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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무가 제 1 권 표지 제목: 절대무가 제 1 권(전 3 권) 지은이: 검궁인 - 차 례 서문(序文) 서장 제 1 장 다양한 인간의 군상 제 2 장 냉혹한 율법 제 3 장 그가 추구하는 바는…… 제 4 장 대의명분 제 5 장 천하를 얻고자 하는 그 제 6 장 인간사의 진리 제 7 장 대계 제 8 장 비화 제 9 장 최고의 재목 제 10 장 마지막 관문 서문(序文)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한때 나르는 새도 떨어뜨리게 할만큼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인물이 이제는 주위에 사람이 없어 보는 이의 마음을 을씨년스럽게 하는 것을 생각하면 창고가 넘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인간에게 욕망이 없다면 발전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욕망에는 반드시 절제가 있어야 한다. 절제 없는 욕망은 그 종말이 비참해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흔히,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던 권력도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것을 우리는 바라보고 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니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니 하는 말들이 헛된 말이 아니듯이 말이다. 정상에 오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정상에 오른 이들은 그 해답을 알고 있을까? 그들에게서 뜻밖에도 정상이란 없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일로정진(一路精進)하는 사람들은 정상을 향해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진하지만 멀리서 보면 그가 바로 정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인간의 아름다움은 행위 그 자체에 있는지도 모른다. 인사재인성사재천(人事在人成事在天)―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성사는 하늘에 달려있다―의 교훈은 격동을 겪고 있는 현세인들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볼만한 일이라 생각된다. 마음을 비우면 모든 것이 담백해질까? 세상사를 한 발 물러나 바라볼 수 있게 되면 좀더 현명해지겠지만 작금의 끓는 세상에서 홀로 무감(無感)해지는 것은 도피가 아닌가? 결국 세상 안에 들어 있는 셈이니 그릇의 모양과 형태를 외면하고 독존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옳고 그름을 제켜 두고는 스스로 옳게 되지도 타인의 그릇됨을 탓할 수도 없는 것 같다. 절대무가(絶代武家)란 초인(超人)의 가계를 지닌 주인공은 스스로의 운명을 부정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초인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하는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와도 상통하는 점이 있지 않을까? 자오정(子午停)에서 검궁인 배상


서장 휘이이잉―! 바람이 불고 있다. 사위가 적막에 싸인 가운데 스산한 바람 소리만이 들려온다. 바람은 누런 기운을 띄어 하늘을 뿌옇게 가리고 있다. 황사(黃沙)였다. 지평선(地平線)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늘은 모래로 자욱하게 뒤덮혀 있었다. 멀리 어렴풋이 옥문관(玉門關)의 모습이 황사의 흐름을 따라 가물거리고 있었다. 옥문관은 중원으로 통하는 길목으로써 항시 긴장감이 감돈다. 인접해 있는 변황의 이족들이 자주 침범하기 때문이다. 옥문관을 넘으면 곧바로 메마른 땅 신강(新疆)이 나오는데 황토바람은 그곳으로부터 불어 오고 있었다. 적수(狄水). 이는 옥문관에서 마주 보이는 산 사이로 흐르는 내의 이름이다. 오랑캐의 땅으로부터 흘러내려온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어쨌든 국경 너머로부터 불어 오는 바람은 쉴새없이 흙모래를 싣고 와 옥문관의 외곽으로 흐르는 강줄기를 붉게 물들인다. 하여 이 강은 적류(赤流)라고 불리우는데 적수도 여기에 합해져 강의 중심부를 관류하고 있다. 적류는 황토바람의 영향 탓인지 붉은 빛을 띄고 있다. 아니, 자세히 보면 단순히 그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핏빛의 강이랄지, 적류는 상류에서부터 하류까지 온통 혈하(血河)가 되어 있었다.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본즉 곳곳에 참혹한 시신들이 널려 있기도 했다. 이는 두 말할 것도 없이 혈전(血戰)의 흔적이었다. 마치 또아리를 튼 뱀처럼 혈전의 자취는 모종의 규칙성을 띄며 도처에 널려 있었는데 종래에는 한 곳으로 집약되었다. 이르자면 어느 한 곳을 사수하려 했던 듯하다고나 할까? 시체가 가장 많이 쓰러져 있는 곳, 즉 가장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음직한 곳은 적류의 상류에 해당되는 위치로써, 바로 옥문관 부근에 자리잡고 있는 한 채의 장원이었다. 장원은 내외부를 막론하고 성한 것이라고는 없었다. 무너진 담벼락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으며, 지면에조차 피가 흥건히 고여 내를 이루고 있었다. 제 형체를 잃은 전문(前門)이 외벽에 가까스로 매달린 채 바람이 불 때마다 기분 나쁜 음향을 내고 있었다. 끼이익! 끼익....... 이 참담한 광경을 모래바람은 무심하게 훑고 지나갔다. 휘스스스― 툭! 피로 얼룩진 현판이 마침내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무참히 떨어져 내렸다. 이것이 한 가문의 종말이었다. 장원의 이름 같은데 현판에는 이제 뭐라고 쓰여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것이다. 휘이이잉―! 비극을 품은 바람은 대청 안으로 기어들었다. 그런데 폐허를 방불케 하는 그곳에는 놀랍게도 사람이 있었다. 도시 살아 있는 생명체라곤 없을 듯 하던 그 험악한 장소에 한 사내와 여인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혈전은 이미 끝난 지 오래였지만 대청 안에는 그들 두 사람으로 인해 여전히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여인은 작금의 참화와 무관하지 않은 듯 넋을 잃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녀에게로 향해져 있는 사내의 눈길이었다. 그 눈은 복잡한 감정을 담은 채 줄곧 여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사내의 반듯한 이마에서는 강한 패기(覇氣)가 느껴졌다. 더구나 머리카락 한 가닥도 흐트러짐 없이


어깨 뒤로 단정히 빗어 넘겨 유별난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기도 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발치에 쓰러져 있는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일순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무엇일까? 내가 이 여인을 베지 못하는 이유는?' 사내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더니 픽 웃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군.' 동시에 그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변황무림(邊荒武林)의 절대자! 이것이 사내를 단적으로 정의하는 어휘다. 실상 그는 백 년을 넘게 끌어온 변황의 겁란을 종식시키며 최초로 변황무림을 통일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나이 서른이 되기까지 여인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일체 관심을 기울여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주위에는 언제고 그의 환심을 사고자 기를 쓰는 여인들이 숱하게 많았다. 하지만 그 여인들은 하나같이 그를 통해 권력이나 영화를 누려 보려는 야비한 부류에 속했다. 때문에 그는 일찍부터 여인들에 관해서라면 마음의 문을 닫아건 상태였고, 오직 변황무림을 위해 헌신해 왔을 따름이었다. ― 나에게 여인은 필요치 않다. 이것이 평소 지론인 바 철저히 독신을 고수했던 그가 지금 한 여인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또 자신에게 묻는다. '이런 감정을 두고 남들은 사랑이라 일컫는가?' 내심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무섭도록 굳어져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감정을 부인하려는 심리가 주원인이었다. 다만 여인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만은 몹시도 흔들렸다. '나는 과연 이 여인을 내게서 떼어 놓을 수 있을까?' 확실히 그 면에서는 자신이 서지 않았다. 여인은 창망 중이라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지만 본연의 미색만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어쩌면 미(美)라는 용어 자체가 그녀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듯. 사내는 얕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젓는다. 그의 입장에서는 결코 여인을 아름답다고 느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일개 범부(凡夫)가 아니라 변황의 제일인자인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닌 적국(敵國)의 여인을 어찌 그런 시각으로 보아줄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중원의 여인일 뿐더러 그가 가장 두려워했고, 또한 가장 힘겹게 여겼던 호적수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곧이어 사내를 사로잡은 느낌은 패배감이었다. 이제껏 그는 스스로를 두고 천하무적(天下無敵)이라는 단어를 서슴치 않고 사용해 왔으며, 이는 또한 변황무림 절대자로서의 권위상 충분히 타당한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긍지가 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눈앞의 여인을 사랑하는 자신과 여인이 사랑했던 자를 향한 무력감 탓이었다. 그 자는 새삼 떠올려 보아도 놀라운 위인이었다. 일 년 전 사내는 변황무림의 군단(軍團)을 이끌고 중원을 침공해 왔는데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그 자에게 저지를 당했다. 그것도 그 자는 단신(單身)이나 다름이 없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사내도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그 자를 우습게 여겼건만 상황은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뜻밖에도 그 자 한 사람으로 인해 사내의 중원공략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던 그 자의 항력(抗力)은 몇 달을 이어가는가 싶더니 무려 일 년을 끌어 사내로 하여금 낙심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여기서 사내는 무적의 고수를 자처하던 스스로에 대해 최초로 회의를 갖게 되며, 이름도 모르는 한 중원인에게 전율을 넘어서 경외심마저 느끼게 되기도 한다. 사내는 그 자가 검을 휘두르는 것을 직접 목도했을 때부터 자신은 그의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자는 죽었다.' 사내는 자조하듯 읊조리며 여인을 응시했다. 그녀를 처음 대한 것은 삼 개월 전, 그는 혹시라도 남아 있을지 모를 불씨를 없애기 위해 그 무시무시한 자를 길러낸 가문을 짓밟고자 이곳까지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뜻대로 그 가문의 모든 생명체를 멸절(滅絶)시켰거니와, 그때에 사내는 여인을 보게 되었다. 사내가 여인에게서 느낀 감정은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그는 여인들 본 순간 머릿속이 텅 비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잠시 동안은 그녀 외에 어떤 사물도 느낄 수가 없었다. 여인이 말했다. "어서 날 죽여라. 그 칼로 내리치면 끝이 아니냐?" 체념이 깃든 낮은 음성을 들으며 사내는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것은 네 알 바 아니다. 한 가지, 내가 저승에 가게 되면 너희 오랑캐들의 뼈를 씹어 주겠다." 그는 말이 통하지 않자 더 묻지 않았다. "흠! 정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어쩔 수 없지." 여인은 똑바로 사내의 눈을 쳐다 보았다. 그녀의 눈에서는 분노의 불꽃이 이글거릴 뿐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스르릉! 사내가 검을 뽑아 들었으되 여인은 역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기세에는 사내가 오히려 움찔했다. '벨 수 없다, 나!' 그는 칼자루를 잡은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자신이 떨고 있다는 사실을 여인이 눈치챌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기를 한참여. "으음......." 사내는 길게 신음을 발하더니 검을 검집에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되도록 짧게 말했다. "베든 안 베든 당신의 목숨은 금후로 내 것이다."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이국(異國)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 사내의 피는 그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심지어 달콤한 환상에 사로잡히기까지 했는데 그 이유는 여인에 대한 감정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마음이 여인을 향하게 되자 어느 날 문득 사내는 자신도 믿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기에 이르렀다. ― 그녀를 곁에 두고 싶다. 결국 그는 자신의 신분마저 잊게 되고 말았다. 다른 인물의 소유였던 여인, 그것도 중원정복의 장도(壯途)를 일 년씩이나 가로막았던 그 자의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었는지도 모른다. 좌우간 사내는 오랑캐라 불리우는 민족의 일원이었으되 야만적이지 않았다. 그는 예의와 법도를 알았으며 이 때문에 사랑이 커져가도 여인을 강제로 범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처럼 시간이 흘렀고 현재에 이르러 사내의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그가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건 여인은 여전히 그를 적대시하며 배척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두 번이나 패했다. 중원에 와서 한 번은 그 자에게, 또 한 번은 이 여인에게......!' 그것은 지나친 자괴감이 아니었다. 분명 죽은 자는 일대일(一對一)로 겨루어서는 승부를 자신할 수 없으리만큼 가공스런 무위(武威)를 보여 주었고, 그 자의 아내인 이 여인은 사내에게 더할 나위 없는 모욕감을 안겨 주고 있었다. ― 난 죽는 한이 있어도 오랑캐의 첩실이 될 수는 없어. 마치 이런 말을 품은 듯한 그녀의 눈을 사내는 감히 마주 보기가 두려웠다. 또한 그녀를 죽여야 한다고 누차 다짐을 했으면서도 끝내 그는 그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말았다. 사내는 그 가문이 안겨 준 손실을 계산해 보았다. '후후......얻은 것이라고는 오직 이 열패감 뿐, 결과적으로 나는 손해만 보았을 따름이다.' 그는 밀려드는 회한을 계속 이렇게 읊조렸다. '그 자로 인해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신강(新疆)의 예하세력이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도 아니지. 천 년 변황의 꿈을 안고 세력을 일으켰던 내가 어이없게도 단 한 사람에게 저지를 당하니 그들로서도 더 이상 나를 신뢰할 수 없었으리라.' 사내는 이제 오랫동안 꿈꾸어 온 중원 정복의 유혹을 접고 돌아가야 했다. 그 자가 앞을 막아서고 있는 사이에 중원무림은 재정비가 되어 정복이 불가능해져 있었다. 물론 신강에서 일어난 반란을 처리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중원을 차지하겠다는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나는 이렇듯 비참하게 되어 옥문관 너머로 되돌아가야 한다.' 남은 것은 없었다. 있대야 위대한 중원의 무인 한 명과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명의 여인을 본 것이 전부였다. 그 자에게서는 무인의 혼(魂)을, 여인에게서는 사랑이라는 마약(魔藥)에 취하게 한 미모와 기품을 보았을 뿐이다. 사내는 안면을 씰룩이며 여인을 돌아 보았다. "나는 돌아간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나는 언제고 이 땅에 다시 온다." 휘이이잉―! 비가 내리려는지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나뭇잎을 휘감고 있었다. 그는 여인을 향해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내게 패배감을 안겨 준 위인들....... 나는 언제고 그대가 속해 있었던 가문을 잊지 않겠다." 여인은 그 말을 듣는지 마는지 반응이 없었다. "단, 그냥 가지는 않는다. 그대를 데려가겠다. 그대는 나, 이 변황무림 일인자의 유일한 전리품이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일종의 선언이었다. "최소한 나는 그대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겠다." 투두둑! 기어이 빗방울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사내의 눈빛은 더욱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그대는 중원을 대표하는 절대무가(絶代武家)의 여인, 내게는 하나의 전환점을 제시해 주게 될 것이다. 장담컨대 나는 당신의 사랑을 취하게 될 테고, 그 후에 중원 정복을 꾀하리라." 그 말에 여인의 입가에는 한 줄기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것은 흡사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듯 했다. ― 그 일이 과연 당신 뜻대로 될까? 이에 사내가 또 말한다. "후후...... 나를 비웃는군. 하긴 나는 끝까지 그대의 마음을 얻지 못 할 지도 모르지. 만일 그렇게 되면 내 더는 중원에 발을 들여 놓지 않겠다." 여인은 묵묵부답인 채로 그를 외면해 버렸다.


"그래, 이건 도박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대를 차지하지 못 하면 나는 중원의 한 여인에게까지 패배한 것이 되고 말거늘, 그런 자가 어찌 천하를 차지하려고 하겠는가?" 사내의 음성에는 얼핏 허탈한 기운이 묻어 있기도 했으나 일편으론 강한 신념이 느껴지기도 했다. 즉 여인의 사랑과 더불어 반드시 중원을 정복하고야 말리라는. 쏴아아아―! 빗방울이 굵어져 대지를 세차게 때리기 시작했다. 현판은 아예 빗줄기에 부서져 날아갔다. 꽈르르르― 쩌적! 비수 같은 뇌전(雷電)이 천공을 쪼개자 여인의 눈가에 일순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어디 마음대로 해 보시지?" 그녀는 눈을 내리 감았다. 제 1 장 다양한 인간의 군상 [1] "헉!" "으음......." 한 쌍의 남녀가 막 원초적인 행위를 펼쳐가고 있었다. 그들은 지저분한 방에서 풍기는 곰팡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각기 상대의 몸에서 분주히 옷가지를 뜯어냈다. "하아, 대인......!" 여인의 입에서 숨이 넘어갈 듯한 교성이 흘러 나왔다. 다만 그녀의 눈은 초점을 잃은 듯 흐리멍덩해진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내와 보조를 맞추고 있긴 하되 웬지 그 일을 자신과는 별개로 두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반면에 사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겠으나 그는 최고조로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 그 자는 저잣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류의 사내로서 점차로 드러나는 몸뚱이에는 제법 근육이 붙어 있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여인을 찍어 누른다. "아........" 그들을 수용하고 있는 방의 넓이는 고작 다섯 평 남짓 밖에 안되어 몇 번을 격렬하게 뒤척이자 금세 두 사람의 체취와 땀 냄새, 후끈한 열기 등으로 가득 차 버렸다. 이런 곳이라면 의례 있을 법한 춘화도(春畵圖)라든가 욕정을 자극할 만한 장식물 따위도 일체 보이지 않았다. 장방형의 방 안에는 단지 하나의 침상만이 덩그렇게 놓여 있었고, 그 위에서 남녀가 동물적으로 뒤엉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낡은 싸구려 벽지에 수 년 동안 햇빛을 못 본 듯한 축축한 방 안을 들여다보면 결론은 쉽게 나게 되어 있다. 이곳은 바로 하급의 홍등가(紅燈街)였던 것이다. "허억...... 헉!" 겨우 얇은 나무 판자 한 장이 방과 방을 구분하고 있었으며, 방음(防音)이 되지 않은 탓에 옆방에서 흘러 나오는 신음소리가 고스란히 귀에 전해지기도 한다. 천정에 걸린 붉은 색의 등이 을씨년스러운 빛을 발하고 있다. 발을 뻗으면 막바로 벽이 닿을 정도로 비좁고 답답한 이 공간에서 주머니가 빈약한 사내들이 여인을 품는다. 여인의 몸 위에서 헐떡이던 사내가 입성(入城)을 시도해 갔다. 한껏 팽배해 있는 배설에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이곳에 온 그가 본격적으로 권리를 행사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당탕! 요란한 음향과 함께 나무 판자로 되어 있던 문짝이 부서져 날아가 그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억! 이, 이런 난변이......."


휘이잉―! 문짝이 달아나자 써늘한 바람이 한차례 방 안을 휘돌았고, 후끈하게 달아 있던 방 안 공기는 삽시에 냉각되었다. "악!" 여인은 뒤늦게야 비명을 발하며 사내를 옆으로 밀쳤다. 동시에 그녀는 수치스러운 듯 이불을 뒤집어썼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방은 하급 홍등가 내에서도 가장 값싼 곳으로 복도나 현관이 없이 문만 열면 막바로 바깥이었다. 아무리 몸을 파는 창녀라 해도 행위를 가려 주던 문이 떨어져 나가고 본즉 길바닥에 고스란히 그 광경을 노출시킬 배짱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뭐얏!" 사내가 빽 고함을 지르며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신이 들자마자 그를 사로잡은 것은 광기에 가까운 분노였다. '어떤 놈이 재수없이!' 열이 식었어도 그 이상으로 울그락 푸르락하는 그의 면전에 한 인물이 우뚝 서 있었다. "염병할! 넌 뭣하는 놈이냐?" 꼭지가 완전히 돌아버린 사내의 입에서는 게거품과 함께 대뜸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곧 괴상하게 변했다. "이, 이런 미친놈이 아닌가?" 이 상황은 불청객(不請客)의 모습을 보면 쉽게 납득이 가리라. 그 자는 욕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불쾌한 내색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내를 향해 히죽 웃어 보이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자는 제 정신이 아닌 듯 했다. 체구는 제법 탄탄해 보였지만 얼굴은 봉두난발에 뒤덮혀 있어 알아볼 수도 없었고, 일신에는 만지기만 해도 부스러져 내릴 듯한 폐포(廢布)를 걸치고 있었다. 나이는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그것은 지저분하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엿보이는 눈빛 때문이었다. 그의 눈은 흐릿한 가운데서도 투명한 빛을 흘려내고 있었다. 어찌 보면 절대의 무심(無心)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철부지의 순진무구함을 드러내는 듯도 했다. 하지만 그 자를 향한 사내의 분노는 무섭게 타올랐다. "이...... 미친놈이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침상에서 벌떡 일어난 사내는 벗은 몸을 가릴 생각도 않고 폐포인의 얼굴로 주먹을 날렸다. 그래도 기초적인 권술 정도는 익혔는지 주먹이 뻗어 나가자 예리한 경풍이 일었다. 뻑! 문짝을 쳐부수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격타음과 함께 사내의 주먹은 폐포인의 면상에 정확히 틀어 박혔다. "개자식! 맛이 어떠냐?" 사내가 득의양양하여 외쳤다. 폐포인의 입술은 금세 퉁퉁 부어 올랐으며 가느다란 핏줄기까지 내비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고통을 모르는 듯 소매로 입가의 피를 쓱 훔치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크크......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잘난 척이군." "뭐, 뭣? 이놈이 죽지 못해 안달이 났구나!" 사내의 주먹이 두 번째로 날아갔다. 퍼억! 이번에도 폐포인은 피하지 못 했다. 그는 복부를 얻어맞고 허공으로 붕 뜨더니 무참하게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건방진!" 사내는 이빨을 갈다 말고 멈칫했다. 폐포인이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서 재차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쯤 되고 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거 못 말릴 놈 아닌가? 자칫 송장 치우고 덤터기 쓸라! 제기랄, 재수 옴 붙었어.' 사내는 미련이 남은 듯 힐끗 침상 쪽을 돌아 보았으나 여인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말았다. "에이, 더럽다. 퉤퉤!" 폐포인은 부서진 문을 통해 나가는 사내의 등을 물끄러미 보더니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크크...... 봐, 저 작자도 내 맷집에는 못 당하잖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여인이 발딱 일어나 소리쳤다. "대인, 대인! 어딜 가세요?" "ㅋ, 그깟 놈의 건달이 대인은 무슨 대인? 저런 놈은 소인잡배야. 여태껏 상대해 보고도 그걸 모르나?" "뭐야?" 여인은 얼굴이 새파래져 폐포인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부서진 문을 통해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난리통에 골목을 오가던 사람들이 구경 삼아 몰려든 것이었다. 이래저래 부아가 치민 여인은 고래고래 악을 썼다. "야! 네가 뭔데 남의 영업을 방해하는 거야? 니가 날 먹여 살리기라도 하겠다는 거니? 번번이 사고를 치니까 손님도 다 떨어지고 화대를 내려도 찾는 사람이 없잖아." 무리도 아니었다. 여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으며 이번만 해도 그녀는 아직 화대를 챙겨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의 고함은 거의 울부짖음으로 화해 이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더 이어졌고, 그 앞에서 폐포인은 바보처럼 머리만 긁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남성(河南城). 이곳은 여러 가지로 유명하다. 아름다운 풍광을 비롯하여 해마다 세 차례씩 열리는 축제, 이 지역 특산의 풍부한 산해진미(山海珍味), 게다가 빼어난 미녀들............. 그런데 그 많은 것들 중에는 하필이면 신제하(新制河)라는, 그리 명예롭지 못한 이름 하나도 끼어 있다. 못났건 잘났건 사내로 태어나면 신체가 멀쩡한 이상 여인 품기를 마다하지 않게 되어 있다. 신제하는 바로 그런 욕망의 분출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 그것도 단 몇 푼만 가지면 원하는만큼 충분히 즐길 수가 있었다. 더러는 신제하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사대부나 돈 많은 부호들로서 더럽고 냄새나는 신제하로 인해 거리가 난잡하고 지저분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쾌락이란 그런 자들에게만 허용된 것이 결코 아니며 세상에는 그들보다 가난뱅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따라서 신제하는 그들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늘 건재했다. 밤. 길 양쪽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집들은 집이라고 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초라하고 너저분했다. 그럼에도 저마다 문 앞에는 붉은 등을 걸어 놓고 있었다. 이것이 매일 보게 되는 신제하의 밤 풍경이다. 좁은 골목에는 계집들이 주욱 나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는데, 의도적인 행태인지 치마를 걷어 올려 희멀건 허벅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녀들은 열심히 그 앞을 지나는 행인들에게 추파를 던졌으며 더러는 길 한복판으로 원정(?)을 나가 코먹은 소리와 함께 사내들의 소매를 잡아 끌기도 했다. "아이, 놀다 가요. 내 극락으로 안내할께."


"얼마냐? 넌." "호호호...... 비싸지도 않아요." 호객 행위를 하는 계집들은 꼭 사내들의 욕정을 자극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얼핏 구역질을 유발시키는 면도 있기는 했지만 그녀들이 파는 웃음에는 비애가 묻어 있었다. 특히 개중에서 아직 순수함이 남아 있는 듯 해맑은 눈동자를 가졌다거나, 반대로 죽음을 코앞에 두었는지 퀭한 눈에서 을씨년스런 빛을 발하는 여인들이 그러했다. 그녀들이 손님을 끌고 들어가는 집들이란 앞서도 말했듯 어른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공간을 두고 맞붙어 있어 먼 곳에서 바라다 보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빽빽히 걸려 있는 홍등이 마치 연등행사 때와 같은 풍경을 만들어 놓아 신제하가 지상낙원인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어쨌든 이곳이 신제하라 명명된 이유는 홍등가에서 동쪽으로 가다 보면 작은 샛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2] "빌어먹을!" 신제하에서 동쪽을 향해 투덜거리며 걷고 있는 한 인영이 있었다. 그 자는 폐포인의 만행(?)으로 인해 재미도 제대로 못보고 홍등가에서 나와야 했던 사내였다. '재수가 없으려니 별 미친놈이.......' 어느 새 그의 걸음은 샛강 가까이에 이르고 있었다. 그의 눈에 한 쪽으로 나 있는 자그마한 목교(木橋)가 들어왔다. '벌써 날이 어두워졌군.' 사내는 하늘을 힐끔 올려다 보더니 목교가 있는 쪽으로 부지런히 걸어갔다. 어슴프레한 석양 아래 샛강으로부터 전해지는 습기를 접하게 되자 그는 웬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흐음?" 사내는 일순 걸음을 멈추었다. 목교 위에 누군가 검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내게 볼 일이?' 그는 예감이 그다지 좋지 않아 조심스레 묻는다. "게 누구요?" 상대방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일말의 오기가 치민 사내는 몇 걸음 더 다가가더니 그만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오늘은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놈들만 보는군." 다리 위에 서 있는 인영은 그가 잘 알고 있는 위인이었다. 이름은 역자심(易子心), 덩치가 거구인데다 힘이 장사였으나 머리가 아둔해 주위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작자였다. 역자심은 말없이 사내를 향해 다가오더니 퉁방울 같은 눈알을 뒤룩거렸다. 그는 일신에 비교적 깨끗한 백의를 입고 있었다. 평소의 그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다. 그는 사내의 면전에 이르자 불쑥 손을 내밀었다. "뭐냐?" 사내가 묻자 역자심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돈." 짧으나 진지함이 담긴 그 음성에 사내의 표정이 멍해졌다. '이게 뭔 소린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이놈이 왜 갑자기 나타나 내게 빚쟁이처럼 군단 말인가?' 사내는 역자심에게 빚을 진 일이 없었다. 순간적으로 당황했던 그는 이내 대노하여 부르짖었다. "이놈이 누구 주머니를 털려고? 멍청한 놈, 강도짓은 아무나 하는 줄 아느...... 억!" 그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명을 지르며 허공으로 번쩍 들려 올라갔다. 천하장사인 역자심에게 멱살을 잡혔던 것이다.


이쯤 되니 평소에 자신하던 권술이고 뭐고 소용이 없었다. "이...... 이놈! 이거 놓지 못 하겠느냐?" 사내는 있는 힘을 다해 바둥거려 보았지만 역자심의 힘을 감당해 내지는 못 했다. 쇠줄로 된 올가미에 걸려든 듯 사지를 휘젓는 것 외에는 꼼짝도 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역자심이 사내의 목을 더욱 옥죄며 추궁한다. "재미를 봤으면 돈을 내야지.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무섭게 눈알을 부라리는 역자심의 얼굴에서 장난기란 일체 찾아 보기 어려웠다. '어이쿠! 이러다간 내가 이놈 손에 죽게 생겼구나.' 사내는 공포감을 느꼈으나 한편으론 어이가 없었다. 그는 분명 느닷없이 나타난 방해자 때문에 재미를 보지 못 했다. 아니, 설사 뜻한 바대로 일이 무사히 성사 되었다 쳐도 그것이 역자심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는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이의를 제기했다. "이...... 이 보게. 그게 뭔 소린가? 난 그 계집과 일을 치루지도 못 했어. 더구나........" 그로서는 목줄기가 조여 숨이 막혀도 할 말은 하고 보자는 심산이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말은 끝을 맺지 못 했다. "끄윽...... 어이쿠!"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저만치 나가 떨어졌다. 역자심이 급기야 그의 목을 감아 쥐더니 힘껏 내동댕이쳤던 것이다. "시끄러워! 대장이 돈을 받아 오라고 했다. 어서 내 놔라." "뭐, 뭐야?" 사내는 전신이 으스러질 것처럼 아파오는 가운데서도 한층 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대장이라니, 이건 또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냐?' 역자심이 그를 향해 점잖게(?) 설명했다. "흠, 그러고 보니 자네는 모르고 있는가 보군." '뭐, 자네?' 사내는 내심 기가 막혔으나 잠자코 있었다. "홍화는 우리 대장의 애인이다. 이건 대장의 말이니까 무조건 맞다. 너는 그녀를 샀으니까 돈을 내야 한다." '애인?' 사내는 눈쌀을 찌푸렸다. 싸구려 창녀를 애인으로 삼는다는 것은 상식 밖의 말이었거니와, 그런 자는 대개 창녀의 몸판 돈이나 갈취하는 기둥서방에 불과하기 마련이다. 아무튼 역자심의 어투는 시종 진지하기만 했다. "원래는 오십 냥을 내야 하지만 재미를 다 못 보았다니 삼십 냥으로 깎아 주겠다." 그는 비록 말투가 어눌하긴 했지만 계속 반말로 나오고 있었다. 이것은 예전의 그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사내는 이래저래 노화가 치밀었으나 당한 깐이 있는지라 안면을 씰룩이며 겨우 이렇게 항변했다. "그 계산은 부당하다. 본래 계집과의 일이란 것이............." 퍽! "아이쿠! 나 죽네." 사내는 면상을 움켜쥐고 땅바닥을 떼굴떼굴 굴렀다. 역자심의 무지막지한 발길에 걷어채이자 콧잔등이 부러졌는지 그의 코에서는 대번에 피가 펑펑 쏟아져 나왔다. "대장이 돈을 안 내놓으면 이렇게 하라고 했다." 역자심은 이번에는 주먹을 불끈 쥐어 흔들어 보였다. 그 기세에 사내는 저항을 포기하며 다급히 외쳤다.


"아...... 알았어. 주....... 주면 될 것 아닌가?"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얼른 품으로 손을 가져갔다. "여기 있네." 사내는 되는대로 은자를 집어내 건네 주었다. 잔뜩 굳어져 있던 역자심의 얼굴이 비로소 활짝 펴졌다. "흠! 역시 대장의 말은 전부 옳아." '염병할 놈!' 사내는 비칠비칠 뒤로 물러났다. "이...... 이제 가 봐도 되겠나?" "물론." 역자심은 인심이라도 쓰듯 선뜻 대답해 주었고, 사내는 그의 마음이 변할까 싶어 꽁무니가 빠져라 달아났다. 혼자 남은 역자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애인이 뭐지? 돈을 받게 해주는 자인가?" 한동안 의문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렴 어때? 어찌 되었건 대장이 말한 것 중 그대로 되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 대장은 참 훌륭해." 한줄기 바람이 휭하니 불어 그의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함부로 흩어 놓았다. [3] "저기다, 돌진!" "와아아아―!" 아이들의 놀이는 언제 보아도 흥이 인다. 야트막한 언덕 위로 개구쟁이 아이들이 떼로 몰려 다니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 위로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아이들은 두 패로 나뉘어 놀고 있었는데, 오색(五色)의 천조각을 깃발처럼 만들어 흔드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나머지는 손에 막대기를 꼬나쥔 채 한창 접전 중이었다. 이르자면 그들은 전쟁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와아아아아―!" 아이들이 내지르는 함성이 근역에 해맑은 음파를 전한다. 이는 그들이 어른들처럼 이해득실을 따져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즐겁기만 하면 무엇이건 서슴없이 하곤 한다. 이 유쾌한 오후에 미백(美白)은 표정을 구긴 채 아이들의 신나는 놀음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분명 동년배들이건만 그들이 어떤 식으로 뛰놀건 자신과는 무관한 탓이었다. 열두어 살 남짓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미백의 얼굴에는 벌써부터 세상사에 지친 어른들에게서나 엿볼 수 있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고 있는 듯한 눈빛도 그와 같은 또래인 아이들에게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깨끗한 피부에 약간 그을린 낯빛이 건강해 보이기는 했으나 그는 일찍부터 정신상의 건강을 잃고 있는 아이였다. 그의 눈길이 다시금 아이들이 뛰놀고 있는 곳으로 옮겨갔다. 머리를 가지런히 뒤로 땋아내린 채 흐트러짐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이 어린 소년은 내심 읊조린다. '저들은 즐겁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미백은 스스로도 자신이 아이답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음 속에 담아 두고 있는 한 사람 때문이었다.


'누나........' 미백은 입 속으로 웅얼거리면서도 가능하기만 하다면 하나 밖에 없는 그 누나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그는 모르지 않았다. 갈등을 대신하듯 미백은 급기야 낮게 소리내어 불러본다. "누나." 그의 가슴 속에서 진한 아픔이 잔물결처럼 일어났다. '싫다!' 이제 미백이 부정하게 된 것은 아이들의 밝은 모습이었다. 그들을 경원함으로써 누이를 용서해야 되었으므로. 예전에는 그도 아이들 속에 섞여 보려고 노력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상처 뿐이었다. ― 넌 안돼! 우리와 어울릴 수 없어. ― 네 누나는 아무에게나 몸을 파는 창녀잖아. 그 소리를 들은 후로 미백은 아이들과 노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다 보니 지우려 애를 써도 여전히 마음 한 귀퉁이에 남아 그를 괴롭히는 것은 누나에 대한 원망이었다. '왜 누나는 그 많고 많은 직업 중에서 하필........' 철부지라 해도 알만큼은 다 아는 미백이었다. '창녀.' 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야. 내가 이래선 안돼! 누나는 나를 위해 내키지도 않으면서 그런 일을 하고 있는데.' 미백은 허리를 굽혀 돌멩이 하나를 집어 던졌다. 휘익―! 저 멀리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돌멩이를 바라보며 그는 눈에 눈물을 가득 담았다. "어이쿠! 어떤 놈이 돌을 던졌느냐?" 미백은 움찔했다. 돌이 떨어졌음직한 곳으로부터 불쑥 한 사람의 머리통이 솟아 올랐던 것이다.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일신에 폐포를 걸친 봉두난발의 인물이었다. 아픈 듯 머리를 어루만지며 다가오는 그를 보자 미백은 반색을 하며 달려갔다. "형!" 폐포인도 소년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이놈!" 미백은 그의 품에 안긴 채 마구 어리광을 부렸다. "형.......!" 정녕 좋은 사람이다. 그가 곁에 있으면 언제고 마음이 편안하고 따뜻해지는 느낌이 든다. 미백이 폐포인을 알게 된 것은 불과 일주일 전으로 그때부터 그를 무척이나 따랐다. 그도 그럴 것이, 폐포인은 소년과 만나자마자 감히 상상치도 못한 말을 했었다. ― 이제부터 네 누나는 내 애인이다. 그 말에 담긴 진의를 알 수가 없어 미백도 처음에는 농으로 여기고 그를 비웃었었다. ― 핏! 누구 맘대로요?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진 두 사람 간의 몇 마디 대화는 미백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성공했다. ― 내 맘대로지. ― 흥,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 멍청한 놈! 너는 애인이 있는 여자는 함부로 바람을 피 우지 못 한다는 걸 모르느냐? 요컨대 폐포인은 미백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해결의 열쇠까지 제시했다고 볼 수 있었다. 아직 나이가 어리다 보니 이후의 먹고 사는 문제나 누나의 입장에 대해서는 아직 절실하게 와닿지


않아서였겠지만. 아무튼 미백은 그 일을 통해 폐포인을 지극히 순수한 사람이라 믿었고, 그 때문에 누나에게도 잘 부리지 못 했던 어리광까지 그에게 부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 형이 정말 나의 매부(妹夫)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미백의 심중에는 어느덧 바람까지 심어져 있었다. '이름도 멋지잖아. 초사영(楚射影)........' 소년은 손을 들어 폐포인, 즉 초사영의 봉두난발을 옆으로 제켰다. 그리고는 활짝 웃으며 물었다. "초형! 어디 갔다 왔는지 내가 알아 맞춰 볼까?" 드러난 초사영의 얼굴에도 미백을 닮은 미소가 그려졌다. "후후...... 네가 그것을 어찌 안단 말이냐? 며칠 사이에 독심술(讀心術)이라도 익혔느냐?" "피이!" 미백은 입을 삐죽이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왜 그걸 몰라?" "흠, 내가 어딜 갔다 왔지?" 소년은 눈을 반짝 빛냈다. "애인에게!" 초사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 천진한 얼굴에서 아픔을 읽어냈던 것이다. "백아야." 초사영의 부름에 미백은 다시 웃음을 보였다. "왜요, 형?" 초사영은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시선을 둔 채 미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 있으면 이 형의 친구가 올 것이다. 너는 그 사람을 따라 가도록 해라." 미백의 얼굴에 언뜻 의아함이 어렸다. "형은요?" "난 할 일이 있구나." 소년은 볼멘 표정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싫어." "말을 들어라. 널 위해서니까." "형.......?" 초사영은 소년을 품에서 떼어 놓더니 몸을 돌렸다. "너도 계속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을 게 아니냐?" ".......!" 미백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사이, 그는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는가 싶더니 금세 언덕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소년은 잠시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크게 외쳤다. "초형! 미백은 형을 존경해요." 목이 메인 듯한 그 음성은 허공 중에 메아리쳤다. 그러나 이미 초사영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였다. 미백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굳어진 듯 꼼짝도 않고 안타까운 눈으로 텅 빈 언덕을 바라보았다. 소년이 있는 위치에서 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는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다. 그 소나무 옆에서 한 여인이 숨을 죽인 채 초사영이 사라져 간 언덕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


여인은 창녀 홍화였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이별을 고했으나 떠나버린 초사영의 모습을 뇌리에서 지울 자신이 없었다. '아마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야. 영원히........' 홍화는 눈썹을 파르르 떨더니 눈을 내리 감았다. '열여섯 번이었어, 그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은.' 그랬다. 초사영은 지난 며칠 간 그녀가 손님을 받고 일을 치르려할 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나 훼방을 놓고 돌아가곤 했었다. 처음에는 홍화도 그가 미친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따라서 어떤 때는 화가 났고, 또 어떤 때는 어이가 없어 웃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일이 열여섯 번이나 반복이 되자 비로소 그녀는 초사영의 행동이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모습을 떠올리는 홍화의 가슴은 어느 새 촉촉한 물기로 젖어들고 있었다. '초사영........' 그 와중에 아이들이 언덕으로부터 밀고 내려왔다. "와아아아― 쳐라!" 전쟁놀이는 바야흐로 절정에 이르러 있는 듯 했다. 아이들의 함성과 땀내나는 몸짓은 상념에 사로잡혀 있는 그녀의 가슴에도 야릇한 감동을 불러 일으켜 놓았다. 그리하여 홍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지는 찰나, 언덕의 한쪽으로부터 거구의 사내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자는 다름 아닌 역자심이었다. [4] 기분 좋은 밤이다. 온몸의 찌꺼기란 찌꺼기는 비지땀과 함께 모조리 체외로 배출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일게 된 후덥지근한 열기가 살냄새를 사방으로 전하고 있었다. "흐음.......!" 사내의 입에서 신음이 토해져 나왔다. 벌거벗은 그의 가슴팍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져 내렸으며 울퉁불퉁한 근육이 요동칠 때마다 계집은 예외 없이 기성을 질러댔다. 사내의 안면에는 칼자국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코 언저리로부터 입술 가장자리까지 선명하게 이어진 그 검흔(劍痕)은 정사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하여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의 밑에 깔려 요동치는 여인은 일견하기에도 대단한 미인이었다. 용모도 그렇거니와 파도처럼 출렁이는 가슴은 터질 듯 풍만했고, 허리는 한 줌도 안 되어 보였다. 어디 그 뿐인가? 실팍한 엉덩이나 허벅지는 웬만한 사내 하나쯤 녹이는데는 아무 문제도 없을 것 같았다. 더구나 입술 밑에 찍혀 있는 까만 점은 그녀가 성격적으로도 음심(淫心)이 무척 강하리라는 사실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악! 하아악........" 여인의 몸부림은 점입가경이었고, 그에 따라 사내의 움직임도 더욱더 격렬해졌다. 침상마저도 두 사람의 행위에는 더 견디지 못 하겠다는 듯 삐걱거리는 괴음향을 냈다. "지겨워." 여인의 음성에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소리야?" "몰라서 물어요?" 사내가 여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여인은 그 팔을 뿌리치고 그를 한 번 매섭게 흘겨보더니 홱 돌아 누웠다.


"대체 언제까지 밀회(密會)나 해야 하죠?" "그, 그야........" "나도 남들처럼 떳떳하게 살고 싶단 말이에요. 허구헌날 남의 눈을 피해 다녀야 하니 이제 신물이 난다구요." "너무 걱정 말아. 곧 잘 될 테니." 사내의 어설픈 위로는 잘 먹혀들지 않았다. "기억나죠? 처음 계획은 이게 아니었어요. 그 때는 분명 육개월 안에 일을 종결 짓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지금이 언젠 줄 알아요? 벌써 열 달이 넘었다구요." "후후후......." 사내는 낮게 웃더니 좀더 성의를 가지고 그녀를 달랬다. "내가 왜 그걸 모르겠나? 나도 다 생각이 있다구. 앞으로 일주일 후면 우린 정식으로 결합할 수 있을 게야." "일주일 후?" "음." "그게 정말인가요?" "물론이지." "호호...... 그럼 됐어요. 그 정도라면 못 기다릴 것도 없죠." 여인은 자못 교태롭게 웃으며 언제 심술을 부렸냐는 듯 손을 뻗어 사내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당신, 혹시 딴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죠? 잊지 말아요. 떠돌이 건달이었던 당신이 현재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다 내 덕분이라는 사실을 말예요." 사내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염려마오, 내 어찌 딴 마음을 품겠소?" "좋아요. 우리는 앞으로 이 호구진(湖邱津)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될 수 있을 거예요. 호호호홋.......!" 여인은 교소를 터뜨리며 사내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 바람에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처박게 된 사내는 욕구가 치밀었는지 거칠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인의 반응도 뒤지지 않아 두 남녀는 금세 뜨겁게 얽혔다. 호구진. 신제하로부터 동쪽으로 이백칠십여 리 떨어진 곳이다. 그리 큰 도시가 아닌데다 인구도 별로 많지 않았으나 그래도 인근에 꽤 알려진 시진이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잠극산(蠶極山) 때문이었다. 잠극산에는 어디고 가릴 것 없이 전체적으로 잠(蠶:누에)을 기르는데 필요한 상목(桑木)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다. 이 산에 올라본 사람이라면 누구고 쉽게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상목의 잎이 무성하게 자라 산을 뒤덮을 때면 말 그대로 뽕나무 밭은 벽해(碧海)로 보인다. 잠은 초기를 지나 성숙 단계로 접어들면서 입에서 가느다란 실을 뿜어내는데 품질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된다. 하나는 상잠(上蠶)이라 하여 명주(明紬)가 그것이요, 또 하나는 하잠(下蠶)이라 하여 견사(絹絲)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잠은 기르는 방법에 따라서도 목잠(木蠶), 가잠(家蠶), 훼잠(卉蠶) 등 여러 가지로 구분되기도 한다. 어쨌든 잠으로부터 뽑아 낸 명주와 견사는 각각 명주방(明紬房)과 견사방(絹絲房) 등으로 구별된 곳으로 보내지게 되며 거기서 일련의 공정을 거치면 비로소 비단으로 완성된다. 호구진 사람들은 대부분 양잠(養蠶)을 하여 생계를 꾸려가는 바, 개중 규모가 가장 큰 곳이 이른바 잠가(蠶家)였다.


호구진의 잠가는 둘로 나뉘어져 있다. 한 곳은 동(東)의 고잠원(高蠶院), 다른 한 곳은 서(西)의 조잠원(曺蠶院)이었다. 그들은 잠에서 얻은 명주나 견사를 명주방과 견사방으로 보내는 중간 생산자의 역할을 도맡고 있었으며, 그에 따르는 방대한 건조장까지도 독자적으로 구비하고 있었다. 고잠원의 원주는 고신각(高信脚)이라는 자로 호구진 사람들은 그에 대해 무척이나 기이하게 여기고 있었다. 고신각이 처음으로 모습을 보인 것은 불과 이 년 전의 일이었다. 그것도 당시에는 곽잠원(郭蠶院)이었던 잠원의 총관으로 채용되었었는데, 일 년 뒤에 원주가 되었다. 이는 나예향(那芮香)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했기 때문으로써 그녀는 잠원의 전 주인인 곽정(郭程)의 아내였다. 호구진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 한결같이 의혹을 느끼고 있었다. 성품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나예향이 어떻게 만난 지 일 년밖에 안 되는 사내와 결혼을 할 수 있었는지 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나예향이 그와 신접살림을 차린 지 몇 달 안 되어 갑자기 죽어 버리자 마을은 온통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두고 이구동성으로 고신각의 짓이라고 했다. 그가 곽잠원의 재산을 탐내 나예향을 죽였으리라는 추측은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으므로. 관부에서 포교가 파견되어 이 사건을 조사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범인은 엉뚱한 사람이었다. 나예향을 죽인 자는 곽잠원 근처에 살고 있던 소천호(蘇天互)라는 이름의 사내였고, 관부에서는 즉시 그를 체포해 갔다. 그 뒷마무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소천호는 처형되었으며 그의 집안도 국법에 따라 쑥밭이 되었다. 얼마 안 되는 재산은 몰수되고 식솔들도 마을에서 ㅉ겨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고신각은 그야말로 팔자가 늘어졌다. 막대한 곽잠원의 재산이 전부 그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 것이었다. 물론 그때부터 곽잠원은 고잠원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후로도 여전히 그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았다. 사건이 종결되었다고는 해도 그가 나예향을 죽인 진범이라는 소문은 내내 꼬리표처럼 그를 따라 다녔다. 한편. 고잠원과 함께 호구진의 양대 잠원인 조잠원도 사정이 비슷했다. 본래의 원주가 늙어서 죽게 되자 그의 젊은 후처인 조서영(漕抒英)이 잠원을 물려 받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두 잠가는 똑같이 어디서 흘러들어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사내와 후처가 차지해 버려 사람들의 입방아에 무수히 오르내렸다. 사람들은 이런 비약까지도 서슴치 않았다. "그게 말이지, 제각기 혼자가 된 양대 잠가의 원주들이 과연 조용히 지낼 수 있을까?" "후후...... 하긴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던데." "어디 그 뿐인가? 두 사람 모두 그릇에 놓인 떡을 거저 집어 먹은 셈이니 처지도 엇비슷하지 않은가?" "ㅋ! 잘 어울리는 한쌍일세." "어이쿠, 말이 씨 될라...... 하하하.......!" 그들의 비웃음은 지나친 것이 아니었다. 고신각과 조서영은 둘 다 양대 잠가의 정통 계승자가 아닐 뿐더러 거머쥐게 된 방법도 온당한 것으로는 보아줄 수가 없었기에. 그래도 설마 했건만 그들의 입담은 사실화되고 만다. 고신각과 조서영이 드디어 화촉(華燭)을 밝힌다니 말이다. 제 2 장 냉혹한 율법 [1] 달빛이 교교한 밤이다.


우우우.......! 어디선가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놀란 야조(夜鳥) 몇 마리가 어둠을 젖히고 화드득 날아갔다. 수림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환한 달빛에도 불구하고 숲 속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 사이로 여기저기 듬성듬성 자리 잡은 무덤들은 마치 웅크리고 있는 괴물처럼 보였다. 찌륵! 찌르르르.......! 늦여름 밤의 귀뚜라미 소리는 처량하기만 했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던가? 아무리 생전에 영화를 누렸을지라도 죽고 나면 한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잡초가 무성한 무덤 앞에 한 인물이 나타났다. 폐포를 입은 그 자는 다름 아닌 초사영이었다. 그는 우뚝 서서 발치께의 무덤을 지그시 내려다 보았다. 그러기를 한참여. 퍽! 퍼퍽! 초사영은 몸을 굽히더니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가 손을 칼처럼 세워 땅을 치자 흙덩이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얼마 안되어 땅 속에서 하나의 관이 나타났다. "미안하외다. 무례를 저질러서." 초사영은 낮게 중얼거리며 관뚜껑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는데 말과는 달리 이어지는 그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우지직! 관은 묻힌 지 오래 되어서인지 힘없이 부서져 나갔다. 그는 개의치 않고 관 속을 들여다보았다. 뭔가 단단히 작심을 한 듯 그의 얼굴에서도 갈등의 빛은 엿보이지 않았다. 관 속에 누워 있는 시체는 살이 모두 썩어 없어지고 뼈만 남아 있었다. 뼈는 달빛을 받자 섬뜩한 인광(燐光)을 발했다. 초사영은 관 속의 뼈를 세세하게 살펴보았다. 크고 작은 뼈다귀를 일일이 손에 들고 관찰했는가 하면 심지어는 코끝에 갖다대고 냄새를 맡아 보기까지 했다. "흠, 이것이군." 그는 마침내 한 개의 뼈조각을 골라 들었다. 그것은 일견하기에도 다른 뼈들에 비해 유난히 검어 보였다. "역시........" 초사영의 고개가 아래위로 끄덕여졌다. 북적대는 인파와 그에 따른 소음이 거창하다. 마을 사람들 거의 다가 몰려온 듯 했다. 안 보는 데서야 뭐라고 험담을 늘어놓던 그들로서 호구진에 거주하는 이상 양대 잠원주의 혼례식에 참석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고로 힘없는 자들은 시류에 저항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덕분에 고신각과 조서영은 온갖 억측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마을 사람들의 축복(?) 하에 당당히 부부가 되었다. 혼례식은 성대하게 치루어졌다. 고잠원은 마당이고 어디고 온통 하객들로 들어 찼거니와, 아직도 대문으로 또 다른 하객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축하합니다, 고원주!" "하핫.......! 고맙소이다." 고신각은 연방 웃음을 터뜨리며 손님들을 맞이했다. 신랑의 예복을 입고 있는 그는 찢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경하 드립니다, 원주." "어이구! 어르신께서도 오셨군요."


그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인사치레를 했고 간간이 주방 쪽을 돌아보며 하인들을 독려하기도 했다. "저 쪽에도 상 하나 차려 내라. 빨리 빨리!" "예! 갑니다요." 오늘의 주인공답게 한껏 치장을 한 조서영의 모습도 보였다. 본시 신부가 하객들 앞에 얼굴을 보이는 것은 드문 일이나 한 번 혼례를 치룬 전력이 있는지라 그런 예의에 구애받지 않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더구나 마을 사람들을 모두 알고 있는 그녀는 별로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직접 음식 시중을 들기까지 했다. 그 모습에 하객들 중 노인들은 더러 눈살을 찌푸렸다. "쯧! 저런 변고가 있나?" "말세야. 초혼이든 재혼이든 법도는 지켜야 하거늘." 반대로 일각에서는 조서영의 편을 드는 노인들도 있었다. "뭐 어떤가? 편한 게 좋지." "맞네. 이런 결혼식에 형식을 차리면 더 볼썽 사납지." 밤이 깊어가도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것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들고 나는 하객들 때문이었다. 붉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는 고잠가는 대단히 넓었다. 그 많은 사람들을 쉴새없이 대접해도 별 무리가 없었을 뿐더러 시간이 흘러 하객들의 일부가 돌아가자 오히려 대청에는 빈 공간이 남아 돌 정도였다. 어쨌든 사람들은 겉으로나마 모두 축하인사를 건넸고, 그 때마다 고신각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결혼하는 날의 신랑이니 멋있어 보여야 하건만 그렇지가 못 했다. 한껏 치장을 한 채 웃음을 머금고 있어도 그의 모습은 시종 섬뜩하게 보일 뿐이었다. 이는 그의 얼굴에 그어져 있는 검흔(劍痕) 탓이었다. 웃을 때마다 그 길다란 검흔은 마치 면상에서 뱀이 기어가는 듯 징그럽게 꿈틀거리곤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 행복해 보이기는 했는데, 어느 순간이 되자 그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막 대문으로 들어서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자는 일신에 낡아빠진 폐포를 걸친 초사영이었다. 고신각은 초사영을 보자 기분이 구겨지고 말았다. 아무리 가난뱅이라 해도 남의 혼례식에 폐포를 걸치고 나타나는 사람은 없다.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어야 도리가 아닌가? 그는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누구지? 처음 보는 놈인데. 거지는 아닌 것 같고.' 때마침 눈이 마주치자 초사영이 그를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고신각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웬지 상대의 눈빛이 가슴을 관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르자면 눈앞의 폐포인에게 자신만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 모두를 들켜버린 듯한 기분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초사영이라 하오. 늦었지만 축하 드리오." 초사영이 인사를 건네오자 고신각은 얼른 그 말을 받았다. "아! 고맙소이다. 어서 안으로 들어 가시오." 선택의 여지란 있을 수 없었다. '오늘 같은 날 이 한 놈으로 인해 잔치를 망칠 수는 없지.' 고신각은 심정이 그러하자 애써 기분을 수습하고는 몸을 돌려 다른 하객들을 향해 걸어갔다. 초사영은 눈치를 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빈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연회장에는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산해진미가 가득 차려져 있었다. 그것들을 본 초사영은 눈빛을 반짝였다.


'흠, 기분은 낼만큼 냈군.' 실제로 이 혼례식에는 여러 방면으로 신경을 쓴 흔적들이 엿보였다. 상차림도 그랬지만 음식을 담은 그릇들까지도 번쩍이는 은제(銀製) 아니면 값비싼 도기(陶器)였다. 음식 종류도 다양했다. 난자완(煖子宛), 죽엽선(竹葉仙), 석임고(石妊枯), 경나한(景拏寒), 취루몽(取累夢), 곡생(穀生) 등 온갖 진귀한 요리들이 널려 있었다. 상만 해도 여느 나무로 된 것이 아니라 특별히 자단목(紫丹木)으로 짠 것이었다. 초사영은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집어 먹었다. 그의 먹는 법은 특이했다. 같은 음식을 두 번 먹지 않았으며 오직 한 가지씩만 취해 아주 조금씩 오랫동안 씹었다. 잠시 후. 그는 배를 어루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대청 뒤로 어슬렁거리며 돌아가는 것을 눈여겨 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대개의 사람들은 쉴새없이 들어오는 산해진미와 향기가 진한 죽엽청으로 인해 먹고 마시는 데만 열중해 있었다. 대청의 뒤편은 넓은 후원이었다. 한 쪽에 삼목을 쌓아둔 야적장이 있었는데 그 옆으로 주방이 나 있는 듯 하인들이 상을 들고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초사영은 걸음을 멈추고 주방 쪽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콧노래를 부르며 나오는 한 계집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두 손에 커다란 쟁반을 받쳐들고 있었다. 초사영은 말없이 계집종을 향해 걸어갔다. 방죽에 까치집 있고 언덕에 맛있는 능소화(陵召花) 있네 내 꿈은 화려해라, 내 꿈은 화려해라 마당에 벽돌 있고, 언덕에 아름다운 십자궁(十子宮) 있네 내 꿈은 화려해라, 내 꿈은 화려해라........ 계집종이 불러대는 노래는 대충 그런 내용으로 그녀는 흥이 올라서인지 음식을 들고 걸으면서도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다 막 건물의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이다. 뭔가 시커먼 것이 그녀의 앞을 턱하니 가로막았다. "어맛!" 와장창! 계집종은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지르며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후후...... 노랫소리가 무척 듣기 좋군." 초사영이었다. [2] "뭐예요?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하다니." 계집종은 그를 보자 화를 발칵내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곧 무엇에 홀린 듯 스르르 풀렸다. 그것은 행색과는 별개인 초사영의 용모 때문이었다. '세상에! 사내가 어쩌면 이렇게도 아름다울 수가 있지?' 계집종의 눈빛은 금세 몽롱해졌다. 기실 초사영은 얼굴을 드러내는 법이 거의 없었다. 만지기만 해도 부스러질 듯한 폐포로 일신을 감싸고 있듯 습관인양 봉두난발로 준미한 얼굴을 가리고 있기 일쑤였다. 그런 그가 계집종에게 기꺼이 용모를 내보였다면 뭔가 숨은 의도가 있을 법 하건만 그녀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 했다.


삶이 단순했듯 사고 체계도 천박한 계집종은 아무 생각도 없이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한성(寒星)처럼 빛나는 초사영의 눈동자에 빨려들고 있었다. 곧게 뻗은 코의 선이나 붓으로 그린 듯한 눈썹, 주사빛에 육감적이기까지 한 입술 등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단지 흠이라면 피부가 지나치리만큼 창백하다는 점이었는데, 이 점은 그녀로 하여금 자신과는 격이 다른 자들에게서나 엿볼 수 있었던 기품과 더불어 가슴시린 고독을 느끼게 했다. 그리하여 계집종이 읊조린 말이란 이런 것이었다. '이 사람은 나를 어찌 볼까? 내 노래를 들었을 텐데.' 그녀의 이름은 죽향(竹香)이었다. "아가씨도 이제부터는 고잠가 사람이 되겠군?" 죽향은 원래 조잠가의 하녀로 그 질문은 마님이 시집을 오게 되어 딸려 왔겠구나는 의미였다. "아니에요, 전 이곳으로 온 지 한참 되었어요." "왜?" "마님이 보내셨어요." "흠, 그랬었군." 초사영의 입가에 한줄기 미소가 매달렸다. 그것은 일면 퇴폐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묘한 웃음이었다. 대부분의 소녀들이 남자의 이런 분위기에는 약하기 마련이다. 남의 집 종의 처지이긴 하나 죽향도 다를 바 없었다. '아! 내가 여염집 규수였다면........' 그녀는 평소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생각까지 하며 자신도 모르게 얕은 탄식을 불어냈다. 눈앞의 낯선 사내는 적어도 그녀가 보기에는 매력 덩어리였다. 특히 그가 전하는 낭랑한 음성은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날 것 같지가 않아 어떤 질문을 해도 다 답해 주고 싶었다. "방금 전 그 노래는 누구에게 배웠나?" "조잠가에 있을 적에 마님께서 하시는 것을 듣고........" "아가씨는 조잠가에서도 마님의 시중을 들었었나?" "네." "여기로 온 지는 얼마나 되었지?" "음...... 한 일 년쯤 되었나 봐요." "그런데도 아직 그 노래를 잊지 않고 있다니 아가씨는 기억력이 무척 좋은 모양이구나." 칭찬을 듣자 죽향은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건." 그녀는 다소 멈칫거렸으나 곧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저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 못되요. 그 노래는 조잠가의 마님뿐만 아니라 이곳 마님께서도 생전에 즐겨 부르셨어요." "나예향 부인도 말인가?" "네." "음, 하긴 노래가 워낙 좋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좌우간 아가씨는 양가를 오가며 마님들을 모시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더구나 나예향 부인은 까다롭기로 유명했었는데." 그 말에 죽향은 처음으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게 아닌데, 두 분 마님의 취향은 비슷했어.'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생각하고 있는 바를 말했다. "실은 그렇지가 않았어요. 두 분 마님은 식성을 비롯해서 모든 면이 닮으셨어요. 그래서 전........" 죽향은 말을 맺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초사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버렸던 것이다.


'설마 가려고?' 죽향은 발을 동동 굴렀다. '아이, 이를 어째?' 사내는 정말로 무정하게 그녀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난생 처음 보는 자에게 마음을 드러낼 수도 없고, 설사 드러낸들 뭘 어쩐단 말인가? 죽향은 저만치 사라져 가는 초사영을 바라보며 한숨만 푹푹 내쉴 뿐 끝내 여하한 제제도 가하지 못했다. 초사영. 그는 흥청거리는 연회장을 피해 고잠원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갔다. 그는 오색등롱이 걸려 있는 한 채의 전각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 곳은 신랑신부가 초야를 치를 장소였다. 초사영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기척도 없이 전각 안으로 스며 들어갔다. 그로부터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그는 밖으로 나왔다. 그가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역시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직도 연회가 베풀어지고 있는 대청을 향해 걸어갔다. 시끌벅적하던 소음은 점차 가라앉았다. 잔치가 파하자 하루 종일 북적대던 하객들도 서로 눈치를 보며 차례로 자리를 뜨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들이 모두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나니 그 자리에는 끝마무리를 하기 위한 하인들만이 남아 있었다. "큰 일을 마쳤군. 후후후........" 고신각은 다소 허탈하게 웃더니 하인들에게 고함쳤다. "자, 뭘 꾸물거리느냐? 모두들 빨리빨리 움직여라." 줄곧 기분은 좋았지만 확실히 접객이란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그것도 하객들이 수백 명에 이르다 보니 주인공인 그는 정작 하루 종일 변변히 음식도 들지 못한 터였다. 잔치의 뒷처리만도 보통 일이 아닌지라 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더미 같은 음식 찌꺼기와 그릇 등을 챙기는데는 앞으로도 한참 걸릴 것 같았다. 그러나 지치기는 해도 허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는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흥분과 기대감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오늘을 위해 오랫동안 뜸을 들여 왔다. '드디어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이루어졌다.' 그런 생각을 하자 그는 절로 몸이 후끈 달아 올랐다. 이제 그에게는 무한한 자유와 행복만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후후...... 금후로는 그짓을 하는데도 남의 눈치 따위는 볼 필요가 없겠지?' 고신각은 신방이 있는 후원의 전각으로 향했다. 전각에는 오색등롱이 걸려 있을 뿐 사람의 그림자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미리 하인들에게 전각 주변에는 얼씬거리지도 말라는 명령을 내려 두었기 때문이었다. 끼익! 그는 문을 열고 들어서며 여유있는 웃음을 흘렸다. "후후...... 많이 기다렸소? 서영." 신방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곳에는 신부복을 걸친 한 여인이 침상에 걸터앉아 있는 것도 보였다. 그녀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조잠원의 원주인 조서영이었다. 고신각은 그녀를 보자마자 정염이 솟구쳐 올랐다. 오랫동안 몸을 섞어온 처지이고 보면 새삼스러울 바도 없었지만 특별한 날이고 보니 색다른 감흥이 일었던 것이다. 마음 한 구석으로는 아쉬움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무릇 인간의 심리란 묘해서 남의 눈을 속여가며 밀회를 나누는 기분도 짜릿했건만, 그 재미와는 영 결별을 해야 되었으므로.


'아무렴 어때? 대신 흠뻑 즐기면 되는 게지.' 고신각은 나름의 자위와 함께 조서영을 덥썩 안았다. "자! 어서........" 옷고름을 잡아 뜯는 그에게 조서영은 짐짓 눈을 흘겼다. "아이, 급하기는!" 말하는 그녀 또한 숨결이 높아져 있었다. "후후...... 오늘은 기대해도 좋아. 그 동안은 내 제대로 안아 주지도 못 했지만 이 참에 능력을 모조리 발휘해 볼 테니까." "정말?" "그럼!" "호호호.......!" 조서영은 간드러지게 웃는 가운데서도 서둘러 신부복을 벗어 던졌다. 그 안에는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한 속곳만을 걸치고 있어 홍등빛을 받자 속살이 투영되어 보였다. 고신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몸을 훑어 보았다. 조서영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짧은 속곳 아래로 곧게 뻗어 내린 다리는 더없이 선정적이었으며 그 위로 풍요로운 질감을 연출하는 둔부나 잘록한 허리 등도 나무랄 데 없었다. 그는 터질 듯 풍만한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 잡으며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기름진 아랫배에 움푹 패인 배꼽, 그 아래로 진하게 우거진 흑림(黑林)에 시선을 고정시킨 그는 아랫도리가 불끈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 "흐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조서영의 비밀스러운 부분으로 손을 옮겨 갔다. 그의 손길에 의해 꾸준히 길들여진 그녀의 샘은 벌써부터 흠씬 젖어 있었다. "하아!" 그녀의 입에서 뜨거운 입김이 토해져 나오자 이때를 기해 고신각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어쩌려고?" "침상에서는 재미가 없어." "그럼?" 고신각은 대답 대신 선 채로 그녀의 다리를 벌려 자신의 허리에 올려 놓았다. 조서영도 즉각 그 뜻을 알아차리고 그의 목을 껴안더니 다리로 사내의 허리를 뱀처럼 휘감았다. 결국 그녀는 사내의 허리에 매달린 모양새가 되어 춤을 추듯 몸을 뒤틀기 시작했고, 고신각도 거기에 맞추어 양손으로 그녀의 둔부를 바짝 움켜쥐고는 힘차게 율동했다. 두 사람의 입에서는 연신 기성이 터져 나왔다. 이는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극도의 쾌감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들은 계속 동작을 이어가며 전신을 무섭게 떨기에 이르렀다. "흐으으.......!" "하악!" 두 남녀의 정력(精力)은 어느 쪽이 우위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절륜했다. 행위에 천착하는 동안 그들은 일체의 지각을 상실한 채 황홀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 그들은 자세를 바꾸었다. 고신각이 한 쪽에 있는 탁자를 끌어당겨 조서영을 그 위에 눕혔던 것이다. 이르자면 그녀는 하반신을 탁자의 아래쪽에 늘어 뜨린 상태로서 온몸을 활짝 개방하고 있었다. 고신각은 그런 그녀에게로 깊숙히 파고 들어갔다. "아아!" 조서영은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입을 딱딱 벌리며 탄식에 버금가는 신음을 흘리곤 했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몸뚱이는 성난 파도 위에 뜬 조각배처럼 마구 흔들렸다.


'완벽해! 모든 것이.' 그녀는 내심 부르짖는다. 정말로 그랬다. 이 순간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쾌락도, 향후로 맞게 될 행복도........ 그녀와 양대 잠원을 이끌어갈 믿음직한 남편인 고신각의 곁에서 밤은 말없이 깊어가고 있었다. [3] "아음........" 하품은 일신이 나른할 때 오는 현상이다. '내가 너무 무리했나?' 고신각은 곁에서 축 늘어진 채 안겨 있는 조서영을 슬쩍 건네다 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미련이 남았는지 간간이 손을 움직여 그의 몸을 이곳저곳 더듬고 있었다. 그러나 고신각은 그 이상 움직여 볼 여력이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 했다면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생각해 보니 그는 배가 고프기도 했고, 방 안에 질펀하게 남아있는 열기로 인해 무척 더웠던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그의 계산이 조서영과 달라도 한참 다르다는 얘기다. 고신각은 궁등이 걸려 있는 천장을 올려다 보며 조서영 모르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기막힌 성공이야. 비참한 꼴로 천하각처를 전전했던 내가 호구진의 양대 잠원주가 되다니.' 그는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있는 조서영을 떼어내고 싶었으나 일단은 꾹 참았다. '그 동안 수고 많았다. 하지만 네년은 필요가 없게 되었다. 얼마 간 시일을 끈 후........' 고신각은 본시 그런 위인이었다. 엄연히 주인이 따로 있던 양대 잠원을 수중에 넣을 때도 그랬거니와 조서영에 대한 처리 문제에도 그는 양심의 가책이라곤 눈꼽만치도 없었다. '이 계집만 자연스럽게 처치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내 세상이다. 젊고 예쁜 계집을 마음대로 골라 품으며 여생을 멋지게 보낼 수 있으리라.' 무릇 인간의 욕망에는 끝이 없다고들 하나 그는 여기에 더 보태 욕망의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마저 가리지 않는 극단의 예를 제시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치사하고 비열한 그의 속셈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정말 대단하군. 이젠 끝났나? 꽤 오래 기다렸다네." 착 가라앉은 그 음성에 고신각은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그 자?' 불현듯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그것은 폐포를 입고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어 불쾌하게 느껴졌던 그 사내였다. 이유는 그도 몰랐다. 단지 낮에 보았을 때도 섬뜩한 느낌을 받았었고 작금에도 낯선 음성을 듣자 그 자가 생각났다. 덜컹! 문이 열리며 서늘한 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동시에 음성의 주인인 듯한 검은 그림자가 들어섰다. '역시!' 고신각은 부지 중 몸을 떨며 황급히 이불을 끌어 당겼다. 조서영도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그의 품에 안겨 들었다. 과연 방문 앞에 우뚝 서 있는 자는 초사영이었다. 그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무심한 투로 내뱉았다. "자네의 정력은 놀랍다. 양대 잠원이 어째서 자네의 수중에 들어 갔는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대...... 대체 무슨 소릴, 넌 누....... 누구냐?" 초사영은 고신각의 말에는 대답도 않고 조서영에게 물었다. "그대는 한동안 일인이역(一人二役)을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나? 나예향이 죽은 뒤로야 해방


되었겠지만." 조서영의 안색이 일변했다. "무...... 무슨 헛소리를.......?" 초사영은 히죽 웃으며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멈춰라, 이놈!" 고신각이 고함치며 침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드러난 근육질 가슴에는 털이 수북했고, 두 다리는 강철 같았다. 그의 얼굴에 나 있는 검흔이 징그럽게 춤을 추었다. "네놈은 뭣하는 놈이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정신 없는 소리나 지껄이고 있는 게냐?" 초사영은 시선을 고신각의 사타구니로 가져갔다. "그 물건도 지금은 맥이 빠져 있군. 쯧! 계집의 비위도 정도껏 맞추어야지. 안 그런가?" 그 말에 고신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아닌 게 아니라 밤새도록 용트림했던 물건은 형편없이 늘어져 있었다. 이래저래 그는 노화가 치밀어 펄펄 뛰었다. "놈!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명년 오늘이 네놈의 제삿날인 줄 알아라." 고신각은 팔을 뻗어 침상 머리맡에 있는 검가(劍架)에서 검을 잡아챘다. 그 검은 호신용으로 늘 곁에 두던 것이었다. "아서게, 그 따위 장난감으로 뭘 하겠다는 건가?" 초사영의 침착한 응수는 오히려 고신각으로 하여금 더 참을 수가 없게 만들었다. "이놈이!" 슈욱! 제법 검을 잡아본 솜씨였다. 어느 새 검을 뽑은 그는 상대를 향해 전광석화처럼 휘둘렀다. 하지만 초사영이 허리를 가볍게 비틀자 그의 검세는 간발의 차이로 빗나가고 말았다. "쯧쯧, 검은 훌륭한데 필부가 들고 보니 별 볼일 없군." 계속되는 비아냥에 고신각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으으...... 놈!" 분통이 터졌으나 별 수 없었다. 검술도 통하지 않는 즉 그로서는 속절없이 참담한 절망의 나락을 엿보아야 했다. '이놈은 대체 누구인가? 난데없이 나타나 기껏 잡은 나의 행운을 산산조각 내놓다니.' 가장 큰 문제는 뭐니뭐니 해도 상대가 자신들의 비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거침없이 행동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우우...... 만일 이놈이 우리의 일을 폭로한다면!' 그것은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었다. 그렇게 되었다간 행운을 놓치는 건 고사하고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기에. 조서영은 아예 이불을 머리까지 푹 뒤집어 쓴 채 공포로 인해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공범(共犯)인 그녀를 힐끗 돌아본 고신각은 내심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절대 안 된다! 이대로 포기해서는.' 그는 죽기살기로 다시 일검을 맹렬하게 떨쳐냈다. 그러나 이어진 것은 초사영의 냉소였다. "쓰레기 같은 인종들!" 피잇! 그의 손이 뻗어가 검을 잡아챘다. 동시에 남은 한 손은 고신각의 가슴팍을 향해 일장을 내쳤다. 펑! "큭!" 고신각은 대번에 비명을 지르며 저만치 나가 떨어졌다. "아!"


조서영이 비명 소리를 듣더니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이때에 그녀의 안색은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어찌 이런 일이.......!' 하지만 거기까지는 아무 것도 아니라 할 수 있었다. "아악!" 조서영은 기겁을 하여 비명을 질렀다. 이는 쓰러져 있는 고신각의 몸과 자신의 몸에 똑같이 푸른 반점이 돋아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우...... 우리에게 무슨 짓을?" 초사영이 기이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 말에 답했다. "놀랄 것 없다. 네가 한 짓을 흉내냈을 뿐이니까." "그럼...... 독?" 조서영은 말하다 말고 실수했다 싶었는지 경황 중에도 얼른 제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후후...... 맞다. 원래 너희 두 사람은 근본도 없는 떠돌이였다. 그러던 중 조서영, 너는 우연히 조잠원의 전 주인인 소로(蘇老)의 눈에 들어 그의 후처가 되었지. 그 후로는 욕심이 생겼다. 호구진의 두 잠가를 손아귀에 넣겠다는." "마...... 말도 안 된다!" 충격을 받아 조서영의 안면은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도 초사영은 무감각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너는 독을 썼다. 소로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그를 독살한 것이지." "아니야! 난 그를 죽이지 않았어. 그는 숙환으로 죽었다." "오호, 바로 그거야. 너는 단번에 다량의 독을 먹이면 가장 먼저 의심을 받게 될 테니까 오랜 병을 가장하여 그에게 매일매일 미량의 독을 먹게 하여 중독시켰다." "듣기 싫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뻔뻔하군. 하긴 네 그 뻔뻔함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병사한 것으로 믿게 되었지. 그러나 나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무덤에서 나온 분골(分骨)이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거든? 미안하다만 난 그의 뼈조각을 가지고 있다." "우우...... 그렇다면 무덤 속에서?" 초사영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뭘 그리 놀라느냐? 별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그는 태연하게 말을 계속했다. "어쨌든 그렇게 하여 하나의 잠가를 움켜쥔 너는 다음 목표인 고잠가로 눈을 돌렸다. 저 작자와 손을 잡고 말이다." [4] 초사영은 고신각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고신각, 너는 처음부터 조서영의 계획에 따라 고잠원에 들어갔다. 조서영의 부탁이라면 고잠가에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겠지. 두 잠가의 가주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으니까. 너는 그곳에서 나예향을 죽였다." "개소리 마라! 그녀는 소천호, 그놈이 죽였다. 그것은 엄연히 관부에서 조사한 바에 의한 결론이다." 고신각이 악에 바친 듯이 외쳐 대자 초사영은 짐짓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예향은 네가 죽였다. 소천호가 죽였다고 알려지기 이전에 그녀는 벌써 죽은 사람이었다." 고신각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부인했다. "집어 치워라! 어디서 되지도 않는 말을 하느냐?" 그와 무관하게 초사영의 음성은 조용하게 이어졌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도 나는 안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예향이 죽고 난 뒤에는 조서영이 그녀의 대역을


했었지." "우우.......!" "너희들의 각본은 감탄스러우리만큼 완벽했다. 고신각, 너는 성격이 유별난 나예향을 일찌감치 제거하고 그녀가 살아있는 것으로 가장해 결혼까지 했다. 물론 당시의 나예향은 조서영이었지. 문제는 언제까지고 그녀를 살아 있게 할 수 없다는데 있었다. 조서영의 일인이역에도 한계가 있었을 테니까." 완전히 질려버린 것일까? 이때부터 고신각과 조서영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초사영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결과적으로 너희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또 한 사람을 죽였다. 그는 나예향을 죽인 범인으로 지목된 소천호다. 너무도 순진하여 함정에 빠뜨리기에는 적격이었지." 초사영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 사건에는 이런 가정이 성립된다. 즉 소천호는 본시 나예향에게 은혜를 입은 자로 그녀의 부름을 받자 곧장 달려갔다. 그런데 그 후로 그녀는 자취를 감추었고, 그 바람에 그에게는 억울하게도 살인의 누명이 씌워졌다. 아닌가?" 그는 툴툴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누구고 다 그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지. 나예향이 소천호를 강가로 불렀다는데 그로부터 그녀는 실종되었고, 그녀의 시신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관부에서는 소천호가 그녀를 죽여 강물에 던져 버렸다는 판정을 내리게 되었고." 초사영은 차가운 눈으로 두 남녀를 쓸어 보았다. "너희 두 사람은 그 끝에 서로 합쳐졌다. 약간 뜸을 들여 소문을 잠재우려 했지만 그것까지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 후후...... 그래도 아무 상관 없었다. 재력이 뒷받침 되다 보니 대세가 너희들 편으로 기울어 있었으니까." 그 말이 끝났을 때, 그는 느닷없는 질문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 일이 네놈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냐?" 고신각은 기를 쓰고 있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고자 달려든다지 않는가? 초사영은 큭큭 웃었다. "관계라...... 그런 건 없다. 단지 난 간특한 수를 쓰는 자들을 천성적으로 혐오한다." "네가 뭔데 그 따위 소릴!" "옳지 못한 일은 누구고 나서서 바로 잡아야 한다. 그래야만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게 되어 있지. 이건 내 신념이다." "염병할 놈!" "닥쳐라. 너희들의 그 욕심 때문에 두 남매가 피해를 입었다. 그들의 이름은 홍화, 아니 본래는 소아홍(蘇娥紅)과 소미백이었지. 그들은 어린 나이에 양부를 잃게 되었고, 소아홍의 경우에는 먹고 살기 위해 사창가를 전전해야만 했다." 조서영이 독이 올라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가 나예향으로 변장을 했다고 그랬는데 무엇으로 그 사실을 증명할 거죠?" "쯧! 끝까지 요망한 계집이로고. 네가 물증 제시를 요구하는 모양이다만 거기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 너라는 인간을 잘 알고 있는 한 인물이 있으니까. 그 자는 너의 취향을 비롯하여 네가 어떤 노래를 즐겨 부르는지도 훤히 안다." "그, 그게 누구죠?" "몰라도 된다." 그 말에 이번에는 고신각이 기세를 올렸다. "놈! 듣고 보니 이렇다할 증거도 없으면서 우리를 모함했었구나. 경을 치기 전에 어서 해약이나 내놓고 썩 사라져라." 초사영은 짐짓 안되었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너는 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느냐? 내가 증인을 대지 않는 것은 억지로 꾸며대서가 아니라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왜 너희들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하지?" "이...... 이놈이!" "진정해라. 어차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해약은 없어." "우우...... 그러고 보니 이 놈이 정말로 우리를 죽이려고?" "맞다. 후후후........" 이때쯤 고신각과 조서영의 몸은 온통 푸른 반점으로 뒤덮혀 있었다. 그대로 두면 죽음이란 당연한 결과였다. "너희들이 소로를 죽일 때 어떤 독을 썼는지는 조사해 보지도 않았다. 나도 독에 대해서라면 약간의 조예가 있는지라 효과가 탁월한 것을 골라 썼을 따름이다." "으으으.......!" 사색이 된 그들에게 초사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 독은 일단 몸에 깊숙이 침투하게 되면 피가 마를 뿐더러 뼈를 갉아먹히는 듯한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 이름하여 흡삭부골시독(吸削腐骨屍毒)이라고 하는데, 혹시 들어 보았나?" "흡....... 흡삭부골시독.......!" 그들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흡삭부골시독이란 백 년 전의 인물인 독마(毒魔) 천황혈독(天荒血毒)이 즐겨 사용하던 독이었다. 말마따나 피를 말리다가 힘줄을 오무라뜨리고 뼈까지도 삭아내리게 하는 전설의 독중지독(毒中之毒)이다. 그러다 종내에는 인간을 한줌의 혈수(血水)로 화하게 만든다던가? 초사영이 물었다. "어떤가? 서서히 효력을 발휘할 때가 되었거늘." 두 사람 중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상대의 얼굴이 검게 타들어가는 것을 보며 넋을 잃었다. 설마 했건만 죽음은 그들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초사영은 비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후후......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대가를 치뤄야 하는 법이다. 저승에 가서라도 소로와 소천호에게 사과해라." "아....... 안돼!" 고신각과 조서영은 동시에 태도를 바꾸어 애원했다. "제발 살려 주시오!" "우리를 너무 탓하지 말아요. 잘못인 줄은 알지만 그저 한 번쯤 행복해지고 싶어서 한 짓일 뿐이에요." 초사영의 응수는 냉담하기 그지 없었다. "그 행복은 너희 몫이 아니었다.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줄 것인즉 그만 조용히 사라져다오." 말을 마치자 그는 몸을 돌렸다. "이놈! 이렇게 우릴 두고 가서는 안 된다. 어서 해독제를 내 놓아라. 어서!" 고신각이 신형을 날려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발작적으로 부르짖었다. 그러나 초사영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훗, 해약은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비켜라." 퍽! 그의 발길이 고신각의 녹아 내리기 시작한 몸뚱이를 무자비하게 거꾸러뜨렸다. 그 광경을 본 조서영은 눈만 찢어져라 부릅뜰 뿐 감히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 했다. "안녕! 참으로 아름다운 신혼 초야다." "악! 가지 마, 안돼―!" 휘익! 들어올 때처럼 초사영은 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져 버렸다. 그 직후, 두 사람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 들었다. "으으....... 내 손, 내 얼굴....... 으악!" "안돼....... 부귀영화를 두고....... 안돼.......!" 고신각은 발광을 하듯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가운데 온몸이 녹아 내리고 있었고, 조서영은 혈수로 변해가는 자신을 훑어 보다가 침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우당탕! "아아아악!" 그녀는 찢어질 듯한 비명과 함께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날, 마을 사람들은 볼 수 있었다. 신혼 초야를 맞아 한창 단꿈에 젖어 있어야 할 고신각과 조서영의 처참한 최후를. 특기할 것은 조서영이 숨을 거두기 직전 미친 듯 웃어제끼며 나예향은 자신들이 죽였노라고 외쳤다는 사실이었다. 그순간의 그녀는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보아줄 수가 없었다. 문자 그대로 혈녀(血女)가 되어 있었으므로. 또한 그날 이후로 신제하에서 초사영이라는 인물의 모습도 더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그의 행방을 궁금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도 일 년 전인가 흘러 들어온 떠돌이로서 그가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길 일이란 없었기에. 그에 대한 기억을 가진 자들은 더러 있었다. ― 괴인(怪人). 왜냐하면 그는 어떤 때는 미친사람처럼 나설 데 안 나설 데 가리지 않고 설치다가, 어떤 때는 철저하리만큼 무심(無心)하게 돌변하기도 하는 괴상한 인간형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항상 봉두난발로 얼굴을 가린 채 폐포를 걸치고 다녀 기피대상이었던 그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어떤 순간에고 내키는대로 행동하되, 목적했던 바만은 죽기를 불사하고 관철시킨다는 점이었다. 그 목적이란 것이 객관적으로 보아 타당성이 있건 말건. 그 외에도 사라진 자는 또 있었다. 역자심이다. 초사영을 대장으로 삼고 무작정 따르던 그 거구의 인간도 신제하에서 씻은 듯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이때에 홍등가의 싸구려 창녀였던 홍화나 그의 동생인 소미백도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지만 그 두 사람은 곧 다른 곳에서 신제하 사람들의 눈에 띄곤 했다. 다만 그들 남매는 여지껏 봐 오던 모습과는 너무도 달라져 있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왜 아니겠는가? 비천하기 짝이 없던 그녀가 여엿한 상류층의 여인이 되어 있으니. 더구나 그녀가 가지고 있는 신분은 놀라웠다. 믿을 수 없게도 호구진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고잠원과 조잠원, 두 잠가의 원주가 그녀였던 것이다. 제 3 장 그가 추구하는 바는…… [1] 노산(盧山). 하남성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 산은 위세도 당당하게 북쪽으로는 북천문산(北天門山)을 이고 있으며, 남(南)으로는 남천문산(南天門山)을 거느리고 있다. 이른바 태고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산으로 유명했는데 주봉인 향로봉(香爐峰)을 위시하여 주위에 늘어선 노산십팔봉(爐山十八峰)이 모두 그러했다. 노산이라 하면 빼어난 경치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수백 년 역사를 지닌


유애사(遺愛寺)였다. 유애사를 향해 산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이곳이 무릉(武陵)이 아닌가고 부르짖을 만큼 풍광(風光)은 더욱 수려하다. 때문에 이곳을 흐르는 계류는 노계(盧溪)라는 본래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상 무릉계(武陵溪)로 불리우기도 한다. 천하오계(天下五溪) 중 하나로 꼽힌다는 노계의 물은 한여름에도 얼음처럼 차가워 입산객들에게 시원함을 안겨 준다. 어디 그 뿐인가? 겨울이 되면 의례 눈부신 빙곡(氷谷)을 형성하여 천하오계 중에서도 수좌를 차지하곤 한다. 계절은 어느덧 초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노계 주변의 수림에도 단풍이 들어 온갖 기경(奇景)들이 사방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우르르르.......! 노계는 일명 노룡폭(努龍瀑)이라는 폭포를 품고 있었다. 그 곳에 이르면 장엄한 물줄기의 소요도 감상할 수 있다. 노룡폭은 하나의 폭포를 이르는 것이 아니라 중앙부의 굵은 물줄기를 포함한 여러 개의 폭(瀑)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하여 노룡폭의 규모는 너비만도 무려 수십 장에 달했다. 초사영은 그 여러 개의 폭포 중 하나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세찬 물줄기가 그의 등판에 쉴새없이 내리 꽂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신에 부딪쳐오는 느낌보다는 줄곧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인간을 왜소하게 만드는, 대자연에 대한 경외감이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는 거대한 규모의 동굴이 뚫려 있었다. 이런 것을 일컬어 허수동(虛水洞)이라고 한다. '과연 자연의 힘이 미치는 영역은 어디까지일까? 인간의 머리로는 저런 것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지?' 폭포의 뒤편에 생성되어 있는 그 동굴은 실제로도 감탄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폭포수를 가로지를 수 있어야 출입이 가능한 허수동은 크기가 상당했다. 동굴 입구의 직경만도 십여 장, 내부의 폭은 십오 장 쯤 되어 그가 행동하는데 아무런 지장도 주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비단 그 뿐이 아니었다. 안으로 깊이 접어 들게 되자 허수동은 더욱 더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똑...... 똑.......! 동굴 안의 습기가 응집되어 마침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천정에는 긴 세월에 걸쳐 한 방울씩 떨어진 물방울의 조화로 수백 개에 달하는 종유석들이 매달려 있었고, 그 중앙으로는 신비한 웅덩이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 웅덩이에서 솟아오르는 빛이 종유석에 반사되어 휘황찬란한 광휘를 사위에 뿌리고 있기도 했다. 이는 어찌 보면 기현상에 속했다. 어찌 빛이 존재하지 않는 동굴에서 연못의 물이 제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단 말인가? 초사영은 무심히 그곳을 지나쳐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연못에서 솟아오르는 빛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저 웅덩이의 바닥에는 백수석(白壽石)이 깔려 있지. 백수석은 불로장생을 바라는 자들에게는 염원의 결정체나 다름이 없다. 범인(凡人)이 그 위에서 침식을 하게 되면 무병장수를, 무림인이 그리 행하면 내공이 급증하는 효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초사영은 시간이 날 때마다 스스로 백수연(白水淵)이라 이름 붙인 예의 연못에 들어가 목욕을 즐기곤 했다. 백수석의 성분이 용해된 그 물은 백정초수(白精草水)라 하여 체내의 찌꺼기를 깨끗이 정화시켜 주는


효험이 있었다. 무(武)의 근본 목적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이롭게 하는 데 있어 몸과 마음에 걸친 혼탁한 기를 배제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궁극적으로는 무극무의심(無極無意心), 즉 무인들의 꿈이자 무의 최고봉인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초사영은 하루도 빠짐없이 백정초수에 몸을 담그며 정(精), 기(氣), 신(身)을 가다듬고 있었다. 이것은 무극무의심의 경지에 이르는 초입(初入)의 단계였다. 잠시 후. 그가 당도한 곳은 입구가 좁은 또 하나의 동굴이었다. 휘잉―! 폭이 갑작스럽게 좁아져서일까? 동굴의 안쪽으로부터 한 줄기 찬 바람이 불어왔다. 그 풍속이란 보통사람 같아서는 한 발자국쯤 뒤로 밀려날 정도의 것이었다. 초사영은 그것에도 익숙해져 있는 듯 조금도 개의치 않고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윽고 그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장방형의 석실이었다. 석실의 사방 벽에는 축축한 습기에도 불구하고 횃불이 제법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천정에는 오리알 만한 야명주가 한 개 박혀 있어 나름대로 어둠을 쫓아주고 있었다. 초사영은 가시적인 것들에는 일별도 하지 않았다. 기실 그의 시야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눈에 익은 경물들에도 관념을 부여할 만큼 감성이 풍부한 그였지만 한 존재가 그의 사고를 일시에 소멸시킨다. 그의 눈길과 마음을 다 함께 맹렬하게 잡아당기고 있는 대상은 석실 한가운데 놓인 돌침상 위의 노인이었다. 그는 노인에게 다가가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불렀다. "할아버님." 인기척을 느낀 노인이 초사영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중도에서 비스듬히 멈춘다. "쿨룩! 쿨룩...... 쿨룩.......!" 초사영은 심히 안타까운 표정이 되어 만류했다. "그냥 누워 계십시오." 굳이 기침을 토해내지 않더라도 안색이 피폐해진 정도로 보아 노인이 병중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가 있었다. "쿨룩...... 왔...... 느냐?" 초사영은 노인의 앞에 이르러 가지런히 손을 모았다. "네,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그래, 잘 왔다." 흐뭇한 미소를 짓는 노인의 눈가에는 반가움과 더불어 따뜻한 기운이 서렸다. 하지만 그 모두가 차마 그대로는 놓고 볼 수가 없는 종류의 것들이었다. 노인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처참하게 뭉그러져 있는 상태였다. 또한 여기저기서 진물이 스며나오고 있었으며 눈에서는 붉은 액(液)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쿨룩...... 쿨룩.......!" 자제하려 무진 애를 쓰는 듯 했으나 노인의 기침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지친 기색으로 다시 누웠다. 초사영은 입술을 질겅 씹더니 묵묵히 침상으로 다가가 노인의 손목을 잡았다. '전보다 더 건강이 나빠지셨다.' 노인의 맥은 희미한 박동만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현상은 얼굴과 마찬가지로 그의


전신에 나 있는 숱한 상흔들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옷으로 감추고 있어서 그렇지, 실상 노인의 몸에는 검, 도, 부(斧=도끼), 삭(索=쇠사슬), 겸(鎌=낫) 등 각종 병기의 흔적들이 채 아물지 않고 무수히 자리잡고 있었다. 여태까지 살아서 버티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으로 느껴질만큼 끔찍스러운 상처가 대부분이었다. "놈! 감히 이 할애비를 동정하는 것이냐? 괘씸한 녀석 같으니라구. 으음........" 노인은 초사영의 눈빛에서 무엇을 읽어냈던지 짐짓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힘에 부쳐 고통스런 신음으로 마감되어버린 그 말에 초사영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닙니다. 소손이 어찌 감히." 노인의 눈에서는 여전히 붉으스름한 액체가 흘러 내리고 있었지만 그 눈빛만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동안 어디를 갔다 왔느냐?" 기력과는 별개로 그의 음성에는 기개가 담겨 있었다. 초사영은 의외로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은 짚히는 바가 있는지 더 묻지 않고 낮게 탄식을 불어냈다. "으음...... 아직도 네 생각에는 변함이 없나 보구나." 그의 음성에서는 장구한 세월을 거쳐 깨달음에 이른 자만이 지닐 법한 연륜이 묻어 나왔다. 초사영은 내심을 들키자 눈길을 아래로 떨구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노인을 정시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강렬하게 타오르는 의지를 품고 있었다. "소손은 절대 그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또...... 그 소리냐?" 노인의 힐난에도 그의 기세는 잦아들지 않았다. "그들은 비겁합니다. 겉으로는 도의(道義)를 내세우면서 그들 스스로가 그것을 저버렸습니다. 그런 자들을 묵과하느니 차라리 소손이 이 자리에서 자결을 하고 말겠습니다." 초사영의 눈은 종유석에 반사되는 야명주의 빛을 받아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노인 역시 완강했다. "안 된다. 그래서는......." "인간의 가치는 그 쓰임새에 있다고 소손은 생각합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쓸모가 없던 자일지라도 적어도 죽어선 흙으로 되돌아가 만물을 소생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예외입니다. 타를 위해서는 머리카락 한 올도 내주지 못하는 자들이 오늘날까지도 오직 욕망을 달성하고자 더러운 목숨을 연명해 가고 있습니다." "사영아, 어찌 네가 그렇듯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느냐?" "소손은 있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자들이 존재하는 한 평화를 구가하려는 노력이나 희생은 단지 헛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구를 위해, 어떤 자들을 안심시켜 주기 위해 평화를 지킨단 말입니까?" "아아! 대체 너는........" [2] 초사영은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잘라 말했다. "저는 불원간 그들을 처단할 것입니다." 그의 결심은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선에 도달해 있어 조부인 노인도 손자를 설득시킬만한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초사영보다 훨씬 오래 살았으니 노인의 머릿속에는 의당 진리랄 수 있는 어휘들이 무수히 담겨 있었다. 그러나 개중에서 어떤 말도 형상화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봐야 손자에게는 먹혀들지 않을 게 뻔했으므로. '허어!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각자 쌓은 업(業)은 결과적으로 그 자신에게 돌아가는 법이거늘.'


노인은 너무도 당연한 그 진리마저 설파하지 못한다. 그것은 일말의 자책 때문이었다. 그가 가장 괴롭게 여기고 있는 것은 초사영의 면전에 누워있는 자신의 몰골이었다. '이 아이는 필경 내 모습을 보며 원한을 더욱 깊게 되새기고 있을 것이다. 분명 이건 아닌데.' 노인은 답답한 심정에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에게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기회가 수없이 많았지만 한 가지 이유가 있어 현재까지 명줄을 근근히 이어왔다. 굳이 핑계라면 핑계가 될 수도 있겠으나 그로서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을 남겨 두고는 도저히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알려 주어야 하는데....... 어찌해야 납득을 시킬 수가 있을까?' 노인은 초사영의 왜곡된 견해가 그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말릴 수 없는 이유는 마음 한구석에서 이율배반적으로 동요를 자극하는 목소리 탓인지도 몰랐다. 노인은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허허...... 어쩌면 나도 이 애의 관념에 은근히 동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실상 그의 내면에도 오래 전부터 초사영과 동류인 핏빛 상처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 따라서 그는 원한 따위는 잊어야 한다고 누차 강조해 오면서도 거기에 반발하는 손자에게서 오히려 일루의 희망을 엿보기도 했었던 것이다. 그래도 노인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사영아, 그리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시대는 이미 지났고, 또 되돌이켜 본들 치죄는 온당치 못하다.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수 있거니와........" 초사영이 그의 말을 중도에서 가로챘다. "할아버님." "말해 보아라." "말씀하신 뜻은 압니다만 아무리 그들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을 해 보아도 소손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들이 제멋대로 결정을 내렸듯 저도 그렇게 하면 그 뿐입니다. 설사 그들처럼 저도 후대의 누군가에게 치죄를 당한대도 말입니다." "쿨럭...... 쿨럭.......!" 노인은 괴로운 듯 가슴을 잡아뜯으며 기침을 토해냈다. 그 바람에 그의 입에서는 검붉은 선지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초사영의 눈빛은 더욱 어둡게 잠겨 들었다. 그는 얼른 조부를 일으켜 세우고는 침상 곁에 놓인 수건을 집어 조심스레 입 가장자리를 닦아 주었다. "괜찮아, 아직은 나 혼자 할 수 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허어! 괜찮다니까." 잠시의 실랑이 끝에 노인의 얼굴에는 약간의 화색이 돌았다. 응혈을 토해내자 차라리 숨통이 트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초사영은 안면에서 근심을 털어내지 못했다. '이대로 돌아가시려는 건가?' 노인이 그의 기색을 눈치채고는 툴툴 웃었다. "쯧, 젊은 녀석이 표정하고는........" 초사영은 표정을 바꾸어 빙긋 웃으며 노인의 몸을 최대한 편한 자세로 눕혀 주었다. "필요한 것은 없으십니까?" "음, 되었다."


초사영은 무거운 분위기가 싫어 짐짓 농을 건넸다. "후후...... 그러게 좀 자중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젊은 날에 힘을 아끼셨으면 지금도 기력이 좋으셨을 텐데." "무슨 소리냐?" 의아해하는 노인에게 그는 말했다. "그렇게 시치미 떼시깁니까? 왜, 할아버님께서 늘상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한창 때에는 첩을 하나 둘도 아니고 무려 열 명이나 거느리셨노라고." "흐흐....... 그 얘기였느냐?" 노인은 그제서야 말뜻을 알아듣고는 괴이한 웃음을 보였다. "음, 나한테도 그런 때가 있었지." "할머님께서 얼마나 애를 태우셨을지 짐작이 갑니다. 바람둥이 부군을 모시느라 매일 독수공방을........" "예끼, 이놈!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노인은 잦아드는 음성이기는 하나 한마디 야단을 치더니 피곤한 듯 눈을 스르르 내리 감았다. "어서 일어 나십시오. 소손은 할아버님께서 여인을 수십 명쯤 거느리셔도 아무 불평도 하지 않을 테니까요." "한 번 노력해 보마." 노인은 화려했던 지난 날을 회상하는 듯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드리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초사영은 웃고 있으되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와 견디기 힘들 지경이었다. '정말로 할아버님께서 이전의 기력을 되찾으실 수만 있다면 내 삶도 방향을 달리 잡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눈에서는 재삼 불꽃이 타올랐다. 그 상태로 그는 손을 뻗어 노인의 전신을 부드럽게 안마해 주었다. 노인은 곧 낮은 숨을 토해내며 깊은 수면으로 빠져들어 갔다. '할아버님........' 초사영은 이후로도 노인의 잠든 얼굴을 지켜 보았다. 한참 후에야 그는 몸을 돌렸고, 어느 틈엔지 노인의 몸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은 불끈 움켜 쥐어져 있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할아버님. 어떻게 생각하시던 소손은 위대한 가문의 신화(神話)를 재건할 것입니다." 슷! 초사영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환영처럼 사라졌다. 그가 없는 석실은 그대로 정적 속에 잠겨 들었다. 역자심. 이 자는 천하에서 가장 심성이 고울지는 모르나 머리가 약간 모자라는 위인이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에게도 돌이나 얻어맞고 다니는 것이 그의 일상 생활이었으나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그저 아이들이 자신을 좋아해서 그런다고 제 편한대로 착각하는 그였다. 그가 초사영을 만난 것은 약 육 개월 전이었다. 초사영은 그날 주점에서 밤새 술을 마셔 만취 상태에 이르러 있었고, 역자심은 무심히 그 곁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초사영은 그를 힐끗 돌아보며 내뱉았다. "쯧, 머리통은 쓸데없이 달고 있는 놈!" 역자심은 그 말을 듣자 몇 번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자신은 해당이 없다고 여겼는지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를 보며 초사영은 픽 웃었다. "머리만 나쁜 게 아니라 귀도 맛이 갔군." 역자심은 그제서야 주점의 난간에서 초사영을 발견하고는 눈을 껌벅이며 다가왔다.


"너, 방금 나보고 한 소리냐?" "그렇다." "내가 바보라는 거냐?" "ㅋ! 그럼 아니냐?" "물론 아니지." 초사영은 대소했다. "하하하...... 하긴 바보가 자신이 바보인 줄을 알 리가 없지." 역자심의 빗자루 눈썹이 홱 곤두섰다. "내가 왜 바보냐? 난 힘도 세고........" "말 잘했다. 너처럼 덩치 좋고 기운이 센 놈이 이런 곳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바보라는 게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알아 듣기 쉽게 해라." "어려운 말이 아니다. 모름지기 너같은 놈은 천하를 구하기 위해 힘을 써야 되는 것이다." "천하를 구해, 내가?" "왜, 싫으냐?" "누...... 누가 싫다고 했느냐?" 역자심은 얼른 갖다 붙이더니 자못 심각하게 말을 이었다. "남들이 그 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던데." 초사영은 쿡쿡 웃었다. "내가 언제 아무나 하는 거라고 했느냐? 너처럼 계산이 밝지 못하고 덜 떨어진 놈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그랬지. 영리한 놈들은 세상을 위해 제 몸을 던지지 않는다." "글쎄, 사람들이 나보고 덜 떨어졌다고는 했지만........" "그럼 된 거다. 그런 놈들이야말로 혼탁한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 수가 있지. 본시 영웅이란 다 멍청한 작자들이다." "정말?" 역자심은 어린애처럼 눈을 빛냈다. 그에 반해 초사영은 게슴츠레하게 풀린 눈으로 계속 주절거렸다. "내가 무엇이 답답해 널 상대로 거짓말을 하겠느냐?" 역자심이 물었다. "넌 똑똑하냐?" "아니, 나도 실은 너처럼 바보다." "그러면서 어떻게 나보다 많은 걸 알고 있지? 내가 보기에는 꽤 똑똑할 것 같은데?" 초사영은 또 웃었다. "크큭! 네가 몰라서 그렇지, 실상 바보와 영리한 자는 백지 한 장 차이다. 난 멍청해지고 싶어 안달이 난 놈이고." "나는 네가 뭔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 듣겠다." "못 알아 들어도 된다. 전부 쓸데없는 소리니까. 단, 세상을 구하는 일에 동참을 하겠다고만 해라." "너도 그걸 하려고?" "그래." 역자심은 환하게 얼굴을 펴며 말했다. "멋있다! 나 혼자서는 자신이 없지만 너하고 라면 웬지 잘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음, 생각 잘 했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뭔데?" "앞으로 나를 대장으로 모셔라." "왜?" "내키지 않으면 관두고."


"아, 아니다! 넌 대장이야." 그날 이후 역자심은 정말로 초사영을 대장으로 섬겼으며, 지금까지도 그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대장과의 만남을 떠올리면 늘 자부심을 느끼곤 한다. 그것은 세상을 구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근사한 일을 하고 있다는 긍지 때문이었다. 역자심은 문고리를 힘껏 잡아 당겼다. 끼이익! [3] 허름한 모옥이다. 지붕을 짚으로 엮어 만든 이런 집은 통상 가난한 자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어느 지역에서나 흔히 찾아 볼 수 있으며 구조도 지극히 단조롭고 평범하게 마련이다. '흠!' 역자심은 배에 힘을 잔뜩 주고 모옥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눈에 우선적으로 띄인 것은 벽에 걸려 있는 몇 점의 싸구려 그림들이었다. 한쪽 귀퉁이에는 초라한 나무 침상이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는 한 사내가 누워 있었다. 중년쯤 되어 보이며 꾀죄죄한 옷차림을 한 그 사내는 피골이 상접했다 싶을 만큼 바싹 말라 있었다. 그는 반쯤 뜬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척도 없이 들어선 낯선 방문객을 보자 그는 비로소 반응을 보였다. "당....... 당신은 누구요?" 그의 물음에 역자심은 헤벌쭉 웃어 보였다. "역자심." 사내는 고개를 갸우뚱 한다. '역자심?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 대체 무슨 일로 나를 찾아 왔지?' 염두를 굴려 보아도 상대에 대한 기억은 없다. 또한 제 집처럼 허락도 구하지 않고 불쑥 들어와 역자심이라는 이름 하나만을 대는 덩치 큰 위인이 그로서는 달갑지 않았다. "무슨 일이오?" 이어지는 그의 음성에는 당연히 경계심이 묻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자심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왔소. 그러니 당신은 나를 대단히 반가워해야 하오." 그의 말투는 어눌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래도 상당한 훈련을 거친 것이었다. 적어도 예를 갖추어 상황에 걸맞는 표현은 하고 있으니 말이다. 반면에 사내는 인상을 구겼다. 대충 판단해 보아도 눈앞의 멍청해 뵈는 자에게 도움 받을 일이란 없을 듯 했기에. "반가워하고, 안 하고는 내 마음이오. 당신은 어서 이곳에 온 이유나 말하시오." "당신 이름이 석문순(石文淳) 맞소?" 중년인은 움찔하여 역자심을 올려다 보았다. '이 자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그의 음성이 한결 고조되었다. "당신 누구야?" 역자심은 묻는 말에는 대답도 않고 갑자기 안색을 굳혔다. "내가 알기로 당신은 어떤 사람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소. 안 그렇소?" '어라? 이건 또 뭔 소리야?' 석문순의 안면 근육이 제멋대로 씰룩였다. '필경 나를 알고 오기는 한 것 같은데.' 그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실제로 그는 한 사람에게 씻지 못할 원한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어디서 떠벌린 적이 없어 그 일에 대해 아는 자는 당사자들을 빼고는 전무하다고 보아야 했다. "그래서? 어디 계속해 보시지." 역자심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탄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의 이름은 풍령패도(風玲覇刀) 사도린(査刀燐)이오. 당신의 부인을 강제로 데려간 위인이지. 이것도 맞소?" 석문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자심이 말한 바는 사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네놈은 누구냐?" 그의 음성은 은근한 살기마저 담고 있었다. 이는 역자심이 사도린과 한 패거리가 아닐까고 의심이 든 때문이었다. 석문순은 심중의 말을 쏟아냈다. "크크...... 사도린, 그놈이 나를 죽이라고 널 보냈더냐?" "아니다, 나는 그가 보내지 않았다. 우리 대장........" 역자심은 대화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본색까지 드러내며 급급히 변명했으나 그의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석문순은 다짜고짜로 침상 가를 뒤져 호신검을 빼 들었다. 츳! "악독한 놈! 잠연(潛娟)을 내게서 빼앗아 가고도 모자라 이제는 후환이 두려워 나까지 죽이려고? 어림없다!" "억! 너 이러면 못쓴다." 휘잉―! 기세는 제법 대단했지만 석문순은 쇠약해져 있는 데다가 그때까지 무공의 무(武)자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가 내지른 일 검은 역자심을 베지 못했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칼날에 베어져 나간 것이라야 겨우 옷자락 한 겹에 불과했다. 그나마 역자심이 조금만 민첩했더라면 능히 피할 수 있었겠지만. "빌어먹을! 내 새 옷이 망가져 버렸다." 역자심은 노화를 터뜨리며 석문순의 손을 움켜 잡았다. 그의 계산 상으로도 최소한 상대의 어설픈 칼솜씨에 목숨을 잃게 되는 일이란 없을 듯 했던 것이다. "놔! 놓으란 말이다." 석문순은 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버텼다. 그는 상대가 살의를 품고 온 자객으로 여겨진 바, 칼을 내주면 자신은 끝장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 밀고 당기는 우스꽝스러운 싸움은 금세 판가름이 났다. 무공을 모르기는 양자가 마찬가지인지라 힘겨루기가 되어 버린즉 석문순이 역자심을 당해낼 리가 없었다. "말을 들으라니까!" "윽!" 역자심은 기어이 석문순의 손목을 비틀어 칼을 낚아채는데 성공했다. 그러고는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더니 품위(?)를 회복한 듯 점잖게 말했다. "자, 이것을 받으시오. 여기에 당신이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이 자세히 적혀 있소." '뭐 이런 별종이 다 있지?' 이래저래 믿을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힌 석문순이 눈알을 번뜩이며 물었다. "목적이 뭐지? 왜 내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거냐?"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역자심은 할 말을 잃어 잠시 주저하다 덧붙였다. "험! 그런 건 알 필요 없소. 내게 이 일을 부탁하신 분이 말하기를 당신은 꼭 지시대로 따를 거라고 하셨소."


