은 것이었다. <감(甘)... 천학(天鶴).......> 초객의 얼굴에는 일순 의혹이 떠올랐다. "감천학이라고?"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십리향을 풍기는 자는 분명 천무독일텐데, 어째서 이 만여(萬如) 은환십팔호(銀環十八號)는 감천학이라는 것일까?' 초객의 검은 동자가 의문을 담은 채 사방을 훑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 것도 발견해낼 수가 없자 그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상관없다. 천무독을 찾아 죽이면 그 뿐, 설사 다른 천무독 백 명을 죽인들 어떤가?" 말을 마치자 초객의 신형은 마치 바람에 실린 듯 둥실 뜨더니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 방향은 바로 엽고운이 사라진 쪽이었다. 허공에서 초객의 웃음이 나직하게 들려왔다. "후후... 늙은 의원(醫員) 산백 따위에게 천가 놈을 뺏길 수는 없지. 후후......." ③ <금창신보(金槍神堡).> 공히 무림 사대세가(四大世家) 중 하나인 금창신보. 그 위용은 우선 거대한 대문에 걸린 금빛찬란한 현판으로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또 그 좌우의 석사자, 그리고 그 석사자의 입에 물린 길이 삼장의 금창(金槍)은 어떠한가? 수평으로 물려있는 금창이 지금 햇살을 받아 번쩍이고 있었다. <만수대례화연(萬壽大禮華宴)> 대문의 좌측 깃발에는 그같이 쓰여 있었다. 그것은 바로 회갑 축하연이 열린다는 뜻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대문으로 연신 축하객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이 무림인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엽고운과 설무곡. 이 두 사람도 마침내 금창보에 당도했다. 그런데 이곳으로 오는 동안 설무곡은 내내 침울했다. 대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으며 한 번도 입을 연 적이 없었다. 그나마 어쩌다 엽고운과 시선이 마주쳐도 재빨리 피해 버리는 것이었다. 엽고운은 그의 그런 행동에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어제 그 일은 모를테고, 대체 왜......?' 하지만 엽고운은 일면 안도하기도 했다. 설무곡이 남장여인이라는 것을 알고나자 거북스러워진 것은 오히려 엽고운 쪽이었다. 따라서 그로서는 말을 걸어오지 않는 편이 훨씬 나았다. 아무튼 그들은 금창신보의 대문으로 들어갔다. 문을 지키던 대여섯 명의 장한이 그를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그 중 한 명이 엽고운을 알아본 듯 반색을 했다. "아! 엽공자님, 이제 오시는군요.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보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맙소이다." 엽고운도 그를 기억해내고는 마주 웃어 주었다. 이전에 금창인혼무적 상관태와 함께 이곳을 방문했을 때에도 지금과 똑같은 상황 하에서 그와 마주쳤던 것이다. 곁에 있던 설무곡의 눈이 언뜻 이채를 발했다. '이 분은 무림인이 아니라면서 어떻게 이곳의 노보주와 친분을 맺게 된 걸까?' 물론 그 의문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상관태의 아들, 즉 상관지청의 글스승이 바로 엽고운이므로. 다만 무림인을 자처하는 설무곡의 상식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할 따름이었다. 화의(華衣)를 입은 예의 장한이 설무곡을 보며 물었다. "엽공자님, 이 분께서는 누구십니까?" 그 말에 설무곡은 비로소 품 속에서 푸른 색 첩지를 꺼냈다. 그것은 금창신보 측에서 띄운 청첩장이었다. 장한은 첩지를 받아 펴본 후, 즉시 공경하는 태도를 보였다.


"아! 설궁(雪宮)에서 오셨군요. 정말 실례했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엽고운은 미간을 슬쩍 좁혔다. '이 여인은 설궁의 인물이었군.' 그도 역시 그때까지 설무곡의 신분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보내로부터 한 줄기 홍영(紅影)이 번쩍 하더니 엽고운의 면전으로 날아들었다. "호호호... 엽대가(葉大哥), 너무 하셨어요. 소매를 이렇게 기다리게 하시다뇨?" 명랑한 여인의 음성이었다. 그 음성의 주인은 타는 듯 붉은 홍의를 몸에 꼭 맞게 입은 절세의 미녀였다. 바로 금창보의 금지옥엽인 날수홍낭자 상관지연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뒤로도 두 명의 미녀가 더 따라 나왔다. 옥적선음녀 도백향과 아미용녀 주화용, 즉 엽고운이 하루 전 관도 상에서 삼환회 인물들로부터 구해준 여인들이었다. 엽고운을 바라보는 상관지연의 표정은 몹시도 들떠있었다. 그녀는 남녀의 예의도 개의치 않는 듯 엽고운의 소맷자락을 부여잡더니 곱게 눈을 흘겼다. "원래 어제 오시기로 되어 있지 않았나요? 소매는 밤새 기다렸단 말이에요." 엽고운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미안하오, 상관소저. 일이 있어 늦었소이다." 상관지연은 그 한 마디에 얼굴을 활짝 폈다. "어쨌든 기뻐요. 이렇게라도 오셨으니." 그녀의 함박웃음은 금세 뚝 멎었다. 설무곡의 존재를 비로소 느낀 것이었다. 그녀는 설무곡이 지나치게 예쁘장하게 생긴 것에 다소 놀라며 엽고운에게 물었다. "이 분은 누구세요?" 엽고운은 태연을 가장하며 대꾸했다. "아! 소개하겠소. 이 분은 설무곡이라는 분이오." 하지만 왠지 목덜미가 뜨끈해지는 것만은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상관지연은 눈을 반짝 빛냈다. "설무곡......?" 그보다 더 큰 반응을 보인 것은 의외로 이제까지 조용히 있던 옥적선음녀 도백향이었다. 그녀는 만면에 의혹을 가득 담은 채 설무곡의 얼굴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저 청년은...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인데?' 이때, 설무곡이 세 미녀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소생은 설궁(雪宮)에서 왔소이다." "설궁?" 세 미녀는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도백향이 즉시 물었다. "그렇다면 설궁의 궁주이신 설산협골선(雪山俠骨扇) 선배님과는 어떤 관계신가요?" 설무곡은 그 말에 움찔하더니 곧 대답했다. "소생의... 부친이시오." 그 말에 도백향은 고운 안면에서 의문을 걷어내는 대신 훈훈한 미소를 담았다. '설산협골선 노선배께는 오직 설운향(雪雲香)이라는 여식이 하나 있을 뿐, 그렇다면....... 호호... 하마터면 나까지도 깜빡 속아넘어갈 뻔했잖아?' 도백향은 원래 옥선신녀(玉扇神女) 설운향과 교분이 있었다. 따라서 설무곡의 남장도 그녀에게만은 별무소용이었다. 도백향이 뭐라 말하려는 순간, 다급한 설운향의 전음성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도언니! 죄송해요. 제발 모른 척 해주세요.) 도백향은 그 말에 따라 즉각 함구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만은 그대로 있지 않고 설운향과 엽고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백향의 차분한 시선이 곧 어떤 낌새(?)를 눈치챈 듯 약간의 흔들림을 보였다. 그녀의 입가에 기묘한 웃음이 번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향후 일이 걱정이군. 저 서생을 가운데 두고 설매와 연매가 서로 연적(戀敵)이 되게 생겼으니, 참.......' 이때, 상관지연이 역시 그녀 특유의 명랑한 목소리로 두 미녀들에게 엽고운을 소개시켰다. "도언니, 주동생, 이 분이 바로 제가 어제 말한 엽공자님이에요. 인사하세요." 엽고운이 먼저 정중히 포권했다. "소생 엽고운이라 하오." "소매는 도백향이에요." 아미용녀 주화용도 얼굴을 붉히며 답례했다. "소매는 주화용이에요." 수인사가 끝나자 상관지연이 엽고운을 잡아끌었다. "엽대가, 이제 안으로 들어가세요. 벌써부터 아버님께서 무척 이나 기다리셨어요." "알겠소이다." 이윽고 일행은 나란히 안으로 들어갔다. 금창신보는 과연 무림사대세가에 어울리게 웅장했으며 그 규모 또한 방대했다. 처처에 누각과 대전(大殿), 연무장(練武場) 등이 있었고 건물도 화려하게 축조되어 있었다. ④ 여러 채의 대전을 지나자 호화로운 전각이 나타났다. 이름하여 영빈청(迎賓廳). 그곳은 금창신보에서 귀빈을 맞는 객청이었다. 일행은 날수홍낭자 상관지연의 안내로 영빈청에 들었다. 긴 탁자 위에 미주가효(美酒佳肴)가 풍성하게 마련된 채 벌써 사오십 명의 군호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흡족한 얼굴로 떠들썩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중앙의 높은 태사의에는 이 날의 주인공인 금창신보의 보주, 즉 금창인혼무적 상관태가 앉아 긴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는 우람한 체격에 금의(錦衣)를 입었으며 머리에는 화건(華巾)을 두르고 있었다. 회갑에 이르렀다고는 하나 젊은이 못지않게 기개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긴 턱수염이 특히 위풍을 더해 주었다. 그가 앉은 태사의 뒤쪽 벽에는 금창신보를 상징하는 두 자루의 금창이 교차되어 걸려 있었다. 그의 맞은편 좌우에는 네 개의 의자가 특별히 마련되어 있었고 그 아래 쪽으로는 수많은 의자가 열을 지어 있었다. 네 개의 의자 중 세 개에는 모두 육순 이상의 비범한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한 자리만이 유독 비어 있는 것이었다. 문득 중앙의 금창인혼무적 상관태가 벌떡 일어섰다. 영빈청 안으로 막 들어서고 있는 엽고운 일행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일행을 맞이했다. "하하하... 엽공자, 어서 오시오. 기다리고 있었소." 엽고운도 이에 응했다. "죄송합니다. 보주." "하하... 오셨으니 되었소. 어서 이리 앉으시오." 상관태가 가리키는 것은 특별히 마련된 네 자리 중 빈 좌석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엽고운을 위해 마련된 상석인 것 같았다. 엽고운은 좌중을 향해 목례한 뒤, 사양치 않고 그 자리에 앉았다. 그 광경에 군호들은 모두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대체 저 백면서생이 누구이길래 상관보주가 저토록 귀빈대우를 하는 것일까?'


그러자 궁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듯 상관태가 좌중을 향해 음성을 높여 말했다. "하하하... 여러분께 오늘 한 분의 기인을 소개하겠소." 그는 손을 들어 엽고운을 가리켰다. "이 분은 엽공자시오." 엽고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루 포권했다. "후배 엽고운,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그러나 군호들의 의혹은 더욱 가중될 뿐이었다. 그들은 강호에서 엽고운이라는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하하... 엽공자는 바로 노부의 불민한 자식을 가르치는 글스승이시오." "아!" 상관태의 말에 군호들은 한결같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 보니 글벌레였군.' '쳇! 난 또 강호의 내노라 하는 인물인 줄 알았지.' 실망이 어린 그들의 얼굴에서는 대개 이런 읊조림들이 엿보였 다. 상관태는 이에 개의치 않고 잔을 힘차게 들어 올렸다. "자! 보잘 것 없는 노부의 회갑을 축하하러 오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뜻으로 삼배(三盃)를 올리오." "와아아--! 장수(長壽)를 기원합니다." "상관보주 천세--!" 군호들은 저마다 우렁차게 응수하며 잔을 비웠다. 엽고운도 그들을 따라 연속 삼배를 비웠다. 도도한 주흥이 이내 좌중을 사로잡았다. 어쩌면 단순하달 수 있는 무인의 기질과 더불어 적당한 술이 어울리자 영빈청 안은 금세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전환되었다. 어느 정도 자리가 무르익자 금창인혼무적 상관태는 엽고운에게 나머지 세 자리에 앉아있는 인물들을 소개했다. "엽공자, 노부의 평생 지기(知己)들을 소개해 드리겠소." "예." "이 분은 무림 사대세가의 하나인 황룡무성보(黃龍武聖堡)의 제팔대 보주, 황룡신장(黃龍神掌) 도육천(陶陸天)이시오." 엽고운은 상관태가 가리키는 인물을 응시했다. 그는 전신에 황포장삼을 걸친 노인으로 가슴에 용(龍)이 수놓아져 있었다. 청수한 얼굴에 안광이 날카로왔으며 양쪽 태양혈도 불룩했다. 유난히 긴 두 팔과 보통 사람보다 두 배나 커보이는 손바닥이 시선을 끌었다. '음, 내외공(內外功)이 깊고 선천적인 조건 덕에 장공(掌功)에 탁월한 인물 같구나.' 엽고운은 내심 이렇게 판단을 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후배, 처음 뵙겠습니다." "헛헛... 반갑소, 엽공자." 상관태가 흐뭇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더니 이번에는 우측에 앉은 노인을 가리켰다. 그 자는 갈의에 깡마른 체구였으며 눈매가 매서운 위인이었다. "저 분 역시 사대세가인 사천(四川) 당가장(唐家莊)의 장주시오. 천수환로(千手幻老) 당백문(唐白文)이라는 분이오." "처음 뵙겠습니다." 엽고운은 포권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사천 당가라면 칠십이 종의 독문암기와 삼십육 가지 독약으로 유명한 가문이다. 과연 이 당백문이란 노인은 눈매를 보아하니 천수환로라는 별호에 걸맞는 암기술의 명인이리라.' 그의 생각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천수환로 당백문은 당금 무림에서 암기 방면의 제일인자로


알려져 있었다. 상관태는 이어 엽고운의 맞은 편에 앉아있는 홍포장삼의 노인을 가리켰다. 그 자는 얼굴이 유독 붉은 빛을 띄고 있었다. "저 분은 사대세가 중 섬서(陝西)의 천화장(天火莊) 장주시오. 모두들 천화신군(天火神君) 제갈호(諸葛蝴)라고 부르지." 그 순간, 엽고운은 자신을 향한 제갈호의 눈빛이 기이하게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찰나적인 현상이었다. "소생 엽고운, 처음 뵙겠습니다." 상관태가 곁에서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무림 사대세가가 이 자리에 전부 모이니 노부의 얼굴에 금칠이 되는 것 같소이다." 세 명의 노인, 즉 세가의 가주들도 모두 웃었다. "하하하... 상관형의 회갑에 우리가 어찌 빠질 수 있겠소?" 이들 사대세가는 당금 무림에서 독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명문대파인 칠파일방이 거의 쇠퇴하여 그 명맥만을 유지해 갈 즈음, 거꾸로 이백여 년에 걸쳐 꾸준히 명성을 다져온 것이 바로 이 사대세가였다. 하남(河南) 금창신보(金槍神堡). 호북(湖北) 황룡무성보(黃龍武聖堡). 사천(四川) 당가장(唐家莊). 섬서(陝西) 천화장(天火莊). 이들은 각기 중원무림에 커다란 세력을 구축했으며 나름대로 정도(正道)를 추구해 왔다. 따라서 무림인들의 의식 속에서 사대세가의 권위란 이미 칠파일방을 능가하고 있었다. 무림에 커다란 일이 발생했을 때마다 사대세가는 서로 첩지를 돌렸고, 결국 힘을 합쳐 이를 해결하곤 했다. 그리하여 이백여 년이 흐르는 동안 사대세가는 은연중 무림맹(武林盟)의 역할을 대행하게 되었다. 축하연의 들뜬 분위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고조되어 갔다. 초청객들은 거개가 한 지방의 패주(覇主)이거나 영웅호걸, 칠파일방에서 파견된 인물 등 하나같이 위명이 쟁쟁한 고수들이었다. 개중에서도 엽고운이 주로 대화를 나눈 상대는 사대세가의 가주들이었다. 바야흐로 이 네 명의 가주들은 엽고운의 박학다식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엽고운이 무공을 제외하고는 다방면에서 능통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천화장의 장주인 천화신군 제갈호만이 계속하여 기이한 눈으로 엽고운을 주시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엽고운의 예민한 감각이 포착해낸 것일 뿐 다른 이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엽고운 자신도 그 일에 그다지 신경쓸 이유가 없었다. 이윽고 축하연은 끝났다. 이는 엽고운 일행이 당도했을 때부터도 두 시진이나 지난 후의 일이었다. 하객들은 각기 헤어지거나 금창신보에 마련된 객방으로 안내되었다. 어느덧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제 15 장·단혈맹(單血盟)의 젊은 맹주(盟主) ① 십오야(十五夜). 둥근 만월이 온누리를 비추고 있었다. 오월의 보름, 밤바람에도 훈풍이 느껴졌으며 어디선가 꽃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월광은 대지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밝은 곳과 어두운 곳, 그 음영을 만들며 낙양의 세가인 금창신보에도 빛을 뿌렸다. 화원. 금창신보의 후원에 위치한 이 화원에도 은가루같은 달빛이 쏟아져내려 화목(花木)을 비추었다.


한 객방으로부터 백색문사의를 입은 청년이 걸어나왔다. 마치 달 속의 선녀와 짝을 맞춤직한 천상의 옥인같은 청년이었다. 스스....... 청년의 백색문사의가 밤바람에 가볍게 나부꼈다. 달빛 아래 고독한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는 자, 바로 엽고운이었다. 멀리서 축하연의 여운들이 아득하게 전해져왔다. 그것은 대청과 영빈청, 주빈관 등에서 술을 마시며 흥겹게 떠드는 소리로써 지금 그의 심정과는 무척이나 대조를 이루는 것들이었다. 금창인혼무적 상관태의 회갑연은 연 삼 일 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그 간에 엽고운도 물론 내내 객관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주인 상관태와 상관지청, 특히 상관지연이 막무가내로 붙들어서였지 그의 의지와는 무관했다. 엽고운은 흥청거리는 소음을 피하기 위해 화원을 따라 주욱 걸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듯 생소해진 것이 과연 그 소리인지 아니면 자신인지를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아직도 베일을 벗지 못한 출신내력과 우울한 성장과정 등은 엽고운에게 있어 항시 아픔과 더불어 타인들과의 어울림에 하나의 장애요인으로 대두되곤 했다. 요컨대 그는 파란만장한 변화를 통해 잠시 잊고 지나칠지언정 결코 거기에서 놓여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밤, 화향 가득한 이 밤도 엽고운에게는 결국 등격리 사막에서의 고독했던 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으음......." 엽고운은 잘 가꾸어진 화원을 거닐며 계속 상념에 잠겼다. 이윽고 화원을 한 바퀴 돈 다음, 그는 한 그루의 계목(桂木)에 기대어 보름달을 올려다 보았다. 이제 쓰라림을 수반한 추억들은 달 속에서 하나하나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엽고운은 흠칫 했다. '인기척?' 조용히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그는 움찔하고 말았다. 상대가 다름 아닌 설무곡이었기 때문이다. '저 여인이 이곳에는 왜......?' 남장여인인 설무곡도 엽고운과 마찬가지로 이 금창신보에 계속하여 삼 일을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동안 서로 대화가 오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설무곡은 가까이 오더니 막바로 입을 열었다. "엽형께선 어째서 밖에 나와 계십니까?" 엽고운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담담히 대꾸했다. "나는 떠드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소."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묘한 침묵이 흘렀다. 엽고운의 시선은 무언을 틈타 자연스럽게 달로 향해졌다. 그에 반해 설무곡은 영 안절부절을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녀는 엽고운의 눈치를 살피며 말할 것이 있는 듯 몇 번씩이나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러다가 안되겠다 싶었는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 엽형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엽고운이 눈을 내려 그녀를 응시했다. 설무곡은 그의 시선에 고개를 푹 떨구며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혹시... 삼 일 전, 객점에서... 제가 술에 취해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는지......?" 엽고운은 내심 흠칫 했으나 가벼운 헛기침으로 이를 일소시켰다. 그리고는 짐짓 정색을 지으며 답해 주었다. "아니오. 그런 일 없었소."


