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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붕기협전 1 권 검궁인·사마달 공저 차례 제1장 제2장 제3장 제4장 제5장 제6장 제7장 제8장 제9장

사막(沙漠)의 고아(孤兒) 인간(人間)의 도리(道理) 시작(始作)을 향한 몸부림 입문(入門) 천붕(天鵬)을 얻다 뜻밖의 개입(介入) 금마궁(禁魔宮) 신공(神公)과 영제(影帝) 지사(志士)를 얻다

서문(序文) 무협소설의 재미는 어디서 오는가? 두 말할 것도 없이 흥미에 있을 것이다. 현실을 초월하는 무한대의 상상(想像)과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풍운만장한 스토리... 거기에 방대한 스케일이 무협소설의 장점일 것이다. 이런 요소는 어떤 소설에도 없는 무협소설만이 갖는 특징일 것이다. 현대는 미디어의 시대다. 다양한 매체와 미디어의 등장으로 소설 읽기는 점차 시들해져 가고 있다. 그러나 활자를 통한 '읽기 행위'는 보다 개인적인 세계를 제공해 준다. 그림과 영상(映像)으로 표현되는 갖가지 창작물들은 획일화되어 독자적인 판단을 허용치 않는 반면 소설 읽기는 완전한 개인의 사고영역을 고수케 해 준다. 『천붕기협전』은 전설의 붕새를 타고 구만 리 장천을 비행하는 주인공의 신비한 세계를 보여준다. 무협소설만이 가지고 있는 웅대한 스케일, 자유분방한 상상력, 수많은 인간 군상(群像)들이 벌이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스트레스가 풀리고, 보다 자유스러워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틀에서 벗어나자. 현대인이 도시를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비등해 지는 것은 그 만큼 자유롭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본저가 독자제현의 자유실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자오정(子午亭)에서 검궁인 . 사마달 배상. 제 1 장·사막(沙漠)의 고아(孤兒) ① 등격리(騰格里) 사막. 영겁의 형상을 보여주듯 사구의 구릉은 그 끝이 없었다. 또한 낮에는 불같이 뜨겁게 달아오르나 밤에는 한풍이 분다. 누군가 이 사막을 사해리(死海里)라고 불렀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죽음의 땅이란 뜻이었다. 그러나 이 천형의 땅에도 초지(草地)가 있었다. 대평원을 이루는 그곳에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서장산(西藏産) 황마(黃馬)와 양떼들이 방목되고 있다. 뚜-- 뚜우-- 뚜우-멀리서 고적(鼓笛)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방목하는 양떼를 모으는 신호로써 이곳의 풍치를 한껏 북돋우기도 한다. 딸랑... 딸랑.......


방울소리는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隊商)들의 행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들이 타고 가는 낙타의 목에서 울리는 소리다. 유목민의 집단인 몽고족들은 대개 족대(族隊)를 이루어 사막을 건넌다. 이들은 양떼를 몰고 가는 무리들과 상업을 하는 대상, 두 종류로 구분되는데 낙타의 목에 걸린 채 울려대는 방울소리는 개중 후자인 장삿꾼들의 상징이다. 딸랑... 딸랑... 딸랑....... 방울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윽고 드넓은 모래언덕 위에 일단의 대상이 나타났다. 인원은 약 오십여 인 정도, 낙타의 옆구리에 각종의 물건들을 짊어지게 했으며 사람은 그 옆에서 걷고 있었다. 대오의 맨 앞에는 두 대의 가마가 있었다. 가마는 지역적인 특성상 낙타의 등 위에 받쳐져 있었는데 휘장도 양피였다. 앞의 가마는 크고 뒤의 가마는 다소 작았다. 역시 낙타를 탄 우람한 체구의 중년인이 이들 가마를 위시해 대오 전체를 인솔하고 있었다. 그는 늠름하게 생긴 몽고인으로 양가죽 옷에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피부가 구리빛인데다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그는 타고난 신력마저 엿보여 전형적인 용사의 모습을 제시해 주는 듯 했다. 그런데 문득 그가 허리를 꼿꼿이 펴며 움찔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의 눈길은 곧바로 먼 지평선을 향했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언덕의 위, 아스라히 바라보이는 거리에서 그는 하나의 검은 검을 발견한 것이었다. '저것은......!' 열사의 사막에서 잔뼈가 굵었다고 자부할 만큼 사막에 관한 한 경험이 풍부한 그였다. 따라서 직감적으로 그 점이 사람임을 알아본 그는 눈을 가늘게 좁혀 시력을 집중시켰다. 한 사람.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밭을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 자가 있었다. 우연일까? 마침 그 자가 향하고 있는 쪽은 대상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일치했다. 그로부터 약 반시진 후. 대상들의 행렬은 마침내 그 자가 있는 곳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러자 중년인이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딸랑! 방울소리가 한 번 크게 울리더니 기나긴 행렬은 일제히 뚝 멈추었다. 첫번째 가마 속에서 한 줄기 창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이랍(吾以拉),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가?" 그것은 물론 몽고어였다. 오이랍이라 불리운 중년인은 즉시 우렁차게 대답했다. "앞에 누군가 쓰러져 있습니다." 그는 대략 삼장여의 간격을 두고 모래 바닥에 엎어져 있는 한 인영을 주시했다. 그 자는 털옷을 입고 있었는데 무참할 정도로 찢겨진 데다가 군데군데 피까지 배어 있었다. 오이랍은 덧붙여 말했다. "아마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지쳤었나 봅니다." 가마 안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인자한 울림을 드리웠다. "음, 여기서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된 것도 다 알라의 뜻일 게다. 오이랍, 어서 그 자를 살펴봐라." "네! 알겠습니다. 족장(族長)님." 오이랍은 명에 따라 낙타에서 내려 엎어져 있는 자를 뒤집었다. 곧 창백하고 깡마른 얼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입술은 갈라 터졌으며 얼굴이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하지만 오이랍이 놀란 것은 정작 그때문이 아니었다.


"족장님! 이 자는 한인(漢人)입니다." "한인?" 가마 안의 음성에도 어지간히 놀라움이 깃들어 있었다. 오이랍은 확신에 가까운 어투로 대답했다. "네! 복장은 우리와 같지만 틀림없는 한인입니다." 그들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 연후, 이어지게 된 음성은 몹시도 부드러운 것이었다. "인명을 구하는데 있어 어찌 종족을 따지겠는가? 오이랍, 그의 상세가 어느 정도인지 보아라." "네." 오이랍은 시선을 다시 반듯이 누워 있는 사내에게로 옮겼다. 나이는 대략 이십칠팔 세 가량, 비록 깡마른 데다가 핏기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으나 일견하기에도 대단히 준수한 용모였음을 알 수가 있었다. 털옷의 앞섶을 붉게 물들인 핏자국과 기이한 대조를 이루는....... "으음." 오이랍은 짧은 탄식과 더불어 옷자락을 헤쳐 보았다. 하지만 무엇을 발견했는지 그의 안색은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려 버리고 말았다. 사내의 가슴 한복판, 그곳에는 핏빛날개가 달린 하나의 화살이 깊숙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아! 이것은......." 오이랍은 자신도 모르게 전율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냐? 오이랍." 가마 안의 음성이 궁금한 듯 물어왔다. 그러자 오이랍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혈전추혼(血箭追魂)입니다, 족장님....... 그것이... 이 자의 가슴에 꽂혀... 있었습니다." "뭣이!" 가마 안으로부터 경악성이 들렸다. "도란태산(圖蘭泰山)의 마왕인 혈령사신(血靈邪神)의 혈전추혼 말이냐?" "그, 그렇습니다." 일순 가마 전체가 가벼운 흔들림을 보였다. 이제까지의 대화로 미루어 현재 마차 안에 있는 인물은 대상의 우두머리이자 그들 부족의 족장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약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경과된 후에야 무거운 음성을 토해냈다. "오이랍, 그 자를 두고 얼른 이곳을 떠나자. 너도 알다시피 혈령사신의 일에 개입한다는 것은 곧 멸족(滅族)을 의미한다." 오이랍의 얼굴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죽어가는 자를 이대로 두고 갈 수야......." 가마 안에서 탄식이 들렸다. "오이랍, 알라께서도 우리의 처사를 결코 나무라지만은 않으실 것이다. 어서 가자." "알겠습니다." 오이랍은 족장의 명에 따라 마지 못해 일어섰다. 연민으로 인해 그의 안면은 침울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낙타에 오르기 위해 몸을 돌리면서도 아쉬운 듯 깡마른 사내를 힐끗 돌아다 보았다. ②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시체인 양 꼼짝도 않던 사내가 불현듯 꿈틀하는 움직임을 보이더니 미약한 중얼거림을 흘렸다. "무... 물을 좀......." 오이랍은 본시 인정이 많은 인물이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가마를 향해 물었다. "족장님, 이 자에게 물을 주는 것도 안 됩니까?" 이 면에서는 가마 속의 인물도 그다지 예외는 아닌 것 같았다.


"아니다. 그에게 물을 주어라." "고맙습니다. 족장님." "오이랍, 너는 정말 어쩔 수가 없는 위인이로구나." 자탄에 가까운 힐난을 들으며 오이랍은 빙긋 웃었다. 아울러 그는 낙타의 옆구리에서 물통을 끌러 깡마른 사내에게 먹였다. 사내는 거의 본능적으로 물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러는 동안 오이랍은 비로소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할 수가 있었다. 그는 보면 볼수록 귀골이 느껴지는 청년이었다. 청년은 물을 다 마시더니 더듬거렸다. "누... 누구신지는... 모르나... 정녕... 감사하오." 그러나 그 다음 순간이었다. "왝!" 청년은 한 모금의 핏덩이를 토해냈다. 검게 엉켜붙은 그 핏덩이 속에는 잘린 내장과 조각난 폐부 등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아무튼 그는 응혈을 배출해내자 다소나마 정신이 회복되는 모양이었다. 그의 눈꺼풀이 힘겹게 들어올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청년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눈은 연신 껌벅거리기만 할뿐 도시 초점을 잡지 못했다. "나... 나는... 이미... 틀렸소....... 은인께서는... 미안하지만... 내... 마지막... 부탁을......." 단지 상황이 빚어낸 무의식적인 행위만은 아니었다. 오이랍은 어느덧 청년의 귓전에 대고 이렇게 소리치기에 이르렀다. "말하시오! 나 오이랍이 당신의 청을 들어 주겠소." "고... 고맙....... 내... 품 속에는 아이가....... 은인... 이... 아이를... 제발 거두어......." 청년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말을 잇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이의 이름은... 엽(葉)...... 고운(古雲)....... 부탁......."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고개로 옆으로 꺾었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검은 피가 주르르 흘러 나왔다. "주, 죽었군......." 오이랍은 청년의 죽음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급히 그의 털옷을 젖혀 보았다. "오오!" 오이랍의 입에서 탄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왔다. 과연 청년의 가슴 속에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어린아이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것이었다. 눈을 감고 있는 아기의 모습은 더없이 평화로와 보였다. 그러나 아기의 입가에 묻어 있는 핏자국이 오이랍의 시선을 확 잡아당겼다. 그는 한 차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아! 이 청년은 자신의 피로 아이의 생명을 지켜 왔구나.' 그의 짐작은 사실이었다. 얼마 동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기는 그런 방법으로 혹독한 사막을 견디며 연명해왔던 것이다. 죽은 청년의 얼굴이 그토록 창백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어찌, 어찌 이런 일이......!' 오이랍은 격정에 휘말린 채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이것을 일컬어 부성(父性)이라 해야 하는가?' 잠시 후. 가마 안에서 들려오는 재촉이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오이랍, 무얼 꾸물거리는 거냐? 어서 떠나자." 오이랍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죽은 자의 품 속에서도 천진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아이를 보며 그의 표정은 몇 번이나 변화를 거듭해야 했다.


"그는... 죽었습니다." 가마 속에서 침음성과 함께 이런 말이 들려왔다. "안되었다만 할 수 없구나. 한시 바삐 이 곳을 떠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오이랍은 가마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유감스럽게도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한 가지 난처한 일이......." "무슨 말이냐?" "이 자의 품 안에 어린 아이가 들어 있습니다." "무엇이?" 가마 안의 인물 또한 무척이나 놀란 듯 했다. 그 사이, 오이랍은 만면에 유원을 가득 담은 채 가마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를 향해 족장으로서의 위엄이 담긴 음성이 나직이 물었다. "오이랍, 네 뜻은 무엇이냐?" 오이랍은 고개를 푹 숙이며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어린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저는 데리고 갔으면 합니다." 가마 안의 음성이 그의 말을 자르듯 강경하게 대답했다. "안 된다. 동정도 좋다만 그로 인해 죽음을 감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오이랍, 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나 역시도 네 생각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부족 전체의 생명이 걸린 일을 어찌 순간적인 감정으로 처리할 수 있겠느냐?" 오이랍은 초조한 어투로 덧붙였다. "이 일을 목격한 사람은 우리 일행 중에서도 족장님과 저 이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숨겨온 어린애만 살린다면 혈령사신도 눈치채지 못할 것입니다." "오이랍, 그대는 대체......." 가마 안의 음성이 탄식으로 바뀌던 그 순간이었다. "응아! 응아!" 두번째 가마에서 느닷없이 어린애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또한 그 뒤를 이은 것은 몹시도 흥분한 듯한 여인의 음성이었다. "나하리칸! 오오, 위대하신 우리의 대족장이시여! 지금 막 공주께서 탄생하셨습니다." 그 외침에 첫번째 가마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게 정말인가?" "네, 아주 아름다운 공주님입니다." 가마 안에서는 환성이 울렸다. "오이랍! 알라의 뜻이다. 그 어린 아이를 살려라." "족장님!" 오이랍은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는 감격한 나머지 땅에 엎드려 크게 절을 했다. "오오! 족장님의 덕은 후세까지 길이 전해질 것입니다." 가마 안의 음성은 격정을 자제하며 이렇게 답했다. "하지만 아이 뿐이다. 죽은 자는 아예 건드리지도 말아라. 혈령사신의 마수는 절대 도외시할 수 없다. 알겠느냐?" "물론입니다!" 오이랍은 만면에 희색을 띤 채 죽은 한인청년의 품에서 어린아이를 꺼냈다. 이어 그는 급급히 어린아이를 품에 감추었다. 대상 뒷쪽의 인물들은 그 광경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것은 전례가 그러했듯 누구도 오이랍과 족장인 나하리칸의 대화에 참견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오이랍의 행동은 은밀한 가운데에서도 무척 신속했다.


이윽고 오이랍은 낙타에 올라 힘차게 외쳤다. "전진--!" 대열은 다시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이랍은 와중에서 힐끗 죽은 자를 돌아다 보았다. 어느새 그는 오른손 주먹에 쥐어져 있던 한 줌의 모래를 시체 위에 뿌려주고 있었다. '부디 안심하고 고이 잠드시오. 그대의 아이는 이 오이랍이 잘 키우리다.' 휘-- 이-- 이잉----! 날은 어두워지고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른바 사풍(砂風), 사막의 바람은 무섭다. 때로는 새로운 사구가 생겨나기도 하고 반대로 어이없이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상들은 날이 어둡기 전에 목적지에 당도해야 한다. 휘-- 이-- 잉--! 그 바람으로 인해 죽은 자의 시체는 차츰 모래로 덮혀가고 있었다. 그의 죽음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③ 사막의 밤. 고요함 속에 기이하게도 흥분과 함성이 들끓고 있었다. 초지의 대평원, 방목하는 야생마들도 모두 잠이 들 시각이었다. 그러나 소란은 좀체로 그칠 기세가 아니었다. "와-- 아아--!" 밤의 적막은 온데간데 없었다. 요란한 음성들이 연신 사위를 울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수십 명의 장정들이 신이 나서 저마다 고함을 질러대는 소리였다. 통나무로 세운 울타리 안. 기세좋게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이 어둠을 밝히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일기당천의 용맹한 한 청년이 지금 마상에서 말과 일전(?)을 벌이고 있었다. 말은 전신에서 새카만 윤기가 흐르는 흑마로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였다. 그 위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청년은 대략 이십 세 정도로 보였으며 몽고인 특유의 우람한 체격과 구릿빛 피부, 부리부리한 눈 등을 지니고 있었다. 다소 오만한 인상의 그는 미친 듯 날뛰는 흑마를 다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두 다리로는 말의 허리를 바짝 조여 감았다. 그리고 양 손으로는 갈기를 움켜쥔 채 등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었다. 히히히-- 힝--! 두두두둑---! 흑마는 그야말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야생의 본능이 청년을 용납하지 않는지 네 굽을 허공에서 마구 휘저으며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끼럇--!" 청년 역시 조금도 지지 않고 우렁차게 외쳤다. 울 밖에서 이 광경을 구경하던 장한들이 일제히 함성과 갈채를 보냈다. "와아-- 와---!" 그런데 그들과 매우 대비되는 풍경이 있었다. 한 구석진 곳이다. 장작불의 불빛을 받아 음영이 어른거리는 가운데 한 소년이 바닥에 앉아 무슨 일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종족이 틀린 것일까? 소년은 상이한 용모를 소지하고 있었다. 우선 피부가 희었으며 얼굴의 윤곽도 이질적인 감을 주었다. 전체적인 선 또한 그들과는 달리 무척 섬세했다. 이 밖에도 그는 유난히 크고 아름다운 눈을 갖고 있었는데 그눈은 고상하고 맑았으며 어찌 보면 깊은


우수마저 담긴 듯 했다. 나이는 약 십사오 세 가량, 지극히 영준한 미소년이었다. 백옥 같은 이마 위로 살풋이 흘러내린 머리칼이 그의 매력을 더해 주고 있었다. 소년은 무릎에 하나의 나무판자를 놓고 있었다. 숯조각을 들고 목판에다가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손이 또 눈에 띈다. 남자의 손이 아름답다면 어불성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투명한 느낌이 일 정도로 깨끗하고 매끄러운 그의 손은 천하 어떤 미녀의 그것과 비견해도 절대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소년의 눈은 아까부터 예의 흑마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숯은 목판 위에서 바삐 움직였다. 그가 자신의 화폭에 담고 있는 것은 바로 날뛰어대는 그 흑마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단지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집념과 욕망, 그리고 아집에 타오르는 그의 눈에서는 일면 무서우리만치 끈질긴 사나이의 혼이 엿보이고 있었다. 나이도 어린 미소년의 눈이 이런 강한 느낌을 발산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이례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타인으로 하여금 뭔가 숨어 있는 내력을 짐작하게 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를 포함해 소년의 모습은 이따금씩 밝아지는 장작불빛을 통해 더없이 신비한 마력(魔力)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이었다. 히히히힝--! 흑마가 허공을 박차며 크게 용트림을 했다. 그 바람에 청년은 그만 비명을 지르며 말의 등에서 이탈되고 말았다. "어억!" 워낙 창졸지간의 사태인지라 누가 돕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었다. 장한들은 당연히 그가 바닥에 내팽개쳐져 중상을 입을 것으로 생각했다. "우우--!" 하지만 그런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은 금세 입증되었다. 휘익--! 놀랍게도 청년은 공중에서 몇 바퀴 멋지게 회전한 뒤, 지면을 밟으며 사뿐히 내려서고 있었다. "와아--!" 그를 향해 장한들은 또다시 함성을 울렸다. 그런데 막상 당사자인 청년에게는 조금도 기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불만스러운 투로 투덜거렸다. "에잇! 오늘도 틀렸군." 그러자 울 밖으로부터 한 장한이 음성을 높여 외쳤다. "소족장(少族長)님! 대단합니다. 우리 부족 중 어떤 자도 저 흑추(黑追)의 등에서는 채 일각도 버텨내지 못했습니다. 소족장님만이 유일하게 무려 한 식경이나 견디셨습니다." 소족장이라 불리운 청년의 얼굴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다. 그는푸르륵거리며 발굽을 들먹이고 있는 흑마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제기랄! 저 놈은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놈이냐? 이곳에 온지 일 년이 되었는데도 통 길을 들일 수가 없으니." 휘익--! 청년은 몸을 날려 가볍게 높은 울을 넘어갔다. 그리고는 한 장한의 손에서 술병을 낚아 채더니 벌컥벌컥 들이켰다 "핫핫핫... 그러나 두고 봐라! 이 아사웅(阿斯雄)은 꼭 너를 굴복시키고 말테다." 호탕한 대소를 터뜨리는 그의 기개는 정녕 능히 한 몸으로 천군(千軍)을 물리칠 정도로 출중해 보였다.


옆에 있던 장한들이 말했다. "틀림없이 저 흑추도 곧 소족장님께 굴복하고 말 것입니다." "하하... 그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암! 소족장님의 솜씨라면 이 일대에서 최고니까." 그 말에 아사웅의 범눈썹이 멋들어지게 치켜 올라갔다. "물론이다! 자, 오늘은 즐거운 날이다. 모두들 마음껏 마셔라." "와아-- 아--!" 장한들은 온 사막이 떠나가라 함성을 내질렀다. 장작불 위에는 낙타 한 마리가 올려졌다. 그것은 이들 유목민 고유의 풍습으로 낙타의 뱃 속에는 다시 한 마리의 양이 들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양을 통째로 구워 먹는 것이야말로 이들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타다닥! 타닥--! 장작불이 거세게 타오르는 가운데 고기 익는 냄새가 구수하게 풍기기 시작했다. "하하하핫......!" "와아아--!" 흥청거리는 분위기 속에 사막의 밤은 점차 깊어갔다. 하지만 구석진 곳에 앉아 있던 소년은 여전히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이제 완성된 그림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흑추의 그림으로써 방금 전 마구 날뛰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그림이다. 말갈기 한 올 한 올이 허공에서 춤을 추는 듯 했으며 네 굽을 놓는 근육과 동작 등까지도 실제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런데 왜일까? 소년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말없이 시선을 옮겨 타오르는 장작불을 응시했다. 이윽고 소년은 벌떡 일어서더니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림이 그려진 목판을 불 속에 던져 버렸다. 휙--!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나의 섬섬옥수가 나타나 날아가는 목판을 재빨리 낚아챘다. "으음?" 소년은 흠칫 놀라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호호호호......." 그의 뒤에서 은방울을 굴리듯 청아한 소녀의 교소성이 울렸다. 그 웃음은 듣는 이의 마음을 단시간에 상쾌하게 바꾸어줄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단지 웃음소리가 이러하다면 그 웃음의 주인은 필경 천하의 미색이리라. 과연 그랬다. 소년이 빙글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눈이 절로 크게 떠질만큼 절색인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이제 십사세 쯤 되었을까?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미란 이미 나이를 몇십 배나 초월해버린 것이었다. 소녀는 몸에 꼭 맞는 금의(錦衣)를 입고 있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선연한 미태가 전신으로부터 물씬 느껴졌다. 물론 용모 또한 절대로 이에 못지 않았다. 양뺨에 귀엽게 패인 볼우물과 이국적인 푸른 눈이 우선 시선을 확 잡아 당겼다. 게다가 빙결인 양 깨끗한 피부와 허리 밑까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 긴 머리칼은 빨간 열매를 문 듯 육감적인 입술과 더불어 더할나위없는 매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소녀의 푸른 눈은 지금 막 돌아선 소년을 향해 장난스럽게 찰랑이고 있었다. 소년이 움찔하여 중얼거렸다.


"아랑(我娘)......." 소녀 아랑은 수중의 목판을 가슴에 안으며 또 웃었다. "호호호... 자강(自康)오빠, 이 그림은 버리려 한 것이니 내가 가져도 되겠죠?" 자강이라 불리운 소년은 준미한 눈썹을 약간 찌푸렸다. 이어 그는 아랑을 직시하며 담담히 말했다. "아랑, 그것을 이리 다오." 아랑은 샐쭉 토라진 표정을 보이며 목판을 뒤로 감추었다. "흥! 싫어요. 내가 주웠으니 이제 임자는 나예요." "아랑, 내가 따로 하나 그려 주겠다." 자강의 어조는 무뚝뚝하게 느껴지리만큼 여전히 담담했다. 아랑이 그의 면전에 대고 입술을 뾰죽 내밀었다. "안 되겠는데요? 나는 이것이 마음에 들어요." 그녀의 가벼운 도리질에도 주변의 공기가 놀라서 파랑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만치 그녀는 아름다왔다. 일순 자강의 큰 눈 속에 희미하나마 미소가 스쳤다. 하지만 그는 이를 부정하기라도 하듯 이내 몸을 돌려 버렸다. 자강은 아사웅을 가운데 둔 채 웃고 떠드는 무리들로부터 천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걸어가는 곳은 어둠 속이었다. 밝음이 싫은 것인가? 아니다, 그는 단지 시끄러운 것이 싫을 따름이었다. "자강오빠......." 아랑은 잠시 멈칫 하더니 곧 자강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의 폭포수같은 머리칼이 움직임에 따라 아름답게 출렁거렸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자강은 전면을 응시한 채 계속 걸어갔다. 그의 걸음은 특이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으며 전혀 힘들어보이지 않아 그런 식이라면 하루 종일을 걸어도 자세가 전혀 흐트러질 것 같지 않았다. 침착한 내면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보행법이랄지, 어떻든 그는 이따금씩 걸음을 멈추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랑도 여지없이 멈추어 섰는데 그가 다시 걸으면 그녀도 역시 그를 따라 다시 교족을 옮겨 놓았다. 이 추적(?)에 대해 자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아랑, 어디까지 따라올 거지?" 아랑이 새침한 어투로 그 말을 받았다. "내가 언제 오빠를 따라갔다는 거죠? 나는 그저 내 갈 길을 가고 있는 중이에요." 자강은 혼자 빙긋 웃더니 방향을 틀었다. 이제 그가 향하게 된 곳은 부족의 거처가 있는 곳과는 정 반대 방향이었다. 아랑은 아미를 살짝 찌푸렸으나 다시금 그를 따랐다. 자강이 마침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아랑." 아랑은 짐짓 시침을 뚝 떼며 선이 고운 턱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자강이 자르듯 무뚝뚝하게 말했다. "계속 따라오면 볼기를 때리겠다." 그 말에 아랑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는 한편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로 손을 가져갔다. 이러한 그녀의 동작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몹시 귀여워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음성은 꽤 매서웠다. "흥! 착각하지 말아요. 오빠는 자신에게 무슨 매력이라도 있는 줄 아나 보죠?" "후후......." 자강은 대답 대신 고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다시 두어 걸음을 내딛더니 풀밭에 털썩 주저 앉았다.


아랑은 예기치 못한 상황 변동에 어찌할까를 고민하는 듯 미간을 좁혔다. 이어 그녀가 갈등 끝에 취한 행동은 눈치를 보며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앉는 일이었다. 아랑이 힐끔거리는데 반해 자강은 그녀의 시선을 도외시한 채 밤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기이한 침묵이 그들 사이에 흘렀다. ④ 잠시 후. "아랑, 이리 와 봐." 자강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 아랑의 얼굴은 언제 토라졌냐 싶게 활짝 펴졌다. 그녀는 마치 한 마리의 나비처럼 달려가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자강의 한 쪽 팔을 끌어 안으며 기쁜 듯이 재잘거렸다. "호호호... 자강오빠, 결국 오늘도 내가 이겼죠?" 자강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밤바람에 아랑의 머리칼이 휘날려 그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러자 풋과일과도 같은 싱싱한 소녀의 체취가 자연스럽게 그의 후각에 전해져 왔다. 태연으로 무장하고 있던 자강의 정신이 약간의 어지럼증을 느낀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것은 내부에 깊숙이 숨겨 두었던 순수한 열정을 그 스스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그래, 아랑. 아마 나는 언제나 너를 이길 수 없을 거야." 자강의 말투는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하지만 아랑의 표정은 그와 역비례였다. 그녀는 영 시무룩해져 이렇게 말했다. "피이, 아랑의 뜻은 그게 아니었어요.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어쩌면 순종인 걸요?" 그녀는 원망이 담긴 눈으로 자강을 응시했다. "나는 지금까지 실상 떼를 쓰고 있었을 뿐이에요. 그건 오빠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고요." 자강은 그녀의 말에 싱긋 웃어 보였다. 웃음, 그것은 자강에게 있어 이 순간 별다른 의미가 있을 수 없었다. 아울러 그 단순한 웃음이 어떤 매력을 풍기고 있는지도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짧게 지나친 웃음의 파장은 실로 대단했다. 아랑은 몽롱해진 눈으로 자강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강의 웃음에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것이었다. 그녀의 맹렬한 눈길을 접한 자강이 오히려 당황하여 물었다. "아랑, 내 얼굴에 뭐가 묻었느냐?" "아, 아니예요." 아랑은 급급히 시선을 돌리며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는 솔직한 대답을 잊지 않았다. "정말이지, 자강오빠의 얼굴은 너무나도 아름다와요. 이 아랑을 바보로 만들고도 남을 만큼이요." 자강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후후... 사내의 얼굴을 가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다니, 그건 칭찬이 아니라 모욕이다." "천만예요! 모욕이라니요? 내가 어찌......!" 아랑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에 따라 그녀의 머리칼이 꿈결처럼 휘날렸다. 자강은 뭐라 더 덧붙이려는 그녀의 입술에 손가락을 세워 갖다 대었다. "그만, 알고 있어. 아랑, 너는 착한 소녀야. 그리고......." 그는 다른 한 손으로 아랑의 결 고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지." "오빠......." 아랑의 얼굴이 금세 붉게 타올랐다. 그녀는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려 고개를 똑바로 들고 있을 수도 없어지고 말았다. 멀리서 장작불이 타오르는 광경이 환상처럼 눈에 들어왔다. 아랑은 한 동안 그것을 보다가 다시 자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강. 그는 망연히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깃든 공허감같은 것이 왠지 아랑으로 하여금 가벼운 실망감을 느끼게 했다. 그녀는 자강이 자신과 똑같은 심정을 나누고 있을 줄 알았던 것이다. 아랑은 이러한 동상이몽을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손을 들더니 자강의 옆구리를 세게 꼬집었다. "앗!" 자강이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실례죠? 기껏 남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는......." "별이 곱지 않느냐? 자, 너도 보아라." "흥! 딴전은......." 말은 이렇게 해 놓았으나 막상 아랑은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자강의 고독이 불현듯 그녀의 가슴에 깊숙이 스며든 때문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강오빠는 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죠?" "다른 이유는 없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좋을 뿐이다." 그 말에서 아랑은 미묘한 여운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녀는 불안과 기대가 반반씩 섞인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나와 함께 있는 것도 싫은가요?" 자강은 흠칫 하더니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느냐? 아랑은 아름답다. 우리 부족뿐 아니라 그 어느 곳에서도 아랑보다 예쁜 여인을 나는 본 적이 없으니까." 아랑은 안도감을 내비치면서도 수줍은 듯 웃었다. 이어 그녀는 자신이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던 것을 작은 음성으로나마 비로소 말하기 시작했다. "이제 이 년만 있으면 나도 성년이에요. 그때는 우리 부족제일의 용사와 가족을 이루게 되지요." 그녀는 자강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부족 모두가 축복을 해줄 거예요. 그리고 그것은 내가 지금껏 염원해오던 순간이기도 해요." 자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침묵은 아랑을 거의 안절부절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자강오빠, 제 말은......." 탄식에 가까운 그 음성에 자강이 비로소 침묵을 깼다. "아랑은 현명하고 아름다우니까 그 어떤 용사든 무척 아끼고 사랑해 줄거야." 아랑의 얼굴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빛으로 잔뜩 상기되었다. 그녀는 흥분한 듯 언성을 높였다. "자강오빠! 당신은 왜 그렇게 소극적이지요? 당신은 왜 남들처럼 힘을 길러 나를 차지하려고 하지 않나요? 사랑까지는 몰라도 내게 영 관심이 없는 것만도 아니잖아요." 어느덧 아랑의 아름다운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자강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그는 잠시 그렇게 굳어 있더니 손을 들어 아랑의 어깨에 올려 놓았다. "아랑, 네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다. 그리고 네가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나도 너를 좋아한다. 그러나......." 음성이 떨려나와서 일까? 그는 끝내 말을 맺지 못했다. 자강의 시선은 어느 결엔가 또다시 하늘 저 편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유성 하나가 꼬리를 길게 끌며 지상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망연히 그것을 응시하던 자강의 눈 속에서 문득 기이한 빛이 춤을 추었다. 내도록 그의 눈에 매달려 있던 우수와는 심히 대조를 이루는 것, 그것은 뜻밖에도 강한 사나이의 혼이었다. 아랑이 그의 상념을 깨듯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자강 오빠, 저 별들이 보이나요? 저 나란히 빛나는 두 별 말이에요." "으음." 자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별에는 전설이 담겨 있지요." "전설?" 아랑은 자강의 품에 살풋이 기대며 취한 듯 얘기했다. "원래는 두 별이 붙어 있었대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서로 떨어지게 되었다나 봐요." "후후... 전설은 전설인가 보군." "한 별은 용성(龍星), 또 한 별은 봉성(鳳星)이라고 해요. 봉성은 항상 용성을 쫓고 있는데 일단 떨어진 그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고 있어요." 자강은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랑의 음성이 촉촉하게 젖어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봉성에는 늘 눈물처럼 물기가 번져 있죠. 봐요, 그렇지 않나요? 저 음울한 빛은 차라리 처절해요. 스스로를 태워서라도 빛을 내 용성의 눈에 띄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용성은 언제나 저렇게 엉뚱한 쪽으로 향해져 있어요." 그녀의 고개가 툭 떨구어졌다. "마치... 오빠는 용성이고 나는 봉성인 것 같아요." 이쯤 되면 뭐라 할 말도 있으련만은 자강의 입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아랑은 마침내 그가 자신의 말을 들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하지만 성격상 아랑은 오래 절망하지 못하는 소녀였다. 몽고인의 피를 이어받아 직선적이고 정열적인 그녀의 기질은 기어이 스스로에게 오기를 유발시켰다. 그녀는 볼이 퉁퉁 부어오른 채 뾰족하게 외쳤다. "오빠! 지금 내 말을 듣고 있기나 한 거예요?" 밤하늘에 시선을 두고 있던 자강이 아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놀란 눈은 그녀를 더욱 화나게 했다. "흥!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오빠란 사람은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거죠?" 아랑은 그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좋아요! 난 가겠어요. 흥!" 그녀는 코웃음을 치더니 무작정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랑! 잠깐......." 자강이 당황하여 외쳤으나 소용없었다. 아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그러나 그녀는 채 얼마 가지 못했다. 탁! "아얏!" 어둠 속에서 돌뿌리에라도 걸렸는지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아랑!" 자강이 황망히 외치며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아랑은 바닥에 주저앉아 울상이 되어 있었다. 무릎을 움켜쥐고 있는 그녀에게 자강은 미안한 얼굴로 물었다. "아랑, 많이 다쳤느냐?" "아야....... 아... 아파!" 아랑이 이마를 찌푸리며 신음하자 자강은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얼떨결에 손으로 그녀의 치마를 헤쳐보려 했다. "어디 보자." 하지만 그의 손이 치마 밑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어딜 만지려고 그래요?" 아랑이 야멸차게 그의 손을 쳐냈다. 자강은 그제서야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고는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아랑, 어서 돌아가서 치료하도록 하자." 그 말에 아랑은 대답을 대신해 몸을 일으켰다. "아얏!" 그녀가 비틀거리며 넘어지려한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도저히 걷지 못하겠어요." 자강은 난처한 기색을 지었으나 이내 그녀에게 등을 내밀었다. "업혀라, 아랑." 아랑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그는 보지 못했다. "어서." "오빠의 등에......?" "괜찮다. 업히라니까." 아랑의 입가에 문득 달콤한 미소가 어렸다. 그녀는 자강의 넓은 등에 교구를 실었다. 그러자 따뜻하고 뭉클한 느낌이 자강의 등판에 전해졌다. 또한 자강의 손은 어쩔 수 없이 아랑의 둔부를 받쳐야 했다. 솜같이 부드러우면서도 뜨거운 감촉이 그의 심중에 떨림을 일으켰다. 소녀의 앞가슴이 지닌 봉긋한 융기를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향긋한 호흡이 그의 목덜미를 간지럽히기도 했다. 자강의 가슴은 어쩔 수 없이 쿵쿵 뛰었다. 그것은 아랑도 마찬가지로써 그녀는 두 손으로 자강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타오르는 붉은 뺨은 그의 등에 밀착시켰다. 두 사람의 체온이 서로의 혈관 속으로 골고루 나누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를 느끼며 무언으로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윽고 자강은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아랑이었다. "오빠, 별이 참 곱죠?" 그것은 한참 전에 자강이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시작은 같았으되 이어지는 아랑의 말은 다른 의미가 추가되었다. "오늘밤은 유난히 별이 밝은 것 같아요. 이 아랑의 마음처럼 말이에요." 무슨 말을 하겠는가? 자강은 그녀의 몸과 마음을 한꺼번에 등에 업은 채 그저 묵묵히 걸을 따름이었다. 어느새 부족의 처소가 가까와지고 있었다. 타오르는 장작불이 더 크게 보이고 장한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도 가까와졌다. 아랑이 문득 불안한 음성으로 말했다. "돼, 됐어요....... 오빠, 이제 내려줘요." 자강의 발길이 뚝 멈추었다. "걸을 수 있겠느냐?" "네, 물론이에요." 자강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내려놓으며 당부했다. "꼭 치료를 받도록 해라." "치료라뇨?" 바닥에 내려선 아랑의 표정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그녀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입술을 뾰죽 내밀어 보였다. "너는... 다치지 않았었느냐?" "호호호호... 다쳐요? 제가요?" 아랑은 까르르 웃더니 몸을 돌려 뛰어갔다. "바보! 오빠는 나한테 속았어요."


자강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는 한 동안 멍하니 서서 산토끼처럼 뛰어 사라져가는 아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자강의 입가에는 곧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는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랑, 예쁘고 착한 소녀....... 부디 너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자강의 눈에 그 특유의 진한 우수가 맺혔다. 그는 빙글 몸을 돌리더니 다시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제 2 장·인간(人間)의 도리(道理) ① 원형천막(圓形天幕). 그것은 일명 빠오라고 부르며 몽고의 유목민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그들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이러한 천막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이는 언제든 이동이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자강이라는, 이 신비한 매력을 지닌 소년은 묵묵히 한 채의 빠오로 걸어 들어갔다. 빠오 안은 의외로 훌륭했다. 겉보기와 달리 바닥에는 붉은 양탄자가 푹신하게 깔려 있었고 천장에는 양유(羊油)를 사용하는 등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또한 둥근 벽면에는 양피가 두텁게 둘러쳐져 있어 외기(外氣)를 차단해 주었으며 한 쪽에는 커다란 탁자와 의자도 있었다. 다른 한 쪽으로는 물건을 쌓아두는 가(架)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곳에는 긴 장창이 교차되어 세워져 있는가 하면 용사를 상징하는 대호(大虎)가 그려진 방패도 걸려 있었다. 그리고 제일 안쪽에 짐승털로 덮힌 침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육순 가량의 한 노인이 힘없이 누워 있었다. 노인은 뜻밖에도 골격이 장대한 편으로 예전에는 필시 우람한 체격의 소유자였을 것 같았다. 그러나 현재의 모습은 안타깝게도 그렇지가 못했다. 깡마른 데다가 안색이 밀랍같이 창백하고 누렇게 떠 있어 일견하기에도 깊은 병이 걸린 환자임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자강이 들어서자 노인은 그 인기척에 눈을 떴다. "아버님." 자강은 침상 앞으로 다가섰다. 노인이 그를 보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는 무한한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자강, 재미있게 놀았느냐?" "네, 무척 즐거웠습니다." 노인은 마치 안간힘이라도 쓰듯 웃어 보였다. "허허허... 이 애비도 건강했다면 함께 나가 네게 쉽게 말 길들이는 법을 알려줄텐데......." 자강은 꿋꿋한 음성으로 그 말을 받았다. "아버님은 곧 쾌차하실 겁니다." 노인은 쓴 웃음을 짓더니 몇 번인가 잔기침을 했다. "이 애비도 이렇게 누운 채로 지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구나." 그의 움푹 들어간 눈에 언뜻 그늘이 드리워졌다. "아무래도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 같구나." 자강의 침착한 얼굴이 몹시도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노인의 말을 부인했다. "아닙니다! 아버님은 아직도 우리 다륜족(多倫族) 제일의 용사이십니다. 어찌 병마 따위를 가지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문득 노인의 눈 속에서 한 가닥 광채가 솟아 올랐다. 자강의 한 마디가 잠깐이나마 그의 꺼져가는 생명력에 지난 날 화려했던 시절의 활기를 불어넣은 것이었다. 심지어 그의 주름진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잡히기도 했다. 노인은 지그시 자강을 응시하더니 다시 말문을 열었다.


"강아(康兒)야, 이리 가까이 오너라." 자강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짐승털로 된 이불 속에서 거칠고 깡마른 손이 나와 그의 손을 잡았다. 노인의 손, 그것은 불과 수 년 전만 해도 다륜족 최고의 용맹을 자랑하던 영광스러운 손이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이렇듯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변해 있는 것이었다. "아버님." 자강은 부친의 손을 보며 형언키 어려운 슬픔을 느꼈다. '그토록 건강하시던 분이 어찌.......' 노인은 그 손으로 희고 섬세한 자강의 손을 쓰다듬으며 인자하게 말했다. "녀석, 네 마음은 이 애비가 누구보다도 잘 안다." "아버님......." "나같은 폐물이 그래도 복이 있어 너처럼 착한 아들을 만나게 되었구나. 나는 이 사실을 두고 알라신께 항상 감사하고 있다." 갑자기 노인의 얼굴이 홱 일그러졌다. 등불에 비친 그의 안면에는 심한 고통이 떠오르고 있었다. "욱! 콜록... 콜록......." 노인은 연신 기침을 해댔다. 그러자 그의 주름투성이인 얼굴은 금세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아버님!" 자강은 얼른 옆에서 물수건을 들어 노인의 얼굴과 목에 번진 식은 땀을 정성스럽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그의 자세에는 정녕 염려와 성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이어 노인의 어깨와 팔, 다리 등을 가볍게 주물렀다. "으음......." 노인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스르르 내리 감았다. 기진한 탓인지 그는 곧 깊은 잠으로 빠져 들어갔다. 자강은 연민이 가득 담긴 눈으로 잠든 노인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가슴은 온통 비애로 메워지고 있었다. '아아! 삼 년 전만 해도 다륜의 오이랍(吾以拉)하면 그 어떤 용사도 고개를 숙였었는데 이렇게 변해 버리시다니.......' 이 병상의 노인이야말로 오이랍, 바로 지난 날 대상을 이끌고 사막을 건너던 중년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강이라는 이 소년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그 당시에 죽은 한인청년의 품 속에서 건져낸 어린애였다. "으음." 자강은 멍하니 천장에 매달린 양유등을 바라보았다. 휘-- 이-- 잉--! 천막 밖으로부터 바람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미미하게 전해지는 바람결이 등불을 흔들어 놓았다. 그에 따라 자강의 눈도 초점을 잃고 잠시 흔들렸다. 이윽고 자강은 시선을 돌려 잠든 오이랍의 창백한 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심중에서 절로 탄식이 일었다. '아! 몇 년 전부터 나는 내 생김새가 다륜족의 인물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강의 얼굴에는 일순 어두운 그늘이 깃들었다. '부족 사람들은 나를 한인의 자식이라고 놀려댔다. 그때 나는 아버님께 달려와 무릎을 부여잡고 울면서 물었지. 아버님, 저는 틀림없는 아버님의 아들이죠? 자랑스러운 다륜 제일 용사의 아들이죠? 그렇죠? 그렇죠? 라고.' 그의 동공 깊은 곳에서 비애가 솟아나왔다. '당시에 아버님은 크게 분노하셨다. 밖으로 뛰어나가 이렇게 부르짖으셨지. 어떤 놈이 자강을 놀리느냐? 누가 감히 다륜 제일 용사의 아들을 모욕하느냐? 나와라! 나와라.......' 자강의 얼굴에는 기어이 눈물이 흘렀다. 그는 입술을 아프도록 세차게 깨물었다.