"음........" 석문순은 침음성을 흘리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누구냐?" 역자심은 어깨를 쫙 펴며 당당하게 대꾸했다. "아주 훌륭하신 분이오. 이제까지 어떤 일이고 그분 말대로 되지 않은 일은 없소." 석문순은 미간을 찌푸렸다. '끙! 이놈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그러면서도 그는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놈의 배후에 있는 자가 사도린과 우호적인 관계가 아닌 것만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의 눈알이 또 다른 의미로 반짝 빛났다. '무슨 연유에서건 나를 통해 사도린을 제거하고자 하는 모양인데, 이것이야말로 내게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어차피 나 혼자서는 복수란 어림도 없었으니.' 그러나 선뜻 응할 수만은 없었다.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위험 부담이 큰 일을 진행시킨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모한 짓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는 내심을 감추고 짐짓 진지한 투로 말했다. "흠, 자네를 보내신 분이 훌륭하다는 건 나도 인정하겠네. 보아하니 뜻이 있어 나같은 자를 도우시는가 본데........" 석문순은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렸고, 이에 역자심이 제꺼덕 걸려 들었다. "맞소, 그분은 그런 분이오." 신이 나서 히죽이는 그에게 석문순이 물었다. "그분의 존함을 알려 주게. 그래야 후에 감사의 인사라도 할 게 아닌가?" "좋소. 그분은.......!" '멍청한 놈!' 석문순의 입가에 조소가 어리는 것도 모르는 채 역자심은 주의를 한답시고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초사영이라고 하오." [4] 풍령패도 사도린. 무림사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름이다. 그가 남긴 불멸의 전설이 있으니, 그것은 백팔십 근의 풍령도(風玲刀)로 펼치는 혈풍참령도(血風斬靈刀)였다. ― 스스로 강자라 여기는 자, 혈풍참령도를 만나지 마라. ― 자신을 불괴지신(不壞之身)이라 여기는 자도 혈풍참령도만은 피하는 게 신상에 이롭다. 항간에 이런 경구가 나돌 정도로 그는 유명했다. 약관에 출도하여 숱한 무(武)의 신화를 만들어 냈다던가? 풍령패도 사도린의 앞에서는 적어도 도(刀)에 관해 논하지 못한다. 강자를 자처하는 자들의 살을 가르고, 강철 같은 육신을 자랑하는 자들의 뼈를 갈랐다는 그의 도법은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라 칭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따라서 그도 이제 나이가 들었건만 그의 명성만은 아직도 사람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풍령애(風靈崖). 강소성(江蘇城) 남단의 가령산(佳領山)에 위치한 절곡이다. 사시사철 수려한 기경을 연출해내는 풍령애는 본래부터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사도린이 말년에 은거하게 되자 더욱 명소가 되어, 언제고 무림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최근 들어 며칠 째인가 무림인들의 출입은 한층 더 잦아졌으며 그 숫자도 이전에 비해 훨씬 늘어나 있었다. 오늘은 그의 회갑연(回甲宴)이 있는 날이다. 아울러 정식으로 무림 은퇴를 선포하는 날이기도 했는데, 그가 남긴 업적에 비추어 볼 때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는 무림인들의 방문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중 태반이 과거 그에게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은혜를 입은 자들로써 그를 무척이나 흠모하고 있었다. 물론 전부가 그렇지는 않았다. 워낙 이름난 사람의 잔치이다 보니 단지 참석하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고 나타난 인물들도 있기는 했다. 그래서인지 그들 가운데는 무림과 연관이 없는 자들도 더러 있었다. 주최측은 부류가 다른 손님들 간에 혹시라도 마찰이 일어날까 염려하여 각기 따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사도린과 인연이 있거나 무림에 속한 자들은 풍령애의 동쪽에, 반대로 호기심에 이끌려 그저 오다가다 들렀다 싶은 사람들은 서쪽에 자리를 잡도록 신경을 쓴 것이었다. 풍령애는 거의 천여 장에 이르는 절벽을 등지고 있는 반면 앞쪽은 넓은 초지였다. 이런 지세 탓에 역시 둘로 나뉘어 배치된 침소들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국이었다. 해가 서산(西山)으로 서서히 기울어갈 무렵이다. 풍령애에 늘어선 전각들이 노을빛을 받아 한결같이 붉게 채색되기 시작했다. 석양은 어느 덧 절벽 끝에 걸린 채 사위를 간신히 비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지에는 여전히 무수한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어 이번 연회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절벽을 배경으로 수십 개의 탁자가 일렬로 놓여 있었다. 이는 모두 손님들에게 음식과 술을 대접하기 위한 것으로 회갑연은 그들의 축복 속에서 성대하게 치뤄지고 있었다. 긴 사각형을 이루고 있는 탁자는 저마다 길이가 십여 장은 족히 되어 보였다. 폭도 일 장 남짓하여 각 탁자마다 오, 륙십명 쯤 되는 인원이 넉넉히 앉을 수 있었다. 그 자리가 전부 메워져 있는 점으로 미루어 현재 이곳에 모인 사람의 숫자는 줄잡아도 천여 명은 될 듯 했다. 우선 풍령각(風靈閣)이라 불리는 사도린의 거처 앞에 여러 개의 탁자가 놓여 있었으며, 그 좌우로 수십 개의 탁자들이 배치되어 있어 넓은 초지도 공간이 모자란다 싶을 정도였다. 한쪽에서는 시비들이 부산하게 움직여 진귀한 음식들을 끊임없이 내오고 있었다. 풍령패도 사도린. 그는 풍령각의 전면에 놓인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의 곁에는 요인들이 배석하고 있었다. "허허...... 쓸모 없는 이 사람을 위해 이렇게 참석들 해주시니 뭐라 감사를 드려야할지 모르겠소이다." "아니외다. 초청해 주셔서 영광이지요. 강축드리오." 귀빈들 중 풍채가 좋은 한 인물이 두 손을 모으며 예를 표했다. 사도린은 그 자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좌중을 둘러보며 음식을 권했다. "차린 것은 별로 없지만 모쪼록 많이 드시기 바라오." 그는 가슴까지 내려뜨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의 모습으로 말하자면 젊은이 못지 않게 당당한 체격을 갖추고 있었으며 짙은 눈썹이 유난히 돋보였다. 무언가 심경 변화가 일 때면 의례 그 눈썹이 먼저 꿈틀거리곤 한다. 또한 조용한 가운데 막강한 패기(覇氣)를 흘려내는 그의 눈은 늘 뜨겁게 타오르는 듯 했다. 그의 눈은 이제껏 주인을 배신해 본 적이 없었다. 주인이 분노하면 그 눈에서는 무서운 신광이 뻗었고, 그럴


때마다 전설이 이루어졌으니까. 천하에서 풍령패도 사도린에게 대적할 자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분위기상 지난날을 회상하는 그의 입에서는 연신 호탕한 웃음이 그치지 않고 있었다. 그와 같은 탁자에 자리한 사람들도 명성이 뒤지지 않는지 하나같이 눈빛이나 기도가 범상치 않았다. 숫자는 약 이십여 명 가량으로 개중에는 승(僧)과 도인(道人)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각기 소림(少林)의 장경각 주인 초혜대사(草惠大師)와 무당(武當) 상청관(上淸館)의 호관도인(護館道人)인 수로진인(守路眞人)이었다. 물론 그 외의 인물들도 유명인들이다. 선풍객(旋風客) 도사량(塗事亮)이 그러했고, 대라신검(大羅神劍) 막인환(漠寅桓), 사후천라(沙吼天喇) 운고(雲高), 예령살(倪靈殺) 예환살(倪幻殺) 형제 등 무림의 절정고수들이 사도린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 배석하고 있었다. 그들 중 개구탐천( 口探天) 나박련(那拍練)으로 말하자면 무엇보다 입담이 걸찍하기로 소문난 위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거지(?)답게 일반적인 예의 따위는 무시한 듯 잔치 석상에조차 엉망인 옷차림으로 출현해 있었다. 이렇다 보니 평소에도 그의 주변에서는 늘상 시시비비가 끊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바람을 몰고 다닌다고나 할까? 그러나 나박련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고 그가 창출해내는 어이없는 상황들을 웃고 넘어가 준다. 그 점은 오늘도 변함이 없었다. 일신에 낡아빠진 청의를 걸친 그는 중인환시리에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여대더니 그것도 모자라 코까지 열심히 후비고 있었다. "사형은 복도 많아." 사형이란 사도린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게 부를 정도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의미다. 실제로 나박련과 사도린은 배분이 같았고, 일찍부터 서로 허물없는 친교를 맺고 있었다. 사도린이 그를 응시하며 입가에 미소를 드리웠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네." 나박련은 손가락에 붙은 코딱지를 튕겨냈다. "젠장! 게다가 나보다 훨씬 더 오래 살게 생겼어." "허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좌중의 인물들은 은연 중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주인공에 대한 예의를 의식해서기도 했지만 나박련이 또 어떤 기상천외한 소리를 할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기대에 찬 그들의 시선에 답례라도 하듯 나박련은 초지에 펼져진 연회장을 한 바퀴 스윽 돌아보며 말했다. "보게! 만장하신 여러분들께서 그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지 않나 말이야." "흠!" 사도린은 수염을 만지작 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로서는 단지 회갑을 축하해 주기 위해 온 사람들이 자신의 장수(長壽)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쳇! 멍청하긴. 자네가 내일이라도 당장 죽을 것 같아 보게. 이분들이 이처럼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겠나?" "그...... 그야.......!" 사도린은 안면에서 미소를 거두는 대신 민망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박련이 내뱉은 말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해 좌중의 분위기를 일시에 냉각시켜 놓았다. '이 친구, 이러다 일 내는 거 아닌지 모르겠군.' 그는 불안한 나머지 멀쩡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나박련에게 일부러 똑같은 어조로 물었다. "내 보기에는 그렇게 말하는 자네도 내일 당장 죽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나는 틀림없이 오늘을 일기로 생을 마감할 게야. 그건 다 자네처럼 나쁜 친구를 둔 탓이지." 나박련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이어 그는 시선을 감미로운 향기가 풀풀 날리는 커다란 술단지로 옮겨갔다. "이놈의 백로홍(百露紅) 말일세. 아무래도 내가 이놈을 마시는 게 아니라 이놈이 나를 홀딱 마셔버릴 것 같거든." 말을 마치자 그는 술단지를 번쩍 집어 들더니 게걸이 들린 듯 목구멍에 들이 부었다. "쯧! 그 얘기였나?" 사도린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울컥이는 나박련의 목울대를 빤히 응시했다. "끄윽! 좋아,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허허...... 천천히 마시게. 술에 체하면 약도 없다지 않나?" 결국 두 사람의 유별난 우의를 이해한 좌중의 인물들은 실소로 긴장을 풀고는 술잔을 높이 들기에 이르렀다. "자! 드십시다. 두 분의 오랜 우정을 위하여." "풍령패도 대협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실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 시각에도 어둠의 그림자는 서서히 그들을 뒤덮어 오고 있었다. 제 4 장 대의명분 [1] 주흥이 무르익자 사도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노부는 잠시 실례하겠소이다. 다른 빈객(賓客)들께도 인사를 드려야 되는지라." 널리 위명을 떨치고 있는 인물일수록 호의를 가지고 자신을 찾아 준 객들을 소홀히 대접할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는 사도린도 예외가 아니었다. "허허...... 먼 길을 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외다." "고맙네. 보잘 것 없는 자의 회갑을 이처럼 축하해 주니." 이때를 기해 무림에서 별반 알려지지 않은 자들도 깎듯한 인사를 받는다. 지위의 고하(高下)든 연배든 오늘만큼은 의식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사도린이 취할 도리였으므로. "허허허.......!" 그는 수십 개의 탁자를 일일이 돌아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럴 때마다 별 볼일 없는 하객들은 도리어 황송해져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리곤 했다. 자신보다 격이 낮은 자들을 환대하기란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건만 사도린은 의외로 이를 쉽게 허용하고 있었다. 사실상 그는 여느 때에도 항상 그런 자세를 취했으며, 그 점은 사도린이라는 인물이 가진 남다른 일면에 해당되었다. 그는 여태까지 타인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보인 적이 없는 자로 어느 때부터인가 겸손은 습관처럼 굳어져 있었다. 사도린의 습관은 그것 말고도 또 있다. 그는 언제, 어디를 가든 반드시 상대의 좌측에 자리를 잡는다. 대개 사람들은 자리를 잡거나 지금과 같이 탁자 곁에 설 때면 의례 우측을 선호한다. 음식을 먹는 장소라면 더욱 그렇다. 거의 우수를 사용하는 즉, 아무래도 좌측은 불편하기에. 사도린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수도(右手刀)를 쓴다. 그러나 그는 일반적인 기준과는 달리 좌측에 있기를 즐겨한다. 그 이유는 투철한 무인의 정신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설명하자면 쾌속한 발도(拔刀)를 위해서는 그 대상을 우측에 두는 편이 유리하다는 점에서 기인된 행동이었다.


현재도 그 규칙은 어김없이 지켜지고 있었다. 사도린은 여러 탁자 앞을 돌아다니고는 있었지만 계속 좌측에 서서 환담을 나누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누가 암습을 가해온다 해도 즉시 대응할 수 있는 자세라 할 수 있었다. "동도 여러분! 부족한 것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이 사모(査某)를 꾸짖어 주시오." 그가 쏟아낸 한 마디에 군웅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웅후한 내공이 깃든 그 음성에서 그들은 내포된 의미와 함께 더 없는 신뢰감을 전달 받았던 것이다. "와아아―! 사대협의 회갑을 진심으로 경하드리오." 본시 기질이 호방한 무인들은 연이어 축배를 들었다. "자! 전설의 주인공께." "사대협께서 무병장수 하시기를." 쨍! 쨍.......! 곳곳에서 잔이 맞부딪쳐 맑은 음향을 울렸다. 이와 더불어 군웅들은 가슴 속에서 일어나는 뜨거운 감정을 느끼며 무림을 종횡하던 한 기인의 생애에 경의를 표했다. 사도린은 그들의 상기된 얼굴을 접하면서 동에서 서로 이어져 넓은 초지를 장식하고 있는 탁자들을 전부 돌았다. 물론 가는 곳마다 그에 대한 칭송과 환호가 넘쳐났다. 그러다 마침내 사도린은 서쪽의 맨 끝에 위치하고 있는 탁자 앞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눈길을 끌만한 요소라고는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허허...... 고맙소이다. 이렇게 찾아 주시어." "강축드립니다, 사대협." 사도린은 거기서도 다른 좌석과 똑같은 인사치레를 잊지 않았고, 객들은 그 답례로 잔을 높이 들어 보였다. 그의 앞에도 주인에 대한 예의로 잔이 놓였다. 그는 아무 생각도 없이 붉은 액체가 찰랑이는 그 잔을 집어 들었다. 그의 손은 나이나 이력과 어울리지 않게 몹시도 희고 깨끗했다. 그 손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혈수(血手)였다는 사실이 오히려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어쨌거나 그는 술잔도 왼손으로 쥔다. 오른손은 철칙상 언제든지 도를 잡을 수 있도록 비워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탁자는 두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그는 완벽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성정이 무인으로서의 기질과 맞물려 현상황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어떤 일이고 완벽을 기하려면 크고 작은 불편이 따르게 마련이다. 사도린이 지금 그랬다. 무엇보다 비어있는 오른손이 영 허전했던 것이다. 이는 평소 오른손을 쓰다가 왼손으로 잔을 들었으니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는 오른손을 앞가슴에 얹어 보기도 하고, 또 축 늘어뜨려 보기도 했으나 종내 어색함을 면하지는 못했다. 결국 사도린은 어떻게도 처리할 수 없는 그 손을 탁자에 올려 놓고는 슬며시 미소지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어느 정도 양 손의 균형이 잡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탁자에는 흰색의 비단보가 씌워져 있어 손에 느껴지는 촉감이 좋았다. 그 비단보 위에는 갖가지 음식들과 함께 숱한 술단지들이 향기를 내뿜어 중인들의 주흥을 돋구어 준다. 사도린도 자못 흥취가 일어 중얼거렸다. '흐음! 기쁜 일이야. 이 많은 사람들이 나 하나를 위해 모두 축배를 들어 주다니. 허허........' 정말이지 길이 기억될 하루였다. 육십 평생 쌓아온 업적이 이 날을 통해 빛을 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유쾌한 기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잠시 후에 그는 뜻하지 현상을 접하게 되었다. 쨍그랑!


좌중 인물들의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이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동시에 그들은 저마다 머리를 움켜쥐며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어? 내가 왜 이러지?" "으으...... 왜 이렇게 어지러운 게야?" 사도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걷혀 나갔다. 불의의 사태는 곧장 한 가지 의혹과 연결되었다. '설마 독(毒)?' 그것이 사실이라면 문제는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풍령패도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이 급전직하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는 어쩌면 무림의 공적(公敵)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누가 감히!' 사도린은 격노하는 한편, 당혹스런 시선으로 급급히 다른 탁자의 인물들을 살폈다. '흐음?' 그의 짙은 눈썹이 불쑥 치켜 올라갔다. 그도 그럴 것이, 연회장의 음식에 어떤 자가 의도적으로 독을 풀었다면 모두를 대상으로 해야 마땅하건만 다른 탁자에 앉은 사람들은 조금도 이상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여하한 중독의 증상도 내비치지 않고 여전히 흥겨운 모습으로 술과 음식을 들며 담소하고 있었다. 사도린은 일단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국소적인 사태로 인해 전체를 동요하게 할 만큼 어리석은 위인이 아니었다. 원래 궂은 일이란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 유리한 법이다. 짧지 않은 인생 경험을 통해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사도린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이 탁자에는 유독 주량이 적은 분들만 모이셨나 보구려. 내 미리 알았으면 약한 술을 대접했을 텐데." 그는 재빨리 하인들을 불렀다. "뭣들 하는 게냐? 어서 이분들을 침소로 모시지 않고." 그의 눈부신 임기응변으로 상황은 더 이상 비약되지 않고 금세 진정되었다. 다행이라면 하인들에게 부축되어 가는 인물들도 쓰러지지는 않고 되려 부끄러워하더라는 점이었다. "이것 참! 적당히 마셨어야 되었는데."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대협." "괜찮소이다. 다들 개의치 마시고 쉬도록 하시오." 사도린은 그들이 쑥맥이라는 사실과 독이 맹독(猛毒)이 아니었음에 무한히 감사했다. 아울러 그는 친절을 가장하여 그들을 자신의 주치의에게 보이라고 지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의원은 오랫동안 그의 건강을 책임져온 자로써 함부로 입을 놀려 그를 위기에 빠뜨릴 위험이란 전혀 없었다. 그런 연후에야 사도린은 원래의 자리로 향했다. 얼굴은 웃고 있었으되, 그의 심중은 부글부글 끓는 상태였다. '어떤 놈이 이 따위 짓을.......!' 그는 아무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내 반드시 잡아 요절을 내고 말겠다.' 그 작은 사건으로 인해 사도린은 등줄기가 후줄근하게 젖어 있었다. 차라리 누가 자신의 목에 직접적으로 칼을 들이댔다면 잠시나마 그렇게 당황하지는 않았으리라. 어쨌든 사건의 내막을 눈치 챈 사람은 그 자신 외에는 없는 듯 했다. 있대야 독을 시전한 자 정도가 아닐지? [2] 한 사람.


그는 의혹과 불안에 사로잡힌 채 몸을 떨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그는 풍령각으로부터 약간 떨어진 탁자에 앉아 있었다. 중병에라도 걸린 듯 애초부터 안색이 창백하기는 했지만 현재는 초조한 눈으로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이 필경 무엇인가 큰 죄를 지은 모양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석문순이었다. '그 사람의 전한 바대로라면 지금쯤 사도린은 피를 토하며 죽어 가야 한다. 그런데 어찌?' 예상이 빗나간 건 비단 그 뿐만이 아니었다. 약간의 중독 증세만을 보이고 연회장을 빠져나간 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쓴 독은 천사심(天使心)이다. 그 독에 중독당한 자들이 어지러움증만을 느끼다니, 이럴 수는 없다. 내가 시전을 잘못했을 리도 없고.' 천사심이란 문자 그대로 천사의 마음과 같이 상대가 미처 알아 차리기도 전에 죽음으로 이끄는 무서운 독이다. 완전하게 무색무취(無色無臭)인 이 독은 절대 고수라 해도 쉽게 발견해 내지 못하며 일단 중독이 되면 해약도 없다. 이 독의 가장 큰 위협은 뭐니뭐니 해도 놀라운 확산에 있었다. 일종의 감염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천사심의 독기운은 가까이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옮겨진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흡수력 때문이었다. 천사심은 물에 잘 녹는다. 그래서 통상 수용액인 채로 시전되는데 인간의 몸에 침투되어도 이 사항은 달라지지 않는다. 즉 체액(體液)에 골고루 녹아 든다는 얘기다. 발작 시간은 중독되고 난 지 한 시간 후이며, 그 와중에도 천사심의 독기는 체내로부터 흘러나와 다른 사람을 감염시킨다. 이는 가벼운 접촉이나 타액(唾液)을 통해서이다. 석문순이 노린 것은 그 점이었다. 비록 그의 발상은 아니었지만 우선적으로 시전이 용이한 데다가 효과를 믿을 수가 있어 그는 독살의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찌 되었건 석문순은 장내가 혼란한 틈을 이용해 그야말로 쥐도 새도 모르게 술병에 천사심을 풀었다. 자고로 술을 마시며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따라서 천사심은 술잔에 묻어 있는 타액과 함께 자연스럽게 탁자보인 흰 비단천에 스며 들었고, 비단천은 차츰 젖어 들면서 전체가 독기운을 품게 되었다. 이때에 사도린이 지닌 바 완벽주의로 인해 오른손을 비단보 위에 올려 놓았으니 그 뒤에 벌어질 일이란 뻔했다. 그런데 그 일련의 과정들을 모두 치루었는데도 어찌된 셈인지 석문순의 독살계획은 깨끗이 실패하고 말았다. 처참한 시체가 되었어야 할 사도린이 빤히 보이는 위치에서 중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웃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자가 나를 속였단 말인가?' 석문순은 의심을 가지는 한편, 아득한 기분이 되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푸르디 푸른 하늘이 자신을 덮쳐 누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 사건의 내막이 밝혀지면 나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사도린이 나를 가만 놔둘 리가 없지. 우우우........' 불안은 결국 죽음에 대한 공포감으로 이어졌고, 덕분에 그는 괴로운 듯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어야 했다. 때마침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옷차림으로 미루어 그 자는 이곳 풍령애의 사람이 틀림없었다. '벌써?' 석문순은 한 가닥 예감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뒤로 흠칫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헉!" 등 뒤에는 어느 틈엔지 풍령애의 고수들이 바짝 다가와 그를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절망하여 부르짖었다. '끝장이군!' 석문순은 눈을 질끈 내리 감았다. 이제는 속았다 하여 억울한 기분도 들지 않았다. 체념이 심중을 차지해 버리자 심지어는 독살의 실패도 그의 사고 영역 밖의 일이 되어 버렸다. '잠연........' 그는 입 속으로 사도린에게 빼앗긴 아내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팔 년 전 강제로 끌려가 본처(本妻)에게 지독한 수모를 겪는다고 하더니만 그나마 소식조차 끊긴 지 오래였다. 석문순은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 순간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왔다. 그는 자위하듯 입가에 쓴 웃음을 매달았다. '내 먼저 가 있을테니 당신도 곧 뒤따라 오구려. 이 못난 남편이 당신에게 해줄 일이란 그것밖에 없군.'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천중동(天中洞). 풍령애의 뒤쪽에 있는 동굴이다. 외부로부터 차단되어 있는 이 음습한 곳은 죄인들을 잡아다 가두는 장소로써, 풍령애 사람들은 무서워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 풍령애의 규율은 엄격하기 그지없어 약간의 잘못만 저질러도 천중동행이 되기 일쑤였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곰팡이 냄새였다. 그 다음으로는 마화(魔火)인양 이글거리는 횃불과 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징그러운 벌레들이다. 그런데 벌레들도 어느 한 지점에 이르자 약속이라도 한 듯 동작을 뚝 멈추고 만다. 그것은 자신보다 더 징그러운 물체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 물체란 다름 아닌 인간이었다. 다만 피가 모조리 빠져 나가 전신이 허연 유기질 덩어리로 변해 있을 뿐이다. 인간이 쏟아낸 다량의 피는 벽에서부터 바닥까지 칠갑이 되어 있는 상태로 말라붙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곁에는 역시 바싹 마른 살점들이 더덕더덕 붙어 있는 형구(形具)들이 걸려 있었다. 끝이 뾰죽한 쇠갈고리를 비롯하여 쇠침이 잔뜩 박혀 있는 채찍, 일명 사흑련(死黑憐)이라는 인두, 뼈를 헤집는 분골수(分骨獸) 등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그곳은 고문을 하기 위한 장소이기도 했다. 횃불의 불빛이 여러 사람의 모습을 비추어 보였다. 중앙에 서서 다른 이를 노려보는 자는 사도린이었다. 그의 곁에는 음침한 안광을 뿜어내는 몇 명의 인물이 더 있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지옥의 악귀같아 보였다. 아마도 그것은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섬ㅉ한 핏빛 낫이나 쇠사슬 등의 고문기구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들의 앞에는 아홉 명의 죄수가 있었다. 죄수들은 모두 양팔이 어깨에서부터 꽁꽁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독살의 주범인 석문순도 그 가운데 끼어 있었다. 그들을 둘러보며 사도린이 냉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분명 네놈들 중 누군가가 오늘 일을 꾸몄을 것이다. 그 자를 색출해 내기 전까지는 너희들 전부가 치도곤을 면치 못할 테니 그리 알아라." 그는 말을 마치자 옆쪽을 흘낏 바라보았다. 그것이 신호인 듯 쇠침이 박힌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촤아악! 물론 그 고문은 대상이 딱히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써 바닥을 내리치는데 그쳤지만 효과만은 지대했다.


이르자면 무언의 협박으로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미리 보여 주고 있는 셈이었다. 과연 죄수들은 바닥의 흙이 깊이 패여 나가자 저마다 몸을 부르르 떨었고, 그것을 기화로 사도린은 말을 이었다. "노부는 사건이 터지자 그때부터 수하들을 시켜 은밀히 빈객들을 감시하게 했다. 그 결과로 네놈들이 수상쩍은 행동을 보이더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전면의 인물들을 하나씩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범인은 네놈들 속에 끼어 있을 것이다. 공연히 무고한 자들에게 피해 입히지 말고 스스로 나서라." 말하는 그의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광망이 쏟아져 나왔다. 이로 미루어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알만 했다. "감히 나, 사도린을 암습하려 들다니 용기가 실로 가상했다. 그 정도의 배짱을 가진 자가 어찌 나서지 못 하느냐?" 용의자 중의 한 명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 저는 아닙니다. 아시다피시 저도 함께 독에 중독 되어 있었는데 어찌........" "닥쳐라!" 촤악! "컥!" 세모꼴의 눈을 가진 그 사내는 채찍에 얻어 맞고는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바닥으로 패대기 쳐져 꿈틀거리는 그의 머리통이 또 다른 고문자의 발에 짓밟혔다. "으으윽!" "누구든 변명을 늘어놓을 생각은 하지 말아라. 판단은 주인께서 직접 하실 것이다." 그 기세에 눌려 더 이상 입을 열려고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용의자들 모두가 입이 얼어 붙어 버렸던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행위란 그저 지척까지 다가온 죽음을 느끼며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떠는 일 뿐이었다. 사도린이 그들로부터 몇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좋다, 나서는 놈이 없으니 예정대로 너희들 모두를 내 수하들에게 맡기겠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저들의 손맛이 얼마나 잔인한지 충분히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우우.......!" 용의자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사색이 되었다. "자! 시작해라." ㅊ! 촤아악―! 명령이 있자마자 지체없이 고문자의 채찍이 날았다. 누가 죽더라도 범인을 찾아내기 전에는 절대 멈추어지지 않을. "으아아악―!" 형장(刑場)은 금세 처절한 비명으로 가득 찼다. 고문자는 죄인들을 다루는데 이력이 붙은 듯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했다. 혈심인(血心人)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의 손속에서 관용이라는 어휘는 추호도 엿볼 수가 없었다. "나, 나는 아니야! 제발........" 촤악! 애원을 하는 한 용의자의 살 속으로 채찍이 파고 들어가 사위에 피보라를 뿌렸다. "끄으.......!" 어떤 용의자는 자신의 것과 꼭 닮아 있는 그 신음 소리를 듣고 공포감을 못이겨 정신을 잃기도 했다. "크크...... 안 되지!" 한 명의 고문자가 어디선가 물동이를 들고 왔다. 촤아아―


물이 기절한 자에게 퍼부어지는 한편, 고문은 계속되었다. [3] 혈심인을 비롯한 고문자들은 진작부터 이 일에 쾌감을 느끼는 위인들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설사 용의자들 속에 진범이 섞여 있지 않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촤악― ㅊ! 퍼퍼퍽―! 피가 튀고 떨어져 나온 살점들이 무참하게 허공에 난비했으나 무자비한 그들의 고문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에 따라 용의자들은 하나 둘 혈인(血人)으로 화해 갔고, 사도린은 그 광경을 냉정한 눈으로 쏘아볼 따름이었다. "안 되겠다. 다음 단계를 시행하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 고문관이 이번에는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커다란 화로를 가져왔다. 용의자들의 살을 지지기 위해 사흑련을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치이익! 벌겋게 달구어진 인두가 뚱뚱한 한 인물의 살에 가 닿았다. "으아아악!" 그 자는 몸통을 뒤로 젖히며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을 발하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으으.......!" 다른 용의자들은 합창이라도 하듯 신음성을 흘렸다. 보나마나 자신들도 그와 똑같은 고문을 당할 게 뻔했으므로. 그런데 그 순간에 사도린은 반짝 눈을 빛냈다. 용의자 중 유독 별개의 반응을 보이는 한 청년을 발견했던 것이다. '수상하지 않은가? 저놈은.' 그 자도 백의였던 듯한 옷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는데 눈빛이 다른 인물들과는 틀렸다. 그만치 고초를 겪었으면 공포에 절어 있어야 하건만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투명하리만큼 선명한 그의 눈빛을 접하자 오히려 사도린이 움찔했을 지경이었다. 기세도 만만치 않아 여타의 용의자들과는 비교가 될 정도로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다 보니 무표정한 청년의 얼굴은 어찌 보면 일말의 조소를 머금고 있는 듯도 했다. '저놈이 범인인가? 아직 새파랗게 젊은데.' 사도린은 청년의 얼굴 윤곽이 매우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약간의 아쉬움마저 느꼈다. 그런 심리는 상대가 범인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서를 베풀 수는 없었다. 그는 계속하여 백의청년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고, 어느 순간에 이르자 청년도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쳤으되 그것은 고문을 지시하는 자와 고문 당하는 자가 주고 받을 수 있는 눈길이 아니었다. 특히 청년의 눈은 강한 도전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괘씸한!' 사도린은 사념에서 벗어나 치를 떨었다. 자신의 눈길을 마주하고도 피하지 않는 청년이 그로 하여금 격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어쩌면 이면에서 그가 느껴야 했던 한가닥 두려움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는 가슴 한귀퉁이에서 일어나는 써늘한 한기를 스스로도 인정하며 들리지 않게 부르짖었다. '어찌 이런 일이! 애송이놈이 감히 이 상황에서 부동(不動)의 정심으로 나를 압도하다니.' 사도린은 내심을 감추며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그 동안에도 그의 눈길은 계속 청년에게로 향해져 있었다. 청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무심한 시선으로 나머지 용의자들을 한 번 쓰윽 둘러 보았을


따름이었다. 청년의 이런 반응은 상대에게 엄청난 모욕감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사도린은 재삼 노화가 치밀었으나 꾹 참고 말했다. "누구냐고 물었다. 끝내 함구하면 난 너를 진범으로 알겠다. 정말로 그렇든, 아니든 간에." 일단 말을 쏟아 놓고 나서야 그는 생각한다. '어떻게 보아도 위험한 놈이다. 더구나 내 속을 훤히 들여다 보며 나를 비웃는 듯한 저 행동거지는.......!' 사도린은 기분이 무척 나빠져 있었다. 사실과 무관하게 청년을 범인으로 지목하겠다고 한 말도 으름장만은 아니었다. 청년의 입이 비로소 열렸다. "소생이 대답하지 않은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대협께선 분명 제게 누구냐고 물으셨지만 그 질문의 의미는 실상 네가 혹 범인이 아니냐는 의미였을 테니까요." 사도린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건 맞다." "물론 저는 범인이 아닙니다. 또 그 말을 곧이곧대로 했다간 끔찍한 고문이나 당할 터인즉 함구할 수밖에 없었지요." 청년의 얼굴에는 한 줄기 깨끗한 선이 그어졌다. 그것은 사내의 미소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차라리 소생에게 범인을 찾아내라고 하시면 거기에는 부응할 자신이 있습니다." "호오! 마치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듯한 말투로구나?"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최소한 이런 고문을 거치지 않아도 범인을 찾아낼 방도는 알고 있지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리석다는 뜻이냐?" 청년은 사도린의 안면이 굳어지는 것을 의식해서인지 어깨를 으쓱 했을 뿐 굳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약아빠진 놈이다, 넌." 사도린은 쓴 입맛을 다신 뒤 말을 이었다. "좋다! 너는 어떤 방법으로 범인을 색출해내겠느냐? 만일 허언을 한 것이라면.......!" 청년이 재빨리 그 말을 받았다. "소생에게도 목숨은 귀중합니다. 적어도 작금의 상황에서 허언 따위나 지껄였다간 어찌 될지 잘 안다는 말씀이외다." "흠!" 두 사람 사이에서 불꽃 튀는 눈싸움이 또 한 차례 전개되었다. 그 광경을 지켜 보면서도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중인들은 청년을 동정해마지 않았다. '제아무리 두뇌가 명석한 자라 해도 무슨 재주로 범인을 찾아낸단 말인가? 저녀석 덕분에 잠시나마 위기를 모면하기는 했지만 안 되었군. 죽는 모습을 보게 생겼으니.' 그들의 염려 뒤로 사도린이 말했다. "자! 속히 범인을 골라 내거라." 청년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우선 사대협께 한 마디 여쭙겠습니다. 독을 시전하는 일은 오늘처럼 성대한 연회가 베풀어지는 상황이라면 어디서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도린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답했다. "음, 아무래도 음식이나 술이겠지." "맞습니다. 그러면 두번째로 대협께서는 음식이 만들어지는 와중에 독이 들어 갔다고 보십니까?" "아니, 그럴 리는 없다."


"그렇습니다. 대협께서는 음식에 상당한 신경을 쓰셨으므로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범인은 틀림없이 연회가 베풀어지는 가운데서 독을 풀었을 것입니다." "음, 그랬겠지." "짚고 넘어갈 사항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연회 도중에 독을 풀자면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일일이 탁자를 돌며 시전하려 들었다간 정체가 드러날 테니까요." "그래서?" "범인은 필경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독수를 썼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방법이란 딱 한 가지 뿐입니다." "흐음........" 사도린은 침음성을 흘리더니 이내 무릎을 탁 쳤다. "아! 부족한 음식이 날라지는 그 순간에.......?" "후후...... 왜 아니겠습니까? 여러 사람의 눈을 피하는 일은 어렵지만 음식을 나르는 시비 한 사람의 눈 쯤은 약간만 신경을 써도 능히 속일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그 독이 무색무취라면 더욱 용이하다고 볼 수 있지요." 사도린은 어느 덧 청년의 추리에 빠져 들어간 듯 흥미로운 눈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좋아, 노부가 듣기에도 네 말에는 충분히 일리가 있다. 하면 범인은 누구지? 대충이나마 사건의 경위를 알았으니 결론을 지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야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청년은 씩 웃더니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정확도를 위해 하나씩 파헤쳐가야 합니다. 혹시라도 범인을 찾는데 실수가 있을까봐서 말입니다." "흠! 뜸을 들이겠노라는 소리 같지만 노부가 참겠다." 안면을 씰룩이는 사도린을 보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소생은 대협께 불손하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되었으니 어서 하려던 말이나 해 보아라." "네, 그러지요. 다만 그 전에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여기에 와 있는 이들은 어찌 하여 용의 선상에 올랐습니까? 대협께서는 어떤 관점으로 이들을 의심하게 되셨는지요?" 사도린은 불쾌한 표정이었으나 말을 아끼지는 않았다. "그 판단은 노부의 심증에 의거한 것이 아니다. 애초부터 연회장에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이중, 삼중으로 감시자들이 매복되어 있었다. 그들이 용의자를 선정했지. 이를테면 거동이 수상하거나 방명록(芳名錄)에 허위 기재를 한 자 등이다. 그들을 추려 다시 종합적인 검토까지 마쳤으니 의문의 여지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군요." "잊지 마라. 그 속에는 너도 포함되어 있었다." [4] 청년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대협께서 상기시켜 주시지 않아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든 추리는 진행하겠습니다. 범인은 앞서 언급했듯 시비의 눈을 속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뭔가 과정이 필요했을 겁니다." "흠!" "예를 들자면 물을 엎지른다거나 음식을 쏟는 등의 실수를 가장하여 시비의 시선을 유도할 수도 있습니다만 이런 류의 방도는 지극히 초보적이고 유치하여 실패할 확률이 높지요. 보다 확실하게 일을 처리하려면 범인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시비에게 자연스러운 접근을 시도했을 것입니다." 사도린은 잠시 듣기만 했다. "저의 짧은 견문으로도 이곳 풍령애에서 취월향(翠越香)이라는 특산물이 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대협께서는 일찍부터 손님들에게 상쾌감을 주기 위해 그 향을 시비들에게 사용하도록 권고하신다지요?" "그렇다." "오늘도 시비들의 몸에서는 취월향내가 풍겼을 것입니다. 잔치가 있는 날이니 여느 때보다 유독 강하게 말입니다." "아!" 사도린은 탄성을 발하더니 뒷말을 이었다. "네 말인즉 범인이 시비와 별도의 접촉을 가졌으니 놈의 몸에서도 틀림없이 취월향 냄새가 나리라는 뜻이렸다?" 당장이라도 행동을 취할 듯한 그를 청년이 말렸다. "잠깐 진정하시고 더 들어 보십시오. 소생의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좋다! 어디 말해 보아라." 흥분을 가라앉히기가 힘들었던지 사도린의 음성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격앙되어 흘러 나왔다. "그쯤의 증거로는 불충분할 수도 있습니다. 용의자들을 문초하시려거든 한 가지 사항을 추가하도록 하십시오." "무엇을 말이냐?" 청년은 눈에서 문득 기오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눈빛을 대한 사도린은 웬지 움츠러드는 자신을 느꼈다. '대체 이놈은 어떤 놈인지 종잡을 수가 없구나.' 그는 내심 혀를 차면서도 청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범인은 대협을 독살하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독은 대협이나 빈객들에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습니다. 이 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사도린은 침묵했다. "그 자는 필경 용독법을 제대로 몰랐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사용한 독에 대해서도 잘못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독에 대해 의외로 무지하다는 말씀이지요." 청년은 말하다 말고 툴툴 웃었다. "그런 자가 이 특별한 날에 상상도 못할 엄청난 사건을 저질렀습니다. 대협께서는 혹 여기서 느껴지는 바가 없으십니까? 과거에 누구에게 원한을 살 일을 만드셨다던가.......!" "그만! 되었다." 사도린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청년으로 하여금 입을 닫게 하고는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아울러 그는 청년의 눈길을 피하며 들리지 않게 탄식을 불어냈다. '하마터면 망신살이 뻗칠 뻔 했는지고! 평생을 두고 후회했던 그 일이 이제 와서 내 숨통을 조일 줄이야.' 청년은 간단한 한 마디로써 말을 맺었다. "어찌 되었건 이 정도면 소생은 용의선상에서 충분히 벗어 났으리라 사료됩니다." 그의 눈에는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허허....... 그 말은 맞다." 사도린은 대소 하더니 미간을 좁힌 채 용의자들을 한 사람씩 자세히 훑어 보았다. 그러고는 고문관에게 명했다. "저 자들의 몸에서 취월향 향기를 확인해 보아라." "넷!" 고문자들은 이내 용의자들의 몸에 코를 들이대고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용의자들은 대부분 벌벌 떨면서도 일편으로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 괴상한 조사에 응했는데 개중 한 사람만이 예외였다. 분노에 찬 눈빛을 번뜩이는 자, 그는 석문순이었다. '그래! 저놈일 것이다. 일전에 사람을 보내 기껏 오늘 일을 벌이게 해 놓고는 무슨 속셈으로


나를.......!' 석문순은 청년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로 인해 염원하던 복수도 못하고 죽을 지경에 처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분통이 터져 뭐라 막 악을 쓰려 할 때였다. 빡! "컥!" 그의 턱이 고문자의 주먹에 맞고 홱 돌아갔다. 어찌나 세게 얻어 터졌는지 반쯤 정신이 나가버린 그의 귀로 혈심인의 냉혹비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 자입니다." 그 뒤로는 사도린의 음성도 전해져 왔다. "그놈과 저 청년만 남겨 두고 다른 자들은 모두 보내라. 그리고 흉수는 노부가 직접 다룰테니 너희들도 나가 있거라." 석문순은 이후로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사도린에 의해 아혈을 찔렸기 때문이었으나 무공에 문외한인 그는 끝까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사도린의 나직한 음성이 그의 고막을 울렸다. "자네는 누군가?" 그 질문은 석문순에게가 아니라 청년에게 한 것이었다. "후후...... 이름을 물으신 겁니까?" "아니네. 내가 궁금하게 여기는 건 자네의 의중일세. 혹여 이번 일로 노부를 물고 늘어질 생각이라면.......!" 어느 덧 사도린은 어투를 달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존중과 협박의 의미가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 "그럴 리가요? 소생은 대협이 관대한 분이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란 옛말도 있지 않습니까?" 사도린은 미간을 잔뜩 구겼다. "자네는 노부에 관해 어디까지 알고 있나?" "남들이 아는 정도 밖에는요." "내게 원하는 바는?" "거두어 주신다면 따르겠습니다." 석문순은 그들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 물론 사도린이 감추고자 마음 먹었다면 그러지 못했겠지만. '일이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지?' 석문순은 의문에 휩싸인 채 눈으로 청년에게 물었다. '초사영, 그대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나야말로 궁금하군.' 잠연. 그녀는 한 사람의 아내로서 평범하게 가정을 꾸려 나가기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우유빛 살결은 그녀의 심성만큼이나 고왔으며 이목구비도 나무랄 데 없었다. 게다가 몸매까지 잘 빠진 그녀가 미소라도 지을라치면 뭇사내들은 가히 넋을 잃곤 했다. 결과적으로 잠연은 본의 아니게 한 사람의 영웅(英雄)을 욕망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정작 그녀 자신은 그런 류의 동물적인 욕망을 지극히 혐오했으나 저항할 힘이라곤 없었고, 이 점은 그녀의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그녀가 사도린의 후처(後妻)가 된 배경이었다. 그런데 이후로 사도린은 그녀를 별반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 짐작컨대 그는 필경 순간적인 충동으로 그녀를 겁탈하기는 했으나 후처로 삼은 이유는 따로 있는 듯 했다.


즉 잠연을 차지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가까이에 끌어다 놓았다면 맞으리라. 덕분에 그녀는 그때부터 줄곧 행복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영위해야 했다. 본처에게 학대와 수모를 당하는 건 그렇다치고, 이름뿐인 아내로서 날마다 독수공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에 무지한 채 착하기만 한 사람들이 의례 그렇듯 그녀는 지금까지 사도린에게든, 그의 아내에게든 원한이라는 감정을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잠연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 모든 것을 운명의 탓으로 돌리곤 했는데, 와중에도 고통은 있었다. 그 고통이란 본래의 남편인 석문순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었다. 그녀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최소한 누구를 사랑할 줄은 알았고, 그 대상은 일편단심 석문순이었던 것이다. 그런 잠연에게 최고의 행운이 주어졌다. 운명의 신도 그녀를 불쌍하게 여겼던지 그토록 목메이게 보고 싶어 했던 석문순을 마침내 그녀의 앞에 나타나게 해 준 것이었다. 더구나 석문순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동안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채 얼마나 보고 싶었던지........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헤어지지 않아도 되오." 잠연은 믿을 수가 없어 되물었다. "그게...... 그게 정말인가요?" 감격으로 인해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는 일신에 하얀 비단옷을 입고 있어서인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에 반해 석문순은 병색이 도는 창백한 얼굴에다 의복 위로 핏자국까지 엉겨 있어 흉신악살을 방불케 했다. 하지만 잠연은 이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오! 내 아내........" "석랑!" 두 사람은 서로 놓칠세라 굳게 껴안았고, 팔 년 만에 이루어진 재회는 둘 다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것으로 이어졌다. 잠연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나는...... 당신의 아내로써 이미 자격을 잃었는데도요?" 무지(無知)란 때로 편리하기도 한 것인가? 그녀의 직설적인 질문에 석문순도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 놓는다. "자격이 없기로 치자면 내가 더할 게요. 팔 년 씩이나 당신을 힘들게 했으니." 곧이어 두 사람은 부산하게 떠날 채비를 했다. 사실 석문순은 누군가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숨어 살기로 약조를 한 끝에 아내와 상봉하게 되었던 것이다. 잠시 후. 잠연이 의복을 갖추어 입은 것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홀가분하게 그곳을 떴다. 지나간 과거지사나 그에 따른 뼈아픈 기억들도 모두 접어버리면 그만이라는 듯. 그들은 단지 향후로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으며, 이렇게 되도록 살아 있었다는데 감사할 따름이었다. 석문순은 되찾은 아내와 더불어 빼꼼히 열린 대문으로 소리 없이 빠져 나갔다. 그런 그의 귀로 모기 소리와도 같이 가느다란 음성이 전해져 왔다. (부디 잘 살아 주시오. 그대들은 이 세상의 도의(道義)를 위해서도 반드시 그래야 할 의무가 있소.) 석문순이 전음입밀의 수법을 알 리가 없었다. 다만 그는 소리를 내면 안될 것 같아 입 속으로 웅얼거렸다. '은공(恩公)......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소이다.'


음성은 또 말했다.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소. 내 존재를 잊으시오. 난 당신이라는 개인에게는 처음부터 아무 관심이 없었으니까.) 냉랭하게 느껴지는 그 음성이 어디서 들려 오는지도 모르면서 석문순은 느낌이 쏠리는 쪽을 힐끗 돌아다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당신이 좋은 사람임을 알고 있소. 당신의 이름 또한 영원히 기억할 것이오. 초사영........' 그날 이후로 석문순과 그의 아내 잠연의 모습은 그 근역에서 더 이상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제 5 장 천하를 얻고자 하는 그 [1] 삼각무림(三角武林). 당금의 무림은 그렇게 표현되고 있었다. 세 개의 기둥이 떠받들고 있는 무림이라는 의미로 성립된 연원을 알고자 한다면 삼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당시 무림은 혼란기였다. 불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암흑의 상황만이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적이 내일은 친구가 되고, 내일의 친구는 그 다음 날이면 다시 적이 될 만큼 어지러운 국면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원인은 정사간의 오랜 대립에서 찾으면 맞았다. 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양측의 갈등은 세월이 흐를수록 풀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도를 더해 가는 추세였다. 그러다 종국에는 이른바 무림종말지전(武林終末之戰)으로 불리우는 일대 전쟁으로까지 비화되었으며, 그 덕에 정과 사를 막론하고 양측 모두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항상 경계해 오던 변황무림도 나름의 패권 다툼으로 혼전을 벌이고 있어 이래저래 정사대전은 십여 년을 끌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덧없는 싸움은 끝나지 않아 그대로라면 중원무림은 완전히 말살지경에 이르고 말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도처에서 울려 나왔다. 바로 그 무렵, 중원무림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변황에서 불기 시작한 무서운 돌풍 때문이었다. 때마침 변황은 한 명의 절대강자가 출현함으로써 오랜 분열이 종식되어 최초의 통일을 이루었다. 이러한 사실은 중원무림의 입장에서 보면 그 자체 만으로도 대단한 위협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변황무림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극한 가소(伽素)는 이후로 국경을 넘어 침공해 오게 되는데, 이유는 그에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필생의 염원이던 통일을 이루자마자 그는 뜻하지 않은 고민에 봉착했다. 이는 오랫동안 혈전에 길들여져 야생마나 다를 바 없는 변황 무인들의 처리 문제였다.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되어 온 그들의 기질은 지나치리만큼 호전적이어서 다스리는 일이 용이하지 않았다. 이렇고 보니 가소는 머리를 싸매다 한 가지 대안을 강구하기에 이르렀으며, 그것이 중원 침략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폭발 직전인 그들의 열정을 해소시켜 주어야 했기에. 그러나 그의 대장정에는 크게 차질이 빚어졌다. 중원정복이라는 거창한 명제는 반드시 성공을 거두어야 되었던 바, 의외로 이를 막는 하나의 장벽이 있었던 것이다. 그 장벽이란 앞서의 한 가문, 즉 절대무가(絶代武家)였다. 실상 가소는 중원무림을 오시했다. 끊임없는 반목으로 인해 사분오열 되었으니 그로서는 하등 두려울 까닭이 없었다.


단지 절대무가만이 예외였을 뿐이었다. 물론 이러한 관계나 그 뒷얘기 등은 엄연히 역사의 일부이면서도 아직껏 세간에 정식으로 공개되지 않아 소위 강호비사라면 맞았다. 어쨌든 가소가 대군을 이끌고 침공해 오자 중원의 정사대전은 즉시 막을 내렸다. 외침(外侵)을 받게 되자 정도든, 사도든 더는 무기를 맞대고 싸울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급히 필요하게 된 것은 정사연맹의 결성이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간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결국 그들 정사 양대무림에 그 시간을 벌어주는 큰 역할을 맡는 것이 옥문관에 위치하고 있는 한 가문이었다. 그런데 정사연맹의 결성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아 지지부진 시간을 끄는 사이 일 년이라는 기간이 덧없이 흘렀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그 기간 동안 예의 가문이 믿을 수 없게도 단가(單家)의 힘으로 변황 전체를 막았다는 사실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가문은 멸망하고 말았지만 또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직후에 가소가 중원정복을 포기하고 말머리를 돌려 변황으로 되돌아 갔다는 점이었다. 이 일련의 사건은 모두가 상식을 이탈한 불가사의였다. 아무튼 한 가문이 희생된 대가로 중원무림이 사상 최대의 위기를 모면한 것만은 확실했는데, 그때까지도 모양새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정사연맹은 그나마 뚜렷한 목표를 잃게 되자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 그리고 정사무림은 또다시 끝없는 전쟁에 돌입하여 그로부터 이십 년이 흐른 지금에는 세 개의 기둥을 형성시켰다. 천궁지회(天宮之會), 흑풍사(黑風邪), 철련(鐵聯) 등 삼대 세력이 중원무림을 삼분(三分)했으니 실로 어이없는 현실이었다. 그래도 무림의 현황을 좀더 깊게 파고 들어가 보자면 삼각관계를 이루고 있는 그들의 조직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천궁지회. 정파무림 그 자체를 일컫는 집합체이다. 그들은 소림(少林)을 위시한 구파일방(九派一幇)의 주축이었으며 매우 특이한 조직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각대 문파를 새롭게 십이천궁(十二天宮)이라 명명하여 동등한 세력의 균형을 이루었는가 하면, 이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 그들은 매달 번갈아 가며 천궁지회 전체의 지휘를 맡는다. 말하자면 각대 문파가 일 년에 한 달은 맹주파(盟主派)가 되는 셈으로 언뜻 보기에도 그 체제는 매우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어떤 난점들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오직 천궁지회에 소속된 인물들만이 알 일이었다. 흑풍사. 이 집단은 마(魔)의 후예를 자처하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마를 추종하는 만큼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들이었다. 정의니, 도덕이니 하는 것은 일체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 자신들의 율법과 기준만을 신봉할 뿐이었다. 그런 자들이 모인 곳이다 보니 흑풍사는 조직체제의 특성도 내용이야 어떻든 철저한 보안 유지에 두고 있었다. 그들의 내부 상황에 관해서는 세간에 알려진 바가 없었다. 다만 천궁지회와 줄곧 대립적인 양상을 띄고 있으므로 그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막강하리라는 짐작이 전부였다. 철련. 무림의 절대강자들이 모인 단체다. 다시 말해 초인(超人)들이 총망라된 집단이라고나 할까? 그들은 오직 무도(武道)를 추구하기 위해 살아가는 자들로 정과 사의 개념조차 초월해 있는 자들이었다.


절대완벽무도(絶對完璧武道)의 구현이 곧 그들이 염원하는 궁극이다. 그런즉 철련 역시도 내부의 일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꺼려 하여 신비의 베일에 가리워져 있었다. 심지어는 그 위치조차 비밀에 부쳐져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호상에는 절대무의 경지를 추구하고자 하는 자라면 누구라도 철련으로 들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다. 어떤 경로를 거쳐 소속이 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 절대강자가 될 자는 누구든 철련으로 가라! 이 경구는 진즉부터 무림 전역에 나돌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천하를 떠받치는 세 개의 기둥, 즉 천궁지회와 흑풍사, 철련 등은 현 무림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직 그들 삼대세력 중 어느 세력이 진정한 강자인지는 뚜렷하지 않으나 폭풍은 서서히 태동하기 시작했다. 강자가 하나여야 한다는 철칙은 천여 년을 이어온 무림의 절대법이기 때문이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그가 장시간에 걸쳐 예의주시하고 있는 대상에게서는 아직 이렇다할 반응이 없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일까?' 흑혼(黑魂). 그는 은신술의 대가이며 살인 전문가였다. 그런 그가 어울리지 않게 자신의 판단을 회의하고 있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놈은 분명.......!' 흑혼은 강한 부정을 위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상황은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스스로 안목이 녹슬었다고 치부하자니 아무래도 억울한 감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자리잡고 있는 곳에는 어둠만이 존재했다. 그곳에서 그는 지루하여 몸을 뒤틀며 죽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름대로 오기가 생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발밑에는 먼지가 두텁게 쌓여 있었다. 필요에 의해서이기는 했지만 호흡을 멈추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부지불식간 한 사발 쯤은 들이마셔야 했으리라. 그는 굵은 통나무에 몸을 은신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대들보였다. 현재 그가 있는 곳이 천정이라는 얘기다.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저놈은 틀림없이 주인을 암살하기 위해 일부러 접근해 왔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여태까지 아무런 행동도 취하고 있지 않고 있으니 무슨 속셈인 걸까?' 흑혼은 초사영이라는 위인이 독살 사건을 해결함으로써 사도린의 측근에 머물기 시작할 때부터 줄곧 의혹을 품어왔고,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사태에 대비하고자 초사영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며 감시하고 있었다. 그는 아래쪽을 힐끔 내려다 보았다. 그곳은 사도린의 집무실이었다. 그의 망막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이 와닿았다. 그들은 사도린과 초사영이었다. "좋습니다." "허허허.......!" 두 사람은 꽤 유쾌한 어조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흉계를 엿본다는 건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때마침 사도린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초사영을 등 뒤에 두고 창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천정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흑혼은 내심 부르짖었다. '이때라면!' 그의 생각은 충분한 타당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실제로 초사영이 사도린을 암살하려고 마음 먹었다면 이 순간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고 보아야 했다.


무인이 상대에게 등을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를 믿는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그 반면에 허점을 드러내는 행위였다. 믿는 자에게 등을 보였다가 암습을 당한 예는 비일비재했다. 그것은 고강한 무공을 지닌 절대고수들도 예외 없었다. 이르자면 신뢰했던 만큼 방어본능마저 잊고 있는 상황에서 뜻하지 않은 공격을 받아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놈! 어서 꼬리를 드러내라.' 흑혼은 어둠 속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슬며시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초사영은 끝내 여하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그 바람에 맥이 풀려버린 흑혼은 쓴 입맛을 다셨다. '빌어먹을! 저놈 때문에 나만 우습게 되었다.' 그는 초사영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거기에 담긴 의미는 의혹과는 거리가 멀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어느 덧 그는 자신도 모르게 생각을 바꾸어 가고 있었다. '저 정도라면 놈이 주인을 암살하려는 것 같지는 않다. 이런 기회가 어디 밥먹듯 만들어 지겠는가?' 그러는 동안 초사영이 천정을 힐끗 올려다 보았다는 사실을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초사영의 눈에서 기광(奇光)이 번뜩 솟았다 사라진 것도 그가 알리 없었다. [2] 두두두두―! 한 필의 말이 갈기를 세운 채 힘차게 질주하고 있었다. "차앗!" 말잔등에 납작 엎드려 채찍을 휘두르는 자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뛰어난 마술(馬術) 덕에 말은 굵은 땀방울을 뚝뚝 떨구면서도 지치는 기색도 없이 들판을 내닫고 있었다. 말은 명마로 몽고(蒙古) 특산인 한혈마(汗血馬)였다. 한혈마의 주인인 듯한 여인은 천생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마상에서 바람을 타는 그녀의 모습은 당차 보이면서도 일편으로는 버들가지 같은 유려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아마도 허리가 너무 가느다란 탓이리라. 그녀는 자못 위태로롭기까지 한 세류요(細柳腰)의 소유자였으니까. 어디 그러한 자태 뿐인가? 용모도 못지 않아 뭇사내들의 시선을 잡아 당기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추수(秋水)처럼 서늘한 빛을 발하는 한 쌍의 봉목은 그대로 상대의 마음을 빨아들일 듯 했다. 단지 흠이라면 유독 높은 코였는데, 이는 절색의 규정에 못미친다는 뜻이 아니라 성품을 대변하는 듯 해서이다. 표정이나 꽉 다물린 붉은 입술에서도 어느 정도 엿보이지만 그녀는 은연 중 오만과 강한 아집을 내비치고 있었다. 이 여인의 이름은 사화연(査花延)이다. 사도린의 여식으로 일찍부터 천하일미(天下一味)라는 미명을 얻고 있다. 그녀는 풍령애의 자랑이자 희망이었으되, 그곳의 여인들에게는 질투의 대상이었다. 이 점은 외부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아 그녀를 한 번이라도 만나 보고자 갈망하는 사내들에 비해 여인들은 대개 마주 대하기조차 꺼리곤 했다. 여인들에게 있어 미모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어떤 여인이고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구를 가지지 않은 예는 없다. 따라서 사화연을 보게 되면 여인들은 절망하고 만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녀처럼 미인이 될 수는


없었기에. 또한 진정한 미녀라면 어느 곳, 어느 때를 막론하고 그 아름다움이 빛을 잃지 않는 법이거니와, 이 사실은 말을 타고 달리는 사화연이 충분히 입증해 주고 있었다. 그 순간의 그녀는 본래의 미색에 역동적인 아름다움을 추가해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이 부시게 만들고 있었으니까. 두두두두―! 숲 속으로부터 막 빠져 나오온 그녀는 전신에서 발산되는 싱싱한 기운으로 인해 숲의 요정을 연상케 했다. 잠시 후. 사화연은 풍령애의 초지로 접어 들었다. 그녀를 보는 풍령애의 인물들은 일제히 예를 표하는 한편, 감탄사를 쏟아냈다. "과연 미의 화신이라 해도 모자랄 정도야." "화중지화(花中之花)가 따로 없네 그려." 히히힝! 그녀가 익숙한 솜씨로 고삐를 잡아채자 말은 두 발을 하늘로 치켜 세우며 즉시 멈추어 섰다. 사화연은 가볍게 땅으로 내려섰다. 그녀는 눈을 들어 주위를 한 번 스윽 둘러 보고는 풍령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그녀가 얼마 안가 걸음을 뚝 멈추었다. 그녀의 시선은 한 사내에게 못박히듯 고정되어 있었다. 사내는 그녀의 앞에서 다가오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처럼 인사를 한다든가 감탄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았던 것이다. '저 자는 목이 굳어 버렸나?' 사화연은 의문 뒤로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건방진!' 상대가 자신의 미색을 알아주지 않으면 그녀는 화가 난다. 많은 사람들의 칭송이 그녀의 자부심을 한껏 키워 놓았고, 그 덕분에 그녀는 이런 상황을 용납하지 못한다. '흥! 제까짓 게 그래 봤자지.' 내심 코웃음을 친 그녀는 사내를 정면으로 노려보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 간의 거리는 삼 장에서 이 장으로, 이 장에서 일 장으로 점차 좁혀졌다. 하지만 그에 따라 표정 변화를 보인 쪽은 사내가 아니라 사화연이었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내의 관심을 끌기는 커녕 반대로 그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사내의 아름다움에 혹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짓을!' 그래도 있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하는 그녀였다. '쳇! 사내가 번드르르하게 생겨 봐야 뭣에 쓴담?' 괜스리 심통이 나는 그녀를 향해 사내가 씩 웃어 보였다. 그 미소를 접하자 사화연은 비로소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 차렸다. 그녀는 약간의 흥미가 일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 작자가 초사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위인이었군. 아버님께서 누차 칭찬해마지 않으시던.' 사화연은 자못 짓궂은 기분이 되어 상대를 응시했다. '어디 정말로 쓸만한 자인지 시험해 볼까?' 그녀는 만면에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 초사영과 마주하더니 지면에 선을 하나 그었다. "이봐요, 당신! 잠깐 여길 좀 봐요." 초사영은 그녀의 말대로 땅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느닷없는 주문이기는 했으나 거절할 이유는


없었으므로. "자! 마상녀(馬上女), 이걸 보고 뭘 어쩌라는 게요?" '마상녀?' 사화연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겨우 눌러 참았다. 마상녀란 얼마나 자신에게 걸맞는 이름인가? 노상 하루의 절반을 말 등에서 사는 그녀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사내가 무척이나 괘씸하게 여겨졌다. 다른 사람들도 그녀의 이런 면을 익히 알 테지만 감히 대놓고 마상녀라며 놀린 자는 아직 없었던 것이다. 사화연은 땅에 그어 놓은 선을 가리켰다. "당신은 내가 이 선을 넘을 것 같나요, 아닐 것 같나요?" 초사영은 눈썹을 약간 치켜 올렸다. "질문의 요지가 뭐요?" "듣자 하니 당신은 꽤 명석한 두뇌를 가졌다면서요? 그럼 무엇이든 다 알 게 아니에요?" 사화연은 반문하고 나서 재미있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호호...... 네가 이것을 어찌 알겠느냐?' 이르자면 그녀는 초사영을 골탕 먹이기 위해 억지를 쓰고 있었다. 초사영이 뭐라 대답하든 그녀는 그 반대로 행동해 그의 기세를 눌러버릴 작정이었다. "흠! 대단히 재미있는 문제구려. 사대협의 영애라서 그런지 보기와는 다른 것 같소이다." '뭐야?' 사화연의 안색이 일변했다. '보기와는 다르다니, 그렇다면 이 작자가 나를 아주 우습게 봤었다는 뜻이 아닌가?' 그녀는 부아가 끓었으나 입술을 악물고 참았다. "만일 당신이 그 문제를 맞춘다면 무엇이든 한 번은 내게 명령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어요." "맞추지 못 한다면?" "내 종이 되어야 해요. 호호...... 물론 당신은 맞추겠지만." 초사영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완전히 당신 편한대로구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자신 없으면 기권해도 좋아요. 대신 내가 지나갈 때까지 허리를 숙이고 개짖는 소리를 내세요." 그 말에 초사영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당신은 확실히 여러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묘한 재주를 지녔구려." "내기에 응할 것인지, 아닌지 부터만 말해요." "후훗! 유쾌한 내기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그가 수락하자 사화연은 냉큼 물었다. "좋아요. 내가 과연 어떻게 할 것 같나요? 넘을까요, 아니면 넘지 않을까요?" 그녀의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차피 마음대로 승부를 가를 수 있을 뿐더러, 그가 기권을 하더라도 망신을 톡톡히 줄 수 있기 때문에 마냥 즐거웠던 것이다. '흥! 봐라, 너도 별 수 없이 당했지.' 초사영이 그녀를 향해 바짝 다가선 것은 그때였다. [3] 선은 그녀의 발 앞에 그어져 있었는데 그는 선을 밟기 직전에 걸음을 멈추었다. 이어 그는 사화연을 쏘는 듯 직시했다. '이 작자가?'


그녀는 눈길이 마주치자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내심으론 무척 당황했다. 그래서 여인의 본성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그에 반해 초사영의 태도는 점입가경이었다. "자! 시작하겠다." '어라, 반말까지 해?' 사화연은 기가 막혔으나 뭐라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질려서이기도 했지만 달리 노리는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네가 지금은 이렇게 나오지만 어디 두고 보자. 잠시 후면 내게 무례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을 테니까.' 초사영이 말했다. "그대는 선을 넘을 것이다." 동시에 그는 손을 뻗어 사화연의 어깨를 확 끌어 당겼다. "어멋!" 비명이 터져 나오는 찰나, 그녀는 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보다시피 내가 이겼다. 그러니 다시는 이 따위 장난으로 사람을 괴롭히지 마라." 사화연은 억울하여 고함을 빽 질렀다. "말도 안돼! 이런 법이 어딨어?" "억지라고 말하고 싶은 겐가?" "그야 물론........" 그녀의 말을 초사영이 중도에서 가로챘다. "처음부터 억지를 썼던 사람은 그대였다. 그리고 그대는 금후로 패배하면 깨끗이 승복하는 법도 배우도록 해라." "이...... 이.......!" 휙! 사화연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이는 상대의 뺨을 후려치기 위해서였지만 그 손은 초사영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이...... 이런 무뢰한......!" "그대에게 명령할 것에 대해서는 추후로 생각해 보겠다. 그대가 좀더 여자다워진 다음에 말이다." 그 한 마디를 끝으로 그는 몸을 돌렸다. 사화연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언제 모욕을 당해본 적이 있는가? 풍령애에서는 적어도 그녀의 말이 법이었으며 정말로 여왕처럼 군림해온 그녀였다. '나쁜 자식!' 그녀는 멀어지는 초사영의 등을 죽일 듯 쏘아 보았다. '내가 어디서 굴러 먹다 왔는지도 모를 떠돌이에게 수모를 당하다니, 언제고 이 빚은 꼭 갚아 주겠다.' 사화연은 분노를 이기지 못해 주먹을 힘껏 움켜 쥐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한 마디가 있었다. ― 좀더 여자다워진 다음에........ 그녀는 제풀에 화들짝 놀랐다. '내가 왜 쓸데없는 생각을?' 이어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려 오자 공연히 바람 소리가 일도록 몸을 홱 틀었다. 풍령애의 뒤 편에는 기경(奇景)이 펼쳐져 있다. 쿠르르르― 그곳에는 길이가 십여 장에 이르는 폭포도 존재했다. 물줄기는 굉음을 울리며 끊임없이 쏟아져 내려 희디흰 포말과 함께 근역을 신비한 물안개로 뒤덮어


놓았다. 아래쪽에 모인 물은 하나의 깊은 못을 만들었다. 물이 어찌나 맑은지 밑바닥까지 훤히 들여다 보이는 그 못에는 붉고 노란 물고기들이 자유로이 유영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선계(仙界)가 따로 없다 싶을 정도로서 마음의 여유마저 절로 생기곤 한다. 폭연(瀑淵)의 한쪽에는 암석군(巖石群)이 자리잡고 있었다. 개중에는 직경이 육, 칠 장에 이르는 거대한 바위가 있는가 하면 표면에 문양이 새겨진 기이한 형상의 바위들도 있었다. 사도린과 초사영은 각기 손에 낚시대를 들고 널찍한 바위에 걸터 앉아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중 누구도 일어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한적한 곳에서의 만남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여유를 느끼게 한다. 더구나 한가롭게 낚시나 즐기고 있으니 그들의 심중에 어떤 생각들이 들어 차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사도린이 물었다. "자네는 누구인가?" 그의 낮은 음성에 초사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쿠르르릉!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의 양은 일정하지가 않았다. 때로 지금처럼 무지막지한 물줄기를 왕창 쏟아내기도 한다. "허허...... 내 질문이 미비했군." 사도린은 자조적인 웃음 뒤로 말을 이었다. "노부는 자네가 우연히 이곳에 오게 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일전의 독살사건도 실은 자네가 꾸몄을 것이라 여기고 있네. 어때, 틀림없지 않은가?" 못의 물도 방금 전에 비해 한결 불어나 있었다. 그로 인해 그들이 드리우고 있는 낚싯대가 조금 더 깊숙이 잠겼다. 마침내 초사영의 입이 열렸다. "새삼스러우신 말씀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시인이었고, 진작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대답인지라 사도린도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역시 그렇군." 그의 음성은 계속 담담하게 흘러 나왔다. "이유는?" 초사영은 아무 말없이 낚시대의를휙 낚아챘다. 촤아악! 허공으로 들어 올려진 낚시대 끝에는 커다란 고기 한 마리가 걸려 퍼덕거리고 있었다. "호오! 제법 크군. 그놈의 이름은 금황어(金皇漁)이네. 아주 귀한 놈인데 자네는 운이 좋군." 말하는 사도린의 시선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확실히 금황어라는 물고기가 주는 매력은 대단했다. 소위 영물(靈物)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이 희귀한 어족은 그도 평소에 무척이나 욕심을 내던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그렇지 않았다. 단지 금황어를 상대가 보여주는 여유에 끌려가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을 따름이었다. 상대의 음성이 귀로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소생은 천하를 얻고자 합니다." 조용하게 울려 나왔으되 그 음성이 전하는 파고는 엄청난 것이었다. 사도린은 잠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분명 천하를 얻고자 하는 야망은 함부로 발설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자칫 미치광이로 오인받을 수도 있으므로. 더구나 약관인 청년이 쟁쟁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무림 고인 앞에서 쏟아낼 소리는 도저히 못 되었다. 초사영은 이 점을 몰랐을까? 아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똑똑해 실언(失言)으로 들릴 얘기라면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로 귀일된다. 그는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나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콰아앙! 굉렬한 음향과 함께 폭포가 두 갈래로 쩍 갈라졌다. 그것은 위쪽으로부터 거대한 바위 하나가 물줄기에 휩쓸려 떠내려오다 보니 자연적으로 빚어진 현상이었다. 그에 따라 밑에 있는 소(沼)에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류의 거창한 파문이 일었다. 그 파문은 크게 번지더니 종내에는 두 개의 중심을 가진 소용돌이로 화해 갔다. "으음........" 사도린은 물살에 의해 무력하게 이리저리 흔들리는 낚싯대를 응시하며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반면에 초사영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오히려 소용돌이를 비웃듯 낚싯대를 더욱 깊숙이 물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러한 일면이 시사하는 바는 컸다. '과연 대기(大器)다. 정녕 천하를 담을 수 있는.' 사도린은 슬며시 손을 들어 가슴을 쓸어 내렸다. '단언컨대 초사영이라는 이름은 불원간 무림 전역을 떨어 울리게 될 것이다.' 그는 시선을 돌려 초사영의 옆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놈, 내 앞에서도 언제나 마음의 칠 푼은 숨기고 있다. 이런 놈을 어찌 믿는단 말인가?' [4] 사도린의 회의는 사실상 심적 동요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도 이 점을 인정하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흉중에 어떤 야망을 품고 있든 그것이 노부와 무슨 상관이 있나?" 초사영은 침착하게 응수해 갔다. "현 무림은 세 개의 기둥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흐음?" 의외의 말에 사도린은 짙은 눈썹을 불쑥 치켜 올렸다. 초사영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천궁지회와 흑풍사, 그리고 철련, 이 삼대 세력은 천하무림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쯤이야 누구라도 익히 알고 있는 바가 아닌가?" "그렇지요." "자네는 점점더 나를 궁금하게 만드는군. 그것이 자네가 나를 노리고 여기까지 온 일과 무슨 관계가 있지?" 초사영은 빙긋 웃었다. "소생은 항상 그들을 떠올리며 한 가지 생각을 하곤 합니다. 천하무림을 관장하고 있는 그들입니다. 요컨대 무림인이라면 누구고 알게 모르게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지요." 그는 사도린을 힐끗 돌아보았다. "그건 사선배께서도 예외가 아니실 것입니다." "흠........" 사도린은 침음했다. 그 말은 결국 당신도 그들 삼대 기둥의 일원이 아니냐는 뜻으로 쉽게 대꾸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하여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버티는 그에게 초사영은 다시 말했다. "그들이 천하의 주인이라면 그것은 그 집단의 우두머리가 천하의 주인이라는 얘기가 되겠지요." "자네.......?" 사도린의 얼굴이 은은히 붉어졌다. 초사영은 그의 입장을 보다 확실하게 조명해 주고 있었다. 즉 소속이야 삼대 세력 중 어느 쪽이든 간에 천하의 풍령패도 사도린도 따지고 보면 삼각 무림의 지배하에서 움직이는 일개 구성원에 불과하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날더러 어쩌라는 것인가?" 초사영의 눈이 일시지간 강렬한 신광을 내뿜었다. "소생이 클 수 있는 숲이 되어 주십시오. 그리 하셔도 노선배께 손해가 돌아가지는 않을 테니까요." "허어! 광오하군." 사도린은 질린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자네는 무서운 말을 너무도 쉽게 하고 있어. 물론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혹 내가 자네의 그런 면을 지나친 오만으로 해석한다면 어쩔텐가?" 질문의 내용에 비해 초사영은 태연스레 답했다. "어찌 생각하셔도 상관 없습니다. 소생은 자신감과 턱없는 오만의 차이를 정확히 알고 있으니까요." "허허허.......!" 사도린은 급기야 너털웃음을 터뜨기에 이르렀다. 말문이 막혀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눈앞의 청년에게 두려움을 느꼈고, 마음이 정돈된 후에야 비로소 입을 뗄 수가 있었다. "내 애초부터 자네에게서 확신을 읽어 내기는 했었네." "후후후........" 초사영은 건져 올린 낚싯대를 크게 휘둘렀다. 휘익! 줄에 매달린 미끼는 허공에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더니 수면을 뚫고 어느 한 지점에 꽂혔다. "어족은 다수(多數)입니다. 소생은 어느 때이건 선택을 바꾸는데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흐음!' 사도린은 안면이 눈에 띌 정도로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그것은 초사영이 자신에게 모종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단은 여생의 전부를 내걸어야 하는 일대 모험이었기에. "자네는 노부가 어찌 하리라고 보나?" 그 말은 천하의 주인이 되겠노라며 겁도 없이 나선 청년에게 용기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처럼 천하제패를 꿈꾸는 인물은 강호무림에서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도린이 여기서 마음을 달리 먹으면 초사영은 야망의 달성을 위해 도전해 보기도 전에 자칫 무림의 공적으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었다. 초사영의 대답은 간단했다. "소생은 스스로의 안목을 믿습니다." "허허...... 인재는 인재를 알아본다,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사도린은 어렵사리 물은데 비해 딱 잘라 말하는 상대를 응시하며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도무지 바늘 귀 만한 틈도 없군.' 결론은 났다. 마침내 그는 항복을 선언하고야 만다. "허허허허...... 흡족하이, 자네를 만나게 되어서."


초사영은 입술 꼬리를 기이하게 말아 올렸다. "소생도 그렇긴 합니다만 노선배로 인해 우(愚)를 범하게 될까 심히 걱정됩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자신을 인재라 여기는 자들에게는 의례 약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스스로에게 너무 관대한 나머지 어떤 일에고 자기 합리화를 앞세우게 되곤 하니까요." "허허...... 노부만 세심한 줄 알았더니 자네는 더 하군." 사도린은 초사영의 말에 담긴 의미를 즉각 알아 차리고는 껄껄 웃었다. 그는 겸연쩍은 듯 덧붙였다. "염려 말게. 노부는 최소한 그 정도로 우매한 인간은 아니네. 비록 허물을 덮기 위해 제 이, 제 삼의 어리석은 행위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그런 일도 다시는 없을 테고." 그것은 독살 사건을 비롯하여 석문순 부부와 관계된 일들을 뜻하는 말이었다. 기실 자책까지는 몰라도 사도린은 그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부끄럽게 여겨온 터였다. 인간이면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인재에 해당되는 자도 마찬가지거니와, 더러 자기 합리화에 급급하다 보면 어이없게도 당위성을 주장하고 나오는 경우까지도 있다. 사도린은 그 부류에는 속하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석문순 쯤은 간단히 베어버릴 수도 있었으리라. 그가 솔직하게 나오자 초사영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얘기가 그쪽으로 비약될 줄은 몰랐습니다. 실은 소생 자신을 경계하고자 꺼낸 말씀이었는데." "되었네, 이 사람! 허허허........" 선악은 별개로 쳐도 인간 됨됨이란 매우 중요하다. 야망의 실현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주위에 자잘한 적(敵)들이 많으면 천하를 적으로 삼아 웅지를 펼 수가 없으므로. 한참을 웃던 사도린은 초사영을 정시했다. "내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네." "말씀 하십시오." "알다시피 노부는 당금 무림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이루어 놓은 사람이네. 반면에 자네는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맞습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니까요." "그렇다면 자네와 내가 공조체제를 유지하기는 무리라고 보는데, 어떤가? 형평성은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네. 그것이 어긋나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되기 쉽상이지." "후후...... 앞서도 언급했지만 소생은 추호도 노선배께 손해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좋아, 한 가지 일을 해 주게. 그 일이 깨끗이 해결되면 자네와 나는 동등한 자격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네." 이어지는 초사영의 말은 너무도 엉뚱했다. "고기가 물렸군요." 과연 사도린이 쥐고 있는 낚싯대의 찌가 물 속을 계속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그렇군." "저 힘으로 보아 아주 큰 놈이 분명합니다." 촤아아―! 사도린이 한 번 가볍게 힘을 쓰자 낚싯줄에는 거대한 물고기 한 마리가 끌려 올라왔다. 이번에도 금황어였다. "아! 노부도 드디어 이 귀한 것을 낚았네 그려." 그는 여태까지와는 달리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그런 그를 보며 초사영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것 참 축하드릴 일이군요. 행운을 잡으셨으니." "허허허.......!" 사도린은 크게 웃더니 다시 낚싯대를 드리웠다.


"그 일은 내일부터 당장 시작하는 것이 좋겠네. 우리에게는 시간이 별로 많지 않네." "그렇겠군요." "일은 자네 혼자서 해야하네." "물론입니다." 촤아악! 초사영은 낚싯대를 힘차게 거두어 들였다. 역시 금황어가 걸려 퍼덕거리고 있었다. 그가 낚아 올린 두번째의 낚은 영물을 보며 사도린은 묘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 과연 자네는 대단하군. 특히 낚시에는 발군의 소질이 있는 것 같으이." "운이 따라주어 가능한 일이지요." 초사영의 착 가라앉은 음성에 금빛을 띈 금황어의 비늘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도린은 웃었다. "오늘은 무척 기분이 좋은 날이야. 허허허........" 제 6 장 인간사의 진리 [1] 인의대협(仁義大俠) 남궁수(南宮秀). 그는 천하가 인정하는 군자(君子)다. 살아오며 아직 한 번도 인의에 어긋난다 싶은 일을 해 본 적이 없다. 때문에 비정한 무림천하에 존재하면서도 그의 손에 죽어간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그의 무공이 천박해서도, 여태까지 목숨이 왔다갔다 할 만큼의 원한을 쌓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사실 그가 일신에 지지고 있는 무공으로 말하자면 당금 무림의 초고수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도전하는 자들도 무수히 많았으며, 마(魔)를 숭상하는 자들은 그에게 무서운 원한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기질상 악을 증오하는 남궁수는 옳지 못한 일에 자주 개입하게 되었고, 그때마다 원한을 품고 물러나는 마도의 고수들은 점차로 늘어만 갔다. 이렇듯 처한 상황은 다른 고수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가 아직껏 살인을 하지 않은 이유는 인의대협이라는 별호가 말해 주듯 그의 심성이 후덕하고 자비로웠기 때문이었다. 인의장(仁義莊). 그가 거처로 삼고 있는 이 장원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또한 그곳에 들어서면 늘상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누구든 와서 쉴 수 있는 곳, 그런 곳이 바로 인의장이었다. 그런데 지금 인의장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인의장 내에 있는 연못가다. 한 사내가 침중한 표정으로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그는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제인검(劑人劒) 담시우(潭時雨). 그는 남궁수의 오른팔 격으로서 인의장의 총관(總管)을 맡고 있다. 한 때는 검도(劍道)로 명성을 날리던 그였으되, 남궁수의 인의지심에 반해 심복이 된 후로는 인의장 외의 일은 염두에 두어 본 적도 없을 정도로 성실하게 일해 왔다. 그것은 예전부터 남궁수도 인정하는 바였다. 이 장원에서 일어나는 일 치고 담시우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되는 것이 없었다. 어쩌면 인의장의 평화와 안정은 그의 빈틈 없는 관리 덕분에 지켜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오늘도 인의장은 고요와 더불어 평화로움에 감싸여 있었거니와, 담시우의 심경만이 그렇지가 못했다. 한가로운 오후 시간에 그는 한 통의 괴서찰을 받았는데, 그 내용인즉 너무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제인검 담시우 귀전(貴前). 거두절미하고 간단히 몇 자 적겠소. 당신의 상전인 인의대협을 시해하려는 자가 있소. 믿고 안 믿고는 당신의 자유이니 거기까지는 상관하지 않겠소.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외다. 그랬다간 당신이 면전에서 인의대협이 죽어 갈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오. 상대는 그만큼 무서운 자요. 그 자의 이름은 초사영, 부디 경계하여 화를 면하기 바라오.> 서찰에는 서명도 없었다. 단지 급하게 휘갈겨 쓴 글귀가 전부여서 내용의 진위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으음.......!" 담시우는 침음성을 흘렸다. '이런 경우에는 수하된 자로서 어찌 행동해야 하는가? 차라리 장주를 위해 이 한 목숨을 내놓으라고 했으면 쉬웠을 것을. 정말로 그분께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그는 더 생각하기도 싫은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문제는 아무래도 서찰 내용의 신빙성에 있었다. 섣불리 인의대협에게 보고하지 못하는 이유도 실은 그 때문이었다. '과연 믿어야 하는가, 무시하고 넘어가야 하는가?' 담시우는 부지 중 이마를 우그러뜨렸다. 정답은 아닐지언정 나름대로의 결론은 이미 나와 있었다. '어쨌든 경비를 강화할 필요는 있다. 상대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니 그래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로서는 만일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담시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연못가의 정자 위로 올라갔다. 이어 그가 한쪽 귀퉁이에 늘어져 있는 줄을 잡아 당기자 각 건물에 매달려 있던 경종들이 연쇄적으로 울렸다. 땡땡땡.......! 잠시 후. 인의장의 총병력이 한곳에 동원되었고, 담시우는 그들에게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본 장에 소속된 자는 지금부터 누구를 막론하고 정해진 위치에서 이탈해선 안 된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고 주위를 철저히 살피되, 다음 명령을 기다리도록 하라." 그로 인해 잠시 소홀했던 경계태세는 물샐 틈 없이 강화되었다. 인의장의 고수들은 제각기 살벌한 안광을 뿌리며 그 간에 쓸 일이 없어 내버려 두었던 병기를 꺼내 닦기 시작했다. 인의장에는 전에 없던 긴장감이 감돌았다. 누구라도 불씨만 제공하면 그대로 터져버릴 듯한. 그와 같은 시각이다. 인의대협 남궁수는 외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허허...... 그 친구가 오랫만에 전갈을 보내 왔어.' 그는 한 친인(親人)의 전갈을 받고 모처럼 인의장 밖으로 나가보고자 하는 중이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내리 비추는 햇살도 따뜻하기만 했다. '쯧! 이 좋은 날에........' 그는 오늘따라 장원 내를 분주하게 오가는 여러 고수들을 바라보며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간혹 가다 성가시게 느껴지기도 하는 법이다. 그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오늘은 나도 혼자이고 싶다. 하긴 개인적으로 친구를 만나러 가는데 저들이 신경을 쓰게 필요는 없겠지?' 스스스........ 남궁수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후로도 그가 장원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풍운이 감도는 인의장에서도 정작 장주인 그만은 여유로웠다. 그는 장원을 한참 벗어나서야 모습을 나타냈다.


'흠! 날씨마저 아주 그만이군.' 그는 내심 중얼거리며 걸음을 점차 빨리 했다. [2]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이고 아래로는 넓은 평원을 펼쳐 놓은 곳, 새들도 힘에 겨우면 쉬었다 간다는 이 고개는 노을이 유독 아름다워 선하령(仙霞嶺)이라고 불리운다. 호북성(湖北省)을 품고 높게 솟아 있는 선하령은 창창하기만 하다. 게다가 초입부터 숨이 턱턱 막혀올 정도로 가파른지라 웬만한 사람들은 오를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래도 멀리서 보면 선하령은 푸른 숲을 좌우로 길게 거느린 탓에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험준한 반면 풍광이 아름다워 아득한 옛날에는 신선(神仙)이 살았었다는 전설도 있다. 현세에도 선하령을 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스스로 신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그만큼 수려함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곳이므로. 그런데 이러한 절경이 온통 핏빛으로 변해 있었다. 놀랍게도 선하령 전체가 피로 얼룩져 있는 것이었다. 초입에서 시작된 혈흔은 꼬리를 물듯 깊은 숲 속으로까지 이어져 심지어는 흐르는 냇물마저도 시뻘겋게 물들였다. 아직도 피의 제전(祭典)은 끝나지 않은 것일까?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도처에 수많은 시신들이 함부로 널브러져 있건만 죽음의 행진은 언제까지 이어질지 도시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순간에는 바람 소리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마치 피로 물든 채 몸부림치는 숲의 기세에 떼밀린 듯. 시신들은 하나같이 회색 전포(戰布)를 걸친 자들이었다. 숨이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에서조차 무심(無心)의 기운이 느껴지는 자들, 그들은 살인각(殺人閣)의 인물들이었다. 살인각. 이곳은 절대의 살인술사(殺人術士)들이 모인 단체이다. 그들은 구성원 하나하나가 희대의 살인 무기나 다름이 없어 일명 살인조(殺人祖)라고도 불리운다. 이르자면 그들은 살인의 천재이자 그 방면에서는 원조 격이라 할 수 있었다. 일단 그들의 표적이 된 상대는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반드시 죽게 된다. 누구도 이들의 살수를 피할 수는 없었다. 단, 공포로 대변되는 그 살명(殺名)에 비해 그들이 무림에 알려진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기환(奇幻)의 신비로 가려져 있는 것이 또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 피의 율법은 어떤 일이고 가능하게 한다. ― 대가만 지불하면 누구든지 죽여 준다. ― 살인조의 검을 피할 자는 천하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이룩한 피의 신화를 뜻하는 경구였다. 돈만 주면 누구든지 죽일 수 있다는 그들 살인각의 흔적이 바로 이곳 선하령에서 보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파앗! 땅 속에서 느닷없이 검광이 치솟아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검광은 또다른 검에 의해 차단되고 만다. "헉!" 푸욱! 검은 찬란한 빛을 발하며 땅 속 깊숙이 박혔고, 갈라진 흙 사이로는 금세 시뻘건 핏물이 고였다. "커억!" 땅 속의 암습자는 단말마의 비명을 토한다.


굳이 확인해 볼 필요도 없으리라. 그는 틀림없이 몸뚱이가 정확하게 두 쪽으로 갈라져 죽었을 테니까. 암습자를 처단하고 검을 회수하는 인물은 초사영이었다. 그는 예리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 보더니 내심 중얼거렸다. '내가 이곳으로 오는 것을 이들이 어찌 알고 있었을까? 또 이들은 왜 나를 목표로 삼고 공격해 오는가?' 의문도 애초에는 가지지 못했다. 그는 숲의 초입에서부터 연이은 암습을 받았고, 그로 인해 무엇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눈앞에서 계속 검광이 번쩍이니 본능적으로 그들을 해치운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숲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서는 그들이 단순한 무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숲 길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꼭 그가 가는 길에만 암습자들이 나타났다. 초사영의 생각은 이어진다. '이들은 내가 어느 곳으로 가려고 하는지까지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도처에 숨어 있는 자들을 속속 발견해 내는 한편, 은신술이나 무공의 수준을 통해 그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들은 분명 살인각이다. 하면, 무엇 때문에 나를?' 살인각은 돈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집단이다. 결국 현재의 사태가 벌어지게 된 이유는 누군가 돈을 지불하며 그를 죽여 달라고 청부한 자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된다. '그자가 누구인가? 내가 이리로 올 줄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사도린과 역자심, 그 두 사람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들에게는 혐의점을 둘 수가 없었다. 역자심은 본래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데다가 살인각에게 살인을 청부할 만한 금력이 없는 위인이다. 그러니 당연히 아니었고, 사도린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초사영을 죽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초사영을 이곳으로 보낸 사람이 사도린이기는 하나 죽이고자 마음 먹었다면 이런 복잡한 수단을 쓰지 않아도 사전에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그래도 만일 사도린이 꾸민 일이라면........' 이 일을 사도린과 연결지어 생각한다면 답은 하나 밖에 없었다. 혹시 초사영을 시험하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 하는. '설마?' 초사영은 함께 낚시를 하던 사도린의 모습을 떠올렸다. '시험을 위해 꾸민 일 치곤 너무하다. 살인조를 내세우면 그 대상은 십중팔구 목숨을 잃는 게 상식이 아니었던가? 아무래도 그의 짓이라고 보기에는 개운치 않은 구석이 있다.' 거듭 염두를 굴려 보아도 결론은 쉽게 내려지지 않았다. 그나마 그에게는 오래 생각할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쉬익! 이번에는 나무 위였다. 그 기척을 느끼자 초사영은 몸을 옆으로 슬쩍 비틀며 검을 곧추세웠다. 파파파팟! 연속적으로 날아온 세 개의 단검이 땅으로 쑤셔 박히는 순간, 초사영은 허공으로 떠올라 암습자를 베었다. 츠팟! 암습자는 두 동강이가 되어 나무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자 역시 회색의 전포를 입은 살인각의 인물이었다. 단칼에 그 자를 베어버린 초사영의 얼굴은 의외로 무표정했다. 세인들을 공포로 떨게 하는 살인각의 살수들도 그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큰 위협이 되지 못 했던 것이다. 다만 내심으로 약간 놀랐을 뿐이었다.


'과연 천하제일의 검학(劍學)이다. 살인각을 상대하는데도 불구하고 별로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되니.' 실상 초사영이 펼치고 있는 것은 과거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이라 불리우던 절대 고수의 검학이었다. 검후(劍候) 초아신(楚峨信). 그로 말하자면 무적검의 신화를 창출해낸 인물이다. 당금 무림에서도 그 신화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인들은 그를 두고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 검과 더불어 살다 검의 총체를 이룩한 자! 평생토록 오직 검도만을 추구하다가 끝내는 인간이 오를 수 있는 마지막 검업(劍業)까지 완성한 인물이라는 얘기다. 한마디로 그의 존재는 무림의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그런데 그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이십 년 전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변황무림이 중원을 침공하기에 앞서 그를 두려워한 나머지 제거해 버렸다고도 했으나 훗날 그것은 근거 없는 낭설로 판명이 되었다. 검후 초아신은 변황무림이 퇴군(退軍)하기 직전에 죽었다고 한다. 또한 평소에 그가 보여 주었던 가공할 무위 때문에라도 앞서의 소문은 가당치 않은 것으로 해석되었다. 단, 여기서 한 가지 끝내 의혹으로 남는 점은 아직 누구도 그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확인한 자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사라진 이후로는 천하제일검을 자처하는 자도, 그렇게 불리울 만한 자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의 검법만이 여태도 세상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도 무림에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초사영에 의해. 아마 무림인들이 이 광경을 목격했더라면 경악을 했으리라. [3] 살인술사들은 더없이 집요했다. 초사영에게 죽어간 자들의 숫자는 벌써 수십 명에 이르고 있었으나 그들의 살검(殺劍)은 도무지 쉬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동료들이 옆에서 죽어가도,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을 잃는 것도 개의치 않고 기계적으로 덤벼들었다. 그것은 불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무모하기 짝이 없는 공세로써 그렇기에 오히려 위력 면에서는 상상을 불허했다. 초사영은 사방에서 정신없이 그들을 맞이하면서도 한 치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고 침착하게 응전해 갔다. 슈악! 어디서 발출되었는지도 모를 한 자루의 단검이 그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어딜!' 초사영의 가볍게 피하며 검을 쓸어 내렸다. 츠으읏! 일명 유성휴(流星休)라는 천하제일검의 검학이었다. 상대는 현란한 빛을 접해 눈을 뒤집는 순간 죽게 된다. 과연 암습자는 그 희대의 검공(劍功)과 맞닥뜨리게 되자 검의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허둥댔다. 동시에 그는 세상의 마지막 빛줄기를 보고는 눈이 위로 홱 뒤집혔다. "크헉!" 그러고는 잠잠해졌다. 초사영은 언뜻 지겨움을 느꼈다. 내막도 모르는 채 그저 베고, 또 베어야 하는 이 싸움이 그는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휘익! 그는 와중에도 신형을 위로 뽑아 올렸다. 아무래도 현재의 위치는 좋지 않았다. 무엇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만을 노출시키고 있자니 은근히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상대의 표적이 되어 있는 이상 우선적으로 그들의 시선을 피해야 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려면 어디건 저들이 보이는 곳으로 위치를 잡아야 하는데........' 현재와 같은 상황에 처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나무 위처럼 높은 곳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 점에서는 초사영도 예외가 아니었으나 그대로 이행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도라면 당연히 살인술사들도 넘겨 짚고 있을 테니까. '방법은 하나다. 앞으로 뚫고 나가는 길 뿐!' 쉬익! 때마침 측면에서 쇠사슬이 날아왔다. 그 끝에는 뾰족한 철침이 박혀 있어 스치기만 해도 중상을 입을 것 같았다. 그그극! 쇠사슬은 여지없이 초사영의 허리를 긁고 지나갔다. 전진만을 염두에 두다 보니 미처 피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신형을 날렸다. 고통을 느낄 틈도 없었다. 그 상황에서도 쇠사슬이 날아온 방향으로 손을 뻗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그에 따라 검광이 번뜩이자 쇠사슬은 곧장 역방향으로 되돌아 갔다. 퍽! 나무 위에서 떨어진 암습자들은 일체 비명이 없었다. 이는 그들이 죽어 가면서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도록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타인에게 죽음을 내리는 자들로써 자신의 죽음에는 철저히 무심해져야 되었던 것이다. ........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초사영은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그렇게 되는 동안 몇 명의 살인술사들이 죽어 갔는지는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살아 있었고, 그런 만큼 살수는 그의 목숨을 노릴 것이다. 얼마만큼의 희생이 나든 살인각은 그가 죽기 전까지는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을 터이므로. 아니나 다를까? 그의 앞으로 세 명의 인물이 다가오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그들에게서는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겨 나왔다. 그들은 살인각의 인물들 중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자들이었다. '드디어 강적을 맞이하게 되는군.' 초사영은 그들이야말로 암습자들 중 최고 고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긴장을 바짝 조이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번 싸움에서는 승산이 적겠군. 공포의 살인조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자들이 세 명이나 나타났으니.' 그는 면전에 다가드는 세 명의 사내들을 정시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빛이 죽어 버린 회색 눈동자의 소유자들로 무공의 깊이를 도무지 추측할 길이 없었다. '어떻든 좋다, 오라!' 초사영은 검을 힘껏 움켜잡았다. 그 행위는 이른바 투지에 의한 것이었다. 원래부터 강자를 대할수록 상대적으로 더욱 투지를 끓어 올리던 그였다. 그런 습성이 이때라 해서 어디로 가겠는가? 스스스........ 초사영이 신형을 움직이자 사내들도 그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선하령을 피내음으로 뒤덮던 일대 전쟁(戰爭)의 종장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윽!" 초사영은 전신이 부서져 나갈 듯한 통증으로 인해 비명을 발하면서도 눈을 번쩍 치켜떴다. 그러나 시야가 흐려져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의식은 아득한 곳에서 가물거리고 주위는 온통 뿌옇기만 했다. 와중에서도 그는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고는 당혹해마지 않았다. '누구인가? 이 자는.' 그는 잡힐 듯 말 듯한 그 영상에 초점을 맞추려 눈을 연신 깜빡여 보았다. 하지만 그 노력은 별 소용이 없었다. '운신은 가능할지?' 초사영은 일말의 기대감과 더불어 이번에는 일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여 보았다. '아! 역시 안 되는군.' 그는 낙심하여 중얼거렸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운신은 커녕 손가락 하나도 꼼짝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여 그는 몇 번인가 시도해 보다가 포기해 버렸다. '나는 죽은 것일까?' 스스로에 대한 이 의문은 무리가 아니었다. 본시 죽음이란 누구에게도 경험을 허용하는 것이 아닌지라 현 상황 같아서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쯧! 상세가 위중하군." 그 소리를 듣자 초사영은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후후...... 아직 죽은 게 아니었던가?' 그는 비로소 안도감을 느꼈다. 예의 음성은 본의든, 아니든 그에게 삶을 확인시켜 주었을 뿐 아니라 의식의 불씨를 당겨 놓아 정신이 들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음성은 이어졌다 "이보게, 젊은이! 내 말이 들리나? 들리면 어디 손가락을 한 번 움직여 보게." 초사영은 순순히 상대방이 시키는대로 이행해 보았다. 그러자 미약하기는 했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끄덕도 않던 손가락이 거짓말처럼 움직여졌다. "오! 정신이 들었나 보군." 그 말에 초사영은 재삼 소리가 들려온 쪽을 주시했고, 마침내 흐릿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자는 초로(初老)에 이른 듯한 인물이었다. 어른거리며 여러 개로 겹쳐 보이는 가운데서도 길게 늘어뜨린 히끗히끗한 수염이나 이마에 그려져 있는 잔주름으로 미루어 대강의 나이를 짐작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신에 청의(靑衣)를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어 평소 생활 습관이라든가 취향마저도 약간은 내비쳐졌다. 유현함이 담긴 눈매와 후덕하고 자애로운 성품이 느껴지는 훤한 이마도 초사영의 시각을 피하지는 못했다. '누구일까?' 초사영은 은연 중 상대의 분위기에 이끌려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도 잊은 채 궁금증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의 심중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듯 청의인이 웃었다. "허허허...... 자네는 그 모양을 해 가지고도 내가 누구인지 묻고 싶은 게로군. 안 그런가?" '후후...... 들켰군.' "자네는 매우 특이한 사람일세. 대부분 젊은이들은 이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몸이 성한지부터 살피게 되지. 그렇지 않으면 왜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고 의아해 하거나. 자네만이 유독 타인의 정체에 먼저 관심을 두는군." 초사영이 입을 열어 대답했다.


"맞...... 소, 당신은...... 누구요?"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서인지 그의 음성은 마음처럼 시원스럽게 나오지는 않았다. "쯧, 얘기를 해도 소용이 없군. 내 말은 자네 스스로에 대한 걱정이 우선이라는 뜻이었거늘." "걱정하면...... 뭐가 달라지오?" "흐음?" 청의인은 눈썹을 불쑥 치켜올렸다. "하긴 틀리는 말은 아니군. 좌우간 자네가 나보다 낫네 그려. 나이도 얼마 되지 않았으면서 벌써부터 일신상의 문제에 그토록 초연할 수 있다니." "후후........" 초사영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주위를 훑어 보았다. 그곳은 동굴의 내부였다. 어디선가 빛이 새어들어와 별로 어둡지 않았거니와, 외부로부터 철저히 차단되어 부상 당한 자가 요상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크윽!" 초사영은 일어나려다 말고 비명을 발했다. 전신에 통증이 몰려와 도저히 몸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그는 맥없이 큰 댓자로 뻗어 누우며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큰 일이다. 이런 상태로라면........' 이 순간에도 그의 머릿속은 매우 복잡했다. 금후의 일에 대한 여러 가지 구상은 잠시도 그를 놓아준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처럼 운신을 못하니 그로서는 막막하기 그지 없었다. 더구나 그의 상세는 굳이 청의인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거의 절망적이었다. 완전하게 치유가 되려면 얼마의 시일을 요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몸은 엉망진창이었다. 검붉은 핏자국이 전신에 걸쳐 엉겨 붙어 있었는 데, 그것은 곳곳에 온갖 종류의 상흔(傷痕)들이 빽빽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대부분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들로써 개중에는 살점이 뭉턱 뜯겨져 나간 부위도 있었다. 이러고도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로 초사영의 육신은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다. 이것은 모두 살인조와의 혈전이 가져다 준 전투의 흔적들이었다. 초사영은 눈을 내리 감았다. 그러자 희미했던 기억의 한 조각이 그의 뇌리에 생생히 떠올랐다. [4] 그들은 이름하여 살인삼조(殺人三祖)라는 자들이었다. 각각 살인대부(殺人大父), 살인대형(殺人大兄), 살인대조(殺人大爪)라는 별호로 불리우기도 하는 위인들이다. 그들의 입으로 직접 말하지는 않았어도 초사영은 직감적으로 그들이 누구인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살인대부는 혈륜(血輪)을 무기로 사용하며 약간 마른 듯한 체격을 가진 자였다. 그에 반해 살인대형은 도끼를 사용하는 자로 인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비곗덩어리로 보일 만큼 엄청나게 뚱뚱한 인물이었다. 마지막으로 살인대조는 혈조공(血爪功)을 초극의 경지까지 연마한 인물로 사실상 살인삼조의 우두머리이기도 했다. 그들의 륜이며 도끼가 펼쳐내는 공세나, 조공 등은 끔찍스럽도록 위력적이었다. 그것들이 바람 소리를 내며 스쳐가면 절로 머리털이 쭈뼛하고 곤두설 정도였다. 초사영은 그들 중 일단 살인대부를 처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승리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대가로 그도 팔의 살점을 절반이나 륜의 먹이로 내주어야 했으므로. 그러고도 그의 긴장감은 크게 덜어지지 않았다. '살인대부는 나를 얕잡아 본 덕에 쉽사리 죽어 갔다. 그러나 남은 이 두 사람은 만만치 않다.'