그 말에 설무곡은 입술을 지그시 물더니 갑자기 고개를 반짝 쳐들었다. 침착을 잃은 쪽은 이제 엽고운이었다. 휘황한 달빛에 그녀의 눈에 고인 눈물이 투영된 것이었다. "어찌......?" 설무곡의 뾰족한 음성이 그의 말을 막았다. "거짓말! 당신은 이미 알고 계셨죠?" 그것은 영락없이 여���의 가느다란 음성이었다. 엽고운은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그녀가 이렇게 나오자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여인이 지금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때아닌 불안이 그를 엄습했다. '설마 삼 일 전의 그 일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엽고운은 곧 자신의 생각을 부인했다. '아니,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이 여인은 그 당시 아예 인사불성이 아니었던가?' 일단 마음이 정해지자 그는 지체없이 입 밖으로 털어냈다. "나는 지금 설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설무곡이 그의 코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시미치 떼지 마세요! 나는 당신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안단 말이에요. 그러고선 어떻게 계속 이럴 수가......." '미치겠군!' 엽고운은 그만 난감해지고 말았다. 설무곡의 말투인즉 이제 내놓고 원망조가 아닌가? 이렇게 되면 그 자신이 치한으로 몰리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설무곡은 얼굴을 잔뜩 붉힌 채 말을 이었다. "당신은 분명 그때 제 몸에......." 엽고운이 당황하여 급히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 그건 본의가 아니었소." "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설무곡은 느닷없이 머리에 쓰고 있던 유건을 벗어제꼈다. 그러자 폭포수같은 긴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비로소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으음!" 엽고운은 신음을 발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설무곡은 그의 앞으로 다시 다가서며 격정으로 몸을 떨었다. "소녀의 본명은 설운향(雪雲香)이에요. 감추려던 것이 노출된 이상 확실하게 알려드리는 게 낫겠지요." 엽고운은 그녀의 고운 뺨 위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그의 가슴에서 어쩔 수 없이 미묘한 진동이 일어났다. 그는 이를 억누르며 차분하게 물었다. "어떤 일에 한해서는 들추지 않고 덮어두는 편이 오히려 이로운 때도 있는 법이외다. 그런데 낭자는 무엇 때문에 이런 식으로까지 나를 추궁하려 드시오?" 그 말에 설무곡, 즉 설운향은 어깨를 움츠렸다. "소녀도 정말로 남자였다면 엽공자님처럼 말했을 거예요." "무슨 뜻이오? 낭자의 말은......." "공자님께 몸을 보인 이상 저는....... 흑!" 설운향은 기어이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엽고운은 그만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달을 보았다.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비로소 깨달은 것이었다. 마음이 산란해져 버린 엽고운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이어 나직하고도 담백한 음성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낭자, 부탁이오만 본연의 모습을 잃지 마시오. 설무곡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며 억지로 술을 들이키던 때의 당신이 어쩌면 당신의 참모습일 수도 있소이다." "아!" 설운향은 몸을 흠칫 떨었다. "낭자는 내 보기에도 향후로 일세를 풍미할 여협같소. 그런데 어찌 한때의 우연으로 인해 다른 인생을 살려고 하시오?" 엽고운의 음성은 차츰 엄숙해졌다. "나는 결코 그 날 밤을 재론할 생각이 없소. 그것은 모두 지난 일이며 또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소." 설운향의 흐느낌은 어느덧 멎어 있었다. 그녀는 단지 조용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따름이었다. 엽고운은 담담히 말했다. "나는 낭자가 어떻게 하여 그런 세속적인 규제에 얽매이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소." "그, 그건......." 설운향은 눈물 젖은 눈으로 안타깝게 그를 응시했다. 엽고운은 그녀가 하려는 말을 짐짓 차갑게 잘랐다. "잊으시오. 그것이 본인을 위해 유익한 방도요." "아아!" 설운향의 신형이 중심을 잃고 휘청했다. 이를 뻔히 알면서도 엽고운은 이렇게 덧붙였다. "낭자 정도의 미모와 가문이라면 얼마든지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나는 거기에 적합하지 않소. 명문 출신도 아니며 무공도 모르는 일개 떠돌이 서생일 뿐이오." 설운향의 얼굴은 충격을 받은 듯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고... 공자님......!" "그럼, 소생은 낭자가 훌륭한 인물을 만나 행복하기를 기원하겠소이다." 말을 마치자 엽고운은 그녀로부터 몸을 돌렸다. "잠깐만요! 공자님." 설운향이 그를 불러 세웠다. "더 할 말이 남아 있소?" 엽고운으로서는 다시 돌아서지 않을 재주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을 받자 설운향은 고개를 푹 숙였다. 두 방울의 눈물이 그녀의 발치께에 있는 이름 모를 풀잎 위로 떨어졌다. "으음......." 엽고운은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그녀의 목덜미를 바라 보았다. 그 순간, 그녀를 안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 치민 것은 왜일까? 아마도 단지 애처로움 때문만은 아니리라. 그러나 결국 엽고운은 눈길을 다시 달을 향해 돌리고 말았다.그는 철심(鐵心)의 사나이, 아니 그것을 고집하는 사나이였다. 설운향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흠씬 젖은 얼굴로 엽고운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공자님의 말씀... 잘 들었어요." "고맙소." "그리고 소녀는 공자님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도 잘 알아요." 일순 설운향의 옥용에는 한 가닥 결심의 빛이 어렸다. 그러더니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말을 비로소 꺼냈다. "하지만 그래서 저는 공자님이 더욱 좋아졌어요. 지금까지 고심했던 것은 공자님에 대한 제 판단에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대체 무슨 말을......?"


엽고운의 눈썹이 미미하게 움직이던 그 순간이었다. 휙--! 설운향은 신형을 날렸다. 그녀의 축축한 음성이 그의 귀로 전해져 왔다. "엽공자님을 사랑해요. 비록 지금은 일방적일지 몰라도, 전 노력할 거예요. 제 사랑이 완성될 때까지......." 설운향의 모습은 화원을 돌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랑한다고? 나를......?' 엽고운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한 줄기 고소가 머물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탄식을 발하며 달빛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가슴이 뭉클 그리움으로 흔들렸다. '아랑(我娘)....... 너도 이 달을 보고 있느냐?' 엽고운의 생각은 멀고 먼 북방, 아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소녀의 고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후후... 벌써 오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지난 시간을 훑어가는 그의 얼굴은 당시와 똑같은 체념으로 얼룩이 졌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랑의 고운 모습은 더욱 선명하게 뇌리에 되살아나고 있었다. 엽고운은 문득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지금쯤 너는 다륜(多倫) 부족의 어느 용맹한 전사에게 시집을 갔겠지? 후후...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어야 한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화원을 다시 한 바퀴 돈 다음에야 객방으로 돌아갔다. ② 밤. 때는 사경으로 기울고 있었다. 천지가 온통 어둠과 적막에 묻혀 있었다. 이제 하객들도 대부분 보를 떠나버려 금창신보는 조용하기만 했다. 객방. 엽고운은 침상에 누워 있었으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설운향과의 일이 마음에 걸리기라도 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엽고운은 지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돌아가신 지도 벌써 이 년이 지났군. 그 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가?' 그의 얼굴에는 짙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사부님의 유명은 바로 북혈마궁(北血魔宮)을 치고 남천신문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과연 그 일은 얼마나 진전되었는가?' 엽고운은 자탄해 마지않았다. '부끄럽다. 진정.......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구나.' 그러다 문득 그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했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 엽고운은 눈살을 찌푸리는 한편, 전신에 내공을 끌어 올렸다. '하나, 둘, 셋, 넷, 모두 네 명이다!' 그의 눈동자가 민감하게 좌우로 움직였다. '몸놀림이 극히 가볍고 소리도 없다. 모두가 절정고수들이다.' 엽고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방문을 비롯하여 창문에까지도 한껏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펑! 파파파팍--! 방문과 창문이 박살나며 네 줄기 인영이 방 안으로 쳐들어왔다. 동시에 무서운 장력과 우박같은 암기, 그리고 번쩍이는 광채가 엽고운이 누워 있던 침상을 덮쳤다.


퍼펑! 침상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것은 실로 눈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엽고운은 이미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의 몸은 어느새 천장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앗......!" 네 인영은 어리둥절한 듯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한 가닥 냉랭한 음성이 그들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암습을 하는 것이오?" "헛!" 네 인영은 어스름한 방 안에서 모두 대경성을 터뜨렸다. 이어 그들은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지며 천장을 쳐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 엽고운의 신형이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그의 좌우 쌍장이 눈부실 정도로 빠르게 번뜩였다. 펑! 퍼펑! "윽! 컥--!" 다급한 비명이 잇달아 울렸다. 네 인영은 튕겨지듯 뒤로 곤두박질치더니 벽에 가 부딪히고 말았다. "후후... 그 정도 대접으로는 아직 미비하군." 엽고운은 냉소와 더불어 이번에는 신형을 풍차처럼 회전시켰다. 그의 좌우 쌍권이 연속적으로 십이 권을 내치고 있었다. 파파파팍--! 권풍은 흡사 예리한 칼바람과도 같았다. "크윽--!" 네 인영은 자신들의 문호(門戶)가 크게 열리는 것을 느끼며 다급히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권격을 빗겨 맞은 그들은 삽시에 전신 내공이 흩어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불가항력이었다. 그제서야 그들 중 한 인영이 황망히 외쳤다. "그만! 멈추시오, 엽소협." "아!" 엽고운은 대경했다. 그 음성이 뜻밖에도 몹시 귀에 익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네 인영 중 한 명이 화섭자를 켰다. 팍! 방 안은 일시에 환하게 밝아졌고 네 인영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 네 명은 전부 얼굴에 복면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화섭자를 켠 복면인이 황촉으로 불을 옮겨 붙이자 제각기 신속하게 복면을 벗었다. 그들의 얼굴을 본 엽고운은 해연히 놀라고 말았다. "아니, 여러분은......?" 네 복면인은 다름 아닌 금창인혼무적 상관태, 황룡신장 도육천, 천수환로 당백문, 그리고 천화신군 제갈호 등으로 당금 무림 사대세가의 가주들이었던 것이다. 금창인혼무적 상관태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멋적게 웃었다. "엽공자, 죄송하오. 별다른 뜻이 있어서는 아니었소." 엽고운은 의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무슨 목적으로 나를 습격했단 말인가?' 황룡신장 도육천이 뒤를 이었다. "과연 우리들의 생각이 딱 들어맞았소이다. 엽공자는 평범한 문사가 아니었구려." 엽고운은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멀쩡한 사람이 바보가 되는 것은 실로 잠깐이구나. 이렇듯 어처구니 없게 시험을 당하다니' 천수환로 당백문도 한 마디 했다.


"공자의 숨은 실력이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뜻밖이었소." 천화신군 제갈호만이 얼굴이 굳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 둘 겨를조차 없었다. 곧바로 금창인혼무적 상관태가 본론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엽공자,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 합시다." 마침 방 안에는 의자들이 놓여 있어 그들 모두가 탁자에 둘러 앉게 되었다. 엽고운도 그 중 하나에 착석했다. 상관태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엽공자는 우리의 행동에 큰 의문을 느낄 것이오." 엽고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 말에 상관태는 고개를 마주 끄덕이며 말했다. "반 년 전 노부는 공자를 처음 알게 되었소. 공자가 보통 문사가 아니라는 것은 사실 그때부터 이미 짐작했었소." 엽고운은 할 말이 없었다. "그리하여 노부는 그간 공자를 예의주시해 왔었소. 그 결과, 역시 엽공자의 태도는 온통 신비한 것들 뿐이었소." 상관태의 어조는 더없이 진지했다. "더우기 공자의 몸에서 풍기는 기질은 무척이나 특이한 것이었소. 그런 기질은 노부 평생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소." 문득 그의 노안에는 모종의 갈등이 어렸다. 그는 눈썹을 가볍게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마침내 노부는 단정을 짓기에 이르렀소. 소협같은 기질은 천하에서 오직 두 가지 유형의 인물만이 가질 수 있다고 말이오." 엽고운이 비로소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대체 어떤어떤 형의 인물을 지칭하시는 것입니까?" 그 물음에 상관태의 갈등은 더욱 짙게 드러났다. 그는 기대와 불안이라는, 두 개의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엽고운을 주시했다. ③ 잠시 후. 사대세가 중 한 세가의 가주인 그의 입이 떨어졌다. "개중 하나는 희대의 마존(魔尊)을 이르는 것이오. 말하자면 은밀히 음모를 진행시키며 때를 기다리는 자를 의미한다고나 할까? 그런 자가 만일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게 되면 그 결과는 일대 혈풍 외엔 없소." 엽고운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자신을 두고 이런 추리가 가능하리라는 것을 그는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엽고운은 일단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네 쌍의 눈으로부터 탐색을 당하는 일이란 여간 긴장을 요하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중도에서 뭐라 피력하는 짓은 되도록 삼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다른 한 인물은 앞서의 예와 정반대로 추정했소." 말을 하는 상관태의 얼굴이 다소 밝아졌다. "일테면 가장 정의로운 사람일 것이라는 뜻이오." "으음......." "인세의 번잡함이 싫어 은거하는 자이거나 혹은 원대한 뜻을 품었으되 아직 그 진행에 골몰해 표출을 꺼리는 인물 말이오." 엽고운은 역시 그 말에도 응대하지 않았다. 상관태가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노부는 그런 가정을 세웠을 때 고심막측이었소." 낮은 탄식이 상관태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물론 후자 쪽의 인물이기를 간절히 기원했소이다." 엽고운은 문득 입가에 기묘한 웃음을 매달았다. 거기에는 약간의 자조가 함께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웃음이야말로 상관태로 하여금 더없이 안도하게 하는 것이었다. "뻔한 얘기오만 청아를 공자의 제자로 보낸 것도 실은 공자를 좀더 면밀히 관찰하기 위한 것이었소. 그리고 그 과정과 더불어 노부는 지금에야 완전히 깨달을 수가 있게 되었소. 공자가 결코 사악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엽고운은 담담히 말했다. "보주께서 그렇게 보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상관태는 빙긋 웃더니 좌중의 세 노인을 둘러 보았다. "노부가 이 세 벗들에게 공자의 얘기를 전했소. 공자의 무공을 시험해 보기로 결정한 것도 바로 노부외다." 엽고운은 반문했다. "그래서 소생을 이곳으로 초청한 뒤 연회가 끝나도록 붙잡으신 것입니까?" "허허... 이르자면 그렇소이다." 엽고운은 씨익 웃으며 다시 물었다. "소생을 시험한 데에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까?" 그것은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네 노인은 갑자기 굳어지더니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 사이에는 왠지 엄숙하고도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윽고 상관태가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물론 이유가 있었소이다." "말씀해 주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상관태의 표정이 이번에는 더할 나위 없이 암울하게 변했다. "엽공자, 현 무림에는 엄청난 피바람이 일고 있소이다. 그 사실을 엽공자도 모르지는 않을 게요." 엽고운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것은 천하 정도인(正道人)이 모두 힘을 합쳐도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무서운 마의 창궐이오." 엽고운은 나머지 세 노인을 차례로 응시했다. 그러자 그들의 얼굴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상관태와 똑같은 그늘이었다. 이를 느낀 그는 비로소 신색을 바로잡으며 진중하게 말했다. "소생에게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네 노인의 얼굴에 각기 미미하게나마 희색이 떠올랐다. 상관태가 세 노인을 둘러본 뒤 말문을 열었다. "역시 노부가 대표로 얘기하겠소이다." 그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듯 하더니 문득 물었다. "엽공자, 혹시 북혈마황(北血魔皇) 탁무군(卓武君)이라는 자에 대해서 알고 계시오?" 엽고운의 안색이 처음으로 동요를 보였다. '북혈마황!' 그것은 천 마디의 말보다도 더 확실한 긍정이었다. 그리고 이무언의 답변은 네 노인에게 즉각적으로 전달되었다. 상관태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북혈마황 탁무군은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 무림을 피보라도 물들였던 혼세팔마(混世八魔)의 후예요." "으음." "그러나 현재 그의 무공은 가공지경이오. 오히려 과거 혼세팔마를 모두 다 합친 것보다도 더욱 강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요." 엽고운은 가슴이 점차 진동해 오는 것을 느꼈다. 상관태의 얼굴에는 아예 먹장구름이 덮혀 있었다.


따라서 그의 음성도 침중하기 짝이 없었다. "현 무림에서는 그 자의 삼 초를 받아낼 자도 없소이다." 엽고운의 눈썹이 슬쩍 찌푸러 들었다. "그 정도로 그 자를 막을 세력이 없습니까?" 그 말에 상관태는 안면을 씰룩였다. "있긴 있었소이다." "어떤......?" "백 년 전부터 그 자의 중원 진입을 제지해 오던 한 문파가 있었소. 워낙 신비에 가려져 있어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으나 남해(南海)에 위치한 남천신문(南天神門)이라 들었소." '오오!' 엽고운의 표정이 격동으로 인해 몹시도 흔들렸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상관태는 잠시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시 이어진 것은 역시 탄식이었다. "그러나 소문에 의하면 남천신문도 결국 북혈마황의 거점인 북혈마궁에 의해 멸망했다고 하오. 불과 오 년 전이라던가?" 엽고운은 내심을 들키지 않기 위해 눈을 내리감았다. 끓어오르는 격정을 그 자신도 주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본문의 치욕이 항간에서 이렇게 떠돌고 있었다!' 상관태의 음성이 연이어 그의 귓전에 부어졌다. "그 후로 오 년 동안 북혈마황은 전 중원무림을 정복하기 위해 본격적인 구상에 접어들었다 하오." 상관태를 비롯한 사대세가의 가주들은 한결같이 일말의 두려움을 떠올렸다. "이는 실로 엄청난 사태요. 그는 경솔하게 움직이는 일개 마두가 아니라 그야말로 일세의 효웅으로서 그의 주도면밀한 계획은 단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것이오." 엽고운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 네 노인의 심정에 동조하게 되었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그가 직접적으로 부딪쳐야 할 문제들이었기에 신경을 더욱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그 계획이란 어떤 것들입니까?" 상관태는 침중하게 대답했다. "그 자는 완벽을 기하기 위해 북혈마궁 외에도 중원의 북쪽 지방을 지배하는 가공할 세 명의 마인을 포섭했소이다." "그들은 누구누구입니까?" 엽고운의 눈은 어느덧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천산(天山)을 지배하고 있는 개세의 마신 구유천존(九幽天尊), 신강(新疆)에서 죽음의 별로 알려진 지옥마성(地獄魔星)......." 상관태는 음성이 떨려 나오자 스스로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마지막으로 청해(靑海)에서 백오십 년 간이나 은거하고 있던 만사지혈(萬邪至血)이 바로 그들이오." 엽고운은 약간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로서는 그 세 마인 중 누구의 이름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관태의 간략한 설명이 그의 이해를 도왔다. "그들 삼 인은 모두 북혈마황과 실력이 버금갈 정도요. 하나같이 희대의 마두들이라 할 수 있소." "으음......." 엽고운은 신음을 발하는 한편, 내심 뇌까렸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북혈마궁의 세력은 엄청나게 불어난 셈이다. 과연 내 힘으로 그들을 물리칠 수 있을까?' 상관태의 어두운 음성은 또한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들 삼 인은 북혈마황에 의해 각기 나름의 세력을 구축한 후, 급기야 북무림에 진입을 개시했소."


"음!" 엽고운의 안면이 무섭게 굳어졌다. '그것이 곧 시작인가?' 그는 내부에서 일어나는 격랑을 그렇게 표출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천하에서 그들의 세력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소. 게다가 또 한 가지 통탄할 사실은......." 상관태는 일단 말을 끊더니 불쑥 물었다. "엽공자는 혹시 천축 이대 사교 중 황교(黃敎)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소?" 엽고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약간은......." 상관태는 더 묻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천여 년 전 황교의 이대 교주인 포융찰이 그 당시 쌍벽을 이루던 홍교(紅敎)에 의해 죽음을 당했소. 물론 그때에 황교도 멸망했소이다." 엽고운은 내심 중얼거렸다. '음, 황교와 홍교의 얘기는 이전에 사부님께 들었다. 이들이 오히려 그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황교가 홍교에 의해 멸망한 것은 남천신문의 내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즉 포융찰은 남천신문의 조사인 천원상인(天元上人)과 힘을 합쳐 혼세팔마를 제거한 바 있다. 그리고 그 뒤에 다시 천하제일인 자리를 놓고 싸우다 패배하여 중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포융찰은 진기가 크게 소모된 상태에서 홍교의 침입을 받아 억울하게도 죽음에 이르고 만 것이었다. 상관태는 계속 말했다. "그때 이후로 천 년이 흘렀으나 당시에 뿌려진 악의 씨앗은 다시 살아났소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황교의 일맥으로 내려온 후예들이 그 원한을 잊지 않고 천여년 동안 칼을 갈아온 것이오." "아!" "사단이 난 것은 겨우 석 달 전이오. 천축에서 일대 혈풍이 일어났었소이다." "으음......." 엽고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상관태는 설명했다. "칠흑같은 밤에 하나의 거대한 붉은 손이 나타나 허공을 떠돌며 근 천여 명에 달하는 홍교의 고수들을 모조리 사멸시켰다 하오이다." 엽고운은 크게 놀랐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렇소. 사람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고 오직 혈수만이 휘젓고 다녔다는데 그 혈수가 바로 홍교를 쓸어버린 것이오." "그럼 그 혈수의 주인이 황교의 전인이라는 말입니까?" 상관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그것은 혈수의 주인이 남겼다는 마지막 말에서 어렵지 않게 추측해 낼 수가 있소." 엽고운은 지체없이 물었다. "그가 무슨 말을 남겼습니까?" "바로 이런 것이었소." 상관태의 말을 빌어 옮기면 이러했다. ④ - 크하하핫......! 천 년 동안의 피가 맺힌 황교의 한을 드디어 이 달랍찰격(達拉刹格)이 풀었도다. 이제는 중원으로! 천 년 전 포융찰 조사를 패배시킨 남천신문을 찾아 빚을 갚겠도다.


