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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 제 1 권 검궁인 저 차례 제 1 장·괴사(怪事)로 열리는 서막(序幕) 제 2 장·뜻밖의 인연(因緣)들 제 3 장·두 번의 이별(離別) 제 4 장·무림성(武林城)의 소성주(少城主) 제 5 장·대역(大役)의 목적(目的) 제 6 장·내분(內分)의 본격화(本格化) 제 7 장·무림왕(武林王)과 그의 아들역(役) 제 8 장·붕천(崩天) 제 9 장·외유(外遊) 제 10 장·운명(運命)의 전환(轉換)

서문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만일 욕망에 한계가 있었다면 오늘날의 세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욕망은 인간의 함정이자 발전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불교(佛敎)에서는 모든 것을 버리라고 말한다. 나도 없고 너도 없으니 세상 또한 없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모든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따랐을 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만물(萬物)이 성불(成佛)하면 이승은 그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역사는 돌고 돈다. 수레바퀴가 구르면 땅에는 자국이 남는다. 그 자국을 따라 세상의 경계가 생기고 법이 생기고 과오(過誤) 또한 남는다. 그래도 한번 굴러가 버린 바퀴는 다시 돌아올 줄 모른다. 아우성처럼 역사의 뒤안길에 뿌려진 피와 눈물을 뒤로 한 채 바퀴는 영원히 사라지고, 또 다른 수레바퀴가 굴러온다. 그것이 삶이라고 누군가 말한다. <천명(天命)>은 한 인간의 이야기다. 그는 자신에게 지워진 짐이 너무나 무겁다고 생각했다.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고 운명이라고 생각했으며 어쩌면 체념할 뻔도 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었다. 어쩌면 운명은 돌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결과는 과정에 의해 생성된다. 인생의 책장을 넘길 때, 다음 페이지에 무엇이 적혀있는지 알 수만 있다면 인간은 결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몇 장 뒤에 '좌절'이란 단어가 적혀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 단어를 바꾸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피나는 노력과 헌신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역사 속의 폭군이나 위정자들은 자신의 최후를 몰랐다. 만일 그들이 몇 페이지 뒤에 적혀있는 자신의 운명을 미리 엿보았다면, 그래도 그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했을까? 겨울비가 내리는 아침에 졸고에 사족을 달아 보았다. 자오정(子午亭)에서 검궁인 배상 서장 ① 천지간에는 무한한 신비가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것을 꼽으라면 그대는 과연 무엇을


꼽겠는가?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광대무변의 천하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어디 한 두 가지일 것이며, 특히 그 파란만장함이야 인간의 두뇌로 어찌 일일이 다 헤아리겠는가? 여기 당금 무림천하(武林天下)에서도 마찬가지, 가히 아홉 겹이라는 구중천(九重天) 만큼이나 신비무궁한 것들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써 삼대신비지처(三大神秘之處)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혈사해(血死海). 장춘도(長春島). 불야성(不夜城). 먼저 이들의 연원을 알고자 한다면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당시로 말하자면 무림이라는 세계가 채 정립되기도 전이다. 곳곳에서 낭인무사(浪人武士)들이 일어나 제각기 최강자가 되기 위해 십팔만리 대륙천하를 피로 물들이던 때이다. 따라서 그 때의 일은 오늘날에 와서는 하나의 전설이 되어 강호무림사(江湖武林史)의 첫 장을 장식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도 그 결과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진정한 대륙제일인(大陸第一人)이 누구였는지는 가려지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황산(黃山) 시진봉(始眞峯)이었다던가? 무려 삼 만에 달하는 낭인무사들이 장장 삼십 주야(晝夜)에 걸쳐 산하를 피로 적시는 대혈전을 벌였다고 하는데, 사상 유래가 없던 그 혈전은 기세에 비해 기이하게도 흐지부지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 날에 참전했던 낭인무사들이 이후로 인세에서 모두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으니 말이다. 결국 이 사실은 훗날의 무인들에게는 하나의 신화로 남게 되었다. 하늘로 사라졌는지, 혹은 땅 속으로 꺼졌는지 영원히 증발되어 버린 그들의 얘기는 언제부터인가 전설로 화해 누대에 걸쳐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었던 것이다. - 시진봉에서 살아 남았던 고수들은 후일의 승부를 기약하고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세계로 들어갔으니, 그 곳이 바로 혈사해와 장춘도이다. 전설은 또 전한다. 이번에는 불야성(不夜城)에 관한 것이다. 이는 혈사해와 장춘도와는 별개이지만 어쩌면 현세에 이르러서는 그것들보다 훨씬 더 세인들의 관심을 끌 요소가 있다. 고금을 통틀어 가장 위대했던 한 명의 기재(奇才)가 있었다. 그는 사문은 커녕 사부도 없이 스스로 무공을 깨우쳤으며, 자신의 무공을 시험하기 위해 천하각파를 찾아가 비무를 청했다. 그 결과로 그는 놀랍게도 천승무적(天勝無敵)이라는 빛나는 위업을 이룰 수가 있었지만, 이 일로 인해 명성을 얻는 대신 오히려 뜻하지 않은 재난과 맞닥뜨려야 했다. 천하무림은 불패(不敗)의 승부사인 그를 어이없게도 공적(公敵)으로 선포했으며 그 때부터 그는 흑백양도(黑白兩道)의 무시무시한 추적을 받기에 이르렀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듯 그는 늘상 홀홀단신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배경이 되어 줄 사문이 없었기에 일신에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도 그렇듯 쫓기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마침내 어느 곳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고 천애(天涯)를 유랑하게 된 그는 불같이 노한다. 그도 인간인 이상 체면에 급급한 나머지 자신의 승리를 용인하지 않으려 드는 무림을 향해 급기야 적개심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포문(砲門)을 열게 된 그의 복수극은 실로 상상을 절하는 것이었다. 전면전(全面戰)이 불가능한 그는 구파일방을 포함한 천하 백팔십개문파의 무공비급을 모조리 훔쳐 냈으니.... 이 사건은 전 무림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하지만 그의 종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고, 그의


실종과 함께 수백 권에 달하는 무공비급도 무림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로부터 오십 년이 흐른 뒤, 즉 그가 사라진지 오십 년 후에 강호에는 하나의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 불야성을 여는 자, 천하를 제패하리라. 그 곳에는 일만 권의 무공비급이 비장되어 있으며 중원무림을 통째로 살 수 있을 정도의 황금이 쌓여 있다. 소문의 연원에 대해서는 전혀 밝혀진 바가 없다. 어디에서, 누구의 입을 통해서 나왔는지 알 수 없는 가운데서도 그 말은 즉시로 천하를 뒤흔들어 놓았으며 무림인들은 제각기 혈안이 되어 불야성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 일은 한 마디로 바다에 빠진 바늘 찾기였다. 불야성은 근거없는 소문만을 파다하게 퍼뜨려 놓았을 뿐 작금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의 눈에도 발견되지 않았다. 어쨌든 무림삼대신비지처에 얽힌 이 이야기들은 천 년에 걸쳐 무림인들의 가슴에 숱한 한(恨)을 남겼다. 이는 그것을 찾아 내고자 열망하는 인간들의 욕구로 인해 끊임없이 혈풍이 일었기 때문으로써 무림인들이나 제문파들이 알게 모르게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두루 개입되었던 것이다. 세인들은 저마다 입을 모아 말한다. 이제 지나간 한을 되풀이하여 쌓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그 신비지문을 열어야만 한다고. 그들이 과연 알까? 그 옛날의 사람들 중에서도 같은 생각으로 덤벼 들었던 자가 있었다는 것을. ② 그가 첫 번째 살인(殺人)을 한 것은 불과 여섯 살 때였다. 이유라야 단 한 가지, 배가 고파서였다. 하지만 이를 두고 그를 함부로 비웃어서는 안된다. 먹고자 하는 본능은 인간이든 금수(禽獸)이든 마찬가지일진대 내리 사흘 굶은 후에 그는 정말로 이지(理智)를 잃고 금수가 되었다. 그럴 만한 동기도 있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살인에 관한 타당성이 부여되었고 그는 때를 놓치지 않고 가차없이 시행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길가에서 우연히 만두를 먹는 한 아이를 발견했다. 그 광경에 굶주린 배가 더욱 더 아우성을 치자 그는 자존심도 잊고 상대 아이에게 만두를 좀 나누어 달라고 했다. 상대가 말을 들어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렇지 못했다. 또한 그 아이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으며 힘도 세 보였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골목으로 아이를 유인하여 다시금 애원에 가까운 사정을 해 보았다. 실제로 그는 아사(餓死) 직전에 이르러 눈앞이 빙빙 돌았으며 만두를 조금만 얻어 먹을 수 있다면 상대에게 엎드려 절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만두를 얻어 먹기는 커녕 그 아이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는데 이 상황에서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직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가 의식할 수 있는 것은 언제, 무슨 기운으로 집어 들었던지 손에 쥐어져 있던 커다란 돌을 한 옆에 휙 내던져 버리고는 원하던 만두를 맛있게 먹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의 그는 생각했다. - 한심한 놈! 겨우 만두 몇 개가 아까워 뒤통수가 부숴져 죽다니. 나는 최소한 너 같이 아둔하고 앞뒤가 막힌 놈보다는 훨씬 더 살아 나갈 자격이 있다. 이것이 바로 피와 살점이 묻은 만두를 씹어 먹으며 그가 내린 결론이었고, 그는 덕분에 굶지 않는 방법과 함께 그 나름의 인생철학을 비로소 터득하게 되었다. 두 번째의 살인. 그 일은 그가 열네 살 때 행해졌다. 당시 그가 살던 마을에는 눈에 띌 정도로 예쁘장한 계집아이가 살았는데 그는 그 계집아이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하지만 계집아이는 이른바 부유한 집안의 금지옥엽으로 천애고아인 그와는 도무지 상대를


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계집아이가 동네의 야산(野山)에 나물을 뜯으러 가는 것을 보고는 몰래 뒤를 따라갔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언덕에 이르게 되자 그는 계집아이에게 진심을 호소하며 친구가 되기를 간청했다. 아마도 여기까지가 그의 내부에 남아있던 마지막 순수함이 아니었을지? 물론 이것은 계집아이로부터 심한 욕설과 더불어 깨끗이 거절당하고 만다. 그리고 모욕을 당한 그는 흥분한 나머지 계집아이를 우악스럽게 몇 대 때려 실신시켜 버렸다. 그래 놓고도 분노가 풀리지 않자 그는 계집아이의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능욕을 한다. 타인에게 짓밟혔을 때에 무섭게 일어나던 잔혹한 범죄심리가 또 한 번 고개를 쳐든 것이었다. 그가 이런 면에서 남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여하한 사건 이후에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 계집애! 거만을 떨고 나를 능멸하더니 꼴 좋구나. 이는 그가 증거인멸을 위해 계집아이를 목졸라 죽인 후, 시신을 언덕에 묻으면서 읊조린 소리였다. 그 직후, 마을에서는 계집아이의 실종 때문에 난리가 났으나 한 동안은 그의 짓이라는 것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성장해 갔다. 그의 범죄도 세 번째에서 네 번째로, 그리고도 더 많은 숫자로 점점 늘어만 갔다. 열다섯 번째까지 살인을 하고 나서야 그는 마을을 떠난다. 그것은 그 때까지도 꼬리는 밟히지 않았으되, 더 이상 그의 범죄 욕구를 부추킬 만한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언제부터인가 그는 살인을 할 때마다 묘한 쾌감을 느꼈으며 살인의 기술도 점차 발전해 갔는데, 이는 그가 은연중 힘을 숭상하게 되면서 보다 확고한 의지로 자리잡게 된다. 즉 자신을 거부하는 자를 모두 제거해 버리고 세상을 손아귀에 움켜 쥐어 보겠노라고 작심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천하에서 가장 강한 자가 되기 위해 어딘가로 떠난다. 소위 그가 달성하고자 한 목표는 대륙제일인, 이 무시무시한 야망의 주인공에게는 스스로 지은 특이한 이름이 주어진다. 마록(摩麓). 이것말고도 그에 관해 달리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면 이렇듯 각별한 성정을 지닌 그가 유난히 흰 피부와 처절하리만큼 아름다운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 소녀. 그녀는 열세 살 때 정조를 잃었다. 가난한 농부의 딸이었던 그녀는 겨우 열 살 때 기루(妓樓)에 팔려가는 신세가 되어야 했다. 그녀가 소지하고 있는 천성적인 아름다움이 죄라면 죄였다. 사람을 빨아 들일듯 큰 눈과 빼어난 미모는 진즉부터 인근에서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던 것이다. 기루로 거처를 옮겨간 그녀는 삼 년 간 주방 일을 거들며 기예(技藝)를 익히다가 마침내 손님을 받게 된다. 이름도 모를 한 명의 풍류객이 그녀를 은자 열 냥에 샀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그 날 밤을 시작으로 그녀의 화류생활은 막을 열었다. 행이랄지, 불행이랄지 뛰어난 미모로 인해 그녀는 매우 인기가 높았으며 그 덕분에 무수한 사내들을 거치기는 했으나 돈을 많이 벌게 되어 착실히 저축도 해 두었다. 그 때까지도 그녀에게는 나름대로 꿈이 있었다. 비록 몸은 더럽혀졌을 망정 언제고 진실한 사랑을 만나 복된 가정을 이루고자 하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 꿈은 그녀가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현실로 다가온다. 그녀는 한 명의 단아하고 품위있는 서생을 만나 생애 최초로 진실된 사랑을 나누게 되었으며, 급기야 둘이 어딘가로 멀리 떠나 새로운 삶을 꾸리자는 약속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꿈은 안타깝게도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유는 서생의 배신 때문이었다. 그 자는 그녀와 알고 지내는 중에도 몰래 다른 여인과 만나고


있었는데 그녀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후였다. 상대는 직책이 꽤 높은 고관(高官)의 딸로써 서생과 벌써 양가의 합의하에 혼약까지 맺어 놓은 상태였던 것이다. 결국 서생은 고관의 딸과 혼인을 하고 말았고 그녀가 받은 충격이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 일을 기화로 그녀는 정말로 타락하고 만다. 그야말로 기계(妓界)의 요화(妖花)랄지, 그녀는 비단 돈 때문이 아니라 매일 밤 남자가 없으면 잠을 못 이루는 탕녀가 되었다. 그에 반해 그녀의 심리는 정반대로 치달렸다. 배신의 상처로 인해 천하의 모든 남자를 극도로 증오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와중에서도 세월은 흘러갔고.... 그녀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갔지만 어느 시기부터인가 그녀를 둘러 싸고 한 가지 기이한 소문이 나돌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거나 그녀와 사랑에 빠졌던 사나이는 반드시 불행(不幸)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그녀는 몸담고 있던 기루를 스스로 떠나야 했다. 도처에서 원성이 자꾸 일어나니 그녀로서도 그대로 눌러 앉아 견디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항예(姮蘂). 이것이 그 비운의 미녀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여전히 그 큰 눈에는 매력이 흘러 넘쳐 천하의 어떤 사내라 해도 사랑하지 않고는 못배긴다는 여인이다. 이런 그녀를 두고 요물(妖物)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불행한 여인으로 동정을 해 주어야 할지.... 이번에 소개할 사람은 또 다른 남자(男子)다. 그는 어릴 적부터 거짓말을 무척 잘했다. 너무나도 감쪽같아 그를 아는 사람 치고 그의 거짓말에 한 두 번쯤 속아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것도 매번 속으면서도 사람들은 그를 경계하지 못할 뿐더러 속고 난 뒤에야 땅을 치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워낙 말을 잘 할 뿐더러 타인에게 지극히 호감을 주는 인상이기 때문이다. 대개 그의 감언이설에 걸려 들게 되면 상대는 머지 않아 패가망신을 하거나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고 마는데, 그런 반면에 그는 남들이 자신의 수단에 걸려 불행해지는 것에 대해 묘한 쾌감을 느끼곤 했다. 요컨대 그는 자신의 세 치 혓바닥과 열 근도 채 되지 않는 두뇌(頭腦)로써 세상에 하지 못할 일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고 자부했으며 이에 매우 만족하며 살아가는 자였다. 그의 이런 수단은 도박(賭博)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그는 적성이 맞아서인지 열 살 때부터 이미 도박에 달통했고, 그것을 통해 실로 많은 사람들을 파멸의 늪에 처박았다. 물론 속임수 도박이다. 그는 이로써 아무 가책도 없이 남의 재산을 무수히 가로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상대의 아내와 자식들까지도 차지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리하여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벌써 내로라 하는 부자(富者)가 되어 있었으나 그는 좀체로 만족할 줄을 몰랐다. 좀 더 넓은 세상에 나가 재주를 마음껏 과시하고 싶은 것이 그의 꿈이었다. 천하를 상대로 사기(詐欺)를 치고, 도박(賭博)을 하고, 천하인 모두를 자신의 하인으로 삼고자 야심을 품었던 것이다. 그러다 이십 세에 이르자 휘하에 무려 열두 명의 첩(妾)과 오백 인 이상의 하인을 거느리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드넓은 세상천지를 향해 마침내 선언했다. - 천하여! 너를 몽땅 차지하겠노라! 황금과 삼촌설(三寸舌), 그리고 천뇌(天腦)라면 나, 능히 너를 가질 자격이 있지 않느냐? 그의 이름은 숙야빈(叔夜賓). 최근 들어 그에게 유일한 고민이 있다면 그것은 나날이 살이 찐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사탕을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그로 인해 자꾸만 몸이 불어 가고 있었다. 열거한 삼 인은 모두 강호무림에 나타난다. 각각 다른 모습이나 그들의 출현은 무림에 거대한 폭풍을


일으켜 놓는다. 피비린내가 그치지 않는 강호의 생리(生理)가 이들의 취향과 부합되었던 것인지, 이들로부터 비롯된 폭풍은 누구도 어떻게 막아야 할지 손을 써볼 도리가 없었다. 그것을 일컬어 세 개의 겁(劫), 즉 삼해천겁(三海天劫)이라 부르는데.... 제 1 장 괴사(怪事)로 열리는 서막(序幕) ① 장원(莊院). 꽤 넓은 터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리 불러야 마땅하겠으나 실제로는 폐가(廢家)에 불과했다. 하긴 아무도 사는 사람 없이 오랫 동안 비어 있었으므로 무리도 아니다. 이 폐장원의 깊숙한 곳에서는 밤이면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은밀한 그 빛을 둘러 싸고 너무도 괴이하고 신비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불빛이 흐느적거린다. 그것은 한 자루의 황촉이 낡고 찌든 탁자 위에서 흘려내는 빛이었다. 그 외에도 모든 기물이 퇴락하여 방 안의 분위기는 금방 유령이라도 툭 튀어나올 듯 음산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어울리지 않게 방의 한 쪽에는 주렴(珠簾)이 쳐져 있다. 그 안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어릿하게 보인다. 황촉의 불빛이 흔들리매 그림자는 흐려졌다 보였다를 반복하곤 했다. 한 명의 청년이 주렴을 마주한 채 우뚝 서 있다. 일신에는 허름한 마의(麻衣)를 입었으나 영준한 용모에 기개가 남달라 보이는 청년이었다. 특히 선연한 눈썹이 관자놀이까지 쭉 뻗어 있어 마치 잘 갈린 검날을 연상케 했다. 나이는 대략 이십 전후인 것 같다. 꾹 다물린 입술에서 완강한 고집이 느껴졌지만 그것은 곧 풀어지고 만다. "네 이름은?" 매일 밤 되풀이 되고 있는 괴이한 문답(問答)이 시작되자 도리 없이 입을 열어 대답해야 했던 것이다. "용백검(龍白劍)입니다." 주렴 속 그림자의 음성은 여인의 것이었는데, 언뜻 느끼기에도 싸늘하여 정감(情感)이라고는 한 점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마치 만년한동(萬年寒洞)에서 울려 나오는 듯 듣기에 따라서는 위협적이기까지 한 음성이다. 음성은 다시 묻는다. "나이는?" "십구 세입니다." "즐겨 입는 옷은?" "유삼(需杉)입니다." "무슨 색이냐?" "아침에는 청삼(靑杉), 저녁에는 백삼(白杉)입니다." "취미는?" "술과 여인입니다." "성격은?" "대체로 쾌활하고 명랑하지만 오만하고 자기 멋대로입니다. 무림성(武林城)의 골칫거리이나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건방지고 안하무인입니다." 주렴 속 여인의 음성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너의 주변인물은?" 청년의 대답 또한 시종 무감동이었다. "부친은 제 육대 무림성주(武林城主)인 무림왕(武林王) 용화천(龍華天)이며, 금비(金琵)와 은비(銀琵)라는 두 시비를 수족인 양 가까이 두고 있는데, 개중 금비의 성격은...."


주렴 여인이 청년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만 해라, 되었다." 청년은 시키는대로 즉각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주렴을 바라보는 그의 눈만은 아직도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원망(怨望)이 섞인 그 눈빛은 무언(無言)의 항변을 내비치고 있었다. 주렴 속 음성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명을 내렸다. "걸음을 걸어 봐라." 청년은 아무 말없이 지시대로 움직였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체념에 익숙져 있는 듯 그의 동작은 몹시도 침착했다. 그는 좌로 걷다가 방향을 틀었고, 벽에 막히자 다시 방향을 바꾸어 걸었다. 어찌 되었건 분명한 것은 그가 무엇도 거칠 바가 없다는 식의 거만한 보법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잠시 후. 주렴 속 여인이 날카롭게 지적했다. "용백검은 항상 왼쪽 팔꿈치를 약간 구부리고 걷는 버릇이 있다. 너는 그 점을 유의해야 한다. 시선은 약간 위쪽으로...." 청년은 처음으로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리고는 자못 한이 배인 음성으로 물었다. "어머님, 대체 언제까지 소자는 남의 흉내만 내고 살아야 합니까? 틀림없이 어머님의 소생인 저를 어찌 당신께선...." "시끄럽다!" 주렴 여인의 호통으로 인해 그의 말은 끊기고 말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음성에 비하면 그것은 약과였다. "누가 널더러 내게 어머니라 부르라고 했느냐? 나는 너 같은 자식을 원치 않았다고 말했지 않느냐? 호호호홋...! 나는 한 번도 너를 자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 자의 더러운 피를 받은 이상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어머니...!" 청년의 얼굴이 무참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다른 사람도 아닌 모친으로부터 부정 당하고 있는 그의 눈에는 순간적으로 무한한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주렴 속 여인은 크게 웃었다. "호호호호홋...! 너는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그래야만 내 자식으로 인정해 줄 수 있으니까. 출생이 그러하니 네 쪽에서 먼저 나를 어미로 받들어야 할 게 아니냐?" 청년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말보다 눈물이 앞섰을 것이므로. 그는 단지 마음속으로만 이렇게 부르짖었다. '아아! 당신이 아버님을 증오하시는 이유까지는 모릅니다만 제가 태어난 것이 그토록 죄가 된단 말입니까? 세상에 나고 싶어 난 자가 어디 있습니까? 무릇 부친의 정기와 모친의 몸을 빌어 나는 것이 상리(常理)일진대 왜 제게 모든 짐을 지우고 죄인처럼 추궁하려 드십니까? 제게 모정(母情)을 베풀기가 그리도 아까우시단 말씀입니까? 오랜 세월에 걸쳐 당신의 따뜻한 정을 그리며 혼자 무수히 눈물을 뿌려 왔건만...!' 거개의 사람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기만 할 뿐 그 깊이를 미처 헤아리지 못해 부모를 서운하게 만들기 일쑤다. 하지만 이들 모자(母子)는 그런 세상의 상식과는 정반대였다. 혈육의 정에 연연해 하는 자식에게 오히려 모친 쪽에서 살벌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 차가움은 의도적이 아니라 본의인 것 같았다. 자르듯 단호한 음성이 이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런 따위의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가 않아. 어차피 너는 앞으로 용백검이 되어야 하니까. 보다 더 철저하게 그로 위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옥(柳玉)이라는 네 이름마저도 버려야 한다.


용백검이 되어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그의 방식대로 행동해야 되는 것이다. 알겠느냐?" 청년의 이름이 아마도 유옥인 모양이다. 그는 비수로 가슴을 베인 듯한 느낌을 감싸 안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겠습니다. 어머...!" "또! 나는 네 어미가 아니라지 않았느냐?" "잘못했습니다." "으음, 이제 볼 일이 끝났으니 그만 성내로 돌아가도록 해라. 사흘 후에 다시 이 곳으로 오너라." 청년 유옥은 비감에 찬 눈으로 망연히 주렴을 응시했다. 그러는 사이, 바람도 없는데 주렴이 가볍게 흔들리더니 그의 모친이라는 여인은 환영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홀로 남게 된 유옥은 잠깐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장승처럼 서 있었다. 오래 전부터 겪어온 일이기는 했지만 그로서는 아무래도 감정 정리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입가에 툴툴 마른 웃음이 번졌다. '이 곳에서 벌어진 일을 천하에서 누가 알까? 더구나 어머님과 나의 이 비정상적인 관계는...?' 사실은 유옥 자신도 이 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적었다. 그는 왜 자신이 용백검이 되어야 하는지, 또 그렇게 하기를 종용하는 모친의 저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무서운 음모의 냄새를 풍기는 이 사건을 두고 주인공 격인 그는 별반 갈등도 없었다. '후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팔자에도 없는 무림성의 소성주(少城主)가 되겠군.' 물론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일이 품고 있는 심각한 문제성에 대해서만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운명의 힘이 그를 조이고 있는데 반해 그 자신은 물심양면에 걸쳐 그것을 거부할 만한 능력이 없는 것을. ② 황가철기점(黃家鐵器店). 낙양성(洛陽省)은 소위 천년고도(千年古都)라 일컬어지는 대도(大都)이다. 무엇이든 없는 것이 없었고 철기점만 하더라도 무려 수십 군데에 달했다. 그 크고 작은 철기점에서는 각종의 농기구를 비롯하여 병장기까지도 생산해 낸다. 규모가 큰 곳에서는 열 개 이상의 용광로를 설치하여, 제법 이름난 장인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엄청난 양의 철기들을 양산(量産)해 내기도 한다. 이 곳 황가철기점은 낙양의 철기점들 중에는 매우 작은 규모에 속했다. 위치도 낙양성의 외곽 지대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단 하나 뿐인 화로에서 고작해야 농기구나 싸구려 병기 따위를 만들어낼 따름이었다. 땅-- 땅땅--! 쇳소리가 부지런히 들려온다. 주인인 황칠(黃七)이 연출해낸 소리는 아니었다. 그는 이제 나이가 많아져 이전처럼 힘든 일은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최근에 봉(?)을 물었다. 얼마 전 한 명의 젊은 일꾼이 들어 왔는데 그 청년은 놀랍도록 일을 빨리 습득하더니 황가철기점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급부상 되었다. 지금 화로에서 시뻘겋게 단 쇳덩이를 집게로 꺼내 망치로 열심히 두드려 대는 것도 바로 그 청년이었다. 청년의 이름은 유옥(柳玉)이라고 했다. 황칠은 그가 들어온 이후로 할 일이 없어졌다. 일을 도맡아 해치울 뿐더러 솜씨까지도 일품이니 도시 참견할 건덕지가 없었다. 그 덕분에 철기점도 전날에 비해 부쩍 영업실적이 늘었다. 땅-- 땅-- 땅--! 청년 유옥은 땀을 흘리면서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현재 한 자루의 낫을 만들고 있었는데, 모르긴 몰라도 또 하나의 명품이 나오리라. 손재주도 그렇지만 늘 최선을 다하는즉 그가 만든 것은 무엇이건 품질이 우수했었지 않은가? 같은 쇠를 썼어도 그의 손에서 나온 작품들은 의례 견고하여 수명이 길었다. 근자에 황가철기의 줏가를 높여 놓은 것도 역시 이 점이 주효했기 때문이었다. '헤헤... 저 놈 덕분에 늘그막에 팔자가 폈지 무에야? 가만히 앉아 있어도 하루에 은자 사십 냥이 굴러 들어오니 말야.' 언제 작업장에 나타났는지 황칠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유옥의 뒤에 서서 그가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유옥은 별로 말이 없는 청년이었다. 하루 종일 그저 묵묵히 일만 했으며 그런 면이 황칠을 더욱 더 흐뭇하게 만들었다. '요즘 놈들은 약아 빠져서 일을 좀 배웠다 싶으면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가거나 월급을 인상해 달라고 나서곤 하는데 저 놈은 들어온지 한참이 지났어도 아무 소리도 없었다.' 중얼거리는 황칠도 약아 빠진 부류에 속하지는 않았다. 그는 부지중 고개를 끄덕이며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기특한 놈, 이번 달부터는 급료를 배로 올려 주어야지.' 그런데 이 때였다. "여봐라--!" 밖으로부터 부르는 소리가 굵직하게 들려왔다. 습관처럼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본 황칠의 눈에 막 철기점 안으로 들어서는 한 명의 중년인이 발견되었다. 그 자는 일신에 금삼을 입은 인물로써 한 눈에도 범상한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칠은 황급히 문 하나로 분리되어 있는 작업장을 빠져 나가 점방의 입구까지 직접 마중을 나갔다. "어서 오십쇼. 헤헤... 무엇이 필요하신지요?" 금삼인은 가까이서 보니 청수한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광채를 발하는 그 눈도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아서도 만인을 압도할 듯한 기상이 엿보이는 인물이었다. 금삼인은 잠시 철기점 안을 둘러 보더니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청년 유옥을 보고는 눈빛을 번쩍였다. "으음, 보아하니 이런 일이나 할 기골이 아닌 것 같은데...." 홀로 뇌까린 그는 손에 무엇인가 비단으로 둘둘 만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황칠을 향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내게는 한 자루의 보검이 있네. 날이 무디어져 갈아야 하는데 아직 그 일을 해 줄 사람을 만나지 못했네. 만일 내 보검을 갈 수만 있다면 그 대가로 은자 오백 냥을 주겠네. 어떤가? 이 곳에서 갈 수 있겠는가?" '오백 냥!' 황칠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오백 냥이라는 돈은 결코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요즘처럼 매상고가 높을 때에도 보름여를 모아야만 겨우 손에 쥘 수 있는 거액이다. 황칠의 입이 쩍 벌어지는 것을 보았는지 못보았는지 중년인은 여전히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네. 벌써 낙양성 내의 모든 철기점에 맡겨 보았지만 아무도 그 보검을 갈지 못했네." 황칠은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우선 무엇보다 그는 중년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말도 안된다. 세상에 갈리지 않는 검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낫을 만들던 유옥이 그들을 향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손님, 제게 그 검을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서로 거리는 약간 떨어져 있었으나 유옥의 얼굴을 정면으로 대하게 된 중년인의 눈에 언뜻 경이의 빛이 떠올랐다. 비록 땀과 먼지에 절어 있기는 했지만 짙은 검미와 선명한 오관에서 역시 강한 인상을 받은


모양이었다. 중년인은 유옥에게로 다가오더니 한 동안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의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물론이지. 여기 있네." 유옥은 비단꾸러미를 두 손으로 받아 바닥에 내려 놓았다. 꾸러미를 풀자 그 속에서는 한 자루의 장검이 나왔다. 검집은 눈에 띄는 흰색의 가죽으로 되어 있었으며 검자루 역시도 그에 어울리게 희디흰 상아로 만들어져 있었다. '으음, 희귀한 보검(寶劍)이로군.' 유옥은 내심 읊조리며 검을 두 손으로 받쳐 들어 보았다. 그의 눈에서 반짝하고 이채가 스친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검자루에 새겨진 글귀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부백(缶白)> 바로 그런 글이었다. 유옥은 즉시로 해석을 달았다. '부(缶)라는 글자는 장군(將軍)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검은 장군검인가?' 금삼의 중년인은 그 때까지도 계속하여 유옥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흠, 기이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군. 한낱 대장장이에 불과한 청년이 이토록 출중한 기상을 지니고 있다니....' 유옥은 천천히 검을 검집에서 뽑아 보았다. 츠으으-검은 잘 뽑혀 나오지 않아 유옥으로 하여금 별도로 힘을 쓰게 만들었다. 보검답지 않게 녹이 잔뜩 슬어 있었던 것이다. 검 전체가 시뻘건 녹으로 뒤덮혀 있는 것을 보자 곁에 있던 황칠도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맙소사! 보아 하니 무인(武人)인 듯 한데 대체 얼마나 검을 손질하지 않았기에 저 꼴이 되었을꼬?' 하지만 검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유옥의 대답인즉 이러했다. "나으리, 이 검은 녹이 슨 것이 아닙니다." "흐음?" 금삼인이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반문했다. "허허, 잘 못알아 듣겠군. 그 모양을 보고도 녹이 슬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유옥은 담담히 대꾸했다. "이 검을 덮고 있는 것은 녹이 아니라 피(血)올씨다." "피...!" 금삼인은 안색이 일변했다. "이 검에는 수많은 생명의 원혼들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 원혈(怨血)이 검의 빛을 가리고 있는 것이지요." "원혈이라...!" 금삼인은 되뇌이더니 정색을 지으며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미거한 소인의 이름을 아셔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자조가 깃든 유옥의 말에 금삼인은 호통을 쳤다. "이 놈! 이름을 대라면 얼른 댈 것이지, 어린 놈이 어찌 어른 앞에서 말을 트느냐? 고이얀 놈 같으니." 그의 얼굴에는 대뜸 서릿발 같은 기운이 어렸다. 그가 화를 내는 것이 단지 유옥의 어투 때문인지, 아니면 그 음성에서 느껴지는 씁쓸한 기운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허튼 소리를 하여 명검을 모독한 놈이 끝까지 말재간이나 부리려 들다니! 아무래도 경을 쳐야 네 놈이 말을 듣겠구나."


황칠이 벌벌 떨며 만류하고 나섰다. "나... 나으리, 부디 용서를.... 놈이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 철이 없습니다요. 제발 마음을 푸십시오." 그는 유옥에게 짐짓 눈을 부라렸다. "이 놈, 어서 나으리께 용서를 구하지 않고 뭘 하느냐?" 유옥은 추호도 거리끼는 구석 없이 잔잔하게 말했다. "소생은 이름을 감추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짐작컨대 나으리도 이 점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하고 계시는 듯 하니 따로 용서를 구할 일은 없으리라 사료됩니다." "건방진!" 금삼인은 여전히 격앙된 말투를 구사하고 있었으되, 유옥을 응시하는 그의 눈은 어느덧 사납던 기세를 풀고 있었다. 유옥이 그를 향해 빙긋 웃었다. "나으리께서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름없는 필부의 목을 치기는 쉬우나 그 마음만은 꺾기 어렵다는 것을. 이는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천장(天將)이라도 다를 바가 없지요." 금삼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네 놈은 노부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더냐?" 유옥은 고개를 젓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아니올씨다. 소생은 다만 이 검이 황제께서 장군에게 하사하신 어검(御劍)이라는 사실을 알아 보았을 따름입니다." "허어!" 기막혀 하는 금삼인에게 유옥은 종전에 비해 빠른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한 유명한 장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명성에 비해 평생에 걸쳐 단 두 자루의 검을 만들었을 뿐인데 오히려 그 때문에 당세에 이르러서도 모든 장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지요." 듣고 있던 황칠은 그야말로 안절부절이었다. '저 놈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자빠졌는 게야? 저러다 정말로 혼쭐이 나려고.' 그의 걱정이 한낱 기우(杞憂)였다는 것은 금세 판명되었다. 금삼인은 그의 예상과는 달리 노화를 터뜨리기는 커녕 오히려 눈을 빛내며 유옥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유옥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 장인은 한산철옹(寒山鐵翁)이라고 불리웠지요. 그가 만든 검은 부백(缶白)과 천문(天文), 두 자루였으며 그는 거기에 각기 염원을 담았습니다. 부백은 이른바 사검(死劍)으로써 악인을 멸하여 세상을 구하는데 써 달라 했고, 천문은 생검(生劍)으로 세상을 제도해 달라는 뜻을 묻어 두었습니다." "으음...." "훗날 부백은 황궁으로 흘러 들어가 황제의 손을 통해 역대의 명장(名將)에게 내려지게 되었습니다만, 아쉽게도 천문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유옥은 부백검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부백과 천문, 이 두 자루의 검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입니다." 금삼인이 호기심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그래, 어떤 전설이지?" "부백에 녹이 슬면, 아니 죽은 자들의 원혈이 깃들면 난세(亂世)가 도래한다는 것이지요. 천문이 나타나 의인(義人)의 손에 쥐어져야 그 난세를 극복할 수 있다고도 합니다." "흠, 재미있군." 가볍게 받아 넘기고 있었으나 금삼인의 안색은 결코 그렇지가 못했다. 전설대로라면 현세가 바로 난세라는 뜻이 아닌가? 그는 미간을 모으더니 유옥을 힐끗 바라보았다.


"너는 그 전설을 믿느냐?" 유옥은 부백검을 검집에 도로 집어 넣으며 미소 지었다. "소생이 믿고 안믿고가 대수이겠습니까? 저도 사실은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옛 이야기란 대개 전해져 내려오는 도중에 과장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희석이 되어지기도 하니까요." 어느 새 완전히 평정을 되찾은 금삼인이 다시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누그러진 그 음성에 유옥은 비로소 대답했다. "소생은 유옥(柳玉)이라고 합니다." 이어 그는 몸을 돌리더니 애초에 하던 일을 붙들었다. 땅-- 따땅--! 망치를 두드리는 그의 동작에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금삼인은 대화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은 물론,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뜰 줄을 몰랐다. 그 무거운 침묵에 가장 불편한 사람은 다름 아닌 황칠이었다. '대체 뭘 하자는 거지? 맹랑한 꼬마 놈 하나 놓고 계속 저러고 있으니....' 그로서는 바랄 것이라곤 단 한 가지 밖에 없었다. 속히 금삼인이 철기점을 떠나 자신을 질식할 듯한 불안과 공포로부터 놓여나게 해 주었으면 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금삼인이 품 속에서 하나의 비단 주머니를 꺼내더니 바닥에 툭 던졌다. "부백검을 갈지는 못했으나 녹이 슨 원인을 알았으니 오백 냥을 네 놈에게 주겠다. 부디 네 말대로 천문이 나타나 부백이 제 빛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유옥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금삼인에게 등을 보인 채 계속 일만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금삼인은 돌아섰다. 그는 밖으로 걸어 나가며 마치 유옥에게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읊조렸다. "내 언제고 네 놈을 다시 만나게 될 것 같구나." ③ "헤헤... 형은 또 직업을 바꾸었나요?" 가죽 조끼를 입고 하얀 털모자를 쓴 소년의 양 뺨은 사과처럼 붉었다. 치기 탓인지 귀엽고 깜찍한 미소년이었다. 유옥은 청하루(靑河樓)의 마굿간에서 갈기가 검은 말의 털을 솔질하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그가 소년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가을이었다. 수궁산(守宮山)에서 내려오는 소년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왜소한 체구에 자기 키만한 활(弓)을 메고는 어깨에 한 마리의 멧돼지를 척 하니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은 생김새답지 않게 사냥을 무척 즐겨했는데 솜씨도 일급이었다. 말을 잘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명궁(名弓)이기까지 하여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슥슥.... 유옥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솔질을 계속 했다. 소년의 말마따나 그는 황가철기점을 그만 두었다. 주인인 황칠이 애걸복걸을 하면서 월급을 다섯 배나 올려 준다고 했는데도 그는 딱 잘라 거절하고 낙양성에서 두 번째로 큰 주루로 거처를 옮겨 마부(馬夫)가 되어 있었다. 아니다. 실은 소년이 아는 것만 쳐도 유옥은 지난 석달 동안 직업을 장장 다섯 번이나 바꾼 바 있었다. "왜죠? 한 가지 일만 오래 하면 재미가 없나요?" 소년은 마구간의 말뚝 위에 걸터 앉아 손으로 턱을 고인 채 귀찮으리 만큼 자꾸 묻고 있었다. "후후...." 유옥은 소리내어 웃더니 반문했다. "너는 무엇 때문에 내게 관심을 갖는 것이냐? 내가 마부가 되건, 대장장이가 되건 너와는 아무 상관도


없지 않느냐?" 소년은 펄쩍 뛰었다. "그 무슨 섭한 소리를!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유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우린 친구가 될 수 없으니까." 해사하던 소년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어째서죠?"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소년의 얼굴이 충격을 받은 듯 몹시도 흔들렸다. "그럼... 역시 신분 때문에...?" 유옥은 검은 말의 손질을 마치고 다른 말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는 다시 말의 털을 손질하며 담담히 대꾸했다. "장군부(將軍府)의 공자(公子)면 거기에 걸맞게 행동해라. 일개 마동에 지나지 않는 나는 뭣하러 따라 다니느냐?" "어떻게 내게 그렇듯 심한 말을...." 소년은 정말로 서운했는지 안색을 은은하게 붉혔다. 유옥은 돌아다 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네가 나를 진심으로 대해 주었다는 것만은 잘 안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보아라. 장차 너는 무가(武家)의 대를 이어 장군이 될테고, 나는 고작해야 장사꾼이나 장인쯤 되겠지. 그 때에 이르면 나는 네 앞에서 허리도 제대로 펼 수가 없을 거야." "쳇! 사내가 되어 가지고 쫀쫀하게 자격지심은?" "쫀쫀?" 유옥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하는 것을 보며 소년은 투덜거리다 말고 활짝 웃었다. "흥! 그런 걱정이라면 하지 않아도 돼요. 그 때 가서도 여전히 형은 형이고, 아우는 아우일 테니까." "마음은 고맙다만 남들이...." 유옥의 말을 소년이 끊었다. "흥! 남들이 무슨 상관이람? 당사자들이 문제지." 이렇게 되면 소년을 쫓아 버리려던 유옥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 셈이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무튼 나는 너와 한가하게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오늘 중으로 삼십 마리의 말 손질을 끝내야 한단 말이다." 소년이 깔깔 웃으며 말뚝에서 뛰어 내렸다. "좌우간 걱정도 많다니까. 내가 도와 주면 되잖아요?" 뭐라 더 말할 틈도 없었다. 소년은 대뜸 팔뚝을 둥둥 걷어 부치더니 물통을 들어 올려 말을 향해 휙 뿌렸다. 히히히힝--! 졸지에 차가운 물벼락을 맞은 말이 깜짝 놀라 앞발을 번쩍 치켜 들더니 앞으로 내달리려 했다. 유옥이 당황하여 말리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두두두두--! 인간에 비해 사고력이 모자란 말은 상황판단을 못하고 그대로 냅다 쏘아져 나가고 말았다. "하하하하...!" 소년은 멍청하게 치달리는 말과 난색을 짓고 있는 유옥을 번갈아 쳐다보며 재미있다는 듯 폭소를 터뜨렸다. 소년의 몸이 이내 비조처럼 움직였다. 일단 움직이자 그는 어느 새 말꽁무니에 바짝 매달려 있었다. "하하하... 이 놈! 서라."


연방 웃어대는 소년의 얼굴은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밝기만 했다. 유옥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만치 그는 소년에 대해서라면 잘 알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이려!" 소년은 신명이 올랐는지 한 바탕 곡예를 벌였다. 허공에서 빙글 회전하는가 싶더니 멀쩡하게 말등에 올라탔고, 이와 동시에 그의 팔은 말의 목을 힘껏 조이고 있었다. 히히히힝--! 꼼짝없이 소년에게 붙잡힌 말은 그를 떨쳐내려 몇 번인가 용트림을 했지만 결국은 신형을 멈추고 말았다. 마구간이 후원에 있다는 것은 실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이런 소동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달려 나오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소년이 말을 몰고 다가오자 유옥은 씨익 웃었다. "해아(海兒), 그래 봐야 소용없을 것이다. 나는 네 놀음에 응해줄 생각이 없으니까. 그만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소년 해아는 입술을 삐죽였다. "정말 중요한 게 해결이 안되는군요." "그게 뭔데?" "난 심심하단 말이에요." "아! 그 정도는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지." 유옥이 소년을 향해 들고 있던 솔을 집어 던졌다. 휙! "아이쿠!" 철퍽하는 소리와 함께 해아는 오만상을 다 찌푸렸다. 오물이 잔뜩 묻어 있던 솔을 받게 되자 더러운 물이 의복은 물론 얼굴에까지 튀었던 것이다. "에페페...!" 해아는 얼떨결에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 댔다. 그러자 그의 얼굴은 오물이 번져 더욱 가관이 되고 말았다. "하하하하...!" 이번에는 유옥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유옥과 미소년 해아. 두 사람의 우의(友誼)는 기묘한 파고를 그리며 이루어져 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우선 그들 사이에는 공통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현재의 위치나 출신 성분 뿐만이 아니라 성품이나 기질 등을 비교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그들에게는 희한하게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유수의 가문에서 나고 자랐으면서도 그에 따라 요구되는 형식이나 예의 따위는 일체 도외시하는 해아, 그런가 하면 유옥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수많은 직업을 전전하면서 낙양성의 알려지지 않은 명물로써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어쩌면 이 점이야말로 서로 다른 그들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인연의 고리인지도 몰랐다. 장차 기인(奇人)으로써의 소지가 다분히 엿보이는.... 좌우간 유옥은 그 간에 어느 직업이고 한 달 이상 매달려 있어 본 적이 없었다. 마굿간 다음에 또 그를 어느 곳에서 볼 수 있을지는 그 자신 외에 아무도 알지 못했다. ④ 안산(岸山). 낙양성 인근에 있는 야산(野山)이다. 경관도 신통치 않거니와 숲도 듬성듬성하니 볼품이 없어 문자 그대로 야산에 불과하다.


