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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사마달.검궁인] 웅풍독패존 -1─────────────────────────────────────── 서설(序說) <군마천웅보(群魔千雄譜)> 이는 중원(中原)의 무림계(武林界)가 탄생한 삼천 년(三千年)이란 유구한 세월을 통해 당금 까지 가장 강(强)했고, 또한 그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고수(高手)들만 적어 놓은 책자다. 군마천웅보에 기재된 인물은 모두 천 명(千名)! 천 명이란 대단히 많은 숫자다. 그러나, 삼천 년이란 기나긴 세월에 비교해 볼 때 그 숫자는 또한 매우 적은 것이기도 하다. 정사(正邪)를 구분하지 않고 군마천웅보에 수록된 천 명의 영웅(英雄)들! 이들 중 그 어느 누구를 꼽아도 한 시대를 주름잡지 않은 자가 없다. 그렇다면...... 이 군마천웅보의 맨 앞장 (章)에 적혀진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과연 그들은 얼마나 엄청난 무공을 지니고 있기에 삼천 년에 걸친 숱한 고수들을 제치고 앞 장에 수록되었단 말인가? 군마천웅보의 가장 앞장에 적혀있는 이름은 다음과 같았다. 천독마제(千毒魔帝) 갈천후(葛天吼). 검마(劍魔) 잔유성(殘臾星). 비천수라신마(飛天修羅神魔). 축융신군(祝融神君) 화진걸(火眞乞). 흑라오격찰(黑羅烏格刹). 빙혼마녀(氷魂魔女). 음양마유신(陰陽魔幽神). 구천현녀(九天玄女). 귀진자(鬼眞子). 군마천웅보의 첫장부터 차례로 적혀있는 이 아홉 명의 개세고수들! 그들의 무공은 능히 천 하를 뒤집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더 엄청난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이 아홉 명이 출현한 시기였다. 하늘의 뜻이었던지 이들은 놀랍게도 모두 동시대(同時代)에 출현한 것이다. 한 나라에 두 왕 (王)이 설 수 없으며, 한 산(山)에 양호(兩虎)가 살 수 없는 법(法)이다. 그렇다면 이들


아홉 명의 개세고수들이야말로 더욱 공존(共存)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과연 그들은 격돌했다. 그것은 파란만장한 일대 소용돌이를 일으켰으며 천지간에 대혈풍(大 血風)을 일으킨 고금미증유의 대사건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 다. 그것은 강호인의 상상을 절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 날 이후, 오리무중(五里霧中)에 싸인 구대마왕(九代魔王)이라고도 불리워졌던 그들은 무림에 영원히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서막(序幕) 음풍세우(陰風細雨). 음산한 바람과 함께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은 어둠침침하고 사위에는 질식할 것만 같은 적막이 가는 빗발 속에 음모(陰謀)처럼 뒤엉켜 있었다. 온통 험악하기만한 이 계곡은 거칠고 삭막했다. 바닥에는 기암괴석(奇岩怪石)이 난립해 있었 으며, 초목(草木) 따위는 눈을 씻고 볼래야 볼 수가 없었다. 바닥은 물론 양쪽 절벽도 한결 같이 암석으로만 이루어진 가히 기괴무비한 계곡이었다. 문득, 음풍세우를 맞으며 한 인영이 계곡의 입구로 들어섰다. 멀리서 보이는 희미한 인영은 언뜻 보기에도 심하게 비틀거리고 있어 어찌보면 엉망으로 술에 취한 취객(醉客)과도 같았 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점차 곡구(谷口)로 다가올수록 그의 모습은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했 다. 그 인영은 아래위로 길게 끌리는 흑의(黑衣)를 입고 있었으며, 깡마른 몸에 얼굴은 백짓 장같이 창백한 노인이었다. 흑의와 창백한 얼굴은 너무도 선명한 대조를 보여 더욱 기괴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백여 세, 창백한 얼굴에 매부리코를 하고 있었으며 두 눈은 움푹 들어가 있어 몹시 음 침해 보였다. 그런데 기괴한 것은 그의 푹 꺼진 두 눈동자가 자광(紫光)을 띄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놀라울 만치 냉혹하고 사이(邪異)해 보이는 괴노인이었다. 괴노인은 왼손과 옆구리 사이에 사방 한 자쯤 되어 보이는 검은 철궤(鐵櫃)를 끼고 있었다. 그는 심하게 비틀거리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의 검은 장포기 온통 선혈로 물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가 오른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복부로부터도 선혈이 쉴새없이 뚝뚝 떨어지 고 있었다. 가는 빗물에 섞여 핏물은 바닥으로 줄줄 흘러 내리고 있었다. 가히 중상(重傷)을 입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럴 수도 있는 것일까? 알고 보니 그가 움켜쥔 복부 사이에는 삐죽이 시뻘건 물 체가 흘러나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창자였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어찌 복부가 터져 내장이 밖으로 흘러나온 상태에서도 살아서 움직 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의노인은 계곡을 향해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계곡의 안쪽으로 들어 서자 양쪽 절벽이 호리병처럼 좁아지면서 더욱 어둠침침해졌다. 흑의노인은 곧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쉬지 않고 계곡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그의 눈에 계곡의 끝이 보였다. 그것은 계곡 중앙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암산(岩山)이었다. 신비스럽게도 전체가 그대로 한 덩어리의 암석으로 이루어진 산이 었다. 높이만 해도 근 수백자에 달했으며, 그 모양새는 입이 떡 벌어질만큼 기괴했다. 자세히 보니 암산의 형태는 한 마리의 용(龍)이 하늘로 승천하는 듯한 모양이었다. 흑의노인은 암산 앞에 이르자 몹시 피곤한 듯이 비틀거리며 암벽에 몸을 기댔다. 생사(生死)의 기로에 선지라 기이한 암산의 형태조차 별로 그의 관심을 끌지 못한 듯 했다. 창백하고 파리한 안색, 종잇장 같이 얇은 그의 입술 사이로는 가는 피가 쉴새 없이 흘러내 리고 있었다. 문득 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복부 사이로 삐져나온 시뻘건 창자를 내려다 보았다. "......!" 돌연 그의 자광을 띈 눈이 허망하게 변했다. 다음 순간 그는 긴장이 풀렸는지, 아니면 더 버 틸 기력을 잃었는지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쿵! 하고 옆구리에 끼여있던 검은 철궤가 둔중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자 거 의 탈진할 듯 보이던 괴노인은 황급히 철궤를 도로 끌어당겼다. 그의 떨리는 손은 철궤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그의 안면은 언제부터인가 부들부들 경련 을 일으키고 있었다. 문득 그는 철궤의 뚜껑을 열어 젖혔다. 그 속에 나타난 물건은 뜻밖에도 차곡차곡 쌓여있는 누런 비단책자들이었다. 모두 아홉 권(卷)이었다. 흑의노인은 비단책자들을 보는 순간 두 눈에서 기이한 광채를 발산 했다. 돌연 그의 입술이 일그러지며 괴소(怪笑)가 흘러나왔다. "흐흐흐......! 결국 나 천독마제(千毒魔帝) 갈천후(葛天吼)는 그 여덟 명을 모두 처치했다. 훗 훗훗...... 크흐흐......!" 그의 입에서는 계속 괴이한 웃음이 흘러나와 계곡을 흔들었다. "훗훗훗......! 귀진자(鬼眞子), 흑라오격찰(黑羅烏格刹), 빙혼마녀(氷魂魔女)...... 그들이 남긴 이 비급(秘 )들과 나의 독공(毒功)......" 흑의노인, 즉 천독마제 갈천후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득의의 광소(狂笑)를 터뜨렸다. 광소는 계곡을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흐핫핫핫......! 이제야말로 천하무림은 나의 것이다! 천하에서 어느 누가 노부의 손 아래 삼 초(三招)를 넘길 수 있겠는가? 으핫핫핫......!" 문득 그의 광소가 잦아들었다. 동시에 그는 안색은 더욱 창백하게 변했다. "으...... 윽!......" 고통스런 비명을 내지르는 천독마제 갈천후. 그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경련을 일으켰다. "우욱!" 갑자기 참담한 비명을 지르더니 그는 울컥 피를 토해냈다. 시커먼 피였다. 그런데 선혈 속에 는 토막난 검은 덩어리들이 잔뜩 섞여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박살이 난 그의 오장육부(五臟六腑)의 조각들이었다. 자신의 입에서 토해져 나온 그것들을 내려보던 천독마제 갈천후의 안색은 절망으로 잔뜩 일그러졌다. "아...... 그러나 트...... 틀렸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구나......!" 이렇게 절망의 부르짖음을 지껄이던 그는 이어 돌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으...... 나 천독마제가 이...... 이토록 허무하게 생(生)을 마쳐야 한단 말인가?" 그의 눈에서 저주의 빛이 폭사되어 나왔다. 그는 원망스러운 듯 잔뜩 찌푸린 음산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점차 짙어가고 있었다. 가는 비는 쉬임없이


계속 내려 그의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크흐흐......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천독마체 갈천후는 이렇게 외친 뒤 눈길을 검은 철궤로 내렸다. 그의 눈에서 괴이한 빛이 번뜩였다. 문득 그는 손을 뻗더니 맨 위에 있는 책자를 집어 들었다. 그 책자의 표지에는 뚜 렷한 서체(書體)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검혼경(劍魂經)> 문득 책자를 들고 있던 천독마제의 눈에서 무서운 살광(殺光)이 뻗어 나왔다. 그는 책자를 움켜쥔 채 원한 맺힌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크흐흐...... 검마(劍魔) 잔유성(殘臾星)! 그 놈의 마지막 살검(殺劍)이 그토록 빠를 줄은 실 로 상상도...... 못했다. 나의 독에 죽어가면서도 그토록 빠른 검초(劍招)를 전개하다니......!" 그는 검에 의해 길게 갈라터진 복부를 어루만졌다. 그의 안색은 희다 못해 이제는 잿빛을 띄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은 점점 짙어져 잠시 후에는 완전히 흑빛이 되어버렸다. 또한 그의 몸은 눈에 띌 정도로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천독마제 갈천후의 눈동자에는 마침내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왔다. 그는 다시 입을 열어 부 르짖었다. "끄...... 끝장이다....... 축융신군 화진걸(火眞乞), 그 놈이 펼친 마염공(魔焰功)의 화기(火氣)가 노부의 전신을 태우기 시작하는구나......." 부르짖는 그의 입술도 곧 시커멓게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또한 입술은 쩍쩍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시커먼 피가 터져 나왔다. 천독마제 갈천후의 얼굴은 완전히 사색(死色)이 되어 있었 다. "우욱! 이제...... 마지막으로 천독마경(千毒魔經)만 넣으면......" 갈천후는 급히 품 속에서 한 권의 양피 책자를 꺼냈다. 그러나 책자를 잠시 내려다 보던 그 는 검혼경과 함께 철궤 안에 집어 넣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철궤의 뚜껑이 닫혔다. 갈천후는 철궤를 닫은 후 비틀거리며


일어섰 다. 이어 그는 하늘을 우러러 비통하게 중얼거렸다. "결국...... 우리 아홉 명은 모두...... 하루사이에 죽는 셈이군......!" 어두컴컴한 하늘이었다. 빗발이 조금 굵어지고 있어 그의 얼굴을 때리고, 입술에서 터져나온 검은 피를 씻어내리고 있었다. 문득 갈천후의 두 눈에서 음독한 기운이 솟아 나왔다. 그는 먹장구름이 몰리는 하늘을 노려보며 저주(詛呪)의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무공은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아무도, 천하의 그 누 구도 다시는 우리들의 무공을 구경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허리를 굽히더니 바닥의 철궤를 들었다. 그는 철궤를 가슴에 안은 채 암산을 향해 돌 아섰다. 그의 눈이 암산을 살폈다. "......!" 비로소 그는 암산의 기이한 생김새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시선을 철궤로 향했 다. 그는 한편으로는 섭섭하고 분노가 뒤섞인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체내에 남아있는 마지막 진기(眞氣)로 이...... 아홉 권의 비급을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 라지게 만들 것이다. 아무도...... 아무도 가질 수 없게......." 그는 철궤를 암산의 벽으로 밀어 붙였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푸...... 욱! 하는 소리와 함께 철궤가 암벽으로 박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왼손을 오른손의 손등에 붙인 다음 철궤를 향해 진기를 발출했다. 그러자 괴이한 일이 발생했다. 서서히, 소리도 없이 철궤가 암벽 속으로 꺼져들어가는 것이었다. 잠시 후 철궤는 암벽 깊숙 이 박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암벽에 균열이 가지도 않았으며, 돌가루가 튀지도 않고 고스 란히 철궤만 밀려들어간 것이었다. 천독마제는 손을 거두었다. 암벽에는 철궤가 들어간 구멍만 뻥 뚫려 있을 뿐, 철궤는 종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슬쩍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암벽에 남아있던 구멍조차 순식간에 메 워지고 말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암벽이 마치 두부처럼


뭉 개진 것이었다. 갈천후는 무심해진 눈으로 철궤가 들어간 암벽을 응시했다. 그의 표정은 허무하게 변해 있 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제는...... 영원히 사라졌구나." 중얼거림과 함께 그의 눈에는 신광이 꺼지듯이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얼굴이 쭈글쭈글하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얼굴은 물론 의복 밖으로 노출된 목덜미와 손등도 삽시에 쭈글쭈글해 졌다. 마침내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입에서는 허탈한 탄 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 진걸. 그의 마염공이 드디어 체내에서...... 이젠...... 끝이다......." 문득 그의 전신에서 시커먼 연기가 푸시시, 하고 피어 올랐다. 연기는 점차 짙어졌다. 동시 에 살이 타는 듯한 역한 내음이 풍겼다. 놀랍게도 천독마제 갈천후의 몸은 타 들어가고 있었다. 쭈글쭈글해진 피부 사이로 쉴새없이 연기가 피어 오르면서. 그러나 갈천후는 비명 한 마디 내지 않은 채 오직 하늘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동공도 완전히 숯이 되어 버렸다. 휘이잉....... 한 차례 축축한 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갈천후의 몸은 스르르 재가 되어 그 자리에 스러지 는 것이 아닌가? 이제 그가 있던 자리에는 검은 재만 한 줌 남아있을 뿐이었다. 우르르릉......! 뇌음(雷音)이 울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빗발이 굵어지며 계곡에 세찬 폭우 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 아! 우르릉! 콰... 앙! 뇌성벽력이 폭우와 더불어 계곡을 함몰시킬 듯 몰아치고 있었다. 세월여류(歲月如流).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수없이 윤전(輪轉)했다. 그런 가운데 물경(勿驚) 사백 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흘러갔다. 제 1 장 · 만년지극용란혈(萬年地極龍卵血) 소주(蘇州).


강소성(江蘇省)에 위치한 소주는 예로부터 고소성(姑蘇城)이라고도 불리웠다. 소주성에서 서남(西南) 방향으로 빠져나가다 보면 하나의 아름다운 다리가 나타난다. 그 아 래로는 맑은 녹수(綠水)가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흘러내렸는데 이 다리를 이름하여 풍교(楓 橋)라고 불렀다. 풍교를 건너 약 이 리(二里) 가량 더 가면 하나의 아늑한 산을 등지고 한 채의 커다란 장원 이 있었는데, 장원의 편액에는 용(龍)이 날고 봉황이 춤추는 듯한 필체로 다음과 같이 각인 (刻印)되어 있었다. - 선은장(仙隱場). 이곳은 과거 황궁(皇宮)에서 관직을 지낸 바 있는 귀인(貴人)의 거처로 귀인은 벼슬이 한림 원(翰林院) 시강학사(侍講學士)까지 올랐었다. 그의 이름은 백운진(白雲進)이라 했다. 그가 관직에 있던 기간은 명(明) 조정이 안정되어 있을 시기였다. 그는 학식과 덕망이

높아 시강학사의 위치까지 올랐지만 말년에 들어서자 스스로 관직을 내놓고 이 곳 선은장에 은거 해 조용히 책을 벗삼아 살았다. 백운진은 손이 귀했는데 그에게는 칠대독자(七代獨子)가 하나 있었다. 백천기(白天麒)란 이름을 지닌 그의 독자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으로 인근에 자자한 명성 을 떨치게 되었다. 열 살도 채 되지 않아 사서삼경(四書三經)은 물론 고절(高絶)한 각종 학 문(學文)에 통달했는가 하면, 어떠한 대학자(大學者)라 해도 그의 스승으로 반 년을 넘긴 사 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반 년 이내에 모든 학자들이 그에게 더 이상 가르쳐 줄 것이 없게 되버리기 때문 이었다. 이렇게 되자 부친인 백운진은 더 이상 글선생을 두지 않고 백천기가 스스로 독학(獨學) 하 도록 했다. 대신 자신의 힘으로 구해줄 수 있는 서적이란 서적은 전부 구해 주었다. 그리하여 백천기의 나이 십육 세가 되니 그의 학문은 부친을 휠씬 능가하게 되었다.


그가 익힌 학문은 방대하기 이를데 없었다. 유학(儒學) 뿐만 아니라 천문지리(天文地理), 의 술(醫術), 도학(道學) 등 모든 방면에 걸쳐 그야말로 고심한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더욱이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백천기는 학재(學才)는 물론이거니와 용모도 매우 비범한 것 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웬일인지 좀체로 바깥으로 나오는 일이 드물었다. 그로 인해 소주 일대에서는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이 거의 없는 반면 그를 모르는 사람 역시 한 명도 없었다. 아무튼 백천기라는 인물은 소주의 일대기재(一代寄才)로 명망이 드높았다. 삼경(三更). 선은장의 밤은 적막하기만 했다. 장원 내의 전각들에서는 불이 하나 둘 꺼져가고 있었다. 그 중 한 방만은 아직도 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장원 안쪽에 위치한 내전의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는데 그 사이로 방 안의 광경이 들여다 보였다. 탁자 앞에서 한 명의 백의소년이 단정히 앉은 채 책을 읽고 있었다. 탁자 위를 비롯하여 사 방의 벽에 이르기까지 그의 주위에는 온통 수많은 책들로 뒤덮혀 있다시피 했다. 유일하게 남은 공간이라야 백의소년이 앉아 있는 곳 뿐, 책들로 인해 방이라기보다는 차라 리 하나의 서고(書庫)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천장에는 밝은 빛을 내는 등(燈)이 걸려 있어 탁자 위를 밝히는 한편 백의소년의 모습도 뚜 렷히 비춰주고 있었다. 백의소년은 지난 날의 반안(潘安)이나 송옥(宋玉)이 무색할 정도의 미안(美顔)이었다. 선명 하고 짙은 눈썹은 검미(劍眉)였으며 한 쌍의 눈은 봉의 눈을 연상케 했다. 얼굴은 관옥같이 맑았으며 콧날은 고르게 뻗어내려 선이 분명한 입술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한 마디로 수려하기 이를데 없는 미소년이었다. 그러나 흠이라면 흠일까? 소년은 무척 허약해 보였다.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파리해 보였으 며 몸매도 가냘픈 편이었다. 이 백의소년이 바로 이 곳 선은장의 소장주(少莊主)이자 신동 (神童)으로 소문난 백천기(白天麒)였다. 백천기는 책을 다 읽었는지 천천히 고서(古書)를 덮었다. 이어 고개를 들자 그의 두 눈에서 는 혜지(慧智)가 충만한 빛이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그는 잠시 멍하니 천장에 걸린 등을 바라보더니 곧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책더미 사이를 피해 창가로 다가가 반쯤 열려진 창문 앞에서 신형을 멈추었다. 서늘한 밤바람의 감촉이 얼굴을 스치자 백천기는 얼핏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는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말았다. 그는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 열 살 때부터 십 년의 세월을 기약하며 만 권(萬卷)의 책을 읽겠다고 맹세했건만, 오늘 따라 왜 이토록 마음이 흔들릴까? 도무지 자신이 없어지는구나.' 음울한 그의 신색에는 심한 자책이 어리고 있었다. 그러나 곧 그는 안색을 가다듬으며 내심 부르짖고 있었다. '백천기여, 백천기! 너는 어찌하여 이다지도 못났단 말이냐? 장부(丈夫)로 태어나 적어도 만 권의 책을 가슴에 넣지 않고서야 대체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거냐?' 백천기는 창문을 통해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캄캄한 하늘에는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막막한 암흑만이 그의 가슴을 압박해올 뿐이었다. 이때 어디선가 은은하게 종(鐘) 소리가 울려왔다. 그 소리는 미묘하게 백천기의 마음에 와닿 았다. 그는 기분이 사뭇 이상해지는 것을 느끼며 부지중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백천기는 급기야 창 밖을 향해 장계(張繼)가 지은 시 한 수를 읊었다. 그것은 풍교야박(楓橋 夜泊)이라는 시로, 바로 소주의 명교(名橋)인 풍교 주변을 노래한 것이었다. 달은 떨어지고 까마귀가 우니 찬 서리가 하늘에 차 있구나. 붉게 물든 단풍과 불타는 어화(漁火)가 근심으로 잠못드는 내 눈에 비치노니 고소성(姑蘇城) 밖에 있는 한산사(寒山寺)에서 야반을 알리는 종소리가 이 배까지 들려오누나. 月落烏啼霜滿天 江楓漁火對愁眼 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 낭랑한 음성으로 시를 읊으니 심야의 적막함과 어울려 그지없는 감상을 자아냈다. 덜컹! 불현듯 한 줄기 거센 바람이 창문을 뒤흔들었다. '음? 웬 바람이......' 백천기는 느닷없이 바람이 몰아치자 새삼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쏴아......!


비는 금세 세찬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굵은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자 백천기 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 가을에 웬 비가 이토록 내리지?" 빗발은 갈수록 굵어졌다. 간간이 밤하늘을 가르며 번갯불이 번뜩거렸으며 우뢰소리도 심심 치 않게 울렸다. 이제 비바람은 창문을 타넘어 방 안까지 들이치고 있었다. 백천기는 감상을 접으며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안 되겠다. 이러다간 방 안의 책이 모조리 젖겠구나.' 마침내 그는 창문을 닫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갑자기 방 안이 온통 푸른 빛으로 가득 차 버렸다. "엇!" 백천기는 놀란 나머지 짧게 비명을 질렀다. 창 밖으로 향한 그의 두 눈이 크게 떠져 있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섬전(閃電)이 온통 밤하늘을 뒤덮고는 지상까지 뻗쳐 내린 것이었다. 정녕 듣지도 보지도 못한 엄청난 번개였다. 그 뒤로는 곧장 천지가 무너져 내릴 듯한 뇌성 (雷聲)이 이어졌다. 꽈르릉... 꽝... 우르르릉......! 백천기는 방이 온통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태어나서 이와 같은 우뢰는 처음인 바, 그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거짓말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천지를 무너뜨릴 듯 울린 우뢰성이 들린 직후, 갑자 기 폭우(暴雨)와 광풍(狂風)이 뚝 멎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아!" 백천기는 납득하기 힘든 대자연(大自然)의 현상에 그만 어리둥절해져 버렸다. 그러는 사이 밤하늘을 뒤덮고 있던 시커먼 먹장구름은 빠른 속도로 물러가고 있었다. 잠시 후 밝은 달이 얼굴을 디밀었고, 머지 않아 야공에는 수를 놓은 듯 별들이 총총히 빛나 기 시작했다. 마치 방금 전에 일어났던 조화(造化)를 부인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백천기는 문득 허탈하게 웃었다. "찰나지간에 온 우주의 힘을 집결시킨 듯한 뇌성벽력(雷聲霹靂)에 이어 이렇듯 갑자기 멀쩡 해질 수 있다니... 대자연 앞에서는 한없이 왜소하고 무력한 것이 인간이로구나. 후후, 나 자 신이 더욱 왜소해지는 것 같구나." 그는 나직히 탄식하며 손을 뻗어 창문을 내렸다. 잠시 후 서재에서는 불이 꺼졌다. 다음 날 아침.


백천기는 간밤에 이런저런 감상으로 늦잠을 잔 터라 이날따라 느지막히 일어났다. 그가 막 눈을 떴을 때, 문 밖으로부터 한 가닥 청아한 음성이 들려왔다. "도련님, 기침하셨나요?" 백천기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영령(令鈴)이냐? 잠시만 기다려라." 지금 그는 어젯밤 책을 읽던 서재 옆에 딸린 침실에 있었다. 그는 대강 옷매무새를 고치며 문 밖을 향해 말했다. "됐다. 이제 들어오너라." 그의 말이 끝나자 방문이 열리며 한 청의소녀가 사뿐히 걸어들어왔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 은 시녀복이었다. 나이는 대략 십오 세 정도, 동그스럼한 얼굴에 두 뺨이 사과처럼 붉고 눈이 초롱초롱하며 대단히 귀엽게 생긴 시비였다. 그녀는 백천기를 보고는 날아갈 듯이 절을 했다. 하지만 그에 반해 그녀의 표정은 전혀 딴 판이었다. 두 눈 가득 장난기가 어려 있는가 하면 심지어 혓바닥을 낼름거리고 있었다. "칫! 도련님은 정말 잠꾸러기예요. 해가 중천에 뜬 지가 언젠데 이제서야 일어나시는 거예 요?" 백천기는 호탕한 웃음으로 그 말을 받았다. "하하하....... 네 말이 옳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질책을 면하기는 틀렸구나." 그러자 청의시비, 즉 영령은 갑자기 방 안을 휘이 둘러보았다. 침실임에도 불구하고 책더미 가 군데군데 쌓여있는 것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눈썹을 찡그리며 코를 막았다. "아이, 책냄새! 정말 도련님은 말릴 수가 없네요. 이렇게 매일같이 책만 읽으니 남들이 그렇 게 부를 수 밖에요." 백천기는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뭐라고 부르는데?" 영령은 짐짓 샐쭉한 얼굴로 답변했다. "책귀신이요, 모르셨어요?" "책귀신?" 백천기는 황당한 표정을 보이며 다시 물었다. "책귀신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러자 영령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 듯 입을 가린 채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진작부터 장원 내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는 걸요? 사 년 전만


해도 책벌 레라고 했는데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아예 책귀신이 되어버린 거지요. 호호호......." 허리를 움켜쥐고 웃어대는 그녀를 보며 백천기는 그만 머쓱해진 채 쓴 웃음을 지었다. "할 수 없지. 책벌레건 책귀신이건 장부(丈夫)가 한 번 결심한 일을 중도에서 바꿀 수는 없 는 법이란다." 그는 곧 아무렇지도 않은 듯 크게 기지개를 켰다. 영령도 더 이상은 그 점에 대해 덧붙이지 않았으며 오랜 습관인 양 숙달된 손길로 그의 침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도 백천기의 눈은 책귀신답게 또다시 책으로 가 있었다. 그의 귀로 영령의 목소리 가 들린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다. "참, 도련님은 간밤에 큰 소란이 난 것을 아세요?" "소란이라니?" 백천기가 몸을 돌리자 영령은 그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아주 잠깐 큰 비가 왔었거든요......." 백천기는 나직히 탄성을 발했다. "아! 그랬었지. 정말 큰 비였어. 그런데?" 그의 물음에 영령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 종알거렸다. "엄청난 벼락이 떨어져 운양곡(雲陽谷)에 있는 혈룡암(血龍岩)이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말았 대요." "뭣이? 그게 정말이냐?" 백천기는 매우 놀랐다. 영령은 그가 크게 반응을 보이자 신이 나서 말을 이어갔다. "네. 그것 때문에 지금 성내가 발칵 뒤집혔어요. 모두들 난리라도 난 것처럼 떠들어대고 있 거든요." 백천기는 검미를 모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 벼락이 떨어진 곳이 혈룡암이었던가?' 혈룡암(血龍岩). 이곳에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하나의 전설이 있었다. 바로 수천 년 전 한 마리의 신령(神 靈)한 혈룡(血龍)이 하늘에서 내려와 용의 형상을 한 운양곡의 혈룡암에서 알을 낳고는 다 시 승천했다는 것이었다. 그 유래는 정확히 알 길이 없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 전설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소주성(蘇州城) 내에 있는 사람들은 매년 혈룡암에서 큰 제식(祭式)을 치르곤 했는데 이제


는 거의 전통으로 굳어져 있는 일이었다. 영령은 침상 정리를 모두 끝내고는 다시 중얼거렸다. "성내의 사람들은 걱정이 대단해요. 혈룡암이 무너지면 틀림없이 불길한 일이 생길 것이라 고......." 백천기가 그 말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내내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에 서는 기이한 빛마저 감돌고 있었다. 이어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들고 있던 책을 도로 제자리에 놓더니 방문으로 향했다. 뒤에 있던 영령이 물었다. "도련님, 어디 가세요?" 백천기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간단히 대꾸했다. "음, 잠시 밖에 좀 다녀오겠다." 그러자 영령이 아까와는 달리 침착한 어투로 당부했다. "도련님, 다른 곳은 몰라도 그 혈룡암 근처에는 절대로 가시지 마세요. 잘못하면 큰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녀의 걱정에는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백천기는 아무 말도 없이 방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혼자 남게 된 영령은 앵도라진 얼굴로 종알거렸다. "흥! 책벌레, 책귀신 같으니라구! 목석(木石)같은 도련님......." 무슨 뜻인지....... 그녀는 잠시 멍하니 서 있더니 백천기가 잠을 자던 침상에 살며시 몸을 눕혔다. 이어 그녀 는 사과같은 양볼을 침상에 조심스럽게 비벼대고 있었다. 밖은 조용했다. 장원 밖. 백천기는 장원을 뒤로 하고 휘적휘적 걷고 있었다. 물론 그가 조반도 들지 않고 나선 것은 영령의 말로 인해 호기심이 동했던 때문이었다. '혈룡암이라면 평소 내가 머리를 식히러 가곤 하던 곳인데 하필 그곳에 벼락이 떨어졌다 니.......' 그는 아쉬움을 억누르며 곧장 운양곡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도중, 거리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이 군데군데 모여 수군대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 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심각하게 굳어진 채 걱정스런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백천기가 지나가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좀체로 바깥 나들 이를 하지 않은 그였기에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대개는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놀라는 이유는 백천기의 탈속하고 비범한 풍모 때문이었다.


산뜻 한 백의를 걸친데다가 준수하기 이를데 없는 그의 용모는 타인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백천기는 그런 사실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그는 중인들의 눈길 을 무시한 채 계속 걸을 따름이었다. 운양곡은 선은장에서 서쪽 방향에 위치한 기운산(奇運山)의 일부였다. 기운산이 가까와질수 록 사람들의 자취는 점차 뜸해졌다. 이윽고 백천기는 기운산 기슭에 당도했다. 그곳에서부터 는 아예 사람들을 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무슨 불길한 일이라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 일부러 접근을 회피하는 모양이었다. 백천기는 망설이지 않고 기운산으로 들어섰다. 그에게는 두려움이라곤 없었다. 다만 지금 그 를 이끌고 있는 것은 호기심과 한 가닥 안타까움일 뿐이었다. 그로부터 약 반 시진 가량을 소비해서야 그는 비로소 운양곡에 당도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곡은 입구에서부터 온통 거친 바위가 널려 있어 진입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지난 밤 집중적으로 쏟아져내린 폭우의 흔적이 역력했다. 바닥의 바위들은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었으며, 계곡의 중앙에는 빗물이 모여 작은 개울을 이룬 채 콸콸거리며 흘러 내 리고 있었다. 백천기는 그것을 보자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잠깐 동안에 내렸던 비가 이 정도라니.......' 그는 곡구에서 잠시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곡 안은 원래 좌우로 험악한 지세의 절벽 이 기울어 있는데다 안으로 가면서 길이 구부러져 있어 그 끝에 있는 혈룡암은 평소에도 그 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었다. 백천기는 쓴 입맛을 다셨으나 내심 결정을 내렸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보자.' 그는 발걸음을 곡내로 옮겼다. 역시 바닥이 울퉁불퉁하고 험하기 그지없어 그의 고초는 이 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몇 번씩이나 넘어지고 비틀거리며 힘겹게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이곳을 더듬는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이 곳의 특이한 지세를 비롯하여 전설이 서려 있는 혈룡암의 위용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그 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기 때문이다. 기실 고작해야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나 찾을까 말까 했던 곳이기도 했지만 이곳이 그의 심 상에 던져준 충격들은 결코 가벼운 것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침내 곡의 끝에 당도하자 그는 고개를 들어 혈룡암을 바라보았다. "아니! 저럴 수가......?" 그는 넋을 잃고 말았다. 높이가 근 수백 자에 달하며, 거대한 용(龍)의 형상을 한 혈룡암의 절반이 완전히 무너져 떨 어져나간 것이었다. 그로 인해 주변에는 거대한 암석덩이로 온통 사태를 이루고 있었다. 백천기는 한동안 그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의 얼굴에는 경탄이 어리고 있었다. '오오! 아무리 자연의 힘(力)이 위대하다고는 하지만 단 한 차례의 벼락으로 인해 저 거대한 혈룡암이 반동강이가 날 수가......' 백천기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천천히 혈룡암으로 다가갔다. 그때였다. 불현듯 어디선가 그의 후각을 자극하는 기이한 향기가 진동해 왔다. 그 향기는 도저히 뭐라 형용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청신하면서도 신비로운 것이었다. '으음?' 백천기는 의혹이 이는 한편 자신도 모르게 향기에 완전히 취해버리고 말았다. 그는 홀린 듯 이 암석덩이들을 피해가며 향기가 풍기는 곳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석(亂石)의 사태가 그를 가로막은 것이었다. 어떤 것은 한 덩어리의 크기가 집채만하기도 했으며, 더러는 칼날같이 날카로운 암석들이 그를 압살할 듯 기우뚱하게 기울어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백천기는 난석 더미를 타오르기도 하고 미끌어지기도 하면서 계속 홀린 듯이 기향이 풍기는 곳으로 다가갔다. 오랫 동안 장원 안에서 책만 읽으며 지냈던 그의 체력으로는 상당 히 무리한 일이었으나 그는 집념을 가지고 계속 진입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의 눈이 무엇인가를 발견한 듯 한껏 크게 떠지고 말았다. "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하고 있었다. 무너져내린 암벽! 바로 그 암벽의 틈새로부터 한 줄기 시뻘건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선혈은 실같이 틈 사이를 흘러내려 땅바닥으로 스며들어 가고 있었다. 백천기가 맡은 기향 은 바로 그 선혈로부터 풍겨나오고 있었다. 백천기는 가벼운 전율이 이는 것을 느끼며 내심 중얼거렸다. '대체 저 암벽 속에 무엇이 있길래 피가 흘러나오는 걸까?' 가까이 다가가보니 바위 틈은 생각보다 크게 벌어져 있었다. (어디 한 번......) 백천기는 호기심이 크게 일어났다. 마침내 그는 암벽 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이어 힘을 주어 잡아당겨 보았다. 우두두... 쿵! 균열이 간 바위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 사이로 뻥 뚫린 구멍이 그의 눈에 들어 왔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 안을 들여다 보았다. "음!" 백천기는 신음을 흘렸다. 바위가 떨어져 나간 곳에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 속에 시뻘건 선혈이 반쯤 고여 있었던 것이었다. 문득 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선혈 속에 무엇인가 둥그런 물체가 윗부분만 노출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것은 청색을 띈 것으로 마치 알(卵)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선혈이 틈 사이로 거의 흘러나와 버리자 물체의 모습이 확실하게 보였다. 알 모양의 물체는 마치 커다란 계란 형상이었는데 크기는 직경 한 자 정도 되어 보였다. 그 알은 암벽이 떨어져나간 충격으로 반쪽으로 깨어져 있었다. 깨진 알 속에 선혈이 고여 있었다. 알고 보니 정신을 맑게 하는 청향(淸香)은 바로 그 선혈로부터 풍기고 있었다. 청아한 향기는 이제 코를 찌르다 못해 사위를 진동시켰다. 그 신비스런 향기는 마치 후각을 빌어 선계(仙界)를 알리려는 듯 천지간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피가 아닌 것 같다.' 백천기는 의혹에 휩싸인 채 한동안 알 속에 고여 있는 액체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어디......' 백천기는 슬며시 선혈에 왼쪽 손을 대 보았다. 순간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백천기의 손끝 이 닿자마자 선혈은 즉시 손을 타고 스며드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런!"


백천기는 크게 놀라 황급히 손을 뺐다. 그런데 너무 서두른 바람에 선혈이 튀어 그의 두 눈 에 들어오고 말았다. '내가 너무 경솔했다!' 두 눈이 화끈하더니 이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쓰려왔다. 백천기는 당황한 나머지 반사적으 로 두 눈을 마구 비벼댔다. 그 사이, 그의 왼손은 이미 선혈이 피부 깊숙히 스며들어 온통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돌아볼 경황이 없었다. 잠시 후 통증은 점차 가라앉았다. 백천기는 그제서야 안도하며 눈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나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본 그는 아 연하여 부르짖었다. "아니, 이럴 수가!" 백천기는 온통 시뻘겋게 변한 왼손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자책해마지 않았다. '어리석게도 사소한 호기심에 이끌려 이 꼴이 되다니! 심히 부끄럽구나. 이런 일로 만일 실 명(失明)이라도 했다면 아버님께서 얼마나 낙심을 하셨을까?' 그러나 막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그는 멈칫했다. 그의 눈에 알 속의 선혈이 들어왔다. 순간 그는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서적에 파묻혀 자라왔다. 그가 읽은 대부분의 책은 유교(儒敎)의 경전(經 典)이었다. 그러나 잡학 분야에 대해서도 닥치는 대로 섭렵해 왔었다. 그의 뇌리 속에 한 권의 책이 떠올랐다. 그것은 괴이현록(怪異玄錄)이란 제목의 고서(古書) 였다. 백천기는 눈썹을 모으며 괴이현록에 기재되어 있던 내용을 더듬어 보았다. 그 속에는 다음 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대계(大界)에는 혈룡(血龍)이라는 기이한 영수(靈獸)가 살고 있느니 이는 만 년을 묵으 면 천계(天界)로 승천(界天)한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혈룡은 승천하기 전 지계(地界)에 하 나의 용란(龍卵)을 낳게 되는데, 그 용란은 부화하기 위해서 필히 천하의 지극정기(地極精 氣)가 모여있는 지극영석(地極靈石)에 파묻혀 있어야만 한다.......> 기억을 떠올린 백천기는 내심 중얼거렸다.


'지극영석 속에서 천 년을 살아 숨쉬며 혈룡으로 화신하려는 용란... 하지만 천재지변(天災地 變)으로 인해 지극영석이 파괴되면 용란도 마찬가지로 깨져버리고 만다고 했다.' 그의 눈이 새삼 이채를 담으며 붉은 액체로 향했다. '깨진 용란은 다시 만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지극영석의 정기(精氣)을 받아들여 하나의 신 비스러운 액체로 화한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이른바 만년지극용란혈(萬年地極龍卵血)이라 적혀 있었다......!' 백천기의 안색이 변했다. '그렇다면 이 액체가 바로 만년지극용란혈이 아닐까?' 그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여 괴이현록의 내용을 연이어 떠 올렸다. '그 책에는 기연(奇緣)을 만나 만년지극용란혈을 마실 수만 있다면 능히 인간의 경지를 벗 어나 신(神)과 같이 된다고 했다!' 백천기는 고개를 들어 무너져내린 혈룡암을 올려다 보았다. '더구나 이곳은 고래로부터 혈룡이 승천했다는 설이 있어 혈룡암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마침내 그는 결론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그렇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이것은 만년지극용란혈임에 틀림이 없다.' 백천기는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붉은 액체가 고인 용란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희열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것은 내 평생에 다시 얻지 못할 엄청난 대기연(大奇緣)이다. 내 어찌 하늘이 내린 크나큰 은혜를 마다할 수 있으랴?" 백천기는 용란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붉은 액체, 즉 만년지극용란혈은 이제 불과 세 푼 깊이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대부분이 균열된 용란 사이로 흘러나가 유실되고 만 것이 었다. 백천기는 더 이상 유실되기 전에 급히 만년지극용란혈을 마시기 시작했다. 용란혈이 목구멍 을 타고 들어가자 즉각 청량한 기운을 느낄 수가 있었다. 다만 아쉽다면 겨우 대여섯 모금을 마시는 동안에 떨어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남은 한 방울까지를 전부 마시고 난 백천기는 만족한 얼굴로 몸을 세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안색은 크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단전(丹田)에서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불 길처럼 치솟아 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난생 처음 당하는 일이었다. 불길같은 뜨거운 기운은 삽시간에 그의 전신으로 번졌 다. 그것은 또한 참을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이었다. "윽! 으으......." 백천기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비명을 지른다고 해소될 고통이 아니었다. 그는 전신이 마치 거센 불길에 휘감긴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며 가히 혼절할 지경이었다. "으아악......!" 마침내 인내의 한계에 달한 그는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벌렁 쓰러졌다. 그러고도 모 자라 연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더니 마침내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죽은 듯이 바닥에 늘어져 있던 그의 몸에서 괴이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신이 서서히 붉게 변하기 시작했는데, 얼굴은 물론이거니와 손, 그리고 마구 바닥을 뒹구 는 바람에 옷자락이 찢어져 드러난 피부마저 점진적으로 시뻘겋게 변해가는 것이 아닌가? 마침내 그는 혈인(血人)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신비한 현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만년지극용란혈이 스며든 그의 왼손만은 오히려 하얗게 탈색되어갔다. 그러나 곧 피부가 쩍 쩍 갈라지더니 껍질이 벗겨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의 왼손이 여러 차례에 걸쳐 허물을 벗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도합 일곱 번의 탈피(脫皮)을 거듭하는 동안 그의 왼손은 눈이 부실 정도로 희게 변해갔다. 마침내는 투명한 백옥(白玉) 빛을 띄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시간은 쉬임없이 흘러갔다. 문득 그의 꼭 감겨진 양눈에서 눈꼬리를 타고 한 가닥씩의 선혈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눈 꼬리로부터 흘러내린 선혈은 그의 양뺨으로 미끄러지더니 바닥으로 똑똑 떨어졌다. 이어 백천기의 몸이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핏빛으로 물들었던 전신 피부가 점 차 엷어지더니 정상을 되찾고 있었다. 그의 몸이 완전히 본 모습을 찾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 시진 가량이 지나서였다. "으음......."


신음소리와 함께 백천기는 눈을 떴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바위에 기 대며 몸을 일으킨 그는 방금 전의 격심한 고통을 생각하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입고 있던 백의가 더럽혀져 있는 것은 물론 군 데군데 찢어져 나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쯧!" 백천기는 혀를 찼으나 달리 상처가 난 곳이 없자 일단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문득 그의 안 색이 야릇하게 변했다. 그는 자신의 체내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전신에서 팽창하며 일어나는 엄청난 기운(氣運)! 그것은 그의 혈맥과 혈맥 사이에 충만하게 퍼진 채 알 수 없는 괴이한 잠력을 부글거리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그는 마치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진 것 같은 상쾌함을 느끼게 되었다. 가볍 게 발만 굴러도 하늘로 솟구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게... 어찌된 거지?' 백천기는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를 감지한 채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두 가지 변화가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왼손과 두 눈이었다. 그의 왼손은 지난 날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천하의 어떠한 미녀의 섬섬옥수(纖纖玉手)인들 그보다 더 아름답고 섬세할 수가 있을까? 왼손은 피부가 투명할 정도로 곱게 변해 마치 백옥(白玉)으로 깎아놓은 듯 매끈해져 있었다. 더욱 신비한 것은 그의 두 눈이었다. 두 개의 동공에서 흘러나오는 눈빛은 그야말로 신비롭 기 짝이 없었다. 담담하게 가라앉아 있으되 한성(寒星)과도 같은 빛나는 신광(神光)이 은은 히 뿌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천하의 어떤 사람일지라도 그의 눈빛에 접하면 매료될 것만 같은 신비한 눈빛이었다. 소년 문사 백천기, 그는 이제 몇 시진 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변해 버렸다. 그는 은연중에 운명의 일대 전환(轉換)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제 2 장 · 광세기연(廣世奇緣) 백천기는 자신의 신체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난 현상에 대해 놀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아, 이렇게 다른 기분일 수가.......'


그는 생각할수록 신기한 느낌이 들어 이리저리 몸을 둘러보고 움직여보며 기쁨을 금치 못했 다. 사실 그는 무림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 자세한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가 복용한 만년지극용란혈(萬年地極龍卵血)은 그야말로 천지간에서 가장 기이하고도 영통 (靈通)한 기물(寄物)로써 보통사람이 복용한다 해도 능히 이백 살까지 장수를 누릴 수 있는 효험이 있었다. 게다가 영원히 늙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평생토록 무병(無病)하여 건강을 유지 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만년지극용란혈을 만일 무림인(武林人)이 복용한다면 단지 한 모금만으로도 그 효용 은 무궁무진 했다. 우선 내공이 즉시 이갑자(二甲子)가 증진될 뿐더러 근골(筋骨)이 엄청나 게 단단해져 웬만한 창검(槍劍) 따위에는 흠집 하나 생기지 않게 된다. 만일 절세의 신공(神功)을 익히게 된다면 천하의 어떤 보검(寶劍)으로도 상처를 입힐 수 없 는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실로 광세기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일개 문약한 서생(書生)일 뿐인 백천기는 일약 기재(奇才)로 태어나게 되었다. 다만 그 자신만이 그 엄청난 행운을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 었다. 우선 그의 왼손만 해도 겉으로는 부드럽고 섬세하게 보이지만 실은 천하의 어떤 물건이라도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두 눈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의 두 눈은 세상의 어떤 기인도 따를 수 없는 안력(眼力)을 지닌 천안(天眼)이 되어 있었다. 밤을 대낮처럼 환히 볼 수 있을 뿐더러, 시력도 크게 증진 되어 백보(百步) 밖의 개미까지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만 귀가해야겠구나." 백천기는 너무 오래 지체했다는 생각이 들자 주위를 둘러보며 떠날 차비를 차렸다. 그러던 중 그는 한곳에 시선을 멈추게 되었다. 혈룡암의 한곳이었다. 그곳 역시 무너져 내린 벽의 틈새였는데 웬 시커먼 물건 하나가 그의 눈길을 끈 것이었다. '저건 또 뭐지?'


다시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하나의 검은 철궤(鐵櫃)였다. 얼마나 오랜 세월이 경과했는지 철궤는 온통 두터운 녹으로 덮여 있었다. 그것은 바위틈에 박혀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바위와 일체 를 이룬 듯한 모습이었다. 백천기는 철궤를 응시하며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대체 어떻게 저런 철궤가 바위 속에 박혀있는 걸까? 저 상태라면 혈룡암이 무너지기 전부 터 석벽 깊숙한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마침내 그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는 철궤를 뽑기 위해 손을 뻗어 보았다. 그러나 철궤를 잡고 당겨 보았으나 워낙 바위와 일체가 되어있는 바람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단단히 박혀 있구나.' 그는 슬며시 오기가 치밀었다. 마침내 그는 왼손을 들어 철궤의 옆부분 바위를 쳐보았다. 순 간 믿을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왼손이 단단한 바위 속으로 쑥 파고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아니!" 백천기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바람에 왼손은 저 절로 바위로부터 빠졌다. 그는 급히 왼손을 살펴 보았으나 상처는 커녕 흠집 하나 나 있지 않았다. 백천기는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분명 바위는 단단하기 짝이 없어 설사 도끼로 후려친다 해도 가볍게 쪼갤 수가 없었다. 그 런데 맨손으로 두부처럼 구멍이 뚫린다는 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백천기는 망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 보았다. 문득 그의 뇌리에 번개처럼 스치 는 것이 있었다. '혹시 만년지극용란혈이 손에 묻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백천기는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부쩍 호기심이 일어났다. '어디 그렇다면......' 그는 왼손을 서서히 치켜 세웠다. 그의 눈은 바위의 툭 튀어나온 한 부분으로 향해지고 있 었다. 다음 순간 그는 왼손으로 바위를 내려쳤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의 한 귀퉁이가 마치 두부조각처럼 잘려져 나갔다. 더욱이 바위의 단 면은 마치 칼로 베어내기라도 한듯 매끈했다. "아!" 백천기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이제 모든 것은 확실해졌다. 그의 왼손은 천하의 어떤 병기보다 더 단단해져 있는 것이었다. 백천기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안색이 상기되었다. 동시에 뭐라 형언키 어려운 흥분을 느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안색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내심 자책하고 있었다. '이 무슨 꼴인가? 무릇 학문(學文)을 한다는 내가 한낱 필부처럼 힘이 강해졌다고 이렇게 가볍게 흥분해서야 쓰겠는가?' 백천기는 자신의 왼손을 들여다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더구나 이렇게 무서운 힘이 생겼으나 자칫 잘못하여 타인에게 피해라도 주게 되면 어쩔 것 인가? 도리어 근심해야 할 일이 아니던가?'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기연을 만난 것은 틀림없지만 이는 내가 원한 바가 아니다. 앞으로는 더욱 조심할 일만 늘 었으니, 장차 이 손이 화근(禍根)을 부르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백천기는 스스로 겸허함을 일깨우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길은 다시 예의 철궤로 향하고 있었다. '어쨌든 저것이 무엇인지는 알아봐야 겠구나.' 그는 왼손을 들어 철궤가 박혀있는 바위를 내려쳤다. 파팍......! 몇 차례 바위를 내려치자 바위는 두부처럼 떨어져 나갔다. 잠시 후에는 철궤를 바위로부터 떼어낼 수가 있게 되었다. 그는 암벽에서 떨어져 나온 철궤를 내려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대체 무엇이 들어있을까? 아무튼 보통 물건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백천기는 철궤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크기는 사방 한 자 정도, 칙칙한 검은 색이었으며 표 면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마침내 그는 철궤의 뚜껑을 잡고 힘을 주었다. 끼이익!


듣기 거북한 마찰음과 함께 뚜껑은 별 저항감없이 열렸다. 백천기의 눈은 꽂히듯이 철궤 안 으로 떨어졌다. 철궤 안에는 고서(古書)들이 들어 있었다. 고서는 모두 누런 양피지(羊皮紙)로 만든 책자들 이었다. 맨 위에 있는 책자의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이 적혀 있었다. <천독마경(千毒魔經)> 백천기는 제목을 본 순간 움찔하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천독마경?" 책자의 제목치고는 어딘가 섬ㅉ하고 음산한 느낌이었다. 더구나 어려서부터 항시 고매한 학 문만을 접해온 그로서는 별반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름이었다. 따라서 그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거 참, 어째서 이런 기분 나쁜 제목을 붙였을까?" 그러나 책귀신답게 그는 어느새 천독마경을 집어들고 있었다. 어떤 책이든 만 권 이상을 읽 겠다는 결심을 한 이상 훑어보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는 천독마경의 표지를 넘겨 보았다. -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存). 첫 장에 적혀있는 한 줄의 문구에 백천기는 그만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기가 막히는군, 이 책의 저자가 누군지 몰라도 감히 이런 광오한 문구를 적다니.......' 그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다음 장을 넘겨 보았다. 그러자 깨알같은 글씨가 나타났다. 그 내 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 사천(四川)에서 태어난 노부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취미를 가져 독(毒)에 대해서라면 광적(狂的)으로 탐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중원(中原)에서 최고의 독문(毒門)이었던 독절문(毒絶門)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 후 자나깨나 오로지 독에 몰두한 결과 오 년이 지나 자 독절문 최고의 고수(高手)가 될 수 있었을 뿐더러 마침내 문주(門主)의 자리도 계승하게 되었다. 노부는 그 후로도 끊임없이 독에 대해 연구해 왔다. 결국 삼십 년의 세월이 지났을 때로부터 본문은 명실공히 무림의 최고문파가 될 수 있었다. 노부 또한 독 한 가지만으로도 능히 천하를 제패할 수 있을만큼 강해졌다. 이후 노부는 필생의 심력으로 창안한 독절문의


각종 독술(毒術)과 독공(毒功)을 집약하여 이 천독마경(千毒魔經)을 남기게 되었다. ..... 중략 (中略)...... 연자(緣者)여, 그대 는 천독마경을 펼치는 순간부터 본문의 제자가 되었음을 명심하라! 그것은 그대가 원하던 원치 않던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단 천독마경을 펼친 이상 피할 수 없는 숙명(宿命)이기 때 문이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인가?' 백천기는 어리둥절함을 금치 못했다. 다만 책을 펼치는 것만으로 제자가 되고, 또 그것이 숙 명이라니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때였다. 백천기는 갑자기 사위가 빙, 도는 느낌을 받고 당혹해마지 않았다. "'아니......!" 그는 급히 손으로 머리를 짚었으나 어지러움증이 가시기는 커녕, 점점 더 심해지기만 했다. 동시에 그는 혈관 속으로 알 수 없는 기괴(奇怪)한 기운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기운은 곧장 머리 위로 솟구쳐 올랐다. 잠시 후 그의 눈빛이 변했다. 동공이 응축되는 듯 하더니 푸르스름한 기운으로 잠식된 것이었다. 그 바람에 그는 삽시간에 딴 사람이 된 듯 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는 자신도 모 르게 천독마경의 책장을 넘겨가고 있었다. "......" 백천기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천독마경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것도 한시도 책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미친듯이 자자구구(字字句句)를 흡수해가고 있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천독마경에 살포되어 있던 기독(奇毒)의 불가사의한 작용에 의한 것이었다. 천독마체 갈천후. 당년의 그는 이미 독만으로 사람의 감정을 조종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훗날을 대비하여 인간의 두뇌에 영향을 주는 기독(奇毒)을 책장에 발라 놓았다. 스스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부르짖을 정도로 오만했던 위인, 갈천후는 자신의 진전(眞傳)을 들추게 될 후인이 중간에서 책을 덮어버리는 불상사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백천기는 기독에 중독된 상태에서 천독마경을 모두 읽어내려 갔다. 따라서


애초에 느꼈던 거부감 따위는 조금도 의식할 수가 없었다. 천독마경은 모두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중 상권에는 독공(毒功)과 독술(毒術) 이 기재되어 있었다. - 독혈참혼공(毒血斬魂功). 이는 천독마제 갈천후의 최고의 독공으로, 그 자신조차 평생 이 독공을 함부로 시전하지 못 했다. 꼭 한 번, 즉 사백 년 전에 있었던 대결투에서 검마(劍魔) 잔유성(殘臾星)과 축융신군 (祝融神君) 화진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용했을 뿐이었다. 이 독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피나는 수련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연성(練成) 후 그 위력은 가히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극랄무비했다. 독혈참혼공에 적중되면 천하의 어떤 고인(高人)일지라도 죽음을 면치 못한다. 아니, 설사 금 강불괴지신의 몸이라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한 줌의 독혈(毒血)로 화하고 마는 것이었다. - 절명만독공(絶命萬毒功). 이것 역시 무섭도록 패도적(覇道的)인 독공이었다. 이 독공에는 천하에서 가장 극렬한 서른 여섯 가지의 극독이 함유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독공에 적중되면 당장 죽지는 않는다고 해 도 한 시진 이내로 삼십육 종의 독을 모두 해독해내지 못한다면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 천향미독공(天香迷毒功). 이른바 독공과 미공(迷功)이 합쳐진 것이라고나 할까? 이 미독공에 적중되면 상대는 전혀 고통을 쾌감마저 느 끼며 죽게 되니 천하에서 가장 기이한 괴공이라 그밖에도 천독마경의 상권에는 수많은 독의 수록되어 있 었다. 그리고 중권에 이르니 독암기(毒暗器)의 제조와 잔인 하고 무서운 것들이었다.

느끼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기이한

할 수 있었다. 사용법과 해독법(解毒法)이 상세히

사용법이 기재되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그 종류만도 무려 칠십이 종(種)이나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혈천마각이라 는 독암기였다. 혈천마각(血天魔角)은 마치 용(龍)의 뿔을 잘라낸 듯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나 선형을 이루고 있었으며 길이는 세 치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천하의 암기 중 가장 극악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혈천마각의 뒷부분에 달린 단추를 누르면 끝 부분이 세 갈래로 갈라지게 되며 내공(內功)을 주입해 던지면 천하의 어떤 단단한 물체라도 관통하게 되어 있었다. 특히 각종 호신강기(護身 氣)는 물론 금강불괴지신까지도 꿰뚫을 수가 있었다. 더욱 무서운 것은 끝 부분에 발려져 있는 식골산(蝕骨酸)이란 극독이었다. 이 극독은 체내에 주입되면 순식간에 전신의 뼈를 녹여 버림으로써 해독약이 따로 없었다. 당년의 천독마제 갈천후는 이 혈천마각을 다섯 개 가지고 있었으나 그 중 한 개 밖에 사용 하지 않았었다. 다만 최후의 일전에서 다섯 개를 모두 사용했었다. 그 혈천마각은 당시 가공할만한 무공을 지녔던 천축(天竺)의 일대마승(一大魔 ) 흑라오격찰 (黑羅烏格格)의 가슴에 격중되어 여지없이 두 개의 피구멍을 만들고야 말았다. 마지막으로 천독마경의 하권(下卷)에는 뜻밖의 내용이 기술되어 있었다. 그것은 의술(醫術) 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술과는 상반(相反)되는 것으로, 바로 독(毒)을 이용해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이독제독(以毒際毒), 이독공독(以毒攻毒)의 독의학(毒醫學)이었다. 또한 독으로써 인 체의 잠력(潛力)을 격발시켜 어느 순간 본신의 능력을 수 배나 증폭시킬 수 있는 기괴(奇 怪)한 용독법(用毒法)도 기재되어 있었다. "......!" 백천기는 두 눈에 푸른 광망을 띈 채로 천독마경을 탐독하고 있었다. 이 순간 그는 모든 것 을 망각한 채 오직 천독마경의 내용을 암기하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결국 희대의 기인 천독마제 갈천후의 안배에 따라 그는 천독마경을 완전히 머리 속에 집어 넣고 말았다. 무림인이라면 이같은 기연은 일생에 한번 만날까 말까 한 대기연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바야흐로 백천기는 천독마경을 덮고 있었다. 그러나 책자를 내려 놓는 그의 눈에서는 아직


도 푸른 광기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천독마경을 내려놓자마자 다시 다음 책 자를 집어들게 되었다. <검혼경(劍魂經)> 이런 제목을 가진 두 번째 책자는 검마(劍魔) 잔유성(殘臾星)이 남긴 검경(劍經)이었다. 검마 잔유성은 한 마디로 무공에 미친 광인(狂人)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하를 떠돌아 다 니며 각종 무공을 두루 섭렵했다. 따라서 천하를 통틀어 그가 익히지 않은 무공은 거의 존 재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만년에 이르자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것이 검(劍)인 것을 깨닫고, 그때부터는 오로지 검법(劍法)의 연구에만 몰두했다. 그 후, 그는 나이 백여 세를 넘겨서야 비로소 이초(二招)의 검법을 창안했다. 그 중 제일초 (第一招) 회소광기천(廻消光氣穿)이었으며, 제이초(第二招)는 섬류잔살문(閃流殘殺刎)이라고 했다. 검마 잔유성은 매우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평생 동안 결코 두 마디 이상을 해본 적이 없는 과묵한 성품으로 백 년 이상을 살아오 면서 그가 한 말이란 모두 합쳐봐야 보통 사람이 하루 동안 지껄인 정도에 불과했다. 그는 패도적인 이초의 검법을 창안했지만 일신에 지니고 다녔던 검조차도 유별나기 이를데 없었다. 길이는 넉 자 두 치, 검자루에는 무지개색을 띈 일곱 개의 구슬이 박혀 있었다. 구슬이 일렬 로 박혀있는 그 끝에는 다시 네 치 정도의 붉은 수실이 달려 있었는데 이것이 어디에 쓰이 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실상 그 수실에는 무서운 용도가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창안한 이초의 검법, 즉 마 검쌍혈식(魔劍雙血式) 중 제일초인 회소광기천을 전개할 때 소용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회소광기천은 바로 그 수실에 의해 전개되는 검초로, 발검(拔劍)을 요하지 않는 괴이한 검법이었으나 그 위력 만큼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일단 검초를 전개하면 일곱 개의 구슬에서 뻗치는 광채가 상하인을 막론하고 사람의 정신을


혼란케 하여 아무리 굳센 정력(定力)을 지닌 자라도 구슬의 광채를 보는 순간 정신이 흐트 러지고 만다. 그러므로 희소광기천으로 상대를 죽이는 일은 어떤 검법을 사용하는 것보다 간단했다. 상대 방은 미처 어떤 수법인지를 깨닫기도 전에 단말마의 비명을 토하게 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잔유성은 평생 동안에 이 회소광기천의 검초를 펼쳐 실패한 적이 없었다. 하나같이 그의 면전에서 고혼이 되어 사라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회소광기천도 마검쌍혈식의 두 번째 초식인 섬류잔살문에 비하면 그저 기수 식(起手式)에 불과했다. 회소광기천이 다양하고 복잡한 변화가 위주라면 섬류잔살문은 단순 하면서도 쾌속(快速)했다. 따라서 이 초식을 전개하려면 일반무림의 검법보다 적어도 세 배나 빨라야 했다. 그야말로 섬전보다도 쾌속절륜한 검법이었다. 검마 잔유성은 평생 이 초식을 전개해본 적이 없었다. 희소광기천만으로도 그의 위명은 충 분히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단 한 번, 그는 천독마제 갈천후의 독혈참혼공에 맞은 상태에서 마지막 남은 진기를 모아 섬류잔살문을 전개했고, 천독마제의 복부를 뚫어 내장이 흘러나오도록 만들게 했다. 희대의 기인인 천독마제 갈천후조차 그 빠르고 무서운 검법만은 채 피해내지 못했던 것이 다. 백천기는 검혼경을 순식간에 읽어 젖히고는 세 번째의 책자를 집어들었다. <축융진결(祝融眞訣)> 이 책자는 상하(上下) 두 부분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 중 상권에는 천하의 모든 화기(火氣)를 다루는 비법이 수록되어 있었다. 이른바 용화(用火), 채화(採火), 그리고 소화(燒火). 말하자면 천지간의 모든 불을 다루는 법 들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권에는 신공(神功)과 장법(掌法)이 수록되어 있었다. - 마염신공(魔焰神功). 이는 극양(極陽)의 신공으로 축융신군은 바로 이 신공을 바탕으로 천하의 절세고수가 될 수 있었다. - 잔소양패혈옥장(殘 兩覇血玉掌). 축융신군이 창안한 이초의 장법으로, 이 역시 양(陽)의 극을 치닫는 장법이었다. 제일초 잔(殘), 제이초 소( ).


먼저 잔(殘)은 축융신공이 최소한 십 성 경지에는 이르러야만 발휘할 수가 있었는데, 이 장 법에 적중된 상대는 온몸이 수백 조각의 숯덩이로 화해 버린다. 제이초식인 소( )에 적중되면 모든 물체가 재로 화해 버린다. 과거 천독마제 갈천후가 죽은 후 곧바로 재가 되어버린 것도 바로 이 소( )에 격중되었기 때문이었다. 백천기의 광기 어린 눈은 다시 네 번째 비급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빙혼마경(氷魂魔經)> 이 비급은 빙혼마녀(氷魂魔女)가 남긴 것이었다. 원래 빙혼마녀는 축융신군과 부부지간으로, 그들은 지극히 금실이 좋았었다. 그런데 가혹한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그들은 각기 기연으로 인해 축융진결(祝融眞訣)과 빙혼마경을 얻게 되었는데 두 가지 무공 은 상극(相克)의 무공이었으므로 그것을 익힌 후로는 그들 사이에 비극이 싹트기 시작했다. 서로간에 상극지체(相克之體)가 되고 보니 부부지락(夫婦之樂)을 누릴 수 없음은 물론, 양자 가 다 성격마저 양극으로 치달리게 된 것이었다. 축융신군 화진걸은 열화같은 성격으로 변했으며, 반면 빙혼마녀는 얼음같이 냉혹하게 변하 고 말았다. 결국 두 사람은 성격의 대립을 감당치 못하고 결별을 고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빙혼마녀는 설산(雪山)의 빙혈담(氷血潭)이란 연못에서 홀로 지내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천연의 빙음지기(氷陰之氣)를 이용해 빙혼마경을 극성에 이르도록 연마했다. 결국 그녀는 금강불괴의 몸을 이루게 되었으며 무림에 등장한 이후로는 적수를 찾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녀는 자연히 천하구대고수(天下九大高手)에 들어 무림을 쟁패하는 대열에 끼게 되었다. 그러나 빙혼마녀는 자신의 무공이 천하제일이라고 과신하게 된 나머지 방심하다가 같은 구 대고수 중에서도 가장 귀계가 뛰어난 귀진자(鬼眞子)의 암습에 말려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축융신군 화진걸을 극도로 분노하게 만들었다. 비록 두 사람 사이의 부부지연은 끊겼다지만 그는 빙혼마녀의 복수를 위해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귀진자를 죽이고 말았다. 하지만 축융신군도 결국은 천독마제 갈천후에 의해 죽음을 당했으니, 사백 년 전의


고사(古 事)는 실로 물리고 물리는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대혈전(大血戰)이었다. 무념무상(無念無想)....... 백천기는 홀린 듯 빙혼마경을 읽어나가고 있었다. 빙혼마경은 두께가 얄팍하여 겨우 이십여 장 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 안에 수록된 무공이야말로 가히 신비막측한 것들이었다. - 빙혼마공(氷魂魔功). 이는 빙혼마녀가 자신이 얻었던 비급의 신공에 빙혈담에서 수련하여 스스로 깨달은 내용을 더하여 완성한 개세무비의 신공이었다. 이 신공을 전개하면 온몸이 투명할 정도로 희게 변한다. 더구나 머리카락과 눈썹은 물론, 입 고 있던 의복까지도 서리가 덮힌 듯이 하얗게 변하게 된다. 이 빙혼마공에 적중되면 상대는 그대로 한 덩이의 얼음으로 화하고 만다. 실로 인세에서 보 기 드문 무시무시한 신공이었다. - 빙혈삼음장(氷血三陰掌). 이는 삼 초의 장법으로 제일초 빙혈무(氷血舞), 제이초 빙혼살(氷魂殺), 제삼초식은 빙천멸 (氷天滅)이었다. 이삼 초밖에 안 되는 장법의 위력은 실로 끔찍했다. 과거 귀진자가 축융신군 화진걸에 의해 단 몇 초만에 죽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달리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귀진자가 이미 빙혼마녀의 빙혈삼음장에 스쳐 맞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빙혼마녀 가 처음부터 빙혈삼음장의 제삼초인 빙천멸을 사용했더라면 승부는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 다. 백천기의 손은 이제 다섯 번째 비급을 집어 들고 있었다. <수라도경(修羅刀經)> 그것은 기이하게도 단 두 장의 양피지로 되어 있었다. 이 도경은 구대고수 중 비천수라신마(飛天修羅神魔)가 남긴 것으로 그가 남긴 단 일초의 도 법(刀法)만이 수록되어 있었다. - 비천수라탈혼일도(飛天修羅奪魂一刀). 이 일초의 도법에는 비천수라신마가 평생에 걸쳐 연구한 도법의 정수가 담겨 있었다. 이 일초의 도법을 창안하기 전에도 그는 이미 천하의 모든 도법을 섭렵하여 천하제일도(天 下第一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는 천하를 제패하려는 야심에 수십 년의 고련 끝에


바로 이 도법을 창안하게 되었다. 이 도법은 가히 통천가공할 만한 도법으로 그 운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먼저 신형을 솟구 친 연후 도를 던지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이 일초의 척도(擲刀)에는 전내력이 담기게 된다. 따라서 일단 도가 그의 손을 떠나 면 상대방은 반항의 여지도 없이 백회혈(百會穴)로부터 회음혈(會陰穴)까지 그대로 양단되 고 만다. 다만 이 도법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것은 상대를 죽이고 난 후 도가 시전 자에게 되돌아올 때 파생되는 문제였다. 회도(回刀)에는 전내력이 담겨있는 바, 그 위력이 조금도 감소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따라 서 도를 제대로 회수하지 못한다면 전개한 자도 역시 머리에서부터 전신이 두 쪽이 나고 마 는 참화(慘禍)를 입는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도법은 완벽하게 연성되었을 때에만 전개가 가능한 것이었다. 당년 비천수라신마는 이 도법으로 일세의 괴마(怪魔)인 음양마유신(陰陽魔幽神)을 죽였었다. 두 장의 양피지에 각기 도법(刀法)을 전개하는 심법(心法)과 도초(刀招)가 적혀 있었다. 백 천기는 비천수라탈혼일도를 단숨에 머리 속에 집어넣었다. 이어 그는 마치 목마른 자가 물 을 찾듯 여섯 번째의 책자를 집어들게 되었다. <음양마유경(陰陽魔幽經)> 이는 두 말할 것도 없이 희대의 괴마(怪魔)인 음양마유신의 무공이 적혀있는 비급이었다. 음양마유신은 색마(色魔) 중의 색마로 그가 음양마유신으로 불리워지게 된 데에는 커다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반남반녀(半男半女)의 괴상한 체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한 달 중 보름간은 남자가 되고, 다시 보름 동안은 여인이 되는 괴인 (怪人)이었다. 더욱이 천성이 음탕한 그는 남자일 때에는 닥치는 대로 여인들을 강간했다. 반면 여인일 때에는 영준하고 건강한 남자를 물색해 무수히 관계를 맺었는데, 덕분에 그는 채음보양(採陰補陽)과 채양보음(採陽補陰)의 비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가공할


내공(內功) 을 연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가히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내공을 습득하여 구대고수의 반열에 들 수 있었다. 음양마유경에는 바로 이런 괴이한 체질을 지닌 그가 자신의 신체조건을 바탕으로 창안한 괴 이무쌍한 무공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 음양마유공(陰陽魔幽功). 이는 남자와 여자의 기능이 공존(共存)하는 양성(兩性)의 묘용을 십분 활용한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본시 음양마유신의 의식과 두뇌는 보름을 주기로 하여 반복을 거듭했다. 말하자면 그가 남 자로 화신할 때는 남성적인 사고를 하게 되며, 여인으로 화했을 때는 지극히 여인적인 사고 가 그를 지배하곤 했다. 말하자면 그는 두 개의 뇌기능을 지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음양마유신은 이를 이용해 천 지간에 다시없는 신공으로 발전시켰다. 즉 하나의 뇌 속에서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일종의 분심술(分心術)로 승화시켰 으니 이것이야말로 고금을 통틀어도 존재하지 않는 기오막측한 신공이었다. - 섭심마공(攝心魔功). 음양마유신은 한때 이 섭심마공으로 강호의 숱한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을 망쳐 놓았었다. 이 마공에 걸리면 아무리 철석간담을 지닌 인물일지라도 꼼짝없이 마력(魔力)에 휘말려 무 릎을 꿇게 된다. 따라서 그는 남자일 때에는 섭심마공으로 여인을 유혹하여 관계를 맺었다. 일단 섭심마공에 걸리면 아무리 지조(志操)가 굳센 여인이라도 그를 위해 치마끈을 풀지 않 을 수 없었다. 반면 여인으로 활동할 때는 설사 성인군자라 해도 그의 유혹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었다. 가 히 마공 중의 마공, 사공(邪功) 중의 사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만변환형술(萬變幻形術).


이는 일종의 역용술(易容術)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강호의 일반적인 역용술과는 판 이하게 다른 것으로 역용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었다. 당년의 음양마유신이 파렴치한 짓을 무수히 저지르고도 무림을 종횡무진할 수 있었던 것도 일신에 지닌 무공보다는 이 만변환형술의 덕분이었다. 그는 이 수법을 통해 그야말로 천 개의 얼굴로 위장했던 것이었다. 음양마유경은 온통 사이한 내용 투성이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만큼 민망한 내용이 담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음양화합(陰陽和合), 즉 남녀의 방중술(房中術)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그곳에는 남녀의 벌거벗은 그림이 깨알같은 주해(註解)와 더불어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 하 나하나의 내용들은 실로 필설로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음탕한 것들이었다. 음양마유신은 수많은 색겁(色劫)을 저지른 위인이었다. 따라서 그가 비천수라신마의 비천수 라탈혼일도에 의해 몸이 두 쪽이 난 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하늘의 심판일지도 몰랐 다. 백천기가 어떤 위인인가?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탐닉했을 뿐더러 가문 또한 유서 깊은 선비의 가문이었다. 그런 그 가 색마인 음양마유신이 남긴 음란하기 이를 데 없는 비급을 머리 속에 담고 있었으니, 그 야말로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 3 장 · 움트는 사랑 백천기는 이제 일곱 번째 책자를 집어들고 있었다. 이번 책의 표지는 범어(梵語)로 쓰여져 있었다. 따라서 일반 사람은 해독이 불가능했다. 그 러나 백천기는 어렵지 않게 해독해 낼 수가 있었다. <만사경(萬邪經)> 그런 제목이 붙어있는 비급은 역시 구대고수의 일인이었던 흑라오격찰(黑羅烏格刹)이 남긴 것이었다. 본래 흑라오격찰은 천축에서 가장 신비한 단체인 가뢰파궁(迦雷巴宮)의 궁주(宮主)였다. 가뢰파궁은 사공(邪功)과 사술(邪術)의 총본산(總本山)으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각종


기 기괴괴(奇奇怪怪)한 대법들이 숱하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 백골강시공(白骨 屍功). 이것은 사악의 극을 달리는 신공으로 일단 익히게 되면 전신에 도검이 불침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손이나 병기가 몸에 닿기만 하면 도리어 손이나 병기를 타고 음기(陰 氣)가 역으로 스며들어 공격자가 도리어 죽음을 당하게 된다. 백골강시공에서 발출되는 음기를 이름하여 백골음풍기(白骨陰風氣)라 부르는데, 이것에 맞으 면 체내의 혈맥이 모두 부패되어 머지않아 온몸이 썩어 문드러져 강시처럼 변해버리는 무서 운 신공이었다. "......." 백천기는 미동도 않은 채 만사경에 몰두하고 있었다. 사실 만사경에는 무공방면 보다는 사 술(邪術)에 더 많은 부분이 할애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 천령귀혼강시대법(天靈歸魂 屍大法). 이는 시체를 움직이는 사술이었다. 즉 자연의 이치를 거스른 채 죽은 사람의 혼(魂)을 부리는 가공할 사법이었는데 시신이 완 전히 부패하지만 않았으면 언제라도 운용이 가능했다. - 탈혼마심술(奪魂魔心術). 이는 음양마유신의 섭심마공(攝心魔功)과 유사한 일종의 섭혼대법(攝魂大法)이었으나, 그 효 용에 있어서는 섭심마공을 휠씬 능가했다. 섭심마공은 한정된 시간 동안에 상대의 마음을 제압하게 되나, 탈혼마심술은 인간의 혼을 제압할 뿐더러 일단 이 대법에 걸리게 되면 뇌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 영원히 원상으로 회 복할 수 없었다. 만사경에 기재된 사술은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을 만큼 많았으며 그 극악무도함은 하늘과 땅이 함께 노할 정도였다. 원래 가뢰파궁의 궁주인 흑라오격찰은 원대한 야망을 품고 천축에서 중원으로 넘어왔다. 그 는 천하에서 자신을 당할 자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며 그 확신은 곧 중원무림의 정복이


라는 흑심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당시의 중원에는 한 사람도 아닌, 무려 팔 인이나 되는 절대고수(絶 代高手)들이 팽팽한 대치국면을 이루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하나같이 흑라오격찰보다 강했으면 강했지 결코 약하지 않았으니 그는 어지 간히도 운(運)이 없었던 셈이다. 결국 그는 중원에 오자마자 그들과 맞닥뜨리게 되었고 물고 물리는 대혈전의 수레바퀴에 휩 쓸려 들게 되었다. 종내 그는 음양마유신을 죽인 비천수라신마의 비천수라탈혼일도(飛天修 羅奪魂一刀)에 의해 함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물론 천축 최고 고수였던 흑라오격찰도 호락호락 당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비천수라탈혼일 도에 몸이 양단되기 직전, 백골강시공을 펼쳐 비천수라신마를 격상시켰던 것이었다. 그 결과, 비천수라신마 역시 전신의 진기가 무산된 나머지 자신이 던진 도를 회수하지 못하 고 스스로의 도에 의해 심장이 관통되어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구대고수가 만든 혈사(血事)는 사백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속에 파묻혔건만 백천기는 시공 을 초월하여 그들의 비사와 만나게 되었다. 백천기는 만사경을 덮은 후 곧바로 여덟 번째의 책자를 펼쳐들고 있었다. <귀진마전(鬼眞魔典)> 그것은 귀진자(鬼眞子)가 남긴 마전이었다. 귀진자로 말하자면 사백 년 전 당시 무림에서 각종 귀계와 암술 따위로는 필적할 대상이 없 던 인물이었다. 그의 악랄한 흉계에 걸려 들면 마치 그물 안에 든 물고기처럼 어느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독심흉랄한 마두였으나 다만 무공에 있어서는 구대고수, 즉 구대마인(九大魔人)들 중 가장 약한 편이었다. 따라서 그가 그들과 평수를 이룬 것은 바로 제갈량을 능가하는 귀계 덕분이었다 할 수 있었 다. 게다가 기관학(機關學)이나 진법(陳法) 등 각종 잡학이 그의 모자라는 무공을 뒷받침해 주었었다. 다만 그에게는 두 가지의 신기한 무공이 있어 항상 그의 목숨을 보호해 줄 수 있었다. - 차경미기(借勁彌氣). 이는 그가 독자적으로 창안한 전설적인 기공(奇功)이었다. 차경미기는 이화접목(以火接木)과 같은 기학으로 상대의 공격을 받으며 그 힘을


고스란히 흡수해 도리어 상대방에게 되돌리는 현묘한 공법이었다. 또한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커다란 위력을 발휘했다. 따라서 귀진자는 이 한 가지 무공만으로도 당시 강호를 종횡무진하면서 기라성같은 고수들을 꺾을 수가 있었다. - 잠종화영보(潛 化影步). 이것은 귀진자가 자랑하는 천하무비의 보법(步法)이었다. 이를 전개하게 되면 한꺼번에 열여덟 개의 환영이 생긴다. 기이한 것은 열여덟 개의 분신 (分身)이 각각 따로따로 움직이며 상대로 하여금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더욱 괴이한 것은 이 십팔 개의 환영 중 실체는 단 한 개도 없다는 것이었다. 십팔 개의 상 (像) 모두가 허상(虛像)으로, 실제의 인물은 그 자리에서 벗어난 채 다른 곳에서 자신의 분 신을 조종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상대방은 잠종화영보가 전개되면 엉뚱한 허상과 격돌을 하게 되어 진력을 소모하게 되는 것이었다. 지난 날 귀진자는 축융신군 화진걸의 마염신공에 의해 가루로 화하기 전까지는 이 잠종화영 보로 무수한 위기를 넘긴 후 구대마인의 서열에 들 수 있었다. "......." 백천기는 드디어 마지막 아홉번 째 책자를 집어들고 있었다. <구천현음경(九千玄音經)> 이는 구대마인 중에서 빙혼마녀와 함께 여인이었던 구천현녀(九天玄女)가 남긴 비급이었다. 구천현음경은 악보(樂譜)로 이루어져 있었다. 악보는 도합 열두 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악곡(樂曲)들은 한 곡 한 곡이 가히 무시무시한 음공(音功)이었다. 이 음공은 듣 는 이로 하여금 환상 속에 빠지게 하는가 하면 희노애락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가 있는 것이 었다. 뿐만 아니라 음공에 내공을 주입하여 상대의 심맥을 산산조각으로 파열시킬 수가 있었다. 구천현녀의 십이음공(十二音功)은 천하의 어떤 악기(樂器)로도 사용할 수가 있었다. 십이음 공 중 마지막 장에는 그녀가 평생의 심혈(心血)을 기울여 창안한 절세의 음공이 수록되어 있었다.


