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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군도 (東沙群島) 제 1 권 표지 제목: 동사군도 제 1 권 (전 3 권) 지은이: 검궁인·백강 - 차례 서문(序文) 제 1 장 죽음의 땅 동사군도(東沙群島) 제 2 장 생체실험(生體實驗) 제 3 장 그녀의 이름은 사사영(四四零) 제 4 장 폭풍전야(暴風前夜) 제 5 장 탈출(脫出) 제 6 장 모멸(侮蔑)을 넘어서 제 7 장 술통 속의 정사(情事) 제 8 장 의문의 살인(殺人) 제 9 장 구사일생(九死一生) 제 10 장 의혹(疑惑) 서문(序文) 낙원(樂園)은 어디에 있는가? 무지개를 따라 끝없이 남쪽으로 남쪽으로 따라가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더듬어 보면 그 시절이 바로 낙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살다보면 즐거운 일도 있고 괴로운 일도 있기 마련인데 우리는 늘 즐거움만을 찾으려 한다. 지나고 보면 그토록 괴로웠던 시절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게 되고 그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말이다. 지옥(地獄)은 어디인가? 사는 것이 곧 지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천국은 어디에 있을까? 죽음 앞에 섰을 때, 그래도 살아있는 것이 천국처럼 느껴질 것이다. 무릇 천국과 지옥은 하나의 그릇에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협의도(俠義道)가 배신과 오만으로 비틀어져 버린 세상을 그려보았다. 권력자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유희장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내린 간단한 결정으로 인해 수백만의 양민이 괴로움으로 신음하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하나가 아니면 열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로 하여금 오류를 인정케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삶을 공식으로 풀 수 없듯이, 잘못된 점도 잘된 점도 다함께 미완성인 것이다. 전저 <철화접(鐵花蝶)>에 보여주신 독자제현의 뜨거운 호응에 감사드리며 두번째 공저를 바친다. 자오정(子午亭)에서 검궁인·백강 배상. 제 1 장 죽음의 땅 동사군도(東沙群島) ① 중원의 최남단인 광동성(廣東省) 조양(潮陽)에서 범선을 타고 꼬박 칠주야를 가면 망망대해에 표표히 떠 있는 섬들을 만날 수 있다. ― 동사군도(東沙群島). 크고 작은 다섯 개의 섬들이 고도(孤島)의 외로움을 의지하듯 모여 있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 섬을 아는 자는 거의 없다. 험난한 풍랑과 싸우면서 굳이 이곳에 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중앙의 섬이 가장 컸다. 섬 전체가 온통 짙은 숲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다른 네 개의 작은 섬이 호위를 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사시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아 청도(靑島)라 불리는 중앙의 섬에는 작은 포구(浦口)가 있으나, 그곳에 정박되어 있는 것은 한 척의 나룻배가 전부였다.


포구에서 섬 중앙으로 들어가면 몇 채의 건물이 나온다. 건물 뒤쪽은 삼면이 병풍처럼 산봉우리가 둘러싸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산봉우리는 의외로 험준했다. 산기슭에는 수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으나 위로 오를수록 기암괴석(奇岩怪石)이 난립했다. 해안에는 백사장이 따가운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고, 이따금 밀려오는 파도가 하얀 물거품을 뱉어내는 광경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청도 주변의 작은 섬들은 암도(岩島), 송도(松島), 초도(草島), 그리고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섬에는 고도(孤島)란 이름이 붙어있다. 이렇듯 아름다운 동사군도. 때묻지 않은 원시적인 풍경은 마치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연상케 했으나 실제로는 정반대였으니....... 사사도(死死島)! 동사군도의 다른 이름은 이처럼 죽음을 상징하는 사사도였던 것이다. ② 우기(雨期)가 끝났는지 천중(天中)에서 이글거리는 태양이 뜨거운 햇살을 동사군도에 쏟아붓고 있다. 연일 광란하던 파도도 지친 듯 정적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렇듯 적막한 동사군도의 한곳에서는 처절한 노역(奴役)이 계속되고 있었다. 슈― 우― 욱―! 짜― 악! 무더운 공기를 가르는 채찍 소리에 이어 섬뜩한 격타음이 검게 그을은 사내의 등에서 작렬했다. 중앙의 섬 청도에 있는 관사(官舍) 앞. 황색의 관복을 입은 차가운 인상의 중년 관리가 사정없이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채찍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선혈이 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사지가 나무기둥에 결박된 채, 그것도 거꾸로 묶여 있는 수인의 등에는 백육(百六)이란 숫자가 쓰여져 있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그의 수인복은 갈가리 찢겨 있었고, 시뻘겋게 선혈로 물들어 있었다. 짝! 쫘악! 채찍은 인정사정 없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인은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으! 지독한 놈.... 오늘도 비명 한 번 안 내겠다 이거군?" 찌는 듯한 무더위다. 강편(剛鞭)을 휘두르느라 땀을 비오듯이 쏟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중년인은 간수들 중 한 명인 동포락(童砲駱)이었다. 얄팍한 얼굴과 가느다란 수염, 날카로운 눈매의 동포락은 잔혹한 성격으로 인해 수인들에게 사신(死神)이란 별호로 불리우고 있었다. "좋다! 백육호.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주마.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 경고임을 명심해야 할게다. 다시 한 번 약초를 버렸다가는 그날이 바로 네 제삿날이 될 것이다!" "놈을 풀어줘라!" 먼 발치에서 숨 죽이며 지켜보던 거지 몰골을 한 수인들 몇명이 동포락의 눈치를 보며 다가와 백육호의 결박을 풀어냈다. 백육호는 바닥에 눕혀졌다. 살이 터지고 뼈마저 노출된 상태라 어떻게 처치해야 좋을지 난감한 상태였다. 수인들이 어쩔 줄 모르고 망설이는데, "제가 할테니 비켜 나세요."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 역시 수인복을 입고 있었는데 삼십대 정도로 보였다. 비록 허름한 차림에 초췌한 모습이었으나 타고난 미색만은 감출 수 없는 듯 여전히 매력이 흐르고 있었다.


수인번호 백삼(百三). 십 년 전 그녀에게 붙은 운명의 이름이었다. 실상 그녀의 나이는 사십줄에 접어 들고 있었다. 백삼호는 동사군도에서 유일한 여인이기도 했다. 백육호의 처참한 모습을 내려보며 한숨을 쉬던 백삼호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터진 상처를 돌보기 시작했다. 찢어진 수인복이 상처에 늘어붙어 있어 하나씩 조심스럽게 떼어내야만 했다. 이때, 동포락은 음탕한 시선으로 백삼호의 뒷모습을 핥듯이 훑어보고 있었다. 그의 목울대가 꿀꺽하고 움직였다. 갑자기 그는 채찍을 휘둘렀다. "이 우라질 놈들! 뭘 보고 있느냐? 어서 제자리로 돌아가 일들이나 해라!" "억!" "아이쿠!" 수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백삼호는 주위의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치료에 열중했다. 그러다 손길이 멈췄다. 백육호가 눈을 떴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보며 말했다. "됐습니다. 큰 은혜를 입었군요." 말을 마치자 백육호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더니 절뚝거리며 수인들을 따라 걸어갔다. "......." 중년여인 백삼호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멋대로 흘러내린 장발과 수척하지만 강인해 보이는 어깨에서 그녀는 젊음의 힘을 느꼈다. '오십 명밖에 남아있지 않은 수인들 중에서 혹독한 고문과 강제노역에도 절망하지 않고 꿋꿋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백육호밖에 없어....' 백삼호는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자신과 함께 끌려와 참담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바람에 지금도 심약해 보이기만 하는 아들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백삼호!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녀의 뒤에서 누군가 외쳤다. 그자는 관사의 경비를 맡고 있는 봉두수(奉斗秀)란 관리였다. "도주님께서 노발대발하고 계시다! 어서 가자!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거다." 봉두수는 백삼호의 소매를 거칠게 잡고 끌고갔다. 백삼호는 치를 떨었다. 도주란 자가 그녀를 찾는 이유란 뻔했기 때문이다. 대낮에 관사에 별 일이 있을 리 없었다. 사사도의 제왕(帝王)이나 다름없는 조탁(曺卓)이 그녀를 찾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밖에 없었다. 동사군도에 사람의 발길이 처음으로 닿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대명(大明) 만력제(萬曆帝) 십일 년 유월 경이었다. 동사군도는 중원대륙과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섬 주위를 휘돌고 있는 험악한 와류(渦流)로 인해 인간이 접근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곳이었다. 십 년 전 죽음의 와류를 뚫고 두 척의 전선(戰船)이 동사군도에 들어왔다. 전선에서 내린 것은 백여 명의 관리와 이백 명에 달하는 수인들이었다. 그때부터 삼 개월 간격으로 수인들과 곡식, 가축, 의복, 술과 차(茶) 등의 물품을 실어왔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불변의 법칙으로 내려왔다. 사실 이곳까지 수인과 생활물품들을 보내는 것은 막대한 재원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사는 변함없이 이어졌다. 단순히 나라의 죄인들을 격리수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기에는 지나친 감이 있었다. 수인들은 수시로 보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섬 사사도에 남아있는 수인들은 오늘날 오십여 명에 불과했다. 그것은 너무나 혹독한 환경 속에서 중노역을 감당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목숨을 잃은 수인들은 천 명이 넘었다. 그들은 사사도에 발을 딛은 순간부터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뼈를 묻게 된 것이었다. ③ "다음!" 관리 팽삼산(彭三山)은 짜증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십 년 동안 반복된 일과에 그는 넌덜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약관 이십 세에 상관(上官)인 스승인 곽초량(郭焦亮)과 함께 절해고도인 사사도에 들어설 때만 해도 남다른 각오가 있었다. 그것은 황궁어의(皇宮御醫)로 봉직한 스승의 비전의학(秘傳醫學)도 전수받고 새로운 약재(藥材) 발굴에도 동참하여 공을 세워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의지도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저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어서 흘러 오 개월 남아있는 임기를 채우고 중원에 있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이즈음이었다. 석조가옥의 입구 앞에 한 줄로 늘어서 있던 수인들 중 맨 앞쪽에 서 있던 한 명이 가옥 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에는 투박한 침상과 의자가 덜렁 놓여 있었다. 약간 떨어진 곳에는 짐승의 가죽을 씌운 커다란 의자에 의원인 듯한 노인이 나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어서 앉아라!" 노인 옆에 서 있던 팽삼산의 호통에 막 들어선 칠순 가량의 수인은 황급히 의자에 앉았다. 노인의 수인복에는 칠오구(七五九)란 숫자가 쓰여져 있었다. "칠백오십구, 오늘은 기분이 좀 어떤가?" 곽초량은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하지만 칠오구의 표정은 겁에 질려 있었다. "예.... 많이 좋아졌습니다." 곽초량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다. "미련한 놈! 그렇게 혼나고도 아직 대답 하나 제대로 못한단 말이냐?" 칠백오십구호는 두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대인! 아닙니다. 이제 막 말씀을 여쭐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래? 그럼 어서 말해봐라." "예, 예.... 어제에 비해 통증이 가라앉기는 했으나 아직 귀가 울리며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참... 숨도 찹니다요." "나른하고 어지러운 것도 여전한가?" "예, 바로 그렇습니다, 대인." "크음......." 곽초량의 용모는 특이한 데가 있었다. 지나치게 마른 체구도 그렇거니와 독사를 빼닮은 눈매, 굴곡진 매부리코와 유난히 불거져 나온 광대뼈가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런 곽초량이 안색을 찌푸리고 고민하는 모습을 칠백오십구호는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옷벗고 침상에 누워라." 곽초량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칠백오십구호는 수인복을 ㅉ듯이 벗어 던지고 침상에 올랐다. 칠백오십구호의 벗은 몸은 장작처럼 말라 있었다. 곽초량은 그의 몸 곳곳을 쿡쿡 눌러보고는 맥없이 늘어져 있는 남근(男根)을 장난치듯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물었다. "계집 생각이 아직도 전혀 없는가?" 칠백오십구호는 큰 죄를 지은 양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그, 그것이.... 요상스럽게 방금 전 백육호를 치료하느라 쪼그려 앉아 있던 백삼호를 보노라니 그만... 흥분이 되어......." "오호라! 지난 오 년 내내 죽어있던 뿌리가 되살아났단 말이냐?"


"예, 부끄럽게도......." 곽초량의 안면에 희색이 떠올랐다. "그게 어디 부끄러운 일이냐?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이지, 안그런가 삼산?" 무료한 표정으로 서 있던 팽삼산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물론입지요, 고희를 넘긴 늙은이가 잃었던 성욕을 되찾았으니 경하할 일이지요." 조롱기가 다분한 어조였으나 곽초량은 개의치 않고 칠백오십구호를 주시하며 말했다. "약이 효험을 발휘하는 것 같으니 앞으로 내 말대로 처신만 잘한다면 네놈은 틀림없이 무병장수할 것이다." 그러나 칠백오십구호의 얼굴에는 조금도 좋아하는 빛이 없었다. "삼산, 이 늙은이의 약을 가져와라." 팽삼산이 들고온 두 개의 사발에는 각각 검붉은 색과 갈색의 탕약이 담겨 있었다. 곽초량은 먼저 갈색의 탕약을 칠오구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 약은 열두 가지 약재 외에도 산조인(=대추씨)과 만청(=순무우)를 갈아 지난 밤 삼산이 정성을 다해 달인 것이다. 이걸 열흘만 복용하면 토사광란으로 인한 빈혈(貧血)이 사라질 것이니 그리 알고 먹어라." 칠백오십구호는 약사발을 받아 단숨에 비워 버렸다. 곽초량은 이번에는 검붉은 색의 탕약이 든 사발을 건네주며 음침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약은 네놈도 알고 있듯이 중원천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귀한 것이다. 너의 젊음을 되찾아준 것도 이 약재 덕이니 향후 삼 개월만 더 장복한다면 불로장수(不老長壽)의 문턱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약사발을 건네 받은 칠백오십구호는 곽초량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 "뭐 하는 게냐? 어서 비우지 않고!" 곽초량의 냉엄한 독촉에 칠백오십구호는 울상을 한 채 사정했다. "대인, 소, 소인은 오래 살고 싶은 욕심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 약을 먹고나면 몇시진 안에 입으로는 토하고 아래로는 설사가 계속되니 죽을 지경입니다. 제발 이 약만큼은 거두어 주십시요." "이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감히 항명하겠다는 거냐? 삼산! 가서 동포두를 불러와라." 칠백오십구호는 대경실색하여 들고 있던 탕약을 벌컥벌컥 들이켜 버렸다. "대인, 다 먹었으니 사신(死神)... 아니 동포두 나리만은 부르지 말아 주십시요" 곽초량은 사이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의 의자에 걸터앉으며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봐, 칠백오십구호, 왜 그리 내 진심을 몰라 주는가? 나는 의원으로서 이곳에서 가장 고령인 자네에게 호의를 베푸는 걸세. 무릇 질병이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네. 그러니 쓸데없는 잡념일랑 다 떨쳐 버리고 늘 평정심을 유지하도록 하게." "예, 예......." "앞으론 자네를 노역에서 빼달라고 동포두에게 말해 두겠네. 그러니 돌아가 마음 편히 쉬도록 하게." 하지만 칠백오십구호는 조금도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참담한 표정으로 절을 한 후 힘없이 밖으로 나갔다. 곽초량은 눈살을 찌푸렸다. "삼산, 아무래도 저 늙은이가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구나. 난 조도주와 상의 좀 해야겠다. 나머지 놈들은 네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라. 알겠느냐?" "예, 그렇게 합죠." 팽삼산의 맥없는 대답을 뒤로 한 채 곽초량은 빠른 걸음을 밖으로 나갔다. 만해전(萬海殿). 사사도의 제왕 행세를 하고 있는 조탁이 기거하고 있는 만해각은 관사의 뒤쪽으로 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울창한 해송림(海松林)을 뒤에 두르고 수인들의 피와 땀으로 지어진 만해전은 조탁의 집무실 외에도 넓직한 대전이 있고 안쪽으로는 호화롭게 꾸며진 침실이 있었다. 그밖에도 몇 개의 방이 딸려 있었는데 그곳에는 이 섬의 유일한 여인인 백삼호가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또한 말단 간수인 봉두수도 이곳에서 살았다. "흠! 칠백오십구호가 그토록 중요하단 말이오?" 집무실. 조탁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시고 있다 곽초량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거구의 중년인으로 온몸이 살덩이로 뭉쳐진 듯했다. "물론입니다. 이미 많은 수인들이 부작용으로 죽어버렸지 않습니까? 그 가운데 칠십이 넘게 산 것은 칠백오십구호가 유일합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결실을 보게 될텐데 만일 그자가 덜컥 목숨을 끊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는 것입니다." 조탁은 살덩이로 파묻히다시피한 눈을 꿈벅거리며 물었다. "지난번 곽의원의 말인즉 백육호와 백사호가 가장 중요한 관찰대상이라고 하지 않았소?" "물론 그렇습니다. 그 두 놈은 육십구호와 백삼호 계집과 함께 십 년 세월을 버텨낸 자들입니다. 물론 육십구호와 백삼호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나 그 두 놈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 채 각종 약재를 밥먹듯이 소화해 내고 있을 뿐더러 다른 자들과 달리 체격도 당당합니다. 이는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따라서 그 두 놈을 연구하면 머지않아 이유를 알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시급한 것은 칠백오십구호입니다. 그 늙은이는 근자 들어 부쩍 말수가 줄고 매사에 부정적인 것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만에 하나 그자가 과거의 팔백이십칠호 늙은이처럼 스스로 목이라도 맨다면 그 책임은 도주께서 감당하셔야 할 겁니다." 조탁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책임을 내가 져야 한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이곳의 죄수들 관리는 도주의 책임이 아닙니까? 게다가 오 개월 후면 본인이나 조도주나 모두 후임자와 교대하여 중원으로 돌아갈테니 당연히 왕야(王爺)께서 그동안의 일들을 물을 터인즉 그때 가서 책임추궁 당하지 않을 것 같습니까?" 조탁의 가느다란 눈에 노여움이 떠올랐다. '이런 쥐새끼 같은 놈, 왕야께 미주알고주알 다 고해 바치겠다는 얘기구만!' 그는 곽초량을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며 물었다. "그럼 나보고 대체 어쩌란 말인가? 칠백오십구호의 주리를 틀고 사지를 결박해 놓으면 되겠는가?" "그건 역효과만 초래할 것입니다. 가뜩이나 삶에 미련이 없는 늙은이를 묶어 놓으면 아마도 열흘을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 탕! 마침내 조탁은 거칠게 술잔을 내려놓으며 분노를 터뜨렸다. "이것 보게, 곽의원! 그럼 대체 어쩌란 말인가? 내가 그 늙은이를 하루종일 업고 다니며 구슬리기라도 하란 말인가?" 곽초량은 얄밉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도주께서 그 늙은이를 좀 구슬러 주어야 합니다." "이런 젠장할!" 육중한 몸을 벌떡 일으키며 조탁은 자신의 가슴을 마구 두들겼다. 머리 끝까지 솟아오른 노기를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곽초량은 경멸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내심 혀를 찼다. '쯧쯧! 개 같은 성질 하고는. 하긴 아무도 오지 않는 이런 절해고도의 수장으로는 저런 흉폭한 작자가


제격이기는 하지.' 그는 비로소 부드럽게 말했다. "도주, 그만 진정하십시오. 사실 도주께서 직접 수고하실 일은 없습니다." 조탁은 무슨 소리냐는 듯 곽초량을 노려보았다.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칠백오십구호로 하여금 삶에 애착을 느끼도록 만들면 됩니다." 조탁은 의자에 주저앉으며 물었다. "그래, 어떻게 하란 말인가?" 곽초량은 은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늙은이에게 몸 보시를 시켜주는 겁니다." "몸 보시라?" "이 동사군도에 계집이라면 백삼호밖에 더 있습니까?" "뭐라고?" 조탁의 분노가 다시 한 번 폭발했다. "자네는 나와 그 계집의 관계를 몰라 그따위 소리를 하는 건가?" 곽초량은 조금도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조도주! 공사를 구별해야 합니다. 그 계집은 조도주의 정실도 무엇도 아닙니다. 기껏 무료를 달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이럴 때 요긴하게 쓰자는데 어찌 그리 노여워 하십니까?" "......!" 조탁은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속이 타는 듯 술병째로 벌컥벌컥 술을 마신 후 침을 퉤! 뱉었다. "좋아, 그건 그렇다치자. 그런데 그 늙은이가 계집을 품을 수나 있단 말인가?" "물론이오." 곽초량의 대답은 간단했다. "못 믿겠네. 이미 칠십이 넘은 늙은인데 고목나무에 꽃이라도 폈단 말인가?" "바로 그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본인이 이런 부탁을 하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니 도주께서 협조를 해 주셔야 합니다." "난 절대 믿을 수가 없네." 곽초량은 차가운 시선으로 조탁을 쏘아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할 말을 다했으니 돌아가겠습니다. 부디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 바랍니다. 어쩌면 칠백오십구호에게 도주와 내 목숨이 걸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잘하면 우리가 이곳에서 보낸 십 년의 세월을 모두 보상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왕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조탁은 곽초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네놈이 걸핏하면 왕야를 내세워 날 협박하고 있다만 두고 보자, 언젠가 네놈을 설설 기게 만들테니!' 조탁은 다시 술병을 움켜 잡았다. ④ 동사군도에 밤이 찾아 들었다. 황홀할 정도로 붉은 노을이 온통 서쪽 수평선을 물들이다가 암갈색으로 그 색조가 바뀐 후, 급격히 어둠이 밀려 들었다. 저녁식사를 마친 수인들은 모두 옥사로 들어갔다. 옥사의 내부는 단순했다. 중앙의 통로를 사이에 두고 앙쪽으로 한 자 높이의 낮은 나무 침상이 길게 열을 지어 있는 것이 전부였다. 아직은 유시(酉時)였으나 대부분의 수인들은 침상에 쓰러져 잠에 곯아 떨어져 있었다. 한낮의 무더위와 노역에 지칠 대로 지친 탓이었다.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는 그들로서는 잠을 자는 것만이 가장 행복한 일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크고 작은 병을 한 두 가지씩은 앓고 있기도 했다. 따라서 모두 퀭한 눈에 비쩍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예외인 자도 있었다. 좌측의 침상 열 맨 끝 한 명의 노인과 두 명의 젊은 사내였다. 그들은 잠을 자지 않고 음성을 죽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봉두난발(蓬頭難髮)의 노인. 그는 작은 키에 뚱뚱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배는 공처럼 둥그렇게 불러 있었다. 나이는 육순 가량 되어 보였는데 혈색이 불그레하여 정력적으로 보였다. 노인의 왼쪽 침상에는 역시 장발의 젊은 수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동포락에게 채찍질을 받았던 백육호였다. 오른쪽 침상에는 냉막한 표정의 수인번호 백사번(百四番)이 누워 있었다. 이들 삼 인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백삼호 여인과 함께 십 년 전 사사도에 온 이래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었다. 홍안의 뚱보노인이 괴소를 흘렸다. "크흐흐, 백육호. 네놈은 천운(天運)을 타고난 놈이야." 백육호는 풀즙을 자신의 상처에 바르고 있었다. 기실 그는 수도 없이 상처를 입었었다. 그때마다 하찮아 보이는 풀뿌리나 풀 으깬 즙을 상처에 바르면 말끔히 치유되곤 했다. 그것은 지난 십 년 동안 경험으로 체득한 것이었다. "육노야(六老爺), 그게 무슨 말씀이오?" "이런 미련한 놈이 있나? 수백 번도 넘게 겪었는데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오늘 네놈이 쏟아낸 피 속에는 어제 처먹은 독물(毒物)이 담겨 있단 말이다." 백육호는 노인이 준 목통(=으름덩굴 말린 것)과 인동초(忍冬草)를 으깨어 만든 즙을 상처 부위에 발라나갔다. 그는 이번 상처도 며칠 안으로 말끔해지리라 믿으며 말했다. "또, 그 말이오? 아무때고 한칼에 죽일 수 있는 벌레만도 못한 우리들에게 뭣 때문에 번거롭게 독물을 먹인단 말이오? 제발 쓸데 없는 말은 그만 두시오." "끌끌! 석두가 따로 없군!" "육노야가 도주와 무슨 앙심이 있는지 몰라도 근거 없는 헛소문으로 분규를 일으키지 마시오. 안 그래도 이곳 수인들은 하루하루를 지옥과 같은 고통 속에서 보내고 있지 않소?" 백육호의 말에는 힐난하는 어조가 들어 있었다. 뚱보노인, 즉 수인번호 육십구호는 겉으로는 화가 난 척 했으나 내심으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녀석의 무심한 눈빛에 매료된 지도 벌써 십 년이 되었구나. 그러고보니 이놈도 벌써 스물이 다 되었구나. 바깥 세상이라면 천하를 질타할 놈인데 이곳에서 썩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란 말야.' 노인 육십구호는 마침내 손을 들고 말았다. "알았다, 알았어. 내 그만 하마. 네 녀석 말대로 그게 무슨 소용 있겠느냐? 자, 그럼 누워봐라." 백육호는 힐끗 고개를 돌렸다. 백사호를 향해서였다. 백사호는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백사호, 오늘은 네가 먼저 육노야와 놀아주는 게 어떠냐?" 백사호의 눈이 떠졌다. 가늘었던 눈이 커지자 섬뜩하도록 찬 안광이 번쩍 빛을 발했다. 그것은 야수의 눈빛이었다. "백육호, 오늘은 저 영감과 놀 기분이 아니다. 난 그만 두겠다." "뭐, 뭐라고? 놀아줄 기분이 아니라고? 이런 썩어빠질 놈들! 너희들 마음대로 하겠다는 거냐?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이런 나쁜 놈들 같으니라구!" 백육호는 피식 웃었다. "진정하시오, 육노야. 오늘은 백사호의 기분이 안 좋은 듯하니 소생이나 두들기는 것으로 만족하시는 게 좋겠소."


육십구호는 침을 퉤 뱉었다. "육시를 할 놈, 좋다. 그럼 네놈을 피곤죽으로 만들어 주마." 백육호는 벌렁 드러누웠다. 그의 표정은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반면 그에게 다가간 육노인의 표정은 엄숙하기만 했다. 방금 전 장난기가 가득했던 눈에서는 형형한 안광이 쏘아나오고 있었다. 잠시 호흡을 고르던 육십구호 노인은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두 손으로 백육호의 온몸을 주물러 나갔다. 근육을 세게 누르는가 하면 수족을 들어 올리고, 때로는 사지관절을 멋대로 비트는가 하면 손바닥으로 근육을 밀기도 했다.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한 동작이었으나 어느덧 육노인의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는 장난스런 행위에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새 한 시진이 지나갔다. 육노인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겉옷이 찰싹 달라 붙어버렸다. 그는 고개를 흔들어 눈 속으로 파고드는 땀방울을 떨구어 내며 쉴새 없이 백육호의 사지를 주물렀다. 한편 백육호는 자신의 좌측 견갑골(肩胛骨) 부위를 강하게 누르는 육노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육노야, 십 년을 하루같이 매일밤 이 고생을 하는 까닭이 뭐요?" "이놈아,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 사람 한 번 만들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이 늙은이가 이러는 걸 몰랐단 말이냐?" 백육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노인은 자세를 바꾸며 특유의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럼 네놈은 무엇때문에 매일밤 노부 앞에 자빠지는 것이냐?" "그걸 몰라서 묻는 것이오? 노망난 늙은이가 하도 졸라대 고통을 참아가면서 장단을 맞춰주는 것이 아니오?" 육노인은 키득거렸다. "클클! 장군 멍군이로구나. 오냐, 네놈의 정성이 갸륵하구나. 그래, 나때문에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아왔단 말이지? 에라, 이 썩을 놈아!" 퍼억! "우― 욱!" 느닷없이 복부에 작렬하는 육노인의 발길질에 백육호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며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았다. 그 모습이 저으기나 만족스러웠는지 육노인은 빈정거렸다. "웬일이냐? 채찍질에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던 놈이? 약을 주랴?" 발끈한 백육호의 고함소리가 막 터져나오려는 순간이었다. 드르르륵! 굳게 닫혀 있던 옥사의 석문이 열렸다. 밖은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 어둠을 등진 채 네 명의 인물이 들어섰다. 옥사 안은 밤새도록 침침한 유등(油燈)이 켜져있으므로 그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었다. 곽초량과 팽삼산이 두 명의 옥졸과 함께 육노인에게로 다가왔다. 유등에 반사된 곽초량의 독사눈과 돌출된 광대뼈가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감상 잘 했소이다. 이미 천 년 전에 맥이 끊겼다는 전설의 추나요법(推拿療法)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소. 과연 명불허전이구려." 육노인의 안색이 변했다. '아뿔싸! 이 생쥐 같은 놈이 창틈으로 엿보는 것도 모르고 추나요법을 시전했으니.... 이제 나도 갈 때가 됐구나. 귀가 이렇게 어두워져서야.' 내심 이렇게 자책했으나 육노인은 겉으로는 느물스럽게 대꾸했다. "역시 황제 폐하를 모시던 어의라 제법 줏어 들은 것은 있구만." "아니? 이 늙은이가 감히 뉘 앞이라고!"


옥졸이 눈알을 까뒤집고 나섰다. 곽초량은 손을 들어 옥졸을 제지하며 지시를 내렸다. "너희들은 다른 수인들 상태를 확인해 보도록 해라." 옥졸들이 돌아서자 그는 다시 육노인에게 말을 던졌다. "어쨌든 이것으로 백육호에게 남아있던 의문 중 하나는 풀렸지만 한 가지 더 묻겠소. 대체 저놈을 어떻게 돌봤길래 저리 완벽한 신체로 만들었소?" 육노인의 대답은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네. 다만 오늘같이 잠 안오는 밤 서로 안마나 해주곤 했지." "흐흐흐, 추나요법이 안마라니.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이오." "곽가야! 네가 알고 있는 추나요법이란 게 대체 무엇이냐? 그 본류가 이미 천 년 전 실전됐다고는 하나 평범한 세인들도 쉽게 해내는 안마나 접골 같은 것이 다 일맥으로 전해져 오는 것이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단 말이냐?" 답변이 궁색해진 곽초량은 헛기침을 했다. "험! 스스로도 억지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아무튼 좋소. 오늘 내가 온 건 말장난을 하려는 게 아니오." "그럼 야심한 밤에 이 더러운 곳엔 어인 행차시오?" "음, 신경 쓰이는 환자가 있어서 왔소." "칠백오십구호 말인가?" 곽초량은 놀라 반문했다. "어떻게... 아시오?" 육노인은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비며 말했다. "그 늙은이는 삼 일을 넘기기 힘들걸?" 곽초량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그게... 정말이오? 어째서......." "대체 뭘 처먹였길래 그리 위(胃)가 썩어 뭉개졌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 그럴 리가." 곽초량은 혀를 내밀어 타는 입술을 축였다. '이 늙은이가 그리 보았다면 틀림없을 것이다. 이자는 황궁어의들 중에서도 신의(神醫)로 추앙받던 당대제일의 의성(醫聖)이 아니던가?' 곽초량은 이마의 땀을 훔쳐내며 사정조로 말했다. "칠백오십구호는 죽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오. 제발... 도와주시오." 한편, 옆에서 팽삼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궁어의 중에서도 거만하기로 소문난 곽사부가 이따위 수인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이 노인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그는 오늘밤처럼 곽초량이 굴욕적인 모습을 보인 적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다섯 달만 지나면 꼭 십 년이 되는구나, 이 아름다운 동사군도가 사사도로 불린 지가." "그렇소. 내게 남아있는 시간은 이제 오 개월 뿐이오." 곽초량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살리자는 일이라면 도와줄 수 있지. 칠백오십구호가 이곳에 들어온 지도 오 년이 넘었으니 나 하고도 쌓인 정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고." 육노인이 이렇듯 쉽게 승낙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듯 곽초량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정말 잘 생각하셨소이다." 곽초량은 내친 김에 십 년을 끌어온 숙원(宿願)도 결말을 지어보자는 욕심이 들었다. "기왕지사 도와주시기로 한 바에야 본격적으로 제 일을......." "닥쳐라! 이놈."


육노인의 호통이 터졌다. 그러나 곽초량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만 하시겠다면 황제폐하께 간청을 하여 수인의 신분을 벗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놈이 귀가 먹었나? 그 더러운 주둥아리를 찢어버리기 전에 닥치지 못할까!" 길길이 뛰며 욕설을 퍼부어대는 육노인을 보자 곽초량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때 옥졸이 달려와 곽초량에게 보고했다. "대인! 아무래도 구백이십팔호가 죽은 것 같습니다." 곽초량은 여전히 육노인을 주시한 채 물었다. "삼산, 구백이십팔호는 어떤 놈이냐?" 팽삼산은 들고 있던 두꺼운 책을 펼쳤다. "구이팔이라. 아, 여기 있군. 이놈은 백일해(百日咳)와 이명(耳鳴)의 증세가 심각한 자로 최근에는 정신까지 혼미하여 착란(錯亂)을 일으킨 적도 있습니다." "그래, 나도 생각 났다. 그 쓸모없던 약골 말이군. 그놈은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해라." "알겠습니다." 옥졸들은 사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구백이십팔호의 다리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잔악한 놈들!" 육노인은 이를 갈았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오. 앞으로 오 개월 동안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오." "대단한 협박이로군." "지켜보면 알 것이오, 내 말이 허튼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해도 내 대답은 십 년 전과 다를 것이 없다. 설사 목숨을 잃는다 해도 악마들의 유희(遊戱)에는 동참하지 않을테니 내 목이 필요하거든 언제라도 가져가거라!" 육노인은 비장한 어조로 힘주어 말했다. "좋소이다. 어찌됐든 칠백오십구호는 부탁하겠소." "물론이다. 단, 두 가지 조건이 있다." "말씀해 보시오. 칠백오십구호의 목숨을 연장하기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겠소." "첫째는 약재를 달일 수 있는 도구를 옥사 가까운 곳에 준비해 줄 것. 두번째는 필요한 약재를 채취하기 위해 백육호와 백사호를 당분간 내가 부릴 수 있도록 할 것. 두 가지다." "알겠소이다. 날이 밝는 대로 도주를 만나 조치하도록 하겠소이다. 하지만 하루에 한 번씩 내게 들러 약을 복용하는 것은 제외시킬 수 없소." "알았으니 이만 꺼져라." 육노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벌러덩 누워버렸다. 곽초량은 매서운 눈빛으로 육노인을 잠시 노려보고는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제 2 장 생체실험(生體實驗) ① 고도(孤島). 동사군도의 다섯 섬들 중 홀로 멀리 떨어져 있다하여 고도란 이름이 붙어있는 섬이다. 이른 아침부터 육노인은 백육호, 백사호를 대동하고 고도에 발을 들여 놓았다. 동행한 관리 두 명은 의례적인 잔소리 몇 마디를 지껄이고는 타고온 나룻배 근처의 그늘가에 누워 따가운 햇살을 피했다. 육노인은 두 청년을 데리고 바구니를 낀 채 섬 중앙으로 들어갔다. "왜 하필 이곳을 택했소? 이 섬엔 별다른 약초가 없는 걸 잘 알면서......." 백육호가 던진 질문이다. 그의 말이 맞았다. 고도는 험악한 절봉 세 개가 높이 치솟아 있을 뿐,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섬이었다. 따라서 이곳에서 약초를 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거리였다.


육노인은 힐끔 돌아보며 침을 탁 뱉었다. "웬 말이 그리 많느냐? 빨리 쫓아 오기나 해라." 육노인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다. 백육호와 백사호는 거의 뛸듯이 해서야 겨우 육노인의 뒤를 쫓아갈 수 있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오르다보니 어느새 산의 중턱, 아니 섬 중앙에 도달했다. 졸졸졸! 그곳에는 맑은 옥수(玉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원한 그늘을 이루고 있는 작은 계곡이었다. "무슨 노인네가 다람쥐처럼 산을 잘 타시오?" 거친 숨을 토해내며 백육호가 사뭇 시비조로 물었다. "염병할 놈, 이 어르신은 인생의 반을 산에서 보낸 사람이다. 헛소리 말고 물에 들어가 땀이나 씻도록 해라." 육노인은 물가의 펑퍼짐한 바위에 걸터앉아 두 발을 물에 담궜다. 백육호와 백사호는 주위를 둘러보며 가슴을 폈다. 오랜만에 노역과 그 지겨운 감시를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그들은 몇 차례 맑은 공기를 들이마신 후 서로 마주 보았다. 보일 듯 말 듯 서로에게 미소를 보내던 두 사람은 옷을 걸친 채로 첨벙! 계곡물로 뛰어 들었다. 조약돌이 환히 들여다 보일 정도로 청명한 계곡물은 무더위를 한순간에 걷어갈 만큼 서늘했다. 첨벙! 쏴아! 두 청년은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물장구를 쳤다. 평소에 장난기가 많은 백육호는 백사호를 물 속에 거꾸로 처박으며 연신 낄낄거렸다. 한편 육노인은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그는 백사호를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녀석, 땟물을 벗으니 눈부실 정도로 준수하구나. 이 늙은이가 이토록 끌리는 데야 세상에 나가면 오죽할까?' 그렇다. 평소 과묵한 데다 늘 냉막한 표정만 짓고 있던 백사호였다. 그런데 계곡물로 목욕을 하고 자유를 접해서인지 이따금 그의 얼굴에 미소가 스치곤 했다. 그 미소는 이상하게도 노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정말 이러긴가?" "억! 어이쿠! 그래, 그래! 물싸움 하자구!" 쏴아! 물줄기가 두 청년 사이에서 포말을 일으키며 오갔다. 귀찮을 정도로 물을 끼얹던 백육호에게 마침내 백사호도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이어 두 청년은 마치 어린애처럼 물싸움을 하며 즐거워했다. 환하게 미소짓는 백사호의 모습은 마치 순수한 소년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저 얼음장 같은 녀석도 백육호에게는 마음을 열고 있어.' 생각에 빠져있던 육노인은 서서히 참담한 현실로 돌아왔다. 가슴 한구석에서 아릿한 통증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이미 오래된 증세였다. 수시로 솟구쳐 오르는 심화(心火)를 억지로 삭히다 얻은 일종의 마음의 병이었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백육호와 백사호는 물속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그동안 육노인은 바구니에다 냇가의 풀을 아무렇게나 뜯어 담고 있었다. 그는 천시를 살피더니 고개를 돌려 외쳤다. "이제 그만 나오너라!" 백육호와 백사호가 젖은 머리칼을 털며 나왔다. 백육호는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육노야 덕분에 호강 한 번 했소이다."


비록 건성으로 내뱉는 말투였으나 그 속에 진심이 담겨 있음을 육노인은 알고 있었다. 백사호도 평소의 그답지 않게 부드러운 눈길로 육노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백육호는 육노인의 바구니를 들여다 보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 "잡초는 뭐하러 뜯으셨소?" "이놈아, 내려갈 시간이 다 됐는데 그럼 바구니를 채워야 할 게 아니냐? 게다가 약초란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쓰는 사람에 따라 잡초도 얼마든지 훌륭한 약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백육호는 할 말을 잃었다. 육노인이라면 충분히 그런 말을 하고도 남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었다. "앉아라, 할 얘기가 있다." 문득 육노인의 음성이 가라앉았다. 그의 표정은 어두워 보였다. 갑자기 숙연해진 그의 모습에 두 청년은 차분한 신색으로 자리잡고 앉았다. "오늘 굳이 고도로 온 까닭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첫째는 조용히 대화할 장소로는 이곳이 적합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할 얘기는 관리들은 물론 다른 수인들에게도 백해무익하다고 판단되어 이곳을 택했다." "......." 두 청년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또 한 가지는 혹시 이 섬에 있을지 모를 진귀한 약초를 찾아보기 위함이다. 이곳의 토양으로 보건데 가능성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부터 노부가 하는 얘기를 듣도록 해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백육호와 백사호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늘 악의 없는 욕설과 농담으로만 일관했던 육노인이 마치 딴 사람이 된 듯했다. 육노인은 눈을 반개하며 말을 이었다. "먼저 너희들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사사도의 실체에 대해 얘기해 주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이었다. 황제의 명을 받은 천여 명의 관리들이 새외변방(塞外邊方)으로 파견된 적이 있었다. 그 이유는 격리수용 시켜야 할 중죄인들의 새로운 유배지(流配地)를 물색하기 위해서였지. 그로부터 반년 후 예상 밖의 결정이 내려졌다. 새로운 유배지로 이곳 동사군도를 지목한 것이다." 육노인의 음성은 다소 경악되어 가고 있었다. "그 무렵 한 초산(草山)에 은거하고 있던 노부에게 황궁의 어림군(御臨軍) 참장(參將)이 수십 명의 병사를 이끌고 찾아왔다. 그 이전에도 황족에게서 어의(御醫)들도 손쓸 수 없는 중환자가 발생하면 교꾼을 보내온 일이 있기는 했으나 어림군이 직접 온 적은 없었지." 이때 묵묵히 듣고 있던 백사호의 안색이 돌연 싸늘히 굳어졌다. "노부는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기이함을 느꼈지만 황명을 거역할 수가 없어 따라 나서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인도한 곳은 뜻밖에도 황궁이 아닌 한 황족의 사저(私邸)였다." "그 황족이 누구요?" 백사호의 입에서 갑자기 질문이 터져나왔다. "그 사저는 건친왕부(建親王府)였다." "직접 건친왕을 만나셨소?" 역시 백사호의 질문이었다. 어지간해서는 하루 종일을 가야 한마디도 뱉아내지 않는 백사호가 육노인의 얘기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이다. "노부를 맞이한 놈은 건친왕부의 집사(執事)였다. 놈은 노부에게 부귀영화를 제공한다는 미끼로 황족들이 복용할 희한한 약재들을 지어 달라고 제안해 왔다." "희한한 약재라니?" 이번에는 백육호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예를 들면 불로선약(不老仙藥), 회춘약(回春藥), 몽혼약(夢魂藥), 강장제(强壯劑) 같은 것들이었다. 노부는 불로선약 같은 것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약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으나 집사는 집요하게 요구했다. 하지만 노부는 응락하지 않았지. 그러자 집사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다. 바로 동사군도에 관한 것이었다." 갈증을 느꼈는지 육노인은 잠시 숨을 돌리며 두 손으로 맑은 계곡수를 떠먹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집사 놈의 말은 이러했다. 능지처참을 시켜야 할 죄인들을 중원에서 수만 리 떨어진 무인도에 모아놓을테니 그들의 몸뚱이를 실험물로 삼아 선약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었다." 백육호와 백사호는 가슴 속에서 쿵! 하는 진동을 느꼈다. '설마 했거늘! 그게 사실이었단 말인가!' 육노인이 음울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이미 이백여 명의 죄인들과 그들을 통제할 백 명의 관리들도 선발해 놓았으며, 특히 지원하는 관리들이 없어 부득이 관직을 삭탈해야 할 부패한 자들 중에서 죄를 묻지 않는 대신 십 년의 임기를 마치면 다시 중용하겠다는 조건으로 인원을 충당했다는 말까지 해주었다." "......!" 백사호의 눈에서는 야수와도 같은 냉혹한 빛이 흘러나왔다. 반면 백육호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아무 얘기도 듣지 못한 듯 시선을 먼 하늘로 돌리고 있었다. 육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노부가 물어 보았지. 아무리 중죄인이라 해도 어찌 살아있는 인간을 실험용으로 쓸 수 있느냐고? 그놈이 뭐라고 말했는지 아느냐?" "......." "어차피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할 놈들이니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어떠한 독물이든, 또는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혼합약재들이든 마음껏 죄수들에게 투여하여 실험을 마친 후 황족들이 안전하게 복용할 수 있는 선단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었다." "그만, 그만 하시오!" 갑자기 백육호가 버럭 고함을 쳤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육노인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육노야! 난 분명히 말했소. 이곳 수인들에게 쓸데 없는 얘기를 하지 말라고. 아무 희망도 없이 사는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대체 얼마나 더 비참함을 느껴야 한단 말이오?" "난 해야만 한다. 그리고 네놈은 반드시 들어야 한다." "무엇 때문이오? 내가 그 추악한 사실을 알게 된다한들 무엇이 달라지오? 왜 내가 꼭 들어야 하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소? 왜 이런 쓸데없는 얘기로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이오?" 백육호는 피를 토하듯 외쳤다. 육노인의 음성이 나지막하게 흘러 나왔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시간?" 백육호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반문했다. "백육, 진정하고 노부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라. 그런 연후에 노부에게 따질 것이 있다면 그때 하도록 해라." 하지만 백육호는 들을 생각이 없는 듯 먼산만 바라보았다. 육노인은 혀를 찼다. "쯧쯧! 웬놈의 고집이 그리 세냐? 에라, 이 말라 비틀어질 놈아! 이 늙은이가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야 겠느냐? 지난 십 년의 우정을 생각해서라도 내 말을 들어���면 어디가 덧난단 말이냐?" 걸죽한 욕설 속에 끈끈한 인정이 담겨있는 육노인의 말이었다. 백육호는 힐끗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육노인은 백육호의 눈 속에 저며있는 처절한 아픔을 읽을


수 있었다. '괴로울 테지, 가슴이 찢어질 듯할 게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넌 이겨내야 한다. 비록 승산 없는 싸움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 "좋소, 어디 한 번 끝까지 들어봅시다. 들어도 안 들은 것으로 하면 될 테니까." 백육호는 중얼거리며 벌렁 드러누웠다. 육노인은 헛기침을 몇 번 한 후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노부는 그날로 건친왕부에 감금되었다. 놈의 제안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들로서는 엄청난 비밀을 알고 있는 노부를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노부는 죽었다고 생각했지. 황실이라면 이 늙은이의 목숨쯤은 파리만도 못하게 여길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 누워 있던 백육호가 호기심어린 표정을 보였다. "엉뚱하게도 날 살린 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게 누군지 아느냐? 바로 돌팔이 의원인 곽초량이었다." 백육호는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그자도 황궁어의 출신인데 돌팔이라니, 너무 한 게 아니오?" "바보 같은 놈! 모르면 국으로 듣기만 해라." 육노인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설명했다. "본시 황제를 직접 진료할 수 있는 의원은 서너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거기에 붙어 약을 달이는 놈들까지 합하면 모두 백 명이 넘는다. 그들 모두가 밖에 나가서는 자신을 황궁어의라 자칭하고 있지. 곽초량도 그놈들 중 하나였다." "......." "그러던 차 놈은 운좋게 건친왕부와 접촉하게 되었는데 그걸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기회라 여겨 자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실력이야 뻔한 놈이었지. 스스로의 한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놈은 노부를 함께 끌고 가기로 작정하고 집사 놈에게 간청했던 게다. 이제야 알겠느냐?" 백육호는 괴소를 흘렸다. "흐흐, 그렇게 된 것이었구려." "노부는 감금된 지 두 달 후 끌려 나가게 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놈들은 바로 조탁과 포두 동포락 등이었다. 놈들과 함께 긴 여행 끝에 광동성 조양진에 당도했는데 거기서 노부는 난생 처음 보는 범선(帆船)을 보았다." 백사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차갑기만 한 그의 표정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 범선은 동사군도를 일 년 내내 감싸고 있는 죽음의 와류를 뚫기 위해 특별히 개조한 전선이었지. 결국 노부는 배를 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배에서 열 살, 일곱 살밖에 되지 않는 소년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게 바로 너희들이었다." 육노인은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 눈길을 들어 허공을 더듬었다. 꽤 긴 정적이 흘렀다. 한참 후에야 백육호가 입을 열어 물었다. "결국 육노야의 말인즉 사사도를 만든 것은 건친왕이라는 것이오?" 육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가 직접 건친왕을 대면하지 않았으므로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모든 계획이 건친왕부 안에서 이루어지고 집행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곳에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오?" "멍청한 놈! 그렇게 말해도 모른단 말이냐? 그럼 어젯밤 죽은 구백이십팔호가 왜 죽었는지 말해줄까?" "그야... 처음엔 눈병이 났는데 나중에 뇌까지 잘못되어 죽은 게 아니오?" 육노인의 표정이 괴이해졌다. "그렇다면 그가 일 년 전 섬에 들어왔을 때 멀쩡했던 모습은 기억하고 있느냐? 그는 건장한 사십대였지.


그런데 눈병이 시작됐고 아무리 치료해도 낫질 않았지. 그 악질적인 눈병의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백육호의 눈에서 의혹이 떠올랐다. "육노야의 말은......." "곽초량은 구백이십팔호의 눈을 실험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일부러 악성 안질이 걸리게 하여 황족들의 시력을 개선하는 연구를 한 것이다. 결과는 죽음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백육호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난 이해할 수 없소. 백일해나 이명(耳鳴) 등의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 삼 개월이 넘었는데도 실험을 강행했단 말이오? 아무리 잔혹한 인간이라고 해도 어찌 멀쩡한 사람을 실험도구로... 어찌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벌일 수가 있단 말이오?" 육노인은 잘라 말했다. "만일 진작에 투약을 중단했다면 죽기는커녕 정신착란 증세로 발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백육호는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이때 백사호가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백육호와 나는 어찌하여 십 년이 넘도록 아무 일이 없단 말이오?" "당연히 너희들에게도 암암리에 각종 실험이 행해졌다. 그 중에서도 백사호에게는 다행히 경미한 증상만 나타났을 뿐이었다. 그 정도는 노부의 추나요법으로 간단히 퇴치할 수가 있었다." 백사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자신에게 피해가 없었던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금니를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백육호는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그럼 난 어떻소?" 육노인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는 백육호를 주시하며 차갑게 말했다. "네놈에게는 곽가놈이 지독한 짓을 수도 없이 행했지. 특히, 황족 누군가에게 너와 비슷한 골격을 가진 자가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온갖 독초를 다 먹였다. 하지만 그 돌팔이 녀석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 "네놈이 극상의 근골을 갖추고 있다는 것과 한 초능력자의 지극정성에 의해 보살펴지고 있다는 사실이지. 게다가 걸핏하면 매질을 해대는 간수놈들 덕분에 독혈(毒血)을 수시로 뺐다는 것이지." 백육호는 피식 웃었다. "초능력자? 자화자찬이 도를 넘은 것 같소이다?" 육노인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이런 버릇없는 놈!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씨부리는 거냐? 고작 노부를 그 정도 인품으로밖에 안 봤단 말이냐?" 백육호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럼, 육노야가 말씀하신 초능력자는 누굴 말하는 것이오?" 육노인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이놈아!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이냐? 노부가 네놈의 가문 내력을 아느냐, 아니면 네놈이 이곳에 끌려온 죄명을 아느냐? 그야 네놈이 더 잘 알 것이 아니냐?" 백육호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육노인은 눈을 가늘게 한 채 그의 아래 위를 훑으며 말했다. "노부가 보건대 그런 능력을 소유한 인물은 노부를 포함한다 해도 세 명을 넘지 못한다. 네놈은 이미 십 년 전에 완벽한 신체의 틀이 갖추어져 있었다. 장담하건대 의술(醫術)로 인한 것이 아니다. 누군지 몰라도 초극(超克)의 경지에 들어선 무공의 비술로 다듬은 것이 틀림없다. 게다가 네놈의 근골은 타고난 것으로......." 갑자기 백육호가 벌떡 일어섰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오. 얘기는 다음에 듣겠소." 그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산 아래를 향해 걸어 내려갔다. 왠지 그의 몸이 경직되어 있었다. 육노인은 묘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버럭 외쳤다. "야, 이놈아! 빈 바구니로 내려갈 테냐?" ② ― 파천황교(破天荒敎). ― 태화천(太華天). 무림이 개사(開史)한 이래 신화를 창조한 두 방회가 있다. 강호에 몸 담은 무림인은 물론이려니와 멀리 새외에 이르기까지 두 방회에 대한 소문은 귀가 따갑도록 박혀들었다. 이 신화는 지금으로부터 약 삼십 년 전 한 꼽추노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당시의 무림은 흑백 간의 힘의 균형이 팽팽했다. 각대문파는 문하제자의 양성과 무예증진에 힘을 쏟아 무림의 전성기에 해당했었다. 그런데 한 노인의 출현으로 인해 무림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고 말았다. 꼽추노인. 그는 정사(正邪)를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각대문파를 격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무공은 가히 경세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열두 명의 마인(魔人)만 해도 강호에서 삼초지적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결국 그들이 천하를 혈세한 지 단 삼 개월만에 전무림은 초토화 되다시피하고 말았다. 십삼 인은 운남성(雲南省) 운귀고원(雲貴高原)에서 성대한 현판식을 열고 파천황교(破天荒敎)의 탄생을 선포했다. 천하혈세의 대가로 천하의 군림자가 된 꼽추노인은 무림에 가공할 철혈법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 무림에는 오직 파천황교의 율법(律法)만이 존재할 것이다. 모든 무림인들은 본교의 교리에 따라야 하며 여하한의 반항도 허용치 않을 것이다! 가히 패도적인 선언이었다. 뜻있는 자들은 분연히 검을 들고 일어섰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는가? 하나같이 피바다 속에 드러누워야만 했다. 이후 무림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파천황교의 율법이었다. 강자존(强者存)의 논리만이 성행했다. 파천황교를 등에 업은 자들은 모든 권세를 향유했다. 그들은 살인, 방화, 강간, 약탈 등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악행을 서슴없이 자행했으며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만일 이러한 암흑기가 조금만 더 지속됐더라면 아마도 무림은 황폐해지고 말았으리라. 하늘도 무심치 않았음인가? 파천황교가 무림을 지배한 지 십 년여가 흘렀을 때, 홀연히 나타난 한 검사(劍士)가 있었다. 그는 한 자루의 고검(古劍)을 등에 멘 채 혈우성풍의 무림에 환영처럼 등장했다. 훗날 사대천왕(四大天王)이라 불렸던 네 명의 수하들만을 대동한 채 나타난 그는 가장 먼저 남경(南京)의 파천황교 분타를 방문했다. 출신내력조차 알려진 바 없는 그는 개세신공을 발휘하여 남경 분타를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로 만들고 말았다. 그러나 십 년이란 세월을 독패군림해 온 파천황교는 그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한순간의 바람이려니 여겼다. 아니, 무림계에서도 그다지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겁풍(劫風)은 그것이 시작이었다. 파천황교의 안경(安慶), 황석(黃石), 무한(武漢) 분타에 이어 파천황교의 교주가 자주 들러 휴식을 취하는 곳으로 알려진 악양분타(岳陽分陀)마저 순식간에 초토화되고 말자 상황은 급변하고 말았다.


관망하며 곧 꺾이려니 했던 무림계의 군웅들이 하나 둘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기치 아래 의혈지사들이 차츰 모이더니 마침내는 그 수효가 일만을 넘게 되었다. 무명검사의 행보는 파천황교의 총본산인 운남성 운귀고원으로 향했다. 그가 운귀고원에 당도했을 때, 그를 따르는 군웅들도 구름처럼 운집되었다. 경천동지(驚天動地)! 마침내 정사대전(正邪大戰)이 벌어졌다. 그 싸움은 무림개사 이래 전무후무한 대혈전이었다. 장장 칠주야(七晝夜)에 걸친 엄청난 혈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영원불멸하리라던 마도들의 총본산인 파천황교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암흑의 신화를 창조했던 교주 역시 한 영웅의 검에 의해 육신이 둘로 나뉘어진 채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또한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던 십이마존도 사대천왕에 의해 숨이 끊기고 말았다. 그밖에도 파천황교의 수뇌부들은 분노한 군웅들에 의해 운귀고원에 뼈를 묻게 되었다. 무림에 위대한 신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천룡대제(天龍大帝) 관일청(關一靑). 그가 바로 무림을 암흑에서 건져낸 위대한 무인이었다. 천룡대제는 사대천왕과 함께 우상으로 떠올랐다. 군웅들은 그들을 받들어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최강의 방회를 결성하였으니, 그것이 곧 태화천(太華天)이었다. 당시 정사대전에 참가했던 의협 일천 명이 자진하여 태화천에 가입하여 명실상부한 무림제일의 방회로 출범한 것이다. 태화천주는 파천황교에 탈취당한 각 방파의 장문영부를 모두 돌려주며 흑백양도간의 화합을 역설했다. 또한 차후로는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무예정진과 후진양성에 힘 써줄 것을 훈시했다. 위대한 태화천 신화의 원년(元年)은 그렇게 막을 올렸다. ③ 태화천은 여러 면에서 무림사에 획기적인 상징을 만들었다. 태화천주인 천룡대제는 무(武)의 신이었으나 결코 자신의 무를 과시하지 않았다. 그는 태화천 소속의 무인들에게 이른바 무혈(無血)의 원칙을 강조했다. 무림계는 끊임없는 칼부림과 은원(恩怨)으로 점철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정도로 혈풍이 반복되는 세계다. 그러나 태화천주는 복수(復讐)를 허용하지 않았다. 무림의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일체의 개인적인 복수나 혈겁을 불용한 것이다. 이른바 무혈시대(無血時代)의 막이 오른 것이다. 무치(武治)가 아니라 덕치(德治)를 실행한 것이다. 이후 무림계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시기와 반목을 일삼던 각 방파 간의 다툼은 사라졌으며, 평화가 지속된 것이다. 무림인들은 화기애애하게 서로의 경사를 축하해 주었으며 안으로는 제자들의 양성과 무예발전에 힘을 쓰게 되었다. 간혹, 순간적으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우발적인 살인을 하게 된 무림인들은 스스로 태화천을 찾아와 자신의 죄를 고하고 벌을 청하였으니, 평화가 완전히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운귀고원의 정사대전에 참여했던 군웅들 중 자발적으로 태화천에 가입한 일천 명의 무인들은 태화천주와 사대천왕의 헌신적인 지도 아래 무예가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태화천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 있었다. 결국 십 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태화천은 고금최강(古今最强)의 문파로 뿌리내리게 되었다. ―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세는 십 년을 가지 못하고 꽃은 십 일을 붉지 못한다.) 세상 일이란 예측불허한 것인가? 무혈천하로 무림의 태평성대를 구축한 태화천은 십 년 후, 원대한 대계(大計)를 시행했다. 그것은 꾸준히 중원무림을 괴롭혀 왔던 변황무림을 정벌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태화천주와 사대천왕은 각각 이백 명씩의 태화천 정예고수들을 이끌고 원정길에 나선 것이다. 서장(西藏), 남만(南灣), 회강(回彊), 북해(北海), 대막(大莫) 등. 태화천주는 태화천의 힘이 절정에 올랐을 때 변황무림을 평정함으로써 항구적인 무림평화를 획책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그것이 태화천의 마지막이 될 줄이야!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원정길에 올랐던 태화천주와 사대천왕은 물론 일천 명에 달하는 태화천의 무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바다에 빠진 바늘인 양, 그들은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수많은 무림인들이 그들을 찾기 위해 변황으로 떠났으나 그들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실로 불가사의��� 일이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천 명이 넘는 인원이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종적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무림계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태화천으로 인해 중원천하는 발칵 뒤집혀버렸다. 후유증은 심각했다. 그동안 심산유곡에 숨어버렸던 사마(邪魔)의 무리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나듯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고, 우후죽순처럼 새로운 방회가 생겨나면서 무림에 피바람이 몰아친 것이다. 이 모두가 태화천이라는 무림의 구심점이 사라지면서 파생한 일이었다. 결국 피가 피를 부르는 악순환의 고리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또한 내부단속에만 치중해 오던 무림방파들도 일제히 세력확장에 나서 혈풍에 휩쓸리고 말았다. 당연한 결과로 흑백양도는 다시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되어 곳곳에서 충돌하며 강호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세월은 말없이 흘렀다. 수없는 변고를 치르면서도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듯이 무림의 역사 또한 쉬임없이 흘러만 갔다. 제 3 장 그녀의 이름은 사사영(四四零) ① 슈― 욱! 무더운 대기를 가르며 나뭇가지가 춤을 춘다. 고도(孤島)의 한 기슭에서 백사호는 땀을 쏟고 있었다. 비록 어색한 몸놀림이기는 해도 그가 펼치는 검법에는 지독한 살기가 배어 있었다. 백육호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백사호, 잠깐 쉬었다가 하도록 하자," 그러나 백사호는 비오듯 땀을 쏟으면서도 고집을 부렸다. "조금만 더 하고 끝내겠소." 백육호는 고개를 저으며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만둬라. 괜한 헛고생 하지 말고. 너는 지금 무예를 연마하는 것이 아니고 광대춤을 추고 있단 말이다." 백사호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의 얼굴은 경직되어 있었다. "너는 온몸이 경직되어 있어. 그건 네 머리 속에 들어있는 증오와 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잊어야 한다고 얼마나 말해야 알겠느냐?" 엄중한 질책이었다.


백사호는 힘없이 머리를 떨구었다. '난들 왜 그걸 모르겠소.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지울 수 없는 것을 어찌하란 말이오?' "백사호, 서둘지 마라. 너도 알고 있듯이 우리들은 물론 이곳 수인들은 모두 기해혈(氣海穴)에 금제(禁制)가 되어 있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가 있단 말이다." 백사호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절해고도인 동사군도로 보내지는 모든 수인들은 황궁의 내가고수에 의해 기해혈이 기묘한 점혈수법으로 제압되어 있었다. 그것은 수인들이 무공을 익힘으로써 발생할지도 모르는 미연의 사태를 예방하기 위한 조처였다. 따라서 수인들은 노역을 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으나 내공을 함부로 익히다가는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백사호, 잠시 쉬고 있어라. 난 육노야를 좀 거들어 주고 오마." 백육호는 몸을 돌려 어딘가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백사호는 심호흡을 하여 답답한 가슴을 풀어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가 않았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말이 없어졌다. 그것은 오래 전의 한 충격적인 기억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② 그날은 만해전을 보수하기 위해 백육호를 비롯한 십여 명의 수인들이 노역 중이었다. 그날 오후 무렵이었다. "헉헉......" 문득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수인들은 모두 그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듯 히죽거리며 소근거렸다. 그들이 보수하고 있는 만해전의 한 창문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신음소리와 거친 호흡소리는 사실 성인이라면 누구나 짐작이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사호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간수들은 음탕한 표정으로 창문을 바라보며 뭐라고 키득거리고 있었다. 백사호는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간수들이 이따금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비웃음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마침내 그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간수들의 시선을 피해 창문을 엿보았다. 그때 본 방안의 정경이라니! 아아! 놀랍게도 그가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가 그 방에 있는 것이 아닌가? 고결한 기품과 온유함으로 지난 날 부친은 물론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오던 어머니.... 그녀가 침상에 얼굴을 파묻은 채 무릎 꿇고 둔부를 한껏 높이 치켜올린 채 신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그녀의 뒤에는 도주 조탁이 벌거벗은 채 격렬하게 하초를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흐윽......!" 어머니의 신음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백사호는 머리가 하얗게 비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어머니가... 어머니가 저럴 수가......!' 그날 밤. 백사호는 커다란 바위를 끌어안은 채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깊이깊이 가라앉으며 그는 자신의 인생을 증오했고, 세상을 저주했다. 짧은 순간에 그다지 길다고 할 수 없는 생애가 번개처럼 지나갔다. 마냥 즐겁고 행복하기만 했던 어린 시절... 황제의 총애 속에 이 나라 최고의 무장(武將)으로 칭송받던 위풍당당한 부친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부친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눈물은 피눈물이었다. 그의 의식이 점점 멀어져 갔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 맨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백육호의 무심한 얼굴이었다. 그는 머리카락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그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 주위를 둘러보니 기암괴석이 보였다. 백사호는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느꼈다. 자살하기 위해 바위를 껴안고 바다에 뛰어들었으나 백육호에 의해 건져진 것이다. "이봐, 쓸데없는 짓 말고 내게 무공이란 걸 배워 보겠어?" '무공?' 백사호는 멍청한 느낌이 들었다. 죽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그는 살아났다. 생의 아무런 미련도 없었는데 어찌 된 셈인지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어쩌면 그의 마음 속에 한으로 자리잡은 증오심 때문인지도 몰랐다. '조탁......! 언제고 널 내 손으로 찢어 죽이고 말리라!' ③ "마침 혼자 잘 왔다. 네놈에게 할 얘기가 있었는데." 바구니에 뭔가를 열심히 담고 있던 육노인은 백육호가 다가오자 반색을 했다. 백육호는 심드렁하니 물었다. "이건 다 뭐요?" "진귀한 것들이지. 이 죽음의 땅은 축복 받은 땅이야. 무엇 하나 버릴 게 없어. 풀 한 뿌리 물 한 방울까지도 말이야." 백육호는 노송에 털썩 기대앉으며 여전히 시큰둥하게 물었다. "아직도 할 얘기가 남아 있소?" "백사호의 무공수련은 진전이 있느냐?" 백육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있을 턱이 있겠소? 그저 울분이나 달래는데 만족할 뿐이오." 육노인은 야릇한 눈으로 백육호를 바라보았다. "네 무공 조예는 대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 있느냐? 노부는 그쪽엔 문외한이라서 말야." "경지는 무슨 놈의 얼어죽을 경지요? 한 줌의 진기도 모을 수 없는 놈이." 백육호의 대답은 퉁명스럽기만 했다. "그럼 네놈은 왜 틈만 나면 작대기를 들고 오두방정을 떠느냐?" 백육호는 피식 웃었다. "그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지 특별한 이유가 있겠소?" 육노인은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터뜨렸다. "카카카! 에라 이 썩을 놈아!" 백육호는 눈을 가늘게 했다. "육노야, 내게 할 말이란 뭐요?" "오냐, 이제 본론에 들어가마. 어떠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노부의 추나요법(推拿療法)을 전수 받아보는 것이." "생각없소." "으잉?" 일언지하에 퇴짜를 맞은 육노인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놈아, 추나요법이 안마나 접골 같은 잡술인 줄 아느냐? 천년이 훨씬 넘는 장구한 역사를 지닌 상고의 비전의예(秘傳醫藝)를 노부가 평생 동안 갈고 닦아 집대성한 비술이란 말이다. 제대로 익히면 그 효능은 엄청난 것으로 게다가 무공과 접목시키면......."


"알고 있소, 그 덕을 톡톡이 보고 있다는 것도." 육노인의 얼굴이 다소 풀어졌다. "그런데, 네놈은 왜......." "육노야, 추나요법의 진수인 정골팔법(正骨八法)으로 타작(打作) 당한 지가 벌써 십 년이 되었소. 내가 아무리 우매한 놈이라 해도 이미 그 뜻을 깨닫고 있소. 하지만......." "하지만 뭐냐?" 되묻는 육노인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랬을테지. 너라면 아무리 난해막측한 추나요법이라 해도 이미 그 깊은 뜻을 깨우쳤을 테지.'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이 죽음의 땅에서." 백육호 특유의 깊이 침잠되어 있는 저 무심한 눈빛은 이따금 육노인을 질리게 한다. 지금 이순간처럼. "네녀석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놈이구나. 평소에는 사사도의 수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품고 있는 듯이 보이다가도 이럴 때는 마치 인생을 다 살은 늙은이와 같이 무기력해 보이니 어느 것이 네놈의 진면목인지 노부는 헛갈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마도 지금의 내가 참모습일 것이오." 백육호의 음성은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무미건조한 것이었다. 잠시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육노인은 눈앞의 냇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청명옥수에 시선을 둔 채 그는 사색에 빠져들었다. '천하의 모든 이치는 저 흐르는 물과 같다. 계곡의 암석 사이를 헤쳐나가기 위해서 물살이 급해지며 소리가 나고, 웅덩이에 고이면 그 흐름이 멈추어진다. 그러나 폭포에 이르면 다시 굉음을 내며 용틀임쳐야 한다. 또한 천신만고를 거쳐 대해에 이르면 흐름은 도도해지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지금 저 녀석의 물줄기는 어디쯤을 흐르고 있는 것일까?' 육노인은 천천이 입을 열었다. "사내라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해도 자신의 의지를 꺾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특히, 네놈은." "푸훗, 육노야는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오?" 백육호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육노인은 어두운 안색을 굳이 감추지 않고 말했다.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혈풍이 곧 사사도를 덮칠 것이다. 네놈은 지금부터 그것에 대비해야만 한다." "어떤 혈겁이 닥친다 해도 새삼스러울 것이 뭐가 있겠소? 늘 죽음을 곁에 달고 다니는 이곳 수인들에게 말이오." "못난 놈, 젊은 녀석이 노부보다도 생에 대한 애착이 없단 말이냐? 네놈이 어떤 연유로 이곳에 흘러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만 그것이 너만 겪는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라. 노부는 제쳐 두고라도 네놈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백사호와 그의 모친 백삼호, 그리고 이곳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무수한 원혼을 생각해 봐라." 백육호의 무심한 눈빛이 가볍게 일렁였다. 하지만 입은 굳게 다문 그대로였다. "누군가 한 놈은 살아 남아 세상에 사사도의 실체를 알리고 나아가 일천이 넘는 원혼들의 한을 풀어줘야 되지 않겠느냐." "꿈 같은 얘기요." "물론 불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네놈이 그 불가능에 도전해 보겠다면 노부가 한 오라기 실낱 같은 희망의 여지는 만들 수 있다." "육노야는 왜 그렇게 내게 집착하시오?" 백육호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네놈이 아니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놈이 없기 때문이다. 네놈 때문에 노부도 한 줌 희망을 부여안고 구차한 목숨을 이어왔다." 백육호는 머리를 저었다.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네놈 몸에 가해져 있는 기해혈의 금제는 누구의 솜씨인 줄 아느냐?" 엉뚱한 질문에 백육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황궁의 어전시위(御前侍衛)로 있다는 무예의 달인 아니오?" 육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단언했다. "황실에 전해 내려오는 무공 중에 그토록 사악한 것이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다른 수인들과 달리 유독 너에게만은 강호 무림인들도 치를 떠는 극랄한 독공(毒功)이 침투되어 있다. 더구나 내가중수법(內加重手法)까지 더해져 있다. 놀랍게도 누군가가 자신의 진기(眞氣)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네 기해혈을 봉쇄시켜 버렸다. 네놈의 단전을 틀어막고 있는 탁한 기운이 바로 그놈의 진원지기(眞元之氣)란 말이다." 백육호는 해묵은 의혹이 명쾌하게 해소되자 또다시 의혹이 떠올랐다. "어떻게 해서 독공을 구사하는 사악한 인물이 국법을 집행할 수 있단 말이오?" 육노인은 모처럼 웃음을 흘렸다. "클클! 네놈의 머리도 가끔은 노부의 수준에 근접할 때가 있긴 하구나. 제대로 물어봤다. 바로 그 점이 사사도의 음모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네놈의 사사로운 원한과 숱한 무고한 죽음 뒤에는 거대한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결코 한두 명의 고관대작들이 사사도를 만든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첩첩산중이구려." 백육호는 어이없다는 듯이 내뱉었다. "낙담하진 마라. 지금 노부가 말한 것은 훗날에 대한 일이고, 당장은 코앞에 다가온 독수(毒手)를 피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곳 관리들의 임기가 이제 오 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 "그자들의 임기가 우리들과 무슨 연관이 있소?" "있다마다. 그간 곽초량이 배편으로 보낸 것이라고는 강장제 몇 첩이 고작이다. 그것도 노부가 짐작컨데 중원에 널려있는 보약들과 별 차이가 없는 평범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십 년이란 긴 세월을 세인의 눈을 피해가며 사사도에 심혈을 기울였던 배후의 인물들이 심사가 뒤틀릴 것은 당연지사다. 어떤 식으로든지 문책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곽초량이 모를 것 같으냐?" "그렇다 해도 곽초량이 우리들에게 무슨 짓을 한단 말이오? 그가 여기 수인들을 모두 죽인다 해도 얻는 것이 뭐가 있단 말이오?" 백육호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구백이십팔호가 죽던 날 밤, 옥사 안에서 곽초량이 노부에게 한 협박을 잊었느냐?" 물론 백육호도 기억하고 있었다. 단지 곽초량의 의중을 알 수 없을 따름이었다. "노부도 놈이 어떤 흉계를 꾸미고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놈이 의원으로서는 재주가 보잘 것 없으나 모사가(謀事家)로서는 타고난 놈이다. 게다가 놈의 허황된 공명심과 독랄한 심성으로 볼 때 자신의 안위와 직결되는 일에 필시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할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자가 무슨 짓을 하건 속수무책(束手無策)일 수밖에 더 있소?" 문득 육노인은 뒤를 돌아봤다. 아래쪽 숲 속에서 백사호가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전신은 땀으로 흥건했고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백사호는 다가오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육노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소." "물어봐라. 노부가 아는 것이라면 다 말해주마." "어찌 하찮은 몇 가지 약재때문에 이런 끔찍한 곳을 만들 수 있단 말이오? ���곳에서 죽어간 일천이 넘는 수인들이 그들과 철천지 원수지간도 아닐 터이고, 더구나 국록을 받는 관리들까지 동원되어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소." 육노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녀석, 고작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 백사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서 답해 주시오." "오냐, 노부가 네놈에게 인생공부를 시켜주마." 육노인은 느긋이 눈을 감으며 훈장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대저 사람이란 욕심이 끝이 없는 법이다. 특히 더 이상 오를 자리가 없는 최고의 위치에 있는 자들 중에는 과욕을 부리는 경우가 허다하지.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불로장수(不老長壽)에 대한 욕망이다. 말로만 듣던 불로초(不老草)나 불로선약(不老仙藥) 따위가 그것이다." 육노인은 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매일밤 나이 어린 동정녀(童貞女)들을 침실로 끌어들이는 고관대부들의 입장에서 볼 때 청춘을 되찾을 수 있는 약재는 꿈에서도 그리는 것이지. 그래서 어떤 희생도 불사하고 거금을 들여 그런 선약을 만들려 하는 것이다." 백육호는 조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후후! 어리석은 자들! 세상에 있지도 않은 선약때문에 고귀한 인명을 희생시킨단 말인가?" 그 말에 육노인이 눈을 부릅떴다. "이런 무식한 놈이 있나? 네놈이 뭘 안다고 헛소리 하는 거냐?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달변가로 명성을 떨쳤던 동방삭(東方朔)이 서왕모(西王母)의 천도(天桃)를 훔쳐 먹고 삼천갑자(三千甲子)를 살았다는 말도 못들어 봤느냐?" 백육호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육노인은 재빨리 말했다. "그것도 꾸민 얘기라고 우길 셈이냐? 그렇다면 팔백 년을 살았다는 팽조(彭祖)란 사람에 대해 언급한 열선전(列仙傳)이란 책은 읽어 보았느냐?" "그만하시오. 육노인. 당신의 말이 맞다고 칩시다." 백육호는 마침내 굴복하고 말았다. "킬킬! 사실 노부도 그 말을 믿는 건 아니다. 어쨌든 사실 여부를 떠나 인간의 장수에 대한 욕망이 끝이 없다는 걸 말했을 뿐이다. 백사호, 이젠 충분한 답이 됐느냐?" 백사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이해할 수가 없소." "이런 돌대가리가 있나? 야 이놈아! 역사에 무수한 선례를 듣고도 모른단 말이냐?" 백사호는 굳은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백육호도 따라 일어서며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 들어올 배에도 지난 몇 달처럼 새로운 수인이 없었으면 좋겠군." "그래야지." 육노인은 바구니에 수북히 쌓여있는 야초(野草)를 백육호와 백사호의 바구니에 나눠 주고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산 아래로 내려갔다. ④ "제기랄! 대체 오는 거야 마는 거야?" 지독한 더위다. 조탁은 굵은 목줄기로 줄줄이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훔쳐내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오늘 만큼은 곡식과 가축, 술과 차(茶)를 실은 수송선이 들어올 것이라 기대하며 무더위에도 아랑곳없이 예의를 갖추기 위해 관복을 갖추어 입고 있었다. 그는 포구에서 벌써 한 시진째 목을 길게 빼고 이제나 저제나 범선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 개월에 한 번 들어오는 수송선이 예정 날짜를 보름을 넘긴 것은 풍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풍랑이 가라앉았는데도 수송선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로 인해 식량 사정이 말이 아니었다. 다른 물품들도 바닥이 나 있었다. 사사도의 제왕인 그의 식탁에도 고기가 오르지 않은 지도 벌써 오래였다.


"도주님, 만해전으로 돌아가 땀을 식히시지요. 소인이 지켜보다가 배가 보이면 즉시 전갈을 올리겠습니다." 부관 노릇을 하는 포두 동포락이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조탁은 연신 땀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빌어먹을. 그럼 자네가 잘 지켜보다 바로 연락해 주게." 비대한 체구를 힘겹게 움직여 관사 쪽으로 올라가는 조탁을 바라보다 동포락은 버럭 외쳤다. "이놈아! 뭐하고 있느냐? 어서 뛰어 올라가 백삼호에게 목욕 준비를 시켜야지!" "예, 예! 그렇찮아도 소인 막 가려던 참입니다." 봉두수는 대답과 동시에 쏜살같이 달려갔다. 퍽! 발길질이 가해졌다. 한껏 호사스럽게 치장한 조탁의 침실이었다. 맑은 샘물을 가득 채운 참나무 욕조에서 투박한 발이 거두어졌다. 사사도의 제왕 조탁은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욕설을 퍼부었다. "이년아!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깨끗이 닦으란 말이다!" 그는 음침한 눈으로 바닥에서 배를 움켜쥔 채 경련하고 있는 벌거벗은 중년여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배가 들어오면 술과 음식이 가득할 테니 네년도 오랜만에 포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정성을 다하란 말이다." 여인은 엉금엉금 기어오고 있었다. 비록 개처럼 기고 있었으나 여인의 아름다움만은 감출 수가 없었다. 얼굴은 삼십대밖에 안 되어 보였으며, 몸매 또한 군살이 별로 없이 풍염하기만 했다. 한때는 고귀했던 여인이기에 아직도 기품이 은은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복부를 얻어맞은 고통에 아랫배를 안은 채 기어오는 모습은 그저 하나의 암컷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적어도 조탁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조탁은 여인이 욕조에 매달리자 손을 뻗어 풍만한 젖가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흐흐! 곧 배가 들어올테니 씻는 건 그만 두고 네년의 그 우아한 춤솜씨나 감상해야 겠다. 정성을 다해 추도록 해라. 혹시 아느냐? 본 어르신이 네 자식놈에게도 고기맛을 보게 해줄는지." 도무지 거역할 수 없는 명이었다. "네......." 여인 백삼호는 떨리는 음성으로 답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서서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욱 사랑했던 지아비 앞에서도 이토록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몸으로 춤을 춘 적은 없었다. 적어도 십 년 전만 해도 이런 일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악문 채 춤을 추고 있었다. 젖가슴을 아래 위로 출렁거리게 하면서, 둔부를 좌우로 빙글빙글 돌리며, 때로는 매끄러운 허벅지를 벌리며 온몸에 땀이 흐르도록 춤을 추었다. 지금 그녀의 마음 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밖에 없었다. 그것은 뙤약볕 아래서 노역에 시달리고 있을 아들, 백사호였다. 좌혼(佐琿). 열일곱밖에 안된 아들 좌혼에게 고기를 먹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모성만이 그녀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푸하하하! 좋아, 역시 네 춤솜씨는 일품이란 말이야." 욕정으로 이글거리는 조탁의 눈이 열심히 춤추고 있는 백삼호의 전신을 핥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기실 백삼호는 사십을 넘긴 여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피부는 아직도 탄력이 넘쳤으며 비단결처럼 부드러웠다. 어디 그뿐이랴?


나이 어린 소녀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완숙하고 고혹적인 면이 있었다. 아니, 무엇보다도 지난 십 년간이나 계속되어온 육체의 향연에도 매번 조탁을 황홀경으로 몰고 가주는 기막힌 재주(?)를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조탁은 비대한 몸을 일으켰다. 욕조의 물이 넘쳐 흐르며 털로 뒤덮힌 그의 불룩한 배가 드러났다. "온다! 배가 들어온다아!" 누군가의 외침에 이어 환호성이 울렸다. "......!" 야자수 그늘 아래에서 오수(午睡)를 즐기던 동포락은 벌떡 일어났다. 눈을 가늘게 뜨고 수평선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오오!" 그는 탄성을 발했다. 과연 두 척의 거대한 범선이 넘실대는 파도를 가르며 미끄러져 오고 있었다. 동포락은 버럭 고함을 쳤다. "서둘러라! 도주님께 소식을 전하고 수인놈들을 불러라! 빨리빨리 움직여라!" "옛!" 관리들은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들에게 즐거운 날이었다. 지난 달, 폭풍우 속에 가축과 수인들의 수가 많이 줄었다. 따라서 오늘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기름진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기쁨과 새로 들어올 풋내기 수인들을 마음껏 희롱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관리들은 연신 싱글벙글했다. "도주님! 옵니다, 와......." 막 침실로 뛰어들던 봉두수는 말을 맺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이, 이런 미친 놈! 호들갑은... 그래 배, 배는 몇 척이냐?" 도주 조탁은 한창 정사중이었다. 그는 백삼호의 엉덩이를 잡은 채 폭포수 같은 땀을 흘리던 중이었다. 봉두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삼호의 희멀건 엉덩이가 높이 치켜져 있었고, 머리는 침상에 박혀 있었다. 그런 희안한 자세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예... 예... 그게, 이, 이번에는 두 척입니다요." 봉두수는 다시 눈을 크게 떴다. 조탁이 여인의 엉덩이를 잡은 채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의 번들거리는 얼굴에는 환락에 겨운 만족감이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두 척의 범선이 닻을 내린 포구 주위는 마치 저자거리처럼 활기가 넘쳤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관리와 물품을 하역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수인들 사이로 조탁과 곽초량은 이제 막 배에서 내린 청색 관복을 입은 초로의 사내에게 다가갔다. "장현령, 먼길에 노고가 많으셨소이다." 조탁의 반가운 인삿말에 광동성 조양진의 현령(縣領) 장소덕(張召悳)은 섭선을 좌우로 흔들며 답례했다. "허허! 조도주. 오랜만이오. 무더위에 고생이 많소이다." 조탁의 뒤를 따라온 동포락이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물주머니를 내밀며 말했다. "현령 나으리, 샘물을 드십시오. 방금 떠온 것이라 뼛속까지 시원합니다요." "허허, 고맙소이다. 동포두." 장소덕은 단숨에 몇 모금의 샘물을 들이키고는 감탄을 터뜨렸다. "커어! 시원하군. 물맛이 어찌 이리도 감미롭소?" 조탁은 범선을 바라보며 물었다. "장현령, 끌고 온 수인은 몇이나 되오?"


"단 한 명이외다." 조탁과 곽초량, 동포락 등은 동시에 소리쳤다. "한 명이라구요?" "그렇소. 어디 봅시다. 아직 안 내렸나?" 장소덕을 따라 눈길을 옮기는 조탁과 동포락의 표정에는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오십여 명밖에 안 되는 지금의 수인으로는 사사도의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노역도 벅찬 형편이었다. 게다가 수인들 대부분은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병자들이라 실제 노역할 수 있는 자들은 고작 이십여 명에 불과했다. 조탁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수인들의 공급이 끊긴 지 얼마인가? 이건 나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닌가?' "아! 저기 내리는군!" 장소덕이 손가락질을 했다. 실망에 찬 눈으로 그쪽을 바라보던 조탁의 눈이 한순간 찢어질듯 커졌다. 이어 그의 입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소녀. 삼베로 만든 허름한 수인복을 입었으나 마치 천상의 선녀가 잠시 노닐기 위해 하계에 내려온 듯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가 조심스럽게 범선에서 포구로 연결되는 발판을 밟고 내려오고 있었다. 열일곱쯤이나 되었을까? 소녀의 전신에서 뿜어져나오는 고아한 향기는 암울한 죽음의 땅을 포근히 덮어주는 듯했다. 해풍에 가볍게 날리는 흑단 같은 머릿결 사이로 불안과 공포에 못이겨 두리번거리는 눈망울은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는 갸름한 콧날과 연분홍빛 입술은 가히 인세의 요정인 듯했다. "......!" 그녀가 나타나자 주위에 있던 관리들은 물론 하역작업에 여념이 없던 수인들마저 손을 멈춘 채 넋을 잃고 말았다. 한편, 쌀 가마니를 둘러메던 백육호도 그녀를 목도했다. 그는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정말 아름답군. 어째서 저런 소녀가 이 죽음의 섬에 유배되었단 말인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이미 재가 되버린 백육호의 가슴에 한 가닥 불꽃이 지펴졌다. 어쩌면 그것은 새로운 운명의 시작을 알리는 징조인지도 몰랐다. "아... 니? 장현령! 저 소녀가 죄인이란 말이오?" 조탁은 시선을 소녀에게서 떼지 못한 채 물었다. "그렇소. 그것도 대역죄인이오." "오호! 그래요? 대역죄인이라......." 어느새 조탁의 얼굴 가득히 환희의 빛이 넘쳐 흘렀다. 뿐만 아니라 실망은 어디로 가고 생기가 넘쳐났다. 그는 소녀를 바라보며 오만 가지 상상을 하고 있었다. "어허! 그만 넋을 잃고 보시구려. 언제까지 이 뜨거운 모래밭에 세워둘 참이오?" 장소덕이 어깨를 치자 그는 화들짝 놀랐다. "어이쿠! 내가 잠시 딴 생각을 했소. 자, 자! 어서 올라가십시다." ⑤ 객실(客室). 조탁과 장소덕은 나란히 앉아 인명부(人名簿)를 들척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조탁은 인명부는 보는둥 마는둥 하며 창가의 의자에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소녀를 연신 훔쳐보고 있었다. "장현령, 지금 있는 백삼호 계집이야 이곳에서 음식 수발이나 허드렛 일을 시킨다지만 저 꽃처럼


어여쁜 계집애는 대체 어디다 쓰라는 것이오?" 장소덕은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창 밖을 가리켰다. "조도주, 나도 잘은 모르지만 창 밖을 한 번 보시오. 저 소녀의 신분이 결코 범상치 않은 것 같소이다." 조탁은 시선을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뭘 보라는 거요?" "허허! 범선 말이오. 갑판 위에 무사들이 서 있지 않소?" 관사에서는 포구가 내려다 보인다. 멀기는 하지만 범선도 눈에 들어왔다. 조탁은 눈을 가늘게 했다. 요즘 들어 시력이 과히 좋지 않은 것이다. 과연 뱃머리에 다른 관리들과 차림새가 완전히 구별되는 세 명의 무사가 뜨거운 태양 아래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저런, 이렇게 더운데 뭣들 하는 거요? 어서 사람을 보내 데려오도록 하시오. 내 시원한 황주(黃酒)를 한 사발씩 대접하도록 이르겠소." 장소덕은 고개를 저었다. "조도주, 그들이 이마에 두르고 있는 두건에 뭐라 씌어져 있는지 보이지 않소?" 조탁은 잔뜩 눈을 찌푸려 무사의 푸른 두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저들은 동창(東敞)에서 왔소." "동창이라고 했소?" 조탁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렇소. 나도 처음엔 매우 놀랐소. 더구나 저들이 소녀를 대하는 태도가 워낙 조심스러울 뿐더러 죄인이 아니라 상전을 대하는 듯하여 이해가 안되었소." "......?" 조탁은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물론 이 죽음의 섬에 유배된 자들치고 예사로운 자는 없었다. 지난 십 년간 그에게 쾌락을 제공해준 백삼호만 해도 보통 신분이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어찌 백삼호 뿐이겠는가. 이곳의 수인들 중 다수가 바깥 세상에서는 한때 대단한 신분과 권력을 누리던 자들���었다. 그러나 단언코 어떤 자도 동창의 무관들이 직접 호송해 온 적은 없었다. "저 소녀의 미색이 워낙 출중하여 호송 도중 장난을 한번 쳐볼까 해도 동창의 무사들 눈치가 보여서 꼼짝도 하질 못했소." 장소덕은 못내 아쉬운 듯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소녀의 전신을 훑어보며 혀를 찼다. 조탁은 음침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장현령, 이곳은 나의 땅이요. 동창의 무사들 역시 내 허락없이는 이 섬에 발을 내릴 수 없소이다. 보시오, 배에서 꼼짝 못하고 있지 않소?" 과연 동창의 무사 삼 인은 뱃머리에서 이쪽 관사만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 아무도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탁은 침을 삼키며 말했다. "장현령, 그러니 아무 걱정말고 저 계집을 끌고 내 방으로 갑시다.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실컷 즐겨야 하지 않겠소?" 장소덕은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고맙소만 난 동창 무사들과 함께 배를 타고 돌아가야 하오. 게다가 그들로부터 무시무시한 경고도 들었소. 아쉽긴 하지만 저 소녀의 수인번호나 적어 주시오." 조탁은 더 권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부터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는 선녀와 같이 아름다운 소녀를 장소덕과 함께 나눈다는 것은 애당초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쯧!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짐짓 혀까지 차며 조탁은 인명부에 눈을 돌렸다. "에에, 또 보자. 보름 전 사백사십호가 노역 중 사망했으니 그 번호를 저 계집에게 부여하면 간단한 일이오." 그는 새로운 수인번호 목록에 사사영(四四零)을 적어 장소덕에게 넘겨 주었다. "사사영이라. 알겠소. 한 수인이 죽음과 동시에 새로운 수인이 탄생했군." 목록을 받아 품에 넣은 후 장소덕은 아쉬운 듯 마지막으로 소녀를 찬찬이 뜯어본 후 걸어 나갔다. 조탁은 그의 뒤를 따라 나가 소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소녀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잠시 기다리고 있거라. 손님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즉시 너와 함께 시원하게 땀을 식혀야겠다." "......!" 소녀는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어깨를 움츠렸다. "흐흐, 귀여운 것. 어찌 인간이 이토록 고울 수가 있단 말이냐? 너무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턴 이 어르신이 각별히 널 아껴줄 테니 말이다." 조탁은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비대한 몸을 흔들며 나갔다. 제 4 장 폭풍전야(暴風前夜) ① 백삼호는 아직도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끌어가며 어렵게 창가로 다가섰다. '사랑하는 내 아들 좌혼.... 이 에미가 이런 치욕 속에서도 목숨을 이어가는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너때문이란다.......' 한편, 포구에서 메고온 술독을 만해전 마당에 내려놓던 백사호는 어디선가 자신을 주시하는 뜨거운 시선을 느꼈다. 그는 손등으로 눈가로 흘러드는 땀을 훔쳐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보았다! 아무렇게나 풀어헤쳐진 긴 머리와 벌거숭이인 채 유방을 드러낸 한 여인을! "......!"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떴다. 창문 안쪽과 밖! 서로를 바라보는 모자의 눈빛이 부딪쳤다. 여인은 괴로움에 비틀거렸다. 너무도 냉막하여 도무지 사람의 눈빛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아들 좌혼의 눈을 본 것이다. 또한 그 눈 속에는 야수와도 같은 증오와 경멸의 빛이 담겨져 있었다. '아아! 아들아!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니? 네눈에... 이 에미가 사람으로, 에미로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여인 백삼호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좌혼, 백사호는 몸을 홱 돌렸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② 하역작업을 마친 두 척의 범선은 인솔자인 장소덕의 승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현령, 그럼 먼길 조심해 가시오." 연신 빙글거리며 작별인사를 하는 조탁이다. 장소덕은 마치 소중한 가보라도 탈취당한 듯 마음이 좋지가 않았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배로 오르며 버럭 외쳤다. "물품은 빠짐없이 내렸느냐?" "예, 나으리. 소인이 꼼꼼히 확인했습니다." 곁에 선 포쾌(捕快)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출발해라!" 장소덕은 큰 소리로 외쳤고 조탁은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손을 흔들어댔다. 장소덕은 평소에는 한심한 인생을 살아가는 불쌍한 작자라고 생각했던 조탁이 오늘만큼은 황제보다


더욱 부럽게 느껴졌다. 그는 코를 휑 풀면서 자신의 선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범선은 닻을 올렸다. 곧 출항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조탁은 오색빛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그는 객실에 홀로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선녀를 어떻게 요리할까 벌써부터 궁리하고 있었다. 그가 막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억?" 그는 깜짝 놀랐다. 한 인물이 마치 석상(石像)처럼 우뚝 선 채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놈! 감히 누구 앞이라고......." 노갈을 터뜨리던 조탁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사나이의 이마에 푸른색의 영웅건이 둘러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황금색 수실로 동(東)이란 문자가 수놓아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이놈은?' "조도주. 난 동창의 왕승(王升)이라 하오." 삼십대 중반의 바로 갑판 위에 서 있던 삼 인의 동창 소속 무사 중 한 명이었다. 조탁은 어리둥절하여 급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범선은 막 출항하는 중이었다. 그가 언제 배에서 내렸는지 그는 보지 못했다. 동창 무사 왕승은 전신이 한 자루의 검처럼 싸늘한 예기를 뿌리고 있었다. "여, 여긴 국법에 의해 내가 관장하는 곳이오. 어째서 허락도 없이......." 조탁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왕승은 차갑게 말했다. "걱정 마시오. 한마디만 하고 떠날 것이오." 놀란 가슴이 조금 진정되자 조탁은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하실 말씀이라면?" 왕승은 섬뜩한 안광을 뿜어내며 한마디 한마디를 힘주어 천천히 말했다. "방금 도착한 아가씨를 잘 부탁하오. 앞으로 조도주를 포함한 이곳의 모든 관리들은 아가씨를 대함에 있어 한치의 소홀함도 없도록 하시오. 만에 하나, 아가씨의 신상에 조금이라도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나와 동료들은 반드시 이곳을 다시 찾을 것이오. 그리고 그날... 이 섬은 피바다에 잠길 것이오." 조탁은 땀이 일순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그러나 왕승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부디 국법만을 믿고 내 충고를 무시하는 우(愚)를 범하지 마시오. 난 이미 언제든 국법을 거스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소." 그렇다. 동사군도는 황명에 의해 호송관과 수인들 외에는 어떤 자도 출입을 금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왕승은 이미 황명을 어긴 중죄를 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을 당당하게 밝히는 태도는 가히 놀라운 것이었다. "잘 알아 들었으리라 믿고 가 보겠소. 결코 다시 만나게 될 일이 없기를 바라오." 말을 끝낸 왕승이 바다를 향해 몸을 돌리려는 순간, "잠깐!" 어느새 조탁의 뒤에 다가와 있던 곽초량이 싸늘한 일갈을 발했다. "귀하는 누구요?" 날카롭게 뻗어있는 검미를 찌푸리며 왕승이 물었다. "본인은 황궁어의 곽초량이오." 자부심이 실려있는 곽초량의 답변이었다. 하지만 왕승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무심하게 물었다. "용건은?" 곽초량은 거드름을 피우며 입을 열었다.


"그대의 이런 무례한 방문을 왕야께서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순간 왕승의 안색이 차갑게 굳었다. 그는 충격을 받은 듯 몸을 가늘게 떨었다. 반면 조탁은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으며 곽초량을 돌아보았다. "그래, 이제 보니 그랬었군." 신음을 흘리며 왕승은 곽초량에게 다가섰다. "네놈이 언급한 왕야란 물론 건친왕을 말하는 것일테지." 곽초량은 눈을 부릅떴다. "네놈이라고?" 막 노성을 지르려던 곽초량은 한순간 숨을 들이켰다. "헉!" 분명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왕승의 어깨 위에 걸려있던 검이 뽑혀 자신의 목젖에 닿아 있었다. "충고에 보답하는 의미로 본인도 한마디 첨언을 하지. 조금 전 내 경고는 네놈의 목숨이 붙어있는 한 유효하다. 설사 네놈들의 배후에 어떤 자가 있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네놈의 성이 곽가라 했는가?" 곽초량은 태어난 이래 이렇게 긴장하긴 처음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곽가, 네놈에게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주마. 본인은 동창의 십이수라검(十二修羅劍)의 수장(首長)인 냉혼검(冷魂劍) 왕승이다. 네놈이 모시는 왕야에게 이렇게 고해라. 왕승과 그의 형제들이 머지않아 이 섬을 다시 찾아올 것이라고. 그 말을 전하면 틀림없이 후한 상을 받을 것이다." "......!" 곽초량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저 악몽 같은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빌 뿐이었다. 왕승은 고개를 돌려 섬뜩한 안광으로 조탁을 쏘아보았다. "조도주, 다시 한 번 말해둔다. 아가씨를 능멸하는 자, 그자가 누구라 해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삶에 일말의 미련이라도 있다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왕승은 검을 제 자리에 꽂으며 두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섬뜩한 눈길을 보냈다. 이어 가벼운 기합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신형을 솟구쳤다. 범선은 이미 삼십여 장 밖으로 멀어져 있었다. 그런데 왕승은 마치 한 마리의 새처럼 날아갔다. 단숨에 이십여 장을 날아간 그의 몸이 하강하는 듯 싶더니, 범선으로부터 누군가 나무토막을 던졌다. 팍! 바다에 떨어진 나무토막을 발로 차며 왕승은 다시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는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뒤집은 후 갑판에 가볍게 내려섰다. 실로 신비막측한 경신술이었다. 범선은 서서히 멀어져 갔다. 잠시 후에는 수평선상의 두 개의 검은 점으로 화하고 말았다. 조탁과 곽초량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뭐, 저런 녀석이 다 있지? 감히 누구에게 칼을 겨누는 거야, 막 되먹은 놈 같으니라구!" 곽초량은 목젖을 쓰다듬으며 투덜댔다. 그는 특히 조탁의 면전에서 치욕적인 모습을 보인 것에 모멸감을 느낀 듯했다. 조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명색이 무관이다. 더구나 용담호혈(龍潭虎穴)로 일컬어지는 건친왕부 내에서 서열 백위 안에 드는 무공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던 그의 체면이 왕승으로 인해 형편없이 구겨진 것이다. "허허.... 알 수 없는 일이군. 왕야께 변고가 있을 리 만무한데 어찌 저런 불한당이 이곳까지 와 흰소리를 지껄인단 말인가?" "아! 덥다, 더워! 뙤약볕 아래 오래 있었더니 머리에 김이 다 나는군." 곽초량은 공연히 너스레를 떨며 몸을 돌렸다. ③ 하남성(河南省) 개봉(開封).