낡은 토지묘(土地廟). 사각사각.... 뭔가 낮은 음향이 계속하여 울리는 가운데 숭숭 뚫린 벽 틈새로 햇볕이 스며들고 있다. 유옥. 사각이는 음향은 그의 손이 섬세하게 움직임에 따라 비롯되고 있었다. 하나의 나무토막이 그의 수중에서 점차 어떤 형태를 갖추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햇빛에 드러나는 유옥의 모습은 여전했다. 대장간이나 마굿간 등에서도 그랬듯 장시간에 걸쳐 묵묵히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그의 손에는 지금 풀무질을 하던 망치나 말의 몸을 쓸어 주던 솔 대신 한 자루의 소도(小刀)가 쥐어져 있었다. 이번에는 목공이라도 되어 있는 것일까? 소도의 움직임에 따라 나무 토막은 서서히 사람의 형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것은 남자상(男子像)이었다. 몸체가 완성되어 가는데 반해 얼굴 부분은 전혀 조각이 되어 있지 않았다. 유옥은 미완성의 조각품을 내려다 보며 한숨을 지었다. "나의 아버님은 대체 어떤 분이실까?" 그의 말대로라면 그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는 직업이 아니라 심상(心想)의 자연스러운 표출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얼굴 부분이 새겨지지 않은 조각을 수중에서 계속 만지작거리며 음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뵙고 싶다. 어머님이야 어찌 생각하시던 내게 있어서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그리운 분...." 유옥의 얼굴에는 서글픔이 매달렸다. "어릴 적부터 어머님은 아버님에 관한 한 오로지 험담과 저주만을 늘어 놓으셨다. 심지어 그 분의 얘기를 하다가 흥분한 나머지 나를 마구 때리신 적도 있었지." 그의 입가에는 쓰디 쓴 웃음이 어리기도 했다. 그는 불행한 기억들을 지우려는 듯 눈을 내리 감았다. 그러나 그의 두뇌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연신 과거를 더듬어 그의 가슴 속에서 읊조림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철이 들어 가면서 내 처지는 더욱 비참해졌다. 어머님은 나를 아무 데나 맡겨 둔 채 일 년이고 이 년이고 어디론가 떠났다가 돌아 오시곤 했다. 나는 그 때마다 객점의 하인이 되거나 상점의 심부름꾼이 되어 천대 받는 생활을 했다.' 지난 세월의 일들은 되돌아 보아야 전부 상처 밖에 되지 않을 것들이었다. 유옥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그 일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안면 가득 비감(悲感)을 떠올렸다. 히히히힝--! 불현듯 밖에서 말울음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동시에 맑은 외침이 그의 고막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옥형! 이런 날 그 안에 틀어 박혀 뭘 해요? 빨리 나와요." 유옥의 입술 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후후... 또 해아가 찾아 왔군.' 그는 조각을 품 속에 갈무리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줄곧 마음이 침중하게 가라앉아 있던 탓일까? 오늘따라 해아의 웃음은 햇살보다 더욱 더 눈이 부셨다. 그가 유옥을 마구 부추키고 있다. "헤헤... 날씨가 좋아요. 이런 날에는 사냥이 제 격이죠." 해아는 잡털 한 올 섞이지 않는 백마를 타고 있었는데 옆에 한 마리의 흑마를 대동하고 있었다. "어서 타요. 하하... 내가 형을 초대하는 거예요. 구겨져 있지 말고 나와 나란히 달리며 사냥이나 하자구요."


유옥은 흑마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가슴 속에서 호기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좋아!" 그는 선뜻 답하고는 흑마 위에 훌쩍 올라탔다. 히히히힝--! 흑마는 그가 앉자마자 힘차게 울며 앞발을 치켜 들었다. "이랴!" "하앗!" 두두두두--! 각기 다른 두 마디의 외침을 필두로 두 필의 말은 곧장 앞으로 내달았다. 그로 인해 기분이 한결 나아진 유옥은 말의 옆구리에 박차를 가하며 내심 뇌까렸다. '이 정도 즐기는 것이야 어떠랴? 나는 아직 젊다. 이대로 썩어 가기에는 아깝단 말이다. 자격이야 있던 없던...!' "하아!" 그는 입술을 고집스럽게 다물고는 말을 몰아갔다. 옆에서 해아가 채찍을 휘두르며 그에게 소리쳤다. "형은 서쪽으로 가요! 나는 동쪽으로 가겠어요. 도중에 노루나 멧돼지를 발견하면 불암곡(佛岩谷)으로 몰아 와요. 알겠지요?" "하하... 그러지." 유옥은 낭랑한 웃음을 전하며 서쪽으로 우회해 달려갔다. 실로 오랫 만에 있은 일이었다. 이처럼 허공을 나는 듯한 기분이 되어 본 것은. 그리하여 그도 오늘 하루 만은 만사 다 잊고 마음껏 사냥을 즐겨 보겠노라고 다짐했다. "이랴--!" 그는 마상에서 전후좌우로 시선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의 손에는 예의 소도가 움켜 쥐어져 있었다. 짐승을 발견하는대로 날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유옥도 이번 만큼은 인심(?)을 써 해아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해아는 그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했으므로 그가 사냥은 커녕 닭 한 마리 못 잡으리라 생각할 게 뻔했다. '후후... 이 작은 칼 하나로도 나는 해아보다 짐승을 두 배는 더 잡을 수 있다. 해아가 어떤 표정이 될지 궁금하군.' 그는 근역에서 짐승의 자취를 발견할 수 없자 말고삐를 늦추며 사방을 살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얼마 쯤을 더 나아갔을 때,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우측의 숲이 가볍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옳지! 걸렸다.' 유옥은 즉시 말머리를 숲 쪽으로 돌렸다. '토끼인가? 아니면....' 두두두--! 아니나 다를까? 그의 기세를 눈치 채고 숲으로부터 튀어 나오는 덩치 큰 놈이 있었다. 꾸워억! 괴성을 지르는 그 놈은 다름 아닌 멧돼지였다. 유옥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는 멧돼지를 따라 달리며 소도를 치켜 들었다. 사실상 소도는 그가 항상 지니고 다니던 것으로써 길이라야 한 뼘 밖에는 되지 않았으나 어떤 병기보다 믿음직스러운 물건이었다. "하하... 너는 오늘 임자를 잘못 만났다. 운이 없어서 그런즉 나를 탓하지 말거라." 마침내 유옥의 수중에서 소도가 날아갔다. 쐐애액--! 햇살을 받아 한 가닥 섬광이 허공을 가르자 멧돼지는 그대로 무력하게 거꾸러지고 말았다. 꾸웨애액...!


멧돼지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유옥은 손을 슬쩍 당겼다. 팍--! 한 줄기 피가 허공으로 솟구치는가 싶은 순간, 소도는 다시금 그의 수중에 들어 왔다. 알고 보니 거기에는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끈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유옥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쓰러진 멧돼지를 말등에 실었다. 그는 호탕한 기분이 되어 동쪽으로 달려갔다. 제 2 장 뜻밖의 인연(因緣)들 ① 불암곡(佛岩谷). 이 곳은 대둔산(大屯山)에 속한 계곡 중 하나로써 몹시도 특이한 지형을 이루고 있었다. 계곡에 높이가 백 장이 넘는 암벽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거대한 불상(佛像)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수백 년 전에 한 석공이 일평생을 바쳐 새겨 놓았다고 하며 그것 때문에 이후로는 명소가 되었다. 암벽 전체를 뒤덮다시피한 불상의 조각들은 도합 일천 개였고 그 사이마다 수많은 암동이 뚫려 있었다. 애초 그 동부는 주로 면벽을 하는 승려 등이 사용했었으나 명(明) 초엽(初葉) 명군에게 쫓기던 백련교도(白蓮敎徒)들이 숨어 들고부터는 양상이 사뭇 달라졌다. 그것은 당시의 명군이 체제에 반기를 든 백련교도들을 척결한답시고 고행승들까지 몰살시켜 버렸기 때문으로, 그 뒤로는 아무도 동부에 들려는 자가 없었다. 늘 그렇듯 불암곡은 고요하기만 했다. 유옥이 그 정적을 깨며 곡내(谷內)로 들어섰다. 소년 해아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는 천천히 말을 몰며 계곡 안을 살폈다.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깊숙히 접어 들었다. 왜냐하면 벌써 입구에서부터 계곡의 안 쪽을 향해 짐승의 핏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었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이것은 해아가 먼저 들어와 있다는 표식이다.' 그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해아가 탔던 백마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유옥의 입가에 한 가닥 미소가 어렸다. '쯧! 또 장난을 치는군.' 그는 말에서 내려 백마의 곁으로 다가섰다. 백마가 그를 알아 보고 히힝거렸다. "네 주인은 어디 숨었느냐?" 유옥은 묻고도 피식 웃었다. 말이 대답을 할 리 만무이므로. 어쨌거나 와중에도 그는 말잔등을 살피고 있었고 거기에 묻어 있는 핏자국을 발견해 내기에 이르렀다. '흠, 사냥감을 가지고 숨었다면....' 유옥은 주위의 지면을 유심히 관찰해 나가다 곧 얼굴에 웃음을 가득 피워 올렸다. 기어이 지면으로부터 앞서 보았던 핏자국을 찾아냈던 것이다. '처음보다 엷어져 있어 찾기가 힘들었지. 후후....' 그는 눈을 들어 암벽에 뚫려 있는 동굴들을 응시했다. '네가 숨어 봐야 고작 저 암동 중 한 곳이겠지.' 핏자국을 따라가 본즉 유옥의 예상은 들어 맞았다. 그는 친절한(?) 그 안내역에 힘입어 한 암동에 이를 수 있었다. 암동은 겉에서 보기와 마찬가지로 안 쪽이 무척이나 어두웠다. 유옥은 입구에서 해아를 부를까 하다가 이내 생각을 바꾸어 직접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쯤을 걷자 그의 귓전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신음소리...?'


유옥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그 신음성은 바로 해아의 것이었다. 이쯤 되니 장난이고 뭐고 없었다. 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큰 소리로 불러 보았다. "해아! 해아--!" 그 음성에 대답하는 것도 역시 신음성이었다. "으으음...." 더구나 그것은 금시라도 잦아들 듯 가냘프기 그지 없어 뭔가 사태의 긴박함을 전하고 있었다. 유옥은 급히 품을 뒤져 부싯돌을 꺼내 들고는 그것을 마찰시켰다. 딱! 따악! 일시적으로 일어난 빛이 암동 안을 밝혀 바닥에 짚이며, 마른 나뭇 가지들이 깔려 있는 것을 알려 주었다. 유옥은 마른 나무 가지에 짚을 말아 불을 붙여 들고는 암동 안으로 더 깊숙히 진입해 갔다. 불빛 덕에 시야가 확 트여 행보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암동은 생각보다 훨씬 길었다. 그로부터 잠시 후. "해아!" 유옥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 앞에는 암동의 끝이 나타났는데 그 바닥에 해아가 엎어져 있는 광경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짚을 모아 불을 크게 붙인 후, 해아에게로 달려갔다. 유옥의 몸이 흠칫 굳어졌다. 그의 눈 또한 믿지 못할 현상을 본 듯 크게 부릅떠져 있었다. "이럴 수가!" 유옥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소년 해아, 아니 이제껏 그렇게 알고 있던 그는 무엇 때문인지 괴로운 듯 마구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유옥이 넋을 잃을 정도로 놀란 이유는 전혀 다른데 있었다. 해아는 몸부림 덕분인지 의복이며 두발이 모조리 헝클어져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즉 사내가 아니었던 것이다. 본시 머릿결이 아름답다고는 생각했으나 하얀 털모자가 벗겨져 나가 마음껏 출렁이니 색감이 평소와는 완연히 달랐다. 그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가슴 쪽에 있었다. 어느 틈엔지 가죽 조끼는 벗겨져 나가 버렸고 그로 인해 풀어진 앞섶 사이로 분홍빛 내의가 살짝 비쳐 보였다. '해아가 여인이었다니!' 그것은 가히 충격이었다. 사실상 유옥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해아가 여인이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렇군! 지금 중요한 것은 해아가 남자냐, 여자냐가 아니다. 대체 어디를 어찌 다쳤기에...?' 유옥은 해아의 상태를 살펴 보기 위해 몸을 굽혔다. 하지만 그는 다시 굳어지고 말았다. 때마침 해아가 뜻밖의 부르짖음을 발했기 때문이었다. "아아... 옥(玉)오빠...." 유옥은 마치 둔기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 맞는 기분이었다. '맙소사! 내게 오빠라고?' 어디 그 뿐인가? 해아는 허공을 휘젓던 손으로 그의 목을 와락 휘감아왔다. "해아!" 유옥은 아연실색했다. 해아의 몸은 닿고 보니 불덩이가 되어 있었고 입술로는 연신 뜨거운 김을 훅훅 뿜어내고 있었다. "이게 대체...!" 그는 너무도 황당하여 말을 이어갈 수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을 한


번도 염두에 두어 본 적이 없으므로 대처 방안도 물론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일단 바짝 밀착해 오는 해아의 몸부터 떼어내려 했다. 무엇보다 풀어 헤쳐진 그녀의 가슴이 얼굴을 압박해 오니 난감하기도 했거니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옥은 좀체로 의도한 바를 이룰 수가 없었다. 한껏 달구어진 해아의 몸은 아교처럼 달라 붙어 도통 떨어져 나가주지 않았다. 떼어 놓으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무서운 힘으로 그를 조여 오고 있었다. 이쯤 되자 유옥의 뇌리에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혹시...?' 그는 우선 해아의 연마혈을 짚었다. "으음." 해아는 맥없이 축 늘어졌다. 유옥은 그녀의 몸을 조심스럽게 살펴 보았다. 앞섶이 풀어져 뽀얀 젖무덤이 드러나 있다. 그 바람에 그가 가슴이 울렁거려 대체 몇 번이나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던지.... 이윽고 그는 해아의 왼쪽 다리 부분 쪽 옷이 찢어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찢어진 옷자락을 걷어 보았다. 과연 그녀의 옥같이 하얀 종아리에는 붉은 상처가 나 있었다. 무엇에 물렸는지 가느다란 이빨 자국이 있었던 것이다. 유옥의 안색이 일변했다. '뱀...!' 바로 그 찰나였다. 쉭! 쉬이익! 등 뒤에서 괴이한 음향이 들려 왔다. 유옥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러자 무엇인가 전광석화처럼 그의 얼굴을 향해 쏘아져 오는 것이 있었다. "엇!" 그는 엉겁결에 팔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동시에 손목이 따끔하는 느낌이 들자 그는 아차 싶어 손을 움켜 쥐었다. 그의 수중에는 어느덧 촉감이 불쾌하고 미끈덩한 물체가 잡혀 있었다. 그것을 살펴 본 그는 크게 놀랐다. '뱀은 뱀인데...!' 그의 미간이 절로 찌푸러 들었다. 왜냐하면 그로서도 그렇게 괴이한 뱀은 난생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뱀은 굵기가 손가락 정도에 길이도 겨우 한 자 남짓이었는데 삼각형을 이룬 머리 한복판에는 붉은 색의 뿔이 나 있었다. 더구나 그 뱀은 허공을 날아 그에게 달려 들지 않았는가? 괴사는 그의 손에 잡혀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유옥은 기분이 나빠져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팍! 뱀의 몸뚱이는 대번에 으스러지고 말았다. 비릿한 냄새와 함께 뜨거운 핏물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내렸다. 유옥은 구역질이 치민 나머지 뱀의 사체를 동굴의 한 귀퉁이로 내던져 버렸다. 하지만 사태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뇌리에 한 가닥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유옥은 이 년 전 한 약포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덕분에 그는 약재에 대해서도 꽤 높은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었다. 어쨌거나 당시에 그는 우연히 한 권의 기서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속에서 보았던 한 구절을 기억해 낸 것이었다. 일명 기금이초록(奇禽異草錄)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거기에는 각종 기수(奇獸)와 영초 등에 관한 것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독사(毒蛇)에 관해 적혀 있는 부분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었다. <음양독각비사(陰陽獨角飛蛇)는 천지간에 음성(淫性)이 가장 강한 독사다. 전신이 초록빛을 띄고 있으며 머리에 하나의 뿔이 나 있고, 또 공중을 날아 다니기도 하는 괴사이다. 그것은 암과 수의 성질이 한 몸에 있어 스스로 교배를 하는 동물로써 그 뱀에게 물리면 지독한 최음(催淫) 상태에 빠지게 된다. 해독방법은 오직 남녀의 음양화합 밖에는 없다. 최음작용 때문에 자칫 남녀 모두 탈진하여 죽을 수도 있지만 이를 극복하는 방도도 있 기는 하다. 그것은....> ② 유옥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휴우! 하필...." 그는 입술을 질겅 씹으며 기금이초록에 실려 있던 문구들을 계속 떠올려 보았다. <음양화합을 치르고도 멀쩡하려면 음양독각비사의 피를 복용해야 한다. 그 뱀의 피는 원래 정력을 충만하게 하는 효능이 있어 고래로부터 방중강장제로 쓰여 왔다. 하룻밤에 수십 번을 관계해도 정기가 고갈되지 않으니....> 유옥은 전신에서 스멀스멀 열기가 이는 것을 느끼며 입가에 고소를 지었다. '결국 어떻게도 피할 수는 없단 말인가?' 그의 단전어림에서는 벌써 욕망의 징후가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어쩌겠는가? 그 역시도 음양독각비사에 물린 것을. 그에게 주어진 상황은 설사 부처라 해도 도리가 없으리라.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 음욕은 곧 그의 전신혈관을 가열시켜 놓아 그로 하여금 이성을 잃어 가게 만들었다. "으음...." 유옥은 낮게 신음을 발하는 한편, 눈을 돌려 해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연마혈이 짚힌 덕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해아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능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얼굴이 온통 붉게 달아 있을 뿐더러 노출된 피부에 혈관이 툭툭 불거져 나와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듯한 위기감을 내보이고 있었다. 유옥의 시선은 해아의 반쯤 열어 젖혀진 앞가슴으로 향했다. 그는 무섭게 팽배해가는 욕망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평소의 자제력은 다 어디로 갔는지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욕망때문에 머리가 터져나갈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이를 악물고 한 일이란 고작해야 한 쪽에 집어 던졌던 음양독각비사를 취하는 것 뿐이었다. '할 수 없지. 이건 참아서 해결될 수 있는 사태가 아니다. 해아를 살리고, 나 또한 살려면 이 방법 밖에 없다.' 유옥은 한 가닥 남은 의지를 빌어 음양독각비사의 피를 마셨으며 실신지경인 해아의 입에도 흘려 넣어 주었다. 그 비릿한 핏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을 끝으로 그는 끝내 욕망의 노예로 화하고 말았다. 언제 해아의 몸 위로 올랐는지, 또 언제 그녀의 연마혈을 풀게 되었는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미안하다. 해아...." 유옥의 입에서 새어나온 이 중얼거림은 아마도 어느 순간에도 그의 내면에서 사라지지 않는 양심이 말한 것이었으리라. "흐으으...!" 몸이 자유롭게 된 해아는 전신을 파르르 떨며 그의 품 속으로 파고 들었다.


부우욱! 의복이 거칠게 찢겨져 나갔으나 그녀가 보여준 반응은 실로 놀라왔다. 그 손길을 거부하기는 커녕 오히려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돕고 있었다. 껍질이 제거되자 그녀의 눈부신 속살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남장을 하고 있을 때의 해아는 미소년 쯤으로 여겨질 만큼 어려 보였으나 막상 벗고 보니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지니고 있는 여성으로써의 본질은 성숙할대로 성숙해 있었던 것이다. 소담스런 앞가슴은 탄력이 넘쳤으며 살결이 어찌나 매끄러운지 그야말로 비단결 같았다. "하아...." 유옥의 손이 젖가슴을 움켜 쥐자 해아는 입을 크게 벌리며 몸을 뒤틀었다. 유옥은 탐욕스럽게 그녀의 입술을 점하더니 손으로 뜨거운 여체의 깊숙한 곳을 더듬어 내려갔다. 무릇 남녀의 본능이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절로 터득하게 마련이다. 유옥과 해아는 마치 서로에게 익숙하기라도 한 듯 한 덩어리가 되어 격렬하게 뒹굴었다. 음양독각비사의 음독에 중독된 그들은 두 개의 불덩이였다. 그들이 뿜어낸 열기는 삽시에 암동 전체를 가득 메웠다. 그것이 운명의 전주(前奏)인지도 모르는 채. 타다닥.... 모닥불빛은 포근했다. 유옥은 그런 감을 느끼면서도 난감하여 입도 벙긋할 수가 없었다. 열풍이 지나간 후, 그는 상대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예기치 못했던 정사(情事)는 그를 더 없이 고심과 번뇌에 빠뜨렸고, 그는 이 상황에서 도무지 속수무책이었다. '해아는 이 일을 어찌 받아 들이고 있을지....' 유옥이 염려하는 것은 무엇보다 바로 그 점이었다. 덕분에 그의 영준한 얼굴에는 딱히 모닥불빛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짙은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의 무거운 심정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으로부터 해결 국면을 맞이했다. 하나의 작은 손이 뻗어와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던 것이다. "옥오빠." 유옥은 흠칫 하여 돌아다 보았다. "깨어... 났느냐?" 그의 어색한 어투에 해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제가... 싫은가요?" 표정과는 달리 그녀의 음성은 물기를 머금은 듯 축축히 젖어 있었다. 이어 그녀는 입술을 잘근 씹었는데, 그 행위가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는 안간힘이라는 것 쯤은 유옥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 해아는....' 유옥은 해아가 평소에 어떤 여인이었던가를 떠올렸다. 그녀로 말하자면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감쪽같이 변장을 하고 자신의 주위를 맴돌던 여인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녀의 자기절제만은 세상 누구도 따르지 못할 터였다. 그는 해아 앞에서 섣부르게 감정을 노출시키는 짓 따위는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해아." 유옥은 심중에 담겨 있으되 풀려 나오지 못하는 말들을 대신하여 얼굴에 닿아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느낌이 정녕 좋구나. 여인의 손은...." "오빠!"


해아의 매끄러운 동체가 그의 품에 스르르 안겨 왔다. 유옥은 그녀를 당겨 안으며 처음으로 그녀가 귀여운 어린 짐승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의식은 어쩌면 여인에 대해 남자들이 갖게 되는 보호본능인지도 몰랐다. '가엾은....' 고통과 유사한 감정이 은은히 가슴을 저며오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자의에서건 아니건 졸지에 자신에게 정복당한 한 여인에 대해 그는 연민지심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해아가 그의 귀에 대고 나직히 속삭였다. "난... 후회하지 않아요." 제법 야무진 그녀의 음성이 유옥의 마음을 더욱 더 헤쳐 놓았다. 그 말에 담긴 뜻을 즉시 알아 차렸던 것이다. "그건 나도 그렇다, 해아. 다만...." 유옥은 그녀의 탐스럽고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네가 걱정이 되는구나. 알다시피 나는 보잘 것 없는 위인이고, 그에 반해 너는...." 해아가 고개를 반짝 치켜 들며 그의 말을 막았다. "그만 해요! 전에도 말했지만 저는 신분 따위로 옥오빠와 딴 세계에 존재하기는 싫어요. 설마... 그 때처럼 그것을 구실로 저를 따돌리려고 하는 건 아니겠죠?"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천진하던 개구장이의 모습이 남아 있 었다. 그것이 처연하고 청순해 보이는 본색과 어우러지자 유옥은 그녀에게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끌려드는 것을 느꼈다. "염려 마라. 절대 그런 사태는 없을 테니까." 그는 그녀의 발그레한 뺨에 입을 맞추었다. "너의 마음이 변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아아! 옥오빠...." 두 사람의 벗은 몸은 방금 전보다 더욱 더 바짝 밀착되었다. 서로 마음이 확인되자 자연스럽게 그리 된 것이었다. 그 상태에서 해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그 동안 본의 아니게 오빠를 속여 왔어요. 절 용서해 주겠지요?" 유옥은 손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남장을 했던 일 말이냐?" "네." 해아의 음성이 잔뜩 기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유옥은 소리내어 웃었다. "후후... 물론 용서할 수 없지. 빼어난 미모를 철저하게 감추고 내게는 보여 주지도 않았으니." "몰라욧!" 해아는 그의 가슴에 뺨을 비비며 수줍은 듯 말했다. "별 수 있나요? 오빠와 함께 지내려면. 제가 여자라는 것을 알았다면 오빠는 그나마 어울려 주지도 않았을 텐데요." 유옥은 또 웃었다. "네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후후... 만약 해아가 이렇게 예쁜 줄 알았다면 내 쪽에서 매일 쫓아다녔을 걸?" 이번에는 해아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는 문제가 일어났다. 이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그들은 껴안은 상태에서 와락 겹쳐 누웠다. "아아...!" 해아의 입에서 달뜬 신음성이 터져 나왔으나 이내 그녀의 입술은 유옥의 뜨거운 입술 세례에 점령 당하고 말았다. 두 사람은 이렇듯 급작스레 뒤엉켜 돌아갔는데, 그 이유는 음양독각비사의 음독이 그들의 체내에서


다시금 발작을 일으켜 놓았기 때문이었다. 먼젓 번과 차이가 있다면 두 사람의 행위가 보다 농밀해졌다는 정도일 뿐, 두 개의 젊은 육체는 상상도 못할 만큼의 정력(精力)으로 불살라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둘다 의복이라는 제약에서도, 의식의 장벽에서도 완전하게 해방된 상태인지라 거칠 것이라곤 없었다. '사랑해요!' 해아는 내심 이 말을 몇 번이나 부르짖었는지 모른다. 정신에서만 존재하던 것을 몸의 모든 감각을 통해 열렬히 받아들이며 그녀는 거의 황홀경을 헤매고 있었다. 유옥 또한 다르지 않았다. '해아, 너는 내 여자다. 이제부터 영원히...!'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 무엇도 소유해 본 적이 없는 그는 아우성쳐대는 여체에 폭발하듯 정염을 퍼부으며 가히 감동과 맞물리는 느낌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두 남녀의 행위에는 피차에 인생전반을 지배하게 될만치 큰 의미가 있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두 사람 다 남녀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백지인 채로 초련(初戀)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③ "그 계집과의 관계를 끊어라." 유옥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왜입니까?" 주렴 속 여인은 노성을 발했다. "몰라서 묻느냐? 너는 용백검이 되어야 한다. 그가 되기 위한 과정 외에는 어떤 행동도 용납할 수 없다." "용백검, 용백검! 다 좋습니다. 제가 남의 분신이 되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견뎌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옥은 생전 처음으로 여인의 앞에서 화를 냈으되, 끝까지 말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가슴 속에서 분노가 끓어 올라 말문이 절로 막혀 버렸기 때문이었다. 흥분해 있는 그와는 달리 여인은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명을 거역할 셈이냐?" 추호도 흔들리지 않는 싸늘한 음성이다. "어머니...?" 무엇을 생각했는지 유옥의 음성이 떨려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여인의 말은 그의 짐작과 틀리지 않았다. "네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별 도리 없지. 그 계집 쪽을 처리 하는 수 밖에. 그래도 괜찮겠느냐?" "그녀를 어떻게 하시려고...?" 유옥은 머릿 속에 떠오르는 끔찍한 상상들을 차마 입에 담지도 못했다. 주렴여인은 의사가 정확히 전달되었다는 것을 알았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덧 유옥은 눈알이 벌겋게 충혈된 채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질겅 씹었다. '더 물을 것도 없다. 해아는 죽게 될 것이다.' 그는 그야말로 눈 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에게 주렴여인은 냉혹하게 잘라 말했다. "너는 그 동안 시키는대로 무엇이든 잘 해냈다. 그러다가 이제 와서 일을 망쳐 버릴 셈이냐?" 유옥은 대답하지 않았다. "앞으로 반 년 후면 너는 무림성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전에 몇가지 해야 할 일이 있느니라." 스스.... 주렴 속으로부터 무엇인가 둥실 떠서 날아왔다. 받아 보니 그것은 한 권의 얇은 책자였다. "그 속에는 용백검의 무공들이 적혀 있다. 너는 남은 육개월 동안 그것들을 전부 익혀야 한다."


여인은 요구만을 내밀고는 짧게 덧붙였다. "명년 삼월 십일에 다시 오겠다. 그 때까지 지시한 사항들을 완수하고 기다리고 있도록 해라." 단지 그 뿐이었다. 의례적인 인사도 없이 말이 끝나 버리자 주렴 안은 벌써 텅 비어 있었다. 유옥의 얼굴에서는 노기가 가시지 않았다. 그의 의사와는 별개로 운명의 날이 정해졌고, 이로 인해 가슴 한 구석에서 치밀고 올라오는 격정의 덩어리를 억지로 눌러 참자니 표정이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쿠쿵-- 콰르르르-거대한 폭포가 위치한 곳이다. 그러나 굉음만이 들려오고 있을 뿐, 막상 폭포수는 흐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폭포수 자체가 꽝꽝 얼어 붙어 하나의 빙주(氷柱)로 화해 있었기 때문이다. 파파파팟--! "한설분분(寒雪紛紛)!" 위이잉--! 검광(劍光)이 연신 차가운 대기를 가르며 번뜩인다. 눈부신 검광이 방원 삼 장을 온통 뒤덮고 있다. 그것은 일견하기에도 광명정대하기 이를데 없는 검법으로써 주위의 빙설이 검파에 휘날려 사방으로 분분히 흩어지고 있었다. "천절오행검(天絶五行劍)!" 우우웅--! 오색의 검기가 허공으로 치솟더니 빙폭을 향해 쏘아갔다. 쾅!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 일검에 의해 빙폭에 구멍이 뚫려 폭포수가 마치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휘익--! 한 가닥 인영이 공중을 빙글 선회하고는 맞은 편으로 떨어져 내렸다. 일신에 마의를 입은 청년, 그는 유옥(柳玉)이었다. 유옥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으로 내렸다. 검식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서는 조금도 지친 구석을 엿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그의 기색을 보건대 그다지 만족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쯧! 아무리 열심히 펼쳐 보아도 검법의 진수가 나오지 않는다. 그건 검보가 충실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듣기 거북한 괴성이 들려와 그의 고막을 울린 것은. "크크... 대체 어떤 놈이 어르신네의 단잠을 방해하느냐?" "흐음?" 유옥은 흠칫하여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꽤 명료하게 들려 왔던 소리의 출처는 도무지 어디인지 짐작도 할 길이 없었다. '환청이었나?' 그가 쓴 웃음을 지으며 찾기를 포기할 즈음, 다시 예의 괴성이 들려왔다. "흘흘흘... 멍청한 놈, 보기보다 네 놈의 청력은 형편없구나. 엉뚱한 곳이나 두리번거리다 말다니, 그런 식으로는 백 날을 헤매도 이 어르신네의 그림자조차 찾아내지 못하리라." '초면에 사람을 놀리다니!' 유옥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시선은 비로소 빙폭의 윗쪽으로 향해졌다. 소리의 감이 그 곳에서 아까보다 확실하게 전해져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불쾌감도 잊은 채 눈을 크게 치떠야 했다. 그것은 빙폭의 한가운데에 떡하니 정좌하고 있는 한 노인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저럴 수가!' 빙폭은 앞서도 언급했듯 강추위로 표면이 얼어 빙주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노인은 그


속에서 좌선에라도 임한 듯 멀쩡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과연 인간으로써 저 상황의 연출이 가능한 것인가?' 유옥은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 괴이한 노인의 생김새란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다. 머리가 훌렁 벗겨졌으며, 기껏 일어서 봐야 오척이 될까말까한 단구에 배는 불룩 튀어 나와 전체적으로 둥근 공을 연상케 했다. 걸치고 있는 옷은 더욱 가관이었다. 마치 어린 아이의 옷을 빌려 입은 듯 치수가 작아 몸에 꽉 끼는데다가 털이 부숭부숭하게 난 팔과 다리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용모라 해서 별반 나을 바가 없었다. 박박 얽은 안면에 위로 뒤집혀진 들창코, 입은 제멋대로 귀밑까지 쭉 찢어져 있다. '으음, 심하군.' 유옥은 체면상 웃음이 터져 나올까봐 극도로 조심을 해야만 했다. 떠돌이인 양 직업을 무수히 바꾸며 각처를 전전하던 그로서도 최소한 이 노인과 같은 인상착의를 지닌 인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노인 쪽에서 그를 보며 히죽 웃어 보였다. 외양으로 인해 일편 징그럽게 느껴지기는 했으나 흡사 어린 아이처럼 천진함이 깃들어 있는 그런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대하자 유옥은 뜨끔했다. '아차, 내가 실수를....' 외모야 어차피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는 거기에 치중한 나머지 상대의 어떤 면도 보려 하지 않았던 자신을 힐책했다. 그 점은 괴노인에게 속절없이 꼬집히고 만다. "크크... 이 놈아, 너 지금 노부를 동정하고 있는 것 맞지? 저런 모습으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 갈까고 말이다." 유옥은 심중을 들키자 얼굴을 붉히며 씨익 웃었다.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후훗! 하지만 그것은 제 탓이 아닙니다. 노인장께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너무 자유분방하게 생기셨기 때문이지요." 그의 대답에는 의외로 여유가 있었다. 그는 괴노인이 성품상 이미 그깟 일 쯤에는 초탈해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고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응수해 갔던 것이다. 과연 괴노인은 입맛을 쩍 다시더니 악의없이 대꾸해 왔다. "그 놈 참, 주둥이가 터져 있다고 말은 잘 하는구나." "하하하하...!" 유옥은 그제서야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못난 것을 시인하면서도 껄껄 웃는 괴노인이나 욕을 먹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 그나 어쩌면 오십보 백보였다. ④ 잠시 후. 웃음을 그친 유옥이 물었다. "어르신께서는 무슨 연유로 그 속에 계시는 것입니까?" 괴노인은 마땅치 않은 얼굴로 투덜거렸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다." 유옥은 그 말을 듣자 새삼 크게 관심을 보였다. "대체 무슨 병이기에 얼음 속에서 치료를 하십니까?" "흥! 네 놈이 그건 알아서 무엇하게?" 노인은 그의 말을 일축시키더니 화제를 돌렸다. "이 놈아, 아직 너는 이름도 말하지 않았다." 유옥은 빙그레 웃었다.


"소생 유옥이라고 합니다." 괴노인은 짐짓 거만한 투로 말을 이어갔다. "험! 그럼 지금부터 내 한 마디 하겠으니 귀씻고 들어라. 노부는 지난 한 달 동안 이 곳에서 네 놈이 무공을 연마하는 것을 지켜 보았다. 그런데 네 놈의 무공이란 것은 한심하기 짝이 없더구나. 그 따위 무공을 익혀 어디다 써먹겠다는 거냐?" 유옥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 말은 맞을 것이다. 내가 익히는 무공이란 어차피 용백검의 흉내에 지나지 않을 뿐더러 완벽한 비급조차 갖추지 못했다. 진정한 고수가 보기에는 웃음거리 밖에 더 되겠는가?' 괴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다시 말했다. "어떠냐? 노부에게 한 번 무공을 배워보는 것이...?" 그의 음성에는 다분히 유혹(?)이 깃들어 있었다. 유옥은 이를 느끼면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의는 감사하나 거절하겠습니다." 괴노인의 눈이 둥그레졌다. "아니, 왜?" 그의 놀라움은 은근한 분노로 바뀌었다. "너 혹시 노부의 무공이 신통치 않을 것 같아 그러느냐?" 유옥은 약간 우울한 표정이 되어 노인의 말을 부인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럼?" "소생은 우선 상승무공을 익힐 자질이 못되고, 익혀 봐야 아무 소용도 없기 때문입니다." 괴노인이 갑자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누가 너에게 자질이 없다고 했느냐?" 우루루루--! 노인의 가벼운 외침에 산곡이 무너질 듯 뒤흔들렸다. 유옥은 고막에 전해지는 엄청난 충격을 느끼며 안색을 굳혔다. '실로 대단한 공력이다!' 이쯤 되자 그는 솔직하게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생을 오랫 동안 지켜 보셨던 한 분이 그러셨습니다. 저의 자질로서는 고작 삼류 무공 밖에 익히지 못한다고." 그것은 바로 비정한 그의 모친으로부터 들어온 소리였다. 그 말을 듣자 노인은 또 한 번 호통을 쳤다. "이 놈 봐라? 대체 누가, 어떤 저의로 네게 그 따위 소리를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럼 노부의 안목이 형편없단 말이냐?" 아연해진 것은 다름 아닌 유옥이었다. 그는 부지중 전신을 가볍게 떨며 확인이라도 하듯 반문했다. "그렇다면 어르신께서 보시기엔 소생의 자질이 쓸만하단 말씀이십니까?" 괴노인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다. "네 놈은 정말로 그렇게까지 자신을 모르고 있었더냐?" 유옥은 갑자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잠시의 침묵이 그에게 가져다 준 것은 내면의 읊조림들이었다. '하긴 나는 그 동안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 보기를 일체 거부해 왔다. 존재의 가치도 인정받지 못하는 마당에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면 맞겠지.' 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어디 쓸만하다 뿐이냐? 너의 골상은 이른바 외범내수용골지체(外凡內秀龍骨之體)가 틀림없다. 흐흐... 그런 골격을 가지고 무공을 못익히면 억울할 일이지." "외범내수용골지체란 무엇입니까?" 괴노인은 기소를 흘렸다.


"흘흘흘...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나 안으로 용골(龍骨)을 숨기고 있다고나 할까? 너 같은 체질은 세 가지 조건만 갖춘다면 능히 천하제일고수가 될 수 있다." 유옥은 비애 이면에 궁금증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 가지 조건이라니요?" "첫째는 영약(靈藥)이다. 희귀한 약재로 너의 몸을 환골탈태시키는 것이지. 그리고 둘째는, 흘흘흘... 노부와 같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이다. 나머지는 개세의 무공인데, 아무리 자질이 출중해도 적절한 무공을 만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유옥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건 하나마나한 소리가 아닙니까? 체질이 어떻든 그만한 조건이라면 누구나 천하제일의 고수가 될 수 있을 텐데요?" 괴노인이 그를 향해 씨익 웃었다. "웃자고 한 소리다, 이 놈아. 네가 하도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제가 그랬습니까?" 내심을 들켰다 싶자 유옥은 은은하게 얼굴을 붉혔다. "어쨌든 소생에게는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군요. 저에게는 영약도, 스승도, 익힐 만한 무공도 없으니 말입니다." 괴노인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고이얀 놈! 너 지금 노부를 놀리는 것이냐?" "네?" "훌륭한 스승을 눈 앞에 두고도 감히 그런 소리를 하다니, 천하에 몹쓸 놈이로고." 노인은 으르렁거리더니 은근한 음성으로 물었다. "네 놈이 노부의 제자가 된다면 삼 년 안에 천하제일고수로 만들어 주겠다. 구미가 당기지 않느냐?" 유옥은 다시금 할 말이 없어져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로서는 상대의 말 중에서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담인지 도통 구별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괴노인의 희한한 설득은 계속 되었다. "보아 하니 네 놈은 아직도 노부의 말을 믿지 못하는 모양이다만 어떻게 되어도 너에게는 밑져야 본전 아니냐?" 유옥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한 말씀이나 저는 누구의 제자도 될 수 없습니다." "왜? 벌써 사부를 정해 두고 있었느냐?" 괴노인의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어리자 그는 되도록 진중한 어투로 답했다. "사부는 모시지 않고 있습니다만 제게는 할 일이 있습니다." "할 일?" "그렇습니다." "흘흘... 네깟 놈이 무슨.... 그래, 그 할 일이란 무엇이냐?" 유옥도 그 말만은 자못 단호하게 잘랐다. "그건 개인적인 일이라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흐음!" 괴노인은 잠시 의혹을 내비치더니 한참 후에야 원래의 익살맞은 표정을 회복하며 입을 였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대신 노부를 위해 한 가지 일 쯤은 해줄 수 있겠지?" 어찌 들으면 억지와도 같은 소리였으나 유옥은 이미 노인에게 호감을 갖게 된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해 드리겠습니다." 그의 시원스런 대답에 괴노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헤헤헤헤... 내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노부는 근 한 달 동안 제대로 먹은 것이 없느니라. 음식을 좀


장만해 다오." 유옥은 빙그레 웃었다. "단지 그 뿐입니까?" 제 3 장 두 번의 이별(離別) ① 고독한 청년 유옥. 그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낙양에서의 겨울을 나름대로 훈훈하게 보낼 수가 있었다. 그것은 빙폭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괴노인과 줄곧 같이 지냈기 때문이었다. 괴노인은 그와 만난 날로부터 빙폭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두 사람이 함께 유옥의 거처(?)인 안산의 토지묘에서 기거했다. 그 동안 유옥은 정성을 다해 노인을 봉양했다. 그는 과거 객점의 주방에서도 일한 적이 있었으므로 요리솜씨가 일급이었고, 그 덕분에 굶주렸다던 노인은 날마다 맛난 음식으로 포식을 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두 사람의 생활은 실로 기이한 것이었다. 서로 심적으로 의지를 하면서도 상대방에 대해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는데, 이 점에 있어 두 사람은 마치 일종의 묵계라도 있는 것처럼 굴었다. 심지어 노인은 끝까지 자신의 이름조차 밝히지 않았고 유옥 쪽에서도 궁금하련만 묻는 일 따위는 결코 하지 않았다. 지내다 보니 노인에게는 괴상한 일면이 있었다. 그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성격으로써, 사당 안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그를 보면 대체 그 간에 어떻게 빙폭 안에서 잠잠히 견딜 수 있었는지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유옥은 이따금씩 그런 노인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리곤 했다. '답답해서 저러시는 것일까? 흡사 늙은 견공(犬公)처럼 맥빠진 모습으로 계속 사당 안을 맴도시니....' 그가 노인을 견공에 비유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실제로 괴노인은 늙어 빠진 개가 하릴없이 주위를 배회하듯 그의 눈 앞에서 무수히 오락가락했으며 어쩌다 한 번씩은 파리를 쫓듯 팔다리를 휘적거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 뿐이면 다행이다. 때로는 돌뿌리에 걸린 것처럼 기우뚱하기도 했으며 느닷없이 두 팔을 날개치듯 휘젓는 적도 있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동작들을 보며 대개 유옥은 싱긋 웃었을 뿐이었는데, 비듬이라도 있는 양 머리칼도 없는 대머리를 열심히 긁어대는 노인을 보자 그도 마침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후후... 어르신, 이젠 머리가 가려우신 겁니까?" 원래 누구든 좀이 쑤시면 이곳 저곳 가렵기도 한 법이다. 유옥의 질문은 그것을 염두에 두고 나온 말이었다. 괴노인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킬킬... 네 놈이 지금 노부를 비웃는 모양이다만 내가 이 나이 먹도록 허리가 구부러지지 않은 비결이 따로 있는 줄 아느냐? 이렇게라도 운동을 해야 소화가 잘 되고 늙지 않는단 말이다. 어디, 너도 한 번 해 보겠느냐?" 유옥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소생은 사양하겠습니다. 후후... 아직 나이도 많지 않은데 벌써부터 늙은 견공의 흉내나 내고 있어서야 쓰겠습니까?" 그 말에 괴노인은 손뼉을 딱 쳤다. "맞다! 이걸 나견타귀(懶犬打鬼)라고 하면 되겠군. 클클클... 게으른 개가 귀신을 때려 잡는다? 내가 지어 놓고 보아도 너무 근사하구나." '끙! 졌다.' 유옥은 내심 항복(?)을 선언하며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입담으로는 노인을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으므로. 이후로도 그는 괴노인의 나견타귀 동작을 무수히 보아야 했고, 그 가운데서 뜻밖에도 놀라운 것들을 발견해 내게 된다. 눈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괴노인의 움직임은 얼핏 보면 무질서한 것 같았으나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특히 그의 행보(行步)에는 주도면밀한 변식이 들어 있었다. 유옥은 그제서야 잊었던 사실 한 가지를 떠올리고는 노인에 대해 경외감을 품기에 이른다. '그렇구나! 내가 그 동안 저 어르신을 만나게 된 경위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군. 애시당초 내가 알지 못하는 한 기인(奇人)일 것이라고 예상 했었건만.' 그는 한 편으로 고소를 짓기도 했다. '여하튼 저것은 틀림없이 무공의 일종일진대, 이렇듯 훔쳐(?) 보아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유옥에게 있어 갈등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정확치 않으나 괴노인은 그 뒤로도 연속적으로 자신의 동작들을 보여 주었다. 그러니 유옥으로서는 좁은 공간 안에서 함께 기거하며 이를 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니, 유옥은 흡사 무엇에 이끌리듯 괴노인의 동작에 빠져 들어가며 자책을 금치 못했다. '안보려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고, 보고 있자니 웬지 죄를 짓는 기분이고....' 사도지간(師徒之間)도 아닌 두 사람은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괴노인은 똑같은 동작을 매일 반복했으며 유옥은 결국 그의 모든 동작을 기억에 새겨놓게 되고 만 것이었다. 어느 덧 두 사람이 토지묘에 머문지도 보름이 지났다. 그 날 유옥은 노루를 잡아다 구웠다. 괴노인은 하루 종일 잠만 자다가 노루고기가 다 익었을 때에야 부스스 일어나 혼자서 노루 한 마리를 거의 다 먹어 치우다시피 했다. 노인은 본래부터 대식가였다. 걸신(乞神)이라도 든 듯 항상 많은 양의 식사를 했다. 그는 기름 묻은 입술을 더러운 소매로 쓱 문질러 닦은 후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기특한 놈! 보기보다 착한 놈이야, 네 놈은." 유옥은 빙긋 웃어 보였다. "어르신께서 워낙 좋으신 분이니까요." "헤헤헷... 그야 물론이지. 이제야 네 놈이 뭘 좀 아는구나." 두 사람의 대화는 많은 말을 심중에 감춘 채 이런 식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실로 안타깝구나. 유감스럽게도 이 세상에는 노부같이 좋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야." "그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괴노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쯧! 네 놈의 앞길이 기구하기 짝이 없단 말이다." 느닷없는 소리에도 유옥은 놀라기에 앞서 고소를 지었다. "장래가 어둡다 해도 소생은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지금까지도 주욱 그래 왔으니까요" "흐흐... 건방진 놈, 제법 도통한 것처럼 구는구나. 관상을 보건대 네 놈의 얼굴에는 세 가지 살(煞)이 끼었어." "세 가지 살이요?" 유옥은 흥미가 당겨 물었다. "그게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험, 천기(天機)란 본시 가볍게 누설하는 것이 아닌데...." 노인은 짐짓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내 그 간의 정리로 네 놈에게만은 특별히 가르쳐 주마." "후후... 어르신의 혜안이야 하늘인들 꿰뚫지 못하시겠습니까?" "허어, 이 놈이 넉살도 늘었군? 좋다, 지금부터 얘기해 줄테니 명심해 듣거라. 네가 가진 첫 번째 살은 풍살(風煞)이다."