엽고운은 은연중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가 그런 말을 남겼단 말입니까?" "그렇소. 게다가 더욱 더 놀라운 일이 발생했소이다." "그것은 또 무엇입니까?" 상관태는 딱딱하게 굳어진 어조로 말했다. "홍교에는 이백여 년 동안 폐관하고 있던 인물이 있었소. 사대전(四代前)의 대법사인 녹존불(綠尊佛)이 바로 그 자요. 그런데 그가 홍교의 멸망에 크게 분노하여 관을 깨고 나왔소." "으음!" "그 자는 즉시 황교의 마지막 전인인 달랍찰격을 추격하여 중원으로 건너왔다고 하오이다." "아!" 얘기가 이쯤에 이르자 더 이상 아무도 입을 열려는 자가 없었다. 질식할 것 같은 그 침묵은 오히려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엽고운은 머릿속이 극도로 어지러웠다. 짧은 시간 동안에 들은 엄청난 사실들이 그를 혼란으로 몰고 간 것이었다. 그러나 와중에서도 커다란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들이 내게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이윽고 엽고운은 단도직입적으로 이를 물었다. "상관보주, 소생에게 이런 얘기를 하시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상관태의 얼굴이 기이하게 변했다. "그것은......." 그는 먼저 세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 노인이 모두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비로소 그의 말문이 열렸다. "사실 정도무림은 지난 이백여 년에 걸쳐 매우 침체되어 있었소이다." "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무림의 중추격인 칠파일방이 계속 몰락일로를 걸어왔기 때문이오." 엽고운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물론 칠파일방도 기울어진 성세를 회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는 했지만 그 성과를 보지 못했소이다. 따라서 정도무림은 그 중심세력을 잃은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되어 버렸소." 상관태는 다시금 세 노인을 둘러보았다. "결국 이끌어 줄 주관자가 없으니 어쩌겠소이까? 그 역할은 그 동안 우리 사대세가가 대행해 왔소이다. 그러나 문제는 힘이었소. 우리는 역량이 딸린다는 것을 내내 통감해야만 했소." 그는 탄식과 더불어 계속 부언했다. "그야말로 전심전력으로 무림정기를 수호하려 애써 보았지만 이제는 정말로 한계에 이르렀소. 거세게 불어닥치는 마의 바람은 우리 사대세가로서는 도저히 불가항력이오." 엽고운은 줄곧 침묵을 유지했다. 상관태는 그를 직시하며 힘주어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사대세가가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 것은 아니오. 우리는 정도무림의 기둥을 자처해 온 만큼 나름대로 혈풍에 대비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해 왔소." 엽고운은 새삼 상관태와 도육천, 그리고 제갈호, 당백문 등을 차례로 응시했다. 그러자 그들의 늙은 얼굴에 어려 있는 비장한 결의가 곧바로 그의 전신기혈을 뒤집어 놓았다. '과연 늙어도 호랑이는 다르구나. 어떤 젊은이가 있어 이들의 의협심과 기개를 능가하겠는가?' 뒤에 이어지는 상관태의 말은 그를 더욱 감동으로 이끌었다. "비록 미약한 힘에 불과하지만 사대세가는 이렇듯 함께 뭉친 것이오. 다행히도 뜻있는 정도인들이 협력해 주어 향후의 전망도 그리 어둡지만은 않소." "훌륭하십니다. 소생, 여러분의 의기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기분입니다." 이것은 엽고운의 진심이었다. 그런데 이를 대하는 상관태의 반응은 참으로 묘했다. 그가 노안에서 빛을


뿌리며 쏟아낸 말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우리가 엽소협에게 바라는 것은 그런 치하가 아니오. 정도의 협웅들을 이끌어 줄 참다운 지도자를 요하오." 엽고운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아까도 말했듯 노부는 누차에 걸쳐 엽공자의 비범한 안목, 무불통지의 학문과 지혜 등을 확인했소. 그리고 언제부터인가는 엽공자를 우리들 협의맹, 즉 단혈맹(丹血盟)의 군사(軍師)로 초빙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소이다." 엽고운은 눈을 크게 부릅뜬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러한 그의 눈에 상관태가 나머지 세 노인과 뭔가 무언의 대화를 주고 받는 광경이 들어왔다. 그 직후, 상관태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또 바뀌었소이다." 말을 마친 그는 느닷없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더니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를 따라 세 노인도 똑같은 행동을 보였다. 엽고운은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아니! 여러분,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상관태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간절하게 말했다. "엽소협, 부디 정도무림을 구해 주시오." 엽고운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그것이 지금 소생에게 하시는 말씀이 맞습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황룡신장 도육천이 나섰다. "초절한 지혜도 그렇거니와 엽소협의 무공은 우리 네 늙은이들을 요지부동으로 묶어 버렸소. 이제 그 결정이 번복되는 일은 없을 것이외다. 엽소협처럼 문무(文武)를 겸전한 인물을 어디 가서 또 만나겠소이까? 청컨대 사양치 말고 단혈맹의 맹주(盟主)가 되어 당세의 환란을 타개해 주시오" 엽고운은 안색이 굳은 채 침중하게 대꾸했다. "소생, 아직은 너무도 미약합니다. 그 말씀은......." 천수환로 당백문이 강하게 그 말을 받아쳤다. "노부는 스스로의 눈을 확신하오. 소협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이 일장의 혈겁을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소." "소생은......." 격동에 찬 상관태의 음성이 다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소협! 이 일은 전 중원무림의 사활이 걸린 문제요. 소협도 중원에서 난 이상 결코 좌시해서는 아니되오." "그렇소이다, 소협." "단혈맹을 이끌어 주시오." 사대세가의 가주들은 일제히 머리를 방바닥에 찧었다. "여, 여러분......!" 엽고운은 그야말로 몸둘 바를 몰랐다. 사대세가의 가주란 어떤 신분인가? 무림의 명숙으로서 신망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이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약관의 청년에게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실로 하늘도 감동할 일이었다. 엽고운인들 그들의 숭고한 정신에 굴복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마침내 그도 격동하여 부르짖기에 이르렀다. '더 이상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이런 인물들과 함께 이 땅 위에 의혈(義血)을 뿌릴 수 있다면 설사 이후로 하늘이 무너진다 한들 두렵지 않으리라.' 엽고운의 무릎 역시 네 노인을 향해 서서히 꺾였다.


"소생, 감히 여러분의 뜻에 동참하겠습니다." 네 명의 노인은 이구동성으로 힘찬 외침을 발했다. "사로(四老), 맹주를 알현하오이다!" 엽고운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곧 그는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사로 여러분, 일어서시오." 그 말에 네 가주, 즉 단혈맹의 사로를 자처함으로써 자신들을 낮추어 버린 네 노인이 비로소 허리를 펴며 일어섰다. "감사하오이다, 맹주." 이윽고 극적으로 일심동체를 이룬 그들은 다시 탁자에 둘러 앉았다. 엽고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러분께선 소생의 사문에 대해 알고 계시오?" 단혈사로(丹血四老)는 모두 기대감이 충만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엽고운은 그들의 시선을 느끼며 담담히 말했다. "소생은 바로 남천신문의 제십칠대 문주요." "오오!" 단혈사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상관태의 부르짖음이 그들의 심정을 이렇게 대변하고 있었다. "오오, 하늘이여! 풍운만변의 무림에서 너무 오래 산 것을 탓했건만, 노부에게 과연 이런 날이 올 줄이야! 한때 무림의 구성(求星)이었으면서도 신비에 가리워져 있던 남천신문의 문주를 이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다니!" 실제로 혼세팔마로부터 근 천 년에 걸쳐 중원무림을 지켜온 남천신문이다. 따라서 단혈사로의 얼굴에는 미래에 대한 흥분과 안도가 동시에 어렸다. 그 사이, 천화신군 제갈호의 눈에서 잠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물론 감격해있는 표정에 가리워져 그것은 누구도 눈치챌 수가 없었다. 엽고운과 단혈사로는 밤이 새도록 계속 밀담을 나누었다. 그것은 주로 북혈마궁을 위시하여 황교, 홍교와 대항하기 위한 세부적인 계획들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혈사로는 엽고운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의 기지나 발상 등이 기대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탁월한 선택을 두고 매우 흡족해 했다. 엽고운은 긴 얘기를 마친 다음 몇 가지 당부를 했다. 그 중에는 강서(江西)의 영락루로 천무독을 찾아가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감천학의 당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엽고운은 단혈맹의 맹주로서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았다. 그러므로 사적인 일 정도는 적당히 위임할 대상이 필요했고 이 점은 단혈사로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사항이었다. 요컨대 새로운 맹주와 그를 신봉하는 네 노인은 이런 면까지도 쉽게 의기가 투합된 것이다. 그들 모두는 날이 환히 밝도록 대화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무튼 이로써 무림에 정과 사의 대혈전은 그 서막을 올렸다. 단혈맹을 중심으로 한 정도무림이 마침내 폭풍의 주역이 되어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눈부신 태양이 대지 위로 불끈 치솟았다. 이와 함께 새 출발을 알리듯 웅장한 금창신보의 문을 나서는 일 기의 인마(人馬)가 있었다. 눈부신 백마에 올라타고 있는 헌헌미장부, 다름 아닌 엽고운이었다. 그러나 엽고운은 이제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천하 정도인들의 사활을 한 몸에 짊어진 단혈맹의 초대(初代) 맹주인 것이다. 금창신보를 나서는 엽고운의 뇌리에는 여러 가지 상념들이 얽혀 있었다. 또한 고독이 잠식해 가던 그의 가슴 속에서는 원대한 포부과 야망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백마는 힘차게 네 발굽을 놓으며 떠오르는 태양의 그 찬란한 빛 속으로 달려들었다.


제 16 장·재회(再會) 1 ① 항주(抗州) 진회하(秦淮河). 이른바 중원 최대의 화류향(花柳鄕)이다. 사나이라면 누구든 평생에 한 번쯤은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라는 말이다. 천하의 미녀란 미녀는 다 모인 듯한 홍등가가 있고 호사스런 귀공자들이 활보하며 은자를 물 쓰듯 한다. 진회하의 강변에 떠있는 수많은 유람선에서는 기녀들의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누가 말했던가? 비록 죽은 귀신일망정 풍류귀(風流鬼)만은 아름답다고. 진회하는 밤과 낮이 따로 없다. 소위 불야성이라는 미명 하에 명문귀족들이나 한량, 호방한 기질을 가진 무사 등의 여러 부류를 상대로 환락을 제공할 뿐이다. 그리하여 항주의 남쪽인 이 하변(河邊)은 풍악과 가무 소리로 인해 늘상 들뜬 분위기에 젖어 흥청거리기 마련이다. 신록이 짙어가는 유월. 진회하에는 화류의 지분 냄새가 더욱 짙어졌다. 하나의 명물이 생겨났기 때문으로 그것은 이 지역의 특성상 한 명의 명기(名妓)를 이르는 말이었다. 취접자홍(翠蝶紫紅). 사람들은 그녀를 모두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취접자홍의 내력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진회하에 온 것은 불과 일 년 전이었다. 거꾸로 말하자면 꼭 일 년 만에 항주 제일의 명기로 급부상된 것이었다. 꽃과 달이 무색할 정도의 미색과 더불어 시서화금기(詩書畵琴棋)에 능통하다는 여인, 뭇 귀공자와 풍류남아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는 여인이 바로 이 취접자홍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접근하여 술자리를 한 번 갖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만큼 취접자홍은 콧대 높은 기녀였다. 설사 왕후장상이 부른다 해도 그녀는 가볍게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여아선루(女兒仙褸). 진회하의 흔하디 흔한 기루(妓樓) 중 하나다. 그런데 최근 들어 항주 최고의 명소가 되었다. 그것은 바로 취접자홍이 이곳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항주 내의 번화한 거리. 오가는 행인들 중에는 호화로운 차림새의 풍류공자들이 숱하게 많았다. 그러나 그들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영준비범한 한 미청년이 나타났다. 그는 항주의 서문(西門)으로부터 한 필의 눈부신 백마를 타고 입성했다. 반안이나 송옥과 견줄 만큼 빼어난 용모, 게다가 눈에서는 부드럽고 우아한 기질이 은은히 묻어나왔다. 피부는 여인보다 더 깨끗했으며 체격 또한 미끈했다. 특히 말고삐를 쥐고 있는 손은 마치 조작품인 양 섬세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바로 엽고운이었다. 엽고운은 그답지 않게 무척이나 화려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백색 문사의를 입고 머리에 유생건(儒生巾)을 둘렀는데 두건의 중심에는 취록색의 비취가 장식되어 있었다. 허리에 두른 옥대(玉帶)도 마찬가지였다. 한가운데가 금으로 번쩍번쩍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심지어 신발에도 보옥이 박혀 있는가 하면 말안장까지도 금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실로 이같은 차림새는 왕후장상이 아닌 이상 웬만한 공자귀인들도 갖추기 힘든 것이었다. 게다가 엽고운은 지금 오른손에 새의 깃털로 된 학선을 쥔 채 유유히 흔들고 있었다. 이를테면 시선을 끌 만한 요소는 전부 구비한 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엽고운은 항주에 들어서자마자 작은 소요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람들마다 그의 모습을 보고는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모두 찬탄과 선망이 어린 눈으로 몇 번이고 돌아다 보았다.


개중에서 여인들은 특히 더했다. 하나같이 엽고운의 풍모에 이끌려 넋을 잃고 마는 것이었다. '아! 멋진 분, 대체 저 분은 어느 댁의 공자님이실까?' 여인들의 얼굴에서 읽히는 읊조림이란 주로 이런 것들이었다.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엽고운은 내심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쯧! 광대가 따로 없군. 목적하는 바가 따로 있지 않은 한 이 따위 놀음은 두 번 다시 할 짓이 아니로구나.' 이것이 바로 엽고운의 온화한(?) 미소 뒤에 숨어 있는 진심이었다. 와중에서 그는 자신이 말했던 그 목적이란 것을 상기했다. '취접자홍.......' 엽고운의 가슴이 불현듯 소리없는 진동을 일으켰다. '금마별부에서 영제의 휘하에 있던 무영사비(無影四秘), 그 중 막내인 취접 조소아의 다른 이름이 자홍이었다. 그것을 그대로 연결하면 곧 취접자홍이 아닌가?' 그는 천진난만하던 조소아의 얼굴을 자연스럽게 뇌리에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겠지. 우연일 것이다. 그녀가 금마별부에서 살아 나왔다는 것도 믿기 힘든 일이며, 또한 그 순수한 소녀가 굳이 기루에 몸을 담을 리도 없지 않은가?' 그러다 문득 엽고운은 거리가 혼잡한 것을 의식했다. 역시 이런 거리에서 말을 타고 간다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었다. 엽고운은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인파를 헤치며 진회하 쪽으로 향했다. 그의 시야에 오순 가량의 두 늙은이가 들어온 것은 이때였다. 그들은 각기 황의와 흑의를 입고 있었는데 두 사람 다 몹시도 음침한 인상이었다. 또한 눈빛이 극히 예리해 일견하기에도 절정급의 고수들로 보였다. 그들은 인파 속으로부터 교묘한 몸놀림으로 다가오더니 엽고운과 부딪치려 했다. 그것이 고의적인 행동이라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엽고운은 가볍게 발을 놀려 부딪쳐 오는 두 노인을 피해냈다. 그 바람에 말이 놀랐는지 울음소리를 냈다. 히히힝--! "대체 당신들은......!" 엽고운은 눈살을 찌푸리며 뭐라 입을 열려 했다. 그러자 두 노인은 의외로 그에게 황급히 사과를 했다. "아! 실례했소이다, 공자." 이렇게 되고 보니 엽고운으로서는 그만 할 말이 없어졌다. 그는 두 노인이 자신을 아래 위로 훑어 보는 것을 느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끄덕여 주어야 했다. "괜찮소이다. 복잡한 길에서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오." 엽고운은 그대로 그들을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사라지자 두 노인 중 한 명이 다른 노인의 귀에 대고 나직히 속삭였다. "틀림없다. 방금 전에 보았던 그 자가 바로 남천신문의 마지막 후예라는 엽고운이다. 삼호(三號)가 비밀리에 보고한 바에 의하면 그 자는 단혈맹의 맹주이기도 하다." 나머지 한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이다. 어서 이 사실을 본궁에 통지해야 하오." 두 노인은 즉시 그곳을 벗어나 인적이 없는 골목으로 숨어 들어갔다. 한 노인이 급히 옷자락을 찢어 무엇인가를 썼다. 그러자 다른 노인은 품 속에서 한 마리의 비둘기를 꺼냈다. 그것은 놀랍게도 살아있는 비둘기였다. 이어 그들은 천조각을 비둘기 다리에 묶고는 급히 하늘을 향해 날려 보냈다. 푸드득--! 비둘기가 막 삼 장 쯤 떠올랐을 때였다.


끄악! 듣기에도 애처로운 비명이 울렸다. 안타깝게도 비둘기는 두 조각으로 잘린 채 피비를 뿌리며 추락하고 있었다. "어떤 놈이냐?" 두 노인은 눈에서 흉광(兇光)을 뿜으며 외쳤다. 그 순간, 그들의 눈 앞에 한 인물이 마치 환상처럼 떨어져 내렸다. 갈색 마의를 걸치고 묵도(墨刀)를 허리춤에 꽂은 괴장한, 바로 초객이었다. 늘 그래왔듯 그의 전신에서는 예외없이 비밀스러운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겨 나왔다. 두 노인은 그 강렬한 살기로 인해 뒤로 주춤 물러났다. "너, 너는 누구냐?" 초객은 얼굴에 난 도상을 꿈틀거리며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나는 아까 너희들이 본 그 자의 일에 다른 놈들이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이다." 그 말에 두 노인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찰나적으로 자신감이 떠올랐다. 합력의 의지가 그들 두 사람의 용기를 회복시켜 준 것이다. 오른쪽 노인이 자못 거만하게 외쳤다. "네 놈은 우리가 누군지 알기나 하느냐?" 초객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알고 싶지도 없다. 없애면 그뿐이다." 이번에는 왼쪽의 노인이 나섰다. "애송이 놈!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감히 북혈마궁을 건드리려 하다니." "북혈마궁!" 초객의 안색이 처음으로 미미하게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자 왼쪽의 노인이 득의를 보이며 말했다. "우리는 북혈마궁의 십혈 중 두 명이다." 그러나 초객은 이내 살벌한 웃음으로 그 말을 받았다. "흐흐... 탁무군, 그 자가 이제는 중원까지 노리는가?" 오른쪽 노인이 대번에 안면을 굳혔다. "닥쳐라! 네가 궁주님을 능멸하다니,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 두 노인은 거의 동시에 쌍장을 펼치며 초객을 공격했다. 위이잉--! 그들의 장력은 정녕 바위를 부수고 금석(金石)을 쪼갤 듯했다. 더구나 급습이었기 때문에 천하의 어떤 고수라도 이를 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반면에 초객은 그 공격을 피하려고도 막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도에 슬쩍 한 번 손을 댔을 뿐이었다. "으헉--!" 두 마디의 참담한 비명이 이어졌다. 그 비명의 주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두 노인이었다. 그들은 상대가 언제 칼을 뽑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단지 무엇인가 눈 앞에서 번쩍 하는, 그것이 그들이 본 것의 전부였다. 두 노인은 눈을 부릅뜬 채 이구동성으로 부르짖었다. "무... 서울 정도로 빠른... 도법... 이다......." 쿵! 털썩....... 그들은 쓰러지는 것만은 선후로 구별을 지었다. 그들의 가슴에서 차례로 피화살이 치솟았다. 하지만 벌써 초객은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린채 그 나름의 의혹에 사로잡혀 있었다. '도대체 십리향을 풍기는 그 자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어째서 북혈마궁에서까지 놈을 쫓는지......?'


북혈마궁은 그 마수를 중원 곳곳에 뻗쳐가고 있었다. 때로는 은밀하게, 또 때로는 공개적으로 대륙을 장악해 나갔다. 그들은 굴종하는 자는 거두되 반항하는 자는 가차없이 그 삼족(三族)에 이르기까지 피로 처단했다. 이로 인해 무림은 비로소 혈겁의 실체를 느끼며 공포에 휩싸였다. 초객의 검은 동자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감천학이기도 하며 동시에 천무독이기도 한 자! 후후후... 그러나 조사한 바에 의하면 놈은 엽고운이라는 자다.' 그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엽고운, 그 자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무공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른다. 그가 왜 감천학과 천무독의 행세를 하며 은환인과 동환인들을 죽였을까?' 초객은 곧이어 이런 단정을 내렸다. '아무래도 좋다. 최소한 놈은 천무독과 관계가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는 땅에 떨어져 죽은 비둘기를 주워 다리에 묶인 천조각을 끌러 보았다. <항주(抗州)에서 남(南) 발견. - 혈사(血四).> 초객은 천을 양 손바닥 사이에 넣고 마주 비볐다. 스스스....... 천은 즉시 가루로 화해 사라져 버렸다. 그 뒤로 그의 음산한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엽고운, 어쨌든 항주에서 네 목숨은 끝난다. 너는 천무독을 위한 두번째 제물이 될 것이다." 휙--! 초객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꺼져 버렸다. ② 여아선루. 취접자홍이 있다는 호화롭기 그지없는 기루였다. 장장 팔천여 평에 걸쳐 높다란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으며 그 안으로는 층층누각과 아름다운 창문들이 보였다. 화려한 대문의 양쪽 기둥에는 춘락(春樂)이라 쓰여진 홍등이 걸려 있었다. 그 앞에서 엽고운은 말을 멈추었다. 그러자 대문이 활짝 열리더니 몇 명의 장한이 뛰어나와 말고삐를 잡았다. "헤헤... 공자대인, 어서 오십시오." 그 중 비교적 옷차림이 깨끗한 중년장한이 인사했다. "너희들은 본 공자가 이곳으로 올 줄을 어떻게 알았느냐?" 엽고운의 물음에 중년장한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헤헤... 공자대인같은 귀인이 이 여아선루가 아니면 무엇하러 진���하에 오셨겠습니까? 당연히 알아서 모셔얍죠." 엽고운은 빙긋 웃었다. "그대는 이런 쪽에 경험이 풍부한 것 같군." "헤헤... 물론입죠. 여기서 잔뼈가 굵은 몸입지요. 이곳의 일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엽고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어서 안으로 안내하게." "네,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장한은 연신 허리를 굽신거렸다.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게 구는데 반해 왠일인지 그는 발길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으음?' 엽고운은 내심 의아했으나 잠시 뒤에는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는 곧 품 속을 뒤지더니 열냥에