역사의 흐름에 따라 진류(陳留), 양주(梁州), 변경(卞京) 등의 이름으로 불리던 고도(古都)로 명성이 자자한 기승절경이 즐비하여 풍광이 뛰어날 뿐아니라 문물이 번창하고 시황(市況)이 성하여 수많은 인파가 넘쳐나는 대도였다. 동가(東街)의 만화대로(萬華大路) 변에는 한껏 치장을 한 주루, 객잔들과 갖가지 점포들이 줄을 이어 늘어서 있는 바 초가을 저녁의 미풍을 맞으며 오가는 행인들이 대로에 넘쳐 흘렀다. 만화대로의 끝에는 순천부(順天府)의 황궁에 못지않는 웅대한 규모의 궁전이 자리잡고 있으니, 바로 당대무림의 패자로 군림하고 있는 무림군왕성(武林群王城)이다. 역대의 무림제파들이 대부분 도성이나 저자거리를 피해 산이나 인적 드문 곳에 자리잡는 데 비한다면 무림군왕성이 대도인 개봉의 번화가를 본거지로 삼은 것은 파격적이라 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도 될 것이다. 용비천군(龍飛天君) 남궁혁(南宮赫). 그는 수백 년의 맥을 이어온 남궁세가를 발판으로 무림군왕성을 일으켰다. 태화천이 갑작스럽게 몰락한 이후로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어버린 강호를 평정하여 자타가 공인하는 당금무림의 지존이 된 것이다. 그는 파천황교가 등장하면서 몰락해 버린 가문을 십수 년간 절치부심(切齒腐心)하여 오늘날의 무림군왕성으로 부활시킨 초인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그의 신공절학은 오랫동안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스스로 창안한 독보적인 것으로 그동안 수없이 치룬 사마외도(邪魔外道)들과의 격전에서 그 가공스런 신위를 충분히 떨쳐 보였다. 그 누구도 그에게 삼초지적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잠룡헌(潛龍軒)은 군왕성의 내성에 위치한 칠층으로 이루어진 수상누각이다. 이 수상누각은 성주 남궁혁이 귀빈들에게 주연을 베풀기 위해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다. "......." 지금 잠룡헌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홍목(紅木)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보며 삼십여 명이 앉아 있었으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보통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 이름만으로도 사마의 무리들의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명문정파의 지존들인 것이다. 상석의 용좌(龍座)에는 가슴까지 내려온 풍성한 백염을 쓰다듬으며 만면 가득히 부드러운 웃음을 담고 있는 인물이 앉아 있었으니, 그가 바로 군왕성주 용비천군 남궁혁이었다. 가슴에 금룡의 자수를 새긴 곤룡포와 허리에 주황색 채대(彩帶)로 격을 갖춘 의관만 보더라도 위엄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남궁혁은 비록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나 그의 눈빛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안으로 갈무리한 신광(神光)이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은은히 번쩍여 한 시대를 관장하는 대영웅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좋소. 그렇다면 여러분들께서 새롭게 결성될 태자당(太子黨)에 적합한 영재들을 추천해 주시오." 오늘 잠룡헌의 회합은 향후 무림에 중대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것은 군왕성주 남궁혁이 제안한 태자당에 관한 긴요한 회의였기 때문이다. 남궁혁의 말이 떨어지자 군웅들은 서로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후에야 사십대의 중년미부가 입을 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태자당은 각 문파의 대를 이을 후손이나 수제자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비록 경륜이 일천하고 자질도 미흡하지만 차기 장문인으로 내정되어 있는 제 여식을 성주님께서 거두어 주시면 저희 화산파(華山派)로서는 큰 경사가 될 거예요." 남궁혁은 첫 발언이 나오자 반색을 했다. "오호! 연문주의 여식이라 하면 화산옥검(華山玉劍) 연채령(燕彩玲) 낭자를 말씀하시는 게 아니오? 어린 나이에 화산파의 비전을 모두 깨우쳤다는 기재 중의 기재이거늘 내 어찌 마다하겠소?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바이오." "성주님의 칭찬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너무 과분하신 말씀이에요." 화산파의 장문인인 매화십검(梅花十劍) 연백경(燕白鏡)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비록 겉으로는 겸양하는 척 했으나 기실은 자식에 대한 자부심이 유별났던 그녀였다. 그런 차에 군왕성주가 군호들 앞에서 찬사를 보내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때 우람한 체구의 중년대한이 컬컬한 음성으로 발언했다. "연장문인께서 장중보주(掌中寶珠)를 내놓으시는데 이 탁모가 어찌 사양하겠소이까? 비록 우둔하기는 하나 장차 금사신궁(金獅神宮)을 이끌어 나갈 소생의 장자(長子)를 성주님께 맡기려 합니다. 부디 엄히 가르침을 주시기 바라오." 벽력천극(霹靂天戟) 탁발륜(卓拔崙)이었다. 그는 독문병기인 풍뢰화극(風雷火戟)으로 불패의 신화를 만들어 낸 금사신궁의 궁주였다. 과거 파천황교에 죽음으로 항거했던 선친의 뜻을 이어 악의 무리들을 척결하는 일에는 선두에 섰던 열혈인이기도 했다. "잠깐, 성주! 이 쓸모 없는 퇴물도 한마디 해야겠소이다." 창노한 음성이 터지자 장내의 군호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한 노인이 일어서고 있었다. 그는 황갈색 도포를 걸친 도인으로, 장백파(長白派)의 장문인 무진도장(無盡道長)이었다. 오 년 전 무림군왕성의 출범 때부터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무림의 원로 중 한 명인 무진도장은 노안으로 군웅들을 한 차례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이 퇴물도 차기 장백파를 이끌어갈 제자를 군왕성에 의탁하겠소. 더불어 몇 명의 영재들을 함께 천거하고자 하오이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우선적으로 태자당에 입당해야 할 이 시대 최고의 기재들이라 할 수 있소이다. 여러분들이 익히 알고 계시는 용봉칠영(龍鳳七英)이외다." 용봉칠영!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이름들이다. 그들은 당금의 무림천하가 공인하고 있는 절세의 기재 칠 인을 말했다. 그중에는 군왕성주의 아들인 칠절신군(七絶神君) 남궁청운(南宮靑雲)과 그의 누이 천향옥녀(天香玉女) 남궁소연(南宮小蓮)이 포함되어 있기도 했다. 그밖에도 백병지왕(百兵之王)으로 일컬어지는 검에 관한한 최고의 달인만을 배출해 온 철검장(鐵劍莊)의 소가주 비천검(飛天劍) 철무영(鐵武榮)이 있었다. 또한 오백 년의 장구한 역사를 이어온 황보세가(黃甫世家)의 금지옥엽인 벽월선자(碧月仙子) 황보수선(黃甫水仙), 지난 날 파천황교에 대항하기 위해 무림의 태두인 소림사와 무당파가 공동으로 만들어 낸 전인 혜왕(彗王)을 비롯하여....... 독(毒)과 암기(暗器)에 관한한 천하제일가문인 사천당문(四川唐門)의 백 년 이래 최고의 기재인 금적수재(金笛秀才) 당세곤(唐世昆), 무림출도 일 년만에 흑도의 거물 삼십여 명을 저승으로 보내버린 신비의 청년무사 무영객(無影客)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용봉칠영! 그들 중 어느 한 명이라도 능히 한 시대의 제왕이 되기에 충분한 재목들이었다. 다만 불행이라면 한 시대에 한두 명도 아니고 일곱 명의 기재가 동시에 탄생했으니 실로 애석한 일이기도 했다. "옳은 말씀이시오!" "그야, 당연한 말씀이 아닙니까?" "허허! 용봉칠영이 빠져서야 태자당은 유명무실할 뿐이 아니겠소?" 군호들은 앞을 다투어 찬동했다. "핫핫핫! 노부도 찬성이오!" 문득 잠룡헌이 흔들릴 정도로 우렁찬 음성이 들렸다.


그는 금관(金冠)과 금의화복(錦衣華服)을 입고 있는 비대한 체격의 거두인(巨頭人)이었다. 만금대인(萬金大人) 호금수(胡金壽)였다. 그는 보통 사람의 두 배가 되는 거구였는데 좌중의 군호들과는 이질적인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즉, 무림인이라기보다는 상계(商界)에 속한 거물이었다. 알만한 사람은 모두 아는 명물 만화루(萬花樓)와 만보점(萬寶店), 중원의 최대규모의 만해표국(萬海驃局)과 만금전장(萬金錢莊) 등을 소유하고 있는 대부호였다. 세인들은 그가 대체 얼마나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소문에 의하면 황궁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보다 많다는 일설이 나돌 뿐이었다. 그가 무림인이 아니면서도 이 회합에 참여한 것은 군왕성과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었다. 그는 군왕성이 출범할 때부터 오늘날까지 매년 재정의 반 이상을 후원하고 있었다. 따라서 군왕성의 신위만큼이나 그는 무림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군웅들 중에는 그런 호금수에게 은연중 불만이 없지도 않았으나 군왕성과의 관계 때문에 아무도 감히 노골적인 불만을 표하지 못하고 있었다. 호금수는 거대한 머리를 갸웃거리며 탁성으로 말했다. "우리 성주님께서 태자당을 만들고자 하시는 까닭이 무엇이겠소? 그것은 제마멸사(制魔滅邪)를 위한 부단한 노고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곳곳을 피로 물들이고 있는 사마의 무리들을 반드시 뿌리째 뽑겠다는 의지의 소산이 아니겠소?" "......." 군호들은 모두 침묵했다. 모두 익히 알고 있는 얘기였다. 호금수는 수염을 손가락으로 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모든 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구천마교(九天魔敎)와 사사련(邪邪聯)은 천 년의 마맥을 이어온 가공할 능력을 갖춘 존재들이오. 그런 마인들과 맞서야 할 태자당이 아니겠소? 그러니 용봉칠영이 빠지면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요?" 호금수의 열변(?)에 몇몇 군호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술잔을 들이켰다. 일개 상인이 무림대사를 논의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그렇거니와 뻔히 아는 얘기를 침을 튀겨가며 설명하는 꼴이 눈에 거슬린 것이었다. 그러나 호금수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마침 이 자리에는 용봉칠영 중 사영(四英)의 부친이 있으니 먼저 그들의 입당부터 경하하는 것이 어떻겠소?" "허허허! 백 번 옳은 말이외다. 호대인의 말씀대로 그럼 본인의 자식놈들부터 입당시키도록 하겠소이다." 군왕성주 남궁혁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군호들의 시선은 일제히 두 사람에게 향했다. 나란히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는 두 사람. 그들은 황보세가의 가주 신주수사(神州秀士) 황보일학(黃甫一鶴)과 철검장의 장주 검존(劍尊) 철자성(鐵仔星)이었다. 두 사람은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무언중 괴로운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는 체념의 빛이 순간적으로 오갔다. 이윽고 황보일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번 태화천의 무혈신화를 이뤄보리라는 성주의 뜻을 어찌 거역하겠소이까?" 태화천의 무혈신화! 그것은 무림인들의 가슴에 살아 있는 무한한 감동이었다. 군호들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때 남궁혁이 몸을 일으키며 포권했다. "고맙소이다. 황보가주."


그의 음성에는 진심이 배어 있는 듯했다. 군웅들은 모두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것은 남궁혁의 가문인 남궁세가와 황보세가 간에 지난 수백 년간 지속되어온 견원지간의 사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 가문은 중원제일가(中原第一家)란 명예를 놓고 수백 년간 팽팽하게 대립되어 왔다. 그러나 그들의 대립 구도는 파천황교의 등장으로 확연한 전환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궁세가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멸문(滅門)을 택하느냐 굴욕적인 굴복을 택하느냐의 기로에서 파천황교의 십이마존에게 영부를 바치며 무릎 꿇는 쪽을 택하고 말았다. 반면 황보세가는 소수의 군소방파들과 함께 멸문을 각오하고 필사의 항전을 펼친 바 있었다. 뒤이어 태화천이 파천황교를 무너뜨리자 황보세가는 세인들의 칭송을 받으며 당당한 명문으로 중원제일가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반면 남궁세가는 무림계의 싸늘한 시선을 피해 십수 년 간을 은둔에 들어갔다. 인간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던가? 태화천이 의문의 실종으로 몰락한 지 오 년이 지났다. 강호에 모습을 감추었던 남궁세가는 다시 강호에 나타났고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더욱이 남궁혁의 가공할 신공과 탁월한 영도력은 삽시에 무림을 평정하며 무림군왕성을 창건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두 가문의 성세는 역전되고 말았다. 남궁세가는 명실상부한 무림의 종주가(宗主家)가 되었으며 황보세가는 상대적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무림인들은 황보세가의 행보에 주목했다. 과연 그들이 남궁세가에 대해 어떤 대응을 할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황보세가의 처세는 남다른 면이 있었다. 특히 가주인 황보일학은 대의(大義)를 위해서라면 남궁혁이 이끄는 무림군왕성의 뜻에 추호도 거슬림이 없이 따라주어 사람들을 감탄시켰다. 오늘만 해도 그러했다. 그는 잠룡헌의 회합에 기꺼이 참여했으며 흔쾌히 자신의 일점혈육인 황보수선을 태자당에 입당시키겠노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행동은 당연히 군호들을 감동케 했다. 한편, 용봉칠영중 비천검 철무영의 부친인 검존 철자성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만금대인 호금수가 컬컬한 음성으로 물었다. "철장주께서는 어찌 말씀이 없으시오?" 군호들의 시선은 일제히 철자성에게 쏠렸다. 특히 남궁혁의 얼굴은 다소 굳어져 있었다. 철자성이 무림에서 점하고 있는 위상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었다. 그의 별호인 검존이 말해주듯 검도(劍道)에 관한한 남궁혁도 한 수 접을 수밖에 없는 무림계 최고의 검의 달인이었다. 또한 평소 의(義)와 협(俠)을 생명보다 중시하는 성품 탓으로 강호인치고 그를 존경하지 않는 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황보일학과는 태화천 시대부터 피로 맺은 의형제지간으로 두 사람은 군왕성과는 독자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오고 있었다. 철자성은 자신에게 쏠린 군호들의 시선과 호금수의 추궁(?)에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돌려 황보일학에게 말했다. "형님, 소제는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뿐만 아니라 남궁혁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황보일학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가 막 뭐라 말하려는데. "거 무슨 소리요? 이곳에 모신 모든 분들이 난세를 평정코자 스스로 혈육을 내놓아 무림평화에


이바지하고자 하는데 어찌하여 철장주만이 대의를 외면하는 것이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오?" 만금대인 호금수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철자성의 얼굴이 처음으로 호금수에게 향했다. 그의 기다란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호대인은 지금 본인을 질책하는 것이오?" "......!" 호금수는 철자성의 눈빛에서 살을 도려내는 듯한 예기를 느끼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그러나 이미 기호지세(騎虎之勢)였다. "헛험! 내 어찌 천하의 검존을 질책할 수 있겠소이까마는... 허허! 아마도 철장주의 자식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는가 보오? 어찌하여 태자당의 입당을 거부하는지 이해가 안가서 말이오." 호금수의 말에는 다분히 조롱기가 배어 있었다. 군호들은 가슴을 졸였다. 그들은 대쪽 같은 철자성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철자성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어지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손을 들어 호금수를 지목하며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 간덩이가 부은 돈벌레 한 마리가 군왕성의 물을 더럽히고 있다는 소문은 벌써부터 들었건만 오늘 보니 사실이었군! 이놈! 다시 한 번 말해봐라. 방금 뭐라고 지껄였느냐!" 철자성의 냉혹한 일갈에 호금수의 안색은 그만 흙빛이 되고 말았다. 이때였다. "철장주, 진정하시고 그만 앉으시구려." 남궁혁이 손을 휘휘 저으며 일어섰다. 황보일학도 철자성의 소매를 당기며 만류했다. "철노제, 자네답지 않게 왜 이러시는가? 더욱이 이곳은 여러 군호들께서 함께 하고 있는 자리가 아닌가? 어서 앉으시게나." "끄― 음." 철자성은 의형 황보일학의 손길만은 뿌리칠 수 없는 듯 어쩔 수 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분기를 참을 수 없다는 듯 앞에 놓여있던 술잔을 입안으로 털어넣었다. 이렇게 되자 장내의 분위기는 어색해지고 말았다. 남궁혁은 좌중을 둘러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 태자당의 입당은 결코 강요에 의해 이루어져서는 아니되오. 비천검 철무영 소협의 입당 문제는 철장주께서 좀더 시간을 두고 결정하시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러니 호대인도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해서는 안될 것 같소이다." 부드러우나 위엄있는 말이었다. 호금수는 급히 그 큰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성주께서 그리 하라시면 따르지요." 하지만 한순간에 중인들 앞에서 하찮은 돈벌레로 전락해 버린 그의 심사는 뒤틀어질 대로 뒤틀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어찌 하랴! 그는 감정을 앞세우는 무림인과는 틀렸다. 냉철하게 잇속을 차리는 장삿꾼답게 벌써부터 그는 득과 실의 계산을 끝내고 있었다. 그것은 당대 최고의 검객인 검존에 대항해 보아야 묘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흐흐! 오늘날까지 한 푼의 손해도 본 적이 없는 나 호금수다. 기필코 오늘 받은 모욕은 백배, 천배로 돌려주마!' 그는 내심 이를 갈며 이렇게 다짐하고 있었다. 문득 황보일학의 중후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좌중을 향해 물었다. "용봉칠영 중 남은 삼영은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소?" 그의 말에 제일 먼저 답한 것은 사각진 턱에 피부가 검은 사십대의 중년인이었다. "사천당문의 후예인 금적수재는 소생이 직접 찾아가 의향을 알아 보겠소이다." 남궁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좋을 것 같소이다. 진문주께서 나선다면야 당문에서도 호의적으로 검토할 것이라 생각하오." 중년인은 신도문(神刀門)의 문주 뇌전도(雷電刀) 진충이었다. 그는 광활한 사천성 일대에서 당문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고 있는 인물이었다. 같은 영역에 속한 당문과는 빈번한 교류를 통해 일찍부터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천 당문은 그의 요청을 쉽게 거절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뒤이어 술 대신 차를 음미하던 무진도장이 창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량수불.... 공교롭게도 오늘 회합에는 소림과 무당의 두 분 장문인이 모두 참석하지 않으셨으니 이 퇴물이 소림사로 나들이 겸 들러 소림 방장과 혜왕을 만나 보겠소이다." 남궁혁은 정중히 포권했다. "감사하오이다. 무진도장." 비록 겉으로는 예의 바르게 처신하고 있었으나 남궁혁의 미간에는 불편한 심기가 깃들여져 있었다. 그것은 뜻밖에도 오늘의 회합에 불참한 무림명숙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인편으로 일일이 초대장을 띄웠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통���도 없이 이십여 명이나 불참하는 통에 회합은 진작부터 김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철자성과 호금수의 대립으로 인해 가뜩이나 썰렁한 회합이 더욱 볼품없게 전락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남궁혁의 가슴속에는 은연중 노기가 치밀고 있었다. 매화십검 연백경의 음성이 들렸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무영객이 남는군요. 어쩌지요? 그는 내력불명이니 이 넓은 중원천지를 찾아 헤맬 수도 없으니 난감한 일이군요." 남궁혁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영객은 본성의 일월단(日月團)을 통해 찾아보면 될 것이오." 연백경은 탄성을 발했다. "아! 그렇군요. 일월단이 움직이면 쉽게 해결되겠군요!" 일월단. 그것은 군왕성의 눈과 귀였다. 중원천하에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는 일월단의 천라지망(天羅之網)에 의해 남궁혁은 천하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하고 있었다. 일월단은 철저히 신분을 숨긴 채 활동하는 천여 명에 달하는 조직원이었다. 그들 중에는 주루의 점소이나 기루의 기녀, 농부, 나뭇꾼, 중, 거지, 심지어는 사창굴의 창녀나 백정 등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서로간에도 누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철저한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어 철저히 비밀이 유지되는 조직이었다. 강호에서는 언제부터인가 그들을 일컬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하늘을 속일 수는 있어도 일월단의 눈과 귀를 피할 수는 없다. 회합은 끝났다. 일단 용봉칠영의 문제는 매듭 지어졌고, 참석 중인 각 방파의 지존들은 자신들의 혈육이나 수제자를 태자당에 입당시키겠다는 공언을 했다. ④ 광대한 무림군왕성의 후면에 위치한 잠풍각(潛風閣)은 성주 남궁혁의 거처로 작은 가산(假山)을 등진 채 빽빽한 자작나무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잠풍각의 한 방안.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두 인물이 정좌하고 있었다. 그들은 백미백염의 용비천군 남궁혁과 군왕성의 총관(總官)이자 일월단의 단주이기도 한 신산(神算) 소손방(蘇孫邦)이었다. 소손방은 한쪽 눈을 검은 안대로 가리고 있었는데 창백한 얼굴에 턱밑에 짧은 염소수염을 기른 음침한 인상의 위인이었다. 그의 하나밖에 없는 눈에는 천하를 뚫어보는 지모가 담겨져 있는 듯 쉴새없이


날카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군왕성의 실질적인 이인자였다. 그러나 외부에는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었으므로 대다수의 무림인들은 그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설사 알고 있다해도 그의 정확한 실체는 모르고 있었다. 소손방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성주님,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됩니다. 아직은 방심을 할 때가 아닙니다." 남궁혁은 고개를 저었다. "답답한 일이야. 아직도 마음을 열지 않는 자들이 있으니......." 그의 안색은 어둡기만 했다. 다수의 불참자로 인해 썰렁했던 회합의 분위기가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소손방의 외눈에서 살기가 번쩍거렸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본성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방치해 두면 안됩니다. 그 같은 행동은 본성의 존엄을 해치고 있습니다. 아직도 태화천의 망령에 사로 잡혀있는 자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해야 합니다. 당금 무림은 태화천이 아니라 무림군왕성의 천하임을 뚜렷이 새겨줘야만 합니다." 남궁혁은 탄식했다. "총관, 아직도 각처에서 사마의 무리들이 횡행하는 터에 어찌 동도들과 다툼을 한단 말인가?" 소손방은 힘주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그들은 소수이나 차제에 일벌백계(一罰百戒)로 다스리지 않으면 공공연히 항명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고 심지어는 본성에 정면대응하는 연맹까지도 결성할지도 모릅니다." 소손방의 어조는 단호했다. 남궁혁은 이미 소손방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날 자신이 무림지존의 자리에 오른 것도 소손방의 책략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정하고 있는 터였다. 그는 서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으음. 그렇다면 그 고집 센 위인들을 설득할 묘책이라도 있단 말인가?" 소손방의 음성이 은밀해졌다. "성주님, 소인에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묘안이 있습니다." '역시!' 남궁혁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래, 무언가? 그 묘안이?" "오늘 확정된 태자당의 젊은 기재들을 남궁 공자님께 맡겨 천하를 주유하게 함으로써 모든 우환은 해결될 것입니다." "천하주유?" "그렇습니다. 이미 공자님의 무예는 성주님을 제외하고는 감히 맞설 자가 없습니다. 태자당의 출범에 즈음하여 무림의 명숙들에게 예를 갖춘다는 명분으로 방문하게 하는 것입니다." "흐음, 그래서?" 소손방의 각진 얼굴에 음침한 빛이 떠올랐다. "소위 명숙들이란 자들은 선배의 예로 공자님의 방문을 맞아 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때 공자님께서는 하루 이틀씩 그곳에 머물면서 지닌 바 무공신위를 드러내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명숙들은 간담이 써늘해지게 되어 자연히 항명하려는 마음이 절로 꺾이게 될 것입니다." 남궁혁은 눈썹을 찌푸렸다. "일부러라도 문제를 일으킨단 말인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명숙들 체면에 결코 공자님을 탓할 수는 없을 겁니다." "으음, 그러다 청운의 신상이 위험해지기라도 한다면......?" 소손방은 괴이하게 웃었다.


"후후, 걱정은 접어두셔도 됩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종리무(鍾里戊)를 붙여 호위토록 할 것입니다. 거기다 함께 동행하는 명문들의 후손들이 있는데 누가 감히 공자님을 위해하겠습니까?" 남궁혁의 미간이 펴졌다.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그렇군. 결국 천하의 명문가의 자손들이 모두 움직이는 것이니 아무도 흑심을 품지 못하겠군." 소손방의 음산한 얼굴에 한 가닥 희미한 선이 그어졌다. "뿐만 아니라 태자당을 이끄는 공자님의 활약은 더욱 돋보이게 됩니다. 결국 무림군왕성의 천하를 굳히게 되는 효과를 보게 될 겁니다." 남궁혁은 자신의 무릎을 쳤다. "과연! 총관의 묘책은 두 마리 토끼를 잡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군." "황송합니다. 후후, 성주님께서 하실 일은 그저 젊은 용봉들의 유람길에 노잣돈이나 두둑이 건네주시면 됩니다." "주지, 암! 두둑이 줘야지. 허허허헛.......!" 어둠이 깔린 잠풍각에서 남궁혁의 웃음소리가 호탕하게 울려 나왔다. 같은 시각. 편월(片月)이 어슴푸레한 빛을 뿌리는 가운데 한 인물이 부복하고 있었다.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절봉으로 둘러싸여 인적은 고사하고 짐승의 발길조차 닿지 않는 단애(斷崖)의 정상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인물은 뜻밖에도 이목구비가 반듯한 사십대 중반의 문사였다. 은은한 월광 속에서 또 다른 빛을 발하는 그의 눈은 심연과도 같아 깊은 지혜가 담겨져 있는 듯했다. 또한 수양의 깊이를 짐작케 하듯 정갈하게 빗어 묶은 머리와 청수한 이마, 곧게 뻗은 콧날은 고매하고 강직한 기품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이 문무(文武)를 겸전한 중년문사는 놀랍게도 무릎을 꿇은 채 누군가에게 최상의 예를 표하고 있었다. "마군자(魔君子), 너의 노고가 대단함을 알고 있다." 밤하늘 어딘가에서 낮고 건조한 음성이 들려왔다. 기이한 것은 그 음성의 주인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알 수 없는 존재! 나이조차 추측할 길 없는 그 음성에는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사이한 기운이 가득 담겨 있었다. 중년인은 급히 이마를 땅에 박으며 대답했다. "주군(主君),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소신의 목숨은 이미 주군을 위해 바친 지 오래이니 그런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별호에 마(魔)자가 붙어있는 중년문사의 음성은 야공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목소리와는 달리 부드럽고 온화했다. "마군자, 본좌 앞에서 그리 겸양할 필요는 없다. 천외천(天外天)의 깃발이 천하를 뒤덮는 날 그대는 일등공신으로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르다. 위대한 신화를 창조하기 위해 좀더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또한 그날이 오기까지는 지금처럼 모든 일을 본좌 대신 집행해야 한다." "존명!" 기이한 일이다. 야심한 시각 험준한 고봉에 황제가 출어(出御)했을 리는 없을 터, 주군은 웬말이며 천외천이란 뚜 무엇인가? "지난 백 일간의 천하정세에 대해 보고하라." 어디서 들려오는지 방향조차 감을 잡을 수 없는 예의 음성이 메아리를 일으켰다. "예! 아직은 군왕성이 독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교의 후예인 구천마교와 사도의 종주인 사사련이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손잡을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녹림(綠林)이 최근 연맹을 이뤘으며,


백도의 동정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심상치 않다?" "예, 최근 군왕성의 독주를 꺼려하는 몇몇 문파들과 무림명숙들이 군왕성을 견제하기 위한 새로운 회합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었다. 마군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머지않아 무림에 태풍이 불 것이 분명했다. "이미 예상한 바로군. 한데 좀처럼 뭉치지 않았던 녹림이 연맹을 이뤘다니, 주도한 인물은 누군가?" 마군자는 고개를 숙였다. "송구스럽게도 아직 그자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현재 그자는 녹림대종사(綠林大宗師)로 불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아낸 바에 의한 것은......." 마군자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보고를 계속했다. "그자는 오십대 초반쯤 된 것 같으며 십팔반무예에 모두 능통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더불어 지략도 겸비한 인물입니다. 들리는 말로는 중원쪽의 무공과는 이질적이란 소문도 들립니다. 소신은 이미 그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위장 잠입한 밀정들에게도 세세히 보고하라는 전갈을 해두었습니다." 예의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역천지계(逆天之計)에 변수가 파생했군. 녹림은 오래전부터 본좌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무리들이었다. 더 방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속히 그자의 정체를 밝혀내라. 아울러 포섭이 가능한지도 알아보도록. 알겠느냐?" "존명!" "그럼 황궁은 어떤가?" 마군자는 이마를 땅에 대며 공손히 대답했다. "건친왕의 세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그의 측근들은 이미 황궁의 요직을 절반 이상 차지했습니다. 특히 동창(東廠)과 어림군(御臨軍)도 그의 수중에 떨어진 것 같습니다." "흐음! 동창과 어림군까지? 역시 건친왕은 일대효웅으로 손색이 없는 인물이로군." "신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본좌는 반 년간의 폐관(閉關)에 들 것이다. 그동안 그대는 역천지계를 집행함에 혼력을 다하도록 해라. 알겠느냐?" "존명!" 먹구름이 밀려와 편월을 삼켜버렸다. 사위는 칠흑 같은 암흑에 휩싸이고 말았다. 삼라만상이 무겁게 가라앉는 듯했다. 폭풍이 불려는가? 먹구름이 가득 덮힌 하늘에서는 습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산봉우리는 후두둑 흔들리는 듯했다. 아직은 고요하기만한 세상이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이 고요함이야말로 폭풍전야(暴風前夜)의 정적이라는 것을. 제 5 장 탈출(脫出) ① 동사군도의 다섯 섬 중 하나인 초도(草島)는 섬 전체가 갈대로 뒤덮혀 있었다. 바다의 짜디짠 물을 흡수하며 자란 해안가의 갈대는 일반 갈대와는 모양새부터가 달랐다. 밑둥 부분은 어른의 팔뚝만큼 굵었으며 길이도 근 열 자를 넘을 정도로 장대했다. 초도에는 이런 갈대가 온통 섬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거친 갈대숲과 습지로 이루어진 초도는 쓸모라곤 없는 곳이었다. 적어도 얼마전까지는 그러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것은 한 소녀가 오고부터였다


그녀의 이름은 사사영(四四零). 물론 본명이 아니라 수인번호에서 비롯된 이름이었다. 본래 동사군도에는 몇 채의 관사가 지어져 있었다. 그것은 모두가 석재로 지어진 석옥구조였다. 그래서 한낮의 뜨거운 태양에 석옥은 달아올라 밤이 되어도 식지를 않았다. 낮에는 그런대로 견딜만 했다. 그러나 밤이면 더욱 견디기가 힘들었다.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도 별 방법이 없으므로 석옥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사영은 감히 도주 조탁에게 한 가지 건의를 했다. "이런 더운 지방에서는 초옥(草屋)을 짓는 것이 좋아요. 낮에는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고 밤이면 열기가 쉽게 빠져나가니 생활하기에 훨씬 편리할 거예요." 조탁은 눈을 부릅떴다. 감히 사사도의 제왕인 자신에게 이런 충고를 하다니. 그러나 한편으로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그 자신부터가 밤의 후덥지근한 공기에 잠을 이루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네가 초옥을 만들 줄은 아느냐?" "수인 몇 사람만 빌려 주시면 며칠 내로 만들어 보겠어요." 이렇게 하여 초도에 몇 사람의 수인이 상륙하게 되었다. 그날부터 사사영은 수인들과 함께 초도에 지천인 갈대를 베어냈다. 웬만한 나무 못지않게 굵고 뻣뻣한 갈대를 베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녀는 우선 초도에 한 채의 초옥을 지었다. 갈대를 엮고 꼬아서 만든 초옥은 놀랍게도 근사한 모양이었다. 둥근 모양의 지붕이 중심부에 첨탑의 형상을 하였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역시 원형의 갈대로 엮은 벽이 꽤나 견실해 보였다. 게다가 초옥 안에는 기둥이 필요없이 내부공간도 넓게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초옥에 임시로 간수들이 기거해 보기로 했다. 사사영의 말처럼 더위를 막아내는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먼저 사사도의 간수들이 자본즉 시원하고 쾌적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대대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조탁은 수인들을 동원하여 초도의 갈대를 베어 석옥 대신 초옥들을 짓게 한 것이다. 삼 개월이 지나자 관사로 쓰였던 석옥들은 이제 창고로 변했으며 조탁의 집무실이나 침실 등이 모두 새로 지은 초옥으로 바뀐 것이었다. 조탁은 만해전 옆에 큼직한 초옥을 지어 새로 입주했다. 그는 자신의 초옥 오른쪽에 백삼호와 사사영을 기거하게 했으며 좌측에는 관리 봉두수의 초옥을 두었다. 초도에서 갈대를 베는 수인들의 표정은 이례적으로 밝았다. 그것은 지금 베는 갈대들이 새로운 옥사를 짓는데 쓰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동안은 옥사를 갈대로 짓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수인들이 편하게 지내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조탁의 고집을 꺾은 것은 곽초량이었다. 그는 점점 수가 줄어드는 수인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옥사를 초옥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설득했던 것이다. 초도의 노역에는 거의 모든 수인들이 동원되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백육호와 백사호였다. 그들은 다른 수인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백육호는 워낙 헌칠한 체격에 남자다운 기질이 물씬 풍겼다. 반면 백사호는 미소녀로 착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흠이라면 지나치게 창백한 안색과 냉막한 눈빛이었다. 백육호와 백사호는 사사도에서 가장 젊은 나이였으며 여러 면에서 비교가 되었다. 백사호가 말이 없고 냉막한 반면 백육호는 사내답고 낙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늘


빈정대기는 했지만 탁 트인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젠장! 좀 쉬었다 하자." 육노인은 간수들이 갈대숲 그늘에서 낮잠 자는 것을 확인한 후 일손을 멈추었다. "어떠냐? 오늘 같은 날은 그런대로 기분이 좋은 것 같은데." 백육호는 히죽 웃었다. "그야 말할 나위 있겠소? 오랜만에 나들이 왔겠다, 이런 날만 계속된다면 살만할 것이오." "흐흐흐! 백사호, 넌?" 백사호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힐끗 그를 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젠장, 뱀같이 차갑기는." 육노인은 투덜거리며 벌렁 드러누웠다. 백육호는 내심 혀를 찼다. '백사호는 지나치게 차갑단 말야. 사내 대장부라면 어느 정도 트인 데가 있어야 하는데 말야.' 육노인은 생각난 듯 물었다. "백육, 추나요법은 진전이 있느냐?" 백육호는 피식 웃었다. "별로 나아진 게 없소이다. 아무래도 내 재주로는 힘들 것 같소." "이런 못난 놈! 이제 겨우 삼 개월간 배우고는 뭐가 어째? 서너 달만에 깨우칠 것이면 그게 어디 비법이랄 수 있겠느냐? 노부도 이십 년이 넘도록 수련했지만 이제 입문단계에 이르렀는데 네놈이 무슨 천고제일의 기재라고 흰소리냐?" 육노인의 말은 여전히 험구였다. 백육호는 그저 빙긋이 웃으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끝이 푸른 하늘은 언제 보아도 막막한 기분이 들곤 했다. "백사, 몸은 어떠냐?" 육노인의 질문에 백사호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덕분에......." 육노인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다짐했다. "너희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몸 상태를 노부에게 보고해야 한다. 근자 들어 곽가놈은 막판에 몰려 극독을 마구 너희들에게 부어넣고 있단 말이다. 더구나 놈은 노부가 너희들에게 추나요법을 실시하는 것을 안 후로는 갈수록 독한 수법을 쓰고 있어." 백육호와 백사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게 아니라 곽초량은 두 사람에게 온갖 희한한 약재를 강제로 복용시키고 있었다. 그에 따라 육노인도 그들에게 추나요법과 동시에 은밀히 약재를 복용시키고 있었다. "끝까지 버텨야 한다. 이제 두 달만 지나면 놈들은 싫어도 이곳을 떠나야 한다. 그 전에 빌미를 주어선 안 된다. 두고 봐라. 앞으로 놈들은 더욱 더 발악을 할게야. 쯧쯧! 과연 몇 사람이나 버티게 될지......." 육노인은 문득 말을 끊었다. 가까운 곳에서 부스럭! 하는 소리가 난 것이다. 세 사람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갈대숲이 흔들리며 한 소녀가 걸어나왔다. 그녀는 바로 사사영이었다. "미안해요. 놀라게 해드렸나요?" 사사영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 백육호와 백사호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사영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비록 칙칙한 수인복을 입고 있었으나 그녀가 지니고 있는 본연의 아름다움이 가려지기는커녕, 더욱 더 돋보였다. 사사영은 보면 볼수록 인세의 사람이 아닌 듯 신비롭기만 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왔어요." "흠! 무엇이오, 낭자?" 육노인의 질문에 사사영의 고운 눈길은 백육호와 백사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분께 드릴 부탁이랍니다." "무슨 부탁이오?" 백육호는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한편 백사호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늘 창백하기만 하던 그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사영은 꽃잎 같은 입술을 살며시 열었다. "어려운 부탁인 줄은 알지만 갈대가 조금 필요해서 그래요. 제가 있는 곳에 갈대가 부족하답니다. 약간만 나누어 주시면 안될까요?" "드, 드리지요." 백사호가 황급히 말했다. 백육호는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녀석, 이제 보니 사사영에게 빠졌군!'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야 이를 말이오? 낭자가 원한다면 갈대가 문제겠소? 아마 백사호가 수확한 갈대를 모두 넘겨줄 것이오. 안 그런가? 백사호?" "나... 나는......." 백사호는 얼굴이 벌겋게 변하며 더듬거렸다. "하하하하......!" 백육호는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백사호는 더욱 얼굴이 붉어졌고, 사사영의 얼굴도 빨개졌다. 두 뺨이 붉게 타오르자 그녀는 더욱 더 아름답게 보였다. "고마워요, 그럼......." 사사영은 고개를 숙여 보인 후 갈대숲으로 사라졌다. ② 죽음의 섬 사사도에 밤이 깃들었다. 쏴아아! 파도가 밀려와 해안가에서 부딪치며 은빛 포말을 토해낸다. 모두가 잠든 밤. 수인들은 갈대로 엮은 옥사에서 깊은 잠이 들었다. 그들은 일단 자리에 누우면 아침이 될 때까지 일어날 줄 몰랐다. 워낙 고된 노역도 노역이려니와 체력이 바닥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으슥한 해안의 바위 뒤편에서 누군가 갈대를 엮고 있었다. 달빛을 받으며 분주한 손놀림으로 갈대를 엮고 있는 것은 한 소녀였다. 사사영이었다. 그녀는 갈대를 여러 가닥으로 찢어내어 그것을 다시 꼼꼼하게 꼬았다. 그렇게 엮은 갈대를 여러 개 모아 하나하나 연결시켜 나갔다. 연약한 소녀의 힘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이곳의 갈대는 워낙 억세어 장정이 다루기에도 벅찬 일이었다. "......." 사사영은 힘이 부친 듯 잠시 일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에 보름달이 떠올라 있었다. 달을 바라보는 그녀의 아름다운 눈에 두 부부의 영상이 떠올랐다. 그들은 바로 그리운 부모님의 얼굴이었다. 사사영의 눈망울에 이슬이 맺혔다. 그녀는 소매로 눈물을 훔쳐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꼭... 돌아가고 말테야. 중원으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갈대가 완전히 연결되자 그리 크지는 않으나 그런대로 한 척의 소선(小船)과 같은 형상이 완성되었다. 사사영은 달이 꽤 기운 것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시간을 지체할수록 탈출은 불가능해진다. 그녀는 온힘을 다해 갈대로 만든 작은 배를 바다로 밀어넣었다. 쏴아아! 배가 바다에 떴다. "......." 사사영은 가슴이 벅차 올랐다. 이제 배를 타고 나가기만 하면 이 지긋지긋한 죽음의 섬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바다에 발을 담그었다. '가는 거야! 설사... 중도에서 수장(水葬)되는 한이 있어도...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곳보다는 나을 거야.' 그녀는 바닷물이 허벅지까지 차오르자 문득 뒤를 돌아다보았다. 사사도. 죽음의 섬은 지난 몇 달간 그녀로 하여금 인간 이하의 수모를 겪게 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고, 고통의 나날이었다. 사사도에는 인간의 모든 추악함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고 있었다. 더러운 욕설과 난폭한 매질, 피비린내와 죽음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참기 힘든 것은 바로 도주인 조탁의 행동이었다. 조탁은 점점 더 광포해져 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음탕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핥듯이 전신을 노려보았었다. 그의 눈길을 받으면 마치 뱀이 온몸을 휘감는 듯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다행히도 그는 그녀에게 직접적인 위해는 가하지 않았다. 다만 눈으로 그녀의 몸매를 감상하고 더러운 침을 흘릴 뿐이었다. 날이 갈수록 그녀를 바라보는 조탁의 눈빛은 점점 충혈되어 갔다. 사사영은 처음에는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 사사영은 잠에서 깨어났다. 바로 옆방에서 들리는 괴상한 소리 때문이었다. 그것은 난생 처음 듣는 음향이었다. 그때문에 그녀는 밤을 꼬박 새워야만 했다. 그런데 그 소리는 그날 밤 이후로 빠짐없이 계속되었다. 조탁의 거칠은 숨소리와 백삼호 여인이 흘리는 야릇한 신음소리가 아무리 귀를 틀어막아도 그녀의 귓전에 파고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짐승들이 내는 소리와도 같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하길래?' 아직 남녀의 행위에 대해 경험이 없는 사사영이었기에 도무지 방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의 거칠은 신음소리에 그녀는 매일밤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녀는 봉두수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야식(夜食)을 조탁에게 갖다 주라고 했다. 사사영은 야식을 들고 조탁의 침실로 갔다. 똑똑....... 문을 두드렸으나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조탁의 괴상한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와! 헉... 그냥 들어오란 말이다." 사사영은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런데 그녀가 방안에서 본 것은! 그것은 실로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비대한 체격의 조탁은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다. 비계살로 뒤덮힌 조탁이 침상 위에서 역시 알몸인 백삼호와 뒤엉켜 있는 것이 아닌가?


사사영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야식을 내려놓기가 바쁘게 침실에서 달려나오고 말았다. 등뒤로 조탁의 음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킬킬! 뭐가 무서워 달아나는 거야? 사사영! 너도 언젠가는 이 짓을 즐기게 될걸?" 사사영은 고막을 틀어막았다. 밤새 들려오던 신음소리가 그날 밤 따라 더욱 크게 들려왔다. 그때부터 그녀는 매일밤을 모멸감과 싸워야만 했다. 조탁은 그녀가 들으라고 일부러 백삼호를 학대했으며 때로는 백삼호가 내지르는 신음은 고통에 찬 비명으로 화하곤 했다. 어디 그뿐이랴? 바로 하루 전의 일이었다. 조탁은 한밤중 몰래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이상한 느낌에 눈을 뜬 그녀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조탁이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그녀의 곁에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비록 그 이상의 행동을 하진 않았으나 사사영은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결국 그녀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설사 탈출하다 죽는 한이 있어도 더 이상 사사도에 머물 수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그녀는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비록 섬 주변에 죽음의 와류가 소용돌이 치고 있다지만 어쩔 수 없어. 그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해도 할 수 없어.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이젠 단 하루도 견딜 수가 없어. 신이여! 제발 저에게 힘과 용기를 주세요!' 사사영은 갈대배를 힘껏 밀었다. 갈대배는 바다를 향해 나갔다. 그녀는 힘겹게 배 위로 올라탔다. 한 사람이 간신히 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배였다. 그녀는 갈대로 엮은 난간을 힘껏 붙잡고 기도를 올렸다. "신이여! 바다를 관장하시는 용왕님이시여! 제발 소녀로 하여금 이 죽음의 섬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출렁출렁....... 연약한 소녀를 실은 갈대배는 넘실대는 물결을 타고 대해를 향해 조용히 나가갔다. ③ 땡! 땡! 땡......! 요란한 종소리가 사사도의 새벽안개를 갈갈이 찢어발겼다. 격렬하게 연속적으로 울리는 종소리에는 무엇인가 변고가 발생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빨리 나오지 않고 뭐하는 거냐! 이 버러지 같은 놈들!" 쌔애액! 짜― 악! 관리들의 욕설과 새벽공기를 찢는 채찍소리가 요란한 종소리와 어우러지면서 사사도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청도 중앙의 넓은 공지로 미처 잠이 덜 깬 수인들이 몰려 들었다. "어서 확인해라!" 두 팔을 저으며 고함치는 조탁의 얼굴에는 온통 분노와 당혹감이 떠올라 있었다. 주변에는 동포락을 비롯한 몇 명의 관리들이 흉흉한 눈빛으로 수인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도주님! 역시 그 계집이 보이지 않습니다." 동포락의 보고에 조탁은 눈알을 까뒤집으며 고함쳤다. "찾아내라! 반드시! 사사영 그 계집을 찾아낼 때까지 모든 노역을 중지하고 섬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찾는 즉시 내게 끌고 와야 한다! 그 계집을 찾을 때까지는 물 한 모금도 주지 마라! 알겠느냐!" 이때 포구로 달려갔던 간수 한 명이 달려와 보고했다.


"도주님, 배가 그대로 묶여 있습니다. 아마도......." "아마도 무엇이냐?" "그 계집이 스스로 바다 속에 몸을 던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조탁의 눈알이 부릅떠졌다. "이 빌어먹을 놈아! 그렇다면 가서 시체라도 건져오란 말이다!" 조탁이 미친 듯이 노갈을 터뜨리자 관리들은 황급히 수인들을 몰고 해변으로 달려갔다. 한편, 그들 속에 섞여 움직이는 백육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자살이라니.... 그렇듯 아름답고 청순한 그녀가 자살했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삼 일 전 그녀는 갈대를 부탁했다. 그래서 백사호와 그는 꽤 많은 양의 갈대를 그녀에게 주었었다. 그때만 해도 단순히 갈대집을 보강하느라 그러려니 했었다. 그런데 자살이라니? 문득 그의 가슴에 불덩이가 치솟았다.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것은 사사영을 쳐다보며 음탕한 눈빛을 번쩍이던 조탁의 모습이었다. '만일 놈이 그녀를 욕보였다면... 그래서 충격으로 그녀가 자살을 택한 게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조탁! 내 반드시 널 찢어죽일 것이다. 아니... 천참만륙을 내버리리라!' 백육호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빛이 뻗어나왔다. 십 년 전, 부친을 원망하고 황제를 증오했을 때도 지금처럼 살의를 느끼지는 않았다. 사사영이란 한 청순한 소녀가 나타나고부터 그는 변했다. 무료하기만 하던 노역 중에도 그는 틈만 나면 사사영의 청순한 얼굴을 떠올렸고, 그때마다 달콤한 느낌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잠시 후 간수와 수인들은 포구에 당도했다. 과연 포구에는 나룻배가 그대로 묶여져 있었다. "이 우라질 놈들아! 뭣들 하고 있느냐? 어서 흩어져 사사영을 찾아라! 물 속까지도 모두 살펴봐라!" 동포락이 채찍을 무섭게 휘두르며 수인들을 닥달했다. 수인들은 허겁지겁 물 속으로 뛰어들거나 해변가로 달려갔다. 백육호와 백사호는 나란히 포구의 왼쪽 암석들이 난립해 있는 해안쪽으로 향했다. 그곳은 워낙 지형이 험하여 접근하기가 힘든 곳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암석들 주변을 살펴보았다. 문득 백육호는 한 바위 곁에서 뿌리라도 내린 듯 굳어졌다. "백육호, 왜 그러시오?" 백사호가 의아한 듯 물었다. "백사호, 우리가 나눠 준 ���대들이 저곳에 쌓여 있었지?" 백육호의 손끝을 따라 눈길을 옮기던 백사호는 무심히 대답했다. "그렇소. 그게 어쨌단 말이오?" 백육호의 안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우리가 어제 노역을 마치고 왔을 때만 해도 갈대는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지금 대부분이 사라지지 않았느냐?" 그의 눈에 격동이 일고 있었다. 백사호는 비로소 무엇인가를 느낀 듯 안색이 변했다. "그랬었구나, 그랬었어......." 백육호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갈대가 사라진 바위 아래를 보고 모든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사사영이 필요로 한 갈대는 바로 탈출하기 위한 용도였다는 것이다.


"과연... 대단한 소녀로구먼. 갈대로 배를 만들어 탈출할 생각을 하다니.... 허허! 갈대는 물에 뜨니 어쩌면 와류를 헤치고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하는 가상한 용기야. 아니... 총명함이 가히 하늘을 덮는구먼." 어느새 육노인이 다가와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백육호는 눈을 돌려 사사영이 탈주를 감행했을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썹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지금쯤 바다 어딘가에서 무섭게 휘몰아치는 와류에 맞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사사영의 처절한 모습이 뇌리에 떠오르는 듯했다.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그만 머리를 감싸고 말았다. '부끄럽구나! 연약한 소녀의 몸으로 운명의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해 목숨을 걸다니... 나는 어떤가? 십 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저 세상을 원망하고 하늘만 탓하지 않았던가? 아아! 부끄럽구나! 부끄러워!' "육노야, 그녀가... 성공할까요?" 백사호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육노인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하늘이 그녀의 갸륵함을 안다면 도와주시겠지." 백육호는 바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이제서야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불길이 번지듯 영혼을 불태우고 있었다. 사사영이 떠난 지금에야 그녀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던가를 깨닫게 된 것이다. 백사호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육노인이 두 사내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이놈들아! 그만 정신 차려라. 사사영은 좋은 곳으로 떠났지만 우리는 찾는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 그들은 기암괴석이 삐죽삐죽 솟아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사영이 탈출을 감행함으로 인해 그만 노부의 계획이 헝클어져 버렸다." 완만한 각을 이룬 바위에 몸을 기대며 육노인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녀가 탈출한 것을 탓하는 것이오?" 백사호는 마땅치 않은 듯 무뚝뚝하게 따졌다. "이런 못난 녀석! 노부가 네놈처럼 속이 좁아터진 줄 아느냐? 주둥아리 닥치고 내 말을 들어봐라." "말씀해 주시오. 대체 무슨 계획인지." 평소에 말이 없던 백사호는 무슨 속셈인지 육노야에게 바짝 붙어 물었다. 육노인은 바다를 향해 서 있는 백육호를 힐끗 바라보았다. 백육호의 눈에 바다 위에 떠오르고 있는 태양이 비쳤다. 육노인의 눈에 야릇한 기운이 스쳐갔다. '이제 보니 사사영이 이 녀석을 깨워놓고 떠났구나. 무려 십 년이란 긴 시간을 잠들어 있는 이 녀석의 영웅혼(英雄魂)을.......' 그는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백육, 노부의 계획에 관심이 없단 말이냐?" 백육호는 고개를 돌렸다. "아니오, 어서 말해 주시오. 육노야." "클클, 진작 그럴 것이지." 육노인은 괴소를 흘리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선 너희들에게 잔소리부터 해야겠다. 앞으로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 특히 이번 사건으로 광폭해져 있는 관리들은 수인들에게 무슨 끔찍한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러니 너희들은 괜한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백육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나도 개죽음 당하는 건 싫소." "암, 그래야지." 육노인은 적이 마음이 놓이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노부가 요즘 시간을 벌어볼 요량으로 곽가놈에게 몇 가지 약재를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은 너희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당분간은 곽가놈이 수인들을 어느 정도 지켜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백육호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동안 내가 할 일이 있소?" "노부는 네놈이 모르는 사이에 너의 몸에 가해진 금제를 풀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봤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앞으로 한두 차례 더 기해혈의 금제를 부수기 위한 시도를 할 참이다." 육노인은 잠시 뜸을 들인 후 백육호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만일 하늘의 도움이 있어 금제를 푸는 것은 물론 무인들의 백년 연공에 달하는 진기가 네몸에 형성된다면 너는 무엇을 하겠느냐? "그날로 사사도의 주인이 바뀌게 될 것이오." 거침없는 백육호의 대답에 육노인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했다. 그는 적지않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흐음. 감은 잡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이때 약간 들뜬 음성으로 백사호가 끼여들었다. "육노야, 그게 가능하오? 그리고 백육, 설사 그렇게 된다 해도 이곳 무관의 수가 백 명에 달하는데 어떻게......." 백육호는 차갑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사도를 장악하는 데는 한 시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육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놈이 오직 근력만으로 무공을 펼칠 때도 간담이 서늘하지 않았던가.' 그는 갑자기 괴소를 흘렸다. "클클! 계획을 또 수정해야겠군. 노부는 네놈을 회복시킨 후 술통에 담아 망망대해로 밀어내려 했었지. 쯧쯧, 그때문에 관리놈들 눈을 피해 술통에 강판을 두르느라 꼬박 한 달을 뼈가 휘도록 고생했는데 말야." "......!" 백육호는 이제서야 육노인이 오랜 세월 노심초사하며 비밀리에 진행해 온 밀계(密計)가 어떤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염려 마시오, 난 결코 혼자 떠나지 않을 것이오." 육노인은 눈을 가늘게 했다. "물론이지. 어쨌든 이젠 그런 모험을 할 필요가 없게 됐군. 네놈이 가진 역량에 설사 백 년 내공이 더해진다 해도 칼날 같은 암초들과 그 무서운 와류를 뚫고 나갈 수 있는지는 사실 자신할 수 없는 일이다. 노부도 그것이 고민이었지." 백사호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물었다. "우리가 타고 갈 전선이 들어올 텐데 뭣하러 짠물 속에서 허우적거린단 말이오?" 백육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백사. 이 섬은 물론 전선 역시 우리 것이 될 것이다." 백사호의 준미한 얼굴에 오랜만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십 년만에 처음 보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육노야, 대체 무슨 수로 백육의 금제를 풀고 백 년 내공을 성취할 수 있단 말이오?" 백육호도 육노인을 주시했다.


"노부가 누누이 얘기했듯이 이 동사군도는 천혜의 섬이다. 이 섬에는 진귀한 약초들이 무수히 널려있다. 이곳의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은 어느 것 하나 신묘하지 않은 것이 없다." 육노인은 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백육 네놈이 섬을 접수한다면 노부는 혼자라도 이곳에 남아 병들어 죽어가는 중생들을 구제해 줄 전설의 불로선약이나 지어볼 요량이다. 흐흐, 곽가놈이 내 재주의 반만 깨우쳤어도 벌써 만들 수 있었을 만큼 동사군도는 영약의 보고(寶庫)가 아니더냐." "육노야! 딴 소리 말고 백육을 어떻게 할지나 말씀해 보시오." 백사호는 참지 못하고 채근했다. 육노인은 히죽 웃으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보였다. 그것은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꽃이었다. 다만 특이한 것은 아홉 개의 푸른 잎과 붉은 꽃잎을 받쳐주는 세 가닥의 뿌리가 여느 것들과 달리 단단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 꽃의 이름이 뭔지 아느냐?" 백육호와 백사호는 눈을 멀뚱이 뜬 채 고개를 저었다. "이 꽃은 원래 복숭아 모양의 열매도 달고 있었다. 지금은 옥사 앞 탕기 속에서 끓고 있겠지만." 백육호는 갑자기 부르짖었다. "천도구엽석화(天桃九葉石花)!" "클클클! 제법이구나. 최소한 곽가의 수준은 넘어선 것 같구나." 육노인은 제자나 다름없는 백육호의 반응에 만족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천도구엽석화의 뿌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것이 억겁의 세월을 단단한 암석을 뚫고 들어가 정기를 빨아들인 뿌리다. 또, 그 정기의 결정체인 열매는 그동안 복용한 독초들을 네 체질에 맞게끔 변화시키기 위해 방금 말했듯이 약탕기 속에 들어가 있다. 그 속에는 불천궁(弗川弓), 반하(半夏), 백봉령(白鳳岺), 망초(芒草), 번석(樊石) 등, 모두 스물두 가지의 약초들이 혼합되어 있다. 너는 오늘부터 매일밤 각기 다른 한 가지의 약초들을 정확한 순서에 맞추어 열흘간 추가해 두어야 한다." "그럼 모두 서른두 가지란 말이오?" 백육호의 안색은 진지해져 있었다. 그동안 그는 육노인의 의술을 틈틈히 전수받아 왔다. 그래서 육노인의 처방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약초들은 독성을 변성시키는 것 외에도 독특한 효능을 가지고 있다. 곽가놈이 오랜 세월 네놈을 실험대상으로 삼아 독초로 장난칠 때 노부 또한 그 독성을 중화시키기 위해 수천 종에 달하는 약초를 뜯어다 먹였다. 노부가 매일 밤 옥사에서 네놈에게 먹인 풀들이 다 그런 것들이다. 그 과정을 통해서 노부는 드디어 서른두 가지의 약초를 찾아냈지.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백육호는 눈을 가늘게 하며 말했다. "아무리 탁월한 효능을 지닌 약초라 해도 생식(生食)으로는 약성이 충분히 작용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래서 곽초량을 도와준다는 핑계로 탕약을 만들어 주며 그것을 해결했을 것이고, 그런데 또 뭐가 부족했단 말이오?" 육노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기특한 놈, 매일 투덜대면서도 익힐 건 제대로 익혔구나. 그 정도면 앞으로 떠돌이 약장사를 해도 굶어죽지는 않겠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네놈 말대로 그런 식으로 해결해 왔지. 그러나 문제는 맹독을 지닌 약재가 없다는 것이었다. 네놈의 금제를 풀기 위해서는 극독이 필요했다. 이른바 이독공독(以毒攻毒)의 논리지. 기해혈을 틀어막고 있는 독공이 너무도 극랄해서 그것을 상회하는 독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 백육호의 눈이 빛났다. 그는 육노인의 말을 새겨듣고 있었다. 백사호는 의술에 대해 별반 아는 것이


없어 그저 방심한 채 듣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날 노부는 고도로 노역을 나갔다가 무릎을 치게 되었다. 그것은 고도의 토양과 번식하고 있는 수목의 종류로 보아 천지간에 가장 강한 독성을 지니고 있다는 천도구엽석화가 자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결국 눈에 불을 켜고 찾아 헤맨 결과 이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꽃은 수천 년간 대자연의 정기를 농축하여 담고 있다. 만일 그 기운이 인체에 순순히 흡수되기만 한다면 무림인의 백 년 내공을 상회하는 엄청난 잠력이 생기게 된다." 백사호는 지루한 듯 물었다.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그 절독이 약이 된단 말이오?" "얼마 안 남았다. 앞으로 열흘만 더 달인 후 이 꽃잎과 아홉 개의 잎을 으깨어 만든 즙과 혼합하면 모든 게 끝난다. 그후엔 네놈에게 달려 있다. 아니, 하늘만이 알고 있지." 말을 끝낸 후 육노인은 조심스럽게 천도구엽석화를 품 속에 갈무리했다. 잠시 후 그는 자세를 바로 하며 심각한 어조로 당부했다. "백육, 잘 듣거라. 노부는 기적을 믿고 있다.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하늘의 안배로 천도구엽석화와 서른두 종의 약재를 동사군도에서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너의 타고난 근골이다. 세번째는 노부조차도 아직 완전히 효능을 알지 못하고 있는 추나요법이다." 백육호를 바라보는 육노인의 눈에는 따스한 빛이 배어나왔다. "틈나는 대로 추나요법에 대해 더욱 연마하거라. 언젠가는 네놈에게 무한한 힘이 될 것이다." 백육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육노야.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소." ④ 벌써 몇 시진째 죽음의 와류와 사투를 벌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처음엔 순조로웠다. 예상했던 대로 칼날 같은 암초와의 충돌에도 갈대배는 튕겨져 오를 뿐, 파손되지 않고 파도를 타고 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바다 깊은 곳에서 회오리치며 솟구치는 와류에 갈대배는 맥없이 갇혀 버리고 말았다. 만일 사사도의 포구에 있는 나룻배였다면 벌써 형체도 남아있지 않을 만큼 와류는 거칠었다. 사사영은 갈대배의 매듭을 혼신의 힘으로 움켜쥔 채 와류의 소용돌이 속에 빙글빙글 돌면서 그저 밖으로 빠져나가기만을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와류는 소용돌이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 일단 범위 안에 들어온 것은 무엇이건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갈대 매듭을 움켜쥔 사사영의 손바닥이 찢겨져 피가 흘러내렸다. 쿠쿠쿵! 콰아아아! 고막을 울리는 굉음과도 같은 파도소리! 산더미처럼 밀려오는 파도더미에 수십 차례나 곤두박질치면서 그 억센 갈대는 점차 찢기고 풀리면서 작은 배는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아아!" 마침내 사사영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아무리 초인적인 의지라 해도 이제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웩!" 그녀는 짜디짠 바닷물을 토해냈다. 수없이 밀려드는 파도에 너무나 많은 물을 삼켜버렸던 것이다. 그녀의 전신에 힘이 빠져나갔다. "흐흐흑......." 그녀는 갈대배에 엎드려 오열을 터뜨렸다. 이대로 수중고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억울했다. 와류는 무정하게 그녀의 오열을 삼키며 쉴새없이 포효하며 휘몰아쳤다. 콰콰콰콰......!


다시 몇 번의 격렬한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사사영은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이 괴로움에서 더 이상 살아있고 싶은 생각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그만 벗어나기로 했다. 눈을 감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움켜쥐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풀어버렸다. '아아... 진작 포기했다면 이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을.......' 그녀는 의식이 아스라히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도리어 마음이 편안해지고 있었다. 제 6 장 모멸(侮蔑)을 넘어서 ① 어김없이 밤은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오늘밤은 여느 때와는 달랐다. 사사도의 관리들과 수인들은 횃불을 든 채 분주히 해안가를 수색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감에 따라 조탁은 더욱 길길이 날뛰었고, 수인들과 관리들은 지칠 대로 지쳐만 갔다. 그러나 조탁의 흉폭한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삼삼오오 패를 지어 먼 해안까지 샅샅이 뒤졌다. 백육호와 백사호, 육노인은 기암괴석이 난립해 있는 해안을 뒤지고 있었다. 백사호가 약간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도 그녀의 옷자락 하나 발견되지 않은 걸 보면 탈출에 성공하지 않았을까?" 육노인은 어두운 밤바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갈대배를 생각해 내다니... 놀라운 소녀야. 지혜와 용기를 한 몸에 지니고 있어. 아마 그런 소녀는 이 하늘 아래 다시는 없을 거야." 육노인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보고 있는 백육호를 바라보며 괴소를 흘렸다. "클클! 사사영이 이곳에 나타날 때부터 네놈은 그 아이에게 빠져 있었지. 하기야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한 쌍의 원앙처럼 잘 어울리는 사이가 되었겠지. 네놈이 용골이라면 그 계집아이는 봉황이니 그보다 어울리는 사이가 또 있겠느냐?" "......." 백육호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너무 낙담 마라. 네놈도 머지않아 광명천지로 나가게 될테니 인연이 닿는다면 그 아이와 필시 조우하게 될 것이다." 육노인은 위로라고 한마디 했다. 그러나 백육호에게는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다. 그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허전함에 더욱 더 뼈저린 외로움을 씹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였다. 뒤쪽으로부터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찾았다! 사사영을 찾았다아......!" '오오, 맙소사!' 백육호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백사호의 안색도 창백하게 변했다. "쯧쯧! 하늘의 시샘이로다! 아깝구나, 아까워......." 육노인도 무거운 탄식을 토해냈다. 무거운 탄식을 토해내며 육노인은 소리난 곳을 향해 걸어갔다. 하얗게 얼굴이 탈색되어버린 백사호가 백육호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웅성거리는 소리....... 빛과 후끈한 불꽃의 열기....... 사사영은 치를 떨었다. 그녀는 생을 포기했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와류에 몸을 맡겨 버렸다. 그런데 이게 뭔가? 그녀를 둘러싸고 들리는 사람들의 소음과 횃불이 일렁이는 듯한 빛과 열기는......?


그녀는 살아난 것이다. 아니, 지옥과도 같은 사사도로 돌아오고 만 것이다. 차라리 죽었으면 더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달아나고자 몸부림쳤던 곳으로 되돌아오다니! "비켜라, 비켜!" 귀에 익은 거친 음성이 들렸다. 조탁이 횃불을 들고 수인들을 헤치고 나타났다. 그는 바닥에 엎어져 있는 사사영을 퉁방울 같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 그는 잡아먹을 듯이 사사영을 내려보다가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처음에는 보기만 하면 찢어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었으나 막상 사사영을 보는 순간 마음이 야릇해지고 말았다. 사사영은 죽지 않았다. 가냘픈 어깨가 숨을 쉼에 따라 가늘게 들먹이고 있었다. 바닷물에 흠뻑 젖은 수인복은 갈갈이 찢겨져 눈부신 속살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온몸에 찰싹 들러붙은 천이 그녀의 섬세한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조탁은 침을 꿀꺽 삼켰다. '빌어먹을! 이 계집은 어떻게 봐도 날 울렁거리게 한단 말야!' 그는 침을 퉤 뱉으며 말했다. "뭣들 하고 있느냐? 이 계집을 내 처소로 옮겨라!" 조탁의 몸은 사라졌다. 그러자 수인들을 헤치며 헌칠한 인영이 다가섰다. 백육호였다. 그는 사사영을 안아들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그때, 우연의 일치였는지 죽은 듯 미동도 않던 사사영이 반짝 눈을 떴다. '......!' 두 남녀의 눈길이 마주쳤다. 영혼의 울림이었을까? 두 사람의 눈동자에 똑같이 파랑이 일어났다. 백육호는 사사영을 등에 업었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사영의 몸이 너무나 가벼웠던 것이다. 넘치는 지혜와 결연한 의지를 갖추었다고는 하나 그녀는 역시 가냘픈 소녀에 불과했던 것이다. 더구나 무시무시한 와류에 시달린 나머지 체력이 극도로 약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백육호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녀를 업고 걸어갔다. 한편, 사사영은 의식이 완전히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다시 지옥으로 되돌아온 것을 알았으나 어이없게도 포근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이 사람의 등은 참으로 푸근하구나. 넓고 따스해. 마치 어릴 적에 아버님의 등에 업힌 것처럼.......' 사사영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백육호의 목을 끌어 안았다. 사나이의 굵은 목을 안은 순간 가슴이 뻐근하도록 안정감을 느꼈다. 백육호는 더욱 더 가슴이 뭉클해졌다. 목줄기에 그녀가 흘린 뜨거운 눈물방울을 감지했던 것이다. 그는 목이 터져라 부르짖고 싶었다. '신이여! 방법이 없단 말이오? 있다면 가르쳐 주시오! 어떻게 하면 이 소녀를 구할 수 있는지를 말이오!' 그는 너무도 무기력한 자신을 증오하고 싶었다. 이제부터 그녀가 겪어야 할 고통이 얼마나 참담한 것인지를 알고 있기에 더욱 심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번번이 당신에게는 폐만 끼치는군요." 갑자기 놀랍도록 차분한 사사영의 음성이 귓전에 들려왔다. 백육호는 입술을 악물었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걸음을 최대한으로 늦춤으로써 그녀가 맞이해야 할 고통을 미루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뿐이었다. 잠시 후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사사영.... 아직은... 포기하지 마시오."


사사영의 몸이 움찔하는 반응을 보였다. 얼마 후 그녀의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에요, 전 너무 지쳤어요. 아무런 미련도 없답니다. 하지만 지금은... 좋군요. 당신에게 업혀있는 것이......." 사사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백육호의 넓은 등에 뺨을 갖다 붙였다. 뒤이어 수줍은 소녀의 음성이 이어졌다. "당신의 등은... 참 좋아요......." 그녀의 뺨은 붉게 달아올랐다. 반면 백육호의 입술에서는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악물고 있었던 것이다. ② "사사영은 본좌가 직접 취조하여 내일 아침 결과를 공표하겠다!" 조탁의 말이었다. 관리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수군거렸다. 그들은 한결같이 실망한 표정들이었다. "젠장, 언제부터 직접 죄인을 취조하셨나?" 관사에서 멀어져가며 이렇게 투덜대는 자가 있는가 하면, "쳇! 어쨌든 부럽다, 부러워." 사사도에서의 근무 만료를 불과 이 개월 앞둔 요즈음의 관리들의 기강은 예전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해이해져 있었다. 그러던 차에 새벽부터 굶어가며 사사영을 수색했던 그들은 그 보상으로 가학적인 쾌감을 기대하고 있었다. 적어도 공개 심문이나 처형을 통하여 여흥을 맛보려니 했던 기대가 무너져 크게 실망한 것이었다. "젠장, 마지막까지 혼자서만 단물을 드시겠다 이거 아닌가?" "쯧쯧! 오늘로써 그 도도하던 사사영도 끝장이구먼." "휴유! 비록 죄인이긴 하지만 아까운 소녀야." "어쩌겠나? 명백히 국법을 어겼으니." 관리들의 수군거림은 조탁의 귓전에도 들렸다. 그의 안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비록 대놓고 떠들어대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절대권위가 점차 무너지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그는 퉁방울 같은 눈으로 관리들을 노려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몇 놈을 요절내버리고 싶었다. 그는 꾹 참고 관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제군들의 노고가 극심했음을 잘 알고 있다. 해서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곧 창고의 문을 활짝 열어놓을 것이다. 모두들 허기진 배를 마음껏 채우고 마시도록 하거라. 한 방울의 술도 남기지 않고 모두 먹어 치워도 좋다." 실로 예상치 못했던 조탁의 말이었다. "와아!" 관리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개중에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만세를 외치는 자들도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와르르 떼를 지어 창고를 향해 몰려갔다. 수인들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그들에게는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다. 그저 새벽잠을 빼앗겼으므로 조금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다면 다행일 뿐이었다. 관사 앞에는 봉두수와 육노인, 백사호, 아직도 사사영을 업고있는 백육호 등이 있었다. 조탁은 음침한 표정으로 명령했다. "봉두수! 넌 저 계집을 내 방으로 옮긴 후 열쇠를 가져가 창고문을 열어주도록 해라." 그는 몸을 홱 돌려 관사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봉두수는 백육호에게 다가갔다. "이리 내려놔라." 그러자 사사영이 발딱 고개를 들더니 차갑게 말했다. "내 발로 걸어갈테니 비켜요."


그녀는 백육호의 등에서 내려왔다. 내리기 전 그녀는 섬섬옥수로 은밀히 백육호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으므로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다만 백육호만이 몸을 부르르 떨었을 뿐이었다. 탕! 사사영이 관사 안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백육호의 가슴 속에서 울렸다. 그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그만 가자." 육노인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자, "이대로 갈 순 없소." 백육호는 육노인의 손길을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 육노인의 안면이 찌푸러졌다. 그는 백사호에게 소리쳤다. "이놈아! 어서 끌고 가자. 이러다 일 나겠다." 백사호는 마지못한 듯 백육호의 팔을 잡아 당겼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백육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땅에 뿌리라도 내린 듯이 나무기둥처럼 서 있었다. 그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어가고 있었다. 부릅뜬 눈은 관사를 노려보고 있었고, 눈동자는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거 안되겠군!" 탁! 육노인이 그의 목덜미를 주먹으로 쳤다. "우― 욱!" 백육호가 선혈을 한 덩이나 토해내며 쓰러졌다. "이러다 심마(心魔)에 빠지겠다. 백사, 어서 이놈을 옥사로 옮겨라." 육노인의 다급한 음성에 백사호는 황급히 백육호를 둘러멨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육노인은 고개를 젓고 있었다. '녀석, 아무리 괴롭더라도 그 지경이 되다니. 겉으로는 낙천적인 것 같더니 속마음은 누구보다 다정다감한 놈이란 말이야. 그래봐야 너만 손해일 텐데.' 옥사 앞에는 두 명의 옥졸이 막 달려오는 백사호를 보고 소리치고 있었다. "뭐하느라고 늦었느냐?" 백사호는 대답없이 백육호를 업고 옥사 안으로 들어갔다. "백육호 저놈은 또 왜 그 모양이냐? 동포두에게 혼줄이라도 났나?" 옥졸은 워낙 자주 봤던 모습인지라 가볍게 한마디 던지고는 뒤따라오는 육노인을 발견하고 물었다. "육백오십구호, 오늘도 저 탕약을 밤새 달일 참인가?" 옥사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후미진 곳에는 장작불 위에서 약탕기 십여 개가 뜨거운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물론이오. 곽대인의 엄명이라 하루도 쉴 수가 없소이다. 이곳은 늙은이에게 맡기고 가서 술이나 드시오." "그래 볼까?" 옥졸이 동료를 돌아보며 운을 띄우자, "그걸 말이라고 해? 우리만 빠질 수는 없지 않는가? 어서 가세!" 두 옥졸은 부리나케 창고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사실 감시라는 건 사사도에서 별 의미가 없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들이 사라지자 육노인은 옥사 안으로 들어섰다. 백육호는 자리에 누운 채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백사호, 침상 아래 약재통을 뒤져보면 연뿌리와 질경이뿌리가 있을 거야. 즙을 내서 이놈에게 먹여라. 노부는 약탕기를 살펴보고 오마."


육노인은 그렇게 지시하고는 밖으로 걸어나갔다. 등뒤로 들리는 백육호의 괴로운 신음소리는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하고 있었다. ③ "긴 말은 않겠다. 너도 국법을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단, 이곳은 나름대로의 법칙이 있다. 특히 탈출을 시도하는 수인들에게는 특별한 조치를 내릴 수가 있게 되어있지." 조탁은 사사영의 젖은 몸을 핥듯이 훑어보며 느긋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대낮처럼 밝혀놓은 유등의 불빛은 흠뻑 젖은 수인복을 입은 사사영의 몸매를 고스란히 비추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매우 관능적으로 보였다. 지금까지는 고귀한 분위기로 인해 육감적인 면모가 많이 가려져 있었으나 바닷물에 젖은 데다 옷까지 여기저기 찢겨져 있어 색다른 육감을 물씬 풍겨내고 있었다. 꿀꺽! 조탁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사사영의 모습은 통째로 삼켜도 시원치 않을 정도로 매력적인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사사도의 율법을 어긴 몸이라 이제 그의 처분만 기다리는 상태가 아닌가? 그는 비대한 몸집을 의자에 걸치며 괴소를 흘렸다. "흐흐! 자살을 하려 했건 탈출하려 했건 네 목숨은 이곳의 도주인 본 어르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율법을 어긴 이상 네 신상은 내게 맡겨졌다. 동창의 무사 아니라 누구라도 내가 시행할 적법한 집행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그 사실을 알고는 있느냐?" 조탁은 두터운 이중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집행방법도 본 어르신에게 일임되어 있지. 참수형에서부터 화형(火刑), 태형(笞刑)에 이르기까지 수십 가지의 처형 방식이 있느니라. 물론 사지를 찢어 죽이는 방법도 있지." "......." 사사영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표정일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조탁은 조금 불쾌해졌다. 그녀가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며 애원하기를 원했던 것이나 예상이 빗나가 버린 것이다. 그는 탁자 위의 술병을 들어 거칠게 들이킨 후 물었다. "살고 싶지 않단 말이냐?" "......." 사사영은 여전히 그의 말은 듣지도 않은 듯 무표정이다. "오냐! 네년의 태도를 보아하니 죽어도 좋단 뜻이렷다. 그렇다면 소원대로 죽여주마!" 조탁은 버럭 외쳤다. 바야흐로 그의 흉성이 발작할 모양이었다. "좀 쉬시오, 육노야." 백사호였다. 그는 옥사 밖에서 약탕기를 달이고 있는 육노인을 향해 짐짓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육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네놈에게 맡기고 들어가마. 너도 잠시 후 들어와 눈 좀 붙이도록 해라." 육노인은 노구를 일으켜 옥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침상에서 두 무릎 사이로 머리를 파묻고 있는 백육호를 보았다. 힘없이 늘어져 있는 그의 고독한 모습에서 지난 십 년간의 참혹했던 세월의 인고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육노인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백육, 앞으로 열흘이다. 십 년을 기다려온 우리의 한을 풀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일을 벌이면 안 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육노인의 음성은 간절했다. "너무 걱정마라. 사사영은 결코 죽지 않는다." 백육호는 힐끗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사자(死者)의 눈을 보는


듯했다. 육노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부드럽게 말했다. "노부의 말을 믿어라. 조탁은 결코 그녀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시련은 있을지언정 목숨의 위협은 없을 것이다. 제발 믿어라. 그녀의 관상을 볼 때 단명(短命)할 상은 아니다. 더구나 그처럼 굳은 의지와 지혜를 겸비한 아이는 하늘이 보살펴 준다. 그러니 너는......." 그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했다. "잘 들어라. 세월은 많다. 너희 둘은 천하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쌍이 될 것이다. 네가 진정으로 그 아이를 마음에 둔다면 오늘의 이 일을 뇌리에 박아 두어야 한다. 진정으로 네놈이 해야 할 일은 앞으로 열흘을 굳은 각오로 버티어 내는 것이다. 그런 연후 이곳을 평정하고 그 아이를 구해내야 한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바램이며 그동안 희생된 일천 원혼을 위로하는 일이다. 알겠느냐?" 육노인은 백육호의 어깨를 몇 차례 두드린 후 일어섰다. 그는 밖으로 나가며 당부했다. "약발이 잘 받을려면 충분히 자 두어야 한다. 내 말 명심해라." 그가 사라진 후, 백육호는 이마를 바닥에 박으며 소리 죽여 부르짖고 있었다. "사사영 소저... 날 용서해 주시오." 같은 시각. 연거푸 마신 술기운에 욕정마저 오른 조탁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크흐흐! 널 처형하기 전에 먼저 처리할 일이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라. 백삼호! 이리 들어오너라!" 조탁은 느닷없이 고함을 쳤다. 잠시 후 한 미부가 주춤거리며 들어섰다. 그녀는 백삼호였다. 방안으로 들어선 순간 그녀는 안색이 변했다. 찢어진 수인복을 걸친 채 바닥에 앉아 있는 사사영을 보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깨달은 듯 불안과 공포의 빛을 떠올렸다. 조탁은 그녀를 노려보며 호통을 질렀다. "네년은 사사영이 야반도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본 어르신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곧 저 계집의 탈출을 묵인한 것이다!" 백삼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탈주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한 것은 죽음으로 다스려야 할 중죄다. 설마 네가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테지?" 백삼호는 털썩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도주님, 저는 모르는 일이옵니다. 도주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어젯밤 도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닥쳐라, 이년! 어디서 변명을 하는 거냐?" 사사영은 입술을 악물었다. 조탁은 억지를 쓰고 있었다. 그녀도 어젯밤 백삼호가 조탁의 침실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억지로 누명을 씌우고 있는 것이었다. "도주님, 제발... 저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백삼호는 오열을 터뜨렸다. "못난 것, 죽음이 그토록 두렵다면 애초에 죄를 범하지 말았어야지." 조탁은 눈을 내리깔며 온통 경멸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백삼호가 본래는 고귀한 신분이며 현숙한 부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성의 노리개가 된 것은 죽음 따위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아들인 백사호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조탁은 늘 그녀를 멸시하고 천대해 왔다. 아니, 도리어 그 점을 이용하고 있었다. 백삼호는 무릎 걸음으로 조탁을 향해 기어가 매달렸다. "도주님, 그간의 정리를 봐서라도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어떤 명이라도


즐거이 받겠나이다." 사사영은 아미를 찌푸렸다. 그녀는 백삼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능히 짐작이 갔다. 그것은 조탁의 변태적인 취향을 얼마든지 맞춰주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백삼호는 조탁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옷을 벗기 시작했다. "도주님, 제발... 저에게 아무 명이나 내리세요. 제발......." 백삼호는 방안에 사사영이 있는 것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그녀는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며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조탁은 술잔을 기울이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녀의 알몸을 훑어보고 있었다. "제발 그만 두세요, 부인!" 사사영은 마침내 더 두고볼 수가 없어 날카롭게 외쳤다.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물며 고개를 홱 돌려 조탁을 노려보았다. "조도주, 당신이 원하는 게 대체 뭔가요?" "뭐라고? 조도주? 쿠하하하......!" 조탁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오냐, 마음껏 지껄여라. 네 오만함이 얼마나 오래갈지 두고 보겠다." 사사영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부인을 돌려 보내세요. 당신이 원하는게 내 몸이라면 기꺼이 던져 주겠어요." 조탁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 이제야 대화가 좀 되는구나. 백삼호, 넌 가도 좋다." "잠깐, 부인 앞에서 약조 하세요. 다시는 이번 일로 문책하지 않겠다고요." 사사영의 말은 또렷하기만 했다. 조탁은 느물거리며 말했다. "좋아, 약조하지. 하지만 본 어르신도 너에게 받아야 할 약조가 있다." "......." "본 어르신은 번잡한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훗날 오늘 일로 동창과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가 않다. 물론 엄정한 법의 집행으로 너와 백삼호 계집을 처형해 버리면 동창도 시시비비를 따지고 들지는 못할 테지만 말야." 조탁은 슬며시 사사영의 기색을 살펴보았다. 사사영은 만면에 경멸의 표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비열한 인간! 좋아요, 약속하지요. 오늘밤의 일은 동창을 포함하여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부인과의 약조를 지키지 않을 땐 그 약조는 지켜지지 않을 거예요." "크하하하! 걱정 마라. 내가 왜 약조를 깨겠느냐?" 조탁은 광소를 터뜨린 후 백삼호를 향해 말했다. "넌 마음 놓고 돌아가라. 내 보장하건데 앞으로 이번 일을 놓고 따질 일은 없을 것이다. 뭣 하느냐? 썩 꺼지지 않고!" "......." 백삼호는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를 챙겨 들었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다 말고 사사영에게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사사영... 미안해요." 조탁은 밖으로 나가는 백삼호의 벌거벗은 뒷모습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흐흐, 하긴 죽이긴 아까운 계집이지. 근자 들어 허리에 군살이 붙긴 했지만 아직은 쓸만하거든. 사실 천지를 뒤져도 저런 절색은 흔치 않지." 멋대로 지저분한 소리를 지껄이는 조탁이었다. 사사영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런 사사영의 모습을 바라보는 조탁의 눈에는 욕화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사사영, 이제 네년이 약조를 지키는 일만 남았다. 스스로 선택했으니 후회도 없을 것이다. 자, 서둘러라 곧 날이 밝을 테니." ④ 사사영의 질끈 감은 눈꺼풀이 경련을 일으켰다. 비록 조탁의 침실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것을 각오하면서 체념했지만 치욕의 순간이 도래하자 자신도 모르게 심금이 떨린 것이다. "벗어라! 네 손으로." 조탁의 음탕한 음성이 떨어졌다. 사사영은 몸을 일으켰다. '그래, 주는 거야.... 더러운 개에게... 적선이나 하는 셈치고.......'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흐트러지려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녀는 섬섬옥수를 들어 옷고름을 끄르기 시작했다. 스르륵! 그녀의 작고 예쁜 발 옆으로 찢어진 윗옷이 떨어져 내렸다. 드러난 그녀의 동그란 어깨와 속살은 눈이 부시도록 희었다. 청결함이 지나쳐 은은한 푸른빛마저 감도는 그녀의 피부에 조탁은 벌써부터 하복부가 불끈 치솟고 있었다. 사사영의 손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녀의 손은 가슴에 가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소담스런 가슴을 가리고 있던 젖가리개가 떨어져 내리고 소녀의 수줍은 가슴이 드러났다. "......!" 조탁은 자신의 눈이 의심스러웠다. 인간이 이다지도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인가? 정녕 사사영의 육신은 뼈와 살로 이루진 것이란 말인가? 그는 입가에 흐르는 침도 의식하지 못한 채 넋을 잃고 사사영의 젖가슴을 바라보았다. 소담한 봉우리의 위에 앵도같이 작은 꽃망울이 맺혀 있었다. 그것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 사사영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했다. 그녀는 조탁의 탐욕스런 시선을 느끼면서도 가슴을 가릴 생각도 않고 무심히 손을 늘어뜨렸다. 조금도 이지러짐 없이 팽팽한 육봉은 소녀다운 청순함과 이제 막 성숙한 여인의 문턱으로 들어서는 난숙함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조탁은 멍하니 젖가슴을 바라보다 사사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열일곱 소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귀하고 기품있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과연 이 소녀를 희롱하고 능욕해도 괜찮은 것인가? 갑자기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이게 웬 개 같은 경우지? 내가 주눅이 들다니.......' 조탁은 고개를 강하게 흔든 후 사사영의 젖가슴을 노려보았다. 탐스런 가슴의 기복이 눈에 띄게 커져 있었다. 아무리 냉담초연한 사사영이라도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탁의 갈등은 끝났다. '흐흐! 그래, 네년이라고 별 수 있느냐?' 그는 조탁은 결심했다. 설사 단 하룻밤만이라도 이 십전십미(十全十美)의 소녀와 뼈가 녹는 듯한 유희를 즐길 수만 있다면 장차 어떤 재앙이 닥쳐온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벗어라! 나머지도." 조탁은 음침하게 외치며 사사영에게 다가갔다. 사사영의 눈썹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허리를 숙이며 하의를 끌어내렸다. 생각보다도 훨씬 풍요로운 소녀의 하체가 손바닥만한 고의만을 남기고 고스란히 드러났다. 조물주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빚어 놓은 듯한 가지런이 뻗은 두 옥주는 한 점의 티끌도 없이 청명하기만 했다. 사사영은 더 이상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 조탁의 털투성이 손이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쓰다듬었다.


"......!" 순간 뇌전을 맞은 듯 그녀의 몸에 경련이 일어났다. 모질게 유지해 왔던 평정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황급히 가슴을 가렸다. 청순무구한 소녀의 몸으로, 감내할 수 없는 치욕의 순간을 버텨보리라던 결심은 더러운 손길이 닿는 순간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고 만 것이다. 사실 애초부터 불가능한 순진한 소녀의 각오였었다. 만일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면 사사영은 차라리 담담한 마음으로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집요하게 희롱해 올 능구렁이를 초연하게 견뎌내기에는 그녀의 마음은 너무도 여린 것이었다. 반면 조탁은 승전한 장수의 기분이 되어 한껏 기세가 등등해졌다. 그는 느긋하게 사사영의 눈가에 번져나온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오냐, 실컷 울어라. 그것이 네게 어울린다. 이제부터는 본 어르신이 잘 돌봐줄 테니 모든 걸 잊고 복종하도록 해라. 이 어르신은 그만큼 널 극진히 대해주마." "흑흑......."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는 사사영이었다. 한 번 울음이 터져 나오자 걷잡을 수 없는 오열로 이어졌다. 조탁은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한 마음이 되어 사사영의 어깨와 등을 쓰다듬었다. 그는 슬금슬금 손길을 아래로 미끄러뜨려 마지막 남은 고의끝을 잡았다. 그가 막 힘주어 그것을 풀려는 순간, "이... 개만도 못한 놈!" 갑자기 방안이 쩌르릉 울렸다. 언제 나타났는가? 두 눈에 이글거리는 분광을 뿜으며 장발의 청년이 방안으로 뛰어 들었다. 낡아빠진 수인복을 걸친 장발청년, 그는 바로 백육호였다. 조탁는 눈을 꿈벅거렸다. 그는 잠시 혼란해졌다. '이거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이렇게 아름다운 계집이 발가벗고 있고 또 저놈이 내 방에 뛰어들다니......?' 그는 눈을 부릅떴다. 백육호가 사사영의 몸에 옷을 걸쳐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사영은 얼굴을 온통 빨갛게 붉힌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공자님, 어쩌자고 이런 무모한 짓을......." 수줍음에 찬 사사영의 음성이 들렸다. "용서해 주시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백육호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있었다. 사사영은 암담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 어리석은 일이에요. 제가 무엇이길래 공자님께서 이런 모험을......." 이때였다. 갑자기 짐승의 발작과도 같은 포효가 울렸다. "으으... 악! 이 가랑이를 찢어 죽일 놈!" 조탁이었다. 그는 눈썹을 거꾸로 세우며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내 오늘 네놈을 찢어 죽이지 않으면 조탁이 아니라 견탁이다!" 비로소 상황판단을 끝낸 조탁이 우장(右掌)으로 번개같이 백육호의 등뒤 지당혈(志堂穴)을 후려쳤다. 펑! 폭음과 함께 백육호는 붕 떠서 날아가더니 조탁의 견고한 침상 위에 떨어졌다. 그 바람에 침상은 박살이 나고 말았다. "백육호, 내 네놈이 언제고 사고칠 줄은 알았다! 흐흐! 그런데 감히 본좌의 침실까지 뛰어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좋다! 오늘로 질긴 네놈의 목숨을 끊어주마!" 조탁의 비대한 몸집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며 두 발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퍼― 억! 펑! 백육호의 몸이 바닥을 구르며 선혈을 줄기줄기 뿜어냈다. 그러면서도 그는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조탁이 구사하고 있는 무공은 소림사에서 유래한 연환십팔퇴(連環十八腿)란 각법이었다. 본래 조탁은 청년시절 잠시 소림사에 입문한 적이 있었다. 당시 소림은 파천황교의 횡행으로 기강이 무너진 상태였으므로 그 같은 불한당이 쉽게 속가제자가 될 수 있었다. 심성이 흉폭한 조탁은 과거 소림사에서 배운 무공으로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바 있었다. 그의 악행이 극에 달하자 소림사에서는 집법승(執法僧)을 내보내 조탁을 추적했다. 이렇게 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조탁은 마침 공공연히 사병(私兵)을 모집하던 건친왕부에 소림파의 무공을 밑천으로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일단 왕부의 무사로 발탁되자 소림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의 단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조탁의 발길질은 일류고수라해도 정통으로 얻어맞으면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다. 백육호는 연속된 그의 공격에 온몸의 뼈가 부러지고 살갗이 터져 버렸다. 뿐만 아니라 내장마저 뒤틀려 의식이 혼미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조탁의 흉성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정신을 잃은 백육호의 몸에 쉴새없이 발길질을 퍼부었다. 퍼― 엉! 퍽! "그만! 제발 그만 하세요!" 가슴을 감싼 채 오들오들 떨고 있던 사사영은 울부짖으며 달려와 조탁의 다리를 부여안았다. "비켜라!" 조탁의 가벼운 발길질에 사사영은 바닥을 몇 바퀴나 굴러 저만치 나가 떨어졌다. "네놈을 찢어죽여 가루를 내버릴 테다!" 시체처럼 옴짝달싹도 하지 않는 백육호의 전신에 무자비한 발길질이 다시 떨어졌다. 퍽! 퍼억! "제발... 그만 하세요! 도주님. 소녀의 간청이옵니다." 일순 조탁의 동작이 멈췄다. 그는 고���를 돌려 분을 바른 듯 새하얀 알몸을 앙증맞은 고의 한 장으로 가린 채 눈물로 호소하는 사사영을 음침한 눈으로 훑어 보았다. "도주님, 이미 저분은 숨이 끊어진 듯하니 바다에 던져 버리면 되잖아요? 어서 소녀를 취하세요. 소녀 비록 남녀지간의 일은 잘 모르오나 성심껏 도주님을 모시겠어요." 사사영의 그 말에 조탁은 한순간에 울화가 말끔히 가라앉았다. 그의 얼굴에 음소가 피어 올랐다. "흐흐흐.... 그래, 두고 보자. 네가 이 어르신을 만족시켜 준다면 이놈은 날이 밝는 대로 바닷물에 수장시키도록 하지. 지금은 밤이 늦었으니." 사사영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렇게 말한 것은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잡으려는 심정에서였다. 더 이상 맞다가는 백육호가 완전히 죽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는 죽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기적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기적에 마음을 건 것이었다. "흐흐, 왜? 마음이 바뀌었느냐? 그렇다면 잠시 생각할 여유를 주마. 그동안 나는 이 송장이나 좀더 타작해야겠다." 조탁의 묵중한 발이 다시 백육호를 짓밟았다. "아악! 하겠어요, 뭐든지." 사사영은 비명을 질렀다. 조탁은 사악한 눈빛을 빛내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정성을 다해 수청을 든다 했으면 뭘 망설이는 거냐? 마저 다 벗어야 할 게 아니냐?" 사사영의 탐스러운 젖가슴을 핥듯이 바라보며 그는 명을 내렸다. 사사영은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흐흐! 난 참을성이 없다. 어서 벗어라." 조탁의 음성에 짜증이 배어나오자 사사영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천조각을 몸에서 떼어내고 말았다.


마침내 유등 아래 모든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수줍게 그 모습을 드러낸 초지(草地). 그녀 스스로도 한 번도 자세히 들여다 본 적이 없는 처녀지림이 마침내 드러나고 만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 줌밖에 안 되는 잘록한 허리를 받치고 있는 풍요로운 둔부까지 모든 것이 드러났다. "흠......!" 조탁은 숨이 턱 막혔다. 그는 오늘밤이 있게 해 준 자신의 부모와 형제, 건친왕, 그리고 신에게 감사했다. 그는 마치 난생 처음으로 방사를 치루는 새신랑처럼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알이 바쁘게 굴러갔다. 아마도 태어난 이후 가장 빠르게 움직였을 것이다. 사사영의 육체는 신의 완벽한 작품이었다. 조탁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탁은 눈요기를 끝낸 듯 손을 내밀어 사사영의 뽀얀 젖가슴을 잡았다. 손바닥을 통해 매끄럽게 느껴지는 소녀의 피부와 팽팽한 탄력에 그는 전율을 온몸으로 느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문득 사사영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떨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듯 한쪽을 바라보았다. 핏덩어리! 그것은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바닥을 느릿느릿하게 기어오고 있는 그것은 핏덩어리였다. 조탁의 발길질에 뭉개질대로 뭉개진 핏덩어리가 그녀와 조탁을 향해 기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고... 공자님!' 그녀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때 그녀는 아! 하고 신음을 발했다. 조탁의 손이 우악스럽게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 것이다. 이어 그의 손은 바쁘게 그녀의 온몸을 주물럭거렸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치를 떨었다. 탐욕이 가득한 얼굴을 들이댄 채 계속 손을 움직이고 있는 조탁을 외면하면서 그녀는 하늘을 저주하고 신을 저주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사사영의 눈에서는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라리 죽었으면!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을!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핏덩이는 조금씩 그녀를 향해 기어오고 있었다. 이때 그녀의 전신을 마음대로 주무르던 조탁의 손이 멈췄다. "이런 빌어먹을. 이렇게 목석 같아서야 어디 흥이 나느냐?" 조탁의 욕설에 사사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다급히 말했다. "편히... 누우세요. 소녀가 도주님의 의복을 벗겨 드리겠어요." "옳지. 이제야 네년이 도도한 기를 꺾었구나. 오냐, 눕지. 눕고 말고." 조탁은 만족하여 의자 위에 길게 드러누웠다. 침상은 백육호가 떨어지는 바람에 산산조각이 났으므로 의자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사사영은 이를 악물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뻗어 조탁의 옷을 벗겨 나갔다. 조탁은 누워있는 중에도 사사영의 여린 육봉을 사정없이 움켜쥐고 마구 주물럭거렸다. 핏덩어리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더욱 빠르게 기어오고 있었다. 조탁이 의자에 길게 눕자 사사영은 더욱 그를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백육호였다. 그는 도무지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피투성이가 된 채로 꾸준히 기어오고 있었다. 사사영은 보았다. 그의 눈에 서린 시퍼런 불꽃을. 그 불꽃은 태산이라도 녹일 듯했다. 사사영은 피를 토하듯 외치고 싶었다. '제발... 포기하세요! 이까짓 소녀의 정절 때문에 마지막 가는 길을 고통스럽게 하지 마세요. 이제 그만 쉬세요. 편히... 눈을 감으세요.......' 하지만 사사영은 말할 수 없었다.


아마도 말하는 순간 저 사내는 비참한 심정으로 숨을 거둘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짧은 순간에 그녀는 백육호의 모든 것을 알아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조탁의 하의를 벗겨 내렸다. 큼직한 속옷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다시 속옷을 끌어 내렸다. 순간 시커먼 육괴(肉塊)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크크.... 놀라기는, 귀여운 것. 이리 올라오너라." 조탁은 손을 내밀어 충실한 노예가 되어버린 사사영을 자신의 배 위에 끌어 올렸다. 이어 털투성이의 손으로 그녀의 알몸을 더듬어 나갔다. 사사영은 거침없이 파고드는 조탁의 거친 손길에 다시 눈물을 흘렸다. 조탁의 손은 이제 그녀의 하복부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로 가득 찬 눈으로 백육호를 바라보았다. '공자님, 제발 포기하세요. 공자님의 생명을 앗아간 하잘 것 없는 소녀의 순결도 이제 깨져버릴테니......' 문득 그녀는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백육호의 눈이 무엇인가 애절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는 그 뜻을 알아들었다. ― 소저, 포기하지 마시오. 날 믿고 조금만 더 버텨 주시오! 바로 그런 소리가 그녀의 영혼을 울리는 듯했다. 그것은 생명의 마지막 끈을 움켜쥐고 다가오는 백육호와 능멸의 순간을 참고 있는 사사영 사이에 오고가는 영혼의 대화였다. 사사영은 이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지 눈빛만으로도 백육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백육호의 눈빛을 읽은 사사영은 간곡한 만류를 자신의 눈빛에 담아 보냈다. 그러나 백육호의 눈빛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사사영은 백육호가 대단히 고집이 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 저 이를 위해서... 불가능한 일인 줄은 알지만 편히 가실 수만 있다면.......' 이때 조탁이 짜증을 왈칵 냈다. "안되겠다. 이 어르신이 할테니 내려오너라." 사사영은 급히 자신의 몸으로 조탁을 누르며 구슬 같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도주님,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소녀는 처음 겪는 일이라 서툴러서 그러니 이해하세요. 편히 눈을 감고 계세요. 소녀가 즐겁게 해드리겠어요." 평소의 사사영이라면 목에 칼이 박혀도 할 수 없는 교태로운 언행이었다. 조탁은 그만 온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사영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입술로 조탁의 털투성이 가슴을 찍으며 섬섬옥수로 그의 비대한 살결을 어루만져 주었다. 본 적도, 배운 적도 없는 짓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비록 서툴기는 했지만 조탁에게는 닳고 닳은 창기보다도 그녀의 행위가 더욱 자극적이었다. 특히 그녀가 촉촉한 입술과 보드라운 손으로 가슴과 복부를 훑으며 내려가자 그는 눈을 감은 채 쾌락에 젖은 신음을 흘렸다. "크음, 그래... 좀더 아래로." 조탁은 욕망의 뿌리를 향해 사사영의 따스한 숨결이 다가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불끈 일어서는 남성의 뿌리가 힘차게 위용을 과시했다. "허음! 어억." 그는 입을 벌리며 신음을 발했다. 사사영은 더욱 빨리 입술과 손을 움직였다. 어떻게 해야 상대가 쾌감을 느끼는 지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저 본능에 따라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움직였다. 그 순간에도 그녀는 백육호가 기어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만일 조탁이 그를 발견하는 날이면 끝장이었다. 그래서 조탁이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 조탁은 불현듯 온몸을 찌르는 듯한 살기(殺氣)를 느꼈다. 그 살기는 자신을 향해 가공할 파괴력을 뿜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육감이었다. 그는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나긋나긋한 소녀의 몸이 그를 누르고 있었다. "잠깐... 읍." 막 일어서려던 그는 숨이 턱 막혔다. 사사영이 대담하게도 천산의 만년설(萬年雪)보다 더 순결한 젖가슴을 스스로 조탁의 입에 들이대는 것이 아닌가! 조탁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육감은 사사영을 뿌리쳐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었다. 그러나 타오르는 욕망은 그를 유혹했다. 앵두처럼 빨간 꽃망울을 달고 있는 소녀의 젖가슴이 그의 입술을 간지럽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그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입을 크게 벌렸다. 천도(天桃)인들 이다지도 달콤할손가! 그는 넣기만 해도 사르르 녹을 듯한 사사영의 젖가슴을 덥석 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조탁은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그는 보았다. 시뻘건 핏덩어리가 유등을 가리며 떨어지는 것을! 그 핏덩어리는 다름 아닌 자신이 짓밟아 뭉개버린 백육호의 몸뚱아리였다. 그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 잠시란 시간은 찰라이기도 했다. 허공에서 백육호의 손바닥이 창처럼 빳빳하게 뻗쳤다. 그리고 그 손칼이 그의 목젖을 파고들었다. 푹!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조탁은 멍청하게 눈을 떴다. '어째서.......' 그는 뭐가 뭔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하찮은 수인놈이라고 생각했던 백육호가 어떻게 허공에 떠서 공격을 하고, 그의 수도가 절정무공으로 그의 목을 꿰뚫었는지... 그의 아둔한 머리와 상식으로는 도저히 풀어질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조탁은 그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그의 눈앞에 자신이 막 입안에 넣었다고 생각했던 탐스런 천도 복숭아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게 먹고 싶어 했던 천도 복숭아였는데....... 죽음의 땅 동사군도를 지난 십 년간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으로 군림했던 제왕 조탁의 허무한 종말이었다. ⑤ 사사영은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생명의 불꽃마저 다했으리라 여겼던 사내가 자신이 보아왔던 황궁의 어떤 고수보다도 더욱 빠른 몸짓으로 허공을 날아와 가볍게 휘저은 손짓 한 번으로 악마의 숨통을 끊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더운 피를 뿜어내고 있는 조탁의 구멍 뚫린 목줄기와 그 옆에 혼절한 채 쓰러져 있는 백육호의 피투성이의 몸이 현실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그녀는 급히 백육호에게 다가가 호흡을 확인했다. '아! 이 사람은 사력을 다해 내 몸을 지켜주고도 아직 한 가닥 숨이 붙어 있구나.' 감동의 눈물이 그녀의 두 볼을 적셨다. '이젠 내가 뭔가를 해야 될 때야.' 사사영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왔다. 명석한 지혜와 냉철한 판단력을 되찾은 그녀는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방안의 가구를 뒤져 금창약을 찾아내 백육호의 상처부위를 처치해 나갔다.


피에 절어있는 수인복을 조심스럽게 벗겨내니 차마 인간의 형상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 드러났다. 그녀는 눈물방울을 떨구며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잠시 후 응급처치를 마친 그녀는 조탁의 의복 한 벌을 골라와 백육호의 몸에 입혔다. 경황중에도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아무리 혼절해 있다지만 사내의 알몸을 다뤄야 했기 때문이었다. 문득 그녀는 자신도 아직 알몸인 것을 깨달고 역시 조탁의 커다란 의복을 몸 위에 둘렀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그녀는 자신보다 두 배가 넘는 백육호를 등에 업은 채 밖으로 나갔다. 한 걸음 한 걸음 해안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애처롭다 못해 안타까울 정도였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관리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는지 왁자한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올 뿐, 관사 주변에는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포구에는 나룻배가 묶여 있었다. 사사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잠시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신이여! 무모한 일인 줄은 잘 아옵니다.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답니다. 부디 저희들을 보살펴 주옵소서!' 사사영은 나룻배를 향해 다가갔다. 어차피 동사군도에는 두 사람 다 남아있을 수가 없었다. 조탁의 죽음이 알려지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어차피 죽게 될 바에야 그녀는 가랑잎 같은 나룻배에 백육호와 함께 운명을 맡기고 섬을 떠날 작정이었다. 물론 섬을 탈출한 확률은 희박했다. 아니, 불가능했다. 섬 주변을 감싸고 도는 무시무시한 와류를 경험한 바 있는 그녀이기에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 외에 선택할 길이 없는 것이다. "아아!" 사사영은 답답한 가슴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화들짝 놀란 그녀는 뒤를 돌아다 보았다. 수십 개의 횃불이 포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침내 조탁의 죽음이 발견된 것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백육호를 안고 나룻배로 올랐다. 이어 나룻배에서 포구와 연결된 밧줄을 끄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내려 오너라!" 문득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사사영은 등골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니 어둠 속에서 두 인영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절망을 느끼며 백육호의 머리를 가슴에 꼭 끌어 안았다. '아아, 공자님. 우리의 인연은 내세에서나 맺어질 모양입니다.' 눈을 감고 있는 그녀에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분위기를 깨서 안됐다만 시간이 없으니 어서 내려와라." 육노인이었다. 그와 함께 나타난 인영은 백사호였다. 두 사람을 확인한 순간 사사영은 반색을 했다. 그녀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백육호를 안고 나룻배에서 뛰어 내렸다. "백사호, 배를 밀어 내거라!"