유옥은 반문했다. "풍살이란 무엇입니까?" "쯧쯧, 무식한 놈! 문자 그대로 바람처럼 떠도는 거다. 이른바 역마살이란 거지. 네 놈 팔자는 필경 그러할 게야.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여기저기 정처없이 말이다." 유옥의 안면에 한 가닥 쓸쓸한 웃음이 깃들었다. 그는 소리내어 말하지 않고 내심으로만 읊조렸다. '그럼 향후의 운명도 이제까지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인가?' 자조에 가까운 그의 중얼거림 뒤로 노인이 다시 말했다. "험! 두 번째 살은 무엇인고 하니...." 괴노인은 그를 한 번 힐끗 보고는 짓궂게 웃었다. "여화살(女禍煞)이다. 되지 못하게 너처럼 못생긴 놈에게 여화살이 끼어 있다니, 망측한지고!" "여화살은 곧 여자를 조심하란 의미가 아닙니까?" "흘흘... 그 말은 제대로 알아 듣는구나. 네 놈은 여난(女難)이 지대할 상이다. 그런 상을 가진 자들은 대개 계집들로 인해 골치가 아픈 것은 물론 자칫 큰 위기를 당하기도 하지." 유옥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골치가 아프다니요? 그토록 행복한 살이라면 열 개가 끼어 있어도 좋겠는데요?" "예끼, 이 정신 나간 놈! 네가 아직 계집에게 뜨거운 맛을 당해 보지 못해 그러지, 실제로 겪게 되면 그 따위 소린 대번에 쏙 들어가게 될 것이다." 유옥은 바람 빠지듯 피식 웃으며 말을 돌렸다. "세 번째 살은 또 무엇입니까?" "기아살(饑餓煞)." "평생 배가 고프리라는 것입니까?" "그렇다. 네 놈은 부자가 되기는 다 글렀다. 팔자가 그리 되어 먹어 아마도 굶는 일이 비일비재할 것이야." 유옥은 쓴 입맛을 다셨다. "설마 그럴 리야...? 이 척박한 곳에서도 소생은 어르신까지 대접할 수 있었는 걸요." "허허... 이 놈아, 너무 자신하지 말아라. 이 늙은이의 관상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으니까." "흠, 그럼 처음으로 점괘가 틀리게 되겠군요?" "예끼! 고이얀." 괴노인은 호통을 치는 듯 하더니 금세 음성을 가라앉혔다. "불쌍한 아이야, 그래도 걱정은 말거라. 이 늙은이가 맘이 내키면 네게 기아살에 대비하는 방법을 알려 줄 수도 있다." '내가 언제 걱정을 했다고?' 유옥은 웃음이 치밀었으나 내색치 않고 물었다. "어떤 방법입니까?" "흘흘... 역시 일종의 운동이야. 그걸 시행하면 웬간해서는 배고픔을 느끼지 않고, 음식을 조금만 먹어도 살게 되지." 유옥은 그 말을 듣자 내심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다. '심법(心法)...!' 놀라서 굳어지는 그의 표정을 보았는지 못보았는지 노인은 여전히 익살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헤헤헤... 이것도 네 놈에게만 특별히 가르쳐 주는 거다. 열심히 익히면 장차 굶어 죽는 일은 없을 게다." 더 무슨 대답을 하겠는가? 유옥은 비로소 노인의 뜻을 알게 되었고 고마움을 느낀 나머지 순순히 따르겠노라고 했다. 괴노인.


그가 가르쳐 준 것은 정말 괴상한 운동(?)이었다. 어떤 상태나 어떤 환경에서도 가능했으며 심지어는 거꾸로 서서도 행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역시 그것은 유옥의 짐작대로 신비한 내공심법의 한 가지였다. "흐흐... 늙고 병든 개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서 착안해 낸 거지. 좀 어렵긴 하겠지만 자꾸 되풀이해 보면 너에게 좋은 선물을 될 게야. 흘흘...." 유옥은 괴노인이 가르쳐 주는대로 이의없이 따라 했다. 그 심법은 첫째로 호흡이 가장 중요했다. 일단 마음을 편하게 한 뒤에 호흡을 길게 들이마셨다가 짧게 토해내고, 다시 길게 마셨다가 짧게.... 이런 식으로 이어가게 되어 있었다. 그것을 계속 하면 종내에는 긴장이 풀어지며 근육이 최고도로 이완되어 전신의 모공이 모두 활짝 열리게 된다. 즉 피부로도 호흡이 가능해지는데, 바로 그 순간을 빌어 체내에 신비무쌍한 잠재력이 형성되는 것이었다. 유옥과 정체불명의 괴노인. 두 사람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 간에 깊은 정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유옥의 입장에서는 더 했다. 어릴 적부터 그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 왔으되, 항상 자신도 모르는 어떤 목적을 위해 강압에 눌려 지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추한 몰골을 지닌 괴노인에게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기우는 자신을 느꼈다. 노인의 우스꽝스럽고 직선적인 언행과 그 속에 감추어진 인간미가 그를 크게 감동시켜 놓았던 것이다. ② 밤. 밖에는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으나 토지묘 안은 따뜻했다. 그것은 작게는 모닥불 때문이었지만 좀 더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괴노인과 유옥이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주원인이었다. 그만치 지난 이십여일 간에 걸쳐 나누어 왔던 두 사람의 정은 끈끈하고도 깊었던 것이다. 괴노인은 유옥에게 무공을 전수해 준다는 말 따위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시종일관 특유의 재담(才談)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동작만을 시전해 보일 따름이었다. 반면에 이를 통해 유옥은 많은 점을 깨닫고 있었다. 노인의 나견타귀라는 재주는 보면 볼수록 신묘한 것이었다. 언뜻 무질서해 보였으나 거기에는 실로 무궁한 변화가 내포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정반음양(正反陰陽)과 구궁팔괘(九宮八卦)의 묘가 깃들어 있을 뿐 아니라 의지에 따라 무형의 강기(剛氣)를 발출시킬 수도 있었다. 아쉽게도 아직 유옥의 내공이 얕아 활용까지는 여의치 않았는데, 최소한 그는 괴노인의 말마따나 오래 굶어도 죽지 않는 비법(?)만은 확실하게 터득해 놓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는 그 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이 신비의 신공이야말로 천고에 드문 기학(奇學)이라는 것을. 금룡십팔수(擒龍十八手). 헌원진기(軒元眞氣). 이런 이름을 가진 두 가지의 신공은 물경 천여년 전의 상고기학들이었다. 당세에 이르기까지도 도교 최고의 기인이라는 포룡자(捕龍子)가 창안한 것이었다. 꿈 속에서 천제(天帝)가 용을 잡아 굴복시키는 장면을 보았다던가? 그 동작들을 하나하나 기억해 가며 만들었다는 금룡십팔수는 금나수법의 정화라 할 수 있었다. 물론 헌원진기도 그에 못지 않게 절묘한 신공이었다. 길을 가거나 잠을 잘 때에도, 혹은 수중(水中)에서도 연마할 수 있었으며 십성에 이르면 몸이 새의 깃털처럼 가벼워져 미풍에도 자연스럽게 실려 날아갈 수가 있었다. 따라서 괴노인이 전수한 두 가지 무공을 완전하게 익히면 능히 군림천하(君臨天下)할 수도 있건만, 이 사실 또한 유옥만이 배우면서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모닥불이 차츰 사그라 들어가고 있었다. 그 곁에서 두 사람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각기 다른 상념에 잠겨 서로를 의식하지 못했다. 유옥은 내심 중얼거렸다. '이 겨울이 지나면 나는 용백검이 되어 활동해야 한다. 대체 내가 왜, 무엇을 위하여...?' 그의 시원스런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분명 내키지 않는 일이었으나 그로서는 피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는 그 일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마저도 가지고 있었다. "클클... 아이야, 무얼 그리도 골똘히 생각하느냐?" 괴노인의 물음에 유옥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노인은 혀를 끌끌 차더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어린 놈이 비밀이 지나치게 많구나. 내 처음 보았을 때부터 느꼈다만 네 놈의 일신상에는 타인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복잡한 일들이 마구 뒤엉켜 있는 것 같더구나." 유옥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 깔았다. "맞습니다. 저에게는 말못할 사정이 많습니다." 괴노인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가벼운 탄식을 발했다. "더 묻지는 않겠다. 대답해 줄 너도 아니니까. 하지만 한 가지만은 기억해라. 향후로 무슨 일을 행하든 하늘을 향해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유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떨구었다. 현재도 그다지 떳떳한 입장이 못되니 장래의 일을 장담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었다. 괴노인은 그의 태도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콧구멍을 후비며 화제를 돌렸다. "너 혹시 무림삼대신비지처(武林三大神秘之處)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느냐?" 유옥은 주춤거리며 고개를 다시 들었다. "혈사해와 장춘도, 불야성 등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 "소문으로 들은 바 외에는 알지 못합니다." "내 그럼 이제부터 말해 주겠다." 괴노인의 표정이 문득 엄숙해졌다. "불야성은 삼백팔십 년 전 불세출의 기재인 십전무제(十全武帝) 무영신투(無影神偸) 화무성도(畵舞成都)가 세웠다. 당시 그는 구파일방을 비롯한 천하무림의 배척을 받아 앙심을 품은 나머지 수백개 문파의 비급을 훔쳐 불야성에 비장시켰다. 그리고 당금에 이르기까지 불야성의 신비지문은 열리지 않았다." 유옥은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혈사해와 장춘도의 역사는 알다시피 천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만일 그것들이 열린다면 천하는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다. 혈사해의 천년마학(千年魔學)과 장춘도의 무학은 중원의 무학으로는 결코 막을 수가 없기 때문이야." 유옥이 물었다. "장춘도는 신선들이 산다는 이상(理想)의 섬이 아니었습니까?" "이상의 섬?" 괴노인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클클... 애초에는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건 종종 예상과는 달리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너도 그 쯤은 이해하리라 생각되는데?"


유옥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하고 자시고도 없습니다. 저는 살아 오면서 아예 예견할 그 무엇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는 씩 웃었다. "어르신께서는 흡사 제가 겪고 있는 고충들을 다 알고 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공허하게 들리는 그 말에 괴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다 알지는 못한다. 다만 언제나 정도(正道)를 걸어야 한다는 것만은 꼭 말해 두고 싶구나." 그의 음성은 꽤 진중하게 이어졌다. "설혹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해도 마음을 꿋꿋하게 먹고 견뎌내면 언젠가는 의기를 펼칠 날이 있게 될 것이다." 유옥은 그 말을 듣자 가슴 속에 일루의 희망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그는 노인을 정시하며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 그러할까요?" "그럼, 내가 허언이라도 하고 있단 말이냐?" "그런 건 아니지만...." 괴노인은 그 선에서 말을 끊으려는 듯 갑자기 졸린 얼굴로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자, 그만 자자." "알겠습니다." .... 유옥이 잠든지 대략 한 식경 가량 지났을 때였다. 곯아 떨어졌지 싶었던 괴노인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는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유옥에게로 다가갔다. 노인의 눈은 잠시 홀린 듯 유옥의 전신을 더듬어 내려갔다. 그러더니 그는 곧 유옥의 몸 위로 손을 뻗었다. 파파파팟--! 괴노인의 손가락 끝에서 지강이 발출되었다. 그 바람에 유옥은 한 차례 꿈틀하다가 전신을 좌악 뻗었다. 노인이 유옥의 전신을 어루만지듯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훌륭한 골격이야. 노부가 지난 일 년 동안 헤매었지만 이 놈만한 골격은 만나지 못했다. 나머지 네 늙은이들이 어떤 놈을 고를지는 몰라도 이런 재목은 찾지 못할 걸?" 괴노인은 그 말에 이어 가부좌를 틀고 운공에 들어갔다. 스스스.... 그의 이마 위에서 오색의 환이 피어 오르더니 층층이 떠올랐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전설적 무학의 경지인 오기조원(五氣朝元)의 현상이 틀림 없었다.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신상내력이 범상치 않음은 이모저모로 드러났으나 설마하니 이 노인의 내공경지가 오기조원에 달해 있을 줄이야 어디 상상인들 했겠는가? 허공을 격하여 괴노인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츠츠츳--! 기묘한 음향과 함께 그의 십지(十指)에서 무형의 기류가 발출되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유옥의 몸은 한 치씩 위로 떠올랐다. 괴노인의 손가락 끝은 계속하여 유옥의 기경팔맥을 따라 스쳐갔으며 때로는 관절과 관절의 틈에서 잠깐씩 머무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노인의 머리 위에 머무르고 있던 오색의 환은 기이하게도 조금씩 엷어져 갔다. 유옥은 여전히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다만 몸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뒤집혀졌다를 반복하는 가운데 가끔씩


무섭게 경련을 일으키곤 할 따름이었다. 그 상태로 얼마나 시간을 흘렀을까? "흘흘흘...." 괴노인은 낮은 웃음을 흘리며 손을 거두었다. 그의 주름진 얼굴은 평소에 비해 부쩍 늙어 버린 것 같았다. 그는 탈진한 듯 노구를 벽에 기대더니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로부터 다시 한 식경쯤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괴노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모습은 방금 전의 피로해 보였던 모양과는 또 달랐다. 노인은 꽤 말짱한 얼굴이 되어 가지곤 깊이 잠들어 있는 유옥을 내려다 보았다. "허허... 통탄할 노릇이로다. 이렇듯 출중한 인재가 아직껏 중용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니. 난세일수록 헤쳐 나갈 영웅이 필요하거늘, 그조차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이야." 노인은 고개를 흔들며 탄식해마지 않았다. "우리 다섯 늙은이가 세상에 나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 한가지 뿐이다. 구천만불왕(九天萬佛王)의 출곡을 대비해 기재로 하여금 장춘백장경(長春百藏經)을 익히게 하는 것이다." 그는 새삼 유옥을 향해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이 아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듯 하지만 놀라운 자질과 오성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누구 못지 않은 인내심과 악에 물들지 않을 정명(正明)한 심성까지도 겸비하고 있다." 노인의 시선은 유옥의 반듯한 얼굴에 가 머물렀다. "아무리 보아도 길상(吉相)이야. 초년운을 좋지 못하게 타고 났으나 그 시기는 이미 흘러 갔고. 혹여 네 놈이 들떠서 날뛸까 봐 정반대로 얘기하기는 했다만." 그는 특유의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클클... 이 년 후에 있을 천주봉회(天柱峯會)가 기다려진다. 그 때까지 네 놈의 충후함이 유지되는데는 아무 문제 없겠지? 만약 그렇지 못했단 봐라, 넌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을테니." 짐짓 으름짱을 놓는 노인의 안면에는 자애로움이 가득 어려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허허... 네 늙은이들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 궁금하군." 스스스.... 말을 마치자 노인의 신형은 마치 환상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겨울 햇살이 구멍 뚫린 천장으로부터 비스듬히 내려와 얼굴을 비추었다. 이를 느끼며 유옥은 기분 좋게 잠에서 깨어났다. 그것은 실로 아늑하고도 편안한 느낌이었다. 정말로 그는 오랫만에 숙면을 취한 듯 가뿐하게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런데 유옥은 기지개를 켜다 말고 흠칫 놀랐다. 날아갈 듯 상쾌한 느낌은 비단 심리적인 면 뿐만이 아니라 신체에서도 확연하게 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가볍다! 새의 깃털처럼....' 내심 중얼거리던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안색이 일변했다. '혹시...?' 아니나 다를까? 유옥은 비로소 사당 안이 허전해졌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또한 그 일이 자신의 신상에 일어난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도 그는 즉시 깨달을 수 있었다. "어르신...!" 공연히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았으나 그의 앞에서 늘상 해괴한 모습으로 얼쩡거리던 노인의 모습은 역시 사당의 어느 곳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떠나버리셨구나. 정말로....' 유옥에게 가장 먼저 부딪쳐온 것는 뭐니뭐니 해도 가슴 한 구석이 텅 비는 듯한 허전함이었다. 그는 노인의 부재(不在)와 더불어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토록 암울하고 고독했던 이전의 시간


속으로. 그의 뇌리에 언젠가 노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흘흘... 인석아, 사람이란 만나면 의례 헤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세상은 넓고도 좁은 법, 우연을 가장하여 다시 만나게 되기도 하지. 삶이란 어차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니까. 이것을 역으로 해석하면 결국 그는 또 한 번의 우연을 빌지 않는 한 노인을 만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그는 목구멍으로 무언가 울컥하고 감정의 덩어리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르신....' 사실 유옥에게는 일종의 괴벽이 있었다. 그는 기구한 운명으로 인해 고독을 부채처럼 껴안고 살아야 되기도 했지만 성격적으로도 아무에게나 정을 쏟지 못하는 유별난 인간형이었다. 그런 그가 정체도 알지 못하는 괴노인에게는 친조부나 다름없는 느낌으로 대해 왔던 것이다. 더구나 노인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것들을 생각하매 그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르신, 저같이 보잘 것 없는 인간에게 어찌 이렇듯 큰 은혜를 베풀고 떠나셨습니까?' 유옥은 넋을 잃은 듯 텅 빈 사당 안에서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멍하니 서 있었다. ③ "준비는 다 되었겠지?" 냉랭한 음성이 귓전에 파동을 전했다. 하지만 이제 유옥은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동요하지 않았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동안 그는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특히 빙폭에서 만나 사당에서 함께 지냈던 괴노인과의 관계 가 그를 크게 변모시켜 놓았다. 더욱 냉철해졌다고나 할까? 그것은 마음 속에 알게 모르게 스며든 노인의 영향으로써, 그는 어떤 여건에서도 주관을 지켜나갈 수 있을 정도로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 점은 유옥의 심중에 무엇보다 자유(自由)를 가져다 주었다. 나름대로 자신감이 생기니 매사에 무조건 얽매이기보다는 한결 자연스럽고 낙천적인 해석으로 다가갈 수가 있었다. 때는 사월. 약속대로 그의 모친은 지난 삼월에 다시 폐장에 나타났다. 그리고 여전히 그 변함없는 싸늘함으로 그를 대하고 있었다. "금월 십팔일이 용백검의 생일이다. 그 날 너는 무림성으로 들어가야 한다." 유옥은 가슴이 은은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꼈으나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얼음장처럼 차갑기 짝이 없는 음성이 계속 그의 고막으로 파고 들어왔다. "내 쪽의 준비는 물론 완벽하게 되어 있다. 이후로도 명령만이 있을 것인즉 어떤 경우라도 너는 따라야 한다." 그 음성에서는 다소 흥분이 묻어 나왔다. 그래서인지 바람도 없는데 주렴이 얼마간의 흔들림을 보였다. "내일 무림성으로 출발한다. 그리 알고 너는 오늘 밤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해라." 유옥이 담담하게 절제된 음성으로 물었다. "제게 하루만 시간을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모든 일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으므로 여하한 경우라도 변경시킬 수가 없다. 어길 시엔 지금까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그럼 너와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닌 관계가 되지. 그래도 조를 테냐?" 유옥의 얼굴에 일순 참담함이 어렸다. '이나마 아무 것도 아닌 관계보다는 나은 것인가?' 그는 입가에 쓴 웃음을 짓는 것으로써 스스로 했던 말을 철회하고는 간단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없었던 얘기로 하지요."


"내일 새벽 낙양성 북문(北門)으로 나오너라. 마차가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반드시 해뜨기 전에 나와야 한다." 주렴이 다시금 가볍게 흔들리더니 그 속에 있던 비정한 모친은 전과 마찬가지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유옥도 주렴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단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의 태도에서 웬지 단호한 의지가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달이 이경(二更)의 암천에 걸려 신비스런 빛을 뿌린다. 이 곳은 낙양성의 장군부(將軍府). 휙--! 야공을 가르며 날아드는 한 가닥 인영이 있었다. 마치 야조처럼 보이는 그 인영은 설사 보초병에게 발견되었다 한들 불시의 침입자로 의심받지는 않을 것 같았다. 괴인영은 장군부의 후원으로 소리없이 날아 들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낙양의 안찰사사(按擦使使) 대장군 독고령(獨孤嶺)의 거처로 그는 은밀히 잠입해 가고 있었다. 독고산혜(獨孤珊慧). 대장군 독고령의 무남독녀이자 장중보옥(掌中寶玉)인 그녀는 한 동안 장군부의 골칫덩어리였다. 독고령은 하나 밖에 없는 혈육이기에 그녀의 뜻이라면 무엇이건 다 받아 주었다. 그로 인해 그녀는 항시 제멋대로였는데, 가장 골치 아픈 현상은 그녀가 남자 흉내를 내는 것이었다. 남장을 한 채 활을 차고 사냥을 즐기는 것은 그렇다 쳐도, 진짜 개구장이 이상으로 장난이 심해 장군부에 소속되어 있는 인물들은 상하를 막론하고 그녀의 밥(?)이었다. 저마다 언제 골탕을 먹게 될지 몰라 전전긍긍하면서도 감히 맞상대를 할 수 없는 처지인지라 그녀를 피하기에 바빴다. 차라리 악의(惡意)가 있다면 미워라도 하지, 그러지 못할 바에야 그저 그녀의 눈에 띄지 않는 것만이 상책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변했다. 남장을 벗고 후원에 틀어 박히더니 그야말로 요조숙녀로 둔갑해 버렸다. 그 변화에 장군부의 사람들은 모두 가슴을 쓸며 안도하는 한편,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또한 그다지 오래 가지 못하리라는 것이 그들의 공통적인 생각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독고산혜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있었으며 여장을 한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녀는 지금도 월영각(月影閣)에서 수(繡)를 놓고 있었다. 그 곳은 타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매우 조용하고 한적한 장소였다. 일찍 아내를 잃은 대장군 독고령이 아내의 거처였던 이 월영각을 딸에게 물려 주었던 것이다. "아! 정말 답답하구나." 독고산혜는 수를 놓다 말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열린 창으로부터 달빛이 흘러 들어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신비롭게 물들였다. 그 가운데 그녀의 눈에서 읽히는 것은 의외로 조갑증이 아니라 짙은 수심(愁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녀의 가장 큰 변화라면 변화였다. 그녀는 수틀을 안은 채 창 밖의 달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옥오라버니를 못본지도 벌써 다섯 달이 넘었는데.... 대체 왜 나를 찾아 주지 않는 걸까?" 또르르 하고 그녀의 눈에서 진주알 같은 눈물방울이 흘러 내렸다. 미녀의 눈물만큼 무서운 무기가 없다고 한다. 철석간담의 사내라 해도 그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과연 그래서였을까? 그녀의 중얼거림에 화답이라도 하듯 가벼운 탄식 소리가 들려 왔다. "으음...."


그 소리를 듣자 독고산혜는 흡사 감전이라도 된 듯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옥랑!" 그녀는 튕기듯 벌떡 일어서더니 창으로 달려갔다. "어디, 어디에 있는 거죠?" 그토록 절실하고 염원이 담긴 음성이 더 있을까? 그에 못지 않게 반짝이는 눈이며, 두근거리는 가슴은 또 어찌할지.... 다행히 귓전으로 전해지는 낯익은 음성이 있어 그녀의 기대가 오늘만은 헛되지 않다. "해아." 스스슷--! 무엇인가 그녀의 뒤로 떨어져 내렸다. 그 기척을 느끼고 독고산혜의 몸이 본능처럼 돌아섰다. "옥랑...!" 그녀는 울부짖으며 한 사내의 품으로 뛰어들어 안겼다. 독고산혜. 이 정열의 처녀가 바로 전날의 소년 해아였던 것이다. "아아! 보고 싶었어요. 너무 너무....." 그녀는 그리운 사람과 만나게 되자 다시는 그의 가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마구 얼굴을 비비며 파고 들었다. 그녀의 정인(情人)은 물론 유옥이다. 그는 독고산혜의 탐스러운 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직히 읊조렸다. "바보같이 울긴...." 그러나 그 역시도 가슴이 울렁이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불암곡의 암동에서 예기치 않게 정을 맺은 이후로 그의 뇌리에서는 한시도 그녀가 떠난 적이 없었다. 다만 모친의 경고 때문에 일부러 그녀를 회피해 왔을 뿐이었다. 스스.... 달이 서서히 기울었다. 아마도 창으로 계속하여 스며 들자니 더운 피를 가진 젊은 남녀에게 미안했기 때문이리라. 아닌 게 아니라 유옥과 독고산혜는 자연스럽게 한 덩이가 되어 침상을 찾고 있었다. 유옥의 손은 벌써 그녀의 봉긋한 젖가슴을 더듬고 있는 중이었다. "불안했어요, 당신.... 혹시 그 동안 저를 잊었을까 봐...." 유옥은 대답을 하는 대신 입술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말을 했대야 고작 이 한 마디 밖에는 하지 못했겠지만. '사랑한다. 산혜, 너를.' 사랑이란 본시 느낌으로 전달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구구한 말보다는 행동으로 표현하는 편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실제로 독고산혜는 무한한 애정이 깃들어 있는 그의 입맞춤과 애무에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대로 전신이 녹아나는 것 같아 한껏 자제를 한다는 것이 바로 그 수준이었다. 유옥은 그녀의 옷을 벗겼다. 그의 손길은 그리 급하지 않았다. 하긴 줄곧 내실에 있었던 그녀는 한 겹의 얇은 내의만을 입고 있어 서둘지 않아도 목적을 이루기는 쉬웠다. 이윽고 독고산혜의 늘씬하고 미려한 나신이 그의 눈앞에 드러났다. 유옥은 달빛에 비친 그녀의 나신을 내려다 보며 기쁨보다는 걷잡을 수 없는 아픔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너와 헤어져야 하다니...!' 하지만 그는 이내 생각을 바꾸고 만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이라도 다른 것을 염두에 두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들 두 남녀 사이에는 이별이라는 장막이 막 가로놓이려 하고 있었다. 그런즉 은은히 비껴 들어오는


황홀한 달빛 아래서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최대한으로 호흡해야만 했던 것이다. 유옥도 마침내 스스로 옷을 벗었다. 그리고.... 흐느끼는 듯한 교성이 규방 안에 가득 차더니 창 밖까지 넘쳐 흘렀다. 독고산혜의 격정은 처음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녀는 가히 몰아지경의 몸짓으로 상대를 받아 들이고 있었다. 유옥은 그녀의 팽팽하게 솟은 젖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힘차게 그녀의 늪으로 유영해 들어 갔다. 여체는 바르르 경련하더니 갓잡아 올린 물고기인 양 퍼득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은 우주도, 삼라만상도 숨을 죽였다. 사내는 깊숙히 침잠했으며 여인은 한껏 대지를 열어 사내를 맞아 들이고 있었다. 그 무한한 생명력을 뿜어내는 대지는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는 신음으로써 끝없이 단비를 갈구했다. 마침내 소낙비를 뿌려 내며 사내는 생각한다. 지금 자신을 포용하고 있는 뜨거운 대지는 어쩌면 그 자신이 내내 고대해 왔던 그리움의 실체, 즉 모성(母性)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육체라는 도구를 빌어 완전한 합일(合一)의 기쁨을 느낌과 동시에 진한 감동에 온 마음을 내맡기고 있었다. '산혜, 너는 내 아내다.' ④ "떠나신다니요?" 독고산혜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유옥은 그녀의 머리칼을 한 웅큼 쥐더니 자신의 코로 가져가 그 향훈에 흠씬 젖어 들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산혜." 그도 물론 알고 있었다.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여인의 몸이 이별의 두려움으로 인해 마구 경련한는 것 쯤은. 그는 다짐하듯 힘이 깃든 어조로 말을 이었다. "돌아온다, 반드시. 그 때에는 너를 데려가겠다." 독고산혜는 그의 얼굴을 보기가 무서워진 듯 고개를 돌리며 잔뜩 겁먹은 음성으로 물었다. "왜죠? 왜 떠나야 하는지...?" 그녀의 얼굴은 어느 새 비맞은 배꽃처럼 푹 젖어 있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건만 사랑을 알게 되고부터 그녀는 몹시도 나약해져 있었다. 이는 그녀가 최근에 가지게 된 여성성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써 그녀는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현재 벌어진 상황보다는 처참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유옥이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가며 말했다. "그것은 내 운명이다. 나는 늘상 그 운명에 떼밀려 살아 왔고 떠나야 하는 것도 역시 그 때문이다." 독고산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유옥의 말을 납득하지 못했다. 그러나 유옥은 그녀의 얼굴에서 자신을 이해하고자 애쓰고 있는 흔적을 발견하며 나직히 탄식을 불어냈다. "미안하다, 산혜. 결국 너에게까지 내 운명의 짐을 지우게 되는구나.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너에게...." 그는 괴로운 듯 눈을 내리 감았다. "용서해라. 내 언젠가는 지금의 고통을 천배 만배로 보상해 주겠다. 그 때까지는 이대로 나를 믿고 기다려 다오." 유옥의 호소는 독고산혜의 심정을 금세 뒤바꾸어 놓았다. 장군가의 금지옥엽으로써 신분의 차이마저 무시하고 사랑을 택했던만치 그의 말이 차지하는 비중은 클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벌써 자신의 것이 아닌, 상대의 아픔을 진정으로 나누어 갖고자 하고 있었다. "그럼요, 기다리고 말고요. 저에게 미안해 하지 말아요. 저는 이미 당신과 일심동체인 걸요." 유옥은 새삼 그녀의 벗은 몸을 와락 껴안았다. "산혜...!"


"옥랑."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금 뜨겁게 겹쳐졌다. 유옥은 그녀의 입술을 세차게 흡입하며 내심 부르짖었다. '내 태어나서 처음으로 운명에 감사하노니, 그것은 너를 알고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신...." 독고산혜는 입술이 떨어지자 수줍은 듯 속삭였다. "가끔씩은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어요. 당신과 이처럼 함께 하며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에요." 그녀는 스스로 말해 놓고도 감동을 받은 듯 전율했으며 이에 걸맞는 대답도 들을 수가 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산혜. 나는 너를 생각하면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니까." 유옥은 그녀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었다. "혹시 알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네가 나를 얼마나 미치게 했는지.... 너는 어쩌면 내 인생의 전환점인지도 모른다." 그 한 마디야말로 그의 삶에 포함된 독고산혜라는 여인의 의미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또한 그 말은 당사자인 그녀에게는 더 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 주었다. "고마워요, 정말...." 두 사람은 서로 굳게 끌어 안았다. 유옥에게는 독고산혜를 향해 가지게 된 애정만큼 비례적으로 늘어가는 회의가 있었다. 그것은 이전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당면한 문제들에 관해서였다. '나는 꼭 정해진대로 살아가야만 하는가? 어머님의 한 때문에 내 삶이, 혹은 영혼이 희생되어도 좋다는 말인가?' 그는 탄식과 함께 말했다. "산혜,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다." "벌써요...?" 독고산혜의 음성이 떨려 나왔다. "어차피 헤어지는 것이야 기정 사실이라지만... 어찌 이 밤이 새기도 전에 떠나시려고...." 유옥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몸에서 새로운 힘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 한 가지 이상(理想)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는 독고산혜를 위해서라도 건재해야 되었던 것이다. 그는 옷을 입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어머님, 분부대로 따르리다. 그러나 이 아들에게도 언젠가는 스스로를 위해 살아가게 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독고산혜. 그녀는 더 이상 울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를 곱게 빗은 다음 입술가에 봄빛같은 미소를 담았다. "말씀대로 저는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 아무리 세월이 변해도,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말이에요." "고맙다, 산혜." 유옥은 감동을 받은 나머지 콧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독고산혜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들어 주시겠어요?" "물론." "떠나시기 전에 정표를 남겨 주세요." "정표...?" 유옥이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몸을 돌렸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독고산혜는 방을 나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자루의 장검을 가지고 왔다. 그 검을 본 유옥은 흠칫


놀랐다. "아! 그것은 부백...!" 말마따나 그것은 이전에 그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바 있는 부백검이었다. 이에 그는 번뜩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때 부백을 갈아 달라고 한 분이 바로...?' 그는 황가철기점에서 일할 당시 금삼을 입고 찾아왔던 한 중년인 손님을 떠올렸고, 부백검의 재출현으로 인해 그 인물이 대장군 독고령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흠, 인연이란 실로 예기치 못할 것이로군.' 유옥은 부백을 다시 대하게 되자 이래저래 기이한 감회를 느꼈다. 그의 곁에서 독고산혜가 검을 뽑았다. 스르르륵...! 그녀는 녹이 잔뜩 슬어 있는 검신을 무릎 위에 올려 놓더니 자못 엄숙하게 말을 꺼냈다. "옥랑, 이 검은 우리 가문의 지보(至寶)예요. 떠나시기 전에 부백의 날(刃)에 일점혈(一點血)을 남겨 주시겠는지요?" 유옥은 빙그레 웃으며 흔쾌히 대답했다. "그 이상인들 못하겠는가?" 그는 즉시 팔을 걷어 부백검 위로 뻗었다. 그리고는 품에서 소도를 꺼내 팔뚝의 한 부분을 스윽 그었다. 주르륵 하고 선혈이 흘러 부백의 녹슨 날 위에 떨어졌다. 그것을 본 독고산혜도 하이얀 팔뚝을 걷더니 은장도로 그었다. 유옥과 독고산혜. 두 젊은 남녀의 피가 부백검 위에서 서로 합쳐졌다. 그 광경이란 마치 경건한 의식인 양 숙연한 기분마저 들게 하는 것이었다. 독고산혜가 하이얗게 웃었다. "선언을 마쳤어요. 옥랑과 제가 한 몸이 되었다는." 유옥도 그 말을 받아 한 마디 했다. "부백이 광채를 되찾는 날, 우리의 사랑도 보다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독고산혜의 눈에 눈물이 차올라 반짝 빛을 발했다. "옥랑!" 두 사람은 다시금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사랑의 맹세를 부백검에 새긴 두 사람의 관계는 이로써 더욱 확고해진 것이었다. 다만 정말로 부백이 광채를 회복하는 날에 사랑의 완성을 볼 지에 대해서는 두 사람 중 아무도 자신하지 못했다. 그것은 어쩌면 운명을 주관하는 신의 영역이므로. 그들이 가진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이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깊은 신뢰였다. 제 4 장 무림성(武林城)의 소성주(少城主) ① 날씨가 잔뜩 흐려 있었다. 용백검(龍白劍)은 하늘을 올려다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곧 비라도 올 것 같군. 그렇지 않느냐? 은비(銀琵)." 마차는 특수하게 설계된 듯 했다. 마차 안은 매우 호화로왔으며 네 필의 준마가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네, 정말 하늘이 새까매졌어요." 은비가 불안한 시선으로 주렴 밖을 살피며 말했다. 그 말을 이어 마부석 쪽에서 뾰로통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 모두가 공자님 탓이에요. 성내(城內)에서는 한참 생일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데 죄지은 사람들처럼


몰래 빠져 나올 게 뭐예요. 이러다 재수없이 비라도 만나게 되면...." 용백검이 히죽 웃으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만 떠들어라, 금비. 돌아갈 때는 은비에게 마차를 몰게 하면 되지 않느냐?" "흥! 천하에 공자님 같은 바람둥이도 없을 거예요. 절세미녀인 상관소저를 두고도 바람을 피우러 은밀히 일잔홍(一殘紅)을 만나러 가시다니 말예요." "하하... 금비, 너 질투하는 거냐?" 용백검은 호탕하게 웃어 젖히더니 슬쩍 손을 뻗어 옆에 있던 은비의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가슴을 만졌다. "아이, 참...." 은비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의 소녀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이보다 성숙한 편이었으므로 여인으로서의 징후는 여러 모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녀는 두려운 듯 얼굴을 붉히며 몸을 움츠렸지만 그리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용백검의 장난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은비를 가볍게 끌어 당기더니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은비가 숨을 할딱이며 속삭였다. "고, 공자님, 이러시면...." 그녀는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용백검의 입술이 그녀의 작은 입술을 그대로 덮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은비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끼며 내심 부르짖었다. '아아! 세상에 이런 현상이 존재했었다니....' 그것은 온 몸이 허공으로 붕 뜨는 듯한 기분과도 흡사했다. 용백검. 그는 바로 이런 위인이었다. 무림성의 소성주라는 지고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방탕기는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덕분에 은비는 첫 입술을 그에게 고스란히 뺏기고 말았다. 온 몸이 불덩어리가 되어 버린 그녀의 귓전으로 용백검의 짓궂은 음성이 파고 들어왔다. "후훗! 은비, 네 입에서는 새콤한 살구냄새가 나는구나." 그는 소녀 특유의 청신한 향취를 이렇게 비유했고 그 주인공인 은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덜컹! 마차가 크게 흔들리며 멈추어 선 것은 그 때였다. "다 왔어요, 공자님." 밖에서 금비의 음성이 들려오자 용백검은 얼른 은비를 무릎에서 내려 놓았다. 와중에도 그는 재빠른 동작으로 은비와 입술을 맞추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되도록 빠른 시간 내에 돌아올테니 너는 금비와 함께 대기하고 있거라. 이경까지는 성으로 돌아가 있어야 되니까." 용백검은 그녀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날은 어느 덧 흐린 중에도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그의 마차는 호화로운 정원의 뒷문 앞에 멈추어 있었다. 마부석에서 금비가 혀를 낼름 내밀었다. "흥, 이 다음에 상관소저를 만나면 죄다 이를 거예요. 공자께서 일잔홍에게 푹 빠져 계시다고 말이에요." 금비는 은비보다 나이가 한 살이 많은 탓인지 약간 더 성숙해 보였다. 용백검은 그녀를 돌아다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 전에 각오부터 단단히 해야할 것이다. 정말로 그랬다간 너를 천정에 거꾸로 매달테니." "에그머니나! 그런 망측한 말씀까지...."


금비는 제 풀에 그만 홍당무가 되어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하하...!" 용백검은 몸을 돌려 작은 목문(木門)과 마주 했다. 이어 그가 두어 번 두드리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활짝 열렸다. 문 안쪽에서 한 중년여인이 얼굴을 내밀더니 반색을 했다. "어서 오세요, 공자님. 그 애가 아까부터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용백검은 안으로 들어서며 소매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슬쩍 중년여인에게 건네 주었다. "이건 매부인(媒婦人)에게 주는 내 선물이오." 일명 매부인으로 통하는 여인은 등롱빛에 그에게 받은 물건을 비춰 보고는 입이 귀밑까지 쭉 찢어졌다. 그것은 족히 은자 오백냥은 나갈 만한 보주(寶珠)였던 것이다. "호호호... 역시 용공자님이세요." 용백검은 즉시 그녀의 안내를 받아 후원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는 걸어가며 은근한 음성으로 물었다. "부탁한대로 일잔홍은 그 동안 손님을 받지 않았겠지?" "그럼요. 여부가 있겠어요? 공자님을 모실 계집이 어찌 감히 다른 사내를 맞겠습니까? 호호... 염려마세요. 그 애는 줄곧 공자님이 오시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으니까요." 용백검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흐음, 좋소. 알다시피 오늘은 내 생일이 아니오? 번잡스러운 잔치석상을 피해 일잔홍과 조용히 자축하려고 하니 그리 알고 배려를 좀 해 주었으면 하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용백검은 호방하고 낙천적이기는 해도 무척이나 까다로운 취향을 가진 귀공자였다. 따라서 시끄러운 것이 싫다는 그의 일면은 자연스럽게 이해 되었다. 어쩌면 그가 슬며시 무림성을 빠져 나온 것도 꼭 바람을 피우겠다는 목적만은 아닐지 몰랐다. "하하하... 못 보던 사이에 더욱 예뻐졌구나." 용백검은 한 송이 작약꽃처럼 붉은 옷에 감싸여 있는 미녀를 보며 크게 웃었다. 일잔홍. 그녀는 얼마 전 홍하원(紅河院)이라는 기원(妓院)에 새로 들어온 기녀로써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절색이었다. 용백검이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우선 피부가 빙옥(氷玉) 같았으며 몸매는 호리호리하면서도 굴곡이 선명했다. 게다가 호수처럼 맑은 눈에 그린 듯 고운 눈썹, 오똑한 코는 마늘쪽 같았고 입술은 꽃잎인 양 붉디 붉었다. 그런 일잔홍이 허리를 숙여 그를 맞이한다. "어서 오세요, 공자님...." 그녀의 음성은 물기가 배인 듯 촉촉히 젖어 있었다. 그 음성은 근사한 인사치레나 그리움의 표현보다 더욱 더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어감을 내포하고 있었다. 기방(妓房)에는 깨끗한 원앙금침이 깔려 있었다. 별로 크지는 않으나 상도 차려져 있었는데 그 위에는 깔끔하고 입맛을 돋우는 요리와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 모두가 용백검의 취향에 꼭 들어 맞는 것들이었다. "앉으세요, 축하주를 준비해 놓았어요." "그러지." 용백검은 대답을 하면서도 일잔홍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하지만 그보다 네 축하를 먼저 받아야겠다." "고, 공자님...." 일잔홍은 약간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이내 용백검이 이끄는대로 그의 품으로 딸려 들어갔다. 그녀의 몸은 뼈가 없는 듯 부드럽기 그지 없었다. 용백검의 입술에 내맡겨진 그녀의 입술 역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으음...." 잠시 녹아날 듯한 입맞춤이 두 남녀 사이에 있었다.


그 사이에도 소문난 바람둥이답게 용백검의 손은 앞뒤로 쉬지 않고 움직여 일잔홍의 옷을 마구 풀어 헤치고 있었다. 반면에 일잔홍은 몸을 가볍게 이리저리 틀었으되, 그 동작은 거부가 아니라 묘하게 용백검의 손동작을 돕는 것이었다. 몇 겹의 의복이 젖혀지자 마침내 그녀의 앞섶으로부터 불쑥 얼굴을 내미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수밀도를 연상케 하는 두 개의 젖가슴이었다. 그리 크지는 않았으나 손바닥 안에 알맞게 쥐어지는 융기에 용백검은 저으기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의 손은 서슴없이 수밀도의 탄력을 시험해 갔다. 그의 입에서는 나직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으음, 좋군." 여체를 평가하는 그의 기준도 까다롭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일잔홍의 젖가슴은 일단 합격인 모양이었다. 그의 손놀림에 따라 이번에는 일잔홍의 입에서 야릇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흐음...." 치밀어 오르는 열정을 자제하는 듯 살짝 아미를 찡그리는 그녀의 표정이란 가히 뇌쇄적인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천하의 풍류객인 용백검이 바야흐로 이런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내 어찌 하여 진작 너를 만나지 못했을까?" 용백검은 읊조림과 더불어 일잔홍의 상의를 완전하게 벗기려 들었다. 그리하여 눈부신 그녀의 어깨가 막 드러날 때였다. "잠깐만요, 그래도 격식은 갖추어야지요." 일잔홍이 생긋 웃으며 그의 품에서 슬며시 몸을 빼냈다. "격식?" 용백검은 콧등을 가볍게 찡그렸다. "아무렴요. 공자님께서는 제가 처음으로 맞이하는 낭군님이세요. 합환주(合歡酒)만은 꼭 드셨으면 해요." 차마 거절할 수 없는 말이었다. 쓴 입맛을 다시고 있는 용백검에게 일잔홍은 술병을 들어 잔에 술을 따른 후, 두 손으로 받쳐 올렸다. 벌어져 있는 그녀의 앞섶에서 젖무덤이 아찔한 충격을 전해오고 있었다. 용백검은 술잔은 보지도 않고 물었다. "또 술을...?" 아무래도 별로 달갑지 않은 얼굴이다. 그는 성내에서 이미 많은 양의 술을 마셨던 것이다. 일잔홍이 그의 무릎 위에 걸터 앉으며 고혹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호호... 그럼 제가 특별한 술을 드리도록 하죠." "특별한 술?" ② 일잔홍. 그녀는 스스로 술잔을 들더니 단숨에 비워 버렸다. 합환주라면 의례 반씩 나누어 마시는 것이 상례이다. 용백검은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아 다소 과장되이 웃었다. "하하하핫...! 내 몫까지 모두 마셔 버린 게냐?" 아니었다. 뜻밖에도 붉은 입술이 그에게로 바짝 다가온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일잔홍이 입술을 조그맣게 오므린 채 그를 향해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흐음?" 용백검은 그제서야 그녀가 술잔 대신 입술로써 술을 전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는 가라앉았던 그의 취흥을 한껏 북돋우는 행동이기도 했다.