- 천살파(天殺破). 문자 그대로 하늘 아래 가장 무서운 음살지공(音殺之功)이었다. 이것은 오로지 단음(單音), 즉 단 한 소리의 음(音)이었다. 그러나 이 간결한 천살파의 무서 움은 가공한 것이었다. 천살파를 전개하면 반경 백여 장 내에 있는 모든 생명체가 일거에 소멸되고 만다. 그것은 비단 인간(人間)과 비인간을 가리 지 않을 뿐더러, 모든 생명을 종식시켜 버린다. 다만 한 가지 약점은 있었다. 그것은 전개하고 나면 체내의 모든 진력이 한 방울도 남김없 이 고갈되어 버린다는 점이었다. 당년에 구천현녀가 구대마인과의 대혈투 때 천독마제의 절명만독공(絶命萬毒功)에 의해 죽 음을 당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녀는 진기를 탕진한 나머지 그의 기습을 감당해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홉 권의 비경(秘經)들. 그것은 일찌기 무림사(武林史)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구대마인들이 남긴 최후의 비학들이 담긴 것이었다. 백천기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아홉 권의 비급을 모두 읽게 되었다. 그가 구천현음 경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그의 눈에 서려있던 푸른 광채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구천현음경을 내려놓는 순간 그는 완전히 정상적인 눈빛을 되찾았다. 갑자기 그는 당혹한 음성으로 부르짖고 있었다. "맙소사! 내가 이 책들을......!" 백천기의 안색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는 아홉 권의 마경을 내려다 보며 스스로를 자책하 고 있었다. '정말 한심하구나! 갈 길이 아니라면 돌아다보지도 말았어야 했거늘!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인해 이처럼 사악한 것들을 읽어 버렸다니.......' 백천기는 사뭇 우울한 신색이 되어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아홉 권의 마경을 읽은 사실을 크게 후회하고 있었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던 그는 다시 안색이 변했다. 아홉 권의 마경이 머리 속에 자자구구 기억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안 된다! 그런 사악한 내용을 기억하다니!' 그는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한 번 기억된 내용은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기억 을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더욱 자자구구가 선명히 떠오르고 있었다. 백천기는 가슴이 격탕하는 것을 느끼며 탄식해마지 않았다. '오로지 살생의 수법들만으로 일관하고 있거늘, 내 이를 접하게 되었으니 근묵자흑(近默者 黑)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던가?' 그는 자신을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나라는 인간의 내면에도 은연중 악(惡)이 도사리고 있었나 보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마서(魔書)의 유혹에 그토록 쉽게 함몰되어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백천기는 한동안 망연한 시선으로 아홉 권의 비급들을 내려다 보았다. 한참 후에야 그는 내 뱉듯이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지, 잊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다음 순간, 그의 손에 들려나온 것은 다름아닌 부싯돌이었다. 그는 아홉 권의 비급들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탁! 부싯돌이 부딪치자 불똥이 튀었다. 잠시 후 아홉 권의 마경들은 불꽃을 내며 타들어가기 시 작했다. 만일 무림인들이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가히 통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사백 년 전 구대 마인이 남긴 비급들은 단지 한 권만 익힌다 해도 능히 천하를 독패할 수가 있는 것들이었 다. 그런데 한 권도 아니고 아홉 권 전부가 그만 잿더미로 화하고 있는 것이었다. 백천기의 표정에는 시종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는 단지 멍한 눈으로 비급이 타면서 내는 연기와 불꽃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림 천년사를 대표할 만한 구대마왕(九大魔王)의 절세기서 (絶世奇書)는 이렇게 하여 지상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백천기는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불꽃은 어느새 사그라 들었고, 그의 발밑에는 검은 재만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 보았다. 불현듯 기이한 느낌이 치밀어 오른 것은 바로 그 순간이 었다. 하늘에는 달이 떠있을 뿐만 아니라 별들도 초롱초롱했다. 하지만 한밤중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주위가 대낮처럼 환하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아니......?" 백천기는 아연함을 금치 못하며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너져내린 혈룡암과 계곡 바닥에 즐비한 바위덩이, 그리고 멀리 보이는 절벽 등이 그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더구나 어두운 그늘 속까지도 환하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정말 이상하구나! 지금은 밤인데 어째서 사물이 이렇게 밝게 보이는 것일까?" 넋이 빠진 듯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은 온통 의혹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혹시 그 만년지극용란혈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 아닐까?' 백천기의 눈썹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는 두 줄기 기이한 신광(神光)이 뻗쳐 나왔다. 하지만 전혀 이를 알 리 없는 그는 다시 미혹에 잠길 뿐이었다. 잠시 후 그는 마치 미몽에서 깨어난 듯 긴 한숨을 토해냈다. "어쨌든 오늘은 길(吉)보다는 흉(凶)이 많은 날이었다......." 그는 비급의 잔재들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이어 그는 걸음을 옮겨 집으 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나절 사이에 백천기의 운명은 일대 전환점을 이루었다. 다만 그 자신만이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장차 그로 인해 백천기의 앞날은 어찌될 것인가? 그것은 오직 하늘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 다. 양춘가절(陽春佳節). 따스한 햇살이 온누리에 퍼져 내리고 있었다. 선은장의 구석구석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들 었다. 특히 잘 손질된 화원에서는 춘화(春花)가 저마다 아름다움과 화향(花香)을 다투어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봄은 대지에 생명력을 부여하되 때론 나른한 감을 전하기도 했다. 춘곤의 여파에 꽃 들도 햇살에 물기가 바랠 때면 이따금 오수(午睡)에 잠긴 듯 늘어져 보이기도 했다. 선은장의 후미진 곳. 이곳은 장주인 백운진이 서책(書冊)을 보관하거나 독서를 하곤 하는 곳으로 묵인(墨人)의 단아함을 입증하듯 주변의 정경이 마냥 청정하기만 한 곳이었다. 정오 무렵이었다.


한 명의 백의서생이 조용히 화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이는 이제 약관에 이른 듯한 훤칠 한 청년이었다. 그의 풍모는 군계일학(群鷄一鶴)으로, 가히 임풍옥수(臨風玉樹)와도 같았다. 관옥같은 피부에는 은은한 홍광(紅光)이 감돌아 신비감마저 느껴졌다. 춤추듯 양쪽으로 내뻗 은 눈썹은 먹으로 찍어 그은 듯 진했으며, 호심을 연상케 하는 두 눈에는 혜지(慧智)가 일렁 이고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백천기였다. 혈룡암(血龍岩)에서 전대미문의 기연(奇緣)을 만난 이래 어느덧 사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그는 헌헌장부로 성장한 것이었다. 혈룡암의 사건이 있은 이후로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신중에 신중을 기해왔다. 그것은 만년지극용란혈 때문에 생긴 변화 때문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섬세하고 부드럽기 만한 그의 왼손은 그날 이후 무서운 파괴력을 보여 주었다. 따라서 그는 행동에 극히 조심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백천기는 따사롭게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화원에 만개한 화초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는 절로 탄성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정녕 좋은 봄날이로다!" 마침내 시흥(詩興)이 도도해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시 한 수를 읊었다. 긴 봄날 햇볕 받아 강산 고운데 바람타고 풍겨오는 화초 향기여! 진흙 차츰 녹으며 제비들 날고 모래홈 따스하니 원앙이 조는구나. 遲日江山麗 春風花草香 泥融飛燕子 沙暖睡鴛鴦 백천기의 얼굴에는 문사 특유의 단아한 시정이 넘치고 있었다. 그는 양명(陽明)을 올려다보 며 봄날의 기운을 들이마시듯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러자 그의 후각에 화사한 꽃향기가 감미롭게 닿아왔다. 봄은 역시 봄이었다. 이때였다. 문득 그의 등 뒤로부터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청아한 소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공자님, 이곳에 계셨군요? 한참 동안이나 찾았어요." 백천기는 목소리의 임자가 누구인지 보지 않아도 대뜸 알 수가 있었다. 그는 미소 띈 얼굴 로 서서히 몸을 돌렸다. 봄으로부터 나선 듯 사뿐히 교족을 움직여 다가오는 아름다운 소녀, 청의를 입고 있는 그녀


는 백옥(白玉)보다도 더 흰 살결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흰 얼굴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또렷한 검은 눈동자는 사람을 매혹시키는 힘이 있었 다. 게다가 몸매도 버들가지처럼 유연했다. 나이는 대략 십팔구 세 정도로, 가히 청초하기 그지없는 소녀였다. 그녀는 다름아닌 시비 영 령(令鈴)이었다. 그녀 또한 사 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완전히 성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비록 일개 시비였으나 어디에서도 시비처럼 보이는 구석이 없었다. 복장만 시비였을 뿐, 그녀에게서는 명문가의 규수를 능가하는 품위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백천기는 영령을 잠시 취한 듯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영령, 날 찾았다니 무슨 일이냐?" 영령은 그윽한 눈길로 백천기를 응시했다. 그녀의 입언저리에는 달콤하기 이를데 없는 미소 가 매달려 있었다. "장주님께서 공자님을 찾으셨어요." "아버님께서?" "네, 아마도......." 영령은 말끝을 흐리며 생긋 웃어보였다. 흰 치아가 살풋 드러나자 금시라도 신선한 여인의 향취가 풍기는 듯 했다. 백천기도 잔잔한 웃음을 머금으며 되물었다. "아마도라니?" 영령은 고운 손을 들어 입을 살짝 가리며 웃었다. "호호호....... 직접 가보시면 아시게 될 거예요." 백천기는 짐짓 괴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영령. 네가 날 놀리려고 단단히 마음 먹었나 보구나.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말을 않는 것이 냐?" 영령의 교소성이 허공 중에 청아한 공명을 울렸다. "호호호호......!" "흐음?" 백천기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가 정히 말 하지 않는다면 굳이 묻지 않겠다. 내 직접 아버님께 가서 여쭤 볼 수밖 에는." 이어 그가 안채를 향해 몸을 돌리자 여인, 나영령(羅令鈴)은 그윽한 눈빛으로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흑백이 분명한 그녀의 눈 속에는 아련한 꿈같은 것이 어리고 있었다. 추운각(秋雲閣).


이곳은 평상시 백운진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백천기는 지금 추운각의 한 정실(淨室)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안쪽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 을 열었다. "아버님, 기아입니다. 부르셨습니까?" 그러자 정실 안에서 담담하고도 단아한 노인의 음성이 울려나왔다. "그래, 어서 들어오너라." 백천기는 정실의 문에 내려진 대나무 발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문사의 처소답게 사방 벽에는 고서화(古書畵)가 걸려 있었으며, 탁자에는 문방사보(文房四 寶)가 잘 정돈된 채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듯 놓여 있었다. 바로 그 탁자 앞에 육순이 약간 넘어 보이는 흰 수염을 가지런히 기른 백의노인(白衣老人) 이 앉아 있었다. 노인은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가운데 타인이 함부로 대하지 못할 위엄을 자연스럽게 갖 추고 있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 관직에 몸 담아오면서 은연 중에 쌓인 품위였다. 그 노인이 바로 백천기의 부친인 백운진이었다. 백운진의 옆에는 역시 비슷한 연배의 황포(黃袍)를 걸친 한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백 천기가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황포노인은 백천기를 대하자마자 유심히 아래위를 훑어 보더니 감탄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 의 입가에는 흡족한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백운진은 아들을 향해 말했다. "기아야, 어른께 인사 올리거라. 이 분은 애비가 관직에 있을 때 가장 친한 벗이었느니라." 백천기는 정중히 배례를 올렸다. "소생, 백천기라 합니다." 황포노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인사에 답했다. "허허허....... 자네에 대한 말은 부친을 통해 수없이 들었네. 하지만 내 직접 보니 자네 부친 의 설명이 너무도 겸손했음을 알겠군." 백천기는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어르신께선......." 황포노인은 낭랑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하....... 자네가 싫지만 않다면 그냥 숙부라고 부르게나." 백천기는 지체없이 허리를 굽혀 보였다. "알겠습니다. 숙부님."


그러자 좌중은 삽시에 화기로운 분위기가 감돌게 되었다. 이 때를 빌어 백운진이 짐짓 정색 을 하며 물었다. "기아야, 너는 애비가 부른 까닭을 아느냐?" "말씀하십시오. 아버님." 백천기는 표정을 엄숙하게 가다듬으며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백운진은 아들을 자애로운 눈빛으로 쓸어 보더니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떼었다. "음, 네가 이 애비에게 십 년을 기한으로 만 권의 책을 읽겠다고 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 써 그 기한이 다 되었구나." 마주 보는 두 부자의 시선에서 만감이 교차되었다. 특히 아들을 응시하는 백운진의 노안(老 眼)에는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대견함이 어리고 있었다. "이 애비는 행여라도 그런 너의 결심을 흔들리게 할까 저어하여 그 동안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한이 지나 목표를 달성했을 것인즉 너도 이제는 남아로써 기개를 펴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백천기는 더 듣지 않아도 부친의 뜻을 알 수가 있었다. "대과(大科)에 응시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과연 백운진의 얼굴에는 빙그레 웃음이 피어올랐다. "허허, 네가 이 애비의 뜻을 알아 차렸구나." 백천기는 약간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아버님, 소자의 학문은 아직도 멀었습니다. 소자는 공부를 더해야 합니다." 백운진의 흰 눈썹이 불쑥 치켜 올라갔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내 알기로도 네 학문은 이미 경지를 벗어났느니라. 하물며 이 애비조차 도 따를 수 없는데 어찌 주저한단 말이냐?" "소자는 다만......." "아무 소리 말아라. 이번 봄 대과에는 필히 응시해야 한다. 또한 네 나이 이십 세에 이르렀 으니 장래 문제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지 않겠느냐?" 백천기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떨구었다. '아버님께서는 혹시......?' 그는 그만 마음이 산란해지고 말았다. 백운진의 음성이 다시 떨어졌다. "기아야. 이 애비의 뜻은 결정되었다. 너는 앞으로 사흘 후에 대과를 보러 떠나거라." "옛?" 갑작스런 말에 백천기가 놀라는 사이, 백운진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진지하게 말을 잇고 있었다. "애비는 이미 금릉 근처에 있는 천불사(天佛寺)에 연락을 해 놓았다. 대과는 아직 두


달이 남았지만 너는 그 동안 바깥 구경을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 이 기회에 견문을 쌓도록 해 라." "아!" 백천기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술렁거림을 느꼈다. 실제로 그는 이십 세가 되기까지 오로지 서재에만 틀어박혀 지냈기 때문에 세상일에 대해서 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두 달이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세상 구경을 한다고 생 각하니 기분이 몹시 묘했다. 아무튼 부친의 뜻이 굳어져 있으니 그로서는 좋던 싫던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부친 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버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허허! 물론 그래야지. 애비 이상 널 염려하는 자는 천하에 다시 없느니라. 너는 가문의 명 예와 앞날이 네 한 몸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면 되느니라."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백천기는 공손히 배례를 올리고는 정실을 물러나왔다. 그가 다섯 발자국 정도 물러났을 때였다. 그의 귀로 황포노인의 만족한 듯한 웃음소리가 들 려왔다. "허허허, 백공(白公), 정녕 자네 아들은 내 평생 처음 보는 기재이네. 마치 인중용봉(人中龍 鳳) 같으니 한눈에 내 마음을 사로잡고 말았네." 그러자 백운진의 응답이 뒤를 이었다. "그럼 자네의 그 보배같은 딸을 내주기로 작정했나?" "핫핫핫.......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서 내 딸아이와 어울리는 청년은 없을 거라 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지금 영랑을 보니 오히려 내 딸이 모자라지 않나 걱정이 되네." "예끼, 이 사람! 그 무슨 말을......." 곧 두 노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추운각을 울렸다. "헛헛헛......." "핫핫핫핫......." 그 사이, 백천기는 추운각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노인의 음성은 그


의 귀에 너무나도 또렷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사실 혈룡암에서 기연을 만난 이후 그는 시력 뿐 아니라 청력도 극히 예민해져 있었다. 따 라서 굳이 엿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귓전에 흘러들고 있었다. 선은장의 다른 건물 사이를 지나는 백천기의 안색은 웬지 어두워지고 있었다. '과연 추측대로 아버님께서는 날 성혼(成婚) 시키려 하시는구나. 하지만......' 백천기는 다소 씁쓸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부친의 뜻이라고는 하나 그로서는 일면 식도 없는 상대와 성혼하기에는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뇌리에 나영령의 모습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었을까? 그녀의 흰 피부와 보조개가 움푹 들어가는 고운 뺨, 그리고 그윽한 미소가 백천기의 뇌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백천기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왜 갑자기 영령이 떠올랐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영령은 사실 미인(美人) 중에 미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선은장에 있는 모든 여인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고아(孤兒)였다. 백천기가 일곱 살 나던 해부터 선은장에 들어와 두 사람은 친남매처 럼 정을 나누며 함께 자라왔다. 그러나 신분으로 치자면 엄연한 주종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백천기의 생각은 달랐다. 영령은 천성적으로 영특할 뿐더러 일개 시비로 보기에는 은은한 품위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늘 영령을 시비가 아닌 한 여인으로 대해 주었었다. 다만 워낙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왔으므로 아직까지는 이렇다할 남녀의 정(情)은 느끼지 않 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혼인 문제가 거론되고 보니 그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감정 을 영령에게 느끼게 되었다. '설마 내가 영령을......?' 백천기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흘 후 백천기는 행장을 갖춘 뒤 부친과 장원의 식솔들에게 인사하고 선은장을 나서게 되 었다. 그는 백마(白馬)를 타고 의장도 백의문사의에 백건(白巾)을 두른 차림새였다. 영령은 장원에서 일 리(一里) 쯤 되는 곳까지 전송을 나왔다. 부득불 따라나서는 그녀를 백 천기도 굳이 만류하지는 않았다. 관도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오래 된 백양목(白羊木)이 우뚝 서 있는 기슭이었다. 백천기는 그곳에 잠시 말을 묶어 놓고 영령을 바라보았다. "영령, 내가 없는 동안에도 잘 지내야 한다." 그의 음성은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나영령은 말없이 그를 올려다 보았다. 햇살 아래 그녀의 흰 피부는 거의 투명해 보일 정도 였다. 그러나 그녀의 커다란 두 눈에 는 뿌연 안개같은 것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영령은 그것이 민망했던지 아미를 숙이더니 가느다란 목소리로 겨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공자님이나 부디......." 그녀의 뒷말은 떨림으로 인해 흩어지고 말았다. 백천기는 손을 뻗어 그녀의 작은 어깨를 감쌌다. 그는 그녀의 어깨가 부르르 떠는 것을 감 지할 수 있었다. 나영령의 긴 속눈썹 끝에 기어코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바보같이 울기는, 곧 돌아올텐데 왜 그러느냐?" 이렇게 말하는 백천기의 가슴도 적지 아니 두근거리고 있었다. "공자님......." 영령은 격정을 이기지 못한 듯 그의 품으로 얼굴을 묻어왔다. "영령." 백천기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몸을 와락 끌어 안았다. 향긋한 여인의 체취와 더불어 뭉클 한 감촉이 옷깃을 통해 그대로 그에게 전달되었다. 백천기는 그만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히며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난생 처음으로 영령의 몸 을 안고 보니 평소의 침착함이란 어디로 다 도망갔는지 그 자신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런 느낌은 영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엉겁결에 그의 품에 안기기는 했으나 그녀는 숨 을 죽이고 있었다. 문득 백천기가 그녀의 부드러운 등을 쓸어 내렸다. "영령......." 그의 음성에는 열기가 담겨 있었다. 그는 영령의 솜털이 보송보송한 귓바퀴에 대고 속삭였 다. "공자님." 영령도 용기가 생겼는지 그의 품에 더욱 깊숙히 몸을 묻었다. 문득 그녀는 조심스레 등을 쓸던 백천기의 손길이 가는 허리로 내려와 바짝 조여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영령은 그만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턱이 치켜


올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뜨거운 사나이의 입김이 부어지는 것을 감지했다. 백천기의 입술이 그녀의 뺨에 떨어져 있었다. 그의 입술은 한동안 뺨을 부비는 듯 하더니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와 마침내 그녀의 꽃잎같은 입술을 덮었다. 영령은 갑자기 전신이 세찬 불길의 수렁에 휘말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입술을 통해 자신의 체내를 흐르는 피가 전부 빨려나가는 듯한 그런 느낌이 전신을 관류했다. 백천기는 영령의 입술을 문 채 가볍게 그 자리에 주저앉고 있었다. 두 남녀는 백양목 아래 에서 작별의 입맞춤에 도취되어 봄날의 일륜(日輪)이 점차 중천으로 올라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백천기와 나영령. 이로써 그들은 새롭게 서로의 존재를 가슴에 새기게 되었다. 사랑스런 여인을 두고 외지로 떠나가는 백천기와 홀로 가슴에만 꼭꼭 묻어두었던 사랑을 마침내 기다림으로 승화시킨 나 영령, 두 연인의 마음은 하나가 되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엄격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으나 이 순간에는 아무 것도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따가닥 따가닥....... 백천기는 경쾌한 말발굽소리와 함께 관도를 달리고 있었다. 두 남녀가 입맞춤을 나누던 언덕 위, 백양목 아래에서는 나영령이 꿈꾸는 듯한 시선으로 사 라져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 4 장 · 빙실(氷室) 속의 나체소녀(裸體少女) 천불사(天佛寺). 이곳은 송(宋) 말엽에 세워진 유서 깊은 사찰(寺刹)이었다. 유구한 역사로 보나 규모로 보나 가히 금릉(金陵) 최고의 사찰이었다. 더욱이 수양깊은 고승(高僧)들이 항상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신도들의 향화(香火)가 사시사 철 끊이지 않아 그 명성을 더해가고 있었다. 정오가 조금 지났다. 천불사의 경내에는 좌우로 승방(僧房)이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장방형을 이룬 그 건물들도 꽤 규모있게 지어져 있었다. 또한 서로 마주보는 승방의 한가운데로는 화원이 꾸며져 있어 고적한 경내에 특유의 아취를 더해주고 있었다.


문득 한 승방으로부터 두 명의 승려가 걸어 나왔다. 그들은 아직 수행을 끝내지 못한 사미승들로 나이는 이십이 채 안 되어 보였다. 그들은 승 방 안에서부터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듯 화원 앞으로 걸어가면서도 계속 입을 놀렸다. 우측의 키가 조금 커보이는 중이 약간 큰 목소리로 말했다. "오현(悟玄), 자네 혹시 지객당(知客堂)에 묵고 있는 젊은 시주를 본 적이 있나?" 그 말에 오현이라 불리운 키가 작은 중이 성긴 눈썹을 치켜 올렸다. "누구 말인가?" 그러자 키 큰 젊은 중이 눈을 횝뜨며 말했다. "왜, 며칠 사이에 소문이 자자한 그 시주 말일세." 오현은 그제서야 깨달은 듯 탄성을 발했다. "아! 백(白) 시주를 말하는 것인가?" 키 큰 중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럼 또 누가 있겠는가? 나는 이 절에 십여 년을 있어 오면서 수많은 귀인공자(貴人公子) 를 대해 왔지만 그 시주만큼 잘난 사람은 본 적이 없었네." 그러자 오현도 공감을 표했다. "하긴 백시주는 용모만 초범한 것이 아니라 인품(人品)과 덕성, 게다가 학문까지도 두루 갖 추었다고 하더군." "아미타불, 내가 정말 부족하긴 부족한가 보이. 오랫동안 수행을 해왔거늘 그 시주를 대하면 어쩐지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지니 이것이 대체 어찌된 현상인지 모르겠네." "아미타불, 혹 자네 시샘이라도 하는 거 아닌가? 하하핫......." "글쎄, 나도 그 점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 중이네만 해답을 구할 수가 없을 것 같네. 쩝! 여 태도 속인의 때를 벗지 못했으니 정녕 부끄러운 노릇일세." "음,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세. 여북하면 주지스님께서도 백시주에 관한 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네." 오현은 말을 하면서 힐끗 상대를 올려다 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한 가닥 고소가 떠올랐다. "어쨌든 우리로선 최선을 다해 모셔야 하네. 주지스님의 당부가 계셨지. 백시주같은 귀인을 우리 절에서 맞게 된 것은 지대한 영광이라고 하시면서 말일세." 두 승려는 긴 승방의 건물을 지나고 있었다. 앞서의 대화에서 엿보이듯 그들은 백시주라는 자에 대해 입에 발린 칭찬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단한 호감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승원(僧院)을 벗어난 후 다시 몇 채의 건물을 지나쳤다. 이윽고 그들이 당도한 곳은


지객당(知客堂)으로 특별히 지은 객사(客舍)가 있는 곳이었다. 그들이 막 지객당으로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문득 한 객사의 문이 열리며 한 명의 백의서생 이 유현한 자태로 걸어나왔다. 그는 바로 백천기였다. 부친의 분부대로 대과(大科)에 응시하기 위해 그는 이곳 천불사에 머무르고 있었다. 두 사미승은 그를 보자 예를 갖추기 위해 즉시 허리를 굽혔다. 오현이 먼저 그에게 조심스 럽게 물었다. "행차하시는 길입니까? 백시주님." 백천기는 온화한 웃음으로 답례했다. "네, 그저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가는 길입니다." 오현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셨군요. 하지만 곧 식사 때가 되니 백시주님께서는 되도록 일찍 돌아오시기 바랍니 다." 백천기는 겸손하게 말했다. "염려 마십시오. 곧 돌아오겠습니다." 이어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백삼자락을 펄럭이며 걸어 나갔다. 이러한 그의 태 도는 귀빈 대우를 받는 자 치고는 거만하지도, 그렇다고 비굴하지도 않은 아주 적절한 모습 이었다. 두 사미승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오현이 뒤늦게서야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 렸다. "아미타불....... 선천적인 상(像)도 그러하지만 후천적인 인품조차도 도무지 나무랄 데가 없는 인물이군." 키 큰 사미승도 한 마디 거들었다. "관운만 있다면 백시주는 이번 대과에서 틀림없이 등과(登科)할 것이네. 아니, 그래야 되지. 치세(治世)에는 학문도 중요하지만 덕망도 못지 않은 관건이니까. 안 그런가?" "염려말게. 장원(壯元)은 따놓은 당상일세. 그런데 자네, 언제 시샘이 찬양으로 바뀌었나?" "아미타불....... 졌네!" "하하하......." 그들은 담소하면서도 내내 백천기가 사라진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비록 출가승(出 家僧)이라고는 하지만 다같이 젊은그들은 시각이 뭇 승인들과는 매우 달랐다. 백천기에 대해 흠모를 가지면서도 반면에 젊음이라는 의식이 질시감을 떨치지 못하게 한


것 이었다. 한편 백천기는 천불사의 사문을 나서고 있었다.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르렀다. 그는 눈부신 듯 창천을 올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에 온 지 벌써 열흘이 넘었구나. 이제 응시일도 며칠 남지 않았구나." 백천기는 선은장을 떠난 이래 줄곧 필마단기로 여행을 즐겼다. 새로운 시진과 현성(縣城)이 나타날 때마다 그는 호기심이 자극되어 여행의 피로를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처음 보는 것이었고 신기했던 그는 소주에서 금릉으로 이르는 길을 여유있게 지 나며 책 속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많은 산 지식들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러다 한 달 보름여에 걸친 여행 끝에 천불사에 도착했었다. 다행히 이곳의 주지는 과거 그의 부친 백운진과 가까운 사이였으므로 처음부터 융숭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다. 백천기의 발길은 천불사를 뒤로 하고 꽤 멀리 걷고 있었다. 산을 측면에 둔 소로(小路)로 접어들자 길 양 옆으로 푸르게 자란 숲이 제법 울창하게 우거 져 있었다. 짹짹...... 휘리릭......! 새들이 힘찬 날개짓과 함께 청아한 지저귐을 발하고 있어 한결 그의 마음을 상쾌하게 했다. 더구나 풀숲에서는 이름 모를 야생화(野生花)들이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며 피어 있었다. "아! 봄이 무르익는구나." 백천기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활짝 열며 신선한 기분을 만끽했다. 그는 계속 소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문득 그의 귓전으로 두런두런거리는 소녀들의 말소리가 전해져왔다. 점차 또렷하게 들려오 는 그 목소리는 봄기운처럼 청랑 하기만 했다. "아가씨께서는 이번 기회에 그 신공(神功)을 완전히 터득하시려는 것 같아." 그러자 다른 소녀의 목소리가 말을 받았다. "그래, 설산신마(雪山神魔)에게서 반 병의 빙옥로(氷玉露)를 빼앗아 왔으니 아마도 곧 연성 하시게 될 거야." "그렇게만 된다면 아가씨께서는 천하무적이 되실 거야." "그런데 과연 그 설산신마가 빙옥로를 반 병 씩이나 뺏기고도 가만히 있을까?" "흥!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쩌게?" 나중의 소녀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 자는 사마(四魔) 중의 하나이고 무공 역시 무척 높은데......"


차가운 코웃음 소리가 즉각 뒤를 이었다. "흥! 그 흉마의 무공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무림에서 비봉옥녀(飛鳳玉女)라 불리우는 우리 아가씨의 무공은 어디 만만하더 냐? 게다가 그 무서운 신공마저 익힌다면 설산신마는 물론 사마가 전부 나서도 겁나지 않을 걸?" 그제서야 앞서의 소녀도 한결 마음을 놓는 듯 했다. "그래, 그건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아무튼 아가씨께서 무사히 연공을 마치셔야 하는 데......." "걱정 마, 틀림없이 아가씨께서는 대성하실 거야. 이제부터 우린 이곳을 철저히 지키기만 하 면 돼. 혹시라도 누가 방해하면 큰일이니까." 그러자 예의 염려하던 소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호들갑스런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추국(秋菊), 너야말로 괜한 걱정을 하는구나. 천하에서 그 어느 누가 아가씨께서 설 치해놓은 현문칠성진(玄門七星陳)을 돌파할 수 있겠니?" 추국이라 불리운 소녀도 따라 웃었다. "그건 맞아. 호호호......" "추국아, 기우 따위는 집어치우고 빨리 가자." 두 소녀의 목소리는 차츰 멀어져 갔다. 사실 그녀들의 대화는 일반인들로서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먼 곳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그러나 백천기의 영민한 청력은 그녀들의 대화를 바로 곁에서 듣는 듯 들을 수 있었다. 그 는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설산신마니 비봉옥녀니 하는 말로 보아 저들은 무림계(武林界)의 사람들인 것 같구나.' 백천기는 그간 여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무림(武林)이란 세계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가 아는 것이라야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들은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며 무서운 능력을 지녔으며, 관이나 국법 따위를 조금도 두려 워 않는 기인들의 세계라는 것이 그가 아는 전부였다. 백천기는 호기심이 동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말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걸음을 옳기게 되었다. 그는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잰 걸음으로 걸었다. 그러나 만일 무림인이 보았다면 그의 모습에 크게 놀라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풀잎 위를 밟고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풀잎이 전혀 뭉개지지 않았다. 분명 발로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풀잎은 전혀 눕지조차 않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구름 위를 유유히 떠다니듯 행운유수처럼 걷고 있었는데 옷자 락 스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있었다. 백천기는 신법(身法)을 익힌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히 답설무흔(踏雪無痕) 에 육박하는 경지를 구사하고 있었다. 실로 믿어지지 않은 일이었으나 정작 당사자인 백천기는 자신의 그런 모습에 대해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그의 몸에는 만년지극용란혈의 작용으로 인해 무림인들로 치자면 이 갑자(二甲子)에 해당하는 공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가 잰걸음으로 달리자 무의식중에 그의 몸이 지면에서 두 치 이상 떠오르게 된 것이었다. 백천기는 무심결에 날아갈 듯이 숲을 가로질러 진입해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그는 주변 환경이 이상한 것을 느끼고 걸음을 멈추게 되었 다. "아니?" 그의 입에서 한 가닥 의혹의 탄성이 흘러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눈 앞에는 온통 울 울창창한 원시림(原始林)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좌우로는 하늘을 찌를 듯한 절봉(絶峯)이 까마득히 솟아있는 것이었다. '맙소사! 여기가 대체 어디길래?' 백천기는 그만 질겁을 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더욱 더 얼이 빠지고 말았다. 놀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주위 경물은 꺼진 듯이 사라지고 원상태를 회복한 것이었다. '어째서 이런 변화가?' 백천기는 이같은 상황에 이르자 자신의 머리가 어찌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의 두뇌는 빠르게 회전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사 년 전 혈령암에서 얻은 아홉 권의 비급 중 귀진마전(鬼眞魔典)의 내용을 떠올린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백천기는 생각할 여지도 없이 무의식중에 귀진마전의 내용을 따르기 시작했다. 귀진마전에는 갖가지 기문진법(奇門陳法)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진학에 관한 한


귀진자는 천 하의 으뜸이었다. 그러므로 귀진마전에 수록된 진법학을 익히게 되면 어떤 진법이라도 거침 없이 격파할 수가 있었다. 잠시 궁리하던 백천기는 갑자기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다.' 그는 밝은 얼굴로 눈 앞의 정경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보니 이곳에 설치된 것은 현문팔로진(玄門八路陳)과 칠성만환진(七星萬幻陳)을 합친 것이로구나." 백천기는 정신을 집중하여 본격적으로 귀진마전에 수록되어 있는 파진법의 구결을 되새겼 다. 그의 기억 속에 접혀있던 귀진마전의 자자구구들이 차례로 떠오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무릎을 탁 치며 낮게 부르짖었다. "그렇군, 이것은 현문칠성진이라 부르는 진법이다." 결국 그는 눈 앞에 설치된 진세를 완전히 파악하게 되었다. 그는 그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까짓 진법 쯤이야!" 그는 서슴없이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풍경은 다시 얼마 전처럼 삼엄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이미 진행 방향을 파악하고 있는 백천기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삼 보 가량 전진하다가 좌측으로 칠 보(七步), 우측으로 십사 보(十四步)를 옮겼다. 백천기는 정확히 방위를 골라 생(生), 사(死), 휴(休), 공(空)의 문(門)을 차례로 열어가고 있 었다. 진을 돌파해 나가면서 그는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제 보니 이 현문칠성진은 완벽하지가 않구나. 최소한 일곱 군데의 헛점이 있다. 후후! 설 사 완벽하게 펼쳤다 해도 날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거침없이 진을 헤쳐 나갔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진을 빠져나올 수 있었 다. 이윽고 백천기가 당도한 곳은 뜻하지 않게도 너른 잔디밭이었다. 잔디를 바라보는 그의 눈 이 반짝 이채를 발했다. 잔디 위에는 풀이 누운 흔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육안으로는 거의 발견할 수 없는 극 히 미세한 흔적으로 천안(天眼)의 경지에 이른 백천기가 아니었다면 발견하지 못할 정도였


다. 백천기는 그 흔적이 바로 얼마 전에 사람이 지나가며 남긴 자취라는 것까지 알아내고 있었 다. 그는 곧 그 흔적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흔적은 가파른 언덕을 지나 조그만 협곡(峽谷)으로 향하고 있었으나 협곡으로 들어서는 동 안 백천기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그때로부터도 약 일각이 지난 후, 백천기는 으슥한 절벽 아래 나 있는 한 은밀한 동굴을 발 견했다. 비록 문사 출신이었지만 백천기는 담력이 컸다. 그는 망설임없이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 다. 동굴 안은 칠흑처럼 캄캄했으나 그의 눈에는 대낮이나 다름없이 환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 런데 동굴로 들어선 순간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전신을 얼어붙게 만드는 싸늘한 한기(寒氣) 였다. "으음." 백천기는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발했다. 뼈를 쑤시는 듯한 한기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소 름이 오싹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한 차례 어깨를 으쓱한 후 다시 동굴 안쪽으로 들 어가기 시작했다. 동굴의 천장과 벽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빙벽(氷壁)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한기도 도 를 더해 이제는 입에서 허연 입김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만년지극용란혈을 복용한 이후 백천기는 추위와 더위를 느끼지 않는 특수한 체질이 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는 전혀 제지를 받지 않고 계속 안으로 향할 수가 있었다. 얼마나 걸어 들어 갔을까? 마침내 동굴의 통로가 끝나고 하나의 빙실(氷室)이 나타났다. 빙실의 문은 얼음으로 되어 있 었는데 그가 가볍게 손을 대자 소리없이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며 열렸다. 백천기는 내친 걸음인지라 망설임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앗!' 하마터면 그는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그의 눈은 크게 떠진 채 빙실의 한가운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얼음으로 된 좌대가 놓여 있었는데 바로 그 좌대 위에 한 명의 소녀가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가 놀란 것은 소녀 때문이 아니었다. 문제는 소녀가 전신에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모습이라는 점이었다. "......!" 백천기의 눈이 경악으로 인해 점차 커지고 있었다. 길고도 우아하게 빠진 목 뒤로 윤이 나는 흑발을 바닥까지 늘어뜨린 소녀....... 처음 백천기 가 본 것은 소녀의 옆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가 받은 충격은 적지 않은 것이었다. 매끄럽고 동그란 어깨와 젖가슴의 볼록한 선(線), 그리고 잘룩한 허리로부터 갑자기 풍만해 지는 둔부 등이 숨이 막힐 정도로 뇌쇄적인 기운을 풍겼기 때문이다. 백천기는 가슴이 진탕되면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여인의 알몸을 대한 것이었다. '내가 이 무슨 추탠가?' 그는 황급히 자신을 나무라면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나 의문이 자꾸만 고개를 치켜들 고 있었다. '이곳은 도저히 인간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춥다. 그런데 저 소녀는 어떻게 옷도 입지 않고 얼음 위에 앉아있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내가 들어와도 일체 무신경하니 대체 이게 무 슨 경우란 말인가?' 마침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소녀는 여전히 그를 본 척도 하지않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소녀의 앞으로 다가가 보았다. "아!" 백천기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천하절색(天下絶色). 이 한 마디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아름다 운 여인의 얼굴이 그의 눈 앞에 있었다. 섬세한 아미와 별빛처럼 빛나는 눈, 그리고 긴 속눈썹....... 게다가 고운 콧날과 앵두같이 선명한 입술 등은 정녕 미(美)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더구 나 그녀의 얼굴에서는 고고한 기운마저 풍기고 있었는데 그것이 더욱 그녀의 매력을 더해주 고 있었다. 백천기의 눈길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에서 차츰 아래로 내려갔다. 정면에서


마주 대 하고 보니 그녀의 나신은 더욱 아름다왔다. 학처럼 길게 빠진 목이 그러했고, 양 어깨로 쭉 뻗은 두 팔이 그러했다. 두 개의 젖가슴은 봉긋하게 상향(上向)으로 솟아 있었는데 호흡을 할 때마다 가볍게 출렁여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이 막히게 할 지경이었다. 그 젖가슴 위에 수줍게 얹혀진 두 알의 분홍빛 열매에 시선이 닿자 백천기는 전율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그 아래의 풍경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버들가지같이 가는 허리와 동그란 배, 그 가운데에 귀엽게 숨은 배꼽, 그리고 그 아래로 는....... 거기에서 백천기는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더 이상 살펴본다는 것은 그의 인격이 허락 치 않았기 때문이다. 백천기는 호흡을 조절하며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어 그는 나체소녀가 눈을 뜨고 있 음에도 그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느끼게 되었다. 문득 그는 소녀의 눈이 한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던 그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빙실의 벽이었다. 그곳에는 소녀의 눈 높이와 같은 위치에 하나의 족자가 걸려 있었다. 백천 기는 족자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 그것은 놀랍게도 한 명의 나체 여인이 정좌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백천기는 다시 고개를 돌 려 보았다. 그림 속 나체 여인의 자세와 얼음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소녀의 모습이 완벽하게 똑같았다. 백천기는 잠시 생각하다 손을 뻗어 족자를 떼어 냈다. 족자는 모두 열두 장으로 되어 있었 는데 방금 전까지 펼쳐져 있던 그림이 맨 마지막 장이었다. 나머지 열한 장을 살펴보자 마찬가지로 나체여인의 상이 그려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 자세가 각각 다르다는 것 뿐이었다. 어떤 것은 서 있고, 어떤 것은 누운 자세였으며, 혹은 엎드려 있거나 거꾸로 서 있기도 하는 등 갖가지 자세였다. 그림은 너무도 세밀하게 그려져 있어 마치 살아있는 여인을 대하는 듯 생생했다.


심지어는 여인의 신비로운 부위마저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각 장마다 그림 옆에는 구결(口訣)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백천기는 평소에 고서화에 취 미가 있었으므로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 구결을 읽어 보았다. 잠시 후 그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백천기는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정녕 사악한 마공(魔功)이구나. 이런 것을 저토록 아름다운 소녀가 익히려 들다니......." 아직 무공을 배운 적이 없었던 백천기였으나 혈룡암에서 얻은 아홉 권의 비급을 머리 속에 담고 있는 이상 무공의 이론에 관해서는 이미 천하에서 필적할 자가 없었다. 그는 열두 장의 족자에 적힌 무공이 어떤 류의 것인지 쉽게 간파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그의 눈에 족자 맨 끝에 적힌 글씨가 들어왔다. <한령마공(寒靈魔功)> 그 밑으로는 「북해(北海) 사태청(邪太廳)」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백천기는 눈썹을 모으며 중얼거렸다. "북해 사태청?" 그는 족자를 내리며 재차 뇌까렸다. "아마도 이 한령마공이란 무학이 북해 사태청이란 곳에서 나왔다는 뜻인가 보구나." 백천기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족자를 돌돌 말아버렸다. 바로 그때였다. 귓전으로 여인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백천기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니?" 얼음 좌대 위에 앉아있던 소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녀는 아까와는 달리 안색이 파 리하게 질려 있을 뿐만 아니라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백천기가 놀란 것은 단순히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체소녀는 그야말로 흉측한 모 습으로 변해 있었다. 전신의 핏줄이란 핏줄이 온통 툭툭 불거져 나와 있어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할 것만 같은 느 낌을 주고 있었다. 백천기는 안색이 크게 변하며 중얼거렸다. "이것은 바로 주화입마(走火入魔)의 현상이 아닌가!"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나체소녀는 한령마공을 익히던 중 주화입마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혈


룡암에서 아홉 권의 비급을 모두 외운 백천기는 대뜸 그같은 현상을 알아본 것이었다. 백천기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곧 침착하게 염두를 굴렸다. '한령마공의 구결로 미루어 볼 때 열두 단계의 연공(練功)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다. 그 중 에서도 가장 어려운 관문은 열두 번째인데, 그렇다면......'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나체소녀의 눈을 바라보 았다. 아니나 다를까? 촛점을 잃은 채 뻘겋게 충혈된 그녀의 두 눈은 방금 전까지 족자가 붙어있 던 벽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백천기는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렇구나! 내가 족자를 떼어내는 바람에 이 여인은 그만 정신집중이 흩어지고 말았구나. 백천기는 자책하며 손에 말아쥐고 있는 족자를 내려다 보았다. '지금 다시 걸어준다 해도 늦었다.' 그는 스스로의 경솔함을 탓하며 대책을 강구해 보았다. '이 여인은 열두 번째의 관문을 돌파하려다 족자를 떼어내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렇다면 내 탓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공임을 알면서도 이 여인이 연성하도록 놔두는 것 또 한 도리가 아니지 않은가?' 백천기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있었다. '한령마공을 익히면 이 여인은 냉혹한 성격으로 변해 일평생 마녀(魔女)로 살아갈 것이다. 더구나 전신에서는 항상 차가운 한기(寒氣)가 발산되므로 어떤 남자도 근접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무공을 생명보다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림인들이라지만 이건 옳지 않다. 행복이 란 사람답게 사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무엇 때문에 스스로 마녀의 길을 걸으려 한단 말인가?' 이때, 나체소녀는 더욱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바람에 그녀는 금방이라도 얼음좌 대로부터 굴러 떨어질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전신의 혈관은 모두 부풀어 올라 백옥같은 피부 위로 지렁이가 기어다는 것처 럼 보기 싫게 돌출되고 있었다. 마침내 백천기는 결심을 굳혔다.


"낭자, 주화입마는 바로 잡아주겠소. 하지만 한령마공의 성취만은 필히 막아야겠소이다." 말을 마치자 백천기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비록 정식으로 내공을 익힌 몸은 아니었으나 체내에 잠재하는 내력은 근 백이십 년 수 위에 해당되었다. 거기에다 그는 아홉 권의 개세적인 비급의 내용을 전부 암기하고 있었다. 따라서 무공의 원리라면 통달 하다시피 한 그는 요상법이나 주화입마의 해결 방법도 자연스 럽게 깨닫고 있었다. 그는 소녀의 앞쪽에 선 채 손바닥을 활짝 펼치고 앞으로 서서히 뻗었다. 뭉클하는 감촉과 함께 그의 손바닥이 소녀의 젖가슴에 닿았다. 그곳은 유근혈(乳根穴)이었 다. 손바닥이 솜처럼 부드러운 젖가슴에 닿는 순간 그는 정신이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난생 처음으로 여자의 젖가슴을 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긴박한 상황이었다. 만일 그가 정 신을 집중하지 못한다면 소녀는 물론 그 자신도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백천기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는 오른손을 나체소녀의 유근혈에 바짝 밀착시키 고는 가볍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는 내공을 운용(運用)할 줄은 몰랐으나 긴장에 힘입어 그 의 손바닥에서는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뜨거운 기력(氣力)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기운은 즉시 나체소녀의 유근혈을 통해 전신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어 찌 된 영문인지 전혀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백천기는 낙심하지 않고 오른손을 그대로 둔 채 이번에는 좌장(左掌)을 다시 그녀의 오른쪽 유근혈에 밀어 붙였다. 이렇게 되니 그는 영락없이 두 손으로 나체소녀의 양쪽 젖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꼴이었다. 하지만 백천기는 추호도 흔들림이 없는 담백한 표정으로 쉬지 않고 나체소녀의 유근혈을 문 질렀다. 약 일 각 쯤 되었을까? 파리하던 소녀의 얼굴에 다소 화기(和氣)가 감돌았다. 백천기는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오른손을 내려 이번에는 소녀의 앞가슴 한복판 단중혈(壇中 穴)에 대었다. 동시에 그의 왼손은 조금 아래쪽의 거궐(巨闕)에 밀착되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경과된 후, 그는 오른손을 움직여 소녀의 배꼽에서 한 치 가량 위에 있는 수분 혈(水分穴)로 미끄러 뜨렸다. 손이 닿는 곳은 한결같이 여인의 내밀한 부분이었으나 인명을 구하는 데는 굳이 사소한 남 녀의 예법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백천기의 생각이었다. 그의 손바닥은 어느새 나체소녀의 배꼽 아래 단전(丹田)까지 내려와 있었다. 단전에 손바닥을 밀착시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의 가슴 속에서 기혈(氣血)이 들끊는 듯 한 묘한 소리가 났다. 꾸르륵거리는 그 소리에 백천기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실상 백천기가 내공을 끌어올리는 법을 알았다면 이토록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가 볍게 몇 번씩 혈도를 가격해 주는 것만으로도 소녀를 주화입마에서 충분히 구해낼 수가 있 었다. 백천기의 손은 단전에서 더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소녀의 은밀한 비역(秘域)에서 불과 손 가락 두 마디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중극(中極)에 도달했다. 그곳에 이르자 백천기의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그의 눈에는 소녀의 은밀한 부분이 확연히 들어오고 있었다. 그곳은 그야말로 그가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비경(秘景)이었다. 부드러운 방초(芳草)가 우거져 있는 부위가 바로 손끝에 닿아 있었다. 방초 우거진 삼각지역 의 그늘에서는 묘한 기향이 풍기는 듯 했다. '으음.......' 백천기는 불현듯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며 그만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웩!" 느닷없는 비명에 백천기는 급히 손을 뗐다. 나체소녀의 입에서 시커먼 핏덩이가 토해져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던 어혈(瘀血)이었다. 백천기는 탄성을 발했다. "아, 이제야 고비를 넘겼군." 과연 나체소녀의 안색은 토혈(吐血) 이후 급격히 정상을 회복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신 에 불거졌던 혈관도 차츰 가라앉았다. 백천기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소녀의 동태를 지켜보았다.


전신에서 불거졌던 핏줄이 가라앉자 소녀는 예의 백옥같이 매끄럽고 하얀 피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더불어 풍만한 젖가슴과 여인만의 굴곡진 부분들이 다시금 신비스러운 마력을 풍기 기 시작했다. 더구나 그곳은 모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손이 밀착되어 있던 곳들이었다. 백천기는 그 만 안면이 후끈 달아오르자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다 문득 바닥에 떨어져 있는 족자에 눈길이 이르자 그는 그것을 집어들고 중얼거렸다. "모두 이것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주제넘는 생각일지 몰라도 이런 마물은 세상에서 없어지 는 것이 나을 것이다." 백천기는 서서히 왼손을 치켜 들었다. 그의 왼손은 이미 수도(手刀)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 다. 천하에서 어떤 미녀의 손보다도 부드럽고 섬세하게 보이는 손, 또한 거의 투명할 정도로 흰 그 손의 위력을 누가 알겠는가? 백천기는 바로 그 손을 서슴없이 내리치고 있었다. 탁! 정확히 그의 왼손은 족자의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그러자 족자는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 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백천기의 일격이 그것도 부드러운 족자를 가루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은 다음 순간에 벌어졌다. 백천기는 걸음을 옮겨 소녀의 정면에 있는 빙벽에 다가가더니 왼손의 인지를 세워 글씨를 썼다. - 낭자의 주화입마(走火入魔)는 소생이 회복시켰소. 그러나 낭자를 마성(魔性)에 빠뜨리게 하는 한령마공은 영원히 없애 버렸소.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에는 한 치 깊이로 그같은 문구가 새겨졌다. 이때, 뒤쪽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백천기는 몸을 빙글 돌렸다. 그는 깜짝 놀랐 다. 나체소녀의 몸이 모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바람에 긴 머리칼이 백옥같은 나신 위를 반쯤 뒤덮고 있었다. 그러나 앉은 자세 그래로 쓰러져 있었으므로 그는 눈 둘 곳을 몰라했 다.


소녀의 다리가 여전히 가부좌를 튼 채 그의 앞에 치켜들려 있었던 것이다. 백천기는 갈등을 느꼈다. 소녀의 몸을 바로 세워놓아야 할지, 아니면 그대로 그곳을 떠나야 할지 그는 망설이더니 곧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위험한 고비는 넘겼으니 곧 깨어날 것이다. 내가 있는 것보다는 사라지는 것이 나 을 것이다.' 그는 미련없이 성큼성큼 빙실을 나섰다. 통로를 걸으며 그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참으로 괴이한 일을 겪게 되었구나......." 한편, 시간이 흐르자 빙실에 혼자 남게 된 나체소녀는 몸을 꿈틀거렸다. 이어 감겨있던 눈을 반짝 뜨며 깨어난 그녀는 자신이 옆으로 누워있는 것을 의식하고는 깜 짝 놀랐다. 그녀는 급히 일어나 앉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안면 가득 짙은 의혹을 드리웠다. '분명히 나는 체내에서 진기가 흩어져 주화입마에 빠졌었다. 그러던 찰나 누군가 도와준 것 같았는데......' 그녀는 염두를 굴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구석으로 가 벗어놓은 옷가지를 찾아 걸쳤 다. 문득 옷을 걸치던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이어 그녀의 아름다운 미간이 찌 푸러지며 분노의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누군가가 이곳에 침입해 내 몸을 보았다. 게다가...... 만지기까지 했다!' 소녀의 고운 눈썹이 푸들푸들 떨렸다. 너무도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그녀는 안색이 새파랗 게 질린 채 이를 갈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내 몸에 함부로 손을 댄 자는 절대로 용서하지 못한다. 내 맹세코 그 자 를 만나면 죽이고 말리라!' 곧 그녀는 한령마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녀가 그토록 고심하며 쌓아 온 한령마공의 진력(眞力)은 체내에 단 한 줌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 이럴 수가?" 그녀의 안색은 창백해지다 못해 완전히 실색(失色)하고 말았다. 그녀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 번 운기해 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본래 그녀가 지니고 있던 무공 외에 한령마공의 기운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녀는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 "아! 어떻게 연공해온 무공인데... 이토록 허무하게 소멸되다니!" 그녀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도대체 누가?" 주위를 훑어보는 그녀의 눈에서는 서릿발같은 찬 기운이 흘렀다. 그녀의 눈은 곧 빙벽의 한 곳에 꽂혔다. 그곳에는 의당 걸려 있어야 할 족자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곳에는 생경한 글자가 남겨져 있었다. 소녀는 크게 놀람과 동시에 이번에는 바닥에서 부스러진 족자의 가루를 보게 되었다. 그녀 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급히 빙벽 앞으로 다가갔다. '이럴 수가? 빙옥로(氷玉露)에서 나온 한기로 이루어진 이 빙벽은 웬만한 보검으로도 손상 시키기 힘들다. 그런데 자그만치 한치 깊이로 글씨가 씌여져 있다니......' 그러나 놀람은 잠깐이었다. 글을 읽어 내려가던 그녀의 표정에는 절망이 뒤덮혔다. 그녀는 멍하니 그 글씨를 바라보며 한맺힌 탄식을 흘려내고 있었다. "아아! 한령마공의 성취가 모두 무산되었으니 이제 그 피맺힌 원한은 어찌 갚는단 말인가?" 소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실의에 빠져버린 그녀의 눈물은 그야말로 피눈물과 같았다. 제 5 장 · 풍운무림(風雲武林) 백천기는 천불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느덧 해는 서산을 향해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산등성이 너머로는 붉은 황혼이 아름답게 깔리고 있었다. 백천기는 황혼을 받으며 서서히 산길을 내려왔다. 문득 그의 눈 앞에 빙실 안에서 보았던 나체소녀의 모습이 그려졌다. 백천기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정말 내 평생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한 행동이 옳은 것이었는지 대해서는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해 줄곧 꺼림칙한 기분이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마녀(魔女)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애써 자위하는 백천기의 뇌리에는 다시금 나체소녀의 아름다운 육체가 떠올랐다. 실로 뇌쇄 적인 여체였다. 더욱이 이제껏 여인과의 접촉이 거의 없다시피 자라온 백천기에게 있어 그녀의 나신은 마음 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백천기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빙실의 나녀로 인해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과거 에 대한 기억이 어둡게 떠오른 것이었다. '이번 일로 지난 사 년 동안 잠잠했던 내 마음이 다시 흔들려 버렸다. 잊어버리기로 작정했 던 그 비급의 내용들을 잊기는 커녕 이번에는 사용하기까지 했으니......' 백천기는 터벅터벅 걸어가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 일이란 정말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닌가 보구나.' 그는 마음이 산란해진 채 차츰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막막한 그의 심경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밀려들고 있었다. 그가 상념에 싸여 산모퉁이를 돌 때였다. 문득 우측의 숲 속으로부터 음침한 괴소성이 그의 귀를 울렸다. "흐흐흐......! 구궁산(丘窮山)! 네 놈이 더 이상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러자 다른 한 노인의 음성이 그 말을 되받았다. "닥쳐라! 이 놈, 노부가 비록 내상을 입어 내공이 손실되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너같은 놈 쯤 은 해치울 수 있다." 다시 예의 음침한 괴소가 울렸다. "흐흐흐! 늙은이가 입은 살아서 죽어가면서도 큰소리를 치는구나. 네 놈은 이미 첫째 형님의 건곤혼원장(乾坤混元掌)에 맞았으니 지금 쯤은 기혈이 엉켜있을 것이다." 음침한 음성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흐흐! 어차피 가만 내버려 두어도 한 시진만 경과하면 네 놈은 죽게 되어 있다. 그러니 일 찌감치 그 옥불(玉佛)이나 순순히 내놓아라." "어림도 없는 소리!" "이 늙은이가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받아라!" 펑! 하는 폭음에 이어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백천기는 영문은 몰랐으나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들린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의 신형 은 쏜살같이 쏘아가고 있었다. 실로 비쾌무비한 신법(神法)이었다. 경공술이라곤 익힌 적도 없는 그가 가히 일류고수를 능 가하는 속도로 치닫는 것이었다. 잠시 후 그는 소리가 들려오던 곳에 당도했다. 그 곳은 넓다란 풀밭이었다. 지금 막 한 명의 청의를 입은 노인이 탈진한 듯 한 그루의 노 송에 기대서 있었다.


노인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입술꼬리에서는 실낱같은 피가 연신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옷도 군데군데 찢겨진 채 홍곤히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청의노인은 한 자루의 금검(金劍)을 들고 있었는데 이미 기운이 쇠진한 듯 검끝이 땅으로 쳐져 있었다. 맞은 편으로 음침한 인상의 흑의노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오른손을 가슴 높이로 바짝 치켜들며 괴소를 흘려냈다. "흐흐, 노부의 영사장(靈蛇掌)으로 네 놈을 아주 황천으로 보내 주마." 다음 순간 흑의 노인은 우장을 흡사 영활한 뱀이 먹이를 채듯 쭉 내뻗었다. 쉬익! 듣기 거북한 음향과 함께 예리한 경풍이 청의노인의 가슴 부위로 쇄도해 갔다. 청의노인은 다급히 금검을 치켜 올렸으나 금검은 채 반도 올려지지도 않았다. 청의노인의 터진 입술에서는 절망적인 탄식이 새어나왔다. "허허, 노부도 이제 끝장이구나." 바로 그때였다. "멈추시오!" 한 가닥 낭랑한 외침과 함께 백천기가 장내로 뛰어들었다. 그 바람에 흑의노인의 손바닥이 막 청의노인의 가슴팍에 닿으려는 찰나 뚝 멈추었다. 흑의노인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몸을 홱 돌렸다. "누구냐?" 그의 눈에 한 명의 백의서생이 들어왔다. 용모는 비범했지만 일견하기에도 무공이란 무자도 모르는 전형적인 서생의 모습이었다. 흑의노인의 얼굴에는 대뜸 경멸이 어렸다. 그는 손바닥을 내리며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날 렸다. "흐음, 노부는 또 어떤 고인이 나타나 방해하나 했더니 겨우 계집애같이 생긴 책벌레였군." 그 말에 백천기는 화를 내기는커녕 빙그레 웃었다. 그는 손을 들어 노송에 기대있는 청의노 인을 가리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노인장, 사유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살생이란 그다지 유쾌한 일은 못되오. 이쯤에서 그만 손 을 거두고 호생지덕을 베푸는 것이 어떻겠소?" 극히 상식적인 말도 상황에 따라서는 우스개가 될 수 있었다. 살인을 밥먹듯이 하는 무림인 에게 백천기의 말은 허허롭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과연 흑의노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괴소를 흘려냈다.


"흐흐, 애송이 놈이 감히 노부를 훈계하려 드는구나. 입 닥치지 못하겠느냐?" 그러나 백천기는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은 채 말했다. "노인장, 생명이란 귀중한 것이오. 그런데 어찌하여 손쉽게 살인을 범하려 하는 것이오?" 흑의노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흐흐! 애송이놈이 겁도 없이 마음대로 지껄이는구나. 내 당장 네 놈의 주둥이를 찢어 놓겠 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오른손을 갈쿠리처럼 세우더니 백천기의 목을 움켜쥐어 왔 다. 쐐액!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리자 백천기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한 일이라야 고 작 본능적으로 몇 걸음을 피해간 것 뿐이었다. "엇!" 놀란 쪽은 오히려 흑의노인이었다. 그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괴소를 흘려 냈다. "흐흐, 네 놈이 제법 몇 수 배운 모양이구나. 어디 그렇다면 노부의 영사장을 받아봐라." 그의 오른손이 흡사 뱀처럼 구부러지더니 날카롭게 쇄도해왔다. 그것은 대여섯 마리의 영사 (靈蛇)가 한꺼번에 먹이를 노리는 듯한 환영을 일으키며 백천기의 복부를 향해 움켜쥐어 왔 다. 백천기는 눈 앞이 아찔했다. 흑의노인은 그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번개같이 그의 맥문 을 낚아채 버렸다. "앗!" 백천기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눈 앞이 어찔하는 순간 손목을 잡혀버린 것이었다. 무공을 모 르는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헉!" 흑의노인은 갑자기 경악성을 내질렀다. 백면서생의 맥문을 움켜쥔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사 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일개 서생의 손목이 아니라 그가 잡고 있는 것은 강철인 듯 딱딱했던 것이다. "이... 이!"


그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이쯤되면 웬만한 통나무라 해도 손가락에 의해 부러져야 할 힘 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도리어 그의 손가락이 부러질 듯 통증이 일 뿐, 상대는 끄떡 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럴 수가!" 백천기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의 손목이 상대에게 잡혀있는 것을 보고 가볍게 뿌리쳤다. "크윽!" 놀라운 일이었다. 흑의노인은 비명을 지르며 급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 표 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손아귀 호구(虎口) 부분이 찢어진 채 선혈이 흐르 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의 경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갑자기 백면서생이 왼손을 어설프게 들어올리더니 휙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처음 서생의 자세는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비스듬히 손이 날아드는 순간 그는 기절초풍을 할 듯 놀랬다. "억... 네 놈이 어떻게 노부의 영사장을......?" 백천기는 바로 흑의노인이 조금 전 공격했던 수법을 똑같이 흉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 은 흑의노인의 독문장법인 영사장의 제삼초(三招), 영사출해(靈蛇出海)였다. 쉬익! 날카로운 파공성이 일며 백천기의 왼손은 세 개의 환영을 일으키며 쇄도해 왔다. "헉!" 흑의노인은 방어고 뭐고 깡그리 잊은 듯 황망히 뒤로 물러섰다. 그가 이렇게 당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천하에서 자신 외에는 영사장법을 알고 있는 인물은 없었다. 그런데 백천기가 펼친 초식은 비록 완벽하지는 못했지만 거의 틀림없는 영사출해였던 것이다. 백천기의 낭랑한 웃음이 장내를 울렸다. "핫핫핫! 노인장, 뭘 그리 놀라시오? 이것은 당신이 내게 가르쳐준 것이 아니오?" 그 말에 흑의노인의 안색이 홱 변했다. "뭣이? 내가 가르쳐 ㅈ다고?" "핫핫! 방금 전 친절하게도 내게 자세히 보여주었으니 흉내낸 게 아니겠소?" 흑의노인은 그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이럴 수가? 이제 보니 이놈은 그야말로 귀재(鬼才)가 아닌가? 단 한 번 본 것을


그대로 익 혀 버리다니.......' 그러나 그도 녹녹한 위인은 아니었다. 무림을 종횡하던 마두로서 체면이 땅바닥에 떨어지자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괘씸한 놈! 어린 놈이 감히 노부를 희롱하는구나." "하하, 노인장, 사양치 마시고 또 한 수 받아 보시겠소?" 백천기는 다시 왼손을 기묘하게 쭉 뻗어냈다. 그 수법을 보자 흑의노인은 안색이 흑빛이 되 고 말았다. "그, 그것은 내 마지막 초식인 영사투살(靈蛇投殺)!" 영사투살이라면 바로 그가 청의노인, 즉 구궁산을 죽이기 위해 최후로 발출하고자 했던 초 식으로 영사장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살초였다. 그런데 백천기가 그것마저 전개할 줄은 정녕 꿈에도 몰랐다. 더구나 그 끔찍한 위력을 누구 보다도 잘 아는 흑의노인은 황급히 오른손을 들어 막았다. "으윽!" 선혈이 튀며 흑의노인의 처절한 비명이 사위를 울렸다. 놀랍게도 손과 손이 맞부딪치자 흑의노인의 손은 예리한 칼에 절단된 듯 깨끗이 잘려진 것 이었다. 그러나 백천기의 공격은 그 여력으로 상대의 손을 절단하고도 그의 심장을 쪼개버 리고 말았다. "으아악!" 단말마의 비명이 숲을 흔들었다. 흑의노인은 심장이 쪼개진 채 저만치 붕 떠서 날아가 처박 히고 말았다. "맙소사! 이... 이런 일이......?" 백천기는 대충 펼친 공격이 설마 이런 결과가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멍하니 자 신의 왼손을 내려다보며 그만 몸서리를 치고 말았다. 그의 왼손은 여전히 깨끗하기만 했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채 언제 살수를 전개했느냐 싶 게 아름답기만 했다. "아아, 실수였다. 이 손을 사용하면 안 되는데... 하지만 설마 이런 결과가 나타날 줄이


야......." 백천기는 자책을 금치 못하며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왼손을 내려다 보았다. 신수(神手)라고나 할까? 만년지극용란혈에 의해 단련된 그의 왼손은 이미 손이 아니라 천하 의 어떤 신병이기(神兵利器)도 감당할 수 있는 무서운 무기로 변한 것이었다. 백천기는 한숨을 내쉰 다음 몸을 돌렸다. 그때까지도 고송에 의지하고 서 있던 청의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노인은 만면에 경악과 두 려움의 표정을 띄운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잿빛에 가까울 정도였다. 백천기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노인에게 다 가갔다. "노인장." "우욱!" 청의노인은 대답 대신 비명을 토하더니 그만 모로 쓰러지고 말았다. 백천기는 바닥에 꿇어앉아 노인의 상세를 살펴 보았다. 그는 맥문을 잡아 보았다. 노인의 맥 은 금시라도 끊어질듯 미약하게 뛰고 있었다. 백천기는 그만 탄식해마지 않았다. "아! 아는 것이 병이라더니, 이렇게 되면 또 그 마경(魔經)의 수법을 이용하지 않을 수가 없 게 됐구나." 일련의 사건들이 백천기를 향해 자꾸만 그 반경을 좁혀오고 있었다. 백천기는 막연하게 보 이지 않는 운명의 힘이 자신을 다른 세계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인명은 구하고 볼 일이 아니겠는가.' 그는 청의노인을 안고 숲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숲은 어둠에 잠겨들고 있었다. 그의 가라앉은 중얼거림이 낮게 깔리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 괴이한 일만 당하는구나......." 백천기는 밤이 되어서야 천불사로 돌아왔다. 그는 야음을 빌어 은밀히 청의노인을 안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그것은 이곳의 승려들 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었다. '결국 석반(夕飯)의 약속은 못지키고 말았군.' 백천기는 낮에 있었던 사미승들과의 약속을 떠올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처소는 이곳 천불사의 객당(客堂) 중에서도 가장 좋은 곳이었다. 그곳에는 작은 청(廳)


을 비롯하여 방만 해도 네 칸이나 있었다. 백천기는 그 중 한 칸의 정실에 청의노인을 눕혔다. 이어 그는 아홉 권의 마경들 중에서 요 상(療傷)에 대한 부분을 떠올리며 청의노인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 한 번도 본격적으로 내공(內功)을 운용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동굴에서 나녀를 치료할 때와 마찬가지로 청의노인을 위해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비해야만 했다. 구궁산(丘窮山)은 정신이 들자 먼저 향(香)이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절(寺)......?' 잠시 후 정신이 또렷해지자 그는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본 그는 자신이 정갈한 방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사방 벽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변변한 집기도 하나 없는 방이었다. 그러나 속된 느낌이라고는 전혀 들지 않는 그런 방이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놋쇠로 된 향로(香爐)가 놓여 있었는데, 향로에서는 자색의 향연(香煙)이 가느다랗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향냄새는 정신을 맑게 하는 효험이 있는 듯 했다. 구궁산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난 분명 건곤혈마(乾坤血魔)의 건곤혼원장에 격중되었다. 그야말로 죽은 것이나 다름 없었 는데 지금은 말짱하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전보다 상태가 더 좋아진 것 같으니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사실이 그러했다. 구궁산은 이미 중상이 완치 되었을 뿐더러 그의 체내에는 예전에는 느끼 지 못했던 새로운 힘이 충만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자 그는 머리를 흔들고는 침상에서 내려오고자 몸을 움직였다. 이때였다. 옆방으로부터 한 가닥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노인장, 무리외다. 내상은 대부분 치유되었으나 외상(外傷)은 아직 심한 편입니다. 다소 시 간이 경과되어야 할 것 같으니 섣불리 움직여 상처가 덧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 구궁산은 흠칫하며 침상에 도로 주저 앉았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방 금 문을 열고 들어온 듯한 한 명의 백의서생이 서 있었다. 그를 본 순간, 구궁산의 얼굴에는 경악이 번졌다. '아니! 저 자는?' 비로소 청의노인은 기억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백의서생이야말로 육장(肉掌)으로 단


두 수 만에 자신을 죽이려던 자를 처치한 인물이 아닌가? 구궁산은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정중히 손을 모았다. "소협, 노부를 구해주신 은혜 백골난망이외다. 초면에 이런 큰 은혜를 입었으니 뭐라 사례를 드려야 할지......" 백의서생, 즉 백천기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저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인지상정에 따랐을 뿐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구궁산은 비로소 백천기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내심 감탄해마지 않았다. 백의서생의 용모는 그야말로 준수했기 때문이었다. '이 청년서생은 정말 신비하기 그지 없구나. 영준한 모습도 그렇거니와 더욱 기이한 것 은.......' 구궁산은 다시 유심히 백천기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양쪽 태양혈(太陽穴)이 전혀 돌출되지 않은 데다가 두 눈빛도 안으로 깊숙하게 갈무리되어 있다. 어디에서도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는데 정말 그 내력을 추측할 길이 없구나.' 구궁산은 내심 결론을 내렸다. '내 예감이 틀림없다면 이 청년이야말로 천하에서 둘도 없는 절세의 기인(奇人)일 것이다.' 그가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백천기는 침상 옆에 앉았다. 구궁산은 가볍게 기침을 한 뒤 말 문을 열었다. "노부는 강남제일보(江南第一堡)의 보주(堡主)인 금검철선(金劍鐵扇) 구궁산이라 하오." 백천기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구대협(丘大俠)이셨군요. 소생은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 출신으로 백천기라 합니다. 구궁산은 마음 속으로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뇌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무림에 그런 인물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백천기는 낭랑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소생은 무림인이 아닙니다. 그러니 구대협께선 잘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 "아!" 구궁산은 그제서야 탄성을 발했다. 그러나 곧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무림인이 아니라면 그 고강한 무공은 어찌 익혔단 말인가?' 이때 백천기는 궁금한 듯 물었다. "참, 구대협께서는 어쩌다 그런 위험을 당하게 되셨소이까?" 그 말에 구궁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일을 이 청년에게 말해도 좋을까?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데....... 잠시 후 그는 결심을 굳혔다. "사실 거기에는 연유가 있었소. 얼마 전 노부는 이곳 강소성에 있는 홍택호(洪澤湖)를 지나 다 우연히 기연(奇緣)을 만난 것이오." 구궁산은 눈을 지그시 감고 회상에 잠기는 듯 했다. 그러나 곧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 었다. 지금으로부터 석달 전. 금검철선 구궁산은 강남제일보를 떠나 북상했다. 목적은 누군가를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그에게는 구설연(丘雪娟)이란 딸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출중한 미모와 총명함으 로 인해 주위에 널리 이름을 떨쳐왔었다. 그로 인해 그녀는 강남일미(江南一美)라는 미명까지 얻게 되었다. 그런 구설연이 최근 들어 갑자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아무리 의술이 뛰어난 사람을 초빙해도 치료에 실패하고 말았다. 심지어는 정확한 병명조차 알아내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되자 구설연은 병마에 시달리다 못해 수척해 졌으며 종내에는 예전의 미색(美色)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골이 상접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구궁산의 마음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딸에게 건강을 되찾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백방으로 손을 썼으나 번번이 실패만을 거듭할 따름이었다. 결국 그는 최후로 한 인물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는 바로 약몽자(藥夢子)란 인물이었다. 그는 과거 구궁산의 부친인 구현우(丘玄宇)와 친교 가 있었던 인물로 그의 의술은 당대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그는 무림의 기인이기도 했다. 구궁산이 강소성 홍택호를 향해 출발한 것도 그를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막상 홍택 호에 이르고 보니 마침 약몽자는 출타중이었다. 구궁산은 당연히 크게 실망하여 오랫동안 기다린 후 결국 편지 한 통을 남긴 채 그곳을 떠 나게 되었다. 무작정 보를 비워둘 수도 없었거니와 무엇보다도 딸인 구설연의 병세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


이다. 사건은 그 직후 벌어졌다. 그것은 구궁산이 홍택호 근처의 무진성(武進城)에 잠시 머물던 때 의 일이기도 했다. 구궁산은 본래 골동품에 취미가 있었으므로 성내의 골동품상을 들르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여행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행하는 일이었다. 그는 한 골동품상에서 우연히 옥불(玉佛)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당대(唐代)의 것으로 고 색이 창연한 진품이었다. 구궁산은 선뜻 그 옥불을 사들인 후 객점에 들어 자세히 살펴보기에 이르렀다. 구궁산은 잠시 말을 끊었다. 백천기는 호기심에 이끌려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옥불에서 무엇을 발견하셨습니까?" 구궁산은 자못 심각한 어조로 대답했다. "옥불의 뱃속에서 한 장의 쪽지와 옥갑(玉匣)을 발견하게 되었소." 구궁산은 백천기를 응시하며 물었다. "소협은 혹시 무영귀도(無影鬼盜)에 대해 들은 적이 있소?" "무영귀도?" 백천기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구궁산은 그가 무림인이 아님을 상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귀도는 당(唐) 중기의 인물로 무림사상 최고의 신투(神偸)로 알려진 인물이오. 어려서 부터 도벽(盜癖)이 있었던 그는 자라면서 천하의 모든 진귀한 보물을 훔치겠다는 결심을 했 다고 전해지고 있소." "으음......." 백천기는 처음 듣는 기이한 얘기에 잔뜩 흥미가 당기고 있었다. 그는 무영귀도란 인물에 대해 관심이 일고 있었다. 구궁산이 설명을 계속했다. "결국 그는 결심한대로 무림 최고의 도둑이 되었소. 심지어 그는 황궁(皇宮)의 보물까지도 훔쳤소. 그러나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의 도벽으로 인해 결국은 전 무림인들이 들고 일어나 게 되었소." "어째서 무림인들이?" 백천기가 의아한 듯 묻자 구궁산은 빙긋 웃었다. "무영귀도는 일반인들이 탐하는 보화 외에도 무림의 명문(名門)이나 각 문파들의 진산지보 (眞山之寶)마저 멋대로 훔쳐냈소. 그 중에는 신병이기(神兵利器)는 물론 각파 독문의 무공비


급(武功秘 )까지 들어 있었으므로 무림인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소." "그래서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구궁산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결국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지. 무영귀도는 당시 정사(正邪) 양도 고수들의 합공(合攻)을 받 아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소." "아." 백천기는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무영귀도가 죽은 후에도 그가 평생에 걸쳐 훔친 보물들은 여전히 찾을 수가 없었 소. 그것들은 그가 죽음으로써 영원히 비밀 속에 사라지고 만 것이오." 백천기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렇다면 구대협께서 얻은 옥불과 무영귀도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까?" 구궁산은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옥불은 바로 무영귀도가 훔쳤던 물건 중의 하나일세.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옥불의 뱃속에 그가 남긴 한 장의 비도(秘圖)가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오." "아!" 백천기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그것은 바로 훔친 보물들을 숨겨둔 장보도였소.. 따라서 노부가 우연히 얻은 옥불이야말로 기연이 아닐 수 없었소."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백천기와는 대조적으로 구궁산은 당시의 희열을 떠올린 듯 만면에 흥분의 빛을 띄었다. 그러나 다시 그의 안색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어떻게 된 셈인지 노부가 옥불을 얻었다는 소문이 삽시에 퍼져 나갔소. 결국 그 때 부터 노부는 줄곧 도망자의 신세가 되고 말았소." 백천기는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만 했다. "그 후로 어디를 가나 노부를 기다리는 것은 혈전이었소. 오늘에 이르는 동안 노부가 겪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소. 특히 금화(錦花) 부근에서는 흑도의 이름난 방파인 건곤방 (乾坤 )에 포위되었는데 그들의 우두머리인 건곤칠살(乾坤七煞)의 협공을 당하게 되었소. 백천기는 구궁산의 얼굴에 분노가 어리는 것을 보며 그가 당시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지 능 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노부도 혼신의 힘을 다했으나 그들의 첫째인 건곤혈마가 펼친 건곤장에 적중되어 그만


중 상을 입고 말았소. 그나마 간신히 탈출했는데 다시 건곤칠살의 다섯째인 영사신마(靈蛇神魔) 를 만나게 될 줄이야......." 구궁산은 말을 흐렸다. 이후의 일은 백천기도 익히 아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백천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된 일이었군요." 구궁산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솔직히 말해 노부도 그리 약하지는 않소. 건곤방의 방주인 건곤혈마를 제외하고는 건곤방 에서 날 당할 자는 없소. 만일 협공을 당하지만 않았어도......" 백천기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소생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당한 사내 대장부로 협공과 같은 비열한 수단을 쓰다니, 그들 에게 보물이 넘어가는 것은 하늘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구궁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맙소. 백소협." 백천기는 구궁산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가 올바른 위인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잠 시 염두를 굴리던 그는 안색을 바로 하며 말했다. "구대협, 한 가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소협께서는 무엇을 알고 싶으시오? 노부가 아는 대로 숨김없이 얘기하리다." 백천기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현 무림의 상황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장 강한 인물이 누구인지도 말입니다." 그 말에 구궁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소협은 무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시오?" 백천기는 담담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구궁산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그렇다면 변변치 못하나마 노부가 아는 대로 설명을 해드리겠소. 먼저 무림에서 불리워 지고 있는 노래를 들어 보시오." 백천기는 단정하게 자세를 가다듬으며 귀를 기울였다. 강남(江南)에는 오가(五家)가 있고 강북(江北)에는 사마(四魔)가 있네 쌍자(雙子)가 은거(隱居)하니 혈영(血影)이 나타나고 잔혼(殘魂)이 사라지니 귀검(鬼劍)이 출현한다 사태청(邪泰廳)과 자부(紫府)의 비극을 기억하라 이들이 재출현 한다면 무림은 혈해(血海)가 되리라 구궁산이 노래를 마치자 백천기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노래는 무슨 뜻입니까?" "노래에 나오는 것은 모두 백여 년 이래 가장 뛰어났던 고수와 단체들의 이름이오." 이어 구궁산은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먼저, 강남오가(江南五家)란 양자강(楊子江) 이남의 기라성 같은 다섯 개의 무가(武家)를 일 컫는 것이었다. 그것은 강서성(江西省)의 강남제일보(江南第一堡), 광동성(廣東省)의 신응문(神鷹門), 호북성 (湖北省)의 악가장(岳家莊), 복건성(福建省)의 은창부(銀槍府), 절강성(浙江省)의 백원곡(白猿 谷)을 말했다. 그들은 각각 대대로 내려오는 가문(家門)으로 형성되었으며 무공 역시 대대로 전수되어 오 고 있었다. 이들 다섯 무가는 한결같이 이백 년 이상의 전통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들의 성 세는 도리어 오파일방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들은 저마다 특성이 있었는데 그중 악가장은 쾌검(快劍)으로 유명했으며, 은창부는 창술 (槍術)로 유명했다. 특히 이들 두 가문은 사백 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편 사마(四魔)란 장강 이북에서 흉명을 떨치고 있는 네 명의 개세마두들을 일컬었다. 설산(雪山)의 설산신마(雪山神魔)와 건곤방의 방주( 主)인 건곤혈마(乾坤血魔), 하나의 검은 깃발로 숱한 인명을 살상한 흑풍마번(黑風魔磻), 한 자루 철조(鐵爪)로 위명을 떨친 철마신 조(鐵魔神爪) 등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 중 건곤혈마만이 건곤방을 세웠을 뿐, 나머지 삼마는 모두 독자적으로 행동했 다. 본래 사마와 강남의 오가는 서로가 경원하는 사이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양자강을 경계로 삼고 서로의 지역을 불침하기로 은연중 묵계한 사이였다. 여기까지 얘기한 뒤 구궁산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실 노부가 장강이북으로 건너간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소. 이유야 어찌 되었든 홍택호 부근에 위치한 건곤방의 영역을 침범한 셈이니까......." 백천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내심 중얼거렸다. '무림인들이란 모두가 배타적(排他的)이란 말인가? 이 땅은 엄연히 이 나라 백성의 것이거 늘 어찌 영역을 정하고 타인을 배척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는 곧 입을 열어 물었다. "그럼, 그 노래의 뒷구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구궁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설명했다. 쌍자(雙子). 그들은 달리 무림쌍자(武林雙子)라고도 불리웠다. 그들은 육십 년 전에 은거한 기인들로 나 이는 이미 백 세가 휠씬 넘은 자들이었다. 쌍자는 약몽자(藥夢子)와 천기자(天機子)를 말하는 것으로 이들 두 기인은 세상을 덮을 정 도로 고강한 무공을 지녔음은 물론 각자 천하에서 둘째라면 서러워할 특기를 지니고 있기도 했다. 약몽자는 화타나 편작에 버금가는 의술(醫術)의 대가였으며, 천기자는 각종 진법(陳法)과 천 문지리학(天門地理學)에 통달해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일찍이 무림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들이 은거해버린 이유에 대해서는 강호에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혈영(血影). 이 칭호는 불과 사오 년 전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괴문파를 말하는 것으로 그 문파의 실제 명칭은 혈영마황전(血影魔皇殿)이었다. 혈영마황전은 신비에 가려진 문파였다. 혈영마황전의 전주(殿主)는 물론, 그들의 규모나 위 치조차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무공이 막강하다는 사실만 널리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혈영마황전은 강호에 나타날 때 항상 혈영수(血影手)라 불리우는 표식을 사용했다. 그것은 피처럼 붉은 손(手) 모양의 영패(令牌)로 이것이 나타날 때마다 어김없이 피바람이 일곤 했 다. 혈영마황전이 출현한 지 불과 사오 년 내에 강호상에서 널리 알려지게 된 것도 바로 그 때 문이었다. 여기까지 들은 백천기는 낮게 신음을 발했다. "음, 정말 기이한 단체로군요." 구궁산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혔다.