백사호는 무슨 뜻인지 알았다. 그는 서슴없이 바다에 뛰어들어 나룻배를 멀리 밀쳐냈다. 마침 해류가 빠져나가는 시각이라 나룻배는 금세 넘실거리는 파도를 타고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얘야, 노부를 따라오너라." 육노인의 손에는 약탕기가 들려 있었다. 그는 사사영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앞장 서 청도의 우측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이리 주시오. 낭자." 백사호는 백육호를 받아 들쳐 업었다. 얼마나 갔을까? 일행은 청도의 가파른 암석군 사이를 지나 까마득한 벼랑 위로 올라갔다. 그곳은 암벽이 병풍처럼 깎아질러 있는 곳으로 아래쪽으로는 단애요, 위쪽은 더 오르기 힘든 암산으로 되어 있는 곳이었다. 육노인은 약탕기를 바닥에 내려놓은 후 말했다. "모두 앉아 있거라. 노부가 이 못난 놈을 좀 살펴 보겠다." 그는 백육호의 눈을 까 뒤집어보기도 하고, 맥도 짚어보며 전신을 세심하게 살펴본 후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 죽기는 싫어서 맞을 때 요령을 부렸구먼. 추나심법을 제대로 써 먹었어. 클클클......." 다급한 상황 속에서도 키들거리는 육노인을 사사영과 백사호는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괜찮을까요?" 사사영은 만면에 근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걱정마라. 곧 깨어날테니. 크크! 그러고보니 너의 응급처치도 나무랄 데가 없군. 앞으로 그럴 듯한 의원부부가 탄생하겠는걸?" 육노인의 짓궂은 익살에 사사영은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백사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육노야, 지금 우스개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소." "노부도 알고 있다, 이놈아. 하지만 작별의 시간은 충분하다. 놈들은 우리가 나룻배를 타고 도주했을 것으로 추측할 테니 말이다. 저 아래를 봐라." 육노야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백여 개가 넘는 횃불들이 포구 근처를 대낮처럼 밝히고 있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백사호, 날 따라오너라." 육노인은 한 암석 뒤로 돌아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커다란 술통을 굴리며 돌아왔다. 그것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높이가 장정의 가슴만 했으며 표면에는 무쇠조각들이 빽빽하게 둘러쳐져 있었다. 처음에는 의아한 눈으로 술통을 살펴보던 사사영이 탄성을 발했다. "아! 이건 사사도의 암초와 와류를 뚫고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군요?" 육노인은 히죽 웃었다. "역시 총명한 아가씨는 다르군. 한눈에 알아보니 말야. 저 멍청한 팽삼산 같은 놈은 약초를 발효하기 위해 술통이 하나 필요하다고 했더니 아무 생각없이 내주던데 말야." 사사영은 신기한 듯 술통의 표면에 촘촘히 둘러쳐져 있는 금속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 강판들은 어떻게 구하셨나요?" "그야 일도 아니지. 노역 중에 틈틈이 연장들을 빼돌렸지. 물론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조금씩 모으느라 몇 달이 걸렸지. 그렇게 모은 연장들을 얇게 두드려 강판으로 만들어 붙이느라 이 늙은이의 힘이 모두 소진되어 버렸다." 사사영은 한숨을 쉬었다. "소녀가 만든 갈대배에 비할 바가 아니군요." 육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천만에. 노부야말로 이곳에서 십 년을 보내면서도 초도에 널려 있는 갈대들로 배를 만들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못했다. 이 술통은 갈대배에 비해 결정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게 뭔가요?" 사사영은 어느새 천진난만한 표정이 되어 육노인을 바라보았다. "방향성이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고자 하는 곳과는 상관없이 그저 조류가 흐르는 대로 떠다니기만 하니 이걸 어찌 배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건 그렇겠군요." 육노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얘야, 네가 만든 갈대배로는 도저히 안되겠더냐?" 사사영은 당시의 공포가 새삼 떠올랐는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와류를 뚫기에는 소녀의 준비가 턱없이 모자랐어요. 특히 와류 속에 머무는 시간이 그렇게 길 줄은 예상 못하고 매듭을 잡고버티려 한 것이 잘못이었어요. 아마 갈대배의 외형을 조금만 더 크게 만들어 그 안에 몸을 넣을 수 있는 공간만 만든다면 성공 가능성은 조금 높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 가능성도 희박하지만요." "허허! 그거 안타깝구나. 좋은 방법을 찾아냈으면서도 시간이 없으니.... 이것도 하늘의 뜻이란 말인가?" 어두운 안색으로 중얼거리던 육노인은 힐끗 아래쪽을 내려본 후 약탕기를 내밀었다. "네가 수고 좀 해줘야겠다.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될 귀한 약이니 네 입으로 흘려넣어 주도록 해라." "무슨... 약인가요?" "나중에 얘기해줄 테니 일단 먹이도록 해라." 사사영의 옥용에 홍조가 어렸다. "하필이면 왜 소녀가......." "허허, 이런 딱한 일이 있나? 그럼 노부가 냄새나는 입을 놈과 비벼대야 한단 말이냐? 백사호 저놈도 마찬가지다. 겉 모습은 희멀건 해도 십 년 동안 입 한 번 물에 개우는 걸 본 적이 없는 지저분한 놈이란 말이다. 또한 짐승도 암수는 구별하거늘 네가 이 자리에 없다면 모를까, 향기 나는 예쁜 입을 놔두고 수컷들이 주책없이 주둥아리를 들이댔다가 만에 하나 저놈이 구역질이라도 일으켜 귀한 약을 토해내면 책임은 누가 진단 말이냐? 잔말 말고 빨리 먹이기나 해라." 사사영은 덥석 약탕기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더 이상 망설이다가는 그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두려웠던 것이다. 탕약을 한 모금 입에 머금은 그녀의 뺨이 볼록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백육호의 머리를 품에 안은 채 손으로 그의 턱을 살짝 당겼다. 귓볼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채 그녀는 백육호의 벌어진 입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육노인은 히죽 웃으며 돌아섰다. 한편 이미 돌아앉아 있던 백사호의 창백한 얼굴에는 한 가닥 허탈한 기운이 떠올라 있었다. 그도 본래는 사사영을 좋아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상 언감생심 사사영에게 연모를 품을 수가 없게 된 입장이었다. "끝났어요......." 사사영의 음성이 들렸다. 두 사람이 돌아보자 사사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순결한 소녀가 입술을 수십 차례에 걸쳐 사내의 입술에 맞대었으니 부끄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수고했다. 이제 노부가 약에 대해서 설명해 주마." "예." 이윽고 육노인의 얘기가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사사영의 안색이 환하게 펴졌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그럼 방금 먹인 탕약은 무용지물이 된단 말인가요?" 육노인은 눈을 반쯤 감으며 말했다.


"그건 노부도 알 수가 없다. 그 약을 달인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아 애초에 기대했던 효능이 반감됐다는 것과 천도구엽석화의 절독성분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사영은 급히 물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왜 먹이신 거죠?" "어차피 독은 필요한 것이었다. 다만 용도에 맞게 변화시키려 했지. 게다가 저놈의 신체는 남다른 데가 있어 웬만한 독은 거뜬히 이겨낼 수 있다. 그래서 노부는 모험을 걸어 보았다. 어차피 막판에 몰리지 않았느냐? 이제 곧 놈들이 이곳으로도 몰려올 것이다." 사사영의 눈에 눈물이 글썽해졌다. "육노야, 그러시다면 저분은 대사를 불과 열흘 앞두고 소녀 때문에 엄청난 과오를 저질렀군요?" "허허, 그건 네가 자책할 일이 아니다." "어찌 제 탓이 아닌가요? 여러분들의 십년대계가 소녀로 인해 엉망이 됐거늘......." "노부는 저놈이 조탁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사사영은 흠칫 놀라 물었다. "그렇다면 왜 그분을 잡지 않으셨나요?" "노부가 잡는다고 고집을 꺾을 놈이 아니다. 또한 이 늙은이도 잡고 싶지가 않았다. 사람에게는 다 타고난 운명이 있는 법이다. 놈이 뛰어든 것도 다 운명이다. 아마 녀석의 성격으로 보아 오늘밤 달려들지 않았더라면 평생을 두고도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남았을 게다." 사사영은 소리 죽여 흐느꼈다. "사실 노부는 창문을 통해 모든 걸 지켜 보았다. 조탁이 죽은 후 네가 저놈을 업고 나오는 걸 확인한 후 즉시 옥사로 가 백사호와 함께 약탕기를 들고 쫓아왔지." 사사영은 그만 땅으로라도 기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토록 부끄러운 장면을 육노인이 모두 지켜보았다니! "허허! 부끄러워 할 것 없다. 너의 행동은 너무도 훌륭했다. 노부가 감동한 나머지 눈물까지 흘렸다면 믿겠느냐?" 사사영은 오열을 터뜨렸다. "소녀의 무모한 행동이 많은 분들에게 난국을 만들어드렸군요. 흑흑......." "울지 마라, 아이야. 모든 것은 뒤집어진 세상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희생자들일 뿐이다. 모쪼록 너희들에게 하늘의 가호가 따르길 빌어주마. 그리하여 대명천지에 사사도의 참상이 낱낱이 알려져 일천원혼들의 한이 다소나마 풀어지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사사영은 흠칫 놀라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육노인은 술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술통에 백육호와 너 두 사람은 동시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사사영은 눈을 크게 떴다. "썰물이 끝나기 전에 떠나야 한다. 어서 서둘러라." 사사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어요, 왜 제가 가야 하나요? 마땅히 두 분께서 가셔야 합니다." 내내 침묵하고 있던 백사호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난 갈 수 없소. 이곳엔 어머니가 있소." "클클클, 노부 역시 남을 것이다. 내 나이 이미 육십을 넘긴 지 오래다. 이젠 미련없이 눈감을 수 있다. 젊은 너희들이 떠나야 한다." 사사영은 입술을 악문 채 고개를 저었다. "뭐라 하셔도 못 갑니다. 두 분이 남으신다면 이분 공자님만 보내세요. 소녀는 남겠어요." 육노인은 눈알을 부라렸다.


"제기랄! 누가 천생연분이 아니랄까봐 고집까지 닮았느냐? 이봐 아가씨, 그럼 이 늙은이가 저 좁아타진 술통 속에 쪼그려 앉은 채 와류에 휩싸여 대가리가 터지게 곡예를 부려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또, 설사 마의 해역을 벗어났다 해도 어디인지 모를 곳으로 끝없이 흘러가다 굶어 죽으란 말이냐?" 실로 괴변이었다. 그러나 사사영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래도 싫습니다. 소녀에게 강요하지 마세요." 이때 백사호가 침울하게 말했다. "육노야, 놈들이 오고 있소." 육노인은 언덕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횃불 행렬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코를 휑 풀었다. "곽가놈이 머리 굴리는 잔재주는 있지. 게다가 의심 또한 많으니 이쪽으로 올라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사사영에게 말했다. "얘야, 시간이 없다. 이건 널 위한 게 아니다. 노부는 몸이 약해 술통 속에서 견딜 수가 없고 백사호는 모친 때문에 떠날 수가 없다. 그러니 너밖에 더 있겠느냐?" "흑흑......." 사사영은 오열을 터뜨렸다. 육노인은 백사호에게 눈짓을 한 후 술통의 뚜껑을 열었다. 백사호는 고개를 끄덕인 후 아직도 의식을 잃고 있는 백육호를 안아다 술통 속에 집어 넣었다. "어서! 늦기 전에 들어가라." 육노인의 음성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소녀는......." 사사영의 더욱 섧게 흐느꼈다. 백사호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백육... 아니 형님을 부탁합니다. 저의 결례를 용서해 주시오." 백사호는 사사영을 번쩍 안아 들었다. "제발......." 사사영은 애원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백사호는 그녀를 술통 속에 밀어넣었다. 그러자 육노인이 재빨리 덮개를 씌워버린 후 그 위에 걸터 앉으며 껄껄 웃었다. "아가씨! 장차 낭군이 될 사내와 신방(新房)을 꾸민 기분이 어떤가? 하하하! 비록 좁기는 해도 황홀할 거야, 안 그런가?" 이때 가까운 곳으로부터 날카로운 고함이 울려왔다. "저쪽에 있다! 어서 잡아라!" 횃불빛이 다가오며 우르르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다가왔다. "아가씨! 내세에서 만나자꾸자. 잘 가거라." 육노인은 술통의 뚜껑을 단단히 잠근 후 술통을 아래쪽으로 굴렸다. 백사호는 처연한 눈으로 굴러가는 술통을 바라보며 외쳤다. "형님! 내 진작부터 당신을 형님이라 부르고 싶었소! 잘 가시오! 그리고... 형수님도 부디 무사하시오!" 휙! 언덕 위로 동포락이 뛰어 올라왔다. 그는 절벽 아래로 술통이 굴러가는 것을 발견하고 버럭 외쳤다. "막아라! 술통 속에 사람이 들어있다." 그는 허리춤에서 검을 빼들고 달려왔다. 백사호는 발로 술통을 걷어차며 동포락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라! 이놈." 쐐액! 동포락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악!"


백사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의 오른 팔이 어깨죽지부터 잘라져 허공에 떠올랐다. 분수 같은 핏줄기가 허공에 확 뿜어지면서 그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나 넘어지면서도 그는 한사코 하나밖에 없는 팔로 동포락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그 바람에 동포락은 술통을 놓치고 말았다. "이이... 지독한 놈!" 동포락의 검이 허공에서 몇 차례 호선을 그렸다. 그때마다 피보라가 뿜어졌다. 백사호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는 서서히 떨어져 나갔다. 잠시 후 바닥에 벌렁 드러누운 그의 눈동자는 허공을 향해 고정되고 말았다. 초점없는 눈동자가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그것은 자애로운 모친의 영상인지도 몰랐다. 동포락은 절벽으로 달려갔다. 그의 앞에는 육노인이 뒷짐을 진 채 태연히 서 있었다. "비켜라! 늙은이!" 육노인은 돌아서며 히죽 웃었다. 그 웃음은 세상사를 달관한 웃음이었다. "늦었네, 이미 떠났어." "이런 빌어먹을 늙은이!" 동포락은 욕설을 내뱉으며 육노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한 줄기 선혈이 뿌려졌다. 육노인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동포락은 황급히 깎아지른 절벽의 아래쪽을 내려다 보았다. 시커먼 어둠 저 아래 검은 바다가 아스라히 보일 뿐이었다. 어디에도 방금 떨어진 술통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이때 그의 등뒤에서 육노인의 빈정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동가야. 억울하면 뛰어내려 쫓아가 보지 그러느냐? 허허, 하긴 네놈이 그럴 용기가 있을 리가 없지만." "으드... 득!" 동포락은 이를 갈며 빙글 돌아섰다. 바닥에 누운 채 야유하고 있는 육노인을 그는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았다. 다음 순간 검이 아래쪽으로 쑤셔 박혔다. 푹!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육노인의 여윈 가슴에 검이 깊숙이 박혀버리고 말았다. "꺼져라! 개 같은 늙���이!" 동포락은 발로 육노인을 힘껏 걷어차 버렸다. 육노인의 몸은 붕 뜨더니 시커먼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분기탱천한 동포락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핏발 선 눈으로 절벽 아래 밤바다를 노려보았다. 문득 그의 입에서 괴소가 터져 나왔다. "크흐흐... 하하하핫......!" 제 7 장 술통 속의 정사(情事) ① 강호무림에는 태자당에 관한 소문이 무성하게 번져나갔다. 삼삼오오 무림인이 모이는 곳이라면 예외없이 태자당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태자당이 결성된 직후, 무림주유에 오른 그들은 가는 곳마다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그런데 그 화제는 사뭇 섬뜩한 것이었다. 태자당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피바람이 일었던 것이다. 그들의 행보에는 수많은 마두(魔頭)들의 수급이 가을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부질없이 뒹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림의 신진고수들이었다.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모두 일기당천의 무예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명문가 출신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무리들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벌써 백여 명이 그들의 검날 아래 고혼이 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마도의 군소방파가 십여 개 이상 괴멸되었다. 이렇게 되자 백도에 몸담고 있는 무림인들은


태자당의 눈부신 활약에 박수갈채를 보내지 않는 이 없었다. 그러나 태자당의 강호주유가 탕마멸사(湯魔滅邪)로만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불상사도 일어났다. 태자당의 당주(黨主)이자 용봉칠영 중 한 명인 칠절신군 남궁청운은 강호선배에 대한 예의를 다 한다는 명분으로 각 지역의 명가와 무림명숙들을 방문했다. 물론 각 명문방파와 무림명숙들은 후기지수들의 방문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남궁청운은 견문을 넓히고 싶다는 이유로 가는 곳마다 비무(比武)를 요청했다. 각 방파의 명숙들은 남궁청운의 비무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한 수 지도하겠노라며 나서게 되었다. 그런데 결과는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다. 남궁청운은 가공할 절기로 여지없이 그들의 자존심을 짓밟고 만 것이었다. 가는 곳마다 비무가 벌어졌으며 패배한 방파의 수뇌들이나 명숙들은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아무리 명가의 후손이라 해도 한낱 후배에게 고배(苦杯)를 든 것은 평생을 두고도 씻지 못할 치욕이 되고 만 것이었다. 남궁청운의 독보행(獨步行)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마침내 무림의 양대산맥인 무당파와 소림사까지 방문하여 비무를 벌였다. 그 결과는 더욱 무림계를 진동시키고 말았다. 무당이 자랑하는 오행검진(五行劍陣)은 물론, 소림사의 십팔나한진(十八羅漢陣)이 그에게 변명의 여지없이 파해되면서 무당과 소림사의 명예가 땅바닥으로 추락하고 만 것이었다. 다만 소림, 무당의 공동전인인 혜왕은 마침 천축으로 수행 중이라 같은 용봉칠영에 속해 있는 남궁청운과의 비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소림, 무당 양대문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수백 년을 내려오며 무림의 양대지주로 불려온 그들의 명예가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었다. 이제 태자당이 가는 곳은 강호인들이 구름처럼 몰리게 되었다. 그들 이십여 명의 청년고수들은 난세(亂世)를 평정할 영웅으로 지칭되었으며, 향후 무림의 태양과 같은 존재로 숭앙받게 되었다. 강서성(江西省) 길안(吉安). 두두두두! 자욱한 황진(黃塵)을 날리며 이십여 필의 준마들이 질풍처럼 달리고 있다. 마상에는 선남선녀들이 차가운 겨울바람은 아랑곳없이 오만한 표정으로 채찍을 이따금 휘두르며 관도를 질주하고 있었다. 얼마나 갔을까? 선두의 청년이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그러자 이십여 기의 인마는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멈추었다. "하하! 이제 귀찮은 자들을 어느 정도 떼놓았으니 천천히 가도록 합시다." 낭랑한 웃음을 터뜨린 자는 가슴에 용문양을 새긴 백포를 걸친 준수한 용모의 청년무사였다. 남궁청운. 바로 태자당의 당주이자 풍운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정광이 번쩍이는 눈으로 이십여 명의 인중용봉(人中龍鳳)들을 둘러 보았다. 그들은 모두 태자당 소속의 영재(英材)들로 그를 따르고 있었다. 남궁청운은 훌쩍 말에서 뛰어내렸다. 좌측으로 접어드는 길은 산로(山路)로 위로 오르면서 험준한 산세로 향하고 있었다. "이곳부터는 말을 두고 올라가도록 합시다. 아마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오." 이때 누군가의 굵직한 음성이 들렸다. "남궁당주, 꼭 이렇게까지 해야 되겠소?" 말을 한 청년은 강직한 인상의 흑삼청년이었다.


그는 역시 용봉칠영 중 한 명으로 철검장의 소가주인 비천검(飛天劍) 철무영(鐵無影)이었다. 그는 무림군왕성의 회합에서 검존 철자성이 태자당에 입당시키기를 꺼려했던 바 있던 인물이었다. 결국 대세에 몰려 태자당에 입당하긴 했으나 다른 청년들과 달리 태자당의 집단행동에 회의적인 인물이었다. 남궁청운은 짙은 검미를 찌푸리며 말했다. "철형, 왜 또 그러시오? 혈영자(血影子) 능사익(凌査益)은 과거 악명을 날렸던 일대마두였소. 비록 지금은 산중에 은거했다고는 하나 악인이 어디로 가겠소? 차제에 후환을 없애기 위해 제거하는 것은 무림평화를 책임져야 할 우리 태자당의 당연한 의무가 아니겠소?" 실로 청산유수와도 같은 달변이었다. 철무영은 뭐라 반박하려 했으나 이때 한 청년무사가 재빨리 동조하고 나섰다. "당주님의 말씀이 옳소이다. 한 번 악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자가 개과천선 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남궁청운의 비위를 맞추듯 나선 청년은 유일하게 태자당에 속하지 않은 자였다. 그는 남궁청운의 종복으로 줄곧 그를 그림자처럼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잠혼도객(潛魂屠客)이란 별호를 지니고 있었다. 이름은 종리무(鍾里戊). 밀납처럼 창백한 안색과 가늘게 번뜩이는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한 느낌이 들게 했다. 그는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남궁세가에 들어와 종복이 되었으나 일반 하인과는 격이 틀렸다. 무예에 남다른 재능이 있어 어릴 적부터 총관 소손방에 의해 추천되어 특별히 무예를 전수받고 남궁청운의 호위무사가 된 인물이었다. 그는 남궁청운의 곁에서 일정한 거리를 뗀 적이 없었다. 마치 그림자인 양 줄곧 주변을 맴돌았다. 한편 남궁청운의 곁을 맴도는 인물이 또 한 명 있었다. 그것은 화산옥검(華山玉劍) 연채령(燕彩玲)이었다. 그녀는 화산 장문인이자 모친의 추천으로 태자당에 가입한 이후로 지난 수 개월 동안 한시도 남궁청운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올해 나이 십팔 세인 그녀는 유난히 붉은 입술과 큰 눈을 지닌 미소녀였다. 그녀는 코웃음치며 남궁청운의 편을 들었다. "흥! 맞아요. 능사익은 지난 날 태화천에 패퇴한 후 수하들을 해산한 후 금분세수(金盆洗手:강호인이 은퇴하기 위해 하는 의식)하고 지금까지 은거하고 있다지만 누가 알아요? 몰래 마공(魔功)이라도 은밀히 연공하고 있을지? 이 기회에 처단하는 것이 옳다고 봐요." 연채령은 생글거리며 남궁청운을 쳐다봤다. 그녀의 표정은 정랑(情郞)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전형적으로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이었다. 남궁청운은 그녀에게 일별도 하지 않고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정히 철형이 마음 내키지 않는다면 여기서 소연과 함께 말들에게 풀이나 먹이며 기다리고 계시오. 얼마 걸리진 않을 거요." 그러자 샐쭉 토라진 듯한 소녀의 코웃음소리가 들렸다. "흥! 내가 왜 철공자와 함께 남아야 해요? 수선 언니라면 또 모를까?" 그녀는 다름 아닌 중원쌍미(中原雙美)의 한 명인 천향옥녀(天香玉女) 남궁소연(南宮小蓮)이었다. 그녀는 남궁청운의 누이동생으로 빼어난 미색과 출중한 무예로 용봉칠영의 반열에 당당히 끼어있는 기녀였다. 특히 그녀의 미색은 무림 청년들의 선망이 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용모와 도발적일 정도로 늘씬한 몸매는 가히 만개한 장미의 화사함을 능가하여 뭇 청년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중원쌍미 중의 또 한 여인인 황보세가의 벽월선자(碧月仙子) 황보수선(黃甫水仙)은 안색이 붉어지며 황급히 말했다. "연매! 무슨 실없는 소리를.... 철소협, 일단 함께 올라가 혈영자가 어떻게 지내는가 확인해 보는 게


어떻겠어요?" 그녀는 남궁소연보다 세 살이 많았다. 따라서 그녀의 자태는 부드러우면서도 우아했다. 뿐만 아니라 매사에 톡톡 튀는 남궁소연에 비해 기품이 있어 보였다. 그녀 역시 용봉칠영에 속할 정도로 무예 또한 비범했다. 철무영의 얼굴도 붉어졌다. "예, 황보소저의 뜻이 그렇다면......." 그는 사뭇 당황한 모양이었다. 남궁청운은 그런 두 사람을 야릇한 눈으로 바라보다 결론을 내렸다. "그럼 다 함께 올라갑시다."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어깨도 흔들지 않은 채 허리만을 꺾어 신형을 날렸다. 휙! 한순간 그는 일학충천(一鶴沖天)의 신법으로 훌훌 날아올랐다. 놀랍게도 한 번 솟구침에 십여 장을 날아 산중턱을 향해 섬광처럼 사라졌다. 가히 절륜한 경공술이었다. ② 낙산(落山) 홍엽곡(紅葉谷). 인적이 드문 계곡 안에 허름한 모옥(茅屋) 한 채가 쓸쓸히 자리잡고 있다. 슥슥! 비질을 하는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모옥 앞마당에 쌓인 눈을 열심히 치우고 있는 중이었다. 나이는 십칠팔쯤 되어 보였다. 다소 까무잡잡한 피부이긴 했으나 깜찍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미끄러지지나 않을까 하여 마당을 깨끗이 쓸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 문득 소녀는 비질을 멈추었다.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진 것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알기로 지난 십여 년 동안 홍엽곡을 방문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야 말로 적막한 곳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도 아니고 이십여 명이나 되는 남녀들이 한꺼번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들은 태자당의 청년고수들이었다. "누구... 세요?" 소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비단옷을 입은 청년이 앞으로 나서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도리어 물었다. "이곳에 혈영자 능사익이 살고 있지 않소? 낭자는 능사익과 어떤 관계요? 그리고 낭자의 이름은 어찌 되시오?" 그는 호리호리한 체구의 옥선공자(玉扇公子) 호사붕(胡司朋) 이었다. 중원제일의 거상 만금대인 호금수의 장자로 늘상 사치스런 생활에 젖어있는 위인이었다. 특히 그는 여인에 관심이 많은 위인으로 아름다운 여인만 보면 추파를 던지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었다. "소녀는... 능파(凌波)라고 해요." "호! 그럼 능사익의 딸인가?" 이번에 나선 자는 중원 북동지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철기문(鐵騎門)의 소문주 철갑신장(鐵甲神將) 장건웅(張健雄)이었다. 우람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의복 대신 청동갑주과 투구를 쓰고 손에는 여덟 자 길이의 장창(長槍)을 든 위인이었다. 그는 성격이 화급하고 직선적이었다. 소녀 능파는 겁에 질려 더듬거렸다.


"그분은... 소녀의 조부님이에요. 그런데 어찌하여......?" 이때 음침한 인상의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종리무였다. "네년이 마두의 핏줄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슈욱! 바람을 가르는 경풍소리와 함께 그의 허리춤에서 검이 뻗어나갔다. 발검에서 운검까지 군더더기라곤 전혀 없는 매끄러운 공격이었다. 그의 검은 끝부분에 두 개의 뾰족한 갈고리가 달려있는 오구검(吳鉤劍)이었다. 능파는 크게 놀랐으나 즉시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허리를 젖히며 두 발을 교차시켜 물흐르듯 유연하게 공격권을 벗어났다. "혈영보(血影步)!" 종리무는 놀라 중얼거렸다. 능파의 보법이야말로 지난 날 강호를 누볐던 혈영자의 독문절기였던 것이다. 능파는 뒤로 물러선 뒤 허리에 손을 얹고 쌀쌀하게 말했다. "왜 살수를 쓰는 거죠? 난 당신들과 일면식도 없고 할아버지 또한 십 년 넘게 홍엽곡을 벗어난 적이 없어요. 대체 우리 조손에게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러는 건가요?" "제법이구나! 그렇다면 화룡팔장(火龍八掌)을 받아봐라!" 종리무를 젓히고 신형을 날린 자는 강호의 신흥세력 중 하나인 구룡방(九龍幇)의 열화권(烈火拳) 마휘(馬輝)였다. 그동안 그는 태자당의 절세기재들에게 눌려 자신의 절학을 제대로 발휘해 보지 못하던 차에 이번 기회에 위세를 떨쳐보려 작정한 것이었다. 위이잉! 장과 권이 위맹한 경기를 뿜으며 사위를 뒤덮었다. 능파는 안색이 변했다. 그녀는 빗자루를 팽개친 후 작은 손바닥을 교차시키며 맞섰다. 그녀의 손바닥은 붉은 꽃잎처럼 분분히 허공을 누볐다. 퍼펑!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은 각각 뒤로 밀려나갔다. "억!" 비명을 지른 것은 마휘였다. 그는 비틀거리다 중심을 잃으며 눈바닥에 고꾸라졌다. 그의 입과 코로는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한편 능파는 모옥의 벽까지 밀려난 채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그녀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이 한 번의 격돌로 우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놀랍게도 차기 구룡방주로 내정된 마휘가 일개 무명소녀에게 밀린 것이다. 남궁소연이 놀라운 듯 종알거렸다. "오라버니, 방금 저 소녀의 손바닥에서 발출된 붉은 빛은 적혈강(赤血 )이 아닌가요?" 남궁청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서히 앞으로 걸어나오며 입을 열었다. "낭자, 어린 나이에 이미 조부의 무예를 십성 성취한 듯하구려. 더구나 여인의 몸으로는 연성하기 어렵다는 적혈강마저 익혔으니 본 공자에게도 한수 가르침을 부탁하오." 남궁청운은 명가의 후예답게 정중히 공수의 예를 표했다. 능파의 안색이 변했다. '이... 이 사람은 정말 무서운 고수구나.'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의 영준한 청년이야말로 방금 전 상대한 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수였다. "낭자께서 선공하시오."


남궁청운은 여유있는 자세로 그녀의 앞에 서며 부드럽게 말했다. 능파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기회를 놓치면 끝이야. 그렇다면.......' 스스스! 능파의 몸이 움직였다. 교족이 엇갈리는 순간 태자당의 청춘남녀들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신형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과연 일대를 풍미한 신법은 다르군." 뒷짐을 진 채 여유있는 태도를 보이던 남궁청운의 입에서 감탄인지 조���인지 모를 말이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희뿌연 그림자가 남궁청운을 향해 다가들며 붉은 광채를 쏘아냈다. 그 빛은 남궁청운의 현기혈(玄機穴)과 신정혈(神庭穴)로 동시에 뻗어나갔다. 능파는 확신했다. '흥! 여유가 지나쳐 오만이 된 것이 너의 패인이다.' 그러나 능파의 판단은 너무 빨랐다. 남궁청운을 향해 뻗었던 적혈강기가 갑자기 맥없이 흐트러져 버린 것이다.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때 그녀의 가슴을 향해 남궁청운의 손이 뻗어왔다. 그 손은 매우 느리게 뻗어왔다. 능파는 충분히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몸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있을 뿐 온몸이 마비되어 버린 것이다. 퍽! 능파는 가슴이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실 끊긴 연처럼 붕 떠 날아갔다. 그녀는 삼 장 밖의 바닥에 무참하게 떨어졌다. 그녀의 가슴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남궁청운은 포권하며 말했다. "미안하게 됐소이다. 낭자의 무예가 워낙 고강하여 본인도 전력을 기울이다 보니 도중에 멈출 수가 없었소. 만일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면 잠시 여유를 줄 테니 다시 한 번 도전해 보시오." 말은 그럴 듯했다. 정중한 태도와 부드러운 음성 모두가 명가의 후손으로 손색이 없는 행동이었다. "남궁당주! 이제 그만하세요." 벽월선자 황보수선이 다소 노기 어린 음성으로 제지하며 나섰다. "아무 죄도 없는 여인이에요. 죄가 있다면 오직 옛 마두의 혈육이라는 것 뿐인데 너무 심하지 않은가요?" 황보수선은 수려한 아미를 찌푸리며 능파를 향해 다가갔다. 그때였다. 슈슈슉! 그녀보다 한 발 앞서 종리무가 신형을 날렸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능파를 향해 잔혹한 살검을 전개했다. '아!' 능파는 눈을 감아버렸다. 너무도 짧은 인생.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멈추시오!" 갑자기 굵직한 호통과 함께 한 자루의 검이 날아왔다. 쩡! 귀청을 찢는 금속음과 함께 종리무의 검은 방향이 비틀어졌다. 오구검은 능파의 왼쪽 뺨을 스치면서 지나가 버렸다. 그 바람에 그녀의 뺨에 길게 검흔(劍痕)이 새겨지며 선혈이 튀었다. "누구냐!" 종리무는 살기어린 눈으로 홱 돌아섰다. 그의 앞에 철무영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이미 중상을 입고 저항할 힘이 없는 소녀에게 무슨 악독한 짓이오?"


"뭐라고? 당신이 뭔데......." 종리무가 불끈하는데 남궁청운이 두 사람 사이로 끼여들었다. "철형, 진정하시오. 종리무는 사마외도의 무리들에게 깊은 원한을 갖고 있소. 그래서 다소 흥분한 것 뿐이오. 이해하시구려." 그는 종리무를 향해 돌아서며 명을 내렸다. "종리무. 너는 집안을 뒤져봐라." "예, 소주." 종리무는 깍듯이 남궁청운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철무영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그는 홱 몸을 돌려 모옥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콜록! 콜록! 무슨 일이냐, 파아(波兒)야?" 문득 기침소리와 함께 한 노인이 모옥을 향해 다가왔다. 그는 산길로부터 땔감을 지게에 가득 실은 채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었다. "이... 이런! 파아야!" 노인은 놀라 부르짖으며 지게를 던지고 달려왔다. 그는 마당 안에 있는 불청객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능파를 부축했다. "운공해라, 얘야." 그는 능파를 똑바로 앉게 한 후 등뒤에 손바닥을 갖다 붙였다. 연후 그는 내공으로 그녀의 상세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연채령이 노인을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이 혹 혈영자인가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한때 그런 이름으로 불린 적이 있었소." 노인의 대답에 태자당의 인물들은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과거 혈영자는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마두 중의 마두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모습은 평범한 산촌의 나뭇꾼 노인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에게서는 예전의 흉폭한 모습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볼 수가 없었다. 철무영이 앞으로 나서며 깊숙이 포권했다. "능선배님, 후배는 철검장 출신으로 철무영이라 합니다. 우연히 길안을 지나던 중 이곳에 은거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들리게 되었습니다." 뒤따라 황보수선도 나붓이 세류요를 굽히며 말했다. "소녀는 황보가의 수선이에요. 잠시 사소한 오해가 있었답니다. 그래서 그만 능소저에게 해를 끼쳤어요. 뭐라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혈영자 능사익은 손녀를 모옥의 벽에 기대어 앉힌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두 남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검존과 신주수사가 자식 농사는 잘 지었군. 그래, 영존들께서도 무고하시오?" "예, 덕택에 평안하시옵니다." 두 남녀는 깍듯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장내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해 졌다. 그러나 그것은 곧 깨어지고 말았다. 남궁청운이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능선배, 어찌하여 이런 험곡에서 십여 년씩이나 두문불출하고 계시오? 또한 저 낭자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절정마공을 연성했으니 그 의도가 무엇이오?" 능사익의 흰 눈썹이 꿈틀했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여전히 부드럽기만 했다. "자네는 누구신가?" 연채령이 끼어들었다.


"이분은 무림군왕성의 소성주시며, 태자당의 당주이신 칠절신군 남궁청운 대협이세요." 턱을 한껏 치켜든 연채령은 자랑스러운 듯 설명했다. 능사익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호라! 그러고 보니 용비신군의 보물이로군. 약관의 나이에 이런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으니 용비신군께 경하드릴 일이로군." 이때 모옥 안에서 걸어나온 종리무가 대뜸 앞으로 나오면서 호통을 발했다. "늙은이! 쓸데없는 너스레는 그만 떨고 당주님의 질문에 답변이나 해라! 대체 이곳에서 무슨 수작을 꾸미고 있는 거냐?" 능사익이 그를 바라보며 담담히 물었다. "자네는 또 누구신가?" 종리무의 눈에서 살기가 뻗어나왔다. "흥! 아마도 관(棺)을 봐야만 눈물을 흘릴 모양이구나." 번뜩! 종리무의 검이 뻗어나갔다. 언제 발검했는지 모를 정도로 빠른 쾌검이었다. 탁! 종리무의 검은 허공에 정지되었다. 능사익의 손에는 나뭇가지가 쥐어져 있었다. 나뭇가지로 검을 막아낸 것이었다. 그로 미루어 그의 내공이 얼마나 정순한지를 알 수 있었다. "허허, 살기가 넘치는 검법이로군. 만일 자네가 전력을 기울인다면 노부는 감당해 내지 못할 것 같군." 능사익은 사람 좋게 웃었다. 그러나 사실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눈앞의 안색이 창백한 젊은이는 그저 팔푼 정도의 내력을 사용했다. 그런데도 그는 큰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제법이다, 늙은이! 다시 한 번 받아봐라." 종리무가 재차 검을 뻗으려는 순간, "물러서라." 남궁청운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소생이 능선배에게 한 수 배움을 청하고자 하오." 철무영과 황보수선은 아미를 찌푸렸다. 두 사람은 능사익이 비록 과거에는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마두였으나 지금의 모습으로 미루어 개과천선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남궁청운의 하는 양은 지나친 감이 있었다. 남궁청운이 장삼을 벗었다. 연채령이 즉시 두 손을 내밀어 장삼을 받았다. 그것은 영락없이 지아비를 대하는 여인의 태도였다. "고맙소, 연낭자." 남궁청운은 사의를 표한 후 능사익을 향해 돌아섰다. 그의 눈에서 정광이 번쩍 일어났다. 능사익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마음을 굳힌 듯했다. '어차피 피할 수 없겠구나. 태화천이 사라진 후 언제고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그는 고개를 돌려 손녀를 쳐다보았다. 능파는 고통을 참는 듯 입술을 악물고 있었다. 능사익은 청년들을 둘러보았다. 태자당의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기재들이었다. 그는 철무영과 황보수선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남녀는 고개를 약간 숙여 보였다. 능사익의 입술이 보일 듯 말 듯 달싹였다. 전음입밀을 시전한 것이다. (이 늙은이의 마지막 당부요. 내 손녀 아이를 부탁하오. 태어나서 한 번도 타인을 해친 적도, 그럴 기회도 없이 외롭게 살아온 아이요. 초면에 과한 부탁이긴 하지만 들어주기 바라오.) 능사익은 불행을 예감한 것 같았다. 철무영과 황보수선은 안색이 변한 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심전심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받으시오, 선배!"


남궁청운의 우렁찬 외침이 들렸다. 우우웅! 그는 이미 공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듯 쌍장을 떨치자 강기로 뭉쳐진 듯한 두 개의 강환( 環)이 무서운 기세로 쏘아나갔다. "음!" 능사익은 신음을 발하며 즉각 전력을 다해 적혈강을 전개했다. 사실 그는 은퇴한 이후로 이렇다하게 무공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 체력이 크게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정면승부보다는 풍부한 실전경험을 활용하여 대응하는 것이 유리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콰쾅! 두 사람의 장력은 정면으로 격돌했다.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참혹한 비명이 터졌다. "으악!" 능사익의 복부에 강환이 적중되며 구멍이 뻥 뚫렸다. 그는 뒤로 날아가 모옥의 벽을 부수며 떨어졌다. 남궁청운은 그저 뒤로 두 걸음 밀려나갔을 뿐이었다. "악! 할아버지!" 능파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그러나 그녀가 능사익을 안았을 때, 능사익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복부에 뚫린 구멍으로는 시커멓게 탄 내장토막이 흘러나와 있었다. "할아버지......!" 능파의 절규가 홍엽곡에 메아리를 일으켰다. 철무영은 치를 떨었다. 그는 남궁청운을 노려보며 한탄하듯 말했다. "정말 잔인하구려, 남궁당주." 황보수선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능사익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철무영은 고개를 저으며 추궁했다. "당주, 이 노선배는 오래 전부터 무림과 인연을 끊고 손녀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었소. 그런데 어찌 이토록 잔혹한 살수를 쓴단 말이오?" 남궁청운의 검미가 치켜올라갔다. "철형, 나역시 괴로운 건 마찬가지요. 하지만 능사익의 손녀가 펼치는 무공을 못 보았소? 장차 그녀가 강호에 나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소? 매사에는 안전이 제일이오. 모두가 무림의 평화를 위한 조치니 더 이상 날 추궁하지 마시오." 철무영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때 마휘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남궁당주의 말이 백 번 옳소! 아예 이 참에 저 작은 마녀의 숨통까지 끊어놓는 것이 후환을 제거하는 일이오." 마휘는 능파에게 당한 것이 못내 분한 듯 흥분하고 있었다. 이때 종리무가 능파를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소주님, 뒷처리는 소인이 하겠습니다." "안돼요!" 느닷없이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황보수선이 교구를 날려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는 고운 아미를 치켜올리며 꾸짖듯 말했다. "이럴 수는 없어요! 당신들은 억지논리와 명분을 앞세워 마치 사냥을 즐기듯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어요. 더 이상은 안돼요! 당신들의 영웅놀음은 이것으로 끝나야 해요!" 종리무의 창백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아가씨, 비켜주시오."


"흥! 날 쓰러뜨리기 전에는 아무도 이 소녀의 옷자락 하나 건드릴 수 없을 거예요!" 능파의 앞을 막아선 황보수선의 결연한 모습에서는 평소의 온화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종리무의 가느다란 눈에서 반짝 살기가 일어났다. 그는 수중의 검으로 그녀의 가슴을 겨누었다. 두 개의 뾰족한 갈고리는 약간만 뻗으면 피를 볼 것 같았다. "마지막 경고요. 비키시오, 낭자." 이때였다. "무엄하다, 종리무! 감히 누구에게 검을 겨누느냐? 어서 황보소저께 사죄하고 물러나 있거라!" 남궁청운이었다. 그는 안색을 무겁게 굳히며 꾸짖었다. 종리무는 즉시 검을 내리며 허리를 숙였다. "아가씨, 소인이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깍듯이 사죄하며 물러서는 종리무의 행동에 중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주인과 종복의 사이라지만 그들은 누누히 종리무의 무공이 태자당 소속의 청년고수들에 못지않다는 것을 보아왔었다. 그런데 남궁청운의 한마디에 이토록 절대복종하고 있으니 은연중 기가 죽는 느낌이었다. 남궁청운은 황보수선에게 다가서며 부드럽게 말했다. "황보소저, 수하의 불찰을 용서해 주시오. 소저의 뜻대로 저 여인은 그대로 둘 테니 이만 마음을 푸시고 내려가도록 합시다." 그러나 황보수선의 반응은 냉랭했다. "먼저 가세요. 소녀는 능선배를 양지 바른 곳에 묻어 드려야 겠어요. 또 저 소녀의 상처도 돌봐야겠어요." 철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옳은 말이오. 그럼 무덤은 내가 만들테니 소저는 그 소녀를 치료해 주시오." "......!" 남궁청운의 영준한 얼굴에 찰나적으로 얼음장 같은 한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돌아서는 황보수선의 우아한 자태를 바라보다 남모르게 한숨을 뱉었다. "좋소. 그럼 먼저 갈 테니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시오." 남궁청운은 일행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그가 신형을 날리자 태자당의 청년들은 일제히 뒤따라 자리를 떴다. 그들이 사라진 직후, 능파의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가 모옥을 흔들었다. "다 죽여버릴 거야...! 군자라고 자처하는 모든 인간들을... 흐흑... 모두 처참하게.... 죽여버릴 거야!" 소녀의 한맺힌 외침은 홍엽곡을 물들이는 석양빛에 침잠해 들어가고 있었다. ③ 출렁출렁....... 술통은 파도에 흔들리며 어디론가 쉬임없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술통 속에 갇힌 두 남녀는 한정된 공간 속에 엉켜 있었다. 장성한 청년과 성숙한 여인이 함께 들어있기에 그곳은 너무도 비좁았다. 만일 사사도를 탈출하기 위한 묘안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이런 식으로 술통 속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사영은 괴롭기 그지없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조탁의 커다란 장삼은 이리저리 술통이 움직이는 바람에 벌써 벗겨져 바닥에 깔려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알몸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전신이 온통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비좁은 술통에는 죽지 않을 정도 만큼의 공기가 통할 뿐, 사방이 막혀 있었던 것이다. 살인적인 더위였다. 온몸이 땀으로 미끈거렸고 숨이 턱턱 막혀왔다. 사사영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와류의 무서움을 경험했으므로 조만간 닥쳐올 재난에 대처해야만 했다.


그녀는 힘겹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백육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비좁고 어두운 공간 속에서 건장한 사내의 옷을 벗기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한참을 땀을 흘린 끝에야 겨우 그의 옷을 벗길 수가 있었다. 백육호도 겉옷만 입고 있었으므로 알몸이 되고 말았다. 성숙한 남녀가 좁은 통 속에 들어있으니 몸이 밀착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땀으로 미끈거리는 바람에 두 사람의 몸은 이리저리 부딪치며 엉기고 있었다. 사사영은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벗겨낸 두 사람의 의복을 길게 찢어냈다. 먼저 한 조각으로 자신의 중요한 부분을 가린 후 백육호의 하체에도 적당히 천으로 가려주었다. 연후 천조각을 길게 연결시켰다. 그것으로 서로의 몸을 단단히 묶었다. 앞으로 닥칠 와류의 소용돌이를 견뎌내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였다. 술통 속에서 서로 몸을 묶고 고정시키지 않으면 와류 속에서 퉁겨져 나가거나 다칠 염려가 있었던 것이다. 사사영은 숨이 턱에 찼다. 그녀는 순결한 처녀였다. 처녀의 몸으로 아무리 의식을 잃고 있다지만 건장한 사내와 몸을 맞대고 있으니 죽고만 싶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술통의 구조상 두 사람의 자세는 해괴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백육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 광경은 영락없이 남녀지간의 이상한 체위(體位)에 다름 아니었다. 그녀는 이런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다리로 백육호의 허리를 바짝 조이고 있었다. 만일 자세가 바뀌면 중심이 이동하여 술통이 옆으로 쓰러지기 때문이었다. 동사군도의 절벽에서 최초로 떨어졌을 때, 술통은 옆으로 넘어진 채 오랜 시간을 떠 있었다. 그때 그녀는 혹독한 시련(?)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었다. 비좁은 공간에서 백육호의 몸을 깔고 엎드린 채 꼼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얼굴과 얼굴이, 가슴과 가슴이, 복부와 복부가 맞닿은 채 술통을 바로 세울 때까지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간신히 술통을 바로 세운 후에는 줄곧 이런 자세를 유지해 온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해도 순결한 소녀의 입장에서 이런 자세는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파도에 술통이 떠올랐다 가라앉을 때마다 백육호의 하체 중심부와 자신의 은밀한 부위가 밀착될 뿐아니라 마찰하기까지 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키다가 머리를 부딪치곤 했었다. 이런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자 마침내 그녀는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쏴아아! 은은히 파도소리가 들렸다. 파도가 점차 거칠어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사사영은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드디어 그 무서운 와류에 접근해 가는 것 같았다. 그녀의 가슴은 점차 뛰기 시작했다. 이미 와류의 무서움을 충분히 겪었기에 더욱 겁이 났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백육호를 껴안았다. 비록 의식이 없다고 하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녀에게 이상한 용기를 주고 있었다. 술통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결국... 와류에 들어왔구나!' 사사영은 더욱 강하게 백육호의 몸을 끌어안았다. 땀으로 미끈거리는 몸이 밀착되었다. 의복을 찢어낸 끈으로 서로의 몸을 단단히 묶어놓긴 했으나 안심이 되지가 않았다. 쿠콰콰콰.......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술통도 심하게 요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였다. 아니, 악마의 호곡성과도 같았다. 사사영은 눈을 질끈 감은 채 혼신의 힘을 다해 백육호를 껴안았다. 술통이 무섭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무엇엔가 부딪치며 술통은 아래 위로, 좌우로, 때로는 빠른 속도로 솟아 올랐다가 무섭게 하강하기도 했다. '아아! 신이시여!' 사사영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절규했다. 굉음은 고막을 터뜨릴 듯 점점 더 커졌다. 쾅! 하는 음향과 함께 술통에 무서운 충격이 가해졌다. 그 바람에 백육호의 몸이 앞으로 꺾이며 사사영에게 덮쳐왔다. 사사영은 얼른 그를 껴안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술통은 중심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산발적으로 요동치던 통이 빙그르 회전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뒤집혀지고 말았다. "악!" 사사영은 비명을 질렀다. 머리가 강하게 부딪친 것이다. 그러나 아픔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통은 뒤집힌 채로 무섭게 진동하는 것이었다. 사사영은 죽어라 백육호의 목을 양손으로 껴안은 채 다리로는 그의 허리를 힘주어 감았다. 그녀는 백육호의 몸을 타고 앉은 채 혼신의 힘으로 고통의 순간을 견뎌나갔다. 통이 산발적으로 요동하는 바람에 그녀의 몸은 이리저리 부딪치며 수없이 멍이 들고 말았다. 너무나 고통스런 나머지 그녀는 포기하고 싶기만 했다. 그러나 그럴 순 없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설사 머리가 깨어지고 눈알이 빠지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살아야만 했다. 살아야만! 살아야만 해! 쿠르르릉! 파도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엄청난 굉음이 고막을 두드렸다. 사사영과 백육호는 한 덩어리가 된 채 수없이 곤두박질치면서 견뎌내야만 했다. 사사영은 어느 순간부터 백육호가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그는 이미 일각쯤 전부터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러나 의식은 완전히 돌아오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분명 조탁의 목을 꿰뚫은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러나 그 후로는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더구나 이곳은 왜 이리 덥고 답답하단 말인가? 게다가 칠흑같이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점차 전신의 감각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 이상한 일이었다. 누군가가 그를 꼭 껴안고 있는 것 같았다. 더구나 그 물체는 미끈거릴 뿐아니라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입술을 핥아 보았다. 짭짜름한 맛이 느껴졌다. 그것은 땀이었다. 한 번 돌아온 감각은 점점 더 되살아나서 이제 코로는 냄새까지 맡을 수 있었다. 이제껏 한 번도 맡은 적이 없는 체취가 코로 기분좋게 들어왔다. 또한 귀로는 쉴새없이 굉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악!" 문득 가냘픈 소녀의 비명이 들렸다. 처음에는 멀리서 들린 듯했으나 곧바로 코앞에서 들려온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 부드럽고 물컹한 여인의 피부가 만져졌다. 그는 눈을 크게 떴다. 비록 캄캄하긴 하지만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의 앞에는 사사영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목을 꽉 껴안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코앞에는 소녀의 유방이 있었다. 앵두알처럼 작은 유실도 분명히 보였다. 그는 방금 전의 비명이 사사영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그는 이제 완전히 현실로 돌아왔다. 경천동지할 굉음과 함께 온몸이 붕 떴다가 가라앉았고, 다시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는 바람에 정신이 아찔아찔했다. '술통!' 그는 내심 부르짖었다. 비로소 모든 것을 확연히 깨달았다. 그는 육노인이 만든 술통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비좁았던 것이다. 동시에 그는 사사영과 그가 술통 속에 든 채 사사도를 맴돌고 있는 죽음의 와류 속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사영이었다. 어째서 그녀는 발가벗은 채 그를 껴안고 있는 것일까! 사사영은 결코 음란한 여인이 아니다. 그녀는 청순한 소녀였다. 그런데 이런 모습으로 그의 무릎에 앉아 있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앞으로 엎어졌다. 그 바람에 얼굴을 사사영의 유방 사이에 박고 말았다. "아앗!" 사사영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를 떠밀기는커녕 더욱 손에 힘을 주어 머리를 껴안는 것이 아닌가? 백육호는 숨이 콱 막혔다. 그는 사사영의 부드러운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문득 육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낄낄대며 웃음짓는 익살스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육노야! 어쩌면 그 노인이 장난을 쳤는지도 모른다!' 엉뚱한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청순하기 그지없는 사사영이 어째서 이런 도발적인 자세로 그를 껴안고 있는지 설명이 되지가 않았다. '맞아! 그 노인이 우리를 이 좁은 통 속에 넣으면서 몽혼약 따위로 장난을 친 게 틀림없다. 아마도 그 약성분은 춘약과 같은 것일지도.......' 육노인은 두 사람이 천생연분이라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을 맺어주기 위해 그런 일을 할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백육호는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미끈거리는 여체가 찰싹 휘감긴 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으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이 그의 단전으로부터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뿔사! 그 영감이 내게도 약을 먹였구나.' 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한 번 피어오른 열기는 좀처럼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단전 아래 불덩이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다급해졌다. "소저......." 그는 사사영을 불렀다. 사사영은 그의 말을 못들은 듯 대답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 작은 음성으로 불렀던 것이다. 더구나 쉴새없이 굉음이 울리고 있었으므로 그의 작은 음성은 아예 들리지도 않았다. 백육호는 더욱 참기가 힘들어졌다. 술통이 요동할 때마다 무릎 위에 걸터앉은 사사영의 매끄러운 둔부가 허벅지를 마찰하면서 야릇한 충동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건강한 청년이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술통이 뒤로 기우는 순간 그는 손으로 사사영의 탄력있는 둔부를 움켜잡았다. 또 한손으로는 그녀의 젖가슴을 잡았다. 손바닥 가득히 전해지는 뜨거운 감촉은 말할 수 없는 쾌감이 되어 그의 혈관을 부풀어 오르게 했다.


백육호는 이미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의 남성은 무섭게 발기되어 사사영의 둔부를 찔러대고 있었다. 사사영은 여전히 그를 꼭 껴안은 채 더운 입김을 그의 귓전에 토해내고 있었다. '사사영도 날 원하고 있어!' 백육호는 지레짐작했다. 이제 더 이상 꺼리낄 것이 없었다. 그는 눈앞에 흔들리고 있는 소녀의 젖가슴을 덥석 물었다. 달콤한 과즙이 입안 가득 밀려드는 것 같았다. 그는 본격적으로 사사영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마주 껴안고 있는 자세가 조금만 손을 움직여도 서로의 신체를 구석구석 애무할 수가 있었다. 한편, 사사영은 점차 의식이 몽롱해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지칠 대로 지쳐 거의 실신지경이었다. 만일 살아야겠다는 의지만 없었다면 벌써 혼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또한 백육호의 목숨도 그녀에게 달려있다는 생각이 지금까지 그녀를 지탱해온 것이었다. 진저리쳐지는 굉음과 와류의 요동! 숨이 막힐 정도의 살인적인 더위! 폐쇄된 공간이 주는 막막한 공포....... 아직까지 혼절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따라서 그녀는 백육호가 벌써 깨어났으며 그녀의 젖가슴을 빨고 온몸을 어루만지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백육호는 체력을 거의 회복하고 있었다. 그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육노인이 먹인 탕약으로 인해 이미 기해혈의 금제가 풀렸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공력 또한 상상할 수 없이 증진되어 있었다. 지금 그의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져 있었다. 그의 숨결이 풀무질하듯 거칠어져 있었다. 그는 뜨거운 입김을 뿜으며 사사영의 입술을 찾았다. 코앞에 그녀의 얼굴이 있었으므로 쉽게 입술을 맞출 수가 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까칠하게 말라 있었다. 하지만 감미로웠다. 다행히 그녀의 입술은 살짝 벌려 있어 그는 깊은 입맞춤을 할 수 있었다. '......!' 황홀했다. 비록 술통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으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소녀의 향긋한 체취와 달콤한 입맞춤이 모든 것을 잊게 만들었다. 그는 손을 움직여 유일하게 자신이 걸치고 있는 천조각을 뜯어냈다. 잠시 후 사사영이 걸치고 있는 작은 천조각도 벗겨냈다. 이제 두 사람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었다. 쿠쿵! 하는 소리와 함께 술통이 기울어졌다. 그는 사사영의 둔부를 바짝 당겨 안았다. 그러자 두 사람의 아랫배가 밀착되었다. 그의 무릎을 타고 앉아 허리에 발을 감고 있는 사사영은 여인의 소중한 문이 활짝 개방된 상태였다. 그야말로 방사를 치르는 자세가 된 것이다. 사사영은 꿈을 꾸고 있었다. 실로 해괴망칙한 꿈이었다. 어떤 사내가 그녀의 온몸을 더듬어대고 있었다. 사내의 손은 그녀의 둔부는 물론 가슴까지 거침없이 더듬을 뿐만 아니라 자꾸만 입맞춤을 해대었다. '안돼.......' 그녀는 거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내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그녀를 애무하고 있었다. 그녀의 젖가슴이 마구 주물러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소중한 곳까지 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아, 안돼!'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 그때였다. 그녀는 자신을 애무하고 있는 것이 백육호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럴 수가!'


그녀는 비로소 정신이 돌아왔다. "고... 공자님!" 순간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제껏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던 통증이 밀려들었다. 뜨겁고 단단한 그 무엇인가가 그녀의 은밀한 곳으로 파고들었던 것이다. 파과(破瓜)의 순간이었다. "악!" 사사영은 입술을 딱 벌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순간 술통이 무섭게 아래로 하강했다. 너무나 급속도로 하강하는 바람에 정신이 아득해져서 그만 자신도 모르게 백육호의 목을 강하게 껴안고 말았다. 제 8 장 의문의 살인(殺人) ① 봄비는 추적추적 내렸다. 봄비를 뚫고 백여 명의 혈포인(血袍人)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한 사람인 양 동작이 똑같았다. 어두운 밤, 그들은 한 웅장한 장원 앞에 당도했다. 기이한 것은 장원의 모습이었다. 담장과 기와, 대문에 이르기까지 온통 검은색이었다. 이런 특이한 장원이라면 중원천지를 뒤져도 오직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흑석보(黑石堡)였다. 흑석보는 어둠의 일부인 듯 희미한 불빛을 낼 뿐 적막에 감싸여 있었다. 불과 이십 년이란 짧은 연륜에도 불구하고 명문의 반열에 올라선 흑석보는 복건성(福建省) 성도인 복주(福州)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흑석보는 오래 전부터 군왕성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군왕성의 회합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독자적인 영역을 고집���고 있었다. 흑석보의 보주 대철추(大鐵椎) 여풍(呂楓)은 옛 태화천의 천주인 천룡대제 관일청 외에는 누구에게도 머리 숙이지 않겠노라 공언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자부심이 대단한 인물로 무공 또한 개세적이었다. 그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근력 외에 심후한 내공으로 인해 독문병기 철추로 무적의 길을 걷고 있었다. 특히 그가 전개하는 폭풍팔추식(暴風八椎式)은 아직까지 십초 이상을 견뎌낸 자가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무공이었다. "쳐라!" 혈포인들 가운데 한 명이 살기찬 명령을 내렸다. 슉슉슉! 혈포인들의 신형이 솟구쳤다. 그들은 일제히 담장을 뛰어넘었다. 마치 붉은 구름이 흑석보를 덮치는 것 같았다. 흑석보 안으로 뛰어든 괴인들은 이미 약조가 되어있는 듯 몇 개 조로 나뉘어져 삼삼오오 신속하게 흩어졌다. 잠시 후, 여기저기서 처절한 비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막아라! 적의 침입이다!"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밤의 정적을 산산이 깨뜨렸다. 곧이어 욕설과 기합소리,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 문이 박살나고 무엇인가 무너지는 소리 등이 아비규환의 수라장을 만들어 버렸다. 눈을 비비며 뛰쳐나오던 흑석보의 무사들은 제대로 칼질 한 번 하지 못한 채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평소 용맹을 떨치던 그들이었으나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혈포괴인들에게는 당할 수가 없었다. 혈포인들이 휘두르는 귀두도(鬼頭刀) 아래 속속 고혼(孤魂)이 되고 있었다. 혈포인들은 인정사정이 없었다. 그들은 남자든 여자든, 심지어는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까지 무참하게 학살했다.


순식간에 시체가 늘어나면서 흑석보는 피바다가 되고 말았다. "멈춰라!" 문득 내전(內殿)으로부터 분노에 찬 외침이 울렸다. 어찌나 우렁찬 음성이던지 대기가 부르르 진동할 정도였다. 내전에서 뛰쳐나오는 인물은 침의(寢衣) 차림이었는데 한손에 거대한 철추를 들고 만면에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거구의 인물이었다. 바로 흑석보주 대철추 여풍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혈포인들을 노려보며 노성을 질렀다. "이놈들, 네놈들은 누구기에 감히 본보에서 살생을 저지르는 것이냐!" 여풍의 턱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그의 주위로 혈포인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모여든 그들은 한마디 말도 없이 그를 겹겹이 포위했다. 질서정연한 모습에서는 인간성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혈포인들 가운데서 한 명의 깡마른 노인이 걸어나왔다. 그는 잔털 하나 없는 매끄러운 얼굴에 푸른 기운이 감도는 초로의 인물이었다. "구천마교(九天魔敎)에서 왔다." "구, 구천마교!" 주위에서 경악성이 울렸다. 흑석보의 살아남은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공포에 질린 채 몸을 후들후들 떨었다. 충격을 받은 것은 여풍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우람한 어깨가 움찔거린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구천마교는 오래 전부터 악의 근원으로 알려진 마도단체였다. 그들이 집마부를 형성한 것은 장구한 세월 이전이었다. 그들의 전신은 마교(魔敎)였다. 마교가 무너진 후 그 후예들이 세운 방회가 바로 구천마교였던 것이다. 그들은 파천황교와 태화천의 등장에 숨을 죽인 채 숨어 있다가 다시 마교의 부활을 외치며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여풍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본보는 구천마교와는 아무 원한이 없다. 그런데 뭣 때문에 이러는 것이냐?" 혈포인은 음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물론 흑석보와는 원한이 없지." "그렇다면......?" "흐흐! 교주님께서 복건성에 본교의 분타를 설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래서 적지를 찾던 중 흑석보가 마음에 들었다. 이유는 그 뿐이다." "뭣이? 이곳에 구천마교의 분타를 세우겠다고?" 여풍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는 가슴을 펴며 앞으로 나섰다. "크하하핫! 건방진 마졸들! 멋대로 지껄이는구나! 오냐, 정 그렇다면 가져가거라. 하지만 날 죽이기 전에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불 같은 성격의 여풍이었다. 그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신형을 날렸다. "쥐새끼 같은 놈, 일단 이 어르신의 철추 맛을 감상해 보아라." 위이이잉! 태산을 무너뜨릴 듯한 철추의 경풍이 장내를 휩쓸었다. "흐흐, 과연 대단하군." 혈포인은 그 자리에 선 채로 쌍장을 날렸다. 퍼― 엉! 요란한 폭음이 터져울리며 여풍의 육중한 체구가 비칠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여풍의 눈이 부릅떠졌다. "으으, 이제 보니 음산의 노마두가 구천마교의 개가 되어 돌아왔구나." 그렇다. 혈포인은 바로 지난 날의 음산일괴(陰山一怪) 염사장(閻司長)이었던 것이다. 그는 괴소를 흘렸다.


"크크, 제법이군. 한눈에 노부의 탈혼장(奪魂掌)을 알아보다니." 염사장의 외모는 오순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나 실제로는 이미 팔십이 넘은 전대의 노마두였다. 그는 십칠 년 전 음산 일대를 자신의 동생과 함께 휩쓸었다. 음산쌍괴가 바로 그들의 별호였다. 두 형제의 탈혼장은 당시 무적팔대마장(無敵八大魔掌) 중 하나로 지칭될 만큼 대단한 위력이 있었다. 아무도 그들의 악행을 제지하지 못하던 중 태화천의 사대천왕 가운데 한 명인 패도(覇刀) 풍뢰(豊雷)가 두 형제를 제압하고 무공을 폐지시킨 바 있었다. 당시 동생인 이괴는 무공을 회복하기 위해 무리하게 운공하다가 주화입마에 들어 목숨을 잃었다. 한편 대괴인 염사장은 그 길로 깊은 산 속에서 숨어지내다가 구천마교 교주인 구천마야(九天魔爺)의 도움으로 잃었던 무공을 되찾았다. 이후 그는 구천마교의 교도가 되어 다시 강호에 출도한 것이다. 여풍은 철추를 번쩍 들어올렸다. "어디 다시 철추를 받아봐라!" 그는 꺾일지언정 구부러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용자였다. 그는 폭풍팔추식을 전력으로 펼쳤다. 위이이이잉! 무시무시한 괴력을 담은 철추가 염사장을 향해 날아갔다. "......!"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혈포인들은 물론 흑석보의 무사들도 일제히 안색이 변하며 뒤로 물러났다. 음산일괴 염사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뒤로 두 걸음 물러나며 양손을 가슴 앞에서 교차시켰다. 그는 이번에는 방심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든 듯했다. "흐흐! 가소로운 놈,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느냐?" 우웅! 그는 탈혼장을 뻗어냈다. 쾅! 두 사람이 격돌하는 순간 폭음과 함께 바닥이 움푹 패여지며 사방으로 흙덩이들이 날아갔다. "과연 대단한 괴력이군. 이제 노부의 솜씨도 감상해 보겠느냐?" 염사장의 신형이 무섭게 여풍을 향해 쏘아갔다. 그는 구천마교에 입교한 후 가공할 마공절학들을 새로이 익혔다. 그중에 경신술인 마마전광비(魔魔電光飛)를 펼쳤다. 여풍은 현기증을 느꼈다. 눈앞이 흐릿해지며 상대의 모습이 사라졌던 것이다. 그는 이를 악문 채 철추를 날렸다. 꽝! 다시 폭음이 일어났다. "윽!" 여풍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칠팔 보나 밀려나갔다. 이번에는 미처 전공력을 주입하지 못했으므로 그가 날린 철추는 도리어 상대의 공력에 밀려 되돌아와 자신의 가슴을 친 것이다. 여풍은 울컥 핏덩이를 토해냈다. 중상을 입고 만 것이었다. "아버님!" 대전 안으로부터 우람한 체구의 청년이 뛰쳐나왔다. 여풍보다도 훨씬 체격이 장대한데다 얼굴은 호상(虎相)이었다. 그는 바로 여풍의 독자인 철탑(鐵塔) 여웅(呂雄)이었다. "아버님, 잠시만 뒤로 물러나 계십시요. 소자가 저 악귀들을 처치하겠습니다." 여웅은 말을 마친 후 홱 돌아섰다. 그의 눈은 무섭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애병인 노호철추(怒虎鐵椎)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러나 염사장은 여웅 따위는 신경쓰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려 명령을 내렸다.


"시간이 없다. 모두 해치워라! 한 놈도 남김없이 쓸어버려도 좋다!" 순간 백팔 명의 혈포인들이 괴성을 발하며 일제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흑석보의 무사들도 질세라 병기를 뽑아 들었다. 여웅은 우렁찬 음성으로 포효했다. "흑석보의 용사들아, 간악한 마졸들을 격퇴하라!" "와아! 형제들의 복수를 하자!" 마침내 격전이 벌어졌다. 양상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전열을 정비한 흑석보의 무사들은 얼마전 기습에 혼비백산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의 용맹함에 불을 지른 것은 여웅이었다. 그들의 기백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곧이어 벌어진 혈전으로 흑석보는 전장으로 화하고 말았다. 목숨을 건 사투가 숨가쁘게 벌어진 것이다. "늙은 마귀야! 네 머리를 뭉개주마!" 여웅의 호통에 염사장은 노성을 발했다. "이런 하룻강아지 같은 놈! 빨리 뒈지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염사장은 탈혼장을 뻗어냈다. 그러나 여웅은 그의 공격을 무시한 채 노호철추를 전력으로 날렸다. "헉!" 염사장은 다급성을 발했다. 그는 탈혼장으로 여웅의 가슴을 뭉갤 수가 있었다. 그러나 죽기살기로 공격해 오는 여웅에게는 꺼림칙하기만 했다. 동시에 부딪치면 둘 다 중상을 입을 게 뻔했다. "빌어먹을 놈!" 그는 욕설을 토하며 신형을 바닥으로 굴렸다. 콰앙! 철추는 바닥을 쳤다. 간일발의 차이로 염사장은 철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닥을 다섯 번이나 구르는 바람에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는 놀란 가슴을 진정하느라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독한 놈... 애비를 능가하는 간담을 지녔구나.' "크하하하! 늙은 마두의 꼴이 이거야말로 영락없이 물에 빠진 생쥐꼴이로구나, 크하하하!" 여웅은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다시 출수할 자세를 갖추었다. 이번에는 부친의 최대절기이자 흑석보의 자랑인 폭풍팔추식의 모든 정화가 담겨있는 제팔식 폭풍멸천(暴風滅天)을 시전할 셈이었다. 염사장의 눈에 짙은 살기가 떠올랐다. 순간의 방심으로 새까만 후배에게 치욕을 당한 그는 공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쌍장에 주입시킨 후 분노를 가라앉혔다. "뜻밖에도 네놈에게 교훈을 하나 얻었으니 감사의 표시로 고통없이 죽여주마." 노마답게 금세 마음의 평정을 찾은 염사장은 마마환영비(魔魔幻影飛)를 전개했다. 그것은 상대방의 눈을 현혹시키는 환술의 일종이기도 했다. 스스스! 염사장의 신형이 둘로 갈라졌다. 이어 셋, 넷으로 환영의 수는 늘어났다. 급기야 염사장의 몸은 열여섯 개로 갈라져 여웅의 주위를 회전하며 요기를 뿌렸다. 여웅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퉁방울 같은 눈으로 전후좌우를 둘러봤다. "지금 귀신놀이를 하자는 것이냐? 사술은 집어치우고 모습을 드러내라!" 여웅은 호통치며 철추를 휘둘러댔다. 하지만 철추는 염사장의 환영만을 가를 뿐 별무소용이었다. 분기탱천한 그는 고함을 발했다. "비겁한 늙은이! 숨어있지만 말고 정당하게 자웅을 겨뤄보자!" 펑! 폭음이 터졌다. 염사장의 탈혼장이 바위 같은 여웅의 등에 작렬한 것이다. "우욱!"


여웅의 거구는 무참히 날아가 담을 들이받으며 떨어졌다. 그로인해 단단한 흑석담에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염사장은 낄낄거리며 괴소를 터뜨렸다. 그는 여웅의 생사를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전력으로 펼친 탈혼장을 정통으로 맞은 그가 살아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놀랍게도 흑석보의 무사들은 혈포인들을 맞아 조금도 위축됨 없이 용맹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실력 차이는 현저했다. 혈포인들의 무공은 하나같이 극랄했으며 내공 또한 강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흑석보의 무사들은 숫자가 줄어갔다. 그들은 피바다 속에 시체가 되어 나뒹굴기 시작했다. "곧 끝나겠군." 염사장은 만족한 듯이 중얼거렸다. 문득 등뒤에서 인기척이 나는 바람에 그는 돌아섰다. "......!" 그는 소름이 쭉 끼쳤다. 의당 머리가 으깨어져 있어야 할 여웅이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염사장은 이렇게 놀란 적이 없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착각을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여웅은 입가에 선혈을 문 채 한 걸음 한 걸음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저놈은 불사신이란 말인가? 어찌 인간이 저렇게 단단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진저리가 쳐졌다. 동시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만일 오늘 저놈을 죽이지 못하면 장차 큰 화근이 될 것이다.' 그는 다시 공력을 끌어 올렸다. "아까운 놈이다만 어쩔 수 없구나. 이번엔 확실히 지옥으로 보내주마!" "......." 여웅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염사장에게 다가서고 있으나 사실은 손가락 하나 들 힘도 없었다. 그를 지탱하게 하는 것은 다만 맹렬한 증오와 투지뿐이었다. "쯧쯔......." 염사장은 혀를 찼다. 그는 노마답게 여웅의 상태를 알아보고 있었다. "잘가라, 어린 친구." 탈혼장이 뻗어 나갔다. 우우웅! 여웅은 고개를 돌려 부친과 흑석보 무사들을 둘러본 후 눈을 감았다. "웅아!" 부친의 울부짖음이 귓전을 울렸다. 퍼엉!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이 터졌다. "으아악!" 뜻밖에도 비명은 여웅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여웅은 어리둥절하여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눈에 가슴을 부여안은 채 피를 토해내고 있는 염사장의 모습이 들어왔다. 염사장은 금방 쓰러질 듯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경악에 찬 눈으로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웅은 그가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제 나타났는지 화사한 백색무복을 입은 일남일녀가 그곳에 서 있었다. 비록 내리는 비를 막기 위해 죽립을 쓰고 있었으나 미려한 몸매만으로도 그들의 용모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왼쪽에 서 있는 청년의 가슴에는 금색 수실로 용문양이 새겨져 있었으며 오른쪽 여인의 가슴에는


봉황이 수놓아져 있었다. 두 사람의 전신에서는 은은한 기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옥음을 흘려냈다. "오라버니, 우리가 좀 늦은 것 같군요." "그렇군, 하지만 아주 늦진 않았다." 청년의 음성은 담담했다. 그러나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배어 있었다. 한편 염사장은 아직도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가 평생 공력을 담아 펼친 탈혼장을 가볍게 받아 쳐 자신에게 중상을 입힌 인물이 이제 겨우 이십여 세밖에 안 되는 청년이라니! 그는 억지로 기혈을 억누르며 물었다. "대체... 네놈들은 누구냐?" 여인이 그를 돌아보며 옥음으로 대답했다. "우린 무림군왕성의 태자당 소속이에요." "군왕성!" 염사장의 ���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한편, 싸움은 잠시 중단되어 있었다. 혈포인들도 모두 손을 놓은 채 물러나 두 남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라버니는 칠절신군이라 불리고 계시죠. 현 태자당의 당주시며 소녀는 천향옥녀라 부른답니다." 두 남녀. 그들은 바로 남궁청운과 남궁소연 남매였다. 이때, 허공에서 옷자락 날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염사장은 고개를 들다가 안색이 홱 변했다. 이십여 개의 인영이 떨어져 내린 것이다. 그들은 모두 청춘남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로 태자당 소속의 청년기재들이었다. 이때 일행 중 한 여인이 날카롭게 외쳤다. "당주님! 명을 내리세요. 이 기회에 구천마교의 마귀들을 모두 쓸어내버려요!" 그녀는 화산옥검 연채령이었다. 몸에 꼭 끼는 홍색경장 차림으로 도발적인 몸매를 그대로 드러낸 채 앞가슴을 두드러지게 내밀고 있었다. 그런 모습은 뭇사내들의 시선을 끌고도 남음이 있었다. "소연아, 여웅 소보주의 상태가 심각한 듯하니 어서 이것을 복용시키도록 해라." 남궁청운은 품 속에서 손바닥만한 옥함을 꺼내 남궁소연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태자당 형제들과 함께 구천마교의 주구들을 척살하겠다." 뜻밖의 위급한 상황에 염사장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태자당에 대한 소문은 자신도 이미 귀가 따갑게 들어오던 터였다. 이 일전은 길보다 흉이 많음을 쉽게 예측할 수 있었으나 그렇다고 다른 방도가 없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것, 선제공세로 기선을 제압하는 것밖에 그가 선택할 길은 없었다. 비록 그들이 최근 강호의 지축을 뒤흔드는 가공할 위세를 떨치고 있다지만 구천마교의 정예로 이루어진 백팔전사의 주력이 건재하지 않은가. 그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빠른 결단이 필요한 순간인 것이다. "쳐라! 애송이들에게 백팔전사의 무서움을 보여주어라!" 휙휙휙! 백팔전사의 신형이 야공을 가르며 날았다. 그러나 가벼운 동작으로 병기를 뽑아든 태자당의 청춘남녀들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들을 맞아 싸우기 시작했다. "크― 악!"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오고 백팔전사들의 수급과 팔, 다리가 허공에 떠올랐다. 그들은 태자당의 적수가 아니었다. 특히 남궁청운과 철무영, 황보수선 등 삼 인의 무예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들의 몸이 스쳐가는 자리에는 반드시 백팔전사들이 추풍낙엽처럼 나뒹굴었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도륙이었다. '으으!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염사장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바람에 진기가 흩어지며 맥이 풀려버렸다. 한편 여웅은 도톰하고 하얀 여인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궁소연이 그에게 자주색 단약 세 알을 건네주고 있었다. "여소협, 어서 이 약을 드세요. 이 속명단은 오라버니가 손수 만드신 거예요. 여소협도 오라버니의 칠절 중 일절이 의예(醫藝)임을 알고 계시죠? 어지간한 내상은 깨끗이 나을 거예요."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 옥음을 발하는 남궁소연의 자태에 여웅의 가슴은 마구 뛰었다. 그의 우락부락한 얼굴에는 홍조마저 떠오르고 있었다. 한편 남궁소연은 그가 넋을 잃고 자신을 바라보자 그만 얼굴을 붉히며 몸을 돌렸다. "이제 곧 싸움이 끝날 테니 운기조식이나 하고 계세요." 남궁소연은 신형을 날려 격전장으로 다시 뛰어 들었다. 여웅은 한숨을 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단약을 삼킨 후 운공조식에 들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과연 속명단의 효능은 대단했다. 진기를 일주천시키는 것만으로 내상의 고통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는 다시 진기를 한 바퀴 돌리려다 말고 벌떡 일어섰다. 빗속을 뚫고 달아나고 있는 염사장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퇴각하라!" 염사장은 패색이 짙어지자 퇴각명령을 내리며 전력을 다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혈포인들도 황급히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누가 마음대로 갈 수 있다고 했느냐?" 남궁청운의 착 가라앉은 음성이 울렸다. 그는 쌍장으로 크게 원을 그렸다. 우우우웅! 둥근 고리 모양의 강기환이 폭사되어 나왔다. 슈― 아― 악! 강기환은 섬광처럼 좌우로 뻗어 나가며 혈포인들을 통타했다.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혈포인들이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강기환은 그들을 거꾸러뜨리며 염사장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헉!" 이상한 예감에 고개를 돌린 염사장은 눈을 부릅떴다. 그것이 그의 생의 마지막이었다. "우와아악!" 참혹한 비명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염사장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허공에 비산되었다. 실로 끔찍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 청년들은 모두 입을 딱 벌렸다. 남궁청운의 가공할 무공에 그들은 전율을 금치 못했다. 남궁청운은 의연한 자세로 여풍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다가오자 흑석보 무사들은 급히 길을 터주며 흠모의 표정을 지었다. "당주님, 수괴의 목을 가져왔습니다." 종리무가 염사장의 수급을 움켜쥐고 다가왔다. 염사장은 팔십 년의 인생이 허무하게 끝난 것을 원통해 하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여보주님, 이것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흑석보 무사들의 혼령을 위로하십시오." 남궁청운의 말에 종리무는 염사장의 수급을 여풍의 발 아래 던졌다.


"남궁당주, 큰 은혜를 입었소이다." 여풍은 포권지례를 취했다. 그것은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표시였다. 비록 평소 무림군왕성의 독주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그였으나, 자신과 아들의 생명,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흑석보를 구해준 남궁청운에게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② 여풍은 남궁청운 일행을 내전으로 안내하며 물었다. "남궁당주, 우연히 들르신 것이오? 아니면 폐보에 변고가 일어났음을 알고 오신 것이오?" 이때 남궁소연이 끼어 들었다. "저희들은 사천성의 신도문으로 가던 중이었어요. 태자당에 가입하기로 되어 있는 사천당문의 금적수재 당세곤 소협을 만날 약조가 되어 있었거든요." "오! 사천당문이 백 년만에 배출한 기재라는 금적수재도 태자당에 합류하기로 했단 말이오?" "네, 그래서 사천성으로 가던 중이었는데 마침 본성에서 보낸 전갈을 받았어요. 오늘밤 구천마교가 흑석보를 급습할 예정이니 일정을 뒤로 미루고 도움을 주라는 내용이었어요." "아, 그랬었구려." "전갈을 받고 달려오느라 끼니는 말할 것도 없고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했지 뭐예요? 지금 몹시 배가 고파요. 보주님, 흑석보의 주방장 요리솜씨는 어떤가요?" 끊임없이 종알대는 남궁소연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여풍과 여웅 두 부자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허! 역시 무림군왕성 일월단의 눈과 귀는 천하를 꿰뚫어 보고 있구려.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었구려." 여풍의 찬탄에 이어 이번엔 여웅이 두툼한 입술을 열었다. "안심하십시오. 흑석보 주방장의 솜씨는 복건성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대가입니다. 아마도 남궁소저와 일행분들의 입맛을 맞추는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남궁소연의 아름다운 자태는 평소 과묵한 성격인 여웅의 마음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고 있었다. 그는 내전 안으로 들어서며 큰 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어서 주방으로 달려가 우삼(于三)에게 일러라! 그간 갈고 닦은 솜씨를 총동원하여 복건성 최고의 진미요리를 올리라고 해라. 참! 술은 뭘로 한다? 남궁소저... 혹 좋아하시는 술이 있으면 하교하십시오. 어떤 술이라도 즉각 구해다 올리리다." 그러나 뒤따라 오던 비천검 철무영이 그의 말을 끊었다. "술은 됐소이다. 오늘 목숨을 잃은 동도들 수백 명의 체온이 채 식지도 않았거늘 어찌 술을 마신단 말이오? 호의는 고마우나 사양하는 게 도리일 것이오." 철무영이 정색을 하며 말하는 바람에 여웅은 그만 귓뿌리까지 시뻘개지고 말았다. 그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제가 잠시 이성을 잃었소이다. 혈육과 다름없는 무사들의 죽음을 두고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충언에 감사드리오." 깨끗이 잘못을 시인하고 머리를 숙이는 여웅의 솔직담백함에 철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도리어 이 철모가 부끄럽소이다." 두 청년의 눈빛이 마주쳤다. 그들은 서로의 호방한 성품에 단번에 호감을 느낀 듯했다. 대전 한가운데 거대한 식탁이 차려졌다. 여풍 부자와 태자당 일행은 주방장 우삼이 최고로 요리솜씨를 발휘한 덕분에 진수성찬을 들고 있었다. 일행은 풍성한 요리를 나누어 먹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장내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흑석보주 여풍은 연신 남궁청운의 무공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남궁청운은 문득 고개를 들며 말했다. "여보주님, 소생이 이곳에 온 것도 인연인가 합니다. 그래서 두 분께 한 가지 청을 드릴까 합니다."


여풍은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흔쾌히 말했다. "허허, 무엇이든 말씀해 보시오. 은공의 청인데 무엇인들 마다하겠소? 내 반드시 들어드리리다." 남궁청운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쾌히 승낙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청이란 다름이 아니고 여소보주를 저희 태자당에 입당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 순간 여풍의 얼굴에는 당황기가 떠올랐다. 만일 자신의 목숨을 달라면 쉽게 줄 수도 있었다. 어차피 남궁청운이 아니었다면 오늘밤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터였다. 그러나 이 청만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여웅은 그의 일점혈육이자 장차 흑석보를 물려받을 위인이었다. 더구나 무림군왕성은 오랫동안 경원해 왔었다. 자식을 태자당에 입당시킨다는 것은 흑석보가 군왕성에 굴복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가 눈살을 찌푸린 채 침묵만 하자 여웅이 나섰다. "아버님, 남궁당주의 청을 받아들이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또한 소자도 큰 물에 뛰어들어 좀더 많은 배움을 얻고 싶습니다." 남궁소연이 생긋 웃으며 거들었다. "그래요. 여소협의 천품에다 무림군왕성의 신공을 익히기까지 한다면 분명 수년 안에 절정고수의 반열에 들 수 있을 거예요." 여풍은 고개를 들어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키지 않았으나 여웅의 눈빛이 확고한 것을 보고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 것인가?' 마침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남궁당주, 우둔한 자식 잘 부탁드리겠소." 힘없이 말한 후 여풍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야공은 빛 한 점 없이 어둡기만 했다. ③ 백육호는 고개조차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반면 사사영은 몇 방울의 눈물을 떨군 후 빠르게 자신을 추스렸다. 그녀는 걸레쪽이나 다름없이 된 옷을 찾아 대충 나신을 가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백육호는 감히 그녀를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더욱 숙였다. "공자님, 그렇게 자책하실 일이 아니에요. 이번 일은 소녀의 품행이 방정치 못해 일어난 거예요. 게다가 공자님께서 드신 탕약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열기가 일어나... 아무튼 공자님께선 아무 잘못도 없어요. 계속 공자님께서 자책하신다면 소녀야말로 몸둘 바를 모르게 될 거예요." 사사영의 말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비좁은 술통 속에서 일어난 일! 두 사람이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고만 것이다. 서로간에 원했든 원치 않았든 그들은 이미 부부의 연을 맺고 말았다. 백육호는 여전히 자책을 금치 못하며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소저, 뭐라해도 내가 죽일 놈이오. 와류를 뚫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소저에게... 감히... 그런 짓을 하다니, 나야말로 가증스런 놈이오." 술통 배의 내부는 여전히 숨막힐 듯한 열기가 가득했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은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자세 또한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의식을 차린 백육호가 두 손으로 술통 벽을 버티고 있었고, 사사영은 두 발을 모아 가슴 앞으로 당긴 채 몸을 구부리고 있어 약간이나마 편한 자세를 취할 수가 있었다. 두 사람은 이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은 몸이었다.


좁은 술통 속에서 그들은 예기치 않은 정사(情事)를 치르게 되었다. 말하자면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것이다. 사사영은 순결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조금도 슬프지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백육호가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것에 기쁘기 한량없었다. 게다가 그는 공력까지 크게 증진되어 있었다. 다만 어쩔 수 없는 처녀의 본능으로 그녀는 한동안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이건 하늘의 뜻이야. 어찌 이분의 잘못이랄 수 있겠어. 내가 계속 슬퍼하면 이분은 더욱 자신을 자책하시게 될 거야.' 마침내 그녀는 마음을 다져 먹었다. 살며시 고개를 들어보니 코앞의 백육호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은은히 가슴이 아팠다. 동시에 그가 믿음직스럽다는 느낌이 솟아올랐다. 그녀는 몸을 움직여 백육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 백육호는 당황했다. 사사영은 더욱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달콤한 음성으로 말했다. "안아주세요. 공자님. 그리고... 눈을 감으세요. 소녀가 고백할 것이 있답니다." "......?" 백육호는 어리둥절했다. 코끝으로는 소녀 특유의 육향이 밀려들고 있었다. "솔직히 소녀는 기뻐요. 공자님의 여인이 되었으니까요. 이건 진심이에요. 공자님도 함께 기뻐해 주신다면 저는 더욱 행복할 거예요. 공자님은... 어떠신가요?" 한껏 용기를 낸 사사영이었다. 비록 경황중이었으나 첫 경험을 한 순결한 처녀의 입으로 그런 말을 꺼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통속이 어두웠기에망정이지 그녀의 얼굴은 노을처럼 붉어져 있었다. "고맙소. 소저......." 백육호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사사영의 등을 안으며 감동을 금치 못했다. 사사영은 낮게 웃었다. "후훗, 공자님께서는 소녀와 다른 생각이신 모양이군요. 자꾸 엉뚱한 말씀만 하시니 말예요." 백육호는 당황했다. "아, 아니오! 난, 나는 염치가 없을 뿐이오." 사사영은 짐짓 토라진 음성으로 샐쭉거렸다. "공자님이야말로 소녀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천박한 여인으로 만드시는군요. 알았어요, 공자님의 마음속에는 후회만이 가득하다는 것을......." 백육호는 다급히 말했다. "그, 그렇지 않소. 난 이 순간이 꿈이 아닌가 할 정도로 행복하오. 정말이오. 만약 꿈이라면 영원히 깨고 싶지 않소이다." 마침내 백육호는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있었다. 사실 그동안 얼마나 사사영을 그리워했던가? 사사영은 ���낄 수 있었다. 맞닿은 백육호의 가슴에서 쿵쾅대는 심장의 고동을 그녀는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침내 그녀의 눈꼬리에서 희열에 찬 눈물방울이 또르르 흘러 내렸다. 그녀는 백육호의 손을 힘주어 잡은 채 마침내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흑흑흑......." "소저, 내가 또 무슨 잘못이라도?" 백육호는 깜짝 놀라 그녀의 손을 당기며 물었다. "아니에요, 공자님. 그게 아니에요." 사사영은 고개를 도리질하며 백육호의 손을 끌어 입을 맞추었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의


벅찬 감정을 입맞춤으로 대신한 것이다. 백육호는 그녀의 행위에 날아갈 듯한 희열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사사영의 젖은 뺨을 쓰다듬었다. "사랑하오, 사사영 소저. 내 생명을 바쳐 당신을 사랑하겠소." "사랑해요, 공자님. 너무 너무......." 백육호의 머리가 숙여지며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사사영의 손이 그의 목을 휘감았다. 두 사람의 입맞춤은 격렬했다.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악양(岳陽)의 목화루(木畵樓)라 하였소?" "예, 중추절(中秋節) 해질 무렵에 만나자고 하셨어요." 백육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육노야에게 목화루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십 년을 붙어 지내며 육노인에게 별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백육호도 목화루는 금시초문이었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사영이 탄성을 발했다. "아! 목화루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백 년 묵은 노백주(老白酒) 때문에 장소를 그곳으로 하신 거예요." "하하! 술 때문이었군. 육노야가 늘 칠주야 동안 술독에 빠져 지냈으면 원이 없겠다고 우스개 소리를 하곤 했었소." 백육호는 사사영을 힘주어 안으며 오랜만에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사사영은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그녀의 입에서 엉겁결에 튀어나온 목화루는 동정호변에 위치한 다루(茶樓)였다. 그곳은 매년 중추절이 되면 부모님과 함께 향차를 마시며 호반의 야경을 감상하던 곳이기도 했다. 백육호는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날짜를 그토록 멀리 잡았을까? 중추절이라면 일 년 가까이 남아 있지 않소?" 사사영은 가슴이 뛰었다. "그건... 아! 그래요. 육노야께서 대륙에 도착하는 대로 급히 해결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셨어요. 그 일이 무엇인지는 말씀 안 해주셨지만 기일이 걸리는 일이라 여유를 두고 약조를 하신 것 같아요." "그것 참 이상한 걸. 육노야에게 중요한 일이라면 내가 모르는 것이 없는데......." 백육호는 고개를 숙여 사사영의 눈을 바라보았다. 순간 사사영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곧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엄청난 비극이 일어날 거야. 절대로 그렇게 되서는 안돼. 이분이 살아가야 할 앞날을 위해서도 난 거짓말을 해야 해. 그것도 완벽한 거짓말을!' "공자님, 그렇다면 육노야도 공자님에 관한 모든 걸 알고 계시나요?" "......." 백육호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는 육노인의 고향과 성장과정은 물론 취미와 좋아하는 음식까지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해 왔으나 정작 자신은 육노인에게 아무 것도 밝힌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육노인도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 한두 가지는 있을 법했다. "그렇구려. 소저의 말이 옳은 것 같소. 육노야에게도 가슴 깊이 담아둔 비밀이 있을 것이오." 사사영은 긴장을 풀며 백육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 과연 잘한 짓일까?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건만... 훗날 재앙의 불씨가 되지나 않을지.' 사사영은 한숨을 쉬며 백육호의 손을 끌어당겨 지그시 자신의 가슴을 눌렀다. 그것은 불안을 떨치기 위한 행동이었다. 한편 백육호는 뭉클한 젖가슴에 손이 닿자 처음에는 흠칫했으나 곧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에서 그녀의 육봉이 만져졌다. 그는 정열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더구나 상세가 회복된 데다 공력까지 급증한 터라 이처럼 가까운 곳에서 여체를 느끼게 되자 참을 수 없는 욕망이 일어났다. 그의 숨이 조금씩 가빠졌다. 사사영은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그녀는 스스로 넝마 같은 옷을 벗어버리고 그의 가슴으로 밀착해 들어갔다. "안아줘요, 공자님." 그녀의 예기치 못한 공세(?)에 백육호는 가슴이 불이 확 당겨지는 기분이었다. "소저!" 그는 뜨거운 입술을 그녀의 입술로 가져갔다. 입술과 입술이 불꽃을 내는 듯 뜨거운 열기를 발산했다. 이제 사사영은 알몸으로 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있는 자세였다. 백육호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안은 채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사사영의 몸이 뒤로 젖혀졌다. 그 위에 뜨거운 입술이 누비기 시작했다. 땀에 젖어 짭짜름했으나 사사영의 젖가슴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났다. 백육호는 서슴없이 그녀의 가슴을 입술과 혀로 핥아나갔다. 동시에 손으로는 그녀의 나신 구석구석을 애무했다. "아아!" 사사영은 고개를 젖히며 숨가쁜 신음을 터뜨렸다. 사내의 힘찬 무엇인가가 그녀의 깊은 곳으로 밀려든 것이다. 그녀는 전신을 바르르 떨며 그의 목에 매달렸다. 파도에 술통이 흔들렸다. 출렁출렁....... 술통이 아래 위로 규칙적으로 흔들릴 때마다 그녀는 입술을 딱딱 벌리고 있었다. 불덩이 같은 사내의 욕망은 그녀의 몸을 통째로 불살라 버리려는 듯했다. 망망대해(茫茫大海). 술통은 바다 위를 끝없이 표류하고 있었으나 술통 속에 들어있는 남녀는 내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④ 신도문(神刀門). 사천성 일대를 주관하는 방파로 현 문주는 뇌전도 진충이었다. 그는 사십오 세의 중년인으로 사천성 일대의 사마외도를 정리하고 신도문을 세웠다. 청풍각(靑風閣). 진충이 휴식을 취하고자 할 때 자주 찾는 아담한 별채였다. 그곳은 신도문의 본채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측백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곳이었다. "이거야 원, 무예를 연마하는 도장이 저자거리로 변했으니 이걸 어찌한단 말인가?" 사각진 턱에 수염을 기른 진충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꺼낸 말이었다. "송구스럽습니다. 저희들의 편의를 보아주시느라 이런 봉변을 당하셨으니......." 남궁청운은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허허! 봉변이라고까지야 할 게 있는가. 그저 좀 소란스러울 뿐이지." 진충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둘렀다. 신도문이 저자거리로 변한 것은 태자당 일행이 도착한 아침부터였다. 남궁청운을 비롯한 태자당의 영걸들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신도문의 본채는 물론 그 일대가 온통 북새통을 이룬 것이다. 개중에는 소홀히 할 수 없는 명문방파의 위인들도 적지 않아 진충은 주인으로서 빈객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야 했다. 대충 사람이 빠져나간 으슥한 밤이 되서야 그는 태자당 일행과 함께 한적한 이곳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게 모두 무림동도들이 태자당에 거는 기대가 얼마나 지대한가를 말해주는 게 아니겠는가."


"저희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남궁청운은 의례적인 말을 하면서 수시로 눈길은 한곳으로 팔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우측에 앉아있는 황보수선과 그녀의 곁에 있는 수려한 외모의 청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청년은 뭔가를 계속 황보수선에게 주절대었는데 그녀는 간간이 미소로 응대해주고 있었다. 남궁청운은 내내 그 장면이 눈에 거슬렸다. 마침내 그는 술을 들이킨 후 청년에게 말했다. "당형, 무슨 밀담을 그리 나누시오? 나도 좀 들어봅시다." "후후! 아무것도 아니니 남궁당주께서는 괘념치 마시오." 청년은 일언지하에 남궁청운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리고 다시 황보수선에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는 금적수재 당세곤이었다. 봉황칠영의 일원이자 사천당문의 기재로 일컬어지는 당세곤은 아침에 태자당의 영걸들과 인사를 마치기 무섭게 황보수선의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 추근거리는 중이었다. 그는 태자당의 향후 행로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표명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황보수선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남궁청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누가 보아도 그가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때였다. "당주님, 그쪽은 신경 쓰지 마시고 제가 한 잔 올릴 테니 드세요." 나긋나긋한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그녀는 늘 열정이 넘치는 연채령이었다. 그녀는 백옥술병을 들어 그에게 기울였다. 그러나 남궁청운은 치미는 울화를 삭히기 위해 눈을 감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님, 그만 소자와 함께 안채로 들어가시지요. 어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진충의 아들 도군(刀君) 진대휘(進大輝)가 헛기침하며 말했다. 그는 부친을 닮아 강인한 외모의 젊은이였다. 그 역시 태자당의 일원으로 근 육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온 탓에 한시라도 빨리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허허! 그러자꾸나. 내가 있어봐야 분위기만 해칠 테니 이만 일어나야겠다." 진충은 영걸들의 인사를 받으며 진대휘와 함께 청풍각을 떠났다. 영걸들이 다시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황보수선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저도 물러나야겠어요. 몸이 좀 좋지 않아서요." "황보소저, 많이 편찮으시오? 증상을 소상히 말씀해 보시오. 내 처방을 쓰도록 하리다." 남궁청운이 즉시 나섰으나 황보수선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약을 먹을 정도는."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이때 당세곤이 그녀에게 다가서며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부축해 드릴 테니 같이 갑시다. 마침 소생도 일어날 참이었소이다." 황보수선은 아미를 찡그렸다. "아니에요, 혼자 갈 수 있어요." "하하! 알겠소이다." 당세곤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물러났다. 그러나 황보수선이 한숨을 쉬며 사라지자 그도 좌중을 향해 대충 인사하고는 급히 사라졌다. "오라버니, 뭐 저런 작자가 있죠? 낯가죽이 저렇게 두터운 위인은 처음 보겠어요." 남궁소연이 불만을 터뜨렸다. 그녀의 말은 작지 않아 좌중의 영걸들이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그러자 옥선공자 호사붕이 말했다. "소연낭자, 진노를 거두시오. 내 기회를 봐서 그자를 혼내 주겠소이다." 남궁소연은 힐끗 그를 바라본 후 코웃음쳤다. "흥! 호공자가 무슨 재주로요? 그자는 당당히 용봉칠영의 반열에 든 자라구요." "나도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 그런 걱정은


접어두시오." "흥! 누가 호공자 걱정을 한댔나요?" 남궁소연은 차갑게 쏘아붙인 후 청풍각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되자 분위기는 어색해지고 말았다. 남궁청운은 여전히 침묵한 채 술만 마시고 있었다. 철무영과 여웅 등 몇몇 영걸들은 눈치를 보며 하나 둘 자리를 떴다. 결국 연회는 파장이 되고 말았다. "수선언니, 불쾌하셨죠?" 황보수선의 침실이었다. 남궁소연이 찾아와 뾰루퉁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후후, 나보다 네가 더 심사가 꼬여 있는 것 같은데?" 황보수선의 말에 남궁소연은 본심을 드러냈다. "그래요,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어요. 가뜩이나 피로 얼룩진 지겨운 유람길에 신경 쓰이는 피곤한 작자들까지 설치고 있으니 정말 참기가 힘들지 뭐예요." "그래도 어쩌겠니. 그들도 명문방파의 자손들인데." "피! 명문의 자손이라구요? 아마 시정 잡배나 파락호도 그들보다는 염치가 있을 거예요. 그럼, 언니는 아무렇지도 않단 말예요?" "사실 나도 피곤해.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아버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견디고 있는 중이야." "언니 아버님께서 뭐라 하셨는데요?" "아버님께서는 무림에 암운이 덮였다고 걱정하셨어. 그래서 앞으로 태자당이 큰일을 해내야 한다고 하셨지. 내게는 황보세가의 명예를 위해 태자당과 함께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대의에 충실하라고도 말씀하셨지. 그러니 내 어찌 공공연히 불편한 심사를 드러낼 수 있겠니?" 남궁소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짐짓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랬군요. 효녀로 소문난 언니니 아무리 울화가 치밀어도 웃으며 삭힐 수밖에 없었군요." "뭐라구? 요것이!" "호호호! 언니. 농담이에요, 호호호!" 방안에서 도망가고 쫓아가는 두 소녀의 청아한 웃음소리가 방울이 짤랑거리듯 이어졌다. 한참을 눈물까지 찔금거리며 웃어대던 남궁소연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참! 수선언니, 궁금한 게 있어요." 황보수선도 웃음을 멈추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왜 철공자가 태자당에 참여했을까요? 부친인 검존께서도 탐탁치 않아 하는 것을." "글쎄.... 나도 철숙부께서 태자당에 대해 좋지 않은 느낌을 갖고 계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철소협이 굳이 부친의 반대를 저버리고 왜 동참하려는지 이해가 안가." 남궁소연이 예쁜 코를 찡그렸다. "피이, 거짓말! 철공자가 언니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여했다는 것은 태자당 사람이라면 뻔히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언니만 모른단 말이에요? 내가 정말로 모르고 물어본 줄 아는 모양이지?" 황보수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을 수도 있지. 의형제간인 양가 어른 덕에 철소협과 나도 어린 시절부터 오누이처럼 허물없는 관계로 지내왔어. 아마 나에 대한 걱정때문에 그랬는지도 몰라." "단지 걱정때문이었을까?" 황보수선은 곱게 눈을 흘겼다. "요 말괄량이가 또 좀이 쑤시는 모양이구나." 그러나 남궁소연의 짓궂은 질문은 멈추지 않았다. "언니를 바라보는 철공자의 눈빛이 굉장히 뜨겁던데.... 언니는 어때요? 아무런 감정이 없단 말인가요?"