'내 평생 그렇게 화를 내시는 아버님을 뵈온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어쩌면 내가 아버님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양 뺨을 타고 흘러 내리던 눈물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이를 느끼며 자강은 두 주먹을 불끈 움켜 쥐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나의 친부모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태어났으며 또 어떻게 해서 이곳에서 자라게 되었는지....... 아아! 자강, 대체 너는 누구냐?' 자강은 급기야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슬픔과 더불어 막막한 심정이 그의 심장에 터질 것 같은 압박감을 전하고 있었다. 그는 죽은 듯이 병상에 누워 있는 오이랍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버님을 세상의 누구보다도 사랑한다. 그러나 인간인 이상 혈육에 대한 본능적인 이끌림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내 출생에 얽힌 비밀들은 아마도 평생토록 나를 괴롭힐 것이다.' 자강은 입술을 짓씹으며 손을 품 속에 집어 넣었다. 이어 그의 손에는 네모 반듯하며 손바닥만한 크기의 옥패(玉牌)가 잡혀 나왔다. 그것은 항시 그의 목에 걸려 있던 물건이었다. 옥패는 전체가 푸른 색으로 전면에 살아 등비(騰飛)하는 듯한 아홉 마리의 용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이른바 구룡옥패(九龍玉牌), 그는 어릴 적부터 이것을 떼어놓아본 적이 없었다. 자강은 옥패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애초에 나는 습관처럼 걸고 있던 이 옥패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출생에 의문을 느끼면서부터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지.' 그는 손바닥 위에 옥패를 올려놓고 잔뜩 노려 보았다. 그가 옥패를 뒤집자 그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애자(愛子) 고운(古雲)에게. 부(父).> 이 간단한 문구는 자강에게 있어 오랜 기간 동안 차라리 형벌과도 같은 것이었다. 작금에도 그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고 있었다. '이 글은 결국 무엇을 뜻하는가? 고운이란 이름은....... 그리고 부(父)는.......' 자강은 옥패를 부서져라 꽉 움켜 잡았다. 그의 안면근육이 무섭도록 씰룩이고 있었다. "고운... 고운......." 사실상 자강은 이 이름을 지금까지 수천만 번도 더 되뇌었었다. 아울러 그럴 때마다 그는 여지없이 이렇듯 금단 현상과도 같은 격정에 사로잡히곤 했다. 왜일까? 자강은 언제부터인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없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것은 아득한 기억의 저 편에서 고운이라는 이름을 많이 들어본 것 같은, 그런 기이한 느낌이었다. 자강은 움켜쥐었던 손을 펴 다시 옥패를 응시했다. 이어 그는 조심스럽게 식지로 고운이라 쓰여진 글씨 부분을 눌렀다. 착! 가벼운 음향과 함께 놀랍게도 옥패에는 조그만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그 구멍 속에는 양피지가 돌돌 말려있는 것이 보였다. 자강은 양피지를 꺼내보았다. 거기에는 괴이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것은 부채살처럼 활짝 펼쳐진 사람의 손이었다. 손바닥에 실낱같이 가늘고 붉은 선들이 어지럽게 엉키듯 그어져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더욱 기이한 것은 손가락 끝에 각기 색이 틀린 매화송이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백(白), 황(黃), 청(靑), 적(赤), 자(紫)의 다섯 가지 색깔이었으며 그 다섯 송이의 매화 곁에는 또한 깨알만한 글씨들이 씌어져 있기도 했다. 실로 괴이한 그림이 아닐 수 없었다. 자강은 양피지를 지그시 내려다 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 그림을 발견한 것은 불과 반 년 전으로 얼마 전까지도 나는 이 내용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었다.' 문득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거의 이해하게 되었지.' 자강은 오른손을 쫙 폈다. 그만이 가지고 있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손, 피부가 유난히 곱고 섬세한 손이었다. 그 손이 중지(中指)를 가볍게 튕겨내고 있었다. 핑--! 예리한 파공음이 울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팍! 놀랍게도 맞은편에 세워져 있던 한 자루의 장창(長槍)이 중간에서 정확히 부러져 나가고 말았다. 그것은 자강이 직접 만든 물건으로 그 단단함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자강은 기이한 표정으로 부러진 장창을 바라보았다. '나는 단지 손가락을 뻗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찌 손가락 끝에서 바람이 나가 물체를 부수는가?' 그는 곱기만한 자신의 손끝으로 시선을 옮겨갔다. '내 이전부터 아버님께 약간의 권각법(拳脚法)과 창봉술(槍棒術)을 배웠다지만 이런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자강의 얼굴에 보기 드물게 만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 아마도 남들이 본다면 귀신의 수법이라고 할 것이다.' 그는 감회가 깃든 눈으로 양피지의 그림을 내려다 보았다. 그 그림을 통해 배우게 된 지법(指法)은 자강에게 남다른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힘을 쓰는 수단이기보다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하나의 끈으로써 그의 심중에 부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강이 익히고 있는 것은 그림에 내재되어 있는 것 중 백분지 일도 채 되지 않았다. 만약 그가 그 비밀을 완전하게 풀어낸다면 그야말로 다시없는 기연(奇緣)이 될 것이었다. 자강은 양피지를 원래대로 만 뒤 옥패의 구멍에 도로 집어 넣었다. 이어 그가 고운의 이름을 다시 누르니 구멍도 없어졌다. 옥패는 언제 열렸었냐 싶게 전혀 변함이 없었다. 자강은 옥패를 품 속에 갈무리 했다. 그의 생각은 또 한 차례 미지(未知)의 부모에게로 향했다. '이 물건이 정말로 내 친부가 남긴 것이라면 필시 보통 인물이 아닐 것이다.' 일말의 기대와 더불어 안타까운 심정이 다시금 그를 고심(苦心)으로 이끌었다. 차츰 시간이 흐르매 그것은 엷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의 머리마저 터질 듯한 지경으로 몰고 갔다. 자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움켜 쥐었다. "아아......!" 괴로와서 미칠 것만 같은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천막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흑야(黑夜). 검은 천공(天空)이 머리 위에 떠 있었다. 하나의 유성(流星)이 길게 꼬리를 그리며 대지(大地)의 저 편으로 멀어져 갔다. 자강은 유성이 사라진 곳을 향해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유성이 떨어진 저곳은 중원(中原)이라는 이름의 땅....... 가고 싶다. 내 뿌리를 찾아서......." 그의 눈 속에서 문득 기광이 번뜩였다. 그 의미는 단지 이상야릇한 우수가 아니라 그의 내부에서 용트림 하는 원대한 포부와 염원의 발현이었다. 그러나 곧 자강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말았다. 그의 뇌리에 오이랍의 늙고 병든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오오! 나는 갈 수 없다." 자강은 절망적인 심정이 되어 피를 토하듯 부르짖었다. 다음 순간, 그의 입술을 비집고 한 가닥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야아--!" 그것은 울분과 비애, 그리고 통한이 뒤섞인 외침이었다. 자강은 이어 무작정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캄캄한 벌판의 끝으로 그는 종종 이렇게 달리곤 했다. 중원을 향한 열정이 그에게 이렇듯 정신없이 내닫기를 종용했던 것이다. 밤도 어느덧 사경(四更)으로 기울고 있었다. 얼마 안있으면 여명이 부윰하게 밝아올 터였다. 하지만 자강은 밤이슬에 온몸이 젖는 것도 모르고 계속 외로운 짐승처럼 달리고 또 달렸다. ② 조양(朝陽). 북방의 거친 대지에도 햇살은 어둠과 혼돈을 지우며 동쪽으로부터 찬란하게 퍼져 오르고 있었다. 이름도 없는 어느 협곡(峽谷). 등격리 사막의 후미진 곳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그런 황산과 협곡이 얼마든지 있다. 이 협곡도 그 중 하나였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거친 돌과 모래더미 뿐인 곳, 아침 이슬에 푹 젖은 자강이 거기에 멍하니 서 있었다. 밤새 달려 그가 당도한 곳이 바로 이 협곡인 것이었다. "헉헉......." 자강은 가쁜 숨을 내뿜고 있었다. 전신이 온통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었다. "후우... 힘들군." 자강은 비틀거리며 한 바위에 걸터 앉았다. 그의 젖은 몸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피어 올랐다. 그러나 변함없이 그는 아름다왔다. 비록 땀과 먼지투성이였지만 그것도 결코 타고난 용모를 훼손시키지는 못했다. 아니, 붉게 상기된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오히려 매력적이기까지 했다. 어쨌든 자강의 마음은 여전히 출렁임이 멈추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이제 내심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아버님, 왜 차라리 속 시원히 말씀해 주시지 않습니까?' 자강의 준미한 눈썹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때였다. 바로 뒤켠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강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앗!" 그는 크게 놀랐다. 뒤쪽 바위틈에서 한 마리의 늑대가 나타나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늑대의 크기는 양 두 마리를 합친 것만큼이나 컸다. 더구나 어지간히도 굶주리고 지친 듯 털은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었고 뱃가죽도 등허리에 딱 들러붙은 것이 매우 흉험한 모습이었다. 자강은 섬뜩한 기분이 드는 한편 오이랍의 말을 떠올렸다. - 사막에는 수천수만의 늑대들이 무리를 지어 다닌다. 그들은 일명 혈랑(血狼)이라 불리우는데 그들에게 걸리면 아무리 용맹한 자라 해도 뼈도 못추린다. 그는 나름대로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저 놈의 모습을 보니 아마도 늙고 지쳐 무리 중에서 떨어져 나온 놈인가 보구나.' 크르르릉--! 늑대는 낮게 포효하며 바위 위로 훌쩍 뛰어 올랐다. 늙었다고는 하나 몹시도 날렵하고 위협적인 동작이었다. 자강도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생각을 굴렸다. '저 놈은 필시 나를 잡아먹을 심산인 게로군. 다른 야생먹이를 구할 능력은 없는 것 같고.......' 그는 일단 신형을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는 늑대를 정면으로 쏘아보며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다가오지 마라. 너는 배가 고파 나를 먹으려 하는 모양이다 만 네가 공격해오면 나 역시도 손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크르릉--! 늑대는 그의 말에도 더욱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릴 따름이었다. 자강의 무거운 음성이 뒤를 이었다. "어쩌면 내가 너를 죽일지도 모른다." 크르르르....... 늑대가 그를 향해 두어 걸음 다가왔다. 비릿한 냄새와 더불어 짙은 살기가 훅 끼쳐왔다. 늑대의 눈은 잔뜩 핏발이 서 있었다. 자강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그렇게 노려보아도 소용없다. 나는 전혀 겁을 먹지 않을 뿐더러 네가 이제 늙어서 힘이 모자라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크크... 크르릉....... "제발! 나는 너를 해치고 싶지 않다. 덤비지 말아 다오." 자강은 마치 말이 통하는 상대에게 그러하듯 계속 늑대를 달랬다. 하지만 늑대의 공격성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크르르릉--! 그 울음에는 이런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았다. - 나는 너를 먹어야 해. 그래야만 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그래, 네 말대로 네 손에 내가 죽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어차피 죽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니냐? 늑대는 다시 발을 떼어 자강과의 거리를 한층 더 좁혀왔다. 금시라도 덮쳐들 듯 등을 잔뜩 움츠린 채 이빨을 드러낸 것이 여간 포악한 기세가 아니었다. 한편. 언제부터인가 자강의 등 뒤에는 하나의 인영이 서 있었다. 그는 애당초부터 그곳에 있었던 듯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어느 순간에 그가 나타났는지는 기척도 느낄 수가 없었다. 마의를 걸치고 있는 그 자는 죽립을 깊숙이 눌러쓰고 있어 용모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또한 허리에는 괴이하게도 한 자루의 죽검(竹劍)을 대충 빗겨차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 검이지, 실은 오죽(烏竹)을 아무렇게나 삐죽하게 잘라낸 것으로써 그다지 쓸모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의 전신에서는 기괴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것은 질식할 듯한 살기와 함께 은연중 사람을 압도하는 중압감이었다. 그는 흡사 그림자처럼 자강의 등 뒤에서 장내를 주시하고 있었다. 물론 자강은 그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늑대가 공격을 개시했다. 크르르릉! 크왕--! 늑대는 힘찬 도약과 동시에 입을 쩍 벌려 자강을 물어 뜯었다. "웃! 이 놈이?" 자강은 황급히 몸을 틀었다. 찌익! 그의 왼편 옆구리의 옷자락이 길게 찢겨나갔다. 늑대는 그 찢어진 옷자락을 물고 다시 덤벼왔다. 이쯤 되자 자강도 급기야 차갑게 외치기에 이르렀다. "나는 너를 해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구나." 크릉--! 늑대는 앞발을 치켜 뻗으며 다시 덮쳐왔다. 그 순간, 자강은 늑대를 향해 오른손 중지(中指)를 곧게 튕겨냈다. 핑--! 크아앙--!


늑대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곤두박질쳤다. 이어 무참하게 바닥에 떨어진 늑대는 데굴데굴 굴렀다. 어느새 늑대의 이마 한복판에는 손가락 굵기 만한 피구멍이 뚫린 채 그곳으로부터 피가 치솟고 있었다. 크으... 으응....... 늑대는 구슬픈 신음소리를 내다 결국 사지를 한 번 파르르 떨더니 축 늘어져 버렸다. 이어 자강이 늑대의 주검에 당혹을 보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으음!" 그의 등 뒤에 말없이 서 있던 죽립의 괴인이 신음인지 탄식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흘려냈다. 실상 자강이 늑대에게 손가락을 뻗을 당시에는 놀란 듯 가볍게 몸을 떨기도 했었다. 자강은 그때까지 이도저도 알지 못했다. 현재 상황에서 그를 사로잡은 것은 오직 죽은 늑대에 대한 측은지심이 전부였다. "아아! 살생이란 정녕 너무도 괴로운 것이로구나." 그 뒤를 이어 그는 비로소 한 소리 담담한 음성을 들어야 했다. "아이야, 너도 이미 알고 있었지 않느냐?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네가 죽는다는 것, 즉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법칙 말이다." 그제서야 자강은 자신의 등 뒤로부터 한 사람의 존재를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놀란 얼굴로 즉시 뒤를 돌아다 보았다. "누구요?" 자강은 죽립을 쓴 괴인을 보자 눈에 대뜸 의혹을 드리웠다. 반면에 죽립인은 그를 보지 않았다. 단지 늑대의 이마에 뚫린 구멍을 보며 낮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정말 믿기 힘든 일이군. 오백 년 전에 사라졌던 불마성승(佛魔聖僧)의 오환매영지(五幻梅影指)가 출현하다니." "귀하는 대체 누구십니까?" 자강은 정중한 어투로 다시 물었다. 죽립인은 대답 대신 그에게 시선을 돌리며 엉뚱한 말을 물어왔다. "아이야, 너는 그 지법을 어디서 배웠느냐?" 역시 억양이 담기지 않은 담담한 음성이었다. 자강은 죽립인을 쓰윽 훑어 보고는 약간 볼멘 소리로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그렇게 묻는 당신이 누구신지 궁금하군요?" 죽립인의 무감동한 억양은 이제 추궁에 가까워져 있었다. "내 이름을 말해 봐야 너는 모를 것이다. 어서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하거라." 자강은 픽 실소를 터뜨렸다. "그런 식이라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말해 줘도 당신은 모를 테니까요." 재치있게 되받아치는 그 논조에 죽립 속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덕분에 음성도 한결 밝아져 있었다. "무척 재미있는 아이군." 간단한 말 뒤에 그는 한 동안 죽립 사이로 자강을 응시하더니 또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자강." 간단명료한 대꾸였다. "자강이라......." 죽립인은 문득 왼손을 들어 삿갓을 뒤로 젖혔다. 그러자 그의 용모가 드러났다. 나이는 약 삼십 정도,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눈에 긴 눈썹과 일자로 다문 입술 등이 강팍한 인상을 풍겼다. 안색은 누르스름했고 콧날은 반듯했다. 눈에서는 칼빛같은 예기가 흘러 나왔으나 대체로 검은 동자가 많아 보였다.


죽립인은 자강을 응시하며 왠지 친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 이름은 천무독(千武獨)이다." "천무독 어른이시군요." "그렇다. 너는 나와 친구가 되고 싶지 않느냐?" 느닷없는 질문을 받는 순간, 자강은 알 수 있었다. 자칭 천무독이라는 인물의 말 속에 짙은 고독감이 배어 있다는 것을. 그의 전신에서 풍기는 두터운 벽과 같은 냉기도 함께 느껴졌다. '이 사람도 나처럼 그 누구와도 사귐을 갖지 않은 것 같구나.' 동병상린일까? 자강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고 있었다. "좋습니다. 친구가 되겠어요." 천무독의 메마른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스쳤다. 그 웃음기는 평생 몇 번밖에 짓지 않은 듯 사뭇 어색해 보였다. 하지만 일편으로는 그러한 희소성 때문에 오히려 귀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천무독은 흔쾌하게 답변했다. "좋다, 소형제. 고맙구나." 이어 그는 약간의 아쉬움이 담긴 어조로 덧붙였다. "나는 바쁜 일이 있어 그만 가야겠다.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자네가 사는 곳은 어디인가?" "저는 탑리지(塔里地)의 다륜(多倫) 부족에 속해 있습니다." "음." 천무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바위 옆에서 말라있는 한 개의 나뭇가지를 꺾어 들었다. "소형제, 지금부터 내가 취하는 동작을 잘 보아라. 이것을 눈에 익혀 두면 장차 크게 쓸모가 있을 것이다." 그는 나뭇가지를 잡은 채 똑바로 중상단으로 앞으로 내밀었다. "으음." 자강은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집중했다. 나뭇가지는 내뻗자마자 그 끝이 세 갈래로 갈라졌다. 좌우로 빠르게 흔들린 것이었다. 휘이-- 익--! 나뭇가지가 어지럽게 춤을 춘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자강은 그야말로 눈 앞이 아찔함을 느껴야 했다. 그것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괴검초(怪劍招)로써 전혀 방어를 생각지 않은 일방적인 검식이었다. 어찌 보면 단순한 듯 하면서도 거기에는 매우 복잡다난한 변화가 깃들어 있었다. 나뭇가지의 환영(幻影)은 또한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강은 굳은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의 머리 속은 온통 나뭇가지 그림자에 의해 지배당하고 만 것이었다. '중상단으로 쭉 뻗어 삼각방(三角方)으로 나눈다. 그 후 다시 세 번 찌르고... 좌로, 우(右)로.......' 자강은 아예 몰아지경에 빠져 버렸다. 단 한 번 펼쳐졌으며 단 한 번 보았던 그 일초 검식에 완전히 매료된 때문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 정신을 차린 자강은 자못 허탈해지고 말았다. 괴사나이 천무독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언젠가는 다시 만나지겠지.' 자강은 한 가닥 섭섭한 기분이 들었으나 애써 이를 억눌렀다. 이와 더불어 무의식 중에 그는 손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스읏--! 놀랍게도 자강의 손끝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있었다. 천무독이 보여준 검초를 정확히 구사해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자강은 알지 못했다. 그 검식이 자신의 향후 안녕에 가져다줄 크나큰 영향을....... ③ 교역이란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이어진다. 물물교환(物物交換) 따위의 원시적인 것에서부터 고도의 상행위에 이르기까지 그 방식도 다양하다. 하지만 그 목적에 있어서는 모두 대동소이하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보다 나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이다. 다륜족이라 해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양가죽이나 황마(黃馬) 등을 팔아 생필품들을 구입한다. 유월. 해마다 이때 쯤이면 다륜족은 큰 행사를 치른다. 그들의 본거지인 탑리지에서 동으로 이백 리나 떨어진 곳으로 가 걸지게 상업을 벌이는 것이다. 고목하(古目河)에 위치한 달란족(達卵族)의 거대한 부락이 바로 그 무대였다. 달란족은 등격리 사막 일대의 유목민 중에서도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영향력 있는 부족이었다. 따라서 이들과의 상업은 다륜족의 대사(大事)라 할 수 있었다. 상품으로 실리는 물건은 물론 가장 질 좋은 것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대(隊)를 이루어 고목하를 향해 출발할 때는 개중 날래고 힘센 용사들이 차출되며 아낙들이 마중을 나가기까지 한다. 말하자면 부족 전체가 술렁이는 것이다. 한 채의 빠오 안. 자강은 지금 의복을 갖추는 중이었다. 무더운 계절이라 얇은 흰 천을 몸에 감고 있었다. 반면에 그의 행랑 속에는 사막의 밤을 이기기 위한 털옷이 준비되어 있기도 했다. 곁에서 자강을 돕는 손길이 있었다. 아랑이었다. 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소녀는 실상 다륜족의 공주(公主)였으나 그에게만은 신분도 가리지 않고 거의 헌신적으로 따른다. 이는 어쩌면 운명적으로 내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옛날 자강이 사막의 한 복판에서 오이랍에 의해 구원되던 그때, 가마 속에서 출생(出生)한 아기가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아랑은 무엇이 기쁜지 연신 뺨에 보조개를 지으며 생글거렸다. "호호호... 역시 자강 오빠예요. 이런 큰 거래에 아버님께서 선뜻 대표자로 지목하셨으니 말이에요." 그녀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자강은 다륜족 전체에서 가장 현명했으며 특히 이재(理財)에 밝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의 비상한 두뇌는 오래 전부터 대족장인 나하리칸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온 터였다. 그리하여 거래 때마다 줄곧 대동되곤 했는데 이번에는 아예 전격적으로 대표자가 되는 영광을 안게 된 것이었다. 자강은 옷을 모두 입자 허리에 가죽띠를 단단히 매었다. 아랑이 무엇인가를 품 속에서 꺼내더니 수줍은 듯이 내밀었다. "오빠, 이것은... 내가 어제 밤을 새워서 만든 모자예요. 어디 한 번 써 보세요." 자강은 흠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괜찮다. 나는......." 아랑이 곱게 눈을 흘기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아이 참! 왜 오빠는 아랑의 성의를 무시하는 거죠?" 자강은 어색하게 웃었다. "고맙다, 아랑. 너무 미안해서 그러지를 않느냐?"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모자를 받아 머리에 쓰니 꼭 맞았다. 그것은 백여우가죽으로 만든 귀한 것으로써 흰 옷과 조화를 이루어 그의 영준한 용모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해 주었다. 바람 앞의 옥수(玉樹)가 이와 같을까? 더구나 균형잡인 탄탄한 몸매는 십오 세라는 나이보다 훨씬


성숙한 느낌이 들게 했다. "아! 멋있어요, 정말......." 아랑의 솔직한 성정은 칭찬에 있어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탄성에 이어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구석에서 한 자루의 패검(佩劍)을 집어 들었다. "오빠, 이것도 허리에 차 보세요." 그녀는 손수 그것을 자강의 허리에 채워 주었다. 물론 검까지 갖추니 자강의 모습은 위용마저 더 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외양에 대해 별로 관심을 쏟은 적이 없었던 자강은 짐짓 빈정거리기를 서슴치 않았다. "후후... 꼭 극성맞은 아내 때문에 광대 놀음을 하는 것 같군." 그 한 마디에 아랑의 얼굴은 금세 잘 익은 홍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자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그녀는 전혀 불쾌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곧 여유있게 맞받았다. "흥! 무슨 상관이람? 오빠가 뭐라 하든 아랑이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괜찮아요." 자강은 더 입을 열지 못하고 그만 고소를 지어야 했다. 그러한 웃음까지도 좋았던 것일까? 아랑은 눈이 부신 듯 자강의 웃는 모습을 응시했다. 그녀의 얼굴은 누구도 말릴 수 없는 행복감으로 흠씬 젖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참! 한 가지 주의를 줄 것이 있어요." "으음?" 아랑은 심각한 표정이 되더니 말을 이었다. "달란족 족장의 딸인 파라오(坡羅娛) 공주 말이에요. 그녀는 사막 제일의 미녀로 소문이 나 있어요." "그런데?" "만약 오빠가 그녀에게 반해서 사고라도 저지른다면 이 아랑이 가만 놔두지 않을 거예요. 당장 쫓아가서......." "하하하... 사고? 내가 말이냐? 그리고 당장 쫓아와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자강의 입에서 드물게 대소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아랑의 하는 양이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자강은 이 순간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는 웃음을 그친 후, 나직이 그녀를 불렀다. "아랑." 자강의 눈은 어느덧 은은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그의 눈길을 받자 아랑은 금세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 눈길이 그대로 자신의 가슴에 깊숙이 파고 드는 듯 했던 것이다. 사뭇 어색해져버린 그녀는 괜스리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흥! 갑자기 왜 그렇게 아랑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거예요?" "아랑!" 자강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감정이란 원래 억제하면 억제할수록 더 거세게 타오르는 법이다. 마침내 그도 그 한계를 절감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에그머니나!" 아랑은 깜짝 놀라 얼떨결에 그의 가슴을 떠밀었다. 하지만 완강한 힘에 의해 그녀는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니 그것은 사실 기습(?)에 대한 방어본능이었을 뿐, 그녀의 의지도 아니었다. 과연 당혹의 순간이 지나자 거부를 표명하던 그녀의 손은 기다렸다는 듯 자강의 목을 휘감고 있었다. "아랑." "오... 오빠......." 두 남녀의 몸은 한 치의 틈도 없이 합쳐졌다. 자강은 아랑의 날씬한 교구를 그야말로 으스러져라


껴안았다. "으음......." 아랑은 숨이 막혀오는 가운데 전신이 녹아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자강의 목에 매달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윽고 아랑의 불꽃같이 타오르는 뺨 위에 자강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의 입술 역시도 그대로 불길이었다. 그 입술은 뺨에서 미끄러지더니 그녀의 꽃잎같은 입술을 덮었다. "읍!" 아랑은 충격을 받은 듯 꿈틀거렸다. 뜨거운 자강의 육질이 그녀의 입술을 열고 깊숙이 침범해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아!' 아랑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자강의 격렬한 입맞춤이 곧바로 그녀를 희열의 극치까지 몰고간 것이었다. 시간은 그들의 곁에서 느낄 수 없을만치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그 동안 아랑은 그야말로 천상(天上)에 떠 있었다. "아랑, 사랑한다." 꿈결인 양 자강의 음성이 그녀의 귀를 간지럽혔다. "아아! 자강... 자강오빠......." 아랑은 내심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이것은 꿈이야, 꿈! 오빠가 내게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어.' 그녀는 자강의 품 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 들며 읊조렸다. '꿈이라도 좋으니 제발 깨지나 말았으면.......' 오랜 시간을 낭비하다가 비로소 굳게 서로를 끌어안은 두 사람은 언제까지고 떨어질 줄을 몰랐다. 뚜-- 뚜우--! 긴 고적소리가 탑리지의 벌판을 울렸다. 드디어 대를 이룬 다륜족의 인물들이 고목하를 향해 출발하게 된 것이다. 사오십 명의 청년들이 낙타와 말에 잔뜩 물건을 실은 채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을 선두에서 지휘하게 될 인물은 다름 아닌 소족장(少族長) 아사웅(阿斯雄)이었다. 건장한 황마 위에 앉아 있는 아사웅의 위용은 당당하기 그지 없었다. 사실 그가 대족장인 나하리칸을 대신해 임무를 수행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벌써부터 족장으로서의 기백이 엿보이고 있었다. 평소 무예라면 밥먹기보다 좋아하던 아사웅은 말안장에 방패와 긴 쌍창을, 허리에는 반월도(半月刀)를 차고 있었다. 실로 준수하면서도 용맹해 보이는 무사의 모습이었다. 특히 흑의를 유독 즐겨입는 그는 외관상으로도 이미 다륜 청년들의 선망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한편. 자강은 한 천막 앞에서 말을 탄 채 서 있었다. 아랑이 옆에서 그의 행장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있었다. 천막 속으로부터 한 인물이 걸어나왔다. 자강의 양부(養父)인 오이랍, 바로 그였다. 하지만 그는 걷기조차 힘겨운 듯 허공을 더듬으며 몹시도 비틀거렸다. 아랑이 재빨리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아저씨, 몸도 불편하시면서......." "콜록! 콜록......." 오이랍은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아버님......."


자강이 얼른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오이랍은 그를 향해 손을 내저어 보였다. "강아야, 어서... 가거라. 내 걱정은 말고......." 자강은 사뭇 안타까운 표정이 된 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소자, 될 수 있는 한 빨리 다녀 오겠습니다." "그래......." 오이랍의 안면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스쳤다. 뚜-- 우우--! 고적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대상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였다. 아닌 게 아니라 아사웅의 우렁찬 외침이 그 뒤를 이었다. "자! 출발이다." 자강은 낮게 탄식을 발한 후, 몸을 일으켜 말에 올랐다. "아버님, 그럼 다녀 오겠습니다." "그래... 콜록! 콜록......." "자강오빠, 무사히 다녀와요." 자강은 그녀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아랑도 따라오던 걸음을 멈추며 섬섬옥수를 저었다. 오이랍. 그는 왠지 어두운 기색으로 멀어져가는 자강을 바라보았다. 까닭을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이번 길은 평탄치 않을 것만 같구나. 어제부터 계속 머릿 속이 뒤숭숭 했는데.......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오이랍은 다시 기침을 쏟아냈다. "콜록... 콜록......!" "아저씨, 이제 그만 안으로 들어가세요." 아랑이 그를 억지로 천막 안으로 들게 했다. 그 사이에도 다륜족의 대상은 긴 고적소리의 여운을 남긴 채 행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④ 호수(湖水). 사막 지방에서 호수를 발견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분명 존재했다. 사방 이십여 장에 이르는 호수, 아니 그것은 차라리 작은 연못이라는 표현이 옳았다. 석양(夕陽)이 사막을 지배하는 시각. 낮동안 지글지글 타던 태양이 서편으로 넘어가며 고목하의 벌판에 어스름한 그림자를 깔았다. 물론 아직도 한낮의 열풍이 남아 있어 날씨는 무덥기만 했다. 이곳은 초지였다. 수목도 제법 우거져 있었고 작은 연못의 물은 그야말로 명경지수였다. 고목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 이곳을 일컬어 사람들은 묘안호(苗眼湖)라 불렀다. 푸른 물 빛깔이 흡사 고양이의 눈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또한 이곳은 타인들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아 은밀하고도 조용한 곳이었다. 그것은 묘안호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달란족의 대족장이 거처하는 원형 천막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족장의 혈족이 아니면 비중이 높은 귀빈들만이 이 근처를 다닐 수 있을 뿐 일반 유목민들에게는 아예 금지(禁地)로 규정을 지어 놓은 것이었다. 자강.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이 묘안호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위치로 그는 수목의 가지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붉은 황혼이 호수의 수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자강의 눈은 마치 홀린 듯 거기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달란족과의 거래를 훌륭하게 마쳤다. 탁월한 능력으로 인해 예상보다 훨씬 좋은 수확을 얻은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그들의 귀빈으로써 이 호변, 즉 족장의 빠오 군(群)에 머무르는 특별 대접을 받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자강은 이 일련의 상황들이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일을 마치니 한시바삐 탑리지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그것은 병상에 있는 오이랍과 아름다운 아랑이 줄곧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 정녕 아름다운 호수다.' 자강은 노을에 비친 묘안호를 내려다 보며 내심 절로 감탄이 일었다. 이는 그가 이곳 고목하에 와서 처음으로 느끼는 감상적인 기분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노을을 등진 채 묘안호로 한 명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자의(紫衣)를 입고 있었는데 몽고 고유의 복색이었다. 머리는 궁형으로 틀어 올렸으며 나이는 대략 십칠팔 세 정도,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야말로 인중봉(人中鳳)이라고나 할까? 갸름한 얼굴, 보석같은 푸른 눈, 그린 듯한 아미와 날렵하게 빠진 콧날, 그리고 누구든 보기만 하면 녹아날듯 황홀한 육감을 발산하는 입술 등 어느 한 곳 나무랄 데가 없었다. '저 여인의 미색은 실로 눈이 부시구나!' 자강은 나무 위에서 자의미녀의 용모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는 눈 앞에서 노을을 배경으로 그려진 한 폭의 미녀도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는 이제까지 아랑을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로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자의미녀의 아름다움은 아랑에 비견해도 절대 뒤지지 않았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자의미녀가 소지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성숙한 미로써 아랑은 갓 피어난 꽃망울로, 이 여인은 활짝 개화한 꽃송이로 구분지어 표현하면 꼭 어울릴 것 같았다. 자강은 궁금증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저 소녀는 누구일까?' 그러나 그러한 의문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앗!' 자강은 놀라서 하마터면 입 밖으로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자의미녀가 호숫가에 이르더니 갑자기 걸치고 있던 옷을 훨훨 벗어던졌기 때문이었다. 일순 자강은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그 사이, 자의미녀는 벌써 옷을 다 벗고 나체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몸매 또한 용모에 못지 않았다. 노을 아래 미녀의 나신이 발산해내는 아름다움이란 가히 폭발적인 것이었다. 빙기옥골(氷肌玉骨), 아니, 그런 도식적인 표현만으로는 부족했다. 홍옥(紅玉)으로 빚어 만든 신의 예술품이 그곳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쭉 빠진 몸매는 나는 새를 연상케 했다. 그에 반해 앞가슴의 융기와 둔부의 풍만함은 전혀 다른 기경(奇景)을 연출하고 있었다. 아마도 비례적으로 잘록한 세류요 때문이리라. 기름진 아랫배를 거쳐 대리석같이 매끈한 두 다리가 시작되는 지점, 무성한 삼림을 이룬 그곳은 또한 수줍은 듯 엷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여인은 자신 외에 아무도 없다고 여겼는지 주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자신이 실 한 올 걸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 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듯 했다. 그녀는 막 사라지려는 석양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두 팔을 허공으로 뻗으며 전신을 활짝 폈다. '맙소사!' 자강은 내심 질겁을 했다. 나무 위에서 그 기막힌 광경을 보고 있던 그는 그만 민망하여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하지만 이 순간 그 자신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금시라도 혈관이 터져나가 버릴 듯한 본능적 충동이었다. 아직 이렇다할 경험이 없는지라 관능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자강이었다. 때문에 충격파는 상대적으로 더 거셀 수밖에 없었다. 그는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내심 부르짖었다. '차라리 눈을 뜨자!' 그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는 발상이었다. 무릇 상상력이란 눈을 감고 있으면 더욱 배가 되기 마련이 아닌가? 여인의 하는 양은 점입가경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기지개를 켜듯 팔다리를 뻗은 채 동체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솟을 곳은 솟고 꺼질 곳은 분명하게 꺼진 여체가 그 출렁이는 육감까지도 적나라하게 자강의 눈에 전해왔다. 그의 눈에 핏발이 돋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아마도 나는 저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할지도 모른다.' 자강은 입가에 고소를 떠올렸다. 그는 눈 앞에 펼쳐진 환상과의 싸움에서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강이 이렇듯 기이한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그의 뇌리에 크나큰 공명을 울리는 음향이 일었다. 첨벙! 여인이 묘안호의 푸른 물 속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그녀는 그대로 지상의 선녀였다. 아름다운 나신으로 물살을 가르며 유영하는 그녀의 자태는 도저히 인간 같지가 않았다. 자강은 물론 눈을 감는 짓 따위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는 비로소 심중으로부터 보고 싶다는 솔직한 본성을 끄집어내며 미녀의 동작 하나하나를 탐닉하듯 눈길로 쫓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슬며시 호숫가에 번져가는 또 하나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윽하게 사위를 울리는 노랫 소리....... 그것은 바로 미녀의 주사빛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옥음이었다. 또한 그 노래는 잔잔한 파문인 양 호수 전체를 이내 신비한 천상경(天上境)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미녀... 그리고 소리.......' 자강은 흡사 꿈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 감각에 대해 신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세외신비경을 깨뜨리는 난입자가 있었다. 한 줄기 흑영(黑影)이 불쑥 나타난 것이었다. '아사웅!' 자강은 크게 놀랐다. 호숫가에 출현한 흑의인은 바로 다륜족 의 소족장인 아사웅이었던 것이다. "뭐예요? 당신은!" 미녀는 기겁을 하여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설마하니 난데없는 인물이 나타나 자신의 알몸을 보게 될 줄이야 꿈엔들 알았겠는가? 그녀는 우선 물 속으로 급급히 몸을 숨겼다. 반면에 아사웅은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먼저 포권을 하더니 당당한 음성으로 말했다. "파라오 공주, 처음 뵙겠소이다. 본인은 다륜족의 왕자인 아사웅이라 하오이다." 비록 불시에 나타나긴 했어도 그의 태도에는 자못 호기가 넘쳤다. 어쩌면 이런 짓궂음은 그의 남성적인 매력을 단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일면이기도 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점은 호수 속의 나녀, 즉 파라오 공주에게는 단지 분노의 시발점이 되었을 뿐이었다. "당장 꺼져요! 내가 언제 당신이 누구냐고 물었죠?"