초사영은 그 순간에도 살인대형과 살인대조를 처치할 방법을 열심히 강구했으나 도무지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의 코앞에서 숨쉴 틈도 없이 무지막지한 공세를 가해 왔다. 그것도 두 사람의 합공(合功)이었다. 덕분에 초사영은 계속 밀려나 최초로 싸운 곳은 숲 속이었으되 강 하류인 선하령 중턱까지 내려와 있었다. '살인귀들!' 그들의 무서운 점은 뭐니뭐니 해도 절대 무심이었다. 동료 한 명이 목전에서 죽어 갔어도 그들의 눈빛은 나타날 때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한 올도 없는지 시종 똑같은 기세로 공격만을 퍼부을 따름이었다. 위잉! 츄아악―! 살인대형의 도끼와 살인대조의 혈조가 앞뒤로 동시에 날아드는 순간이었다. 초사영의 입에서도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혈환무(血幻舞)!" 이는 유성휴의 검학 중 가장 빠르고 변화가 다양한 검식으로 펼쳐지면 방향과 관계없이 목표물에 적중된다. 파파파팟! 검기의 회오리가 두 명의 살인술사들을 무섭게 덮쳐갔다. 그들의 의복은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어졌고, 그 위로 시뻘겋게 핏물이 배어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특유의 회색빛 눈으로 재차 무기를 꼬나 쥐었다. '빌어먹을!' 초사영은 좌측 어깨와 목덜미로부터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입술을 질겅 씹었다. 어느 틈엔지 도끼와 혈조는 각각 그의 어깨와 목덜미를 갈라 새로운 상처를 내놓았던 것이다. 그의 상처에서도 피가 쏟아져 나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는 점점 기가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애시당초 이 싸움은 무리였다. 게다가 어느 쪽이 죽든 죽어야만 끝이 나게 될 모양이니........' 초사영은 이를 악물며 전 내공을 끌어올렸다. '결과는 운에 맡기리라. 나는 최선을 다하면 그뿐!' 츠츠츠........ 그의 검극으로 찬란한 진홍빛 무지개가 피어 올랐다. 그 광경을 보는 살인이조의 눈에 처음으로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구천혈(九天血)!" 파아아아― 짧은 외침과 함께 미증유의 거력(巨力)이 검극으로부터 뻗어 나와 사위로 퍼져갔다. 화라라락! 두 살인술사의 찢어진 옷자락이 바람도 없는데 제멋대로 펄럭였다. 유성휴의 최후 초식이자 절대 살인검초인 구천혈이 대지를 질타하기 위해 일으켜 놓은 현상이었다. 살인대형과 살인대조의 손에서도 각각의 무기가 날았다. 위이이잉― 파아앗! 그 위력도 종전과는 비할 수 없이 막강한 것이었다. 마침내 세 가지의 무기는 제각기 소임을 다하기 위해 허공에서 주인을 함께 격돌했다. 콰콰쾅! 쿠르르르― 그리고 모든 것이 아득해졌다. 초사영은 믿을 수 없게도 두 살인술사의 회색빛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지는 것을 본 직후, 의식을 잃고


말았다. '끔찍한 혈전이었다.' 초사영은 당시를 회상하며 새삼 몸서리를 쳤다. '결국 그들은 죽고 나는 이처럼 살아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전에 청의인이 말해준 바 있었다. ― 노부가 자네를 발견했을 때 그곳에는 자네 말고도 두 명의 인물이 더 있었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죽어 있어 어쩔 수 없이 자네만을 구하게 된 것이네. 초사영은 청의인을 힐끗 돌아다 보았다. 기억들을 더듬다 보니 약간 묘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단지 살아 있다는 이유로 구해 주었다. 그들도 숨이 붙어 있었으면 구함을 받았겠지.' 그의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거기다가 지금까지 나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최소한 그들과 어째서 싸우게 되었는지도. 이를테면 악인과 선인의 구별보다는 생명을 구하는 일이 먼저라는 건가?' 초사영은 자신과 관념이 다른 청의인을 통해 자비(慈悲)가 무엇인지를 은연중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동화될 마음은 없었다. 그는 그이고, 자신은 자신이니까. 단, 청의인의 처사가 고마운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도 진작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터이므로. 초사영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지난 며칠 간 기력이 많이 회복되어 그는 걸을 수도 있었다. 그의 입에서 생명의 은인에 대한 깍듯한 인사가 건네졌다. "소생 어찌 감사를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청의인은 껄껄 웃었다. "허허...... 됐네, 이 사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거야 누구에게고 당연한 일이거늘, 어찌 은혜라 할 수 있겠나? 모쪼록 마음 쓰지 말기를 바라네."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소생만 해도........" 초사영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대화가 너무 깊어지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도 있겠기에. 그는 잠시의 침묵 뒤에 화제를 돌렸다. "노선배의 존함을 알고 싶지만 이제껏 밝히지 않으시는 것으로 미루어 감히 여쭈어볼 수가 없군요." "잘 생각했네. 피차에 이름은 알아서 무엇 하겠는가?" "그럼 후에 다시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그 말에 청의인은 눈을 번쩍 떴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린가? 벌써 가겠단 말인가? 안 되네. 그 몸으론 아직 무리야. 최소한 보름은 더 요양해야 하네." "소생은 급한 용무가 있어 지체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일이 그리 급한지는 모르나 웬만하면 나와 함께 가세. 내 거처가 좀 누추하기는 하지만 자네 한 몸 뉘일 자리는 충분히 마련해 줄 수 있네." 초사영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호의는 감사하나 따를 수가 없군요." "흠........" 청의인은 나직히 침음할 뿐 더 권하지는 않았다. "언제고 선배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초사영은 몸을 돌렸다. "허어, 그것 참!" 청의인은 멀어져 가는 초사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난색을 지었다. 그때 문득 동굴을 나가던 초사영이


뒤를 힐끗 돌아보며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청의인은 개의치 말고 가라는 듯 손을 저어 보였다. 무릇 인간사에서 끊을 것은 미련없이 끊어야 하는 법이다. 초사영은 그 진리만은 너무도 잘 아는 위인이었다. 제 7 장 대계 [1] 물하(勿河). 이 강줄기는 자연의 혜택을 받아 수면이 그리 깊지 않으면서도 깨끗하고 맑기로 유명했다. 물길은 수많은 세월의 소용돌이를 포용한 채 도도히 흘러가고 있다. 이러한 물하의 흐름이 두 갈래로 비껴 지나는 산허리 아래에는 하나의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름하여 물회하(勿會河)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며 소중히 여기는 것은 참으로 많다. 주위의 친인들이 그러할 것이며, 사시사철 머리 위로 밝은 빛을 내리 쪼여주는 태양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또한 자연의 신비도, 그 소산(所産)인 물도 그러하리라. 물이란 어쩌면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다. 필요한 만큼 주어지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즉 그 중요성이란 절대적이다. 이 때문에 물회하 사람들은 언제나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여긴다. 최소한 그들에게 먹고, 마실 것에 대한 염려는 없었다. 왜냐 하면 물하가 그들 생명의 젖줄이 되어주니 말이다. 물하가 마르게 되면 그들은 죽을 것이다. 이는 과장이 아니라 반박의 여지가 없는 기정사실이다. 깨끗한 물하와 더불어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물회하의 사람들, 그들에게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곳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곡식은 성장을 멈추었고 가축들은 미친 듯 발광을 했다. 사람들은 시름시름 앓아 누웠으며, 이를 기화로 물회하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은 서서히 죽음에 가까워져 갔다. 물회하의 의원들은 수많은 병자들을 돌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최근까지 일이 없어 놀다시피 했으나 현재는 위중한 환자도 다 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의 곁은 의례 즐비하게 널브러져 있는 환자들의 신음과 가족들의 통곡소리 등으로 인해 아수라장이었다. 하지만 정작 병명을 제대로 짚어낸 의원은 없었으니, 물회하에 덮쳐온 변고는 하나의 괴사로 정의되었다. 심지어 누구의 입에선가 이런 말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 물회하에 남은 것은 죽음 뿐이다. 와락! 작게 접혀 있다가 펼쳐졌던 서신은 악력(握力)을 당하지 못하고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으음! 어떻게 이런 일이........" 남궁수가 놀라는 이유는 서신의 내용 때문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더니 그답지 않게 격노하여 전신을 부르르 떨기에 이르렀다. "내 누군지는 모르나 사람들의 생명을 놓고 희롱하는 자는 절대로 용서치 않겠다." 남궁수의 옆에는 제인검 담시우가 굳어진 얼굴로 서 있었다. 그도 서신의 내용은 보아서 알고 있는 터였다. '어떤 자가 감히 물회하 사람들의 식수원인 물하에 독을 풀어 그것으로 장주께 협박을 가해 온단 말인가?' 그랬다. 물회하 사람들이 갑자기 고통을 겪게 된 원인은 그것이었고, 남궁수는 분노해마지 않았다. 그는 앞서도 언급했듯 인의대협이라는 별호답게 매사에 광명정대하며 인의(人義)를 중시하는 군자였다. 그런 그에게 배달된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인의대협 귀전(貴前), 귀하를 접견하고자 하오. 다만 중원 무림의 명사(名士)께서 본인과 같은 일개 무명소졸을 만나줄지 의문인지라, 결례를 무릅쓰고 물하에 약간의 잔재주를 부려 놓았으니 그리 아시오. 폐혈수맥잔(廢血水脈殘)이라면 아마 귀하께서도 모르지 않을 것이오. 보름 간을 계속 투여하게 되면 인체의 생혈(生血)이 말라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는 천하 절독이외다. 명심하시오. 본인이 귀하를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은 보름 뿐이오. 그 이후에 일어나게 될 불상사에 대해서는 본인도 책임질 수 없으니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기 바라오. 장소는 물심루(勿心樓)요.> 이것은 어떻게 보나 남궁수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아무리 인의롭다 한들 이런 사건을 통해 모종의 일을 벌이려 하는 자를 그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흥분하고 있는 그를 담시우가 조용히 불렀다. "장주." "무엇인가? 말해 보게." "이것은 함정입니다. 일전에 제 앞으로도 한 통의 서찰이 날아 들었는데, 거기에는 누군가 장주를 노리는 자가 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번 일은 그 자가 꾸민 계략이 분명합니다." 담시우는 강한 어조로 말을 하면서도 설득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남궁수의 성품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천하의 도덕군자이되 악만은 무섭도록 증오하는 그가 아니던가? "그래도 어쩔 수 없네. 나는 가야 하네." "안 됩니다. 가시면 위험합니다." 담시우의 음성이 약간 고조되었다. 인의장의 사람이 된 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남궁수의 말에 반발해본 적 없는 그가 이 정도로 나온다면 매우 완곡한 표현이라 할 수 있었다. 반면에 남궁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러고는 눈을 내리감음으로써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뜻을 전했다. 담시우는 안면을 씰룩이며 덧붙였다. "장주! 그 자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만큼 악독한 위인입니다. 물회하 사람들 모두에게 고통을 안겨준 그가 장주께는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음, 나도 각오하고 있네." "이 일은 비단 각오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번 길에 장주께서는 자칫 큰 변을 당하실 수도 있습니다." 남궁수는 감았던 눈을 뜨며 담시우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날더러 가만히 앉아 있으란 말인가? 그러다 물회하 사람들이 다 죽기라도 하면 그때는 어쩌라는 겐가?" "장주!" "이 한 목숨이 무에 그리 대단하다고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겠는가? 나는 그 자를 만나러 갈 것이네." 담시우는 할 말을 잃은 듯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남궁수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죽는 것은 별반 어려운 일이 아닐 게야. 그러나 물회하 사람들은 그 점을 모르고 있을 것이네. 필경 그들은 몹시 당황해 하거나 고통스러워 몸부림을 치고 있겠지." "그렇지만........" "더 이상 말하지 말게. 내 뜻은 정해졌네. 나는 그들이 나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것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네." "으음!" 담시우는 짧게 신음을 토해냈다. 이십 년 넘게 보필해온 남궁수이다 보니 그 심중이 모두 들여다 보이는 그였다.


하지만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남궁수를 보며 한 가지 결심을 굳혔다. '안될 일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장주께서 그곳에 가시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의장이 또다시 들썩였다. 담시우의 쩌렁쩌렁한 음성이 대청 안에 울려 퍼졌다. "듣거라! 너희들은 지금부터 장주를 여기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시게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장주께서 인의장을 나가시는 일이 일어난다면 너희들의 목을 베어 책임을 묻겠다." 그곳은 인의장 소속의 고수들이 전부 모인 자리였다. 특별히 나서서 답하는 자는 없었으나 강한 어조를 띈 담시우의 음성은 그 뒤로도 오래도록 장내를 울렸다. 그를 바라보는 수백 개의 시선들은 하나같이 엄숙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그들도 담시우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듯. 사실 담시우가 갑자기 왜 이런 명령을 내리는지는 수하들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의는 제기되지 않았으며 무조건 따르리라는 순응만이 엿보일 따름이었다. "좌검대(左劍隊)는 정문을, 우검대(右劍隊)는 장주의 거처를 엄중히 경비하도록! 즉시 시행하라." 과연 담시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인의장의 무사들은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장주를 장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라. 이 말은 언뜻 인의대협을 유폐시키라는 것처럼 들려 자칫 반역의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장원 내에 감도는 긴장감은 의구심을 일소시켜 주었다. 더구나 인의대협 남궁수의 인품이나 그에 따르는 담시우의 충정을 고려할 때,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인의장의 수많은 고수들은 곳곳에 배치되어 삼엄한 경비망을 펼쳤다. 이는 목숨이 달아날까 두려워서라기보다는 명령체계를 존중하던 그들의 오랜 습성 탓이었다. 그렇듯 인의장 전체가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시각, 남궁수는 아무도 모르게 장원을 나서고 있었다. [2] 물심루. 물하에서 조금 위쪽으로 올라가면 한 채의 누각(樓閣)이 나온다. 그곳에는 옛날 두 남녀가 이루지 못한 사랑을 저승에서나마 이루어 보고자 자진을 했다는 가화(佳話)가 서려 있다. 물하를 둘러싼 산세는 수려하기 그지 없어 물심루에서 내려다보면 절로 감탄사가 일 정도였다. ― 무릉도원이 어디 따로 있을 손가? 여기에 와서 앉으면 그대로 무릉도원이지. 물회하 사람들의 그러한 자부심이 깃들어 있는 만큼 물심루 주위의 자연 경관은 수려함 외에도 운치마저 간직하고 있었다. 물이 흐르는 소리는 풍악이나 다름이 없었다. 물심루 안에서는 지금 일신에 백의를 입은 한 명의 서생(書生)이 바깥 풍경을 내다 보고 있었다. 이곳에 와 있은 지 한참 되었건만 그의 시선은 줄곧 고요하기만 했다. '그는 올 것인가?' 홀로 읊조리는 그는 초사영이었다. 긴장과 더불어 약간의 흥분을 느끼고 있어서일까? 물소리만이 들려오는 정막감 속에서도 기다림은 지루하지 않았다. 마침내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왔군.' 상대는 그의 등 뒤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나직한 음성이 그의 귀로 전해져 왔다. "자네가 서신을 보낸 사람인가?" 초사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소."


그 순간, 그의 심중에서는 이런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물하에 독을 풀어 이 자를 유인한 것은 분명 잘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타난 자, 즉 인의대협 남궁수는 말했다. "보아하니 젊은 사람인듯 한데 심보가 너무 고약하군. 그래, 고작 나를 만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단 말인가?" "후후......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이오. 그만큼 당신이라는 인물에 대해 큰 비중을 두었다는 뜻도 될 테니까." "뭣이?" 남궁수의 음성이 노기를 띄었다. "내가 언제 그런 식으로 나를 중히 여겨달라고 했던가?" "판단은 본인이 하오." 잘라 말하는 초사영에게 그는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자네, 정말 몹쓸 사람이군. 그 나이에 벌써 술수에 능한 데다가 그것도 모자라 제왕이라도 된양 멋대로 굴고 있으니." "나는 본시 그런 사람이오." "허허...... 개정의 여지가 없군." 남궁수는 씁쓸하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왜 나를 보자고 했는가? 자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후후...... 정말로 몰라서 묻는 게요?" "그럼?" 초사영은 돌아보지 않아도 남궁수의 안색이 어떻게 변해 있는지 알 수가 있었다. 이어지는 그의 어조에서는 한층 더 두터운 자조가 묻어 나왔다. "나는 일개 무부(武夫)일 따름이오. 그래도 명성을 얻고는 싶은데 당신처럼 덕(德)이 없으니 편법이라도 쓸 밖에." "으음...... 이런 식으로 나를 죽임으로써 말인가?" "그렇소." 남궁수는 화를 내는 대신 탄식을 발하고 있었다. "무인의 본분이란 정기신(精氣身)의 일체를 이루어 무(武)의 원리를 깨닫고자 노력하는 것이네. 그런데 자네는........" 초사영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지당한 말씀이외다. 본인도 그쯤은 익히 알고 있소. 하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세상은 내게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나는 일반적인 관념에 얽매일 수가 없소." "궤변이다, 그건! 인간은 대동소이하네. 무인도 마찬가지일진저, 비열한 자나 세상을 탓하는 것이네." "후후후.......!" 초사영은 묘한 웃음을 흘리더니 덧붙였다. "당신에게는 내 판단을 나무랄 권리가 없소. 꼭 당신 생각만이 옳은 건 아니니까. 보편타당성을 핑계 삼아도 그건 마찬가지요. 내게 걸맞는 최선(最善)은 따로 있소. 당신과 나는 이 자리에서 옳고, 그르냐의 차원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주장을 펴고 있을 뿐이오." 말을 마치자 그는 비로소 천천히 몸을 돌렸다. "무인에게는 무가 전부요. 내가 지금부터 당신이 가진 덕이 하나의 허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겠소." 이때에 남궁수는 눈을 내리 감고 있었다. '관념의 벽을 넘기란 정녕 어려운 문제로다. 어설픈 훈계로는 도저히 이 청년을 감화시키지 못


하겠구나.' 그러다 슬며시 눈을 뜬 그는 크게 놀랐다. "맙소사! 자네는........" 놀라기로는 초사영도 다를 바 없었다. '빌어먹을!' 뜻밖에도 인의대협 남궁수는 일전에 자신을 구해 주었던 그 청의인이었던 것이다. 어이없어 하는 상대의 얼굴을 보자 초사영은 아무런 말도, 생각도 떠올리지 못했다. '하필 내 생명의 은인이 죽여야 할 자였다니.' 그는 일편으로는 우습기도 하고, 일편으론 허탈하기도 했다. 관념상의 차이는 고사하고 그로서는 상대가 자신의 목숨을 내달라고 해도 거절하지 못할 입장이었으므로. "허허...... 일이 공교롭게 되었군. 나는 설마하니 자네가 이번 일의 주인공일 줄은 몰랐네." 남궁수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사이, 초사영은 내심 크나큰 갈등과 싸워야 했다. '죽여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그 끝에 그는 냉정을 되찾으며 중얼거렸다. '이 일은 우연이 빚어 놓은 현상은 아니다.' 원래부터도 우연 따위는 믿지 않았던 초사영이었다. 그는 우선 처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을 가늠해 보았다. 그러나 뚜렷한 답안은 나오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는 자신에 대해 약간의 회의마저 들었다. '혹시 내가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이분에게 입은 은혜를 부정하려고 드는 건 아닐까?' 초사영은 이런저런 고심 가운데 입술을 깨물었다. '별 수 없군. 당사자에게 묻는 수밖에.' 그는 남궁수를 정시하며 말문을 열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대협께선 그날 무슨 연유로 그곳을 지나치게 된 것입니까?" 그의 말투는 어느 덧 공대로 바뀌어 있었다. "그건 왜 묻나?" "알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하긴 특별히 숨길 일도 아니지. 나는 그날 친인의 전갈을 받고 그를 만나러 나갔었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음, 그는 풍령패도 사도린이었네." 초사영의 안면이 일시지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놀라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다 보니 그리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를 만났습니까?" "아니, 만나지 못 했네. 꽤 오래 기다렸는데 달리 급한 용무가 있었는지 그는 나타나지 않더군." 초사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야 쓰디 쓴 음성을 토해냈다. "그는 그곳에 올 마음이 없었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남궁수가 의아한 듯 물었으나 대답은 없었다. "음........" 긴 침음성 뒤로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가로놓였다. 그 침묵을 깬 자는 남궁수였다. "자네, 나를 어떻게 할 셈인가?' 초사영도 그 질문에만은 분명하게 답했다. "오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물회하 사람들은?" "그들도 빠른 시간 내에 괴질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남궁수는 껄껄 웃었다. "허허...... 자네와 나의 생각은 일치하는 면도 있네. 예를 들면 무고한 양민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부분이 그것이네." "소생을 놀리시는 겁니까?" "아닐세. 이제야 말이네만 자네는 그들을 빌리기는 했어도 자책을 면하지는 못했을 거라 여겨지네. 방금 전에 있었던 자네와의 대화에서 내 그 점을 느낄 수가 있었지." "그만 두십시오!" 초사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몸을 홱 돌렸다. "부인하지 말게. 자네는 심지가 곧은 청년이야." "후후...... 조금 더 두고 보면 소생이 어떤 위인인지 잘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물심루를 나섰다. 그의 뒤에서는 남궁수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3] 푸른 빛을 발하는 검이 한 사람의 목을 겨누고 있다. "당신을 베지는 않겠습니다." 검의 주인은 초사영이었다. 그는 이 상황에서도 일 점의 동요도 없이 침착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목에 검날이 바짝 닿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연한 것으로 미루어 그에게 왜 풍령패도라는 별호가 붙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사도린이었다. "허허...... 베지 않는다면서 왜 검은 겨누는가?" 그의 물음에 초사영은 간단히 대답했다. "듣고 싶은 말이 많아서외다." "자네답군." "그건 전자에 있었던 일도 해당되는 말입니까?" "물론." 사도린은 입가에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언제 알았나?" "인의대협과 상면한 후에." 초사영도 어느 덧 희미한 웃음기를 보이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네. 이로써 노부와 자네가 동등한 자격을 가지게 되었으니 자네에게도 손해는 아닐 걸세." "문제는 제가 죽었을 수도 있다는 점이외다." 사도린은 문득 정색을 지으며 잘라 말했다. "그 정도로 죽을 자라면 필요 없네." "호오! 대단한 발상이시구려." 초사영은 짐짓 탄성을 발하더니 의도적으로 검극을 살짝 밀었다. 사도린의 목에서는 붉은 선혈이 스며 나왔다. "위협은 관두게. 설사 이 자리에서 목이 떨어진다 해도 노부는 스스로 벌인 일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네." "그 두둑한 배짱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후후...... 소생 이제야 풍령패도의 명성을 실감하겠구려." 초사영의 음성에서는 계속하여 비아냥이 느껴졌다. 그는 검을 거두며 냉랭하게 덧붙였다. "경고하건대, 금후로는 어떤 이유로든 저를 농락하지 마십시오. 그랬다간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소생도 장담 못합니다." "염려 말게.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테니까."


"그 말은 이번 한 번으로 만족했단 뜻입니까?" "맞네." 사도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노부는 자네를 좋아하네. 그러나 자네와 나의 교분은 감정을 전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네. 요컨대 노부가 살인조를 보낸 데는 감정을 정리하려는 의도도 다분했었지." "후후...... 얼핏 수긍이 가는 얘기외다. 유감스럽게도 노선배와 저는 동류(同類)의 인간들이니까." 초사영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자네는 그 관문을 뚫고 지금에 이르렀네." "관문?" "허허...... 말하자면 그렇다는 게지." "저로서는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표현입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인정하게. 냉혹한 것은 노부가 아니라 무림이라는 전장(戰場)이야. 처처에 관문이지. 필경 앞으로도 수많은 난제들이 자네를 가로막을 걸세. 더구나 천하를 얻고자 하는 이상 그것을 회피할 수도 없겠고." "후후...... 노선배는 말재간도 탁월하시구려?" 사도린은 빙그레 웃었다. "그런 편이네. 그리고 친구를 위할 줄도 알지." "인의대협 말입니까?" "음." 초사영은 쿡쿡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절더러 그를 죽이라고 했습니까?" "자네가 죽이지 못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으니까." 멀쩡한 상대의 말에 초사영은 비로소 안면을 굳혔다. "노선배께서는 좀 솔직해질 필요가 있소이다. 소생이 만일 그를 죽이고 이 자리에 서 있다면 당신은 저를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친구와의 의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제가 미덥지 않아서였을 테지요." "으음........" "당신은 제가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인의대협에게 서찰을 보내 만나자고 했습니다. 살인조가 저를 습격할 것으로 예상되는 선하령에서 말입니다." 사도린은 그 점에 관해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는 초사영을 직시하며 이렇게 물었을 따름이었다. "내가 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나?" "아마도 살인조와의 싸움에서 제가 크게 다칠 것으로 예상했었겠지요. 그래서 인의대협로 하여금 우연처럼 그곳을 지나다 저를 발견하도록 손을 써 놓으셨을 테고." "계속해 보게." "당신은 인의대협을 제 생명의 은인으로 만들어 놓고 그를 죽이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것도 관문이었지요. 그 상황에서 제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재미있어 하면서, 아닙니까?" 사도린은 입맛을 쩍 다셨다. "부인하지 않겠네. 그 당시 노부의 생각은 이랬네. 아무리 상황이 절박하다 해도 생명의 은인을 죽일 수 있는 자라면 상황에 따라서는 내게도 검을 휘두를 것이라고 말이야. 우리는 언제고 상호간에 이견이 생길 수도 있거니와, 그때마다 불안에 떨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초사영이 물었다. "인의대협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 그는 모른다. 자네도 만나 보아 알겠지만 그는 진정한 정인군자다. 나와는 전혀 다른 부류의


인물이지." 사도린의 말에 그는 풀풀 헛웃음을 날렸다. "맞습니다. 그의 눈에 당신이나 전 인간으로 보이지도 않을 겁니다. 그건 사실이기도 하고. 안 그렇습니까?" "허허허허.......!" 사도린도 급기야 대소를 터뜨렸다. 그의 웃음이 멎기를 기다려 초사영은 지나가는 말처럼 가볍게 물었다.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그 한 마디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일전에는 피차 자세한 언급을 회피했었지만 당금의 삼각무림에서 세 개의 기둥 중 어느 한 곳에 속해 있지 않은 자는 없다. 초사영이 물은 것은 사도린의 소속이었다. 사도린의 짙은 눈썹이 한 번 꿈틀 했다. 그러고도 그는 잠시 뜸을 들인 후에야 입을 열었다. "흑풍사(黑風邪)." 그가 머뭇거린 이유는 묻지 않아도 그 이름 하나면 족했다. 흑풍사라면 이른바 생명의 당위성마저도 파괴해 버린다는 자들이 모여 있는 공포의 집단이 아닌가? "그랬군요." 초사영은 별반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사전 정보 외에도 몇 차례 되지는 않으나 사도린과의 조우를 통해 이미 어느 정도는 소속을 넘겨 짚고 있었다. 물론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말을 들었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풍령패도 사도린이 흑풍사의 인물이라는 사실은 전 무림에 충격을 주고도 남음이 있었기에. 초사영은 씁쓸히 웃었다. "후후...... 짐작은 하면서도 철련이시기를 바랐었는데." 이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삼각무림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사도린과 흑풍사의 혹독한 명령체계는 아무래도 부조화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초사영은 고개를 들어 사도린을 바라보았다. '흐음?' 그는 의외라는 기분이 들었다. 대화의 요지가 바뀌어서일까? 사도린의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너무도 판이해 보여 마치 다른 사람을 마주 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초사영은 그 생소한 느낌의 원인을 흑풍사라는 어휘에서 찾아 내고는 일말의 회의로 인해 고개를 저었다. '이것이 풍령패도 사도린의 본 모습인가?' 그랬다. 여태까지 보아 왔던 사도린은 광명정대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나름대로 패기로 가득찬 한 사람의 절대자였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틀려져 있었다. 흡사 어둠 속에서만 살아온 듯 안색이 창백해진 데다가 광채를 뿜어내던 동공도 급격히 응축되어 칙칙한 회색을 띄고 있었다. 초사영은 그를 비웃기보다는 가슴 한귀퉁이가 써늘해져 자신도 모르게 입 속으로 읊조렸다. '흑풍사!' 다시 말해 풍령패도 사도린은 개인으로서는 무림의 명숙이되 흑풍사 내에서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얘기다.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네만 노부는 선택을 후회하지 않네. 흑풍사의 일원으로서 말이야." "후후...... 아직은 그렇게 말씀하셔야겠지요." 초사영은 의미심장한 한 마디에 이어 질문을 던졌다. "본론으로 들어 가지요. 흑풍사에서 노선배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입니까?"


사도린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그가 말한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4] 흑풍사의 조직은 크게 두 부(府)로 나뉘어져 있다. 흑부(黑府)와 사부(死府). 그 중, 흑부는 흑풍사의 본체와도 같은 기관으로 여타의 단체에서 같으면 본단이라 할 수 있었다. 다만 흑풍사가 외부로 드러내 놓고 활동하는 조직이 아니다 보니 거창한 명칭 따위를 갖다 붙이지 않았을 따름이다. 어쨌든 이들은 그 같은 이유로 조직의 구성도 간단하다. 흑부는 다시 두 개의 조직으로 분리되며 그 둘은 일명 쌍혈각(雙血閣)이라고도 불리운다. 흑풍사의 특수 행동대격으로 예혈각(刈血閣)과 흑혈각(黑穴閣)이 그것들이다. 그 밑으로는 사전(四殿)이 또 있다. 초혼전(招魂殿), 악마전(惡魔殿), 살수전(殺手殿), 혈궁전(血宮殿) 등. 그런가 하면 흑풍사의 최고 선봉대격인 십육은밀사단(十六隱密死團)이 그 아래로 더 있기도 하다. 반면에 사부는 조직구성이고 뭐고 논할 것도 없이 상, 하의 단적인 구별만이 전부였다. 지휘부 아래 막바로 칠십이로(七十二路) 암흑마군(暗黑魔軍)이 있었으므로. 단, 그들 암흑마군은 흑풍사의 세력 중 유일하게 대외에 알려져 있었다. 이 때문에 무림인들에게는 종종 암흑마군이 곧 흑풍사의 전체 세력인 것으로 오인되는 경우도 있다. 흑풍사 내에서는 설사 수뇌급 인사라 해도 자신이 소속된 곳이 아닌 다른 조직에 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이것는 흑풍사가 가지고 있는 특징 가운데 하나로 그들은 철저한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으음........" 초사영은 사도린의 말이 끝나자 낮게 신음을 흘렸다. 그는 흑풍사라는 단체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하다. 그처럼 단순한 조직 체제로 무림을 삼분하는 대열에 끼어 있었다니. 이들이 왜 공포의 대명사이자 죽음의 사자로 불리웠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는 물었다. "노선배가 맡고 계신 직책은 무엇입니까?" 사도린은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침착한 음성으로 답했다. "노부는 그 중 칠십이로 암흑마군의 군주(君主)라네." "그럼 사부에 속해 있다고 볼 수 있겠군요." "그렇네." 초사영은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안으로 삼켰다. 그는 놀라움을 지나쳐 충격에 가까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건 정말이지 상상을 불허하는구나. 천하를 주름잡는 풍령패도가 고작 그 정도의 직책을 갖고 있다면 흑부나 사부를 관장하고 있는 자들은 대체 어떤 인물들이란 말인가? 또 흑풍사의 최고 직책인 사주(邪主)는?'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를 쓰는 한편, 그대로 참고 있을 수가 없어 입을 열었다. "사주는 누구입니까?" 사도린은 고개를 저었다. "부끄럽지만 그건 노부도 알지 못하네." "네에?" 초사영은 기가 막혀 상대를 빤히 응시했다. '아니, 칠십이로 암흑마군의 군주라는 신분을 가지고도 사주가 누구인지 모른다니 말이 되는 소린가?' 하지만 그는 마음을 바꾸었다. 어차피 그 자신도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어 살고 있는 바, 타의


비상식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심중에 싹트는 것이 있었다. 그는 어느 덧 동류의식에서 기인된 비교치를 의식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일말의 호승지심을 느꼈다고 보면 맞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만나보고 싶은 인물이다. 앞으로는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만.' 그의 심경과는 별개로 사도린이 말을 꺼냈다. "자네는 분명 내게 손을 내밀었네. 그러나 내 입장에서 보면 자네가 적기에 뛰어 들어 주었다고 할 수 있네." "무슨 말씀이신지?" "흑풍사는 현재 한 가지 중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네." "어떤 계획입니까?" "본래는 암약 조직이기 때문에 외부로 드러나는 것을 금기시 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네. 서서히 무림의 표면으로 등장하려고 준비 중이지." "그 일이 저와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그렇네." "으음!" 초사영은 침음했다. 더 듣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무림을 휘젓게 될 돌풍이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흑풍사가 어떤 단체인가? 오늘날까지 보여 주었던 힘만으로도 전 무림을 전율케 했거늘, 그들이 본격적으로 무림사에 관여하게 된다면 당금의 세력판도는 완전히 뒤집어질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주실 수 없습니까?" 초사영의 물음에 사도린은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그 계획명은 파천황(破天荒)일세." "명칭부터 꽤 거창하군요." "그럴 수밖에. 그것은 앞으로 흑풍사가 무림에 나서면 선봉에 서게 될 전위대(前衛隊)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니까." "대충 짐작이 갑니다. 무림제패를 위한 도구들을 따로 양성한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도구?" 반문한 사도린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틀리는 말은 아니로군. 어떤 일이고 도구도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지." "흠! 그들로 인해 무림은 한바탕 아수라장이 되겠군요." "아마도." 그들의 추측은 사실에 가까운 것이었다. 공포의 집단인 흑풍사가 작정을 하고 본격적으로 길러내는 전위 공격대라면 얼마만한 능력을 가지게 될지 상상이 가고도 남을 노릇이기에. "노선배는 제가 그 계획 추진에 참여하기를 바라십니까?" "바로 그 얘기네." 초사영은 잠시 아무 말도 않고 생각에 잠겼다. 그에게도 선택이란 언제나 신중을 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사도린은 종용하듯 말했다. "갈등의 여지는 없을 것이네. 자네가 아니라도 임용할 사람은 부지기수니까. 그 계획 자체를 탐내는 자들도 많고." "으음........" "파천황에 대해서는 흑풍사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도 대부분 관심을 가지고 있네. 그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후계자를 그 곳으로 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 차후의 흑풍사는 파천황이 주도하게 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 "이를테면 이 기회에 입지를 굳혀 놓으라는 말씀입니까?"


"그렇네. 황주(荒主)는 흑풍사 내에서 서열 십 위이네. 단숨에 막강한 권력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일세." "그렇군요." 사도린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매달렸다. "이 정도면 더 생각할 여지가 없는 걸로 아는데?" 초사영은 지그시 눈을 내리 감았다. '파천황주라........ 내게는 꼭 필요한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의 대답은 심중과 다르지 않았다. "좋습니다. 한 번 뛰어들어 보도록 하지요." "허헛! 내 그렇게 나올 줄 알았네. 기회란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지. 어쩌면 이번 일은 평생을 바쳐도 얻기 힘든 제왕(帝王)의 등용문(登龍門)일지도 모르네." "인정합니다." 초사영의 말에 사도린은 힘주어 대꾸했다. "출발은 사흘 후네." 그날 밤. 어둠에 잠긴 대지에는 달빛만이 뿌려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홀로 어둠을 지키고 서 있는 한 사내가 있다. 달빛이 그의 뒤로 고독해 보이는 긴 그림자를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막상 사내의 표정에서는 아무 것도 읽혀지지 않았다. 마치 고독마저 초월해 버린 듯 시종 무심 일색이었다. 그의 어깨 위에는 한 마리의 새가 올라 앉아 있었고, 새의 목에는 무엇인가 흰 천 같은 것이 둘러져 있었다. 사내는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무가(武家)의 위대한 신화가 재현될 것이다." 그 음성이 떨어지기기 무섭게 야조(夜鳥)는 어둠을 뚫고 천공으로 날아 올랐다. 후드득.......! 사내는 새의 몸체가 하나의 까마득한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계속 지켜보고 서 있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이루어진 일이었다. 통상 이렇듯 타인의 눈을 피해 새를 날리는 이유라면 한 가지밖에 없다. 어딘가로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그 내용이 비밀을 요하는 것일 경우에 말이다. 그가 누구에게, 어떤 서신을 보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내는 서서히 몸을 돌렸고, 그에 따라 어둠 속에서 드러난 사내의 얼굴은 달빛을 받아 눈이 부시도록 희었다. "파천황으로 인해 흑풍사는 붕괴된다. 그리고 절대무가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흑포를 휘날리며 읊조리는 사내는 초사영이었다. 그는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또한 그 절대의 무가와 그의 관계는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소리 없이 밤 안개가 내려 앉았다. 제 8 장 비화 [1] 변한 것은 없었다. 노룡폭(怒龍瀑)은 오늘도 힘찬 물줄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 뒤편의 허수동(虛水洞)도 그대로 있었으며 백수연(白水淵)도 여전히 맑고 깨끗하기만 했다. 대자연은 이처럼 불변(不變)이되, 그 앞에서 왜소한 존재인 인간은 오히려 그럴 수가 없다. 한 사람이 이곳에서 자신의 흔적을 지우려 하고 있었다.


노룡폭의 허수동이다. 초사영은 안으로 접어 들어가면서 줄곧 심정이 착잡했다. '떠나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 그는 불행하게도 기약할 수 없는 내일을 운명처럼 짊어지고 있는 위인이었다. 따라서 그 자신의 말마따나 이제 떠나가면 그것이 곧 영원한 이별이 될지도 몰랐다. 허수동 내의 석실로 들어서게 되자 그의 착잡함은 불안감으로 이어졌다. 그는 쿵쿵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한 발자국씩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었다. '설마 그 사이에 별 일이 일어나지는.......?' 초사영은 내심 중얼거리며 그 불안의 주체(主體)인 한 노인을 넌즈시 바라보았다. '할아버님!' 석실 내부도 이렇다할 변화는 없었다. 허름한 침상이 놓여 있는 것도, 그 위에 조부인 노인이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것도 여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진정되지 않는다. 초사영은 침착하려 애쓰며 나직히 입을 열었다. "제가 왔습니다."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대답은 역시 없었다. 그는 침상가에 가까이 다가가서야 돌아 누운 노인이 입에서 붉은 선혈을 토해내며 고통스러워하는 광경을 목도하게 된다. "괜찮으십니까?" 말을 건네는 초사영의 음성에서는 짙은 우려와 안도가 동시에 묻어 나왔다. 얼마나 걱정이 되는지야 새삼 논할 바도 못 되었거니와, 그래도 노인이 아직 죽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으음........" 노인의 신음성을 들으며 초사영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미간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할아버님, 접니다. 사영........" 그가 몇 번인가 흔들자 비로소 노인은 감겨져 있던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그 눈은 초사영을 향하기는 했으나 얼른 초점이 맞추어지지는 않았다. "누...... 누구.......?" 초사영은 절망감을 씹으며 같은 말을 또 해야만 했다. "사영입니다." "그래........" 노인은 경황 중에도 안면 가득 반가운 기색을 떠올렸다. 그의 입에 묻은 핏물을 닦아 주며 초사영은 잠시 침묵했다. 말을 꺼내려 했다간 눈물이 먼저 쏟아질 것 같았으므로. "그간...... 잘 지냈느냐?" 안부는 노인 쪽에서 묻고 있었다. "네, 할아버님께서 이렇게 되어 계신데도 저는........" "허허...... 내 고질병이...... 발작을 일으키는 거야 어디 하루 이틀 일이냐? 걱정...... 할 것 없다. 곧...... 나아지겠지." '나아진다구요?' 초사영은 내심 되물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조부는 병세가 막바지에 이르러 바야흐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흠.......! 네 모습은...... 갈수록 늠름해지는구나." 노인은 대견하다는 듯 손자를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초사영은 여기서 또 한 가지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노인이 평소에 그런 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래저래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는 건가?' 초사영은 노인의 두 손을 와락 움켜 쥐었다. 확실히 체념이나 포기란 쉽게 접근해갈 수 있는 감정이 못 되는 모양이었다. 노인의 손목에서 전보다 더 기력이 쇠잔해진 듯한 느낌이 전해오자 그는 금시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녀석, 얼굴을...... 좀 펴려무나. 이 할애비는 지금......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 "할아버님........" 초사영은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일그러진 안면을 보며 노인은 슬며시 웃었다. 물론 그 미소는 초사영에게 더욱 고통을 선사했다. 노인이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는...... 괜찮다. 네가 이처럼 헌헌장부가 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아무 여한이 없느니........" "할아버님!" 초사영은 급기야 격정을 이기지 못해 노인을 부둥켜 안았다. 동시에 그는 마음 속으로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안 된다! 이렇게 보내드릴 수는 없다.' 그들 노소(老少)는 늘상 뜻이 맞지 않았다. 제각기 도의를 주장하되 방향만은 정반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반된 관념과 정은 별개였다. 두 사람은 실로 오랜 세월을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 주며 살아 왔었고, 그렇기에 기정 사실화된 이별이 이토록 가슴 아픈 것이었다. 노인이 말했다. "이제......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해도...... 말리지 않겠다. 허허...... 말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겠지만 말이다." "할아버님........" "으으.......!"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리는 노인의 입으로 다시금 검붉은 핏물이 흘러 나왔다. '오오! 죽음이란 왜 이다지도 힘들게 다가오는가?' 초사영은 습관인양 노인의 입에 수건을 갖다 대며 중얼거렸다. 익숙한 손놀림에 반해 그의 손은 몹시도 떨렸다. 그는 이 순간 마음을 바꾸어 현실을 인정하고 만다. 고통스러워하는 조부를 곁에서 보고 있자니 차라리 빨리 숨을 거두어 해방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조차 드는 그였다. 갑자기 노인의 흐릿하던 눈빛이 정광(精光)을 띄었다. 그것은 이른바 회광반조의 현상이었다. 죽음에 임박해 생명의 불꽃이 최후로 활활 타오르는. "사영아, 지금부터 잘 듣도록 해라. 어쩌면 이것이 내 마지막 말이 될지도 모르니." "어찌 그런 말씀을.......!" "허허...... 네가 아무리 안타까워해도 소용이 없다. 세상에는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일이 참으로 많지." "할아버님........" 노인의 음성은 이후로 강하게 그의 귀에 와 닿았다. "알다시피 우리 가문은 이십 년 전, 무림의 평화를 위해 크게 기여했지만 종내 절대무가라는 이름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렸다. 그 점을 두고 너와 이 할애비는 의견이 엇갈렸었지. 나는 할 일을 다했으면 그 뿐이라 했고, 너는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처참한 대가를 치룬데 대해 불만을 토로하곤 했었다." "맞습니다." "하지만 얘야, 최근 들어 생각해 보니 가장 중요한 건 네가 그 가문의 후손이라는 사실이더구나." 그랬다. 초사영은 그 위대한 무가(武家)로 일컬어지는 절대무가의 직계 후손이었던 것이다. 그는 죽어가는 노인의 손목을 부여잡은 채 씁쓸히 웃었다. "너무 새삼스러우신 말씀이시군요."


"허허...... 그렇게 들리느냐?" 노인의 웃음 소리도 전하는 느낌은 똑같이 썼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가문은 오래 전에 멸절되고 절대무가라는 명성만이 세인들의 기억 한 귀퉁이에 남아 있는 이 마당에 후손 운운이란 그저 부질없는 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노인의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넌 내가 왜 이런 얘기를 꺼냈는지 아느냐?" "글쎄요." "분명 멸문을 당하면서까지 변황무림을 막아냈다는 점을 들추어 네가 가지고 있는 불만이나 고조시키려는 건 아니다. 다만 죽어간 인물들의 행적을 재조명하여 네가 뜻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한 말이다." "할아버님께서도 제 생각을 인정하시는 겁니까?"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 단, 이 할애비는 네가 본래의 취지에서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겠다." "으음........" "그 당시 중원무림은 사전에 약속했던 연합맹을 이루지 못했다. 그 덕에 우리 가문은 끝까지 단독으로 변황무림을 상대하다가 붕괴되는 사태에 이르고 말았지. 더구나 그 후로도 중원무림은 우리의 희생으로 평화를 되찾았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 버리고 또다시 실리를 위한 아귀다툼을 벌였다. 정녕 한심하고 어이없는 행태였지." 노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작금에도 그들은 삼각무림이라는 기형(奇形)의 세력판도를 이룬 채 각기 영역을 넓혀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맞습니다. 그래서 소손은........" 초사영은 격한 감정을 억누르느라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가 안고 있는 증오의 불씨는 그것이었다. 이르자면 그는 한(恨)을 품고 있었다. 비록 시대가 달라 그 자신이 직접 나선 일은 아니라지만 최후까지 중원무림을 지키기 위해 고독하게 싸워야 했던 인물들의 비원(悲願)에 공감하고 있었고, 그들을 대신해 징치에 나선 터였다. 또한 이를 위해 그가 행하고자 하는 일들은 모두가 혹독한 피의 율법에 의거한 것이기도 했다. 그가 판단하건대, 중원무림인들은 과거에도 그랬듯 현재도 분열만을 일삼아 무림의 존재 가치를 흐려놓고 있었다. 따라서 정과 사, 혹은 삼각구도의 첨예한 대립관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일제 정리를 단행하는 것이 그의 희망 사항이었다. 그 수단은 역시 제패(制覇)가 되겠지만. ― 내가 세운 법(法)은 옳다. 나는 누구에게도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천하로 하여금 이 법에 무릎꿇게 할 것이다. 왜냐 하면 나는 천하를 위해 쓰이다가 천하에 의해 버려진 절대무가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평소 그를 지배하던 신조(信條)였다. 다시 말해 그는 초사영이라는 일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가문의 꺼지지 않는 불씨로써 부활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 불길이 설사 지옥화(地獄火)가 될지언정. 그는 낮으나 신념에 찬 어조로 말했다. "복수는 필요악(必要惡)입니다. 그것도 인정해 주십시오."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은 아니다. 너는 대체 이제까지 이 할애비의 얘기를 뭘로 듣고 있었느냐?" "그럼 소손더러 전대의 우를 또 범하란 말씀이십니까?" 따지고 드는 손자에게 노인은 급기야 화를 벌컥 냈다.


"못된 놈! 할애비의 유언까지 거스르려 하다니." "으음!" 초사영은 짧게 신음을 흘리더니 말을 이었다. "저를 고통으로 몰아넣지 마십시오. 할아버님께서 그러시면 저는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뭣이?" "저도 가능하다면 시키시는대로 따르고 싶습니다. 하지만 자라오면서 굳어져 버린 관념을 하루 아침에 바꾸어 버릴 수는 없습니다. 무엇을 위해 제가 그래야 합니까?" 노인은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그것은 천하무림을 위해서다. 나는 네가 무림의 안녕을 위협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 "우우우.......!" 초사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쥔 채 신음을 흘렸다. 그런 그를 보면서도 노인은 질책을 멈추지 않았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놈, 너는 네 가문이 어떻게 변황무림의 침공을 막았는지 제대로 알고나 있느냐?" "하면, 소손이 알고 있는 사실 외에 또 다른 무엇이 숨겨져 있었단 말씀입니까?" "왜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저도 더 이상은 어린애가 아닐 뿐더러 가문에 관해서라면 어떤 비밀이든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한 가지도 남김없이 알려 주마. 다 듣고 나면 너도 네 자신을 재점검해 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서두를 끊은 그의 음성은 꽤 침착하게 이어졌다. "현재 네가 사용하고 있는 무학이 누구의 것인지는 너도 잘 알고 있겠지." "그야 천하제일검의 무학이 아닙니까?" "맞다. 그리고 네가 어찌하여 그것을 익힐 수 있었는지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네, 그분은 제게 숙부(叔父)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초아신은 분명 네 숙부다. 더 나아가서는 절대무가에서 배출된 고수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고." 초사영이 물었다. "결국 제가 알게 될 비밀은 숙부님과 관계된 것입니까?" "그래, 우리 가문이 결사적으로 변황무림을 막고자 했던 것은 중원무림의 안위를 염려해서였으나 그 전에 먼저 네 숙부인 그가 동기를 부여한 탓이었다." "동기를 부여하다니요?" "들어 보아라." [2]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 변황의 제 일인자로 군림하게 된 가소(伽素)가 중원을 침공해 온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 직전까지 그는 뜻밖에도 신변의 위협마저 느끼며 지내야 했다. 그것은 근 백여 년 간이나 전쟁을 치루며 살아 왔던 그들이 변황 통일이 이루어진 뒤에도 여전히 검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들의 호전성(好戰性)이었다. 그런즉 가소는 변황의 통치가가 되기는 했어도 그들이 언제 자신에게 반역의 칼을 들이댈지 몰라 전전긍긍해야 했다. 긴 세월에 걸쳐 다져진 그들의 기질은 어떤 수단으로도 통제가 불가능했고, 그것을 해소시키고자 했던 가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화약고와도 같았다. 그리하여 생각다 못한 가소는 결과적으로 그들을 다스릴 수 있는 모종의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는데,


중원무림에의 침공이 바로 그것이었다. 남아도는 그들의 혈기를 변황의 오랜 숙원인 중원 진출로 돌려 볼 심산이었던 것이다. 가소는 그렇게 중원 침공을 목표로 놓고 세부적인 사항을 검토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결과로 중원에 한 명의 만만치 않은 고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천하제일검인 검후 초아신은 기껏 전략을 다 구성해 놓은 가소에게 있어 크나큰 골칫거리였다. 어쩌면 자신들의 진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인물이었으므로. 가소는 중원 침공 직전 결단을 내린다. 그는 초아신을 제거해야만 후환이 없으리라는 판단하에 한 명의 고수를 급파했다. 그 고수는 이름하여 혈미인(血美人)이었다. 별호에서 능히 짐작할 수 있듯 그녀는 공포의 상징인 마녀(魔女)로 훗날 고금제일무녀(古今第一武女)라고도 불리웠다. 본시 변황에는 인간의 신체로는 익힐 수 없다는 희대의 음공(陰功)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혈미인은 우연한 기회를 빌어 그 음공을 극성까지 연마한 초고수였다. 일명 빙백소수마예(氷魄素手魔藝)라던가? 혈미인이 익힌 이 음공은 중원무림을 전율케 했다. 그녀에게는 도시 적수가 없었다. 천하에 내로라하던 고수들이 한결같이 그녀의 일 수에 맥없이 쓰러져 갔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중원무림은 혈미인 한 사람 때문에 숨을 죽여야 했고, 그 소문은 초아신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초아신은 그때 벌써 변황무림의 동태를 예의 주시해 오고 있던 터라 그녀가 변황에서 파견된 고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아무도 모르게 단신으로 그녀를 찾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예정된 두 사람의 대결은 이루어지는데........ 승부의 결과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천하제일검이라는 무명(武名)도 혈미인의 음공 앞에서는 무력하게 꺾이고 말았다. 패배란 초아신 자신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로써, 그는 혈미인의 독수(毒手)로부터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기는 했으나 그 대신 크나큰 불안과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혈미인의 가공할 무위를 직접 접해 본 그는 그런 고수를 길러낼 수 있었던 변황의 저력에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 더구나 향후로 닥칠 변황의 대대적인 침공을 예상하고 있었던 그는 고심 끝에 한 가지 결심을 굳히기에 이르렀다. 자신의 가문이 지닌 힘을 이끌어내 그들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이 일을 기화로 절대무가의 신화는 이루어졌다. 원래 그의 가문은 강호상에 이름이 나 있지 않았다. 이는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명리에 연연하지 않아 그때까지도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중 초아신만이 무림에 출도해 명성을 얻은 바, 그는 자신의 가문이라면 능히 중원무림을 구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문제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은둔 생활을 고수해 온 그들을 어떻게 무림으로 등장시키냐는 점이었다. 초아신은 한동안 이를 두고 고민하다가 묘안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지나치게 극단적이기는 했으나 효과를 기대하기로는 더없이 적절한 방도였다. 그는 수치를 무릅쓰고 수하들에게 근역을 돌아 다니며 소문을 내게 했다. 혈미인과의 일전에서 패배한 전력을 한층 더 부풀려 그녀의 무공에 의해 자신이 사망했노라고. 소문은 즉각 가주(家主)이자 하나 뿐인 그의 형, 초하단(楚廈鍛)의 귀에 들어갔고 결과는 불문가지였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의 죽음에 초하단은 크게 충격을 입었다. 더구나 동생을 끔찍히 사랑했던 그는 하필 변황의 고수에게 무참히 죽어 갔다는 말에 격노했다.


이 사건을 계기를 초하단은 복수를 맹세하는 한편, 비로소 무림의 정황에 눈을 돌리게 되었으며 동생인 초아신이 왜 그처럼 죽어가야 했는지도 나름대로 면밀히 분석해 보았다. 결국 초하단은 오랜 봉문(封門)을 풀고 변황무림의 세력에 대적하여 최후까지 싸우다 죽었다. 그런데 이 일련의 사태에서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초하단의 존재를 아직도 중원무림인들이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초하단은 변황을 맞아 분전하는 중에도 시종 동생인 초아신으로 행동했는데, 그것은 가문에서 초아신의 이름만이 유일하게 무림에 알려져 있는지라 혈미인과 대결하여 죽음을 당했다는 그와 가문의 명예를 동시에 회복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르자면 초하단은 속된 명리와 진정한 명예의 차이를 잘 알고 있는 인물로서 참된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스스로 존재를 접는 일마저도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그 당시 장렬하게 전사한 인물은 초아신으로 알려졌고, 그 내막은 심지어 자(子)인 초사영도 몰랐던 부분이었다. 세인들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절대무가의 비화(秘話), 거기에는 일신에 관계된 모든 것을 초개처럼 내던질 수 있었던 초하단, 초아신 형제의 희생이 내재되어 있었다. 어쨌든 그 이후로도 초아신의 실제적인 행방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초아신은 형에게 중원무림의 구원이라는 막중한 과업을 일임하고는 전장(戰場)에조차 모습을 내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럴 수가.......!" 초사영은 반쯤 넋이 나가 탄식해마지 않았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심중으로 읊조렸다. '나는 정말 몰랐었다. 나의 가문이 변황을 맞아 싸운 이면에 그런 사연을 가지고 있을 줄은........' 노인의 음성이 그의 귓전을 울렸다. "그때 검후에게는 두 명의 수하가 있었다. 그는 참전하지 못하는 자신을 비관하며 그들에게 자신의 가문을 도와 이적(夷敵)들을 이 땅에서 몰아 내라고 명했었지." 초사영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계속 듣기만 했다. "그들 두 명의 수하는 그것이 마지막 명이라 여기고 그 길로 곧장 절대무가로 달려갔다. 둘 중 한 명은 함께 분전하다가 죽고, 다른 한 명은 부상을 입은 채 전장을 빠져 나왔다. 멸문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이 없는지라 초하단이 한 사람을 구해 달라고 그에게 부탁했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말을 멈추고 초사영을 올려다 보았다. "그럼?" "그래, 그 당시 구출된 사람이 갓난 아기였던 너다." "우우우...... 더 듣고 싶지 않습니다. 왜 이제 와서 그런 얘기들을 제게 하시는 겁니까?" "괴롭겠지만 네가 알아야 할 사실은 더 있다." "무엇이 또?" "그것은 지금까지 숨겨 오느라 나도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던 부분이다. 죽기 전에는 털어 놓아야 할........" 초사영은 이 순간 머릿속이 헝클어져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노인에게서 듣는 바 외에도 그에게는 따로 고독한 성장과정을 통해 얻어진 아픈 기억의 파편들이 있었거니와, 그것들까지 속속 떠올라 그를 무던히도 괴롭혔던 것이다. 노인은 침중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그때 너를 들쳐 업고 세상으로부터 잠적해 버렸던 그 자의 이름은 낙성검호(落星劍豪) 비사무(秘思武), 바로 노부다." "네에?"


초사영의 눈이 한껏 부릅떠졌다. 그는 마치 커다란 쇠뭉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유명을 달리한 인물들의 일화만도 감당하기가 벅찬거늘, 눈 앞에 버젓이 살아 있는 자마저도 엄청난 비밀을 품고 있다가 그에게 충격을 선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찌 이런 일이! 내 유일한 혈육임을 한 번도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할아버님께서 나의 친조부가 아니셨다니.' 그는 급기야 하늘이 빙빙 돈다고 생각했다. 낙성검호 비사무. 이 인물은 초사영과의 관계야 어찌 되었건 단순히 검후의 수하로서만 논해질 수는 없는 위인이었다. 그의 낙성검(落星劍)에 의해 펼쳐지는 낙성뢰검(落星雷劍)의 위력은 한 때 천하를 떨어 울린 바 있었다. 다만 명실공히 천하제일검인 검후 초아신이 등장함으로써 낙성검호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그는 이후로 나이를 불문하고 자청하여 검후의 수하가 되었다. 하지만 비사무는 낙성혈마(落星血魔)라는 원래의 별호가 말해 주듯 절대무가의 전란에 휩쓸리기 전까지는 무림을 휘젓고 다녔으며 공포의 대명사로 지칭되기도 했었다. 물론 그 또한 검후와 함께 죽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고자 했던 말을 모조리 쏟아내서일까? 회한에 젖어 들었던 노인, 아니 낙성검호 비사무의 동공이 급격히 응축되기 시작했다. "할아버님.......!" 초사영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잊은 듯 크게 부르짖었다. 그는 황급히 비사무의 맥문을 잡아 보았다. '오오! 마침내........' 초사영은 절망에 휩싸이고 말았다. 비사무의 맥박은 너무도 약해져 거의 정지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지체 없이 맥을 통해 본신의 진기를 죽어가는 비사무에게 유입시켜 주었다. 잠시 후. 비사무의 눈은 반짝 생기를 띄었다. "으음........" "괜찮으십니까?" 울부짖는 듯한 초사영의 물음에 비사무는 눈을 깜박여 대답했다. 그러고는 아직도 다 하지 못한 말들을 꺼냈다. "사영...... 네 부친은 그렇게...... 돌아가셨다. 부디...... 그분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 네가 헤아릴 수 있기를........" 비사무의 눈가에 처음으로 뿌연 습막(濕幕)이 어렸다. 그것은 비단 말을 맺지 못하는 안타까움에서만은 아니리라. "그럼 숙부께서는, 숙부께서는 어찌 되셨습니까?" "그분에 관해서는...... 나도 모른다. 혈미인과의 싸움으로...... 크게 부상을 당하시고는 낙심을........ 그것이 내가 아는 전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네 모친께선 당시...... 살아 계셨었다." 초사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삼 눈을 부릅떴다. "그, 그렇다면 지금은?" "아마도 그 자, 가소가 변황으로 모셔간 듯........ 네 모친은 미색이 빼어나신지라........" "그럴 수가!" 초사영은 기쁨에서가 아니라 그 반대인 심경에서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비사무의 말마따나 빼어난 미색으로 인해 적장(敵將)의 눈에 들어 그의 영토로 끌려 갔다면 설사 현재까지 살아 있다고 해도


죽느니만 못했기에. 비사무가 갈쿠리처럼 비쩍 마른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너무...... 비통해 하지 마라, 사영........ 노부가 알기로 가소는...... 우리와 적대관계여서 그렇지...... 훌륭한 인물이었다. 짐작컨대...... 네 모친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을 것........" "할아버님, 죄송합니다. 못난 꼴을 보여........" 초사영의 눈에서는 기어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을 보며 비사무는 호흡이 거칠어지는 와중에도 말했다. "아니야. 노부는...... 네가 있어 정녕...... 행복했다. 더구나 아직도 나를 그리 불러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고맙다니요?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할아버님께선 소손에게 있어 언제고 친조부 이상의 존재이셨습니다." "그래, 너도 실은 내게 친손자 이상이었........" 비사무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으나 그것은 심한 각혈로 인해 금세 지워져 버렸다. "쿨룩, 쿨룩! 끄으....... 헉!" "할아버님! 할아버님.......!" 초사영은 미친 듯이 부르며 그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종말의 시간은 예정대로 다가왔고 비사무는 이를 피하지 못했다. 그의 눈빛이 서서히 어둡게 꺼져갔던 것이다. 그 광경을 보게 되자 초사영은 일체의 동작을 멈추었다. 화려한 명성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낙성검호 비사무는 이름도 없는 동굴에서 그렇게 숨어 거두고 말았다. 초사영. 그는 망연자실한 모습이 된 채 굳어져 있었다. 텅 빈 그의 뇌리에는 더 이상 무엇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아니, 일체의 사고(思考)가 뿌옇게 퇴색 되어 버렸다. 비사무의 죽음이 가져다 준 충격은 예상보다 훨씬 커서 단단하기 그지 없던 그의 의지마저 무너뜨리고 만 것이었다. 특히 마지막으로 남긴 고맙다는 말은 내내 초사영의 귓가에서 맴돌았다. 오랜 세월에 걸친 비사무의 진심을 알 수 있는. 이윽고 초사영의 육신은 허물어지듯 앞으로 기울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단 한 마디 뿐이었다. "할아버님........" 이어 방금 전까지도 두 사람의 대화로 웅웅 울렸던 허수동은 언제 그랬냐 싶게 태고의 정적으로 잠겨 들었다. 비사무의 시신 위에 엎드려 있는 초사영의 등으로 어둠이 내리 덮혔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그가 가슴 속으로 느끼는 어둠과 동일한 색채였다. [3] 구마졸(九魔卒). 이는 현재 머무르고 있는 광야에서만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다른 곳에서는 그렇듯 천박하게 취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흑풍구문자(黑風九門刺)라는 본래의 이름은 통하지 않았다. 취지에 맞추려면 반드시 격을 낮추어야 되었던 것이다. 그들을 한 사람씩 소개하면 이렇다. 잔인혈자(殘人血刺).


이 자는 문자 그대로 상대를 아주 잔인하게 죽인다. 그에게 죽은 사람 치고 시체가 온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음으로 공포혈자(恐怖血刺). 그는 상대로 하여금 극단의 공포를 느끼며 죽어가게 만든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기술이 요구되는데 그 하나하나가 단지 전해듣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일 정도라고 한다. 환상혈자(幻想血刺). 이른바 환상살인이랄까? 그가 적을 죽이는 방법이란 가히 미학(美學)이 논해질 정도로 환상적이라는게 정설이다. 은밀혈자(隱密血刺). 이 자는 살인의 천재로써 상대가 누구건 일단 죽이고자 작정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감쪽같이 시행하곤 한다. 극락혈자(極樂血刺). 상대가 느끼는 고통에서 희열을 느끼는 자다. 그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는 자는 끔찍한 고통부터 각오해야 된다. 무심혈자(無心血刺). 어떤 행위를 하건 무심일색인 그는 살인에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 그리하여 때로는 잔인혈자보다 더욱 잔인해지기도 하며, 상대를 괴롭히는데 있어 극락혈자를 능가하기도 한다. 소소혈자(笑笑血刺).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살인을 하는 위인이다. 자칭 천하에서 가장 안전하게 사람을 죽이는 자라는 그였다. 과연 그 안전이 무슨 덕이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쾌살혈자(快殺血刺). 그에게 걸리면 상대는 죽어 가면서도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 한다. 그만큼 빨리 죽인다는 얘기다. 백의혈자(白衣血刺). 이 자는 항상 백의를 단정히 차려 입고 다닌다. 복장에 어울리게 살인 수법도 깨끗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흑풍구문자는 저마다 한 방면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자들이었다. 사실 그런 별칭이 주어질 정도라면 그들의 무공 실력이 어떤 수준인지야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하는 각 방면에서는 천하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위인들이었는데, 그들을 통상 구마졸이라 부르도록 허용된 자들이 따로 있었다. 이들은 다름 아닌 파천황에 선택된 재목들이었다. 스스스........ 한 인영이 움직이고 있다. 그 동작에는 기척도, 소음도 없었다. 게다가 귀신 같은 신법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민첩하기 짝이 없다. 인영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십여 장을 나아간다. 그가 이렇듯 재빠르게 헤쳐가고 있는 곳은 빽빽한 밀림 속이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이 시야를 가리고 있건만 그는 숲도, 어둠도 일체 장애가 되지 않는 듯 거침없이 전진을 감행하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서일까? 그의 얼굴은 흡사 분칠을 한 듯 비정상적으로 뽀ㅇ다. 이마에는 뭔가 작고 검은 자국이 찍혀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숫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십구(四十九> 인영은 파천황에 선택된 자였다. 이마에 씌어 있는 숫자는 그가 지니게 된 또 하나의 이름이었다. 여기서는 본래의 이름 대신 숫자로 불리워질 뿐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이름은 형가(炯苛)였다. 비록 지금은 필요에 의해 접어 두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는


자신의 본 이름을 한순간도 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그는 다짐했었다. '내 형가라는 이 두 글자를 세상 어느 누구의 것보다 더 존귀(尊貴)한 이름으로 만들겠노라.' 그것은 천하제일인이 되겠다는 의지나 마찬가지였다. 작금에도 형가는 빠르게 움직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천애 고아다. 고독과 그에 따르는 아픔들을 뼈저리게 겪으며 살아 왔다.' 그 말은 곧 어릴 적부터 고아라는 이유로 뭇사람들에게 천대를 받으며 자랐다는 뜻이었다. 사실상 그는 자신을 보호해 주고 사랑해 주어야 할 부모를 일찌감치 잃었다. 그의 부모는 딱히 이렇다할 죄도 없이 누군가의 칼에 억울하게 살해 당했다. 천행으로 그만이 살아 남기는 했지만 죽음보다 못한 생을 영위해야 했다. '나는 세상을 원망하지는 않아. 그러면 내 자신이 오히려 더욱 초라해 질 따름이니까.' 형가는 웬간해서는 지나간 날을 반추하는 짓도 하지 않는다. 떠올려 봐야 고통스러운 일들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 야망의 터전, 이 대명천지가 후일 나의 과거를 충분히 보상해 주게 될 것이다.' 전면으로 아름드리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이곳은 그것에의 달성을 위한 첫 관문이다.' 형가는 신형을 날려 나무 위로 올라갔다. 사위는 여전히 지척도 분간할 수 없이 어둡기만 했다.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가지 소리만이 요란하여 시각과 청각 모두가 교란되기 딱 알맞은 상태였다. 형가는 그곳에서 잠시 기다리며 기회를 엿보았다. 뒤이어 또 다른 인영이 숲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헉!" 그 인영의 눈에는 한순간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그를 응시하던 형가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럴 수가! 나뭇잎이 비수가 되어 날아 들다니.' 인영은 서둘러 몸을 피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그의 팔에는 나뭇잎에 의한 혈선이 그어지고 말았다. <일백칠(一白七)> 인영의 이마 위에도 그런 숫자가 적혀 있었다. 다음 순간, 그의 생명과도 같은 숫자 위로 나뭇가지가 파고 들었다. 그것은 나뭇잎에 이은 또 한 차례의 암습이었다. 백칠 호는 위기를 직감하고 빠르게 신형을 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가 피한 쪽으로 나무가 쓰러지면서 통째로 덮쳐왔다. 뿐만 아니라 땅에 떨어졌던 나뭇잎과 가지들도 재차 고개를 쳐들고 그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쇄도해 오고 있었다. 파파파팍! 백칠 호는 일시지간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댔다. 그 상황은 설사 절세의 고수라 해도 감당키 어렵다. 사방에서 동시에 밀어 닥치는 공세를 어떻게 피한단 말인가? 그는 눈 앞으로 다가드는 온갖 살인 도구들, 즉 나뭇잎과 나뭇가지, 흙덩이 등을 보며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 '환상살인(幻想殺人).......!' 그 깨달음은 죽음과 직결되었다. 파아악! 백칠 호의 일신에서 선연한 핏줄기가 솟아 올랐다. 말마따나 환상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인가? 놀랍게도 숨을 거두는 찰나,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우수수........ 쓰러진 그의 시신 위로는 나뭇잎과 흙덩이가 내리 덮혔다. 미소 탓인지 그 소음도 죽음을 찬미하는 갈채인 듯 싶었다. 백칠 호의 시신은 수북한 나뭇잎 등에 감쪽같이 묻혀 버렸다. 그 광경은 지켜보고 있는 자에게도 봄날의 포근함이 대지 위에 내려 앉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 일으켰다. "크큭! 과연 환상살인이군." 기소를 흘리며 나무에서 떨어져 내리는 자는 형가였다. 그는 죽은 자의 무덤(?)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가슴이 써늘해지는 공포감이 엄습해 왔기 때문이었다. 언제 그 자신에게도 이런 암습이 가해질지 알 수 없었다. 이곳은 환상혈자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숨겨져 있는 숲 속이었다. 그야말로 환상혈자의 분신이나 다름 없는 공격물들이 도처에서 꿈틀거리며 상대의 목숨을 노리는 장소였다. 극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백칠 호처럼 더 이상의 숨쉬기를 포기하고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가야 하는 것이다. [4] 은밀혈로(隱密血路).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명명된 곳이 있다. 누가 붙였는지는 모르나 그 이름은 파천황의 무리들에 의해 불리워지고 있었다. 물론 그런 이름을 붙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은밀혈로는 연상되는 바와는 달리 전후좌우가 환히 뚫려 있는 평원(坪原)으로 바람도 자주 불지 않는 고즈넉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 조용함 속에는 무서운 살기(殺氣)가 내포되어 있었다. 몸을 숨길 만한 곳이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는 이 드넓은 곳에 은밀하게 죽음의 기운이 배어 있었다. 이 말은 어딘가에 살인자가 은신해 있다는 뜻이다. 부지불식간 살수가 덮쳐 들면 꼼짝없이 죽어 주어야 하는 장소가 바로 은밀혈로라 할 수 있었다. 형가는 은밀혈로를 지나기 위해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쩌면 죽음을 향한 것이 될지도 모를 그 행진을 그로서는 멈출 수가 없었다. 이는 그의 운명이므로. 또 다른 절대 죽음의 장소이다. 일신에 청의를 입고 있는 한 인영이 침묵 속에서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소리를 내서도 안 되었다. 그것은 상대를 죽이고 자신만이 살아 남아야 되기 때문이었다. 스슷! 누군가 역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나타났다. 그 자는 출현과 동시에 청의인의 등 뒤로 바짝 다가서고 있었다. 그의 손이 청의인의 목덜미를 날쌔게 잡아챘다. "컥! 누...... 누구냐?" 청의인은 금세 숨이 멎어 갈 듯 기성을 발했다. 졸지에 당한 변고 앞에 그는 너무도 무력했다. 사실상 그 아닌 누구라도 이 상황에서는 별 수 없었겠지만. "크크...... 어리석은 놈! 아무리 주변이 어두워도 달빛은 살아 있다. 네 그림자를 조심했어야지." "아!" 청의인은 그제서야 실책을 깨닫고는 탄성을 터뜨렸다. 새로 등장한 자는 그 자신의 그림자로부터 솟아났던 것이다. 하지만 사태를 무마할 여유는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끄윽!" 청의인은 상대의 손에 목줄기를 비틀리자 입가에 쓴웃음을 드리웠다. 죽음이 너무 빨리 다가왔다고


여기며. "미안하구나. 일이 이렇게 되어서." 괴인영은 청의인을 바닥에 메다 꽂았다. 퍽! 그는 상대의 생사여부란 굳이 확인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손을 툭툭 털었다. 그러더니 어둠 속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크크크...... 내 손에 걸리면 누구라도 이렇게 된다. 왜냐 하면 파천황의 주인은 나 소려곡(宵黎哭)이어야 하니까." 바람을 타고 흐르는 그의 음성은 스산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파천황주에 도전한 모든 이들의 생각이 자신과 같으며, 그로 인해 양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혈옥(血玉). 이마에 새겨진 숫자는 백육십사 호다. 그는 상당히 오랫 동안 한 곳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른다. 하긴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어느 순간이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중점일 뿐이다. 그의 뇌리에는 아무 생각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것은 그 자신이 의도적으로 머릿속을 텅 비운 채 감각만으로 모종의 기회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왔다!' 마침내 백육십사 호는 몸을 솟구쳤다. 파팍! "헉!" 누군가의 입에서 경악에 찬 외침이 튀어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원초적인 생리현상을 해결하고 있는데 갑자기 가랑이 밑에서 한 자루의 검이 그를 찔러 왔다. 그 바람에 뿜어져 나오던 오줌줄기마저도 얼어붙듯 정지되어 버렸다. 대신 그의 몸에서는 핏물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치솟은 검에 의해 가랑이로부터 위로 갈라지고 있는 그 자는 팔십칠 호였다. 그를 벤 암살자는 그의 예상권에서 벗어나 땅 속에 은닉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길! 용번도 보지 말라는 건가?" 팔십칠 호는 급기야 머리끝으로 튀어 오르는 검을 보며 혼자 씨부렁거렸다. 그동안 너무 긴장감에 시달린 탓일까? 그는 죽음을 맞게 되자 공포감보다도 짜증을 앞세우고 있었다. 쿵!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모로 쓰러졌다. 스읏! 거구인 팔십칠 호의 시신을 밀어 제끼며 지면 위로 올라서는 위인이 있었다. 그는 앞서의 백육십사 호였다. 긴 시간을 지루해하지 않고 기다린 덕에 그는 목표물을 포착할 수 있었고, 그 찰나에 검을 뻗어 기어이 원하던 바대로 목적을 달성하고 만 것이었다. 그의 앞에서 인내심이 부족했던 팔십칠 호는 처참하게 양단된 채 핏물을 쏟으며 널브러져 있었다. 이른바 무심혈관(無心血關). 이것은 파천황의 도전자들에게 상대를 죽이고도 절대적으로 무심해야 한다는 철학을 종용하는 관문이었다. 그곳에서 백육십사 호는 쓰게 웃었다. '역겨워.' 그가 살인을 하고 스스로에게 역겹다는 생각을 가져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전에는 이보다 더한


상황도 수태 있었지만 단 한번도 그런 느낌과는 만나본 적이 없는 그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정확히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였다. '동굴에서 만난 그 작자........' 백육십사 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그때 왜 나를 구해 주었을까? 우리는 모두 경쟁자들이다. 그렇건만 나를 죽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지?' 상념은 계속 꼬리를 이었다. '정말 싫은 작자다.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쓸데없는 짓은 왜 해 가지고 이토록 부담을 준단 말인가?' 슬며시 부아를 끓어 올리고 있는 백육십사 호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여인이라는 것도, 무엇하러 이곳에 들어 왔는지도 생각하지 않기로 작정한 지 오래였다. 사실 그녀에게는 언제고 목적한 바 외에는 일체 염두에 두지 않는 무서운 일면이 있었다. "흥!" 불현듯 그녀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아울러 심중으로는 이렇게 뇌까리고 있었다. '괘씸한 작자, 사십사 호! 나는 너의 이름을 알고 있다. 구마졸이 너를 우리들 중 제일로 꼽고 있다는 것도. 그러나 내가 있는 한 파천황주의 자리는 어림도 없다, 초사영!' 그녀는 손에 들린 검을 와락 움켜 쥐었다. 두 사람. 그들의 자세는 묘했다. 거의 맞붙어 있다시피 한 채 왼손을 마주잡고 있었다. 아마 오른손이었다면 반가워 악수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그러나 다정하게(?) 깍지를 끼고 있는 왼손에 반해 오른손에는 각기 상대를 겨눈 것인 듯 검을 비껴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도 똑같이 서로를 잡아 먹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지금 싸우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자세야 어떻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실제적으로 그들 사이에 교차되는 것은 일촉즉발의 무시무시한 살기였다. 더구나 두 사람의 검은 상대의 몸 가까이에 바짝 붙여져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어느 부위고 쉽게 베어낼 수 있을 듯 했다. 숨통을 끊어 놓는 일도 역시 다를 바 없었다. 문제는 누가 더 빠르게 검을 쓰느냐였다. 그 속도에 따라 두 사람은 생사가 결정지워지게 되어 있었다. 극히 짧은 찰나를 빌어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고 만다. 결국 그들은 그 기회가 되어줄 상대의 허점을 찾아내기 위해 기이한 자세도 불사하고 긴 시간을 소비한 셈이었다. 언뜻 보면 그들은 그 상태로 굳어져 버린 것도 같았다. 하지만 마냥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고, 이를 익히 잘 아는 두 사람은 종내 움직임을 개시했다. 츳! 누가 먼저였는지는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다만 둘 중 누군가의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냈을 뿐이었다. 승패가 가리워진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스르르........ 한 사람의 신형이 무력하게 허물어졌다. 그 자의 목덜미에는 어느 틈엔지 작은 혈흔(血痕)이 살짝 그어져 있었다. 반면에 생을 획득한 자의 일신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그것은 상대가 미처 검을 뻗을 겨를도 없이 신속하고 정확한 검법을 구사했다는 증거였다. 말하자면 이 일전에서의 승리는 쾌검(快劍)이 안겨준 것이었다. 승자의 입가에는 만족감을 뜻하는


미소가 매달렸다. "쾌검혈흔(快劍血痕)! 후후...... 이로서 흑풍구문자가 내놓은 모든 것을 습득했다. 이 정도면 더 이상 도전자가 없겠지?" 그의 이마에도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일(一)> 제 9 장 최고의 재목 [1] 흑풍구문자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의 눈앞에는 광야막(廣野幕)이 펼쳐져 있었다. 그들은 일부러 그곳에 장방형 탁자를 놓고 둘러 서 있었다. 회의를 통해 현재 상황을 평가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탁자의 중심에 서 있는 자가 가장 눈에 띈다. 일신에 백의를 입은 그는 언뜻 보기에도 깨끗한 얼굴에 차가운 인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가 백의혈자였다. 외양에 걸맞게 살인 수법도 깨끗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자가 바로 그다. 유난히 흰 얼굴에 가늘게 그어져 있는 적미(赤眉)가 웬지 사이(邪異)한 느낌을 전해 주고 있다. 그는 말을 꺼내기 위해 특유의 날카로운 눈으로 중인들을 쓰윽 훑어 본다. 그는 이처럼 은연 중 우두머리 행세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흑풍구문자 가운데 별도의 수뇌가 없기 때문이었다. 따로 지시를 내리는 자가 없다 보니 그리 되었다는 얘기다. 이 점은 그의 독단에 의해 이루어진 사항이어서 다른 혈자들의 불만을 사기에 딱 알맞았다. 하지만 그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 나머지 혈자들은 그와 부딪치기 싫어 일체 군소리를 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백의혈자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통솔하는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지나치게 설친다거나 강권을 발동한 예는 아직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생김새와 마찬가지로 조용하고 깨끗한 것을 선호했으며 행동도 그렇게 하는 위인이었다. 그래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백의혈자가 그 이면에 천하의 어느 누구보다 다양한 인격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잔인, 비정, 무심, 냉혹, 소살심(笑殺心) 등등........ 이런 면들이 나머지 혈자들로 하여금 불만을 토로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백의혈자는 어투도 늘상 명령조였으되, 그의 말에 답하는 혈자들은 전혀 이의를 표명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결과를 누가 말해 보라."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네 명이다." 자진하여 응수해 간 자는 잔인혈자였다. "네 명이나 된다고?" "그렇다. 그들은 각기 형가, 소려곡, 혈옥, 초사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 네 명이 현재까지 다른 자들을 제치고 뛰어난 기량을 보여 주고 있다." 백의혈자는 번거롭다는 듯 싸늘한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그런 설명은 필요 없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가 누구인가만 알면 된다. 그런 자가 있기는 있나?" 잔인혈자는 민망한 듯 입맛을 쩍 다시더니 약간은 망설이는 투로 대꾸했다. "초사영이라는 자가 쓸만한 것 같던데?" "흠! 예상은 했었지만 역시 그였군. 그가 살아남은 사백여 명의 파천황 중에서 가장 뛰어난 기재란 말이지?" "이를테면 그렇다. 아직 결론이 나지는 않았지만." "아니, 지금 쯤이면 확정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백의혈자는 만족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곁에 있던 소소혈자가 넌즈시 물었다. "초사영이라면 사십사 호를 말하는 건가?"


늘상 머금어져 있는 그의 미소는 이 순간에도 환했다. "맞다. 그 자는 다른 자들과 비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발휘해 왔다. 방금 전에 나열된 네 명 중에서도 파천황주에 가장 가깝게 접근해온 놈이지." "누가 그를 추천했지?" "풍령패도 사도린." "흠, 그 자라면 믿을만 하겠군." 소소혈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나머지 셋은 누구의 추천을 받았나?" "형가는 초혼전주(招魂殿主)가, 소려곡은 혈궁전주(血宮殿主)가 추천했다. 혈옥만이 뚜렷한 추천자가 없다." 백의혈자의 미간에는 일순 묘한 선이 그어졌다. 그것을 보며 소소혈자도 고개를 갸웃했다. "거 아주 재미있군. 추천자도 없이 어떻게 들어왔지?" 잠자코 있던 잔인혈자가 그 말을 받았다. "꼭 그렇게 말할 수만은 없다. 그는 십육은밀사단의 공동 추천이 있었던 자다. 다른 도전자들처럼 특정 인물의 강력한 천거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렇지." "크크...... 그게 그 말 아닌가? 고작 그 정도의 추천이라면 혼자힘으로 밀어 부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텐데." "좋도록 생각해라. 어쨌든 불신이 가는 자는 아니니까." "요지는 그것이었군. 좌우간 대단한 집념을 소유한 자인 듯 하군. 배경도 없이 스스로 파천황에 뛰어 들다니." 혼잣말처럼 읊조린 소소혈자는 새삼 광야막을 둘러 보았다. "어디 그 혈옥이라는 자의 실력을 좀 볼까?" 휘이잉―! 바람이 그들 흑풍구문자의 옷자락을 펄럭이며 지나갔다. 그 와중에 백의혈자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과연 그들 중 누가 파천황을 수중에 거머쥐게 될 것인가? 상당히 궁금해지는구나." 그는 자신 외에 다른 여덟 명을 돌아다 보았다.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파천황주는 우리가 이루지 못한 살인도 능히 시행할 수 있는 자로 키워진다. 그런 연후에는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하게 되어 있지. 그러나 나는........" 그의 음성은 강렬한 힘을 담은 채 이어졌다.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 말에 답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혈자들의 눈가에는 차례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 한 소리 내뱉았다. "우리도 같은 심경이다.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모르지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크크...... 당연한 말을 구태여 왜 하느냐?" 도시 납득하기 어려운 얘기들이었다. 그것은 최소한 파천황주를 뽑으려는 자들이 할 만한 소리는 못 되었으므로. 아무튼 이들 사이에 무엇인가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분명했는데, 그 내용을 아는 자들은 오직 이들 뿐이었다. 이와 같은 시각에 수많은 인영들이 속속 광야막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애초에는 팔백여 명이나 되었지만 혈로를 헤쳐온 탓에 지금은 그 절반인 사백여 명으로 줄어든. 휘우우응―!


사풍(砂風)이 광야막을 휩쓸어 가고 있었다. 모래로 뒤덮힌 사막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아스라한 지평선만이 보일 따름이었다. 휘이이이―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사위에 온통 모래를 뒤집어 놓는다. 금세 눈앞이 뿌얘져 버리는 이 현상은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일어나 이제는 조금도 신기할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바람이 사막의 끝에서 불어 온다고 말하나 정작 그 끝이 어디인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처럼 광대하기 그지 없는 사막이 이름하여 광야막이었다. 그곳에는 사백여 명에 달하는 인영들이 모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모래 위를 휩쓸고 지나가는 거친 바람 소리 외에는 여하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들은 같은 자리에 존재하고 있을 뿐 대화를 나누는 예가 없었다. 눈인사 따위의 아는 척조차도 일체 없었다. 그런 상태로 그들은 타오르는 시선을 광야의 한 끝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과 머리칼을 함부로 휘날렸으나 모두가 굳어진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기(氣)란 기는 눈으로만 집중된 것일까? 그들이 지닌 사백여 쌍의 눈에서는 한결같이 패기와 더불어 무한한 집념, 그리고 야망의 불길이 쉴새없이 치솟고 있었다. 그들의 뒤쪽에는 아홉 명의 인물이 우뚝 서 있었다. 저마다 일신을 통해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자들이었다. 이들 흑풍구문자의 눈은 앞의 사백여 명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중 백의혈자가 입을 열었다. "자!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발점이다. 너희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이 선택받은 자가 될 것이다. 파천황주가 되면 그는 향후로 천하인들에게 경배를 받을 것이며, 흑풍사 내에서도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선동에 가까운 음성 뒤로 그는 크게 외쳤다. "가라! 목숨을 내걸고 도전해 보는 거다." 그 말의 파장은 컸다. 휘익! 휙휙휙―! 천명(天命)이라도 떨어진 듯 사백여 명이 한꺼번에 내달아 광야막을 가로질러 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드넓은 광야막은 삽시에 뿌연 먼지로 뒤덮히고 말았다. 그들이 사라진 직후, 팔 인의 혈자들은 뒤에 남아 이런 말들을 웅얼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본격전에 돌입했군." "크큭! 출발한 놈은 사백 명 안팎이지만 끝까지 살아 남게 될 놈은 과연 몇이나 될까?" "거기까지는 우리가 상관할 바 아니다. 어차피 필요로 하는 자는 몇 명에 지나지 않으니까." "일 년이라고 했던가? 그 기간을 무사히 넘기고 최초로 이 곳으로 돌아오는 자가 파천황주이다." 파천황주란 이미 언급되었듯 흑풍사가 새롭게 구상해낸 특수 기동대의 지휘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일단 뽑히기만 하면 이후로는 대내외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소유하게 된다. 하지만 파천황주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과연 누가 흑풍사가 안배해 놓은 온갖 난관을 뚫고 파천황주가 될지? 휘이이이잉―! 광야막의 바람은 여전히 거세기만 했다. [2] 하루, 이틀, 사흘...... 그리고 열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초사영은 날짜 세는 일조차 포기한 상태였다.


풍령패도 사도린의 제의를 받아 들여 파천황주에 도전하기는 했지만 그 시험들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애초에 나설 때는 어지간히 자신만만했던 그였다.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을 해칠 수는 없다고 자부해온 터였으므로. 그러나 그의 자신감은 흔들리고 있었다. 현재까지만 해도 그는 숱한 죽음의 관문을 넘고서야 가까스로 이곳에 이르러 있었거니와, 앞으로도 어떤 위험이 닥칠지는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지금 머무르고 있는 장소는 이름도 모르는 동굴 안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짐승처럼 웅크린 채 또 다른 형태의 시험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딱히 죽음이 두렵다고는 말할 수 없었으나 초사영은 아직 부응할 마음이 없었다. 그 죽음이 자연의 법칙에 의한 것이 아닐진대 그는 오기로라도 최후까지 살아 남을 작정이었다. 다만 그 일이 뜻대로 될지는 미지수였다. 노력이야 어느 순간이고 계속 멈추지 않겠지만 현 시점에서의 생과 사는 그 자신도 장담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곳곳에서 죽음의 마수(魔手)가 내내 그를 불렀다. 더구나 그들은 그와 똑같은 운명을 걸고 있는 동료들이었다. 상호 간에 죽고, 죽이는 비정(非情)의 단련은 여기서도 다를 바 없었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본인이 죽는다는 냉혹한 법칙을 그들은 목숨을 내놓고 철저히 배워 가야만 했다. 초사영의 눈빛은 어두운 동굴 속에서 야수의 그것인양 무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 외에 다른 자를 제거하기 위해 한껏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 일에 자책은 어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상대도 그를 죽이기 위해 똑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을 테니까. 초사영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문득 고소를 지었다. '후후...... 내가 지나치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군.' 분명 이 동굴 안에 그 말고 다른 사람도 은신하고 있었다. 그렇건만 사위가 너무도 적막하다 보니 자신의 심장 박동마저도 평소보다 무척이나 크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는 애써 정신을 다른 데로 돌렸다. '방금 전에는 벽에서 창이 튀어 나왔었지.' 고개를 돌려보고 싶었으나 이는 불가한 행동이었다. 기척을 내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나 진배 없으므로. 때문에 그는 곁눈으로 동굴 내부를 탐색해 보았으나 칠흑 같은 어둠이 시야를 가려 어디가 어디인지 도저히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이곳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동굴인 것 같지만 실은 기관장치들이 밀집되어 있는 험지(險地)이다. 멋모르고 움직였다간 어떤 꼴로 죽어갈지 모른다.' 이래저래 초사영은 동굴에 꼼짝없이 갇힌 신세나 다름이 없었다. 보름이 지났는지, 혹은 한 달이 지났는지 그는 날짜 관념도 상실한 채 오직 어둠과 벗하고 있을 뿐이었다. 와중에도 긴장만은 풀 수가 없었다. 만일 그랬다면 수시로 닥쳐드는 암격에 그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리라. 그동안 물 한 방울 얻어 먹지 못했으나 허기 따위도 잊은 지 오래였다. 절실한 삶에의 욕구에 비한다면 차라리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 할 수 있었다. 초사영은 이 동굴 안에서만 적어도 열 명 이상의 인간을 죽였다. 안력도 통하지 않는 암흑 속에서 펼쳐진 전투인지라 자신의 손에 죽어간 상대가 누구인지는 당연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도 끝은 아니었다. 얼마 전부터는 한 명의 정체불명인과 죽음을 건 숨바꼭질을 벌여야 했다. 그 자는 강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초사영이 두려움을 느낄 만큼 무공은 물론 기질까지도 강한


위인이었다. 그것은 몇 번의 격돌을 통해 절감한 바였다. '상대는 타고난 승부사다.' 초사영은 진즉부터 상대의 공격에 당해 몇 군데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이는 정체불명인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입증해 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었다. 한동안 동굴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적요는 일순간에 깨지고 만다. 쉬익! '흡!' 어둠을 뚫고 날아온 것은 한 자루의 예리한 비수였다. 초사영은 급히 자세를 낮추어 피하는 한편, 그답지 않게 암담한 심정이 되어 부르짖었다. '그 자는 건재했다. 빌어먹을!' 그는 자신이 다친 만큼 그 자가 죽거나 상처를 입었으리라 여기고 있었는데 그 계산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상대는 버젓이 살아 있으며, 기세가 위축되지 않은 채 선공(先攻)하는 것으로 미루어 부상도 크지 않은 게 분명했다. '누구일까? 그 자는.' 초사영은 처음으로 상대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도를 더해가는 놀라움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긴장감도 더욱 고조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 자는 지금껏 내가 만난 상대 중 가장 강할 것이다. 어쩌면 이번 싸움에서는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즉 최대한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때였다. 슉! 또 한 자루의 비수가 다시 날아든 것은. 초사영은 마음과는 달리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그것은 전신을 후벼놓은 여러 개의 상처 탓이었다. 싸악! 비수는 그 틈을 놓칠세라 그의 왼쪽 어깨를 무자비하게 가르고 지나갔다. '음!' 그는 신음조차 입 밖으로 낼 입장이 못 되었다. 그랬다간 자신의 위치를 상대에게 알려주는 격이 될 터이므로. '정녕 빠르고도 정확한 공격이었다. 내가 만약 여기서 소리라도 낸다면 다음에는 내 심장을 향해 날아 오겠지?' 그는 이를 악물고 어깨의 통증을 참으며, 이 난관을 타개할 수 있는 방도를 연구해 보았다. '비수가 또 날아오기 전에 무슨 대책이 서야 할텐데?' 때마침 그의 뇌리를 관통하는 한 가닥 상념이 있었다. ― 명심하게. 평범한 방법으로는 전 생애를 바쳐도 얻지 못하는 기회가 이 제왕의 등용문이라는 사실을 말일세. 그것은 풍령패도 사도린이 그가 떠나올 때 선사했던 충고의 말이었다. 당시에는 자신감에 차 있어 흘려 들었지만 지금에 와서 가슴 속에 기이한 공명을 울리는. 이 현상은 적용이 달라짐으로써 일어난 것이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누구나 생각해 낼 수 있는 방도로는 이길 수 없다는 얘기가 되겠군.' 요컨대 말 속에 담긴 의미만을 추출하여 하나의 영감으로 승화시킨 초사영은 내심 중얼거렸다. '상대의 수법은 치밀하면서도 교활하다. 그렇듯 완벽을 구가하는 자를 해치우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요구되지.' 슈욱! 비수가 날아왔다. 하지만 초사영은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하는 척 하면서 일부러 왼쪽 어깨를 내주었다. 스읏! '윽!' 그는 이번 관문이야말로 생사를 가르는 최대의 고비라고 생각한 바, 소위 고육지계(苦肉之計)도 불사했던 것이다. 초사영은 두 번에 걸쳐 깊숙이 갈라져 버린 왼쪽 어깨에서 다량의 피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에 의한 통증은 삽시에 가슴까지 전해져 폐부를 후비는 듯 했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두고 보아라! 이 대가는 네 목숨으로 받겠다.' 초사영은 그 상태로 신형을 이동시켜 갔다. 벽을 등 뒤로 하고 몸을 바짝 붙인 채 전진을 시도한 것이었다. 그 순간에도 한 자루의 비수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퍽! '욱!' 예리한 비수가 이번에는 허벅지를 쑤시고 들어가 박혔다. 그러나 초사영은 작정한 바가 있는지라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머리는 경황 중에도 비상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피곤하거나 몸에 이상이 생기면 어딘가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마련이다.' 그의 등이 슬며시 벽에 가 닿았다. '후후...... 그 자도 내가 비수에 맞았으니 당연히 벽에 기댈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그가 중얼거리는 사이, 색다른 공격이 가해졌다. 푸욱! 동굴 벽에서 불쑥 창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기관장치에 의해 발출된 창은 기어이 그의 어깨를 꿰뚫었다. '크윽! 그 자도 벽에 기관이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상 이런 사태까지도 계산에 두고 있었으리라.' 초사영은 즉시 어깨로부터 창을 뽑아냈다. '으으윽!' 상처 부위를 불로 지지는 듯한 극도의 통증에 그도 어쩔 수 없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는 동안 상대의 공격은 중단되었다. 아마도 그의 상태를 가늠해 보느라 잠시 손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으음!" 초사영은 의도적으로 다 죽어가는 듯한 신음 소리를 내며 어깨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쥐어 허공에 뿌렸다. 그 덕분에 동굴의 사방 벽은 그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런 연후, 그는 들리지 않게 기소를 머금었다. '후후...... 일 단계는 성공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상대가 강한 것이 주지의 사실이듯 초사영도 못지 않게 강했다. 이 팽팽한 대치 상태에서 승부수를 구하고자 한다면 어느 쪽이든 먼저 허(虛)를 노출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상대는 너무도 영악하여 그럴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이 쪽에서 어떻게든 허를 가장하여 그 자를 유도하는 것 뿐이었다. 초사영은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재차 신음을 흘렸다. "으으으.......!"


그 소리는 누가 들어도 죽음에 임박한 자의 것이라고 여겨질만큼 처절했다. 그가 뿌린 피냄새와도 무척 잘 어울렸다. 물론 그 신음성은 그의 위치까지도 정확히 알려 주었다. [3] '자! 오라.' 초사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쉬익! 비수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 들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오른쪽 어깨를 허용했다. "컥!" 그가 내지른 비명은 계산에 의해 약간 과장이 되기는 했으나 비로소 솔직하게 아픔을 토로한 것이었다. 또한 그 효과가 얼마나 클지는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여기서 초사영은 사실에 입각한 기막힌 연기를 한 가지 더 추가한다. 그는 비수가 뚫고 지나간 오른쪽 어깨를 감싸쥐며 무너지듯 바닥으로 쓰러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스스...... 퍽! 그 소리는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조용한 동굴에 파동을 일으킬 만한 음향은 되어 주었다. '이것까지가 이 단계!' 초사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으되, 생각을 더 이어가지는 못했다. 무리한 고육지계로 인해 육신이 망가져 가는즉 정신이라고 해서 마냥 온전하게 버텨줄 리가 없었다. 사실 제 때에 지혈(止血)을 시키지 못한 덕에 새로운 부상도 영향을 미쳤지만 그 이전의 상처들이 더 큰 문제였다. 그 상처들은 고통을 수반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무참하게 썩어 들어가 대부분 검게 변색된 고름덩이를 매달고 있었다. 그는 의식의 흔들림을 스스로도 느끼며 부르짖었다. '무얼 하느냐? 빨리 덮쳐오지 않고.' 다행히도 상대는 정신을 잃을까 염려하여 초조감에 빠져 있는 그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스슷!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자는 확실하게 기척을 냈고, 뒤이어 초사영을 향해 서서히 다가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척은 곧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끝까지 조심하려는 의도로 해석되었다. '놈! 너도 꽤 질기구나.' 초사영의 자조적인 읊조림 뒤로 상대의 움직이는 기척은 다시 들려왔고, 느낌상 방금 전보다는 한결 가까워진 듯 했다. '후후...... 이제 겨우 의심이 풀린 모양이군.' 그는 제멋대로 뛰노는 가슴을 억누르며 상대와의 거리가 더 좁혀지기를 기다렸다. 사박, 사박.......! 바람결인양 미미했던 기척은 가벼운 발자국 소리로 발전되었고, 초사영은 곧 상대의 두 발을 볼 수 있었다. '드디어!' 초사영은 마음 속으로 남은 거리와 함께 발자국의 숫자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이때를 기해 상대는 검을 뽑아 드는지 금속성도 그의 귀에 전달해 주었다. '되었다!' 내심 외치는 순간, 초사영의 신형은 빠르게 퉁겨져 올라갔다. 동시에 그의 손은 상대의 수중에서 검을 탈취하고 있었다. "엇!"


예기지 못한 사태에 상대는 기겁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 자는 재빨리 비수를 뽑기 위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훗! 늦다." 초사영은 냉소하며 그대로 일 권을 내뻗었다. 퍽! "욱!" 상대는 그의 주먹에 턱이 홱 돌아가는가 싶더니 맥없이 한 옆으로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적어도 이 상황에서의 두 사람은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물론 상대는 다친 곳이 거의 없는 성한 몸이고, 초사영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방심하여 기선을 놓친 이상 순간 포착에 성공한 초사영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초사영은 곧바로 상대에게서 뺏은 검을 치켜 들었다. 이는 두 말할 것도 없이 그 자의 가슴에 쑤셔박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내리 꽂히던 검은 중도에서 멈추었다. 비록 칠흑같은 어둠 속이지만 그는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희미하게나마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그 자가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아 차리게 되었던 것이다. '쓰헐!' 그는 내심 욕설을 퍼부었다. 그것은 상대가 여인이라기보다는 그녀를 처치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껏 계속 당해 주면서 기회만 잡으면 단칼에 목을 베리라 작정했건만 그런 마음이 스르르 해소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기세를 눈치 챘는지 여인은 코웃음을 쳤다. "흥! 왜 죽이지 못하는 거냐?" "닥쳐라!" 초사영은 검을 쑤셔박는 대신 신경질적으로 그었다. 피가 튀었으나 그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다. 단지 가슴 한 복판에 작은 혈선을 하나 그리는데 그쳤을 뿐이었으니까. 초사영은 입술을 짓씹으며 상대를 노려 보았다. 여인은 이때에 눈을 내리감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표독스러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망설일 것 없다. 어서 나를 죽여라." 생을 포기한 듯 음성도 심금이 떨릴 만큼 무심했다. 초사영은 더 이상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일 마음이 없는지라 그는 침착을 회복하려 애쓰는 중이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그가 손을 쓰지 않자 여인은 슬며시 눈을 떴다. 그녀는 초사영의 표정을 살피더니 조소를 날렸다. "흐흣! 여인에게는 관대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내 손에 죽을 뻔한 주제에 허영은!" 그녀의 비아냥은 이렇게 이어졌다. "쯧, 아직 멀었군. 어리숙한 위인 같으니." 초사영을 두고 어리숙하다고 하는 사람은 아마 천하에서 그녀밖에 없으리라. 하긴 풍령패도 사도린마저도 가지고 놀았던 그의 전력을 그녀가 어찌 알겠는가? 초사영은 어이가 없어져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계속하여 멋대로 내뱉았다. "어쨌든 확실한 건 네가 괴상한 놈이라는 점이다." 음성만은 약간 누그러져 있었다. "나는 너를 죽이려고 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번번이........" 여인은 말하다 말고 제 풀에 입을 다물었다. 급기야 초사영이 검을 회수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려는 거냐?" 여인이 묻자 그는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베고 싶지 않다. 하지만 용서할 수는 없다." 짜악! 그녀는 뺨에 불이 번쩍 이는 것을 느끼고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들었다. "정신 나간 놈! 웬 행패냐?" "나는 본시 여인은 이렇게 다룬다." 초사영은 차갑게 잘라 말했다. "뭣이?" 여인은 격노하여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초사영은 손을 뻗어 이번에는 여인의 엉덩이를 세게 후려쳤다. 철썩! "내가 여인들에게 너무 관대할까봐 걱정인 모양인데, 앞으로도 그런 염려는 붙들어 매 두어라." "이...... 이 망할 자식.......!" 여인은 길길이 날뛰었으나 막상 덤벼들지는 못했다. 그래 봐야 수치를 만회하기는 커녕 망신살만 더 뻗쳤겠지만. 초사영은 문득 허탈감이 밀려와 혼자 중얼거렸다. '이 여인도 본래 이처럼 악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곳이 파천황이란 이름 하에 친구라는 관계가 일체 성립되지 않는 장소이기에 독기를 품고 있는 것이리라. 연이어 생사의 갈림길을 누비며 어찌 여인다울 수 있겠는가?' 그의 감정은 은연 중 분노로 바뀌어 갔다. '세상은 어찌하여 갈수록 혼탁해져 가는가? 누구고 본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가 없다. 그대도, 나도.' 초사영은 착잡한 심경을 억누르며 여인을 직시했다 "네가 사내들과 동등한 무사가 되고자 한다면 말리지 않으마. 단, 그 전에 그만한 자격이 있는지 보아야겠다." "뭐, 뭐라고?" "사내처럼 구는 여인이나 여인 같은 사내는 양쪽 다 매력이 없다. 더구나 함부로 설치면 상대가 피곤해지는 법이다. 좀더 분명한 색채를 가지라는 얘기다." 말과 함께 그는 여인에게로 바짝 다가갔다. "무, 무슨 짓을?" 그는 손을 뻗어 당혹해 하는 여인의 앞섶을 찢었다. 부욱! "헉! 미쳤구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두 손으로 앞가슴을 가렸다. 그러나 그 행동은 초사영의 비웃음을 면치 못했다. "호오! 꼴 같잖은 수치심이 남아 있었군." "건방진........" "닥쳐라!" 짜악! 여인은 또 한 차례 뺨을 얻어 맞았다. 아울러 그녀는 가슴을 칼로 베이는 듯한 훈계를 들어야 했다. "너는 단지 거친 언행으로 사내의 흉내를 내고 있을 뿐, 아직 멀었다. 나는 네 따위의 한심한 계집은 베지 않는다." 말을 마치자 초사영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놈, 서라!" 발악을 하는 듯한 여인의 음성이 그의 뒷등을 때렸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태연하게 동굴을


나서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여인도 포기했는지 더는 날뛰지 않았다. 그저 천정을 향한 채 망연히 누워 있을 뿐. [4] "지독한 작자들! 우리를 모조리 죽일 참인가?" 아까부터 투덜거리는 자는 소려곡이었다. 그의 옆에는 세 명의 인물이 더 있었다. 초사영을 비롯하여 형가, 혈옥 등이었다. 심정이야 모두 같겠지만 그들은 소려곡과는 달리 아무 말도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파천황주 감으로 지목받고 있는 네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우연이었다. 적어도 그들의 관점으로는. 어쩌면 구마졸의 안배로 인해 모이게 되었을 수도 있으나 그것은 그들 네 명의 사고 영역에서 제외된 일이니 차라리 모르는 체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보다 지금 네 명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늘까지도 붉게 물들어 있으니 언뜻 석양빛인가도 싶었지만 아직 시각이 일러 해는 중천에 높이 떠 있었다. 이 붉은 빛의 정체는 다름 아닌 불길이었다. 화광(火光)은 붉어진 하늘로 시커먼 연기마저 뭉클뭉클 피워 올리고 있었다. 구마졸이 산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네 사람이 서 있는 곳은 산정(山頂)으로, 어찌 하든 불길 속에서 무사히 살아 남는 것이 금번의 관문이었다. 단순히 산불을 끄고자 한다면 살아 남기가 어렵다. 말하자면 이것은 지혜를 묻는 시험이라 할 수 있었다. 네 사람은 망연한 시선으로 산 아래쪽을 응시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려가려면 까마득하게 멀었으며 그나마 타오르는 불길로 인해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훈련도 좋지만 산불을 내다니,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소려곡의 불평은 지극히 당연한 노릇이었다. 본래 산불이란 났다 하면 눈깜짝할 사이에 번져가게 마련이다. 바람도 때 맞추어 위쪽으로 불고 있는지라 불길은 진즉부터 근역을 뒤덮으며 네 사람을 위협하고 있었다. 눈썹에서 노린내가 나고 콧구멍이 시커멓게 그을릴 정도로 근접해온 불길은 기세 또한 어찌나 대단한지 지옥염화(地獄閻火)라 칭한들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이곳의 네 명은 파천황주 후보 중에서도 수위를 달리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이렇다할 대책은 없었다. "지하에는 열독을 매설해 놓았다. 불길을 피한답시고 땅을 파고 들어갔다간 잘 익은 고깃덩어리가 될 것이다. 제기랄! 이래 놓고 대체 어쩌란 말이야?" 어느 덧 이죽거리는 소려곡의 얼굴에는 초조해 하는 빛이 역력히 떠올랐다. 그것은 다른 세 명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정도면 죽음을 앞둔 상황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불길은 하늘마저 뒤덮으며 쉴새없이 번지고 있었고, 땅 속에서는 열독이 도피자를 차단하고 있다지 않는가? 이 와중에 살아 남을 길이란 그저 막막할 따름이었다. "으으...... 덥다. 불길이 닿기도 전에 몸이 다 익어 버리겠어." 벌써 의복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그쯤 되고 보니 열기로 인해 이제는 내장까지 타 들어가는 듯 했다. 형가는 시종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가슴 속에서는 쏟아져 나오지 못한 많은 언어들이 들끓고 있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아직 내 실력을 다 발휘하지도 못했는데, 천하가 눈앞으로 다가와 있는데........'


대충 그런 골자를 형성하고 있는 그 말들은 형가의 오랜 염원과 더불어 당면한 안타까움을 뭉뚱그려 놓은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혈옥은 한 곳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저 작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의 눈길이 닿는 곳에는 초사영이 앉아 있었다. 그는 심각하게 안면을 굳힌 채 전면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혈옥은 다급한 나머지 그에게 은근히 기대를 품고 있는 중이었다. '똑똑한 자이니 뭔가 방책을 강구해낼 법도 한데?' 그러나 그녀의 기대는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초사영도 나머지 삼 인과 마찬가지로 뾰족한 수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화르르륵.......! 불길은 그들의 발 아래까지 침범해 왔다. "우우...... 이 일을 어쩐다지?" "끙! 우리도 끝장인 모양이군." 초사영이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것은 그때였다. 다른 세 명의 시선은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눈 속에 녹아 있는 것은 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였다. 이를 의식한 초사영은 입술 꼬리를 기이하게 말아 올렸다. 그것은 일편 몹시도 허탈하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그렇게 그는 세 사람을 일별한 후,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마른 나뭇가지들을 줍기 시작했다.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세 사람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의혹이 떠올랐다. 하지만 함부로 입을 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이상한 행동을 납득하지는 못 했으되, 최소한 그가 자신들을 구해낼 수 있으리라는 점만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뭇가지들을 수북하게 쓸어 모은 초사영은 한 곳에 그것을 모아놓고 쭈그리고 앉았다. '저 나뭇가지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세 사람의 시선은 내내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그의 다음 행동에 그들은 합창이라도 하듯 비명을 질렀다. "앗! 저...... 저.......!" 화르르륵.......! 뜻밖에도 초사영은 나뭇가지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삼 인의 아연한 눈길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은 사뭇 여유로왔다. 소려곡이 참다 못해 한 마디 내쏘았다. "이봐! 그게 무슨 짓이야? 설마 이곳에서 함께 자살을 하자는 얘기는 아니겠지?" 짜증 섞인 으름짱에도 초사영은 그를 한 번 힐끗 돌아다 보았을 뿐 반응하지 않았다. "쳇! 잘난 척 하더니 아주 맛이 갔나 보군." 혈옥도 빠지지 않고 툭 내뱉았다. 기대가 무산되자 그녀는 묘한 배신감에 사로잡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녀의 별난 심리에 관심을 가지는 자는 이곳에 한 사람도 없었다. 타타탁! 불길은 마침내 코앞으로 들이 닥쳤다. "음.......!" 누군가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연기 때문에 호흡이 곤란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자! 다들 보아라."