황보수선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그 사람과 나는 그런 사이가 아냐." "또 거짓말을 하는군요. 철공자는 분명 언니에게 연정을 품고 있어요. 언니도 그걸 당연히 알고 있고요. 단지 언니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을 뿐이에요. 난 이해가 안돼요. 언니가 왜 그렇게 마음을 닫고 있는지. 내가 봐도 철공자는 참 좋은 사람 같은데 말이에요. 인물, 성품, 가문, 그리고 무공까지 어디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낭군감 아녜요? 안 그래요, 언니?" 남궁소연의 채근에 황보수선은 또렷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도 철소협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잘 알아. 하지만 나에겐 이미 정랑(情郞)이 있어. 그건 철소협도 알고 있어. 그래서 철소협과 난 더욱 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거야. 어때, 이번엔 네 추측이 틀렸지?" 남궁소연은 놀란 듯 눈을 크��� 뜬 채 할 말을 잃었다. "후후, 너 놀랬구나." 황보수선의 웃음 띤 질문에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남궁소연은 잠시 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언니가 말한 정랑이 저에게는 오라버니가 되는 당대 최고의 기재인 칠절신군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요?" "어머! 남궁당주? 호호호호!" 황보수선의 웃음보가 터졌다. 그러나 남궁소연은 집요했다. "왜 웃어요? 내가 정확히 집었죠? 그래서 무안해 웃는 거죠? 그렇다면 그렇게 무안해 할 것 없어요. 사실 오라버니가 언니를 생각하는 마음은 결코 철공자 못지 않을 거예요. 언니도 알고 있죠? 그래서 언니도 은연중에 오라버니에게 마음이 기울었을 테고 말이에요." "그만, 그만해라. 네 오라버니가 아니니까." 황보수선은 겨우 웃음을 참아내며 남군소연의 입을 막았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그럼 대체 누구예요?" 남궁소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그쳤다. 바로 그때였다. 쾅! 쾅! 쾅! 누군가 급박하게 문을 두들겨댔다. "누구세요?" 대답은 활달한 남궁소연의 몫이었다. 왈칵 문을 열어 젖히고 한 인물이 뛰쳐 들어왔다. 철무영이었다. "황보소저! 아무 일 없소?" 황보수선은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네, 철소협. 대체 무슨 일이길래?" "휴― 우! 다행이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철무영에게 남궁소연은 경황중에도 농을 건넸다. "철공자님, 여기 저도 있어요. 제 안부는 묻지 않으시나요?" "아! 남궁소저. 미안하오." 엉겁결에 사과를 한 철무영은 다시 황보수선을 돌아보며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사람들이 죽었소. 그것도 우리 태자당 형제들이......." "넷? 아니, 누가요? 어떻게?" 남궁소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언가권(言家拳)의 소가주 임표(林杓) 소협과 아미파의 수제자 석정진인(碩頂眞人)이 각기 자신의 방에서 독살된 시체로 지금 막 발견됐소." "아니 누가 감히......?" 남궁소연도 경악을 금치 못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보수선은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시신은 지금 어디 있나요?" 제 9 장 구사일생(九死一生)


① 그것은 누가 보아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독살(毒殺)이었다. 외상 하나 없이 절명한 시체의 피부는 까맣게 변색되어 있었고, 입가에는 거품을 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방안에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맨 처음 임표의 시체를 발견한 것은 그들의 방에 씻을 물을 들여넣던 신도문의 하인 만석동(萬石童)이었다. 또한 그는 허겁지겁 뒷걸음질쳐 나오다 맞은편의 방문을 부수게 되었고, 그곳에서 역시 독살당한 석정진인을 발견했다고 했다. 황보수선은 창백한 표정으로 시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상하군요. 짧은 순간에 두 사람이나 독살되다니......." "그렇소. 더구나 이들의 무예는 결코 범상한 수준이 아니거늘 이렇게 허무하게 당한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소." 방안에 들어온 영걸들 중에서 남궁청운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주기가 올라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어쨌든 그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평소에 발랄하기만 하던 남궁소연이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였다. "석정진인은 내일 일찍 아미산에 다녀오겠다며 문도들에게 나눠줄 선물을 챙겼었는데......." 아미파가 위치한 아미산은 이곳에서 준마를 타고 한나절이면 다녀올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요?" 방금 전까지 청풍각에서 남궁청운의 곁에 바짝 붙어앉아 술을 함께 나누던 연채령이 아미를 찡그리며 말했다. 사실 그녀는 간만에 남궁청운과 단둘이 대작하던 분위기가 깨진 것에 내심 화가 치밀고 있었다. 진충이 팔짱을 껸 채 말했다. "흠, 아마도 외부인의 소행은 아닐 것이오. 오늘밤은 나는 새도 들어오지 못할 만큼 엄중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소. 그러니 아무도 기척없이 이곳에 잠입할 수가 없기 때문이오." 기실 누구보다도 진충의 놀라움이 가장 컸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걸출한 무림의 두 젊은이가 죽은데 대해 책임을 회피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이때였다. 호사붕이 의아한 듯 말했다. "모두 이곳에 모였는데 금적수재만 보이지 않소이다." "그렇군요! 그자는 어디 갔죠?" 남궁소연은 대뜸 금적수재 당세곤을 그자라고 칭했다. 과연 장내에는 오직 당세곤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이때 누군가의 음울한 음성이 들려왔다. "당소협은 당문세가로 돌아갔습니다. 소인에게 내일 아침 일찍 태자당에 합류하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바로 나갔습니다." 말한 자는 종리무였다. "흥! 천방지축이로군." 남궁청운이 코웃음치며 중얼거렸다. 내내 심기를 건드렸던 작자였으므로 그의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때 생각에 잠겨있던 진충이 남궁청운을 향해 말했다. "남궁당주, 여기서 이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오. 밤도 깊었으니 일단 모두 처소로 돌아가는 게 좋겠소. 그리고 당주는 잠시 노부와 얘기 좀 나눕시다." 남궁청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진충이 앞장 서고 남궁청운이 그의 뒤를 따라나갔다. 태자당 영걸들도 하나 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신도문의 무사들이 두 시신을 조심스럽게 옮길 때까지 황보수선은 석정진인의 방안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던 철무영이 궁금한 듯 물었다. "뭔가 짚이는 것이라도 있소?" 황보수선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석정진인의 찻잔 속에 독이 있었던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철무영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렇다면 금적수재의 소행일 가능성이 많겠구려." 철무영도 내심 당세곤에 대해서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황보수선은 나란히 숲길을 걸으며 반문했다. "철소협은 왜 그를 의심하죠? 그는 벌써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지 않아요?" "청풍각을 떠났다고 해도 그자가 집으로 갔다는 증거는 없지 않소? 게다가 난 종리무란 자를 신뢰하지 않소. 무엇보다도 독살이라는 것이 우연은 아닐 것 같소. 독의 전문가인 금적수재이고 보면 혐의를 피할 순 없을 것이오." "물론 사천당가가 용독(用毒)에서 천하제일이긴 하지만 전 도리어 그 점이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무엇이 이상하단 말이오?" "사건이 그렇게 단순할까요? 누구나 금적수재를 흉수로 지목하게 될 거예요. 만일 그가 진정한 범인이라면 어째서 의심 받을 짓을 하겠어요?" "황보소저, 그자는 영악한 자요. 아마 이런 점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을지도 모르고. 이른바 허허실실(虛虛實實)의 계략을 쓴 게 아니겠소?" 황보수선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왠지 석연치 않아요. 그를 흉수로 단정하기에는......." "소저 혹시......." 철무영은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지 운을 띄우곤 입을 다물었다. "혹시 뭐죠?" 황보수선이 재촉하자 철무영의 입이 한참만에야 열렸다. "혹시 소저가 그자에게 어떤... 호감을 가지고 있어서......." "후훗, 제가 금적수재를 싸고 도는 게 아니냐 그 말이군요?" 황보수선이 미소 지으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이어 따지듯이 반박했다. "철소협답지 않은 말이에요. 그런 의심을 하다니. 더구나 제 마음속에 오랜 세월 담아둔 정인이 있다는 걸 알면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황보수선의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야무진 질책에 철무영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들며 말했다. "황보소저, 이미 십 년씩이나 소식이 끊긴 사람을... 그것도 철없던 시절의 추억 하나만 가지고 지금껏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니, 이제 잊을 때도 되지 않았소?" 황보수선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추억만은 아녜요. 그 사람과 저는 양가 어르신들에 의해 태중혼약(胎中婚約)이 됐던 사이에요." "그건 더욱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백부님도 당시의 혼약은 잊으라고 말씀하셨소. 소저가 그토록 연연해하는 그자는 물론이고 그자의 집안도 십 년이 넘도록 소식이 끊기지 않았소? 소저는 대체 뭘 기다리는 것이오? 그자의 혼백이라도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이오?" "그만하세요! 철소협." 황보수선은 갑자기 차갑게 외쳤다. 평소의 온유한 성품답지 않은 태도였다. 그녀는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 철무영은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문주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남궁청운은 순순히 진충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본래 태자당은 내일 낮 신도문을 떠나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에 있는 삼정회(三正會)로 향하는 마지막 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런데 진충이 일정을 연기해 달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걸세. 분명 살인자는 내부에 있으니 며칠 안에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네." "물론이지요. 태자당의 당주인 제 입장도 있습니다. 이대로 출발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나야말로 날벼락을 맞은 기분일세. 반드시 그놈을 찾아내 요절을 내지 않고는 한숨도 자지 못할 것 같네. 그래서 묻는 말인데 혹시 심중에 짚이는 것이라도 없나?" 진충은 은근히 떠보았다. 남궁청운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뭐라 말씀드리기가 힘듭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금적수재가 가장 의심스럽기는 하나 단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문득 진충이 단호하게 말했다. "당세곤은 아니네. 비록 녀석의 품행이 경박하고 여색을 밝힌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본성이 악한 놈은 아니네. 더구나 아무 원한관계도 없는 그들을 살해할 이유가 없네." 기실 진충은 어릴 적부터 당세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남궁청운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남궁당주, 은밀히 내사해 보세. 마음 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일단은 노부와 자네 주위 모든 인물들을 냉철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네. 또한 혹시 발생할지 모를 변고에 대비해 덫을 놓도록 하세. 내 말뜻을 이해하겠는가?" "물론입니다, 문주님." "좋네. 그럼 이제 구체적인 얘기로 들어가세." 진충과 남궁청운은 밤을 잊은 채 숙의에 들어갔다. ② 이젠 한 방울의 침도 남아있지 않았다. 백육호는 사사영의 입을 통해 자신의 침을 수도 없이 넘겨주었다. 그녀가 완전히 탈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넘겨줄 침도 없었다. 목과 입안을 태우는 갈증은 백육호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으니 하물며 연약한 소녀 사사영에겐 더할 나위 없는 끔직한 괴로움이었다. 사사영은 혼미해진 의식으로 이따금 백육호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듯 나약한 신음을 발할 뿐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 망망대해를 표류한 지 한 달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와류를 통과한 후로 파도는 잔잔했다. 그래서 술통의 뚜껑을 열고 수시로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망망대해 뿐, 어느 곳에서도 육지는 보이지 않았다. 낮동안에는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가 통을 찌는 듯이 달구어 댔으며, 밤이면 뼈를 얼릴 듯한 냉기가 흘렀다. 그에 따라 두 사람은 낮에는 옷을 모두 벗어 바닷물에 적신 후 몸에 걸치는 것으로 열기를 식혀야 했고, 밤이면 꼭 껴안은 채 추위를 참아야 했다.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체력이 약한 사사영은 혼절하고 말았다. 백육호는 그녀의 체력이 바닥났음을 느꼈다. 그래도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추나요법 덕분이었다. 그는 쉴새 없이 그녀의 몸을 주물러주며 자신의 진기를 부어넣어 주었던 것이다.


이제 그것도 효력이 닿지를 않았다. "소저, 눈을 뜨시오! 눈을 뜨란 말이오!" 백육호는 사사영을 흔들며 소리쳤다.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 말해 보시오! 이대로 잠들면 안되오. 어서 말을 해! 말을 하란 말이오!" 백육호는 피를 토하듯 외쳤다. 한참 후에야 사사영의 눈까풀이 바르르 떨리며 열렸다. "오! 소저, 내가 보이오? 내가 누구요?" 사사영의 눈이 희미하게 웃었다. 갈라터진 입술이 들썩였다. "공... 자님. 내... 낭군.... 백공자." "오! 신이여, 감사합니다. 소저! 다시는 눈을 감지 마시오. 그리고 말을 하시오! 아무 말이라도 말이오!" 백육호는 울고 싶었다. 아니, 그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공자님, 소녀는 죽지... 않아요. 죽을... 수... 없어요." 사사영은 힘겹게 중얼거렸다. "물론이오, 소저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오. 내가 살아 있는 한... 신이라 해도 소저의 생명을 어찌할 수는 없소!" 사사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공자님... 소녀를... 영매라 불러 주세요." "알았소, 영매!" "고마워요. 그리고... 소녀의... 잘못도... 용서해... 주세요." "다, 다 용서하겠소. 어떤 잘못도 다 용서해 줄 테니 아무 걱정 말고 힘을 내시오." "됐어... 요. 이제... 잠을 좀... 자야겠어요." 사사영의 눈이 사르르 감겼다. "안돼! 눈을 떠!" 백육호는 놀라 외쳤다. 그러나 사사영은 눈을 뜨지 않았다. 백육호는 방금 나눈 대화가 현실이 아닌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는 사사영을 끌어안은 채 오열을 터뜨렸다. 눈물이 흘렀다. 피눈물이었다. 그의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내려 사사영의 얼굴에 떨어졌다. 그때였다. "......!" 그의 눈이 한껏 부릅떠졌다. 그는 술통 배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와류를 벗어난 이후로 뚜껑을 벗겨버린 것이다. 그는 아득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오! 이게 꿈은 아니겠지!"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분명 꿈이 아니었다. 수평선상에 하나의 검은 점이 보였다. 그 점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범선(帆船)이었다. 커다란 돛을 단 범선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백육호는 미칠 듯한 희열이 온몸을 관류하는 것을 느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젖먹던 힘을 다해 손을 흔들었다. "여기요! 여기! 사람이 있소......!" 생각보다 음성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는 단전에 힘을 주고 목청이 터져라 외쳐댔다. 범선은 그의 말을 들었는지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백육호는 갑자기 넝마나 다름없는 옷조각을 들어 황급히 사사영의 몸을 덮었다. 그녀는 거의 알몸이었던 것이다. 범선은 더욱 다가왔다.


그러나 갑판 위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냥 지나쳐 버릴 지도 모른다!' 백육호는 다급했다. 더 이상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사사영을 안고 술통에서 뛰어 내렸다. 풍덩! 차가운 바닷물이 정신을 차리게 했다. 그는 ���엄치기 시작했다. 범선을 향해 죽을 힘을 다해 헤엄을 쳤다. 아직도 범선까지의 거리는 멀었으나 그는 하나의 생각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범선에 가까이 가야 하는 것이다. "살려 주시오! 사람 살리시오!" 그는 범선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목청이 터져라 외쳐댔다. 하늘의 가호였을까? 범선의 갑판 위에 인영이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어 여러 명의 선부(船夫)들이 갑판에 나타나며 그를 발견한 듯 손가락질하는 것이 보였다. 눈물이 났다. '아아! 이젠 살았다! 사영! 우린 살았소!' 백육호는 희열에 몸을 떨었다. 그때 파도가 치는 바람에 그는 짠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범선이 코앞에 다가들었다. 그는 진기를 끌어올렸다. 한손에 사사영을 안은 채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솟구쳤다. 다행히 그의 몸은 삼 장 가량 치솟았다. 그는 갑판에 뛰어올랐다. ③ "엇! 뭐야?" "웬 놈이냐?" 갑판 위에 모여있던 선부들이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누군가 배 아래를 내려다보며 손가락질했다. "저길 보게! 술통을 타고 온 모양이야!" 백육호는 갑판 위에 떨어지면서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판에는 웃통을 벗어젖힌 험상궂은 인상의 장한들이 수십 명이나 득실거리고 있었다. "흐흐! 하늘에서 뚝 떨어졌나 했더니, 표류중이었군?" "헤헤헤! 운이 좋았군, 망망대해에 우리 배를 만나다니 말이야." 장한들은 키득거리며 백육호를 둘러쌌다. 그들의 눈이 어지럽게 두 사람을 살펴보고 있었다. 사실 백육호와 사사영은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더구나 백육호는 실 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뚱이였다. 또한 사사영은 간신히 누더기옷으로 상체의 앞부분과 아랫도리만 가린 형국이었다. 누가 보아도 두 사람은 실성한 광인이거나 거지 몰골이었다. "물... 물 좀 주시오!" 백육호는 소리쳤다. 그러나 장한들은 그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게걸스럽게 사사영을 훑어보고 있었다. 누더기옷 사이로 사사영의 눈부시게 흰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특히 탐스런 둔부와 젖가슴이 반 이상이나 노출되어 있었다. "오냐, 물을 줄 테니 그 계집의 옷을 벗겨봐라. 하하핫!" "낄낄낄! 술통 속에서 실컷 즐기다 온 모양인데 우리 앞에서 한번 더 해봐라. 그럼 원없이 물을 주마!" "옳거니! 그거 재밌겠다. 어서 해 봐라! 푸하하하!" 백여 명이나 되는 장한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로 갑판 위는 시끌벅적해졌다. 백육호는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그는 장한들이 보통 선부들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인상이 하나같이 험상궂은 데다 말투도 잔악했던 것이다. 그는 한손으로 사사영을 껴안은 채 뒤로 물러났다. 이때 한 명의 장한이 불쑥 손을 내밀더니 사사영의 옷을 낚아채려 했다. 백육호는 황급히 물러나며


소리쳤다. "사람이 죽어가고 있소. 어서... 물을 주시오." "킬킬! 줄 테니 이것 좀 벗기자." 헛손질을 한 장한이 다시 손을 뻗어왔다. 그러자 다른 장한들도 질세라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때였다. "모두 물러서라!" 갑자기 우렁찬 고함이 터져나왔다. 선실로부터 한 인물이 나타났다. 그자는 소매 없는 상의를 입고 있었는데 그나마 옷섶이 벌어져 우람한 가슴 근육을 통째로 드러내고 있었다. 가슴에 털이 수북한 사십대의 험상궂은 중년거한이었다. "멍청한 놈들! 일에 순서도 없이 날뛴단 말이냐?" 중년거한의 말에 장한들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누군가 변명을 했다. "대주님. 그게 아니옵고 막 알리려던 참이었습니다요." 거한이 다가오자 장한들은 좌우로 물러서며 길을 터주었다. 거한은 백육호와 사사영을 번들거리는 눈길로 훑어보더니 음악한 미소를 지으며 명령했다. "물부터 갖다줘라! 욕심을 채우려거든 우선은 살려놔야 할게 아니냐!" "예, 그러문입쇼." 약삭빠르게 생긴 장한 한 명이 선실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가지고 왔다. "옛다! 어서 마셔라. 대주님께서 기다리신다." 백육호는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바닥에 사사영을 눕힌 후 바가지를 그녀의 입술에 기울였다. 그러나 의식을 잃은 사사영이 물을 마실 힘이 있을 리 없었다. 백육호는 그녀의 턱을 눌러 입을 벌리게 한 후 누더기 천을 물에 적신 후 입에 짜 흘려 주었다. 사사영의 목울대가 조금씩 움직이며 물을 받아 마시는 듯했다. 그러나 여전히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백육호는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 없이 귀를 그녀의 가슴에 갖다대었다. 미약하긴 하지만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고맙소. 아직 살아있어 주어서. 아아!' 그는 쏟아지는 환희의 눈물을 삼키며 자신도 바가지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는 몸을 일으킨 후 포권했다. "도움에 감사드리오. 염치없지만 한 번만 더 간청을 드리겠소." 거한은 눈알을 희번뜩이며 말했다. "말해봐라. 네놈의 그 보기 싫은 아랫도리를 가려줄 의향은 있으니까. 하하핫!" "우하하하......!" 장한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백육호는 여전히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검붉게 그슬린 몸은 오랫동안의 허기로 비쩍 말라 있었다. 백육호는 수치감을 느꼈다. 당당한 사내 대장부로 장한들에 둘러싸인 채 알몸으로 서 있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당한 자세로 가슴을 편 후 말했다. "감사하오. 하지만 먼저 병자를 그늘로 옮길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으면 하오. 그리고 배 안에 어떤 약재가 있는지 말씀해 주시오. 소생이 필요한 몇 가지만 쓰도록 선처해 주신다면 더욱 고맙겠소이다." 중년거한, 즉 장한들의 대주는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갑판 위에 누워있는 반라의 사사영을 내려보며 이죽거렸다. "흐흐! 그럼 무엇으로 감사를 표하겠느냐? 혹 네놈이 타고 온 술통 속에 금은보화라도 들어 있느냐?" 백육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는 않소만... 훗날 반드시 은혜를 갚겠소이다."


"훗날? 푸하하하......! 난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약속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소생이 어찌해야 하겠소?" "크크, 네놈이 할 일이란 없다. 굳이 성의 표시를 하고 싶다면 이 배의 갑판이나 쓸고 닦도록 해라." 백육호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그리 할테니 어서 병자를 치료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대주는 비로소 고개를 돌려 외쳤다. "여봐라! 저 계집을 내 선실로 옮기도록 해라." "옛! 대주님!" 우르르! 장한들이 덮쳤다. "비키시오! 내가 옮기겠소." 백육호는 급히 사사영을 막아섰다. 장한들은 욕설을 퍼부었다. "비켜라! 네놈은 걸레질이나 해라. 선녀 같은 계집은 우리에게 넘기란 말이다." 장한들은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오랫동안의 선상 생활로 인해 여색에 굶주린 듯했다. 그래서 너나할 것 없이 사사영을 만져보려는 것이었다. 백육호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비켜라! 이놈들아! 이 여자는 병자란 말이다!" 그러나 장한들이 달려드는 바람에 백육호는 사사영에게서 밀려나고 말았다. 그 틈을 이용해 잽싸게 달려든 몇 명의 색한들이 사사영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 바람에 사사영의 나신을 덮고 있던 누더기 옷이 벗겨져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눈부신 태양 아래 사사영의 나신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말았다. 백육호는 그만 눈이 뒤집혀지고 말았다. "이 더러운 놈들! 어서 내려놓지 못하겠느냐!" 그러나 색한들이 그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사사영의 사지를 잡아 번쩍 치켜든 채 그들의 대주를 향해 달려갔다. 백육호의 입에서 야수와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모두 죽여주마! 네놈들을 모두!" 문득 백육호의 몸을 붙잡고 있던 네 명의 장한들이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컥!" "크아악!" 그들은 백육호가 두 팔을 휘두르자 무려 일 장 밖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백육호의 알몸이 움직였다. 아니, 움직인 것이 아니라 빛살처럼 장한들 사이를 누볐다. 놀랍도록 빠른 몸놀림으로 그는 장한들을 누비며 사사영을 향해 달려갔다. "으아악!" 사사영을 둘러메고 있던 장한들은 처참한 비명과 함께 날아갔다. 퍽!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백육호가 휘두르는 주먹과 발길질에 장한들은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그들은 갑판 위에 나뒹굴었는데 놀랍게도 단 한 방씩을 맞고 절명해 버렸다. 마침내 백육호는 사사영을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사사영을 등에 업은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실로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그는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했다. 오직 분노가 가슴을 꽉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비켜라! 내 앞을 막는 자는 모두 죽인다." 백육호는 거칠게 외친 후 선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장한들은 주춤주춤 뒤로 밀려났다. 순식간에 동료 십여 명을 사지로 보내버린 백육호의 엄청난 무위에 공포심을 느낀 것이었다.


죽은 동료들은 망망대해를 무법천지로 주름잡던 녹녹치 않은 무리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마치 지푸라기 쓰러뜨리듯한 백육호에게 그들은 일시적으로 기가 질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대주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쳐라! 흑풍선대(黑風船隊)의 용사들아!" 폭갈이 떨어지자 장한들은 일제히 병기를 뽑아들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비록 방심한 탓에 어이없이 당했으나 상대는 무기는 고사하고 알몸에 한 명의 의식을 잃은 병자를 업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흉흉한 기세로 포위를 좁혀 들었다. 그들의 눈에는 번들거리는 욕망이 흘러나왔다. 백육호의 등에 업혀있는 여인은 기가 막힌 미녀였다. 비단결 같은 피부는 물론 몸매가 가히 뇌쇄적이었다. 그들은 이번 기회에 공을 세우면 여인을 안아볼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며 차츰 포위를 좁혀들었다. "......!" 백육호는 위기를 느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의 기억은 어린 시절을 더듬어 가고 있었다. '권법과 장법은 우문숙부의 철사붕천공(鐵獅崩天功)이 당대 최강이라고 했었다.' 그는 결심을 굳혔다. 범선의 장한들은 해적(海賊)들임이 분명했다. 일거에 그들의 기를 꺾어놓아야 했다. 그는 왼손으로 사사영의 둔부를 받친 채 오른손만으로 해적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는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장심에서 황금빛 서기가 일어났다. 우수를 벼락같이 떨쳤다. 꽈― 꽝! 벽력치는 듯한 폭음과 함께 손바닥이 춤을 추었다. 그러자 십여 명의 색한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확인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머리가 으깨지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즉사하고 말았다. "헉! 저럴 수가......." 해적 흑풍선대의 대주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죽여라! 사정 보지 말고 계집까지 해치워라!" 척살령이 떨어졌다. 해적들 중 이십여 명이 우르르 선실 뒤쪽으로 달려가더니 병기고에서 탄궁(彈弓)을 꺼내왔다. 그들은 탄궁을 당겨 두 남녀를 겨냥했다. 그밖에 다른 해적들도 강차(鋼叉), 배노(背弩), 금표(金飄) 등 각종 수전(袖箭=암기)들을 겨냥했다. "쏴라!" 대주의 명이 떨어지자 이십여 자루의 탄궁이 격사되었다. 따다다다당! 강판도 뚫어버린다는 파괴력을 지닌 연주탄(連珠彈)이 맹렬한 기세로 폭사되었다. 뿐만 아니라 각종 독랄한 암기가 동시에 허공을 찢으며 사출되었다. 백육호는 이를 악물었다. '부숙부의 천은무영보(天隱無影步)를 펼치지 않고서는 피할 길이 없겠구나!' 백육호는 허리를 급격히 숙이고 오른발을 축으로 빙글 회전하며 왼발로 순식간에 여든한 번의 변화를 짚어나갔다. 팔방의 방위에서 쇄도한 탄자와 암기들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 위로, 옆구리 사이로, 또는 다리 밑이나 가랑이 사이로 마치 계곡을 빠져나가는 급류처럼 빗겨나가 버렸다. "으― 악! 컥!" 도리어 암기들은 흑풍선대의 해적들에게 격중되고 말았다. 자신들이 발사한 암기에 자신들이 맞은 것이었다. 수십 명이 비명을 지르며 가슴을 움켜쥐고 나가 떨어졌다. 백육호는 어느새 한 자루의 만도(彎刀)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는 둥글게 굽은 만도를 무섭게 휘둘러댔다.


'풍숙부의 멸신극패도(滅神克覇刀)다. 너희들에게는 과분한 감이 있지만 어쩔 수 없구나.' 위이이잉! "크― 아― 악!" 만도가 허공에 칼그물을 펼치자 단말마의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백육호를 포위했던 해적들은 반수 가까이 사지가 떨어져나가며 피바다 속에 나뒹굴고 말았다. "으으....... 저놈은 인간도 아니다." 백여 명에 달하던 용맹한 수하들의 절반 이상이 졸지에 싸늘한 시체로 화하자 대주는 그만 공포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한편 백육호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비록 기해혈의 금제가 풀리긴 했지만 무공을 펼칠 때마다 가공할 위력이 뻗어나오고 있었다. 기실 그는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육성 이상의 힘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적들은 추풍낙엽처럼 날아가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판 위에는 시뻘건 핏물이 내를 이루며 흘렀다. 시체들이 즐비하게 쓰러져 있었다. "......." 백육호는 만도를 늘어뜨린 채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앞에 해적들이 무릎꿇고 있었다. 대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공포에 질린 채 머리를 바닥에 박고 있었다. "소협, 아니 대협... 살려주십시오. 이놈이 그만 눈이 어두워 대협을 몰라 뵙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살려만 주신다면 목숨을 바쳐 평생을 대협의 종으로 살겠습니다." 대주는 거구를 와들와들 떨며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백육호는 그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진정으로 죄를 뉘우친다면 살려주겠소. 일어나시오. 날 선실로 안내해 주시오." 백육호는 더 이상 살인을 하고 싶지 않았다. "예, 예.... 감사합니다, 에... 선실은 보시다시피 이미 활짝 열려 있습니다." 백육호는 대주의 손짓에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선실 벽 한쪽이 태풍을 맞은 듯 통째로 뜯겨나가고 선실 내부가 훤히 보였다. 그곳은 침실로 쓰였던 곳인 듯 제법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백육호는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 휘장이 처져 있었다. 백육호��� 휘장을 걷다가 흠칫 놀랐다. 침상 위에 한 여인이 누워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고개를 홱 돌렸다. 대주가 기겁을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대... 대협. 그 계집, 아니 그 여인은... 아직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화... 확인해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백육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서 결박을 풀어주시오." ④ 침상 위에는 삼십대 초반 가량으로 보이는 미부(美婦)가 사지가 동앗줄로 묶인 채 누워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옷자락이 젖혀져 있어 터질 듯이 풍만한 젖가슴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봉변을 당하는지는 않은 듯 다른 옷차림은 이상이 없었다. 명령을 받은 대주는 황급히 미부의 결박을 풀었다. 미부는 몸이 자유롭게 되자 얼른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백육호에게 큰 절을 올렸다. "대협의 구명지은에... 감사드립니다." 백육호는 몸을 비켜 그녀의 절을 받지 않았다.


"이러지 마시오 부인, 감사할 것 없소이다." 미부는 한사코 절을 하며 말했다. "아니옵니다. 저의 정절과 생명을 구해주셨으니 평생의 은인이십니다." 백육호는 한숨을 쉬며 그녀의 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되었으니 이제 일어나시오." 고개를 들던 미부는 갑자기 질겁을 하며 도로 머리를 숙였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은공... 몸을 가리셔야... 저도......." "......!" 백육호는 비로소 자신이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그는 먼저 사사영을 침상에 눕힌 후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는 몸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눈길이 아직 무릎 꿇고 있는 대주에게 가 멎었다. 대주는 눈치가 빨랐다. 그는 황급히 벽에 걸려있던 비단옷을 걷어내 두 손으로 바쳤다. "대협, 누추하긴 하지만 우선 이것이라도 걸치십시오." "고맙소." 백육호는 옷을 받으며 담담히 말했다. 그는 대충 옷을 걸친 후 말했다. "당신은 지금 즉시 배 안에 있는 약재들을 모두 거두어 오시오. 하찮은 것일지라도 빠짐없이 말이오." "예예!" 대주는 연방 허리를 굽신거린 후 밖으로 물러났다. 그의 모습은 마치 신하가 황제를 대하는 듯했다. 백육호는 몸을 돌려 미부를 바라보았다. "부인, 이젠 일어나도 됩니다." 미부는 비로소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백육호는 흠칫했다. 미부의 용모가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귀한 기품이 서려 있었다. 다만 한 가닥 수심을 담고 있는 눈망울이 걸리긴 했으나 남자라면 누구나 꿈에도 그릴만한 절세미인이었다. 미부는 다소곳이 고개 숙이며 청했다. "은공, 지하의 선실에 잡혀온 여인들이 있으니 구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짐승만도 못한 작자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그놈들은 인간이 아니......." 미부는 놀란 듯 입을 다물어 버렸다. 커다란 나무상자를 든 대주가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인은 이미 대협 덕분에 개과천선하였습니다. 그리고 지하 선실의 여인들도 모셔오겠습니다. 대협, 여기 약재를 모두 가져왔습니다." "음, 거기 놓으시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대주는 공손히 예를 취한 후 수하들을 대동하고 사라졌다. 미부는 불안한 듯 아미를 떨며 말했다. "은공, 저자는 사악하기 그지없는 자입니다. 행여 지하에 있는 여인들 중 심하게 욕보인 여인의 입을 막기 위해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릅니다. 제가 따라가봐야겠습니다." 백육호는 내심 일리가 있다고 여겨졌다. "부인, 그렇다면 소생이 다녀오겠소이다." "아니에요, 저분의 상세가 위중하니 치료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은공께서 알고 계시니 저자들도 더 이상 딴짓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미부는 또렷하게 말한 후 종종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백육호는 미부의 용기와 지혜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대단한 여인이구나. 필시 보통 신분이 아닐 것이다.'


그는 대주가 가지고 온 나무상자를 열었다. 우선은 사사영의 상세를 치료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상자 안에는 약재들이 수북하게 들어 있었다. 바다를 무대로 생활하는 해적들의 습관으로 위급한 경우를 대비하여 웬만한 약재는 늘 지니고 다니는 것이었다. 백육호는 약재를 골라냈다. 칡뿌리나 구기자 잎, 오가피 등속을 먼저 골라냈다. 시간이 없었다. 골라낸 약재를 입안에 넣고 씹은 후 그 즙을 사사영의 입에 흘려넣어 주었다. '이 정도로는 사영을 완전히 치료할 수 없다. 한시라도 빨리 육지로 가서 큰 약방을 찾아야 한다.' 그는 한숨을 쉬며 침상 곁에서 사사영을 지켜 보았다. 사사영은 아직도 혼수상태를 헤매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미부와 대주, 뒤를 이어 십여 명의 여인들이 선실 안으로 들어섰다. 백육호는 그들을 보는 순간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여인들 중 나이가 어려 보이는 네 명의 소녀가 눈에 띄었다. 그녀들은 모두 미색이었는데 모두 해적들이 입는 큼직한 옷을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소녀들 중에서 한 명은 마치 실성한 듯 눈의 초점이 흐리멍텅해 보였다. "은공.... 이 짐승 같은 작자들이......." 미부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는 순간 대주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대협, 수하들을 잘못 다스린 소인을 벌하여 주십시오! 소인이 자칫 방심한 사이... 못된 놈들이 저 소녀들을 욕보였습니다. 모두가 소인이 평소 수하들을 단속하지 못한 탓입니다." 이때 미부의 곁에 바짝 붙어있던 소녀들은 비로소 공포에서 벗어난 듯 울음을 터뜨렸다. "흑흑흑.....! 마님, 무서워요! 저 사람들이 마구 때리고... 옷을 찢어버린 후......." 알고 보니 소녀들은 미부의 시비들이었다. 그녀들은 나이가 많아야 십칠팔 세 정도밖에 안된 소녀들이었다. 비로소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그녀들은 미부의 치맛자락을 잡고 대성통곡했다. "대협....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주와 그를 따라온 네 명의 수하는 그만 머리를 바닥에 쿵쿵 찧으며 목숨을 구걸했다. "은공, 이... 악마와 다름없는 놈들을 죽여주세요. 이 짐승보다 못한 놈들이 제 시비들을 무참히... 짓밟았답니다. 특히... 저 아이는 여러 놈들에게 그만 윤간을.... 저놈들은 인간이 아니랍니다. 그러니 어서 죽여 주세요. 네?" 미부의 얼굴에는 증오심이 어려 있었다. 백육호는 시선을 돌려 아직도 넋이 나가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유난히 미모가 뛰어나 눈에 띄었다. 그러나 해적들에게 윤간을 당한 충격으로 정신이 나가버린 듯했다. 백육호는 그만 가슴에 분노가 치밀었다. 문득 동사군도에서 조탁에게 희롱당하던 사사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주먹을 부르르 움켜쥐었다. "이... 간악한 놈들! 네놈들은 백 번 죽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대협.... 살려주십시오. 소인은 이 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 못된 놈들은 이미 천벌을 받아 대협께 목숨을 바쳤습니다. 더구나 남아있는 수하들은... 범선을 운항해야 하니... 제발 당분간 만이라도 목숨을 연명하게 해 주십시오." 백육호는 흠칫했다. 당장이라도 머리통을 부숴버릴 생각이었으나 마음이 달라졌다. '일리 있는 말이다. 이 큰 범선을 운항하기 위해서는 손이 필요하다. 더구나 사영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촌각을 다투어 육지로 가야 한다.' 백육호는 마음이 흔들렸다. 또한 난생 처음으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터라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기도 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미부를 향해 말했다.


"부인, 소녀들에게 물어 확인해 주겠소? 저자들 중 만행에 가담했던 자가 있는지 말이오." 그는 선별적으로 징계하기로 마음을 돌린 것이다. 미부는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에 탄식하고는 몸종들을 향해 물었다. "얘들아, 저놈들의 얼굴을 잘 보아라. 너희들을 능욕한 자가 있는지 말이다." 통곡하고 있던 소녀들은 울음을 그치고 해적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곧 어깨를 들먹이며 말했다. "흐흑! 모르겠어요, 마님. 너무나 무서워 눈을 감고 있었어요.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나 된 데다... 흐흐흑!" "......." 백육호는 난감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누구를 징계해야 할지 기준이 서지 않았다. 이때였다. 동그랗고 귀엽게 생긴 소녀가 갑자기 손가락을 뻗으며 외쳤다. "저놈이에요! 소녀는 분명히 기억해요!" 소녀가 가리키는 자는 대주의 좌측에서 무릎 꿇고 있던 뱁새눈을 지닌 작자였다. 그는 펄쩍 뛰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소인은 그때 동료들과 술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날카롭게 외쳤다. "이... 더러운 놈! 네놈이 한 짓을 똑똑히 보았어! 네놈의 엉덩이에 나 있는 화상 자국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단 말이다!" 백육호의 입에서 차가운 명이 떨어졌다. "돌아서서 바지를 내려라." "헉!" 뱁새눈의 해적은 사색이 되었다. 그러나 백육호의 날카로운 눈을 보자 그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멈칫대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서 벗어라." 백육호는 싸늘한 음성으로 재촉했다. "예......." 뱁새눈은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하고 허리춤을 잡았다. 그런데 바지를 내리는 척하던 그는 갑자기 냅다 달려나갔다. 그러나 서너 걸음이나 달아났을까? "어, 어억?" 그자는 무엇에 잡아당겨진 것처럼 몸이 뒤로 꺾였다. 백육호가 손를 내밀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허공을 움켜쥐는 것처럼 구부러져 있었다. 백육호는 손가락을 당겼다. 뱁새눈은 질질 끌려왔다. 끌려오면서 찌이익! 하는 소리가 났다. 그의 바지가 찢겨져 나간 것이다. 허여멀건한 엉덩짝이 드러났다. 엉덩짝 한가운데 과연 거무죽죽한 화상 자국이 선명하게 나있는 것이 보였다. "가거라!" 백육호는 냉갈을 터뜨렸다. 그의 손이 주먹을 움켜쥐더니 허공을 갈겼다. 펑! 하는 폭음과 함께 뱁새눈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그는 등 한복판이 거대한 쇠뭉치로 얻어맞은 듯한 고통을 느끼며 붕 떠올랐다. "으아아악!" 단말마의 비명이 길게 이어지며 갑판 위로 날아간 그는 바다 위에 떨어지고 말았다. 단 일권에 황천으로 직행한 것이다.


백육호는 예의 소녀를 향해 말했다. "낭자, 어렵게 용기를 냈소이다. 그럼 다른 자는 또 없소?" 동그란 얼굴의 소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당시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에... 얼굴을 기억할 수가 없어요. 흑흑......." 소녀는 다시 오열을 터뜨렸다. 이때 증오가 가득 담긴 눈빛으로 대주를 쏘아보고 있던 미부가 소녀의 말을 이었다. "은공, 제가 한 말씀 올리겠어요. 설사 이자들이 그 자리에 없었다 해도 똑같은 놈들임에는 틀림없어요. 더구나 대주라는 자는 그 시간에 저를 농락하고 있었어요. 다행히 능욕당하지 않은 것은......." 미부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결심한 듯 다시 말했다. "그건... 저 작자가 추잡한 짓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이에요. 그 사이에 대협께서 절 구해주신 거예요." 미부는 당시의 악몽이 되살아난 듯 진저리를 쳤다. 그리곤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자는 철저하게 절 희롱하기 위해 별 망측한 짓거리를 다 강요했어요. 비록 제가 정절은 지켰다하나... 저자에게 받은 수모와 치욕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예요. 은공. 제발 저의 간청을 받아주셔서 저놈을 죽여주세요. 아니면... 제가 죽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미부의 얼굴에는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 백육호는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대주를 죽이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사영을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육지로 가야만 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때였다. "에잇!"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대주가 갑자기 자신의 오른손으로 왼쪽 팔꿈치를 내리쳤다. "으악!" 그는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선실 바닥에 팔뚝이 잘려져 떨어졌다. 그의 팔꿈치에서는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크윽! 대협. 그리고 마님.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남은 생을 의롭게 살아갈 테니 부디 이 팔 하나로 노여움을 푸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 예기치 못한 상황에 백육호는 고개를 돌려 미부를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육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인, 이렇게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니 한 번 기회를 주도록 합시다. 게다가 어차피 배를 몰 사람이 필요한 처지니 이쯤에서 용서해 주는 게 어떻겠소?" 미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제 입장에서 어찌 고집을 부릴 수 있겠어요? 은공의 뜻대로 하세요." 그러나 미부의 표정은 어두웠다. 결코 만족스럽지 않은 듯했다. 백육호는 행여나 그녀의 마음이 변할까봐 몸을 돌리며 말했다. "대주, 어서 지혈한 후 배를 출발시키시오. 최대한 빨리 육지를 향해 방향을 잡으시오." 대주는 잘려나간 팔뚝을 안은 채 허리를 숙였다. "예, 대협. 삼 일 안에 육지를 밟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황급히 돌아섰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는 그의 얼굴에는 사악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제 10 장 의혹(疑惑) ① 광활한 대지 위에 우뚝 서 있는 신도문(神刀門)의 장원.


밤하늘에는 하현달이 희미한 빛을 뿌리고 있다. "아니, 이 시각에 웬일이오?" 태자당의 일원이며 신도문의 소문주인 도군 진대휘는 자신의 처소로 들어서는 방문객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음이 뒤숭숭해서 어디 잠이 와야지요. 침상에서 뒤척이다 진형과 얘기나 나눌까 하고 왔소이다." "아, 그래요? 하긴 나도 잠이 안 와 차를 마시던 중이었소. 어서 오시오. 차 한 잔 대접하리다." 진대휘는 부친의 뒤를 이어 신도문을 이끌어갈 차기 문주감으로 걸출한 인재였다. 도군(刀君)이란 별호가 말하듯 도법에 있어서는 이미 일가를 이룬 청년이었다. 그는 방문객이 자리에 앉자 찻잔에 뜨거운 차를 따라 주었다. "방금 끓인 것이라 아직 뜨거울 것이오. 사천성 일대에서는 꽤 유명한 형실차(荊實茶)지요. 들어보시오." "고맙소이다. 불청객을 이렇듯 환대해 주시니 말이오." "원, 별말씀을 다하시오." 차를 한 모금 맛본 방문객은 문득 음성을 낮춘다. "진형, 사실은 상의할 일이 있어서 찾아왔소이다." "무슨......?"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진형은 남궁당주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허허, 갑자기 웬 엉뚱한 질문이오?" 진대휘는 방문객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내 ���은 지난 육개월 동안 남궁당주의 통솔하에 태자당 일원으로 함께 지내며 느낀 진형의 솔직한 의견을 말씀해 달라는 것이오." "갑자기 그렇게 물으니 당황스럽소. 어쨌든 남궁당주는 당대 최고의 영웅이 아니오?" 방문객의 음성은 더욱 낮아졌다. "세간의 평판이야 누군들 모르겠소? 내가 알고 싶은 건 진형의 견해요. 사실 나는 남궁당주를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소. 물론 그의 무공이야 무림군왕성주 외에는 적수를 찾기 어려우리만큼 절륜하다는 것은 인정하오." "......." "하지만 자신의 무공과 신분을 배경으로 그는 지나치게 오만하게 굴고 있소. 매사에 독선적이고 이기적이란 말이오. 게다가 명예욕과 승부욕에 치우쳐 대의를 망각하는 행위를 다반사로 벌이고 있지 않소? 내 생각에 그는 패웅은 될지언정 난세를 구할 영웅은 아닌 것 같소. 진형의 생각은 어떻소?" 진대휘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생각을 하시다니... 뜻밖이오."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하긴 소생도 남궁당주가 훌륭한 인재라는 것은 동감하고 있소.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은 느끼지 못하오. 아마도 그의 패도적인 성품 때문이 아닌가 하오. 사실 그동안의 중원유람은 어쩔 수 없이 따라다녔을 뿐이오." "역시 그랬구려. 그렇다면 이건 큰 문제가 아니오? 아직도 항주까지 가야 하는 일정이 남아있지 않소? 대체 언제까지 남궁당주의 장단에 맞추어야 한단 말이오? 그렇다고 어르신들이 만든 태자당을 거부할 수도 없고. 이거야말로 진퇴양난이 아니겠소?" "흠, 사실 나도 그 문제에 대해 어젯밤 아버님과 상의를 했소이다." 방문객의 끈질긴 회유(?)에 마침내 진대휘도 속마음을 털어놓고야 말았다. "아, 그러셨소? 영존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일단은 자중하라 하셨소. 곧 군왕성에서 각 방파의 지존들이 모이니 그때 이 문제를 거론하시겠다고 하셨소."


방문객은 탄성을 발했다. "그거 잘됐구려. 이번 유람을 마치고 귀향할 동지들 중에도 우리처럼 불만을 느낀 인물들이 꽤 될 테고, 서로의 의견을 규합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 않겠소?" 진대휘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소?" 방문객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구천마교와 사사련의 기세가 갈수록 등등하니 걱정스런 일이오." 진대휘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한시바삐 사마의 무리들을 척결해야 할텐데 정도무림에서는 아직도 손을 놓고 있으니......." 방문객은 특유의 야릇한 눈빛으로 또 질문을 꺼냈다. "진형은 무림군왕성이 구천마교와 사사련을 타파할 수 있다고 보시오?" "글쎄요... 전력을 기울인다면 가능하지 않겠소? 성주의 무공도 그렇거니와 용봉칠영에 속하는 남궁청운 남매, 그리고 삼천에 달하는 일급고수들과 일천이 넘는 일월단의 조직으로 미루어보아 천하무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오." "그럼, 구천마교와 사사련이 연합하여 무림군왕성을 합공한다면 그 승패는 어떻게 예상하시오?" "그럴 리가 있겠소? 그들이 천 년을 이어내려온 앙숙간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거늘." "만약이라는 것이 있지 않소? 가정을 해서 한 번 대답해 보시오." "만일 그들이 힘을 모은다면 무림군왕성도 감당해 내지 못할 테지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백도무림도 단결하여 무림군왕성을 도울 테니 역시 최후의 승자는 무림군왕성이 될 것이오." "그러나 요즘처럼 남궁당주가 인심을 잃어서야 어디 다른 방파에서 호응하겠소?" 방문객의 냉담한 표현에 진대휘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말씀이 지나치구려. 우리가 남궁당주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치고 그 일을 어찌 무림대사와 연관시킨단 말이오? 또, 다른 태자당 동지들이 그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소? 아니, 설사 그들이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해도 무림에 혼란이 일어난다면 사사로운 감정은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소?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척사위정(斥邪爲正)의 대열에 합류해야 할 것이오. 물론 나 또한 그리 할 것이오." 의기가 충만한 진대휘의 말이었다. 심야의 방문객은 입가에 음산한 미소를 그리며 짐짓 고개를 숙였다. "진형, 내 잠시 편협한 마음에 실언을 했소이다. 용서하시오." 진대휘는 상대가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자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외다. 내가 너무 딱딱하게 굴은 것 같소이다." 진대휘는 상대의 찻잔이 비었음을 보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형실차가 입에 맞는 모양이구려. 잠시 기다리시오. 더 끓여오겠소." "아니오, 진형. 그보다도 진형께 보여줄 게 있소이다. 자, 이걸 한 번 자세히 보아주시오." 방문객은 소매로부터 작은 퉁소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보통 퉁소보다 두 치 가량 짧은 것으로 선홍빛이었다. 워낙 붉은 빛이라 마치 피를 칠한 듯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우연한 기회에 전대 기인으로부터 얻은 것인데 소리가 절묘하기 그지없소. 한 번 불어볼 테니 이리 귀를 갖다대 보시오." "......." 진대휘는 내키지 않았으나 방금 전 상대를 무안하게 했는지라 할 수 없이 한쪽 귀를 퉁소 끝으로 갖다댔다. 방문객은 퉁소를 입에 대기 전에 나직하게 말했다. "진대휘, 잘 가게." 훅! 퉁소에 입김을 부는 순간 진대휘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는 한쪽 귀를 손으로 막으며 비명을 발했다.


"크윽!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진대휘의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밀려나오고 있었다. "진대휘. 자네의 강골협심이 명을 재촉했으니 내 탓하지 말게. 자네의 귓속에 파고든 것이 뭔지 아나? 설명이 필요 없는 부골독침(腐骨毒針)이네. 아, 안심하게. 고통은 곧 그칠 것이니 편히 눈 감게나." 방문객은 소매 속으로 퉁소를 집어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 이럴 수가? 네놈이...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진대휘의 손가락 사이로는 검은 피가 꾸역꾸역 밀려나왔다. "흐흐... 잘 가게. 자네의 죽음은 내 꿈을 이루기 위한 포석 가운데 하나라네." 방문객은 서서히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나가며 한마디를 남겼다. "머지않아 천하는 뒤집힌다. 그때가 되면 본인의 가문은 백년의 숙원을 이루게 되지. 물론 자네야 그것을 볼 수 없을 테지만." 쿵! 그가 문을 닫고 나가는 순간 방안에서 마치 고목이 쓰러지는 듯한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 ② 남궁소연은 방금 목욕을 끝내고 물기를 닦아냈다. 여느 여인보다 한 뼘 이상 큰 늘씬한 신장을 가진 남궁소연의 나신은 유난히 굴곡이 심했다. 열일곱 살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풍만하게 부풀어 오른 가슴과 한 줌밖에 안되는 가느다란 허리, 그 아래로 바짝 올라붙은 풍요로운 둔부는 그녀의 육체가 이미 무르익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남궁소연은 낮 동안의 불쾌했던 감정을 씻어내고 한결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욕조 곁에 미리 마련해둔 침의(寢衣)를 집어들었다. 침의는 특별히 파자사국(巴子斯國:페르시아)의 상인으로부터 산 것으로 감촉이 부드러운데다 매미날개처럼 얇아 속살이 거의 투영되어 보이는 것이었다. '오늘은 상쾌한 기분으로 단잠을 자야지.' 그녀는 내의를 입지 않은 채 침의만을 알몸 위에 걸쳤다. 그러자 풍만한 젖가슴은 물론 은밀한 부위의 방림까지 그대로 비쳐 보였다. 그녀는 집에 있을 때는 늘 이런 차림으로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휘장을 걷고 내실로 나온 그녀는 경대 앞에 앉아 치렁치렁한 흑발의 물기를 털어냈다.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며 머리칼을 빗어 넘기던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한순간 당혹감이 떠올랐다. "......!" 용봉칠영의 일원인 그녀의 청각은 예민했다. 그녀는 갑자기 머리털이 쭈뼛 일어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진 것이다. 그것도 역겨운 사내의 숨결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짙은 홍조가 번졌다. 동시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녀는 살며시 머리에 꽂아 넣으려던 옥잠(玉簪)을 움켜쥐더니 전광석화처럼 뒤쪽을 향해 퉁겨냈다. 쉭!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옥잠은 창문을 뚫고 밖으로 사라졌다. 그와 거의 같은 속도로 그녀는 신형을 날려 창문 앞에 내려섬과 동시에 문을 열어젖혔다. "......?" 그녀의 발갛게 상기된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창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찌르륵 대는 풀벌레 소리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입술을 잘근 물더니 휙! 하고 신형을 날렸다. '내가 잘못 들었을 리가 없어! 틀림없이 사내의 거친 숨소리였어!' 창밖은 화원이었다. 그녀는 신형을 날려 화원을 한 바퀴 돌며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옥잠이었다.


'그 놈에게 격중됐어. 그렇다면 옥잠을 몸에 박은 채 도주한 거야. 대체 어떤 놈일까? 더러운 놈 같으니라고!' 남궁소연은 이를 뽀드득 갈며 잠시 서 있다가 다시 신형을 날려 방안으로 돌아갔다. 탁! 창문이 닫쳤다. 화원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잠시 후 누군가의 음침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그것은 너무나 낮아 지척에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흐흐....... 천하에 저런 몸매를 가진 계집은 흔치 않지. 뜻밖에도 눈요기하게 되었군. 이제 남은 것은 흣흣... 그 날이 멀지 않았다." 사내의 음성은 창문 위. 그러니까 지붕 위에서 들렸다. "제법이로군. 내 몸에 상처를 입힐 정도라니. 하지만 눈요기 한 대가로 알고 참아주지. 후후후......." 지붕 위에서 흑영이 움직였다. 그는 왼쪽 어깨에 박혀있는 옥잠을 뽑아냈다. "내게 예물을 보낸 것으로 알고 간직해 두지." 사내는 옥잠에 묻어있는 피를 소매로 닦은 후 갈무리했다. 이어 그는 가볍게 어깨를 흔들었다. 스슥! 그의 모습이 안개처럼 사라졌다. 한편, 남궁소연은 아무리 생각해도 찜찜하기만 했다. 방금 전 일어난 일이 내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연거푸 심호흡을 해보았으나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대체 놈이 언제부터 자신을 훔쳐보았을까 생각하니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어쩌면 놈은 목욕할 때부터 자신을 훔쳐봤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터질 듯한 분노를 느꼈다. 가뜩이나 요즘 들어 노골적으로 추근대는 호사붕으로 인해 심사가 뒤틀려 있는 그녀에게 이번 일은 불붙은 기름에 물을 부은 격이 되어버렸다. '대체 어떤 작자일까? 호사붕 그자라면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하고도 남을 놈이긴 한데... 그 자가 아니라면? 여웅? 아니야, 그도 내게 관심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렇게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사람은 아냐. 장건웅? 아니, 마휘일지도 몰라. 그자도 아니라면... 혹, 당세곤일까? 그래, 그자도 추잡스럽기로 따지면 호사붕 보다 한술 더 뜨는 자야. 아... 아니야, 그자는 수선언니에게 빠져있으니 아닐 꺼야. 그럼 대체 어떤 놈일까?' 남궁소연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던 태자당 청년들을 일일이 떠올리며 가능성을 헤아려 보았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머리만 욱신거릴 뿐, 뚜렷한 혐의자를 잡을 수가 없었다. "누구야? 도대체 어떤 놈이야!" 휙! 남궁소연은 부아가 치민 나머지 탁자의 찻잔을 냅다 집어던졌다. 쨍그랑! 벽에 부딪친 찻잔이 박살났다. 남궁소연은 탁자 위에 고개를 박은 채 눈을 감았다. '어떻게 해서든 꼭 찾아내고 말 테야. 반드시.......' 그녀는 입술을 악물고 각오를 다졌다. 그때였다. 왈칵! 갑자기 침실 문이 부서져라 열리며 한 인물이 뛰어들었다. "소연낭자!" 버럭 외치며 들이닥친 호사붕은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에 속살이 훤히 비치는 침의만을 걸친 남궁소연의 늘씬한 몸이 고스란히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꺅!"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남궁소연은 엉겁결에 황급히 가슴과 아랫도리를 가렸다.


"나가! 이 색한아! 어서 나가, 꺼지란 말야!" 남궁소연은 몸을 옹송그리며 악을 쓰듯 외쳤다. 그러나 호사붕은 여유만만이었다. 그는 팔짱을 껸 채 노골적으로 남궁소연의 뇌쇄적인 몸매를 훑어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연낭자, 난 근처에서 산책하던 중 이 방에서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길래 낭자에게 위험이 닥친 줄 알고 달려왔소이다. 너무 그리 놀라지 마시오." "알았으니 어서 나가요! 당신은 예의도 모르나요? 뭘 그렇게 쳐다봐요? 돌아서요! 어서!" 잔뜩 몸을 웅크린 채 남궁소연은 마구 외쳤다. 그야말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알았소. 곧 나갈 테니 염려 마시오. 한데 방금 전 그 소리는 뭐였소?" 느물거리며 입을 놀리는 호사붕의 눈에는 욕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말하는 중에도 쉴 새없이 눈알을 굴리며 남궁소연의 풍만한 몸매를 감상하고 있었다. "이... 더러운 인간!" 남궁소연은 입술을 깨물며 갑자기 한 손을 뻗어 매섭게 공격했다. 쐐애액! 반짝이는 물체가 호사붕의 미간을 향해 날아갔다. "헉! 낭자!" 호사붕은 경악하며 손을 반원으로 휘둘러 날아온 물체를 낚아챘다. 그것은 남궁소연이 손가락에 끼고 있던 옥지환(玉指環)이었다. "호오! 이런 소중한 것을 내게 주다니, 그저 낭자께 고마울 따름이오." 남궁소연은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호사붕을 짓이겨 버리고 싶었으나 지금 그녀는 알몸이나 다름없는 차림새라 그럴 경우 호사붕의 눈요기만 실컷 시켜줄 것이 뻔했다. 급기야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발 나가주세요. 흑흑......." "아니, 왜 우는 것이오? 알겠소, 변고가 없음을 알았으니 이만 돌아가겠소. 그러니 어서 눈물을 그치시구려." 말은 그렇게 했으나 호사붕은 아직 나갈 생각은 없는 듯 도리어 음침한 미소를 띠며 다가섰다. 그때였다. "나가달라는 아가씨 말씀을 못 들으셨소이까?"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 성큼 들어섰다. 그는 바로 종리무였다. 종리무의 눈에는 싸늘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억! 자네가 어떻게 여기에?" 불청객의 출현에 호사붕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종리무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또 한 사람이 죽었소이다." "뭐... 뭐라고? 누, 누가 죽었나?" "신도문의 소문주 도군 진대휘 공자가 부골독침을 맞고 절명했소이다." "그, 그럴 수가! 흉수는?" "아직 잡지 못했소. 모두들 한 자리에 모이라는 당주님의 명이 떨어졌소. 그러니 어서 가시오." 호사붕은 마지못해 몸을 돌리다 말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미련에 찬 눈으로 돌아서 있는 남궁소연의 풍만한 둔부를 핥���이 바라보며 말했다. "소연낭자,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 한마디 하겠소. 난 낭자를 걱정하는 마음뿐이오. 그러니 내 마음을 알아주시오." 호사붕은 떨어지지 않는 눈길을 돌린 후 밖으로 사라졌다. "흑흑흑! 개만도 못한 놈!" 남궁소연은 어깨를 들먹이며 외쳤다.


"내 반드시 네 눈에서 피눈물을 쏟게 할 거야! 흑흑흑......." 종리무는 흐느끼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물론 그러셔야지요. 백 배, 천 배로 오늘의 수모를 돌려받아야 합니다. 소인도 돕겠습니다, 아가씨." "고마워.... 종리무." 남궁소연은 곤경에 처한 자신을 구해준, 가문의 오랜 종복인 종리무에게만은 왠지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에게서 남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어깨를 쓰다듬고 자신의 알몸이나 다름없는 육체를 훤히 보아도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비로소 몸을 활짝 펴며 돌아섰다. "나도 가봐야겠지?" 순간 종리무의 가느다란 눈에 묘한 빛이 일어났다. 그의 눈은 빠르게 남궁소연의 젖가슴을 훑고 있었다. "내키지 않으시면 쉬고 계십시요. 소인이 당주님께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남궁소연은 침상 아래 벗어놓은 의복을 챙기며 말했다. "아니야, 내가 공과 사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오라버니가 난처해질 거야. 게다가 진소협이 참변을 당했다는데 당연히 가봐야지." 허리를 숙이자 그녀의 둔부가 치켜 올라갔다. 두 개의 분홍색 엉덩이 사이로 갈라진 부분이 여지없이 종리무의 눈에 들어왔다. 종리무의 눈빛에 열기가 일어났다. 그는 슬쩍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물컹한 남궁소연의 둔부가 손바닥에 닿았다. "어머! 뭐 하는 거야! 어서 나가!" 남궁소연은 깜짝 놀라 부르짖으며 돌아섰다. 종리무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소인은 그럼...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밖으로 사라지는 종리무를 바라보며 남궁소연은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오늘밤은 왜 이러지? 평소에도 저자의 눈빛이 심상치 않아 조심했거늘... 오늘밤은 아무래도 뭔가에 홀린 것 같아.'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남궁소연은 그만 어깨를 들먹였다. ③ 진대휘의 시신을 가운데 둔 채 태자당 청년들과 신도문의 문주 진충은 침통한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진대휘의 시신은 검푸른 빛을 띠고 있어 한눈에 독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진충은 진대휘의 귓속에서 뽑아낸 부골독침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집에서 장자(長子)가 희생된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에 그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살기로 이글거리는 눈을 들며 말했다. "이 독침은 지나치게 가늘어 손으로 발출할 수 없는 것.... 필시 퉁소나 특별한 기관장치로 쏘았을 것이다. 세곤, 여기에 대해 할 말이 없는가?" 금적수재 당세곤은 힘없이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부골독침은 분명 퉁소로 발출할 수 있게 특별히 제작된 것입니다." "자네의 금적(金笛)은 아직 소지하고 있는가?" "예, 보여 드리겠습니다." 당세곤은 사람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느끼며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애병(愛兵)인 퉁소를 꺼내 보였다. "자네도 그 퉁소로 독침을 불어낼 수 있겠지?" 진충의 질문이었다. 당세곤은 그의 의도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는 탄식을 발하며 대답했다. "진문주님, 소생과 진형은 형제나 다름없는 죽마고우입니다. 어느 간악한 놈이 소생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것입니다. 문주님께서는 행여 이런 치졸한 음모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흉수는 반드시 제


손으로......." "먼저 질문에 답해주게." 진충의 음성에서는 진득한 살기가 느껴졌다. 당세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소생은 독침은 쓰지 않습니다. 다만 금침을 암기로 쓰고 있을 뿐입니다." "퉁소 안의 금침을 꺼내보게." 당세곤은 금적을 기울여 바닥에 몇 개의 금침을 떨어뜨렸다. 곁에 서 있던 남궁청운이 바닥에 떨어진 금침을 집어 유심히 살펴보더니 중얼거렸다. "그렇군, 독은 묻어 있지 않군." 진충도 금침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호사붕이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당연히 지금은 독이 묻어있지 않겠지요. 진형을 독살한 후 바로 닦아냈을 테니까요." "뭣이? 호형은 날 흉수로 단정한다는 것이오?" 당세곤의 음성이 싸늘하게 변했다. 호사붕은지지 않고 말했다. "물론이오. 나는 당신이 흉수라 확신하오. 어제와 오늘의 완벽한 독살이야말로 당신 외에 달리 의심 가는 인물이 없지 않소?" 당세곤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부골독침에 발라져 있는 화골산(化骨散)은 독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을 갖춘 자라면 누구라도 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오. 우리 사천 당가에서는 화골산의 용독을 무림에서 금지시킨 백 년 전부터 그 규약을 충실히 지켜오고 있었소."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단 말이오? 더구나 이곳을 둘러보시오. 너무 깨끗하지 않소? 격투의 흔적이라곤 전혀 없소. 진형은 평소 가깝게 지내오던 자에 의해 지척의 거리에서 퉁소에 의해 암산당한 것이오. 당신이 말했듯 진형과 당신은 오랜 벗이니 당연히 의심을 받지 않았을......." "닥쳐라! 네놈이 감히 날 능멸하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당세곤은 노갈을 터뜨리며 벌떡 일어나 호사붕을 향해 다가갔다. "흐흐! 내게도 독수를 쓰려고? 좋다, 어디 또 한 번 퉁소를 불어봐라. 아니지, 먼저 금침에 화골산을 발라야 하지 않겠나?" 호사붕은 품에서 섭선을 꺼내들며 빈정거렸다. 당세곤은 분노로 전신을 떨며 퉁소를 들어올렸다. "더러운 황금으로 전신을 두르고 다니는 놈이 강호에 뛰어들들더니 안하무인이로구나! 내 무림동도를 대신하여 네놈의 목을 거두어 주마!" 두 사람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치했다.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감이 실내에 감돌았다. 기이한 것은 이 사태에 태자당의 누구도 제지할 의사가 없는 듯 도리어 뒤로 물러나 두 사람이 싸울 공간을 비워주었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 그리 호감 받지 못하는 인물인 탓도 있었으나 역시 모두가 당세곤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내의 인물들은 호사붕이 용봉칠영에 속하는 당세곤의 공격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한 가운데 싸움이 벌어지기를 기다렸다. "찻!" 마침내 당세곤이 일갈하며 선공했다. 그의 금적은 직선을 그리며 호사붕의 안면을 찔러갔다. 그 빠르기는 전광석화와 같았으며, 기세는 거암도 뚫어버릴 정도였다. 과연 용봉칠영의 일원으로 손색이 없는 공세였다. 그러나 이에 대응하는 호사붕의 실력 또한 군웅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 발도 물러나지 않고 섭선을 쫘르륵! 펼치더니 아래서 위로 부치며 퉁소를 받아쳤다. 깡! 고막을 치는 금속성과 함께 일합을 교환한 두 사람은 각기 두 걸음씩 물러서며 중심을 추스렸다. 이번 대결의 결과는 뜻밖에도 호각지세(互角之勢)였다.


당세곤은 곤혹스런 표정으로 뇌까렸다. "호사붕, 과연 숨은 재주가 있구나. 그래서 광오하게 굴었구나. 하지만 이번에는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금적을 비스듬히 눕히며 재차 공격하려 했다. "멈추게!" 문득 진충의 입에서 무거운 외침이 터져나왔다. 당세곤은 움찔하여 그를 돌아다보았다. "세곤, 자네는 집으로 돌아가게. 그리고 자네의 결백이 만천하에 증명되기 전에는 결코 신도문을 찾아오지 말게." 차갑게 식어버린 아들의 시신을 안고 몸을 일으킨 진충은 침중한 안색이었다. 당세곤은 고개를 떨구며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문주님께서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소생은 곧 진형의 빈소를 찾아오겠습니다. 그때는 제 손에 흉수의 수급이 들려져 있을 것입니다." 당세곤은 태자당 일행에게는 인사 한마디도 없이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잠시 후 밖에서 그의 한맺힌 음성이 들려왔다. "호사붕!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날까지 부디 무사하기를 빈다." 호사붕도지지 않았다. "흐흐! 그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겠다. 당세곤." 진충은 아들의 시신을 안은 채 남궁청운에게 말했다. "남궁당주, 자네도 태자당의 영웅들과 함께 그만 이곳을 떠나주게." 남궁청운은 흠칫했다. "아니? 진문주님. 진형이 운명을 달리한 마당에 저희더러 떠나라니... 그렇다면 흉수는 어찌하란 말입니까?" 진충은 힘없이 머리를 저었다. "모두가 부질 없는 짓이네. 내 허황된 명예욕이 아들을 죽였는데 어찌 더 욕심을 부리겠나? 훗날 흉수의 정체를 알게 되면 연락이나 해주게. 그러니 자네들은 오늘 바로 이곳을 떠나도록 하게. 다행히 아들놈의 죽음으로 아미파와 언가에게 면목은 갖추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네. 멀리 배웅하지 못함을 이해들 하시게." 밖으로 나가는 진충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노영웅의 말로를 보는 것 같았다. 그가 사라지자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오라버니! 이대로 가면 안돼요! 꼭 흉수를 우리 손으로 잡아야 해요!" 침묵을 깬 것은 이제까지 몇 차례나 안색이 변하고 있던 남궁소연이었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아니다. 진문주 말씀대로 우리는 이곳을 떠나는 게 낫겠다." 남궁청운은 고개를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청년들은 모두 고개를 흔들며 함께 자리를 떴다. "당주님, 항주행은 예정대로입니까?" 문득 흑석보의 소보주 여웅이 물었다. "물론이오. 계획을 변경시킬 이유가 없소." 남궁청운은 단호하게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종리무와 연채령이 서둘러 쫓으며 따라붙었다. "자, 우리도 각자 방으로 돌아가서 행장을 꾸립시다. 죽은 사람은 그렇다 쳐도 산 사람들은 제 할 일을 해야 하지 않겠소? 어서 서두릅시다." 호사붕이 흐들갑스럽게 떠들며 일행을 재촉했다. 그런 호사붕을 표독스럽게 쏘아보던 남궁소연은 황보수선의 팔짱을 끼며 나직하게 말했다. "수선언니, 저 능글맞은 작자가 무공을 숨기고 있던 것 같죠?" 황보수선은 밖으로 나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금 전 나도 놀랐어. 그저 노잣돈이나 보태며 끼어 든 한량인 줄 알았는데 무공조예가 그 정도라니......." "그래요. 지금 생각해보니 아까도 제 방에서 옥지환을 낚아채는 솜씨가 범상치 않았어요." "응? 무슨 소리야? 언제 호소협이 네 방에서 무공을 펼쳐 보였단 말이야?" "흥! 저 작자가 글쎄... 아이고 분통터져! 언니, 그 얘기는 나중에 할께요. 지금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려 말을 못하겠어요. 그나저나 언니는 잘 됐네요. 추근대던 금적수재가 떨어져 나갔으니 말이에요. 아! 난 언제나 호사붕 저 인간의 얼굴 안보고 살 수 있을까? 내 속도 모르고 오라버니는 저 작자를 감싸고 돌기만 하니.... 빨리 유람을 끝마치고 성에 돌아가 아버님께 말씀드려야겠어요." 남궁소연은 하소연하듯 조잘대며 황보수선과 함께 화원을 가로질러 갔다. ④ 백육호는 무너진 선실 벽 대신 임시로 휘장을 걸어놓아 외부와의 시선을 차단시켰다. 그는 침상으로 다가갔다. 간헐적으로 신음을 발하고 있는 사사영은 아직도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측은한 눈빛으로 그녀의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나신이었다. 그는 묵묵히 그녀의 나신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추나요법으로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갑판으로부터 여인들의 두런거리는 음성이 간간이 들려왔다. 이제 하루만 있으면 육지에 도착한다는 기대감으로 부쩍 활기를 되찾은 여인들이 갑판에 몰려나와 대해에 떨어지는 낙조(落照)를 감상하고 있는 듯했다. 충격으로 인해 실성했던 예쁘장한 소녀도 정신을 다소 찾은 듯 이따금 백육호와 눈길이 마주치기도 했으나 아직 한마디 말도 꺼내지는 않았다. 그밖의 다른 세 소녀는 미부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인해 불과 이틀만에 안정을 보이고 있었다. 소녀들은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고 보듬었으며, 이따금 희미한 미소를 지어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참혹한 기억을 완전히 떨구고 원래의 밝은 심성을 회복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한편 흑풍선대의 대주와 그의 수하인 두충량(杜忠亮)은 뱃일에 열심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용서해달라며 소녀들에게 온갖 성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소녀들에게 조타술을 가르쳐 주기도 하고, 자신들이 갈취해 놓은 보석들을 꺼내 나눠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질겁하며 그들을 피하던 소녀들도 차츰 마음이 풀린 듯 보석류를 받아 쥐고는 했다. "빌어먹을! 어떤 독도 통하지 않으니 대체 저놈은 어찌된 인간이란 말인가?" 흑풍선대의 대주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내뱉었다. "아마 전설에나 나오는 만독불침지신이 진짜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니 독물을 밥먹듯이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두충량도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틀동안 그들은 배 안에 있는 독이란 독은 모두 백육호의 찻잔에 발라 놓았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백육호는 차를 수십 잔이나 마셨으나 멀쩡했던 것이다. 지금 두 사람은 퀴퀴한 냄새가 나는 선실 한구석에서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고 있었다. "섣불리 계집들에게 독을 먹이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입니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는 듯이 두충량이 내뱉었다. 아닌게 아니라 아니라 백육호가 저렇듯 멀쩡한데 여인들 중 누군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면 지금쯤 두 사람의 목숨이 붙어있지를 않았을 것이다. "그따위 소리 할 때가 아니다. 내일이면 육지에 당도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들의 목은 붙어있지를 않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대책이 없단 말이냐?"


"대주님, 정말 우릴 죽일까요? 소인 생각으로는 그 자가 거짓말을 할 위인 같지는 않은데......." "멍청한 놈!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라. 네놈 같으면 우리 같은 악질을 뭐가 예쁘다고 살려두겠느냐? 아니, 놈은 그렇다 치자, 계집들은 육지를 밟기가 무섭게 우리를 죽이려 들텐데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대주는 치를 떨고 있었다. "역시... 그렇겠군요." 그 두목에 그 수하였다.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만일 그것마저 실패한다면 우리는 육지에 도착하기 전 바다에 몸을 던지는 수밖에 없다." "대주님, 아직도 써 보지 않은 독이 또 있습니까?" "독으로��� 안된다. 삼일취주(三日醉酒)를 먹이는 것이 마지막 방법이다." 두충량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이고, 대주님. 그 지독한 독도 아무 효용이 없는 판에 양조장에서 빼앗아 온 삼일취주를 쓰다니... 이건 소도 웃을 일입니다." "이놈아! 세상일이란 정해진 대로만 되는 게 아니다. 삼일취주는 독이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승산이 있을 지도 모른다. 의외로 시큼털털한 술 한 잔이 그 놈에게는 더 무서운 독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그동안 계집들을 통해 그 효능이 입증되지 않았더냐? 일단 마시게 되면 최소한 삼 일은 뻗어버리지 않더냐? 어쩌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 "흐흐, 그렇게만 된다면야......." "자, 삼일취주를 술병에 담도록 해라. 우리의 장거를 용왕님께서 갸륵히 여겨주신다면 그 괴물 같은 놈은 삼 일간은 죽음 같은 잠에 빠져들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덧없이 죽어간 동료들과 스스로 팔뚝을 잘라내며 목숨을 연명해야 했던 본인의 복수는 물론이고 배 안에 있는 계집들은... 아니, 그 놈이 안고 온 선녀 같은 계집까지 모두 우리 것이 된다." "대주님 말씀대로만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다. 흐흐흐......." 대주와 두충량. 그들은 구제불능의 인간들이었다. "이건 무엇이오?" 백육호는 눈을 크게 떴다. 미부가 진수성찬으로 가득한 식탁을 차려놓은 것이다. "내일이면 대륙에 도착할 테고... 그리되면 은공과도 작별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 마음을 담아 몇 가지 요리를 해보았습니다. 가뜩이나 솜씨가 없는 데다 재료마저 부실해 영 볼품없이 되버렸어요. 하지만 정성만은 가득 담았으니 모쪼록 맛있게 들어 주세요." "......." 백육호는 감동을 금치 못했다. 그는 지금까지 정성이 담긴 요리상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 즐거움은 십 년이 넘도록 까맣게 잊고 살았었다. 식탁을 보는 순간 그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정말 감사하오. 이런 식탁에 앉아본 지가 하도 오래되서... 정말 고맙소이다." 미부는 백육호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함께 드십시다. 참, 밖에 있는 낭자들도 함께 하는게 어떻겠소?" 백육호는 의자에 앉으며 권유했다. "그렇지 않아도 의향을 물어봤어요. 하지만 아직은 무리인 것 같아요. 그나마 스스로 음식을 먹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지요. 아, 저 소녀도 어서 정신을 차려야 할텐데......." 미부는 창가에 앉아 넋을 놓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 소녀에게 다가가 살며시 손을 잡아 이끌었다. 소녀는 멍청한 표정으로 그녀가 이끄는 대로 식탁에 앉았다.


"이 소녀는 분명 여염집 규수는 아닐 거예요. 정확한 것은 모르겠으나 전신에 흐르는 신태만 보더라도 신분내력이 범상치 않은 것 같아요." 백육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말씀하시는 부인 또한 제 눈에는 범상한 분은 아닌 것 같소이다." 그는 곧 그 말을 한 것을 후회했다. 미부의 안색에 일순간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던 것이다. 그녀의 큰 눈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듯했다. "부인, 용서하시오. 소생이 실없는 소리를 했소이다." 미부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오늘따라 마음이 심란해서 그래요. 천첩에 대해 소상히 밝히지 못함을 이해해 주세요. 떳떳이 밝히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라... 그저 성이 모용(慕容)이라는 것만 말씀 드리겠어요." 백육호는 탄식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소생이 경솔했습니다. 부인께서는 너무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번 일은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일이니 그저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모용부인은 백육호의 말에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예, 은공. 아니 백공자님의 말씀 가슴 깊이 담아 두겠어요." "자, 이제 어서 드십시다. 음식이 식겠소이다." "예......." 백육호는 먼저 식탁 한가운데에 놓인 탕의 국물을 맛보았다. "오! 기가 막히구려. 이 요리의 이름이 뭐지요?" 모용부인은 어느새 얼굴에서 어둠을 걷어내고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칠향계탕(七香鷄湯)이에요.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이에요. 그럼 이 나미감당우(懦米嵌糖藕)도 들어보세요." 마치 낭군에게 칭찬받은 아낙처럼 행복한 기분에 젖어 그녀는 이것저것 자신이 직접 만든 요리를 백육호에게 떠먹여 주기도 했다. 백육호 역시 십 년만에 누려보는 호강에 안온한 감상에 젖어들어 음식을 마음껏 즐겼다. 두 사람의 정겨운 식사가 얼마쯤 계속되었을까? 휘장 밖에서 대주의 칼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협, 잠시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아, 들어오시오." 한 팔밖에 남아있지 않은 대주는 호로병 하나를 들고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들어섰다. "지하창고를 정리하던 중에 나온 술입니다. 아까 보니 마님께서 각별한 저녁을 준비하시는 것 같아 혹시나 흥취를 돋구시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 가져왔습니다." 대주는 식탁 위에 호로병을 조심스럽게 올려놓고는 예를 취하고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백육호가 흔쾌히 말했다. "고맙소. 대주, 내 아직 술은 배우지 못했으나 맛있게 먹겠소."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대협. 소인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신 대협의 은혜는 평생이 걸려도 갚지 못할 큰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음식과 곁들여 드시면 한층 흥이 더 하실 것입니다." 허리를 굽실대며 물러나온 대주는 뱃전에 몰려서 있는 소녀들을 음침한 눈으로 훑어본 후 총총히 어딘가로 사라졌다. 백육호는 호로병을 들었다. "부인도 한 잔 하시겠소?" "아니에요, 전 술을 한 모금도 하지 못해요. 백공자님도 술을 못하신다면 굳이 드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하! 아직 그들을 의심하시는 것이오? 괜찮소이다. 이미 이틀간 그들이 끓여온 차를 대여섯 잔이나


마셨지만 아무 탈도 없었소이다. 사실 내 몸은 어지간한 독은 다 감당할 수 있소이다. 하지만 함께 차를 마신 부인과 다른 낭자들도 멀쩡한 걸로 봐서 그들이 허튼 농간을 부리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았소?" "그렇긴 하지만... 왠지 그자의 음흉한 눈빛을 보면 아직도 회개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아서요......." "당연하지요. 그에게 끔찍한 봉변을 치렀으니 그럴만도 하지요. 하지만 지나친 의심은 마음 속에 병을 키우는 것이니 여유를 갖는 것이 좋소이다." 백육호는 술병을 코에 대고 향을 맡아보았다. 쌉쌀하고 새큼한 냄새가 제법 향기로웠다. "내가 존경하는 한 분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며칠이고 술독에 빠져 지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씀하시곤 했었소. 그때마다 술이 과연 무엇이길래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었소이다. 그런데 오늘 기회가 왔으니 한 잔 마셔봐야겠소이다." "정히 그렇다면 천첩이 한 잔 올리겠습니다." 모용부인은 애써 불안한 마음을 털어내며 호로병을 받아 잔에 따랐다. 백육호는 추호도 망설임 없이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오! 맛이 희안하구려. 씁쓸한 것 같으면서도 달콤하고, 그런가 하면 새큼하기도 하니 정말 기이한 맛이오." 백육호는 이번에는 스스로 호로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 모용부인은 그런 백육호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를 바라보는 한 쌍의 눈이 또 있었다. 그것은 실성한 소녀의 눈이었다. 그녀의 눈은 불안에 떨리고 있었다. "흐음. 모용부인, 술이 들어가니 기분이 묘해지는 것 같소. 몸도 나른하게 풀리는 것 같은데......." 연거푸 몇 잔의 술을 자작한 백육호는 나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모용부인은 아미를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백공자님, 처음 하시는 술이니 그만 하시는 게 좋겠어요." "아, 아직은 괜찮소. 딱 한 잔만 더하겠소. 이제 겨우 육노야의 말을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오. 조금 졸리기는 하지만 아주... 좋은 기분이오." "육노야?" 모용부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처음으로 그 이름을 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마음이 불안했다. 백육호가 몇 잔 술에 너무 빨리 취하고 있다고 느낀 것이다. 아무리 술을 처음 대한다고 해도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백공자님, 안되겠어요. 이미 취기가 올랐으니 술은 그만 하시고 음식을 드세요." 모용부인은 호로병을 빼앗듯이 잡았다. 그러나 백육호는 몸을 일으키더니 호로병을 낚아챘다. "공자님......?" 모용부인이 아연하여 그를 바라보는데 백육호는 호로병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갑자기 옆으로 픽 쓰러졌다. ' 와당탕! 호로병이 깨져나갔다. 동시에 백육호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는 팔다리를 쭉 뻗었다. 놀랍게도 그는 무겁게 눈을 감더니 코를 드르렁 골며 잠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아닌가? 그로부터 장장 삼 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는 수면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모용부인의 놀람에 찬 비명을 자장가 삼으며. 잠시 두 사내의 음침한 괴소가 다가왔으나 그는 깊은 수면 속으로 점점 더 빠져들 뿐이었다. - 다음 권에 계속 동사군도 (東沙群島) 제 2 권 표지


제목: 동사군도 제 2 권 (전 3 권) 지은이: 검궁인·백강 - 차례 제 11 장 아쉬운 이별(離別) 제 12 장 혈세천하(血洗天下) 제 13 장 젊은 영웅(英雄)들 제 14 장 천하경영(天下經營)의 방법(方法) 제 15 장 추나신공(推拿神功) 제 16 장 엇갈리는 애정(愛情) 제 17 장 수렵장(狩獵場)의 함정(陷穽) 제 18 장 되찾은 이름 제 19 장 역천지계(逆天之計) 제 20 장 실종(失踪) 제 21 장 백야무정객(白夜無情客) 제 11 장 아쉬운 이별(離別) ① "백공자님.... 백공자님! 정신이 드세요?"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통증 속에 백육호는 여인의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대체 여기가......?" 백육호는 천 근의 무게로 느껴지는 무거운 몸을 꿈틀거리며 축 쳐져 있던 눈까풀을 들어 올렸다. 그는 바짝 다가와 있는 여인의 얼굴을 보았다. "절... 알아보시겠어요?" 백육호는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눈앞의 얼굴은 다름 아닌 모용부인이었다. "부인, 방금 전까지 함께 식사를 한 사람을 내 어찌 못 알아보겠소?" 백육호는 피식 웃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주변 풍경이 생소했던 것이다. 모용부인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흘렸다. "후훗, 방금 전이라고요? 그건 벌써 삼 일 전이에요. 그리고 이곳은 배 위가 아니라 육지랍니다. 광동성의 조양진(潮陽鎭)이란 제법 큰 어촌이랍니다." "예? 삼 일 전이라고요?" 백육호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그가 있는 곳은 해적선의 선실이 아니었다. 그는 아담한 방의 침상 위에 누워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조양진에서 가장 깨끗한 객점이랍니다." 백육호는 허둥댔다. 그는 창가로 달려가 밖을 내다보았으며, 다시 방문을 열어 밖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는 음성을 높여 외쳤다. "사사영.... 영매는 어디 있소?" "잠깐 앉으세요. 얘기가 길거든요. 백공자님께서 삼 일간 잠에 취해 계시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답니다." 모용부인의 침착한 태도는 백육호의 흥분을 가라앉히게 하는데 효과가 있었다. 아직도 어리벙벙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백육호는 마지못해 침상에 걸터앉았다. "자세히 말씀해보시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이오?" "우선 백공자께서 삼 일간이나 주무셔야 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아요." 백육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영매가 어디 있는지부터 말씀해 주시오."


"사소저는 없어요. 하지만......." "뭣이? 그럼 어디 있소? 그녀는 병자란 말이오. 그건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소?" 얼굴에 노기마저 띠는 백육호를 모용부인은 잠시 야속한 듯 바라보다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해 드릴테니 흥분부터 가라앉히세요. 사소저는 한 기인이 데려갔어요." "기인이라니? 그가 왜 영매를......?" 백육호는 멍청히 중얼거렸다. "혼란스러우실 거예요. 그래서 처음부터 순서대로 말씀드리려 했던 거예요. 답답하시더라도 참고 제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세요." 백육호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모용부인은 차분한 어조로 며칠 전의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백육호가 느닷없이 쓰러지자 모용부인은 물론이고 실성한 것으로 알고 있던 소녀도 소스라치게 놀라 그에게 달려들어 흔들었다. 사실 소녀는 일부러 실성한 듯 가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육호는 도무지 깨어날 줄을 몰랐다. 아무리 세차게 흔들어도 그는 코를 골며 잠에서 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휘장이 걷혀지며 대주와 두충량이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려는 두 여인들을 간단히 제압해 결박해 버렸다. 이후 모든 것이 뒤집혀지고 말았다. 갑판에 있던 세 소녀도 굴비 엮듯 함께 결박한 후 대주는 백육호가 먹은 술이 삼일취주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떠들어댔다. 모용부인과 네 소녀는 사색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주는 자신을 죽이라고 주장했던 모용부인의 뺨을 세차게 갈기며 욕설을 퍼부었으며 곧바로 침상에 누워있는 사사영에게 다가가 이불을 걷어냈다. 한편 두충량은 충격으로 다시 의식을 잃어버린 소녀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또 다시 만행이 자행되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갑자기 창노한 노갈과 함께 두 인물이 선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육순이 넘어 보이는 늙은 여인과 사십대로 보이는 중년여인이었다. 두 여인은 선실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대주와 두충량을 너무도 간단히 장력으로 격살시켜 버렸다. 놀라운 것은 정신을 잃었던 소녀였다. 중년여인이 소녀의 등을 한 번 치자 그녀는 정신을 되찾았다. 이어 중년여인을 알아본 듯 갑자기 그녀의 품에 몸을 던지며 대성통곡을 터뜨린 것이다. 알고 보니 중년여인은 그 소녀의 모친이었던 것이다. 중년여인은 소녀가 납치된 후 바다를 이잡듯이 뒤지다 마침내 극적인 재회를 한 것이었다. 모용부인은 두 여인에게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자세히 설명했다. 중년여인은 자신의 딸이 해적들에게 무참히 능욕당했음을 알자 그만 노갈을 터뜨리며 대주와 두충량의 시신을 난도질해 버렸다. 물론 그런다고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대충 선박의 일들이 정리되자 늙은 여인은 사사영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은은히 놀라는 빛이 떠올랐다. 결국 두 여인은 소녀와 사사영을 한 척의 쾌속선에 옮긴 후 해적선을 떠났다. 백육호는 두 손으로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자신의 무지와 오만, 방심이 모든 것을 망쳤던 것이다. 그는 ���기학대의 심정에 빠져들어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부림쳐야만 했다. "백공자님,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놈들이 워낙 간교하고 사악하여 당한 것이에요. 다행히 적시에 도움의 손길이 뻗쳐 우리는 아무런 봉변도 당하지 않았으니 그렇게 괴로워 하시지 마세요." 모용부인은 안쓰러운 눈길로 백육호를 바라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사소저도 별일 없을 거예요. 그 노여인의 말씀으로는 사소저의 용태가 너무 심해 자신의 거처로 데리고 가 치료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곳에는 진귀한 약초들이 많으니 완치가 가능하다고


하시더군요." 백육호는 머리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 "그곳이... 어디요?" "그건...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다만 남자들은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금남(禁男)의 땅이라고만 하셨어요. 그리고... 한 말씀 더 하셨어요. 백공자님께 전해달라시더군요. 그곳은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곳이니 괜한 정력을 허비하지 말라고.... 사소저와는 연이 닿는다면 머지않아 만나게 될 거라고 하셨어요." 백육호는 고개를 번쩍 들며 외쳤다. "그런 경우가 어디 있소? 두 사람 모두 의식이 없는 틈에 멋대로 결정을 내려 사람을 갈라놓다니...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더구나 영매의 치료는 나 혼자서도 해낼 수 있었소. 그런데 어째서 멋대로 사람을 데려갔단 말이오?" "......." 모용부인은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가 풀이 죽어 고개를 떨구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분께서 중년여인에게 하시는 말씀을 우연히 들었어요. 사소저는 하늘이 자신에게 보내준 소녀라고요. 무슨... 타고난 성령옥체(聖靈玉體)라고 하며... 아무튼 그런 말로 미루어 보아 사소저에게 결코 위험은 없는 것 같았어요." 백육호는 기억을 더듬었다. 육노인도 사사영이 하늘이 내린 옥체를 타고난 소녀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사소저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얼마쯤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 괴로우시겠지만 머지않아 건강을 회복하고 밝은 모습으로 백공자님 앞에 나타날 테니 마음을 편히 하고 기다리세요." 백육호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만 여겨졌던 것이다. 잠시 후 그는 창가로 다가가 눈앞에 보이는 어촌의 한가로운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포구의 한 허름한 가옥 마당에서 어망과 통발 등의 어구를 손질하고 있는 어부와 그 가족들의 분주한 모습이 아스라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왠지 쓸쓸하게 느껴지는 모용부인의 음성이었다. "글쎄요......." 그러고 보니 드넓은 중원대륙에 발을 들여놓긴 했으나 딱히 갈 곳이 없었다. 모용부인은 그의 곁에 다가와 함께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 아낙네가 부럽군요. 행복해 보여요." 남편을 도와 어구를 손질하던 아낙이 가슴을 풀어헤치고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자식인 듯 보이는 아이들이 뜰에만 대여섯 명은 되는 것 같았다. 백육호는 모용부인의 고운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을 보았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부인, 나 때문에 며칠을 허비했군요. 어서 돌아가십시오. 아! 시비들은 어디에......?" "옆방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럼 어서 가보십시오. 여러 가지로 고마웠소이다. 모용부인." 모용부인의 우수어린 눈동자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독이 짙게 배어 있는 백육호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더니 자신의 뒷머리에서 비녀 하나를 뽑았다. "백공자님, 이 비녀를 받아주세요. 보잘 것 없는 것이나 은공에게 드리는 작은 성의로 생각하시고 거두어 주세요." 그녀가 내미는 비녀는 청옥으로 된 것으로 연꽃 세 송이가 정교하게 양각되어 있었다. "은공 소리를 듣는 것이 부끄러우나 고맙게 받겠소이다." 백육호는 사양할 수 없었다. 모용부인의 절실한 마음이 전달되었던 것이다. "또 뵐 수 있을까요?"


모용부인의 큰 눈망울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 같았다. 백육호는 침묵했다. "언제 떠나실 거죠?" 별 의미 없는 질문을 반복하는 모용부인이었다. "바로 출발할 생각이오. 아, 일단 함께 나갑시다. 부인께서 가셔야 할 곳이 멀다면 안전한 곳까지 모셔다 드리겠소이다." "아니에요. 배웅은 안해 주셔도 돼요. 친정이 조양진에서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어요. 이번에 해적들에게 납치당한 것도 모처럼 친정에 들린 기분에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 뱃놀이를 나갔다가 그만 그리 된 것이랍니다." 모용부인은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방문을 열고 사라졌다. 백육호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특별히 꾸려야 할 짐이 있을 리 없었으나 그의 눈에 한 자루의 철검과 회색의 보따리가 들어왔다. 자신도 모르게 철검을 집어든 그는 유심히 살펴보았다. 색이 바랜 고색창연한 검집 위에 몇 개의 자수정이 박혀 있었다. 언뜻 보아도 보통 검이 아닌 듯했다. 손잡이에도 굵은 자수정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비록 바래긴 했으나 붉은 수실도 매달려 있었다. 그는 호기심을 느끼며 검을 뽑아보았다. 스르릉! 청명한 음향과 함께 주인을 반기듯 새하얀 검신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방안에 은은한 서기가 감돌았다. 거울처럼 반사되는 검신에는 초서(草書)체로 흘려쓴 용명(龍鳴)이란 문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필시 내력이 있는 검이다. 검을 만지는 순간 알 수 없는 웅후함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게 어째서 방안에 있는 걸까?' 그는 잠시 생각하다 검을 제자리에 놓고 보따리를 풀어보았다. 보따리 속에서는 뜻밖의 물건들이 나왔다. 황금, 산호(珊瑚), 비취(翡翠), 묘안석(猫眼石) 등이 가득 들어 있었던 것이다. '대체......?' 그는 의혹을 금치 못했다. 이 정도 양이면 가히 성을 살 수 있을 정도였다. 이때 문이 열리며 모용부인이 들어왔다. '......!' 백육호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구름처럼 머리를 틀어올리고 잔뜩 성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화사할뿐더러 요염하기까지 했다. 백육호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으나 그보다는 궁금증이 앞섰다. "마침 잘 오셨소. 부인, 이 검은 무엇이고 또 이 보석들은 무엇이오?" 모용부인은 그가 바로 질문을 던지자 서운한 표정이 스쳤으나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 제가 미리 말씀드린다는 것을.... 그 검은 사소저를 데려가신 노파께서 백공자님께 전하라 하신 거예요." "왜 나에게......?" "그분 말씀이 백공자님께서 자신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한 영웅과 많이 닮았다고 하시더군요. 또한 본시 그 용명검은 여인이 다루는 것이 아니라면서 임자를 만났으니 드린다더군요. 참, 그분은 자신이 이성에게 베푼 호의로써는 이번이 두번째라고 하시면서요." "......." 백육호는 침묵했다. 허락도 없이 사사영을 데리고 가버린 그녀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그로서는 이런 호의가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용명검은 봉명검과 함께 자웅(雌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어요. 그분은 훗날 백공자님이


봉명검을 소지한 여인을 만나게 되실 거라고 예언하시면서 그 날이 되면 공자님은 이 검에 얽혀 있는 내력을 알게 되실 것이고 아울러 미지의 힘도 얻게 되신다고 하셨어요." 백육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알겠소이다. 그럼 이 보따리에 관해서 말씀해 주시오. 혹 그녀가 날 동정하여 적선한 것이 아니오?" 모용부인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것은 천첩이 꾸려놓은 거예요. 그것은 해적선에서 추려낸 것들이고요. 그중에는 제가 강탈당했던 것들도 조금 포함되어 있어요. 제가 보니 백공자님은 수중에 아무 것도 지니신 게 없더군요." "그렇소. 호의는 고맙지만 이런 건 내게는 어울리지가 않소. 그러니......." "백공자님, 천첩이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공자님은 오랜 세월을 낭인생활을 하시게 될 거예요.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재물은 필요하게 될 거예요. 더구나 그것들은 해적선에서 걷어온 것이니 임자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아무 부담 가지실 필요가 없어요." 백육호는 완강했다. "해적선에서 나온 보석은 그렇다쳐도 부인의 패물을 소생이 가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외다." "공연히 천첩이 쓸데없는 말씀을 드렸군요." 모용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우수어린 눈을 내려감으며 자조하듯 말했다. "그 패물들은 혼례 때 남편에게서 받은 예물들이랍니다. 그 날 이후로 전 남편의 강요에 의해 그것을 한시도 몸에서 뗄 수가 없었어요. 심지어 잠자리에서도 그중 아무 것이라도 착용하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지요. 그러던 차에 해적들에게 강탈을 당했어요. 그 광경을 시비들이 목격했으니 남편도 그 사실을 알게 될 거예요. 사실 제 시비들은 남편 쪽 사람들이에요. 의심 많은 남편이 절 감시하기 위해 붙인 거지요." "......." "그러다 시비들까지 당하게 된 거예요. 하지만 일이 우습게 되었어요. 시비들 덕택에 천첩은 해적들에게 납치는 되었을망정 능욕은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에요. 우습죠? 제 꼬락서니가.... 어쨌든 그 패물들은 시비들 모르게 제가 다시 챙겼으니 그 아이들은 해적선과 함께 수장된 걸로 알고 있을 거예요. 전 그저 백공자님께 작은 도움이라도 드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공자님이 그것을 더럽다 생각하시면 저와 헤어지신 후 마음대로 처분하세요. 거지에게 적선을 하시든, 오물통에 버리시든 말이에요." 모용부인의 말에는 심한 자괴감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당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백육호를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여기서 헤어지는 게 좋겠어요. 제가 너무 많은 말을 했군요." 문고리를 잡는 모용부인의 손이 바르르 떨고 있었다. "아무 내색 없이 백공자님과 담담하게 작별인사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잘 안되는군요." "부인......." 백육호는 한숨을 쉬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뭐라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때 그녀의 가녀린 손이 그의 손을 덮었다. 두 사람의 손을 통해 서로의 체온이 전해졌다. 백육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뜨거운 마음을. 모용부인은 입술을 악물고 눈물을 삼켰다. "공자님, 부디 사소저와 하루 빨리 해후하시길 빌겠어요. 그런 후 세속의 풍진이 닿지 않는 외진 곳에 정착하여 행복한 두 분만의 삶을 누리세요. 제 몫까지 모두 드릴께요. 저는 공자님과의 짧은 추억을 가슴에 안고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신에게 감사드리며 남은 삶을 채울 거예요." 모용부인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내다보지 마세요. 이대로 그냥 갈 테니. 그럼 안녕히......."