아사웅의 짙은 눈썹이 홱 거슬러 올라갔다. 탑리지에서라면 이런 모욕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였다. 소족장이라는 신분도 그렇거니와 모든 여인에게 흠모의 대상이었던 그가 아닌가? 아사웅은 곧 이곳이 고목하라는 사실과 더불어 자신이 왜 여기에 왔는가를 떠올리며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그리고는 내면에 숨겨져 있던 말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파라오 공주, 얼마 전 그대의 모습을 본 이후로 본인은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어 버렸소. 당신을 사모하오. 이건 이 아사웅의 진심이외다." "닥쳐요! 당신같은 치한에게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으니 어서 내 앞에서 사라져요." 파라오 공주의 시종일관 살찬 반응은 아사웅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려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설득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인내의 한계를 초월한 것이었다. "공주, 나는 지금 청혼을 하고 있는 것이오. 그리고 만일 공주께서 이를 수락한다면 달란족과 다륜족은 하나로 합쳐져 보다 강대한 세력을 이룩하게 될 것이오. 등격리 대막(大漠)의 통일은 그야말로 시간 문제요." "미쳤군요! 다륜족은 청혼을 이런 식으로 하나요?" 정곡을 찔리자 아사웅은 움찔했다. 아울러 그는 볼 수 있었다. 물 속에 잠겨있는 파라오 공주의 나신이 부들부들 떠는 것을. 또한 그것이 단지 물살이 전하는 한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도 그는 명확히 알 수가 있었다. "아사웅! 썩 가버리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겠어요. 달란의 용사들을 불러 당신을 처치하게 할 거예요." 그 말은 전혀 효용을 발휘하지 못했다. 사실 용맹무쌍한 아사웅에게 있어 위협이 되는 일이란 세상에서 그다지 흔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되려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핫핫핫... 공주, 안 되었소만 이 근처에는 아무도 없소. 또 있다해도 벗은 몸을 다른 사람에게 보인다는 것은 공주께 그리 유쾌한 일이 못될 것이오. 그렇지 않소?" 파라오 공주는 금세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이, 이... 파렴치한 자!" "뭐라 해도 좋소. 이왕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나 아사웅은 필히 이 자리에서 공주를 내것으로 만들고 말겠소." 말을 마친 아사웅은 성큼성큼 호수로 접근해갔다. 바야흐로 서로를 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비극이 하나의 사건으로 비화되려는 순간이었다. "다, 다가오지 마라!" 파라오 공주의 얼굴에는 이제 증오를 대신하여 공포감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곁에서 아사웅이 이를 악문 채 옷을 벗으려 하고 있었다. ⑤ 이때, 줄곧 두 남녀의 설전을 지켜보고 있던 자강은 품 속을 뒤져 한 장의 검은 천을 꺼내 얼굴을 감쌌다. 눈만 내놓고 복면을 한 그는 즉시 나무 위에서 뛰어 내렸다. 휘익--! "잠깐! 멈추시오." 자강은 곧바로 아사웅의 앞을 가로 막았다. 뜻밖의 방해자를 맞이한 아사웅은 흠칫 놀라는 한편 사나운 기색으로 물었다. "네 놈은 누구냐?" 가뜩이나 심정이 뒤틀려 있는 판이니 말이 곱게 나올 리가 없었다. 자강은 내심 혀를 찼다. '쯧! 이성을 잃어 눈이 뒤집히고 말았군. 당신을 위해서라도 나는 당신이 저지르려는 행위를 말릴 수밖에 없구려.' 한편. 파라오 공주는 수치감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결과적으로 자신이 목욕하는 광경을


두 명씩이나 엿보고 있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아무튼 자강은 음성을 무겁게 바꾸어 입을 열었다. "친구, 그대의 행동은 너무 지나친 감이 없지 않소. 그래서 본의 아니게 내가 나선 것이니 부디 품위를 되찾으시오." 그 말에 아사웅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일말의 자조가 깃든 기이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네 놈은 지금 그걸 충고라고 하는 거냐? 품위를 회복하기란 어차피 틀려 버렸다. 나 아사웅, 망신만 당하고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외다." 자강의 대답에 아사웅은 느닷없이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과연 그러한지 저 아름다우신 공주께 한 번 여쭈어 봐라!"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후후... 네 놈에게는 그것이 간단한 문제일지 모르나 내게는 그렇지 못하다. 다륜 제일의 용사이자 왕자인 이 아사웅이 진심을 짓밟혔단 말이다." 자강은 탄식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그런 자신감이 일을 그르쳤소. 남녀간의 애정이란 본시 일방적인 것이 아니오." 아사웅은 마침내 분노를 터뜨렸다. "건방진 놈!" 쨍--! 이어 몸을 가볍게 비틀자 그의 허리춤에서 불꽃이 튕겼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예기가 번뜩이는 반월도가 들려져 있었다. "네 놈은 내 일에 참견한 대가를 단단히 치르게 될 것이다!" 아사웅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월도를 가로 그었다. 쐐애액--! "웃!" 이제껏 대전 경험이 없었던 자강은 몹시도 당황했다. 급히 뒤로 물러섰으나 그것은 이미 가슴 옷자락이 찢겨나간 후였다. 동시에 그는 가슴이 화끈해 오는 것을 느꼈다. "후후... 제법 하는 놈인 줄 알았더니 순 헛탕이었구나!" 아사웅은 다시 반월도를 쓸어갔다. 쐐--애-- 액! 평소 무예를 그다지도 좋아했던만큼 창봉술과 아울러 그의 도법은 조예가 비범했다. 어지러운 칼그림자 속에서 자강은 그만 정신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눈 앞이 흐려지는 가운데 그는 칼이 자신의 정수리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피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했다. '이것이 죽음......?'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위기가 실감되는 찰나, 자강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에 찬 패검으로 갔다. 스릉--! 검은 뽑혀지자마자 앞으로 불쑥 내밀어졌다. 동시에 그것은 중상단의 높이에서 괴인 천무독(千武獨)이 펼쳐냈던 일초의 검식을 정확히 구사해내고 있었다. 스슥--! 검끝이 세 갈래로 갈라지며 부채살같은 검영을 일으켰다. "헉!" 다급한 비명이 그 뒤를 이었다. 핏줄기가 호선을 그리며 허공으로 쫘악 퍼져 나간 것도 바로 그 순간의 일이었다. 다륜의 용자(勇者)인 아사웅. 놀랍게도 그가 칼을 집어던지며 뒤로 비칠비칠 물러나고 있었다. 피가 콸콸 흐르는 왼쪽 눈을 감싸쥔


채. 아사웅은 도시 믿을 수가 없었다. 단지 그는 검광이 번쩍 하는 것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왼쪽 눈에 격통이 전해진 것은 이미 상황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는 자강의 패검이 언제 자신의 눈을 찔렀는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이르자면 자강의 일초식은 어떻게도 막거나 피해낼 재간이 없는 기괴무비한 공격이었다. 얼굴을 가린 아사웅의 두 손 사이로 검붉은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으으......." 그는 쥐어짜듯 고통스러운 신음을 발했다. 일이 이 지경으로 확대되자 그보다 더 놀라고 당황한 것은 자강이었다. "아사웅......!" 자강은 어쩔 줄을 몰라하며 아사웅에게로 다가갔다. "우우... 이 놈!" 아사웅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자강에게 일권을 날렸다. 퍽! "으윽!" 자강은 가슴을 정통으로 얻어맞고는 뒤로 나가 떨어졌다. 아사웅도 더 이상은 공격하지 않았다. 그것은 왼쪽 눈의 출혈이나 자강의 검법에 대한 두려움 따위에서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파라오 공주가 곁에서 다 보았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아사웅은 한쪽 눈을 감싼 채 반월도를 집어 들었다. "놈! 두고 보자." 그는 이런 말을 뱉고는 어둠이 깔린 수목 사이로 사라져갔다. "우욱!" 몸을 일으키려던 자강은 피를 한 모금 토해낸 뒤 다시 고꾸라지고 말았다. 아사웅의 거친 일격이 무방비 상태인 그로 하여금 적지아니 상처를 입게 한 것이었다. 그 사이, 파라오 공주는 황급히 물에서 나와 옷을 입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쓰러져 있는 자강의 곁으로 다가갔다. 자강은 고통스러운 듯 눈을 내리감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파라오 공주의 얼굴에 한 가닥 갈등이 서렸다. '이 사람은 나 몰래 숨어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 사람으로 인해 나는 위기를 넘긴 것이 아닌가?' 막상 고심은 잠깐이었다. 파라오 공주는 이내 결심이 선 듯 입술을 깨물며 자강의 상세를 살피려 했다. 그녀의 이러한 기척을 느낀 자강이 손을 내저었다. "그만 두시오. 우욱!" 간신히 한 마디를 한 자강은 다시금 피를 토해냈다. 이어 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더니 힘겹게 덧붙였다. "공주, 나는 공주가 오기 전부터 이곳에 있었소. 공주를 본 것은 절대 고의가 아니었으니 염두에 두지 않았으면 하오." 자강은 줄곧 파라오 공주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정시하지는 못할 망정 그의 눈빛만은 깨끗하고 순수했다. 물론 그도 남자인 이상 욕구 자체에 있어서는 그 자신도 부정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이성(理性)이 어느 누구보다 건재하다는 사실이었다. 파라오 공주는 자강의 맑은 눈빛에서 어렵지 않게 그 내면을 읽어낼 수가 있었다. 그러자 눈 앞의 복면인에 대한 적개심이나 의혹 따위는 거짓말처럼 금세 일소되었다. "으음......." 자강은 손바닥으로 땅을 짚으며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바람에 허술하게 둘러쓴 복면이 기어이


풀어지고 말았다. 마침내 그의 준수한 용모가 고목하의 월광 아래 훤히 드러났다. 감히 달과 비견해도 손색없는 얼굴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아아!" 파라오 공주는 일순 탄식과도 같은 신음을 불어냈다. 경위야 어찌 되었건 조각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운 얼굴과 마주한 그녀는 잠시 넋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 자강은 당황한 나머지 비틀거리면서도 몸을 돌렸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신형을 움직였다. "여, 여보세요! 잠깐만......." 불러 세우려 했으나 별무소용이었다. 자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버렸고 파라오 공주는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대체 저 사람은 누구일까?'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문득 홍조가 어렸다. '이곳에 저렇듯 수려한 사람이 있었다니.......' 파라오 공주의 가슴을 조금씩 설레이게 하는 밤, 사막의 밤이 밀려오고 있었다. 제 3 장·시작(始作)을 향한 몸부림 ① 탑리지(塔里地)는 온통 흥분과 축제 분위기로 휩싸였다. 그것은 고목하로 떠났던 대상들이 예년보다 수배 이상의 수확을 안고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선물과 색다른 물건들을 싣고 올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때문이었다. 이는 특히 탑리지의 부녀자들로 하여금 환성을 올리게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쾌거 외에 경악할 만한 사태도 있었다. 그것은 소족장인 아사웅이 느닷없이 애꾸가 되어 돌아온 일로써 다륜족 전체를 의혹에 빠뜨린 엄청난 사건이었다. 대족장인 나하리칸을 위시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으나 아사웅은 한사코 대답을 기피하는 기현상까지도 연출했다. 그는 탑리지로 돌아온 이후 말이 없어졌다. 다만 하나 뿐인 오른쪽 눈으로 섬뜩한 살기를 뿜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렇듯 변해버린 아사웅은 예의 외눈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무섭게 노려 보았다. 그때마다 그는 심중으로 부르짖고 있었다. '그때에 그 자는 나를 찌른 후 당황하여 내 이름을 불렀다!' 시간이 흐르매 아사웅의 추리도 점차 좁혀져갔다. '당시에도 그 자의 모습은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이는 필시 내가 아는 인물이라는 뜻일 게다. 그렇다면 분명 우리 부족 중 어떤 놈일진저, 내 반드시 그 놈을 가려내 내가 당한 것과 똑같은 고통을 당하게 해 주리라!' 자강. 그는 아사웅과 마주칠 때마다 가슴이 섬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희번뜩이는 외눈이 마치 자신의 내부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자강은 평소 흠모까지는 몰라도 아사웅을 결코 싫어하지는 않았다. 기질적인 차이로 인해 함께 어울린 적은 없으나 나름대로 그의 호방함에 대해 호감을 가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자강은 그를 보면 자책으로 인해 몹시 괴로왔으나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는 아랑과는 친남매지간이 아닌가? 물론 아사웅은 꿈에도 몰랐다. 다륜족 중 가장 조용하고 침착했던 자강이 바로 자신을 해친 자일 줄은. 빠오 안. 오이랍은 오랫만에 침상에 기대 앉아 있었다.


오늘따라 그는 여느 때에 비해 얼굴이 꽤 밝아 보였다. 그 사이 건강이 나아졌을 리는 없으나 이 정도라면 적어도 회복의 기미는 기대해도 될 것 같았다. 그 앞에는 자강이 앉아 있었다. 오이랍이 자강을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허허허... 이 애비는 네가 자랑스럽기 그지없구나. 너는 정말로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해냈다." "과찬이십니다." "허허... 그렇게 겸손할 필요는 없다. 너는 부족 전체가 놀랄 만큼 일을 잘 해냈으니까." 자강이 빙긋 웃어 보이자 오이랍은 깡마른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자강, 만일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너에게 무예를 가르치겠다. 너를 다륜 제일의 용사로 키울 작정이다." 그 말에 자강은 눈을 반짝였다. 오랫만에 듣는 오이랍의 밝고 힘찬 음성에 한량없이 기뻤던 것이다. 그는 과거 오이랍이 보여주었던 위맹한 모습이 떠올라 절로 감회에 빠져 들었다. 당사자인 오이랍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눈은 추억을 더듬듯 아련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잠시 후. 오이랍이 생각난 듯 물었다. "참, 요미(姚美)는 어디 갔느냐?" 자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침에 잠깐 본 적은 있습니다만 점심 이후로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요미는 오이랍의 첩(妾)이다. 그녀는 제법 미색을 갖춘 몽고녀로 오이랍의 아내가 죽은 후 후실로 들어왔다. 그러나 별로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여 오이랍은 그녀에게 이렇다할 애정을 쏟지 않았다. 단지 형식상의 부부라고나 할까? 그나마도 오이랍이 병들고부터는 더 엉망이었다. 요미의 모습은 오이랍 근처에서는 아예 보기가 드물어졌다. 그녀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은 이미 다륜족 내에 파다하게 알려져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자강에게까지 추파를 던진 추잡한 여인이 바로 요미였다. 자강은 그녀를 떠올리자 안색이 절로 찌푸려졌다. 오이랍의 입장을 의식하여 내내 입을 다물고는 있었으나 비위가 상하는 것만은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오이랍이 피곤을 느꼈는지 도로 자리에 누우며 말했다. "자강, 이제 그만 가서 쉬어라." "네, 아버님." 자강은 공손히 대답한 후, 천막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곧장 자신이 거처하는 또다른 작은 천막으로 돌아왔다. 밤이 소리없이 깊어가고 있었다. 자강은 침상에 누워 잠을 청해보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는 언제부터인가 종종 있는 일로써 천무독과 우연히 만나게 된 이후 그에게 배운 일초의 괴검식(怪劍式)이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강은 부지중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정녕 괴이한 검법이다. 연마할수록 어렵기만 하니......." 실상 자강은 그 동안 틈만 나면 그 일초의 검식을 연마해왔다. 하지만 그는 늘 한계에 부딪치곤 했다. 간단한 듯 하면서도 무궁무진한 변화가 그 속에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문득 자강은 검법을 연마하고 싶다는 충동적인 욕구와 만나게 되었다. 튕기듯 침상에서 벌떡 일어선 그는 지체없이 밖으로 나갔다. 월광이 탑리지의 황량한 분지를 비추고 있었다. 자강은 근처에서 잡목의 가지를 꺾어 들었다. 그것으로 검을 대신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연후, 그는 괴검초를 연마하기 시작했다.


휘휙! 휙--! 나뭇가지가 움직일 때마다 경미하나마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렸다. 노력이 거듭되는 동안 그 속도가 처음보다 수십 배는 빨라진 것이었다. 중상단부로 뻗어내는 동작과 세 갈래로 나누는 동작은 이제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쌔액--! 경풍 소리가 다시금 공기를 갈랐다. 그러자 어지러운 나뭇가지 그림자가 순간적으로 그의 신형을 가려 버렸다. 이른바 절대필살(絶對必殺)의 검법! 이 변화무쌍한 검초는 괴이하고도 독랄했다. 아울러 쾌속하기가 비할 바 없으며 상식을 벗어난 패도지검초(覇道之劍招)였다. "휴우--!" 약 한 시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자강은 동작을 멈추며 땀을 훔쳤다. 어느덧 달이 기울고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보였다. 하지만 그의 귀로 들려온 것은 불행을 예고하는 음향이었다. 오른쪽 구릉의 뒤편이었다. 나직한 여인의 교소가 들려온 것은. "호호호... 당신은 한이 없군요. 아직도 만족하지 못했단 말인가요?" 자강은 멈칫 굳어지고 말았다. 여인의 그 간드러진 음성은 얼핏 듣기에도 귀에 익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순간,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소리가 들린 쪽으로 은밀하게 접근해 갔다. 이어 그가 커다란 암석 뒤에 몸을 숨기는 찰나, 이번에는 혼탁한 중년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흐흐흐... 그건 그대의 육체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야. 내가 여태까지 혼이 달아나지 않고 이렇게 멀쩡한 게 오히려 의심스러울 지경이야." 그것은 유창한 한어(漢語)였다. 자강은 어릴 적부터 상거래를 위해 한어를 익혔으므로 대뜸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그의 얼굴을 뜨끈뜨끈하게 만드는 것은 비단 그것 뿐이 아니었다. 여인의 음성이 다시 그 말을 받고 있었다. "호호호... 하긴 제가 이래뵈도 그 방면에서는 꽤 쓸만한 여자로 정평이 나 있죠. 하지만 당신 없이는 이 몸도 이젠 더 이상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수치를 모르는 듯한 어투에 자강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몽고어와 한어가 뒤섞인 그 끈끈한 음성은 그로 하여금 구역질이 치밀게 하고 있었다. 이윽고 자강은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의 기척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그의 시야에는 과연 일남일녀가 들어왔다. 여인은 앞가슴의 옷자락이 반쯤 풀어헤쳐져 쓰러져가는 달빛 아래 두 쪽의 젖무덤을 태반 이상 드러내 놓고 있었다. 전체적인 옷매무새나 머리칼까지도 형편없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의 붉게 상기된 얼굴은 요염하기 그지없었다. 정사(情事)의 여운 탓인지 눈에서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상태였다. 그 여인의 얼굴을 본 순간, 자강은 마치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 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미리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확인선상에 이르자 새삼 기가 막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시! 그녀가 아니기를 바랐건만.......' 그 여인은 바로 오이랍의 두번째 부인인 요미였다. 그녀가 한밤중에 이런 후미진 곳에서 뭇사내와 뒤엉켜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허리를 바짝 조여안고 있는 자는 대략 사십대쯤 되어 보이는 한 중년인이었다. '맙소사! 저 자는.......' 그 자 역시 자강이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②


마수광(馬水光). 그는 중원에서 온 상인으로 약 한달 전 진귀한 물건을 잔뜩 내밀어 다륜족의 대족장인 나하리칸으로부터 크게 환대를 받은 자였다. 그런데 거래를 마치고도 탑리지를 떠나지 않아 약간의 의혹을 사고 있기도 했다. 마수광은 구겨진 황삼을 대충 걸쳐입고 있었는데 얼굴이 사각형에다 눈빛이 무척이나 음침해 보였다. "흐흐흐... 한 번 더 즐기자니까." 그가 요미를 거칠게 쓸어 눕힌 곳은 하필 자강이 숨어있는 암석 바로 밑이었다. "흐응, 너무 늦으면 의심을 산단 말이에요." 요미는 짐짓 앙탈을 부렸지만 그렇다고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아니, 그녀는 벌써 몸이 달아 올랐는지 금세 두 팔로 마수광의 굵은 목을 휘감고 있었다. 마수광이 요미의 옷을 잡아채듯 다시 풀어제꼈다. 그러자 희고 풍만한 육봉이 여지없이 노출되었다. "아이... 으음......." 요미는 신음을 발하며 몸을 비틀었다. 그에 따라 두 개의 육봉이 출렁이며 허공에 기요한 육감을 전했다. 마수광의 손이 거침없이 그 위에 얹혔다. 그는 터질 듯한 육봉을 덥석 쥐더니 마구 주물러대기 시작했다. "흐흐흐... 대체 이것이 무엇이길래 나를 이토록 미치게 하지?" 요미의 입에서 뜨거운 교성이 새어나왔다. "아이, 당신도 참! 으으음......." "흐흐흐... 이 삭막한 곳에 너같은 미인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나 마가(馬哥)가 횡재했지." 마수광의 음탕한 동작은 점입가경이었다. 그의 손은 요미의 유방을 거쳐 치마 속으로 깊숙이 쑤시고 들어갔다. "하아......!" 요미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암짐승같은 숨결을 토해내며 점차 육욕에 몰입되어 갔다. 이어 치마 속으로 들어간 마수광의 손이 어디를 어떻게 건드렸는지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악! 그, 그러지 말아요......." 하지만 그 가학(加虐)에 대한 요미의 반응은 실상 강력한 요구였다. 아닌 게 아니라 동공을 허옇게 뒤집으며 허공을 젓는 그녀의 모습은 절정에 이른 욕망을 표출하고 있었다. "흐흐흐......." 마침내 마수광도 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요미를 덮쳤다. 그는 요미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핥아대기 시작했다. 그의 혓바닥이 벌거벗은 상반신을 스칠 때마다 요미는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두 남녀의 불륜은 점점 더 격렬하게 변해갔다. 오로지 행위에 몰두해있는 그들은 의복 따위에도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마수광은 요미의 치마자락을 훌렁 제끼더니 그대로 돌진을 시도하고 있었다. 요미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허연 허벅지를 비비적대며 마수광을 도와 그의 바지춤을 벗겨내리고 있었다. 두 남녀의 행위는 그야말로 동물의 교접을 연상시켰다. "하악!" 요미는 이어 기성을 지르며 상체를 발딱 일으켰다. 그러자 마수광은 마치 기다렸다는듯 앉은 자세를 취하며 그녀의 허리를 받아 안았다. 그리고....... 희열의 극치를 치달리는 그들은 뒤이어 엎치락 뒤치락하며 격전을 방불케하는 장면들을 연출했다. 신음소리와 더불어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사막의 밤을 광란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이 광경을 낱낱이 목도하게 된 자강의 눈에 핏발이 섰다. '추잡한!'


그는 가슴이 뒤집혔다. 더구나 부친인 오이랍이 병중임을 의식하자 다른 사내와 통정하고 있는 요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와 모멸감을 느껴야만 했다. '애초부터 저런 계집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해도 너무 하지 않은가? 최소한 아버님이 살아계신 동안만이라도 자제했어야 하거늘.......' 자강은 치를 떨면서도 그 자리를 피하려 몸을 돌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죽기살기로 요절을 내버리고 싶었으나 부친의 명예를 생각하니 그도 할 짓이 아닌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탁! 그의 발에 돌뿌리가 걸려 소리를 내고 만 것은. '아뿔싸!' 자강은 당황한 나머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누구냐?" 암석 뒤에서 마수광의 거친 고함성이 울렸다. '마주치면 안 된다!' 자강은 내심 부르짖으며 급급히 몸을 숨기려 했다. 휘익--! 바람소리와 함께 자강의 앞을 가로막는 인영이 있었다. 그것은 물론 몰골이 엉망인 마수광이었다. 하지만 와중에도 그가 구사하는 신법만은 전광석화와도 같았다. 그것을 본 자강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이 자는 결코 평범한 상인이 아니다!' 반면에 마수광은 상대를 확인하자 음침한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이제 보니 별 것도 아닌 애송이 놈이었군." 그는 대뜸 만면에 흉흉한 살기를 띄웠다. 이때, 부스럭거리며 암석 뒤로부터 요미가 나타났다. 그녀는 자강을 보자마자 기겁을 했다. "자강......!" 일이 이쯤 되자 자강도 더 이상은 회피할 생각이 없어졌다. 그는 잔뜩 경멸이 담긴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후후... 나는 지금 눈을 씻으러 돌아가는 중이었소. 워낙 못 볼 것을 보아 놓아서 말이오." 마수광이 요미에게 물었다. "아는 놈인가?" 요미는 두려움으로 인해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륜 제일의 용사였던 오이랍의 첩으로써 간통 사실이 알려진다면 필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간신히 대답했다. "바, 바로... 오이랍의 아들이... 에요." "오이랍의?" 마수광의 눈이 의외라는 듯 둥그렇게 떠졌다. "이 놈은 겉으로 봐선 몽고인 같지 않은데?" 그 말에 어느 정도 위안이라도 얻은 것일까? 요미는 아까보다 훨씬 진정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옛날에 오이랍이 주어다 기른 자예요." 그러나 자강은 그 순간 머리가 핑 도는 듯 했다. '주어다 기른......?' 그는 충격 때문에 눈 앞이 캄캄해질 지경이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신세가 밝혀지고 보니 그의 심경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마수광의 비웃음이 그 뒤를 이었다. "흐흐흐... 그럼 결국 애비 없는 새끼라는 말이군."


다행인지 불행인지 자강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넋을 잃은 그는 단지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마수광이 냉혹하고도 비정하게 외쳤다. "어쨌든 우리를 엿본 이상 네 놈은 살려둘 수가 없다!" 다음 순간, 그는 오른손을 번쩍 쳐들었다. 그의 손목에는 한 개의 동환(銅環)이 채워져 있었다. 그는 그 구리 팔찌에 조각되어 있는 용의 머리 부분을 눌렀다. 쨍--!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동환은 가늘고 긴 장검으로 변했다. '흐음?' 자강의 안색이 일변했다. 평소 무예를 정식으로 익힌 적이 없었던 그는 병기에도 거의 문외한이었다. 따라서 마수광의 연검은 그에게 적지아니 당혹을 가져다 주었다. "흐흐... 쥐새끼같은 꼬마놈! 네 눈이 죄지." 마수광은 기형의 장검을 꼬나쥐고는 서서히 자강에게로 다가들었다. 자강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마수광의 검이 그의 목을 겨눈 채 계속하여 거리를 좁혀왔다. 연신 밀려나던 자강은 마침내 한 나뭇가지에 등이 걸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의식하면서도 도저히 걸음을 멈출 도리가 없었다. 딱! 마른 나뭇가지가 맥없이 부러져 나갔다. 그 소리를 들으며 자강은 등에서 진땀이 솟는 것을 느꼈다. "흐흐흐... 애송이 놈, 네가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마수광은 스산한 음성을 흘리며 수중의 장검을 뻗었다. 쉬익--! 그것은 아찔할 정도로 빠르고 악랄한 검식이었다. 자강은 그 공격을 피할 수가 없자 전력을 다해 지면으로 몸을 굴렸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역부족이었다. "윽!" 왼쪽 어깨가 화끈하는 순간, 허공으로 피가 튀었다. 검은 어느새 그의 어깨 부분 살갗을 두텁게 갈라놓았던 것이다. 반면에 마수광은 자신의 공격이 성공하지 못하자 뜻밖이라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엇! 이 놈이 제법 날렵하군." 이어 그는 즉각 검을 세 갈래로 나누어 뻗었다. 쉬쉬쉭--! 예리한 검풍이 코끝에 닿자 자강은 그만 눈 앞이 뿌얘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절망적인 찰나, 그의 눈에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가 들어왔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 나뭇가지를 잡았다. 자강의 손에서 천무독의 괴검식이 눈부시게 펼쳐진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쐐애액--! "으악--!" 마수광은 처절한 비명과 더불어 오른쪽 눈을 감싸쥐며 뒤로 물러났다. 나뭇가지가 정통으로 눈에 박혀버린 것이었다. 마수광은 고통과 경악이 어우러진 음성으로 물었다. "이... 이 검법은......? 네... 네가 어떻게......?" 그의 외눈이 자강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이윽고 마수광은 자신의 눈에서 나뭇가지를 뽑아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안구가 나뭇가지에 딸려 나왔다. "이... 이 찢어 죽일 놈! 그 검법을 어디서 배웠는지는 모르나 절대로 가만 두지 않겠다." 마수광은 길길이 뛰며 재차 검을 들이대려 했다. 자강이 오른손 식지를 쭉 뻗은 것은 그때였다.


핑--! 오환매영지(五幻梅影指)가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크악!" 마수광의 이마에 구멍이 뻥 뚫렸다. 그곳으로부터 한 줄기 피화살이 분출되더니 그는 이내 고목처럼 뒤로 넘어갔다. 쿵! 실로 속절없는 죽음이었다. 자강은 그제서야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어깨에서 흘린 피로 인해 그는 상반신이 시뻘겋게 젖어 있었다. 이 갑작스러운 사태의 전개에 요미의 안색은 아예 잿빛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불쌍해 보일 정도로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자강이 비틀거리며 요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는 그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자... 자강, 제발......." 그 바람에 대충 여몄던 옷자락이 벌어지며 그녀의 속살이 함부로 비어져 나왔다. 유방은 물론이거니와 아랫배의 은밀한 비소까지도 유감없이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자강은 차라리 참담한 심정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곧 참을 수 없는 격분으로 이어졌다. 그는 땅에 떨어져 있는 마수광의 검을 집어 번쩍 치켜 들었다. "나는 당신을 절대 용서할 수 없소!" "아악!" 요미는 자강이 검을 채 휘두르기도 전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검을 쥔 자강의 손이 허공에서 뚝 멈추었다. "죽음이 그렇게도 두렵소?" 그는 냉엄하게 덧붙였다. "나는 당신을 죽이지는 못하오. 이는 단지 당신이 아버님의 여인이기 때문이오. 하지만 이대로 보낼 수는 없소." 쉬익--! 자강의 검은 요미의 목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그녀의 탐스러운 머리칼을 싹뚝 잘라 버렸다. 반자나 되는 자신의 머리칼이 허공에 분분히 흩어지는 것을 보며 요미는 혼비백산 했다. "아아악--!" 이어 그녀는 옷자락이 휘날려 알몸이 환히 드러나는 것도 잊은 채 마구 달아나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내닫는 그녀의 모습이란 실로 가관이었다. "아버님......." 자강은 신음처럼 탄식하며 검을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끓어오르는 울화를 발산이라도 하듯 앙천광소했다. "으하하하핫--!" ③ 오이랍의 빠오 안. 자강이 피에 젖은 모습으로 걸어 들어왔다. 오이랍은 침상에 기대앉은 채 지난 날 자신이 쓰던 월영도(月影刀)를 닦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강의 끔찍한 모습을 보게 된 그는 크게 놀랐다. "강아야! 대체 어찌 된 일이냐? 그 꼴은......." 자강은 침상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 "그 상처가 무엇이란 말이냐?"


흥분하는 오이랍에게 자강은 고개를 떨구며 대답했다. "마수광을 죽였습니다." "뭣이?" 누렇게 뜬 오이랍의 얼굴에서 그나마 핏기가 싹 가셨다. "네가... 그 일 때문에......?" 자강은 그 말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아버님께서는......?" "어리석은! 그깟 계집 때문에 그런 큰 일을 저지르다니." "아버님......." 자강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럴 수가! 아버님께서는 미리 아시고도 가만히 계셨다.' 그는 그야말로 피눈물이 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 동안 침상을 벗삼으면서 느꼈을 오이랍의 무력감이 그에게 피부로 전달되어져 왔기 때문이었다. 자강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그런 연후, 그는 방금 전에 벌어졌던 일들을 모두 털어 놓았다. 오이랍은 얘기를 들으며 몇 번씩이나 안색이 변했다. 이어 그는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강아야." "네, 아버님." "어찌 되었건 살인을 저질렀으니 다륜족의 계율이 너를 이대로 가만히 두지는 않을 것이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자강은 고개를 푹 숙였다. "날이 밝기 전에 이곳을 떠나라." "예?" 그는 놀란 얼굴로 오이랍을 쳐다보았다. "또한 틀림없이 그 계집이 너를 모함해 해치려 들 것이다." 자강은 고개를 흔들며 굳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저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오이랍이 그를 향해 탄식을 불어냈다. "그것을 누가 믿어줄 것 같으냐? 여우같은 그 계집의 농간은 아무도 당해내지 못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 중원인은 나하리칸의 귀빈이다. 그러니......." 오이랍의 음성은 단호한 한 마디로 이어졌다. "떠나라! 지금 당장." 자강은 고개를 들어 그를 정시했다. "아버님을 두고 제가 어찌 떠나겠습니까?" "바보같은 녀석!" 자강은 입술을 깨물며 완강한 어조로 말했다. "뭐라고 하셔도 좋습니다. 저는 아버님을 두고는 절대 떠날 수 가 없습니다." 그러자 오이랍이 버럭 고함을 쳤다. "이 애비의 처음이자 마지막 명령이다! 떠나라." 자강은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려 땅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아버님, 부디 그것만은 용서해 주십시오." 오이랍의 노안에 일순 눈물이 맺혔다. 그것이 기쁨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비감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이렇게 물었다.


"너는 결국 이 병든 애비 때문에 못 떠난단 말이냐?" 오이랍의 음성은 곧 단호하게 변했다. "그럼 내가 없어지면 떠날 수 있겠군." "예엣?" 자강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드는 찰나였다. 오이랍의 입가에서 신혈이 흐르고 있었다. 스스로 혀를 깨물은 것이었다. "아, 아버님! 어찌 이러실 수가......." 삐익! 삑--! 문득 밖으로부터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또한 그 소리는 금세 가까와지고 있었다. 이는 다륜족이 어떤 급박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 알리는 신호였다. 오이랍이 입에서 피를 주르르 쏟아내며 말했다. "결국 일이 터진 것 같구나. 떠나라, 어서......." "아버님--!" 자강이 울부짖자 오이랍은 잿빛이 되어가는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아들아, 나의 아들아......." "아버님......." "너는 지금껏 네 신상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겠지."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입 안에는 다시금 선혈이 가득 고이고 있었다. 자강이 안타까운 음성으로 그를 만류했다. "아버님! 이제 제게는 그런 것 따위 필요 없습니다.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오이랍은 오랜 세월 동안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최후의 말을 하기 위해 계속 입술을 움직였다. "별로 알려줄 것이 없어서 미안... 너를 만나게 해준 사막에 감사... 네 진실된 이름은... 엽... 고운... 부... 부디......." 다륜족 최고의 용사로써 평생토록 혁혁한 무위를 자랑하던 그는 결국 이렇게 죽었다. 그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자 입 안에 고여 있던 피가 쏟아졌다. 이번에는 동강난 혀도 섞여 나왔다. "아버님--!" 자강, 아니 엽고운(葉古雲)의 피맺힌 절규가 천막을 흔들었다. 어차피 헤어지는 것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이별이 그의 가슴을 온통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었다. 휘익--! 빠오의 휘장이 거칠게 젖혀지며 일단의 무리가 들어선 것은 그때였다. 앞장 선 자는 바로 외눈에 흉험한 살기를 띄고 있는 소족장 아사웅이었다. 그의 옆에는 요미가 서 있었고 뒤로는 다륜족의 젊은 청년들이 각기 장창과 칼을 찬 채 살기등등한 기세로 서 있었다. 아사웅이 먼저 노기가 깃든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은혜를 악으로 갚는 놈! 오이랍의 체면을 봐서가 아니라 나는 실제로 너를 아껴왔다. 다륜의 형제들이 너를 비웃을 때도 보이지 않게 비호했으며 심지어는 내 핏줄인 아랑과의 사이도 묵인했었다. 그런데 내 눈을 이렇게 만든 자가 바로 너였다니......." 분노와 배신감으로 인해 그의 안면이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사웅......." 엽고운은 도저히 아사웅의 시선을 맞받을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순간, 그의 눈에 교활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요미의 얼굴이 들어와 꽂혔다. '저 여인이 기어코 나를 궁지로 몰아 넣었구나.' 아사웅이 다시금 분성을 발했다. "너는 살인을 저질렀다. 더구나 마수광이 당한 수법은 전날에 내가 당했던 것과 똑같더구나. 내 다른


사람 같았으면 몰라도 너에게만은 엄중한 처벌을 내리겠다." 엽고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네 놈의 사지를 찢어 탑리지의 입구에 걸어 놓겠다!" 아사웅은 허리춤에서 반월도를 뽑아 들었다. 쨍--! 그러자 엽고운은 오이랍이 죽기 직전에 매만지던 월영도를 재빨리 집더니 침상 안쪽의 천막을 칼로 북 찢었다. "놈! 도망을 칠 셈이냐?" 아사웅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엽고운은 찢어진 천막 사이로 뛰쳐나가며 고통이 배인 음성으로 외쳤다. "아사웅! 용서하시오. 그 일은 결코 내 뜻이 아니었소. 당시를 돌이켜 보면 당신도 이해할 것이오." 이어 그는 요미를 향해 냉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 당신을 두 번은 용서하지 못하겠소!" 쐐액--! 월영도가 무섭게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그는 한을 품고 죽어간 오이랍을 대신해 마침내 처단을 감행한 것이었다. "아악!" 처절한 비명이 일었다. 오이랍의 혼이 깃든 월영도는 요미의 복부에서 등 뒤까지를 관통하고 말았다. 요미는 두 손으로 칼을 잡은 채 푹 고꾸라졌다. 쿵! 그녀는 죽은 오이랍을 향해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그것은 실로 희한한 광경이었다. 흡사 자신의 남편에게 부정에 대한 참회라도 바치듯 요미는 그렇게 죽어간 것이었다. 그 순간, 엽고운은 벌써 그 자리에 남아있지 않았다. "놈을 추격해라--!" 아사웅의 외침이 다륜의 청년들에게 떨어지고 있었다. ④ 엽고운. 그의 탈주는 정녕 고독한 것이었다. 그것은 곧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일탈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가 이른 곳은 말(馬)들이 있는 곳이었다. 엽고운은 수백 마리의 말들 중 유일한 흑마에게 시선을 던졌 다. 바로 흑추(黑追)였다. 휙--! 엽고운은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흑추의 앞으로 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사웅조차 길들이기에 실패한 이 야생마가 그의 접근에 오히려 머리를 낮추고 반긴다는 사실이었다. 엽고운은 흑추의 귀에 대고 다급히 말했다. "추아야, 네가 나를 살려 주어야겠구나. 어서 나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 다오." 그는 안장도 없는 흑추의 등에 뛰어 올랐다. 히히히힝--! 흑추는 그가 올라타자 즉시 힘찬 울음소리를 발했다. 두두둑--! 쉬익--! 흑추의 눈부신 도약은 오장이나 되는 울타리를 단숨에 뛰어 넘었다. 이어 일기의 인마는 한 덩어리가 되어 밝아오는 여명 속으로 쏜살같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 뒤로 호각 소리가 날카롭게 울리며 인영들이 속속 나타났다. 바야흐로 탑리지 전체가 발칵 뒤집혀버린 것이었다.


한편. 아사웅은 곧장 추격대를 이끌고 엽고운을 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탄 일반의 황마로써는 도저히 흑추를 따를 수가 없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엽고운과 추격대의 거리는 점점 멀어질 따름이었다. "빌어먹을! 멈춰라--!" 아사웅은 일단 추격대를 멈추게 한 후, 외눈으로부터 살광을 번뜩이며 중얼거렸다. "용의주도한 놈! 흑추까지 미리 길들여 놓았을 줄이야......." 그는 내심 감탄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를 갈았다. "그러나 자강, 내가 너를 놓칠 것 같으냐? 다륜족의 기강을 흐뜨려 놓고는 도주까지 하다니!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 아사웅은 곁에 있던 한 청년에게 지시했다. "랍격(拉格)! 너는 지금 즉시 돌아가 지리에 밝은 용사 백 명과 서장산(西藏山) 대황견(大黃犬)을 모두 끌고 와라." 그러자 랍격이란 청년이 놀라 물었다. "기어이 잡아들이실 작정이십니까?" "물론이다. 놈은 결코 내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다. 흑추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최소한 열흘은 걸려야 등격리 사막을 벗어날 수 있다. 더구나 놈은 지리에 어둡고 음식은커녕 물도 없으니 반드시 내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알았습니다." 랍격은 더 이상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리고는 즉시 두 명의 청년과 함께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돌아갔다. 오이랍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남은 십여 명을 인솔해 다시 말을 달렸다. 그들을 따라 거친 모래바람이 사막을 휩쓸어가고 있었다. 황혼 무렵. 낮 동안 모래알을 녹여버릴 듯 내리쪼이던 폭양이 서녘의 지평선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불같이 뜨겁고 후끈후끈한 사열(砂熱)은 그야말로 열탕을 이루고 있었다. 하나의 사구에 흑추와 엽고운이 나타났다. 그들 인마는 지칠대로 지쳐 축 늘어진 채 걷고 있었다. 인간과 말을 따로 구분지을 것도 없이 그들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으며 열기로 인해 살갗이 거의 갈라터질 정도에 이르고 있었다. 엽고운이 흑추의 등에서 내려온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러고도 그는 미안한 얼굴로 흑추의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추아야, 네게 너무 고생을 시키는구나. 나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하다니 정말 할 말이 없다." 과연 명마(名馬)는 어디가 달라도 달랐다. 흑추는 그 말을 알아들은 듯 대뜸 긴 얼굴을 좌우로 흔들었다. 전날에 아사웅이 흑추를 손에 넣으려 그토록 애쓴데는 바로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엽고운에 의해 먼저 정복되었다는 사실을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 녀석! 속도 넓구나. 후후......." 엽고운은 흑추의 커다란 귀를 잡아당김으로써 고마움과 더불어 친근감을 전했다. 이어 그들은 터벅터벅 걸어 다시 몇 개의 사구를 넘었다. 히히힝--! 갑자기 흑추가 전면을 향해 코를 벌름거리며 힘찬 울음을 터뜨렸다. 엽고운은 곧장 그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추아, 너......?" 그는 지체없이 흑추의 등에 올랐다. 그러자 흑추는 새로운 힘이 솟아난 듯 뜨거운 모래를 날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오오! 물, 물이구나." 엽고운은 희열에 찬 부르짖음을 발했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하나의 강 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수량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좌우로 초지를 형성한, 이른바 사막의 젖줄이 그의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엽고운은 그것을 보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혹시 이 강이 오륵목하(烏勒木河)가 아닐까?' 그가 알기로 오륵목하라면 등격리 사막에서 유일무이한 강이었다. 길이는 길지 않았으나 사막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귀한 생명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히히힝--! 첨벙! 흑추는 벌써 강물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아아! 이렇게 고마울 데가......." 덕분에 물 위로 곤두박질쳐진 엽고운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이어 사람과 말이 다 함께 배가 터지도록 물을 마셨다. "아아......." 엽고운은 감개무량한 얼굴로 허공을 우러러 보았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 이처럼 물이 맛있었던 적이 또 있었던가? 하지만 갈증이 해소되자 그를 엄습하는 것은 극도의 피로감이었다. 결국 그는 초지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흑추는 그 곁에서 조용히 풀을 뜯고 있었다. 밤. 어둠 속에서 물소리가 아득히 들려오고 있었다. 엽고운은 전신이 축축히 젖어있는 것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이때였다. 컹! 컹! 컹--! 불현듯 개짖는 소리가 그의 고막을 파고 들었다. "아뿔싸!" 엽고운은 벌떡 일어났다. 그는 순간적으로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얼마 전 서장에서 들여온 개들이 아닌가? 사납고 코가 영민하기로 이름났다는.......' 엽고운은 그만 절망감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또한 대황견의 추적술이 놀랍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일단 냄새만 포착하면 하늘 끝까지라도 쫓는다는 무서운 짐승이었다. 엽고운은 난감하여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어 그는 한 가지 결심을 굳힌 듯 흑추에게로 다가갔다. "추아야, 너는 강변을 따라 계속 달려다오. 나는 아무래도 이 강을 건너 가야겠구나." 흑추는 그 말에 의아한 듯 푸드득 거렸다. "너는 부족 내에서 아끼는 명마니 발견되어도 무사할 것이다." 히히힝....... 흑추는 나직이 울부짖었다. "추아야, 부탁한다. 네가 대황견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는 사이에 내가 이 오륵목하를 건너면 혹 살 희망이 생길지도 모른다." 엽고운은 흑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간절히 말했다. 흑추는 알겠다는 듯 발굽을 움직였다. 하지만 아쉬운 눈으로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본 뒤에야 흑추는 강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첨벙! 엽고운은 강물로 뛰어 들었다. 다행히도 물살은 세지 않았다. 비록 헤엄은 잘 치지 못했으나 생사가


달린 일인지라 그는 전력으로 팔을 저어 오륵목하를 건너갔다. 사막의 열기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모래알마저도 바삭바삭하게 태워버리는 그 열기에 지상의 어떤 생물체가 견딜 수 있겠는가? 과연 동물은 물론 나무 하나, 심지어 풀 한 포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열사만이 높고 낮은 구릉들을 형성한 채 영겁의 시간을 입증해줄 뿐이었다. 자강. 그는 부모가 누구인지, 심지어는 이름이나 성(姓)도 모르고 몽고인들의 틈에서 자라났다. 그리고는 엽고운이라는 이름이 자신의 것임을 확인한 지 불과 수일 만에 처참한 지경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불행을 운명처럼 짊어진 그는 이제 열사의 한복판에서 손가락 하나 꼼짝할 기력도 없었다. 의식조차 혼미한 상태였다. 입술이 갈라터졌으며 피가 엉겨있는 옷자락과 살갗에는 온통 모래가 달라붙어 있었다. 예전의 용모는 도무지 간 곳이 없었다. "으으... 무, 물... 좀......." 차가운 음성이 그 말을 받았다. "물이 먹고 싶으냐?" 혼몽을 거듭하던 엽고운의 의식이 퍼뜩 되돌아왔다. 이어 힘겹게 고개를 들자 그의 눈에 십여 명의 장한이 말을 탄 채 폭양을 등지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바로 다륜족의 용사들이었다. 그들을 태우고 있는 말 앞에는 두 마리의 대황견이 시뻘건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있었다. 그것을 본 엽고운은 내심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 '틀렸다! 살아날 가망은 단 일푼도 없어지고 말았구나.' 한 장한이 그를 향해 살기 등등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독한 악종같으니! 물 한 방울 없이 이 사막에서 어떻게 칠일 간이나 버텼단 말이냐?" 다른 장한의 음성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네 놈도 이제 끝장이다." '당신 말이 맞소. 후후...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런 것 같소.' 엽고운은 눈을 감았다. "이 길로 네 놈을 소족장님께 끌고 가야겠다. 네 놈 때문에 괜히 우리가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동정의 여지도 없다." 칼칼한 음성과 함께 하나의 밧줄이 날아왔다. 휘익--! 그것은 마치 독사처럼 엽고운의 허리를 휘감았다. "후후... 고통스럽겠지만 좀 참아라." 다음 순간, 엽고운을 묶은 채 말들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옷자락과 살갗이 뜨거운 모래에 마찰되어 마구 찢기고 갈라졌다. 그것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그에게 안겨 주었다. "으하하하... 한인의 잡종아! 맛이 어떠냐?" "우우욱--!" "후후... 안 되었다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어디 네 놈의 목숨이 얼마나 질긴지 한 번 시험해 보겠다." 엽고운을 끌고 달리는 장한은 다륜족 중에서도 유난히 흉폭한 자였다. 그는 인정사정두지 않고 말을 더욱 거칠게 몰았다. "으으윽--!" 엽고운은 전신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엄청난 고통에 그야말로 의식이 가물가물해질 지경이었다. 일행 중 다른 장한이 한 마디했다.