세 사람의 귀로 초사영의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들의 시선은 타 오르는 불길에서 그에게로 옮겨졌다. "아! 저것이다." "오오, 우리는 뭣도 모르고.......!" 그들의 입에서는 절로 경탄성이 새어 나왔다. 상대적으로 불평불만은 말끔하게 종식되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초사영이 지른 불은 점차 크게 확산되어 가고 있었는데, 반대로 그가 최초로 불을 놓았던 곳은 불길이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던 것이다. "공간이 생겼다!" "됐어, 일단 저 쪽으로 피하자." 세 사람의 신형은 빛살처럼 이동해 갔다. 그것은 초사영이 서 있는 자리, 정확히 말해 불길로써 진화된 곳으로였다. "우우...... 믿을 수가 없군." 놀람을 표하는 그들에게 초사영은 말했다. "일단 불길이 지나간 자리는 또 타는 일이 없다. 이미 풀과 나무가 다 타버려 더 이상 태울만한 재료가 없기 때문이지." 이때처럼 초사영의 음성이 크게 들린 적도 없으리라. 세 사람은 생명줄을 잇게 되매 감격해마지 않았다. 아직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하늘을 뒤덮고 있어 호흡은 여전히 곤란했는데, 그 정도는 이제 문제도 아니었다. 소려곡이 몸을 움직여 근처의 불을 끄기 시작했다. "젠장! 숨통은 우선 확실하게 터놓고 보아야겠지?" 습관인양 투덜거리고는 있었으나 그의 음성 속에는 얼핏 듣기에도 겸연쩍어 하는 빛이 담겨 있었다. 형가도 따라서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평소에도 그랬듯 입을 굳게 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몸짓으로 무언가를 계속 부정하려 애쓰는 기색을 나타냈다. '이 자는 실로 위협적인 존재다. 그토록 황망한 지경에도 돌파구를 모색할 정도로 냉정을 유지할 수 있다니.' 그런 경계심은 소려곡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예상 외의 호적수다. 까딱하면 저 자에게 황주자리를 내주게 생겼는 걸? 절대 안 되지, 그것만은.' 혈옥도 불을 끄면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저 작자! 내겐 넘을 수 없는 장벽이다.' 아무튼 초사영까지 가세하여 네 사람이 노력한 끝에 주위로는 어느 덧 제법 넓은 공간이 생겨나 있었다. 그곳은 물론 그들이 불을 꺼서 마련한 자리였다. 네 명은 제각기 서로에게서 등을 돌리고 선 채 자신들과 간격을 두고 타 오르는 불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후로도 불길은 그들이 있는 곳을 침범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주변에서는 점차 사그러져 가는 추세였다. 그러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부터는 불길이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그쪽을 향하고 있는 네 사람의 얼굴은 화광으로 인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들의 표정만은 이전의 무심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초사영도 역시 무표정이었다. 공을 세웠다 해서 들뜬 기색도, 목숨의 건진데 대한 안도감도 전혀 엿볼 수가 없었다. 그러기를 한참여. "빌어먹을........"


투툭! 소려곡은 불타버린 앙상한 나뭇가지를 발로 차더니 휘적휘적 불길이 잦아든 쪽으로 방향을 잡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등은 얼마 전까지와는 다르게 축 쳐져 있었다. 형가도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 직전에 초사영을 힐끔 돌아 보기는 했지만 이내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그 두 사람을 보며 혈옥은 주춤거렸다. 그녀는 무슨 할 말이 있는지 한동안 이글거리는 불길에 의해 붉게 달아오른 초사영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 그녀의 마음이었다. 중성적(中性的)인 경향을 띄고 있으니 판단이란 불가능했다. "흠!" 그녀는 헛기침과 유사한 소리를 내더니 그것을 끝으로 앞서 자리를 뜬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초사영은 묵묵히 멀어져 가는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한 줄기 미소가 그어졌다. 그것 또한 의미는 알 수가 없었지만. 제 10 장 마지막 관문 [1] 구 월이다. 파천황의 전사들이 본격적인 시험을 치르기 시작한 지도 어언 구 개월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동안 그들은 처절하게 싸워 왔다. 팔이 부러지는 것은 보통이고, 전신이 상처 투성이에, 여기저기 암기들이 빽빽히 박힌 채 목숨을 이어가는 자들도 있었다. 그나마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자들도 수두룩했다. 대략 삼분지 일 가량이 불에 타 죽거나, 서로 죽고 죽이는 상잔의 와중에서 덧없이 사라져 갔다. 그러나 일 년을 채우려면 아직도 삼 개월이 남아 있었다. 일 년이 되어야 최후의 심판이 벌어지는, 즉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살아 있어야만 이제껏 싸워온 보람이라도 있으리라. 앞으로 도전해야할 관문들도 만만할 리는 없었다. 지금껏 지나온 것들에 비해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수월치는 않을 지옥의 관문들이 파천황의 전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쨌든 구 월 하고도 일 일은 그들에 있어 가장 잔인한 날이었다. 그들에게 지나온 어떤 날보다 절망을 선사했기에. 이날부터 그들은 적과의 싸움이 아닌, 자신과의 싸움을 치루어야 했다. 진작 정신력도 시험 대상이기는 했지만 신체적인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이번 관문의 요지였다. 인간의 몸에는 백팔경락(白八經絡)이 있다. 그것들은 상호 엄밀한 균형을 이루며 갖가지 조화를 만들어 낸다. 머리가 비상한 인물은 개중 천혜혈(天慧穴)이 그 균형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자라고 보면 맞다. 힘이 좋은 위인은 거궐혈(巨闕穴)이 튼튼한 자이다. 그런가 하면 송옥이나 반안 같이 빼어난 용모를 자랑하는 사내들은 모든 경락이 순기(純氣)로 차 있는 자들이다. 이렇듯 인체의 백팔경락은 서로 균형을 이루면서도 역할이 다르니 어느 한 가지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만약 이러한 백팔 개의 경락이 외부로부터 손상을 입게 된다면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고통에 직면하며, 종내에는 폐인이 되고 만다. 정백맥(定百脈). 이 말은 문자 그대로라면 백 개의 맥을 정돈시킨다는 뜻으로, 누구라도 귀가 솔깃해질 만한 소리였다. 하지만 이곳 광혼산(狂魂山)에서는 이를 역으로 응용해 맥을 흐트러뜨리는데, 여기에는 엄청난 고통이 수반된다. 그 와중에 의식을 잃는 것은 보통이고 반신불수도 각오해야 한다.


다시 말해 꼭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을 안겨 주는 것이 밀문(密門)의 첫번째 관문이었다. 천부득(喘不得). 인체에는 호기(呼器)와 흡기(吸器)가 있다. 숨을 쉬는 거야 두 말할 나위도 없고, 트림이나 하품 등으로 체내의 부적정한 현상을 조절하는 것도 이 기관들을 통해서이다. 또 다른 예로 잔기침의 경우만 해도 통상 내부가 뒤틀리거나 아픈 곳이 있으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절로 나오게 된다. 이 외에도 추위가 닥치면 호흡기가 좁아져 발열(發熱)이 최대한 방지되며, 반대로 지나치게 더울 때는 크게 열려 체내에 차 있는 뜨거운 김을 훅훅 내뿜게 된다. 다만 이런 과정들이 원할하게 이루어진다 해도 참기 어려울 만큼 덥거나 추운 것을 좋아하는 인간은 별로 없다. 대개의 사람들은 알맞게 서늘하고 알맞게 따뜻한 것을 선호한다. 만일 누군가 인위적인 수단으로 인간에게 극단적인 추위나 더위를 느끼게 한다면 그것처럼 가혹한 고문도 없으리라. 천부득은 바로 그런 행위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를 시행할 자들은 흑풍구문자들이었다. 그들은 피고문자들에게 약간의 고통이 따를 뿐이라 했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결코 그 정도가 아니었다. 먼저 열독단(熱毒丹)을 투여한다. 그러면 그 대상은 체내에 차 오르는 열기로 인해 금세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 오른다. 이때에도 인체는 당연히 호흡을 빌어 내부의 열기와 외부의 공기를 교체시키려 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열독단의 열력(熱力)이 워낙 강하다 보니 일부 밖에는 배출해 내지 못해 눈이 충혈되고 코피가 터져 나온다. 그럴 즈음 투여되는 것이 한음단(寒陰丹)이다. 이 약물에는 순간적으로 극도의 한기(寒氣)를 내는 효과가 있다. 때문에 투여 대상은 전신을 와들와들 떨게 된다. 혀도 딱딱하게 굳고 눈물이 얼어붙어 눈조차 제대로 뜰 수가 없다. 그러다 잠시 시간이 흐르면 열기와 한기는 체내에서 똑같은 비율로 공존하게 되어 그 순간 만큼은 몸이 평온해진다. 하지만 결국 얼음이 열기에 녹고, 뜨거움이 한기에 의해 사그러드는 자연의 법칙은 여기에도 예외없이 적용된다. 즉 인체 내에서도 그러한 반응이 일어난다는 얘기다. 한 사람의 몸 속에서 열기가 한기를 공격하며, 한기가 열기를 잠식해가는 무형(無形)의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한 고통이란 가히 상상을 불허한다. 우선 살갗이 붉으락 푸르락 변색이 되면서 수만 마리의 개미가 기어다니는 듯 전신이 근질근질해진다. 급기야는 견디다 못해 제 스스로 살점을 물어뜯고 싶어질 정도이다. 그 무수한 한열(寒熱)의 교차는 종내 피부를 갈라 터지게 만드는데, 그 틈으로 흘러 나오는 피까지도 뜨겁고 차다. 그러나 당사자는 그때 쯤이면 거의 아무 증세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미 오감(五感)이 마비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의식도 온전하지 못하다. 열기와 한기의 침입은 두뇌를 상대로도 이루어져 인간을 백치에 가깝게 만들어 놓는다. 이렇게 되면 고통은 차라리 별 것도 아닌 게 되고, 최후로 인간에게 남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자살에의 충동이다. 뭐랄까, 철학적 의미의 주석을 달자면 생존을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순환 기능조차 타에 의해 완전히 무시되어 버린, 즉 무의식 중에도 삶을 포기하게 된다고나 할지?


천부득이라는 고문은 인간을 철저히 파괴시키며 나아가서는 자연의 섭리를 위배하는 행위라 할 수 있었다. 이 모든 현상들과 싸워 이겨내야 하는 것이 밀문의 두번째 관문이었다. 벌써 보름 째였다. 밀문의 관문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한 것은. '우우...... 이건 단순히 고통을 겪게 하는 차원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말살시키려는 행위다.' 초사영은 치를 떨었다. 그의 몸은 망가질대로 망가져 성한 곳이 있다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살갗은 모조리 벗겨져 가느다란 실핏줄은 물론 더러 굵은 혈관까지 툭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무성하던 머리칼도 홀랑 타 버려 이마에까지 진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심한 구타를 당했는지 뭉개진 흔적이 있는가 하면 불로 지져 놓아 근육이 오그라 붙은 곳도 있었다. 그가 있는 장소는 밀폐된 공간이었다. 실은 동굴이라고 해야 맞겠지만 입구가 한 치의 틈도 없이 폐쇄되어 있었다. 더구나 그곳은 운신이 불편할 만큼 좁았다. 사방의 크기라야 고작 한 평쯤으로 다리를 뻗으면 곧바로 벽이 닿았다. 삐이이이........ 어디선가 괴음향이 들려왔다. 그 음향은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로 금세 비좁은 공간을 메우는가 싶더니 그의 고막으로도 깊숙히 파고 들었다. 우우우웅― 경미하던 음향은 점점 커져 종내에는 굉렬한 음파를 전했고, 그 바람에 천정과 사방의 벽에서 흙더미가 쏟아져 내렸다. 콰르르르―! 초사영은 협소하기 그지 없는 공간이 그나마 흙더미로 메워져 가자 몸을 최대한 작게 웅크렸다. 그곳은 이른바 토중혈(土中穴)이었다. 입구야 지면에 있겠지만 그처럼 땅 속 깊은 곳에 파 놓았으니 말이다. 어쨌든 소리는 기관장치를 거치게 되자 고주파로 변했으며 그로 인해 흙더미들이 견디지 못하고 마구 쏟아졌던 것이다. 이것도 파천황의 전사들을 상대로 안배된 밀문의 한 관문이었다. 일명 돌지후(突地吼)라 불리우는. 사람을 땅 속에 가두고 사방으로 굉음을 울려대면 반향이 엄청나다. 동굴이 무너지는 건 둘째 치고 사람도 망가진다. 우선 고막이 터져 귀에서 피가 쏟아지며, 온몸의 기혈(氣穴)이 들끓고 근육마저도 제멋대로 뒤틀리고 만다. 초사영은 지금 그 고통들을 몸으로 직접 겪고 있었다. '지독하구나! 정녕........' 그는 귀를 감싸고 있던 두 손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것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핏물은 귀에서 뿐만이 아니라 울컥일 때마다 입에서도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쏟아지는 흙더미가 가해오는 위협도 만만치 않았다. 전신을 조여오는 압박감과 더불어 호흡까지도 곤란했다. 그러고도 음향은 그치지 않았다. 아니, 더욱 소름끼치는 것으로 화해 막대한 파장을 전하고 있었다. "우우우.......!" 초사영은 어느 덧 무력하게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내장이 모두 제 자리를 이탈한 지 오래로 그는 이제 자신의 신체 중 어떤 부위가 어떻게 아픈지도 알지 못했다.


게다가 이따금씩 천 장 높이에서 갑자기 무저(無低)의 늪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득함까지 느껴지자 초사영은 와중에도 의식을 잃을까봐 두려움에 사로잡혀야 했다. 그러다 문득 그는 한 가닥 상념을 붙들 수 있었다. '크크...... 그들의 머리통이 보고 싶다. 어떻게 생겨 먹어서 이런 고문 수단을 연구해낼 수 있었는지.' 그것은 일종의 오기라면 맞았다. 그는 참담한 심경 가운데서도 증오심으로부터 투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투지로써 초사영은 돌지후라는 전대미문의 무시무시한 관문을 통과했다. [2] 백설분(白雪紛). 피부를 벗기고 힘줄을 잡아 뽑아 그 위에 소금을 뿌리는 고문이다. 그 꿈틀대는 힘줄 위로 뿌려지는 흰 소금 알갱이들이 백설과 같다 하여 백설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잔혹한 수법에 비해 명칭만은 아름답다. 사저수(四箸手). 발등과 손등을 꼬챙이로 꿰어 허공에 매단다. 밑에서는 모닥불이 피어 오르고 몸에는 기름이 듬뿍 발라진다. 이후의 상황은 굳이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리라. 의당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 통째로 구워지는 광경이 연출될 테니까. 꼬챙이로 손과 발을 꿰뚫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럽거니와, 살이 익는 과정에서는 거개가 처절하게 몸부림 친다. 불이 타 다 꺼질 때까지 살아 남으면 통과다. 초사영. 그는 앞에 열거된 고문들을 한 가지도 빠짐없이 차례로 경험하면서도 줄곧 같은 생각을 했다. ― 그자들이 보고 있다. 아마도 내 고통은 그들의 즐거움이 되어 주겠지. 어쩌면 그들은 이런 식으로 우리와 승부수를 놓고 맞겨룸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내를 발휘해야 하는 이유로는 충분했다. 설사 그 고통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것일지라도. 그는 누구에게도 패배를 해서는 안 되는 위인이었다. 우선 무엇보다 그 자신이 패배를 용납하지 못 했고, 나아가서는 그의 가문이 지닌 위대함이 그러할 터였다. ― 황주는 나다! 초사영의 뇌리를 지배하는 그 한 마디는 실제로도 매 순간마다 크게 작용하여 그의 투혼을 이끌어 내곤 했다. 아울러 그것은 끝내 무서운 살심(殺心)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그 대상은 흑풍구문자였다. 특히 백의혈자를 떠올릴 때면 그는 이를 악물었다. ― 그대는 어차피 내 수하가 된다. 직위가 황주의 아래니까. 그때에 이르면 그대는 지금의 내가 느낀 고통들이 얼마나 지독했었는지 절감을 하게 될 것이다. 초사영은 이곳으로 오기 전의 일들도 간간이 떠올렸다. 낙성검호 비사무의 죽음을 비롯하여 그보다 훨씬 전에 있은 홍화 남매와의 조우, 또 풍령패도 사도린과 전격적으로 맺어졌던 이해관계 등 그의 과거지사는 다채로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느 순간이든 그가 남달리 주관이 뚜렷했었다는 사실이었고,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였다. 초사영은 미래를 향해서도 이렇게 부르짖는다. ― 누가 뭐래도 나는 나다. 이 사실은 내가 죽기 전까지는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 광야막. 거센 바람이 모래펄을 무시로 뒤집고 있다.


그 광경을 본지는 대강 일 년쯤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광혼산으로부터 이곳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여기서 무사하다는 개념은 단지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는 의미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으므로. 현재 이 사막에는 백오십 명이 약간 넘는 인원이 모여 있었다. 앉거나 선 자, 또는 비스듬히 누워 있는 자 등등. 그들은 모두 이곳에서 출발했던 파천황의 전사들이었다. 애초에 사백 명이나 되던 그들의 숫자는 그처럼 눈에 띌 정도로 현저히 줄어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달라진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패기와 열정이 넘치던 그들의 눈빛은 야수의 그것으로 화해 있었고, 몸도 하나같이 비쩍 말라 더없이 강팍해 보였다. 좌우간 그들의 공통된 분위기는 전에 비해 긴장이 풀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개중에는 지루해 하거나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자도 있었다. 그들의 앞에 백의혈자가 등장했다. "들어라! 약정된 일 년의 기한이 지났다. 바야흐로 그대들의 웅지를 펼 때가 온 것이다." 흑풍구문자, 아니 파천황이 구마졸이라 낮추어 부르는 위인들이 그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마침내 일 년이라는 고통의 기간은 지났다. 하지만 그 점에 대해 흥분하거나 들뜬 기색을 내비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다들 너무도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지금부터 한 가지 일을 해내야 한다. 약정에는 없었지만 이것이야말로 최후의 관문이라 생각해도 좋다." 그 말에 장내는 비로소 술렁이기 시작했다. 정해진 관문을 전부 돌파하고 저마다 약속대로 파천황주가 되기 위해 모인 이 마당에 무슨 헛소리인가고. 백의혈자는 그 소요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파천황이 필요로 하는 인원은 백팔 명 뿐이고 나머지는 불필요한 인원이다. 따라서 그것을 추려내야 하는데, 여기서는 판별이 곤란하다. 그대들의 능력은 바깥 세상에서 시험을 거치게 될 것이다." ― 바깥 세상! 그 말이 던져준 충격은 대단히 컸다. 정작 염원의 고지인 파천황주 운운에는 꿈쩍 않던 전사들이 뜻밖에도 그 한 마디에 격정을 감추지 못했다. 바깥 세상이란 아직도 그들에게는 생경하고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것은 오랜 기간 동안 모진 고초와 싸우느라 다시 보게 될지의 가능성조차 포기하고 지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확실히 젊었다.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나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일이 단지 동경만이 아니라 당면한 현실이 되었다고 생각하자 금세 눈빛을 달리 하고 있었다. 그들의 강렬한 안광을 느끼며 백의혈자는 말했다. "명심해서 듣거라. 모든 관문들이 그러했듯 이번에도 그대들이 살아 남게 될 확률은 적다. 백팔 명이 아니라 그 이하의 숫자로 줄어들 수도 있으니 각오를 단단히 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대들은 혈류단(血流丹)을 복용했다. 그 의미는 다들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혈류단은 일종의 금제용 독단(毒丹)이었다. 일정 기간 내에 해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한 줌의 혈수로 화하고 만다. 이 끔찍한 독에 사로잡힌 이상 시전자가 시키는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을 뿐더러 중도에서 탈출하는 일이란 불가능했다.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지 않는 한. "자! 떠나라. 그곳은 바로........" [3] 만박가(萬博家). 중원무림인 치고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다.


태행산(太行山)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만박가는 지혜로써 전 무림을 대표하는 가문이었다. 이르자면 당금 무림은 천궁지회를 탄생시켰고, 천궁지회는 무림을 이끌어가기 위해 만박가의 지혜를 필요로 했다. 천궁지회는 십이 개 세력이 매달 돌아가며 영도자격인 천궁지천궁(天宮之天宮)으로 행세를 하는데, 그러자니 나름대로 일사불란한 입안과 실행 체제가 요구되었다. 만박가는 그 면에서 천궁지회의 구미에 맞았고, 오랜 회유 끝에 지금은 천궁지회의 군사가(軍師家)가 되어 있었다. 반면에 이 노선 변경은 만박가의 존재를 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니 양자는 상부상조의 관계라 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 후로 십 년이 지났을 때, 만박가는 놀랍게도 천궁지회의 심장부로까지 떠오르게 되었다. 무림의 일설(一說)이 그 점을 대변해 준다. ― 만박가를 치느니, 차라리 소림사(少林寺)를 무너뜨리는 편이 훨씬 용이할 것이다. ― 만박가는 언제나 조용하다. 객(客)을 가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지 않는 자는 가면 죽는다. ― 만박가의 주위에는 무림의 모든 기관진식들이 총제적으로 숨겨져 있다. 어느 덧 지혜의 가문에서 발전하여 그야말로 철옹성이 되어버린 만박가였다. 전각군(殿閣群). 탑을 연상케하는 지붕들이 담장 위로 무수히 치솟아 있었다. 담장은 시커먼 색으로 꽤나 두터워 보였다. 주위로는 폭이 삼 장쯤 되어 보이는 낭하(浪河)가 흐르고 있었다. 밤은 낭하의 수면 위로 떨어지고,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수면을 가로지르는 인영들이 있다. 파천황의 전사들이었다. 그들의 뇌리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백의혈자가 했던 말이었다. ― 만박가주인 만박천심(萬博喘心) 도어림(掉魚林)을 죽여라. 그 일을 달성하는 자가 파천황주다. 그들은 기척도 없이 낭하를 건넜다. 어둠에 잠긴 만박가는 그들의 출현을 눈치채지 못한 듯 고요하기만 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회의하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파천황의 전사들과 행동을 같이 하고 있는 초사영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너무 조용하지 않은가? 만박가라면 공히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져 있거늘 어째서?' 의문은 곧 불안으로 이어졌다. 다른 전사들도 그의 표정을 보고 긴장이 되는지 안면을 굳혔다. 곁을 지나는 자들은 그를 힐끔거리기도 했다. 파천황의 전사들은 이미 초사영을 황주로 인식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일 년간 함께 생활하며 보여준 그의 능력이나 집념 등은 아무리 부정을 하려 애써도 그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갖게 했던 것이다. 초사영은 그들의 생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감 따위는 그들에게 말해줄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자칫 우왕좌왕하는 오합지졸로 전락해 버릴지도 모르기에. 중요한 것은 이번 일을 반드시 해내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설사 상황이 안 좋은 쪽으로 변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가능한 한 자신감을 가지고 부닥뜨려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쓸데없는 걱정 따위는 하등 도움이 안 되었다. 마침내 앞장 섰던 전사들이 담을 넘기 시작했고, 이와 동시에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졌다. 슈슈슈슉―! "큭! 끄윽.......!" 화살이며, 암기들이 담장 위로 쏘아져 올라가거나 막 담을 넘어가던 전사들을 덮친 것이었다.


'역시 수비가 허술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좀 늦기는 했지만 초사영은 뒤쪽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것은 앞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뜻대로 돌아가 주지 않았다. 촤아악―! 낭하로부터도 수많은 장창들이 솟구쳐 올라왔다. "으아아악―!" 전사들 중 몇 명이 또 무참하게 죽어갔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후퇴란 불가한 일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눈에 불을 켜고 전면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무무무감(無感)의 생자(生者)인 그들은 일 년여에 걸친 사투 끝에 앞으로 나아가는 길만을 배웠을 뿐이다. 따라서 그들은 속속 담을 넘어 만박가 내로 들어갔다. 초사영도 그들 속에 섞여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다만 심중에 차오른 불안감은 여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이를테면 뭔가 덜미를 잡아챌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좋지 않아!' 전사들이 무언 중에 그에게 종용하고 있었다. ― 네가 황주다. 다시 말해 초사영은 목표를 노린다기보다는 자신들을 인도해 주기 바라는 그들의 바람을 저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크아아악―!" 전사들의 비명은 끊이지 않았다. 무적이라 믿었던 그들이 만박가에 이르자 너무도 무력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이는 만박가가 그만큼 두려운 존재라는 뜻이다. 그 덕에 이십여 명의 전사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어 초사영의 주위에는 그들의 시체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초사영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는 전사들이 죽은 이유를 만박가의 기관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고 있었다. '이번 일은 예정된 음모다. 이곳의 지형은 그 자들이 사전에 가르쳐 주었던 것과는 틀리지 않은가?' 이때, 그의 앞쪽에서 갑자기 땅이 쑥 꺼졌다. 그에 따라 터져 나온 것은 전사들의 아득한 비명이었다. 이 사태로 희생된 자들의 숫자는 도합 열 명이나 되었다. '저런 함정까지!' 초사영은 입술을 질겅 씹더니 신형을 위로 솟구쳤다. "다들 이곳으로 모여라! 흩어져선 안 된다." 허공을 울리는 그의 외침에 전사들이 우르르 몰려 왔다. 그러나 개중 몇 명이 다가오지 못한 채 또 죽어갔다. 느닷없이 두꺼운 철판들이 땅 속으로부터 솟아나와 여기저기 길을 차단했고, 그 위로 어디선가 암기들이 우박처럼 날아와 그들을 덮쳤던 것이다. 쿠르르릉! 지면에 발을 딛기가 무섭게 초사영의 앞에도 시커먼 철판이 가로막아 섰다. 그는 즉시 일 장을 후려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철판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혈류(血流)!" 휘류류류―! 그의 검극에서 가공할 열검공(熱劍功)이 뻗어 나갔다. 푸르르........ 철판이 달아 오르는가 싶자 그는 재차 일 장을 내쳤다.


펑! 그제서야 철판은 무너지듯 주저 앉았다. 초사영은 황급히 주위를 돌아다 보았다. 도처를 장식하던 철판들은 어느 새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뒤켠을 메우고 있는 것은 각종 암기에 당한 전사들의 시체였다.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전사들은 지시대로 그의 곁에 모인 자들이었다. 초사영은 그들을 대충 헤아려 보았다. 채 백 명도 되지 않았다. 그들이 분분이 외치고 있었다. "이게 아니다! 그들이 말해 준 지형과는 전혀 틀리다." "그들은 처음부터 우리를 죽이려고 작정을 했다. 속히 이 곳을 빠져 나가야 한다." "애시당초 만박가는 우리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대상이었다. 이건 분명 함정이다." 그들도 초사영과 똑같은 결론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맞다, 그 자들은 우리를 속였다.' 그는 심중에 든 말을 내놓는 대신 일갈했다. "조용히 해라!" 그 짧은 외침은 소요를 일시에 가라앉혔다. 그는 전사들 가운데서 혈옥과 형가, 소려곡 등을 눈으로 확인하며 말했다. "우리들이 누군가?" 그의 눈에서는 한광(寒光)이 쏟아졌다. "파천황이다! 우리에게 불가능은 없다." 장내에는 일시지간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울러 꺼져가던 불씨가 다시 피어 오르듯 전사들의 눈에서도 서서히 강렬한 신광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 불가능을 모르는 파천황! 그 말에 담긴 의의는 그들로 하여금 결의를 다지게 만들었고, 불안이 빼앗아 갔던 본래의 모습을 회복시켜 놓았다. "어차피 도피는 성립되지 않는 터, 우리는 도전해야 한다. 이는 파천황이 금후로 무림에 남길 전설(傳說)의 한 장이다." 소려곡이 그의 말을 받아 외쳤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아니, 우리의 전설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전사들이 냉정을 되찾고 진입할 움직임을 보일 때, 초사영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흘러 나왔다. "그 일은 나 혼자 한다." "뭐, 뭣이?" 소려곡이 아연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하지만 초사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장내는 잠시 침묵으로 뒤덮혔다. '천하제일의 기관진식을 자랑하는 만박가를 혼자서 상대하겠다니, 지금 제 정신인가?' '함정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 마당에 무엇 때문에 혼자 짐을 떠맡으려 하는 건지?' 전사들의 얼굴에서는 한결같이 그런 표정들이 읽혔다. 그들 속에 섞여 있던 혈옥이 앞으로 나서며 비양거렸다. "설마 이 기회를 빌어 영웅이 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초사영은 그녀를 노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너 같으면 그러고 싶겠느냐? 나는 단지 희생을 줄이자는 것 뿐이다. 생각해 보아라, 만박가에 발을 딛자마자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 졌었는지를." 대답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우리는 이곳에서 다 함께 뼈를 묻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즉 나 혼자서 뛰어들어 보겠다는


말이다. 지금에야 얘기지만 나는 만박가와 개인적인 원한이 있다." 뒤에 덧붙인 말은 거짓이었다. 그는 만박가와 아무 관계도 없으면서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런 말까지 했다. "끝으로 너희들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구마졸은 필경 우리가 살아 돌아간다 해도 혈류단의 해약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처단해다오." 초사영은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건 오늘부로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파천황으로서 열어가야 할 전설지장(傳說之章)이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무운을 빌겠다." 휘익!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몸을 날려 어둠의 한편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전사들은 그때까지도 멍한 얼굴들이었다. 불현듯 혈옥이 신형을 뽑아 올렸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쏘아져가는 그 방향은 초사영이 사라진 쪽이었다. "큭! 저희들끼리 잘난 척 하게 내버려둘 순 없지." 기소와 함께 떠오르는 인영은 형가였다. 삽시에 멀어져 가는 그 뒷등을 보며 소려곡도 야릇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안 되지, 나만 빼놓으려고 하다니. 지난 일 년동안 지겹도록 나를 앞지르던 놈인즉 오늘도 그럴 수 있나 봐야지. 놈이 죽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을 테고........" 휙! 그도 몸을 날렸다. 긴 여운을 남기는 그의 음성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전사들은 알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 담긴 진의(眞意)도. 잠시 후. 그들은 제각기 한 마디씩 내뱉었다. "에라! 내 고향은 여기다. 어디 고향이 별 것이던가? 뼈를 묻게 되면 그곳이 곧 고향이지." "구마졸 놈들! 명줄이 길었다." 그로부터 전사들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도 광야막이 아니라 초사영에 이어 혈옥과 형가, 소려곡 등이 차례로 사라져 간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다음 권에 계속절대무가 제 2 권 표지 제목: 절대무가 제 2 권(전 3 권) 지은이: 검궁인 - 차 례 제 11 장 불가피한 귀속 제 12 장 그는 역시 그였다 제 13 장 황금 오십만 냥의 청부 제 14 장 사랑은 그렇게 다가온다 제 15 장 수뇌회의(首腦會議) 제 16 장 친구(親舊)와 연인(戀人) 제 17 장 친구(親舊)의 죽음 제 18 장 여인(女人)들 제 19 장 각자 다른 고통의 몫 제 20 장 암도진창의 주역으로


제 11 장 불가피한 귀속 [1] 회랑(廻廊). 초사영은 그 초입에 서 있었다. 그의 뒤로는 몇 구의 시체가 엎어져 있었다. 그들은 만박가의 무사들이었다. 흐르는 피로 바닥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초사영이 만박가로 들어온 지는 한참이 지났다. 그가 안쪽으로 파고들수록 점차 무공이 높은 무사들이 그를 맞이했다. 초사영은 발 밑으로 흐르는 붉은 핏물과 회랑의 안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가주(家主)의 거처가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군.' 이곳은 여태까지 보아 왔던 건물들과는 격이 달랐다. 규모만도 훨씬 더 방대한 데다가 외관을 갖추느라 쓰인 자재들도 다른 곳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고급스러워 보였다. '만박가의 가주는 소문대로 치밀한 자다. 거처의 진입로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게 해 놓았다. 막막하군.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으니.......' 여기까지도 간신히 찾아들어온 초사영이었다. 그는 전신이 처참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악전고투를 치른 흔적들은 곳곳에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원래 있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새로운 상처로 덧씌워졌다. ....... 파천황의 전사들에게 당부와 함께 이별을 고한 후, 그는 전속력으로 몸을 날려 만박가의 내부로 날아왔다. 이윽고 초사영이 당도하게 된 곳은 어딘지는 모르나 그곳은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그곳에서 전면으로 보이는 거대한 문을 열어 젖히니 안쪽은 막바로 넓은 대전(大殿)이었다. 그 대전에서 그를 처음으로 환영해 준 것은 불길이었다. 마치 지옥의 마화와도 같은 불길이 그가 들어서자마자 천장으로부터 마구 쏟아져 내렸던 것이다. 대전은 이내 불바다로 화하고 말았다. 문이란 문은 그 순간 모두 봉쇄되었다. 사방의 벽이 한 바퀴 회전하는가 싶더니 출입구이고 뭐고 가릴 것 없이 벽 자체가 전부 두터운 철벽으로 막혀 버렸다. 철벽은 불길로 인해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고, 대전은 텅 비어 있어 잠시 발을 옮겨 디딜 만한 곳도 없었다. 그는 돌파구를 찾고자 자신도 모르게 천장을 힐끗 올려다 보았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그때는 마침 또 다른 철벽이 천장을 가로막으려는 찰나였다. '기회다! 저 틈을 놓치면 나는 만박가주를 만나기도 전에 불에 타 죽고 말리라.' 초사영은 전력을 다해 신형을 솟구쳤다. 그리하여 막 천장마저도 철벽으로 봉쇄되려는 순간, 그는 아슬아슬하게 대들보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후! 환영 인사치고는 심하군.'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런데 이처럼 어렵사리 탈출에 성공한 그는 미처 숨돌릴 여유도 없이 화살 세례를 받아야 했다. 대전의 뒤뜰을 지날 무렵이었다. 그는 무심코 발치에 놓인 돌멩이를 툭 찼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쉬이익― 슉슉슉! 초사영은 다급히 몸을 회전시켰지만 간격을 두지 않고 촘촘히 날아오는 화살을 다 퉁겨낼 수는 없었다. "윽!" 몇 대의 화살이 그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잠깐의 부주의로 그는 팔과 다리, 어깨 등에 관통상을 입고


만 것이었다. ....... 초사영은 지나온 혈로(血路)를 생각하다 미간을 찌푸렸다. 더 기억해내 봤자 하등 도움될 일이 없었으므로. 그는 회랑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이밀었다. '이번에는 어떤 암격이 기다리고 있을지?' 초사영은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채 전진했다. 특히 전자에 실수가 있었는지라 그는 행동에 한층 더 신중을 기했다. 자칫 긴장을 놓았다간 또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몰랐기에. 그러다 문득 초사영은 무엇을 발견했는지 눈을 휩떴다. '이것은!' 그는 퉁기듯 뒤로 물러났다. 회랑의 바닥은 철판으로 되어 있었고, 거기에는 엄지손가락 만한 크기의 구멍이 규칙적인 배열을 이루며 뚫려 있었다. 의심의 여지가 다분히 있다는 얘기다. 아니나 다를까? 푸스스스....... 철판의 구멍으로부터 짙푸른 연기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맹독성을 지닌 독연(毒煙)이었다. 초사영은 급히 숨을 멈추었다. 연기를 약간 들이 마셨을 뿐인데도 그것은 그로 하여금 머리가 어질어질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즉각적인 응수가 아니었다면 독연이 직접 그의 얼굴에 뿜어져 그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지독하군. 이것은 신경을 마비시키는 독이다.' 그는 체내의 산소 량이 급격히 감소하는 것을 느끼며 다시 몸을 움직였다. 슈슈슈슉―! 막 자리를 뜨려는 그를 향해 벽으로부터 무수한 암기들이 쏘아져 왔다. 초사영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기가 막히는군. 신경을 마비시킨 연후에 공격이라 이거지? 시간까지 철저히 계산해 안배해 둔 기관이로구나.' 어느 틈에 뽑아 들었는지 그는 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파파파파팟! 암기들은 사방으로 모조리 퉁겨 나갔다. 바닥에 수두룩하게 떨어진 그것들은 살펴본즉 창이나 도끼, 독침 등이었다. '흠, 종류도 다양하군.' 암기세례가 멎자 초사영은 지체없이 신형을 날렸다. 그가 회랑을 거의 다 건너 왔을 즈음이었다. 콰르르르릉! 또 한 차례 기관장치가 작동되었다. 그가 딛으려던 철판의 한 장이 갑자기 굉음과 함께 밑으로 푹 꺼졌던 것이다. '헛!'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삼켰을 때, 초사영의 몸은 이미 철판이 가라앉으면서 생긴 빈 공간으로 추락해 가고 있었다. 아래에는 장창들이 빽빽이 들어차 뾰족한 창날을 빛내고 있었다. 그는 몸이 꿰어지기 직전에 급히 위로 뽑아 올렸다. 그러나 눈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거대한 쇳덩어리였다. 슈앙! 초사영은 단지 철구(鐵球)가 전하는 음향만으로도 오싹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필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털썩! 떼구르르....... 그는 회랑 바닥을 나뒹굴어 겨우 철구를 피했다. 쾅! 콰르르르― 굉음과 더불어 뿌연 먼지구름이 사위를 뒤덮었다. 그것은 철구가 세차게 바닥에 처박히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로 인해 초사영은 불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분진이 가라앉아 시야가 트이자 그는 입을 딱 벌렸다. '이럴 수가!' 놀랍게도 회랑은 그 새 붕괴의 현장으로 돌변해 있었다. 철구의 가공할 위력에 의해 일부가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만약 내가 저 밑에 깔렸었다면 압사(壓死)는 물론이고 시체조차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진저리를 치며 몸을 일으키던 초사영은 다음 순간 도로 나자빠져야 했다. 기척도 접근해 오고 있는, 아니 면전에 벌써 도달해 있는 비창(飛槍)들을 보았던 것이다. 파팍! "음......!" 황급히 몸을 굴려 피하기는 했으나 그 중 한 자루가 그만 그의 어깨에 쑤셔 박히고 말았다. '쯧, 잠시도 방심을 허용하지 않는군.' 초사영은 어깨에 박힌 창을 뽑아내려 했다. 하지만 창끝이 갈고리처럼 휘어져 있어 그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젠장! 단번에 뺀다. 하나, 둘, 셋!' 그는 셋을 셈과 동시에 어깨에 힘을 잔뜩 주는 한편, 다른 손으로는 힘껏 창을 잡아 뽑았다. 팍! "크윽!" 그의 몸이 일시지간 앞으로 확 기울었다. 참기 어려운 고통이 밀려오자 그도 인간인 이상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빼낸 창을 화가 난 듯 멀리로 던져 버렸다. 이어 초사영은 누더기가 된 옷에서 가장 깨끗한 부분을 찢어냈다. 그러고는 살점이 떨어져 나간 어깨를 동여매어 지혈(止血)시켰다. 이는 독(毒)이 있을 것에 대비한 행동이었다. 일단의 조치를 마친 그는 새삼 자신을 향해 날아들었던 창들 중 한 자루를 집어들더니 면밀히 살펴보았다. '역시!' 짐작대로 창날에는 독이 발라져 있었다. 게다가 창끝은 갈고리형에 끝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어 잘 빠지지도 않을 뿐더러 독이 훨씬 더 빨리 퍼져 나가게 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의 지혈은 한 발 늦은 것이 되고 말았다. 독 기운이 심장으로 뻗쳐가기 전에 손을 쓴 것은 천만 다행이었지만. 곧 어깨로부터 은은한 통증이 전해져 오면서 전신이 떨리기 시작했다. 초사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래도 전진을 멈출 수는 없다. 사실 독 따위야 예상했던 바이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 않은가?' 그의 우장(右掌)으로부터 막강한 장력이 뻗어 나갔다. 장력은 회랑의 끝을 때렸다. 쿠르르르릉! 회랑이 지진을 만난 듯 뒤흔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장이 내려앉고 바닥이 튀어 올라 회랑은 쑥대밭이 되었다. 초사영은 그 혼란을 뚫고 쾌속하게 질주해 갔다. 그러기를 한참여. "아!"


그의 입에서는 절로 탄성이 새어나왔다. '만박가에 이런 곳이 있다니!' 그는 눈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살벌한 곳에 아름다운 화원이라, 그럼 사람이 살기는 사는 모양이지?' 지금은 초겨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원에는 온갖 기화이초(奇花異草)들이 앞다투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붉은 색, 노란 색, 잎이 큰 것, 향기가 강렬한 것 등등 가히 화국(花國)이라는 어휘를 떠올릴 만큼 많은 종류의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던 것이다. 초사영은 망설임 없이 화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물론 한편으로 주위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화원의 중앙에는 백석로(白石路)가 깔려 있었고, 그곳을 지나게 되자 화향(花香)은 계속 코끝에 와 닿았다. '흠, 어쨌든 좋군.' 그는 잠시 화향에 도취되어 있었던 자신을 발견하고는 고소를 지었다. 그 속에 숨겨져 있을 모종의 암계를 연상하니 스스로가 몹시도 어리석게 느껴지는 그였다. 초사영은 재삼 긴장을 조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런 곳은 의례 사람을 방심하게 만든다. 아름다움이 정신을 빼앗아 위험에 반응하는 감각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인계(美人計)라는 책략도 파생되지 않았을지? [2] 띵... 띠잉......! '흐음?' 초사영은 눈썹을 불쑥 치켜올렸다. 어디선가 경미하게 비파음(琵琶音) 같은 것이 들려오고 있었다.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그는 청력을 한껏 높인 채 화원의 곳곳을 돌아보며 소리의 출처를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심히 스쳐 지나가기에는 너무도 구슬픈 음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었다. 그곳에는 눈길을 끄는 하나의 거대한 바위가 있었으며, 그 옆으로는 새로 지은 듯한 정자(亭子)도 한 채 있었다. 그림 같은 그 모습은 그대로 무릉도원을 연상시켰다. 띠딩...... 띵! 비파음은 정자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졸졸졸....... 정자 가까이는 작은 운하(運河)도 있었다. 소리는 운하를 건너며 더욱 아름답게 치장되어 초사영의 귀를 두드렸다. '으음!' 초사영은 무엇에 이끌리듯 정자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지키는 사람도, 진식 따위도 없는 듯 했다. 긴장은 절로 스르르 풀렸고, 그는 단지 비파 소리에 심취되어 정자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두운 밤길이었으나 그는 곧 정자에 이를 수 있었다. 그의 눈에 신비롭기 그지없는 비파음의 주인공이 들어왔다. 한 여인이었다. '아름답다!' 초사영이 그녀를 보고 느낀 첫 소감은 그것이었다. 그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여인의 옆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는데 어둠 속에서도 갸름한 얼굴 선이 돋보였다. 또한 고운 자태로 미루어 한눈에 그녀가 미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초사영은 몸을 움직여 여인의 앞쪽으로 돌아갔다. 정면에서 보니 역시 그녀는 굉장한 미인이었다. 일신에는 눈부신 백의를 입고 있었으며, 칠흑같이 검고 긴 머리채를 가지런히 묶어 한 쪽 어깨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초사영은 일편 의문을 갖기도 했다. '이 여인은 어찌 이런 곳에 있지? 도저히 야심한 시각에 혼자 나와 비파를 켤 만한 분위기가 못 되거늘.' 그러나 그 때, 이미 그의 한 쪽 발이 무의식중에 정자의 난간에 올려진 후였다. '엇!' 초사영은 다음 순간 용수철처럼 뒤로 퉁겨 나갔다. 그것은 여인과 눈이 마주치던 그 찰나의 일이었다. '죽어 있다! 이 여인의 눈은.' 꽈꽝! 심중의 부르짖음과 동시에 정자는 그만 통째로 날아가고 말았다. 비파음도 더 이상은 들리지 않았다. 휘류류류―― 대폭발로 인한 화열(火熱)은 드넓은 화원마저도 순식간에 휩쓸어 버렸다. 그 바람에 어둠 가운데서도 한껏 화향을 뿌려내던 기화요초들은 모두 재가 되어 사라졌다. '휴우! 하마터면 큰 일 날 뻔했다.' 그의 안도는 일순에 지나지 않았다. 잿더미로 화했던 화원이 갑자기 뜻하지 않은 변화를 보였던 것이다. 그곳은 어느 덧 열사(熱砂)의 사막으로 화해 있었다. '후후...... 눈에 익은 경관이라 다행이군.' 초사영이 툴툴 웃은 이유는 얼핏 광야막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곳이라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보아온 그였으므로. '이것들은 환상(幻想)에 지나지 않는다. 화원도, 미녀와 음률도, 이 사막까지도........' 그는 삭막한 모래펄에 혼자 남게 되자 그렇게 중얼거리는 한편, 주의 깊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길은 없었다. 보이는 것은 오직 진로를 가로막는 모래 언덕 뿐이었다. 초사영은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어떻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천하에 내가 발견해 내지 못하는 진법(陣法)이 존재하다니.' 자부심으로 치자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그였다. 그러다 보니 이처럼 화가 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누가 나, 초사영을 함부로 가지고 논단 말인가?' 그는 한 술 더 떠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투지를 끓어 올리고 있었다. 이런 면은 사실 그의 천성에 가까웠다. 이윽고 그가 밟고 올라선 모래언덕은 불가사의한 변화를 일으켜 거대한 암석군(巖石群)으로 바뀌었다. 철썩! 쏴아아아― 그의 앞에는 사막을 대신해 검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초사영은 무력하게 진법에 휘말리고 있을 뿐, 대책을 강구해내지 못했다. '쯧! 점입가경이로군.' 그는 집채만한 파도가 자신을 덮쳐 오자 본능적으로 이를 피하면서도 고소를 금할 길이 없었다. 반면에 파도는 다음 순간 뿌우연 물안개로 화해 허공을 뒤덮는가 싶더니 주변의 풍경을 바꾸어 놓았다. '아!' 봄이다. 대지(大地)는 신록의 푸르름으로 빛난다. 싱그러운 물기를 머금고 햇살 아래 눈부신 기경을 연출하고 있다. 꽃들은 서로 질세라 짙은 화향을 뿜어내며, 그 사이로는 희고 노란 나비들이 꿀을 탐해 부지런히


날아다닌다. 꽃술을 물고 여름이 온다. 물줄기가 한층 소리 높여 졸졸거리고 나무들은 지친 듯 허리를 휜다. 산자락 아래 펼쳐진 그 그늘에 자리하면 신선이 따로 없다. 세상만사가 다 부질없음이라......! 가을도 좋다. 추풍(秋風)에 온갖 과일들이 수확을 기다리며 풍성하게 익어가고, 곡식들도 낱알을 품어 황금 벌판을 이룬다. 우수수........ 나무는 마른 잎들을 떨구어내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그처럼 한 곳으로 달음박질하던 가을은 이내 숨을 죽인다. 한풍(寒風)과 더불어 밀어닥친 손님은 겨울이다. 아해들이 흥겹게 웃으며 얼음을 지치는 동안 어른들은 토방(土房)에 모인다. 도란도란 정겨운 얘기를 나누는 그네들의 손짓, 몸짓에 겨울밤은 소리 없이 깊어만 간다. 사계(四季)는 하나같이 아름다울진저! 초사영. 본시 그는 강인한 기질의 소유자였다. 워낙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난 탓도 있겠지만 무가의 후손답게 일찌감치 무심을 터득하여 웬만한 일에는 동요하는 법이 없었다. 이 천생의 무골(武骨)로 하여금 마음이 약해지게 만드는 요인은 불과 몇 가지 안 되는데, 그 중 하나가 미(美)였다. '아름다워............!' 중얼거리던 그는 퍼뜩 놀란다. 의외로 탐미주의자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긴 했으나 타고난 기질이 어디 가겠는가? '어리석은! 환상에 얽매이다니.' 초사영은 자책을 함으로써 무뎌져 있는 투혼(鬪魂)을 일깨웠다. 희끗희끗 눈발이 휘날리는 저 겨울의 포근한 환상이 끝나는 순간 죽음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수도 있었으므로. 그는 체내의 기를 끌어당겨 한 소리 외침을 발했다. "하앗!" 다소 황당해 보이는 그 행위는 제법 효과가 있었다. 그 덕에 그는 확실히 맑은 정신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침착 하자. 아무리 복잡하고 난해하다 해도 진법에는 반드시 파해 법이 있게 마련이다.' 초사영은 자기 최면에 의거해 생각을 정리해 갔다. '환상은 분명 존재하고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유(有)는 무(無)로 직결되고.............' 그는 깨달아지는 바를 소리내어 읊조렸다. "사물의 있고 없음은 인간과도 무관하지 않은 진리다. 태어났으되 죽는 것은 무요, 살아가는 일은 유인즉 있음과 없음은 한 개체에 공존하는 불가분의 자연 현상이랄 수 있다. 그리고 공존이란 마음으로써 이을 수 있는 것!" ― 공즉시색 색즉시공(空卽是色 色卽是空)...... 하나는 무한(無限)이요, 무한은 하나라........ 초사영은 심중 깊은 곳을 울리는 강한 공명을 느끼며 스르르 눈을 내리 감았다. 그의 뇌리에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눈을 감았다는 것도,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다만 몸이 가벼워지고 있을 뿐. 스스스....... 그의 신형은 유령인양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조용히 전진하고 있었다. 환상은 그 사이에도 변화를 거듭했다. 겨울이 마침내 혹독한 단면을 드러내 사위에는 무시무시한 광풍(狂風)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아름드리 나무들이 마구 쓰러지는가 하면 천둥과 번개가 난무했다. 꽈르르릉― 쩌저적! 곳곳에서 땅거죽이 푹푹 꺼지더니 그곳으로부터 혈망이며 독충들이 떼로 몰려 나왔다. 그것은 어떤 무기의 위협보다도 섬뜩하여 영락없는 지옥도를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초사영은 그곳에 없었다. 그는 분명 거기 있으나 없는 것이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으니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그의 빈 껍데기일 따름이었다. 눈을 감은 채 전진하고 있는 그의 곁으로 수많은 죽음들이 쉴새없이 부딪쳐 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와 맞닥뜨리면 그 순간에 스스로 소멸되곤 했다. 허체(虛體)의 정심(精心)이랄까? 그것은 초사영이 새롭게 터득하게 된 절대무(絶對無)의 경지이자 진세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이윽고 그가 이른 곳은 뜻밖에도 정자가 서 있던 자리, 즉 환상이 시작되던 원래의 위치였다. 거기서 그의 신형은 갑자기 아래로 쑥 꺼져 들어갔다. [3] '이곳이다!' 초사영은 눈을 반짝 빛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정자 밑이었다. 그는 여기서 일체 회의를 요하지 않는 강렬한 예감과 만나고 있었다. '만박가에서 가장 은밀한 장소........ 이 정도면 만박천심(萬博喘心) 도어림의 거처로서는 충분하군.' 그는 단정짓듯 읊조리더니 입가에 기소를 매달았다. '후후...... 만박천심, 그대도 이젠 끝장이다. 내 반드시 그대를 잡아 동료들을 죽게 한 죄를 묻겠다.' 이어 초사영은 추리의 범위를 넓혀 나갔다. '중지(重地)에서도 지하에 위치하고 있는 데다가, 진법으로 인해 입구마저 발견이 용이하지 않은 만큼 만박가 내의 기관들도 여기서 작동되었을 확률이 크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그의 거처와 기관의 핵심부는 그리 떨어져 있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나로서는 일석이조를 노릴 수 있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의 발 앞에는 용도를 짐작하기 힘든 육중한 버팀목이 가로놓여 있었다. '이건 무얼까?' 그는 버팀목을 손으로 더듬으며 면밀히 살펴보았다. '흠. 이것은 건물로 치자면 대들보였군. 굵기로 보아 여기에서도 꽤 비중 있는 건물의 것일 듯 한데?' 초사영은 즉시 바닥, 즉 건물의 천장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물론 소리는 전혀 내지 않았다. 잠시 후. 바닥에는 사람 하나쯤은 쉽게 통과할 수 있을 만한 구멍이 생겼다. 초사영은 그 구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하여튼 대단하군. 지하에서도 한 층을 더 파 내려가 건물들을 축조해 놓았으니. 만박가가 무림에서 왜 그토록 명성이 자자했는지 이제야 알겠구나.' 그가 내려선 곳은 대청인 듯한 너른 실내였다. 한쪽에는 붉은 색의 주렴이 바닥까지 이르도록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초사영은 주렴을 걷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 그는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입 밖으로 소리를 낼 뻔했다. 그곳에는 뜻하지 않게 누군가 사람이 있었다. 더구나 그 자는 큰 의자에 앉은 채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초사영이 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만박천심?' 초사영은 자문해 놓고, 이에 답하듯 고개를 저었다. 상대는 만박천심으로 보기에는 기도가 너무도 달랐다. 무슨 일에서 동요되지 않을 것 같은 묵중함이 그에게는 분명히 있었고, 이 점은 초사영의 안목이 틀리지 않는 한 뒷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었다. '고수다!' 탄성에 이어 초사영의 얼굴에는 한 가닥 의문이 떠올랐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만박천심은 당연히 아니겠고. 그 작자는 군사(軍師)일 따름이지, 이런 유의 예기(刈氣)를 흘려낼 수 있는 무인은 아니다.' 그는 더 나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의 뇌리에는 벌써부터 수많은 단어들이 새겨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분노와 무관하지 않았으며 종내 한 마디로 집약되었다. '함정으로 우리를 유인했던 자!' 아니나 다를까? "드디어 왔군." 정체불명인이 입을 열었고, 그 말을 통해 초사영은 생각했던 바들이 전부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나는 이 자의 손에 철저히 놀아난 셈이군.' 일편 모멸감마저 드는 그였다. 이때, 서서히 의자가 회전하더니 정체불명인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보자 초사영은 아연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일신에 흑포(黑布)를 걸친 그 자에게서 우선적으로 느껴진 것은 누구도 따르지 못할 패기(覇氣)였다. 그것은 전신에 흐르는 사이(邪異)함과 더불어 무섭도록 초사영을 위협해 왔다. 흑포인이 물었다. "네가 초사영이라는 아이냐?" 한 올의 감정도 느낄 수 없는 착 가라앉은 음성이다.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는 그의 시선은 어느 특정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초사영에게 향해져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으나 그는 실상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사영은 그를 정시하지 못했다. 그랬다간 왠지 자신의 심중을 들켜버릴 것 같아서였다. "그렇소." 말을 쏟아낸 초사영은 부지 중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름대로 담담하고자 애를 썼지만 자신의 음성이 떨려 나온 것을 스스로도 의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내가 이 자에게 기선을 제압 당하지는?'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렇듯 기도에 밀리면 승부수는 더욱 기대하기가 어려울 터이므로. 초사영은 현실을 인정하기 싫어 입을 떼었다. "당신은 누구요?" "허허허.......!" 흑포인이 가소롭다는 듯 낮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는 곧바로 초사영으로 하여금 기혈이 들끓게 만들었다. '으음! 대단한 공력의 소유자다. 단지 웃음소리만으로 이 정도의 위력을 과시할 수 있다니.' 그렇다고 상대에게 두려움을 가질 그가 아니었다. 당혹스러운 것이야 부인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공포와는 달랐다. 배포도 남달리 컸지만 죽을 뻔한 고비만도 족히 수백 번은 넘긴 그였다. 그 이력이 어디로 가겠는가? '지금껏 나는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면서 살아 남았다. 어차피 목숨은 하나다. 하늘이 진정 내 뜻을


안다면 이대로 쉽게 무너지지는 않으리라.' 초사영은 마음을 굳게 다졌다. 그러고는 이를 입증하려는 듯 초점이 명확치 않은 흑포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허허...... 겁이 없는 놈이로고!" 그 자는 그렇게만 내뱉었을 뿐 더 이상 뭐라고 말이 없었다. 그는 푹신해 보이는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이 때를 기해 어디선가 여러 명의 인영이 유령처럼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초사영은 눈을 번쩍 떴다. 어디서 많이 본 듯 한 눈에도 낯설지 않은 인영들, 그들의 숫자는 아홉이었다. '구마졸!' 그랬다. 그들은 틀림없는 흑풍구문자였다. 광야막에서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그들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놀라움은 비단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럴 수가!' 천하에 두려울 것이라곤 없을 듯 하던 흑풍구문자가 흑포인을 보자마자 오체복지(五體伏地)하고 있었다. 분위기상 명령이 없는 한 그들은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흑포인이 손짓을 하자 그들은 황송한 듯 겨우 몸을 일으켰고, 곧바로 신색을 정비하기까지 했다. 그 광경을 본 초사영은 기가 막히기도 했지만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구마졸이 저렇게 쩔쩔매는 걸 보면 혹시 저 자는 흑부나 사부의 부주가 아닐까?' 한 가닥 날카로운 음성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사십사 호! 무엇하고 있느냐? 어서 꿇어라. 이분은 우리 모두의 주군(主君)이시다." 음성의 주인은 흑풍구문자 중 백의혈자였다. 아울러 그 말은 간접적으로 흑포인의 정체를 알려 주기도 했다. '역시 그랬었군.' 신비에 가리어진 공포의 흑풍사(黑風邪), 그곳에서 서열 이 위인 흑부(黑府)의 부주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본래 흑풍사의 인물들은 여간해서는 외부에 모습을 내보이는 예가 없었다. 그런즉 하급자도 아니고 흑부를 총괄하고 있는 인물이 현신(現身)했다는 것은 대사건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초사영으로서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고 이 자리에 무릎을 꿇을 마음은 더욱 없었다. 흑부주가 나직이 말했다. "흠! 꽤 대담한 아이로군. 내가 누구인지 알았으면서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으니." 그것은 칭찬이기도 했지만 지극히 오만한 말이었다. 흑풍구문자의 눈에서는 그 순간 살기가 번뜩였다. 이는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초사영의 뻣뻣한 태도가 부른 것이었다. '후후...... 그대들은 구제불능이로구나.' 이것이 그들의 살기에 대한 초사영의 답이었다. 실은 그도 흑풍구문자를 향해 살심을 무럭무럭 피워 올리고 있었기에. 이 점은 흑부주를 상대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심중에 차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느라 몸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그의 입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당신들은 한 통속이었소?" "건방진!" 백의혈자를 비롯한 흑풍구문자가 일제히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여차하면 손을 쓰는 것도


불사할 기세였다. 그들을 향해 초사영은 말했다. "무조건 복종이란 있을 수 없소. 당신들은 내게 무릎을 꿇으라고 하기 전에 왜 이곳에 와 있게 되었는지 해명부터 해야 마땅할 것이오. 그렇지 않는 한 나에게는 상대가 부주든, 아니 설사 사주(邪主)라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소." 그것은 매우 타당한 질책이었다. 하지만 어찌 해석되었는지 무표정하던 흑부주의 얼굴은 일순 무섭게 일그러졌다. 우드득.......! 심경을 대변하듯 그가 앉은 의자의 모서리가 잘게 부서져 나갔다. 그의 입에서는 분노에 찬 음성이 새어 나왔다. "놈! 광오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구나." "하면, 내가 어떻게 나오기를 기대했소?" 초사영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양자의 눈길이 허공을 가로질러 무섭게 얽혀 들었다. 이 소리 없는 싸움은 추호도 양보가 없었다. 두 사람의 눈에서 뿜어지는 불길에 사위의 공기마저 파르르 진동하는 듯 했다. 흑풍구문자는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이런 극단의 하극상(下剋上)은 도대체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입을 연 자는 초사영이었다. "대답해 주시오. 당신들이 파천황을 만들고 전사들을 훈련시킨 진정한 목적은 무엇이오?" "미친놈! 죽어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백의혈자가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초사영은 그에게는 일별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도 눈이 있다면 한 번 밖을 내다보시오. 수많은 파천황의 전사들이 무참하게 죽었소." "입 닥치지 못하겠느냐?" 잔인혈자가 마침내 발작이라도 하듯 퉁겨 올랐다. "놔두어라." 흑부주는 손을 저어 그를 제지시키더니 말했다. "재미있구나, 어서 계속해 보아라." "좋소!" 초사영은 음성을 가다듬은 뒤 거침없이 덧붙였다. "아마 당신들은 애초부터 파천황을 완성시킬 생각은 없었을 것이오. 무엇인가 별도의 목적을 위한 소모품 정도로 여겼을 뿐, 그렇지 않소?" "저, 저런 괘씸한!" "너희들은 가만히 있거라." 흑풍구문자들의 노성을 흑부주가 가로막았다. 그런 후 그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 "뻔하지 않소?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들이 이곳에서 나와 마주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허허허.......!" 흑부주는 대답 대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로 인해 그리 넓지도 않은 실내가 크게 진동을 일으켰다. 천장이든, 벽이든 금시라도 허물어질 듯 뒤흔들렸던 것이다. [4] 이윽고 웃음을 멈춘 흑부주는 흑풍구문자를 힐끔 돌아다 보았다. 그것은 자신을 대신해 말을 해주라는 신호 같았다. 백의혈자가 앞으로 한 발 나서더니 흑부주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혀 보였다. 이어 그는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초사영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네가 알고 싶다면 진상은 얼마든지 말해 줄 수 있다. 단, 오늘 일에 대한 대가만은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애써 분기를 억누르는 듯한 그의 어조에 초사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응수했다. "호오! 적반하장이란 그대들을 위해 생긴 말 같구려? 어쨌든 그 점은 각오하고 있으니 염려 마시오." "놈! 끝까지 겁을 모르고 날뛰는구나." 청수한 백의혈자의 안면이 제멋대로 씰룩였다. 그 상태에서 그는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네 말 대로다. 파천황은 소모품에 불과할 뿐이다." "이유는?" "천궁지회의 이목을 가리고자 해서이다. 그동안에는 암암리에 거사를 도모해 왔지만 이제 본 흑풍사는 무림에 전면적으로 나서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천궁지회, 아니 엄밀히 말해 천궁비영(天宮秘影)의 눈과 귀를 속여야만 했다. 그들은 보나마나 우리의 등장을 필사적으로 막을 테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계획은 십중팔구 좌초된다." "으음!" 초사영은 짧게 침음성을 흘렸다. 그의 내면에서는 계속하여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결코 이들을 용서할 수 없다! 절대 신임과 권좌를 조건으로 내걸었던 그 혹독한 시험들이 고작 천궁비영을 겨냥한 것이었다니........' 천궁비영. 이들은 속칭 천궁지회의 눈과 귀라 일컬어지는 자들이다. 즉 천궁지회에서 요하는 모든 정보들을 수집하고 분석한다. 그들이 모르는 일은 천궁지회도 모른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신속하고 치밀한 정보망을 자랑하는 비밀 조직이다. 심지어 오늘의 천궁지회가 있기까지는 그들의 조력이 오 할은 넘었을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일 정도였다. 천궁비영이 발족된 지는 겨우 십여 년 남짓이지만 그 짧은 기간에 비해 그들이 이룬 성과는 대단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들이 어느 곳에 존재하는지, 그들이 이루었다는 성과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도 항간에 떠도는 소문은 이러했다. ― 그들이 없었다면 천하는 흑풍사가 장악했을 것이다. ― 흑풍사가 표면에 나서지 못하고 암약 조직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절대적으로 그들 때문이다. ― 천궁비영은 흑풍사의 내막을 대부분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신비를 가장하고 기세를 올려 봐야 그들에게는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로 보일 것이다. 무림인들 중에서는 천궁비영을 십이 개 천궁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그만큼 천궁비영이 무림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크다는 소리다. 초사영도 그 점을 부인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천궁지회의 막강세에 대해서라면 그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터였다. '아무튼 이제야 얘기가 제대로 되어 가는구나. 꼬리를 잘려도 머리는 늘 건재하다는 것이 흑풍사라는 조직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들에 대해 파악해 놓고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표면으로 부상하는 건 고사하고 암약도 불가능해져 자칫 조직 자체가 와해될 수도 있을 테니까.' 그의 입가에는 비릿한 조소가 걸렸다. "하긴 정황은 이해가 가오. 천하의 흑풍사도 천궁비영만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 잠자코 있던 흑부주가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았다. "놈! 말이 지나치다."


초사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게 노하지 마시오, 아시다시피 나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했을 뿐이외다." 이어 그는 백의혈자에게 물었다. "풍령패도 사도린도 그 계획에 관해 알고 있었소?" "아니,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의 신분 정도로는 파천황 건을 위시하여 구체적인 사안을 알 수가 없다." "그럼 당신들은 그보다 위라는 얘기요?" 백의혈자의 얼굴이 은은히 붉어졌다. "놈! 별 걸 다 묻는구나. 이번 일에서 우리 흑풍구문자는 예외였다. 왜냐하면........" 초사영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흠, 그랬겠지. 지위의 고하를 떠나 당신들은 파천황의 훈련 교관 노릇을 해야 되었으니까." "으으...... 놈.......!" "그런데 어땠소? 기껏 키워 놓고 몰살을 시키려니 약간은 아쉬운 기분도 들었을 법 한데, 아니오? 거듭되는 초사영의 비아냥에 백의혈자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붉으락푸르락하는 그의 얼굴은 실로 볼만했다. 흑부주는 안 되겠는지 한 마디 했다. "어리석은 놈, 더 이상 궁금한 것이 없는 모양이구나." 그 말에 초사영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그건 아니지. 내가 알고 싶은 바는 아직 많다.' 그는 지나치는 듯한 말쯤으로 금세 분위기를 환기시켜 놓는 흑부주에게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흑사풍의 흑부주답다. 이런 순간에조차 일 점의 동요도 없이 사람들의 심리까지 꿰뚫고 있군.' 초사영은 음성을 가다듬어 입을 열었다. "이곳으로 우리를 끌어들인 연유는 무엇이오?" "으음, 대답은 해 주겠다만 내 네놈에게 보고하는 것이 아니니 착각하지 말아라." '쯧! 쓸데도 없는 자존심은.' 초사영은 중얼거림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그 뒤로 어조가 곱지 않은 백의혈자의 말이 이어졌다. "천궁비영은 필시 정보망을 통해 파천황이 길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점을 감안하여 너희들에게 이곳을 치게 했다. 만박가는 천궁지회의 군사가인즉 보다 확실하게 그들의 주의를 끌자는 목적에서였지." "그렇게 해서 얻어질 것은?" "거기까지는 네가 알 바 아니다." "혹시 다른 곳에서도?" "크크크...... 그건 너 좋을 대로 생각해라." 백의혈자는 재미있다는 듯 기소를 흘렸다. 그에 반해 초사영은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파천황의 전사들이 그나마 헛되이 죽어간 게 아닌가 싶은 의구심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감쪽같이 속아서 다른 목적으로 이용된 것만 해도 충분히 억울하거늘, 뭔가 또 다른 흑막이 존재했던 것이다. '오오! 이것이 정녕 우리가 그토록 신봉하고 성취하고자 했던 파천황의 실체란 말인가?' 그의 눈앞에는 일순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갔다. 말이 없던 형가, 불평불만이 많아 늘 투덜거리긴 했지만 의외로 성품이 곧았던 소려곡, 거친 사내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고 싶어했던 여인 혈옥 등등........ 그 얼굴들의 숫자를 일일이 헤아리자면 한이 없다.


'그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이렇듯 이중, 삼중으로 음모가 게재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초사영은 어느 덧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까지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난 일년 여 동안의 혹독했던 훈련 과정과 죽음의 관문들이었다. '그 때에 우리들은 살아남기 위해 시종 적대관계를 유지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분명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초사영은 그 끝에 동지애(同志愛)라는 어휘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고는 괴로운 듯 부르짖었다. '전사들이여! 파천황은 우리들 말고도 또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다른 곳에서 길러진 그들 파천황이야말로 우리가 목표했던 흑풍사의 특수 공격대일 테고.' 탄식은 곧 엄청난 분노를 불러왔다. '애시당초 이들은 파천황이라는 명칭 하에 두 개의 각본을 짜 놓았었다. 하나는 천궁지회의 파괴가 주목적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들을 소모품으로 사용하자는 것이었지.' 초사영은 시선을 돌려 흑부주를 노려보았다. "이 구상은 당신의 작품이오?" 그는 상대가 답하기도 전,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만박가를 친다는 정보를 흘려 그들의 힘을 이곳으로 유도한 것은 그 기회를 이용해 제 이의 파천황, 아니 진짜 파천황으로 하여금 천궁비영을 치게 하려는 의도였을 게요." 옆에서 쾌검혈자가 불쑥 끼어 들었다. "닥쳐라, 사십사 호! 너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후후...... 자격이 없다?" 초사영은 기이하게 웃더니 짐짓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이 맞소. 하지만 내가 당신들에게 받았던 사십사 호라는 번호를 내던지면 달라질 것이오. 안 그렇소?" 흑부주가 그 말을 받았다. "본래의 이름은 초사영이지, 아마? 너의 대단한 기개만은 본좌도 인정하겠다. 다만 그것이 허용되는 곳이 있고, 또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초사영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천하에서 나, 초사영에게 자격유무를 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소. 그건 당신이라도 예외가 아니외다." "흠, 사도린에게서 네 얘기는 들었다. 감히 천하 제패를 운운한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구나. 그러나 천하를 움켜쥐려면 소수의 희생에 연연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럴 듯한 소리요만 그건 궤변이외다. 나는 무가치한 희생은 본질적으로 혐오하는 사람이오." "허허......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천하를 얻는다는 건 축복 받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많은 죽음을 동반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으음........" 초사영은 처음으로 할 말을 잃고 침음성을 흘렸다. 계속하여 듣다 보니 상대의 말은 어느 결에 필요악(必要惡)을 주장하던 자신의 변과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5] 그의 뇌리에는 가문의 신화를 재현하기 위해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스스로의 맹세가 떠올랐다. ― 나는 이후로 비정인(悲情人)이 되겠다. 초사영이라는 인간의 탈은 과감하게 벗어 던지리라. 그 맹세가 제대로 지켜져 왔는지는 그 자신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필히 향후의 지침으로 삼아야 했다. 초사영은 급기야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쩔 수 없지! 운명이 원한다면.' 그는 바야흐로 파천황 전사들의 죽음으로부터 놓여 나고자 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가 풍령패도 사도린을 통해 흑풍사에 접근한 목적은 염원에의 달성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였기에.


물론 파천황 전사들의 얼굴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화광(火光)으로 일그러진 얼굴, 암기에 꽂혀 고슴도치가 되어 죽어가던 얼굴,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만 장의 함정 속으로 떨어져 가던 얼굴........ '그들을 잊기 위해서는!' 초사영의 갈등은 한 가지 구상이 잡힘으로써 끝을 맺었다. 이어 그는 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예전에 누군가 날더러 어리숙하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 말은 맞는 것 같소. 아직도 나는 당신이 말한 전부를 수용하지는 못 하겠으니까." "허허...... 본 좌가 직접 너를 거두어도 말이냐?" "흐음?" 초사영의 눈썹이 위로 불쑥 치켜 올라갔다. 그 제안은 적어도 그가 알기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실상 그가 몰라서 그렇지, 흑부주가 이렇듯 흑풍구문자를 시켜 그에게 정황을 모조리 설명해 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파천황의 전사들 중 초사영이 가장 뛰어나다는 점을 중시해 그를 흑풍사로 끌어들이고자 이곳에 왔다. 그의 능력이라면 자신들을 능히 찾아내리라 여기기도 했고. 요컨대 그런 제안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이와 같은 경로로 그가 정말 흑풍사의 일원이 된다면 특별히 과시하지 않아도 일신의 능력을 전 무림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제안을 거절하면 흑풍사 자체를 거부하는 행위가 되므로 그 결과는 죽음뿐이었다. 초사영은 딱히 수락도, 거절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은즉 그의 생각이 어떤 쪽으로 기울고 있는지는 그 자신 외에 아무도 알지 못했다. 흑부주는 묵묵히 기다렸다. 권위를 내세우기에 앞서 그는 초사영을 유심히 관찰했던 바, 무척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기다림은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안에 선뜻 수락을 해 왔다면 실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 곁에서 흑풍구문자들만이 안절부절을 못하고 있다. 흑부주의 심리상태를 감히 넘겨짚지 못하는 그들은 그가 이러다 노화를 터뜨리면 어쩌나 하여 전전긍긍이었다. 그러기를 한참여. 흑부주가 꽤 오랜 침묵을 깨며 말문을 열었다. "본좌 같으면........" "말씀해 보시오. 세이경청 하겠소." 초사영의 눈이 빛을 발했다. "그 일은 일단 접어 두겠다. 후일에 갚으면 되므로." "본인도 그럴 생각이외다. 후후........" "그렇다면 무엇을 망설이느냐? 어차피 살아 남을 자는 살아 남고, 죽을 자는 죽게 되는 것이 상리이거늘." "그것도 맞소." 초사영은 꼬박꼬박 응대를 하면서도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흑부주는 자신의 심경을 마치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듯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자는 내가 이르지 못한 비정(非情)의 묘를 터득하고 있다. 나로서는 넘기 어려운 거대한 산(山).......!' 이는 패배를 시인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흑풍사의 흑부주라면 공포의 대명사로 알려졌듯 의당 악랄하고 잔혹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초사영은 그에게서 진작부터 거인(巨人)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런 느낌은 무공의 우열에 의한 판단에서가 아니라 초인에 가까운 상대의 완성도에서 기인된 것이라면


맞았다. 초사영은 말했다. "본인은 아까부터 한 가지 구상을 세웠었소. 그런데 당신이 내게 확신을 가져다주는구려." "무슨 뜻이냐?" "살아남을 자는 살아 남고, 죽을 자는 죽는다는 말은 정말이지 심금에 와 닿았소."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냐?" "나는 당신을 죽일 것이오." "저, 저런 발칙한 놈!" 흑풍구문자가 그를 향해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흑부주는 한쪽 손을 뻗어 그들을 저지했다. "그대로 있거라! 경거망동하지 말고." 그 태도란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기이했다. 흑부주는 충성스럽기 그지없는 흑풍구문자는 싹 무시하고 말을 함부로 내뱉는 초사영을 비호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스르르 미소마저 번졌다. "물론 당장은 아니렸다?" 초사영도 흰 이를 드러내며 마주 웃었다. "그렇소.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내가 당신이 앉은 의자의 높이와 똑같은 위치에 섰을 때, 당신의 목숨을 취하겠소." "허허...... 본 좌가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았군." 흑부주는 흡족한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반해 초사영은 안면을 굳히며 말했다. "내 기량이나 처세가 아직 당신을 따르지 못하니 한 가지 예외는 두어야겠소." "무엇이냐?" "나는 파천황 전사들의 죽음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소. 그 대가로 저 자들의 수급을 베겠소." 그가 지칭한 인물들은 흑풍구문자였다. "미...... 미친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네놈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그들은 독기를 뿜으며 검 집에 손을 갖다 대었다. "꼭 그래야 하겠느냐?" "물론이오. 이건 내 짐작이오만 그렇지 않으면 저들의 수중에 있는 혈류단의 해약도 끝내 얻어내지 못할 것 같소이다." 그의 비아냥에 흑부주는 혀를 끌끌 찼다. "쯧! 그건 그렇지 않다. 해약은 본 좌가 가지고 있다." "소용없소. 당신이 뭐라고 말해도 저 자들에 대한 내 증오는 덜어지지 않을 것이오." "으으...... 죽일 놈!" "부주! 저놈을 만 갈래로 찢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흑풍구문자는 격노하여 한 마디씩 부르짖었다. 그 기세로 미루어 그들은 정말로 초사영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듯 했다. "좋다! 양자가 다 원한다니." 흑부주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흑풍구문자의 신형이 동시에 초사영을 향해 날아 들었다. 하지만 그때에 이미 초사영의 손에서는 검이 뻗어 나가고 있었다. 파츠츠츳―! 찬란한 검광(劍光)이 진홍빛의 무지개를 그리며 흑풍구문자 전원을 일거에 덮쳐갔다. "아니, 저것은!" 담담한 빛을 발하던 흑부주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오오! 저 검법은 틀림없는 유성휴다."


경악성과 함께 그의 안면이 마구 꿈틀거렸다. 명실공히 흑풍사의 흑부를 관장하는 그가 무림에 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일개 무인의 검법을 보며 그처럼 놀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사위를 울렸다. "크아아악―!" 누구의 것인지는 일일이 구별할 수가 없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비명 소리는 거의 합창이 되어 있었으므로. 오랜 신화가 입증하듯 유성휴를 막을 자는 천하에 없었다. 시전자의 뜻에 의해 거두어지지 않는 한. 진득한 피내음이 번져가는 실내에서 흑부주가 그답지 않게 신음처럼 읊조렸다. "이것이 유성휴의 율법인가?" 그 말에 답하는 자는 없었다. 죽은 자들이야 더 논할 것도 없고, 초사영도 착잡한 표정을 지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제 12 장 그는 역시 그였다 [1] 대룡표국(代龍表國). 강소성(江蘇省) 항주(抗州)에 자리하고 있는 표국이다. 이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단지 천하제일표국이라 불리울 만큼 거대한 규모 때문만은 아니다. 대룡표국은 대륙의 표물 가운데 사 할의 운송을 도맡고 있다. 이곳의 내정을 알게 되면 대강남북으로 이어지는 물자의 흐름까지도 모조리 파악할 수가 있다. 장점괴(張店怪). 그는 한 사람의 표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보표로 십여 년을 넘게 일해 오다 최근에야 표사로 승진했으며, 그 첫번째 맡은 임무란 것도 겨우 문을 지키는 위사(偉士)였다. 그의 존재란 대룡표국에서는 아주 미미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가 가진 자부심만은 대단했다. 그것은 대룡표국의 위세가 워낙 크다 보니 일개 위사라 할지라도 여타의 단체에 비하면 외부에서 상당한 대우를 받기 때문이었다. 표물을 따라 대륙의 각 지방을 돌아다니는 동료들의 경우에는 더 했다. 강호의 내로라 하는 세력도 대룡표국의 기치만 내보이면 물러서 길을 비켜주곤 한다지 않는가? 대룡표국의 정문 앞이다. 장점괴는 오늘도 어김없이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대룡표국에 들어서려면 좋든 싫든 반드시 정문을 거쳐야 한다. 또한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서 있는 이 장점괴에게 깍듯이 굴어야 통과하기가 수월하다. 한가로운 오후, 점심도 배불리 먹었겠다 잠이 솔솔 오는 판국에 멀찍이서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뭐야? 저놈은.' 장점괴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한 인영을 공연히 사나운 눈길로 응시하며 미간을 긁었다. 그 자는 일신에 흑의를 걸쳤으며 머리에도 검은 죽립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서 보기에도 왠지 오만한 기운이 풍기는 것 같아 장점괴의 눈에 거슬렸다. 이르자면 누구라도 대룡표국을 찾아오는 자는 예의에 신경을 쓰게 마련이건만 저 자는 어찌하여 검을 비켜 안은 채 죽립을 벗을 생각도 않고 비딱하게 걸어오느냐는 거였다. '어라?' 장점괴가 더욱 어이없어 한 이유는 상대가 대룡표국의 당당한 위사인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냥 안으로 들어가려 했기 때문이었다. "멈추어라!" 장점괴의 입에서 마침내 호통이 터져 나왔다. 상대를 괘씸하고 가소롭게 여기다 보니 그의 음성에는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무게가 팍 들어가 있었다. 흑의인은 그제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너는 누구냐? 속히 성명을 대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무단으로........" 장점괴의 음성은 중도에서 끊겼다. "여기가 대룡표국 아니었나?" 생뚱맞은 흑의인의 말에 그는 정문에 붙어 있는 현판을 한 번 힐끗 돌아다보았다. '쓰헐! 이놈은 글자도 읽을 줄 모르나?' 장점괴의 눈에는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대룡표국이 맞기는 맞다. 하지만 너 같은 자가 함부로 드나들 곳은 못 된다." "왜?" 멀쩡하게 이유를 묻는 흑의인의 태도야말로 자신감이 넘쳐흘렀지만 장점괴는 그 점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정말로 무식한 위인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못 들어가게 막으면 조용히 물러설 일이지, 대룡표국의 위사이신 이 어르신에게 꼬치꼬치 캐물어? 오냐, 너 오늘 잘 걸렸다.' 장점괴는 배에다 힘을 빡 주고 말했다. "왜냐니, 네가 지금 나에게 시비를 붙자는 게냐?" "바로 맞추었다." 흑의인은 대답과 동시에 푹 눌러 쓰고 있던 죽립을 위로 살짝 밀어 올렸다. 덕분에 막 발작을 일으키려던 장점괴는 자동적으로 상대의 드러난 얼굴을 보게 되었다. '이 자는!' 한껏 부릅떴던 그의 눈이 원래 크기보다도 작게 오그라든 것은 눈과 눈이 딱 마주치던 순간의 일이었다. 흑의인의 눈은 그가 보기에도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한 올도 찾아 볼 수 없는 절대 무심의 색채를 드리우고 있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다. 이 자는 절정의 고수다.' 장점괴는 금세 겁을 집어먹고 더듬더듬 물었다. "다....... 당신은 누구.......?" "네 조상." 츠읏! 섬뜩한 검광이 일시지간 허공을 갈랐다. 그 뿐이었다. 장점괴는 수급이 몸체와 분리되어 더 이상은 묻거나 으름장을 놓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잘려진 그의 머리통과 목에서는 더운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무식한 것도 죄다." 흑포인은 바닥을 나뒹구는 장점괴의 수급을 내려다보며 큭큭 웃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검을 회수했다. 그는 문을 통과해 대룡표국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입에서 대상도 없는 나직한 독백이 흘러 나왔다. "천하의 누구도 나 형가의 앞을 가로막지 못 하거늘." 이어 그가 대룡표국의 중문(中門)을 넘어서는 찰나였다. 휙! 휘휙―! 어디서 나타났는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인영들이 속속 대룡표국의 담장을 뛰어 넘기 시작했다. 그들도 흑의에 검은 죽립을 깊숙이 눌러 쓴 자들이었다. "으아악!" 한 가닥 처절한 비명이 대룡표국 내에서 울려 나왔다. 그것은 흑의인들이 들어간 지 일 각도 채 안 되어 벌어진 사태였다.


이를 기점으로 생의 최후를 대변해 주는 단말마의 비명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웬 놈들이냐? 으아아악―!" "기습이다! 크으윽........" 공히 천하제일표국으로서 삼대에 걸쳐 이름을 떨쳤던 대룡표국은 그렇게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하악!" 여인이 기성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그녀의 팔다리는 뱀처럼 사내의 몸통을 휘감은 채 조여대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여인의 표정이었다. 그녀는 이마를 잔뜩 구기고 있었는데 때로는 눈을 까뒤집으며 입술을 깨물기도 했고, 때로는 입을 딱딱 벌리며 죽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이는 곧 인간이 극단의 고통과, 그 반대인 쾌락의 정점을 똑같은 표정으로 나타낸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예였다. 아무튼 여인의 몸뚱이 위에서 상하 운동을 하고 있는 사내는 온몸이 근육질로 뭉쳐진 듯한 중년인이었다. 그의 얼굴은 물론 등판에도 굵은 땀방울이 무수히 맺혀 있었다. 섬전일도(閃電一刀) 진구주(震九州) 하국령(何國翎). 이것이 중년인의 이름이었다. 강호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는 대룡표국의 주인이기도 했지만 교우관계도 폭이 넓었던 것이다. 흑백도(黑白刀)를 막론하고 그와 직, 간접적으로 교분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개중 그로부터 물질적인 도움을 받은 자만 해도 일일이 꼽을 수 없을 만큼 다수였다. 물론 그의 교우관계에서 물질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었다. 그는 본시 호방하면서도 소탈한 성품을 지니고 있어 어떤 유형의 사람과도 쉽게 친해지는 그런 위인이었다. 또한 자기 사람이다 싶으면 그는 책임지고 상대의 뒤를 끝까지 밀어주는 화끈한 일면도 있었다. 이 때문에 기질이 까다롭거나 괴벽한 자도 하국령에게는 결국 매료되고 만다. 그러고 보면 대룡표국이 천하제일의 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성품이 가져다준 결과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에게도 한 가지 약점은 있었다. 소위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는 말도 있거니와 하국령은 미녀에 약했다. 아름다운 여인만 보면 탐심이 발동하여 차지하고 싶다는 것 외에 아무 생각도 없어져 버리는 그였다. 그는 언제고 마음에 드는 여인이 생기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혹하여 그 밤으로 품에 안곤 했다. 기녀(妓女)나 무녀(巫女), 심지어는 유부녀에서 머리를 깎은 비구니에 이르기까지 그가 안아 보지 않은 여인은 없었다. 그것이 자랑할 만한 이력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지금 그가 찍어누르고 있는 여인도 그 범주에 속했다. 그녀는 유부녀로 항주 출신인 한 초부(樵夫)의 아내였다. 하국령은 저잣거리에서 딱 한 번 그녀를 보고는 시쳇말로 안달이 났었다. 급기야 그는 그녀의 집으로 달려갔고, 갖은 협박과 회유를 불사한 끝에 그녀를 데려올 수 있었다. 상대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으나 이때에 그가 썼던 수단 중 가장 주효했던 것은 뭐니뭐니 해도 금력(金力)이었다. 어찌 되었건 원하던 여인을 수중에 넣은 하국령은 그로부터 근 한 달간을 오직 그녀에게만 푹 빠져 있었다. 오늘만 해도 그는 아침상을 물리자마자 여인과 일을 벌인 터였다. "흐윽! 그...... 그만........" 여인은 그 사이 절정의 고비를 몇 차례나 넘었는지 지친 기색을 보이며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하국령은 그녀의 요구를 접수하지 않았다.


"무슨 소리! 나는 아직 멀었거늘...... 으으.......!" 그의 율동은 오히려 더욱 격렬해지고 있었다. "아이, 참!" 여인의 얼굴에 막 짜증이 어리던, 그 때였다. 쾅! 문을 거칠게 열어 젖히며 침실로 뛰어드는 자가 있었다. 그는 대략 삼십 대로 보이는 한 장한이었다. "구, 국주! 큰 일 났습니다." 그는 분명 침상에 펼쳐진 낯뜨거운 광경을 목격했을 텐데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듯 다급히 외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방사(房事)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일시에 멈추어졌고, 하국령의 입에서는 곱지 않은 소리가 튀어 나왔다. 쾌락의 절정을 막 눈앞에 두고 있었던 그로서는 아무리 급한 일이 생겼다 해도 불청객이 반가울 리 없었다. 반면에 여인은 얼이 빠진 듯 그와 장한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잘 되었다는 듯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버렸다. "국주! 어서 나가 보십시오. 본 국에 침입자들이........" "뭐, 뭣이?" 하국령은 믿어지지 않는 듯 눈을 크게 치켜 떴다. 섬전일도라는 별호가 말해 주듯 그는 쾌도(快刀)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용납하지 않는 자였다. 실제적으로도 지금까지 그의 쾌도식을 받아낸 자는 당금 무림에서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가 주인으로써 떡 버티고 있는 대룡표국에 웬 침입자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놈이냐?" 그의 노갈에 표사는 움찔했다. "그들은 흑풍사의.......!" 장한의 대답은 거기서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무엇에 놀랐는지 눈을 화등잔만하게 부릅뜨는가 싶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숙여 자신의 사타구니를 내려다보았다. '검!' 그랬다. 서슬 푸른 한 자루의 검이 어느 결엔지 그의 회음혈을 뚫고 관통되어 있었던 것이다. "으아악!" 뒤늦게서야 장한의 입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우우.......!" 하국령도 이 순간만큼은 전신이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것은 갑작스런 수하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른바 삼각무림을 구성하고 세 개의 기둥 중 하나이자 공포의 대명사인 흑풍사, 그 존재를 의식하며 더할 나위 없는 충격에 사로잡혀 있다면 맞았다. '그들이 왜?' 의문은 이제 와서 필요치 않았다. 그의 눈앞에는 이미 또 한 차례 믿을 수 없는 일이 전개되고 있었다. 흔들리는 장한의 그림자로부터 검은 죽립을 푹 눌러 쓴 흑의인이 소리도 없이 환상처럼 솟아 나왔던 것이다. 쿵! 장한의 몸이 무너지듯 쓰러진 것은 그 다음 일이었다. [2]


'적(敵)!'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하국령은 이불을 제키며 벌떡 일어났다. 아마도 삶에 대한 본능이 그를 일깨운 것이리라. 하지만 머리맡에 놓인 도를 잡아가던 그의 손은 의지와는 달리 뚝 굳어지고 말았다. '늦었다!' 그는 사타구니에 와 닿아 있는 싸늘한 감촉을 느끼며 부르짖었다. 애도(愛刀)의 자루를 잡긴 했으나 그것을 뽑는다면 그의 몸은 영락없이 사타구니서부터 두 쪽이 날 것이다. '빌어먹을! 가망이 없다.' "훗! 듣던 대로 여색은 어지간히 밝히시는군." 흑포인은 훤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발가벗고 있는 그의 몸을 훑어보며 비아냥거렸다. 하국령은 이를 악물었다. '우우...... 이런 망신까지 당하다니!' 이제껏 살아오면서 그는 자신에게 지금과 같은 순간이 닥쳐 오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알몸을 들킨 것은 상대도 사내이니 안면을 깐다 쳐도, 천하의 쾌도로써 도 한 번 뽑아 보지 못 했데서야 어찌 죽어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는가? "누구요? 당신은." "형가다." "형가?" "그렇다. 흑풍사의 파천황 소속으로 혈풍(血風), 귀살(鬼殺) 이 대(二隊) 중 귀살대의 대주(隊主)를 맡고 있지." "귀살대라고?" 하국령은 부지 중 눈 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끝났군.' 그는 뻔히 대답의 내용을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서 무얼 바라오?" "목." 형가는 짧게 답하고는 검을 쥔 손에 힘을 가했다. 슥! 검 날이 파고들자 하국령의 사타구니에서는 핏방울이 스며 나왔다. 그는 한 차례 세차게 몸을 떨었다. 인체 중 가장 예민한 곳에 상처를 입고 보니 절로 오한이 일었던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이 모습을 여인에게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는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하국령은 입술을 짓씹으며 물었다. "본인은 귀하나 흑풍사에 죄를 지은 바가 없소. 그런데 어찌 하여 나를 이토록 핍박하는 게요?" 형가는 쿡쿡 웃었다. "하국령, 그대는 자신의 신분도 잊은 모양이군." 하국령의 눈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게요? 나는 대룡표국의 국주요." 형가의 웃음소리는 한층 더 커졌다. "크크...... 맞아, 대룡표국의 국주이지.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텐데? 밝히기가 거북하다면 내가 말해 주지. 이곳은 천궁지회의 강소분타이며 그대는 분타주다." 그의 검이 일 촌 가량 더 파고 들어갔다. "으.......!"


하국령은 진저리를 쳤다. 설마 했지만 숨겨 왔던 이중의 신분이 노출되었고, 그렇다면 그의 죽음은 기정 사실이었다. 그 때였다. "형가, 그건 좋지 않은 버릇이다." 나직한 음성과 함께 다른 한 명의 흑포죽립인이 실내로 들어섰다. 형가는 미간을 모을 뿐 돌아다보지도 않았다. "쓰헐! 또 나서는군." 그는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그 자의 등장으로 일단 위기를 모면하게 된 하국령은 가슴을 쓸어 내리는 한편,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자는 누구인가?' 형가가 짜증 섞인 어투로 그 자에게 말했다. "황주(荒主)! 그렇게도 할 일이 없느냐? 대체 언제까지 남의 제사에 배 놔라, 감 놔라 참견을 할 셈이냐? 네가 상전이라 해서 자만하는 모양이다만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더 이상은 내 비위를 건드리지 말아다오, 목이 온전하고 싶으면." 황주라 지칭된 흑포죽립인은 초사영이었다. "나는 쓸데없는 참견을 하는 게 아니다. 너도 알다시피 상대는 우리와 똑같은 무인이다." "그래서?" "무인이 되어 무인을 능멸한다면 스스로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형가는 입술꼬리를 기이하게 말아 올렸다. "크크...... 차라리 대놓고 욕을 해라." "이미 했는데 또 하란 말이냐?" "빌어먹을! 이제는 말재간까지 나를 앞지르는구나." 형가는 툴툴거리면서도 하국령의 사타구니에서 검을 거두었다. 결국 그는 하국령으로 하여금 무인답게 최후를 마칠 수 있도록 정당한 결투의 기회를 주고자 했던 것이다. "자! 이것이 마지막 기회이니 전력을, 어?" 말은 필요 없었다. 하국령은 벌써 손을 쓰고 있었으니까. "차앗!" 그도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기다릴 것도 없이 전력을 다해 공세를 펼쳐내고 있었다. 츄악! 살벌한 도광이 형가의 몸을 횡으로 베어갔다. 도식의 변화는 없었으나 지극히 단순한 그 공격이야말로 천하의 어떤 변식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오직 쾌(快)에 묘를 두고 있는즉 빠르기가 상상을 불허했으므로. 하지만 그 찰나였다. 파츳! 한 가닥 눈부신 섬광이 피어 오른 것은. 그에 따라 하국령의 도는 형가의 옆구리로부터 삼 촌 가량의 거리를 두고 거짓말처럼 딱 멈추어졌다. '이럴 수가!' 하국령의 눈에는 경악과 불신의 빛이 동시에 떠오르고 있었다. 이어 그는 눈을 깔아 자신의 가슴 부위로부터 시작하여 발끝까지 흘러 내리는 핏자국을 훑어갔다. 형가의 검은 그의 심장에 깊숙이 파고 들어가 있었고, 시선을 그쪽으로 옮긴 하국령의 눈에는 거센 파동이 일었다.


"대단하다! 나의 쾌검을 앞서다니....... 큭!" 그의 거구는 짧은 비명을 끝으로 고목처럼 고꾸라졌다. "대인! 흐흐흐흑.......!" 방금 전까지 겁에 질려 웅크리고 있던 여인이 통곡성을 발했다. 어떤 식으로 인연을 맺었건 하국령은 그녀의 남편이나 다름이 없으니 슬프지 않으면 비정상이리라. 형가는 특유의 무심한 시선을 나부(裸婦)에게 던졌다. 여인은 흐느끼던 와중에도 그와 눈이 마주치자 질겁을 했다. 그녀는 자신이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조차 염두에 들어오지 않는 듯 새파랗게 질린 채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사...... 살려 주세요, 나리.......!" 눈물, 콧물이 뒤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을 보며 형가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그에게 초사영이 말했다. "너, 설마 이 여인의 피를 검에 바르려는 건 아니겠지?" 형가는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매달며 검을 거두었다. "너 같으면 그러고 싶겠느냐?" "후후...... 당연히 아니다." 쾅! 때마침 문을 박차고 들어온 흑포죽립의 한 장한이 무릎을 꿇었다. 그는 형가를 향해 공손히 보고했다. "끝났습니다, 대주." "물론 말끔하게 처리했을 줄로 믿는다." "네! 한 놈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장한은 머리를 숙여 보였다. "수고했다." 형가는 초사영을 돌아다보았다. "다음은 어디냐?" "진주의 언가문(言家門)이다. 사흘 후, 독산(獨山)의 토지묘(土地廟)에서 보자." "좋다." 형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장한에게 말했다. "철수한다." 그가 앞장서자 장한도 즉시 그의 뒤를 따랐다. <파천황주(破天荒主) 득천하(得天下)> 초사영이 무슨 생각으로 새삼스레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는 영패를 꺼내 들었는지는 모른다. 그는 피로 쓴 듯한 그 붉은 글자들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도로 품 속에 갈무리했다. 그는 나부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여인은 재삼 벗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 살려 주세요. 제발!" "그 말은 아까도 했었소." 그는 말을 마치자 일지(一指)를 날렸다. "으음........" 여인은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침상 위에 엎어졌다. 혼혈이 짚혀 때 아니게 깊은 잠 속에 빠져든 것이었다. 스윽! 초사영은 신형을 돌렸다. 그가 세운 비정의 율법은 아직도 상대를 구분하여 적용되고 있었다. 아니, 그는 그 점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변(辯)까지 마련하고 있었다. '역시 나는 나다.' 이것은 예전에 그와는 노선이 다른 인의대협(仁義大俠) 남궁수를 상대로도 했던 말이었다.


그는 도처에서 여러 유형의 인물들과 접견을 했으되 자신의 색채를 고수하며 완성을 향해 다가가고자 하고 있었다. [3] 천하가 충격과 공포로 인해 술렁이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파괴와 죽음의 행진에 전 무림이 발칵 뒤집어졌던 것이다. 검은 피풍의(被風衣)와 검은 죽립(竹笠). 그것들은 하나의 상징, 즉 검은 바람으로 일컬어졌다. 그리고 검은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예외 없이 혈우(血雨)가 뿌려져 대지를 시뻘겋게 물들이곤 했다. 그들이 내리는 죽음으로 천하는 경악과 전율에 사로잡혔다. 대룡표국을 필두로 독산의 언가문이 하루아침에 괴멸되었으며 미산호(微山湖)의 서각보(石家堡)가 그 뒤를 이었다. 불과 석 달이었다. 짧다면 짧은 그 기간 동안 혈풍의 회오리 속에 쓰러져 간 문파들은 도합 스물 한 개에 이르렀다. 검은 피풍의와 검은 죽립의 군단이 출현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죽음의 심판이 내려졌고, 그 터는 폐허가 되어 버렸다. ― 왜, 무엇 때문에? 무림인들은 하나같이 그러한 의혹에 휩싸였다. 그들은 혹여 자신들이 흑풍혈우(黑風血雨)에 휩쓸릴까봐 전전긍긍하면서도 아직 그 연유를 몰라 의아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혹은 이내 풀렸다. 놀랍게도 흑풍혈우에 스러져 간 문파들은 전부가 천궁지회와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표면상으로는 개별적인 문파들이었으되, 알고 보니 천궁지회가 비밀리에 가입시켜 키워가던 분타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철저하게 쓸어버린 무리의 정체는 검은 바람이라는 말 그대로 흑풍사(黑風邪)였다. 조직 가운데 파천황이라 명명된 전위대를 내세웠다던가? 아닌 게 아니라 천하에서 흑풍사를 제외하고는 천궁지회를 상대로 검을 들이댈 수 있는 집단은 없었다. 삼각무림의 균형을 깰만한 제 사의 세력이 새로 등장하지 않는 한. 이 엄청난 사건을 계기로 무림인들은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도 암약으로 일관해 왔던 흑풍사가 그 모습을 전면에 드러냈으며, 일 차로 천궁지회에 도전하고 있음을. 천궁지회와 흑풍사. 이들 양자가 언제 정면으로 충돌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흑풍사가 칼을 뽑은 이상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한 혈겁의 징조 속에서 무림인들은 저마다 그 여파를 두려워한 나머지 잔뜩 긴장한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화원(花園). 규모는 방대했으나 제대로 손질이 가해지지 않았다. 곳곳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으며, 각기 이름이 다른 수많은 꽃들도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뒤섞인 채 아무렇게나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래도 아주 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정성이 깃든 한 손길이 버려진 화원을 다듬어 가고 있었다. "쯧! 답답하구나. 공간은 충분히 넓거늘 영역 다툼이 이곳에서도 벌어지고 있으니." 화원의 한 가운데였다. 한 명의 청수한 중년인이 혀를 차며 꽃이 핀 자리에 듬성듬성 자라 있는 잡초들을 뽑고 있었다. 일신에 걸치고 있는 의복은 하얗게 핀 목련 송이보다 더 희어 보이는 장삼(長衫)이었고, 가지런히 쓸어 올린 머리는 하나로 틀어 올려 백옥잠(白玉簪)을 꽂고 있었다.


검은 수염이 가슴까지 길게 내려와 있는 그의 나이는 불혹(不惑)이 갓넘어 보였다. 인상은 대체로 청수한 편이다. 그러나 인상과는 달리 그를 대하고 있노라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는 그의 전신을 통해 발해지는 은은한 기품 때문이었다. 태산 같은 웅대한 기상이 우러나오는 것도, 그렇다고 대해를 갈라버릴 듯한 극패(極覇)의 기도 또한 아니다. 마치 텅 비어 버린 무한의 공간이 그를 감싸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렇기에 오히려 그 모두를 수용할 수 있을 듯 불가사의한 분위기를 그는 자아내고 있었다. 천궁비영(天宮秘影) 군옥명(君玉明). 이것이 그의 이름이다. 천하에서 가장 신비한 존재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자, 천궁지회에 속해 있는 천궁비영(天宮飛影)의 영주(令主)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천궁비영은 천궁지회 내에서 정보에 관한 일을 전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십이천궁 중 비영궁 소속이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자들을 일컬어 천궁비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천궁비영은 사실 군옥명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이는 단지 그의 별호가 천궁비영이라서는 아니었다. 그의 지혜(智慧)는 절대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만박가가 무너진 후로는 천궁지회의 대소사(大小事)를 처리하는 데 있어 그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곤 했다. 이러한 내막은 대개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극소수에 불과한 인물들만이 그에 대해 알고 있을 뿐이었다. 벌써 한 무더기의 잡초를 뽑아낸 군옥명의 모습은 언뜻 보면 농사일이나 하는 촌부(村夫)로 비춰질 듯도 했지만 그는 결코 그런 부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아무튼 그의 표정은 내내 무림사를 좌지우지할 중대한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진지하기만 했다. 그는 뽑아 낸 잡초 더미를 들고 화원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물처럼 고요한 그의 눈에는 이것들을 어디에다 처리하면 좋을까라는, 지극히 평범한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음, 이쯤이 좋겠군." 그런데 그의 다음 행동은 도시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다. 뽑아낸 잡초는 버리는 것이 상례이건만 군옥명은 화원의 한 공간에 다시 뿌리를 내리도록 정성껏 심어 주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자신이 심어 놓은 잡초에게 던지는 웃음이었다. "너도 뜻이 있어 났을 터인즉 잘 자라거라. 어떤 생명이라 해서 살아갈 가치가 없겠느냐? 네 끈질긴 생명력이야말로 오히려 만개한 꽃들보다 훨씬 더 아름다울지니........" 군옥명은 정말로 귀중한 생명체를 대하듯 잡초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의 등뒤에서 누군가의 청명한 음성이 들려와 그와 잡초의 대화를 중단하게 했다. "사부!" 제 삼자의 출현을 알고 있었던 듯 군옥명은 담담한 기색으로 돌아섰다. 과연 그곳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이십 대쯤으로 보이는 그 자는 활달한 기상과 함께 시원스러운 성목(星目)에, 칼날같이 뻗은 눈썹과 곧은 콧날의 소유자였다. 한눈에도 무척이나 강렬한 인상이었다. 얄팍하면서도 한 일자로 굳게 다물려 있는 입술은 그에게는 냉엄한 일면이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듯 했다. 더욱이 각이 진 턱 선은 예기(刈氣)를 안으로 갈무리하고 있는 것 같아 역시 대하기 편한 인물은 아니지 싶었다. 옥사후(玉獅侯). 운명이 그에게 정해준 이름이다. 군옥명의 제자인 그는 현재 천궁비영의 부영주로써 군옥명을 보좌하고 있다.


군옥명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옥사후를 응시했다. "무슨 일이냐?" 옥사후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입을 떼었다. "본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군옥명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그것은 잡초를 대할 때보다 못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인상을 부드럽게 폈다. "나를 찾아온 것으로 보아 뭔가 네 혼자 힘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듯 하구나." "송구스럽습니다." 옥사후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 그들이 무슨 일로 왔다더냐?" "요즘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흑풍사의 준동에 관한 문제로 왔습니다." "흠, 그것이라면 결론을 지어 보내지 않았느냐?" 옥사후은 미간을 모았다. "네, 하지만 파천황이라는 전위대의 힘이 의의로 감당하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빨리 대책을 세워 달라고........" 군옥명은 가볍게 웃었다. "허허...... 어린아이가 보채는 식이로군. 내 그들에 관한 모든 사항에, 심지어 수뇌의 이름까지 조사하여 알려 주었거늘 무엇을 더 원한다는 것이냐?" "그 수뇌라는 인물의 능력이 예상을 벗어난지라........" "초사영 말이냐?" 옥사후는 대답하지 못 했다. 그런 그에게 군옥명은 느릿하나 분명한 음성으로 덧붙여 말했다. "그것은 이유가 되지 못 한다. 아무리 그가 뛰어난 인물이라 해도 파천황은 흑풍사라는 거대한 단체 중 일개 조직일 뿐이다. 그들을 감당하지 못해 이토록 부산을 떤다면 천궁지회의 이름은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음!" "가서 전해라. 천궁비영은 흑풍사 전체를 상대해야 하므로 그 일부를 가지고 전전긍긍할 수는 없노라고." 여전히 부드러운 어조였으나 그 음성에서는 냉정함이 묻어 나왔다. 그나마 군옥명은 말을 마치자 신형을 돌려 화원 가운데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또 잡초를 뽑기 위해서. 옥사후의 눈에는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사부를 알고 있었다. 어쩌면 당사자보다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잡초를 뽑고 있는 군옥명이야말로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며 닮고자 노력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치 처음 대하는 생소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사부 군옥명은 자상함과 세심함을 동시에 지닌 사람이 아니던가? 또한 천궁비영의 영주라는 막중한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평범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위인이 소탈한 군옥명이었다. 이를테면 하급의 수하들과도 격의를 두지 않으며 그들의 생일까지도 일일이 기억하고 있다가 금일봉을 내준다. 그들이 뭔가 곤란한 지경에 이르면 언제고 몸소 나서서 해결해 줄 정도로 넓은 도량까지 겸비한 인물이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달랐다. 아니,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파천황 건에 대해서만은 유독 딱딱하게 대응하고 있다. 사실 무림에 새로 등장한 파천황의 세(勢)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했다. 천궁지회의 피해는 막대했고,


다급하다 보니 본부의 사자(使者)가 달려와 그 타개책을 요청하는데도 이렇듯 무참하게 돌려보내려 하는 것이다. '도무지 모를 일이다. 사부께선 어떤 생각으로 그 건을 외면하듯이 저러시는 걸까?' 늘 그랬듯 그 깊은 속은 일일이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본부의 사자에게는 무어라 설명해야 하나?' 옥사후는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까지 직접 찾아 왔다고는 하나 그들의 지위나 신분을 생각할 때 사부의 말을 그대로 전하기란 매우 고역스러웠던 것이다. "허허허...... 네가 몹시 난처한 모양이구나." 옥사후는 얼굴을 은은히 붉혔다. 잡초만 뽑고 있는 줄 알았던 군옥명이 자신을 계속 의식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애써 심중을 감출 필요는 없다. 너로서는 그들과 원만한 관계를 이루어야 할 테니 고민도 되겠지. 이 사부는 뜻이 다른 곳에 있어 이번 일만은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네가 나서는 것은 막지 않겠다." "네?" 옥사후는 흠칫 놀라는 한편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신의 야망에 관해서는 사부도 잘 알고 있으리라 여겼지만 이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고 말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군옥명은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네가 내 밑에서 일을 도운 지도 상당히 오래 되었다. 그 쯤 했으면 너도 스스로의 웅지(雄志)를 펴볼 때가 되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이 사부에게 묻도록 하고." "사부........" 옥사후는 고개를 떨구었다. 언제나 사부는 자신에게 이렇듯 관대했으며 부친처럼 솔선해서 일을 처리해 주었으니까. "되었으니 그만 물러가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옥사후는 감격 어린 시선으로 사부를 바라보며 읍했다. 그 뒤로는 멀어지는 그의 등을 응시하며 군옥명이 중얼거렸다. "그래, 한번 세상사를 경험해 보는 것도 좋겠지. 비록 초사영의 적수는 되지 못 할지라도 패배라는 것을 통해 자신을 단련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좋은 공부도 없지." 군옥명은 시선을 옮겨 하늘을 쳐다보았다. 푸른빛이 선명한 하늘에는 조각 구름이 떠 있었다. 구름 위로 한 청년이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나이답지 않게 깊이 사색할 줄 알며, 그만치 아집도 강한 인물이었다. 그 얼굴을 대하자 군옥명은 미소를 지었다. "녀석, 강해졌구나. 입김 한 번으로 강호를 온통 뒤흔들어 놓을 만큼. 성급하지만 않으면 좋으련만." 무심히 흘려 보내는 듯한 그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오직 그 자신만이 알고 있는. 제 13 장 황금 오십만 냥의 청부 [1] 세 채의 모옥(茅屋)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그 위치는 화원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평소 이곳은 무척 조용하고 한가로웠는데 오늘 따라 적지 않은 방문객들이 있었다. 모옥 주변으로 십여 명의 강호인물들이 낮은 음성으로 뭐라 얘기를 하며 서 있었던 것이다. 승(僧), 도(道), 속(俗) 등 그들의 신분이나 복장은 다양했으며 남녀노소가 고루 끼어 있기도 했다. 옥사후는 세 채 중 중앙의 모옥으로 향했다. 그를 보자 앞서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깍듯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는 미소로써 그들에게 답하며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두 인물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있었다. 두 명 다 칠순에 가까워 보이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각기 속가(俗家)의 인물과 화상으로, 안광(眼光)을 안으로 은은하게 갈무리하고 있어 일견하기에도 심후한 내공의 소유자들임을 알 수 있었다. 속인와 화상은 옥사후가 들어서자마자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옥사후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두 분께서는 그대로 앉아 계십시오. 소림(少林)과 화산(華山)의 장로(長老)들께서 이러시면 소생으로서는 오히려 불편할 따름입니다." 말마따나 소림과 화산의 장로라는 그들 두 사람을 각자 소개하자면 이렇다. 혜진대사(慧眞大師). 소림사의 현 장문방장(丈門防長)인 혜각선사(慧覺禪師)의 사제로 장로원 소속이자 계지원(戒知院)의 원주(院主)이다. 비록 장로원에서는 서열이 다섯번째에 불과하나 무공으로만 따진다면 혜자 돌림의 승려들 가운데서는 장문방장을 제외하고 가장 실력이 뛰어난 고수였다. 매화검자(梅花檢子) 여구양(呂九陽). 화산파의 오대장로(五大長老) 중 일 인으로 삼십이로(三十二老) 매화무영검(梅花無影劍)을 완벽하게 터득하여 이른바 화산일절(華山一絶)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만일 누군가 이곳에서 그들을 보았다면 크게 놀랐을 것이다. 이는 그들 두 사람이 어떤 장소에서나 쉽게 대면할 수 있는 위인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대사가 아니고는 하산(下山)하는 일이 거의 없는 구대문파의 대표격인 인물들이었다. "허허...... 그럼........" 그들도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며 도로 착석했다. 그들은 매우 만족해 하는 듯한 얼굴이었는데, 그것은 젊은 옥사후가 일찌감치 겸양의 덕마저 깨우치고 듯 했기 때문이었다. 옥사후도 탁자에 가 앉았다. 그는 잠시 두 사람을 응시하더니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부께서는 두 분께 그냥 돌아가시라고 하셨습니다." "음........" 혜진대사와 여구양은 똑같이 미간을 모았다. 그들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 옥사후가 말을 이었다. "한 마디 별도로 남기신 말씀은 있었습니다." "별도로?" 옥사후는 그들이 절박한 심정에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물어오자 겸연쩍은 듯 씩 웃었다. "소생, 감히 말씀드리기 민망하나 사부께서는 두 분이 정 도움을 필요로 하신다면 소생더러 나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봉황 대신 닭인 격이니 실망할 만도 하건만, 혜진대사와 여구양은 그렇지 않았다. 두 사람은 체신도 잊은 듯 만면에 안도의 빛을 떠올리며 차례로 말했다. "그렇다면 뭘 더 바라겠소? 부영주가 영주를 대신해 나서 주신다니 우리는 한 시름 놓았소." "이번 길은 헛걸음이 아니었소이다." 이는 그들이 얼마나 옥사후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었다. 옥사후는 새삼 두 사람을 향해 포권했다. "두 분께서 이처럼 저를 믿어 주시니 최선을 다해 이번 일을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구양이 수염을 쓸어 내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야 당연하지 않소? 영주의 학문과 지혜를 물려받은 사람은 천하에서 오직 옥소협 한 사람 뿐이거늘, 어찌 우리가 신뢰하지 않을 수 있겠소?" "감사합니다." 그들이 어깨에 힘을 실어주자 옥사후는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이어 그는 진중한 어조로 운을 떼었다.