"모용부인!" 백육호는 미끄러져 나가는 모용부인을 다급히 불러보았으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그녀를 쫓으려던 그는 문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를 불러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건가?' 그는 고개를 저으며 문을 닫고 말았다. 모용부인의 체향이 은은히 감도는 썰렁한 방안에서 그는 갑자기 밀려드는 외로움을 전신으로 느끼며 사사영을 떠올렸다. 미치도록 보고 싶은 느낌에 그는 참담한 고독의 늪 속으로 빠져들었다. ② 조양진을 횡으로 관통하는 대로의 동쪽 끝에 관청은 위치해 있었다. 그 관청 안쪽 깊숙한 곳에 현령(縣令) 장소덕(張所德)의 처소가 자리잡고 있다. 축시(丑時) 무렵이라 관청은 어둠에 잠겨 있었으나 장소덕의 침실 창밖에 솟아있는 거송의 가지 위에는 언제부터인가 한 인영이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오늘따라 장소덕의 침실에는 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는 새로 들어온 어린 관기(官妓)의 수청을 받느라 밤을 밝히고 있는 것이었다. 나이 오십을 넘기면서부터 도리어 더욱 여색을 밝히게 된 그에게 동정녀인 관기의 머리를 올려주는 오늘 같은 밤은 쉽게 잠들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한 시진이 넘도록 불이 꺼지기만을 기다리던 거송 위의 그림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듯 가볍게 혀를 찬 후 몸을 일으켰다. 슷....... 그는 소리없이 창문에 매달렸다. 조심스럽게 창문을 연 그는 건물 안으로 그림자처럼 스며들었다. 십여 개의 화촉(華燭)이 타오르는 침실. 지금 그곳에서는 후끈한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침상 위에는 두 개의 알몸뚱이가 얽혀있었다. 하나는 비대한 체격으로 온통 비계투성이의 사내였으나 하나는 대조적으로 가냘프면서 백설처럼 흰 여인의 나신이었다. "하아......." 장소덕의 정력은 절륜했다. 그는 모처럼만에 안게 된 동기의 나신을 구석구석 집요하게 애무하고 있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여체 탐험을 하는 바람에 전신이 온통 땀투성이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벌써 한 시진이 넘도록 그는 좀처럼 동기를 놓아주려 들지 않았다. 그동안 몇 차례나 방사를 치르는 바람에 동기는 탈진할 대로 탈진해 있었다. 그저 온몸을 힘없이 늘어뜨린 채 이제나저제나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장소덕은 추호도 멈출 생각이 없는 듯 혀끝으로 애무하며 그녀의 온몸을 짓이기고 있었다. "아아, 나으리.... 이제 그만 좀 하시와요." 동기는 거의 울듯한 심정으로 애원했다. "허허! 이런 몹쓸 것이 있나? 이제 겨우 길을 닦았거늘 예서 그만 하라니 말이나 되는 소리냐? 입 닥치거라. 이제 곧 너도 열락의 문으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장소덕은 동기의 몸을 뒤집었다. 체위(體位)를 바꾸어 즐기려는 것이었다. 동기는 비명을 발하며 엎드렸다. 장소덕은 새삼 쾌락으로 온몸을 긴장시키며 그녀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힘차게 돌진했다. "흐음......." 그러나 뜻대로 되지가 않았다. 몇 번의 방사로 인해 그의 노구 역시 생기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는 안간힘을 쓰며 동기의 몸으로 밀고 들어가려 끙끙댔다. "나으리... 이제 그만......." 참다 못한 동기가 고개를 돌렸다. 문득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녀는 입을 딱 벌린 채 어쩔


줄을 몰라했다. "저... 저......." "응? 왜 그러느냐?" 이상함을 느낀 장소덕이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미안하게 됐소이다. 하지만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부득이 결례를 범했소이다." 심야의 침입자였다. 그는 한 자루의 철검을 쥔 채 우뚝 서 있었다. 바로 지척의 거리였다. "......!" 장소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긴 머리��� 대충 틀어올린 채 유령처럼 서 있는 흑영은 차분하게 말했다. "몇 가지 장현령께 확인할 것이 있어 왔으니 너무 놀라지 마시오." 어린 관기는 황급히 이불을 당겨 머리 위까지 뒤집어썼다. 비록 열여섯 어린 나이이기는 하나 이런 경우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것이다. 섣불리 도망치려 하지 마라, 침입자의 얼굴을 보려하지 마라, 설혹 능욕을 당하더라도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려 하지 마라, 침입자가 무슨 짓을 하건 비명을 지르지 마라....... 처음 겪는 돌발적인 상황임에도 영악한 관기는 선배들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했다. "네... 네놈은 누구기에 감히...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오히려 오십 풍상을 헤쳐온 장소덕의 처세가 슬기롭지 못했다. 상대가 좀도둑이 아닌 바에야 자신의 침소에 들이닥치며 아무 저지도 받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만큼 그는 당황하고 있었다. 퍽! "크윽!" 장소덕은 침입자의 가벼운 발길질에 내장이 끊어지는 듯한 극렬한 고통을 느끼며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 "반 시진 전부터 이 침실주위의 포쾌 열두 명이 깊이 잠들어 있소. 그러니 앞으로 교대할 반 시진 동안은 장현령과 나는 아무 간섭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소이다." 그 말인즉 소리 질러야 소용없다는 것을 뜻했다. "이, 이보시오! 대체... 왜 이러시오? 재물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줄 테니 말씀해 보시오. 대체 얼마나 드리면 되겠소......?" 한 번의 발길질에 장소덕은 상대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체험한 듯했다. "장현령,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만 신중히 대답하시오. 대답에 한 치의 거짓이라도 있을 시에는 이 검이 얼마나 날카로운지를 당신 목으로 시험해보게 될 것이오. 공연히 애써 화를 자초하지 마시오? 알겠소?" "예, 예, 잘 알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물어 보십시오.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은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장소덕은 공포에 휩싸여 벌벌 떨었다. 그의 사타구니 사이에 매달려 있는 양물은 조금 전과는 달리 형편없이 졸아든 채 달달 떨리고 있었다. 그는 비로소 느낀 것이다. 상대는 격이 틀린 강호의 고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침입자의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기도만으로도 그는 숨이 턱턱 막힐 듯했다. "이번 달에도 직접 사사도에 다녀왔소?" 침입자, 즉 백육호는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니... 사사도를 어떻게......?" 퍽! "아이쿠!" 장소덕은 복부를 움켜쥔 채 뒹굴었다. 벌거벗은 추괴한 몸뚱이가 바닥을 대여섯 차례나 굴러갔다. 그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난생 이토록 지독한 고통은 처음이었다.


"대답만 하라고 했소." "아, 알겠습니다요......." 장소덕은 부들부들 떨며 손을 싹싹 비볐다. "예.... 보름 전에 소인이... 다녀왔습니다." "그곳 상황을 자세히 말해보시오. 예전과 무엇이 변했는지." "귀... 귀공도 이미 알고 계셨군요? 아니... 아닙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사사도에 큰 변괴가 일어났습죠." "어떻게?" "소... 소인이 그곳에 도착했을 땐 아무도 없었습니다. 관리들은 물론이고... 죄수들도 단 한 명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섯 개의 섬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쥐새끼 한 마리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입지요." 백육호는 경악성을 목안으로 삼키며 급히 반문했다. "그럼 섬 안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단 말이오?" "그... 그렇진 않은 것 같습니다요. 사사도의 도주 처소인 만해관 옆에 조탁 도주의 봉분이 있어 파헤쳐봤는데... 부패하긴 했으나 아직은 알아볼 수 있는 그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었습니다. 목에 큰 상처를 입은 것으로 미루어 누군가에게 타살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밖의 시신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외부세력이 사사도를 침입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조각배 한 척이 고작인 그곳 사람들이 한순간에 증발해 버릴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밖에 눈에 띄는 다른 변화는?" 백육호는 무겁게 물었다. "예.... 사람들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석조 가옥과 최근에 만든 초옥들도 모두 멀쩡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듯... 지극히 평온한 정경이었습지요." "외부세력이 들어왔었다면 장현령은 그들이 누구라고 추측하시오?" "그건... 소인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감히 황실의 명으로 관리되는 동사군도에 무단침입하여 사람들을 모두 데려갈 정도라면... 보통 인물은 아닐 겁니다요. 하지만 소... 소인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이 말씀은 보고를 받고 황실에서 급히 내려오신 어림군(御臨軍) 참장께도 똑같이 드린 말씀입지요." "그 참장의 이름을 기억하시오?" "서... 성은 기억합니다. 동행한 일행들이 등(鄧)장군이라고 호칭하는 걸 들었습니다. 형형한 안광에 행동거지가 신중하여 과연 어림군의 장수로 손색이 없구나 하고 감탄했었지요." 어느 정도 공포감에서 벗어났는지 답변하는 장소덕의 고개가 조금 들려 있었다. "그 등장군이란 자가 당신에게 달리 한 말은 없었소?" "예, 사사도와 관련된 것은 그 어떤 것도 함부로 발설하고 다니지 말라는 엄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은밀히 이곳 수군들을 바다에 풀어 의심이 가는 해적들의 본거지를 뒤져보라는 명도 내렸습죠." "그래, 소득이 있었소?" "웬걸요, 이 일대 몇 군데 해적들의 섬을 급습해 봤으나 무고하게 납치된 몇 명의 상인들을 구출해낸 것 외에는 별무소득이었습죠. 그 어디에서도 사사도 사람들은 그림자도 찾지를 못했습니다." 백육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 다시 날카롭게 물었다. "사사도와 관련된 사항은 항상 당신이 직접 황실로 보고하시오?" "아닙니다요. 이 광동성의 안찰사에게 보고를 드립죠. 이번에도 그리했으나 사안이 심각하다 여겨 황실의 장수가 소인에게까지 와서 확인을 한 것입지요." "좋소. 그렇다면 그 장수는 누가 내려보낸 것이오? 황제요? 아니면 건친왕이요?"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장소덕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리곤 곧 실언했다는 것을 느낀 듯 급히 덧붙였다. "아니... 제 말씀은... 그러니까... 어림군 참장이야 당연히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내려오셨을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됐소,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해도 됐소." 백육호는 장소덕이 사사로이 건친왕부의 명을 받아 움직이는 관리가 아님을 확인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모든 것이 불분명한 시점에서 아무 내막도 모르고 있는 어리숙한 현령 하나를 붙잡고 갑론을박할 일이 아니었다. 이제 그에게는 더 이상 들을 것이 없다는 판단이 섰다. "장현령,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묻겠소. 당신은 사사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소?" 장소덕은 엉뚱한 질문에 잠시 멍한 표정이더니 더듬거리며 답했다. "글쎄요.... 소인의 짧은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습죠. 단지 중죄인들을 격리수용하기 위한 유배지로 쓰기에는 사사도는 적합한 곳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대륙에서 물자와 인원을 지원하기에는 워낙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매번 거친 풍랑과 와류에 목숨을 내놓고 항해를 해야 하니... 사실 소인도 그간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지요. 위에서 하신 일이니 피치 못할 곡절이 있을 테지만 지난 십 년간 막대한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백육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몸을 돌렸다. "당신의 마지막 답변이 목숨을 살렸소." 그 말의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그는 거짓말처럼 장소덕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어이쿠! 십년감수했구나......." 장소덕은 긴장이 풀리자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으리.... 괜찮으시옵니까?" 이불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어린 관기가 재빠르게 튀어나와 장소덕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오냐, 오냐.... 난 괜찮다. 너야말로 무척 놀랬겠구나." 알몸으로 안겨오는 관기의 교태에 장소덕은 한순간에 현령으로서의 위엄을 되찾으며 제법 태연한 미소마저 띠었다. "나으리, 너무 무서워... 꼼짝할 수가 없었나이다." "그래, 나 또한 그러했으니 넌들 오죽했겠느냐. 자... 우선 몸을 좀 씻어야겠으니 욕실로 가자꾸나." 다시 살아났다는 기쁨 하나로 장소덕은 관기 앞에서 추태를 보인 것에 대한 민망함 따위는 접어버린 채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 천첩이 모실 테니 편히 몸을 담그시고 마음을 진정시키세요." "그래, 그러자꾸나. 허허... 이 귀여운 것. 어찌 됐거나 너도 오늘밤 일은 절대 타인에게는 발설해서는 안된다. 알겠느냐?" "걱정 마시와요, 나으리. 천첩이 그런 눈치도 없는 줄 아시옵니까?" "알았다면 됐다. 필시 오늘밤 일은 심상치 않은 곡절이 있음이 분명하다. 나는 물론이고 너 역시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렸다가는 큰 봉변을 당하게 될 게야." 욕실의 목욕통에 몸을 담그며 장소덕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낯이 익어.... 어디서 본 듯도 한 인물인데. 대체 어디서 봤을까......?' 장소덕은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봤으나 결국 알아내지 못한 채 눈을 뜨고 말았다. 관기의 부드러운 손바닥이 온몸을 어루만지자 다시금 욕정의 불꽃이 스물거리며 지펴졌던 것이다. 제 12 장 혈세천하(血洗天下) ① 구룡방(九龍 )의 괴멸! 단 하룻밤 사이에 신흥 강호세력인 구룡방의 천 명이 넘는 무사들이 몰살을 당했다. 구룡으로 일컬어지는 아홉 명의 방주( 主)와 그 식솔들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며, 그토록


위풍당당했던 구룡방의 즐비한 전각과 건물들은 잿더미로 화하고 말았다. 그것은 구천마교(九天魔敎)의 백팔전사(百八戰士)들이 몰고 온 혈풍이었다. 장백파(長白派)의 몰락! 같은 날 밤, 오랜 전통을 이어온 장백파의 문도(門徒) 팔백여 명도 목숨을 잃었다. 또한 장문인인 무진도장(無盡道長)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동체가 양단되는 처참한 모습으로 이승을 등지고 말았다. 그것은 사사련(邪邪聯)의 정예인 구구환사객(九九幻邪客)이 일으킨 혈겁이었다. 강호상에 위명을 날렸던 두 문파가 한 날 한 시에 참화를 당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무림군왕성을 추종했다는 것이었다. 무림은 발칵 뒤집혔다. 명문방파의 지존들은 속속 개봉부의 무림군왕성으로 몰려들어 대책을 수립하느라 고심하는가 하면 몇몇 방파들은 차제에 무림군왕성과 자신들이 무관하다는 것을 속속 강호에 공표하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무림군왕성이 사마척결의 선두로 내세운 태자당마저도 여덟 명의 이탈자가 발생하여 불과 십삼 명의 인원만이 남게 되었다. 그야말로 강호의 인심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사태였다. 이 사태는 무림에 묘한 기류(氣流)를 형성했다. 먼저 무림군왕성과 거리감을 유지해 오던 방파들은 이 사태를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무관심과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반면 평소 무림군왕성 쪽에 서 있던 방파들은 대책을 세우기에 분주했다. 결국 백도무림은 양분(兩分)되고 만 것이다. 반면 구천마교와 사사련이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자 그동안 기가 죽어있던 흑도(黑道)의 방파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지에서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으며 납치와 강간을 공공연히 자행하여 무림천하는 삽시에 흉흉해지고 말았다. 이에 무림군왕성의 성주 용비천군 남궁혁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서둘러 태자당을 강호로 파견했다. 십삼 인의 태자당의 젊은 영웅들과 무림군왕성의 백호단(白虎團) 소속 이백 명의 일급무사들로 이루어진 토벌대였다. 그 조치는 과연 효과가 있었다. 토벌대는 파죽지세로 구천마교와 사사련을 공격했다. 그 결과 불과 삼 개월여 만에 구천마교의 삼개분타와 사사련의 팔개지단이 붕괴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또다시 어지럽게 얽혀버렸다. 그 와중에서 또다시 무림군왕성을 추종하는 숭양문(崇陽門)이 구천마교의 습격을 받고 폐허가 되버린 것이다. 바야흐로 무림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탁한 시대로 접어들고 만 것이다. ②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에 위치한 삼정회(三正會). 삼정회의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대문 앞에는 수백 명의 무사들이 술렁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무림군왕성의 토벌대였다. 그들은 삼정회에 하룻밤의 숙식을 요청했다가 거절을 당한 것이다. 삼정회는 무림군왕성과 관련을 맺었다가 혈사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면서 냉정하게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으으! 비열한 인간들! 목숨을 내놓고 놈들과 혈전을 벌여온 우리들을 이렇게 문전박대하다니......!" 옥선공자 호사붕은 부드득 이를 갈며 분노에 찬 음성을 토해냈다. "당주님!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무림평화를 이룩하고자 생명을 던진 동료들을 생각해서라도 이런 파렴치한 인간들은 마땅히 엄하게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우락부락한 얼굴에 온통 노기를 띄운 철갑신장 장건웅의 말이었다. 여기저기서 옳소! 하는 찬동과 분노의 외침이 일어났다. 십삼 인의 태자당 영웅들을 비롯하여 이백여 명의 백호단 소속 무사들은 모두가 주먹을 움켜쥐며 분통을 토로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남궁청운의 비통함은 심대한 것이었다. 가히 충격적이라 할 수 있는 삼정회의 처사에 그의 자존심은 크나큰 상처를 받은 것이다. 영준하기 그지없는 그의 안면에는 깊은 주름살이 새겨졌다. 그는 눈썹을 파르르 경련하며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때였다. 비음이 섞인 교태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당주님은 직접 나설 필요가 없어요. 객점을 찾아 편히 쉬도록 하세요. 소녀와 몇몇 동지들이 저 삼정회의 비겁한 퇴물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전한 후 돌아가겠어요." 관능미가 물씬 풍기는 화산옥검 연채령의 말이었다. 그러나 남궁청운의 안색은 풀리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하늘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때 침통한 안색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비천검 철무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남궁당주, 우리가 이해하고 물러섭시다." "뭐라고? 이대로 돌아가자는 말씀이오? 난 절대 그럴 수 없소! 수천의 무림동도들이 희생당한 터에 자신들의 안위에 급급하여 우리를 개 쫓듯 하는 저 작자들을 어찌 내버려둔단 말이오? 그럴 순 없소!" 분통을 터뜨리며 나선 것은 구룡방의 소방주인 열화권(烈火拳) 마휘였다. 그는 구룡방과 함께 졸지에 부모와 가족, 문도들이 몰살되어 천애고아나 다름없이 되어 있었다. 철무영은 탄식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마형, 진정하시고 내 얘기를 들어보시오. 만약 우리가 삼정회와 피를 보게 된다면 그건 구천마교와 사사련의 함정에 스스로 발을 들여넣은 것이 될 것이오. 그들은 무림군왕성과 강호제파들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소. 그럴수록 우리들은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오." 그 말에 황보수선이 동조하고 나섰다. "그래요. 앞으로도 삼정회와 같은 방파들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어요. 그럴 때마다 그들을 적으로 간주한다면 백도무림은 저들과 싸우기도 전에 자멸하고 말 거예요. 그러니 신중을 기해야 되요." 텁석부리 수염의 중년대한, 즉 백호단주 철나한(鐵羅漢) 포곤명(包坤明)도 컬컬한 목소리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소성주님, 저 역시도 철공자와 황보소저의 말씀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남궁청운이 장고 끝에 결단을 내렸다. "좋소. 이대로 돌아갑시다. 머지않아 삼정회의 옹졸함을 안주 삼아 거나하게 술잔을 들이키게 될 것이오. 아주 가까운 장래에 말이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하며 남궁청운은 백마의 고삐를 당겼다. 이때 호사붕이 나섰다. "잠깐! 남궁당주님. 이 많은 인원이 객점으로 몰려가는 것은 마땅치가 않습니다. 그것은 무림군왕성의 위명에도 손상을 입는 일입니다. 그러지 말고 여기서 가까운 곳에 저희가 운영하는 만화루(萬花樓)의 항주분점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는 게 어떻습니까? 만화루를 통째로 내드릴 테니 주위의 이목에 신경 쓰지 않고 편히 쉴 수 있을 것입니다." 남궁청운은 반색을 했다. "고맙소, 호형. 무림에서 잔뼈가 굵은 노물들은 꼬리를 말며 동도의 손을 뿌리치는데 무림과 무관한 상계(商界)에 몸담고 있는 호형이 위험을 무릅쓰고 백년 가업을 기꺼이 내놓겠다니 뭐라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소." 남궁청운이 인용한 노물이란 당연히 삼정회를 이끌고 있는 세 명의 수뇌를 일컫는 것이었다. "하하! 그런 하찮은 일에.... 자꾸 그러시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겉으로는 겸양하는 모습이나 호사붕의 얼굴에는 득의의 기운이 가득했다. "그럼 소제가 앞장 서도록 하지요." 호사붕은 준마에 박차를 가했다. 한마디 기합과 함께 적갈색 준마의 복부를 내질렀다.


히히히힝! 두두두두! 말은 번쩍 앞발을 치켜들었다가 곧바로 내달렸다. 군웅들은 그의 뒤를 따라 일제히 말을 달렸다. 자욱한 황진이 구름처럼 그들의 뒤를 가득 메웠다. 만화루(萬花樓). 만금대인 호금수가 운영하는 중원 최대의 기루다. 중원 각지에 열두 개의 분점을 가지고 있는 만화루는 하나같이 호사스런 전각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내부 장식 또한 호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그곳에는 천하 곳곳에서 선발해온 미희(美姬)들이 즐비하여 풍류객들 사이에 명성이 높았다. 더구나 만화루의 항주분점은 미인이 많기로 정평이 나 있는 항주의 특성에 걸맞게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녀들이 가득하여 고관대작의 자제들과 풍류명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이곳은 늘 문전성시를 이루어 오래 전부터 만화루의 항주분점을 일컬어 세인들은 극락원(極樂園)이라 부르기도 했다. 토벌대는 만화루에 들었다. 호사붕은 저녁식사를 겸한 거창한 주연을 베풀어 피로에 지친 군웅들을 위로했다. 산해진미와 명주(名酒)로 가득한 연회를 대한 군웅들은 모두가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게다가 주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무희(舞姬)들의 관능적인 모습에 대개가 젊은 영걸들로 이루어진 토벌대의 눈이 한껏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지난 삼개월 동안 하루도 쉴새 없이 긴장감으로 보냈던 그들이기에 이런 자리는 더욱 더 즐겁기만 했다. 반면 황보수선과 남궁소연은 도통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그녀들은 종아리에서 허벅지까지 트여져 걸을 때마다 속살이 허옇게 비치는 차림의 기녀들이 연회장을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고는 민망하기가 그지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군웅들 사이에 앉은 기녀들의 도발적인 언행 역시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기녀들은 군웅들의 무릎 위에 걸터앉거나 품에 안긴 채 교태를 부리며 술잔을 따랐으며, 어떤 기녀는 아예 노골적으로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기도 했다. "흥! 정말 눈 뜨고 볼 수가 없네!" 남궁소연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내뱉었다. "동생, 우린 자리를 뜨는 게 좋겠어." 황보수선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두 여인은 서둘러 식사를 끝낸 후 조용히 연회장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연채령은 달랐다. 그녀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무희들의 요염한 춤사위를 감상하는 한편 연신 남궁청운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은근히 이런 질탕한 연회 분위기를 즐기는 것 같았다. 야화림(夜花林). 만화루의 후원에 자리잡은 야화림은 온갖 기화이초(奇花異草)가 만발한 화원 한가운데 있었다. 이곳은 특별한 장소로 웬만한 고관 거부들조차 들기가 힘든 곳이었다. 이십여 년 동안 만화루에서 이곳 야화림에 든 손님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야화림의 한가운데에는 아담한 인공연못이 있었고, 연못 가운데에는 정자가 있었다. 자시를 넘은 시각인데도 정자 안에는 주흥(酒興)이 넘치고 있었다. 남궁청운은 술을 단숨에 들이킨 후 탄성을 발하고 있었다.


"흐음! 과연 좋은 술이로군. 그간의 울화와 번뇌가 한꺼번에 씻겨나가는 것 같구나." "호호! 이번엔 천첩의 잔을 받으실 차례이옵니다." 거듭되는 술잔에 남궁청운의 안색은 벌개져 있었으며 그의 총기어린 눈빛도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그의 양옆에는 반라(半裸)이다시피한 네 명의 미희들이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호사붕은 연회를 마친 후 남궁청운을 따로 이곳 야화림에 초청하여 향연을 베풀고 있는 중이었다. 미희들은 몸에 속살이 은은히 비쳐보이는 망사의만을 입고 있었다. 그녀들은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만화루 최고의 미녀들이기도 했다. 서역에서 건너왔다는 팔등신의 금발미녀는 물론이고 남만(南蠻)이 고향인 까만 피부의 미인, 부상국(扶桑國)의 영주의 딸이었다는 앳되 보이는 창백한 안색의 소녀가 남궁청운에게 달라붙어 술을 따라준다, 다리를 주물러 준다, 어깨를 두드려준다 하며 착착 휘감기고 있었다. 또 한 명의 여인은 궁장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삼십대 초반 정도 되어보였다. 나이게 걸맞게 그녀의 몸매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농염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고혹적인 자태로 칠현금을 뜯어 주흥을 돋구고 있었다. "허허! 아방궁(阿房宮)의 주지육림도 이만은 못했을 것이오. 호형, 내 오늘의 극진한 환대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천하의 내로라 하는 한량들도 그림자 한번 구경하기 힘들다는 만화루주가 친히 금까지 뜯어 흥취를 돋구니 정녕 꿈이 아닌가 싶소." 남궁청운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찬사를 발했다. "하하!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소제와 당주님은 혈육이나 다름없는 사인데 이 정도 대접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렇구려. 호형과 소연이 맺어지게 되면 우리는 머지않아 한 집안 식구가 될 테니." "하하! 바로 그렇습니다. 소제는 당주님이 강호의 혈풍을 평정하고 무림을 일통시키는 그 날 소연낭자에게 정식으로 청혼할 생각입니다." "그거 좋소! 그리 하시오. 내 적극 밀어줄 테니. 그리고 그 날은 결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장담하겠소." "물론 그러실 테지요. 소제도 믿고 있습니다." 호사붕이 남궁청운의 기분을 연신 떠올려주는 동안 칠현금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만화루주가 다가왔다. "곧 천하의 주인이 되실 나으리께 신첩이 한 잔 술을 올리고 싶군요." "하하하! 이거 영광이외다." 남궁청운은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자고로 사람은 칭찬에 약한 법인가 보다. "신첩이 기루에 의탁한 지 올해로 꼭 오 년째입니다. 그간 숱한 영웅호걸들을 보아왔으나 나으리 같은 분은 뵌 적이 없사옵니다. 그러니 영웅께서는 굳이 신첩 앞에서 웅지를 숨기실 필요가 없사옵니다." 미녀의 칭찬에 남궁청운의 풀어진 눈에 언뜻 기광이 떠올랐다. "오호! 그대가 내 심중을 모두 헤아리고 있구려." "그렇사옵니다. 나으리께서는 하늘 아래 누구도 섬길 수 없는 절대자의 운명을 타고나셨습니다. 설사 나으리의 부친이라 해도 말입니다. 신첩은 분명 그것을 느끼옵니다." 남궁청운은 문득 눈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그대는 지금 망발을 하고 있다! 세 치의 짧은 혀를 잘못 놀려 목숨을 잃는 경박한 자들이 지천에 널렸거늘 어찌하여 망발을 하는 것이냐?" 짐짓 꾸짖는 남궁청운이었으나 여인의 입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으리의 칼을 받는다 해도 천첩의 예감대로 될 것이옵니다. 아마도 올해 첫눈이 야화림에 설화(雪花)를 만개시킬 때면 나으리께서는 단 하나뿐인 무림지존의 자리에 등극해 계실 것이옵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뱉어내는 당돌한 여인을 남궁청운은 무섭게 노려보았다. 맞은편에 앉아 빈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호사붕은 묘한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잠시 경직되어 있던 남궁청운의 안면이 한순간 눈녹듯 허물어져 내렸다. "고약한 여인이로군 그대는... 예군향(芮君香)이라 했는가?" "예, 그러하옵니다." 남궁청운은 눈을 가늘게 하며 은근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대는 오늘밤 내 침소에 들 의향이 있느냐?" 예군향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이미 몇 해 전에 삼십을 넘긴 신첩이옵니다. 기루에서는 퇴물과 다름없는 나이의 신첩이 어찌 그런 광영을 욕심낼 수 있겠사옵니까? 나으리 또한 곁에 있는 세 명의 아이들만으로도 오늘밤은 부족함이 없을 것이옵니다." 남궁청운은 몸이 달아올랐다. 쉽게 안기는 여인보다는 퉁기는 여인이 더 매력있는 법이라 했던가? "스스로를 비하하면서까지 날 거부하는 것은 아직은 내가 그대를 안을 자격이 없다는 말로 들리는데?" "천만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닳고닳은 천첩의 육신이 그토록 탐나신다면 올 겨울에 다시 한 번 왕림하여 천첩을 찾으시옵소서. 오늘 이후로는 그 날이 오도록 절개를 지키겠사옵니다." "하하하! 과연 천하의 날고기는 사내들을 발 아래로 굽어본다는 예군향이군. 과연 명불허전이야!" 비록 퇴짜를 맞기는 했으나 남궁청운은 잔뜩 흥이 올랐다. 특히나 그를 흥분시킨 것은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비치지 않았던 자신의 야망을 그녀가 한눈에 간파했다는 것이다. "나으리, 대업을 이루시는 날까지 천기를 누설해서는 아니 될 것이옵니다. 또한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자신의 곁에 있음도 늘 유념하시옵소서." 남궁청운은 새삼스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호사붕도 그녀를 쏘아보았다. 예군향은 할말을 다한 듯 입술을 다물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관능으로 뭉쳐진 듯한 몸으로 남궁청운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 "나으리, 다시 뵙게 될 그 날까지 부디 옥체보중 하시길 빌겠사옵니다." 남궁청운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군향, 그대를 기억해 두겠다." 예군향은 호사붕에게도 허리를 가볍게 숙여 예를 취한 후 뒷걸음으로 정자를 빠져나갔다. 그녀가 나간 후 남궁청운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호형이 부럽구려. 저런 영명한 여인을 곁에 두고 있으니 말이오." 매서운 눈초리로 예군향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호사붕은 얼른 안색을 바꾸며 응대했다. "곁에 두다니요? 저 여인은 이곳의 주인일 뿐 소제와는 아무 교류가 없습니다." 남궁청운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소? 그렇다면 혹 영존의 총애를 받고 있어 호형이 자제하는 것은 아니오?" 남궁청운의 예군향에 대한 관심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미색에 홀려서만은 아니었다. 천하의 흐름을 꿰차고 있는 듯한 그녀의 통찰력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소제가 알기로 저 여인은 워낙 결벽증이 심하고 고고한 성품이라 그 누구도 가까이 하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소이다." "허허... 그런가?" 남궁청운은 흡족한 마음이 되어 다시 한 잔의 소흥주(紹興酒)를 기분 좋게 비워냈다. "당주님, 소제는 잠시 동지들의 거처를 둘러보고 올 테니 천천히 즐기고 계십시오." "호형의 노고가 크오. 그럼 빨리 다녀오시오, 내 기다리고 있겠소." 호사붕은 세 여인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건넨 후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나으리, 신첩에게도 한 잔 주시와요." 투명한 망사마저 어느새 발치 아래로 벗어버린 세 여인은 남궁청운에게 달려들었다. 각기 다른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는 세 명의 기녀들에게 남궁청운은 어쩔 수 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으음......." "아이, 나으리......." 정자 안에는 뜨거운 육(肉)의 향연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③ 남궁소연은 기가 막혔다. 아니 아예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연회장에서 황보수선과 먼저 빠져나온 그녀였다. 그런데 황급히 쫓아온 호사붕이 황보수선을 먼저 방으로 안내한 후 그녀에게 별도로 안내한 방은 다른 일행들과는 멀리 떨어진 별채였다. 몸을 씻고 침의로 갈아입은 그녀는 호사스럽고 푹신한 침상에 몸을 눕혔다. 그간의 혈전으로 누적된 피로로 인해 그녀는 금세 잠들 수 있었다. 그런데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녀는 기묘한 냄새를 감지했다. 처음에는 이곳이 기녀들이 있는 곳이니 지분냄새거니 생각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겨버렸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향을 맡는 동안 그녀는 점점 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만 것이다. "크흐흐! 노부 평생에 이런 우물은 처음 보는군." "맞아, 어디 한 군데 흠잡을 데 없는 계집이야." 깊은 수면 속에서 소스라치게 놀란 남궁소연이었다. 갑자기 들려온 음침한 음성에 천 근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얼굴에 온통 검버섯과 지렁이 같은 주름살이 가득한 추악한 두 늙은이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아직도 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고 있지를 못했다. 눈을 떴으되 정신은 여전히 몽롱하기만 했던 것이다. "아직 앳띤 얼굴이건만 몸뚱아리는 터질 것 같단 말야. 흐흐, 익을 대로 익었어." "클클, 과연 그 풋내기 녀석이 통사정 할만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궁소연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도무지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마혈이 제압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머리도 욱신거리는 것이 상황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녀는 뜨악한 느낌에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노선배님들은 누구시고... 또 여기는 어디죠?" 질문을 하면서도 그녀는 스스로도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아름다운 아가씨가 이제야 정신이 드셨구먼." "흐흐, 걱정 말아라. 곧 널 열락의 세계로 인도해 줄 정랑이 도착할 것이다." 남궁소연은 두 노인의 이해할 수 없는 답변을 귓전으로 흘리며 차츰 맑은 정신을 회복했다. 잠시 후 그녀는 대경실색했다. 그녀는 속살이 내비치는 침의 차림 그대로 몇 개의 촛불을 밝혀놓은 웬 허름한 사당 안에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남궁소연은 너무나 놀라 입을 크게 벌렸으나 비명이 나오지 않았다. 놀람이 너무 큰 탓이었다. 이때 두 추괴한 노인들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삼십 년이 넘도록 색을 잊은 채 살아왔거늘... 이 계집의 몸을 보고 있으니 절로 마음이 동하는데......." "그러게 말일세. 그럼 우리가 먼저 손을 대는 게 어떨까? 사실 그 애송이 녀석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본교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잠시 이용할 뿐인데." "이 사람아, 이 계집의 귀가 열려 있으니 말조심 하게." "쯧쯧! 천하의 사독(邪毒)이 언제 이렇게 소심해졌지? 그럼 자네는 손 안에 들어온 천하절색을 곱게 그 애송이에게 넘겨주자는 얘긴가?" "흐흐흐! 그야 물론 아니지. 굴러 들어온 염복을 내차는 바보가 어디 있는가? 교주님도 우리가 이렇게까지 그 풋내기 녀석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은 원치 않을 걸세."


"흘흘, 역시 자네는 화통한 친구야." "흐흐, 그야 이를 말인가? 자, 그럼 서두르세. 어린 녀석이 나타나 훼방놓기 전에." 마주 보며 괴소를 터뜨리던 두 노마두는 징그러운 손길을 남궁소연을 향해 뻗쳐왔다. 남궁소연은 기겁을 했다. "제발 내 몸에 손대지 말아주세요! 노선배님... 제발 이러지 마세요. 흑흑흑......."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는 남궁소연이었다. 그녀는 두 노마의 동정을 사기 위해 오열을 터뜨렸으나 별무소용이었다. 먼저 사독이 손을 뻗어 그녀의 젖가슴을 덥썩 움켜쥐었다. "악!" 남궁소연은 비단폭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하체가 썰렁했다. 또 한 노마가 그녀의 침의자락을 아래서 위로 휙 걷어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그녀의 눈부신 허벅지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말았다. "아악! 그만... 그만해! 이 미친놈들아!" 남궁소연은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그러나 두 노마는 히죽거리며 아랑곳없이 손을 뻗었다. 한 놈은 그녀의 젖가리개를, 한 놈은 한 장밖에 없는 고의를 벗기기 위해. 그때였다. "젠장, 도저히 못 봐주겠군!" 문득 젊은 사내의 음성과 함께 장내에 유연한 인영이 날아들었다. "아니? 웬 빌어먹을 놈이 삼십 년만의 운우지락을 훼방놓는 것이냐?" 막 젖가리개를 벗겨내려던 사독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힐끗 불청객을 일별한 또 다른 노괴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남궁소연의 고의를 잡아 당겼다.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만한 고의가 여지없이 찢겨져 나갔다. 남궁소연은 그만 눈앞에 캄캄해졌다. 태어나서 그 누구에게도 보인 적이 없는 여인만의 은밀한 부위를 훤히 노출시킨 것이다. 그녀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이때 불청객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였다. "더러운 늙은이들이 눈이 멀어 본 공자의 무서움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슈슈슈슉! 불청객의 손에서 십여 개의 비황석(飛蝗石)이 날아갔다. "억?" 두 노마두는 상상을 초월한 급공에 놀랐고, 다시 자신들의 요혈을 향해 정교하게 날아오는 비황석에 놀라 정신이 번쩍 나는 듯 양손을 들어 응수했다. 파― 앙! 따당! 연속으로 경쾌한 소리가 이어지며 사당 바닥에 비황석이 뒹굴었다. 그러나 몇 개의 비황석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사살(邪煞)! 괜찮은가?" 사독의 다급한 외침에 사살이라 불린 노마두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혈해혈(血海穴)과 늑골 아래에 위치한 중부혈(中府穴)에는 비황석이 반 이상 파고들어가 검붉은 피를 흘려내고 있었다. 그나마 순간적으로도 일갑자의 내공으로 호신강기를 운공한 덕분에 목숨만은 간신히 건진 사살은 험악한 눈으로 불청객을 쏘아볼 뿐 반격할 자세조차 취하지 못했다. 사독 역시 무사하지는 못했다. 그의 좌측 다리의 복토혈(伏兎穴)은 비황석에 무참히 찢겨나가 피를 뿜고 있었다. 여색에 눈이 뒤집혀


있는 데다 불청객이 호리호리한 유생풍의 젊은이라 방심했던 것이 뜻밖의 화를 몰고 온 것이다. 사독은 다리의 통증을 참아내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네놈은... 사천당문의 자손이냐?" "그렇소." 불청객은 다름 아닌 금적수재 당세곤이었다. "미리 알았다면 암기에 대비했을 텐데......." "그랬다면 나 역시 비황석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오." "보아하니 암기에 독을 바른 것 같지는 않구나." "물론이오. 사천당문의 문도들은 암기에 독을 사용하지 않소." "제길, 그나마 다행이군. 사독이 독상을 입었다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도 남을 일이지." "그런 걱정은 접어두고 어서 지혈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상처가 얕지 않을 것이오." 기습적인 단 일초의 독문 암기술로 두 노마두를 제압한 당세곤의 얼굴에는 여유로운 승자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빌어먹을, 꼴이 말이 아니군. 오냐, 노부가 스스로 화를 자초했으니 누구 탓을 하겠느냐? 하지만 곧 네놈을 찾아갈 것이다. 노부의 독공으로 사천당문의 독에 도전할 테니 그때 다시 보도록 하자." "얼마든지! 그럼 두 분은 잘 살펴가도록 하시오." 의기양양한 당세곤을 뒤로하고 사독은 사살을 부축하여 사당을 빠져나갔다. 어이없는 참패를 당한 노마두들의 뒷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당세곤은 남궁소연 곁으로 다가가며 히죽거렸다. "아니, 무림군왕성의 공주님께서 어쩌다 이런 봉변을 당하시게 되었소?" "어서... 마혈을 풀어... 주세요." 남궁소연은 눈을 감은 채 울먹거렸다. 가슴까지 말려 올라간 침의와 찢겨져 나간 고의로 인해 여인의 은밀한 부위를 드러내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비참하여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어이쿠! 고정하시오. 남궁소저. 내 혈도를 풀어줄 테니 그만 눈물을 거두도록 하시오." 당세곤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의 옆에 주저앉아 손을 뻗어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흐음? 괴이한 점혈수법이로군. 어떻소? 아직도 움직일 수가 없소?" 눈으로는 여인의 나신을 낱낱이 감상하며 두 손으로는 그녀의 마혈을 풀어준다는 명분하에 멋대로 그녀의 부드러운 속살을 주물럭거리며 그는 물었다. 남궁소연은 그저 눈물만을 쏟아낼 뿐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녀는 당세곤이 일부러 마혈을 찾지 못하는 듯 몸을 더듬어 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의 뺨을 세차게 후려갈기고픈 마음이었다. 갑자기 혈맥이 뚫렸다. "아! 되었소이다. 일어나 보시오, 소저." 당세곤은 큰일을 해낸 듯 손을 탁탁 털며 몸을 일으켰다. 남궁소연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뒤집혀진 침의를 내린 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엉엉! 통곡하듯 울었다. "쯧쯧, 고정하시오. 우선 이 옷이라도 걸치시오." 당세곤은 자신의 장삼을 벗어 내밀었다. 남궁소연은 마지못해 손을 뒤로 내밀어 옷을 받은 후 재빨리 걸쳐 입었다. 당세곤의 장삼은 길어 그녀의 발목까지 완벽하게 가려주었다. 한순간에 기막힌 볼거리가 사라지자 당세곤은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남궁소저, 아까 오면서 보니 만화루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 것 같았소이다." "옛?" 화들짝 놀란 남궁소연은 울음을 꿀컥 삼키며 돌아섰다. "싸움이라니요? 누가 습격이라도 해왔단 말인가요?"


"자세한 건 알 수 없소. 난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어 만화루를 둘러보며 감시하던 중 두 노괴물이 한 여인을 들쳐업고 나가는 것을 보고 혹시나 해서 쫓아온 것이오. 그런데 두 노괴물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려 수백 명의 인영들이 만화루로 덮쳐가는 것을 보게 되었소." 남궁소연은 그만 마음이 다급해졌다. 만화루에 있는 군웅들은 대부분이 만취해 곤한 잠을 자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당공자님, 오늘의 은혜는 마음에 새겨두겠어요. 전... 이만 만화루로 가봐야겠어요." 당세곤이 제지할 틈도 없이 그녀는 몸을 날려 사당문을 나서려 했다. 그러다 동시에 밖에서 달려 들어오던 한 인물로 인해 급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머, 호공자!" "엇? 소연낭자! 이게 어찌 된 일이오?" 호사붕은 남궁소연의 옷매무새를 살펴보곤 안쪽에 서 있는 당세곤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호공자님은 어떻게 이곳에 왔지요? 만화루에 혈전이 벌어졌다는데......." "그렇소. 구천마교와 사사련의 마졸들이 급습해 왔소이다. 지금 동지들과 치열한 혈전을 벌이고 있소. 그 와중에 소연낭자가 보이지 않아 필경 납치를 당했으리라 생각하여 이 일대를 샅샅이 뒤지던 중이오. 그건 그렇고... 저 당가 놈이 소연낭자를 납치했었단 말이오?" 남궁소연은 눈을 부릅떠 호사붕의 안색을 쏘아보다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몽혼약에 의식을 잃고 두 노마두에게 납치되었어요. 당공자님이 절 구해주셨어요." "그... 그렇게 되었단 말이오?" "그래요." 남궁소연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호사붕의 변화를 살폈다. 이때 당세곤이 안에서 걸어나오며 말을 건넸다. "남궁소저, 나 역시 동도들이 습격을 받은 것을 알고 그냥 지나칠 수 없으니 어서 만화루로 돌아갑시다." "그래요. 어서 가요, 당공자님이 함께 가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남궁소연은 얼른 화답했다. 구천마교와 사사련이 연합했다면 그 위세는 대단할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일행들은 모처럼만의 주연을 즐기고 퍼져 있는 상태가 아닌가? 이럴 때 용봉칠영의 일인인 당세곤이 가세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녀는 호사붕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신형을 날렸다. 휘영청 밝은 만월을 품에 등지고 날아오른 남궁소연의 날씬한 교구를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호사붕은 막 몸을 날리려던 당세곤에게 시비를 걸었다. "당가야! 네놈이 이곳에 어떻게 나타났는지 모르겠으나 다시 한 번 소연낭자 주위를 배회했다가는 내 손에 곤욕을 치르게 될것이다!" "하하하! 호사붕, 네놈이야말로 본 공자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해라. 특히 이런 호젓한 곳에서 다시 조우하게 된다면 그 날이 곧 너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 오늘은 하늘이 네놈을 살린 줄이나 알아라." 당세곤의 호리호리한 체구는 곧바로 남궁소연의 뒤를 쫓아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으으! 당가 네 이놈......." 호사붕은 이를 갈며 당세곤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잠시 후 그는 사당 안을 살펴보았다. 바닥에 점점이 선혈이 떨어져 있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동시에 남궁소연의 것으로 짐작되는 찢어진 고의자락도 눈에 들어왔다. "빌어먹을 늙은이들.... 감히 내 여자를 손대려 하다니!" 그는 치미는 울화를 쉽사리 삭히지 못하고 사당 안을 닥치는 대로 부수며 괴성을 내질렀다. "으아아악!" 꽈르릉!


잠시 후 사당 한 채가 그의 손에 의해 풍비박산이 나버리고 말았다. ④ 아비규환(阿鼻叫喚)! 아니, 지옥도(地獄圖)였다. 호사스런 고루전각들과 화원, 인공연못으로 이루어진 만화루의 아름다움은 간 곳이 없었다. 오백여 명의 무림고수들이 얽히며 뿜어내는 피보라와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 바닥에 나뒹구는 시신들로 만화루는 참경의 극을 이루고 있었다. 곳곳에 동체가 분리된 시신과 잘려나온 수급이 나뒹굴고 있었다. 바닥이 환히 보이던 연못물도 시뻘건 혈수(血水)로 화해버리고 말았다. 고수들의 장력에 못이겨 화원의 꽃나무는 짓뭉개지고 뿌리째 뽑혀 나갔으며, 전각과 방사의 벽, 담장은 여기저기 허물어지고 말았다. 창창창! 꽈르릉......! "으악! 크아악!" 병장기 부딪치는 소음과 폭음, 단말마의 비명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어둠 속에서 피아도 구별하지 못한 채 그저 눈앞을 가로막는 그림자라면 무조건 장검을 휘둘러대는 실정이었다. 눈앞의 인영의 가슴에 검을 쑤셔박았던 자는 곧 누군가의 창에 등을 관통당해야만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무림군왕성의 토벌대는 속속 쓰러지고 있었다. 특히나 주색에 절은 백호단의 무사들은 무공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한 채 하나둘 쓰러져갔다. 핏빛 전포(戰袍)를 걸친 구천마교의 백팔전사들은 완벽한 계획하에 쳐들어 왔으며 적절한 전법과 진세로 밀어붙여 백호단의 무사들을 여지없이 짓밟아댔다. 얼굴을 두건으로 감싼 사사련의 구구환사객들은 주로 태자당의 젊은 영걸들을 상대로 진세를 발동하여 무자비한 공세를 가하고 있었다. 영걸들은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연신 뒤로 밀리며 고전을 면치 못하였으며, 이미 서너 명의 영걸들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다만 몇 잔의 술을 들이켰을 뿐 과음을 하지 않고 기녀를 품지 않았던 철무영과 여웅을 포함한 오륙 명의 영걸들과 황보수선, 연채령 만이 평소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간신히 몸을 방어할 뿐이었다. 그나마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사사련의 네 명의 절세고수가 장내에 뛰어들어 철무영과 황보수선을 견제하자 태자당의 기세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백척간두(百尺竿頭). 풍전등화의 위기상황에 몰렸음에도 그들의 우두머리인 남궁청운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같은 시각. 남궁청운도 위기에 몰려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야화림의 정자에서 그는 구천마교의 사 인의 절정고수들에게 협공을 당하며 전신을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를 열락 속에 몰아넣었던 세 기녀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알몸에 간신히 바지만을 꿰입은 채 허우적대고 있었다. "크크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쳐대던 칠절신군이 고작 이 정도였느냐?" 동서남북 네 방위를 점한 채 여유 있는 자세로 남궁청운을 핍박해 들어가던 네 명의 인물은 하나같이 늙은이들이었다. 그들 중 가장 연로해 보이는 북쪽 방위의 노괴가 조소를 흘리며 판관필을 휘저었다. 우우���! 판관필은 허공에서 무수한 필영을 그려내며 남궁청운을 압박해 갔다. 그러나 남궁청운은 그의 조소에 대꾸하기는커녕 제대로 모아지지도 않는 진기를 억지로 끌어올리느라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어찌된


셈인지 진기가 산산이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대형! 이제 그만 끝냅시다. 주색에 절어있는 놈을 상대로 구천마교의 사대봉공(四大奉公)이 이만큼 놀아줬으면 예우는 충분히 해준 셈이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잠시 즐거웠으나 놀이에 싫증이 나던 참이었다." 스스로 사대봉공이라 신분을 밝힌 네 마두의 공세가 눈에 띄게 잔혹해졌다. "칠절신군! 숙취는 저승에 들어가서나 깨야 될 운명이로구나." "클클, 이런 철부지 녀석 하나때문에 본교가 그토록 골머리를 썩혔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소이다." 판관필과 검, 도, 혈륜(血輪)이 어지럽게 허공을 가르며 남궁청운을 향해 짓쳐갔다. 맨손으로 한순간 한순간의 고비를 위태롭게 넘겨가던 남궁청운은 이번 공세를 견뎌낼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단 한 번의 출수를 위하여 아껴두었던 진기를 양손에 끌어냈다. 무림에 출도한 이래 단 한 차례도 시전해 본 적이 없었던 패왕수라공(覇王修羅功)이 장심에 어느 정도 모아졌다고 느낀 순간 그는 일성 포효를 발했다. "크아아아!" 꽈르르릉! 사자의 포효성과 더불어 암천을 일시에 무너뜨릴 듯한 굉음이 터졌다. 그야말로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듯했다. 그 바람에 상황은 일변하고 말았다. 노도와 같은 기세로 남궁청운을 덮쳐가던 네 마두는 남궁청운이 펼친 최후의 신공에 휘말리고 말았다. 혈륜으로 남궁청운의 허리를 세 치 이상 파고들었던 노마두는 그만 벼락 같은 기운이 역으로 팔을 타고 흘러들어 심장이 파열되어 즉사하고 말았고, 검으로 남궁청운의 가슴 한 치 가량 살점을 베어버린 자는 남궁청운이 휘두른 장력을 정통으로 얼굴에 맞고 머리통이 박살나며 날아가고 말았다. 판관필을 구사하던 사대봉공 중의 첫째는 필을 제대로 휘둘러 보기도 전에 칠팔 장을 뒤로 퉁겨나가 고목을 들이받으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또한 장도(長刀)를 막 남궁청운의 등에 쑤셔박던 노마는 남궁청운이 왼손을 뒤로 빙글 돌리는 바람에 막강한 강기에 휘말려 허공에서 곤두박질을 치며 날아갔다가 간신히 바닥에 몸을 굴리며 겨우 목숨만을 부지할 수 있었다. "......!" 남궁청운은 제자리에 우뚝 선 채 눈을 부릅뜨고 서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멀쩡한 듯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굳게 다물고 있는 입술을 비집고 흘러내리는 선혈은 그렇다 치고, 코와 귀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위중한 내상을 입었음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두 마인을 철혈의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으으......." "이럴 수가......?" 요행히 목숨을 건진 두 노마는 신음을 흘렸다. 그들은 남궁청운이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었음은 알아보았으나 방금 겪은 끔찍한 상황으로 인해 온통 공포감에 휩싸여 있었다. "대형.... 승부를 걸어 볼까요?" 떨리는 손으로 장도를 찾아 든 자가 조심스럽게 첫째의 의향을 물었다. 첫째는 대답을 미룬 채 남궁청운의 신색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남궁청운이 늘어져 있는 양팔을 들어 가슴 앞에서 팔짱을 틀었다. 그의 두 눈은 내심 염두를 굴리고 있는 사대봉공의 첫째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 흘렀다. "돌아... 가자!" 첫째 노마는 탄식을 토해냈다. 결정을 내렸음에도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잠시 남궁청운을 주시하며 입을 놀렸다. "남궁청운! 네놈이 이겼다. 무림군왕성의 소성주가 이런 극악한 마공을 연성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분명... 너는 강하다. 노부가 알고 있는 그 누구보다도. 하지만 너는 영원한 승자일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네놈도 곧 알게 될 것이다."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기고 두 봉공은 시신으로 화한 두 동료의 시신을 걸쳐멘 후 몸을 날려 사라졌다. "......." 그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을 부릅뜨고 서 있던 남궁청운의 몸이 부르르 경련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쾌속한 신법으로 날아와 남궁청운의 곁에 내려섰다. 그때까지도 남궁청운은 목석이 된 양 우뚝 서 있었다. 나타난 인영은 바로 그의 수하인 잠혼도객 종리무였다. "당주님! 괜찮으십니까?" 종리무의 눈에 당혹함이 어렸다. 그는 슬쩍 남궁청운의 어깨를 건드렸다. 그러자 그토록 굴강했던 남궁청운의 몸이 마치 썩은 볏단 허물어지듯 맥없이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종리무는 급히 남궁청운을 안아 바닥에 눕힌 후 맥을 잡아 보았다. '이럴 수가! 심맥이 모두 절단나 버렸구나.' 종리무의 안색은 흙빛이 되어버렸다. 남궁청운은 상상을 절하는 강인한 정신력과 특유의 자존심으로 위기를 버텨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의 오장육부는 제자리를 이탈해 버렸으며, 전신의 혈맥이 터져버린 상태였다. "회생불능이로군. 어쩌다 이 지경이 됐단 말인가?" 종리무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다시 뇌까렸다. "총관의 노발대발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종리무는 남궁청운을 안고 일어섰다. "어쨌든 의원에게 보여 봐야겠다." 그는 남궁청운을 안은 채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상황은 반전되었다. 남궁소연과 당세곤이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용봉칠영의 일원이니 만큼 지닌 바 무공이 절륜무비했다. 그들은 전장에 뛰어들자마자 추호도 인정을 두지 않고 마졸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변화로 인해 구천마교와 사사련의 연합세력의 진용은 일시에 와해되고 말았다. 일단 균형이 깨지자 궁지에 몰려있던 군웅들은 전열을 재정비할 여유를 찾았으며 차츰 본연의 무공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군웅들은 한숨 돌리게 되었고, 그 틈을 이용하여 종리무는 뒤늦게 남궁청운에게 달려갈 수 있었다. 한결 여유를 되찾은 철무영과 황보수선은 더욱 매서운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으며, 태자당의 영걸들과 사기를 되찾은 백호단도 무서운 공세를 가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삐이익! 어디선가 날카로운 휘파람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구천마교와 사사련의 마졸들이 일제히 퇴각하기 시작했다. "놈들이 도주한다! 한 놈도 놓치지 말아라!" 백호단주 철나한 포곤명의 우렁찬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급습으로 인해 수많은 동료들을 잃어버린 토벌대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은 마졸들이 퇴각하자 그대로 보낼 수가 없었다. 마졸들의 뒤를 추격하며 분노에 찬 공격을 펼치자 수십 명의 마졸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게 되었다. "모두 추격을 중지하고 돌아오라!" 갑자기 토벌대에 제동이 걸렸다.


남궁청운을 품에 안고 힘없이 나타난 종리무를 발견한 포곤명의 명령이었다. 그는 대경하여 종리무에게 달려갔다. "어떻게 된 건가? 소성주님의 용태가......?" "아무래도......." 종리무는 말꼬리를 흐렸다. 포곤명은 급히 남궁청운의 상태를 살핀 후 주위를 둘러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호공자! 어서 의원을 불러주시오. 그리고 이곳에 의술에 정통한 분이 계시면 도와주시오. 지금 당주님의 생명이 위태롭소이다!" 그 말에 남궁소연과 호사붕, 연채령이 다급히 달려왔다. "오라버니!" "당주님!" 애타는 여인들의 절규 속에서도 남궁청운은 미동도 하지 못했다. 호사붕은 침통한 표정으로 중인들에게 말했다. "내가 곧 항주의 명의란 명의는 모두 끌고 올 테니 우선 당주님을 방으로 옮기시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달려가는 호사붕을 남궁소연은 싸늘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이때 철무영이 군웅들을 돌아보며 무겁게 말했다. "여러분, 우선 부상자들을 방으로 옮겨 응급치료를 해야겠소. 의원들이 올 때까지는 이곳을 수습하는 것이 좋겠소이다." 토벌대의 피해는 심각했다. 백호단의 이백 명의 무사들 중 백여 명이 목숨을 잃거나 중상을 입었으며, 열세 명 태자당 영걸 중에서도 다섯 명이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그야말로 무림에 나선 이래 최대의 좌절을 맛본 것이다. "황보소저, 다친 데는 없소이까?" 멍하니 서 있는 황보수선의 곁으로 당세곤이 다가오며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예, 마침 당소협이 도와주셔서 전 아무 일 없었어요. 도움에 감사드려요." "하하! 무사하시다니 다행이오. 이곳으로 달려오며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르오." 황보수선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한데 당소협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된 거죠?" "사실 소생이 태자당의 뒤를 미행한 지는 보름이 넘었소이다. 아무래도 날 무림의 공적으로 몰아넣은 간교한 자가 태자당 내부에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소. 그래서 은밀히 뒤를 쫓으며 의심 가는 자들을 내사하던 중 오늘의 변고를 만나게 된 것이오." "그랬었군요. 이유야 어찌됐든 당소협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오늘밤 무사하지 못했을 거예요." "소저께 그런 말씀을 들으니 소생도 기쁘기 한량 없소이다. 사실 지난 보름간 밤잠을 설치고 끼니도 걸러가며 태자당의 꽁무니를 쫓아다닌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소이다." "그게 뭔데요?" 기실 황보수선은 대부분의 태자당 영걸들과 달리 당세곤에 대해 그리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가 동료들을 살해한 용의자로 지목되어 따가운 눈길을 받을 때도 그녀는 내심 그가 범인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태자당이 위기에 몰려있을 때 그가 도움의 손길을 뻗치자 그에게 호감마저 느끼게 된 지금이었다. "바로 황보소저 때문이오." "예? 저 때문이라구요?" 황보수선은 눈을 크게 떴다. "그렇소. 그날 어쩔 수 없이 태자당에서 이탈한 후 소생은 황보소저에 대한 그리움으로 매일 밤을 지새워야 했소. 그리고 결심했소. 누명을 벗고 소저의 앞에 당당히 서겠노라고......."


뜻밖의 고백. 분명 사랑의 고백이었다. 황보수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곧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후훗.... 과연 장안에 자자한 소문대로 여인을 홀리는 당소협의 입심은 대단하군요. 미안하지만 전 그만 동료들 일손을 거들러 가봐야겠어요." 당세곤의 갑작스런 구애를 가볍게 받아넘긴 그녀는 군웅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세곤은 그녀의 뒤를 쫓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등에 진심이 담긴 듯한 뜨거운 말을 풀어냈을 뿐이었다. "사실 그간 소생이 파락호와 다를 바 없는 방탕한 생활을 해온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황보소저를 향한 마음은 어디까지나 진심이오. 이 당모가 난생 처음으로 느낀 순수한 마음을 언제고 소저도 아실 날이 있을 것이오. 뿐만 아니라 소생은 칠절신군과 비천검도 소저를 은연중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하지만 난 결코 소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소저를 향한 사랑이 깊고 크다고 자부하기 때문이오." "......." 황보수선은 부지중에 걸음을 멈추었다. 당세곤의 말 속에 담긴 진심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우아한 뒷모습에는 당세곤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집요하게 따라붙고 있었다. ⑤ 탕탕탕......! 부서져라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백육호였다. 어젯밤에는 약방(藥房)을 연 이후로 가장 많은 환자가 몰리는 바람에 새벽에야 간신히 눈을 붙였던 터라 그는 성가신 느낌이 들었다. 항주에서 자그마한 약방을 열고 뿌리내린 지도 어언 육 개월여가 지났다. 그간 그의 약방을 다녀간 환자들의 입을 통해서 그는 명의(名醫)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하루종일 환자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그 바람에 밤늦도록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야 했다. 그가 항주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사사영 때문이었다. 망망대해의 술통배 속에서 그녀가 의식을 잃기 전, 항주의 명승지 중 하나인 육화탑(六和塔)을 자주 찾았노라고 말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장차 사사영이 그를 찾아오기 쉽도록 육화탑 근방에 약방을 열었으며 간판도 백육호약재방(百六號藥材房)이라 내걸었다. "뉘시오?" 잠이 덜 깬 채 문가로 걸어간 그는 짐짓 짜증스럽게 물었다. "백공자님! 저 수월(水月)이에요. 어서 문을 열어주세요." 수월이라면 며칠 전 매독(梅毒)에 걸려 이곳을 찾아왔던 만화루의 기녀였다. 백육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문의 빗장을 당겼다. "무슨 일이오? 어디가 덧나기라도 했소?" 문이 열리자 다급히 들어선 것은 이십대 초반의 아름다운 여인으로 과연 만화루의 기녀 수월이었다. 그녀는 손에 등롱을 들고 있었다. "웬걸요? 천첩은 백공자님의 신묘한 의술 덕분에 그 지긋지긋한 병마에서 벗어나 벌써부터 손님을 맞고 있는 걸요." 수월의 매독은 증세가 자못 심각했었다. 국부는 물론이고 가슴, 배, 심지어는 수족까지 장미빛 반점으로 뒤덮여 조금만 더 두었다면 온몸이 썩어 문드러질 지경이었다. 백육호는 그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 참 다행이구려. 그런데 무슨 일로 이 새벽에?" "예, 먼저 백공자님의 숙면을 깨운 것에 사죄드리겠어요. 하지만 저희 만화루에 끔찍한 변고가 발생하여 이렇게 경황없이 찾아왔으니 용서해 주세요." "흐음. 변고라 함은?" 백육호는 잠이 달아난 것을 느꼈다. 비록 숙면의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다시 잠들기는 틀렸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어젯밤 만화루의 작은 주인이신 호공자님이 강호의 협객분들을 모시고 왔답니다. 그런데 연회가 끝날 때쯤 갑자기 흉적들이 기습해와 수많은 사상자가 났답니다. 참, 호공자님이 모시고 온 협객분들은 무슨... 태자당(太子黨)이라고 불리는 분들이었어요." "......!" 백육호의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에서 번쩍 기광이 솟아났다. 그러나 그 광채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헛걸음을 했구려. 난 무림인은 진료하지 않소." 수월은 다급하게 말했다. "천첩도 백공자님이 무림인들과 관리에게는 약재 한 첩도 처방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허겁지겁 달려온 데는 이유가 있답니다. 그것은 천첩이 보기에도 태자당의 영웅들은 하나같이 의���심이 투철한 인중용봉들이기 때문이에요. 그런 걸출한 영웅들이 치료를 받지 못해 목숨을 잃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워 백공자님께 간청을 드리러 온 거예요. 그러니 부디 오늘 하루만이라도 그분들을 진료해 주세요. 네?" 백육호는 냉담하기만 했다. "항주에 의원이 나 혼자만은 아니오. 늦기 전에 다른 의원을 찾아 보시오." "아니에요. 호공자님 말씀으로는 어지간한 의원으로는 손도 댈 수 없는 중상을 입은 분들이 부지기수라고 했어요. 더구나 태자당의 당주이신 남궁공자님은 오장육부가 이탈하고 혈맥이 모두 터져버려 항주의 어떤 의원도 살릴 수가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천첩이 백공자님께 달려온 거예요." 백육호의 마음은 여전히 움직일 줄 몰랐다. "나 역시 다른 의원들과 다를 게 없소." "아니에요. 어떤 연유로 백공자님께서 이런 외진 곳에서 허름한 약방을 꾸려나가시는 줄은 모르나 이곳을 다녀간 환자들은 백공자님이야말로 하늘이 내려주신 신의(神醫)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어요. 천첩 또한 그렇게 믿고 있고요." "쯧쯧, 어리석은 사람들이군. 희대의 신의 성수신의(聖手神醫)가 버젓이 하늘 아래 존재하고 있거늘 어찌하여 나 같은 돌팔이에게 그런 칭호를 붙인다는 건가?" 백육호는 혀를 찼다. 그의 뇌리에 한 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슴이 뭉클하도록 보고 싶은 인물, 육노인이었다. "백공자님, 다른 호걸들은 그렇다 쳐도 각 방파의 대를 이어야 할 후손들로 이루어진 태자당의 영웅들 중 한 사람만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마땅히 그리 해야 인간의 도리가 아닐까요?" 끈질기게 늘어붙는 수월이었다. 백육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부상당한 자들 중에 혹시 황보세가와 철검장의 후예도 포함되어 있소?" "어머! 백공자님도 그분들을 아시나보죠?" "......." "글쎄요. 그 두 분이 어떤 상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어젯밤 싸움이 무척이나 끔찍했다는 거예요. 천첩이 언뜻 보니 피바다 속에 쓰러져 있는 무사들이 살아있는 무사들보다 훨씬 많았어요. 오죽하면 당대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남궁공자께서 그 지경이 되셨겠어요?" 백육호의 눈에 갈등이 어렸다. 수월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백공자님, 일단 함께 가셔서 둘러보신 후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시면 되잖아요?"


"알았소, 이제 그만 하시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정말 감사 드려요! 백공자님." 몇 번이고 절을 하는 수월을 밖에 둔 채 백육호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몇 가지 필요한 약재를 챙긴 후 나왔다. "갑시다.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백육호는 새벽 여명 속으로 나섰다. 수월은 신이 나서 그의 뒤를 쪼르르 따라왔다. 백육호는 새벽 거리를 걸으며 심호흡을 했다. 그의 이번 행차의 결과가 어찌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치 앞의 일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간이 아니던가? 제 13 장 젊은 영웅(英雄)들 ① 백육호는 만화루로 들어섰다. 만화루의 대청에는 수십 명의 부상자들이 즐비하게 누워 있었으며 항주 근방에 있는 이름난 의원들이 총동원된 듯 그들은 분주히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백육호는 곧바로 후원쪽으로 안내되었다. 벌써 십여 명의 의원들이 남궁청운의 상세를 보았으나 모두가 포기했던 모양이었다. "오라버니! 흑흑흑......." 방안에 들어서기도 전에 여인의 흐느낌소리가 흘러나왔다. 방안에는 십여 명의 군웅들이 침상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백육호가 들어서자 군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향해졌다. 개중에는 기대에 찬 표정을 짓는 자도 있었고, 어떤 자는 그가 지나치게 젊은 것에 실망하는 눈치이기도 했다. "어디 봅시다." 군웅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음에도 백육호는 추호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군웅들 사이를 헤치고 남궁청운이 누워있는 침상으로 다가갔다. 남궁청운은 반듯한 자세로 누워있었다. 그의 얼굴은 밀랍처럼 창백했으며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어 마치 시체 같은 모습이었다. 백육호는 맥도 짚어보지 않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모두들 나가 주시겠소?" 군웅들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때 남궁소연이 그의 소매를 잡고 매달렸다. "이보세요! 의원님.... 저희 오라버니를 살릴 수 있을까요?" 남궁소연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백육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직은 뭐라 말할 수 없소. 하지만 절망적인 것은 아니오. 상태가 워낙 위중하여 시간이 없소이다. 그러니 모두들 나가 주시오." 군웅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과연 눈앞의 젊은 의원을 믿을 만한 지가 자신이 없는 듯했다. 한편 백육호는 군웅들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그의 눈이 철무영을 거쳐 황보수선에게 멎었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황보수선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백육호는 무심히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래요, 여러분. 이 분이 고칠 수 있다잖아요. 어서들 나가주세요." 남궁소연은 다급하게 군웅들에게 말했다. 호사붕이 미심쩍다는 듯이 반론을 펼쳤다. "이것 보시오. 정말 당주님을 살려낼 수 있소? 공연히 두 번 죽이는 짓을 할 것 같으면 손을 떼는 게 좋을 것이오." 그러자 황보수선이 나서며 꾸짖었다. "호소협! 그 무슨 망발인가요?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매달려야 할 때예요. 어쨌든 의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러니 더 이상 실례의 말씀은 삼가세요!" 평소 온화한 성품이던 황보수선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옳소." "맞는 말이오. 운명은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소." 군웅들은 하나둘 밖으로 사라졌다. 호사붕은 여전히 불만인 듯 머뭇거리다가 할 수 없이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의원님." 마지막으로 남궁소연과 연채령, 황보수선이 밖으로 나갔다. 방안에는 남궁청운과 백육호만이 남게 되었다. "황보소저, 왜 그리 화가 나셨소?" 황보수선이 회랑으로 나선 순간 기다리고 있던 철무영이 낮은 음성으로 그렇게 물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왜 그런지." 황보수선은 당혹한 표정으로 대꾸한 후 종종걸음으로 그를 지나쳤다. 그녀는 회랑의 좌우에 있는 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딘가 모르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철무영은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동안 늘 침착하고 사려 깊은 모습을 보이던 그녀였다. 그런데 방금 전의 그녀의 모습은 마치 무엇엔가 홀린 듯했던 것이다. 군웅들은 이제나저제나 하며 의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들은 방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약속은 약속인지라 아무도 감히 방안으로 뛰어들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저 의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일각이 여삼추라 했던가? 기다림의 시간은 한없이 지루했다. 인시(寅時) 무렵, 드디어 방문이 열리며 젊은 의원의 모습이 나타났다. 밖에서 기다리던 군웅들은 우르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어떻게 됐나요? 백공자님." 극도의 긴장으로 안색이 창백해진 남궁소연이 백육호의 소매를 잡으며 물었다. "며칠 요양하면 일어날 것이오." "와아!" 백육호의 무심한 답변에 군웅들의 환호성이 이어졌다. 남궁소연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급히 반문했다. "정말... 오라버니께서 살아나신 건가요?" "그렇소." "아!" 두 여인이 픽 쓰러졌다. 남궁소연과 연채령이었다. 극도의 긴장감에 싸여있던 두 여인은 일시에 탈진현상을 보인 것이었다. "다른 중상자가 있소?" 백육호는 군웅들을 둘러보며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백호단주 포곤명이 공손히 답했다. "대인께서 직접 수고하실 일은 없소이다. 다른 의원들이 무난히 수습하고 있으니까요. 아무튼 대인께서 사경을 헤매던 소성주님을 구해주셨으니 그 은혜는 하해와도 같습니다. 무림군왕성 사천여 식솔을 대신하여 소생이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포곤명은 두 손을 마주잡은 채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때 호사붕이 눈알을 굴리며 나섰다. "백대인, 소생이 신의를 몰라보고 실언을 한 것 같소.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라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내 곧 주안상을 보라 이르겠소이다." 백육호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면 이만 돌아가겠소. 내 환자들이 몰려올 시간이오." 백육호는 휭하니 몸을 돌려 성큼성큼 회랑을 걸어나갔다. "아니... 백대인! 그렇다면 수고비라도 받아가야 할 것 아니오?"


호사붕은 품속에서 대충 잡히는 대로 한 웅큼의 금자를 집어들고 백육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백육호는 호사붕이 거만한 자세로 내민 손을 잠시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그가 집은 것은 금화 한 닢이었다. "이것이면 충분하오." 백육호는 어이없어 하는 호사붕의 어깨를 가볍게 밀며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아니... 뭐 저런 건방진 놈이......." 무안을 당한 호사붕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러나 군웅들이 그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음을 알고 급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포곤명이 급히 나섰다. "이대로 은공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오. 내 직접 배웅이라도 하고 오겠소이다." 포곤명은 빠른 걸음으로 백육호를 쫓아 나갔다. 그러자 황보수선과 남궁소연, 철무영 등도 뒤따라 나섰다. "백대인!" 포곤명은 저만치 마당으로 내려서고 있던 백육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은공을 마차로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오." 백육호는 고개를 저었다. "호의는 고맙소만 사양하겠소. 의원으로서 의당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러면 도리어 거북할 뿐이오." 백육호는 끝내 포곤명의 호의를 거절하고 휘적휘적 걸어갔다. 뒤따라 나왔던 군웅들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이 백육호의 어깨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군웅들은 왠지 그에게 신비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② 백육호는 만화루을 빠져나온 후 관도를 거쳐 한 야산으로 접어 들었다. 새벽 안개가 자욱이 깔려있는 산길이었다. 이제 언덕만 두어 개 넘으면 명승지 육화탑이 나타나고 그가 경영하는 약방이 나올 것이다. 그가 한적한 이 길을 택한 것은 항주 시내로 가는 것보다 지름길이기 때문이었다. "......." 그는 유람에 나선 풍류객인 양 유유자적한 자세로 안개를 헤치며 걸어갔다. 방금 전 당대의 영웅으로 불리는 남궁청운을 구해준 일도 그는 이미 잊어버린 듯했다. 그는 안개 속을 걸으며 명상에 잠겨있었다. 그의 뇌리에는 쉴새없이 수많은 상념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되풀이된 일이었다. 동사군도를 탈출한 이후 지금까지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았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틈만 나면 동사군도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 부질없는 상념인 것을.......' 백육호는 언덕을 넘어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그때였다. "멈춰라!" 문득 뒤쪽에서 음침한 외침이 울렸다. 백육호는 걸음을 멈추고 서서히 돌아섰다. 안개 속에서 십여 개의 홍색인영이 날아오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앞에는 얼굴에 붉은 두건을 이마에 두른 홍의인 십여 명에 내려섰다. 그들은 사사련의 구구환사객이었다. "네놈이 백가 성을 쓰는 의원이 맞느냐?" 한 명이 다짜고짜로 물었다. "그렇소만." 백육호는 자신을 빙 에워싸는 무리들을 둘러보며 담담히 대꾸했다. "클클! 다행이군. 고작 여기밖에 안 왔으니."


그자는 일행 중 수뇌로 보였는데 육순 가량의 노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북망산(北亡山)의 입구로 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군." 백육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무슨 소리요? 이곳에 무덤 쓸 일이 있소?" "흐흐흐! 말귀를 빨리 알아듣는군. 그렇다. 이 호젓한 곳에 네놈을 묻어주기 위해 사사련의 사대호법의 일원인 노부 추도남(秋途南)이 친히 행차하게 되었다." 백육호의 눈에 한순간 기광이 스쳐 지나갔다. "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이곳에 뼈를 묻어야 하오?" 추도남은 만면에 살기를 드러내며 말했다. "물론 궁금하겠지. 너 같은 약장수를 저승으로 보내기 위해 사사련의 어르신께서 거동하셨으니 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주지. 그건 네놈이 어설픈 잔재주로 칠절신군을 돌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알겠느냐?" 백육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죽어야 할 이유란 말이오?" "흐흐, 그렇다." 추도남은 한 걸음 물러나며 명령을 내렸다. "시간끌 것 없다. 어서 이 약장사를 북망산으로 보내라!" 구구환사객 중 한 명이 번뜩 신형을 날려왔다. 쐐애액! 그는 다짜고짜로 장도를 휘둘렀다. 아마도 일도(一刀)면 충분히 상대를 양단할 수 있다 생각했는지 그는 단순한 초식을 펼쳤다. 그런데 상황은 엉뚱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엇?" 환사객 전두충(田杜忠)은 장도가 텅 빈 허공을 가른 것을 느끼고 엉거주춤 선 채 두리번거렸다. 의당 피를 뿌리며 두쪽이 나있어야 할 젊은 의원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돌아가시오. 난 당신들과 놀 생각이 없소. 더구나 하나뿐인 목을 그냥 내줄 생각은 더욱 없으니 말이오." 백육호의 음성이 전두충의 등뒤에서 들렸다. "헉!" 전두충은 머리털이 곤두섰다. 지척에서 들린 소리로 미루어 만일 상대가 슬쩍 손만 뻗었다면 그는 등에 일격을 고스란히 얻어맞았을 것이다. 전두충은 이를 악물며 장도를 뒤로 돌려 휘둘렀다. "이런 미꾸라지 같은 놈! 어디 다시 한 번 피해봐라!" 쐐애애액! 이번에는 흉흉한 기세로 장도가 허공에 칼그물을 이루었다. 그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하릴없이 허공만 베었고, 상대방은 허공에 둥실 뜬 채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 아니오. 다시 갈 길을 방해하면 용납하지 않을지도 모르오." "......!" 이 사태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특히 우두머리인 추도남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사련의 호법 중 하나인 그 자신도 허공에서 몸을 띄운 채 입을 열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눈알을 굴리더니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이제 보니 보통 놈이 아니구나! 여봐라, 모두 합세하여 놈을 죽여라!" 십여 명의 환사객들은 각자 병장기를 뽑아들고 백육호를 향해 공격해갔다. 슈슈슉! 쐐애액!


안개가 산산조각으로 흩어지며 가공할 경기와 칼빛이 난무했다. 그야말로 숨돌릴 틈도 없는 공격이었다. 백육호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왼손을 뒤집으며 뿌렸다. 우르릉! 뇌음과 함께 환사객들이 비명을 발하며 날아갔다. 단 일 장의 공세에 모두 허공으로 곤두박질쳐 버린 것이다. 추도남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는 눈앞의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시후, 간신히 이성을 회복한 추도남은 수하들이 모두 불귀의 객이 되버린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내 미처 말하지 못했소. 내게서 인정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라는 사실을 말이오." 그렇게 말하는 백육호의 표정은 음울하기만 했다. "으으, 방금 전 그 무공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느냐?" 나름대로 평생을 무공 외길로 달려온 추도남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그는 상대의 무공에 대해 알고자 했다. 백육호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알려하지 마시오.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그럼... 노부를 살려주겠단 말이냐?" "내 앞길을 막지만 않는다면 노인장을 굳이 죽일 이유가 없소." "괴이한... 자로군. 자네는." 추도남은 멍한 표정으로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 휙 신형을 날렸다. 상대가 자신을 죽일 의사가 없는 것을 확인한 이상 한 시라도 머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백육호는 잠시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 서서히 돌아섰다. 그의 눈은 숲쪽으로 향했다. 그는 누군가를 향해 담담히 말했다. "이제 모습을 보일 때가 되지 않았소?" "하하! 점입가경(漸入佳境)이로군." 숲으로부터 한 가닥 낭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젊은 중이 걸어나왔다. 나이는 이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그는 어찌나 살이 쪘는지 마치 공처럼 둥글게 보였다. 기이한 것은 뚱뚱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이 꽤 준수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신에 잿빛의 가사(袈裟)를 입고 있었다. "하하! 그대가 천축(天竺) 밀교비전인 유가기환술(琉伽奇幻術)까지 꿰뚫어 볼 줄은 몰랐소." 중은 듣는 이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백육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날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소. 스님의 기척을 알아낸 것은 무공이 고강해서가 아니라 내게 남보다 발달된 오감(五感)이 있었기 때문이오." 백육호는 솔직이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오랜 세월 동안 육노인에게 시달리며 추나심법을 전수 받았던 그는 범인의 한계를 초월하는 초감각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잘 이해가 안되는구려." 승려의 의혹은 당연한 것이었다. "스님은 소생에게 무슨 용건이 있소?" 백육호는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질문을 던졌다. 젊은 승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용건은 없소. 그저 만화루를 향해 가던 중 호기심이 발동하여 방금 전의 일을 지켜보았을 뿐이오. 만일 무심코 지나쳤다면 평생 후회할 뻔했소." "......."


백육호는 침묵했다. 그가 무슨 일로 만화루에 가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자신의 일이 아니면 알려하지 않는 것이 그의 습성이었다. "그곳에 칠절신군이 있다기에 만나서 담판을 지으러 가는 중이었소." "칠절신군과 담판을?" 자신도 모르는 반문하는 백육호였다. 온화해 보이는 젊은 중이 무림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칠절신군과 담판지으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도 은연중 호기심이 일어났던 것이다. 젊은 중은 순후한 눈으로 백육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 전에 먼저 내 이야기부터 해야겠소. 내 비록 삭발하고 가사를 입고 있기는 하나 본시 중은 아니오. 본시 타고난 심성이 포악하고 탐욕스러워 아무리 면벽십년을 해도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에는 턱없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오." "......." 백육호는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이 자는 비록 자신을 비하하는 말을 하고 있으나 말처럼 포악한 위인은 아니다. 어쩌면 정반대로 소탈담백한 위인인지도 모르겠다.' 중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일곱 살 이후로 이십 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을 소림사에서 지내다보니 자연히 스님 흉내를 내게 되었소이다. 어쨌거나 사람에겐 호칭이 필요하니 지금부터는 날 혜왕(彗王)이라 불러주시면 고맙겠소이다." 백육호는 그만 안색이 변했다. "아니? 그렇다면 스님이... 아니 귀하가 바로 소림과 무당의 공동전인으로 용봉칠영에 꼽히는... 혜왕이란 말씀이오?" 혜왕! 일찍이 무림에서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소림, 무당의 공동전인이란 무림사상 유례없는 내력이 그렇거니와 무림군왕성 출신의 칠절신군 남궁청운과 쌍벽을 이루는 이 시대의 젊은 영걸이란 꼬리표가 항상 따라다니는 위인이었다. 그러나 혜왕은 머리만 보이고 꼬리는 보이지 않는 구름 속의 신룡(神龍)인 양 지금까지 그를 보았다는 위인은 거의 없었다. 그는 최근까지 천축(天竺) 지방으로 수행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했다. 혜왕은 준수한 얼굴에 한 가닥 기이한 표정을 떠올리며 말했다. "할 일 없는 위인들의 입에 오르내렸구려. 하하! 아무래도 좋소이다. 아무튼 소문의 일부는 사실인 것 같소이다." 백육호는 새삼스런 눈으로 혜왕을 바라보았다. "소생이 만화루로 그를 찾아가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소?" "궁금하오." 백육호는 순순히 대답했다. 혜왕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친근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하하, 그건 소생이 천축에 가 있는 동안 칠절신군이 소림사와 무당산에 올라 지나친 행동으로 모욕을 끼쳤기 때문이오. 내 비록 두 문파의 정식제자는 아니나 한때 수행의 은을 입은 도리로 어찌 그 사실을 방관하겠소? 그래서 그 일을 따지기 위해 가는 길이었소이다." 백육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방금 전 남궁청운을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안되었소이다. 혜왕. 그때문이라면 헛걸음했소이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혜왕의 가느다란 눈이 커졌다. "칠절신군은 어젯밤 큰 싸움을 벌여 중상을 입었소이다. 요행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나 귀하와


자웅을 결하려면 최소한 한 달 이상은 요양을 해야 할 것이오." "이런, 이런!" 혜왕은 낭패한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찼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오?" 혜왕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만나서 반가웠소이다. 소생은 이만." 백육호는 가볍게 포권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가 어깨를 스치며 지나가버리자 혜왕은 안색이 변했다. "아니? 여보시오! 그렇게 가버리는 법이 어딨소?" 혜왕의 뚱뚱한 몸이 구르듯 백육호를 따라갔다. 백육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만나고 헤어지는 건 세상사의 흔한 이치요. 귀하는 불문(佛門)의 도리를 알면서 어찌 집착하시오?" 주객전도(主客顚倒)라도 한참 전도되었다. 혜왕의 얼굴에는 히쭉 괴상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껑충 뛰어올라 백육호의 곁에 내려서며 말했다. "불문에는 이런 말도 있소. 옷깃만 스쳐도 전생의 인연이 있다 하였소. 이대로 헤어진다면 부처님도 아쉬워할 거요." 육화탑 근처의 관도변에 위치한 반점(飯店). 변변한 현판도 갖추지 못한 궁색한 곳에서 두 사람은 조반을 먹었다.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손님은 두 사람밖에 없었다. "백대인, 오늘은 조반이 빠르시구려." 칠순이 넘은 반점의 영감은 직접 요리를 내오며 깍듯이 인사했다. 기실 이곳은 백육호가 자주 오는 곳이라 안면이 익어 있었다. 반점 주인도 그가 오는 것을 크게 환영했다. 이 일대에서 명의로 소문난 그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제 보니 가는 곳마다 백형은 환영받는 존재이구려." 혜왕은 감탄한 듯 말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마주친 사람들이 한결같이 백육호에게 공손히 인사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백형을 대하는 태도가 마치 신을 보는 듯하외다. 아마도 그건 백형이 이곳 사람들에게 큰 음덕을 베풀었기 때문이라 생각하는데......." "그만 하고 어서 식사나 하시구려." 백육호는 듣기 민망하여 혜왕의 말을 중도에서 끊어버렸다. 혜왕은 반점 영감이 내놓은 황주(黃酒)를 병째로 들며 물었다. "어떻소? 해장술 한 잔 하는 것이?" 백육호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아무리 세상이 혼탁하다 해도 귀하는 스님 차림이 아니오? 그런데 아침부터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여줘야 되겠소?" 말은 그렇게 했으나 백육호는 벌써 잔을 내밀고 있었다. 그 역시 술생각이 났던 것이다. 혼자 사는 동안 그는 꽤 술이 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주거니받거니 하며 황주를 거의 비워가고 있었다. 술이 얼큰해지자 혜왕의 얼굴도 불콰해졌다. 그는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백형, 백형의 무공에 대해 알고 싶은 점이 한둘이 아니오. 그런데 아까 들으니 목숨을 내놓기 전에는 알려줄 수 없다고 말하던데 나 역시 그렇소?" "그렇소. 누구라도 예외는 아니오." 백육호의 대답은 단호했다. "이런 빌어먹을!" 혜왕은 불평을 터뜨렸다. 도무지 중이라 할 수 없는 말투였다. "좋소, 대체 왜 그런지 이유라도 말해 줄 수 없소?"


백육호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서늘한 눈에 음울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다시 술잔을 입술로 가져가며 말했다. "간단하오. 난 무림인이 아닌 평범한 의원으로 일생을 마치고 싶소. 그때문이오." 혜왕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뿐이란 말이오? 백형의 내력이 노출되어 무림에 휘말리게 될까봐서란 말이오?" "그렇소." "이런 빌어먹을.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였군, 그래." 혜왕은 술잔을 탕! 소리가 나게 탁자에 내려놓으며 불쑥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 물읍시다. 백형은 운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백육호는 무심한 어조로 답했다. "난 운명을 믿지 않소. 신(神)도 마찬가지요. 자신의 삶은 철저히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다고 믿고 있소." 확신에 찬 말이었다. 혜왕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엇이 백형으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갖게 했는지 몰라도 나는 다르오. 난 인간은 정해진 운명을 타고난다고 굳게 믿고 있소." "내 생각일 뿐이오. 귀하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소." 무정한 말투였다. 그러나 혜왕은 백육호가 비정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겉으로는 무정해도 그의 속마음은 정열(情熱)과 격정(激情)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혜왕은 술을 단숨에 들이켠 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백형, 사실 내가 칠절신군을 만나려는 이유는 그와 잘잘못을 따지기 위함만은 아니오. 사실은 백도무림의 단결을 이루어보기 위해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려는 것이 목적이었소." 백육호는 고개를 저었다. "내게 무림 얘기를 하지 마시오. 관심 없소이다." "하하! 이미 늦었소. 백형은 이미 무림의 일에 깊이 발을 들여놓고 있소. 아무리 발을 빼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오." 백육호는 눈썹을 꿈틀했다. "어째서 그렇소?" "백형이 남궁청운을 구해주는 순간 이미 운명은 결정된 것이오. 조금 전 사사련의 호법을 놓아주지 않았소? 그것으로 인해 백형은 사도무림의 공적으로 지목된 것을 아시오?" "......." 백육호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물론 백형은 살생을 저어하는 마음에 그를 놓아주었을 것이오. 하지만 그로 인해 무림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바로 백형의 운명이라오." "......." 백육호는 묵묵히 혜왕을 바라보았다. 그는 상대가 자신을 무림의 일에 끌어들이려는 한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그것은 일종의 호의에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혜왕은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알려드릴 것이 있소이다. 소림과 무당, 개방( )을 비롯하여 곤륜, 청성 등의 명문정파는 얼마 전 비밀리에 회동했소이다. 그것은 당금무림의 혈겁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함이었소이다. 그 자리에서 한 가지 중대한 결정이 내려졌소." 혜왕은 히쭉 웃으며 말했다. "어쩌면 태자당과 맞서는 일이 될지도 모르지만 이 혜왕이 주제 넘게도 명문정파 연합의 맹주(盟主)를 맡게 되었소이다." 백육호는 흠칫했다.


"귀하에게 거는 기대가 대단한 모양이구려." "그렇소. 비록 맹주의 권한을 제어할 수 있는 각파의 장로급 인사들로 구성된 원로회(元老會)가 있기는 하지만 배분을 중시하는 명문정파로서는 가히 파격적인 결정이었소. 그것은 그만큼 당금무림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반증하는 것이오. 난 맹주를 맡은 이상 이 한 몸 아끼지 않을 생각을 하고 있소. 그래서 강호에 나오게 된 것이오." "......." "강호에 나오자마자 첫번째 찾아간 곳이 어딘지 아시오? 바로 두 갈래로 갈라진 백도세력 모두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황보세가를 찾아갔소이다." 백육호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황보가주께서는 내 뜻을 들으시고 크게 기뻐하셨소. 그분은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개봉으로 달려가 무림군왕성주를 만났소이다. 그러나 군왕성주는 그분의 중재에 응하지 않았소. 아마도 그는 우리의 실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소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직접 칠절신군을 만나기 위해 나선 것이오." 백육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이해가 안 되는 일이오. 무림군왕성이나 백도연맹이나 모두 한 길을 가는 동지인데 어찌하여 자신의 입장을 고수한단 말이오? 그것은 사도로 하여금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취하게 하는 일이 아니오?" 혜왕은 히죽 웃었다. "바로 그것이오. 겉으로는 무림평화를 위한다면서도 실제로는 사사로운 명예욕에 눈이 멀어 있는 것이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백도인들이 사도무림에 당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오." "......." "백형, 날 도와주시오. 백형이 내쪽에 서 주신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소이다." 백육호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흘렀다. "귀하는 중대한 우(愚)를 범하고 있음을 아시오?" 혜왕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우? 어떤 우를 말이오?" "지금 귀하는 백도무림의 단합을 피력하면서도 내게 백도연맹을 밀어달란 말을 하고 있소이다. 그렇다면 귀하가 무림군왕성과 다른 점이 무엇이 있단 말이오?" "......!" 혜왕은 할 말을 잃었다. 백육호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그는 술잔을 기울였다.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는 황주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쓰디쓴 탕약처럼 느껴졌다. 그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백형의 고언 마음 깊이 담아두겠소이다. 그럼 이만 가보겠소이다." "어디로 가시오?" "마음을 바꾸었소이다. 백형을 만난 후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 깨달았소이다.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야겠소이다. 소림사로 돌아가겠소." 백육호는 담담히 말했다. "배웅하지 않겠소이다." 혜왕은 몸을 일으키더니 정중히 합장했다. "백형, 머지않은 장래에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그때는 밤새도록 마셔봅시다." 백육호는 빈 술병을 들어보였다. "그러려면 꽤 많은 술이 필요할 것 같소. 내 비록 부자는 아니지만 그 날의 술값은 내가 내겠소." 혜왕의 가느다란 눈에서 섬광이 번쩍 빛났다. 그는 한동안 백육호를 주시하더니 가사를 펄럭이며 돌아섰다.


③ 낙도서원(落島書院). 산동성(山東省) 제남(濟南)에서 서쪽으로 삼십 리쯤 가면 천민들이 사는 마을이 나온다. 주로 사냥꾼이나 백정 따위들이 어울려 사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게 서원(書院)이 생긴 것은 지금으로부터 십오 년 전이었다. 한 젊은 유생이 홀연히 마을에 들어와 직접 대나무로 엮어 지은 허름한 서원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마을의 어린아이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사냥꾼, 백정, 또는 퇴기(退妓)의 자식이거나 걸인들의 아이들이 학문을 익힌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웃을 일이었다.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도 젊은 유생이 하는 짓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가 오랜 세월에 걸쳐 변함없이 아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쳐주자 마침내 그의 참뜻을 알고 존경하게 되었다. 십오 년이 흐른 지금, 유생은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으며 백여 호 남짓한 마을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어 있었다. "원주님, 송구스럽습니다. 이거 번번이......." "허허! 내가 좋아 하는 일이니 그런 인사는 접어두시오. 어서 가보시구려." 백정 노대삼(魯大三)은 오늘 낮 소에게 받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는 낙도서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오는 중이었다. 늘 그랬듯이 낙도서원의 원주는 아무 대가없이 그의 상처를 치료해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절뚝거리며 서원을 나서는 노대삼을 직접 문앞까지 나와 배웅해 주기까지 했다. 원주의 눈동자에는 깊은 지혜가 담겨져 있는 듯했다. 또한 수양의 깊이를 짐작케 하듯 정갈하게 빗어 묶은 머리와 청수한 이마, 곧게 뻗은 콧날은 고매하고 강직한 기품을 느끼게 했다. 낙도원주. 그의 이름은 사마을지(司馬乙支)였다. 마을사람들은 그를 사마선생(司馬先生), 또는 그저 원주라고 불렀다. "......."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그에게는 또 하나의 신분이 있었으니....... 그가 십오 년간이나 백정마을에 틀어박혀 서원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범인은 감히 상상도 못할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사마을지는 노대삼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문득 입술을 달싹였다. "환령(幻靈), 출입을 삼가라 했거늘." "화급한 전갈이 있습니다, 군사(軍師)." 어디에서 들려온 음성인가? 분명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둘러보아야 서원 주위에 우거져 있는 청죽림(靑竹林) 뿐, 인기척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사마을지의 안색은 여전히 평정할 뿐이었다. "간단히 고하도록." 사마을지는 허공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예, 우선 동사군도의 일부터 보고하겠습니다. 그곳에 들이닥쳐 관리들과 죄수들을 모두 납치해간 자들은 동영(東瀛)의 해적들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해적?" 사마을지의 눈썹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들이 동사군도를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또 무슨 이유로......?" 환령이라 불린 인물에게서 아무런 응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것은 사마을지의 의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뜻이었다. "태화천(太華天)의 후예도 끌려간 것이 확실한지 알아보았느냐?"


이번에는 환령의 응답이 있었다. "그 점이 이상했습니다. 해적들이 납치해간 죄수들 속에 그자는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몇몇 인물들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사군도를 둘러본 결과 절벽 위에서 누군가의 잘려진 팔과 오래 전에 흘린 듯한 선혈이 말라붙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짐작컨대 그곳에서 혈투가 벌어진 것 같았습니다. 아마 그자는 그때 바다에 빠져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사마을지의 안색이 흔들렸다. "탈출했을 가능성도 있지." "속하의 판단으로는 동사군도에서 탈출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불변의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직접 확인하지 않은 이상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 환령은 응답하지 않았다. '제왕의 후예가 수장(水葬) 되었다...? 물론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사마을지는 왠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떻게 할까요? 명만 내리시면 바로 해적들의 본거지를 쓸어버리겠습니다." 사마을지는 한 가닥 조소를 입가에 물었다. "형제들이 수만 리 바다를 건너가 하찮은 해적들을 소탕할 정도로 한가하단 말인가? 주군(主君)께서 출관(出關)하실 날이 머지 않았다. 그 전에 무림의 일정을 앞당기는 것이 우선이다. 해적들의 일은 그대로 두어라. 너는 계획대로 일을 마무리 짓도록 해라. 또 다른 소식이 있느냐?" "칠절신군이 이끄는 무림군왕성의 토벌대가 구천마교와 사사련의 공격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칠절신군은 한때 사경에 빠졌으나 엉뚱하게도 한 무명의원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회생했습니다." "무명의원?" "예, 군사. 한데 칠절신군을 구한 그자는 사사련의 환사객이 제거하려 했으나 도리어 단 일초에 열두 명의 환사객을 저승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사마을지의 눈썹이 가늘게 흔들렸다. 그의 부드러운 눈에서 일순 날카로운 빛이 솟아났다. "그자의 내력은 파악했느냐?" "아직.... 다만 그자는 약방을 열고 있으며 백육호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만을 알아냈을 뿐입니다." "백육호? 그런 이름도 있단 말이냐? 무슨 일련번호 같은데... 백육호라... 엇!" 사마을지는 갑자기 경악성을 발했다. 그의 안색이 한순간에 딱딱하게 경직됐다. "환령! 너는 지금 즉시 형제들에게 일러 백육호란 자의 신원을 파악하도록 해라. 또한 지금 이후로 그자의 주변을 철저히 감시하도록 해라. 절대 행적을 놓쳐선 안된다. 알겠느냐?" "옛! 알겠습니다." 환령은 심상치 않은 사마을지의 태도에 황급히 복명했다. "또 다른... 소식이 있나?" "예, 군사 어른. 녹림 쪽의 새로운 소식이 있습니다." "그래? 무엇인가?" 사마을지의 안색이 비로소 풀렸다. 그는 녹림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왔고, 이제 그 결실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지금까지 포섭한 녹림의 산채는 이제 이십사채(二十四寨)에 달했습니다." 사마을지의 눈살이 가볍게 찌푸러졌다. "녹림칠십이채(綠林七十二寨) 중 이십사채라면 아직 멀지 않았느냐?" "그건... 녹림대종사가 워낙 만만치 않은 작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자를 회유시킬 가능성이 다소 높아졌습니다. 이것이 최근에 들어온 희소식입니다."


"그래? 그나마 다행한 일이군. 그렇게만 된다면 힘을 절약할 수 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신중을 기하라 전해라. 녹림대종사는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마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조만간 노부가 직접 녹림을 둘러볼 생각이다. 이제 더 없느냐?" "예! 이상입니다." "알겠다. 그럼 복귀하도록." 청죽림이 바람에 흔들렸다. 환령이 사라졌는지, 아직 어딘가에 숨어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마을지는 몸을 돌려 유유히 걸어갔다. 저만치 대나무로 지은 서원의 전경이 보였다. "쯧쯧, 당분간은 서원을 비워야하겠군." 그는 마음이 편치 않은 듯했다. '그래도 이제 청아(淸兒)가 있으니 마음을 놓을 순 있게 됐어. 그나마 다행한 일이지.' 그는 한 여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생각만 해도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러고 보면 세월은 참으로 화살과도 같이 빠르다. 십오 년 전 그의 앞에 나타났던 청아는 일곱 살짜리 코흘리개 계집애였었다. 부모도 없이 거리를 떠돌며 구걸하는 그녀를 우연히 제남성에서 발견하고 데려왔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학문을 가르쳤고, 친딸처럼 양육해왔다. 그러기를 어언 십오 년, 지금은 어엿한 스물두 살 아리따운 여인으로 성장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이제 낙도서원의 대소사를 혼자 도맡아 꾸려나가고 있었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물론이려니와 타고난 총명과 온화함으로 인해 아직도 혼자 몸인 사마을지의 가슴에 늘 훈훈한 기운을 불어 넣어주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십오 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청아는 그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딸처럼 느껴졌고, 그녀가 차츰 자라면서는 알 수 없는 정(情)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이성간에 느낄 수 있는 그런 정에 가깝기도 했다. 물론 사마을지는 그녀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려 애쓰기는 했으나 때로는 그의 고독한 마음 한구석에서 그녀의 존재는 이성(理性)보다는 감성(感性)으로 점점 더 큰 자리를 차지해오고 있었다. "녀석.... 또 어딜 가냐고 따지려 들 테지. 이번엔 뭐라 변명하나? 옳거니, 그래! 녀석이 입만 열면 장가가라 재촉했으니 이번엔 색시감을 보러 나간다고 하면 되겠구나. 허허허......!" 사마을지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서원으로 들어섰다. 지금쯤 청아는 자신을 위해 맛깔스런 저녁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제 14 장 천하경영(天下經營)의 방법(方法) ① "절... 기억하시나요? 오늘 새벽에 만화루에서 ㅂ었지요." "......!" 느닷없는 방문객. 그것도 아름다운 여인이다. "기녀 수월에게 물어서 공자님이 계신 곳을 알게 됐어요." 황보수선이었다. 마침 약방의 문을 닫아걸던 백육호였다. 황보수선의 방문을 받은 그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무슨 일로 이 누추한 곳까지......?" "공자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어요. 잠시 들어가도 좋을까요?" 황보수선은 맑은 눈으로 백육호를 빤히 바라보며 대담하게 말했다. "아... 아니오. 워낙 누추한 곳이라... 이곳보다는 근처의 다원(茶院)이 좋을 것 같소." 몹시도 허둥대는 백육호였다. 황보수선의 흑백이 분명한 눈망울은 그런 백육호를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연인처럼 나란히 밤길을 걸었다. 육화탑을 끼고 도는 한적한 오솔길은 몹시 운치가 있었다. 월광이 두 사람을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공자님의 성함은 무척 특이한 것 같더군요?" "그건... 선친께서 유별나신 분이셨소이다." "아! 그럼 작고하셨나요?" 황보수선의 음성이 한층 낭랑해졌다. "예, 오래 전에 운명하셨소이다. 모친도 소생이 어릴 적에 타계했지요." 모친에 관한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백육호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본 것은 고사하고 그녀의 얼굴조차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가슴 아픈 일이군요. 제가 공연한 것을 물었어요." "아니오. 워낙 오래 전 일이라 이젠 담담할 뿐이오. 그런데 소저께서는......?" "참, 아직 제 소개도 하지 않았네요. 전 황보세가 출신으로 황보수선이라 해요." 쿵! 백육호의 심장에서 북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그는 눈썹을 부르르 떨며 내심 중얼거렸다. '역시... 그랬었군. 그래서... 이 여인을 보는 순간 그렇게... 당황했었어.' 쇠뭉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 속에서 백육호는 심란한 눈길을 허공으로 돌려버렸다. "왜 그러시나요? 혹... 언제 절 보신 적이라도 있나요?" 황보수선은 고운 얼굴에 의혹의 빛을 띠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 아니오. 나 같은 위인이 그럴 기회가 있었겠소? 더구나 무림세가의 금지옥엽을 어찌 감히? 다만 고귀한 소저께서 갑자기 나 같은 놈을 찾아와 좀... 당황했을 뿐이오." 늦은 시간의 다원은 한산했다. 백육호를 알아본 다원 주인의 깍듯한 안내로 두 남녀는 이층의 전망좋은 자리에 마주 앉았다. 향기로운 김이 오르는 우슬차(牛膝茶)를 찻잔째 두 손으로 감싸쥐고 한 모금 맛을 본 황보수선이 낮게 탄성을 발했다. "아! 정말 좋은 차예요. 우슬차는 이곳 항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건가요?" "우슬차를 내놓는 곳은 많으나 유독 이곳의 우슬차는 특별하지요. 주인장에게 특별히 제조법을 알려 주었지요." 황보수선은 탄복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쩜 공자님은 의술뿐 아니라 다도(茶道)에도 밝으시군요?" "과찬이시오. 내게 의술을 전해준 스승께서 워낙 우슬차를 즐기셔서 소생은 어깨너머로 배웠을 뿐이오." 황보수선은 커다란 눈으로 백육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이 안개처럼 어려 있었다. 백육호는 잠시 그녀의 눈을 마주 보다가 그만 시선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공자님의 성(姓)은 정말 백씨(百氏)인가요?" 백육호는 흠칫했다. "그럼... 소생이 거짓 성씨를 쓸 이유라도 있단 말이오?" 백육호는 짐짓 반박했으나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뇌리에 육노인이 평소에 윽박질렀던 말이 떠올랐다. '이놈아, 거짓말을 하려면 사람의 눈을 똑바로 보지 마라! 네놈의 어설픈 표정을 보고 누가 속아넘어 가겠느냐!' '그렇소. 그건 나도 동감이오.' 백육호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황보수선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러나 백육호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별 의미가 있어 여쭌 것은 아니에요. 다만 특이한 성이라 혹시나 해서 여쭌 거예요."