"셋째! 너무 심하게 다루지 마라. 살려서 끌고 가야 한다." 셋째라 불리운 장한은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그는 말의 속도를 늦추기는커녕 더 몰아가기 위해 채찍을 휘둘렀다. "염려 마시오! 이 놈은 이 정도로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이오." 쌔액--! 그러나 채찍은 말 궁둥이에까지 미처 이르지 못했다. "컥!" 장한은 비명과 더불어 갑자기 채찍을 놓아버리는 대신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끄으......." 쿵! 그는 어이없게도 말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⑤ "셋째! 이게 어찌된 일이냐?" 나머지 장한들이 고함 치며 일제히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들은 셋째라는 자의 목에 깊숙이 박힌 한 자루의 핏빛 화살을 보자 모두 눈을 크게 부릅떠야 했다. "이것은!" 그들의 안색은 대번에 잿빛으로 화했다. "혈전추혼(血箭追魂)! 혈령사신(血靈邪神)의 표식이 아닌가?" 한 가닥 음침한 음성이 그들의 공포감을 가중시켰다. "크흐흐흐... 감히 어떤 놈들이 사막의 사신(死神)이 사는 이 도란태산(圖蘭泰山)의 금역까지 침범했느냐?" 이와 동시에 맞은편 구릉에서 십기의 인마가 나타났다. 한결같이 이마에 홍건을 두르고 있었으며 말잔등에도 홍포를 씌운 혈의의 장한들이었다. "헉!" 다륜족의 용사들은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거의 무의식적으로 말을 뒷걸음질치게 했다. 아울러 그들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구릉의 뒷쪽을 바라 보았다. 과연 그곳에는 웅장한 도란태산의 산봉(山峯)이 병풍처럼 겹겹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들은 추격에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도란태산에 가까이 온 것을 미처 의식하지 못한 것이었다. "후퇴하라--!" 다륜의 장한들은 각기 외치더니 뿔뿔이 흩어져 필사적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겨우 삼 장쯤 벗어났을까?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그들은 차례로 말에서 투두둑 떨어지고 말았다. 히히히힝--! 아홉 필의 주인을 잃은 말들만이 허망한 몸짓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 장한들의 목에는 어김없이 혈전추혼이 한 자루씩 박혀 있었다. "크크ㅋ... 어림도 없는 수작이다. 감히 혈령사신대(血靈邪神隊)의 손에서 도망을 치려 하다니." 혈의장한 중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괴소를 터뜨렸다. 그는 콧등에 사마귀가 난 자로 매우 음침한 인상이었다. 휙--! 그는 말 위에서 훌쩍 뛰어 내리더니 모랫벌에 엎어져 있는 엽고운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무성의한 발길이 엽고운의 몸을 아무렇게나 뒤집었다. "으윽!" 엽고운의 비명에도 그 자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란 고작 이런 것이었다.


"네 놈은 몽고인이 아니구나?" 엽고운은 간신히 몸을 추스려 일어섰으나 굳이 어떤 대답도 할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장한이 다시 음산하게 물었다. "너는 무슨 일로 이 놈들에게 쫓겼느냐?" 엽고운은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말해 보았자 이로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더러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장한에게 적지아니 반감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애송이 놈! 죽고 싶어 환장을 했느냐? 감히 혈령사신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다니, 당장에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겠다." 장한은 말 뿐이 아니라 실제로도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냈다. 하지만 엽고운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아예 시선까지도 거두어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이 찢어 죽일!" 혈의장한은 격분한 나머지 대뜸 주먹을 날렸다. 퍽! "으윽!" 엽고운은 왼쪽 어깨가 바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나가 떨어졌다. 그의 어깨에서는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엽고운의 육신이 무력하게 땅바닥을 뒹구는 순간, 그가 지니고 있던 구룡옥패가 툭 떨어졌다. 그것을 보자 혈의장한의 안색이 일변했다. "아니! 저것은 구룡옥패가 아닌가?" 놀란 것은 비단 그 자 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아홉 명의 혈의장한들까지도 금세 눈이 휘둥그레지고 있었다. 장한은 콧잔등에 난 사마귀를 씰룩이더니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사신(邪神)께서 그토록 찾으려 하셨던 구룡옥패가 이렇게 쉽게 나타나다니, 으핫핫핫......!" 그는 곧 추궁하듯 엽고운을 다그쳤다. "꼬마놈, 이 옥패를 어디서 얻었느냐?" 동시에 장한은 몸을 숙여 옥패를 집어 들었다. 그 광경을 보게 되자 엽고운은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내 것이다! 내놔라--!" 그는 언제 일어났는지 죽은 다륜 용사의 칼집에서 번개같이 월아도를 뽑더니 그대로 장한을 찔러갔다. 그것은 천무독에게서 배운 괴검일식이었다. 쉬익! 그러나 검식의 위력은 평소의 십분지 일도 발휘되지 못했다. 이는 엽고운이 너무도 탈진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펑--! "크윽!" 그는 오히려 가슴을 다시 주먹으로 얻어맞고는 뒤로 다섯 걸음이나 밀려났다. "크흐흐... 어린 놈이 제법 칼을 쓰려 한다만 아직 멀었다. 그런 시시한 수법에 내가 당할 것 같으냐?" 장한은 미끄러지듯 다가오며 엽고운의 월아도를 낚아챘다. "아!" 엽고운이 신음과도 같은 탄성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어느새 월아도를 탈취한 장한은 거기에 손가락을 튕기고 있었다. 쨍--! 그의 가벼운 일지에 의해 월아도는 그만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는 아직 무공의 세계를 두루


섭렵하지 못한 엽고운으로서는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으음, 대단한 자로구나!' 이때, 장한이 칼을 내던지더니 구룡옥패를 들어 보였다. "꼬마 놈! 너는 엽장청(葉長靑)과 어떤 관계냐?" '엽... 장청......?' 엽고운은 심장이 멈추어 버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자신과 성이 같은 그 이름에서 순간적으로 그는 운명적인 예감과 조우하게 된 것이었다. "흐흐... 이 구룡옥패는 과거 엽장청이 지니고 있던 물건이다. 그런데 네 놈이 어떻게 하여 이것을 손에 넣었느냐는 말이다." "후후......." 엽고운은 전신으로 번져가는 격정을 쓴 웃음으로 대신했다. "사실은 나도 그것이 무척 궁금하외다." 그러자 장한은 무섭게 외쳤다. "괘씸한! 관을 보기 전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놈이구나." 퍽--! 엽고운은 이번에는 그의 발길에 채여 다시금 모래 위로 벌렁 넘어졌다. 복잡한 상념으로 인해 비명조차 잊은 채....... 장한이 다가와 발로 그의 가슴을 짓밟았다. "자! 발에 힘을 조금 더 주면 네 놈은 문드러진다. 이래도 말하지 않겠느냐?" "모, 모른다지 않았소......? 후후후......." 엽고운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도시 종잡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으스러지는 듯한 이 통증은 과연 외부적인 압력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내부에서 들끓는 그 무엇 때문인가? 그의 인생을 휘어잡고 있던 불행과 더불어 이 순간 확실하게 다가오는 것이라곤 단 한 가지, 그것은 비참하고도 절망적인 죽음의 냄새였다. 아니나 다를까? "지독한 놈! 지옥에나 가거라." 장한은 치를 떨더니 마침내 발에 힘을 가했다. 휘이이-- 잉--! 갑자기 엄청난 모래바람이 휩쓸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광풍이 불어와 장한들은 대번에 몸의 중심을 잡기도 힘든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이, 이게 무슨 변괴냐?" 밝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있었다. 동시에 허공으로부터 귀청을 찢을 듯한 괴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크아악! 크르륵--! 이와 더불어 모래를 동반한 폭풍은 더욱 거세어졌다. "허엇!" 혈의장한들은 말과 사람이 다 함께 날아가 버리지 않나 싶은 위기감을 느끼며 급급히 허공을 살폈다. 때마침 공포가 깃든 한 장한의 외침이 그의 귀에 꽂혔다. "저, 저것은... 천붕(天鵬)이다--!" 그도 이내 눈으로 볼 수가 있었다. 이른바 전설의 영조(靈鳥)인 천붕의 웅자(雄姿)를. 한 마리의 새가 태양은 물론 하늘 전체를 그 거대한 몸통으로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말이 새였지, 그 날개를 편 길이를 이르자면 근 백자, 즉 십장에 가까웠다. 하늘이 먹구름에 가리워진 듯 온통 컴컴해진 것도 바로 이때문이었다. 휘이잉--! "앗!" 천붕의 한 차례 날개짓이 일순 우두머리 장한의 신형을 휘청하게 했다. 이로 인해 그는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앗차하는 사이에 구룡옥패를 놓치고 만 것이었다. 이때, 허공으로부터 웅후한 웃음소리가 뿌려졌다. "으하하핫... 도란태산의 귀졸(鬼卒)에게 알려라! 언젠가는 노부의 전인(傳人)이 찾아와 이 악배들의 본거지를 평지로 만들겠다고 말이다! 으하하하......!" 그러자 혈의장한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기혈이 팽창하는 것을 느끼며 안색이 시뻘겋게 달아 올랐다. 그 순간, 엽고운의 몸은 무형의 힘에 이끌려 허공으로 딸려 올라갔다. "저, 저런! 멈춰라--!" 혈의장한들은 경황 중에도 질겁을 하여 고함쳤다. 천붕의 등쪽에서 다시 예의 음성이 들려왔다. "노부의 일거수면 너희들의 목숨쯤은 모조리 거둘 수 있다. 단지 오늘이 노부의 생애 중 가장 기쁜 날이기에 살생을 자제할 뿐이다. 으하하하... 그러나 훗날을 대비해야 할 것이다. 노부의 전인이 찾아갈 날을. 으하하하......!" 휘이이이-- 휘이이잉--! 광풍은 돌연 그 기세를 바꾸어 회오리를 일으켰다. 그러자 대기가 곧장 소용돌이 치며 거대한 모래 기둥을 형성시켰다. 그것은 흡사 하늘이 내린 재앙과도 같았다. 천붕의 날개짓에 의해 지상에 이렇듯 엄청난 난변이 도래한 것이었다. 이윽고 천붕은 그 위세를 떨치고 난 후, 하늘 높이 올라가 까만 점으로 화하더니 남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아!" 혈령사신대의 장한들은 모두 넋을 잃은 채 망연히 서 있었다.그들은 방금 전의 사실을 두고 도무지 현실감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꿈으로 쳐도 끔찍한 악몽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역시 우두머리 장한이었다. 그는 안색이 잔뜩 일그러진 채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으음, 분하다! 구룡옥패를 도로 빼앗기다니......." 그 말에 나머지 장한들은 깜짝 놀랐으나 그의 기색이 워낙 험악한지라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후.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더니 말을 몰아 도란태산(圖蘭泰山)으로 향했다. 그들이 달리는 방향으로 모래먼지가 계속하여 자욱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제 4 장·입문(入門) ① 석부(石府). 돌로 지어진 건물 속의 한 방이었다. 사면이 모두 깨끗하고 단아했다. 고서화와 병풍이 둘러쳐져 있는 방 안의 공기 또한 청정하면서도 엄숙하기 그지 없었다. 벽쪽에 있는 침상 역시도 돌로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엽고운이 죽은 듯이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등격리 사막에서 자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던 미소년이 지금 이곳에 와 있다. 침상 옆에 있는 돌의자에는 전신에 백의를 입은 학발동안(鶴髮童顔)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백세가 훨씬 넘은 듯한 그 노인은 눈썹이 길고 얼굴이 붉었는데 기이하게도 무릎 아래를 흰 천으로 가리고 있었다. 엽고운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에는 왠지 복잡한 기운이 내내 어려 있었다. 그의 입에서 급기야 탄식이 터져 나왔다. "나소(羅宵)여! 네 희생으로 이 늙은 목숨은 건졌지만 그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백의노인의 얼굴에는 언뜻 비감이 깃들었다. "본문의 남천구로(南天九老)는 뿔뿔이 흩어져 그 생사조차 알지 못하고 노부 또한 두 다리를 잃고


말았으니......." 흰 천으로 덮힌 노인의 무릎에는 바로 이런 사연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다리쪽을 내려다 보는 그의 눈에는 처절한 원한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북혈마황(北血魔皇)! 두고 보아라. 이토록 철저히 당하기는 했으나 노부는 결코 여기서 주저앉지 않는다. 그 혈원(血怨)은 반드시 갚고 말 것이다." 백의노인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침상 위의 엽고운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그의 눈에는 기쁨이 차올랐다. "이 아이로 말미암아 나 남천신군(南天神君) 화진성(火眞星)은 인생을 헛되이 마감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남천신군 화진성, 이것이 백의노인의 명호인 모양이었다. 그는 기대와 감동이 어우러진 음성으로 다시 중얼거렸다. "아마도 역대 조사들의 음덕(陰德)일 것이다. 신체 조건도 훌륭하지만 보아 하니 이 아이에게도 심각한 내력이 있는 모양인데 그것은 결국 굳건한 정신력의 밑거름이 되어 줄 것이다." 화진성은 일면 쓴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굳이 동정할 필요는 없겠지.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아이에게 있어 그러한 정신력은 복구 내지는 재건을 꿈꾸는 노부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어 만면에 결의의 빛을 떠올렸다. "아무튼 나 화진성의 목적은 이 아이를 향후로 천상천하의 유아독존인(唯我獨存人)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북혈마궁을 궤멸시키기 위해서는 오직 그 방법밖에 없다." 화진성의 음성은 하나의 부르짖음으로 이어졌다. "노부는 이 아이로 하여금 본문의 명예를 다시 중천에 뜬 태양과 같이 빛나게 할 것이다." 이때, 침상 위에 누워 있던 엽고운이 가벼운 신음을 흘렸다. "으음......." 화진성의 얼굴에 대뜸 희색이 번졌다. 그러한 가운데 엽고운이 눈을 번쩍 떴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몹시도 어리둥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을 관심 깊게 내려다 보는 학발동안의 노인에게 물었다. "여기는... 어디입니까?" 화진성은 빙긋 웃더니 자애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이야, 안심해라. 노부는 결코 너를 해칠 사람이 아니다." 엽고운은 그 사이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일단 주위를 훑어 본 그는 정말로 마음이 가라 앉았다. 석실 안의 단아한 분위기가 그로 하여금 안정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면에 생경한 기분도 없지는 않았다. 이제껏 사막의 빠오를 거처로 삼고 있던 터라 이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엽고운은 체력이 회복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어깨의 상처도 깨끗이 나아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다시 물었다. "노인장께서는 누구십니까?" 화진성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허허... 기억이 나지 않느냐? 노부는 너를 구한 사람이다." 엽고운은 비로소 탄성을 발했다. "아! 그 거대한 괴조와 함께 나타나셨던 분이시군요." "허허허... 그렇다. 노부는 마침 천붕을 타고 그곳을 지나다 너를 보게 되었다." "그 거대한 새가 천붕입니까?" "천붕에 대한 얘기는 훗날 들려 주마. 그보다도 네가 불편하지 않다면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엽고운은 곧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기다렸다. 화진성이 그를 향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당시 네가 처해있던 상황은 처참했다. 몽고족에게 쫓긴 끝에 다시 사막의 사신이라는 혈령사신대에게 죽음을 당하기 직전이었다. 대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말해줄 수 있겠느냐?" 엽고운은 마음과는 달리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간에 있었던 여러가지 일들이 뇌리에 떠올라 그의 안색을 어둡게 했다. 실상 양부인 오이랍의 죽음, 자신의 신세, 그리고 아사웅과의 관계등 불운으로 점철된 그의 이력은 그리 쉽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이 못되는 것이기도 했다. 화진성이 그의 침울한 표정을 보고는 탄식처럼 말했다. "거북하다면 얘기하지 않아도 좋다." 엽고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먼저 제 이름은 엽고운(葉古雲)이라고 합니다." "흠, 특이한 이름이군." 화진성의 말에 엽고운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불리워본 적이 없었던 이름입니다." "으음......." 화진성도 아직 소년에 불과한 그에게서 깊은 슬픔을 발견하고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이윽고 엽고운은 탑리지의 다륜족들 사이에서 오이랍의 손에 의해 자라난 일로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주욱 얘기했다. 그 파란만장한 사연들을 말하는 도중 어쩔 수 없이 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기도 했다. 화진성은 그의 얘기에 안색이 몇 번씩이나 변화를 거듭 했다.특히 구룡옥패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그의 눈빛이 몹시도 흔들렸다. 그는 얘기가 끝나기를 기다려 이렇게 말했다. "얘야, 내게 그 옥패를 보여줄 수 있겠느냐?" 엽고운은 만면에 비감을 떠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안타깝게도 옥패는 혈령사신대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말에 화진성은 빙그레 웃었다. "허허... 네 품 속을 살펴 봐라." "옛?" 엽고운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급히 품 속을 헤쳐보았다. 그는 곧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무사히 자신의 목에 걸려있는 구룡옥패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아!" 그는 안도의 한숨과 더불어 옥패를 끌렀다. 화진성은 옥패를 받아 살펴본 뒤, 그가 말하는 대로 고운(古雲)이라는 글씨 부분을 눌렀다. 착! 음향과 함께 구멍이 생기며 그 속에서 동그랗게 말려진 양피지가 나왔다. 화진성은 양피지를 펼쳐 들었다. 그곳에는 전과 다름없이 다섯 손가락이 쫙 벌려진 그림이 있었다. 손바닥에는 붉은 줄이 복잡하게 쳐져 있었고 손가락 끝에는 백, 황, 청, 흑, 자색의 다섯 송이 매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을 대한 화진성은 안색이 급변하여 부르짖었다. "오오! 이것은 오환매영지(五幻梅影指)가 아닌가?" 그 말에 엽고운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그것은 과거 천무독도 오환매영지를 알아보고는 화진성과 마찬가지로 놀라움을 표명했던 일이었다. "오환매영지란 대체 어떤 것입니까?"


엽고운의 물음에 화진성은 심각한 표정으로 답했다. "으음, 이는 오백 년 전 불문(佛門) 제일의 기승인 불마성승(佛魔聖僧)의 절예다." "불마성승이라면......?" "음, 그 분은......." 화진성은 눈을 내리감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불마성승(佛魔聖僧). 그는 우선 기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일정한 문파에 소속된 적이 없었으며 늘 독단적으로 행동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천하의 모든 불문무공(佛門武功)을 섭렵하여 위명을 날렸다. 소림, 아미, 곤륜 등 중원의 삼대불문을 비롯하여 천축 라마교의 무공까지도 거의 통달하다시피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천여 년 전 무림을 피로 물들였던 가공할 무리들, 즉 사(邪)의 대종사격인 혼세팔마(混世八魔)의 마공십팔예(魔功十八藝)가 수록된 비급을 우연히 획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불(佛)과 마(魔)라는 양대 극성의 무공들을 고루 연성하여 가히 지고무상의 무학경지에 도달했다. 그 당시에도 무림에서는 그의 무공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단지 상상을 불허할만큼 높고 깊다고만 전해질 따름이었다. 이에 덧붙여 혼세팔마란 어떤 존재인가? 그들은 무림사상 사도 최강의 고수들이었다. 또한 그 극악무도함이 그야말로 하늘을 찔러 그들이 횡행할 때의 무림은 이른바 암흑기라고 할 수 있었다. "아!" 엽고운은 화진성의 얘기에 완전히 빠져 들고 말았다. 비록 금시초문의 얘기들이기는 했으나 중원 무림의 비사에 관한 한 그는 격동에 이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화진성은 그의 내심을 짐작한 듯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다음 말은 탄식에 가까운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과거지사가 아니다. 혼세팔마가 사라진 지 천 년이 지난 지금, 그들보다 더욱 강하고 잔인한 자들이 무림을 어지럽히고 있으니......." 그는 말끝을 흐리며 복잡한 눈빛으로 엽고운을 바라보았다. 이때, 엽고운은 조심스럽게 불마성승의 유물인 오환매영지의 도해를 회수하더니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눈에서 읽히는 진지함이 다시금 화진성을 고심으로 몰고 갔다. '이 아이는 눈빛이 정명하며 무공에 대한 열의도 대단한 것 같다. 그러나 과연 이 아이가 그들을 물리칠 수 있을까? 설사 당년의 불마성승이 나타난다 해도 고하를 가릴 수 있을지 알 수 없건만, 이 아이가 그들을 꺾을 수 있을지......?' 그는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어쨌든 이미 결정된 일이다. 노부는 이 아이의 미래에 운명 의 전부를 걸었다. 바야흐로 한 판의 도박이 시작될 것이다.' 화진성은 깨끗하고 단아한 엽고운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안면을 씰룩였다. 탈속(脫俗)을 느끼게 하는 엽고운의 분위기가 그로 하여금 절로 탄식을 불어내게 했다. '아! 이 아이를 그 무서운 마의 혈풍(血風) 속으로 끌고 들어가자니 도저히 양심이 허락치를 않는구나.' 그의 침묵에 담긴 갈등이 은연중 전달된 것일까? 엽고운이 고개를 들어 그를 정시했다. "어르신,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무슨 심려라도......? 혹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사양치 않겠습니다." 그 말은 화진성에게 적지아니 위안이 되었다. 이로 인해 결국 최후의 용단은 내려졌다. '그렇다! 지금 와서 회의한다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다. 내게 주어진 운명이 있다면 이 아이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아이와 내가 만나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이리라.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아이를 천하무적의 고수로 키우는 길 뿐이다.' ② 화진성의 눈에서 기광이 뻗쳐나왔다. 이어 그의 신형은 앉은 채로 공중으로 일장 가량이나 둥실 떠올랐다. 그의 몸은 허공에서 고정된 듯 뚝 멈추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과 똑같은, 지극히 안정된 자세로 공중에 떠 있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엽고운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니!" 그가 넋을 잃고 있는 사이, 화진성은 오른손을 가볍게 내밀었다. 그러자 어디서 날아왔는지 하나의 조그만 삼각깃발이 마치 끈이라도 달린 듯 화진성의 손에 잡혔다. 이윽고 화진성의 신형은 서서히 아래로 내려오더니 본래대로 의자에 앉았다. "아!" 엽고운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화진성이 그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아이야, 너는 이같은 무공을 배우고 싶지 않으냐?" "무공? 그 묘기가 말씀입니까?" 엽고운은 의혹과 기쁨이 뒤섞인 어조로 반문했다. 이어지는 그의 다음 말은 실로 순진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저같은 사람도 가능합니까?" '이 아이는 무(武)의 세계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구나.' 화진성은 내심 고소를 지으며 짐짓 은근한 투로 물었다. "왜, 자신이 없느냐?" 엽고운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일변했다. 그는 오기가 불끈 치밀었으나 평소의 침착함을 빌어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자격을 여쭈었을 뿐, 그것은 자신감과는 전혀 무관한 사항입니다." "그래?" 화진성은 자못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곧 일체의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응수했다. "그럼 왜 아직도 침상에 앉아 있느냐?" 엽고운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지체없이 침상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으려 했다. "사부님." 그러나 그는 무릎을 굽힐 수가 없었다. 기이한 무형의 기운이 뻗어와 그것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이 무슨......?" 엽고운은 의혹과 더불어 억지로라도 몸을 굽히려 했다. 그러자 화진성의 여유있는 음성이 그를 제지시켰다. "허허허... 아이야, 노부가 비록 예의를 따지는 사람은 아니지만 사도지례(師徒之禮)를 이렇게 해치우고 싶지는 않구나." 그제서야 엽고운은 몸을 바로 세웠다. "따라 오너라." 화진성은 말과 함께 다시 신형을 띄웠다. 이어 그의 몸은 허공에서 삼척이나 뜬 채 문을 밀고 나갔다. "아!" 엽고운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는 화진성을 두고 도무지 인간인지 신선인지 구분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석실 밖. 엽고운은 비로소 현재 자신이 있는 곳이 여러 채의 석옥이 지어진 석부(石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화진성은 여전히 삼척 허공에서 앞장서 가고 있었다. 엽고운은 걸음을 빨리 하여 열심히 그를 따라갔다. 다시 석부의 밖으로 나온 엽고운은 부지중 탄성을 터뜨렸다. "오오! 이것은......."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대해(大海)가 한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철썩! 쏴아아---! 파도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바다, 그것은 엽고운으로 하여금 실로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 이제까지 열사의 사막에서만 살아왔던 그가 아닌가? 따라서 생소하달지, 두렵다고 해야할지, 일종의 외경심과 아울러 뭐라 정의하기 힘든 복합적인 느낌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파도는 금시라도 육지로 범람할 것 같았다. 하지만 긴 모래사장은 마치 이를 포용하듯 햇살 아래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일면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나아가서는 인간에게 평화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한 장면이기도 했다. 화진성은 한 언덕의 경사 위를 오르고 있었다. "이런! 내가 잠시 한눈을 팔았구나." 엽고운은 정신이 번쩍 든 듯 그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얼마나 경사진 곳을 올라갔을까?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었을 때, 그는 한 산봉의 정상에 올라와 있었다. 엽고운은 호기심에 찬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섬이었구나!" 과연 그러 했다. 사방 어느 곳을 보아도 온통 망망대해로 둘러싸인 한 고도(孤島)에 그는 와 있는 것이었다. 섬은 그다지 크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작지도 않았다. 또한 그 반면은 날카로운 기암(奇岩)의 절벽이었으며 나머지 반면은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문득 그의 등 뒤에서 엄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이야, 이리로 오너라." 엽고운은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의 눈에 화진성이 하나의 커다란 암벽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우르르르릉--! 굉음과 함께 놀랍게도 암벽은 좌우로 쫙 갈라졌다. 동시에 그곳에는 시커먼 통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들어 오너라." 화진성이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엽고운은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를 따라 통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통로는 아래를 향해 계단식으로 되어 있었다. 꽤 공이 들여진듯 계단은 한결같이 반듯했다. 어디로 유통이 되는지 주변을 흐르는 공기도 의외로 신선한 편이었다. 너무 어둡다는 것이 유일한 흠이었으나 그것도 화진성이 품 속에서 한 개의 야명주(夜明珠)를 꺼내자 금세 해결되었다. 희미하나마 그 빛이 길을 밝히자 두 사람은 계속 앞으로 전진했다. 계단은 대략 십여 장을 내려가다가 끝났다. 이윽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하나의 넓은 광장이었다. 눅눅한 습기가 느껴졌으며 사방의 벽과 천장에는 천연의 석순들이 삐죽삐죽 자라고 있었다. 화진성은 연이어 한 쪽으로 갔는데 그곳에는 한 개의 석문(石門)이 있었다. 그가 손을 흔들자 석문은 가벼운 마찰음을 내며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 잘 손질된


석도(石道)였다. 좌우로는 여러 칸의 석실이 질서있게 자리잡고 있었으며 벽과 천장에는 군데군데 야명주들이 박혀 있었다. 두 사람은 통로를 한참 지나 커다란 문 앞에 이르렀다. <조사전(祖師殿).> 철문에는 용사비등의 필체로 그 같이 씌여져 있었다. 문의 손잡이는 한 마리의 금룡(金龍)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그 눈은 붉은 보석으로 대신했고 입이 크게 벌어진 형상이었다. 화진성의 음성이 엄숙해진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운아(雲兒), 이곳은 역대의 조사들을 모신 곳이니 몸과 마음을 다 함께 경건히 하거라." "네." 엽고운은 자세를 바로 하고는 철문을 향해 절을 했다. 이어 그는 한 옆으로 물러서며 한 가닥 의혹을 느꼈다. 화진성이 철문 앞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왜 서지 않으시는 것일까?' 그때까지도 그는 알지 못했다. 화진성의 두 다리가 무릎 아래로부터 잘려져 나가고 없다는 것을. 화진성의 묵직한 음성이 그의 상념을 끊었다. "남천신문(南天神門)의 제십육대 제자 화진성이 삼가 무례를 무릅쓰고 조사께 아룁니다." 엽고운은 절로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화진성이 곁에서 계속 말을 이었다. "제자는 이미 이곳에 들 자격을 상실했습니다. 제자의 어이없는 실책으로 인해 본문(本門)은 숙적인 북혈마궁(北血魔宮)에 의해 멸절되고 말았습니다." 화진성은 비감에 젖은 듯 전신을 가볍게 떨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곧 신색을 가다듬으며 결연하게 덧붙였다. "그러나 영명하신 조사의 정령(精靈)이시여! 제자 화진성, 이 남천신문의 죄인이 거룩한 조사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부디 용서하소서." 엽고운은 듣고 있자니 왠지 가슴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비록 구체적인 의미는 알 수 없으되 화진성의 어조에서 그는 사뭇 비장함을 느꼈던 것이다. 화진성은 품 속에서 삼각기를 꺼내더니 금룡조각의 벌린 입에다 꽂았다. 그러자 거대한 철문이 믿을 수 없게도 위로 들려 올라갔다. 스르르르릉--! 철문의 안쪽으로부터 곧장 환한 빛이 쏟아져 나와 두 사람의 시야를 밝혔다. 엽고운의 입에서는 절로 탄성이 일었다. "아!" 철문 안은 하나의 넓은 석실이었다. 그리고 그 전면에는 열다섯 구의 좌화(坐化)한 시신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노인이 있는가 하면 중년인도 있었고 서생(書生), 도사(道士) 등 신분도 각양각색이었다. 같은 점이 있다면 꼭 한 가지, 그것은 그들의 모습이 한결같이 비범하다는 사실이었다. 열다섯 구의 그들 시신 앞에는 거대한 청동향로가 놓여 있었다. 연기는 나지 않았으나 기향(奇香)을 담담히 뿜어내는. 엽고운은 먼저 제일 우측의 시신을 살폈다. 그 인물은 흑의(黑衣)를 입은 청수한 중년서생이었다. 의복과는 대조적으로 창백하리만큼 흰 피부를 지닌 자였는데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어려 있었다. 어디를 봐도 죽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의 앞에 놓인 위패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 있었다. <남천신문 제일대 조종(祖宗) 천원상인(天元上人) 석중헌(石中軒), 이백삼 세에 좌화(坐化).> 엽고운은 크게 놀랐다.


'맙소사! 이백삼 세라고? 인간이 그토록 오래 살았다는 것도 놀랍지만 저 분의 모습은 또 어떤가? 기껏해야 사십 정도인데.......' 화진성이 그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 "운아, 제일대 조종께 무릎을 꿇어라." 엽고운은 이의없이 그 말에 따랐다. 화진성이 뒤에서 머리를 숙이며 아뢰었다. "제자 화진성, 제일대 조종을 뵙습니다. 예언하신 바대로 본문은 세워진 지 천 년이 흐른 지금 완전히 몰락해버린 상태입니다. 모두가 이 미거한 제자의 탓입니다." 화진성의 음성은 몹시도 떨려 나왔다. 엽고운은 머리를 땅에 댄 채 그 말을 열심히 새겨 듣고 있었다. 아울러 그의 가슴 속에는 차츰 남천신문이라는 문파가 커다란 비중으로 스며들었다. 화진성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이 일을 단지 천운(天運)으로 돌리기에는 이 제자 너무도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남천신문을 회생시킬 수 있는 후인을 물색하던 중 마침내 한 인물을 만났습니다." 그는 마치 산 사람에게 고하듯 눈으로 엽고운을 가리켰다. "바로 이 소년입니다. 바라옵건대 조종께서는 부디 그에게도 천원무경(天元武經)을 익힐 수 있도록 선처해 주옵소서." 그는 말을 마치자 즉시 엽고운으로 하여금 천원상인 앞에 구배(九拜)를 올리도록 했다. 엽고운은 그가 시키는 대로 정중하게 아홉 번 절을 올렸다. 쿠르르르릉--! 굉음이 울리더니 그의 바로 앞 바닥이 아래로 푹 꺼졌다. "앗!" 엽고운이 놀라는 사이, 마찰음과 함께 바닥은 이내 원래대로 올라왔다. 그런데 그곳에는 놀랍게도 전에 없던 하나의 금갑(金匣)이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화진성은 감격과 더불어 그대로 바닥에 엎드렸다. "조사시여! 제자 화진성, 맹세하노니 이 아이로 하여금 남천신문의 맥을 잇게 하는 한편 반드시 본문의 위명을 찬연히 빛나게 하겠나이다." 그의 노안에서는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③ 이른바 신학수련(神學修練)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정녕 신의 무학을 익히는 것과도 같았다. 남령도(南靈島). 이것이 바로 중원의 남단에 위치한 이 섬의 이름이었다. 엽고운은 이 남령도에서 남천신군 화진성의 뒤를 이어 남천신문의 새로운 후계자가 되었다. 더구나 그 직후 곧장 신공수련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 이는 가히 기연에 버금가는 행운이었다. 하지만 화진성의 무공 전수 방법은 실로 혹독하기 그지 없었다. 덕분에 남해의 이 절해고도에서는 해가 뜨고 달이 뜨는 세월의 흐름조차 살같이 지나갔다. 엽고운. 그는 늘 새벽부터 일어나 밤이 깊어지도록 잠시도 쉬는 법이 없었다. 오로지 무공연마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대라주천자오심공(大羅周天子午心功). 이것은 남천신문의 독문 심법으로 일반적인 무학과는 다른 특성이 있었다. 매일 자시(子時)와 오시(午時)에 정확히 달과 해를 바라보며 일월(日月)의 정기를 흡수하는 것이었다. 즉 하루에 두번씩 연기좌공(練氣坐功)해야 했는데 그때마다 음양의 두 가닥 기운이 엽고운의 체내에 형성되었다. 물론 자시에는 음기가, 오시에는 양기가 키워졌다. 이 음양공생의 좌공법은 꾸준히 연공하면 여타의 심법에 비해 내력을 얻는 속도가 두 배나 빠르다는 강점이 있었다. 그야말로 천하제일기문(天下第一奇門)의 독보적인 심법이었다.


그 밖에도 엽고운은 화진성으로부터 수많은 무학들을 전수 받았다. 검법으로부터 장법, 권법, 지법, 각법, 그리고 경공술에 이르기까지 남천신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각종의 무학들이 총망라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과연 눈코 뜰 사이가 없다는 말은 이래서 생긴 것일까? 엽고운은 하루하루를 피땀나는 무공 연마로 일관하며 그 흔해빠진 속설을 절실하게 통감하고 있었다. 남천신문의 무공은 대체로 광범위하고 변화무쌍했다. 그러면서도 정심박오하다는 데에 그 가치가 더욱 빛난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압권인 것은 융통성이었다. 광명정대하되 결코 정(正)에 치우치지 않아 신속과 더불어 잔혹한 일면도 있었다. 말하자면 기습적이며 패도적이랄 수 있는 다방면의 무학들까지도 두루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남천신군 화진성. 그는 생의 희망을 전부 엽고운에게 걸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전수하기에 이르렀다. 덕분에 남천신문의 직전 무공 외에도 그가 백 년 이상을 강호에 머물며 보고 듣고 깨우친 천하 각파 무공의 장단점 등이 하나도 남김없이 엽고운의 머릿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화진성은 사파나 흑도에 속한 방문좌도(方門左道), 심지어는 하오문(下五門)에서 사용하는 각종의 독랄한 암수까지도 모조리 가르쳤다. 거기에다 진법을 위시하여 기관지학, 기문둔갑, 의술, 기타 잡학 등도 전수하니 엽고운을 무학의 종사로 키우기 위한 그의 의지는 실로 하늘도 감복할 만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화진성은 엽고운의 내공을 속성시키기 위해 남천신문의 최대기보인 금령대주천단(金靈大周天丹)을 내놓았다. 그것은 희대의 영단으로 한 알에 능히 십 년의 내공 증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골격을 정비하고 눈과 귀를 밝게 하며 기를 바꾸는 신묘한 효능도 있었다. 엽고운은 화진성의 명령에 따라 백 일에 한 번씩 금령대주천단을 복용해야 했는데 그것은 열 알이 전부였다. 꼭 일 년이 지났다. 어느덧 계절이 네 번이나 바뀐 것이다. 그 짧고도 긴 나날이 스쳐지나는 동안 무공의 무자도 모르던 엽고운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무공의 급진전을 이룩했다. 강호의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일류 고수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다시 두 달이 흐르자 불운을 딛고 일어선 이 기재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져 버렸다. 남천신군의 엄명이 떨어진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운아야, 이제 때가 되었다. 너는 지금부터 조종께서 남기신 천원무경을 익혀야 한다." 엽고운은 숙연한 표정을 지은 채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탁! 천원무경이 든 금갑이 그의 무릎 위에 떨어졌다. "이것은 천원상인께서 직접 창안하신 무학진경으로 남천신문의 진산지보다. 그러나 워낙 그 내용이 심오하여 익히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화입마할 위험도 있다." 화진성은 조용히 눈을 내리감으며 말을 이었다. "조종께서도 이 점을 무척 염려하셨지. 실제로 그 분 대에서 이 천원무경을 익히다가 불구가 된 분도 있었다. 요컨대 비장한 각오가 있기 전에는 익힐 수 없는 무공이다." "으음!" 엽고운의 눈이 일순 광채를 발산했다. 그는 금갑을 바라보며 되려 모종의 의지와 희망, 그리고 포부에 불타 올랐다. 화진성은 무겁게 말했다. "너는 이제부터 천원무경을 익혀라. 단, 너 혼자의 지력(智力)과 오성(悟性) 만으로 깨우쳐야 한다.


이는 남천신문의 대를 이을 자에 대한 조종의 유시다." "알겠습니다." 엽고운은 끓어오르는 심경을 억누르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행운을 빈다." 휙--! 화진성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석실 밖으로 사라졌다. 넓은 석실 안에는 엽고운만이 남게 되었다. 그가 무공을 수련해야 하는 곳이 바로 조사전이 있는 이 석동인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 날부터 엽고운은 남천신문 최대의 비공이 수록되 있는 천원무경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 첫 장을 열었다. 천원무극단공(天元無極丹功). 이는 천원상인이 평생을 연구하여 깨우쳐낸 것으로써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경지의 신공이었다. <기(氣)를 단전에 모아 내단을 형성시킨다. 즉 구결을 통해 동시에 상중하 삼단전의 내단정혈기(內丹情血氣)를 키운 다음, 중단전에서 원정내단(元精內丹)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절정에 이르도록 연마하면 금강불괴지신이 되며 수화가 불침한다. 또한 심력에 의해 무형의 내단을 체외로 유출시키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단지 뜻만으로 백장 밖의 적을 살상할 수도 있다.> "아!" 엽고운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새어나왔다. 이 기상천외한 천원무극단공의 위력에 그는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천하에 이러한 신공이 있었다니! 무릇 체내에서 내단을 키우는 것은 천지간의 정기를 흡수한 영물들에게나 있을 법한 일일진대 어찌 인간으로써 그 영역에 도전을 시도했으며, 또 완성을 볼 수 있었단 말인가?' 엽고운은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느끼며 다음 장을 들추었다. 천원무극생사절유검(天元無極生死有劍). 이렇듯 긴 이름은 엽고운을 몹시도 아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장을 넘기니 도합 십팔 초의 검식이 구결과 도해로 나뉘어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었다. "으음!" 엽고운은 먼저 검법의 이름 중 생사(生死)의 의미를 알게 되자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그 안에 활인(活人)과 필사(必死)라는 두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법은 일단 전십오식과 후삼식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 중 전십오식은 부드러운 기운을 그 근본으로 하고 있어 문자 그대로 활인제도검(活人濟度劍)이라 할 수 있었다. 사람을 해치기보다는 스스로 물러나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써 여하한 고수와 싸워도 절대 패하지 않음은 물론 장강대하와도 같은 압도적인 기운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 십오 초의 검식을 역으로 전개하면 판도가 전혀 달라진다. 매초가 모두 냉혹무비한 살수로써 이른바 탕마사인검(蕩魔死引劍)이 바로 그것이었다. 또한 이 검식에는 어떤 공격도 막아낼 수 있다는 강점이 있었다. 여타의 신공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기습적으로 날아드는 암기까지도 완벽한 방어가 가능했다. 그런가 하면 후삼식은 일명 천원삼절검(天元三絶劍)이라고 부르는데 각기 이런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어기강살(馭氣 煞), 천공제인(天空制引), 검무파천황(劍霧破天荒). 이 삼초는 바로 이기어검술(以氣馭劍術)의 삼 단계였다. 개중 어기강살은 전신의 기를 한 자루의 검에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단지 검을 던지는 가벼운 동작만으로도 무려 백장 밖에 떨어져 있는 적을 살상시킬 수가 있었다. 천공제인은 그보다 위인 신검합일의 단계였다. 몸과 검이 혼연일체가 되어 날아가면 틀림없이 적을


일도양단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검무파천황은 어검술 사상 최고의 기학이었다. 이것을 전개하면 몸과 검이 모두 한 가닥 안개로 화해 버린다. 즉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부유하며 상대를 격살하는 것으로써 가히 신화적인 경지의 검법이었다. 당년의 천원상인조차도 연마에 실패했을 정도로 가공할 절예였다. "오오!" 엽고운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오히려 회의가 일 지경이었다. 그 검법을 두고 인세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가 어려웠다. 천원무경의 다음 장에는 경공(輕功)이 실려 있었다. 이름하여 잔영비마술(殘影飛魔術)과 잠종무영보(潛踵無影步). 잔영비마술은 몸을 날릴 때 그 그림자가 채 신형을 따르지 못한다는 기쾌무비한 경공술이었다. 허공으로 백장을 날아오를 수 있으며 한 번 솟구칠 때마다 삼백장을 연기처럼 흐를 수 있는 것이었다. 잠종무영보는 도합 백팔방위로 몸을 분산시켜 상대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신묘무쌍한 보법이었다. 따라서 상대는 시전자의 종적을 육안으로 전혀 볼 수가 없었다. 천원무경이라는 이 절대적인 신학기보의 맨 뒷부분에는 또다른 세 가지, 즉 삼대기공(三大奇功)이 수록되어 있었다. 첫째, 무형심지인(無形心旨印). 이는 몸을 쓰지 않는다. 마음만으로 공력을 일으키게 되어 있으며 한 가닥 무형강기를 발산해 상대를 격살하는 것이었다. 물론 발출시 아무런 소리도, 형체도 없다. 심지어 공기의 미세한 파동조차 일체 일어나지 않으므로 상대는 죽는 순간까지도 거의 눈치조차 채지 못한다. 이 무형심지인은 고대의 무형무풍장(無形無風掌)이나 무형지(無形指)를 극에 이르도록 발전시킨 절예였다. 둘째, 제마어린참(制魔魚鱗斬). 이것은 정녕 괴이한 무공이었다. 열 손가락 끝에서 편린, 곧 강기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천하의 어떤 호신강기도 파괴시켜 버린다. 지법도 장법도 아니었으나 필살의 괴공이었다. 셋째 자전혈겁륜(紫電血劫輪). 이 구결에 따라 공력을 일으키면 주위 십여장의 기류가 무섭게 회전하며 흡력을 일으킨다. 대기 중의 물체들이 전부 말려들어 하나의 자색 륜(輪)을 이루는데 이 자전혈겁륜에 부딪치면 무엇이든 온전히 남아날 도리가 없었다. 다시 일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엽고운은 그간 불철주야 오로지 무공연마에만 혼신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천원무경 내의 무공을 약 삼성 가량 터득해낼 수가 있었다. 이는 실로 경악할만한 진보였다. 아울러 그것은 그가 이개성상(二個星霜)을 바쳐 하루같이 노력해 온 결과이기도 했다. 제 5 장·천붕(天鵬)을 얻다 ① 쏴아-- 쏴아아--! 검푸른 파도가 포말을 일으키며 절해고도인 남령도를 친다. 백사장. 군데군데 기암괴석이 솟아있고 흰 모래가 파도에 씻기우는 곳이다. 엽고운은 지금 한 날카로운 암석 위에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남천신군 화진성이 의자를 놓고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무릎 아래를 여전히 흰 천으로 덮은 채 줄곧 기이한 눈으로 엽고운을 응시하고 있었다.