"제게 한 가지 방안이 있습니다만........" "오! 어서 말씀해 보시오." "적들은 상상외로 우리에 대한 정보에 훤합니다. 그런 자들을 상대로 계속 무력만을 사용하려 든다면 피해는 앞으로도 점점 더 커질 것입니다." "하면?" "허허실실(虛虛實實)의 양동작전을 펼쳐야 합니다." "허허실실?" 옥사후는 눈에 의문을 담고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을 향해 꽤 자신 있는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우선 여러분께서는 전력을 기울여 파천황과 대결을 벌이는 척 하되, 공성계(空城計)를 쓰도록 하십시오. 그 다음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일단 피해를 줄이는 수단은 되겠구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영악한 자들이니 몇 번이나 통할지는 소생도 장담 못 하겠습니다만." "단번에 그쳐도 효과는 매우 클 것이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오." "빠른 시일 내에 황금 오십만 냥을 조달하여 주십시오." 혜진대사와 여구양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황금 오십만 냥? 그것도 이 일에 필요하오?" 옥사후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좋소, 마련해 보리다." 대안이 없어 수락은 했지만 두 장로는 흑풍사에 대항하는데 황금이 따로 왜 필요한지 그때까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오십만 냥의 황금이란 적은 액수가 아니다. 더구나 눈치를 보아하니 군비(軍費)로 사용되는 것도 아닌 듯 한즉 그들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게 당연했다. 어쨌든 허허실실 작전과 연결 지어 보면 뭔가 답이 나올 것도 같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회의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럼 우리는 부영주만 믿겠소." "아미타불...... 옥시주께서도 이번 기회에 기량을 마음껏 발휘해 곧바로 본 회에 참여하시길 바라오."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옥사후도 웃으며 따라 일어섰다. "하하...... 소생도 그렇게 되기를 앙망합니다." 그는 장로들을 문 앞까지 전송했다. 그러고는 돌아서며 자신감에 찬 미소를 입가에 피워 올렸다. "초사영이라 했던가, 파천황주라는 자가? 후후......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위인으로 알려졌지만 본인이 나선 이상 그도 기세가 한 풀 꺾이게 될 것이다. 아니, 그의 야욕은 죽음으로써 그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다." 나직이 읊조린 옥사후는 각오를 다지려는 듯 맑은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켰다. 그의 뇌리에는 벌써 야망을 달성하여 기쁨에 취한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2] 부슬부슬........ 때늦은 가랑비가 여인의 한숨처럼 질척이며 내린다. 그런 느낌 탓일까? 빗방울이 뺨에 와 닿는 감촉은 공연히 사람의 기분을 추연하게 만들었다.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이라도 한잔 마시지 않으면 심한 우울증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 듯한 날이었다. 초사영도 인간의 정서를 가지고 있는 한 예외는 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자꾸만 가라앉는 심경을 추스르지 못해 대책을 강구하려 길을 나서는 중이었다.


관도(官道) 옆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주점이다. 초사영은 전신이 흠뻑 젖은 채 그곳을 찾았다. 그는 비 내리는 풍경이 내다보이는 창가의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서 오십쇼. 오늘 같이 궂은 날은 따끈한 청주와 오리구이가 제격입죠. 헤헤........" 초사영은 점소이를 힐끗 쳐다보고는 싸구려 독주에 야채 한 접시를 안주로 주문했다. "여기 잔 하나 더 갖다 주시오." "알겠습니다요." 잠시 후. 점소이는 주문한 것들을 모두 가져다주기는 했으나 내심 투덜거리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나 원, 비가 구질구질하게 오니까 별 이상한 사람도 다 있군. 혼자 와서 잔은 왜 두 개람?' 이때, 초사영은 점소이의 불평과는 무관하게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는 창 밖을 바라보며 한 사람을 떠올렸다. '할아버님!' 비록 진정한 혈육관계는 아니었으나 초사영에게 있어 낙성검호(落星劍豪) 비사무의 존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이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초사영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육친보다 내내 동고동락(同苦同樂)했던 비사무에게 마음이 더 기울어 있었다. 그는 투박한 잔을 집어들었다. '할아버님, 받으십시오. 소손이 올리는 잔이올씨다.' 생전의 비사무는 오늘처럼 질척거리며 비가 오는 날이면 의례 내상이 도져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곤 했었다. 그 고통을 잊고자 독한 술을 마셔대 상세는 더욱 악화되고........ 초사영은 술을 따라 잔을 채웠다. 그러고는 자신의 잔에도 넘치도록 가득 부어 단숨에 들이켰다. '이젠 편히 지내시겠지. 고통 없는 세상에서.' 그의 쓸쓸한 독백 뒤로 어디선가 비파음이 들려왔다. 딩....... 띠딩.......! 이런 작은 주점에서 듣게 되는 것 치고는 꽤 그럴 듯한 선율이었다. 앳된 여인의 노랫소리도 이어서 귓전을 울렸다. 초사영은 이를 기화로 매우 이중적인 심리가 되었다. 비감(悲感)에 사로잡혀 있어서인지 일편으로는 그 음이 아름답다고 느끼면서도 무척이나 신경에 거슬렸던 것이다. "후후...... 비가 오니 여러 모로 마음이 흐트러지는군." 그는 비파음이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 밖이었다. 그곳에 백발의 노인 한 명과 어린 소녀가 서 있었다. 비파는 노인이 연주하고 있었고, 노래는 십오, 륙 세쯤 되어 보이는 그 소녀가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모습은 거지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추레하기 짝이 없었다. 남유연인(南有戀人), 봉자우귀(縫子于歸) 행군역로(行君役勞), 여정유재(旅程悠哉) 과우상병(過于想病), 구지부득(求之不得) 자혜자혜(子兮子兮), 즘양기사( 恙其事) 즘양애애( 恙哀愛), 아심비상(我心悲想) 남쪽에 사랑하는 이 있어 만나고저 돌아갈 제, 가는 길 험악하고 힘드니 남은 길이 아득하구나 지나친 재촉에 병이 들어, 그리운 님 더욱 만날 수 없어라 아아! 어이할거나 그 일을 어이할거나 슬픈 사랑을, 내 가슴만 쓰리구나


노래는 가사도 그렇거니와 부르는 음성까지 청승맞아 듣고 있자니 차라리 참담한 기분마저 들었다. 초사영은 또다시 술 한 잔을 비웠다. 그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미간을 구겼다. 그것은 술이 써서가 아니라 어쩐지 자신의 처지를 누군가에게 들켜버린 듯한 느낌 탓이었다. '빌어먹을! 술도 더 못 마시겠군.' 때마침 그의 심중을 휘젓던 노래 소리가 뚝 그쳤다. 초사영은 일편 잘 되었다 싶어 방금 전까지 노인과 소녀가 서 있던 자리를 살펴보았다. 그들 두 노소는 어느 틈엔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다행이다. 그 따위 노래를 더 듣지 않을 수 있어서.' 그의 안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누군가 주점의 문을 밀고 안으로 성큼 들어섰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예의 노인과 소녀였다. '끙! 질기군.' 초사영은 두 노소(老少)와 눈길이 마주치자 일부러 고개를 돌려 외면해 버렸다. 그는 비감을 떨치려 이곳에 왔지, 더 보태려고 온 것이 아니었기에. 의외로 그의 신경전은 연장되었다. 기척을 듣자 하니 두 노소는 자신에게로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왜 굳이?' 초사영의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주점 내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우측으로 두 개의 탁자를 사이에 둔 채 한 명의 금포인이 앉아 있는 것을 제외하면 그 자신뿐이었다. 금포인은 만취한 상태로 누가 들어오는지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끄럽게 노래 가락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초사영은 잠시 금포인과 매창(賣唱)들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는 사이에 노인과 소녀는 그의 탁자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쭈르르........ 초사영은 의도적으로 느리게 술을 한 잔 따랐다. 그러고는 역시 습관인양 단숨에 들이켰다. "크으!" 그는 젓가락으로 안주를 집으며 비로소 그들을 응시했다. "내게 무슨 볼일이 있소?" 노인이 비파를 내려놓으며 허리를 구부렸다. "헤헤...... 공자, 이 늙은이와 불쌍한 손녀를 위해 적선을 베풀어주십시오. 가진 게 없어 이런 재주나 피우고 있으니 공자 같은 분의 도움이 아니고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요." 초사영은 흐릿하게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노래를 들었으니 거절할 수도 없겠군." 그는 좌수를 품 속에 넣으며 소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비록 행색은 말이 아니었으나 가까이서 보니 소녀의 얼굴은 제법 예쁘장했다. 그녀는 신명이 난 듯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 두 손을 내밀며 다가왔다. 그러나 바닥이 미끄러웠을까? "앗!" 소녀는 초사영과 한 발자국 정도의 거리를 남겨 두고 휘청했다. 그녀는 본능인 듯 재빨리 손을 뻗어 탁자를 붙들었다. 쓰러지지 않으려면 그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이어 소녀는 다시 손을 내밀려다가 그만 실수로 탁자 위에 놓인 젓가락 통을 툭 치고 말았다. 파파파팟! 수십 개의 젓가락이 통에서 탄출된 것은 그때였다. 젓가락들은 일제히 초사영의 가슴을 노리고 쏘아져 갔다. 하지만 불시의 기습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슈슈슉! 소녀의 소매 속으로부터 쇠털보다도 가늘고 작은 침들이 은빛 광망을 뿌리며 초사영의 얼굴로 쇄도해


갔던 것이다. 노인도 빠지지 않았다. 그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비파를 휘둘러 초사영의 목을 후려쳐 갔다. 이 동시 다발적인 암습은 천하 제일의 신법을 지니고 있다 해도 피해낼 재간이 없었다. 불과 팔 길이 정도의 지척지간에서 젓가락과 은침, 게다가 무기로 화한 비파까지 날아드니 피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실로 놀라운 것은 초사영의 대응이었다. 촤아악―! 품 속에 있다가 튀어나온 좌수의 소매가 부채처럼 활짝 펼쳐져 무형의 힘을 받은 젓가락들을 퉁겨냈다. 파파파팍! 그런가 하면 초사영은 우수로는 품 속에서 금빛 물체를 꺼내 즉각적으로 얼굴을 가리는 한편, 적시에 몸을 움직여 날아드는 비파까지도 기가 막히게 피해냈다. 결국 젓가락은 그의 소매에, 은침들은 금빛의 둥근 물체에 부딪쳐 모조리 휘거나 부러진 채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물론 노인의 비파도 허공을 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럴 수가! 저...... 저 자는 인간도 아니야." 소녀가 넋이 나간 듯 부르짖었다. 그녀로서는 초사영의 반응이 이처럼 신속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에잇, 이거나 받아랏!" 쐐애애액―! 예리한 파공성과 함께 노인의 비파 속에서 한 자루의 철전(鐵箭)이 쏘아져 나갔다. "어딜!" 파팍! 초사영은 잔을 들어 상대가 쏜 비장의 무기를 퉁겨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 방향은 다름 아닌 소녀에게로였다. "아악!" 그녀의 입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저...... 저.......!" 노인이 놀라 부르짖는 사이, 소녀는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쿵! 그녀의 목에는 퉁겨져 나간 철전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으으.......!" 비파를 안고 있는 노인의 안색은 백짓장이 되어 있었다. 그를 향해 초사영은 입을 열었다. "미안하게 되었소, 나 대신 저 소녀가 당하게 되어서." 어투는 담담했으나 그 말은 분명 비아냥이었다. 노인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더듬더듬 물었다. "어...... 어떻게 우리의 암습을 눈치채고.......?" 초사영은 씩 웃었다. "그건 내가 영민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었소. 그것도 너무 많은 실수를." "실수?" "그렇소. 첫째, 이곳은 관도 변의 작은 주점이지 노래를 팔 수 있을 만큼 번화한 시진의 주루가 아니오." "으음.......!" 노인의 긴 수염이 바람도 없는데 파르르 떨렸다. "둘째, 당신은 마땅히 이 점을 생각해 보아야 했소. 이 주점에서 나와 저 사람 가운데 누가 노래를 팔아줄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인가를 말이오." 초사영은 이 판국에도 만취한 탓에 놀라는 기색도 없이 흥미로운 눈길로 자신들을 응시하는 금포인을


가리켰다. 확실히 그랬다. 초사영이 입고 있는 옷은 노래를 살만한 여유도, 풍류도 엿볼 수 없는 궁색한 흑의였다. 반면에 금포를 입고 부(富) 티를 내는데다가 노래나 흥얼거리는 자라면 기분파로 남의 노래를 사 줄 가능성도 높았다. 초사영은 말을 마치자 안면을 굳혔다. "자! 이제 당신이 말할 차례가 된 것 같소. 누구의 명을 받고 나를 암살하려 했소?" 노인은 언제 겁에 질렸느냐 싶게 갑자기 광소를 터뜨렸다. "내가 그 대답을 하리라고 보느냐? 크하하하하.......!" 노인의 웃음소리는 곧 잦아들었다. 대신 그의 입에서는 진득하면서도 검붉은 핏물이 흘러 나왔다. "맙소사! 저런 짓을........" 초사영은 무의식 중에 노인에게 다가가려 몸을 일으켰으나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손을 써 봐야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 자는 입 안에 감추고 있던 독단을 깨물고 죽었다. 필경 살수집단에 속한 인물이리라. 자결을 함으로써 비밀을 지키는 것은 그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지.' 그는 주점을 나가기 위해 다시 일어섰다. 관객이던 금포인은 사건이 너무 쉽게 끝나 버리자 싱겁다는 듯 고개를 돌리더니 자작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초사영은 그 자를 지나쳐 사색이 되어 있는 장궤 앞에 은 덩어리를 던져 주고는 주점을 나섰다. [3] 관도(官道). 산허리를 굽이치며 돌아가는 길이다. 황토길이라서 맑은 날은 뿌연 먼지로 가득하고 비오는 날이면 의례 곳곳에 물웅덩이가 고여 질척거리곤 한다. 지금도 그 길은 가랑비에 젖어 행인들의 신발을 더럽히고 있었다. 그러나 초사영은 이를 개의치 않고 길을 따라 일정한 보폭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회합 일자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구나.' 그 말은 혈풍대와 귀살대로 나뉘어진 두 개 조의 파천황이 한 장소에 모이는 날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는 주점에서의 사건 따위는 잊어버린 듯 향후로 있을 일에 대한 구상들로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던 순간, 초사영은 이상한 기미를 느꼈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걸음을 멈춘 채 주위를 돌아보았다. 곧이어 그의 입술을 비집고 차가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나와라! 숨어서 엿보지만 말고." 거칠고 듣기 거북한 음성이 그 말을 받았다. "크크...... 꽤 날카로운 청각을 지녔구나, 초사영." 소리는 관도 변의 숲에서 울려나온 것이었다. 그 음성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내공이 담겨 있었다. 스스슷! 과연 숲 속으로부터 하나의 인영이 튀어나오더니 초사영의 앞에 내려섰다. "당신이었군." 초사영은 상대를 알아보고는 미간을 모았다. "흐흐...... 기억할지 모르겠다만 우리는 초면이 아니다. 주점에서 상견례를 치루었으니 말이다." 느닷없이 앞을 가로막고 나선 그 인물은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시끄럽게 노래를 흥얼거리던 중년의 금포인이었다. 초사영은 냉소했다.


"당신도 내게 볼일이 있었소? 주점에서는 수하들이 면전에서 죽어가도 모르는 척 구경만 하고 있더니." 질책을 들으면서도 금포인은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당연하다는 듯 멀쩡하게 응수해 왔다. "그런 멍청한 년놈들은 더 이상 필요 없다. 암격을 가하고자 했으면 좀더 치밀했어야지, 안 그렇느냐?" "매우 비정한 논리이구려." "크ㅋ! 비정하다고? 웃기지 마라. 살수에게 있어선 어떤 경우에 처하든 실수나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초사영의 빙긋 웃었다. "그럼 그대들은 전문적인 살수였소?" "여우 같은 놈!" 금포인이야말로 실수를 저질러 놓고는 제 풀에 안면을 씰룩거렸다. 하지만 그의 기세는 이내 회복되었다. "상관없다. 네가 우리의 정체를 알았다 해도 목숨이 끊어지면 별 수 없을 테니까." "후후...... 자신이 있소?" "물론이다." "좋소, 그렇다면 한 가지 더 물어도 되겠구려? 당신은 살수를 자처했으니 분명 청부를 받았을 텐데........" 금포인이 중도에서 말을 가로챘다. "감히 청부자가 누구인지를 묻고 있는 게냐?" "그렇소." "크크크...... 그걸 알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초사영은 피식 웃었다. 태도로 보아 상대의 입에서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기란 틀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밑져야 본전이니 물어 보기는 했다. "어떤 방법이 있소?" "지옥에 가서 염라대왕에게 묻는 것이다." "쯧! 짐작 대로군." 초사영은 혼잣말처럼 읊조리더니 말을 이었다. "안 되었소만 염라대왕과의 접견은 아마 나보다 당신이 먼저 하게 될 것이오." 금포인은 안색을 굳혔다. "괘씸한! 보자보자 하니 애송이 놈이 멋대로 주둥이를 놀리는구나.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것도 모르고." 그 순간이었다. 휙! 초사형의 신형이 벼락처럼 금포인을 덮쳐갔다. "훗! 잔소린 관두고 염라대왕께 안부나 전하시오." 짓궂은 음성도 함께였다. 금포인도 못지 않게 빠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순식간에 초사영의 공격 권에서 벗어나 미끄러지듯 삼 장 여나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그는 허공을 향해 크게 외쳤다. "죽여라!" 그러자 양쪽 숲으로부터 잠복해 있던 네 개의 인영이 튀어나오더니 무시무시한 기세로 초사영을 지나쳐갔다. 파아아아아― 네 줄기의 시퍼런 섬광이 그물처럼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러나 초사영은 예상하고 있었던 듯 어느 틈엔지 검을 빼든 채 횡벽이단(橫壁二段)으로 검세를 떨쳐내고 있었다. "으악! 크으윽―!"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잇달아 네 번이나 울렸다. 이와 함께 관도 위로는 피우박이 쏟아져 내렸다. 그를 습격한 네 명의 인물은 모조리 몸이 양단 되어 죽어 갔던 것이다. "이...... 이럴 수가.......!" 금포인은 불신이 가득찬 눈으로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설마하니 수하들이 그토록 쉽게 당하리라곤 상상도 못한 그였다. 스슷! 초사영은 숨도 돌리지 않고 막바로 금포인에게 쏘아져 갔다. 네 명의 기습을 받았거니와, 그들을 쳐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호흡 하나 흐트러져 있지 않았다. 금포인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저 자세는!' 하지만 이때에 초사영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방향을 틀어 신형을 위로 솟구쳤다. 스팟! 그의 몸이 허공에서 반 바퀴 회전했다. 그는 그렇게 머리는 땅을 향하고 발은 하늘로 향한 채 수직으로 검을 뻗었다. "하앗!" 츠으으― 기합성과 더불어 대기를 가를 듯 날카로운 검기(劍氣)가 검극에 형성되었다. 그 광경이란 마치 검의 길이가 삽시에 석 자나 더 늘어난 것 같아 보였다. 스으읏! 초사영의 손이 가볍게 춤을 추었다. 그에 따라 한 줄기 흰 빛과 같은 검광이 폭사되며 관도 위를 가로세로 그어갔다. 쐐애애액―! 그것은 실로 괴이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이었다. 허공에 거꾸로 선 자세에서 펼쳐내는 검법도 그랬지만, 보다 의아스러운 것은 그가 왜 지면을 난도질하느냐는 것이었다. 이유는 금세 밝혀졌다. 그 신비로운 검무(劍舞)는 두더지처럼 땅 속에 숨어 있었던 자들을 처단하기 위한 공세였다. "으아악―! 크윽!" 처절한 비명이 연이어 터지며 질척이는 관도에서 서너 명의 흑의인들이 솟아 나왔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듯 마구 몸부림을 쳐 대더니 잠잠해졌다. 죽은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지하에 은신했던 자들은 그들만이 아니었던 듯 검흔이 그어진 곳에서는 핏물이 시뻘겋게 번져 나와 빗물과 함께 계곡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이 모든 장면들을 끝까지 지켜본 금포인은 좀 전의 당당하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급기야 그의 입에서는 신음과도 같은 읊조림이 새어 나왔다. "유성휴(流星休)! 천하제일검의 그 검공(劍功)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금포인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공포의 기색이 완연하게 드러나 있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아도 한참 잘못 보았다. 유성휴를 펼칠 만한 자라면.......!' 초사영은 유성휴의 검법을 조부, 아니 가신(家臣)이라고 할 수 있는 낙성검호 비사무에게서 배웠다. 또한 비사무는 천하제일검 초아신에게서 직접 전수 받은 바 있다. 말하자면 가전(家傳)의 형식을 벗어나지 않았건만 금포인은 그 검법을 놀랍게도 한 눈에 알아보고 있었다.


이는 얼마 전에 흑풍사의 흑부주도 그랬었다. 검법의 원래 주인인 초아신이 실종된 지도 어언 이십 년이 넘었건만. 파악! 초사영은 허공에서 이번에는 한 바퀴를 회전하더니 검을 수직으로 뻗은 채 지상으로 돌진해 왔다. 그와 일체가 된 검은 금포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태산압정(泰山壓頂)과 유사한 패도일식이었다. 츠파앗! "헉!" 금포인은 기겁을 하며 황망히 수중의 검을 떨쳐냈다. 쐐애애액―! 화려한 검광이 폭발하듯 일어나며 그의 머리 위로 두터운 검막이 형성되었다. 카캉! "흑!" 날카로운 금속성과 짧은 비명이 거의 동시에 울렸다. 금포인의 검은 박살난 채 검 자루만 남아 있었고, 물샐 틈 없는 검막을 꿰뚫었던 초사영의 검은 그의 심장을 관통하여 등판으로 그 끝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후후...... 염라대왕이 반가워하겠군." 초사영은 낮게 웃더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는 금포인의 얼굴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아직 말하지 않았다. 청부자가 누구인지." 금포인은 어렵사리 입술을 비죽였다. "네놈도...... 죽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네 목에는 황금 오십만 냥이 걸려 있다. 본 각의 살수들이 너를 노리고, 컥!" 그는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피를 토하며 고꾸라졌다. 초사영이 냉정하게 그의 심장에서 검을 뽑아 버렸던 것이다. "끝내 청부자를 밝히기는 싫은 모양인데, 이런 자를 붙들고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지." 초사영은 금포인의 품 속을 뒤져 몇 가지 물건을 꺼냈다. 그는 그 중에서 동패(銅牌)를 집어들었다. <동살령(銅殺令) 삼호(三虎)> "역시 살인각의 인물이었군." 초사영은 동패를 보고 금포인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는 흑풍사에 들기 전, 강호를 주유하며 그때까지 존재하던 모든 세력과 그들이 사용하는 표기 등을 익힌 바 있었다. "저건 뭐지?" 초사영은 금포인의 핏물로 인해 벌겋게 적셔진 한 통의 서신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펼쳐 들었다. <표적이 지금 왕옥산(王屋山)을 지나고 있음>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고 서명도 없었다. "훗! 표적이라고? 나를 두고 하는 말이군." 초사영은 동패와 서신을 시체 위에 내던졌다. 그러나 무심한 동작에 비해 그의 표정은 그리 무감해 보이지 않았다. '금후로는 더욱 긴장해야겠군. 청부자가 누구이건 살인각의 살수들을 줄줄이 달고 다니게 생겼으니.' 그때였다. 스슷! 경미하나 뒤쪽의 숲 속으로부터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듯한 음향이 일었다. "아직도 남아 있었나?" 초사영은 돌아다보지도 않고 수중의 검을 날렸다.


"아악!" 뾰족한 비명이 뒤를 이었다. "여인?" 초사영은 흠칫 놀라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직감적으로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침착하자. 여살수(女殺手)일 수도 있으니까.' 그는 애써 자위하면서도 비명 소리가 울린 곳으로 다급히 신형을 날렸다. 휘익! [4] 숲 속. 수풀더미와 크고 작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진 곳에 한 여인이 쓰러져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젊었다. 초사영의 검은 여인의 왼쪽 견갑골을 관통한 상태였다. 충격을 못 이겨 기절한 듯 그녀는 축 늘어져 있었다. "음! 어찌 이런 일이........" 초사영은 몹시도 곤혹스러워지고 말았다. 그는 원래부터 웬만해서는 여인들과 상대를 하지 않으려 하는 편이었다. 그것은 소위 남존여비(男尊女卑)에 입각해서가 아니라 여인과는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어려우리라는 판단 하에서였다. 일신에 무예를 익혔든, 아니든 여인들은 대개 신체적으로 남자에 비해 나약하기 때문에 감정선도 다르게 마련이다. 초사영은 이런 면 때문에 의도적으로 여인들을 기피해 오다가 사상 초유의 실수를 범하고 만 것이었다. 어쨌든 그는 일말의 책임을 느껴 죽은 듯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인을 안아 일으켰다. "아니!" 여인의 얼굴을 본 초사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혈옥(血玉)!" 여인은 놀랍게도 그가 과거 광혼산에서 수련을 쌓을 때 파천황주의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였던 혈옥이었다. '어찌 이런 곳에?' 의아해 하며 여인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던 초사영은 나직이 한숨을 터뜨렸다. "혈옥이 아니다. 판에 막은 듯 닮기는 했어도." 그의 시선은 여인의 얼굴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에게는 이런 점(點)이 없었다." 초사영이 지칭하는 곳은 여인의 입술 오른쪽 위 부분이었다. 거기에는 작은 점 하나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속칭 미인점, 아니 요부(妖婦)점이라던가? 여인은 그런 것을 가지고 있어 무림 여걸인 혈옥과 구별이 되었던 것이다. 초사영은 미간을 좁혔다. "그녀와 쌍둥이일까? 그녀에게서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었는데. 좌우간 이 여인의 입술 가에 점이 없었더라면 나로서도 두 사람을 분간하지 못할 뻔 했다." 그는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찌 되었건 목숨을 잃게 할 수는 없지." 초사영은 여인을 안아 들고 몸을 날렸다. "이...... 이 나쁜 인간.......!" 뾰족한 여인의 음성이 터져 나오는 곳은 왕옥산(王屋山)에서도 어느 이름 모를 산 봉에 자리잡고 있는


동굴이다. 동굴은 내부가 상당히 넓었다. 또한 세상과 동떨어진 별천지에 들어온 듯 갖가지 형태를 이루고 있는 종유석들로 미루어 석회동(石灰洞)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태고의 신비를 품고 있는 종유석들은 유감스럽게도 여인의 카랑카랑한 외침성이 일으켜 놓은 진동 때문에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여인은 동부 안의 넓고 평탄한 곳에서 한 사내와 약간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옷은 피로 얼룩이 진 데다가 여기저기 찢겨져 걸레나 다름이 없었다. 그 상태로 여인은 독오른 고양이처럼 눈썹을 바짝 치켜올린 채 사내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 광경만 보아서는 사내가 여인에게 못된 짓이라도 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어깨 부위에는 속옷을 잘라 만든 붕대가 감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사내의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치료해 준 사내에게 여인은 이처럼 독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래, 너는 남녀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법도도 모르느냐? 무식하기 짝이 없는 놈 같으니." 사내, 즉 초사영은 연이어 퍼부어지는 지독한 욕설에도 침묵만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는 진작부터 여인이 살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바, 변명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한 가지 의문사항은 있었다. '이 여인은 지금 무얼 가지고 나를 야단치는 거지?' 그에 대한 답은 곧 나왔다. "어떻게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 일면식도 없는 아녀자의 옷을 벗기고 속옷을 찢어........" 여인은 극도로 흥분해 있기는 했지만 그 상황에서도 차마 뒷말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아마도 낯뜨거운 일을 제 입으로 까발리자니 민망했던 모양이다. '훗! 그거였나?' 초사영은 내심 실소하는 한편, 여인의 붉어진 얼굴로부터 색다른 형태의 종유석으로 시선을 옮겨갔다. 그런 유의 앙탈 같으면 그로서도 들어줄 의무가 없었으므로. 그에게 외면을 당한 여인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이봐! 넌 벙어리냐? 잘못을 저질렀으면 의당 사과를 해야 마땅하거늘, 어째서 함구하고 있는 게야?" 초사영은 다시금 눈을 돌려 여인을 응시했다.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하지?" "뭐, 뭣?" 여인의 눈에서 새파란 불꽃이 일었다. 그녀는 눈 꼬리를 파르르 떨며 더욱 길길이 날뛰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여인의 몸에 손을 대놓고도 뻔뻔스럽게 나오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초사영은 일편 어이가 없었으나 그녀의 아우성에서 해방되고자 내키지도 않는 응수를 했다. "좋아, 그렇다면 내 한 마디 묻지. 상처를 치료해 준 것이 매우 못마땅한 모양인데 그냥 둘 걸 그랬나? 피를 한없이 쏟다가 그 자리에서 죽어 가도록?" "그, 그야.......!" 여인은 여전히 기세를 꺾지 않고 씩씩거렸으나 그에 반해 말문이 막힌 듯 아무 소리도 하지 못 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녀 자신도 과다 출혈로 젊은 나이에 일찍 죽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어떻게 재수가 없다 보니 숲을 지나다 느닷없이 칼을 맞기는 했지만. "비열한 자식! 생색을 내 잘못을 무마하려고 하다니." 이 말은 곧 정조관념을 손상시킨 데 대해서는 분통이 터지되, 적어도 상대가 베푼 호의만은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후후...... 다행히 아주 꽉 막힌 여인은 아니었군.' 초사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비로소 현 사태가 아주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는 정말로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하마터면 무고한 여인을 살수로 오인해 저승으로 보낼


뻔했으니까.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여인은 그 전모를 알지 못하는 듯 엉뚱한 문제로 그를 핍박하더니, 이제는 은인(恩人)쯤으로 여기게 되었는지 악다구니도 더 이상은 쓰지 않고 있었다. 초사영은 붉으락푸르락하는 여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때에 문득 그녀가 신선하게 느껴진 것은 왜였을까? '혈옥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랬다. 여인은 도통 감정 절제가 안 되는 듯 저돌형에다 직선적이었다. 늘 경직되어 있어 내면을 짐작키 어려웠던 혈옥과는 가히 극단의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혈옥은 초사영 자신과 동류이고, 눈앞의 여인만이 별개의 인간형으로 보이더라는 얘기다. 그리고 이 점은 초사영의 눈에는 일종의 매력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아이, 몰라!" 여인은 제 풀에 마구 도리질을 하더니 발딱 일어섰다. 그 바람에 찢어진 옷자락이 벌어지며 그 사이로 그녀는 봉긋한 젖무덤과 매끄러운 살결 등을 아낌없이 보여 주었다. 초사영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쯧! 또 좋은 구경을 하고 말았군." "악!"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옷자락을 추스렸다. 그녀는 초사영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누가 당신더러 보라고 했죠? 치한 같으니." 그녀는 자신의 죄(?)를 그에게 뒤집어씌우고는 있었으나 어느 새 그녀의 어투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변해 있었다. 초사영은 빙긋 웃으며 그녀와 똑같이 응대해 갔다. "그저 보여 주니 보았을 따름이외다." "이...... 이.......!" "후후후........" 그는 새삼스레 격노하는 여인을 보고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런 후 농을 마무리짓기 위해 짧게 말했다. "그만 이곳을 떠나도록 합시다." 여인은 냉소하며 톡 쏘아 붙였다. "흥! 가려면 당신이나 가요. 누가 나까지 상관하랬나?" 그녀는 팔짱을 끼고 홱 돌아섰다. 초사영은 그런 그녀가 무척 귀엽게 느껴졌지만 더 이상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그에게는 현 시점에서부터 새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황금 오십만 냥을 걸고 살인각에 의뢰하면서까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가 누구인지 밝혀 내는 일이었다. 살수들에게 계속 ㅉ기다 보면 아무래도 활동에 제한을 받게 되므로. 초사영은 일단 풍령애로 가 사도린을 만나보기로 했다. 그러면 최소한 살인각의 암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있을 테고, 혹 문제의 청부자가 누구인지 알게 될지도 모르니까. 또한 며칠 후에 있을 파천황의 회합에도 때맞추어 가야 하건만 여인을 치료하느라 꼬박 반나절을 소비했으니 그로서는 마음이 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나 혼자 가겠소. 단, 이곳은 깊은 산중이오. 밤새 기온이 뚝 떨어져 얼어죽게 되거나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곪아 터져도 그때 가서 나를 원망하지는 마시오." "쳇! 나는 뭐 바본가, 그렇게 될 때까기 여기 있게?" 초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되었소만 부디 가다가 산짐승이나 만나지 마시오. 그놈들의 공격에 대응할 자신이 있다면 몰라도." 여인은 부아가 치미는 듯 고함을 빽 질렀다.


"꼭 무서운 짐승들을 만난다고 할 순 없잖아요!" "하긴, 그것도 맞는 얘기요." 초사영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신형을 돌렸다. '정말 가는 거야?' 여인의 안색이 일변했다. 사실 그의 말 대로였으니까. 이 동굴에 혼자 남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고, 혼자 산을 내려가다가는 어떤 변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초사영이 벌써 동굴 입구까지 이른 것을 보자 오기고, 뭐고 팽개치고 다급히 외쳤다. "이, 이봐요!" "내게 무슨 볼 일이 남았소?" 초사영은 여인의 의중을 잘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었다. 물론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기다리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오기를 부리다 자존심마저 구겨져 버린 여인은 대답도 없이 총총 걸음으로 그를 지나쳐 먼저 밖으로 향했다. "흥! 뭘하고 있담? 빨리 떠나자면서." 괜스리 내쏘는 그녀의 뒷등을 보며 초사영은 씩 웃었다. '역시 귀여워.' 제 14 장 사랑은 그렇게 다가온다 [1] 동굴 밖으로 한 사, 오장 정도 걸어 나왔을까? "아!" 여인은 털썩 주저앉으며 어깨를 감쌌다. 아무래도 걸음을 걸으니 검상(劍傷)에 충격이 전해진 모양이었다. 초사영은 미간을 모았다. '이를 어쩐다?' 그의 고민을 그리 길지 않았다. "실례!" 그는 여인을 안아 들더니 산 아래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조금도 망설임 없는 행동이었다. "이...... 이게 무슨...... 놔요, 놔!" 졸지에 그의 품에 안기게 된 여인은 발버둥을 쳤다. "시끄럽소!" 초사영은 짐짓 고함을 쳤다. 여인은 대번에 풀이 죽어 가만히 있었다. 그가 이렇게 나오기는 처음이었으므로. '쯧, 내가 너무 심했나?' 초사영은 실소할 뿐 눈치채지 못했다. 그 순간 여인의 입가에 소리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는 사실을. 그것은 누구고 모종의 목적이 이루어졌을 때 지을만한 그런 웃음이었다. 이윽고 그들 두 남녀는 산 아래에 당도했다. 여인은 주위 사람들을 의식한 듯 최대한 고통에 겨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어깨에 바짝 매달렸다. 이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행위였으나 초사영은 일부러 모르는 체 했다.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마을은 가옥수가 삼백 호(戶)는 족히 될 듯했다. 위치에 비해 제법 규모가 있는 시진(市塵)으로, 그 어귀에 이르자 초사영은 여인을 내려놓았다. "이런 곳이라면 필경 큰 의원도 있을 것이오. 상처가 덧나지 않게 계속 치료를 받도록 하시오. 당신이 치료받을 만큼의 돈은 내가 주겠소." "쳇! 필요 없어요. 누가 당신에게 도움을 받는다고 했어요? 나는 이쪽으로 갈 테니 당신은 당신대로


알아서 가세요." 그가 정중하게 권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냉큼 발을 돌려 시진으로 향했다. '후후...... 대책도 없으면서 큰 소린.' 초사영은 일편 아쉬움이 남았으나 잘라 말했다. "좋소, 우리의 인연은 이게 전부인 것 같으니 헤어지도록 합시다. 쾌유를 빌겠소."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빠르게 멀어져 가는 여인을 향해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그 자신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잠시 후. 여인은 가던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녀는 초사영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다음 코웃음을 쳤다. "흥! 바보 같은 작자." 여인은 소매 속을 더듬어 무엇인가를 꺼냈다. "어디 보자." 그것은 두둑한 전대였다. 그녀는 몹시 만족스러운 듯 전대를 허공에 한 번 휙 던졌다가 받았다. "제법 묵직한데, 얼마나 들었을까?" 그녀의 얼굴에는 조소를 떠올랐다. "뭐, 치료비? 자기에게 무슨 돈이 있다고. 전대는 내 수중에 들어온 지 오래인데. 그것도 모르고 으스대는 꼴이라니, 정말 자다가도 웃을 일이야. 호호호호.......!" 여인은 맹랑하게도 초사영의 전대를 슬쩍(?)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고통을 가장하여 그의 품에 안겼을 테고. 어쨌든 그녀의 투술(偸術)만은 깜찍한 연기와 함께 발군이었다. 초사영의 눈마저도 멀쩡하게 속였을 정도이니 말이다. 여인은 희희낙락이었다. "황금이 이쯤이면 당분간 생활비 걱정은 안 해도 되겠는걸? 호호호...... 호박이 넝쿨 째 굴러들어 온다는 말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부상을 좀 입기는 했지만." 그녀는 기대에 부풀어 전대를 풀었다. "에게게! 이게 뭐야, 겨우 은자 열 냥이잖아? 요걸 가지고 그렇게 잘난 척을 한 거야?" 여인은 실망한 나머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정말 이게 단가? 더 없나?" 아쉬운 표정으로 전대를 톡톡 털던 여인의 눈에 일순 의아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땡그랑! "이건 무엇이지?" 그녀는 허리를 구부려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왠지 섬뜩한 느낌을 주는 철패(鐵牌)였다. "쳇, 이것 때문에 그렇게 무거웠었구나." 여인은 약간의 두려움이 없지는 않았으나 호기심에 이끌려 철패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곧 그녀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야 했는데, 이는 철패에 새겨져 있는 글귀 때문이었다. <파천황주(破天荒主) 득천하(得天下)> 그다지 낯설지는 않은 문구다. "파천황주라...... 어디서 들었더라? 분명 누군가에게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여인은 연신 고개를 꺄우뚱거리더니 얼마 안가 기억 속에서 무엇인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 맞다. 근자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 흑풍혈우(黑風血雨)...... 흑풍사 소속이라는 그 군대가 파천황이었어. 아니, 그럼 그 덜 떨어진 작자가 파천황주란 말이야?" 그녀는 무림인은 아니었다. 다만 어려서부터 강호 전역을 떠돌아 다녀 귀동냥에는 제법 밝았다. "어쩐지...... 나에게 깜빡 속아넘어가기는 했지만 그 자가 강호를 진동시키고 있는 초사영이라는


위인이었구나." 여인은 바짝 움츠러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래도 다행이다. 그 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으니."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그녀가 막 그곳을 뜨려는 순간 등뒤에서 뜻하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흠!" '악!' 여인은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돌아다보지 않고도 상대가 누구인지 직감적으로 알아 차렸다. 하지만 도저히 아는 체는 할 수가 없었다. 지은 죄가 있어 간이 오그라 붙는 마당에 뭐라 말을 하겠는가? 먼저 입을 연 것은 상대방이었다. "덜 떨어졌다고 욕해도 할 말이 없군. 내 품에서 물건을 꺼내 가는 것도 몰랐으니까." '어휴! 난 이제 죽었군.' 여인은 비로소 빙글 몸을 돌렸다. 음성의 주인은 흑의를 입은 것은 좀 전과 같았지만 등에 매달려 있던 검은 죽립을 지금은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가늘게 떨었다. '저런 건 뭣하러 머리에 쓴담? 겁나게스리.' 이처럼 무언(無言)으로도 얼마든지 협박이 가능한 죽립인은 여인과 불과 일 장도 안 되는 거리에서 석상처럼 서 있었다. 그는 물론 초사영이었다. "주시오." 초사영은 간단히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여인의 얼굴이 일순 귀밑까지 붉어졌다. 원래 남의 물건을 슬쩍 하는 것이 전문이기는 했지만 그녀라고 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상황이 역전되었는데도 벌써 수단을 강구했는지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안 되겠는데요?" 초사영은 죽립을 손가락으로 치켜올리더니 히끗 웃었다. 말을 대신하여 여전히 다른 한 손을 내민 채였다. 여인은 저항하다 겁이 나자 댓바람에 고함을 질렀다. "치사하게! 주면 될 것 아니에요?" 그녀는 들고 있던 전대를 초사영에게로 던졌다. 휘익! 초사영은 그것을 받아 들고도 손을 거두지 않았다. 전대 속에는 정작 그가 원하는 철패가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다예요." 여인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뒤로 감추었다. 초사영은 전대를 바닥에 툭 던졌다. "이 속에 든 은자는 당신이 가져도 좋소. 그 뒤에 감춘 물건이나 어서 돌려주시오." "안 돼요. 당신은 내게 상처를 입혔잖아요." 초사영은 크게 놀랐다. "아니, 그럼 그 일을 알고도 그렇게 시치미를?" "그야 피차 일반 아닌가요?" 여인의 당돌한 기세에 그는 기가 막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말마따나 그도 시치미를 뗀 건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본의가 아니라 그녀가 모르는 듯 하니 굳이 알려 줄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로서는 아직 드러내야 할 부분보다는 감추어야 할 부분이 많았으므로. "내게 원하는 게 뭐요?" "응분의 보상." "아까는 싫다고 하지 않았소?" "흥! 그때는 전대에 황금덩이가 들어있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그런데 겨우 은자 열 냥이라니!" 여인은 볼 장 다 보았다는 듯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않고 다 쏟아내더니 아예 철패를 품 속에 집어넣었다. 초사영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물었다. "결국 당신이 원하는 건 황금이오?" "원래는 그랬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요." "어떻게?" "상처가 완벽하게 치유될 때까지 내 신변을 보장해 줘요. 그때가 되면 이 철패를 돌려주겠어요." 작심을 한 듯 여인의 태도는 완강했다. "당신은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으니 무공을 모르는 나쯤은 거수지간에 죽일 수 있을 거예요. 철패를 손에 넣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거구요." "그건 맞소." "맞긴 뭘 맞아요? 일테면 그렇다는 게지." "끙!" 초사영의 입에서는 급기야 괴상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 그를 보며 여인은 생긋 웃었다. 그로 인해 그녀의 오른쪽 입술 위에 있는 작은 점도 따라 움직였다. "보아하니 당신은 나를 죽일 사람은 못 돼요. 억지로 철패를 뺏어가지도 못 해요. 그랬다간 나는 자결하고 말 테니까. 그냥 죽지도 않죠. 성문에 당신이 내 순결을 빼앗았다고 쓴 커다란 천을 늘어뜨리고 목을 맬 거예요." "맙소사!" 초사영은 일시지간 멍청해지고 말았다. 판단 착오로 칼 한 번 잘못 썼다가 걸려도 단단히 걸려든 것이다. 이 상황에서 겨우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란 이런 것뿐이었다. "내게도 잘못이 있으니 다른 건 다 좋소. 그렇지만 내가 언제 당신의 순결을 빼앗았단 말이오?" 여인은 발끈 성을 냈다. "그걸 몰라서 물어요? 내 허락도 없이 옷을 벗기고 속살을 보았잖아요. 자고로 여인의 순결은 지순한 거예요. 팔뚝만 보여도 가치를 잃게 마련인데 내가 당신 같은 사람에게 그 꼴을 당하려고 오늘날까지 순결을 지켜 온 줄 알아요?" "아이쿠! 또 그 얘기요?" "자꾸 하면 어때서요? 당신이 칼을 던지지만 않았으면 나는 아무 일 없이 산을 내려 올 수 있었다구요. 모두가 당신 잘못이니까 당신이 책임을 져야만 해요." 이쯤 되면 초사영도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졌다! 야단도 아주 제대로 치는구나.' 그는 할 말이 없어 잠자코 있다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원한다면 황금은 충분히 지불하겠소." 여인은 빽 고함을 질렀다. "생각이 달라졌다고 했잖아요? 내가 요구하는 것은 이제 돈이 아니에요. 신변의 안전이 더 중요해졌단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어찌 해야 하오?" 연신 한숨뿐인 초사영에게 여인은 태연하게 말했다.


"완쾌될 때까지 나를 보호해 줘야죠. 데리고 다니면서." "뭐, 뭣?" 초사영은 기가 막혀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2] 그는 여인에 관한 자신의 관점이 옳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확실히 여인과는 공감할 수 있는 면이 없으며 그나마 감정선이 달라 맞부딪쳐 봐야 이로운 일이 없으리라는. 그러나 참으로 기이한 것은 그 점을 통감하면서도 불쾌한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지금도 그는 여인이 자신을 졸졸 따라 다니는 광경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염려의 대상은 그 자신이 아니라 여인이었다. 그는 일개 범부(凡夫)가 아닌 흑풍사의 파천황주이다. 보보에 위기요, 가는 길 자체가 혈로이니 그녀를 보호해 주기는커녕 사지(死地)로 몰아 넣지나 않으면 다행이리라. 초사영은 마음이 영 개운치 않아 물었다. "당신은 나를 아오?"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 유명한 파천황주 초사영, 맞죠?" "후후후........" "왜 웃는 거예요?" "웃을 수밖에.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나를 따라 다니려고 하는 진 몰라도 그래 봐야 얻어지는 건 고생뿐일 게요." 여인은 코웃음을 쳤다. "흥! 당신은 그런 걱정까지 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내가 언제 당신을 따라 다닌다고 했어요? 보호를 원한다고 했지." "그게 그거 아니오?" "달라요! 분명히........" 초사영은 손을 휘휘 저어 그녀의 말문을 막았다. "아, 설전은 그만 둡시다. 당신 말이 다 옳소." "알면 됐어요." 여인은 자르듯 말하고는 휑하니 몸을 돌렸다. "우선 식사부터 해요. 하루 종일 먹은 것이 없어 배고파 죽겠단 말이에요." "쯧! 정말 난감하군. 말대로 따르지 않을 수도 없고." 초사영은 혀를 차면서도 그녀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곱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제멋대로인 줄을 알면서도 그는 이상스러우리 만치 그녀에게 이끌려 가고 있었던 것이다. 소소(素素). 이것이 그녀의 이름이라 했다. 그녀는 묻지도 않았는데 초사영에게 자신의 내력을 모두 얘기했다. 그녀는 불행하게도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부모를 여의고 어릴 적부터 고아로 자랐다. 그러다 십여 년 전에 어느 홀아비에게 입양되어 그럭저럭 육 년간을 양부 밑에서 살았다. 하지만 양부마저 사 년 전에 세상을 떠나 버리자 그녀는 예전처럼 혼자가 되었다. 남은 것이라곤 양부에게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편으로써 배웠던 소매치기 기술이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이후로는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소매치기한 푼 돈 등으로 근근히 생활해 가고 있는 처지였다. "음식이 참 맛있네요. 배가 고파서 그런가?" 소소의 어조는 그늘진 구석 없이 쾌활했다. 그것은 자신의 신세를 밝힐 때도 내내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버님을 찾으려고 해요." 초사영의 면전이라 해서 딱히 가리는 것도 없었다. 그녀는 음식을 입에 한 움큼 집어넣고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사실 당신의 검에 당한 것도 세상 어딘가에 계실 아버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그때는 정말 무시무시한 싸움 때문에 겁에 질려 넋을 잃었었죠." "후후...... 상상이 가오." "나중에야 싸움이 그친 줄 알고 겨우 몸을 움직였는데, 그것도 아니더군요. 갑자기 눈앞에서 무엇이 번쩍 하는가 싶더니 하늘이 노래지더라구요." "그리고 깨어 보니 그 동굴이더란 말이겠지?" 소소는 고개를 주억였다. "맞아요." "그 당시에는 왜 이처럼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소?" 초사영이 묻자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나는 당신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줄 알았거든요. 당신처럼 미끈하게 생긴 사람은 대개 부자잖아요? 기왕 다친 거야 어쩔 수 없고, 돈이나 빼내 가려구요." "그 대단한 정조 관념은 어쩌고?" 소소는 기이하게 웃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나도 모르죠. 생각이야 수시로 바뀌는 거니까." "후후...... 정말 못 말리겠구려." 초사영은 웃으면서도 내심 크게 놀라고 있었다. 그 이유는 자신에 관한 것으로써,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그는 꼭 필요로 하는 경우 외에는 이렇듯 많은 말을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웃는 행위도 물론 거기에 포함되었다. 그런 그가 심지어는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이 여인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아마 척박한 환경에 놓여 있으면서도 구김살 없이 밝기 때문이리라.' 그는 물었다. "당신은 내가 혐오스럽지 않소?" 소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데요?" "다치게 해 놓은 데다가........" "하긴 난 당신을 만나 순전히 손해만 입었어요." "그러니 묻는 게요." 그의 앞으로 소소는 음식이 담긴 접시를 밀었다. "혹시 알아요? 나만 열심히 먹었어요." 초사영은 대답 대신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둘러대기는.' 소소는 화제를 돌렸다. "나는 이렇게 형편없이 살아도 내 생부(生父)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멋진 분이세요." 초사영은 그녀의 생부에 대해 아는 바도 없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왠지 그래야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는데, 그러다 다시 그는 스스로에게 놀라고 만다. '아니,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그는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일과 관계되지 않는 한 타인의 삶까지는 돌아볼 여유가 없었고, 그것이 싫어 인연 맺기를 기피하기도 했었다. 그런 그가 소소라는 한 여인을 앞에 놓고는 여태까지 고수해온 습성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누가 강요를 했다면 절대 못 했을 짓이었겠지만. 소소는 말해 놓고 제 풀에 입을 가리며 웃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면요, 실은 양부가 그러셨거든요. 친부모님을 꼭 찾으라면서. 나는 어떤 소리든 양부의 말씀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어요." '흠! 양부와 정이 두터웠던가 보군.' 초사영은 그녀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 자신도 과거지사를 들추어보면 그녀와 유사한 경험이 있으니까. 친부모가 아닌 낙성검호 비사무의 손에서 자란 그가 아닌가? 다른 점이 있다면 초사영은 비사무와의 기억들을 한(恨)으로 덧씌워 간직하고 있는 반면, 소소는 양부를 현재까지도 자신을 이끌어 주는 정신적인 지주로 보고 있었다. 초사영은 잠시 주어진 운명을 변명 삼아 내심으로 자위도 해 보았지만 결국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여인의 마음 자세가 나보다 낫다. 나는 할아버님을 존경하고 따르기는 했지만 늘 견해 차이로 그분을 상심하게 만들었지. 앞으로도 그 면은 달라지지 않을 테고.' 소소가 여전히 밝은 음성으로 말을 건네 왔다. "양부께선 또 뭐라고 한 줄 알아요?" "글쎄...... 잘 모르겠구려." 초사영이 고개를 젓자 그녀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피, 재미없긴. 상대방이 자랑을 하려고 하면 좀 눈치껏 분위기를 띄워줄 수도 있으련만." 그는 쓰게 웃었다. "사실 나로서는 그렇게 하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중이오. 그 방면에 워낙 재능이 없어 놔서 그렇지." "호호호...... 그래도 완전히 가망이 없는 건 아니네요. 자신을 꽤 잘 알고 있으니 말이에요." 소소는 아이처럼 깔깔 웃더니 말을 이었다. "얘긴 이쯤에서 관두어야겠어요. 당신 시달리는 모습은 나도 더 이상 못 봐주겠으니까요." '그건 아닌데.' 초사영은 내심 중얼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생각했소. 그만 여기서 나갑시다." "알았어요." 소소도 별 불만 없이 그를 따라 일어섰다. 한적한 산길이다. 두 남녀는 나란히 걸으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주로 소소가 재잘대면 초사영은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였다. "당신은 무척 바쁜가 봐요?" "그렇소. 오늘 중으로 반드시 한 곳에 도착해야 하오." 소소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날이 저물어 가는데도요?" "저 절벽만 넘어 가면 되오." 초사영은 손가락으로 전면의 험준한 절벽을 가리켰다. 그러자 소소는 금세 질린 표정이 되어 반문했다. "말도 안돼. 어떻게 저길 넘어 가요?" "저 쪽이 지름길이라 어쩔 수가 없소. 싫으면 당신은 빙 돌아서 오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나는 곧장 갈테니." "뭐, 뭐라구요? 그걸 말이라고 해요?" "말이 아니면 무엇이겠소?" 초사영은 일부러 걸음을 빨리 해 그녀와의 거리를 크게 벌려 놓았고, 소소는 기겁을 하여 그를 쫓아갔다. "같이 가요! 그렇게 혼자 가면 어떡해?" 잠시 후. 두 사람은 절벽을 뒤로 한 채 초지(草地)로 들어서고 있었다.


소소는 언제 불평을 했냐 싶게 탄성을 발했다. "아! 아름다워요. 이곳이 어디죠?" "풍령애(風嶺崖)." [3] "허허...... 어서 오게." 풍령패도 사도린이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미리 보낸 전갈을 받고 마중을 나온 것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초사영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사도린은 계속하여 호탕한 웃음으로 그를 반겨 주었다. "허허허...... 다시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쁘이. 더구나 그 사이에 내로라하는 인물이 되어 있으니 자랑스럽기 그지없네. 내 오늘은 크게 한턱 내지. 아니, 자네가 내야 되나?" 그의 너스레에 초사영은 씁쓸히 웃었다. "후훗, 그게 과연 한턱 낼 일인지 모르겠군요." "이 사람! 거 무슨 소린가? 자네의 도약은 실로 눈이 부실 정도이네. 향후로는 더 높이 비상하게 되겠지만." "글쎄요........" 초사영의 반응이 계속 밋밋하자 사도린은 화제를 돌렸다. "떠날 때는 혼자였던 사람이 이제는 어찌 둘이지?" 그의 시선은 소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왜, 그래선 안 되는 겁니까?" "아니야. 그럴 리가 있나?" 사도린은 고개를 젓더니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워낙 의외여서 말이네. 자네답지 않다고나 할까?" "후후...... 그건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개는 안 해 주려나?" 초사영은 씩 웃으며 간단히 대답했다. "소생이 이 여인에게 대단한 빚을 지고 있지요." "빚?" "네, 아마도 갚지 않으면 천하가 시끄러워질, 윽!"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곁에서 소소가 손톱을 세워 그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꼬집었던 것이다. 초사영은 고소를 지었다. "이것 보십시오. 늘상 이렇게 시달리고 있습니다." "허허허허.......!" 풍령패도 사도린이야말로 그답지 않게 대소했다. 그는 젊은 두 남녀의 하는 양이 재미있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특히 초사영의 현재 모습은 보면서도 도시 믿어지지 않았다. 사람이 어떻게 그처럼 달라질 수가 있는지. 소소는 막상 일을 벌이긴 했으나 누군지는 몰라도 잔뜩 위엄이 들어가 보이는 자가 웃으니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민망한 듯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변명했다. "실례가 많습니다. 초면에........" 듣고 있던 초사영이 쿡쿡 웃었다. "평소대로 하시오. 어울리지 않게 무슨.......!" 그의 말은 또 중도에서 뚝 끊겼다. 그것은 소소가 그에게 찢어져라 눈을 흘겼기 때문이었다. "아, 별 뜻은 없었으니 참으시오. 내가 잘못했소." 초사영은 짐짓 손을 휘휘 저으며 사과했다. 그 말을 듣자 소소는 함박웃음을 떠올리며 사도린에게


인사를 했다. "소녀는 소소라고 합니다." "음, 그래도 소개를 받게 되니 다행이군. 노부는 두 사람의 싸움에 치어 계속 벌이나 서게 될 줄 알았지." "에그머니나! 노어르신까지........" "허허허...... 별 뜻은 없었으니 참게. 내가 실례했네." 사도린도 어느 새 분위기에 동화된 것일까? 그가 초사영의 말을 똑같이 받아서 하자 장내는 잠시 웃음 마당이 되었다. 이윽고 사도린의 짤막한 자기소개가 있었고, 그 뒤로 초사영과 소소는 그의 안내에 따라 풍령각으로 들어갔다. 귀빈실(貴賓室). 그 곳에는 푸짐한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각자 자리를 잡고 앉자 사도린이 입을 열었다. "최근에 들려오는 소문이란 온통 자네에 관한 것뿐이더군. 명실공히 천하무림의 우상으로 부각된 게야." 초사영은 말을 대신해 고소로써 답했다. 사박사박........ 조심스럽게 치마 끄는 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실내로 들어섰다. 그녀는 두 손을 앞으로 다소곳이 모으고 있었고, 걸음걸이도 날아갈 듯 사뿐사뿐 했다. "아, 왔구나. 이분들과 인사를 나누도록 해라." "네, 아버님." '아버님이라고? 그렇다면........' 초사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가 알기로 사도린의 여식이라면 언젠가 한 번 마주쳤던 사화연(査花延) 뿐이었다. 그런데 치마를 살짝 치켜들고 온갖 얌전을 다 떨며 들어오는 이 여인이 그녀라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상녀(馬上女). 초사영이 그런 별명을 붙일 만큼 사화연은 거칠고 오만한 여인이었다. 그때의 모습만을 기억하고 있던 초사영으로서는 아연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더구나 현재의 모습도 사화연과는 썩 잘 어울렸다. 제멋대로일 적에도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아름다웠던 만큼 미모가 받쳐 주어서인지 그녀의 언행은 조금도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소녀 사화연, 귀공(貴公)을 뵙습니다." 어투도 확연히 달라져 있었고, 그 때문에 사화연에게서는 흔히 말하는 고귀한 기품마저 느껴졌다. 초사영은 그녀가 가볍게 머리를 숙일 때, 목덜미가 은은히 붉어져 있는 것을 보며 기가 막혀 내심 혀를 차야 했다. '쯧! 세상일이란 정녕 알 수가 없군. 전날에 내게 공연한 시비나 붙여 오던 그녀가 이 여인이 맞나?' 어쨌든 그도 예에 답하는 의미로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오, 사소저. 그동안 잘 지내셨소?" "덕분에요." 말을 하며 고개를 드는 사화연은 얼굴까지 붉어져 있었다. 여인 특유의 수줍음마저도 내비치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 그 광경을 지켜보며 심사가 영 편치 않은 사람이 있었다. 소소였다. 그녀는 가슴이 끓어오르는 것을 제어하지 못해 난감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누구나 생긴 값은 하게 마련이라니까!'


소소는 매서운 눈으로 초사영을 흘겨보았다. '흥! 엄청나게 보기 좋군. 아름다우신 귀공녀를 앞에 두고 기분이 좋아 헤벌쭉해 있는 저 꼴이라니.' 그러나 자리가 자리이니 만치 명색이 손님으로 와 가지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사화연과 같은 신분은 갖추지 못 했어도 눈치 하난 누구보다 빠른 그녀였다. 소소는 잠시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를 할까하고 고심하다가 한 가지 묘안을 짜냈다. 그녀는 자신이 연출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영, 제게도 저 귀하신 분을 소개시켜 주셔야죠." '엉?' 초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소의 그윽한(?) 음성도 놀라웠지만 만나게 된 이후 처음으로 이름까지 불리고 보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어이구! 누가 보면 영락없이 연인 사이인 줄 알겠군.' 그의 충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화연의 반응이 또한 상상을 뒤집는 묘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호호...... 소개랄 게 뭐 있나요?" 사화연은 일단 그렇게 운을 뗀 뒤, 태연하게 말했다. "전 화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구요,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나중에 저분 공자께 여쭈어 보세요. 공자께선 저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알고 계시니까요." 초사영은 입을 딱 벌렸다. '졌다!' 그러는 사이, 두 여인들 사이에서는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그녀들은 정면으로 마주치기를 꺼려 시선을 돌리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의식해 안면이 굳어져 있었다. 사도린이라 해서 그 눈치를 모를 리가 없었다. '저 아이가 설마?' 그는 사뭇 걱정이 깃든 눈으로 자신의 여식인 사화연을 응시했다. 분위기가 망가지는 것은 둘째치고, 초사영에게 마음이 기울어 있을 딸의 장래가 몹시도 염려되었던 것이다. '그래선 안 되는데...... 이 일을 어찌 할꼬?' 풍진강호, 게다가 천하제패를 꿈꾸고 있는 위험한 사내라면 사윗감으로는 절대로 사양하고 싶은 사도린이었다. 또한 초사영의 옆자리는 이미 소소라는 이름의 야생화(野生花)를 연상시키는 처자가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사도린은 쓰린 심정을 감추고 초사영에게 잔을 권했다. "자! 한 잔 받게. 오늘은 자네가 주인공이니." "고맙습니다." 초사영도, 그도 어색한 가운데서 술잔을 들었다. [4] 밀실(密室). 사도린과 초사영이 마주 앉아 있다. 이곳은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 별도로 마련된 자리였다. 사도린이 말했다. "자네는 무엇하러 이곳에는 들렀나?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닐 텐데. 그렇다고 내 힘이 필요할 리도 없고, 아닌가?" 힐책이 깃든 듯 어감이 묘한 그 말에 초사영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응수했다. "아닙니다. 실은 노선배의 도움을 얻기 위해 왔습니다." "내게 말인가?" 사도린은 불쑥 반문했다가 안 되겠는지 기세를 꺾었다. "내가 무엇을 도와주면 되겠나?"


"두 가지 정보가 필요합니다." "어떤?" 초사영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입을 떼었다. "우선...... 살인각주(殺人閣主)가 누구입니까?" 사도린도 의외의 질문인 듯 멈칫 했다. 그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진중한 기색으로 상대를 직시했다. "알고자 하는 이유는?" 초사영이 곧바로 대답을 못하자 그는 다시 물었다. "왜, 말해줄 수 없는 건가?"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태까지도 그랬듯 두 사람은 이 시점에서도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초사영은 별로 내키지 않는 투로 덧붙였다. "그들이 저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네를?" 사도린은 놀라 묻더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럴 리가 없네. 그들이 다른 사람도 아닌 파천황주를 죽이려고 하다니, 그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네. 아마 자네가 뭔가 잘못 알고 있을 게야." 초사영은 말없이 품 속에서 하나의 동패를 꺼내 보였다. "이게 무언가?" 무심코 동패를 받아든 사도린은 거기에 쓰인 글자를 보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휩떴다. "아니, 이것은?" <동살령(銅殺令) 삼호(三虎)> 그것은 틀림없이 살인각 인물의 신분을 나타내는 표기였다.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정녕 이상한 일이군. 그들이 자네를 노리다니." "이 패의 주인은 한 통의 서신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제가 아예 표적으로 지칭되어 있더군요." "그들은 자네를 죽일 수 없을 텐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들이 저를 죽일 수 없다니, 그럴 만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사도린은 정색을 했다.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그들이 자네를 못 건드리듯이 자네도 마찬가지이네. 각주를 죽이고자 했다면 포기하게." 초사영은 더욱 의아해졌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사도린은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아직 모르고 있는 모양이네만, 살인각은 사실 흑풍사에 속해 있는 조직이네." 초사영은 크게 놀랐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러면서 그들이 어찌 저를?" "글쎄, 나도 그 점이 납득이 안 되네." 실상 그것은 사도린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이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청부자가 있었다고는 하나 소속이 같으면서 어떻게 전위대장을 척살하려 들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질문의 방향을 약간 틀었다. "살인각주의 서열은 본 단에서 어느 정도입니까?" "십 위네. 자네와 비슷할 걸세." 사도린은 자못 심각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까도 말했지만 다른 마음은 품지 말게. 그에게 손을 대서는 안 되네. 살인각주도 본 단의 율법에


의해 문초를 받게 되겠지만 그에 대한 복수도 용납이 안될 걸세." 초사영은 같은 질문을 또 던졌다. "살인각주는 누구입니까?" "흠! 이렇게 되면 얘기가 원점으로 되돌아온 셈이군." 사도린은 나직이 탄식을 발하고는 입을 열었다. "나도 그에 대해서는 잘 모르네. 단지 각주가 여인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네." "네? 방금...... 여인이라고 하셨습니까?" 초사영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그 모습을 본 사도린은 고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네. 놀랍겠지만 공포를 몰고 다니며 천하를 휘젓는 살인각주는 여인이라네." "으음........" 초사영은 침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생각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이 순간에도 그의 심중에는 이런 말이 오갔다. '살인각주라면 여인으로 취급하지 않아도 될 터!' 사도린은 그의 굳어진 표정에서 무엇을 읽어 냈는지 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 점을 명심하게. 자네가 살인각에 칼을 들이대면 나와의 관계도 달라진다는 것을. 흑풍사는 오직 율법에 의해 움직일 뿐 개인적인 교분은 일체 무시하니까." 초사영은 그 말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사도린은 그의 침묵에 고개를 내젓고는 화제를 돌렸다. "이제 내가 묻겠네. 자네는 두 가지 정보를 얻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고 했지.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 초사영은 흐릿한 미소를 떠올렸다.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니 관두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아무래도 사선배와 저의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무슨 뜻인가?" "흑풍사의 율법에 너무 얽매이지 마시라는 얘기입니다. 사선배와 저는 처음 만났을 때 약속했던 그 인연으로 계속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앞으로의 일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나, 운명적으로 생사를 같이 하게 될 테니까요." 이번에는 사도린이 침묵했다. 초사영은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그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사도린도 말리지 않았다. "그러게. 피곤할 텐데 거처로 가 쉬게나." 그렇게 하여 밖으로 나가는 초사영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그는 어지러운 듯 이마를 짚었다. ― 운명적으로 함께........ 그 한 마디가 그의 뇌리를 맴돌았던 것이다. '운명이라!' 그러나 사도린은 특유의 냉철함을 회복하고는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초사영, 너는 아직 멀었다. 이 사도린이 어떤 인간인지를 모르다니. 나란 인간은 설사 수족처럼 아끼던 수하라도 일단 손실을 가져오면 용서하지 않는다." 그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것은 그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손익계산을 따지지 않는 여식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 수 년동안 잠자리에 들기 전에 딸의 거처를 돌아보는 일은 그에게 있어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특히 더 딸을 찾아보아야만 할 것 같았다. 지난날에는 야망으로 마음을 소모하느라 딸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지 못 했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가는 탓인지 근래에 들어서는 딸이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는 그였다. '뭐라 책할 수는 없겠지만........' 사도린은 요조숙녀로 변해 자신을 안심시키던 딸이 초사영에게 집착을 보인 그 웃지 못할 광경을


떠올렸고,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바보 같은 녀석!" [5] "함께 잠을 자겠다니.......?" 초사영은 어이가 없어 눈을 크게 떴다. 소소는 얼굴을 은은히 붉히면서도 대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이곳이 무서워요.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인상이 험악하고. 혼자서는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아요." "걱정 마시오. 이곳은 안심하고 자도 될 만한 장소이니 어서 침소로 돌아가시오." "싫어요! 도적 같이 생긴 자들이 떼거지로 몰려 있는 데서 어떻게 혼자 잠을 자요?" "훗!" 초사영이 웃자 소소는 눈을 치켜 떴다. "당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아요. 당신도 도적인데 뭘 모르고 그런다, 이거죠?" 초사영은 뜨끔해서 아무 말도 못했다. 천하에 두려울 것이라곤 없는 그도 소소의 직선적인 화법만은 두려웠다. 워낙 대책이 서지를 않기 때문이다. 그는 바삐 둘러댔다. "그게 아니오. 남들의 이목이 신경 쓰여서 그렇지. 젊은 남녀가 한 방에서 잠을 자면 그들이 어찌 여기겠소? 당연히 불순한 쪽으로 상상을 하게 될 게요." 소소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 생각하든 아무 상관없어요. 더 볼일도 없으니까. 나는 당신을 믿어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 말릴 겨를도 없이 얼른 초사영의 침상 위로 올라왔다. "맙소사! 또 억지를........" "쳇! 너무 몰아 세우지 말아요. 그냥 옆에서 조용히 잠만 자겠다는 데 뭘 그리 인색하게 굴어요?" 소소는 앉아 있는 그의 옆에 드러눕더니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초사영은 짐짓 음침한 음성을 냈다. "당신이 믿는다는 내가 엉뚱한 마음이라도 먹으면?" 그것은 그녀를 내쫓기 위한 위협이었다. 하지만 혹을 떼려던 그는 오히려 혹 하나를 더 붙이게 되고 말았다. 소소는 벌떡 일어나더니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래도 할 수 없죠." 초사영은 기가 막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 사람이 어찌 이렇게 수시로 변할 수가 있소? 언제는 그보다 훨씬 작은 일로도 나를 죽일 듯 핍박하더니." "그땐 그때구요. 사정이 달라졌잖아요?" "다르긴 뭐가 다르다는 게요?" 소소는 그를 향해 찢어져라 눈을 흘겼다. "그걸 정말 몰라서 물어요? 그때 이미 볼 장 다 봤는데 이제 와서 내가 무얼 가리겠어요?" 초사영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쯧! 도무지 당해낼 재간이 없군.' 아무 말 하지 않는 그에게 소소는 계속 이죽거렸다. "당신은 나빠요. 내 순결을 망가뜨리고도 끝내 나 몰라라 하겠다는 모양인데, 그래선 안 되는 거예요. 아무리 이곳에 연인을 숨겨 두었었다지만........" 초사영이 그녀의 말을 중도에서 가로챘다. "이유는 그거였소?" "그거라뇨?" "질투."


"에그머니나!" 소소는 심중을 들키자 비로소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나 기왕 내친 김이라 생각했는지 부인하지는 않았다. "맞아요. 그녀를 떠올리면 난 가슴에서 불이 붙는 것 같아요. 그녀는 정말 나를 기분 나쁘게 해요." "사낭자가 당신에게 어쨌게?" "흥! 꼭 어째야지만 밉나요? 무엇보다 훌륭한 신분을 가진데다가 나보다 훨씬 더 예쁘고........" 소소는 말을 더 이어가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이때에 처음으로 초사영은 그녀의 얼굴에서 처연한 표정을 읽었다. "소소." "네?" "당신도 그녀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예쁘오. 또한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매력이 있소. 결코 신분 따위로 비교될 수 없는." 소소는 굳어졌던 얼굴을 활짝 폈다. "정말?" "음." 초사영은 어깨에 와 기대는 그녀를 피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늘 웃는다고 약속하시오, 전처럼." "호호...... 물론이요. 참, 나 여기서 자도 되는 거죠?" "마음대로 하시오. 후후후........"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웠다. "팔 좀 이리 내밀어 봐요." "왜?" "왜긴요? 베고 자려고 그러지." "이거나 베시오." 초사영은 자신의 베개를 소소에게 내 주었다. 하지만 소소는 베개를 도로 밀더니 그의 팔을 끌어 당겼다. "난 베게보다 이게 더 좋아." "참 내!" 초사영은 쓰게 웃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녀의 어이없는 언행은 그로 하여금 이렇게 읊조리게 만들었기에. '가엾은........' 소소는 그의 팔을 베개 삼아 곧 잠이 들었다. 그것은 그녀가 정말로 초사영에게 경계심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도 분명 정상적인 기능을 가진 남자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는 여하한 욕구도 일지 않았을 뿐더러 그녀의 말마따나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이 전부였다. 소소의 잠자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초사영은 중얼거렸다. '사낭자를 만나러 가려던 계획은 미루어야겠군.' 그는 사화연으로부터 저녁식사가 끝난 직후, 긴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 밤에 거처로 와 달라는 제의를 받았던 것이다. 초사영은 차라리 잘 되었지 싶었다. 야심한 시각에 여인의 침소를 찾아가려니 아무래도 심사가 편치 않던 그였다. 게다가 자신을 믿고 곁에서 잠이 든 여인을 두고 다른 여인을 만나러 가는 일은 스스로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초사영은 손을 들어 불을 껐다. 그에 따라 방 안은 어둠 속으로 침몰되었다.


여인. 일신에 백의를 걸친 한 여인이 창 밖에 서 있었다. 그녀는 묘한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질투가 어려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안도의 빛도 떠오르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불꺼진 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전까지는 화원 옆에 서서 창을 통해 한 여인이 사내의 팔을 베개 삼아 자는 광경을 몰래 훔쳐보기도 했다. 그녀는 풍령애의 소주(少主)인 사화연이었다. 사화연은 처음 낯선 여인이 초사영에게 몸을 기대었을 때 질투에 사로잡혀 침실로 당장 뛰어 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를 억누르는데는 앞으로 평생을 살아가면서 발휘해야 할 인내력을 총동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간신히 질투를 잠재우자 그 다음으로 밀려든 감정은 불길 같은 분노였다. 그것도 초사영에 대한 배신감으로 인해 활활 타오르다가 종내에는 자신을 향한 분노로까지 이어졌다.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쏟고 있는 사내를 남몰래 사모해 왔으니 자존심이 상해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사실 사화연은 초사영을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이 끌렸었다. 그래서 공연한 시비도 걸었었는데, 자신이 그에게 꺾이게 되자 관심은 애정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물론 그녀도 당시에는 그 감정을 부인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고, 그렇게 하는 사이에 그는 기약도 없이 떠나 버렸다. 그때부터 사화연은 날마다 그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건만 그는 일 년이 지나도록 소식조차 전해오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그녀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벗어 던지려 했으나 그도 실패했다. 때로 죽이고 싶도록 야속하고 밉다가도 그의 얼굴만 떠올리면 그리움이 밀려드니 말이다. 그 즈음에 그녀는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변해갔다. 그토록 좋아하던 말타기가 시들해졌는가 하면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치마가 자꾸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런 자신의 변화가 싫어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려고도 했으나 그때의 그녀는 벌써 헤어나지 못할 만큼 마음이 초사영이라는 사내에게 기울어 있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사화연은 자문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 문제에 대한 답이 있었다면 이처럼 청승을 떨고 있지도 않았을 테니까. 불현듯 등뒤로부터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얘야, 무슨 근심이라도 있느냐?" "아!" 사화연은 화들짝 놀라 돌아섰다. '아버님........' 그녀의 눈에 부친인 사도린의 모습이 들어왔다. 사도린은 그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그가 이곳에 나온 지는 꽤 되었다. 다만 그의 여식이 상념에 잠겨 부친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사화연은 그에게 심중을 들켰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목덜미가 달빛 아래서도 붉은 기운을 보였다. "언제...... 나오셨어요?" 기어 들어가는 듯한 딸의 음성에 사도린은 가슴이 무척 쓰렸다. 하지만 그는 내색치 않고 미소를 지으며 다가섰다. "날이 제법 춥구나. 어서 들어가자." 사화연은 말없이 부친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부녀(父女)가 당도한 곳은 사화연의 침실이었다. 두 사람은 차례로 침상 옆에 놓인 간소한 탁자에 가 앉았다. 사도린이 입을 열었다. "말해 봐라. 무엇이 너를 그다지도 힘들게 하느냐? 이 아비는 너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해줄 수가 있다. 근심거리가 있으면 다 털어놓아라." 그는 매우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있었다. 애초에는 그럴 생각이 아니었으나 초사영과 소소와 한 방에 든 것을 보고 딸이 괴로워하자 그 나름의 방식을 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 자리에서 사화연이 그들 두 남녀를 죽여 달라고 청하면 그는 즉각적으로 그 일을 시행하려 들었으리라. 그러나 그녀의 방식은 부친과는 엄연히 달랐다. 아무리 고통스러워해도 사화연은 사랑을 하는 장본인이었으므로. 그녀는 고개를 가만히 들며 입술을 떼었다. "아버님, 소녀 내일 출행(出行) 할까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사도린은 의외라는 듯 눈을 치켜 떴다. "갑자기 어디를 가겠다는 말이냐?" "네, 대고모(大姑母)님을 찾아 뵈올까 해요." "왜?" "내일이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지 칠 년 째 주기로........" 그 말에 사도린의 안색은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밤이 깊었으니 그 문제는 내일 얘기하도록 하자." 제 15 장 수뇌회의(首腦會議) [1] 비류장(飛流壯). 개봉(改封)의 교외(郊外)에 위치한 장원이다. 인근 사람들이 이 장원에 보내는 시선은 묘했다. 우선 장주가 누구인지도 모르며 장원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행색도 평범하지 않았다. 대부분 병장기를 소지하고 있거나 체격이 건장하고 날렵한 자들뿐이어서 무림 고수들로 예상되었는데, 개중 여자는 아주 드물었다. 이렇다 보니 분위기까지 삼엄해서 연고자 외에는 몸을 사리느라 누구도 장원 근처에 얼씬거리려 들지 않았다. 소소도 장원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이상한 기류를 감지하고 있었다. 특히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유별나 보여 그녀는 나름대로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 자들은 전부 똑같은 모습이었다. 하나의 단체에 속해 있는 듯 한결같이 일신에 검은 피풍의를 걸친 채 검은 죽립을 깊숙이 눌러써서 안면을 가리고 있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장원에 들기는커녕 그들을 보자마자 꽁무니를 뺐을 것이나 현재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어떤 인물들이고, 무엇을 하는 자들이건 초사영과 동류(同類)라는 점이 일단은 그녀로 하여금 이곳에 발을 붙일 수 있게 했다. 그녀도 눈치가 빨라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이 장원이야말로 강호상에서 파천황이 활동하는 기반이라는 것을. "후훗! 왔구나." "음, 사정이 있어 좀 늦었다." 소려곡은 대청의 계단 앞에서 초사영을 맞이했다.


수인사를 마친 그는 눈을 부릅떴다. 그것은 초사영의 뒤를 따라오는 여인에게로 시선이 향하던 순간의 일이었다. 그의 입에서는 이런 부르짖음이 튀어 나왔다. "혈옥.......!" 소려곡으로서는 뜻하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갑자기 사라져 버렸던 그녀가 어떻게 초사영을 만나 합류할 수 있었는지. "훗! 누가 혈옥인데?" 초사영의 실소에 그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혈옥이 아니라고?' 소려곡은 눈앞의 여인을 새삼스레 뜯어보고는 그제서야 의혹을 거두었다. 그녀는 확실히 혈옥이 아니었다. 용모는 똑같았지만 느껴지는 분위기가 달랐던 것이다. 과거 혈옥은 매사에 냉소적이었으며 음풍처럼 칙칙하고 싸늘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틀렸다. 일면 당차 보이기는 했으나 긍정적 사고와 더불어 활달한 적극성이 엿보였다. 소려곡은 끝내 여인의 입가에서 요부점(妖婦點)을 발견해 내고는 괴상한 웃음을 흘렸다. "크크...... 혈옥도 저런 점이 하나쯤 찍혀 있었으면 성격이 나긋나긋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초사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누구냐? 저 낭자는." "빚쟁이." "또!" 소소는 눈을 하얗게 흘겼다. "후후후...... 차츰 알게 될 것이야." 초사영의 애매한 대답에서 소려곡은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왠지 변한 듯한 모습에서도 짚이는 바는 있었다. '흠, 누구나 때가 되면 짝을 찾게 마련인가?' 그는 실소하더니 들리지 않게 탄식을 발했다. '혈옥......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소려곡은 혈옥을 사랑했었다. 한 번도 본인 앞에서 밝힌 적은 없었지만 함께 지옥 훈련을 받던 시절에도, 그녀가 사라진 이후로도 그런 감정 때문에 무척 괴로웠던 그였다. 따라서 혈옥과 꼭 닮은 여인을 보게 되자 그의 가슴 한 귀퉁이에 숨겨 두었던 그리움 보따리는 그대로 풀려 나왔다. '보고 싶다........' 소려곡은 그답지 않게 멍하니 소소를 응시했다. '뭐야? 아까부터 재수 없게스리.' 소소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젠장! 얼굴이나 좀 잘생겼으면 또 몰라.' 그녀는 죽립 사이로 드러난 소려곡의 음침한 얼굴도 그렇지만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 눈빛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소는 성질이 나 뭐라 쏘아 부치고 싶었으나 초사영을 한 번 힐끗 돌아다보더니 억지로 눌러 참았다. '너, 오늘 운 좋았다! 내 예전 같았으면 불이 번쩍 나도록 뺨을 올려 붙였을 테지만 인심 썼다.' 이는 그녀의 생각일 뿐 현실 가능성은 없었다. 소려곡이 어디 뭇 여인에게 뺨이나 맞고 있을 사람인가? 초사영이 물었다. "형가는?" 소려곡은 심리상태가 그러한 탓인지 쓰게 내뱉었다. "여자를 만나러 갔다."


"여자?" "놈은 최근 한 여자를 알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그녀에게 푹 빠져 있는 것 같아." "설마?" 초사영은 믿기 어려운 듯 고개를 저었다. '철심(鐵心)을 지닌 형가가 여자에게 푹 빠지다니 그런 일도 일어날 수 있는가?' 하지만 그는 이의를 철회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하긴 나 같은 위인도.......!' 그는 부지 중 소소를 슬쩍 건네다 보기도 했다. '저 희한한 여인을 만나기 전에는 형가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도 나를 보면 내가 그에게 놀란 만큼이나 놀라겠지.' 초사영은 은근히 궁금해졌다. '어떤 여인일까? 그의 마음을 휘어잡은 그녀는.' 소려곡이 그의 표정을 읽었는지 말을 이어갔다. "나도 그 여인에 대해서는 잘 몰라. 임무를 시행하는 중에 만났다던데. 오늘도 데리고 올지 모르겠군." "흠, 한 번 보고 싶다." 초사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다른 친구들은 언제 도착하느냐? 그들에게도 이번 회합 건은 연락을 해 두었겠지?" "사정이 좀 달라졌어." "달라지다니?" 소려곡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본부에서 전갈이 왔다. 수뇌회의를 개최한다고." "음, 그랬었군." 초사영은 미간을 모았다. 본부의 수뇌회의라면 파천황의 황주인 그 자신도 참가해야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언제지?" "내일." "시간이 없군." 초사영은 혼잣말처럼 읊조리며 소소를 돌아다보았다. 그녀의 재빠른 눈치는 이 순간에도 적용되었다. "나도 갈래요." 소소는 말과 함께 냉큼 그의 옆으로 가 달라붙었다. 제 삼자인 소려곡의 시선 따위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이, 그야말로 죽어도 떨어지지 않을 기세였다. 초사영은 미소를 떠올린 채 담담히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곳까지는 당신을 초대할 수가 없소." 소소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나는요?" "여기 있도록 하시오." 간단한 대답에 그녀는 매우 실망한 듯 말했다. "나를 보호해 준다던 약속은 어쩌고?" 초사영은 소려곡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네가 돌봐 주어야겠네." 소려곡은 미간을 구겼다. "왜 하필이면 나야?" "네가 적임자니까." "쓰헐!"


입으로는 툴툴거리고 있었지만 소려곡은 이미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그는 초사영에 대해서는 늘 그런 식이었다. 더구나 그가 데려온 여인이라면 보살펴 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하긴 혈옥과 닮아서인지 낯선 느낌은 안 드니까.' 소려곡은 고소를 지으며 초사영에게 물었다. "언제 떠날 거냐?" "당장 가지 않으면 제 시간에 도착하기 어려울 거야." "좋아, 다녀와서 보자구." 소려곡은 몸을 돌려 대전으로 향했다. "자! 낭자도 따라 오실까? 가겠다는 놈은 보내 줘야지." "그렇지만........" 미적거리는 소소를 돌아보며 그는 한 쪽 눈을 찡긋 했다. "걱정 마시구려, 잡아먹지는 않을 테니." 소려곡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이 어르신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외다. 면상이 초가 놈보다 좀 후져서 그렇지." "푸훗!" 결국 소소도 웃으며 그를 따랐다. 대전에 들어가기까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는 것만은 잊지 않았지만. [2] 초사영. 그는 소소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신형을 돌렸다. 밖으로 다시 나가기 위해서였다. 방금 장원에 들어 왔으나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길을 나서야 하는 것이다. 그가 빠른 걸음으로 막 대문에 이르렀을 때였다. 형가가 문을 밀며 들어서고 있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옆에 백의를 걸친 한 여인을 대동하고서였다. '흠! 저 여인이 소려곡이 말했던 그녀인가 보군.' 초사영은 그들 두 남녀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있는 모습에 절로 미소를 떠올렸다. 형가에게 여인이 생겼다는 사실은 의외였지만 기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모쪼록 두 사람의 관계가 끝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여인은 매우 아름다웠다. 가녀린 목덜미가 유난히 고왔고, 눈이 큰 편이어서 청순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 외에도 부드럽게 휘어진 눈썹이나 붉고 도톰한 입술 등 나무랄 데 없는 미색을 지닌 여인이었다. 형가는 초사영을 보고는 어색했던지 여인의 손을 슬쩍 놓았다. 그러더니 괜히 나오지도 않는 헛기침을 했다. "헛, 험! 왔군." "후후...... 보기 좋은데 뭘 그래? 죄라도 지은 것처럼." 초사영의 짓궂은 언사에 형가는 얼굴이 벌개졌다. "노, 놀리지 마라! 빌어먹을........" 곁에서 여인은 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애꿎은 앞 고름만 만지작거렸다. 초사영은 어깨를 으쓱 했다. "이런, 누가 너를 놀린단 말이냐? 그보다 이 미인을 나에게 소개시켜 줘야지. 앞으로 자주 보게 될텐데." 형가는 그의 용인이 기뻤던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이쪽은 상관운봉(相官雲鳳)이고, 이쪽은 초사영........" 어찌 되었던 철심이라 불리 울 만큼 외곬수인 형가는 여인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도통 재주가 없었다. 소개라는 것도 그의 입을 빌게 되자 그저 밋밋하기만 했다. 그래도 그의 입장을 생각해 초사영은 정중히 포권 했다. "어서 오시오, 상관소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공자." 여인도 예를 갖추느라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는 수줍어하는데 비해 무척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형가의 여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기품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형가가 여인 하난 잘 골랐군.' 초사영은 흡족한 기분이 되어 미처 발견하지 못 했다. 고개를 숙인 상관운봉의 눈에 반짝 하고 스쳐 가는 야릇한 광채를. 그러고 그것은 이내 거짓말처럼 스러져 버렸다. 그는 형가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형가를 잘 부탁드리오. 물론 알아서 잘 하시겠지만." "무, 무슨 헛소리!" 형가는 펄쩍 뛰며 두 팔을 내저었다. "누구에게 누구를 부탁해야 하는데?" 초사영은 짐짓 혀를 끌끌 찼다. "쯧! 명색이 사내가 되어 가지고 아녀자처럼 낯빛이나 붉히는 주제에 자존심은. 아무렴 어떻느냐? 그게 그거지." 형가는 눈을 부릅떴다.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한다. 네 말마따나 사내인 내가 어찌 여인에게.......!" "후후...... 되지도 않게 권위 내세우지 마라. 벌써부터 너를 손아귀에 넣고 계신 미인께서 비웃으시실라." "이...... 이.......!" 두 사람의 격의 없는 농담은 웃음마당으로 이어졌다. 그런 연후, 초사영은 정색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잠시 실없는 농을 했소이다, 상관소저. 본 장원이 누추하기는 하나 소저의 벗이 될 만한 여인도 있으니 심심하지는 않을 게요. 소저의 방문은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바외다." 형가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벗이 될만한 여인? 그게 누군데?" "들어가 보면 알 게야." "그럼 너도?" "후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아!" 형가는 대뜸 초사영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았다. "축하한다, 사영! 진심으로." "피차 일반일세, 친구." "좋은 일이야. 아주........" 자신도 경험해 본즉 그렇다는 얘기일까? 형가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상관운봉을 향해 모종의 눈짓을 했다. 그녀는 그 눈짓의 의미를 알아차리고는 초사영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형가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입을 열었다. "좌우간 고맙다. 여러 가지로........" "되었다, 서로 인사치레는 관두기로 하자. 그보다 상관소저의 거처는 어디지?"


형가는 어색하게 미소를 떠올렸다. "이 근처 객점(客店)에........" 그 말은 곧 거취가 일정하지 않다는 얘기였다. "그래서야 안 되지. 당장 거처를 이리로 옮기도록 하게." "정말?" 형가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파천황이 흑풍사의 전위공격대라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일체의 개인적인 행동이 용납되지 않으며, 특히 사정(私情)에 빠지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였다. 하지만 초사영은 이를 굳이 염두에 두지 않았을 뿐더러 수하들에게도 종용한 바가 없다. 그렇게 자유를 주어도 그들이 별다른 문제를 일으킨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이외에도 초사영의 법(法)은 흑풍사의 법과 차이가 있었으나 수하들은 파천황주인 그의 법을 신봉하고 따랐다. 형가라고 해서 예외일 리가 없었다. 초사영에 대한 그의 믿음은 가히 절대적이었던 바, 작금에도 만사가 원하던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자 감격해마지 않았다. "젠장! 이제 고맙단 말도 못 하겠다. 황송해서." 초사영은 고개를 저었다. "형가, 너답지 않다. 우리 사이에 무슨." "사영........" 그를 응시하는 형가의 눈이 몹시도 흔들렸다. "어서 들어가 보아라. 미인께서 기다리실 게 아니냐?" "그래." 형가는 대답에 이어 신형을 돌렸다. 초사영은 만면에 미소를 담은 채 멀어져 가는 그의 뒷등을 지켜보았다. '사랑의 힘이란 정녕 위대할진저! 누가 지금의 형가를 보고 지난날의 냉혹했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까?' 그는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형가가 지닌 무감(無感)의 회색 눈동자에서 비로소 흐르게 된 따뜻한 빛을. '인간은 거개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때문에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감정을 향유할 권리가 있지. 이것은 강제로 막으려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차가워 보이는 사람일수록 내면에는 오히려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게 마련이니까.' 전에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이런 관념을 초사영은 감히 확신할 수 있었다. 아울러 그는 그 확신의 주체(主體)라 할 수 있는 한 존재를 떠올렸다. '소소........' [3] 오 월이다. 계절은 어느 덧 여름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산록이 푸르름을 더해 가는 오 월이 되자 무림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동안 일어난 일련의 혈풍이 되려 무색할 지경이었다. 그런 가운데 천궁지회는 오 월의 천궁지천궁인 아미파(峨嵋派)가 대권을 행사하여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불문(佛門)답지 않게 이상스러우리만큼 강경책을 고수했으며 이로 인한 여파는 무림 전역에 미치고 있었다. 한마디로 폭풍전야(暴風前夜)랄까? 무림의 이러한 침묵은 모든 무림인들을 일로 불안에 잠기게 했다. 심지어 어떤 이는 벌써부터 처절한 피내음을 연상하기도 했다. 운중산(雲中山).


말 그대로 사시사철 운무로 뒤덮여 있는 산이다. 그래도 봉우리만은 하늘을 찌를 듯 장쾌하게 뻗어 있어 사방으로 초여름의 싱그러움을 한껏 뿜어내고 있다. 아래쪽으로는 많은 계곡들을 두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골이 깊어 소위 절곡이라 불릴 만한 것들이었다. 광풍곡(狂風谷). 운중산의 숱한 절곡들 중 하나로 일 년 내내 짙은 안개가 깔려 있어 인근의 사람들까지도 접근을 꺼려하는 곳이다. 바람은 안개와 싸우기라도 하려는 듯 사납게 불어 제킨다. 그럴 때마다 안개는 주위로 흩어지며 품고 있었던 전각군(殿閣群)을 슬며시 내보이곤 한다. 천하의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으나 전각군을 이루고 있는 자들은 스스로를 일러 흑풍사라 한다. 세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그들이 십만대산의 한 절곡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흑풍사의 본 단으로 들어서는 길은 구절양장(九折羊腸)의 험준함으로 바람의 흐름마저도 막을 듯 했다. 가다가 급격히 좁아지는 계곡, 중간에서 뚝뚝 끊어지는 길, 수시로 바뀌는 지형 등으로 인해 근역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도 일단 이 길로 들어오면 빠져나갈 수가 없다. 출입이 자유로운 사람은 흑풍사의 핵심 인물들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집결하는 시기에는 이곳 광풍곡의 지형이 더욱 기괴하게 바뀐다. 이는 외부인들의 접근을 보다 철저하게 차단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흑풍사는 그것만으로는 모자란지 일일이 들어가려는 자들의 신분을 확인까지 했는데, 그 방법도 무척 복잡했다. 흑풍사의 인물들에게는 각기 고유의 비밀번호가 하나씩 있다. 그리고 이곳에 들어 올 때는 새로운 번호를 받게 된다. 즉 원래의 비밀 번호와 이곳에서 받은 번호를 합치면 길어진 그 번호가 신분을 확인하는 증명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종합적인 번호가 현장에서 하나의 철패에 새겨지고, 가슴에 이 철패를 달게 되어야 통과할 수 있었다. 이런 사항들로 미루어 천하의 어떤 인물이라도 흑풍사의 본 단에 침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 통과의례도 몇몇 사람에게만은 예외였다. 물론 앞서의 수뇌들로써 그들에게는 아무런 절차도 필요 없었다. 오늘은 그런 자들이 모이는 날이다. 때문에 은밀한 경비가 펼쳐진 가운데 그들은 한 곳에서 토의를 하고 있었다. 장방형의 석실 안이다. 중앙에는 긴 원탁이 놓여 있다. 원탁이 의미하는 바는 원칙적으로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만큼은 평등하다는 것이었다. 지위나 서열이 다르니 원칙과 실상의 차이는 현격했지만. 정면에는 상석(上席)으로 보이는 태사의 두 개가 따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태사의의 뒤로는 검은 색 휘장이 드리워진 가운데 흐릿하게 의자 하나가 또 보였다. 그 특별석들은 아직 모두 비어 있었다. 태사의 바로 아래에는 한 명의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눈썹이 붉어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는 위인이었는데 무엇을 생각하는지 줄곧 눈을 내리 감고 있었다.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흑포를 걸치고 있었으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가끔씩 태사의 쪽을 힐끔거렸다. 그들이 이른바 흑풍사의 수뇌들이었다. 인원은 열 명으로 하나같이 눈빛에서 강렬한 예기가 뻗어 나와 금방이라도 석실 전체가 쨍하는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갈 듯 했다. 그 흑포인들 중에는 초사영도 끼어 있었다. 그도 파천황주의 자격으로써 배석하고 있는 것이었다. 초사영이 이 자리에 앉게 된 것은 이번이 두번째였다. 하지만 분위기에 적응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특히 최초로 이들을 대했을 때의 놀라움은 대단했었다. 그 구성원들은 한 마디로 그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어떻게 포섭이 되었는지 모두 무림에서 사라진 지 오래인 전대의 거마(巨魔)나 효웅(梟雄)들이었던 것이다. 초사영은 새삼 그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예혈각주. 쌍혈각 중 예혈각을 관장하는 그는 정면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세인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는 살문(殺門)의 문주로 명호는 살인천작(殺人天爵) 기사기(機舍己)였다. 살문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름이다. 살인각이 등장하기 전까지 전 중원을 공포에 떨게 했던 전대미문의 살인귀들이 모여 있는 집단이었으므로. 그런데 소리도 없이 사라진 그 문파의 주인이 여기에서 예혈각주로 화해 있는 것이었다. 흑혈각주. 과거 한 때 혈문(血門)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전 무림을 피바다로 만들겠노라며 공언하던 자들이 있었다. 그들도 문주의 실종으로 무림에서 자취를 감추긴 했지만. 혈존(血尊) 곡풍비(曲風匕)가 그 당시 혈문의 문주로 무림에 죽음의 의미를 깨우쳐 주었다는 위인이다. 일명 고금제일혈(古今第一血)로도 불리는 그가 흑혈각주였다. 그의 산하인 사전(四殿)만 해도 면모가 그리 녹녹치 않다. 우선 초혼전주를 들자면, 천 년 밀교(密敎)의 맥을 이은 자로 위명이 쟁쟁했던 음혼군(隱魂君) 목위영(木委榮)이었다. 항간에는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버젓이 살아 밀교의 재건을 꿈꾸고 있었다. 흑풍사의 일각이자 그로서는 음지(陰地)인 초혼전에서 비상할 날개를 다듬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살수전주는 천살마희(天殺魔姬)라는 인물로 흑풍사 내의 수뇌급 인사 중에서는 유일무이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천살마희는 저 유명한 혈미인(血美人)이 남긴 고금 제일 무녀(武女)의 아성에 도전하려는 당찬 여마(女魔)이다. 세번째로 혈궁전주는 적멸(寂滅)을 부르짖는 자였다. 자신의 앞에서는 살아있는 모든 생물과, 그들이 존재함으로서 이루어지는 시간 개념도 단지 죽어야 할 폐기물에 불과하단다. 이렇다 보니 별호도 명왕대제(冥王大帝)다. 과거 적멸궁(寂滅宮)의 궁주였던 그는 실제로 천하를 적멸의 시간 속에 잠기게 만든 이력이 있는 희대의 거마였다. 마지막으로 악마전주를 논하자면 악마의 저주와도 같았던 하나의 전설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들 악마의 무리는 어둠으로부터 솟아 대지를 모조리 집어삼키기 위해 중원에 왔다. 이를 가리켜 무림인들은 핏빛 삼지창(三枝槍)의 신화라고 하는데 주인공인 악마천자(惡魔天子)가 바로 악마전주이다. 그밖에 칠십이로 암흑마군주. 앞에서 충분한 언급이 있었듯 이 직위는 풍령패도 사도린이 맡고 있다. 그도 이 자리에 참석해 있었다. 십육은밀사단주도 보인다. 죽련(竹聯)의 장(章)이라 하여 대나무는 십육은밀사단의 병기이자 증표이다. 공포스러운 죽음의 잔재들과 함께 하는. 그들은 혈명단(血名單)의 맹세 하에 철저한 암중 활동을 유지하면서도 죽혈천하(竹血天下)를 이루려 하고 있다. 그들의 수뇌는 죽혈자(竹血子)라는 인물로 평생에 걸쳐 하나의 신조만을 고수해온 자다. 거슬리는 자는 죽인다는 그의 철칙은 십육은밀사단의 불문율이 되어 있었다. 초사영은 그들을 통해 이런 결론을 내린 바 있다. '흑풍사가 당금 삼각무림의 일 각을 당당히 차지하게 된 것은 절대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왜소하다고 여기는 한 인간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壁)을 대했을 때


느끼는 절망감이나 두려움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말이라면 맞았다. 아무튼 이 순간에 최종적으로 초사영의 눈길을 잡아 끈 인물은 지금까지도 상석의 아래에 서 있는 노인이었다. 그 자는 시종일관 눈을 감고 있어 흉중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도무지 짐작할 길이 없었다. 특징인 붉은 눈썹 밑에는 잔주름이 잘게 접혀 있어 이 또한 두드러져 보인다. '대두혈박(大頭血搏) 예노(曳老)........' 초사영은 침음하듯 그의 이름을 읊조려 본다. 대두혈박은 당대의 지략가다. 그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는지에 관해서는 천하의 누구도 알지 못 한다는 게 정설이다. 단, 거기서 나오는 지략이 인간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사실만은 모르는 이가 없다. 죽음이라는 의미를 물으면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게 답해줄 수 있으리라는 인물이 바로 그였다. 대두혈박의 뇌리에는 유부계(幽府界)의 책략이 담겨 있다. 죽이기 위해 속이고, 모함하고, 타락시키고, 고통에 몸부림치게 만드는 등 온갖 재주를 다 가진 자이다. 그는 사파 무림에서도 주요 경계 대상이었지만 정파 무림인들에게는 존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늘상 극도의 불안과 긴장을 종용해 온 터였다. 흑풍사가 당금에 이르러 공포로 대변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러한 대두혈박 예노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초사영. 그는 대두혈박에게서 눈길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의 눈이 이제까지와는 틀린 색채를 띈 채 한 사람을 응시했다. '살수전주!' 그가 주변 인물들의 눈을 피해 탐색하듯 주의 깊게 바라보는 자는 살수전의 전주인 천살마희였다. '하지만 아니다.' 초사영은 천살마희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가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저 자는 대리 인물이다. 천살마희는 여기 오지 않았다.' 흑풍사를 핵심을 이루고 있는 수뇌급 인물들은 저마다 무림에서 나름대로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철저한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르자면 무림 표면과 그 이면에서 전개해 가는 활동 내역이 양지와 음지처럼 극명하게 다르다는 얘기다. 거개가 광명천하에서 드높은 명망을 얻고 있어 한 자리에 동시에 모이는 일이란 그들로서도 그리 쉽지 않은 노릇이다. 그런즉 간혹 세인들의 이목을 의식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직접 오지 않고 대리인을 참석시키곤 한다. '오늘 회의는 상당히 중요한 것이거늘, 오지 못 했다면 필경 이를 상회할 만한 무엇이 있었다는 뜻이리라.' 초사영은 그 선에서 더 구체적인 추리까지는 할 수 없었으나 진작부터 천살마희를 향해 살의(殺意)를 품고 있었다. 모종의 사건을 두고 그는 확증을 거머쥐지 못 했을 뿐, 심증만은 단단히 굳혀 놓고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런 심경은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그는 천살마희의 대리인에게 두었던 시선을 자연스럽게 거두었다. 때마침 두 개의 상석에 흑포인 둘이 자리하고 앉았다. 초사영은 그 두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흑부주와 사부주.' 그러나 그의 신경은 곧 나타나 그들 배후의 최고 상석을 메우게 될 흑풍사의 사주(邪主)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초사영은 기대가 크다 보니 가벼운 흥분마저 이는 것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번 회의 때에는 사주가 사정이 생겼다며 불참하는 바람에 그로서는 이번이 첫 대면이었다. [4] '사주는 어떤 위인일까? 흑풍사의 인물들도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에 대해 언급하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초사영은 내심 중얼거리면서도 눈길만은 흐트리지 않고 검은 색 휘장으로 감추어진 태사의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휘장 뒤에는 한순간 검은 그림자가 환상인양 버티고 앉아 있었다. '이럴 수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와서 앉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이렇듯 황당한 일이 정말로 가능한 것인가?' 초사영은 너무도 기가 막힌 나머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의 귀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자! 회의를 시작하겠소." 대두혈박 예노였다. 상석의 사주나 두 부주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들은 듣고 나서 결정을 내리면 되는 존재들인 것이다. 대두혈박은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의 안건을 말하기 위해 그동안에 있은 상황부터 간단히 요약해 보겠소." 좌중의 인물들은 조용한 가운데 듣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본 흑풍사는 오랜 기간에 걸쳐 두 개의 파천황을 길러냈소. 그 이유는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듯 정식으로 무림에 출도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고자 해서였소." 대두혈박은 시종 같은 어조를 유지해 갔다. "예정대로 광야막에서 거두어진 자들은 만박가를 쳤고, 다른 장소에서 길러진 파천황의 본대(本隊)는 같은 시각에 천궁비영의 본단으로 짐작되는 곳을 쳤소. 하지만 작전에 비해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소." 그는 초사영 쪽을 힐끗 돌아보더니 계속 말했다. "만박가를 친 파천황은 그래도 낫소. 뒤늦게 소식을 알고 몰려든 천궁지회의 무사들을 저지시켜 파천황의 본대가 천궁비영을 칠 시간을 벌어 주었소. 만박가의 가주인 만박천심을 놓쳤다는 점만 제외하면 인정할 만한 공로외다." 초사영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실패를 인정한다는 뜻을 표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일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는 그로서는 그 말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는 적당히 각본을 짜서 읊고 있는 대두혈박을 보자 가슴에서 열화 같은 분노가 일었다. '내 지금은 참는다만 언젠가는!' 초사영이 노기를 삭이느라 눈을 내리깔고 있는 사이에도 대두혈박은 좌중을 향해 침착한 음성을 이어갔다. "천궁비영을 쳤던 파천황은 아주 형편없었소. 본대라는 명칭이 무색하리만큼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했소. 그들을 통해 이루려던 우리의 계획 자체가 모조리 시행착오로 돌아가 버렸다는 말이외다."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덧붙였다. "일이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의 책임만은 아니오. 무엇보다 우리의 정보망이 미비했던 탓이외다. 천궁비영의 본단이라 여기고 그들을 파견시킨 곳은 허위로 꾸며 놓은 일개 지단이었으니까. 덕분에 파천황주가 바뀌기는 했소만." 이런 평가 끝에 대두혈박은 결론을 이끌어 냈다. "아무튼 그 결과가 작금에야 나타나고 있소. 천궁비영이 그 일을 기화로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한 것이오."