황보수선은 찻잔을 섬섬옥수로 받쳐들고 한 모금 마셨다. 그런 그녀의 자태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더구나 창문을 통해 흘러드는 교교한 달빛으로 인해 그녀의 모습은 마치 선녀가 잠시 속세로 하강한 듯 싶었다. 백육호는 목이 탔다. 이럴 때는 우슬차가 아니라 독한 술을 한 잔 마시고 싶어진다. 그러나 찻집에서 술을 찾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는 그 침묵을 참아내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황보수선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공자님을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어머님의 병환에 대해 상의 드리고 싶어서랍니다." 백육호는 고개를 들었다. "자당께서 환우 중이신가요?" "예, 십 년 전 심적인 타격을 받으신 후로 병을 얻어 자리보전하게 되셨답니다." 백육호는 진지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충격에서 벗어나면 곧 회복되리라 했는데 도리어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졌어요. 이제는 실어증(失語症)으로 하루 종일 한 말씀도 하시지 않게 됐어요. 그동안 부친께서는 천하의 명의란 명의는 모두 모셔와 진맥을 시켜 보았으나 아무런 효험도 보지 못했어요. 물론 사해팔황(四海八荒)에서 구해온 온갖 진귀한 약재들��� 소용없었어요. 이제는... 가족들마저 알아보지 못하고 하루 종일 누워만 계시니 답답한 노릇이에요." "......." "그러던 중 오늘 새벽 공자님이 남궁소협을 회생시키는 것을 보고 부랴부랴 찾아왔어요. 공자님, 제 어머님을 구해주세요. 아마 이 상태라면 어머님은 석달을 넘기시기 힘들 것 같아요." 황보수선의 음성은 촉촉히 젖어있었다. 백육호는 난감했다. 그는 더욱 술이 마시고 싶었다. 마침내 그는 점원을 불렀다. "이곳에서 술을 팔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꼭 한 잔 마시고 싶으니 주인장께 말씀드려 주겠소?" 점원은 군말 없이 사라지더니 잠시 후 술은 물론 간단한 안주까지 챙겨들고 돌아왔다. "주인어른께서 얼마든지 술을 드시라고 하셨습니다." "고맙다고 전해주게." 백육호는 병째로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 황보수선은 그런 백육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백육호의 얼굴에는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제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드린 것 같군요." "아니오......." 두 병째 술병을 잡아가던 백육호의 손이 허공을 저었다. "소저, 내가 고칠 수 있는 병이라면 당연히 보아드려야 마땅한 일이오." 황보수선은 소리라도 지를 듯이 기뻐했다. "그럼, 저와 함께 무한(武漢)으로 가시겠어요?" "소저께서 먼저 가시오. 난 이곳 일을 정리한 후 곧 출발하겠소." "저희... 집을 알고 있나요?" "아, 그건... 천하의 황보세가를 찾아가는 것이 어렵겠소이까?" 백육호는 재빨리 술병을 입에 처박았다. 황보수선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② 구천마교와 사사련은 무림군왕성을 주축으로 하는 백도세력과 끝까지 싸우겠노라 천명했다. 뒤이어 그들은 천하에 산재한 흑도의 방파들을 통합하여 삽시에 삼만이 넘는 거대한 연합세력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백도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다. 소림과 무당을 중심으로 명문대파가 결맹을 한 것이다. 그들은 십정회(十正會)라 일컬어졌다. 십정회는 수 차례 무림군왕성과 백도의 대동단결을 도모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무림군왕성은 십정회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만이 유아독존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결국 백도무림은 양분되고 말았다. 그에 비하면 구천마교와 사사련이 손을 잡고 결성한 흑도연합은 일사불란한 전열을 마쳤으며 무림의 백년흥망이 달린 대회전을 차질없이 준비해 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흑백(黑白)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았던 강호의 제파들은 은연중 흑도연합 쪽에 승산을 두게 되었다. 아무래도 분열된 백도무림의 힘이 흑도연합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무림상황은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③ 남궁청운은 치를 떨었다. 만화루에서의 고초는 그의 생애에 큰 오점(汚點)을 남겼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좌절도 없이 승승장구해왔다. 그런데 만화루의 참패로 인해 자존심이 여지없이 구겨지고 만 것이다. 더구나 태자당의 인원은 고작 팔 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결국 태자당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버린 것이다. "운아(雲兒), 시간이 없다. 더 이상 머뭇거리다가는 백도무림을 놈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게 될 지도 모른다." 무림군왕성주 남궁혁의 얼굴에는 우려의 빛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군왕성의 후원에 위치한 잠풍각(潛風閣). 남궁청운은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고 있었다. 지금 그곳에는 그들 부자 외에도 남궁소연과 총관인 신산(神算) 소손방이 두 시진이 넘도록 숙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아버님, 백도무림을 양분시킨 것은 십정회입니다. 대다수 백도인들은 본성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란을 일으킨 십정회와 굳이 손을 잡을 필요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남궁청운은 부친의 설득에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남궁혁은 그를 타일렀다. "운아, 상황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 무림개사 이래 흑도의 무리들이 오늘날처럼 단결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들의 힘은 본성의 힘만으로는 당할 수가 없다. 더구나 십정회가 탄생한 후 속속 백도인들이 본성에서 이탈해 가고 있다. 이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 본래 무림군왕성의 영향권에 들어있던 백도제파들 가운데 여러 방파들이 이탈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사천의 명문인 신도문은 공공연히 십정회에 동참한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물론 소자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상황이 안 좋다고 본성이 십정회와 손을 잡는다면 향후 이보다 더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세세만년 무림을 이끌어가야 할 본성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남궁혁은 혀를 찼다. "허허! 운아야, 당장 감당할 수 없는 겁란이 코앞에 이르렀거늘 너는 어찌 자존심만 내세우려 하느냐? 먼저 흑도의 기세를 꺾은 후 논의해도 될 일이 아니냐?" 남궁혁은 마침내 언성을 높였다. 평소 남궁청운의 도도한 성품과 타협을 모르는 고집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나 때가 때인 만큼 이번만은 그대로 넘어갈 일이 아닌 것 같았다. '허! 내 운아를 잘못 키웠구나. 그저 야심만으로 뭉친 편협한 인간이 되버렸지 않은가?' 남궁혁은 거인(巨人)이었다. 그가 무림군왕성을 불멸의 문파로 키운 것은 무공도 무공이려니와 대인다운 풍도와 포용력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남궁청운이 계속 고집을 부리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총관의 생각은 어떤가?" 그는 고개를 돌려 소손방에게 물었다. 소손방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소인도 소성주님의 의견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십정회에 속한 자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본성이 수많은 동지들을 희생시켜가며 무림평화를 위해 뜨거운 피를 흘릴 때 그들은 뒷전에서 방관하며 헐뜯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본성에 반기를 들다니... 속하의 생각 같아서는 도리어 그들부터 응징하고 싶습니다." 한쪽 눈을 검은 안대로 가린 소손방의 음성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남궁혁은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알 수 없는 일이야. 남궁세가를 일으켰고 본성의 창건에서 오늘날까지 모든 대소사가 총관의 신산지계(神算之計)에서 비롯되었거늘.... 늘 냉정하고 침착했던 총관이 어찌하여 최근 들어 갑자기 과격한 행동을 일삼고 심지어는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남궁혁은 눈을 가늘게 하며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총관, 설마 그럴 생각은 아니겠지?" 소손방은 외눈에 번쩍 살기를 드러냈다. "성주님, 소인이 언제 복안없이 나선 적이 있었습니까?" 남궁혁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 그럼 어디 총관의 복안을 들어볼까?" 평소의 남궁혁이라면 소손방이 하는 말은 무엇이든 신뢰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렇지가 못했다. 그는 소손방이야말로 화약(火藥)과 같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는 과거의 소손방이 아닌 듯했다. "먼저 본성을 배반하려는 무리들을 단속해야 합니다. 더 이상의 이탈자가 나타난다면 본성이 와해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흠, 그래서?" 소손방은 외눈으로 힐끗 남궁청운을 일별한 후 차갑게 말했다. "당금 무림에서 흑백을 불문하고 존경을 받는 인물은 황보세가입니다. 만일 신주수사 황보일학마저 십정회와 손잡는다면 본성은 명분이 급격히 퇴색하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신주수사의 의제(義弟)인 검존이 이끄는 철검장(鐵劍莊)마저 십정회에 가담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렇게 되면 눈치만 보고 있던 다른 문파들도 다투어 십정회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권력에 민감한 만금대인도 등을 돌릴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곧 본성의 붕괴를 뜻하는 것입니다." "......!" 남궁혁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분명 소손방은 무림정세를 읽는 눈이 정확했다. 오죽하면 그의 별호가 신산(神算)이겠는가! 유화적(宥和的)으로 매사를 처리하는 것을 선호하는 남궁혁이었으나 그의 정세분석에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를 만들어낸 그였다. 지금 와서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으음. 자네의 판단이 정확하네. 그럼 대책도 생각해 두었을 테지. 그건 무엇인가?" "일단 가장 중요한 변수인 황보세가를 확실히 붙잡아두는 방법이 있습니다." "오! 그게 무엇인가?" 남궁청운은 반색을 하며 물었다. "간단합니다. 바로 두 가문이 사돈을 맺는 것입니다." "사돈? 그럼... 운아와 수선이가 부부지연을 맺게 하자는 건가?" 남궁혁은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이때 묵묵히 듣고만 있던 남궁청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미 소손방과 사전논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습니다. 마침 소성주님도 벽월선자 황보수선 낭자에 대해 호감을 갖고 계시니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게다가 황보낭자의 무예도 용봉칠영에 들 정도로 출중하니 이를 두고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라 할 것입니다. 물론 철검장을 위시한 다른 방파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겠습니까? 후후후......." 왠지 음침하게 느껴지는 소손방의 웃음소리가 방안 공기를 흔들었다. "안돼요! 그건." 이때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남궁소연이 느닷없이 반대하고 나섰다. "안되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남궁청운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수선언니에게는 이미 정인이 있어요. 그것도 아주 오래된......." "하하하! 비천검 철무영 말이냐?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두 집안 사이에 친교가 두텁다고는 하나 그자는 황보소저의 마음을 완전히 얻지는 못했다." 남궁소연은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철공자가 아니에요. 수선언니의 마음속에 있는 정인은 철공자도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철공자도 적극적으로 언니에게 구애하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뭣이?" 남궁청운의 안색이 험하게 변했다. "그자가 누구냐?" "그건 나도 몰라요. 하지만 내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에요. 직접 언니에게서 들었으니까요." "......!" 남궁청운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러나 곧 가슴을 펴며 말했다. "좋다. 네 말이 사실이라 해도 난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 무림을 위한 대사(大事)이기 때문이다." 남궁소연은 입술을 삐죽였다. "오라버니는 지금 억지를 쓰는 거예요. 무림을 앞세워 언니에게 강제로 구애에 응하도록 하려는 거예요. 안 그래요?" "시끄럽다! 네가 뭘 안다고 나서는 거냐?" 남궁청운은 노갈을 터뜨렸다. 남궁소연은 그만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만 두거라. 이유야 어쨌든 벽월선자는 무림에서 첫손 꼽히는 명문의 규수다. 운아가 그 아이를 마음에 두고 있다면 나 역시도 기쁜 일이다. 다만 그 아이에게 오랫동안 연정을 쌓아온 정인이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좀더 명확히 알아볼 일이다." 남궁청운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 이번 일만큼은 아버님께서 힘을 써 주셔야겠습니다. 혼례는 인륜지대사인데 설마 모른 척하시지는 않겠지요?" 남궁혁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 네가 애비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 얼마만이더냐?" 남궁혁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오냐, 아들의 혼사에 애비가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내일이라도 황보가주를 만나 의중을 떠보도록 하겠다. 황보가주도 애비의 청혼을 소홀히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비로소 환한 미소를 띠우는 남궁청운이었다. 반면 남궁소연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황보일학의 평소 성품으로 볼 때 무림군왕성주의 청혼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황보수선이 겪어야 할 고통은 같은 여인의 입장에서 안타깝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재색을 겸비한 수선언니라 해도 부친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을 거야. 아! 여인이란 결국 천하를 경영하는 남자들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란 말인가?' 남궁소연은 공연히 비참한 기분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님, 소녀는 그만 가보겠어요." 남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태자당의 일원이자 용봉칠영에 속하는 딸이었으나 아무래도 이번 일에는 별 소용이 닿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남궁소연이 사라지기를 기다려 소손방에게 물었다. "그래, 다음의 비책은 또 무엇인가?" "당금 무림의 형세는 적어도 삼 개월 이상은 유지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동안 각 세력간에는 이익과 여러 가지 상관관계로 인해 몇 차례 이합집산(離合集散)과 합종연횡(合從連橫)이 일어날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직 못지않게 수많은 자금이 소요됩니다." "흐음, 그래서?" "성주님께서는 황보세가와 함께 천하상계의 거목인 만금대인을 반드시 묶어둬야 할 것입니다. 흑도의 무리들은 필요한 자금을 얼마든지 약탈로 보충할 수 있지만 본성이나 십정회는 그렇지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맞는 말일세. 그렇다면 만금대인은 또 어떤 방법으로 묶어둔단 말인가?" "똑같은 방법입니다. 오직 혈연(血緣)만이 안심하고 그를 묶어둘 수 있습니다." "혈연?" "그렇습니다. 마침 만금대인의 장자인 옥선공자가 소연아씨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뜻이 본성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궁혁은 흠칫 놀랐다. 그는 남궁청운을 똑바로 주시하며 물었다. "운아, 그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호사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소연을 열렬히 사모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도 수 차례 도와달라는 말을 했을 정도입니다. 소자의 생각도 총관과 같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소자와 황보낭자, 소연과 호사붕의 혼례를 한꺼번에 치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궁혁은 너털웃음을 쳤다. "허허허! 공동혼례를 치른단 말이냐? 그렇게는 할 수 없다. 엄연히 혼례에는 따라야 할 법도가 있거늘, 최소한의 시차라도 두고 성대한 혼례를 치뤄야 할 것이다. 그건 우리 가문의 예법이기도 하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남궁혁은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에는 남궁청운과 총관 소손방의 주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들의 설명을 듣는 동안 그의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어쨌든 그도 인간이었다. 피땀 흘려 이룩한 무림군왕성의 지위를 지킬 수만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뜻대로만 된다면 십정회도 어쩔 수 없이 대세에 이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총관, 그 일은 그렇다치고 흑도연합에 비해 본성의 세력이 현재 열세에 놓여있지 않은가?" 소손방은 외눈을 번쩍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일거에 우위에 설 수 있는 방안이 있습니다." "뭣이? 그래, 어떤 방안인가?" 남궁혁은 침을 삼켰다. "당금 무림은 크게 삼분(三分)되어 있습니다. 백도와 흑도, 그리고 오랫동안 하오문으로 분류되어 주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가장 많은 인원과 방대한 조직을 지니고 있는 녹림(綠林)이 있습니다."


남궁혁은 눈을 부릅떴다. "아니? 녹림과 손을 잡으란 말인가?" 그는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녹림은 이른바 도적들의 무리가 아닌가? 무림군왕성이 어찌 도적의 무리들과 손을 잡는단 말인가? 그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 일이었다. "녹림은 현재 한 걸출한 인물에 의해 일통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의 힘은 과거와 다릅니다. 흑도연합에 비해도 조금도 밀리지 않을 정도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소손방은 틈을 주지 않고 얘기했다. "다만 그들은 명문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열등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무림을 평정한 후 떳떳이 강호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정식 문파의 호칭과 더불어 신분을 보장한다는 밀약을 해준다면 반드시 우리편에 설 것입니다. 자칫 흑도연합 쪽에서 먼저 그들에게 선수를 친다면 우리로서는 양면에 적을 맞이하는 셈이 되고 맙니다." "으으음!" 남궁혁은 신음을 흘렸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도 오래 전부터 녹림이 무시할 수 없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대의명분을 내세워 살아온 일생이었다. 아무리 힘들다 해도 한낱 도적무리들에게 손을 잡자고 할 정도로 낯이 두껍지가 못했던 것이다. "아버님,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방금 전 아버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무림평화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설혹 녹림과의 연합을 취한다 해도 본래의 목적이 순수하다면 우리를 비난할 자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무림평화가 달성된 후에 녹림과의 밀약을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뭣이? 파약(破約)을 하란 말이냐?" 남궁청운은 눈을 부릅떴다. 평생을 광명정대하게 살아온 그였다. 신의(信義)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그에게 아들의 거침없는 말은 충격이었다. '이... 이 녀석은 패도(覇道)의 길을 가기로 작정했단 말인가? 내게 어찌하여 이런 자식이 태어났단 말인가?'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아버렸다. 잠시 후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운아야, 녹림에 관한 것은 총관과 상의하여 진행하도록 하거라. 이번 일에 애비는 관여하지 않겠다." 남궁청운의 얼굴에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아버님은 심려 마십시오. 그저 소자와 소연의 혼례에 신경써 주시면 됩니다. 머지않아 좋은 소식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안 그렇소? 총관?" "후후후! 물론입니다. 소성주님." 남궁청운과 소손방은 손발이 척척 맞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들은 예를 취한 후 물러갔다. 그런데 그들이 회랑을 걸어가며 주고받는 대화가 남궁혁의 귓전으로 들어왔다. "소성주님, 이제부터 천하경영은 소성주님께서 직접 관장하셔야겠습니다. 소인이 충심으로 보필하겠습니다." "고맙소, 총관. 사실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곤경은 아버님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오. 나는 결코 아버님과 같은 전철을 밟지는 않을 것이오." "물론 그러셔야지요. 후후......." 남궁혁은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자 한 조각 편월(片月)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 만월이던 것이 저리도 작아졌구나.... 하지만 머지않아 다시 풍성함을 되찾겠지. 이것이야말로 만고의 진리거늘.... 어찌하여 너는 그것을 모른단 말이냐? 운아야.......' 남궁혁의 얼굴에는 고뇌의 빛이 떠올랐다. 잠시 후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흑야혼((黑夜魂), 있느냐?"


"네! 주군." 어디선가 무심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할 일이 생겼다." "하명하십시오." 남궁혁은 입술을 움직였다. 그는 전음입밀로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제 15 장 추나신공(推拿神功) ① 추나신공(推拿神功). 본시 육노야로부터 전수받은 것은 추나요법(推拿療法)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백육호는 수 차례에 추나요법의 효험을 체험했다. 그래서 그는 동사군도에서 탈출한 이후 틈만 나면 추나요법에 대해 연구했다. 그 결과 육노야의 추나요법을 자신만의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그것이 바로 추나신공이었다. 추나요법은 본시 환자를 치료하는 외치법(外治法) 중 하나로 이천여 년 전부터 내려온 오래된 요상법이었다. 인간의 맥(脈)과 혈(穴)을 문지르고(推), 때리고(打), 당기고, 찌르고, 틀고, 풀어줌으로써 막힌 기혈을 터뜨리고 인체에 고여 있는 나쁜 피를 풀어주는 요법이었다. 거기에 시술자가 기(氣)를 실어 시술하게 되면 그 효능은 열 배가 더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손에 기를 담는 특별한 심법(心法)이 필요하다. 백육호는 추나요법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 추나심법을 고안해냈다. 편월(片月)의 희미한 빛이 비치는 야산. 백육호는 느릿느릿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일정한 법도도 없이 흐느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어찌 보면 술에 취한 자가 비틀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다리 관절이 비정상적으로 뒤틀리며 몸의 중심이 수시로 허물어져 내렸고, 척추 또한 옆으로 기우뚱, 뒤로 기우뚱하며 멋대로 꺾여졌다. 팔은 뼈가 없는 듯이 흐느적거리며 허공을 휘저었으며 고개도 힘없이 툭툭 떨구어지곤 했다. 매일밤 되풀이되는 일이었다. 백육호는 자정(子正)만 넘으면 육화탑이 있는 산으로 올라가 그런 행위를 반복했다. 그 행위는 꼬박 한 시진이 넘어야 끝나곤 했다. 연후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격탕된 기혈을 다스리는 토납법(吐納法)을 시행했다. '기(氣)는 만물의 근원이다. 죽은 자의 몸이 미세한 차이지만 가벼워지는 까닭이 무엇이냐? 바로 기가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인간 뿐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에는 모두가 기가 존재한다. 도랑에 고인 썩은 물에는 기가 존재하지 않으나 계곡을 흐르는 옥수나 흐름을 멈추지 않는 강물, 망망대해의 바닷속에도 기가 존재한다. 기란 무궁무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호흡하는 대기 중에도 기가 존재한다. 그 기를 흡수하게 되면 상상할 수도 없는 힘을 얻게 된다.' 흔히 말하는 인간의 잠재력은 무릇 기에서 비롯된다. 그 기의 힘을 자신의 의지로 운용할 수 있게 하려면 적절한 법도를 익혀야 한다. 백육호는 추나심법을 통해 그 기를 운용하는 법을 깨달았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강호인들이 연마하는 심법과는 사뭇 달랐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했다. 얼마전 사사련의 환사객들을 통해 처음으로 무공을 시전한 적이 있었다. 다만 그는 환사객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기에 자신의 능력 또한 비교할 수가 없었다. 행장은 이미 꾸려놓았다. 백육호는 약방문에 당분한 휴업(休業)한다는 방문을 적어 놓았다. 이웃사람들에게도 그가 돌아올


때까지 약방을 돌봐달라는 당부를 해놓았다. 그는 무명천으로 용명검을 감싼 후 어깨에 메었다. 그밖에 몇 가지 물건을 허리춤에 감싼 후 길을 떠났다. 황보수선의 부탁대로 그녀의 모친을 진료하기 위해 정든 처소를 등진 것이다. "정말 그가 호자(虎子)란 말인가?" 사마을지의 손에는 방문(榜文)이 들려 있었다. 방금 전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는 그의 수하 환령으로부터 전해받은 것이다. 그것은 백육호가 길을 떠나기 전 약방문에 내건 것이었다. <당분간 휴업(休業)하니 양해해 주기 바람. -의원(醫員) 백육호(百六號).> 방문의 내용은 지극히 간략했다. 그러나 사마을지의 날카로운 눈은 방문의 말미에 적혀있는 서명에 못박혀 있었다. "백육호라....... 이건 결코 일반적인 이름이 아니다. 사연이 있어도 한참 있는 것이지. 과연 그란 말인가?" 어둠 속에서 환령의 의혹에 찬 음성이 들려왔다. "군사, 설마 그가 동사군도에서 사라진 백육호와 동일인이란 뜻입니까?" 사마을지의 눈이 번쩍 빛났다. "왜 아니겠느냐? 바로 그다." "군사!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니... 설사 그렇다해도... 그것이 대세에 영향을 줄 일이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누가 그렇다고 하더냐? 아무리 완벽한 대계(大計)라도 한 치의 틈이 생기면 걷잡을 수 없이 구멍이 커지게 된다. 더구나 그가 바로 태화천(太華天)의 후예라면 보통 일이 아니다." 환령의 음성은 더욱 가라앉았다. "하오면... 삭초제근(削草制根) 해야겠지요." "물론이다. 하지만 아직 모습을 드러낼 때가 아니다. 따라서 직접적으로 나설 순 없다. 방법이 있다면 남의 손을 빌릴 수밖에." "차도살인(借刀殺人)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바로 그렇다." "그럼... 누구를?" "살막(殺幕)." 사마을지의 짤막한 말이 떨어진 순간 환령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저... 전설이 되어 버린 살수집단이 아직 살아있단 말입니까?" 잠시 뜸을 두고 환령의 회의에 찬 음성이 뒤를 이었다. "설사... 그렇다해도 명분 없는 청부는 받지 않는다는 그들이 아닙니까?" 사마을지의 눈이 가늘어졌다. "살막의 이십오대 막주는 노부와 함께 한림원(翰林院)에서 청운의 꿈을 꾸던 동문이었지. 그도 역시 중도에 붓을 꺾어야만 했던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 일전 군사께서 언급하셨던 한림삼수(翰林三秀) 중 한 분이 살막의 막주란 말입니까?" "그렇다. 썩어빠진 세상이 한림원의 걸출한 인재 세 명을 풍진강호로 내몰았었지......." "......." "계획을 바꾸어야겠다. 백육호란 의원의 등장이 새로운 변수로 떠올랐다. 노부는 이 길로 살막으로 가겠다. 너는 예정대로 건친왕부를 들른 후 녹림으로 가도록 해라." "존명!"


환령의 음성이 멀어져갔다. "......." 사마을지는 망연한 눈길을 황혼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날마다 뜨고 지는 해다. 그러나 요즘 들어 자신의 인생도 황혼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낙도서원에서 수백 리 떨어진 곳이었다. 한적한 객점의 창가에 서서 타오르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이 유난히 초라하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② 백육호는 짜증이 났다. "정말 그대들을 죽여야만 길을 갈 수 있단 말이오?" "네놈의 오만은 남궁청운을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구나." 관도를 가로막고 선 인물들은 구천마교의 사대봉공 중 살아남았던 두 명의 봉공과 백팔전사들이었다. 그들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백육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길을 가던 행인들은 그들의 흉흉한 기세에 질려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백육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난 그대들과 아무 원한이 없는데 이처럼 길을 막으니 날더러 살인을 하라는 것인가? 좋소, 정 살기가 귀찮다면 그대들의 뜻을 이루게 해줄 수도 있지." 백육호는 앞으로 걸어갔다. 너무도 유유한 그의 모습에 앞을 가로막는 마졸들은 섬뜩했다. 차창! 그들은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들었다. "뭣들 하느냐? 저 애송이 의원을 쳐죽여라!" 백육호와 앞에 있던 두 명의 마졸이 폭갈을 터뜨리며 덮쳐왔다. "죽어랏!" 쐐애액! 두 자루의 장도가 곧바로 날아왔다. 백육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다만 어깨에 메고 있던 무명천으로 감싼 물체를 슬쩍 움직였을 뿐이었다. "크윽!" 두 마졸은 피를 토하며 거꾸러졌다. 그들의 턱에 용명검의 자루가 박혔던 것이다. 백육호는 태연히 걸어갔다. 단지 검자루만으로 두 명을 해치운 그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이었다. "안되겠다! 구환진(九 陣)을 펼쳐라!" 스스슥! 백팔전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아홉 명이 일조로 둥근 원진을 펴 백육호를 포위했다. 언뜻 보기에는 단순한 진세 같았으나 아홉 명이 일조를 이루고 그 뒤를 다시 방위에 따라 아홉 명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구환진은 구천마교가 흔히 펼치는 전술 중 하나였으나 그 무서움은 차륜전법(車輪戰法)이라는 데 있었다. 즉, 많은 수로 소수의 강적을 만났을 때 펼치면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 백육호는 걸음을 멈춘 채 냉정한 눈으로 그들의 진세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는 강한 흥미가 떠올라있었다. '구궁(九宮)을 교차하여 펼쳤다. 그로써 두 진이 상호보완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방의 진에 허점이 드러나면 즉시 후방의 진이 자리를 메운다. 단순한 것 같지만 장기전에 돌입할 경우 자칫 진력이 고갈되기 쉽다.' 백육호의 뇌리에는 한 노인의 청수한 모습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그에게 학문(學問)과 각종 잡학(雜學)을 가르쳐 주었던 용선생(龍先生)이었다. 용선생은 그에게 학문은 물론 기관지학(機關之學), 천문지리(天文地理), 기문둔갑(奇門遁甲) 등을


세세히 가르쳐 주었었다. 당시는 몰랐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용선생의 가르침이 새삼 떠올랐다. 그는 구환진을 보는 순간 저절로 진법의 허점을 간파할 수 있었다. 그 모두가 용선생 덕분이었다. "쳐라!" "죽어라!" 위이잉! 이윽고 공격이 시작되었다. 아홉 명의 마졸들이 전후좌우에서 동시에 공격해왔다. 특이한 것은 그들이 끊임없이 회전하면서 공격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막으려 들면 먼저 공격했던 자는 사라지고 뒤쪽에서 그의 공격을 맞받아쳐왔다. 만일 그 공격을 받으려 치면 전후좌우에서 일시에 공격이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추나십이수(推拿十二手)를 시험해 볼 좋은 기회다.' 백육호는 쌍수를 교차시켰다. 추나십이수. 얼마 전 그가 창안한 무공이었다. 추나심법을 통해 얻은 일종의 금나수(擒拿手)였다. 도합 십이식으로 이루어진 추나십이수는 장법(掌法)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치고, 당기고, 퉁기고, 밀고, 꺾고, 찌르고, 누르고, 돌리고, 잡고, 긁고, 틀고, 붙이는 열두 가지 동작이 다양한 변화(變化)를 일으키며 연속동작으로 전개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으악! 크악!"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백육호는 마치 나비처럼 구환진 사이를 누비며 양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은 밀어쳤다가 원을 그리는가 하면 때로는 수도로 뻗었다가 손가락으로 구부려 잡���채거나 손등, 주먹, 팔꿈치가 연달아 눈부신 변화를 일으키며 마졸들의 요혈을 가격했다. "으으... 저럴 수가?" 구천마교의 봉공은 눈을 부릅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장면이었다. 백육호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진세 사이를 누비며 백팔전사의 면전에 붙었다 떨어졌다. 그때마다 수하들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날아가거나 피를 토하며 거꾸러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눈 몇 번 감았다 떴을 정도였다. 바닥에는 즐비하게 백팔전사가 누워 있었다. 그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으으......." 봉공은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비로소 사사련의 호법 추도남이 한 말이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쩡! 그는 허리춤에서 판관필을 뽑았다. 그는 옆에서 넋을 잃고 있는 또 한 명의 봉공에게 외쳤다. "삼제(三弟), 협공하세." 삼봉공의 안색이 흐려졌다. 그는 주춤거리며 회의에 찬 어조로 말했다. "대형,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습니다......." 대봉공은 눈알을 부라렸다. "뭣이? 이대로 물러나잔 말이냐?" "그... 그게 아니라......." "못난 놈! 저놈은 괴물이 아니다. 필경 진력이 손상되었을 터, 우리가 전력으로 합공하면 승산은 충분할 것이다." "그... 럴까요?" 삼봉공은 마지못한 듯 허리춤에서 삼첨극(三尖戟)를 뽑았다.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단창(短槍)이었다.


"죽어랏!" 대봉공의 판관필이 여덟 개의 환영을 뿌리며 백육호의 요혈을 찔러갔다. 동시에 삼봉공의 단창은 백육호의 등을 노리며 쇄도해 갔다. 그들이 동시에 펼치는 합격술은 오랜 시간 동안 연마한 것이라 위력이 절륜했다. 그러나 백육호는 미끄러지듯 방위를 이동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공격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헉!" 두 마두는 대경실색하며 급급히 공세를 회수했다. 그때였다. 눈앞에 신형이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손이 허전해졌다. "헉!" 삼봉공은 경악에 찬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없었다. 삼첨극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가 넋을 잃는 순간 갑자기 심장이 화끈하며 무엇인가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으아악!" 삼봉공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벌렁 쓰러졌다. 그의 가슴에는 자신의 애병인 삼첨극이 깊숙이 박혀있었다. "셋째......!" 대봉공은 대경실색하며 부르짖었다. "왜 자꾸 날 귀찮게 하는 것이오." 백육호는 무심히 말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 그걸 몰라서 묻느냐? 너는 우리의 숙적인 남궁청운을 도왔을 뿐더러 사사련의 환사객들을 죽였다. 그것은 우리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냐?" 백육호는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귀하들은 날 계속 추격하겠구려?" "물론이다. 네놈이 아무리 강하다해도 삼만이 넘는 동지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대봉공은 이미 승산이 없다는 것을 자인한 듯했다. 그의 얼굴에 기는 꺾였으나 눈에서는 원독의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흐흐.... 이 하늘 아래 숨쉬는 것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네가 아무리 잘났다해도 혼자일 테니까." "어이가 없군." 백육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기에 수월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남궁청운을 치료하는 일에 나서려 하지 않은 게 아닌가? 무림의 일이란 한번 뛰어들면 좀처럼 발을 뺄 수가 없는 법이었다. 대봉공은 그가 침묵하자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왜 두려우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목을 길게 늘이고 부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둘 의향도 있다." 착각도 큰 착각이었다. 대봉공은 그가 구천마교와 사사련의 힘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한 듯했다. 백육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골치 아프군. 의원이 환자를 구하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니. 산다는 것이 왜이리 피곤하단 말인가? 저 하늘의 구름처럼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도 없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돌려 대봉공을 바라보았다. "귀하는 아직도 날 죽일 생각이오?" "나... 나는......." 대봉공은 더듬거리며 뒷걸음질쳤다. 그의 눈에는 공포의 빛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수중의 판관필은 바닥에 거꾸로 박혀 있었다. 손을 뻗기만 하면 잡을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판관필을 잡는 순간 백육호의 수도가 그의 목을 쳐버릴 것 같았다.


"하하하! 그럼 소생은 이만 가보겠소." 백육호는 빙글 몸을 돌리더니 유유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 대봉공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상대방의 모습은 언덕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완전히 시야에서 자취를 감춘 후에야 그는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대체... 저놈은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그는 바닥에 즐비하게 널려있는 시신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③ - 흑련사(黑聯社). 구천마교와 사사련을 주축으로 한 흑도연합을 일컫는 말이다. 흑련사는 급격히 팽창했다. 그들은 흑도의 거의 모든 방파를 끌어들였으며, 심지어는 흑백지간에 놓여있는 여타의 방파들마저 자신들의 예하로 귀속시켰다. 그로 인해 흑련사는 걷잡을 수 없이 방대한 세력을 형성했으며 나날이 그 규모가 커져만 갔다. 반면 백도무림은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무림군왕성과 십정회의 반목으로 그 전열을 채 갖추지 못한 탓으로 곳곳에서 파죽지세와 같은 흑련사의 공세에 백도무림은 패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흑련사는 중원무림을 일통(一統)하려는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에 무림군왕성과 십정회는 힘을 합치기는커녕 사사건건 반목하고 있어 뜻있는 인사들의 개탄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하나의 변수가 발생했다. 녹림(綠林)의 등장! 수백 년간 강호의 하류배로 취급받아 왔던 녹림의 무리들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한 걸출한 인물에 의해 통합되어 강호상에 급부상한 것이다. 수백만 녹림도를 통합한 인물은 녹림대종사(綠林大宗師)였다. 그는 사분오열되어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던 녹림도에 일사불란한 지휘체제를 도입하여 단숨에 정예군단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백도무림을 대신하여 그들이 흑련사의 횡행을 저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변화에 무림인들은 당혹을 금치 못했다. 의당 흑련사에 맞서 무림정기를 수호해야 할 무림군왕성과 십정회는 수수방관하고 있는데 한낱 도적떼로 알았던 녹림이 대신 나서자 가치관에 혼돈이 온 것이었다. 그야말로 무림의 상황은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난측하기만 했다. 무한(武漢). 백육호가 이곳에 온 지도 열흘이 지났다. 그는 황보세가에 무사히 도착했으며 황보수선의 모친인 운하설(雲河雪)을 진료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운하설은 차도를 보이고 있었다. 백육호는 추나요법과 약물요법을 병행했다. 그때문인지 운하설은 차츰 정신이 명료해졌으며 생기(生氣)를 되찾아갔다. 물론 완전히 정신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실어증을 앓아온 그녀였기에 비록 눈을 떴으나 대화를 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조금씩 식사를 하게 되었고, 이따금 주위 사람들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황보세가는 잃었던 활기를 되찾아갔다. 황보수선은 물론 부부간의 정이 남다른 신주수사 황보일학도 모든 것이 백육호 덕분이라며 수없이 치하했다. 그러나 정작 백육호는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더 이상 추나요법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운하설의 병세가 호전되자 약방문을 작성했다. 황보세가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날은 백육호가 황보세가에 온 지 열하루째 되는 날이었다. 저녁이 되자 여러 사람이 모였다. 그들은 황보일학 부녀와 마침 이곳을 방문한 철검장(鐵劍莊)의 철자성 부자, 금적수재 당세곤을 비롯하여 옥선공자 호사붕 등이었다. 공교롭게도 거의 동시에 그들이 방문한 것이다. 검존(劍尊) 철자성은 황보일학의 의제였다. 따라서 수시로 황보세가를 드나들었으므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당세곤과 호사붕은 처음으로 황보세가를 찾아온 것이다. 본래 인품이 후덕한 황보일학은 그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런데 식탁의 분위기는 왠지 어색하기만 했다. 백육호는 담담한 표정으로 묵묵히 식사를 했다. 반면 황보수선과 철무영의 안색은 눈에 띌 정도로 딱딱해 보였다. 황보일학과 철자성도 그리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당세곤 역시 무엇이 불만인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오직 호사붕만이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하하! 무림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기뻐할 경사가 아닙니까?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호사붕은 대소를 터뜨렸다. 며칠 전 일이었다. 무림군왕성에서 용비천군 남궁혁이 사람을 보내 청혼을 해왔다. 그것은 황보수선을 군왕성의 며느리로 맞이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강호에 금세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철자성은 더 이상 침묵을 참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형님, 청혼을 받아들이실 겁니까? 사실 소제가 형님을 찾아온 것은 바로 그 일 때문입니다." 철자성은 호사붕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신중해야 합니다. 이번 일은 단순하게 처리할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뭐라고 말씀 좀 해보십시오, 형님!" 황보일학은 고뇌에 찬 눈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황보수선을 바라보았다. "아우, 내 어찌 그것을 모르겠나? 그래서 더욱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이네. 본래 나는 혼례만큼은 딸아이가 원하는 대로 할 생각이었네. 하지만 군왕성이 공개적으로 청혼을 해왔으니 참으로 난감하게 되었네." 이때였다. 호사붕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아니, 노선배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금 무림의 영웅 중에서도 영웅인 남궁당주의 배필이 되는 것인데 어찌하여 난감하다고 하시는 겁니까?" 당세곤이 식탁을 탕, 치며 나섰다. "그게 무슨 말버릇이오? 이 자리에는 강호의 대선배님들이 두 분이나 계신데 귀하가 어찌 버릇없이 끼여든단 말이오?" "......!" 호사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벌떡 일어서려다 말고 도로 주저앉으며 사나운 눈으로 당세곤을 노려보았다. 본래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사람이었다. 철자성이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형님, 소제의 생각은 좀 다릅니다. 아무리 무림군왕성이라 해도 혼사만큼은 당사자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니 수선이 원치 않는다면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 말에 줄곧 고개를 떨구고 있던 황보수선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현제(賢弟), 아직 시간이 있으니 그 얘기는 그만 하도록 하세. 이곳에는 백선생도 계시니 오늘은


즐거운 식사를 나누도록 하세나." 철자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 얘기는 따로 천천히 합시다. 한데 당소협과 호소협은 어인 행차신가? 단순히 지나는 길에 들른 것 같지는 않은데?" 두 청년을 바라보는 철자성의 눈길은 부드럽지 않았다. 그는 당세곤이 자신의 아들인 철무영과 함께 용봉칠영에 속하는 기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에게 호감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만금대인의 아들 호사붕은 더더욱 호감이 가지 않았다. "예, 소생이 이곳에 온 것은 평소 흠모하던 황노선배님께 인사를 여쭙는 것과 함께 태자당 일원인 황보소저를 소생의 집으로 초대하기 위해서입니다." 호사붕의 말에 황보수선의 아미가 잔뜩 찌푸러졌다. 호사붕은 그녀의 반응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마침 부친께서 작금의 무림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태자당이 분발해야 한다시며 격려의 자리를 만들테니 젊은 인걸들을 초빙하라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황보일학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 만금대인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소? 과연 훌륭한 어른이시로군." 호사붕은 득의에 찬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그래서 소생은 무림군왕성과 흑석보를 거쳐 이곳에 온 것입니다. 이곳에서 황보낭자에게 정식으로 초청의 예를 드린 후에는 철검장으로 갈 예정이었습니다. 이미 철기문과 화산, 금사신궁 등에는 전갈이 가 있을 것입니다." 황보일학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인자한 음성으로 말했다. "허허! 그랬었군. 그야 좋은 일이 아닌가? 어찌 마다할 일이겠소? 수선아, 너도 참석하도록 하거라." 황보수선은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예, 그리 하겠어요. 아버님." 그녀는 시선을 호사붕에게로 돌렸다. "한데 호소협, 남궁당주도 참석하나요?" "그야 이를 말입니까? 태자당의 영웅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에 당주님이 빠져서야 말이 안되는 일이지요. 물론 소연낭자도 참석하실 겁니다." 황보수선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알겠어요. 저도 반드시 가겠어요." 기실 그녀는 마음속으로 한 가지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직접 남궁청운을 만나 청혼을 거두어 달라고 하려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부친이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었다. "하하! 호형, 소생도 초청자 명단에 들어있소?" 당세곤이 빈정거리며 묻자, 아니나 다를까? 호사붕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떠올랐다. "귀하도 태자당에 속해 있소? 내가 알기로는 태자당 동지들을 암살한 흉수로 지목받고 있는 것 같은데?" 당세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하! 진실은 언제고 밝혀지는 법이오. 이번 기회에 확실히 누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꼭 갈 생각이오. 그러니 젓가락 하나만 더 준비해 주시구려." 의외로 호사붕은 선선히 응답했다. "좋소. 어차피 준비할 식탁이니 불청객 하나 끼어든다고 달라질 것은 없소. 굳이 오겠다면 말리지 않겠소." 당세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는 호사붕을 예리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다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호의에 감사드리오. 내 받드시 가리다." 이때 황보수선이 엉뚱한 말을 던졌다. "호소협, 그럼 이곳에 계신 백공자님도 함께 가도 되겠지요?"


"아니... 황보소저, 그건......?" 자신과 관련 없는 대화에 설련주(雪蓮酒)의 맛을 음미하며 고개 숙이고 있던 백육호였다. 그는 놀란 나머지 더듬거렸다. 호사붕은 힐끗 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물론이지요. 그렇지 않아도 소생이 청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백선생은 우리 당주님의 생명의 은인이 아니오? 의당 형제들의 열렬한 환영��� 받을 것이오." "하지만 소생은......." 황보일학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백선생, 그리하시오. 선생의 의술 덕분에 아내의 증상도 많이 호전됐으니 수선과 함께 들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이다." 백육호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당세곤은 좌중을 둘러보며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거 잘됐구려. 마침 이곳에 철형도 와 계시니 우리 모두 함께 출발하면 되겠구려?" 호사붕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그럼 그렇게 알겠습니다. 소생은 준비할 것도 있으니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그는 황보일학과 철자성에게 손을 마주잡는 공수의 예를 표했다. "아니? 하루 유하지도 않고?" "아닙니다. 먼저 가서 귀빈들을 맞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게 도리일 것 같습니다. 그럼......." 호사붕은 황보일학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 황보세가를 떠났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황보수선과 철무영, 당세곤도 출발했다. 그 속에는 뜻밖의 초청을 받은 백육호도 포함되어 있었다. ④ 무한에서부터 만금장(萬金莊)이 있는 남경(南京)까지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당세곤은 황보수선과 동행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듯 연신 빙글거리며 한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반면 황보수선의 관심은 다른 데 가 있었다. 그녀는 당세곤의 말에는 콧대답을 하면서도 여행 도중에 백육호에게 이곳저곳의 명승지를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당세곤의 자존심을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뿐만 아니라 철무영도 우울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당세곤은 끈질겼다. 그는 황보수선이 어떻게 대하든 지치지 않고 그녀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으며 관심을 끌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었다. 한편 백육호는 당세곤과 철무영의 표정에서 그들이 황보수선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짐작해낼 수 있었다. 그는 황보수선이 고의로 자신에게 접근하며 이것저것 친절하게 말을 할 때마다 두 청년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다. 그 점은 그를 몹시 불편하게 했다. "자, 배도 출출하고 하니 객잔에서 요기를 하도록 합시다." 황보수선의 곁에 바짝 붙어 쉴새없이 종알거리던 당세곤이 말고삐를 당기며 제안했다. 양자강변에 위치한 안경(安慶)이란 시진이었다. 강변에는 객점들이 제법 번성하고 있었으며 양자강의 물줄기를 이용한 문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일행은 규모가 꽤 커 보이는 객점에 들었다. 점소이에게 말고삐를 넘기고 안으로 들어서자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들이 꽉 차 있었다. "조용한 자리가 없느냐?"


당세곤은 점소이에게 은자를 쥐어주며 물었다. "헤헤! 그럼 소인을 따라옵쇼." 점소이는 은자를 받자 입이 쩍 벌어지며 그들을 이층으로 안내했다. 이층은 탁 트인 전망을 갖추고 있어 한눈에 양자강이 내려다 보였으며 내부도 제법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그곳에는 꽤 부유해 보이는 상인(商人)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을 뿐, 자리가 넉넉히 비어 있었다. 일행은 창가에 자리를 잡은 후 음식을 시켰다. 음식이 나오자 그들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요란한 말발굽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두두두두두! "끼럇!" "......?" 일행의 눈길은 일제히 창밖으로 향했다. 사십여 명의 마상인(馬上人)들이 말을 멈추고 있었다. 그들은 민첩한 동작으로 좌우의 객점들을 향해 흩어졌다. "호! 상당한 고수들이로군. 어떤 자들일까?" 당세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일행은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우당탕! 쿵쿵! 문득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잠시 후 이층으로 오 인의 남색 무복(武服)을 걸친 무사들이 올라왔다. 그들은 바로 마상인들이었다. "저들은......?" 철무영의 눈이 번쩍 빛났다. 무사들의 이마에 두른 영웅건에 새겨진 글씨를 본 때문이었다. - 동(東). 영웅건에는 푸른색 수실로 그런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아는 자들인가요?" 황보수선이 물었다. "그렇소. 저들은 황실 소속의 동창(東廠) 무사들이오." 이때였다. 좌중을 날카로운 눈으로 둘러보던 중년무사가 음성을 돋궈 외쳤다. "모두들 이 그림을 주목하시오!" 곁에 선 한 무사가 한 폭의 초상화를 펼쳐 좌중을 향해 보여주었다. "이자는 대역죄인이오. 여러분 중에 이자를 본 사람이 있다면 어서 나서시오. 나라에서 후한 상을 내릴 것이오." 초상화를 펼친 무사는 느린 걸음으로 좌석 사이를 돌며 일일이 초상화를 손님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보여주였다. 잠시 후 그는 일행이 있는 자리까지 왔다. "이자를 본 사람 없소?" 무사는 일행을 향해 딱딱하게 물었다. 모두 고개를 저으려는데, "그자가 무슨 죄를 지었소?" 느닷없는 질문이 나왔다. 일행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질문은 백육호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무사는 눈빛을 번쩍이며 물었다. "이자를 보았소?" 백육호는 담담히 말했다. "내가 먼저 물었소." "뭣이?" 무사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갖고 있는 동창의 무사였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백육호의 태도는 무례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너는 누구냐?" 무사는 초상화를 접으며 날카롭게 물었다. 백육호는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라의 녹을 먹는 이라면 당연히 겸손해야 할 터, 귀하는 어찌하여 근본을 잊고 백성을 핍박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오?" "이... 이 놈이?" 무사의 안색이 푸르댕댕하게 변했다. 한편 백육호는 초상화의 인물을 보는 순간 적지 아니 놀랐다. 초상화의 인물이야말로 언젠가 동사군도에 찾아왔던 동창무사 왕승(王升)이었던 것이다. 그는 사사영을 직접 호송해 왔던 동창 소속의 무사로 당시 동사군도의 수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대역죄인이 되었다니 백육호는 궁금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백육호는 그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왕승이 직접 사사영을 호송하고 왔을 뿐 아니라 동사군도의 제왕 조탁과 곽초량에게 사사영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말라고 협박했기 때문이었다. 무사는 손바닥으로 식탁을 탕! 소리나게 내리쳤다. "이놈! 넌 누구냐? 대역죄인과 무슨 관계라도 있느냐?" 무사는 백육호의 태도에 부쩍 의심이 간 듯 눈에 살기를 돋구었다. "아무 관계도 없소." 백육호는 여전히 담담히 말했다. "뭐라고? 그럼 네놈이 감히 날 놀리려 했단 말이냐? 더구나 동창의 부영반 나리께서 직접 납신 자리에서 말이냐?" 무사는 슬쩍 뒤쪽을 쳐다보았다. 역삼각형의 얼굴에 죽 째진 눈을 가진 중년무사를 은연중 가리키는 말이었다. 동창의 부영반. 그 정도 신분이면 왕후장상(王侯將相)이나 고관대작(高官大爵)이라 해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다. 그러니 권력으로 백육호의 기를 꺾어보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깔려있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는 상대를 잘못 택했다. 그의 눈앞에 앉아 있는 사 인은 일반백성이 아니라 강호인이었던 것이다. 이때 황보수선이 고운 눈을 치뜨며 항의했다. "당신이야말로 국록(國祿)을 먹는 관리가 아닌가요? 어찌하여 양민에게 하대를 하며 윽박지르는 거죠?" 평소에는 온유한 성품에 차분하기만한 황보수선이었으나 오늘따라 그녀의 얼굴에는 차가운 냉기가 감돌았다. "방금 뭐라고 하였느냐?" 문득 착 가라앉은 음성과 함께 중년무사, 즉 부영반이 다가왔다. 이때였다. 철무영이 일어서더니 부영반을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설명했다. "부영반 나리, 서로에게 오해가 있는 듯 싶습니다. 소생은 귀주성 철검장의 철무영이라 합니다. 이분 소저는 황보세가 출신의 황보소저이며 이분은 사천당문의 당세곤 소협입니다. 그리고 이분 백공자는 항주에서 존경받고 있는 명의(名醫)로 감히 소생이 신분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대역죄인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부영반이란 자는 흠칫했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차가운 기운은 곧 부드럽게 풀렸다. "알고 보니 무림의 기린아로 일컬어지는 용봉칠영 중에서 세 분이 계셨구려. 이거 몰라보고


결례했소이다. 본인은 상관종무(上官鍾茂)라 하오." 상관종무는 주먹을 모아 포권했다. "아, 상관대협이셨군요. 혁혁한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원, 별말씀을 다하시오. 철소협." 철무영의 깍듯한 공대에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상관종무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다른 분도 아니고 강호에 혁혁한 명성을 지니고 계신 분들이니 설명해 드리겠소이다. 초상화의 죄인은 한때 본인과는 한솥밥을 먹던 처지였으나 갑자기 역천의 죄를 저지른 자올씨다." "역천의 죄라 하심은......?" 철무영도 이쯤 되자 궁금증이 일어 물었다. "그자는 동료들을 선동하여 황족의 사저(私邸)에 침입했소이다. 마침 그곳에는 절정무공을 익힌 위사(衛士)들이 황족을 호위하고 있었기에 역도들은 소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달아났소이다. 동창은 그 사건의 수습을 맡게 되었소이다. 그래서 초상화를 배포하고 그자를 찾으러 나선 것이외다." 백육호는 짚이는 것이 있었다. '황족이라 함은 아마도 건친왕일 것이다. 왕승은 건친왕부를 습격했다가 도주했을 것이다.' 그는 왕승의 행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그가 대역죄를 마다하지 않고 동료들과 함께 그 같은 일을 감행한 이면에는 반드시 피치 못한 사정이 있으리라 여겨졌다. 대영반은 어깨를 들썩이며 덧붙였다. "그자는 중상을 입고 있소이다. 머지않아 우리들 손에 잡힐 것이오." 철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상관대인께서 직접 동창의 고수들을 이끌고 나섰으니 천하의 그 누가 잡히지 않겠습니까?" "하하! 물론이지요. 자, 그럼 이만 가보겠소이다. 아무튼 강호의 영웅들을 만나게 되어 반가웠소이다." 상관종무는 대소를 터뜨리며 돌아섰다. 그가 계단을 통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려 철무영은 자리에 털썩 앉으며 백육호를 나무랐다. "백선생, 어째서 동창의 무사들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오? 자고로 관리들과는 어떤 일로도 상충하지 말라는 것이 무림의 관례가 아니오? 더구나 보통 관리도 아닌 황궁의 동창무사들에게 무엇때문에 쓸데없는 객기를 부리는 것이오?" 철무영은 그동안 백육호에게 지니고 있던 감정을 이번 기회에 쏟아내려는 듯 날카롭게 추궁했다. 그러자 황보수선이 즉각 나섰다. "철소협, 그만 하세요. 백공자님이 뭘 잘못했다고 그러는 거예요? 애초부터 잘못은 그들에게 있었어요. 그러니 그만 하세요." 철무영은 그만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소저! 이번 일은 소저가 나설 일이... 아, 아니오! 그만 둡시다!" 철무영은 화가 치민 듯 벌떡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계단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음식은 채 반도 손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자 당세곤이 빈정거렸다. "아무리 백선생이 황보소저의 모친을 구했다지만 소저의 관심이 지나친 것 같소이다." 가시가 돋친 말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철무영의 반응에 당혹해 하던 황보수선은 그를 한 차례 흘겨보고는 이내 백육호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백공자님, 철소협은 공자님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너무 괘념치 마세요." 백육호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황보소저. 이번 일은 내가 잘못한 것이오. 따라서 철형이 나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공연히 소저가 날 비호할 것 없소이다. 소저의 그런 행동은 날 돕는 것이 아니라 해치는 일이오. 내 분명히 말하거니와 앞으로는 절대로 내 일에 나서지 마시오." 백육호는 말을 마친 후 몸을 일으켰다.


"백공자님. 아직 음식이 남았어요. 왜......?" 황보수선은 얼굴을 붉히며 말끝을 흐렸다. 백육호가 그녀의 말을 듣지도 않고 이미 계단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한편 당세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천하제일의 가문과 미색(美色), 재능을 지닌 그녀였다. 강호의 영웅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그녀에게 구애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평소의 그녀는 언제나 품위있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낱 무명의 의원에게 굴욕적인 취급을 받으면서도 말없이 감내하고 있지 않은가? 당세곤은 착잡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아니, 그는 울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황보수선의 마음이 이미 저만치 멀어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제 16 장 엇갈리는 애정(愛情) ① 남경(南京). 역대 황조의 고도(古都)로 옛 영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남경의 중심가에서 동쪽으로 야트막한 산이 있다. 이곳에 거대한 장원이 자리잡고 있는 바,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만금장(萬金莊)이다. 천하제일부호인 만금대인 호금수의 이름은 몰라도 만금장은 알 정도로 남경에서는 가장 유명한 곳이다. 이곳은 그 규모만으로 볼 때는 자금성과 비할 수는 없으나 그 화려함이나 건축물의 정교함은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만금장의 건축재는 서양으로부터 들여온 대리석을 비롯하여 청옥기와 등을 사용하였으며, 모든 대전과 내실에는 두터운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백화가 만발한 화원, 정원에 세워져 있는 석탑(石塔)의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곳곳에 인공연못과 가산 등을 배치하여 절묘한 풍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귀빈상품관(貴賓上品館). 지금 그곳에는 태자당의 준걸들이 모여 있었다. 백육호와 황보수선, 철무영, 당세곤 등은 긴 여행 끝에 이곳에 도착했다. 그들은 태자당의 낯익은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다만 늘 남궁청운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던 종리무만이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삼층 구조의 귀빈상품관 일층에서 연회가 베풀어지고 있었다. 대전 중앙에는 흑오석으로 만든 장방형의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는 각양각색의 산해진미가 가득 차려져 있었다. 태자당의 영걸들은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남궁당주님, 더도 말고 이곳에서 보낼 삼 일 동안만은 모든 번뇌를 잊고 마음껏 즐기도록 하십시오. 손님 접대에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소제의 부친께서 만반의 배려를 해주셨으니까요." 호사붕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남궁청운은 흐뭇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고맙소, 어디 한 번 오랜만에 허리띠를 풀고 즐겨���시다." "호호! 그럼 소녀가 먼저 한 잔 올리겠어요." 연채령이 교소를 터뜨리며 술병을 들어 올렸다. 남궁청운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변함없이 애정이 들어 있었다. "하하! 좋소이다. 연낭자, 한 잔 가득 따라주시오." 남궁청운은 손을 내밀어 술잔을 받았다. 장내의 젊은이들은 모두 열 명이었다. 그들은 서로 잔을 주고 받으며 차츰 흥이 올랐다. 다만 나란히 앉아있는 황보수선과 남궁소연만이 그다치 편치 않은 기색이었다.


한편 백육호는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에게는 달리 술을 권하는 사람도 없었으나 개의치 않고 연거푸 잔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의 곁에 앉아있는 철기문의 소문주 철갑신장 장건웅도 그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듯 빠른 속도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하하! 이제 보니 백선생의 주량이 대단하구려. 자, 이번엔 내 잔을 받아 보시오." 남궁청운이 몸을 일으키더니 백육호에게 다가왔다. "백선생이 아니었다면 살아나지 못했을 몸, 이번 기회에 감사를 드리는 바요." 백육호는 담담히 응수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소이다." 그는 남궁청운이 따라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남궁청운은 그를 지나쳐 황보수선에게 다가가 다시 술을 권했다. 사실 그가 일어선 주목적은 그것이었다. "황보소저, 한 잔 하시겠소?" "아니에요, 마시지 않겠어요." 황보수선은 찬 바람이 휭 도는 듯한 음성으로 거절했다. 그 바람에 남궁청운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소저, 뭐 언짢은 일이라도 있소?" "잘 아실 텐데요." 황보수선은 톡 쏘아붙인 후 고개를 돌려버렸다. 남궁청운의 영준한 얼굴에 언뜻 노기가 스쳤다. "내가 우매해 그런지 소저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소이다. 하하하!" 짐짓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으나 그의 얼굴에는 어색함이 어렸다. 황보수선은 노골적으로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 남궁당주님을 당대의 영웅으로 흠모해왔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설마 무엇때문인지 모른다고 하시지는 않겠죠?"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곁에 앉아있는 남궁소연에게 말했다. "연매, 여긴 너무 답답해. 나가서 바람 좀 쏘이지 않겠어?" 남궁소연은 즉각 호응했다. "그래요, 안 그래도 저도 숨이 막히는 것 같았어요." 두 여인은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 이렇게 되자 남궁청운의 안색은 보기 흉하게 변해버렸다. 그는 밖으로 사라지는 황보수선의 뒷모습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다 시선을 돌렸다. 마침 생글거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연채령이었다. 연채령은 줄곧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남이 알아챌 정도로 그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여인이었다. "연소저, 한 잔 주겠소?" 남궁청운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녀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 연채령의 얼굴에 활짝 미소가 떠올랐다. "호호! 물론이지요. 소녀는 언제나 당주님과 대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하하하! 그렇소? 그럼 오늘밤은 연소저와 함께 즐겁게 보내봅시다." 짐짓 호탕하게 웃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그의 음성은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그 광경에 맞은편에 앉아있던 흑석보의 소보주 여웅은 철무영을 돌아보며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철형, 오늘따라 남궁당주가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소이까?" 철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것 같소. 몹시 불안해 보이는 것 같소." 철무영은 물론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남궁청운은 공개적으로 황보수선에게 청혼한 상태였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황보수선이 쌀쌀하게 나오니 마음이 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여웅은 평소 철무영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술잔을 가볍게 부딪치며 혀를 찼다. "이렇게 중대한 시기에 당주가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문제요, 문제." 직선적인 성품의 여웅은 고개를 흔들어댔다. 철무영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당주의 심정도 이해는 가오. 흑련사의 출현과 녹림의 준동, 게다가 같은 동도인 십정회가 독자노선을 걷고 있으니 무림군왕성의 소성주로서 어찌 복잡하지 않겠소?" 그의 말은 겉으로는 남궁청운을 옹호하는 듯했으나 기실 자세히 들으면 독선적인 성품의 남궁청운을 나무라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맞은편에 나란히 앉아있는 남궁청운과 연채령이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두 남녀의 눈빛이 풀려 있었다. ② "언니, 오라버니께서 변하신 것 같아요. 지난번 만화루 사건 이후로는 모든 게 달라졌어요. 물론 예전에도 지나치게 굴강한 성격이 문제긴 했지만 요즘처럼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진 않았어요. 늘 정기가 충만해 있던 눈빛도 탁해졌고, 매사에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는 것 같아요." 남궁소연은 불안한 듯 털어놓았다. 월광이 휘황하게 비치는 화원(花園)이었다. 남궁소연과 황보수선은 나란히 화원을 거닐고 있었다. "아마도 무림의 난국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일 거야. 누가 뭐라 해도 남궁당주는 당대의 영웅이 틀림없어. 머지않아 본연의 자세로 돌아올 거야. 남궁당주야말로 무림정기를 수호하는 대열의 선두에 선 분이 아니겠어? 그러니 좀더 기다려 봐야지." 남궁소연은 방긋 미소지었다. "언니는 정말 너그러운 분이에요. 나 같으면 가문을 내세워 정략적인 청혼을 한 사내를 그렇게 감싸지는 못할 거예요." 황보수선은 담담히 말했다. "후후, 공과 사는 명확히 해야지. 나도 네 오라버니의 처사는 못마땅해. 하지만 그렇다고 남궁당주의 모든 능력과 인품을 매도할 수는 없는 일이야." "그럼 언니는 청혼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그건 아니야. 그런데 너도 호소협의 청혼을 받았다던데 그게 사실이야?" 남궁소연의 안색이 금세 어두워졌다. "사실이에요. 열흘 전 만금대인으로부터 아버님에게 정식으로 청혼이 들어왔어요." "어쩔 생각이야?" 남궁소연은 망연한 눈으로 화원을 한 차례 둘러보다 한숨을 쉰 후 말했다. "아직 모르겠어요. 그나저나 언니는 천하가 알고 있는 효녀가 아니에요? 만일 부모님께서 청혼을 수락한다면 어쩌실 거예요?" 황보수선의 얼굴에 결연한 표정이 어렸다. "지금까지 난 부모님의 뜻을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어.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리 부모님의 뜻이라 해도 따를 수가 없어." 남궁소연의 눈이 커졌다. "더구나 오래 전 잃어버렸던 정인을 되찾은 지금은 더욱 어쩔 수가 없어." 남궁소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인? 언니가 언젠가 얘기했던 그분 말인가요?" "그래. 그분과 난 너무나 오래 떨어져 있었어. 하지만 이젠 그분을 찾았으니 난 내 삶을 찾아야겠어." 황보수선의 얼굴에는 홍조가 피어올랐다. "아! 그분을 찾았다고요? 어떤 분인가요?" 남궁소연은 호기심을 금치 못하고 급히 물었다. "미안해. 아직은 그분이 누군지 밝힐 수가 없어. 왜냐면... 아니야. 때가 되면 연매에게 그분에 관한 것을 말해줄게. 지금은 아니야." "알았어요. 언니." 남궁소연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황보수선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


"연매는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없어? 내가 보기에도 호소협은 연매의 반려자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남궁소연은 동지를 찾았다는 듯이 급히 말했다. "그렇죠? 언니가 보기에도? 난 그 작자가 너무나 싫어요. 그 자의 음흉한 눈빛만 봐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에요." "그 정도야?" "네. 하지만 내게는 언니와 같은 정랑이 없어요. 그러니 더욱 답답할 뿐이에요." "그럼 흑석보의 여소보주는 어때? 연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던데." 남궁소연은 풀이 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알아요.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요. 분명 좋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럼 철기문의 장소협은? 그 사람도 연매에게 대단한 관심을 품고 있는 것 같던데." "장소협도 좋은 분이라는 건 알지만 역시 마찬가지예요." 황보수선은 한숨을 쉬었다. "아아, 어려운 일이야. 남녀지간의 일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건데." 남궁소연은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았다. "어쨌든 고마워요, 언니. 절 걱정해줘서."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지금까지 연매를 남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어. 그러니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언제고 연매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나면 내게 얘기해 주겠지?" "호호! 알겠어요, 언니. 참 그러고 보니 사랑이란 대단한 것 같아요. 언니의 모습이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아마 그럴 거야." 황보수선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달빛을 받은 그녀의 얼굴은 신비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아! 언니는 정말 아름다워. 이런 언니의 사랑을 받는 그분은 대체 누굴까?' 남궁소연은 사랑에 빠져있는 황보수선의 얼굴을 바라보며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 "싫으면 그만 두겠소!" 남궁청운은 냉소를 터뜨리며 손을 뗐다. "아, 아니에요. 당주님. 다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침실 안. 연채령은 손으로 젖가슴을 가린 채 바들바들 떨었다. 연회가 파한 후 그녀는 얼결에 남궁청운의 처소로 따라오게 되었다. 남궁청운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를 번쩍 안더니 침상에 던졌다. 그는 거침없이 그녀의 옷을 벗겼다. 술기운 탓인지 연채령도 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평소에 남궁청운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으므로 그의 행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응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처녀였다. 옷이 벗겨지고 젖가슴이 드러나자 그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아니야!' 그녀는 젖가슴을 가리며 몸을 도사렸다. 남궁청운은 다시 그녀의 허리를 껴안으며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난 연소저가 내게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소.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깨끗이 물러나겠소." 말은 부드러웠으나 은근한 협박이 깃들인 말이었다. 연채령은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맞아요, 전... 당주님을 오래 전부터 사모해왔어요. 그런데 당주님이 벽월선자에게 청혼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심정이었어요." 남궁청운은 짐짓 고뇌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내 의사와는 상관없는 일이오. 다만 무림평화를 위해 양가의 어르신들께서 추진하시는 일이오.


내 진심과는 무관한 일인 것이오. 사실 그동안 연소저에게 마음을 열어놓지 못한 것은 무림상황이 어지럽기 때문이었소. 모든 것이 끝난 후에야 개인적인 감정을 밝히게 될 것이오. 믿어 주시오." 남궁청운의 언변은 청산유수였다. 그는 술기운과 여색에 대한 욕망으로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그것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눈앞의 여체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아......." 연채령의 몸에 힘이 빠졌다. 그녀는 크게 감동한 듯 젖가슴을 가린 손을 풀며 남궁청운의 손을 잡아 끌었다. "전 당주님의 말씀을 믿어요. 세상이 아무리 뭐라 해도... 전 믿겠어요."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그래, 아무려면 어때? 이 분이 날 사랑하시는 한 언젠가는 떳떳한 사이가 될 수 있을 거야. 분명히.......' 연채령은 눈을 살포시 감은 채 사지를 늘어뜨렸다. "......." 남궁청운의 눈에서 욕망의 빛이 이글거렸다. 그는 상체를 일으켜 연채령을 내려보았다. 그녀의 젖가슴이 봉긋이 솟아 있었다. 순결한 처녀의 상징인 듯 젖가슴 정상에 매달려 있는 두 개의 유실(乳實)은 앵도알처럼 작았다. 유실을 받치고 있는 유륜(乳輪)도 연분홍빛이었다. "날 믿으시오. 채령......." 그는 달콤한 음성으로 속삭이며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묻어날 듯 부드러운 유방을 살며시 움켜쥐었다가 쓰다듬자 연채령의 입술이 벌어졌다. "으음.... 살살 해줘요." 그녀의 몸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평소 사모하던 사내다. 그의 손길이 닿자 절로 흥분이 되었다. 꼭 술기운 탓만은 아니었다. 남궁청운은 그녀의 하의마저 벗겼다. 눈부시게 흰 다리가 드러났다. 대리석처럼 곧게 뻗어내린 다리였다. 이제 남은 것은 여인의 신비지를 가리고 있는 손바닥만한 고의 한 장이었다. 그는 주저없이 고의마저 벗겨버렸다. 연채령은 태초 그대로의 나신이 되었다. 남궁청운의 호흡이 가빠졌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옷을 벗어던지고 여체 위에 엎드렸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먼저 그녀의 나신을 샅샅이 감상하며 손으로 부드럽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연채령의 몸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아아!" 연채령은 참을 수 없는 듯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남궁청운의 얼굴이 그녀의 유방 사이에 파묻혔다. 그는 입술을 벌려 그녀의 유실을 물었다. "학!" 난생 처음 사내의 입안에 소중한 유실을 담게 된 연채령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신음을 발했다. 남궁청운의 본격적인 애무가 시작되었다. 그는 입술과 혀를 이용해 그녀의 전신을 구석구석 누볐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불안감과 흥분이 교차하는 가운데 연채령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녀의 미간이 찡그러져 있었다. 희열과 알 수 없는 슬픔이 교차된 표정이었다. 남궁청운은 그런 그녀가 몹시 고혹적이란 생각을 하며 마침내 최후의 자세에 돌입했다. 여인의 다리를 슬며시 벌리며 그 사이로 파고들어간 것이다. "흑!" 연채령의 입술이 딱 벌어졌다. 무엇인가 뜨겁고 둔탁한 이물질이 자신의 육체 한가운데로 파고든 것이다. 생살이 파열되는 듯한 고통이 순간적으로 그녀의 전신을 세차게 강타했다. 파과(破瓜)의 순간이었다.


남궁청운은 그녀의 몸속으로 단번에 들어간 후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공한 것이다. 드디어 연채령의 모든 것을 그의 소유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연채령의 나신이 흔들렸다. 사내의 목을 껴안은 채 그녀는 온몸으로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눈가장자리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쁨 탓인지 고통 때문인지... 스스로도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었다. 깊은 밤. 남궁청운은 몇 번이나 그녀의 몸을 소유했다. 연채령은 파과의 고통을 지난 후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녀 역시 익을 만큼 익은 육체의 소유자였다. 마침내 그녀도 운우(雲雨)의 즐거움을 깨달은 듯 신음소리를 내며 적극적으로 응하기 시작했다. ③ 하루가 지났다. 귀빈상품관에 젊은 영걸들이 모였다. 지난밤의 연회 이후 다시 모인 것이다. 식탁에는 여전히 산해진미가 올라와 있었다. 만금대인 호금수가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영걸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허허! 어젯밤에는 잘들 ���시었소?" "예, 대인 덕택에 간만에 즐거웠습니다." 남궁청운이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띄운 채 대답했다. 그는 기이한 눈으로 맞은편에 앉아있는 황보수선의 안색을 은밀히 살피고 있었다. "허허! 반가운 소리요. 천하의 태자당주가 이 호모의 누추한 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니 말이오." 한편, 평소 담대한 행동을 해왔던 연채령은 목까지 발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장내에 모여있는 영걸들은 어렴풋이나마 눈치를 채고 있었다. 어젯밤 유난히 질척였던 것과, 연회가 파한 후에도 얼싸안다시피 하며 두 사람이 함께 사라졌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방금 전 남궁청운이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는 의미도 연채령의 태도에서 능히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자, 오늘도 즐거운 하루가 될 수 있도록 본인이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소이다. 모쪼록 마음껏 즐기시기 바라오." 무엇이 그리 좋은지 호금수와 호사붕 부자는 연신 벙글거리고 있었다. 또한 그들 부자와 맞추어 웃는 인물은 남궁청운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묵묵히 젓가락을 놀릴 뿐이었다. 특히 당세곤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본래 쾌활했던 그가 완전히 말이 없어져 주위 사람들이 어색해할 지경이었다. 한편 철무영도 줄곧 무거운 표정이었다. "조반이 끝난 후에는 사냥 준비를 해 두었으니 모두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호사붕이 중인들을 향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아버님께서 틈틈이 나가시는 사냥터에는 갖가지 짐승들이 널려 있으니 한 분도 빠짐없이 나서 주십시오. 참, 이번 사냥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분께는 아버님께서 마련한 특별한 상이 있으니 기대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그 말에 가라앉아 있던 장내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만금대인의 씀씀이가 크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터에 호사붕이 호언장담까지 하니 절로 솔깃한 마음이 든 것이었다. 수렵장(狩獵場)은 만금장의 뒷산이었다. 그곳은 사유지(私有地)였으므로 만금장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산이 그리 높지는 않았으나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었고, 그 범위가 넓어 야생동물이 서식하기에는 알맞은 곳이었다. 만금대인은 이곳을 일 년에 몇 번 개방했다. 아니, 개방이라기보다는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자신과 상거래하는 거상(巨商)들이나 이따금


황족과 고관들을 초빙하여 이곳에서 사냥대회를 열곤 했다. 그의 이런 행위는 일각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었다. 은밀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곳에서 가끔은 동물이 아닌 인간사냥까지 벌어진다고 했다. 물론 확인된 소문은 아니었다. 진시(辰時) 무렵. 만금대인을 포함한 열한 명의 인물들이 말을 타고 수렵장에 들어섰다. 이들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일꾼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만금대인은 사냥하는 일인 당 각기 열 명씩의 하인들을 할당하여 일을 돕도록 배려해 두고 있었다. "자, 지금부터 정확히 두 시진 동안 사냥에 들어가겠소이다." 호피(虎皮)로 만든 사냥복을 걸친 호사붕이 마상에서 손을 번쩍 들며 설명했다. "두 시진 후에는 이곳에서 징을 세 번 칠 것이니 그 소리를 듣는 즉시 이곳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에서 아버님께서 공정한 심사를 하여 오늘 우승자를 가려 준비한 포상품을 하사할 것입니다. 한 가지 유의하실 점은 이곳에는 맹수들은 물론 독충과 곳곳에 늪지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출중한 무예를 갖추고 있어 특별히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 영걸들은 그의 말을 귀담아 들어 두었다. 그들은 모두가 젊었다. 따라서 호승심이 강했다. 기왕이면 사냥을 많이 하여 우승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자, 그럼 징소리가 들리는 순간부터 사냥을 시작하기 바랍니다." 이때였다. "잠깐! 호형, 포상품이 무엇이오? 미리 알려줄 수는 없소?" 구룡방의 소방주 열화권 마휘가 호기심에 찬 질문을 던졌다. 호사붕은 부친 호금수를 돌아보았다. 호금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호사붕은 만면에 득의의 미소를 떠올리며 영걸들을 둘러보았다. "그럼 속시원히 말씀드리겠소이다. 오늘의 승자에게 돌아갈 포상품은 강호에 그 명성이 널리 퍼져 있는 옥류검(玉流劍)이외다." "우와!" 마휘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다른 영걸들도 마찬가지였다. 옥류검이라면 무림인이라면 누구라도 탐내는 천하의 명검인 것이다. 옥류검은 평상시에는 허리에 두를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한 일종의 연검(軟劍)이다. 그러나 한 줌의 진기만 주입하면 강철처럼 빳빳해져 쇠나 바위를 무베듯 하는 신검이었다. 따라서 내공의 기초만 되어 있어도 옥류검을 얻으면 고수의 반열에 들 수 있을 만큼 널리 알려진 명검이었다. "천고의 명검을 소유할 수 있는 기회는 여러분 모두에게 있습니다. 다만 보검은 한 자루뿐이니 절대 조를 이루어 행동을 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으나 혹시라도 담합하여 어느 한 사람을 밀어주어도 안됩니다. 여러분을 수행하는 하인들이 모두 확인할 테니 행여나 규정에 어긋나는 행동은 삼가시기 바랍니다. 그럼, 여러분의 행운을 빌겠습니다." 호사붕의 말이 끝나자 만금대인의 손이 허공으로 올라갔다. 힘차게 손이 떨어지는 순간 징소리가 울렸다. "와아아아......!" 두두두두두! 영걸들은 지체없이 말을 달려 숲으로 뛰어들었다. 각기 열 명씩의 건장한 장한들을 대동한 채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한편 백육호도 마지못해 사냥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그는 사냥에는 별 뜻이 없었다. 그래서 하인들을 대동한 채 느릿느릿 말을 몰아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갔을까? 숲 사이의 소로에서 백마를 탄 미녀가 나타났다. 그녀도 열 명의 하인들을 대동하고 있었는데 백육호의 곁으로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백공자님,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찾아왔어요." 황보수선이었다. 백육호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실 것 없소. 내 비록 무림인은 아니나 한두 가지 호신술은 익히고 있소이다. 또 하인들이 호위해 주는데 무슨 걱정이시오?" 황보수선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함께 있겠어요." "하하, 아까 호소협이 하는 얘기도 듣지 못했소? 함께 조를 이루고 다니면 안된다 하지 않소?" "전 포상품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 규칙에 얽매일 필요도 없죠." 백육호는 그녀를 주시하며 물었다. "소저도 무림인이 아니오? 그런데 어찌 천하의 명검을 포기하려 하시오? 더구나 옥류검은 여인이 쓰기에 더없이 적합한 보검이 아니오?" 황보수선은 백육호의 곁에서 말을 몰며 눈에서 그윽한 빛을 발했다. "과연 백공자님은 박학다식하시군요. 무림인이 아닌데도 옥류검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계시네요." "그야.... 들은 풍월이었을 뿐이오." 백육호는 적당히 얼버무릴 뿐이었다. 황보수선은 의미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셨군요." 그녀는 정말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듯 천천히 말을 몰았다. 백육호는 할 수 없이 그녀와 나란히 숲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제 17 장 수렵장(狩獵場)의 함정(陷穽) ① 철갑신장 장건웅은 퉁방울 같은 눈을 부릅뜨고 숲 깊숙이 달려 들어갔다. 그는 오늘의 사냥이야말로 자신을 위한 것이란 확신을 하고 있었다. 중원 북단의 초원에서 자란 그는 걷기보다 먼저 말을 타고 초원을 질주했으며 사냥은 일상생활이나 다름 없었다. '사냥이란 무공의 고하로 판가름나는 것이 아니다. 짐승들의 습성을 얼마나 파악하고 있느냐와 자연환경을 어떻게 유용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따라서 오늘의 승자는 당연히 나일 것이다.' 그는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강골협심(强骨俠心)의 대장부로 명성이 자자한 그였으나 도무지 여인관계에만은 쑥맥인 그였다. 태자당에 입당한 날부터 그의 열병은 시작됐다. 그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하늘색 궁장을 차려입고 서글서글한 눈매로 자신을 향해 인사를 건네던 천향옥녀 남궁소연을. 그동안 수없이 그녀에게 말을 걸 기회가 있었으나 그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끙끙거리만 했을 뿐, 아직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호사붕이 그녀에게 청혼을 하다니....... 만금장에서 공개적으로 그녀에게 청혼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었다. '두고보자. 옥류검은 내 차지다. 기필코 옥류검을 차지해 그녀에게 선물로 주리라. 그럼 그녀도 내 마음을 알아줄 것이다.' 장건웅은 서둘렀다. 그는 분명 오늘의 승자는 자신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만 두 시진이란 시간제약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평소라면 우선 지형부터 파악하고 맹수들의 근거지도 확인해야 했다. 연후 함정을 파고 매복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속전속결해야 했다. '후후! 모두 거들떠보지도 않는 물소부터 잡자. 그 다음부터가 시작이다.' 그의 생각은 남달랐다. 야생물소를 때려 잡아봐야 승자가 될 가망은 없다. 그러나 그의 최종목표는 물소가 아니었다. 물소는 하나의 미끼에 불과한 것이었다. 지금쯤 태자당의 영걸들은 숲을 헤매며 호랑이나 곰, 따위의 맹수를 찾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 사냥 경험상 그들이 호랑이나 곰을 발견할 확률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노리고 있는 목표는 흑표(黑彪)였다. 그는 수렵장에 오기 전 이곳에 몇 마리의 흑표를 풀어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흑표라면 호랑이 못지않는 포획물인 것이다. 그래서 물소를 미끼로 흑표를 잡기로 목표를 정한 것이다. 물론 흑표 대신 호랑이나 곰이 걸려도 상관은 없었다. '사냥광이신 아버님도 아직 흑표는 한 마리도 잡아보지 못하셨소. 그놈을 한 번 잡아보는 게 아버님의 소원이셨소.' 식탁에서 호사붕이 그에게 은밀히 건네준 말이었다. 말하자면 흑표만 잡으면 이번 사냥대회의 우승은 맡아놓은 당상이라는 것이다. '후후! 흑표는 바로 내것이다.' 장건웅은 조심스럽게 늪을 향해 접근해갔다. 늪지에 물소 떼가 한가롭게 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물소는 흑표가 가장 즐기는 사냥감인 만큼 분명 놈은 근처에서 몸을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흑표는 여간 영악한 동물이 아니다. 놈들은 확실한 우위를 점했다고 판단하기 전에는 결코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기회를 발견하면 단숨에 달려들어 상대의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물고 늘어진다. 장건웅은 자신을 따르던 하인들에게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고 일러둔 후 물소 무리들 중에서 중간 정도 크기의 물소 한 마리를 골랐다. 그는 발자국 소리를 죽여가며 접근해갔다. 지나치게 큰 물소는 흑표의 경계심을 자극하므로 일부러 적당한 놈을 고른 것이다. 물소의 무딘 감각은 장건웅의 신법을 감지해내지 못했다. 중간 크기라지만 그래도 가축인 황소의 두 배나 족히 되는 놈이었다. 장건웅은 숨죽여 목표를 향해 접근한 후 전광석화처럼 자신의 애병인 창을 날렸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창은 정확히 물소의 허벅다리에 꽂혔다. 꾸워어억! 물소는 괴성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그 순간 물소 떼들은 놀라 우르르 달아나기 시작했다. 늪지 가에서 놀던 물소 떼는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개천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허벅지를 관통당한 물소는 펄쩍 뛸 뿐 좀처럼 대열을 따라가지 못했다. 어느 정도 뒤쳐져 절뚝거리며 달리던 놈은 포기한 듯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장건웅의 신형이 유령처럼 날아갔다. 그는 재빨리 물소의 배 아래로 달라붙었다. 물소는 미처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느리게 걸어가고 있었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그는 느긋이 마음을 먹었다. 아무리 신법이 빨라도 흑표의 속도를 따라갈 수는 없다. 따라서 그는 물소 배에 매달려 흑표가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아마도 놈은 다친 물소를 발견하고 후미에서 도약할 것이다. 그리고 물소의 등에 올라타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이다. 그는 물소의 배 아래 달라붙어 있으므로 흑표는 미처 그의 존재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적당한 기회를 포착하여 흑표의 목을 꿰뚫으면 되는 것이다. 준비를 마친 장건웅은 침착하게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왔다!' 그는 바짝 긴장했다. 저멀리 나무 아래 한 마리의 흑표가 느리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흑표는 쉽사리 달려오지 않았다. 놈은 물소 근처에 다가오더니 주위를 탐색하듯 빙빙 맴돌고 있었다. 시커먼 코를 찡긋거려보고 잔뜩 자세를 낮추어 물소를 의심스런 눈초리를 노려보곤 했다. 과연 인간 못지않은 영악한 동물이었다. '오너라! 뭣 하느냐?' 장건웅은 조바심을 쳤다. 그의 기다림은 과연 헛되지 않았다. 휘익! 마침내 흑표가 지면을 박차고 달려든 것이다. '한 번뿐이다. 두 번은 없다.' 장건웅은 오른쪽 겨드랑이에 끼고 있는 창을 바짝 움켜잡았다. 손바닥에 촉촉한 땀이 배어나왔다. 크워어어억! 갑자기 물소가 구슬프게 울며 앞발을 번쩍 치켜올렸다. 크아아앙! 흑표가 등에 떨어진 것이다. 놈은 단숨에 물소의 뒷덜미 숨통 부근을 물어뜯었다. 그때였다. "탓!" 장건웅은 기합을 발하며 창을 전광석화처럼 내찔렀다. 창은 아래서 위로 솟아올라 여지없이 흑표의 복부에 박혀버렸다. 캬아아앙! 흑표는 포효를 내지르며 몰소의 등에서 떨어졌다. 그 순간 물소의 배에서 뛰쳐나온 장건웅이 창을 더욱 깊이 찔러넣었다. 크아아앙! 흑표는 창이 꽂힌 채 바닥을 굴렀다. 네 발로 장건웅을 노리고 할퀴려 들었다. 장건웅은 급히 몸을 숙였다. 슉! 하고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창을 놓지 않았다. 아차하면 창이 박힌 채로 흑표는 달아나 버릴 것이다. 그는 창을 잡은 채 바닥에 뒹굴었다. 흑표는 영악한 놈이었다. 그가 창을 놓지 않자 그대로 데굴데굴 굴렀던 것이다. 그 바람에 그도 함께 구르게 되었다. 비록 창의 길이가 있었으나 그는 흑표와 지척까지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휙! 흑표의 발톱이 날아왔다. "큭!" 그는 비명을 질렀다. 재수없이 흑표의 발톱이 얼굴을 스친 것이다. 그 바람에 그의 이마가 찢겨져 나갔다. 끈끈한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마를 만졌다. 그 바람에 창이 ���안에서 빠져나갔다. "아차!" 경악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흑표는 창을 꽂은 채 밀림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놈! 포기해라! 달아나봐야 오래 가지 못한다!"


장건웅은 노갈을 내지르며 흑표를 쫓아갔다. 여느 때 같으면 상처입은 맹수를 쫓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그러나 흑표의 복부에서 창이 깊숙이 박혀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놈은 출혈로 인해 둔해질 것이다. 그래서 약간의 간격만 두고 따라가면 종내에는 놈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일각쯤 흐르자 흑표는 더 이상 달아나지 못하고 벌렁 쓰러졌다. 놈은 네 다리를 버둥거리고 있었다. 장건웅은 기쁨에 차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여봐라! 어서들 와서 이놈을 포박해라!" 그의 뒤를 따라온 하인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그러나 흑표는 흑표였다. 크아앙! 하인들이 접근하자 포효를 지르며 다시 벌떡 일어나 입을 쩍 벌렸다. 하인들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비켜라! 내가 가보겠다." 장건웅은 하인들을 물린 후 흑표범에게 다가섰다. 흑표는 고개를 돌려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장건웅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껏 천여 마리에 달하는 맹수의 숨통을 끊으면서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괴이한 일이로군.......' 그러나 그의 뇌리에는 남궁소연이 옥류검을 받아들고 환히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자 불길한 감정이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네 다리를 허공에 뻗은 채 누워있는 흑표에게 다가갔다. 놈은 이제 완전히 힘이 빠진 듯했다. 그는 창끝을 잡고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잘 가라." 푸욱! 뜻밖의 음산한 외침이 뒷통수에서 들려왔다. 순간 등줄기가 화끈했다. "헉!" 장건웅은 입을 딱 벌리며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한 자루의 장도가 그의 가슴에 비쭉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장도를 바라보다 서서히 몸을 돌렸다. "너... 너희들이... 왜?" 그는 눈알을 부라렸다. 열 명의 하인들은 모두 병장기를 쥐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장도를 놓으며 물러서고 있었다. "흐흐흐! 이제 그만 가거라!" 윙! 위이잉! 장건웅은 눈앞에 캄캄해졌다. 아홉 명의 하인들이 일제히 병기를 휘두르며 덮쳐온 것이다. 그의 어깨에 손도끼가 떨어졌다. 가슴에 두 자루의 검이 박혔다. 옆구리에 창이 관통해 들어왔다. 무릎 아래로 비륜(飛輪)이 파고들었다. "으아아아악!" 그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② 태자당의 영걸들과 함께 숲속으로 들어갔던 호사붕이 되돌아왔다. 그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호금수가 앉아있는 천막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아버님, 오늘로 모든 것이 끝나게 되겠군요." 호금수는 눈을 가늘게 하며 대답했다. "아직 낙관하기에는 이르다. 상대는 천하명가의 걸출한 후예들이다. 그렇게 쉽게 끝나진 않을 것이다." 호금수가 있는 곳은 한쪽이 열려 있는 천막 속이었다. 그는 산해진미를 가득 차린 상 앞의 호피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늘씬한 미녀들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호사붕은 옆에 있는 의자에 몸을 묻으며 말했다.


"수렵장 안에 매복하고 있는 흑련사의 정예고수들이 오백 인이 넘습니다. 더구나 풋내기들은 포상을 타기 위해 제 정신이 아닐 겁니다. 자신들이 함정에 빠진 줄도 모르고 있으니 결과는 이미 난 것이나 다름없지요." 호금수는 혀를 찼다. "결과는 두고봐야 아는 것이다. 녀석." "하하! 글쎄 이미 끝난 일이나 다름 없다니까요." 호사붕은 옆에서 시중드는 미녀의 둔부를 손바닥으로 철썩 치며 말했다. 부친 앞이건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이놈아! 그리 간단한 일이라면 무엇하러 독안금붕(獨眼金鵬)이 직접 거동했겠느냐?" "옛? 그분이 직접 왔단 말입니까?" 호사붕은 눈을 크게 떴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들 부자의 대화는 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수렵장 안에 흑련사의 오백 명 정예고수가 매복하고 있다니......? 게다가 독안금붕이라니? 그는 사사련의 련주(聯主)로 현재는 흑련사의 공동 사주로 군림하고 있었다. 또 한 명의 사주는 구천마교의 교주인 천리신마(千里神魔) 혁세기(赫世紀)였다. "지금... 그분은 어디 계십니까?" 호사붕은 정신이 번쩍 난 듯 물었다. "그분은 남궁청운과 백의원의 수급 만큼은 직접 취해야겠다며 밀림 속으로 들어가셨다." 호사붕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두 애송이 때문에 직접 나섰단 말입니까?" "이놈아, 천려일실(千慮一失)이란 말도 모르느냐? 그분이 사사련의 련주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번 일을 완벽하게 성공시키기 위해 직접 나서신 것이다." "으음, 과연 대단한 분입니다." "그만큼 남궁청운이 흑련사에는 부담스러운 존재라는 뜻도 되지." "그럼 백의원은? 그자는 의원이 아닙니까?" 호금수는 눈을 가늘게 했다. "그자의 정체가 모호하다. 나도 그자를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독안금붕께서 나섰으니 곧 놈의 정체가 밝혀질 거다." 호사붕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가에 괴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쨌든 오늘이 지나면 무림의 판도는 바뀔 겁니다. 내로라하는 영걸들이 떼죽음하게 되었으니 소자도 슬슬 기지개를 켜야겠습니다." 호금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하지만 서두를 것 없다. 무림인들은 자신들의 힘만 믿고 우리 상계(商界)를 업신여기고 있지만 최대한 그 점을 이용해야 한다. 적당한 기회가 오면 세상이 바뀔 것이다. 그때까지는 잠룡(潛龍)처럼 수면에 깊이 가라앉아 있는 것이 좋다." 놀라운 말이었다. 호금수의 말은 곧 상인으로서 무림제패의 야욕까지 품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호사붕은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아버님, 소자를 믿어주십시오. 반드시 무림을 평정할 테니까요. 상인을 업수이 여기며 아무 때나 거드름 피우며 손을 내미는 작자들을 머지않아 아버님 앞에 엎드리게 하겠습니다." "오냐, 애비도 그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지금까지 무엇 때문에 막대한 황금을 써가며 무림군왕성과 흑련사 사이를 오갔겠느냐? 모두가 앞날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바로 널 위해서이기도


했다." 호금수의 음성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단,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단 말이 있다. 남궁청운의 경우를 보면 알 것이다. 너는 매사에 경거망동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시무자위준걸(時務者爲俊傑:때를 아는 자가 영웅)이라 했지 않느냐?" "염려 마십시오. 소자도 남궁청운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은인자중(隱忍自重)할 것입니다." "허허허! 어쨌든 오늘은 기쁜 날임에 틀림이 없다. 참, 며느리가 될 아이는 어찌됐느냐? 잘 조치해 두었겠지?" 호사붕은 히죽 웃었다. "이를 말씀입니까? 남궁소연의 털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안배해 두었습니다. 흑련사에도 단단히 당부해 놓았거니와 본가의 비밀조직인 황금총(黃金總)의 엄선한 고수 이백 명을 투입시켜 놓았습니다." "뭐? 이백 명이나?" "흐흐, 소자의 내자 될 여인 외에도 미색이 출중한 두 계집이 있지 않습니까? 아버님을 위해 그녀들에게도 고수들을 붙여놓았으니 터럭 하나 손상없이 잡아들일 겁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호금수의 입이 벌어졌다. "허허헛! 네놈이 애비의 속마음을 헤아리는구나. 황보수선이란 아이는 애비의 마음에 꼭 든다. 안 그래도 그 말을 하려고 했지." 호사붕은 음침한 미소를 흘렸다. "후후, 연채령이란 계집은 틀렸습니다. 그 계집은 벌써 남궁청운과 한 몸이 됐으니 독안금붕께 진상품으로나 쓰면 될 것입니다." "허허허! 녀석, 계집 보는 눈 하나는 이 애비를 능가하는구나. 좋다. 오늘밤이 기대가 되는구나." 그들 부자의 대화는 실로 후안무치한 것이었다. 그들은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음담패설을 지껄이며 술을 마셔댔다. 수렵장 안에서 일어날 일들을 안주 삼아서. ③ '기이한 일이다. 뭔지 알 수 없지만 이 숲속에는 찌르는 듯한 살기가 느껴진다.' 백육호는 아까부터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묵묵히 뒤따르고 있는 이십 명의 하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저자들은 보통 하인들이 아니다. 눈빛이 안으로 갈무리되어 있고, 발걸음도 가벼워 낙엽 밟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만금장이 아무리 돈이 많다해도 저런 자들을 하인으로 고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드렇다면......?' 이때 황보수선이 주위를 둘러보며 탄성을 발했다. "이곳은 정말 멋진 곳이에요. 울창한 밀림과 지형이 잘 조화되어 있어요. 다만 인공(人工)의 흔적이 조금씩 눈에 띄는 것이 옥의 티긴 하지만요." 그녀는 시종 생글거리고 있었다. 백육호와 동행하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운 듯했다. 백육호는 담담히 말했다. "황보소저, 기왕 사냥에 참가했으니 토끼라도 한 마리 잡아야 하지 않겠소?" "토끼요? 호호! 기왕이면 곰이나 늑대가 낫지 않을까요? 그래야 체면이라도 유지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문제 없어요. 제가 도와드릴께요." 백육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단, 너무 떨어지진 마시오." 황보수선은 그 말이 무척이나 기쁜 듯 방긋 웃었다. "호호! 걱정 마세요. 설령 백공자님이 절 쫓아낸다해도 따라갈 테니까요." 꾀꼬리가 지저귀는 듯한 교소를 터뜨리는 황보수선이었다.