엽고운은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 있었다. 가부좌를 튼 자세로 그는 천원무극단공을 연성하는 중이었다. 이를 지켜보는 화진성의 얼굴은 심각하기 그지 없었다. 잠시 후. 엽고운이 긴 숨을 토해내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화진성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 스승은 자질이 미천하여 천원무극단공을 연마하지 못했다. 때문에 천원무극생사절유검도 제대로 익힐 수가 없었다." 엽고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이러한 그의 신색은 몹시도 차분하고 정명한 것이었다. 예전에 비해 외양도 많이 변해 있었다. 옥골선풍(玉骨仙風)의 미청년, 이것이 바로 그의 모습이었다. 안색은 백옥같이 맑았으며 신비하도록 깊은 눈에는 정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르자면 천하의 그 어떤 여인도 한 번 보고 나면 절대로 잊을 수가 없을 듯한 풍모랄까? 특히 그의 전신에서 발산되는 은은한 매력은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기에 충분했다. 화진성의 음울한 음성이 계속하여 그의 귀에 꽂혔다. "노부는 천원삼절검 중에서도 제일초인 어기강살까지밖에 깨우치지 못했다. 허허... 욕구만 가지고는 안 되는 일도 세상에는 허다한 법이지." 일말의 자조가 깃들어 있던 그의 어투가 갑자기 전환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노부는 백 년 동안 적수를 찾지 못했다. 천원무극생사절유검 중에서도 천원삼절검의 위력은 그 정도로 막강했던 것이다." 화진성은 힘주어 말한 후, 강한 신념과 기대가 어우러진 얼굴로 엽고운을 응시했다. "너는 이미 어기강살을 거의 완벽하게 터득했다. 또한 천공제인도 사성 가량이나 연성해냈다." 그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을 이었다. "너의 내공이 일갑자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 정도 수위에 머무는 것이지, 만일 이갑자에 이른다면 천공제인도 능히 정복을 하게 될 것이다." 엽고운은 궁금한 빛을 띄운 채 사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태양이 정면으로 비추이자 그의 얼굴은 그야말로 새롭게 떠오르는 별처럼 신선한 매력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정녕 출중한 아이로고!' 화진성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으나 표면상으로는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음성은 더욱 엄숙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자만해서는 안 된다. 제삼 단계인 검무파천황은 과거 대조종조차도 터득하지 못한 희대의 절학이다. 그것은 내공 수위와는 별개로 특별한 깨우침을 얻지 않는 한 도저히 익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으음." 엽고운은 자신도 모르게 얕은 한숨을 흘렸다. "그 깨달음을 거치지 못하면 검무파천황은 영원히 익힐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성패는 오로지 네 노력과 인연에 달려 있다." 엽고운은 시선을 망망대해로 던졌다. 햇살에 부서지는 파도의 조각들이 따가운 빛으로 화해 그의 눈을 아프게 찔러왔다. 쏴아아아--! 파도소리 또한 귓전에 가득 차올랐다. 하지만 무념무상에라도 이른 듯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곁에 있는 화진성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반면에 화진성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환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노부가 지난 날 어기강살을 십 년에 걸쳐서야 간신히 터득한 것을 생각하면 네 무공진전은 정녕 놀라운 것이다." 엽고운은 가볍게 얼굴을 붉힐 뿐 역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반응에 화진성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테면 뜻이 상통하는 사부와 제자, 두 사람의 대화가 마침내 방향을 선회했다. "자, 그럼 그간에 익힌 무형심지인을 전개해 보아라." 그 말이 떨어지자 엽고운의 눈이 굳게 감겨졌다. 동시에 그의 안면은 긴장에 휩싸였다. 화진성 역시도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주시했다. 다음 순간, 엽고운의 백삼자락이 가볍게 펄럭였다. 그러자 그가 마주 대하고 있는 바위와 그가 앉아 있는 암석 사이의 모래알들이 무형의 압력을 받은 듯 위로 튕겨 올랐다. 스스슷--! 그와 약 삼장 가량 떨어져 있는 바위에서 돌가루가 마구 날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이어 돌가루가 가라앉자 바위에는 놀랍게도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천원(天元).> 눈으로 보면서도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엽고운은 분명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바위에 이렇듯 글씨가 뚜렷하게 새겨진 것이었다. 비록 획이 비뚤어지고 깊이가 얕기는 했지만 이는 절대 아무나 이룩할 수 있는 성취가 아니었다. 이 광경에 화진성은 내심 경악과 더불어 희열을 주체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으음! 무형심지인을 익힌 지 고작 일 년밖에 되지 않거늘 벌써 오성이나 터득해 내다니....... 내공만 밑받침이 된다면 혹시 당년의 대종사가 이룩하셨던 경지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오히려 책망에 가까왔다. "운아, 무형심지인의 극치는 일체 동요 없이 정확하게 목표물만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런데 너는 유감스럽게도 공력을 펼칠 때 옷자락이 펄럭였다." "부끄럽습니다. 사부님." 엽고운은 민망한 듯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런 그를 향해 화진성은 못을 박듯 끝까지 일침을 놓았다. "쯧! 쓸데없이 대기 중에 압력을 생성시켜 모래를 튕겨 냈으니 이는 아직도 화후가 부족한 탓이 아니더냐? 너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더욱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엽고운은 목덜미까지 붉어진 채 얼굴을 들지 못했다. 어찌 그가 상상인들 할 수 있으랴? 실상 그의 무공수준은 중원에 나가면 이미 정상급의 고수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는 사이, 화진성의 두번째 명령이 떨어졌다. "제마어린참을 전개해 보아라." 쉭--! 엽고운은 양 손을 기쾌무비하게 앞으로 뻗었다. 그 순간, 그의 손 끝에서 이번에는 무수한 유형의 강기가 발출되었다. 비늘의 형상을 한 수백 개의 탄공(彈功)이 무서운 속도로 뻗어나갔다. 파파파팍--! 그것은 오장 밖에 있는 거대한 바위를 노린 것이었다. 꽈르르릉--! 바위는 대번에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돌가루가 휘날려 주위를 자욱하게 뒤덮고 있었다. 그 경이로운 장면들은 화진성의 안색을 급변하게 만들었다. '지독한 놈! 설마 하니 저 정도에 이르렀을 줄이야.......' 엽고운의 성취는 그의 상상을 수십 배 상회하는 것이었다. "계속하여 자전혈겁륜을 전개하라." 화진성은 흥분을 억누르기 위해 짐짓 호통을 쳤다. "차앗!"


엽고운은 기합성을 발하며 양 손을 합쳤다. 그러자 그의 양 손을 기점으로 그의 주위에는 은은한 자줏빛 노을이 서렸다. 우우웅--! 무시무시한 소용돌이가 굉음을 울리더니 무려 사오장 내의 대기를 모조리 빨아 들였다. 그 엄청난 흡력에 의해 모래는 물론 자갈이나 바위조각 등이 전부 휘말리고 있었다. "차핫--!" 엽고운은 쌍수를 좌우로 뻗었다. 위잉--! 쐐애액--! 마침내 두 개의 자색 륜(輪)이 그의 좌우로 날았다. 그것은 압축된 대기가 형성해낸 가공할 위력의 륜이었다. 쾅! 꽈르릉--! 자륜이 부딪치자 십장 높이의 거대한 암석이 폭음을 일으키며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이렇듯 연속되는 놀라움으로 인해 화진성은 내심 찬탄을 금치 못했다. '아아! 무형심지인, 제마어린참, 그리고 자전혈겁륜....... 과연 조종이신 천원상인의 능력은 신과도 같도다.' 그는 이어 그 세 가지 기공을 전개하고도 전혀 흔들림 없이 암석 위에 앉아 있는 엽고운을 바라 보았다. '그런데 이 아이가 조종의 무학을 그대로 이어받다니! 내가 정녕 복이 있어 말년에 불세의 기인을 내 손으로 거두게 되었구나. 나아가서 이는 본문의 크나큰 영광이로다.' 화진성은 기대에 대한 충족감으로 인해 가슴에서 일어나는 진동을 제어할 길이 없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숙원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다지며 감격해마지 않았다. 화진성의 숙원이란 바로 북혈마궁(北血魔宮)의 붕괴였다. 따라서 그는 이제 긴 얘기를 자신의 애제자에게 들려주어야 했다. 화진성은 우선 담담하게 서두를 꺼냈다. "이리 오너라." "네, 사부님." 엽고운은 앉은 채로 낙엽처럼 떠 화진성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울러 바닥이 모래땅이었으나 그는 단 한 알도 흩어지지 않는 기고한 경공조예를 보이고 있었다. 화진성은 이를 뻔히 알면서도 못본 척 말을 이어갔다. "수고했다. 흡족한 수준은 아니나 이 년여에 걸쳐 그 정도에 이르렀으니 그 열성만은 가상하구나." 엽고운의 고개가 다시 꺾였다. 이를 의식하며 화진성은 더욱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네게 해줄 얘기가 있다. 귀기울여 듣기 바란다." "제자, 경청하겠습니다." "음, 그러니까 벌써 천 년도 더 지난 일이다." 그는 허공을 응시하며 길게 탄식을 불어냈다. "그 당시 무림에는 엄청난 위기가 닥쳤다. 그것은 중원의 북쪽 끝에서 여덟 명의 가공할 마왕들이 출현하면서부터 시작된 혈겁(血劫)이었다." ② 이른바 혈우성풍(血雨猩風). 피의 수레바퀴가 전 중원을 짓밟고 지나갔다. 혼세팔마(混世八魔). 그들은 여덟 명의 대마두들로써 개개인의 무공만 해도 천하에서 당할 자가 없었다. 심지어 십대문파(十大門派)의 지존들조차도 일대 일의 대결에서 단 십초도 받아내지 못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들 팔마가 모두 뜻을 같이 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무림은 와해


직전의 위기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전무림인을 통틀어 편히 발을 뻗고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어제까지 멀쩡하게 살아 숨쉬던 자가 하룻밤 사이에 핏덩이로 화하는 일이란 비일비재였다. 이처럼 중원 각처가 동시에 혈풍에 잠긴 이후로는 누구도 내일이라는 말을 쓰지 못했다. 그것은 모두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하루살이 운명들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혼세팔마의 혈겁은 극에 이르렀다. 그들이 가진 중원정복의 야심은 엄청난 살상으로 인해 무림인의 혈해 위에 세워지고 있었다. 이천 년 역사의 무림이 바야흐로 그 종말을 예견하고 있을 때, 마치 구세주와도 같은 한 인물이 나타났다. 천원상인(天元上人). 중천의 태양이 어둠을 몰아내는 신령한 힘을 발휘하듯 그는 그렇게 도탄에 빠진 무림에 현신했다. 외견상으로는 단지 중년서생으로 보일 뿐인 그 기인의 무공은 정녕 불세출의 것이었다. 이 자칭 천원상인이라는 인물은 먼저 혼세팔마의 첫째와 결투를 벌였다. 그리고는 약 삼백여초만에 대마를 제압하고 말았으니 이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대 쾌거였다. 나머지 칠마가 복수를 위해 차례로 그에게 덤벼 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불문가지였다. 그의 장하(掌下)에서 백초 또는 불과 수십초만에 모조리 패배하고 만 것이었다. 물론 사도의 마두들인 혼세팔마, 그들이 이 한 번의 패배로 얌전히 승복할 리가 없었다. 급기야 그들은 천산(天山)으로 천원상인을 유인해 일제히 합공을 개시했다. 그것은 실로 하늘이 놀라고 땅도 흔들리는 공전절후의 대결전이었다. 또한 그 이후의 상황은 미리 예시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찌 육신을 가진 한 인간이 사마(邪魔)의 정기를 타고난 혼세팔마를 한 날 한 시에 전부 당해낼 수가 있겠는가? 마침내 천원상인은 이 싸움으로 인해 중상을 입은 채 무림을 떠나야만 했다. 단지 가슴 속에 제마멸사(制魔滅邪)의 굳은 뜻을 새기고는 그 길로 천축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황교(黃敎). 이는 천축의 이대이교(二大異敎) 중 하나였다. 홍교(紅敎)와 더불어 험악하고 무서운 이교도들의 집단이었다. 천원상인은 단신으로 그곳을 찾아갔다. 황교의 대법사(大法師)인 포융찰(布戎刹). 그는 천축제일의 고수였다. 그가 지닌 일신의 무공은 이른바 마공이학(魔功異學)들로 중원의 무학과는 매우 상반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포융찰은 늘상 중원무학과 고하(高下)를 가리려는 욕망을 품고 있었다. 그 이면에는 혼세팔마와 마찬가지로 중원제패라는 야심이 숨어있기도 했다. 당시 포융찰의 나이는 백이십 세였다. 그와 천원상인 사이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각기 중원과 천축의 제일기인인 그들이 그로부터 얼마 후에 함께 중원으로 건너왔다는 사실이었다. 음산(陰山)의 대황봉(大荒峯). 또 한 차례의 대격돌이 있었다. 혼세팔마의 합공과 천원상인, 포융찰의 공동대적은 장장 칠주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무림 개사 이래 가장 치열한 격전이었다. 붕우리의 형태가 바뀌었는가 하면 지세까지도 변해버릴 정도였으니 오죽 하겠는가? 마침내 중원을 피로 물들이던 혼세팔마는 꺾이고 말았다. 모두 극심한 중상을 입은 채 중원을 벗어나 도주해버린 것이었다. 그 후로 혼세팔마는 다시 무림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포융찰이 이번에는 천하제일고수의 자리를 놓고 천원상인에게 도전했다. 아울러 그는 하나의 조건을 제시했다. 즉 이기는 자가 중원과 천축을 모두 관장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천원상인은 이를 받아들여 다시 결전을 치루었다. 물론 그의 뜻은 지배에 있지 않았다. 포융찰을 조용히 천축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만이 그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결국 수호의 강인한 의지는 음험한 탐심을 무너뜨렸다. 천여초만에 천원상인이 포융찰을 꺾고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포융찰은 대패하여 중상을 입는 수치를 당해야 했다. 그는 천축으로 가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대는 진정한 천하제일의 기인이오. 그러나 그대의 후예들까지도 그대와 같으리라고는 믿지 않소. 언젠가는 내 후계자가 그대의 일문을 끊어 놓을지도 모르오. 아니, 반드시 그런 날이 오게 될 것이오." 천원상인이 남천신문(南天神門)을 세운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단단히 당부했다. "황교를 항상 경계하라. 그들은 혼세팔마 이상의 혈풍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고심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천축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으니, 포융찰이 수명을 다해 이승을 하직한 후로 황교와 쌍벽을 이루던 홍교가 그들을 친 것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황교는 완전히 멸망해 버렸고 중원과 천축 간의 보이지 않는 접전은 그 상황에서 일단락을 맺게 되었다. 화진성은 여기까지 얘기를 한 다음 탄식을 발했다. "문제는 당금 무림이다. 그때로부터 천 년이 흐른 지금, 때아닌 엄청난 마의 기운이 창궐하고 있다." 엽고운은 사뭇 긴장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화진성이 어두운 안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당시 혼세팔마는 깨끗이 소탕되었다. 첫째인 등천비마(騰天飛魔)와 둘째인 북빙요희(北氷妖嬉)를 제외하고는 음산의 대격전에서 모두 죽음을 당했었다. 살아남은 두 마두 역시 무공을 폐쇄 당한 채 강호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안면이 기이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느냐? 그 두 마두의 후손이 작금에 이르러 조상들의 악업을 잇고 있는 것이다." "아!" 엽고운은 크게 놀랐다. "팔십 년 전 북해(北海)에 거대한 궁이 생겼다. 일명 북혈마궁(北血魔宮)이 바로 그것이지. 그리고 그 궁의 청년궁주가 다름 아닌 혼세팔마의 후예이다. 그가 어느날 문득 과거의 빚을 청산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그는 북혈마황 탁무군(卓武君)이라는 자로써 정식으로 본문에 도전장을 낸 바 있다." "으음......." 엽고운은 궁금증이 치밀어 올랐으나 더 묻기를 포기해야 했다. 그것은 화진성의 얼굴에 깔린 짙은 수심을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화진성은 자괴감에 젖어 이렇게 말했다. "팔십 년 전 노부는 이곳에 단신으로 찾아온 그와 겨루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노부는 약 삼천여초만에 반초 차이로 그에게 패하고 말았다." "사부님......." "그 후로 약 삼십 년이 흐른 뒤, 그러니까 오십 년 전이구나. 노부는 설욕을 위해 본문의 제자들과 함께 북해로 찾아가 다시 겨루었다. 그러나 그때는 불과 천초만에 패했다." "아! 그런 일이......." "노부까지도 죽을 고비에 처했으나 그나마 본문의 호법인 남천구로(南天九老)의 지략으로 간신히 탈출했다." 화진성은 급기야 장탄식을 발했다. "그 자의 무공은 그 후로도 엄청난 속도로 발전했다." 엽고운은 눈을 빛내며 그를 주시했다. "이십 년 전에도 노부는 그와 겨루었다. 그때는 일대 일의 대결이었지. 그런데... 노부는 채 백초도 견디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화진성은 허탈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노부도 더 이상은 수치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뒤늦게 나마 각고하여 다시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백세가 넘고 보니 노부의 무학은 발전을 볼 수가 없었다." "으음......." "이 년 전 노부가 북혈마궁으로 또 찾아간 것은 어쩌면 오기였을 것이다. 남천구로가 극구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전 제자를 동원하여 북혈마궁을 쳤었다." 화진성의 얼굴은 심한 자책으로 얼룩이 졌다. "본문은 그로 인해 결국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노부는 그 자에게 오십초만에 패했으며 두 다리마저 잃게 되었다. 남천구로 또한 생사도 알 수 없는 가운데 흩어졌고 그 밖의 본문제자들은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뼈아픈 대참패였지." 그의 노안에는 어느덧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그때 천붕(天鵬)이 나타나 구해내지 않았다면 노부는 아예 그곳에서 뼈를 묻고 말았을 것이다." 듣고 있던 엽고운도 못내 탄식을 금치 못했다. 화진성은 기어코 눈물을 쏟아내며 통탄해마지 않았다. "모두가 노부의 잘못이었다. 노부의 죄는 그 어떤 대가로도 씻을 길이 없게 되었다." "사부님......." 그런데 이때였다. 크르르-- 크악! 불현듯 귀청을 때리는 괴조(怪鳥)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도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 보았다. 쾅! 콰르르릉--! 한 산봉 위였다. 거대한 바위가 산산조각이 되어 부서져 내리는 광경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예의 천붕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날개를 편 길이가 무려 십 장에 달하는 그 전설의 괴조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오오!" 엽고운이 탄성을 발하는 사이, 화진성은 격동하여 부르짖었다. "천붕! 천붕이......." 휘이이잉--! 천붕은 허공에서 맹렬한 폭풍을 일으키며 빙글빙글 맴돌았다.그야말로 하늘이 어두컴컴하게 가려질 정도로 엄청난 크기였다. 우웅! 우르르릉--!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그러더니 천붕은 서서히 북쪽으로 사라져 갔다. 그 광경을 보며 화진성이 더없이 공허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가는구나! 천붕......." 천붕은 허공에서 순식간에 까만 점으로 화해버렸다. 하지만 화진성은 천붕이 사라진 후에도 그 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아! 천붕이여, 너는 이제 영원히 나타나지 않겠구나." 안타까움이 깃든 그의 말에 엽고운은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기색을 눈치챈 화진성이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벌써 백 년도 지난 일이다. 노부는 이 섬에서 무공을 연마한 뒤 곧바로 강호에 출도했었다. 그때에 우연히 천중산(天中山) 의 한 산곡에서 천붕을 만났다." "그러셨군요." "천붕은 당시 만년독각룡(萬年獨角龍)과 처절한 혈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매우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전설인 양 신비스러운 일화였다. 엽고운은 흥미를 느껴 얘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노부는 천붕과 합세하여 독각룡을 물리쳤다. 그리고 천붕은 나를 한참 본 뒤 북쪽으로 날아갔었지. 인연이라고는 단지 그것 뿐, 이후로 백 년이 지나는 동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화진성의 안면에 서서히 격동이 차올랐다. "그래서 영물인지, 백 년이 지나도록 그 일을 잊지 않고 있다가 북혈마궁에서 사경에 이른 노부를 구해 주더구나. 말하자면 은혜를 갚은 것이지." "으음!" 엽고운은 눈을 돌려 천붕이 날아간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형언할 수 없는 기이한 느낌이 그의 내부에서 솟아올랐다. 그것은 천붕이라는 영조에게 향해진 무한한 동경이었다. 물론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훗날 그 잠깐의 인연이 생각지도 않게 다시 이어진다는 사실을....... ③ 다시 반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엽고운의 무공은 그야말로 일취월장(日就月將), 이전보다 더욱 눈부신 진전을 보게 되었다. 엽고운은 어느덧 금령대극천단을 여덟 개나 복용했다. 덕분에 그의 내공은 근 백 년 수위에 이르러 있었다. 그 반면에 남천신군 화진성은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이도 역시 북혈마황 탁무군과의 대결이 빚은 비극 중 하나였다. 그때에 입은 중상의 후유증은 심각했다. 그리하여 화진성은 근자에 들어 하루 중 대부분을 침상에 누워 있어야 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시들어가는 고목과도 같았다. 엽고운이었다. 휘익--! 하지만 그의 실체는 보이지 않았다. 단지 백영(白影)만이 한 가닥 광선으로 화하여 남령도를 돌고 있을 따름이었다. 절정의 경공술인 잔영비마술(殘影飛魔術)을 연마하는 중이었다. 그의 수준은 현재 약 구성(九成)에 이르고 있었다. 따라서 움직이고는 있으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엽고운은 이렇듯 매일같이 섬 주위를 수백 바퀴씩 돌며 경공을 연마해왔다. 지금만도 이백여 번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거리로 따지자면 대략 천 리에 해당되었다. 휘-- 휙--! 엽고운의 신형은 바람소리를 내며 허공 중에 연신 백선을 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한 곳으로부터 은은한 진동음을 느꼈다. "흐음?" 그는 마침내 달리다 말고 뚝 멈추어섰다. 미약하기는 했지만 지반이 흔들리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스팟--! 발을 구른다 싶은 순간, 어느새 그는 백장 밖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다시 몇 차례 신형을 이동하여 그는 하나의 커다란 암반 위에 올라서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곳은.......' 엽고운은 언뜻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반 년 전 천붕이 날아갔던 자리가 아닌가?' 그의 시선은 그 당시에 천붕이 무너뜨려 놓은 암반의 한 귀퉁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또한 그를 놀라게 한 지반의 진동은 바로 그곳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우르르릉--! 그가 보고 있는 가운데 바위 하나가 굴러 떨어져 나갔다. 아울러 그곳에는 기이하게도 한 개의 구멍이 뚫리게 되었다. '그럼 이 암반의 내부에 공간이 있었단 말인가?'


엽고운은 잔뜩 호기심이 일었다. 하지만 구멍은 무척 좁았고 아래로 깊이 뚫려 있어 그 속까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들어가 봐야겠군!' 엽고운은 곧 신형을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들어가기가 꽤 불편했던데 반해 통로는 금세 넓어지고 있었다. 수직으로 뚫린 그 통로를 그는 안정된 자세로 날아 내려갔다. 십장, 이십장, 그리고 오십장....... 그의 낙하가 마침내 백장쯤에 이르렀을 때였다. 쿵! 엽고운은 발이 바닥에 닿는 것을 느꼈다. "오오!" 그의 입에서 부지중 경탄성이 터져 나왔다. 바닥의 중앙에 놓여 있는 둥그런 백석(白石)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 돌은 타원형이었으며 전체가 유백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 크기로써 길이가 일장, 높이는 약 팔 척에 달했다. 더구나 그것이 뿜어내는 광채로 인해 현재 위치가 지하의 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사위는 무척 밝았다. 엽고운은 지대한 관심을 가지며 곁으로 다가가 백석을 만져 보았다. 그러자 돌로부터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 그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정녕 괴이한 돌이구나. 대체 이것이 무엇일까?' 엽고운은 결국 호기심에 떠밀려 백석의 주위를 돌며 계속 살펴 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으음?' 그는 문득 코 끝에 스쳐오는 기향(氣香)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한 쪽의 바위 위였다. 그곳에서 괴형상을 지닌 한 그루의 나무가 그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 나무는 높이가 한 자밖에 되지 않았다. 가지는 검은 색, 잎은 백색이었으며 가지 끝에는 두 개의 열매가 달려 있었다. 둥근 모양의 그 열매 역시 희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같은 나무에서 열렸으면서도 하나는 피처럼 붉고, 하나는 푸른 색이었다. 기이한 향기는 바로 그 열매에서 풍겨나온 것이었다. 엽고운은 마치 이끌리듯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이것은 무슨 과일이길래 땅 속에서 열리는 것일까?' 그는 무심코 손을 뻗어 개중 붉은 색의 열매를 땄다. "웃!" 엽고운은 순간적으로 움찔 했다. 색깔을 상징으로 내세우기라도 한 듯 그 열매는 후끈한 열기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집어던질까 했으나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다. 모종의 신비감은 오히려 엽고운으로 하여금 열매를 먹게 만들었다. 아울러 그것은 입 안에서 스르르 녹더니 즉시 목구멍을 타고 그의 내부로 흘러 들어갔다. "크으윽!" 엽고운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는 목과 가슴, 그리고 배를 감싸쥐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붉은 열매는 엽고운의 뱃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엄청난 열기를 발산했으며 곧장 그의 전신을 불길처럼 휘돌기 시작했다. "으으으......." 실로 창졸지간의 일이었다. 엽고운은 흡사 화염지옥에 떨어진 것 같은 고통에 휩싸여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피부가 타서 벗겨지는 것인지, 혹은 오장육부가 녹는 것인지, 그는 참을 수 없는 뜨거운 기운으로 인해


진저리를 친 후 급기야 혼절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순간, 정녕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투둑! 툭......! 엽고운의 전신 뼈마디에서 묘한 음향이 울렸다. 근육의 팽창과 더불어 그의 근골이 거짓말처럼 불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피부가 거북이의 등처럼 쩍쩍 갈라지더니 허물을 벗듯 흉칠한 껍질이 벗겨져 나가고 있었다. 이어 새롭게 드러나는 것은 백옥빛의 투명한 살갗이었다. 천고의 기연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리라. 엽고운이 복용한 것은 전설상으로나 존재하는 음양천선신과(陰陽天仙神果)라는 것으로써 그 중 양과에 해당되었다. 이를 복용하면 이른바 환골탈태(換骨奪胎)은 물론 체내의 양화진력이 절로 생성되어 순양열화신강(純陽熱火神 )과 같은 극양기공도 쉽게 연성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공력의 급증으로 생사현관(生死玄關)이 타동되어 무공이 입신의 경지에 이른다. 이같은 행운을 얻게 된 엽고운은 급격히 성숙해져서 그 모습이 이십여 세 정도로 보였고 몸도 커졌다. 따라서 그가 입고 있던 옷은 저절로 찢겨져 나갔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음과까지 복용을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만일 양과와 음과를 함께 취할 수 있었다면 능히 그는 금강불사지체(金剛不死之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보다 더 큰 행운과의 조우였는지도 모른다. 음과를 미처 복용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생각지도 않았던 신묘한 것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우르릉....... 쩍! 뿌지직--! 타원형의 백석은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부서져 내리고 말았다. 좌우로 흔들리며 멀리까지 지반을 진동시킨 것은 하나의 탄생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던 것이다. 과연 백석 속에서는 한 마리의 괴이한 새가 나왔다. 놀랍게도 그것은 불사(不死)의 영조라는 천붕의 새끼였다. 눈부신 백색 깃털, 쇠갈쿠리같이 단단해 보이는 긴 부리, 타는 듯 붉은 눈동자, 그리고 쇠기둥을 연상시키는 발목과 억센 발톱 등 천붕이 가졌던 특징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그 몸체는 대략 일장 정도 되어 보였다. 아직 어미에는 못미치나 일반의 조류에 비하면 엄청난 크기였다. 아무튼 백석은 어미 천붕이 남기고 간 알이었던 것이다. 새끼천붕은 밖으로 튀어 나오더니 미숙한 걸음으로 본능인 양음양천선신과를 향해 다가갔다. 꾸르르....... 괴이한 울음을 내며 그 영조는 음양천선신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열매가 하나밖에 없는 것이 무척 아연한 모양이었다. 새끼천붕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곧 푸른 색 열매를 집어 삼켰다. 흡사 내정된 운명에 다가가듯. 하지만 그에 수반되는 고통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크아악--! 천붕은 생애 최초로 날개를 펼치며 울었다. ④ 엽고운. 그는 무엇인가 자신의 얼굴을 건드리는 것을 느끼며 혼몽 속에서 깨어났다. "웃!" 눈을 뜨자마자 그는 깜짝 놀랐다. 거대한 괴조가 부리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 생경한 기분은 그로 하여금 벌떡 일어나 뒤로 물러나게 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몸이 뒤로 오장이나 날아갔다는 사실을. 그가 전혀 힘을 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같은 기현상이 발생한 것이었다.


크르륵! 크으......! 괴조, 즉 천붕이 낮게 울며 다시 그에게 다가왔다. 분명한 것은 그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이 적의(敵意)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쯤 되자 엽고운도 태도를 달리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가운데서도 절로 경계심이 풀렸다. 이어 그는 부서져버린 백석의 껍질을 볼 수가 있었다. '아! 저건 저 새를 탄생시킨 알이었구나.' 음양천선신과의 푸른 열매가 마저 없어진 것도 곧 그의 눈에 발견되었다. '이 새가 먹은 것일까?' 사실 천붕은 음양천선신과를 모두 섭취해야 했다. 그래야만 완전한 영조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양과를 엽고운에게 미리 빼앗겨버린(?) 것이었다. 반면에 그러한 손해로 인해 천붕은 엽고운에 대해 오히려 친밀감을 갖게 되었다. 음과 양, 즉 극과 극은 상통한다는 오묘한 논리까지도 음양천선신과에 깃들어 있던 것일까? 어쨌든 각기 음과와 양과를 나누어 먹은 일인일수(一人一獸)는 소위 영성(靈性)이 통하게 되었다. 엽고운 역시도 그 사이에 벌써 급격히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그는 천붕의 긴 부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천붕, 아니 붕아(鵬兒), 너도 내가 싫지 않으냐?" 끄륵....... 새끼천붕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울었다. 그 모습에 엽고운은 크게 기뻐했다. "너는 내 말을 알아 듣는 모양이구나?" 크르륵! 끄윽--! "하하하... 이럴 수가! 내가 정녕 귀한 친구를 얻었군." 크악--! 엽고운은 천붕의 커다란 몸체를 와락 껴안았다. 이렇게 되어 엽고운과 천붕의 새로운 인연은 시작되었다. 그것은 실로 하늘의 안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잠시 후. 엽고운은 마음이 가라앉자 이곳에서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곧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수직의 통로가 눈에 들어오자 엽고운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태어난 지 반 시진도 채 되지 않는 새끼천붕과 그 통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붕아 너, 날 수 있는 것이냐?" 크륵....... 천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도 확실하게 자신이 서지 않는 것 같았다. 이에 엽고운은 그만 난감해지고 말았다. '역시 무리겠지. 더구나 이 통로는 입구가 너무 좁아 붕아가 설사 날아오른다 해도 빠져나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한 동안 고심하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그렇지! 천붕의 어미가 이곳에서 알을 낳은 것을 보면 틀림없이 출구가 따로 있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엽고운은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 이곳이다." 과연 그가 기대했던 출구가 있었다. 다만 바위로 막혀 있어 보이지 않았을 뿐, 그 틈으로 맑은 공기가 스며 들어왔던 것이다. 엽고운은 그 바위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제마어린참(制魔魚鱗斬)의 기공이었다. 그러자 그의 손끝에서는 무수한 편린의 강기가 폭출되었다.


파파팟--! 쾅! 꽈르릉--! 놀랍게도 바위는 작열하는 불꽃의 파편과 함께 삽시간에 돌무더기로 화해 사방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그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이제 커다랗게 뻥 뚫려 있는 구멍이었다. "아!" 엽고운은 자신의 무위에 스스로도 넋을 잃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능력은 수배나 진보해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비로소 그는 자신의 신체를 내려다 보았다. "이럴 수가!" 엽고운은 또 한 번 경악에 이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의복이 뜯겨져 나간 것은 그렇다치고 신체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는 그 자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것이 나인가?' 엽고운은 회의에 찬 눈으로 놀랍도록 팽창해버린 근골과 백옥같이 다져진 피부를 응시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전신에서는 알수 없는 힘이 솟구쳤고 눈과 귀도 한층 밝아진 느낌이었다. 엽고운은 이런 발견에 잠시 멍했으나 곧 정신을 차렸다. "붕아야, 나가자." 그의 독려에 힘입어 천붕은 후다닥 구멍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구멍 밖은 뜻밖에도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였다. 그 가 서 있는 곳은 바로 남령도 후면의 벼랑이었던 것이다. "붕아--!" 엽고운이 놀라 외치는 그 찰나였다. 푸드득! 휘이익--! 천붕은 추락과 더불어 몇 번인가 서툴게 날개를 젓더니 곧이어 힘차게 상승했다. 그 광경에 엽고운은 탄성을 발했다. "과연 천붕이구나!" 스스스....... 그의 모습이 없어진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그는 눈깜짝할 사이에 바다 위 백장여를 날아 섬의 전면에 사뿐히 내려섰다. 휘잉--! 천붕이 그 곁에 날아내리며 날개를 가지런히 접고 있었다. 엽고운은 천붕의 깃털을 쓰다듬으며 사뭇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붕아, 사부님께로 가자. 너를 보면 그 분도 아마 크게 기뻐하실 것이다." 천붕도 동감이라는 듯 경쾌하게 울었다. 크륵! 남천석부(南天石府). 그곳은 과거 남천신문의 문도들이 기거하던 장소였다. 그러나 지금은 단지 화진성과 엽고운만이 지키고 있는 썰렁한 곳이었다. 엽고운은 석부에 당도하자마자 화진성의 거처를 찾았다. "사부님!"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으음?" 엽고운의 눈썹이 홱 치켜 올라갔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침상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사부님......?" 엽고운을 놀라게 한 것은 방 안이 비어있다는 그 자체가 아니라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었다. 저으기 당황하는 그의 눈에 탁자 위에 놓인 한 장의 쪽지가 들어왔다. 엽고운은 급히 쪽지를 집어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화진성의 친필이었다.


<운아, 네가 이것을 보는 순간 노부는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너와 지낸 이 년 반의 시간은 노부 평생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노부는 남천신문의 죄인이다. 바로 본문을 몰락하게 한 장본인이 아니더냐? 너를 거둔 것도 실은 이때문이었다. 노부는 네가 북혈마궁을 물리치고 남천신문을 재건해 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바로 이 못난 사부의 죄업을 씻는 길이다. 이 당부를 끝으로 노부는 조사전으로 들겠다. 훗날 네가 오늘의 나처럼 수명을 다해 조 사전으로 오게 되면 그때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비로소 영겁의 시간을 함께 할 수 있겠지. 운아, 내 사랑하는 제자여! 무운을 빈다. 사부 남천신군 절필(絶筆).> "사부님......." 비감에 젖은 엽고운의 음성이 낮게 울려 퍼졌다. 그는 쪽지를 움켜쥔 채 털썩 무릎을 꿇었다. 꾸륵! 꾸르륵....... 천붕이 엽고운의 심정을 알기라도 하는 듯 그의 어깨에 부리를 비벼왔다. 결국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게 되는 것인가? 남천신군 화진성. 겁난의 세월을 살아온 그는 그렇게 엽고운의 곁에서 사라졌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무한의 시공을 향해....... 제 6 장·뜻밖의 개입(介入) ① 고통으로 점철된 나날들이었다. 화진성이 죽은 뒤로 또 반 년, 그 시간들은 엽고운에게 있어 처절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고독이라는 자신과의 싸움....... 따라서 엽고운은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오직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무공수련이 바로 그것이었다. 엽고운은 그저 눈만 뜨면 미친 듯이 무공을 연마했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움직일 때마다 바위가 깨졌고 대기가 진동했다. 남령도를 한꺼번에 오백 번이나 날기도 했다. 그것도 어느날 아침 불과 한 시진 동안에. 덕분에 그의 무공 경지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증진되었다. 특히 경공은 이제 완벽의 경지에 이르러 그가 잔영비마술을 펼치면 신형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가을. 서늘한 날씨였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사시사철기후가 따뜻한 남해였으나 가을만은 이렇듯 접할 수가 있었다. 엽고운은 끝없는 창천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번 겨울까지 무공수련을 계속한 후, 봄이 되면 이곳을 떠나야겠다.' 석부에 마련된 양식이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다. 원래 반 년마다 한번씩 육지로 나가 의복 등 일용품과 함께 구해오곤 했었는데 그 시기가 도래한 것이었다. 엽고운은 내심 염두를 굴렸다. '붕아는 아직 멀리 날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붕아를 타고 가면 사람들이 크게 놀라게 될 것이다.' 남천신군 화진성이 떠나 버리자 그간에 엽고운은 새끼 천붕을 벗삼아 고독감을 달랬었다. 천붕도 그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으며 가까운 거리 정도는 그를 등에 태우고 다니기도 했다. '배를 이용해야겠군.' 양식은 겨울을 보낼 만큼만 있으면 되었다. 하지만 길을 나서야하는 부산함은 전과 다름 없었고 와중에서 엽고운은 사부에 대한 그리움으로 목이 메일 지경이었다. 이전에는 그 길을 늘상 화진성과 동행했었기 때문이었다. 남령도에는 작은 목선이 있었다. 엽고운은 목선에 돛을 달고 떠날 준비를 했다. 목선은 돛과 노를


동시에 쓰는 것으로 길이가 이장 남짓 했다. 그는 마침내 목선에 올랐다. 휘잉--! 푸드득....... 그의 머리 위로 천붕이 날고 있었다. 푸른 하늘을 선회하는 그 모습에서는 언뜻 위엄마저 느껴졌다. 엽고운은 허공을 바라보며 빙긋 웃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붕아! 곧 돌아올테니 섬을 지키고 있거라." 끄악--! 붕아의 힘차고도 시원스러운 답변이었다. 쏴아아--! 삐걱! 삑....... 엽고운을 태운 배는 망망창파를 헤치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남령도에서 북쪽으로 꼬박 사흘을 가면 만경포(萬景浦)라는 포구가 나온다. 엽고운은 그곳에서 석달치의 양식을 싣고 붕아가 기다리는 남령도로 출발했다. 철썩! 철썩--! 뱃전에 부딪치는 파도소리가 그의 외로움을 한결 덜어주었다. 끼륵! 끼륵! 갈매기 또한 그를 위로하듯 낮게 날며 울어대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바다로 나선 지 하루가 지난 그 다음 날 아침이었다. 바람이 갑자기 거세어지고 있었다. 휘이-- 이잉--! 철썩! 촤아아--! 파도가 높아지는 것을 의식하며 엽고운은 안색을 굳혔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먹구름으로 까맣게 뒤덮혀가고 있었다. '날씨가 심상치 않군.' 그의 불안은 적중했다. 그로부터 반나절이 지나자 바람은 더욱 세게 불었고 사위가 온통 어두컴컴해지고 말았다. 우르르르릉....... 뇌성이 은은하게 울렸다. 이미 파도는 근 십여 장 높이로 부침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거대한 바다 위에서의 목선은 그야말로 가랑잎같았다. 파도와 함께 붕 떠올랐다가 무섭게 떨어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쿠르르릉-- 철썩! 쏴아아--! 거친 풍랑은 의례 비를 부르기 마련이다.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간헐적인 섬전(閃電)도! 우르릉--! 콰앙! 쏴아아--! 마침내 우뢰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엽고운의 작은 목선은 금세 폭풍우에 휩쓸려 버렸다. '큰일이다!' 엽고운은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더미같은 파도는 당장이라도 배를 박살낼 듯 엄청한 기세로 계속 덮쳐들고 있었다. '잘못 떠났구나! 시기를 가려서 출발할 것을.' 엽고운은 비에 흠뻑 젖은 채 양 발에 내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려 배의 흔들림을 방지시켰다. 그러나 한낱 인간이 대자연의 힘에 항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우르르르릉--! 촤아아--! 해일이 몰려오고 있었다. 정녕 태산과도 같은 물의 벽이었다. "오오!" 엽고운은 경외감과 절망을 동시에 느꼈다. 높이가 수백 장에 달하는 해일은 기어이 배를 산산조각내고 말았다. 쿠르르르-- 꽝--! "헉!"