해당하는 은덩이를 장한에게 던져 주었다. "아!" 그제서야 장한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 이거 황송해서....... 어서 드십시오! 공자대인, 귀인, 아니 젊은 어르신." "후후... 잘하면 그대는 나를 아버지라고도 부르겠군?" "예? 헤헤... 어려울 것도 없습지요. 아버님, 어서 드십시오." "하하핫......." 엽고운은 기어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심이야 어떻든 이러한 그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영락없는 풍류공자였다. 잠시 후. 엽고운은 여아선루의 향청(香廳)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에서는 얼굴에 분을 두껍게 바른 중년부인이 그를 맞았다. 그녀 역시 엽고운의 용모와 차림새를 보고는 민망할 정도로 비굴하게 굴었다. "호호호... 환영합니다, 공자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방문이 열리더니 기녀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호호호호... 공자님......." 까르륵거리는 웃음 소리, 코를 찌르는 지분 냄새 등 엽고운은 대번에 머리가 어지럽고 역겨운 느낌이 일었다. 애시당초 이런 상황하고는 체질이 맞지 않는 그였다. 이윽고 술상이 준비되었다. 대여섯 명의 기녀들이 엽고운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온갖 교태와 추파를 보내며 환심을 사려 드는 것이었다. 이에 엽고운은 단지 눈살을 가볍게 찌푸릴 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중년부인이 염려스러운 듯 물었다. "공자, 이들이 마음에 안 드시나요?" "여기에 속해 있는 기녀들에게도 등급이 있소?" "호호... 물론이죠. 오방(五房)과 삼향(三香), 그리고 일교(一嬌)가 또 있어요." 엽고운이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떻게 분류되는 것이오?" "호호호... 오방은 말 그대로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지며 일반적인 손님을 받는 아이들입니다. 그러나 오방 중 일방의 아이를 사 려 해도 족히 은자 오십 냥은 써야 하죠." 엽고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다음은?" 중년부인은 그를 향해 눈웃음을 쳤다. "그 위로 삼향이 있어요. 이곳의 아이들은 전부 명문 출신으로 특별히 명문대가(名門大家)에도 능통합니다." "가격은?" "삼향은 은자 백 냥, 이향은 이백 냥, 일향은 삼백 냥이지요." 엽고운은 씨익 웃었다. "일교는?" 중년부인은 즉각 대답하지 못하고 안색을 굳혔다. 그녀의 내심에서는 이런 부르짖음이 일고 있었다. '아이고! 내가 오늘 재신을 만났나 보구나.' 이어 그녀는 애교가 찰찰 넘치는 음성으로 말했다. "호호호... 일교는 이 여아선루의 상징이랍니다. 바로 취접자홍이 일교지요. 그러나......." 중년부인은 짐짓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라니?" "아니, 그게 아니라......." 엽고운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확실히 하시오." 그의 자신있는 어투에 중년부인은 얼굴을 활짝 폈다. "호호... 역시 공자님은 호기 있는 분이시네요. 호호호......." "그러니까 빨리 말해 보시오." "호호호... 그것이... 가격이 좀 비싸서... 호호호... 물론 공자님같은 분께야 아무 것도 아니시겠지만요." 엽고운이 물었다. "얼마를 내야 하오?" 중년부인의 눈은 그 순간 탐욕으로 반짝 빛났다. '호호... 단단히 걸려들었구나, 순진한 공자님!' 그녀는 짐짓 정색을 하며 말했다. "취접자홍을 청하시려면 은자 천 냥을 내셔야 해요." 엽고운의 안색이 일변했다. "천 냥이라고?" 은자 천 냥이라면 한 사람이 평생을 놀고 먹을 수 있을 뿐더러 한참을 써도 다 못 쓰는 액수였다. 따라서 아무리 천하명기라 해도 은자 천 냥을 지불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중년부인은 그의 놀란 표정에 거북한 웃음을 흘렸다. "호호... 워낙 부담스러운 액수이기는 하지요." 그러나 엽고운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은 더욱 놀라왔다. "아니, 취접자홍이 고작 은자 천 냥 짜리라는 말이오?" "네?" 중년부인이 되려 아연해졌다. 그런 그녀의 앞에 엽고운은 한 알의 묘안옥(苗眼玉)을 꺼내 놓았다. 그것의 가치로 치자면 적게 잡아도 은자 만 냥은 족히 되었다. "자! 취접자홍을 불러 주시오." "아! 네, 네......." 중년부인은 희색이 만면하여 날 듯이 밖으로 나갔다. 호사의 극을 이룬 밤. 엽고운이 안내된 곳은 마치 황궁을 방불케 하는 전각이었다. 방 안의 장식도 온통 사치스럽기 그지 없었다. 묘강산 양탄자가 바닥에 깔려 있었으며 휘장은 비단이요, 심지어 기둥의 조각에도 금물이 입혀져 있었다. 엽고운은 지금 호피를 두른 커다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있었다. 그는 방문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과연 취접자홍이 조소아일까?' 기대감과 불안이 그의 심중에서 무수히 교차되었다. 그러나 시간이란 의례 기다릴수록 더디게 가는 법이다. '후후... 내가 이런 일로 조급해 하다니.......' 엽고운은 고소를 짓는 한편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그의 무학으로 이르자면 가히 대종사(大宗師)의 경지에 올라 있다. 그러므로 일단 작정하자 그는 금세 명경지수와도 같은 고요와 평정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마침내 그의 귓전으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왔군.' 사르르....... 방문이 열리더니 한 가닥 방향이 코 끝에 전해졌다. 안으로 들어서는 여인은 자의(紫衣)를 화려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머리는 궁장으로 틀어올려 비취와 홍옥으로 장식했다. 몸매는 버들가지인 양 유연했으며 사뿐히 걷는 발걸음은 흡사 꽃잎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단순히 교족을 옮기는 동작에도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응집된 듯한 미녀다. 뿐만 아니라 전신에서는 은은한 품위까지도 넘치고 있었다. '과연 대단한 미태로구나.' 엽고운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고개를 깊숙히 숙이고 있어 그 여인의 용모까지는 아직 알아볼 수가 없었다. ③ 엽고운의 눈이 탐색이라도 하듯 미녀의 자태를 훑어갔다. '설마.......' 취접자홍은 그의 면전에 이르자 공손히 큰절을 올렸다. 그녀는 이어 꾀꼬리같은 음성으로 인사했다. "취접자홍이 공자님을 뵙습니다." 그 순간, 엽고운은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분명 그 음성은 과거 한때 그의 청각을 스쳐 지났던 것이었다. '조소아!' 엽고운은 더 이상 자제할 아무런 이유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그의 입이 열리며 탄식과도 같은 음성이 흘러 나왔다. "소아, 정녕 네가 틀림없구나." "아!" 취접자홍의 가녀린 어깨가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반짝 쳐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시야에 가득 들어온 것은 바로 연민에 휩싸인 엽고운의 얼굴이었다. "다, 당신은......." "그렇다. 나다, 소아." 두 사람은 각기 틀린 시선으로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과연 취접자홍은 엽고운의 짐작대로 틀림없는 취접 조소아였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과거 금마별부에 있을 때와는 매우 달라 보였다. 훨씬 성숙해져 있다고나 할까? 봉긋한 앞가슴, 잘록한 허리, 풍만한 선을 이룬 둔부 등 완연한 성숙미를 보이고 있었다. 분위기도 이제는 그저 만만하게 대할 수 있는 소녀의 그것이 아니었다. 취접 조소아의 격동 어린 음성이 이어졌다. "엽공자님......." 그러나 그 한 마디가 전부였다. 잠시 뭐라 정의하기 힘든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한참 후에야 엽고운이 입을 열었다. "살아 있었군." 그 말에 조소아는 당장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는 듯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뇨, 소첩은 조소아가 아니에요. 단지 진회하의 기녀, 취접자홍일 뿐이에요." 엽고운은 멈칫 했으나 곧 차분하게 말했다. "소아, 많이 변했구나." 조소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다가 다시 번쩍 드는 순간,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래요, 변했어요. 과거의 조소아는 죽었어요. 지금 있는 것은 오직 여아선루의 일등 기녀예요." "소아!" "뭐죠? 저를 대하시는 그 눈빛은? 기루에 오셨으니 공자님께선 흠뻑 즐기고 가시면 그만 아닌가요?" 엽고운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망연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온기를 품은 그의 손길이 가만히 다가가 그녀의 어깨 위에 얹혔다. "소아, 이해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그간 고초가 심했나 보구나. 어떻든......." 그는 격정을 억누르려는 듯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나는 무척 기쁘다. 단지 네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말이다." 엽고운이 당시 금마별부 내에서 구양월미 외에 따로 호감을 품은 소녀가 있다면 바로 조소아였다. 애초 무영사비(無影四秘)는 영제의 수하이면서도 각기 나름대로 깨끗한 심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점을 모르지 않았던 엽고운은 그녀들에 대한 감정이 각별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조소아에게는 은연중 많은 관심을 기울인 바 있었다. 그것은 오누이와 같은 친근함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취접 조소아. 그녀는 엽고운에게 어깨를 잡힌 채 굳어버린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변해갔다. 오기를 불러일으키던 경계심이 점차 눈녹 듯 풀려버린 것이다. "흑! 공자님......." 마침내 조소아는 엽고운의 품 안으로 달려 들었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더니 서럽게 흐느껴 울었다. 눈물이 흘러 넘쳐 금세 엽고운의 앞섶을 적셨다. "실은... 보고 싶었어요. 미칠 듯 외로워도 다른 사람은 생각이 안 나는데 유독 공자님만은......." "소아......." 엽고운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가슴에 뭉클 전해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 자체라기보다는 그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그리움이었다. "나도 아마... 네가 보고 싶었던가 보구나." 지순하기만 했던 두 사람의 감정도 세월과 더불어 우여곡절을 거치자 변모한 것이다. 이 순간 엽고운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스스로의 감정이 애정의 색채를 띠고 있다는 것을. "흑흑... 공자님......." 엽고운은 그녀의 등을 쓸었다. "그래, 실컷 울어라. 네 마음이 풀릴 때까지......." 그 말에 조소아는 정말로 격하게, 그리고 오랫 동안 오열했다. 아울러 그녀는 자신이 이토록 마음 놓고 울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격해 마지 않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조소아의 흐느낌도 차츰 잦아들었다. 그녀는 마치 어미 품에 안긴 어린 새처럼 평화로움을 느끼는 가운데 입을 열었다. "꼭 일 년 전이군요. 금마별부 비극의 날, 저는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탈출을 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 후로... 저는 무공을 상실하고 말았어요. 이젠... 폐인... 이나 다름이 없는 거죠......." 조소아의 음성은 어느덧 떨려 나오고 있었다. "몇 번이고... 죽으려고 했어요. 더 이상 살아가는 일에 대해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허나, 그렇지만......." "소아." 엽고운은 낮게 탄식하며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조소아의 말은 계속되었다. "세 언니의 비참한 처지를 생각하면... 전 도저히... 도저히 죽을 수가 없었어요."


엽고운은 흠칫 놀랐다. "그녀들이... 살아 있느냐?" 조소아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래요. 하지만 차라리 죽은 것만 못해요. 흑......." 그녀는 다시금 울음보를 터뜨렸다. 엽고운은 그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는 정색을 하며 물었다. "그녀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역시 이곳에....... 지금까지 줄곧 제가 모시고 있어요." 엽고운은 말했다. "그녀들을 만나 보겠다." 그러자 조소아가 질겁을 하며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안돼요! 언니들이 만약 지금 처지로 공자님을 대한다면 아마 충격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도 몰라요." 엽고운은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그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단 말이냐?" 조소아는 눈물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금마별부에 있던 다른 인물들은 어찌 되었는지 아느냐?" "몰라요. 저희들끼리 뭉쳐서 빠져 나왔기 때문에 거기까지는 미처 살필 겨를이 없었어요." 엽고운은 생각을 정리하는 듯 잠시 침묵했다. 한참 후에야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소아, 이제 나를 만났으니 이 생활은 관두어라." 조소아의 고운 안면이 일순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아니에요. 호의는 감사하지만 저는 이곳에서 언니들과 살겠어요. 저, 그 동안 꽤 강해졌어요." 엽고운의 어조가 강경해졌다. "안 된다! 그래서는." 조소아는 갑자기 아연한 표정이 되어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건 왜죠? 공자님께서 무엇 때문에 절더러......." 그녀는 격정이 차올랐는지 말하다 말고 제풀에 뚝 끊었다. 그것은 그녀의 고개가 또 한 번 아래로 푹 꺾이는 찰나였다. "오늘... 제가 최선을 다해 흥을 돋구어 드리겠어요. 그러니 내일은 떠나세요. 저 따위는 깨끗이 잊으시고요." 엽고운은 차라리 실소가 터져나왔다. "소아, 네가 나를 어찌 보고 이러는지 모르겠구나. 솔직히 나는 무력하다. 그래서 금마별부가 그 지경이 되도록 아무런 손도 쓰지 못했었다. 그러나 최소한 네 신상에 관한 것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그의 음성에는 한 가닥 자조마저 깃들어 있었다. "공자님......." 조소아가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또다시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의미가 다른 것이었다. "제가... 제가 오히려 공자님을 괴롭혀 드렸군요. 죄송... 으흑!"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소아, 이렇게 계속 울기만 할 테냐?" 엽고운도 이번에는 말리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문 밖에서 갑자기 힘차고도 격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떤 놈이 그녀를 울리느냐?" 펑--! 문짝이 부서질 듯 열리며 한 중년거한이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자는 칠 척의 거구에 얼굴이 구리빛이었다. 게다가 턱까지 온통 구레나룻으로 뒤덮혀 용맹무쌍하게 보이는 인물이었다. 이에 반해 눈만은 마치 보석을 방불케 할 정도로 빛이 났다. 한눈에도 강한 내공의 소유자임을 느낄 수가 있었다. ④ "당신은 누구요?" 엽고운이 침착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자 조소아가 의외로 반색을 하며 그 사이에 끼어 들었다. "용대협!" 하지만 중년인은 그녀를 제껴놓고 엽고운을 향해 외쳤다. "이 용붕비(龍鵬飛)는 금전이나 권력을 믿고 제멋대로 날뛰는 놈들을 제일 증오한다! 내 오늘 네 놈에게 뜨거운 맛을 단단히 보여 주겠다." 만면에 살기를 띤 그를 보며 엽고운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조소아가 곁에서 다급히 그를 만류했다. "용대협! 그 무슨 오해의 말씀을......." 자칭 용붕비라 칭한 중년인은 연이어 우렁차게 말했다. "조낭자! 저런 녀석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소. 내가 뒷책임까지 다 질테니 낭자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오." 이 광경에 엽고운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쯧, 의협심은 쓸만한데 성격이 너무 급한 친구로군.' 그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받아라!" 용붕비가 괴이하게 왼손을 떨쳐왔기 때문이었다. 위이잉--! 웅후하면서도 예리한 경풍이 뻗어나왔다. 그것은 손을 찍는 것도, 후려치는 것도 아닌 별난 수법이었다. 그 사이, 엽고운의 안색이 미미한 변화를 드리웠다. 경풍이 밀려들자 그의 신형은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꺼져 버렸다. 스스스....... "엇!" 공세가 헛손질에 그치게 된 용붕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곧 몸을 홱 돌리며 웃음을 흘렸다. "흐흐... 제법 한 수 하는 놈이었구나!" 그가 재공격을 시도하려는 순간, 엽고운이 외쳤다. "잠깐! 손을 멈추시오." "엉?" 용붕비는 멈칫 했다. 그 앞에 다시 모습을 나타낸 엽고운이 사뭇 기이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당신은 그 추풍호백수(追風虎魄手)를 어디서 배웠소?" 용붕비는 크게 놀라 반문했다. "네, 네가 어찌 우리 사신문(四神門)의 무공을 아느냐?" 엽고운은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추풍호백수는 사신보(四神譜)라는 비급에 기재된 무공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제가 소유하고 있다가 내게 주었었지.' 그는 용붕비를 향해 물었다.


"귀하는 사신문의 인물이오?" "으음, 사신문....... 본문은... 벌써 오래 전에 없어졌다." 용붕비는 심중을 감추지 못하는 위인이었다. 따라서 말을 하는 동안 그가 어떤 기분이 되어가는지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럼 지금은?" 엽고운의 질문이 한층 날카로와지자 용붕비는 이마에서 땀까지 흘렸다. 그는 땀을 훔쳐내기 위해 소매를 이마로 가져갔다. '흐음?' 엽고운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용붕비의 오른손목에 채워진 금환(金環)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삼환회(三環會)!' 엽고운은 즉시 안색을 싸늘하게 굳혔다. "후후... 삼환회 소속이라는 말을 왜 못 하시오?" 용붕비는 그 말에 거대한 몸을 흠칫 떨었다. "네 놈이 그걸 어떻게?" 엽고운은 굳이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른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사신보가 금마별부로 흘러든 것은 벌써 천이백 년 전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신문의 전인(傳人)이 현존하고 있다니 놀랍구나. 그런데 어찌 하여 삼환회에는 가입한 것일까?' 엽고운의 얼굴은 어느새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너, 너는 누구냐?" 용붕비가 의혹에 찬 듯 물어왔으나 그는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삼환회라면 곱게 봐 넘겨 줄 수 없는 그가 아닌가? 한편. 사태가 이렇듯 험악하게 돌아가자 안절부절 못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조소아였다. 그녀는 양자의 대립 국면에서 한 마디도 끼어들지 못한 채 가슴을 졸여야 했다. '아! 어째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무림의 일이란 늘 그랬다. 어제의 친구가 하룻밤 자고 나니 세불양립의 원한 관계로 돌변해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진회하에서의 일 년 간은 조소아에게 이런 무림의 생리를 절로 깨닫게 해 주었다. 따라서 그녀는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한 채 다만 상황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소아의 기대는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엽고운의 싸늘한 음성이 그녀의 가슴에 육중하게 얹혀 왔다. "본인은 귀하와는 더 할 말이 없소. 또한 당신이 삼환회의 인물이라는 것을 안 이상 이대로 돌려보내 줄 수도 없소." 이 말을 듣고 얌전히 있을 용붕비가 아니었다. "애송이 놈! 내 오늘 너를 잡아 족치지 못한다면 성을 갈고 말겠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즉각 공격자세를 취했다. 양손은 교차시켜 뻗었으며 발은 여덟 팔자, 몸은 앞으로 구부렸다. 그것은 흡사 꿈틀거리는 용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엽고운은 짐짓 조소를 흘렸다. "후후... 등천용혼장(騰天龍魂掌), 그 정도로는 나를 상대하지 못할 거요." 용붕비는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아니, 어떻게 이 놈이 본문의 무공을 낱낱이 안단 말인가?' 마침내 보다 못한 조소아가 각기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용대협! 이게 무슨 짓이에요? 엽공자님, 제발....... 용대협은 좋은 분이에요. 제 말을 믿어 주세요." 엽고운은 무거운 음성으로 그 말을 받았다.


"소아, 이 일은 네가 상관할 바가 못 된다. 너도 이 자의 정체를 안다면 결코 나를 막지 못할 것이다." 용붕비는 움찔했으나 역시 침중하게 말했다. "조낭자, 저 놈의 말은 다 맞소.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나도 싸움을 그만둘 수는 없소." 조소아는 불현듯 몸을 가늘게 떨었다. "용대협, 당신이 어떤 분인가는 처음부터 개의치 않았어요. 단지 저는 지금 대협을 염려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오?" 조소아는 엽고운을 힐끗 보더니 말을 이었다. "용대협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절대로 엽공자님의 상대는 될 수가 없어요." 용붕비의 구리빛 안면이 마구 씰룩거렸다. "조낭자! 천하에서 내가 두려워할 자는 열 손가락을 넘지 못하오. 설마 하니 저 애송이 놈이 그 중에 들어 있다고는 믿을 수가 없소." 그는 급기야 쌍장을 기괴하게 뻗으며 엽고운을 공격했다. 위잉--! 쉭--! 날카롭고도 웅후한 경풍이 다섯 갈래로 뻗어 나갔다. "후후......." 엽고운은 냉소하며 몸을 빙글 돌렸다. 동시에 그는 품 속에서 한 자 길이의 벽옥소를 꺼내 휘둘렀다. 그것은 바로 감천학이 남긴 유물 중 하나였다. 파파팟--! 벽옥소는 단번에 수십 개의 환영을 그리며 믿기 어려울 정도로 조밀한 막을 펼쳐냈다. 그것은 남천신문의 독문검법인 천원무극생사절유검, 그 전 십오 식 중 활인제도십오검(活人濟度十五劍)이었다. 쏴아아--! 불과 한 자 길이의 벽옥소에서 그야말로 장강대하와도 같은 검풍이 쏟아져 나왔다. 퍼펑! 펑--! "윽!" 용붕비는 자신의 장력이 산산이 분산되는 것을 느끼며 뒤로 튕겨 나갔다. 뿐만 아니라 손목까지 시큰거려 오자 그는 안색이 크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실상 사신문의 무학도 절대 가볍게 볼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천신문의 초절한 검학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물론 용붕비가 이를 알 리 없었다. 아니, 설사 알았다 해도 인정할 수가 없는 그였다. 그는 곧 자신의 최대 무기인 천생의 신력(神力)과 용맹으로 연달아 장권을 날렸다. 위잉--! 펑! 펑! 엽곡운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큰소리 칠 만하구나. 이 자의 무공은 현 무림 사대세가의 가주들에 비해도 최소한 한 단계 위다.' 용붕비는 주작삼권(朱雀三卷)에 해당하는 비영주작권(飛影朱雀拳)과 현무사권(玄武四卷)의 태을현무장(太乙玄武掌) 등 사신문의 무공들을 고루 구사하고 있었다. 위잉--! 펑! 퍼펑--! 방 안은 삽시에 팽팽한 경풍의 소용돌이에 갇히고 말았다. 그바람에 조소아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 연신 뒤로 물러났다. 그러는 동안에도 엽고운은 제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쏴아! 쏴아--! 본시 활인제도십오검은 광명정대하면서도 무한한 내력을 품고 있어 여하한 공격인들 추호의 흔들림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우직한 거한 용붕비. 그는 내심 낙심천만이었다. 일신의 무학을 전부 다 펼치고도 상대를 격퇴시키지 못하자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그에 반해 천변만화하는 상대의 초식은 제대로 파악조차 할 재간이 없었다. 급기야 그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예상보다 훨씬 무서운 놈이다! 이 놈의 무공은 어쩌면 회주보다도 더 강한 것 같다.' 그가 멈칫거리자 엽고운의 무심한 음성이 떨어졌다. "다 공격했소? 그럼 이번에는 내 차례요." 츠츠츠--! 벽옥소로 전개하는 그의 검법이 크게 변했다. 전 십오식의 검초를 거꾸로 전개하는, 이른바 탕마사인십오검(蕩魔死引十五劍)을 펼친 것이었다. 파츳--! "헉!" 용붕비는 갑자기 눈 앞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상대의 초식에 휘말리자 기혈이 역류해 버린 것이다. 동시에 무형의 살기가 그의 전신요혈을 무섭게 압박해 왔다. "으헉......!" 용붕비는 그만 안색이 창백해지며 손발을 흐트러뜨렸다. 그로부터 그는 채 사오 초도 지나지 않아 무기력에 빠져 버렸다. 다음 순간, 용붕비는 목 부근이 뜨끔했다. '끝이다!' 대번에 상반신이 마비되며 맥이 탁 풀렸다. 그 찰나, 그는 십여 개의 벽옥소가 일시에 자신의 천령개로 떨어져 내리는 듯한 환상같은 장면을 보았다. 그야말로 절대절명의 위기였다. 용붕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안돼요--!" 조소아가 날카롭게 외치며 그의 앞으로 몸을 날렸다. 엽고운은 벽옥소가 그녀의 머리로 떨어지자 깜짝 놀라 몸을 후퇴시켰다. "소아! 이 무슨 짓이냐?" 그러자 조소아는 엽고운을 향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엽공자님! 이 분은 저희 네 자매에게는 생명의 은인이에요. 이 분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예요. 제발 소첩을 보아서라도 용서해 주세요." 용붕비는 눈을 번쩍 뜨더니 격하게 외쳤다. "비키시오! 조낭자, 나 용붕비는 죽을지언정 욕되게 살고 싶지는 않소." 이쯤 되자 엽고운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음, 그런 사연이 있었군. 하긴 처음부터 죽이기는 아까운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다. 더구나 삼환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덕행을 베풀 수 있는 정도라면 성품이 어떤 인물인지 알 것 같다.' 그는 선뜻 마음을 정하고 벽옥소를 품 속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달리 정중하게 포권했다. "용형, 피차에 손을 쓰는 짓은 관두기로 합시다. 누가 다치던 제일 슬퍼할 사람은 바로 여기, 죽어라고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취접자홍일 테니까." 그 말에 용붕비는 놀란 나머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머리로는 상대방이 이렇게 쉽게 마음을 돌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반면에 조소아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아울러 그녀는 행여라도 결정이 번복될까봐 급히 용붕비의 소매를 잡았다. "용대협! 빨리......."