"강남오가에서는 혈영마황전에 대해 예의 주시하고 있소. 비록 아직까지는 그들이 정면으로 도전한 적은 없으나 분명 나날이 위협적인 존재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오." 백천기는 그가 하는 이야기들을 기억 속에 새겨 두었다. 구궁산은 다시 노래에 나오는 구절 들을 설명해 주었다. 잔혼(殘魂). 그것은 두 사람을 일컫는 말로 잔결마(殘缺魔)와 마혼신(魔魂神)을 말했다. 그들은 정사지간(正邪之間)의 인물들로 성격이 괴팍할 뿐더러 매사를 마음 내키는 대로 행 동했다. 따라서 그들이 정도에 속한 인물인지, 사도에 속한 인물인지조차 파악하기가 힘들었 다. 그러나 그들 역시 이미 사십여 년 이래로 무림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귀검(鬼劍). 그는 최근에 등장한 절세의 검수(劍手)였다. 그는 얼굴에 항상 귀면(鬼面)을 쓰고 다녀 귀검이란 별호가 붙었는데 지금까지 그의 손 아 래에서 삼 초(三招)를 넘긴 자가 없었다. 그는 오로지 검만을 사용했으며 태어나서부터 검을 익힌 듯 놀라운 검법을 구사했다. 그러나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가 늘 쓰고 다니는 귀면탈 외에는 아 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었으며, 심지어는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야말로 신출귀몰하게 나타났다가는 홀연히 사라지곤 하는 그는 최근 들어 무림을 경동시 키고 있었다. 제 6 장 · 공포(恐怖)의 선상혈전(船上血戰) "마지막 구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백천기의 질문에 구궁산의 안색은 갑자기 변했다. 그의 표정에는 일말의 두려움마저 떠오르 고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단체들이오." 이렇게 말문을 꺼낸 구궁산은 한동안 침음하더니 입을 열었다. 북해(北海)의 사태청(邪泰廳)과 남해(南海) 자부신궁(紫府神宮). 이 두 단체는 백 년 전 무림에서 일제히 자취를 감추었던 가공할 세력을 지닌 신비문파였 다. 그 가운데 사태청은 마도(魔道)에 속한 단체였으며, 자부신궁은 정사(正邪)가


불문명한 단체 였다. 이 두 단체가 동시에 그토록 무서운 이름을 떨치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 다.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만 해도 중원에는 구파일방(九派一 )이 있었다. 그런데 백 년 전 가공할 혈겁(血劫)이 일어나면서 그들 중 형산, 공동, 점창, 청성 등의 사파 (四派)가 사태청에 의해 괴멸되고 말았다. 그들이 일시에 몰살하는 비극이 일어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사를 불문하고 사태청과 자부신궁에게 멸문당한 방파는 무려 백여 개가 넘었 다. 그 두 단체의 혈풍에 휘말려 희생된 인명만 해도 수만 명에 달했으니 그야말로 무림사 (武林史) 이래 유례를 찾기 힘든 대참살극이었다. 그런데 정장 혈겁의 장본인인 사태청과 자부신궁은 혈겁을 일으킨 후 강호상에서 돌연히 사 라지고 말았다. 그 이후 백 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흘렀음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 번도 나 타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무림인들은 당시의 끔찍했던 사건을 기억 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당 년의 비극을 전해들어온 무림인들은 그들 두 문파의 이름만 들어도 안색이 변하고 공포심을 느낄 정도니 알만한 일이었다. 여기까지 들은 백천기는 문득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얼마 전 한 동굴의 빙 실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때 내가 본 족자에는 분명 북해 사태청이란 서명이 있었다.' 그는 넌즈시 구궁산에게 물었다. "구대협, 북해 사태청이 사용하는 무공은 혹시 음(陰)에 속한 무공이 아닙니까?" 구궁산은 뜻밖의 질문에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들은 한령마공이란 가공할 극음(極陰)의 무공을 사용하고 있소. 그런데 소협이 어떻게 그것을 아시오?" 백천기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얼버무렸다. "북해는 본시 추운 곳이 아닙니까? 단지 추측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강남제일보의 보주인 구궁산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 만무였다. 그는 강호에서 잔뼈


가 굵은 인물답게 뭔가 낌새를 느끼고는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백천기가 굳이 말하 지 않는 것을 캐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요즘 사천(四川)을 중심으로 종종 무림인들이 죽어가고 있소. 그런데 그 시체의 몸에 청색 장인(掌印)이 남아있는 것이 발견되고 있소." 구궁산은 심각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 청색 장인이야말로 북해 사태청의 독문절기 중 하나인 청살마라장(靑殺魔羅掌)인 것이 틀림없소. 이로 미루어 그들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소. 그들이 다시 등장한 다면 무림은 일대 혈겁에 휩싸일 것이 분명하오." 그의 표정은 어둡게 가라앉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백 년 전의 성세를 지닌 채 재등장한다면 현 무림에서는 아무도 그들을 제지 하지 못할 것이오. 그야말로 무림은 그들에 의해 피바다가 될 것이오." 백천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비록 무림인은 아니었으나 평화가 깨지는 것은 원치 않았 다. 게다가 그는 어렴풋이 무림의 일이 자신과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 다. 그는 생각에 잠긴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구궁산은 그를 바라보며 얼마 전의 광 경을 떠올리고 있었다. 백천기가 영사신마를 간단하게 죽이던 가공할 무공을 떠올리자 불현 듯 한 가닥 서광이 비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영사신마가 비록 건곤칠살 중 다섯째이며 건곤혈마에 비해서는 한 수 아래라고 하지만 그 역시 무림의 일대마두다. 노부가 그와 싸운다 해도 최소한 백여 초는 겨뤄야 제압할 수 있 을 것이다. 그런데 이 청년은 그 자를 단 이 초만에 죽이지 않았던가?' 구궁산은 눈을 빛내며 백천기를 응시했다. '게다가 이 청년은 심지가 바를 뿐더러 유현한 인품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이 청년이야말 로 당금의 난세(亂世)를 타개해 나갈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는 짧은 시간 동안이었으나 백천기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그는 조심스 럽게 입을 열었다. "백소협, 노부 소협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소만......."


그 말에 백천기는 상념에서 깨어나며 빙긋 웃었다. "무엇입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구궁산은 약간 머뭇거리다 어렵게 서두를 꺼냈다. "노부의 생각으로는 무림계에 조만간 무서운 혈풍이 불어닥칠 것 같소. 그러나 아무리 둘러 봐도 이 난세를 평정할만한 인물은 보이지 않소. 다만 혈풍을 막아낼 인물은 오직 한 사람 밖에 없는 것 같소." 백천기는 궁금한 듯 물었다. "어떤 분입니까?" "바로 백소협이오." "넷?" 백천기는 아연한 표정으로 구궁산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구대협께서는 잘못 아셨소이다. 소생은 무림인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무공이라고는 배운 적도 없는데 어찌 무림의 일에 나설 수 있단 말입니까?" 구궁산은 정색을 하며 백천기를 주시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은은히 불쾌한 표정이 떠오 르고 있었다. "끝까지 노부를 놀릴 생각이 아니라면 솔직히 말해 주시오. 노부가 아무리 소협에게 구명지 은을 입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노부를 기만한다면 결코 용납하지 못할 것이오." 백천기는 안색이 변했다. "어째서 갑자기 그런 말씀을......?" "백소협은 정녕 몰라서 묻는 것이오?" 사태가 이쯤에 이르자 백천기는 탄식을 흘려냈다. "소생은 지금까지 구대협께 한 마디도 거짓을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본래 소생이 이곳에 온 것은 며칠 후 열리는 대과에 응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구궁산은 한 치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백소협이 영사신마를 죽인 그 수법은 무엇이란 말이오?" 이번에는 백천기가 정색을 했다. "그 점은 소생에게 피치못할 사정이 있어 말씀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대 협을 속인 것은 없습니다." 구궁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몇 차례나 안색이 변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사정이 있으니 그것은 더 묻지 않겠소. 하지만 소협의 그 무공은 정녕 놀라운 것이었소. 비록 무림인이 아니라 부인하지만 노부가 볼 때 소협께서는 무림과


완전 히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오." 백천기는 그저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허허....... 소협은 영사신마를 가볍게 죽였으니 노부 정도는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오. 그러 니 천하를 상대로 장부의 기개를 펴봄직 하지 않소?" 백천기는 의아한 표정으로 구궁산을 바라보았다. 그는 구궁산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 는지 짐작이 되었던 것이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소생은 일개 문사일 뿐입니다." "허허! 어디 두고 봄세. 결코 소협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오." "하하, 마치 소생에게 협박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허헛! 그렇게 됐나? 하지만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오." 백천기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하지만 소생은 부친과 가문의 뜻도 결코 저버릴 수 없소이다." 구궁산은 집요했다. "문(文)이란 무엇인가? 결국 평화를 추구하기 위함이 아니오? 만일 무림계가 피로 물들게 되면 세상도 결코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오. 그때도 한가롭게 책이나 읽으며 문을 운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백천기는 안색이 변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소생도 역시 그 점에는 공감합니다. 문과 무는 본래가 하나 인즉 올바른 뜻을 펴는 데는 우선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렇소! 당금 무림계는 암운(暗雲)에 휩싸여 있소. 소협께서 지닌 능력을 무림에 헌신 한다면 문으로 입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소이다." "......." 백천기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잠시 갈등의 표정을 짓던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소생의 능력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모르나 이곳의 일이 끝난 후 강남제일보로 한 번 방문하겠습니다." 그 말에 구궁산의 얼굴에는 희색이 떠올랐다. "그게 정말이오?" "물론입니다." 구궁산은 격동을 참지 못하며 백천기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의 노안이 흥분으로 인해 가볍 게 떨리고 있었다.


"고맙소! 소협." 백천기는 멋적은 듯 쓴 웃음을 지었다. "감당키 어렵습니다. 소생이 무슨 능력이 있다고... 기대하시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허허! 그 무슨 말을, 노부의 눈이 틀리지 않는다면 소협이야말로 무림의 구성(求星)이 될 것이오." 구궁산은 문득 품 속에서 비단천에 감싸인 물건을 꺼냈다. 그는 조심스럽게 비단천을 끌러 냈다. 그러자 고색창연한 옥불(玉佛)이 나타났다. 그는 옥불을 백천기에게 내밀며 말했다. "소협을 만난 것을 기념으로 선사하는 것이니 성의를 생각해서 받아주기 바라오." 백천기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아니, 이것을 왜 제게?" 그는 구궁산이 옥불로 인해 죽음에 처하기까지 했다는 것을 들었으므로 도저히 받을 수 없 다고 생각했다. "사양하지 마시오. 예로부터 보물은 인연이 있는 자만이 얻는 것이라고 했소. 향후 무림계에 뛰어들 때 어쩌면 크게 소용 닿을 수도 있을지 모르오. 그러니 아무 말 말고 받아 주시오. 아니, 계속 사양한다면 노부 화를 내겠소." 구궁산의 표정은 엄숙하기 그지 없었다. 백천기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더 이상 거절했다간 정말 그가 화를 낼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결국 그는 옥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잠시 보관해 두겠습니다." 강남제일보주 구궁산. 그가 굳이 옥불을 백천기에게 선사하는 데는 실로 깊은 뜻이 있었다. 그것은 백천기로 하여 금 무림계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백천기가 옥불을 받자 그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스쳤다. "옥불의 뱃속에는 옥갑이 있소. 그 옥갑 속에는 주안신단(駐顔神丹)이란 단약이 있는데 그것 을 복용하게 되면 평생 동안 늙지 않고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놀라운 효용이 있소. 과거 인연이 닿아 얻은 것인데 그것도 소협께 드리겠소." 그 말에 백천기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세상에 그런 약이 있다니... 그럼 불로장생(不老長生)이란 말이 허구가 아니었단 말씀입니


까?" 구궁산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무림계에는 존재하고 있소이다. 앞으로 소협께서 무 림인이 되신다면 그보다 더 신비한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오." 백천기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새삼스러운 눈으로 옥불을 만져 보았다. 문득 그는 이토록 진귀한 물건을 서슴없이 그에게 선사하는 구궁산에 대해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보물을 단 한 번 본 내게 선사하다니, 이 분이야말로 대단한 도량을 지닌 분이구나. 결국 큰 빚을 진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구나.' 그는 막 뭐라 얘기하려다 갑자기 눈썹을 쫑긋 치며 올렸다. 갑자기 귓전으로 경미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 그는 웬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구대협, 누군가 이곳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발자국이 극히 경미한 것으로 보아 보통 사람 이 아닌 것 같습니다." "......!" 그 말에 구궁산은 안색이 변하며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러나 그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객당 밖에서 부는 밤바람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아마 천불사 밖 삼백 장 정도까지 접근한 것 같 습니다." 백천기의 말에 구궁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삼백 장이라고?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구나. 인간의 청력으로 어찌 그토록 먼 곳에서 들려오 는 소리까지 들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구궁산은 백천기가 헛소리를 지껄이는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믿었다. 따라서 더욱 그에 대한 경외감이 일어났다. 백천기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발자국 소리는 두 가지입니다. 그 중 하나는 간격이 뜸하고 딱딱한 것으로 미루어 절름발 이거나 아니면 외발인 것 같습니다." "외발?" 구궁산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 자는 건곤칠살 중 넷째인 독각괴마(獨脚怪魔)일 것이오. 그 자는 왼쪽 다리가


없소." 백천기는 구궁산의 표정에서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직 이 분은 상처가 완치되지 않았다. 그러니 또다른 강적이 닥친다면 위험할 수밖에 없 다. 그렇다면 내가 나설 수밖에 없겠구나.' 그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먼저번에는 운이 좋았다고 치고 이번에도 내가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구나.' 그는 영사신마를 간단히 죽인 것이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번에도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을지가 자신이 없었다. 이제 발자국 소리는 객당 쪽으로 가까워져 있었다. 백천기는 방 안을 둘러 보았다.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구석에 놓여있는 바둑판이 눈에 띈 것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그는 머릿속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바둑판으로 다가가더니 바둑돌을 두 웅큼 쥐었다. 흑돌과 백돌을 각각 한 웅큼씩 집어 낸 것이었다. "......?" 구궁산은 그가 무엇 때문에 바둑돌을 꺼냈는지 알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백천기는 바둑돌을 방 안의 군데군데에 뿌리기 시작했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렇게나 뿌리는 것 같았으나 자세히 보면 그가 방위를 계산하며 바둑돌을 여러 곳에 놓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구궁산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물었다. "백소협, 그것은 혹시......?" 백천기는 다 뿌린 바둑돌들을 살펴보며 빙긋이 웃었다. "기다려 보십시오. 잠시 후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구궁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백천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되었던 것이 다. 이때였다. 밖으로부터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음, 대체 어떤 놈이 다섯째를 그토록 잔인하게 죽였단 말인가?" 그 목소리는 거칠고 음랭한 것이었다. 그러자 다른 목소리가 그 말을 받았다. "정말 제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지 못할 뻔 했습니다. 다섯째의 팔과 가슴에 남겨진 상처로 보아 천고의 신병을 사용한 듯 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자가 구가 늙은이를 구해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방 안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구궁산은 안색이 급변했다. 백천기는 넌지시 물어 보았 다. "구대협께서는 저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구궁산은 침중히 말했다. "알다 뿐이오? 저들은 건곤칠살 중 셋째인 삼지신마(三指神魔)와 넷째인 독각괴마요." 이윽고 발자국 소리는 객당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객당 안으로 들어와 이 방 저 방 뒤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백천기와 구궁산이 있는 정실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백천기는 두 사람을 보게 되었다. 오른쪽의 인물은 매부리코에 음침한 인상의 인물이었다. 그는 눈매가 날카롭게 째진 채 연 신 살광을 발산하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그의 왼손 손가락이었다. 그는 손가락이 세 개밖에 보이지 않았다. 왼쪽의 인물은 다리가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머리칼이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으며 일신에 는 갈의를 입고 있었다. 또한 손에 검은 색의 철장(鐵杖)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다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이때 구궁산은 두 괴인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급히 백천기를 바 라보다가 어리둥절했다. 백천기는 그저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지을 뿐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구 궁산은 그만 탄식을 금치 못했다. '아, 일개 서생 출신인 백공자가 저리 침착한데 노부는 공연히 겁을 먹고 있지 않은가? 정 말 부끄럽구나.' 이때 매부리코의 노인, 즉 삼지신마가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정말 이상하군, 분명 이 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는데?" 그 말에 구궁산은 어리둥절하여 백천기를 돌아 보았다. 백천기는 그와 눈길이 마주치자 그 저 빙긋이 웃어 보이기만 했다. 구궁산은 마침내 영문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 기인이로다! 흔해빠진 바둑돌 몇 개로 방 안에 기문진법을 설치해 놓았구나. 내


비록 그런 줄은 알았으나 이토록 좁은 방 안에서 저 두 노마가 지척에 있는 우리를 발견하지 못 하다니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절세의 진식이구나.' 구궁산은 더욱 더 백천기에 대해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마음이 놓 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는 마음이 느긋해진 채 삼지신마와 독각괴마를 바라보았다. 두 노마는 방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으나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같은 광 경은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두 노마는 구궁산의 바로 옆을 지나면서도 보지 못하고 눈알만 디룩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삼지신마는 눈을 부릅뜨며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흐흐흐, 이제야 알겠구나. 어떤 놈이 이 방에다 잔재주를 피워놓은 것이 분명해!" 그 말에 구궁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노괴물이 이곳에 진식이 펼쳐져 있는 것을 눈치챘구나!' 삼지신마는 신형을 날리더니 방 한가운데를 향해 덮쳐갔다. 펑! "으윽!" 요란한 폭음과 함께 그는 무형의 벽에 부딪친 듯 뒤로 퉁겨져 나갔다. 놀랍게도 방 안에는 무형의 강기( 氣)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삼지신마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곧 분노의 표정을 띄우며 왼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세 개밖에 없는 손가락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방 한가운데를 노려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삼음홍화지(三陰紅花指)로 진법을 격파하고 말겠다!" 슈슈슉! 예리한 파공성과 함께 손가락에서 세 줄기 강맹한 지력이 뻗어 나왔다. 퍼퍼퍽......! 둔탁한 격타음이 들렸으나 방 안에는 여전히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삼지신마에게서 일어났다. "크윽......." 그는 손가락이 부러질 것 같은 통증에 안색이 시커멓게 죽고 말았다. 그것을 보자 이번에는 독각괴마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세째 형님, 소제가 한 번 해보겠소." 독각괴마는 수중에 들고 있던 철괴장을 들더니 방 가운데를 향해 무섭게 휘둘렀다.


위이이잉! 파공성만으로도 철괴장에는 적어도 천 근 이상의 내력(內力)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괴장에 부딪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응?" 혼자 허공을 휘저은 꼴이 된 독각괴마의 얼굴이 황당하게 변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 다. 갑자기 한 가닥 기이한 잠력이 일더니 그의 철괴장을 벼락같이 떨쳐냈다. "억!" 독각괴마는 호구가 파열되는 듯한 격통을 느끼며 뒤로 주르륵 밀려 나갔다. 과연 자신의 손 아귀가 멀쩡할지 의문이 일 정도였다. 그는 손목은 물론 팔꿈치, 심지어는 어깨까지 떨어져 나갈 듯한 격통을 느꼈다. 비로소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일고 있었다. 이때 삼지신마가 창 황하게 외쳤다. "네째, 우리가 상대를 너무 얕보았다. 놈은 예상보다 강하다."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후퇴하자는 뜻이었다. 독각괴마는 부아가 치밀어 거친 숨을 토해 냈으나 그렇다고 감히 다시 공격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철괴장을 거두며 사 나운 음성으로 말했다. "내 오늘은 이대로 간다만 어디 두고 보자! 어떤 놈이든 건곤방을 건드린 이상 제 명대로 살기는 힘들 것이다!" 그 말을 남기고 두 사람은 신형을 날려 사라져 버렸다. 월광(月光). 휘영청한 만월이 대지에 밝은 빛을 뿌려내고 있었다. 달빛은 사람의 마음을 음울하게 만든다. 그것은 평화스러우면서도 웬지 가슴이 울렁거리는 파문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밤, 어두워야 할 밤이 달빛으로 인해 너무 밝기 때문일까? 장강(長江). 도도히 흘러넘치는 대하가 수만 년을 두고 중원의 대지를 갈라 놓은 곳, 역사의 수레바퀴를 따라 온갖 풍운(風雲)이 이 장강의 물결 속에서 포말과 함께 명멸을 거듭했다. 장강에도 월광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도도히 흐르는 강심에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배는 조각배, 돛대 하나. 사공 한 명....... 배의 중앙에 자리잡은 선객(船客)이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백의에서 달빛은 더욱 눈부신


반사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제 약관의 청년이었다. 고아한 문사 차림이되 준수하기 그지없는 외관으로 인해 그의 젊 음이 또한 달빛이 무색하리만큼 찬연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백천기였다. 그는 감상에 젖은 채 장강의 밤을 즐기고 있었다. 일엽편주를 띄우고 홀로 기울이는 그의 술잔 속에도 달이 둥실 떠 있었다. 장강의 물 위에 뜬 달, 밤하늘이 모자라서인가? 신비한 빛을 발하는 그의 검은 동공에도 달 은 떠올라 있었다. 백천기는 자음자작하며 다른 손으로는 하얀 옥선(玉扇)을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이따금 무 엇인가 흥얼거리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한껏 시흥이 도도해진 모양이었다. 사실 선비가문에서 태어난 그가 이런 밤풍경에조차 도취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 한 일이리라. 불현듯 강안(江雁)으로부터 배 한 척이 나타났다. 그 배는 규모도 컸지만 대단히 화려했다. 달빛 아래 강심을 향해 서서히 미끄러져 가는 그 선박은 부호나 명문의 유선임이 분명해 보였다. 배를 잠시 바라보던 백천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정말 멋진 배로구나." 그러자 옆에 서서 삿대질을 하고 있던 사공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공자께서는 저 배를 처음 보시는 모양이구려?" 백천기는 다시 술잔을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는 이 지방 사람이 아니외다." 사공은 유쾌하게 웃었다. "허허허....... 어쩐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 배를 모를 리가 없습죠." 그 말에 백천기는 관심이 동해 물었다. "저 배에는 필시 대단한 내력이라도 있는 모양이구려." 사공은 자기의 견식을 보이는 것이 기분 좋은 듯 우쭐한 음성으로 설명했다. "내력도 내력 나름이 아니겠소이까? 저 배가 황제폐하의 친아우님이신 태성왕(太聖王)께서 타고 계신 배라면 어찌 생각하시오?" "태성왕?" 백천기는 놀란 눈으로 배를 응시했다. 사공의 설명이 계속 되었다. "본시 태성왕께서는 한 곳에 얽매어 계시는 것을 싫어하시는 분이오. 따라서 그 분은 황궁 을 마다하시고 유유자적 살아 가신답디다. 물론 공무는 손을 떼신 지 오래라오."


"......." "그 분께서는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이곳 장강에 모습을 보이시곤 합니다. 아마 오늘은 달빛 이 밝아 나오신 모앙입니다." 백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태성왕에 대해서 어느 정도 들은 바가 있었다. 바로 부친인 백운진을 통해서 였다. 백운진은 관직에 있을 당시 태성왕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두터웠을 뿐 더러 서로의 인품에 대해 흠모하는 사이였던 것이다. 백천기가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문득 강의 맞은 편으로부터 한 척의 괴선박이 태성왕의 배를 향해 무섭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그 배는 전체가 검은 색인데다 지붕까지 철갑으로 씌워진 쾌속선이었다. '웬지 느낌이 좋지 않은데? 저 배가 왜 태성왕 전하의 배를 향해 접근해 가는 것일까?' 백천기는 괴선을 예의 주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쾌속선은 태성왕의 배에 가까이 이르렀는 데도 불구하고 전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꽝! 우지끈! 급기야 괴선은 유선의 옆구리를 세차게 들이박았다. 그와 동시에 백천기는 괴선으로부터 십 여 개의 흑영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보았다. '아차!' 백천기가 놀라는 사이, 날카로운 비명이 야공을 갈랐다. "으아악!" 이어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강상(江上)을 어지럽게 뒤흔들었다. 백천기는 급히 손가락을 들어 유선을 가르켰다. "사공! 어서 저곳으로 배를 대시오." 그러나 사공은 이 놀라운 사태에 겁이 났던지 선뜻 배를 움직이지 못하고 두려운 표정을 지 을 뿐이었다. "고, 공자......"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다시 밤공기를 찢었다. 풍덩! 유선으로부터 시체 한 구가 강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본 사공은 그만 안색이 흑빛이 되고 말았다. 백천기는 노한 음성으로 그를 재촉했다. "어서 노를 저으시오!"


"나, 나는......." 사공은 여전히 멈칫거리기만 할 뿐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였다. 무엇인가 둔중한 물체가 떠내려 오더니 그들이 탄 배에 부딪쳤다. 백천기와 사공의 시선이 일제히 배의 고물 쪽으로 쏠렸다. "으악!" 사공은 비명을 질렀다. 그의 얼굴은 공포로 인해 삽시에 시퍼렇게 질리고 말았다. 백천기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배의 고물에 부딪친 것은 다름 아닌 한 구의 시체였다. 더구나 그 시체의 형상은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머리의 반쪽이 완전히 잘려져 나가 선혈과 뇌수를 강물에 흘려내고 있었다. 백천기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감히 어떤 자가 태성왕 전하가 탄 배를 습격한단 말인가? 정녕 패역무도한 악인들이로구 나.' 풍덩! 문득 바로 옆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사공이 물로 뛰어들고 있었다. 그는 상황이 겁 나게 돌아가자 아예 배를 버리고 도망치는 것을 택한 것이었다. 죽어라 강안으로 헤엄쳐가는 사공을 보며 백천기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난경에 처해 혼자 살겠다고 달아나다니! 역시 소인(小人)은 어쩔 수가 없구나.' 그러나 그 순간에도 유선으로부터 들려오는 병기 부딪치는 소리, 처절한 비명 등은 연신 그 치지 않았다. 하늘도 놀란 것인가? 차츰 먹구름이 끼는가 싶더니 그토록 휘황하던 달빛은 어느새 어둠 속 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주위는 더욱 공포스러운 분위기로 화하고 말았다. 백천기가 홀로 타고 있는 조각배에는 그 동안에도 몇 번인가 둔중한 음향이 더 일어났다. 시체가 계속 떠내려 왔던 것이다. 마침내 백천기는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태성왕 전하가 위험하다. 어떻게든 구해야 겠다.' 다급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침착을 잃지 않았다. '내가 아는 비급의 구결(口訣) 속에 과연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로서는 태성왕의 배까지 다가가는 것조차 힘든 일이 었다. 이때였다. 그의 눈에 떠내려오고 있는 시체 한 구가 들어왔다. 그것을 본 순간 섬전처럼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흑라오격찰(黑羅烏格刹)의 만사경(萬邪經)에 나오는


천령귀혼강시대법(天靈歸魂畺屍大法)을 쓰면!' 멀리서 구할 것도 없었다. 그는 배의 고물에 걸려있는 십여 구의 시체들을 노려보았다. 다음 순간, 그의 눈에서는 괴이한 빛이 흘러 나왔다. 그는 새끼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이빨로 물어 뜯었다. 그러자 손가락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핏방울을 강물에 몇 방울 떨구었다. 실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이어 백천기는 다시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이번에는 피를 세차게 빨아들였다. 입 안 에 피가 가득 고이자 그는 허공에 대고 뿜었다. 푸우......! 놀라운 광경이 벌어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가 뿜어낸 피는 삽시에 허공으로 번지더 니 사위를 온통 진한 혈무(血霧)로 뒤덮고 만 것이었다. 그 반경은 사방 삼 장여에 달했다. 잠시 후 혈무는 거짓말처럼 걷히고 말았다. 그러나 백천기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더욱 놀라운 광경이 벌어진 것은 이때였다. 뱃고물에 걸려 있던 십여 구의 시체들이 돌연 위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 뿐이 아니었다. 시체들의 몸에서는 괴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전신에 경련을 일으 키는 것이었다. 특히 복부에서는 상하로 심한 기복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튼 십여 구의 시체들은 보이지 않는 괴이한 힘에 의해 조종되는 듯 유선을 향해 움직이 고 있었다. 달도 먹구름 속으로 숨어든 컴컴한 강물 위에서 공포의 이동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었다. 유선 위. 갑판에서는 십여 명의 흑의복면인들이 각기 다른 병기를 든 채 흉광을 번뜩이며 사방을 두 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들 도살자(屠殺者)들은 살벌한 기세로 보아 살아있는 어떤 생명체도 용납치 않으려는 듯 했다. "으아악!" 문득 갑판의 후미로부터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웬 놈이냐?" 흑의복면인들은 일제히 비명이 울린 쪽을 돌아 보았다. 순간 그들은 경악성을


내질렀다. "앗! 저, 저것은?" 그들의 눈에 자신들의 동료인 한 복면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등 뒤에 웬 시커먼 그림자를 매단 채 그 그림자에 의해 한창 목을 죄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두둑! 어둠 속에서 뼈마디가 부서지는 음향이 섬뜩하게 울렸다. 이어 그림자가 손을 놓자 복면인 은 그대로 힘없이 고꾸라졌다. 흑의복면인들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더욱이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은 실체를 드러낸 시커먼 그림자의 모습이었다. 물에 퉁퉁 불어있는 시체, 그것도 가슴 한가운데가 갈라터진 참혹한 시체가 아닌가? 더구나 시체의 찢어진 복부에서는 창자가 길게 흘러나와 있었다. "으으...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흑의복면인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눈 앞에 두고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란 바로 이런 것이리라. 복면 사이로 드러난 그들의 두 눈은 경악에 이어 회의와 불신, 그리 고 공포로 뒤바뀌고 있었다. 시체가 갑자기 괴상하게 몸을 움직였다. 껑충 뛰듯이 전면으로 달려든 것이었다. 이어 그 시 체는 번쩍 두 팔을 쳐들더니 한 흑의인을 향해 다짜고짜로 내리쳤다. "헉!" 흑의인은 질겁을 하며 재빨리 옆으로 피했다. 펑! 시체의 팔은 선실의 한 부분에 적중되었다. 하지만 그 위력은 실로 엄청났다. 단단하기 그지 없는 선체의 모서리가 대번에 박살나며 사방으로 잔해들을 튕겨내고 있었다. 간신히 시체의 공격을 피해낸 흑의인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넋나간 듯 시체를 응시하던 그만 미궁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 놈은 아까 내 손에 죽었던 놈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다시 살아나 날 공격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마치 지옥의 염라사자라도 만난 듯 얼이 빠져 버렸다. 우두둑! 우두둑....... 묘한 소리를 내며 시체가 다시 그를 공격했다. 시체의 두 팔이 휘둘러질 때마다 무서운 경 풍이 일었다.


흑의인은 극도의 긴장과 공포로 인해 전신이 마구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간신히 용기 를 내 혼신의 힘을 다해 수중의 대감도(大坎刀)를 휘둘렀다. 쉬익! 팍! 시체의 두 팔이 그의 대감도에 의해 뭉턱 잘라졌다. 팔이 잘라져 나간 둥치로부터 분수같은 핏줄기가 뻗어 나갔다. 핏줄기는 그대로 흑의인의 얼굴과 몸에 흠뻑 뿌려졌다. 피를 뒤집어쓰면서도 그가 느낀 것은 기쁨이었다. '그럼 그렇지, 제깐 놈이 별 수 있나?' 하지만 그의 기쁨은 순간에 그치고 말았다. 두 팔이 팔꿈치까지 잘려진 시체가 곧바로 재공 격을 시도해온 것이었다. "허억!" 흑의인은 그야말로 대경실색했다. 그는 시체의 육탄공격을 간일발의 차이로 간신히 피해내 며 옆구리가 화끈하는 것을 느꼈다. 옷자락과 함께 한 웅큼의 살덩이가 뜯겨져 나간 것이었 다. "크윽!" 뒤늦게서야 그는 비명을 내질렀다. "저... 저 놈은 인간이 아니다! 귀, 귀신이닷!" 누군가의 입에서 공포에 질린 부르짖음이 토해져 나왔다. 사태가 이쯤 되자 다른 흑의인 한 명이 분통을 터뜨리며 성큼 나섰다. 그는 우람한 체구를 지닌 자였다. "빌어먹을! 귀신이든 인간이든 모조리 박살을 내버리겠다." 거칠게 외친 그는 미친 듯이 수중의 귀두도를 휘둘렀다. 위이잉! 파파팟! "크아악!" 시체는 허공을 찢는 듯한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끔찍하게도 머리 위 백회혈(百會穴)로 부터 가랑이 사이 회음혈까지 정확하게 두 동강이 나고 만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설사 귀신인들 별 수가 있겠는가? 쿵! 하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시체는 두 조각으로 나뉘어 각기 따로 갑판 위에 쓰러졌다. 낭자한 피가 갑판을 역한 피비린내로 메웠다. "휴우!" 흑의인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쿵! 쿵쿵....... 연이은 괴음향이 그들의 등 뒤로부터 들려왔다. 흑의인들은 또다시 가슴이 철렁하여 뒤를 돌아다 보았다. "으으으!" 그들은 공포에 질린 채 그 자리에서 얼어 버리고 말았다. 갑판 위에는 한 구도 아닌,


무려 아홉 구의 시체들이 장승처럼 우뚝우뚝 서 있었다. 형태도 가지가지였다. 가슴이 뻥 뚫리거나 복부가 갈라진 시체, 혹은 팔이나 다리가 끊어진 시체 등, 목불인견이 따로 없었다. 공통점이라면 하나같이 환생(還生)이란 꿈도 못꿀 정도로 치명상을 입고 있다는 것이었으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들이 눈을 부릅뜬 채 떡 버티고 서 있으니 실로 기가 막힐 노릇 이었다. "이, 이 놈들이......" 흑의인들은 마침내 간장이 바짝 오그라 붙는 듯한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시체들이 성 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으으......!" 흑의인들은 발바닥이 갑판에 달라붙은 듯 꼼짝도 못한 채 연신 신음만을 흘려내고 있었다. 개중에 담력이 뛰어난 몇몇 흑의인들이 병기를 휘두르며 시체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병장기가 일으키는 파공성이 밤공기를 갈갈이 찢어놓았다. "크아...... 악!" 여기저기서 처절한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투툭... 촤아악! 시체들의 잘린 팔다리가 갑판 위에 여기저기 나뒹굴었고, 그 때마다 분수같은 핏줄기가 허 공에 피안개를 뿜어댔다. 갑판 위의 정경은 그야말로 아수라지옥이었다. 시체와 살아있는 인간의 대결! 달빛도 없는 음산한 밤, 강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같은 장면은 그야말로 직접 보지 않고 는 믿어지지 않는 불가사의한 장면이었다. 애초부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싸움이었다. 선상의 흑의복면인들로 치자면 무림에서는 가히 일류급 고수들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고 한들 시체를 상대로 싸운 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영혼(靈魂)이 없는 시체들은 두려움을 알 리가 없었으므로 육체의 일부를 잃으면서도 도무 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흑의복면인들은 마침내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동작이 둔해져갔다. 차츰 그들은 밀리기 시작 한 것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판 위는 인육(人肉)과 피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마침내 갑판 위에는 정적이


돌아왔다. 그 위에서 비틀거리는 것은 오직 한 개의 그림자였다. 그는 열 명의 흑의복면인들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였다. 나머지 흑의인들은 이미 시체로 변해버린 지 오래였다. 홀로 남은 흑의인은 마치 악귀나찰 같은 형상이었다. 전신에는 온통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 으며 두 눈은 광기(狂氣)로 번들거렸다. 문득 그는 수중의 검을 번쩍 치켜들더니 마구 휘둘 러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그는 미쳐버린 듯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퍽! 퍽! 퍽...... 혈육이 뒤범벅이 되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그러나 그때였다. 그의 등 뒤로부터 한 가닥 차 가운 냉소성이 들려왔다. "뭘 그리 억울해 하시오? 준 것을 되돌려 받는 것이야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소?" "헉!" 흑의인은 경악성을 발하며 급급히 뒤로 돌아섰다. 제 7 장 · 태성왕(太聖王) 흑의인의 눈 앞에는 한 명의 백의서생이 서 있었다. 흑의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음성을 흘려내고 말았다. "네, 네 놈은 누구냐?" 백의서생, 즉 백천기는 착 가라앉은 눈길로 갑판 위의 참경을 둘러보았다. 그는 눈살을 가볍 게 찌푸리는 듯 했으나 곧 냉랭하게 말했다. "널 지옥으로 데려갈 사신이다." 그러자 공포와 살육으로 인해 이성이 마비되어 있다시피 한 흑의인은 앞뒤 가릴 것도 없이 다짜고짜로 덤벼들었다. "미친 소리하지 말아라!" 그의 수중의 장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몸부림에 불과했다. 이미 전신에 무수한 상처를 입고 있는 그로서는 정확한 초식을 구가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백천기는 가볍게 왼손을 들어 올렸다. 쩡! 하는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검은 여지없이 동강나고 말았다. 그 사이 백천기는 우수 로 영사신마에게서 눈대중으로 훔쳐배운 영사장법(靈蛇掌法) 중 마지막 살초 영사투살(靈蛇 投殺)을 펼쳤다. 퍽! 그의 우수는 흑의인의 어깨에 격중되었다.


"윽!" 흑의인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백천기의 왼손이 번뜩 움 직였다. "크아악!" 흑의인은 처참한 비명을 내질렀다. 백천기의 왼손이 그의 가슴을 꿰뚫고 등까지 관통해버린 것이었다. "끄으으......" 흑의인은 두 눈을 휩뜬 채 서서히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백천기는 왼손을 뽑아낸 뒤 뒤로 물러났다. 쿵! 하고 앞으로 쓰러진 흑의인은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축 늘어져 버렸다. 즉사한 것이었 다. 그가 죽자 백천기는 전신을 휘청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게 아니었는데.... 저 자는 이미 저항 능력을 상실하지 않았던가?" 백천기는 넋을 잃은 듯 흑의인의 시체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 나왔 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잔인해 졌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때였다. 선실로부터 은은한 소리가 들려왔다. '또 누군가 있구나!' 그는 갑판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복도는 길게 뻗어 있었다. 음향은 그 복도의 끝으로부터 들 려오고 있었다. 선실(船室). 선실 안은 매우 넓었으며, 특별히 신경을 써서 꾸민 듯 호화로우면서도 고상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지금 선실 한 가운데에는 두 명의 황의복면인이 서 있었다. 복면 사이로 엿보이는 눈에서는 살기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한쪽에서는 숨막히는 결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한 명의 황의복면인 과 청의를 입은 소녀가 일대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청의소녀는 대략 십팔구 세 정도 되어 보였는데 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아름다운 절세미녀였다. 그는 날렵한 청의경장을 입고 있었는데 가슴에는 은색 수실로 매화(梅花)를 수놓고 있었다. 치렁치렁한 흑발은 푸른 띠로 질끈 묶어 등 뒤로 넘겼는데 몸을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리고 있었다. 백옥같은 피부에 그린 듯 고운 눈썹, 한 쌍의 봉목(鳳目), 곧은 콧날과 붉은 입술은 가히 경 국지색이었다. 몸매 또한 늘씬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아미를 매섭게 치켜올린 채 한 쌍의 교수(嬌手)를 어지럽게 흔들며 황의복면인과 싸 우고 있었다. 그러나 힘이 부치는 듯 반듯한 이마에는 구슬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녀의 뒤쪽에는 금포노인이 우뚝 서 있었는데 인상이 고결하기 이를데 없었다. 근엄하게 생긴 사각형의 얼굴에 흰빛이 섞인 눈썹은 양 옆으로 길게 뻗쳐 있었으며, 반백의 수염이 가슴까지 늘어져 있었다. 체격은 다소 호리호리한 편이었으나 타인을 압도하는 위용 때문인지 사뭇 당당해 보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얼굴에는 온통 복잡한 표정이 얽혀 있었다. 이때, 청의미소녀가 앙칼지게 외쳤다. "네 놈들은 무엄하기 짝이 없구나! 감히 왕야(王爺)의 목숨을 노리다니, 국법이 무섭지도 않 느냐?" 마주 싸우던 황의복면인이 음산하게 내뱉았다. "흐흐흐! 계집년, 헛소리는 집어 치워라. 왕야고 뭐고 목숨을 부지해야 가능하지 않느냐? 게 다가 국법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뭣이? 이런 발칙한 놈들!" 청의소녀는 격분하여 옥수를 더욱 거세게 떨쳐냈다. 쌔애액! 날카로운 경기가 매섭게 황의복면인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황의복면인은 여유만만했다. 그는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 이리저리 몸을 피하며 음흉한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얼굴은 곱상하게 생긴 계집이 입은 꽤나 더럽구나. 본 어르신이 좀 매만져 주 마." 그의 양손이 교묘하게 교차되더니 앞으로 쭉 뻗어 나갔다. 그것을 본 청의소녀는 놀란 외침 을 터뜨렸다. "천목장(天目掌)! 그럼 네 놈들은 바로 천목삼귀(天目三鬼)로 구나?" 그러자 선실 가운데에 있던 황의복면인이 차갑게 외쳤다. "세째, 일이 지저분하게 되었다. 우리들의 정체가 노출된 이상 그 계집을 살려둘 수 없게


되 지 않았느냐? 우리의 정체를 안 이상 그 계집은 살려둘 수가 없게 됐다. 당장 숨통을 끊어 버려라." 청의소녀를 상대하던 황의복면인은 눈알을 희번뜩이며 대꾸했다. "알았소, 첫째형, 십 초 내로 결판내겠소이다." 이어 그는 두 손을 번갈아 교차시키더니 더욱 기묘한 수법으로 쌍장을 휘둘렀다. "앗!" 청의소녀는 다급히 몸을 비틀며 피했다. 연신 뒤로, 옆으로 몰리는 그녀는 더욱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긴 머리칼이 헝클어져 이마와 목덜미에 엉켜붙고 있었으며, 만면에 초조해하는 기색이 드러 나고 있었다. 찌익! 급기야 그녀의 상의 앞자락이 길게 찢겨져 나갔다. 황의복면인의 장력에 비스듬히 스쳐맞은 것이었다. 그녀의 뽀얀 살결이 목덜미를 비롯하여 젖가슴 바로 위까지 드러나고 말았다. "이... 악적!" 청의소녀는 수치감과 분노에 그만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그녀는 드러난 살결을 감추느라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다급히 물러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황의복면인은 득의의 괴소를 흘리며 다가섰다. 청의소녀를 제압하는 것은 시간 문제인 것이었다. "멈춰라!" 문득 웅후한 음성이 장내를 울렸다. 이제까지 사태를 바라보고만 있던 금포노인이 앞으로 나선 것이었다. 그는 흰 눈썹을 꿈틀거리며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무슨 연유로 본 왕야의 목숨을 노리는가?" 비록 짧은 한 마디였으나 위엄이 깃든 음성이었다. 황의복면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러나 곧 우두머리인 듯한 황의인이 차갑게 내뱉았다. "알 필요 없소이다. 우리는 그저 명을 받고 이행하는 것 뿐이오." "뭣이?" 금포노인이 다시 뭐라 말하기도 전, 황의인은 버럭 고함쳤다. "셋째! 뭘 하느냐? 빨리 그 계집부터 죽여라." "넷!" 셋째라 불리운 황의복면인은 청의소녀를 향해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금포노인, 즉 태성왕은 크게 분노했다. "무엄하기 짝이 없는 도배들이로다!"


말과 함께 그는 양손을 무섭게 떨쳐냈다. 꽝! 천목삼귀의 셋째는 황급히 장력을 맞받았으나 뒤로 세 걸음이나 주르륵! 밀려나고 말았다. 그는 물론 다른 천목이귀조차 그 광경에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태성왕이 무공을 익혔다는 말은 들었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실력이구나!' 태성왕은 노기어린 음성으로 외쳤다. "본 왕야는 오늘 네 놈들을 붙잡아 국법이 분명 살아있음을 보여주겠노라." 그 말에 천목이귀가 비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왕야 나으리! 과연 그것이 당신 뜻대로 될까? 당신의 무공은 꽤 쓸만하지만 우리 천목삼귀에 비하면 아직 멀었소." 그는 앞으로 나섬과 동시에 쌍장을 휘둘러 공격했다. 위잉! 웅후한 경풍이 파도처럼 밀려나갔다. 태성왕은 눈썹을 꿈틀하더니 역시 쌍장을 연달아 마주 뻗었다. 펑! 퍼펑! 몇 차례의 요란한 폭음이 터지며 장력의 소용돌이가 선실 안에 일대 회오리를 일으켰다. 그 바람에 온갖 기물들이 마치 폭풍을 만난 듯 마구 휘날렸다. 두 사람의 대결은 막상막하였다. 그들은 똑같이 한 걸음씩 물러나 있었으며 서로 상대에 대 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편, 천목삼귀의 셋째는 여전히 청의소녀를 몰아부치고 있었다. 그는 완전히 승기를 잡아 청의소녀를 구석으로 밀고 갔다. 찌익! 다시 청의소녀의 옷이 찢어졌다. 이번에는 하의였다. 덕분에 그녀의 눈부신 허벅지까지 찢어 진 옷자락 사이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것을 보자 삼귀의 눈에는 탐욕의 빛이 일어났다. "흐흐흐! 기가 막힌 살결이구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쓸만한 계집이군." 그의 노골적인 말에 청의소녀는 치를 떨었다. 하지만 속살을 보였다는 수치심 때문인지 그 녀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흐흐흐, 귀여운 계집." 삼귀는 음탕한 눈빛을 번뜩이며 그녀에게 다가들었다.


꽈앙! 엄청난 굉음이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선실 한쪽의 벽에 구멍이 뚫려버린 것이었다. "엇! 누구냐?" 천목삼귀는 일제히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뚫린 구멍으로부터 한 백의인영이 뛰어들고 있었다. 그는 무서운 속도로 곧장 셋째에게로 덮쳐들었다. 삼귀는 느닷없이 백영이 덮쳐오자 다급히 손을 들어 막았다. 그의 손이 무엇엔가 부딪쳤다. 퍽! 하는 섬ㅉ한 음향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단순한 동작의 결과는 비참했다. 삼귀의 손은 그대 로 절단되고 만 것이었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피분수가 잘린 그의 손목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불행은 거기 서 그치지 않았다. 백영의 손이 허공에 원을 그린 순간 무엇이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삼귀 는 머리가 박살나며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황천으로 가고 말았다. 이 갑작스런 사태에 천목이기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때 백영은 다시 천목삼귀의 둘째인 이기를 향해 날아갔다. 이귀는 혼비백산하며 다급히 등 뒤에서 자오구(子午鉤)를 꺼내 후려쳤다. 백영은 물론 백천기였다. 그는 왼손을 뻗어 자오구의 끝을 덥썩 잡았다. 그 광경에 이귀는 만면에 희색을 띄었다. '이 놈이 죽을려고 환장을 했구나! 맨손으로 무기를 잡다니.' 그는 자오구를 힘껏 비틀었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자오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백천기의 입에서 느닷없이 광소가 터져 나왔다. "으핫핫핫핫......!" 우지직! 자오구의 끝이 엿가락처럼 구부러지고 있었다. 이귀의 안색은 시뻘겋게 변해 버렸다. 찰나, 백천기의 오른손이 그의 목을 찔러갔다. 그 바람에 이귀는 그만 자오구를 놓아 버리고는 다 급히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가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부릅떴다. 어느새 백천기의 오른손이 그 의 가슴을 스쳐간 것이었다. 핏물이 배어나와 가슴을 시뻘겋게 적셨다. "가라!"


냉오한 일갈이 일더니 자오구가 번뜩 날아와 그의 가슴을 쑤시고 들어갔다. "으아악!" 이귀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그는 맥없이 선실의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의 손은 가슴에 박힌 자오구를 붙잡고 있었으나 뽑아낼 수가 없게 되었다. 이미 숨이 끊겼기 때문이 었다. "으으......" 대귀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저 숨을 서너 번 쉬었다 싶은 순간에 두 명의 아우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백천기의 차가운 음성이 그를 일깨웠다. "너희들을 조종한 자는 대체 누구냐? 이실직고하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 대귀는 정신이 들자 이를 부드득 갈아부쳤다. "이... 이 찢어 죽일 놈!" 그는 등 뒤에서 검을 뽑았다. "건방진 놈! 내 네 놈의 심장을 꺼내 잘게 썰어주마!" 백천기는 냉소했다. "개전의 여지가 없군. 결국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그는 선실 안을 둘러보았다. 벽에 한 자루의 검이 걸려있는 것을 보자 태성왕을 향해 공손 히 물었다. "왕야, 저 검을 잠시 빌려도 되겠습니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시오. 소협." "감사합니다. 왕야." 백천기는 정중히 포권하고 나서 검을 두 손으로 취했다. 스르릉......! 검을 뽑자 용의 울음과도 같이 웅후한 음향이 선실을 울렸다. 일단 검이 뽑혀지자 검신에서 뿜어지는 광채가 선실 안을 휘황하게 만들었다. 백천기는 서서히 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그것을 보자 대귀는 내심 의혹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된 거지? 저 놈의 자세로 미루어 평생 검을 한 번도 만져보지도 못한 것 같지 않은 가? 온통 헛점 투성이의 저 자세는......' 그러나 곧 그는 자신의 생각을 부인했다. '아니다! 두 아우를 죽인 것만 봐도 놈은 절정고수다. 놈이 저러는 것은 필시 연극일 것이 다.' 대귀는 이렇게 결론을 지으며 바짝 긴장을 조였다. 검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는 축축히


땀 이 배이고 있었다. 이때, 백천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방위를 이동하고 있었다. 과연 발검 자세 치고는 도대체 상리와 맞는 부분이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발을 옮길 때마다 부스러진 나무 조각들이 그의 발길에 따라 움직이며 모종의 진세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대귀는 일각일각 그야말로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감히 선제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한 그는 초조한 심정을 억누르며 백천기가 움직이는 대로 빙글빙글 따라 돌고 있었다. 그가 공격을 개시한 것은 순전히 끓어오르는 울화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죽어라!" 슈슈슉! 그가 검을 휘두르자 귀를 찢는 파공성과 함께 다섯 갈래의 검기가 부채살처럼 퍼지며 날아 갔다. 그것은 뼈를 가를 듯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뻗어 나갔다. 그런데 검기가 막 백천기를 덮친 순간, 뜻밖에도 주위환경이 돌변하는 것이 아닌가? "앗! 이럴 수가......?" 갑자기 정신이 빙글빙글 돌자 대귀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천지가 칠흑같이 캄캄해졌을 뿐 더러 온통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은 충격이 온 것이었다. 그는 기혈(氣血)이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더불어 그의 내공이 스르르 무산되어 버리고 말았 다. 그는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이게 대체 어찌된 영문이란 말인가?' 이때 그의 귀로 한 가닥 차가운 웃음이 들려왔다. "후후후, 잘 가시오." 한 자루의 검이 대귀의 가슴을 후비고 들어갔다. 써늘한 검날의 촉감에 대귀는 전신을 부르 르 떨었다. "으으으......"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찢어져라 부릅뜬 그의 눈에 비로소 주위 경물들이 살아났다. 동시 에 면전에서 싸늘하게 웃고 있는 백의서생의 모습도 보였다. "이... 이럴 수가......? 믿... 을 수가 없다!" 대귀는 신음처럼 중얼거리며 비틀거렸다. 그 순간 검이 뽑혀져 나갔다. 촤악......! 한 줄기 피보라가 허공으로 분출되었다. 동시에 그의 몸은 ㅆ은 짚단처럼 앞으로


고꾸라지 고 말았다. 백천기는 무감동한 눈으로 대귀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인도 타성(惰性)일까?'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살생에는 명분이 존재한다 는 점이었다. 마침내 백천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림인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백천기는 시선을 태성왕에게로 돌렸다. 태성왕의 근엄한 얼굴은 다소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백천기의 눈길과 마주치자 표 정을 풀더니 씁쓸하게 말했다. "소협,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더라면 오늘 이후 두 번 다시 장강의 달빛을 보지 못할 뻔 했 군." 그는 왕야의 신분이면서도 소탈한 어투를 구사하고 있었다. 백천기는 그 점에 호감을 느끼 며 허리를 굽혔다. "황공합니다. 전하." 그는 허리를 펴며 비로소 태성왕을 정시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이때 대 충 옷매무새를 고친 청의소녀가 청아한 음성으로 말했다. "전하, 이곳은 어지러우니 옆방으로 옮기소서." 태성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지. 소협, 이리 오게나." 두 사람은 옆의 선실로 자리를 옮겼다. 청의소녀가 재빨리 의자를 가져와 태성왕이 상좌에, 백천기는 그의 맞은 편에 앉았다. 백천기는 청의소녀가 자신을 유심히 쳐다보는 것을 느끼고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태 성왕이 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소협에게 우선 이 아이부터 소개해야겠군." 백천기는 고소를 떠올렸으나 가벼운 목례로 답했다. "이 아이는 내가 데리고 있는 아이로 아주 영특하지. 이름은 모용산산(募容珊珊)이라고 하 네." 청의소녀 즉, 모용산산은 얼굴을 붉히며 백천기에게 사뿐히 절을 했다. 그러한 그녀는 천성 적인 미모를 지니고 있어 행동 하나하나가 고혹적으로 보였다.


백천기도 정중히 답례했다. "소협의 이름은?" 태성왕의 말에 백천기는 신색을 가다듬으며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생은 백천기라 합니다." "백천기?" 태성왕은 그의 이름을 뇌이더니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백천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께서는 소주성에 기거하고 있는 백운진이란 분을 기억하십니까?" 태성왕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것을 보며 백천기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 분이 바로 부친이십니다." "아! 그랬었군!" 태성왕의 얼굴에 비로소 환한 웃음이 드리워졌다. "백공의 자제라면 전날 선은장의 신동(神童)이라 불리웠던 인물일텐데, 그가 바로 자네였 나?" "과장된 소문일 뿐입니다." 태성왕은 금포를 떨치더니 덥썩 백천기의 손을 잡았다. "내 진작부터 백공으로부터 자네 얘길 들었네만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어 유감이군. 아무튼 반갑네." "황공합니다." 태성왕은 깊은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듣자하니 자네는 만 권의 책을 모두 읽기 전에는 장원을 나서지 않겠다고 공언했다던데 어 떻게 이 남경까지 오게 되었나?" 백천기는 그 말에 담담히 말했다. "얼마 전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그럼 이미 만 권의 책을 모두 독파했단 말인가?" 태성왕은 자못 경탄이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뿐만 아니라 모용산산도 크게 놀란 기색이었다. 만 권의 책을 모두 읽다니,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을 읽어도 그 절반도 읽지 못 할 분량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방대한 양을 그것도 약관에 불과한 청년이 모두 독파했다니, 모용산산은 믿 어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그윽한 시선은 백천기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정말 대단한 분이시구나.' 사실 모용산산은 어려서부터 왕가에서 자라나 늘 대하는 것이 모두가 명문대가의 귀공자들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자신이 그 동안 보았던 어떤 세도가의 공자도 백천기에게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장담할 수 있었다.


백천기의 담담한 음성이 들렸다. "소생은 금번 대과를 치르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태성왕은 가슴 앞에 늘어진 반백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만 권의 지식이 어디 가겠나? 그 정도 실력이라면 능히 장원이 되고도 남음이 있 을 것이네." 백천기는 민망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단지 읽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학문의 깊은 오의(奧意)를 깨닫기에는 소생 아직 멀 었습니다." "으음......." 겸양을 하면 할수록 신뢰감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백천기를 바라보는 태성왕의 눈에는 점 차 깊은 관심이 깃들고 있었다. 문득 태성왕은 정색을 하며 물었다. "그런데 자네의 부친은 학사인데 자네는 어찌 그리 뛰어난 무공을 익힐 수 있었는가?" "그것은......." 백천기는 갑작스런 질문에 그만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그러자 태성왕은 기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황가의 핏줄을 타고 났으면서도 무공을 연마했네. 그러니 자네가 솔직히 말한다 해도 이해하겠네. 그렇지 않은가?" 그 말에 백천기는 비로소 용기를 내서 말했다. "소생은 그저 우연히 상고의 비급을 얻어 스스로 몇 수 익힌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일은 부친께서는 전혀 모르고 계십니다." 태성왕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랬었군. 그렇다면 내 자네 부친에게는 아무 말 하지 않겠네." "감사합니다. 왕야......." 백천기는 태성왕에게 더할 나위 없는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그는 부친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그에게 털어놓게 된 셈이었다. 어느덧 밤이 가고 환하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선실의 창을 통해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백천기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정중하게 읍하며 말했다. "날이 밝았습니다. 소생은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태성왕은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서는 웬지 한 가닥 망설임이 어려있었다. "그럼."


백천기가 막 몸을 돌리는 순간 태성왕은 비로소 말을 꺼냈다. "천기, 내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네." "하명하십시오." 태성왕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백천기를 올려다 보았다. "며칠 안으로 왕부(王府)를 방문해 주지 않겠나? 내 자네에게 긴히 할 말이 있네." 백천기는 흔쾌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대과가 끝난 후 찾아뵙겠습니다." "고맙네." 태성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애스런 시선으로 백천기를 바라보았다. 백천기는 뒤로 몇 발자 국 물러나 다시 허리를 굽혔다. "그럼, 전하께서는 옥체 보중하시기 바랍니다." 태성왕은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 가게. 천기." 백천기는 걸음을 옮겨 선실문을 나섰다. 그가 사라지자 선실에는 태성왕과 모용산산만이 남게 되었다. 태성왕은 혼잣말처럼 중얼거 렸다. "으음, 기대 이상이군.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더니, 필시 당년의 백공을 능가할 것 같구나." 한편 시종 백천기를 지켜보고 있던 모용산산은 넋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백천기 가 사라진 선실문 쪽에서 여전히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백천기.......' 비록 처음 대하는 상대였으나 백천기의 영상은 이미 그녀의 방심(芳心)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말았다. 십팔 년 동안 굳게 닫혀있던 그녀의 마음 문이 활짝 열린 것이었다. 모용산산. 그녀는 실상 기구한 운명의 소녀였다. 그러나 정인(情人)을 맞이한 순간부터 그녀의 인생은 화창한 봄날로 새롭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꿈에 잠긴 듯 몽롱한 표정으로 봄맞이의 첫 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었다. "산산아, 서둘러야겠구나. 지난 밤 변괴로 배가 엉망이 아니냐? 너는 가서 남아 있는 선부들 을 찾아보아라." 태성왕의 음성이었다. 그러나 모용산산은 그 말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그저 못박힌 듯 서 있을 따름이었다. 태성 왕은 좀 더 큰 목소리로 불렀다. "산산!" 그제서야 모용산산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네?"


태성왕은 그녀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헛헛헛......! 내 선부들을 소집해 보라고 했느니라." 모용산산은 그만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내심을 들킨 그녀는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푹 떨구었다. "부디 용서를....... 소녀가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 같사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친 뒤 종종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태성왕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흠, 저 아이의 가슴에도 드디어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구나." 제 8 장 · 음양마유공(陰陽魔幽功) 천불사(天佛寺)의 객당(客堂). 백천기는 방 안의 탁자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붓으로 열심히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 었다. 그것은 사람의 인체구조였다. 특히 그는 인체의 각 혈도를 상세히 그리고 있었다. 혈도를 잇는 수많은 선은 그야말로 거미줄같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백천기는 무아지경에 빠진 듯 섬세하게 붓을 놀려 혈도와 혈맥을 그려나가고 있었다. 붓이 움직일 때마다 혈도의 위치와 그것을 잇는 경맥의 선이 추가 되었다. 지금까지 그가 그려놓은 혈도의 숫자만도 사백이십여 곳, 이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삼백육십오 개를 이미 한참이나 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천기의 손은 도무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또한 그가 새롭게 추 가하는 부위는 세간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백천기는 붓을 놓으며 탄식했다. "아, 이 음양마유공(陰陽魔幽功)의 도해는 정말 오묘불가사의 하구나." 그의 눈은 완성된 인체의 도해를 내려다 보았다. '내 의술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는데 인체에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혈도 와 경맥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백천기는 새삼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 동안 나는 문(文)에만 치우쳐 무(武)를 경시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한 낱 우물안 개구리의 소치일 뿐이다. 진정한 무학의 세계를 엿보게 되니 지난 날의 내가 우


스워지는 느낌이 드는구나.' 그는 눈빛을 번쩍이며 도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인체의 머리부분에 멎어 있었다. "양쪽 태양혈과 천뇌혈(天腦穴)을 연결하고 있는 이 부분의 경맥이 인간의 두뇌를 조종하고 있다. 이것을 잘 활용함으로써 인간의 두뇌를 두 개로 나눌 수 있게 될 줄이야......." 백천기는 경맥과 혈도가 있는 위치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바로 음양마유신(陰陽魔幽神)이 남긴 음양마유공이었다. 백천기는 기억을 되살려 바 로 도해를 완벽하게 그려낸 것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음양마유공의 구결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뇌리 속에 자자구구가 한 자도 남김없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제 백천기는 더 이상 마공(魔功)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몇 차례의 환란을 겪은 이후로 무공을 익혀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어디, 공력을 운행해 보자.' 그는 침상 위로 올라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양손을 각기 양쪽 가슴에 엇갈리게 포갠 자세 를 취했다. 그러한 운공 자세는 드물게 보는 것이었다. 보통 내공을 운공할 시에는 양손을 배꼽 밑 단 전(丹田) 부위에 놓는 것이 일반적인 자세였다. 아무튼 백천기는 그 상태에서 음양마유공의 구결에 따라 호흡과 운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일단 호흡법만도 무척 까다로왔다. 숨을 연속하여 세 번 들여 마신 후 이빨로 혀를 반쯤 깨 물고는 코와 입으로 동시에, 그것도 정확히 반만 내뱉아야 했다. 나머지 반의 숨은 기력을 모으듯 가슴 속에 깊숙이 밀어 넣어야 했는데 이를 반복해서 지속 하기란 여간 힘든 노릇이 아니었다. 인내란 곧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백천기는 과거 학문을 익힐 때나 수양을 쌓아갈 때도 지금 과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무엇이든 궁극에 이르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고 그는 이 사실을 이미 오래 전에 깨닫고 있었다. 음양마유공의 구결대로 운공하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백천기의 단전에서는 처음으로 한 줄기 진력(眞力)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오오!' 그가 막 기쁨의 탄성을 발하는 찰나, 갑작스러운 기현상이 일어났다. 단전에서 형성된 진기 는 열력을 띄우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용암처럼 마구 들끓으며 엄청난 양으로 증폭된 것이었 다. '으윽!' 백천기는 흡사 단전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으나 이를 악물고 음양마유공의 이 단계 인 심법(心法)을 운공했다. 그것은 단전에 형성된 진기를 혈맥에 따라 유통시키는 과정이었 다. 열기는 그의 전신 혈맥을 따라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것은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음양마공의 심법에 따라 유통되었지만 나중에는 저절로 거대한 열력으로 화해 미친 말처럼 그의 전신 경맥을 타고 질주했다. "으으윽!" 백천기는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기어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가공할 열력은 이미 그의 전신 혈도를 따라 칠주천(七周天)을 운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운행을 거듭할 때마다 그 뜨거운 힘은 감소되기는 커녕 점점 더 가중될 뿐이었다. 백천기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온몸에서 비오듯 땀을 쏟아 내었다. 열력이 포화상 태에 이르자 그는 전신이 그대로 폭발해버릴 것만 같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렇게 십사주천(十四周天)을 왕복했을 때였다. 용암처럼 거세어진 열기는 그의 머리 뒤 옥 침혈에 이르러 딱 멎었다. 그러자 백천기는 옥침혈이 갑자기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양쪽 태양혈이 한 치 가량이나 솟아오른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음 순간, 그의 천뇌혈이 터질 듯이 팽창해졌다.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격심한 고통이 일어났다. 백천기는 자신의 몸이 그대로 두 조각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으으......!" 신음을 흘리는 그의 귀로 불현듯 콰쾅! 하는 폭음이 전해져왔다. 이어 고막이 찢겨나가는


듯한 충격으로 그는 혼절할 지경이 되어 전신을 무섭게 떨었다. 마치 거센 폭풍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듯 거대한 기운이 그의 몸 구석구석으로 마구 퍼져나 가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체내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가공할 잠력이 활화산처럼 생성되었다. 그것은 확 산되었다가는 모이고, 모였다가는 다시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으으...... 으윽!" 걷잡을 수 없는 그 기운은 그의 안색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그의 안색은 시뻘겋게 되는가 하면 문득 새하얘졌고, 또 어떤 때에는 시커멓게 죽어버리기도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백천기의 이마 한가운데서는 흰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고 있었 다. 그 김은 뿌연 덩어리를 이루더니 잠시 후에는 그의 온몸을 뒤덮어 버렸다. 백천기. 그는 지금 일세를 풍미할 풍운아로서 그 첫 번째 관문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었다. 상고 이래로 가장 신비한 신공인 음양마유공. 그것은 선천적으로 반음반양(半陰半陽)의 체질 을 타고난 음양마유신이 자신의 신체적 특성과 현문(玄門)의 신공을 조화시켜 창안한 신공 이었다. 그러므로 음양마유신은 마도의 인물이었지만 그의 음양마유공은 사도의 기운을 띄지 않았 다. 도리어 오묘하며 심현한 정통의 신공이라 할 수 있었다. 백천기는 음양마유공의 운용을 빌어 만년지극용란혈의 복용에서 얻은 근 이 갑자에 달하는 내공을 본신의 진기로 융합시키고 있었다. 실로 고금을 통하여 이런 예는 없었다. 무림사상 어느 누가 불과 하룻밤 사이에, 그것도 단 한 번의 운공으로 이 갑자의 내공을 성취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천부적 자질과 각고의 노력, 그리고 무엇이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용기 등이 함께 어울려 있어야 이룩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기적이란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인지도 몰랐 다. 우르르...... 우르릉...... 마치 뇌음과도 같은 진동이 백천기의 체내 혈맥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무림인이면 평생 의 염원인 임독양맥(任督兩脈)과 생사현관(生死玄關)의 타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백천기의 이마 한가운데에서 솟아나던 하얀 기체는 이제 머리 위 천령개에서


피어오르고 있 었다. 시간의 개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백천기가 눈을 떴을 때, 그의 전신에서는 물 흐르는 듯한 진기가 흐르고 있었다. 엄청난 잠 력이 자연스럽게 본원진기로 융합되어 그의 전신에서는 무궁무진한 진력이 샘솟고 있었다. 백천기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서는 무쇠라도 녹일 듯한 신광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짧은 순간일 뿐, 그가 눈길을 한 번 감았다 뜨는 순간 자취도 없이 스러져 버렸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평범한 눈(眼). 그 눈은 예기(銳氣)를 안으로 깊이 갈무리한 채 그저 겉 으로는 담담한 빛을 띄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무림에서 전설로나 들을 수 있는 무학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 른바 반박귀진(返撲歸眞)의 경지였다. 백천기는 몸을 약간 움직여 보았다. 그러자 전신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금시라도 발을 구르면 하늘 끝까지라도 오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탁자로 걸어가 의자에 앉은 후 내심 중얼거렸다. '정말 놀랍구나. 음양마유공이 내 몸에 이토록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다니 실로 상상 이상이 구나.' 그는 자신이 그린 도해를 내려다 보았다. '음양마유공의 제 삼 단계는 음양인(陰陽人)이었던 음양마유신의 최대 업적이라 할 수 있 다.' 백천기의 표정에는 한 가닥 기쁨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것은 얼마나 신비한 공부인가? 한 사람이 생각을 둘로 나누어 각각 다른 행동을 할 수가 있다니.' 그는 문득 얼마 전 선상(船上)에서의 결투가 생각났다. '무공이란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위급한 상황에서는 탁상공론 보다야 힘이 우선하지 않는 가?' 백천기는 도해를 집어 둘둘 말면서 생각을 이었다. '나는 애초 아홉 권의 비급에 담겨있던 마공들을 뇌리에서 지워버리려고 했었다.


그러나 근 간에 여러 가지 사건에 휘말리면서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이용하게 됐다.' 그의 담담하던 눈에 형형한 신광이 드리워졌다. '어쨋든 나는 방관자가 될 수는 없었다. 눈 앞의 불의를 보고도 대처할 능력이 없다고 등을 돌린다면 머리 속에 아무리 넓은 학문을 담고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백천기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마공(魔功)이라 해도 그것은 쓰기 나름이다. 올바른 목적에 사용한다면 무공은 수단에 불과 하므로 정공과 마공을 구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무공이란 사용하는 자의 심성에 따라 구 분되어야 한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자 그는 비로소 마음의 짐을 벗어낸 듯 홀가분한 기분을 누릴 수 있었 다. 이윽고 백천기는 눈을 돌려 창 밖을 내다보았다. 밖은 아직도 어두운 밤이었다. 그는 문득 태성왕과의 약속이 떠올랐다. 대과는 사흘 전에 끝났다. 그는 시험을 치른 후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백천기는 출세나 명예에 대해 초연한 편이었다. 때문에 그는 대과의 결과에 대해 조 금도 연연해하지 않았다. 그 동안 그는 구대마경에 수록된 무공에만 온 신경을 집중해온 것 이었다. '내일 쯤에 왕부로 찾아가야겠구나.' 백천기는 이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자야겠구나. 밤이 너무 깊었다.' 그는 침상으로 다가가며 옷을 벗었다. 옷을 벗는 그의 손길에 옥불이 접촉되었다. 그것은 강 남제일보의 보주 금검철선 구궁산으로부터 받은 무영귀도의 유물이었다. 백천기는 옥불에 대해 은연중 궁금증이 일어났다. 그 동안에는 옥불을 자세히 살펴볼 겨를 이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침상에 걸터앉아 옥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옥불의 크기는 약 반 자 정도였으며 전체가 녹황색의 옥으로 되어 있었다. 불룩 튀어나온 배를 두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는 자세의 정교하게 만들어진 환희불(歡喜佛)의 조각상이었다. 환희불은 배꼽까지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어 조각한 솜씨가 실로 드물게 보는 명장의 솜씨였 다.


"정말 살아 움직일 듯한 불상이구나." 백천기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옥불의 배꼽을 꾹 눌러 보았다.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환희불의 밑부분이 빠지더니 그 곳으로부터 한 개의 옥갑과 양피지 가 떨어져 나왔다. 백천기는 먼저 옥갑을 집어들었다. 조심스레 뚜껑을 열자 방 안에는 기이한 청향이 진동했 다. 옥갑 속에는 붉은 빛이 도는 단약이 십여 개나 들어있었는데, 그것은 크기가 사람의 동공만 한 것으로 신비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백천기는 단약을 들여다 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것이 바로 젊음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는 주안신단(駐朱顔神丹)인가 보구나.' 그는 불현듯 선은장에 남아있을 나영령이 떠올랐다. 그러자 그의 입가에는 빙그레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영령에게 이것을 주면 무척 기뻐하겠구나.' 백천기는 옥갑의 뚜껑을 닫은 후 침상 머리맡에 내려 놓았다. 이어 그는 양피지를 펼쳐 보 았다. 양피지에는 검고 붉은 줄이 빽빽히 그어져 있었고, 그 옆에는 깨알만한 글씨가 가득 적혀 있었다. 백천기는 한참 동안이나 유심히 살펴 보았으나 과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파악해 낼 수 없었다. 다만 검고 붉은 선들을 보아서 어떤 지점을 가리키는 지도(地圖)라는 것만은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어디인지 알 수가 있나?' 그는 가볍게 실망하는 기색으로 글씨 부분을 읽어 보았다. 잠시 후 그는 비로소 탄성을 발 했다. '이제 보니 이 지도에 표시된 곳은 바로 남안탕산(南雁蕩山) 옥현봉(玉玄峯)이었군.' 백천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손가락을 뻗어 한 개의 글 자를 지워버렸다. 그것은 바로 옥현봉의 옥(玉)자였다. 그는 옥자 대신 그곳에 천(天)자를 적어 넣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만일을 위해 약간 바꿔놓는 것도 좋겠지.' 백천기는 지도를 접어 옥갑과 함께 옥불 속에 집어 넣었다. 바로 그때였다. 느닷없이 창 밖 으로 음침한 웃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흐흐흐......" 슈슈슉! 동시에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창문을 뚫고 다섯 줄기 은광이 쏘아져왔다. 워낙 창졸지간에 일어난 일이라 백천기는 다급히 침상에 엎드렸다. 파파팍! 은광은 그의 머리를 스치고 벽에 적중되더니 그대로 벽면을 관통해 버렸다. "누구냐!" 백천기는 날카롭게 외치며 몸을 날렸다. 그는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날아갔다. 밖은 깊은 밤이었다. 백천기는 곧장 허공을 날아올라 지붕 위로 올라갔다. 사방을 쓸어 보는 순간 멀리 두 줄기 인영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비록 사위가 칠흑같이 어둡기는 해도 그 의 천안을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백천기는 자신도 모르게 공력을 돋구며 두 발을 굴렀다. 쉬익! 그의 신형은 화살처럼 날더니 순식간에 십여 장의 거리를 날아가고 있었다. 야조(夜鳥)인들 그보다 빠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멈춰라! 도적!" 그의 음성이 밤공기를 갈랐다. 그러나 도망자들은 대꾸조차 없었다. 다만 그들은 밤고양이처 럼 천불사의 대웅전 지붕을 타고 죽어라 달아나고 있었다. 백천기는 냉소를 터뜨렸다. "흥! 그렇다고 내 손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는 공력을 배가하여 더욱 신형을 솟구쳤다. 그러자 그의 몸은 빛살처럼 날아가더니 두 인 영의 머리 위를 뛰어 넘어서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억!" 두 인영은 깜짝 놀라 신형을 멈추며 백천기를 노려보았다. 그들은 사십 세 정도의 중년인들 로 검은 야행복을 입고 있었으며 한결같이 음침한 모습이었다. 백천기는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대들은 누구길래 야밤에 염탐한 것이오?" 두 중년인은 서로 마주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그 중 오른쪽에 선 자가 입을 떼 었다. "너는 신풍오협(神風五俠)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신풍오협?" 백천기는 피식 실소했다. "후후, 알고 보니 근래 들어 감숙성을 휘젓고 다닌다는 신풍오마였군? 스스로 협자를


붙이 다니 정말 가소로운 일이군." 백천기는 얼마 전 구궁산에게 당금 강호의 명성있는 인물들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와중에서 신풍오마도 잠깐 언급된 적이 있었다. 신풍오마는 감숙성 일대에서 제법 흉명을 떨치고 있는 마두들로 특히 경공 방면에서는 가히 무림의 일절로 일컬어지는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신풍오마가 유명한 것은 비단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강호에 출도한 지 불과 십여 년이었다. 그 사이 아무도 그들의 비위를 거슬리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이 한 번 원한을 맺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복수를 하기 때문이 었다. 설사 그들보다 강한 고수라 할지라도 집요하게 복수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상대 하려 들지 않게 된 것이었다. 백천기는 그들의 자세한 내력까지는 알지 못했다. 아니, 설령 미리 알았다고 한들 두려워할 그도 아니었다. 그는 냉정한 시선으로 두 중년인을 노려보았다. "그대들은 무슨 이유로 본인을 압습한 것이오?" 그러자 이번에는 왼쪽의 중년인이 괴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흐흐흐, 애송이 놈,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두 가지 이유?" "그렇다. 본래 우리는 어떤 인물로부터 네 놈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것이 첫번째 이유다." "......!" 백천기는 적지 아니 놀랐다. 그는 무림인이 아니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자신을 죽여달라 고 했단 말인가? '대체 누가 나를?' 그는 궁금함을 금치 못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누가 날 죽여 달라고 했소?" 신풍이마는 똑같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우리도 모른다. 우리들은 대가만 받으면 청부를 이행할 뿐, 청부자가 누구인지는 따 지지 않는다." 오른쪽 사나이가 재차 말했다. "흐흐흐, 그런데 널 죽이려고 엿보는 순간 우리는 네 놈이 환희옥불을 지니고 있는 것을 알 게 됐지. 그래서 두번째 이유가 생겼다."