결국 그는 일잔홍의 나긋한 허리를 끌어 안고 그녀가 주는 특별한 술을 받게 되었다. 입술과 입술이 합쳐지니 곧바로 향긋한 액체가 여인의 숨결과 함께 입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용백검은 더 없이 흡족해져 한 손으로 그녀의 둔부를,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젖가슴을 주무르며 그 액체를 빨아 들였다. 이윽고 그는 술이 다 없어지자 다음으로는 달큰한 기운이 느껴지는 일잔홍의 혀를 마음껏 흡입했다. "으음...!" 그는 이 각별한 입맞춤을 통해 여타의 여인들에게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황홀한 경지를 헤매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신이 솜처럼 나른하게 풀어지는 것 같다고나 할까? 이렇게 되자 그로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더 참아야할 이유도 없었으므로 그는 일잔홍의 젖가슴을 쓰다듬던 손으로 거칠게 그녀의 옷을 벗겨내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잘 되지를 않았다. 맹세코 여인의 옷벗기는 일이 이처럼 어려웠던 적은 없었다. 게다가 갑자기 무릎에 앉아 있는 일잔홍의 무게가 천근처럼 무거워지는 것은 또 무슨 현상이란 말인가? 용백검은 자꾸만 몸이 늪 속으로 빠지는 듯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 때까지도 일잔홍의 혀는 자신의 입 안에서 기민하게 움직이며 그의 전신에 짜릿짜릿한 전율을 일으키고 있건만. 그는 정신이 몽롱해진 채 입술을 떼며 중얼거렸다. "너는 요물(妖物)인가 보다. 일잔홍...." 스르르.... 용백검의 육신이 믿을 수 없게도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를 바라보는 일잔홍의 태도였다. 그녀는 얼굴에 요악(妖惡)한 미소를 드리우며 일어섰다. "호호호호... 어리석긴!" 그녀의 입에서는 경멸에 찬 웃음이 흘러 나왔다. "무림성의 소성주이며 오만하기 그지 없다는 옥기린(玉麒麟)도 색계(色計)에는 속수무책이로군." 일잔홍은 고개를 돌리더니 한 쪽을 향해 말했다. "그만 나오시죠, 공자님." 스슥! 벽에 쳐져 있던 휘장 속으로부터 한 인물이 걸어 나왔다. 그 자는 용백검이었다. 이르자면 또 한 사람의 용백검으로써 일신에 연홍빛 유삼을 입은 것도, 얼굴이나 키, 몸매조차도 쓰러져 있는 그와 한 치도 틀림이 없는 모습이었다. 마치 쌍동이처럼 용백검과 닮아 있는 그 자는 눈에 한 가닥 냉기를 띈 채 일잔홍을 노려 보았다. "실로 교활한 여인이로군, 당신은." 일잔홍은 아무렇지도 않게 응수했다. "호호... 그러는 당신도 앞으로는 별 수 없을 걸요? 나보다 오히려 더 교활해지게 될 테니까." 그녀는 벌어져 있는 앞섶을 가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젖가슴이 삐죽 드러나 있었으나 부끄러워하는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그녀는 새로운 용백검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좋든 싫든 우리는 동지(同志)예요, 아닌가요? 호호... 그런 의미에서 술 한 잔 나누는 것은 어떨까요?" "그래야겠지. 당신 같은 여인과 멀쩡한 정신상태로 시간을 보내려면 역겨울테니 말이오." "호호... 너무 그러지 말아요. 밖에서는 우리가 만리장성을 쌓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을 텐데요." 용백검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오." 일잔홍은 그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뱅어 같이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예의 호박색이 도는 액체를 따른 후, 그에게 내밀었다. "자! 동지애를 다지기 위해 축배를 들도록 해요."


용백검은 술잔을 받고 빙긋 웃어 보였다. "후후... 이 술 속에도 독(毒)을 넣었소?" 그는 잔을 입으로 가져가 단숨에 술을 마셔 버렸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일잔홍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체 어떤 비법을 썼소? 똑같은 술을 마시고도 쓰러지는 자와 쓰러지지 않은 자가 있으니 말이오." "호호호호...!" 일잔홍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교소를 터뜨렸다. 그 바람에 그녀의 아름다운 젖가슴이 크게 출렁였다. 이는 어쩌면 요염해 보인다기보다는 여인으로써의 수치감 따위에서 완전히 일탈된, 가히 여장부적인 면모라 할 수 있었다. "간단해요. 저는 술이나 술잔에는 아무런 장난도 치지 않았어요. 아까 말했던 특별한 잔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거죠." "호오! 그랬었군." 용백검은 놀람을 표명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신은 정녕 무서운 여인이오. 아름답고 우아한 얼굴 뒤에 또 하나의 섬뜩한 얼굴을 감추고 있는...." "호호호호... 그건 칭찬으로 받아 들이겠어요. 혹 용공자께서도 제 입술잔을 시험해 보시겠다면 기꺼이 응해 드리죠." 용백검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 나는 사양하겠소. 저 꼴이 되어 당신 앞에서 드러누워 있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는 눈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다른 용백검을 가리켰다. 일순 그의 동공에서 적지아니 흔들림이 일어났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도 연민과 색채가 비슷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술잔을 기울이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잔이 비워지자 용백검은 술을 따라 일잔홍에게 주었다. "자! 가시가 있는 장미에게." "호호호... 고마워요." 일잔홍은 소리내어 웃으며 술을 마셨다. 그들은 그 뒤로 권커니 잣커니 하며 한 병의 술을 모두 비웠다. 어찌 보면 그것은 매우 해괴한 풍경이었다. 방 한가운데에 한 명의 용백검이 쓰러져 있고, 그와 똑같이 생긴 또 한 명의 용백검은 젖가슴을 드러내 놓고 있는 미녀와 술을 나누고 있으니 누가 보아도 제대로 된 광경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일잔홍이 탁자 위에 놓어 있던 모래시계를 들어 올렸다. "시간이 다 되었군요." "후후... 하긴 그만하면 만리장성을 쌓고도 남았겠지." 용백검은 몸을 일으켰다. "그만 헤어져야겠구려." 일잔홍이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한 가지 보여 드릴 것이 있어요." 용백검은 뭐냐고 물으려다 멈칫했다. 갑자기 일잔홍이 그의 면전에서 걸치고 있던 치마를 풀어 내는 바람에 놀라서 하려던 말이 목구멍으로 도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왜...?" 붉은 치마가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서도 그가 한 말이라곤 고작 이것 뿐이었다. 곧이어 속옷마저도 떨어져 나가고 일잔홍은 적나라한 알몸의 하체를 드러내게 되었다. 용백검은 자신도 모르게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대리석처럼 매끄러운 허벅지는 물론 여인의 밀림지역까지도 노출되니 본능적으로 회피하게 된 것이었다. 일잔홍이 의미심장한 어조로 물었다.


"왜 끝까지 보지 않는 거죠?" 용백검은 비교적 차갑게 대꾸했다. "꼭 보아야 할 이유라도 있소?" "호호호호홋...!" 일잔홍은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웃음을 그치더니 조소가 깃든 음성으로 말했다. "좌우간 어지간히도 몸을 사리는군요. 마치 내가 당신에게 함께 즐기자고 유혹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에요." "그럼 아니었소?" "그건 보면 알게 될 테니까 어서 보기나 하세요." '대체...?' 용백검은 의혹이 치미는 가운데 고개를 돌려 일잔홍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길은 그녀의 젖가슴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잘록한 허리와 동그랗고 풍만한 둔부, 군살이라고는 한 점도 붙어 있지 않은 아랫배와 그 곳에 앙증맞게 패여진 배꼽.... 그녀의 몸에는 도무지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라곤 없었다. 하지만 용백검의 눈은 어느 한 곳에서 딱 고정되었다. 동시에 그의 눈에서는 이채가 번뜩였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일잔홍이 말했다. "호호호... 보셨나요? 이건 비밀표기(秘密表記)예요. 이런 표식이 있는 여인을 만나면 믿어도 좋아요. 말하자면 당신을 위한 조력자들의 신분을 보증하는 표식이죠." 용백검의 시선은 일잔홍의 배꼽 아래에 못박혀 있었다. 그 곳은 여인의 밀림지대에서 약간 윗부분으로써 거기에는 놀랍게도 한 송이의 붉은 매화(梅花)가 선명하게 피어 있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정교하게 새겨진 문신(文身)이다. 실로 영활하기 짝이 없는 안배였다. 비밀 표식을 여인의 중지에 새겨 놓다니, 옷을 다 벗기지 않고서는 확인할래야 확인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비밀 유지의 확률이 가장 높은 표식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보도록 하세요. 이 매화의 꽃술은 직위를 나타내죠. 최고는 다섯 개구요. 당신은 다섯 개의 꽃술을 새기고 있는 분을 만나면 그 분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해요." 용백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일잔홍의 아랫배에 새겨진 매화의 꽃술이 세 개인 것을 보고 있었다. "호호... 아마도 다섯 개의 꽃술을 당신은 영원히 볼 수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 분은...." 일잔홍은 여기에서 스스로 입을 닫아 버렸다. 이어 그녀는 치마를 여미며 냉래하게 내뱉았다. "제 역할은 끝났으니 어서 성내로 돌아가 보세요." 용백검은 역시 묵묵히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쓰러져 있는 용백검을 바라보았다. '과연 저 자가 일신에 아무 이상도 없이 무사할지? 얼굴이 벌써 자색으로 변해 있거늘....' 중얼거리는 가운데 용백검은 가슴이 크게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 자신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었다. '쯧!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그는 심중의 동요를 부인하려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구름을 밟는 듯한 그의 보법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그의 왼쪽 팔꿈치는 습관인 양 약간 구부러져 있었다. ③ 쏴아아--! 어두운 밤하늘에서 빗줄기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금비가 입술이 삐죽 나와 가지고는


투덜거렸다. "글쎄, 이렇다니까. 고생문이 훤하게 생겼군. 이 빗속을 뚫고 돌아가야 하다니." 그녀의 불평에 용백검은 씨익 웃어 보였다. "고생은 네가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이번 길에는 은비를 마부석에 앉혔으니 불평을 해도 그녀가 해야지, 왜 네가 더 난리를 부리느냐?" "흥, 이게 다 공자님 때문이에요. 그래, 고 여우 같은 일잔홍이 어떻게 공자님을 홀리던가요?" "하하... 알려 주면 너도 한 번 배워 보겠느냐?" "어머, 공자님은...!" 금비의 얼굴이 금방 홍당무가 되었다. "하하하...!" 그의 입에서 낭랑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차는 우중에도 무림성을 향해 일로 내달리고 있었다. "으음, 피곤하군." 용백검은 느긋하게 중얼거리더니 곧 의자에 드러누워 잠이 들어 버렸다. 그를 바라보며 금비는 다시 이죽였다. "흥, 피곤도 하시겠지. 대체 얼마나 그 계집과 질탕하게 어울리셨길래 이처럼 곯아 떨어지셨을까?" 그녀의 얼굴에 역력히 드러나는 것은 질투의 빛이었다. 결국 그녀의 불만 토로는 낮은 탄식으로 끝을 맺었다. "못말리는 바람둥이 공자님...." 잠든 용백검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에는 언뜻 한 가닥 수심이 매달리기도 했다. 무림성(武林城). 이 곳은 곧 무림의 하늘이다. 무림성주의 말 한 마디는 무림의 법(法)이었으며 그의 권한에 따라 군소방파(群小 派) 쯤은 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화할 수도 있었다. 제 일대 무림성주는 황실의 인물로써 왕자(王子)였다. 그는 궁중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권력다툼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어느 날 갑자기 황족(皇族)이라는 신분조차 미련없이 집어던져 버리고 단신으로 무림에 뛰어 들었다. 그로 말하자면 천부적인 무골(無骨)이었으며 황실의 비밀무고를 통해 이미 수백 종의 기학을 익힌 바 있는 위인이었다. 그는 무림에 나오자마자 한 가지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무림인들이 서로 반목하며 유혈충돌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강력한 세력을 만들어 억제시키리라 작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림의 정도(正道)와 사도(邪道)는 그야말로 물과 기름이었고 그나마 자파의 이익과 명예에 급급하여 기본적인 화합도 알지 못했다. 어쨌든 주천성(朱天成)이라는 이름을 가진 황가출신의 그 기인은 그런 상황에서도 의기가 꺾이지 않고 무려 사십 년의 긴 세월을 바쳐 마침내 무림성을 세우기에 이른다. 그는 몸소 나서서 차례로 흑백양도의 거물들을 꺾어 갔는데, 그의 기량은 비단 무공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뛰어난 지략(智略)과 인품, 게다가 타고난 영도력까지 갖추고 있었던 그는 결국 당대에 불멸의 금자탑을 이룩할 수가 있었다. 무림성은 바로 그렇게 탄생되었다.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障)의 아들 중 한 사람이었던 그는 강호무림에 그 나름의 왕국을 세웠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오른 것이었다. 대통을 이어가는 방식만은 황실과 달랐다. 무림성주인 주천성은 평생 독신이기도 했거니와 자신의 대를 이을 재목으로 그 시대에 가장 뛰어났던 인물을 지목했으며, 다음 대에도 반드시 그렇게 하기를 종용했다. 이 전통은 계속 이어져 내려와 누구든 자격을 갖추면 무림성주가 될 수 있었다. 원로원(元老院)의 추천을 거쳐 성주의 인가를 받으면 차기 성주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원로원의 심의추천을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림을 위해 지대한 공적을


쌓은 인물이어야 하며 개인적으로도 무공과 인품, 그리고 영도력과 무림인들의 지지까지도 얻고 있는 인물이라야만 했다. 따라서 역대 무림성주는 대개가 정파 출신이었는데 예외도 있기는 했다. 유일무이하게 사도인(邪道人)으로써 무림성의 권력을 수중에 거머쥐게 된 인물이다. 현음신군(玄陰神君) 단리목(壇里木). 그는 본래 사도에 속해 있는 현음교(玄陰敎)의 교주였다. 그러나 출신이 이러한 그가 제 오대 무림성주가 되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인물은 전 무림에 걸쳐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오십 년 전, 천축법왕(天竺法王)이자 달라이대라마였던 적리휼금(赤里恤琴)이 중원에 침공을 했을 때이다. 제 사대 무림성주인 도성(刀聖) 구양술(歐陽術)마저도 그 싸움에서 쓰러지자 무림성은 뿌리째 흔들렸었다. 이 때를 기해 분연히 나선 인물이 현음신군 단리목이었다. 그는 사도인들을 모두 규합하여 적도들에게 항거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무림의 정과 사를 하나로 묶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으며 그 단합된 힘은 적리휼금이 이끄는 무리들을 중원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런즉 그가 무림성 원로원의 추대를 받아 현음교주에서 무림성주로 자리바꿈을 하는데는 하등의 문제가 없었다. 무림성은 일원(一院)을 위시하여 이전(二殿)과 사개지단(四個支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원이란 원로원을 의미한다. 이 곳은 무림성 내에서 최고의 배분을 지닌 원로들이 관장하고 있으며 신임 성주를 심사하는 것은 물론 재위 중인 성주의 행동에 대한 문책까지도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기관이다. 현재 원로원에 속한 팔대원주(八大院主)는 전부 백 세가 넘은 인물들로써 사실상 무림 최고의 원로급 인사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체적인 율법을 지니고 있어 무림성 내에서 유일하게 성주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무방한 인물들이었다. 천무전(天武殿)과 군마전(群魔殿). 이 두 곳을 일컬어 이전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상호간에 소위 불가침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다. 무림성은 제 오대 성주를 맞이한 이후로 정사(正邪)의 개념을 초월한 곳이 되어 있었다. 정도인이든, 사도인이든 원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가입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양자 간의 의식 차이에서 오는 충돌이나 불편은 수시로 난제로 대두되었고 이것을 해소하기 위한 방책으로 고수들을 두 부류로 크게 나누어 배속시키게 되었다. 정도인은 천무전에, 사도인들은 군마전에 따로 나누어 둔 것이다. 각기 이들을 책임지고 있는 양대전주란 무림성주 다음가는 절대적인 권력자들로써 이 두 사람이 지닌 영향력은 무림 각대 문파의 장문지존들보다 오히려 지대하다 할 수 있었다. 끝으로 사개지단을 열거하자면 이러하다. 일명 풍운뇌우(風雲雷雨)로도 불리우는 그들은 풍령단(風鈴團), 운현단(雲玄團), 뇌정단(雷霆團), 흑우단(黑雨團) 등이었다. 이들 사개지단을 이르자면 무림성의 본격 정예이자 힘의 중추였다. 무림성주가 직접 관장하고 있으며 천하무림의 위급한 사태가 발생했을 시에도 출동하게 되는 것은 이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저마다 다른 특색이 있었다. 풍령단은 대개 무림성주의 직계로 구성되며 맡은 임무도 성주를 보위하는 것인지라 일종의 근위대와 같은 성격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인원이 적은데 반해 영향력은 막강했다. 그들은 항상 나타날 때면 풍령소리를 울렸는데 이것은 곧 무림성주의 현신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풍령소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무림성주 그 자체이기도 했다. 운현단은 대부분 여인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녀들이 가진 조직체계는 특수했다. 당대에 이르기까지도 전대 무림성주인 현음신군의 현음교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뇌정단은 흑우단과 함께 무림성의 행동조였다. 그들은 무림의 일에 직접적으로 깊숙히 개입하여 각 문파와의 연락 및 의전 등을 처리하고 있었다. 천하무림의 거봉(巨峰)인 무림성은 바꾸어 말하면 무림 전체로 표현될 수 있었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가 무림성에 들기를 원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무림성주가 되어 천하를 호령하는 것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고 있었다. 그 무림성의 중심부에서 풍운은 시작되었다. ④ 쩌쩍! 우르르르-- 콰앙! 뇌성벽력이 태산(泰山) 무성곡(武聖谷)을 온통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뇌전이 번뜩일 때마다 무림성의 웅자(雄姿)가 대낮 같이 환하게 드러나곤 했다. 소성주인 옥기린 용백검이 돌아온 것은 늦은 밤이었다. 무림성은 크게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나누어진다. 그 중 내성에 성주가 기거하는 무존각(武尊閣)과 원로원이 있다. "쯧쯧... 이 상태로 계속 쏟아져 내리다간 성 전체가 모조리 홍수(洪水)에 잠겨 버리겠는 걸?" 용백검은 마차 안에서 밖을 내다보며 씨익 웃었다. 그가 타고 있는 마차는 이제 막 외성을 지나 내성에 이르고 있었다. 금비가 곁에서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게 제가 뭐랬어요? 날씨가 너무 험상궂어서 아무래도 폭우를 만나게 될 것 같다고 했잖아요." 용백검이 어깨를 들먹이며 키들거렸다. "큭큭... 그럼 나더러 보기 싫은 작자들과 어울리며 그들이 뱉아내는 형식적인 축하인사나 받고 있으란 말이냐?" 금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식적이라니요?" 용백검은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를 띄었다. "그 작자들은 단지 부모님 때문에 이 용백검 앞에서 웃는 얼굴을 보이는 것이지. 훗훗... 돌아서면서 그들이 뭐라고 비웃는지 나도 알고 있단 말이다." "공자님...." 금비의 큰 눈이 연민의 빛을 띠운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서랏!" 밖으로부터 날카로운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그 바람에 마차가 멈추고 마부석에 있던 은비의 앙칼진 외침이 이어졌다. "당신들은 눈도 없어요? 이 마차가 누구의 것인지 뻔히 알면서도 어째서 그 따위 소리를 하고 있는 거죠?" 한 가닥 음침한 음성이 그 말을 받았다. "알고 있다, 은비낭자. 하지만 내성(內城)에 출입하려면 반드시 영패가 있어야만 되지 않는가?" 은비의 노한 음성이 다시 전해져 왔다. "탁영주(卓令主)께선 요즘 상당히 소임에 충실해지셨군요? 흥! 그렇다고 소성주님까지 검문을 한다는 건 너무하지 않나요?" "흐흐... 그건 노부에게 따질 바가 아니다. 나는 다만 규칙을 엄수하고자 할 뿐이니까." "비키세욧! 비키지 않으면 그냥 통과해 들어 가겠어요."


마차가 덜컥 하고 움직였다. 그러자 예의 음성이 말했다. "흣, 막진 않겠다만 이 사실은 즉시 성주께 보고될 것이다. 이것은 네 말마따나 노부가 직무에 충실하기 때문이지." 마차 안에서 괴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그 때였다. "큭큭... 실은 그래서 내가 탁일공(卓一孔)나리를 존경하고 있소. 그 충성심을 누가 따르겠소이까?" 용백검이었다. 스슷--! 마차의 문 앞으로 한 중년인이 다가들었다. "공자님이시군요. 흐흐... 제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규칙이 엄중한지라...." 용백검은 더 듣기 싫은 듯 상대의 말을 잘랐다. "아! 그야 물론이지, 누가 감히 규칙을 무시할 수 있겠소?" 그는 소매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던졌다. "자! 확인하시오, 탁영주." 휙! 빗발을 뚫고 날아가는 물체는 황금빛을 띄고 있었다. 그것은 정확히 중년인의 가슴 한복판으로 쏘아져 갔다. "틀림없는 무존령(武尊令)입니... 억!" 중년인은 말하다 말고 비명을 질렀다. 황금빛 물체가 받으려는 순간에 갑자기 방향을 틀어 어깨를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하하하... 확인했으면 어서 비켜 주시오." 용백검은 대소를 터뜨렸다. 중년인, 즉 탁일공은 손을 들어 한 쪽 어깨를 움켜잡고 있었다. 어느 덧 그의 어깨에서는 피가 배어 나와 빗물을 타고 주루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하하... 들어가자, 은비." "네, 소성주님." 은비가 야무지게 대답했다. 동시에 마차는 진흙탕을 촤악 퉁겨 내며 성문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쓰헐! 성주의 위세만 아니라면 저 애송이를...!' 탁일공은 마차의 꽁무니에 대고 내심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무림성의 소성주인 옥기린 용백검.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무림성 내에서 극히 적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는 명목상으로는 분명 무림성의 소성주였으나 실질적인 권한이 전혀 없었다. 이것은 성주의 대통을 잇는데 있어 혈연이나 문계 따위를 인정하지 않는 무림성의 오랜 전통 때문이었다. 그가 차기 성주가 되려면 어디까지나 그만한 공적이나 실력이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소성주인 용백검은 그런 것들을 이루어 나가기는 커녕 평판마저 좋지 않았다. 무공을 연마하고 성내의 일을 돕는 대신 장난을 치거나 엽색행각을 일삼고 있으니 도리가 없었다. 그는 원로원의 눈 밖에 난지도 오래였다. 게다가 평소에 드러나는 성격조차도 오만하고 제멋대로인지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는 무림성주인 그의 부친조차도 아들에게 실망을 거듭한 나머지 곱지 않게 대했다. 모친인 천음선자(天音仙子)만이 그를 꾸준히 비호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생일이라 해서 대접이 융숭할 리가 없었다. 무림성주는 아예 성내에서 연회를 개최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으며 누구도 그의 처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천음선자가 도저히 안되겠던지 내성에서 조촐하게 잔치석상을 마련했는데 그래도 그녀의 체면을 보아


하객은 꽤 많았다. 용백검이 일잔홍을 만나러 몰래 빠져 나가는 바람에 그나마 후반에 가서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기는 했지만. 그가 자신의 처소에 당도한 시각은 이경이 넘어서였다. 잔치는 이미 파장이 나 있었고, 그를 기다렸다거나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무림성의 인물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 용백검의 이번 외출(外出)이 앞날에 몰고 올 이변에 대해서 말이다. 제 5 장 대역(大役)의 목적(目的) ① 욕실에는 수증기가 자욱하게 차 올라 있었다. '결국 무림성에 들어오는데 성공했다. 유옥(柳玉), 너는 철저히 용백검의 분신(分身)이 되는 것이다. 후후....' 용백검, 아니 유옥은 뜨거운 욕탕 안에서 몸을 씻고 있었다. 그는 완벽에 가까운 치밀한 계략으로 인해 마침내 용백검과 자리를 바꾸어 무림성에 들어온 것이었다. 비록 처음 입성이었으나 무림성의 구조는 그에게 있어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사전에 무림성의 구조 도면을 놓고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외워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옥은 만사 진행이 순조로운데 비해 착잡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이것이 내 얼굴이란 말인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용백검의 얼굴일 뿐이다. 이 몸도 역시 그의 것....' 그는 자신의 왼쪽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 곳에는 전에 없는 흉터가 생겨나 있었다. 용백검이 가졌던 흉터와 똑같은 크기,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유옥은 고개를 숙여 긴 머리카락을 들어 물에 푹 담그었다가 다시 들었다. 흑발이 눈 앞을 가린 가운데 그는 읊조렸다. '훗훗... 무림성, 너는 아느냐?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 날만을 위해 키워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자욱한 수증기 속에서 기이한 웃음을 흘리던 그는 눈을 지그시 내리 감았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피로감이 느껴졌으며 눈을 감자 전신이 솜처럼 풀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 한 가닥 음성이 들려와 그를 놀래켰다. "그만 나오셔야지요, 공자님." 달콤한 음성의 주인은 다름 아닌 금비였다. 언제 욕실 안으로 들어 왔는지 그녀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올려 주고 있었다. 유옥은 내심 저으기 당황했다. "너로구나, 금비...." 여전히 태연을 표방하고 있기는 했지만 수건을 들고 서 있는 금비를 그는 도저히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남녀가 유별하거늘, 대체 얼마나 깊은 관계이기에 목욕 중에도 서슴없이 들어온단 말인가?' 그의 심중을 알리 없는 금비가 생긋 웃었다. "자, 어서요. 계속 그렇게 물 속에 계시면 지치시잖아요?" 유옥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을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부단히 준비를 해왔지만 이런 방면에 관한 한 전해 들은 바가 없거니와 아무 대책도 서 있지를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주인으로써 종을 거느려 본 적이 없었으며, 남녀 사이에 대해서도 그다니 익숙하지 못한 처지였다. 특히 방탕함은 그의 관념에서 허용되지 않는 범위에 있었다. 그는 잠깐의 갈등을 거쳐 내심 중얼거렸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는 현재 유옥이 아니므로.'


쏴아아.... 유옥은 단단히 마음을 먹는 한편, 욕통 속에서 알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가능한 한 얼굴이 붉어지지 않도록 애를 쓰면서 입을 열었다. "어서 닦아 다오. 오늘은 피곤해서 일찍 자야겠다." "호호... 공자님도! 연극에 아주 이력이 붙으셨나 봐요. 그 정도면 소비까지도 깜빡 넘어 가겠는데요?" 유옥은 가슴이 철렁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의 손이 부지중 가늘게 떨렸다. 뭔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내막이 있다는 것, 그리고 금비의 말 중에 들어 있던 연극이라는 단어 등이 그의 신경줄을 팽팽하게 당겨 놓았다. '여차하면 너는 내 손에...!' 유옥은 어느 덧 금비를 향해 보이지 않게 공격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걱정이 기우였다는 것은 금세 판명되었다. 금비는 아무 것도 개의치 않는 듯 다시 지껄여 댔다. "하긴 그 노릇도 어느 면에서는 힘드실 거예요. 호호... 소비는 생각만 해도 우스워요. 결과적으로 공자님께선 탕아로 위장한 채 천하인들을 모두 기만하고 계신 게 아닌가요?" 금비는 그의 몸에 묻어 있는 물기를 정성껏 수건으로 닦아 내었다. 그녀는 조금도 수줍어 하지 않았다. 늘상 하던 일인 듯 그녀의 행동은 그저 자연스럽기만 했다. 반면에 그녀의 시중을 받고 있는 유옥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의 충격이란 이래저래 말 할 수 없이 컸다. '그럼 용백검은 세간에 알려진 바와는 다른 인물이 아닌가?' 금비가 그의 가슴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가끔씩은 소비도 불안할 때가 있어요. 이번 행차만 해도 그래요, 같이 연극에 휩쓸리면서도 공자님께서 일잔홍에게 정말로 넘어 가실까봐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현음진기(玄陰眞氣)를 십성까지 연마하시기 전에는 필히 동정을 지키셔야 되거늘, 그렇지 못하면 교주(敎主)님의 불호령이...." '현음진기를 연성 중이었다고? 용백검이?' 유옥은 완전히 한 방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때마침 금비가 명랑한 어조로 종알거리지 않았다면 그는 그대로 물 속에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으리라. "다 되었어요, 공자님. 이것을 입으세요." 그녀는 미리 준비해 온 듯 한 벌의 장삼을 그의 몸에 걸쳐 주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되어 물었다. "어디 편찮으신가요? 공자님의 안색이 좋지 않아요." 유옥은 평소의 용백검의 그러했듯 히죽 웃어 보였다. "아니다, 잠깐 딴 생각을 하고 있었지." "무슨 생각을요?" "후후... 어디 한 번 알아 맞춰 봐라." "흐음...?" 금비는 눈을 사르르 굴리더니 손뼉을 탁 쳤다. "알았어요! 공자께서는 지금 상관소저의 문제로 고민하고 계시는 거죠? 그렇죠?" 유옥은 시인도 부인도 아닌 애매한 대답을 했다. "반만 맞추었다." 그는 금비를 지나쳐 내실로 걸어 들어갔다. "그럼 반은 또 뭔가요?" 그녀가 뒤를 따르며 호기심에 찬 음성으로 묻자 그는 돌아다 보며 씨익 웃었다. "현음진기를 연성하면 그 즉시 봉매(鳳妹)와 결혼할 생각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의 일이지."


"무엇이 문제인데요?" "너와 은비 중에서 누구를 먼저 해치울까를 생각했거든." "해치우다니요?" 금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유옥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짐짓 엄숙하게 말했다. "그건 말이다..." 농탕하게 이어지는 그의 뒷말은 결국 금비라는 대담한 소녀마저도 질겁을 하게 만들었다. "세상에! 공자님께선 어찌 그런 말씀까지 노골적으로...." "하하하... 당연한 것 아니냐? 희대의 탕아가 남녀 관계에 관해서라면 뭔 짓인들 못하겠느냐?" "몰라욧! 공자님과 더 말하지 않겠어요." 급기야 금비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달아나 버렸다. 그녀를 쫓아낸(?) 유옥은 일부러 크게 웃어제꼈다. "하하하하핫...!" 침전(寢殿). 유옥은 아직도 본래의 주인인 용백검의 체취가 남아 있는 그 곳에 들며 못내 우울한 심경을 떨치지 못했다. 그나마 침실의 휘장을 젖히는 순간, 그는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침상 위에 놓여 있는 한 장의 종이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무사히 입성한 것을 축하한다. 이제부터는 더욱 더 매사에 빈틈없이 행동해야 한다. 특히 금비와 은비에게 헛점을 노출시켜서는 안된다. 무림성은 와호장룡(臥虎藏龍)이니 경거망동은 금물이다. 당분간은 지리(地理)와 주변인물들, 생활습관 등을 익혀 두도록 해라. 다음 번에 첫 번째 명(命)을 전달하겠다. 이 종이는 읽는 즉시 삼켜 버려라.> 유옥의 입에서는 절로 쓴 웃음이 새어 나왔다. "후후... 결국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군. 명을 내리고, 나는 그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고...." ② 삼 일이 지났다. 그 동안 유옥은 편지를 통한 지시 사항에 따라 무림성에 대해 웬만큼 파악을 해 두었다. 하지만 되도록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일만은 피하고자 애썼다. 용백검에 대해서라면 이 곳에 오기 전 완벽할 정도로 익혀 놓은 상태였으나 막상 그의 대행을 하려고 보니 사소한 데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수시로 장애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유옥은 한 여인의 방문을 받았다. "오랫만이군요, 백검." 그는 첫 눈에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아 보았다. 따라서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리 고운 투가 아니었다. "아니, 이게 대체 웬 일이오? 봉매가 나를 다 찾아오다니. 필경 내일 쯤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 그의 빈정거림에 여인은 할 말을 잃은 채 안면을 굳혔다. 일신에 눈부신 백의(白衣)를 걸치고 있는 그녀는 큰 눈에 한 가닥 우수를 담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십팔, 구 세쯤 되었을까? 우아하고 기품 있는 자태가 한 마리의 학(鶴)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한 동안 어두운 눈빛으로 유옥을 응시하더니 보다 진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요즘 통 만나지 못해 피차에 얘기할 기회가 없었어요." 유옥은 앉은 자세에서 일어나 보기는 커녕 다리를 탁자 위에 척 하니 올려 놓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야 봉매가 나를 피하니까." 백의의 미녀, 즉 상관영봉(上官靈鳳)은 아미를 살짝 찡그렸다.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었다. 그녀가 가진 상식으로는 정혼녀(定婚女) 앞에서 탁자 위에 발이나 올려 놓는 사내를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전하시군요." 상관영봉은 짧게 잘라 말하고는 보기가 역겹다는 듯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려 버렸다. 창 밖은 화원이었다. 그 곳에는 용설란이 피어 있어 상관영봉으로 하여금 아련한 추억에 젖어 들게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방금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혹시 기억 나세요? 우리 두 사람이 정담을 나누며 함께 저 화원을 공들여 가꾸던 때 말이에요." 유옥은 피식 웃었다. "그건 기억해서 무엇 하겠소? 벌써 오래 전의 일인 것을. 현재의 나는 꽃 따위에는 관심이 없소." 그의 눈이 한 가닥 기이한 빛을 띄었다. "어떻소? 나와 함께 성 밖으로 바람이나 쏘이러 가는 것이? 내가 아주 그럴 듯한 장소를 알고 있는데." 자못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그 말에 상관영봉의 고운 안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정녕 목불인견(目不忍見)이군요. 대체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거죠? 최소한 내가 알고 있었던 용백검은 이런 위인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어찌 하여...." "핫핫핫핫...!" 유옥은 대소를 터뜨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마주치면 의례 잔소리나 늘어 놓을 줄 알았단 말이오. 이 좋은 날씨에, 아직 결혼한 사이도 아니면서 바가지나 긁히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못되오." 충격을 받은 듯 상관영봉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세상에! 백검, 당신이 어찌 내게 이렇듯 무례할 수가...." 그녀를 향해 유옥은 정색을 지으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날더러 무례하다고 했소? 그런 소리 마시오. 내 보기에는 봉매야말로 답답하기 그지 없소. 우리는 이제 설레임이나 가슴 속에 품고 있을 정도로 어린애들이 아니오. 새삼 꽃얘기나 하고, 시나 논하며 점잔을 빼는 것은 위선이오." "맙소사...!" 상관영봉은 감정이 도를 넘어서자 교구를 파르르 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옥은 여전히 비난을 그치지 않았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얘기요만, 봉매의 유치한 감상에는 되려 내가 짜증이 날 정도요. 성숙한 여인이라면 남자의 의중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하건만 당신은 전혀 그러지를 못하지 않소?" 잔뜩 떠벌인 그는 말을 잊은 듯 굳어져 있는 상관영봉에게 은근슬쩍 다가 들었다. "당신만 괜찮다면 내가 하나씩 가르쳐 주겠소. 우리의 관계가 좀 더 흥미있게 발전될 수 있는 방도를 말이오." 유옥은 거기에 한 술 더 떠 상관영봉의 손을 잡더니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내가 이러는 것은 봉매가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오. 당신의 곁에 있으면 나는 오직 한 가지 생각 밖에 들지 않소." 그는 호흡이 거칠어진 채 그녀의 귀에 대고 연신 뜨거운 입김을 퍼부었다. "우리 말을 타고 한 번 신나게 달려 보지 않겠소? 최근 내가 새로 발견한 동굴이 하나 있는데 그 곳에서...." "놔욧!" 상관영봉은 날카롭게 외치며 그의 손을 홱 뿌리쳤다. 그녀는 계속하여 격한 어조로 부르짖었다. "백검! 당신은 사람도 아니에요. 이 지경에도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하려 하다니, 타락해도 철저히 타락했군요. 성내의 고수들이 당신더러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당신 앞에서는 모두 웃는 척하지만 돌아서서 뭐라고 손가락질 하는지 아느냐구요?"


유옥은 멋적은 듯 손을 툭툭 털며 대꾸했다. "후후... 내가 그 작자들이 뭐라고 하는지까지 꼭 신경을 써야 하오? 미안하오만 관심없소. 나는 다만 나일 뿐이니까." 그의 입술 꼬리가 기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비판을 하려면 제대로 하시오. 그 작자들이야말로 내 아버님의 권위에 아부나 하는 비굴한 족속들이거늘, 후후...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어머님이 건재해 계시는 한 누구도 이 용백검을 내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오. 그 점에 있어서는 아버님께서도 예외가 아니실테고." "저... 정말 당신은 구제불능이군요...?" 부들부들 떠는 그녀에게 유옥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렇게 남의 말 하듯 쉽게 하지 마시오. 봉매 역시 구제불능이기는 마찬가지니까." "무, 무슨 뜻이죠? 그건...?" "험! 아마도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모양인데, 이 참에 내 친절하게 알려 주리다. 뛰어난 미색에 비해 유감스럽게도 봉매에게는 여자로써의 매력이 없소." "뭐... 뭐라고요...? 그 말... 진심인가요?" 상관영봉은 급기야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유옥의 어투는 그야말로 폭력에 가까웠다. 게다가 그는 고개를 모로 꼬며 혀를 차는 짓도 서슴치 않았다. "쯧! 모름지기 여자라면 고분고분한 면도 좀 있어야지." "아아...!" 상관영봉은 마침내 장탄식을 하기에 이르렀다. 너무도 낙심한 나머지 뇌리에 절망이라는 어휘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체념한 듯 허탈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어리석었어요. 그래도 한 가닥 기대를 품고 찾아 왔는데, 당신은 제 선에서도 끝내 어찌해 볼 수가 없군요." 유옥은 그녀의 눈에 눈물이 담기는 것을 보면서도 잔인한 한 마디를 잊지 않았다. "후후... 다른 건 몰라도 봉매가 내 정혼녀라는 것만은 필히 기억해 두어야 할 게요. 그것은 이미 세상에 다 알려져 있는 사실이니까. 아울러 그 결정을 누가 했는지도 잊어서는 안되오. 후후... 이래서 권력의 그늘이란 치사하면서도 편리한 것이지." 상관영봉은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흑! 어리석은 사람.... 당신은 애정 없는 혼인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유옥은 그녀의 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어르듯 말했다. "훗훗... 그거라면 염려하지 마시오. 본시 애정이란 침실을 같이 사용하게 되면 얼마든지...." "나쁜 사람!" 짝! 기이한 음향과 함께 유옥의 뺨에서 불이 번쩍 일었다. 상관영봉이 참다 못해 그의 뺨을 후려 갈긴 것이었다. "으흐흐흑...! 당신을 저주할 거야. 죽는 날까지...." 상관영봉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부짖으며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옥은 손도장이 찍힌 뺨을 쓰윽 문지르더니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후후후... 역시 미숙해. 다른 여인에 비하면 아직 멀었거든? 도도하게 콧대나 세울 줄 알았지 제대로 구실을 하려면 보통 훈련 가지고는 어림도 없겠어. 앞으로 결혼만 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내 기초부터 새로 손을 보아 주리라. 후후후...." 불행하게도 그 말은 상관영봉의 귀로 고스란히 흘러 들어갔다. 하지만 이 경황에 그녀가 어찌 알아 차리겠는가? 유옥이 음성에 의도적으로 내공을 실었다는 것을. 그녀는 내심 절규라도 하듯 부르짖었다. '이럴 수가 없어! 도저히 이럴 수는....'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무작정 앞을 향해 달렸다. 한 순간이라도 빨리 용백검의 음성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것이 그녀의 유일한 바램이었기 때문이었다. ③ 용백검의 시비 중 한 명인 은비. 찻잔을 받쳐 들고 들어오는 그녀의 볼은 잔뜩 부어 있었다. "정말 너무 하셨어요, 공자님." 유옥은 침상에 큰 댓자로 뻗어 누운 채 히죽 웃었다. "뭐가 말이냐?" "상관소저께서는 장차 공자님의 부인이 되실 분 아닌가요? 그런데 어쩜 그렇게 잔혹하게 대하실 수가 있어요?" "후후... 은비." "네?" "이리 가까이 와 봐라." 은비는 쭈삣거리기는 했으나 명대로 그에게 다가왔다. "쟁반을 내려 놓아라." 역시 그녀는 시키는대로 했다. 그러자 그녀의 몸은 소리를 지를 겨를도 없이 침상 위로 넘어지고 말았다. 유옥이 자기 쪽으로 그녀를 사정없이 끌어 당겼던 것이다. "왜 이러시... 으음!" 그녀는 꼼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어느 새 유옥은 그녀를 찍어 누른 채 그녀의 입술까지도 점령하고 있었다. 은비는 일시지간 사고기능이 마비된 듯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유옥, 즉 용백검에게 빼앗긴 입술은 그녀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벌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입술을 떼어낸 유옥이 말문을 열었다. "훗훗... 때로 상황에 따라서는 잔인성도 발휘할 수 있는 법이지. 중심을 못잡고 비척거리다간 일을 그르친다." 그는 은비를 놓아 주고 천정을 향해 누우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그녀에게 신경을 써줄 수가 없을 바에야 잠시 내 곁에서 떼어 놓는 방법도 나쁘진 않지." 은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도 두 분께서 사이 좋으실 때가 보기 좋았는데...." 그녀의 음성에는 사뭇 동정이 묻어 있었다. 자님께서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이 은비는 잘 알아요. 아주 어렸을 적부터 공자님을 보아 왔으니까요." 유옥은 내심 기가 막혔다. '이런 것인가? 주종의 관계란? 자신을 놓고 마치 상대의 일부라도 된 양 사고하고 행동하는구나.' 그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은비의 말이 이어졌다. "성주님께서 공자님을 가혹하게 대하시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텐데...." 그녀의 염려가 진심이라는 것쯤은 유옥도 능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동정을 받으면서 되려 그녀를 동정했다. '같은 인간이면서 과연 이래도 되는 건가?' 유옥은 어쩔 수 없이 비천하게 살아온 자신의 지난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리 용백검의 모습을 하고 흉내를 내고 있어도 용백검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 시각에도 불안은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이 소녀도 그렇지만 금비 역시도 하는 양으로 보아 용백검과 는 하인과 주인 이상의 관계다. 육체적인


접촉은 차치하고라도 일단 용백검의 개인적인 비밀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을 정도이니 근친(近親)이나 다름 없다고 봐야 한다.' 유옥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잡혔다. '하긴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다면 무리도 아니리라.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야겠군. 용백검처럼 굴기 위해서는 이 두 시비를 수족과 같이 부려야 하거늘, 자칫 실수라도 했다간 대번에 정체를 발각 당하고 말 것이다.' 은비가 그를 불렀다. "공자님."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낮게 속삭였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오늘 밤 공자님을 모시고 싶어요." 유옥은 흠칫 놀라며 얼른 둘러댔다. "그게 안된다는 것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은비는 소리 죽인 탄식을 흘려냈다. "그러기에 안타깝다는 것이지요. 사실 금비 언니와 저는 항상 공자님을 그림자처럼 따랐어요. 또 공자님께서도 이전부터 저희들에게는 각별한 정을 쏟아 주셨고요." "그야 그랬었지." "그래서 말씀이에요. 오늘 같은 날에는 정말로 공자님을 위로해 드리고 싶은데...." "후후... 거기까지는 마음쓰지 않아도 괜찮다." 은비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 보았다. "잘 아시잖아요? 소비도 더 이상은 어린애가 아닌 걸요. 지난 번 공자님께서 마차 안에서 처음으로 저에게 입을 맞추어 주셨을 때, 저는 그것이 공자님의 의도적인 행동인 줄을 알면서도 속으로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녀는 별반 부끄러워 하는 기색도 없이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듣는 유옥의 심경은 그렇지가 못했다. '쯧! 정말 갈수록 태산이군.' 그는 내심을 감추고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땐 나도 무척 좋았다." "정말요?" 은비의 얼굴이 해사하게 빛났다. "금비언니와 저는 공자님께서 다른 여인과 어울리시면 그러지 않으려 노력해도 종종 질투를 하게 돼요. 물론 저희들은 공자님의 소유이지만 감히 총애를 독차지하고 싶거든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유옥의 가슴에 뺨을 부볐다. "어차피 저희는 현음교(玄陰敎) 사람이잖아요? 무림성과는 별개로 오직 공자님만을 영원히 따를 것이니...." 그 말을 듣자 유옥은 매우 놀라는 한편, 한 가지 사실에 가깝게 짚히는 바가 있었다. '현음교는 전대 성주의 사문(師門)이고, 현재의 교주는 천음선자다. 그런데 이 소녀의 말을 빌자면 결국 그녀는 남편인 용화천과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은비는 눈을 사르르 내리 감았다. "하루 빨리 공자님께서 현음신공을 연성하시기를 바래요. 그럼 금비언니와 제가 얼마든지...." 그녀도 차마 그 다음은 이어가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유옥은 실소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그녀를 끌어 안았다. "말이라도 고맙구나. 이 참에 약속하지. 내 현음신공을 십성까지 익히게 되면 제일 먼저 너를 안겠다." "아! 그게 정말이신가요?" 은비는 기쁨을 감추지 못해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정작 은전(?)을 베풀겠노라고 쾌히 선언했던 유옥은


스스로에 대해 약간의 구토증을 느끼고 있었다. '이 철없는 아가씨야, 나는 그럴 마음이 없단다. 설사 그런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서겠지.' 혼자 읊조리다 일편 처량한 기분마저 드는 그의 귀로 또다른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흥! 공자님은 남자답지 못하시군요. 어쩜 그렇듯 멀쩡하게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실 수가 있죠?" 유옥보다 은비가 더 놀라 재빨리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갔다. 어느 새 방 안에는 금비가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입술이 한 자나 되게 튀어 나온 채 계속 이죽거렸다. "언제는 이 금비를 제일 먼저 품어 주마고 해 놓으시곤!" '끙! 이 짓도 정말 못해 먹겠군.' 유옥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꿀꺽 삼키고는 대소했다. "하하하...! 내가 그랬던가?" 도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들에게 혁명의식이나 고취시켜 주려고 무림성에 들어온 것이 아닌 이상 그는 새삼스레 그녀들의 존재 방식에 왈가왈부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럼 계획을 바꾸도록 하지. 어떻겠느냐? 그 날 내가 너희 둘을 다 사랑해 주면?" "에그머니낫!" "공자님도 참...!" 유옥의 담대한(?) 응수가 마침내 금비와 은비로 하여금 두 손을 들고 항복을 선언하게 만들었다. 그는 얼굴을 붉히고 있는 두 시비를 향해 다시금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살령(殺令). 편지를 들고 있는 유옥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금일 유시(酉時), 자면독비(紫面獨臂) 노명(魯明)을 척살(斥殺)해라. 사용되는 병기(兵器)는 필히 삼첨쌍극(三尖雙戟)이어야 한다. 그 외의 흔적은 절대로 남기지 말아야 하며 숨이 끊어진 것을 잊지 말고 확인하도록 해라.> 그는 글이 씌어져 있던 종이 조각을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등줄기에서는 선뜻한 찬 바람이 일고 있었다. ④ 일명 구씨철가(丘氏鐵家). 이 철기점은 태산 주선현(朱仙縣)에 위치하고 있으며 농기구 보다는 주로 병장기를 만들어 파는 곳이었다. 이들은 대대로 병기제작을 해온 덕에 나름의 전통을 이룩하고 있기도 했지만 번창의 이유를 꼽으라면 무엇보다 근처에 무림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들 수 있었다. 다수의 무림인들이 무림성을 드나들며 이 곳에서 병기를 손보거나 새로 주문했고, 이로 인해 구씨철가에서는 항상 여러 종류의 병기를 눈에 잘 뜨이도록 진열해 놓고 있기도 했다. 구진삼(丘眞三). 이 노인이 구씨철가의 주인이다. 그가 벌써 팔대 째 이어져 내려오는 구씨철가를 운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가계(家系)의 기술을 밑천으로 하여 병기 제작 솜씨가 남달리 뛰어났다. 오시(午時) 무렵. 구진삼 노인은 하나의 병기를 팔았다. 병기를 사러 온 사람은 머리에 죽립을 깊이 눌러쓰고 있어 용모를 알 수가 없었다. 그 자는 처음부터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병장기를 둘러 보고는 개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구진삼은 매우 어리둥절해 했다. 뜻밖에도 그 자가 고른 것은 웬만해서는 잘 팔리지도 않는 병기였던 것이다. '요즘에도 삼첨쌍극을 쓰는 인물이 있었던가?' 그가 의혹을 느끼는 찰나에 죽립인은 값을 물어 보더니 즉시 셈을 끝내고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졌다.