그러나 그녀의 염려는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 용붕비는 체념한 듯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을 뿐 더 이상 기세를 높일 것 같지는 않았다. 놀라운 것은 그의 다음 동작이었다. 그 상태에서 무엇을 연구하는지 골똘해 있던 용붕비는 갑자기 엄숙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러더니 누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엽고운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용형......?" 아연해진 것은 비단 엽고운 만이 아니었다. 조소아도 할 말을 잃은 듯 멍한 얼굴로 용붕비를 응시했다. "용대협......." 하지만 용붕비의 태도는 더없이 진지했다. "소협! 졌소이다. 몸과 마음 다 합쳐서 말이오. 앞으로 나 용붕비는 소협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소." 엽고운이 그를 향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용대협, 그러지 말고 일어나시오. 우리 사나이들끼리 술이나 한 잔 멋지게 마셔 봅시다." 용붕비는 그 말대로 벌떡 일어나더니 공수했다. "좋소이다, 소협! 나 용붕비의 목숨은 이제부터 소협의 것이니 무슨 말인들 따르지 못하겠소이까?" 장내의 분위기는 이리하여 급전되었다. 취접 조소아도 얼굴을 활짝 펴더니 즉시 밖으로 달려나갔다. 잠시 후, 방 안에는 풍성한 주안상이 차려졌다. 제 17 장·재회(再會) 2 ① 엽고운과 용붕비, 그리고 취접 조소아. 세 남녀는 연신 술잔을 나누었다. 이렇듯 술이 몇 순배 오가자 분위기는 더욱 자연스러워졌다. 용붕비는 연달아 다섯 잔을 따로 더 마시더니 무겁게 물었다. "엽소협께서는 보아 하니 삼환회와 무슨 좋지 않은 감정이라도 있는 것 같던데, 이 용모(龍某)가 알면 안 되겠소이까?" 엽고운은 담담히 대답했다. "약간의 빚이 있소이다." 그 말에 용붕비는 안색이 변해 다시 물었다. "엽소협의 성은 정말로 엽씨(葉氏)가 맞소이까? 혹시... 옥면승풍(玉面昇風) 감천학이 아니신지......?" 엽고운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분명 엽씨 성을 가지고 있소. 감천학이 아니외다. 그러나 그와 관계는 있소이다." 그는 여전히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죽음을 당한 은환, 동환들도 잘 알고 있소. 사실 그들은 모두 내 손에 죽었소." 용붕비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소, 소협께선 그럼 천무독과 무슨 관계가......?" "그렇소. 그 분은 내 의형뻘 되시는 분이오." "아!" 용붕비는 탄식하더니 스스로 술을 따라 연거푸 넉 잔을 더 들이켰다. 그는 괴로운 듯 안면을 몹시도 씰룩였다. "이 용모는 비록 삼환회에 몸을 담고는 있지만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부끄러웠던 적이 많았소이다." 엽고운은 묵묵히 들었다. 때로는 침묵이 상대로 하여금 진실을 토로하게 하는데 유효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실은 나도 역시 삼환회주의 명을 받고 천무독을 잡기 위해 파견된 금환인이오. 그러나 그 명도 결코 탐탁치가 않았소이다. 그 이유는......."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과거 천무독과 나 용붕비가 친분이 두터웠었기 때문이외다."


'음, 그랬었군.' 엽고운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용형, 괜찮다면 내게 삼환회의 내력을 알려줄 수 있겠소?" 용붕비의 얼굴에 일순 갈등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정하는 데에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음성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후 입을 열었다. "삼환회에는 세 명의 회주가 있소이다. 그들은 각기 마환(魔環) 목령비(木靈非), 혈환(血環) 철우성(鐵雨星), 사환(死環) 영호전(令弧殿) 등이오. 그리고 그들의 무공은 가히 인간의 짐작으로는 헤아리기가 불가능할 정도요." 엽고운은 다소 침중하게 물었다. "만약 용형과 싸운다면 어느 정도요?" 용붕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십 초를 넘기지 못할 것이오." 엽고운의 안색이 처음으로 큰 변화를 보였다. '용붕비의 무공은 현 무림에서 최절정급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을 상대로는 십 초도 못 넘긴다니.......' 용붕비가 다시 말했다. "세 명의 회주 외에도 오 명의 금환인(金環人), 십팔은환대(十八銀環隊), 칠십이동환대(七十二銅環隊)가 있소." "으음!" "은환 정도의 인물이라면 강호에서 각 파 영수에 못지 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소. 아마도 대충 사대세가와 버금갈 것이오." 엽고운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용붕비가 다시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말을 이었다. "일반적인 고수들로는 철환대(鐵環隊)가 있소. 하지만 그들은 그 숫자가 무려 수백 명에 달하고 있소." "으음!" 용붕비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 외에도 삼환회에는 제삼(第三)의 세력이 있소이다." "제삼이라니......?" "그들은 이른바 삼환팔령(三環八靈)이라고 하는 여덟 명의 괴인들이오." "팔령?" 용붕비는 눈을 감으며 천천히 설명했다. "팔령은 실로 괴이하고 신비하기 이를데 없는 낭인(浪人)들이오. 그들은......." 용붕비는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팔령이란 다음과 같다. 공야( 爺), 초객(草客), 산백(刪佰), 불귀(不歸), 염미(艶美), 잠룡(潛龍), 사령(死靈), 무혼(無魂) 등으로 그들은 정녕 신비하기 짝이 없는 괴인들이었다. 공야. 그를 알고자 한다면 낫을 쓰는 촌로(村老)의 모습을 연상하면 되었다. 나이는 칠십이 세, 거처도 항상 불분명했다. 그러나 삼환회에 위기가 닥쳤을 때는 다르다. 그는 어느 곳에서인지 귀신처럼 나타나 예의 낫으로 적의 목을 찍는다. 초객. 그는 도귀(刀鬼)다. 평생 한 자루의 묵도를 차고 다녔으며 천하 모든 도법 중에서도 쾌도식만을 취해 자신의 독창적인 무학으로 삼았다. 그는 전문 살수였다. 산백.


그는 늙었으며 의원(醫院)이었다. 얼굴은 인자하기 그지 없었으나 마음은 독랄하다. 독의 달인으로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게끔 상대를 독살시킨다. 불귀. 그는 체격이 우람한 거한(巨漢)으로 도끼를 무기로 쓴다. 오직 도끼를 휘두르는 것 외에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는다. 평상시에도 산중에서 나무를 찍어 넘기며 살고 있는 괴인이다. 염미. 팔령 중 유일한 여인(女人)이다. 본시 절색의 미녀인데 때로는 기녀로, 때로는 여염집 규수로, 또 때로는 순박한 산골처녀로 변한다. 그리하여 그녀의 미혼향과 무서운 손톱 아래 수백 명에 이르는 영웅호걸이 죽었다. 잠룡. 그는 준수하고 멋진 미청년이다. 연검을 무기로 쓰며 언제 보아도 귀공자나 풍류남아로 보였다. 그의 얼굴에서는 늘 부드러운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빙심의 사나이였다. 정확히 상대의 미심을 찔러 죽여 속칭 일점홍(一點紅)이라는 명호를 갖고 있었다. 사령. 그는 모습도, 형체도, 그림자도 볼 수 없는 환객(幻客)이었다.그의 경공술은 명실공히 천하제일이다. 그가 쓰는 무기는 그 길이가 불과 세 치에 종잇장 같은 유엽비도다. 번쩍 하는 순간 상대의 목에는 어김없이 비도가 꽂힌다. 무혼. 그는 고독한 나그네다. 항상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며 허리에 찬 죽검이 그의 무기다. 냉정하고 침착하기 이를 데 없어 초객과 함께 무림에서 이대 살수로 꼽힌다. 그가 쓰는 천극삼화홍(天極三花紅)은 천하제일의 살초였다. 그러나 막상 그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 무혼이 바로 천무독이었다. 엽고운은 얘기를 모두 듣고는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용형이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은 그것이 전부요?" "그렇소이다." "후후... 어쨌든 나로서는 의외구려. 천형이 삼환회의 팔령 중 한 명이었다니." 용붕비는 고개를 젓더니 다시 설명했다. "그들 팔령은 실상 삼환회에 소속되었다고는 볼 수 없소. 전 무림에 각각 흩어져 있으며 그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소. 단지 삼환회주 삼 인이 공동으로 발부한 삼환혈령(三還血令)만이 그들을 움직일 수가 있소." 그 말에 엽고운은 몹시도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팔령의 존재는 실로 신비롭구나.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적인 면에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의 출신 역시도 꽤나 비밀스럽겠군.' 그는 또 물었다. "그들 팔령의 무공은 어느 정도요?" 용붕비는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순수한 무공만으로 치면 나 용붕비 역시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소. 그러나 그들에게는 각기 가공할 수법이 한 가지씩 있어 천하의 어떤 고수도 당해내지 못하오." "으음!" "가령 세 명의 회주 중 한 명이 나를 죽이려 한다면 적어도 삼 초는 필요하오. 그렇지만 팔령은......."


"팔령은?" "개중 누구든 예의 마수를 펼치면 나는 아마 단 일 초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오." 엽고운의 안색이 미미한 변화를 보였다. "설마... 그 정도란 말이오?" "그렇소이다." 용붕비는 침중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습을 보며 엽고운은 내심 팔령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기로 작정했다. 그리고는 방금 전에 비해 한층 신중하게 물었다. "그런데... 천형은 팔령에 포함되어 있으면서 어째서 삼환회의 추격을 받고 있는 것이오?" 용붕비는 낮은 탄식과 함께 말을 이었다. "으음....... 천무독은 본시 무혼이라는 별호대로 혼이 없는 비정한 인간이었소이다. 그러므로 그가 뻗치는 살수는 한 번도 실패라곤 없었소. 하지만 그도 인간이었기에......." 그의 얼굴에는 형언키 어려운 연민이 깃들었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천무독은 팔령에게 금기사항으로 되어있는 연심(戀心)이란 것을 품게 되었소. 뜻하지 않게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것이오." "흐음!" "그때부터 천무독에게는 인정이 살아났소. 그 후로 세 번의 살인 명령에 거듭 실패했고....... 그것은 살수 특유의 비정함을 잃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소." "이해가 가오." "그러나 삼환회는 그런 천무독을 방관하지 않았소. 결국 삼환회주가 그에게 그 여인을 포기하라고 명령을 내렸지요. 물론 천무독은 그 명령을 듣지 않았소." 엽고운은 내심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으음, 천형에게 그런 과거가 있을 줄은.......' 그의 뇌리에는 이 순간 고독하기 그지 없는 천무독의 영상이 떠올라 있었다. 용붕비의 말이 계속되었다. "삼환회와 천무독의 갈등은 실로 심각한 국면에 이르렀소. 그러다가 어느 날, 삼환회주는 마침내 삼환혈령을 찍어 팔령 중 초객과 산백에게 그를 제거하라고 명했소." '흠, 쓸모가 없으니 없애 버리자는 뜻이었나 보군.' 엽고운은 이렇게 짐작했으나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혼 천무독은 그 당시 교묘하게 탈출을 했고 팔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잡히지 않고 도피생활을 계속해 오고 있소." 엽고운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팔 년의 도피생활이라....... 천형의 고초가 어떠 했을지는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것 같구나.' 용붕비는 술을 따르며 침중하게 말했다. "더구나 천무독은 달아나면서 사환(死環) 영호전 회주의 아들인 영호랑(令弧浪)을 죽였소. 그래서 삼환회주는 분노한 나머지 더욱 맹추격을 단행한 것이오. 또한 현재는 그 추격을 끝맺기 위해 거의 전 고수들을 풀어놓은 상태요." 엽고운은 얘기를 듣다 말고 문득 안색을 굳혔다. '아! 감천학이 죽으면서 한 말......! 그것이 혹 이 일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그는 자신의 기억 속으로부터 들은 말을 그대로 끄집어냈다. ② - 그 사람은 살아있다. 낙영탑(洛英塔)....... 엽고운은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단혈사로에게 강서성 경안현의 영락루를 찾아가라고 했었는데....... 그들이 감천학의 말을 전달하면 천형은 물론 낙영탑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혹시 감천학이 말한 그 사람이 곧 죽었다던 영호랑이


아닐까?' 그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혼 천무독을 죽이기 위한 하나의 음모일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엽고운은 안색이 변했다. 이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용붕비가 그를 향해 코를 씰룩거렸다. 그러더니 엽고운보다 표정이 더 기이해지는 것이었다. "아! 이것은......." 엽고운이 의아하여 물었다. "왜 그러시오?" 용붕비는 대답 대신 매우 당혹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소협, 혹시 삼환회와 부딪칠 때 이상한 것은 못 느끼셨소? 소협의 몸에서 십리향이 느껴지오이다." "아뿔싸!" 엽고운은 당황한 듯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용붕비가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누군가 소협의 몸에 십리향을 뿌렸소. 특히 팔령이라면 백리 밖에서도 이 냄새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소." 그는 어느덧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주위를 둘러 보았다. "어쩌면 지금 쯤은 팔령 중 누군가가 소협을 추격하고 있을 것이오." "으음, 그렇겠구려." 엽고운의 음성도 다소 무거워져 있었다. 그러나 곧 그는 고개를 흔들더니 용붕비를 직시했다.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소. 설사 그들이 온다 해도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막아내면 될 테니까." "그야 그렇지만......." 용붕비는 엽고운의 의중을 알면서도 자못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굳이 당부를 잊지 않았다. "소협의 실력이야 이 용모가 어찌 모르겠소이까? 하지만 일부러 모험을 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오. 지금이라도 옷을 갈아 입으셨으면 하오." 엽고운은 그 말에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 십리향이 그토록 끈질긴 것이라면 옷을 갈아 입는다고 해서 당장 지워지겠소?" "그럼 어쩌시려고......?" 용붕비가 묻자 엽고운은 만면에 신비한 미소를 드리웠다. "용형께선 그만 안심하시오. 내게 방법이 있소이다." 그는 용붕비를 향해 한 쪽 눈을 찡긋 해 보였다. "우리, 그 문제는 이제 젖혀둡시다. 내게 삼환회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주시오." 엽고운의 태도는 그야말로 유유자적이었다. 그것을 보자 용붕비는 내심 일말의 불안을 떨칠 수가 없었다. '대체 어쩌자는 것일까? 설마 혼자 몸으로 천무독을 제외한 칠령(七靈)을 다 상대하겠다는 것은 아닐테고.' 그러나 그의 생각은 이내 방향을 틀었다. '아! 어쩌면 이 분은 그 이상도 각오하고 있는지 모른다. 만일 이 분이 삼환회 전체를 상대하려 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용붕비는 이 순간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괴상하게 변해있는지 알지 못했다. 가슴 속에서 격정이 차오르자 그의 이목구비가 균형을 잃은 채 마구 움찔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오!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일세의 영웅과 마주하고 있었구나. 미처 몰라보고 괜한 걱정을.......' 용붕비는 그 상태에서 허심탄회하게 말문을 열었다. "엽소협, 절강성(浙江省) 야우산(夜雨山)의 한 계곡에 가면 거대한 장원이 있소." "흐음?"


"그곳에는 지금 한 명이 머물고 있소." "그가 누구요?" "마환(魔環) 목령비(木靈非)요." 엽고운의 눈에 한 가닥 이채가 스쳤다. 곧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용형이 회주의 거처까지 말해 주다니! 정녕 이것이야말로 내게는 천재일우의 기회다.' 엽고운의 심중에서는 벌써 한 가지 작정이 서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일단 발설을 보류하고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용형, 아마도 천형은 지금 낙영탑으로 가고 있을 것이오." "낙영탑!" 용붕비는 안색이 변했다. "낙영탑이 무엇 하는 곳이며 어디에 있는 것이오?" "그건......." 용붕비의 음성이 갑자기 낮아졌다. 이어 그는 전음지술을 통해 한동안 무엇인가를 열심히 얘기했다. 엽고운은 용붕비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귀담아 들었다. 그런 연후, 이번에는 그가 용붕비에게 진지하게 얘기했다. 물론 그 역시 전음이었다. 그 사이, 용붕비의 안색은 수십 차례나 변했다. 만면에 경악과 감탄이 어리더니 그것은 종내에 이르자 존경으로 탈바꿈했다. 이윽고 용붕비는 탁자 위에 주먹을 놓더니 고개를 숙였다. "엽소협, 아니 엽대가(葉大哥)! 이 용붕비는 이 순간부터 대가로 모시기를 하늘에 두고 맹세하겠소. 금후로 용붕비는 대가의 수족이 될 것이오." "용형!" 엽고운의 안면이 몹시도 흔들렸다. 그가 뭐라 말하려 하자 용붕비는 아무 말도 듣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엽대가! 만약 청을 들어 주지 않는다면 이 용붕비는 스스로 자결하고 말겠소." 실로 충직하기 그지 없는 위인이었다. "으음!" 엽고운은 할 수 없이 튀어 나오려던 말을 그대로 삼켜 버렸다. 기실 그로서는 용붕비의 제안이 기뻤다. 앞으로의 행도에 있어 능히 자신의 오른팔이 되어 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엽고운은 비로소 내심을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고맙소. 어쩌면 본인은 그 동안 용형같은 분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소. 단, 우리는 형제일 뿐 주종관계는 아니오." "대가(大哥)!" 용붕비는 감읍해 마지 않았다. 이 광경에 이제껏 얌전히 앉아 시중을 들던 취접 조소아가 더욱 좋아라 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대번에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아! 이 기분을 어찌 말해야 할지....... 소녀, 엽공자님과 용대협의 결연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후후... 소아, 네 축하를 받으니 더욱 기쁘구나." "고맙소, 조낭자." 세 사람은 마음을 합쳐 축배를 들었다. 잠시 후. "그럼, 소제는 엽대가가 지시한 대로 일을 꾸미겠소이다." "잠깐!" 엽고운은 빙그레 웃으며 품 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꺼냈다. "용... 노제, 이것을 받으시오. 그대 사문(師門)의 비급인 사신보(四神譜)에 천이백 년 전 천하를


주름잡던 절대고수들이 장단점을 수정보완해 놓은 것이오. 익히면 용노제에게 크게 도움이 되리라 믿소." 용붕비는 감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오오! 본문의 비전비급을 되찾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정녕 대가의 은혜는 백골난망이로소이다." 엽고운은 미소를 지은 채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물건이 이제야 제 주인에게 돌아갔을 따름이오. 용노제의 힘으로 사신문이 재건될 날도 머지 않은 것 같소." "고, 고맙소이다. 대가......." 용붕비는 책자를 받아들더니 몸을 돌려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것은 바로 눈물이 흐르려는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물론 엽고운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용붕비의 젖어드는 눈이 이미 그의 가슴에 뭉클한 충격을 전한 것이었다. '용붕비, 당신은 진정 강직하고 충후한 성격을 지녔구려! 당신 같은 아우(?)를 가지게 되어 이 몸이 영광이외다.' 그���데 이때였다. "엽공자님, 제가 한 잔 따르겠어요." 조소아의 음성에 엽고운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는 술잔을 잡는 대신 그녀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 "소아!" "왜......?" 조소아는 그의 굳어진 얼굴을 보자 흠칫 몸을 떨었다. "내게 술을 따르고자 하는 것은 아직도 기녀로서냐? 아니면 너를 아끼는 한 사람을 위해서냐?" 엽고운의 추궁은 너무도 신랄한 것이었다. "저, 저는......." 취접 조소아. 그녀의 머리에 꽂혀 있는 푸른 나비가 심한 떨림을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비취로 된 나비의 조각을 꽂고 있었던 것이다. 엽고운의 시선이 그 취접에 가서 멎었다. "인간의 삶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난관이 따르는 법이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 그러나 난관이란 극복해 나가는 데서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이 성숙해가는 것은 바로 그때문이니까. 안 그렇느냐?" "엽공자님......." 조소아의 커다란 눈망울에 다시금 수정같은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몸을 한 차례 가늘게 떨더니 마침내 입술을 짓씹었다. "알겠어요. 엽공자님의 말씀은 모두 옳아요. 이후로는 하라시는 대로 모두 따르겠어요." 엽고운은 그제서야 표정을 풀었다. "내일 당장 너의 세 언니를 만나겠다." "네?" "놀랄 것 없다. 그녀들의 일에 관해서라면 추호도 네게 원망이 돌아가지 않게 처리할 테니까. 너는 그저 나를 믿으면 된다." "네......." "그리고 이건 명령인데, 그만 눈물을 거두어라. 내가 취접자홍에게 몹쓸 짓을 한 줄 알고 누가 또 쫓아오면 어쩌겠느냐?" "호호호......."