백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날 죽이고 옥불을 뺏고자 한단 말이로군." "흐흐! 머리가 나쁜 놈은 아니구나. 그렇다! 알았다면 어서 목을 길게 늘여라!" 백천기는 신풍이마를 바라보며 염두를 굴리고 있었다. '내 청력은 상당히 예민한데도 저들이 가까이 다가오도록 아무런 기척도 못 느꼈으니 과연 경공 방면에서 무림일절이란 말도 허구가 아닌 듯 하구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그런데 내 목숨을 청부한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원한을 지닐만 한 자는 떠오르지 않는데....... 건곤칠살도 아니다. 그들은 내 정체를 모른다. 그렇다면 선상 에서 혈투를 벌였던...? 아니다. 그들은 모두 죽지 않았는가?' 그는 혼란이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이 갈만한 인물이라곤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신풍이마가 번갈아가며 말했다. "흐흐, 애송이 놈! 갑자기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느냐?"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이려면 스스로 목을 바치는 것이 좋을 거다!" "정말 어이없는 자들이로군.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않겠는가?" 그 말에 오른편의 중년인이 앞으로 나서며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 네가 정녕 신풍 오형제의 무서움을 모르는구나." 왼편의 중년인도 그와 똑같이 한 걸음 나섰다. 그러자 장내에는 팽팽한 살기가 감돌았다. 오 른쪽의 중년인이 음침한 괴소를 흘려냈다. "흐흐흐! 네 놈은 이제 경공의 극치인 신풍은허술(神風隱虛術)을 보게 될 것이다. 죽기 전에 안목이나 높여 두거라." 일순 신풍이마의 신형이 흐릿하게 변했다. 동시에 그들의 모습은 장내에서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엇!" 백천기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발했다. 그 순간 그의 좌우에서 바람을 가르는 듯한 날카 로운 음향이 들려왔다. 슈슈슉! "윽!" 백천기는 가벼운 비명을 흘렸다. 그는 어깨에 통증을 느꼈다. 옷자락이 길게 찢겨져 나간 것이었다. 그는 어깨를 감싸며 몸을 홱 돌렸다. 그러나 신풍이마의 모습은 온통 뿌연 그림자만 보일 뿐 그 실체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백천기는 놀람을 금치 못하며 청력을 최대한으로 기울여 보았다. 그러자 귓전으로 한 가닥 미세한 발자국 소리가 잡혔다. 그것은 바로 이마 중 한 명이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기 위해 지면을 밟는 소리였다. 슈육! 예리한 경풍이 쇄도해 왔다. 백천기는 즉시 뒤로 몸을 뺐으나 이미 늦었다. 펑! 하는 폭음과 함께 이번에는 오른쪽 어깨가 화끈했으며 그 충격으로 그는 바닥에 뒹굴고 말았다. 그의 좌우에서 비웃음 소리가 터졌다. "푸핫핫핫! 이제 보니 별 것 아닌 놈이었군. 천목삼귀가 당했다길래 공연히 긴장했군!" "킬킬!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쓴 격이군. 고작 이 정도인 줄 알았다면 애초에 신풍은허술 은 쓰지도 않았을 텐데, 쯧! 공연히 기력만 낭비했군." 역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신풍이마의 야유가 이어졌다. "흐흐! 넷째. 너의 흑살장(黑殺掌)에 맞은 이상 놈은 이미 귀신이 되었을 것이다." "헤헤헤! 형님, 이제 놈의 수급을 잘라가는 일만 남았소이다." 신풍이마는 의기양양하며 제멋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사실 백천기가 바닥에 나뒹굴게 된 것 은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실전(實戰) 경험이 부족해서 그리 되었을 뿐이었 다. 바닥에 쓰러진 채 백천기는 운공을 해보았다. 그러자 어깨에 가벼운 통증이 느껴졌을 뿐 별 다른 이상은 없었다. 그는 내심 고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키려다 문득 생각을 바꾸었다. '이 자들의 무공은 평이한 수준이지만 경공만은 무시할 수가 없다. 그러니 내가 지금 일어 선다면 다시 불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작정하고 그대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람소리가 가늘어지며 신풍이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들은 득의만면한 채 백천기의 곁으로 다가왔다. 왼쪽의 중년인이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헤헤! 그러고 보니 이 놈은 꽤 쓸만한 얼굴을 가지고 있군. 내 평생 처음 보는 미남이야. 하지만 아깝군, 이렇게 요절을 하게 됐으니 말이야." 그러자 오른쪽 중년인이 싸늘하게 내뱉았다. "넷째!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수급이나 취해라." "그야 여부가 있겠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중년인은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쓰러져 있던 백천기의 몸이


퉁겨지듯 벌떡 일어섰다. "엇?" 신풍이마는 대경하여 다급한 외침을 발했다. 그러나 백천기는 일어서는 탄력을 빌어 허공으 로 이 장여를 솟구치더니 그들을 향해 쌍장을 벼락같이 내뻗었다. 그는 연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음양마유공을 십 성 가량이나 끌어올린 것이었다. 그러자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뇌성이 터졌다. 꽈르르르릉! 신풍이마는 그야말로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그들은 무방비 상태에서 가히 태산같은 경기가 머리를 짓눌러오자 터질 듯한 압박감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전신을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그들은 다급히 전신의 내공을 끌어올려 쌍장을 마주 올려쳤다. 허공과 지상에서 세 가닥의 경기가 맞닥뜨렸다. "크아아악!" 두 마디 단말마의 비명이 울렸다. 가공할 폭음과 함께 신풍이마의 육신은 피떡이 되며 날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형체조차 알 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채 오 장 밖으로 곤두박질치며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아뿔싸!" 백천기는 이 가공할 결과에 스스로도 대경하여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이럴 수가! 음양마유공의 위력이 이 정도일 줄이야.' 그는 처참하게 짓뭉개진 두 구의 시신을 바라보며 그만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말았다. 주위 십여 장이 온통 그가 펼친 음양마유공에 의해 초토화되어 있었다. 나무, 풀, 바위 할 것 없이 모두가 거센 경력에 휘말려 엉망이 되어 있었다. 마치 일대 폭풍이 지상을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 광경은 백천기로 하여금 망연자실케 했다. 그는 처음으로 펼친 음양마유신공의 위력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백천기는 놀라움이 가시자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염두를 굴렸 다. '신풍오마는 모두 다섯 명이다. 그들은 항시 행동을 같이 한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세 명은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여기까지 생각한 백천기의 안색이 급변했다. '아차, 환희옥불! 그것을 방 안에 두고 왔다.' 백천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음 순간 그는 신형을 쏜살같이 날리고 있었다.


밤하늘에 일 직선을 그으며 날아가는 그의 신법은 빛살과도 같았다. 불과 숨 몇 번 쉴 사이에 백천기는 자신이 머무르는 천불사의 객당으로 되돌아왔다. 방 안을 살펴보던 백천기는 그만 안색이 굳어지고 말았다. 역시 염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 었다. 환희옥불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 더 생각할 일도 없이 그는 신풍오마의 교활한 계책에 넘어간 것이었다. 그가 이귀를 뒤쫓는 사이에 삼마가 빈 방을 뒤져 옥불을 탈취해 간 것이었다. 백천기는 분노를 금치 못했다. 더구나 그들의 얄팍한 속임수에 당했다고 생각하니 자신의 경솔함에 화가 치밀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옥불 안의 비도는 별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이 유출됨으로서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모른다. 결국 내 불찰이로구나." 백천기는 그만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지고 말았다. 그는 뛰어난 기억력으로 양피지의 내용을 이미 머리 속에 넣어두고 있었다. 게다가 양피지 의 내용을 변조까지 해두었으므로 물건을 잃어버린데 대해서는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무영귀도가 남긴 환희옥불이 밖으로 유출된 이상 엄청난 쟁탈전이 벌어질 것이 틀림 없었다. '좋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내 책임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옥불을 되찾고 말겠다. 백천기는 결심을 굳히고 방 안을 살펴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기이한 정광이 뻗어 나오고 있 었다. 잠시 후 그는 흔적을 발견했다. 그것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미세한 발자국이었다. 오직 신안을 지닌 백천기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역시 세 명의 발자국이다. 신풍삼마임이 틀림없다.' 백천기는 방 안을 뒤져 간단한 행장을 꾸린 후 탁자 위에 몇 자를 적어 놓았다. 이어 지체 없이 창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바야흐로 옥불을 되찾기 위한 추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제 9 장 · 옥불(玉佛) 쟁탈전(爭奪戰) 추격은 밤새 계속되었다.


새벽 여명이 밝아올 무렵에 이르자 백천기는 차츰 거리가 좁혀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제 얼마 후면 따라 잡을 수 있겠구나.' 그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추격하는 동안 그의 내심에는 어느덧 신풍삼마에 대 한 살기가 팽창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더 달렸을까? 문득 그의 귓전에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극히 경미한 음향이었으나 그 는 동쪽으로 십여 리 떨어진 곳에서 울려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쾌속하게 날아갔다. 숲 속의 공지. 그곳에서는 한창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세 명의 야행복을 입은 자들을 삼십여 명의 무림인들이 둘러싼 채 맹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난전(亂戰)으로 인해 주위에는 벌써 피투성이가 된 십여 구의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흉신악살처럼 생긴 한 거한이 시뻘건 도끼를 휘두르며 세 야행인을 공격하고 있었다. 야행 인들은 다름아닌 신풍삼마였다. "신풍오마! 어서 옥불을 내놓지 못하겠느냐?" 위이잉! 도끼가 위맹하게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신풍삼마는 똑같이 장풍을 날리며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악도부(惡屠斧)! 웃기지 마라. 옥불은 엄연히 우리 형제들의 것이다. 만일 탐하는 놈이 있다면 황천 구경을 시켜 주마!" 펑! 장력과 도끼가 격돌하자 폭음이 일었다. 악도부는 멈칫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 나 곧 그는 두 눈을 부라리며 고함쳤다. "신풍오마! 네 놈들이 제법 한 가닥 한다마는 어림도 없다. 자, 받아라!" 그의 거대한 도끼가 다시 허공을 뒤덮었다. 우우우웅! 도끼의 기세는 태산을 가를 듯 했다. 신풍삼마는 엄청난 위세에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그들은 신형을 휘청거리며 급급히 뒤로 물러났다. "건방진 놈! 감히 우리 형제에게 도전을 하다니." 삼마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갑자기 신형을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자 그들의 모습이 흐


릿해지는 것이 아닌가? "엇?" 악도부는 어리둥절해졌다. 그 바람에 그의 도끼도 공격 대상을 잃고 허공을 후리고 말았다. 이때였다. 그는 양팔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크헉!" 악도부는 눈을 부릅떴다. 어느 새 양팔이 댕겅 잘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으아아아.......!" 그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두 줄기 피분수가 사방으로 뻗어 나갓다. "뒈져라!" 펑! "크아아아악!" 악도부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삼 장 밖으로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의 목은 반쯤 잘 린 채 덜렁거리고 있었다. 이 끔찍한 광경은 중인들을 더 없이 놀라게 했다. 삼십여 명의 무림인들은 한결같이 안색이 대변한 채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보물에의 유혹은 그들을 다시 충동질했다. "여러분! 놈들의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우리가 전력으로 합공하면 결국 피를 뿌리고 죽을 것이오! 자, 함께 덤빕시다." 누군가의 외침에 중인들은 크게 용기를 얻고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와! 죽여라!" 장내는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쳐라!" 장풍(掌風)과 도검(刀劍), 암기(暗器) 등이 난무하는 가운데 장내는 삽시에 아수라장으로 화 하고 말았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신풍삼마는 그만 당황을 금치 못했다. 대마(大魔)가 이를 부드득 갈더니 살기띈 음성으로 외쳤다. "이놈들!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모조리 덤벼라! 한꺼번에 황천으로 보내주 마." 처절한 살육전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크아악!" 단말마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신풍삼마는 예의 독보적인 경공에 의지하여 그야 말로 종횡무진 움직였다. 그들의 신형은 희뿌연 그림자로 화해 아예 보이지도


않았으며, 그 들이 중인들 사이를 비집고 지날 때마다 중인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삼마는 모두 연검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연검조차도 백광만을 뿜어낼 뿐, 언제 발출되고 회수되었는지 볼 수가 없었다. 시체들의 수효는 점점 불어났다. 이제 풀밭은 즐비한 시체들과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로 인 해 지옥도로 화하고 말았다. 삘릴리... 삘리리리릴......! 문득 어디선가 한 줄기 처량한 피리소리가 들려왔다. "엇!" 신풍삼마 중 대마가 그 소리를 듣자 경악성을 터뜨렸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이마와 그들을 공격하던 중인들도 한결같이 공포의 표정을 지었다. "이 피리소리는......!" 싸움은 어느새 멈추어져 있었다. 숨막히는 정적이 장내를 휩쓰는 가운데 피리소리는 점점 더 깊이 중인들의 고막을 파고 들어왔다. 처음에는 애처로운 여인의 애소인 듯 들리더니 종내에는 음산하고 살벌한 음으로 변하고 있 었다. "유령귀혼곡(幽靈鬼魂曲)......!" 누군가 공포에 질려 부르짖었다. 그 말에 중인들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뒤이어 다시 공포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혈소마객(血簫魔客)......!" 그 한 마디는 중인들에게 사망의 신호인 듯 했다. "유령귀혼곡이 끝나기 전에 도망가지 못하면 모두 죽는다!" 누군가 그렇게 외친 순간 중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지며 달아나기 시 작했다. 한편, 백천기는 벌써부터 인근 숲 속에 당도해 있었다. 그는 장내에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나 자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유령귀혼곡? 혈소마객이란 자가 그토록 무섭단 말인가?' 그는 장내를 주시했다. 그곳에는 이제 신풍삼마와 칠팔 명의 인물들만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옥불에 대한 탐심을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한결 같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점은 신풍삼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때, 고조되어 가던 피리음이 뚝 그쳤다. 이어 장내에 울려퍼진 것은 음랭한 웃음소리였다.


"흐흐흐, 유령귀혼곡이 끝났는데 남아있다니, 네 놈들은 살기가 귀찮아진 모양이구나." 이어 장내에 한 명의 인영이 번뜩 날아들었다. 그는 전신에 혈의를 걸친 칠순 가량의 노인이었다. 중간에서 굽어진 매부리코에 독사눈을 하고 있었으며, 손에는 역시 섬뜩할 정도로 붉은 빛의 혈소(血簫)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으스스한 살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혈소마객은 한기가 도는 시선으로 중인 들을 둘러보며 음침하게 말했다. "흐흐흐, 노부의 경고를 무시하고 달아나지 않았으니 네 놈들은 염라부에 가더라도 후회는 없겠지." 그 말에 중인들은 안색이 급변했다. 그러나 군웅들 중에서 한 명의 위맹해 보이는 중년인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노선배의 규약은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옥불은 결코 노선배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아 니...... 으윽!" 중년인은 채 말을 마치지도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는 단지 눈 앞에 번쩍하는 핏빛의 광 선이 날아드는 것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쿵! 하는 둔중한 음향과 함께 그는 고목처럼 뒤로 넘어졌다. 그의 이마 한가운데에는 어느 새 세 개의 혈점(血點)이 찍혀 있었다. 중인들은 기겁을 하며 부르짖었다. "혈, 혈망신사(血芒神砂)......!" 혈망신사란 혈소마객이 자랑하는 독랄하기 그지없는 암기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들은 서 로의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기에 이르렀다. 한편 숲 속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백천기도 어지간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음, 저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암기를 발출하면 피하기가 쉽지 않겠구나.' 그는 자신이 그러한 경우에 처했을 때를 잠시 생각해 본 후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별 다른 방법이 없구나. 혈망신사가 발출되기 전에 먼저 손을 쓰는 수밖에는.' 혈소마객은 음산한 표정으로 중인들을 쓸어보며 괴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흐흐흐! 감히 노부의 말에 대꾸를 하다니! 네 놈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놈이건 노부를 거스 르는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 아니, 이미 너희들은 살아있을 자격을 상실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대마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전면으로 나섰다. "혈소마객, 당신 눈에는 우리들이 보이지도 않소?"


혈소마객은 빙글 돌아섰다. 그는 독사눈에 푸른 광망을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흐흐, 신풍오마! 지금 그 말은 노부에게 한 것이냐?" 거만하기 그지 없는 말투였다. 그는 신풍오마 따위는 같잖게 여긴다는 표정이었다. 대마는 안색이 홱 변하며 외쳤다. "혈소마객! 으스대지 마라. 네 놈의 무공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우리도 그다지 밀리지 않을 것이다." 혈소마객은 여전히 냉랭하게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흐흐, 경공이 무공의 전부냐? 실상 네 놈들은 경공 한 가지만 그럴듯 했지 무공을 논한다 면 보잘 것 없는 하류 잡배들에 불과하다." 마침내 대마는 분노를 터뜨리고야 말았다. "닥쳐라! 늙은이, 주둥아리를 찢어놓고 말겠다." 동시에 그는 일장을 내뻗었다. 그러나 혈소마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선 채 소 맷자락을 떨쳤다. 펑! "으윽!" 대마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다섯 걸음이나 밀려 나갔다. 그의 안색은 흙빛이 되고 있었다. 그는 혈소마객의 가벼운 소맷바람에 그만 기혈이 역류하고 만 것이었다. '안되겠다! 무공으로 치면 놈은 우리의 적수가 아니다.' 대마는 이런 생각이 들자 재빨리 고개를 돌려 이마와 삼마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심전심(以 心傳心)인가?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렬로 섰다. "형제들! 신풍은허술을 펼쳐라." 대마의 외침이 터졌다. 스스슷......! 신풍삼마의 신형이 희뿌연 그림자로 화해 장내에서 사라졌다. 이 광경을 직접 목도한 혈소 마객은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흠, 이것이 놈들이 자랑하는 신풍은허술이로구나. 무림의 일절이라더니 과연 보통이 아니구 나.' 혈소마객은 방금 전과는 태도가 판이하게 달라졌다. 그는 신중하게 공력을 끌어올리며 사방 을 경계하고 있었다. 비록 안하무인(眼下無人)격인 성격이었으나 일단 전투에 임하자 그는 달라진 것이었다. 쉬익! 예리한 파공성이 그의 왼쪽 옆구리로 날아들었다. 동시에 백광이 번쩍했다. "헛!"


혈소마객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급히 이를 피해냈다. "좌삼보!" 외침이 터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혈소마객의 손에 들려져있던 혈적이 어느새 번뜩 핏 빛 그림자를 그리고 있었다. 슈슈슉! 그러나 그의 혈적은 허공을 치고 말았다. 그의 등 뒤에서 대마의 음침한 괴소가 터졌다. "크흐흐, 혈소마객! 네 놈은 우리 신풍오마를 너무나 얕봤다. 어디 단단히 맛을 보여주마." 아울러 각기 다른 세 방향에서 일제히 날카로운 검기가 쇄도해 왔다. 쐐애액......! 혈소마객은 위기를 느끼며 다급히 몸을 놀려 좌로, 우로 피했다. 어차피 그의 눈에는 신풍삼 귀의 모습이 제대로 들오지 않았다. 다만 싸늘한 검기가 일시에 세 곳의 요혈로 파고드니 그는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흐를 정도였다. 찌이익! 옷자락 찢기는 소리와 더불어 혈소마객은 오른쪽 옆구리가 선뜻함을 느끼며 대경했다. 그의 옆구리는 이미 옷이 갈갈이 찢어진 채 선혈이 내비치고 있었다. "이... 이 괘씸한!" 혈소마객은 노기충천하여 부르짖었다. 대마의 비웃는 음성이 그의 노화를 더욱 부추켰다. "흐흐흐! 이제 보니 혈소마객이란 이름도 과장된 소문에 불과했군! 늙은이, 맛이 어떠냐?" "이 찢어 죽일 놈들!" 혈소마객이 길길이 뛰는 찰나, 다시 세 방향에서 백광이 번뜩이더니 대마의 호통이 들렸다. "늙은이! 그만 누워라." 쐐애애액......! 그러나 그 순간, 혈소마객은 몸을 팽이처럼 회전하더니 흡사 까마귀 울부짖는 듯한 괴성을 길게 터뜨렸다. "크하하핫......! 죽어라! 혈광살혼(血光殺魂)!" 귀청을 찢는 듯한 피리 음향이 장내를 휘감았다. 삐이이익! 그가 풍차처럼 몸을 회전하며 혈적을 휘두르자 수십, 아니 수백 개에 이르는 피리 그림자와 함께 날카로운 소성이 장내를 온통 뒤흔든 것이었다. 공격하던 신풍삼마는 물론이거니와 관전하던 자들까지도 피리음에 모두 고막이 파열되는 듯


한 고통을 느꼈다. 개중에서 내공이 약한 자들은 기혈이 역류하여 뒤로 벌렁벌렁 쓰러지고 있었다. 이같은 사태에 군웅들은 황급히 자리에 주저앉아 내공을 운공하기 시작했다. 한편 숲 속에 있던 백천기는 별다른 장애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다만 피리음이 귀 에 거슬린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그는 계속 장내를 주시하고 있었다. 신풍삼마의 신법이 마침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공에 있어서 혈소마객에게 상대 가 안 되는 것이었다. "크흣흣흣......!" 혈소마객은 듣기 거북한 괴소를 터뜨렸다. 문득 날카로운 피리소리와 함께 혈적의 광망이 크게 확산되었다. "크아악!" 신풍삼마가 비로소 신형을 드러냈다. 그들은 하나같이 안색이 백짓장이 된 채 입가에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혈소마객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흐, 이제 노부의 진정한 무서움을 알겠느냐?" 신풍삼마는 기세가 꺾인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남은 길은 오직 도망 뿐이다!' 다음 순간 그들은 각각 세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수십 년을 함께 행동해온 그들답게 이 방 면에서도 역시 의사가 통일되었던 것이다. "엇! 서라!" 혈소마객은 대노하여 즉각 몸을 솟구쳤다. 그러나 그의 그런 행동은 소용없는 짓이 되고 말 았다. "크아악!" 그가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세 마디의 비명이 울리더니 달아나던 신풍삼마가 일제히 바닥 으로 곤두박질친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한결같이 이마가 뻥 뚫려 있었는데 그곳으로부터 피가 뭉클뭉클 솟아 오르 고 있었다. 혈소마객은 이 돌연한 사태에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곧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삼음홍화지(三陰紅花指)......." 그는 눈썹을 홱 치켜올리더니 한 곳을 향해 외쳤다. "삼지신마(三指神魔) 정호(丁胡)!"


괴소성이 그 말을 받았다. "흐핫핫핫핫......! 혈소마객, 무려 십 년만에 이곳에서 다시 상봉하게 되었구려." 괴소와 함께 두 줄기 인영이 장내로 날아왔다. '결국 저 자들까지 합류하는구나.' 숲 속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백천기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장내에 나타난 두 명은 다름이 아니라 건곤칠살의 셋째, 넷째인 삼지신마와 독각괴마였던 것이다. 그들이 나타나자 혈소마객는 안색이 변했다. 그는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으로 내심 중얼거렸 다. '독각괴마까지? 삼지신마 한 놈이라면 모르겠지만 두 놈이 합세하면 아무래도 승산이 희박 하겠구나.' 삼지신마가 먼저 음침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흐흐흐, 누형(累兄), 십 년을 못보았더니 그 동안 누형의 무공은 엄청나게 진보했구려." 혈소마객은 그 말에 억지웃음을 지으며 응대했다. "정형의 삼음홍화지야말로 더욱 더 날카로와진 것 같소." 삼지신마는 세 개뿐인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은근한 압력을 가해왔다. "흐흐흐, 누형, 누형의 형님이신 흑풍마번(黑風魔幡)과 우리의 첫째 형님과는 동도인(同道人) 으로 한 번도 예를 거스른 적이 없었지 않소? 그러니 그 분들의 아우인 우리도 도리를 따라 야 할 터, 노부는 한 집안끼리 싸우고 싶은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소이다." "그야 동감이오." "그래서 말씀이오만,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누형께서 양보하고 물러나는 것이 어떻겠소?" '능구렁이 같은 놈! 형님이 안 계신 것을 기화로 협박하는 구나.' 혈소마객은 분통이 터졌으나 나름대로 염두를 굴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음, 저 놈의 말은 일리가 있다. 이 자리에 형님이 계시다면 몰라도 나 혼자서는 저 둘을 상 대하기가 벅차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생각해 냈는지 고개를 들더니 짐짓 너그럽게 웃어보였다. "허허허! 어쨌거나 두 분이 오신 이상 노부가 더 이상 할 말이 있겠소? 노부는 이만 조용히 사라지겠소이다." 그 말에 삼지신마와 독각괴마는 희색을 띄웠다. 삼지신마는 표정을 풀며 허리를 굽혔다. "누형, 체면을 살려줘서 정말 고맙...... 엇?" 그는 말을 채 맺지도 못하고 다급한 외침을 발했다. 그들이 방심한 틈을 노려 혈소마객이 재빨리 죽어있는 신풍삼마 중 대마에게 몸을 날린 것


이었다. 그의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대마의 품을 뒤져 어떤 물건을 움켜쥐고 있 었다. "저, 저 놈이!" 삼지신마가 노성을 터뜨리는 순간, 혈소마객은 이미 허공으로 신형을 솟구치고 있었다. "네 놈이 감히 우릴 속이다니!" 삼지신마는 노기충천하여 신형을 날렸다. 그의 뒤를 독각괴마가 외발로 지면을 구르며 뒤쫓 아 가고 있었다. 혈소마객은 그야말로 기를 쓰고 내달았다. 이미 목적을 달성한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전심 전력으로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못가 어디선가 은방울 굴리는 듯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호호호......! 혈소마객, 어딜 그리 급히 가시나요? 가려거든 물건은 놓고 가지 그래요?" 동시에 한 가닥 부드러우면서도 끈끈한 잠력이 혈소마객을 향해 몰려왔다. "억!" 혈소마객은 가슴이 조여드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급격히 허공에서 떨어졌다. 그는 하마터면 바닥을 뒹굴뻔 하다가 힘겹게 중심을 잡으며 외쳤다. "누구냐?" 한 줄기 향풍이 이는가 싶더니 그의 면전에 한 명의 절세미녀가 나타났다. 전신에 화려한 금의를 입고 있는 미녀였다. 나이는 대략 십팔구 세 정도, 한눈에도 경국지색 의 절세미녀였다. 그러나 여인의 얼굴에는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어 마치 북풍한설을 연상케 했다. 여인은 품 에 옥금(玉琴)을 가볍게 껴안고 있었다. 그녀의 출현에 놀란 사람은 또 있었다. 그는 바로 백천기였다. '아니, 저 여인은......?' 백천기는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금의미녀는 다름아닌 비봉옥녀(飛鳳玉女)였다. 바로 한 동 굴의 빙실에서 본 나체소녀였던 것이다. 그는 비봉옥녀의 알몸을 샅샅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금의로 성장(盛裝)하고 있었 다. 그로인해 더욱 아름답고 고귀한 기품을 풍겨내고 있었다. 이때, 뒤쫓아온 삼지신마와 독각괴마가 노기등등한 채 혈소마객을 둘러쌌다. 삼지신마는 이


를 부드득 갈며 외쳤다. "혈소마객! 감히 얕은 수를 쓰다니." 혈소마객은 그 말에 움찔하면서도 비봉옥녀에게서 잠시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양자(兩者)를 다 경계하자니 그는 정신이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한편 백천기는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갈수록 일이 복잡하게 얽히는구나. 아무튼 좀 더 지켜본 다음에.......' 혈소마객은 온통 적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곧바로 신색을 회복했다. 내심이야 어떻든 그는 오만한 시선으로 세 사람의 적을 노려보았다. 그는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노장이었다. 따라서 이 상황에서도 재빨리 안정을 찾은 것 이었다. 그는 먼저 비봉옥녀를 향해 일갈했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계집년! 네 년은 누구길래 감히 노부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냐?" 비봉옥녀는 코웃음치며 말했다. "산을 넘으니 또 산이 나타나고, 그 산을 넘으니 또 다른 산이 나타난다. 그곳에는 한 마리 의 금봉(金鳳)이 날고 있다." "......!" 엉뚱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읊조림이 끝난 순간 혈소마객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눈을 가늘 게 뜨더니 신음을 발했다. "음! 알고 보니 요즘 두각을 나타낸다는 비봉옥녀라는 계집이로구나." "음......." 삼지신마와 독각괴마도 침중한 신음을 흘려냈다. 장내에는 이미 그들 이외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칠팔 명 쯤의 군웅들도 거물들이 잇달 아 나타나는 바람에 겁을 집어먹고 사라진 후였다. 비봉옥녀는 혈소마객을 바라보며 냉소를 날렸다. "흥! 그래도 늙은이가 제법 안력은 있구나. 본 낭자를 한눈에 알아보다니." 혈소마객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음침하게 변했다. "아무튼 좋다, 그런데 노부를 막은 이유는 뭐냐?" 비봉옥녀는 힐끗 그를 쳐다보더니 역시 싸늘하게 말했다. "몰라서 묻느냐? 물론 옥불 때문이다." "뭣이? 흐흐! 과연 네 년이 이것을 가져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냐?" "흥! 그건 두고 보면 알 것이다." 혈소마객은 냉소를 터뜨렸다. "크ㅋ! 꿈도 꾸지 말아라! 누가 뭐래도 물건은 노부의 것이다. 아무도 가져갈 수 없다."


비봉옥녀의 고운 눈썹이 상큼 치켜올라갔다. 삼지신마와 독각괴마도 분노를 떠올리고 있었 다. 이때였다. 문득 한 줄기 낭랑한 음성이 그들의 귓전을 울렸다. "하하! 이쯤에서 그만 두시는 게 어떻겠소? 안 되었소만 옥불의 진정한 임자는 바로 나요." 장내로 한 명의 백의서생이 서서히 걸어나왔다. 그는 바로 백천기였다. 그가 나타나자 네 사람은 일제히 안색이 변했다. 소위 무림의 절정고수라 자부하던 자신들 이 그가 지척에 있도록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놀랬기 때문이었다. 특히 혈소마객은 또 한 명의 적수가 나타나자 짜증스런 음성으로 외쳤다. "네 놈은 또 뭐냐?" 백천기는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보시다시피 별 쓸모없는 일개 서생일 따름이오." 혈소마객은 두 눈에 살기를 띄었다. "건방진 책벌레 놈! 서당에 처박혀 책이나 읽을 일이지, 살기가 귀찮아지기라도 했느냐?" 백천기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대답했다. "후후, 물건을 찾는 일이 아니라면 이렇게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오. 호생지덕을 생각해 내 당신에게 권유하겠소. 옥불의 주인은 나니 좋은 말할 때 내놓는 것이 어떻소?" "뭣이?" 혈소마객의 안색이 사납게 구겨졌다. "이 애송이 놈이 보자보자 하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구나!" 그는 분성을 지르며 우수를 쭉 뻗어 일장을 날렸다. 비록 가벼운 일장이었지만 그의 장력에 서는 웅후한 파공성이 일어났다. "하하! 이것이 당신의 대답이오?" 백천기도 호탕하게 웃으며 슬쩍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펑! 두 줄기 장력이 허공에서 맞부딪치며 폭음을 울렸다. 순간 혈소마객은 가슴을 쇠뭉치로 얻 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며 안색이 급변했다. "억! 이럴 수가......!" 창졸지간 뒤로 두 걸음이나 밀려난 그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백천기는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백천기의 입가에는 여전히 담담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그 광경에 혈소마객은 그만 가슴이 철렁해지고 말았다. '으으! 이 책벌레의 무공이 이 정도일 줄이야!' 그는 안색을 일그러뜨린 채 눈알을 좌우로 굴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진이 더럽구나. 이곳을 무사히 벗어나기는 틀린 것 같다. 그렇다면.......' 혈소마객은 문득 고개를 돌려 삼지신마를 향해 말했다. "정형, 노부가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소?" 삼지신마 정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음침한 음성으로 말했다. "누가야!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냐?" 그러나 혈소마객은 화를 내기는 커녕 더욱 부드럽게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수작을 부린다고 통하겠소? 노부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쯤이야 모르겠소?" 기가 죽어 하는 말에는 진심이 들어있는 듯 했다. 그 바람에 삼지신마는 그만 솔깃해져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멍청한 놈, 또 걸려 드는구나.' 혈소마객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품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그는 잠시 품 속을 뒤지더 니 옥불을 꺼내 들었다. "정형, 노부는 아무래도 이것을 끝까지 지켜낼 자신이 없소이다. 내 다른 사람에게 뺏기느니 차라리 정형에게 주겠소." 혈소마객은 정말로 옥불을 삼지신마에게 던졌다. 삼지신마는 뜻밖의 사태에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눈 앞에 찾아든 기회를 놓 칠 그가 아니었다. 그는 만면에 희색을 띄며 손을 내밀었다. "아무튼 고맙소. 누형!" 그러나 옥불이 그의 손에 닿기 직전, 날카로운 교성이 들렸다. "삼지신마! 옥불에 손대지 마라." 비봉옥녀의 살기 띈 음성이었다. 동시에 그녀는 섬섬옥수를 앞으로 쭉 뻗었다. 슈육! 날카로운 경풍이 삼지신마의 완맥을 내리쳤다. "엇!" 삼지신마는 급히 손을 도로 회수하고 말았다. 아무리 옥불이 탐난다 해도 억지로 잡아가다 가는 손목이 댕겅 잘릴 판국이었다. 데구르르! 그 바람에 옥불은 주인을 찾지 못하고 그만 바닥에 뒹굴고 말았다. "이 개같은 년이!" 삼지신마는 격분한 나머지 안색이 시퍼렇게 변하며 독각괴마를 향해 거칠게 외쳤다. "넷째! 어서 저 계집을 해치워라." 독각괴마는 두 눈을 희번뜩이며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셋째형은 안심하고 옥불이나 건지시오." 그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껑충 뛰어 비봉옥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흐흐, 계집애야! 노부와 한 바탕 놀아보자." "흥! 누가 겁낼 줄 아느냐?"


비봉옥녀의 교갈이 울리는 순간, 벌써 독각괴마는 괴장으로 그녀의 상체를 무섭게 후려치고 있었다. 위이잉! "죽어라! 계집." 비봉옥녀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지 흡사 나부끼는 꽃잎처럼 고운 옥장을 홱 뿌렸다. 독각 괴마의 안면에는 사뭇 득의의 기색이 떠올랐다. "흐흐, 그 따위 손장난으로 노부의 이백 근 괴장을 막으려 들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파파파팍! 날카로운 파열음이 연달아 사위를 울렸다. 비봉옥녀의 장력이 마치 파도치듯 독각괴마의 괴 장을 맞받아쳤던 것이었다. "억!" 독각괴마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는 손바닥이 찢어질 듯한 통증에 하마터면 괴장을 놓칠 뻔 했다. 그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럴 수가? 나이 어린 계집이 육장(肉掌)으로 괴장을 막아내다니.......' 독각괴마는 눈 앞에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도무지 믿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현실이었다. '대체 이 계집의 내공이 얼마나 되길래......?' 비봉옥녀는 여전히 제 자리에 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싸늘한 안색으로 독각괴마 를 노려볼 따름이었다. 한편 삼지신마는 비봉옥녀를 독각괴마에게 맡긴 후 급히 옥불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가 막 옥불을 잡는 순간 낭랑한 음성과 함께 기이한 잠력이 뻗어왔다. "하하하! 손을 거두시오. 옥불은 주인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소?" "이... 이런!" 삼지신마는 뒤로 주르르 밀려나며 낭패한 기색이 되고 말았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상대는 예의 백의서생이 아닌가? 삼지신마는 노기충천했다. "이... 책벌레! 정말 죽고 싶어 환장 했느냐?" 백천기는 빙긋 웃었다. "무슨 섭섭한 말씀을 그리 하시오? 소생은 아직 장가도 못갔는데 어찌 죽고 싶겠소?" 그의 익살에 삼지신마는 얼굴이 붉그락 푸르락하며 노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킥!" 백천기의 귀로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그 웃음 소리는 분명 여인의 것이었다. 그러나 비봉옥녀는 아니었다. 거리상으로 보아 장내 에서 들려온 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또 누가......?' 백천기는 의구심이 일었으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를 제외하고서는 아무도 웃음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삼지신마를 향해 짐짓 엄숙하게 말했다. "삼지신마, 물론 당신도 알겠지만 무릇 짐승은 먹이 때문에 죽고, 사람은 재물을 탐하다 죽 는다 했소이다." "뭐, 뭣이?" "그러니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소. 당신이 끝까지 옥불에 탐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결국 그 세 개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조차 잃지 않을까 해서 말이오." 충고(?) 치고는 그야말로 삼지신마의 아픈 곳을 정통으로 찌르는 것이었다. 과연 그는 발연 대로 했다. "이... 미친 놈! 주둥아리를 닥치지 않으면 당장 찢어죽이고 말겠다!" 쐐애액! 급기야 그는 쌍장을 날리며 덮쳤다. 백천기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며 빈정거렸다. "쯧! 성질이 급하면 오래 살지 못하는 법이오." 펑! "헉!" 폭음과 함께 삼지신마의 다급한 비명이 터졌다. 그는 뒤로 세 걸음 밀려나가더니 다급히 손 가락을 감싸쥐었다. 그는 손가락이 부러질 듯한 통증을 느낀 것이었다. "으으, 대체 네 놈의 정체는 무엇이냐?" 백천기는 계속 웃음 띈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말하지 않았소? 책벌레라고 말이오." "이... 이 건방진......!" 삼지신마는 마침내 이성을 잃고 내공을 극력으로 끌어 올렸다. 이어 그는 자신의 절학인 삼 음홍화지(三陰紅花指)를 발출했다. 쐐애액! 세 줄기 붉은 기류가 화살처럼 뻗어나가며 파공성을 울렸다. 삼음홍화지는 정확히 백천기의 가슴 요혈을 노리며 날아갔다. "훌륭한 수법이오!" 백천기는 은연중 탄성을 발했다. 사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그는 오른손을 들더니


슬쩍 앞으로 밀듯이 뻗어냈다. 그 순간, 미리부터 운기하고 있던 음양마유공이 장력을 따라 발출되었다. 우르르......! 은은한 뇌음이 울리더니 곧 무시무시한 폭음으로 이어졌다. 콰앙......! "크아악!" 삼지신마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주르륵 밀려 나갔다. 그의 안색은 흙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으으....... 이럴 수가? 노부의 칠십 년 내공이 깃든 삼음홍화지를 이토록 쉽게 막아내다니, 저 놈은 대체 귀신이란 말인가?' 그가 어찌 꿈엔들 생각 하겠는가? 백천기가 겨우 칠 성(七成)의 내공만을 사용했다는 사실 을. 아무튼 삼지신마의 세 개 뿐인 왼손 손가락은 백천기의 예언대로 무사하지 못했다. 마치 무 우처럼 퉁퉁 부어올라 뼈속까지 스며드는 격통을 유발시키고 있었다. 펑! 이때 그의 곁에서 한 차례의 폭음이 울리더니 허공으로 날아가는 독각괴마의 모습이 보였 다. 독각괴마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더니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도 역시 비봉옥녀의 장력에 무참하게 당한 것이었다. "으윽!" 독각괴마는 힘겨운 신음을 발하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그러다 문득 그는 자신의 발 아래 옥 불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경황 중에도 그는 희색을 띄며 옥불로 손을 뻗었다. 비봉옥녀가 수수방관할 리 없었다. "흥! 어림 없다." 날카로운 교성과 더불어 매서운 장력이 날아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전혀 뜻밖의 사태였다. "엇! 옥불이......?" 독각괴마의 외침이 들린 순간, 옥불은 어이없게도 허공으로 휘말려 올라가 버렸다.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옥불로 향했다. "호호호홋! 이 귀중한 옥불을 두고 여러분께서는 서로 양보만 하시니 할 수 없이 내가 가져 야겠군요."


명랑한 여인의 교성이 허공에서 울리는가 싶자 한 줄기 청광이 번쩍 스치더니 그대로 옥불 을 낚아채 버렸다. "앗! 저... 저것!" 중인들이 크게 놀라는 사이, 바람이 일더니 장내에 하나의 홍영(紅影)이 나타났다. 홍의를 입은 소녀였다. 그녀는 십육칠 세 정도로 보이는 미소녀로 흑백이 분명한 또렷한 눈 과 사과처럼 붉은 뺨을 지닌 매우 귀볍게 생긴 소녀였다. 소녀의 어깨 위에는 청색의 털의 독수리가 앉아 있었다. 독수리는 검처럼 날카로운 부리를 지녔으며 두 눈이 태양처럼 붉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방금 전 옥불을 낚아챈 것은 바로 독수리의 짓이었다. 독수리의 부리에 옥불이 물려 있었던 것이다. 홍의소녀는 중인들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옥불을 품 속으로 집어넣으며 맹랑하게 종알거렸 다. "호호! 그럼 이 옥불은 이제부터 내 것이에요." "꼬마 계집애야! 어서 그것을 내놔라." 독각괴마가 거친 소리를 토해내며 덮쳐갔다. 꾸악! 괴이한 음향과 함께 푸른 빛이 번뜩인 것은 그때였다. 청색 독수리가 독각괴마에게 날아간 것이었다. "헉!" 독각괴마는 다급히 외치며 뒤로 몸을 빼냈다. 찌익! 그의 왼쪽 어깨에서 옷자락이 찢어지더니 선혈이 튀었다. "크으!" 살점이 한 웅큼 떨어져 나가 버리자 독각괴마는 괴로운 신음을 발했다. 삼지신마가 다급히 외쳤다. "넷째! 물러나라." 독각괴마는 비틀거리며 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선혈이 줄줄 흐르고 먼지투성이인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셈이었다. 이때 삼지신마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홍의소녀를 향해 자못 진중한 투로 물었다. "낭자는 혹시 신응문(神鷹門)의 문주(門主)인 신응노인과 무슨 관계라도 있소?" 홍의소녀는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그래도 당신은 제법 안목이 있군요. 그래요, 나는 그 분의 딸이에요." 그 말에 장내의 중인들은 모두 안색이 일변했다. "그렇다면 낭자가 바로 신응녀 임청하(林淸霞)란 말이오?" "호호! 맞았어요."


홍의소녀, 즉 임청하는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연신 웃고 있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삼지신마의 표정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는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일이 갈수록 엉키는구나. 아무래도 오늘은 저 옥불을 얻기가 힘들 것 같다. 비봉옥녀 하나 만 해도 감당하기 힘드는데 신응녀 까지 나타났으니.......'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백천기에게로 향해졌다. '게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저 서생 놈은 더욱 무서운 인물이다.' 삼지신마는 형세가 자신들에게 불리함을 깨닫고는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았다. 제 10 장 · 여심난측(女心難測) 신응녀 임청하는 비봉옥녀에게 다가가더니 방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곽언니, 오랫만이군요." 그러나 비봉옥녀는 냉정하게 대했다. "하매도 오랫만이야. 그런데 그 동안 많이 큰 것 같군." 그녀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 했다. 신응녀 임청하가 교소를 터뜨리며 다시 말했다. "호호호! 언니는 갈수록 예뻐지는군요. 그런데 왜 그때 신응문을 몰래 떠났지요?" 비봉옥녀는 간단히 대꾸했다. "더 이상 신세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하지만 언니가 떠나시는 바람에 오빠께서는 크게 상심하셨어요." 비봉옥녀는 여전히 쌀쌀하게 말했다. "안 됐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야." 그러자 임청하는 놀랍다는 듯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어머! 언니는 꽤나 매정하시군요. 정말 오빠의 심정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하나요?" 비봉옥녀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그의 자유일 뿐이지, 내가 타인의 감정까지 책임질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에 임청하의 입가에는 다소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참 언니두......." 한편 중인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들은 장내가 소강상태에 빠지자 저마다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이때 백천기가 성큼성큼 임청하에게 걸어갔다. 그는 홍의소녀 임청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 다. "낭자, 그 옥불은 내 것이니 그만 돌려주는 것이 어떻겠소?" 그 말에 임청하는 펄쩍 뛰었다. "어머! 어째서 이 옥불이 당신 것이죠?" 백천기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것은 애초부터 소생이 갖고 있던 물건이었소이다." 임청하는 픽 웃었다.


"갖고 있었다고 해서 당신 것이라면 지금은 내가 갖고 있으니 내 것이 아닌가요?" 백천기는 내심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맹랑한 소녀로구나.' 그는 다소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낭자, 소생은 지금 농담 하자는 게 아니오. 내가 말하는 소유란 탈취와는 그 의미가 다르 오. 더구나 옥불로 인해 혼란이 일고있느니 낭자의 신상에도 결코 이롭지 않을 것이오. 그러 니 어서 돌려 주시오." 임청하는 고운 눈으로 그를 빤히 응시하더니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옥불을 지킬 자신이 있다는 얘긴가요?" "자신이 있고 없고는 차후 문제외다. 나는 단지 최선을 다하면 그뿐이오." 백천기의 말에 임청하는 한동안 그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은 당돌할 정도로 빤히 그를 바라 보았다. 백천기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두 남녀의 눈빛은 허공에서 마주친 채 꽤 오 랫동안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임청하의 얼굴에 엷은 홍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품 속으로부터 순순히 옥불을 꺼냈다. "좋아요, 당신에게 돌려 드리죠." 그녀는 마침내 백천기에게 옥불을 건네 주었다. 그러자 삼지신마와 독각괴마가 동시에 신형 을 날리며 고함쳤다. "애송이! 손을 거둬라. 옥불은 우리가 가져 가겠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공격했다. 쐐애액! 위이잉! 삼음홍화지와 괴장의 파공성이 허공을 뒤덮었다. 백천기는 눈썹을 꿈틀 하더니 차갑게 외쳤 다. "옥불은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몫이 아니다! 그대들은 당장 이 자리에서 사라져라." 다음 순간, 그는 음양마유공을 십 성이나 끌어 올렸다. 꽈르르르릉......! 엄청난 뇌성이 사위를 진동했다. 콰앙! 경천동지할 폭음과 함께 폭풍의 소용돌이 속에서 두 마디의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으윽!" 삼지신마와 독각괴마는 곤두박질치듯 허공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바닥에


떨어진 후 에도 연달아 십여 걸음이나 후퇴했다. 그 광경에 비봉옥녀와 임청하는 놀란 나머지 그만 입 을 딱 벌리고 말았다. '정말 심후한 내공이구나!' 그녀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 삼지신마와 독각괴마는 입가에 선혈을 주르륵 흘리며 비틀 거렸다. 그들은 서로 마주보더니 갑자기 신형을 날렸다. 허공으로부터 삼지신마의 원독에 찬 음성이 들려왔다. "두고 보자! 오늘의 이 원한은 반드시 갚겠다." 그들의 모습은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에 상황이 돌변하자 임청하는 한동안 멍하 니 백천기를 응시했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방긋 웃으며 말을 건냈다. "당신, 정말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군요?" 백천기는 그녀를 힐끗 쳐다본 후 담담히 대답했다. "과찬이외다. 운이 좋았을 따름이오." 문득 그의 안색이 변했다. 무심히 옥불을 만지던 그의 손에 밑부분이 열려있는 느낌이 감지 된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환희옥불은 뱃속이 텅 비어 있었다. 그 속에 있던 비도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아뿔사, 혈소마객 그 자가......" 백천기는 정신이 번쩍 들어 급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미 혈소마객의 자취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검미를 성큼 치켜올리더니 땅을 박찼다. "이런 실수를, 너무 방심했구나." 그는 자책이 담긴 한 마디를 남긴 채 비조(飛鳥)처럼 허공을 날아갔다. 물론 혈소마객이 사 라진 방향을 향해서였다. 신응녀 임청하가 그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이봐요! 잠깐 서요!" 하지만 이미 백천기의 신형은 그녀의 시야를 벗어나고 말았다. 쾌속무비하게 쏘아져 나가는 그의 속도는 눈으로도 따라잡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임청하는 속이 무척 상하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흥! 어쩜 저렇게 예의도 모르는 사람이 있담? 한 마디 인사도 없이 훌쩍 떠나 버리다 니......." 그녀는 백천기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잠시 후 임청하는 고개를 돌리더니 비봉옥녀에게 물었다.


"언니는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비봉옥녀는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모르겠어. 나도......." 그녀는 다소 음울한 시선으로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애초의 계획이 실패한 이상 반드시 그 환희옥불을 차지해야만 된다. 하지만......' 이런 그녀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임청하는 다시 물었다. "언니는 그 사람을 잘 아시나요?" "그 사람이라니?" 임청하는 얼굴을 약간 붉히더니 짐짓 토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아이 참, 누군 누구예요? 그 백의서생 말이죠." 비봉옥녀는 흠칫 놀라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알겠니?" 그러자 임청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생긋 웃었다. "호호! 아니면 되었어요. 난 또 혹시 언니가 그 분과 밀접한 사이가 아닌가 해서요." 그 말에 비봉옥녀는 피식 웃어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실은 나도 하매처럼 그를 처음 만난 것에 불과해. 그런데 하매가 정말로 묻고 싶은 것은 뭐지?" 그러자 임청하는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 언니 생각엔 제가 뭘 알고 싶어할 것 같아요? 그거야 뻔한 거 아닌가요?" "으음......." 비봉옥녀는 가볍게 탄식을 발할 뿐이었다. 임청하는 빠르게 종알거렸다. "어쨌든 언니가 그 분에게 관심이 없다니 다행이네요. 저는 그 분이 좋아졌거든요. 호 호......!" 그녀는 말과 함께 교구를 날렸다. "곽언니! 그럼 나중에 봐요." 그녀의 날씬한 교구는 화살처럼 백천기가 사라진 방향으로 쏘아 나갔다. 장내에는 비봉옥녀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비봉옥녀는 백천기와 임청하를 떠올리며 나직이 뇌까렸다. "관심이 없어 다행이라고? 후후......." 쓸쓸하고 건조한 웃음이 그녀의 입가에 흘렀다. 그녀의 눈속에는 웬지 모를 공허감이 어리 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백천기와 임청하가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내 목적은 오직 한 가지! 환희옥불에 숨겨져 있던 비도를 취하는 것 뿐이다. 그밖의 것은 아무 관심도 없어......." 그녀의 중얼거림이 흩어지고 있었다. 한편 백천기는 계속 질주하고 있었다. 그의 천안은 면밀하게 혈소마객이 남긴 흔적을 쫓아가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 신풍삼마를 추적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그다시 어렵지 않았다. 대략 한 시진 쯤 지났을


때였다. 문득 앞 쪽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찾았군.' 그의 신형은 마치 빛살처럼 신음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날아갔다. 그는 눈을 크게 떴다. 모 퉁이를 돌자마자 한 바위 옆에 혈소마객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것이 보인 것이었 다. "어떻게 된 일이오?" 그가 이렇게 외치자 혈소마객은 감았던 눈을 힘겹게 떴다. 밀랍같이 창백한 그의 얼굴에는 이미 사신(死神)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백천기를 보고도 놀랄 기력마저 없는 듯 간신히 입 술을 달싹일 뿐이었다. "너... 너는......" 백천기는 급히 물었다. "비도는 어디 있소?" 혈소마객은 쓴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트... 틀렸다. 비도는... 내 수중에 없다......." "대체 무슨 소리요? 누가 가져갔단 말이오?" "비도를 찾을 생각은 버... 려라. 비... 도를 가져간 자들의 무공은 너무도... 가공... 천하에서 누구도 감당 못... 한다......." 백천기의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그야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니오. 어서 누가 가져 갔는지나 말하시오." 혈소마객은 문득 신음을 내뱉더니 두 눈에 공포를 가득 담은 채 간신히 말했다. "자... 잔(殘)... 혼(魂)... 큭!" 그것이 끝이었다. 혈소마객은 최후의 한 마디를 남기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잔혼? 그렇다면 잔결마(殘缺魔)와 마혼신(魔魂神)을 말하는 것인가?" 백천기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다시 강호에 나타났단 말인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잔혼(殘魂)은 잔결마와 마혼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무림에 가공할 공포의 의미를 던지고 있는 것이었다. 태성왕부(太聖王府). 이곳은 현 황제의 아우인 태성왕의 거처였다. 원래 남경에는 두 개의 왕부가 있었다. 그 중 한 곳이 태성왕부였으며 다른 한 곳은 선황의 네 왕자들 중 막내인 주성왕(朱聖王)이 기거하는 주왕부(朱王府)였다. 오후 무렵, 태성왕부의 정문을 향해 한 필의 백마가 다가왔다. 마상에는 한 명의 기품있게


생긴 백의청년이 타고 있었다. 왕부의 정문에는 좌우로 높이 일 장이 넘는 거대한 돌사자가 눈을 부라린 채 우뚝 서 있었 다. 돌사자의 앞에는 각기 한 명씩의 금의를 입은 대한이 버티고 서 있었는데 그들은 몸집이 우 람했으며 허리에는 대도(大刀)를 차고 있어 위풍이 당당해 보였다. 그들은 오후의 사양(斜陽)을 받으며 다가오는 마상의 백의청년을 바라보며 자못 감탄의 기 색을 띄우고 있었다. 햇살을 등진 백의청년은 그야말로 인중지룡(人中之龍)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허! 대단한 풍모를 지녔구나. 이제껏 왕부를 드나들던 어떤 귀공자도 비할 바가 아니다. 두 명의 금의대한이 똑같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백의청년은 말에서 가뿐히 내려섰다. 그는 다름아닌 백천기였다. 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태성왕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가 말에서 내리자마자 오른쪽 돌사자 앞에 있던 금의대한이 급히 다가가 포권했다. "공자께서는 무슨 일로 이곳에 오셨소이까?" 금의대한의 태도는 정중하기 그지 없었다. 백천기도 마주 포권하며 예의바르게 답했다. "소생은 백천기라 하오. 얼마 전 태성왕 전하의 부름을 받고 이제야 오는 길이오." 그 말에 금의대한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왕야께서?" 그의 눈에는 약간의 의혹이 어리고 있었다. 실상 태성왕은 성격이 담백한데다 한운야학처럼 떠돌아 다니기를 좋아하는지라 좀체로 왕부 에 머무는 적이 없었다. 또한 외부 인사를 왕부로 불러들이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금의대한은 한동안 미심쩍은 얼굴로 백천기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백천기에게서는 의심이 갈만한 구석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금의대한은 마침내 한 발 물러서며 정중히 말했다. "섭하게 여기지는 말아 주십시오. 임무상 어쩔 수 없이 여쭤본 것 뿐입니다." 백천기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지사입니다. 그러니 전하께 전갈이나 해주시오." 금의대한은 방금 전보다 더욱 깍듯하게 고개를 숙혔다. "일단 안으로 드십시오. 공자." 금의대한이 옆으로 물러서자 왼쪽 돌사자 앞에 서 있던 금의대한이 말고삐를 넘겨 받았다. 잠시 후 백천기는 왕부 안으로 안내되었다. 왕부는 방대한 규모를 지니고 있었다. 고루거각이 치솟아 있었고 대전의 규모 또한 황궁을 방불케 했다. 게다가 연무장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백천기는 왕부를 둘러보며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시 대명의 왕부다운 훌륭한 건축이구나.' 그도 그럴 것이, 지붕은 모두 청색의 옥(玉)기와를 얹었으며, 기둥 하나마다 세밀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백천기는 한 채의 웅장한 대전으로 안내되었다. 금의무사는 그를 인도하여 대전의 회랑(廻廊)을 지났다. 다시 두 곳의 청(廳)을 지나더니 그 는 오색구슬 주렴이 드리워진 원형의 문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은 조용할 뿐더러 담담한 청향(淸香)이 감돌아 정신을 맑게 해주는 곳이었다. 금의무사 는 주렴 앞에 부복하더니 엄숙한 음성으로 아뢰었다. "전하, 백공자께서 당도하셨습니다." 그러자 주렴 안쪽으로부터 낮게 깔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서 모셔라." 음성의 주인공은 과연 태성왕이었다. 백천기는 담담한 표정으로 주렴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전 안으로 들어선 그는 정면의 태사의에 앉아 있는 태성왕을 볼 수 있었다. 태성왕이 있는 내전은 태성왕부의 규모와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검박하고 조촐한 모습이 다. 방 한가운데 단목으로 된 탁자와 의자가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을 뿐 바닥에는 그 흔한 양탄자조차도 깔려 있지 않았다. 사방의 벽면도 마찬가지였다. 몇 점의 고서화가 걸려있을 뿐, 이렇다 할 장식물은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백천기는 방 안의 담백한 모습에 자뭇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 기인이구나. 무엇이든 원하기만 하면 취할 수 있는 지고무상한 신분인데도 이 분의 생활은 담백하기 그지없구나.' 그는 태성왕에 대해 절로 존경심이 일어났다. 이때 태성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갑게 그 를 맞이했다. "어서 오게, 그동안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네." 백천기는 허리를 깊이 숙여 답했다.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소생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태성왕은 미소를 지으며 단목탁자로 다가섰다. "자, 의자에 앉게." 백천기는 태성왕에게 다시 한 번 예를 표한 후, 그가 가리키는 자리에 앉았다. 맞은 편에


앉 은 태성왕의 눈길이 부드럽게 백천기의 얼굴에 와닿고 있었다. 태성왕은 흰 수염을 쓰다듬더니 다소 흥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천기, 자네는 과연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네." "무슨 말씀이신지......?" 백천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허! 내 처음부터 자네가 대과에서 장원할 것이라 믿고 있었네." 백천기는 그제서야 비로소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는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태성왕은 마치 자신의 일이기라도 한 듯 연신 흡족한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허허, 시험관인 선우공(鮮于公)의 칭찬이 대단하더군. 평소에는 그렇게도 말이 없던 위인이 니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하는 걸 보면 알만한 일이네." 백천기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상 그는 하루 전에 자신이 장원으로 뽑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명리에 초연한 성 품이었으므로 그 사실을 그저 담담히 받아들였을 따름이었다. "허헛, 내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네. 더구나 백공의 자제라면 내 친자나 다름 없지. 그런 자네가 뛰어난 기재이기까지 하니 나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네." 백천기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황공합니다. 전하." 태성왕의 흰 눈썹이 문득 찌푸러졌다. "자네, 그 전하라는 호칭을 좀 떼어버릴 수 없나? 사실 이전부터도 대단히 거슬렸네." "그럼......?" "음. 날 백부라고 부르게." 백천기는 당황해 마지 않았다. "어찌 감히 그런 불경(不敬)을......." "같은 소리를 또 되풀이해야 하나? 내 뜻을 잘 알면서도 그렇게 나온다면 결국 날 무시하는 셈이 아닌가?" 태성왕의 태도는 강경했다. 백천기는 난색을 지었으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소질, 백부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태성왕은 흔쾌하게 웃었다. "허허헛! 진작 그랬어야지. 이 백부는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구나." 이렇게 하여 백천기는 졸지에 황가(皇家)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저 담담히 받아들일 뿐이었다. 애당초 그가 흠모했던 것은 태성왕 개인이었지 그의 배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득 문 밖으로부터 청아한 음성이 들려왔다. "전하, 방금 주성왕(朱聖王) 전하께서 왕부에 도착하셨다 하옵니다."


태성왕은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산산(珊珊)아, 잠시 이리 들어오너라." 주렴이 조심스럽게 걷히며 한 소녀가 사뿐사뿐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다름아닌 모용산산이 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시비의 차림이 아니었다. 전신에 푸른색의 하늘거리는 의삼을 걸쳤으며, 머리는 등 뒤로 길게 땋아 내리고 있었다. 또한 가벼운 화장을 한 듯 두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어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태였다. 고개를 숙인 채 다소곳이 서 있는 그녀에게 태성왕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허허허! 산산, 누가 와 있는지 한 번 보아라." 그 말에 모용산산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백천기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 왔다. "어멋!" 그녀는 놀란 외침을 발하더니 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가뜩이나 수줍음을 잘 타던 그녀의 얼굴은 제 풀에 당황하여 더욱 빨갛게 물들어 버리고 말았다. 백천기는 몸을 일으켜 목덜미까지 붉어진 그녀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모용낭자, 오랫만이외다." 그러자 모용산산은 어쩔 줄을 모르는 듯 말까지 더듬었다. "제, 제가 무례를... 고, 공자님께서 계신 줄을 미처 몰랐습니다." 태성왕은 그 모습에 대소를 터뜨렸다. "허허허! 산산, 백공자는 당분간 이곳에 머물기로 했느니라." 그 말에 흑백이 분명한 모용산산의 눈에 언뜻 기쁨이 스쳤다. "아참, 넷째가 당도했다고 했더냐? 산산, 어서 가서 왕야를 모셔오도록 해라." 태성왕의 분부에 모용산산은 다시금 머리를 조아렸다. "네, 전하." 그녀는 몸을 뒤로 물리다 말고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금번 사왕야의 행차에는 자연군주(紫娟君主)께서도 함께 오셨다 하옵니다." "자연이?" 태성왕은 사뭇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연군주는 주성왕의 하나밖에 없는 딸로 왕가의 많은 군주들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미모와 자질을 갖추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재주는 실로 비상하기 짝이 없었다. 시(詩), 서(書), 화(畵)는 물론 금(琴), 기(棋)에도 정통하여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여인이었다. 더욱이 그녀의 용모야말로 가히 천하절색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제껏 그녀를 보았던 사람이라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양귀비나 서시(西施)가 무색할 것이 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다만 자연군주는 천품이 고고하고 자존심이 강하여 천하의 남자들을 발 아래로


굽어보고 있 었다. 태성왕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허어, 지금까지 서왕부(西王府)를 떠나지 않던 그 아이가 무슨 바람이 불어 이곳 동왕부(東 王府)에 왔단 말인가?" 본시 남경에 있는 두 개의 왕부는 달리 동서로 나누어 불리우고 있었다. 태성왕은 곧 고개 를 끄덕여 보였다. "알았다. 너는 그 분들을 모시고 오너라." "네." 모용산산은 문 밖으로 나가며 뭔가 아쉬움이 담긴 눈으로 백천기를 응시했다. 그 모습에 태 성왕은 빙그레 웃었다. 이어 그는 그녀가 나가기를 기다려 낮게 말했다. "허허허, 천기야." "하명하십시오." "내 보기에 아무래도 저 아이는 너에게 반한 것 같구나." "네?" 백천기는 아연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백부님." 태성왕의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퍽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천기, 네가 보기에 저 아이는 어떠냐?" 백천기는 멈칫했으나 곧 담담하게 대답했다. "모용낭자는 대단히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태성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너도 정녕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그건 사실입니다." "흐음, 그렇다면 어떠냐? 네가 원한다면 나는 저 아이를 네게 줄 수도 있다." 백천기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백부님, 아름답다고 해서 모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닌 줄로 압니다. 더구나 모용낭 자의 의중도 모르는 채 일방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태성왕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건 네 말이 맞다. 그러나......" 그의 미간에 언뜻 깊은 주름이 잡혔다. "너는 진정한 내 뜻을 아직 모른다. 너는 장차 한 명의 정실만을 갖지는 못할 것이다. 관상 (觀相)으로 보아 필히 삼처사첩을 거느리게 될 테니 말이다." 그 말에 백천기는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멋적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만 하십시오, 백부님. 소질 민망해서 자리에 앉아있기도 거북할 정도입니다." 태성왕은 껄껄 대소를 터뜨리며 손을 흔들었다. "허허! 알겠다, 내 그만하도록 하지. 그러나 방금 한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다. 자고로 여인 을 상심하게 만들어 좋은 일은 없으니 이 점을 반드시 명심해 두거라." 이어 그는 신색을 가다듬더니 백천기를 똑바로 정시했다. 그 바람에 백천기도 자세를 바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태성왕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널 부른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백천기는 고개를 저었고 태성왕의 긴 탄식이 뒤를 이었다. "오늘 주성왕이 이곳에 오는 것도 그 일 때문이지." 백천기는 무엇인가 심각한 일이 있음을 깨닫고는 내심 긴장을 조였다. 이때, 문 밖으로부터 모용산산의 음성이 들려왔다. "전하, 사왕야와 자연군주를 모시고 왔사옵니다." 태성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드시도록 해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렴이 걷히며 두 사람이 들어섰다. 앞장 선 인물은 당금 황제의 막내동생인 주성왕이었다. 그는 일신에 화려한 금포를 입은 사십대의 중년인으로 용모가 단 아하고 청수했다. 그러나 검은 두 눈썹 아래에서 번쩍이는 눈빛은 대명의 황족다운 위엄이 넘치고 있었다. 그 의 금포에는 용이 수놓아져 있었고 허리에는 금대를 두르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일신에 은의를 걸친 절세미인이 따르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십팔구 세 가량, 머리를 궁장으로 틀어 올렸으며 손에는 깃털로 된 공작선을 비스듬히 들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이루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학같은 고고함에 버들같은 유려 함을 겸비하고 있었고, 성숙미와 청초한 분위기를 동시에 갖춘 완벽한 미인이었다. 그들이 들어서자 태성왕은 근엄함을 잃지 않는 가운데서도 환하게 웃었다. "오! 어서 오게, 아우." "오랫만에 뵙습니다. 형님." 태성왕은 자연군주를 향해서도 미소를 지었다. "허허! 자연은 그간 더욱 아름다워졌구나." 자연군주는 곱게 웃으며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대충 인사가 끝나자 태성왕은 백천기를 그들에게 소개했다.


"내 자네에게도 말한 바 있네만 이 젊은이가 바로 백공의 자제일세. 아울러 이번 대과에서 장원을 차지한 인재이기도 하지." 백천기는 주성왕을 향해 깊숙히 읍했다. "소생 백천기, 전하를 뵙습니다." 주성왕은 관심 깊은 눈으로 백천기를 살펴본 후,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출중한 인물이로구나. 형님께서 왜 그토록 칭찬하시는지 이제야 알겠구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흠, 자네에 관해서라면 형님께 귀가 따가울 정도로 얘기를 들었네." "황공합니다. 전하." 백천기는 인사를 마치자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주성왕의 시선은 백천기에게서 내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가 초면인 인물에게 이렇듯 관심을 보인 것은 그야말로 드문 일이었다. 자연군주는 그때까지도 줄곧 침묵하고 있었다. 그녀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백천기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으나 실은 고고하기 그지없는 자연군주 의 가슴에는 잔잔한 파랑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주성왕을 통해 백천기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그녀는 그저 과분 한 칭찬 쯤으로 일축해 버렸었다. 그런데 막상 직접 백천기를 대하고 보니 그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 앞의 청년이 야말로 가히 인중지룡(人中之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었다. 그것은 천부적인 오기 때 문이었다. 사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심중 깊은 곳에서 백천기에 대한 은근한 반발심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특히 그녀는 백천기의 영준한 용모에 대해 내심 코웃음치고 있었다. '흥! 저 번드르르한 얼굴로 어쩌다 노인들의 환심을 샀는지는 모르지만 내게는 통하지 않을 걸?' 이러는 동안 중인들은 탁자를 가운데 두고 자리 잡았다. 태성왕은 그들의 얼굴을 차례로 쓸 어 보았다. 제 11 장 · 왕부일화(王府逸話) 모용산산이 향차(香茶)를 날라왔다. 백천기는 푸른 자기 찻잔에 담긴 향차가 귀한 용정차(龍井茶) 임을

알아 보고는


천천히 맛 과 향을 음미하며 마셨다. '역시 황가(皇家)인지라 객을 대접하는데도 격조가 있구나.' 이때 태성왕이 찻잔을 내려 놓더니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천기, 내 널 청하기에는 말못할 사연이 있었다." 백천기는 표정을 가다듬은 채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세인들이 알아서는 안 될 황가의 커다란 비밀 때문이네." 태성왕은 이어 긴 탄식을 불어냈다. 그 바람에 좌중은 일시에 무거운 침묵에 휩싸이고 말았 다. 주성왕은 물론 자연군주의 표정도 심각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태성왕은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말을 이었다. "흠, 원래 우리 황가는 선황(先皇)의 혈육인 사형제가 있다. 선황께서 승하하신 후, 자연스럽 게 첫째 형님께서 위(位)를 물려 받았다." 거기까지는 세간에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으므로 백천기도 능히 알고 있었다. 태성왕의 얼굴 에는 점차 짙은 암운이 깃들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셋째인 무성왕(武聖王)의 행동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삼왕야께서......?' 백천기는 내심 의혹을 금치 못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태성왕의 침중한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내가 알기로도 무성왕은 오래 전부터 무림의 고수들을 휘하에 두고 은연중 비밀세력을 키 우고 있었지." 백천기는 다소 의아한 느낌이었다. 사실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 다. 대대로 왕후장상들은 사재를 털어 낭인무인(浪人武人)들을 규합하여 사병화(私兵化) 시 키는 예가 허다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천기는 웬지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태성왕이 굳이 그 말을 꺼낸 데는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태성왕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내 입으로는 발설하기조차 부끄러운 얘기지만 셋째는 감히 황위(皇位)의 찬탈을 노리고 있 는 것 같다." "넷?"


백천기는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어찌 그러실 수가!" 그는 마치 뒷통수를 쇠뭉치로 얻어맞은 듯 멍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자 이제껏 잠자코 있 던 주성왕이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으음, 행인지 불행인지 그 음모는 아직 표면으로 드러난 것은 아니네." 주성왕은 번쩍이는 시선으로 허공을 노려 보았다. "하지만 최근에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무성왕은 현재 상당수에 이르는 흑도마두(黑道魔頭) 들을 거느리고 있네." 백천기는 부지중 분노를 금치 못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설사 삼왕야일지라도 대역죄(大逆罪)를 면치 못하실 것입니다." 그의 말은 진중하면서도 단호한 면이 있었다. 태성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셋째는 패륜(悖倫)도 불사할 정도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다." 그의 말은 점입가경이었다. "내가 장강에서 습격 받은 일만 해도 배후에 셋째가 개입되어 있는 게 분명하다." 백천기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증거라도 있습니까?" 태성왕은 딱딱하게 굳은 안색으로 설명했다. "음. 본래 나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장강에 배를 띄우고 세상 물정을 익히곤 하지. 그런데 그 사이에 황실에서 긴급한 연락이라도 있을까 하여 항상 기일이 정해지면 형제들에게 통보 해 주곤 했었다. 물론 그들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말이다." "으음......." 백천기는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려냈다. 더 듣지 않아도 의심의 여지는 충분한 것이었 다. 그의 안색이 굳어지자 중인들도 모두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더욱이 황족인 그들의 얼굴에 는 일말의 수치감마저 떠오르고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백천기는 외인(外人)이었기 때문이다. 태성왕은 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셋째가 날 습격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백천기의 눈썹이 꿈틀 했다. "그게 대체 무엇입니까?" 태성왕의 얼굴에 문득 엄숙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바로 한 개의 옥패(玉牌) 때문이지." 태성왕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설명했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황가에서는 오랜 내분 끝에 급기야 비극적인 사태가 일어났었다.


왕자들끼리 서로 황위를 차지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상잔(相殘)을 벌인 것이다." "아! 그런 일이......" 황가의 비사(秘史)를 알 리 없는 백천기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그로 인해 좌중은 더 욱 무거운 분위기에 빠졌다. "그로 인해 무서운 일이 황실의 곳곳에서 일어났다. 허허, 대명(大明)의 수치스런 일이지." "음......." 백천기는 신음을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성왕의 내면에 담긴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황상의 진노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모반(謀反)은 평정되었으나 그로 인해 황 가는 커다란 손실을 입을 수 밖에 없었지." 태성왕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어 그는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되자 황제께서는 한 개의 옥패를 만드셨다. 훗날에 다시 발생할지도 모를 비극을 미연에 방지하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어떤 물건입니까?" 백천기의 질문이었다. "천황령(天皇令)이라 하는 것이다." "천황령......?" "천황령은 모든 황족들을 누를 수 있는 지고무상(至高無上)의 권위를 지닌 물건이다." 그것은 백천기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가 관심을 보이자 태성왕의 어조는 더욱 진지 해졌다. "이후로 천황령은 황제의 옥새와 더불어 대명의 이대지보(二大之寶)로 전해져 내려왔다. 아 니, 천황령은 사실 옥새보다 더욱 귀중한 것일지도 모르지. 당금의 황상이라 해도 천황령의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하니 말이다." 백천기는 내심 아연해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천황령의 권위는 황제를 능가한다는 말인데....... 만일 불측한 마음을 품은 외부인 이 천황령을 습득하게 되면 그 결과는 어찌될 것인가?' 그는 의문이 일자 즉시 물었다. "백부님, 그럼 천황령이야말로 황실에 위협이 되지 않겠습니까?" 태성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런 점도 없지 않다. 그러나 천황령은 극비리에 직계 황손에게만 전해져 내려


왔기 때문에 외부인은 물론 중신들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 또한......" 그는 주성왕의 얼굴을 힐끗 바라본 뒤 말을 이었다. "선황께서는 천황령을 첫째 형님께 물려주시려 했다. 그러나 형님의 심성이 지나치게 온후 하고 나약한 것을 걱정하신 나머지 결국 내가 맡게 되었다." 백천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뇌리에는 장강에서의 사건이 그림처럼 선명하게 그려 지고 있었다. 그는 당시 위험한 상황에서도 담담함을 잃지 않은 태성왕에 대해 경외감을 느낀 적이 있었 다. '하긴 백부님이라면 천황령을 보관하고 계실 만 하다.' 백천기는 한동안 침묵 끝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소질을 부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태성왕은 불현듯 두 눈에서 정광을 뿜어냈다. "그것은 물론 무성왕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서지." 백천기는 흠칫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소질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태성왕은 손을 내젓더니 잘라 말했다. "아니, 너에게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그는 백천기를 똑바로 주시하며 물었다. "너는 내가 왕의 몸으로 어떻게 무공을 익혔는지 아느냐?" "모릅니다." "오래 전, 무림의 한 기인으로부터 배웠다. 그 분은 바로 천기자(天機子)라는 분이셨다." "천기자!" 백천기의 입에서 경악에 찬 탄성이 흘러나왔다. 천기자라면 바로 무림쌍자(武林雙子) 중 한 명이었다. 그로 말하자면 무공은 물론 기문둔갑 (奇門遁甲)과 천문지리(天文地理) 등 각종 학문에 능통한 기인 중의 기인이었다. '백부님께서 천기자와 연을 맺고 계실 줄이야.......' 백천기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본래 무림인들은 관이나 황가에 대해서는 인연을 맺지 않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런데 당금의 최절정 인물 중 하나인 천기자가 태성왕에게 무공을 전해주었다는 것은 실로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한편, 자연군주는 백천기의 맞은 편에 앉아 줄곧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그녀의 봉목(鳳目)에서는 차츰 이채가 떠오르고 있었다.


어느덧 그에 대한 반발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백천기의 언행에서 그녀는 점차 매료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태성왕의 음성이 그녀의 상념을 끊었다. "천기자는 내가 평소 존경하던 분으로 이전에는 학문을 논하는 스승이기도 했다. 그런데 최 근에 내 얼굴에서 근심이 떠나지 않자 그 분은 까닭을 물으셨고 나는 모든 것을 털어놓게 되었다." "......." "그러자 그 분은 점(占)을 치시더니 이번에 장강에 배를 띄우게 되면 한 명의 기인이 나타 날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또한 오직 그 자만이 황궁의 음모를 척결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 셨다." 백천기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태성왕은 단순히 천기자의 예언에 의지하여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닌가.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백부님, 하지만 소질은 황가의 인물이 아니므로 그 일에 개입할 명분이 없습니다." "그 점이라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태성왕은 주성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눈길을 받자 주성왕의 입가에는 의미 깊은 미소 가 떠올랐다. 그들은 무언중에 서로의 심중을 확인하는 듯 했다. 잠시 후 태성왕은 다시 입을 열었다. "명분이 없다면 만들면 된다. 그 정도 준비도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자 주성왕이 그의 말을 받았다. "소협, 그대는 대과에 장원을 하였으니 관직을 받을 수가 있네. 그렇게 되면 자격은 충분한 셈이지. 이미 형님과 나는 상의한 바가 있네." 태성왕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 "허허, 너만 수락한다면 내일 당장이라도 황제폐하께 상소하겠다." "......!" 백천기는 아연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대명제국의 왕이었다. 그런 그들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개 문사인 자신에게 모든 운명을 걸려하고 있었다. 백천기는 내심 탄식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라는 두 분이 나같은 범부(凡夫)를 영입하려 친히 나 서려 하시다니.......'


그가 입을 다물고 있자 좌중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심지어는 자연군주의 봉목에도 일말의 기대와 초조감이 떠올르고 있었다. 백천기는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백부님, 그리고 전하와 군주께서는 심려치 마십시오. 이 백천기 비록 미거하나 대명의 백성 입니다. 황실이 존폐의 위기에 놓였다니 설사 목숨을 내놓으라 하신들 어찌 감히 명을 거역 하겠습니까?" "오오! 천기......." 태성왕과 주성왕은 감격스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소생 두 분의 뜻을 받들기 전에 몇 가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비록 제 사견에 불 과하나 대사를 위해서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헛헛헛......! 내 그럴 줄 알았지. 너는 벌써부터 복안이 있었구나. 어서 말하거라. 더 기다리 다간 이 백부의 숨이 넘어갈지도 모르니까." "하하! 설마 그렇게까지......" 태성왕과 백천기. 두 사람의 모습은 진짜 숙질(叔嫉)에 버금가는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잠시 후 백천기는 침착하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의 음성은 매우 낮았으나 태성왕과 주성왕, 그리고 자연군주의 귀에는 그 어떤 말보다도 확실하게 들려왔다. 그들은 눈과 귀를 백천기에게 집중한 채 그가 하는 말을 경청하기 시작 했다. 그들 삼 인은 수시로 안색에 변화를 일으켰다. 그것은 백천기가 말하는 내용이 하나같이 그 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백천기의 얘기가 끝났다. 한동안 방 안은 침묵에 잠겼다. 한참 후에야 태성왕이 얼굴 을 활짝 펴며 탄성을 발했다. "정말 멋지다. 천기! 내 장담하건데 네 지혜야말로 천하의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주성왕도 만면에 희색을 띈 채 말했다. "앞으로 모든 일은 자네에게 일임하겠네. 대명황실의 운명이 자네의 어깨에 얹혀 있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닐세."