구진삼 노인은 웬지 그 죽립인의 모습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그는 꾸역꾸역 밀려드는 다른 손님들에게 병기를 파느라고 그 일은 까맣게 잊고 말았다. 이 날따라 유독 수입이 좋아 싱글벙글이기까지 했던 그의 기분은 자신의 집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산산이 깨졌다. 그의 늙은 아내가 벌벌 떨며 고해 왔다. "여... 여보.... 호아(虎兒)가 없어졌어요...!" 구노인은 대경실색했다. "호아가 없어졌다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리요?" 호아란 그의 하나 밖에 없는 손자의 이름이었다. 불행히도 아들부부는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본래부터 몸이 허약했던 그의 아들은 어린 호아를 남긴 채 죽었으며, 며느리 도 과부의 처지를 비관하여 시름시름 앓더니만 그 다음 해에 남편의 뒤를 따라 이승을 하직했다. 그런즉 호아에 대한 구노인의 애정은 천하의 무엇에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금이야 옥이야 하며 부모보다 더 극진한 정성으로 키워왔던 것이다. 그는 내심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보다고 부르짖으며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물었다. "물론 찾을만큼 찾아 보고서 하는 말이겠지?" "이... 이것이 호아의 방에 떨어져 있었어요...!" 구노인은 울먹이는 아내로부터 한 장의 쪽지를 받아 들었다. 거기에 적혀 있는 글을 읽어 본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 글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금일 오시 경 삼첨쌍극을 사간 사람에 대해 누가 묻거든 무조건 그런 일은 없었다고 대답하라. 만일 발설 했다간 그대의 손자는 처참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 아이는 데리고 있다가 삼개월 후에 돌려 보내겠다.> 그것은 단지 일방적인 협박일 뿐 서명도 없었다. 하긴 지금 처지에 그런 친절을 기대할 수도 없었지만. "이... 이럴 수가...!" 구노인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자면독비(紫面獨臂) 노명. 그는 요 며칠 사이에 몹시 기분이 나빴다. 그것은 얼마 전 흑우단(黑雨團) 소속의 고수들과 충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명은 뇌정단(雷霆團) 소속이다. 평소 뇌정단과 흑우단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감정 벽이 쌓여 있었다. 이는 그들이 무림성 내에서 비슷한 활동을 벌이고 있음으로써 생긴 필연적인 현상이랄 수 있었다. 뇌정단과 흑우단은 매사에 걸쳐 상대조직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으며 그 덕분에 은연중 서로를 견제해 왔던 것이다. 이는 어쩌면 무림성주인 용화천이 의도하는 바이기도 했다. 그는 두 지단(支團)이 서로 경쟁을 통해 발전해 가기를 바랐고, 그의 기대대로 어느 면에서는 실효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작금에 이르러 크게 문제로 대두된 것은 역작용이었다. 그들 이개 지단은 예상 외로 무섭게 반목했고, 그로 인한 영향이 무림성 전체에 미치고 있었다. 도처에서 속속 불신(不信)의 불협화음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노명의 일도 그 중 한 예였다. 그는 사소한 일로 인해 흑우단 소속의 고수들과 시비가 붙었는데 그것이 싸움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직접적인 그의 상대는 추안룡(醜顔龍) 이개명(李開明)이라는 인물로써 홧김이었겠으나 그 자는 노명에게 병신이라고 욕을 했다. 노명에게는 별호에 붙은 독비(獨臂)라는 문자가 알려 주듯 팔이 하나 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는 항상


불구자 특유의 열등감을 지니고 있기도 한 위인이었다. 이런 그에게 병신이라 했으니 사태는 불문가지였다. 그는 대뜸 이성을 잃을 만큼 분노했고, 그 대가로 이개명의 별호가 추안룡인 것을 들먹이며 마음껏 비웃어 주었다. 실제로 이개명의 얼굴은 보기가 역겨울 정도로 추악했던 것이다. 감정이 얽힌 두 사람의 싸움은 정녕 볼만 했다. 중인환시리에 체면도 망각한 채 엎치락 뒤치락 했으니 무림성 내에서 그 사건을 모르는 자는 한 명도 없게 되었다. 와중에서도 실력만은 노명 쪽이 우세했다. 그는 오십초 만에 이개명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승리를 구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때마침 원로원의 한 인물이 그 곳을 지나다 뜯어 말리는 바람에 싸움은 중단되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노명은 이개명을 그대로 죽여 버렸을지도 몰랐다. 그 뒤로 노명은 원로원으로 불려가 호된 문책을 당했다. 부상을 당했다는 이유로 이개명은 제외된 채.... 노명은 새삼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빌어먹을! 건방진 흑우단 놈들, 다시 걸리기만 하면 그 때는 반드시 숨통을 끊어 놓고 말겠다." 그는 지금 얼큰하게 취기가 올라 있었다. 끓어 오르는 울화를 삭이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밖에서 술을 잔뜩 퍼마신 후, 막 성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취기란 의례 만용을 부르기 마련이다. 덕분에 그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기는 커녕 오히려 설욕까지를 열망하고 있었다. 문득 한 가닥 음성이 들려와 그를 더욱 자극시켰다. "맞소, 그 놈들은 한 번 크게 낭패를 당해야 할 놈들이오." "누구...?" 노명은 흠칫하여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음 순간, 그의 눈이 의외라는 듯 크게 떠졌다. "소성주!" 길모퉁이의 한 바위 위였다. 그 곳에 한 인물이 걸터 앉아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자는 망나니로 소문이 나 있는 무림성의 소성주였던 것이다. 용백검, 즉 유옥은 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어 보였다. 그런 그의 옆에는 술병과 마른 고기로 된 안주가 놓여 있었다. 어쨌든 예를 무시할 수는 없는지라 노명은 급히 포권했다. "소성주께 인사 드립니다." "후후... 거추장스러운 예의 따위는 사양하겠소. 이리 와서 나와 술이나 한 잔 합시다." "속하가 어찌 감히...." 우물거리는 그의 말을 유옥이 잘랐다. "거리낄게 무에 있소? 이 곳에는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소. 그러니 오늘만큼은 서로 흉금을 터 놓고 친구가 되어 봅시다." 노명의 안색이 취중에도 미묘하게 변했다. 실상 그도 성내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용백검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때로는 경멸하기까지 했었다면 맞았다. 하지만 서열이란 노명이 함부로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그는 보이지 않게 쓴 입맛을 다시면서도 명을 거역하지 못해 용백검이 앉아 있는 바위 위로 올라갔다. 이로써 두 사람의 권작은 시작되었다. "노형은 흑우단 놈들에게 어찌 분풀이를 할 작정이오?" 유옥의 말에 노명은 정곡을 찔린 듯 멈칫했다. "그, 그건...!"


그가 더듬거리자 유옥이 다시 말했다. "그 놈들은 항시 안하무인이오. 나라는 존재는 도무지 인정을 하려 들지 않는 괘씸한 놈들이오." 불유쾌한 얼굴로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유옥에게 노명이 비로소 은근히 물어왔다. "근자에 소성주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어디 있다 뿐이오? 놈들이 작당을 하여 내가 좋아하는 취옥이년을 패거리 중 한 놈에게 빼돌렸단 말이오." 노명의 눈살이 절로 찌푸러 들었다. '제 버릇 개 못준다더니, 역시 계집 타령이군.' 그가 쓴 웃음을 짓고 있는 사이, 유옥은 또 투덜거렸다. "아마도 놈들은 일부러 그랬을 것이오. 나를 무시하고 있었으니까. 내 언젠가는 버릇을 톡톡히 가르쳐 놓고야 말겠소." 노명은 심중을 감추고 적절히 상대를 부추켜 나갔다. "그렇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놈들은 공공연하게 소성주의 비난을 하고 다니지요." 이 점은 그 자신도 다를 바가 없었으되, 일단은 무엇도 손해날 일이 없는지라 선뜻 나온 말이었다. 반면에 유옥은 경솔하게도 그 앞에서 벌컥 화를 냈다. "정말 안되겠군. 내 그 놈들을 혼내 주어야겠소." 노명의 입가에 한 가닥 회심의 미소가 피어 올랐다. "물론 그러셔야지요. 그런 놈들은 방치해 두면 안됩니다. 필경 저희들만의 세상인 양 설쳐댈 테니까요." 이번에는 유옥이 은근하게 물었다. "그럼 노형이 나를 도와 주시겠소?" "하명만 하십시오. 속하, 어떻게든 소성주를 돕겠습니다." 노명은 말을 하며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일이 잘만 되면 설욕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해결될 뿐만 아니라 문책도 피할 수 있으니 그로서는 일거양득인 셈이었다. 유옥이 그를 보며 만족스러운 듯 빙그레 웃었다. "노형이 그리 말해 주니 내 천군만마를 얻은 듯 하오." '어리석은 놈!' 노명은 내심 조소를 금치 못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유옥은 등 뒤에서 보따리 하나를 끌러 내렸다. "노형, 이게 뭔지 아시오? 후후... 이것은 이개명이라는 놈이 즐겨 쓰는 해괴한 무기요." 보따리를 끄르자 말마따나 그 속에서는 이개명의 독문무기인 삼첨쌍극이 나왔다. 그것을 보자 노명의 안색이 일변했다. "아니, 소성주께서 그걸 어떻게...?" 유옥은 히죽 웃었다. "똑같이 생겼을 뿐, 이 물건은 가짜요." 그는 노명이 더 뭐라고 말하기도 전 삼첨쌍극을 양손에 나누어 쥐었다. 그의 음성이 기괴하게 변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나는 이개명을 함정으로 몰아넣을 작정이오." "무슨 말씀이신지?" 노명은 안면 가득 의혹의 빛을 떠올렸다. "후후후... 못알아 들으니 설명해 드리지. 이 무기로 당신을 죽이면 그 혐의가 누구에게로 갈 것 같소?" "무, 무슨 짓을!" 노명은 술이 확 깨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소름끼치는 음성이 그의 동작을 앞질렀다.


"후후... 늦다!" 슉! 한광이 번뜩 일더니 처철한 비명을 불렀다. "크으윽!" 미처 피하고 어쩌고 할 겨를도 없었다. 한 자루의 삼첨극이 노명의 앞가슴에 그대로 박혀 버렸던 것이다. 노명은 그 직후에야 겨우 몸을 뒤로 빼낼 수가 있었다. 허공 중에 피보라가 뿜어지는 장면이 그 자신의 눈에도 들어왔다. 하지만 노명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즉시 몸을 위로 뽑아 올리며 하나 뿐인 팔로 일장을 떨쳐냈다. 위이이잉--! 사발만한 장강(掌 )이 유옥의 정수리를 향해 섬전처럼 쇄도해 왔다. 그런데 이런 공격조차 예측하고 있었던 것일까? "하하하...." 유옥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리며 신형을 비스듬히 솟구쳤다. 그의 수중에서는 또 하나의 삼첨극이 날아갔다. "크헉!" 노명은 허공에서 마치 살맞은 짐승처럼 튀어 올랐다가 떨어져 내렸다. 삼첨극이 그의 동체를 관통해 버린 것이었다. 쿵! 그는 무력하게 바위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눈을 부릅뜬 채. 그는 아마도 꿈에서조차 소성주의 손에 의해 자신이 죽으리라고 는 생각해 보지 않았으리라. 유옥. 어느덧 이 불행한 청년은 용백검의 껍질을 벗고 그 자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노명의 시신을 내려다 보는 그의 눈에는 무한한 고통이 어려 있었다. 본의가 아닌 살인은 그를 더할 나위없이 착잡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는 한 동안 침묵하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미안하오, 노형." 이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잠시 후. 유옥은 우선 노명의 시신에서 삼첨쌍극을 회수했다. 그는 그것을 눈에 띄지 않도록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가 묻었다. 이어 그는 술자리는 그대로 놔둔 채 노명의 시신을 끌어다 다시 인근에 묻고는 핏자국을 일부러 어설프게 지워 놓았다. '이 정도면 무공을 소지한 자들의 눈에는 충분히 발견되리라. 그리고 누구라도 이 살인을 이개명의 짓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후후... 정녕 교활한 이간책이지.' 유옥은 모친의 의도를 확연히 깨닫고는 자조를 금치 못했다. 그녀는 무림성의 분열을 획책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일을 위한 도구....' 어떻든 이 일에 관한 한 그녀의 목적은 어김없이 달성될 것이다. 비록 행동이 방정치 못해 체신을 잃기는 했다지만 누가 있어 감히 무림성의 소성주를 의심하겠는가? 유옥은 잠시 음울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그 자리를 떠났다. 노명의 시신이 묻혀 있는 곳을 한 번 힐끗 돌아본 후.... 제 6 장 내분(內分)의 본격화(本格化)


① 자면독비 노명의 죽음. 이 사건은 무림성 내에 실로 크나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의 시체가 발견된 것은 그가 죽은지 사흘째 되는 사월 이십사일 밤, 무림성으로 이르는 한 산로(山路)의 숲에서였다. 그 근처에 먹다 남은 술과 음식부스러기가 있으매 개방의 한 거지가 좋아라 달려 갔다가 핏자국을 보았고, 이상히 여겨 무림의 대들보인 무림성에 알려왔던 것이다. 마침 노명의 실종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몇몇의 인물들이 달려가 조사한 끝에 한 구의 시체를 숲 속에서 파내기에 이르렀는데 죽은 자를 본즉 틀림없는 노명이었다. 그의 죽은 모습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눈을 휩뜬 채 상체가 거의 으스러져 걸레쪽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노명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가 소속되어 있던 뇌정단은 크게 동요했다. 그 이유는 그를 죽인 범인이 흑우단 소속의 추안룡 이개명일 것이라고 추정했기 때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시체에 나 있는 상흔(傷痕)은 외문병기인 삼첨극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무림성에서 삼첨극을 쓰는 자라고는 이개명 밖에 없었으니 달리 생각해 볼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얼마 전에 이개명은 노명과 크게 싸운 적이 있어 이 사건의 범인으로 주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일로 인해 무림성에는 때 아닌 긴장감과 살기가 감돌았다. 이제껏 두 지단 사이에 충돌은 끊임없이 있었으되 이처럼 살인으로까지 발전된 경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당사자인 이개명은 자신의 짓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를 향한 뇌정단 고수들의 분노는 이미 극을 치닫고 있었다. "단주(團主)! 이번 일은 절대 묵과해서는 안됩니다." 뇌정단의 부(府)에서도 팔대령주(八大令主)들이 모여 저마다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그들의 맞은 편으로 한 명의 중년인이 의자에 앉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백안귀견수(白眼鬼見愁) 여후령(呂侯嶺). 그는 뇌정단의 단주로써 강호 상에서도 공포의 존재였다. 그의 눈에는 검은 동자가 없었다. 오직 흰자위 밖에 없는 그는 일명 백사신(白死神)으로도 통한다. 그가 지닌 한 쌍의 귀견수(鬼見手)는 삼장 내의 생물들을 일거에 쓸어버릴 정도로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여후령은 흰 눈을 번뜩이며 음침하게 물었다. "이개명의 짓이 틀림 없느냐?" 제 팔령주(八令主)인 귀검(鬼劍) 사마각(司馬角)이 흥분한 어조로 그 말을 받았다. "재고의 여지도 없습니다. 노명의 상흔은 틀림없이 이개명의 삼첨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그 놈은 증거를 숨기기 위해 시체유기까지 하고도 혐의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으음...." 여후령은 신음을 흘렸다. "정녕 간특한 놈이로고!" 그 말에 팔대령주 모두가 한 마디씩 거들었다. "놈은 분명 흑우단의 위세를 믿고 날뛰는 것입니다." "더욱 용서할 수 없는 것은 흑우단의 처사입니다. 그 쪽에서는 아직 이렇다할 해명도 없습니다." "단주! 그 간에는 참아 왔지만 더 이상 망설여서는 안됩니다. 이 기회에 반드시 놈들을 응징해야 합니다." 마침내 여후령이 삭막한 얼굴에 은은히 살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의 어조만은 여전히 차갑도록 침착했다. "다들 조용히 해라.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 조만간 철(鐵)단주를 만나 담판을 짓도록 하겠다."


그는 수하들을 둘러 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끝까지 경거망동해서는 안된다. 내분을 일으키면 성주께서 진노하신다는 것 쯤은 잘 알고 있겠지?" "명심하겠습니다." 백안귀견수 여후령은 팔대령주를 물리고 난 후,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었다. 그도 인간인 이상 보고를 듣고 나자 타오르는 적개심을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철단주, 각오해야 될 것이다. 그대가 감히 나를 무시한다면 절대 이대로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테니까.' 이로써 무림성의 긴장은 최고조로 팽배해졌다. 뇌정단과 흑우단의 마찰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나 그것이 결국 두 단주의 대결로 양상을 바꾸었으니 당연한 노릇이었다. 일찌기 내분을 일으키는 자는 일벌백계로 참수하겠다는 성주의 엄명이 있기는 했다. 또한 그 때문에 그들 이개단이 최대한으로 자제해 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한계에 이르고 말았다. 두 조직 사이의 불화는 극대화되어 더 이상의 합치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무림성은 실상 전 조직이 이런 형국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한 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 동안 무림왕 용화천의 패도적(覇道的) 경향으로 인해 억눌려 있었을 뿐, 내부의 융화가 깨어진지는 이미 오래였다. 그러다가 하나의 계기가 주어지고 보니 그 결과란 그야말로 불에다 기름을 들이 부은 격이었다. 천음선자(天陰仙子). 그녀는 내성의 별원(別院)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용화천의 정실부인이면서도 무림성 내에서 나름대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일세의 여장부가 바로 그녀였다. 천음선자는 사개지단(四個支團) 중 운현단(雲玄團)을 관장하고 있었는데, 과거 무림맹주였던 현음신군의 직계로써 당금 현음교(玄陰敎)의 교주이기도 했다. "부르셨습니까? 어머님." 용백검, 즉 유옥은 그녀를 향해 공손히 절을 올렸다. 별실의 분위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느끼기에 천음선자는 실제의 나이와는 달리 삼십대로 밖에 보이지 않는 미부(美婦)로써 그리 따스한 인상은 아니었다. 그녀는 일신에 백의를 입고 있었으며 수중에는 학의 깃으로 만든 섭선을 쥐고 있었다. "오냐, 너는 요즘 어떠냐?"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냉정한 말투였으나 그녀의 음성 속에는 숨길 수 없는 모정(母情)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을 느끼자 유옥은 자신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어머님의 염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천음선사의 음성이 더욱 차가운 기운을 띄었다. "최근에 네 부친께서 너를 부른 적은 없었더냐?" "없었습니다." 유옥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그녀의 눈에서는 일순 섬뜩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이제 자신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아예 망각해 버린 것 같구나." "그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천음선사의 고고한 얼굴에 한 가닥 경멸의 빛이 어렸다. "하긴 애당초부터 그에게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가 없었지. 오직 야망 하나로만 점철된 인간형이었으니까. 그 밖의 것은 조금도 수용할 줄 모르는 냉혈인이었어." 유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와의 결혼생활에서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천음선자의 음성에서는 절절한 한(恨)이 배어 나왔다. "고독과 소외감, 단지 그것 뿐이다. 무림성주의 정실이란 그저 듣기 좋은 허울이었던 게야." 유옥은 전해지는 어감을 통해 천음선자가 남편인 용화천을 무척이나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지낸 기간은 평생에 걸쳐 단 하루 밖에 없었다. 바로 혼인식 날, 그가 신방에 들었던 것이 전부야. 그것도 너라는 아이를 얻기 위해서 말이다." 유옥이 반문했다. "그래서 어머님께서는 제가 아버님의 뒤를 잇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야. 아니, 그래선 안되지. 너는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심지어 결혼조차 자신이 가진 야망의 실현 도구로 생각하는 그런 위인이다." "어머님...." 유옥은 짐짓 어두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보다 날카롭게 이어지는 천음선자의 음성을 묵묵히 들었다. "그는 소원대로 모든 것을 얻었다. 그토록 원하던 무림성주가 되었으며, 천하제일인자가 되었다. 호호... 그런데 나는 뭐지?" 웃음소리를 내어도 그녀의 안색은 처절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님을 잃었고, 사랑을 잃었고, 또 인생까지도 잃었다. 호호홋...! 그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인간의 표상이야." 천음선자 단리경. 그녀는 하소연의 대상이 아들이라는 것을 잊기라도 한 것처럼 남편에 대한 비난을 줄줄이 쏟아 놓고 있었다. "그는 세상의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다. 믿는 것이라야 오직 자신 뿐이며, 아내나 자식까지도 수시로 의심한다." 그녀의 결론인즉 이러했다. "너만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 이 어미가 끝까지 지켜줄 테니까. 계획했던 일만 제대로 마치면 그 때부터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천음선자의 매서웠던 눈길이 저절로 스르르 풀렸다. 그것은 아마도 아들이 이루어줄 바에 대한 무한한 기대와 염원 때문이었으리라. 반면에 유옥은 내심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정말 소문과는 다르군. 용화천은 독단이 심하기는 해도 매우 사려 깊고 인정이 넘치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거늘.' 이렇게 되자 그는 부지중 천음선자에게 동정심이 우러나는 것을 느꼈다. 더구나 그녀가 그토록 신뢰하는 아들의 흉내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자 일면 크게 미안한 감정도 들었다. 이 때, 천음선자가 정색을 짓더니 물었다. "너의 현음신공은 어느 정도에 이르렀느냐?" 유옥은 찰나적으로 가슴이 섬뜩해지고 말았다.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한단 말인가?' 그는 용백검이 현음신공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조차 최근에야 알게 된 처지이다. 그는 마음을 굳게 먹고 입을 열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소자, 아직은 초보단계에 불과합니다." 천음선자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 수련을 게을리 하는 것은 아니냐?" "그, 그것이...."


그가 우물거리자 천음선자는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금후로는 매일 연공관에서 수련하도록 해라. 이 어미는 네가 하루라도 빨리 현음비전(玄陰秘傳)을 익혀 현음교의 대통을 잇기를 고대하고 있다." "죄송합니다, 어머님." 천음선자는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를 떠올렸다. "그것만이 오직 이 어미는 물론 네 자신이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이다. 이 어미로서는 해줄 말이라곤 그것 밖에 없구나." "어머님...." "내 누차 말했다만 지난 날 네 외조부께서는 정말로 훌륭한 어른이셨다. 너도 부단히 노력하여 그 분처럼 되도록 해라. 그 분은 현음교 사상 가장 강한 분이자 정의감이 투철한 분이셨지. 하기는 그 때문에 오늘까지도 그 분의 죽음이 여전히 의혹으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천음선자는 말끝을 흐렸다. 동시에 그녀는 차마 뒷말을 이을 수 없다는 듯 등을 돌리더니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언제고 그 흑막은 파헤쳐질 것이다. 설사 그 일을 위해 현음교의 모든 것이 바쳐진다 해도...."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유옥은 가슴에 하나의 커다란 의문 덩어리가 뭉쳐지는 것을 느꼈으나 감히 이를 묻지는 못했다. "너는 하루 빨리 현음신공을 익혀 현음구식(玄陰九式)을 네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머지 않아 현음구매(玄陰九妹)도 폐관을 끝낼테니 대비를 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천음선자는 내실로 들어 갔다. "그 때는 더 이상 바보 흉내를 내지 않아도 될 것이야." 유옥. 그는 혼자 남게 되자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머리 속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 도저히 불가능했던 것이다. '용화천과 천음선자와의 관계는 그렇다 치고 전대 현음교주의 죽음이 의혹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폐관을 곧 끝낸다는 현음구매란 또 무엇인지...?' ② 유옥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와 침상에 드러누웠다. 무림성에 들어온 때로부터 그 뒤로 있었던 일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그의 머리 속에서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가 이 곳에 입성하기 위해 수많은 준비를 했었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즉각 대처할 수 있는 임기응변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그는 백여가지에 달하는 직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들어와 보니 그것은 별로 통하지 않았다. 무림성을 둘러 싸고 여러 가지 수수께끼들이 있어 하나씩 들추어질 때마다 여지 없이 그를 당혹시켰던 것이다. 무림성은 공히 무림의 최고봉이다. 따라서 권한은 절대적이었으되 무림성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배타적이었다. 무엇보다 제각기 속셈이 달랐으며, 이로 인해 표면적으로는 멀쩡한 가운데 자주 충돌하곤 했었다. 개중에서도 무림성주와 그의 부인인 천음선자 사이에 게재된 갈등이 가장 심각하여 유옥은 그들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무엇인가를 놓고 몹시도 궁금해졌다. '사랑이 없는 부부생활이라.... 끔찍하군. 그것도 이십 년 가까이 지탱해 왔다니 말이다.' 유옥은 쓴 웃음을 지었다. '내 주제에 무슨 쓸데 없는 생각을....' 그는 머릿 속을 비워 버리고자 자세를 바꾸어 돌아 누웠다. 그러다 문득 그는 침상 옆의 벽에 무엇인가 돌출된 부분이 있는 것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이런 것이 있었나?' 그것은 하나의 구슬이었는데, 반쯤 벽에 박혀 있었으며 누군가의 손길이 많이 닿은 듯한 흔적을 엿볼 수가 있었다. 유옥은 호기심을 느낀 나머지 조심스럽게 구슬을 눌러보았다. 그그그긍--! "웃!" 그는 돌연한 변화에 크게 놀랐다. 괴음향과 함께 그가 누워 있던 침상이 빙글 하고 반 바퀴 정도 돌아갔던 것이다. 회전이 멎자 유옥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 침상 아래 쪽으로 비밀통로가 나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내심 탄성을 발했다. '아! 이런 곳에 암문(暗門)이 있을 줄이야.'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통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그가 밟아가고 있는 것은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대략 헤아려 보니 이십여 단쯤 되는 것 같았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는 하나의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른바 지하밀전(地下密殿)이라고나 할까? 그 곳은 사람이 기거했던 듯 꽤 잘 꾸며져 있었다. 전반적으로 아늑한 분위기로써 바닥에는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벽에는 진품으로 보이는 산수화도 한 점 걸려 있었다. 또 한 쪽의 서가에는 고서(古書)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는데 그것들을 둘러 보자 유옥은 짚히는 바가 있었다. '혹시 이 곳이 천음선자가 말하던 연공실이 아닐까?' 그는 이어 맞은 편 쪽으로 하나의 문을 발견하고는 곧장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곳은 석실(石室)이었다. 중앙에는 장방형의 좌대(座臺)가 있었다. 그런데 좌대는 검은 색으로써 몹시도 괴이한 느낌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가운데 부분은 사람이 계속하여 앉았던 듯 약간 패여 있었다. '저 곳에 앉아서 연공을 하는 모양이군.' 유옥은 중얼거리며 앞에 놓인 서탁(書卓)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위에는 세 권의 얇은 책자가 있었다. 책자는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표지가 퇴색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거기에 씌여져 있는 제목만은 제법 뚜렷하게 보였다. <현음비경(玄陰秘經)> <현음구식무결(玄陰九式武訣)> <현천마경(玄天魔經)> 유옥은 너무도 기뻐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 현음교의 비급을 수중에 넣게 되다니.' 그 자신이 원했건 그렇지 않건 현재 그는 목적을 가지고 무림성에 잠입해 있고, 그 목적은 반드시 달성이 되어야 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그를 구속하는 과중한 부채였기에. 하지만 현음신공을 모르고선 무엇도 불가능했다. 언제고 천음선자에게 정체가 발각될 것인즉, 그렇게 되면 부채의 청산은 고사하고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국이었다. 유옥은 정말이지 그 세 권의 현음교 무학경전을 향해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먼저 현음비경을 펼쳐 보았다. 전날에 그는 그 구결들을 대충 전수받은 바 있었다. 비록 당시의 것은 완전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현재의 비급을 익히는 데는 크게 바탕이 되어 주었다. 현음비경에는 현음교의 최대비학인 현음신공이 수록되어 있었다. 유옥은 천천히 구결을 읽어 내려갔다. <현음신공은 극유극음(極柔極陰)을 그 기본으로 한다. 총 십이단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제 십단계에 이르면서부터 진가를 펼쳐 보일 수 있다... 하략(下略)....>


그는 구결을 음미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깊이 빠져 들어갔다. 지극히 난해하기는 했으나 자자구구가 각기 오묘한 뜻을 품고 있어 학문적 의미로도 매료될 수 밖에 없었다. 동시에 유옥은 현음신공의 위력에 대해서도 감탄을 금치 못 했다. 정통의 무류(武流)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으되 그렇다고 편격괴이한 방외지학도 아니었다. 부드럽고 음(陰)한 가운데 만물을 소진시키는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다면 맞았다. 다음으로 현음구식무결. 현음교 무학의 최대 정화(精華)이다. 아홉 개의 변식 속에 무려 팔만사천 가지의 변화가 내포되어 있어 펼쳤다 하면 현음진기(玄陰眞氣)와 병행되어 어떤 호신기공이나 외가강기(外家 氣)도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 현음구식은 전삼식(前三式)과 중삼식(中三式), 그리고 후삼식(後三式)으로 나뉘어지는데 그 중 전삼식은 현음교 제반무학의 기초가 되는 것이었다. 반자결(反字訣), 합자결(合字訣), 이자결(離字訣). 이 세 가지 결(訣)로 이루어지며 특별한 초식은 없다. 현음진기를 구사하여 상대방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거나(反), 두 가지 기운을 하나로 합하거나(合), 물을 가르듯 끊는 것(離)을 말한다. 물론 말로는 간단하나 익히기는 난해하다. 중삼식은 일명 현음삼절(玄陰三絶)로도 불리워진다. 제 일식은 사인교(死引橋), 제 이식은 인혼멸(引魂滅), 제 삼식 은 천파무(天破舞) 등이다. 하나같이 놀라운 절학들이다. 여기에는 보법과 장법, 행공(行功)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당년의 현음신군 단리목을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 현음삼절이라 한들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후삼식은 현음교의 교조(敎祖)인 현음노조(玄陰老祖)가 창안해 놓은 이래 완벽하게 익힌 사람이 전무했다. 워낙 극랄무비하기도 했지만 너무도 심오하여 무공으로써 익히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까지 알려지고 있다. 이름도 무시무시하다. 제 일식은 혈해등룡무(血海騰龍舞), 제 이식은 건곤암공뢰(乾坤暗空雷), 제 삼식은 현음구(玄陰球)이다. 유옥. 그는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구나. 어찌 세상에 이렇듯 엄청난 무공이 존재할 수가 있단 말인가? 만일 이 무학들을 전부 익힐 수만 있다면 능히 천하를 제패하고도 남으리라.' 그는 새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으음, 그러고 보니 당년의 현음신군이 제 오대 무림성주가 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구나.' 그는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혀 세 번째 비급을 펼쳐 보았다. 첫 장을 열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현천마군(玄天魔君)이 남긴다. 후세인들은 현천(玄天)이 현음(玄陰)을 능가함을 깨닫게 되리라.>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유옥은 자못 오기스러운 그 글에서 황당함과 더불어 강한 흡인력을 느끼며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건륭(建隆) 팔 년, 천우도(天憂道)에 입교(入敎)하다. 그 당시 노부의 나이는 십 세였다. 그런데 천우의 문하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은 노부 외에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그가 바로 현음교의 창시자인 송익현(宋益玄)이다. 우리 두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천하제일기재(天下第一奇才)임을 자부했고 천우노조(天憂老祖)를 떠난 후에는 뜻이 맞지 않아 각자의 길에 들어섰다. 하지만 현실적이고 의지가 굳은 송익현이 현음교를 세운데 반해 나는 타고난 방랑벽으로 인해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 때까지 우리들 사이의 우의는 건재했건만, 어느 날 나는 현음교를 찾아갔다가 사소한 다툼


끝에 송익현과 백초를 싸우게 되었다. 그 결과는 나의 처참한 패배였다.> 유옥은 글을 읽다 그 주인공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 분에게서는 심한 괴벽이 엿보인다. 호승지심이야 무인이니까 당연하겠지만, 옳고 그름은 어디로 갔던 우선 내키는대로 행동하는 분방함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는 입술 꼬리를 말아 올리며 다시 글에 시선을 던졌다. <나는 그 후로 절치부심 무공을 수련하여 기어이 독문무학을 창안해 내는데 성공했으며, 그 무학을 현천무극공(玄天無極功)이라 명명하고 송익현을 찾아갔다. 그러나 나는 불행히도 그에게 진 빚을 끝내 갚지 못했다. 내가 다시 만나게 된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제서야 나는 내 나이도 이미 백이십 세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오호통재라! 나는 현천무극공에 몰두한 나머지 세월이 흐르는 것조차 잊고 살았던 것이다... 중 략(中略)... 나는 확신한다. 현천무극기(玄天無極氣)는 천지간의 음양지기를 조화시킨 것으로써 천하제일의 무학이다. 다만 평생에 걸친 염원이 송익현의 죽음으로 달성되지 못해 통탄스러울 뿐이다. 여기 한 권의 책자에 현천무극기를 남기노니, 이를 취하게 된 후세인은 부디 현천이 현음을 능가한다는 것을 증명해 다오.> 글은 그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유옥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정말 대단한 집념이다. 장장 백여 년에 걸친 투혼(鬪魂)으로도 모자라 후대에까지 유언을 남기다니....' 그는 스스로 말해 놓고도 집념이라는 단어에 걷잡을 수 없이 이끌리는 자신을 느꼈다. 이는 현천마군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감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건륭 팔 년이라면, 맙소사! 이 분은 지금으로부터 육백 년 전의 인물이 아닌가? 그 옛날 북송(北宋) 때 사용하던 연호가 건륭이거늘...!' 유옥은 놀라는 한편, 회의도 없지는 않았다. '과연 이 분이 장담한 것처럼 현천무극공이 그렇게 강할까? 존경스러운 면은 어디까지나 이 분의 집념이지, 무공까지는 확실한 믿음이 가지 않는구나.' 그가 반신반의하는 이유는 앞서 보았던 현음무학이 너무도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의혹을 풀고자 현천마경을 펼쳤다. 그것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었다. <신공편(神功篇)> <강기편( 氣篇)> 신공편에는 현천무극심법(玄天無極心法)이 도해와 구결로써 적혀 있었다. 강기편에는 문제의 현천무극기가 수록되어 있었는데 호신강기는 물론 장공(掌功), 지강(指 ), 심지어는 검강(劍 )으로까지 전개할 수가 있었다. 강기편의 구결과 해설은 유옥으로서도 이해하기 힘들 만큼 매우 복잡했다. 분량도 신공편에 비해 다섯 배나 많았다. 유옥은 의혹은 고사하고 넋을 빼앗긴 양 독서 삼매경에 빠져 들었다. 최소한 그는 현천마경을 읽는 동안에는 자신의 처지를 비롯하여 평소 잊지 않으려 했던 것들을 망각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조차도 그는 의식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천마경과의 만남이란 그의 생애에 일대 전기(轉機)를 부여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차 그가 현천마경 상의 무학을 익히고, 그 가치를 깨달으며, 또 자유자재로 활용하기까지에는 많은 시일이 소요될 것이다. 하지만 현천마공을 얻음으로써 유옥의 운명이 어떤 국면으로 접어들지는 흥미를 가지고 지켜볼 일이다. ③


무림성의 긴장도는 나날이 증폭되어 가고 있었다. 그 사이에 사건이 또 있었던 것이다. 자면독비 뇌명의 죽음을 놓고 뇌정단의 단주인 백안귀견수(白眼鬼見手) 여후령은 마침내 흑우단의 단주인 생사도(生死刀) 철장규(鐵長圭)를 직접 찾아 가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여후령은 철장규에게 엄중한 항의와 함께 추안룡 이개명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와 입장이 다른 철장규는 이를 수락할 수가 없어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여후령은 드러내놓고 뇌정단을 향해 독기를 품게 되었고, 그 때부터 무림성의 외성(外城)에는 일촉즉발의 심상치 않은 공기마저 흐르기 시작했다. 이런 그들과 나란히 박자를 맞추어 가야하는 유옥의 고통이 뭐니뭐니 해도 가장 컸다. 그는 지금 얼굴을 잔뜩 굳히고 있었는데 그의 손에는 한 장의 종이가 구겨진 채 쥐어져 있었다. '두 번째의 명령서!' 그의 몸이 부지중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에게 또 살인을 요구하고 있다.' 소위 명령서는 그가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사이에 그의 눈 앞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는 재빨리 신형을 날려 지붕 위로 올라가 보았지만 아무도 발견할 수 없었다. 유옥은 입술을 질겅 씹었다. '이번에는 이개명을 죽이라고?' 이어 그의 입에서 툴툴 새어나온 것은 마른 웃음이었다. '어머님은 대체 무슨 이유로 무림성에 내분을 일으키려 하시는 것일까? 계속 이렇게 나가면 종국에는 이 거대한 무림성도 자멸(自滅)하고 말 것이다. 설마 그것을 바라시지는...?' 유옥은 불현듯 주먹을 와락 움켜 쥐었다. '이 명령을 꼭 따라야 하는가?' 무섭게 회의하는 그의 뇌리에 창백한 안색을 지닌 한 명의 미녀가 떠올랐다. 호호... 나를 어미라 부르고 싶다고? 안되었다만 지금으로서는 허용할 수 없다. 내가 긴 세월 동안 한을 끌어 안고 살아온 것도 알고 보면 너 때문이다. 나는 너만 보면 미칠 것 같다. 너는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 네 출생은 내 평생 가장 큰 실수이자 불운(不運)이었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일이라면 너는 생명을 내던져서라도 완수해야 한다. 그것이 나에 대한 네 의무다. 어미란 말도 그 때 가서 듣겠다. 유옥의 안면이 무참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어릴 적 저는 단지 당신을 어머니라 부르고 싶어 당신이 시키는대로 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는 제가 부르고 싶으면 그렇게 불렀습니다. 당신이야 뭐라시던. 그리고 지금은....' 사실상 유옥은 모친에게 더 이상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미 그녀를 모친으로써 포기한지 오래였고, 어머니라는 명칭도 이제는 하나의 상징 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옥이 독고산혜와 인연을 맺던 그 시점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 때 두 사람의 정을 끊어 놓기 위해 독고산혜를 놓고 협박하던 모친의 어투를 그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나아가서는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어쩌면 모친과 한 판의 대결을 벌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일이 끝나면 놓여 나리라는 기대 때문에 말이다. 확실한 것은 이 미친 듯한 싸움이야말로 유옥에게 더욱 더 어두움과 뼈저린 고독감을 안겨 준다는 사실이었다. 왜 안그렇겠는가? 지독히 힘겨운데 반해 얻고자 하는 싸움이 아니라 버리고자 하는 싸움이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다름이 아니라 세상에서 단 일점 뿐인 혈연(血緣)을. 그의 좌절은 고소가 되어 흘러 나왔다. "후후... 이개명, 안되었소만 그대는 죽어 줘야겠소." 그가 고른 병기는 검(劍)이었다. 폭이 좁고 양쪽에 날이 서 있는 그 검은 보기에도 섬뜩했다. 길이는 정확히 두자 일곱 치, 무게는 삼십


근 짜리였다. "얼마입니까?"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그의 물음에 구노인은 덜덜 떨며 겨우 대답했다. "그... 그냥 가져 가십시오, 나리...!" 죽립인은 흠칫하더니 낮은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왜 돈을 받지 않습니까?" 구노인은 여전히 공포에 질린 얼굴로 애걸하듯 말했다. "호(虎)... 호아는 잘 있는지요...?" 죽립인은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호아라니,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나... 나리, 왜 이러십니까요? 무엇이든 원하는 것은 다 드릴테니 제발... 호아만은 무사히 되돌려 주십시오. 이 늙은이는 그 손자놈 하나 보고 살아온 몸입니다요." 구노인은 기어이 어흐흥 하며 황소 울음을 터뜨렸다. "그 녀석은... 저희 보잘 것 없는 가문의... 유일한 핏줄...." 노인은 우느라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럴 수가!' 죽립인은 내심 부르짖고 있었다. 참담해진 심경을 대변이라도 하듯 바람도 없는데 그의 옷자락이 마구 흔들렸다. 왜냐하면 그는 구씨철가에 호아라는 손자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듯 그 아이에게 손가락 하나 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 당신이....' 추안룡 이개명. 그의 기색은 요즘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숙부인 생사도 철장규로부터 줄곧 치도곤을 당해 왔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내가 언제 노명을 죽였단 말인가? 그토록 열심히 해명을 해도 도통 믿으려 들지를 않으니....' 이개명으로서는 억울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정말로 노명을 죽이지 않았건만 철장규는 그렇다 치고 같은 흑우단 소속의 동료들도 그의 결백을 도무지 믿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독문무기인 삼첨쌍극이야 누가 의도적으로 훔쳐 내서 사고를 칠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그가 자면독비 노명이 사라졌던 날에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는 점이었다. 물론 그 시각에 이개명은 노명의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말못할 사정이 있었다. '젠장, 그 일을 내 입으로는 까발리자니 도저히....' 이개명은 추악한 얼굴에 잔뜩 짜증스러운 표정을 실었다. 노명을 죽이고 싶도록 증오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는 그 따위 어리석은 살인은 하래도 할 위인이 아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결과가 뻔할 짓을 어찌 저지르겠는가 말이다. 그 날 밤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실은 이런 일이 있었다. 추안룡 이개명은 성내에 있지 않았다. 그도 역시 노명처럼 술생각이 나 밤중에 혼자 성 밖으로 나간 것이었다. 이개명이 갔던 방향은 노명과는 무관한 쪽으로써 그는 주루에 이르기 전, 인근의 한 화전(火田) 부락을 지나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우연히 한 명의 화전민 처녀가 목욕하는 장면을 보았는데 그녀는 뜻밖에 너무도


아름다웠다. 도시 화전민 출신의 처녀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미색이 뛰어났으며 피부도 충격적이리만치 희고 고왔다. 본래 이개명은 얼굴은 추해도 마음만은 그리 악한 자가 아니었다. 그는 달빛 아래서 아름다운 여인의 알몸을 보게 되자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했지만 그저 넋을 잃고 바라보았을 뿐,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 곳을 떠나려 했다. 그러나 뾰족한 비명소리에 그가 멈칫한 것도 바로 그 때였다. 놀라서 돌아다 본즉 처녀는 어느 덧 물가에 쓰러져 있었다. 이개명은 인정상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급히 달려가 처녀의 상태를 살펴 보았다. 그녀는 의식을 잃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다리를 독사에게 물린 것이었다. 그는 곧바로 처녀를 근처의 동굴로 데려가 성의껏 치료해 주었다. 아울러 그가 느낀 것은 가까이서 대하고 보니 그녀가 더욱 더 아름답더라는 사실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처녀는 의식을 회복했다. 이개명은 그녀와 마주하기를 꺼려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추악한가를 알고 있었으므로 여인을 대하는 일에 항상 자신감이 없었던 것이다. 그 처녀 역시 자신의 얼굴에서 혐오감을 느끼리라 여기고는 알아서 먼저 피해 주려던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의외로 처녀가 그를 불렀다. .... 이개명은 아침이 되어서야 동굴에서 나왔다. 처녀는 고맙게도 앞을 못 보는 장님이었고 아는 길을 더듬어가 목욕을 하다가 때를 맞춘 듯 화를 입었던 것이다. 밤 사이에 이개명은 처녀와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오죽하면 그는 그 처녀를 두고 천생의 배필이라고까지 여겼을 정도였다. 운우지정(雲雨之情)도 흠뻑 나누었다. 이 일로 인해 이개명은 새로 태어난 듯한 기쁨을 느꼈다. 그는 처녀가 앞을 못 본다는 점이 어떤 운명처럼 여겨졌으며 장차 그녀와 가정을 이룰 것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④ 이개명은 우울한 가운데서도 그녀를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앉았던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보고 싶다. 수련(水蓮)....' 그는 그 날 이후로 머릿 속에서 한시도 수련의 존재를 떼어 놓아 본 적이 없었다. 그 밤, 동굴에서의 광경들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남모르게 가슴마저 뿌듯해지곤 했었다. '언제고 기회를 봐서 그녀에게 청혼을 해야지.' 추안룡 이개명의 나이 벌써 삼십이 세다. 외모와는 별개로 그는 가정을 가지고 싶다는 욕구가 지대했다. '젠장, 때가 좋지 않으니 당장은 어렵겠고....' 그는 다시금 부아를 끓어 올렸다. '대체 어떤 놈이 노명을 죽이고 내게 엉뚱한 혐의를 뒤집어 씌웠을까? 내 잡히기만 하면 요절을 내고 말리라.' 이개명은 처소에서 나왔다. 역시 술이 마시고 싶어서였으나 그의 발걸음은 성을 빠져 나오자마자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예의 화전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이개명의 가슴은 소년인 양 마구 설레이고 있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에 살고 있다고 했지?' 그는 수련을 만날 생각이었다. '부중이 조용해지면 숙부님을 찾아 뵙고 내 뜻을 알려야지. 아마 그 어르신도 흐뭇해 하실 게야.' 그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까지도 어리고 있었다.