"으음........" 좌중에는 답답한 침음성이 감돌았다. 누구라고 따로 지목할 것도 없이 그들은 천궁비영에 관해서라면 다 같이 심적인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그들 속에 끼어 있는 초사영도 약간은 놀랐다. 하지만 그가 놀라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흑풍사의 정보망이 미비하다고 하더니 그렇지도 않군.' 이는 초사영이 천궁비영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는 뜻으로도 해석되는 묘한 중얼거림이었다. 그의 입가에 매달린 미소도 실내의 분위기와는 사뭇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 상태로 그는 이어지는 대두혈박의 말을 들었다. "그들의 활동 재개에 따른 대안(對案)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소. 하나는 현 조직을 개편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대두혈박은 말을 멈추고 상석을 올려다보았다. 흑부와 사부를 관장하는 두 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전에 상의를 거쳤는지 두 사람의 표정은 담담했다. 여기에 힘입어 대두혈박은 시선을 좌중에게로 돌렸다. "조직 개편이란 필요성은 명확하나 현재의 상황에서는 지난한 일이오. 이후로도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즉, 그렇게 되면 또다시 개편을 감행해야 될 테니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는 볼 수가 없소." 누군가 물었다. "그럼 나머지 방안은 무엇이오?" 대두혈박은 힘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철련주(鐵聯主)의 자리를 획득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반드시 취해야 할 최선의 방안이외다." 이는 일종의 폭탄선언이나 진배없었다. 좌중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 배에 타고 있는 그들도 거기까지는 감히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말마따나 흑풍사에서 철련의 련주위를 얻게 된다면 조직의 개편 따위는 더 이상 논할 필요도 없었다. 철련의 막강한 힘을 흡수함으로써 천궁비영의 정보조직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물론 그 이상의 일도 추진해 갈 수 있을 터이므로. 대두혈박의 음성은 흥분하여 다소 떨려 나왔다. "솔직히 그렇게만 되면 본 흑풍사가 천하를 장악하는 것은 시간 문제외다. 안 그렇소?" 패기(覇氣)에 찬 그의 말은 금세 좌중에 영향을 끼쳤다. 그들의 얼굴에도 서서히 기대감과 희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초사영만이 그들과 생각이 틀렸다. '음! 정녕 무서운 일이다. 만일 이들이 원하는 대로 되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절대의 거력(巨力)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대두혈박은 말을 맺었다. "금후로 우리는 철련 쪽에 온 신경을 기울여야 하오. 아니, 그보다 먼저 그쪽 동정을 살핀 후 차차 세부 계획을 발표할 것이니 각자 맡은 조직을 재점검하도록 하시오. 이것이 오늘 논제의 최종적인 결론이외다." 그는 좌중을 한 번 스윽 둘러보았다. "이상으로 본 회합을 마치겠소. 각자 하산하는 대로 임무에 충실을 기해 주시기 바라오." 좌중의 인물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두혈박의 일방적인 진행과 보고의 형식으로 회의는 끝났고, 나머지 인물들은 어떤 말도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정해진 바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얼마 후. 실내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두혈박도, 흑부주나 사부주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초사영은 실내에서 나서자마자 한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흠! 드디어 본 사의 위대한 패업이 달성되려나 봅니다." 그는 무척이나 기대가 담긴 어조로 첫 마디를 끊었다. 파천황주라는 직위는 흑풍사의 핵심 수뇌들 중에서는 최하위였다. 따라서 당연히 공대였으며 상대는 십육 은밀사단주였다. "그렇네. 흐흐.......!" 은밀사단주는 원대한 야망의 실현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여겨서인지 눈에서 기이한 광채를 흘렸다. 어떻든 말문이 트이자 초사영은 신참답게 쑥맥처럼 물었다.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살인각은 본 사의 서열 십 위권 내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은밀사단주 죽혈자가 그를 힐끗 보더니 반문했다. "그건 왜 묻는가?" "아니, 오늘 회합에 살인각주가 참석하지 않은 것이 이상해서일 뿐입니다. 저는 무림에서의 활동상황으로 보아 그만한 위치라면 의당 수뇌회의에서 만나게 되리라고........" 죽혈자는 정색을 했다. "자네, 암흑마군주에게서 못 들었나? 자네를 천거했으니 그 정도는 알려 주었으리라 생각되는데." 뭔가 탐색을 하는 듯한 그의 눈길을 초사영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얼굴을 은은히 붉히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풍령패도 어르신께서는 본 사에 관한 한 일체 얘기하기를 꺼려하시는지라...... 스스로 알아 가면 된다고........"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 원래 그것이 본 사의 규정이니." 죽혈자는 수긍하더니 간단히 말했다. "살인각주는 참석을 했었다." "그럼?" 죽혈자는 귀찮다는 듯 덧붙였다. "살수전주가 그다. 사내에서는 살인각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고 살수전이라 부른다." "아!" 초사영은 탄성을 발하면서도 내심으론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 짐작이 맞았군.' 그는 돌아서려는 죽혈자에게 물었다. "아까 보았던 살수전주는 천살마희가 아닌 것 같던데요?" "그건 상관없다. 수뇌들 중 누구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면 대리인을 참석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회의 내용은 차후에 알게 되는 겁니까?" 죽혈자는 마침내 미간을 구겼다. "살수전은 사주의 친위대다. 직속 수하들인 셈이니 모르긴 몰라도 회의 내용은 사전에 미리 알고 있을 것이다." "아! 그렇겠군요." 초사영은 그 말에 이어 황송한 듯 허리를 깊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번거롭게 여러 가지를 여쭈어서." "되었다. 내 대놓고 물으니 이번에는 할 수 없이 대답해 주었다만 추후로는 사양하겠다." "알겠습니다." 죽혈자는 대화가 끝나자 그 흔한 인사치레도 생략하고 찬바람을 일으키며 자리를 떠 버렸다. 덕분에 혼자 남게 된 초사영은 정황을 정리해 보았다. '살수전, 아니 살인각은 무림에 알려졌듯 단순한 살인청부 집단이 아니다. 아마도 그들은 사주의 명령 없이 자체적으로 청부를 받거나 그것을 해결하지는 못 하리라.'


그의 추리는 커다란 의문에 봉착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나를 죽이려 했단 말인가? 기껏 거두어 놓고 사주가 나를 왜?' 그 의문에는 답이 없었다. 철저한 점조직을 이루고 있는 흑풍사 내에서 그가 사주의 의도를 어찌 안단 말인가? '음, 누구에게 달리 물어볼 수도 없고.' 초사영은 답답한 나머지 걸음을 옮기다 발끝에 걸리는 돌멩이를 툭 걷어찼다. 제 16 장 친구(親舊)와 연인(戀人) [1] 곡추(曲秋). 그리 높지 않은 산과 들을 고루 가지고 있는 곡추는 경관이 수려하지는 않아도 항시 깨끗한 곳이었다. 외곽을 흐르는 샛강도 상류에서 하류까지가 모두 투명했다. 그래서인지 곡추에 사는 아이들의 모습은 맑은 심성만큼이나 천진스럽다. 그들의 노는 양을 보고 있노라면 흐뭇한 미소가 절로 머금어진다. 그들과 함께 오후에 보게 되는 샛강의 수면은 비늘을 반짝이는 채색사(彩色絲) 마냥 따사롭기 그지없다. "야! 성공이다." "하하하.......!" 아이들은 좋아라 손뼉을 쳐 댄다. "자, 네 차례야." "알았어! 이번엔 잘해 보일 테야." 아이들의 찰랑이는 어조 속에는 작은 기쁨이 넘쳐흐른다. 그들이 하고 있는 놀이는 두꺼비집 짓기였다. 손을 흙더미 속으로 쑤욱 집어넣고 다지듯 콩콩 두드리는 흔한 놀이를 하면서도 그들은 마냥 즐거워한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쯧! 흙을 좀더 높이 쌓아야 새 집이 지어지지. 아까처럼 또 와르르 무너지면 어쩌려고?" "아무래도 그래야 되겠지? 좋아." 강변의 흙은 모래에 가까워서 아이들이 가지고 놀기에 좋았다. 그 때문에 형성된 그들의 세계에는 나름대로의 진지함과 더불어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보기 힘든 함박웃음이 있었다. 따라서 아이들의 놀이는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순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는데, 한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훤칠한 키에 용모가 빼어난 한 청년이 아까부터 안면을 굳힌 채 아이들의 놀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초사영이었다. 그는 샛강의 바위 위에 걸터앉아 한 아이에게 계속 눈길을 모으고 있었다.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다. '두꺼비집을 짓던 아이가 손으로 돌을 내리치자 기막히게도 돌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아무리 괴사가 많은 무림계라고는 하나 어린아이가 무슨 특별한 무공을 익혔겠는가? 그렇다고 타고난 신력(身力)이 엿보이지도 않건만 눈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초사영은 직접 목도했으면서도 작은 고사리 손이 그처럼 대단한 능력을 보였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이곳으로 오게 된 경위만 해도 그렇다. 그는 광풍곡에서 내려와 비류장으로 돌아가던 중 누군가의 발자국을 발견하게 되었다. 일부러 찾고자 했던 것은 아니고 지나치다 우연히 눈에 띄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무심코 시선을 떼려던 그는 한 가지 중대한 점을 발견해 내고는 흥미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발자국은 거기에서부터 이곳 강가에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분명 한 사람의 것이되 여러 차례 거듭된 변화를 보였다. 어느 때는 발자국이 맞나 싶을 만큼 아주 깊게, 어느 때는 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그래도 도중에 끊기거나 지워지지 않은 덕에 초사영은 발자국을 따라 오다 보니 여기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초사영은 아이들을 응시하며 기억 속에 접혀 있는 홍화와 그녀의 동생 백아를 떠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돌을 두 동강내던 아이로 인해 감상은 여지없이 깨졌고, 그는 섬뜩한 느낌이 들어 일신을 가늘게 떨어야 했다. 더구나 돌을 내리치던 순간의 아이는 손에서 푸른빛을 폭사시켰던 것도 같았다. 그는 아이가 깨뜨려서 내던져 버린 돌멩이를 주워 들었다. 그 돌은 역시 돌답게 단단하기 그지없어 무공을 지니지 않은 한 어른들도 맨 손으로는 도저히 부술 수가 없을 듯 했다. '흐음, 필시 무슨 내력이 있을 것이다.' 초사영은 아이에게 직접 물어보는 편이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하하...... 또 팍삭 주저앉았다." "에이, 나 안 할래!" "어? 야, 저기 봐. 누가 온다." 아이들은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이 다가오자 이상한지 놀이를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크게 경계를 두지는 않아 천진난만한 표정들만은 그대로였다. "너희들 재미있는 놀이를 하고 있구나?" "네, 아저씨도 같이 한 번 해 보실래요?" "후후...... 난 되었다. 어릴 적에 많이 해 보았거든." 초사영은 간단히 거절하고는 돌을 깨던 아이에게 말했다. "꼬마야, 아저씨랑 얘기 좀 할까?" 손에 흙을 바르고 있던 아이가 씩 웃었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음, 지나가는 나그네란다. 네 이름은 뭐지?" "아소(阿少)." "그래 아소, 아저씨가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서 그러는데 대답해 줄 수 있겠느냐?" "뭔데요?" "아까 보니까 너는 맨 손으로 돌을 깨는 재주를 가졌더구나. 그건 누구에게 배웠니?" 아이는 어깨를 으쓱 했다. "나도 몰라요." "몰라?" "네, 조금 전에 어떤 할아버지가 지나가시다가 내 손을 꼭 잡더니 걸리적거리는 돌은 깨버려야 하는 거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장난 삼아 한 번 해 본 것인데." 초사영은 눈을 반짝 빛냈다. '그랬었군. 그 할아버지라는 인물이 이 아이에게 무슨 수를 썼던 것일까?' 그는 물었다. "아소, 그 할아버지가 네게 어떻게 했더냐?"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삐죽였다. "몰라요. 그냥 그게 전부였어요. 씨이, 다시 해 보니까 안 되더라구요." "음, 네가 아쉬웠겠구나."


초사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꾸하기는 했으나 내심으로는 이만저만 놀란 게 아니었다. '누구일까? 불과 잠깐이기는 했지만 철없는 어린아이를 일약 고수로 탈바꿈시켰던 그 인물은?' 그는 아소 등에게 인사를 건넨 후, 발자국을 따라 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아이가 말했던 그 할아버지라는 자의 것일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발자국은 숲 속 어딘가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초사영은 끝까지 추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얼마쯤 갔을까? 초사영은 굉렬한 음향에 발을 멈추었다. 꽈르릉! 쏴아아아― 거대한 폭포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전개되었다. 그곳에는 발자국의 주인공인 듯한 한 노인이 서 있었다. '저 인물인가?' 초사영은 나무 뒤에 은신한 채 노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일신에 흑의를 걸친 노인은 묵묵히 폭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무릎까지 물 속에 잠겨 있는 상태였으나 이를 개의치 않는 듯 꼿꼿한 자세로 폭포와 마주하고 있었다. 폭포와 노인과의 거리는 이십여 장쯤 되어 보였다. 그는 약해진 물줄기가 무릎 언저리를 지나는 가운데 오른손을 치켜들고 있었다. 아무 것도 쥐고 있지 않은 빈손이었다.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초사영은 숨을 죽이고 노인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그러나 노인은 계속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흠, 좀처럼 움직이질 않는군.' 그로부터 근 한 시진이 지나도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아이들의 놀이터로부터 이곳까지 따라온 초사영은 노인의 그런 모습에서 더욱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다만 노인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막강한 기도를 통해 그가 무공연마를 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때문에 시선을 떼지 않고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덧 해는 정수리 위에서 장중한 햇살을 퍼부어 대고 있었다. 그 가운데 초사영은 일말의 두려움마저 느꼈다. '자세는 줄곧 동일하되 강렬하던 기도가 스러지듯 약해지는가 싶더니 이제는 표출되지도 않는다. 이는 저 노인의 내공이 반박귀진에 이르렀다는 증거다.' 흑의노인은 어쩌면 그가 무림출도 후 처음으로 대하는 초절정의 고수라 할만 했다. 초사영은 침중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노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2] '아니, 저건?' 초사영은 크게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입 밖으로 낼 뻔했다. 그의 눈에는 일순 회의와 불신이 떠올랐다. 노인의 오른손에는 한 자루의 검이 들려 있었다. 분명 방금 전에는 빈손이었건만 뻔히 보고 있는 새에 그리 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검에서 뿜어지는 빛이었다. 아무리 명검이라 해도 어차피 쇠붙이로 만들어졌을 터이거늘 노인의 검에서는 환상처럼 찬연한 빛 무리가 발산되었던 것이다. 초사영은 눈이 부셔서 뜨기도 어려운 가운데 심각한 표정으로 노인이 하는 양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사위에 빛을 뿌리는 검, 아니 빛을 상징으로 삼은 듯한 신비지검은 그에게 이루 형용키 어려운 충격을 선사했다. '저 빛은 틀림없이 내공으로 형성된 것일 테고........'


그렇게 판단이 되자 그의 뇌리에는 검과 관련된 무림의 전설이 떠올랐다. 검을 쓰는 무인이 도달할 수 있는 초극의 단계는 이른바 검왕지검(劍王之劍), 혹은 초인삼검(超人三劍)이라 불린다. 이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삼 단계로 나뉜다. 그 첫째로 손꼽히는 무검(無劍). 수중에 검이 없으되 있는 것이나 진배없는 절대무(絶對武)의 경지를 이르는 말로 흔히 심검(心劍)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심즉살(心卽殺), 살즉심(殺卽心)이라는 믿기 어려운 수단이 통한다는 불가사의한 경지를 뜻하는 것이기에. 그 아래의 단계로 환검(幻劍). 정순한 내공을 바탕으로 이루어 내는 환상의 검학이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깨달음 없이는 얻지 못한다는 초인검도(超人劍道) 중 하나로 특히 파괴력 면에서는 두 말이 필요 없다. 이 고도의 파검(破劍)은 빛으로 검기를 형성하며 천하의 어떤 것이라도 부술 수 있다는 전설이 뒤따르고 있다. 그러한 경지에 오르면 자신 외의 다른 사물에 혼검기(魂劍氣)를 불어넣어 주는 일도 가능하게 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화검(化劍), 천하의 모든 변화를 능히 제압한다는 검의 경지이다. 무검이나 환검과는 달리 실존적인 대신 분검(分劍)으로 초인적인 신위를 떨칠 수 있다고 한다. 이르자면 초사영은 전설의 일부가 실현되는 광경을 본 셈이었고, 그에 따라 종내에는 위축감마저 느껴야 했다. 초인삼검을 지니게 되는 자는 천하 위에 홀로 우뚝 선다고 했거니와 그 말은 그의 가슴에 고스란히 와 닿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서 설마 전설의 환검을 보게 될 줄이야!' 초사영도 화검(化劍)의 경지까지는 믿었었다. 그러나 그 이상 단계는 전설로 치부하고 웃어넘긴 그였다. 그는 새삼 흑의노인에게 지대한 호기심을 느꼈다. '누구인가, 환검을 구사하는 저 절세의 고수는?' 초사영은 의문과 함께 한 가지 추측을 해낼 수 있었다. 이는 아까 아소가 보여 주었던 파석(破石)에 대한 결론이었다. '그 힘은 혼검기였다. 또한 그 사건은 아직 노인이 환검의 완벽한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기도 한다. 그는 아이에게 혼검기를 불어넣어 봄으로써 자신이 어떤 경지에 도달해 있는지를 가늠해 보려 했을 테니까.' 그가 여러 방면으로 염두를 굴리고 있는 동안에도 노인의 환검은 광도(光度)를 점점 더해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초사영은 비로소 노인이 지금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있었다. '보아하니 폭포를 가르려고 하는 듯 한데, 과연?' 노인은 그의 기대처럼 쉽사리 움직여 주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지루하도록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으므로. 마침내 억겁의 시간이 지나고 초사영의 인내가 한계에 이를 즈음, 환검의 빛 무리가 꿈틀하는 동작을 보였다. '아!' 짧은 탄성도 빛 무리가 이동해 간 속도보다는 느렸다. 마른하늘에서 예고도 없이 벼락이 떨어진 것 같다고나 할까?


폭포를 향해 빛 무리는 그렇게 퍼부어졌고, 초사영의 심중에서는 절로 경악성이 일었다. '오오, 부서진다!' 그 말은 언뜻 이해되지 않는 표현이었다. 검에 의해 물줄기가 갈라질 수는 있어도 부서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므로. 그러나 폭포는 빛 무리와 충돌한지라 정말로 부서지고 있었다. 최초에는 뿌연 물안개로 화해 흩어지는가 싶더니 급기야 대폭발을 일으켜 송두리째 사방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콰아아아― 그 여파로 폭포 뒤에 있던 절벽에는 난데없는 하나의 허수동이 생성되기도 했다. 우르르릉―! 이후로 폭포는 아래로 쏟아져 내리지 못하고 저 혼자 거대한 몸체를 좌우로 뒤틀고 있었다. 밑에 있던 못으로는 폭포수를 대신해 돌덩이며 흙덩이들이 마구 퍼부어지고 있었다. 콰콰콰콰― '우우우...... 가공할 파괴력이다!' 초사영은 내심 비명에 가까운 부르짖음을 발했다. 쏴아아아― 폭포는 이내 정상적인 흐름을 되찾았고, 노인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무표정하게 그 모습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초사영은 한바탕 꿈이라도 꾼 듯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직접 두 눈으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장면들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노인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 것은 그때였다. 초사영도 노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는지라 서로의 시선은 허공에서 강렬하게 얽혀 들었다. '으음, 대단한 안광이다.' 초사영은 은연중 몸이 굳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무인에게 있어 최고의 적은 자신이라는, 흔한 진리를 그가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곧 내부로부터 용솟음쳐 오르는 거대한 힘을 느꼈다. 그것은 형상화되지 않는 힘, 즉 자긍심에 입각한 투혼이었다. 이렇게 되자 초사영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아득해지기 시작한 의식의 끈을 잡아채듯 그의 눈은 보다 강렬한 신광을 내뿜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는 불꽃이 튀었고,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처럼 극도의 긴장감이 스며 나왔다. 노인이 검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 "누구냐? 너는." 쉽게 흘러 나온 그 음성으로 인해 초사영은 순간적으로 기혈이 진탕되는 것을 느꼈다. '우욱! 지독하군.'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늠연한 것이었다. "나는 나외다." "흐음?" 노인의 눈이 번쩍하고 섬광을 발했다. 그 빛은 의외다 싶은 정도를 지나쳐 건방지다는 식의 힐책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초사영이 물었다. "당신이야말로 누구시오?" 이는 나이차이에 따르는 기본적인 예의마저도 싹 무시한 어투였다. 노인은 잠시 말이 없다가 나직이 웃었다.


"허허........" 쿠르르르― 노인의 웃음소리에 의해 엄청난 음파(音波)가 발생했다. '욱!' 초사영은 또다시 기혈이 뒤집히자 머릿속까지도 헝클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 그의 입가로는 핏물이 배어 나왔다. 하지만 그는 경황 중에도 목구멍으로 기어올라오는 응혈을 꿀꺽 삼켰다. 이 의식적인 행위는 자신의 패배를 조금이라도 만회해 보고자 하는 오기였다. 어차피 진 것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노인의 가벼운 웃음 한 번에 어이없게도 피를 토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그래도 꺾이고 싶지는 않다!' 초사영의 심중에서는 그런 부르짖음이 일고 있었다. 노인이 그를 향해 말했다. "이기고 싶거든 철련(鐵聯)으로 오라." 초사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었나?' 철련이라는 그 한 마디의 어휘가 주는 의미는 컸다. 쓰라린 패배감을 덮어 버리기에도 충분하리만큼. [3] 소려곡은 당혹해마지 않았다. '저놈이 어디서 못 먹을 걸 먹었나?' 초사영이 광풍곡의 수뇌회의에 참석했다가 돌아온 것은 어제다. 그런데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얼굴을 하고 나타나서는 가벼운 인사말도 없이 거처로 들어가 버렸다. 소소가 반색을 하며 친근하게 맞이했지만 무안만 당하고 말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소려곡이 더 민망할 정도였다. 그나마 이후로는 한 번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하는지 거처에 틀어 박혀 두문불출이었고, 들여보내는 음식마저도 죄다 물리는 해괴한 사태를 연출 중이었다. '쓰헐 지난번에는 여자를 데려와 귀찮게 하더니!' 소려곡은 내심 투덜거렸지만 그것은 그저 오랜 습관일 뿐 악의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실제로는 초사영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걱정하는 이가 바로 그였다. 이면에 짚이는 바도 없지는 않았다. '혹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패배를 맛본 것은 아닌지?' 워낙 철석같이 믿고 있다 보니 단정짓지는 못 했지만 그는 초사영에게서 그런 기색을 읽어내고 있는 터였다. 때문에 소려곡으로서는 심히 염려가 되기는 했으나 위로의 말을 건네기는커녕 일의 경위조차 물을 수가 없었다. '외상은 없지만 모르긴 몰라도 내상을 입은 것 같던데.' 그도 무인인 이상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에 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건드리지 않으려 자제를 하면서도 일편으론 이렇듯 안절부절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인에게 있어 패배란 항시 자연스럽게 따라 다니는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소려곡이 본 바는 단지 초사영의 패배 그 자체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었다. '사영은 지금 스스로의 약한 일면을 발견하고 회의에 빠져 있는 것이다. 내용은 잘 몰라도 그 패배를 통해 그는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에 들어갔으리라.' 초사영의 패배나 회의 등은 소려곡에게도 대단히 영향을 미칠만한 사건이었다. 여태껏 강한 면만을 보여 주었던 한 인간이 이처럼 약해질 수 있다는 사실은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초사영이 누구인가? 파천황의 황주 자리를 놓고 함께 훈련을 받던 시절부터 작금에 이르기까지 소려곡에게는 정신적인 지주였다. 또한 이 점은 향후로도 절대 변해서는 안 되는 사항이었다. 소려곡은 면전에 그를 두고 있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속히 일어서라, 사영! 넌 그래서는 안 된다. 만박가를 치다 지리멸렬하여 뿔뿔이 흩어졌던 우리들을 너는 일일이 찾아 모았다. 그리고 파천황의 본대에 합류시키면서 뭐라고 했었느냐? 이제는 너를 믿고 따르라고, 그러면 길이 보일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그런 네가 어찌.......!' 그의 고심은 끝내 긴 한숨으로 이어졌다. 벽으로 벌레 한 마리가 기어가고 있었다. 어디에서 튀어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미물(微物).' 그렇게 서두를 끊은 초사영은 그 하찮은 존재를 의인화시켜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너도 분명 나와 똑같이 생명을 지니고 있을진저, 그 가치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느냐?'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대답 따위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 물음은 자신을 향한 것이었으므로. 초사영은 자조적으로 읊조렸다. '나는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서 살아왔다. 때문에 스스로에게 지고한 가치를 부여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이루어 내지 못 하리라 여겼으니까.' 그는 기어이 쿡쿡 웃고 만다. '나에겐 적어도 불가능이란 없을 줄 알았단 말이다. 하지만 이게 뭔가? 한낱 미물과 비교해도 나을 바가 없게 되었다.' 초사영은 벌레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너는 내 손가락 하나면 죽는다. 나 역시 누군가의 손짓 한 번이면 목숨이 날아가 버릴 테고. 우우우.......!' 심적 고통을 대변하는 듯한 그의 절망적인 눈빛은 계속 어디론가 가기 위해 벽을 기어오르는 벌레를 따라 움직였다. 그러기를 한참여. 벌레를 쫓던 초사영의 눈이 문득 이채를 발했다. '넌 왜 멈추지 않는 거냐?' 그는 벌레에게 묻더니 일순 몸을 가늘게 떨기도 했다. 자신과 동일시하던 벌레에게서 크게 느껴지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저 미미한 꿈틀거림...... 그러나 꿋꿋하다.' 초사영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벌레가 악착같이 벽에 달라붙어 이동해 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래, 저것이었어! 비록 언제, 누구에게 짓밟힐지는 알 수 없지만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멈추어지지 않을 저 몸부림이야말로 내가 행해야 할 진리다.' 아주 사소한데서 얻어진 깨달음은 어느 덧 빛이 스러져 있던 초사영의 눈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요는 마음가짐이다. 패배했으되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면 무(無)요, 다시 일어서면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으리라.'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내 지나온 행로를 되돌아보아도 모든 승부에서 다 이긴 것만은 아니다. 저 벌레처럼 수많은 손가락들의 위협을 받았었고, 그때마다 좌절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도중하차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벌레로 취급해 퉁겨내려 하건, 또는 죽이려 들건 나는 우직할 정도로 내 길을 고집해 왔다.' 초사영은 나름의 결론이 내려지자 더는 지체하지 않았다.


쾅! 그는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스스스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그를 훑고 지나갔다. '시원하군.' 초사영은 세상에 태어나 이렇듯 바람결이 맑고 상쾌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잔뜩 주려 있던 배가 요동을 치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려곡! 려곡―!" 그의 외침에 눈을 번쩍 뜬 자가 있었다. 소려곡이었다. 막 잠이 들려는 찰나였으나 그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는 퉁겨지듯 침상을 내려왔다. '사영! 드디어 네가 나를 부르는구나.' 소려곡은 대충 옷을 입은 후, 부리나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럼 그렇지, 네놈이 어디 오래 속을 썩일 놈이더냐?' 초사영이 그를 보자마자 죽는 시늉을 했다. "어디 먹다 남은 음식 좀 없느냐? 뱃속에서 난리가 났다." "미친놈! 겨우 자는 사람 깨워 가지고 하는 소리라곤." 소려곡은 짐짓 인상을 우그러뜨리면서도 기뻐하는 기색만은 감추지 못했다. "이 늦은 시각에 음식이 어디 있냐? 주방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벌써 곯아 떨어졌을 텐데." 초사영은 어깨를 으쓱 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이대로 굶어 죽을 수밖에."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소려곡은 무섭게 눈을 부라리더니 말을 이었다. "놈! 오늘 빚은 후에 단단히 갚아야 한다." 그는 몸을 홱 틀더니 어딘가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주방 쪽이었다. 아마도 자신이 직접 초사영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려고 작심을 한 모양이었다. 소려곡은 거리가 한참 벌어지자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라. 내 곧 천하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선보이겠다." 초사영이 물었다. "너 음식을 만들어 본 적은 있느냐?" "아니, 한 번도 없다." "맙소사! 그럼?" "말이 많다! 이 위대한 소려곡 어르신이 주방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무림사에 길이 남을 대사건이다." 그 말은 일편 맞는 소리이기도 했다. 돌아온 영웅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소려곡이 그런 일을 자청할 까닭이 없기에.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비류장의 주방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한 요리사(?)가 음식을 만든답시고 부산을 떨며 땀을 뻘뻘 흘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온갖 재료며 기구들이 뒤범벅이 되어 본인도 책임을 못 지는 사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게다가 음식이 타서 숯덩이가 된 건 그렇다 치고, 초사영이 쫓아가지 않았으면 주방에서 화재가 일어날 뻔 했으니........ [4] 사흘이 지났다. 소려곡은 한가로이 후원을 거닐다 우뚝 멈추어 섰다. 저만치에 무언가 떨어져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저게 뭐지?' 그것은 한 통의 서신이었다. 소려곡은 후원의 한가운데로 걸어가 서신을 집어 들었다. 초사영은 요즘 매우 편안했다. 괴노인에게 패배감을 느낀 후로 크게 상심하기도 했으나 그것을 극복해 내자 그의 심정은 담담해져 있었다. 이는 일종의 여유였다. 승부에 연연해 하다가 그것을 초월해 버린즉 절로 마음의 여유가 생기더라는 얘기다. '애초부터 이랬어야 했는데, 그동안은 내가 너무 시야가 좁았다. 최후에 가서 이기는 자만이 진짜 승자인 것을.' 초사영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마저 어렸다. '한 가지씩 새로 다져 나가도록 하자. 이제까지와는 또 다른 의미로써 출발해 보는 거다.' 그는 이러한 결심에 다가서기까지 그 배경에 묵묵히 있어준 한 인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려곡.......!' 엄밀히 말하자면 그와 소려곡은 파천황이라는 집단 내에서는 철저하게 상급자와 하급자로 구별되는 관계였다. 그러나 여전히 말을 트고 지낼 정도로 허물이 없는 두 사람 사이에는 진작부터 깊은 우의가 자리잡고 있었다. 초사영은 한밤중에 자신에게 음식을 대접하려다 손을 데인 소려곡을 떠올리자 심중으로부터 웃음 대신 진한 감동이 스며 나오는 것을 느꼈다. '소려곡, 내 다시는 너를 실망시키지 않겠다.' 인간으로서 누구에게 신뢰와 기대를 받는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다. 초사영은 그 점을 개의치 않고 살아 왔으되 현재는 소려곡이라는 인물을 통해 절감하고 있는 중이었다. 우당탕!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들어선 것은 그때였다. 그 자는 상념의 주인공인 소려곡이었다. "왜?" 빙그레 웃는 초사영에 반해 그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사영! 큰 일 났다."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이지?" "그녀가 사라졌다." "누가.......?" 안색이 하얘져 가는 초사영에게 그는 심각하게 말했다. "누군 누구겠느냐? 소소지." "아!" 초사영은 정신이 아찔해져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자 상황을 이해 못 하는 사람처럼 되물었다. "무슨 소리냐? 소소가 사라지다니." "아무려면 그녀가 스스로 떠나기야 했겠느냐?" "그럼?" "이걸 봐라." 소려곡이 내민 것은 화원에서 주운 예의 서신이었다. 초사영은 급히 서신을 펼쳐 들었다. 거기에는 누구의 것인지 구별하기 힘든 어지러운 필체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네 연인을 잠시 데려 가겠다. 되찾고 싶으면 반드시 혼자 오라.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죽는다. 시간은 자시(子時)경. 장소는 운려묘(雲旅墓).> 서명 따위는 있을 리가 없었다.


'혼자 오지 않으면 소소를 죽이겠다고?' 와락! 서신은 초사영의 수중에서 맥없이 구겨졌다. "어디서 발견했지?" 소려곡은 대답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왜?" "믿어지지 않아서." "뭐가?" "너 말이다. 네가 이처럼 침착을 잃는 모습은 처음 봤다." 초사영은 납치 당한 사람이 소소가 아니고 혈옥이라면 어떻겠냐고 물으려다 관두었다.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므로. 소려곡이 뒤늦게야 그의 물음에 답했다. "그 서신은 후원에서 발견했다. 그 즉시 소소의 방으로 달려갔지만 그녀는 없었다." "흠, 난감하군." 침음하는 그에게 소려곡이 물었다. "어떻게 할 셈이냐?" "우선 상대가 제시한 대로 따라야겠지." "설마 정말로 혼자 갈 생각은 아니겠지?" "안 그러면 그녀가 죽는다." 소려곡은 펄쩍 뛰었다. "그래도 안돼! 그건 너를 단신으로 끌어내려는 함정이다. 난 솔직히 그녀와 너를 바꿀 수는 없다." 초사영은 할 말이 없자 얼른 화제를 돌렸다. "형가는 어디 갔느냐?" "딴소리 마라. 그놈이 이 일과 무슨 상관이냐?" 소려곡은 크게 화를 내면서 말을 이어갔다. "놈은 또 상관운봉(上官雲鳳)을 만나러 갔다. 요즘 얼굴 구경하기도 힘들어 거의 쓸모가 없어져 버렸다." "후후...... 그건 나에 대한 비난같군." "쓰헐! 다들 어울리지 않게 여자는." "질투하지 마라. 너도 때가 되면 그나 나처럼 될 테니까." "빌어먹을 놈! 농담을 지껄이는 걸 보니 제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구나." "그래." 소려곡은 같은 말을 또 물었다. "혼자 갈 거냐?" 이쯤 되자 초사영도 요지를 피하지 않았다. "물론이다. 나는 지금 소소로 인해 이런 일이 빚어진 것만으로도 너에게 상당히 부끄럽다." "참견을 아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구나?" "맞다. 혼자 가게 해 다오, 려곡." "그렇지만........" "걱정 마라. 소소도, 나도 안전할 게야." 소려곡은 침묵했다. 초사영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나직한 탄식 외에 더 쏟아낼 말이 없었던 것이다. 초사영은 몸을 일으켰다. "다녀오겠다."


소려곡은 답하지 않았다. 제 17 장 친구(親舊)의 죽음 [1] 달빛은 교교로웠다. 세상은 어둠에 잠겨 있었으나 포근한 춘기(春氣)를 한껏 비축해 두었다. 후르르........ 한 마리의 야조(夜鳥)가 허공을 가른다. 하지만 그 광경은 춘색 탓인지 괴기로워 보이지 않는다. 이런 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정겨운 마음을 갖도록 종용한다. 더구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죽음으로써 이어간 가남가녀(佳男佳女)들의 영혼이 떠도는 곳임에랴! 누군가 사랑을 맺지 못해 한탄하는 이가 있다면 이곳에서 사랑을 속삭이기를. 그리하면 반드시 이루게 될지니........ 만일 그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대들의 사랑이 과연 진실된 것이었는가를 되돌아보아야 하리라. 운애사화(雲愛思話)라고나 할까? 운려묘는 고래(古來)의 비극을 간직한 채 오늘날 세인들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초사영. 그는 길게 이어진 묘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어둠이 짙게 깔려 있어 주위 경물이분명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그의 능력이라면 그런 것에 하등 구애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밤을 낮과 같이 환하게 꿰뚫어 볼 정도의 안력을 지니게 된 지는 벌써 오래이므로. 어쩌면 어두운 것은 그의 심상(心象)인지도 몰랐다. 전면으로 한 쌍의 석상이 서 있었다. 남녀가 서로를 그윽이 바라보는 광경이 표현된 것이다. 주변에 흔하게 널려 있는 것들도 하나같이 남녀의 절실한 사랑을 묘사한 그림들이었다. 어떤 것은 별리(別離)의 슬픔을, 어떤 것은 해후의 기쁨을 그려 놓아 제각기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리곤 한다. 그림의 주인공들은 모습이나 입고 있는 의복, 신분을 나타낼만한 장식 등도 각양각색이었다. 특히 다리를 저는 사내가 있는가 하면 장님 여인도 있어 인간 세계에서 따지려 드는 조건들을 초월한 진실된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다. 초사영은 애써 그런 것들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했다. 이는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기가 힘들어서였는데, 그런 그도 한 장면을 보고는 눈을 화등잔만하게 부릅떠야 했다. 여인의 나신(裸身). 그 충격적인 장면의 주인공은 소소였다. '이럴 수가!' 다행히 사지를 활짝 열고 누워 있기는 해도 그녀의 몸에는 이렇다할 고문이나 겁간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창문 새로 흘러 들어오는 달빛에 의해 그녀의 나신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초사영의 해석은 달랐다. 일편으로 안도하기도 했지만 그로서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저 꼴이 무언가? 내 연인이라고 칭하면서 저렇게 발가벗겨 놓은 건 나를 모욕하자는 의도일 것이다.' 그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보았다. 별로 이상한 바는 없었다. 기대했던 사람의 흔적이나 기척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사영은 소소에게 선뜻 다가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잠시 기다렸다. 어차피 우롱은 당해 놓았으니 서둔다고 해서 처해 있는 상황이 호전될 리는 없었기에. 묘 입구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왔군.' 초사영은 느긋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에 따라 당연스레 무엇인가 시야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한 명의 흑포인이었다. 그 자도 초사영을 보고 있었다.


'고수다!' 초사영은 흑포인의 눈에서 강렬한 예기를 느끼는 한편, 순간적으로 의혹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누구인가? 저 눈빛은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데.'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곧 알게 되겠지.' 초사영은 일단 여유를 갖고자 했다. 지금으로선 그것만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은 흑포인이니까. 흑포인이 복면으로 덮인 입술을 꿈틀거렸다. "대단히 의연하군. 궁금한 점이 많을 텐데." 그 음성은 쇠를 긁는 듯 탁하고 듣기 거북했다. '가성(假聲)이로군.' 초사영은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끼며 간단히 답했다. "그대를 꺾으면 다 알게 될 테니까." "후후...... 말되는군. 그러나 흥정은 필요하다." "흥정?" "결론부터 말하지. 애초부터 내 목적은 오직 너를 죽이는 것뿐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저 여인에게는 더 이상 피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흠! 매우 관대한 처사로군." 초사영은 비아냥에 이어 소소를 힐끗 돌아보았다. 혈도를 제압당했는지 그녀는 의식을 잃고 있었다. 흑포인이 그의 심정을 짚어내듯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안심해라. 지금도 그녀는 수면에 빠져 있을 따름이다." 휙! "밖으로 나오너라. 여긴 비좁다." 흑포인은 신형을 날리는가 싶더니 금세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게된 초사영은 잠깐의 짬을 빌어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저런 납치범도 있을 수 있는가?' 그도 몸을 날렸다. 휘익―! 운려묘는 저만치에 있다. 여기서도 열려진 창문 틈으로 희끄무레하게 달빛을 받고 있는 소소의 나신이 보인다. 흑포인과 초사영은 오 장 여의 간격을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 사이에는 금방이라도 불꽃이 퉁겨 오를 듯 삼엄한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기회가 오기를 몹시 기다렸다." 흑포인이 말하며 검을 잡아갔다.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초사영의 손도 검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파팟! 두 사람의 신형이 동시에 야공(夜空)을 갈랐다. 카카캉――! 일 초의 격돌은 섬전일순에 이루어졌고, 그들은 어느 새 위치를 바꾸어 상대편이 섰던 자리에 내려서고 있었다. 이어 흑포인이 몸을 돌려 다시 검을 뻗는 순간, 초사영의 검에서도 찬란한 무지개 빛 검광이 폭출되었다. "십색십혈(十色十血)!" 이는 유성휴의 검학 중 일 식이었다. 흑포인의 검에서는 핏빛을 띈 검력(劍力)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폭광야(爆光野)!"


꽈꽝! 두번째의 격돌은 위력 면에서 첫번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초사영은 다른 이유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있었다. 그는 검식을 통해 흑포인의 정체를 알아 차렸던 것이다. '오오, 네가 왜?' 초사영은 뭔가 말하려 했으나 미처 입을 열지 못 했다. "사영! 또 간다." 흑포인의 맹렬한 외침이 용납하지 않았기에. 그아앙―! 섬뜩한 소음을 동반한 그의 살검이 몰아쳐 왔다. 최후를 장식하기 위한 일 검인 듯 그 속도도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정말로 나를 죽이려고!' 초사영이 위기감을 느꼈을 때, 그의 검극에서는 이미 주인의 의지를 벗어난 진홍의 검강(劍强)이 뻗고 있었다. 이 일 검에 생과 사가 결정지어지는 만큼 두 사람의 검식에는 모두 십이 성의 내공이 담겨져 있었다. 꽝! 꽈르르르― [2] 가슴 속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이 일었다. '왜, 무엇 때문에 네가?' 초사영은 자신의 귀로 그 절규와도 같은 부르짖음을 듣고 있는 듯 뜨거운 격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형가........"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예의 흑포인이 누워 있었다. 그 자는 초사영이 읊조렸듯 형가였다. 휘익! 초사영은 형가에게로 날아가 얼굴을 가리고 있는 면포(面布)를 벗겨냈다. 뻔히 알면서도 굳이 확인을 하는 그의 심리는 그때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의혹을 대변한 것이었다. 형가라면 적어도 초사영의 생각으로는 지금쯤 상관운봉을 만나, 미숙할 테지만 사랑을 속삭이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어찌 기막히게도 이곳에서 일을 벌여 놓고 있다가 종내 친구의 검에 의해 숨을 거두려 한단 말인가? 초사영은 넋을 잃은 듯 망연히 형가를 내려다보았다. 형가의 검은 그의 옆구리를 지난 바 있었다. 치명상은 아니었으나 그 상처에서는 핏물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반면에 형가는 앞서도 말했듯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그의 가슴은 무참하게도 좌우로 쩍 벌어져 붉은 살집과 허연 뼈, 심장부까지를 모조리 드러내 놓고 있었다. 그래도 심장은 아직 펄떡였고 그 덕분인지 형가는 어렵사리 감았던 눈을 떴다. 그가 최초로 떠올린 표정은 씁쓸함이었다. "사영." "형가, 이게 대체.......?" "욱!" 형가는 대답 대신 검은 피를 왈칵 토해냈다. 그의 안색은 눈에 띌 정도로 빠르게 핏기를 잃어갔다. "나는...... 전 생애를 통해 한 번쯤은...... 너를 이기고 싶었다. 너는 내게 있어 친구이자 적.......! 내 아버지는......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도부(屠夫)...... 흐흐...... 난 그 사실이 창피하고 분해 어릴 때부터 이 세상 최고의 자리에 서고 말겠다는 결심........" 끊어질 듯 이어져 가는 형가의 음성을 들으며 초사영은 그를 탓하기에 앞서 그 말에 공감하는 자신을 느꼈다. '형가, 너도 그랬었느냐? 나처럼 세상에 한을 품고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고독한 몸부림으로 일관해


왔구나.' 형가의 입가에는 비릿한 웃음이 매달렸다. "파천황에의 도전...... 그로써 나는 소망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그러나 아니었...... 사영, 너 때문에...... 너는 내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 "바보 같은 놈!" "그래...... 난 바보다. 네가 파천황주의 자리를 차지했을 때...... 나는 축하해 주지 못 했...... 못난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며 괴로워했었으니........ 결국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너를 이겨 보고자........ 흐흐...... 네 귀에는 우습게 들리겠지만........" 초사영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너답지 않게 소소를 납치해 그 따위로 나를 모욕하고 내게 검을 겨누었느냐?" "내 허욕이 부른 결과...... 하지만 원인은 따로 있...... 욱!" 형가는 다시금 피를 토하더니 괴로운 듯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입에서 흐른 핏물은 앞가슴을 흥건히 적셨다. "그렇게까지 할 뜻은 없었....... 그가 종용........" "뭣이? 누가 말이냐?" 어느 덧 그의 눈빛은 퇴색해 가고 있었다. 이를 느끼자 초사영은 조급한 심정이 되어 다그치듯 물었다. "말해 다오! 누구냐? 네 심리를 알고 이용한 자가." "살인각주...... 그녀를....... 조심해라. 사영........" "살인각주!" 초사영은 그야말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쨌든 형가는 그 말을 끝으로 영원히 입을 다물었고, 그의 죽음이 남긴 것은 너무도 많았다. 허무한 여운이 그러했으며 초사영의 가슴 속에 불붙게 된 분노와 살심이 그러했다. '이나마 소소가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납치범이 형가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살인각주의 주문에 따라 더욱 불행한 사태가 야기되었을 것이다.' 초사영은 형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떠올렸다. '그녀라고? 그럼 살인각주가 본색을 드러낼 정도로 형가와 가까운 사이였다는 얘긴가?' 그는 몸을 날려 묘 안으로 들어갔다. '미안하오, 소소. 그대에게는 정녕 할 말이 없구려.' 초사영은 내심 중얼거리는 가운데서도 뭔가 부딪쳐 오는 예감이 있어 그녀를 낚아채고는 최대한 빨리 그곳을 떴다. 휘익―! 그의 신형은 순식간에 삼십여 장을 날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뒤편으로 운려묘에서는 흰 연기가 솟는 듯 하더니 굉렬한 폭음이 일었다. 꽝! 운려묘는 폭발하여 송두리째 날아가고 말았다. 아마도 폭약이 미리 매설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초사영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입술을 질겅 씹었다. '형가, 내 너에게 고마워해야 되겠구나. 네가 정말로 독한 마음을 먹고 시간을 끌었더라면 소소와 나는 운려묘와 더불어 폭사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휘류류류― 묘 터에서 비롯된 불길이 산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형가의 덧없는 죽음과 비원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잘 가게, 나의 친구여.......!' 초사영의 눈에는 소리 없이 눈물이 차 올랐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려곡은 눈을 휩뜨고 부르짖더니 다음 순간에는 멍해져 말문을 열지도 못했다. 풀어진 듯 망연한 그의


눈 속에서는 형언키 어려운 분노가 꿈틀거렸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음성에는 누구도 말릴 수 없는 냉엄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사영! 다시 말해 보아라. 누가 누구를 죽였다고?" 초사영은 침중한 어조로 답했다. "내가 형가를." "아니, 그렇게 표피적인 것 말고 진짜를 말이다." "원한다면!" 초사영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살인각주가 비열한 수단까지 써서 그로 하여금 나를 죽이도록 했으나 그는 자청하여 내 손에 죽어갔다." "크으윽.......!" 소려곡은 소리내어 울부짖었다. 처지가 동일한 만큼 그와 형가의 우의도 결코 초사영에 뒤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초사영은 없는 말을 지어내야 했다. "살인각은 나에게 뭔가 원한을 갖고 있던 자의 청부를 받아 그런 일을 저질렀을 것이다." 그는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사실 살인각주인 천살마희가 초사영을 죽이려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제는 수법도 한층 더 치밀해져 그의 측근인 형가를 이용하려고까지 했다. 그런 그녀가 흑풍사의 요인(要人)인 살주전주이며, 어쩌면 그 일이 사주의 명령에 따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초사영은 도저히 소려곡에게 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로서는 소려곡이 넘겨짚는 짓조차 하지 못 하도록 완전하게 차단을 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았다간 소려곡의 성격상 흑풍사 전체를 적으로 삼고자 할지도 모르니까. "우우! 살인각 놈들, 내 가만 두지 않겠다." 치를 떠는 그를 보며 초사영은 눈을 내리 감았다. 며칠 후. 흑풍사에서 형가의 죽음에 대해 애도의 뜻을 전해왔다. 당연한 예우였다. 일개 수하로 치부하기에는 그가 파천황의 귀살대주로써 워낙 많은 일들을 해냈으므로. 소소는 납치 사건이 있은 이후로 도통 말이 없어져 버렸다. 그녀 역시 그 일로 인한 타격이 컸던 것일까? 간혹 초사영과 시선이 마주쳐도 먼저 피하기 일쑤였다. 아무튼 비류장은 때아닌 초상집이 되어 버렸다. 저녁 무렵에는 형가의 연인인 상관운봉이 찾아왔다. 그녀로 말하자면 몰락한 관료(官僚)의 여식으로 사창가에 팔려갈 뻔한 위기에서 생전의 형가에게 구함을 받은 바 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아름다운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그녀의 복이 그 뿐이었는지 형가를 잃고 만 것이었다. 상관운봉은 도착하자마자 눈물부터 쏟았으며 칠일장(七日藏)이 끝나도록 형가의 빈소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았다. 그 동안에 비류장 사람들은 밤마다 그녀의 구슬픈 곡성(哭聲)으로 인해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점에 대해 불평하는 자는 없었다. 불행한 운명에 놓인 한 여인이 유일한 의지처였던 연인을 잃고 슬픔에 잠겨 있거늘 어떻게 자제를 요구할 수 있겠는가? 초사영도 오열하는 그녀를 볼 때마다 심중에 무럭무럭 차 오르는 살심을 느끼며 다짐을 거듭했다. '천살마희!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네가 누구의 사주를 받아 이 따위 짓을 벌였건.' 형가의 빈소로 사용된 장소는 비류장에서 서재에 해당되는 방이었다. 상관운봉이 비탄에 빠져 있는


동안 소소도 몇 번인가 그녀가 눈치채지 않게 그 곳을 드나들었다. 소소의 입장에서는 형가가 미울 수도 있으련만 그의 죽음이 모든 사태를 미화시켜 놓은 것 같았다. 그녀는 상관운봉의 처연한 모습을 보면 항시 남의 일이 아닌 듯 그토록 밝았던 얼굴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곤 했다. 형가의 시신은 빈소에서 예정대로 칠 일을 머물다 모처에 묻히기 위해 떠났다. 그러고도 비류장은 근 한 달이 넘도록 활기를 잃고 침묵에 잠겨 있었다. [3] 아름다운 손을 가진 이가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 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약간 달리 표현하면 평범을 비범으로 가꾸어 놓는다고도 할 수 있다. 그의 손길이 머무는 곳은 화원이었다. 아니다, 화원이라고 하기에는 아무래도 좀 무리한 감이 있었다. 어쩌면 그곳은 초원(草原)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꽃과 잡초가 마구 뒤엉켜 함부로 자라 있는 곳이기에. 군옥명. 이 아름다운 손의 주인은 최근 들어 꽃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가 다듬고 가꾸는 것은 어이없게도 잡초였다. 만일 정말로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 본다면 그의 괴이한 행각에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할 게 틀림없었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생각해 보아도 잡초란 본시 꽃의 성장을 위해 제거해야 마땅한 대상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군옥명은 미치지 않았으며 화원에 들어앉아 있는 그를 보면 이색적인 사고방식에 일말의 두려움마저 든다. 적어도 옥사후가 느끼기에는 그렇다는 얘기다. 옥사후는 진작부터 군옥명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부는 매사에 저런 식이었다. 남이 눈도 돌리지 않는 것에서 무언가를 찾아내시곤 했지. 어떤 현상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 그 세심함이야말로 오늘날의 사부를 만든 힘이다.' 군옥명은 공히 천궁비영의 절대자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평범을 고수해 왔는데, 그것이 과연 진정한 평범의 범주에 들었던가? 더구나 군옥명은 누구에게나 이해와 관용을 고루 베풀기는 하되 자신의 영역을 타인에게 허용하는 법이 없다. 그 면에서는 유일한 제자인 옥사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인가 옥사후는 화원에서 사부의 일을 거들고자 청했다가 무안하게도 일언지하에 깨끗이 거절당하고 말았다. 군옥명이라는 한 인간이 심고 가꾸어 온 진리 안에 그는 직전제자이면서도 끝내 포함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옥사후는 들리지 않게 탄식을 발했다. '사부는 분명 저 안에 천하대권의 향방과 무림경영(武林經營)의 도의를 감추고 계신다. 그런데 내게는 왜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고 한사코 밀어내기만 하시는 것일까?' 요즘 들어 그는 사부에게 종종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 전까지는 믿고 따르는 스승이니 만치 상대 쪽에서도 자신을 끔찍이 아끼는 줄로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고 사부가 쌓아올린 성(城)은 여전히 사부만의 것이었다. '사부께 있어 나는 어떤 존재일까?' 회의도 적지 않은 옥사후였다. 화원에 있는 사부를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약간의 배신감마저 들 정도였다. 그는 발끝으로 지면을 찍어눌렀다. 그 바람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그의 발가락 아래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그것은 사부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나는 사부의 뜻에 의해 제자가 되었으며 천궁비영의 부영주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런데도 늘상 사부께서는 나와 보이지 않게 거리를 두고 계시다.'


심경이 좋지 않은 탓인지 상상은 비약된다. '혹시 어디에 나 말고 다른 제자가 있는 건 아닐까?' 옥사후는 제 풀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감히 그러면 어쩌고, 안 그러면 또 어쩔 것인가? 어차피 그 일도 사부의 소관인 걸.' 그는 마침내 몸을 돌려 버렸다. 이곳에 계속 있어 봐야 비참한 기분만 더 할 것 같아서였다. 그때 문득 그의 앞으로 달려오는 한 인물이 있었다. '저 자는 정진(精眞)!' 정진은 영내에 입수되어 분석까지 마친 정보를 최종적으로 서류로 작성해 올리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천궁비영의 조직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서각(書閣). 대내외적으로 입수된 모든 정보들을 비치해 놓고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열람할 수 있는 곳이다. 수각(收閣). 정보의 수집처이다. 아울러 천하에 산재해 있는 천궁비영의 암행자(暗行者)들을 관리하는 곳이기도 하다. 분각(分閣). 수집된 정보는 이곳에서 유형별로 분류된다. 결각(結閣). 수각과 분각을 거친 정보의 비중을 판단한다. 이곳에서 채택된 것들이야말로 천궁비영의 주요한 정보라 할 수 있다. 정진은 위의 기관들 중 결각의 각주였다. 그는 무엇 때문인지 급히 내닫다가 옥사후를 발견하자 우뚝 멈추어 섰다. "부영주를 뵙소이다." "음, 무슨 일이오?" 당연한 질문이었다. 옥사후에게는 부영주라는 직책상 결각에서 올려진 정보를 영주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일차적으로 검토할 의무 내지는 자격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보기에도 아니었다. 결각주인 정진은 사부인 군옥명에게 막바로 가고 있는 것이분명했다. '나를 거치지 않고 직접 찾아오다니.' 옥사후는 내심 불쾌하기 짝이 없었으나 이를 표출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슬쩍 돌려 물었다. "사부께 특별히 올릴 말씀이라도 있소?" "그게 저........" 정진은 당황한 듯 무엇인가를 뒤로 감추며 얼버무리려 했다. 그로 인해 옥사후의 추궁은 오히려 자연스러워졌다. "뒤에 있는 건 무엇이오?" "이것은........" 정진이 할 말을 잃고 더듬거리는 동안 옥사후는 그의 등뒤로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흠! 이 서찰은 어디서 온 것이기에 내게 숨기셨소?" 정진의 손에는 과연 한 통의 서찰이 들려 있었다. 그는 망설였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제대로 말문을 열었다. "부영주, 달리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이 서찰은 영주께 직접 전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영주께 직접? 그래야 하는 것도 있었나?" 옥사후는 고개를 갸웃뚱하며 평이한 어조로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듣고 있는 정진은 상대의 언행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옥사후의 눈에서 찰나적으로 번뜩인 분노의 빛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정진은 입장이 난감해지자 일단 고개를 꺾었다. "아직 모르셨다니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후후...... 그대가 송구할 것까지야!" 옥사후는 쓰게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정진은 그에게 서찰을 건네주며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보십시오. 이 서신에는 비상하는 흑조 한 마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이 영주께서 직접 받아 보시는 특수한 서신의 표식입니다. 개봉은 영주 외에 누구도 불가합니다." 결국 정진은 상대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할 말은 다한 셈이었다. 이쯤 되면 옥사후로서는 별 도리가 없었다. "음, 알겠으니 어서 영주께 가 보시오. 공연히 내가 끼어 들어 시간만 지체된 것 같구려." "무슨 말씀을. 그럼 이만........" 정진은 예를 표한 뒤 총총히 멀어져 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옥사후는 더 없이 상심하여 중얼거렸다. '여러 가지로군. 가뜩이나 비참한 판국에!' 휘이이잉― 무심히 지나는 바람마저 옥사후의 황량한 가슴을 할퀴어 놓았다. 그는 맥이 빠져 고개를 푹 떨구었다. '후후후...... 이제는 화가 나지도 않는구나.' 그런데 그가 무거운 발길을 몇 걸음인가 떼어놓았을 때였다. 누군가 그를 불러 세우는 사람이 있었다. "사후야." 옥사후는 흠칫하며 자신도 모르게 멈추어 섰다. '사부께서 왜 나를?' 방금 전 자신을 부른 음성은 군옥명의 것이었다. 옥사후는 기계적으로 빙글 돌아섰다. 그 사이에 군옥명은 벌써 그와 가까운 위치에까지 와 있었다. "어인 걸음이십니까? 사부." 옥사후는 허리를 깊이 숙였고, 그런 제자를 응시하는 군옥명의 눈빛은 유현하기만 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 순간에도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를 대신해 어디 좀 다녀와야겠다." "제자가 말씀입니까?" 군옥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미파다." "꼭 제자가 다녀와야 할 일입니까?" "그렇다. 너라야만 하지. 내일 출발할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사부." "가서 이것을 천불대사께 전하거라. 대좌를 요하는 일이니 너도 내용을 미리 보아 두어야 할 테고." "아!" 굳어졌던 옥사후의 안면이 활짝 펴졌다. 군옥명이 내민 것은 방금 전 정진이 전하고 갔던 서찰이었다. "사부........" "그래, 조심해 다녀오너라." 군옥명은 서찰을 건네주고는 화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에서는 옥사후가 흔들리는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래도 사부께서는 나를 무시하지는 않으신다.' [4] 아미산(蛾 山). 산 자체로써 지니는 의미는 특별할 것이 없다. 보기 흔한 자연 경관의 일부일 뿐 산세가 유독 빼어나지도, 그렇다고 지리적으로 어떤 요건을 갖춘 바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한 무림인들만은 아미산을 두고 느끼는 의미가 각별했다. 그 근처를 지나려면 그들은 한


번쯤은 반드시 산을 향해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곤 한다. 이를테면 금불장법(金佛掌法), 오운불혈수(五雲佛穴手), 천수십팔장(天獸十八掌), 복호사(伏虎寺), 금정봉(金頂峯) 등의 친숙하기까지한 어휘들이 모두 아미산에 자리잡고 있는 아미파(蛾 派)와 관련된 것들이다. 특히 이번 달에는 천궁지천궁이라는 별도의 용어가 붙어 있기도 하다. 아미파에는 방금 전 옥사후가 방문해 있었다. 그는 지금 사부인 군옥명의 명대로 한 사람과 대좌하고 있는 중이었다. 풍성한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려 앞가슴을 덮다시피한 그 인물이 천불대사(天佛大師)였다. 무림에서는 그를 백염공(白髥公)이라는 속가명(俗家名)으로 부르기도 한다. "어서 오시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그보다도 여기........" 옥사후는 공손하게 서찰을 건넸다. 안색이 불그스레하여 강건해 뵈는 천불대사가 그것을 받아 읽어 내려갔다. <그 동안 알아본 결과 살인각은 흑풍사 소속인 살수전이었소. 본거지는 왕옥산(王屋山)의 음무애(陰霧崖)요. 영주의 빠른 결단을 기대하며.> "아미타불.......!" 천불대사의 입에서는 경악성을 대신한 불호가 흘러 나왔다. 서찰의 내용은 충격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살인각이라면 무림의 이단자로 불리우는 자들이 모여 있는 살인청부 집단이다. 그 동안 그들의 비열하고 잔혹한 살수에 의해 천궁지회의 고수들이 얼마나 많이 죽어 갔던가? 그런데 그들이 흑풍사의 살수전이었다는 것이다. 서찰을 쥐고 있는 천불대사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는 격정을 억누르느라 연신 불호를 읊어댔다. 아무리 불문의 고승이라 해도 인간인 이상 감정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살인각이 끼쳐온 엄청난 인명 손실을 생각하자 그는 불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인 자비(慈悲)마저도 그 순간만큼은 상실하고 있었다. 더구나 꼬리를 감춘 채 숱한 혈겁을 자행해 왔던 살수전의 진면목은 물론 본거지까지 밝혀지니 천불대사로서도 치밀어 오르는 살심을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옥사후는 상대의 심경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하긴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 그는 뻔히 짐작되는 바를 말로써 물었다. "대사께서는 이 일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천불대사는 잠시 입을 열지 못한 채 잠자코 있었다. 그의 기색을 살피며 옥사후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저는 이번 기회에 살수전을 무림도상에서 아예 제명시켜야 한다고 봅니다만, 대사의 견해는 어떠신지요?" "아미타불........" 불호를 외운 천불대사는 눈을 내리 감았다. 파르르 떨리는 그의 눈썹이 심중의 번민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살인각의 윤곽이 확실하게 드러난 이상 결론은 지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마땅히 처벌해야 되었다. 하지만 천불대사로서는 일단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이면에서는 덧없이 희생을 당한 천궁지회 고수들의 영상이 떠올라 그에게 막대한 고통을 안겨 주었다. '허허...... 아까운 인물들이 무수히 스러져 갔다.' 그 중에는 막역한 사이였던 지인(知人)들도 다수 있다.


천불대사는 그리 짧지 않은 갈등 끝에 눈을 떴다. 애초와는 달리 그의 눈에서는 강렬한 신광이 뿜어져 나왔다. "악은 방치해 두어서는 아니 되네. 향후로도 선인(善人)들이 그들로 인해 갈 때가 되기도 전에 이승을 떠나게 될 테니 말이야. 가능한 한 살생은 피하고 싶네만, 아미타불........" 옥사후가 착 가라앉은 어조로 그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무림에서 사라져 주어야 합니다. 흑풍사의 조종에 따라 움직였겠으나 그 간의 죄업이 너무 커 존재의 가치를 잃은 자들입니다." "아미타불...... 노납의 생각도 그렇네." 천불대사는 고개를 끄덕인 뒤 넌지시 물었다. "이 서찰은 누구에게서 전해져 왔는가? 필적으로 보아 영주가 직접 적어 보내신 건 아닐 테고." "맞습니다. 사부께서 몸소 내리신 서찰은 아니지요." "그러게 누가 보냈느냐고 묻지를 않는가?" 옥사후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흑조라는 자입니다." "아미타불...... 하면, 그 흑조라는 인물에 대해 말해줄 수 없는가? 영주의 신임이 대단히 두터운 듯 한데." 옥사후는 눈썹을 슬쩍 찌푸렸다. "대사, 죄송합니다만 그 자에 관한 사항은 외부에서 함부로 발설할 수가 없습니다." 잘라 말하는 그의 어투에 천불대사는 아연한 듯 눈을 치켜 떴다. 옥사후가 아무리 천궁비영의 부영주라 해도 이 자리에서 대답을 거부할 만큼의 권위는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미타불...... 옥시주, 그 말뜻은 무엇인가? 노납이 개인적으로는 어떨지 모르나 적어도 가진 신분만은 외인(外人)으로 치부될 수 없다고 생각하네만?" 옥사후는 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혹여 천궁지회에 침투해 있을지도 모를 간세들의 귀에 들어갈까 우려해서이지, 제가 어찌 감히 대사의 자격 여부를 따지겠습니까?" 그 말은 분위기를 더욱 냉각시켰다. "흐음........" 천불대사는 불편한 기색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간세 운운한다는 것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자파(自派)의 경계를 허술하게 여긴다는 뜻으로도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알았네. 그 문제는 접어 두기로 하지." 덕망 높은 고승에게도 자파의 명예는 소중한 법이다. 옥사후는 천불대사가 말은 그리 해도 무척 노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실상 옥사후도 흑조라는 인물에 대해 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액면 그대로 말했다간 자신의 명예야말로 땅에 떨어지게 생겼으니 말이다. 그에 비하면 차라리 천불대사의 오해를 사 불손한 위인으로 낙인찍히는 편이 훨씬 나으리라는 게 그의 계산이었다. 사부의 주변에 대해 잘 모른다면 그것은 불신임과 통하는 얘기다. 옥사후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보면 맞았다. 공연히 밉상을 떨며 뻣뻣하게 버티는 수밖에는. 그래 놓고는 그도 심정이 편치 않아 입술을 질겅 씹었다. 새삼 사부의 처사가 야속하여 눈물이 다 솟을 지경이다. '내가 어리석었다. 사부께서 이곳으로 나를 보내실 때 얼마나 감격해 했던가? 이런 사태가 벌어질 줄도 모르고. 과연 사부께서도 이 일을 예견하지 못 하셨을까?' 옥사후는 탁자 밑에서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내 돌아가면 막바로 정진이 흑조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물어볼 테다. 만일 그렇다면 그때는 나도 참지


않겠다.' 바야흐로 불만의 불씨는 점점 커져 그의 마음을 무섭게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천불대사가 무감동한 어조로 말했다. "아미타불...... 이만 돌아가 보시게나. 여기 일은 알아서 진행해갈 터인즉 아무 염려하지 말게." 뼈가 있는 그 말에 옥사후는 얼굴이 확 달아올라 인사에 대한 답례를 핑계로 얼른 고개를 숙여야 했다. "염려는요, 대사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습니까?" "고맙군." 천불대사는 간단히 답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옥사후는 참담한 심정이 되어 읊조렸다. '빌어먹을! 객(客)이 일어나기도 전에 주인이 먼저 나가 버리는 법도 있나?' 아미파 특유의 강경책은 곧바로 적용되었다. 천불대사는 옥사후와의 면담 직후, 회의를 소집했다. 그것은 살수전의 처리문제를 놓고 단안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청심각(靑心閣). 아미파 내에서도 중대한 업무가 이루어지는 별각이다. 이곳에서는 정기적으로 회의가 열리며, 안건들이 처리되곤 한다. 지금은 정기회의는 아니나 요인들이 빠짐없이 소집되어 있다. 그들을 둘러보며 천불대사가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오늘 노납이 여러분들을 소집한 이유는 예기치 못했던 정보를 한 가지 접했기 때문이오." 그 말에 좌중 인물들은 저마다 긴장을 감추지 못 했다. 갑작스럽게 소집에 응하게 된 것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천불대사의 안색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 탓이었다. 그들 속에는 각 파에서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자 파견된 자들도 배석하고 있었다. "그 정보를 통해 노납은 결론을 지었소. 흑풍사의 살수전을 무림에서 영원히 제명시키기로. 물론 반대하시는 분들은 계시지 않으리라는 견지 하에서 말이오." 일명 불로생검(不老生劍). 화산 출신의 고수인 그는 평소부터 성질이 급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오늘이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좌중에서 가장 빠른 반응을 보인 사람은 그였다. "대사! 난데없이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소생은 워낙 천박한 귀를 지니고 있는지라 하나도 못 알아 듣겠소." 그와 동감인 듯 다른 인물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천불대사는 그들을 일일이 훑어보며 자신의 실태를 시인했다. "그러고 보니 노납이 순서를 바꾸어 말했구려. 살수전이라 해서 생경하셨겠지만 그들은 살인각이외다." 좌중 곳곳에서 탄식과 신음이 쏟아져 나왔다. "그럴 수가! 살인각이 흑풍사의 살수전이었다니." "무량수불.......! 무서운 일이로다." 그러나 그들의 기색도 천불대사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단순한 놀라움에서 차츰 격정과 분노를 내비쳤던 것이다. 천불대사는 비교적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본 천궁지회는 그들을 칠 것이오. 그래야만 흑풍사도 이 땅에 아직 도의가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 오늘의 회의는 천불대사의 결정을 놓고 가부를 논하는 형식이었으되, 누구도 반대하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 구체적인 사안도 주재자인 천불대사가 발표했다.


"우리는 금일부터 살인각을 대상으로 이른바 정심무적대(正心無敵隊)를 편성할 것이오. 이로써 무림에 정의의 깃발을 높이 세우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외다." 제 18 장 여인(女人)들 [1] "아악!" 여인의 것인 듯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초사영은 걸음을 뚝 멈추었다. '이 음성은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더 지체하지 않고 비명이 들려온 쪽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휘익―! 여인이 혼자서 마차를 몰고 다니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더구나 요즘처럼 강호 정세가 불안한 때는 그저 조용히 들어 앉아 있는 게 상책인지도 모른다. "흐흐흐...... 계집, 얌전히 굴어라. 그러면 이 나으리들이 너를 즐겁게 해 주겠단 말이다." "뭣 하느냐? 어서 이리 오라니까. 크크........" "비켜!" 뾰족하게 외치는 여인은 단신으로 외유(外遊)를 나왔다가 봉변을 당하게 된 모양이었다. 그녀의 마차는 험상궂게 생긴 다섯 명의 장한들에게 가로막혀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여인은 위기감 탓인지 안색이 하얘져 있었으나 그 상태로도 장한들의 탐욕을 일으키기에 충분할 만큼 아름다웠다. 일신에는 착 달라붙는 녹의경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용모에 뒤지지 않는 몸매까지도 드러나 보였다. 아무튼 여인은 다섯 명의 장한 앞에서는 무력한 존재였다. 단지 입으로만 열심히 대항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썩 비키지 못 하겠느냐? 어딜 감히, 악!" 여인은 호통을 치다 말고 마차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한 장한이 휘두른 채찍에 허리가 감겼던 것이다. "비키라구? 흐흐...... 네가 보기엔 이 나으리들이 그 말에 고분고분하게 따를 것 같느냐?" "자, 자! 가만 좀 있거라. 이 어르신으로 하여금 미리 힘을 빼게 만들지 말고." 여인은 부단히 발버둥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한 장한에게는 허리를, 다른 한 장한에게는 발목을 붙들렸다. "악! 놔, 놓으란 말이야!" "흐흐흐...... 앙탈 부리지 마라. 조금 후면 즐거워서 기성을 지르게 될텐데 뭘 그러느냐?" 이번에는 털투성이의 장한이 여인의 앞섶으로 손을 뻗어 왔다. 그녀는 반항할 여지가 없자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ㅌ! 더러운 자식." "아니, 이년이?" 짜악! "악!" 장한이 여인의 뺨을 세차게 후려갈겼고, 그 바람에 그녀의 입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놓아 주어라." 어디선가 착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웬 놈이냐?" 다섯 장한들은 하나같이 면상을 구기며 방해자를 찾았다.


관도의 저쪽에 어느 틈엔지 한 인물이 나타나 있었다. 그는 흑포를 입은 청년으로 수려한 외관을 갖추고 있으되 왠지 모르게 그의 아름다움에서는 사이(邪異)함이 느껴졌다. 그는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온 초사영이었다. "놓아주라고 했다." 언뜻 권태가 배인 듯한 음성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장한들은 무슨 용기로 노상에서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모르지만 모두가 강호 상에서 별 볼일 없는 작자들로 초사영과는 손을 나눌만한 상대가 못 되었다. "건방진!" 한 장한이 으르렁거리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때마침 초사영이 손을 들더니 나뭇가지를 가볍게 쓰다듬었던 것이다. 푸스스........ 나뭇가지에서는 대번에 푸른 연기가 치솟았다. 초사영은 그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삼매진화(三妹眞火)의 수법을 보여줌으로써 장한들에게 내공의 차이를 확실하게 납득시켜 주었고,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요...... 용서를.......!" 장한들은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도 비로소 초사영이 자신들의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초사영은 여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렇듯 외진 길에서 여인이 홀로 마차를 몰고 다니다니, 이번 일의 책임은 당신 자신에게 있소." "당신은.......!" 여인은 힐책을 들으면서도 반색을 했다. 하지만 초사영은 굳어진 얼굴을 펴지 않고 냉랭하게 말했다. "나도 당신을 알아보았었소, 마상녀(馬上女)." 그랬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긴 했으나 그의 빈정거림에 얼굴을 붉히는 여인은 사도린의 여식인 사화연이었다. 아직도 초사영을 연모하고 있는 그녀는 부지 중 지난 일들을 기억 속에 떠올리며 친근하게 말을 붙여왔다. "제 잘못은 알지만 너무 꾸짖지는 말아 주세요. 소녀도 아무 일 없이 나온 건 아니고, 어머님의 기일에 맞추어 대고모님 댁으로 가던 길이었어요." 초사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마치 누가 물어 보더냐는 식의 무심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사화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덧붙였다. "좌우간 소녀를 구해 주셔서 고마워요. 어떻게 감사에 대한 보답을 해야 될지........" 초사영이 그 말을 중도에서 끊었다. "되었소." 마상녀 사화연의 표정이 뚝 굳어졌다. 박대(薄待)도 그 정도면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 것이었다. 연정까지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안면이 있는 사람끼리 길에서 우연히 만났으면 예의상이라도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초사영의 언사는 점입가경이었다. "자, 피차에 볼일이 없는 듯 하니 가 보시오." "네?" 그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마저 매달렸다. "이쯤이면 당신의 연극은 대성공을 거둔 것 아니오? 여기서 뭘 더 바라시오?" "아니, 그걸 어떻게.......?"


사화연은 놀라서 말을 꺼냈다가 실수했다 싶었는지 얼른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 막았다. '이런 낭패가 있담?' 그녀는 가슴이 무너져 내려앉는 것은 물론 너무도 수치스러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화연이 연극을 꾸민 이유는 간단했다. 자연스럽게 초사영과 만나고 싶다는 일념이 전부였으니까. 결국 나쁜 의도에서도 아니고, 그리 큰 잘못도 아니건만 그녀는 당사자인 초사영에게 톡톡히 망신을 당한 것이다. '내가 그렇게도 잘못한 걸까?' 그녀의 눈에는 어느 덧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한편. 초사영은 이곳으로 오자마자 정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알기로 사화연의 무공은 고수급이었다. 앞서의 장한들 정도라면 다섯 명이 아니라 오십 명이라도 거뜬히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사화연이 털복숭이 장한에게 뺨까지 맞아 가면서 열연(?)을 할 때 그는 하마터면 폭소를 터뜨릴 뻔했다. 아무튼 그 경위를 거친 초사영의 생각은 이러했다. '이 여인은 나와 인연이 없다. 설사 있다 해도 내 처지로는 한 여인도 감당하기 벅차거늘 어찌 둘을 수용한단 말인가?' 이는 형가의 죽음이 가져다 준 결론이었다. 초사영은 세상에 혼자 남게 된 형가의 여인, 즉 상관운봉을 보며 느낀 바가 적지 않았다. 그 자신도 어쩌면 종국에는 형가처럼 타인의 검에 의해 죽어갈지 모르는 운명이기에. 이미 맺어진 인연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새로 움트는 인연의 싹은 초장부터 잘라 버리리라 작정을 했던 것이다. 초사영은 내친 김에 못을 박아 두는 일도 잊지 않았다. "사소저, 우리는 서로 취향이 맞지 않는가 보오." "무슨 말씀이신지.......?" "난 귀찮은 것을 매우 싫어하오." "귀찮은?" 사화연은 반문하더니 훅 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굳어져 있는 그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예전에 소저와 나는 한 가지 약속을 했었소. 내기에서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부탁을 들어 주기로." 초사영은 사뭇 냉엄하게 덧붙였다. "지금 그 부탁을 하겠소. 당장 집으로 돌아가시오." "뭐...... 뭐라구요? 당신이 어떻게 내게!" "할만 하니까 하는 게요." 사화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야,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어. 어찌........" 넋이 나간 듯 읊조리는 그녀를 두고 초사영은 몸을 돌렸다. '잘 가시오, 소저. 부디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기를.' 그가 몇 걸음인가 나아갔을 때, 사화연이 부르짖었다. "이봐요! 당신 정말 그렇게 가버릴 건가요?" 초사영이 대답하지 않자 그녀의 음성은 더욱 고조되었다. "야, 이 목석! 가다가 발목이나 부러져라. 흐흐흑.......!"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었고, 초사영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은 채 그 자리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2] 왕옥산(王屋山). 이 산은 문사(文士)의 산이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가까운 곳에 구산서고(九山書庫) 중 하나인 왕산서원(王山書院)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문사의 정신은 항상 곧아야 한다. 왕옥 산은 언제나 그런 정신을 주장하기라도 하듯 죽림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거친 무인들과는 실로 동떨어진 세계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왕옥 산은 고정관념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일대 혈풍이 몰아 닥치고 있었다. "죽여라!" "흑풍사의 주구들! 한 놈도 남기지 마라." "이번 기회에 천궁지회의 힘을 보여 주리라!" 외침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하늘을 찢을 듯한 비명성과 각종 병장기이 부딪치는 소음들이 근역을 가득 메웠다. 난데없는 혈풍의 원인은 여기에 살인각이 존재하고 있는 탓이었다. 천궁지회가 입수된 정보에 따라 그들의 본거지라 추정되는 이 왕옥산의 음문애를 급습했던 것이다. 덕분에 항시 왕산서원과 더불어 평화를 가장하고 있던 음문애는 창졸지간 아비규환의 지옥경으로 화하고 말았다. 살인각, 아니 살수전의 고수들이 제아무리 살인의 술사(術士)들이라 해도 천궁지회의 세(勢)를 당해내지는 못 했다. 천궁지회 측은 사전에 충분한 작전이 수립되어 있는 데다 인원도 훨씬 많아 승부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 했거니와, 살인각은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꼼짝없이 당하고 만 것이었다. 혼전의 일각(一角). 피윽! 화살처럼 비쾌무비한 신법으로 날아가는 한 인영이 있었다. 그가 쏘아져 가는 곳은 살인각의 후면이었다. 장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싸움과는 무관하게 느껴지는 인물, 그는 초사영이었다.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는 뻔한 노릇이었다. 그는 풍령패도 사도린에게도 공언을 했지만 형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살인각주를 처단하겠다는 뜻을 확고하게 굳히고 있었다. 다만 그가 천궁지회의 공격이 있는 때에 당도한 것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다!' 초사영은 한 채의 전각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건물의 양식이나 품격이 여타의 건물들과는 비교가 될 정도로 뛰어나 보였기 때문으로, 그 전각이 각주의 거처라는 추리는 그가 아닌 누구라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의 발이 지면에 닿기도 전, 몇몇의 인영들이 덮쳐왔다. 스스슷―! "어딜!" 츄악! 그의 검이 섬광을 뿜자 대뜸 다섯 개의 수급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추호의 용서도 없는 냉혹한 일 검이었다. 또한 이 때에 그는 이미 전각 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그곳은 전각의 회랑이었다. '흠, 이제부터 대접이 융슝하겠지?'


초사영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긴장을 다지는 한편, 빠른 속도로 회랑을 가로질러 갔다. 파파파파팍! 예측대로 그를 반기는 것들이 있었다. 좌, 우측 벽으로부터 쇠털같이 가는 우모독침이 우박처럼 쏟아져 나왔다. 초사영은 냉소하며 장력을 쳐냈다. 두두두툭! 맹위를 과시하던 우모독침은 그의 장세와 맞부딪치자 모조리 무력하게 지면으로 곤두박질하고 말았다. 콰르릉―! "웃!" 이번에는 머리 위였다. 멀쩡하던 천장이 갑자기 거대한 바위가 내리누른 듯 폭삭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이는 깔렸다 하면 초고수라도 육포 신세를 면치 못할 절대 위기였다. 하지만 초사영은 그 자리에 없었다. 어느 틈에 몸을 빼냈는지 그는 벌써 저만치에서 아무 일 없었던 듯 종전과 같은 속도로 내닫고 있었다. 소위 전광석화와 같은 신법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나온 말이리라. 초사영은 이후로도 대여섯 차례의 암격과 기관의 공세를 맞이했으나 그때마다 특유의 기지와 신법을 발휘해 그것들을 모두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천살마희, 이제야 그대를 볼 수 있게 되었구나.' 마침내 그는 최종적인 목표지점에 도착해 있었다. 그곳은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밀전(密殿)의 문 앞이었다. 문은 가볍게 밀자 아무런 소리도 없이 열렸고, 그의 신형은 그 틈으로 연기처럼 스며들어갔다. 과연 밀전 안에는 누군가 있었다.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위치에 태사의를 놓고 한 사람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반갑군." 초사영은 그렇게만 말했다. 용건을 생략한 것은 상대가 방문 목적을 잘 알고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자신을 죽이려 열심히 따라 붙었으니 왜 모르겠는가? 상대의 비릿한 음성이 그의 귀로 전해졌다. "죽으러 왔느냐?" 초사영은 미간이 슬쩍 찌푸러 들었다. '빌어먹을! 또 가짜로군.' 일신에 혈포를 입고 얼굴을 복면으로 가린 그 자는 다른 건 몰라도 음성으로 미루어 남자가 틀림없었다. 초사영은 간단히 잘라 말했다. "각주가 있는 곳을 대라. 너와는 놀 시간이 없다." "무슨 헛소리냐?" 혈포인, 즉 가짜 살인각주는 짐짓 눈을 부릅뜨며 호통을 쳤으나 그 기색에서 당혹감만은 감추지 못 했다. "한 번만 더 묻겠다. 각주는 어디 있느냐?"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각........" 그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초사영의 검이 코앞에 이르자 살벌한 예기로 인해 숨이 막혀 왔기 때문이었다. '이 자는 내 적수가 아니다!' 이 다급한 부르짖음은 심중에서 일어났으되, 그의 입에서 새어나온 것은 짧은 신음성이었다. "큭!" "이...... 이런!"


초사영은 김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혈포인의 면전에 들이댔던 검을 도로 끌어 내렸다. 그는 혈포인의 고개가 푹 떨구어지는 것을 보며 입술을 질겅 씹었다. '필경 독단을 깨물었겠지?' 그는 사태를 짐작하면서도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어 혈포인의 고개를 들어올려 보았다. 역시 그 자는 절명해 있었고, 입가에서는 검붉은 핏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철저하군.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반격 한 번 시도하지 않고 막바로 자살을 꾀하다니." 초사영은 자책으로 인해 쓴 입맛을 다셨다. "내가 어리석었다. 지난번에도 이와 똑같은 상황을 경험했으면서 미처 방비를 하지 못했다." 그는 일편 허탈하기까지 했다. 이 일을 위해 나름대로 공을 들였건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 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그가 단념했다는 뜻은 아니다. 초사영은 심기를 추스르고는 뭔가 단서가 될만한 것을 찾아내기 위해 밀전 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잠시 후에는 무엇을 발견했는지 눈을 휩떴다. 충격을 대변하듯 그의 입에서는 경악성이 절로 새어 나왔다. "자양지(紫陽紙)!"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어딘가로 빛살처럼 쏘아져 갔다. 휘익―! [3] 향(香)은 언제나 사람들의 기분을 유쾌하게 만들어 준다. 또한 좋은 향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기도 하는 법이다. 낙양 근교에 위치한 한 채의 장원, 이곳이 세인들에게 유달리 기억되는 이유가 바로 그 향 때문이다. 소하장(蕭河莊). 이런 이름을 가진 그 장원에서는 일명 자화(紫花)라 하여 신비한 향기를 내뿜는 화목을 재배하고 있었다. 자화에서 추출한 향은 주로 다른 물품에 첨가하는 식으로 사용되곤 했다. 자화향이 배이게 만든 종이를 쓰는 것은 소하장만의 오랜 관습이자 그들의 자랑이었다. 그 종이를 이름하여 자양지(紫陽紙)라고 하는데, 일단 향을 먹여 두면 아주 오랫동안 유지되어 고급으로 친다. 초사영은 살인각에서 자양지를 발견하자마자 즉각적으로 그 종이의 원산지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더 연구해볼 것도 없이 이곳 소하장으로 급히 달려왔다. '이 일은 천살마희의 계책이분명하다. 내가 어떤 위인인지를 아는 한 멋모르고 자양지 같은 흔적을 남겨둘 리가 없지. 그녀는 모종의 의도를 품고 나를 여기로 유인한 것이다.' 초사영은 진작부터 그 점까지도 간파하고 있었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위험한 함정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는 회피하기는 커녕 천살마희의 유인극에 선뜻 부응했다. 그만큼 자신감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로서는 처단을 더 이상은 미룰 입장이 못 되었던 것이다. 끼이익! 초사영은 소하장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 장원은 그와 다분히 연계가 있는 장소로 낯선 곳이 아니었다. 그는 이전에 몇 번인가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었다. 그것은 여기서 기거하고 있는 상관운봉을 만나 보기 위해서였다. 지난날 어느 때인가 초사영은 생전의 형가에게 거취가 불분명한 그녀를 비류장 내로 들이라고 권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상관운봉은 도저히 그럴 면목이 없다며 사양했고, 그래서 자리잡게 된 곳이 이 소하장이었다. 비록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형가가 죽기는 했으나 그녀는 초사영의 배려로 여기 남아 있게 되었으며, 비류장에 있던 형가의 위패도 이곳으로 모셔왔다. 소소도 간혹 이 장원에 들르곤 했다. 형가가 죽기 직전에 자신에게 어떤 짓을 했건 그녀는 연인을 잃은 상관운봉을 안쓰럽게 여긴 나머지 찾아와 위로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초사영은 탐탁치 않은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왜 하필 이곳인가? 형가의 영혼이 머무르고 있을 터, 어쩌면 소소도 지금 와 있을지 모르겠군.' 그를 알아보고 반기는 이가 있었다. "아! 공자께서 오셨군요." 역시 몇 번인가 보았던 나이 어린 시비였다. "음, 그래. 상관소저는 어디 계시지?" "처소에요. 조금 아까 소아가씨께서도 오셨지요. 소녀가 두 분께 연락을 올리겠어요." "그리할 필요는....... 아니다, 내가 왔다고 전하도록 해라." 초사영은 은밀히 그녀들의 주변을 돌아보고 싶었으나 시비의 눈에 띈 이상 이상하게 보여질까봐 생각을 바꾸었다. '하긴 여기까지 왔으니 그 마녀와는 어떤 형태로 부딪치든 상관없으리라.' 그는 시비가 사라지자 별각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가장 먼저 그를 맞이한 것은 친구의 죽음을 일깨워 주는 짙은 단향 내음이었다. 전면에는 위패가 모셔져 있고, 그 좌우로 곱게 접힌 긴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초사영은 착잡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형가, 바보 같은 네놈 때문에라도 천살마희는 반드시 내 손에 죽게 될 것이다.' 상실의 아픔을 그리 표현한 그는 일면 안도하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이구나. 네가 죽은 지도 꽤 오래 되었건만 그녀는 여전히 너를 잊지 않고 있는 듯 하니 말이다.' 그는 친구를 보듯 위패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저런 일들을 알고나 있느냐? 죽음이란 어떤 것인지...... 단절이냐? 아니면........' 초사영의 읊조림은 거기서 중단되고 말았다. '아! 머리가........' 그의 몸이 은연중 가늘게 떨렸다. 그것은 갑작스런 현기증 때문이었다. 그는 시야가 뿌얘지는 것을 느끼며 이제까지와는 다른 눈빛으로 전면을 노려보았다. '저 단향이 주범이다. 천살마희는 내가 이곳에 들르리라는 사실을 계산에 넣고 있었다.' 그의 판단은 옳다고 보아야 했다. 그렇지 않고는 이런 안배를 할 수가 없었을 테니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초사영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는 내심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상관운봉과 소소를 떠올렸다. 별각을 먼저 찾는 그의 습성을 아는 여인은 어린 시비를 제외하면 그 두 사람뿐이었으므로. 초사영은 어지러운 듯 비틀거리더니 끝내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단향에서 흘러 나온 독연(毒煙)이 기어이 그의 정신을 마비시킨 모양이었다. 휙! 어디선가 하나의 인영이 날아들었다. 전체적인 선이 가늘고 섬세한 것으로 미루어 그 인영은 여인이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호호호.......! 초사영, 너도 별 수 없구나."


득의에 찬 교소성이 별각을 울렸다. 여인은 죽은 듯 의식을 잃고 있는 초사영에게로 다가갔다. 쉭! "죽엇!"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그녀의 손에서 섬뜩한 빛이 뿜어졌다. 그 빛의 정체는 날이 새파랗게 선 비수였다. 그러나 상황은 여인의 뜻을 따라주지 않았다. "어림없다." 냉랭한 일 성과 동시에 초사영이 벌떡 일어섰던 것이다. 그는 입에서 피독단(避毒丹) 하나를 내뱉으며 씩 웃었다. "넌 아직도 나를 잘 모르는구나, 마녀." "이...... 이럴 수가.......!" 얼굴을 복면으로 가린 여인은 뜻밖의 상황에 비명에 가까운 부르짖음을 발하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 상황에서도 이어지는 그녀의 대응만은 눈부신 것이었다. 와장창! 그녀는 창문을 박살내며 그대로 몸을 빼냈다. "서라!" 초사영이라 해서 얌전히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마치 그림자로 화한 듯 그녀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흡!" 여인은 급기야 숨넘어가는 소리를 발하며 신형을 멈추었다. 어느 새 초사영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흠, 이제야 길고 긴 상호 추격전이 끝을 맺는가 보군. 그 동안 무슨 일이 그리 바빠 수뇌회의에도 나타나지 않았지?" "건방진! 그건 네놈이 상관할 바 아니다." 여인은 앙칼지게 외치며 비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초사영에게 덥석 덜미를 잡혔기 때문이었다. "놔라, 애송이!" "넌 내게 함부로 지껄일 자격이 없다. 모르느냐? 너와 나는 흑풍사 내에서 서열이 같다는 것을." "닥쳐! 난 한 번도 그 점을 인정해 본 적이 없다." "크크...... 제멋대로군. 네가 사주라도 되느냐? 어차피 너도 나와 똑같이 그의 충직한 하수인에 불과하다." 비야냥과 자조가 뒤섞인 그 말에 여인은 격노했다. "네놈은 목숨이 몇 개냐? 감히.......!"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여유있게 되받아친 초사영은 그녀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그는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의식했으나 이를 스스로 일축해 버리듯 복면을 거칠게 잡아챘다. "난 네가 누군지 알았다, 그것도 방금 전에야." 과연 초사영은 복면이 벗겨져 나간 얼굴이 예상했던 여인의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도 설마 했더니!" 씰룩이는 그의 안면에는 형언키 어려운 분노와 실망이 어려 있었다. 그는 비할 수 없이 참담한 심경이 되어 형가의 위패가 놓인 별각을 힐끗 건너다 보았다. '적어도 이 계집이어서는 안되었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형가가 기뻐하는 것을 보았고, 그 때문에 이 계집에게 감사했었다. 그런데 형가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었다니.' [4]


초사영의 앞에 고개를 쳐들고 서 있는 여인은 상관운봉이었다. 긴 머리칼이 이마를 반쯤 뒤덮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 그녀는 이제 살인각주로 불려야 할 여인이다. 그녀는 서슴없이 초사영을 비웃었다. "그래서 넌 아직 애송이라는 것이다. 서열이 같다고 해서 네가 나와 동등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초사영은 쓴웃음으로 상대의 말을 받았다. "맞다. 너와 나는 큰 차이가 있다." "호호...... 그걸 이제야 알았느냐?" 그는 문득 정색을 했다. "오해하지 마라! 내가 말하는 건 방식의 차이다. 물론 내 방식으로도 너 같은 계집 하나쯤은 얼마든지 다룰 수 있다." 그 말에 비로소 상관운봉은 몽상에서 깨어나듯 외쳤다. "감히 나를 죽이기라도 하겠단 말이냐?" 초사영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애초에는 그럴 계획이었으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무슨 소리냐?" "넌 이 시각부로 살인각주 천살마희가 아니다. 단지 내 친구인 형가의 여자일 따름이다." "뭐, 뭣이?" 상관운봉은 노하여 부르짖더니 큰 소리로 웃었다. "오호호호홋.......! 나를 가지고 놀 심산인가 본데 포기해라, 초사영. 그 멍청한 작자는 죽은 지 오래다." 초사영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는 죽지 않았다. 최소한 네 육신 어느 곳엔가 불어넣어졌을 그의 숨결이 영원히 살아 너를 따라다닐 테니까." "우우우...... 놈! 그 따위 헛소리를........" 상관운봉은 더 이상 웃지 못하고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네가 나를 어쩌건 난 널 죽일 것이다!" 이를 악무는 그녀의 눈에서는 독랄한 살기가 뻗어 나왔다. 그것을 느끼자 초사영은 지금까지 궁금하게 여겼던 점을 오히려 자연스레 물을 수 없었다. "넌 왜 그처럼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냐?" 그 질문에는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이전에 주변에서 들었던 바에 의하면 살인각, 아니 살수전은 흑풍사주의 친위대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명령이건 사주에게 직접적으로 하 달받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흑풍사주가 초사영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럴만한 여지도 충분했다. 무엇보다 초사영은 완전한 흑풍사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고, 그것은 최종적으로 무림의 판도를 뒤엎어 흑풍사의 존망을 위협할 수도 있었으므로. 초사영은 그런 생각들을 단계적으로 더듬어 가면서도 약간의 회의가 없지는 않았다. '설마하니 사주가 거기까지 넘겨짚지는 않았겠지?' 상관운봉의 대답은 그의 의문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걸 몰라서 묻느냐? 너를 죽이는 일은 살인각을 이끄는 각주로서의 내 임무였다." "임무?" "그렇다. 본 각은 흑풍사의 재정을 담당하고 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지. 우리는 액수에 따라 심지어 황제의 목이라도 원한다면 따올 수 있다." 초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죽여 달라고 청부한 자가 있다는 말이군."


"물론이다. 그것도 자그마치 황금 오십만 냥을 걸었다." "호오! 오십만 냥이나?" "네가 어떤 위인이건 일 개인의 목숨 값 치곤 아주 비싼 편이지. 그 정도면 본 각이 벌어 들이는 연간 청부살인대금의 삼분지 일에 해당되는 막대한 금액이다." "음, 싼 것보단 낫군." 초사영은 태연히 말한 후, 물었다. "그 청부자가 누구냐?" 대답은 기대할 수가 없었다. 살인청부업의 제일 조건이 청부자의 비밀 보장이라는 사실은 그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아니나 다를까? "알려줄 수 없다. 그러나 알만한 방법은 있지." "무슨?" "호홋! 그건 지옥에 가서 형가와 나란히 알아보면 훨씬 쉽게 답이 구해질 것이다. 죽어랏!" 츠츠츳! 대답 대신 날아온 것은 상관운봉의 검이었다. 하지만 초사영이 누구인가? 명실공히 천하제일검인 숙부의 진전을 고스란히 이어 받은 그다. "무리하지 마라!" 카카카캉―! 그의 절대 검학은 상관운봉이 떨쳐낸 검세를 모조리 떨쳐내 그녀로 하여금 낙심에 이르게 했다. "으음!" 상관운봉은 입술을 짓씹었다. 아울러 그녀는 검만으로는 도저히 초사영의 상대가 되지 않자 비상수단을 발휘했다. 당금 천하를 떨어 울리는 살인각주인 만큼 상관운봉에게는 별도의 재간이 있었다. 어쩌면 무공보다 그 재간이야말로 그녀의 오늘이 있도록 배경이 되어 주었는지도 몰랐다. 스스스........ 그녀의 몸에서 두 마리의 붉은 나비가 날아올랐다. 허공에 아름다운 선을 그리는 그 나비들은 보통 나비가 아니었다. 초사영도 그것들을 보자 흠칫 놀라는 기색을 나타냈다. '저것들은 혹시 쌍혈접(雙血蝶)?' 쌍혈접이란 삼백 년 전 공포시대를 창출했던 혈접마녀(血蝶魔女)의 독문무공을 이름이다. 단순히 암기수법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고, 그렇다고 정공(正攻)이라고 하기에는 편격하고 괴이한 무공이었다. 쌍혈접은 문자 그대로 두 마리의 붉은 나비인데, 제 스스로 사람의 호흡을 감지해내 공세를 가한다. 그 아름다운 날갯짓을 통해 수백, 수천 개의 독암기가 비산되는 것이다. 따라서 혈접무를 피하려면 호흡을 중지할 수밖에 없지만 그로 인해 죽음을 재촉하게 된다. 왜냐하면 쌍혈접을 날린 자의 검이 그 순간에 맞춰 숨통을 끊어 놓을 테니까. 초사영은 쌍혈접의 내력을 떠올리며 일단 호흡을 멈추었다. 그 모습을 보며 상관운봉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디 이래도 네가 내 검을 피할 수 있나 보겠다.' 스으으으― 두 마리의 나비가 이루어 내는 춤은 의외로 속도가 빨라 금세 초사영의 주위를 날갯짓으로 뒤덮고 있었다. 그의 호흡을 느끼지 못 했을 테니 암기를 발출하지는 않았지만. 그 순간을 기해 상관운봉의 검이 소리 없이 날아들었다. 호흡을 중단한 상태에서 그 일 검을 피하기란 지난한 일이었다. 그것은 아마 초사영이라 해도 다를 바 없으리라.


그러나 세상에는 왕왕 상식을 뒤엎는 사태가 벌어지곤 한다. 믿을 수 없게도 초사영은 그 검을 피해내고 있었다. '앗!' 놀란 사람은 상관운봉이었다. 그녀의 공세가 무위로 돌아가자 허공을 마구 휘젓던 혈접무도 중단되었다. 기(氣)가 서로 통해져 있으니 이는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찰나였다. 츳! 초사영의 검이 한 줄기 섬광을 발한 것은. "헉!" 상관운봉은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을 뿐 가슴을 쪼개오는 예리한 검날을 방비하지는 못 했다. 사악! '읍! 늦었다.' 세로로 베어진 그녀의 가슴에서는 핏물이 스며 나왔다. 치명상은 아니었으나 그 검흔은 곧 패배를 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검의 주인은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떠올리지 않고 있었다. 만박가의 진법을 통해 체득하게 된 절대무극심의 경지를 그는 이곳에서 발휘하고 있었다. "으음!" 상관운봉은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신음을 흘렸다. 그것은 비단 상처에서 느껴지는 아픔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초사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역시 나를 죽이지 않겠다는 거냐?" "나는 한 번 내뱉은 말은 쉽게 번복하지 않는다." 상관운봉은 고소를 지었다. "이유를 물으면 또 형가 얘기를 꺼내겠지?" "물론이다. 그는 지금도 너를 사랑하고 있을 테니까." 그녀는 비로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는 멍청하니까." 초사영이 물었다. "너는? 그를 넌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었느냐?" 상관운봉의 눈꼬리가 홱 치켜 올라갔다. "그것까지는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닐 텐데? 형가는 네 친구라지만 나는 분명히 아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 그러나 형가의 빈소에서 흘렸던 네 눈물이 전부 다 거짓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우우우.......!" 상관운봉은 괴상한 신음을 발하더니 갑자기 크게 외쳤다. "필요 없다! 나는 여자도, 인간도 아니다. 단지 살인각주일 뿐이니 더 이상 고문하지 말고 나를 죽여 다오." 발작에 가까운 그녀의 몸부림을 목도하며 초사영은 정말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몸을 돌리는 그를 향해 상관운봉은 연이어 고래고래 악을 썼다. "잘난 척 하지 마라, 초사영! 너는 선심을 베푼 척 하고 있지만 난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어. 살인각의 인물이, 그것도 각주가 패배하고 살아 남을 수 있으리라고 보느냐?" 초사영은 응대하지 않았다. 그는 벌써 그녀와 한참 떨어져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 놓고 있었다. 상관운봉도 잠잠해졌다. 그녀는 언제 발작을 했냐 싶게 멍한 표정으로 멀어져 가는 초사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뜻하지 않는 말을 쏟아 놓았다.


"조심해야 할 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옥사후다." 낮게 울리는 그 음성은 이렇게 이어졌다. "이건 네가 나를 살려 주었대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형가, 그 멍청한 위인 때문에........" 초사영의 걸음이 뚝 멈추어졌다. 상관운봉은 그의 그런 반응을 보며 더욱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너도 형가만큼이나 멍청한 작자다. 하지만 네 곁에는 좋은 여인이 있으니 그 위인처럼 불행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소소는 나 같은 계집과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그녀는 끝으로 한 마디를 더 던졌다. "어서 후원으로 가 보아라. 늦으면 그녀는 죽는다." 파앗! 상관운봉은 말을 마치자마자 허공으로 섬전처럼 솟구쳤다. 그러고는 이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늦으면 죽는다고, 소소가?' 초사영도 뒤이어 다급히 몸을 날렸다. 휘익―! 제 19 장 각자 다른 고통의 몫 [1] "아악! 살려줘요, 사영! 사영―!" '아직 죽지는 않았다.' 비명 소리를 들은 초사영은 전력을 다해 날아갔다. 휘휘익―! 그의 발 아래로 화원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전체를 가로지르도록 화원은 텅 비어 있었고, 그녀의 다급한 외침도 더 이상은 들려오지 않았다. '어디지?' 초조감에 휩싸인 그의 눈에 한 채의 건물이 들어왔다. 그것은 후원의 후미진 곳에 있는 허름한 창고였다. '저기다!' 초사영은 신형을 날려 창고 앞에 내려섰다. 그는 두텁고 단단해 보이는 철문을 향해 일 장을 내쳤다. 꽈꽝! 철문은 종잇장처럼 구겨져 버렸으며, 초사영은 그 틈으로 지체없이 몸을 밀어 넣었다. '웃!' 그는 얼굴을 확 덮어오는 열기로 인해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 그만치 창고 안은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그것은 한 쪽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장작불 탓이었다. 그 위에는 사람도 들어갈 만한 커다란 가마솥이 걸려 있었는데, 얼마나 오래 가열을 했는지 벌겋게 달아 있었다. 게다가 가마솥 속에는 기름이 펄펄 끓고 있어 막대한 열기 외에도 기름방울을 사방으로 퉁겨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악마의 혓바닥처럼 넘실거리는 불길도, 거기 걸쳐진 끓는 기름솥도 아니었다. '소소!' 전라(全裸). 어쩌면 매우 얄궂은 일이었다. 형가에게 납치되었을 때도 그녀는 발가벗겨져 있더니 현재도 똑같은 꼴을 하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 당시에는 그나마 얌전히 눕혀져 있었지만 지금은 짐승처럼 천장에 손발을 묶인 채 대롱대롱 매달려 기름솥으로 빠질 위기에 놓여 있었다.


아래쪽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그녀를 지탱시키고 있는 밧줄을 태우며 매캐한 냄새를 전하고 있었다. '지독한!' 투툭! 밧줄은 거의 끊겨져 나가고 한 가닥만이 남아 있었다. 휘익! 초사영은 빠르게 날아가 그녀를 낚아챘다. 소소는 몸부림치다 혼절했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경황 중에도 그는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을 내려다보았다. '아름답다.' 그의 심중에서는 절로 그런 읊조림이 일었다. 아니, 소소는 속눈썹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초사영은 탄식을 금치 못 했다. '나를 따르지 않았으면 이런 일 따위는 겪지 않았을 것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이 무슨 봉변인가?' 그는 연민지심이 매달린 눈길로 품에 안긴 그녀를 응시하더니 그곳을 뜨기 위해 신형을 날렸다. 비류장. 초사영은 소소의 등을 툭 쳤다. 아직도 그녀의 몸을 덮고 있는 것은 그가 벗어 걸쳐준 장삼이었다. "그만 일어나지 그러오? 장난은 관두고." 소소는 그의 무릎을 베고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는 그녀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듯 했는데, 초사영의 행동을 감안하건대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이래도 안 일어날 거요?" 철썩! 이번에는 그녀의 엉덩이로 초사영의 손이 떨어졌다. "아야!" 소소는 소리를 지르더니 눈을 반짝 떴다. "때리긴 왜 자꾸 때리는 거예요?" 뾰족한 그녀의 음성에 초사영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원래 말로 안 되는 사람은 때려야 하는 법이오. 진작 깨어났으면서 안 일어나고 버티는데 별 수 있겠소?" "좀 이러고 있으면 안 되나요?" "누구 인내심 시험할 일 있소?" 소소의 눈이 묘한 빛을 발하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인내심이라니, 그건 무슨 뜻이죠?" 초사영은 짐짓 볼멘 소리를 했다. "다리가 저리단 말이오." 소소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큭큭 웃었다. "겨우 그래서였어요?" "아니면, 어떤 종류의 것이길 바랐소?" "네?" 소소는 움찔하더니 더듬거렸다. "나...... 나는 그게 아니라........" "뭐요?" "아무래도 당신이...... 지루해 했을 듯 해서........"