외마디 비명이 전부였다. 엽고운의 모습은 파도에 휩쓸려 종내 보이지도 않았다. ② 한 채의 견고한 석옥(石屋). 그것은 파도가 휘몰아치는 섬의 벼랑 위에 지어져 있었다. 그 섬은 사면이 기암으로 둘러싸여 있어 몹시도 황량한 곳이었다. 기이한 것은 그곳의 형태였다. 어찌 된 셈인지 중앙부가 움푹 꺼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칙칙해 보이는 검은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마치 죽음의 연못같다고나 할까? 넓이는 약 백여 장에 달했다. 하지만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괴석들과 푸른 이끼만이 잔뜩 덮여 있는 천험의 절지(絶地)였다. 석옥 내의 한 석실. 돌로 된 침상에 한 청년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핏기라곤 한 점도 없었다. 그는 바로 엽고운이었다. 침상의 주위로는 각기 다른 모습을 한 네 명의 괴인들이 서 있었다. 단지 같은 것이 있다면 그들 모두가 기대와 불안이 뒤엉킨 복잡한 기색으로 엽고운을 주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가장 오른쪽의 괴인은 겉보기에 오순쯤 된 것 같았다. 갈의를 입고 있었는데 얼굴이 청수한 편이었고 턱에는 짧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유독 깊고 큰 눈에는 현기가 어려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인물은 팔순 정도의 노인으로 혈의를 입고 있었다. 얼굴빛 또한 홍색이어서 일면 화급한 성격이 엿보였다. 다시 그의 옆으로는 칠순 쯤의 흑의노인이 눈가에 냉혹한 살기를 드리운 채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움푹 패인 눈과 예리한 콧날, 그리고 종잇장같이 얄팍한 입술을 지니고 있어 매우 음산하고도 잔혹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마지막 인물은 육순의 노인이었다. 의복이라야 괴상한 가죽 같은 것으로써 그것도 단지 아랫 부분만을 대충 걸치고 있었다. 괴이하게도 전신의 피부가 푸르스름 했으며 가느다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손톱은 무엇 때문인지 근 한자 가까이 기르고 있었는데 마치 나무토막과 같이 시종 무표정이었다. 이들 네 괴노인은 벌써 오래 전부터 이곳에 있었던 듯 했다. 그들 중 갈의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상노이(常老二), 이 아이가 과연 살아날 수 있을까?" 그 말을 받은 것은 흑의노인이었다. "물론이오. 그 엄청난 폭풍우 속에서도 이처럼 살아 나왔는데 이제 와서 죽을 리가 있겠소?" "그러나 숨결이 너무 미약해서......." "후후... 구양노대(歐陽老大), 왜 그리 걱정이 많아지셨소? 내 의술을 한 번 꽉 믿어 보시오. 숨만 붙어 있다면 천토막이 난 시체라도 살릴 자신이 있소. 그리고 우리는 벌써 육십 년 동안이나 이런 아이를 기다려오지 않았소?" 그러자 혈의를 입은 괴노인이 거칠게 쏘아부쳤다. "빌어먹을! 상노이, 너는 언제나 큰소리만 치는구나. 그럼 이 꼬마 놈은 왜 아직도 눈을 뜨지 않는 것이냐?" 눈알을 부라리는 그에게 흑의노인의 응수 또한 만만치 않았다. "혁노삼(赫老三)! 한 마디만 더 지껄이면 가만 놔두지 않겠다." "뭣이?" 그들 양자간의 공기는 금세 험악해지고 말았다. 아랫부분만 가린 푸르딩딩한 노인이 그들의 싸움을 일축시키고 나섰다. "시끄럽다!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오직 이 애송이 놈이어야 한단 말이다. 계속 떠들면 너희 둘 다 내쫓아 버리겠다." 그 말에 일리가 있었는지 성급한 혈의노인도 결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는 애써 화를 눌러참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 녀석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내공이 근 이 갑자에 이르니 우리와 맞먹을 정도가 아닌가?" 구양노대라 불리운 갈의노인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 역시 그것이 줄곧 의문이었다. 어떤 고명한 인물이 과연 이런 아이를 키워냈단 말인가?" 전신에서 푸른 빛을 흘려내는 괴노인이 무겁게 중얼거렸다. "내가 알기로 그런 능력을 가진 곳이 있다면 천하에서 오직 북혈마궁(北血魔宮) 뿐이오." "북혈마궁!" 나머지 세 노인이 일제히 경악성을 발했다. 갈의노인이 곧 그들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틀렸다. 북혈마궁은 본시 음한지공을 근본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 아이의 혈맥 속에는 강맹한 양강의 기운이 흐르고 있다. 절대 북혈마궁에서 온 아이가 아니다." "그렇군." 세 괴인은 모두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어디서 온 놈이오?" 혈의노인의 말을 푸르딩딩한 괴인이 딱 잘라 버렸다. "그런 것에 신경 쓸 필요가 어디 있느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녀석 자체이지, 이 놈의 사문은 아니다." 그러자 혈의노인은 화를 내기는커녕 득의만면하여 말했다. "어쨌든 이 놈의 몸에서 흐르는 양강지력으로 미루어 노부의 극일태양신공(極日太陽神功)을 빠른 시일 내에 연성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되면 귀문관(鬼門關)쯤은 단숨에 녹일 수가 있 지. 크흐흐......." 전신이 푸른 괴노인도 비로소 구겨진 얼굴을 폈다. "동감이다. 거친 풍랑 속에서 칠 일 동안이나 버틴 걸로 보아 이 놈의 근력이면 노부의 잠어수패공(潛魚水覇功)을 연마할 자격이 충분하다. 아니, 노부조차 돌파에 실패한 그 무시무시한 마정을 필히 통과해낼 것이다." 혈의노인은 유쾌해진 듯 손뼉을 딱 쳤다. "좋다! 이제 구양노대와 상노이의 결정만 남은 셈이군." 하지만 푸르딩딩한 괴노인의 대답은 의외로 침중했다. "그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구양노대의 기관학과 진법, 역리지학은 너무도 어렵고 복잡하다. 상노이의 의독술도 역시 마찬가지로 보통 사람같으면 백 년을 배워도 다 못배운다." 갈의노인, 즉 구양노대가 옆에서 쓴 입맛을 다셨다. "음, 그 말은 맞다. 노부와 상노이의 몫이 빠져 버리면 설사 마정과 귀문관을 통과한다 해도 이 아이는 사로(死路)와 독관(毒關)에서 제지당하고 만다." 그는 어두운 안색으로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 백 일 후면 마정의 소용돌이가 멎는다. 그 기회를 빌어 마정을 통과해야 하거늘, 때를 놓치면 우리는 앞으로 또 육십 년을 기다려야 한다." 쾅! 혈의노인이 발로 바닥을 세차게 굴렀다. "빌어먹을! 그럼 이 놈이 그 모든 것을 백 일 안에 익혀내야 한단 말이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오. 차라리 우리가 다시 시도해보는 편이 훨씬 낫겠소." 푸르딩딩한 괴노인은 냉소했다. "혁노삼! 지금 농담을 하자는 거냐? 육십 년 전 우리 네 명이 그곳에서 빠져나올 때를 잊지는 않았을텐데? 수십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초주검이 되어 겨우 탈출하지 않았느냐 말이다. 더구나 들어가는 것은 나오는 것보다 백 배나 더 힘들다." 혈의노인은 울화가 치민 듯 씩씩거렸다.


"젠장! 들어갈 수만 있다면 나오는 거야 문제가 아닌데......." 좌중은 곧장 침묵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들 사이로 흐르는 것은 다만 암울한 공기가 전부였다. 과연 그들을 고심하게 하는 마정, 귀문, 사로, 그리고 독관이란 무엇인가? 불현듯 구양노대가 침묵을 깨고 나섰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오?" 혈의노인이 급히 물었다. 그러자 구양노대는 힐끗 흑의 노인, 즉 상노이를 쳐다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벌써부터 상노이에게 한 알의 영묘한 신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뭐, 뭣!" 상노이는 그야말로 기겁을 했다. 하지만 그의 안면이 마구 씰룩이는 것을 알면서도 구양노대는 이를 못본 척 덧붙였다. "일명 천외기환단(天外奇幻丹)으로 그것은 일정 기간 동안 인간의 능력을 수십 배나 증폭시키는 효험이 있지. 적어도 백일 동안은 범인(凡人)을 천하 기재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혈의노인이 버럭 외쳤다. "상노이! 사실이냐?" 상노이는 펄쩍 뛰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너희들은 노부가 그 신단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아느냐?" 혈의노인은 주먹으로 돌탁자를 부서져라 내리쳤다. 쾅--! "빌어먹을! 무슨 헛소리냐? 만약 네 놈의 말을 신(神)과 영(影), 두 분이 들었다면 네 놈은 뼈도 추리지 못했을 것이다." "뭣이?" 상노이의 안면에서 순간적으로 핏기가 싹 가셨다. 전신이 푸른 노인이 사뭇 괴상한 어조로 맞장구쳤다. "혁노삼의 말이 백 번 지당하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 신단을 내놓지 않으면 너는 능지처참을 면치 못할 것 같다." 그는 가느다란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말했다. "과거 신(神)과 영(影)께서 우리 네 명으로 하여금 금마별부(禁魔別府)를 탈출하게 한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냐? 그러나 우리는 특이한 체질과 더불어 금마궁(禁魔宮)의 사관(四關)을 뚫을 수 있는 절기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그 분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상노이는 그의 말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너는 그깟 알약이 아까와 주어진 임무마저 저버리겠다는 것이냐?" 마침내 상노이는 참담한 표정이 되어 외쳤다. "그만! 알겠으니 더 이상 말하지 마라. 빌어 먹을......." 그는 품 속에서 하나의 옥갑을 꺼내더니 바닥에 내팽개쳤다. "자! 이것이 천외기환단이다. 구워먹든 삶아먹든 너희들 마음대로 해 보아라." "흐흐흐... 진작에 그럴 일이지." 혈의노인이 옥갑을 주워 대뜸 뚜껑을 열어 젖혔다. 과연 그 속에는 금색의 신단이 한 알 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즉시 침상 위에서 혼절해 있는 엽고운에게 먹였다. "흐흐흐... 이제 이 놈이 깨어나기만 기다리면 되겠군." 푸르딩딩한 괴노인이 기오한 음성으로 그 말을 받았다. "육십 년....... 실로 긴 세월이었다. 금마궁에 계신 두 분과 그곳의 친구들이 드디어 해금(解禁)될 수 있겠구나. 그렇게 되면 저 광활한 중원무림도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누구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 네 괴노인은 만면에 모종의 기대와 갈망을 담은 채 서로


시선을 교환할 뿐이었다. ③ 엽고운은 길고 긴 혼몽 속에서 깨어났다. '여기는......?' 눈을 뜨자마자 그가 느낀 것은 의혹 이외에도 구름을 탄 듯 상쾌한 기분이었다. 전신이 말할 수 없이 개운했으며 머리 또한 명경지수(明鏡之水)처럼 맑았던 것이다. 엽고운은 침상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는 이어 네 명의 괴노인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혈의괴노인의 웃음소리가 석실 안을 울렸다. "크흐흐... 과연 상노이의 의술은 쓸만하군. 저 꼬마놈이 드디어 깨어났다." 엽고운은 잠시 멍해졌다. 그러나 곧 그의 뇌리에는 천지를 뒤덮을 것 같던 물의 벽, 즉 해일이 떠올랐다. '그럼 그때 내가 죽지 않았던가?' 엽고운은 네 명의 괴노인들을 차례로 응시했다. '아마도 이 노인들이 나를 구했나 보구나.' 그는 침상에서 내려와 그들에게 공손히 포권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여 소생을......?" 구양노대가 빙그레 웃으며 그의 말을 막았다. "소형제, 자네가 왜 그런 변을 당했는지부터 말해 주게나." 그러자 엽고운은 순간적으로 염두를 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본문의 일은 일단 숨기는 것이 좋겠다. 북혈마궁에 패배한 후 멸절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 그는 생각을 정리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생은 남해의 이름 모를 섬에서 혼자 생활해 왔습니다. 그곳으로부터 고기를 잡으러 나왔다가 이런 변을 당했습니다." 그 말에 상노이가 음산하게 물었다. "섬에서 혼자 살았다고? 너혼자 말이냐?" "그렇습니다. 부모님이 함께 계셨었으나 저보다 앞서 풍랑을 만나는 바람에 두 분 다 돌아가셨습니다." "음, 그렇다면 네 스승은 누구냐?" 이번에는 구양노대였다. 엽고운은 내심 뜨끔했으나 짐짓 어리둥절한 얼굴로 반문했다. "저에게는 스승님이 없습니다." 혈의노인이 무섭게 그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괘씸하구나! 감히 우리를 속이려 들다니. 너의 내공 수위는 현재 이갑자에 달한다. 스승도 없이 어찌 그런 공력을 키울 수가 있단 말이냐?" 엽고운으로서는 시치미를 떼는 것 외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공력, 그리고 이갑자, 그게 무슨 말들입니까?" "이 꼬마놈이 끝까지 노부를 우롱하려 드는구나. 네가 보기에는 노부가 그런 말에 호락호락 속아줄 것 같으냐?" '당신은 속아주어야만 하오.' 엽고운은 이런 내심을 감추고는 얼른 둘러댔다. "삼 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님께서 제게 운공심법이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소생이 아는 것이라고는 그것 뿐입니다." 그의 멀쩡한 얼굴을 향해 상노이가 차갑게 물었다. "단지 운공심법만으로 내공이 이갑자나 된단 말이냐?" "그건......."


"왜 말을 못하느냐?" 상노이의 추궁은 날카롭기 그지 없었다. 엽고운은 가볍게 입술을 깨물더니 여전히 침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소생도 확신하지는 못합니다만... 이전에 섬에서 우연히 이상한 과일을 먹은 적은 있습니다." "과일?" 네 괴노인들이 한결같이 의혹의 빛을 띄웠다. 엽고운은 내심 쓴 웃음을 짓는 한편 지난 날 화진성으로부터 들은 만년홍삼과(萬年紅參果)의 모습을 떠올려 그대로 얘기했다. 상노이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그건 만년홍삼과다. 네가 그걸 먹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으음......!" 노인들은 모두 침중한 신음을 발했다. 네 쌍의 눈이 한 동안 의혹을 드리운 채 엽고운을 주시했다. 개중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상노이였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해가 간다. 만년홍삼과는 양강의 정기를 지닌 영물이다. 그런데 네 몸 속에 양강지기가 흐르고 있으니 결국 말과 일치하는 셈이다." "그럴 듯 하군." 혈의노인도 뭔가 미진한 기색을 보였으나 그렇다고 더 이상 부정할 기색은 아니었다. 전신이 푸른 괴노인이 토를 달았다. "과연 만년홍삼과 정도로 이갑자의 내공을 얻을 수 있을까?" "여러분들께서 믿던지 안 믿던지 그것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엽고운이 딱 잘라 말하자 상노이는 입가에 기소를 매달았다. "꼬마야, 그건 네 말이 맞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아니었더라면 너는 지금쯤 죽은 목숨이었을 거라는 사실이다." 그 말에 엽고운은 내심 짚히는 바가 있었다. '으음, 이들은 내게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뭔가 거래를 요청할 모양이구나.' 아니나 다를까? 네 명의 괴노인은 상노이로 인해 애초의 목적을 상기하게 되자 누구도 더는 추궁하려 들지 않았다. 구양노대가 일신된 음성으로 물었다. "자네는 우리가 누구인지 궁금하겠지?" 엽고운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빙긋 웃었다. "우리는 해천사신(海天四神)이라고 한다." 구양노대를 위시한 네 괴노인, 즉 해천사신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의 눈이 무언의 교감을 나눈 뒤, 그들을 대표해 다시 구양노대가 말문을 열었다. "소형제, 노부가 자네에게 한 가지 얘기를 해 주겠네." "경청하겠습니다." ④ "지금부터 약 팔십 년 전 해남(海南)에 한 단체가 있었네." 엽고운은 정말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귀를 기울였다. 구양노대는 침을 한 번 삼킨 후, 얘기를 계속 했다. "일명 해천교(海天敎)라 하지. 정의(正義)를 중히 여기는 단체였으나 대대로 중원의 일에는 그다지 상관하지 않았네." "으음." "그런데 당시 중원무림에는 음모와 혈겁의 전조가 일기 시작했네. 여러 방면으로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무리들이 서서히 마각을 드러냈고 특히......." 구양노대는 문득 안색을 굳혔다. "북쪽 무림에 북혈마궁(北血魔宮)이라는 신비집단이 생겨났네." '북혈마궁!' 엽고운은 내심 크게 놀랐다. 구양노대의 음성은 이제 종전과는 다른 비중으로 그의 귀에 꽂히기 시작했다. "북혈마궁은 그 세력이 방대한 것은 물론 무공이 절고한 마두들의 집단이었다. 그들은 중원 정복의 야욕을 꿈꾸며 마수를 차츰 광범위하게 뻗쳐갔다." "음!" "이를 보다 못해 당시 해천교의 교주이신 신공(神公)과 영제(影帝)께서는 마침내 봉기하시기에 이르렀다. 북혈마궁을 치기 위해 전 해천교도를 이끌고 중원으로 떠나신 것이다." 엽고운이 흥미를 보이자 구양노대는 탄식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겠는가? 그들을 태운 선박 군단은 이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작스러운 폭풍과 해일을 만났다. 그로 인해 배들은 모조리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아! 그런 일이......." "그런데 바다 밑에서 그 배들은 놀랍게도 한 동굴로 빨려 들더니 거대한 지하석부(地下石府) 속으로 유입되었다." 구양노대의 음성은 왠지 묘한 어감을 띠어가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아득한 옛날 한 기인이 만든 금마궁(禁魔宮)이라는 곳이었다. 바로 이 섬의 아래에 있지." 엽고운이 슬며시 물었다. "그 금마궁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살았습니까?" "그렇다. 그들은 전부 무사했다. 더구나 금마궁 안에는 뜻밖에도 어마어마한 보물과 기진이보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으음......." "후후... 해천교도들은 저마다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들은 보물을 잔뜩 취한 후 빠져나갈 출구를 찾았지. 그런데 후후... 유감스럽게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예?" 엽고운이 어이없어 하는 반면 구양노대는 당시의 일을 회상하며 만면에 절망을 떠올렸다. "그들이 출구를 찾는 데에는 꼭 오 년의 세월이 걸렸다. 하지만 그 출구란 것은 도저히 나갈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나갈 수가 없다면......?" 엽고운의 반문에 구양노대는 다시금 탄식을 불어냈다. "금마궁을 만든 기인은 그 출구에 가공할 네 개의 관문(關門)을 설치해 놓았다. 그곳의 보물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으려는 심산이었겠지." "그 관문이란 어떤 것들입니다?" "이른바 마정(魔井), 귀문(鬼門), 사로(死路), 독관(毒關)이네." "으음!" "그 관문들은 각기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누구도 통과가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신, 영 두 분 교주께서는 연구를 거듭하시다가 결국 한 가지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해천교의 사대 호법으로써 해천사신이 결성된 것도 바로 그때의 일이지." 구양노대는 손을 들어 턱에 난 짧은 수염을 쓸었다. "그들 네 사람의 능력을 합치면 능히 그곳을 빠져나갈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어 수염을 쓸던 손으로 자신의 코끝을 가리켰다.


"첫째인 나 만사귀재(萬事鬼才) 구양수(歐陽修)......." 구양노대, 아니 구양수는 차례차례 각 노인들을 소개했다. "둘째인 독수절의(毒手絶醫) 상견불(常見不), 세째인 화신(火神) 혁화성(赫火城), 그리고......." 그의 손이 마지막으로 푸르딩딩한 노인에게 가 멎었다. "넷째인 괴룡수신(怪龍水神) 구기(仇奇)까지가 바로 그들이지." 만사귀재 구양수는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노부의 기관지학과 진법이학이 사로의 함정을 뚫고, 독수절의 상노이의 독술은 독관을 통과, 그리고 화신 혁노삼의 극일태양신공으로 귀문을 녹이며 괴룡수신 구노사(仇老四)만이 수공으로 마정의 엄청난 소용돌이를 뚫고 나가면 되었던 것이다." "충분히 일리가 있군요." 엽고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양수의 말을 빌자면 해천사신의 능력은 각기 한 방면에서 일가를 이루고 있은즉 과연 금마궁의 사관을 돌파해내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구양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신과 영, 두 분 교주께서는 그렇듯 우리들에게 희망을 걸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우리들을 출구 밖으로 내보냈다. 우리들은 수십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결국 탈출에 성공했지. 그리고 그후로 육십 년 동안 자나깨나 금마궁에 갇힌 형제들을 구출하는 방법 연구에 세월을 보냈다." 엽고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육십 년!' "하지만 숱하게 시도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금마궁은 실상 나오기보다 들어가기가 훨씬 더 어려웠던 것이다." "으음......." "나오면서 느낀 것이지만 그곳은 우리 네 명이 동시에 도전할 구조가 못되었다. 각기 한 개씩 관문을 통과한다고 해 보았자 그 시간 동안 나머지 세 명은 위험을 무릅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신경을 쓰다가는 그나마 함정에 걸리기 십상이었다." 엽고운은 비로소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제게 무엇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구양수는 탄식하며 말했다. "물론 그것은 금마궁에 갇혀있는 우리 형제들을 구해달라는 것이네. 그들은 그 안에서 지난 팔십 년 동안이나 햇빛 한 점 보지 못한 채 오직 나갈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야." 엽고운의 눈썹이 가볍게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소생의 능력으로 어찌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구양수는 문득 입가에 미묘한 웃음을 띄었다. "정황을 들어 알겠지만 그것은 우리들 개개인의 능력을 한 몸에 갖춘 인물이라야 가능한 일이지. 이는 얼핏 들으면 무모한 얘기 같지만 우리들 해천사신도 바보는 아닐세."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의 내력에 대해서는 자네 스스로 얘기한 것 외에는 모르지만 자네의 신체 조건에 관한 것은 이미 다 파악해 두었다는 말이야. 또한 거기에 보태 약간의 손도 써두었네." '맙소사! 꼼짝없이 얽혀들게 생겼군.' 엽고운은 내심 고소를 지었다. 만사귀재 구양수는 다소 강제성이 느껴지는 묵직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자네는 이제부터 사양치 말고 우리 네 명의 절기를 익히게." 엽고운의 입술 꼬리가 기이하게 말려 올라갔다. "어차피 피할 수도 없겠군요. 좋습니다. 소생, 여러분들께 큰 빚을 졌으니 최선을 다해 보답하겠습니다." "고맙네."


구양수가 손을 뻗어 엽고운의 손을 잡았다. 엽고운은 수단이야 어떻든 마주잡은 그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가 매우 격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머지 삼신도 역시 이렇다하게 내심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독수절의 상견불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백 일 후면 마정의 소용돌이가 멎는다. 그때야말로 금마궁에 들어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너는 이 백 일 동안에 우리들의 절예를 모두 습득해야 한다." 엽고운은 깜짝 놀랐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말씀입니까?" 괴룡수신 구기가 싸늘하게 그 말을 잘랐다. "우리들이 미리 손을 써놓았다지 않았느냐? 너는 그저 열심히 배우기만 하면 된다." 엽고운은 미간이 찌푸려지려는 것을 참고 순순히 응했다. "알겠습니다." 고된 훈련은 이 날부터 당장 개시되었다. 엽고운이 마침내 해천사신의 네 가지 절기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매일 낮동안을 엽고운은 바닷물 속에서 살다시피해야 했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괴룡수신의 수공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그의 잠어수패공은 그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었다.완전히 연마하면 물 속에서 몇 년이고 살 수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특이한 호흡법 때문이었다. 즉 전신의 땀구멍을 이용해 호흡을 할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잠수(潛水), 분수(分水), 파수(破水), 통수(通水) 등 물을 다스리는 각종 기공을 엽고운은 육십여 일만에 모두 익혔다. 또한 밤에도 그는 쉴 수가 없었다. 만사귀재의 기관지학과 진법, 역리지학을 익혀야 했으며 화신의 극일태양신공과 독수절의의 의독술까지도 차례로 정복해 나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실로 불가사의한 것은 천외기환단의 효능이었다. 덕분에 그는 지칠 줄을 모르는 체력을 과시하게 되었으며 오성 또한 가히 초인에 이르고 있었다. 엽고운이 해천사신의 절기를 모조리 습득하는 데에는 백 일 중에서도 불과 칠십 일이 걸렸을 따름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맹훈련은 실상 엽고운에게 있어 또 하나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남천신문의 초절한 무학들을 바탕으로 하여 그 위에 새롭게 탑을 쌓고 있다면 옳은 표현이리라. 엽고운 자신도 결코 이 점을 모르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혼신을 다한 결과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이룩하게 된 것이었다. 제 7 장·금마궁(禁魔宮) ① 마침내 백 일이 지나 기다렸던 그 날이 도래했다. 해천사신은 모두 흥분된 상태였으나 역시 겉으로는 이를 내색치 않으려 했다. 물론 엽고운이 그 눈치를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엽고운은 그들의 감정에 굳이 끼어들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저 모르는 척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어떤 상황에서건 스스로의 도(道)를 잃지 않으려 애썼던 인물이 바로 그였으므로. 정오 무렵. 엽고운을 비롯한 해천사신 일행은 드디어 마정(魔井)에 도착했다. 그것은 바로 섬 중앙에 있는 칙칙한 호수였다. 넓이는 가까이서 보니 약 백장 정도였고 이미 오래 전에 준비한 듯 그 가장자리에는 낡은 목선이 매어져 있었다. 다섯 사람은 묵묵히 배에 올랐다. 괴룡수신이 두 발에 공력을 주입하자 배는 미끄러지듯 수심을 향해


나아갔다. 잠시 후. 호수의 정 중앙으로부터 약간 비껴난 지점에서 배는 멈추었다. 물결은 고요했으며 일행의 입 또한 굳게 닫혀진 채 아무도 먼저 침묵을 깨려 하지 않았다. - 팔십 년 영어(囹圄)의 세월을 과연 깨뜨릴 수 있을까? 이런 관건을 목전에 두고 있는 이상 해천사신의 심정이 어떨지는 능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더구나 육십 년 동안에 걸친 실패를 가슴에 껴안고 있는 그들이었으므로 설사 두려움을 가진다 한들 이해가 가고도 남을 노릇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해천사신은 한결같이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이는 그들이 그만큼 긴장에 휩싸여 있다는 의미였다. 괴룡수신 구기가 엽고운을 힐끗 쳐다 보았다. "이 물을 보니 어떤 생각이 드느냐?" 침묵을 깬 첫 마디 치고는 저의를 종잡기가 힘든 말이었다. 엽고운은 검은 물을 내려다 보며 그저 생각나는 대로 대꾸했다. "무척이나 음침하군요." 구기의 눈빛이 일순 야릇하게 변했다. "그것밖에 못 느끼겠느냐?" 엽고운은 그제서야 씩 웃으며 말했다. "이 가운데 응집된 물은 익수(溺水)가 분명하군요. 또한 조용하나 보이지 않는 가운데 회(廻)와 살(殺)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기의 안색이 일변했다. '놈! 놀랍구나. 단번에 이 마정의 성질을 파악해 내다니.' 그의 얼굴에는 기쁨에 앞서 일말의 불안이 스쳤다. '어쩌면 우리는 충견(忠犬)이 아니라 한 마리의 호랑이를 잡아들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기는 재빨리 표정을 지워 버렸다. "네 말이 맞다. 이 중심에는 가공할 살기(殺氣)가 포함되어 있다. 내부적으로 엄청난 수압이 마구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지." 나머지 삼신은 여전히 입을 열 생각이 없는 듯 단지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구기는 엽고운을 향해 한 개의 나뭇가지를 내밀었다. "자, 보아라." 나뭇가지가 검은 물의 한 중심부에 떨어졌다. 출렁! 파파팍--!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나뭇가지는 압력을 받은 듯 순식간에 박살이 나고 말았다. 동시에 그것은 눈깜짝할 사이에 물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으음!" 엽고운은 섬뜩한 기분을 느끼며 낮게 신음을 발했다. 구기의 스산한 음성이 그 뒤를 이었다. "보았느냐? 마정은 이처럼 죽음의 절지다. 모든 것을 부수며 또한 삼켜 버리지. 그러나 앞으로 일 주일이 지나면 천기(天機)의 변화에 의해 이 끔찍한 소용돌이가 멎는다. 그 시간은 겨우 일각 정도이다." 엽고운은 정색을 한 채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 동안에 너는 수중 삼백장 내로 들어가 귀문을 부숴라." "알겠습니다." 구기의 침중한 어조에 비해 엽고운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것은 자신감이라기 보다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종의 투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를 알리 없는 해천사신은 그의 대답에 저으기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들의 눈에는 엽고운이 경솔하게 비춰지고 있었고, 이로 인해 그들은 결국 노파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육십 년 간의 고심과 좌절이 그들 해천사신에게 가져다준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기우(杞憂)였다. 사실상 그들은 지금 모두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르고 있기도 했다. 반면에 마정을 응시하는 엽고운의 기색은 태연하기 그지 없었다. 괴룡수신 구기가 기어이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대체 너란 놈을 믿어도 되는지......." 말하다 말고 그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오오! 소용돌이가 멈췄다." 휙--! 그의 놀란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엽고운의 신형이 빨려들 듯 마정으로 입수했다. 그 동작은 너무도 민첩하여 소리는 물론 물 한 방울도 튕겨내지 않았다. 구기의 안색이 이제까지와는 달리 묘하게 일그러졌다. "정녕 대단한 놈이다. 저 놈은 벌써 수공에서 나를 능가한다." 언뜻 질투감이 배인 그 말에 만사귀재 구양수는 마치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내 기관지학이나 역리학 등도 저 자 앞에서는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다." 독수절의 상견불이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그건 당연한 현상이오. 천외기환단이 놈을 백 일만에 귀재로 바꾸어버린 것이오. 이제 우리 넷 중 누구도 저 놈의 상대가 못 되오." 화신 혁화성은 안면을 마구 씰룩였다. "저 놈이 성공하고 나오면 그때는 어쩌지?" 해천사신은 서로 눈치만 살필 뿐 아무도 뭐라 말하지 못했다.구양수가 묵묵히 있다가 한참 뒤에야 입을 떼었다. "그것은 우리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신, 영 두 분께서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다." "아! 그렇겠군." 혁화성이 말하자 상견불과 구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해천사신의 표정은 그리 밝지가 않았다. 그들은 다 같이 기억 속에서 두 인물의 실체를 떠올리며 가슴 한 귀퉁이가 써늘해지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신공(神公)과 영제(影帝)....... 그 분들은 정의감은 있으되 공명심에 관한 한 양보를 모르는 분들이 아닌가? 자신들보다 능력이 뛰어난 자를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해천사신은 머리가 지끈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런 염려 때문에 침울해져야 하는지 회의가 일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눈에서 이런 표정을 읽으며 고소를 지어야 했다. '놈! 그간 정이 들었었는데.......' 한편. 엽고운은 마정을 통해 깊숙이 내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의지와는 무관한 현상이었다. 알지 못할 무서운 힘이 그의 몸을 계속 아래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 속도또한 엄청나게 빨랐다. 엽고운은 한 동안 끌려 들어가다가 염두를 굴렸다. '이렇게 계속 가다간 어떤 위험이 닥쳐들지 알 수 없다. 이제부터는 내가 물을 다스려야 한다.' 그는 일단 잠어수패공(潛魚水覇功)을 극력으로 끌어올린 다음, 수공을 차례로 시전했다. '파수! 분수! 통수--!' 파파파팍! 쏴아아--! 엽고운을 휘감고 있는 물결이 일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으윽!'


그는 무시무시한 그 수압에 의해 흡사 피부가 찢겨 나가고 심장이 터져버리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우르릉--! 그가 재차 수공을 발휘하자 상황은 훨씬 호전되었다. 다행히도 물결이 그의 몸 밖으로 약 일 장 가량 밀려 나간 것이었다. '되었다!' 그것은 바로 잠어수패공의 최고 단계인 이수(離水)의 경지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그리하여 엽고운은 비로소 물을 이기고 스스로의 조종에 의해다시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물은 계속하여 일장 밖으로 밀려나 주었다. 백장... 이백장....... 그러나 아래로 내려갈수록 엽고운은 점차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전신 혈맥이 터질듯 팽창되었으며 물도 겨우 일척 거리 밖에 밀려 나가지 않았다. 그러던 한 순간, 엽고운은 급기야 기혈이 꽉 막히는 것을 느꼈다. 이제 더 이상의 하강은 불가능했다. 잠어수패공의 한계가 바로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엽고운은 급히 천원무경상의 신공을 일으켰다. '천원무극단공(天元無極丹功)!' 그 즉시 그의 체내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었다. 상, 중, 하, 삼단전에서 뜨거운 열류가 일더니 중단전에 단단한 원정내단이 형성된 것이었다. 침착을 회복한 엽고운은 이어 입 속으로 구결을 운용했다. 그러자 원정내단의 정화(精華)는 삽시에 무형의 호신강기로 화해 그의 몸 밖 삼장 범위를 커다란 광휘로 휩싸버렸다. 쏴아아--! 물결은 그의 전신으로부터 삼장 밖으로 다시 밀려 나갔다. '휴우--!' 엽고운은 압력이 사라지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불가사의한 신공이 그를 이렇듯 수화불침의 단계에 이르게 한 것이다. 기실 이 정도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은 천원무극단공을 창안한 당년의 천원상인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더구나 엽고운이 그것을 연마한 지는 불과 삼 년, 그야말로 고금 이래 초유의 성취를 이룩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가 복용한 희대의 영약영물들, 즉 금령대주천단과 음양천선신과, 천외기환단 등이 바로 이같은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물론 그가 쏟았던 각고의 노력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이윽고 엽고운은 약 삼백여 장 밑을 잠수하게 되었다. 우르르릉--! 갑작스러운 뇌성과 더불어 사방의 물결이 파동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아뿔싸! 벌써 일각이 지났나 보구나.' 당황하는 엽고운의 눈에 바닥에 뚫린 하나의 동혈(洞穴)이 쏘아져 들어왔다. '저곳이다!' 그는 지체없이 동혈 안으로 들어갔다. 그 찰나, 벽력음과 함께 물 속에서 무시무시한 섬전(閃電)이 작렬했다. '휴우!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구나.' 엽고운은 한숨을 내쉬는 한편 물살을 헤치고 앞으로 쾌속하게 나아갔다. 쏴아아--! "푸우!" 어느 지점이었을까? 그는 물 밖으로 불쑥 솟구쳐 올라왔다. 이어 주위를 둘러 보니 그곳은 하나의 동굴로써 현재 그의 몸이 잠겨 있는 곳은 하나의 연못이었다. 엽고운은 연못 밖으로 나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과도한 진력 소모로 인해 그는 몹시도 피로한


상태였다. 엽고운은 곧장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하지만 천원무극단공이 십성의 경지에 올라 있었으므로 그의 운공 시간은 단지 숨 몇 번 쉬면 되는 정도였다. 대략 차 반 잔 마실 시각이 지나자 엽고운의 운공은 끝났다. 그러자 그의 신체는 다시 맑고 정명해졌으며 환히 빛나는 얼굴 위에서 눈동자가 혜광(慧光)을 뿌려내고 있었다. 절세의 미남자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이른바 천하제일의 기남아(奇男兒), 이것이 엽고운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② 동굴을 가로막은 철문. 엽고운을 기다리고 있는 이것이 바로 문제의 귀문(鬼門)이었다. 전면에 푸른 녹이 잔뜩 슬어 있는 그 철문은 도저히 그 두께를 가늠하기가 힘들 정도로 육중해 보였다. 중간부분에는 십팔 개의 악마상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모두 입을 쩍 벌린 채 각양각색의 흉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름하여 지옥을 지킨다는 십팔아수라귀, 부릅뜬 눈과 날카롭게 돌출된 이빨 등이 실로 섬뜩한 광경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엽고운은 그 앞에서 잠시 염두를 굴렸다. '음, 이 문을 통과하려면 저 십팔 개 악마상의 입 속으로 동시에, 똑같은 분량으로 극일태양신공의 열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그의 얼굴이 긴장으로 인해 잔뜩 굳어졌다. '조금이라도 오차가 빚어진다면 즉시 무서운 기관이 발동해 이 동굴이 무너져 버린다.' 그러다 문득 엽고운은 기이한 표정이 되어 귀문을 노려보았다. '화신이 말하기를, 십팔악마상을 모조리 부숴버리면 저 문 자체가 붕괴된다고 했다. 후후.......' 그의 눈이 싸늘한 광채를 발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무작정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이 금마별부(禁魔別府) 안에 있는 인물들이 어떤 자들인지 확인하기 전에는 자중하는 편이 낫다.' 나이에 비해 인생의 쓰디쓴 단면을 많이 겪었던 엽고운이었다. 따라서 매사에 신중을 기하는 것은 하나의 습관이 되어 있었다. '해천사신이 나를 모르듯 나도 그들을 모르니까. 후후후.......' 결정이 내려지자 엽고운은 전신에 극일태양신공을 운공했다. 다음 순간, 그의 전신에서 눈부신 백광이 번쩍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그가 극일태양신공이 십이성의 경지에 달했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한 장면이었다. 원래 극일태양신공은 홍, 황, 청의 삼 단계를 먼저 거치게 되어 있었다. 즉 삼성에 이르면 전신에서 홍색 불꽃을 발산하며 육성에 이르면 황색, 구성에 이르면 청색 불꽃을 내게 된다. 사실 화신 혁화성도 극일태양신공의 현재 수위가 아직 청색 불꽃을 내는 단계인 구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 전수받은 엽고운이 그의 경지를 상회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혁화성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것은 엽고운이 그의 앞에서 끝내 황색불꽃을 피워올리는 정도로 자신의 진전을 감추었기 때문이었다. 파팍--! 팟--! 엽고운은 연달아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눈부신 백광이 십팔개로 뻗어나가 십팔아수라귀의 입 속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쩡--! 마침내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리더니 철문이 위로 올라갔다. '됐다!' 엽고운의 눈가에 가볍게 희색이 스쳤다. 이어 그는 연기처럼 문 안으로 스며 들어갔다.


쾅! 귀문은 다시 아래로 떨어져 내려 굳게 닫혀 버렸다. '으음, 정말 엄청난 두께였다. 만일 방법을 모르는 채 우직하게 부수려 들었다면 진력이 바닥나도 모자랐을 것이다.' 엽고운은 귀문에 일별을 고한 뒤, 몸을 돌려 전면을 바라 보았다. 그의 앞으로는 어두컴컴한 통로가 길게 뻗어 있었다. '사로(死路)다! 세번째의 관문인.......' 엽고운은 전신에 내공을 극으로 끌어올리며 천천히 전진했다.그 순간, 놀랍게도 그의 발은 바닥에서 약 세 치쯤 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설의 경공인 무력답지(無力踏地)였다. 엽고운은 마치 구름을 타듯 그렇게 앞으로 나아갔다. '사로에는 삼십육 가지의 기관매복과 칠십이 종의 암기, 그리고 도합 열두 개의 절진이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 그는 통로를 돌아보며 계속 생각에 잠겼다. '해천사신도 이곳을 통과하면서 수십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역(逆)으로 들어가므로 그 위험도는 그때에 비할 바가 아니다.' 통로는 그 쯤에서 우측으로 구부러지고 있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 반대편인 좌측으로도 샛길이 나 있다는 점이었다. '소위 좌생우사(左生右死), 이는 진법의 기초에 해당되는 용어다. 그러나 이곳에 설치된 진은 역음양귀진(逆陰陽鬼陣)이니만큼 그대로 시행해서는 큰 변을 겪게 된다.' 엽고운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우측으로 꺾어져 들어갔다. 다시 얼마쯤 가자 이번에는 세 갈래 길이 나왔다. 그곳에서는 그도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삼재문(三才門)! 일, 이, 삼이 각기 흉(兇), 살(殺), 압(壓)의 함정이다. 첫번째 난관에 부딪친 셈이군.' 말하자면 그 세 갈래 길 전부가 함정인 것이었다. 엽고운은 미간을 슬쩍 찌푸리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 "무릇 흉이란 삶을 방해하는 것이며, 살은 죽음에의 창조다. 그에 비한다면 압은 그래도 조금이나마 희망이 있다." 결국 엽고운이 택한 것은 삼, 즉 압의 문이었다. 우르릉--! 굉음과 더불어 천장에서 엄청난 크기의 암석이 떨어져 내렸다. "차앗!" 엽고운의 신형은 빛살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러나 희뿌연 그의 그림자가 막 암석을 피하려는 찰나였다. 꽝--! 암석이 그대로 그의 신형을 깔아버렸다. 그것은 통칭 압사(壓死)가 연상되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 위로 자욱한 흙먼지가 날려 칙칙한 죽음의 냄새를 풍겼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울리는 한 가닥 낭랑한 음성이 있었다. "후후후... 저 무지막지한 바위에 깔려 죽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억울한 노릇일 것 같다. 죽더라도 곱게 죽어야 할 것 아닌가?" 엽고운이었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곧 멀쩡하게 살아 있는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사실상 암석에 깔린 것은 그의 실체가 아니라 허상(虛像)이었다. 잠종무형보(潛踵無形步)라는 희대의 보법이 그를 구해낸 것이었다. 스스스....... 엽고운의 신형은 다시 연기가 되어 그곳을 떴다.


광장(廣場). 사방이 백장여쯤 되어 보일 정도로 넓었다. 툭! 그곳에 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엽고운이었다. 그가 마침내 사로를 통과하여 이 광장에 당도했다. 삼십육 개의 기관 매복과 칠십이 종의 암기, 또한 열두 개의 절진 중 그 어느 것도 종내 그를 막지 못했던 것이다. 엽고운의 몸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피어 오르고 있었다. 약 두 시간여에 걸친 사로와의 치열한 접전에 그는 지칠대로 지쳐버렸다. 그의 안색은 밀랍처럼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쿵! 꼿꼿이 서 있던 엽고운은 마침내 힘없이 주저 앉았다. 이어 그는 품 속에 손을 넣어 밀랍에 싸인 단약 한 알을 꺼냈다. '마지막 남은 금령대주천단(金靈大周天丹)이다. 이것을 복용하면 소모된 진력을 금세 회복할 수가 있다. 정말... 끔찍한 관문이었다.' 엽고운은 단약을 삼킨 후, 대략 이각에 걸쳐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그의 몸을 둘러싸고 오색영롱한 환이 떠돌고 있었다. 그런데 그 광경은 어느 순간부터 더욱 더 신비한 기현상으로 발전되었다. 그의 이마 위에서 영출된 환은 점점 커지더니 종내에는 그의 몸 주위로 다섯 겹의 막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 조화지경이 삼화취정(三和聚精)이나 오기조원(五氣朝元)인지, 혹은 반박귀진(返璞歸眞)을 뛰어넘어 등봉조극(騰縫造極)인지 확실하게 단정지을 수는 없었다. 다만 오색의 다섯 겹 막이 천원무극단공의 절정경지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허(虛)가 곧 실(實)이요, 실이 곧 허인지라 엽고운은 무심에 이른 채 허구와 실제 사이에서 환영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일체의 잡념이 제거된 무아지경의 상태라고나 할까? 끝으로 엽고운의 몸을 감싸던 오색막은 찰나적으로 혼돈과도 같은 기광을 뿜어내더니 이내 연기처럼 스러져 버렸다. 엽고운이 감았던 눈을 뜬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눈빛이 거기에 있었다. 고요하고 맑기만 할 뿐 전혀 기(氣)가 없는 듯한 눈빛, 엽고운은 마침내 천원무극단공의 초극 단계에 이르러 내공의 정화를 깊숙이 갈무리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는 당년의 천원상인 석중헌(石中軒)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로써 가히 무종(武宗)으로 추앙받아야 마땅한 성취였다. 스슷! 엽고운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스스로의 능력이 불과 하루 전에 비해도 몇 배나 진보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천외기환단(天外奇幻丹)의 오묘불가사의한 약력이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엽고운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으음!" 고요했다. 그러나 정(靜) 속에는 무서운 살(殺)이 있었다. '마지막 관문도 만만치 않겠군.' 엽고운은 새삼 긴장을 다져야 했다. 지금 그가 있는 곳, 즉 백장 넓이의 광장에는 사방으로 여덟 개의 통로가 뻗어 있었다. '이른바 팔로독황절지(八路毒荒絶地)가 이곳인가?' 엽고운은 와중에서도 일단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혔다. 그러자 그의 뇌리에는 무엇인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는 앞서의 삼관을 통과해 내면서 어렴풋이나마 이 금마궁의 관문 속에 한 줄기 보이지 않는 암도(暗道)가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다.