"자 그럼, 날 따라오시오." 백육호는 박차를 가했다. 히히힝! 말은 깜짝 놀라 앞발굽을 번쩍 치켜 올렸다가 쏜살같이 내달렸다. "어멋? 같이 가요!" 황보수선도 짜랑한 옥음을 발하며 능숙한 기마술로 저만치 앞서가는 백육호의 뒤를 쫓았다. 한편 산책이라도 나온 듯 천천히 가던 두 사람이 갑자기 내달리자 이십 명의 하인들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더니 황급히 따라 달렸다. 백육호는 한 마장 정도 전력으로 달린 후 말을 멈추었다. 황보수선이 다가오기를 기다린 그는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황보소저,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하오. 지금부터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 같소." 황보수선은 서늘한 눈을 깜박였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이곳 공기가 이상하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소. 주변에 찌르는 듯한 살기가 깔려 있소이다." "......?" 황보수선은 안색이 변했다. 그녀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평화스럽고 아름다운 정경만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대체 무엇이 심상치 않은지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는 백육호였다.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조심하겠어요." 이때 허둥지둥 달려온 하인들이 두 사람의 주변에 당도했다. 황보수선은 빠르게 그들을 훑어보았다. 그녀는 본래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백육호의 말에 유심히 하인들을 살펴본 그녀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녀는 즉시 전음입밀로 말했다. (과연 백공자님 말씀이 맞군요. 이자들은 보통 하인배들이 아니에요. 분명 뭔가 있어요. 그러니 공자님은 절대로 제 곁을 떠나지 마세요.) 황보수선은 바짝 긴장했다. 지금까지 그녀는 살벌한 전장을 수십 회나 겪어보았다. 그러나 지금처럼 긴장하기는 처음이었다. 그것은 곁에 있는 백육호가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이자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짐승몰이꾼들은 분명 아니야. 그렇다면......?' 두 사람은 서서히 말을 몰았다. 겉으로는 사냥을 하기 위해 짐승을 찾는 것처럼 보였으나 기실 두 사람의 생각은 다른 데 있었다. 황보수선은 백육호의 곁에 바짝 붙은 채 주변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한편 하인들은 그들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르고 있었다. 백육호는 그녀에게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황보소저, 다른 사람들이 위험한 지경에 빠졌을지 모르오. 우선 철소협을 찾아보는 게 어떻소?" 황보수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어서 가봐요." 두 사람은 눈짓을 주고받은 후 마치 사냥감이라도 발견한 양 박차를 가하며 숲속으로 말을 몰았다. 두두두! 그들이 갑자기 내달리자 하인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 중 누군가 음침하게 외쳤다. "놓치면 안된다! 쫓아라!" 휘휙휙! 그들은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놀라운 일이었다. 풀 위를 스치며 날아가는 그들의 신법은 결코


짐승몰이꾼이라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야수처럼 일제히 숲속으로 달려들어갔다. 그러나 백육호와 황보수선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냄새를 맡았구나!" 한 위인이 욕설을 퍼부었다. "할 수 없다. 지금부터 조를 나누어 추격한다. 백가놈은 발견하는 대로 척살해라. 단, 계집은 생포해야 한다. 어서 쫓아라!" "옛!" 하인들은 일제히 대답한 후 각각 사오 명씩 짝을 이루어 신형을 날렸다. 그들은 바로 흑련사의 정예고수들이었다. "멈추시오!" 히히힝! 달리던 말이 급히 멈추었다. 마상에는 백육호와 황보수선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하인 차림의 한 사나이였다. "왜 그래요? 사냥감이 이쪽으로 달아났는데." 황보수선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가 모시고 온 분이 이곳에 미끼를 풀고 매복중이십니다. 그러니 이곳은 양보해 주셔야겠습니다." "그분이 누구죠?" "무림군왕성의 남궁소저이십니다." 황보수선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녀는 박차를 가하며 날카롭게 외쳤다. "흥! 그렇다면 내가 직접 그녀의 의향을 물어보겠어요. 비켜요!" 히히힝! 말은 발굽을 번쩍 들었다가 놓으며 앞으로 달려갔다. 황보수선은 남궁소연이 위기에 놓여있을 것 같아 마음이 급해진 것이었다.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인 차림의 사내는 신형을 번쩍 날려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가볍게 쥐었는데도 말은 꼼짝을 하지 못했다. "흥! 막을 수 있다면 어디 해보시지!" 위잉! 황보수선의 좌수가 살짝 뒤집어지며 암경이 뻗어나갔다. 사내의 반응은 신속했다. 그는 즉시 장력으로 그녀의 암경을 막아냈다. 펑! 폭음과 함께 황보수선은 상체를 흔들었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비로소 상대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용봉칠영에 속하는 고수였다. 비록 이번 장력에 오성의 내공밖에 사용하지 않았으나 상대방은 거뜬하게 자신의 공격을 막아냈다. 사내는 즉시 뒤로 물러나며 소매에서 뿔고동을 꺼내 입에 대었다. 뿌우웅......! 고동소리가 숲을 울렸다. 황보수선은 백육호를 돌아다보았다. 백육호는 고개를 침중하게 가로저으며 말했다. "늦으면 남궁소저가 위험할 것이오." "알겠어요, 백공자님." 황보수선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신형을 날렸다. 그녀는 제비처럼 허공을 날아 사내에게 덮쳐갔다. 명문 출신인 그녀의 신법은 화려했다. 허공에 뜬 상태로 쌍장을 뻗자 회오리와도 같은 장력이


뻗어나갔다. 사내는 자신이 적수가 못됨을 느낀 듯 황급히 뿔고동을 던져버리고 숲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황보수선의 장력을 피하지 못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등에 장력이 떨어졌다. "크아아악!" 사내는 피를 토하며 숲속에 처박혔다. 백육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단한 무공이구려." 황보수선은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워요." 백육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 후 말했다. "이미 음모가 시작된 것 같소이다. 어서 가봅시다. 남궁소저가 위험할지 모르는 일이오." "알겠어요, 공자님." 황보수선은 말에 뛰어오르더니 힘차게 박차를 가했다. 두 필의 준마는 밀림 속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얼마 달리지 못하고 그들은 말을 멈추어야 했다. 밀림은 갈수록 빽빽해졌으므로 말을 타고는 더 이상 진입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어떡하죠?" 황보수선은 난감한 듯 돌아보며 물었다. 백육호는 잠시 생각하더니 담담히 말했다. "지금으로써는 남궁소저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요. 마침 이곳은 밀림이 잔뜩 우거져 있으니 은신하기가 좋소. 난 이곳에 숨어 있을 테니 소저가 먼저 달려가 보는 것이 어떻소?" "그건......." 황보수선은 난색을 지었다. 위험이 곳곳에 널려있는 곳에 백육호 혼자 내버려두고 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괜찮소이다. 내 한 몸 숨기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소이다. 그러니 어서 가보시오. 더 늦기 전에 말이오." 황보수선은 입술을 깨물었다. "알겠어요. 하지만 공자님은 절대로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여선 안돼요. 되도록 빨리 돌아올 테니까요." "알겠소이다. 걱정 말고 가보시오." "그럼......." 황보수선은 내키지 않는 듯 몇 걸음 가다가 돌아보았다. 백육호가 커다란 나무 뒤로 몸을 숨기는 광경이 보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녀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아! 천하의 주인이 되셔야 할 분이 어쩌다가 저런 수모를 겪게 되었단 말인가?' 그녀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백공자님, 조금만 참으세요. 이 난국이 평정되기만 하면 소녀는 공자님과 함께 무림인이 아닌 평범한 아낙으로, 아니면 의원의 아내로 공자님과 함께 심산유곡에서 약초를 재배하며 살아가겠어요. 그리하여 공자님의 얼굴에서 사라진 미소를 되찾도록 노력할 거예요. 오직 공자님만을 사랑하며 한평생 살아갈 거예요.' 황보수선은 눈에 눈물이 고이는 걸 느끼며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순간 백육호는 나무 뒤에서 유유히 걸어나왔다. "쯧쯧, 팔자에 없는 겁쟁이 흉내를 내는군."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린 후 청력을 기울여 보았다. 그의 청력은 천이통(天耳通)의 경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 소리는 아니고... 이 소리는 남궁청운의 고함소리... 음! 이건 철형의 목소리군. 급하게 됐구나!'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마치 뇌전을 방불케 하는 속도였다. 그는 밀림 사이를 스쳐 날아가며 내심 염두를 굴렸다. '남궁소저에게는 황보소저가 갔으니 당분간은 큰 위험이 없을 것이다. 먼저 철형부터 구해야겠다.' 그는 상황이 매우 급박하다는 것을 느꼈다. 수렵장 안에 흐르고 있는 공기는 그야말로 살벌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만금장의 호금수는 사냥을 핑계삼아 태자당의 영걸들을 죽음의 함정에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④ "이... 이놈들! 아직 멀었다. 어서 덤벼봐라!" 철무영. 그는 비록 고함을 치고 있었으나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그의 등에는 비수가 세 자루 꽂혀 있었고, 어깨와 다리에도 자상(刺傷)이 나 있었다. 전신은 온통 선혈 투성이였으며, 신형은 중심을 잡지 못해 비틀거리고 있었다. 지금 그의 주위에는 이십여 구의 시신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를 포위하고 있는 자들은 무려 오십여 명이 넘었다. "흐흐! 과연 대단하군. 중상을 입고도 흑련사의 일급살수들을 이십여 명이나 해치우다니... 얘들아, 이제 그만 편안한 곳으로 모시거라!" 육합창(六合槍)을 땅에 짚고 있는 중년인이 명을 내렸다. 그는 흑련사 살수들의 우두머리인 듯했다. 얼마전 철무영은 운좋게 발견한 백호(白虎)와 사투를 벌인 끝에 놈을 쓰러뜨렸었다. 백호를 사냥했으니 오늘의 우승자가 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런데 백호를 쓰러뜨리고 숨을 돌리는 사이 그를 도와주는 척했던 하인들이 일제히 비수를 날렸다. 꿈에도 그들을 의심하지 않았던 그는 아차하는 사이에 다섯 군데나 비수를 맞고 말았다. 그때부터 숲속에서 수십 명의 흑련사 살수들이 뛰쳐나와 그를 협공했다. 그는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점차 기력이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쳐라!" "놈은 지쳤다!" 위이잉! 쐐애액! 오십여 명의 흑련사 살수들은 무자비한 공격을 펼쳤다. 철무영은 본능적으로 쌍장을 휘둘렀으나 아무런 진기도 발출되지 않았다. 그는 한 살수가 뻗은 창이 자신의 심장으로 파고드는 것을 보고도 속절없이 눈만 크게 뜰 뿐이었다. '이렇게... 끝난단 말인가?'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그런데 비명의 주인공은 철무영이 아니었다. 그의 심장을 향해 창을 뻗었던 장한의 입에서 터져나온 것이다. 그자는 창을 떨구며 두 손을 허우적거렸다. 그는 자신의 목으로 튀어나온 뾰죽한 물체를 뽑으려 했으나 이내 쿵! 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뒷덜미에 어른 손가락 굵기만한 나뭇가지가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웬 놈이냐?" 살수들의 우두머리가 고함을 지르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철형! 괜찮소?" 휙! 하늘에서 인영 하나가 뚝 떨어졌다. 그는 바로 백육호였다. "아니... 백선생이 어떻게......?" 혼미한 의식 속에서도 철무영은 그를 알아보고 의혹을 금치 못했다.


"철형, 걱정말고 이 약부터 드시오. 그리고 내 등에 업히시오. 이곳부터 빠져나가고 봅시다." 백육호는 품속에서 검은 환약을 꺼내 철무영의 입안에 넣어준 후 재빨리 손을 놀려 그의 상처 주위 혈을 눌러 지혈시켰다. 그 사이 한 살수가 장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으나 어찌된 셈인지 그는 무릎을 푹 꺾으며 거꾸러지고 말았다. 백육호의 발이 그의 무릎 아래를 걷어찬 것이다. 철무영은 의혹이 구름처럼 피어났으나 순순히 약을 삼켰다. 어쨌든 살고 볼일이었다. 백육호는 그를 등에 업은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살수들은 갑자기 나타난 그를 중심으로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그러나 쉽사리 덤벼들지는 못했다. 방금 전 백육호가 펼친 눈부신 수법에 다소 겁을 먹은 듯했다. "이제 보니 네놈이 바로 괴수신의(怪手神醫) 백육호란 놈이구나!" "괴수신의?" 백육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실소를 흘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별호가 붙은 모양이었다. "과연 네놈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 위이잉! 중년인은 육합창을 휘두르며 공격해왔다. 그는 흑련사에 투신하기 전에는 육합문(六合門)의 문주였다. 지금은 흑련사의 십령(十令) 중 한 명이었으나 스스로의 무공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위인이었다. 그의 외호는 육합신창(六合神槍), 성명은 악곤(岳坤)이었다. 그는 삼십육로(三十六路) 육합창술을 시전하며 단숨에 십팔식을 전개했다. 백육호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열여덟 자루의 창이 마치 소나기처럼 전신 요혈로 퍼부어졌던 것이다. 그는 급히 피했으나 창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자 가슴이 섬뜩했다. '보통이 아니구나.' 그는 등에서 무명천을 끌러냈다. 천 속에서 용명검이 드러나자 비장한 마음이 들었다. '부디 그 검법만은 사용하지 않게 되기를.......' 그의 신색은 어둡게 변했다. 그는 지금까지 마음 깊이 묻어두었던 검법(劍法)을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멋진 검이군! 멋진 승부가 되겠어." 악곤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용명검을 노려보며 말했다. "용서하시오, 선공하는 것을." 백육호는 억양 없는 음성으로 말함과 동시에 검법을 전개했다. 슈슈슉! 용명검이 눈부신 검광을 뿌리며 전개됐다. '아니? 이건......?' 악곤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상대가 보검을 꺼낸 것을 보고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필경 경세적인 검법이 펼쳐지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백육호가 전개한 것은 지극히 평범한 검법이었다. 강호의 삼류고수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삼재검법(三才劍法)이었던 것이다. 악곤은 어이가 없었다. 동시에 화가 치밀었다. '이놈이 날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그는 눈을 부릅뜨며 육합창을 연속 전개했다. 차차창! 창과 용명검이 몇 차례 부딪쳤다. 바로 그 순간, 악곤은 손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억?"


그는 대경실색했다. 애병 육합창이 토막토막 잘려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그는 자루만 남은 창을 들고 망연자실해지고 말았다. 그때였다. 슉! 용명검이 그의 면전에서 빛살처럼 뻗어왔다. "헉!" 그는 본능적으로 육합창을 휘둘렀으나 소용없었다. 다섯 자 길이였던 육합창은 한 자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절꺽! 하는 소리와 함께 그나마 남아있는 창이 다시 잘려지고 그는 서늘한 검기를 목부분에 느꼈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목이 절단되었다. 육합문의 문주로 일생을 풍미했던 악곤의 불운이었다. 그의 첫번째 불운은 백육호를 만났다는 것이었고, 두번째 불운은 천고의 신병 용명검을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목은 깨끗이 절단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저럴 수가......!" 흑련사의 오십여 명 살수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주춤하는 사이에 백육호의 신형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하다.' 판단을 내린 그는 살수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크악!"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그는 용명검으로 단번에 세 명을 베어버렸다. 절묘한 검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단금옥쇄(斷金玉碎)하는 천고의 기병의 힘으로 상대를 병기와 함께 통째로 베어버린 것이다.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그는 선혈을 흠뻑 뒤집어쓴 채 살수들을 베어넘겼다.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는 싸움이었다. 흑련사의 살수들은 이미 죽음을 도외시한 듯 동료들의 시신을 밟으며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그는 치를 떨었다. '이자들이 인간이란 말인가? 어찌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는 수렵장에 펼쳐진 죽음의 함정이 상상 이상으로 무섭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구나 등에 업힌 철무영은 출혈이 지나친 탓으로 호흡이 불규칙한 상태였다. '이런 식으로 싸우다간 끝이 없겠다.' 그는 독하게 마음먹고 신형을 떠올렸다. "야아아아!" 마치 신룡의 포효와 같은 외침을 발한 그는 검과 몸이 하나가 되어 좌측의 살수들을 향해 떨어졌다. 수십 갈래의 검광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그는 다시 신형을 날렸다. "앗! 쫓아라!" 살수들은 고함을 질렀다. 백육호가 다섯 명의 살수들을 벤 후 숲을 향해 신형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백육호는 전력을 다해 신형을 날렸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살수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제 18 장 되찾은 이름 ① 남궁청운의 무공은 한 단계 더 올라가 있었다. 만화루에서 고초를 겪었을 때에 비하면 그의 무공은 괄목할만한 신장세를 보였다. 평소 무림의


기린아로 촉망받고 자랐을 때만 해도 그는 남다른 자부심으로 스스로의 무공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의 고비를 넘긴 후로는 모든 것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따라서 무림군왕성으로 돌아간 직후 자신의 무공을 재점검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의 무공은 한 단계 상승했던 것이다. "......." 그는 수렵장 안으로 들어선 순간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무공이 극강에 달한 고수만이 감지할 수 있는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뭔가 잘못됐다. 사냥은 사냥이되... 인간사냥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는 가슴이 뛰었다. 숲으로 두 마장쯤 들어갔을 때 그는 판단을 내렸다. 그의 뒤를 따르는 열 명의 하인들의 발걸음이 지나치게 가볍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일부러 말을 전력으로 달려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인들은 조금도 뒤지지 않고 따라붙었다. '저자들은 하인이 아니다!' 그는 가슴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너희들은 누구냐?" 그는 말을 멈춘 후 돌아서며 물었다. 전광 같은 안광으로 하인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는 그의 표정에는 냉기가 흘렀다. "누구라뇨? 저희들은 사냥 몰잇꾼......." 대답하는 작자는 말끝을 흐렸다. 남궁청운의 입가에 조소가 어리는 걸 보았던 것이다. 그는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당주님께서 뭘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슈슈슉! 그의 손이 허리를 떠남과 동시에 자오정(子午釘)이 발출되었다. "어딜!" 쩡! 쩡! 남궁청운의 소매가 떨쳐지자 자오정이 사방으로 퉁겨져 나갔다. "쳐라!" "놈이 눈치챘다!" 흑련사의 살수들은 마각(馬脚)을 드러내 일제히 공격을 가했다. "하하하! 가소로운 것들!" 남궁청운은 이미 암수를 대비하고 있던 터라 즉각 반격을 펼쳤다. 그는 무림군왕성의 소성주이자 태자당의 당주였다. 그의 무공은 후기제일인이라 불리웠다. 아무 흑련사의 일급살수들이라해도 그의 무공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크아악!" "한심한 놈들! 감히 날 암격하려 하다니!" 남궁청운은 단숨에 일곱 명을 거꾸러뜨린 후 재차 장력을 날렸다. 펑! 다시 두 명의 살수가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남은 한 명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숲속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서라!" 남궁청운은 말을 달려 그의 뒤를 쫓았다. 살수는 더욱 깊은 숲속으로 달아났다. 울창한 숲으로 인해 남궁청운은 더 이상 말을 달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마음을 돌렸다. '이럴 게 아니다. 황보소저가 위험하다.' 그는 졸개 한 명을 쫓아봐야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고 즉각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북쪽으로 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가 막 박차를 가하려는 순간이었다. "남궁당주, 아직 이곳의 일이 끝나지 않았네." 문득 한 가닥 창노하면서도 사기가 가득한 음성이 그의 고막을 울렸다. "누구냐?" 그는 상대방의 음성만으로도 강적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강호에서는 노부를 독안금붕(獨眼金鵬)이라 부르지." "독안금붕!" 남궁청운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부르짖었다. 슈욱! 허공으로부터 거대한 새가 떨어져내렸다. 남궁청운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부셨다. 찬란한 금빛 새가 떨어지고 있었다. '헉!' 그는 마상에서 몸을 흔들었다. 금빛 새는 눈 깜빡할 사이에 면전에 떨어져 내렸다. 알고 보니 새가 아니라 인간이었다. 금빛 장포를 날개처럼 펄럭이며 허공을 날아내린 자는 왼쪽 눈이 감겨져 있었다. 애꾸였던 것이다. 키는 칠 척, 나이는 육순이 넘어 보였다. 피부는 구릿빛이었으며 깡마른 체격이었다. 남궁청운은 신음을 흘렸다. "으음, 뜻밖이오. 이곳에서 사사련의 련주를 보게 되다니......." 그렇다. 상대방은 사사련의 련주이자 당금 흑련사의 공동주인 중 한 명인 독안금붕이었던 것이다. 독안금붕은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너무 늦게 알았다." 남궁청운은 눈썹을 성큼 치켜올렸다. "내 비록 호구(虎口)에 떨어졌다고는 하나 아직 승부는 나지 않았소." "오냐, 관을 보아야 눈물을 흘린다더니. 더 시간 끌 이유가 없겠지?" "바라는 바외다." 훌쩍 말 위에서 뛰어내린 남궁청운은 허리춤에서 천왕도(天王刀)를 뽑았다. 그것은 그의 애병으로 지금까지 한 번도 뽑아보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천왕도를 상단으로 뻗은 채 두 발을 팔자(八字)로 벌렸다. 그야말로 태산처럼 무거워 보이는 자세였다. '으음! 호랑이 새끼인 줄 알았건만 이미 다 큰 범이 되어 있었군. 저놈을 지금 꺾지 못하면 향후 큰 우환이 될 것이다.' 독안금붕의 외눈이 번쩍 빛났다. 그는 소매를 떨쳤다. 그러자 두 개의 금륜(金輪)이 나타났다. 원형의 금륜은 날카로운 이빨이 달려 있어 살짝 스치기만 해도 살점을 뜯어낼 정도로 예리해 보였다. 윙! 그의 손에서 금륜이 회전했다. "젊은 친구 먼저 손을 쓰게나." "굳이 그럴 필요 없소이다." 남궁청운 특유의 호승심을 드러내며 조금도 위축감을 보이지 않았다. "쯧쯧, 혈기를 다스리지 못하는 걸 보니 어직 멀었군. 자네는 용장은 될지언정 진정한 영웅의 재목은 아니로군." 독안금붕은 그를 비웃었다. "으하하하......! 걱정해 줘서 고맙소. 하지만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오. 귀하가 비록


대선배이긴 하지만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는 말도 듣지 못했소? 오늘 이후로 당신은 더 이상 거드름을 피우지 못하게 될 것이오." 그야말로 방약무인한 말이었다. 남궁청운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전신에 공력을 극도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클클! 어리석은 놈, 애비의 명성을 업고 승승장구하더니 가슴에 바람이 잔뜩 들었구나. 네놈에게 세상이 얼마나 넓은가를 보여주마." 독안금붕의 외눈에서 금빛 안광이 뻗어나왔다. 남궁청운은 눈이 부심을 느꼈다. 위이이잉! 드디어 금륜이 독안금붕의 손을 떠나 날아갔다. 두 개의 금륜은 마치 태양처럼 눈부신 빛을 반사하며 좌우로 파고들었다. 남궁청운은 태산처럼 서 있다 금륜이 좌우로 쇄도하는 순간 천왕도를 휘둘렀다. 깡, 깡! 불꽃이 사방으로 퉁겼다. 금륜은 정확히 그의 칼을 맞고 퉁겨나갔다. "타앗!" 남궁청운은 기합성을 발하며 신형을 날렸다. 그는 허공으로 삼 장 가량 떠올랐다. 일직선으로 떨어지며 단천획지(斷天劃地)의 일도를 펼쳤다. 무림사의 일장을 장식했던 무림군왕성주인 용비천군의 절학인 천왕도법(天王刀法)이 펼쳐진 것이다. '헛, 대단하군!' 독안금붕은 헛바람을 들여마시며 쌍장을 합쳤다. 위이이잉! "......!" 막 지면으로 떨어져내리던 남궁청운은 좌우에서 강맹한 경기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시선을 돌렸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방금 전 쳐냈던 금륜이 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급히 도법을 거두며 왼발로 오른 발등을 찍으며 삼 척 가량 떠올랐다. 두 개의 금륜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발바닥을 스치며 지나갔다. "흐흐흐! 제법이구나. 하지만 아직 멀었다." 독안금붕이 쌍장을 교차시켰다. 순간 지나갔던 금륜이 마치 그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듯 방향을 꺾어 다시 날아왔다. 이번에는 더욱 빨라 마치 빛살처럼 보였다. '억!' 남궁청운은 본능적으로 천왕도를 휘둘렀다. 카캉! 불꽃이 퉁기며 팔목이 시큰해졌다. 다음 순간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퉁겨나갔던 금륜이 두 쪽으로 갈라지며 네 개로 나뉘어져 재차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그는 호흡이 탁해져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처음 끌어올렸던 진기가 고갈나고 있었다. 그는 천근추(千斤錐)의 신법으로 급격히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머리 위를 스치며 네 개의 금륜이 지나갔다.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졌다. 금륜의 경기에 머리카락이 잘린 것이다. 그는 기겁했다. 그는 상대를 얕보는 마음을 버리고 천왕도를 단단히 움켜잡은 후 금륜을 노려보았다. 독안금붕의 무공은 너무나 괴이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위이잉! 다시 네 방향에서 금륜이 날아왔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할 수 없군. 패왕수라공(覇王修羅功)을 펼치는 수밖에.'


그는 공력을 전력으로 끌어올려 쌍장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네 개의 금륜이 쇄도하자 쌍장을 뻗으며 신형을 빙글 회전시켰다. 콰쾅! 폭음과 함께 네 개의 금륜이 산산조각나며 사방으로 날아갔다. "헉!" 독안금붕은 대경실색했다. 설마하니 자신의 절학을 이십을 조금 넘은 남궁청운이 파해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한편 남궁청운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가거라! 늙은이!" 우우우웅! 쌍장을 뻗자 가공할 회오리 강기가 뻗어나갔다. 독안금붕의 외눈이 번쩍 빛났다. "크흐흐흐! 애송이놈! 기고만장했구나!" 그도 물러서기는커녕 앞으로 다가오며 쌍장을 뒤집었다 벼락처럼 뻗어냈다. 쿠콰콰쾅! 굉음과 함께 바닥이 움푹 패이며 흙덩이가 치솟아올라 천지간을 어둡게 했다. "크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흙덩이가 떨어진 후, 장내에 비틀거리는 인영의 모습이 드러났다. 독안금붕이었다. 그는 피를 울컥 토하며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앞. 남궁청운은 안색이 납덩이처럼 굳어진 채 서 있었다. 그의 우수가 뻗어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독수리발톱처럼 구부리고 있었다. "흐흐, 가거라. 늙은이." 손가락을 와락 움켜쥔 순간. "크아아악!" 독안금붕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붕 떠올랐다. 그의 가슴에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심장이 통째로 뜯겨져 나왔다. 쿠웅! 잠시 후 그는 바닥에 떨어졌다. 심장에 구멍이 뻥 뚫린 처참한 모습이었다. "......." 남궁청운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에는 아직도 펄떡거리는 심장이 쥐어져 있었다. 손가락을 모으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심장이 터지며 선혈이 사방으로 퉁겼다. 경악할 일이었다. 방금 전 그가 펼친 무공은 패왕수라공이었다. 그것은 남궁가문의 독문신공이 아니었다. 남궁가의 심법(心法)은 도가(道家)에 그 연원이 있는 것으로 패왕수라공처럼 잔혹하지 않았다. 남궁청운의 미간이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마기(魔氣)였다. "흐흐흐......." 남궁청운의 입에서 음침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독안금붕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늙은이, 날 원망마라. 네가 자초한 것이었으니까......." ② "설마 했는데.... 네놈이 흑련사의 주구일 줄이야......!" 남궁소연은 이를 갈며 호사붕을 노려보았다. 호사붕은 유들유들한 표정이었다. "소연낭자, 주구란 표현은 듣기 거북하구려. 소생은 흑련사의 영주(令主)를 맡고 있소. 소생의 부친은


장로(長老)이기도 하오. 그러니 이번 일은 공적(公的)인 일인 것이오." 숲속의 한 공지. 수십 명의 황금총(黃金總) 고수들이 에워싼 가운데 두 여인이 분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녀들은 바로 남궁소연과 황보수선이었다. "후후! 각자에겐 그 스스로의 길이 있는 법이오. 우리 만금가는 황금으로 천하를 제패했소. 우리가 어느 쪽과 손을 잡느냐는 것은 온전히 우리 자신의 문제요. 당신들보다 흑련사가 우리에게 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을 뿐이오." 호사붕의 여유있는 말이었다. 남궁소연은 칠절편을 움켜쥔 채 황보수선을 돌아다보았다. 그녀가 적시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자신은 벌써 호사붕의 포로가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오십여 명의 황금총 고수들은 그녀를 생포하려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 "흥! 우리 무림군왕성이 너희 가문에 섭섭하게 한 적이 있단 말이냐?" 남궁소연의 말에 호사붕은 느긋하게 답했다. "거듭 말하지만 만금가는 손해보는 장사는 하지 않소. 무림군왕성보다는 흑련사가 본가에 더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오." 호사붕은 음침한 눈으로 남궁소연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흐흐, 오늘을 위해 얼마나 많은 투자를 했는지 아시오? 이제 그대는 얌전히 내 품에 안기는 것이 좋을 것이오." 남궁소연은 그의 눈길이 자신의 몸을 훑어보자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ㅌ! 더러운 놈, 어디서 함부로 음탕한 혓바닥을 놀리는 거냐?" 그러나 그녀의 반응은 호사붕의 음심을 더욱 충동질했을 뿐이었다. "흐흐, 네 앙칼진 성미가 더욱 구미를 돋구는구나. 사실 황보수선 같이 얌전을 빼는 것보다는 더욱 내 성미에 맞는다." "닥쳐라! 이 더러운 놈! 네 주둥아리를 뭉개주겠다!" 쐐애액! 분노가 극에 달한 남궁소연은 칠절편을 날카롭게 휘둘렀다. "호오! 낭군될 사람에게 너무 지나치군?" 호사붕은 유연한 보법으로 칠절편을 피하며 계속 약을 올렸다. 남궁소연의 무예는 범상치 않은 것이었으나 호사붕은 쉽게 그녀의 공세를 피해내고 있었다. '이 자가 지난 번 옥지환(玉指環)을 빼앗아 간 것은 우연이 아니었어. 이제 보니 자신의 무공을 감추고 있었구나.' 남궁소연은 신도문에서의 치욕이 되살아났다. 당시 호사붕은 자신의 몸을 집요하게 훑어보며 그녀가 던진 옥지환을 가볍게 낚아챘었다. "후후! 벌써 지쳤나? 그럼 이만 내 품에 안기는 게 어떻소? 극락의 꿀맛을 보여줄 테니." 호사붕의 야유가 이어졌다. 남궁소연은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앙칼지게 외치며 칠절편을 휘둘렀다. 쌔애애액! 허공을 가르며 연편이 꿈틀거리며 날아갔다. 이번에는 호사붕도 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어깨를 흔들하는가 싶더니 채찍의 사정권 안으로 달려들었다. 남궁소연은 안색이 변했다. 채찍은 길었다. 적당한 간격을 두어야 제 위력을 발휘한다. 호사붕은 그녀의 약을 올려가며 그녀로 하여금 냉정을 유지할 수 없도록 충동질했다. 그러다 틈을 타 파고든 것이었다. "앗!" 그녀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팔꿈치 부분의 곡지혈(曲池穴)이 따끔해지며 그만 채찍을 놓치고


말았다. 호사붕의 손이 그녀의 곡지혈을 움켜쥔 것이다. "이... 비열한 놈! 놓지 못하겠느냐?" "흐흐! 그만 앙탈부려라. 이젠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남궁소연은 이번에는 허리춤의 마혈(痲穴)이 뜨끔 하는 것을 느끼며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네 뜻대로 됐으니 어서... 죽여라!" "쯧쯧, 아직도 내 진심을 몰라주는군. 평생을 함께 할 여인을 죽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호사붕은 남궁소연을 음탕한 눈길로 쓸어보며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여인의 손처럼 희고 가느다란 손이 남궁소연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치워라! 이 개 같은 놈아!" "흐흐, 하늘 같은 낭군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호사붕은 남궁소연의 젖가슴을 덥석 움켜쥐었다. "악! 이 짐승 같은 놈이......!" 남궁소연은 전신을 부르르 경련했다. 말할 수 없는 수치감으로 인해 정신이 아득해졌다. 호사붕은 그녀의 귓전에 대고 속삭이듯 물었다. "지난 번 만화루에서 두 노마에게 납치된 적이 있었지? 후후, 그때 기분이 어땠느냐?" 남궁소연은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치를 떨었다. "이... 이제 보니 그것도 네놈이 시킨 짓이었구나?" "후후! 물론이지. 그날 밤 너와 인연을 맺어볼까 해서 말이야. 하지만 훼방꾼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었지." 훼방꾼이란 당세곤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개만도 못한 놈아! 어서 날 죽여라!" 남궁소연은 급기야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호사붕은 그녀의 허리를 안은 채 한 손을 그녀의 가슴 속으로 밀어넣었다. "후후, 그건 안되지. 이렇게 아름다운 육체를 땅에 묻기는 너무나 아깝지 않느냐?" 그는 뭉클한 젖가슴을 손으로 덥썩 움켜쥐었다. "악! 제발... 그만하란 말야!" 남궁소연은 하마터면 졸도할 뻔했다. 처녀의 몸으로 중인환시리에 당하는 모욕이 너무나 컸던 것이다. 이때였다. "이 더러운 색마! 죽어라!" 앙칼진 호통과 함께 날카로운 경기가 날아왔다. 황보수선이 황금총의 무사들 사이에서 몸을 뽑아올려 덮쳐온 것이다. "하하! 이건 또 뭐지?" 호사붕은 남궁소연의 뒤로 숨으며 이죽거렸다. "이 가증스러운 인간아! 썩 앞으로 나서라!" 호사붕은 고개만 불쑥 내밀며 이죽거렸다. "그래 어쩔 테냐? 네년도 이 어르신의 계집이 되고 싶으냐?" "뭐... 뭐라고?" 난생 처음 들어보는 치욕적인 언사에 황보수선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면 좀 기다려라. 네년을 귀여워해 줄 어르신이 따로 계시니 말야." 말을 하면서도 호사붕의 손은 여전히 남궁소연의 젖가슴을 주물러대고 있었다. "이... 금수만도 못한 놈!" 황보수선은 쌍장을 번쩍 치켜올렸다. "수선언니, 흥분하지 마세요. 이자가 일부러 언니를 격동시키고 있어요!" 남궁소연은 경황중에도 그녀에게 경고를 보냈다. 방금 전 자신이 휘말려들었던 것을 떠올린 것이었다.


"호오! 감히 지아비를 험담하다니, 고약한 계집이로구나." 호사붕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아악!" 남궁소연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젖가슴이 무참히 그의 손아귀에서 뭉개진 것이다. "손 떼지 못하겠느냐!" 휙! 황보수선은 신형을 날려 호사붕을 덮쳐갔다. 그때였다. 쏴아아! 갑자기 허공에서 시커먼 그물이 떨어져 내렸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녀의 몸은 그물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황금총의 인물이 나뭇가지 위에서 그물을 던진 것이었다. 황보수선은 그물에 갇힌 인어(人魚)가 되어 허우적거렸다. 그녀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다해도 천잠사(天蠶絲)로 짜여진 그물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하핫! ��� 좋구나. 무림의 일대재녀가 그물에 갇힌 신세가 됐으니 말이다." 호사붕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이로써 그는 중원쌍미(中原雙美)로 불리는 두 여인을 사로잡은 것이다. 황보수선은 허리춤에서 비수를 꺼내 그물을 자르려 애썼으나 어찌된 셈인지 잘려지지가 않았다. "하하하! 네년은 천잠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느냐? 천하의 보검이라도 벨 수 없을 것이다. 공연히 헛수고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황보수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것이 천잠사 그물이란 말인가? 아아! 그렇다면 벗어나기는 틀렸구나.' 이때 허리춤이 뜨끔하더니 온몸이 마비되어 버렸다. 호사붕이 그녀의 연마혈을 짚어버린 것이다. "수선언니!" 남궁소연은 피를 토하듯 부르짖었다. "후후, 어디 쓸만한 몸매를 지녔는지 살펴볼까?" 호사붕은 남궁소연을 내버려 두고 그물을 걷더니 황보수선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황보수선은 눈앞이 캄캄했다. 수십 명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서 옷을 벗기우게 될 줄이야! 그녀는 이 믿을 수 없는 사태에 절망을 금치 못했다. '아아! 이런 모욕을 받게 되다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그녀는 혀를 깨물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턱이 마비되고 말았다. 간악하기 그지없는 호사붕이 눈치채고 그녀의 아혈(啞穴)마저 짚어버린 것이다. 문득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호사붕이 그녀의 경장 하의를 벗겨버린 것이다. 대리석처럼 미끈한 두 다리가 드러나고 말았다. "호오! 겉보기와는 틀린걸?" 호사붕은 탄성을 발했다. 눈처럼 흰 피부와 늘씬하게 뻗어내린 다리를 보는 순간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제길, 이제 보니 남궁소연 못지않은 계집이로구나.' 그는 입맛을 다셨다. 황보소연을 부친에게 양보한 것에 대해 후회가 막심이었다. 그는 황보수선의 상의를 벗기기 시작했다. 못 먹을 떡 주물러나 보자는 심산이었다. 황보수선은 그만 죽고만 싶은 기분이었다. 가슴 속으로 불쑥 손이 밀고 들어오자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그때였다. 푸른 하늘에서 커다란 새가 떨어져 내렸다. '......?' 그녀는 의아했다. 그러나 곧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더욱 눈을 크게 떴다. '저분은......!'


그녀는 하마터면 심장이 입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허공에서 떨어져내리고 있는 인영은 바로 백육호였던 것이다. "더러운 손을 떼지 못하겠느냐!" 위이잉! 태산이라도 누를 듯한 장력이 밀려왔다. "제기랄!" 호사붕은 욕설을 퍼부으며 급히 황보수선에게서 손을 떼며 장력을 쳐올렸다. 펑! "윽!" 호사붕은 신음을 발하며 연달아 뒤로 물러났다. 바닥에 한 치 이상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우웩!" 그는 선혈을 토해냈다. 단 일 장의 격돌에서 내상을 입고 만 것이었다. 백육호는 소리없이 황보수선의 앞에 내려섰다. 그는 급히 그녀를 안으며 물었다. "황보소저, 괜찮으시오?" 황보수선은 아혈이 짚혀있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백육호는 아! 하고 탄성을 발하며 그녀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아! 이게... 꿈은 아니겠지요." 황보수선은 말문이 터지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했다. 이때였다. 뚜우우우! 멀리서 뿔고동 소리가 울려왔다. 백육호는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급히 물었다. "어느 혈이 점혈되었소?" 황보수선은 황급히 눈을 감아버렸다. 그녀의 바지는 아직 벗겨진 상태였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허리의 세 군데......." 백육호는 그녀의 혈을 풀어주려다 흠칫했다. 눈부시게 흰 허벅지가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얼른 그녀의 바지를 여며준 후 혈도를 타통시켰다. 황보수선은 혈이 풀리자 벌떡 일어났다. "내 이... 인간 같지 않은 놈을 가만 두지 않겠어요!" 그녀는 이를 갈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호사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오십여 명의 황금총 고수들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놈들은 모두 달아났소. 방금 전 뿔고동 소리가 퇴각신호인 것 같소." 황보수선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요?" "모르겠소. 일단은 남궁소저부터 구하고 봅시다." 그는 남궁소연을 구하는 일을 황보수선에게 맡겼다. 남궁소연의 옷도 반쯤 벗겨져 있었던 것이다. ③ 뜻밖의 변수가 상황을 반전시켰다. 수렵장에 깔려있던 흑련사와 황금총의 고수들은 일제히 퇴각했다. 그것은 무림군왕성의 무사 천여 명이 밀려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만금장은 졸지에 주인이 뒤바뀌고 말았다. 호금수를 비롯하여 그가 비밀리에 거금을 들여 고용했던 황금총의 고수들이 모두 달아났던 것이다. 남아있는 자들은 노약자나 무공을 모르는 여인들뿐이었다.


수렵장의 일은 일단락 되고 사태는 수습되었다. "장형도... 죽었단 말이오?" 여웅이 비통한 듯 중인들을 향해 물었다. 그도 심한 고초를 겪은 듯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그렇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소. 그는... 처참하게 죽었소." 남궁청운의 음성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는 호사붕에게 철저히 농락당한 한으로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태자당은 이번에 지대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 철기문의 장건웅과 구룡방의 소방주 열화권 마휘가 참혹한 시신으로 수렵장 내에서 발견되었다. 뿐만 아니라 화산파의 연채령은 행적이 묘연했다. 철무영과 황보수선, 남궁소연은 무사했지만 그들은 이번 일로 말할 수 없는 심적 타격을 입고 말았다. 여웅 또한 몇 개월 요상을 해야 할 정도로 중상을 입었다. 무사한 사람은 백육호와 남궁청운, 그리고 당세곤 뿐이었다. "진작에 말했어야 했는데... 설마 이렇게 빨리 놈들이 음모를 꾸밀 줄은 몰랐소." 당세곤이 탄식하며 말했다. 영걸들이 모여있는 곳은 만금장의 대전이었다. 그 말에 남궁소연이 발갛게 충혈된 눈으로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럼 미리 알고 있었단 말인가요?"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당세곤에게 집중되었다. 당세곤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난 벌써부터 호사붕이 흑련사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중인들의 안색이 변했다. 남궁소연은 말도 안된다는 듯이 따져 물었다. "그럴 수가? 그런데 어째서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죠? 사전에 말했다면 이렇게 어이없이 당하지는 않았을 거 아녜요?" 당세곤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꼭 그렇다고 말할 순 없었을 것이오. 우선 여러분은 내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오. 아직도 내가 신도문에서 동지들을 독살했다고 의심하고 있지 않소?" "......!" 중인들은 멈칫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신도문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대부분 당세곤을 의심했던 것이다. "난 그 사건이 있은 후 끈질기게 호사붕을 조사했소이다. 놈에게 냄새가 나기 때문이었소. 그 결과 결정적인 단서를 찾게 되었소이다." "무슨 단서죠?" 남궁소연이 계속 물었다. "여러분은 언가권의 임표와 아미파의 석정진인이 독살되던 날을 기억하시오? 그 두 사람의 시신을 발견한 자가 누군지 말이오?" 남궁소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중얼거렸다. "물론이에요. 그건 두 분의 방을 보살피던 하인이었잖아요." 당세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난 그자를 주목했소. 그자의 뒤를 면밀히 살핀 결과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소. 그자는 만석동(萬石童)이란 자로 그 사건이 있은 직후 신도문을 떠났소. 그리고 어디서 생겼는지 돈을 물쓰듯 하며 지내고 있었소." "으음......." 남궁청운은 신음을 발했다. "나는 그자를 심문해서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는데 성공했소. 그자는 매수당했던 것이오." 이번에는 여웅이 조급하게 물었다. "그래, 무엇을 알아냈소?"


"만석동은 호사붕의 부탁을 받고 독초(毒草)를 푼 물을 두 사람에게 갖다 주었소. 결국 두 사람은 그 물로 세안을 한 후 중독되어 죽은 것이오." "그럼 당시 방안에 있던 찻잔은 또 무엇이오?" "그건 호사붕이 혼선을 빚게 하기 놓아둔 것이었소. 결국 내가 표적이 되도록 수를 쓴 것이었소." 이제까지 잠자코 듣기만 했던 황보수선이 의문을 제기했다. "호사붕의 간악함으로 미루어 만석동이란 자의 입을 함구시켜야 하지 않았을까요? 또 물에 담갔다는 독초는 무엇이길래 두 분이 속수무책으로 당했을까요?" 당세곤은 부드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 후 고개를 끄덕엿다. "역시 황보소저의 안목은 예리하군요. 먼저 독초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소. 알다시피 우리 당문(唐門)은 독(毒)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문이오. 나는 만석동의 얘기만 듣고 그것이 무색무미무취(無色無味無臭)의 특성을 지닌 선인장의 한 종류라는 것을 알았소. 그것은 중원의 동남방, 즉 십만대산(十萬大山) 일대에서만 나는 것이오. 말하자면 사사련(邪邪聯)이 있는 지역과 인접한 곳인 것이오." "......." "결국 이 일에는 흑도의 거물인 사사련이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오. 그리고 만석동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을 것이오." "그게 뭐죠?" "첫째는 호사붕이 방심했다는 것이오. 그는 일단 흉수로 날 모함하는데 성공했다 믿고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수도 있소. 둘째는 공연히 그를 죽였다가 다른 단서를 남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오." 중인들은 침묵했다. 그의 말이 맞든 안 맞든 간에 지금으로써는 반박할 근거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당세곤의 눈길은 다시 황보수선에게 향했다. 그의 눈빛에는 뜨거운 관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호사붕이 적도로 판명난 이상 그는 새로운 희망이 생긴 셈이었다. 황보수선은 그의 눈길이 부담스러운 듯 고개를 떨구며 물었다. "그렇다면 왜 이제와서 그 얘기를 꺼냈나요? 미리 말했다면 장공자와 마공자가 희생당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당세곤은 한숨을 쉬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내가 말해봤자 여러분은 믿지 않았을 것이오. 특히 남궁당주는 호사붕과 막역한 사이지 않았소?" 그 말에 남궁청운의 얼굴이 붉어졌다. 입이 백 개라 한들 할 말이 없었다. 그는 호사붕과 죽이 맞았었다. 만일 당시 당세곤이 이런 말을 했다면 아마도 스스로가 발벗고 나서서 당세곤을 몰아붙였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난 좀더 확실한 증거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오. 그러나 설마 수렵장에 우리를 몰아넣고 인간사냥을 시작할 줄은 꿈에도 몰랐었소." 당세곤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사실 내가 무사한 것도 수렵장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었소. 나는 사냥을 하는 척하면서 증거를 찾기 위해 만금장을 뒤지고 있었소.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나 역시 화를 면치 못했을 것이오." 중인들은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황보수선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튼 이 정도인 것이 다행이에요. 만일 적시에 무림군왕성에서 원군을 파견하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는 수렵장 안에서 죽고 말았을 거예요." 이때 남궁청운이 종리무를 돌아보며 물었다. "한데 너는 어찌 알고 달려왔느냐?"


사실 황금총과 흑련사의 고수들이 퇴각한 것은 종리무가 천여 명의 고수들을 이끌고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종리무는 담담히 말했다. "흑련사의 정예고수들이 만금산장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일월단(日月團)에서 급보로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성주님의 명을 받고 즉시 달려온 것입니다." 남궁청운의 안색이 밝아졌다. "과연 일월단이로군! 그들의 눈과 귀는 천하의 어떤 것도 속일 수가 없지!"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땅에 떨어졌던 자존심이 일월단으로 인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는 느낌이 든 모양이었다. "그래, 아버님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느냐?" "성주님의 전갈이 있었습니다." "그래, 무엇이냐?" "이곳의 일이 수습되는 대로 당주님과 아가씨는 물론 태자당의 여러분들은 즉시 성으로 들어오시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래? 아니 무엇때문에?" 종리무는 눈을 가늘게 하며 설명했다. "성주님께서는 더 이상 무림의 사태를 방관할 수 없다며 곧 전열을 정비하여 흑련사와 일전을 결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으음,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남궁청운은 눈을 가늘게 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총관은 다름 말씀이 없었느냐?" 종리무는 흠칫하더니 소매속에서 밀봉된 서신 한 통을 꺼내 두 손으로 바쳤다. "이걸 소성주님께 전달하라 하셨습니다." 남궁청운은 중인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서신을 그 자리에서 읽지 않고 품속에 집어넣었다. "알겠다. 이곳 일이 정리되는 대로 태자당의 사람들과 함께 내일이라도 떠나도록 하겠다." 이때 남궁소연이 불쑥 말했다. "오라버니, 태자당이라곤 이제 오빠와 절 제외하면 수선언니와 철공자, 그리고 여공자밖에는 남지 않았어요." "그래서?" 남궁청운의 안색이 홱 변했다. 그는 남궁소연의 말뜻을 알았다. 본래는 이십여 명이나 되었던 태자당이 이젠 불과 몇 명밖에 남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주인 그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남궁소연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 질책을 한 것이었다. "제 말은... 모든 것이 밝혀진 이상 당소협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남궁소연은 찌르는 듯한 시선이 돌아오자 고개를 떨구며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당세곤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그는 태자당에서 축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기뻐한 것은 물론 태자당에 복귀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황보수선과 다시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으음, 그야 물론이다." 이번에는 황보수선이 나섰다. "제 생각엔 여기 백선생도 함께 가주셨으면 좋겠어요." 그 말에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백육호에게 향했다. 백육호는 흠칫했다. 그는 생각지도 않은 화살이 자신에게 떨어진 것이 그리 반갑지가 않았다. "당형이야 당연히 태자당에 복귀할 수 있다지만 백선생은 무림인이 아니거늘......." 남궁청운은 회의적인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이때 남궁소연이 꾀꼬리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경황이 없어 말씀 드리지 못한 게 있어요. 여러분은 저와 황보언니가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는지 모를 거예요. 그건 바로 백선생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이에요. 백선생은 숨은 고수였어요. 그 간악한 호사붕도 백선생의 일장에 중상을 입고 도주했어요. 그러니 백선생이야말로 백도무림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분이에요." "......!" 남궁청운을 비롯한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백육호에게 집중되었���. 황보수선도 거들고 나섰다. "소연 동생의 말이 맞아요. 백선생이야말로 숨은 기인이세요." 이렇게 되자 남궁청운은 새삼스런 눈으로 백육호를 보게 되었다. 이때 철무영도 가만 있지 못하고 나섰다. "그렇소이다. 내 목숨을 구해준 분도 백선생이오. 당시 난 육합신창 악곤에게 죽을 뻔했소. 그때 백선생이 나타나 놈을 죽이고 포위망에서 날 구해주셨소이다." "육합신창까지?" 남궁청운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육합신창이라면 육합문의 문주로 무림에서 초절정 고수였다. 잠시 날카로운 눈으로 백육호를 쳐다보던 그는 서서히 포권하며 말했다. "백선생, 이거 소생이 귀인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구려. 내 목숨을 구했을 뿐더러 소연의 생명까지도 구해주셨다니 그저 감읍(感泣)할 따름이오." "별 말씀을......." 백육호는 마주 답례하며 말문을 흐렸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부각되는 것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선생께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자 하오. 들어주시면 고맙겠소이다." 남궁청운의 말에 백육호는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무엇인지 말씀해 보시오." 남궁청운은 가볍게 헛기침을 한 후 말을 꺼냈다. "기왕에 백선생께서 숨은 실력을 드러내어 우리에게 도움을 주신 이상 이 참에 태자당에 가입하여 탕마멸사의 대열에 참여하시는 게 어떻겠소? 이는 모두가 원하는 일이외다." "소생은......." 백육호는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철무형이 급히 나섰다. "백선생, 그렇게 하십시오. 강호에 몸을 담은 이유만으로도 악을 멸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백선생이 태자당에 가입한다면 태자당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는 셈이 될 것입니다." 백육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송구스런 말씀이오나 그것만은 받아들이기가 곤란합니다. 소생은 이미 평생을 의원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사람이오. 게다가 천하명가들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태자당에 가입하는 것은 어울리지도 않는 일이오. 소생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그 말에 남궁청운의 눈에서 냉기가 번뜩였다. 철무영은 만면에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뭐라 말하려 했다. 이때 황보수선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섰다. "백공자님, 제 생각엔 굳이 태자당이나 무림군왕성에 가입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다만 이번에 저희들과 함께 군왕성으로 들어가시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요? 어차피 의기로 뭉친 곳이니 공자님께서 견문도 넓힐 겸 한 번 방문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백육호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황보소저마저 이러니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구나.' 사실 그는 태자당은 물론 무림군왕성에도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황보수선은 계속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간절한 빛이 담겨 있었다. 그 눈빛을 본 순간 백육호는 그만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할 수 없지. 일단 그곳에 함께 간 후 조용히 물러나와도 될 테니까.' 마침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번 기회에 견문을 넓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자격일 뿐 태자당에 가입하는 일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히 해두고 싶소이다." 그 말에 남궁청운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는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백선생은 태자당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모양이구려?" 백육호는 흠칫했다. "그럴 리가 있겠소이까? 다만 소생에게는 소생의 길이 있을 뿐이외다." 남궁청운은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자, 그럼 내일 아침 출발하기로 합시다. 여러분은 그동안 쉬시는 게 좋겠소." ④ 교교한 달빛이 화원을 비추고 있다. "백공자님, 왜 절 속이셨죠?" "속이다니, 내가 언제 낭자를 속였단 말이오?" 화원을 거닐던 남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화원 사이에 난 소롯길을 걷던 중이었다. "제 눈을 쳐다보세요." 황보수선은 고개를 들어 대담하게 백육호의 눈을 마주보았다. 저녁식사 후 백육호의 처소로 방문한 그녀였다. 백육호는 그녀의 제안으로 산책을 하던 중 느닷없이 항의를 받은 것이다. 커다란 한 쌍의 눈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백육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이거 괜히 나왔구나. 단단히 각오한 것 같은데.......' 그는 슬며시 황보수선의 눈을 피했다. "왜 제 눈을 마주 보지 못하는 거죠?" "난... 낭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황보수선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좋아요, 그럼 우선 무공을 숨긴 것부터 해명해 보세요." 백육호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아, 그것 말이오? 그야 처음부터 숨길 생각은 없었소. 다만 굳이 내 입으로 말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소." "네, 그럴 수도 있겠네요." 황보수선은 뜻밖에도 순순히 응했다. "하지만 공자님은 달리 숨기는 게 있죠?" '윽, 끝난 게 아니었나?' 백육호는 내심 비명을 질렀다. "그럴 리가 있소? 내가 낭자에게 무엇을 또 숨긴단 말이오?" "공자님, 그렇다면 제 눈을 똑바로 보고 말씀해주세요. 다시 묻겠어요. 저에게 정말 숨기시는 건 없나요?" 백육호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휴우! 이보다 더한 고문은 없을 것이다.' 그는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며 말했다. "대체 무엇을 숨긴단 말이오? 난 속이는 게 없소이다." "그럼 왜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거죠?" "그건......." "그건 뭐죠?" 황보수선은 집요했다. 백육호는 식은땀을 닦으며 얼버무렸다.


"낭자가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이오." "......!" 황보수선은 설마 그가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다는 듯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미처 이런 응답에 대응할 말을 생각하지 못한 그녀는 얼굴이 붉어진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백공자님, 우리 좀더 걸어요." 그녀는 작은 음성으로 말하고 먼저 걸음을 떼었다. 백육호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화원 사이로 난 소로를 한동안 걷자 아늑한 정자가 하나 나타났다. 그곳은 사방이 숲으로 싸여있어 주위의 시선이 차단된 곳이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정자 안으로 올랐다. "한 여인이... 있었어요." 황보수선은 정자의 난간에 기댄 채 잔잔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 여인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어른들에 의해 태중혼약을 맺은 상태였어요. 두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릴 적부터 거의 함께 자라나다시피 했죠. 꼬마적부터 신랑각시 놀이를 하며 행복하게 자라났어요." "......." "그런데 두 아이가 열 살 되던 해였어요. 신랑 집안이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어요. 물론 꼬마신랑도 함께 말이에요." 황보수선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한편, 그 말을 들은 백육호의 눈썹도 경련을 일으켰다. '제발 그만 하시오, 낭자!' 백육호는 내심 괴롭게 외쳤다. 그러나 물론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꼬마각시는 어째서 꼬마신랑이 사라졌는지를 알지 못했어요. 매일같이 소꿉놀이를 하던 꼬마신랑이 사라지자 슬픔을 금치 못했어요. 그래서 자나깨나 집밖으로 나가 꼬마신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죠. 그래도 꼬마신랑은 돌아올 줄을 몰랐어요. 어느 하늘 아래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황보수선의 눈에 맑은 이슬이 비쳤다. 그녀는 격동이 치민 듯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꼬마각시는 믿었어요. 언젠가 꼬마신랑이 환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달려올 거라고.... 그렇게 세월은 자꾸만 흘러갔어요. 한 달이 넘고 일 년이 넘고... 그러기를 열 번을 반복했는데도.... 이제 꼬마각시는 성숙한 여인이 됐지만 신랑은 여전히 소식이 없었답니다." 황보수선의 뺨으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백육호는 멍한 시선을 밤하늘에 던지고 있었다. "마침내 주위 사람들이 여인을 설득했어요. 이제 그만 잊으라고요. 심지어는 부모님까지도 태중혼약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고 말씀하시며 좋은 사람을 만나라고 설득했답니다. 물론 그녀도 그렇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어요. 때마침 여인에게 구애해오는 사람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잊으라고 말하는데도 여인은 과거의 꼬마신랑을 잊을 수가 없었답니다.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확실히 느끼게 되었어요.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하나... 꼬마신랑밖에 없다고 말이에요." 마침내 황보수선은 어깨를 들먹이며 숨죽여 흐느꼈다. "왜 여인이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그건 언제인가는 꼬마신랑이 돌아올 거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랍니다. 비록 그녀에게 구애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여인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래요. 여인도 꼬마신랑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여인은 지난 날의 아름다웠던 추억만 안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오늘까지도... 마음 속에 그 어떤 남자도 들여놓지 않았던 거예요....... 흐흐흑!" 마침내 황보수선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참고 참았던 고독이 한꺼번에 격발된 것이었다. 그녀는 난간에 기댄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는 손길이 있었다. 백육호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황보수선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대는 정말 어리석구려. 왜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단 말이오?" 백육호의 음성도 떨리고 있었다. 황보수선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격정적으로 외쳤다. "관(關) 공자님! 맞죠? 당신이 바로... 꼬마신랑이죠?" 쿵! 백육호의 가슴에 종이 울리는 듯한 격동의 소리가 있었다. 그는 황보수선을 내려다보았다. 눈물에 흠뻑 젖어있는 그녀의 얼굴은 비맞은 한 떨기 목련화였다. "그렇소. 내가 관운빈(關雲彬)이오." 휘황한 달빛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달빛은 화원의 꽃나무를 비추고 정자 안의 남녀에게도 신비한 광휘를 뿌려주었다. "아아! 운빈! 돌아와주었군요! 돌아왔어요!" 황보수선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백육호, 즉 관운빈의 목에 매달렸다. 그녀의 가슴은 터질 듯이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꼬마신랑을 기다리며 보냈던 무수한 나날들.... 이제 그가 돌아왔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렸던 그가, 관운빈이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다. 한편, 꽃나무 아래서 인영 하나가 비틀거렸다. 그는 두 사람의 뒤를 조심스럽게 밟았던 철무영이었다. 그는 정자 안의 남녀가 포옹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무에 몸을 기댔다. 그의 얼굴에 허탈감이 가득 떠올랐다. '돌아왔구나. 죽은 줄 알았었는데.......' 철무영은 몸을 돌렸다. 그의 가슴은 이 순간 절망으로 가득 찼으나 한편으로는 황보수선의 행복을 기원하고 있었다. '소저, 축하드리오. 그대의 사랑을 되찾은 것을 말이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두 남녀의 입술은 하나가 되었다. 황보수선은 이제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관운빈의 목을 세차게 껴안고 있었다.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제 19 장 역천지계(逆天之計) ① 깎아지를 듯한 고봉(高峰). 운귀고원(雲貴高原)의 한 산봉우리 위에 한 청수한 노서생이 오체복지하고 있다. 그의 앞에는 회색의 운무(雲霧)가 자욱이 덮여 있었다. 고봉을 휘감고 있는 운무와는 사뭇 달랐다. 어딘가 인공적인 느낌이 드는 운무였다. 운무가 미미하게 흔들리며 그 속에서 억양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마군자,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건가?" 마군자(魔君子)라면? 청수한 인상의 노서생이야말로 낙도서원(落島書院)의 주인 사마을지였다. 그렇다면 그에게 또 다른 신분이 있었단 말인가? 사마을지는 이마를 땅에 댄 채 보고를 올렸다. "그렇습니다. 주군. 아직 때가 아닙니다." "어째서지? 지금까지 너무 오래 기다렸다. 짐(朕)은 더 이상 기다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짐(朕)이라면 황제를 지칭하는 말이 아닌가?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사마을지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혜광(慧光)이 충만했다. 만천하의 지략(智略)을 담고 있는 눈빛이었다. "주군, 비록 건왕이 황궁을 장악하고 있다지만 예측할 수 없는 변수에 대비해야 합니다. 역대 황조의


권력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무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은 안심할 상황이 아닙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운무 속에서 한 가닥 궁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짐은 인정할 수 없느니라. 천외천(天外天)의 힘으로 아니될 일은 없느니라." 사마을지는 충심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주상, 지난 날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뼈아픈 패배를 잊으셨습니까?" "마군자, 태화천이 중원에서 소멸된 지 십 년이 지났다. 그들로 인해 천외천의 창건이 이십 년이나 지체됐다. 이십 년은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다. 그동안 충분한 준비를 끝마쳤다. 설사 그들이 다시 부활한다해도 이제는 본천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느냐?" 사마을지는 여전히 엎드린 채 간언(諫言)했다. "물론 현재 본천의 힘은 당시의 태화천을 열 번 격파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력(武力)만으로는 무림을 일시 정복할 수는 있어도 세세만년 통치할 수는 없습니다. 이 점을 통촉해 주옵소서." "으음.... 마군자, 네 고집은 정말 대단하구나." 운무 속에서 절대자의 독백이 흘러나왔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다시 예의 음성이 울려왔다. "그렇다면 그대가 굳이 무림군왕성에 집착하는 것도 그때문인가?" "그러하옵니다, 주군. 비록 용비천군 부자가 기대에는 못 미치고 있으나 그간 닦아온 군왕성의 위상과 기반은 본천이 무림진출의 교두보로 삼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황실을 건왕에게 맡긴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은 천하를 경략하기 위한 포석이며 서두르지 않음은 곧 그만큼 희생을 줄이고자 함입니다." 절대자의 음성에는 불만이 실려 있었다. "천외천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다소의 희생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피를 두려워한단 말이냐?" "통촉하여 주옵소서! 본천이 태평천하를 이루려는 것은 권력과 무력에 신음하고 짓밟혀온 만백성에게 평화와 자유를 주기 위함이옵니다. 따라서 영세불멸의 천외천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심을 얻어야 하는 것이옵니다." "......."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사마을지는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이윽고 운무가 가볍게 흔들렸다. "자네는 본좌에 버금가는 고집불통이로군......." 사마을지의 얼���에 화색이 돌았다. "좋다, 그대의 충언을 받아들이겠다. 무림군왕성과 관련된 제반사항은 향후 두 달간 그대에게 일임하겠다. 그러나 두 달이다. 그 안에 무림을 접수하지 못하면 그에 따른 문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까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면 본천의 천병(天兵)을 풀 것이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천외천의 세상을 이루고 말 것이다. 알겠느냐?" "존명!" 사마을지는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절대자는 화제를 바꾸었다. "마군자, 태화천의 후예가 등장한 것이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속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흠, 명이 질긴 놈이로구나. 네가 이미 살막에게 위임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살막주에게도 전하라. 다소 늦은 감은 있으나 천외천의 대열에 동참하라고. 한때 자네와 비견되던 한림원의 수재라면 그 자질과 역량을 인정할 수 있겠지. 짐이 중히 쓸 수 있을 것이니라." 사마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찌 대답이 없는가?" "그리... 하겠습니다."


고개 숙인 사마을지의 안색은 이 순간 창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는 내심 한탄하고 있었다. '내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구나. 천하에 둘도 없는 유일한 벗을 사지로 몰아넣다니... 이 일을 어찌해야 옳단 말인가?' "가거라. 가서 천하를 접수하라!" 절대자의 명이 떨어졌다. "존명!" 사마을지는 힘차게 대답했다. 스스스......! 운무가 흐트러졌다. 인위적으로 산봉우리 한켠에 뭉쳐져 있던 운무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 자리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마을지는 일어섰다. 그는 잠시 비틀했다. 그의 어깨에 천하의 모든 것이 걸려 있었다. 그 무게 때문인지 그의 안색은 납덩이처럼 굳어져 있었다. 천외천(天外天)! 대체 무엇인가? 그들은 감히 역천(逆天)의 음모를 꾸미고 있단 말인가? ② 침체되어 있던 백도무림이 돌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것은 칠절신군 남궁청운의 쾌사(快事) 때문이었다. 그는 만금장에서 흑련사의 두 거물 중 한 명인 독안금붕을 죽였다. 비록 그곳에서 태자당 영걸 중 두 명이 목숨을 잃고 한 명이 실종되었으나 흑련사가 치른 대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밖에도 백도무림에 전해진 낭보(朗報)는 괴수신의(怪手神醫)의 등장이었다. 괴수신의는 뛰어난 의술 외에도 육합문주 육합신창을 제거함으로써 지닌 바 절학(絶學)를 드러낸 것이다. 그가 가세함으로써 백도무림은 오른팔을 얻은 셈이나 다름없었다. 또 한 가지 낭보는 십정회의 동태였다. 그동안 움직이지 않던 십정회가 본격적으로 흑련사 타도에 나선 것이다. 십정회는 행동을 개시하자마자 흑련사의 십이 개 분타를 단숨에 초토화시키는 개가(凱歌)를 올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강호에 전설로 전해지던 남해(南海)의 검각(劍閣)이 근 이백 년만에 검후(劍后)를 배출해낸 것이다. 검후는 중원에 상륙하자마자 북상하면서 흑련사의 분타를 연속 궤멸시켰다. 이미 녹림도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던 흑련사는 일대위기를 맞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흑련사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흑도무림을 통합한 거력(巨力)으로 중원 곳곳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면서 백도무림과 호각지세(互角之勢)를 이루고 있었다. 어쨌든 무림은 핏빛 선풍에 휘말렸다. 가는 곳마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내를 이루고 있었다. 한편 그 와중에 하나의 비보(悲報)가 답지되었다. 그것은 만금장의 수렵장에서 실종된 연채령을 구출하기 위해 화산파의 장문인 매화십검(梅花十劍) 연백경(燕白鏡)이 독자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는 남궁청운에게 자신의 여식을 구출해달라는 청을 넣었다가 신통한 답변을 듣지 못하자 그만 참지 못하고 화산파의 문도들과 함께 독자적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그 결과 흑련사의 고수들에게 포위되어 화산문도들과 함께 몰살(沒殺)을 하고만 것이었다. 무림의 명문이나 구파일방의 일원인 화산파의 궤멸은 백도무림 최대의 참사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그야말로 비극의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④ 폭염이 한풀 꺾이고 제법 아침저녁으로 한기를 느끼게 하는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초가을이다. 개봉부의 무림군왕성.


이곳에 집결해 있는 군웅들은 계절의 변화를 느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중원전역에서 답지되는 혈전에 관한 소식과, 흑련사와의 대회전(大會戰)이 임박했다는 정신적인 압박감 때문이었다. 따라서 군웅들의 신경은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들은 사소한 일에도 쉽게 짜증을 내었고, 서로간에 크고 작은 분쟁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었다. 잠혼도객 종리무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성안의 누구보다도 그의 심사는 뒤틀려져 있었다. 군왕성의 한 내실. 종리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항의하고 있었다.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종노릇을 계속하란 겁니까?" 무림군왕성의 총관 소손방은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찾아와 항의하는 종리무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진정해라, 군사께서 그리 하신 데에는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종리무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군사의 뜻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잘못된 일입니다. 십오 년 전 몰락했던 남궁가를 선택했던 것부터가 문제란 말입니다. 군사의 의도대로라면 무림군왕성은 이미 몇 년 전에 무림을 완벽하게 장악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무림을 장악하기는커녕 엉뚱하게 십정회가 생겨 백도의 분열이 일어나질 않나, 흑련사 따위에 곤욕을 치르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흥분하여 얼굴이 붉어져가는 종리무를 소손방은 음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괴소가 흘러나왔다. "클클, 네놈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뭐가 틀렸단 말입니까?" "남궁가를 선택한 것이 잘못됐다는 점은 노부도 동감한다. 남궁혁은 통솔력이나 인화력은 그만하면 됐으나 위인이 그릇이 작고 심약하다. 또한 자식인 남궁청운은 담력과 재능은 갖추었으나 지나치게 욕심이 앞서고 조급한 성품이다. 그로 인해 남궁부자는 우리의 대행자로서 부족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도리어 그 점이 적격일 수도 있다." 종리무는 핏대를 올렸다. "아니, 어째서 말입니까?" "후후, 한 번 생각해 봐라. 만일 그들 부자가 태화천주 관일청과 같은 인물일 경우를 말이다. 그들이 그토록 완벽하다면 우리의 통제가 먹혀 들어가겠느냐? 아마도 호랑이 새끼를 키운 격이 되고 말 거다. 그렇게 되면 본천으로서는 적수 하나를 더 맞이하는 셈이 될 거다." "......." 종리무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소손방의 말이 틀림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군사께서는 무림군왕성에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다. 남궁부자는 우리가 다루기에 적합한 인물이다. 비록 기대에는 못 미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역할을 해낸 셈이다. 남은 일은 천병이 출정한 후에 처리하면 된다. 물론 군사께서는 그 전에 한 가지 계책을 세워놓으셨다." "계책이라시면?" "먼저 백도무림을 통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유부단한 남궁혁을 제거하고 야심만만한 남궁청운을 부상시켜야 한다. 그는 패왕수라공이 십 성(十成)의 경지에 접어들었다. 머지않아 마성(魔性)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후후! 우리의 대행자로서 충분한 몫을 해낼 것이다." 종리무는 의혹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가 어떤 일을 맡는단 말입니까?" "바보 같은 놈, 그렇게도 머리가 안 돌아간단 말이냐?" 소손방은 짐짓 짜증을 내면서도 설명을 덧붙였다. "지난날 태화천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나 문파들, 무림군왕성에 동조하지 않는 십정회나 기타 문파들을


궤멸시킬 것이다. 후후, 곧 무림대회전을 벌일 것이다. 그때를 이용해 놈들을 모조리 제거할 생각이다." "후후, 그럼 남궁청운의 손을 빌린단 말이군요." "그렇다. 남궁청운은 야심에 눈이 멀어 있고, 패왕수라공의 마성으로 인해 점점 더 잔혹한 성품으로 변해가고 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일에 방해가 되는 문파에 대해 이를 갈게 되어 있다." "후후,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군요. 한데 괴수신의란 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놈에게서 심상치 않은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클클, 네놈도 제법 보는 눈이 있구나. 맞다. 군사께서도 놈을 주목하고 있다. 이미 살막에 살인청부를 넣어 두었다." "살막까지 동원되다니... 크흐흐... 정말 대단하군요." "이놈아, 한가하게 웃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다시 한 번 만금장에서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들은 그 날로 제삿날이 될 것이다." 종리무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놈들이 그런 흉계를 꾸미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일이 그 지경이 된 것은 엄밀히 말해 일월단의 과오가 아닙니까?" "일월단에는 이미 하문(下問)을 끝냈다. 호씨 일가의 감시를 맡았던 열두 명 중 계집 한 명만 제외하고는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사한 일이 또 발생한다면 네놈은 물론이고 노부 또한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예, 명심하겠습니다." 종리무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소손방의 경고가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노부의 말을 명심해라. 우리의 희생도 그 결실을 맺는 단계에 와 있다. 마무리를 잘 해야 오랜 기간 타인으로 살아오며 치렀던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종리무가 다가가자 소손방은 품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꺼내 주었다. 검은 색의 표지에 살명부(殺名簿)란 글씨가 적혀 있었다. ⑤ "왔느냐? 흑야혼." 용비천군 남궁혁은 칼날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네. 성주님." "뭐라 하더냐?" "성주님의 뜻에 적극 따르겠다고 합니다." 남궁혁의 얼굴에 희색이 스쳤다. "다행한 일이군. 수고했다. 그만 물러가도록 해라." 흑야혼이란 자는 소리없이 사라졌다. 그는 남궁혁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는 수하로 아무도 그를 직접 본 자가 없을 정도로 은밀히 활동해 왔다. 그가 오고 가는 것은 오직 남궁혁만이 알 수 있었다. 남궁혁은 애병 창룡도(蒼龍刀)를 수직으로 들어올렸다. 도극(刀極)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방안의 어둠을 가르는 듯했다. "이로써 반전의 기틀은 마련됐다. 남은 것은 결단뿐! 기필코 해내야 한다. 수백 년을 이어내려온 본가의 명예를 걸고." 남궁혁의 용안에서 쏟아져 나온 안광은 창룡도의 도기를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기이한 일이었다. 무림군왕성의 성주란 당대의 제일인을 의미한다. 그런 그가 이토록 비장한 심정으로 내리려 하는 결단은 과연 무엇인가?


밤이 깊어가도록 그는 창룡도를 움켜쥔 채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남궁청운은 몹시 불쾌했다. 부친인 남궁혁이 자신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혼례문제를 일방적으로 처리해버린 것이다. 남궁혁은 만금장 사건 이후 황보수선과의 혼담을 취소해 버렸다. 황보세가에도 사람을 보내 정식으로 청혼을 철회했다. 그 과정에서 남궁청운과 한마디의 상의도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대체 무슨 속셈으로 그러는지 알 수가 없군!" 남궁청운은 불쾌감을 뛰어넘어 분노까지 느끼고 있었다. 종리무가 그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당주님, 소인의 생각으로는 성주님께서 당주님을 견제하려는 것 같습니다." 남궁청운은 고개를 홱 돌렸다. "뭐라고? 아버님이 말이냐?" "그렇습니다. 사실 소총관을 위시하여 본성의 무사들은 거의 모두 당주님의 무예와 통솔력을 따르고 있습니다. 성주님은 늙어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당주님의 기를 꺾기 위해 그런 조치를 취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으으음."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 남궁청운이었다. 그러나 종리무의 말을 듣고 보니 그것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인은 성주님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하늘 아래 어떤 부모가 자식이 잘되는 걸 질투한단 말입니까?" 남궁청운의 불쾌한 기색을 살피며 종리무는 계속 충동질을 했다. "아마 당주님께서 독안금붕을 죽인 것이 계기가 되었을 겁니다. 그로 인해 백도무림이 활기를 되찾고 만천하에 당주님의 위명이 진동하니 성주님은 조급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혼사문제를 무위로 돌림으로써 제동을 걸었을 겁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 남궁청운은 버럭 외쳤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짜증이 어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총관께서도 혀를 차며 몹시 언짢아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성의 많은 무사들도 공개적으로 당주님의 위상에 먹칠을 한 처사에 대해 못마땅해하고 있습니다." "으음, 그야 생각이 있는 자라면 그렇게 생각할 테지." 남궁청운의 음성에는 노기가 담겨 있었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무림상황은 나날이 어지러워지는데 성주님께서 저러시니... 하루 빨리 당주님께서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늦기 전에 흑련사를 궤멸시키고 십정회를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성주님이 저렇게 발목을 잡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노릇입니다." 종리무의 교언영색(巧言令色)은 마침내 남궁청운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흥! 그렇다고 내가 이대로 주저앉을 것 같은가?" "그럼... 어쩌시렵니까?" 종리무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으음, 무슨 수를 쓰던지 해야겠지......." 남궁청운은 답답한 듯 방안을 맴돌았다. 막상 말은 해놓았으나 별다른 수가 떠오르지 않는 눈치였다. 종리무는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주님, 소인에게 한 가지 묘안이 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그래? 어떤 묘안인가?" 남궁청운은 종리무에게 바싹 다가섰다. 종리무의 입가에 음침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그는 보지 못했다. ⑥ "어머! 그게 사실이에요?" 남궁소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호, 왜 뜻밖인 모양이지?" 황보수선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지금 날아갈 듯 홀가분한 심정이었다. 그간 골머리를 썩혀왔던 남궁청운과의 혼사문제가 깨끗이 해결되었을 뿐더러 그토록 그리던 정랑과 해후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보석이 정성스러운 세공을 마친 듯 황보수선의 아름다움은 더욱 눈부시게 빛났고, 정숙하기만 했던 그녀는 남궁소연에 버금가는 수다를 떨기 시작했으며 사소한 일에도 배를 움켜쥐고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지금 두 여인은 무림���왕성을 나와 개봉부의 번화가를 나란히 걷고 있었다. 백육호, 즉 관운빈의 의복을 사기 위해서였다. 옷가게에서 청삼과 백삼 두 가지 의복을 고른 황보수선에게 남궁소연은 집요하게 물었다. 대체 누구의 옷이냐고. 결국 황보수선은 못이긴 척 관운빈과의 해후에 관해 털어놓게 되었다. 남궁소연이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것도 관운빈이 바로 괴수신의 백육호였다는 사실은 경이롭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정말 놀랐어요. 하긴... 확실히 그분이 예사로운 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긴 했어요. 그런데 설마 언니의 옛연인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남궁소연은 문득 황보수선을 빤히 바라보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그녀는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아무리 그래도 언니는 정말 너무 변했어요. 어쩜 하루아침에 그렇게 뻔뻔스러워질 수 있죠?" "뭐? 뻔뻔해져?" "호호! 그렇지 않구요? 얌전하기로 이름난 언니가 수다스러워지질 않나, 뭔가에 쫓긴 듯 허둥대질 않나... 도무지 사람이 그렇게 달라질 수가 있단 말인가요? 연인을 만나면 다 그렇게 되는 건가요?" 황보수선의 얼굴에 붉어졌다. "후후, 나도 알아. 예전과 많이 틀려졌다는 것을. 하지만 너도 곧 그렇게 될 것 같은데?" 황보수선의 의미심장한 말에 남궁소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또 무슨 엉뚱한 소리예요?" "흥, 시치미 떼지마. 나도 다 알고 있으니. 너 요즘 당소협과 사랑에 빠져 있지?" "뭐라구요? 언니, 그건 말도 안돼요." 화들짝 놀란 얼굴로 남궁소연이 소리를 높여 부정했다. "그래? 좋아. 사실이 아니라면 내가 훼방을 놓을 수도 있어. 너도 잘 알겠지만 당소협은 본래 바람둥이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너와 당소협 사이를......." "그만둬요, 그런 협박은 언니한테 어울리지 않아요. 좋아요, 말하겠어요." 앵두빛 입술을 삐죽 내밀며 황보수선을 곱게 흘겨본 후 남궁소연은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싫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직 사랑 운운하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에요. 다만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재미있고 편하다, 그래서 함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싫지는 않다는 정도일 뿐이에요. 이건 진심이에요." "좋아, 네 말을 믿지. 그럼 싫지 않다는 감정이 생긴 건 언제부터야?" "솔직히 얘기하면 몇 달 전 만화루에서 노괴물들에게 납치되었을 때부터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조금 생겼어요. 처음에는 그 사람에게 내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인 것이 수치스러웠으나 차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사람이 특별하게 보이기 시작하더라구요." 황보수선은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그건 좋지 않은데... 네 자발적인 의사가 아니라 우발적인 상황에 의해서 그런 것이라면 일종의 속박 때문이 아닐까?" "속박이란 표현은 옳지 않아요. 나도 그런 불상사에 얽매일 만큼 고지식하지는 않아요. 단지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사람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거지요."


'그게 그 말이지, 이 맹추야.' 황보수선은 내심 혀를 찼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 없이 남궁소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특별한 감정 같은 것은 생기지 않았어요. 더구나 그 사람이 한때 수선언니에게 열렬한 구애를 펼쳤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인 걸요. 그러다 지난 번 만금장 사건 이후로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변하게 됐어요." "어떻게?" "사실... 그 사람이 그날 저녁 내 방에 찾아왔더랬어요." "어머, 무슨 일로?" "특별한 볼 일이 있는 건 아니었어요. 다만... 이것저것 우스개소리도 하고 은연중 수작도 걸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게 싫지가 않았어요. 게다가 그때는 나도 언니가 정랑을 만나 사랑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기도 했구요." "흠, 그랬구나." 황보수선의 표정은 자못 진지했다. "수선언니,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아직 그 사람과 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남궁소연은 황보수선의 팔을 잡아 흔들며 자신의 어색한 감정을 감추려 했다. "그래 알았어. 그럼 그 얘기는 그만 하고 우리 오랜만에 나왔는데 어디 가서 맛있는 것 좀 사먹을까?" "피이! 평소에는 아무리 꼬셔도 바쁘다고 빼더니 백선생님... 아니 관소협이 곁에 없으니까 외로워서 그러죠? 호호! 하지만 미안하게 됐군요. 오늘은 내가 좀 바쁘거든요." "뭐? 웃기지 말아, 요 여우야." 황보수선은 짐짓 빼는 남궁소연의 소매를 반강제로 끌고 개봉부의 명물인 진향루(眞香樓)로 들어섰다. 진향루의 요리솜씨는 중원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뛰어난 것이었다. 때문에 이곳에는 천하일품의 요리를 맛보기 위해 몰려든 미식가들로 인해 늘 북적대고 있었다. 다만 삼층만큼은 다소 여유가 있었다. 그것은 엄격한 기준에 의해서 삼층의 손님을 따로 받기 때문이었다. 무림군왕성의 금지옥엽인 남궁소연은 삼층에 오를 수 있는 고객의 기준에 충분히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무사히(?) 삼층에 오를 수 있었다. "호호, 네 덕에 진향루의 삼층에 다 올라와 보는구나." 호화롭게 꾸며진 삼층을 둘러보며 황보수선은 자리에 앉았다. 드문드문 자리를 메우고 있는 손님들은 하나같이 부호거나 신분이 높은 사람들로 보였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가 감히 황보세가의 벽월선자를 거절하겠어요?" 남궁소연은 겸양을 떤 후 몇 가지 요리를 주문했다. 점소이가 물러가기 무섭게 남궁소연은 궁금한 듯 물었다. "언니, 관소협은 어디를 그렇게 급히 가신 거예요? 혹시 언니를 놔두고 숨겨놓은 연인에게 달려간 게 아닐까요?" 남궁소연의 큰 눈망울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런데 황보수선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맞아. 연인을 찾으러 가신 거야." "어머, 한 술 더 뜨는군요." "정말이야. 나와 재회하기 전에 한 여인을 만난 적이 있었대." 마치 남 얘기하듯 황보수선은 편안하게 털어놓았다. "관공자님은 지난 십여 년간의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놓으셨어. 난 그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나 역시 그 여인을 하루 빨리 만나보고 싶어." 남궁소연은 황보수선의 얼굴을 뚫어질듯 바라보았다. 황보수선의 얼굴에는 한 점의 가식도 엿보이지 않았다.


"진실이로군요." "그래, 내가 왜 거짓을 말하겠니." "그럼 관소협의 연인에 대해서 언니는 눈꼽만큼도 질투를 느끼지 않는단 말이에요?" "말했잖아. 그녀를 만나고 싶다고. 관공자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정말 좋은 분인 것 같아. 아름답고 총명할 뿐더러 어진 데다 용기까지 두루 갖추고 있으니, 그런 분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니?" "......!" 남궁소연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황보수선이 다른 여인과 구별되는 가장 큰 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에게는 남다른 도량이 있었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수긍하고 흔쾌히 받아들이는 넓은 아량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관공자님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기도 해.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와 공자님의 해후도 없었을 테고, 그럼 난 평생을 외로운 노처녀로 살았을 거 아냐? 결국 내게도 그분은 은인인 셈이야." 남궁소연은 탄성을 발했다. "참 이럴 때의 언니는 대단해 보여요." "호호, 자고로 영웅에게는 삼처사첩(三妻四妾)도 많은 게 아냐." "꽥! 그럼 언니는 앞으로도 관소협이 바람 피우는 대로 모두 집안으로 불러들여 함께 살겠다는 소리예요?" 남궁소연이 질겁을 하고 따져들었다. "호호! 놀래기는. 그건 아니야. 나와 그녀 외에는 어떤 여인도 관공자님께 접근하지 못하게 할 생각이야. 또 공자님도 헤프게 정을 흘리고 다닐 분이 아니야. 하마터면 나도 그녀 때문에 공자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못할 뻔했을 정도니까. 그때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황보수선은 만금장에서 자신에게 냉정했던 관운빈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 그랬었군요. 그러고 보니 관소협은 대단한 분이군요." "누구보다 강인한 의지가 있는 분이야." 황보수선은 몽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내내 붙어있다 오늘 아침 헤어진 관운빈에 대한 벌써부터 그리움이 사무쳐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 와서는 억지를 써서라도 그를 따라가지 못한 것이 후회되기까지 했다. "그분은 언제 돌아오시죠?" "글쎄, 대회전이 있는 날까지는 돌아오신다고 했어." 황보수선의 음성에는 힘이 없었다. '아마도 그 날까지 기다리는 것이 평생을 기다려온 것만큼이나 힘들 것 같아.......' 그녀는 내심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제 20 장 실종(失踪) ① 두두두두......! 관운빈은 모처럼 맞이한 자유를 만끽하며 말을 몰았다. 무림군왕성주 남궁혁이 그에게 직접 내준 천리마는 두 시진이 넘도록 질풍처럼 달렸지만 조금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무림군왕성에서 보낸 한 달여의 기간은 그에게 압박감을 주었다. 그곳은 도무지 체질에 맞지 않는 곳이었다. 천하 각처에서 몰려든 군웅들로 북적대는 무림군왕성에서는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나름대로 각 지역의 패주들로 자부하는 인물들이 서로의 권위나 체면을 내세우느라 크고 작은 마찰을 끊임없이 빚어냈고, 삼삼오오, 또는 문파와 문파끼리 파당(派黨)을 형성하여 몰려 다니는 모습은 그에게 환멸감을 불러 일으켰다. 도무지 백도인들의 모습은 그에게 본받을 만한 점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들은 명예와 이익에 탐닉했고,


진정으로 무림을 위해 자신을 내놓으려 하는 인물은 아무리 찾아도 볼 수가 없었다. 군웅들의 그런 모습에서 관운빈은 역겨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서둘러 무림군왕성을 떠난 것이었다. 성을 빠져나오는 순간 비로소 숨통이 트여졌고, 날아갈 듯 자유로운 느낌이 들었다. 만일 그곳에서 황보수선과의 달콤한 시간들이 없었다면 하루라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황보수선의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리자 그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늘 현숙한 모습과 사려 깊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헌신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그런 성품은 남자라면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것이었다. 관운빈은 말을 몰며 내심 중얼거렸다. '필경 영매(零妹)도 기쁜 마음으로 황보소저를 받아줄 것이다. 태중혼약으로 이루어진 인연만으로 십 년을 넘게 날 기다려왔는데... 영매도 분명 이해할 거야.' 그는 황보수선과 사사영이 서로 손을 마주잡고 미소짓는 모습을 머리에 그리며 가슴이 뛰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야산을 지나 나즈막한 숲언덕을 넘자 인가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토담을 두른 초라한 인가였다. 인가를 발견하자 그는 시장기를 느꼈다. '저곳에서 잠시 쉬어 가야겠구나.' 그는 토담집 앞에서 말을 멈추었다. "주인장, 계시오?" 말고삐를 집 앞의 우물가에 맨 그는 문을 두들겼다. 그러자 곧 노인의 메마른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콜록콜록! 게 뉘시오?" "지나던 과객인데 잠시 요기를 할까 들렀소이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콜록!" 질질 신발을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허리가 잔뜩 구부러진 백발노인이 지팡이를 받친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관운빈의 아래위를 훑어본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시오. 달리 먹을 것은 없고 소면이라도 괜찮다면 한 그릇 나눠줄 수 있소만." 관운빈은 빙긋 미소를 띠었다. 소면이 어딘가? "그럼 폐를 끼치겠소이다." "콜록콜록.... 너무 좋아할 것 없소. 돈은 받아야 하니까. 안 그러면 이 늙은이가 뭐 먹고 살겠소?" "하하, 물론이지요. 노인장." 관운빈은 밝게 웃으며 노인의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이라고 해야 비좁은 토방 두 칸이 전부였다. 좁은 방안에는 낡은 탁자가 두 개 놓여 있을 뿐, 의자마저 없었다. 의자 대용인 듯 거적이 깔려 있을 뿐이었다. 도리없이 거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관운빈은 소면을 나오기를 기다렸다. 두 칸이라고 해야 실내는 벽이 없이 부엌과 방으로 연이어져 있었다. 노인은 솥 안에서 소면을 담고 있었다. 잔뜩 구부러진 허리와 백발, 나무껍질처럼 마른 피부는 노인의 나이가 최소한 칠순은 넘어 보이게 했다. "노인장, 연로하신 분이 어찌하여 이런 외진 곳에 혼자 사시는 것이오? 슬하에 자식도 없습니까?" 측은한 마음이 든 관운빈은 그렇게 물었다. "있기야 있었습죠. 그것도 아홉씩이나... 콜록! 하지만... 맞아죽고 굶어죽고 병들어죽고... 또 한 놈은 목매달아 죽었지.... 하여간 모두 죽었소이다. 마누라도 병들어 죽어버렸고... 콜록콜록!" 노인은 연신 기침을 하며 그렇게 대답했다. 잠시 후 젓가락을 꽂은 채 투박한 소면그릇이 나왔다.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관운빈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노인은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세상이 썩어 있으니 순하고 착한 것들은 제 명대로 살지 못할 수밖에. 콜록콜록!"


연기 탓인지 노인은 연신 기침을 발했다. "자네도 인상을 보아하니 손해보는 일이 많겠구먼. 콜록! 독하게 사시오. 눈감으면 끝나는 인생... 후회 없이 살다 가구려." 노인의 말에는 뼈가 있는 것 같았다. 소면을 입에 넣던 관운빈은 문득 동작을 멈췄다. "왜 그러시오? 소면이 입에 맞지 않는 모양이구려?" "아, 아닙니다.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요." 소면의 맛은 예상을 뛰어넘는 훌륭한 것이었다. 관운빈이 잠시 동작을 멈춘 것은 갑자기 주변에 찌르는 듯한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가 다시 소면을 먹기 시작했다. "더 있으니 모자라면 말씀하시오, 콜록콜록! 언제 갈지 모르는 인생, 기회가 될 때 배불리 먹어두시오." 관운빈은 다시 동작을 멈추었다. 그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가 사라졌다. "슬슬 배고픈 중생들이 몰려올 때가 됐는데... 어디 준비를 좀 해볼까나......." 노인은 가마솥의 뚜껑을 열고 한 웅큼의 면을 넣은 후 휘젓기 시작했다. 펄펄 끓는 솥안에서 솟아오른 뜨거운 김이 노인의 몸을 뒤덮었다. "콜록, 콜록, 콜록......!" 자욱한 김에 모습이 가려지게 된 노인. 그러나 기침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바로 그때였다. 슈슉! 문득 관운빈이 앉아 있는 거적을 뚫고 한 자루 검이 솟아올랐다. 관운빈은 벌렁 뒤로 쓰러졌다. 본능적인 반응이었으나 검은 그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파파팍! 동시에 거적을 뚫고 괴인영이 솟구쳐 올라왔다. 인영은 ���만치 나뒹굴었다. 그의 등 한복판! 젓가락 하나가 박혀있었다. 관운빈이 날린 것이었다. 그것은 다만 시작일 뿐이었다. 관운빈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굴러가듯 벽쪽으로 피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토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파파파팟! 실내의 바닥에서 흙덩이가 치솟으며 한꺼번에 네 개의 인영이 솟구쳐 나온 것이다. 그들은 바닥에 은신하고 있는 살수들이었다. "......!" 관운빈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전후좌우로 살수들이 압박해 들어왔다. 그들은 신형을 이동하면서도 조금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로 미루어 숙련된 특급살수들임이 분명했다. 슈슈슉! 배후에서 검이 날아왔다. "어딜!" 관운빈은 낭랑하게 호통치며 몸을 한 바퀴 돌렸다. 그는 손에 철컥! 하는 둔탁한 감촉을 느꼈다. 비명은 없었다. 분명 상대의 검을 자르며 목줄기를 끊었으나 그자는 한마디의 비명도 발하지 않았다. 관운빈의 등에도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용명검을 쥔 채 우뚝 서 있었다. '지독한 자로군. 죽어가면서도 신음 하나 내지 않다니.......' 쓴 입맛을 다시며 관운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 명의 살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했음에도 그들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고 두 눈에 살기를 번뜩이며 쇄도해왔다. 슈슈슉! 동시에 세 자루의 검이 날아왔다. 용명검이 지체없이 허공에 원을 그렸다. 이번에는 충분한 대비가 되어 있었으므로 결과는 선명히 나타났다. 삼 인의 살수는 검과 몸이 함께


분리되며 피보라 속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번에도 그들은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 관운빈은 시선을 돌려 아직도 가마솥 안의 면을 휘젓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번쩍 빛났다. 토담집 벽이 무너져 내리는 와중에도 노인과 가마솥 주위에는 한줌의 잔해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가?" 가마솥의 뚜껑을 닫으며 노인이 물었다. "감각이 조금 예민한 편이오. 하지만 확신은 못했었소. 어쨌든 귀하의 수하들은 완벽했소. 단지 불운했을 뿐이오." 사실이었다. 관운빈의 뛰어난 감각에도 바로 직전에야 살수들의 기미를 눈치챘을 뿐이었다. 바로 바닥에 숨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숨소리 하나 나지 않았던 것이다. "별난 젊은이였군." 노인은 여전히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굽은 허리도 그대로였다. "흑련사에서 보냈소?" 관운빈은 담담히 물었다.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 늙은이는 살막의 우노(愚老)라고 하네. 혈기왕성한 시절부터 워낙 우둔한 짓만 골라 하다보니 모두들 그렇게 부르더군." 관운빈은 내심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강호에 나온 이래 이것저것 줏어 들은 것이 적지 않았다. 살막이라면 전설적인 청부집단이었다. 그는 침중하게 말했다. "이해가 안 되는구려. 살막은 반드시 죽어야 할 이유가 있는 자 외에는 억만금을 준다 해도 청부를 받지 않는다고 알고 있소. 내가 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이오?" "그건 막주가 판단할 일, 노부는 그저 명을 따를 뿐이네. 더 궁금한 점이 있는가?" "누가 청부했소?"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보기보단 어리석군. 그럼 더 이상의 질문은 없는 것으로 알겠네. 이제 손을 쓸 테니 조심하게." 노인, 우노는 지팡이를 짚으며 그를 향해 느릿느릿 걸어왔다. 둘 사이의 간격은 불과 두 장 정도였으나 우노의 걸음이 너무 느려 꽤 먼 거리처럼 지루하게 느껴졌다. "......." 관운빈은 우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의 생에서 처음 격돌하게 되는 강적이었다. 우노는 아무런 기운도 발산하지 않은 채 마치 촌노가 나들이라도 하는 양 무심히 걸어왔다. 관운빈의 용명검이 움직였다. 그런데 검극이 우노가 아닌 허공을 향했다. 그의 시선도 검극을 따라 허공에 고정되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관운빈의 자세를 힐끗 쳐다본 우노가 몸을 돌려 자신이 서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관운빈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뜻인가? 그만두겠다는 것인가?' 관운빈은 우노의 보폭에 맞추어 그를 향해 다가갔다. 용명검은 여전히 비스듬히 허공을 향한 채였다. 우노의 걸음걸이는 느려 터졌다. 마치 걷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관운빈의 전신에는 긴장감이 팽배했다. 그의 눈은 우노의 등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우노는 마침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싸울 의사가 전혀 없는 듯 무쇠솥의 뚜껑을 열었다. 그의 덩치와 거의 비슷한 무거운 솥을 가볍게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괴이해 보였다. 솥에서 나온 뜨거운 김이 그의 신형을 뒤덮었다. "......!"


관운빈은 전신에 초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그의 시력은 범인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자욱한 수증기 속에서 우노가 그를 향해 공격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껏 이럴려고 그랬나?' 그는 내심 코웃음쳤다. 수증기가 그를 향해 밀려왔다. 그는 용명검을 휘둘렀다. 캉!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솥뚜껑은 쪼개졌다. 순간 막강한 잠력이 쪼개진 솥뚜껑 사이로 밀려왔다. 도무지 항거불능할 정도로 거대한 잠력이었다. 관운빈은 눈을 부릅떴다. 솥뚜껑 사이로 전광석화처럼 지팡이가 날아온 것이다. 그는 일시에 두 손과 두 발을 떨쳐냈다. 용명검은 무쇠솥 조각을 날려버렸고, 그의 좌수는 장력을 뿌렸다. 펄펄 끓는 물이 그를 향해 쏘아왔던 것이다. 동시에 오른발로는 우노의 안면을 걷어찼으며, 왼발은 중심축이 되어 급격히 신형을 휘전시켜 지팡이를 피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적절하고 빠른 대응이었다. 우노는 비록 정타는 피했으나 그의 족풍(足風)에 휘말려 뒤로 칠팔보나 밀려나가 버렸다. 솥뚜껑과 뜨거운 물도 사방으로 날아가버렸다. 관운빈은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했다. 그가 막 재차 공격을 펼치려는 순간이었다. 퍽! 갑자기 그의 등에 쑤셔박히는 작은 두 손이 있었다. 관운빈은 눈을 부릅뜨며 빙글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그의 뒤에는 고작 칠팔 세밖에 안되어 보이는 난쟁이가 서 있었다. 그가 놀란 것은 그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의 바로 뒤에서 나타날 수 있었는가 하는 점때문이었다. 놀랍게도 난쟁이는 솥뚜껑 뒤에 붙어 있었다. 솥뚜껑이 용명검에 의해 쪼개지며 날아갔을 때, 그는 유령처럼 몸을 날려 그의 뒤에 내려섰던 것이다. "끄... 끄으으......." 난쟁이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보며 괴상한 신음을 흘렸다. 그의 손이 없었다. 분명 관운빈의 등에 박아 넣었건만, 관운빈이 돌아서면서 자연스럽게 빠졌던 손이었다. 그런데 손목만 남아 있었다. "가라." 관운빈은 좌수를 빙글 돌렸다. "케에에엑!" 처절한 비명과 함께 난쟁이는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토벽을 뚫고 날아가버렸다. 그때였다. 우노의 신형이 미끄러져 오며 기척도 없이 지팡이를 찔러왔다. 푸욱! 다시 한 번 섬뜩한 소리가 났다. 그러나 이번 것은 관운빈의 등에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아래로 쳐져 있던 용명검이 위로 올라가며 우노의 심장에 박히는 소리였다. 우노의 지팡이는 관운빈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 있었다. "허허허....... 어떻게 이런 일이?" 우노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물었다. "말해주겠나? 눈을 감을 수 있도록." 관운빈은 담담히 말했다. "내겐 남들에 비해 발달한 초감각이 있소. 그것은 추나신공을 익혔기 때문이오. 난쟁이가 내 등을 찔렀을 때도 마찬가지요. 내 혈맥(血脈)은 마음대로 위치를 이동할 수 있어서 그의 손은 견갑골(肩胛骨) 사이에 박히게 되었소. 근육에 힘을 주어 그의 손목을 절단해 버렸소. 결국 노인장의


암습은 기발했지만 내겐 통하지 않았소." "추나신공이라......?" 우노는 눈을 반쯤 감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안색이 더욱 희게 보였다. "하지만 너무 낙담 마시오. 내가 입은 상처도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오." 우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넨 이미 인간의 한계를 극복했군. 그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우리의 패배는 당연한 것이야. 그럼 내 심장을 뛔뚫은 검법은 어떤 것이었나?" "......." 관운빈은 이번만은 침묵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자네는 태화천의 후예인가?" 우노의 뜻밖의 질문이었다. 관운빈은 흠칫했으나 곧 안쓰러운 눈길로 우노를 응시했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로군.... 이 늙은이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게 됐으니. 태화천주의 전설적인 검법인 천룡무극검(天龍無極劍)을 맛보게 되었으니......." 관운빈의 표정이 기이해졌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천룡무극검법을 시전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죽는 순간까지도 숨기려 했던 것이었다. 만일 이렇게 갑작스런 공격을 받지 않았다면 절대로 펼치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그로 하여금 비장의 검법을 펼치게 한 것이었다. "이 늙은이의 번거로운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나?" 아마도 우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이십 년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관운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죽은 막내를 비롯하여... 자네에게 죽은 아들들을 노부와 함께 태워주겠나? 이승에서 애비 노릇 한 번 다정하게 해보지 못했는데 저승에서는 함께 즐겁게 살아봐야 하지 않겠나?" 관운빈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럼... 이들이 모두... 노인장의 아들들이란 말입니까?" "그렇다네." "모두 죽었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우노의 음성에서 점차 힘이 빠져나갔다. "모두 죽었었지. 그것을 막주가 살려냈네. 하지만 살아난 것은 뼈와 근육, 그리고 맥박 정도라고 이해하면 정확할 걸세. 이미 자식 놈들의 영혼은 새까맣게 타버렸거든. 이 몹쓸 세상에서 힘깨나 쓴다는 놈들에 의해 우리 애들은 그때 다 죽은 것이지. 광대짓 하는 부모를 타고났다는 것이 그 애들의 공통된 죄였고... 그 외에도 큰 놈은 너무 글을 잘 깨우친다는 죄를 지었고 둘째 놈은 너무 힘이 넘쳐나는 죄가 있고... 셋째 놈은 인물이 너무 반반한 죄를 지었지. 그리고......." "그만하시오, 노인장." 관운빈이 우노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우노는 관운빈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 숨을 뱉으며 그는 자신과 자식들의 일그러진 인생을 독백처럼 흘려내었다. "...희한한 건 막내 놈이야. 오늘도 그러했듯 일곱 살 되던 해에도 스스로 목을 매달았었거든. 그 이후로 성장이 멈춰 아주 재미있는 모습이 됐지. 그 덕에 세상에 한풀이는 제일 많이 할 수 있었지만......." 우노의 넋두리는 한참을 더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침침하게 잠겨가던 우노의 눈빛이 반짝 기광을 발하며 관운빈을 향했다. "젊은이, 사실 난 오늘의 죽음을 예감했었네. 그리고 이런 날을 기다려 왔기도 했지. 그래서 자식들을 모두 이끌고 왔지. 막주의 명을 받는 순간 그것을 직감했네. 본막의 겁난이 우리 부자들의 죽음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막주도 알고 있는 듯했어. 어찌됐거나 조심하게. 본막의 살수들이 아직은 더 남아있으니... 젊은이, 이제 검을 빼주게. 이만 자식들을 에미 곁으로 데리고 가야겠어. 고마웠네."


우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관운빈은 그의 심장에 꽂혀있는 용명검을 뽑아냈다.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관운빈의 의복에 선혈이 튀었다. 천리마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말발굽이 일으킨 자욱한 황진 너머로 검은 연기가 피어 올랐다. 토담집이 불길에 휩싸인 것이다. 연기는 일직선으로 피어올랐다. 아마도 하늘로 곧장 올라갈 것이다. 관운빈은 고개를 돌려 힐끗 연기를 바라본 후 침울한 표정으로 박차를 가했다. ② "하아.... 천첩은... 수 차례에 걸쳐 만금대인 부자를... 학! 경계해야 한다고... 전갈을 올렸습니다." "그런 막연한 전갈로는 미흡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아아!" "본좌가 왜 널 살려두었다고 생각하느냐?" "하아... 그건......." "네가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유는 그것뿐이지. 아직은 쓸만한 네 몸뚱이가 널 살렸다." "황공... 헉! 하옵니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다.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알겠느냐?" "조... 존명!" "이렇게 아름다운 네 몸뚱이가 무참히 찢기는 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지." "아... 하악." "하지만 잘 들어라. 본천(本天)의 율법은 만인에게 공평한 법이다. 유념해야 하리라." "아― 아― 악!" 창틀을 움켜쥔 여인의 섬섬옥수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앵도 같은 입술은 한껏 벌어져 있었다. 한 떨기 꽃과 같은 옥용에 고통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알몸이었다. 두 개의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젖가슴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구겨지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 곤룡포(昆龍袍) 차림의 위인이 서 있었다. 그는 여인의 젖가슴을 억세게 틀어쥔 채 몸을 흔들고 있었다. "하아... 악!" 여인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녀의 중심부를 강타한 무엇인가가 희열보다 열 배는 더 큰 고통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여인의 몸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곤룡포의 인물이 떨어져 나갔다. 그녀의 대리석 같은 다리 아래로 선명한 혈화(血花)가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여인은 알 수 있었다. 이미 그녀의 주인은 그 자리에 없을 것이다. 여인은 창틀과 벽을 훑으며 무너져 내렸다. 발등이 파묻힐 정도로 푹신한 양탄자에 머리를 처박은 여인은 한손을 입안에 쑤셔 넣었다. "흐흑흑......." 오열을 터뜨리는 여인. 놀랍게도 그녀는 만화루의 여주인 예군향이었다. ③ 무림군왕성주 남궁혁은 오십여 명의 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은밀히 개봉부를 벗어났다. 그것은 충복 흑야혼의 진언에 따라 나선 잠행이었다. 그의 잠행은 총관 소손방은 물론 아들 남궁청운조차 모르게 결행되었다. 개봉을 벗어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선두에 선 위사들이 들고 있는 유등의 불빛을 통해 주위에 널려있는 봉분(封墳)들의 모습이


을씨년스럽게 비쳤다. 그가 도착한 곳은 공동묘지였던 것이다. 얼마 후 남궁혁은 개중 규모가 커 보이는 거대한 봉분 앞의 사당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거라. 누구를 막론하고 접근을 용납해선 안된다." 남궁혁은 위사들에게 명을 내리고 등불을 든 채 사당의 문을 밀었다. 사당 안. 침침한 어둠 속에서 한 점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누군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으음, 흑야혼. 먼저 와 있었느냐?" 남궁혁은 사당문을 잠궜다. 한편, 을씨년스런 묘���의 분위기는 위사들을 심란하게 했다. 초가을의 밤바람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고, 왠지 으시시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주변을 경계하면서 흘끔흘끔 사당을 돌아다 보았다. 남궁혁이 들어간 후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여인의 성숙한 젖가슴과 같은 반달이 구름 속에 자취를 감추었다 드러내기를 몇 번이었을까? 위사들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머지않아 동이 틀 것 같았던 것이다. "너무 지체되는 걸......." 위사들의 수장인 황대봉(黃大鋒)은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소인이 한번 들어가 볼까요?" 한 수하가 기다렸다는 듯 나섰다. "아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성주님의 명 없이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지 않느냐?" 석연치 않으면서도 황대봉은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사당 안으로 들어간 남궁혁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이윽고 아침 햇살이 묘지 주변을 훤히 비추고 말았다. 황대봉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사당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쿵쿵쿵! 그는 사당문을 두드렸다. "성주님! 소인 황대봉이옵니다. 성주님! 날이 밝았습니다!" 쾅! 쾅! 쾅! 그는 다시 크게 문을 두들겨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황대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안되겠다! 문을 부수어라!" 다급해진 그는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서너 명의 수하들이 병기로 문을 부수자 그는 즉각 사당 안으로 신형을 날렸다. 사당 안은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불을 밝혀라!" 수십 개의 유등이 밝혀지자 사당 안의 정경이 드러났다. "......!" 황대봉은 눈을 크게 떴다. 사당 안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던 것이다. "성주님이 안 계시다니... 이게 어찌된 일이냐?"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때 한 위사가 바닥을 가리키며 외쳤다. "지하로 통하는 통로인 것 같습니다!" "어디냐?" 황대봉은 급히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과연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는 바닥에 널빤지를 들춰낸 듯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열어라!"