"소소." 초사영은 정색을 했다. "가끔씩 아주 잊는가 본데, 나도 남자요. 알겠소?" 그는 무안하여 쩔쩔 매는 소소를 옆으로 밀어냈다. "자! 혼자 편히 쉬도록 하오. 난 한 잔 하러 가야겠소." "잠깐만요!" 소소가 팔을 뻗어 그를 도로 붙들었다. "왜?" "당신만 남자면 다인가요?" "흐음?" "나도 여자란 말이에요. 목석 같은 사내........"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초사영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고는 기어 들어가는 듯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피하지 말아요. 당신이 그러면...... 난 견딜 수가 없어요." "소소........" "나도 알아요. 내 존재가 당신에게 번번이 방해가 되고...... 또 그때마다 당신을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을........" "그만 하오." 초사영은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어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왜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었소? 실은 당신이 나를 위험하게 만든 게 아니라 그 반대요." 소소는 그를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난.......!" "소소!" 초사영은 기어이 감정조절에 실패해 그녀를 와락 부둥켜안고 말았다. 그는 소소의 귓가에 대고 격정적으로 부르짖었다. "내가 당신에게는 여러 모로 죄를 짓는구려. 괴롭힌 것으로도 모자라 자책까지 하게 만드니........" "사영!" 소소도 그를 마주 안으며 열띤 음성을 토해냈다. 두 사람은 이 순간에도 사랑이란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의 마음만은 어떤 미사여구를 갖다 붙인 것보다 더욱더 절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초사영은 왠지 처절한 심정이 되어 말했다. "당신은 처음부터 크게 실수했소. 나란 놈은 끝내 당신을 보호해 주지 못할 게요. 칼끝에 운명을 맡기고 사는 처지에 내가 감히 누구를 돌보아줄 수 있겠소?" "알아요! 다 아니까 날 내치지만 말아 줘요." "당신을 내친다고, 내가?" 초사영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차라리 그럴 수 있으면 좋겠소." 그는 물기를 머금은 듯 촉촉한 소소의 입술 위에 가만히 자신의 입술을 얹었다. 이어 그의 혀끝이 부드럽게 치아를 훑어가자 그녀는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아아........" 초사영은 혀로 소소의 속눈썹을 부드럽게 애무해 갔다. 아울러 그녀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도 그 때에 알아 차렸다. "소소.......!" 흔들리는 그의 눈이 그녀의 젖은 눈을 바라보는 동안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자리에 겹쳐


누웠다. ........ 여체(女體)는 불새인양 뜨거웠다. 하지만 그녀를 덮어 누르는 사내의 열정은 훨씬 더 격렬하여 활화산과도 같았다. "사영, 사영.......!" 소소는 그 열정의 주인을 끝없이 부르며 그대로 몸이 타서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려도 좋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손이 무언가를 움켜쥐듯 마구 허공을 휘저을 때, 초사영은 그녀의 안에서 화려하게 폭발할 수 있었다. '소소, 내 여자........' [2] 소하 강(蕭河江). 폭이 넓지 않아 샛강에 가까울 정도이다. 수심(水深)만은 꽤 깊어 대형 범선을 제외하면 웬만한 배들은 수용할 수 있다. 이곳 소하 강에서 유람선이 떠다니는 광경은 언제라도 흔히 보게 된다. 수면은 가볍게 부는 바람에 낮은 찰랑임을 보이고 있었다. 잔물결 위에 한 척의 유람선이 떠 있었다. 그 규모는 그리 크지는 않았으나 일견하기에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돛은 단청(丹靑)이라도 매긴 듯 요란스런 색채를 띄고 있었고, 뱃머리를 비롯해 전면이 흰색으로 칠해져 있어 호사스러움과 더불어 독특한 풍류까지도 엿볼 수 있는 배였다. 여인의 규방에서나 봄직한 주렴들이 선실이며 선상 곳곳에 드리워져 있었는데, 하나같이 오색의 패옥들로 이루어져 있어 유람 나온 대부호의 배인 듯도 했다. 그렇다면 의당 수행자들을 위시하여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려야 하거늘 배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휘익! 선상으로 하나의 인영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입가로 가느다란 혈흔을 내비치고 있는 그 인영은 여인이었다. 상관운봉. 초사영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살인각주였다. 그녀는 인기척이 없다는 점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배 위에 내려서자마자 선실 쪽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선실로 통하는 길은 목조계단으로 되어 있었다. 다만 선실의 문만은 육중한 철문인지라 굳게 닫혀 있고 보니 뭔가 비밀을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상관운봉이 들어서자 선실 안에는 의외로 한 사람이 더 있어 그녀를 맞이해 주었다. "아니, 아가씨! 어찌된 일이에요? 이 모습은.......!" 그 사람이란 상관운봉의 시비였다. 놀라는 소녀의 말마따나 상관운봉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입가에 남아 있는 핏자국 외에도 그녀는 안색이 형편없이 초췌해진 데다가 의복도 군데군데 찢겨져 있었다. "아가씨........" 마음 약해 보이는 시비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고였다. 그것을 보자 상관운봉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으니 염려하지 말아라. 그보다 흑부주께 연락을 드려라. 내가 만나 뵙기를 청한다고." 무슨 일에든 고분고분할 것 같은 시비가 왠지 그 말에는 머뭇거릴 뿐 대답이 없었다. 실제로 그녀는 이제껏 주인이 명령을 내리면 한 번도 우물쭈물해 본 적이 없기도 했다.


상관운봉은 그제서야 기이함을 느꼈다.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 그러고 보니 은잠시킨 수하들도 없지 않은가?' 놀라움은 커다란 불안감으로 연결되었다. '필시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다.' 그녀가 막 그러한 판단을 내릴 때였다. "오랜만이오, 각주." 어디선가 낭랑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상관운봉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어떤 놈이?' 이 배는 기실 상관운봉의 특별한 거처였다. 그녀는 종종 새로운 계획을 구상하거나 진행되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오늘처럼 아무도 모르게 혼자 들러 머리를 식혀 가곤 했다. 현재는 그렇지 못하지만 이 배는 늘상 그녀의 수하들이 은밀하게 지켜 왔는데, 그 수하들이란 모두 여인들이었다. 따라서 사내의 음성이란 이 안에서는 들을 수 있는 게 아니건만 누군가 허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것이었다. "누구냐?" 묻는 음성만은 침착하게 흘러 나왔다. 아무리 상황이 몰렸다 해도 그녀는 어디까지나 당대의 살인각주이므로. 선실의 입구 쪽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손에 섭선을 든 채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띈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상관운봉은 그를 보자 고운 안면을 씰룩였다. "옥사후!" 과연 그 미공자는 천궁비영의 부영주인 옥사후였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누가 권하기도 전에 선실 한가운데 있는 의자에 가 앉았다. "반갑구려." '감히!' 상관운봉은 이곳까지 찾아와 제멋대로인 그의 태도가 심히 불쾌했으나 일단은 내색치 않고 용건부터 물었다. "이곳엔 왜 왔죠?" 딱딱한 그녀의 어조에 비해 옥사후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유야 달리 무엇이 있겠소? 나는 청부자이고 그대는 내 청부를 받아들인 사람이니 뻔한 것 아니오?" 그는 황금 오십만 냥을 걸고 초사영을 죽여 달라고 청부한 장본인이었다. 그러니 그 일에 관한 한 진척 사항이나 결과에 대해서는 언제고 물을 권리가 있다고 보아야 했다. 상관운봉은 곱지 않은 투로 물었다. "꼭 여기여야 했나요? 그렇지 않고도 연락이야 얼마든지 취할 수 있었을 텐데. 이곳은 내 개인 처소예요." 옥사후는 나직이 웃었다. "후후후......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오." "그야 당신 생각이겠고, 난 달라요. 일의 결과만 해도 난 당신에게 보고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요. 설사 실패를 하더라도 애초의 약조대로 청부금의 두 배를 상환하면 그만이니까. 어서 돌아가 주세요." 축객령은 그에게 통하지 않았다. "당신은 실패를 늘 그런 식으로 무마하오?" "뭐, 뭣?" 상관운봉은 만면에 노기를 드러냈으나 곧 기세를 거두었다. 어차피 칼자루는 상대방이 쥐고 있으니 말이다.


"실패한 건 시인하겠어요. 하지만 그것은 일차적으로 그렇다는 얘기고, 표적은 반드시 제거될 거예요. 내 한 달 안으로 그 자의 수급을 취해 당신에게 보내겠어요." 빙글거리던 옥사후의 음성이 문득 싸늘하게 변했다. "지금 나하고 장난하자는 건가?" 반말로 나오는 그를 상관운봉은 놀란 눈으로 응시했다. 그러나 옥사후의 말투는 바뀌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약속 기일은 분명 오늘이었다. 더구나 천궁비영의 부영주로써 황금 오십만 냥을 싸들고 직접 청부를 맡길 정도라면 이 일이 얼마만한 비중이 있는지도 모르지 않을 텐데?" 상관운봉도 더 이상은 참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실패를 만회할 재주는 내게 없다. 청부금의 두 배를 돌려주는 것밖에." "넌 청부금도 반환하지 못 한다." "무슨 소리냐? 네가 뭔데 그런 말을........" 그녀의 말은 옥사후에 의해 중도에 끊기고 말았다. "나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가지고 있던 자격을 박탈당한 건 바로 너다." "뭣이?" "넌 이제 살인각주도, 흑풍사의 살수전주도 아니다. 빈 껍데기만 남은 초라한 계집에 불과하지. 아닌가?" 상관운봉은 아무 말도 못하고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이 자가 그런 사실들을 어떻게?' 옥사후는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 "이전에도 너에게는 실질적인 권한이 없었다. 그 청부를 수락한 것만 해도 네 결정에 의해서가 아니었지. 사주를 대신하여 흑부주의 허락이 떨어졌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닥쳐! 네가 어째서 거기까지 상관하는 거냐?" 격분하는 상관운봉을 향해 그는 잘라 말했다. "난 그 이상도 상관할 수 있다." "헛소리!" 꽝! 상관운봉은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그 덕분에 분위기는 약간 누그러졌지만 옥사후는 말을 그치지 않았다. "중요한 사실은 흑부주가 청부금의 반환을 거절할 거라는 점이다. 그 와중에서 너는 목숨을 부지하기도 바쁠 테고." "뭐라고?" 상관운봉의 안색이 일변했다. 능히 나올 법한 얘기였다. 그녀야말로 흑부주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일에 실패해 그녀는 살인각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흑부주는 필경 그 책임을 물어 그녀를 제거하려 들것이다. 그녀가 죽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 말고도 또 있다. 우선 청부를 받은 자가 그녀인즉 흑부주는 그녀를 제거함으로써 슬며시 발을 빼고자 할 게 틀림 없었다. 그래야 오십만 냥의 두 배에 해당되는 배상금을 물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다음으로 파천황과 살인각의 적대 관계 해소를 위해서도 희생양은 필요했다. 내막이야 어떻건 양측 다 흑풍사 예하의 조직이면서 암투를 벌인 꼴이 되었으니 일을 조용히 마무리 지으려면 한 쪽은 사라져 주어야 했던 것이다. 상관운봉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결과적으로 내 이용가치는 끝났다는 뜻이다. 게다가 흑부주는 초사영을 흑풍사로 끌어 들였으면서


이면으로는 그를 없애는데 동의하지 않았는가? 그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나를 살려두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녀는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내게 뭘 원하는 거냐?" "후후...... 이제야 대화가 제대로 풀리는군." 옥사후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난 너에게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손해만 입었다. 앞으로도 백만 냥을 돌려 받거나 초사영을 척살하기는 글렀지." "으음........." "하지만 아쉬운 바는 없다. 솔직히 이렇게 될 경우도 어느 정도는 예상을 했었으니까." 그의 입가에는 더욱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너는 지금부터 손실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즉, 그에 상응하는 정보를 내게 제공해야 할 것이다." "미쳤구나! 내가 거기에 응할 것 같으냐?" "아직도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가 본데, 후후...... 유감스럽게도 너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래도 거절한다면?" "후회할 것이다." 옥사후는 잘라 말했고, 그 뒤로 이어진 것은 비명이었다. "아악!" 그 비명 소리의 주인은 상관운봉의 시비였다. 어디서 날아 왔는지 시비의 가슴에는 한 자루의 검이 깊숙이 꽂혀 있었다. "죽일 놈! 모두 계획적이었구나?" "아마도." 옥사후는 태연스레 대답하더니 밖을 향해 외쳤다. "다들 들어오시오!" 그 말에 따라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듯 일단의 혈포인들이 선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의 숫자는 정확히 열 명이었다. 개중 한 명이 시비의 가슴에서 검을 쑥 잡아 뽑았다. 파아아― 핏물이 튀어 흰색으로 치장된 선실 안을 더럽혔다. "자, 선물이다." 한 혈포인이 웬 마대 자루를 그녀 앞에 휙 내던졌다. 자루가 열리며 몇몇 개의 수급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그것은 상관운봉의 명에 의해 배를 지키던 수하들의 머리통이었다. "우우...... 죽일 놈들!" 상관운봉은 격노하여 치를 떨었고, 그 사이에 혈포인들은 유령처럼 움직여 옥사후의 뒤로 가 시립했다. [3] 옥사후가 그들을 돌아보며 소개했다. "이들은 혈영사(血影蛇)라고 하는데 이번에 그대를 위해 특별히 초빙한 인물들이다." 그 한 마디는 놀랍게도 당금 살인각주인 상관운봉의 기세를 단번에 꺾어 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혈영사라는 이름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옥사후는 득의만면하여 덧붙였다. "이 정도면 내가 너를 얼마나 후히 대접하는지 알 것이다. 네가 범상한 인물 같았으면 이들까지 동원하진 않았지." 상관운봉은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의 눈에는 벌써부터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지옥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혈포를 바닥까지 내려뜨린 채 무심히 서 있는 자들, 그들의 눈빛에서는 조금도 인간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굳이 정의하자면 피에 굶주린 야수의 그것과 같다고나 할까? 각기 손에 무기 말고도 채찍과 인두를 들고 있는 그 자들을 일컬어 무림인들은 말한다. ― 고문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여, 혈영사를 부르라! 그들은 시체의 입이라도 열게 만들지니. 그러한 일 편의 경구가 대변해 주듯 혈영사는 고문술의 전문가들로써 그들의 손에 걸렸다 하면 어떤 사람이건, 여하한 비밀도 털어놓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 한다. 그들에게 맡겨지면 죽음은 차라리 행복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들을 향해 옥사후의 냉혹한 음성이 떨어졌다. "시작하시오." "아아아악―!" 상관운봉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비명 소리가 선실 안을 울렸다. 고문은 윤간(輪姦)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대개 기질이 드센 여인은 육체적 고통에도 잘 꺾이지 않게 마련인데, 혈영사는 고문의 대가들답게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상관운봉은 반항을 하다 주로 안면을 얻어 터져 다른 사람처럼 보였고, 하체는 피곤죽이 되어 있었다. "흐으으...... 개만도 못한...... 놈들.......!" 그녀의 비명 소리는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기진맥진하여 의식을 잃어가고 있다는 얘기다. 옥사후의 차가운 음성이 그 위로 떨어졌다. "이 단계를 실시하시오." "아아악―!" 상관운봉은 단단히 결박지어져 있는 상태에서 튀어 오를 듯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어쩌겠는가? 그녀의 비소(秘所)를 드나드는 것은 이제 채찍의 손잡이와 벌겋게 단 인두인 것을. 옥사후는 처음부터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조용히 그녀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입가에는 어느 때부터인가 잔인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난 앞으로 이보다 더한 짓도 사양치 않겠다. 아니, 어쩌면 이 편이 나를 눈에 들어 하지도 않는 사부의 비위를 맞추느라 애쓰는 것보다 훨씬 편한 노릇일 수도 있지.' 원래 옥사후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정한 위인이었는지, 혹은 사부에 대한 반발심으로 인해 그렇게 까지 변질이 되었는지는 그 자신도 잘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가 이 순간에 향후로 나아가게 될 노선을 완전하게 결정지었다는 사실이었다. "흐으으으........" 인간이되 인간이랄 수 없는 혈인(血人)이 신음을 흘려 내고 있었다. 여인이 아니게 된 지는 벌써 오래 전이다. 상관운봉. 그녀의 모습은 한 마디로 처참했다. 무림에서 잔혈인(殘血人)이라 불리는 혈영사 중 일 인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옷은 한참 전에 벗겨져 바닥을 뒹굴더니 핏물이 튀어 본래의 색깔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옷이 그 정도일 때 그 옷에 감싸여 있던 그녀의 몸이 어떤 지경인지는 달리 형용할 길이 없다. 짓이겨진 혈구(血軀)라고 밖에는. 언제 옮겨왔는지 선실의 한가운데에는 석 자 가량의 좁은 탁자가 놓여 있고, 상관운봉은 그 위에 눕혀져 있었다. 피곤죽이 된 그녀의 머리와 팔다리는 탁자 밖으로 늘어뜨려져 있었는데 멋대로 흐느적거리는 것으로 보아 균형을 지탱해줄 뼈대나 근육마저도 으스러진 것 같았다. 인간이 인간을 그런 상태로까지 망가뜨려 놓는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잔혈인에게는 그것이 상식이었으니 아주 그다운 고문의 흔적이랄 수 있었다.


그러고도 고문이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크흐흐.......!" 만족스런 웃음을 흘리며 다가드는 잔혈인의 수중에는 작은 쇠꼬챙이가 들려져 있었다. 그것은 상관운봉의 얼굴 쪽으로 가 뭉개진 안구 속으로 쑤시고 들어갔다. "으으으.......!" 그녀는 역시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신음으로 대신했다. 만신창이가 된 그녀의 몸뚱이가 무섭도록 큰 떨림을 보였다. "그...... 그만.......!" 마침내 상관운봉은 항복을 선언했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버틸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가 희망하는 바는 단 한 가지, 어서 이 고문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무엇이든...... 다 말하겠다." 체념이 깃든 그녀의 말에 잔혈인은 옥사후를 힐끗 돌아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의향을 물은 것이었다. 옥사후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을 좌우로 저었고, 그에 따라 고문은 재개되었다. 푹! 쇠꼬챙이가 상관운봉의 남은 안구를 쑤셨다. "으으으....... 죽여...... 줘.......!" 그 애원을 듣고도 잔혈자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품 속에서 작은 옥병 하나를 꺼내 그녀의 코에 무엇인지 모를 액체를 들이부었다. 이는 그녀가 기절해 있기 때문이었다. "끄르르륵!" 상관운봉은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용수철처럼 펄쩍 뛰어 올랐으나 다시 잠잠해졌다. 그러자 잔혈자는 이번에는 대침을 한 개 집어들더니 그녀의 가슴에 깊숙이 꽂았다. "으으........" 의식은 그렇게 또 강제로 회복되었지만 그녀는 예전의 상관운봉이 아니었다. 살인각주라는 거창한 직함을 지닌 그녀는 고문으로 인해 완전히 죽어 버렸던 것이다. 연속되는 극단의 고통들을 겪게 되자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기능은 마비상태에 이르고 말았으므로. 거기까지가 옥사후가 원하던 지점이었다. 그는 애초부터 상관운봉이 거짓을 지어내어 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으며, 이 때문에 고문에 더욱 완벽을 기했다면 맞았다. 후에 가서 진위를 가리느라 진땀을 빼느니 아예 이곳에서 확실한 답을 얻어 가자는 것이 그의 계산이었다. 옥사후는 보이지 않게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후후...... 이제 저 계집의 입에서 나오는 정보는 틀림이 없다고 봐도 좋으리라.' 때마침 상관운봉의 처절한 음성이 전해져 왔다. "죽여 줘.......!" 옥사후는 비로소 입을 열어 답했다. "좋아, 죽게 해 주지. 그러나 그건 너도 아까 말했듯 내가 묻는 사항에 하나도 빠짐없이 대답을 할 때의 얘기다." "그...... 그래...... 이 고통...... 벗어나게 해 다오." 그는 나직히 웃었다. "후후...... 단순하군.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란 꼭 죽음만 있는 게 아니야. 경우에 따라서 넌 목숨을 건질 수도 있다. 어때, 더 연명하고 싶지 않느냐?" "으으...... 시...... 싫다. 그건........" "호오! 삶이 무척이나 두려워진 모양이군? 하긴 그 지경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어쨌든 좋다.


어차피 너의 생사여탈권은 내게 있으니 그 점만 기억하면 된다." 이죽거리던 옥사후의 음성이 은근해졌다. "너는 지금부터 두 가지를 말해 주어야겠다. 첫째는 흑부주에 관한 모든 것, 두번째는 파천황주에 관해서다. 제대로 답하지 않으면 네 고통은 연장된다. 아주 오래도록........"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흑부주는........" 상관운봉의 꺼져 들어가는 듯한 음성이 실내를 울렸다. 제 20 장 암도진창의 주역으로 [1] 성하(盛夏). 팔 월로 접어들면서 대지는 폭염으로 인해 신음했다.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냇가나 계곡, 버들잎이 길게 늘어져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놓은 곳 등을 찾았다. 그냥 앉아 있다간 열풍에 질식해 버릴 것 같았으므로. 하지만 그 열풍과는 대조적으로 죽음의 싸늘한 기운이 무림 전역을 휘돌고 있기도 했다. 그것은 타는 듯한 무더위를 대번에 식혀 줄 수 있을 정도로 공포스러운 현상이었다. 유구무언(有口無言). 중원무림은 어느 지역을 가도 침묵 일색이었다. 웃고 떠드는 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대다수의 무림인들이 저마다 몸을 사리고자 입 열기를 꺼려하고 있었다. 어제는 풍음곡(風音谷)이 무너졌다. 그들이 어떤 단체이며 누가 세웠느냐는 것 따위는 상관없었다. 무림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막강한 세력을 떨치던 그들이 졸지에 멸문을 당했다는 점뿐이었다. 후에 그들이 흑풍사의 숨겨진 조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전무림인들을 경악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이도 그들의 몰락 그 자체보다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런가 하면 그저께는 쾌음림(快陰林)이 멸절되기도 했는데 관심의 초점은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쾌음림이라는 대문파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외에도 마검방(魔劍幇), 혈영문(血影門), 무영탑(無影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문파들이 무림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며 그들도 전부 흑풍사의 비밀조직임이 밝혀졌다. 그래도 무림은 여전히 침묵을 고수했다. 어느 누구도 연이은 멸문 사건에 대해 용기 있게 거론하려 들지 않았다. 이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 모두가 사건의 개요를 알고 있다는 뜻으로 그들은 머지 않아 일어나게 될 전면전(全面戰)이 두려워 하나같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번 혈겁의 주역은 천궁지회와 흑풍사였다. 천궁지회가 흑풍사의 무림 지부들을 일방적으로 격파시킨 것이었으며, 그 일은 지난 며칠 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루어졌다. 최초의 사건을 들자면 아무래도 살인각의 멸망이리라. 그들이 흑풍사의 살수전이라는데 놀라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암약조직인 흑풍사가 무림에서 그만치 대단한 활동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상황은 더욱 경악을 불러 일으켰다. 파천황의 활약으로 세력 범위를 넓혀가던 흑풍사의 지부들이 살인각을 필두로 차례차례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찌 알았는지 천궁지회가 암중에 숨어 있는 흑풍사의 조직들을 하나씩 찾아내 궤멸시키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 와중에서 파천황의 활동은 전면 중단되었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무림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며 어디로, 혹은 왜 사라졌는지 일체의 후문조차 없었다. 이 사실은 무림인들에게 커다란 의문을 던져 줌과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하나의 불길한 예감을


떠올리게 했다. 이르자면 미래의 혈풍에 대한 전조랄까? 이 시점에서 그들은 흑풍사와 천궁지회가 전면전을 내다보았던 것이다. 당금 무림을 양분하고 있다시피 한 두 거대 세력, 그들이 벌이게 될 대전투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림의 침묵도 그 때문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절망감이 그들 모두에게서 말을 빼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소위 강호대전(江湖大戰)이랄지, 누가 떠들지 않아도 그것이 기정사실로 화해가고 있는 팔 월이었다. 지글지글 끓는 염천(炎天)이 저주스럽기까지 한 계절........ 흑풍사의 총단이 있는 운중산이다. 하늘은 흑운(黑雲)으로 뒤덮여 있다. 금방이라도 장대비가 쏟아져 내릴 듯한 조짐이 엿보인다. 무림에서 이는 혈풍이 이곳 십만대산에 먹구름을 몰아다 놓는 것이다. 날아다니는 새도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철저한 경비가 이루어지고 있는 흑풍사의 총단이다. 그런데 그 위를 떠도는 구름은 마치 향후로 그들이 맞이하게 될 운명처럼 검은빛에서 점차 붉은 빛을 띄어가고 있는 듯 했다. 백여 개를 헤아리는 전각군은 한결같이 살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 사이를 오가는 수많은 흑포인들도 저마다 허리에 병기를 매단 채 안색을 무겁게 굳히고 있었다. 어디서 돌멩이 하나라도 떨어지면 금세 조각내 버릴 듯. 그야말로 혈전지야(血戰之夜)인양 긴장하고 있었으니, 이것이 천궁지회와 천하 쟁패를 다투는 흑풍사 총단의 풍경이었다. 밀실(密室). 흑풍사의 수뇌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정기회합은 아니었으나 비상사태가 발생하여 모두 하던 일을 제쳐 두고 일로 내달아 제 때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아홉 명의 인물이 원탁을 놓고 빙 둘러앉아 있었다. 그 위쪽으로는 전과 마찬가지로 세 개의 태사의가 놓여 있었다. 태사의는 전부 비어 있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이번 회합에서는 흑부주나 사부주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원탁의 한 개 좌석도 공석(空席)이었다. 원래는 십 인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야 정상이었지만 최근 살인각이 붕괴됨으로써 각주인 천살마희가 불참하여 그리 되었다. 그렇다고 좌중에서 특별히 그녀의 안부를 묻거나 궁금해하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천살마희 상관운봉의 존재는 그렇게 쉽사리 그곳에서도 지워져 버린 것이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은 어디까지나 전체를 주도해 나갈 사안일 따름이었다. 일 개인의 신변은 아무 의미도 없었으며 그에 마음을 쓸 만큼 어리석어서도 안 되었다. 배석해 있는 구 인은 하나 같이 침중한 기색이었는데, 이 또한 천살마희라는 한 개체와는 무관하다고 보면 맞았다. 대두혈박은 원탁의 중심부에 서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의례 눈을 감고 있던 그였으되, 오늘은 중대한 발표라도 있는지 긴장된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고 있었다. 좌중의 시선은 당연히 대두혈박에게 쏠려 있었다. 그가 사주를 대행해 회의를 주재해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므로 그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사영. 그도 파천황주로써 그들 구 인 중 한 명으로 회의에 참석 중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기이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작전중지의 명령이 떨어진지 이틀만에 회의가 소집되다니, 이를 어찌 해석해야 하는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은 그 뿐이 아니었다. '이번 회합은 분명 수뇌부의 회의이다. 그런데 파천황의 전사들도 대동하라고 했다. 이것은 또 무슨 의미인가?' 이런저런 의문점들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뇌리를 가득 메웠으나 그로서는 달리 어떻게도 행동을 취할 수가 없었다. 일단은 흑풍사에 소속이 되어있는 고로 상부의 지시대로 그는 파천황의 전사들을 이끌고 왔다. 영문을 모르는 그들은 지금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표면적인 이유 정도는 초사영도 알고 있었다. '도처에서 비밀 조직들이 와해되고 천궁지회가 무섭게 득세하고 있으니 대처방안도 필요하겠지. 그러나........' 그는 뭔가 자신이 모르고 있는 부분으로 인해 계속 편치 않은 심정이었다. 아까부터 전해져 오던 은근한 압박감도 그것과 상당한 연관성이 있으리라 여겨졌다. '파천황은 내 수족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을 총단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무림에서 흑풍사의 존재를 숨기겠다는 의도이기도 하겠으나 일편으로는 내 활동에 제재를 가하려는 뜻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하면, 왜인가?' 초사영은 문득 추리를 중단하고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파고들지 말자. 어차피 화살은 쏘아진 것!' 이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기보다는 쓸데없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 자신이 답답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앞으로도 그의 행로에는 무수한 위험이 뒤따를 것이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번 일도 그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의 입가에는 어느 덧 희미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왜 초조해 하는가? 설사 예기치 못한 위기가 닥친들 지금까지 그래왔듯 돌파해 나가면 될 것을. 겨우 이 정도 상황에 전전긍긍해서야 대계(大計)를 펼칠 수가 없지.' 그제서야 초사영은 느긋한 기분이 되어 의자에 깊숙이 등을 묻었다. 다른 이들처럼 대두혈박에게로 향해진 그의 시선에도 흔들림은 엿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대두혈박이 입을 열었다. "우선 오늘 회합의 취지에 관해 말씀드리겠소." 그가 꺼낸 첫 마디는 언제나 그렇듯 개회 선언이었다. 그 말을 시작으로 좌중은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회합의 논제를 누가 주창했든 그들은 전례로 보아 의견을 내놓는 법이 좀처럼 없었다. 주로 일방적인 결의사항을 듣고 따르는 것이 그들의 정해진 입장이라 할 수 있었다.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사주(邪主)의 특명에 의해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외다." [2] '사주가?' 초사영은 흠칫했다. 그것은 좌중의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여태까지는 이 중 누군가 안건을 올리면 자동적으로 수뇌회의가 열렸고, 사주는 참석하는 정도로 그쳤을 뿐이다. 그가 회의를 소집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두혈박은 좌중의 반응을 무시하고 거침없이 말했다. "지금부터 노부가 말씀드리는 사항은 사주의 뜻인즉 그렇게들 아시기 바라오." 말마따나 사주의 뜻이라면 논의는 더욱 필요치 않았다. 사실상 어떤 지위에 있건 흑풍사에 몸담고 있는 인물들에게 있어 사주의 존재란 신(神)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여기에 모인 수뇌급 인물들 중에서도 진면목을 아는 사람이 없으리만큼 그는 철저히 베일에 가리어져 있었다.


그가 직접 명령을 내리는 예도 거의 없었다. 대부분 다음 서열인 흑부주나 사부주를 거쳐 하달되곤 했었다. 말하자면 사주는 막후에서 일의 진척 상황을 지켜보기나 하는 무소부지의 상징적인 입장으로 일관해 왔다. 흑부주나 사부주도 신비를 다 벗은 것은 아니었다. 가끔씩 수뇌부의 회합에 참석하여 위엄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들도 얼굴을 공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때문에 그들에 관해서 모르는 자가 태반이었다. 예컨대 흑풍사에 가입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들은 사주를 비롯하여 흑부주와 사부주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인지에 대해서 의심을 품을 정도였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흑풍사라는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자들은 그들 세 사람을 동일 인물이라고까지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수뇌회의를 통해 그들이 개별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진작 밝혀졌으며, 이제는 그 권위가 확인되고 있는 셈이었다. 이는 수뇌들의 숙연한 표정만 보아도 능히 알 수 있었다. 각자 일 각에서 나름의 위세를 떨치고 있는 그들이 정말로 신의 전언(傳言)을 듣는 듯한 자세로 앉아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거개가 만면에 경외감을 떠올린 채 대두혈박의 카랑카랑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주께서는 근자에 일어난 일련의 참사에 대해 심히 유감을 표명하셨소. 다들 아시겠지만 본 흑풍사의 세력들이 그렇듯 허무하게 무너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소. 여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들이 대단히 많기도 하오." 좌중의 구 인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일련의 비밀조직들이 와해된 사건에 대해서는 벌써부터 뭔가 의외의 변수가 작용했으리라고 여기던 터였기에. 그 변수에 대해 대두혈박은 결정적으로 꼬집어냈다. "어째서 그런 일들이 가능했을까하고 연구해 보았을 때 결론은 본 흑풍사 내에 배신자가 있다는 것으로 압축되었소. 이는 사주께서도 수긍하신 부분이오." 좌중에서는 들리지 않는 소요가 일었다. 여전히 침묵이었으되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반응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사주도 동의를 표했다는 대두혈박의 말은 그들로 하여금 곧바로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바짝 긴장한 채 옆자리를 힐끗거리는 그들은 표정에는 적의가 담겨 있었다. 살인각의 궤멸을 필두로 한 천궁지회의 득세는 절대 하급자의 배신 정도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흑풍사 내에서도 일급으로 취급되던 기밀들이 새어 나간 것으로 미루어 배신자는 수뇌부 내에 있다고 봐야 했다. 결국 오늘 이 자리에도 버젓이 나와 있을 배신자로 인해 그들 구 인은 각기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들 중 불편한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내 놓고 말하는 자는 없었다. 자고로 죄지은 자가 더 큰 소리를 낸다고 했던가? 그들은 미지의 상대를 경원시 함과 동시에 자신이 의심을 받게 될까봐 미리부터 방어막까지 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답답한 침묵을 깨는 한 사람이 있었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면 군사(軍師)나 사주께서는 그 윤곽도 파악하고 계시리라 믿소만?" 그는 흑혈각주인 혈존(血尊) 곡풍비였다. 곡풍비로서는 싫든 좋든 이렇게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살인각, 아니 살수전을 위시한 사개 전이 형식상 흑혈각의 예하인 이상 혹시라도 그들 간에 불협화음이 일면 그가 가장 먼저 곤란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대두혈박은 더 이상의 언급을 회피했다. "그 문제는 차후에 다시 논의하도록 하겠소. 다들 그렇게만 아시고 지금부터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하겠소."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사주께서는 한 가지 중대한 결정을 내리셨소. 그 배경에 관해 설명하자면 현재 본 사는 무림 표면에 거창하게 노출되기만 했을 뿐 계획의 차질로 인해 일을 추진시키지 못한 상태요. 약간의 수정은 불가피하게 되었소." 대두혈박은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단적으로 이르자면 본 사의 최고 과제였던 무림 제패를 당분간 보류한다는 뜻이외다." 좌중 인물들의 안색이 일변했다. 흑풍사가 오늘날까지 암약을 하던,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던 대두혈박의 말처럼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던 것은 어디까지나 무림의 패권장악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보류하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어떤 일을 추진하건 뚜렷한 목표가 없이는 거동이 어려울 뿐더러 수하들을 다루기도 그만큼 쉽지 않을 게 뻔했다. 이렇다 보니 사주의 뜻이라는 강력한 단서가 붙어 있기는 했으나 좌중의 동요가 큰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초혼전주인 음혼군 목위영이 한 마디 했다. "군사! 사주께서 그러한 결정을 내리셨면 하좌들은 따를 수밖에 없소이다. 그러나........" 그는 서열이 서열인지라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인 듯 좌중을 한 번 스윽 둘러본 후에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작금과 같은 상황만 해도 절로 이루어진 게 아니오. 뜻하지 않은 손실이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이처럼 잠적한 상태에서 주저앉게 되면 결과는 더 나빠지오." 대두혈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럴 수도 있겠지." "우리는 계속 전진해야 하오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간에 기껏 쌓아 놓았던 기반들을 통째로 날려 버리게 될지도 모르오. 청컨대 군사께서는 이 점을 유념해 주시기 바라오." 좌중의 인물들도 그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흑풍사는 근자에 들어 여러 개의 지부를 잃기는 했으나 여전히 삼각무림의 일각을 차지하고 있어 거대 문파로서의 위용에는 별 문제가 없다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뻗어나갈 길은 한 가지였다. 목표의 중단이란 길든 짧든 불붙었던 그들의 야심에 찬 물을 끼얹는 일이므로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보아야 했다. 대두혈박. 심기가 깊은 이 위인은 좌중의 의도를 읽어냈으며 더도, 덜도 아닌 꼭 한 마디로 그들의 불만을 종식시켰다. "사주의 뜻이오." 그 말은 분명 아까도 들었고 그에 대한 이의도 제기되었다. 하지만 재차 거론되자 또 다른 비중으로 좌중을 압도해 버렸다. 더는 누구도 감히 토를 다는 자가 없었다. 요컨대 사주의 뜻을 거스를 자신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최소한 사주라고 불리는 신(神)의 역량을 능가하기 전에는. 대두혈박은 그들을 보며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도 실은 그들과 같은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사주의 뜻을 핑계 삼아 그들을 누르긴 했어도 그가 사주는 아닌 것이다. '불만이란 하등 쓸데가 없지. 필요한 건 오직 복종........' 대두혈박에게도 흑풍사의 율법은 동등하게 적용되었고, 이런 때의 그는 누구보다 참담할지도 몰랐다. 당대 제일의 지략도 복종을 요구하는 거대한 힘 앞에선 펼칠 수가 없으므로. 그를 포함하여 좌중의 침묵은 종전보다 길었다. 그 긴 침묵의 끈이 끊어진 것은 한 줄기 음산한 음성에 의해서였다.


"군사, 한 가지만 여쭙겠소." 말을 꺼낸 사람은 악마전주인 악마천자였다. 그의 얼굴은 혈색은 고사하고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무덤에서 갓 튀어나온 듯한 괴기스러운 모습이었다. "칠십이로 암흑마군도 활동을 중단하게 되는 것이외까? 그들은 애초부터 다른 조직들과는 달리 무림 표면에 공개한 세력이었으니 그럴 필요가 없지 않소이까? 이 시점에서 그들을 시켜 천궁지회의 공세에 반격을 가하면 어떨지, 적어도 피해에 대한 응분의 대가만큼은 지불해야 될 것 아니오?" 이는 지극히 악마천자다운 발언이었다. 정황이 달라져 휴지기를 맞이하는 입장이 되었을망정 피 값을 치뤄야 할 대상만큼은 속시원하게 쓸어버리자는 제안이었다. 그것은 일편 타당한 논리이기도 했다. 그들이 목표에서 한 발 물러서 있는 동안 천궁지회가 더 세력을 키워 놓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훗날 그들 자신에게 치명타가 될 수도 있었기에. 대두혈박은 오히려 그에게 물었다. "그럼 변황과 철련은 염려 안 해도 되오?" "흠?" 악마천자는 움찔 놀라더니 잠잠해졌다. 시커먼 안색이 붉은 기를 띄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는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 꽤나 수치스러워하는 듯 했다. 그의 직속 상급자인 흑혈각주 곡풍비가 쓰게 읊조렸다. "맞소. 그들도 견제해야겠지." 덕분에 악마천자는 고개까지 떨구게 되고 말았다. 그를 보며 대두혈박은 입가에 희미하게 기소를 매달았다. "칠십이로 암흑마군은 늘 대기상태로 있어야 하오. 변황은 그래도 낫지만 철련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오." "으음........" "더욱이 철련은 요즘 들어 묘한 양상을 보이고 있소. 그들 중의 몇 몇은 전례를 깨고 강호에 출도했소. 이는 확인된 사실이니 틀림없을 게요." [3] 초사영의 뇌리에 불현듯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웅장한 폭포를 부수던 흑의노인........ 내게 철련으로 오라 했었지. 그도 근자에 출현했다는 철련측 인물이리라.' 그는 새삼 흑의노인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도 모르는 그 노인은 초사영에게 있어 가볍게 지나칠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쓰디쓴 패배감과 더불어 종국에는 귀중한 깨달음을 얻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든 한 번쯤은 부딪치게 되겠지.' 초사영은 하나의 지난한 과정을 지난 만큼 매우 담담한 심정으로 노인과의 재승부를 기약하고 있었다. 다시 맞닥뜨리게 되면 절대 지지 않으리라는 신념과 함께. '그 동안 나도 부지런히 힘을 배양해야 한다. 그럴 만한 여건이 주어질지는 미지수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양 주먹을 불끈 말아 쥐는 그였다. 그의 동상이몽(同床異夢)과는 별개로 좌중의 인물들은 침음하고 있었다. 개중 두 세 명은 초사영과 마찬가지로 철련과 모종의 부딪침이 있었던지 실눈을 뜨고 기억을 더듬는 듯 했지만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이 자리에 모인 자들로 이르자면 제각기 천하에서 내노라 하는 절정의 고수들이었다. 이런 인물들에게 고심을 안겨줄 정도라면 철련이 당금 무림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는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철련이 무림에 등장한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연혁에 비해 그들이 남긴 흔적들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것도 개개인이 모두 무의 최고 경지를 이루려는 자들이므로 소위 초강의 무인 집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마 이 추세로 가다가 당세에 절대무존(絶代武尊)이 탄생하게 된다면 그는 십중팔구 철련 출신이리라. 그들은 외부의 일에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무도만을 추구하니까. 몇 년 전인가,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등에 거무튀튀한 철검(鐵劍) 하나만을 달랑 멘 보잘 것 없는 위인이었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무림인들이 느낀 소감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얼마쯤 시간이 지나고 나자 사람들은 그에 대한 판단을 바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철마(鐵魔). 그의 호칭도 당연히 그렇게 바뀌었다. 그것은 그가 무림을 종횡하기 시작한지 약 일 년 정도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그 당시의 그는 속칭 철검신화(鐵劍神話)라고 불리는 희대의 괴사를 창출해내고 있었다. 정도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무당의 해검대(解劍臺)가 그의 검에 꿰이는 수모를 겪었고, 사도의 종주를 자처하던 사혈묵존(死血墨尊)은 불과 십 초만에 수급이 날아갔다. 이를 필두로 무수히 이어진 일련의 행각들은 결과적으로 철마가 어떤 능력을 가진 위인이며, 그런 초고수를 배출해낸 철련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절감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아직도 철련의 실체에 관해서는 무림에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러나 단 일 인에 의해 평가된 것만으로도 철련의 저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참 후에야 알려진 일이지만 철마는 철련의 핵심고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여준 무위는 가공지경이었으니, 무림인들은 두려움을 갖게 된 나머지 철련이라는 조직체에 대해 더 이상 알기를 거부했다. 여타의 무림 단체들은 상층부의 몇몇 인물들을 제외하면 대개 단합된 힘으로 우위를 과시하게 마련이나 철련은 각 개인의 실력이 전 무림을 휘저을 정도로 막대했던 것이다. 오죽하면 항간에는 이런 말도 떠돌았다. 철련의 인물들은 무공의 극의(極意)를 깨닫고자 전념하다 보니 도인이나 불자처럼 은원(恩怨)조차 초탈해 버렸다는. 실제로 그러한지야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대충 거기에 유사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을 철련은 어쩌면 현 무림과 별개인 제 이의 무림계인지도 몰랐다. 아무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는 특이한 영역을 그들은 구축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두혈박이 입을 열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제위들께선 너무 비관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시오." 좌중의 시선은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철련이 상상을 불허하는 힘을 소유하고 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들은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오. 그들에게는 궁극적인 목표가 없소." 십육은밀사단주인 죽혈자가 그 말을 받았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오? 당분간이긴 하겠지만." 대두혈박은 고개를 저었다. "엄연히 다르오. 그들은 무엇보다 이 쪽에서 먼저 건드리지 않는 한 위협이 될 요소가 적소. 하나, 둘 무림에 모습을 내보이는 것을 보면 앞으로 어떤 노선을 탈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현재까지는 그렇소이다." 그는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께서는 이 차제에 오히려 분발해야 하오. 본 사는 얼마간의 기간만 지나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진 힘으로 무림 전역을 질타하게 될 것이오." 죽혈자가 김이 빠진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엇으로 더 강해진단 말씀이외까? 사주께서 혹시 새로 인원을 보강하실 계획이라도 가지고 계시면 모를까." 잠자코 있던 풍령패도 사도린이 처음으로 나섰다. "바로 그것이외다." "흐음?" 대두혈박이 흥미롭다는 듯 그를 응시했다. "암흑마군주께선 무엇을 생각하고 계시는지?" 사도린은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이며 정중히 답했다. "노부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지난 번 회합에서 들은 바에 의거한 것이외다. 사주께서는 이 기회를 통해 철련의 힘을 흡수하고자 하실 터, 결국 같은 맥락이라 사료되오." "아!" 좌중은 그제서야 잊고 있던 부분을 떠올리며 신색을 정비했다. 그 당시에 그들도 똑똑히 들었었다. 철련주의 자리를 흑풍사에서 획득해야 한다는 놀라운 발언을 말이다. 거기에 비추어 계산을 해 보면 흑풍사는 목표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최대의 도약기를 갖게 되는 셈이었다. 대두혈박이 사도린에게 슬쩍 농을 던졌다. "암흑마군주께선 그 간 다른 방면에서 진전을 보셨구려? 자칫하면 이 대두혈박이 군사 자리를 내놓게 생겼소." "별 말씀을." 사도린은 짧게 응할 뿐 이후로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며 초사영은 착잡한 기분이 되어 중얼거렸다. '사노선배의 진정한 속셈은 무엇일까? 나와 뜻을 같이 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떤 때는 딴 사람이 되기도 하더니, 흑풍사 내에서도 불투명한 태도를 보이는군. 늘상 대세는 가장 빨리 읽어 내면서도 사견(私見)은 드러내지 않고........' 어쨌든 사태는 점차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에 초사영은 나름대로 생각을 정돈해 갔다. '흑풍사 내에서 나는 고립되어가고 있다. 현 위치에 오르기까지에는 사노선배나 흑부주의 입김이 작용을 했지만 애초부터도 그 두 사람은 나를 도우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사주는 아마도 이제부터 발 벗고 나설 모양인데 철련이 과연 그의 뜻대로 움직여질지?' 초사영은 그 점에 관해서는 다분히 회의적이었다. 여태까지도 사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흑풍사 내의 다른 이들처럼 그를 신으로 여기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철련주의 자리를 차지하든, 철련의 세력을 흡수하든 그 발상만은 정말이지 감탄스럽다. 만일 그것이 현실화될 수만 있다면 천하제패는 시간 문제일 테니까.' 그에 반해 좌중은 어느 덧 희열에 들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기대에 부풀이 있었으니, 과연 그들과 초사영 중 어느 쪽의 관점이 타당한지는 넘겨짚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초사영이라는 위인만 해도 광오하기로 치자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경위야 어떻든 무림 출도의 이유 자체가 천하를 수중에 거머쥐는 일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따라서 흑풍사주의 능력은 그가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상 그의 예상을 훨씬 웃돌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는 짐짓 공손한 투로 물었다. "사주께서는 구체적인 복안도 가지고 계십니까?" "흠, 의당 그러시겠지만 말씀은 없으셨소." 대두혈박은 짧은 대답으로 그의 질문을 일축시켜 버렸다. 모르는 바에 대해서도 그저 잠자코 있으라는 의미였다.


사도린이 힐끗 초사영을 응시했으나 그도 말이 없었다. "자! 이 정도면 회의는 마쳐도 될 듯 하오. 제위들께선 각자 제 위치로 돌아가 있도록 하시오. 개별적인 전달사항이 있을 시엔 따로 연락이 갈 것이오." 대두혈박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떴다. 좌중의 인물들은 약간씩 흥분을 내비치며 실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초사영도 그 틈에서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으나 사도린에게는 의도적으로 일별도 고하지 않았다. 사도린 쪽에서 그를 불렀다. "잠깐, 파천황주께서는 기다리시게." '왜?' 초사영이 가만히 있자 사도린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리 곱지 않은 말투에 사도린은 껄껄 웃었다. "허허...... 그건 나도 모르지. 자네를 청한 분이 계시네." "누가?" "흑부주시네." 초사영은 흠칫 했으나 내색치 않고 담담히 물었다. "부주께선 어디 계십니까?" 사도린의 시선이 한 쪽을 가리켰다. [4] 그가 있는 곳은 광장이라 해도 좋을 만큼 넓었다. 그 크기는 어림잡아도 팔십 평쯤으로 중앙부는 오목하게 들어가고 주변이 솟아 있는 구조였다. 또한 둥근 형태로 솟은 그 곳은 위에서 아래로 계단처럼 층이 지어져 있었다. 그는 거기서 의자를 놓고 앉아 무엇인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대상은 한창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는 두 마리의 개였다. 한 마리는 흑견이고, 한 마리는 황견이었다. 크르릉―! 포효와 함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흑견이 막 황견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던 것이다. 그는 그 끔찍한 광경에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는 투견들의 싸움 장면을 무척 즐기는 것도 같았다. 뚜벅, 뚜벅........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그의 시선이 비로소 개들로부터 떼어졌다. 입구 쪽으로부터 한 인영이 걸어오고 있었다. 점차 그와 거리를 좁혀오는 그 자는 초사영이었다. 그는 시선을 원위치로 돌려 개들의 격투를 감상했다. 그를 향해 초사영이 말을 건네 왔다. "취미십니까?"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아름다운 광경이 아닌가?" 초사영은 할 말을 잃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크르릉! 크르르르........ 쉬잇! 개들의 혈전(血戰)은 점입가경이었다. 황견을 물어뜯었던 흑견의 목에도 어느 새 이빨 자국이 깊게 나 있었다. 사고력이 부족한 두 마리의 개는 철망으로 둘러 처져 있는 작은 공간에서 죽기살기로 맞붙고 있었던 것이다. '저것을 보고 아름다운 광경이라고?'


초사영은 상대의 말에 공감하고자 애를 써 보았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때마침 흑견이 황견의 뒷다리를 물어 피는 또 튀었고, 그 바람에 그는 눈을 돌려야 했다. 그로서는 도저히 그 광경을 아름답게 보아줄 수가 없었다. 적어도 미(美)를 판단하는 그의 기준만은 이런 처절함이나 역겨움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황견은 그 자리에서 몇 바퀴나 뱅글뱅글 돌았다. 깨개갱.......! 뒷다리의 아픔을 호소하는 그 찢어질 듯한 비명은 정말이지 들어줄 게 못되었다. '어차피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살아 남기 위한 싸움을 한다. 하지만 그것을 구경하며 미를 부여한다는 건.......!' 그와 가치기준이 다른 상대, 즉 흑부주가 말했다. "아름다운 것이다. 생명을 걸고 싸우는 일은." 그 음성은 마치 혼자 중얼거리는 듯한 것이었다.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죽는다. 다른 놈에게 물어뜯긴 끝에 고통과 패배감을 느끼며 죽게 되는 것이지." 초사영이 물었다. "고통이야 당연하겠지만 패배감도 느낄까요?" "물론. 저들의 존재는 승리를 위해서이니까." 흑부주의 논리는 비약되었다. "승리란 오늘 날 인간들이 살아온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이기면 많은 것들을 소유하게 되는즉 누구도 승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단, 승리를 쟁취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못되지. 때문에 두려움도 파생되었을 터!"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흑부주의 눈이 문득 강렬한 신광을 내뿜었다. "봐라! 저 개들은 필사적으로 싸운다. 왜인지 아나? 이기는 개에겐 먹이와 휴식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는 쪽엔 죽음이 돌아갈 것도 알고 있고." 그는 초사영을 힐끗 돌아보았다. "황주는 저 개들이 그것을 느끼지 못하리라고 보나?" 대답도 그는 스스로 했다. "아니야, 개들도 안다. 한낱 짐승임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그것을 분명히 알지. 인간들만이 알지 못할 뿐이다. 그런 자들을 약자라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게야. 힘이 없어 얻을 것을 기대하지도 못하는 인간의 군상들, 허허허........" "으음!" "보게, 얼마나 좋은가? 이 세상은. 힘을 갖추게 되면 무엇이든 원하는 바대로 취할 수가 있지." 흑부주는 이번에도 넌지시 묻기는 했다.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글쎄요." 짧게 대답한 초사영은 그가 뭐라 더 괴상한 논리를 펼치기 전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를 왜 부르셨습니까?" 흑부주는 낮게 웃었다. "허허...... 전에 비해 태도는 깍듯해졌지만 자네는 여전히 나를 싫어하는 것 같군." "좋고, 싫고의 개념은 초월한지 오래입니다." 초사영은 잘라 말한 뒤, 약간 어조를 높여 다시 물었다.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에 대한 흑부주의 답은 엉뚱했다.


"믿지 않을지 모르나 본 좌는 자네를 좋아한다. 심지어 그 턱없는 오만함까지도." "후후...... 이제부터는 겸손을 가장해야겠군요." "되었다. 난 자네와 적이 되고 싶은 사람이 아니니까." 흑부주는 실소하더니 정색을 지었다. "자, 본론으로 들어가지." 초사영은 내심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직도 흑부주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사주의 결정은 회의를 통해 알았겠지. 그러나 사주의 뜻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무엇이 더 있습니까?" "자네, 암도진창(暗道陣倉)이란 말을 아는가?" 초사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장자방(張子房)이 항우(項羽)를 속이기 위해 쓴 계책이 아닙니까?" "그렇다. 장자방이 사천성(泗川省)으로 이르는 유일한 길을 불태워버림으로써 항우와 싸울 의사가 없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던 것이지." 항우는 사천성 밖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 때에 장량(張良)은 사천성 내에 군사를 주둔시켜 놓고 있었는데, 힘이 모자란 탓에 어떻게든 수를 써 항우로 하여금 밀고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만 했다. 당시 사천성으로 이르는 길은 항우군에 의해 모조리 봉쇄되고 오직 하나의 길만이 남아 있었다. 이른바 잔도(殘徒)라는 것으로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결국 장자방은 고심 끝에 잔도를 불태웠고, 그것을 본 항우는 그가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고 믿게 되었다. 그렇게 항우의 방심을 유도한 장자방은 이후로 은밀한 가운데 군사를 강성하게 길렀다. 그리하여 종내에는 항우를 쳐 승리를 거두기에 이르니 그 계책이 일명 암도진창이었다. 초사영은 미간을 모았다. "제게 그 얘기를 들려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흑부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자네를 좋아한다고." "제가 궁금한 것은 진의(眞意)입니다." 흑부주는 나직하게 웃었다. "좋아, 그것도 말해 주지. 지금 흑풍사 내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이 누구인 줄 아는가?" "모릅니다." "황주 자네다.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사주는 그런 자네에게 특명을 내리셨다." "특명?" "본 사는 진작부터 지하로 잠적해 있는 상태다. 곧 천궁지회에 휴전을 요청할 예정이지. 잔도는 그렇게 불태워질테고 남은 것은 새로운 암도(暗道)를 구축하는 일이다." "하면, 저는?" "황주가 그 일을 해야 한다." "제가...... 말씀입니까?" 초사영은 사뭇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관심을 끈다지만 그 일에 흑풍사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다 젖혀 두고 왜 하필 자신과 같은 신출내기를 지목한단 말인가? 이어지는 흑부주의 말은 더욱 그러했다. "이 일에는 본 사의 미래가 달려 있다. 나는...... 황주가 맡은 바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 내리라 믿는다." "그렇지만........"


초사영이 뭐라 덧붙이려 하자 그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투견장으로 다가갔다. "쯧! 이놈들, 빨리 좀 끝내거라." 투견은 그 때까지도 맹렬히 싸우고 있었고, 초사영은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그의 입가에는 의외로 기이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일이 점점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다음 권에 계속-. 절대무가 제 3 권 표지 제목: 절대무가 제 3 권(전 3 권) 지은이: 검궁인 - 차 례 제 21 장 대기(大器)로서의 발돋움 제 22 장 운명(運命)의 덫 제 23 장 각기 다른 대결의 명분(名分) 제 24 장 승자(勝者)는 없다 제 25 장 철련(鐵聯)의 주인(主人) 제 26 장 초인(超人)에 들다 제 27 장 거인(巨人)의 죽음 제 28 장 결전(決戰) 제 29 장 무검(無劍) 제 21 장 대기(大器)로서의 발돋움 [1] 인간이라 해서 모두가 뚜렷한 삶의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설사 있다 해도 기분에 따라 변하는 경우도 많다. 어차피 살다 보면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게 마련이니까. 그러나 초사영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삶의 목적이란 운명과도 같은 것이어서 신념 내지는 열혈과 오기 등이 뭉뚱그려진 집합체라 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전 생애를 던져서라도 이루어야 할 일이 있었다. 다만 그 일은 꿈이라든가 희망 따위와는 거리가 멀어 처절한 투쟁을 거치지 않고는 달성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절대무가의 마지막 후예라는 운명의 무게는 시시각각 그를 짓누르며 그에게 혈로(血路)도 사양치 말라고 종용한다.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숲 속이다. 쏴아아아―! 폭포수가 빚어내는 요란한 물소리만이 숲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다. 초사영은 거침없이 쏟아져 내리는 그 물줄기를 바라보며 작금에도 다짐하고 있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남은 것은 전력투구일 뿐.' 상황은 늘상 변했다. 그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 절반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예측 불허의 사태로서 그를 당혹시켰다. 하지만 어느 때고 그는 포기를 몰랐으며, 번번이 위기를 하나의 기회로 승화시켜 가곤 했다. 그것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강인함과 무인다운 끈질긴 집념 때문이었다. 초사영은 목적의 궁극에 이르기 위해 몇 단계로 나누어 한 가지씩 침착하게 계획했던 바를 진행시켜 가고 있었는데, 이곳에서의 일도 그 일환이라 할 수 있었다. 쿠르르르― 힘차게 용트림하는 폭포수를 응시하며 그는 읊조렸다.


'저 물줄기는 내게 말한다. 쉬지 말고 돌진하라고.' 스팟! 그의 신형은 어디론가 섬전처럼 쏘아져 갔다. 허름한 모옥 안이다. 겨우 십여 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었으나 그 안은 온통 문서들로 빽빽이 들어 차 있었다. 한 쪽 벽면으로 서화가 몇 폭 걸려 있어 그나마 썰렁함을 덜어 주었다. 짐작컨대 이 모옥의 주인은 상당히 냉철할 것 같았다. 꼭 필요로 하는 것은 지키되 그 외에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는. 아무튼 나머지 세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문서들은 외부로부터 전해져 온 것들이었다. 양이 워낙 많다 보니 책장도 수용의 한도를 넘은 듯 이리저리 휘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방 구석구석에는 미처 다 꽂아 두지 못한 문서들이 이삿짐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기도 했다. 방의 한 가운데에는 네모진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이곳에도 찾아오는 사람은 있는 것일까? 탁자 위에는 주변에 놓인 것들과 비슷한 문서 두 장이 놓여 있었는데 아직 개봉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영주, 문서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보고하는 자는 천궁비영 결각(結閣)의 정진이었다. 그는 정중히 포권한 뒤 몸을 돌렸다. 천궁비영주 군옥명은 정진이 사라지자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탁자 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문서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그 중 한 장의 문서에 고정되었다. 두 문서는 각기 달랐다. 하나는 천궁비영 내의 일급 비밀에 해당된다는 의미로 결각주의 도장이 찍혀 있었으며 나머지 하나에는 흑조(黑鳥)가 한 마리 그려져 있었다. 군옥명의 눈길이 머문 것은 일급 비밀 문서가 아니라 흑조 그림이 그려져 있는 쪽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들었다. "흐음......." 군옥명…은 문서의 내용을 읽는 동안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후 그는 그것을 품 속에 넣더니 다른 문서를 펼쳤다. 그의 입에서는 한 가닥 침음성이 새어 나왔다. "드디어 시작이군." 그 말에 담긴 의미는 컸다. 늘 그렇듯 군옥명이 논하는 바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천궁비영, 나아가서는 무림의 판도에 영향을 미칠 만한 사항들이었으므로. 그 일급 비밀문서는 하나의 정보를 보내왔다. <분류 : 초특급. 내용 : 흑풍사가 휴전을 제의해 왔음. 분석 : 영주의 결정을 요함. - 결각주 -> 문서의 후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적혀 있었다. <별첨 : 지하로 잠적해 들어간 흑풍사가 모종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음. 미확인. 계속 동태를 파악하는 중임.> 일급 비밀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기는 했지만 천궁비영의 정보망은 과연 압권이었다. 그들은 언제, 어떻게 알아냈는지 벌써부터 흑풍사 내에서 벌어지는 일의 윤곽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군옥명이 정작 비중을 두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흑조.......' 그는 모옥 밖으로 나와 품 안에 넣었던 문서를 꺼내 다시 읽어보았다. 그 내용은 지극히 간단하여 그다지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을 듯 하지도 않았다.


<만나고 싶습니다.> 단 한 줄의 글이었다. 한 쪽 귀퉁이에는 약속 날짜와 장소가 적혀 있었지만 그 첨부 사항을 제외하면 말이다. 결국 만나고 싶다는 말 자체가 군옥명을 사로잡고 있다는 얘긴데, 이는 그 상대가 흑조로 불리는 위인인 탓이었다. 그 자는 신비의 베일에 가리어진 존재다. 그러면서도 당금 무림의 천궁비영주인 군옥명으로 하여금 흑풍사의 휴전 제의라는 거창한 논제조차 뒤로 제켜두도록 만들고 있다. "네 쪽에서 벌써 나를 찾아올 정도가 되었다니,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로구나. 허허허......." 군옥명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방대한 화원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가 이제까지 기이한 방법으로 가꾸어 온 화원이다. 거기에는 변함없이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화원의 주인은 물론 군옥명이다. 그는 매일같이 이곳에서 잡초들을 옮겨 심고 물을 주어 가며 소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언제부터인가? 이제 잡초들은 자리를 잡은 채 누구도 뽑아낼 수 없을 만큼 굳건하게 뿌리를 내렸다. 꽃과 나무에 기생하며 양분이나 갈취하던 시절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갔다. 모두가 제 나름대로 떳떳하게 터를 차지하고는 여봐란듯이 쑥쑥 커가고 있었다. 군옥명은 그런 광경을 것을 보는 것이 더없이 즐거웠다. 그는 잠시 머리를 식힐 겸 화원의 이곳저곳을 손보았다. 사실상 그 화원은 그의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군옥명은 최근 들어 의식을 달리 하기 시작했다. 그는 화원을 가꾸며 습관인양 한 사람의 영상을 떠올렸으며, 그 자에게 넘겨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그가 작정한 화원의 새로운 주인은 평소 아껴온 제자도, 신뢰하는 수하들 중 누구도 아니었다. '흑조, 이제부터는 네가 이 화원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때가 이르렀으니.' 사라락! 그의 손등으로 억새풀 하나가 날아와 떨어졌다. '그 아이... 참으로 당돌했었지.' 군옥명의 뇌리에는 그야말로 억새풀처럼 강하고 끈질긴 근성을 지니고 있던 한 소년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래, 넌 칠 년 전에도 나를 감탄시켰었다.' 그가 흑조를 만난 지도 어언 칠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었다. 군옥명은 지그시 눈을 내리 감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2] 백색천하(白色天下). 흐린 하늘을 이고 산하는 흰빛에 잠겨 있었다. 집도, 나무도, 심지어 얼어붙은 강물까지도 눈 속에 파묻혀 본래의 형상은 거의 알아 볼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그 현상은 인근에만 해당된 것이 아니었다. 그 십여 년만에 내린 폭설로 인해 중원 전역이 눈밭으로 화하고 말았다. 그러고도 보족한지 눈발은 계속 허공을 뒤덮고 있었다. 때로 거센 바람까지도 휘몰아쳐 눈보라가 행인들을 무차별로 할퀴어대는 혹한(酷寒)의 날씨였다. 휘이이이잉―! 군옥명은 작은 창문을 통해 대설(大雪)에 잠긴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썹을 가볍게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듣던 대로군.' 눈도 웬만큼 내려야 정취가 있지, 이 정도면 지겨운 법이다. 아닌 게 아니라 한동안 눈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그는 느려터진 행차에 다소 짜증이 일기도 했다. 혹여 폭설로 인한 피해는 없는지 시찰을 하는 중이면서도 제 풀에 지쳐버린 그였다. 하필 공교롭게도 그가 출도한 날부터 눈은 더욱 기승을 부리듯 쏟아져 내렸던 것이다. 이렇듯 그의 행도를 방해하는 굵은 눈발은 언제 그칠지도 알 수 없었다. 하늘이 암회색이니 말이다. 따가닥, 따가닥....... 그가 타고 있는 사두마차는 눈보라 속에서도 전진을 거듭하고 있기는 했다. 눈 덮인 대지 위에 흔적을 남기며. 휘류류류― 때마침 강풍이 불어와 마차 지붕을 덮고 있던 산더미 같은 눈을 쓸어갔다. 하긴 그래서 마차인 줄을 알지, 방금 전까지는 마차가 아니라 커다란 눈덩이가 움직이는 듯 했다. 군옥명은 일편 걱정이 태산이었다. '큰 일이군. 이대로 사흘만 더 내리면 모든 길이 막혀 통행조차 불가능하게 생겼으니.' 그는 휘장을 내리기 위해 손을 뻗다 말고 눈을 약간 치떴다. 멀찌감치에서 뭔가 움직이는 물체를 보았던 것이다. '들짐승인가?' 군옥명은 답답하던 차에 잘 되었다 싶었다. 그는 새카만 점으로 보이는 그 물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는데, 그것은 꾸준히 어느 한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저기 까만 점이 있는 쪽으로 말을 달리라." 군옥명의 분부가 떨어지자 마차는 예의 물체를 향해 다가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형태가 드러나는 그것은 들짐승이 아니라 인간, 아니 어린 소년이었다. '이 추위에!' 군옥명은 호기심을 벗어나 미간을 구겼다. 이제 십사, 오 세 정도 되었을까? 얼마나 오랫동안 걸어 왔는지 소년의 머리 위에는 눈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렇다 보니 눈썹이며, 머리카락에는 체온에 녹은 물줄기가 다시 얼어 고드름이 된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손은 꽁꽁 얼어서 푸르죽죽했고, 발은 눈덩이가 되어 신발이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있었다. 그것은 소년에게서 보여지는 총기였다. 오관이 워낙 정명하기도 했지만 그의 눈빛은 나이와 무관하게 예사롭지 않았다. 휘이이잉―! 거센 눈보라가 한 차례 소년의 얼굴을 휩쓸고 지나갔다. 군옥명은 왈칵 측은지심이 일어 마차에 태울 요량으로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 그는 자신이 소년에게 크게 실수를 저질렀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녀석이?' 소년은 군옥명을 무섭도록 노려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동정의 빛을 읽어내자 자존심이 무척 상했던 모양이다. 그러한 소년의 도전적인 면모는 군옥명의 가슴 속에 적지 않은 충격을 전했다. '이 추위에 홑옷을 입은 채 덜덜 떨고 있으면서도 어린것이 어찌 저렇듯 당당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마부에게 명했다. "잠시 멈추어라."


군옥명은 소년의 코앞에 마차를 갖다 대게 했다. 그러고는 넌지시 말을 건네 보았다. "아이야, 가는 곳이 어디냐? 내가 데려다 주겠다." 그 음성은 군옥명 자신이 듣기에도 매우 부드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소년은 마차로부터 고개를 홱 돌리더니 태연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당돌한 놈! 호의를 거절하겠다는 것인가?' 군옥명은 일편으론 괘씸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른 한 편으론 그런 소년이 매우 마음에 들기도 했다. 그 자신도 납득하기 어려운 그러한 호감은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흠, 저 아이는 뉘 집 자제일까? 행색은 저래도 평범한 출신일 것 같지는 않은데.' 군옥명은 마부에게 일렀다. "저 아이의 뒤를 따르거라." 이후로도 그는 계속 관심을 가지고 소년을 주시했다. 휘이이― 이잉―!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눈보라는 시야를 가릴 정도였고, 그 속에서 소년은 걷고 있었다. 체력의 한계인지 가끔씩은 휘청거리거나 넘어지기도 했으나 그래도 소년은 가능한 한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마차에 오른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가닥, 다가닥....... 이런 곳에서 느긋하게 사위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란 어쩌면 추위에 떨고 있는 자에게는 강렬한 유혹인지도 모른다. 웬만하면 태워 달라고 애원할 법도 하건만 소년은 백색의 대지 위를 홀로 오연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기를 한참 여. 거센 눈발이 서서히 위력을 상실해 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오십여 장을 이어지던 행렬은 어느 곳에서 뚝 멈추었다. 소년이 갑자기 몸을 돌려 마차를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히히힝! 말이 놀랐던지 커다란 울음소리를 냈다. '옳지! 생각이 바뀐 게로군.' 군옥명은 짐짓 시치미를 떼며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왜, 내게 볼일이라도 있느냐?" 말하자면 소년을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은 얼마 전에 비해 눈발이 한결 잦아든 상태인즉 만일 소년이 동승을 청해 오면 그는 슬쩍 거절해 볼 참이었다. 하지만 군옥명의 짖궂은 장난기는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뜻밖에도 소년은 그에게 이렇게 물어 왔다. "어르신께선 왜 자꾸 저를 따라오시는 겁니까?" '뭐, 뭣?' 군옥명은 소리도 못 내고 눈을 크게 휩떠야 했다. 깍듯이 경어를 쓰고 있으되 소년의 말에는 분명 힐책이 담겨 있었고, 덕분에 그는 말문이 꽉 막혀 버렸기 때문이었다. '쯧! 망신살 뻗치는 건 잠깐이군.' 군옥명은 내심 혀를 끌끌 차고는 신색을 가다듬었다. 눈치 작전이 보기 좋게 실패했으니 나이를 불문하고 전면전을 감행하고자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는 소년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너는 왜 내가 네 뒤를 따른다고 생각하느냐?" 소년이 눈꼬리를 불쑥 치켜올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에 군옥명은 움찔 놀랐으나 계속 말을 이었다. "이 길은 너만 다닐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오가게 되어 있는 길이거늘, 어찌 그렇게 주장할 수가 있지?"


그것은 실상 억지였지만 대답이 궁색해지게 만드는 말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는 한 술 더 뜨는 억지 소리가 튀어 나왔으니까. "이 길은 제 길입니다." "허어!" 군옥명은 재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야, 넌 지금부터 내가 알아듣도록 해명을 해야 될 것 같구나. 이 길이 네 길이라니, 네가 길을 닦아 놓기라도 했단 말이냐? 아니면 이 땅이 네 것이라도 되던지, 그러기 전엔 함부로 주장해서는 안 되느니라." 푸르게 질린 소년의 입술이 열렸다. "어르신께서는 이 길이 처음이십니까?" 엉뚱한 질문이었으나 군옥명은 꽤 성의를 가지고 응했다. "음, 그렇다만 내가 이 길이 초행(初行)인 것과 네 길이라고 우기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 소년은 총기 어린 눈을 반짝 빛냈다. "관계는 없습니다. 다만 이 길의 임자가 아니니 그 처음이라는 것에 의미를 둘 뿐이지요. 저는 언제인가부터 이 길에 눈이 쌓이기를 기다려 왔습니다.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길을 첫번째로 걸을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눈이 내리지 않았으면 모르나 이처럼 눈이 내렸으니 지금의 이 길은 당연히 제 길입니다. 오랫동안 품어온 제 염원이 하늘에 닿아 눈이 오게 만들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이야, 그건 타당한 얘기라고 볼 수가 없구나." 고개를 젓는 군옥명에게 소년은 간단히 말했다. "제 기준에서만 타당하면 그만입니다." "뭐라고?" 군옥명은 이 순간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년의 기세는 어지간해서는 꺾일 것 같지도 않았거니와, 애초에 그 자신이 부당하게 나갔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말꼬리를 돌렸다. "하나만 묻자. 너는 어째서 이 길을 택해 눈이 오기를 기다렸느냐? 다른 길도 많은데 하필이면 왜?" 소년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이 길은 평상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갑니다. 저는 그들의 흔적이 완전무결하게 흰빛으로 덮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연후에는 밑에 깔려있을 그 흔적들을 밟고 싶었지요." "아!" 군옥명의 입에서 경탄성이 새어 나올 때, 소년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몸을 돌리더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놀랍구나! 저 아이는 모습만 아이이지, 실제로는 이미 어른이 되어 있다. 그것도 일대 풍운아로서의 면모를 갖춘.' 그는 소년을 불러 더 말을 시켜 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소년을 단순한 흥미의 대상으로 놓고 볼 때는 체면이란 것을 망각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크게 의식되었기 때문이었다. 군옥명은 최근 들어 천궁비영의 총수로서 자리를 굳혀가고 있었다. 따라서 내키는 대로 행동할 입장이 못 되었다. '그래도 저만한 그릇을 놓칠 수는 없다.'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소년에게 외쳐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마차가 그의 손짓에 의해 소년의 뒤로 따라 붙었다. "이름을 꼭 밝혀야 합니까?"


소년은 돌아다보지도 않은 채 무심히 물었고, 그로 인해 군옥명은 쓰게 웃어야 했다. "나에게도 너처럼 당찬 시절이 있었던 것 같구나. 그래서 물었을 뿐이니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좋다." 소년은 그제서야 돌아서더니 그와 얼굴을 마주 했다. "초사영(楚射影)입니다." 군옥명은 잠시 소년을 바라보다 품 속으로 손을 넣었다. "내 너에게 주고 싶은 것이 있다." 툭! 그가 소년의 발 앞에 던진 것은 하나의 철패(鐵牌)였다. "부담은 갖지 마라. 나는 마음에 드는 사람에겐 무엇이든 잘 주곤 하니까. 언제고 내가 기억나거든 그 철패를 가지고 오너라. 장담컨대 네게 손해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 초사영은 더 이상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으며 철패를 집어들려고 하지도 않았다. 군옥명은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마부에게 명했다. "가자!" 두두두두......! 마차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빠른 속도로 아득한 지평선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3] "허허......." 절로 너털웃음이 나온다. 흑조, 아니 초사영이라는 인물과의 첫 대면이 던져 주었던 그 신선한 충격파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군옥명을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에 모옥 안으로 들어와 있던 그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 덧 석양도 자취를 감추고 하늘에는 서서히 어둠의 기운이 뒤덮이고 있었다. '그때 준 철패는 나 군옥명을 상징하는 신패였지.' 누구도 걷지 않은 길, 그것도 내재해 있는 타인의 흔적들을 밟고 걸어가겠다는 소년의 모습에서 군옥명이 후일의 패자(覇者)를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를 만나게 된 것은 이 년 전이었다.' 군옥명은 기억을 더듬으며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소년에게 억지로 떠맡기다시피 했던 신패를 그는 어느 날인가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수하에게서 건네 받았다. "이걸 어디서 입수했느냐?" 군옥명이 묻자 수하는 민망한 나머지 차마 고개도 들지 못 하고 대답했다. "그게 저... 신제하(新制河) 부근의 홍등가에서 굴러다니는 것을 혹시나 하여 가져와 보았습니다." "뭐, 뭣이? 홍등가라고?" 군옥명은 너무도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아울러 그는 소년에게 강한 배신감마저 느꼈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아무리 나에 대해 모른다 해도 그 아이가 내게 이토록 모욕을 안겨 줄 줄이야......!' 그것은 소년에게 걸었던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남다른 기개에 반해 한 수 접어주고, 신패까지 내 주었건만 그 결과는 참담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고심하기를 며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옥명의 뇌리에서는 소년의 영상이 떠나지 않았다. 애써 지워 버리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소년은 이미 큰 의미를 지닌 채 그의 심중에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결국 군옥명은 소년을 찾아보기로 작정했고, 일주일 만에 소년과 상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신제하 근처의 허름한 술집에서였다. 천궁비영의 정보망은 군옥명으로부터 소년의 인상착의를 듣고는 시차를 초월하여 기어이 그를 찾아냈던


것이다. 술집은 입구에서 부터 기분을 구기게 만들었다. 붉은 색의 주렴은 낡아 빠져 얼룩덜룩하게 칠이 벗겨진 데다가 중간에서 뚝뚝 끊겨 길이도 고르지 않았다. 그야말로 지저분한 홍등가 주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군옥명은 잠시 얼굴을 굳힌 채 서성였다. '그가 이런 곳에 있단 말이지? 예전과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면 그때는 어찌해야 되는가?' 그는 지역적인 특성을 의식하며 소년의 변화를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흠, 그래도 할 수 없다. 일단 부딪쳐 보는 수밖에.' 군옥명은 주렴을 걷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리하여 주점 안으로 들어서자 몇 개의 탁자가 눈에 띄었다. 탁자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궁색한 차림에 표정도 어두웠다. 개중에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자도 있고 젊은이도 있었는데 한결같이 낙오나 실패를 연상시키는 위인들이었다. 그 속에서 소년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소년의 모습은 오 년 전에 비해 무척 변해 있었다. 키가 한 뼘이나 더 커 있었고 체격으로 보아서도 소년이라는 어휘가 무색할 만큼 완전한 어른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는 봉두난발에 폐포(廢包)를 입고 있었는데 군옥명의 눈에 쉽게 뜨인 이유는 그런 행색에도 불구하고 술집의 분위기와는 다른 예기(刈氣)가 그에게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군옥명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 수하를 대동하지 않고 단신으로 이곳에 왔다. 그는 폐포인의 앞에 가 앉았다. 이어 뭐라 말을 건네려고 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는 잠자코 상대를 쳐다보기만 했다. 변화는 군옥명에게도 약간의 당혹을 안겨 주었다. 눈앞의 폐포인은 확실히 오 년 전의 그 소년이 아니었다. 그 당시보다 나아졌든, 못해졌든 그것은 마찬가지라 할 수 있었다. 그의 침묵에 폐포인, 즉 초사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셨군요." 군옥명은 일순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자네는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나?" "네." 그러고 보니 군옥명의 앞에도 잔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는 또 졌구나 싶어 자못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 신패는 잘 받아 보았네." "후후후......." 초사영도 마주 웃었으나 별다른 언급은 없었다. 군옥명은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 넘겼다. 반백의 세월이 그의 머리에 희끗희끗한 백발을 드리워 놓고 있었다. 그것을 의식해서는 아니겠으나 그는 점잖게 초사영을 나무랐다. "자네는 왜 일을 어렵게 만들었나? 신패를 가지고 그냥 나를 찾아오면 되었을 것을." 초사영은 씩 웃었다. "저로서는 이쪽이 더 의미가 있으니까요." "뭐라고?" 군옥명이 표정이 일순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불쾌감을 가라앉히느라 한참 뒤에야 말을 이었다. "자네답군. 외양은 변했으되 예전 그대로야. 늘 자신이 정한 기준대로만 움직이려 들고."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이들의 대화 속에는 이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초사영은 군옥명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신패를 유출시켰다. 그것도 신제하라는 지명을 덧붙여 그를 크게 놀라게 하고는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이 당연한 듯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군옥명으로서는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초사영이라는 청년에게 농락을 당한 기분마저 들고 있었다. '감히 천궁비영의 영주인 내게......!' 그런 생각에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할 때였다. 초사영의 입술 사이로 의미 깊은 한 마디가 흘러 나왔다. "어르신께선 만약 일개 산적 두목쯤 되셨다면 전 그런 수단을 쓸 마음도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말은 군옥명의 발목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나를 알긴 아는군.' 인간에게 있어 자긍심이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군옥명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무리 초사영이라는 존재에 큰 가치를 두고 있다 해도 그 자신이 짓밟히면서까지 관계를 이어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군옥명이 낮은 어조로 물었다. "그래, 지금부터 어찌할 셈인가?" 초사영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술병을 들어 자신의 앞에 놓인 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술은 안 드시겠습니까?" 군옥명은 더 이상 화를 내거나 조급해 하지 않았다. 몇 번째 같은 상황을 겪게 되자 그도 이력이 붙은 것일까? 그는 꽤나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아니, 나는 술을 별로 즐기지 않네. 못 마시는 바는 아니나 사고력이 흩어지는 게 싫어서이지." "후후... 어르신다운 말씀이군요." 초사영은 잔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훌쩍 들이켰다. 그러고는 비로소 본론을 말했다. "저는 한 자루의 명검(名劍)이 되고 싶습니다." 군옥명의 응대도 만만치 않았다. "자네의 뜻이 그렇다 한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자넨 매사를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하지 않는가?"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초사영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천하의 명검도 올바로 쓸 줄 아는 인물을 만나야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 법이지요. 저도 그 정도는 압니다." "말은 맞네만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군옥명은 별로 즐기지도 않는다면서 스스로 술을 한 잔 따라 마시더니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가 명검이 되리란 보장을 어떻게 하는가? 그건 기개나 자신감만으론 안 되는 일이네." 요는 실제적으로 능력을 입증해 달라는 소리였다. 초사영은 말없이 술을 한 잔 더 따랐다. 이어 그가 술잔을 손에 들자 상상치도 못 했던 기현상이 벌어졌다. 잔에 가득 담겨 있던 액체가 군옥명이 뻔히 보고 있는 앞에서 기체로 화해 감쪽같이 증발해 버렸던 것이다. 이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로 군옥명을 매우 놀라게 했다. '언제 저렇듯 초절한 무공을?' 분명 오 년 전에 보았던 소년은 유별난 기질을 제외하면 평범의 범주에 드는 소년이었다. 추위에 꽁꽁 얼어 있어 무공을 익힌 흔적은 전혀 엿보이지 않았거늘, 언제 그러한 경지의 내공을 쌓았는지 그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자네, 무공을 익힌 지는 얼마나 되었나?"


초사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아마도 그 연한은 제 나이와 같이 보시면 될 겁니다." "훌륭한 교관이 곁에 있었던 게로군." "출신 덕분이지요." 군옥명은 그 순간 봉두난발로 반쯤 가리어진 초사영의 얼굴에 무한한 자부심이 어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출신을 물으면 답해줄 수 있는가?" 초사영은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겠습니다. 단지 남에게 굽히지 않을 만큼은 된다고 밖에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으음......." 군옥명은 침음성을 흘리더니 낮게 말했다. "자네는 표현을 정정할 필요가 있네. 내 보기에 자네는 궁극적으로는 명검만이 아니라 패검(覇劍)이 되려 하는 것 같군." "아마도." 그는 초사영을 똑바로 응시했다. "만일 내가 그 패검을 거부한다면?" 초사영도 눈을 빛내며 그를 마주 보았다. "죄송한 말씀이나 그렇게 되면 전 이 시각부로 어르신의 배포를 비웃게 될 것입니다." "허허... 그건 매우 비극이로군." 군옥명은 껄껄 웃고는 묘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명검은 몰라도 패검은 종종 주인을 베는 경우가 있지." 초사영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차갑게 잘라 말했다. "패검에는 주인이 없습니다. 스스로 존재할 뿐." "하면, 나는 무언가?" "계약자! 그것도 명검이 될 때까지에 한해서입니다." "그 후론?" "그것을 왜 제게 묻습니까? 선택은 본인이 하는 겁니다." "허어!" 군옥명은 기가 막힌 듯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 했다. 그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가로 놓였다. 그런 연후, 입을 연 자는 군옥명이었다. "검날의 우수성을 알았으니 나도 일단 명검을 구경해 보고 싶군. 그건 아주 흥미로운 일이니까." "흥미로운?" "그렇네. 사실 그 동안 내 인생은 너무 단조로웠지." "후후후... 천하의 천궁비영주가 그리 말씀하셨다는 걸 알면 무림인들 모두가 자존심이 상하게 될 겁니다." "그야 그들 사정이고, 난 이제부터 자네와 한 판의 거창한 도박을 벌여볼 참이네." "고맙습니다." 군옥명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은 후에 해도 되네. 명검이 완성된 다음에 말이야." "달리 복안이라도 있으십니까?" "내 자네에게 이 년이라는 기간을 줌세. 그 안에는 자네가 비빌 만한 언덕이 되어 주겠다는 얘길세." 이번에는 초사영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직접적인 도움은 싫습니다."


"그럼?" "저에게는 암중 기반이 필요합니다. 전면에 나서서 이루어야 할 일은 제 스스로 처리해 나가겠습니다." "좌우간 대단하군. 자네는." "수락하시는 겁니까?" "물론. 지금부터 자네의 암호명은 흑조(黑鳥)일세." [4] 군옥명은 혼자 읊조렸다. '그는 무림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게 될 것이다. 누구도 차지하지 못 했던 절대 권좌(權座)에 앉아서.' 그는 자신이 가꾸어온 화원을 지그시 내다보았다. 화원의 이름은 군옥훼(群玉卉)였다. 이는 그가 붙인 이름으로 고락을 같이 해왔다는데서 착안된 것이었다. '그 아이로 인해 언제부터인가 나는 꽃들을 방치하고 잡초를 키워왔다. 한때는 내가 괜한 짓을 하는 게 아닌가하고 회의도 들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진정한 주인의 자격은 바로 그 끈질긴 근성과 생명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군옥명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장 중요한 건 그가 젊다는 사실이다. 걸 수 있는 희망도 무한대에 가깝지. 나의 젊음은 오늘을 이루는데 모조리 바쳐졌지만 그의 젊음은 내가 쌓아놓은 기반을 주축으로 미래의 전부를 책임지게 될 것이다.' 명실공히 당금 무림의 천궁비영주인 그는 그렇게 남은 생을 설계해 가고 있었다. 그가 왜 스스로 패업을 이루려고 하지 않는지는 물을 필요가 없다. 누구나 인생은 자기 방식대로 가꾸게 마련이며 만족을 느끼는 측면도 다르므로. 휘이이잉......! 가을의 초입을 알려 주듯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달빛은 지면 위에 신비한 빛을 뿌려대고 있었다. 나뭇잎들이 어둠에 파묻힌 채 귀를 간지럽히듯 사박거렸다. 교교로이 비취는 달빛도 그 사이로는 스며들지 못해 그들의 은밀한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청풍월(靑風月).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으나 고풍스럽게 느껴지는 정자였다. 달빛은 이 청풍월에 그림자라는 긴 꼬리를 드리워 주었다. 스읏! 하나의 인영이 정자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본 뒤 바닥에 앉았다. 하지만 그 뿐, 그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나타나면서부터 줄곧 한 곳을 향해져 있었다. 그것은 정자에서 내려다보이는 한 산로(山路)였다. 군옥명. 그는 힘겹게 산로를 오르고 있었다. 두뇌만을 사용하는 인물이다 보니 무공 방면에는 취약했던 것일까? 이따금씩 바람이 불어와 반백인 그의 머리카락을 흐트러 놓았다. 푸르륵! 어디선가 어둠을 가르는 야조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군옥명은 그 소리에 이끌려 사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했으나 곧 본연의 자신을 깨닫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이윽고 그의 눈에 하나의 검은 물체가 들어왔다. 그것은 청풍월이라는 이름을 가진 예의 정자였다. 군옥명은 그곳에 초사영과 만나기로 했었다. 정자 안에서 누군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확인하지 않아도 그 인물이 초사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양자간의 거리가 좁혀지자 초사영은 말없이 허리를 숙였고, 그런 그를 보며 군옥명은 손을 저었다. "되었네. 자네가 인사라니, 어울리지 않네." "후후...... 이상하게 낙인이 찍혔군요."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본 상태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상당히 오랫만에 가지게 된 만남이었다. 그 동안 그들은 서신으로만 연락을 취했을 뿐,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다. 초사영은 희뿌연 달빛 아래서 상대의 안색을 살폈다. 군옥명은 여전히 청수한 모습 그대로였다. 나이가 오십이 넘은 사람치고는 표정도, 눈빛도 무척이나 맑아 보였다. 군옥명이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넸다. "어쨌든 반갑군. 근 이 년만에 보는 것인가?" 초사영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정확히 일 년 팔 개월만입니다." "건강해 뵈는군." "영주께서도 변함없으십니다." 푸드득......! 아까 기척을 내던 그 야조인가? 새가 일으킨 작은 소음이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여운을 전했다. 군옥명은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만나자고 했는가? 웬만한 일 같아서는 이렇게 나를 불러내지도 않았을 듯 한데." 초사영은 기색을 바로 하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중대한 일로 긴히 상의드릴 것이 있어 서신을 띄우게 되었습니다." "무슨?" "흑풍사에 관해서입니다. 그들이 지하로 잠적했다는 사실은 영주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만." "물론 아네. 거기까지는." "문제는 흑풍사가 달리 저의를 품고 있다는 점입니다." 군옥명이 물었다. "저의라니, 그런 게 있었나? 그들의 잠적이야 은밀히 힘을 기르고자 하는 수단일 테고. 달리 무엇이 또 있단 말인가?" 초사영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들은 그 전략을 일컬어 암도진창이라고 하더군요." 군옥명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표현은 그럴 듯 하군. 천궁지회의 이목을 가리고 암암리에 뭔가 다른 일을 꾸민다는 뜻이겠지?" "맞습니다. 노리는 바가 아주 거창하지요." "흐음!" 군옥명은 짧게 신음하더니 물었다. "자네는 암도진창에 얼마나 관련이 되어 있는가?" "후후...... 관련 정도가 아닙니다." "그럼?" "절더러 암도를 놓으라고 하더군요." 초사영은 지나치는 투로 가볍게 말했으되 받아들이는 군옥명은 그렇지가 못 했다. 그는 미간을 모으며 심각하게 응했다. "의외로군. 그들이 자네를 선택했다니."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다. 그를 보고 있다가 이번에는 초사영이


물었다. "그들이 절 선택하면 안 되는 거였습니까?" 군옥명은 그 말에는 답하지 않았다. "말해 주게. 그 암도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초사영은 그를 정시했다. "왜 제 질문은 그냥 지나치려 하십니까?" "허허... 나야말로 자네가 모른 체 하고 지나쳐 주었으면 했는데 곧바로 덜미를 잡히고 마는군." 초사영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영주께서는 저를 옭아매려 하셔서는 안 됩니다." "옭아맨다고, 내가 말인가?" "그럼 아닙니까? 아직 약정 기한인 이 년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저를 의심하지는 않으실 텐데 어째서?" 군옥명은 손을 저어 그의 말을 제지시켰다. "내 말을 잘 듣게. 절대무가의 후예 초사영." 초사영의 안면 근육이 제멋대로 씰룩였다. "알고 계셨습니까?" "모를 수가 없지 않은가? 초씨라는 희성(稀姓)에다 절대 패자의 면모, 어릴 때부터 남다르던 기질, 또 있네." 초사영은 쓰게 웃었다. "무엇이 또 남았습니까?" "검학(劍學)! 자네는 스스로 말하지 않았을 뿐 신분을 노출시키고 다닌 셈이네. 의도적인 측면도 있었겠지만." "과연 천궁비영의 정보망은 명불허전이군요." 군옥명의 입가에도 쓴웃음이 매달렸다. "아니,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자네의 우직함일세. 일찍부터 품은 뜻이 있다면 얼마든지 신분을 감출 수도, 다른 자의 무공을 사용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정공(正攻)만이 최선이 아니란 것도 모르지는 않았겠고?" 초사영은 소리내어 웃었다. "후후후...... 문제가 있어도 전 제 방식을 고수할 겁니다." "역시 자네답군. 하지만 정작 큰 문제는 따로 있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네의 의식." 군옥명은 짧게 잘라 말한 뒤, 덧붙였다. "절대무가는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 변황을 맞아 싸우다 아깝게도 멸절되고 말았지." "갑자기 그 소린 왜?" "그냥 듣기만 하게. 그들은 화를 당하기 전에 무림에 연수해 줄 것을 요청했었지." 군옥명의 음성은 낮고도 음울하게 이어졌다. "무림은 그들에게 그러겠노라고 굳게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았네. 신의를 저버렸던 것이지." 초사영은 정말로 할 말이 없어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검푸른 야공에 걸린 달이 그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한숨을 깊이 내쉬는 군옥명의 시선도 달을 향했다. 그런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만약 그 당시에 중원무림이 정말로 흑, 백도를 불문하고 연수해서 거사를 도모했더라면 절대무가가 그렇듯 허망하게 스러지지는 않았을 게야."


"으음......." "결과적으로 그들은 무림인들의 비양심 때문에 멸문한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아니, 보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로군." 군옥명의 입술이 잔 경련을 일으켰다. "절대무가의 사람들은 애시당초 무림을 위해 피를 흘렸네. 거개의 무림인들과는 달리 자파의 영달은 초월했던 위대한 가문이었지. 최후까지 무림의 평화를 위해 헌신했던............." 초사영이 비로소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을 떼었다. "당금 무림은 그것을 잊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작금에도 무림인들은 오직 익권을 위한 암투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절대무가가 흘린 피의 가치란 그저 보이지 않는 역사의 일부일 따름입니다." 군옥명은 그답지 않게 흠칫 몸을 떨었다. "무섭군. 혹시나 했는데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하긴 자네로선 분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솔직히 저는 그렇게 아귀다툼을 벌이는 무림의 생리를 지극히 혐오합니다. 적어도 그들에 의해 절대무가의 신화가 한낱 어리석은 광대짓으로 치부되는 건 용납하지 못합니다." "으음......!" 군옥명은 가히 앓는 소리에 버금가는 신음을 토해냈다. "자네 의식은 꼭 내가 걱정하던 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군. 그렇지 않기를 바랐는데." 초사영이 내쏘듯 물었다. "그럼 절 도와준 것을 후회하시겠군요? 제 의중을 훤히 다 아셨으니 말입니다." "자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군옥명은 문득 노기를 띈 채 초사영을 노려보았다. "하면?"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네. 아직도 일루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미구에 현실화될 것이네." "무엇이 말입니까?" "절대무가의 숭고한 의성(義性), 이를 나는 신봉하네." 말하는 군옥명의 시선은 불타는 듯 뜨거웠다. "내가 아는 한 절대무가의 사람들은 무림에 해를 끼칠 사람들이 아니야. 나는 지금도 천하에서 가장 의협심이 강한 인물들을 꼽으라면 단연코 그들을 꼽거든." [5] 초사영. 오랜 갈등을 거친 이 위인은 쿡쿡 웃었다. "별로 듣기 싫은 말은 아니로군요. 예전에는 분명 그랬을 겁니다. 이십 년 전까지는 말입니다." 군옥명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그들이 그러했듯 그 후예도 실은 진실로 무림을 사랑하는 위인이네. 그 자신만이 모르고 있을 뿐." "가당치 않습니다." "그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대단한 집념의 소유자이지. 그런데 그 집념이란 알고 보면 옳지 못한 현상을 참지 못 하는 무인혼(武人魂)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네, 아닌가?" 초사영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그만 두십시오! 이미 언급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무림인들을, 그들이 속해 있는 무림을 혐오한다고." 그의 부르짖음은 절규로 화하여 조용한 산중을 뒤흔들어 놓았다. 군옥명은 그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할 말만은 잊지 않고 쏟아냈다.


"허허허... 그게 아니래도. 자네가 혐오하는 건 당금의 무림인들이지, 무림 그 자체는 아니야." "천만에!" 초사영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는 무림이 어찌 되든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군옥명은 그대로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 뜻을 입증해 보이겠습니다." 말을 마친 초사영의 손에는 어느 새 검이 들려져 있었다. 반면에 군옥명은 미동도 않고 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대신 그는 일신을 통해 은은한 백광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특히 그의 눈빛은 기이하리만큼 투명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흑풍사와의 휴전을 방해하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하긴 내가 여기서 자네 손에 죽으면 계획대로 될 걸세. 나는 흑풍사의 파천황주에게 죽은 것으로 알려질 테고." "후후...... 설명이 필요 없어 다행이군요." 군옥명은 씁쓸히 웃었다. "허허...... 앞일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는군. 천궁비영주를 잃은 천궁지회는 당연히 흑풍사의 휴전제의를 거절하고 맞붙으려 하겠지. 싸울 명분이 주어져서 그들은 오히려 대환영일 게야. 그리 되면 무림은 최악의 전장으로 화할 텐데 걱정이군. 그 혼란을 틈 타 변황에서 침공해 오면 어쩌지?" 초사영은 차갑게 잘라 말했다. "변황은 제가 책임집니다." "호오! 절대무가의 신화가 이상하게 재현되겠군. 그 부분도 자네의 각본 속에 들어가 있었나?" "어쩌면." 초사영은 애매모호한 대답을 내놓은 가운데 변황의 절대자에게 강제로 끌려갔다는 모친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변황을 쳐야만 하는 이유 한 가지가 더 있었던 것이다. 치열한 설전의 와중에서 군옥명은 어느 덧 전신이 눈빛과 마찬가지로 반투명체가 되어 있었다. 뒤늦게야 그 현상을 인지한 초사영은 내심 아차 싶었다. '틀렸다!' 아니나 다를까? 군옥명의 일신을 투과하여 그의 등뒤에 있던 나무가 보인다 싶은 순간 환청과도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미안하네만 나는 이렇게 일찍 죽을 수가 없는 몸이네. 아직은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지." 아득하기만 한 그 음성을 들으며 초사영은 비로소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 있으나 벌써 여기를 떠났다.' 군옥명의 것이 틀림없는 음성은 또 전해져 왔다. "그렇다고 비겁하게 무작정 도망치자는 건 아니네. 내 자네에게 한 가지를 주겠네. 그것은 천궁비영일세. 갑작스런 결정은 아니니 부디 사양치 말게." "우우우............!" 검을 잡고 있는 초사영의 손이 노기로 인해 부르르 떨렸다. 군옥명은 진작 모든 정황을 꿰뚫고 있었으며 우려했던 바대로 그를 철저하게 옭아매 가고 있는 것이었다. "당신이 무슨 권리로?" 그 말은 예의 신비한 음성으로 인해 끊겼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게. 최소한 나는 절대무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네. 그들의 본성에 대해서는 더욱더." 음성은 강하게 부언했다. "자네는 필히 협도(俠道)를 걷게 될 걸세."


"닥치시오!" 초사영은 격노한 나머지 소용없는 짓인 줄을 알면서도 수중의 검을 휘둘렀다. 쉬익! 그의 검은 군옥명의 목덜미를 정확히 꿰뚫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각적인 현상일 뿐 그는 아무 것도 베지 못 했다.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천궁비영주인 군옥명이 아니라 그를 닮은 허상(虛像)일 뿐이었던 것이다. 팟! 군옥명의 허상도 그나마 연기처럼 꺼져 버렸다. 그의 음성만이 초사영의 귓전에 몽롱하게 울려왔다.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네. 가까운 시일 내에......."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후로는 군옥명이 근처에서 아주 사라졌듯 음성도 더 이상은 들려오지 않았다. 초사영은 허공을 바라보며 입술을 질겅 씹었다. '영주! 당신이야말로 정녕 대단한 위인이외다. 나를 완전히 꼭두각시로 만든.' 이것은 지자(智者)로만 알려져 있던 군옥명이 예상을 훨씬 웃도는 초고수임을 확인한 그의 소감이었다. 그런데 그가 생각해 보아도 참으로 이상했다. 심히 불쾌하기는 해도 현재 그의 기분은 열패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군옥명을 죽이겠다고 검을 뽑았다가 실패했으면서도 그것에 대한 회의 역시 조금도 일지 않았으니, 이제껏 그가 보여준 기질상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인가?' 자문해 보았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고, 그는 툴툴 웃었다. "어쨌든 처음으로 대하는 신비한 무공이었다. 정식으로 겨루어도 승부를 자신할 수 없을 만큼." 놀랍게도 그 나직한 읊조림에 답하는 음성이 있었다. "클클...... 모르고 있었던 모양인데 가르쳐 주지. 그건 몽생착시(夢生錯視)라는 술공(術功)이야." 군옥명은 분명 아니었다. "누구?" 초사영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그처럼 기척도 없이 나타났는지 정자로 이어지는 숲길에는 한 명의 노인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젠장! 또 나를 앞지르는 초고수인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도록 낌새도 몰랐으니.' 초사영은 차라리 허탈해져 어깨를 늘어뜨리고 말았다. 노인은 손에 술호로를 들고 있었는데 그 외에는 이렇다할 특징이라곤 없었다. 길게 늘어뜨린 푸스스한 수염으로 보나,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보나 그저 평범한 촌로(村老) 같았다. 초사영이 물었다. "뉘십니까? 노인장은." 그의 말에 이어 노인의 호통이 정자를 뒤흔들었다. "시끄럽다! 황천법문(皇天法門)도 알아보지 못 하는 주제에 노부의 정체를 알려고 들어?" '황천법문?' 처음 듣는 어휘였다. 문파의 이름이라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무엇도 연상되는 바가 없는. 초사영은 안면을 은은히 붉히며 조심스레 물어 보았다. "초면에 실례지만 황천법문은 어떤 문파입니까?" 돌아온 것은 또 한 번의 벽력같은 호통이었다. "지지리도 못난 놈! 황천법문은 네놈처럼 용렬한 것들이 입에 올릴 만한 문파가 아니다." 그러고도 노인은 한참을 씩씩대더니 기분이 가라앉자 혼자 중얼거렸다. "흠, 다행스러운 일이야. 군옥명이 황천법문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니. 허허...... 아직 세상이


망하지는 않겠군." "무슨 말씀이신지?" 그 말에 노인의 얼굴은 다시 험악해졌다. "무슨 말은, 네놈은 입 닥치고 있으라지 않았느냐?" 사태가 이쯤 되자 초사영도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생전 처음 보는 노인에게 이토록 핍박을 당하는 것이지?' 그의 눈빛이 차가워지자 노인은 아예 도끼눈이 되었다. "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눈알을 부라리는 것이냐? 네 놈은 어른을 대하는 예의도 배우지 못 했더냐?" 초사영은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무슨 어른이 이렇담?' 그가 이처럼 노인을 정신 이상자쯤으로 치부하고자 할 때였다. 심혼을 때리는 강한 한 마디가 그의 귀에 꽂혀왔다. "쯧! 저러고도 천하제일검의 후손이라니, 이래서 옛말에 후손 하나 잘못 두면 가문이 망한다고 했지." '이 노인은 미치지 않았다!' 초사영은 내심 단정을 내리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정색을 지으며 같은 말을 반복해 물었다. "노인장께선 뉘십니까?" 노인의 눈꼬리가 홱 치켜 올라갔다. "뭐, 노인? 이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노부를 다 늙은 폐물 취급하는구나. 네 눈에 어떨지 몰라도 난 아직 백삼십 세밖에 되지 않은 팔팔한 청춘이다, 이놈." 초사영은 노인이 의도적으로 대답을 회피하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은연중 검 자루를 슬쩍 고쳐 잡았다. 노인이 그 광경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놈! 하늘 높은 줄 모르는도다. 검이란 본시 쓸 데다가 쓰는 것이지 아무 때나 빼들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강도 높은 고함성도 그렇지만 이때에 노인의 눈은 흡사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엄청난 광휘를 뿌리고 있었다. '오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저 눈빛은.' 초사영은 그 순간 아득한 심연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상태에서 노인의 음성은 점차 멀어져 갔다. "내 네놈과 술 한 잔 하러 왔으나 난데없이 황천법문이 출현하는 바람에 이대로 그만 돌아가야겠다. 좌우간...... 네놈은 앞으로 눈을 크게 떠야 하느니...... 이것이 무슨 소린지 못 알아 듣겠거든 오너라. 철련으로......." '아아!' 초사영은 일시지간 쓰러질 듯 휘청 했다. 그것은 노인의 음성이 전해준 충격 때문이었다. '철련! 역시 그곳이었다.' 그가 정신을 되찾는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후로도 그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잠시 구름에 가렸던 달빛이 재삼 정자 안을 훤히 비춰 주었다. 그런 가운데 초사영은 허탈하게 내뱉고 있었다. "철련...... 게다가 황천법문......." 휘이잉! 한 줄기 스산한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왠지 으스스 잔 소름이 돋게 하는.


제 22 장 운명(運命)의 덫 [1] 대전(大殿). 그다지 넓다고는 할 수 없으나 웅장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억겁의 풍사에도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는 염원을 담고 있어서일까? 청강마석(靑岡摩石)으로 쌓아올린 대전은 신성불가침의 영역과 같은 압도적인 면모를 보여 주고 있었다. 정면의 상좌(上座)에도 청강마석을 사용해 일곱 개의 계단처럼 쌓아올린 단(壇)이 있었으며, 그 위에는 흑오목(黑烏木)으로 된 태사의가 놓여져 있었다. 한 사람. 그는 일신에 금의전포(金依戰布)를 걸치고 있었다. 머리를 가지런히 쓸어 올려 옥황잠(玉皇蠶)을 꽂고 있는 그는 매우 청수했다. 가슴까지 폭포수처럼 늘어진 흑염(黑髥)은 장년의 나이로 보이는 그에게서 깊은 연륜을 느끼게 했다. 어디 그 뿐인가? 칠 척 장신의 거구에서 발해지는 패도적인 기운은 대전의 웅위로움마저도 제압하는 듯 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금의전포인의 전신을 감싸고 있는 것은 삶의 영욕을 두루 거친 듯한 허무와 권태였다. 그 상반되는 인상과 기도 때문일까? 그는 어찌 보면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는 듯도 하고, 어찌 보면 천하를 뒤덮을 웅심을 안으로 감추고 있는 듯도 했다. 그런 모습으로 금의전포인은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동창(東窓)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사방으로 열려있는 창을 통해 가끔씩은 바람도 불어 왔다. 그런데 그 바람결과는 별개로 대전의 공기가 일순 크게 파동쳤다. 석상처럼 앉아 있던 금의전포인이 일어섰던 것이다. 그의 움직임은 대전의 공기를 하나의 흐름으로 만든 것과 달리 조용하기만 했다. 사각, 사각....... 그가 발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모래가 발 밑에서 밟혔다. 먼지 한 점 없을 것 같은 대전은 의외로 바닥이 모래였다. 대전의 중앙에 이르렀을 때, 그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청강마석 위로도 모래가 뿌옇게 덮여 있었다. 금의전포인은 가만히 손으로 바닥을 쓸었다. 모래가 손끝에 닿자 그의 미간이 슬며시 모아졌다. "이 모래들이 끊임없이 따라 붙는 이유는 나를 사랑해서인가, 아니면 나를 이기고 싶어서인가?" 뭐라 형용키 어려운 감정이 깃든 독백이었다. "어찌하여 무수히 청소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모래들은 이곳까지 침범해 오는 것인가? 이곳마저 모래 바다로 만들고 싶다는 건지, 그렇다고 문을 열지 않을 수도 없고......." 끝내 그의 음성은 탄식으로 마무리되었다. 금의전포인은 열려 있는 동창을 응시했다. 창을 통해 눈에 들어오는 정경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높은 성벽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으며, 그 사이로는 우거진 숲과 돌이나 나무로 지은 수백 채의 가옥들, 혹은 빠오(천막) 등이 저마다 나름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황금빛을 발하는 모래였다. 태양광을 반사시키며 바다처럼 드넓게 펼쳐져 있는 대사막(大沙漠)이다. 간간이 보이는 높고 낮은 구릉들은 한 폭의 그림인양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실제로는 잔혹한 것이었다. 사막은 생명을 짓밟고 있었다. 풀들을 메마르게 하여 초지를 벗겨 놓음으로써 인간들이 애써 이룩해


놓은 삶의 터전을 조금씩 갉아먹어 가고 있었다. 일부 황폐해진 마을과 초원의 풍경이 그 사실을 여실히 입증해 주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금의전포인의 눈에는 고통과 더불어 인간에 대한 진한 연민이 떠올랐다. "신으로부터 저주받은 대지, 그러면서도 끝내는 정복해야만 하는 대지, 너 사막이여!" 낮게 부르짖는 그의 안면에는 누구를 대상으로 한 것인지 그 자신도 모르는 분노와 회한이 뒤엉켜 있었다. 그 때였다. 사각, 사각....... 그의 등뒤로부터 모래를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의전포인은 느릿하게 신형을 돌려 세웠다. 한 여인이 대전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일신에 백의를 걸친 그녀는 꽃망울을 갓 터뜨린 금란화(金蘭花)가 꽂혀 있는 백자화병(白恣花甁)을 손에 들고 있었다. 여인은 칠흑 같은 머리를 궁장형으로 틀어 올렸는데, 그 위에 살짝 덮여 있는 것 또한 흰 비단으로 된 천이었다. 화장기는 엿볼 수가 없었으며 가녀린 목에서 어깨, 그리고 다시 허리로 이어지는 연호정수(燕湖精水)한 자태는 나이를 초월하여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차분한 걸음으로 이동하는 모습에서는 여인다운 현숙함마저 물씬 배어 나왔으니, 그녀는 어떤 기준으로 놓고 논해도 능히 최고의 여인이라 불릴만 했다. 아름답기만 한 금란화가 여인의 앞에서 색이 바랜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리라. 백의여인은 조심스레 백자화병을 창가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할 일이란 오직 그것이 전부인양 신중한 동작이었다. 실은 매사를 전부 그런 자세로 임하는 여인이었지만. 이윽고 그녀는 금포인을 향해 돌아섰다. 그러고는 단정한 입매에 살며시 웃음기를 드리웠다. 그 웃음으로 인해 대전의 분위기가 일시에 환하게 밝아졌다. 적어도 금의전포인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는 아까부터 창가에 놓인 백자화병의 금란화보다는 그녀에게 관심이 깃든 시선을 주고 있었으므로. 그도 미소로 답하며 입을 열었다. "시각이 아직 이른데 벌써 기침했었소?" 백의여인은 짧게 응수했다. "그러시는 당신은요?" 나이에 비해 투명하도록 맑은 음성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뭇 신비감마저 느껴졌는데, 어떻든 그녀는 말씨와 행동 모두에서 자연스럽게 기품이 묻어 나오는 여인이었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투로 묻는다. "아침부터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셨습니까?" "생각은. 잠시 거닐었을 뿐이오." 백의여인은 그에게 기대듯 옆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바람이 불고 있는 창 밖을 내다보며 우려 깊은 음성을 이어갔다. "당신은 아직도 중원(中原)에의 꿈을 꾸시나요?" 금의전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무언(無言)을 긍정으로 해석했는지 여인은 소리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저 아래를 보세요." 그녀의 말에 따라 금의전포인은 광막한 황금빛 사막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어 성벽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당도하자마자 정해진 행사라도 되는 양 금의전포인과 백의여인을 향해 오체복지했다. 그들의 숫자는 금세 수십,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서는 어떤 소음도 일어나지 않았다.