비밀에 싸여 있어 보통의 지혜로서는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또 하나의 생로(生路), 그것은 이를테면 아무런 장애도 없이 무사히 금마궁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랄 수 있었다. 엽고운은 진지한 눈으로 여덟 개의 통로를 응시했다. '저 중 어느 길로 가도 독관(毒關)의 위협을 모면할 길이 없다. 독이 겁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불필요하게 힘을 낭비하는 것도 실상은 어리석은 짓이다. 병법에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온갖 지식들을 모조리 짜내기 시작했다. 엽고운이 알고 있는 것은 무한히 많았다. 사부인 남천신군 화진성으로부터 그는 각종 기관, 진법, 역리술 등을 배웠다. 물론 그 자체로만은 현오한 경지가 못되었지만 거기에다 만사귀재 구양수로부터 배운 것들을 합치니 그 양상이 달라졌다. 소위 통천가공할 지혜가 그의 머릿 속에 들어 차 있는 것이었다. '색즉지공(色卽之空), 공즉지색(空卽之色).......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불법(佛法)에서 유래하나 그 이치만은 크게 범용성이 있다.' 엽고운은 상념의 세계로 깊이 몰입되어 갔다. '무한은 유한에 이르고 다시 무한을 낳는다. 일, 이, 삼, 사, 오, 이 오행은 다변의 도리를 낳았다. 고로 일원태극삼재사상오행육합칠성팔패구궁(一元太極三才四象五行六合七星八卦九宮).......' 그의 생각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 마리의 거미가 일천척의 실을 토했다. 그렇다면 이는 바로 무에 유.......' 엽고운은 뒷짐을 진 채 연신 광장 안을 맴돌았다. 그의 발은 그 동안 줄곧 바닥에서 세 치 가량 떠 있었다. 광장의 바닥은 형형색색의 돌로 총총히 박혀 있었다. 붉고, 푸르고, 검고, 누렇고, 자색인 것 등등. 개중에서 엽고운의 발끝은 매화 모양의 오채석(五彩石)을 밟았다. "이것이다!" 그 부르짖음은 확신이 깃든 단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다섯 개 매화 모양의 돌을 밟고 선 엽고운의 눈에서는 밝은 신광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하하하핫... 묘하군! 비밀은 아주 간단한 곳에 있었구나. 매화입경(梅花入境), 이곳이 바로 통로일 줄이야." 다음 순간, 엽고운은 동시에 다섯 개의 돌을 밟았다. 덜컹! 놀랍게도 바닥이 꺼지더니 그의 신형은 아래로 꺼져 버렸다. 석실(石室). 그것은 하나의 통로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곳곳에 야명주가 박혀 있는 밝은 길로써 각종 기관장치가 복잡하게 설치되어 있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를 보게 되자 엽고운의 얼굴에는 기묘한 미소가 어렸다. '후후... 왜 내가 진작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기관이 설치된 공간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통로라는 것을. 광장의 무수한 돌을 통해 천기(天機)의 방위(方位)로 위장되어 있었을 뿐이다.' 휙--! 그는 지체없이 몸을 날렸다. 얼마 후. 엽고운은 한 석벽 앞에 당도했다. 그 석벽에는 네모 반듯한 돌이 박혀 있었다. '이, 사, 육, 팔... 중심!' 그는 내심 읊조리며 차례대로 돌을 눌렀다. 쿠르르릉--! 석벽이 좌우로 갈라지자 엽고운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되었다! 이것이 바로 금마별부로 통하는 비밀 문이다.' 그런데 그 순간, 문 안으로부터 빛이 쏟아져 나옴과 동시에 앙칼진 소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냐?" 그것은 마치 옥구슬이 부딪치는 듯 맑고 아름다운 음성이었다. ③ 엽고운은 당당하게 문 안으로 들어섰다. 쿠르르릉--! 석벽은 원래대로 다시 닫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한 명의 소녀를 볼 수가 있었다. "흐음?" 엽고운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눈 앞의 소녀는 일견하기에도 절세의 미소녀였다. 하지만 그가 놀란 것은 비단 그녀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물고기의 껍질인 듯한 것으로 대충 가슴과 아랫 부분을 살짝 가렸을 뿐 눈부신 살결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고 있었다. 대략 십오륙 세 정도, 그러나 육체의 발달은 나이를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봉긋한 가슴과 팽팽한 둔부, 현기증이 일 정도로 매끄러운 허벅지 등이 이미 성숙한 여인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보조개가 돋보이는 용모 또한 가히 일품이었으나 역시 육감(肉感)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뭐랄까? 그녀에게서는 전반적으로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분방함이 엿보였다. '매우 특이한 소녀로군.' 엽고운이 느낀 감정은 단지 그것 뿐이었다. 이는 주어진 책무가 그의 감각을 경직시켜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를 대하는 미소녀의 표정은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녀는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더니 잘록하게 패인 허리에 두 손을 척 걸치고는 날카롭게 외쳤다. "네 놈은 누구길래 감히 내 처소로 들어왔느냐?" 엽고운은 포권하며 낭랑하게 말했다. "소저, 실례를 용서하시오. 소생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은 다만 지리를 잘 몰라서였을 따름이오." "음!" 소녀는 다시 뭐라 말하려다 말고 붉은 입술을 꼬옥 다물어 버렸다. 엽고운의 눈에서 그녀는 일체의 사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이번에는 엽고운이 부드럽게 물었다. "소저, 이곳이 금마별부가 맞소이까?" 그제서야 소녀는 기색을 달리 했다. "맞아요. 그럼 당신은 대체 어떻게 알고 여기로 왔지요?" 그녀는 경계를 푸는 대신 안면 가득 의혹을 떠올렸다. 이를 느낀 엽고운은 씨익 웃어 보였다. "소생은 밖에서 왔소." "아! 밖이라고 했나요? 지금?" 소녀는 흥분한 듯 거듭하여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그럼... 혹시 당신은 해천사신이 보낸 사람이 아닌가요? 그 분들의 제자가 맞죠?" 엽고운은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의 제자는 아니오. 그러나 분명 관계는 있소." 소녀는 금세 격동에 찬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아아! 왔군요, 결국....... " 그녀는 엽고운을 와락 끌어안았다. 감격에 겨워 이성을 잃은 것일까? 수치도 잊은 듯 엽고운의 목에 매달리고 있었다. 반면에 엽고운은 당혹을 금치 못했다. 느닷없이 매끄러운 여체가 감겨들자 그는 얼굴이 확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소, 소저! 나는 떨어져서 얘기해도 다 알아들을 수 있소." 그 말에 소녀는 얼른 그에게서 떨어졌다. "미안해요. 제가 당신에게 불편을 끼쳐드렸나 보군요." 그녀는 아름다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이었다. "이해해 주세요. 저는 이곳에서만 살아서 바깥 세상의 예의 같은 것은 잘 몰라요." 소녀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기색이라야 순수한 기쁨 외에는 달리 아무 것도 없었다. 엽고운은 그녀의 행동이 충분히 납득되었다. 나이상으로 따져보면 그녀가 금마별부 안에서 태어났으리라는 짐작은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세상사에 무지한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이윽고 소녀는 마냥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따라 오세요. 저는 이전부터 할아버지께 누군가 꼭 우리를 구하러올 것이라는 말을 몇십 번이나 들었어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 앞장 서 달려갔다. 엽고운은 빙그레 웃으며 소녀의 뒤를 따랐다. 그의 눈은 한 마리의 암사슴과도 같은 그녀의 뒷모습에서 영 떨어지지 않았다. 단지 외양의 아름다움만으로는 엽고운을 이처럼 끌어당기지 못한다. 순진무구함이 합쳐지자 그는 비로소 그녀의 벌거벗다시피한 몸에서 싱싱한 매력을 발견해내고 있었다. 윤기 도는 맨 등판, 세류요와 대조를 이루는 동그란 둔부의 출렁임, 그 위에서 물결치는 긴 머리칼....... 이런 것들이 현란한 허벅지의 움직임과 더불어 그의 고독한 가슴에 푸르른 초원의 향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정녕 아름답구나!' 엽고운은 내심 탄성을 발하며 그녀를 따라갔다. 또 다른 석실. 천장에는 주먹만한 야명주가 박혀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둥근 석탁이 놓여 있었고 그 주위로 세 인물이 앉아 있었다. 중앙에는 약 칠순 가량으로 보이며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그 좌우로는 사십대의 중년남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도 모두 의복 대신 가죽같은 것을 걸치고 있었다. 노인은 청수한 얼굴에 매우 인자한 풍모였다. 반면에 중년남자는 용모가 준수한 편인데 비해 무표정하고 눈빛이 싸늘했다. 끝으로 중년여인은 가죽으로 가리워졌으나 몸의 굴곡이 선연하며 기름진 피부와 꽃같은 용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 석실 안으로 하나의 작은 인영이 다급히 뛰어들어왔다.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그 인영은 바로 예의 미소녀였다. 하지만 노인은 그녀의 하는 양에 혀를 끌끌 찼다. "허어! 월미(月美)야, 말만한 처녀가 그렇게 뛰면 되느냐? 볼기를 몇 차례 때려야지 안되겠구나." 곁에 있던 중년남녀는 빙그레 웃을 따름이었다. 소녀가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된 채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 그게 아니라... 왔단 말이에요!" 노인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녀석, 천천히 말해 보아라. 대체 무엇이 왔다는 것이냐?" 월미라 불리운 소녀는 조부를 향해 짐짓 인상을 썼다. "아이 참! 그 분... 할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시던 그 분이 왔는데도요?" 노인의 안색이 대뜸 미미한 떨림을 보였다.


"월미,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설마......?" 월미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래요. 외부(外部)에서 한 분이 오셨어요." 그 한 마디에 의자에 앉아 있던 삼 인이 튕기듯 벌떡 일어섰다. "뭣이? 그게 정말이냐?" 그 순간, 석실 안으로 들어서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두말할 것도 없이 엽고운이었다. "오오!" 삼 인은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저마다 감탄사를 연발할 뿐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도 모르고 멍청해져 버렸다. 개중에서도 노인은 특히 넋나간 얼굴로 엽고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 노인의 안면이 서서히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격동, 충격, 그리고 허탈까지 거치고 나서야 그의 입이 열렸다. "그대가 정녕... 밖에서 오신 분이오?" "그렇습니다. 소생 엽고운(葉古雲)이라 합니다." 엽고운의 대답이 떨어지자 노인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과연 왔구려! 그 네 분은 평안 하시오?" 그는 노인의 눈에 눈물이 고여오르는 것을 보며 반문했다. "해천사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소." 엽고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건재해 계십니다." "아!" 노인은 기어코 눈물을 주르륵 쏟아냈다. "긴 세월....... 장장 팔십 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네 분께서는 임무를 수행하셨구려." 담담히 웃는 엽고운에게 노인은 급히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오. 그리고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시오." 독촉에 버금가는 노인의 어조에도 엽고운은 전혀 역감이 일지 않았다. 오히려 연민이 앞선다면 맞는 표현이었다. '무리도 아니다. 팔십 년이란 얼마나 긴 세월인가?' 그는 자리에 앉은 후, 노인이 원하는 대로 해천사신에 관한 것들을 비교적 상세하게 얘기해 주었다. 물론 거기에는 자신의 임무와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얘기를 듣는 동안 노인과 두 중년남녀의 안색은 무수히 변화를 거듭했다. 곁에서 월미는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꿈꾸듯 황홀에 이른 표정으로 함께 듣고 있었다. 마침내 엽고운의 얘기가 모두 끝났다. 노인과 중년남녀는 못내 격동을 감추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노인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협, 우리들이 왜 이렇게 흥분하는지 아시오?" 그는 손가락을 들어 월미를 가리켰다. "이 아이는 노부의 손녀인 구양월미(歐陽月美)요, 그리고 노부의 이름은 구양인(歐陽仁)이라 하오." 엽고운의 시선이 중년남녀에게 향하자 노인이 설명했다. "그들은 노부의 아들부부로 구양현(歐陽玄), 며느리인 상유랑(常瑜娘)이오." "으음." 엽고운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노인, 즉 구양인은 안면 가득 짙은 감회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해천사신 중 첫째인 만사귀재 구양수 어른께서 바로 이 늙은이의 부친이시오." "아!" 그는 중년미부 상유랑을 눈으로 가리켰다.


"그 아이는 또한 독수절의 상견불 어른의 증손녀가 되오." 그 말에 상유랑의 얼굴에는 한 가닥 비감이 스쳤다. 사실 그녀는 증조부인 독수절의 상견불의 얼굴조차도 몰랐다. 따라서 혈육에 대한 막막함이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할퀴었던 것이다. 좌중의 분위기는 삽시에 침중하게 가라앉고 말았다. 엽고운은 거기에 빠져드는 자신을 느끼며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④ 엽고운은 짐짓 무심한 음성으로 물었다. "해천사신은 소생에게 신공(神公)과 영제(影帝), 두 분을 만나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일가족을 이룬 세 사람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들은 곧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는데 그 눈길에는 왠지 불안과 회의가 깃들어 있었다. 이를 눈치 챈 엽고운은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왜 이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한숨 섞인 구양인의 음성이 이내 그 뒤를 이었다. "소협, 물론 신공과 영제는 필히 만나셔야 하오. 그러나 이 늙은이의 얘기를 먼저 들어 보시겠소?" "좋습니다." "신과 영, 두 분은 원래 이복형제였소. 그 분들은 해천교(海天敎)의 양대교주로써 이전에는 서로 팽팽한 균형을 이루며 나름대로 평화를 구가해 왔었소." 구양인의 노안이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을 꼭 우애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곳 금마별부에 들어온 이후로 두 분의 사이는 크게 악화되고 말았소." 엽고운은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특히 사십 년 전, 금마무고(禁魔武庫)가 발견된 날에는 정녕 끔찍했었소. 그곳에 있는 수많은 기진이보와 무공비급을 두고 두 분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 일대 혈투를 벌이기까지 했소." 엽고운은 흠칫 놀랐다. '금마무고가 대체 무엇이기에......?' 구양인의 침울한 음성은 더욱 비감에 젖어 들었다. "그 대혈투는 해천교 사상 최악의 비극이었소. 그 싸움으로 인해 두 파로 갈라졌거니와 며느리의 조부인 내 친구가 죽고 말았소. 하지만 그 정도는 기실 아무 것도 아니오. 해천교도 중 절반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으니......." 그의 얼굴이 급기야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그까짓 보화나 무공비급 따위가 인간의 목숨보다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무튼 양 파는 그것들을 똑같이 나누어 가진 뒤에야 싸움을 중지했지만 그나마 잠정적인 휴전에 불과 했소. 지금까지도 그 두 분은 끊임없는 암투를 벌이고 있소." 엽고운은 그만 어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아니, 겨우 이 지하석부 안에서 두 파로 갈라졌단 말입니까?" 그 말에 구양인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소협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오. 그러나 이 금마별부는 그 넓이만도 무려 십만 평이 넘는 곳이오. 천여 개의 석실과 네 개의 광장(廣場), 그리고 다섯 개의 가산(假山) 등으로 이루어져 있소." "아!" 엽고운은 경이감을 금치 못했다. "이곳은 지하석부라기 보다는 하나의 성(城)이오. 실제로도 금마궁(禁魔宮)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소." "금마궁?"


"그렇소. 그 이름에 담긴 내력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으나 규모 만큼은 절대 이름에 뒤지지 않소." 엽고운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물었다. "이곳에 있는 총인원은 얼마나 됩니까?" "약 오백여 명 정도 되오." 구양인은 그 말에 이어 어두운 어조로 덧붙였다. "불행히도 현재 세 파로 나뉘어져 있소." "세 파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신공(神公) 쪽에 가담하고 있는 이백여 명과 영제(影帝) 쪽의 이백여 명, 그리고 노부와 같이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중도파가 약 백여 명 있소." 엽고운은 내심 실소했다. '당신들은 어리석소. 아무리 이 별부가 넓다 한들 어디 인간세상 전체에야 비하겠소? 그런데 이 좁은 세계에서 자청하여 복잡한 생을 영위해 가고 있었다니.......'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일까? 구양인은 흰 수염을 만지며 쓴 입맛을 다셨다. "신공과 영제, 두 분은 아무도 거스를 수가 없는 분들이오. 성격이 무섭도록 편협하게 변했는가 하면 그간에 무공 또한 상상을 불허할만큼 높아졌소이다." 엽고운은 문득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어 물었다. "노선배께서는 혹시 북혈마황(北血魔皇)을 아십니까?" "물론. 알고 있소." "신과 영이라는 그 두 분의 무공과 북혈마황을 비교하면 어느정도나 차이가 있습니까?" 구양인은 탄식과 더불어 대답했다. "냉정히 말해 과거에는 그 두 분이 북혈마황의 상대가 못되었소. 합공을 한다면 모를까......." 그러자 이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중년인이 처음으로 나섰다. "그러나 지금은 북혈마황도 두 분에게는 어림 없소. 두 분 중 한 분에게 덤벼도 백초를 간신히 버틸 수 있을 것이오." 엽고운은 눈썹을 모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신, 영이라는 지배자 못지 않게 이들도 편협해져 있다. 북혈마황이라면 천하를 뒤흔들어버린 대마두다. 그런데 어찌 그의 무공이 답보상태이리라고 함부로 단언한단 말인가?' 그는 자연스럽게 사부인 화진성을 떠올리고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통탄해마지 않으셨다. 팔십 년 전에는 막상막하였다가 세월과 함께 북혈마황의 무공은 실로 무섭게 증진했지. 결국 이십 년 전에는 사부님도 그의 오십초 적수밖에 되지 못하셨었다.' 엽고운의 입가에는 절로 고소가 머금어졌다. '그 점으로 미루어 신, 영은 기연을 얻었다지만 작금에도 북혈마황을 그렇게 쉽게 꺾지는 못할 것이다.' 이때, 구양현이 재차 말했다. "과거 조부이신 만사귀재 구양수 어른은 이곳에서 신, 영 다음가는 고수이셨소. 그러나 지금은 그 분보다 강한 고수가 최소한 열 명이 넘을 것이오. 그 모두가 금마무고에서 나온 무공비급 때문이오." 엽고운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대체 금마무고의 무공이 어느 정도이길래 이들이 이토록 자신을 갖는 것일까?' 물론 그는 자신의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고개를 갸웃해 보이며 약간의 의문을 제기했을 따름이었다. "글쎄... 당신들이 생각하는 북혈마황의 무공이란 팔십 년 전의 수준이 아닙니까? 소생의 짧은 견해로는 그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구양현은 그 말에 조금도 수긍하지 않았다. "최소한 그 정도의 고수라면 이곳에 십여 명도 넘게 있소." 엽고운은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구양현, 자고로 우물 밖에도 우물이 있고, 하늘 밖에 또 하늘이 있는 법이오.' 그의 침묵을 대신해 구양인이 다시 말했다. "솔직히 말해 노부는 그대의 출현에 대해 꼭 반갑지만은 않소. 한 편으로는 더없이 감격스러우나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차라리 오지 않았더라면 하는 심정이오." 엽고운의 눈썹이 가볍게 치켜 올라갔다. "무슨 말씀이신지......?" "정말로 그 이유를 모르겠소?" 구양인의 반문에 엽고운은 고개를 저었다. "직접 말씀해 주십시오." 구양인은 마치 신음을 토하듯 낮게 말을 이어갔다. "그것은 신과 영, 두 분이 금마궁 밖으로 나갈 가망이 없다고 느끼게 되면 혹여 야망이나 집념을 버리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우리는 두 분이 화해하고 다시 의좋게 살기를 염원하오." 엽고운은 그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신과 영이라는 그 두 사람이 진즉부터 당신의 뜻을 헤아렸다면 이러저러한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을....... 탐욕이란 그처럼 인간의 눈을 멀게 하는 모양이외다.' 그러나 구양현의 내심은 또 다른 모양이었다. 그는 다분히 냉소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아버님, 그런 허망한 기대는 갖지 마십시오. 그 두 노인은 아마도 지금 쯤이면 이곳에 외인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도 뻔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구나." 구양수는 허탈한 한 마디를 끝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그가 알기로도 구양현의 말은 절대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신공과 영제는 곳곳에 측근의 인물들을 세간으로 깔아놓고 있어 금마궁 내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손바닥 들여다 보듯 훤하게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 두 사람의 이목을 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구양인의 노안에는 짙은 수심이 어렸다. 그것은 무공 못지 않게 심기가 깊은 신과 영이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이후로 어떤 일을 벌일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발 그로 인한 희생이나 없어야 할텐데.......' 이것이 바로 해천교에 평생을 바친 한 노인의 충정이었다. 그에 반해 엽고운은 나름대로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눈을 내리감았다. 그의 두뇌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회전했다. 그는 먼저 처신에 대해 결론을 지은 후, 스스로에게 물었다. '신, 영은 이곳에서 각자 제왕처럼 군림하는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능력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불현듯 석실 밖에서 한 줄기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구양인은 신령을 받으시오!" "으음......." 구양인은 미리 각오하고 있었던 듯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그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침중한 신음을 흘려낼 뿐이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는 사이, 석실 밖으로부터 한 명의 소동이 태연하게 걸어 들어왔다. 제 8 장·신공(神公)과 영제(影帝) ① 소동(少童). 그는 기껏해야 십이삼 세 남짓이었다. 그러나 창백한 얼굴, 아니 그의 몸 전체에서 사뭇 냉혹함과


오만함이 묻어 나왔다. 역시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일신에 가죽옷을 걸쳤는데 그는 지금 두 손으로 하나의 금패를 받쳐들고 있었다. <신령(神令).> 금패의 전면에 양각된 글씨에서 광채가 발산되었다. 구양인을 위시하여 구양현, 상유랑, 구양월미 등 네 명은 일제히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구양인, 신령을 받들겠습니다." 그러자 소동이 차갑기 그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구양인, 외부에서 온 자를 즉시 신공부(神公府)로 보내시오. 신공께서는 벌써부터 기다리고 계셨소." 명령조인 그 말에 구양인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는 불안이 깃든 눈으로 소동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러자 소동은 싸늘하게 호통쳤다. "구양인! 감히 신령을 거부하겠다는 것이냐?" 듣고 있던 엽고운의 검미가 홱 거슬러 올라갔다. 이어 그가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서자 소동이 음산하게 물었다. "그대가 외부에서 왔다는 자인가?" 엽고운은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렇다네." "신공의 명이시다. 신공부로 따라와라." 소동의 태도는 그야말로 안하무인격이었다. "나 역시 일단 이곳에 들어오게 된 이상 네가 뭐라 하든 신과 영이라는 두 분을 만날 것이다." 엽고운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소동은 의아해하는 일면 뭔가 비위에 거슬렸는지 콧등을 슬쩍 찡그렸다. 엽고운의 눈이 그런 그를 직시했다. "먼저 너의 그 고약한 버릇부터 고쳐 놓아야겠다." 구양인 등 네 명은 동시에 안색을 굳혔다. 구양인이 재빨리 엽고운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만 두시오, 소협. 그는 신공의 심복인 십이천동(十二天童) 중 한 명이오. 건드려봤자 이로울 것이 없소.) 엽고운 또한 전음으로 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것입니다.) 한편. 소동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만면에 짙은 살기를 띄었다. 그의 입술 꼬리가 괴이하게 말려 올라갔다. "크흐흣! 네가 나 마살천동(魔殺天童)을 훈계 하겠다고?" 엽고운은 대답을 생략하고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 마살천동은 울화가 치민 듯 이를 갈았다. "좋다! 신공께 끌고 가기 전에 네 놈에게 우선 단단히 맛을 보여주겠다." 그는 대뜸 오른손을 뒤집었다. 쉬익! 그 순간, 마살천동의 손바닥에는 놀랍게도 푸른 빛의 가느다란 선이 나타났다. 파파팟--! 그가 우장을 휘두르자 푸른 기운이 전면을 향해 날카롭게 뻗어나왔다. 그것은 흡사 독거미가 줄을 토해내는 광경을 연상시켰다. 엽고운은 이같은 공격에 저으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단하군! 꼬마에게서 이렇듯 괴이한 수법을 보게 되다니.'


그는 일보 후퇴와 더불어 좌로 빙글 돌며 공격을 피했다. "흐흐흐... 청살귀주장(靑殺鬼蛛掌)을 피하겠다고? 어림 없다." 파파팟--! 마살천동의 손바닥이 어지럽게 춤추었다. 그에 따라 푸른 기운이 현란하게 뻗어나와 엽고운을 휘감기 시작했다. 쉬이이익--! 귀를 찢는 듯한 파공성과 더불어 푸른 선은 무시무시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엽고운은 본의 아니게 수십 번이나 몸을 움직이며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다. '쯧! 내가 이 꼬마를 너무 과소평가 했구나.' 그는 정신을 가다듬는 한편 두 손가락을 구부려 민첩하게 마살천동의 손목을 노렸다. 쉬익--! 날카로운 경풍이 뻗었다. 그러나 마살천동은 두 발을 어긋나게 밟으며 가볍게 이를 피했다. "흐흐흐... 만사귀재 구양수의 절기인 단혼맥혈수(斷魂脈血手)로구나. 과거에는 그것이 해천교의 최고 무공에 속했지만 지금은 고작 하류에 불과하다." 마살천동은 재차 좌권우장(左拳右掌)을 매섭게 뿌려냈다. 쏴아아--! 파파팟! 엽고운의 모습이 일순 안개로 화하더니 스르르 꺼져버렸다. 잠종무영보를 펼쳐 공격권을 벗어난 것이었다. "아니?" 마살천동은 목표를 잃자 당황한 나머지 금세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말았다. 소년의 한계는 역시 어쩔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헉!" 어깨가 뜨끔하더니 힘이 쭉 빠지는데야 어쩌겠는가? 이어 그는 등 뒤로부터 엽고운의 낭랑한 웃음소리를 들어야 했다. "하하하... 꼬마야, 네 무공도 제법이긴 하다만 무해(武海)는 넓다. 그에 비하면 너는 아직 우물 안 개구리다." 마살천동의 창백한 얼굴이 분노로 인해 시퍼렇게 변했다. "이... 이 놈이 치사하게 사술(邪術)......." 짜악--! "크윽!" 유갑스럽게도 그의 말은 도중에 비명으로 화했다. 왼뺨에서 불이 번쩍 일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네, 네 놈이 감히 나를......." 그의 뺨을 멋지게 후려친 엽고운은 냉엄하게 잘라 말했다. "과연 네 그 말버릇이 어디까지 가는지 보겠다." 짝! 짝! 짝--! 연속해서 격타음이 울렸다. "윽! 커억......." 마살천동은 물론 잇달아 비명을 토해냈다. 그의 양뺨이 무참할 정도로 부풀어 올랐는가 하면 입가장자리는 온통 선혈로 더럽혀져 버렸다. 그럼에도 굽힐 줄 모르는 기개만은 그럴싸했다. "이 찢어 죽일 놈! 내 필히 너를 죽이겠다." 엽고운의 음성이 비로소 은은한 분노를 드리웠다. "네가 아직도 네 잘못을 모르는구나!"


짝! 짝짝짝--! 그는 양손의 교차 속도를 배가시켰다. "크으윽--!" 마살천동은 눈 앞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이 오가는 것을 보았다. 이빨이 부러져 나가고 입 안에는 피가 가득 고였다. "빌어라! 그러지 않으면 네 이빨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엽고운의 음성은 다시 담담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의 손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었다. "크윽! 크흐흐흐......." "얼마나 더 버티나 볼까?" 짝! 짝! 짝짝짝--! 마살천동은 이제 얼굴 전체가 홍안이 되어 버렸다. 실로 무서운 벌의 결과였으나 그렇게 되니 비로소 어린애다왔다. 짝! 짝짝--! 엽고운의 태연한 손놀림은 급기야 마살천동의 코에서까지 피가 터지게 했다. "우우우......!" 매에는 장사가 없다던가? 마침내 마살천동은 항복을 선언했다. "자... 잘못... 크윽! 잘못했다--!" "그 공손치 못한 말버릇을 고치라고 했을텐데?" 엽고운의 담담한 음성이야말로 그의 귀에는 아수라귀의 협박보다 몇 배나 더 무섭게 들리는 것이었다. 짝--! "악! 자... 잘못... 했습... 니다!" 마살천동은 얼굴이 두 배나 커진 후에야 처음으로 뿌리 깊은 습관의 벽에서 일탈할 수 있었다. 엽고운은 대소했다. "하하하... 진작 그럴 것이지. 자고로 어린애는 그처럼 어린애다와야 하는 것이다." 이로써 마살천동의 극악한 기세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자존심이 땅바닥에 떨어졌으나 그는 더 이상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만 내심으로 증오를 끓어올리는 것만이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놈! 두고 보자. 내 이 일을 신공께 알려 네 놈을 갈가리 찢어 죽이게 하고야 말겠다.' 사고(思考)가 단순하다 보니 그만큼 원한도 깊게 자리잡았던 것이었다. 아무튼 그는 허리와 어깨가 다시 뜨끔하더니 몸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자, 이제 너의 주인인 신공께 안내해라." 엽고운은 그렇게 말한 뒤 구양인을 돌아다 보았다. "노선배님, 염려하지 마십시오. 곧 돌아오겠습니다." "소협......." 구양인 일가는 어두운 안색으로 그를 응시했다. 특히 미소녀 구양월미는 잔뜩 겁먹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엽고운은 그녀를 향해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장난기가 엿보이는 그 동작은 구양월미를 안도하게 하는 일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금세 도화빛으로 물들여 놓았다. 그런 연후, 엽고운은 마살천동을 재촉했다. "자, 가자." 휙--! 마살천동은 내심이야 어떻든 군말 없이 앞으로 몸을 날렸다. 엽고운이 그 뒤를 그림자인 양 따랐다. 그렇게 그들은 긴 통로를, 그리고 수많은 석실과 두 개의 커다란 광장, 한 개의 가산 등을 스쳐 지났다.


'과연 이곳이 넓기는 넓구나.' 엽고운은 새삼 경이감을 금치 못했다. ② <신공부(神公府).> 커다란 석문에 웅휘한 필체로 그런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마살천동이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신공께 아룁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자를 데려 왔습니다." 쿠르르릉--! 굉음과 함께 석문이 좌우로 열렸다. 그 뒤를 이어 웅후한 음성이 또 다른 진동음을 울렸다. "들어오라!" 마살천동은 안으로 들어가더니 고개를 숙이며 한 옆에 섰다. 엽고운은 석문 안을 대충 살펴 보았다. 그곳은 일종의 대전으로 중앙에 양탄자가 길게 깔려 있었고 그것이 끝나는 위치에는 커다란 태사의가 높이 놓여 있었다. 한 명의 금의노인이 그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좌우에는 네 명의 중년인이 시립하고 있었다. 실내는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천장은 물론 벽면에도 각종 벽화가 새겨져 있었으며 금은보옥 등이 여기저기 박혀 있었다. 특히 사면 기둥에는 금룡이 둘러져 있었는데 천장으로부터 붉은 휘장이 늘어져 자못 엄숙한 분위기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후후... 정녕 호사의 극치로군. 이래서 과연 인간의 욕구란 끝이 없다는 것일까? 이런 것들을 누리면서도 달리 쟁취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니.' 엽고운은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태사의에 앉아 있는 금의노인은 외견상 약 칠순 정도로 보였다. 그러나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그것 뿐이었다. 눈이 실같이 가늘고 콧날이 예리한 반면 안광이 조금도 내비치지 않아 무공의 깊이를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실제의 나이 또한 짐작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한 것은 그가 팔십 년 전에도 해천교의 교주였으니 백 세가 훨씬 넘은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를 호위하고 있는 네 명의 중년인은 각기 도끼, 검, 도, 그리고 가슴에 비도를 십자로 교차하여 꽂고 있는 괴인 등이었다. 사용하는 무기가 달라서인지 그들의 인상은 저마다 달랐다. 한결같이 안색이 음침하고 싸늘하다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마살천동은 방금 전과는 달리 의기양양한 투로 말했다. "부주, 제자는 신령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했습니다." 신공부에 들어오니 기가 되살아난 모양이었다. 어쨌든 보고를 듣게 되자 태사의에 앉은 인물, 즉 신공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마살천동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마살천동의 얼굴이 두 배나 커진 것을 보더니 그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신공은 곧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마살천동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즉시 대답했다. "저 놈이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지 않길래 제자는 따끔하게 혼을 내주려 했습니다. 그런데 비겁한 암수를 써서 오히려 제자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신공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음, 결국 네가 패했단 말이지?" 마살천동은 막바로 심한 저항감을 드러냈다.


"그, 그런 뜻이 아니라......." 신공이 그의 말을 차갑게 잘라 버렸다. "마살, 본좌가 애초에 너에게 뭐라고 말했었느냐?" "네......?" "그 분을 공손히 모셔오라고 했을텐데?" 마살천동은 당황해마지 않았다. "하, 하지만 그는 신령을 모독......." 이번에는 신공의 호통이 그의 말을 일축했다. "미련한 것! 그는 본부의 인물이 아니다." "제자는 그저......." 추상같은 추궁은 계속 이어졌다. "유치하고도 경망스럽도다! 너는 본좌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 "부, 부주......!" 마살천동은 그만 안색이 핼쓱하게 질리고 말았다. 그를 향해 신공은 비정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네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본좌가 말을 안해도 알 것이다." 마살천동의 얼굴에는 순간적으로 절망이 어렸다. 급기야 그는 털썩 무릎을 꿇으며 애원하기에 이르렀다. "부주, 제발 용서를......." 신공은 그에게서 시선을 옮겨 엽고운을 응시했다. "그것은 본좌의 권한이 아니다. 네가 용서를 구하려거든 저 손님에게 구하도록 하라." "우우......!" 마살천동은 안면을 일그러뜨렸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급히 엽고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엽고운의 얼굴에서 단 한 점의 연민도, 호의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하긴 저 자가 나를 비호해 줄 리가 없지!' 마살천동은 그만 눈 앞이 아득해졌다. 죽음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잠시 그들 두 사람 사이를 오가던 신공의 눈빛이 야릇하게 변했다. 특히 마살천동을 내려다 보는 그의 가느다란 눈에서는 일순 살기가 번쩍 일었다가 사라졌다. 이를 느낀 마살천동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부주......." 그의 호소는 거의 울부짖음으로 화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엽고운의 기색에는 여전히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신공의 얼굴이 마침내 무섭게 굳어졌다. 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마살천동을 향해 가볍게 눈짓을 보냈다. 마살천동은 체념한 듯 고개를 푹 떨구었다. 어차피 항명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오른손이 부들부들 떨며 품 속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더니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쉬익--! 그러나 비수는 곧 무형의 타격을 받고 튕겨나가 버렸다. 쨍! 엽고운이 그 뒤를 잇듯 비로소 전면으로 나섰다. "소생,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말해 보시오." 짐짓 태연을 가장하고 있으나 신공은 이미 엽고운에게 적의(敵意)를 품기 시작했다. 그것은 엽고운이 아무런 동작을 취하지 않았음에도 마살천동의 비수가 날아갔기 때문이었다.


물론 무형심지인(無形心指印)이라는 천원무경 내의 절학을 그가 알 리 없었다. 그렇기에 전혀 기척도, 소리도 없는 천고의 기학은 그의 기분을 더욱 더 상하게 만들었다. 그 귀신같은 한 수의 주인공이 담담히 말하고 있었다. "소생, 금마궁 내의 법도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굳이 피를 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의 눈과 신공의 눈길이 찰나적으로 부딪쳤다. 그 순간, 놀랍게도 신공의 예리한 눈꺼풀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무서운 놈! 해천사신은 내게 감당하기 힘든 놈을 보냈구나.' 신공은 이런 생각을 했으나 곧 미소로 얼버무렸다. "자네가 그런 말을 하는 데야 할 수 없지." 그는 다시 냉엄하게 마살천동을 꾸짖었다. "어서 손님께 감사드리지 않고 무엇하느냐?" 마살천동은 그 기세에 떼밀려 엽고운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엽고운은 마살천동의 눈빛에서 지독한 원한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아이로구나, 너는.......' "그만 물러가거라." 신공의 명령에 마살천동은 신형을 번뜩여 어디론가 사라졌다.그 직후, 신공은 아래에 있는 석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협, 이리 앉게나." 그러더니 그 자신 또한 태사의에서 내려와 석탁과 마주하고 앉았다. 그의 음성은 이례적으로 은근하게 이어졌다. "자네는 해천사신의 제자이니 노부가 말을 놓아도 되겠지?" 엽고운은 빙긋 웃으면서도 분명한 어조로 답했다. "소생은 해천사신과 사도의 관계가 아닙니다. 단지 그들의 부탁을 받고 왔을 뿐입니다." 그 말에 신공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흐음, 그럼 노부가 실례한 셈이군." 그의 가느다란 눈이 날카로운 빛을 발하며 엽고운을 응시했다. "소협은 이곳까지 이르렀으니 물론 관문들을 돌파했겠지?" 엽고운은 대답 대신 몹시도 피곤한 표정을 보였다. "죄송합니다. 소생은 너무 지쳐서 좀 쉬고 싶습니다." 신공은 번번이 자신의 말이 막히자 내심 노기가 치밀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는 화를 눌러참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 내가 그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네." 그는 수하들, 즉 네 중년인을 향해 손을 들었다. "소협께 쉴 곳을 안내해 드려라." 엽고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고했다. "말씀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소생이 이곳에 들어와 제일 먼저 만난 분이 구양노인입니다. 그 분께로 가겠습니다." 신공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럴 텐가?" "그럼 소생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엽고운은 포권지례를 취한 뒤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그의 깍듯한 언행에는 전혀 흠잡을 곳이라곤 없었다. 하지만 지금껏 신공의 면전에서 이토록 거침없이 행동한 자는 없었다.


신공을 둘러 싸고 있던 수하들 중 도끼를 멘 자가 분노한 듯 앞으로 튀어나가려 했다. 신공이 손을 저어 그를 제지시켰다. 쿠르르릉--! 석문이 열리자 엽고운은 당당한 걸음으로 석실을 빠져 나갔다. 쿵! 그를 내보낸 후 석문은 도로 닫혔다. 예의 중년인이 도끼자루를 움켜 쥐며 분통을 터뜨렸다. "실로 건방지기 짝이 없는 놈입니다." 검을 멘 자도 한 마디 거들었다. "감히 부주 앞에서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신공은 무거운 음성으로 두 사람의 말을 받았다. "너희들은 그 자의 반도 따르지 못한다." "옛?" "놈은 무서울 정도로 냉철하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놈은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입장을 알고는 그 점을 오히려 역이용하려 들고 있다. 이대로 돌아간 것은 아마도 생각을 정리하여 앞으로의 처신을 결정하려는 심산일 것이다." 신공의 가느다란 눈에서는 예기가 뿜어져 나왔다. "해천사신은 큰 우( )를 범했다. 지나치게 영리한 놈과 인연을 맺은 것이지. 어쩌면 놈은 이곳에서 뜻하지 않은 풍파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으음......." 네 중년인은 일제히 침중한 신음을 흘렸다. ③ 신공부를 나온 엽고운은 절로 미간이 찌푸러 들었다. '구양노인에게 들은 것보다 훨씬 지독하구나. 신공, 그 자는 편협한 정도가 아니라 음독하고 잔혹한 인물이다.' 그는 마살천동의 성품을 생각해 내고는 내심 중얼거렸다.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주종(主從)이 똑같구나.' 엽고운은 방금 전 자신이 지나왔던 길을 거의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걷는 것은 단지 좀더 세밀하게 지형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휙--! 한 인영이 마치 연기처럼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신법이었다. 엽고운조차도 앞을 막아서도록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자의 모습을 보게 된 엽고운은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상대는 뜻밖에도 십삼사 세 정도의 귀여운 소녀였다. 짧은 치마와 상의는 역시 물고기의 가죽이었다. 백옥같이 흰 살결이 입은 옷과 잘 어울렸다. 머리의 한 옆에는 취록색의 나비를 깜찍하게 꽂고 있었다. 소녀는 작은 입술을 움직여 꾀꼬리같은 음성을 쏟아냈다. "저의 주인께서 공자님을 뵙자고 하십니다." 그 말에 엽고운은 직감적으로 와 닿는 것이 있었다. '영제(影帝)겠군.' 그러나 그는 의중을 감춘 채 빙긋 웃었다. "나 말인가? 나는 낭자의 주인은커녕 낭자를 본 기억도 전혀 없는데......?" 이번에는 소녀가 배시시 웃었다. "소녀가 어찌 엽공자님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엽고운은 표정을 고쳐 정색을 했다. "흠, 이제 보니 낭자의 주인이란 영제이신 모양이군. 맞는가?" 반면에 소녀는 이렇다할 꾸밈없이 명랑하게 대꾸했다. "네." "만약 내가 가지 않겠다면?" "네?" 소녀는 금세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나는 지금 피곤해서 쉬러 가는 길이다. 어린 낭자, 영제는 내일 뵙도록 하지." 엽고운의 말에 그녀는 무척 곤란한 듯 울상을 지었다. "안 돼요, 그건......." "왜지?" "영제께서는 반드시 공자님을 모셔오라고 하셨어요." "호오! 그렇다면 무력이라도 쓰겠다는 건가?" 소녀는 그야말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소녀는 감히 그런 무례를 저지를 수 없어요. 제게는 단지 간청을 드리는 것밖에는 허용되지 않았어요." 엽고운은 소녀를 직시하며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낭자의 향명(香名)은 어찌 되지?" "어머나!" 소녀는 얼굴을 붉혔으나 곧 조그맣게 대꾸했다. "취접(翠蝶), 조소아(趙小娥)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요." 엽고운은 느닷없이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영제께서는 비상한 수단을 강구해 내셨군." 이어 그는 취접 조소아에게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내가 미녀에게 약한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핫핫핫......." 취접은 얼굴이 홍시가 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 가지! 어린 낭자." 엽고운의 시원스러운 한 마디에 그녀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고마와요, 엽공자님......." 취접은 곧 앞장서 안내했다. 엽고운은 그녀를 따라 걸으며 풋풋한 소녀의 향기를 코 끝으로 접할 수가 있었다. 반면에 그는 의문나는 점 또한 기탄없이 물어 보았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모두 옷을 그런 식으로 지어 입는가?" 엽고운은 기이한 눈으로 그녀가 걸친 가죽옷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의식한 취접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수줍음과는 별개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곳에는 수많은 기진이보가 있어요. 제일 귀한 것이 옷감이지요. 고귀한 신분이 아니면 옷을 제대로 걸칠 수가 없어요." "음." 엽고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계속 말을 주고받는 사이, 두 사람은 여러 갈래의 통로를 지나 목적지에 이르렀다. <영제전(影帝殿).> 한 석문에 쓰인 그 글씨는 매우 유려한 필체였다. 취접이 석문을 향해 몇 번인가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엽고운은 보았다. 어느 한 부분에 취접의 내력이 부딪치는 것을. 우르르릉--!


석문이 좌우로 갈라지며 거대한 대전(大殿)이 나타났다. 사방이 모두 대리석으로 축조된 화려한 곳이었다. 그러나 엽고운은 안으로 들어서자 의혹을 느꼈다. 풍경 자체는 신공부와 별다른 점이 없었으나 양탄자가 끝나는 곳의 태사의 위에는 의외로 아무도 없었다. 더욱 더 기이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취접이 텅 빈 태사의를 향해 공손히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영제께 아룁니다. 엽공자님을 모셔 왔습니다." 그러자 한 줄기 유령과도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그만 돌아 가거라." "네." 취접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곳을 뜨기 직전,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엽고운을 힐끗 돌아보았다. 엽고운은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떠올렸다. '과연 내 눈이 틀리지 않았군. 어쩌면 이 소녀야말로 이곳에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리라.' 그는 취접에게 다시 한 눈을 찡긋해 인사를 대신 했다. 이때, 태사의 쪽에서 예의 음성이 들려왔다. "엽고운 소협이 맞는가?" 엽고운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는가?" "후후......." 엽고운의 입가에 기소가 매달렸다. "나는 형체도 없는 인간과는 얘기하고 싶지 않소이다." 우렁찬 웃음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핫핫핫핫핫......." 태사의 위에는 곧 한 무더기의 안개가 서렸다. 그러더니 그것은 점차 뭉쳐져 사람의 형태로 화하기 시작했다. 엽고운은 그 괴이한 광경에 내심 침음성을 발했다. '으음, 저것은 또 무슨 기공이란 말인가?' ④ 잠시 후. 그는 태사의에 앉은 채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한 명의 백의노인을 볼 수가 있었다. 나이는 약 팔순 가량, 안색이 창백한데다 몹시 음침한 인상을 풍기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더욱 괴이한 것은 노인의 눈빛이 거의 투명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또한 그의 주위로는 뿌연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백의노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그는 아래로 내려오더니 서슴없이 엽고운의 손을 잡았다. "내가 귀빈에게 무례했네. 용서하게." 엽고운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무례했던 쪽은 소생입니다." "핫핫핫... 소협이 그렇게 말하니 오히려 더 미안하군." 백의노인, 즉 영제는 그의 손을 이끌어 석탁으로 향했다. "우선 자리에 앉게." "먼저 앉으십시오." 두 사람은 선후로 마주 앉았다. 영제가 담담히 물었다. "신공을 만나 보았나?"