백천기는 그저 담담히 말할 뿐이었다. "과찬이십니다. 소생은 그저 민망할 따름입니다." "아닐세. 자네의 능력에는 백 마디의 찬사가 부족할 지경이네." 주성왕은 연신 감탄을 그치지 않았고 곁에서 이를 지켜보는 태성왕의 얼굴에도 흡족한 미소 가 내내 머물러 있었다. 한편 자연군주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이 순간 미묘한 기색이 어리고 있었다. 백천기를 바라 보는 그녀의 눈에는 신비한 광채가 일어나고 있었다. 과연, 일대기녀인 그녀가 무엇을 생각 하고 있는지는 오직 그녀 자신만이 알 뿐이었다. 숲 속. 그곳은 왕부의 후원에 있는 가산(假山)에 있었다. 말이 가산이지, 그 크기로 말한다면 웬만한 야산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따라서 가산에 우거 진 숲도 울창하기 그지없었다. 백천기는 지금 숲 속의 한 거목에 기대선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왕부에 머문 지도 벌써 열흘이 흘렀구나. 황제를 만나러 북경에 가신 태성왕께서는 언제 돌아오실지도 알 수 없고. 그렇다고 계속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는 문득 몸을 바로 세웠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오늘부터는 틈나는대로 무공을 익혀야겠다. 나의 내공은 현재 이 갑자에 달하지만 그에 비해 초식 방면은 아직 멀었다.' 백천기는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숲 가운데 있는 공지에 당도해 있었다. 그곳은 바닥에 부드러운 풀이 깔려 있 어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백천기는 풀밭에 서서 상념에 잠겼다. '아홉 권의 비급들은 하나같이 인간 능력의 한계를 벗어난 것들이다. 따라서 짧은 기간 내 에 그것을 모두 연마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중 한 가지만 해도 한 개인의 필생 절학이 담겨 있으니 욕심내서는 안 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백천기는 구천마경의 내용을 하나씩 더듬어 보았다. 그것은 그들 속에서 비교적 속성으로 익힐 수 있는 무학을 떠올리기 위함이었다. 마침내 그는 귀진자(鬼眞子)의 귀진마전(鬼眞魔典)에 기재되어 있던 두 가지의 무공을 떠올 렸다. '차경미기와 잠종화영보라면 다른 무공들에 비해 훨씬 익히기가 쉬울 것이다.'


차경미기(借勁彌氣). 이는 이화접목(離火接木)의 이치를 적용한 무공이었다. 차경미기를 운공하게 되면 무(無)에서 유(有)를 생성할 수가 있었다. 즉 상대의 공력을 빌어 역(逆)으로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내공 소모를 필요치 않는 기이한 무공이었다. 또한 익히는 과정도 간단했다. 단지 백 년 이상의 내공과 일정한 자질만 갖추고 있다면 빠 른 시일 내에 극성에 이를 수 있었다. 반면에 그 두 가지 조건이 겸비되지 않으면 평생을 익힌다 하더라도 그 성과를 기대하기 어 려웠다. 잠종화영보(潛踪化影步). 이것은 천하에서 가장 신묘한 보법이었다. 상대방의 시각을 교란시켜 공격을 어긋나게 하는 가 하면 공수(攻守) 양면으로도 활용도가 높은 보법이었다. 만일 전력으로 잠종화영보를 펼치면 상대는 오직 팔방(八方)을 에워싼 그림자밖에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허(虛)였으므로 상대를 교란시키는 데는 일품이었다. 이 잠종화영보 역시 오랜 기간의 수련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다만 뛰어난 이해력만 있으면 속성이 가능했다. "......." 백천기는 풀밭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는 차경미기와 잠종화영보라는 두 가지 무공의 특성과 요결들을 떠올리며 무념무상(無念 無想)의 경지에 들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새소리나 바람소리조차 그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완전한 정적의 세계로 그는 쉽게 몰입해 들어갔다. 왕부의 후면에 위치한 이 가산은 태성왕 이외에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따 라서 아무도 그를 방해하는 자가 없었다. 백천기의 표정은 완전한 무심(無心)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지그시 눈을 내려감고 있는 그는 설사 코 앞에서 태산이 무너진다 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어느덧 해는 서편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문득 백천기의 눈꺼풀이 들려지더니 기이한 신광을 번쩍 뿜어냈다. 곧이어 그의 얼굴에 번


지는 것은 형언할 길 없는 희열이었다. 백천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그렇다! 이 이치는 복잡한 듯 하지만 실은 무척이나 단순한 것이로구나!" 그는 불과 반나절 동안의 명상을 통해 귀진자의 차경미기와 잠종화영보의 이치를 환히 깨달 은 것이었다. 백천기는 곧 그 무공들을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곧 몸을 움직였다. 그는 한 그루의 나무를 마주보고 섰다. 어른 세 아름은 족히 되어 보이는 고송이었다. 백천기는 고송을 향해 서서히 우장을 내밀었다. 스스스---! 그의 장심에서 무형의 경기가 발출되어 고송을 휩쓸어 갔다. 그러나 그 경기가 채 닿기도 전에 고송의 솔잎은 모조리 떨어져 날아가고 말았다. "차앗!" 다시 짧은 기합과 함께 이번에는 백천기의 좌장이 번뜩였다. 휘류류류륭! 괴이한 음향과 함께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고송에서 떨어져 나간 수천만 개의 솔잎들이 일 제히 무형의 힘에 휘말리더니 고송의 둥치를 향해 쏘아가는 것이 아닌가? 파파파팍......! 솔잎은 하나도 남김없이 고목의 둥치에 깊숙히 꽂혀 버렸다. 백천기는 비로소 양손을 거두었다. 그의 입가에는 만족한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정말 신묘하구나." 백천기는 신형을 바로잡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이번에는 잠종화염보를......" 그의 어깨가 흔들 하는가 싶더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휘리리릭! 바람소리가 일어났다. 그의 모습은 허상(虛像)이 되어 방원 삼 장여의 테두리를 어지럽게 회 전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신형이 하나로 합쳐지더니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하지만 그의 모습에서는 일점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대단한 절기다. 차경미기와 이 잠종화영보면 어떤 위기라고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다." 백천기는 자신감이 생기고 있었다. 그것은 향후 새롭게 열리는 세계에 대한 확신감으로 이 어지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저물어가는 하늘을 응시했다. 일몰(日沒)이 눈에 들어오자 그의 심경은


더 욱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밖의 무공들은 너무나 잔혹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 여러 번 경험했지만 결정적으로 상대 방을 격살해야할 때에 필요한 것이지 통상적으로 사용하기에는 지나친 감이 있다. 지금 현 재 내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강호의 일반적인 초식들이다.' 그는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만 처소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띵... 띠딩... 딩....... 불현듯 어디선가 금음(琴音)이 울려왔다. 그것은 마치 바람결에 흔들리는 퐁경 소리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계곡을 흘러내리는 옥수를 연상케 하기도 했다. '누가 이런 훌륭한 연주를 하는 것일까?' 백천기는 내심 탄성을 발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가 걸어가는 방향은 처소와의 반대 편이었다. 그는 무심결에 금음을 좇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가산이 끝나는 곳에 이르자 그곳에 방원 십여 장에 달하는 하나의 연못이 나타났다. 연목 한가운데에는 정교하게 지어진 정자가 있었는데 우아한 목교(木橋)가 한껏 정취를 자 아내며 이어져 있었다. 금음은 바로 그 정자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석양은 대지에 노을을 깔고 있었고, 고운 노을빛은 연못물에 반사되어 그윽한 풍치를 이루 고 있었다. "......." 백천기는 그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었다. 게다가 꿈결 같은 금음이 간간이 귓전을 울리니 마치 천상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어느덧 그의 발은 자신도 모르게 목교를 밟고 있었다. '자연군주?' 금음의 주인공은 바로 다름 아닌 자연군주였다. 정자에서 금을 타고 있는 것은 바로 그녀였 던 것이다. 무릎에 살며시 옥금을 올려놓고 연주하는 그녀의 자태는 가히 천상의 선녀를 방불케 했다. 날아갈 듯한 백색의 비단나삼을 입은 채 머리를 궁장으로 틀어올린 그녀는 자태는 사나이의 간장을 타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문득 금음이 갑자기 뚝 끊어졌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자연군주의 고개가 서서히 들려졌다. 이어 그녀의 망막에는 백천기의 모


습이 들어왔다. 자연군주는 입가에 신비한 웃음을 띄웠다. "공자께서 어인 일로......?" 백천기도 급히 포권했다. "금음에 도취되어 실례를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소이다." "호호호! 공자께서는 칭찬이 지나치시군요?" 비록 겸양의 말이었으나 그녀의 어투는 습관인 듯 여전히 오만했다. 백천기는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외다. 소생도 음(音)에 대해서는 다소 알고 있소이다. 군주의 금음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소이다." 자연군주의 눈이 이채를 띄며 그를 응시했다. "공자께서 음을 아신다니 다행이군요. 그렇다면 이리 오셔서 소녀로 하여금 경청할 영광을 베풀어 주시지요." 백천기는 그만 고소를 짓고 말았다. "군주께 비하면 소생의 솜씨는 그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소이다." 자연군주는 강하게 말했다. "그래도 소녀는 듣고 싶습니다." "정히 그러하시다면, 소생 보잘 것 없는 솜씨나마 보여 드리겠습니다." 백천기도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연군주로부터 칠현금을 넘겨 받자 그는 잠시 현을 고르더니 이내 탄주하기 시작했다. 잠 시 후 정자 안은 금음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것은 담백하면서도 청량한 곡조였다. "......!" 듣고 있던 자연군주의 얼굴에는 놀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녀는 홀연히 붉은 입술을 열어 중얼거렸다. "멋진 산중유정곡(山中幽情曲)이로군요." 백천기는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하! 군주께서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 같아 소생도 기쁘오. 그럼 그런 의미에서 한 곡 더......" 그의 손가락이 현 위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자연군주는 다소 넋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그가 탄주하는 음을 듣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알 리가 없엇다. 백천기는 이미 악기를 다루는 솜씨에 있어 일가견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금과 소(簫)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독보적 경지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었다. 자연군주는 부지중 내심 이렇게 뇌까리고 있었다.


'또... 졌어.' 문득 그녀의 앞섶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것은 놀랍게도 눈물 방울이었다. 그녀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어느새 금음에 매료되고 있었던 것이다. 구구절절 애간장이 끊어지는 사연을 풀어내는 듯한 금음의 조화는 인생의 슬픈 단면을 보여 주는 듯 했다. 부지불식간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금음에 빨려들고 만 것이었다. 마침내 자연군주는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느 틈엔가 그녀의 고운 얼굴은 눈물로 흠씬 젖어 있었다. "흑흑......." 그녀의 나직한 흐느낌에 백천기는 안색이 변했다. '이럴 수가, 상심루(傷心淚)란 제목의 이 곡(曲)이 오만하기 그지없는 군주의 마음을 이렇게 쉽게 파고들 줄이야.' 상심루는 다름아닌 구천현녀가 남긴 아홉 개의 음공 중 서곡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위력은 즉각 나타난 것이었다. 더구나 백천기는 탄금하면서 전혀 내공을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군주는 이성을 잃고 금음에 말려든 것이었다. 만일 그가 내공을 사용했더라면 자연군주는 필경 내상(內傷)을 입거나 심맥에 큰 손상을 입 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마침내 백천기는 손을 멈추었다. "으음......." 그는 탄식을 불어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직도 환몽(幻夢)에서 깨어나지 못한 자연군 주를 내려다 보았다. 그는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당신은 이제껏 세상과 너무나 두터운 벽을 쌓고 있었소. 바라건대 오늘 이후로는 그 벽을 허무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는 발길을 돌렸다. 어느덧 날은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백천기는 방 안의 침상 위에 가부좌를 튼 채 음양마유공을 운공하고 있었다. 정자에서 자연군주와 그 일이 있은 후로 다시 닷새가 지났다. 그 동안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력을 가다듬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로 인해 음양마유공은 이제 거의 십 성의 수위에 이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백천기는 눈을 떴다. 정신이 한결 맑아져 있음을 느끼며 그는 더 없이 상쾌한 기분이 들었


다. "백공자님, 안에 계시옵니까?" 문득 밖으로부터 맑은 소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백천기는 그 음성이 모용산산임을 알아차리고는 옷차림을 매만지며 말했다. "들어 오시오. 모용낭자." 문이 열리더니 자색 옷을 입은 모용산산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녀의 자태는 무척이나 현숙해 보였다. 그녀는 백천기를 보자 얼굴을 살짝 붉히며 수줍은 음성으로 말했다. "공자님, 방금 전 전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아!" 백천기는 탄성을 발하며 말했다. "모용낭자의 안색이 밝은 것으로 미루어 필시 좋은 소식이 있는 것 같소만......?" 모용산산은 배시시 웃었다. "전하께서는 단지 공자님을 모셔오라고만 하셨어요." 백천기는 쾌히 응수했다. "알겠소. 내 의복을 갈아입은 후 곧 바로 가리다." 모용산산이 다가서며 말했다. "제가 도와 드리겠어요." 그녀는 평소의 소심함과는 대조적으로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백천기의 옷을 벗기려 들었다. 깜짝 놀란 것은 백천기였다. "아니... 그럴 필요 없소이다." 그는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모영산산의 봉 긋한 젖가슴을 건드리게 되었다. "어머......!" 모용산산은 그만 질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런......" 백천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황급히 포권하며 말했다. "낭자, 용서하시오. 정말 고의가 아니었소이다." 그러나 모용산산은 그보다 더욱 당황하고 있었다. 그녀는 귓볼까지 새빨개진 채 어쩔 줄을 모르는 모습이었다. "아... 알고 있어요. 공자님께서는 아무 잘못이......" '쯧! 내 어쩌다 이런 실수를?' 백천기는 자신을 나무라며 자뭇 난색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순간이었으나 손끝에 스친 모 용산산의 뭉클한 젖가슴의 감촉을 쉽게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수줍어하고 있는 모용산산을 바라보며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이 소녀는 정말 아름답구나. 더구나 수줍어하는 모습이야말로 가슴을 뛰게 할 정도로


매혹 적이구나.' 문득 그는 자연군주를 떠올렸다. '이 소녀는 군주와는 다른 매력을 풍긴다. 군주가 고귀하고 단아한 미를 지니고 있다면 이 소녀야말로 가냘픈 난초와도 같구나. 누가 더 아름답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성이 있구 나.' 문득 그는 태성왕이 모용산산을 그에게 주겠다고 한 말을 떠올리며 입가에 고소를 지었다. 어쩐지 그 생각만 하면 싫지 않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훗! 남자의 본성은 어쩔 수 없단 말인가?' 이때 모용산산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물러가고 있었다. "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공자님......." 그 말에 백천기는 정신이 번쩍 들어 얼른 대답했다. "알았소. 낭자." 방 안의 둥근 탁자를 가운데 두고 백천기와 태성왕이 앉아 있었다. 태성왕은 여느 때와는 달리 관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북경에서 다녀오자마가 옷도 채 갈아 입지 않고 백천기를 부른 것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내내 만족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밝은 목소리로 백천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천기, 모든 일이 뜻대로 되었다. 황제폐하께서는 청을 모두 수락하셨다." 백천기는 흔쾌한 표정을 띄었다. "백부님의 노고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러자 태성왕은 문득 엄숙한 신색을 지었다. "천기, 이제부터 네 위치는 과거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항시 처신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백천기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질, 명심하겠습니다." 태성왕은 무거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북경에서 황제를 배알하는 일 외에도 널 도울 세 명의 고수들을 선정해 두었다." "세 명의 고수라시면?" "황궁의 동창(東廠)에서 선출한 고수 두 명과 금위위의 고수 한 명이다." "그들은 어떤 인물들입니까?" 백천기의 질문에 태성왕은 음성을 낮추어 설명했다. "우선 동창에 속한 첫 번째 인물은 현재 나이 오십 세로 무형신검(無形神劍)이라 불리우는 인물이지. 그의 이름은 전우진(田雨 )이라 하지. 또 한 명은......." - 다음 권에 계속 [사마달·검궁인] 웅풍독패존 -3───────────────────────────────────────


제 12 장 · 대계제일보(大計第一步) 태성왕은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이제 겨우 십구 세의 아리따운 낭자지." "......?" 백천기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태성왕은 껄껄 웃었다. "허허허! 하지만 결코 그녀를 얕봐서는 안 된다. 그녀의 무공은 동창에서 따라가는 자가 없 다. 그녀는 황실의 비밀고수며 구문제독(九門提督)의 양녀(養女)이기도 하다." "......." "더우기 그녀는 무공은 물론 지략까지 겸비한 일대재녀다. 은령선자(銀令仙子) 우문경(宇文 京)란 명호를 가지고 있다." 백천기는 태성왕의 말에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태성왕의 다음 말은 그를 놀라게 했다. "게다가 그녀는 천기자의 수제자이기도 하지." "아!" 태성왕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금의위에서 선출한 인물은 더욱 괴이한 인물이다." 백천기는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그는 본시 무림인으로 십 년 전쯤 금의위에 가입했다. 그는 무공보다는 변장과 암기술(暗 器術)에 능한 편으로 별호는 천수나타(天手羅駝), 이름은 현무호(玄武湖)라고 한다." 백천기는 내심 중얼거렸다. '천수나타 현무호.......' 태성왕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친히 그들 세 명에게 도와줄 것을 부탁했지. 따라서 그들은 보름 안으로 이곳에 도착 할 것이다." 백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무엇입니까?" "그들은 결코 예사 인물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을 마음으로부터 굴복시키지 못하면 그들을 다룰 수 없을 것이다. 결과는 오직 네 수완에 달려 있으니 알아서 하도록 해라." 태성왕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천기, 날 따라오너라. 너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 백천기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태성왕은 벌써 앞장 서 방을 나서고 있었다. 왕부의 후면에 위치한 한 채의 석전(石殿). 이 석전은 용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건축물이었다. 기이한 것은 석전의 어디에도 출입구 가 없다는 것이었다. 탑(塔)도 아니요, 대전도 아닌 괴이한 건물이었다.


석전에 당도한 태성왕은 밋밋한 석벽을 마주보고 섰다. 석벽은 대리석으로 축조되어 있어 매우 견고하게 보였다. 벽면에는 정교한 솜씨로 여의주(如意珠)를 쟁취하려는 쌍룡(雙龍)의 그림이 각인되어 있었다. 태성왕은 한동안 감회깊은 시선으로 벽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손을 뻗어 여의주를 눌 렀다. 우르릉......! 굉음과 함께 석벽이 좌우로 갈라지더니 아래로 통하는 돌계단이 나타났다. "따라 오너라." 태성왕은 앞장 서 계단을 내려갔고 백천기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그의 뒤를 따랐다. 지하석부로 통하는 통로는 음산하기만 했다. 석벽에는 칙칙한 이끼가 끼어 있었으며, 천장으 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태성왕은 품 속에서 화섭자를 꺼내 불을 밝혔다. 불빛에 비친 지하통로는 무척 오래 된 듯 온통 침침하기만 했다. 대략 백여 개의 계단을 내려가자 비로소 통로는 평평하게 이어졌다. 그곳부터는 비교적 건 조하고 깨끗한 편이었으며 벽면도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었다. 몇 번인가 구부러진 모통이를 돌자 두 사람 앞에는 한 칸의 석실이 나타났다. 석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백천기는 탄성을 금치못했다. 석실의 사면 벽이 온통 고서(古書) 로 꽉 찬 서가(書架)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천장에는 주먹만한 야명주(夜明珠)가 은은히 빛을 뿌리고 있어 그다지 어둡지는 않았다. 언뜻 보기에도 족히 수만 권은 될 듯한 엄청난 양의 고서들이 온통 벽면을 메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들이 다 모인 듯한 곳이었다. "이토록 많은 책이 있다니......." 백천기는 가슴에서 은은한 진동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약관의 나이에 만 권(萬卷)의 책을 읽을 정도로 책을 좋아하던 그였다. 그는 사방의 고서들을 둘러보느라 잠시 넋을 잃고 있었 다. 태성왕은 그를 보며 빙그레 웃더니 설명해 주었다. "이 책들은 선황(先皇) 대대로 모아놓은 것들이지. 대부분 유가(儒家)의 진본(眞本)들이다.


그러나 이중에는 무가(武家)의 비급들도 상당수 있다." 태성왕은 다시 그 방을 가로질러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방원 삼 장쯤 되는 석실이었는데 역시 천장에는 주먹만한 야명주가 드문드문 박혀 있어 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이곳에는 서가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맞은 편 석벽에 검은 나무로 짜여진 하나의 시렁이 놓여 있었고, 그곳에는 갖가지 병기(兵器)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그것은 하나같이 고색창연한 것들이었다. 태성왕은 병기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의 병기들은 명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모두가 귀한 것들이다. 오래 전부터 대명(大 明)을 수호하던 장군들의 무기거나 황가에서 수집한 진품들이 대부분이다." 백천기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병기들을 살펴보았다. 과연 한눈에도 병기들이 보통 물 건이 아님을 알아볼 수 있었다. 태성왕은 석실 한가운데 놓여있는 탁자로 걸어갔다. 탁자 위에는 한 자 높이의 검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는 잠시 상자를 내려다 보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은 내가 삼십 년 전 우연히 얻게 된 물건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무공을 몰랐었기 때문 에 별 관심이 없었지." 그는 상자를 열어젖혔다. 상자 안을 들여다 보던 백천기는 부지중에 탄성을 발했다. 상자 안에는 누렇게 바랜 양피책자가 십여 권이나 들어 있었던 것이다. 백천기는 그것을 보자 불현듯 수 년 전 혈룡암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녹슨 철상사 속에서 구천마경을 얻었던 장면이 생생히 떠오른 것이었다. 태성왕은 맨 위에 있는 책자 한 권을 집어 들며 말했다. "보다시피 이것들은 무공비급(武功秘 )이다." "모두 말입니까?" "그렇다. 바로 무림의 지주(支柱)인 구파일방(九派一幇)의 비전무공(秘傳武功)들이지. 게다가 그들 문파에서 이미 오래 전에 실전된 무공들이기도 하다." 백천기는 그 말에 아연함을 금치 못했다. '놀라운 일이다. 구파일방의 실전된 절기들이 어찌하여 이곳에 있단 말인가?' 구파일방은 언제부터인가 쇠퇴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어찌 된 셈인지 신공절기는 다수 실전되고 그들의 무공은 강호상에서 점점 평범한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현세에 들어서는 간신히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 예전과 같은 성세는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강호정세는 사마외도(邪魔外道)의 팽창선상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정파의 기둥이 되었던 구파일방이 그 역할을 스스로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구파일방은 수십 년 전부터 봉문(封門)한 채 문하제자들의 강호 출입조차 일체 금하고 있었 다. 그 현상에 대해 중원무림에서는 의론이 분분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무림인들은 구파 일방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봉문한 이유가 제자들을 고련(苦練)시켜 언젠가는 다시 중원무림의 ]축이 되 려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 태성왕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 비급들을 네게 맡기겠다. 향후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잘 선정하여 익히도록 해라. 백천기의 눈썹을 꿈틀했다. '구파일방은 강호의 수호정기(守護正氣)나 다름이 없다. 무슨 연유로 이 비급상의 무공들이 실전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내 손에 들어온 이상 언젠가는 각파에 돌려주어야 겠구나. 그는 진지한 어조로 태성왕을 향해 물었다. "백부님, 이 비급들을 소질이 마음대로 처분해도 되겠습니까?" "음?" 태성왕은 잠시 흠칫하더니 그의 심중을 짐작한 듯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 네 뜻이 무엇인지 짐작이 간다. 물론이다.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 "고맙습니다. 백부님." 백천기는 공손히 포권하며 상자를 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러자 태성왕은 그의 어깨를 두 드리며 말했다. "천기, 너는 어느새 무림인이 되어 있었구나. 그저 일개 서생인 줄로만 알았더니 말이다. 그 렇다면 내 다시 한 가지 보여줄 것이 있다." 태성왕은 그를 이끌고 다른 석실로 들어갔다. 그곳은 사방이 이 장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규모로 청정(淸淨)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이곳은 내 연공실(練功室)이다." 과연 석실의 중앙에는 정좌할 수 있는 포단이 깔려 있었고 한 쪽 구석으로는 정갈한 향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태성왕은 벽으로 걸어가더니 한 부분을 지그시 눌렀다. 끼이익! 기묘한 음향과 함께 벽의 한곳에 작은 구멍이 나타났다.


태성왕은 그곳으로부터 하나의 철궤를 꺼내더니 내려 놓았다. "이것은 조상들 중 한 분이 우연히 입수한 물건이다. 그 분은 황인(皇人)의 신분이면서도 평 소 유람을 즐겨하여 대강남북(大江南北)을 두루 돌아다니셨지." "......." "그분께서는 하남성(河南省) 마애산(摩涯山)의 절혼령(節魂嶺)이라는 곳에서 뜻하지 않았던 것을 발견하셨다." 백천기는 눈을 빛내며 그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태성왕의 말이 계속되었다. "그것은 바로 여덟 구의 백골(白骨)이었지. 그 백골들 주위에는 여러가지 물건들이 남겨져 있었는데 그 물건들을 거두어 오셨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무림에서 요긴하게 사용되는 것이 었기 때문이다." 백천기는 안색이 변했다. 그는 무엇인가 가슴을 치는 예감을 느낀 것이었다. 그의 눈길은 자 신도 모르게 철궤를 향해 박히고 있었다. 태성왕은 철궤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이 안에 그 물건들이 들어 있다. 역시 네 뜻대로 사용해도 좋다." 그는 안색을 굳히더니 침중하게 말했다. "천기, 네 임무는 실로 막중하다. 먼저 네가 해야 할 일은 보름 후 북경에서 올 세 명의 고 수들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보름 안에 구파일방의 실전무공들을 완 전히 터득해야만 한다." 백천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성왕은 신뢰의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이곳에는 보름 동안 먹을 양식이 준비되어 있다. 지금부터 너는 잡념을 버리고 무공 수련 에 들어가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진중하게 대답한 후 백천기는 태성왕을 응시했다. 두 사람의 눈빛이 부딪쳤다. 두 사나이, 그들은 비록 엄청난 신분과 연령 차이가 있었으나 눈빛을 주고 받는 가운데 뜨 거운 정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백천기는 숙연한 안색으로 정중히 읍했다. "소질, 백부님의 후의에 감복했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써 보답할까 합니다." "그럼 보름 후에 다시 만나기로 하자." 말을 남기고 태성왕은 몸을 돌렸다.


백천기는 혼자 남게 되자 비급을 꺼내 살펴보기 시작했다. 수백 년 전 강호를 주름잡던 구파일방의 정종무학(正宗武學)들은 무궁무진한 조화를 품고 있었다. 그야말로 정수(精髓)만을 모아 놓았다고나 할까? 현세에 이르러 보잘 것 없이 전락해버린 구파일방의 무공은 이들 비급상의 무공과는 현격한 격차가 있었다. 백천기가 느낀 점은 구파일방의 무공이 지극히 광명정대(光明正大)하다는 사실이었다. 구천 마경의 잔혹성과 사이(邪異)함에 꺼렸던 그는 비급의 무공들을 보자 기쁨을 금치 못했다. '정말 무학의 길이란 끝이 없구나. 마공에서도 나름대로 도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 무학들이야말로 도 그 자체로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백천기는 포단에 앉은 채 비급을 읽고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비급은 한 권 한 권 바 닥으로 떨어졌다. 비급 속의 무공 내용들은 그럴 때마다 그의 뇌리에 완벽하게 기억되고 있 었다. 백천기는 하루 두 번의 식사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무아지경에 빠져 버렸다. 하루, 이틀, 사흘....... 물 흐르듯 시간이 흘러 어느덧 십이 일 째가 되었다. 그 동안 그가 얼마나 무학을 성취했는 지는 아무도 몰랐다. 철궤를 앞에 두고 백천기는 궁금증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들어있을까?' 손을 대자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뚜껑이 열렸다. 제일 먼저 그의 눈에 띈 것은 한 자루의 장검(長劍)이었다. 그런데 그 모양이 매우 특이했다. 전체가 순백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으스스한 한기(寒 氣)를 발산하고 있었다. 검자루에 박힌 일곱 개의 보석에서는 홍채(虹彩)가 뿌려지고 있었으며 그 끝에는 기다란 수 실이 달려 있었다. 수실의 길이는 대략 한 자 정도로 재질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수 실은 검집과 마찬가지로 백색이었다. 백천기는 넉 자에 이르는 장검을 바라보며 왠지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손을 뻗어 검을 집어 들었다. "음!" 선뜻하도록 차가운 촉감에 그는 눈썹을 꿈틀했다. 다음 순간 맑은 금속성이 울렸다. 스르르릉! 장검이 뽑혀지자 눈부신 광채가 그를 압도했다. 검신으로부터 찬연한 백광(白光)이 뻗치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검신에는 전자체(篆字體)로 다음과 같은 글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 마혼백혈검(魔魂白血劍). '마혼백혈검? 별 이름은 아니구나.' 백천기는 검을 도로 검집에 넣고 이번에는 두번째 물건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직사각형으로 된 붉은 혈옥(血玉)이었다. 길이는 약 반 자 가량, 표면에는 지옥도(地 獄圖)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끔찍하기 짝이 없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의 광경이었다. 불길이 이글거리는 곳에서 벌 거벗은 남녀 수백 명이 갖가지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형벌을 당하고 있는 조각이었다. '음! 이토록 끔찍한 조각을 새겨놓다니.......' 백천기는 쓴 입맛을 다시다 문득 혈옥의 한쪽 귀퉁이에서 약간 튀어나온 부분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곳을 엄지손가락으로 슬쩍 눌렀다. 챙!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혈옥으로부터 한 자루의 도신(刀身)이 뻗어 나왔다. "흠!" 백천기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도는 금시라도 피가 뚝뚝 떨어질 듯 시뻘건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도신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 탈백수라도(奪魄修羅刀). 백천기는 전율을 느꼈다. '어찌하여 한결같이 이런 이름들이 붙어있단 말인가?' 이어 그는 세번째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다섯 개의 뿔(角) 모양을 하고 있는 물건이었다. 그것을 본 백천기의 안색이 변했다. '아! 이것은 혈천마각(血天魔角)이 아닐까?' 혈천마각이라면 천독마제 갈천후의 독문암기(獨問暗器)다. 백천기는 세 치 가량의 크기에 나 선형 뿔 모양을 한 혈천마각을 만지며 가슴이 쿵쿵 뛰고 있었다. '결국 내 예감이 맞았단 말인가?' 백천기는 급히 다음 물건을 꺼내 보았다. 그것은 한 권의 낡은 양피책자였다. <마혼검경(魔魂劍經)>


겉 표지에는 힘찬 필체로 그렇게 씌어져 있었다. 백천기가 떨리는 손으로 표지를 넘기니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씌어 있었다. - 검(劍)을 얻어 도(道)를 여니 천하를 얻은 듯 하도다. 검마(劍魔) 잔유성(殘臾星). 백천기는 큰 충격을 받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랬었구나! 이것은 바로 그들의 유물이다." 그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이름하여 구대마왕(九大魔王). 그들은 과거 마애산 절혼령에서 싸움을 벌였다.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그 대전은 장장 보름 여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결국 공전절후의 대혈전은 막을 내렸고, 그 결과는 천독마제 갈천후를 제외한 나머 지 팔 인의 죽음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모두 최후를 마치고 만 것이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우연히 주황가의 한 선인이 그곳을 발견했다. 그는 여덟 구의 해골 옆에 나뒹굴고 있는 구대마왕의 유물을 취하게 된 것이었다. 마혼검경(魔魂劍經)에는 특이한 내력이 있었다. 검마 잔유성은 애초 두 가지 검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최후절학인 마검쌍혈식(魔劍雙血 式) 외에도 마혼칠검(魔魂七劍)이란 검법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마혼칠검은 일명 섬전마혼무형칠검(閃電魔魂無形七劍)이라고도 불리우며, 이는 상대로 하여 금 숨을 쉴 틈도 없이 마구 몰아쳐 저승으로 향하게 하는 가공할 쾌검식(快劍式)이었다. 이 검법은 일 초 일 식을 따진다면 마검쌍혈식에는 미치지는 못하나 나름대로 천하무쌍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 검마 잔유성이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정작 마검쌍혈식이 아니라 이 마혼칠검으로 인해 서였다. 마검쌍혈식은 검마가 평생에 단 두 번밖에는 사용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마 혼칠검만으로도 천하를 질타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 마혼검경을 살펴보는 백천기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장탄식을 발했 다. "아! 이들 구대마왕들과 나의 인연은 대체 어디까지 얽힐 것인가? 혈룡암 이후로 끝나는 줄 알았더니 오늘까지도 이어질 줄이야!" 밤이었다.


왕부(王府)의 거대한 건축물들도 적막에 싸인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다만 한 채의 전각(殿閣)에서만 여전히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야심한 시각에 잠못 이루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방 안에 한 명의 중년인이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금포(金袍)를 걸치고 있었는데 가슴 부분에는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한 마리의 흑룡(黑龍)이 수놓아져 있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이같은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그의 용모는 대단히 평범해 보였다. 오히려 안색이 누르스름한 것이 촌가(村家)의 인물같은 분위기마저 풍겼다. 그는 지금 맞은 편 탁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탁자 위에 켜져 있는 황촉을 바라보고 있었다. 촛불을 응시하는 그의 두 눈에서는 연신 기이한 빛이 솟았다꺼지곤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의 안색이 침울하게 변하더니 품 속에서 한 자루의 섭선을 꺼내고 있었다. 철선(鐵扇)이었다. 그는 철선을 만지작거리며 내심 한숨을 쉬었다. '휴우, 나 천수나타(千手羅駝)가 놈들을 피해 황궁(皇宮)으로 들어온 지도 벌써 십오 년이 흘렀구나. 그러나 갈수록 놈들에 대한 두려움은 커지기만 하니.......' 중년인은 어두운 얼굴로 생각을 굴렸다. '그런데 태성왕께서 굳이 날 이곳까지 불러 만나라고 한 자는 어떤 인물일까? 궁금하기 짝 이 없구나.' 그의 눈에서 문득 신광이 떠올랐다. '아무튼 곧 만나게 될 테지.' 중년인은 문득 수중의 철선을 들어올렸다. 촤르륵! 경쾌한 음향을 내며 칠선이 활짝 펼쳐졌다. 그것은 강골(剛骨)을 재질로 하여 만들어진 희귀 한 섭선이었다. 스슷! 섭선이 슬쩍 움직이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탁자 위에 놓인 황촉의 불꽃이 정확히 세 동강이가 난 것이었다.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 었다. 불꽃을 자르는 무공이 존재하다니....... 중년인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후, 추풍파로선(秋風破爐扇)도 이젠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구나." 그의 읊조림이 끝나는 순간, 어디선가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정말 멋진 수요!" "누구냐?" 그는 벌떡 일어서며 철선을 세웠다. 예의 음성이 뒤따랐다. "후후후, 당신이 과연 내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있을까?" 그 소리는 실로 괴이하기 그지 없었다. 사방에서 동시에 울리는 것 같은가 하면, 공중에서 빙글빙글 도는 것 같기도 했다. 중년인은 안색이 변하여 부르짖었다. "이... 이것은 사백 년 전에 실전된 공동파( 派)의 천지회음대법(川地廻音大法)......!" 그러자 호탕한 웃음이 들려왔다. "핫핫핫! 역시 금의위(錦衣衛)의 최고고수답게 안력이 보통이 아니군." "어떻게 나의 정체를......?" 중년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훗훗, 천하에서 내가 모르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소." 중년인은 눈에서 싸늘한 광망을 폭사시키며 외쳤다. "어쨌든 좋다. 그까짓 수법으로 계속 날 희롱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받아랏!" 찰나적으로 그의 소맷자락이 번뜩였다. 슈슈슈슉! 일곱 줄기의 청광(靑光)이 창 밖으로 빛살처럼 날아갔다. 그러자 창 밖으로부터 탄성이 울렸 다. "칠성청린망(七星靑燐芒)이로군. 과연 듣던대로 대단한 수법을 가졌군. 무림제일의 암기명인 (暗器名人) 답소." 그 소리가 들린 순간 뜻밖의 사태가 발생했다. 섬광처럼 뻗어가던 일곱 개의 칠성청린망은 창에 닿기도 전에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닌가? 중년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럴 수가! 놈은 이미 방 안에 들어와 있었구나.' 마침내 그는 안면 가득 분노를 드리우며 거칠게 외쳤다. "모습을 드러내라! 신법의 묘만 믿는다는 것은 참다운 무인(無人)의 길이 아니다. 어서 정정 당당하게 나서라." "후후후....... 그것도 나쁘진 않소." 뿌연 막이 형성되는가 싶더니 한 줄기 인영이 중년인의 등 뒤로 모습을 드러냈다. 흡사 유 령을 방불케 하는 신법이었다. 그러나 중년인은 그때까지도 이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눈을 잔뜩 부릅 뜬 채 오직 전면만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뭘 꾸물 거리느냐? 어서 모습을 나타내라." 그의 외침이 끝나는 그 순간이었다. "후후! 여기요." "헉!" 중년인은 헛바람을 들이켜면서 번개같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바로 코 앞에 한 명 의 백의서생이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뿔싸!' 중년인은 그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백의서생의 인상은 냉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옆으로 쭉 째진 눈은 음침했으며 코는 전형적 인 매부리코였다. 또한 창백한 안색에 입술마저 얄핏하여 도시 인간미라곤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백의서생은 등 뒤에 한 자루의 괴이한 검을 메고 있었다. 그 검은 자루와 검집이 모두 흰색 이었으며 손잡이 끝에는 역시 흰색의 긴 수실이 매달려 있었다. 그를 보자 중년인은 내심 절로 오한이 일었다. '으음, 이 자의 두 눈은 독사(毒蛇)같이 악랄하고 비정해 보인다. 하지만 안광은 안으로 갈 무리하고 있으니... 혹 전설상으로나 들을 수 있는 반박귀진(返璞歸眞)의 경지에 이른 게 아 닐까?) 중년인의 가슴이 써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여기까지 생각한 그의 안색은 푸르게 질리고 말았다. 그는 주춤 뒤로 물러나며 떨리는 목소 리로 입을 떼었다. "너는...... 사태극(史太克)이 보내서 왔느냐?" 그 말에 괴서생은 두 눈에 기이한 빛을 띄며 반문했다. "사태극?" 중년인은 분노의 기색을 드리웠다. "시치미 떼지 마라!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아니, 지난 십오 년 동안 나는 지칠대로 지쳤다. 이제 죽던 살던간에 결판을 내고 싶다." 그러자 괴서생의 입에서는 괴소가 흘러 나왔다. "후후....... 그대는 진정 나를 사태극이 보낸 자라 생각하오?" 중년인은 마치 단정짓듯 잘라 말했다. "천하에서 너같은 고수를 키울 만한 곳이라곤 오직 혈영마황전(血影魔皇殿) 밖에 없다."


"혈영마황전!" 괴서생은 안색이 변해 부르짖더니 곧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현무호(玄武湖), 그대는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을 보는 눈만은 형편 없군. 안됐지만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인물이 아니오." "그, 그럼?" 중년인은 당혹하여 안색을 일그러뜨렸다. "내 이름은 백천기라 하오." 호쾌하게 답변하는 괴서생, 그는 바로 백천기였다. 서서히 팔을 돌려 뒷짐을 지는 그에게 천수나타 현무호는 놀란 듯 부르짖고 있었다. "그, 그렇다면 당신이 바로 천제령주(天帝令主) 백대인(白大人)이란 말이오?" "천제령주?" 백천기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중년인은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아니란 말이오?" 백천기는 그제서야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그는 상대방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비로소 음성을 가다듬어 말했다. "대인(大人)이란 호칭은 너무 과분하오. 그러나 틀림없이 나는 백가 성을 쓰는 사람이오. 그 말에 중년인은 이번에는 짙은 의혹의 빛을 떠올렸다. "하지만 내가 전해들었던 백대인의 모습과 지금의 당신과는 전혀 닮지 않았는데......?" 백천기는 또다시 기소를 흘렸다. "후후후....... 현위령(玄衛令), 당신이야말로 어리석음을 가장하는구려. 당신이 변장을 하고 있 는데 나 또한 진면목을 드러내란 법은 없지 않소?" 중년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이, 이제까지 내가 변장을 한 사실은 누구도 알아내지 못했거늘! 당신이......." 그의 놀라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백천기의 음산하던 얼굴이 차츰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의 얼굴 근육은 조금 씩 이동하더니 매부리코가 정상으로, 째진 눈은 점차로 커지고 있었다. "아! 이럴 수가......." 중년인은 탄식에 가까운 부르짖음을 토하고 있었다. 그 사이 백천기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준수하기 그지 없는 그의 용모가 재생된 것이었 다. "아!" 중년인은 갑작스레 눈 앞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그의 무릎 이 서서히 꺾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금의제일위(錦衣第一衛) 천수나타 현무호, 백대인께 인사드리오. 부디 무례를 용서하시기


를......." 그러나 막 굽어지려던 그의 허리는 무형의 힘에 의해 절로 펴지고 있었다. 현무호는 다시 공력을 일으켜 억지로 허리를 굽히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무형의 힘은 더욱 커져 허리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전신에 맥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며 저항을 포기하고 말았다. 잠시 후 그는 안면 가득 경악을 담은 채 상대방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눈에 여전히 뒷짐을 진 채 빙그레 웃고 있는 백천기의 모습이 보였다. '아! 과연 태성왕께서 그렇게 칭찬하시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구나.' 백천기는 탁자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그는 천수나타 현무호를 향해 부드럽게 입을 열었 다. "앉으시오. 현위령." "감사합니다. 백대인." 현무호도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백천기는 묵묵히 현무호를 주시하더니 생각 난 듯 물었다. "현위령이 방금 전에 내게 천제령주라 했는데 그것은 어찌 된 영문이오?" 현무호는 불현듯 엄숙한 신색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황제폐하의 엄명입니다. 백대인을 천제령주로 모시고 명령에 절대 복종하라는 분부 가 계셨습니다." 백천기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곧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담았다. "당신은 정말 어떤 일을 시켜도 복종할 수 있겠소?" 현무호는 금세 그 의미를 알아 차리고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만일 이전 같았으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황제폐하의 명이 지엄하다 해도 소인 무림에서 잔뼈가 굵어진 몸, 설사 하늘의 명이라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에게서는 무림인 특유의 기개가 느껴지고 있었다. 백천기는 신음을 흘리며 물었다. "흠, 하면?" "소인 이 나이에 이르도록 타인에게 속을 내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백대인이 시키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따를 것입니다." 백천기는 싸늘한 안광을 뿜어냈다. 투시력(投視力)을 지닌 듯한 예리한 그의 눈길은 현무호 를 쏘아보고 있었다. 현무호는 그만 가슴 한 구석이 얼어 붙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으음....... 대단한 눈빛이다!' 그는 마침내 그 눈빛을 더 이상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피해 버렸다. 그제서야 백천 기는 스르르 안광을 거두었다. "좋소. 현위령, 그럼 나도 그대를 받아 들이겠소."


백천기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도 알고 있겠지만 내가 행하고자 하는 일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오. 나와 당신의 뜻이 하나에서 열까지 빈틈 없이 맞아 떨어져야만 해낼 수 있는 일이오." 현무호는 공손히 응수했다. "몰론입니다. 만약 금후로 소인이 백대인의 명을 거스를 경우에는 설사 목을 쳐도 원망치 않겠습니다." 그의 얼굴에서 굳은 결의가 엿보이자 백천기는 내심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 자는 의외로 강직한 성격을 지니고 있구나.' 백천기 또한 만족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좋소. 그대의 뜻이 정해진 것 같아 나도 기쁘오.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현무호는 사뭇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 현위령이 말한 혈영마황전의 사태극이란 인물에 대해 알고 싶소이다." 그 말에 현무호는 안색이 급변했다. "그, 그것은......." 그의 두 눈에는 일말의 공포마저 떠오르고 있었다. 이를 본 백천기는 고소를 지으며 덧붙였 다. "말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좋소." 현무호는 잠시 멍해지더니 이내 긴 탄식을 터뜨렸다. "아! 그 이름이야말로 지난 십오 년 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고 소인을 괴롭히던 이름이었습 니다." 그의 얼굴에는 회의와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들고 있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마침내 입 을 열기 시작했다. "본래 소인의 진정한 명호는 환영천수(幻影千手) 만여춘(萬如春)이라고 합니다." 백천기는 묵묵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소인은 경공(經功)과 암기(暗器), 변장술로 한때 무림을 독보했었습니다. 그러다 지금으로부 터 이십여 년 전......." 그의 음성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십 년 전. 현무호, 즉 만여춘은 북안탕산(北雁蕩山)을 지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우연히 한 명의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강설화(江雪花), 이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운명 탓이었는지 만여춘은 그녀를 만나자마자 곧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북


안탕산에 머물기로 작정하고 그 길로 강설화와 혼인하여 은거를 시작했다. 그것은 살벌한 도산검림(刀山劍林)을 헤치며 피바람 속에서 살아왔던 그로서는 처음 맞는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그들 부부에게는 실로 뜻하지 않은 불행이 들이닥쳤다. 바로 만여춘의 아내 강설화가 약초 를 캐다가 비오공(飛蜈蚣)이란 독충(毒蟲)에 물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비오공의 독은 무서운 절독으로 그 날부터 강설화는 의식불명이 되어 그야말로 생사지간을 헤매게 되었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의 행복은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이에 만여춘은 당혹과 비탄을 금치 못하며 아내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 했지만 방 도를 찾을 길이 없었다. 이때 그에게 검은 손길이 뻗어왔다. 마침 그 시기에 한 명의 괴여인이 그가 사는 초옥(草屋) 을 방문한 것이었다. 그녀는 강설화를 치료할 수 있는 해독약(解毒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대신 한 가 지 조건을 내세웠는데 그것은 치료 후 어떤 한 단체에 가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여춘은 괴여인의 말에서 의혹을 느꼈으므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갈등을 겪게 되 었다. 그러나 죽어가는 그의 아내는 그에게 뒷일까지 걱정할 틈을 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승낙을 하고 말았다. 결국 만여춘은 해약을 얻어 사랑하는 아내를 살릴 수가 있었다. 따라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건강을 되찾은 강설화와 함께 괴여인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곳에 당도한 만여춘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단체란 알고 보니 지극히 무서운 조직이었다. 잠시 얘기를 끊은 현무호는 안색이 침중하게 변했다. 그는 백천기를 바라보며 탄식하듯 말 했다. "저는 그곳에서 사태극(史太克)을 만난 것입니다." 백천기는 나직한 음성으로 반문했다. "사태극은 대체 어떤 인물이오?" "그 자는 마황전 소속의 사신궁(四神宮)의 궁주(宮主)입니다. 결국 소인은 사신궁 내의


청룡 신(靑龍神)이란 직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으음......." "그곳에는 소인 외에도 이따금 새로운 무림인들이 영입되곤 했는데 하나같이 무공과 능력에 따라 지위를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를 데려갔던 괴여인은 주작신(朱雀神)이었습니다." "그랬었구려." 백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소인은 그곳에 머물면서 혈영마황전의 무서운 음모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심 한 갈등을 겪던 끝에 그곳을 탈출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 현무호는 문득 만면에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마침내 소인은 탈출을 결행했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아내는 그만... 놈들에게 붙들려 비참하 게 죽고... 소인만 비겁하게도 혼자 빠져나오게 되었습니다." 현무호의 말은 격정으로 인해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백천기는 그의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자책으로 인해 잔뜩 일그러진 그의 표정 에서 충분히 심정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무호는 눈동자를 허공으로 향한 채 허탈하게 말했다. "그때부터 소인은 무림을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도 한 곳에서 사흘 이상 머무른 적 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마황전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 그는 언뜻 두려움을 떠올렸다. "실로 끔찍한 나날들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추적의 마수(魔手)를 피하기 위해 음식도 잠도 제대로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수십, 아니 수백 번은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습니 다." 현무호는 새삼 당시의 일이 생각나는 듯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그때마다 소인은 변장술과 경공 덕분에 간신히 살아날 수가 있었습니다. 결국 금의 위(錦衣衛)에 가입했습니다. 그것은 황궁이란 장소가 몸을 숨기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음......." "과연 금의위에 들어오자 마황전의 고수들도 거기까지는 손을 뻗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소인은 지난 십오 년 동안 무사히 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백천기는 얘기를 듣고나자 현무호에 대해 연민지심이 솟구쳤다. 그러나 겉으로는


내색치 않 고 담담히 물었다. "현위령, 내 몇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소." 현무호는 안색을 가다듬더니 즉시 대답했다. "무엇이든지 하명하십시오. 백대인." "대체 혈영마황전의 음모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현무호는 안색을 굳혔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털어놓았다. "그들의 음모는 바로 중원무림을 장악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또 무엇이 있소?" "더 나아가 이 나라 전체를 삼키려 하고 있습니다." "뭣이?" 백천기는 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수가! 감히 그들이 역천(逆天)을 꾀하다니......." 그는 가슴에서 거센 파문이 이는 것을 느끼며 급히 물었다. "혈영마황전의 주인은 대체 어떤 인물이오?" 현무호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소인도 모릅니다. 그것은 비단 소인 뿐만 아니라 마황전 소속의 인물들에게조차 극비 사항 으로 되어 있습니다 " 그 말에 백천기는 괴이한 느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혈영마황전에 속한 인물들조차 모른다고?' 이때, 현무호가 무거운 어조로 덧붙였다. "단지 소인이 아는 것이라고는 제가 속해있던 사신궁 역시 혈영마황전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는 것 뿐입니다. 실로 기라성같은 고수들이 혈영마황전에 운집해 있습니다." "으음......." 백천기는 신음을 흘려 내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당신이 시전한 추풍파로선(追風破爐扇)은 어떻게 배우게 되었소? 그것은 황산파(黃 山派) 최고의 선법(扇法)으로 이미 사백 년 전 실전된 것인데." 그 말에 현무호는 움찔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는 이제껏 한 번도 자신이 구사하는 선법의 유래를 알아내는 인물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내심 탄복을 금치 못하며 대답했다. "그것은 소인이 사신궁에 있을 때 그곳에 있던 한 괴노인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입니다 ." "괴노인?" 백천기는 눈썹을 모았다. "실상 제가 사신궁을 벗어나려고 마음 먹은 것도 따지고 보면 그 노인의 충고 때문이었습니 다." 백천기는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그 노인의 정체를 알고 있소?"


현무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모릅니다. 노인은 성품이 괴이할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조차 신비노인으로 불리워지고 있었 습니다." 백천기는 침음했다. 그는 상념에 잠긴 듯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잠시 그들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백천기는 문득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현위령, 당신은 추풍파로선을 몇 초까지 익혔소?" 뜻밖의 질문에 현무호는 흠칫하는 듯 했으나 솔직하게 대답했다. "십이 초까지 익혔습니다." 백천기는 빙그레 웃었다. "좋소. 현위령, 당신의 얘기는 고맙게 들었소." 이어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현무호를 직시하며 물었다. "당신은 혈영마황전이 찾아오는 것이 그렇게도 두렵소?" 현무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실 그의 내부에는 크나큰 비원(悲怨)이 똘똘 뭉쳐져 있었다. 하지만 아내의 목숨까지 빼앗 기면서도 복수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가 너무도 강하기 때문이었다. 백천기는 그를 바라보며 힘차게 말했다. "현위령, 추후로 당신은 혈영마황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소. 내가 있는 한 천하의 누구도 당신을 건드리지 못할 것이오." 백천기의 말에는 지대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것은 혈영마황전이란 가공할 거마단체 를 적대시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만일 강호인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필시 미쳤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쩐지 현무호는 백천기의 말에 든든한 믿음을 느꼈다. 동시에 이제까지 없었던 용기가 솟아나는 것을 느끼 게 되었다. 이때, 백천기는 몸을 일으키더니 지시했다. "현위령, 문방사보(文房四寶)를 대령하시오." 현무호는 지체없이 문갑(文匣)을 뒤져 지필묵을 꺼낸 후 탁자 위에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그 는 의아한 표정으로 백천기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엇 때문에 문방사보를 준비하라는지 짐작 조차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천기는 붓을 잡고 먹을 듬뿍 찍었다. 이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화선지에 글을 써 내려갔 다. 용사비등한 필체가 종이를 가득 메우자 그는 붓을 놓았다.


붓을 탁자에 놓는 순간 백천기의 몸은 뿌옇게 흐려지는 듯 하더니 유령같이 방 안에서 사라 져 버렸다. "아!" 현무호가 탄성을 발하는 순간 밖으로부터 문득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현위령, 그것은 당신에게 주는 선물이오. 그럼, 나중에 봅시다." 음성은 점차 멀어져 갔다. 현무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탁자 위의 먹물도 채 마르지 않은 종 이를 내려다 보았다. 잠시 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맙소사! 이것은 추풍파로선의 최후 삼 초식인... 추풍삼탈(追風三奪)의 구결이 아닌가?" 그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추풍삼탈. 그것은 바로 황산파의 최고 선법인 추풍파로선의 마지막 삼대절초로 이미 그 맥 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 구결을 살펴보는 현무호의 얼굴에는 경악에 이어 희열이 가득 떠오르고 있었다. '오오! 내게 이런 기연이 오다니. 대체 백대인은 어떤 분이기에 이런 능력을 지니고 있단 말 인가?' 제 13 장 · 도전(挑戰)과 응수(應酬) 호정원(護政院). 이곳은 왕부에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 회의석상이나 토론장으로 이용하는 곳으로 전체가 하 나의 대청(大廳)이었다. 호정원은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접객을 위주로 하는 만큼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바닥 에는 양탄자가 두텁게 깔려 있었으며 벽에는 각종의 진귀한 고서화나 장식물이 부착되어 있 었다. 한가운데에는 팔선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주위로 다섯 개의 의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 데 지금 두 개의 의자에는 두 명의 인물이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그 중 한 인물은 천수나타 현무호였고 그의 옆에 있는 자는 중년의 선비차림의 인물이었다. 중년선비의 인상은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 전신에서 차고 은밀한 기(氣)가 넘치고 있었으 며 가늘게 째진 두 눈과 날카롭고 곧게 뻗은 콧날이 냉막한 그의 성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 다. 더우기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신광은 그가 결코 보통 인물이 아님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이때, 밖으로부터 두 사람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태성왕과 백천기였다. 그들을 보자 현무호와 중년선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허허허......! 예의에 구애받을 필요 없네. 모두 자리에 앉게." 태성왕이 호탕하게 웃으며 먼저 자리에 앉자 그들도 착석했다. "황공합니다." 실상 태성왕으로 말하자면 대명황국(大明皇國) 왕야의 신분으로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지체였다. 그러나 그는 형식에 치중하지 않는 소탈한 인품의 소유자라는 것도 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태성왕은 일행을 둘러보더니 현무호를 향해 물었다. "은령선자(銀鈴仙子)가 보이지 않는군?" 현무호가 다소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녀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태성왕은 은은한 노기를 드리우며 말했다. "내 사소한 예의 따위는 따지지 않으나 그렇다고 신의를 업신여기는 행위에 관대하지는 않 지. 그대들은 이 점을 명심하게." 백천기가 빙긋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아마도 바보가 아닌 한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단지 저에 대한 도전이리라 사료됩니다." "마찬가지이니라. 네가 막중한 책임을 걸머지고 있는 한 너에 대한 도전도 나로서는 용납이 되지 않는다." 태성왕은 여전히 무거운 음성이었으나 곧 신색을 바로 잡았다. "그건 그렇다치고, 내가 여러분에게 이 분을 소개하겠네." 그는 눈을 들어 백천기를 가리켰다. "바로 이 분이 자네들이 앞으로 모시게 될 백천기 대인이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현무호는 인사를 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 순간, 그의 귀로 한 가닥 전음이 들려왔다. (현위령,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앉아 계시오.) 그것은 바로 백천기의 음성이었다. 현무호는 사뭇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의를 제기


하지 않고 그의 말을 따랐다. 태성왕이 이번에는 중년선비를 일컬어 말했다. "현질, 이 쪽은 무형신검(無形神劍) 전우진이라 한다. 바로 동창의 영반이지." 그는 마지막으로 손을 들어 현무호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 쪽이 금의제일위인 천수나타 현무호라고 한다." 소개가 끝나자 백천기가 먼저 안색을 가다듬으며 인사했다. "만나게 되어 반갑소. 두 분." 문득 무형신검 전우진의 차디찬 눈 속에서 스산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천제령주라 는 인물이 의외로 나이가 어린 것을 목도하게 되자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 다. 백천기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두 분께 굳이 드릴 말씀이 없소이다. 이미 모든 정황을 알고 계실 것인즉, 이제는 실 행만이 남았을 뿐이오." 현무호와 전우진, 두 사람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일제히 백천기를 주시했다. 특히 전우 진은 칼끝같이 예리한 시선으로 백천기의 눈빛을 정면으로 맞받고 있었다. 백천기는 여전히 개의치 않고 엄숙하게 말할 따름이었다. "이번 일은 그야말로 중대사(重大事)요. 따라서 피차간에 진정으로 마음이 통하지 않는다면 성취가 불가능하오." 그러자 전우진이 자르듯 싸늘한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그것은 나도 동감이오." 그는 안광을 번뜩이더니 다시 입을 떼었다. "그러나 과연 백대인께 우리들을 움직일만한 능력이 있는지는 의문이외다. 만일 그렇지 못 하다면 노부는 스스로 직위를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이번 일을 포기하겠소." 그 말투는 실로 차갑고 오만하기 그지 없었다. 보다 못한 태성왕이 뭐라 언급하려 하자 백 천기가 손을 들어 이를 만류했다. 이어 그는 침착함을 유지한 채 분명한 어조로 물었다. "당신의 자존심이란 것은 정녕 국가의 안녕보다도 중요하오?" 전우진은 그 말에 대뜸 반발했다. "추궁하지 마시오! 왕야시라면 몰라도 당신에게는 아직 그럴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소이다." "음......." 백천기는 침중한 신음을 흘렸다. "좋소. 당신의 심중은 일면 이해되는 부분도 있소이다. 자, 그럼 당신이 나를 시험하고


싶다 면 원하는 바를 말해 보시오." 그러자 전우진은 기다렸다는 듯 거침없이 내뱉았다. "노부는 십칠 세 때부터 동창에 가입했소. 그리고 그 동안 황실을 지키기 위해 국가의 위난 은 물론 온갖 사건에 개입하여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숱한 악전고투를 치루어 왔소." 그의 냉막한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맹세컨대 이십오 년이라는 세월을 두고 나는 무패(無敗)였소. 천하에서 나의 검(劍) 보다 빠른 자는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소이다." 백천기는 한일자로 입을 꽉 다문 채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전우진이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지금 이 자리에서 노부가 일초의 검법을 전개하겠소. 만약 백대인께서 그 초식에 포함된 변화의 숫자를 알아낸다면 나는 두말 않고 그대에게 굴복하겠소." 백천기는 비로소 태도를 바꾸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전영반. 당신의 말은 더 들어줄 수가 없구려." 그의 표정이 무섭도록 싸늘하게 변해갔다. "본인이야말로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오. 따라서 나는 당신이 제시한 방법을 따를 수가 없소." "뭣이?" "다만." 백천기는 냉랭하게 말하며 손가락을 한 개를 세워 보였다. "일 초에 그대의 검을 날려버리지 못한다면 내가 먼저 모든 것을 포기하겠소." "뭐, 뭣!" 전우진의 안색은 삽시에 돌변해 버렸다. 그는 만면에 노기를 띄는 한편 비웃음이 섞인 괴소 를 흘려냈다. "흐흐흐....... 백대인, 내 평생 그대같이 광망스러운 말을 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소이다." 그러나 백천기는 그와는 달리 담담한 투로 응수했다. "안 됐소만 그것은 당신의 견문이 좁기 때문이오." 그 말은 그야말로 전우진의 분노에 불을 붙이는 격이었다. 전우진의 두 눈은 급기야 섬뜩한 살기를 내뿜었다. "흐흐....... 좋소! 그러나 백대인께서 자만하다 상처를 입는다 해도 노부에게는 일체 책임이 없음을 명심하시오." 백천기는 여유있게 씨익 웃어 보였다. "물론이외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우진은 자리에서 불끈 일어났다.


전우진은 둔중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팔선탁자로부터 대청 중앙의 공간으로 걸어갔다. 대청 은 그들 두 사람이 비무를 하기에는 그다지 좁은 편이 아니었다. 백천기도 뒤이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일 장 거리를 두고 대치상태를 이루었다. 전우진은 검을 항상 허리에 차는 습관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검법이 쾌검(快劍)이므로 하시 라도 쉽사리 손이 닿을 수 있는 위치에 검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전우진의 눈은 마치 화살처럼 백천기를 주시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살벌할 정도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차앗!" 전우진의 입에서 냉갈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무서운 광망이 전면을 향해 뻗어 나갔다. 슈슈슈슉! 백천기는 그것을 보고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숨막히는 한 순간, 검광은 그대로 백천기의 머 리 위로 떨어져내렸다. "앗......!" 관전하던 태성왕과 현무호가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파팍! 쨍......! 각각 다른 두 가닥 음향이 귀청을 울렸다. "억!" 다급한 비명이 뒤를 이었다. 동시에 한 줄기 은광이 허공을 가르더니 그대로 대청의 기둥에 꽂혀버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형신검 전우진의 검이었다. 백천기의 광망스러운(?) 예언이 드디어 현 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전우진은 금시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그의 안색은 경악과 충격으로 인해 밀랍처럼 창 백하게 변해 있었다. "이, 이럴 수가!" 그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추호도 흔들림이 없는 백천기의 모습이 들 어왔다. 전우진은 전율을 금치 못하며 부르짖었다. "이, 이건 사술(邪術)이다!" "사술?" 백천기의 얼굴에 처음으로 조소가 떠올랐다. 그는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전우진. 먼저 그대의 앞섶을 보고 말하시오."


그 말에 전우진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럴 수가?" 전우진은 안색이 시퍼래졌다. 놀랍게도 그의 앞섶은 갈기갈기 찢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더 우기 그 옷자락에는 도합 스물네 개에 달하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구멍이 뚫린 위치는 모두가 그의 신체에 있어 사혈(死穴)에 해당되는 부 분들이었다. '이럴 수가? 만약 상대가 내게 살의(殺意)를 품었더라면 어찌 되었을 것인가?' 전우진은 식은 땀이 등줄기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제서야 그 는 체념이 깃든 시선으로 백천기를 쳐다보았다. "대체 이것이 무슨 검법이오?" 그러자 곁에 있던 태성왕이 그 말에 대답했다. "그대는 잘못 알고 있네. 그것은 검이 아닐세." "그럼......?" 전우진이 의혹을 보이자 백천기는 왼손을 내밀어 보였다. "바로 이 손(手)이외다." "아!" 전우진은 탄성을 발함과 동시에 백천기의 백옥(白玉)같이 희고 섬세한 왼손을 응시했다. 그 의 귀로 백천기의 음성이 꽂혔다. "바로 대명의 황실을 위기에서 구할 손인 것이오. 그대는 이제 이 손 아래 굴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소이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나 엄중하기 그지 없었다. 전우진이 다시 뭐라 말하려는 순간 현무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앞으로 나와 깊게 읍했다. "나 현무호는 신명을 다해 대인을 따르겠소이다." 실로 시의적절한 일조(一助)였다. 진작부터 백천기를 알고 있었으며 무공까지 전수받았던 현 무호는 이 순간을 빌어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전후사정을 알 리 없는 전우진은 내심 놀라 부르짖었다. '저 괴퍅한 자가 웬일로?' 실상 동창과 금의위는 모두 황궁의 직속 기관이었지만 서로 왕래가 없는 편이었다. 동창의 영반인 전우진과 금의제일위인 현무호와는 더더욱 교분이 없었는데 그것은 두 사람 의 성격은 물론이거니와 서로를 경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대청 밖으로부터 한 줄기 은방울이 구르는 듯한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호호호호! 전영반께서도 인정하실 건 인정하셔야죠. 설마하니 굴복이 싫어서 자결이라도 할 셈인가요?" 그 소리에 대청 안의 중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대청으로 은의(銀衣)를 입은 한 소녀가 사뿐사뿐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나이는 이제 겨우 십칠팔 세 정도, 하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미(美)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백옥같이 뽀얀 피부에 두 뺨에는 보조개가 옴폭 패여 있었다. 또한 두 눈은 칠흑같이 검고 도 또렷했다. 세상에 갓 내려온 선녀와도 같은 용모의 소녀였다. 그녀가 들어서자 대청 안이 금세 환해지 는 느낌이 들었다. 백천기조차도 그녀를 보며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실로 아름다운 소녀로군.' 은의소녀가 발걸음을 옮기자 그때마다 영롱한 방울소리가 뒤따랐다. 딩......디딩...... 딩....... 그녀는 좌중으로 다가오더니 먼저 태성왕을 향해 나붓이 대례를 올렸다. "전하께 인사 여쭙겠습니다. 원하건대 오늘 있은 소녀의 결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우문낭자, 어서 오게." 태성왕은 자신의 유감을 그녀가 미리 말해버리자 그저 빙긋 웃음으로서 묵인해 주었다. 은의소녀는 몸을 돌리더니 백천기에게 다시 허리를 굽혔다. "백대인께 소녀 우문경이 인사 올립니다." 백천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했다. "반갑소이다. 은령선자(銀鈴仙子) 우문경 소저." 우문경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생긋 웃었다. "소녀가 늦게 온 것에 대해서는 백대인께서 널리 양해하시리라 믿어요." 이어 그녀는 멍하니 서 있는 동창 영반 전우진을 힐끗 보더니 고운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 었다. "소녀는 백대인의 명이라면 어떤 것이든 듣겠어요." 그녀의 일련의 태도는 실로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다. 태성왕조차 내심 탄성을 터뜨렸다. '허어, 이처럼 약삭빠른 아이는 처음 보았구나.' 문득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자신의 질녀(姪女)인 자연군주의 영상이었다. '자연은 똑똑한 아이이기는 하나 영악하지는 못하다. 앞으로 그런 면에서 위험을 당하는 일 이 없어야 할텐데.......' 무형신검 전우진은 마침내 작정한 듯 입을 열었다.


"백대인, 방금 전 속하의 무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백천기는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전우진은 표정을 굳히더니 다시 말했다. "약속대로 백대인의 명에 복종할 것을 맹세하오이다. 하지만 충심(忠心)이라고는 말씀드릴 수 없소이다. 몸은 굴복해도 마음은 굴복한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정말 대단한 자존심이로군.' 백천기는 오기로 뭉친 듯한 전우진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저 고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보고 있던 태성왕이 대소를 터뜨렸다. "허허허......! 어쨌든 의기가 투합되니 보기 좋군. 그럼 모두들 앉게. 이제부터 앞으로의 일을 설명하겠네." 중인들은 마침내 팔선탁자를 가운데 두고 자리에 앉았다. 은령선자 우문경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백천기를 응시하더니 슬며시 그 의 옆자리에 앉았다. 백천기가 흠칫했다. 우문경으로부터 느껴지는 여인 특유의 향기로운 체취(體臭)가 그의 후각에 강하게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태성왕은 그들 두 사람의 맞은 편에 앉아 있었으므로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그는 내심 혀를 찼다. '허어! 천기 저 아이는 여복(女福)을 타고 났군.' 그러나 곧 태성왕의 얼굴에는 기이한 웃음이 떠올랐다.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이유야 어쨌든 모두 한 마음을 이루면 일을 추진하기에 수 월하지 않겠는가?' 태성왕은 천천히 좌중을 쓸어 보았다. 중인들은 진지한 얼굴로 그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마침내 태성왕의 입술이 열렸다. 월광(月光). 보름달이 교교한 빛을 뿌리는 밤이었다. 왕부 깊은 곳에 위치한 화원(花園)에는 갖가지 기화요초가 피어 있었다. 백천기가 뒷짐을 진 채 이곳을 거닐고 있었다. 휘황한 월광이 그의 몸에 떨어져 내리며 지면에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시서(詩書)를 즐기는


선비출신의 백천기, 그는 달이 밝자 절로 시흥(詩興)이 일어 후원에 나온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내내 시를 읊고 있었고 그의 낮은 음성은 은은하게 화원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문득 백천기는 입술을 닫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바닥에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 등 뒤에 메여 있는 마혼백혈검(魔魂白血劍)의 자루를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갑자기 검을 뽑아보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그러자 그는 망설임없이 즉각 자세를 취했다. 그의 두 발이 고무래 정(丁)자를 이루며 벌어져 있었다. "차앗!" 맑은 기합성이 그의 입에서 터지는 순간, 사위는 온통 희뿌연 백기(白氣)에 휩싸이고 말았 다. 검명(劍鳴)조차 일지 않았다. 마혼백혈검은 기척도 없이 뽑혀져 순식간에 천지를 검의 광영 (光影)으로 뒤덮고 만 것이었다. 착! 가벼운 음향과 함께 마혼백혈검의 검영이 사라져버린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검은 어느덧 얌전히 검집에 꽂혀져 있었다. 아니, 검은 애초부터 뽑힌 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때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우수수......! 그 일대의 나무와 화초로부터 꽃송이가 모조리 떨어져내린 것이었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광 경이었다. 달빛 아래 오색의 꽃잎이 춤추며 흩날리는 장면은 세외의 선경(仙景)과도 같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었으니, 땅에 떨어진 꽃잎의 중심에는 하나같이 미세한 구멍 이 뚫려있는 것이 아닌가? 그 구멍의 뚫린 위치나 크기는 한 점의 오차도 없이 모두 똑같았다. 그것을 보자 백천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과연 마혼칠검의 최후초식인 마혼인(魔魂印)의 위력은 가공하구나. 이 초식이 완전하게 펼 쳐지면 과연 받아낼 수 있는 인물이 존재할지.......' 그의 입가에 문득 기소가 매달렸다. '후후! 어제 나는 이 마혼인을 단지 육 성(六成)의 내공으로, 그것도 맨손으로 펼쳐 전우진 을 격패시킬 수 있었다.' 문득 그는 안색이 굳어진 채 음성을 높였다.


"엿보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 줄기 청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호호호....... 과연 백대인께선 청력도 대단하시군요." 그와 동시에 화원 반대쪽으로부터 걸어나오는 선연한 그림자가 있었다. 그녀는 바로 다름 아닌 은령선자 우문경이었다. 휘황한 달빛이 그녀의 은의에 반사되어 밝은 빛을 뿌렸다. 마치 달빛을 휘감은 듯한 그녀의 모습은 가히 고혹적이었다. 만지면 터질 듯한 볼에 귀엽게 패인 보조개, 그리고 꿈꾸듯 신비한 한 쌍의 눈망울이 가까 이 다가오고 있었다. 백천기는 그녀를 향해 먼저 말을 건넸다. "우문낭자였구려. 그런데 야심한 시각에 이곳에는 웬일이오?" 우문경은 다시 한 차례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저는 이곳에 오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백천기는 고소를 지었다. "후후, 그럴 리가 있겠소이까?" 우문경은 배시시 웃더니 처음으로 그를 정시했다. "아무튼 소녀는 정말 놀랐어요. 대인의 검법이 그토록 초절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죠." 그녀는 백천기기가 뭐라 응수하기도 전, 고개를 숙이더니 바닥에 흩어져 있는 꽃잎의 숫자 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실상 그 음성이 언제 끝날지는 그녀 자신조차도 짐작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지루하 지도 않은지 그녀는 계속하여 꽃잎을 일일이 헤아렸다. "정확히 백팔십 개로군요!"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것은 진정 인간의 수법이 아니예요. 만약 이 초식이 펼쳐진다면 백팔십 명의 목이 단번 에 우수수 떨어진다는 얘긴데......." 백천기는 그 말에 쓴 입맛을 다셨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무림의 고수를 어찌 한 송이의 움직이지 않는 꽃과 비교할 수 있겠 소?" 그러자 우문경은 강력하게 부인했다. "아뇨, 제 안력도 보통은 넘어요! 추측해 보건대 그 검법이 일단 전개되었다 하면 천하의 어 떤 고수라 해도 발이 얼어 붙어 움직일 생각도 못하게 될 거예요." "과찬이오. 그건."


백천기는 겸연쩍어 단지 씨익 웃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달빛에 투영되는 그의 웃음은 너 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워낙 준수한 용모이기도 했지만 월광을 받고 서 있는 그의 그런 모습은 도저히 인세(人世) 의 인물이 아닌 듯 했다. 우문경은 잠시 말을 잃은 듯 입술을 다문 채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내가 지금 환상(幻像)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덕분에 백천기는 거북해지고 말았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벗어나기라도 하려는 듯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럼 우문낭자께선 볼 일을 보도록 하시오. 나는 이만......." 그가 등을 보이자 우문경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만요, 대인." "내게 무슨 용무라도 있소?" 백천기는 빙글 돌아서며 물었다. "물론 있죠. 실은 그 때문에 여기까지 왔구요." 우문경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백천기를 직시했다. 붉은 꽃잎을 문 것 같은 그녀의 입술이 제법 야무진 음성을 발했다. "듣자하니 백대인께서는 선비집안 출신이라 하시던데....... 그것이 사실인가요?" 백천기는 피식 웃음이 터져나왔다. "용무란 내 신상에 관한 것이었소?" 우문경은 문득 앵도라진 얼굴로 말했다. "그래요. 그 무서운 실력의 배경이 궁금하다는 거죠." 백천기는 담담한 웃음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후후....... 별로 대단한 실력도 못되오이다." "흥! 그렇게 꼬리를 말아 버리면 다 인가요?" "흐음?" 갑작스레 변해버린 그녀의 말투에 백천기는 눈썹을 꿈틀 했다. 그러나 우문경은 내친 김이 라 생각했는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멍청한 척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멍청한지 종잡을 수가 없군요. 당신에게 관심 을 가지는 게 그렇게 싫은가요?" 백천기는 그만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문경이 그의 면전으로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눈부신 은삼을 날리는 그 모습은 월궁(月宮) 의 항아인들 그녀처럼 아름다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확실히 아름답긴 하다. 하지만.......' 백천기의 내심에서 절로 탄식이 일었다. 실상 그의 주변에는 많은 여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우문경처럼 영활하고도 도전적인


여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은연중 거부감이 있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백천기의 무감한 시선에 비해 우문경의 눈은 활활 타는 듯 했다. 문득 그녀는 향기로운 호 흡을 불어내며 속삭이듯 물었다. "대인의 풍모가 이토록 출중하시니 필시 부인 역시 대단한 미인이겠군요?" 백천기는 역시 고소를 지었다. "그것도 관심사였소? 유감이오만 나는 아직 가정을 갖지 않았소이다." "호호호호......." 우문경은 교소를 터뜨리더니 붉은 입술을 도발적으로 놀렸다. "대인께는 유감인지 몰라도 제겐 도리어 다행인 걸요?" 그것은 명백한 유혹이었다. 백천기의 표정이 아연해지는 것을 보며 우문경은 나긋나긋하게 덧붙였다. "소녀가 이상해 보이실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저는 마음이 끌리는 상대라면 절대 놓칠 수 가 없어요." "후후....... 일방적으로 말이오?" "비웃지 마세요. 저도 어릴 적부터 황궁에서 자랐기 때문에 왕가와 명문대가(名門大家)의 공 자님들을 수없이 보아 왔었어요. 그러나 한 번도 이런 느낌은 가져본 적이 없었어요." "으음......." 백천기는 장승처럼 우뚝 선 채 신음을 흘렸다. 갑자기 우문경의 얼굴이 그의 코 앞에 다가든 것은 그때였다. "대인, 아니 공자......."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백천기의 얼굴로 부어졌다. "공자께선 제가 예쁘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백천기는 황급히 그녀의 말을 막았다. "우문낭자!" 그러나 우문경은 조금도 물러설 줄 몰랐다. "공자......." 이때, 바람에 나부끼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백천기의 얼굴과 목덜미를 휘감았다. 그러자 여인 의 진한 향기에 갇혀버린 백천기의 눈에 무엇인가가 비쳤다. 그것은 바로 진실이 담겨있는 우문경의 두 눈동자였다. 놀랍게도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담 겨있었던 것이다. '......!' 백천기는 그만 가슴이 덜컥하는 것을 느꼈다.


'구문제독부의 금지옥엽인 이 여인, 천하의 남성들을 오시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오늘 자존 심에 상처를 입으면서까지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그도 목석은 아니었다. 더구나 상대는 절세가인이 아닌가? 달빛 아래 미녀의 얼굴이 바로 그의 턱 밑에 있었다. 젖은 눈망울이 열기를 담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윤기가 흐르는 앵두같은 입술은 살 짝 벌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백옥 같은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 빛났다. 마침내 백천기를 내내 가로막았던 마음의 벽이 그 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우문낭자......." 마침내 그의 입술이 아래로 떨어졌다. 입술이 맞닿자 우문경은 흡사 감전이라도 된 듯 전신 을 부르르 떨었다. "공자......." 그녀는 쓰러지듯 백천기의 품에 안겨들었다. 백천기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나긋한 몸을 끌어 안았다. 그러자 부드러운 뭉클한 감촉이 그의 양팔 가득히 전해지고 있었다. "낭자......." 백천기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치켜들었다. 함초롬히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도화빛으 로 물들어 있었다. 그의 양손이 그녀의 부드럽고 뜨거운 두 뺨을 감싸 주었다. 우문경은 보석같은 두 눈을 사르르 내리 감았다. 아울러 그녀의 입술은 무엇인가를 애타게 갈구하는 듯 가쁜 숨결을 토해내고 있었다. 백천기는 격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드는 자신을 느끼며 얼굴을 숙였다. 두 사람의 얼굴이 포개지기 시작했다. 먼저 이마가 닿더니 코끝이, 그리고는 두 개의 입술이.......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문득 한 줄기 예리한 파공성이 그들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팍! 뒤를 이어 기묘한 음향이 울렸다. 그 바람에 두 남녀는 질겁을 하며 서로에게서 떨어져 섰 다. 그들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으로 정신을 차렸다. 백천기는 급히 정신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우문낭자, 미안하외다. 누군가 왔소." 그의 눈이 주위를 둘러 보다가 한 그루의 나무에 가 멎었다. 그곳에는 한 개의 나뭇잎이 둥 치에 반 이상 박혀 파르르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적엽비화(摘葉飛花)!'