금의전포인은 미간을 모았다. "허어! 내 저러지 말라고 누차 명을 내렸건만." 백의여인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듣지 않는 게 당연하지요. 그들은 마음으로 당신을 우러러 받드는 것이지, 명령에 의해 따르는 것이 아니니까요. 유리성(琉璃城)의 성주(城主)인 당신의 존재는 적어도 이 사막에서는 신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요?" 유리성이라면 중원무림에서도 모를 수 없는 이름이다. 그 이름은 이십 년 전에 절대무가를 탄생시켰으며 죽음과 저주에 이르는 공포로 중원 전역을 휩쓸었기에. 그 이름은 변황 제일의 세력을 대변한다. 이름의 주인은 물론 대사막을 포함한 접경 지역의 통치자이다. 북으로는 외몽고, 서로는 탑리목분지(塔里木分地), 동으로는 열하성(熱河省)의 북부까지 관장해온 절대 패자인 것이다. 금의전포인. 그가 바로 그 주인공이며 이십 년 전에는 중원 침공을 감행한 덕에 중원무림인들로부터 잔혈마존(殘血魔尊)이라는 거창한 별호까지 얻었던 인물이었다. [2] 가소(伽素).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위대한 무인 중 한 사람이었다. 중원인들에게 마존으로 취급되어진 것도, 대사막과 초원에서 절대적으로 추앙 받게 된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이르자면 악마와 신으로 동시에 불리어지는 인물이 그였으나 정작 본인은 양쪽 다 거북해 했다. 지금도 그는 평범한 인간으로서 이렇듯 난처한 상황에 혀를 차고 있을 뿐이었다. "쯧! 저들로 인해 나는 바깥 구경을 한 지도 오래 되었소. 어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가 있어야지." 가소는 몸을 돌려 태사의로 향했다. 여인이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랐다. 지난 십수 년 간 그래왔던 것처럼. 여인은 가소가 태사의에 앉기를 기다려 스스럼없이 그의 곁인 모래바닥에 무릎을 꺾고 앉았다. 또한 섬섬옥수를 포개어 그의 무릎 위에 가만히 올려놓기도 했다. 가소가 친근하게 그녀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방금 전 중원에의 꿈을 버리지 못 했느냐고 물었소?" 백의여인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기분이 상했다면 용서하세요." "아니오. 당신을 탓하고자 말을 꺼낸 것은 아니오." 가소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여인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물론 부정하지는 못하오. 아직도 분명히 내 마음의 한 구석에는 중원에 대한 야망이 남아 있소. 그러나 나는 그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는 것을 보아야 하는 입장이오." "그 말씀은?' "사막에서 이루어야 할 꿈 말이오." "아!" 여인은 탄성을 발했고, 이 시대에 한 번도 패배를 용납하지 않았던 무신(武神)은 지극히 부드러운 음성으로 부언했다. "저 사막을 내다보시오. 무엇이 눈에 띄오?" "모래와 바람이 전부입니다." "그렇소. 당신 말이 맞소.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생명이 있는 것은 무엇도 살 수 없는 황량한 곳이오."


"하면, 저 곳에서 어떤 꿈을 이루시려는 것입니까?" "어쩌면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영원히 잡지 못할 몽상에 불과할지도 모르오. 저 모래땅은 꿈조차 거부할 수도 있으니." 가소의 음성은 다소 침중하게 이어졌다. "사실 지금까지도 뭔가 형체를 만들어 놓으면 얼마 안가 빠져나가거나 허물어져 내게 절망을 안겨 주었더랬소." "으음........" 여인은 공감하는 듯 나직한 침음성을 흘려냈다. "그래도 젊은 시절의 나는 날마다 새벽이면 일어나 창 너머로 보이는 사막에 그림을 그려보곤 했었소. 모래가 푸른 초지로 변하고...... 그 초지에서 말들이 뛰어 놀고, 목동이 즐겁게 노래하며 젖을 짜는 그림을......." "아름다운 염원이군요." "그렇소. 하지만 그 염원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만 퇴색되어 갔소. 사백 년 전 이 땅에 유리성이 세워진 이래 모래에 의해 초지와 숲이 점차로 파괴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말이오." 여인의 눈에도 가소와 동류의 아픔이 떠올랐다. 그녀도 지난 십수 년 간 그와 똑같은 것들을 보아 왔으므로. 안타깝게도 초원과 숲은 계속 조금씩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저주스런 모래는 아름다운 것이라면 모조리 삼켜 버리는 사악한 습성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불안감에 떠밀리게 되자 유리성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고, 종국에는 무엇인가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십 년 전에 중원 침공이라는 그 무시무시한 일을 결행하게 된 것도 그 탓이 없지는 않았다. 모두를 파괴와 불행으로 몰아 넣으면서까지 말이다. 가소는 여인의 우울함을 의식해 미소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소. 내가 왜 중원정복에 실패했는가를. 그리고 근래에 들어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소." 그녀는 아무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소.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이미 패배자들이었기 때문이오. 그 상처 입은 몸으로 경계를 넘어 갔으니 성공을 거둘 리가 없었다는 얘기요." 가소의 음성은 조금씩 열기를 띄어 갔다. 마치 깊이 잠겨 있던 뜨거운 것들이 하나씩 분출되듯 힘이 실려가고 있었다. "우리로 하여금 실패하게 만든 대상은 중원인들이 아니라 애당초 우리를 꺾어 놓았던 모래였소." "왜 그리 생각 하셨습니까?" 여인은 이해하기 어려운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방향 설정이 틀렸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아!" "꺾였으면 재도전을 했어야 마땅하거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 했소. 삶의 터전을 짓밟으며 사막으로 바꾸어 가는 모래가 두려워 회피했던 것이오." "당신......!" "그렇소. 우리는 모래를 극복할 생각은 하지 않았소. 그보다는 안락한 방법을 추구했지. 모래와 바람이 없는 대지, 산과 물이 존재하고 숲과 옥토가 넘쳐나는 중원을 빼앗으려 했단 말이오. 대자연과는 겁이 나 싸워 보지도 않고 남의 땅이나 가로채서 간단히 고통을 해결하려 했었소." 가소의 자성(自省)은 여인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했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에는 어느 덧 눈물이 차 오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가소는 계속 열변을 토했다.


"어리석게도 그 당시에는 이런 생각은 하지 못 했고, 우리는 아무 소득도 없이 중원에 큰 죄만 짓고 말았소." "오오......!" 떨고 있는 여인의 손을 그는 힘주어 잡았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오." 가소는 다짐이라도 하듯 말을 이어갔다. "나는 눈앞의 적과 싸울 것이오. 우리의 삶을 파괴해 가고 있는 저 모래와 싸워서 필히 이겨내고 말겠소. 대자연의 힘이 무한하다고는 하나 우리 인간들도 따지고 보면 그 일부가 아니오? 나는 그 승리가 가져다 준 기쁨을 안고 정중하게 한 번 중원을 방문할 작정이오." "그래서...... 어쩌실 건지요?" "중원 최고의 무인과 겨루어 보겠소. 과거처럼 무지한 침공이 아닌, 당당하게 우위를 가리는 승부를 가지고 싶소." 여인은 격정을 이기지 못해 그의 한 쪽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의 눈물이 가소의 무릎을 흠씬 적셨다. "기뻐요, 고맙구요. 당신께 매이게 된 것을 금후로는 정말로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가소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나야말로 고맙소.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되다니." 그는 한결 가라앉은 음성으로 덧붙여 말했다. "지금에야 얘기요만 내가 생각을 올바로 정리하게 된 배경에는 당신이 있었소. 만일 당신이 곁에 없었더라면 나는 아직도 진정한 절대자의 도(道)를 깨닫지 못 했을 것이오." "아니...... 이전에도 당신은 절대자였어요. 원한과 증오로 가득 차 있던 제 마음을 함락시킨......." "그렇지 않소. 나는 늘 기개를 앞세우면서도 떳떳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갈등과 회의를 거듭하는 이중적인 인간이었소. 그러나 이제부터는 아니오. 향후로 내가 얻게 될 승리는 모두 절대자로서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게요." "믿어요, 당신이 그것들을 필히 성취하시리라고."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기 위해 가소의 수중에서 한 손을 살며시 빼냈다. 결론적으로 자신에 대한 승리와 절대자로서의 완성을 추구하겠노라는 그가 여인의 눈에는 이 순간 인세에 다시없을 거웅(巨雄)으로 비춰졌다. "조반을...... 준비하겠어요." "아! 잊었었군. 시비를 부르겠소." "아니에요. 오늘은 제가 직접 당신을 위해 뭐든 음식을 만들고 싶어요. 허락해 주시는 거지요?" 가소는 여인의 손을 얼른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빼냈던 한 쪽 손마저 도로 부여잡았다. "그 말은...... 지난 이십 년 동안 참으로 듣고 싶었던 것이었소. 당신의 고운 손에 물을 묻히는 일은 용납하기 힘들지만...... 내 오늘은 특별히 허락하리다." 가소의 음성은 그답지 않게 약간 떨려 나오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의 말 한 마디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는 얘기다. 그의 뇌리에는 새삼스레 여인을 데리고 이곳 유리성으로 막 돌아왔을 때의 일들이 떠올랐다. 당시의 그녀는 얼음보다 더 차갑고 매정하여 그의 가슴을 무수히 할퀸 바 있었다. 세월이 약이 되었는지 그녀가 어느 시점에서부터 서서히 마음의 빗장을 열어준 것에 대해 그는 지금도 감사하고 있었다. 이는 그만치 그녀도 어려운 사랑을 수용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실로 내재한 사연들이 많았다. 오늘에야 비로소 그들은 완전하게 벽을 허물고 합치된 것이었다. 한동안 그의 눈을 바라보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저도 알아요...... 당신은 언제나 변함없이 제게 잘 대해 주셨지요. 분에 넘칠 정도로요."


가소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게요. 내 사랑은 시작부터 매우 이기적인 것이었소." 그의 입가로 스르르 쓴웃음이 번졌다. "내가 어떤 위인인지를 다 알면 당신은 실망할 게요." "무슨 말씀이신지?" "사실 그 동안 당신에게 숨겨 왔던 것이 있소." 여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아는 한 가소는 자신에게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숨기는 짓 따위는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웬 엉뚱한 소리란 말인가? 가소는 품 속에서 한 장의 전서(傳書)를 꺼내더니 사뭇 미안한 얼굴로 여인의 앞에 내밀었다. "이걸 보시오." "무엇입니까?" 여인은 기이한 예감으로 인해 한 가닥 불안을 느끼며 전서를 받아 들었다. 가소의 나직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당신 아들에 관한 소식이오." "아!" 여인은 충격을 받고는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마치 강렬한 뇌전이 몸을 훑고 지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정말...... 로요?" "그렇소." 여인의 안색은 빠르게 탈색되어 갔다. 운명이 씌워 놓은 덫을 그녀로서는 감당하기가 너무도 벅찼던 것이다. 그녀를 지켜보는 가소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절대의 가치를 숭앙하며 추구하고자 하는 그도 이런 류의 고통에는 평범한 사고를 지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력하기만 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픔을 읽으며 허공에서 교차되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는 못했다. 격정이 두 사람의 말문을 똑같이 막아 놓았기에. [3] "이상입니다." 말을 맺는 사도린의 음성에는 긴장이 배어 있었다. 지금 그가 부복하고 있는 곳은 전면에 검은 휘장이 드리워진 밀실이었다. 그의 앞에는 두 개의 태사의가 나란히 놓여 있었으며 각기 흑부주와 사부주가 앉아 있었다. 휘장의 뒤쪽에는 흐릿한 그림자만을 보여 주는 한 인영이 자리하고 있었다. 흑풍사 내에서 살아있는 신으로 군림하는 신비의 인물, 즉 사주였다.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아. 그러니까 초사영은 자네의 생일 연회에서 처음 대면하게 되었고, 그의 재질이 뛰어나 파천황에 천거했단 말이지?" 물은 사람은 사부주였다. 그를 향해 사도린은 머리를 깊숙이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보고 드린 바와 같이 그는 충분히 천거할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에게 매혹당했군. 그대는." "시인합니다." 사도린은 솔직함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현 상황에서도 초사영에게 불리하게 작용될 것 같은 소리는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것이다. 사부주는 곁에 시립하고 있는 대두혈박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대두혈박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말했다.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본래 새로운 인물을 등용할 때에는 해당 기관이 사내로 데려다 조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사(査) 군주에게는 그를 좋게 보고 천거했다는 것 외에는 책임이


없습니다." "흠, 그건 그렇군." 사부주는 영 찜찜한 얼굴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다. 그에 따라 대두혈박도 묘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초사영의 공로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가 영입되었기에 오늘과 같은 작전을 수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들의 대화를 듣는 사도린은 짙은 의혹에 잠겨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이렇듯 급히 불러 들였단 말인가?' 말마따나 갑작스런 호출 명령이었다. 그것도 한밤중에 야조를 통해 연락을 받은 그는 그 길로 풍령애를 떠나왔다. 더구나 이곳에 불려왔을 때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부주와 흑부주는 그렇다 치고, 수뇌회의 때에도 잘 참석하지 않는 사주까지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혹여 나에게 불상사가 일어나는 것은 아닌지?' 사도린은 내심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무엇보다 사주가 등장한 것으로 미루어 필시 자신이 무엇인가 중대한 일에 관련이 되었으리라고 추측 중이었다. 그는 이곳에 당도하자마자 추궁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다름 아닌 초사영을 천거하게 된 동기였다. 사도린은 그것을 지금 와서 왜 밝혀야 할 필요가 있는지 여태도 알지 못 했다. 다만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심상치 않다 보니 전전긍긍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사실 사도린은 야심을 품고 초사영과 손을 잡았던 인물이며 그 때문에 그를 파천황에 밀어 넣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 일이 새삼 문제시되고 있은즉 공범(共犯)이나 진배없는 그로서는 등에서 진땀이 흐르지 않을 수 없었다. 흑부주가 나직이 말했다. "대두혈박, 사군주에게 이번 작전의 개요를 말해 주어라.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될 사람이니까." "알겠습니다." 대두혈박은 고개를 숙이고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초사영은 본 흑풍사에 입문했을 때부터 경계 대상이었소. 관례대로 조사를 받았거니와 일신에 지닌 능력에 비해 출신이나 과거 행적 등이 너무도 불투명했기 때문이오. 그래서 그는 특별히 시험을 거치게 되었소." "시험이라면?" 사도린이 묻자 대두혈박은 어렵지 않게 대꾸했다. "흑부주의 명을 받들어 시행한 것이외다. 즉 살수전을 출동시켜 초사영의 진정한 내력을 캐보려 했었소." 그 말에 사도린은 비로소 그 간의 정황을 알 수 있었다. '그랬었군. 살수전에서 무엇 때문에 그를 노리나 했더니 이런 내막이 있었다. 이것이 전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심중을 내색치 않기 위해 짧게 물었다. "결과는?" "놀랍게도 그는 천하제일검인 초아신의 무공을 사용했소." 사도린은 눈을 크게 휩떴다. "그게...... 사실이오?" "그럼 내가 없는 말이라도 지어낸다는 게요?" "아, 아니외다. 내가 너무 놀라 잠시 결례했소이다." 임기응변에 능해 대두혈박에게 재빨리 사과까지 했으나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무진 애를 써야만


되었다. '그가 초아신의 무공을!' 충격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천하제일검 초아신은 벌써 이십 년 전에 죽었다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떨쳤던 명성은 현재까지도 사그라들지 않고 고스란히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거니와, 그의 가공할 무공을 뜻하지 않게 초사영이 펼쳤다는 것이다. 사도린은 침착을 잃지 않는 대신 무겁게 입을 떼었다. "그와 초아신의 관계는 밝혀졌소?" 대두혈박은 말을 이었다. "아직 거기까지는 아니오. 단, 그가 우리와 뜻을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하오." "그것을 어떻게 자신할 수 있소?" "왜냐하면 그가 천궁지회를 치는 그 기간 동안 우리의 비밀조직들도 기습을 받기 시작했으니 말이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 "누군가 계속해서 우리 비밀조직에 관한 정보를 밖으로 유출시키고 있었던 것이오." 사도린은 미간을 모았다. "그럼 그가?" 대두혈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십중팔구는 그러리라 여겨지오. 초사영은 천궁지회의 첩자가 틀림없소. 뜻밖의 사실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또 무엇이 있소?" "천궁지회에서도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 하오. 정보의 출처도 믿을 만한 곳이니 의심의 여지가 없소." 사도린은 그의 단정에도 불구하고 확인하듯 물었다. "믿을 만한 곳이라면 어디를 뜻하는 게요? 본 흑풍사 내의 정보망이 아니고서야......." "너무 자세히는 알려고 하지 마시오. 천궁비영의 핵심인물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계시면 되오." 이쯤 되니 사도린은 혼란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초사영은 어떤 인물인가? 그를 속속들이 잘 안다고 여겼건만 그게 아니었던가?' 의혹으로 치자면야 대두혈박을 비롯한 장내의 인물들도 경험한 바이겠으나 그들과는 입장이 틀렸던 것이다. 대두혈박이 그의 고심을 대신한 듯 말했다. "나는 나름대로 추측을 해 보았소. 과연 초사영이라는 인물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일까하고." "그래, 결론은 얻으셨소?" "그렇다고 봐야 할 것이오. 아마도 그는 계획적으로 천궁지회와 본 흑풍사가 충돌하도록 유도한 것 같소." 사도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도 안 되오. 그가 어떻게 그런 엄청난 짓을?" 의도적으로 과장된 몸짓을 보이기는 했지만 실제로도 그는 초사영이 그런 일을 획책했다는 것은 믿기가 어려웠다. 천궁지회와 흑풍사가 어떤 단체들인가? 양측이 다 명실공히 삼각 무림을 이루고 있는 거대 세력 중 하나이다. 초사영이 아무리 야심만만하고 배포가 크다고 한들 아직까진 그들 두 단체를 농락하려 든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나 사도린이 초사영에 관해 조금만 더 깊이 알고 있었더라면 회의 따위는 일체 갖게 되지 않았으리라.


[4] 흑풍사의 군사(軍師)인 대두혈박. 그는 확실히 사도린을 앞지르는 면이 있었다. "초사영이 대담한 행동을 벌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소이다. 사군주께서는 그 이유가 무엇일 것 같소?" '빌어먹을! 그걸 내가 어찌 아느냐?' 사도린은 이래저래 뭔가 심중에서 울컥 치미는 게 있었으나 꾹 참고 어눌하게 응수해 갔다. "글쎄요, 미치광이가 아니고서야......." 대두혈박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미치광이가 아니오. 지나치게 똑똑한 나머지 은원을 너무 철저히 규명하려고 해서 탈이지." "흐음?" "그는 전 무림을 상대로 도전장을 냈소. 본 사와 천궁지회 간에 충돌을 야기시킨 것도 그 일환이었소." "군사, 부탁이오만 좀 쉽게 말해 주시오. 난 무슨 말인지 도대체 못 알아 듣겠소이다." 급기야 손을 이마에 갖다대는 사도린에게 그는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해답이 나올 게요. 신화가 갑자기 현실로 대두되었다고나 할까?" "아!" 사도린은 짧게 탄성을 발하는 한편, 뭔가 짚이는 바에 의해 전신을 한 차례 격렬하게 떨었다. 대두혈박이 그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울 게요. 나도 그랬었으니까. 사실 절대무가(絶代武家)를 떠올렸을 때의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소." "으음......." 사도린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내기까지 했다. 그때까지 그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사부주가 나섰다. "그대들은 자중해라. 신화는 신화일 뿐, 이십 년을 격하여 현실에서 재현시키려 한다는 건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 그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초사영이 절대무가의 후손이건, 뭐건 본 사를 능멸하려 한 이상 용서할 수 없다." 그 말에 정신을 가다듬은 대두혈박이 뒤를 이었다. "사군주께서 그 일을 맡으셔야 되겠소. 그를 천거했으니 그 정도의 책임은 지셔야 마땅할 것이외다." 그는 사부주와 흑부주의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어조에 약간 더 힘을 주었다. "그 일이란 단순히 그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오. 그렇게 하면야 손쉽기는 하겠지만 초사영으로 인한 우리측의 손실은 메울 길이 없어지는 게요. 양 부주께서는 이 기회에 그를 감쪽같이 이용하라고 말씀하셨소." 거기까지는 사도린도 납득이 가는 듯 전면 수긍했다. "어떤 방법으로 말이오?" "파천황에게는 천궁비영을 치도록 명이 내려져 있소." "흐음?" 사도린의 안면이 몇 번인가 마구 씰룩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심중에서는 이런 부르짖음이 일고 있었다. '우리측에서 먼저 천궁에 휴전을 제의해 놓고 공격이라니, 이건 너무 야비한 수단이 아닌가?' 대두혈박은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것은 사도린의 심중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웃음이었다. "별 문제는 없을 것이오. 그들이 공격하기 전에 본 사에서는 천궁비영에 연락을 취할 예정이니까."


대두혈박은 소매 속에서 한 장의 서신을 꺼내 내밀었다. 사도린은 서신을 받아 읽어보고는 신음을 흘려야 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란 거대한 음모의 덫이었기에. <천궁비영 친전(親傳). 요지(要旨) : 초사영과 파천황에 대한 협조건. 초사영은 이십 년 전 멸망한 절대무가의 후손으로 천궁지회와흑풍사를 충돌하도록 유도하여 무림을 도탄에 빠뜨리려는 야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음. 그는 가문의 복수를 하겠다는 계획 하에 귀 회와 본 사의 휴전을 깨고자 은밀히 비영궁으로 향하고 있음. 그의 의도는 무림의 혼란을 통해 득세하려는 것이 틀림없음. 그 자는 흑조라는 신분으로 본 사는 물론 귀 회에도 그 동안 적지 않은 손실을 가져다주었으리라 사료됨. 이에 본 사는 책임을 통감하며 그를 제거하고자 칠십이로 암흑마군을 추적대로 재편성, 뒤를 쫓고 있는 중임. 심심한 사과와 더불어 천궁지회의 양해를 요망함.> 대두혈박은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천궁비영은 이 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될 것이오. 초사영이 이끄는 파천황은 본 사의 명대로 그들을 완전히 궤멸시키려들 테니까. 그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사군주께서도 익히 아실 터인즉 더 설명하지 않겠소." 사도린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천궁비영 측이 이 서신의 내용을 믿으려 할지?"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렇지는 않을 게요. 하지만 각본이 완벽하니 상관없소. 일단 그들은 파천황의 군단을 막느라 정신이 없게 될 것이고, 그때에 맞추어 사군주가 등장해 주면 그들로서는 무어라 할 말이 없을 게요." "흐음! 듣고 보니 정말 그렇겠구려." "군주께서는 암흑마군을 이끌고 천궁비영의 본 단까지 밀고 들어가시오. 명분은 초사영의 체포요. 그렇게 되면 본 사는 힘 안들이고 두 가지 수확을 거둘 수 있소." 사도린은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럼 그 두 가지 수확이란 천궁비영을 치는 일과 초사영의 제거를 뜻하는 것이외까?" 그 말에는 흑부주가 답했다. "군주, 회의는 금물이다. 명심해라. 천궁비영을 쳐도 본 사는 하등 걸릴 일이 없다. 무림의 공적(公敵)을 처치하는데 그 정도의 불상사야 얼마든지 일어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천궁비영 측도 좋든, 싫든 그 사태를 감수하게 되겠지." '뻔한 속셈!' 사도린은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당신들이 의도하는 건 그 뿐만이 아닐 것이다. 필경 칠십이로 암흑마군의 힘을 약화시켜 나를 거세하려는 계산도 포함되어 있겠지. 멋모르고 초사영 같은 자를 천거한데 대한 문초를 그런 식으로 하려는 것이리라.' 흑부주의 음성이 그의 귓전을 울렸다. "사군주, 수고해 주기 바란다. 부디 칠십이로 암흑마군이 본 사의 정예임을 만방에 과시하도록." 사도린은 모멸감이 느껴져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들었다. 상대의 저의를 알면서도 명령에 복종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이 그 순간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는 초사영을 뇌리에 떠올렸다. '지난 날 네가 내 앞에서 주장하던 바가 이것이겠지? 아무리 설쳐 봐야 삼각 무림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 일개 구성원에 불과하다는. 그 당시에도 인정은 했었지만.' 사도린의 읊조림은 계속 이어졌다.


'나보다 네가 훨씬 낫다. 뜻을 펴다 중도에서 죽어갈지언정 이렇듯 비굴하게 타협하지는 않아도 말이다.' 그는 초사영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내심 씁쓸히 웃었다. 최근까지도 초사영을 어리고 미숙하게만 자신이 더 없이 한심하고 딱하게 느껴지는 그였다. '미안하구나, 초사영!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대두혈박의 날카로운 음성이 그를 재촉했다. "사군주께선 뭘 하시오? 속히 일을 결행하지 않고." 사도린은 그제서야 흑부주와 사부주의 따가운 시선이 의식되었다. 그는 더 지체하지 않고 숙였다. "존명!" 사도린은 몸을 일으켜 밖으로 향했다. 그가 나가고 나자 논제가 없어진 듯 좌중에는 무거운 감돌았다. "흠......." 휘장이 드리워진 곳에서 나직한 침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 소리는 놀랍게도 사도린이 남기고 간 음울한 공기를 대번에 일소시켜 버리는 위력이 있었다.

되니까 보았던

고개를

침묵이

제 23 장 각기 다른 대결의 명분(名分) [1] 스스스스....... 밤안개가 춤을 춘다. 반월(半月)이 잠겨 있는 호면(湖面) 위로 바람을 따라 낮게 떠도는 물안개는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초사영은 오래 전부터 그 정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파양호( 陽湖). 바다를 연상시킬 정도로 드넓은 호수는 그 자체만으로도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다. 굽이치는 파도가 만들어 내는 포말이나 그 위에 덮인 뿌우연 물안개는 금상첨화라고나 할까? 초사영 같은 위인도 감탄을 금치 못한다. '파양호! 동정호와 더불어 대륙에서 손꼽는 대호(大湖)라더니, 크긴 크구나. 더구나 웅장한 모습 외에 이처럼 아름다움마저 간직하고 있다니.' 파양호의 밤 풍경은 그를 신비감으로 몰고 가더니 종내에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자아내도록 만들었다. "아아! 이런 곳에서 근심 걱정 모두 잊고 조용히 파묻혀 지낼 수 있다면......." 제 소리에 놀라기라도 한 것일까? 초사영은 흠칫하는 기색을 보이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후후...... 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그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는 커다란 숙제를 안고 있었으며, 그 해결을 위해 인생을 내놓았다. 일신의 안락함이라든가 평범한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여유 따위는 전부 그와 인연이 없는 것들이었다. 종종 남다른 행로로 인해 샛길을 엿볼 때도 있었지만 초사영은 항시 그 다음 순간에는 제 위치로 돌아와 있곤 했다. 지금도 그것은 다를 바가 없는지라 그는 기분을 바꾸기 위해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켰다. 파르르륵......! 호면을 차고 오르는 밤바람에 그의 옷자락이 찢어질 듯 몸부림쳤다. 바람에 휩쓸려 올라온 안개는 그의 전신을 휘감아 버려 주위 경물들을 모조리 흐릿하게 변형시켜 놓았다. '그래, 나는 아무 것도 보지 말아야 한다.' 마침내 초사영은 투명한 백라(白羅)로 덮인 듯한 파양호의 풍경을 스스로 외면할 수 있었다.


"내가 보아야 할 것은 단 한 가지 뿐!" 그는 강한 어조로 자신을 추스리며 신형을 돌렸다. 그런 심리의 연장인지 그의 발걸음은 점자로 빨라졌다. 호수를 따라 얼마쯤 걷던 그는 멈추어 섰다. 짙은 안개 속이었으나 한 척의 배가 보였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배는 시야가 차단된 사각지대에 정박하고 있는 셈이었다. 뱃머리 부근의 갑판 위에서 한 인물이 서성이고 있었다. 언뜻 보면 제 자리를 느릿하게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제법 여유있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잔뜩 찌푸러진 미간에 초조한 기색이 어려 있으니 말이다. 초사영은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치솟았다. 휙! 그는 안개 속을 갈라 단숨에 갑판에 내려섰다. "사영?" 예의 인영이 돌아서며 반색을 했다. 초사영도 정면으로 그와 얼굴이 마주치자 씩 웃어 보였다. "오래 기다린 모양이구나, 려곡." 그 인영은 소려곡이었다. 그는 초사영이 내민 손을 잡아가면서도 짐짓 으르렁거렸다. "못된! 난 시간을 정확히 맞추어 여기로 왔다. 그런데 정작 오라고 했던 놈이 안 오니 갑갑해 죽는 줄 알았다." 성격상 표현을 거칠게 해서 그렇지, 그 말 속에는 짙은 우의가 담겨 있었다. 그들은 피차에 상대가 늦으면 무슨 변고라도 있는 게 아닌가 해서 걱정을 하곤 했다. 초사영도 이를 아는지라 걸맞게 응수했다. "내 야단을 맞게 될 줄 알았지. 갑판 위를 오락가락하는 널 보니까 진작부터 귀에서 연기가 솟고 있더구나." "푸흐흐흐...... 그래, 별다른 일은 없었고?" "음." 초사영은 간단히 답한 후, 선창의 안 쪽으로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준비는?" "전원이 도착해 있네." "좋아." 초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궁비영의 동태는?" 소려곡은 표정을 진중하게 고치며 말했다. "계속 감시 중이긴 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무슨?" "천궁비영의 본 단에 조등(弔燈)이 걸려 있더군." "조등이라고?" 초사영은 흠칫하여 소려곡을 똑바로 응시했다. 소려곡은 입맛을 쩍 다시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것 같아 조사를 해 본 결과, 천궁비영이 사망했다는 정보를 얻어냈다." 초사영의 눈썹이 불쑥 치켜 올라갔다. "뭣! 천궁비영이?" "내가 보기엔 모종의 음모가 아닐까 싶은데, 넌 어떠냐?" 소려곡은 상대의 의사를 묻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생각이 맞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초사영은 지난번에 있은 군옥명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그 때 그는 분명 해야 할 일이 많이 있다며 사라지지 않았던가? 그런 위인이 느닷없이 죽었다니.' 그는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으나 말로 쏟아 놓지는 않았다. 곁에서 그를 지켜보던 소려곡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쓰헐! 뭔가 감을 잡았으면 내게도 얘기를 해 주어야 할 게 아니냐? 사람 답답하게스리." 초사영은 간단하게 잘라 말했다. "눈으로 본 것만 믿어라." "천궁비영의 죽음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말라는 것이냐?" "성급하게 판단할 필요는 없으니까. 어찌 되었건 그 일은 신경 끄고 내일 새벽에 공격할 수 있도록 준비나 해 다오." "알았다." 소려곡은 대답해 놓고도 무엇 때문인지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를 보며 초사영은 미간을 모았다. "더 할 말이라도 있는 거냐?" 소려곡은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이유는 없지만 난 이번 계획이 달갑지가 않다. 화친을 도모한 것도 그렇고, 이 마당에 우리더러 천궁비영을 습격하라고 하니 뭔가 이치에 맞지 않아." 초사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긴 나도 그런 느낌이 없지는 않다.' 소려곡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사실 천궁비영도 군세가 약한 편은 아니지. 그러나 칠십이로 암흑마군을 동원하면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지 않느냐?" "그야 그렇지." "흑풍사 자체가 잠적해 버린 이상 애써 휴전이니 뭐니 해서 연막을 칠 까닭도 없었거니와, 그 다음에 우리들이 나서서 공격을 한들 계산상 남는 이익이 없어." 초사영은 피식 웃었다. "언제 우리가 그런 걸 따졌느냐? 우리는 그저 맡겨진 일만 제대로 수행하면 그 뿐이야." "옳은 말이군. 지극히." 소려곡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 곳을 뜨려다 말고 그는 등을 돌린 채로 나직이 물었다. "너 정말 아무 일도 없었느냐?" "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나?" 초사영의 반문은 욕설을 들을 빌미가 되었다. "염병할 놈! 내 이제부터 네 걱정을 또 하면 차라리 성을 갈겠다. 기색은 그게 아닌데도 늘 별 일 없었다지. 앞으로 내 눈을 속이려면 좀더 확실하게 연극을 해라." "후후...... 성을 갈더라도 부디 초 씨로 바꾸지는 말아라. 내게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으면." "안되었다만 그럴 일은 없을 게다. 빌어먹을!" 소려곡은 말을 마치자 선창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의외로 세심하고 따뜻한 친구!' 초사영은 한동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파도가 가라앉아 잔물결이 찰랑거리는 호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변한 것이다. 그가 눈치챌 정도로.' 숨길 수도,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내면의 소리였다. 초사영은 스스로도 그 내면의 소리를 수긍했으며 그것이 군옥명을 만난 이후부터였다고 생각했다. '천궁비영주는 필시 죽지 않았으리라. 그는 어쩌면 이런 식으로 내 진로를 터주며 나를 시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입술 가에는 쓴웃음이 맺혔다. '내게 천궁비영을 주겠다고 했는데 나는 그곳을 공격하게 생겼으니 이상한 거래가 되어 버렸군.'


초사영은 팔짱을 끼고 주위를 거닐었다. '강한 이성도 감정의 침해를 받기 마련인가? 그건 나도 소위 인간이라는 얘기가 될 것이다.' 그는 시선을 먼 곳으로 던졌다. '그러나 나는 더욱 강해지도록 노력할 것이다. 부러질 때 부러질 망정 굽히거나 흔들릴 수는 없다. 그럴 것 같았으면 오래 전에 할아버님께 고개를 숙였겠지.' 부는 바람에 땅 위를 점령했던 안개는 흩어지고 없었다. 물안개만이 수면에 멀리로까지 낮게 깔려 있을 뿐이었다. '내일은 혈전이 벌어지겠지. 결과가 어떻든 이 파양 호는 변함없이 아름다울테고.' 무심코 독백을 흘려 내던 초사영은 고소를 떠올렸다. '변함없이?' 정서가 깔린 독백의 일부를 되씹어 보며 그는 어쩌면 자신의 외고집을 비웃고 있는지도 몰랐다. 초사영은 침실로 가기 위해 선창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오늘 밤 자신이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2] 모옥 안.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자들은 여기에도 있었다. 밤이 깊었건만 그들은 빙 둘러앉아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군옥명이 죽은 후로는 텅 비어 있던 방이었다. 오랜만에 그 빈 공간을 네 명의 인물이 와서 차지하고 있었다. 한 노승이 눈에 띄었는데, 그는 소림의 호법승(護法僧)인 무우대사(無愚大師)였다. 그가 이 자리에 있게 되기까지에는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본시 천궁비영은 따로 경비를 세워 두는 법이 없었다. 천궁지회에서 나와 상주하는 인물이 있었고, 그들이 경비 내지는 보호역을 담당해 주었던 것이다. "아미타불...... 정녕 기막힌 일이오. 흑풍사에서 무슨 저의로 이런 짓을 벌였는지......." 탄식하는 무우대사의 옆에는 도인도 한 명 앉아 있었다. 무당의 진곡진인(眞曲眞人)이었다. 그도 무우대사나 다른 한 명의 인물과 함께 천궁비영에 상주하는 고수로서 오늘의 자리가 특별하기론 마찬가지였다. "어디 기가 막히다 뿐이오?" 나머지 한 인물, 즉 화산의 자죽검협(紫竹劍俠) 도위량(陶韋亮)이 말을 받았다. 그는 얼굴빛이 약간 검은 자로 눈가에 검흔이 그어져 있어 가만히 있어도 예기가 느껴지는 자였다. "휴전을 제의해 놓고 영주를 은밀히 불러내어 암살하다니 이건 도저히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외다. 저의를 따지기 전에 우리에게는 차후를 위한 대비책 마련이 시급하오. 흑풍사는 원래부터 암계를 즐겨 쓰는 자들이 아니외까?" 외양뿐 아니라 말투에서도 그의 깐깐한 성품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또 다른 한 사람에게로 돌아갔다. 그 자는 신분상 이 자리에서는 별개의 존재라고 할 수 있었으며 시종 말도 없었다. 일신에는 백의를 입고 있었는데 긴 머리를 풀어 헤쳐 허리 아래까지 내려뜨리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과의 대비로 인해 창백한 안색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이는 그 자는 천궁비영의 부영주인 옥사후였다. 평소 깔끔한 것을 선호해 차림이 단정하던 그가 그처럼 흐트러진 모습으로 석상처럼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좌중의 인물들 중 그 점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이라 해도 졸지에 사부를 잃게 되면 그와 마찬가지로 넋을 잃게 되었을 테니까. 옥사후는 전면의 신위(神位)를 향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었다.


<천하대협 군옥명 지위(天下大俠 君玉明 之位)> 불현듯 옥사후의 입에서 한 가닥 음성이 새어 나왔다. "절대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초사영......!" 낮았으되 그 음성에는 절절한 통한과 분노가 배어 있었다. 이로 미루어 그가 지금 자신을 억제하느라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는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노릇이었다. 덕분에 이런저런 논의가 오가던 좌중의 분위기는 자못 숙연해졌다. 그들은 한결같이 옥사후를 보며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기도 했다. 무우대사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부영주, 우선은 사태의 추이를 관망해 봅시다. 흥분하여 사태에 임하게 되면 자칫 일을 그르칠 수도 있소." 옥사후가 처음으로 그를 힐끗 돌아다보았다. "상황이 선명하게 보이는데도 말씀입니까? 그러느니 차라리 초사영에게 직접 찾아가서 사부를 정말로 시해했느냐고 따져 묻는 편이 훨씬 낫겠군요." 무우대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미타불...... 진정하시오. 노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오만 그가 이끄는 파천황은 우습게 여길 상대가 아니오." 그 한마디에 이제껏 담담하던 옥사후의 눈에서 섬뜩한 광망이 뻗어 나왔다. 그 누구와도 비교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의 성정이 여기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이었다. "본 천궁비영도 만만치는 않을 것입니다. 비록 사부께서 유명을 달리 하시기는 했지만 힘만은 건재합니다." "내 말뜻은 그게 아니라......." 변명을 하려는 무우대사의 말을 그는 차갑게 잘랐다. "사부의 영전에 맹세하노니, 가까운 시일 내에 반드시 그 자를 처단하고 말겠습니다." "아미타불......!" 무우대사는 더 하고 싶은 말을 탄식과도 같은 불호성으로 대신했다. 그 곁에 잠자코 있던 진곡진인이 냉각된 분위기를 의식해서인지 조심스럽게 나섰다. "무량수불...... 대사, 그 건에 대해서는 부영주께 맡겨 두십시다. 우리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닌 듯 싶소." 그 말에는 꽤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은연중 옥사후라는 인물의 지위 향상을 암시하고 있다고나 할까? 옥사후는 천궁비영의 부영주라고는 하나 영주인 군옥명의 그늘에 가리어져 오늘날까지 존재가 미미했었다. 나름대로 곳곳에서 부단히 활동을 펼치기는 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군옥명의 인가가 떨어지고 난 후에야 가능했던 일인지라 타인들로부터 인정을 받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호랑이가 죽으면 여우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말도 있거니와, 중인들로서는 옥사후가 성에 차지 않더라도 이제는 꼼짝없이 그를 천궁비영의 영주 자격으로 대접해야만 되었다. 본인도 이를 알아 차렸는지 곧 태도를 바꾸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독단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대사께선 널리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옥사후는 사과와 더불어 정중히 포권을 취해 보였으며, 그런 그에게서는 전에 없던 품위마저 엿보이고 있었다. 정도 무림 최고 후기지수로서의 면모야 예전부터 갖추고 있었지만 달라진 지위가 그를 더욱더 받쳐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무우대사나 진곡진인은 아예 함구해 버렸고, 도위량의 각별한 성품만이 여전한 기세를


보였다. "그 새 부영주께선 부쩍 성숙해진 것 같소. 부디 사부이셨던 군영주의 명성에 필적할 만한 인재가 되어 주시오." 이는 인정할 것은 인정하면서도 따끔한 일침(一針)이 내포된 말이었다. 사부의 영전에서 품위를 과시하는 제자가 아무래도 아름답게 보일 리는 없었으므로. '빌어먹을 늙은이!' 옥사후는 내심 욕설을 퍼부은 뒤, 그들 삼 인의 거북스러운 눈길을 피해 가슴을 쭉 폈다. '내 곧 그대들에게 보여 주겠다. 나라는 인물이 천궁비영을 관장하게 된 것은 무림의 홍복(洪福)이라는 사실을.' 그가 진심으로 사부의 죽음을 애도하는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듯 관심이 다른데 쏠려 있으니 말이다. 그때였다. 누군가 모옥 안으로 왈칵 뛰어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검은 봉투에 싸인 문서를 들고 있는 그는 결각의 정진이었다. "부영주!" 그는 급하게 뛰어 온 듯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맞는 옥사후의 음성은 그리 곱지 않았다. "무슨 일이오?" 호들갑을 점잖게 나무라는 것이었으나 그 한 마디의 위력은 대단했다. 옥사후의 앞에서는 늘상 정중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당당했던 정진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꺾고 있었다. "죄송하오이다. 워낙 급전(急傳)이다 보니......." 그는 검은 봉투를 옥사후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무엇이오? 이건." 문서를 훑어 본 옥사후는 기이한 웃음소리를 냈다. "후후후후......!" 그것은 비애와 함께 왠지 처절함마저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무우대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부영주, 어떤 내용이길래 그러시오?" "기뻐하십시오. 그들이 제 발로 걸어 들어 온다는군요." 좌중의 인물들도 그가 내려놓은 문서를 읽어보았다. 그들의 안색은 한결같이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그 급전이란 흑풍사로부터 날아 온 것이었다. 정진도 결각주인 만큼 먼저 개봉을 하기는 했으나 판단이고 뭐고 할 여지도 없이 그대로 들고 이곳으로 달려 왔다. "아미타불...... 어찌 이런 사태가?" "그럼 흑풍사에 내분이라도 일어났다는 게요?" "파천황이 쳐들어 온다니...... 무량수불......." 좌중의 반응에 옥사후는 냉소했다. "이것이야말로 흥분할 일이 아닙니다. 차분하게 논의하여 대응 방안을 마련토록 해야지, 안 그렇습니까?" 그 말에 아무도 대꾸하는 자가 없었다. 특히 무우대사는 수치감을 느낀 듯 노안을 은은히 붉히고 있었다. 이틀 후. 그들은 다시 모옥에 모였다. 회합은 전날에도 있었지만 이유는 흑풍사가 보내온 서신을 놓고 적절한 방도를 강구하기 위해서였다. "아미타불...... 예상했던 기일이 도래했소. 뭔가 확실한 대책이 서 있지 않으면 그들을 막아내기는 어려울 게요." 무우대사의 말에 옥사후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보다 그들이 쳐들어온다는 것을 어떻게 단정짓습니까? 그 자체가 계략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자죽검협 도위량이 뒤를 이었다. "일리 있는 얘기외다. 파천황은 엄연히 흑풍사의 조직이거늘, 아무리 반역을 꾀했다 해도 어째서 자체적으로 그들을 처리하지 않고 우리 진영에서 일을 벌이려고 하는지 모르겠소." "그건 초사영이 임의로 휴전을 깨고자 기습을 감행하는 바람에 그리 되었다고 하지 않더이까?" 진곡진인이 말하자 옥사후는 고개를 저었다. "그 부분은 석연치 않습니다. 과연 초사영이 흑풍사라는 배경 없이 독단으로 그 일을 벌일 수 있을까요?" "흐음......." 중인들은 침음성을 흘리며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그의 말은 옳았기 때문이었다. 옥사후는 계속 그런 식으로 대세를 주도해 나갔다. "어찌 되었건 가장 큰 문제는 기일이 촉박하여 지원군을 요청할 틈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곳의 힘만으로 그들을 막아내야 하는즉 다들 각오를 단단히 하셔야 될 겁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제가 알기로도 초사영은 지극히 위험한 자입니다. 전 무림을 상대로 가문의 복수를 하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만큼 섣불리 다루었다가는 우리측이 크게 다칠 것입니다." 중인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그 와중에 무우대사가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부영주, 이렇게 앉아 기다리느니 차라리 나가서 그들과 싸우는 것은 어떻겠소?" 옥사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아니 될 말씀입니다. 이곳은 천혜의 요새로 다수를 맞아 싸우기에는 더 없이 적절한 장소입니다. 밖으로 나가 봐야 이로울 것이라곤 조금도 없습니다." "흐흠, 그렇다면야......." 그로써 중지는 모아진 셈이었다. 그들은 옥사후에게 전권을 일임하고 협조를 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문 밖에서 급박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부영주! 그들이 당도했다는 보고가 들어 왔습니다." 옥사후는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드디어 왔군!" 그는 중인들을 젖혀 두고 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아미타불...... 우리도 나가십시다." 무우대사를 위시하여 그들도 뒤를 따랐다. [3] 휘이이잉―! 바람결은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피 냄새를 전하듯. 그의 발 아래에서 돌멩이 하나가 무참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이는 그의 심기가 편치 않다는 증거였다. "군주! 파천황이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급한 전갈에도 그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군주......?" 수하가 재차 불렀으나 사도린은 응대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말을 못해서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므로. '파천황...... 이렇게 끝나고 마는가?' 그가 있는 곳은 천궁비영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작은 산이었다. 그의 뒤쪽으로는 칠십이로 암흑마군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그 숫자는 어림 잡아도 수백이 넘어 보였다. "저어...... 군주."


사도린은 그제서야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알았다. 그만 물러가거라." 지금 그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한 가지 뿐이었다. '연아야!' 사도린은 의외로 이 순간에 일점 여식인 사화연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죄책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허허...... 어미의 정도 못받았으면서 훌륭히 자라 주었어.' 읊조리다 보니 그의 기억은 과거로 되돌아간다. 출세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한 때였다. 당시 그는 스스로를 포함해 일신에 딸린 전부를 버렸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원하는 바를 아무 것도 달성할 수 없었기에. 그 상황에서 그의 아내는 불치의 병이 들었고, 돌보아줄 남편이 없는 가운데 외로움과 싸우다 끝내 죽고 말았다. 그래서 사도린은 아내를 생각하다 보면 늘상 자신이 그녀의 목을 조인 것 같아 자책을 면치 못하곤 했다. 이 점은 그녀가 남기고 간 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내를 그 지경으로 몰아갔듯 그는 사화연에게도 자라는 동안 무엇 하나 제대로 신경을 써 준 적이 없었다. 최근 들어 성의를 한껏 발휘하긴 했지만 그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그렇듯 고아 아닌 고아로 지내온 딸에게 사도린은 훨씬 더한 고통을 안겨 줄 입장이 되어 버렸다. 그녀가 생애 최초로 사랑하게 된 인물을 그는 죽여야만 하는 것이다. '이 아비를 용서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이 일이 내 뜻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주어도.......' 사도린은 풍령애가 있는 쪽의 하늘을 우러러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현실을 수용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칠십이로 암흑마군의 삼엄한 예기가 뭉쳐져 있는 곳으로.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 활시위는 당겨졌다.' 그의 입에서 일성의 외침이 울려 나왔다. "공격할 채비를 갖추어라!" 심적인 고통과는 별개로 행동해야 하는 인간, 그의 눈이 몹시도 흔들리고 있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사도린이 그러한 자신을 발견하고 비애를 느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바람은 기승을 부리며 하늘로 휘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휘류류류― 스스슷!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 죽립에 검은 피풍의로 전신을 감싼 그들의 운신은 달빛도 없는 이 밤에는 분간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검은 그림자들은 한 촌락으로 깊숙이 잠입해 갔다. 그곳에는 몇 채의 목옥(木屋)을 중심으로 대략 삼백여 채에 이르는 집들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평범한 촌락이었으되 기이하게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야심한 시각이라도 누군가 글 읽는 소리 정도는 들려 와야 정상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촌락이 정도 무림의 비밀 정보처인 천궁비영의 본거지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런 의문은 갖지 않게 되리라.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지만. 그곳에 잠입을 시도하고 있는 무리는 흑풍사의 파천황이었다. 그들은 계곡들 사이로 얽히고 설키듯 교묘히 자리잡고 있는 가옥들을 통과해 중심부로 밀고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이다. 둥둥둥둥―!


기다렸다는 듯 웅장한 북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어둠이 달아나며 사위가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횃불들이 도처에서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가옥 내에서도 일제히 점등을 했던 것이다. 어둠에 휩싸였던 촌락은 바야흐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그 속에서 초사영은 굳어지고 말았다. '함정!' 예기치 못했던 사태였다. 횃불의 불빛은 그를 비롯한 파천황의 전사들을 모두 노출시키기도 했지만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수백의 인영들까지도 친절하게 보여 주었다. '게다가 포위되기까지!' 그의 등에서 진땀이 솟을 때, 전사들 사이에서는 크게 동요가 일었다. 소려곡이 곁에서 김빠진 음성을 냈다. "쓰헐!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더라니." 휘익! 하나의 그림자가 숲 속으로부터 튀어 올라와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목옥의 지붕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그는 주위를 한 차례 쓰윽 훑어 보더니 낭랑한 음성을 냈다. "이곳에 초사영 소협도 있소?" 이름이 불리어지자 초사영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 했다. 하지만 소려곡이 막아서며 그를 대신하듯 크게 외쳤다. "넌 누구냐?" 지붕 위 인영이 대답했다. "본인은 옥사후라 하오." 자신을 소개한 그는 싸늘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기다렸소이다. 내 천궁비영의 부영주로서 그대들을 열렬히 환영하는 바이오." 소려곡은 초사영을 힐끗 돌아보더니 전음으로 물었다. (저 작자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느냐? 군옥명이 없으니 저렇게 나서서 설쳐대는 모양인데.) (약간은.) 초사영도 전음으로 답했다. 실제로는 옥사후와 일면식도 없는 처지였으나 언젠가 천살마희, 즉 상관운봉이 당부했던 말을 뇌리에 떠올렸던 것이다. ― 옥사후라는 자를 조심해요. 초사영은 옥사후를 유심히 바라보며 덧붙여 말했다. (설칠 만한 자일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지략은 물론 군옥명의 모든 것을 물려받았다니까.) (빌어먹을! 살아 남기는 어렵겠군.) 옥사후의 음성은 또 들려왔다. "자! 그럼 수고들 하시오. 손님 대접은 소홀하지 않도록 꽤 신경을 써 두었소이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나타났을 때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놈! 그 따위 소린 안 해 주어도 된다." 소려곡은 약이 오르는 듯 주먹을 허공에 대고 휘둘렀다. 그 때를 기해 그들을 에워싸고 있던 포위망이 점차 조여들기 시작했다. 이를 느낀 소려곡이 초사영에게 물었다. "어쩔 거냐?" 초사영은 망설임 없이 간단하게 말했다. "수하들에게 전력으로 무차별 공격을 가하도록 명하게." 소려곡은 펄쩍 뛰었다. "너 지금 제 정신이냐? 이렇게 포위된 마당에." "맞아. 우리는 포위되었다. 더구나 저들은 우리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으니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일 게야." "그런데 어째서?" 소려곡은 초사영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더듬거렸다. "이번 일은 그냥...... 포기하자." "아니, 저들의 예측에는 우리가 도주하리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을 게야. 후퇴를 하게 되면 저들의 뜻대로 움직여 주는 결과밖에는 안 된다. 실패할 확률도 그만큼 커지지." "그럼?" "방법은 하나 뿐이다. 죽음에서 삶을 찾는 것!" 소려곡도 그제서야 수긍의 뜻을 표했다. "알았다. 시키는 대로 하지." 그는 명을 내리기 위해 파천황의 전사들 쪽으로 돌아섰다. "잠깐!" 초사영이 그를 제지시킨 후,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한 가지 명이 더 있다. 이건 너에게만 해당된다." "나에게만?" "그래, 공격이 시작되면 넌 최선을 다해 도주해라." "무, 무슨 소리야?" 소려곡은 어이가 없어 초사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울러 그는 초사영이 자신의 손을 꽉 잡고 있다는 것도 알아 차렸다. "사영......?" "내 명을 거부하지 말아라. 심히 유감이지만 우리의 몰살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소려곡은 큭큭 웃었다. "그래서, 나 혼자만 탈출해서 뭐 하라는 거냐?" "어디 은밀한 곳을 찾아가 숨어서 살도록 해라. 천궁지회와 흑풍사의 힘이 미치지 않는 장소에서 말이다." "잡놈!" 소려곡의 얼굴이 급기야 벌겋게 상기되었다. "네놈이 날 어찌 보고............." 초사영이 그의 말을 중도에서 끊었다. "말 들어라, 려곡. 부탁이다." "얼씨구! 이놈이 명령이 안 통하니 이젠 부탁까지?" "려곡!" "미친...... 그럼 넌?" "난 여기서 죽어도 상관없다. 목표에 도달하지 못해 애석하기는 하다만 최소한 시도해 보았다는 자부심은 있으니까." "너......?" 소려곡은 갑자기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것은 상대에게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사영, 너에게는 내가 모르는 부분이 더 있었구나.' 그가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초사영이 예고도 없이 그를 향해 일장을 내쳤다. 펑! "으아아― 죽일 놈―!" 막강한 장세가 소려곡을 대번에 삼십여 장 밖으로 날려 버렸다. 그가 사라지자 욕설의 여운만이 장내에 남았다.


'려곡, 부디 살아서 돌아가다오. 그리고 소소를 부탁한다.' 초사영은 마음 속으로 그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전하고는 파천황의 전사들에게 직접 명했다. "공격해라! 무차별이다." 츠파앗! "크아아악―!" 검광이 뿌려지고 피가 튀어 올랐다. 외침과 함께 초사영이 몸을 날려 일검에 몇 명의 수급을 떼어냈던 것이다. 그가 보여준 극쾌의 선전(宣戰)은 포위 당한 파천황 전사들의 사기를 하늘까지 올려놓아 상황을 급전시켰다. 채채챙! 파아아아― 파천황의 전사들도 일제히 몸을 날리거나 검을 뽑아 들고는 눈에 보이는 적들을 마구 주살해 가기 시작했다. 콰쾅! 콰르르르릉― "으아악! 크아아악―!" 순식간에 장내는 아수라장으로 화하고 말았다. 횃불 속에 무수한 검광이 번뜩였고, 그럴 때마다 피가 튀고 살덩이가 베어져 나갔다. 삽시에 평화로운 촌락으로 보이던 천궁비영의 본거지는 귀역(鬼域)으로 화하고 말았다. [4] 모옥 안. 군옥명의 전유물이던 탁자에는 옥사후가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한 장의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계곡 사이에 있는 이 촌락의 전경이었는데, 곳곳의 요소와 가옥에는 각기 붉고 푸른 동그라미들이 그려져 있었다. 옥사후가 붉은 동그라미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것은 사문(死門)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기관장치와 천궁지회의 절정 고수들이 배치되어 있지. 파천황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걸려들면 죽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 그는 시선을 파란 표기로 돌렸다. "이 생문(生門)에도 죽음은 존재한다." 그의 눈에 기광이 스쳐가며 입가에는 미소를 피워 올렸다. 그것은 섬뜩하도록 차갑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그들은 이곳을 통과하기 위해 천궁지회의 수많은 고수들을 베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피아(彼我)를 구분할 필요가 없지. 후후...... 이번 결전의 핵심은 바로 이 점이다." 옥사후는 천궁지회에 속해 있다고 볼 수 있는 천궁비영의 부영주이다. 천궁지회 측에 대한 별도의 배려가 있어야 마땅하거늘 오히려 희생을 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생문을 지키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사부의 뒤를 이어 영주가 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거나 내 능력이 사부보다 뒤떨어진다고 보는 괘씸한 위인들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파란 점을 툭툭 쳤다. "안되었지만 그대들은 죽어 주어야겠다." 낮게 읊조리는 그의 음성에는 사뭇 득의가 어려 있었다. "그래도 내가 지시한 바를 충실히 지키는 자는 살아 남겠지. 그리고 죽은 자들을 거울 삼아 향후로 이 옥사후를 밀어 주게 되겠고. 나를 거스르면 어찌 된다는 걸 알 테니까." 옥사후가 세운 전략에는 그처럼 무서운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는 이후로 얻어질 수확에 대해서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번 싸움이 끝나면 나 옥사후는 당당히 천궁비영의 영주로써 자리매김을 하게 되리라. 나아가서


천궁비영은 천궁지회 전부를 장악하게 될 것이다." 크든 작든 야망이란 정신의 소산이니 인간으로서 야망을 품는 것은 그르게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에의 달성을 위해 어떤 식으로 노력을 기울이는지는 명확하게 따져 볼 일이다. 여기서 비로소 옳고 그름이 가려지며 선인(善人)과 악인(惡人)이 구별되니까 말이다. 옥사후의 경우에는 야망을 이루기 위해 어제까지 동료였던 자들을 서슴치 않고 죽이려 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선인의 범주에서 이탈하고 있다고 보면 맞았다. 양심의 가책 따위도 없었는데, 이럴 수 있는 연유는 사부인 군옥명과 그의 관계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답이 나온다. 옥사후는 군옥명에 대해 극도의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군옥명은 언제부터인가 유일한 제자인 자신을 젖혀놓고 내막적으로 다른 자와 유착되어 있었다. 더구나 흑조라는 암호명을 가진 그 인물이 초사영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옥사후는 전신의 피가 거꾸로 도는 기분이었다. 제자를 배신한 사부, 또 그 사부를 배신하여 시해한 흑조, 이렇게 이어지는 연결고리는 옥사후가 비뚤어진 야망을 설계하는데 다시없는 타당성을 부여해 준 셈이 되었다. 밖으로부터 약간의 긴장을 머금은 음성이 들려왔다. "부영주, 정진이외다." 옥사후는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들어오시오." 정진이 대내외 정보를 분류하는 결각주로서 상황 판단에 일가견이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에게 옥사후가 물었다. "어떻습디까? 현 상태는." 정진은 시립한 자세 그대로 허리를 숙이며 보고했다. "의외로 저항이 거세오이다. 생문을 지키는 자들의 피해가 커 막대한 손실이 우려됩니다." "놈은?" 옥사후가 지목해 묻는 대상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초사영이었다. 정진은 지극히 침중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자의 무공 실력은 상상 이상입니다. 단숨에 삼 관까지 돌파하고 현재는 몇몇 측근들과 사 관을 뚫고 있습니다." 옥사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심 중얼거렸다. '좋아, 불과 반 시진만에 사 관에 도달해 있을 정도라면 곧 나와 대면하게 되겠군. 기대를 벗어나지 않아 다행이다.' 그는 물었다. "놈이 오 관에 들어설 만한 예상 시각은?" "일 각 후면 가능할 것입니다." 정진은 대답하더니 시키지도 않은 말까지 했다. "그러나 그가 오 관을 통과할 때쯤이면 오직 그 만이 살아남아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쯧, 멍청한 작자! 넌 나를 위로한답시고 말했겠지만 그것이야말로 내가 학수고대하던 일이란 말이다.' 옥사후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다행이구려. 그리고 애써 마련해 놓은 선물이 있으니 놈도 끝내는 제거할 수 있을 것이오." 그는 여유있게 창가로 향하는 반면, 정진은 제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장승처럼 서 있었다. 나가 보라든지 뭐라든지 지시 사항이 없고는 움직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슈슈슈슉―!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아무리 초절한 무학을 지니고 있더라도 이 속을 뚫고 나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리라.


파파파팟! 초사영은 검을 휘둘러 화살을 퉁겨 내며 전진하고 있었다. 물론 그도 어깨, 허벅지 등을 화살에 꿰뚫린 상태였다. 그 와중에 그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와 행동을 함께 하는 자는 그 자신을 포함해 다섯 명이 전부였다. 무수한 파천황의 전사들이 네 개의 관문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죽어가거나 곳곳으로 흩어져 버렸던 것이다. 초사영은 한 인물을 응시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멍청한 놈! 사라지랬더니." 그 자는 소려곡이었다. 그는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아내며 씨익 웃었다. "돌대가리 같은 놈, 내가 멍청한 줄 이제야 알았느냐?" "시끄럽다!" "흐흐...... 나 혼자 도망가는 것보다야 네놈 곁에 붙어 있는 편이 훨씬 낫지. 그래야 살아날 확률도 높고. 안 그렇느냐?" "닥치라고 하지 않았느냐?" 초사영은 짐짓 성을 냈으나 마음은 그 반대였다. 그의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 미소마저 떠오르고 있었다. 소려곡이 장내로 되돌아온 것에 대해 그는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일편으론 고맙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놈! 포위망을 뚫고 이곳까지 오기만도 수월치 않았을 텐데.' 그것은 그의 짐작만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소려곡은 초사영의 곁으로 오느라 이 촌락을 벗어나는 것만큼이나 위험을 겪어야 했는데, 그러면서도 오지 않고는 도저히 견디지 못할 정도로 초사영에게 정이 깊었다. 아무튼 초사영을 비롯한 다섯 명의 파천황들은 땀을 비오듯 흘리며 검으로 화살을 일일이 막아내는 수고를 해야만 되었고, 개중에서 일신이 멀쩡한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화살 우박이 말끔히 사라졌다. "휴우, 마침내 화살이 다 떨어졌나 보구나." 소려곡은 긴박한 상황에서도 너스레를 떨었다. 초사영이 그를 보며 어깨를 으쓱 했다. "하긴 그렇게 쏘아 댔으니 떨어질 때도 되었지." 여유를 보이고는 있으되 그들의 심경은 편할 리가 없었다. 초사영은 불안이 깃든 시선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5] 그 곳은 잡초만이 무성한 화원(花園)이었다. 건너편으로는 한 채의 모옥이 보였다. 비록 거리가 멀기는 했으나 초사영은 그 모옥의 창문에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인물이 옥사후라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초사영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침착하게 말했다. "화살 세례는 그쳤지만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저 곳까지 도착하려면 심장이 몇 차례는 더 덜컥거릴 테니까." 소려곡을 포함한 나머지 사 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사영은 화원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가 약 이, 삼 장 정도 진입해 갔을 때였다. 파팟! 화원의 땅 속으로부터 일곱 개의 인영이 튀어 올랐다. 츠츠츠츳―! 도광(刀光)이 난무하며 다섯 명의 객(客)을 덮쳐왔다. 묘한 것은 그들의 공세가 마치 초사영과 다른 네 명을 갈라놓으려는 듯 중간부를 짓쳐 온다는


점이었다. "차앗!" 파츠읏! 초사영의 맹렬한 검세가 떨쳐졌다. "잡종들!" 소려곡도 욕설을 퍼부으며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카카카캉! "크아아악―!"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고, 그 가운데 연이은 비명 소리가 화원을 흔들어 놓았다. 비명은 정확히 여덟 번 울렸다. 불시에 기습을 가해온 자들이 초사영과 소려곡의 손에 의해 죽었으며, 그들의 공세에 파천황 전사 한 명의 목이 달아났다. "우우우......!" 치를 떠는 동료들에게 초사영이 말했다. "동요하지 마라. 위험은 끝난 게 아니니." 그의 경고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나머지 삼 인은 자세를 추스르며 흔들림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사사사삭! 지극히 미약한 음향이 울리며 잡초의 무리들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도합 열두 줄기로 흡사 배가 지나며 강물에 긴 꼬리를 남기듯 물결치는 모양을 만들어 냈다. "조심해라!" 초사영은 날카롭게 외치며 전면으로 쏘아져 갔다. 그 방향은 갈라지는 잡초 무더기의 정 중앙이었다. 팟! 직선으로 대기를 가르던 그의 신형이 위로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그의 검은 내리찍는 도끼인 양 수직으로 그어졌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화원 위로 피 분수가 뿜어졌다. 그러는 동안 열한 줄기의 물결은 해일처럼 일제히 치솟아 오르며 소려곡 등 남은 세 명을 무섭게 덮쳐갔다. 콰아아아―! 그 기세란 실로 장관이었다. 열한 개의 그림자가 허공에서 거미줄처럼 얽혀 밀어닥치자 소려곡이 다급히 외쳤다. "흩어져라!" 아울러 그는 수하들에게 물러설 여유를 벌어주기 위해 열 한 명이 형성해 낸 검막에 그대로 돌진해 갔다. 파파파팟! 그의 손에 들려져 있는 검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춤을 추었다. 하지만 곁눈으로 그 광경을 보게 된 초사영은 대경했다. "저, 저런!" 파아앗―! 부르짖음이 먼저인지, 그의 신형이 먼저 날아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른바 신검합일(身劍合一)을 이룬 그는 질풍처럼 쏘아져가 소려곡과 십일 인 합격의 검막 사이로 파고들었다. 카카카캉! 콰우우우― 연이은 금속성과 함께 대기가 무섭게 진동했다. 그 바람에 혈우가 뿌려졌으나 비명은 그 속에 파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이 한 번의 격돌로 소려곡을 덮쳤던 열한 명의 무사들은 놀랍게도 전신이 걸레쪽처럼 찢겨져 죽고 말았다. "으음!" 땅에 내려서는 초사영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전력을 다해 펼쳐낸 공세로 그들 열한 명을 제거할 수는 있었지만 그도 각기 다른 부위에 삼검(三劍)이나 맞았던 것이다. 비록 치명상은 아니었으나 그의 상세도 가볍지는 않았다. 상처는 대부분 한 자 길이에 달했으며, 어깨의 상처가 가장 깊어 그 부분은 허옇게 뼈가 드러나 있었다. "사영......!" 소려곡이 마치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겨우 일 검을 맞는데 그쳤거니와, 초사영이 그처럼 중상을 입은 것을 보자 오히려 더 가슴이 내려앉았기 때문이었다. "정신 빠진 놈!" "그러는 넌?" 두 사람은 결국 쓰게 웃고 말았다. 그런데 이 때였다. "크억!" 갑자기 처절한 비명이 울려서 돌아다본즉 파천황 전사 가운데 한 명이 나동그라지고 있었다. 그는 땅 속으로부터 튀어나온 도에 발목이 잘린 채 쓰러져 몸부림치고 있었다. 초사영은 대노했다. "야비한!" 그의 신형이 이번에는 수하들의 앞으로 날아갔다. 츠으으으읏―! 그의 검이 광란과도 같은 춤사위를 펼쳤다. "으악! 크아악―!" 잇달아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리며 땅 속으로부터 십여 명의 청의인들이 튀어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분노의 일검에 의해 저마다 신체에서 머리통을 잃고 있는 상태였다. 슈슈슈슉―! 화살 세례가 재개된 것은 그 찰나였다. 어디서 발출되었는지도 모를 십여 대의 화살이 미처 숨돌릴 틈도 없이 초사영에게 퍼부어졌다. 더구나 이때의 그는 허공에 떠 있는 처지인지라 안성맞춤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안돼―!" 소려곡의 외침이 허공을 찢었다. 동시에 그는 빗살처럼 솟구쳐 오르더니 초사영을 밀어 밑으로 떨어뜨렸다. "으허억!" 그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울려 나왔다. 그 소리는 초사영의 귀로 분명히 전해져 왔다. 화살이 살갗을 뚫고 몸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섬뜩한 음향과 함께. 이어 그는 소려곡이 전신에 화살이 박혀 고슴도치가 되어 있은 모습과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수하 두 명이 땅 속에서 솟구치는 청의인들에게 죽어 가는 광경을 보아야 했다. 그 두 가지 사태는 모두 몸의 중심을 잡지도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져 그가 맞이한 것은 오직 처참한 결과일 뿐이었다. 푸르르르......! 초사영의 옷자락이 세차게 파동쳤다. 쿵!


소려곡이 쓰러진 연후에야 그는 앞으로 튀어 나갔다. "려곡!" 파파팍! 그는 화살을 모조리 제거한 후 소려곡의 몸을 안아 올렸다. 하지만 전신에서 핏물을 줄줄 쏟아내는 소려곡은 회생불능의 상태가 되어 있었다. "사영." 소려곡은 씩 웃으며 초사영을 올려다보았다. "려곡......." 초사영은 무엇이든 말을 건네고 싶었으나 목구멍이 콱 막혀와 겨우 이름을 부른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침묵에 소려곡은 하얗게 웃었다. "놈! 고통스러워하지 마라. 그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난 단지 방금 전의 빚을 갚은 것뿐이니까." "그래, 아주 잘 했다. 멍청한 놈!" 초사영의 눈에는 어느 덧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친구를 떠나 보내는데 대한 비애는 그도 감당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소려곡도 자신의 죽음을 감지했는지 나직이 말했다. "사영, 난 그녀가 보고 싶다." "뭐? 누구 말이냐?" "혈옥." 초사영의 안면이 괴상하게 비틀렸다. 그는 혈옥이 소려곡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입을 다물고 있자 소려곡은 큭큭 웃었다. "나도 안다. 그녀는 나를 벌레처럼 여겼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녀를 좋아했으니...... 외로웠던 걸까?" "그럴 게야. 너나 나나 이 넓은 천하에 마음둘 곳이라곤 없이 홀홀단신이었으니까." "맞아. 고독은 신념과는 별개이지. 쿨룩!" 소려곡은 기침을 하며 붉은 선혈을 토해냈다. "비겁한 놈, 기어이 나보다 먼저 갈 모양이구나." "흐흐...... 잘 되었지 뭐냐? 사는 건 지겨운 일이었어. 게다가 친구가 이렇게 배웅해 주니 더 바랄 게 없다." 애써 태연을 가장하는 그의 음성만이 흐를 뿐 사위는 조용하기만 했다. 간간이 불어와 잡초들을 흔들어 놓는 바람결을 제외하고는 밤하늘을 찢어놓던 비명이나 격렬한 외침들, 병장기의 격돌이 빚어내던 소음 등도 소멸되었다. 천궁지회의 공격이 더 이상 없다는 얘기다. 두 명의 파천황 전사들을 죽인 세 청의인은 방심한 상태인 초사영을 공격했다면 능히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 터인데도 어찌 된 영문인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거짓말 같은 정적의 연유는 무엇인지? 제 24 장 승자(勝者)는 없다 [1] 옥사후. 그는 모옥 안에서 정진을 옆에 세워둔 채 초사영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말려 올라갔다. '후훗! 그래, 네놈도 고통을 겪어야 한다. 이제껏 정도와 사도를 오락가락하며 멋대로 놀았으니 대가를


치뤄야지.' 정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공격을 멈추시는 것입니까? 지금 제거하시면 간단할 텐데. 그래야 후환도 없으리라 여겨집니다만?" 옥사후는 냉소했다. "후환까지는 염려하지 않아도 되오. 그 정도의 방비는 나 옥사후에게도 마련되어 있으니까." "어쩌시려고?" "놈은 쉽게 죽어서는 안 되오. 나는 그를 위해 특별한 선물들을 마련해 두었소. 각주께서는 구경이나 하시오." 정진은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하고 눈살을 모았다. 아무래도 그로서는 군옥명과 옥사후를 동격으로 놓고 신뢰할 수는 없었고, 그 때문에 매우 불안했던 것이다. '예감이 좋지 않다. 어쩐지 뭔가 일이 잘못될 것 같아.' 하지만 그는 입 속으로 맴도는 그 말을 끝내 입 밖으로 쏟아 내지는 못했다. 스스스....... 진한 풀내음을 머금은 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으음...... 좋다. 꽃향기보다 이게 나아. 우리도...... 잡초에 불과하지 않았느냐?" 죽음을 앞두어서인지 깨달음은 컸다. 소려곡의 읊조림은 놀랍게도 무림 제일의 지자(智者)였던 군옥명의 철학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 자신은 알지 못 했지만. "잡초의 생명력은...... 질기다. 사영, 넌...... 반드시 그래야 한다. 앞서 간 형가와 내 몫까지 다...... 네가 이어다오." 입술이 굳어져 가는지 그의 음성은 몹시도 더듬거리며 흘러 나오고 있었다. "난...... 너를 잘 모른다. 그러나 부디...... 뜻을 이루기를......." "려곡!" 초사영은 피가 배이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 덧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려 얼굴을 흠씬 적시고 있었다. "놈! 울지...... 마라. 넌...... 매사에 무감해질 필요가...... 있어. 단 한 가지에서만 빼고......." 소려곡은 흐릿해져 가는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소소...... 그녀에게는 잘...... 대해 줘라. 좋은 여자야. 그리고...... 안 되었다만...... 그녀는 네놈의 아이를 가지고 있어." "뭐라고?" 초사영의 눈빛이 일순 몹시도 흔들렸다. 그것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 했던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기 때문이었다. "자고로...... 부모 노릇은 쉬운 게 아냐. 잘못하면...... 자식으로부터 크게 원망을...... 들을 수도......." "려곡......." 초사영은 자신의 인생 전반을 꿰뚫는 듯한 소려곡의 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더는 어떤 충고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의 친구는 숨을 거두고 말았으므로. 평소에 시끄러우며 욕설까지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던 소려곡의 죽음은 이렇듯 조용하고 진지하게 이루어졌다. "잘 가라, 친구." 초사영은 소려곡의 시신을 되도록 편안하게 눕혔다. 그런 후 그는 애검을 잡고 일어서더니 모옥 쪽으로 신형을 돌렸다. '후후...... 날더러 너희 몫까지 살아내란 말이지?' 그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소슬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문득 검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 너의 마지막 말이니 들어주고 싶다만 그럴 수가 없을 것 같다. 내가 어찌 너의 죽음에 무감할 수가 있지?' 휘익! 초사영은 신형을 뽑아 올렸다. 그것은 옥사후의 그림자를 내비치고 있는 모옥을 향해서였으며, 그런 그의 일신에서는 새삼 뜨거운 열기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칠흑 같은 밤. 세상은 침묵하고 있건만 이글거리는 횃불이 밤을 살라먹고 있는 이곳만은 예외였다. 휘이이잉―! 밤바람을 타고 피 냄새가 진동했다. 이는 일단의 무시무시한 도살자들에 의해 빚어진 현상이었다. 그들은 도처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데다가 심신이 극도로 피폐해 있는 상태였으나 그들로 인해 마을도, 산도 모조리 혼돈의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크아아악―!" 줄을 잇는 비명 소리는 멀리 어둠 속으로까지 번져 나갔다. 그것은 대부분 방어진을 구축한 쪽에서 울려 나오는 것이었다. 숱한 인원이 계속 동원되고 교체되었으되, 거개가 차례로 불귀의 객이 되는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진로(進路)에 주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가고 시뻘건 핏물이 땅을 흥건하게 적셨으나 신이 들린 듯한 무리들의 검무(劍舞)는 도시 멈출 줄을 몰랐다. ― 최후까지! 이런 맹세를 기치로 삼고 당대에 고명한 천궁비영궁을 죽음만이 존재하는 혈해(血海)로 만들어 가는 자들, 이들은 이름하여 파천황이라 불리는 특전대였다. 칠십이로 암흑마군주 사도린. 붉은 화광이 그의 얼굴을 진홍빛으로 달구어 놓았다. 그가 서 있는 자리에도 화광이 불어닥쳐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로써 드높은 명성을 날리던 이개 단체가 몰락하는구나. 천궁지회의 천궁비영도 흑풍사의 파천황도.......' 사도린이 이렇듯 읊조릴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방관자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서 있는 자리는 초토화된 천궁비영이 훤히 다 내려다보이는 한 언덕이었다. 말마따나 몰락을 굽어보는 그의 눈빛은 무심 일색이었다. 그의 뒤로는 칠십이로 암흑마군이 날카로운 검날을 비켜 세운 채 출동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도린은 이제 무엇에도 미련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평생토록 노력하여 얻은 풍령패도라는 명호에조차 관심이 없었다. 설사 누가 곁에서 패(覇) 자를 패(敗)로 바꾸어 조롱한들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쉴새없이 터져 오르는 비명을 들으며 서서히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천궁비영을 이루고 있던 촌락이다. 집채는 모조리 불타 버리고, 타다만 지붕과 무너진 담벼락이 흡사 폐허(廢墟)를 방불케 했다. 여기 저기에 찢어지고 떨어져 나간 살점들이 싸늘히 식은 채 널브러져 있었고, 어쩌다 살아남은 자들의 쥐어짜는 듯한 신음 소리만이 바람결에 실려 번져 나가고 있었다. 그런 그곳으로 다가드는 흑포 인영들이 있었다. 스스스스......! 칠십이로 암흑마군이었다. 그들이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촌락 주위를 엄밀히 에워싸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기세를 방관에서 접전 태세로 바꾸었는데, 이는 싸움 자체에 목적을 두어서가 아니라 접수를


위해서였다. 검날이 무디어지고 피로에 지친 이개 세력을 한꺼번에 쓸어 버려 그 치사한 승리를 흑풍사에 바쳐야 되는 것이었다. "저들의 싸움은 예상보다 꽤 오래 가는군요." 앞에 섰던 부관, 즉 실질적 수장(首將)의 말이었다. 그는 화염과 비명에 휩싸인 천궁비영의 촌락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도린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그렇다. 나도 본 사의 파천황이 천궁비영을 이 정도로 궁지에 몰아넣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천궁비영의 수비망은 와해된 상태입니다. 그들은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그런 셈이지." 사도린은 부관이 듣기에 매우 애매모호한 답을 내놓고는 촌락군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광과 비명이 점차 사그라들고 있는 것을 느끼며 그는 쓴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본래 천궁비영의 경비체제는 둘로 분리되어 있었다. 한 쪽은 외곽의 수비를 담당하고 있었고, 다른 한 쪽은 옥사후 등이 버티고 있는 모옥을 집중적으로 지키고 있었다. 파천황도 여기에 맞추어 황주인 초사영이 몇몇을 이끌고 중심부의 경비를 뚫었으며, 이리저리 흩어졌던 전사들도 외곽의 수비를 무너뜨리는 대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흠! 내가 할 일은 별로 없군.' 사도린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재삼 칠십이로 암흑마군을 돌아다보았다. 그가 가볍게 손 한 번만 들어올리면 파천황과 천궁비영은 그들에 의해 끝장을 보게 될 것이다. 갈등도 할만큼 했다. 그런즉 사도린은 더 이상 방관자가 아니라 직접 죽음을 내리는 심판자로 탈바꿈을 해야만 했다.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 사도린은 심중에서 고개를 쳐들려 하는 상념들을 애써 떨쳐 버리듯 양 발에 힘을 주었다. 콰직! 그가 서 있던 자리가 한 자나 되게 밑으로 움푹 파여 들어갔다. 주위를 감싸고 있던 정적 탓인지 나뭇가지 등속이 부서지며 유난히 큰 음향을 냈다. 그 소리가 결단을 부추겼는지 사도린은 마침내 외쳤다. "공격하라! 보이는 것은 모조리 척살하라." 그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암흑마군은 함성을 토해내며 닥치는 대로 쳐부수어 가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검광과 살기는 하늘이라도 뒤덮을 것 같았다. [2] 화원, 아니 잡초가 무성한 초지는 꽤 넓었다. 초사영은 그 곳으로 점점 더 깊숙이 진입해 가고 있었다. 잡초들은 실상 아무렇게나 자란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꾸준히 가꾸어 왔는데, 그 손길이 끊어진 지금은 주인을 대신해 공허한 기운만을 자아내고 있었다. 초사영은 주위를 둘러보며 한 발자국씩 천천히 이동했다. '이제까지도 그랬지만 이곳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진세를 구축할 수 있는 장소다.' 초지는 실상 사람의 키만큼 자란 억새풀에서부터 무릎 길이까지 오는 이름 모를 풀들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무척이나 다양해 곳곳에 암기를 설치해 놓았을 법도 했다. 사람이 숨기에도 적합하여 언제, 어디서 은잠하고 있던 자들이 툭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초사영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전진해 갔다. 모옥과의 거리는 불과 삼 장 여를 남겨 놓고 있었다. '옥사후! 기다려라. 네 목숨은 내 것이다.'


그는 불빛이 반짝이는 모옥을 노려보며 마음 속으로 그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휘스스스― 지나는 바람결에 잡초군이 소리를 내며 몸을 옆으로 뉘였다. 그런 가운데 초사영은 촉각을 곤두세운 채 신중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사사삭! 잡초군이 그의 주변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이는 자연적인 것과는 엄연히 구별되는 현상이었다. '후후...... 오라! 누구라도 베어 주겠다.' 초사영은 진작부터 적들이 도처에 몸을 숨긴 채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위를 맴돌 뿐 막상 그를 덮쳐 오지는 않았다. 바람이 잠시 그치자 그 순간에는 화원도 적막감으로 뒤덮였다. 초사영은 일부러 걸음을 옮겨 소리를 냈고, 그에 따라 적들이 이동하는 기척을 좀더 확연히 느낄 수가 있었다. 사사사삭―! '이들은 직접적으로 나를 노리는 것이 아니다.' 그랬다. 그들은 초사영과 움직이는 방향이 같아 공격할 의사보다는 그를 한 곳으로 몰아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렇다면?' 초사영은 전면의 모옥을 지그시 응시했다. '알겠다! 옥사후, 너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검집을 고쳐 잡았다. 옥사후와의 한 판 대결이야말로 그가 원하던 바였으므로. 옥사후라는 인물을 그 나름대로 정의하자면 친구인 소려곡을 비롯해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파천황을 몰살시킨 자이며, 나아가서는 천궁비영의 현 우두머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모옥과의 거리는 이 장 정도로 좁혀졌다. 은잠자들은 여전히 공격을 가하지 않고 있었다. 초사영은 모옥 안에 있을 옥사후를 떠올리며 읊조렸다. '후후...... 옥사후, 너는 목에 검을 겨누어도 천궁비영주로서의 품위를 의식해 고상한 척 할지?' 스읏! 그는 더 지체할 까닭이 없다고 여겨지자 빠르게 잡초를 헤쳐갔다. 모옥의 창문으로 흐릿한 얼굴 하나가 보였다. 옥사후 쪽에서 그를 관찰하기 위해 창으로 다가선 것이었다. 모옥 안. 옥사후는 자못 흥분한 음성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크ㅋ! 초사영,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아느냐? 네놈은 내가 보는 앞에서 서서히 죽어가게 될 것이다." 그는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는데, 움켜 쥔 양 주먹에는 습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허공에 푸른 섬광을 뿌리며 뒤편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군옥명의 신위가 모셔진 제단이 있었다. "사부! 잘 보아 두시오. 당신이 그토록 신망을 쏟던 자는 이 안에 들어서자마자 지옥이 무엇인지 실감하게 될 게요." 그는 열려진 다른 창으로 힐끗 하나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모옥 옆에 새로 생긴 그 봉분에는 군옥명이 누워 있었다. "후에 마음이 내키면 내 저 자의 시체를 거두어 당신 옆에 묻어줄지도 모르지. 단 그 시체는 온전하지 못할 거외다. 우선 문을 밀고 들어서는 그 순간에 다리가 절단될 테고......." 옥사후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그놈에게도 필시 무인의 오기가 있을 터인즉 팔을 이용해 나에게로 기어오려 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크크...... 천장에서 철장이 쏘아져 양 팔을 꿰뚫어버릴 것이오." 그의 입가에는 한 줄기 미소가 그어졌다. 준수미려한 용모의 소유자이다 보니 오히려 더욱 섬뜩한 느낌을 자아내는. "그 후로도 쉽게 죽이지는 않을 작정이오. 오랫동안 내게 고통을 안겨 주었으니 그 세월에 대한 응분의 대가로 천하에서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 가도록 만들겠소." 옥사후는 말을 마치자 창문에서 슬쩍 비켜났다. 이는 초사영에게 초조함을 더해 주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한편. 창으로 보이던 인영이 사라지자 초사영은 쿡쿡 웃었다. '옥사후, 네가 제법 여유를 부린다만 한 가지 사실만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너는 반드시 내 손에 죽는다. 그렇지 않으면 소려곡의 영혼이 지하에서도 편히 잠들지 못할 테니까.' 모옥과의 남은 거리는 일 장 여, 그는 더 이상 주위의 반응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은잠자들의 저의를 알아 차렸으니 그들이 뒤따르건 말건 상관할 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후우!" 초사영은 한 차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런 연후, 그의 신형은 비쾌하게 암공(暗空)을 갈라갔다. 휘익―! 모옥의 문이 눈앞으로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막바로 문을 밀고 들어가 유성휴 중에서도 가장 강맹한 초혼혈(招魂血)로 기선을 제압......!' 초사영의 상념은 의외의 방해자로 인해 중단되었다. (멈춰! 위험하다.) 그는 흠칫 놀람과 동시에 계획을 바꾸어 허공에서 빙글 돌아 문 앞에 내려섰다. 아무래도 긴박감이 느껴지는 그 전음성을 싹 무시해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누가?' 전음성은 이어졌다. (쳇! 안 보는 사이에 지독하게 멍청해졌구나. 옛날에는 제법 머리가 잘 돌아가더니만.) 초사영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나를 알고 있는 자인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전음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아내지 못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 순간에 넌 죽게 된다. 문을 여는 척 하고 뒤로 빠르게 물러나라.) 초사영은 이 의외의 사태에 빠르게 염두를 굴렸다. '혹시 이것도 옥사후의 암계가 아닐지?' 그도 배제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일단 상대의 정체를 모르니 다분히 의심의 여지가 있었을 뿐더러 옥사후라면 배후에서 그런 수단을 쓰고도 남을 위인이라 여겨졌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 넌 내 말대로 뒤로 물러나기만 해라. 나머지는 내가 처리해 주겠다.) 재차 들려온 전음은 초사영의 행동을 결정하게 했다. '이건 마치 나를 꼭두각시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하필 그의 자존심을 건드려 놓았으니 말이다. 소려곡을 죽인 옥사후가 모옥 안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목숨을 잃게 될까봐 머뭇거리는 것만 해도 마땅치 않았거늘, 들려온 음성은 그의 비위와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호의에서인지 악의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어림없다.' 초사영은 전음성이 알려온 당부를 외면하고 문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 때에 전신이 피로 얼룩진 채 숨을 거두던 소려곡의 모습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었을까? '려곡! 어쩌면 곧 너를 만나게 될지도.......' 어차피 진실과 허위의 확률은 반반이었고, 어떻게 해도 모험을 피할 수 없는 그는 애초의 생각대로


밀고 나갔다. (바보 같은 놈!) 꽝! 문짝은 초사영의 손짓에 의해 간단히 부서져 날아갔다. 동시에 그의 검이 무서운 기세로 뻗어 나갔다. 츠파앗! 그의 뒤편에서 한 무리의 인영이 폭풍처럼 덮쳐간 것도 그 찰나의 일이었다. 그들은 은잠하고 있던 천궁비영의 은밀단으로, 계속 초사영의 동태를 살피다가 그가 모옥의 문을 부수자마자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일제히 공격을 가해온 것이었다. 초사영은 역시 그들에게는 신경조차 쓸 수가 없었는데, 이유는 그보다 더한 것이 앞쪽에서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쐐애애액―! 허공을 가르는 그 은빛 찬란한 물체는 그의 하체를 노리고 날아든 은륜(銀輪)이었다. "웃!" 초사영은 즉시 검을 아래로 꺾어 은륜을 받아쳤다. 카캉! 검과 은륜이 부딪히며 무수한 불꽃을 퉁겨냈다. 그 바람에 은륜은 허공을 한 바퀴 돌더니 바닥으로 처박혔다. 하지만 그로써 위기를 완전히 모면한 것은 아니었다. 쑤아아앙― 이번에는 무려 수십 개에 달하는 은륜이 쏘아져 왔고, 초사영은 그 눈부신 은빛 광휘로 인해 눈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죽음?' 그의 연상이 저승의 문턱으로 이어지고 있을 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옥사후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오오! 이것이야.' 초사영이 죽음을 엿보는 순간을 그는 탁자에 앉아 여유롭게 즐기며 짜릿한 쾌감으로 인해 경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그의 계산상으로는 초사영의 부상은 필연이었다. '진정 아름답도다, 은륜의 재물이여! 후후후...... 넌 죽지는 않는다. 두 다리만이 형체도 없이 으스러질 뿐. 그럼 너는 두 팔로 기어서 내 발 밑으로 오게 되겠지.' 옥사후는 가히 황홀경에 사로잡혀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림의 공적(公敵)인 네놈만 잡아죽이면 이까짓 천궁비영이 붕괴된 일쯤은 누구도 탓하지 않을 것이다. 이후로 얼마든지 멋들어지게 재건할 수 있으니까.' 그의 상상은 옥사후라는 자신의 이름 석 자가 거대한 반석 위에 올려놓아지는 데까지 서슴없이 비약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확신을 가지고 기다렸는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은빛 광채로 뒤덮인 곳에서 의당 비명이 터지고 피 분수가 솟구쳐 올라야 하건만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어째서?' 옥사후는 전신에서 들끓던 피가 싸늘히 식는 것을 느꼈다. '설마...... 실패했단 말인가?' 휘익―! 생각과 그의 동작은 거의 일치했다. 느낌이 부딪쳐 온 순간 그는 이미 초사영이 있었던 자리로 쏘아져 가고 있었다. 그의 눈에 은빛 광막이 걷히고 초사영의 뒤에서 배수진을 치고 있던 은밀단이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정작 초사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라져?'


옥사후는 대노했다. "병신 같은 것들! 놓쳤단 말이냐?" 그는 은밀단을 노려보며 발작적으로 외쳤다. "빌어먹을!"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그는 부서진 문짝을 발로 냅다 걷어찼다. 와지끈! 문짝은 그나마 맥없이 날아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런데 문짝이 놓여 있던 바닥에는 커다란 구멍이 휑하니 뚫려 있었다. 그 구멍은 사람 한 명쯤은 족히 들어 갈만한 크기로써 옥사후로 하여금 퍼뜩 정신이 들게 했다. '땅 속?' 쿠르르르― 그러고 보니 지면은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빠르게 시선을 움직여 모옥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것이다!" 옥사후는 긴 선을 그으며 들썩이는 흙더미를 발견하고는 크게 부르짖었다. 초지로 이어지고 있는 그 선은 흡사 두더쥐가 땅 속을 파고 전진해 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추잡스런 놈!" 그는 냉소하며 검을 빼들었다. 챙! "쫓아라! 절대로 놓쳐선 안 된다." 외침과 함께 그는 수중의 검을 날렸다. 그 수법은 절정의 내공을 바탕으로 펼친 이기어검술(以氣馭劍術)이었다. 쉬이잉― 그의 검이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내며 들썩이는 땅을 그어 갔다. 이 때에 요동치던 땅거죽은 초지에 우거진 잡초들을 좌우로 크게 갈라놓고 있었다. 파파파팍――! 옥사후의 내력이 담긴 검은 바닥에 깊숙이 박힌 채 그 뒤를 빠르게 추적해 가고 있었다. 휘이익! 검은 십여 장쯤 가다가 옥사후의 수중으로 되돌아 왔다. 기(氣)의 전이(轉移)가 그 이상은 불가능해서였는데, 검 끝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자 옥사후는 자위했다. '그래도 베긴 베었다.' 그것은 초사영이 부상을 의미하므로. "후후...... 이 상태라면 네놈도 얼마 못 갈 것이다." 득의하여 신형을 뽑아 올리려던 그는 움찔했다. 그 순간을 기해 느닷없는 함성이 사위를 메웠던 것이다. "와아아아―!" "쳐라! 한 놈도 남김없이 쓸어 버려라." 그 뒤로 이어지는 것은 은밀단의 비명이었다. "크으아악―!" 옥사후는 안면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건 뭐지?' 그의 뇌리에는 비로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흑풍사의 칠십이로 암혈마군......!' 가까운 곳에서 붉은 화염 기둥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로 인해 하늘은 시커멓게 죽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천궁비영을 뒤덮었던 혈전의 종막(終幕)이었다. [3] "으윽!" 운신을 할 때마다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검을 맞아 등판이 쩍 갈라져 있는데다가 상처로 자꾸만 흙이 밀려들어가고 있으니 천하의 초사영도 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부상을 문제 삼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지금 그에게 관심의 초점이 되어 있는 것은 상대의 정체였다. 하지만 확인해 볼 길은 없었다. 흙더미 속에 갇혀 눈조차 뜰 수가 없는 지경인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퍼퍼퍽! 다행히 암흑 속에서도 귀는 열려 있는지라 초사영은 현재의 상황만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으음! 그러고 보면 정통의 공부(工夫)만이 전부는 아니구나. 한낱 잡술 정도로 여겼던 술법으로 목숨을 건졌으니.' 그는 이른바 토공(土功)에 의해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살아난 바, 스스로 고정관념을 철회하고 있었다. 사실 토공도 단순한 무공은 아니었다. 우선 흙과 돌을 자유자재로 다루어야 하고 지층의 압력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무림에서도 익히고 있는 자가 적은 괴공이었다. 앞쪽에서 흙을 파내고 있는 자의 존재를 계속 느끼며 초사영이 알아낸 것이라곤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것도 확실한 답이 아니라 추측에 불과했지만. '여인인 듯 하다.' 이는 언뜻언뜻 전해지는 체향 탓이었다. 특별히 향을 사용한 것 같지는 않았으나 뭔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와르르르....... 흙더미는 전면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양도 엄청났는데 그것은 초사영에게로 고스란히 퍼부어지고 있었다. 이 좁디좁은 공간에서, 그것도 전진해 가자니 피할 도리는 도무지 없었으며 불평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내심 쓰게 읊조렸다. '별 수 없지. 이 상황은 내가 자초한 격이니.' 초사영은 주위가 조용한 것으로 미루어 위기를 벗어났다고 판단했으나 무력감이 엄습해 와 견디기가 힘들었다. '내 꼴이 이게 뭔가? 자존심을 내세우다 더욱 수치스러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는 이렇듯 얌전히 뒤따르기만 할 게 아니라 상대에게 뭔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구해준 이 자는 누구일까? 분명 나를 알고 있는 듯 했는데, 흡!'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흙더미는 야속하게도 입 속으로까지 밀려 들어왔던 것이다. 초사영은 자조를 금치 못했다. '이 자가 지금 내 모습을 보았다면 또 멍청하다고 했겠지?' 그의 뇌리에는 문득 모옥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상처 입은 그의 등에서는 어쩔 수 없이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실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만약 이 자가 때맞추어 나타나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꼼짝없이 죽고 말았으리라.' 앞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연상만은 자유인지라 초사영은 그 당시의 일을 선연하게 그려볼 수가 있었다. 그는 선두로 날아온 하나의 은륜은 쳐냈지만 숨돌릴 틈도 없이 수십 개의 은륜이 덮쳐 들자 그만


체념에 빠졌었다. 그런데 그 찰나에 밟고 있던 지면이 쑥 꺼졌고, 초사영은 그 밑으로 빨려 들어 갔다. 그런 류의 놀라움이란 정녕 묘한 경험이었다. 덕분에 은밀단과 옥사후의 함정을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이 가져다준 충격도 그리 만만치는 않았으므로. 토공, 달리 말하면 지둔술(地遁術)에 대해 감탄을 한 것만도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다. 땅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자마자 신비감에 사로잡혀 있는 그의 귀로 전음의 주인인 듯한 자의 음성이 들려 왔다. ― 내 허리를 꽉 잡아라! 놓치면 죽는다. 초사영은 그제서야 음성이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전음일 때는 몰랐었는데 육성을 접하고 보니 어디선가 한 번쯤 들은 듯 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기억을 더듬을 여유까지는 없었다. 지상으로부터 검날이 파고 들어와 무자비하게 등판을 쑤시자 그는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에 몸을 세차게 떨어야 했다. 곧이어 가느다란 비명 소리를 들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게 아니라 그 정체불명의 인물이 흘린 것이었다. 아마 그 자도 같은 검에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초사영의 상념은 거기서 중단되었다. 흙을 파헤쳐 가던 자의 손놀림이 처음에 비해 둔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기 때문이었다. '부상 탓이리라. 그 자의 검에 당한.' 그는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이래저래 미안한 마음이 들어 죽을 맛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자가 지나간 흙더미 속에서는 은은한 피내음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내 우둔함 때문에!' 그가 자책에 휘말려 있을 때, 점점 느려지던 상대의 동작은 급기야 긴 한숨과 함께 멈추어졌다. "후우! 더 이상은 안 되겠군." 그 자는 말과 함께 지상으로 솟구쳐 올랐다. 파악! 초사영도 허우적거리며 기를 쓰고 위로 몸을 뽑아 올렸다. '이제 살 것 같기는 한데.......' 그는 머쓱한 중에도 시야가 트이자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이 솟구쳐 올라 온 곳은 화원의 한 가운데였다. 아울러 초사영은 신비인의 모습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 자는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가죽옷을 입었으며, 얼굴에도 검은 복면을 하고 있었다. 대충 짐작은 했었지만 가녀리면서도 굴곡이 선연한 몸매로 보아 다른 건 몰라도 그 자가 여인인 것만은 확실했다. 초사영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상대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에게로 쏘아져 왔다. "지금이 한가롭게 그런 것이나 따지고 있을 때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국에 빠져나갈 궁리는 하지 않고." "그, 그야 그렇지만......." 다짜고짜 야단부터 맞게 된 초사영은 반쯤 넋이 나가고 말았다. 그런 그를 여인은 사정없이 몰아 부쳤다. "넌 내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옛 친구도 몰라보는 주제라니...... 쯧!" 그녀는 초사영을 아예 바보 취급하고 있었다. 반면에 그는 욕을 먹고도 흙투성이가 된 얼굴을 활짝 폈다. "혈옥!"


"푸훗......!" 여인은 실소하더니 제 손으로 복면을 떼어냈다. 나타난 그 얼굴은 과연 파천황의 지옥 훈련을 함께 거치며 서로에게 살검(殺劍)을 겨눈 경험까지 있었던 혈옥이었다. 초사영도 그녀를 따라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그 기세는 여전하군. 내 단언컨대 천하의 여인을 다 불러모아도 너 같은 여인은 또 없을 것이다." "설마 날 비웃는 건 아니겠지? 완전한 남자로 변신을 하든, 본연의 여인으로 남든 색채를 분명히 하라고 말한 건 너다. 물론 나는 처지에 맞게 후자를 택했고." 혈옥이 오른손을 내밀자 그도 맞잡아 갔다. "후후후...... 비웃다니? 존경스러울 지경인 걸." 서로 악수를 나누는 상태에서 그녀가 물었다. "너도 참 많이 변한 것 같더구나." "멍청해졌다고?" 그의 반문에 혈옥은 갑자기 음울한 표정이 되어 답했다. "일맥상통하는 얘기지. 소려곡도 마찬가지고." 초사영의 음성도 방금 전과는 달리 착 가라앉았다. "그의 죽음을 보았느냐?" "음. 그 전에 네가 그로 인해 죽을 뻔했던 것도."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했던 행동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왜?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비록 소려곡이 죽고 너는 살아 있지만 느낀 점이 많았다. 솔직히 두 사람 사이가 부럽기도 했고." 초사영은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단지 그것 뿐이냐?" "또 뭐가 있지?" "이런 말을 해서 어떨지는 모르겠다만......." 말끝을 흐리던 그는 침중하게 덧붙였다. "려곡은 마지막 순간에 널 보고 싶다고 했다." "바보 같은 작자!" 혈옥은 짐짓 화를 내며 몸을 홱 돌렸다. 하지만 초사영은 그녀가 가슴 아파 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미안하다. 심적 부담을 주어서." 혈옥은 등을 돌린 채 그 말에 대꾸했다. "신경 쓰지 마라. 상심을 끌어안은 채 죽은 놈도 있거늘, 이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지. 내 언제고 기회가 닿으면 그를 위해 명복을 빌어줄 작정이다." "고맙다, 혈옥." "그런 소린 관두어라. 소려곡은 내 친구이기도 하니까. 이전에는 내가 어리석어 그의 진정한 가치를 몰랐었지." 그녀는 쓰게 말한 후, 화제를 돌렸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하자. 주변이 온통 그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상태다." "그들이라면 천궁비영?" "맙소사!" 혈옥은 어이가 없는지 그를 힐끔 돌아다보았다. "넌 아직 이번 싸움의 내용조차 모르고 있었구나?"


초사영은 흠칫 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는 최소한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그녀가 어떻게 이 자리에 나타날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초사영은 입술을 질겅 씹었다. "말해 다오, 일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혈옥은 고개를 저었다. "차차 알게 되겠지. 말해 주고 싶어도 시간이 없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네가 내 말을 듣지 않는 바람에 애써 열어 놓은 법문(法門)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점점 모를 소리만 하는구나, 넌." "그렇게 되었나?" "법문은 뭐며, 또 그 곳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니?" 그녀는 역시 말을 아꼈다. "지금은 말해 줘도 모를 것이다. 어쩌면 모르고 있는 편이 나을 수도 있고. 아! 저길 보아라." 혈옥은 수풀 사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흐음?" 초사영은 그녀가 지시한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도 초지의 곳곳에 몸을 숨기고 있는 흑포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보다시피 이 주위는 포위되어 있다. 아니, 법문 주위를 그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말해야겠지. 그들의 포위망을 뚫고 법문에 든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혈옥은 화원의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나마 늦으면 꼼짝없이 갇히게 된다. 서둘러야지." 초사영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들이 누구냐?" 그녀가 신형을 솟구치며 말했다. "흑풍사의 칠십이로 암흑마군." "어쩐지 행색이 그런 것 같더라니!" 그도 이를 악물며 혈옥을 따라 몸을 뽑아 올리려 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게 되고 말았다. 그녀가 도로 지면으로 날아 내리며 탄식처럼 내뱉었다. "늦었어." [4]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에는 많은 일들이 있다. 포괄적으로 기쁜 일, 유쾌한 일, 상쾌한 일, 즐거운 일 등등. 그 일들은 정서에 영향을 미쳐 결과적으로 생활에 활력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오감(五感)과의 연관은 당연하다. 눈이 있어 즐거운 일을 접할 수 있고, 귀가 있어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코가 있으니 향긋한 미각을 느끼게 되고, 혀가 있어 맛난 음식을 기꺼이 섭취할 수 있다. 개중 눈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권이다. 사물에 대한 판단은 의례 봄으로써 이루어지는즉 볼 수 없는 자들은 다른 기관을 쓰는 자보다 훨씬 더한 고통을 겪게 마련이다. 그런데 여기 이 사람은 본다는 사실로 인해 기쁨과는 반대인 극도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었다. "흐음............." 풍령패도 사도린이었다. 그의 입에서는 언제 나오는지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직한 탄식이 뿜어지고 있었다. 감은 조금 멀었지만 그는 한 동작도 놓치지 않고 다 보고 있었다. 검이 부딪치는 광경이며, 이따금씩 목이 잘리는 장면 등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그는 전부 보아야만 했다. 보여지는 풍경은 시종여일(始終如一)이다.


하나의 인영이 번쩍 솟구쳐 오르면 숱한 검이 그를 따라 붙고, 비명과 함께 양자의 검광이 무섭게 어우러진다. 그 인영이란 초사영이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가 상대하고 있는 자들은 천궁비영이 아니라 칠십이로 암흑마군이었다. 흑풍사의 파천황주인 그가 살수전에 이어 두번째로 동료나 마찬가지인 자들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어서인지 그리 놀랍다거나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이 순간 암흑마군주인 사도린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가 무척 궁금할 따름이었다. "차앗!" 휘류류륭―! 싸움은 도대체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기세가 죽었다 싶으면 또다시 검이 밀려 왔고,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살 속으로 여지없이 파고들었다. 그들의 집요함이란 살수전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초지에서부터 시작된 혈전은 이제 근역의 산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그들이 부지불식간 천궁비영의 영역을 벗어나고 있다는 의미도 되었다. 접전은 벌써 세 시진 째였다. 초사영은 자신이 얼마만큼의 인원을 죽였으며, 몇 자루의 검이 몸을 스쳐 갔는지 기억도 하지 못했다. 그에게 느껴지는 것이라곤 숱한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안타깝게도 점차 기력이 쇠진해가고 있다는 점 뿐이었다. 멀리로 혈옥의 분전하는 모습이 보였다. 파아아― '쯧! 괜히 끼어 들어 가지고.' 초사영은 검을 휘두르며 자신과 엇비슷하게 지쳐가고 있는 그녀에게 마음으로나마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는 혈옥도 종국에는 소려곡처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그 때문에 오히려 힘을 얻어 버텨내고 있었다. 적어도 친구들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고 싶지는 않은 그였기에. 그의 허벅지에는 수많은 검의 파편들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옆구리 어림에서 전해져 오는 고통에는 정신이 몽롱할 지경이었다. 얼핏 보아도 뼈가 드러나 있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하지만 초사영은 그런 부상들을 조금도 비관하지 않았다. 가슴에서 흐르는 피가 지면을 붉게 물들이고 있건만 그는 자신을 두고 기꺼운 마음에서 웃을 수도 있었다. '혈옥,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