조소아는 눈물을 머금은 채 하얗게 웃었다. "하하하......." 엽고운도 밝게 웃으며 그녀를 쓸어 안았다. "엽공자님, 소녀는 정말......." "안다, 네 마음은." 엽고운의 품에 안긴 조소아는 스르르 눈을 내리감았다. 포근함과 더불어 평화로움이 전신에 밀려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지난 날의 고통 따위는 이 순간 물거품처럼 스러져 버렸다. "자! 나가자, 소아." 엽고운의 음성이 꿈결처럼 들리는 가운데 그녀는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둥실 뜨는 것을 느꼈다. 방 안에서 두 사람의 모습은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술잔에 가득 고여 있는 맑은 액체만이 방금 전까지 그 자리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각, 전각의 지붕 위에는 한 명의 괴장한이 반듯이 누워 있었다. 가슴에 묵도를 안은 채. 팔령 중 이대 살수라 일컬어지는 인물. 초객이었다. 그는 마침 떠오른 한 조각의 달을 바라보며 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세 회주는 실로 큰 적을 만들었군.' 그의 얼굴에 나 있는 긴 도상이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정녕 뜻밖이다. 용붕비가 배신할 줄은.' 초객은 계속 달에 시선을 둔 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좋다. 이 일은 나하고 상관이 없으니까. 하지만 천무독이 낙영탑으로 갔다니 나도 슬슬 움직여 봐야겠구나." 그는 묵도를 비껴들어 달을 가리켰다. "가는 길에 우선 엽가 성을 가진 그 아이와 용붕비를 해치우고 그 다음으로 천무독을 처단하겠다." 쏴--! 초객의 몸이 누운 채로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달 속으로 그의 신형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광경이었다. 슷! 초객은 달 가까이 이르러 문득 몸을 틀었다. 그러자 그의 모습은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의 뒤로 푸른 달빛이 여아선루의 호화로운 누각과 대전들을 비추고 있었다. ③ 언덕은 햇살이 잘 드는 곳이었다. 즉 양지에 비스듬히 형성된 이 언덕에는 풀밭이 곱게 펼쳐져 있다. 해가 채 중천에 도달하지 못한 오전 무렵이다. 무명옷을 입은 한 소녀가 풀밭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기이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돌. 그녀는 작고 큰 돌들을 잔뜩 앞에다 모아둔 채 그것들을 차례로 올려놓아 탑 쌓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나어린 유동녀(幼童女)들이나 하는 유치한 놀이다. 하지만 무명옷을 입은 소녀는 일견하기에 적어도 십팔 세는 넘어 보이지 않는가? 그 정도의 나이라면 성숙한 여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계속 탑 쌓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동작에는 더구나 아무런 목적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연속 행위로서 그대로 놓아두면 평생이라도 그런 놀이를 계속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인의 얼굴은 의외로 굉장한 미모였다. 도화빛을 띤 양뺨이 우선 탐스럽기 그지 없었다. 또한 눈은 그렇게 큰 사람도 있을까 싶은 정도로 컸으며 가히 형언키 어려울 만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한 번쯤 웃어 준다면 천하의 어떤 남자라도 금방 자신을 팽개치고 그 치마폭 아래 무릎을 꿇고 말리라. 그런데 반해 여인은 웃을 줄을 몰랐다. 아니, 가끔 웃기는 웃었다. 쌓아 올린 돌탑이 와르르 무너질 때 그녀는 웃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 웃음이 너무도 무미(無味)하다는 사실이었다. 꽃은 아름답다. 그러나 향기가 없다면 그 가치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꽃의 생명력이란 본시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향기에서 기인된다 할 수 있다. 그처럼 무명옷의 여인은 분명히 살아있으며 아름다왔지만 타인에게 감동을 줄 만한 아무런 요소도 갖고 있지 못했다. 와르르르....... 돌탑이 또 무너졌다. 여인은 벙싯 웃더니 다시 돌을 쌓기 시작했다. 돌을 쌓는 손도 역시 아름다왔다. 하지만 온기라던가 행위에 대한 열의가 느껴지지 않아서인지 맛도 뭣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돌탑이 완성되자 여인은 아래서부터 그 층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문득 하나의 긴 그림자가 돌탑을 어둡게 가렸다. "넷, 넷, 넷......." 여인은 다음 숫자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손가락은 올려 짚어가면서도 헤아리는 숫자는 계속 같은 수가 반복되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와 일깨워 주었다. "다섯, 여섯, 일곱, 그리고 지금은 팔 층이오." 여인은 뒤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한 명의 백의서생이 서 있었다. 엽고운이었다. "소랑, 아니 운미(雲美)." 그가 부르는 이 무명옷의 여인은 바로 무영사비 중 둘째인 소랑 전운미였다. 그런데 전운미는 엽고운을 보고도 전혀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입가에 예의 그 무미한 웃음까지 떠올리는 것이었다. "아, 엽공자님이시군요. 여긴 어쩐 일이죠?" 오히려 크게 놀란 쪽은 엽고운이었다. '어쩐 일이냐고? 그것이 첫인사......?' 과거지사야 어떻든 그들 두 남녀는 생사도 모르는 채 떨어져 있다가 일 년 만에 만났다. 따라서 매일 보듯 이렇게 자연스러운 인사를 나눌 처지는 도저히 아니었다. 아무튼 엽고운은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맙소. 운미가 이 엽모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어서." 그 말에 전운미는 사뭇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새삼 기억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이 금마별부에서 엽공자를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금마별부라고?' 엽고운은 비로소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맙소사! 이 여인은 지금 여기를 금마별부로 착각하고 있구나.' 그는 무참할 정도로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어찌 이런 일이.......' 엽고운은 마음의 진동을 억누르며 침착하게 물어 보았다. "그럼 신(神)과 영(影), 두 분은 어디 있소?" 전운미는 그 사이에 벌써 자신이 열중하던 일, 즉 돌탑을 쌓는 일로 되돌아가 있었다. 따라서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운미! 신공과 영제는 지금 어디 있소?" 그의 음성이 높아지자 전운미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뚝 멈추었다. 그 바람에 돌탑은 그만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그녀는 왈칵 짜증을 부렸다. "아이 참!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되었잖아요." 전운미는 흩어진 돌들을 탐욕스럽게 앞으로 끌어다 모았다. 아마도 처음부터 다시 쌓으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안 되었다 싶었는지 되물었다. "조금 전에 제게 무엇을 물었죠?" 그것은 바로 그녀의 친절한 본성이 엿보이는 일면이었다. 엽고운은 내심 무언가 불끈 치미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신공과 영제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소." "신공, 영제......?" 전운미는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언제나 신비하게 행동하는데. 그리고 요즘 들어서는 통 마주친 일도 없어요." 엽고운은 자신의 내부에서 울컥이는 것이 일종의 분노였다는 사실을 그 순간에야 확연히 깨달을 수가 있었다. '신공과 영제! 그들이 이 여인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 이번에는 소랑 전운미가 말을 건네왔다. "참! 엽공자님께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어요." 그녀는 손을 들어 그새 중천 쯤에 이른 태양을 가리켰다. "대체 저것은 무엇이죠? 우리 금마별부에 있는 것 중에서도 제일 크고 훌륭한 구슬 같아요. 궁금해서 물어 보아도 언니는 저것의 이름을 통 가르쳐 주지 않거든요." "아!" 엽고운은 그만 탄식을 발하고 말았다. 그는 상심(傷心)을 이기지 못해 급기야 소랑 전운미의 어깨를 덥썩 움켜쥐고 말았다. "운미!" "아이, 아파요." 전운미는 눈을 곱게 흘기며 이죽거렸다. "바람둥이 같으니! 구양월미(歐陽月美)는 어쩌고 나한테까지 이렇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거죠? 호호호......." 그녀는 자못 어이없다는 듯 웃어제끼기도 했다. 그러나 와중에도 그녀의 손은 어느덧 엽고운의 목을 부여안고 있었다. "하긴, 나도 당신이 너무 좋아요. 금마별부를 다 뒤져도 당신보다 내 마음을 끄는 사람은 없거든요." 전운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에게 매달렸다. "운미......." 엽고운은 측은지심이 일어 그녀를 가볍게 받아 안았다. 그리고는 다정하게 등을 쓰다듬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운미는 그의 품에 몸을 묻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참 이상도 하죠?" "뭐가 말이오?" "그 많던 사람들이 왜 보이지 않죠? 모두 어디로 갔어요?" "가엾은!" 엽고운은 그대로 그녀를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솟구치는 비애와 연민을 달리 어떻게도 표현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으음!" 소랑은 얕게 신음을 발하더니 그의 품에 뺨을 마구 비벼댔다. 그녀 자신의 말마따나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었다. 엽고운은 잠시 그렇게 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운미, 빙매와 월교는 어디 있소?" 전운미는 그의 가슴에서 얼굴을 삐죽 내밀더니 언덕의 뒤편을 가리켰다. "저기예요. 방 안에 있지요."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언니와 견아는 밖으로 나오지를 않아요." "음." "또 소아, 그 계집애는 겨우 며칠 만에 한 번씩 들르곤 하니....... 그들은 이 소랑이 싫은가 봐요. 도무지 같이 놀아 줄 생각을 안 해요." 주섬주섬 일러바치는 전운미의 말이 다시금 엽고운의 가슴을 아프게 할퀴어 놓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한껏 기대를 품은 얼굴로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엽공자님, 어때요? 나와 놀지 않겠어요?" "좋소, 그렇게 합시다." 엽고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이 진한 슬픔을 담은 채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 여인이 그때의 명랑하던 소랑인가?' 엽고운은 돌탑 쌓기를 다시 시작하는 전운미의 곁에 앉았다. 그리고 한동안 그녀와 같이 쌓아 주다가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운미, 우리 빙매와 월교를 만나 봅시다." 전운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들어가 보세요. 저는 만나기 싫어요. 언니는 저만 보면 눈물을 흘려서 귀찮아 죽겠어요. 전 이곳에서 혼자 놀고 있겠어요." 엽고운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으음......." 그는 긴 탄식을 발한 후, 몸을 일으켰다. ④ 언덕 위. 그곳에는 아담하게 지어진 한 채의 띠집이 있었다. 그것은 취접 조소아가 특별히 세 언니를 위해 마련한 것으로 항주 진회하로부터 북쪽으로 약 십 리 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조소아는 며칠에 한 번씩 어김없이 여아선루를 나와 이 집에 들렀다. 그러나 올 때와는 달리 돌아갈 때는 늘상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붓곤 했다. 엽고운이 마침내 이곳에 당도했다. 그는 잠시 멍한 시선으로 띠집을 바라보다가 문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집 안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엽공자! 당신인 걸 알아요. 들어오지 마세요.' 엽고운은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냉하상(冷霞霜)!' 과연 그러했다. 냉하상의 찬 음성은 다시 이어졌다. "당신이 어떻게 소아를 꼬드겨 여기까지 찾아왔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 돌아가세요."


"냉소저......." 엽고운의 말이 시작되기도 전, 냉하상은 잘라 말했다. "당신은 우리의 처지를 능히 짐작할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알 것이고요. 절대로 들어오면 안 돼요." "으음......." 엽고운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곧 그의 얼굴에는 단호한 기색이 어렸다. "냉소저! 용서하시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 들어가야만 하겠소." 말과 함께 그는 문을 힘껏 밀었다. 끼익--! 문 안쪽은 막바로 대청이었는데 무척이나 어둠침침했다. 엽고운은 성큼 대청으로 올라섰다. "나가요!" 앙칼진 음성과 아울러 무엇인가 그의 면전으로 날아왔다. 쉭--! 잡고 보니 그것은 하나의 촛대였다. 엽고운은 고소를 지으며 촛대가 날아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청보다 더 컴컴한 하나의 방 안. 물론 엽고운의 시력은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는 방 안이 컴컴한 이유가 창문을 모두 검은 천으로 막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내 알아 차렸다. 엽고운은 천천히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 나가요! 제발......." 방구석에 놓인 침상으로부터 애타는 음성이 들려왔다. 침상 위에는 한 여인이 이불을 하반신까지 덮고 앉아 있었다.깡마르고 안색은 밀랍같이 창백한 여인이었다. 눈마저 움푹 꺼져 있어 살아있는 사람인지 시신인지조차 구별이 힘들 정도였다. '아!' 엽고운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저 여인이 그 냉정하고 총명하던 빙매 냉하상이란 말인가?' 침상 위의 여인, 즉 냉하상은 피라도 토하듯 외쳤다. "어서 나가라니까요! 그러지 않으면......." 그러나 엽고운은 발길을 멈추지 않고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급기야 냉하상은 황망히 손을 내저었다. "다, 다가오지 말아요! 제발......." 이때, 한쪽 벽에서 문이 열리며 긴 탄식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언니, 엽공자께 너무 그러지 마세요." 그 문을 통해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바로 월교(月矯) 백견아(白絹娥)였다. 그런데 그녀를 본 순간, 엽���운의 눈은 찢어져라 부릅떠지고 말았다. 월교 백견아. 그녀는 푸른 보석을 연상시키는 눈과 빙결처럼 희고 매끄러운 살결, 그리고 비단결같은 머리칼을 가진 이국적인 미녀였다. 하지만 지금의 백견아는 눈을 감은 채 손으로 벽을 더듬어 움직이고 있었다. 또한 머리칼은 놀랍게도 완전히 백발이었다. '이럴 수가!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누구보다 탐스러운 머리와 푸른 색의 아름다운 눈을 가졌던 여인이 이 지경이라니.' 엽고운이 넋을 잃고 있는 사이, 침상 위에 있던 냉하상이 갑자기 미친 듯 웃어제꼈다. "호호호호... 엽공자! 이제 만족하셨나요? 미모라면 나름대로 자부해 오던 무영사비가 전부 이 꼴이죠."


자조가 깃든 그녀의 웃음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호호호... 한 명은 반신불수가 되어 이렇듯 주저앉아 있고 그렇게 잘 웃던 소랑은 백치, 월교는 백발에 장님이죠. 그리고 막내는 세 병신들을 위해 기루에서 술을 팔고요. 호호호호......." "냉소저......." 엽고운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냉하상이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지난 날, 금마별부는 비록 폐쇄된 곳이었으나 웃음이 있었어요. 일면으론 행복도 있었고요." "으음." "그랬는데, 그랬는데 지금은... 호호호호호......." 조용히 듣고 서 있던 월교 백견아가 그녀를 만류했다. "언니! 엽공자님을 왜 그리 대해요? 엽공자님은 우리가 이렇게 된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냉하상은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아니야! 저 자가 금마별부에 오지만 않았다면 우리가 이렇게 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거야. 신, 영이 아무리 서로 으르렁거려도 우리는 그들의 치하에서 그저 얌전히 살았을 거고." "그만! 언니는 지금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백견아가 듣다 못해 음성을 높이자 냉하상은 오히려 더욱 가시 돋힌 음성으로 외쳤다. "셋째! 너는 그럼 저 자에 대해 아무런 원망도 들지 않느냐?" 백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언니, 우리가 아무리 이런 처지에 놓였을지언정 호의를 가진 분께 함부로 죄를 덮어씌워선 안 돼요. 이 모든 것은 어쩌면 예정된 일이었어요. 신, 영은 끝까지 우리를 보호해 줄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요." 감겨있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신, 영은 애초부터 우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어요. 단지 이용한 것에 불과할 뿐. 그들은 엽공자님이 오지 않았어도 자신들의 야망을 위해 어떤 방법으로든 탈출을 시도했을 거예요." 백견아는 쓸쓸한 어조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니 언니....... 이 이상은 엽공자님을 탓하지 말아요. 언니가 그럴수록 제 심정은 오히려 더 비참해져요." 그녀가 말하는 동안 냉하상은 벌써 잠잠해져 있었다. 사납던 기세는 다 어디로 갔는지 불쌍할 정도로 움츠러들어 버렸다. 창백한 얼굴에 남은 것이라곤 오로지 비탄일 따름이었다. 이윽고 냉하상은 엽고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거의 꺼져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맞아요. 셋째의 말은 조금도 틀림이 없어요. 엽공자님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어요." "으음......." 엽고운으로서는 탄식 외에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사실 전 당신을 떠나 보내기 위해서 되지도 않는 폭언을 했어요. 당신의 얼굴을 대하면 괴로움만 더할 뿐인지라......." 냉하상의 마지막 음성은 아예 울부짖음에 가까왔다. 그러자 무겁게 닫혔던 엽고운의 입이 마침내 떨어졌다. "이대로 떠날 수는 없소." "뭐라고요?" 냉하상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녀는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날카롭게 외쳤다. "그럼 대체 어쩌겠다는 거예요? 설마 하니 당신이 우리를 책임지기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바로 그렇소." 냉하상은 잠시 멍했다가는 느닷없이 크게 웃었다. "호호호호... 우리를, 우리를 책임지겠다고요! 호호호......." 그것은 정녕 처절함이 핏물처럼 진득하게 엉겨 있는 웃음이었다. 이어 그녀는 웃음을 뚝 그치더니


싸늘하게 물었다. "어떻게요?" 엽고운은 담담히 응수했다. "당신들을 치료하겠소." "치료?" 냉하상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엽공자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정말로 모르나요?" 엽고운은 그녀가 말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우리는 이래봬도 금마별부에서 수많은 비급을 익혔어요. 그속에는 고금(古今)의 의서도 있었죠. 특히 저는 의술에 관해서라면 알 만큼 알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네 자매의 상처 치료에는 포기를 선언한 지 이미 오래예요." 엽고운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냉소저, 당신은 자신의 의술이 지난 날 해천사신(海天四神)의 한 인물인 독수절의(毒手絶醫)보다도 뛰어나다고 생각하시오?" "그건 왜 묻죠?" 냉하상의 안색이 기이하게 굳어졌다. "그 분의 실력이면 어떨까 해서요." "그... 그는......." 냉하상은 수치심을 느낀 듯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요, 그 분이라면 아마 가능할 거예요." 그녀는 금세 고개를 반짝 쳐들더니 따지듯 물었다. "하지만 당신은 그 분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 분도 비록 우리와 같이 있지는 않았지만 금마도 전체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으니 그 저주의 날에 필히 참변을 당했을 거예요." 엽고운은 그녀가 보건 말건 씨익 웃었다. "나는 그의 의술을 전수받은 사람이오." "흥! 그 분의 의학은 고심막측하기 그지 없어요. 수십 년을 배워도 다 못 배울 거예요. 그런데 당신이 어찌......." 엽고운은 어깨를 으쓱 했다. "믿던 안 믿던 그것은 당신의 자유요. 나는 반드시 당신들을 고쳐 놓겠소." 그가 이렇듯 편한 분위기를 만들어 줌에도 불구하고 냉하상은 여전했다. 그녀는 고집스럽게 쏘아부쳤다. "흥! 설사 그렇더라도 당신의 도움은 받지 않겠어요." 엽고운은 그녀를 비난하고 싶은 심정이 아닌지라 사뭇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건 자존심 때문이오?" 냉하상은 고개를 싹 돌려 버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엽고운은 시선을 돌려 월교 백견아를 응시했다. "백낭자, 당신의 생각은 어떻소?" "저... 저는......." 백견아는 말을 못하고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녀의 감은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방울져 내려왔다. 이것을 보자 엽고운의 가슴에는 한 가닥 쓰린 감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애써 이를 제어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좋소, 무언은 곧 승인이라 믿겠소." 엽고운은 냉하상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냉소저, 소아는 벌써부터 내 뜻에 동의한 바 있소. 그런가 하면 소랑은 판단할 능력이 없고, 또한 백낭자도 역시 거절하지 않았소. 남은 것은 오직 당신 뿐이오."