사위는 조용하기 그지 없었다. 그녀를 처음 만나던 날 밤처럼 달빛이 쏟아지는 중에 그의 그림자만이 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하하... 어딜 가시오? 이형(李兄)." 갑자기 들려 온 웃음소리에 이개명은 흠칫 놀랐다. "아니, 소성주...?" 그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한 곳을 응시했다. 한 그루의 백양목 아래 연남빛 유삼을 입은 미서생이 서 있었는데 그 자는 생각지도 않았던 무림성의 소성주 용백검이었다. 용백검이 만면에 미소를 띈 채 같은 말을 또 물었다. "이형께선 야심한 시각에 어디를 가시오?" "아... 저...." 이개명은 순간적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무슨 죄를 지으려 가는 것은 아니었건만 뭐라 선뜻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불쑥 나타난 훼방꾼에게 수련에 대한 얘기는 더더욱 하기가 싫었다. 그는 대충 둘러대었다. "어딜 가긴요? 속하는 지금 바람을 쐬고 있는 중입니다." 용백검, 아니 유옥이 히죽 웃었다. 이개명은 그 웃음을 대하자 웬지 머리털이 쭈뼛해지도록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로 이형이 노명을 죽였소?" 그 물음에 이개명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안면을 싸늘하게 굳히며 분명한 어조로 답했다. "그것은 잘못된 소문입니다, 소성주! 그 때 속하는...." 유옥이 그의 말을 도중에 가로챘다. "후후... 하지만 노명의 몸에 난 상처는 이형의 삼첨쌍극 자국이라던데?" 빈정거리는 듯한 상대의 말투에 이개명은 화가 치밀었다. "어떤 놈이 나를 모함하고자 했다면 그 정도의 연극은 얼마든지 벌일 수 있었을 것이외다." "듣고 보니 그건 맞구려. 유감스럽게도 이형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그렇지." "속하는 결백하오이다!" "쯧, 모두들 그렇게 생각해 주면 좋으련만." 언성을 높이는 이개명에 비해 유옥은 놀리는 것인지, 어쩌는 것인지 한껏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 "혹 그 날 밤 살인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있다면 이형의 누명은 당장 벗겨질 것이오. 그렇지 않소?" 이개명은 분기를 삭이느라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물론...." "나는 그 사람을 알고 있소." 유옥의 말에 이개명은 귀가 번쩍 틔었다. "그, 그게 누구입니까?" "나요." 유옥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콧등을 가리켰다. "소성주께서...?" 이개명은 아연해진 나머지 퉁방울 눈을 껌벅였다. 유옥은 다시금 히죽 웃더니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나는 노명을 죽인 사람이 누군지 확실히 알고 있소. 아까도 말했듯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이개명은 반신반의했으나 어쨌든 그 말이 반가운 소리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그렇다면 소성주님은 그 자가 왜 속하에게 그런 누명을 씌웠는지도 아십니까?" "물론이오." 유옥은 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내가 아는 건 비단 그 뿐이 아니오. 나는 그 자가 이형을 모해하기 위해 사용했던 삼첨쌍극을 땅에


묻는 것도 보았소. " "우우...!" 이개명은 흥분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를 보며 유옥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 자의 목적은 무림성에 내분을 조장하는 것이었소." "그 몹쓸 놈이 누구입니까?" "이리 가까이 오시오. 내가 우선 물증을 보여 주겠소." 이쯤 되니 이개명도 의심을 버리고 유옥에게 다가갔다. "바로 이것이오." 유옥은 등 뒤에서 길다란 보자기를 끌어 내리더니 그것을 상대가 보는 앞에서 끌렀다. 그러나 이개명에게는 보자기 속에서 나온 물건이 무엇인지는 확인해 볼 겨를이 없었다. 슉! 단지 흰 빛이 그의 눈 앞에서 번뜩 했을 따름이었다. "소, 소성주 당신이... 크윽!" 조금도 경계를 하지 않았던 이개명은 비명과 함께 뒤로 벌렁 넘어가고 말았다. 그의 목에서는 피분수가 치솟고 있었다. 유옥의 손에는 어느 덧 한 자루의 괴검(怪劍)이 들려 있었다. 그 검은 폭이 유난히 좁고 양쪽에 날이 새파랗게 서 있었다. 검 끝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다... 당신이...." 이개명은 쓰러진 채로 눈을 부릅뜨며 더듬거렸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그의 눈에는 불신과 회의가 덮혀 있었다. 유옥이 검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이 검이 누구의 것인지 당신은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건... 뇌정단의 제 팔령주인 귀검(鬼劍)... 사마각의...." 유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보이겠지만 실은 아니오. 닮은 것과 진짜는 다르니까 말이오. 하지만 이 검에 의한 상처는 아마도 사람들의 눈에 사마령주의 소행으로 보여지게 될 것이오." 이개명은 경황 중에도 충격을 받은 듯 물었다. "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그는 그제서야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결국 노명의 죽음도 눈 앞에 있는 소성주의 짓이었던 것이다. 유옥은 음울한 어조로 대꾸했다. "방금 전에 말했지 않소? 무림성에 내분을 일으켜 놓는 것이 내 목적이라고." "으으... 소성주, 당신이 무엇 때문에...?" 이개명은 의식이 흐려져 가는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유옥이 씁쓸하게 읊조렸다. "나 역시 이런 내가 무척이나 못마땅하오, 이형." "그건 또 무슨...?" "궤변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오. 후후...." 이개명은 납득이 가지 않는지 탄식을 불어냈다. "어떻든... 당신이 그럴 수는...."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머릿 속이 텅 비는가 싶더니 그만 혀가 굳어져 버린 것이었다. 그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어느 새 주변을 시뻘겋게 적시고 있었다. 마침내 이개명은 고개를 옆으로 힘없이 떨구었다. "이로써 두 번째 살인을 한 셈이군."


유옥은 말할 수 없이 참담해진 심경으로 무고한 한 인물의 주검을 바라보았다. 그는 곧 들고 있던 검으로 시선을 옮기며 자조적인 중얼거림을 쏟아냈다. "미안하오, 이형. 그대에게는 정녕 할 말이 없구려." 탄식을 끝으로 그는 몸을 돌렸다. 그런 그의 뒷모습은 금시라도 무너져 내릴 듯 몹시도 허허로와 보였다. 휙--! 그는 마치 도망이라도 치듯 그 곳에서 사라졌다. 그 직후, 한 가닥 섬세한 인영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일신에 거친 삼베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것은 화전민의 전형적인 복색이었다. 그녀는 이개명의 가슴에 손을 대 보고는 중얼거렸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어." 이어 여인의 섬섬옥수가 막 쳐들리던 그 순간이었다. 이개명이 힘겹게 눈을 뜨더니 그녀를 알아 보고 반색을 했다. "수... 수련.... 당신이 어찌 이 곳에...?" 여인의 얼굴에는 싸늘한 기운이 피어 올랐다. "누가 수련이란 말인가요?" "수... 련...?" 이개명의 추한 얼굴이 의혹으로 인해 더욱 일그러졌다. 여인은 개의치 않고 손을 내려 이개명의 심장을 눌러갔다. "호호... 이개명, 내가 누군지 안다면 너는 저승에 가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모르고 죽는 게 백 번 낫지." "으음...." 가슴에 여인의 손바닥이 닿자 이개명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그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싹 사라져 버렸다. 기어이 완전하게 숨이 끊어지고 만 것이었다. 여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유옥이 사라진 방향을 힐끗 바라본 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벌써부터 동요하고 있다니 한심하군. 이렇게 되면 필경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텐데...?" 여인의 눈빛이 일순 반짝하고 요기를 발했다. "호호호... 하지만 그다지 염려하지는 않아. 당신은 결코 벗어날 수가 없을 테니까 말이야." 스스슷--! 그녀의 신형이 달빛을 타고 날아갔다. 제 7 장 무림왕(武林王)과 그의 아들역(役) ① 그가 무림성에 들어온 것은 일 년 전이었다. 그 동안 그는 천무전(天武殿)에서 없어서는 안될 가장 필요한 인물이 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해 왔다. 그리고 그 결과로 마침내 그는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이른바 무림성의 제 이인자. 그것은 절대 아무나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처음 그가 입전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빨리 그 위치를 점하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첩첩이 도사리고 있는 천무전이야말로 무림 정도(正道)의 최고 준령이 아닌가 말이다. 금검대협(金劍大俠) 상관자기(上官自機). 그는 당금 무림에서 명실상부한 인의대협(仁義大俠)으로 지목받고 있었다. 하북 금검가(金劍家)의 가주인 그는 실제로도 평생 동안 협행(俠行)에 일신을 바쳤다. 그의 존재는 정도의 대부(代父)나 다름이 없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도 그의 앞에서는 자리를 양보할


정도였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하곤 한다. 금검대협 상관자기가 전주(殿主)로 있는 한 천무전은 정도무림의 표본과 같은 곳이라고. 한 사내. 그에게는 요즘 한 가지 커다란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자꾸만 살이 찐다는 사실이었다. 영준했던 얼굴이 두덕두덕 살이 붙자 두리뭉실하게 되어 버렸고, 코가 뭉툭해졌는가 하면 눈은 반비례적으로 가늘어졌다. 그는 단 음식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항상 주머니에 사탕을 넣고 다니며 틈만 나면 우물거리는 것이 그의 유일한 취미였다. 그러나 그의 나이 이십사 세,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아직 몸이 불기에는 이른 나이였다. '큰 일이군. 지난 번보다 허리띠를 더 늘려야 할 참이니.' 그는 동경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더니 마땅치 않은 얼굴로 혀를 끌끌 찼다. 숙야빈(叔夜賓). 이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가 천하를 통틀어 가장 많은 황금을 보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 외에도 그가 가진 재산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중원 전역에 두루 걸쳐 무려 열 채의 거대한 장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장원들은 하나같이 말을 타고도 주위를 한 바퀴 돌라치면 아침 일찍 출발해야 겨우 해가 떨어질 무렵에 원위치로 되돌아 올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천하에서 가장 많은 하인을 거느린 사람이기도 했다. 아마도 그에 필적할 인물은 자금성의 황제 밖에 없으리라. 그 뿐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열두 명의 첩이 있었으며 고르고 골라서 뽑아 온 수백 명의 절세미인들이 그의 시중을 든다. 그에게 정실은 없었다. 그것은 그가 아직 세상에서 자신의 부인이 될만한 여인을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열거한 이 모든 것을 내버려 두고 그는 일 년 전 무림성의 천무전에 입전했다. 그가 호화로운 생활과 거대한 왕국 같았던 대장원을 벗어나 천무전에 뛰어든 것은 바로 흉중에 품고 있는 원대한 야망이 원인이었다. 숙야빈은 뚱뚱한 몸에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사탕이 수북히 들어있는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그는 주머니를 열어 사탕을 한 알 꺼내더니 입 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아 나직히 중얼거렸다. "며칠 전에는 자면독비 노명이 죽더니 어젯밤에는 추안룡 이개명이 피살 되었다." 그의 가느다란 눈이 조금씩 움직였다. "어딘지 모르게 작위적인 냄새가 난다. 노명의 몸에 난 상흔이 이개명의 삼첨쌍극에 의한 것이고, 이개명의 목을 관통한 것은 뇌정단 팔령주의 봉검(棒劍)이란 말이지? 훗훗... 누군가 뇌정단과 흑우단을 이간시키려 했었나 보군." 숙야빈은 입가에 조소의 빛을 떠올렸다. "어쨌든 두 지단의 해묵은 감정에 불이 붙게 되었군." 그는 사탕을 와삭하고 깨물며 몸을 일으켰다. "나도 슬슬 움직여 봐야지." 무존각(武尊閣)은 내성의 중심부에 있었다. 갑작스레 무존령(武尊令)이 발동되었다. 무림성주인 용화천이 이전(二殿)과 사단(四團)의 수뇌들을 회동시켰는데 이것은 아무런 사전 설명이나 예고도 없이 내려진 명령이었다.


유옥의 발길도 무존각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를 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에게도 역시 방금 전에 무존령이 내려졌던 것이다. 무존각은 도합 칠층을 이루고 있는 건물로써 무림성 내의 성역(聖域)이랄 수 있었다. 성주는 칠층에서 기거하며 각 층마다 성주 직속의 풍령십사(風鈴十師)가 지키고 있었다. 풍령십사의 존재는 하나같이 신비에 가려져 있었다. 그들의 정체에 관해서는 오직 용화천만이 알고 있을 따름이었다. 사개지단 중 풍령단(風鈴團)은 이들 풍령십사가 관장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풍령단주가 풍령십사 중 일인인 풍령일사(風鈴一師)였으므로. "무존령을." "난 소성주다." "무존령." 유옥은 무존각의 입구에서 풍령단 소속의 한 중년인에게 저지를 당하고는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다. "너는 눈도 없느냐? 나는 무림성의 소성주다." 그러나 안색이 창백하기 그지 없는 중년인은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똑같은 말만을 되풀이 했다. "무존령을." "빌어먹을...!" 유옥도 더 버티지 못하고 소매 속에서 무존령을 꺼내 던졌다. 중년인은 무존령을 받아 앞뒤로 살펴본 후에야 말했다. "들어 가시오." "잘 나셨군." 유옥은 비양거리는 어조로 툭 내뱉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층별로 입구마다 각기 한 명씩의 인물이 서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목각인형인 듯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유옥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을 지나치기는 했으나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만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으음, 정녕 무시무시하군.' 그가 느낀 바는 다름이 아니라 막강한 무위를 지닌 내가고수들만이 지닐 수 있는 일종의 기(氣)였다. 아무튼 유옥은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무사히 육층까지 올라갈 수 있었지만 그 곳에서부터는 양상이 사뭇 달랐다. 한 명의 화상(和尙)이 앞을 막아 섰는데 그 자는 나이를 도시짐작할 수 없는 위인이었다. 홍색가사를 입었으며 목에 해골을 특수약품으로 처리해 축소시켜 만든 염주를 걸고 있었다. 눈은 파란 색이면서 은은하게 붉은 빛이 감돌았다. 키는 육 척, 어찌나 뚱뚱한지 몸두께가 보통 사람의 세 배 이상이었다. "모두 내놓아라, 꼬마야." 유옥은 다짜고짜로 이런 말을 듣게 되자 어리둥절해졌다. '뭘 내놓으란 말인가?' 그는 의혹이 담긴 시선으로 이국적인 냄새가 풍기는 화상을 바라보았다. 화상이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너는 저것이 안 보이느냐?" 유옥은 그의 손가락이 지시하는 쪽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그 곳에는 하나의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로 여러 가지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각종 무기들을


비롯하여 섭선이나 가죽주머니 등의 개인적인 소지품들이었다. "이 곳을 통과하려면 품에 지닌 것은 먼지까지도 전부 털어 놓아야만 한다." 유옥은 눈살을 찌푸렸다. "성주님의 명이오?" "무존각의 법칙이다." "난 소성주...." 화상이 그 말을 끊으며 으르렁거렸다. "시끄럽다! 아무 것도 내놓고 싶지 않으면 도로 내려가면 될 게 아니냐?" 이쯤 되면 실랑이를 벌여 봐야 시간낭비이리라. "빌어먹을!" 유옥은 투덜거리면서도 할 수 없다는 듯이 품 속에 있던 소지품들을 몽땅 꺼내 놓았다. 그의 소지품에는 별 것도 없었다. "됐소? 파란 눈의 스님." 그는 그대로 화상을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그는 곧 솥뚜껑만한 화상의 손에 의해 맥문을 잡히고 말았다. "아직 한 가지가 더 있지 않느냐?" "무엇 말이오?" "킬킬... 감추어야 소용 없다. 아무리 시치미를 떼도 나는 네 허리춤 속에 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유옥은 일순 가슴 한 귀퉁이가 써늘해지는 기분이었다. 허리춤 깊숙한 곳에 감추고 있는 것까지도 능히 알아 볼 정도라면 대체 상대의 안력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그것은...." 그가 더듬거리자 화상이 잘라 말했다. "내놓아라." "싫소." "킬킬... 싫으면 할 수 없지. 도로 내려가라." "젠장...!" 유옥은 허리춤에서 종이 꾸러미 같은 것을 꺼내더니 화상을 향해 휙 집어 던졌다. "이젠 가도 되는 거요?" 이번에는 화상이 눈을 크게 부릅뜬 채 말을 못하고 어물거렸다. 종이 꾸러미가 펼쳐지며 그 속에 그려져 있는 것을 보게 된 순간 화상은 기가 막혀 넋이 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유옥이 그를 향해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혹시 당신도 생각이 있으면 내게 연락을 주시오. 그 중 괜찮은 계집 하나쯤은 언제라도 주선해 줄 수 있소." 말을 마치자 유옥은 더 볼 일이 없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화상은 멍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탄식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자고로 호부(虎父)에 견자(犬子) 없다고 하거늘, 어찌 하여 용(龍)의 새끼가 미꾸라지란 말인가?"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실망의 기색이 가득 담겨 있었다. 바닥에 풀어져 있는 종이꾸러미는 음화(淫畵)였다. 그것도 삼류 사창가 창녀들의 나신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었다. 특히 맨 위에 펼쳐져 있는 종이 속에서는 물동이를 연상시킬 정도로 젖가슴이 큰 창녀가 화상을 향해 두 다리를 활짝 벌린 채 음탕하게 웃고 있었다. 화상의 입에서 기어이 괴소가 흘러 나왔다. "클클클... 고것 참, 고약한 족속이로고."


② "본인이 여러분들을 소집한 이유는 이 자리를 빌어 한 가지 중대한 발표를 하기 위해서요." 한 중년인이 태사의에 앉은 채 중후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자신이 부른 인물들을 한 차례 주욱 둘러 보았다. 그가 당금 무림의 제왕으로 일컬어지는 무림왕(武林王) 용화천(龍華天)이다. 그는 일신에 금빛 곤룡포를 입었으며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기개로 인해 위풍당당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각이 진 얼굴에 눈썹은 관자놀이까지 뻗쳤고 우뚝 솟은 코, 한일자로 꽉 다물려 있는 입술 등에서는 강인함이 엿보였다. 숱이 많고 검은 수염은 가슴까지 보기 좋게 늘어져 있다. 무존각 칠층의 대전은 전체가 흑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닥의 양탄자도, 기둥도, 벽과 천정도 모두 검은 색이었다. 천정에는 궁등이 걸려 있었는데 그것은 만년유등이었다. 지금 대전에는 기라성 같이 쟁쟁한 인물들이 도열해 있었다. 양대전(兩大殿)의 수뇌인물들을 위시하여 내로라 하는 무림성의 일급 고수들이 전부 부름에 응해 달려온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긴장된 표정이었으되, 성주의 말을 한 자도 놓치지 않고 경청하려는 듯 진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의 귀로 다시 전해지는 무림왕 용화천의 음성은 묵직하고도 낮았다. "본인은 내일 아침 성을 떠날 것이오." 그의 한 마디가 일으켜 놓은 반향은 컸다. 중인들은 모두 안색이 일변했을 뿐더러 크게 술렁거리고 있었다. 용화천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이번 출성(出城)은 기일이 얼마가 될지 본인도 장담할 수가 없소. 짧으면 육 개월, 길면 일 년이 넘을지도 모르오." "아니, 어찌...." 중인들의 동요는 더욱 커졌다. 무림왕 용화천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인식 속에서 살아 있는 무림의 신(神)이자 거목(巨木)이었다. 무림성 내에서 그를 대행할 수 있는 자는 한 명도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반면에 용화천은 단단히 작정을 하고 있었던 듯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심히 미안한 말이나 행선지는 여러분께 밝힐 수가 없구려. 본인의 출성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용무 때문이오. 수행(修行)도 대동하지 않을 것이오." "안될 말씀입니다! 성주." 강력히 반대하고 나서는 자는 풍령단주였다. 그는 평소에도 무림왕 용화천의 그림자나 다름이 없었으며 무림성의 실질적인 실력자이기도 했다. 구룡신군(九龍神君) 엽무해(葉霧海). 그의 나이는 벌써 칠순이 넘어 있었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사순 정도 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고 성품이 과묵한 편이었다. 그의 무공 수준이 무림성주와 비교해 불과 종이 한 장의 차이라는 사실은 천하무림인 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본래 동해(東海) 구룡도(九龍島)라는 신비문파의 문주인 그는 언제부터인가 용화천의 곁을 잠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 따라서 그의 만류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었다. 용화천은 입가에 엷게 미소를 떠올렸다. "이 일은 확정된 것이라 번복할 수가 없습니다, 엽단주." 그는 신분을 도외시하고 엽무해에게만은 공대를 해왔다. "왜냐하면 이번 길은 오랫 동안 본인을 고심케 했던 신상의 문제를 해결하려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주...." "허허... 걱정 마십시오. 본인은 곧 돌아올 것입니다."


엽무해는 굽히려 들지 않았다. "성주의 안위는 무림전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만일 불상사라도 생긴다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용화천은 빙긋 웃었다. "기우(杞憂)입니다. 당금 무림에서 누가 이 용모(龍某)를 건드리려 하겠습니까?" "성주...." "아무튼 결정된 사항이니 그리 아십시오." 이쯤 되자 엽무해도 더 이상은 고집할 수가 없었다. 용화천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중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본인이 결정한 바는 이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소. 여러분께서는 따라 주시기를 바라오." 그의 말에 중인들의 얼굴에는 짙은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용화천은 그들을 향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것은 본인의 부재 중 누가 직위를 대행해 주느냐에 관한 사항이오." 좌중에는 일순 긴장감이 감돌았다. 당금 무림성주의 직위란 무림의 정세를 좌지우지하는 위치이므로 설사 잠깐 동안이라도 그 역의 대행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노릇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차기 무림성주로 등극하는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지도 몰랐다.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두 사람에게로 향해졌다. 그들은 다름 아닌 천무전주와 군마전주였다. 정사무림의 양대거두(兩大巨頭)랄 수 있는 그 두 사람이야말로 성주의 대통을 이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들이기 때문이었다. 금검대협(金劍大俠) 상관자기와 사황(邪皇) 냉전령(冷典嶺). 이 두 사람의 위명은 이미 사해를 떨어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그들 두 사람의 기색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직위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중인들이 어떤 반응을 전하든 시종 담담한 얼굴일 뿐이었다. 그들은 이런 일에 동요할 입장이 아니었다. 설사 개인적으로 야망을 품고 있다 한들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되었다. 양인의 거취 문제는 여러 가지 이해 관계가 얽혀 있어 중인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그들 두 사람에 의해 향후 무림성의 세력 판도가 결정된다고도 할 수 있었으므로 경솔한 언행은 일체 삼가해야 되었던 것이다. 용화천이 다시금 위엄이 깃든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본인은 이 일에 있어서도 역시 여러분들의 의견을 접수하지 않을 작정이오. 아까도 말했듯 본인의 결정에 여러분들이 따르고 협조해 주기를 바라고 있소이다." 중인들은 약간의 의혹을 내비쳤으나 이의를 달지는 않았다. 그것은 무림성주가 가진 권위가 그만큼 절대적이라는 의미로써 반발할 수 있는 자는 장내에서 한 사람도 없었다. "본인은 성주의 위(位)를 본인의 아들인 백검에게 맡기겠소." "맙소사!" "오오! 어찌 이런 일이...." 장내에는 잠시 일대 소요가 일었다. 아무리 성주의 독자(獨子)라지만 무림성의 골칫거리이자 난봉꾼이었던 용백검에게 무림성주의 직위를 대행하게 한다니 충격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중인들은 용화천의 처사에 모두 어이가 없어져 넋을 잃고 말았다. 그에 반해 용화천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갔다. "여러분들께서는 이 결정을 수용해 주시오. 만일 그러지 못하겠다고 나서는 자가 있다면 본인은 더 이상 그를 무림성의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오." 어투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담담했으되 그의 음성에서는 누구도 항거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위세가 느껴졌다.


그리하여 중인들이 저마다 안색을 굳힌 채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용화천은 자신의 아들을 나직히 불렀다. "백검, 이리 오너라." 중인들의 시선이 한 쪽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는 용백검이 지루한 듯 하품을 하고 있다가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히죽 웃었다. 그는 부친인 용화천에게로 시선을 옮기더니 빙글거리듯 물었다. "후후... 아버님께서는 지금 농담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용화천은 정색을 지었다. "나는 농담 따위는 즐기지 않는다. 검아, 너는 이 아비가 없는 동안 본성을 지켜야 한다." "훗!" 용백검, 아니 유옥은 말도 안된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실제로도 그는 당황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화천의 엄중한 음성이 그에게로 떨어졌다. "내가 지니고 있던 전권을 너에게 맡기겠다. 좋든 싫든 내가 없는 동안 너는 무림성을 관장해야만 한다." 유옥의 얼굴에서 비로소 웃음기가 싹 가셨다. 태연을 가장하려 무진 애를 썼으나 마침내 그 한계에 다다른 것이었다. 그는 용화천의 눈길을 피하며 내심 부르짖었다. '대체 이 일을 어찌 받아 들여야 한단 말인가? 과연 무림성주 용화천의 진의(眞意)는 무엇인가?' ③ 밤. 무존각이다. 열린 창으로 내려다 보이는 무림성의 규모는 실로 웅장무비했다. 무림왕 용화천. 명실공히 이 시대의 거인인 그는 지금 등을 돌린 채 암천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유옥이 멍하니 서 있었다. 용화천은 벌써 일각 가량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를 지켜 보며 유옥은 자못 혼란에 빠져 있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이대로 가다간 꼼짝없이 무림성주의 대역을 하게 생겼거늘....' 휘이이잉--! 창문을 통해 한 줄기 바람이 스며 들어 용화천의 곤룡포를 휘날리게 만들었다. 그는 등을 돌린 채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로서도 무척 힘든 결정이었다." 유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하가 다 비웃겠지만 나는 그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왜인줄 아느냐?" 용화천은 공허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헛... 그건 네가 내 아들이기 때문이지." 유옥이 짐짓 키득거리며 그의 말을 받았다. "쿡쿡... 방금 절더러 아들이라고 하셨습니까? 그 사실을 기억해 내셨다니, 전 아주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 "잊는다고? 내가 너를 말이냐?" "그럼 그렇지 않으셨단 말씀입니까?" "그건 표현이 다르다. 나는 다만 실망스러운 아들을 인정할 수가 없어 회피해 왔을 뿐이다." 용화천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 덕분에 나는 혼자였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너라는 아들을 가진 이후로도 그 사실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지."


유옥이 그리 곱지 않은 어조로 대꾸했다. "훗훗... 그야 결과적으로 자업자득이 아닙니까?" "그건 네 말이 맞다." 용화천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탄식처럼 읊조렸다. "넌 그 동안 이 아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살아 왔는지 아느냐? 허허헛... 혹시 제왕의 고독이 어떤 것인지 상상해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구나." "후후... 감정의 사치를 누리려고 하시는군요. 숱한 사람들이 오르려고 하는 제왕의 자리에 오르고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은 단지 가진 자의 오만에 불과합니다." "가진 자의 오만?" 용화천은 반문하더니 몸을 돌렸다. 그를 정면으로 대하자 유옥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어야 했다. '저 눈! 마치 나를 꿰뚫어 버릴 듯 하구나.' 과연 용화천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유옥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어 그는 자르듯 차가우면서도 웬지 격정이 느껴지는 묘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모른다. 이 아비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 "후후... 정말 그러할까요?"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세상으로부터 배척 당하게 된 한 사람이 있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는 결심하게 되었다. 언제고 최강자가 되어 세상을 손아귀에 움켜 쥐고 말겠노라고. 그것만이 복수가 될 테니까." 용화천의 음성은 낮게 이어지고 있었다. "훗날 그는 결심한 바대로 천하제일인이 되었다. 헛헛...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그가 걸어온 길은 멀고도 험했다. 피도 눈물도 모르는 비정(非情)의 길을 그는 걸어야만 했다."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유옥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한 가닥 알 수 없는 감정이 번지는 것을 느꼈다. 그로서는 무림왕 용화천의 인간적인 면모를 처음 대했을 뿐더러 그로 인해 오히려 강한 연민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친근감과도 통하는 감정이었다. "사실상 너의 어머니와 나는 애정으로 맺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 두 사람은 어쩌면 각자 필요성을 더 따졌는지도 모르지. 당시 내 경우에는 무림성주가 되려는 야심 때문에 악마에게 혼이라도 팔라면 서슴없이 팔 정도에 이르러 있었다." 유옥은 씁쓸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어머님과 벽을 쌓고 계신 것입니까?" "부인하지 않겠다." "그럼 저란 놈은 무엇입니까? 제 존재 역시도 아버님의 안중에는 없었단 말씀입니까?" 용화천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건 절대 그렇지 않다. 네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던들 오늘과 같은 결과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너도 알다시피 무림성은 무림의 하늘이다. 능력이 없는 자는 성주가 될 수 없지. 나는 내 아들이라 해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림성주가 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유옥이 빈정거리듯 물었다. "그렇다면 이번 결정은 또 무엇입니까?" 용화천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솔직히 나로서는 일생일대의 도박인 셈이다. 이 한 번의 도박에 내 모든 것을 걸기로 작정했으니까." "흐음...." "내가 돌아오면 그 때에는 많은 변수가 있게 될 것이다." 유옥은 용화천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필경 자신의 아들이 대임을 맡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따라 모종의 중대사를 처리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유옥은 궁금한 빛을 내비치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아버님께서는 어디를 가시려는 것입니까?" 용화천은 입술 꼬리를 기묘하게 말아 올렸다. "안되었지만 아직은 말할 수가 없구나. 이 고충 또한 때가 이르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 용화천은 탄식과 함께 덧붙였다. "어쩌면 이번 길이 마지막 길이 될런지도 모른다. 설사 그렇다 해도 나는 가야만 한다. 그것은 내가 뿌린 씨는 오직 나만이 거둘 수가 있기 때문이다." 유옥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가지 못하도록 말려야 한다! 결국 이 말뜻은....' 그 사이, 용화천은 염원이 담긴 눈으로 유옥을 바라보았다. "나는 믿는다, 너를." 유옥은 그 눈길을 차마 맞받을 수가 없었다. 또한 어떤 행동이든 취해야 했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의 입가에는 체념이 내포된 자조의 웃음이 떠올랐다. '훗훗... 어리석다, 유옥. 너는 지금 용백검의 흉내를 내고 있을 뿐 그가 아니지 않느냐?' 용화천의 음성이 그의 귓전에 와 닿았다. "내 떠나기 전에 너에게 줄 것이 있다." 유옥은 휘청이던 정신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무엇을...?" "언제고 네가 곤경에 처하거든 이것을 가지고 북경(北京) 낙선재의 황노인을 찾아가도록 해라. 그럼 네 앞에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이것이 이 애비의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다." 용화천은 품 속에서 하나의 녹옥 조각을 꺼내 유옥에게 건네 주었다. 그것은 반부(半部)로 보이는 일종의 문장(紋章)이었다. 거기에는 한 마리의 기린이 새겨져 있었는데, 유서 깊은 물건인 듯 조각을 해 놓은 솜씨가 정교하기 이를데 없었다. 뒷면에는 낙관도 찍혀 있었으나 반쪽이 떨어져 나가 있으니 누구의 인(印)인지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황노인을 만나면 모든 것을 알게 된다. 네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이 애비에 관한 것까지도 말이다." 용화천의 눈에는 비록 찰나적이긴 했지만 무한한 비애와 고통이 어렸다. 그것은 평소 그가 보여 주던 위엄과는 심히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아버님...." 유옥은 불러 놓고 스스로가 깜짝 놀랐다. '아차!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소리가 나오다니.' 다행히도 그 때는 용화천이 그로부터 다시 등을 돌린 뒤였다. "왜 그러느냐?"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유옥은 더듬거리면서도 사태를 급히 무마시켰다. "그럼 소자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허허허... 혹시 이 애비에게 할 말이 있었던 것은 아니냐?" "아닙니다." "하긴 내 앞에서 허심탄회하게 말하기는 어려울 게다. 실은 우리 부자 사이에 이렇게 긴 말을 나눈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니까. 미안하구나, 다 이 못난 애비의 불찰이다." 용화천의 음성에서는 진한 자책이 묻어 나왔다. 이를 느끼자 유옥은 내심 씁쓸한 심정이 되어 읊조렸다.


'부부 사이의 갈등이 결국 부자간의 관계에 깊은 골을 파 놓았구나. 진짜 용백검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부친의 진심을 알고 기뻐했을지...?' 간다고 해 놓고도 멍하니 서 있는 그에게 용화천이 말했다. "밤이 깊었다. 어서 돌아가거라. 너의 어머니에게는 네가 대신 얘기해 다오. 나와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으니 말이다." 유옥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깊숙히 허리를 숙인 후, 그 자리를 황황히 빠져 나왔다. '저 분이 정말로 나의 부친이라면...!' 아무도 알지 못하리라. 그 순간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 것도, 그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버린 것도.... ④ 무림왕 용화천이 떠나가던 날부터 무림성은 일변했다. 거목이 중심을 잡고 있는 한 무림성은 명실상부한 무림의 하늘이었다. 그러나 그 기둥이 빠져 나가자 상황은 달라졌다. 용화천이 없는 무림성은 웬지 맥이 빠진 것처럼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렇듯 침중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가운데 며칠이 지나갔다. 그리고.... 천무전(天武殿). 이 곳에서는 전례없이 정사무림(正邪武林)의 두 거두가 마주 하고 있었다. 금검대협 상관자기와 사황 냉전령. 두 사람은 다소 어색한 기색이 된 채 아까부터 상대의 얼굴만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상관자기가 먼저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며 그 무거운 침묵을 깼다. "냉형(冷兄)께서 소제를 찾아 오시다니 정말 뜻밖이구려." 냉전령으로 말하자면 이십 년 전만 해도 녹림(綠林)의 대종사(大宗師)였던 위인이다. 그는 약간 마른 얼굴에 움푹 패인 깊숙한 눈을 지녔으며 일신에는 회포(灰匏)를 걸치고 있었다. 그가 사목(蛇目)을 번뜩이며 진지하게 답했다. "아시다시피 본성은 동요하고 있소이다. 성주께서 떠나신 후 로 각 조직이 겉돌고 있는 느낌이 드오." 상관자기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지 않소? 소성주께서도 이제까지는 별 로 실수가 없으셨고...." 그는 부드러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노부가 알기로 소성주의 태도는 전날에 비해 크게 달라지셨소이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무존각에서 줄곧 성내의 각종 자료와 문서들을 훑어 보며 중원각처의 조직 체계와 연락 상황 등을 검토하고 계시다 하오." "으음, 그 소식은 나도 듣고 있었소." "그럼 더 말할 것도 없겠구려. 어쩌면 이번 기회에 소성주께서 일신된 모습을 보이게 될런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오? 허허... 모름지기 호부(虎父)에 견자(犬子) 없다는 말도 있듯 소성주의 숨겨져 있던 능력이 발휘된다면야 성주를 위해서건 무림을 위해서건 그보다 다행한 일이 어디 있겠소?" 냉전령의 눈에서 일순 싸늘한 한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래, 상관전주는 계속 그렇게 표면적인 상황만 보고 수수방관하고 있을 참이오? 지금 외성의 공기가 점점 더 험악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텐데도 말이오?" "그건...." 상관자기가 말끝을 흐리자 냉전령은 코웃음을 쳤다. "사개지단의 반목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오. 지금까지는 성주의 강력한 조처로 인해 발화가 억제되어 왔으나 그 분이 안 계신 지금은 다르오." "특별히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허어! 상관전주께서는 꼭 큰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한 말투시구려. 일이 터졌다 하면


이미 늦소." 냉전령의 음성이 다소 고조되었다. "뇌정단과 흑우단의 감정 대립은 벌써 손을 쓰기 힘든 단계에 이르렀소. 유혈(流血) 사태의 조짐까지도 엿보인단 말이오." 상관자기가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사태가 그 정도로 심각하단 말이오?" "훗훗... 왜 이러시오? 상관전주. 그 사실은 성내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거늘, 무엇 때문에 발뼘을 하려드는 게요?" 냉전령의 말에 상관자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노부가 물읍시다. 냉전주야말로 무슨 의도로 나를 찾으셨소? 설마 하니 내가 뇌정단과 흑우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모를까봐 추궁하러 온 것은 아닐테고...?" 사황 냉전령의 깊숙한 눈이 더욱 음침해졌다. "후후... 우리 좀 더 솔직해집시다. 상관형, 어차피 무림성에서 우리 두 사람의 존재는 허수아비가 아니었소?" "그, 그건 무슨 의미요?" 상관자기는 정말로 놀랐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무림성을 주도하는 것은 사개지단과 원로원이고 우리 양대전은 그저 들러리가 아니었소?" 냉전령의 음성은 어느 덧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달리 표현하면 무림 전체가 단지 한 명의 제왕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었다는 얘기요. 그렇지 않소?" 상관자기는 이마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며 같은 말을 다시 물었다. "냉형의 뜻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오?" 냉전령은 상대방의 변화에 일부러 더 말을 빙빙 돌렸다. "우린 피차 마찬가지 입장이오? 아무리 성내의 일에 기여를 해도 결국은 한 명의 제왕을 빛내 주기 위한 도구에 불과할 뿐, 후후... 내 말이 틀렸소?" 상관자기는 정색을 지었다. "냉형, 그만 되었으니 어서 핵심을 말하시오." "훗훗... 요컨대 제왕은 한 명이면 족하다는 얘기요. 이 시점 에서 또 다른 제왕이 탄생하는 것은 아무도 원하지 않소." "으음...!" "애당초 성주는 강하기만 했지 너그럽지 못한 인물이었소. 그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자는 가차없이 제거해 버리는 냉혹한 제왕이었소. 따라서 무림성은 천하무림의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제왕을 위한 세력일 뿐이었소." 냉전령의 어조는 점차로 집요해졌다. "결과적으로 무림성이 그의 개인 세력이 되자 무림의 각 문파역시 그를 위한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소. 노부만 해도...." 그의 눈에서 섬뜩할 정도로 푸른 안광이 번쩍였다. "과거에는 팔십만에 달하는 녹림인들을 다스리며 소위 녹림대종사(綠林大宗師)로 불리웠었소만, 지금은 이렇게 좁은 울타리에 틀어 박힌 채 모든 권한을 잃고 말았소." 상관자기는 말을 잃은 듯 묵묵히 듣기만 했다. "상관형도 마찬가지요. 과거 금검가(金劍家)는 공히 중원제일가(中原第一家)가 아니었소? 구파일방조차도 매사에 한 수 양보했을 뿐더러 상관형에게 중원팔가연맹(中原八家聯盟)의 맹주 자리를 맡기지 않았었소? 그런데 지금은 어찌 되어 있소?" 상관자기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반쯤 내리감고 무엇인가 상념에 잠겨 있었는데,


안색이 침중해진 것으로 미루어 사황 냉전령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별로 어렵지 않게 짚어내고 있었다. "후후... 제왕의 시대는 막을 내릴 때가 되었소. 그리고 우리가 나서서 그 일을 주도해야만 하오." 상관자기는 눈을 떴으되 단 한 마디를 물었을 따름이었다. "그 일에 대한 복안이라도 있소?" 그 말에 답한 자는 냉전령이 아니었다. "핫핫핫...! 물론입니다." 한 가닥 웃음소리와 함께 한 명의 청년이 대전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를 보자 상관자기는 흠칫 놀랐다. "자네는...!" 그 자는 일신을 비단으로 감은 뚱뚱한 청년이었다. "숙야빈, 전주를 뵙습니다." 그는 습관을 버리지 못해 입 안에서 사탕을 우물거리면서도 상관자기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저는 지금껏 오늘이 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상관자기의 안색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자네가 이번 일의 모사(謀士)였나?" "하하...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만 맹세컨대 소생은 다른 뜻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대인(大人)은 대도(大道)만을 걸어야 한다는 옛 성현들의 말씀을 따르고자 할 뿐이지요. 물론 제가 아니고, 두 분 말씀입니다." 숙야빈의 말에 상관자기는 눈썹을 치켜 세웠다. "그래서 노부도 모르게 냉전주의 마음을 움직여 놓았나?" 그는 역겹다는 듯 숙야빈의 살찐 뺨을 노려 보았다. 하지만 숙야빈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전주. 냉전주께서 회동하신 것이 어찌 제 의사에 의해서만이겠습니까? 소생은 다만 냉전주께서 작금의 사태를 바로 보시기를 간청했을 따름이올씨다." "감히...!" 상관자기는 만면에 은은히 분노를 드리웠다. 그것은 숙야빈의 능수능란한 말재간에 그 속을 뻔히 들여다 보면서도 어느 덧 혹하고 있는 자신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숙야빈이 그런 그를 향해 공손히 읍했다. "죄송합니다. 소생은 전주를 위해, 나아가서는 정도무림을 위해 나섰습니다만 혹여 합당치 않았다면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냉전령이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상관형이 정말 부럽소이다. 숙야소제 같은 수하가 있었다면 지금쯤 노부는 벌써 천하를 향해 웅비(雄飛)하고도 남았을 것이외다." 상관자기는 그 말에 쓴 웃음을 지었다. 그는 숙야빈을 내려다 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내 네 놈이 언제고 일을 터뜨릴 줄 알고 있었다만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리라고는 생각치 못했었구나.' 숙야빈이 그의 심중을 엿본 듯 히죽 웃으며 말했다. "부디 망설이지 마십시오, 전주. 기회란 적절히 이용하지 않으면 허망하게 놓쳐 버리고 말지요." "으음...." 상관자기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는 천성적으로 숙야빈 같은 인물을 무척 경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야빈을 유독 가까이 둔 것은 어쩌면 오늘 같은 경우를 예상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렇듯 야심만만하고 교활한 인물이야말로 자신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으므로. 마침내 인의(仁義)라는 허울 안에 조심스럽게 감추어져 있던 상관자기의 야망이 적나라하게


표출되었다. "소빈(少賓), 네 계획을 천천히 얘기해 보아라." 숙야빈을 부르는 호칭마저 달라졌다. 이는 처음 있는 일로써, 웬만큼 신뢰하고 아끼기 전에는 절대 나올 수가 없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그것이 진심이라는 법은 없지만. 숙야빈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전주께는 예의가 아니나 실은 냉전주님과는 벌써 얘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쏟아낸 말들은 실로 상상치도 못할 만큼 엄청난 것들이었다. 향후로 무림성에 대풍운을 몰고 올 정도로 말이다. 제 8 장 붕천(崩天) ① 무림성의 공기는 하루가 다르게 긴장감이 고조되어 갔다. 뇌정단과 흑우단의 대립은 성주의 출성 이후로는 노골화 되어 어느 쪽이든 먼저 터져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노명과 이개명의 죽음이 가져다 준 파급효과는 지대했다. 특히 이개명이 흑우단주인 생사도(生死刀) 철장규의 조카이고 보면 사태의 심각성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외성에서는 늘상 병장기를 휴대한 두 지단의 고수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녔으며, 마주치는 눈빛에 의례 살기를 담았다. 조그마한 변수라도 생긴다면 당장에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비화될 참이었다. 덕분에 무림성 내의 모든 사람들이 불안한 심경이 되어 사태의 추이를 관망했는데, 종내 일은 터지고 말았다. "흑! 이, 이럴 수가...." 막 침소로 들어서던 흑우단주 생사도 철장규는 코 끝에 훅 끼쳐 오는 피비린내에 눈을 크게 부릅떴다. 침상 위. 그 곳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져 있었다. 철장규는 최근 부인을 맞아 들였는데 늦게 결혼한 탓에 몹시 애지중지했다. 그의 아내는 나이도 젊을 뿐더러 용모가 빼어나 그로 하여금 매일 밤 침실에 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처럼 난데없는 변을 당한 것이다. "대체 어떤 놈이...!" 철장규는 그 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양 우뚝 선 채 분노로 인해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부들부들 떨었다. 침상은 온통 피투성이였으며 그토록 사랑하여 매일 밤 탐닉하던 아내의 몸뚱이가 그 위에 엎어져 있었다. 그것도 무참하게 알몸이었고 목은 어디론가 달아나 버린 상태였다. "우우우...." 철장규는 눈썹이 하늘로 솟구쳐 오름과 동시에 급급히 엎어진 아내의 몸을 뒤집어 보았다. 목이 끊겼어도 그는 아내를 알아 보았고 그녀의 젖가슴 한 복판에서 평소 특징처럼 여겼던 두 개의까만 점을 확인하자 그대로 이성을 잃고 말았다. "크으윽!" 철장규가 기어이 짐승처럼 포효성을 발한 것은 아내의 하반신을 보고서였다. 처참하게 짓뭉개진 모양새로 미루어 필시 능욕을 당한 것이 틀림 없었다. "어... 어떤 놈이 감히 이런 짓을... 크으으으...." 무섭게 번뜩이던 철장규의 눈이 문득 찢어질 듯 벌어졌다. 아내의 손에 꼭 쥐어져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의 분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여지명(呂地命)! 내 네 놈을 갈가리 찢어 죽이고 말테다." 목을 잃은 여인의 손아귀에는 찢어진 천조각이 쥐어져 있었다. 그것도 누구의 것인지를 금세 알 수 있는.... 백안귀견수(白眼鬼見愁) 여후령.