수하들이 널빤지를 들어내자 지하로 통하는 어두운 계단이 나타났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결심하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은 의외로 길었다. 삼십여 개의 계단을 내려가서야 바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부터 일직선으로 뻗은 통로가 나왔다. 잠시 후, 한 칸의 장방형 석실이 나타났다. 석실은 텅 비어 있었다. 황대봉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럴 수가......!" 석실 안에는 하나의 탁자와 네 개의 의자만이 놓여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석실 바닥에 남궁혁이 들고 있었던 유등이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황대봉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분명 무슨 일인가가 벌어진 듯한 상황이었다. "주위를 샅샅이 조사해 봐라!" 위사들은 일일이 손바닥으로 사방의 벽을 더듬으며 조사해보았다. "앗, 문입니다!" 한 위사가 외쳤다. 과연 그가 서 있던 벽이 안으로 밀려들어가 있었다. "비켜라!" 황대봉은 소리치며 벽을 밀었다. 벽이 빙글 돌아가며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은 반대로 위쪽을 향해 나있었다. "모두 날 따라라!" 그는 긴장한 음성으로 외치며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계단은 그리 길지 않았다. 머지않아 그는 머리 위에 무엇인가 막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두 손으로 힘껏 밀어 올렸다. "......!"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럴 수가......!" 그는 망연자실해지고 말았다. 계단을 빠져나오니 그곳은 사당에서 불과 삼십여 장도 떨어지지 않은 한 숲속 공지였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무 것도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그는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수하들에게 외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성주님을 찾아 보아라!" "옛!" 수하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주위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무뿌리 하나, 풀 한 포기까지 면밀히 조사했다. 그러나 아무리 이 잡듯이 주위를 수색해도 단서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의 주인 남궁혁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제 21 장 백야무정객(白夜無情客) ① 청천벽력(靑天霹靂)! 무림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무림군왕성주 용비천군 남궁혁이 갑자기 실종된 것이다. 군웅들은 망연자실해지고 말았다. 흑련사와의 대회전을 눈앞에 두고 발생한 이 괴사(怪事)에 모두들 넋이 나가버렸다. 쾅! "이... 가증스러운 놈들 같으니......!" 남궁청운은 버럭 화를 내며 탁자를 내리쳤다. 무림군왕성의 대전이었다. 탁자를 중심으로 기라성 같은 위인들이 앉아 있었다.


먼저 일월단주를 겸임하고 있는 총관 소손방을 비롯하여 백호단주(白虎團主) 철나한(鐵羅漢) 포곤명(包昆命), 철사단주(鐵獅團主) 신풍절도(神風絶刀) 섭우송(攝盂松), 금붕단주(金鵬團主) 묵검자(墨劍子) 사마일수(司馬一秀), 특명사(特命師) 이효(李爻), 위사장(衛士長) 황대봉과 남궁소연, 그리고 남궁혁의 부인 다정선자(多情仙子) 온수운(溫水雲)이 모여 있었다. 온수운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무인(武人)의 아내로는 드물게 무공과는 담을 쌓고 지낼 뿐 아니라 평소 무림군왕성의 대소사에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여인이었다. 늘 자신의 거처인 운정각(雲貞閣) 안에서만 맴돌았었다. 남궁혁은 분노에 찬 시선으로 장내의 인물들을 둘러보며 화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십정회가 철군(撤軍)하다니...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래도 된단 말이오?" 남궁청운이 분노를 터뜨린 것은 방금 전 들어온 전서구의 내용 때문이었다. 흑련사와 대치하던 십정회가 갑자기 철수했다는 내용이 전해진 것이다. 그로 인해 흑련사는 더욱 기세를 올린다는 보고가 속속 답지되고 있었다. "그자들이 과연 백도인이라 할 수 있단 말이오? 이런 비열한 짓을 저지르다니...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오!" 남궁혁의 눈에서는 광기마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대단주 중 가장 연장자인 금붕단주 묵검자 사마일수가 차분한 음성으로 나섰다. "소성주님, 십정회의 갑작스런 철수는 탐탁치 않은 면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 길을 걷는 동도임에는 틀림없으니 좀 신중히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마일수는 평소에도 묵직한 성품으로 인해 무림군왕성에서 비중있는 인물로 통하고 있었다. 남궁청운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힐끗 쏘아본 후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다른 의견은 없소이까?" "금붕단주의 견해에 동감합니다." 백호단주와 철사단주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남궁청운은 그만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눈은 소손방에게 향해졌다. 자신의 편을 들어주기를 원한다는 듯. 그러나 기대했던 소손방마저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쯤 되면 남궁청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좋소이다. 여러분의 뜻은 잘 알았으니 십정회 문제는 일단 보류해 둡시다. 그러나 흑련사를 물리친 후 이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오. 내 분명히 이 자리에서 밝혀두는 바이오." 이때였다. 남궁소연이 나섰다. "오라버니! 다른 건 다 오라버니 뜻대로 해도 좋으니 아버님 문제만은 제발 내 의견에 따라주세요!" 무림군왕성의 수뇌부 전부와 모친까지 모인 자리에서 그녀가 나서자 남궁청운은 더욱 불쾌감이 치밀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내가 뭘 고집대로 했단 말이냐? 그래, 아버님께서 실종되신 것이 내 탓이란 말이냐? 나 역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활동을 중단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 남궁소연은지지 않고 반박했다. "왜 말이 안돼요? 아버님은 분명 흑련사가 아니면 또 다른 적대세력에 납치되셨어요. 아버님이 안 계신 무림군왕성은 장수를 잃은 군사예요.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요. 흑련사를 물리치기는커녕 자칫하면 본성의 몰락을 부채질 할 수도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 잠시 활동을 중단하고 아버님부터 찾자는데 왜 안된다는 거예요?" 남궁청운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집어치워라! 네 말대로 흑련사나 다른 세력이 아버님을 납치해갔다고 치자. 그렇다고 활동을 중단하면 그들이 아버님을 풀어 줄 것 같으냐?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욱 더 전열을 정비하여 흑련사를 치는 것이다. 놈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 한다. 아마 아버님께서도 그것을 지지하실 것이다."


남궁소연은 기가 막힌 듯 눈물까지 흘리며 말했다. "그만 하세요! 어찌 자식된 도리로 아버님을 찾는 것을 포기한단 말이에요! 정 그러면 나 혼자라도 아버님을 찾겠어요. 이제부터 오라버니는 내 행동에 간섭하지 마세요!" 남궁청운은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는 탁자를 주먹으로 치며 외쳤다. "좋다! 네 멋대로 하거라. 화산파 장문인처럼 흑련사로 달려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거라! 난 상관하지 않겠다!" 남궁청운의 눈에는 괴광이 번뜩였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사이한 기운이었다. 남궁소연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라버니는 지금 제 정신이 아니에요. 미쳤어요! 미쳤다구요!" 그녀는 눈물을 뿌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오라비에게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괘씸한 것... 그래, 어디 마음대로 해보거라. 그렇다고 내가 눈썹 하나 깜박할 줄 아느냐?" 남궁청운은 냉소를 머금은 채 중얼거렸다. 한편 이때까지 꼼짝 않고 앉아 있던 온수운이 살며시 몸을 일으키더니 남궁소연의 뒤를 쫓아나갔다. 사대단주들은 당혹한 얼굴로 몸을 일으켜 주모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다만 남궁청운만이 그 자리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소성주님, 소인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소손방이 어수선해진 장내 분위기를 추스리며 입을 열었다. "말씀해 보시오."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은 비어있는 성주님의 자리를 메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심점을 잃고 흩어질지 모르는 군웅들의 마음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에 금붕단주 사마일수가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무슨 가당치 않은 말씀이시오? 성주님의 생사가 불분명한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성주님의 행방을 찾는 것이오. 가당치 않다고 생각하오." 소손방의 하나밖에 없는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사마단주, 지금이 평화로운 시기라면 의당 그래야 할 것이오. 하지만 지금은 무림의 흥망을 결정짓는 중차대한 시기요. 주군에 대한 도리로 성주자리를 공석으로 둔 채 사마의 무리들과 대회전을 치를 수 있단 말이오? 과연 누가 선두에 서서 통솔할 것이며, 설사 적임자가 있다 해도 지휘체계가 확립되겠소? 지금 본성에는 수많은 백도인사들이 집결되어 있소. 그들을 과연 누가 인솔할 수 있을 것 같소?" "......." "흑련사와 일전을 벌이는 데 선봉이 되어야 할 사람은 당연히 무림군왕성주여야 하오. 타 방파의 수장에게 지휘권을 양도해도 된단 말이오? 그건 아니될 말이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무림인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소성주님을 하루 빨리 성주로 추대하여 대오를 재정비해야 하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오." 소손방의 장광설이 끝나자 좌중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는 신산(神算)이란 별호를 가지고 있었다. 무림군왕성이 오늘의 성세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지략 탓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듯 조목조목 따져서 설득하자 장내의 인심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소손방의 외눈이 특명사 이효에게 향해졌다. 이효의 안색이 불편해졌다. 그러나 소손방이 계속 그를 주시하자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소생 총관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소성주님께서 성주의 자리를 대행하여 무림을 이끌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효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떨구었다. 소손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남궁청운을 향해 말했다.


"소성주님, 아무도 이 일에는 반대하지 않을 줄로 압니다. 만일 반대자가 있다면 그것은 본성의 배신자일 뿐일 것입니다. 이 일은 한 시도 늦춰져서는 안될 일이라고 봅니다." 중인들은 안색이 변했다. 소손방이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하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한 말 가운데 반대자는 본성의 배신자라는 말에 모두 입이 얼어붙고 말았다. 남궁청운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허허, 이것 참... 여러분들이 이렇게까지 날 신임할 줄은 몰랐소이다. 이것 참 진퇴양난이외다." 짐짓 난감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으나 그의 행동은 대부분의 제위들에게 어색함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일은 이미 예정된 수순에 의해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소손방이 한 번 더 간곡하게 남궁청운에게 중임을 맡아줄 것을 제청했던 것이다. 거기에 특명사 이효가 다시 거들고 나섰다. 이효는 본래 남궁혁의 직속으로 그의 명을 각 단주 및 무림군왕성의 수하들에게 전달하는 중임을 맡았던 자였다. 그가 소손방을 지지하고 나서니 상황은 일방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② 제이대 무림군왕성주의 보위는 남궁청운에게 넘어갔다. 총관 소손방과 특명사 이효의 주관으로 그 일은 신속히 진행되었고, 무림군왕성에 집결되어 있던 군웅들은 놀라운 심정으로 그 같은 일을 지켜보게 되었다. 대부분의 군웅들은 남궁청운이 성주의 자리를 넘겨받은 것을 피치 못할 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일부는 부친의 유고(有故)를 틈타 성주에 오른 그를 의혹에 찬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다는 대세론에 기울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신산 소손방의 달변에 큰 영향을 받은 탓이기도 했다. 이로써 이십오 세의 젊은 무림지존이 탄생하게 되었다. 일부 군웅들은 열렬히 환호하며 남궁청운의 시대에 축하를 보내기도 했다. 남궁청운은 성주가 된 다음날 뜻밖의 손님을 맞게 되었다. 성주로서 집무실까지 옮긴 그가 산적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분주한 가운데 종리무의 안내를 받으며 한 여인이 들어선 것이다. "......!" 그녀를 본 순간 그는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무르익어 터질 듯한 육체를 궁장(宮裝)으로 감싼 삼십대의 절세미녀는 다름 아닌 만화루의 여주인이었던 것이다. "오! 예군향! 이게 웬일이오? 날 다 찾아오다니......?" 남궁청운은 그녀를 잊지 않고 있었다. 만화루의 후원 야화림에서 그녀를 처음 만난 이래 그녀의 농염함에 크게 반해 있었던 것이다. "호호호, 소첩이 일전에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예언?" 종리무는 예군향을 안내한 후 지체없이 물러갔다. 집무실에 단 둘이만 남게 되자 ���군향은 갑자기 날아갈 듯이 절을 했다. "소첩, 무림지존이 되신 것을 경하드리옵니다!" "오오!" 남궁청운은 비로소 무슨 뜻인지 알았다. 당시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다. - 첫눈이 야화림에 설화(雪花)를 만개시킬 때면 나으리께서는 단 하나뿐인 무림지존의 자리에 등극해 계실 것이옵니다. 남궁청운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낙엽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직 첫눈은 내리지 않았는데 예상보다 이른 것인가?' 그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예군향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예군향은 또 이렇게 말했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순결을 지킨 채 그를 기다리겠노라고. 술상이 들어왔다. 눈치 빠른 종리무가 두 사람의 해후를 위해 마련해 들여보낸 것이었다. 남궁청운은 술상에 나란히 앉자마자 궁금한 점부터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해 하던 터였다. 그래, 만금대인이 꼬리를 말고 사라진 후 어떻게 지냈는가?" "소첩은 그 이후로도 만화루를 경영하며 지냈습니다." "그랬었군." 남궁청운은 그의 잔에 술을 따르는 예군향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에 더운 김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삼십을 갓 넘긴 농익은 여인이었다. 그는 욕망이 불끈 치솟았다. "받으세요. 나으리의 무림군왕성주 등극을 경하하기 위해 천산만수(千山萬水)를 건너왔사옵니다." 예군향의 나긋나긋한 말에 그는 눈을 반쯤 감으며 물었다. "그뿐인가?" "그럼 원하시는 게 또 있사옵니까?" 예군향의 옥음은 남궁청운의 욕화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벌써 잊었느냐? 내가 용좌에 오르는 날 품에 안기기로 한 약조 말이다." 남궁청운은 슬며시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예군향은 그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 "무림군왕성주의 자리가 용좌라는 말씀이오이까?" "물론 아니지. 하지만 가장 근접해 있는 자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군향, 그대가 스스로 먼길을 달려온 것이 고작 술 한 잔을 권하기 위한 것은 아닐 터인즉 공연히 내 속을 끓일게 뭐가 있느냐?" 예군향은 그의 품에 안기며 나긋하게 물었다. "진정으로 신첩을 원하시옵니까?" "원하다 뿐이냐? 그대와 함께라면 평생을 침상에서 보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예군향은 남궁청운의 품에서 몸을 빼내며 뇌쇄적인 미소를 지었다. "나으리의 언변이 예전과 비할 바 아닐 정도로 매끄러워졌군요. 그간 필시 많은 여인들을 섭렵하신 게지요?" 샐쭉한 표정을 짓는 예군향의 자태는 그대로 천상우물이었다. "푸하하하! 군향, 질투하는 것이냐? 천하의 내로라하는 사내들을 돌 보듯 하던 그대가 말인가?" 남궁청운은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웃어보는 그는 천하를 손에 쥔 듯 마냥 즐거웠다. "나으리, 신첩도 사내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고 있사옵니다. 다만 아직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할만한 영웅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지요. 지난날 야화림에서 나으리를 뵙던 날 신첩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나으리야말로 신첩의 몸과 마음을 다 바칠 수 있는 영웅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옵니다." "그래, 그날 그대가 그런 말을 했었지." "그날 이후 신첩은 정절을 지키며 나으리의 승천(昇天)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던 중, 나으리께서 무림군왕성주로 등극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이렇듯 단숨에 달려온 것이옵니다." 남궁청운은 솟구치는 희열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네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군향, 그대는 정녕 사랑스러운 여인이다." "나으리, 신첩은 지금 너무 기뻐 제대로 말을 잇기조차 힘들 지경이옵니다. 나으리께서 원하신다면 신첩은 언제든 몸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사옵니다."


"오, 군향!" 남궁청운은 와락 예군향을 끌어안았다. "나으리......." 예군향은 뜨거운 호흡을 남궁청운의 목에 부었다. 순간 남궁청운은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더 이상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는 덥썩 그녀를 안아들고 내실로 향해 걸어갔다. 잠시 후. 푹신한 침상에 예군향을 던진 그는 서둘러 옷을 벗으며 말했다. "내 오늘 널 취하리라." 예군향은 눈을 가늘게 뜨며 달콤하게 말했다. "신첩도 오늘을 기다렸사옵니다." 남궁청운은 찢어발기듯 옷을 벗어던졌다. 그의 우람한 근육이 드러나자 예군향은 더욱 눈을 가늘게 했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색정이 흐르는 눈으로 사내의 우람한 나신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남궁청운은 그녀의 눈길에 더욱 짜릿한 감정을 느꼈다. 지금까지 많은 여인들을 상대해봤지만 예군향만큼 그의 욕정을 자극하는 여인은 없었다. 그는 거친 숨을 쉬며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때였다. "신첩이 스스로 벗겠나이다. 보아 주시겠습니까?" 남궁청운은 입이 벌어졌다. 그는 침상에 걸터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말고!" 예군향은 허리를 간들거리며 침상 앞에 섰다. 그녀는 일부러 애를 태우려는 듯 옷고름을 천천히 끌렀다. "어서... 뭣 하느냐?" "아이, 재촉하지 마시고......." 마침내 궁장 상의가 벌어졌다. 순간 남궁청운의 눈이 크게 떠졌다. 두 개의 수밀도 같은 젖가슴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풍만한 젖가슴이었다. "흐음!"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예군향은 치마를 벗었다. 드디어 그녀의 눈부신 나신이 드러났다. 두 개의 젖가슴은 터질 듯이 솟아 있었고, 그 위에 바짝 고개를 들고 있는 유실(乳實)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듯했다. 윤기나는 아랫배로 내려오던 남궁청운의 눈이 충혈되었다. 군살이라곤 한 점도 없는 그녀의 아랫배에 짙은 숲이 우거져 있었다. 그는 이처럼 짙은 숲을 지닌 여인을 본 적이 없었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짙은 숲속에 그를 위한 환희가, 천국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듯 벌떡 일어섰다. "이리... 이리 오너라." "아니되옵니다. 나으리, 먼저 절을 받으셔야 합니다." "절이라니......?" 남궁청운은 어리둥절했다. 예군향은 한 손으로는 젖가슴을, 한 손으로는 방초를 가리며 말했다. "나으리를 평생의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절차이옵니다." "오! 그대는 정녕 날 감격케 하는구나. 오냐, 기꺼이 받으마. 나 또한 군향, 그대를 평생 곁에 둘 것을 약조하겠노라." "그저 곁에 두기만 하시렵니까?" 한 손으로 가리기에는 지나치게 풍만한 젖가슴과 무성한 신비림이었다. 남궁청운은 머리가 터질 듯했다. "아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대와 사랑을 나눌 것이고... 내 모든 것을 그대와 함께 공유할 것이다.


이제 됐느냐?" "넘치옵니다. 나으리, 신첩의 절을 받으시옵소서." 예군향은 몸에서 손을 떼어 절을 했다. 남궁청운은 꿀꺽 침을 삼켜야 했다. 예군향은 나비가 꽃에 내려앉듯 고운 자태로 큰절을 올렸다. 급격한 굴곡이 이루어낸 현란한 여체가 바닥에 엎드렸다. "군향! 이제 되었다. 어서......." 그러나 이제 시작이었다. "나으리, 편히 누우세요. 신첩이 모시겠사옵니다." 예군향은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그녀는 손으로 남궁청운의 가슴을 슬쩍 밀었다. 남궁청운은 못이긴 듯 뒤로 넘어졌다. 그는 눈을 크게 뜬 채 예군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침상에 올라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아래서 위로 보이는 여체는 더욱 풍요로워보였다. 그는 온몸의 혈관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나으리께서는 가만히... 계시면 되옵니다." 예군향이 그의 몸 위에 살며시 앉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둔부가 허벅지에 닿는 순간 남궁청운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 너무나 큰 자극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놀랍게도 그녀는 부드러운 입술과 혀를 동원하여 그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오오......." 남궁청운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눈을 뜨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나신 위에서 예군향의 입김이 오르내렸다. 그녀의 혀와 입김이 스칠 때마다 그는 쉴새없이 가슴을 들먹이며 거친 호흡을 내쉬었다. 기다란 흑발이 그의 전신을 비질하듯 쓸고 있었다. 그것이 주는 자극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헉!" 어느 순간 남궁청운은 전신을 경직시켰다. 그녀가 자신의 민감한 곳을 점령해버린 것이다. 그 상태로 그녀의 집요한 공략이 시작되었다. 남궁청운은 이빨을 악물어야 했다.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쾌락의 정점에서 그는 허우적거렸다. 남궁청운의 고개가 뒤로 꺾이며 침상에 박혔다. 부릅뜬 눈은 촛점을 잃고 흔들렸다. 화려한 폭발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주위의 모든 경물도 어지럽게 돌았다. 그는 구름을 타고 함께 허공으로 둥둥 뜨는 듯했다. 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지독한 환락 속에 그의 영육이 떨어진 것이다. 그는 혼미한 가운데 눈을 떴다. 예군향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상체를 흔들고 있었다. 기다란 흑발이 사방으로 춤추고 있었다. 예군향은 말을 탔다. 건장한 천리마였다. 그녀는 대지를 힘차게 밟으며 달리고 있었다. 이따금 천리마는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때마다 대지가 꿈틀거렸다. 그녀는 더욱 힘차게 내달렸다. 천리마의 전신에서 비오듯이 땀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땀방울에 대지가 흠뻑 젖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 그만......." 남궁청운은 눈자위가 하얗게 돌아가며 애원의 말을 토했다. ③ 관운빈은 항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마상에서 건량(乾糧)을 씹으며 길을 재촉했다. 얼마나 갔을까? 황혼에 물든 양자강 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삘리리리....... 문득 어디선가 애조에 찬 피리소리가 들렸다. "......."


관운빈은 감상적인 마음에 말에서 내려 고삐를 쥐고는 나루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루터에는 볼품없이 낡은 나룻배 한 척이 쓸쓸하게 물결에 출렁이고 있었다. 그곳에서 누군가 등을 진 채 앉아 피리를 불고 있었다. '황혼의 나루터에서 피리를 불다니... 운치 있는 사공이로군.' 피리의 애잔한 음률이 주변의 고적한 분위기와 동화되어 그로 하여금 감상에 젖게 만들었다. 촌각을 아끼며 달려온 관운빈이었으나 그는 피리소리의 감흥에 빠져 그 자리에서 한동안 귀를 기울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가? "그만 타시게나." 사공의 음성이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사공이 배에 탄 채 노를 잡고 있었다. 관운빈은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말과 함께 나룻배에 올랐다. 나룻배는 곧 유유히 강상으로 움직였다. 관운빈은 사공을 살펴보았다. 낡은 배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사공은 처음부터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당연히 그가 나룻배를 탈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그랬었군. 날 기다렸어.' 기이한 일이었다. 사공이 자신을 기다렸다는 것을 직감했으나 그의 마음은 더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그런 감정을 느꼈다면 원인은 간단하다. '이 사공은... 적은 아니다.' 방갓 밑으로 검은 수염을 내비치고 있는 사공이었다. 그가 막 뭐라 물으려는데 사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노부는 살막의 백야무정객(白夜無情客)이라 하네. 살막의 주인이지. 자네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으니 일부러 소개하지 않아도 되네." "......!" 경악! 이보다 놀라운 일이 또 있을까? 관운빈은 하마터면 벌떡 일어설 뻔했다. 그는 자신의 방심에 대해 놀라웠다. '이자가 살막주라니... 나는 어째서 아무런 살기도 느끼지 못했을까? 설마하니 내 직관이 무너져버렸단 말인가?'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다. '무엇이 내 감각을 무력화 시켰을까? 왜 감지하지 못했을까? 이자는 살막의 막주다. 필시 내 목을 노리고 왔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조금도 적의를 느끼지 못했단 말인가?' 그는 의혹에 찬 눈으로 백야무정객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암갈색의 황혼이 양자강을 물들였고, 백야무정객의 쓸쓸한 어깨너머로는 검은 물살이 출렁였다. 밤바람이 불고 있었다. 백야무정객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일 년에 한 번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중추절도 머지 않았군." '그런가? 이 사람에게 중추절은 그런 의미였나?' 강변에서 듣던 피리의 애잔한 가락을 되새기던 관운빈은 이내 훈훈한 그림을 떠올렸다. 온갖 해괴한 짓거리를 벌이며 낄낄대던 괴팍한 노인, 그러나 그에게는 부모 이상의 사랑을 주었던 육노야의 모습이었다. 또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극한상황에서도 자신을 믿고 의지했던 백사호(百四號)였다. 중추절이라면 헤어졌던 그리운 이들과의 재회의 약속일이다. 중추절이 오기만을 그 역시 손가락 꼽으며 기다리지 않았던가?


그는 또 은근히 사사영을 만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와 그렇게 불시에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나란히 손잡고 옛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부풀어있을 것이다. 관운빈은 비로소 입술을 열었다. "그렇군요, 불과 한 달밖에 남지 않았군요.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던 중추절이." "자네도 기다렸던 모양이군." 방갓 아래로 자신을 주시하는 눈빛을 보는 순간 관운빈은 기이함을 느꼈다. 그의 눈빛이 의외로 청명했던 것이다. 갑자기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제 그만 손을 쓰시지요." "아, 그렇군. 날이 어두워졌구만." 백야무정객은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관운빈은 알고 있었다. 백야무정객이라는 별호의 의미를. 그는 반드시 밤이 되어야 살수를 쓰는 특이한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 "자네는 내가 왜 밤에만 살인하는지 아는가?" 관운빈은 침묵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네. 첫째는 죽는 자의 고통스런 얼굴과 피를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 두번째는 살막의 막주인 내가 살인을 하면서 청승맞게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지." 관운빈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우습지도 않은 농담이오." "그럴 테지. 믿기지 않을 게야." 백야무정객은 유유히 젓던 노를 놓았다. 관운빈은 긴장했다. 그러나 백야무정객은 뱃머리에 걸터앉았다. "너무 긴장하지 말게. 밤은 기니 서두를 것 없네." 관운빈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의 행동이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는 느낌이었다. "한 가지 묻겠네. 자네의 어릴 적 글선생은 혹 용씨(龍氏) 성을 쓰지 않았나?" 관운빈은 깜짝 놀랐다. "아니, 그걸 어찌 아시오?" 백야무정객은 희미하게 웃었다. "자네의 생명을 필요로 하는 친구에게서 들었네. 그는 또 놀라운 말을 하더군. 자네가 바로 태화천의 후손이라고 말일세. 난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 하지만 지금은 믿게 되었네. 자네의 얼굴이 그 사실을 증명해 주었네. 난 자네 부친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거든." 관운빈의 안색이 차가워졌다. "그러고 보면 자네와 난 무관한 사이가 아니네. 자네의 글선생 용화문(龍和文)과 난 죽마고우니 말일세." 관운빈은 심금이 떨리는 걸 느꼈다. "그럼... 귀하 역시 한림삼수(翰林三秀)의 일원이겠구려?" "허허! 그 친구가 그런 얘기도 하던가? 아마도 자네를 무척이나 아꼈었나 보군." 방갓 속의 눈빛이 한결 더 부드러워졌다. "그래.... 한때 그렇게 불렸던 적이 있었지." 관운빈은 가슴에 은은한 통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의 뇌리에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에게는 부친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해주었던 사람이었다. 태화천의 군사(軍師)이자 그의 스승인 용선생의 모습이었다. 그에게서 슬픈 사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한림삼수(翰林三秀). 유림(儒林)의 최고 석학(碩學)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바로 한림원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출중한 삼 인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한림삼수였다. 장차 정국을 이끌어갈 재목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던 그들이 한날 한시에 청운의 꿈을 접어야만 했던 비운의 사건이 있었다. 한림삼수의 비범함을 질투했던 권력자들에 의해 그들은 눈물을 뿌리며 한림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질투에 눈이 먼 권력자들은 한림원의 석학들이 장차 명조를 이끌어갈 기둥이라는 점을 내세워 한림원에서 수학할 수 있는 자격을 국법으로 제한해 버렸던 것이다. 그 새로운 국법은 명백히 한림삼수를 겨냥한 것이었다. 한림삼수 중 한 명은 팔촌 당숙(堂叔)이 열흘간 옥살이를 한 적이 있었으며, 또 한 명은 적자(嫡子)가 아닌 서자(庶子) 출신이었다. 마지막 한 명은 부친의 낮은 신분이 문제가 되었다. 결국 전도가 양양했던 세 청년은 통한의 눈물을 뿌리며 한림원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그후 이십 년의 세월이 흘러 그들 중 한 명인 용화문은 관운빈의 글선생이 되었고, 또 한 명은 살막의 막주가 되었다. "또 한 분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관운빈은 울적한 심정에 빠진 채 물었다. "자네의 수급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네." "아!" 관운빈은 탄성을 발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를 통해 한림삼수가 간접적으로나마 재회한 셈이군. 모양새가 우습게 되기는 했지만." "그렇군요. 감회가 깊겠습니다." 백야무정객의 고개가 가볍게 숙여졌다. 그는 명상에 잠긴 듯했다. 관운빈은 고개를 들어 야공에 무심히 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한쪽이 심하게 깎여나간 초생달이었다. 관운빈은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랬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결전이라면 가능한 빨리 해치우고 싶었다. 그 다음의 결과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꼭 이래야 한단 말인가? 함께 양자강의 야경을 즐기며 용선생의 지난 날을 안주 삼아 술 잔을 나눌 수는 없단 말인가?' "술 한 잔 하겠나?" 불가능한 상상에 젖어있던 그에게 던져진 한마디는 귀를 의심하게 했다. "방금 뭐라 하셨소이까?" "술 한 잔 하겠냐고 물었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관운빈의 입이 슬며시 벌어졌다.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좋은 말씀입니다. 얼마나 있습니까?" "이 밤을 새울 만큼은 될 것이네." 백야무정객의 음성은 밝았다. "하하! 그렇습니까?" 관운빈은 오랜만에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밤을 새워 마시겠다는 백야무정객의 말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좋은 밤일세. 젊은 친구." 백야무정객은 뱃전 한모퉁이에서 보따리를 끌렀다. 그 속에는 제법 커다란 술항아리가 들어있었다. "하하! 소생이 먼저 한 잔 올리겠습니다." "그러게나." 백야무정객도 제법 밝아진 음성으로 말하며 잔을 내밀었다. 관운빈은 지체없이 술을 따랐다. 호박빛의 잔에 술이 가득 채워지자 잔 속에 달이 비쳤다. "하하! 잔 속에 달이 떴군요. 정말 낭만적인 밤입니다."


"허허! 그렇군. 자네도 한 잔 하게." 이번에는 백야무정객이 그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잔을 들어올린 후 단숨에 첫잔을 비워냈다. 이어 두 사람은 권커니작커니 하면서 쉬지 않고 술을 마셨다. 술은 제법 독해서 몇 잔 마시지 않았는데도 두 사람의 얼굴에는 취기가 감돌았다. 어느덧 동녘이 트면서 어둠이 밀려가고 있었다. 양자강에는 자욱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문득 히히힝! 하는 말울음소리가 울렸다. 나룻배에 타고 있던 말이 고개를 흔들며 울음소리를 낸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붉게 화기가 올라 있었다. 이제 술항아리도 동이 나버렸다. 자욱한 물안개로 인해 강안(江岸)이 희미하게 보였다. "곧 동이 트겠군요." 관운빈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유난히 짧은 밤이었군." 관운빈은 가슴 속에 찬바람이 도는 것을 느끼며 그를 쏘아보았다.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해가 뜨지 않았으니까요." 그의 말은 살수를 뻗을 시간이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백야무정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만 두겠네." "예? 어째서입니까?" "취해서 그러네." 관운빈은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용선생 때문입니까? 저에게 살수를 못 쓴 것이?" "그런게 아닐세." "그럼......?" "자넬 벨 확신이 없었네. 또한 베고 싶지도 않았네." "어째서 그런 생각을......?" "이십 년만에 나타난 죽마고우로부터 청부를 받는 날 이런 결과를 올 것을 어렴풋이 예감했었네." 관운빈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청부를 거절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럴 수도 있었지.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백야무정객은 몸을 일으켜 노를 잡았다. 밤새 자유로이 노닐던 나룻배는 곧 직선궤도를 그리며 움직였다. "그 친구는 나와 달리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네. 보기 좋더군.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고 지쳐 매일 밤을 취해 떨어졌던 나와는 많이 틀려 보였지. 그 친구는 말했네. 썩어빠진 세상을 뒤엎고 천하만인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지상낙원(地上樂園)을 세워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네를 죽여야 한다고 했네. 나는 그 대상이 태화천의 후손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의 청부를 받아들이기로 했네." 백야무정객의 음성은 낮았다. 관운빈은 술항아리를 통째로 기울이고 있었다. "천하를 좀먹는 더러운 권력자들을 베어버리기 위해 붓 대신 칼을 잡은 후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피바람 속에서 살았네. 하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더군. 아니, 더욱 교활하고 탐욕적인 인간들이 세상을 여전히 어지럽히고 있었네. 내 마음과 달리 세상은 점점 더 혼탁해졌고 썩어갔지. 백성들은 놈들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고 그 인간들의 추잡한 욕망에 희생되는 악순환만을 반복해 왔네. 결국 난 아무것도 해낸 것이 없었지. 난 너무나도 무력했던 것이네." 술항아리 속의 마지막 술 한 방울도 떨어졌다.


"그 친구가 말한 지상낙원은 천외천(天外天)이란 단체였네. 그가 말한 천외천의 이상(理想)은 다분히 환상적이더군. 천외천에서는 어떤 인간들이든 평등하다더군. 재물이 있거나 없거나, 출신이 비참하거나 화려하거나, 팔다리가 달려 있거나 없거나 모두가 똑같은 위치이며 공정한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하더군. 또한 작금의 천하를 오염시키고 있는 더러운 작자들은 모두가 혹독한 죄값을 치르게 될 거라더군. 내겐 꽤 괜찮게 들렸어......." 관운빈은 술항아리를 기울여보고 있었다. 딱 한 모금만 더 마셨으면 하는 기분이었다. "한림삼수 중에서도 가장 걸출했던 그 친구는 그가 아니었네. 다소 과격해진 것도 같았고 말수도 많아진 듯했어. 천외천을 세우고 말겠다는 신념이 그를 변모시킨 것 같았네. 어쨌든 나는 그의 청부를 받아들였지. 마지막 청부라고 생각하며......." 관운빈은 술항아리를 내려놓고 물었다. "그런데 왜 포기한다는 겁니까?" "자네와 대화하던 중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르더군. 과연 천하만인이 동등하게 산다는 것이 가능할까? 천외천을 통치해 나갈 인물이 지금의 권세가와 확실히 다를 정도로 성인군자일 것인가? 설혹 그렇다해도 그 숭고한 뜻이 세세만년 변질되지 않고 이어내려갈 수 있을까? 또한 천외천을 세우겠다는 숭고한 의지를 지녔다면 살인청부를 한다는 것은 우습지 않은가? 더구나 왜 그 대상이 태화천의 후예여야 한단 말인가? 그런 의문들이 꼬리를 물었네." 관운빈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돌아서는 친구의 뒷모습이 왠지 쓸쓸하게 느껴지면서부터 가졌던 의문일세. 다만 해답을 찾지 못하고 이곳까지 왔을 뿐이지. 그런데 자네를 만나면서 그 의문이 더욱 증폭되었네. 결국 난 한 가지 해답을 찾아냈다네. 지금으로써는 그것이 최선의 답인지 확신할 수는 없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평안해지더군." 나룻배는 강기슭에 닿고 있었다. 백야무정객은 닻을 던지며 말했다. "자네 성은 당연히 관씨(關氏)일 테지. 잘 가게, 관소협." "이대로 절 보내는 겁니까?" "그럼 내가 할 일이 그것밖에 더 있겠는가? 허허허! 어서 가게 관소협." 관운빈은 말을 끌고 강기슭으로 올라갔다. 그는 몇 걸음 걷다가 돌아섰다. "천외천에서 노인장의 행동을 용납할까요? 그런 원대한 야망을 품은 단체라면 그 힘 또한 무시할 수 없을 텐데 말입니다." 관운빈의 걱정은 진심어린 것이었다. 백야무정객은 다시 닻을 끌어올렸다. 그는 방갓을 고쳐쓰며 말했다. "며칠 전 그 친구가 사람을 보냈네. 자신의 주군(主君)이 날 원한다더군." 관운빈은 흠칫했다. "천외천에 가입하라는 겁니까?" "그런 것 같았네." "어찌 하셨습니까?" 백야무정객은 노를 들어 강바닥에 박았다. "거절했네." 관운빈은 눈썹을 모았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소생이 도움이 된다면......." 백야무정객은 그의 말을 웃음으로 끊었다. "허허허! 살막을 너무 우습게 보지 말게. 자네의 호의는 고맙게 받아들이겠네. 우린 서로의 갈 길이 다르고 타고 난 운명 또한 다르다네. 이제 인연은 이것으로 접어두도록 하세. 그럼 어서 가 보게. 시간이 많이 지체됐네." 관운빈은 서운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시 뵐 수 있을까요?" "글쎄......." 백야무정객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노를 밀었다. 나룻배가 소리없이 강상으로 미끄러져 갔다. 백야무정객은 방갓을 치켜올리며 그를 향해 웃었다. 처음으로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의 얼굴은 청수했다. 오순이 약간 넘어 보이는 얼굴에 인상적인 용모였다. "선배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저만치 멀어져 가는 나룻배를 향해 관운빈은 음성을 높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룻배는 곧 물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 관운빈은 한참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자욱한 물안개만이 강을 덮고 있었다. 어젯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있었던 일들이 마치 한바탕 꿈처럼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문득 멀리서 한 가닥 음성이 전해져 왔다. 천리전성술(千里傳聲術)이었다. "천외천을 주의하도록 하게... 아무래도 그곳은... 지상낙원이 아니라... 천하를 더욱 더 도탄에 빠뜨릴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곳이네......." 관운빈은 그의 말을 가슴에 담아두었다. 잠시 후 그는 중얼거렸다. 백야무정객은 들을 수 없었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알겠소이다. 노인장. 지상낙원이 있다면 누군들 원하지 않겠소이까? 그들이 진실하다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오......." 관운빈은 몸을 돌려 언덕으로 올라갔다. 천리마가 그를 기다리다 지루한 듯 한가롭게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 다음 권에 계속 동사군도 (東沙群島) 제 3 권 표지 제목: 동사군도 제 3 권 (전 3 권) 지은이: 검궁인·백강 - 차례 제 22 장 출정(出征) 제 23 장 마군자(魔君子)의 눈물 제 24 장 전락(轉落) 제 25 장 뜻밖의 구원(救援) 제 26 장 만남 제 27 장 무엇이 선(善)이오? 제 28 장 떨어진 별 제 29 장 어둠 속에 핀 꽃 제 30 장 운귀고원(雲貴高原)으로 제 31 장 종말(終末)을 향하여 제 32 장 사랑과 야망(野望) 제 33 장 지상낙원(地上樂園) 동사군도(東沙群島) 제 22 장 출정(出征) ① 두두두두......! 무림군왕성의 성문이 활짝 열리며 수많은 인마(人馬)들이 달려나갔다. 성주 남궁청운을 필두로 이만여 명에 달하는 백도무림의 군웅들이 노도처럼 출정(出征)을 개시한 것이다. 그들의 최종 목표는 흑련사의 총단이 있는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이었다.


출정대는 삼대(三隊)로 나뉘어졌다. 전군(前軍)은 철기문의 문주 흑풍창왕(黑風槍王) 장호량(張虎亮)을 수장으로 흑석보와 군소 팔개방파 연합으로 결성되었으며 그 수는 칠천에 이르렀다. 중군(中軍)은 남궁청운이 직접 통솔하였는데 태자당의 영걸들과 무림군왕성의 벡호단, 철사단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금사신궁을 비롯한 오개방파가 포함된 일만여 명에 달하는 주력부대였다. 후군(後軍)은 황보세가와 철검장, 삼개방파가 포함된 삼천여 명 규모로 수적으로는 가장 작았다. 그들의 주임무는 흑련사와 정면대결을 벌이기보다는 다분히 지원부대의 성향을 띠고 있었다. 대대적인 출정대가 빠져나간 무림군왕성에는 금붕단주(金鵬團主) 묵검자(墨劍子) 사마일수(司馬一秀)만이 금붕단과 함께 남아 있었다. "이거 꼴이 말이 아니군요." 볼멘 소리의 주인공은 청수한 외모의 검존 철자성이었다. "노제, 그리 투덜대지 말게. 성주는 나름대로 우리들을 배려하여 후군에 편성한 듯 한데......." 신주수사 황보일학의 말에 철자성은 노기를 띠며 말했다. "형님, 천하가 비웃고 있습니다. 수백 년 무림정기를 수호해 온 황보세가와 철검장이 고작 식량마차나 끌고 있으니 누구인들 웃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남궁성주의 실종을 틈타 전격적으로 성주 자리를 차지한 새파란 녀석이 우리와는 협의도 없이 독단으로 만사를 처리하니 이거 부아가 치밀어 못 참겠습니다." 황보일학은 너털웃음쳤다. "허허! 그러지 말고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게. 흑련사가 어디 보통 세력인가? 성주가 이런 전략을 취한 것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걸세." "그 광오한 위인이 그런 깊은 심계가 있겠습니까?" "이 사람, 성주 곁에는 신산 소손방이 있지 않나. 아마도 그의 조언을 받았을 것이네. 우리를 후군에 편성한 데는 반���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걸세." 철자성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 듯 코웃음쳤다. "흥! 소손방이란 작자는 지략가라기보다는 모사꾼이 더 어울릴 겁니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덕분에 철자성의 안색은 다소 풀린 듯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길게 대열을 이루어 따라오고 있는 인마들을 바라보았다. 비록 삼천에 불과한 병력이지만 결코 적은 수효는 아니었다. 게다가 각종 물자를 가득 실은 마차만도 수백 대에 달해 대열의 꼬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투덜거렸다. "어쨌든 협의도 없이 멋대로 결정한 것은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황보일학은 너그러운 웃음을 흘렸다. "허허, 자네가 이해하게. 아직 경력이 일천한 젊은이 아닌가? 그래도 이런 난국에 그런 영웅이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형님, 영웅이란 말은 아무에게나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당대에는 영웅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환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만일 태화천이 건재하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흑련사는 고사하고 구천마교나 사사련 따위는 감히 머리도 내밀지 못했을 겁니다." "그야... 당연한 일이지." 황보일학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태화천주는 그의 의형(義兄)이다. 십일 년 전 돌연히 증발해 버린 의형을 떠올리자 그의 가슴은 찌르는 듯이 아파왔다. 그는 상념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길이 험해지고 있었다. 산길이 협소해지면서 양쪽으로 깎아지른 협곡(峽谷)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꽤 험한 곳이군요."


철자성은 사뭇 긴장한 표정으로 협곡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황보일학은 본연의 자세로 돌아왔다. "자네는 이곳이 초행인가 보군. 저곳은 마협관(魔峽關)이라 불릴 정도로 험준한 곳이네. 만일 우리를 노리는 적이 있다면 당연히 저곳에 매복을 펴놓았을 것이네." 철자성은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곧 말도 안된다는 듯이 반박했다. "원, 형님도. 중군과 전군이 모두 무사히 통과했는데 설마하니 우리를 노리는 놈이 있겠습니까?" 황보일학은 눈을 가늘게 하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각별히 주의하는 게 좋을 걸세."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중군이 협곡의 끝에서 진을 치고 우리를 기다리기로 했지 않습니까? 지나친 기우(杞憂)입니다. 형님." 그렇다. 남궁청운이 이끄는 중군은 그들이 마협관을 다 빠져나올 때까지 협곡 끝에서 대기하고 있겠노라는 전갈을 보내왔던 것이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라고 했네." 황보일학은 손을 번쩍 들었다. "부르셨습니까?" 황보세가의 수하 한 명이 달려왔다. "음, 너는 이십 명의 무사들과 먼저 들어가 보아라. 이상이 있으면 즉시 전서구(傳書鳩)를 날리도록." "옛! 가주님." 수하는 즉시 이십여 명의 선발대를 편성하더니 말을 달려 마협관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황보일학은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단 척후병을 보내 마협관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통과할 생각이었다. 한편, 이십여 기의 인마가 마협관으로 달려 들어오는 것을 노려보고 있는 두 명의 인물이 있었다. 그들은 마협관의 한 절봉 위에 몸을 숨긴 채 두 눈에 살기를 번쩍이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만금대인 호금수 부자였다. ② 관운빈은 남궁청운이 통솔하는 중군에 포함되어 있었다. 항주에서 돌아온 그는 황보수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림군왕성으로 돌아왔고, 남궁청운의 일방적인 명(?)에 따라 중군에 편성된 것이다. 황보수선은 그가 돌아온 것에 크게 감격해 했다. 뿐만 아니라 요즘 들어 자신에게 관심을 끊은 듯한 남궁청운의 태도에도 적이 안심이 되었다. 따라서 관운빈과 함께 중군에 편성된 것을 몹시 기뻐했다. 어쨌거나 관운빈과 함께라면 지옥이라도 함께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래 들어 그녀는 일생 중 가장 행복한 나날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흑련사와의 대회전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나 그녀는 조금도 걱정되지가 않았다. 반면 관운빈은 출정대에 속해 있으면서도 생각이 달랐다. 그는 군웅들과 함께 움직이고는 있었으나 흑련사와의 대회전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었다. 그는 백야무정객을 만난 이후 무림의 진짜 위기는 흑련사가 아니라 천외천(天外天)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천외천이야말로 장차 무림에 가공할 환란(患亂)을 일으킬 존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외천은 아직 그 존재조차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형식적으로 출정대에 가담하면서도 심중으로는 천외천의 정체에 대해 부심하고 있었다. 한편, 마협관을 통과한 중군은 행군속도에 박차를 가해 동관(潼關)까지 내쳐 달렸다. 연후 마협관과 이백 리나 떨어진 동관의 한 초원에서 행군이 멈춰졌다. 남궁청운은 그곳에 천막을 치고 야영(野營) 지시를 내렸다.


그곳에서 흑련사의 총단이 있는 서안까지는 하루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근접한 거리였다. 실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분명 신산 소손방은 전서구를 날려 황보일학이 이끄는 후군이 마협관을 통과할 때까지 협곡 끝에서 기다리고 있겠노라 했다. 그런데 약속을 어기고 마협관을 통과한 즉시 동관까지 달려와버린 것이다. 물론 그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중군의 지휘체계는 오직 남궁청운과 소손방이 독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둠이 깔리자 군웅들은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다. 천여 개가 넘는 천막들이 웅대한 진영(陣營)을 구축하고 있었으나, 머지않아 치를 대회전 때문인지 군웅들은 힘을 비축하기 위해 일찌감치 휴식에 들어간 것이다. 대부분의 천막에는 불이 꺼졌으며, 소수의 경비무사들만이 외곽을 지키고 있을 뿐, 사위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진영의 중앙. 유독 환히 불이 밝혀진 거대한 천막이 있었다. 그곳은 남궁청운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천막의 주위에는 일백 명의 위사들이 삼엄한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천막 안은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바닥에는 발등이 파묻힐 정도로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었으며, 천장에는 공명등이 밝혀져 있었다. "나으리, 사소한 일들에 너무 연연해 하시면 천하의 주인이 되실 수 없을 것이옵니다." 나긋한 여인의 속삭임이 울렸다. "알고 있소. 하지만 황보세가와 철검장은 무림의 유수한 명문인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남궁청운의 음성에는 곤혹스러움이 깔려 있었다. 지금 그는 양모(羊毛)로 된 커다란 침상에 누워 있었다. 방금 전 정사를 치른 듯 벌거벗은 몸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의 옆에는 역시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예군향이 비스듬히 누운 채 그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이, 부친까지 감금한 분이 왜 갑자기 나약한 말씀을 늘어놓는 거예요? 자고로 군자는 독해야 한다고 했어요." "아버님을 감금한 것은 잠시 행동을 제약한 것에 불과한 것이오. 이번 일과 어찌 비교할 수 있단 말이오?" 이게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남궁혁의 실종은 그가 꾸민 일이란 말인가? 가히 하늘도 놀랄 일이었다. 예군향은 몸을 일으켜 그의 상체에 엎드렸다. 터질 듯이 풍만한 젖가슴이 눌려 옆으로 비어져 나왔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놀렸다. "호호, 마음을 편히 하세요. 이번 결전이야말로 나으리의 장래를 결정할 중대한 일이에요. 잡념을 떨쳐버리고 눈을 붙여야 합니다. 신첩이 단잠을 주무실 수 있도록 도와드릴 테니......." 예군향은 붉은 혀를 날름대며 남궁청운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신첩은 사람 보는 눈만큼은 누구보다도 밝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으리의 그릇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신첩에 볼 때 소총관이야말로 비범한 위인이에요. 나으리께서 천하를 경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의 도움이 필요해요. 이번에 소총관이 세운 전략은 탁월한 거예요. 그러니 그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봐요." 예향군의 혀는 뱀처럼 날름거리며 남궁청운의 가슴을 간지르다가 아래로 내려갔다. 남궁청운은 짜릿한 쾌감을 느끼며 신음을 발했다. "으음.... 그대 말이 맞아.... 그래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소......." 예군향은 그의 배꼽 어림에서 고개를 들었다. "하면 왜 이리 약한 모습을 보이시죠? 혹 황보세가의 그 계집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어 그러는 게 아닌가요?" "으음, 그럴 리가......."


예군향은 손으로 부드럽게 그의 허벅지를 어루만지며 달콤하게 말했다. "나으리, 신첩에게는 솔직히 말씀하셔요. 나으리는 장차 천하의 주인이 되실 분입니다.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 했거늘 신첩이 어찌 질투 따위를 하겠습니까? 나으리께서 황보가의 계집을 마음에 둔다면 그 점 신첩이 알아서 처리하겠나이다. 그러니 황보세가에 대한 처리에 너무 마음 쓰실 것 없사옵니다." 남궁청운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예군향의 애무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황보세가와 철검장을 치는 일은 흑련사가 전면에 나서니 설사 일이 잘못된다 해도 나으리에게 누가 될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 걱정 마시고 오늘밤은 푹 쉬시는 게 좋을 거예요." "으음." 남궁청운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말을 마친 예군향이 그의 민감한 부분을 강하게 자극했던 것이다. 그는 참지 못하고 자세를 바꾸며 그녀를 덮쳐 눌렀다. "그만 하시오,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아, 운랑......." 예군향은 사지로 남궁청운의 전신을 뱀처럼 휘감으며 뜨거운 숨결을 토해냈다. 천막 안은 금세 뜨겁게 달아올랐다. 또 다른 천막 안. "해낼 수 있겠느냐?" "흐흐! 이를 말씀입니까? 제 평생 염원이 달성되려는 순간인데." "좋다, 단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맡겨 주십시오. 십 년 넘게 오늘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 계집은 절대 이 종리무의 손을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종리무의 눈에서 교활한 빛이 흘러나왔다. 천막 안에는 신산 소손방과 그가 마주앉아 있었다. "자만하지 마라. 이번 일에는 군사는 물론 주군께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무림군왕성을 인수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일이다. 자칫 욕정에 눈이 멀었다가는 대사를 망치는 것은 물론 네 목숨도 보장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흐흐.... 심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계집의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치게 할 자신이 있으니까요." 소손방은 외눈으로 그를 쏘아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널 믿어보마. 하지만 서둘지 마라. 당분간은 남궁청운을 전면에 내세울 것이다. 그러니 여유를 가지고 그 계집을 완벽하게 정복해야 한다." "후후, 물론입니다. 심려 마시고 지켜봐주십시오. 머지않아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소손방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넌 운이 좋은 놈이다. 호사붕 부자 사건이 너에게 전화위복이 되었으니 말이다." 종리무의 얼굴에 음침한 빛이 어렸다. "일곱 살 때부터 줄곧 남궁가의 종살이를 해왔습니다. 하늘이 무심치 않다면 이제부터는 무엇인가 달라질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후후, 그렇군. 일곱 살부터였지. 그러고 보니 벌써 십오 년이나 지났구나. 네놈도 이제 성가(成家)할 때가 된 셈이군." "그동안 쌓인 한을 보상받을 때가 된 것입니다. 흐흐......." "그리도 좋으냐? 하지만 지금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네놈이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만큼 눈부신 성과를 올려야 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후후후, 지켜보겠다." 소손방과 종리무.


이 두 사람의 음모는 뿌리가 깊은 것이었다. 오래 전부터 무림군왕성에 독기에 찬 뿌리를 박아넣고 있던 그들이 이제 결실을 캐내려 하고 있었다. ③ 아수라장(阿修羅場). 피가 내를 이루고 시체가 산을 이룬 것은 불과 반 시진만의 일이었다. 무림군왕성의 후군으로 출병한 삼천여 군웅들은 마협관 허리 부분에서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다. 상대는 호금수, 호사붕 부자가 이끄는 흑련사의 마도세력이었다. 그들은 깎아지른 마협관의 절벽 위에서 바위를 굴리고 궁노(弓弩)를 쏘며 단숨에 군웅들의 절반 이상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다. 정신없이 굴러 떨어지는 집채만한 바위와 빗발치듯 날아오는 궁노에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어버린 황보일학과 철자성은 비통이 극에 달했다. 간신히 협곡의 허리부분을 빠져나왔을 때는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도 삼분지 일 이상이 중상을 입은 채 온몸을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엎친 데 덮쳤다고나 할까? 지옥을 빠져나온 그들을 다시 수천 명의 흑련사 마도들이 공격해 왔다. 마협관은 지옥을 방불케 했다. 군웅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물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패색이 짙어질 뿐이었다. 비극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헉!" 신주수사 황보일학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옆구리에 반월도(半月刀)가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이... 노옴!" 꽈르릉! "크아악!" 황보일학은 노룡(老龍)처럼 부르짖으며 장력으로 중년인을 날려버렸다. 그자는 머리가 으깨진 채 황천으로 직행했다. 그러나 황보일학의 옆구리에서는 창자가 쏟아져 나왔다. "뒈져라! 늙은이!" 다시 전후좌우에서 일제히 창과 구환도, 비륜이 날아왔다. 황보일학은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허허허허! 결국... 이렇게 가야 한단 말인가?" 윙! 비륜이 그의 목을 스치고 날아갔다. 황보일학의 목이 허공에 붕 떴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무림의 거목(巨木)이 쓰러지는 순간이었다. "크하하하! 철자성, 예전에 네놈이 군왕성 잠룡헌에서 본좌에게 지껄였던 말을 기억하느냐? 하긴 네놈은 까맣게 잊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어르신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네놈은 그때 노부를 돈벌레라고 했었다." 철자성은 전신이 피로 물든 채 수중의 철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는 이십여 명의 황금총 고수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그는 저만치 앞에서 약을 올리는 호금수를 노려보며 외쳤다. "그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네놈의 기억력만큼은 쓸만 하구나." "쯧쯧!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객기를 부리는구나. 붕아야, 저 늙은이의 뼈와 살을 분리시켜줄 때가 온 것 같지 않느냐?" 호사붕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종잇장처럼 얇은 옥류검(玉流劍)이 들려있었다. 그는 입가에 차디찬 조소를 머금은 채 한 발 한 발 다가왔다. 철자성은 피로 물든 철검을 번쩍 치켜들었다. "오너라, 더러운 놈! 노부 비록 늙었다만 너 같은 조무래���는 얼마든지 상대할 힘이 남아 있다!" 철자성이 누구인가?


검존(劍尊)이란 별호가 말하듯 당대제일의 검객으로 일생을 풍미했던 절정고수다. 그가 호통을 치자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황금총의 고수들은 기가 질린 듯 주춤거렸다. 호사붕은 코웃음쳤다. "흥! 대단하시오. 하지만 오늘 이후로 다시는 철장주의 웅혼한 기상을 볼 수 없을 테니 안타까운 일이오?" 호사붕은 유유히 그에게 다가갔다. 황금총의 인물들은 뒤로 물러나며 길을 터주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이 장여의 거리를 두고 대치했다. "어디 상처 입은 맹호의 최후 발악이 어떨지 감상해 볼까?" 호사붕은 교활한 눈으로 철자성의 아래위를 살펴보며 이죽거렸다. 기실 그는 모험을 즐기는 위인이 아니었다. 이미 철자성이 전신에 수십 군데의 자상(刺傷)을 입어 중심조차 제대로 잡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나선 것이다. 철자성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일갈했다. "오너라! 더러운 황금충에게 진정한 무도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마!" "흐흐흐.... 큰 소리는 여전하다만 과연 말만큼 실속이 있는지 모르겠군." 호사붕은 최후의 상황에 직면해서도 꺾이지 않는 철자성의 당당한 기개에 마음 한구석에서 찜찜한 느낌이 들긴 했으나 보검의 위력을 믿고 단전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전세를 살피던 호금수의 눈이 크게 열렸다. "저건 또 뭐냐?" 마협관의 후방으로부터 황진(黃塵)이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것이 그의 눈에 보인 것이다. 대충 잡아도 수천이 넘어 보이는 인마가 달려오고 있었다. 호금수의 곁에 있던 황금총의 총주(總主)인 구지신마(九指神魔) 금사후(金獅厚)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글쎄올시다. 무림군왕성의 주력부대는 최소한 이백 리 밖에 있을 텐데......." 구지신마 금사후는 흑도(黑道)의 거물이긴 했으나 호금수의 황금에 몸을 판 인물이었다. 그는 본래 소림사(少林寺) 출신의 화상이었으나 이십 년 전 파계한 후 흑도에 몸을 담아왔다. 소림에서 탄지신통(彈指神通)을 익혀 주무기로 삼는 그는 무공은 뛰어났으나 지력(智力)이 다소 부족한 위인이었다. "이런... 당장 달려가 알아보지 못하고 무슨 헛소릴 하는 거냐?" "알겠소이다. 대인." 금사후는 급히 말에 뛰어오르더니 수하들과 함께 달려갔다. 호금수는 즉시 호사붕에게 외쳤다. "붕아야! 서둘러라. 웬 놈들이 몰려오고 있다!" 호사붕은 흠칫하여 뒤를 돌아보다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제길! 저건 또 웬 놈들인가?" 그는 내공을 잔뜩 끌어올렸다. 웅! 하는 소리와 함께 옥류검에서 눈부신 광채가 발산되었다. 천고의 신병(神兵)인 옥류검에서는 석 자 가량의 검기가 폭사되며 주위를 싸늘하게 얼어붙게 했다. "뒈져라! 늙은이!" 그는 검과 몸이 하나가 되어 쏘아나갔다. 옥류검에서 뻗어나온 검기는 거암을 양단할 듯 가공할 기세였다. "하룻강아지 같은 놈!" 비록 전신에 수없는 상처를 입긴 했으나 검존의 자부심은 청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는 침음성을 내며 철검을 비스듬히 휘둘렀다. 츠츠츳!


철검에서 칙칙한 예기(銳氣)가 뿜어져 나왔다. 일견하기에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 않는 기세였다. 그러나 당사자인 호사붕은 소스라치게 놀라야 했다. 그는 옥류검의 위력을 믿고 철검을 반 동강이로 만들 요량으로 검을 날리는 기세에 더욱 힘을 가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이지 방향이 엉뚱하게 빗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의 검은 목표물에서 좌측으로 비껴나가고 말았다. 마치 강력한 자력(磁力)이 작용한 것 같았다. "헉!" 호사붕의 안색이 허옇게 변했다. 입김만 세게 불어도 쓰러지리라 생각했던 철자성의 검식은 불가사의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시커먼 철검이 자신의 정수리로 떨어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보아야 했다. 비로소 상대가 검존으로 칭송받는 까닭을 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그는 철검이 정수리에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따― 앙! 고막을 치는 금속음과 함께 세 개의 인영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갈라졌다. 철자성과 호사붕, 그리고 호금수였다. 호금수는 아들이 철검 아래 두 쪽이 나려는 상황을 보고 다급히 전권에 뛰어든 것이었다. 간일발의 차이로 호사붕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철자성의 혼신의 힘을 다한 진력에 그만 내부가 진탕되어 울컥 피를 토하고 말았다. 방금 전의 일검(一劍) 속에는 검존 철자성의 필생의 공력이 담겨 있었다. 그는 오늘의 일전이 필경 생의 마감으로 이어질 것을 예감하고 체내의 잠력을 최대한 쏟아내 호사붕을 죽이려 했던 것이다. 엉뚱하게도 대신 그의 검을 막은 호금수는 그만 엄중한 내상을 입은 채 뒤로 칠팔 보나 밀려나갔다가 피를 토하고 거꾸러지고 말았다. 반면 철자성은 철검을 바닥에 꽂아 간신히 몸을 지탱한 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이제 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누군가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져 내릴 정도로 체력이 바닥나 있었다. "뭣들 하느냐? 저 놈을 죽여라!" 호금수는 간신히 목숨을 건진 후 옥류검을 흔들며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황금총의 수하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철자성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방금 전 그의 괴력(怪力)을 보았으므로 내심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비록 검에 의지한 채 위태롭게 서 있는 철자성이었으나 언제 또 무시무시한 살수를 쓸지 불안했던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퇴각! 모두... 퇴각하라!" 마협곡의 후방으로 달려갔던 황금총주 금사후가 다급히 달려오며 외쳤다. "뭣이? 그게 무슨 소리냐?" 수하들에 의해 간신히 부축된 호금수는 놀라 외쳐 물었다. "대인! 녹림의 대부대가 몰려오고 있소이다! 자그마치 오천이 넘습니다!" "뭐... 뭣? 녹림?" 호금수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생각지도 않았던 변화였다.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벌써 지축이 울리는 말발굽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온 것이다. "빌어먹을! 퇴각! 모두 퇴각하라!" 호금수는 두 손을 저으며 명을 내렸다. 그러나 황금총과 흑련사의 무리들은 앞을 다투어 격전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헉!" 그들이 빠져나간 직후, 철자성은 허물어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현깃증을 느끼며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④ 예상은 했으나 흑련사의 힘은 가공했다. 철기문의 기마대를 선봉으로 한 무림군왕성의 군웅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과연 사마의 뿌리가 질기긴 질기구나." 서안 북쪽의 구릉지대에 위치한 흑련사의 총단은 그 규모가 놀라웠다. 무림군왕성은 그들의 성보(城堡)를 대를 나누어 일제히 공격했다. 그러나 흑련사의 완강한 저지에 막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전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신산 소손방은 중얼거리고 있었다. "놈들의 힘이 예상외로 강한데요." 그의 곁에서 종리무도 다소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소손방은 곤혹스러웠다. 이번 대회전으로 흑련사를 필히 궤멸시켜야 한다는 군사의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흑련사의 저항은 완강하기만 했다. 백만 평의 광활한 초지와 능선을 따라 축조(築造)되어 있는 흑련사의 성보를 사방에서 동시에 공략했지만 군웅들은 오직 한곳만 제외하고는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었다. 우세를 점하고 있는 곳은 흑련사의 북문 쪽으로 쳐들어간 대오로, 공격에 가담한 것은 관운빈과 당세곤을 비롯한 태자당의 영걸들과 군소 삼개방파의 군웅들이었다. 그들은 북문을 부수고 내성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철기문을 앞세워 남쪽 정문으로 공격해 간 남궁청운의 주력부대, 즉 무림군왕성의 백호단, 철사단을 비롯한 삼개방파의 연합세력과 서문을 맡은 흑석보와 사개방파의 군웅들, 동문을 맡은 금사신궁 등의 사개방파는 흑련사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진퇴를 거듭하며 도리어 패색마저 드러내고 있었다. "으음, 놈들은 자라목처럼 숨죽이고 있다 우리가 쳐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있었군. 독안금붕이 죽은 후 사기가 저하됐을 거라고 판단한 우리들이 얕보고 덤비기를 기다렸던 거야. 그것도 모르고 황보세가와 철검장을 놈들에게 진상한 꼴이 되었으니......." 소손방의 한탄이었다. "어떻게 하지요? 이러다 패하기라도 하면 무슨 망신입니까? 그 전에 일단 뒤로 물러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종리무의 말에 소손방은 고개를 저었다. "늦었어, 발을 빼기엔." "그럼 이대로 패배를 맛봐야 한단 말입니까? 그간 무림군왕성에 기울인 세월과 땀을 모두 허사로 만든단 말입니까? 군사와 주군의 엄중한 문책은 어떻게 하고......?" 종리무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별 도리 없지. 천운을 바라는 수밖에." "천운이라니요?" 소손방은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북쪽을 봐라. 괴수신의란 자의 활약으로 이미 북문을 열고 내성으로 진입하고 있다. 만일 그자가 흑련사의 괴수를 꺾어만 준다면 상황이 반전될지도 모른다." 종리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어쩌다 이 지경이 됐지요? 이게 다 군사의 고집 때문이 아닙니까? 일찍이 폐관을 마친 본천의 팔대봉공(八大奉公)만 나섰어도 흑련사 쯤은 단숨에 평정했을 것이 아닙니까?" "미련한 놈! 또 그 소리냐? 네깐 놈이 어찌 군사의 바다보다 깊은 책략을 헤아릴 수 있단 말이냐?" 소손방의 힐책에 종리무는 돌연 이를 악물며 말했다. "어쨌든 흑련사의 괴수만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저도 가보겠습니다."


소손방은 고개를 저었다. "아서라, 만용을 부릴 때가 아니다. 공을 세울 기회는 많으니 경거망동하지 마라." "그럼 남궁청운이나 호위할까요?" "그럴 필요 없다. 놈은 곤경에 처하게 되면 패왕수라공으로 자신의 목숨을 충분히 방어할 수가 있다. 마공을 시전하면 할수록 놈은 마성에 더욱 쉽게 빠져들테니 내버려두는 게 낫다. 그러니 네 계집에게나 가보아라. 절대 그 계집이 목숨을 잃는 불상사가 나서는 안된다." 종리무의 음침한 얼굴에 괴소가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그럼." 휙! 종리무는 즉각 신형을 날려 흑련사의 성보를 향해 달려갔다. "군사가 염려했던 대로 과연 무림은 녹녹한 곳이 아니야. 도리어 황궁을 상대하는 것보다 십 배는 지난한 일이로군. 처음부터 너무 가볍게 생각했어." 소손방은 몇 번이고 혀를 차며 자신의 경솔을 탓했다. 관운빈은 한시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얼마전 마관협에서 후군이 습격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병력의 절반 이상이 손실되고, 무엇보다도 신주수사 황보일학이 숨을 거두었다는 전서구를 받았던 것이다. 황보수선은 부친의 사망 소식에 까무러쳤었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자신의 몸을 돌볼 생각도 않고 흑련사의 무리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부친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악에 바친 것이었다. 상황이 이 지경이니 관운빈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무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부친이 기습을 받아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 놓였다는 전갈을 받은 후 노기에 찬 검을 마구 휘두르며 적진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태자당의 영걸들은 황보수선과 철무영의 목숨을 내건 분전으로 인해 고무되었다. 결국 철벽과 같던 흑련사의 방어벽은 무너졌고, 그들은 북문을 뛰어넘어 내성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황보수선과 철무영은 내성에 들어서자마자 한 인물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이 혈안이 되어 찾는 인물은 바로 구천마교의 교주이자 흑련사의 수괴인 천리신마(千里神魔) 혁세기(赫世紀)였다. 혁세기의 위치는 쉽게 파악되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각자 흩어져 혁세기를 찾아 나섰다. 관운빈은 어쩔 수 없이 황보수선의 뒤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황보소저, 잠깐만 기다리시오." 그는 앞을 가로막는 마도인들을 용명검으로 가차없이 베어넘기며 소리쳤다. 황보수선은 한 전각의 모퉁이를 돌아서다 그의 외침을 듣고 멈칫했다. 비록 비통한 나머지 잠시 이성을 잃긴 했으나 정인의 다급한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든 것이었다. 관운빈은 두 명의 마도인을 베어버린 후 신형을 날려 그녀의 곁에 떨어져내렸다. "황보소저, 마음을 가라앉히시오. 내 반드시 빙장어른의 원한을 갚겠소. 그러니 혼자 행동하지 마시오. 알겠소?" 그가 힐난 반, 위로 반의 말을 건네자 황보수선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아! 빙장어른이라니... 왜 이제야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그녀는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꼭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날 따라오시오, 내가 놈을 찾아볼 테니." 관운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흑련사의 인물들이 포위망을 좁혀오다 그의 번갯불 같은 안광을 마주하자 움찔하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 그의 가공할 공격에 십여 명이 추풍낙엽처럼 날아가는 것을 본 것이었다. 휙!


관운빈은 신형을 날렸다. 그는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듯 한 중년인의 뒷덜미를 움켜쥐더니 번개같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크으......." 장한은 혈도를 잡히자 전신을 축 늘어뜨리며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한 번만 묻겠다. 혁세기는 어디 있느냐?" 중년인은 얼굴이 잿빛이 된 채 더듬거렸다. "나... 난 모른다." 우두둑! 소름이 오싹 끼치는 음향이 울렸다. 그것은 중년인의 척추뼈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으아아악!" 중년인의 눈알이 뒤집혔다. 온몸이 뒤틀리며 뼈마디가 분절되는 고통이 왔다. 관운빈은 추나요법을 응용하여 그의 척추뼈를 토막토막 분리시켜 버린 것이다. "끄으... 마... 말하겠소... 제발!" "어디 있느냐?" 백육호는 손을 다소 늦추었다. "나... 남쪽으로... 삼백 장 가면... 흑갈색 칠층누각이 보일 거요......." "이름이 뭐냐?" "흑루(黑樓)......." 관운빈은 중년인의 뒷통수를 때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중년인의 눈알이 튀어나왔다. 비록 목숨을 잃지는 않아도 실명(失明)할 것이 분명했다. "갑시다." 관운빈은 황보수선의 손을 잡고 신형을 날렸다.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이십여 명의 마도인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길을 터주었다. "고마워요, 공자님." 황보수선은 눈물을 훔치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제 23 장 마군자(魔君子)의 눈물 ① "노부는 천외천의 팔대봉공(八大奉公) 중 다섯째로 사승(死僧)이라 하네." 칠흑처럼 검은 가사를 입은 노승이었다. 안색은 대조적으로 창백했으며, 눈은 실처럼 가늘어 감았는지 떴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 살막(殺幕). 중원에서 가장 신비한 곳이라 일컬어지는 곳이다. 청부살인을 의뢰하려면 독특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 동정호(洞定湖) 변의 악양루(岳陽樓) 근처에서 국화(菊花)바구니를 물에 띄우면 된다. 물론 바구니에는 청부내용과 금액을 함께 넣어두어야 한다. 국화바구니는 물의 흐름을 따라 어디론가 흘러가고, 청부자는 돌아가 기다리면 된다. 청부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드시 다음날 그 자리에 국화바구니가 되돌아온다. 살막은 이런 독특한 방식으로 청부업을 행해왔으므로 세인들은 살막이 어디에 있는지, 살막의 살수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런데... 신비에 싸여있는 살막이 처음으로 외부에 노출되고 말았다. "으아악!" "크악!" 단말마의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을 때 백야무정객은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홀로 바둑판을 놓고 복기(復碁)하던 그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살막은 동정호의 한 갈대섬 속에 있다. 빽빽하게 우거진 갈대숲으로 인해 외부인은 이곳에 전설적인 청부집단 살막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살막의 살수들은 세상에 버림받은 인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도합 사십구 인(四十九人). 그들은 피로 결의형제를 맺은 사이다. "으아악!" 가까운 곳에서 십삼살(十三殺)의 비명이 울렸다. 백야무정객은 대살(大殺)로 막주이기도 하다. 그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이제 삼살과 이살만 남았군.......' "흐아악!" "크윽!" 두 마디 비명이 좀더 가까운 곳에서 울렸다. 백야무정객은 벌떡 일어났다. '마흔여덟 명의 아우들이 전멸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고작 반각... 대체 어떤 인물들이길래?' 그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대나무로 엮은 정자에서 밖으로 걸어나갔다. 연못에서 금잉어가 펄쩍 뛰어올랐다. 슉! 금빛이 스친 순간 잉어는 눈알이 관통된 채 허연 배를 드러내고 물위에 드러누웠다. '염주.......' 백야무정객은 잉어의 눈알을 관통한 것이 한 알의 금빛 염주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염주알이 연못 바닥에 반짝이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자네가 살막의 막주인가?" 건조하다 못해 시체의 음성과도 같은 칼칼한 음성과 함께 죽림 속에서 흑색 가사를 입은 중이 걸어나온 것이다. 백야무정객은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천외천은 상상 이상으로 엄청난 곳이군. 귀하 같은 자가 수뇌도 아니고 여덟 명 중 한 명이라니......." 그렇다. 그는 사승(死僧)이 나타났을 때 그의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를 접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 정도면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만큼 강한 기도를 풍기는 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고작 팔대봉공 중 일인이라니. "오제(五弟)! 이제 마무리 짓고 돌아가세. 이십 년만에 세상에 나왔는데 바람 좀 쐬고 가야 할 것 아닌가?" 죽림으로부터 또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그는 폭이 좁은 한 자루의 괴도(怪刀)를 어깨에 꽂은 키가 칠 척이 넘는 비쩍 마른 노인이었다. 회색의 장삼을 펄럭이고 있었다. "셋째형, 잠시 기다리시오. 이제 다 끝났소이다." 사승은 수중의 선장(禪杖)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목에는 순금으로 된 염주가 반짝이고 있었다. 백야무정객은 회의노인을 바라보며 내심 탄식했다. '머지않아 무림에 엄청난 혈겁이 일어나겠구나. 이들이 이토록 강하니 과연 누가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뇌리에 청수한 학자풍의 인물이 떠올랐다. '친구여, 자네가 그토록 장담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나?' 백야무정객은 처연한 눈길로 두 괴인을 바라보았다. "팔대봉공이라면... 귀하들은 혹 지난 날 파천황교(破天荒敎)의 십이마존과 어떤 사이인지 말해 줄 수 있소?"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삼십여 년 전, 무림사상 유례가 없었던 혈세천하를 만들었던 파천황교가 거론되다니! 사승의 실눈에서 섬광과도 같은 안광이 번쩍 솟았다가 사라졌다. "흐흐흐! 과연 살막의 막주답군. 한눈에 우리의 연원을 알아내다니 말이야. 좋아, 곧 지옥에 갈 몸이니 속시원히 말해주지. 자네 말이 맞다. 천외천의 팔대봉공은 파천황교의 십이마존의 맥을 이어받았지. 네 분의 마존께서는 우리 여덟 명에게 진전을 나누어 주셨으므로 그 수가 좀 줄었을 뿐이라네. 이제 됐나? 그럼 자네 목을 가져가야겠네." 백야무정객은 정자로부터 들고 나온 검을 서서히 뽑았다. "자, 가네!" 스스스! 사승의 신형이 백야무정객의 시야에서 돌연 사라져버렸다. 이미 사승의 극랄함을 알아본 백야무정객은 눈을 감고 호흡을 멈추며 사승의 체온을 감지하려 애썼다. 적막! 숨막힐 듯한 적막이 한순간에 깨졌다. 위이이잉! 선장이 가공할 기세로 그의 정수리에 떨어진 것이다. 거의 같은 순간 백야무정객의 검이 화려한 빛살을 토하며 원을 그렸다. "윽!" 모습을 드러낸 사승의 입술 사이로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의 가슴을 덮고 있는 흑색 가사가 두 치 길이로 베어져나가 펄럭였으며, 그 사이로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패자는 백야무정객이었다. 그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사승의 선장이 그의 심장을 정확히 갈라버린 것이다. '자네가 이 악마들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버린 이자들을......?' 마지막 순간에 백야무정객은 관운빈을 떠올렸다. 그는 눈을 감았다. 지면에 엎어지는 순간까지도 그의 눈은 감겨지지 않았다. "가세." 팔짱을 낀 채 관전하고 있던 회의노인이 등을 돌렸다. 사승은 가슴의 상처를 지혈한 뒤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죽림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무림에서 가장 신비한 곳으로 알려진 살막이 영원히 막을 내린 순간이었다. ② 흑루(黑樓)는 칠층누각이다. 관운빈과 황보수선은 조심스럽게 흑루에 올랐다. 두 사람은 무사히 칠층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의외로 가로막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칠층에 오르는 순간. "후후, 배짱 한번 좋구나. 이곳까지 들어오다니." 두 사람의 귓전을 울리는 음침한 소리가 있었다. 관운빈은 눈썹을 모았다. 칠층의 대전은 바닥이 단단한 흑오석(黑烏石)으로 깔려 있었고, 삼면의 벽에는 작은 창이 나 있었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대전 안쪽에 태사의(太師倚)가 있었고, 그곳에 흑색장포를 걸친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의 뒤에는 네 명의 하나같이 음산한 인상의 괴인들이 서 있었다. "귀하가 천리신마 혁세기요?" 흑삼노인은 백발백염의 칠순 가량 되어 보이는 노인으로 흑삼만 아니었다면 인자한 노인으로 보이는 인상이었다. "허허, 그렇네. 자네가 바로 괴수신의인가?"


관운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남들이 그리 불러주고 있소." "이 악적......! 불공대천지한을 갚으러 왔다!" 윙! 황보수선이 검신합일이 되어 덮쳐갔다. "허허! 성급한 계집아이로군." 혁세기는 태사의에 앉은 채 수염을 쓰다듬었다. "소저!" 관운빈은 흠칫 놀라며 즉시 신형을 날렸다. 그녀의 무공이 아무리 높다해도 흑련사의 괴수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킬킬킬! 너는 우리들이 상대해 주마!" 문득 그의 앞을 가로막는 네 그림자가 있었다. 혁세기의 뒤에 서 있던 사 인의 괴인이었다. 그들은 전대의 노마두들로 냉면수라(冷面修羅)와 상문객(喪門客), 혼세인마(混世人魔), 유령도부(幽靈刀夫)였다. 그들은 구천마교주인 혁세기와 동일한 배분의 노마들로 신주사마(神州四魔)란 외호를 갖고 있는 가공할 마공의 소유자들이었다. 쾅! 폭음이 울렸다. 관운빈은 사마가 동시에 쳐낸 잠력(潛力)에 기혈이 거꾸로 흐르는 것을 느끼며 주르륵 뒤로 칠팔 보나 밀려나갔다. "......!" 그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한 명도 아니고 네 명을 동시에 상대한다는 것은 그만큼 승산이 희박한 일이었다. 그는 힐끗 황보수선 쪽을 바라보았다. 혁세기는 고양이가 쥐를 희롱하듯 소매를 펄럭이며 여유있게 황보수선을 상대하고 있었다. 황보수선은 악에 바쳐 사생결단을 낼 듯 검을 휘두르고 있었으나 그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속전속결하지 않으면 위험하겠구나.' 관운빈은 공력을 끌어올렸다. 이때 두 명의 노마가 좌우에서 각각 음풍(陰風)를 날렸다. 냉면수라와 상문객이었다. 그들이 익힌 신공은 음한지공(陰寒之功)에 속한 듯했다. "부끄러움도 모르는 늙은이들!" 그는 추나신공을 운용하여 혈(穴)를 이동시켰다. 각각 좌우로 그들의 공격을 받아 방향을 돌려 신형을 빙글 돌리며 쳐냈다. "엇!" 경악성이 울렸다. 앞뒤로 공격해 들어오던 혼세인마와 유령도부는 동료들의 장력이 그대로 밀려오자 당황하며 급히 장력을 쳐냈다. 쾅! "우욱!" 그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엉뚱하게도 자신들끼리 장력을 주고받은 꼴이 된 것이었다. 그들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방금 전 관운빈이 펼친 무공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한편, 천리신마 혁세기는 힐끗 그 광경을 살핀 후 내심 중얼거렸다. '놀라운 놈이다! 고작 이십여 세에 불과한 놈이 어디서 저런 무공을 익혔단 말인가?' "죽어라! 원수!" 파파파팟! 돌연 눈부신 검광이 밀려왔다. 황보수선이 그의 목을 노리고 검을 날린 것이다. 혁세기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상기된 옥용에 구슬 같은 땀방울을 매달고 덮쳐오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는 소매를 빙글 돌렸다.


"앗!" 갑자기 기이한 경력이 밀려나와 검의 방향이 틀어지는 바람에 황보수선의 몸도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혁세기는 손가락을 뻗었다가 잡아당겼다. 그것은 허공섭물의 일종인 흡혈마강(吸血魔 )이란 무공이었다. "악!" 황보수선은 일시에 몸의 중심을 잃으며 그에게 딸려갔다. 혁세기의 손가락이 갈쿠리처럼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어 오고 있었다. '아아!' 그녀는 혼신을 힘을 다해 끌려가지 않으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불가사의한 흡인력이 그녀의 몸을 잡아당겼고, 기혈(氣血)이 거꾸로 흘러 정신이 아득해지고 만 것이다. 구천마교의 교주인 혁세기의 무공은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것이었다. 찌이익! 천 찢기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가슴 옷자락이 길게 뜯겨져 나갔다. 그 바람에 눈부시게 흰 속살이 드러나고 말았다. "허허, 이리 오너라, 계집아이야." 혁세기는 다시 손가락을 움켜주었다. "아아!" 황보수선은 절망의 신음을 발하며 비틀비틀 그에게 끌려갔다. 이제 한 자만 더 끌려가면 여지없이 그의 포로가 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녀는 눈앞이 아찔했다. 복수는커녕 자칫하면 노마의 손에 잡혀 어떤 치욕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도와줘요! 관공자님!" 그녀는 날카롭게 구원을 호소했다. "허허! 안됐구나, 계집애야. 유감스럽게도 너의 공자님은 널 돌볼 겨를이 없을 것이다." 마침내 황보수선은 허리춤이 뜨끔하는 것을 느끼며 쓰러지고 말았다. 혁세기는 그녀의 혈도를 제압한 후 손을 뻗어 허리를 받쳤다. 그의 눈에는 만족의 웃음이 어렸다. 품에 떨어진 것은 아름다운 전리품(戰利品)이었다. 그는 비록 칠순이 넘었으나 아직도 왕성한 정력을 자랑하고 있었으므로 황보수선과 같은 미인을 품에 안자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너무 겁먹을 것 없다, 아이야. 노부가 널 귀여워해 줄 테니......." 그는 황보수선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그녀의 가슴을 더듬어갔다. 바로 그때였다. 꽈르르릉! "으악!" "케에에엑!" 뇌성과 같은 폭음에 이어 처절한 비명이 일어났다. 동시에 칠층의 누각 한쪽 벽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자욱한 먼지가 실내를 메운 가운데 한 줄기 강기가 뻗어왔다. "헛!" 혁세기는 헛바람을 들이키며 왼손으로 강기를 받아쳤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뒤로 두 걸음 밀려나고 말았다. 그 순간 손이 허전해졌다. 허리를 안고 있던 황보수선을 빼앗긴 것이다. 먼지가 가라앉자 그는 눈을 부릅떴다. "천리신마! 늙어도 곱게 늙지 못했구나! 부끄럽지도 않느냐?"


관운빈이었다. 그는 황보수선을 품에 안은 채 신광이 감도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혁세기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관운빈의 뒤에 네 구의 시신이 누워있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과 동배(同輩)로 구천마교의 원로들이었다. 무공으로 치자면 그 자신도 사마의 합격(合擊)를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모두 황천으로 떠나다니....... '이... 이 놈의 무공은 대체 얼마나 높단 말인가?' 눈알을 굴리던 그는 무너져 내린 한쪽 벽을 보고 반짝 이채를 빛냈다. 사위는 조용했다. 그는 가슴이 철렁했다. '모두... 당했단 말인가?' 그는 무림군왕성과의 대회전에서 패배하리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충분치는 않았으나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관운빈이 여기까지 들어왔을 때는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노마, 달아날 생각은 포기하는 게 좋을 것이다." 관운빈은 그의 눈동자가 굴러가는 것을 보고 눈치챘다. 스르릉! 청명한 울림과 함께 누각 안에 눈부신 검광이 일어났다. 관운빈이 용명검을 뽑은 것이다. "흐흐, 누가 달아난단 말이냐?" 천리신마 혁세기는 음소를 흘리며 소매를 펄럭였다. 우웅! 소매로부터 시커먼 장영이 뻗어나갔다. 카캉! 불꽃이 퉁겼다. 관운빈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혁세기의 소매로부터 발출된 것은 사람의 손 모양을 한 거무칙칙한 괴병(怪兵)이었다. 용명검은 쇠를 무 베듯 하는 천고의 신병이었다. 그런데 괴병은 멀쩡했다. "흐흐흐, 애송이놈! 받아라!" 쏴아아! 허공에 검은 그림자가 가득 메워졌다. 상대의 괴병이 수십 갈래로 뻗어온 것이다. 관운빈은 눈을 가늘게 하며 용명검을 수평으로 뻗었다. 차창! 불꽃이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는 손목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끼며 재차 공격을 가했다. 두 사람은 단숨에 십여 초를 주고받았다. 그야말로 불꽃튀는 접전이었다. 한 덩어리가 된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위치를 세 번이나 바꾸며 얽혔다. "......!" 두 사람은 마주보고 대치했다. 혁세기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그의 괴병이 반 토막밖에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노마, 이제 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관운빈은 무겁게 말하며 검을 좌로 비낀 채 수평으로 뻗었다. 특이한 자세였다. "그것은......?" 혁세기의 눈에 경이의 빛이 떠올랐다. 그런 자세를 언젠가 본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디서 보았는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우우웅! 관운빈의 검극으로부터 묘한 진동음과 함께 검기류가 흘러나왔다. 그 기류는 검신을 싸고 돌더니 마치 한 마리의 용(龍)과 같은 현상을 만들며 허공으로 꿈틀거리며 뻗어 올랐다. "헉......!"


혁세기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 순간 관운빈의 신형이 떠올랐다. 혁세기는 눈이 부시는 것을 느끼며 혼신의 힘을 다해 쌍장을 뻗었다. 꽈르르릉! 천번지복하는 굉음이 울렸다. "크아아아악!" 처절한 비명. 그리고... 검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끄으으......." 혁세기는 신음을 발하며 비틀거렸다. 그의 가슴에 용명검이 박혀 있었다. 관운빈은 그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의 가슴 앞 옷자락이 검게 타들어가 있었다. "관공자님!" 황보수선은 놀라 부르짖었다. 관운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기이한 신광(神光)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혁세기의 가슴에 꽂혀 있는 용명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놈은... 천룡대제와 어떤 관계냐......?" 혁세기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는 눈에는 온통 경악과 회의가 담겨져 있었다. "네놈이 사용한 검법은... 천룡무극검법(天龍無極劍法)이... 아니더냐?" "그렇소." 관운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수가... 태화천(太華天)의 후예가... 살아 있었단... 말이냐......?" 희대의 마인(魔人) 천리신마 혁세기. 그의 무릎이 서서히 꺾어지고 있었다. 쿵! 그는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그는 두 손으로 가슴에 박혀 있는 용명검을 뽑아내려 했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듯 손을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이었다. 관운빈은 고개를 들어 황보수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저, 미안하지만 내 검을 회수해 주지 않겠소?" 황보수선은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신형을 날려 혁세기의 앞에 떨어졌다. 그녀는 검자루를 잡은 후 야멸차게 말했다. "노마! 이제 지옥으로 갈 때가 왔구나." 혁세기의 눈알이 서서히 뒤집혔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에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흐흐....... 다행한 일이다. 너같이 아름다운 계집의 마지막 인사를 들으니......." "가거라. 악마!" 츄아악! 검을 당기자 혁세기의 심장으로부터 시뻘건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황보수선은 급히 신형을 날려 핏줄기를 피했다. 쿠웅! 혁세기는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몸은 더 이상 움직일 줄 몰랐다. 사사련과 연합하여 마도천하를 이룩하려던 구천마교의 교주는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황천으로 간 것이다. "흐흑흑! 아버님......!" 황보수선은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부친 황보일학의 원수는 갚은 셈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이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오열했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관운빈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고 있었다. "진정하시오, 소저." "흐흑! 공자님......."


그녀는 더욱 큰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품으로 몸을 던졌다. 흑련사의 혈겁으로 인해 천하는 도탄에 빠졌었으나 무림군왕성과의 대회전으로 인해 흑련사는 몰락하고 말았다. 난세영웅(亂世英雄)이 탄생했다. 흑련사의 수괴인 천리신마 혁세기를 황천으로 보낸 것은 괴수신의 관운빈이었다. 무림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개의 의원으로 알았던 그가 무림최대의 흉적을 잠재울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로 인해 관운빈의 이름은 중천에 뜬 태양처럼 빛나게 되었다. 혁세기가 죽자 흑련사의 마도인들은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무림군왕성의 연합군은 승기를 잡고 그들을 단숨에 몰아쳐 마침내 흑련사는 대패하고 말았다. 살아 달아난 자는 소수에 불과할 정도의 대승이었다. 전무림이 환호했다. 드디어 무림은 평화를 되찾은 것이었다. 다만... 그 와중에서 눈물을 흘리는 비운의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화산파의 연채령이었다. 그녀는 흑련사에 납치된 후 여인으로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치욕을 당해야 했다. 더구나 그녀의 가문인 화산파 또한 몰살하고 말았다. 이제 그녀는 천애고아나 다름없는 몸이 된 것이다. 여인으로서의 순결과 명예를 철저히 짓밟히고 가문마저 몰락한 그녀가 갈 곳은 없었다. 그녀는 군웅들이 내지르는 승리의 함성을 뒤로 하고 쓸쓸히 어딘가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그녀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③ "환령(幻令), 누구의 소행인지 아느냐?" "군사, 잊으셔야 합니다." "아느냐고 물었다." "그것이... 주군의 뜻임을 모르신단 말입니까?" "마지막으로 묻겠다. 누구냐?" "......삼존(三尊)과 오존(五尊)께서 집행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그는 넋을 잃었다. 그의 청수한 얼굴은 온통 혼백이 달아난 듯했다. 마군자(魔君子) 사마을지였다. 그는 갈대로 이루어진 동정호의 한 섬에서 불타버린 죽옥(竹屋)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발치께에는 열일곱 구의 시신이 누워있었다. 그의 눈길이 한 노인의 사체로 떨어졌다. 그는 바로 살막의 막주인 백야무정객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마을지는 억양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말했다. "먼저 가거라." 그의 뒤에는 갈의(葛衣)를 입은 중년인이 서 있었다. 기이한 것은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분명 얼굴을 가리고 있지 않았는데도 흐릿한 기운이 안면을 덮고 있어 용모를 알 길이 없었다. "......함께 있고 싶습니다. 군사." "그럼 좋을 대로......." 사마을지는 허리를 굽혀 백야무정객을 안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까풀 사이로 눈물이 비어져 나와 백야무정객의 회색빛으로 변한 늙은 얼굴에 떨어졌다. 그는 후들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몇 번을 휘청거리며 걷던 그는 잠시 후 멈추었다. 그의 앞은 시야가 탁 트여있었다. 갈대밭이 끝나는 곳이었다. 잔잔한 동정호의 수면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사마을지는 평생의 벗이었던 백야무정객의 시신을 내려놓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퍽! 퍽! 그는 연장도 쓰지 않고 맨손을 뻗어 땅을 파헤쳤다. "제가 하겠습니다." 갈의인 환령이 다가오자 그는 손을 저었다. "물러서라!" 그의 음성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알겠... 습니다." 환령은 그의 처참한 기분을 이해한 듯 뒤로 물러섰다. 잠시 후 구덩이가 생기자 그는 백야무정객의 시신을 구덩이 속에 안치했다. 땅 속에 반듯이 누워있는 백야무정객의 모습을 내려보는 그의 눈썹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석양(夕陽)이 지고 있었다. 마침내 봉분이 완성되었다. 마군자 사마을지는 봉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친구여.... 편히 가게나." 사마을지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 24 장 전락(轉落) ① 정사대회전(正邪大會戰)이 끝난 후. 무림군왕성에서는 성대한 연회가 벌어졌다. 흑련사의 붕괴를 기념하고 군웅들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함이었다. 연무장에는 수십 열로 상이 차려졌다. 산해진미와 술이 수시로 날라져 왔고, 군웅들은 마음껏 먹고 마시며 오랜만에 허리띠를 푼 채 환담을 나누었다. 승리의 기쁨에 들뜬 군웅들은 거나하게 취한 채 자신들의 무용담을 자랑했으며 화제가 끊이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단연 떠오르는 것은 관운빈에 대한 것이었다. 정사대회전으로 인해 무림에 새로운 영웅(英雄)이 탄생했다는 것이 군웅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들은 입에 침을 튀겨가며 관운빈을 칭송했다. 한편, 남궁청운은 각 방파의 장문들을 비롯한 무림고인들, 태자당의 영걸들을 위해 잠룡헌(潛龍軒)에 별도의 연회를 마련했다. 정작 본인은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몸이 불편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으나 군웅들은 어렴풋이 사정을 짐작하고 있었다. 정작 정사대회전의 주인공이었어야 할 그보다는 관운빈이 영웅으로 떠오른 데 대한 불편한 심기(心氣)를 드러낸 것이었다. 잠룡헌에서도 화제는 단연코 관운빈에게 모아졌다. 군웅들은 당대의 영웅이란 표현이 부족한 듯 입을 모아 불세출의 영웅이란 칭호를 썼다. 군웅들은 몇 차례나 관운빈에게 박수갈채를 보냄으로써 그의 활약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이렇게 되자 관운빈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술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슬며시 자리를 떴다. 황보수선도 덩달아 자리를 떠 그의 뒤를 따랐다. "휴..... 이제 살겠군." 잠룡헌을 빠져나온 관운빈은 가슴을 펴며 심호흡했다. 황보수선은 그의 곁에 바짝 다가서며 미소지었다. "후후, 그렇게 불편하셨어요?" "아마 그 자리에 더 앉아 있었다면 숨이 막혀 죽었을 것이오." "어머! 설마요."


황보수선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관운빈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 그가 전무림의 떠오르는 태양으로 칭송받는 것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졌으며, 기쁜 마음이 한량 없었다. "기뻐요, 전." 그녀는 고개를 살며시 기대며 속삭였다. "뭐가 그리 기쁘오?" "공자님께서는 이제 무림의 구성(求星)이 되셨어요. 이제 천하무림에서 공자님의 영명을 모르는 이는 없을 거예요." 관운빈은 피식 웃었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하오? 난 도리어 불편해 죽겠소." "그건 공자님께서 너무 겸손하셔서 그래요. 무림에 몸을 담은 사람들이 평생을 경주해도 얻지 못할 명성을 얻으셨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어요?" "후후, 그래서 난 무림이 싫다는 것이오." 황보수선은 그를 올려보았다. 관운빈의 얼굴에는 일종의 허무한 빛이 어려있었다. 그녀는 가슴이 철렁했다. "공자님은 아직 젊어요. 그런데 어찌......." 관운빈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렇소. 난 아직 젊소.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겪었소." 두 사람은 인공호수 주변을 산책했다. 호수는 꽤 규모가 컸으며 주변에는 화목(花木)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어 은은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두 사람은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비록 별 말은 없었으나 두 사람 사이에는 유정(有情)이 흐르고 있었다. 관운빈은 문득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소저, 날이 밝는 대로 이곳을 떠나야겠소." 황보수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이 원하시는 대로요. 그런데 어디로 가지요?" "악양의 목화루로 가야 하오. 그곳에서 영매와 육노야, 백사호를 만나기로 약조가 되어 있소." "저도 함께 가면 안될까요?" 관운빈은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소저는 먼저 집으로 돌아가시오. 옛친구들을 만난 후 곧바로 찾아가겠소. 연후 빙장어른의 장례도 치르고 빙모님께 정식으로 청혼도 하겠소." "아......." 황보수선의 가슴에는 슬픔과 기쁨의 감정이 동시에 몰아쳐 왔다. 부친의 죽음으로 인한 아픔과 관운빈이 정식으로 청혼하겠다는 데 대한 기쁨이었다. '아! 아버님이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어쩔 수 없이 눈물짓는 황보수선이었다. 관운빈은 그녀를 가볍게 안으며 뺨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수선, 빙장어른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실 것이오. 그만 눈물을 거두시오. 보시오, 저 하늘에 빙장어른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지 않소?" 관운빈은 손을 뻗어 만월을 가리켰다. "공자님......!" 황보수선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든든한 사나이의 가슴에서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이 그녀를 슬프게 했지만 반면 잃었던 사랑을 되찾았기에 그녀는 이겨나갈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룡헌을 조용히 빠져 나온 남녀가 또 있었다. 바로 당세곤과 남궁소연이었다. 두 사람은 은밀한 화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당세곤은 한동안 뜸을 들이다가 말을 꺼냈다. "남궁소저, 이제 대회전도 끝났으니 우리들의 문제를 논의해 봐야 하지 않겠소?" "우리들의 문제라니요?" "혼례를 치뤄야 하지 않겠소?" "뭐, 뭐라고요?" "허, 왜 그리 놀라시오? 이 당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오?" 남궁소연은 놀란 눈을 몇 차례 깜박이다가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당공자가 싫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직 그 문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기습적인 청혼이었다. 남궁소연은 가슴이 퉁탕대며 뛰고 있었다. 당세곤은 본래 넉살좋은 인물이었다. 그는 슬며시 남궁소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살다 보면 사랑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오. 이 당모가 싫지만 않다면 당장 혼례부터 치르는 것이오." "호호! 그런 말이 어딨어요? 만일 그래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어쩌구요?" "걱정 마시오. 그때는 귀여운 옥동자가 내 대신 그대를 기쁘게 해줄 테니 말이오." "어머! 어쩜 그런 말을......!" 화원의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남궁소연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하하하! 남녀가 혼인을 하면 아이가 탄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뭘 그리 놀라시오?" "시, 싫어요. 그런 말은......." 남궁소연은 그만 부끄러움을 참지 못해 당세곤의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하하하! 알겠소, 내 그만 하리다." 당세곤은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는 불타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왜 그리 빤히 보세요? 그리고 이 손 놓으...... 읍!" 남궁소연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당세곤이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껴안으며 입술을 점령해버린 것이다. 그녀는 깜짝 놀라 몸부림쳤으나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짜릿한 입맞춤! 남궁소연은 난생 처음으로 사내와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너무나 놀라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그때 당세곤의 뜨거운 혀가 그녀의 입술을 밀고 들어왔다. '아... 안돼.' 그녀는 도리질을 했으나 집요하게 밀고 들어오는 당세곤의 공략에 마침내 입을 열고 말았다. 그의 혀는 유영하듯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안에서 움직였다. 어찌된 셈인지 그녀의 온몸에 맥이 탁 풀어지고 말았다. 두 다리도 중심을 잃고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한편 당세곤도 감미로운 기분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여색(女色)을 탐닉한 바 있었다. 그가 상대한 여인들은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았으나 대부분이 사랑과는 거리가 먼 순간적인 쾌락의 대상들이었다. 이 순간 그는 지금까지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는 어떻게든 남궁소연을 자신의 여자로 만들겠다는 집념을 불태웠다. 그것은 욕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아......." 남궁소연은 신음을 흘렸다. 무엇에 홀린 듯이 그녀의 머리 속은 텅 비었고, 온몸이 달아올랐다. 당세곤은 능숙하게 그녀를 애무했다. 그의 손은 어느새 남궁소연의 옷자락 사이로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아아, 그만... 제발 그만 하세요." 남궁소연은 다급히 외쳤다. 그러나 정신이 몽롱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여인을 무수히 다뤄본 당세곤은 그녀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애무의 강도를 높여갔다. 마침내 남궁소연의 호흡이 빨라졌다. 그녀는 새근거리며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어느덧 그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