냉하상은 입이 붙어 버린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소한 당신 하나 때문에 나머지 세 여인이 일평생 불행을 지고 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소." 엽고운은 말은 마치자 성큼성큼 냉하상에게 다가갔다. 냉하상은 그만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어... 어쩌려는 거예요?" "당신을 강제로 끌어내겠소." 엽고운은 지체 없이 팔을 뻗었다. "안 돼요!" 그의 손이 냉하상이 덮고 있던 이불을 확 걷어 버렸다. "아앗! 무, 무례한......." 냉하상은 절규에 가까운 외침과 더불어 손으로 얼른 얼굴을 가렸다. 엽고운이 부드럽게 그녀를 달랬다. "후후... 부끄러울 것 없소이다. 치료를 위한 행동일 뿐이니까." 그는 이어 다짜고짜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놔, 놔욧!" 냉하상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마구 쳤다. 그러나 엽고운은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놔 줄 수가 없소. 후후... 또한 이것은 내 짐작인데, 아마도 영원히 이렇게 될 것 같소." '영원히... 라고?' 냉하상은 흡사 둔기로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때리는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멍하니 엽고운을 올려다 보았다. 다음 순간, 냉하상이 저지른 행동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흑......!" 그토록 매정하고 지독하게 버티던 그녀가 마침내 엽고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오열을 터뜨렸다. "흑흑흑......." 그것은 그간에 쌓였던 울분과 한이 한꺼번에 봇물처럼 터져나온 통곡성이었다. '쯧! 그다지 모질지도 못하면서.......' 엽고운은 그녀를 바짝 안고는 백견아의 손을 잡았다. "백낭자, 갑시다." "네." 백견아는 뺨 위로 연신 눈물을 떨구면서도 입으로는 방싯 웃었다. 그 미소만은 여전히 황홀한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디로 가실 생각인가요?" 그녀의 물음에 엽고운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장소가 마련되어 있소. 따라오기만 하면 되오." 끼익--! 문이 열리자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 엽고운에게 안겨있던 빙매 냉하상은 재빨리 얼굴을 그의 가슴에 숨겼다. 수치감이 아직 씻겨지지 않은 때문이었다. "호호호... 엽공자님은 역시 바람둥이라니까. 어느 결에 무서운 언니까지도 다 넘어갔네?" 어느새 소랑 전운미가 다가와 까르르 웃고 있었다. 제 18 장·굴복(屈伏)의 미학(美學) ① 항주(抗州)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 산중이었다. 엽고운. 그는 왼손에는 약초가 가득 찬 주머니를, 오른손에는 약초 캐는 소도(小刀)를 쥔 채 허리를 쭉 펴고


있었다. 하늘은 무한히 푸르렀다. 때는 팔월, 한여름이었다. 찌는 듯한 더위가 산천을 내리쬐고 있었으나 엽고운의 이마에는 단 한 방울의 땀도 맺히지 않았다. 이는 그가 이미 한서불침(寒署不侵)의 초절한 기학들을 두루 갖춘 때문이었다. 엽고운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다시 왼손의 약초 바구니를 내려다 보았다. '오늘로써 무영사비를 치료한 지 두 달이 흘렀다. 이제는 거의 완치가 되고 마지막 대법만이 남았다. 앞으로 며칠 후면 이전의 상태로 회복될 것이다.' 그는 천천히 걸어 산을 내려갔다. '그 동안 용노제가 수고를 많이 해 주었다. 단혈맹과의 연락은 물론이거니와 그 외에도 다방면의 소식들을 전해 주었다. 역시 그는 기대만큼 역할을 잘 수행해내고 있다.' 엽고운은 지난 두 달 간 무영사비의 상세를 치료하면서도 무림의 동태를 관찰하는 일만은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대세가가 주축을 이룬 정도무림의 맹주인 만큼 그는 무림의 일에 이미 깊숙히 개입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엽고운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단혈맹으로부터 전서구를 받았으며 용붕비를 통해 수시로 갖가지 안배를 마련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한 곳에 머무르면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지만 천하무림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히 알고 있었다. 엽고운은 걸음을 약간 빨리 했다. '치료가 끝나면 곧바로 절강성의 야우산으로 가야지.' 문득 그의 입가에 신비한 미소가 어렸다. '후후후... 마환(魔環) 목령비, 그 자야말로 내 계획에 있어 첫 상대다. 그 다음은.......' 엽고운이 막 산을 내려와 평탄한 길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 한 가닥 인기척이 감지되어 그를 멈칫 하게 했다. 더구나 그 음향은 너무도 경미해 무엇도 파악해 낼 수가 없었다. 어찌나 은밀한지 엽고운이 아니라 설령 천하제일 고수라도 따라잡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엽고운의 얼굴이 일순 무겁게 가라앉았다. '대체 누가 이런 비쾌한 몸놀림을......?' 그는 일단 심호흡을 한 뒤,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눈을 내리감고 한 가지 특이한 대법을 펼쳤다. 이름하여 견불무아신통대법(見不無我神通大法), 그것은 무명무아신승(無名無我神僧)의 비급에 기재된 불문이학(佛門理學)으로 고금을 통틀어 유일무이하달 수 있는 기공이었다. 일반적으로 소리를 감지하는 데 있어 최고 기능을 발휘하는 것은 역시 천이통(天耳通)이다. 그러나 이 천이통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가령 인간이 한 가지 감각만을 최고치로 사용하고자 한다면 나머지 기관, 즉 오관을 비롯하여 그 밖의 신체의 기능까지 완전히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천이통에서는 바로 이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정확히 백 장 이내여야만 음향을 탐지해낼 수가 있었다. 이에 비하면 견불무아신통대법은 한 차원 높다고 할 수 있었다. 일단 펼치기만 하면 귀를 제외한 일체의 감각들이 차단되어 오로지 듣는 것에만 공력을 집중시키게 되어 있다. 능히 오백 장 밖의 낙엽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것이 이 기공의 놀라운 묘용이었다. 그 대신 치명적인 약점도 있었다. 이것을 펼치는 동안 시전자의 신체는 외부에 대한 저항력을 모두 상실해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아무튼 엽고운은 견불무아신통대법으로 귀를 활짝 열었다. 스슥-- 사사삭--! 과연 지극히 민첩한 발자국 소리가 그의 청각에 잡혔다. 그것은 무려 삼백 장 밖에서 들리는 것이었다. 엽고운의 안색이 일변했다. '으음, 대단한 경공의 소유자다.' 그는 내심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이것은 비단 무공 수련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실전 경험을 통해 얻어진 발군의 보법이다.' 엽고운은 미간을 좁히며 차분하게 추리해 나갔다. '내가 이같은 느낌을 받은 것은 평생에 걸쳐 단 한 번뿐이다. 과거 천세형을 만났을 때, 바로 그때에 이와 동일했었다. 그렇다면 상대는.......' 그는 마침내 한 인물을 꼽았다. '초객!' 놀라움은 잠깐이었다. 곧이어 엽고운의 얼굴에 슬며시 떠오르는 것은 당혹이 아니라 오히려 회심의 미소였다. '보나마나 십리향을 맡고 왔겠지. 후후후... 초객, 하지만 그대는 이 십리향으로 인해 거꾸로 당하게 될 것이오. 안되었지만 나 엽고운은 이미 만반의 준비가 갖춰져 있소이다.' 대체 그는 무엇을 준비했다는 것일까? 팍! 엽고운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꺼져 버렸다. 초객(草客). 그는 틀림없는 초객이었다. 갈색 마의를 입고 얼굴에는 도상이 그려져 있는 괴장한, 전신에 비밀스러운 냄새가 가득하며 허리춤에는 한 자루의 묵도를 찬 사나이....... 초객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천천히 라는 것은 동작 그 자체가 아니라 유현해 보이는 그의 기도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의 몸놀림은 신쾌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도상을 제외하면 그저 평범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더우기 표정이라고는 일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눈빛만은 여전히 검게, 그리고 괴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십리향은 갈수록 짙어졌다. 이윽고 초객이 그 냄새를 따라 당도한 곳은 바로 얼마 전까지 엽고운이 서 있던 자리였다. 하지만 그 순간, 초객은 안면을 싸늘하게 굳혔다. '응?' 십리향의 냄새가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휙--! 초객은 몸을 날리더니 마치 풍차처럼 사방 십여 장을 맴돌았다. 그 속도는 그야말로 눈부시게 빨랐다. 도저히 사람이 낼 수 있는 속도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도록 초객은 끝내 냄새의 종적을 잡지 못했다. 그의 안색이 처음으로 몹시 흔들렸다. '내가 뿌린 십리향은 백 리까지도 발산된다. 그런데 엽가 아이는 어떻게 한 순간에 그것을 벗어났단 말인가? 그 자가 단번에 백 리를 날아갈 수라도 있단 말인가?' 초객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럴 리는 없다. 그도 인간인 이상.......' 그의 생각은 도중에서 뚝 끊겼다. 갑자기 십리향의 냄새가 강력하게 풍겨왔기 때문이었다. '이럴 수가! 무려 열다섯 방향에서 십리향이 발산되고 있다.'


초객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굳어졌다. 그는 이마에 식은땀이 끈끈하게 배이는 것을 느꼈다. '놈! 이제 보니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이때, 사방에서 동시에 괴이한 음성이 들려왔다. "후후후... 초객, 나를 죽이러 왔소?" 초객은 대꾸도 하지 않고 청각을 최대한으로 집중시켰다. 하지만 그 음성의 방향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음성은 계속하여 들려왔다. "아마도 당신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오. 십오 방향으로 분산된 십리향 가운데 과연 나를 찾아낼 자신이 있소?" 그 사이에도 초객의 눈은 예리하게 움직였다. 실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사위를 훑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이었다. '저곳이다!' 번쩍하고 초객의 몸이 날았다. 전광석화, 그 한 마디로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와 동시에 십오 장 밖에서 무엇인가 흰 물체가 그의 유도에 의해 정확히 두 동강이 났다. '베었다.' 초객은 확신했다. 그러나 바로 그 찰나, 목덜미로 섬뜩한 물체가 바짝 와 닿는 것을 감지하며 그는 대경실색했다. "헉!" 초객은 전신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귀로 낮은 웃음소리가 전해져 왔다. "후후후... 초객, 당신은 실패했소. 당신이 벤 것은 단지 내 겉옷일 뿐이었소." 펄럭--! 허공 중에서 동강났던 흰 물체는 그제서야 바닥으로 떨어졌다. 과연 그것은 백삼자락이었다. "으으......." 초객은 흡사 짐승과도 같은 신음을 흘렸다. 그의 이마에서는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굵은 땀방울이 주르르 굴러내렸다. 얼굴에 난 긴 도상은 흉칙하리 만큼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것은 두려움과는 또 다른 종류의 색채였다. '끝이다!' 초객의 심중에서는 이런 부르짖음이 일고 있었다. 이윽고 뒷덜미에 닿았던 예의 섬뜩한 감촉이 사라졌다. 초객은 직감적으로 위기가 사라진 것을 느끼며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입에서는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으음......." 초객의 눈은 자신의 코 앞에 서 있는 한 미청년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는 그 청년을 익히 알고 있었다. '엽고운.......' 엽고운의 손에는 여전히 약초 캐는 소도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그 상태에서 초객을 향해 담담히 웃어 보였다. 초객은 안면을 괴이하게 실룩이며 물었다. "왜 나를 죽이지 않았느냐?" 엽고운은 묘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오." "뭣!" 초객은 정곡을 찔리자 움찔 했다. 사실인 즉 그로 말하자면 평생을 도(刀)와 함께 살아 온 전문 살수였다. 따라서 이 한 번의 실수는 곧 죽음이나 마찬가지의 의미였다. 엽고운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당신은 이제 초객의 껍데기일 뿐 본연이 초객이 아니오." 초객은 그 말에 마침내 전신에서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엽고운이 수중의 소도를 허리춤에 꽂으며 말했다. "후후... 만약 아직도 나를 죽일 의사가 있다면 지금 베어도 상관 없소." '이 놈이 나를 조롱하는구나!' 초객은 격노하여 즉시 손을 묵도에 갖다 대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충동적인 행동이었지 본의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제라도 상대를 베면 초객으로서의 명예는 회복될지 모른다. 적어도 참관인이 없는 이상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이미 그 부분까지 넘겨 짚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또한 초객 자신도 알고 있었다. 명예심이란 것도 양심을 속이고선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것을. 초객의 이마에 굵은 심줄이 잡혔다. 분노와 절망 사이에서 그는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반면에 엽고운은 단지 조용히 서 있을 따름이었다. 그의 자세는 마치 아무런 방비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일면 허(虛)하면서도 실(實)한 것, 그것이 바로 엽고운이 취하고 있는 자세였다. 말하자면 그는 무방비 상태로써 오히려 가장 완벽한 방어막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었다. 특히 무서운 것은 초객을 응시하는 엽고운의 눈이었다. 더없이 맑고 깨끗한 그 눈빛이야말로 초객의 마지막 남은 자신감을 여지없이 박살내고 말았다. '크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것이 바로 초객이 상대의 모습에서 내린 결론이었다. 따라서 완전히 압도되어 버린 그는 급기야 손목을 떨기에 이르렀다. '졌다!' ② 초객은 마침내 묵도에서 손을 떼며 눈을 스르르 내리감았다. 그의 체념 위에 엽고운의 담담한 음성이 부어졌다. "초객, 그대의 도법은 가히 천하제일의 쾌도라 할 수 있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거기에는 생명이 없었소. 오직 죽이기 위한 수단일 뿐, 아무 것도 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오. 심지어는 자신조차도......." 초객은 안면에 미미한 흔들림을 보이며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열려진 그의 눈에 창천을 올려다 보는 엽고운의 모습이 가득 쏘아져 들어왔다. "실상 인간의 능력이란 무한대요. 그런데 생명이 없는 그 도법이 지금까지 그대의 무한한 능력을 막고 있었소." "으음!" "당신은 혹 도(刀)의 진정한 가치를 아시오?" 초객은 진땀을 흘렸다. 평생을 도와 함께 살아왔으면서도 이 순간 그는 무엇이라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피? 죽음? 예전 같으면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것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으며 그 어떤 대답을 떠올려도 적합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엽고운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초객, 이것을 보시오. 구지엽(九支葉)이오." 그는 바구니에서 잎이 아홉 개 달린 자색의 약초를 꺼냈다. "만물은 제각기 그 모양과 용도가 다 다르오. 또한 그 모든 것은 각기 가진 바 그대로일 때가 가장 장점이 많소."


엽고운의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매달렸다. "구지엽은 독기를 지니고 있어 그냥 먹으면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소. 그러나 끓여서 그 물을 마시면 반대로 훌륭한 해독 효과가 있소." 초객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어지는 부언을 조금도 거부감 없이 귀담아 들었다. "무릇 사물의 본성은 발휘되기에 따라 그 가치가 변하기도 한다는 말이외다. 물론 사람도 마찬가지요." 엽고운은 불현듯 초객을 직시했다. "초객, 당신은 도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믿소?" 그의 타는 듯한 시선에 초객은 절로 움츠러들었다. "후후... 도란 즉 심(心)이오. 마음 속에 살(殺)을 품으면 사도(死刀)요, 생(生)을 품으면 생도(生刀)가 된다는 이치외다." 초객은 전신을 가늘게 경련했다. 이를 보며 엽고운은 자못 힘이 깃든 어조로 덧붙였다. "당신은 방금 전 오직 살만을 염두에 두었기때문에 실패했소. 만일 마음을 비우고 무상을 향해 펼쳤다면 나 역시 그 일도를 피하지 못했을 것이오." 초객은 내심 외치듯 부르짖었다. '아! 내가 정녕 어리석었다. 이 자는 애초부터 내가 범접할 수 있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인정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이는 곧 굴복이었다. 엽고운. 그는 잠시 고요한 시선으로 초객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잠깐!" 초객이 그를 불러 세웠다. 엽고운은 묵묵히 되돌아 섰다. 여전히 그의 눈은 아무런 흔들림 없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초객이 무척이나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내게 그런 말을 해 주는 이유는 무엇이냐?" 엽고운은 입술 꼬리를 가볍게 말아 올렸다. "그것은 당신이 내가 아는 누군가와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오." 초객의 안색이 일변했다. "천무독을 말하는 것이냐?" "좋을대로 생각하시오. 어쨌든 나는 그저 하고 싶은 얘기를 했을 따름이오" 초객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간을 좁혔다. 이어 그는 평소의 무심과는 다른, 왠지 생경하게 느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도 평생 처음으로... 내 하고 싶은 말을 하겠다." 그는 스스로도 어색했는지 침을 꿀꺽 삼킨 후 말을 이었다. "천무독은 얼마 전 삼환회의 낙영탑에 침입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삼환회의 고수들에 의해 감금되어 있다." "흐음?" 엽고운의 안색이 처음으로 대변했다. 그 순간, 초객은 어깨를 흔들 하는가 싶더니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엽고운만이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잠시 후. 엽고운은 고개를 주억이며 중얼거렸다. '초객....... 내게 이런 비밀을 알려 주다니, 역시 악인은 아니었다. 다만 이제껏 정(正)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살았을 뿐.' 그는 문득 수중의 구지엽을 입에다 넣고 씹었다.


그것은 날로 먹을 경우에는 독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엽고운은 멀쩡했다. 무공조예가 이미 만독불침에 이른 때문일까? 팍! 그의 신형도 어디론가 꺼져 버렸다. 그런데 그가 사라지자마자 그 자리에는 네 줄기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휙휙--! 놀랍게도 그들은 금마도를 지키던 해천사신(海天四神)이었다. 만사귀재(萬事鬼才) 구양수, 독수절의(毒手絶醫) 상견불, 화신(火神) 혁화성, 괴룡수신(怪龍水神) 구기 등이었던 것이다. 금마별부가 붕괴되면서 엄청난 해일과 소용돌이에 의해 금마도도 가라앉고 말았으나 그들 역시 살아 남았던 모양이었다. 그들 중 넷째인 괴룡수신 구기가 주위를 휘이 둘러보더니 사뭇 난처한 얼굴로 입을 떼었다. "정말 골치 아프군. 사환(死環)이 죽여 달라고 부탁한 인물이 바로 저 녀석이었다니." 그 말에 만사귀재 구양수도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사환 영호전이 아니었다면 우리 네 명은 꼼짝없이 금마도와 함께 수장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구명지은(求命之恩)도 전혀 감사하지 않군." 화신 혁화성이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명확한 요지를 말하시오. 그래서 어떻게 하잔 말이오?" 그의 화급한 성깔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구양수는 고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 요지란 우리가 저 엽가 아이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그럴 능력도 없다. 이미 그 놈은 우리 네 사람의 능력을 초월했으니까." "그렇다면?" 이번에는 독수절의 상견불이었다. 그러자 화신 혁화성이 퉁방울같은 눈을 부릅뜨며 거칠게 말했다. "무식하기는! 뻔하지 않느냐? 거꾸로 사환을 죽일 수 밖에." 그 말에 나머지 세 사람은 일제히 안색이 변했다. 괴룡수신 구기가 냉랭하게 코웃음쳤다. "혁노삼! 웃기지 마라. 네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들의 설전에 구양수가 점잖게 나섰다. "물론 사환의 무공은 가공하다. 그러나 우리 네 명이 힘을 합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잠시 그들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저마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구양수의 설득이 그 침묵을 깼다. "그 동안 우리는 사환을 위해 실로 많은 일을 해주었다. 결코 내키지 않는 일도 사양하지 않았으니까. 그 정도면 빚은 충분히 갚은 셈이다." 상견불이 자못 음침한 표정으로 맞장구쳤다. "노대(老大)의 말이 맞다. 현재 우리가 마음을 맡길 수 있는 자는 오직 엽가, 그 애송이 놈 밖에 없다." 그는 문득 이를 부드득 갈았다. "신, 영 그들은 너무도 우리를 실망시켰다. 그 놈들 때문에 금마별부의 수많은 생명이 사라진 것을 생각하면 뼈를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것 같다. 우리가 과연 무엇 때문에 금마도에서 육십 년의 세월을 바쳤는데....... 더구나 강호에 나와본 즉 모두 그들과 똑같은 놈들 뿐이 아니더냐?" 구양수가 탄식하듯 그의 말을 이었다. "신공은 몰라도 영제는 이미 존재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는 현재 거대한 음모를 진행 중이다. 만약 우리의 거처를 안다면 당장에라도 포섭하려 들 것이다." 화신 혁화성이 볼멘 소리를 했다. "나는 그런 자 밑에 가느니 차라리 초야에 묻혀 버리겠다." 괴룡수신 구기가 음산하게 그를 들쑤셨다.


"영제의 능력은 가히 신과 같다. 그가 우리를 그냥 둘 것 같으 냐? 죽어 버리지 않는 한 그의 이목은 절대 피하지 못한다." 구양수가 또 다시 그들 사이에 끼어 들었다. "과거 우리 네 명은 전부 은연중 서로를 경계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우리는 다 같은 피해자다. 신과 영, 그들에게 이용당한 것이다." "으음!"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한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신공와 영제인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상견불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로 신, 영을 가볍게 보면 안된다. 그들의 능력은 육십여 년 전과 또 다르다. 어쩌면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위일지도......." 그 말은 모두를 대번에 침중한 심경으로 몰고 갔다. 그러자 구양수가 분위기를 전환시키듯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무방하다. 이제 우리 네 사람에게는 전적으로 의탁할 사람이 한 명 생겼다." 세 쌍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그는 확실하게 잘라 말했다. "그가 바로 엽고운, 그 녀석이다." "아! 그렇지." "흐흐흐......." 세 사람은 성격상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으나 결국은 수긍이라는 동일한 색채로 의견이 일치되고 있었다. "그 아이는 무서울 정도로 총명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압권인 것은 그의 성정이 순후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천하에서 오직 그 아이만은 절대적으로 믿을 수가 있다." 그 말에 이의를 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구양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말했다. "그 녀석은 곧 무영사비를 완치시켜 놓을 것이다. 후후... 그 계집들은 단지 장식품 구실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놈에게 향후로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화신 혁화성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그럼 대계(大計)를 위해 포석이라도 깔고 있다는 말이오?" "후후... 말하자면 그런 셈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 따위 계산은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다. 그래서 더 귀엽지. 후후......." 괴룡수신 구기가 문득 염려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 녀석은 무영사비를 데리고 다니려 하지 않을텐데......?" 상견불이 음침한 음성으로 그 말을 받았다. "흐흐...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 주면 될 게 아니냐? 내게 그 녀석으로 하여금 계집들을 줄줄이 꿰차고 다니게 할 방도가 있다." 그는 의혹에 차 있는 삼 인을 둘러 보며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흐흐흐... 내게 천외기환단(天外奇幻丹) 말고 또 하나의 훌륭한 물건이 있음을 잊었는가?" "아!" 세 노인은 모두 탄성을 발하며 무릎을 쳤다. 이어 그들은 무엇을 떠올렸는지 괴이한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크크크큭---!" ③ 두 달에 걸친 요상치료. 그것은 마무리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엽고운의 신묘한 의술에 의해 무영사비가 거의 완쾌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빙매(氷魅) 냉하상.