그의 다리가 충격으로 인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이... 이것을 정말 흑우단에서 보내왔단 말이냐?" 그의 앞에서 제 팔령주인 귀검(鬼劍) 사마각이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흑우단 소속의 졸개가 가지고 와서는 내던지다시피 하고 달아났습니다." 여후령의 흰자위 밖에 없는 눈이 섬뜩한 살기를 뿜어냈다. 그의 면전에는 지금 피 묻은 보자기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보자기 위에는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는 하나의 수급이 놓여 있었는데 잘려진 목에서는 아직도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급의 얼굴은 대략 삼십 세쯤 되어 보였으며 언뜻 느끼기에도 여후령과 매우 닮아 있었다. "으으... 지명을 죽이다니, 감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여지명, 즉 죽은 자는 바로 여후령의 하나 뿐인 아들이었다. 평소 품행이 좋지 않아 그 점은 마땅치 않았으되 여후령으로서는 그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입장이었다. 그러다 그 일점의 혈육을 목이 끊긴 수급으로 대하게 되었으니, 여후령의 심경이 어떨지는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쾅! 여후령은 탁자를 주먹으로 갈겼다. 그 바람에 애꿎은 탁자가 박살이 나는 그 순간, 그는 무섭게 부르짖었다. "더 이상은 못 참는다! 철가 놈을 당장 쳐죽이지 않으면 차라리 나 여후령이 목숨을 끊어 버리겠다." 그의 흰 눈에서 광기(狂氣)에 가까운 분노가 이글거렸다. 무존각의 별실(別室). 유옥은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서류 속에 파묻혀 비명 아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휴우!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끝이 없군. 대체 아버님께서는 어떻게 이 많은 서류들을 매일 검토해 오셨단 말인가?" 한 가닥 차가운 음성이 그 말을 받았다. "그것은 성주로써 의당 해야할 일이었습니다. 성주께서는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일도 모두 직접 처리하셨습니다." 음성의 주인은 다름 아닌 풍령단주 구룡신군 엽무해였다. 하지만 유옥은 픽 웃을 따름이었다. "아버님이야 어떠셨든 나까지 그러라는 법이 어디 있소? 후후... 감탄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날더러 인생의 재미를 포기하고 이 냄새나는 서류더미나 뒤적이고 있으라면 사양하겠소. 그럴 바에야 차라리 무림성의 마구간을 돌보는 게 백 번 낫지." 엽무해의 안색이 일변했다. 무림왕 용화천도 그에게는 경어를 썼을 뿐더러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다소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무림성주의 직위를 한낱 마구간 지기와 비교하다니, 그런 불경한 발언은 아무리 소성주라 해도 용납하지 않겠소." "훗훗...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요? 마치 나를 이 자리에서 내몰기라도 할 것 같구려?" 신분의 차이 때문이었을까? 엽무해가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어찌 감히 속하가...." "핫핫핫... 그렇다면 참견하지 마시오. 어차피 아버님이 돌아오시기 전까지 성주로써의 권한은 내게 있으니까." 엽무해는 정말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의 심중에서는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하는 탄식이 들끓고 있었다. '소성주, 당신은 지금 당신의 위치가 어떤 줄을 안다면 결코 태평일 수가 없을 것이오. 어쩌면 성주께서 돌아오시기도 전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지도....' 유옥이 하품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아함, 피곤하군. 난 이만 쉬어야겠소. 나머지 일은 단주가 잘 알아서 처리해 주시리라 믿소."


말을 마치자 그는 곧장 내실을 향해 걸어갔다. 엽무해는 명대로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유옥의 뒷모습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었다. "호호호...." 수증기가 가득 찬 욕실에서 금비, 은비의 교소가 들렸다. 유옥은 그녀들의 목욕 시중을 받으며 의아한 듯 물었다. "왜 웃는 것이냐?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있기에...?" 금비가 그의 등을 밀며 킥킥거렸다. "호호홋... 요즘 공자님의 행동이 우스워서 그래요. 호호... 위엄을 가장하신 그 모습이란...." 은비도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푸훗! 정말 그래요. 더구나 공자님 앞에서 그 근엄한 엽단주가 쩔쩔 매는 꼴이라니, 목불인견이더군요." 유옥은 피식 웃었다. "후후... 난 또 무슨 일이라고? 그 일이라면 말도 말거라. 난 죽을 지경이다. 그런 건 도무지 체질에 맞질 않거든." 쏴아아--! 그는 물보라를 튕기며 몸을 일으켰다. "피곤해서 그만 자야겠다. 너희들도 가서 자거라." 금비와 은비는 근육이 잘 발달된 유옥의 몸을 훔쳐 보며 얼굴을 붉혔다. 그것은 그에게 옷을 걸쳐 주면서도 다르지 않았다. 이는 최근 들어 새삼스럽게 그녀들에게 일어난 현상이었다. 어릴 적부터 시중을 들어 왔건만 이제 와서 공연히 가슴이 더워지고 그와 눈빛만 마주쳐도 가슴이 뛰곤 하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그녀들이 믿고 있는 용백검이 가짜라는데서 찾으면 맞았다. 지겹도록 미리 알고 있던 인물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내였으니 말이다. ② 침실로 들어서려던 유옥은 멈칫했다. 스슷--! 한 인영이 막 침실로부터 연기처럼 빠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인영을 보자 유옥은 크게 놀랐다. '저 여인은...!' 그녀는 그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여인이었다. '풍령십사 중 유일한 여인인 채화령이 아닌가? 그녀가 왜?' 요지화화(瑤地花花) 채화령(蔡花鈴). 이 여인은 풍령십사 중 막내로써 타고난 미색과 뛰어난 기지, 고강한 무공 등을 지녔고 특히 역용술이 일품이었다. 방년 이십칠 세였는데 평소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으며 이른바 풍령단의 꽃이랄 수 있었다. 어떻든 유옥은 의혹을 금치 못했다. '성주의 처소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거늘....' 그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침실로 들어갔다. 그러다 문득 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한 장의 종이 쪽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유옥은 급히 종이를 집어 들었다. "아! 이것은...." 그는 흡사 쇠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 몹시도 충격을 받았다. 그 쪽지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오늘 밤 상관영봉과 함께 성 밖으로 나가 그녀를 정복해라. 그 후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서는 계속 지시하겠다.> 더욱 놀라운 것은 종이의 끝부분에 붉은 색으로 매화인(梅花印)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예전에 한 번 본 일이 있는 문양이다. 유옥은 그것을 이 곳에서 다시 대하게 되자 머리 속이 극도로 어지러워졌다. '대체 어찌 된 일인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무림성주가 암중에서 명령을 내린 장본인이었단 말인가? 이 쪽지를 놓고 간 사람이 채화령이고 보면 그도 배제할 수가 없는 사실일진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구나. 과연 무림성주가 왜,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인단 말인가?' 그가 혼란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여태껏 상황으로 미루어 자신을 무림성으로 침투시킨 모친이 필경 무림성주와 가공할 원한을 지녔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정말 모를 일이군.' 유옥은 내심 읊조리면서도 지시에 따르기 위해 재빨리 움직여 채비를 했다. 때는 삼경. 무림성을 빠져 나가는 두 가닥 인영이 있었다. 그들의 뒤로 달빛이 먹구름에 의해 점차 침식되어 가고 있었다. 휘이이잉--! 습기를 잔뜩 품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무슨 사건이라도 터질 듯한 전조와도 같았다. 한 곳에 이르자 그들 중 여인, 즉 상관영봉이 물었다. "내게 하겠다는 말이 무엇이죠? 꼭 성 밖에서 해야 할 이유는 또 뭐였나요?" 그녀의 어조는 쌀쌀맞기 그지 없었다. 용백검, 즉 유옥은 자신들이 무림성에서 꽤 떨어진 곳까지 왔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그녀를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말하리다. 봉매가 요즘 들어 자꾸만 나를 피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오?" 상관영봉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픽 웃었다. "겨우 그 얘기였나요?" "우리에게 그 이상 심각한 얘기가 어디 있소?" 상관영봉은 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당신에게는 심각할지 몰라도 내게는 끝난 얘기예요." "끝나다니, 어째서 끝났단 말이오?" 상관영봉은 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잘라 말했다. "어째서는요? 우리 사이가 끝났으니 그렇죠." 유옥은 짐짓 펄쩍 뛰었다. "말도 안되오! 우리는 엄연히 정혼을 한 처지가 아니오?" "흥! 애정 없는 결혼이 성립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아버님께서도 제 생각에 반대하지 않으셨어요. 성주께서 돌아오시면 파혼을 선언할 거예요. 물론 그 분께서도 승낙하실 테고요." 유옥은 태도를 바꾸어 기소를 흘렸다. "ㅋㅋ... 그 새 마음이 변했다는 말이군?" 상관영봉이 홱 돌아서더니 따지듯 말했다. "변한 것은 백검, 당신이지 내가 아니에요." "아무튼 결과는 마찬가지가 아니오?" 유옥은 자못 느끼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 "후후후... 나는 봉매가 변한 이유를 알고 있소. 바로 다른 남자가 생겨서 그렇다는 것을 말이오." "뭐, 뭐라구요?" 상관영봉의 가냘픈 몸이 바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나를 상대로 어찌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있죠?" 그녀의 안색은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으하하핫...! 시치미를 떼면 내가 모를 줄 아시오? 언제부터인가 숙야빈, 그 작자와 은밀히 놀아나고 있었으면서."


"더... 더러운...!" 휙! 상관영봉의 섬섬옥수가 바람을 가르고 날아왔다. 하지만 그 손은 목표물을 맞추기도 전에 상대에게 나꿔 채이고 말았다. "핫핫핫...! 양심에 찔리니 폭력으로 떼우려 드는군." 그녀는 대로하여 부르짖었다. "이 손, 놓지 못해요?" "왜, 그 자의 손이 아니라서 싫소?" "닥쳐욧! 이 속속들이 추잡한... 악!" 상관영봉은 비명을 질렀다. 유옥이 그녀를 다짜고짜로 끌어 안고는 입을 맞추려 했기 때문이었다. '아아! 이런 일이....' 그녀가 절망에 휩싸여 막 눈을 내리 감으려 할 때였다. 한 가닥 얼음장 같이 차가운 음성이 들려와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려는 행위를 가로막았다. "한심하군, 너 같은 놈이 무림성의 소성주라니." 그 뒤에 곧바로 이어진 것은 참담한 비명이었다. "크으윽!" 그것은 놀랍게도 유옥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 동시에 그의 몸은 음유한 강기에 휘말려 무려 오장 밖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입으로는 피화살을 내뿜으면서 말이다. "이 무슨...?" 어느 결에 눈을 떴는지도 몰랐다. 상관영봉은 느닷없는 사태에 거의 넋을 잃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한 인물이 들어 왔다. 그는 일신에 혈의를 걸친 청년으로 그녀와는 십여 장이나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인상은 너무도 강렬하여 한 번 보면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피처럼 붉은 옷 외에도 긴 머리를 역시 붉은 띠로 묶어 어깨 뒤로 흘러 내리게 하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아도 가히 빨려들 듯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창백하다고 여겨질 만큼 흰 피부에 오관이 섬뜩할 정도로 아름다운 그 청년을 향해 상관영봉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다... 당신은... 누구죠?" 혈삼청년은 입술 끝을 약간 말아 올리며 대꾸했다. "내 이름은 마록(摩麓)이라 하지." "마록...?" 상관영봉은 의혹의 빛을 띄며 되뇌었다. 그 이름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처음 듣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후후후...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이다만 얼마 후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게 될 것이다. 향후로는 천하 무림이 내 발 아래 엎드리게 될 테니까." 상관영봉은 그 말에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흥! 보기보다 형편 없는 위인이었군. 나를 구해 주었다고 함부로 광오한 말이나 지껄이고 있다니.' 마록은 눈에 기이한 빛을 띄며 말을 이었다. "낭자는 무척 아름답군. 내 선언에 대한 기념품으로는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이야." "그, 그건... 무슨 뜻이죠?" 상관영봉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핼쑥하게 질렸다. 그러자 마록은 본색을 드러내듯 섬뜩한 미소를 흘렸다. "후후... 정말로 몰라서 묻나? 낭자는 앞으로 본인의 처첩(妻妾)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마... 말도 안되는!"


쐐애액--! 상관영봉은 앙칼진 외침과 함께 대뜸 쌍장을 날렸다. 당금 무림에서도 그녀의 무공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후후후... 이제 보니 너의 매력은 따로 있었군." 마록은 움직이지도 않은 채 소매만을 슬쩍 저었다. "앙탈을 부리는 여인은 언제 보아도 귀엽다." "앗!" 상관영봉은 음산하면서도 부드러운 힘이 가닥가닥 전신을 덮쳐 오자 의지와는 무관하게 맥없이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무서운 흡인력이었다. "후후후후...." '아! 백검,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상관영봉은 득의에 찬 마록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도 어느 덧 정신이 아득해져 가고 있었다. 스스스슷--! 일진의 음풍(陰風)이 불었다. 그리고 이를 끝으로 마록의 웃음도, 그녀의 모습도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③ "으으...." 유옥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으나 도로 무릎을 꺾으며 울컥하고 한 모금의 피를 토해냈다. 그는 괴청년 마록이 사라져 간 방향을 바라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으음, 대단한 자였다. 마록이라... 했던가...?" 그는 와중에서도 온 몸이 마치 얼음 구덩이에 빠진 듯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가슴이 터져 나갈 듯한 압박감까지도 그를 무던히 괴롭혔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일 그 순간에 현천무극신공(玄天無極神功)을 펼치지 않았다면 결과는 더욱 비참했을 것이다.' 그의 입에서는 자조적인 웃음이 풀풀 새어 나왔다. '어쨌든 나는 실패했다. 누구의 명령이든 이행했어야 되었거늘, 그것만이 내 본분이거늘... 후후후....' 유옥은 비틀거리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금후로 있을 사태에 대한 걱정과 스스로에 대한 비감까지 겹치자 그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해져 있었다. 그는 자위라도 하듯 다시금 읊조렸다. "차라리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 편이 나았는지도 모르지. 타인의 이름과 모습을 도용해 한 여인을 억지로 취하는 따위의 일 보다야...." 하지만 그에게도 호승심은 있었다. 무림성에 들어가 목적과는 별개로 견문을 넓히고 현천마공을 익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무인으로서의 기개까지도 착실하게 쌓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마록, 그대와는 필히 다시 만나게 될 날이 있을 게다. 그 때에는 틀림없이 이 빚을 갚아 주지." 서서히 어둠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그의 뒤로 핏물이 점점이 따르고 있었다. 콰르르릉-- 쾅! 쏴아아아--! 뇌성벽력(雷聲霹靂)과 함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폭우가 태산(泰山) 전체를 함몰시킬 듯 쏟아져 내리고 있다. 오경(五更) 쯤이나 되었을까? 그러나 하늘이 온통 먹구름에 뒤덮혀 여명이 밝아올 기미는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무림성으로 이르는 길목이다. "으음...." 한 인영이 나직히 신음을 흘리며 청석판이 깔려 있는 석로를 걷고 있었다. 다름 아닌 용백검, 아니


유옥(柳玉)이었다. 그는 현재 거의 탈진상태였다. 마록에게서 입은 일장의 상세는 생각보다 훨씬 엄중하여 심맥이 크게 진동되었던 것이다. 만일 그의 몸에 안산(岸山)의 괴노인이 주입해 놓은 기류와 현천무극기가 내재해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마록이 떨친 일장에 아마도 즉사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마침내 그의 눈에 거대한 성루(城樓)가 보였다. '다 왔군.' 그는 일순 쓰러질 듯 휘청거렸으나 사력을 다해 신형을 바로 잡았다. 그렇듯 폭우 속에서 뿌옇게 보이는 성문을 향해 다가가던 그는 불현듯 눈을 크게 떴다. 놀랍게도 성문이 활짝 열리더니 그와 동시에 수십기의 인마(人馬)가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두두두두두--! 그들은 폭우도 아랑곳 없이 전속력으로 치달리고 있었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유옥이 의혹을 느끼는 사이 인마는 순식간에 코 앞에 이르렀다. 시야가 흐려져 처음에는 마상의 인물들이 누구인지를 몰랐으되, 곧 알아 보게 된 그는 매우 놀랐다. '저 자는 사황(邪皇) 냉전령이 아닌가?' 수십, 아니 수백기는 됨직한 인마는 유옥을 짓뭉갤 듯 밀고 달려 들었다. 냉전령이 이끄는 그들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무림성 군마전(群魔殿) 소속의 사도고수들이었다. "잠깐 서시오!" 유옥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자신도 모르게 우뚝 서서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런 저지도 별무소용이었다. "크하하핫...! 웬 정신 나간 놈이냐?" 촤아아악--! 군마전의 부전주(副殿主)인 냉혈편마(冷血鞭魔) 호악애(好嶽艾)가 독문병기인 묵혈마편(墨血魔鞭)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크헉!" 유옥의 입에서는 대번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진기라곤 한 모금도 끌어 올릴 겨를이 없었던 그는 그대로 허공으로 붕 떠올랐고 폭우 가운데서도 피보라를 뿌렸다. "크하하하핫...! 기다려라, 녹림의 친구들이여! 머지 않아 녹림천하(綠林天下)가 도래하리니!" 두두두두두두--! 인마는 흙탕물을 마구 퉁기며 질풍노도와 같이 내달렸다. 그 기세란 천하를 단숨에 짓이길 듯했다. "으윽! 성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유옥은 처참한 몰골이 되어 길 옆의 도랑에 처박혀 있으면서도 불안스레 부르짖었다. 쏴아아아--! 폭우는 전혀 그칠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빗물과 피, 진흙 등으로 뒤범벅이 된 채 모로 누워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전신이 부서져 나갈 듯한 고통이 그를 엄습해 왔다. 그의 등줄기에는 묵혈마편이 쓸고 지나간 자국이 있었는데 그 곳은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살점이 뭉턱 떨어져 나가 있었다. 그러나 고통보다는 초조감이 더 크게 유옥을 사로잡았다. '이변이 있지 않은 한 이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 빨리 성 안으로 들어가 보아야 할텐데....' 그리하여 그가 눈길을 성 쪽으로 보내는 순간, 성문으로부터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무수한 인마가 쏟아져 나왔다. 두두두두두--! 그들은 삽시에 유옥의 옆을 지나쳤다. 그는 긴장하고 있는 덕에 이번에는 마상의 인물들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맙소사! 저들은 천무전(天武殿)의 고수들이다.' 금검대협(金劍大俠) 상관자기(上官自機)를 비롯하여 천무전의 고수들을 확인한 그는 더 없이 충격을 받았다. '이럴 수가!' 유옥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무림성을 비운 것은 겨우 하룻밤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무슨 중대한 사태가일어났기에 군마전과 천무전의 고수들이 모두 무림성을 등지고 빠져 나간단 말인가? 그는 가슴이 답답하여 금시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일단 몸을 움직일 수 있어야 정황을 알아볼 것 아닌가?' 유옥은 도랑에 처박힌 채 꼼짝도 할 수가 없었을 뿐더러 의식마저도 가물가물해져 오자 자신을 향해 부르짖었다. '안된다!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바램일 따름이지, 그의 영육(靈肉)은 이내 따로 분리되고 말았다. 그는 귓전에 들려오는 빗소리가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죽음과도 같은 나락으로 침몰해 갔다. ④ "오오! 어찌 이런 일이...!" 불타버린 폐허에서 한 인영이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전신이 찢기우고 망가진 그가 피와 흙탕으로 얼룩진 채 충격으로 인해 제대로 중심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정녕 현실이 맞는가? 하루 전만 해도 천하를 굽어보던 무림성이 이 꼴이 되어 있다니." 그 폐허는 그의 말마따나 무림성의 잔해였다. 무림의 하늘이라 일컬어지던 무림성이 어이없게도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태산의 웅장함보다 오히려 더욱 위세를 떨쳤던 무림의 왕지(王地), 즉 무림성이 하룻 밤 사이에 초토화가 된 채 그 무참한 잔재만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저기서 연기가 피어 오르고, 그에 따라 시체가 타는 역겨운 냄새가 널리 퍼져 나가고 있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에 함부로 널려 있는 무수한 시체들.... 불에 반쯤 타거나 아예 숯덩이가 되어 버린 그들은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천하무림을 영도하던 무림성의 고수들이었다. "우우... 믿을 수 없다. 누가 있어 이처럼 엄청난 혈겁(血劫)을 일으켰단 말인가?" 피투성이의 인영은 흡사 절규하듯 부르짖고 있었다. 유옥이었다. 그는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무림성이 잿더미가 된 것을 보고는 이렇듯 통탄해마지 않았다. 실로 너무도 어이없는 일이었다. 무림왕 용화천이 어딘가로 떠난지도 한 달 밖에 되지 않거늘, 그가 돌아 온다는 기별도 있기 전에 무림성이 붕괴되고 만 것이었다. 유옥은 눈 앞에 벌어져 있는 사실로 인해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는 엄연한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지도 못했다. 시체 타는 냄새와 잿더미 사이로 피어 오르는 연기 등 그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생생했건만 그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다. 후후... 아마도 이 곳은 무림성이 아닐 게야." 툴툴 웃으면서도 유옥은 사방을 둘러 보았다. 폐허가 된 성터에 살아 있는 것이라곤 오직 그 밖에 없었다. 답답한들 누구에게 물을 수도, 알아 볼 수도 없었다. 그런 유리감(遊離感)은 그로 하여금 마치 인간 세상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 던져진 듯한 기분마저도 들게 만들고 있었다. 유옥은 현기증을 느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머리에는 그 순간 무림왕 용화천의


모습이 떠올랐다. - 나는 믿는다, 너를! 이것은 용화천이 무림성을 떠나기 직전 무존각에서 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 말을 듣고 이행코자 노력했어야 될 사람은 유옥이 아니라 그의 아들인 용백검이다. 이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유옥은 내심 중얼거렸다. '성주, 안타깝지만 결국 당신의 뜻에 나는 이렇게 밖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책이 드는 자신의 심리를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무림왕 용화천과 아무런 관계도 없을 뿐더러 모친을 의식한다면 무림성 자체를 적대시해야 되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유옥은 용화천을 떠올리자 무거운 죄라도 지은 듯 마음이 무겁기 그지 없었다. 그는 시커멓게 그을은 기둥에 몸을 기대며 눈을 내리 감았다. '모두들 어떻게 되었을까? 천무전과 군마전의 고수들은 성을 떠났고, 그렇다면 원로원의 원로들과 사대지단은? 또한 그 간에 시중을 들어주던 금비와 은비는...?' 그는 두 시비의 모습이 떠오르자 더욱 괴로운 심정이 되고 말았다. 어떤 식으로든 그녀들과 나누었던 정은 고독하게 살아온 그에게 은연중 큰 위안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성주의 부인인 천음선자(天音仙子)는 어찌 되었을까?' 유옥은 싸늘하면서도 고귀한 기품을 보이던 천음선자를 기억 속에서 꺼내고는 착잡한 기분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나를 자신의 아들인 용백검으로 알고 있었다. 남편을 증오하는 불행한 여인, 그녀도 죽었을까?' 그의 걱정은 한 가지 의문으로 이어졌다. '그녀가 말한 현음구매(玄陰九妹)란 누구를 말하는 것이었을까? 용백검이 현음신공을 완성하고 현음구매의 연단(練丹)이 끝나면 모든 게 달라진다고 했는데 그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유옥은 언뜻 짚히는 바는 있었으되 확신이 서지 않는 탓에 그 점에 대해 여태까지도 명확한 답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림성에 들어온 이후로 그는 범인(凡人)들로서는 상상치도 못할 파란을 겪었다. 무엇보다 살인 명령서를 전달받고 내키지 않는 지시사항을 수행해야 했던 것이 그는 가장 괴로웠다. 그런가 하면 그는 매화인이 찍힌 또다른 명령서를 받고 무척 놀라기도 했는데 이유는 그 매화문양이 일잔홍이라는 기녀의 몸에서 보았던 매화문신과 동일했기 때문이었다. 이 일을 두고 연결지어진 사건들은 하나같이 그에게는 불가사의였다. 요지화화 채화령의 행동도 그렇고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공격하고 상관영봉을 납치해 간 마록도 마찬가지였다. 어쨌거나 이 모든 일들은 짧은 시일 내에 벌어졌었다. 유옥은 그 점을 염두에 두게 되자 오늘 날까지 살아온 자신의 생이 모두 그처럼 오리무중을 헤맨 광대와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여전히 기둥에 기댄 채 일말의 자괴감을 느꼈다. '훗훗... 나는 참으로 어리석었다. 그저 시키는대로만 행동해 온 꼭두각시가 바로 나였으니....' 분명 처음 갖는 기분은 아니었으되 이번 사태를 기화로 그는 더욱 더 확실하게 스스로를 조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을 바라보니 아직도 캄캄했다. 비는 벌써 그쳤으나 먹구름이 낮게 깔려 사위를 짙은 어둠으로 가두고 있었다. 유옥의 가슴 속에도 이와 똑같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그런데 침음하던 그의 귀로 문득 귀에 익은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였다. '아! 이 음성은...?' 그는 부지중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그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화령(花鈴)." "네, 틀림없이...." 말소리와 함께 날씬한 두 개의 인영이 어른거리며 다가오자 유옥은 움찔하더니 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곧이어 그는 전부터 익히 알고 있던 두 여인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볼 수가 있었다. 그는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맙소사! 저 여인들은 일잔홍과 채화령이 아닌가?' 유옥은 가슴이 은은하게 진탕하는 것을 느꼈다. '역시 저 두 여인은 한 통속이었구나.' 이 때, 일잔홍이 무심한 표정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아마도 죽은 시체 쯤으로 생각한 듯 그녀는 쓰러져 있는 그를 보았으면서도 사뭇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상관영봉과 함께 성 밖으로 나간 후론 도무지 종적을 찾을 수가 없으니, 설마 그대로 달아났단 말인가?" 그 말을 듣자 유옥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나를 말하는 것이군.' "궁주(宮主)께서 그가 실종된 사실을 아신다면 크게 노하실 거야. 어떻게든 그를 찾아야만 해."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걸요." "그럼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없어져선 안되거늘...." 일잔홍은 시종 근심스러운 어투였다. "그 자는 궁주님과는 어떤 사이인가요? 언니." 채화령이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잘 몰라. 단지 궁주께서 그를 몹시 미워하신다는 것 뿐.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 철저하게 이용은 하시면서도 말이야." "쯧! 재미없는 관계로군요?" 일잔홍이 채화령의 말을 잘랐다. "쓸데없는 비약은 관두고 빨리 찾기나 하자. 본궁의 고수들이 철수한지도 한참 지났다. 합류하려면 우리도 서둘러야 해." "알겠어요." 그녀는 잊었던 것이 생각난 듯 불쑥 물었다. "천음선자는 잡지 못했다면서?" "네, 그녀의 무공은 정말이지 상상 밖이었어요. 본궁의 십이혈불(十二血佛)을 모두 죽인 데다가, 사대천왕(四大天王) 중 광목천왕(廣目天王)에게 상처까지 입히고 달아났어요." "으음, 뜻밖이군. 천음선자의 무공이 그렇게 고강했다니...." 두 여인의 음성이 점차로 멀어져 가매 유옥은 가느다랗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음선자가 무사하다니 불행 중 다행이다. 그건 그렇고, 저들이 말하는 본궁이란 어떤 단체일까?' 그의 생각은 꼬리를 물듯 계속 이어졌다. '그들이 바로 무림성을 무너뜨린 단체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요지화화는 그들이 보낸 첩자이겠지.' 유옥은 한 가닥 기이한 느낌도 들었다. '그녀들이 궁주라 지칭하는 그 인물은 또 누구인가? 나를 증오하면서도 이용하려 든다고 했겠다...?' 다음 순간, 그의 안색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혹시... 어머님...?' 그는 그러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엎드려 있었다. 아무래도 일잔홍과 채화령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 움직이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서히 한 가지 생각을 굳혀가고 있었다. '일단 마수(魔手)로부터 벗어나야겠다. 네 더 이상 그들의 하수인(下手人) 노릇은 할 수가 없다. 기왕 그들의 감시권 밖으로 튕겨져 나왔으니 냉정하게 사태를 관망해 보기로 하자.' 그러나 유옥은 이내 탄식해마지 않았다. 어디로든 가고자 해도 천지간에 그가 발 붙일 곳이라곤 아무데도 없었던 것이다.


우르르-- 우르르릉-멀리 암천으로부터 은은한 뇌성(雷聲)이 울려 왔다. 유옥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한시라도 빨리 이 곳을 떠나고 보자.' 그는 잠깐 동안이라 할지라도 이 지옥 같은 무림성에 더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온통 시체 뿐인 무림성은 지난 날의 위용은 간 곳이 없고 이른바 귀역(鬼域)으로 화해 있었다. 유옥은 비틀거리며 무림성을 등졌다. 그는 가중된 중상으로 인해 진기가 모두 소멸되어 단 한 올도 끌어올릴 수 없는 상태였다. 그의 모습은 곧 어둠을 비집고 장내에서 멀어져 갔다. 쩌적--! 시퍼런 뇌전이 번쩍하고 암천을 갈랐다. 이어 천지개벽을 알리는 듯한 뇌성벽력이 울리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역시 폭우였다. 붕괴된 무림성의 폐허 위로 비는 마구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세상의 종말을 고하기라도 하듯이. 세차게 때리는 빗줄기는 그야말로 삼백년의 전통과 위업을 지켜 온 무림성의 붕괴를 통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 9 장 외유(外遊) ① - 무림성(武林城)이 붕괴(崩壞)되다. 한 마디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대사건이었다. 전 무림이 경악해마지 않았다. 천하의 무림성이 무너지다니, 그게 어디 있을 법이나 한 소리인가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태산(泰山)의 무성곡(武聖谷)으로 달려갔다가 그 곳에서 잿더미가 된 무림성을 볼 수가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무림은 뿌리째 뒤흔들렸다. 삼백여 년간이나 막대한 영향력으로 정사무림을 지배해 온 무림성이 붕괴되었으니 향후 무림의 운명은 과연 어찌될 것인가? 누가, 혹은 왜라는 질문은 이미 소용이 없게 되어 버렸다. 무림성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으리만큼 초토화되어 버렸고 무림인들은 경악과 더불어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또 다른 사건들이 일어나 무림 전역을 태풍처럼 질타했으니, 그 개요는 각기 이러했다. - 중원제일가(中原第一家)를 중심으로 중원팔대세가(中原八大世家)가 연합, 금검대협(金劍大俠)을 맹주로 추대하여 의검맹(義劍盟)을 결성하다. - 팔십만 흑도녹림(黑道綠林)이 과거 녹림대종사였던 사황(邪皇) 냉전령을 수뇌로 군마회(群魔會)를 세우다. 이 두 가지의 사건이 던져준 충격은 너무도 컸다. 무림성의 천무전과 군마전, 양전(兩殿)의 전주들이 다시금 정사무림의 태두로써 무림에 등장했으니 말이다. 그들은 맹회를 세우기 전에 무림성을 탈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튼 그 사실은 하나의 커다란 의혹으로 인해 더욱 더 전 무림을 경동시켰다. 무림인들은 저마다 무림성이 그 두 인물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로 인해 무림정세가 나날이 긴장감을 더해 갈 즈음, 또 하나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구파일방(九派一 )의 장문인들이 무림성의 붕괴에 관해 중원제일가에 추궁을 하기 위해 달려 갔다가 당하게 된 일 때문이었다. 뜻밖에도 금검대협 상관자기는 사태가 그 지경임에도 불구하고 구파일방의 지존(至尊)들에게 사건에


대한 해명은 커녕 오히려 의검맹에 가맹(加盟)하기를 요구했다고 한다. 구파일방의 지존들은 의당 그 제안을 거절했는데, 일은 비단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놀랍게도 인의대협으로써 명망이 드높았던 금검대협이 그들에게 무서운 협박을 가했다던가? 그 내용인즉 자신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으면 정도무림을 위해 당장이라도 나서서 구파일방의 현판을 모두 떼어 버리겠다며 으름장을 놓더라는 것이었다. 정녕 그것은 무림인 모두가 금검대협으로부터 뒤통수를 한 대 씩 얻어 맞은 격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었다. 구파일방은 무림의 대들보다. 그러므로 구파일방을 의검맹에 가입시키고자 하는 것은 곧 그들을 수하에 두겠다는 의미로써 더 나아가서는 무림을 제패하겠다는 야심의 표출이었다. 이에 구파일방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들은 사태의 수습을 위해 곧바로 회합을 가지고 논의에 들어 갔는데.... 그 결과로 얻은 것은 오직 참담함 뿐이었다. 왜냐 하면 중원제일가를 비롯한 팔대세가의 세력이 당금에 이르러 이미 구파일방을 한참 능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체면이 종잇장처럼 구겨져 버린 구파일방은 분루를 삼키며 후일을 기약하는 한편, 봉문(封門)을 선언하고 말았다. 천여 년 간 전통이 이어져 내려 왔으면 무엇 하겠는가? 그토록 수모를 당하고도 이렇다할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으니, 그들이 치욕을 느끼고 문을 걸어 잠근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유례없는 사태로 인해 바야흐로 무림의 세력 판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폭풍전야(暴風前夜)라고나 할까? 의검맹과 군마회의 대립은 무림을 크게 양분시켰으며, 그 때문에 암중으로는 실종된 무림왕 용화천의 행방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또한 은밀히 일어나고 있었다. 그 반면에 어떻게 알아 차렸는지 무림왕의 재등장을 저지시키려는 의검맹과 군마회의 움직임도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 일로 난세(亂世)로 치닫고 있는 무림, 이른바 각축전의 양상을 띄어가는 승부수에 있어 최후승자는 과연 누가 될지...? 화룡표국(火龍 局). 이 곳은 산동(山東) 일대에서 신용이 높기로 정평이 나 있는 표국이었다. 국주(局主)인 금검화룡(金劍火龍) 황보승(皇甫昇)은 본래 무당파의 속가제자로서 전 무림인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그의 표국이 날로 번창을 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인품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북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화룡표국의 깃발을 휘날리며 십여대의 표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표행의 선두에서는 연신 힘찬 외침이 일었다. "이랴! 갈 길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핫핫...! 표행을 무사히 마친 뒤에는 걸찍하게 한 잔 걸치게 될 것이다." 호쾌하게 웃어대는 자는 우람한 체격에 금빛 옷을 입고 있는 중년의 인물로써, 그가 바로 금검화룡 황보승이었다. 표차를 호송하는 인원은 그를 포함해 도합 삼십 명이었고 이십 명의 마부가 따라 붙어 표물의 운반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송화령을 오르고 있었다. 그 고개만 넘으면 북경에는 거의 다 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막 고갯마루에 이르렀을 때였다. 슈슈슈슈슉--! 느닷없이 좌, 우측의 송림으로부터 빗발치듯 암기가 쏘아져 나와 그들을 덮쳤다.


"큭!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연속적으로 터졌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인해 마부들은 물론 웬만큼 무공을 갖춘 표사들까지도 무력하게 속속 쓰러져 갔던 것이다. "누, 누구냐?" "막아라! 도적들의 기습이다." 호통소리와 고함 등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그들 일행은 삽시에 대오에서 이탈되는 등 난장판을 이루고 말았다. "크하하하핫...!" 휘휘휘휙--! 사방에서 괴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그 때부터였다. 그들은 대략 십여 명 쯤 되었는데 나타나기가 무섭게 다짜고짜로 잔혹한 살수를 펼쳤다. 위이잉--! 파츠으읏-장과 검(劍), 도(刀) 등이 난무하는 동안 계속하여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그 바람에 마부들은 모두 이승을 하직한지 오래였고 삼십 명의 표사들도 그 자들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피보라가 도처에서 허공을 뒤덮는가 싶더니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호기방장했던 표사들은 전멸해 버렸다. "으으... 너희들은...!" 황보승이 신음처럼 부르짖었다. 어느 덧 안색이 참담하게 변해버린 그는 기막힌 사태에 말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으하하핫...! 황보승, 오랜만이다." 한 명의 자의인이 크게 외치며 전면으로 나섰다. 그 자는 대충 사십 대로 보였고 무척이나 음침한 인상이었다. "자면살호(紫面殺虎) 패륵(貝勒), 네가 감히...!" 황보승의 얼굴에는 경악을 지나 극도의 분노가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자면살호 패륵은 그의 반응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괴이쩍은 웃음을 흘릴 따름이었다. "훗훗훗... 황보승, 잔소리는 집어 치우고 그 동안 밀린 통행세나 내놓아라. 내 오늘은 필히 받아야겠다." 황보승은 대번에 노호성을 발했다. "교활한 놈! 무림성이 무너졌다고 벌써부터 함부로 날뛰다니. 그래, 네 놈들의 세상이 얼마나 오래갈 것 같느냐?" 패륵의 응수도 만만치 않았다. "크ㅋ! 시끄럽다. 표물을 놓고 간다면 너의 가련한 목숨만은 살려 보내줄 수도 있다. 어쩌겠느냐? 빨리 대답해라." 황보승이 그런 협박에 꺾일 리가 없었다. "미친! 헛소리하지 마라." 츠츳--! 그는 어느 새 허리춤에서 금검을 뽑으며 날아 오르고 있었다. 발검(拔劍)도, 신법도 모두 비쾌무비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상대를 잘못 만난 상태였다. "핫핫핫...! 네 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그 따위 썩어 빠진 무당검법으로 노부에게 덤비다니." 위이이잉--! 패륵의 손바닥이 뒤집혀지더니 시커먼 장영을 뿌려냈다. 카앙! 한 차례 금속성이 일자 황보승은 비명을 토해냈다.


"크으윽!" 역시 그로서도 역부족이었다. 금검이 튕겨 나감과 동시에 그는 뒷걸음질로 연달아 사, 오보나 밀려나고 말았다. "크ㅋ! 죽음을 재촉하는 놈에게는 이것 밖에 줄 게 없구나." 파츠츠츳--! 패륵의 손바닥이 무섭게 회전하며 묵영(默影)을 뿌렸다. 그리하여 황보승이 절대절명의 위기를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아 버리는 그 찰나였다. ② "헉!" 이 의외의 다급성은 언뜻 듣기에도 틀림없이 패륵의 것이었다. 따라서 놀란 나머지 눈을 도로 번쩍 치켜 뜬 황보승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헉!" "끄으윽--!" 장내는 온통 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한 청년에 의해 패륵의 일당이 시쳇말로 작살이 나고 있었던 것이다. 황보승은 딱 벌어진 입을 미처 다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오! 저 청년은....' 그 청년이라면 그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얼마 전에 고용한 마부로써 남달리 부지런하고 침착하여 황보승이 매우 눈여겨 보아 두었던 인물이었다. 아무튼 전권으로 뛰어든 마부 청년은 괴이무쌍한 신법으로 흑의인들 사이를 누비며 양손을 휘저어 대고 있었다. 마치 술에 취한 듯, 혹은 게으른 늙은 개가 어슬렁거리듯 비틀거리는 그 청년의 동작이란 자못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이 스치는 곳에서는 예외없이 기변이 속출했다. 그토록 기세등등하던 흑의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차례로 메다 꽂히듯 고꾸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얼이 빠졌던 패륵이 급기야 정신을 차린 듯 노성을 질렀다. "멈춰라! 네 놈은 누구냐?" 그의 호통은 실효를 발휘하지 못했다. "크억!" 마지막 한 명의 흑의인이 비명과 함께 패륵이 뻔히 보는 가운데 목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지고 있었다. 마부 청년은 술에 취한 듯 한참 더 비틀거리다가 신형을 멈추었다. 그것은 실로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괴무학이었다. 이윽고 청년은 고개를 들었다. 남루한 차림새도 그렇지만 흙으로 얼룩진 그의 얼굴은 그저 평범하기만 했다. "날더러 누구냐고 물었소?" 청년이 여유있게 히죽 웃어 보이자 패륵은 오히려 움찔하여 음성을 가라앉혔다. "그렇다." 청년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시라도 읊듯 한가롭게 말했다. "글쎄, 그저 바람따라 구름따라 정처없이 흐르는 나그네라고 나 할까?" "그럼 풍운(風雲)... 유객(流客)...?" 패륵은 뜻을 이어 문자로 지어내 보더니 떫은 감 씹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열심히 머리 속을 뒤져 보아도 그런 명호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한 가지였다. 상대가 무명인(無名人)이라는 것, 이를 추리해낸 패륵은 종내 눈살을 찌푸리기에 이르렀다.


"그래, 네 놈은 겁도 없느냐?" 기청년 풍운유객(?)은 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후후... 백주대로(白晝大路)에서 살인을 하고 물건을 강탈하려는 그대만큼은 나도 겁이 없지. 이쯤이면 대답이 되었소?" "건방진 놈!" 쐐애애액--! 패륵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즉시 쌍장을 내뻗었다. 시커먼 묵장이 여지없이 풍운유객을 향해 날아갔다. "하하하핫...!" 풍운유객은 대소를 터뜨리며 아까와 마찬가지로 비틀거렸다. '엇!' 관전 중이던 황보승이 내심 비명을 질렀다. 패륵의 장력이 청년의 가슴을 정통으로 때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청년의 신형이 쓰러질 것처럼 휘청이더니, 그 틈에 멀쩡하게스리 파리라도 쫓는 듯 손을 슬쩍 젓고 있었다. "크으윽!" 참담한 비명이 울린 것은 그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비명의 주인은 패륵이었다. 그가 목을 움켜쥔 채 뒤로 벌렁 넘어가고 있었다. 그의 목에는 어느 새 구멍이 뻥 뚫려 있었고 그 곳으로 핏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황보승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럴 수가...!' 그러나 그의 놀라움은 그 직후에 도를 더 했다. "으음...." 청년이 힘없이 모로 쓰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아니! 소협...!" 황보승이 대경하여 급급히 그를 부축해 갔다. 객방(客房). 유옥은 쓴 웃음을 지었다. "만일 그 때 패륵이란 자가 조금만 더 시간을 끌었다면 소생은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의 안색은 혈색이라고는 찾아볼 길이 없을 정도로 창백해져 있었다. 황보승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일세. 고인을 미처 몰라보고 한낱 마부로 부렸다니...." 상대가 민망한 듯 말끝을 흐리자 유옥은 빙그레 웃었다. "그건 선배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원래 소생이 표행에 끼어든 것 자체가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는 목적에서였으니까요."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무림성에서 빠져 나온 후, 그는 자신의 상세가 생각보다 엄중하다는 것을 느꼈다. 더구나 일잔홍과 채화령의 추격도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유옥은 신분을 숨긴 채 마부로 위장하여 화룡표국의 표행에 끼어 들게 되었다. 마침 표물 운반도 북경행인지라 그의 결정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무림왕 용화천에게서 받은 반 조각의 녹옥문장을 가지고 북경 낙선재의 황노인을 찾아가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서 자면살호 패륵의 습격을 받았고 유옥은 보다 못해 나섰다. 당시 그가 쓴 무공은 안산의 괴노인으로부터 배운 것으로써 역시 신분 노출을 꺼려 일부러 그것을 택했다. 황보승이 말했다.