백천기는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대단한 실력이다. 그런데 대체 누가......?' 그는 의혹을 느끼며 나무로 다가가 잎을 뽑아냈다. 그는 나뭇잎을 살펴본 순간 잎이 조금도 상하지 않은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정도 고수라면 결코 흔치 않다.' 이때, 옆으로 다가와 나뭇잎을 보던 우문경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홍운엽(紅雲葉)!" "방금 뭐라고 했소?" 백천기는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하며 나뭇잎을 면밀히 들여다 보았다. 나뭇잎은 기름하게 생 겼는데 잎의 중간에는 구름 모양의 붉은 반점이 있었다. 우문경의 놀란 음성이 들렸다. "이 잎은 아무데서나 나뒹구는 나뭇잎이 아니예요. 바로 무산(巫山)의 홍운곡(紅雲谷)에서만 나는 것이죠." 흑백이 분명한 그녀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이 잎으로 말하자면 백 년 전 무림의 절세기인이었던 무산성모(巫山聖母)가 독문수법으로 쓰던 것이에요." 백천기는 궁금증이 일었다. '설마하니 무산성모가 이 자리에 현신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이 왕부에서 이런 수법을 구사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즉시 운공하여 천안(天眼)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그의 시력은 곧장 화원 속을 투시하여 그곳에 숨어있는 한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백천기는 안력을 더욱 돋구었다. '저 여인은!' 그가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화원 속에 숨어 있던 인물은 뜻밖에도 자연군주였던 것이 다. 그의 손에서 홍운엽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우문경을 향해 말했다. "낭자, 밤이 너무 깊었으니 이만 가보겠소이다." 몸을 돌리는 백천기의 표정이 굳어져 있는 것을 본 우문경은 감히 말릴 수가 없었다. 그녀 는 멀어져 가는 백천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고만 있었다. '일이 잘 풀리려는 참이었는데 대체 웬 작자가 방해를 했담?' 우문경은 볼이 잔뜩 부은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화 원의 꽃나무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윽고 그녀는 뭐라 투덜거리더니 화원을 뒤로 하고 사라져 버렸다. 마침내 그곳에는


아무 도 남지 않게 된 것이었다. 문득 가벼운 미풍이 이는가 싶더니 적막이 감도는 화원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녀는 바로 자연군주였다. 무심한 달빛이 부서져 내리는 가운데 그녀의 표정은 더없이 쓸쓸해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멍하니 보름달을 응시했다.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그녀의 가슴 속에 묘한 파문을 만들고 있었다. "경매(京妹)의 용기가 부럽구나......." 무슨 뜻인가? 대명(大明)의 군주인 그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정말 상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자연군주는 낮게 탄식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눈에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홍운엽이 들어왔다. 그녀는 잎새를 주을 생각도 않고 음울하게 읊조렸다. "얼마나 못난 짓인가?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면서 다른 여인에게 양보할 수는 없으니......." 스스스....... 한 줄기 밤바람이 자연군주의 목덜미를 스산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한기가 이는지 몸을 잔뜩 움츠리더니 허탈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원(內院) 쪽으로 사라진 지 얼마 안되서 였다. 쉬익!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한 가닥 청광(靑光)이 화원 마당을 스쳐갔다. 그 푸른 그림자는 바 닥에 떨어진 홍운엽을 낚아 챈 뒤 한 그루의 나무 위로 날아 올라갔다. 나무 위에는 한 인영이 걸터앉아 있었다. 청광은 그 인영의 어깨 위에 내려 앉았는데 그것 은 한 마리의 청색 깃털을 가진 독수리였다. 나뭇가지에 천연스럽게 앉아있는 인영은 다름 아닌 신응녀(神應女) 임청하였다. 그녀는 섬섬 옥수를 들어 청응에게서 홍운엽을 받아들고 있었다. 교교한 달빛이 생기발랄한 임청하의 얼굴 위에서 반사되고 있었다. 그녀는 홍운엽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술 가장자리에 신비한 미소를 담았다. "천기자(天機子)의 여제자에다가 무산성모(巫山聖母)의 전인이라? 흥! 하지만 너희들이 아무 리 설쳐도 나 임청하를 당하지는 못할 걸?" 스스슷! 그녀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잠시 후 그녀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제 남아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제 14 장 · 출행(出行) 호북성(湖北省) 무창(武昌). 호북에서 가장 큰 성도인 무창에서도 십여 리나 떨어진 관도(官道), 때는 가을로 접어들어 제법 쌀쌀한 추풍(秋風)이 관도의 황사 위를 맴돌고 있었다. 정오 무렵 도상에는 세 필의 인마가 나타났다. 따각, 따각....... 그들은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백천기와 현무호, 무형신검 전우진 등이었다. 백천기는 백마에 백의를 걸쳤으며 등에는 역시 백색의 검은 메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출중 하기 그지 없었다. 일행은 태왕부를 떠난 것이다. 은령선자 우문경은 먼저 강남제일보(江南第一堡)로 가 기다리 기로 약정되어 있었다. 얼마 후, 그들의 눈에는 객점(客店)이 들어왔다. 백천기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마침 식사 때도 되었으니 잠시 쉬어 갑시다." 현무호와 전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객점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객점은 그다지 크지 않았 으나 그런대로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이곳은 무창성(武昌城)으로 통하는 대로이므로 손님들이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객점 밖 의 나무 그늘 아래 십여 개의 탁자가 놓여져 있었다. 일행은 그곳에 자리잡고 앉았다. "무엇을 드릴까요?" 명랑한 음성과 함께 한 소녀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 소녀는 약 십육칠 세 쯤 되어 보였는데 허름한 차림새에 비해 깔끔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칼은 두 가닥으로 길게 땋아 내렸으며, 시골소녀답지 않게 흰 피부를 지 니고 있었다. 현무호가 그녀를 향해 음식을 주문했다. "여아홍(女兒紅) 두 근과 오리고기 볶음 세 접시. 그리고 이 집에서 가장 자신있는 요리 서


너 가지를 함께 가져오도록 해라." 소녀는 얌전히 대답한 후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녀의 눈이 백천기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문득 그녀는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이 더니 양 뺨에 홍조를 띄었다. 이어 소녀는 당황한 나머지 몸을 돌려 종종걸음으로 뛰어가 버렸다. 이때, 현무호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대인께서는 무엇 때문에 강남제일보로 가려고 하십니까?" 백천기는 담담히 말했다. "얼마 전 보주인 금검철선(金劍鐵扇)에게 방문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소." 현무호의 눈썹이 슬쩍 찌푸려졌다. "그렇게 되면 무림의 일에 뛰어드는 셈이 아닙니까?" "걱정 마시오. 현위령. 내게도 생각한 바가 있소이다. 그리고 이건 추측이오만 무성왕(武聖 王)은 역모를 꾀하기 위해 무림인들과 결탁했을 가능성이 크오." 백천기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강남제일보는 수백 년에 걸친 무림의 명가요. 그곳에는 많은 무림인들이 드나들고 있소. 따 라서 그곳에 가면 어떤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오." 현무호와 전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속하들이 미처 그 점을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때였다. 객점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한 명의 소년이 있었다. 그는 십삼사 세 가량 되어 보 이는 귀엽게 생긴 청의동자(靑衣童子)였다. 소년은 두 마리의 토끼를 움켜쥔 채 뛰다시피 달려오며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누나! 누나! 청아(靑兒)가 토끼를 두 마리나 잡았어." 그러자 객점 안에서 예의 소녀가 걸어나왔다. 소녀는 고운 눈살을 찌푸리더니 소년을 나무 랐다. "청아! 너 할아버지께 그렇게 혼나고도 또 그런 짓을 했니?" 청아라 불리운 소년은 혓바닥을 낼름 내밀었다. "피이! 누나는 자나깨나 그 말밖에 모르지? 하지만 이번엔 할아버지도 허락하셨으니 걱정 없어." 소녀는 손을 내저으며 제법 엄하게 말했다. "어쨌든 쓸데없이 동물을 죽이는 건 나쁜 짓이야." 그러나 청아는 지기 싫은 듯 코웃음을 날렸다. "흥! 누나는 고기도 안 먹나?" 소녀는 급기야 작은 주먹을 움켜쥐더니 호통을 쳤다. "청아! 너 자꾸 말대꾸 할래? 이 누나가 널 좀 때려 주어야 겠다." 그녀는 정말로 주먹을 흔들며 청아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 기세에 놀랐는지 청아는


기겁 을 하며 고함치듯 외쳤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누나가 청아를 때리려 한대요." 이때 객점의 문이 열리며 한 명의 노인이 걸어나왔다. 노인은 누런 베옷을 입고 있었는데 병약하고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가슴까지 길게 늘 어진 은빛 수염과 함께 풍기는 인상은 범상치가 않아 보였다. "콜록! 콜록......." 노인은 문득 심한 기침을 했다. 그러나 기침이 멎자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청아의 작은 어 깨를 두드렸다. "허허허! 네가 누나에게 맞을 짓을 했겠지." 청아는 고개를 쳐들더니 반발했다. "아니에요! 저는 단지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았을 뿐인 걸요?" 그러자 노인이 점잖게 타일렀다. "청아야, 내 전에도 말했다만 함부로 살생을 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란다. 그러니 누나가 야단치는 것은 당연하단다." 청아는 금세 풀이 꺾여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청아는 단지......." 소년이 투덜거리며 변명하려 들자 노인은 온화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이 할애비까지 야단칠 생각은 없구나. 어서 손 씻고 와서 식사를 하도록 해라." 청아는 그제서야 얼굴을 활짝 폈다. 두두두두......! 문득 관도 저쪽으로부터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말발굽 소리는 삽시에 객점 앞에 당 도했다. 모두 네 필의 말이었다. 마상에는 한결같이 검은 삿갓을 깊숙이 눌러쓴 괴인들이 타고 있었 다. 그들은 옷조차 흑의을 입고 있어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음침한 분위를 풍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말에서 신속히 뛰어내렸다. 그러나 그들을 본 순간 노인의 안색이 급변했다. 동시에 그는 손을 뻗어 청아를 밀며 황망 히 부르짖었다. "청아야! 빨리 안으로 들어 가거라." 네 명의 삿갓괴인이 노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들 중 한 명이 음침한 괴소를 터뜨 리며 말했다. "흐흐흐흐! 은염공(銀髥公) 두현상(杜賢相). 십 년 동안 죽어라 도망다니더니 겨우


이런 곳 에 숨어 있었느냐?" 노인은 얼굴이 굳어진 채 반문했다. "너희들은 철마신조(鐵魔神爪) 상구(尙仇)의 명으로 왔느냐?" 삿갓괴인 중 한 명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렇다. 우리는 철마교에서 온 흑천사립(黑天四笠)이다." "흑천사립!" 노인, 즉 은염공 두현상은 크게 놀라는 한편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으음, 이 자들이 바로 요즘 철마조가 거두어 들였다는 놈들이로구나. 잔인하고 악랄하기로 이름난 살수(殺手)들이라고 하더니만.' 객점은 그들의 출현으로 살벌한 분위기로 돌변했다. 그 바람에 식사를 하던 손님들은 하나 둘 눈치를 보며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다만 백천기 일행만이 아무 것도 못 본 듯 여전히 담소를 나누며 술과 음식을 들고 있었다. 이때 객점의 소녀가 급급히 일행에게 다가가더니 황급히 말했다. "어르신들. 이곳은 위험하니 자리를 피해주세요. 네?" 백천기는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어보였다. "우린 괜찮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꼬마낭자." 소녀는 금세 울상이 되어 흑천사립을 가리켰다. "아저씨는 저들이 보이지도 않나요?" 현무호가 짐짓 눈을 크게 뜨더니 그 말을 받았다. "아! 저 삿갓 쓴 친구들 말인가? 그들도 아마 술을 마시러 온 모양인데 이쪽으로 합석하자 고 할까?" 소녀는 기가 막힌 듯 그를 향해 되물었다. "아저씨는 무림인의 무서움도 모르나요?" 현무호가 미처 답하기도 전에 음침한 외침이 고막을 울렸다. "두현상!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옥소(玉簫)를 바쳐라." 백천기 일행은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두현상이 싸늘히 외치고 있었 다. "어림도 없는 소리! 그것은 네 놈들에게 내줄 물건이 아니다." 비웃음이 담긴 음침한 음성이 그 뒤를 이었다. "흐흐흐....... 두현상! 네 놈이 한때 이름을 날렸던 것은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옛날 이야기일 뿐, 지금의 너는 단지 쓸모없는 병자다." 흑천사립은 두현상을 가운데 두고 사방위로 서서히 에워싸기 시작했다. "마지막 경고다. 어서 물건을 내놓아라." 그들은 한결같이 삿갓을 눌러 쓰고 있었기 때문에 시종 누가 말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 두현상은 비록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었으나 추호도 흔들리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의기가 높아지는 모습이었다. "내 작금에 이르러 기력이 쇠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네깟 놈들에 게 쉽사리 꺾일 것 같으냐?" 흑천사립 중 누군가가 차갑게 내뱉았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 죽이고 가져갈 수밖에!" 또다른 음성이 일갈했다. "뒈져랏!" 호통과 동시에 일장을 떨친 자는 서쪽 방위에 있던 괴인이었다. 두현상은 재빨리 몸을 돌리 며 장력을 맞받았다. 펑! 가죽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리고 난 직후, 괴인과 두현상은 각기 한 걸음씩 뒤로 물러 났다. "흐흐, 과연 병이 들었어도 이전의 실력은 남아 있군."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우욱! 쿨럭, 쿨럭......." 두현상은 만면에 괴로운 표정을 떠올리며 심한 기침을 터뜨렸다. 삽시에 그의 안색은 백짓 장같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그 모습에 한쪽 구석에서 떨고 서 있던 청아가 장내로 달려오며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할아버지!" 두현상은 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청아야, 다가오지 마라! 위험......" 그러나 청아는 어느새 그의 소맷자락을 부여잡고 있었다. "이 나쁜 놈들! 감히 우리 할아버지께 무례하게 굴다니, 이 청아가 용서하지 않겠다." 분연히 외치는 소년의 기세는 실로 당당하기 그지 없었다. 청아는 말을 마치자마자 작은 주먹을 움켜쥐더니 한 삿갓괴인에게 덮쳐갔다. 용기는 가상했 으나 무모한 행위였다. "이 꼬마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삿갓괴인은 거칠게 외치며 우악스러운 일장을 뿌려냈다. 펑! "악!" 청아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소년의 작은 몸뚱이가 땅바닥에 떨어 져 나뒹굴었다. "이번엔 아주 숨통을 끊어주마!" 삿갓괴인은 살벌하게 중얼거리며 다시 손바닥을 치켜세웠다. "악! 청아야!" 소녀의 뾰족한 비명이 고막을 찢을듯 울렸다. 그러나 삿갓괴인은 무정하게 손바닥을 내려쳤


다. 문득 한 가닥 예리한 음향이 허공을 가른 것은 바로 이때였다. "억!" 삿갓괴인은 비명을 지르며 급히 손바닥을 감싸쥐었다. 그의 손은 삽시에 시뻘건 선혈로 물 들고 말았다. 보니 그의 장심에는 한 개의 대나무 젓가락이 깊숙히 박혀 있었다. "어, 어떤 놈이냐?" 삿갓괴인은 노성을 지르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는 마침내 탁자에 앉아 태연하게 식사하고 있는 백천기 일행을 발견했다. 마침 백천기가 하나 뿐인 젓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삿갓괴인은 그만 가슴이 섬뜩해지고 말았다. '이제 보니 이곳에 고인이 있었구나.' 하지만 그는 상대가 그다지 나이가 많지 않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살기띈 음성으로 말했다. "흐흐흐! 애송이 놈, 네 놈이 이 젓가락을 던졌느냐?" 백천기는 억양이 느껴지지 않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런 것 같소." 삿갓괴인은 노기등등하여 외쳤다.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느냐? 감히 우리 일에 참견하다니." 백천기는 그를 힐끗 보며 담담히 말했다. "본인도 사실 남의 일에 끼여드는 일에는 흥미가 없소. 하지만 옳지 않은 것은 그냥 지나치 지 못하는 성격이라 잠깐 끼여들었소." "뭣이?" 삿갓괴인들은 일제히 몸을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이때 소녀는 백천기를 바라보며 작은 가 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아, 저 분들도 무림인이셨구나.' 소녀의 얼굴에 문득 은은한 홍조가 어렸다. '난 또 그런 줄도 모르고 호들갑을 떨었으니.......' 부끄러움이 담긴 그녀의 눈길은 백천기의 준수한 얼굴로 향해지고 있었다. 한편 백천기는 전우진을 향해 묻고 있었다. "전영반, 흑천사립의 악행은 어느 정도요?" 전우진은 엄숙한 어조로 대답했다.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저들은 무림에 나오자마자 태산사걸(泰山四傑)을 필두로 무 당파(武當派)의 십이도인 등, 수많은 정파의 고수들을 살해했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끊더니 만면에 분노를 드리웠다. 강직한 그의 성품은 타협을 몰랐으며 악에 대해서는 단호한 것으로 이름나 있었다.


"더구나 저 놈들은 무공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까지도 심심찮게 살상해온 자들입니다." 그 말에 백천기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흑천사립을 주시하며 냉랭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살아 있어 봤자 세상에 해악(害惡)만 끼치겠군." 전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흑천사립은 그야말로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마침내 그들 중 한 명이 노성을 질렀다. "네 놈들은 대체 어떤 놈들이냐?" 그 말에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현무호가 나섰다. "네 놈들을 지옥으로 안내하려고 관부(官府)에서 나왔다." "뭣이?" 흑천사립은 일제히 경악성을 터뜨리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예로부터 관과 충돌하지 말라는 것은 무림의 불문율이었다. 오래 전부터 무림과 관은 상호 불간섭해 왔던 것이다. 이번에는 전우진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흑천사립! 네 놈들의 악행도 오늘로 끝이다." 그 말에 흑천사립은 몹시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 중 한 명 이 음산한 괴소를 발했다. "흐흐흐! 관인이라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네 놈들은 이 자리에 뼈를 묻게 될 테니까." 현무호가 듣다 못해 벌떡 일어섰다. "가소로운 놈들! 정말 허파가 부어도 단단히 부은 놈들이구나!" 삿갓괴인의 응수도 만만치는 않았다. "큭큭! 고작해야 관부의 위세를 믿는 네놈들이야말로 어리석어도 한참 어리석은 놈들이다." 현무호는 표정을 얼음장같이 굳히며 노호성을 터뜨렸다. "이 놈! 귀 씻고 잘 들어라. 본좌는 금의위의 위령(衛令)인 천수나타 현무호다." "뭣이?" 흑천사립은 크게 놀라 부르짖었다. 현무호의 음성이 이어졌다. "게다가 여기 계신 분이 뉘신지 아느냐? 바로 동창의 영반이신 무형신검 전우진 대인이시 다." '이럴 수가! 황궁의 최고고수들이 한꺼번에 강호에 출현하다니.' 흑천사립은 비로소 사태가 잘못 되어감을 깨달았다. 천수나타 현무호와 무형신검 전우진은 황궁 뿐만 아니라 이미 강호무림에도 널리 알려져 있 었다. 흑천사립은 그만 기가 꺾인 채 어깨를 늘어뜨리고 말았다. 상대방의 위명에 전의를 상실한


것이었다. 이때 현무호가 백천기를 향해 예를 갖추어 공손히 물었다. "대인, 손을 쓸까요?" 백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두 분의 재량에 맡기겠소이다." "알았습니다." 현무호는 흑천사립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흑천사립은 마치 사신이라도 만난 듯 다가오는 만큼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런 한편 그 들은 백천기를 힐끗 바라보며 의혹을 금치 못했다. '저 청년은 또 누구길래 금의위의 최고고수인 현무호가 저토록 공손히 대한단 말인가?' 한편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소녀는 새삼 경이에 찬 시선으로 백천기를 응시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경외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때 현무호는 흑천사립의 앞에 멈추더니 수중의 철선을 활짝 펼쳤다. 그의 눈에서는 싸늘 한 광망이 뻗어나왔다. "흑천사립, 너희들은 오늘로서 운이 다 했다." 흑천사립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현대협....... 우리들은 관부와 원한 맺는 것을 원치 않소이다. 더우기 우리들 뒤에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무호는 노성을 발했다. "닥쳐라! 이제는 너희들이 배경을 내세울 참이냐?" 다음 순간, 그의 철선이 무섭게 휘둘러졌다. 파파파파팟! 파공성과 함께 철선은 허공에 수십 개의 선영(扇影)을 그려냈다. "혼탈(魂奪)!" "으아악!" 선혈이 치솟으며 한 괴인이 뒤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는 삿갓이 두 쪽으로 갈라진 채 즉사하고 말았다. 삿갓과 머리가 그대로 두쪽으로 쪼개진 것이었다. 단 일 초에 황천으로 직행한 것이었다. "으....! 이럴 수가......." 나머지 세 명의 괴인들은 그야말로 혼비백산, 급급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혈탈(血奪)!" 현무호의 냉갈이 일어나며 다시 철선이 날아갔다. "크아악!" 뒤이어 세 마디의 참담한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흑천사립은 미처 저항할 자세를 갖추기도 전에 거의 동시에 저승으로 간 것이었다. 실로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제 장내는 흡사 폭풍이 지나간 듯 적막이


찾아왔 다. 한편,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두현상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 일찌기 황궁의 고수들이 무섭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저렇게 무공이 강할 줄이야!' 그러나 정작 경악을 금치 못한 것은 당사자인 현무호였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철선 과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흑천사립의 시신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추풍삼탈(追風三奪)의 위력이 이렇게 강할 줄이야? 그저 한번 시험해 보았을 뿐이데 단 이 초만에 강호의 이 자들을 간단히 죽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현무호가 펼친 것은 백천기로부터 구결을 전해받은 추풍파로선의 마지막 삼 초식이었다. 그는 설마 그 삼 초가 이렇게 무서운 위력을 발휘할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었던 것이다. 은염공 두현상이 정중히 읍했다. "현대협, 정녕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현무호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마주 포권했다. "흑천사립은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소. 무림의 일은 차치하고라도 그 자들은 양민학살이란 중죄를 지은 자들이니 관에서 처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소." "하지만......" 현무호는 슬쩍 몸을 비키며 백천기를 바라보았다. "굳이 감사를 표하고 싶다면 대인께 하시오." 그 말에 두현상은 백천기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문득 그의 안색이 하얘졌다. 어찌된 셈인지 무형의 경기가 벽을 친 듯 도무지 허리를 숙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두현상은 안색이 변해 내심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보아하니 이 청년은 약관에 불과해 보이는데 벌써 선천강기(先天 氣)를 익히고 있다니.......'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황궁에 언제 이런 신비고수가 있었단 말인가?' 백천기는 두현상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노인장, 감사할 필요는 없소이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오." 그 말에 두현상은 감동한 모양이었으나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이 늙은이는 여러분이 아니었으면 벌써 송장이 되었을 것이오. 부디 청컨대 이 늙 은이에게 다소나마 보답할 기회를 주시오." 그가 이렇게 나오자 백천기는 도리어 사양할 수가 없게 되었다. "자, 그럼 어서 안으로 드시구려."


백천기는 일행과 함께 객점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들의 뒤로 소녀가 말없이 따랐다. "완아(脘兒)야. 어서 술과 안주를 준비하거라." "네, 할아버지." 완아라 불리운 소녀는 기쁜 듯 명랑하게 대답하더니 백천기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이어 그녀는 새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주방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귀여운 소녀로군.' 백천기는 미소를 띈 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일행이 자리잡고 앉자 백천기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두노인은 흑천사립과 어떤 원한이라도 있었소이까?" 두현상은 탄식을 불어내더니 우울한 기색을 띄었다. "내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소. 하지만......." 좌중은 그의 침중한 음성에 모두 귀를 기울였다. 두현상은 한동안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문득 음성을 낮추어 물었다. "여러분들께선 혹시 백원곡(白 谷)에 대해서 들어보신 분이 있소?" 현무호는 눈썹을 꿈틀하며 반문했다. "백원곡? 강남오가(江南五家) 중 하나인 절강성(浙江省)의 백원곡을 말씀하시는 것이오?" 두현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이다. 실상 노부는 백원곡의 곡주(谷主)외다." 그 말에 전우진은 놀란 듯 반문했다. "노인장이 그 유명한 백원노인(白猿老人)이란 말이오?" "그렇소이다." 현무호도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두현상은 어느새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약간의 허명만을 얻었을 뿐이외다." 그는 곧 허탈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백원곡은 사실 십 년 전에 없어졌소이다." "......?" 중인들은 아연한 표정으로 두현상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처음 듣는 말이었던 것이다. 문득 두현상의 얼굴에 한 줄기 비감(悲感)이 떠올랐다. "그 이유는 흑천사립이 내놓으라고 하던 옥소(玉簫) 때문이었소." "옥소? 대체 어떤 물건이기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오?" 두현상은 눈을 스르르 감더니 과거사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십 년 전, 두천인(杜天引)이란 이름을 지닌 아들이 있었소. 그 아이는 우연히 상 고시대의 보물인 옥소 하나를 얻게 되었소. 그런데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당시 사마 (四魔) 중 한 명이었던 철마곡의 철마신조(鐵魔神爪)가 눈치채고 말았소. 결국 그 자는


옥소 를 얻기 위해 백원곡을 습격하였소......." 그의 표정은 처절하게 변하고 있었다. "결국 아들 부부와 백원곡의 식솔들은 그날 이후 몰살하고 말았소. 다행인지 불행인지 옥소 는 노부가 지니고 있었는데 당시 두 손자손녀와 함께 밖에 나가 있었으므로 화를 면할 수가 있었소." 여기까지 말한 후, 두현상의 눈은 활활 타올랐다. "그 후 노부는 철마신조를 찾아 철마곡으로 달려갔소. 그리고 그와 근 천여 초의 싸움을 벌 였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두현상은 참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결국 노부는 반 초 차이로 패배하고 말았소. 놈의 철마조(鐵魔爪)가 가슴에 격중된 것이오. 당시 중상을 입은 노부는 간신히 탈출했소. 그 날 이후로 이렇게 두 손자 손녀와 함께......" 그는 자조 반, 회의 반으로 노안에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하지만 그때 입은 상처로 기혈(氣血)이 막혀 내공이 절반 이상이나 감퇴 되었소이다. 뿐만 아니라 철마조의 극독에 중독되어 이렇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오. 허허, 만일 지 금처럼 폐인이 되지 않았다면 흑천사립 따위에게 그토록 모욕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두현상의 얼굴에는 수치감이 떠올라 있었다. 이렇게 되자 좌중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같은 무인의 입장으로 그의 마음을 모르는 자 는 아무도 없었다. 문득 백천기가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두노인, 소생이 상처를 좀 봐도 되겠소?" 두현상은 체념의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오, 소용없소이다. 공연히 폐만 끼치게 될 뿐이오. 노부도 백방으로 손을 써보았지만 여태 이 지경이라오." 백천기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상심과 체념이야말로 더 큰 병이외다. 육체의 병은 무슨 수를 쓰던 고치게 되어 있소이다." 그 말에 두현상의 은염이 미미한 떨림을 보였다. '젊은 청년의 말재간이 실로 보통이 넘는구나.' 그는 백천기의 말 한 마디로 인해 절망의 늪으로부터 한 가닥 희망이 일어나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두현상은 마침내 결심한 듯 상의를 벗었다. "음!" 그의 상체가 드러나자 백천기를 위시한 중인들은 한결같이 침중한 신음을 발했다. 그의 가 슴 한복판에는 자색을 띈 다섯 개의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때 두현상의 손녀 완아가 음식을 들고 다가왔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비쩍 마른 가슴 한 복판에 새겨진 상흔을 보며 연민의 표정을 짓고 있었 다. 완아는 안타까운 한숨을 가늘게 내쉬었으나 곧 침착하게 요리를 탁자에 내려 놓았다. 백천기는 소녀의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이자 홀연히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이 소녀는 채 피지도 않은 나이에 불행을 마치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구나. 과연 불행한 소녀로구나.' 백천기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두낭자, 식염(食鹽) 한 그릇과 석각(石角) 세 냥을 갖다 줄 수 있겠느냐?" 완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공손히 대답했다. "네." 그녀는 잰 걸음으로 밖으로 사라졌다. 대략 반 식경 가량이 지나자 그녀는 두 가지 물건을 구해 돌아왔다. 그녀는 물건을 탁자에 내려 놓으며 물었다. "이것은 무엇에 쓰시려고요?" 백천기는 그녀를 보며 빙긋 웃었다. "꼬마낭자의 근심을 덜어주려고 한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할아버님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 필요한 물건들이지." "아!" 완아는 부지중 탄성을 발했다. 그녀로서는 갑자기 환한 서광(瑞光)이 비친 듯한 얼굴을 했 다. 지금까지 그녀의 삶에서는 행운이란 좀체로 없었다. 그런데 백천기를 만나는 순간부터 갑자기 좋은 일이 자꾸만 일어날 듯한 예감이 들고 있었 다. 그녀는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자뭇 흥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할아버지의 병을 고칠 수 있나요?" 백천기는 대답 대신 두현상에게 말했다. "두노인, 지금부터는 고통이 따르더라도 참으셔야겠소." "알겠소이다." 두현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기는 품 속에서 길이가 네 치 정도 되는 한 자루의 소도(小刀)를 꺼냈다. 문득 그는 두 현상의 가슴에 남아있는 손가락 자국을 향해 번개같이 소도를 휘둘렀다. "으윽......." 두현상의 악다문 이빨 사이로 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의 가슴에는 어느 새 실낱같이 가 느다란 소도의 자상(刺傷)이 거미줄처럼 무수히 나 있었다. "할아버지... 흑!" 보고 있던 완아와 청아가 울음을 터뜨렸다. 마치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인 양 진저리를 치는 두 남매에게서는 뜨거운 정이 느껴지고 있었다. 백천기는 소도를 품 속에 갈무리 하더니 이번에는 탁자에 놓인 식염과 석각가루를 물에 개 었다. "......." 중인들이 모두 침묵한 채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백천기는 그 배합물을 두현상의 상처에 고루 바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두현상은 급 기야 상체를 뒤틀며 비명을 질렀다. "으윽......!" 배합물이 상처 속으로 스며듦에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치 무서운 고통이 엄습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곧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거미줄 같이 그어진 자상으로부터 시커먼 액체가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현상은 근 일 각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 동안 두현상은 줄곧 안면을 경련하며 고통스 러운 신음을 흘려냈다. 그러나 백천기는 냉정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문득 그는 손가락을 튕겨 연달 아 지풍을 날렸다. 파파파팟! 두현상은 곧 상처로부터 고통이 가시며 청량한 느낌이 전신에 퍼지는 것을 느꼈다. 이어 눈 꺼풀이 무거워지며 나른한 잠이 걷잡을 수 없이 몰려 들었다. 그것은 백천기가 그의 수혈(睡穴)을 짚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두현상은 이내 깊은 잠에 떨


어져 버렸다. 그가 탁자에 얼굴을 박고 잠에 떨어지자 완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할아버지께서는 괜찮으실까요?" 백천기는 담담히 말했다. "걱정마라. 한 잠 푹 주무시고 나면 완쾌될 것이다." 그는 몸을 일으켜 객점 밖으로 걸어 나갔다. 현무호와 전우진도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완아와 청아는 잠든 두현상을 안아서 내실에 옮긴 후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 사이 백천기 일행은 객점 밖의 노천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청아가 탁자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소년의 눈은 잔뜩 기대를 품은 채 현무호를 주시했다. "아저씨는 정말로 멋졌어요! 그 못된 악당들이 꼼짝도 못하고 벌벌 떨던 것을 생각하면 얼 마나 고소했는지 몰라요." 현무호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다. 소년의 천진무구함이 황궁의 제일고수인 그를 당황하게 만든 것이었다. 청아는 존경심을 가득 떠올리며 야무지게 말을 이어갔다. "나도 크면 꼭 아저씨같은 사람이 될 테야!" '나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현무호는 내심 고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소년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아 짐 짓 부드럽게 물었다. "꼬마야, 내게 무슨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느냐?" 청아는 또랑또랑한 눈을 굴리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에게도...... 무공을 한 수 가르쳐 주시지 않겠어요......?" 현무호는 싱긋 웃더니 백천기를 가리켰다. "꼬마야, 너는 사람을 잘못 봤다. 이 분이야말로 엄청난 무공을 지니고 계시다." 청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저씨 보다도요?" 현무호는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나같은 사람은 천 명이 있어도 대인 어른을 당할 수 없단다." "아!" 청아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백천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현위령,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오?" 현무호는 다시 크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하, 백대인. 그러지 마시고 이 아이에게 몇 수 가르쳐 주십시오. 어차피 이 아이도 거 친 무림계를 헤쳐 나가려면 자신을 지킬만한 무공은 필요할 것입니다."


그의 말에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백천기는 생각했다. 곧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청아야, 이리 오너라. 너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마." 그 말에 청아는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청아는 그야말로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는 이는 다름아닌 완아였다. 그녀의 시선에는 부러워하는 빛이 역 력히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백천기는 완아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두낭자도 배우고 싶으면 와도 좋다." 그 말에 완아는 펄쩍 뛰기라도 할 만큼 기쁜 심정이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녀 는 단지 얼굴 가득 홍조를 띄운 채 마지못한 듯 다가가고 있었다. 백천기는 그들을 데리고 객점의 뒤쪽 공터로 돌아갔다. 그곳은 야산이었는데 마침 무공수련을 하기에 알맞는 초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세 사람은 풀밭에서 삼각형의 구도를 이룬 상태로 서로 마주보고 섰다. 이윽고 백천기가 차 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자, 이제부터 내가 이르는 것을 잘 들어라. 이것은 무림에서는 아는 자가 한 사람도 없는 무공이다. " 완아와 청아는 눈을 반짝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바로 유운청신장(流雲淸神掌)과 미리보법(彌鯉步法)이란 것이다." 백천기는 그 두 가지 무공의 구결을 자세히 설명했다. "유운청신장은 가볍고 빠른 것이 특징이다. 모두 열여덟 가지의 변화가 내포되어 있으며, 어 느 장소 어느 시기에서도 펼칠 수가 있다. 또 한 번 펼치면 연속하여 십팔 장(十八掌)을 전 개할 수 있으며 초식의 선후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 그는 직접 그 장법의 시범을 보였다. 유운청신장은 실상 사백 년 전에 실전된 화산파(華山派) 비전의 절기(絶技)였다. 그것은 유 (柔)한 반면 변화가 무쌍하며 쾌속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두 남매는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백천기가 펼쳐보이는 장법의 변화를 주시했다. 백천기는 공력을 전혀 가하지 않고 아주 느리게 장법을 전개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바닥에서는 수십 갈래의 경기가 뻗어나와 파공성을 냈다. 휘리리릭! 휙휙!


그의 장영은 풍차처럼 어지럽게 돌아가 도무지 공격하는 방향을 알 수 없게 했을 뿐더러 어 느 것이 허(虛)고, 어느 것이 실(實)인지조차 분간할 수가 없었다. 완아와 청아는 온 정신을 집중하여 그가 시연해 보이는 장법의 변화를 주시했다. 백천기는 시연을 끝낸 후 두 남매에게 따라해 보라고 지시했다. 두 남매는 처음에는 엉성하 게 흉내냈으나 그가 몇 차례 지적을 해주고 자세를 바로잡아 주자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지 나자 어느 정도 초식 흉내는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대충 전수가 끝나자 이번에는 미리보법(彌鯉步法)을 전수해 주었다. 미리보법은 역시 실전된 아미파(峨眉派)의 보법으로 불문(佛門)의 심오한 정기가 담겨져 있 었다. 느린 듯 하면서도 은중한 가운데 변화가 내포된 보법으로 일단 능숙하게 연마하면 어떤 상 대를 만나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보법이었다. 완아와 청아 남매는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두 가지 무공을 연마했다. 사실 그 무공은 평 생을 익혀야 겨우 터득할 수 있는 신기막측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의(奧意)를 꿰뚫어 보고 있는 백천기가 자자구구 해석을 곁들여 주고, 직접 틀린 자세까지 바로 잡아주게 되자 두 남내는 반나절이 안 되어 절반 이상 익혀낼 수가 있게 되 었다. 그야말로 명사(名師)를 만난 행운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한편 백천기는 두 남매의 성취도가 매우 높자 절로 흥취가 일어났다. 그는 두 남매의 자질 이 의외로 뛰어난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는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 들더니 말했다. "내 너희들에게 검법(劍法) 한 가지를 더 가르쳐 주겠다. 이 검범은 영사십이식(靈蛇半空十 二式)이라고 한다. " 영사십이식은 백천기가 건곤칠살 중 다섯째인 영사신마의 영사장법(靈蛇掌法)을 검법으로 개조한 것이었다. 단 한 번 흉내내 본데 그쳤으나 거기에 묘를 더하여 즉흥적으로 검법으로 만든 것이었다. 비록 단시간에 창안한 것이기는 했으나 그 위력의 영활함은 영사장법을 몇 배나


능가하는 것이었다. 휙휙휙! 슈슉슉! 나뭇가지가 휘둘러질 때마다 수십 송이의 검화(劍花)가 피어나 보는 눈을 어지럽게 했다. 마 치 영사(靈蛇)가 춤추듯 교묘하게 뻗고, 후리고, 찍는 그 수법은 실로 독특한 데가 있었다. 청아와 완아는 그 광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단 한시도 백천기가 휘둘러 대는 나뭇가지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백천기는 영사십이식의 시범을 모두 마친 뒤 말했다. "앞서 가르쳐준 두 가지 무공에 영사십이식까지 완전히 익힌다면 너희들은 어떤 고수를 만 나더라도 쉽게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야, 신난다!" 청아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으며 완아 역시 얼굴이 사과처럼 빨개진 채 자뭇 흥분한 표정이 었다. 이어 그들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그 세 가지의 무공에 몰입되어 버렸다. 다음날 아침. 백천기 일행은 이른 시각부터 떠날 차비를 차렸다. 그때 두현상이 방에서 뛰어나오며 다급 히 외쳤다. "잠깐만! 백대협." 그의 안색은 하루 전보다 크게 좋아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눈에는 은은한 신광이 감돌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내공 또한 거의 회복 단계에 이른 것 같았다. 두현상은 깊숙히 포권하며 감격이 깃든 어조로 말했다. "이 은혜는 백골난망(白骨難忘)이외다. 더구나 아이들에게까지 무학을 전수해 주시다니......." 그가 채 말을 잇지 못하자 백천기는 밝게 웃었다. "하하하,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시오. 자꾸 그러시면 더이상 말도 하지 않겠소." 두현상은 그 말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허!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설마하니 노부로 하여금 보답할 기회마저 허락하지 않는단 말씀이오?" 백천기는 문득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노인, 이 사람은 별로 한 일이 없소이다. 더구나 하늘 아래 사람은 모두 도와가며 살아야 하거늘, 하찮은 일에 보답 운운한다는 것은 올바른 행위가 아니외다." 두현상은 그 말에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백대인께서는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백천기는 담담히 대답했다. "강남제일보로 가는 중이외다." "강남제일보......." 두현상은 낮게 중얼거리더니 다시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백천기는 가볍게 포권했다. "그럼, 이만 떠나겠소이다." "잠깐만, 대인." "......?" 백천기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두현상은 품 속에서 무엇인가 긴 보자기로 감싼 물건을 꺼냈 다. "백대협께 이것을 드리겠소이다." "이건?" 두현상은 침중한 음성으로 답했다. "이것이 바로 백원곡 참화의 원인이 되었던 백옥신마소(白玉神魔簫)란 물건이외다." "백옥신마소?" 두현상은 음울한 얼굴이 되어 옥소를 어루만졌다. "이 옥소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저 유명한 장인(匠人), 비거수(非居 )가 만든 진품(珍品)이 라오." 백천기는 눈을 번쩍 빛냈다. 학문을 깊이 익힌 그는 골동품에도 조예가 있어 전국시대의 명 장 비거수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백옥신마소는 사백 년 전 음공(音功)으로 위명을 펼쳤던 구천현녀(九天玄女)의 독문무기이기도 했소이다." '구천현녀라고!' 백천기는 안색이 변했다. 두현상은 백옥신마소를 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 "만일 백대협께서 이것을 취하시지 않는다면 노부는 영원히 없애겠소이다." 그는 새삼 옥소에 얽힌 비극을 떠올렸는지 만면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 백천기는 잠시 생각했다. '하긴 이 옥소로 인해 이 노인의 일생이 비극으로 물들었으니 가지고 있는 것이 도움이 되 지 않을 것이다. 이 물건은 노인에게야 일개 마물(魔物)에 불과할 것이다.' 마침내 그는 옥소를 받아들였다. "고맙소이다. 두노인, 그럼 적당한 임자가 나타날 때까지 대신 보관하도록 하겠소." 그러자 두현상은 마치 큰 짐을 벗은 듯 홀가분한 표정으로 너털웃음쳤다. "허허....... 이제야 비로소 노부는 빚을 조금이나마 갚은 기분이 드는구려." 마침내 백천기 일행은 작별을 고하고 객점을 떠났다. 그들은 각기 말을 타고 관도(官道)를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이랴!"


두두두두두....... 대지를 울리는 힘찬 말발굽 소리와 더불어 세 필의 말이 달려 나갔다. 그들은 올 때와는 달 리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태양이 찬연한 빛을 뿌리며 그들의 뒷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바로 그때,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는 한 쌍의 아름다운 눈길이 있었다. 그녀는 바로 완아였다. 언제부터인지 그녀의 눈 속에는 뽀얀 안개같은 것이 서리고 있었다. 그녀는 세 필의 인마가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백원노인 두현상. 그는 뒤늦게서야 완아의 그런 모습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그러나 문득 깨달아지는 바 가 있자 내심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허어! 이 녀석도 벌써 다 컸구나. 하기야 그런 인물을 보고 반하지 않을 여자가 있을 리 없 지.' 두현상은 완아의 가녀린 어깨를 두드렸다. "완아야, 어서 준비해라. 우리도 떠나야지." "넷? 어디로......." 완아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보며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럼 너 혼자 남아 있을 이유가 있느냐? 이 할애비는 이곳을 정리하고 강남제일보로 갈 생 각이다." "아! 할아버지......." 완아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허허, 녀석!" "소녀, 당장 준비 하겠어요." 그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더니 나는 듯이 객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제 15 장 · 강남제일보(江南第一堡)의 혈풍(血風) 바람이 불고 있었다. 높은 산에서는 어느덧 낙엽이 부는 바람에 우수수 날리고 있었다. 휘이이이잉! 추풍이 메마른 대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강남제일보(江南第一堡)는 강서성(江西省) 일대에서는 정도무림(正道武林)의 지주인 곳이었 다. 거대한 보문(堡門)은 이 날따라 활짝 열려져 있었다. 좌우로 열린 보문을 통해 수많은


무림 인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보내 곳곳에서는 줄곧 화기에 찬 호탕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가 하 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까지 어우러져 마치 경사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보의 중앙에 위치한 대청(大廳)에서는 근 백여 명에 달하는 군웅들이 술잔을 마주치고 있었 다. 그들은 저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담소하고 있었다. "여러분, 잠깐만 주목해 주시오." 불현듯 우렁찬 음성이 중인들의 소음을 그치게 했다. 중인들의 시선은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그곳은 대청의 가장 안쪽이었다. 커다란 의자에 한 명의 위풍당당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은 중인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다름아닌 강남제일보의 보주이자 금 검철선(金劍鐵扇)이란 별호를 지니고 있는 구궁산이었다. 구궁산은 좌중을 둘러보더니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험, 보잘 것 없는 노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동도들이 와주시니, 정말 무어 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그러자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 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그 자는 일신에 은의를 입었으 며 제법 강직한 인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자뭇 칼칼한 음성으로 말했다. "구형(丘兄)! 그게 무슨 말이오? 노부는 구형과 오랜 지기라 그렇다쳐도, 다른 분들이야 왜 예까지 왕림했겠소?" 그는 앞에 놓인 술잔을 기분 좋게 쭉 들이켰다. "강서성(江西省) 정도무림의 맹주(盟主)인 구형의 탄생일이 어찌 보통 행사라 할 수 있겠소? 핫핫핫......." 그 말에 여기저기서 호탕한 음성들이 맞장구를 쳤다. "맞소이다!" "패대협(貝大俠)의 말에 동감이오!" 구궁산은 선 자세로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여러분, 정말 고맙소이다. 자! 술과 음식은 얼마든지 내놓을 테니 마음껏 드시기 바라오." 그 순간, 대청 안은 온통 환호성으로 뒤덮혔다. "와아......!" "하하하! 역시 구대협다운 배포외다!"


장내는 다시금 이전의 분위기로 되돌아갔다. 무림인들은 본래 호방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술이 들어가자 온통 시끌벅적했으며 여기저기서 가가대소가 울려나오고 있었다. 연회는 한층 무르익어갔고 오늘의 주인공인 구궁산은 흡족한 얼굴로 군웅들과 담소를 나누 고 있었다. 문득 구궁산은 자신의 주위를 둘러 보았다. 동석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비범한 고수들이었다. 먼저 그의 오른쪽으로는 육순 가량으로 보이는 청수한 인상의 도인(道人)의 모습이 보였다. 점잖게 앉아 있는 그는 부드러운 안광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황의가사를 입은 칠순 가량의 노화상이 묵묵히 염주를 굴리고 있었다. 관자놀 이까지 길게 자라난 백미(白眉) 때문인지 그의 인상은 더없이 인자하게 느껴졌다. 구궁산의 좌측으로는 예의 강직해 보이는 은의노인이 앉아 있었다. 강남제일보주 구궁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이 세 인물이야말로 당금 무림에서 쟁쟁한 명성을 날리는 인물들이었다. 먼저 도인 그는 무당파(武當派) 상청관(上淸觀)의 관주(觀主)로 도호는 옥허자(玉虛子)라 했 다. 그는 무당 장문인인 태허자(太虛子)의 사형(師兄)이자 무당파의 실질적인 제일고수이기 도 했다. 옥허자는 무공의 수련을 위해 상청관의 연공실에서 삼십 년 간이나 폐관 했었다. 사실 그의 출관은 불과 몇 달 전에 이루어졌다. 출관하자 마자 그는 태허자의 부탁을 받고 이곳 강남제일보에 오게 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번 방문은 그에게 있어 강호의 첫 나들이 인 셈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얼마나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노화상은 소림사(小林寺) 장경각(藏經閣)의 각주인 각인대사(覺忍大師)였다. 그는 소림 오대장로(五大長老) 중 한 사람이며 소림에서 가장 신비스런 인물이었다. 각인대사는 수십년 동안 장경각에 기거하면서 수많은 소림비학을 섭렵한 것으로 알려진 인 물이었다. 마지막으로 은의 노인은 강남오대세가 중 하나인 은창부(銀槍府)의 부주로 은창무적(銀槍無 敵) 패인도(貝寅到)이었다. 패인도는 무림에서 창술(槍術)의 제일인자로 꼽혔으며 그가 이끄는 은창부의 세력은


복건성 (福建省) 전역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는 오가(五家) 중에서도 강남제일보의 구궁산과 친했다. 그 때문에 이번 구궁산의 생일 잔 치에 가장 먼저 달려온 인물이기도 했다. 은창무적 패인도는 정색을 하더니 구궁산을 향해 입을 열었다. "구형, 소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 "말씀하시오, 패형." 패인도는 기이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섭섭하오이다. 구형께서 고민이 있으면 내게 털어놓을 줄 알았는데 어찌하여 아무 말씀도 하지 않은 것이오?" 구궁산은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 이시오?" 패인도는 탄식하며 말했다. "오늘은 즐거운 날이외다. 그런데 구형의 심기는 그다지 편치않아 보이니 하는 말이오. 누군 가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소? 소제의 말이 틀렸소?" 구궁산은 비로소 표정을 풀더니 고소를 지었다. "으음, 패형을 속일 수는 없구려. 하지만 달리 생각은 마시오. 내 패형께 감출 일이 무엇이 있겠소? 다만 분위기가 분위긴지라 기회를 찾느라 잠시 시간을 끌었을 뿐이오." 그의 미간이 은연중 좁혀지고 있었다. "어차피 그 건에 관해서는 패형은 물론 동도 여러분들과 상의하려던 참이었소이다." 패인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다만 구궁산의 표정이 약간 무거워보여 지레짐작했을 뿐인데 막상 그가 이렇게 말하자 가슴이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일이 있긴 있구나! 대체 그게 뭐길래?' 이때, 구궁산은 내친 김에 좌중을 둘러보며 목청을 돋구었다. "여러분! 노부의 말을 좀 들어 보시오." 그 말에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구궁산은 침착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술을 열었다. "여러분께 여쭙겠소이다. 근간의 무림 동태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보신 분이 있소이까?" 그 말에 군웅들은 안색이 변했다. 경사스러운 날 갑자기 무림 정세를 거론하자 분위기가 갑 자기 가라앉게 된 것이었다. 구궁산은 아무도 말을 않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무림에는 심상치 않은 암류(暗流)가 흐르기 시작했소이다." "......!"


군웅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들은 숨을 죽이며 구궁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느덧 흥청 거리던 분위기는 가라앉고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리고 있었다. 구궁산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사천성(四川省)에 사는 절친한 붕우로부터 최근 한 가지 소식을 들었소이다." 그는 좌중을 둘러보며 계속 말했다. "그의 전언에 의하면 얼마 전부터 사천성의 곳곳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것이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시체들의 가슴에 한결같이 청살마라장(靑殺魔羅掌)의 장인(掌印)이 찍혀 있다는 것이었소. " "청살마라장!" "그럴 수가......!" 군웅들은 크게 술렁거렸다. 어떤 자는 경악성을 발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기까지 했다. 이때 패인도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그게 사실이오? 그렇다면 북해(北海) 사태청이 다시 등장했다는 것이오?" 구궁산은 탄식을 발했다. "그렇소이다." "그럴 수가......." 장내는 술렁거렸다. 북해 사태청이 거론되자 군웅들의 얼굴은 너나할 것 없이 딱딱하게 굳 어지고 말았다. 동시에 그들은 가슴 한 구석에서 찬 바람이 이는 것을 금치 못했다. 장내의 이런 반응에 옥허자는 눈을 내리 감더니 탄식을 흘려냈다. "아! 아무리 북해 사태청이 무섭다고 하나 한낱 사마외도(邪魔外道)가 하나 등장했다고 해서 한결같이 공포에 떨다니......." 그 말에 바로 옆에 있던 소림의 각인대사도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실로 기가 막힐 노릇이오. 실상 사백여 년 전만 하더라도 구파일방의 영도 아래 무림의 정기가 굳굳했건만......." 그는 어두운 안색으로 덧붙였다. "당시만 해도 구파일방은 전성기를 누리며 항차 끊임없이 새로운 무공들을 창안해 냈는가 하면 수많은 문하제자들을 배출해 냈다 하오. 적어도 구천마왕(九天魔王)이라 불리던 아홉 명의 절세마인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오." 옥허자는 도호를 외우며 그의 말을 받았다. "무량수불.... 빈도도 사존으로부터 당시의 일을 전해들은 바 있소이다. 그들 아홉 명 마두들


의 무공은 실로 초인적이었다 하오." "아미타불... 결국 그들로 인해 오늘날 구파일방의 위상이 땅에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니오. 그들이 구파일방의 정예고수들을 숱하게 해침으로써 각파의 절학들은 맥이 끊기게 된 것이오." 옥허자는 괴로운 듯 두 눈을 내리감았다. "무량수불....... 정녕 개탄할 일이오. 이제 무림에는 오파일방 만이 남았으니 과거의 성세에 비할 바가 아니오." 그 말에 구궁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도장, 하지만 지금와서 한탄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이까? 더구나 오랫동안 자취를 감 추었던 북해 사태청이 재등장한 이상 대책을 세우는 것이 시급한 일이 아니겠소?" 패인도 역시 기개있게 말했다. "그렇소. 지금 당장 급한 일은 대책을 세우는 일이외다!" 그 말에 각인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미타불....... 그럼 빈승이 본사로 돌아가 장문방장님께 군웅대회를 열도록 건의 하겠소이 다." "빈승은 곧 소림사로 돌아가서 장문인께 정도무림의 군웅대회를 열도록 건의 하겠소이다. 각파가 힘을 합치면 사태청의 위난을 막을 수 있지 않겠소?" 구궁산은 미간을 모으며 말했다. "그것도 옳으신 말씀입니다만 그럴 시간이 없는 것 같소. 더구나 현 정도무림의 힘은 과거 에 비한 현저하게 기력이 떨어져 있으니 저들의 놀라운 능력을 당해낼 지가 의문이외다. 더 구나 설상가상(雪上加霜) 얼마 전에는......" 구궁산은 말끝을 흐렸다. 군웅들은 초조한 표정으로 그가 말을 이어 나가기를 기다렸다. 구 궁산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잔혼(殘魂)까지 재등장했소. 그들 중 마혼신(魔魂神)까지 이미 모습을 보였소이다. 그런가 하면 혈영마황전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실정이오. 그러니 남해 자부신궁(紫府神宮) 이라고 가만 있을 지가 의문이오." "아......."


군웅들은 한결같이 안색이 굳어지고 말았다. 그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기라성같은 마도 단체의 절세마인들이 속속 다시 모습을 보이고 있다니....... 군웅들의 눈에는 벌써부터 피보라에 휩쓸리는 강호무림이 보이는 듯 했다. 이때였다. "구형! 그래서 대체 어쩌자는 거요? 설마하니 이대로 앉아서 당하자는 것이오? 어서 결론을 내려 주시오." 성질 급한 패인도가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구궁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패형. 그렇지 않아도 말씀 드리려던 참이었소." 그는 정색을 짓더니 엄숙한 음성으로 말했다. "노부는 지금 한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오. 노부 오랫동안 생각해 왔으나 그 인물만이 현세 무림의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소이다." "......?" 군웅들은 일제히 의혹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러나 구궁산은 자신있는 음성으로 재차 말했다. "오직 그 인물만이 무림을 혈겁(血劫)에서 건져낼 수 있을 것이오." 마침내 패인도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구형께서 그토록 극찬하고 있는 그 인물이란 대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이오?" 그러나 구궁산은 좀체로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침묵한 후 말했다. "만일 약속을 지켜준다면 오늘 그가 이곳에 나타날 것이외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문득 어디선가 음산무비한 웃음소리가 군웅들의 고막을 파고 들었다. "크흐흐흐......!" 군웅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백여 명이 넘는 군웅들이 들어찬 가운데 감히 누가 이런 무 례한 괴소를 터뜨릴 수 있단 말인가? "누구냐!" 군웅들 가운데 한 명의 우람한 체격을 지닌 장한이 버럭 외쳤다. 바로 그때였다. "크아아악!" 장한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렁 나동그라지는 것이 아닌가? 군웅들이 대경실색하는 가운데 장한은 사지를 떨며 즉사하고 말았다. 놀랍게도 그의 이마 한복판에는 손가락 굵기의 구멍이 뻥 뚫려진 채 그곳으로부터 한 줄기 피화살이 솟구치고 있었다. 군웅들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부르짖었다. "삼음홍화지(三陰紅花指)!" "삼지신마(三指神魔) 정호다!" 그러자 마치 화답이라도 하듯 대청을 쩌렁쩌렁 울리는 일진광소가 들려왔다. "푸핫핫핫핫! 구궁산, 오늘은 목을 길게 늘여야 겠다!" 휙! 휙휙! 옷자락 휘날리는 소리가 잇따라 울리며 장내에는 십여 명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들을 보는 순간, 구궁산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건곤칠살의 셋째와 넷째인 삼지신마 정호와 독각괴마(獨脚怪 魔)였다. 그들 옆에는 음침한 인상의 애꾸눈 괴인이 백포(白抱)를 걸친 채 우뚝 서 있었다. 그 자는 바로 건곤칠살의 여섯째인 독안비마(獨眼飛魔)였다. 또한 추악한 용모의 괴인도 있었다. 그 자는 주먹만한 딸기코가 하늘을 향해 뒤집어져 있었 으며 퉁방울 같은 눈에 두터운 입술을 지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인간이라기보다는 괴물에 가까운 형상이었다. 그가 바로 건곤칠살의 일곱째인 추 면살마(醜面殺魔)였다. 추면살마와는 대조적인 인물도 있었다. 그는 흰 피부에 제법 영준한 용모를 지닌 중년서생 이었다. 그는 눈자위가 푸르스름하여 음탕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는 건곤칠살의 둘째인 백면음마(白面淫魔)였다. 그들을 거느리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바로 건곤방(乾坤幇)을 장악하고 있는 개세마두 인 건곤혈마(乾坤血魔) 파극소(巴極召)였다. 파극소는 홍포장삼을 입고 있었으며, 나이는 육순이 훨씬 넘어 보였다. 그는 한 자나 되어 보이는 긴 눈썹을 지니고 있어 한 번 본 사람이면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특이 한 인상이었다. 게다가 눈썹조차 붉은 색이어서 더욱 강한 인상이었다. 이때, 대청의 군웅들 중 누군가가 겁에 질린 음성으로 외쳤다. "건곤칠살(乾坤七殺)이다......!" 건곤칠살은 건곤방의 위명과 함께 무림에 공포의 존재들로 알려져 있었다. 다만 지금은 칠 살이 아니라 육살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들 중 다섯번째 서열의 영사 신마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건곤방은 물론 건곤육살의 위명은 아직도 쟁쟁했다. 따라서 그들의 출현은 삽시에 장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건곤육살의 뒤에는 네 명의 인물들이 더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중년승려로 백색의 가사를 입고 있었다. 용모 또한 한인(漢人)이 아닌 이국인 이었다. 그는 연신 가느다란 실눈으로 좌중을 쏘아보며 입가에 묘한 웃음을 흘려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세 명의 노인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그들은 쌍둥이들이었다. 똑같은 용모에 흑 의를 입고 등에도 똑같은 모양의 흑색의 도(刀)를 메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열 명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풍기는 기세는 압도적이었다. 그로 인해 장내는 질 식할 것만 같은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이때 구궁산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침중하게 말했다. "건곤혈마 파극소! 노부에게 무슨 볼 일이 있길래 친히 이 강남제일보까지 왕림하셨소?" 그 말에 건곤혈마는 고개를 뒤로 젓히며 괴소를 흘렸다. "크흐흐흐......." 그의 웃음소리는 점차로 더 커졌다. "크하하...... 하하하하...... 핫핫......!" 그의 광소는 대청 안을 온통 뒤흔들었다. 그 바람에 군웅들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개중에서 내공이 약한 자들은 가슴이 터질 듯한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구궁산은 노성을 질렀다. "건곤혈마! 대체 본보에 온 목적이 뭐냐?" 파극소는 웃음을 뚝 그쳤다. "목적? 물론 있지. 그것도 세 가지나 되지." 구궁산의 눈살이 찌푸러졌다. "대체 그게 무엇이오?" 파극소는 음침한 시선으로 구궁산을 쏘아보며 말했다. "구늙은이! 네 놈은 얼마 전 무영귀도의 유물인 환희옥불을 가지고 있지 않았느냐?" 구궁산은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곧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부인하지 않겠소. 분명 옥불을 잠시 지녔던 적이 있소. 그러나 이미 물건은 내 손을 떠나버 렸소." 파극소는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네 놈은 꽤 오랫동안 옥불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 속에 담긴 비밀을 풀어냈을 게 아니냐? 노부가 알고 싶은 점은 바로 그것이다." 구궁산은 눈썹을 꿈틀하며 노성을 발했다. "듣자니 정말 가관이로군! 노부가 비밀을 풀어냈다면 지금까지 가만히 있겠느냐? 아니, 설사 알고 있다 한들 어찌 네놈에게 털어놓겠느냐?" 파극소는 안광을 번쩍이며 위협했다. "구늙은이, 아마도 살기가 귀찮아진 모양이구나. 감히 노부에게 대들다니." 구궁산은 코웃음치며 말했다. "정말 안하무인이로군. 어쨌든 노부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구궁산이 잘라 말하자 파극소는 두 눈에 흉흉한 살기를 띄었다.


"좋다, 그럼 두번째 목적을 얘기해 주마. 노부의 다섯째 아우가 죽었다. 네 놈은 그 대가를 치뤄야겠다." 구궁산은 눈을 가늘게 하며 반문했다. "대가라니?" 파극소는 으스스한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네 목을 대신 놓아야 한다." "뭣이?" 구궁산과 대청 안의 군웅들은 그 말에 하나같이 분노를 금치 못했다. 파극소는 마치 구궁산 의 목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딸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는 것이었다. "세번째 목적을 말해주마." 파극소는 군웅들을 둘러 보았다. 그의 눈길을 접한 군웅들은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어 목을 움츠리고 있었다. "흐흐....... 이곳에 있는 자들은 지금 이 시각부터 한 단체에 무조건 가입해야 한다." "......!" 군웅들은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구궁산은 어이가 없다는 듯 노갈을 터뜨렸다. "파극소! 감히 무슨 망언을 지껄이는 거냐?" "망언이라고? 과연 그럴까? 만약 명을 어긴다면 너희들이 가야할 길은 오직 하나 뿐이다. 그것은 바로 저승행일 뿐이다." 파극소의 언행은 군웅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군웅들은 노기충천하고 말았 다. 결국 한 중년인이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미친 놈들! 건곤칠살이 제아무리 무섭다 해도 나 장백일절(長白一絶) 만유기(萬有奇)는 네 놈들과의 일전을 불사해서라도 정도무림의 정기가 살아있음을......"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크아악!" 만유기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양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어느 틈엔가 그의 가슴 한복 판에는 열 십자(十字)로 칼자국이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쿠웅! 그는 피분수를 뿜으며 탁자에 엎어지고 말았다. 그는 언제,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른 채 숨이 끊기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군웅들이 대경하는 사이, 듣기 거북한 웃음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흐흐흐! 감히 혈영마황전의 뜻을 거스르다니!"


세 흑의노인이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들은 쌍둥이 괴인들이었다. "혀... 혈영마황전!" 구궁산은 경악성을 발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쌍둥이 괴인들을 향해 물었다. "당신들은 혈영마황전에서 나왔소?" 가운데 서 있던 흑의괴인이 음침하게 대답했다. "그렇다." 갑자기 대청 안은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군웅들의 얼굴에는 공포감이 떠올랐다. 문득 은창무적 패인도가 벌떡 일어섰다. "내 이제야 너희들의 정체를 파악했다. 십자귀령참인도(十字鬼靈斬刃刀)를 보니 네 놈들은 필시 삼령도객(三靈刀客) 이겠구나." 과연 일문의 영수답게 패인도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은 채 호통을 쳤다. "네 놈들은 온갖 만행을 저지르다 공적으로 몰려 변방으로 쫓겨나더니 삼십 년이 지난 지금 에 와서 혈영마황전의 주구가 되어 다시 나타나다니, 정말 뻔뻔스런 놈들이구나!" 군웅들은 그제서야 그들의 정체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낼 수가 있었다. 사실 삼령도객은 오 랫동안 잊혀진 존재였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과거 악랄무비한 마두였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군웅들은 그들 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 가슴 한 구석으로부터 찬바람이 이는 것을 느껴야 했다. 이때, 흑의노인이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마치 피칠이라도 한 듯 전체가 시뻘 건 사람의 손(手)이었다. "저, 저것은... 혈영수(血影手)......!" 누군가가 놀라 부르짖었다.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흑의노인은 음산한 괴소를 터뜨렸 다. "흐흐흐....... 혈영수가 현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역하는 자가 있다면 지위여하를 막론하고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 말에 군웅들은 전율을 금치 못했다. 구궁산은 내심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음, 건곤혈마가 말하던 단체는 바로 혈영마황전이었군.' 그는 점차 가중되는 위기를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길(吉)보다는 흉(兇)이 많겠도다!' 이때 삼령도객 중 대령(大靈)이 살벌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 혈영마황전에 가입을 원하는 자는 앞으로 나와라." 군웅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포와 불안 속에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러나 한편 으로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혈영마황전의 행위에 대해 분노를 금치 못했다. 문득 한 백발노인이 벌떡 일어서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대령을 노려보며 말했다. "노부는 곤륜(崑崙)의 표운장(飄雲掌) 채운평(蔡雲平)이다. 노부는 죽으면 죽었지, 혈영마황 전 따위의 사마외도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을 천명하는 바이다." "뭣이?" 삼령도객 중 이령(二靈)이 분성과 함께 우수를 번개같이 등 뒤로 보냈다. 쐐액! 한 줄기 검은 도기가 전광처럼 뿜어졌다. "어리석은 놈, 죽어라!" "헉!" 채운평은 갑작스런 공격에 다급히 신형을 위로 솟구쳤다. 그는 허공에서 몸을 기묘하게 틀 더니 방향을 세 차례나 바꾸어 날아드는 도세를 피해냈다. 일견하기에도 대단히 훌륭한 신법이었다. 이를 본 이령은 괴소를 흘렸다. "흐흐! 제법 그럴 듯한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이로구나. 그러나 비었다!" 순간 그의 흑도(黑刀)가 방향을 바꾸었다. "억!" 찌익! 채운평은 대경하여 다시 신형을 비틀며 바닥으로 내려섰다. 그러나 그의 어깨 옷자락은 이 미 십자로 크게 찢겨져 있었고, 옷자락 사이로는 선혈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내려선 곳은 공교롭게도 백색가사를 입은 중년화상의 앞이었다. 여전히 눈웃음 을 짓고 있던 백의화상은 채운평이 착지하자마자 슬쩍 한손을 쳐들었다. 우웅! 그의 손에서 금광(金光)이 발출되더니 그대로 채운평의 등을 강타했다. "크으윽!" 미처 피하고 어쩌고 할 틈이 없었다. 채운평은 비명을 지르며 대여섯 걸음이나 앞으로 밀려 나갔다. 채운평의 입에서 검은 핏덩이가 울컥 토해져 나왔다. 그는 비틀거리며 뒤로 돌아서더니 이 를 부드득 갈았다. "크으... 비겁하게 암수(暗手)를 쓰다니......." 그러나 백의화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무릇 고수라면 여하한 상황에서도 일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하는 법, 공격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네 불찰이니 죽어 마땅하다." 불자(佛者)답게(?) 그는 억지조차 훈계조였다. 다음 순간 그의 우장이 다시 번뜩였다. 금광은 채운평의 가슴에 정확히 적중되었다.


"크아악!" 채운평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붕 떠서 날아가 떨어졌다. 큰 대자로 쓰러져 있는 그의 가슴에는 시커먼 구멍이 뚫려 있었다. 결국 비명횡사하고 만 것이었다. 이 광경은 군웅들의 가슴에 노도와 같은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여기저기서 소요가 일기 시 작했다. "감히 오랑캐놈이 중원에 들어와 살상을 하다니!" 구궁산이 발연대로하여 외쳤다. "미가수(彌迦手)를 펼치는 걸 보니 네 놈은 천축(天竺) 극습찰단(克什刹丹)에서 온 소면마수 (笑面魔手) 나하율(羅何律)이로구나." 백의화상은 눈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후후후....... 금검철선 구궁산, 과연 일문의 종주답구나. 내 정체를 금방 알아 차리다니." 구궁산은 노성을 발했다. "네 놈 또한 혈영마황전의 주구가 되기 위해 국경을 넘어 왔느냐?" 소면마수 나하율은 계속하여 이죽거렸다. "크흣! 주구라니 당치도 않다. 본좌는 혈영마황전의 귀빈이다." 그 말에 구궁산을 위시한 군웅들은 일제히 안색이 굳어졌다. '도대체 혈영마황전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구나! 언제 천축의 고수까지 포섭했단 말인 가?' 이때 대령이 음침하게 외쳤다. "자, 이제부터 열을 세겠다. 그 동안 태도를 결정해라. 그렇지 않으면 몰살을 면치 못할 것 이다." 그는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늘어가는 숫자에 따라 숨막히는 긴장이 군웅들의 목을 조였다. 이윽고 대령이 여덟을 세었 을 때였다. 패인도가 성큼성큼 나서더니 호기롭게 외쳤다. "무림동도 여러분! 우리는 그래도 정도무림의 내노라하는 고수들이오. 최소한 일개 사도문파 에 의해 기개를 꺾고 그들의 주구가 된다는 것은 실로 조상님들께 부끄러운 일이오? 그런 행위를 한 후 어떻게 저승에 가서 사문의 어른들을 뵈올 수 있겠소? 안 그렇소?" 지금 군웅들에게 필요한 존재는 바로 이런 영도자였다. 아니나 다를까? 패인도의 말이 끝나 기가 무섭게 군웅들은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옳소! 맞서서 싸웁시다." "와아! 혈영마황전의 마졸들에게 당할 우리가 아니다. 모두 쓸어 버립시다!"


군웅들의 억눌렸던 분노가 기어이 폭발을 하고 만 것이었다. "흐흐흐....... 미친 놈들! 죽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마침내 싸움이 시작되었다. 군웅들은 일제히 병기를 뽑아들고 건곤육살과 삼령도객, 소면마 수 나하율을 향해 덮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의기만 갖고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혈영마황전 측은 비록 열 명에 불과했으나 그들은 개개인이 최절정 마두들이었다. "크아악!" 차차차창! 펑! 퍼펑! 연이어 비명과 비명,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장력이 마주치는 폭음 등이 대청을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것은 군웅들 쪽이었다. 강남제일보에 축하객으로 왔던 정도인들은 추 풍낙엽처럼 쓰러져가고 있었다. 금검철선 구궁산은 건곤혈마 파극소와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의 싸움은 겉으로 는 막상막하로 보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구궁산이 밀리고 있었다. 한편 은창무적 패인도는 태산이라도 엎을 듯한 기세로 삼령도객의 대령을 맞아 싸우고 있었 다. 그는 타고난 위맹한 천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숨막히는 대접전이었다. 두 사람의 무기인 은창과 흑도는 수없이 부딪치며 불똥을 퉁겨내고 있었다. 패인도가 노리는 것은 다름 아닌 속전속결이었다. 각인대사는 천축의 고수인 나하율과 육장(肉掌)으로 겨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싸움이야말 로 도검(刀劍)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내력을 이용해 싸우고 있었으므로 어느 한 쪽이 기울게 되면 치명적인 결과가 나 타날 수밖에 없었다. 무당파의 옥허자는 허명을 얻은 인물이 아니었다. 삽십 년을 참오한 그의 무공은 과연 헛되 지 않았다. 그는 건곤육살의 둘째인 백면음마와 싸우고 있었는데 백면음마는 연속 뒤로 밀려나고 있었 다. 반면 군웅들은 실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으악!" 한 군협이 이마에 피구멍이 뚫린 채 삼 장이나 날아가 떨어졌다. "크아악!" 역시 한 중년장한은 가슴이 십자로 갈라진 채 피보라를 뿌리며 고꾸라졌다.


그런가 하면 독각괴마의 장(杖)이 한 도인의 갈빗대를 으스러뜨리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대 청 안은 도살장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건곤혈마 파극소가 구궁산을 향해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 구궁산, 이만 굴복하는 게 어떠냐? 시간이 흐르면 희생자만 늘어날 뿐이다." "닥쳐라! 무릎을 꿇느니 차라리 네 놈과 함께 분사하여 고인들의 영전에 바치고 말겠다." 그 말에 파극소는 냉소를 날렸다. "크ㅋ! 그게 네 놈 뜻대로 될 것 같으냐? 좋다, 죽는 게 소원이라면 건곤혼원장(乾坤混元掌) 의 맛을 보여주겠다." 건곤혼원장은 파극소 최후의 독문절학으로 과거 구궁산으로 하여금 중상을 입게 했던 절공 이었다. 우우웅! 파극소의 쌍장에서 붉은 강기가 발출되었다. 그것은 마치 붉은 안개처럼 형성되더니 구궁산 을 향해 뻗어나갔다. 구궁산은 전신 경맥이 터질 듯이 압박되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한편 패인도는 내심 울화가 치민 나머지 폭발직전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두 개의 짧은 은 창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대령과의 일전이 쉽게 승부가 나지 않고 있었다. 차창! 은창과 흑도가 격돌하며 무수한 불꽃을 허공으로 뿌려냈다. 대령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 고 있었다. '과연 은창부의 부주(府主)답구나.' 문득 그는 안면을 굳히며 냉갈을 터뜨렸다. "패인도!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십자귀령참인도의 위력을 보여주마." "무슨 헛소릴 하는 거냐?" 패인도의 안면이 사납게 씰룩였다. 그는 수중의 은창 두 개를 마주 붙였다. 그러자 은창은 한 개로 합쳐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길이가 일곱 자에 달하는 장창(長槍)으로 변했다. "응?" 대령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러나 그의 흑도는 이미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받아라!" 폭갈과 함께 십자 형상의 광망이 섬전처럼 내뻗었다. "어딜!" 패인도는 호통을 지르며 장창을 휘둘렀다. 차차차창! 귀청을 찢는 금속음과 아울러 불꽃이 난무했다.


"윽!" 패인도는 급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는 황급히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옷자락이 길게 찢겨져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상대의 흑도는 옷자락을 갈라놓았을 뿐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다. 놀란 것은 대령이었다. '이 놈이 십자귀령참인도를 받아내다니!' 경악이 채 가시기도 전, 이번에는 은창이 허공을 여덟 조각으로 가르며 번개같이 찔러왔다. "삼령도객! 이번엔 네 차례다. 노부의 은창법의 정수를 받아보아라." 쐐쐐애애액! 은창이 여덟 개로 분리되며 대령의 팔대사혈을 노렸다. 대령은 황급히 몸을 회전하며 흑도 를 휘둘렀다. 차차차창! 허공에 난비하는 불꽃이 폭죽처럼 일어났다. 두 사람의 공방전은 도무지 우열을 가름할 수 가 없었다. 이때였다. "흐흐흐! 각인(覺忍), 미가수(彌迦手)를 받아봐라!" 소면마수 나하율의 음침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의 양손이 눈부신 금빛을 띄었다. "아미타불......." 불호를 외우는 각인대사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두 줄기 금광이 소리도 없이 뻗쳐왔다. 각인대사는 승포자락을 떨쳤다. 파파파팟! 파열음이 울렸다. "웃!" 나하율은 신음을 토하며 급급히 양손을 회수했다. 그는 자신의 경력이 각인대사의 소맷자락 에 부딪친 순간, 마치 강철벽을 때린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나하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단포삼(丹布杉)......!" 단포삼은 소림사 내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비예(秘藝)였다. 그것은 불문(佛門)에서 내려오는 외문무공(外門武功)으로 이것을 연성하게 되면 다만 소맷자락을 스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격살할 수 있는 신비의 무공이었다. 각인대사는 사백여 년 전에 실전된 단포삼을 오랜 연구 끝에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나하율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흐흐....... 과연 장경각에서 내내 졸고 있지만은 않았나 보구나. 그러나 미가수의 위력은 이 제부터다." 각인대사는 더욱 긴장을 조이는 한편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음 순간 그의 안색은 참담하게 변했다. 대청의 여기저기에 군웅들의 시신들이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아미타불! 이럴 수가!" 각인대사의 불심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청정한 마음 속으로부터 불길같은 살기가 치 솟아 올랐다. 그는 눈을 번쩍 뜨면서 대갈했다. "정녕 흉악무도한 중생들이로다!" 각인대사는 양팔을 활짝 벌렸다. 이어 그는 손을 단전(丹田)에 모으더니 서서히 위로 끌어올 렸다가 돌연 앞으로 내뻗었다. 우우웅웅! 나하율은 대경실색하여 부르짖었다. "그것은... 소림 최고의 신공인 달마혜정신공(達魔慧淨神功)!" 꽈르르릉! 엄청난 뇌음과 함께 폭풍과도 같은 경기가 밀려왔다. 꽝! "으헉!" 나하율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뒤로 연속 다섯 걸음이나 후퇴했다. 그의 얼 굴은 온통 경악과 분노로 인해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 빌어먹을!" 그의 가는 눈에서 무서운 살기가 내뻗쳤다. 웃음이 사라진 그는 이제 소면마수가 아닌, 그야 말로 살면마수(殺面魔手)로 화하고 말았다. "각인! 내 네 놈을 갈기갈기 찢어놓지 않으면 절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다음 순간, 그의 양손에서 나는 금빛이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강하게 일어났다. 그것 을 본 각인대사는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내심 중얼거렸다. '으음, 저 자가 미가수를 극성으로 끌어 올리는구나.' 그에 맞서 그는 달마혜정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우우웅... 우웅! 웅후한 파공성과 함께 그의 승포자락이 바람을 맞은 듯 휘날렸다. 그야말로 일촉즉발(一觸 卽發)의 순간이었다. 삘리리리... 삘리리리...... 어디선가 갑자기 한 줄기 음산한 피리소리가 들려왔다. 그 바람에 대청 안에서 벌어지던 혼전(混戰)은 일시에 중단되고 말았다. 피리소리가 너무나 도 괴이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피리의 곡조가 바뀌었다. 처량하게만 느껴지던 음색(音色)이 이번에는 처절하게 변해 버린 것이었다. 그러자 장내의 인물들은 온통 기혈이 역류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건곤혈마 파극소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피리음에 내공이 깃들어 있다니....... 대체 웬 놈이지?" 나하율은 그를 힐끗 보며 말했다. "우리 편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오. 어째 예감이 좋지 않소." 삼령도객이 굳은 얼굴로 피리음의 출처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피리소리 는 어느 방향에서 들려오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바로 이때였다. "하하하하......! 피리음이 멈추면서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장내에 세 가닥 인영이 날아들었다. 제 16 장 · 놀라운 무위(武威) 장내에 나타난 인물은 다름 아닌 백천기와 전우진, 현무호 일행이었다. "백공자!" 구궁산은 대뜸 알아보고 격동의 음성으로 백천기를 불렀다. 대청 안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백천기를 주시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그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은창무적 패인도는 백천기를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대단한 기품이로군, 구형. 저 청년은 대체 누구요?" 구궁산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 공자가 바로 내가 말했던 그 인물이오." 패인도는 더욱 놀라며 새삼스럽게 백천기를 바라보았다. '저 청년이 당금의 난세를 구원할 인물이라고?' 한편 옥허자와 각인대사도 백천기를 바라보며 안색이 변하고 있었다. 그들은 좀체로 표정이 변하지 않는 수양깊은 인물이었으나 백천기를 보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동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각인대사는 백천기를 바라보며 경탄해마지 않았다. '아미타불, 과연 구대협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구나. 저 청년은 비록 나이는 젊으나 안광(眼 光)이 안으로 깊숙히 갈무리 되어 있구나. 저런 현상을 보일 수 있는 인물은 고금을 통해서 도 몇 명 되지 않는다.' 그는 고개를 돌려 옥허자를 바라보았다. 옥허자는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인 것이었다.


이때 파극소는 백천기 일행을 노려보며 물었다. "방금 전 피리는 누가 분 것이냐?" 백천기는 그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소생이 불었소이다." 그 말에 파극소는 한 자나 되는 붉은 눈썹을 흔들었다. '이 놈이 노부를 희롱하는 건가? 방금 전의 피리음에는 최소한 일갑자 이상의 내공이 포함 되어 있었거늘, 이제 약관에 이른 놈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그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면서 이번에는 백천기와 나란이 서 있는 전우진과 현무호를 바라보 았다. '저 두 놈들 가운데 한 명일까?' 이때 백천기는 만면에 엄숙한 표정을 띄우며 말했다. "파극소, 그대는 왕법(王法)을 무시하고 임의로 살인을 행했소. 따라서 엄중한 처벌을 각오 해야 할 것이오." 그 말에 파극소는 잠시 멍해졌다. 그러나 곧 어이가 없다는 듯이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네 놈이 무슨 권리로 왕법을 내세우는 거냐?" 백천기는 전우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전영반, 본인에게 그만한 권리가 없소?" 무형신검 전우진은 숙연한 표정을 짓더니 파극소를 향해 준엄하게 호통 쳤다. "파극소!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거냐! 이분은 황제폐하의 어명을 받들어 파 견된 분이시다!" "어명!" 파극소를 포함한 중인들은 그 말에 한결같이 대경하고 말았다. 특히 파극소는 내심 당황을 금치 못했다. '황궁에서 나왔다고? 빌어먹을......! 황궁에서 무슨 일로 이곳에 나왔단 말인가?' 이때 백천기의 싸늘한 음성이 그의 고막을 파고 들었다. "파극소, 국법대로 그대를 다스리겠소." 억양이 느껴지지 않는 그 음성이야말로 파극소에게는 더없이 섬뜩하게 들렸다. 그의 안색이 수시로 변화를 일으켰다. 건곤혈마 파극소는 강북 일대에서 건곤마방(乾坤魔幇)을 이끄는 일대효웅(一代梟雄)이었다. 하지만 그도 관을 무시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파극소의 눈에는 잠시 갈등의 빛이 어렸다. 이때, 추면살마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건방진 애송이 놈! 국법을 논하기 이전에 네 목을 간수할 생각부터 해라." 추면살마로 말하자면 악명 높은 건곤칠육 중에서도 가장 성질이 급하고 포악한 인물이었다. 그는 다짜고짜로 쌍장을 어지럽게 휘두르며 공격해왔다.