"만났습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던가?" 엽고운은 마치 스쳐지나는 투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별 말은 없었습니다." 영제는 쓴 입맛을 다셨다. "아마도 자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의 체면 때문이겠지. 좋아, 나도 더 이상은 묻지 않겠네." 엽고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영제가 이번에는 꽤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노부가 있으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게. 그가 자네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던 노부가 이렇게 곁에 있는 한 감히 건드릴 수는 없을 것이네." '후후... 자고로 손뼉이란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지. 영제, 당신도 음험하기가 신공과 다를 바가 없구려.' 엽고운은 내심 고소를 짓는 한편 짐짓 난색을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영제가 즉각 반응을 보였다. "흐음! 그가 필경 자네에게 무엇인가 당부한 모양이군." '후후... 매우 마음에 드는 추측이오.' 엽고운은 내심 야유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당혹을 가장했다. "그렇습니다." "그래, 무엇을 당부하던가?" "금마궁을 벗어나는 사관(四關)에 관해......." 엽고운은 일부러 말 끝을 흐렸다. "사관이라고?" "네." 영제는 만면에 은은한 살기를 드리웠다. "놈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이번에도 아마 자네를 이용해 자신의 세력만 몰래 이곳에서 빼내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어 차갑게 덧붙였다. "놈의 비열함에 대해서는 노부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놈을 견제할 수 있는 사람도 역시 나 영제 뿐이다." 엽고운은 그 말에 어떤 토도 달지 않았다. 영제는 힐끗 그의 눈치를 살피더니 다시 물었다. "물론 해천사신은 자네에게 그 사관을 뚫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겠지?" "그렇습니다." "노부에게 그것을 알려줄 수 없겠나?" 엽고운은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영제는 그와의 거리를 좁혀 가까이 다가왔다. "왜? 곤란한 점이라도 있나?" 엽고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우선 사관은 너무도 복잡하여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신공께선 이미 제게......." 그는 말하다 말고 갑자기 입을 닫았다. 영제의 안색이 일변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신공이 자네에게 무엇을 어찌 했단 말인가?" "아, 아닙니다. 아무 것도......." 영제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더 말하지 않아도 알겠네. 분명 놈은 신공부의 보물로 자네의 환심을 사려 했겠지?"


엽고운은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안면을 통해 미미한 변화를 내비쳤다. 반면에 그는 급히 고개를 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아닙니다! 그건......." 그것은 하나의 단정을 유도하는 언행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제는 단 일 점의 회의도 없이 그의 말을 받아 들였다. "그만! 이제 되었네. 실상 이 금마별부에는 보화나 무공비급이 수두룩하지. 특히 무공비급은 이곳에서 하급에 속하는 것도 무림에 나가면 절정비급으로 불리울 정도네. 그 중 어떤 것이 자네에게 건네 갔을지는 뻔한 노릇이지만......." "소생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영제께서는 제 말씀을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엽고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한 몸짓은 영락없이 입장이 거북해진 자의 그것이었다. 그의 뛰어난 연기력(?)은 영제의 입을 통해 곧바로 입증되었다. "자네는 아무 걱정하지 말게. 노부가 다 알아서 할테니." 엽고운은 낮게 한숨을 불어내며 포권했다. "소생은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그럼......." "잠깐만!" 엽고운이 몸을 돌리려 하자 영제는 급히 그의 소매를 잡았다. "또 무슨......?" 엽고운의 검미가 슬쩍 찌푸러 들었다. 이를 느낀 영제는 서둘러 품 속에서 얇은 책자 한 권을 꺼냈다. "이것은 사신보(四神譜)라는 절세의 비급이네. 내 자네같이 출중한 젊은이를 만나게 되어 그 기념으로 내놓는 것이네." 엽고운은 정색을 하며 손을 저었다. "소생은 받을 수 없습니다." "부디 사양하지 말아 주게. 단지 노부의 성의일 뿐 다른 뜻은 조금도 없으니 안심해도 되네." 엽고운은 몹시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신공께서 나중에라도 이 일을 아시면......." 그를 향해 영제는 자못 의미심장한 미소를 건넸다. "여기가 어디인가? 영제전일세.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는 법이 없지. 그리고 지금은 여기 있는 사람이라야 우리 둘 뿐이지 않은가?" 엽고운은 짐짓 주위를 살핀 후,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잘 유용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엽고운은 다시 한 번 포권하고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영제는 말없이 멀어져 가는 엽고운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착각이었을까? 그의 눈에서 찰나적으로 한 가닥 섬광과도 같은 빛이 명멸한 것은. 제 9 장·지사(志士)를 얻다 ① 금마궁은 그야말로 별유천지(別有天地)였다. 어느덧 엽고운이 이곳에 온 지도 열흘이 흘렀다. 그 간에 그는 거의 매일같이 신공과 영제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나름의 구상들을 현실화시켜 나갔다. 엽고운은 물론 목적이 따로 있는 이상 어느 순간에도 본연의 자세를 흐트러뜨린 적이 없었다. 신공에게는 영제의, 영제에게는 신공의 핑계를 대며 금마궁 탈출의 날을 일단 질질 끌었다. 와중에서 재미있는 점이 있다면 엽고운이 거부(巨富)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각종 무공비급 외에도 수많은 기진이보들이 그의 수중에 굴러들어온 것이었다. 그것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신공과 영제가


그에게 억지로 떠맡긴 뇌물이었다. 아무튼 그러는 동안 엽고운은 애초에 뜻한 바대로 금마궁 내의 상황을 거의 파악해낼 수 있었다. 먼저 신공의 휘하에는 세 명의 무서운 고수가 있었다. 오행수(五行 ) 독고천(獨孤天), 팔황천마(八荒天魔) 음무회(陰無回), 신안(神眼) 여후량(呂侯亮) 등이 그들이었다. 그 중 오행수는 금마무고의 오행마경(五行魔經)을 터득한 자로써 무공으로는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였다. 그에 반해 팔황천마는 독공절장(毒功絶掌)을 익혔으며 성품이 잔악무도한 것으로 으뜸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가장 위협적인 자는 역시 신안 여후량이었다. 그는 심계가 깊고 치밀한 위인으로 일신의 무공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내면을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일설에 의하면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상대를 죽일 수 있다는 자가 바로 그였다. 또한 신공에게는 항상 그림자처럼 따르는 네 명의 고수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중년의 나이였으며 형제였다. 마부(魔斧) 사마통(司馬通), 귀검(鬼劍) 사마각(司馬角), 환도(幻刀) 사마수(司馬水), 혈섬(血閃) 사마군(司馬君) 등. 그들은 어릴 적부터 신공으로부터 각기 틀린 절기를 직접 전수 받았으며 그의 옆에서 촌보도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었다. 그 외에 또 있다. 팔구 세에서 십사오 세에 이르는 소동들로 구성된 십이천동(十二天童)이 바로 다음 서열이었다. 그들은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역시 신공이 직접 키운 인물들로 하나같이 독랄하기 이를데 없었으며 무공도 신비막측했다. 그 밖에도 신공에게는 이백여 명의 수하들이 더 있었는데 대부분이 강호에 내세우면 절정고수에 해당하는 자들이었다. 이같은 세력이란 중원무림에서 능히 일문을 세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반면에 영제의 세력도 결코 못지 않았다. 그에게는 사대고수(四大高手)와 무영사비(無影四秘)가 있었다. 사대고수는 혈불(血佛) 공화승(空火昇), 묵편마검(墨鞭魔劍) 절염(截焰), 천갈부인(天蝎婦人) 화옥향(花玉香), 탈명비마(奪命飛魔) 서문빙(西門氷) 등을 이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영사비란 각기 빙매(氷魅) 냉하상(冷霞霜), 소랑(笑娘) 전운미(全雲美), 월교(月嬌) 백견아(白絹娥), 취접(翠蝶) 조소아(趙小娥) 등이었다. 사대고수의 무공은 거의 추측이 불가능했다. 혈불은 원래 중이 아니었다. 단지 얼굴이 붉고 머리가 벗겨져서 그렇게 불리울 뿐이었다. 몹시도 음험한 인물이라는 것이 그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묵편마검은 별호 그대로 묵편(墨鞭)과 마검(魔劍)의 귀재였다. 천갈부인은 독의 제일인자였다. 실제 나이는 삼십대 후반이었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이십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타고난 미모와 더불어 품행이 매우 단정치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탈명비마는 일명 천수비마(千手飛魔)라고도 불리웠다. 그런 만큼 그는 전신에 백팔 가지의 무시무시한 암기를 숨기고 있으며 암기수법 또한 가히 기경에 올라 있었다. 무영사비는 모두 이십 미만의 절세미녀이자 영제가 손수 길러낸 재녀들로 저마다 개성이 달랐다. 첫째인 빙매는 미모에 반해 웃음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항시 전신에서 얼음장같은 한기를 풍겼다. 둘째인 소랑은 빙매와는 정반대였다. 언제라도 입가에서 달콤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는데 그 웃는 모습의 매력이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세째인 월교는 실로 특이한 미모의 소지자였다. 이녀(異女)인지 눈이 푸른 색이었고 피부는 그야말로 백설같이 희었다.


네째인 취접, 그녀는 무영사비 중 가장 막내로 무척이나 천진난만했다. 머리에 별호와 똑같은 푸른 나비를 꽂고 다녔다. 이들 무영사비는 각기 독특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연약한 일개 여인이라 하나 결코 무시 못할 고수들이었다. 영제 휘하의 고수는 물론 이뿐만이 아니었다. 신공과 마찬가지로 절정급의 인물들로만 근 이백 인에 달했다. 아담한 석실. 엽고운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한 명의 아름다운 소녀가 안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바로 구양월미였다. 그녀는 침상 위를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아직도 자고 있잖아?' 구양월미는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대체 얼마나 자려고.......' 그녀는 침상 곁으로 다가가더니 엽고운을 흔들어 깨웠다. "운오빠, 이제 그만 일어 나세요." "으음......?" 엽고운은 부시시 눈을 치뜨며 몸을 뒤척였다. "미안하지만 더 자야겠다. 으음......." 그가 돌아누워 버리자 구양월미는 입술을 삐죽였다. "흥! 안돼요. 어서 일어나라니까요." 그녀는 그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간지럼을 태웠다. "그, 그만... 그만해라! 하하하......." "빨리 일어나지 않으면 더 간지를 거예요?" 그 말에 엽고운은 튕기듯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 바람에 더 간지럼을 태우려던 구양월미는 그만 손을 헛짚어 그의 품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어머나!" 그녀는 깜짝 놀라 급히 몸을 빼려 했다. 그러나 그 의도는 실현되지 않았다. "네가 안면을 방해했겠다?" 엽고운의 억센 팔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아 버린 것이었다. "후후... 너는 의당 벌을 받아야 한다." 그는 이어 구양월미의 터질듯 동그란 둔부를 가볍게 때렸다. 찰싹! "맙소사!" 구양월미는 삽시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버렸다. "이... 야만스러운......." 그녀는 주먹으로 엽고운의 가슴을 치려 했다. 하지만 엽고운은 이를 슬쩍 피하며 그녀의 매끈한 허리를 더욱 조여 안았다. "으음!" 구양월미는 야릇한 신음을 토하더니 갑자기 순한 양처럼 태도가 바뀌어 그의 품으로 무너졌다. 엽고운은 맨살이 노출된 구양월미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은 실로 그의 상상을 웃도는 것이었다. 구양월미는 눈을 내리감은 채 도화빛이 되어버린 얼굴을 그에게 들이밀고 있었다. 그녀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뜨거운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쯧! 난감하군.'


엽고운은 내심 혀를 찼으나 가슴이 절로 뜨거워지는 것만은 그 자신도 어쩔 수가 없었다. 반나의 상태로 밀착되어 오는 여체의 감촉은 그의 정염을 부추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엽고운은 오른손으로 털가죽 이불을 끌어다 그녀와 자신을 함께 덮었다. 그 의미를 어찌 해석했는지 구양월미는 그의 목에 두팔을 걸고는 더욱 적극적으로 매달려왔다. 엽고운의 뜨거운 입김이 그녀의 귀에 훅 하고 부어졌다. "안고 싶다. 너를......." 구양월미는 대답 대신 눈을 동그랗게 치뜨며 그를 응시했다. 황홀감이 깃든 그녀의 눈은 무언으로 응락을 표하고 있었다. 엽고운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며 다시금 속삭였다. "너는 이제 내 여자다." 연인(戀人)의 이 한 마디처럼 여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이 또 있을까? 아닌 게 아니라 구양월미의 새빨개진 얼굴에는 감동의 물결이 스르르 번졌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더니 거의 울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요. 소매는 오빠의 여자예요." 이를 필두로 엽고운의 손길은 능숙하게 구양월미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아아......." 구양월미는 온몸에 불꽃이 당겨지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자신을 내맡겼다. 가쁜 숨결이 그녀의 가슴을 마구 들썩여 놓았다. 엽고운은 그녀가 걸치고 있는 가죽옷을 전부 벗겨냈다. 하지만 말이 전부이지, 그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었다. 단지 두 조각 뿐이었므로 간단한 두 동작이면 충분히 해결되었다. 마침내 구양월미는 털가죽 이불 속에서 알몸이 되어 버렸고 엽고운은 그녀의 가죽옷을 곁에 있는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구양월미. 그녀는 사실상 순결한 처녀였다. 다만 중원의 여인들과는 기질이 다를 뿐이었다. 물론 예의범절을 아주 모르지는 않았으나 이곳에서 자라온 그녀에게 결코 큰 구속이 될 수 없었다. 아니, 그녀는 스스로 그 구속마저도 내던졌다.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기간이었으나 그녀는 엽고운을 통해 살아온 나날의 전부를 통틀어도 취할 수 없던 것들을 비로소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이름하여 세인들은 사랑이라 부르던가? 구양월미는 예전에 없었던 그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지 이미 오래였다. 그리고 작금에 이르자 젖가슴을 움켜쥐어오는 엽고운의 손길에 그녀는 심히 흥분된 나머지 전신을 바르르 떨어야 했다. 엽고운의 손은 비단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팽팽한 젖가슴에서 내려와 잘록한 허리로, 또 둔부로 향해가고 있었다. "으음......." 구양월미는 무아지경에 몰입된 듯 달뜬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웬일인지 엽고운은 애무만 거듭할 뿐 적극적인 행동으로 이어가지는 않았다. 이 점을 두고 구양월미는 채 의혹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폭발할 듯 팽배한 욕구가 그녀의 정신을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하아....... 어서 저를......." 엽고운의 눈이 번쩍 기광을 발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왔구나!' 그는 석문을 노려보며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매달았다. '적을 최대로 보되 자신을 최소로 보이게 하는 것, 이 또한 병법이 내게 가르쳐준 승리의 비결이다.' 이때, 석문 밖으로부터 한 줄기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엽공자, 들어가도 되겠소?" 그러자 기절할 듯 놀란 것은 구양월미였다. "에그머니나!" 그렇듯 활활 타오르던 그녀의 몸은 삽시에 차갑게 굳어지고 말았다. 엽고운이 곁에서 당황한 음성으로 외쳤다. "누, 누구요?" "여후량이외다." 엽고운은 짐짓 어색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 여형... 들어오시오." 그 말이 끝나자 곧 석실 안으로 한 중년인이 들어섰다. 그러나 그는 침상 위의 남녀를 보고는 대뜸 눈살을 찌푸렸다. 구양월미는 목까지 털가죽 이불을 뒤집어 쓴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더구나 탁자 위에 놓인 가죽옷은 그녀가 알몸이라는 사실을 더욱 더 확실시해 주는 것이었다. 엽고운은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씨익 웃어 보였다. 물론 그 순간에도 그의 두뇌는 빠르게 회전했다. '신공의 수하 중 가장 무서운 자가 바로 이 여후량이다. 먼저 그를 물리쳐야만이.......' ② 신안 여후량. 그의 실제 나이는 칠십이 넘었다. 하지만 외견상으로는 사십 대로 보였으며 용모 또한 준수했다. 특히 크고 뚜렷한 두 눈에서는 뭐라 형언키 힘든 현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엽고운이 먼저 그에게 말을 건넸다. "여형, 이런 모습으로 대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신안 여후량은 보일 듯 말 듯 미미한 웃음을 흘렸다. "개의치 않소. 영웅이 미녀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욱 부끄럽소이다." 여후량은 문득 정색을 했다. "그건 그렇고, 신공께서 엽공자를 찾으시오." "하지만 지금은 좀......." 엽고운의 손은 그때까지도 털가죽 속에 파묻혀 있었거니와 말하는 도중에도 구양월미의 몸을 계속 더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행위에 대한 미련같은 것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여후량의 깊숙한 눈이 비로소 흔들림을 보였다. '내가 정녕 이 자를 잘못 보았단 말인가?' 그러나 그의 내심은 곧 이렇게 읊조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다루기가 쉬워지지.' 이윽고 신안 여후량은 담담하게 말했다. "볼 일이 끝나는 대로 곧장 신공부로 오시오. 내 신공께는 잘 말씀드려 놓으리다." "고맙소이다. 여형." 엽고운은 만면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럼......." 신안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휭하니 밖으로 나갔다. 그 직후, 구양월미가 털가죽을 젖히며 상체를 발딱 일으켰다. 그녀는 엽고운을 향해 날카롭게 쏘아부쳤다.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그가 들어오도록 하다니. 그럼 소매는 어찌 하라는 거죠?" 엽고운은 빙긋 웃으며 손으로 그녀의 젖꼭지를 살짝 비틀었다. "월미와 나 사이가 공인되는 셈이니 좋지 않은가?"


"정말... 멋대로군요? 오빠는......." "하하하......." 엽고운은 다시 구양월미를 안았으나 아까와는 그 태도가 사뭇 달랐다. 뭐랄까? 상황에 의해 요구된 것이 아니라 진심에서 비롯된 동작인지라 한층 느긋해져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엽공자, 들어가도 될까요?" 엽고운은 크게 놀랐다. '영제의 수하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큰일날 뻔 했구나. 다행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길래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영제의 측근 인물들은 한결같이 경공에 뛰어난 조예가 있었다. 그러므로 설사 엽고운이라 할지라도 지척에 이르기 전에는 그들의 출현을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한 가닥 요염한 웃음소리가 그 뒤를 이어 들려왔다. "호호호호... 사랑하는 님을 품고 있으니 이 누님은 생각도 나지 않나 보군." 엽고운의 눈썹이 절로 찌푸러 들었다. '천갈부인이군.' 하지만 그는 곧 안색을 회복하며 꽤 친근한 어투로 대꾸했다. "소생은 또 누구신가 했소이다. 어서 들어오시오, 부인." 그 말에 세 명의 뛰어난 미인들이 나란히 안으로 들어섰다. 개중 전신에 붉은 털옷을 걸쳤으며 극히 요염하고 몸매가 풍만한 미부, 그녀가 바로 천갈부인이었다. 그녀를 가운데 두고 오른쪽에 서 있는 여인이 무영사비 중 첫째인 빙매 냉하상이었다. 전신이 온통 싸늘한 기운에 덮혀 있어 건드리기만 해도 얼음가루가 풀풀 날릴 것 같은 여인이었다. 그 왼쪽에는 무영사비의 둘째이자 눈이 푸르고 피부가 백설같은 미녀, 즉 월교 백견아가 서 있었다. 어쨌든 석실 안으로 들어선 세 여인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알몸인 채로 엽고운에게 안겨 있는 구양월미의 모습이었다. 그녀들의 안색은 각각 다른 변화를 나타냈다. 먼저 천갈부인 화옥향의 치켜올라간 눈꼬리에는 일말의 질투가 어렸다. 빙매 냉하상의 눈에는 조소가 스쳤으며 월교 백견아의 푸른 눈은 호기심과 흥미를 동시에 떠올렸다. 천갈부인이 구양월미를 향해 야릇한 웃음을 전했다. "호호호... 나는 동생의 사랑을 받는 행복한 여인이 과연 누군가 했더니, 바로 금마별부 제일의 미녀인 구양낭자였군." 구양월미는 내심 죽을 맛이었다. 연이어 두 번이나 똑같은 일을 당하고 보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엽고운 역시도 머쓱한 듯 히죽 웃으며 어깨를 흔들었다. 그 바람에 무참하게도 두 남녀를 덮고 있던 털가죽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밖으로 드러난 구양월미의 옆모습은 여하한 동물적 상상도 단번에 일소시키는 것이었다. 봉긋 솟은 젖가슴, 미끈한 등, 그리고 잘록한 세류요의 허리와 풍만한 둔부 등이 나무랄데 없는 아름다움을 과시했다. "아!" 구양월미는 얼른 털가죽을 도로 덮으려 했다. 하지만 엽고운이 한 팔로 허리를 감아버려 그녀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 광경은 실로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냉하상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으나 천갈부인은 야릇한 눈빛을 발했다. 월교 백견아의 푸른 눈도 미묘한 변화를 드리웠다. 천갈부인이 홍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아무래도 우리가 시간을 잘못 택해서 왔나 보군요."


엽고운이 빙긋 웃자 그녀는 애교 넘치는 음성으로 말했다. "동생, 이 누나는 물러가겠어요. 영제께서 동생을 보고 싶어 하시니 오늘 중으로 꼭 들러주어야 해요." "알겠소이다." 천갈부인은 눈웃음을 치며 엽고운에게 한쪽 눈을 감아보였다. "그리고 시간 나는대로 이 누님의 거처로 한 번 놀러와요." 그녀는 구양월미에게 한 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구양낭자, 재미 많이 보도록 해요." 천갈부인은 말을 마치자 교구를 빙글 돌렸다. 그 순간, 그녀의 둔부가 묘한 출렁임을 일으켰다. 그것은 일견하기에도 다분히 유혹이 깃든 동작이었다. 마침내 세 여인은 모두 석실 밖으로 사라졌다. 그 뒤로 엽고운은 본신의 내력을 최고도로 끌어올려 귀를 기울였다. 그러기를 한참여, 그의 표정은 서서히 침착을 되찾고 있었다. '음, 이제 아무도 없군.' 엽고운은 비로소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월미, 그만 일어나 옷을 입어라." "네?" 구양월미는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 보았다. "무슨 뜻이죠? 그 말은......." 다음 순간, 그녀는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 그럼 오빠께선 의도적으로 저를......?" 엽고운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누르며 부드럽게 말했다. "월미, 그것은 네 말이 맞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예 이런 일조차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해가 가지 않아요. 저는......." "후후... 결코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지금은 네가 나를 도운 것이고 앞으로는 내가 너를 돕게 된다는 말이니까." 구양월미는 비로소 사르르 얼굴을 붉혔다. "죄송해요, 오빠. 전 그런 것도 미처 모르고......." 엽고운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자, 이젠 일어나 옷을 입을 수 있겠지?" "싫어요!" "으음?" 구양월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투정을 부렸다. "조금만 더 누워 있다가... 앗!" 그녀는 짧게 비명을 울렸다. 엽고운이 그녀의 엉덩이를 다시금 찰싹 때린 것이었다. "혼이 나야겠구나! 벌써부터 낭군의 말을 안듣다니." "몰라요!" 구양월미는 그대로 엽고운의 품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왠지 침울했다. "아무래도 두려워요. 전......." "무엇이 두렵다는 거지?" 그녀는 섬섬옥수로 엽고운의 가슴팍을 연신 어루만졌다. "언제부터인가 제 가슴은 당신의 영상 하나만으로 꽉 차버렸어요. 하지만 당신은 마치 별세계의 인물처럼 멀게만 느껴져요. 잡으려해도 도저히 잡을 수 없는 환상 속의 왕자님 같아요." 엽고운은 낭랑한 웃음으로 그 말을 받았다.


"하하하... 월미, 네가 나를 너무 높이 평가했나 보구나." 구양월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신공과 영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무서운 분들이에요. 그런데도 당신은 그들을 마음대로 요리할 정도로 능력있는 분이잖아요. 그리고 또 여인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엽고운은 그녀의 벌거벗은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월미, 염려하지 마라. 나는 절대 너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정말?" 구양월미는 고개를 쳐들며 환하게 웃었다. 그 신선한 웃음이란 그녀의 얼굴을 갓 피어난 한 송이의 꽃으로 만들고 있었다. "물론이다, 월미." "아! 사랑해요, 운오빠." 두 남녀의 사이에는 뜨거운 입맞춤이 있었다. 엽고운의 입술이 구양월미의 입술을 점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혀가 취한 것은 비단 입술 뿐만이 아니었다. 구양월미의 몸과 마음, 아울러 영혼까지 포함된 전부였다. "으음......." 구양월미는 고개를 뒤로 꺾으며 몸을 떨었다. 그녀의 복숭아 같은 두 개의 젖가슴은 그 순간 사랑으로 터질듯 부풀었다. "월미, 서둘러 다오." 엽고운은 입술을 떼며 이렇게 말했다. 구양월미는 꿈에서 깬듯 아쉬운 빛을 지우지 못했으나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알겠어요." 그녀는 대답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전라라는 사실을 깨끗이 망각한 채. "아!" 엽고운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그것은 바로 손으로 느끼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의 차이였다. 그로서도 그녀의 완전한 나신은 처음 보았던 것이었다. '아름답구나! 정녕.......' 그의 시선은 대리석으로 깎아놓은 듯한 그녀의 알몸에서 좀체로 놓여나지를 못했다. "어머?" 구양월미는 엽고운의 타는 듯한 시선을 느끼자 당황을 금치 못했다. 아울러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몸을 잔뜩 움츠렸다. "뭐, 뭘 봐요? 어서 고개를 돌려요!" "하하하......." 이번에는 엽고운이 그녀의 명령에 복종(?)했다. 하지만 그는 구양월미의 옷입는 소리를 귓가로 느끼면서도 곧장 복잡한 상념에 빠져 들었다. '신공과 영제, 그들의 무공 수준만은 아직도 정확히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어쩌면 내 예상을 초월한 것인지도 모른다.' 엽고운의 안색은 절로 어두워졌다. '해천사신의 부탁대로라면 의당 그들을 밖으로 나가게 해주어야 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엄청난 일이다. 결국 북혈마황과 같은 마두가 두 명 더 늘어나는 셈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무림은 아마도 일대 혈풍에 잠기고 말 것이다.' 그의 얼굴에는 곧 한 가닥 결의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공과 영제, 두 사람만은 이 금마별부에 영원히 가두어 놓아야 한다.' 엽고운은 주먹을 불끈 움켜 쥐었다. '이 일은 끝까지 철저한 계획 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차질이 빚어지면 내 목숨은 두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무고한 인명의 희생이 뒤따르게 된다.' 그는 이어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매달았다. '그 일단계가 마무리 되었다. 지금부터는 제이단계를 착수해나가야 한다.' ③ 엽고운은 구양인과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듯 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왠지 침중하기만 했다. 엽고운은 석탁을 한 손으로 짚으며 말을 이었다. "소생이 해천사신으로부터 금마별부를 해금시켜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솔직히 그 결과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구양인은 흰 수염을 쓰다듬을 뿐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이곳에 들어와보니 문제가 달랐습니다." 엽고운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신공과 영제는 해천사신에게 들은 것과는 너무도 다른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렇듯 앞뒤 가리지 않는 야망을 가지고 무림으로 나간다면 그 이후의 일이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구양인의 입이 비로소 열렸다. "그럼 소협의 의견은......?" 엽고운은 자르듯 차갑게 대꾸했다. "소생은 신공과 영제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생각입니다." "으음......." 구양인은 신음을 발하더니 곧 무겁게 덧붙였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모험이오. 그 두 분이 소협의 의중을 안다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 엽고운은 그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구양어른께 상의하는 것입니다." 구양인은 고소를 지었다. "노부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엽고운의 음성이 다시금 진지해졌다. "소생은 이전에 구양어른이 하신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신공도, 영제도 따르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고수가 백여 명 정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사실이오." 구양인은 안면을 딱딱하게 굳혔다. "소협은 그들을 포섭할 생각이오?" "그렇습니다." 엽고운의 말에 구양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그들은 중도파를 자처하고 있기는 하나 결코 두 분에게 대항하려 들지 않을 것이오." "아직도 층성심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까?" "물론 그런 의미는 아니오. 신과 영이라는 두 분의 절대자에게 감히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면 맞을 것이오." 엽고운이 씨익 웃었다. "소생이 그 불문율을 깨겠습니다." 구양인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길게 탄식했다. "확실히 소협은 보통 분이 아니오." "과찬이십니다." "아니, 나는 과찬 따위는 할 줄 모르오."


"그렇다면 제게 도움을 주시겠습니까?" 구양인의 어조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소협이 필요로 한다면 이 늙은이가 무엇을 못하겠소?" "그럼 먼저 여쭙겠습니다." 엽고운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이렇게 물었다. "그 백 인의 고수 중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구양인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으음, 그런 식으로는 누구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가 없소이다. 다만 소협이 진정 일을 추진하고 완성시키려면 최소한 그들 중 세 명의 도움을 얻어야 하오." "그들이 누구 누구입니까?" "일지선옹(一指仙翁) 상관화(上官華), 장천노수(掌天怒手) 장양수(張陽首), 그리고 구대선생(丘大先生) 등이오." 엽고운은 미간을 좁히며 더욱 진지하게 물었다. "그들은 어떤 인물들입니까?" "일지선옹과 장천노수는 무공이 신과 영, 두 분의 가장 강한 수하와 대등하오. 하지만 성격상으로는 무척 대조적이오. 일지선옹은 침착한 반면에 장천노수는 열화와도 같이 급하오." 구양인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실상 신, 영이 가장 경계하는 인물은 바로 구대선생(丘大先生)이오. 그는......." 두 사람의 밀담은 한 동안 계속 되었다. 가산(假山). 금마별부의 내부에는 도합 다섯 개의 가산이 있었다. 그런데 모두 그 크기가 대단했으며 그 중 동쪽의 두 개는 신공부에, 서쪽의 두 개는 영제전에 속해 있었다.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가산은 물론 중립을 지키는 인물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연못은 가산의 풀밭과 더불어 자연스러운 미경(美景)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그 속에는 금잉어가 헤엄치고 있었으며 위로 걸쳐진 정자는 그림같이 고왔다. 실로 선경이 따로 없었다. 다만 푸른 하늘만은 그 풍경에서 제외되었다. 지하에 축조된 인공의 가산이었기 때문에 하늘이 보일 리 없었다. 정자 안. 두 명의 노인이 마주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바로 일지선옹 상관화와 장천노수 장양수였다. 학발동안에 인자한 풍모를 가진 팔순노인이 일지선옹, 허연 구레나룻이 얼굴을 덮고 있었으나 젊은이 못지 않게 우람한 체구를 지닌 칠순 정도의 노인이 장천노수였다. 엽고운이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나 두 인물은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오직 바둑을 두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일지선옹은 백의를, 장천노수는 황의를 각기 입고 있었다. 엽고운은 정자 안으로 들어가 포권 했다. "소생 엽고운, 처음 뵙겠습니다." 일지선옹과 장천노수는 여전히 그에게 일별도 하지 않았다. 탁! 장천노수가 검은 바둑돌을 놓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헛헛헛... 선옹, 이제 굴복하게. 이건 묘수가 아닌가?" 일지선옹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노수, 자네는 큰 실수를 했네. 그 수는 좋은 수이기는 하나 너무 무모한 것이었네." 탁! 그는 흰 바둑돌을 바둑판의 검은 집 우현에 놓았다. "자신의 역량도 모르고 함부로 굴면 이렇게 되지. 하하......."


그 말에 이제까지 묵묵히 서 있던 엽고운의 눈썹이 위로 홱 치켜 올라갔다. '음, 이 노인은 지금 나를 빗대서 얘기하고 있구나.' 이때, 장천노수는 손을 들었다. "졌네. 매번 이러니 자네와는 영 둘 맛이 나지 않는군." 일지선옹의 미묘한 충고가 다시 이어졌다. "허허허... 노수, 바둑이란 본시 명경지수(明鏡之水)와 같은 마음을 요하는 것일세. 저돌적인 근성이나 오기만 가지고는 결코 경지에 오를 수가 없는 것이네." 엽고운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차라리 정면으로 대놓고 얘기하면 수용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이런 식의 비아냥은 도저히 이대로 참아줄 수가 없다.' 그는 일단 자세를 바로 한 뒤에 입을 열었다. "외람된 말씀이나 소생이 두 분께 감히 한 마디 하겠습니다." 두 노인은 역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엽고운은 이를 개의치 않고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선옹의 말씀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역량을 숨기고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도 정도 나름입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패기와 공격적 성향으로 밀고 나갈 때도 있어야 합니다." 일지선옹은 바둑돌을 만지작거리던 동작을 뚝 멈추었다. "보수성이란 단지 인내 면에서 그 가치를 발휘할 뿐 발전은 전혀 기약할 수 없습니다. 종종 행동력이 부족한 자들에게서 이러한 보수성을 엿보게 되기도 합니다." 일지선옹의 노기 띤 얼굴이 비로소 엽고운을 돌아다 보았다. "자네, 지금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아닙니다. 저는 바둑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오만방자한 청년이군." 엽고운은 빙긋 웃었다. "압니다. 올바른 진리를 피력하려다 보면 자칫 그런 자로 낙인 찍힐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자 일지선옹의 노기가 놀랍게도 웃음으로 전환되었다. "자네, 바둑을 아는가?" "약간은......." "내 자네와 한 번 두어 보고 싶군."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일지선옹은 담담한 시선으로 엽고운을 응시했다. "자네가 백을 쥐게." 그가 손을 들자 한 개의 바둑알이 엽고운을 향해 날아갔다. "감사합니다만 후배는 흑을 잡겠습니다." 촤라락--! 바둑판 위에 빽빽하게 놓여 있던 바둑돌들이 일제히 붕 떴다. 또한 그것은 허공에서 흑백으로 분리되더니 백은 일지선옹의 바둑통으로, 흑은 엽고운의 바둑통으로 정확히 찾아 들어갔다. ④ 한 개의 흑돌이 바둑판의 좌하(左下)에 떨어졌다. 탁! "자, 두십시오. 노선배님." 엽고운의 낭랑한 음성이 울렸다. 일지선옹과 장천노수, 두 노인의 안색이 동시에 일변했다. '대단한 놈이다!' 일지선옹은 백미를 꿈틀 하며 바둑알을 판에 올려 놓았다. 마침내 대국이 시작되었다.


탁! 탁......! 맑은 음향과 함께 흑백의 돌이 연이어 떨어지자 국면은 금세 가경에 접어 들었다. 초반의 형세는 거의 막상막하였다. 엽고운은 마치 아무 생각도 없는 듯 검은 돌들을 마구 올려 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무슨 조화 속인지 잠시 후에는 틀림없이 놀라운 수와 복병으로 화해 있었다. 탁! 탁탁....... 국면은 급기야 일대 변화를 일으켰다. 함부로 두는 듯한 엽고운의 수가 연속 공격으로써의 묘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으음......." 일지선옹의 이마에는 어느덧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그는 놀란 나머지 내심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오오! 정녕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수법이다. 스스로 실력을 꽤 자부해 왔건만 내가 이처럼 궁지에 몰리다니.......' 일지선옹은 침착을 잃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써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엽고운의 공격에 밀려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었다. 백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그러다가 대마까지도 여지없이 잡혀 버리자 일지선옹은 그답지 않게 안면을 일그러 뜨렸다. '졌다! 완전한 패배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런 연후, 일지선옹은 신색을 재정비하며 담담하게 물었다. "이제 자네가 이곳을 찾은 이유를 말하게." 탁!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는 다시 바둑돌 한 개를 판 위에 올려 놓았다. 일견하기에도 그 위치는 대국을 전혀 도외시한 것이었다. 엽고운도 그를 따라 아무 곳에나 바둑돌을 놓았다. 탁! "지인(志人)을 구하기 위해서 입니다." 일지선옹의 눈꼬리가 일순 파르르 떨렸다. 그는 한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더니 또 한 개의 돌을 놓았다. "그 일은 너무 엄청난 것이네." 탁! 엽고운의 기색에는 추호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뜻이 합쳐지면 만사가 형통인 법입니다." 탁! "역량이 딸리는 것은 어찌 하겠나?" 탁! 엽고운은 싱긋 웃었다. "정공(正攻)을 펼친다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바보 짓 입니다. 쓸데없는 힘의 낭비라고나 할까요?" "그럼 자네의 뜻은......?" "조개와 학이 싸우면 이득은 마부(馬夫)가 봅니다." 일지선옹은 엽고운의 말에 완전히 이끌려 들고 말았다. 그는 더 이상 바둑돌을 놓을 생각도 않고 신중하게 물었다. "상대가 혹 자네의 생각을 앞설지도 모르네." 엽고운은 자신감이 깃든 음성으로 답했다. "적이 한 번 움직이면 저는 두 번 움직이고, 적이 두 번 생각하면 저는 열 번을 생각할 것입니다." 일지선옹의 눈썹 끝이 미미한 떨림을 보였다.


"만일 적이 만변(萬變)이면?" 엽고운은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떠올리며 즉시 응수했다. "그렇다면 저는 불변(不變)입니다." 일지선옹은 그만 넋을 잃고는 멍하니 엽고운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그의 노안에는 뜻밖에도 뽀얀 안개같은 것이 서렸다. 한참 후에야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진정 기인일세. 지난 육십 년 간의 기다림이 이런 보람으로 이어질 줄이야....... 내 이제 자네를 위해 목숨을 바친들 조금도 아까울 것 같지가 않군." 그 말에 옆에 있던 장천노수가 냅다 고함을 질렀다. "선옹! 자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바로 이때였다. 한 줄기 음유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노수, 자네는 상황 판단이 너무 느리군.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진정한 주군(主君)을 만난 것이네." 중인들은 일제히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자 안으로 한 인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검은 수염에 백색 문사건을 쓰고 역시 백색의 도포를 입은 중년인이었다. 그는 얼굴이 옥같이 희었으며 심호(深湖)를 연상시킬 정도로 맑고 고요한 눈을 가진 자였다. 엽고운은 그가 누구인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구대선생(丘大先生)이로구나!' 엽고운은 지체없이 몸을 일으키며 포권했다. "후배 엽고운, 구대선생을 뵙겠습니다." 구대선생은 의외로 그 인사를 받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엽고운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예를 거두어 주십시오. 무릇 대사에는 나이가 필요치 않습니다. 능력이 있는 자만이 위에서 군림할 수 있는 법입니다." 구대선생은 그야말로 깍듯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노부는 육십 년을 하루같이 소협과 같은 분의 출현을 기다려 왔소이다. 부디 이 늙은이로 하여금 주군으로 모실 수 있는 영광을 베풀어 주십시오." 당사자인 엽고운은 물론 일지선옹과 장천노수도 크게 놀랐다. "어찌 제가 감히......." 당혹감이 깃든 엽고운의 말에 구대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상하의 구별이 확실하지 않으면 결코 일을 추진할 수가 없소이다. 사양치 마시고 제 뜻을 받아 주십시오." 그러자 일지선옹도 이의없이 허리를 굽혔다. "구대선생의 말이 백 번 옳습니다. 소신(小臣), 일지선옹이 주군께 인사드리오." 장천노수는 뒤늦게야 황망히 허리를 구부렸다. "이 장천노수도 주군을 뵈오이다." 엽고운은 실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가 백 살이 넘는 세 고인이 자신에게 복종을 표해오니 그로서는 이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세 분께선 이러지 마십시오. 후배, 민망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으니 어서 허리를 펴시기 바랍니다." 구대선생의 어투는 단호하기 그지 없었다. "주군께서 허락하기 전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소이다." "으음......." 짧은 순간을 빌어 엽고운의 안색은 무수한 변화를 거듭했다. 물론 그것들은 감동이나 격정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어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의 눈 속에서 한 가닥 기광이 번뜩였다. 마침내 그의 입이 떨어졌다. "그럼 이 엽고운, 세 분의 충심을 기꺼이 받아 들이겠습니다."


그러자 구대선생을 비롯하여 일지선옹, 장천노수 등의 표정이 일시에 환하게 밝아졌다. '오오! 드디어 이 금마별부에도 한 가닥 서광이 비치는구나.' 그들은 내심으로 한결같이 그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한 칸의 석실. 그곳은 바로 구대선생의 거처 중 한 방이었다. 가운데 석탁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사방의 벽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석탁의 주위로 엽고운을 위시하여 구대선생, 일지선옹, 장천노수 등 네 사람이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 내용은 대부분 금마별부 내의 세력 균형에 관한 것들이었다. 아무튼 네 사람은 의기가 투합되었다. 엽고운을 중심으로 확고하게 뭉쳐진 것이었다. 구대선생, 일지선옹, 장천노수, 이 삼 인은 사실상 중립을 지키는 백 인의 고수들 중 가장 지위가 높은 인물이었다. 따라서 엽고운은 자연스럽게 중도파의 고수들을 포섭할 수 있었다. 구대선생이 문득 신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주군께서는 혹시 이 금마별부의 내력을 아십니까?" 엽고운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이어 그는 궁금증을 나타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본인도 진즉부터 이곳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많았습니다. 대체 이곳은 언제, 누가 만들었습니까?" 구대선생은 일지선옹과 장천노수를 둘러본 다음 탄식했다. "이 금마별부에는 실로 엄청난 비밀이 있소이다." 엽고운은 의혹을 금치 못했으나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구대선생은 생각을 정리하는 듯 눈을 감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천이백 년 전, 그러니까 당(唐) 초엽의 일입니다. 그 당시 태종(太宗)은 중원을 정복하고 나서 그 세력을 변방과 새외로까지 넓혀가고 있었소이다." "으음!" "수많은 상대 세력들이 혼신의 힘으로 항거했지만 역부족이었소. 이미 강대해져 버린 당으로 인해 모두가 추풍낙엽(秋風落葉), 아니 낙성(落星)처럼 국운마저 다 하고 말았소이다." - 다음 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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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제1장 사막(沙漠)의 고아(孤兒) 제2장 인간(人間)의 도리(道理) 제3장 시작(始作)을 향한 몸부림 제4장 입문(入門) 제5장 천붕(天鵬)을 얻다 제6장 뜻밖의 개입(介入) 제7장 금마궁(禁魔宮) 제8장 신공(神公)과 영제(影帝) 제9장 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