그녀는 하반신의 경직 상태가 풀려 어느 정도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전처럼 경공을 쓸 정도는 아니었으나 걸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곧 그녀에게 있어 커다란 희망이었다. 또한 매일매일 복용하는 영약 덕분에 그녀의 외양도 예전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되찾았다. 빙매라는 별호답게 얼음장처럼 싸늘한 미를 회복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엽고운을 바라볼 때만은 확연히 달랐다. 그녀의 표정은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따뜻하게 변하곤 했다. 그것을 일컬어 소위 애정의 힘이라고 할지....... 소랑(笑娘) 전운미. 그녀의 정신은 이제 정상인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다만 그녀는 전처럼 많이 웃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웃어야 할 대상이 단 한 사람으로 정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그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자리에는 어김없이 엽고운이 있었다. 참다운 미소를 존재하게 해 준 그 대상을 향해 그녀는 마치 온 마음을 바치듯 활짝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월교(月矯) 백견아. 하얗게 세었던 그녀의 머리는 다시 검어져 있었다. 예전의 검고 눈부시던 머리결을 거짓말처럼 되찾은 것이다. 시력을 잃었던 눈도 지금은 뿌옇게나마 사물의 윤곽을 파악할 정도까지 치료되었다. 그녀는 매일 엽고운이 제조한 약물로 눈을 씻었고 현재도 그러고 있는 중이었다. 취접(翠蝶) 조소아. 그녀는 애초의 약정에 따라 기루의 일은 그만두었다. 진회하의 취접자홍은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조소아, 그녀는 이후로 언제나 생각한다. 자신은 영원히 엽고운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여인이라고. 바야흐로 무영사비는 어둠에서 벗어나 나날이 활기에 차 있었다. 그녀들은 한껏 희망에 부푸는 일면 나름대로 엽고운에 대한 애정을 은밀히 키워가고 있었다. 엽고운. 그는 비스듬한 언덕에서 약초를 캐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이 처방한 약방문에 마지막으로 소요될 것들이었다. 그 옆에서 취접 조소아가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엽고운이 캐낸 풀뿌리들을 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그녀는 자못 들뜬 음성으로 물었다. "운오빠, 정말 오늘 세 언니가 전부 회복될까요?" "물론이지." 엽고운의 음성은 즉각 조소아의 여린 눈물샘을 건드렸다. "기뻐요, 정말....... 전 늘상 하늘에 감사드리고 있어요. 오빠같은 분을 만나게 해 주신데 대해......." 엽고운은 씨익 웃으며 일어섰다. "낯뜨거워지는 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돌아가 약을 배합하자." "네, 오빠." "소아, 산백초(散白草)를 다오." 엽고운이 손을 내밀자 조소아는 급히 서둘러 바구니에서 흰색 약초를 꺼내 주었다. 그곳은 그리 크지 않은 장원으로 그들이 지난 두 달간 함께 기거해 오던 장소였다. 말하자면 엽고운이 무영사비를 위해 특별히 마련한 일종의 요상처라 할 수 있었다. 엽고운은 과거 금마별부에서 신공과 영제로부터 많은 보화를 얻은 바 있었다. 물론 대폭발의 와중에서 그것들을 모두 가지고 나오지는 못했지만 개중 진귀한 몇몇 가지가 엽고운과 함께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 보화의 가치는 실로 상상을 불허했다. 그것들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축에 드는 묘안옥 한 알만 처분해도 당장에 일개 성을 살 만큼의 은자를 취할 수가 있었다.


그로 인해 엽고운은 강호에 나온 이래 한 번도 은자에 구애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또한 그의 이렇듯 막강한 재력(?)은 무영사비의 치료를 위해 아낌없이 쓰여지고 있었다. 엽고운은 지금 조소아와 더불어 약실(藥室)에서 약을 제조하는 중이었다. 그는 수십 가지의 약초를 썰어 탕기에 넣고 달였다. 약실 안에는 도합 네 개의 화로가 있었는데 각 화로마다에는 서로 재료가 다른 약들이 끓고 있었다. 조소아도 즐겨 엽고운을 도왔다. 그녀는 하루같이 그의 곁에 붙어 있으면서 자질구레한 잔심부름도 결코 사양치 않았다. 엽고운은 이런 조소아에게 자신이 지닌 의술을 차근차근 전수해 주었다. 그녀는 매우 총명하여 그 동안 이를 거의 절반 가량이나 습득해 놓고 있었다. "자! 소아, 이제 다 되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엽고운은 네 종류의 약을 지그시 내려다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이어 그가 몸을 일으키자 조소아의 얼굴에는 온통 기대와 흥분이 차 올랐다. '아! 드디어 세 언니의 본래 모습을 보게 되는 건가?' 그들은 나란히 안채로 들어갔다. 햇살이 들어오는 방. 냉하상, 전운미, 백견아 등 세 여인이 탁자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들은 더없이 밝은 표정으로 줄곧 화기애애하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방 안으로 엽고운과 조소아가 들어섰다. 그러자 세 여인의 시선이 일제히 엽고운에게 집중되었다. 이와 더불어 그녀들은 저마다 최대한의 아름다움으로 그를 맞이했다. 냉하상의 싸늘하던 얼굴은 무르녹는 봄기운으로, 천하의 모든 꽃이 시들 정도로 화사한 전운미의 웃음은 또 어떤가? 그런가 하면 월교 백견아의 달콤한 무언의 말은 흡사 꿈결 같았다. 이러한 세 미녀들의 표정 변화는 실내 분위기를 일시에 천상낙원의 그것으로 바꾸어 놓고 있었다. 이를 느끼자 엽고운 역시도 유쾌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자! 아름다운 낭자분들, 오늘로써 마지막 치료가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소. 모두들 준비하시오." 세 여인은 이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엽고운은 방 한 구석에 놓인 침상으로 걸어갔다. 그 침상은 물론 환자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조소아를 포함한 네 여인을 차례로 쓸어본 뒤,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상매(霜妹)부터 이리로 오시오." 그 말에 냉하상은 움찔 하며 얼굴을 붉혔다. "왜 하필이면 제가 먼저......?" 엽고운은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하... 당신은 제일 언니이니 치료에도 당연히 앞장을 서야 하지 않겠소?" 전운미가 곁에서 거들었다. "언니도 잘 알면서 뭘 그래요? 오빠의 손길은 무척이나 유연하죠. 아마도 새삼스럽게 아플 일은 없을 걸요?" 냉하상은 얼굴을 곱게 찌푸렸다. "둘째, 너......!" "하하하... 그건 운미의 말이 맞소. 내 손은 주인에 비해 무척 온순하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냉하상은 그만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목덜미까지 붉혔다. 엽고운은 더 지체하지 않고 그녀의 몸을 담쑥 안아 침상에 눕혔다. "스스로 눕지 않으면 이렇게라도 할 수 밖에. 후후... 자, 어디 좀 봅시다." 그는 손을 뻗어 냉하상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냉하상은 부끄러움에 못 이겨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물론 그 와중에서도 몸을 얌전히 내맡기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치마가 걷혀지니 백옥같은 다리가 나타났다. 하지만 이를 응시하는 엽고운의 시선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발을 돌려 보시오." 냉하상은 즉시 교족을 좌우로 돌려 보였다. "으음, 좋소." 엽고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냉하상의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발바닥 밑 용천혈(湧泉穴)과 발등에 있는 태형혈(太衡穴)을 차례로 가볍게 찍었다. "자, 느낌이 어떠오?" 냉하상은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시원한... 기분이에요......." 엽고운은 다시 고개를 끄덕인 다음, 이번에는 발목에 있는 곤륜(崑崙), 해곡혈(解谷穴)을 눌렀다. "지금은 어떻소?" "역시... 좋아요." 엽고운은 그녀의 무릎으로 손을 옮겼다. 곡천(曲泉), 혈해(血海) 등 두 혈도가 그의 손가락에 의해 눌려졌다. "이것도 시원한 느낌이오?" "네." 냉하상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엽고운의 손이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까지 거슬러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급기야 그녀는 고개를 모로 돌리고 말았는데....... 나머지 세 여인은 그 광경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엽고운은 냉하상의 허벅지에 위치한 은문(殷門), 한부혈(寒府穴)을 찍었다. 그녀의 입에서 문득 가벼운 신음이 새어나왔다. "음....... 조금... 아파요." "그랬을 것이오." 엽고운은 손을 떼었다. "하지만 대단히 상태가 양호하오. 이제 추궁과혈의 수법으로 굳어진 근육만 풀어주면 상매는 완치될 것이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공력을 두 손으로 끌어 올렸다. 곧 그의 손은 하얗게 변했다. 이윽고 엽고운은 서슴없이 냉하상의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발바닥에서부터 허벅지까지 손길이 안 미치는 곳이 없었다. 냉하상은 점차 마음의 평정을 되찾으며 치료에 응했다. 부끄러움이야 처음과 다를 바 없었지만 엽고운의 진지한 태도가 은연중 그녀를 숙연하게 만든 것이었다. 치료란 비단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차가운 느낌이 한동안 두 다리를 얼리는 듯 싶더니 갑자기 타는 듯한 뜨거움이 밀려 들었다. 그것은 엽고운의 손이 그녀의 각 혈도를 통과하는 도중에 선홍색으로 물들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러다가 그것은 다시 냉기로 뒤바뀌고....... 이렇듯 차갑고 뜨거운 기운은 몇 차례나 반복되며 그녀의 하반신을 오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냉하상은 전신이 나른해지는 기분과 더불어 깊은 잠에 떨어지고 말았다. 엽고운의 손이 비로소 그녀의 몸에서 떼어졌다. "상매는 내일부터 뛸 수도, 경공을 펼칠 수도 있을 것이오." "아아!"


세 여인은 희열에 들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엽고운은 미소와 함께 이번에는 소랑 전운미에게 말했다. "운미, 의자에 앉으시오." "네." 전운미는 방긋 웃으며 의자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럼 시작하겠소." 엽고운은 약간 떨어진 곳에서 일단 숨결을 고르더니 품 속에서 은갑을 꺼냈다. 그 속에는 은침이 빽빽하게 들어 있었다.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엽고운은 은침을 하나씩 집어 신중하게 전운미의 머리 각 요혈에 꽂았다. 은침은 각기 다른 방향, 그리고 다른 깊이로 꽂히고 있었다. 백회(百會), 뇌호(腦戶), 태양(太陽), 신정(神庭), 미심(眉心), 옥침(玉沈), 천주(天柱) 풍지혈(風池穴) 등 한결같이 약간만 상처를 주어도 치명적인 위험이 따르는 요혈이었다. "휴우......." 엽고운은 은침을 모두 꽂은 뒤, 손을 내렸다. "지금부터 한 식경 후면 은침이 절로 빠질 것이며 운미도 맑은 정신으로 되돌아올 것이오." 그러나 당사자인 전운미는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눈을 감은 채 말이 없었다. 엽고운은 빙긋 웃으며 월교 백견아를 불렀다. "견아, 이리 오시오." "네." 백견아는 이전처럼 손으로 더듬지 않고도 꽤 침착한 걸음걸이로 그의 앞에 이를 수 있었다. 엽고운은 끈적끈적한 약물을 천에 찍은 후, 그녀의 눈에 발랐다. "음!" 백견아는 흠칫 몸을 떨었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엽고운의 담담한 음성이 그녀에게 더없는 위안을 주었다. "매우 쓰릴 것이오. 하지만 견뎌야 하오. 일각 후면 견아는 이전의 푸른 미안(美眼)으로 우리와 마주하게 될 테니까." "아!" 백견아는 혹시라도 치료가 실패로 돌아갈까 봐 애써 눈물을 삼켜야 했다. 아울러 이 순간의 감격을 그녀는 심중의 부르짖음으로 대신했다. '만일 이대로 광명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소녀, 평생 노예가 되어 엽공자님을 섬기겠어요.' 그 사이, 엽고운은 깨끗한 천으로 백견아의 눈을 감싸고 있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취접 조소아 뿐이었다. 냉하상과 전운미는 의식을 잃었으며 백견아는 눈에 천을 두른 채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다. ④ 엽고운의 눈이 조소아를 향했다. "소아, 저 쪽 침상에 눕도록 해라." 침상은 다른 쪽에 또 하나가 마련되어 있었다. "네, 오빠." 조소아는 신뢰가 가득 담긴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어 그녀는 제 발로 걸어가 침상 위에 똑바로 누웠다. "전신에 힘을 풀고 기를 단전(丹田)에만 집중시켜라. 그러나 절대로 공력을 일으켜선 안된다." "네." 조소아가 막 눈을 감는 순간이었다. 파파파팍--! 엽고운이 열 손가락을 뻗자 무형의 진기가 발출되어 조소아의 전신 대혈을 무섭게 때렸다. 그것은 심오하기 그지없는 일종의 격공타혈(隔空打穴) 수법이었다.


"음!" 조소아는 놀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발했다. 충격도 그렇거니와 고통은커녕 온몸이 시원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로 하여금 더욱 경이감으로 몰고 갔다. "엎드리거라." 그녀가 등을 보이자 격공타혈이 또다시 속개되었다. 엽고운이 진기를 내뻗는 이 수법은 가공할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손가락을 튕겨내는 동작이란 전혀 보이지도 않았다. 잠시 후. 조소아는 전신에서 기운이 모두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엽고운의 음성이 들려왔다. "눈을 감고 빨리 심법 구결에 따라 내공을 운기해라. 내가 직접 네 운공을 돕겠다." 조소아는 그 말에 따라 급히 자신의 심법인 태을천음신공(太乙天陰神功)을 운기했다. 그 심법은 무영사비가 영제로부터 전수받은 것으로써 지난 날 금마별부를 이룬 십일 인의 무공 중 한 가지였다. 이윽고 조소아는 자신의 천령개와 앞가슴 사이의 거궐혈(巨闕穴)에 엽고운의 손바닥이 닿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그곳으로부터 두 줄기 뜨거운 기운이 흘러 들어 곧장 사지백해로 전해졌다. 그 기운은 흡사 장강대하와도 같은 기세로 순식간에 막혔던 경혈을 뚫더니 그 여세를 몰아 생사현관(生死玄關)과 천지이교(天地二交)마저 타통시켜 버렸다. "아!" 조소아는 일순 몸이 지상을 벗어나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는 듯한 해방감을 만끽하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눈 앞에는 엽고운이 빙그레 웃고 서 있었다. 엽고운은 천원무극단공(天元無極丹功)이라는 개세의 현공으로써 조소아의 내상을 치료함과 더불어 그녀의 내력에 그야말로 필생의 도움을 준 것이다. "오빠! 소매를 이렇게까지......." 조소아는 감격에 겨워 눈물도 채 흘리지 못했다. "소아, 여한이 없기를 바란다. 이제 네 내공은 이전보다 오히려 수 배나 증진되어 있을 것이다." "오빠......." 조소아는 마���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전신이 날아갈 듯 상쾌하며 힘이 무궁무진하게 솟구치는 이 현상을 두고 그녀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엽고운은 연거푸 진기를 소모한 까닭에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소아, 조금 있으면 다들 깨어날 것이다. 네가 아까 제조해 놓았던 약들을 들게 해라." 그런 연후에야 엽고운은 비로소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아아......." 조소아는 더없이 애틋한 시선으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로부터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냉하상과 전운미가 깨어났다. "언니들......." 그제서야 조소아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재빨리 두 여인에게 약을 가져다 주었다. 또한 그녀는 백견아의 눈에 감았던 천도 조심스럽게 벗겨냈다. 네 여인은 각기 약을 마신 뒤, 모두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엽고운. 제일 먼저 눈을 뜬 것은 역시 그였다. 공력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높은 경지에 올라 있는지라 단지 몇 번의 호흡만으로도 즉시 진력을 보충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엽고운은 의자에 앉아 네 여인이 운기조식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시간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흘러갔다. "음!"


냉하상이 번쩍 눈을 떴다. 그녀는 정신이 들자마자 자신의 다리를 놀려 보더니 희열에 찬 외침을 발했다. "아! 제 다리가 완전해졌어요. 오오! 이럴 수가......." 그 뒤를 이어 소랑 전운미가 깨어나 생긋 웃었다. "쌀쌀맞고 말수도 적던 언니가 그렇게 소리를 꽥꽥 질러대는 순간이 있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차라리 이 기회에 별호를 빙매에서 환매(歡魅)로 바꾸지 그래요?" 그것은 의식의 암흑에서 떨치고 나온 그녀의 첫 음성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누가 보아도 농담을 즐기며 명랑하기 그지없던 이전의 전운미로 되돌아온 것이다. 월교 백견아는 눈을 뜨자 마음 놓고 펑펑 울었다. "보여요! 엽대가(葉大哥), 당신의 얼굴이....... 흑흑......." 엽고운은 여인들의 아우성(?)에 그만 정신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물론 말할 수 없이 흡족한 심정이야 따로 존재했지만. 취접 조소아. 그녀가 언제 눈을 떴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침상에서 일어날 생각도 않고 마냥 넋을 잃고 있었다. "오빠, 대체 이를 어찌 감사해야 할지......." "후후... 별 말을 다 하는구나. 나로서는 그저 소아, 네가 기쁘면 그것으로 되었다." 그 말을 환희에 들떠 있는 세 여인이라고 못 들었을 리 없었다. "엽대가--!" "흑! 오빠......." 무영사비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달려와 안겼다. 엽고운도 두 팔을 한껏 벌려 그녀들을 맞이했다. 네 여인은 모두 얼굴을 엽고운의 가슴에 묻은 채 감격의 눈물을 뿌렸다. 그는 이를 보며 내심 읊조렸다. '다행이다. 두 달 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서....... 이들 무영사비를 회복시킴으로써 심중의 짐이 다소나마 덜어진 것 같구나. 금마별부의 일을 생각하면 늘 고통스러웠는데.......' 실로 그로서는 만감이 교차되는 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갑자기 냉하상이 나직한 신음을 발하며 몸을 비트는 것이었다. 엽고운이 흠칫 놀라 물었다. "왜 그러시오? 상매." 냉하상의 안색이 묘하게 변했다. "이상해요. 전신이 마치 개미가 기어가는 듯 근질근질하고... 점점 뜨거워지는 느낌이에요." 그러자 소랑 전운미도 붉어지는 얼굴을 손으로 만지며 말했다. "저, 저도 이상해요. 엽대가......." "이, 이런!" 엽고운은 당황하여 급히 월교와 취접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예외 없었다. 백견아는 백견아대로, 조소아는 조소아대로 둘 다 눈이 몽롱하게 풀어진 채 가장자리가 붉게 변해 있었다. 무영사비의 이렇듯 야릇한 분위기는 정녕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엽고운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이들이 왜? 혹 치료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의 불안은 이내 방향을 급전환 했다. 한 가닥 가느다란 향기가 그의 콧속으로 전해진 때문이었다. '이 무슨......?'


엽고운은 안색이 돌변해 즉시 향기의 출처를 찾아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창문에 놓인 한 송이의 붉은 꽃이었다. "춘음매괴화(春淫梅塊花)!" 엽고운은 이어 탄식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토해냈다. "우우... 저것은 천하에서 가장 음(淫)한 기운을 지닌 꽃, 해천사신(海天四神)이다! 그들이 살아 있었구나." 그는 창 밖을 향해 노성을 터뜨렸다. "독수절의(毒手絶醫) 상견불! 살아 있는 것은 반갑소만, 대체 왜 내게 이런 고약한 짓을 하는 거요?" 음산하면서도 카랑카랑한 상견불의 음성이 대답했다. "ㅋㅋ! 엽가 꼬마야, 그것은 자네를 위한 것이니 너무 원망하지 말게. 그 네 명의 소녀는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고 착한 여인들이니 자네는 그런 선녀들과 맺어지게 해 준 나에게 오히려 감사해야 할 걸세. 크크크......!" 안면이 괴상하게 일그러진 엽고운이 다시 외쳤다. "내가 춘음매괴화 정도를 이기지 못할 것 같소?" 창 밖에서 상견불은 여전히 낄낄거렸다. "물론 자네의 의독술은 현재 나를 능가할런지도 모르지. 그러나 치사한 비방에서는 결코 나를 따르지 못할 걸세. 백 년 이상을 독과 함께 살아 오면서 나는 별별 못된 짓은 다 해 보았거든?" "어림없소!" 엽고운은 냉소하며 창가에 놓인 춘음매괴화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팍! 춘음매괴화는 대번에 가루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순간, 그 꽃에서 푸른 연기가 확 퍼지더니 순식간에 엽고운과 무영사비의 코로 흡입되었다. 엽고운은 대경하여 부르짖었다. "운우지락무(雲雨之樂霧)!" 그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휘청했다. '당했다! 꼼짝 없이.......' 엽고운은 혈맥이 급속도로 팽창하며 단전부위가 뜨겁게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황망히 무영사비를 돌아다 보았다. "맙소사!" 무영사비는 하나같이 얼굴이 도화빛으로 붉게 달아오른 채 눈에 춘정(春情)을 가득 떠올리며 온몸을 비틀고 있었다. "흐... 흑......!" 그녀들의 입에서는 거친 숨결과 함께 연신 자극적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엽고운은 당혹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을 도로 주워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그 역시도 운우지락무를 마신지라 벌써부터 강력한 춘화(春火)로 인해 몸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아! 엽대가......." "오빠......." 무영사비는 어느덧 이성을 잃은 모양이었다. 그들 네 여인은 가쁜 숨을 들먹거리더니 답답한 듯 제각기 입고 있던 옷을 마구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헉!" 엽고운은 숨이 콱 막혔다. 의원으로서 그녀들을 대할 때와는 판이한 느낌이 그의 가슴을 무작정 덮어눌러 왔다. 왜 안 그렇겠는가?


태초의 적나라한 모습이 된 네 개의 여체가 그의 눈 앞에서 너울거리고 있었다. 뽀얗고 투명할 정도로 맑은 피부, 풍만한 젖가슴과 궁륭을 그리는 둔부....... 잘록한 허리, 매끄러운 아랫배와 미묘하게 배꼽 주위로부터 폭발적인 유혹을 일으키는 선(線)....... 대리석같은 두 개의 허벅지 사이에서는 무릉비경의 황홀한 밀지(密地)가 언뜻언뜻 모습을 보이고....... 이 모든 것은 차라리 하나의 환상이었다. 그리고 그 현란하고 황홀한 환상은 그대로 엽고운의 정신을 침몰로 이끌어 갔다. "학학......!" "으으... 음......." 불길처럼 달아오른 네 개의 젊은 육체들이 스스로 제 살을 태우기 시작했다. 확실한 것은 그것이 단지 쾌락이 아니라 화신 혁화성의 말마따나 미래를 위한 포석이라는 점이었다. "크ㅋ! 제 머리를 못 깎는 놈은 어쩔 수가 없어. 나라도 나서서 반들반들하게 밀어 주는 수밖에......." 독수절의 상견불의 음성이 묘한 여운을 만드는 가운데 엽고운은 탄력이 넘치는 네 여인의 육림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것은 정녕 뜨겁고도 끝이 없는 육체의 향연이었다. 무영사비는 그 하나하나가 절색의 미녀들이다. 또한 그녀들이 지니고 있는 육체의 마력 역시 절대 미모에 뒤지지 않았다. 천하의 남성들을 자멸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고도 남음이 있는. - 다음 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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