위잉! 파공성과 함께 노도와도 같은 경기가 뻗어나왔다. 백천기는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좌수를 슬쩍 치켜 들었다. 그러자 그의 무형(無形)의 기류가 내뻗어 추면살마의 쌍장과 정통으로 맞부딪쳤다. 파파팍! 추면살마는 자신의 장력이 양쪽으로 갈라져 버리는 것을 느끼고는 대경실색했다. 백천기의 음성이 은은하게 그의 귓전을 울렸다. "그대가 본인을 무시하니 어쩔 수 없군." 한 줄기 경기가 추면살마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추면살마는 다급히 이를 피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크아아악!" 가슴이 쫙 갈라졌다. 믿을 수 없게도 그는 자신의 눈으로 가슴이 정확히 쪼개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그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풍경이었다. "저, 저럴 수가......!" 중인들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토록 가공할 무공을 지닌 추면살마가 단 일 초에 황천으로 가버린 것이다. 이때 삼지신마 정호가 노성을 질렀다. "이 찢어 죽일 놈! 감히 일곱째를 죽이다니." 삼지신마와 함께 독안비마도 몸을 솟구쳐 동시에 백천기를 덮쳐갔다. "세째! 여섯째! 멈춰라!" 파극소는 당황하여 다급히 외쳤다. 그러나 두 사람은 듣지 못한 듯 벌써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삼지신마의 세 개밖에 없는 왼 손 손가락이 삼음홍화지(三陰紅花指)를 격출해냈다. 슈슈슉! 예리한 파공성과 함께 세 가닥의 붉은 선이 백천기의 사혈을 향해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독안비마는 철필(鐵筆)로 백천기의 눈을 찍어갔다. 쉭쉭! 두 사람은 절정고수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합격술(合擊術)은 한 치의 차도 없이 완벽한 조 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 중인들은 현깃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백천기가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 해도 두 마두 의 합공을 당해낼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백천기는 두 팔을 비스듬히 교차하더니 괴상한 동작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는 손을 끌어당 겼다 뻗는 동작을 한번씩 취했다. 그것은 귀진자의 절기인 차경미기(借勁彌氣)였다.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다. "으악!" 독안비마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그의 이마에는 세 개의 피구멍이 뚫어져 있었는 데 그것은 바로 삼음홍화지에 의한 것이었다. 독안비마는 벌렁 쓰러진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외눈을 부릅뜨며 부르짖었다. "셋째형... 당신이... 왜?" 그것이 끝이었다. 그는 불신의 눈빛이 가득한 외눈을 채 감지도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만 것 이었다. "이... 이럴 수가!" 정호는 완전히 넋이 나가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발출한 삼음홍화지가 독안비마를 죽이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비정한 것이었다. 독안비마는 분명 삼음홍화지에 맞아 절명한 것이었다. "미... 믿을 수가 없다!" 삼지신마는 넋나간 채 부르짖었다. 이때 소면마수 나하율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정말 무서운 이화접목(以火接木)이로다!" 대청 안의 군웅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결같이 넋나간 모습들이었다. 결국 눈깜짝할 사이에 건곤칠육 중 두 명이 생을 마감했다. 이제 장내의 형세는 완전히 뒤 바뀌고 말았다. 다만 정작 당사자인 백천기는 여전히 담담한 모습이었다. 물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하율이 문득 입을 열어 물었다. "그대가 방금 전 사용한 무공은 무엇인가?" 백천기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나하율을 완전히 무시하는 듯한 행 동이었다. 나하율은 그만 분기탱천하여 음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오만방자한 놈!" 그는 앞으로 나섰다. "그 수법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미가수에는 미치지 못한다." 나하율은 백천기를 향해 쌍장을 들어 올렸다. 그의 장심에서는 지금까지보다 더욱 눈부신 금광이 발출되었다. 백천기의 입술이 움직였다.


"정말 수치를 모르는 자로군. 신성한 불제자의 몸으로 살생을 일삼다니, 너의 더러운 손을 떼어 주마." 그는 아주 평범하게 왼손을 흔들었다. 그저 파리를 쫓는 듯한 동작이었다. "크아아악!" 나하율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피보라와 함께 무엇인가 다급한 비명이 나하율의 입에서 터졌다. 동시에 무엇인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나하율은 안색이 백짓장같이 창백해진 채 뒤로 급급히 물러나고 있었다. 무참하게도 그의 왼손은 팔목 부근에서 깨끗이 잘려진 채 피분수를 뿜어내고 있었다. 잘려져나간 그의 손이 바닥에서 팔딱팔딱 뛰고 있었다. 가히 공포스런 광경이었다. "으으... 손! 내 손......!" 백천기는 냉담하게 말했다. "그렇게 아까우면 천축까지 가지고 가시오." "뭐, 뭣이!" 나하율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흉광이 뻗어 나왔다. 하나밖에 없는 우수를 벼락같이 떨쳐냈다. "죽일 놈! 너 죽고 나 죽자!" 우우우웅! 가공할 경력이 백천기를 향해 쇄도해 갔다. 그러나 이때 백천기의 옆에 서 있던 전우진이 번뜩 몸을 날렸다. "대인께 무례한 자는 곧 황상(皇上)을 욕되게 하는 자!" 다음 순간, 한 줄기 검광이 섬전처럼 허공을 가르며 나하율의 오른손을 베어갔다. 쨍! 예기치 않은 금속성에 전우진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검날에 부딪친 것이 흡사 강철과 같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그의 검은 분명 나하 율의 오른손을 내려쳤다. 그러나 그의 손은 멀쩡하지 않은가? 전우진의 미간에 섬뜩한 살기가 치솟았다. 그는 즉시 발로 바닥을 차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쐐애애애액! 그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허공으로부터 무수한 검망(劍網)이 쏟아져 내렸다. "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군웅들은 가슴이 철렁하여 시선을 집중했다. 전우진은 나하율의 맞은 편에 떨어져 내려 있었다. 그는 애초부터 검을 뽑지도 않은 듯 했다. 반면 나하율은 전신에 피를 뒤집어쓴 듯한 모습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전신에서


수많은 핏줄기가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아! 저럴 수가......." 군웅들은 전율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황궁의 고수라 해도 이토록 무서운 검법을 소유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때 나하율은 처절한 표정으로 전우진을 쏘아보았다. 그는 이미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였 다. 전신에 적어도 사십팔검을 맞은 것이었다. 그는 이를 두드득 갈았다. "크으으... 두고 봐라! 나는 죽지만... 극습찰단의 고수들이 반드시... 복수를... 크윽!" 나하율은 마침내 고목처럼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나하율의 피부가 쭈글쭈글해지는가 싶더니 중년의 얼굴이 서서히 늙은 얼굴로 변해가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나하율의 얼굴은 칠십이 휠씬 넘은 고령자로 변하고 말았다. "아아......." 군웅들 중 누군가가 탄식을 발했다. 실로 괴이한 일이었다. 한편 백천기는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다. '추하군. 마공으로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니, 결국 죽는 순간에는 본모습으로 돌아갈 수 밖 에 없는 것을. 인간의 욕망은 대체 어디까지이기에......' 한편, 파극소는 심금이 떨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두 아우를 비롯하여 강력한 방수(幇手)인 나하율까지 잃고 보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백천기를 바라보며 내심 침중한 신음을 흘렸다. '으으, 내 무공은 나하율과 비교한다면 종잇장 차이밖에 없다. 그런데 나하율이 단 일 초에 손목을 잘렸다면......' 그의 눈길은 다시 전우진에게로 향했다. '게다가 저 자의 검법은 내가 이제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빠른 쾌검이다. 저 자 하나를 상 대하기에도 벅차거늘.......' 파극소는 점차 자신감을 상실하고 있었다. 이때 장내의 거듭되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던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삼령도객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서서히 위치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는 백천기였다. 백천기는 이미 그들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마침내 삼령도객은 백천기를 포위했다.


삼령도객의 우두머리인 대령이 음침하게 말했다. "애송이 놈, 감히 혈영마황전을 적대시하다니, 지옥문이 두렵지 않은 놈이구나." 백천기는 피식 웃었다. "혈영마황전에 대한 그대들의 충심은 참으로 가상하다만 상황판단이 이토록 어두운 것을 보 니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 유감이군." 대령은 문득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네 놈의 무공이 제법 쓸만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너무 우쭐할 것 없다. 우 리 삼령도객의 특기는 삼령도절진(三靈刀絶陳)이다. 한번 시험해 보겠느냐?" 백천기의 미간이 좁혀졌다. "삼령도절진?" 그러자 현무호가 침착한 음성으로 그에게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저 자들은 혈영마황전의 직속인 마령궁(魔靈宮)의 인물들로 일명 마령사자 (魔靈使者)라 불리우는 흉맹한 자들입니다." 그 말에 삼령도객은 놀라고 말았다. 그들 중 이령이 추궁하듯 물었다. "네 놈이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이냐?" 현무호는 그를 쏘아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나는 혈영마황전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다." 삼령도객이 의혹에 사로잡혀 있는 사이, 백천기는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마령궁이라면 과거 현위령이 속했던 사신궁(四神宮)과 같이 궁자가 붙는구나. 그렇다면 대 체 혈영마황전은 얼마나 많은 마두들을 끌어들였단 말인가?' 이때 그의 귀로 현무호의 전음이 흘러 들어왔다. (대인, 마령사자의 신분은 사신궁에서의 사신(四神)과 같은 직위입니다. 사실 저들 중 한 놈 의 실력도 과거의 속하와 대등합니다. 그러니 각별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백천기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때 대령이 현무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좋다, 네 놈에게 뭔가 대단한 비밀이 있는 모양이구나. 조금만 기다려라. 네 놈의 주리를 틀어줄테니." 이어 백천기를 향해 돌아섰다. "애송이 놈, 네 놈의 가슴을 열십자로 그어 주마." 휙! 휘휙! 삼령도객은 일제히 몸을 날려 백천기를 가운데 두고 에워쌌다. 그 광경에 전우진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대인, 속하가 상대하겠습니다." 백천기는 고개를 흔들었다.


"염려마시오. 삼령도절진이 얼마나 대단한지 견식해 볼까 하오." 그 말에 전우진은 멈칫하더니 내심 중얼거렸다. '음, 역시 백대인은 젊구나. 이런 상황에서 견식이라니. 하기야 백대인의 무공이라면 큰 위 험은 없을 것이다.' 전우진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인 후 뒤로 물러났다. 군웅들의 시선은 일제히 백천기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삼령도객에게 집중되었다. 일순, 대령의 입에서 폭갈이 터졌다. "죽어라!" 파파파팟! 세 자루의 흑도가 동시에 칙칙한 검기를 뿜었다. 검기는 줄기줄기 뻗어 백천기의 몸을 천참 만륙할 듯 했다. 그러나 백천기는 도기가 몸에 다다르도록 꼼짝도 않다가 갑자기 몸을 틀었다. 그의 발은 삽 시에 서른여섯 차례나 방위(方位)를 바꾸고 있었다. 스스스스슷......! 그의 신법은 그야말로 신출귀몰했다. 그는 잠종화영보(潛 化影步)를 펼친 것이었다. 보법을 펼치며 백천기는 쌍장을 좌우로 나누어 장력을 날렸다. 요란한 폭음이 잇달아 울렸다. "크으윽!" 삼령도객은 강력한 반탄력으로 수중의 도가 튕겨나갈 듯한 충격을 느끼며 뒤로 세 걸음이나 밀려 나갔다. 차차창!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도를 마주치더니 갑자기 풍차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백천기는 그들 속에 갇힌 후 사방으로부터 전신을 압박해오는 무서운 암경(暗勁)을 느꼈다. 관전하던 군웅들은 모두 안색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삼령도절진은 여타의 도진(刀陣)과도 판이하게 달랐다. 일단 진세가 전개되자 보이는 것이라 곤 온통 흑영(黑影) 뿐이었다. 더구나 시간이 흐를수록 회전 속도가 더욱 빨라지며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백천기 자신도 내심 저으기 놀라고 있었다. '음, 과연 이들이 자신만만해 할만 하구나.' 그는 은연중 경맥이 막히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때였다. "죽어랏!" 호통과 함께 가공할 도기(刀氣)가 사방에서 뻗쳐왔다. 실로 엄청난 기세였다. 백천기는 감히 방심하지 못하고 몸을 빙글 회전시켰다. 그의 입에서 차디찬 냉갈이 터졌다.


"마혼인(魔魂印)!" 그것은 마혼칠검(魔魂七劍)의 마지막 초식이었다. 일단 검이 뽑히자 천지는 온통 백광(白光) 에 뒤덮히고 말았다. "크아악!" 참혹한 세 마디의 비명이 군웅들의 고막을 두드렸다. 군웅들은 한결같이 전신을 부르르 떨 었다. 피보라가 허공을 자욱히 메우고 있었다. 잠시 후 장내의 상황이 드러났다. 선혈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비틀거리는 세 인영이 보였다. 그들은 삼령도객이었다. 그들의 모습은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혈인(血人)이 되어 있었다. 쿵, 쿵....... 마침내 그들은 연이어 뒤로 넘어갔다. 참혹한 죽음이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수많은 검상(劍 傷)이 그어져 있었다. 그 검상은 한 사람에게 정확히 육십 개씩, 도합 백팔십 개의 자국이 나 있었다. 그것은 가공 할 마혼인(魔魂印)이 남긴 작품이었다. 군웅들은 넋을 잃었다. 그 중에서도 은창무적 패인도는 자신의 눈이 믿기지 않았다. '오오! 이럴 수가....... 이것이 과연 인간의 무학이란 말인가?' 그는 경이에 찬 시선으로 피바다 속에서도 옷자락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서 있는 백천 기를 바라보았다. 각인대사는 합장한 채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미타불....... 무림의 복(福)이로다. 오늘같은 난세에 천하기재(天下奇才)가 나타나다니.......' 옥허자도 만면에 기쁨을 드리웠다. '무량수불....... 설마하니 단 일 초로 대마두인 삼령도객을 참살할 줄이야.......' 한편 건곤혈마 파극소는 안색이 흙빛이 된 채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고 있었 다. 그러나 그는 걸음을 멈추며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백천기의 냉랭한 음성이 그를 잡았 던 것이다. "파극소, 이제 그대의 일행은 네 명밖에 남지 않았소. 이쯤 되면 목을 길게 늘일 때도 되지 않았소?"


그야말로 모욕적인 언사였다. 그러나 파극소는 감히 반박할 수 없었다. 백천기의 불가사의한 무공을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안색이 백짓장 이 된 채 전신을 경직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으으......." 마침내 파극소의 입에서는 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러다 문득 그의 얼굴에 한 가닥 교활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더니 크게 외쳤다. "애송이 놈! 다가오지 마라, 한 걸음이라도 접근하면 이 굉천뢰(轟天雷)를 터뜨려 버리겠다!" "앗!" "굉천뢰.......!" 군웅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파극소는 손에 주먹만한 크기의 검은 구(球)를 쥐고 있었다. 그것은 반들반들한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저런 비열한 놈!" 군웅들 중에서 누군가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파극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굉천뢰를 흔들어 보였다. "흐흐! 이것이 터지면 대청은 물론 방원 백 장 이내가 초토화되고 말 것이다." 백천기는 그를 바라보며 빈정거렸다. "그렇다면 그대도 함께 죽겠군." 파극소는 두 눈에 흉광을 번뜩이며 말했다. "흐흐! 물론이지, 하지만 모두 함께 간다면 그다지 억울할 것도 없지 않겠느냐?" 갑자기 그는 신형을 뒤로 날림과 동시에 굉천뢰를 백천기를 향해 던졌다. "앗!" 군웅들이 모두 대경실색하는 찰나였다. 펑! 바닥에 떨어진 굉천뢰에서 폭음과 함께 화염이 치솟았다. "피하시오!" 군웅들이 놀라 부르짖으며 사방으로 달아나는 사이에 굉천뢰에서 치솟은 화염은 급격히 사 라졌다. 대신 시커먼 연기가 빠른 속도로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는 사방이 온통 먹통 속에 빠진 듯 캄캄해지고 말았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 어난 일이었다. 방원 이십 여장이 묵연(墨煙)에 뒤덮인 것이었다. 굉천뢰라고 한 것은 사기(詐欺)였다. 그것은 달아날 때 사용하는 연막의 일종인 것이었다. 잠시 후 묵연이 걷히자 과연 건곤혈마 파극소와 그의 일행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백천기의 얼굴에 은은한 분노가 드리워졌다. 실상 연막이 형성되자마자 상황을 알아차리기


는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건곤혈마 일행은 그의 천안(天眼)마저 피해 유령처럼 사라져 버렸 다. 일말의 자책이 그의 가슴을 쓰리게 할퀴고 지나갔다. '으음, 잠깐의 방심으로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군.' 구궁산도 안타깝다는 듯이 발을 구르고 있었다. "허어! 그 여우같은 작자가 수백 년 전에 사라졌던 광무신염탄(廣霧神焰彈)까지 가지고 있었 구나." 광무신염탄은 삼백 년 전 뇌화신군(雷火神君)이란 인물이 만들어낸 것으로 무림에서는 구전 으로나 전해지고 있던 물건이었다. 어쨌든 위기는 지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청 안의 분위기는 무겁기 그지없었다. 구궁산은 신색을 가다듬으며 백천기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백공자께서 오시지 않았더라면 본보는 오늘로 막을 내릴 뻔 했소이다." 그의 말투는 과거와 달리 깍듯했다. 그것은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 외에도 백천기의 신분으 로 미루어 당연한 일이었다. 백천기도 마주 포권하며 겸손하게 응수했다. "아니외다. 소생은 오히려 죄송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이같은 참사는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을......." 그는 장내의 참혹한 정경을 둘러보며 자못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구궁산은 길게 탄식했다. "별 말씀을... 모든 것이 다 하늘의 뜻일 게요." 이어 구궁산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음성을 높였다. "여러분, 이분 공자가 바로 노부가 얘기했던 그 분이오." 그러자 은창무적 패인도가 대소하며 나섰다. "핫핫핫......! 솔직히 말해서 노부는 구형이 공자를 극구 칭찬했으나 믿지 않았소이다. 그러나 지금은 도리어 그 칭찬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구려." 백천기는 빙긋 웃으며 그에게도 포권일례 했다. "과찬이외다. 불초는 백천기라 합니다." "하하하! 노부는 그저 허명만 얻은 은창부의 은창무적 패인도라 하오." 패인도에 이어 각인대사가 합장했다. "아미타불....... 빈승은 각인이라 하오." "무량수불....... 빈도는 무당의 옥허(玉虛)라 하오." 옥허자도 역시 자신을 소개했다. 백천기는 그들에게 일일이 답례한 뒤, 비로소 자신의 측근인 현무호와 전우진을 소개했다. "이 분들은 동창과 금의위의 제일고수들입니다." "불초 천수나타 현무호라 하오."


현무호는 주먹을 두루 쥐어 흔들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에 반해 전우진은 냉담하게 말 했다. "노부는 무형신검 전우진이라 하오." "오오......!" 군웅들 사이로 탄성이 번졌다. 그들은 실상 황궁의 조직이나 직위는 잘 몰랐으나 천수나타 현무호나 무형신검 전우진의 명성만은 전부터 귀가 따갑게 들어왔던 것이다. 군웅들은 새삼 경이의 눈으로 백천기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대체 약관에 불과한 청년이 어 떻게 쟁쟁한 황궁의 이대고수들을 휘하에 거느리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들이었 다. 각인대사가 불호를 외우며 말했다. "아미타불, 소협의 기개가 실로 하늘을 찌를 듯 하는구려. 게다가 황궁의 제일고수까지 대동 하고 계시니 대명의 앞날이 든든하오이다." 옥허자도 한 마디 거들었다. "빈도도 구대협 덕에 관문 밖을 나선 것을 다행이라 여기고 있소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고 인을 만나 안목을 크게 넓혔소이다." "그만들 하십시오. 소생 몸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백천기는 정말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는 장내를 둘러 보며 말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불초는 황제폐하의 어명을 받들어 관인의 신분으로 무림에 나왔습니 다." 군웅들은 모두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불초가 나선 이유는 무림을 어지럽히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마(魔)의 집단을 파악하기 위해 서입니다." 그는 군웅들에게 자신의 신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천제령주(天帝令主)는 황제의 대행(代行)이나 마찬가지 신분이 부여되고 있었다. 천제령주는 중원의 어떤 관부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황제가 친히 왕림한 것과 마찬가지 예우를 받게 되 어있었다. 제 17 장 · 태음신맥경(太陰神脈經)의 여인 강남제일보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한 별원.


백천기는 그곳에 기거하고 있었다. 이곳은 구궁산이 특별히 배려해준 곳으로 강남제일보 내 에서 가장 조용한 곳이었다. 그 동안 백천기는 많은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을 통해서 강호 무림의 정세에 대해 많은 사실들을 알아낼 수가 있었다. 정오를 조금 넘은 시각. "......." 백천기는 점심 식사를 끝낸 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품속에서 한 자루의 옥소를 꺼 냈다. 그것은 백원노인 두현상으로부터 받은 백옥신마소(白玉神魔簫)였다. 백천기는 옥소를 어루만지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 옥소는 강철보다 더 단단하다. 게다가 음률마저 뛰어난 명기다.' 문득 그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며칠 전 이 곳에 올 때 백옥신마소로 구천 현녀(九天玄女)가 남긴 아홉 개의 곡 중 두번째 곡인 최심마정곡(催心魔精曲)을 연주한 바 가 있었다. 당시 그는 내력을 이 성 정도밖에 동원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공이 약한 인물 들은 기혈이 막힐 정도로 고통을 받았던 것이다. '최심마정곡이 그 정도라면 나머지 일곱 개의 곡은 대체 위력이 어느 정도일지 알 수가 없 구나.' 백천기는 문득 가슴이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만일 구천현녀가 남긴 최고의 음공인 천살파(天殺破)를 펼치면 어떻게 될까?' 백천기는 한동안 생각하다 백옥신마소를 입가로 가져갔다. 그는 머리 속으로 천살파의 구결 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곧 옥소를 내리고 말았다. 천살파의 구결이 생각보다 훨씬 난해했기 때문이었다. '구결을 익히지 않고서는 연주할 수가 없겠구나.' 백천기는 먼저 구결부터 익혀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천살파의 구결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대략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천살파의 구결에 내포된 묘의(妙意)가 하나하나 떠올랐다. 그것은 뛰어난 오성(悟性) 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년의 구천현녀조차 천살파를 참오하는데 평생이 소모 되었던 것이다.


이윽고 백천기는 구결을 머리 속으로 그리며 백옥신마소를 불어 보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옥소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응?' 백천기는 의혹이 일자 이번에는 내공을 끌어올린 후 옥소를 불었다. 하지만 여전히 옥소에 서는 아무런 음향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이번에는 내공을 십 성으로 끌어 올려 피리를 불었다. 삐익.....! 소리가 나오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곡조라기보다는 귀에 거슬리는 음향일 뿐이었다. 그 나마 음향은 잠깐 나오다가 다시 끊겨 버렸다. 그런데 이때 믿어지지 않는 현상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그의 앞에 놓여져 있던 자기병에 거 미줄같은 금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백천기는 그 사실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다시 백옥신 마소를 불었다. 삐이익......! 다시 한 차례 듣기 거북한 음향이 울렸다. 자기병이 흔들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스스스스...... 자기병은 위쪽부터 가루가 되어 먼지처럼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것은 순식간 에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자기병이 놓여 있던 나무탁자가 윗부분부터 역시 먼지가 되어 흘러내 리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럴 수가?" 백천기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가공할 음공이로구나!" 그는 멍하니 백옥신마소를 내려다 보았다. 천살파(天殺破)는 천하의 음공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음공이었다. 일단 전개했다 하면 그 어 떤 물체라도 삽시에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천살파를 완벽하게 익히면 그 위력이 방원 백장 여에 달한다고 했는데.......' 백천기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그 느낌은 구대마왕에 대한 경외감으로 이어졌다. "그들의 무공은 도저히 인간의 능력이라고 할 수가 없다. 만일 그들이 남긴 무공을 모두


터 득한다면......" 부지중 그는 전신을 가볍게 떨었다. 그러나 그가 평온을 되찾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는 소탈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후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기껏해야 일부분씩 발췌해서 활용할 정도인 내가 공연한 망 상을 하는 것이다. 한 사람도 아닌 아홉 기인의 필생 절학을 어찌 모두 익힐 수 있단 말인 가? 그것은 과욕에 불과한 일이다.' 이때, 방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곧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대인, 들어가도 되겠소이까?" 금검철선 구궁산이었다. 그는 이제 호칭을 공자에서 대인으로 자연스럽게 바꾸고 있었다. 백 천기는 신색을 가다듬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들어오십시오. 보주." 방문이 열리고 구궁산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백천기는 심상치 않은 기 운을 느낄 수가 있었다. 구궁산의 미간에는 어두운 그늘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백천기는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보주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구궁산은 애써 밝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한 가지 의논할 일이 있어 왔소이다." "말씀 하십시오." 백천기가 관심을 보이자 구궁산은 다소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실은...... 내 딸아이때문이외다." "영애께 무슨 일이 있습니까?" 구궁산은 기어이 탄식을 불어내고 말았다. "대인도 알 것이오. 노부에게 여식이 있다는 것을....... 예전에도 그 아이에 대해 대인께 잠시 말씀드린 적이 있소만은." 백천기는 빙긋 웃었다. "기억이 납니다. 어릴 적부터 미모가 출중하여 강남일미(江南一美)란 찬사가 자자하다는 낭 자가 아닙니까?" 구궁산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이다. 하지만 지금은 중병이 들어 폐인이 되어 있소이다." 구궁산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어렸다.


"요즘 와서 딸아이의 병세가 더 심각해졌소. 더우기 오늘은 하루종일 의식을 잃고 있으니... 생각다 못해 백대인을 찾아오게 되었소이다." 구궁산은 한 가닥 기대를 담고 백천기를 바라보았다. "혹 백대인께 무슨 방도가 없을까 염치불구하고 찾아온 것이오." 백천기는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영애께선 이전에도 몸이 허약한 편이었습니까?" 구궁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외다. 몇 년 전만 해도 그 애는 아주 건강했었소." 백천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소이다. 한번 살펴보지요." 구궁산은 크게 기뻐하며 장읍했다. "고맙소이다. 대인." 그러나 백천기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직 답례를 받기에는 이릅니다. 영애의 병세를 보기 전에는 불초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구궁산은 비로소 얼굴을 활짝 펴며 말했다. "아니오. 노부는 웬지 백대인이라면 그 아이를 살려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오." 백천기는 쓴 웃음을 지었다. "너무 기대는 갖지 마십시오. 어쨌든 두고 볼 일입니다." 이윽고 구궁산이 앞장을 섰다. 백천기는 그를 따라 나섰다. "그 아이가 건강할 때에는 보중이 온통 화사했소이다. 그러나 지금은 온통 침울하기만 하 오." 탄식어린 구궁산의 말을 들으며 백천기는 내심 중얼거렸다. '하기사 금지옥엽이니 그럴 만도 하겠구나. 어떤 병인지 모르지만 가능하면 구해봐야 겠구 나.' 두 사람은 회랑을 따라서 걸어갔다. 잠시 후 그들이 당도한 곳은 아름답게 축조된 한 채의 전각이었다. 전각 주위에는 낮은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고 둥근 월동문(月洞門)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월동문을 지나자 정교하게 가꾸어진 화원이 눈에 들어왔다. 화원 한가운데는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인공연못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은 연못 속에는 비단 잉어가 유유히 헤엄치며 놀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정원이로군.' 백천기는 화원을 둘러보며 경탄을 금치 못했다. 전각은 잠겨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전각 안으로 나란히 들어섰다. 그들이 들어서는 순간 두 명의 녹의시비가 달려와 맞이했다.


"보주님을 뵈옵니다." 십오륙 세밖에 되어보이지 않는 귀엽게 생긴 두 시녀는 공손히 절을 했다. 구궁산은 손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연아는 어떠냐?" 얼굴이 둥그스름한 시녀가 대답했다. "아가씨께서는 막 잠에서 깨어나셨어요." "으음......." 구궁산은 침중한 신음을 발했다. 이어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시녀들에게 당부했다. "너희들은 부를 때까지는 아가씨 방으로 들어오지 말도록 해라." "네." 시녀들은 공손히 대답하고는 자신들의 처소로 사라졌다. 구궁산은 복도를 지나 제일 안쪽에 있는 방으로 걸어갔다. 그는 방문 앞에 멈추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연아야, 들어가도 되겠느냐?" 잠시 후 방 안으로부터 한 가닥 미약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버님이신가요......?" 비록 기진한 음성이긴 했으나 지극히 고운 음성이었다. "오냐, 애비다." "들어오세요....... 아버님." 구궁산은 가만히 방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백천기도 조용히 뒤를 따랐다. 방 안은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 두 개의 화로(火爐)가 있어 약간 더운 느낌이 들고 있었다. 여인의 규방답게 방의 장식은 한결같이 아름답고 은은했다. 벽에는 수놓은 족자가 걸려 있 었으며 천장에는 궁등(宮燈)이 매달려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방 안쪽에는 분홍색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 사이로 침상이 은은히 보이고 있었다. 구궁산은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상 위에는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그녀는 대략 십구 세에서 이십 세 정도 되어 보였다. 비록 병색이 완연하긴 했으나 과연 구궁산의 말처럼 대단한 미녀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 었다. 유난히 긴 속눈썹과 오똑하게 선 콧날, 윤곽이 뚜렷한 입술 등으로 미루어 건강하기만 했다 면 드물게 보는 미녀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그녀는 몹시 피폐한 모습이었다.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린 듯 몸은 수척하여 가랑잎처럼 말라 있었다. 게다가 피부도 병색이 뚜렷해 보였다.


백천기는 그녀를 보자 웬지 연민지심이 치미는 것을 금치 못했다. 이때 힘없는 눈길로 백천 기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이 분은...... 누구신가요?" 구궁산은 여인, 즉 구설연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었다. "백대인이라고 한단다." 백천기는 정중히 포권했다. "처음 뵙겠소, 구소저. 소생은 백천기라 하오." 구설연은 파리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버님께서는 최근 몇 년 동안 아무도 제 방에 데려오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이렇게 공자 님를 모시고 온 것을 보니 공자께서는 필시 범상한 분이 아니시겠군요." 그녀의 잔잔한 음성에 백천기는 빙긋 웃었다. "별 말씀을. 소생은 그저 평범한 인물일 뿐이오." 이때 구궁산은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아야, 백대인과 얘기를 나누고 있거라. 애비는 잠깐 나갔다 오겠다." 구설연도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님. 염려마시고 다녀오세요." 구궁산은 백천기를 향해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조용히 방에서 물러나갔다. 방에는 백천기와 구설연,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구설연은 한동안 백천기를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공자님께서는 저에 대해 들으신 적이 있나요?" 백천기는 빙그레 웃었다. "귀가 따갑도록 들었소이다. 총명하고 아름다운 낭자라고." 구설연의 표정이 문득 기이하게 변했다. "정말로 아름...... 답다고...... 하셨나요? 그럼 공자께서는 소녀를 보고 몹시 실망하셨겠군요." 그녀의 파리한 얼굴에는 한 가닥 서글픈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것을 본 백천기는 웬지 뭉클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 않소이다. 소생의 눈에도 구소저는 절세가인으로 보이오." 구설연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절 위로하실 필요는 없답니다." 백천기는 담담히 말했다. "본시 아름다움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소이다. 구소저가 굳이 완미(完美)를 고집하지만 않 는다면 소생이 보기에는 지금으로서도 충분히 아름답소."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미를 느끼는 것이 시각만은 아니오. 보다 중요한 것은 내면미(內面美)외다. 진정한 아름다 움은 마음에 있으니 어찌 겉모습만을 따지겠소?" "아!"


구설연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하고 말았다. 그녀는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격앙된 음성으 로 말했다. "기뻐요. 공자같은 분을 뵙게 되어서요. 사실 저는......" 그녀는 체력이 딸린 듯 말을 끊고 잠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소? 낭자?" 백천기가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묻자 구설연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상관없어요. 저는 공자를 대면하고 실은 부끄러웠어요. 헌헌하신 미장부 앞에서 저의 초라한 모습을 보이자니....... 하지만 공자의 말씀은 제게 큰 위안이 되었을 뿐더러 그로 인 해 용기마저 생기는군요." "낭자가 그러하다니 소생도 기쁘오." 백천기는 씨익 웃어보인 후, 부드럽게 물었다. "낭자는 자신의 병에 대해 아는 바가 있소?" 구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병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답니다. 아버님께서는 숨기려 하시지만 절음증(絶 陰症)이란 불치의 병이랍니다." 백천기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불치란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이다. 세상에 고치지 못할 병은 없는 법이오." 구설연은 체념이 깃든 미소를 지으며 나직이 말했다. "그것만은 저도 어쩔 수가 없답니다. 헛된 기대를 품을 정도로 어리석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저는 사실 병 때문에 수많은 의서를 읽었고 나름대로 연구하기도 했어요. 공자님께는 우습 게 들리실지 몰라도 제 의술은 어느 정도 경지에 들어섰답니다. 그래서 더욱......" "치료방법이 정말 없단 말이오?" 구설연은 잠시 망설이더니 탄식하며 말했다. "다만 한 가지만이......." "그게 무엇이오?" 구설연의 눈가에는 일순 허망함이 깃들었다. "그것은...... 천하제일의 신의인 약몽자가 육십 년 간에 걸쳐 제조해낸 회정기원신단(廻精氣 元神丹)이에요." "회정기원신단." 백천기는 낮게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약몽자를 찾는 것이 급선무겠구려." 구설연은 고개를 살레살레 내저었다. "비록 약몽자 선배님이 돌아가신 조부님과 친구이셨다고는 하나 과연 그 희세의 신단을 내 주실지는......."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왜냐하면 그 신단은 천하에서 단 한 개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그 분은 신단을 목숨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고 계셔요." 구설연은 스르르 눈을 내리감으며 다시 덧붙였다. "게다가 그 분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랍니다. 그분께서 무림에서 떠나신 지 이미 육십 년이나 지났으니... 아버님께서도 거의 포기하신 걸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얼굴에 점차 검은 기운이 덮히기 시작 했다. 한참 후에야 그녀의 눈꺼풀이 다시 열렸다. 그녀는 몹시 힘겨운 듯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저는... 언제나 잠에 빠져 있어요. 그래도 오늘은... 공자가 자리해 주셔서... 평소보다 무척이 나 정신이 맑았고... 오래 버틴 편이었어요......." 구설연은 뭔가에 짓눌린 듯 무겁게 숨을 토해냈다. "또... 졸음이 몰려 오는군요......." "낭자." 백천기의 부름에도 구설연은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더니 그녀는 깊은 잠에 빠진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단지 한 가닥 미약한 숨결만이 불안정하게 지속되고 있을 뿐이었다. "으음." 백천기는 측은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병마로 인해 잠식되어 가는 그녀의 젊음이 그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구설연의 잠든 모습은 지극히 평화로와 보였다. 하지만 마치 이 세상과 전혀 무관한 듯한 그 모습에서 백천기는 그녀에게 다가들고 있는 사신의 그림자를 감지할 수가 있었다. 그는 구설연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탄식했다. "아시오? 낭자의 지금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 육탈(肉脫)을 이루니 그대의 얼굴은 더욱 더 섬세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소. 이대로 땅에 묻히기는 정녕 아까울 정도로......." 문득 그는 흠칫 놀랐다. '아니, 이것은?' 그의 눈에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구설연의 양미간에 돋아나 있는 한 줄기의 푸 른 선(線)이었다. 그것이 우연히 그의 천안에 들어온 것이었다.


백천기는 가볍게 신음하며 염두를 굴렸다. '음! 정말 이상하구나. 절음증이라면 미심혈에 청음맥(靑陰脈)이 지나갈 리가 없는데.......' 그는 구설연을 내려다 보며 명상에 잠겨들었다. 그로부터 약 일 각이 지난 후, 백천기의 얼굴에는 동요가 일어났다. '혹시?' 다음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구설연의 가슴으로 손을 가져갔다. 막 그녀의 가슴에 손이 닿은 순간 그는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처녀의 뭉클한 젖가슴이 손에 감지되었기 때문 이다. 이때 구설연의 미간에 돋아난 푸른 선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본 백천기는 당황하 여 내심 부르짖었다. '청음맥이 짙어지는 것은 곧 사선(死線)에 이르렀다는 것인데, 하필이면 내가 보는 데서 이 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백천기는 그만 다급함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더이상 방치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없다. 비록 남녀가 유별하다고는 하지만 정확한 병명을 알아내는 것만이 치료의 첩 경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 그는 망설임없이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구설연의 몸을 덮고 있는 금침을 걷 어낸 후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가냘픈 여체가 드러나고 있었다. 몇 번 손을 놀리지 않아 구설연의 상반신은 완전히 벌거벗 게 되었다. "......." 몹시 수척한 몸이었다. 다만 처녀의 상징인 젖가슴만은 아름답게 솟아나 있었다. 특히 그 정 상에 앙증맞게 돌출되어 있는 연분홍빛 유실은 경황중에도 백천기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백천기는 그녀의 젖가슴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잠시 후 그는 안색이 크게 변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구설연의 양쪽 젖가슴 사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젖가슴 사이에는 한 줄기 푸른 선이 세로로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추측대로구나. 이것은 절음증이 아니라 태음신맥경(太陰神脈經)이 보이는 전형적인 증상이다.'


백천기는 눈썹을 가늘게 떨었다. 이 순간 그의 심중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악에 휩싸 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운명의 조화란 말인가? 내가 태음신맥경을 가진 여인을 만나게 될 줄이야!' 태음신맥경(太陰神脈經). 고대로부터 전해내려 오기를, 인간의 체질에는 희귀한 경우가 몇 가지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태양신맥경(太陽神脈經)과 태음신맥경이었다. 그것은 각기 양(陽)과 음(陰)의 형태로 남자라면 태양신맥경, 여인은 태음신맥경이었다. 이 두 가지 체질은 천 년만에 한 명 날까말까한 희귀한 것으로 전설로나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 체질을 타고난 사람은 지혜와 오성이 초인적(超人的)이나 치명적인 것은 이십을 넘기지 못하고 단명(短命)하게 되어 있었다. 다만 한 가지, 희세의 영약을 복용하여 전신의 피를 바꾸어 주어야만 살아날 수 있었다. 사 실 백천기도 이십 이전에 죽을 운명이었으나 기연을 만나 만년지극용란혈(萬年地極龍卵血) 을 복용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백천기는 구설연의 젖가슴 사이에서 눈길을 옮겨 파리한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가슴 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 역시 태양신맥경....... 오! 이게 무슨 운명의 만남인가?' 백천기의 체질은 바로 태양신맥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만년지극용란혈을 마시게 되기까지도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구대마왕의 비급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그것은 천독마제의 천독마경(千毒魔 經) 의술편에 태양, 태음신맥경에 대해 상세히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만년지극용란혈은 그가 만난 광세기연이기에 앞서 암암리에 목숨을 건지는 필요불가결 의 수단이 되어준 셈이었다. 시간이 점차 흐르고....... 백천기는 이미 구설연을 치료할 방법을 뇌리에 묻어놓고 있었다. 또한 괴로운 것도 실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저히 그렇게는.......' 백천기는 구설연의 양쪽 젖가슴 사이로 가만히 손을 뻗어 그 곳에 돋아 있는 푸른 선을


어 루만졌다.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감촉이 그의 손끝을 타고 전해져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와 동시 에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로 싸늘한 느낌도 함께 전해지고 있었다. 백천기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구소저, 도저히 나는...... 그대를 구할 수가 없겠구려." 그는 곧 조심스럽게 그녀의 옷을 입혀 주었다. 그리고 금침을 그녀의 턱 밑까지 치켜올린 후,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때맞추어 방문이 열리며 구궁산이 들어섰다. 그는 백천기를 보자마자 진지하게 물었다. "연아는...... 어찌 되었소이까?" 백천기는 애써 담담하게 대답했다. "조금 전에 잠들었습니다." 구궁산은 침상가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탄식을 불어냈다. "불쌍한 것, 그나마 짧은 인생을 잠으로 다 소진 하려느냐? 그럴려면 마음껏 누리고나 떠나 야......" 그는 고개를 돌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백대인께서 보시기에...... 딸아이의 병세는 어떻소이까......?" 그의 말이 백천기의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백천기는 안색을 굳힌 채 침중하게 말했다. "먼저 구대협께서 아시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구소저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럼?" 백천기 또한 그답지 않게 탄식을 토해냈다. "구소저는 단지 태음신맥경이라는 기이한 체질을 타고 났을 뿐입니다." "태음신맥경?" 구궁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급히 물었다. "그게 무엇이오?" 백천기는 곧 나직한 어조로 태음신맥경에 대해 설명했다. 잠시 후 구궁산은 절망적인 신음을 발했다. "그렇다면 약몽자의 회정기원신단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말이오?" 백천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천지간의 정기를 흡수한 영수(靈獸)의 피가 아니고서는 체질을 바꿀 수가 없소 이다." "그럴 수가!" 구궁산은 절망에 잠겨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의 노안(老顔)에는 갑자기 짙은 허무감마저 어리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서는 결국 물기가 배어나왔다. "마지막 기대도 이렇듯 허물어져 버렸으니 연아는......." 백천기는 그만 전신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결국 그는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말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대협, 영애를 구하는 방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오? 그것이." 구궁산은 금세 안색이 밝아지더니 황급히 물었다. 백천기는 내심 탄식을 금치 못하며 털어 놓았다. "공교롭게도 불초 역시 기이한 체질로 태음신맥경과 상반되는 태양신맥경입니다." "아니, 그것이 정말이오이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찌......?" 구궁산이 말끝을 흐리자 백천기는 고소를 지었다. "아직 죽지 않고, 더구나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느냐고 물으시려는 것입니까?" 그는 이렇게 되어 몇년 전 혈룡암(血龍岩)에서 만년지극용란혈을 복용한 사실까지도 어쩔 수 없이 말해야 했다. 물론 구대마왕의 비급 건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삼가했다. 구궁산은 부러움과 함께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오! 백대인의 신상에는 그런 복록이 있었구려." 반면에 그는 새삼 경이의 눈으로 백천기를 바라보기도 했다. '으음! 젊은 나이에 무공성취가 가공하다 했더니 과연.......' 백천기는 다시 고개를 쳐드는 갈등들을 의식하며 빠른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만년지극용란혈은 이제 더 이상 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소생의 체내에 잠재되어 있던 것도 이미 본신진원(本身眞元)과 융합되었으므로 전혀 효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으음, 그렇다면 희망이 없구려." 구궁산이 씁쓸히 웃는데 반해 백천기의 음성은 신중해지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방법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 그게 무엇이오?" "바로 천지음양교원대법(天地陰痒交元大法)입니다." "......!" 구궁산은 넋이 나간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백천기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럼 불초는 이만 물러 가겠소이다." 그러자 구궁산이 급히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만, 백대인." 돌아서는 백천기의 눈에 구궁산의 비장한 표정이 들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구궁산은 떨리 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백대인, 노부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 될 것이오. 딸아이를...... 구해주시오." 백천기가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구대협께서는 그 결과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셨습니까?"


구궁산의 얼굴이 못내 비통하게 일그러졌다. "물론 알고 있소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명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겠소이까?" 백천기는 난색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영애의 생각도 과연 구대협과 같을지?" "으음......." 구궁산은 신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장담할 일은 아니나 연아는 노부의 심정을 결코 모르지 않을 것이오. 또한 다른 사람도 아 니고 백대인이라면......." 그는 말끝을 흐리더니 갑자기 백천기를 똑바로 응시했다. "혹 이 일로 인해 백대인께 누를 끼치게 되지 않을지가 오히려 걱정이외다. 하지만 대인께 서 원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굴레도 씌우지 않을 것을 맹세하겠소." "솔직히 소생은 그 점까지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소이다." 백천기가 고소를 짓자 구궁산은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었다. "대인, 아니 은공(恩公)......." "무슨 짓입니까? 구대협." 백천기는 깜짝 놀라며 황급히 그의 소매를 잡았다. 그러나 구궁산은 그야말로 요지부동이었 다. "대인의 은혜가 실로 하해와 같소이다. 우리 부녀(父女), 평생을 두고 잊지 않을 것이외다." 구궁산의 뇌리에는 전자의 일까지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금릉에서의 일로, 그 자신이 백천기로부터 구명지은(救命之恩)을 입던 순간의 한 장면이었다. "구대협, 계속 이러시면 소생이 민망해지외다." 백천기는 말과 함께 구궁산의 손을 잡아 주었다. 따뜻한 인간애(人間愛)가 그 손을 통해 전 해지자 구궁산은 전율했다. "백대인......." 탁자 위에는 화촉(華燭)이 밝게 켜져 있었다. 그런가 하면 침상에는 한 쌍의 원앙이 수놓아진 화려한 금침이 깔려 있었으며 한 미녀가 눈 을 꼭 감은 채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구설연이었다. 여전히 창백하고 병색이 도는 그녀의 뺨에는 불그스레한 연지가 찍혀 있었다. 그녀는 신부 (新婦)의 화장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화촉을 마주하고 백천기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물끄러미 불꽃을 응시하는 그는 여전히 백


의차림이었다. 백천기는 마침내 천지음양교원대법의 시행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화촉 외에도 간단한 주어육과(酒魚肉果)가 정성껏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은 구 궁산의 배려였다. "음......." 백천기는 침중한 신음을 터뜨리더니 앞에 놓인 금배(金杯)에 홍색빛이 감도는 술을 가득 따 랐다. 이어 그는 거침없이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그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이윽고 백천기는 몸을 일으키더니 침상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눈길은 곧장 구설연의 아름다운 얼굴에 떨어졌다. 도화빛의 연지는 오히려 그녀의 파 리한 안색과의 대조로 인해 웬지 모를 슬픔을 자아냈다. 백천기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 문득 한 손을 뻗어 금침을 거두었다. 신부옷을 입고 있는 구설연의 뺨을 가볍게 쓸며 그는 탄식해마지 않았다. "낭자, 부디 이 일로 인해 또다른 고통을 겪게 되지 않기를......." 이어 그는 구설연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손길이 가늘게 떨리는 가운데 신부복이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사르르....... 여인의 맨살에서 느껴지는 것은 야릇한 육향(肉香)이었다. 비록 종아리가 드러난 것에 불과 했으나 그것은 여타의 부위에 이르는 여하한 상상도 가능한만큼 다분히 유혹적이었다. 백천기는 냉정을 유지하기 위해 심호흡을 한 뒤, 그녀의 속옷마저 전부 벗겨 내렸다. 구설연의 나신(裸身)은 수척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묘한 매력이 있었다. 오랜 병 고를 견뎌온 생명력이 파리한 몸매에 깃들어 있는 것이었다. 젖가슴만은 성숙한 여인의 성징(性徵)을 말하듯 제법 풍요로운 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허리는 한 손에도 쥐어질 듯 가늘었다. 그러나 둔부로 내려올수록 급격한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비록 마른 몸이었으나 요철(凹凸) 이 분명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백천기는 두 개의 대리석 기둥인 양 섬세한 그녀의 다리를 보며 급기야 탄성을 발했다. "아름답구나! 만일 태음신맥증으로 시달리지 않았다면 정말 빼어난 미인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그는 운공(運功)에 접어 들었다. 잠시 후, 그는 전신의 진원(眞元)을 손바닥에 모으고는 구설연의 두 젖가슴에 갖다


붙였다. 손바닥이 밀착된 곳은 젖가슴 바로 밑부분인 양쪽 유근혈(乳根穴)이었다. 백천기는 가볍게 마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장심(掌深)으로부터 두 줄기 뜨거운 진기 가 흘러나와 그녀의 유근혈로 계속하여 유입되었다. 그 상태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차츰 구설연의 젖가슴은 따뜻한 온기를 되찾아갔다. 이 를 감지한 백천기는 손바닥을 내려 거궐혈(巨闕穴)과 장문혈(章門穴)을 차례로 마찰해 나갔 다. 그곳은 바로 가슴과 아랫배 사이로 손대기 민망한 위치였으나 백천기는 개의치 않았다. 그 의 장심은 뜨겁게 달아오른 채 마찰을 멈추지 않었다. 다시 그의 손이 내려갔다. 이번에는 단전과 기해혈(氣海穴), 이곳은 구설연의 아랫배에 해당 하는 부위였다. 백천기의 손바닥은 그곳을 거쳐 더 아래로 내려갔다. 여인의 비밀스런 치부와 불과 한 치밖 에 떨어지지 않은 석문(石門)과 중극혈(中極穴)에 이르른 것이었다. "으음......." 백천기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 나왔다. 그러나 그는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수습하고는 다시 공력을 끌어 올렸다. 어느덧 그의 이마에는 구슬같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동시에 그의 정수리에서는 하 얀 김이 무럭무럭 피어 오르고 있었으니, 이것은 그가 공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이때,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혼몽에 잠겨 있던 구설연의 몸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이었 다. 기이하게도 수척한 육체가 점차 신비한 빛을 띄어가는가 싶더니 그녀의 피부에는 믿기 어려 울 정도로 팽팽한 탄력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탈태환골과도 같은 현상으로 그녀는 서서히 예전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있었다. 백천기는 손바닥을 떼어냈다. 그의 안색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구설연의 얼굴도 도화빛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가슴을 들먹이며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마다 뜨거운 입김이 뿜어져


나왔 으며 그로 인해 흔들리는 젖가슴은 몹시도 육감적이었다. 백천기는 저으기 안도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성공이다. 이제는 음양교합법(陰陽交合法)만이 남았구나.' 그는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우람한 근육과 늘씬하게 빠진 체격이 드러났다. 넓고 탄탄한 가슴, 그리고 잘록 한 허리 등이 화촉의 불빛을 받아 묘한 열기(熱氣)를 반사시키는 듯 했다. 마침내 그도 구설연과 똑같이 완전한 알몸이 되었다. 백천기는 우뚝 선 채 멍하니 구설연의 나신을 내려다 보았다. 차츰 그의 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는 단전 밑으로부터 거센 열류가 마치 용암처럼 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 다. 그는 슬쩍 손을 흔들었다. 화촉이 꺼졌다. 백천기는 어둠이 덮힌 침상 위로 쓰러졌다. 구설연의 달아오른 나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풍(熱風)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진한 애욕의 몸부림을 수반한 채 점차 비등점을 향 해 치달리고 있었다. 열락에 허우적거리는 두 줄기의 야릇한 신음이 어둠 속으로부터 들려왔다. 구설연은 미몽 속에서도 전신의 모든 감각을 열어 사내를 깊숙히 빨아들이고 있었다. "아아......." 간헐적으로 들리는 신음이 그것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아!" 이때 어디선가 가느다란 탄식성이 울렸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탐닉에 몰두해 있는 두 남녀 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열풍의 밤이었다. 격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은밀한 하나의 작은 역사(歷史)가 이루어지고 있 었다. "......." 백천기는 눈을 떴다. 그의 곁에서 구설연이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귀여 운 암고양이처럼 그의 가슴에 안긴 채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백천기는 손을 들어 잠시 그녀의 매끄러운 등을 쓸었다. '깨어나 있지 않은 건 참으로 다행이군.' 그는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는 옷을 입은 다음 잠든 구설연을 내려다 보았다. 굳이 천안을 빌지 않아도 어둠과 대조 를 이루는 그녀의 뿌연 동체는 그의 눈에 명확하게 들어왔다. 백천기는 억양이 자제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오늘밤의 일은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기를......." 그는 그 말을 남기고는 곧장 그녀의 방에서 나왔다. 밖은 여전히 별이 총총한 밤이었다. 백천기는 한동안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 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채 안정을 취하기도 전, 문 밖에서 다급한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대인, 속하 전우진입니다." 백천기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오?" 전우진의 대답이 들려왔다. "은령선자 우문낭자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오?" 백천기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소?" "별원에 있습니다." 백천기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 밖에는 무형신검 전우진이 초조한 안색으로 서 있었다. "가 봅시다." 백천기는 그보다 먼저 앞장을 서고 있었다. 별원(別院)에는 여러 칸의 정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몇 개를 전우진과 현무호가 쓰고 있 었다. 하나의 정실, 침상에는 은령선자 우문경이 걸터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 한쪽 팔을 붕대로 감싸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현무호 가 침중한 얼굴로 서 있었다. 백천기는 방 안에 들어서자 급히 물었다. "어찌된 것이오, 그 상처는?" 우문경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대인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해요."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소?" "이곳으로 오던 중 뜻하지 않은 일전이 있었어요. 상대는 의외로 강적이었어요." 우문경은 수치감을 드러내며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이런 태도에 백천기는 내심 침중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문낭자의 무공이라면 황궁 내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다. 현위령이나 전영반과 막


강막하를 이룰 정도인데 대체 누가? 그녀를 다치게 했단 말인가?'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소?" 그의 질문에 우문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어요. 그들은 두 명의 늙은이였는데 각각 팔이 하나씩밖에 없는 자들이었어요. 그들 은 무공이 어찌나 고강한지 저는 그들에게 십 초도 견뎌내지 못했어요."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백천기는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혹 그들 중 한 명은 오른팔, 다른 한 명은 왼팔이 없지 않았소?" 우문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맞아요! 대인께서 그걸 어찌......." 백천기는 신음을 발하며 내뱉고 있었다. "그들은 잔혼(殘魂)이오. 바로 잔결마와 마혼신이란 노마두 들이오." "잔혼!" 중인들은 그 말에 한결같이 안색이 일변했다. 무림에서 사라진 지 오래인 대마두 잔(殘)과 혼(魂), 그들의 출현은 장내 인물들에게 있어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문득 우문경이 기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두 노마는 떠나면서 괴상한 말을 했어요." "괴상한 말이라니?" 백천기의 말에 우문경은 기억을 더듬어 당시의 일을 전했다. ...... 으핫핫핫! 결국 장소를 알아냈다. 누군지 몰라도 비도의 옥(玉)자를 천(天)자로 변조해 놓았지만 그 따위 수작에 넘어갈 우리가 아니다. 크하하하핫......! "맙소사, 그들이......." 백천기는 창황히 부르짖더니 중인들을 재촉했다. "여러분, 모두 떠날 차비를 하시오. 시간이 없소." "어디로 말입니까?" 현무호가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남안탕산." 백천기의 간단히 대꾸했다. 전우진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구대협께는 뭐라고 말해야......" 백천기는 단호하게 말했다. "시간이 없소. 훗날 해명하면 되오." 그 말에 일행은 떠날 차비를 차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일제히 밤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제 18 장 · 무서운 소녀(少女) 황량한 산로(山路). 윙... 위이... 잉! 매서운 한풍(寒風)이 몰아치는 가운데 두 인영이 나타났다. 그들의 옷자락이 바람에


마구 휘 날리고 있었다. 두 명의 백발노인, 그 중 한 명은 청의를 입었으며 다른 한 명은 백의를 입고 있었다. 그들은 어찌나 늙었는지 얼굴이 온통 거미줄같은 주름살로 뒤덮혀 있어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백 세를 훨씬 넘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똑같이 외팔이였다. 따라서 빈 소맷자락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백의노인이 괴소를 흘리며 말했다. "흐흐흐, 냉여초, 이제 사흘만 더 가면 남안탕산에 당도하게 된다." 그 말에 청의노인도 음침한 웃음을 흘려냈다. "흠! 서자기, 그곳에서 옥현봉(玉玄峰)만 찾으면 우리들의 백년 숙원을 푸는 셈인가?" "크하하핫......!" "푸핫핫핫......!" 두 괴인은 서로 마주보며 앙천광소 했다. 그들은 잔혼(殘魂), 즉 잔결마와 마혼신으로 청의노인은 잔결마 서자기(徐子奇), 백의노인은 마혼신 냉여초(冷如哨)였다. 두 괴인은 웃음을 그치더니 바람처럼 내닫기 시작했다. 한편, 그들이 달려가는 전방 세 마장 앞. 산길의 맞은 편 모퉁이로부터 노소(老少) 두 사람이 걸어 오고 있었다. 노인은 약 육순 가량 되어 보였는데 그는 십팔구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청의소녀를 부축하고 있었다. 청의소녀는 몹시 고통스러운 듯 노인의 팔에 매달려 신음을 발하고 있었다. 노인은 소녀의 어깨를 껴안으며 근심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평아야, 많이 아프냐?" "네, 할아버지. 흑흑......." 소녀는 급기야 나직하게 흐느꼈다. 그러자 노인은 주위를 둘러보더며 난감한 듯 중얼거렸다. "정말 야단났구나. 근처에는 인가도 보이지 않으니......" 이때, 청의소녀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할아버지! 평아가 죽어요. 아악!" 모퉁이 쪽에서 잔결마 서자기와 마혼신 냉여초가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였다. 그들을 보자 노인은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잔결마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 다. "아이구! 나으리들, 제발 좀 도와 주십시오." 잔결마는 욕설을 퍼부으며 소매를 떨쳤다. "빌어먹을! 이 손 놓지 못하겠느냐?" "어이쿠!" 노인은 비명과 함께 저만치 나가 떨어졌다. 그러나 노인은 의외로 질겼다. 그는 비틀거리며 간신히 일어 나더니 이번에는 마혼신에게


다가가 매달렸다. "나으리, 손녀가 병이 나 죽어가는데 노자가 바닥이 났습니다. 제발 불쌍히 여겨 한 푼 만......." "한 푼?" 마혼신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네, 네!" "흐흐흐! 얼빠진 놈, 우리는 백수십 년을 살면서 남에게 받은 적도 준 적도 없다." 그는 발을 들더니 냅다 노인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크악!" 노인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풀밭에 처박혀 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청의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악! 할아버지......!" 그녀는 눈물을 비오듯 쏟으며 바닥을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여 노인이 처박힌 숲 쪽으로 다 가갔다. 소녀가 풀숲을 헤치니 입가에 선혈이 낭자한 채 신음을 흘려내는 노인의 모습이 보 였다. 마혼신은 그들을 향해 침을 퉤 뱉았다. "퉤! 재수없게스리!" 잔결마 서자기가 스산하게 웃었다. "흐흐흐! 신경쓰지 말고 어서 가세." 그들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빈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그곳을 떠났다. 그런데 잠시 후, 놀랍게도 풀숲 속에 쓰러져 있던 노인이 벌떡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그는 입가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더니 청의소녀를 향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흐흐, 성공이다." 청의소녀도 허리를 펴고는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할아버지의 연기는 정말 일품이었어요. 놈들이 감쪽같이 속아 넘어 갔잖아요?" 그녀의 기색은 방금 전과는 딴판이었다. 병이 들기는 커녕 발랄함이 넘치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노인을 졸랐다. "어서 보고 싶어요. 빨리 꺼내보세요." 노인은 득의만면하여 품 속에서 한 장의 양피지를 꺼냈다. "흐흐흐, 이것만 있으면 우리는 향후로 중원을 독보(獨步)할 수 있단다." 그러다 문득 그는 손으로 옆구리를 만지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 나왔다.


"빌어먹을! 그 늙은 병신 놈의 발길질이 보통이 아니구나. 오십 년간이나 혼원일기공(混元一 氣功)으로 단련되어 창칼도 안들어가는 노부의 몸에 이렇게 충격을 주다니." 그 말에 청의소녀가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할아버지, 많이 아파요?" 노인의 구겨진 인상은 좀체로 펴지지 않았다. "잠시 운공조식하면 괜찮을 거다. 으음, 확실히 잔혼의 무공은 대단하구나. 만일 놈들 중 한 명이라도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면...... 이 할애비는 몇 초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는 몸을 으스스 떨었다. 그러자 청의소녀가 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할아버지, 그 지도는 제가 보관하고 있을테니 빨리 운공조식부터 하세요." 그러나 노인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다." 그는 곁에서 누가 채가기라도 할 듯 재빨리 양피지를 품 속에 쑤셔 넣었다. 그런 연후에야 안심이 되는 듯 비로소 으슥한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노인은 두 손을 단전에 모으고 운공삼매에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청의소녀의 눈에서 괴이한 빛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청의소녀는 우수를 칼처럼 세우더니 번개같이 노인의 앞가슴 단중혈(檀中穴)을 강타했다. "윽!"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소녀의 갑작스런 살수(殺手)에 한창 운공중이던 노인은 외 마디 비명과 함께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네... 네가!" 청의소녀는 비웃음을 흘렸다. "호호호! 내가 이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겠지." 노인은 분노에 찬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설마... 네가 날... 이렇게 할 줄이야......." 청의소녀는 싸늘하게 코웃음쳤다. "흥! 악무상(岳無常), 지도는 내가 가져 가겠다." "안 된다! 그것만은......" 악무상이라 불리운 노인은 경황중에도 기겁을 하며 몸을 움츠렸다. 청의소녀의 야멸찬 냉소 가 떨어졌다. "흥! 곧 죽을 놈이 웬 욕심이냐?" 동시에 그녀의 우수가 번쩍 움직였다. 퍽! 칼날같이 세운 그녀의 손끝은 다시 정확히 악무상의 견정혈(肩井穴)을 때렸다. "크윽!" 악무상은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벌렁 쓰러지며 나뒹굴었다.


"이... 악독한 것......." 그러나 청의소녀의 얼굴은 냉혹하기 그지 없었다. "흥! 악무상, 그래도 네 놈에 비하면 훨씬 낫다. 내 네 놈에게 순결을 뺏긴 것을 생각하면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다." "뭐, 뭣......?" 악무상은 사색이 깃든 채 눈을 부릅떴다. "하, 하지만 너는 노부 아니었으면 벌써 죽......" 청의소녀는 갑자기 요란한 홍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 네가 과연 선의(善意)로 날 살려 주었더냐? 고맙기는 커녕 치가 떨릴 지경이다." 냉혹한 일갈이 그녀의 입에서 터졌다. "죽어라!"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악무상의 가슴을 발로 짓이겼다. 우드득......! 악무상은 입을 쩍 벌렸다. 그는 가슴이 으스러진 채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즉사하 고 만 것이었다. 청의소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책이라고는 추호도 느끼지 않은 채 이글거 리는 증오심으로 악무상의 시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이어 그녀는 악무상의 품 속에서 양피지를 꺼낸 후 시체를 발로 걷어차 버렸다. "흥! 너같은 더러운 늙은이는 벌써 지옥에 갔어야 했다." 청의소녀는 수중의 양피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한참여, 그녀의 얼굴에는 은은한 살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양피지를 품 속으로 넣은 뒤 중얼거렸다. "만일 이 지도로 인해 고강한 무공을 얻는다면 무림의 사내놈들은 모두 발 아래 엎드리게 만들리라!" 실로 가공할 말이었다. 청의소녀의 눈에서는 원독어린 광망이 줄기줄기 뻗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손을 툭툭 털더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한 가닥 낭랑한 음성이 그녀를 멈추게 했다. "젊은 낭자가 너무 잔인하구려." "누구냐?" 청의소녀는 앙칼진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가벼운 미풍이 이는가 싶더니 세 명의 인물이 그녀의 앞을 가로 막았다. 그들은 청수한 얼굴을 지닌 사십대 가량의 중년인들로, 한결같이 백삼(白衫)을 입고 있었다. 또한 눈에서는 정기(正氣)가 흐르고 있어 백도의 인물임이 분명했다. 청의소녀는 그들을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네 놈들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살려둘 수가 없구나."


세 중년인은 흠칫했으나 곧 어이없다는 듯이 앙천광소했다. "핫핫핫......! 낭자는 우리가 누군지 알고나 하는 소리인가?" 그 말에 소녀의 얼굴에는 언뜻 의혹이 떠올랐다. 그러자 한 명의 중년인이 바닥에 뒹구는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더니 허공으로 가볍게 던졌다. 다음 순간, 그의 오른손이 번개같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파츠츠츳! 수십 갈래의 검광이 어지럽게 난무했다. 놀랍게도 허공에 던져진 돌멩이는 가루가 되어 우 수수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광경에 청의소녀는 놀라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악가(岳家) 쾌검(快劍)!" 그녀는 부지중에 뒤로 물러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 당신들은 악가장(岳家莊)의 인물들......?" 그러자 예의 중년인이 입가에 미소를 매달았다. "후후후, 그렇소. 낭자, 우리는 악가삼검(岳家三劍)이오." "아!" 청의소녀는 그만 안색이 핼쓱해지고 말았다. 악가삼검은 당대무림의 명문인 강남오가에 속한 악가장 출신이었다. 또한 그들은 악가장의 노장주인 신주제일검(神州第一劍) 악천비(岳天飛)의 세 아들로 무공 의 고강함이 악천비에 비해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들이 구사하는 악가 비전의 섬전십팔검(閃電十八劍)은 명실공히 무림의 일절로 알려지고 있었다. 천룡검(天龍劍) 악세기(岳世期), 노호검(怒號劍) 악세창(岳世昌), 신학검(神鶴劍) 악세진(岳世 震). 이 세 명이 바로 악가삼검이었다. 당혹을 금치 못하고 있는 청의소녀에게 천룡검 악세기가 말했다. "낭자, 우리는 그대를 해칠 뜻이 조금도 없소." 악세기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더구나 악무상은 악인이므로 그를 죽인 것도 탓하지 않겠소. 다만 한 가지 볼 일이 있을 뿐이오." "무슨... 볼 일이죠?" 악세기는 엄숙하게 말했다. "낭자가 갖고 있는 장보도를 좀 보고 싶소." "뭣이?" 청의소녀의 두 눈이 치떠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 고개를 뒤로 젖히며 날카로운 교소를 터뜨 렸다. "호호호호! 이제 보니 천하의 악가장도 결국은 보물을 탐하는 소인배 무리에 불과했구나. 일순, 악가삼검의 짙은 눈썹이 똑같이 위로 거슬러 올라갔다. 급기야 그들 중 가장


성질이 급한 노호검 악세창이 참지 못하고 분성을 터뜨렸다. "닥쳐라! 함부로 입을 놀리면 성치 못할 것이다." 그는 곧장 앞으로 나서려 했다. 천룡검 악세기가 손을 들어 그를 만류했다. 악세기는 청의소녀를 주시하며 준엄하게 나무랐다. "낭자!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오. 우리는 단지 그 장보도가 불러 일으킬 피바람을 우려할 뿐이오. 만일 사도 인물의 손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무림의 불행이 아니오? 그래서 우리가 잠시 접수하려는 것이오." "흥! 말은 번드르르 하다만 그걸 어찌 믿느냐?" 청의소녀는 잔뜩 몸을 도사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무튼 절대 못준다! 내가 죽지 않는 한은......." 악세기의 눈살이 가볍게 찌푸러 들었다. 이때였다. "건방진 계집!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셈이냐!" 노성과 함께 한 줄기 검광이 날아왔다. 노호검 악세창이 참지 못하고 검을 발검한 것이었다. "아악!" 청의소녀는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녀의 실력으로는 악가쾌검을 당할 수가 없었다. 찌이익! 급급히 피해냈으나 그녀의 앞가슴 옷자락이 그만 세로로 잘라져 버렸다. 그 바람에 그녀의 백옥같은 유방이 드러나고 말았다. 바로 그때였다. 무엇인가 툭,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다름아닌 가슴 깊에 숨겨 두었던 양피지, 즉 장보도였다. "앗! 장보도......" 청의소녀는 안색이 급변해 재빨리 손을 뻗었다. 그러나 천룡검 악세기의 동작은 그녀보다 한 수 더 빨랐다. 그는 발끝으로 지도를 차 허공 에 띄운 뒤, 손으로 낚아채 버렸다. "앗! 도둑놈, 내놓아라!" 청의소녀는 길길이 뛰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악세기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선 후 담담하게 말 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낭자를 해할 뜻이 전혀 없소. 장보도를 얻었으니 이만 돌아가겠 소." 그의 말이 끝나자 악가삼검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몸을 돌렸다. "멈춰라! 장보도를 내놓아라!" 청의소녀는 미친 듯이 고함쳤다. 그러나 악가삼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제히 발을 굴러


신형을 날렸다. 허공으로부터 악세기의 음성이 들려왔다. "낭자! 세상을 그렇게 비뚤어진 시각으로 바라보면 안 되오. 그리고 매사를 행함에 있어 필 히 자신의 역량을 헤아린 후에 행사하는 것이 옳을 것이오." "뭐, 뭐라고?" 청의소녀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녀의 눈에는 한 줄기 사악한 웃음이 번졌다. 그녀는 악가삼검이 사라진 곳을 노려보며 차디찬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네 놈들은 이미 산혼독(散魂毒)에 중독되었다. 그러니 아무리 잘난 척 해봐야 앞으로 한 시 진을 버티지 못할 거다. 더우기 그 전에 고수라도 만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걸?" 문득 그녀는 하늘을 우러르더니 처절하게 웃어제꼈다. "호호호호호......!"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청의소녀는 문득 산길 저쪽으로부터 몇 개의 인영이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네 명이었다. 그런데 허공을 가르며 다가오는 그들의 속도는 그야말로 빛살과 도 같았다. 청의소녀의 얼굴에 언뜻 놀라움이 스쳤다. '당금 무림에서 저 정도의 경공술을 가진 자는 몇 사람 되지 않는데 대체 저들은 누구일 까?' 문득 청의소녀의 눈에는 교활한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빛은 금세 스러졌다. 그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갑자기 땅바닥에 주저앉더니 악무상의 시체를 와락 부둥켜 안았다. 그녀의 입에서는 통곡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할아버지! 으흐흑흑......!" 잠시 후 그녀가 있는 곳에 네 줄기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다름아닌 백천기 일행이었다. 그들은 강남제일보를 떠난 후 남안탕산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 백천기의 눈에 시신을 끌어안고 흐느껴 울고 있는 청의소녀가 들어왔다. 백천기는 비록 갈 길이 바빴으나 차마 그냥 지나갈 수 없어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청의소녀를 향 해 다가가며 물었다. "낭자께선 무슨 일로 울고 있소?" "으흐흑흑...... 흑흑!"


청의소녀는 대답 대신 서럽게 흐느꼈다. 백천기는 그녀가 안고 있는 시체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 다. "낭자, 어찌 된 일이오? 우리가 도와줄 일이라도 있다면......"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청의소녀는 울음을 뚝 그치며 날카롭게 쏘아부쳤다. "너희들도 다 똑같은 놈들이다! 어서 꺼져라." "......?" 백천기는 물론, 곁에 있던 현무호와 전우진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은령선자 우문경도 고운 눈썹을 치떴다. 백천기는 쓴웃음을 지었으나 더욱 부드럽게 말했다. "낭자, 무슨 오해가 있는 모양이오. 우리는 결코 나쁜 사람들이 아니오." 청의소녀는 그제서야 고개를 쳐들며 물었다. "그럼 당신들은 악가장의 인물들이 아니란 말인가요?" "악가장?" 백천기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전우진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이미 감정이 상한 듯 그다지 곱지 않은 투로 말했다. "낭자는 너무 경솔하군. 우리는 악가장 사람이 아니다." 백천기는 손을 저어 그를 물리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낭자, 우리는 악가장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오. 그러니 무슨 영문인지 말씀해 보시 오." 청의소녀는 비로소 안색을 풀더니 눈물을 닦아내며 일행을 둘러보았다. 그런 연후에야 그녀 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의 부친은 표사( 士)로 표행( 行)을 나갔다가 녹림의 무리들에게 걸려 그만 죽음을 당하 셨지요. 그게 벌써 삼 년 전의 일이랍니다. 흐흑......" 그녀는 새삼 슬픔이 솟구치는지 다시 오열을 터뜨렸다. 절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 었다. 청의소녀는 만면에 슬픔을 가득 담은 채 울먹이며 입을 떼었다. "결국 그 일로 어머님께서는 병을 얻게 되었지요. 더구나 가세가 기울어 어머님의 병은 더 욱 깊어지게 되었답니다." "음......." 현무호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이 흘러 나왔다. 특히 우문경은 눈시울이 붉어지기까지 했다. 청의소녀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마침 우연히 지나던 의원 한 분이 진찰한 결과 어머니의 병은 천년홍삼이라는 신비한


영초 가 있어야만 고칠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한 가지 소문 을 듣게 되었어요. 그것은 남안탕산 옥현봉에 있는 천궁석부(天弓石府)란 곳에서 그 영초가 서식한다는 것이에요." "......!" 중인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것은 그녀가 말한 장소 때문이었다. 하필 무영귀도의 장보도에 표시된 곳과 일치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백천기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 다. '천궁석부를 알고 있다니? 그것은 비도를 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곳이거늘!' 과연 그랬다. 천궁석부는 바로 무영귀도가 평생 모은 보물을 묻어둔 비밀장소였다. 백천기는 과거 비도를 살펴 보았을 때 옥현봉의 천궁석부를 머리 속에 기억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청의소녀는 비통한 기색이 되어 말했다. "흑흑...... 그래서 저는 조부님과 의논한 끝에 이곳까지 오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잔혼이란 외팔이 노인 두 명을 만나게 되었어요." 백천기 일행은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현무호가 다급히 물었다. "흑흑! 보시다시피 그 악마같은 자들이 조부님을 죽였답니다." "아니, 어째서?" "그것은......." 청의소녀는 문득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할 수 없다는 듯이 털어 놓았다. "조부님과 저는 우연히 그들이 하는 대화를 듣게 되었어요. 그들은 무슨 장보도를 가지고 있는데 천궁석부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지도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현무호가 다시 재촉하듯 물었다. "조부님과 저는... 어머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천년홍삼이 천궁석부 속에 있다는 것은 알 았으나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계책을 쓰기로 했답니다." 청의소녀는 조금 전 잔혼을 상대로 썼던 계략을 숨김없이 얘기했다. "정말... 교묘하군!" 소녀의 이야기가 끝나자 전우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탄성을 발하고 말았다. 그는 청의소녀의 말을 들으며 자신이 잔혼이었을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웬지 가슴


이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이 소녀야말로 교활하기 그지없구나. 그랬기에 잔혼같은 노마두들이 당할 수밖에 없었구나. 만일 모친을 살리기 위한 일념만 아니었다면 정말 무서울 정도로 교활한 짓이로다.' 한편, 은령선자 우문경의 표정은 아까와는 딴판이었다. 같은 여인이어서일까? 문득 그녀는 이상한 느낌이 든 것이었다. 그녀는 줄곧 청의소녀의 언행을 관찰하던 중 여러 가지로 수상쩍은 점을 발견한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황궁에서 자라난 그녀였다. 더욱이 대내제일고수로 부상 하기까지 그녀는 결코 만만치 않은 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특히 주목한 것은 바로 청의소녀의 유난히도 반짝거리는 눈이었다. '잠시도 한 곳에 머물 줄을 모르는 저 눈.... 저것은 간교한 자들 특유의 눈빛이야.' 그러나 우문경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침착하게 관찰하기만 했다. 청의소녀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비도를 얻은 직후였답니다. 갑자기 악가삼검이란 자들이 나타났어요. 흐흑! 그 놈 들은 할아버님을 이렇게 잔인하게 죽이고는 애써 손에 넣은 장보도를 그만 뺏아가고 말았어 요." 그 말에 현무호는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렸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소위 정파로 자처하는 악가장 놈들이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전우진의 안색에도 역시 냉엄한 기운이 떠올랐다. 그것을 보자 청의소녀는 은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때 백천기는 시선을 힐끗 악무상의 시체에게로 향했다. '으음.......' 그의 심중에는 절로 탄식이 일었다. 왜냐하면 그는 악무상의 주검에서는 악가쾌검에 의한 검흔(劍痕)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 전우진의 칼칼한 음성이 그의 상념을 일깨웠다. "대인, 어서 추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무호와 우문경도 재촉했다. "맞습니다. 놈들이 더 멀리 가기 전에 쫓아가야 합니다.." 백천기는 그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청의소녀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낭자도 함께 가겠소?" 청의소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가서 그 놈들이 죽는 모습을 이 두 눈으로 꼭 지켜 보겠어요."