"어쨌든 노부는 자네에게 구명(救命)의 은혜를 입었네.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유옥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과히 염두에 두지 마십시오. 소생으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요." 황보승은 안면 가득 미소를 짓더니 물었다. "무리한 질문인지는 모르네만 소협은 어느 문파 출신인가?" 유옥은 겸연쩍게 웃었다. "소생은 본래 어느 문파에도 속해 있지 않았을 뿐더러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황보승은 내심 의아했으나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잠시 있다가 유옥이 문득 물었다. "선배님께선 혹시 마록이란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마록...?" 황보승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노부, 비교적 강호의 소식통이라고 자부하네만 아직 그런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네." 유옥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머리속에서는 단 한 시도 마록이란 이름이 떠나 본 적이 없었으나 굳이 초면인 사람에게 답답한 심경을 드러내 보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보승이 그 뒤를 이어 탄식하듯 말했다. "하여간 이번 일을 계기로 노부는 무능함을 절실히 깨달았네. 일단 약정된 표물이나 건네 주고 표국업에서 손을 뗄 작정이네. 차제에 강호에서 은퇴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는 제 감정에 휩쓸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림성이 무너진 뒤로 강호는 무법천지가 되었네. 무림성주께서 실종되지만 않았어도 감히 무법자들이 이토록 판을 치지는 못했을텐데...." 그 말에 유옥은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림성의 소성주인 용백검에 대해서는 모르십니까? 혹시 그에 대해서는 들은 소문이 없으신지...?" 황보승의 얼굴에 일순 경멸의 빛이 짙게 떠올랐다. "그 천하의 난봉꾼 말인가? 쯧, 자고로 호부에 견자 없다고 했거늘 무림성주께 어찌하여 그런 용렬한 아들이 있는지.... 따지고 보면 무림성이 그처럼 허망하게 붕괴된 것도 다 그 작자 탓이라고 볼 수 있네." "그 정도였습니까?" "그렇네. 놈은 평소에도 제 부친의 명예를 더럽히는 짓 따위나 일삼더니 무림성이 무너지자 겁이 났는지 달아났다고 하네." "으음, 한심하군요." 유옥이 상대와 더불어 비난을 쏟아놓은 것은 어쩌면 자신을 욕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몰랐다. 그는 무림성의 붕괴 사건이 있은 후로 아직도 일말의 자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황보승은 그 말 끝에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소협은 어디로 가실 작정인가?" 유옥은 애써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북경에 볼 일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고 산동 제남에 들려 주시게. 노부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구명은공을 갚도록 기회를 주시게나." 사람 좋은 그의 말에 유옥은 씩 웃었다. "그 일에 관해서라면 염두에 두지 마십시오." 그러자 황보승은 간절히 덧붙였다. "꼭... 들러 주시면 고맙겠네, 소협." 유옥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③ 북경(北京). 명실공히 명(明)의 황도(皇都)인지라 북경 시가지의 번화함이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사통팔달(四通八達)한 도로는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했고, 금전옥루의 대택들이 처마를 맞대고 즐비하게 이어져 있었다. 도로는 하나 같이 넓직하여 마차가 한꺼번에 열 대쯤 나란히 달린들 아무 문제도 없으리만큼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길들을 꽉 메운 채 저마다 바삐 걸어 가고 있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도 모두 화려하고 깨끗했다. 유옥(柳玉). 그는 복잡한 저잣거리를 홀로 걷고 있었다. 그의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머리는 제멋대로 헝클어져 수세미가 되어 있었고 옷에도 땟국물이 줄줄 흘렀다. 누가 보더라도 영락없는 상거지의 몰골이었다. 혹여 흙먼지에 가려져 있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본다면 흠잡을데 없는 오관으로 인해 판단이 달라질지 모르나 최소한 북경 시가에서 그 정도로 한가한 사람은 없었다. 유옥은 잠룡(潛龍)의 시간을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꽤 여유있게 보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그는 전에 없이 편안한 기색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북경은 정말 크군. 황도로써 조금도 손색이 없어.' 유옥은 과거 천하 각처를 떠돌아 다닌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북경처럼 큰 도시는 처음이어서 그는 마치 어린애처럼 눈을 빛내며 신기한 듯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마침 오시가 지나고 미시(未時) 무렵이라,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그 일대는 혼잡하기 이를데 없었다. 더구나 그의 발길이 닿고 있는 곳은 개중에서도 가장 혼잡한 저잣거리였다. 번화한 상점들, 물건을 늘어 놓고 열심히 호객행위를 하는 장사꾼들, 거기에다 흥정하느라 언성을 높이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두 어우러져 한참을 북적대고 있었다. 유옥은 거리의 색채를 즐기면서도 혼란해진 나머지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어 댔다. '휴우! 이러다간 정말 넋이 달아나고 말겠군.' 그는 이제껏 주어진 환경으로 인해 지나칠 정도로 조용한 삶을 살아 왔고 좋든 싫든 그에게 익숙한 것은 고독이었다. 그런즉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쉽사리 적응이 될리 만무였다. 어쨌든 그 와중에 유옥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추었는데 거기에만은 별로 사람들이 몰려 있지 않았다. 왜인가 싶어 자신도 모르게 관심을 쏟던 그는 곧 이유를 알아 차리고 피식 웃었다. 그 곳에는 한 명의 점장이 노인이 점잖게 거적을 깔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노인이 제시한 복채였다. <인생의 길흉화복을 은자(銀子)로 단돈 일천 냥에 점친다.> 노인의 앞에 놓인 죽판에는 버젓이 이렇게 씌여 있었다. 유옥도 그 점에서만은 다소 어이가 없었다. '원 세상에, 한 번 점을 치는데 은자 천 냥이라니....' 아니나 다를까? 지나치던 행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모로 꼬았으며 점장이 노인을 향해 야유마저도 서슴치 않았다. "미친 늙은이!" "천 냥이 어디 장난인가? 돌아도 단단히 돌았지." 반면에 점장이 노인은 행인들의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시종 눈을 내리 감은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르자면 어디 마음대로 지껄여 보라는 식의 오만함이 엿보였다. 노인의 모습은 몹시도 특이했다. 하얗게 센 수염과 머리카락은 길게 자라 바닥까지 닿고 있었으며 양눈썹도 어찌나 긴지 한 자나 되게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유옥이 노인에게 다가간 것은 딱히 어떤 심정에서였는지 꼬집어 말하기가 힘들었다. 아무튼 그는 노인을 향해 물었다. "노인장, 정말로 길흉화복을 모두 점칠 수 있습니까?" 노인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대꾸했다. "무척이나 어리석은 놈이군. 믿지 못하겠으면 직접 시험해 보면 될 것이 아니냐?" 의외로 칼칼한 그 음성을 접하자 유옥은 흠칫 놀라는 한편, 씁쓸한 기분이 되어 말했다. "그러고 싶지만 소생에겐 돈이 없군요." 점장이 노인은 벌컥 화를 냈다. "네 놈이 지금 누굴 놀리는 것이냐? 돈도 없으면서 왜 편히 쉬고 있는 사람을 가지고...." 노인은 소리치다 말고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홧김에 번쩍 뜨인 그의 눈에 유옥의 모습이 가득 담기던 순간의 일이었다. 허연 눈썹 밑에 있던 노인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래, 돈이 없단 말이지?" 느닷없이 은근하게 바뀌어 버린 그의 말투에 유옥이 되려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그렇습니다만...." "내 너에게만은 특별히 외상으로 해 주겠다. 어떠냐?" "외상도 있습니까?" 유옥이 물은 이유는 꼭 그러기를 바라서는 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말하고 나서 고개를 좌우로 젓고 있었다. "호의는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그가 듣게 된 것은 뜻밖에도 점장이 노인의 호통이었다. 노인은 눈을 크게 부릅뜨더니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고이얀 놈! 이제 와서 왜 싫다는 것이냐? 이 천상천하제일신복(天上天下第一神卜)의 점을 못믿겠단 말이냐?" 유옥은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쯧! 내가 과연 야단맞을 짓을 한 것인가? 천상천하제일신복이라는 자부심도 좋지만 그 덕분에 나는 바보가 되는구나.' 하지만 그는 화가 나기보다는 웬지 이 괴팍한 점장이 노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꼈다. 때문에 잠시 말문을 닫았던 그는 이내 솔직하게 털어 놓기에 이르렀다.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그런 뜻은 아닙니다. 다만 저에게는 외상을 갚을 만한 능력이 없을 따름입니다." 점장이 노인은 혀를 끌끌 찼다. "쯧쯧! 한심한 녀석하고는. 젊은 놈이 그 정도 밀어 부칠 패기도 없더란 말이냐? 하늘이 정녕 불공평하시구나. 너 같은 녀석에게 비천신마상(飛天神馬相)을 내려 주시다니." 유옥이 빙긋 웃으며 반문했다. "비천신마상이 무엇입니까?" "클클... 네 놈도 그건 알고 싶으냐?" "그야 물론이지요." 점장이 노인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이 놈 봐라? 아주 공짜로 신괘(神卦)를 알려고 드는군?" 유옥은 점점 더 노인에게 흥미가 일었다. 그는 아예 작심을 하고 노인의 앞에 바짝 붙어 앉으며 물었다. "저도 공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외상을 언제 갚으면 되는지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히히... 네 놈이 이제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구나. 그러나 주제파악도 좀 해야 하느니라. 천 냥 빚을 네깟 놈이 무슨 수로 갚겠느냐? 하긴 이럴 때 써 먹으라고 속담도 있기는 하다만. 왜 천 냥 빚도


말 한 마디에 갚는다고 하지 않더냐?" 유옥은 푸우 하고 웃었다. "욕을 하시면서도 정답까지 다 알려 주시는군요?" "쩝! 지금 일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느냐?" 노인은 입맛을 다시더니 입을 열었다. "실은 네 놈이 노부에게 넘어간 게야. 공짜로 점을 쳐주는 대신 내 너에게 한 가지 일을 부탁하려던 참이거든." "하하하... 제가 졌습니다." 유옥은 크게 웃고 난 뒤 덧붙여 말했다. "무슨 부탁인들 소생이 못들어 드리겠습니까? 무려 은자 천 냥 짜리인데요. 단, 하늘과 땅을 우러러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일이라야만 됩니다." "어쭈! 이 놈이 문자까지 쓰는구나?" 노인은 짐짓 눈을 희번뜩이며 으르렁거렸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놈이로고! 넘겨 짚어도 유분수지, 아무려면 노부가 네 놈에게 몹쓸 짓이야 시키겠느냐?" "이르자면 그렇다는 말씀이지요." "쯧, 세 치 혓바닥이 마물(魔物)이로고!" 점장이 노인은 혀를 차더니 갈고리처럼 비쩍 마른 손을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내 놔!" "뭘 말입니까?" "손." "후후후...." 유옥이 웃으며 시키는대로 응해 주자 노인은 그의 손을 잡더니 눈을 지그시 내리 감았다. 그 상태로 대략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흘러갔을 때였다. 노인이 갑작스레 분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빌어먹을! 그 놈의 못생긴 늙은이가 선수를 쳤구나." "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유옥을 향해 노인은 몹시 화가 난 듯 대상도 확실치 않은 욕설을 마구 퍼부어 댔다. "망할 놈의 추귀(醜鬼), 대체 어느 틈에 손을 썼더란 말인가? 모처럼 만에 신통한 뼈다귀를 발견했나 했더니 어느 새 놈이 벌써 냄새를 맡고는 핥아 버리고 말았다." 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유옥은 도무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황당해 있던 그가 느닷없이 비명을 질렀다. "으윽!" 그도 그럴 것이, 뜻밖에도 노인의 손으로부터 무서운 기운이 흘러 들어와 그로 하여금 전신이 뒤틀리게 만들어 놓았다. "으으... 왜 제게...?" "시끄럽다!" 노인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볼 일이 끝난 듯 그의 손을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내뱉듯이 몇 마디를 던졌다. "노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네 놈은 더 이상 연명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몸 속에 잡귀가 끓어 피가 썩어 들어가는 꼴이라니,노부가 그 잡귀를 한 곳으로 몰아 냈으니 그리 알아라." 그 말을 듣자 유옥은 충격처럼 다가오는 느낌이 있었다. "아! 그럼...." 그는 부지중 탄성을 발했는데 그것은 부상으로 인해 줄곧 답답하고 통증이 느껴졌던 가슴이 시원하게


뚫렸기 때문이었다. 유옥은 비로소 노인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점장이를 가장한 이 노인장께선 필경 무림기인이시겠구나.' 그의 눈에는 절로 흠모의 빛이 떠올랐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노인이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내 너에게 길(吉)한 점궤를 알려 주겠다. 삼 일 후, 북쪽으로 가라. 소(牛)는 나쁘고 거북이(龜)가 좋다. 그리고 명심해라. 앞으로 사흘 동안은 아무 것도 먹어선 안 된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 유옥은 어안이 벙벙했으나 잠자코 듣고 있었다. "달이 뜰 때 거북이가 기어가면 무조건 따라 가거라. 예로부터 거북이가 마시는 물은 몸에 좋다고 알려져 있느니라. 그 다음이야 네 놈의 재수에 달려 있다만." 노인은 한 마디도 못알아 듣고 망연해 있는 그를 힐끗 보더니 몹시도 투덜거렸다. "염병할! 아무래도 손해 보는 장사야. 그렇지만 할 수 없지. 이번 시기를 놓치면 백 년을 기다려야 되니...." 유옥은 내심 신음을 발했다. '끙! 이건 완전히 일방적인 도깨비 놀음이로구나. 아니면 내가 지독히 머리가 나쁘던가.' 그런 그에게 노인이 빽 하고 고함을 질렀다. "이 놈아! 꼴도 보기 싫다. 어서 썩 꺼지지 못하겠느냐?" 유옥은 민망한 나머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갈 때 가더라도 빚은 갚아야...?"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 붙들어매 두어라. 꼭 기억했다가 때 가 되면 너를 부르겠다." 역시 의혹만을 유발시키는 발언이었다. 유옥은 뭐라 더 물으려다가 노인이 눈을 감아 버리자 더 말도 붙이지 못했다. 그것은 노인의 행동을 통해 다시 입을 열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감사하다는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노인으로부터 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그가 몇 발자국쯤 가서 고개를 돌렸을 때, 점장이 노인의 모습은 이미 그 곳에 남아 있지 않았다. 유령처럼 소리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제 10 장 운명(運命)의 전환(轉換) ① 생명을 가지고 있는 이상 배고픔을 참는다는 것은 어떤 고통보다도 견디기 힘든 일이다. 때로 짐승들 같은 경우에는 너무 굶주리다 보면 머리가 돌아버려 평소 자신을 위협하던 맹수에게 거꾸로 달려 들기도 한다. 그러나 먹을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먹을 입장이 못되어 굶는 건 정녕 불행한 일이었다. 북경(北京). 이 곳은 소위 없는 것이 없다는 도시다. 먹을 거리만 해도 천하에서 희귀한 산해진미로부터 각 지방의 특산물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흥청흥청 넘쳐날 정도이다. 그로 인해 북경내 반점들이 밀집해 있는 거리는 연일 북적였으며 그들 반점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음식 냄새는 배고픈 그에게 창자가 비틀어질 정도로 괴로움을 주곤 했다. '정말로 죽겠구나!' 유옥은 지금 대빈루(大賓樓)라는 한 주루 앞에서 헐떡이고 있었다. 그 곳은 북경에서 가장 큰 주루로써 음식이나 술맛이 항간에 정평이 나 있는 터였다. 그는 꼬박 삼 일을 굶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칭 천상천하제일신복이라는 노인의 말 한 마디 때문이었다. '내가 혹시 쓸데 없는 짓을 하는 건 아닐까?'


회의가 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지금이라도 당장 대빈루로 뛰어 올라가 마구 음식을 먹어 대고 싶은 유혹을 참느라 등에서 진땀이 다 솟을 지경이었으니까. 그의 수중에는 얼마 되지는 않으나 은자도 있었다. 그 정도면 최소한 한 끼를 걸직하게 사 먹을 만큼은 되었다. 유옥은 느긋하게 이빨을 쑤시며 대빈루로부터 나오는 사람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니 창자 속에서는 더욱 더 난리가 났고, 덕분에 그는 지칠대로 지쳐 버렸다. 그답지 않은 낙담도 어쩌면 이 허기(虛飢) 때문이리라. '도무지 낙선재를 아는 사람이라곤 없으니, 정말 북경에 있기는 있는 것인가?' 유옥은 지난 사흘 동안 북경 전역을 뒤지다시피 하며 무림왕 용화천이 말한 낙선재를 찾아 보았으나 결과는 허탕이었다. 말마따나 낙선재를 안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막막한 심정이 되어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천하에 의지할 곳 없는 신세야 언제고 다를까만은 하찮은 민생고(?)가 그로 하여금 한층 더 뼈저린 외로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꼬르르륵...! 그는 뱃 속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쓰게 웃었다. '후후... 밥을 달라는 원초적인 아우성....' 마침내 유옥은 발길을 돌렸다. 그림의 떡을 보며 배를 움켜 쥐고 있느니 차라리 음식냄새가 전해지지 않는 곳으로 피해 버려야겠다고 모진(?)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는 은연중 안산에서 만났던 괴노인과 점장이 노인을 동시에 떠올리며 내심 중얼거렸다. '쯧! 배고픈 팔자를 면하게 해 준다던 그 분의 비법도 이번에는 별무소용이로군. 대체 점을 치던 노인장께서 내 몸에 무슨 수를 써 놓으셨길래 내가 이 모양이 되었지?' 유옥으로 말하자면 대체로 시련에 굴하지 않는 극기형(克己形) 인간이다. 하지만 그가 현재 느끼고 있는 배고픔은 일반적인 굶주림과는 내용이 판이하게 달랐다. '후후... 이건 마치 삼 일 간 시험이라도 치르는 것 같군.' 그의 내부에서 그런 읊조림이 막 일고 있을 때였다. 히히히히힝--! 급촉한 말울음 소리에 이어 누군가 폭갈을 터뜨렸다. "비켜라, 거지 놈! 죽고 싶지 않으면." 위이이잉--! 무엇인가 유옥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있었다. 동시에 쌍두마(雙頭馬)가 이끄는 한 대의 마차가 그의 뒤에서 멈추었다. 그것은 온통 화려한 주옥(珠玉)들로 요란하게 치장된 마차였는데, 마부석에서 험상궂게 생긴 한 중년장한이 그에게 마구잡이로 채찍을 휘둘러 온 것이었다. 채찍은 대번에 유옥의 목을 휘감아 버렸다. 이렇게 되자 그도 감정을 가진 이상 울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 대로상에서 함부로 사람을 치는 자는...!'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크게 비틀거렸다. "억!" 마부석의 장한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채찍을 당겨 거지청년을 멀리 날려 버리려다 되려 그 쪽으로 몸이 확 쏠리는 바람에 그만 중심을 잃고 마부석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장한도 보통 내기는 아니었다. 휙! 그는 신형을 돌려 지면에 내려선 후, 눈을 무섭게 부릅떴다. "이 찢어 죽일 놈!" 쐐애애액--!


채찍이 살아 있는 뱀인 양 움직이며 또다시 유옥을 향해 날아왔다. 그 음향만 해도 어찌나 위맹한지 정말로 거기에 맞았다간 살점이 몇 근쯤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유옥도 어쩔 수 없이 움찔 놀랐다. 자칫 우물쭈물 하다가는 대번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지 싶었던 것이다. 그는 재빠르게 안산의 괴노인에게서 배운 나견타마(懶犬打馬)를 펼쳐냈다. 그러자 마치 게으른 늙은 개가 어슬렁거리듯, 술에 취하기라도 한 듯 그의 신형 채찍 사이로 흔들흔들 움직였다. 실로 절묘하기 그지 없는 신법이었다. 반면에 중년장한은 힘껏 채찍을 날렸으나 번번히 허탕인즉 노화가 탱천하여 채찍을 집어 던지더니 쌍장을 날렸다. 우우우웅--! 그의 손바닥에서 무시무시한 장력이 쏟아져 나왔다. 지나던 행인들은 그 광경에 모두 안색이 변해 가지곤 급급히 도망을 쳤다. 최근 들어 무림인들의 횡포가 너무 심해져 그들로서는 저마다 몸을 사리기에 바빴던 것이다. 유옥은 그토록 민심이 각박해진데 대해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업보(業報)다. 나로서는....' 그는 아직도 진기의 유통이 활발하지 못해 누구와 직접적으로 손을 나눌만한 처지가 못되었다. 신법의 묘를 발휘하여 상대의 공격을 속속 피하기는 했으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의 투지에 불을 붙인 것은 한 가닥 분노였다. '어떻든 다짜고짜로 살수를 쓰다니, 용서할 수 없다.' 유옥은 급기야 신법을 변화시켰다. 스스스--! 그는 늙은 개가 갑작스레 먹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턱을 바짝 곤두세우더니 무섭도록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엇?" 장한은 깜짝 놀랐다. 눈 앞이 뿌얘지는가 싶은 순간, 상대방의 모습이 시야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나으리, 이 어깨 위의 물건 좀 치워도 되겠소?" "헉!" 중년 정도의 그 장한은 전신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왜 안그렇겠는가? 한 가닥 음성이 바로 등 뒤에서 들리더니 무엇인가 섬뜩한 물체가 뒤통수를 찔러 왔으므로. "으으...." 그의 이마에서는 절로 식은 땀이 배어 나왔다. '정녕 귀신 뺨치는 신법이로구나. 한낱 거지 놈의 일신에 신통한 재간이 숨어 있을 줄이야....' 낙심을 내비치는 그를 보며 유옥은 쿡쿡 웃었다. "나리, 당신도 목을 떼내려면 아깝겠지?" "으음...." 중년인은 자신이 미리 해 놓은 짓이 있는지라 신음을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신의 목은 다른 사람들의 목과는 크게 차이가 날 것이오. 틀림없이 금테를 둘렀을 테니까 말이오." "놈! 주둥이를 멋대로 놀리는구나." "쯧쯧... 당신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려. 본의 아니게 목을 내맡겼던 적은 있은 만큼 입만은 보다 더 자유로와야 되지 않겠소? 지금부터는 얌전히 두었던 손도 크게 활용하여 금테 두른 당신 목을 따줄 작정이지만." 유옥은 말과 함께 수중에 든 소도(小刀)를 약간 움직였다. "헉...!"


마침내 중년인은 다급성을 터뜨렸다. "후후... 너무 겁먹지 마시오. 대로상에서 행인들을 무시하고 마차를 마구 몰아가던 그 용기는 다 어디로 갔소? 나는 당신 덕에 저승으로 호적을 옮기게 될뻔한 사람이외다." "으으...." 중년인은 비지땀을 흘리며 마차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마도 어떤 식으로든 구조 신호라도 보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때마침 마차 안으로부터 한 가닥 교소성이 새어 나왔다. "호호호호호...! 정말 재미있는 분이군요." 그것은 듣는 이로 하여금 심혼이 녹아들게 만들 정도로 간드러진 웃음소리였다. "아... 아가씨...." 중년인은 응원군을 확인하자 짐짓 애원조로 읊조렸다. 유옥은 고개를 돌려 마차를 응시했다. 그의 입가에는 아까와는 의미가 또 다른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어떻게 하면 좋겠소? 이 분 나리를 말이오." 마차 안의 음성이 답했다. "호홋! 그야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죠. 나는 단지 마차를 몰라고 시켰을 뿐이니 그를 어찌 하든 당신 처분에 맡기겠어요." 유옥은 히죽 웃으며 다시 중년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당신도 들었을 것이오. 당신의 주인께서는 당신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는구려." "아가씨! 어쩌면 이러실 수가...." 중년인은 마차를 향해 서운함이 깃든 음성으로 항의를 했고, 그 자를 보며 유옥은 고개를 갸웃했다. "참 이상하군. 당신의 생명은 내 손에 달려 있거늘, 어째서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오?" 말을 마친 그는 한 번 더 손을 슬쩍 움직였다. 츳! "우욱!" 중년인은 급기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뒷덜미에서는 어느 덧 가늘게 피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 분의 말이 맞다. 흑우(黑牛), 너는 어째서 그 분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지 않는 것이냐?" 마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여전히 고혹적이었으나 방금 전에 비해 싸늘하게 냉각되어 있었다. 중년인, 즉 흑우는 체념한 듯 비장한 표정을 짓더니 버럭 고함을 질렀다. "좋다! 어디 죽일테면 죽여 봐라. 내 당장 죽을 망정 네깟 거지놈에게까지 살려 달라고 비는 일은 없을 것이다." 흑우는 본시 매우 우직한 사내였다. 이를테면 부러지면 부러졌지 결코 구부러지려 들지는 않는 류의 인간형이었다. 유옥은 그에게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하하하... 당신이 만약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목숨을 구걸했다면 지금쯤 한 쪽 귀를 잃었을 것이오. 당신의 그 고지식한 성품이 당신의 목숨을 구했소." 그는 낭랑하게 웃더니 더 이상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주위에 늘어서 있는 구경꾼들 사이를 헤치고 당당히 걸어갔다. "흐음...!" 흑우는 괴상한 신음을 흘리며 손을 들어 자신의 뒷덜미를 쓰다듬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유옥의 지금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차 안으로부터 예의 음성이 들려 온 것은 그 때였다. "잠깐만! 소협께선 정말로 그냥 가 버리실 건가요?"


유옥이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내게 무슨 볼 일이라도 있소?" 차르르륵.... 구슬이 부딪치는 영롱한 음향과 함께 마차의 주렴이 열렸다. ② 발. 마차 밖으로 처음 내밀어진 것은 여인의 발이었다. 분홍색 가죽신에 감싸인 그 발은 너무 작아 귀엽고 앙증스러웠다. 그 뒤로 나타난 것은 역시 분홍색의 치마였다. 그리고.... 유옥은 잠시 그 자리에서 멈칫 서야 했다. '아!' 그의 심중에서는 절로 탄성이 일고 있었다. 마차 안으로부터 내려온 여인은 환상인 양 아름다웠다. 도저히 인간세계에 존재하지 않을 듯한 미색(美色)의 소유자, 이런 여인을 두고는 단 한 마디로 밖에 정의하지 못한다. 십전십미(十全十美). 더 이상의 형용사는 필요치 않았다. 정녕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으니 여하한 미사여구인들 그녀를 제대로 묘사해 낼 수는 없으리라. 피부는 빙결처럼 희고 매끄러워 바람조차 주르르 흘러내릴 듯 했다. 그런가 하면 오관은 명장(明匠) 조각품처럼 정교했고, 반짝이는 눈은 흡사 밤하늘의 유성과도 같았다. 여인이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을 대하자 유옥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했다. 지금껏 아름다운 여인들을 적지아니 대해 본 그였으나 눈 앞의 여인만한 미모는 기억을 모조리 뒤져 봐도 전무했던 것이다. 여인이 꽃같은 입술을 열어 말했다. "소협, 바쁘지 않으면 저와 식사라도 나누지 않겠어요?" "조... 좋소." 유옥은 말을 내뱉고 나서야 내심 아차 싶었다. '이런 낭패가 있나? 바보같이 내가 한낱 여인의 미색에 홀려 넋을 잃고 말다니.' 그러나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호호호홋...." 여인은 사내의 혼백을 빼버릴 듯한 웃음을 흘리며 앞장 서 주루를 향해 걸어갔다. 유옥은 그녀의 뒷모습을 한 동안 응시하다가 쓴 입맛을 다시며 따라갔다. '쯧! 잠깐의 실수로 일이 영 잘못 돌아가고 있군.' "호호호... 제 이름은 항예(姮蘂)라고 해요. 공자께서는 혹시 화중화(花中花), 운중룡(雲中龍), 검중검(劍中劍), 도중도(刀中刀), 마중마(魔中魔), 협중협(俠中俠), 기중기(奇中奇) 등의 일곱 사람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나요?" 유옥으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다. 그는 무안한 듯 얼굴을 은은히 붉히며 대꾸했다. "글쎄올시다. 워낙 견문이 짧아 놔서...." 미녀 항예는 섬섬옥수로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그럼 공자의 존명은 어찌 되시나요?" 유옥은 씨익 웃었다. "존명이라니 당치도 않소이다. 그저 이름없는 떠돌이로써 바람따라 구름따라 흘러 다니는 나그네일 뿐이오." 그 말을 들은 항예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렇다면 최근 들어 무림에 협명을 드날리는 풍운유객이 바로 소협이셨나요?"


"이름을 날리다니...?" 유옥은 잘 모르겠다는 듯 반문하고 나서 내심 투덜거렸다. '쯧, 나는 정말 운도 없군. 비록 아무렇게나 지은 이름이기는 하지만 본래 임자가 있었던 모양이니....' 항예가 경이감이 담긴 눈으로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어쩐지 처음 뵐 때부터 소협의 기도가 남다르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송화령에서 자면살호 패륵을 손가락 하나로 날려 버린 대단한 분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유옥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다. '그럼 그게 나였나?' 항예가 그를 향해 생긋 웃었다. "그건 그렇고, 소협은 담이 커도 이만저만이 아니시군요. 지금 군마회에서는 혈안이 되어 소협을 찾고 있는데 버젓하게 북경성을 활보하고 계시다니 말이에요." "군마회가 무엇 때문에 나를 찾는다는 게요?" 유옥이 묻자 항예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소협께선 그럼 자면살호가 군마회 소속인 것도 모르셨었나요? 그 자의 횡포가 너무 심해 진즉부터 그에 대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는데." 유옥이 눈살을 슬쩍 찌푸리며 반문했다. "그렇다고 나도 꼭 그걸 알고 있어야 하오?"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항예는 자신이 실수를 했다 싶었는지 말끝을 흐렸다. 동시에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에 은은히 존경과 선망의 빛을 떠올렸다. 그녀는 별빛같은 눈을 빛내며 나직하게 탄식했다. "으음, 천하의 정도인들이 모두 소협처럼 기개가 반듯하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난세가 도래해도 그저 방관할 뿐이지, 아무도 직접 나서려 들지는 않아요. 정말 한심한 세태죠." 이번에는 유옥이 물었다. "실례오만 아까 말한 자구(字句)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오?" "참, 그것도 모르셨었죠?" 항예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 오르더니 대답해 주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일곱 명의 신진고수들을 일컫는 말이에요. 이제부터는 한 명을 더 추가해야 되겠지만." "그 한 명은 또 누구요?" "누구긴요, 바로 제 눈 앞에 계신 분이죠." "흐음!" 유옥의 얼굴이 칭찬을 듣자 다소 붉어졌다. 항예는 그를 보며 생긋 웃더니 덧붙여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는 지금 그 여덟 명 중에서 두 사람이나 모여 있는 셈이군요." 유옥은 새삼스럽게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럼 낭자가...?" 항예가 재빨리 그 말을 받아 답했다. "그래요, 제가 화중화예요." "아! 역시...." "역시 어떻단 말인가요?" 속이 들여다 보이는 질문이었으나 유옥은 솔직하게 응했다. "아름답다는 얘기외다." "호호호... 고마워요.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백 번 듣느니 소협에게 한 마디를 듣는 쪽이 훨씬 기분 좋군요."


항예는 뱅어같이 가지런한 손으로 흘러 내리지도 않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슬쩍 매만졌다. "저는 그들 여섯사람을 차례로 하나씩 만나 볼 작정이에요. 왜 그러는지 아세요?" "모르오." "그들 중에서 진정한 영웅에게 시집을 가기 위해서요." 유옥은 내심 기가 막혔다. '정녕 이 말을 믿어도 되는 건가? 고작 신랑감을 구하기 위해 풍진강호(風疹江湖)에 나왔다니.' 화중화가 그윽한 눈으로 그를 건네다 보았다. "풍운유객, 당신은 제가 아름답지 않은가요? 혹 남자로써 한 번 품어 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나요?" '쯧! 정말 할 말 없게 만드는군.' 유옥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낭자는 앞으로 여섯 명의 인물들에게도 그리 묻겠구려?" "호호호홋...! 가능하기만 하면요." 화중화의 말에 그는 은연중 혀를 끌끌 찼다. '하긴 자부심을 가질만도 하지. 나도 잠시 동안 넋을 잃었을 정도이니. 하지만....' 유옥은 의도적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말마따나 상대가 아름답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미모를 놓고 경쟁자가 생기기를 원하는 여인에게 관심을 둘 정도로 한가하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그는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찡그렸다. 흑우가 한 쪽 구석에서 커다란 오리구이를 통째로 들고 맛나게 뜯고 있는 모습을 보자 잊었던 허기가 다시 느껴졌던 것이다. 꼬르르륵--! 그의 뱃속에서 일어난 전쟁은 급기야 외부로까지 표출되었다. 그 소리를 듣고 화중화 항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배가 무척 고프신 모양이네요? 그러고 보니 얘기를 나누느라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었군요. 어서 드세요." '쩝! 먹을 수 있는 입장만 된다면 내가 왜 이러고 있겠소?' 유옥은 쓴 웃음을 지었다. "아니, 실은 배탈이 났소이다. 낭자나 많이 드시오." ③ 유옥은 투덜대며 걸어가고 있었다. '제길, 국수 한 가닥 못 먹고 몽땅 털렸군. 결국 천상천하제일신복 어르신 때문에 이 고생이지 뭔가? 향후에야 어떤 일이 생기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던데....' 그가 한숨을 푹푹 쉬는 것은 화중화 항예를 대접하느라고 가지고 있었던 돈을 모두 털어 바쳤기 때문이었다. 유옥은 주린 배를 안고 허탈하게 웃었다. '쯧! 요 모양이 된 건 다 내 탓이지 누굴 원망하겠는가? 정녕 부끄러운 짓이었다. 여인의 미모에 홀딱 넘어가 아무 생각도 없이 줄레줄레 따라 갔었다니. 혹 신복 어르신이 그 때의 나를 보셨다면 욕설을 와장창 퍼부으셨겠지. 후후후....' 자성(自省)은 그를 금세 냉철에 이르게 했다. '화중화는 일주일 후, 천안사(天安寺)에서 검중검과 도중도를 만난다며 내게도 그 곳으로 오라고 했었다. 정말 천진한 것인지, 영악한 것인지 구별이 안되는 여인이다.' 유옥은 뇌리에 화중화의 뇌쇄적인 미태가 떠오르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몹시도 위험한 존재라는 점이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사내를 멋대로 조종할 수 있는 여인이다.' 그는 어둑해진 거리 한 편에서 심호흡을 했다.


'나는 자유인(自由人)이다. 천하의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자 했거늘, 허영에 정신을 내맡기고 있는 그깟 여인에게랴...!' 뚜렷한 목표지점도 없이 마냥 북쪽으로 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쉽기는 커녕 고역이었다. "헉헉...!" 유옥은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북경성을 빠져 나와 그는 멍청해 보일 정도로 북쪽으로만 내리 치달리고 있었다. 차라리 다행이랄까? 지쳐서 허덕이기는 해도 텅 비어 버린 뱃속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동안 개울이 나타나고, 산이 가로막고, 심지어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입을 쩍 벌리기도 했으나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 어쨌든 방향이 정해진 이상 똑바로 가는 것만이 최선이었기에. 다만 딱한 것은 내공이 거의 폐쇄된 상태라 경공을 쓸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그는 종종 눈앞이 빙글빙글 돌고, 두 다리가 제자리 걸음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그러나 유옥은 자신과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그는 천상천하제일신복의 말을 전적으로 믿었으며, 스스로를 위해 뭔가 최선을 다할 수 있다는 데에 커다란 긍지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는 무림성에서 겪었던 생애 최대의 좌절을 통해 여러 방면으로 심적 변화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런 면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무엇보다 무능한 자신이 싫었고, 때문에 대상이 무엇이든 싸워 이기고 싶었던 것이다. 유옥은 바라다 보이는 전면을 향해 홀로 부르짖었다. '끝까지 가 보는 거다! 내 앞에 어떤 운명이 펼쳐지든 향후로는 내 의지와 주관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이는 그의 사고(思考)가 어떤 방면에서 열리던 이미 하나의 귀일점(歸一點)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말이었다. 밤도 깊어 이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유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지금 두 갈래 길 앞에 서 있었는데,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그 두 길은 모두 북쪽으로 향해져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갈까하고 잠시 멈칫거리고 있을 때, 우측 길로부터 한 명의 농부가 나타났다. 유옥은 농부에게 물었다. "미안하지만 말씀 좀 묻겠습니다. 이 두 길은 각기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농부는 한밤중에 사람과 마주치게 되자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상대의 태도가 정중한 것을 보고는 대답해 주었다. "왼쪽으로 가면 와우산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수구산이외다." 와우산(臥牛山)과 수구산(睡龜山). 그 이름에서 유옥은 퍼뜩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아! 한 쪽에는 소 우(牛) 자가 들어가고 다른 쪽에는 거북 구(龜) 자가 들어 가는구나.' 그것은 당연히 천상천하제일신복의 말과 연관이 지어졌다. - 소는 나쁘고, 거북이는 좋다. 유옥은 농부에게 고맙단 인사를 건네고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수구산이 있다는 오른쪽 길을 택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숨이 턱에까지 차 올라서야 유옥은 수구산에 다다랐다. 이름 그대로 수구산은 거북이가 누워 있는 것 같은 형상이었다. 그는 산의 정상에 올라와 있었다. 그 곳은 거북이로 치자면 머리 부분에 해당되는 위치였다. 사위는 어둠과 적막에 싸여 있었다.


유옥은 고개를 들어 야공을 올려다 보았다. 비록 달은 구름에 가리워져 있었으나 그는 생전 처음으로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한 느낌을 받고는 내심 중얼거렸다. '이것이었나? 정상을 정복한 기분이란....' 목적지까지 오자 일면 허탈감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로서는 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인해 기쁘기 그지 없었다. 그러기를 한참여. 달빛이 구름을 뚫고 나와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러자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크게 웃어 제꼈다. "하하하하핫...!" 그의 눈이 한 곳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바로 저것이다! 으하하하하... 저것이었어." 유옥의 얼굴에는 더 할 나위 없는 희열이 번져 있었다. 그의 시선이 꽂혀 있는 곳, 즉 산봉 아래 쪽에는 거북이의 그림자가 새겨 놓은 듯 명확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침내 그는 천상천하제일신복 노인의 말이 뜻한 바를 알아 차렸으며 그 때문에 이토록 감격해 하고 있는 것이었다. 유옥은 그 상태로 거북이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 달이 뜰 때 거북이가 기어 가면 따라 가거라. 예로부터 거북이가 마시는 물은 몸에 좋다고 알려져 왔느니라. '달빛이 이동하면 그림자도 자연히 움직이겠지. 그 분의 말씀인즉 그 그림자를 따라 가라는 의미였다.' 그리하여 인내를 가지고 한참을 서 있자 어느 순간인가부터 서서히 거북이 그림자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유옥은 산 아래로 정신없이 내달렸다.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왔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으나 그는 젖먹던 힘까지 다 짜내어 분주히 다리를 움직였다. 불행하게도 그림자가 지시하는 곳은 생각보다 멀었지만. ④ "허억!" 유옥은 거의 혼절할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이제는 운신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와중에도 그는 애써 눈을 치뜨며 전면을 주시하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그림자는 여전히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맙소사! 저건...." 유옥의 입에서 문득 절망에 찬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바야흐로 그림자가 이른 곳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디 높은 절벽이었다. "후후...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내가 그 꼴이로군." 기가 막혀 하는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림자는 절벽을 타고 기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거북이가 절벽에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가고 있는 듯한 광경이었다. 유옥이 벌떡 일어나 절벽에 도전(?)을 감행한 것은 순전히 오기에서였다. 기진하여 반쯤 풀어져 있던 그의 눈에서는 언제 그랬냐 싶게 불똥이 튕겨 나오고 있었다. "좋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 보자." 절벽은 칼날같이 뾰족한 편암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으윽...!" 손과 팔꿈치, 무릎 등이 그 편암들에 찢기고 긁혀 유옥의 몸은 금세 피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고통이야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러나 무섭게 타오르는 그의 집념은 그런 것 쯤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직 그것만이 삶의 목적인 듯 그는 사력을 다해 절벽을 기어 오르며 그림자를 뒤쫓고 있었다. '대체 나로 하여금 어디까지 올라가게 만들 참인가?'


힐끗 아래를 내려다 본 그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하여 눈을 감아야 했다. 기력이 쇠잔해 있는 탓도 있었지만 그는 벌써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이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가슴이 쿵쿵거리는 것을 스스로도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이 때, 그의 귓전으로 가느다란 물소리가 들려왔다. "오오...!" 유옥은 안색이 급변해 얼른 귀를 절벽에 갖다 댔다. '절벽 속이다.' 동시에 그는 거북이의 그림자가 조금씩 후퇴하는 것을 느끼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달빛의 이동에 따른 자연현상이 그에게는 흡사 소임을 다하고 물러가는 것처럼 여겨진 것이었다. '결국....' 유옥은 내부로부터 격정이 치밀어 올라와 잠시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그가 지금 몸을 기대고 있는 곳은 절벽 중간 지점으로써 신경을 모으자 물소리는 더욱 확실하게 들려왔다. 뚝... 뚝...! '그리 멀지 않은 위치다.' 그는 품 속에서 소도를 꺼내 절벽을 찍었다. 칵! 카각.... 무수히 불꽃이 튕기고 그의 팔이 얼얼해질 즈음, 절벽의 한 부분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더니 커다란 구멍을 드러냈다. 그 구멍은 본래 하나의 바위로 막혀 있었는데 유옥이 주변의 잡석들을 파헤치자 견디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 것이었다. 구멍은 한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크기였다. 물소리는 그 안 쪽으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똑... 똑.... 유옥은 서슴없이 구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천정에는 고드름 같은 종유석들이 늘어져 있었다. 그 끝에서 유백색의 기이한 액체가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바닥은 검은 색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예의 액체는 떨어지는 족족 개중 움푹한 곳에 고이고 있었다. 유옥은 액체에서 풍기는 향기로운 냄새에 힘입어 전신의 피로가 말끔히 가시고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인가? 몸에 좋다는 물이...?'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바닥에 고여 있는 액체에 양손을 집어 넣었다.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아!" 놀랍게도 손이 액체에 닿자 뭐라 형용키 어려운 청량한 느낌이 팔을 타고 어깨까지 전해져 온 것이었다. 이어 손을 들어 올려 본 그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럴 수가! 손이 투명해져 있다니...?' 이 때, 바닥에 고여 있던 액체는 마치 외부의 침입을 거부하기라도 하듯 흑암 속으로 스르르 스며들고 있었다. 더 이상 생각하고 말고가 없었다. 유옥은 급히 허리를 숙여 바닥에 입을 대고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액체를 들이 마셨다. 그런데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체내로 들어가자 그는 뱃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발했다. "크으윽...!"


불덩어리를 삼킨들 이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유옥은 견디지 못해 배를 움켜쥐고 데굴데굴 구르다 의식을 잃고 말았다. .... 이른바 탈태환골(脫胎換骨). 그 기현상은 유옥이 혼절해 있는 동안에 이루어졌다. 투두두둑...! 전신의 피부가 무섭게 균열을 일으켰다. 먼저 체내의 열기로 인해 새까맣게 타들어 가더니 가뭄 때의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종내에는 뱀이 허물을 벗듯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유옥의 몸은 징그러울 정도로 마구 뒤틀어져 누운 자세 그대로 툭툭 퉁겨 오르기도 했다. 그것은 뼈마디가 멋대로 수축과 이완을 거듭함으로써 일어난 또 하나의 기현상이었으나 당사자인 그는 정신을 잃고 있어 이 사실을 조금도 의식하지 못했다. 유옥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이 일련의 변화들은 그가 마신 신비한 액체 때문이었다. 그 액체란 바로 인세에서 단 한 방울도 얻기 힘들다는 공청석유(孔淸石油)였던 것이다. 무릇 천지간의 영험한 정기(精氣)가 모여 이루어진다는 천세지보(千世之寶)가 그것이다. 따라서 이를 얻은 것은 곧 유옥이 희대의 기연(奇緣)을 만났다는 의미였다. 이래서 천지를 주관하는 신(神)더러 공평하다고 하는가? 모친에게까지 존재 자체를 거부 당했던 불행한 청년. 그의 운명이 바야흐로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것도 장차 천하에 풍운을 몰고 올 기인(奇人)으로써 이 곳에서 새롭게 탄생되고 있었다. - 다음 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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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제1장·괴사(怪事)로 열리는 서막(序幕) 제2장·뜻밖의 인연(因緣)들 제3장·두 번의 이별(離別) 제4장·무림성(武林城)의 소성주(少城主) 제5장·대역(大役)의 목적(目的) 제6장·내분(內分)의 본격화(本格化) 제7장·무림왕(武林王)과 그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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