백천기는 내심 고소를 지었다. '후후....... 다른 것은 몰라도 저 증오만은 거짓이 아니로군. 하지만 이상한 것은 어째서 그런 중오심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는 이내 호기심을 떨치고 현실로 되돌아왔다. "전영반, 현위령과 함께 노인의 시체를 묻어주시오." "넷!" 전우진은 근처에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악무상의 시신은 봉분 속에 묻히게 되었 다. 봉분 앞에서 청의소녀는 절을 올렸다. 이어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백천기에게 사뿐히 허리 를 굽혔다. "저...... 제 이름은 채홍평(蔡紅平)이라고 해요." 백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채낭자였구려. 그런데 낭자는 경공을 할 줄 아시오?" 채홍평은 다소 얼굴을 붉혔다. "네. 조금은......." "그럼 떠납시다." 말과 함께 백천기는 몸을 날렸다. 그의 일행도 일제히 발로 땅을 박차며 신형을 솟구쳤다. 채홍평은 경악해 마지 않았다. 백천기가 날아오르자 때를 같이 하여 한 줄기 거대한 잠력(潛力)이 일더니 그녀의 몸을 감 싼 채 앞으로 치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아아!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그녀는 옆에서 자신과 똑같은 속도로 달리고 있는 백천기의 모습을 힐끗 바라보았다. 내공 을 전혀 쓸 필요가 없으니 그녀에게는 백천기를 관찰할 여유도 생긴 것이었다. 백천기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이 반짝 이채를 발했다. 하지만 일행 중 누구도 그것 을 눈치챈 자는 없었다. 일행은 쏜살같이 전면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대여섯 개의 산을 넘어 계속 달렸다. 얼마를 달렸을까? 그들의 눈 앞에 넓은 공지가 나타났다. 순간 일행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 다. "악!" 채홍평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공지에 벌어져 있는 상황은 그야말로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경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지옥도(地獄圖)를 방불케 하는 장면이 공지에 벌어져 있었다. 줄잡아


사오십여 구 의 시체가 피로 내를 이룬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음......." 백천기는 침중한 신음을 흘리며 앞으로 날아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역한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문득 전우진이 외침을 발했다. "대인! 여기 악가 놈들의 시체가 있습니다." 그 바람에 일행은 전우진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세 구의 시체 가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 시체들은 과연 악가삼검이었다. 현무호는 그들을 내려다 보며 냉랭하게 코웃음 쳤다. "인과응보다. 결국 탐심을 가진 자는 이렇게 되기 마련이지." 백천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손을 뻗어 그들의 눈을 까뒤집어 보았다. 유난 히 거무스름하게 변색된 악가삼검의 얼굴이 의혹을 던져 주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눈은 검은 동자와 흰자위가 구분이 안될 정도로 안구 자체가 시커멓 게 상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지, 독(毒)에 중독되어 있소." "옛?" 중인들의 경악에 이어 백천기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들이 당한 것은 산혼독(散魂毒)이라는 것이오." 전우진과 현무호, 우문경 등의 안색이 굳어졌다. 반면 채홍평의 눈에는 일순 싸늘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으나 아무도 이를 알지 못했다. 실상 백천기는 독에 대해서 이미 일가(一家)를 이룰 정도였다. 고금을 통틀어 독의 제일인자 였던 천독마제의 천독마경을 익혔으니 당연한 노릇이었다. 따라서 백천기의 얼굴에서는 일점의 동요도 볼 수 없었다. 그의 그런 점이 채홍평으로 하여 금 일말의 두려움을 갖게 만들었다. '대체 이 사람은 얼마나 많은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이때 현무호는 나뭇가지로 악가삼검의 시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장보도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그는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인,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전우진이 냉랭하게 말했다. "아직까지 있을 턱이 없지."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우문경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대인, 이들의 가슴에 찍힌 장인(掌印)을 보셨나요?" 그 말에 현무호도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속하도 보았습니다. 마침 장인을 보고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백천기는 담담히 반문했다. "어떤 무공에 의한 것이오?" 현무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심각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북해 사태청의 이대마공(二大魔功) 중 하나인 한령마공(寒靈魔功)에 의한 것 같습 니다." "한령마공......." 백천기는 안색이 변하여 중얼거렸다. 그는 악가삼검 중 한 명을 바라보았다. 그 자는 옷섶이 젖어 있었는데 은은히 손바닥 자국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죽은 자의 상의를 젖혀 보았다. 그러자 가슴팍에 창백한 손바닥 자국이 찍혀있는 것이 보였다. 이때 전우진도 주위의 시신들을 살펴보더니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대인, 이곳에 있는 시체들도 대부분 북해 사태청의 고수들에게 당한 것입니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한령마공에 당한 자가 있는가 하면 사태청의 이대마공 중 하나인 청살마라장(靑殺魔羅掌) 의 흔적도 있습니다." 그 말에 백천기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청살마라장이라면 과거 금릉 교외의 한 동굴 속에서 나체소녀가 익히고 있던 마공이 아닌 가?' 현무호가 침중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사태청에서 한령마공을 익힌 자는 불과 다섯 사람을 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러니 이곳에 왔던 자들은 필경 북해 사태청의 중심인물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일행은 침묵에 잠겼다. 북해 사태청이라면 무림인 치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런 그들이, 그것도 중심인 물이 대거 나타났다면 옥현봉에 한바탕 혈풍(血風)이 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잠시 후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백천기였다. "이렇게 된 이상 시간을 끌면 끌수록 사태가 악화될 것이오. 지금으로선 한시라도 빨리 옥 현봉에 당도하는 것이오." 그 말에 은령선자 우문경이 의아한 듯 물었다. "장보도도 없는데 그곳에 가봐야 무엇하나요?" 그러자 백천기의 얼굴에는 한 가닥 신비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시선을 남쪽으로 향하며 담담히 말했다.


"최선을 다하면 되오. 모사재인성사재천(謀事在人成事在天)이라 했소." 즉,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나 성사는 하늘에 달렸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하면 하늘의 뜻이 따른다는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그 말에 중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미 백천기에 대해 마음 깊이 감복하 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하자는 것은 무엇이라도 따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때였다. 채홍평이 문득 백천기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공자님, 부탁이 있어요." 백천기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엇이오, 낭자." 채홍평의 얼굴에는 간절한 빛이 어렸다. "제발 소녀도 그곳으로 데려가 주세요." 백천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되오, 그곳은 낭자가 갈 곳이 못 되오." 그러자 채홍평의 눈에서 눈물이 반짝였다. "제발 부탁이에요. 저는 할아버님까지 잃었어요. 기왕지사 나선 것 천년홍삼을 구하지 못하 면 저는 돌아갈 수가 없어요. 설사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어머님을 구하기 위해서는 지옥이라도 가야할 형편이에요." 백천기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그는 지그시 채홍평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가 무엇을 생 각하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제발... 공자님, 저도 가게 해 주세요....... 흐흑......." 채홍평은 기어이 오열을 터뜨리고 있었다. 한편 우문경은 아예 고개를 돌려버리고 있었다. 채홍평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아까부터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 '흥! 교활한 계집 같으니라고, 동정심을 유발하여 대체 무엇을 얻으려는지 모르나 넘어갈 백 대인이 아니시다.' 그러나 그녀는 백천기의 말에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좋소, 그럼 낭자도 같이 갑시다." 백천기의 말에 우문경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는 뭐라 항의하려 입술을 열었다. 그러다 무 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니야, 내가 반대하면 백대인께서 속 좁은 여자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어. 차라리 내버려 두는 게 낫겠어.'


우문경은 채홍평을 노려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에서는 강한 경멸감이 떠오르고 있었다. "자, 그럼 갑시다." 백천기는 신형을 날렸다. 일행은 다시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채홍평은 여전히 백천기의 곁에 바짝 붙은 채 힘 안 들이고 따라가고 있었다. 제 19 장 · 귀검(鬼劍)과 혈영마황전(血影魔皇殿) 태양이 떠오르자 동녘은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다. 이곳은 절강성(浙江省) 남안탕산 부근의 이름없는 황산(荒山).일출의 홍광(紅光)을 뚫고 다 섯 줄기 인영이 쾌속하게 날아왔다. 그들은 산기슭에서 급격히 신형을 멈추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백천기와 그 일행이었다. 그들이 멈춰선 곳에는 참혹하게 죽은 다섯 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 일행은 다섯 구의 시체를 내려다 보았다. 그들은 음침한 인상의 중년인들로 겉으로 보기에 는 아무런 상처도 나 있지 않았다. 그들을 살펴보던 전우진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신음을 발하며 중얼거렸다. "음, 이들은 바로 음산오효(陰山五梟)입니다." "음산오효?" 백천기의 반문에 전우진은 눈을 가늘게 하며 설명했다. "이들은 사도에 속한 무리들로 무공이 꽤 강한 편입니다. 그래도 항간에서는 제법 일류로 취급되던 자들이었는데 이렇게 한꺼번에 죽다니......." 백천기는 음산오효의 상처를 조사해 보았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이들은 검에 의해 당한 것이오." "검?" 중인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보아도 음산오효에게서 검흔 따위는 보이 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천기는 담담히 말했다. "그것도 단 일 초에 당했소." 그 말에 전우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천하에 그 누가 이들을 동시에 일 초에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현무호도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말했다. "속하도 동감입니다. 한 명이라면 몰라도 동시에 다섯 명을 상대로 어찌......" 백천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상식적으로는 그렇소. 하지만 이건 분명한 사실이오. 이들은 쾌검(快劍)에 의해 당했소. 그 것도 종잇장처럼 얇은 연검(軟劍)에 의한 것으로 워낙 쾌속하게 전개되었으므로 피 한 방울 나지않은 것이오. 자세히 보면 이들의 목부분에 가는 혈선(血線)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소." 이어 그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정도로 빠른 검법을 구사할 인물이라면 누가 있겠소?" 전우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의견을 말했다. "당금 무림에서 쾌검으로 치면 역시 악가장(岳家莊)이 가장 유명합니다. 그 중에서도 악가장 의 장주인 신주제일검(神州第一劍) 악천비가 가장 강합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흔들며 덧붙였다. "하지만 속하의 검법도 그에 못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속하는 이런 쾌검을 구사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악천비도 그만한 능력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천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런 절정의 쾌검을 펼치려면 최소한 백 년의 내공은 지니고 있어야 가능하오." 그 말에 삼 인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당금 무림에 누가 백 년의 내공수위를 지니고 쾌검을 구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새삼스럽게 음산오효의 시체를 내려다 보았다. 이때였다. 문득 단말마의 비명이 울렸다. 백천기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 비명은 오직 그의 귓전에만 들 려온 것이었다. 비명이 울린 곳은 적어도 십 리(里) 이상 떨어진 곳이었던 것이다. "왜 그러세요? 대인?" 우문경이 의아하여 묻자 백천기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비명소리요." "......?" 중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백천기는 담담히 말했다. "이곳에서 십 리 쯤 떨어진 곳에서 난 비명이오." "넷?"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로서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거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백천기 의 능력을 알고 있기에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천기는 몸을 돌리고 있었다. "가봅시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채홍평이 넋을 잃은 표정이었다. '대체 이 분은 어느 정도의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도저히 추측을 할 수 없을 정도구 나.'


산기슭에 십여 구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그 시체들은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어떤 단체의 인물들인 것 같았다. 그들과 똑같은 복장의 인물들이 이십여 명 더 있었다. 그들은 한 명의 흑의인을 포위한 채 한창 대치하고 있었다. 한결같이 양쪽 태양혈이 불쑥 치솟아오른 것으로 미루어 내외공(內外功)이 겸비된 고수들로 보였다. 그들의 뒤쪽에는 다섯 명의 인물이 관전하며 서 있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는 이마 한가운데 검은 점이 찍혀있는 칠순 가량의 자의노인으로, 매 부리코에 두 눈이 움푹 들어가 있어 음침하고 잔혹해 보였다. 그는 냉막한 표정으로 장내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네 명의 중년인이 나란 히 서 있었다. 모두 복장이 틀렸으며 그들 중 한 명은 여인으로 삽십 세 가량 되어 보이는 미부(美婦)였다. 그녀는 타는 듯이 붉은 홍의를 터질 듯한 몸에 밀착되게 입고 있었으며 끝이 살짝 치켜올라 간 눈꼬리에는 음탕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홍의미부와 나란히 서 있는 세 명은 한결같이 안광이 날카로와 절정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한편, 백천기 일행은 장내에서 십여 장 정도 떨어져 있는 수림에 은닉한 채 상황을 예의주 시하고 있었다. 백천기는 이십여 명에게 포위되어 있는 흑의인을 바라보았다. 흑의인의 얼굴을 본 순간 백 천기는 흠칫했다. 흑의인의 피부는 거므티티한 채 윤기가 번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천기는 안력을 돋 구어 보았다. '이제보니 저 자는 가면을 쓰고 있구나.' 문득 그의 뇌리에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혹 저 자는 귀검(鬼劍)이 아닐까?' 그는 바로 강호에 떠도는 노래의 한 대목을 떠올리고 있었다. 쌍자(雙子)가 은거하니 혈영(血影)이 나타나고 잔혼(殘魂)이 사라지니 귀검(鬼劍)이 출현한다. 바로 그런 노래였다. 백천기는 흑의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흑의인의 두 발은 엇갈린 팔자(八字)자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 자세는 하시라도 공격이


가능한 자세였다. 그는 왼손에 검을 들고 있었는데 검은 자루에서 뽑여지지 않은 채 였다. 그가 들고 있는 검 은 폭이 엄지 손가락 정도밖에 안되는 것으로 길이는 석 자, 두께도 검집까지 합쳐도 종잇 장처럼 얇은 괴검이었다. '만일 저 검이 뽑혀져 나온다면 그 두께는 매미날개 정도일 것이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할 때였다. 문득 현무호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백천기는 의아하여 물었다. "왜 그러시오? 현위령." 그러자 현무호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손으로 장한들의 뒤에 서 있는 자들을 가르쳤다. "대인, 저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의 음성은 약간 떨려 나오고 있었다. "모르오." 현무호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자의를 입고 있는 저 늙은이가 바로 사신궁의 궁주인 사태극입니다." '사태극이라고!' 백천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다시 현무호의 음성이 들렸다. "뿐만 아니라 그 자의 뒤에 서 있는 네 명 중 홍의여인은 바로 주작신(朱雀神)으로 과거 속 하를 사신궁(四神宮)에 가입케 했던 여인입니다." 백천기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들 네 명은 사신(四神)이겠구려?" "그렇습니다." 대화가 오가는 사이 현무호는 서서히 평정을 회복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반면 백천기의 표 정은 심각하게 변하고 있었다. 모조리 등장했으니, 추후로 얼마나 사태가 험악하게 흘러갈지 모르겠구나.' 이때, 음산한 괴소성이 그의 고막을 자극했다. "흐흐흐흐....... 귀검(鬼劍)! 과연 네 검법은 듣던 것 이상으로 훌륭하구나." 그 음성의 주인공은 바로 사신궁의 궁주이자 혈영마황전(血影魔皇殿)의 중심인물인 사태극 이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백천기는 눈을 반짝 빛냈다. '과연 추측대로 저 흑의인은 귀검이었구나.' 흑의인, 즉 귀검의 싸늘한 응답이 들려왔다. "후후......! 사태극, 제대로 보았구나. 그렇다면 내가 혈영마황전 따위는 안중에 두지


않는다 는 것도 알겠지?" 그의 목소리는 듣기 거북할 정도로 괴이했다. 심지어 그의 음성은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불분명했다. 이때 사태극은 움찔 놀라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너는 어떻게 노부의 정체를 알았느냐?" 귀검은 괴소를 흘렸다. "후후! 천하에서 내가 모르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사태극은 그를 노려보며 음침하게 말했다. "건방진 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구나." 그는 두 눈에서 살광을 흘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더이상 볼 것 없다. 놈을 쳐라!" 그 순간, 이십여 명의 장한들이 일제히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들보다 한 발 앞선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귀검의 검이었다. 그가 막 오른손을 검자 루에 갖다댔다 싶은 순간 섬광이 작렬했다. 츠츠츠츳! 번개불같은 검광이 둥근 원을 그렸다. "크아악!" 이어 들리는 것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처절한 비명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열 명의 장한이 비명을 토하며 벌렁벌렁 넘어갔다. 대체 언제 검을 발출 하고, 언제 검법을 펼쳤는지 육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쾌검이 펼쳐진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결같이 장한들의 목젖에 실낱같은 혈선이 그어졌다는 사실이었다. 피 한 방울조차 나오지 않은 채 그들은 황천으로 간 것이었다. 수림 속에서 장내를 바라보던 백천기는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검법이로구나.' 놀라기는 사태극도 마찬가지였다. 한 순간에 수하들을 절반 가까이 잃어버린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귀검! 도대체 네 놈의 사문(師門)은 어디냐?" 귀검은 그를 힐끗 보며 조소를 날렸다. "너는 그걸 알 자격이 없다." "뭐... 뭣이?" 사태극의 얼굴이 푸르스름하게 변했다. 마침내 그는 살기띈 음성으로 외쳤다. "백호신(白虎神), 놈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줘라." "넷!"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네 인물 중에서 백의를 입은 중년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들은 사신궁의 사신(四神)으로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로 불리우고 있었다.


백호신은 귀검을 향해 다가가며 음소를 흘렸다. "흐흐....... 졸개 몇 명을 해치웠다고 자만하지 마라. 지금부터가 진짜일테니까." 그러나 귀검은 안색 하나 변치 않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검은 윤기가 흐르고 있었는데 마 치 무쇠로 조각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천하의 누구도 내 검 아래서는 일 초를 넘기지 못한다. 너도 마찬가지다." 실로 광오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미친 소리!" 백호신은 노갈을 터뜨리며 쌍장을 활짝 떨치며 공격해 들어갔다. "죽음을 찾는 불나방같으니라고." 귀검의 냉혹한 음성이 울린 순간 백호신은 눈 앞에 무엇인가 번쩍하는 것을 보았다. "크으윽!" 무엇인가 화끈하는 느낌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실 백호신은 극도의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따라서 공격하는 척 했으나 실은 최대한의 방어를 펼치며 덮쳤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에는 귀검의 검날이 지나가고 말았다. 백호신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어느새 그의 가슴은 시뻘겋게 젖어 있었다. "으으......! 믿을 수가 없다. 어찌 이럴 수가......?" 반면 귀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변함없는 자세였다. 심지어는 그가 쥐고 있는 검은 아예 뽑혀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귀검은 그를 바라보며 억양이 없는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백호신이라 했느냐? 기억해 두겠다. 너는 내가 무림에 나온 이래 처음으로 일 초를 받아낸 셈이다." "으으......" 백호신은 신음을 흘렸다. 그는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록 죽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결코 가벼운 상처는 아니었다. 이때였다. 사태극이 앞으로 걸어왔다. 그는 귀검과 일 장 거리를 두고 멈추며 물었다. "묻겠다. 아직 네 일초를 받아낸 사람이 없었다고 했느냐?" "그렇다." 귀검의 간단한 대답에 사태극의 표정이 괴이하게 변했다. "그럼 본좌와 일 초를 겨뤄보겠느냐?" 귀검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물론. 지옥이 두렵지 않다면." 사태극은 어이가 없는 듯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실로 가소롭구나. 대체 무엇을 삶아 먹었길래 그토록 기고만장하는지 본좌가 친히 네 뱃 속을 갈라 봐야겠다." 사태극은 자세를 잡았다. 두 사람의 사이는 일 장여, 사태극은 공격자세를 취한 채


귀검을 노려보았다. 바야흐로 두 사람 중 누구라도 손만 들면 불똥 튈 격전이 시작될 순간이었다. 사태극의 눈은 실처럼 가늘어진 채 귀검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귀검의 헛점을 노리고 있 는 듯 했다. 그러나 귀검의 자세는 그야말로 완벽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는 여전히 팔자형의 보법을 취 하고 있었는데 가볍게 검을 쥐고있는 모습에서는 바늘구멍만한 틈도 찾아볼 길이 없었다. "......!" 문득 사태극은 등줄기로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과연... 큰 소리 칠만 하구나.' 그러나 큰 소리 친 이상 더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그는 서서히 쌍장을 치켜 세웠다. 그러자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다. 그의 장심(掌心)에서는 선명한 핏빛의 고루( ?)가 형성된 것이었다. 그 혈고루는 금시라도 피를 뚝뚝 흘려낼 듯 선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처음으로 귀검의 눈빛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혈루장(血?掌)......!" 그러나 정작 놀랜 것은 사태극이었다. '어찌 저 놈이 내 무공을 안단 말인가? 혈루장을 아는 자는 무림에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생 각했는데!' 이때 귀검이 음산한 음성으로 물었다. "사태극, 너는 제왕혈신경(帝王血神經)의 무공을 완전히 터득했느냐?" 사태극은 그만 아연실색할 지경이었다. "네... 네가 어찌 제왕혈신경까지 아느냐?" 귀검의 입에서 괴소가 흘러나왔다. "후후!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느냐? 너에게 제왕혈신경을 빼앗긴 분이 내게 복수를 부탁했는 데 말이다." "뭐, 뭣이?" 사태극은 머리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고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너... 너는 그럼 천은상인(天殷上人)의 제자냐?" 귀검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안색이 변하는 걸 보니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있는 모양이로구나." 아닌 게 아니라 사태극의 안면이 수십 차례나 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


춤주춤 물러나고 있었다. '으으, 그 늙은이의 명이 그리도 길 줄이야. 그때 죽은 줄 알았는데 죽지 않았었단 말인가?' 문득 귀검의 으스스한 음성이 떨어졌다. "사태극, 네 놈은 정녕 살아있을 가치도 없는 인간이다. 내 네 목을 따 사부님의 영전에 바 쳐야 겠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줄기 가공할 검광이 귀검의 허리로부터 뿜어져 나갔다. "흑!" 사태극은 부지중 헛바람을 들이키며 전력으로 신형을 날렸다. 찌익! 그의 옆구리 옷자락이 길게 찢겨져 나갔다. 실로 가공할 쾌검일식이었다. 어찌나 빠른지 언 제 검이 뽑히고, 언제 공격이 가해졌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사태극은 안색이 허옇게 질리고 말았다. '아차 하다간 정말 목이 날아가겠구나!' 마침내 그는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리며 외쳤다. "애송이 놈! 혈루장의 위력을 보여주마!" 휘르르릉......! 섬뜩한 핏빛 기류가 소용돌이 치며 날아갔다. 귀검도 검자루를 향해 손을 움직였다. 파아아아! 가공할 검기가 그의 허리춤에서 폭사하듯 날아갔다. 검기와 핏빛의 기류는 마침내 한가운데 서 뒤엉켰다. 콰아아아......! 그야말로 엄청난 격돌이었다. 핏빛 기류와 검기의 소용돌이가 두 사람의 모습을 완전히 삼 켜 버렸다. 그런 가운데 십여 초가 숨가쁘게 지나가고 있었다. 문득 펑! 하는 폭음과 함께 두 가닥 인영이 갈라졌다. 중인들의 시선이 어지럽게 좌우로 갈라졌다. 동시에 하나같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먼저 사태극의 모습은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입고 있던 의복은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으며, 앞가슴은 물론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귀검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그의 왼쪽 어깨에는 혈고루의 장인(章印)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 다. 양패공상(兩敗共傷). 두 사람은 그 누구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 것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먼저 입을 연 것은 사태극이었다. "흐흐으....... 귀검, 혈루장에는 고루독( ?毒)이 묻어있다. 이제 네 놈은 한 시진 안으로 끝장


날 것이다." 웃는지 우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쥐어짜는 듯한 음성이었다. 귀검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끝까지 비열하구나 네 놈은......" "흐흐흐! 그것이 곧 생존 방법임을 모르느냐?" 사태극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힘겹게 손을 흔들었다. "놈을 죽여라." 그러자 사신이 일제히 움직였다. 그들은 귀검을 포위해 들어가고 있었다. 귀검은 뒤로 물러나며 으스스한 음성으로 내뱉았다. "기다려라, 사태극! 며칠 안으로 네 놈의 더러운 목을 취할 테니." 현무신이 재빨리 귀검을 막아섰다. "어딜 도망가려고?" "비켜라! 날 막는 자는 죽는다." 귀검의 검이 불을 뿜었다. 파아아! "크윽!" 현무신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무엇인가 피보라와 함께 풀밭에 떨어지더니 펄쩍펄쩍 뛰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현무신의 오 른팔이었다. 가공할 쾌검일식에 현무신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팔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크아아아! 이럴 수가......." 현무신은 잘린 오른팔을 왼손으로 부여잡고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그때였다. 귀검은 땅을 박 차고 신형을 날렸다. 청룡신, 주작신이 아차하고 추격하려 했을 때는 이미 귀검의 모습은 삼십 장 밖으로 사라지 고 있었다. "비, 빌어먹을!" 청룡신이 발을 굴렀으나 이미 추격하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였다. 이때였다. 갑자기 사태극이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앗, 궁주님!" 주작신이 날카롭게 외치며 급히 교구를 날려 그를 부축했다. 사태극은 전신을 한차례 부르 르 떨더니 간신히 입을 열었다. "으으....... 놈의 검법은 정말 가공할 위력이었다. 일푼만 더 위쪽에 맞았으면... 심장이 절단 될 뻔했다." 사태극은 한 손으로 왼쪽 가슴을 누르며 힘겹게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가자. 소종사(少宗師)께 놈의 출현을 알려야 한다." 그 말에 사신을 포함한 장한들이 사태극을 호위하듯 에워쌌다. 잠시 후 그들은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한편, 수림 속에서 지금까지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천수나타 현무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인, 지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놈들을 소탕해야 합니다." 그러나 백천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때가 아니오, 현위령." "때가 아니라니......" 현무호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백천기는 담담히 말했다. "지금 저들을 처치해봐야 우리에겐 별 이득이 없소. 왜냐하면 이 일대엔 수많은 고수들이 운집하고 있으므로 힘을 아껴야 하기 때문이오." "하지만......" "이곳에 몰려온 자들은 하나같이 보물에 탐심을 품은 자들이오. 따라서 서로간에 적대적인 입장이오. 그대로 내버려둔다 해도 사태극은 또 다른 적들을 만나게 될 것이오. 굳이 우리쪽 에서 힘을 뺄 필요는 없소. 안 그렇소?" "그, 그거야......." 현무호는 그만 얼굴을 붉혔다. 백천기의 말이 백번 옳았기 때문이었다. "공자님은 무공 뿐 아니라 상당한 지략가(智略家)시군요?" 갑자기 톡 나서서 이렇게 말하는 채홍평을 향해 백천기는 문득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후후, 꼭 그렇지만도 않소. 때로는 알고도 속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오." 그 순간 채홍평의 얼굴이 왜 새빨갛게 되버렸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바로 은령선자 우문경이었다. '호홋! 역시 백대인이시구나. 내가 공연한 걱정을 한 셈이 되었어.' 이때 백천기는 장내를 한 번 둘러본 다음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은 더 상황을 관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사태극 말고도 이곳 남안탕산에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몰려왔을 가능성이 있소. 그러니 공연히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 그 말에 우문경이 아미를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데 어찌된 걸까요? 남안탕산에 이렇게 많은 고수들이 몰려든 것은?" 백천기는 잠시 생각하더니 결론을 내렸다. "장보도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무림에 소문이 퍼졌을 것이오. 그 동안 입에서 입으 로 전해져 보물에 눈 먼 자들이 몰려왔을 것이오." 이어 그는 네 사람을 둘러보더니 지시를 내렸다. "이제부터 우리는 변장을 해야겠소." 현무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변장을? 아니 어떻게 말입니까?" "전영반과 현위령은 잠시 내 하인으로 변장해야 겠소. 그리고 두 낭자는


남장(男裝)을 하여 각각 서동(書童) 차림을 하는 것이 좋겠소." 그 말에 일행은 저마다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우문경은 남장이라는 말에 흥미로운 표 정을 지었다. 누구의 명이라고 거부하겠는가? 그들은 가까운 인가로 가 복장을 구한 후 예정대로 두 사람 은 하인으로, 두 여인은 각각 서동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백천기는 본래 서생의 복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달리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었다. 다만 그 는 만용환형술(萬容幻形術)을 펼쳤다. 그러자 그의 얼굴 근육이 변화하더니 추악한 청년의 얼굴로 화했다. 그 얼굴은 지난 날 왕 부에서 현무호와 인사를 나누던 때의 모습이었다. "맙소사!" 채홍평은 그의 달라진 모습에 기겁을 하고 부르짖었다. 전우진과 우문경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역용약이나 인피면구에 의존하지 않고 다만 공력만으로 피부빛깔과 근육까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 그만 입을 벌릴 지경이었 다. 이윽고 일행은 못생긴 청년서생과 두 명의 하인, 그리고 서동의 모습으로 변장을 마쳤다. 그 같은 모습은 영락없이 강호에 유람을 나온 부귀한 집안의 청년서생과 그 일행처럼 보였다. 백천기는 일행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됐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오." 그는 소매를 떨치며 앞장섰다. "자, 이제 모두 갑시다." 마침내 그를 선두로 하여 일행은 걷기 시작했다. 이미 남안탕산으로 들어서 있었다. 이제 남 은 것은 옥현봉을 찾는 것 뿐이었다. 옥현봉(玉玄峰)은 남안탕산에서도 괴이한 봉우리에 속했다. 그것은 전체가 흑석(黑石)으로 이루어져 있는 대다 멀리서 보면 마치 한 자루의 날카로운 붓이 거꾸로 서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가까이 가보면 봉우리는 갖가지 형상의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어 실로 기기묘묘


한 풍광을 자아내고 있었다. 새벽 안개가 자욱하게 옥현봉을 휘감고 있었다. 그로 인해 옥현봉의 모습은 흐릿하기만 했는데 새벽 바람에 운무가 일렁일 때마다 여기저기 서 인영(人影)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옥현봉의 정상에서 조금 못미친 기슭이었다. 그곳에는 하나의 커다란 바위가 있었고 바위 위에는 여러 명의 인물들이 서 있었다. 그들의 한가운데에는 홍의(紅衣)을 입은 한 청년이 뒷짐을 지고 유유히 서 있었다. 그는 드물게 보는 미남자였다. 백옥같이 흰 피부에 짙은 눈썹, 부리부리한 눈매는 출중한 사 나이의 기개를 보여주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입술이 지나칠 정도로 얄팍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사나이의 매력을 물씬 풍기는 모습이었다. 홍의청년의 양 옆에는 두 노인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칠순이 넘어 보였다. 왼쪽의 노인은 음침한 인상에 이마에는 검은 점이 찍혀 있었으며 자의를 입고 있었다. 놀랍 게도 그는 혈영마황전의 사신궁주인 사태극이었다. 그의 뒤에는 사신이 우뚝 서 있었다. 한편 홍의청년의 오른쪽에는 금의(金衣)를 입은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보통 사람의 세 배 는 됨직한 비대한 체구에 온통 살로 뭉쳐진 듯한 얼굴에는 온통 홍광이 서려 있었다. 그는 손목에 각각 세 개씩의 금환(金環)을 차고 있었다. 살로 뭉쳐진 듯한 얼굴에 살짝 금을 그은 듯한 실눈은 감고 있는지 뜨고 있는지 모를 정도였으나 이따금 무쇠라도 관통할 듯한 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한편 약간 뒤쪽에는 세 명의 괴승(怪僧)이 품자(品字)형을 이룬 채 정좌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핏빛의 가사를 입고 있어 몹시 사이한 느낌을 주었다. 그들은 나이가 백 세가 넘어 보였는데 눈썹이 길게 자라 귀밑까지 늘어져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들은 중원인이 아닌 듯 했다. 움푹 꺼져 들어간 눈과 상대적으로 높은 코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또 다른 인물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다름아닌 건곤방의 방주인 건곤혈마(乾坤血魔) 파 극소와 백면음마, 삼지신마, 독각괴마 등이었다. 다만 그들은 다른 자들과는 달리 공손한


자 세로 팔을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지금 그들은 바위 위에 서서 운해(雲海)를 뚫고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고 있는 듯 했 다. 아닌게 아니라 해가 뜨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일출을 감상한다고 보는 것은 무리였다. 남안탕상의 옥현봉. 무림의 이목이 온통 집중되고 있는 이곳에서 일출을 감상한다면 세 살 먹은 어린아이라도 믿지 않을 것이 다. 문득 홍의청년이 중얼거렸다. "요극천(姚剋千)에게서는 소식이 없는가?" 그러자 그의 왼쪽에 서 있던 사신궁주 사태극이 급히 대답했다. "네, 아직 기별이 없습니다." 이어 사태극은 약간 망설이는 듯 하더니 미심쩍은 어조로 물었다. "소종사(少宗師), 요극천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무영귀도가 평생을 걸쳐 이룩해 놓 은 천궁석부(天弓石府)를 열 수 있을까요?" 소종사라 불리운 청년은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지었다. "사궁주(史宮主), 요극천을 절대로 얕보지 마라. 무공은 그대보다 약할지 모르지만 귀계(鬼 計)와 잡학(雜學) 분야에서는 그를 따라갈 자가 없다." 담담하나 심혼을 압도하는 듯한 음성이었다. 사태극은 가슴이 짓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청년은 부리부리한 눈에 언뜻 신비한 광채를 발하며 덧붙였다. "하지만 요극천은 탐심 역시 많은 자다. 사궁주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 사태극은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침묵하기만 했다. "그 자는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를 도우려는 게 아니다. 다만 혼자 힘으로는 천궁석부의 보 물을 취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일단 합작하려는 것이다. 보물을 발견한 뒤에는 어떻게 변 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말에 우측에 서 있던 뚱보 금의노인이 축 처진 두 뺨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결국 그 놈도 위험인물이 아닙니까?" 문득 홍의청년의 눈에서 섬뜩한 안광이 흘러나왔다. "마령궁주(魔靈宮主), 그대는 본좌가 그 정도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 마령궁주는 그만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홍의청년의 눈빛을 접한 순간 그만 온몸이 오그라


들 정도로 위축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는 비대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겁을 집어먹고 있었 다. "속... 속하는 단지." 이때였다. 휙휙휙......! 옷자락 날리는 소리와 함께 바위 위로 십여 명의 인영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들은 한결같이 흑의에 복면을 하고 있었는데 바위에 올라서자마자 일제히 홍의청년에게 부복했다. 청년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마령제일호(魔靈第一號), 근처를 살펴 보았느냐?" 부복해 있던 한 복면인이 더욱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네! 과연 소종사님의 예측대로 옥천봉 일대에는 많은 고수들이 은닉하고 있습니다. 청년은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흘렸다. "후후, 먹을 게 있으면 파리떼가 꼬이게 마련이지."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다시 절봉 아래 자욱하게 깔려있는 운해를 바라보고 있었 다. 문득 그의 짙은 눈썹이 미미한 흔들림을 보였다. 네 명의 거한(巨漢). 그들은 상체를 벌거벗고 있었다. 그로 인해 바위처럼 단단한 근육이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 었다. 지금 그들은 한 채의 가마를 멘 채 날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신장이 구 척에 달하는대다 피부는 구릿빛을 띄고 있어 마치 철인(鐵人)을 연상케 했다. 그들은 가마를 멘 채 험한 바위가 불쑥불쑥 솟아있는 가파른 절봉을 마치 평지처럼 가볍게 올라오고 있었다. 홍의청년은 운해를 뚫고 그들을 발견했다. 그는 거한들이 메고 있는 가마를 보자 짙은 눈썹 을 슬쩍 찌푸리고 있었다. 잠시 후 가마는 바위 위로 올라왔다. 거한들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가마를 극히 조심스럽 게 바닥에 내려놓고 있었다. 홍의청년은 가마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군( 君),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곳까지 왔소?" 그러자 가마 안으로부터 차분하게 가라앉은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정말 내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모르시나요?" 그러자 홍의청년은 침묵했다. 가마 안에서는 가벼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정말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냉담해지는군요." 홍의청년은 자르듯 차갑게 말했다. "동감이오." 가마 안의 여인의 음성이 다소 높아졌다. "이제는 과거를 부정하려고까지 하는군요. 당신은 정말 변해도 너무 변했어요.


대종사(大宗 師)님의 제자가 된 이후로 이전의 다정다감함은 어디로 가고......" "말 삼가시오." 홍의청년의 음성이 냉랭해졌다. 그는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비단 여군, 당신일지라도 내 스승님을 함부로 입에 올리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소." 차르르륵! 마침내 가마의 주렴이 좌우로 갈라지며 한 여인이 나왔다. 취록색 궁장(宮裝)을 걸친 미녀였다. 머리를 구름처럼 틀어올린 이 궁장여인은 대략 이십이 삼 세 쯤 되어 보였다. 고아해 보이는 그녀는 봉황을 닮은 눈에 원망과 회한을 담은 채 청 년을 응시하고 있었다. "해도 너무 하는군요. 당신으로 인해 무림이 얼마나 큰 혼란을 겪고 있는지 알기나 하나 요?" 그러나 그녀를 마주한 청년의 눈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궁장미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듯한 태도였다. 궁장여인은 낙심하여 가볍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건곤혈마와 그밖의 무 리들이 시립하고 있었다. 그들을 본 궁장여인의 고운 아미가 잔뜩 찌푸러들었다. "이제야 당신이 변한 이유를 알겠어요. 저런 사도의 무리들과 늘상 어울리니......." "뭣이?" 건곤사살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대살인 건곤혈마 파극소는 물론, 특히나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삼지신마 정호는 안면을 씰룩이며 흉소를 흘렸다. "흐흐흐....... 낭자, 대체 얼마나 명줄이 길기에 그런 말을 하는거지?" 궁장여인이 그를 힐끗 보더니 경멸하듯 말했다. "흥! 당신이야말로 오래 살려면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돌려야 할거예요." 그녀의 태도는 가히 안하무인이었다. 홍의청년에 대한 유감이 그에게로 퍼부어진 셈이었다. "이... 이......" 삼지신마는 마침내 인내의 한계를 느낀 듯 홍의청년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소종사! 속하가 손을 쓰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청년은 힐끗 그를 바라보더니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정호, 출수하는 것은 그대의 자유다. 하지만 당신의 실력으로는 그녀의 옷자락 하나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그 말에 삼지신마를 비롯한 주위의 모든 인물들은 안색이 크게 변하고 말았다.


'설마 그럴 리가!' 물론 당사자인 정호는 더욱 더 믿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는 허락이 떨어졌다고 생각되자 두 눈에 살광을 폭사하며 궁장여인을 향해 장력을 날렸다. 우우웅! 웅후한 파공성과 함께 위맹한 장력이 뻗어나갔다. 그때였다. 가마를 메고 왔던 네 명의 건한 들 중에서 한 명이 앞으로 나서더니 그의 장력을 받아쳤다. 꽝! 마치 천근 바위가 박살나는 듯한 폭음이 울렸다. "억!" 비명은 정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는 거대한 암벽을 친 듯 손목에서 어깨까지 온통 울 리는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 이런 빌어먹을!" 삼지신마는 격분한 나머지 이번에는 자신의 절기인 삼음홍화지를 퉁겨냈다. 슈슈슉!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거한은 그의 지력을 마주하여 주먹을 날렸던 것이다. "큭!" 삼지신마는 손가락이 몽땅 부러져 나간 듯한 격통을 느끼며 뒤로 비칠비칠 물러섰다. "호호호!....... 금강사위(金剛四衛)는 금강불괴지신이므로 천하의 그 어떤 것에도 손상되지 않 아요." 궁장여인의 조소가 울렸다. "그, 그럴 수가!" 삼지신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감히 다시 공격할 엄두는 내지 못한 채 안면만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때 홍의청년이 냉랭하게 말했다. "물러나라, 정호." 삼지신마는 마지 못한 듯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분노의 눈으로 궁장여인과 거한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때였다. 문득 하나의 인영이 바위 위로 날아 올라왔다. 그는 육순 가량 되어 보이는 청수 한 인상의 백의노인으로 두 눈에는 혜광(慧光)이 가득 서려 있었다. 그는 긴 머리카락을 문사건으로 단정히 묶어 넘겼으며 검은 수염을 가지런히 기르고 있어 품위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백의노인은 손에 검은 색의 죽통(竹筒) 하나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점(占)를 치는데 사용 하는 도구인 듯 했다.


그가 나타나자 홍의청년의 눈이 가늘어졌다. "요도주(姚島主), 일은 얼마나 진척되고 있소?" 백의노인은 다름아닌 요극천이었다. 그는 현기 어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무영귀도는 대단한 인물이외다. 천궁석부의 기관은 고금을 통털어 기관지학(機關之 學)의 집대성이라 할만한 곳이오. 노부 평생 이처럼 복잡하고도 완벽한 밀부(密府)는 처음 보았소." 홍의청년은 차가운 음성으로 반문했다. "그럼 접근하기가 불가능하단 말이오?" 요극천은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소종사께선 노부의 능력을 너무 얕보는 것 같소이다." "그렇다면?" "다만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외다." 청년은 눈빛을 번쩍이며 물었다. "어느 정도면 되겠소?" 요극천은 손가락 두 개를 꼽아 보였다. "이틀이면 되오." 청년은 잠시 요극천을 바라보더니 문득 음침한 음성으로 말했다. "요도주, 본좌는 당신의 말에 추호의 거짓이 없기를 바랄 뿐이오." 요극천은 펄쩍 뛸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종사!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오? 노부가 어찌 거짓말을 한다 생각하시오?" 홍의청년은 느닷없이 대소를 터뜨렸다. "일테면 그렇다는 말이오. 하하핫핫핫!" 그는 낭랑한 웃음을 터뜨리면서 자연스럽게 요극천의 어깨를 쳤다. 그의 동작은 얼핏 보기 에는 가볍게 두드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요극천은 기절할 듯 놀라고 있었다. 그는 청년의 손이 닿는 순간 마치 어깨가 부서질 것만 같은 통증을 느낀 것이었다. "허허허....... 소종사께서는 농담을 즐기시는구려." 요극천은 역시 지혜가 깊은 위인이었다. 그는 비록 어깨 한쪽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 꼈으나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으며 홍의청년을 마주본 채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핫핫핫핫핫......!" "허허허......."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한동안 길게 웃음을 터뜨렸다. 각기 웃음 속에 비수(匕首)를 숨기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주변의 인물들은 그만 가슴 이 써늘해지는 것을 금치 못했다. "요도주, 시간이 급하오. 그러니 좀더 서둘러 주시오."


홍의청년의 말에 요극천은 대답 대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장내의 인물들을 한 차 례 둘러보았다. "그럼, 가보겠소이다." 요극천은 신형을 날렸다. 그가 사라지자 사태극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과연 소종사의 추측대로 저 자는 다른 뜻을 품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내심을 도통 드러내지 않으니......" 홍의청년은 문득 냉랭하게 말했다. "염려할 것 없다. 그 자가 아무리 머리를 굴린다 해도 결국 본좌의 계산 속에 있으니 마음 을 돌리는 순간 저승 문턱으로 떨어질 것이다." 이번에는 마령궁주가 의혹의 표정을 띄우며 말했다. "소종사, 한 가지 이해가 안가는 일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천궁석부의 일은 비밀 중에도 비밀에 속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널리 알려지게 됐느냐는 점입니다." 홍의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하다. 누군가 일부러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일부러 소문을?" 홍의청년은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만일 나였더라도 그런 소문을 퍼뜨렸을 것이다." "아니, 무엇 때문에......?" "후후, 천궁석부의 기관장치를 해결하지 못하면 어떤 자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만일 장 보도를 손에 쥐고 있다면 걱정할 것이 없지 않느냐? 그렇다면 경쟁자들을 불러들여 천궁석 부의 가공할 기관장치의 힘을 빌어 처치하려 들 것이 아닌가?" "아!" 마령궁주를 비롯한 마두들은 한결같이 탄성을 발했다. 동시에 그들은 홍의청년의 치밀한 생 각에 가슴이 써늘해지는 것을 금치 못했다. 홍의청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소문이 맞는다면 장보도는 현재 북해 사태청의 수중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들의 실력으 로 보아 별다른 변수가 없는 한 우리와 정면으로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본격적인 대비를 해야 한다." 마령궁주를 비롯한 마두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였다. 가장 후미진 곳에 조용히 정좌하고 있던 세 명의 괴승들 중에서 한 명이 눈을 번쩍


떴다. 그가 눈을 뜨자 흡사 번갯불같은 푸른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소종사, 근처에 누군가 도착했소이다." 그 말에 홍의청년은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과연 오가륵(烏迦勒) 대사답소이다. 벌써 알아 채다니." 그러자 오가륵이라 불리운 괴승은 고개를 흔들었다. "겸양 마시오. 소종사가 먼저 알아냈다는 것을 알고 있소이다." 그 말에 아연실색한 것은 다른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 다. 그들은 안색이 변해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누구냐?" "썩 나서지 못하겠느냐?" "흐흐흐흐흐......!" 문득 음산한 웃음소리와 함께 바위의 좌측으로부터 다섯 줄기 인영이 연기처럼 날아와 그들 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장내 인물들의 안색이 일제히 변하고 말았다. 제 20 장 · 풍운(風雲)의 옥현봉(玉玄峰) 그들은 각각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선 우측의 인물은 칠 척의 장대한 체구를 가진 청수한 노인이었다. 그는 백발은염이 멋지 게 조화되어 범상치 않은 기품을 풍기고 있었다. 또한 눈에서는 서늘한 안광을 흘리고 있었 다. 그의 옆에는 한 명의 중(僧)이 서 있었다. 그는 붉은 가사에 역시 붉은 색의 혁화, 심지어는 얼굴색마저 붉었다. 그는 손에 혈옥(血玉)으로 된 불장(佛杖)을 짚고 있었다. 두 사람의 뒤쪽으로는 목상(木像)인 양 뻣뻣한 모습으로 흑의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검은 색의 도(刀)를 쥐고 있었으며 인상은 섬ㅉ하기 그지없었다. 오른쪽 이마로부터 왼쪽 턱에 이르기까지 길게 검흔(劍痕)이 그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의 옆에는 대머리에 황삼을 걸친 대두괴인(大頭怪人)이 서있었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가 한 배 반은 커보이는 대두괴인의 눈을 퉁방울처럼 튀어나온 채 감았다 뜰 때마다 번갯불같 은 안광을 폭사하고 있었다. 마지막 인물은 더욱 괴이한 모습이었다. 그 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백색 천으로 칭칭 휘감고 있었다. 외부로 노출된 곳은 오직 두 개의 눈구멍 뿐이었다. 마치 관 속의 시체가 걸 어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이들을 보자 사태극은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우내오마(宇內五魔)......!" 그 말에 장내는 찬물을 뿌린 듯이 조용해 졌다. 중인들은 한결같이 안색이 변하고 있었다. 우내오마는 희세의 대마두들로 지금으로부터 오십여 년 전에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던 인물 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천신(天神), 혈승(血僧), 사도(邪刀), 마안(魔眼), 귀견수(鬼見愁) 등으로 불리우는 우내오마는 가공할 무공을 지닌 전대거마들이었다. 사태극은 심장이 박동하는 것을 느끼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 노마두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니.......' 이때 그를 바라보며 선두의 오른쪽에 서 있던 인물, 즉 천신이 은염을 쓰다듬으며 기품있게 말을 건넸다. "오랫만이군? 사태극." 사태극은 흠칫 놀랐으나 곧 무거운 음성으로 답했다. "으음. 천신, 용케도 아직 살아 있었구려." 그 말에 천신은 문득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허헛! 사태극, 우리가 비록 늙기는 했지만 아직도 죽을 때는 안 되었다." 사태극은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그럼 당신들도 천궁석부를 노리고 이곳에 온 것이오?" 천신은 주위의 인물들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물론이지." 사태극은 음소를 흘렸다. "흐흐! 과연 당신들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그 말에 천신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사태극, 오십 년 전에도 너는 우리들 중 한 명과 간신히 평수를 이루었었다." 사태극은 입가에 조소를 띄웠다. "흐흐, 그 동안 오십 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어찌 옛날과 비할 수 있단 말이냐?" 사태극의 말투는 어느새 변해 있었다. 천신은 눈을 더욱 가늘게 하면서 말했다. "오, 그럼 너는 그 동안 괴공이라도 연마했단 말이냐?" "흐흐흐......." 사태극이 아무 말도 않고 괴소만 흘리자 천신은 은염을 쓰다듬으며 점잖게 말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른다더니 널 두고 하는 말이구나. 사태극, 그 동안 우리는 잠만 자고 있었 을 줄 아느냐?" 그 말에 사태극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뭐라 다시 대꾸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갑자기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사궁주, 그대는 그만 물러나라." 홍의청년이었다. 사태극은 즉각 뒤로 물어났다. 청년은 우내오마를 향해 냉정한 시선을 던지


며 말했다. "우내오마, 그대들의 명성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 왔소." 천신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를 주시하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바로 혈영마황전의 소종사란 아이냐?" 홍의청년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 알아봐 주니 고맙구려." "허허허! 천하에서 혈영마황전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겠느냐?" "과찬이오." 문득 천신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소종사, 내 자네에게 한 마디 하겠네. 이번 일을 혈영마황전에서 중심이 되어 추진한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가?" 홍의청년은 짐짓 반문했다. "무슨 일을 말하는 것이오?" "허허, 천궁석부를 혈영마황전이 공개적으로 열겠다는 소문은 이미 강호 전역에 쫙 퍼졌네. 이제와서 부인하겠다는 것인가?" 그 말에 중인들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언제 혈영마황전이 천궁석부를 열겠다고 했는가? 그것도 공개적으로 추진하다니? 그러나 홍의청년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는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오. 본전은 확실히 강호에서 혈겁을 조성하고 있는 천궁석부를 공개적으로 열려하고 있소." 군마들은 한결같이 안색이 변했다. 대체 홍의청년의 진의를 파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천신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좋은 일이야, 정말 좋은 일. 그렇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강호의 안녕을 위해 참여하고 싶은 데 받아줄지 모르겠군?" 군마들은 내심 욕설을 퍼부었다. '교활한 놈! 뭐, 강호의 안녕을 위한다고?' 그러나 이때 홍의청년의 흔쾌한 대답이 들렸다. "좋소. 환영하는 바이오." 실로 예상밖의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년의 그 말은 군마들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 었으며 상황을 급변시키는 중대한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소종사! 아니되오, 어찌 그럴 수가?" 사태극이 황급히 나서며 반대했다. 그러나 홍의청년은 그를 보지도 않고 잘라 말했다. "사궁주는 나서지 말라. 이 일은 본좌가 결정한다." 그러나 사태극은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그는 과거 우내오마와 구원(舊怨)이 있었으므로


함 께 행동하는 것이 결코 달갑지 않은 입장이었다. "소종사, 함부로 결정했다가 대종사의 문책을 어찌 감당하려고 이러십니까?" 순간 홍의청년의 눈빛이 무시무시한 광채를 폭사했다. "닥쳐라! 사태극, 지금 너는 누구의 명을 듣도록 되어 있느냐?" "그건... 소종사님의......" 사태극의 안색이 무참하게 구겨졌다. "이곳에서는 내 말이 곧 법이다. 명을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어떤 벌도 내릴 수 있다. 너는 감히 항명(抗命)할 셈인가?" "소... 소종사!" 놀라운 일이었다. 사태극은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바위에 박는 것이 아닌가? "속하 감히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용서하십시오." "......!" 우내오마는 일제히 안색이 변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사태극을 잘 알고 있었다. 사태극은 우내오마의 일인과 필적할만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마도에서 사태극의 영향력은 결코 무 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약관에 불과한 일개 청년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리라고 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홍의청년은 차갑게 말했다. "좋다, 이번만은 용서하마, 그만 일어나도 좋다." "고맙습니다. 소종사......." 사태극은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린 후 일어섰다. 오내오마는 이같은 사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저 소종사... 아니 혈영마황전의 위세가 어느 정도이길래 천하의 사태극이 저런 저자세를 보인단 말인가?' 이때, 홍의청년의 담담한 음성이 다시금 장내를 울렸다. "본좌는 탐욕 때문에 천궁석부를 열려는 것이 아니오. 오직 무림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요. 그러므로 뜻있는 무림동도들의 참여를 적극 권장하는 바이오." 그 말에 우내오마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스쳤다. 그들은 도무지 홍의청년의 심중을 짐작할 길이 없었다. "허허허! 과연 혈영마황전의 소종사답게 흉중이 넓구려. 노부는 탄복을 금치 못하겠소." 천신의 말에 홍의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누구라도 이 일에 참가를 원한다면 지금 즉시 나서시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목청을 돋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말은 진심이오?" 홍의청년은 눈꼬리를 가늘게 하며 말했다. "호오! 이제 보니 주위에 많은 분들이 계셨구려." 휙! 휙휙! 파공성과 함께 바위 뒤편으로부터 세 줄기 인영이 몸을 날려 모습을 드러냈다. 세 사람은 모두 음침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가운데 인물은 백의에 안색이 얼음장처럼 투 명해 보였으며, 좌측의 인물은 흑의를 입었으며 등 뒤에 십자 모양으로 검은 깃발을 꽂고 있었다. 우측의 인물은 깡마른 청의노인으로 그는 양쪽 손톱을 한 자가 넘게 기르고 있었다. 손톱은 갈쿠리처럼 날카로웠는데 푸르스름한 빛을 띄고 있었다. 가장 먼저 그들의 정체를 알아본 것은 사태극이었다. "설산신마(雪山神魔)에 흑풍마번(黑風魔幡), 게다가 철마신조(鐵魔神爪)까지 나타나다니......." 그들은 바로 당금무림을 표현하는 노래 속에 나오는 강북사마(江北四魔)에 해당하는 자들이 었다. 강남오가(江南五家)와 더불어 강북에는 사마가 있다는 말은 오랫동안 노래로 불리워지 고 있었다. 홍의청년은 그들을 바라보며 가볍게 포권했다. "이제보니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세 분도 오셨구려." 안색이 희다못해 창백해 보이는 인물, 즉 설산신마가 답했다. "소종사가 방금 청하지 않았소?" 철마신조가 괴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종사의 말대로 우리는 뜻을 함께 하는 무림동도요. 그렇지 않소?" 홍의청년은 그들을 쓸어보더니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물론 틀림없는 사실이외다. 본좌는 한 번 한 말은 절대로 번복하지 않소." 설산신마와 흑풍마번, 철마신조 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의 흉중에 도사린 암계 (暗計)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쉴새 없이 눈알을 굴리고 있는 것만 봐도 그들이 결코 선한 생각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한 사람, 이 자리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가마를 타고 왔던 궁장 여인이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에 시종 근심스런 표정을 띄운 채 안타까운 시선으로 홍의청년을


응시 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한숨을 쉬며 가마 안으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러나 홍의청년은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며 음성을 높이고 있었다. "아직까지 숨어있을 필요가 있을까? 모두들 모습을 보여 주시오!" 그의 외침에 사방에서 무수한 인영들이 바위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각양각색의 인 물들이었다. 다만 지금까지 나타난 인물들과는 부류가 틀린 자들이었다. 즉, 마도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대부분 정파무림의 인물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구파일방(九派一 )에 속한 인물들이 가장 많았다. 즉 소림(小林), 무당(武當), 아미(蛾嵋), 곤륜(崑崙), 화산(華山), 형산(衡山), 공동( ), 점창(點 蒼), 청성파(靑城派)와 대강남북(大江南北)에 가장 방대한 조직과 인원을 거느리고 있는 거 지들의 단체인 개방( 幇)의 인물들이 대다수였다. 그 중 형산, 공동, 점창, 청성파는 백 년 전 참화를 입은 이후 간신히 그 맥만 이어 내려오 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모두 회동한 것 같았다. 기실 구파일방은 지난 날에 비해 그 위세가 보잘 것 없을 정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따라서 군마(群魔)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만 그들이 이곳에 온 것은 천궁석부 속에 자파의 실종된 무공비급들이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구파일방의 고수들 중에는 얼마 전 강남제일보에서 나타났던 소림의 강인대사와 무당의 옥 허자도 있었다. 한편 구파일방의 고수들 외에도 쟁쟁한 무림의 명숙들이 거의 대부분 운집된 상황이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들은 강남오가(江南五家)였다. 그들은 가주들이 직접 수하들을 거 느린 채 이곳에 직접 나타난 것이었다. 강남제일보주인 금검철선 구궁산, 악가장(岳家莊)의 장주인 신주제일검(神州第一劍) 악천비, 은창부(銀槍府)의 부주인 은창무적 패인도, 또한 신응문(神鷹門)의 문주인 신응노옹(神鷹老 翁)과 그의 애녀인 신응녀 임청하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현재는 멸절해 버린 백원곡의 백원노인(白猿老人)도 두 손자녀와 함께 모습을


보이 고 있었다. 이들은 각기 한 지역을 주름잡고 있는 패주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나타남으로써 강남무림 전체가 동원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밖에도 명망있는 고수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그로 인해 넓은 바위가 비좁다 못해 빽 빽하게 들어차게 되었다. 홍의청년은 그들을 일일이 둘러보고 나서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자! 또 나설 분은 없소?" 더이상 반응이 없었다. 홍의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이것으로 더이상의 참가자는 없는 것으로 알겠소." 이때였다. "잠깐만!" 중인들의 촉각이 일제히 곤두서는 찰나, 바위 우측의 모퉁이로부터 다섯 명의 인물이 서서 히 모습을 드러냈다. 추악하기 그지없는 용모의 한 청년서생을 비롯하여 두 명의 하인 차림 의 중년인, 그리고 두 명의 귀엽게 생긴 동자(童子)였다. 그들은 다름아닌 백천기와 그 일행이었다. 이들의 출현에 가장 놀란 것은 홍의청년이었다. 사실 그는 주변에 은닉하고 있던 고수들의 숫자를 정확히 헤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나타나자 회심의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천하에서 그의 영민한 이목을 벗어날 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그는 마지막으로 나타난 오 인에 대해서만은 조금도 인기척을 감지해 내지 못했던 것이다. 실상 홍의청년의 청각으로 이르자면 사방 백여장 거리 안에서는 어떤 움직임도 놓치지 않을 정도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것도 오 인은 바로 바위에서 오 장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불쑥 나타난 것이었다. '으음! 내 청력으로도 이 자들이 가까이 접근한 사실을 몰랐다니.......' 아무튼 안색이 적지 않게 굳어진 홍의청년은 백천기를 노려보며 물었다. "당신들은 어느 방면에서 왔소?" 백천기는 추한 얼굴로 군웅들을 둘러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우리는 새외(塞外) 쪽에서 왔소. 마침 이곳에 무영귀도란 자가 만들어 놓았다는 천궁석부가 있다길래 구경차 온 것이오." 그는 군웅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있는 줄은 몰랐소. 과연 무영귀도란 자가 꽤나 유명한


모양이 오?" 홍의청년은 오만하게 말했다. "천궁석부를 구경하는 일은 어렵지 않소. 하지만 그러기 전에 한 가지 갖춰야 할 조건이 있 소." 백천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뭐요? 천궁석부가 당신의 소유라도 된단 말이오? 듣느니 금시초문인데......." 홍의청년은 눈빛을 번뜩이며 말했다. "보다시피 이곳에 모인 군호들은 하나같이 절정고수들이오. 또한 그밖에도 많은 인물들이 주위에 몰려와 있소."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오?" "만일 일정한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극심한 혼란이 빚어질 것이오. 다시 말해 참가 자격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뜻이오." 그 말에 백천기는 짚히는 바가 있었다. '무공을 시험하겠다는 뜻이군. 또한 무공으로 우리의 정체를 파악하겠다는 것이고.' 백천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당신의 뜻을 받아 들이겠소." 이어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내 하인들은 약간이나마 무공을 가지고 있소. 당신이 원하는만큼 시험해 보도록 하시오. 홍의청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건방지게 하인을 내세우자 자존심이 상한 것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한쪽에 시립하고 있던 흑의복면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령 육호(六號)." "넷!" 한 명의 키가 큰 흑의복면인이 앞으로 나왔다. 백천기도 전우진을 향해 명령했다. "흑진(黑進), 네가 나가라." "넷!" 전우진도 시원스런 대답과 함께 앞으로 나섰다. 그는 비록 황궁의 제일고수였으나 지금은 일개 하인의 모습일 뿐이었다. 마령육호와 전우진은 일 장여의 거리를 두고 대치했다. 이때였다. 전우진은 흠칫 놀랐다. 갑자기 자신의 명문혈로부터 한 줄기 기이한 암류가 물밀 듯이 밀려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암류는 그의 본신진기와 합쳐져 순식간에 그의 내공이 증진되었다. 그것은 백천기가 보낸 것이었다. 그는 단번에 군웅들을 놀라게 하려는 의도를 품은 것이었


다. 전우진은 그의 뜻을 파악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라!" 기합성과 함께 마령육호가 그를 향해 쌍장을 뻗었다. 우우웅! 그의 장력은 회오리 기류를 일으키며 전우진의 단중(檀中)으로 날아갔다. 전우진은 슬쩍 손 바닥을 뒤집어 흔들었다. 우르릉... 꽈앙! "크으윽!" 놀라운 일이었다. 마령육호는 마치 거대한 철퇴로 얻어 맞은 듯이 뒤로 삼 장이나 날아가 처박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바닥에 떨어진 후 한동안 일어서지도 못하고 전신을 경련하고 있었다. "아, 아니?" 군웅들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놀란 것은 홍의청년도 마찬가지였다. 마령사자는 혈영마황전에서 적어도 이류급에 해당하는 고수들이었다. 강호에서 치자면 능히 수준급의 인물인 그들이 상대방, 그것도 일개 하인에게 이 지경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백천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물었다. "어떻소? 더 시험해야 하오?" 홍의청년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본좌가 미처 몰라 봤소. 이젠 됐소이다." 백천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맙소. 그럼 참가해도 되는 것으로 알겠소이다." 군웅들은 모두 경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백천기 일행의 정체에 대해 의혹을 금 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정체를 아는 자가 없었다. 옥현봉의 정상. 그곳에는 여러 채의 막사(幕舍)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것은 혈영마황전이 설치한 것으로 수 십 개나 되었다. 멀리서 보기에는 날카롭게 보였으나 막상 옥현봉의 정상은 분지(盆地)로 되어 있어 수많은 군웅들이 운집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밤이 되자 막사마다 환하게 불이 밝혀졌다. 그것은 색다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옥현봉 정


상이 온통 불야성으로 화한 것이었다. 밖은 비록 한겨울이었으나 막사 안에는 특별히 마련된 대형 화로(火爐)가 설치되어 있어 벌 겋게 단 불로 후끈한 열기를 띄우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혈영마황전이 이번 일에 상당히 오랫동안 준비를 했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었 다. 한 막사 안, 지금 그곳에는 간이탁자를 가운데 두고 백천기 일행이 무엇인가를 상의하고 있 었다. 막사에는 채홍평만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우문경과 한 채의 막사를 배정 받았는데 백천기 는 우문경만 불러낸 것이었다. 전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인, 아무래도 이번 일은 심상치가 않습니다. 향후의 일을 조금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이 자리는 애초의 뜻과 다르다는 느낌입니다." "무슨 뜻이오?" 백천기가 묻자 현무호도 동감인 듯 말했다. "대인, 우리는 관부(官府) 소속입니다. 이번 일이 무림에 있어서는 중대사이긴 하지만 태성 왕 전하의 명과는 관련이 없지 않습니까?" 백천기는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두 분은 이 일에서 손을 떼자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전우진과 현무호는 동시에 대답했다. 다만 우문경만이 뜻을 달리 하는 듯 눈살을 가볍게 찌 푸릴 뿐이었다. 백천기의 입에서 문득 신비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후훗, 두 분의 뜻은 알겠소. 하지만 내가 아무 생각없이 이번 일에 나섰다고 생각하시오?" "......?" 전우진과 현무호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다만 우문경은 입가에 생긋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백천기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번 일이 우리의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왜 이곳까지 왔겠소? 설마하니 황실의 위엄 을 과시하기 위해 왔다고 생각하시오?"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한 가지만 얘기하겠소. 그것은 천궁석부 안에 능히 일국을 일으킬만한 막대한


보화(寶貨)가 있다는 것이오." "아!" 현무호는 불현듯 깨달은 듯 입을 벌렸다. "그, 그렇다면...... 이번 일에 무성왕까지 연관되었단 말입니까?" 백천기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 확실히 드러난 사실은 없소. 그러나 무성왕이 단독적으로 거사(擧事) 하리라고는 생각 되지 않소. 그에게는 배경이 있을 것이오. 어쩌면 혈영마황전을 등에 업고 있는지도 모르오. "......!" 중인들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무성왕이 무림 인과 손을 잡고 황실을 전복하려 한다면 실로 가공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문득 전우진이 고개를 숙였다. "용서하십시오, 대인. 속하가 대인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함부로 입을 놀렸습니다. 추후로는 결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백천기는 그저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대인......." 현무호가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자 우문경이 짜랑짜랑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저는 대인의 뜻을 헤아리진 못했으나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대인 이라면 결코 쓸데없는 일에 나설 분이 아니니까요." 백천기는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이제 장내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그들은 한동안 여러 가지를 논의한 후 헤어졌다. "대인, 그럼 편히 쉬십시오." 현무호가 고개를 숙인 후 먼저 막사를 나섰다. 전우진도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런데 우문경은 뭔가 아쉬운 듯 머뭇거렸다. 그녀는 백천기를 바라보며 뭐라 말하려는 듯 했으나 한숨을 쉬며 몸을 돌리고 있었다. 백천기는 혼자 남게 되자 상념에 잠겼다. 이 며칠간 일어난 많은 변화들로 인해 머리가 복 잡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는 총명한 두뇌로 한동안 생각하자 하나하나 정리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앞으로 행동해야 할 일들의 우선순위를 결정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무엇을 생각했는지 품 속에서 한 줌의 동전을 꺼냈다. 이어 그는 동전을 탁자 위에 뿌렸다.


짜르륵! 동전은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 백천기는 눈을 가늘게 한 채 은전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는 온 신경을 집중했다. 마치 무 엇인가를 계산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서히 그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그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럴 수가... 이렇게 지독하다니!" 그는 동전을 움켜쥔 후 탁자 위에 다시 뿌렸다. 새로운 형태로 뿌려진 동전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안색은 더없이 침중해지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놀랍구나. 천궁석부야말로 죽음의 함정이다. 서른여섯 개의 방위(方位) 모두가 사문(死門)만 으로 이루어져 있는 지옥의 진세(陣勢)라니......." 그는 동전의 형태를 다시 오랫동안 살펴 보았다. "막아야 한다. 이대로 몰려 들어가면 개죽음할 뿐이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다시 일다경이 흘렀을 때 그는 눈을 뜨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 하지만 누가 내 말을 믿어줄 것인가? 그들은 하나같이 탐욕에 눈이 어두워 있다. 게다 가 날 믿지 않을 것이니......' 백천기의 안색은 잔뜩 흐려지고 말았다. 이때였다. 문득 밖으로부터 누군가의 조심스런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여인의 음성이었다. "백공자님, 들어가도 되겠어요?" '음? 채낭자가?' 백천기는 의외라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들어오시오. 낭자." 막사 한쪽이 살며시 걷히며 채홍평이 들어섰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는 그녀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요염함을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백천기를 곁눈으로 바라보며 나긋이 허리를 숙였다.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요? 백공자님." 백천기는 빙그레 웃었다. "괜찮소이다." 그러자 채홍평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에요." "앉으시오. 채낭자." 채홍평이 약간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권하는 대로 의자에 걸터 앉았다. "그래, 무슨 일이오?"


채홍평은 붉은 입술을 잘근잘근 물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어,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무엇이오?" 채홍평은 그윽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들어주실 수 있겠어요?" 백천기는 의아한 느낌이 들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들어 주리다." 그러자 채홍평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저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세요." 뜻밖의 부탁에 백천기는 아연한 느낌이었다. "무공을? 아니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소?" 그러자 채홍평의 양쪽 끝이 살짝 치켜올라간 매력적인 눈에 언뜻 한기가 어렸다. "이유는 묻지 말아 주세요. 공자님, 다만 이것이 소녀의 평생 소원이라는 것만은 알아주세 요." 그런 그녀의 말에는 절박함이 어려 있었다. "그렇게 절실하단 말이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이 밤에 공자님을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부탁이에요, 네?" 백천기는 한동안 침묵했다. 채홍평은 초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백천기는 한 숨을 쉬었다. "으음, 좋소이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정색을 지으며 말했다. "나 역시 사문을 내세울 입장이 아닌지라 함부로 무공을 전수할 수는 없소. 그러니 한 가지 만 가르쳐 주겠소." 그 말에 채홍평의 눈에서 언뜻 교활한 기운이 스쳐갔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백천기는 담 담하게 물었다. "어떤 것을 배우고 싶소?" 채홍평의 표정이 갑자기 차갑게 변했다. "천하에서 그 어느 누구라도 단 일 초에 죽일 수 있는 무공을 가르쳐 주세요." "......!" 백천기는 그만 안색이 변했다. 채홍평의 야무진 음성이 다시 들렸다. "만일 공자님께서 소녀의 청을 들어주신다면 소녀는 어떤 짓이라도 하겠어요. 공자님께서 원하시는 어떤 일이라도." 그녀의 말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백천기도 일침을 놓는 것을 잊 지 않았다.


"좋소. 솔직히 내키지는 않는 일이지만 내게도 조건이 있으니 일단 낭자의 청을 들어 주겠 소." 그러자 채홍평은 두 눈을 가늘게 좁히며 거듭 강조했다. "반드시 일 초로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무공이어야 해요." 백천기는 엄숙하게 말했다. "좋소, 낭자가 원하는 무공을 가르쳐 주겠소." 채홍평은 눈을 반짝이며 신경을 집중했다. "이 초식의 이름은 마혼인(魔魂印)이라고 하오." "마혼인?" 백천기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이것은 단 일 초지만 숙달되기만 한다면 천하에서 막을 자가 거의 없을 것이오." 마혼인은 검마 잔유성이 남긴 마혼칠검(魔魂七劍)의 최후 초식이었다. 채홍평은 이름만으로 그 검법이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흡족 한 미소를 지으며 온 신경을 집중해 백천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백천기는 한 쪽에 세워 두었던 마혼백혈검을 잡았다. 스르르릉! 검이 뽑히자 한 가닥 용의 울음소리와 함께 막사 안은 백광으로 휘황해졌다. 채홍평의 얼굴이 동요를 일으켰다. 마혼백혈검은 그녀로서는 평생 처음 보는 보검(寶劍)이었 기 때문이다. 츠츠츳! 백천기는 마혼인을 펼쳐 보였다. 그러나 워낙 변화가 무궁하여 채홍평의 눈에는 한 마리의 백룡(白龍)이 춤을 추는 것 같은 환상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검법의 변화를 주시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는 가공할 집념이 느껴지고 있었다. 백천기는 검법 시전을 끝내고는 마혼백혈검을 거두었다. "어떻소? 알아볼 수 있겠소?" 뜻밖에도 채홍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모두 기억했어요." 백천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의혹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 "낭자는 이 초식의 변화를 몇 가지나 기억했소?" 채홍평은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그 초식에는 도합 백팔십 가지의 변화가 내포되어 있어요. 또한 그 백팔십 방위를 양단할 수도 있는데 만일 한 방위로 좁게 하여 펼치면 일 인에게 백팔십 개의 검흔을 남길 수가 있 을 것 같아요." 이어 그녀는 찬사도 빼놓지 않았다. "정말 무서운 검식이에요. 소녀는 천하에 이런 검법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백천기의 얼굴에 한 가닥 전율이 스치고 지나갔다. '대체 이 여인은......' 마혼인은 예전에 백천기가 육성의 힘으로 그것도 장법으로 바꾸어 사용했음에도 무형신검 전우진을 단 일 초에 격파시킨 바 있었다. 게다가 삼령도객도 이 초식에 의해 손 한 번 제 대로 쓰지 못하고 처참하게 죽었다. 물론 백천기도 이 초식을 단지 도해와 구결(口訣)만으로 하루만에 익혔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태양신맥경을 타고난 천하기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범인(凡人)에 불과한 채홍평이 어찌 한 번 보는 것으로써 마혼인의 모든 변화를 기 억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해답은 간단했다. 백천기는 그녀의 눈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자 비로소 느낄 수가 있었다. '음, 인간의 집념(執念)이란 이토록 무섭단 말인가? 이 여인의 놀라운 깨달음은 자질 때문이 아니라 목적을 향한 무서운 집념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때 채홍평이 그에게 공손히 절을 하고 있었다. "소녀, 공자님의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백천기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자 채홍평은 얼굴에 묘한 표정을 떠올리더니 야릇한 음성으로 말했다. "공자님, 소녀는 결코 빚지고는 살 수 없는 성격이에요." 그녀는 한 걸음 물러나더니 어깨를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사르르르.......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에서 옷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가 속에 아무 것도 입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알몸이 고스란히 황촉빛에 드러나고 말았다. 나이답지 않게 터질 듯이 영근 젖가슴은 만지면 금세라도 퉁겨낼 듯 솟아 올랐으며, 그 위 에 열려 있는 자줏빛의 유실은 익을대로 익어 있었다. 잘록한 허리와 펑퍼짐한 둔부, 기름진 아랫배에 무성하게 우거져 있는 삼림(森林)은 놀라운 색기(色氣)를 유발하고 있었다. 채홍평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전라가 된 후 도발적으로 가슴을 흔들었다. 그러자 두 개의 젖 가슴이 좌우로 출렁거렸다.


실로 대단한 색감을 풍기는 여체였다. 그로 인해 막사 안은 금세 숨막힐 듯한 열기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백천기의 눈살은 찌푸러지고 있었다. "이것이 낭자가 말한 대가요?" 채홍평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어요. 소녀가 공자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그녀의 자줏빛 도는 유두가 서서히 돌출되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바치기도 전에 스스로 육 체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방이 그녀의 여심(女心)을 자극할 정도로 준수한 인물 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백천기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그러나 채홍평의 입에서는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음." 그녀는 자신의 젖가슴을 스스로의 손으로 움켜쥔 채 눈을 반쯤 내리감으며 허리를 비틀었 다. "어서요, 공자님......." 백천기의 얼굴에 서서히 분노가 어렸다. 그러나 그것도 모른 채 채홍평은 허리를 좌우로 흔들며 다가왔다. 걸어오면서 그녀는 스스 로의 손으로 자신의 젖가슴과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아이, 어서요." 마침내 그녀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백천기는 눈 앞에서 출렁거리는 젖가슴을 볼 수 있었다. 더구나 그녀의 손은 다리 사이의 우거진 삼림을 살짝 덮은 채 미묘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히 폭발적인 유혹을 발하는 장면이었다. 짝! 느닷없이 그녀의 뺨에서 불이 일어났다. "아악!" 채홍평은 그만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바닥에 벌렁 쓰러진 채 발딱 고개를 들었다. "고... 공자님! 왜......?" 그녀는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선혈을 의식하지도 못한 듯 의혹과 두려움이 담긴 시선으로 그 를 응시했다. 백천기의 싸늘한 음성이 떨어졌다. "낭자는 날 두 번씩이나 모독했소."


"넷?" "애초부터 날 기만했으며 이제와서는 또......." "알, 알고... 계셨나요?" 채홍평의 나신이 경련을 일으켰다. 천변만화하던 그녀의 얼굴에는 이 순간 극도의 공포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백천기의 차디찬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낭자에게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내가 지금까지 호의를 베푼 것은 이유가 있어서 였소. 그것 은 내가 아니라도 낭자는 똑같이 누군가를 속였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아!" "그래서 차라리 속아주는 척 했던 것이오." 채홍평의 전신이 더욱 세차게 경련을 일으켰다. "우선 옷을 입으시오." 백천기의 서릿발같은 음성에 채홍평은 감히 아무 말도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옷을 주워 입 었다. 잠시 후 백천기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내 조건을 말하리다." 채홍평은 여전히 입도 떼지 못했다. "나는 낭자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었소. 그러나 앞으로 그 무공을 아무렇게나 사용한다면 절 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반드시 이유가 합당하거나 옳은 일에만 사용해야 하오." "하지만 소녀는......." 채홍평이 비로소 더듬더듬 입술을 움직였다. "저에게는 남들과는 다른 사정이 있는지라......" 문득 그녀의 표정은 한없이 처량해지고 있었다. 백천기는 탄식하며 말했다. "설사 비운(悲運)으로 인해 불행해졌다고 해도 인성마저 잃어서는 안 되오. 게다가 당신은 스스로 절망하기에는 젊고 아름답기까지 하오." "어찌 제게 그런 말씀을? 소녀의 몸은... 추(醜)합니다." 채홍평의 고개가 푹 떨구어졌다. 백천기는 손을 내밀더니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본시 이름다움이나 추함은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이오. 그러니 낭자는 자 신을 너무 낮게 보지 마시오." "아아......." 채홍평은 기이한 탄식을 흘려냈다.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오열하는 것을 백천기는 손을 통 해 느낄 수가 있었다.


이윽고 채홍평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한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백공자님, 당신은 제가 본 그 누구보다도 남자다운 남자에요. 하지만 소녀는......" 그녀의 음성은 여기서 중단되었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소녀는 그만... 물러가겠어요." 채홍평은 밖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녀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바 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백천기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아아! 하마터면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할 뻔 했군요. 하지만 소녀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없답니다. 이 몸이 부서지고 찢기는 한이 있어도 당신같은 분을 마음껏 사랑할 수만 있다 면......' 그녀의 내심에서 일어나는 말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다만 두 눈에서 쉴새없이 쏟아 지는 눈물만이 그녀의 아픔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제 21 장 · 무서운 음모(陰謀) 백천기는 방금 전 겪은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그는 채홍평이 사라진 후에도 온통 마음이 어지럽기만 했다. 그가 잠들지 못하고 막사 안을 서성이는 동안에도 시간은 쉬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문득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는 몸을 돌리며 침중하게 말했다. "우문낭자, 언제까지나 서 있을 셈이오? 들어 오시오." "아!" 과연 막사 밖으로부터 여인의 탄성이 들려왔다. 휘장이 걷히며 은령선자 우문경이 들어섰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대인께서는 벌써부터 제가 밖에 있었다는 것을 아셨나요?" "아니오. 나도 조금 전에야 알았소." 그 말에 우문경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을 이었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어요. 잠깐 뵈러 왔었는데 채낭자가 먼저 와 있길래......" 말을 맺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막사 안에서 벌어졌던 상황들을 모두 엿 본 모양이었다. 백천기는 냉연하게 잘라 말했다. "설사 의도적이었다고 해도 상관 없소." 우문경은 흠칫 놀라는가 싶더니, 기이한 시선으로 백천기를 응시했다. 백천기는 그녀가 노골 적으로 그를 바라보는 바람에 고소를 지으며 물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소?"


우문경은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예요. 단지......." "단지 무엇이오?" 백천기의 추궁에 우문경은 발끈했다. "정말 짓궂으시군요! 꼭 그렇게 캐물어야만 하나요?" "하하......." 백천기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문경이 어떤 여인인지를 잠시 잊었다는 듯한 모 습이었다. 우문경이 새침하게 물었다. "이번엔 또 왜 웃는 거죠?" "아니오. 단지......." "단지라뇨?" "흠, 그렇게 캐물으니 더욱 대답을 못하겠구려. 원래는 낭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다워 보 인다고 말하려 했는데." "어머, 몰라욧!" "하하하하......." "호호호......" 두 사람은 어느새 마주보며 가가대소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우문경이 웃음을 그치며 야릇한 표정으로 물었다. "참, 대인께서는 채낭자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백천기도 짐짓 의아한 듯 반문했다. "어찌 생각하다니? 무슨 뜻이오?" 우문경은 문득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 아니예요. 소녀가 공연한 질문을 했나봐요." 그녀는 문득 입술꼬리를 야릇하게 말더니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대인, 만일 소녀가 채낭자에게 질투를 느꼈다면 믿으시겠어요?" "설마 천하의 은령선자가 나같이 보잘 것 없는 위인으로 인해 그럴 리가 있소?" 우문경은 갑자기 손톱을 들어 올렸다. "미워요.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백천기는 재빨리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이크! 무섭소이다. 그 손톱 좀 거두어 주시오." 그러자 우문경은 갑자기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을 것 같아요. 비단 용모 때문이 아니라 당신에 게는 남들한테서 찾아보기 힘든 매력이 있거든요." "그럴 리가 있소?" "아니예요. 바로 그 때문에 채낭자도 반한 거예요." 백천기는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우문낭자, 농담은 이제 그만 둡시다."


"피이! 제가 지금 농담 따위나 할 것 같아요?" 은령선자 우문경. 지난 날 태성왕조차도 혀를 내둘렀을 정도로 야무진 이 여인은 이제 백천 기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하지만 백천기는 그녀의 마음이 무섭게 기울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도리어 장난스러운 태도 로 자신의 심중을 감추고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빤히 알고 있는 우문경이었으나 그녀는 자신의 끓어 오르는 정열을 주체하 기가 힘들었다. 여명(黎明)이 밝았다. 옥현봉에 수십 개의 막사가 세워진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백천기는 바위 위에 우뚝 선 채 새벽 바람에 옷자락을 날리고 있었다. "......." 그는 오랫동안 막사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는 근래 들어 내공이 더욱 상승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음양마유공 때문이었다. 음양마유공만이 지니고 있는 양심술과 분심공(分心功) 덕분 이었다. 그 신기막측한 기공 탓으로 그는 다망한 와중에도 항시 무공을 연마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날이 갈수록 그의 무학은 깊은 경지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었다. "음?" 그의 검미가 일순 꿈틀 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 한 바위 위에 우뚝 서 있는 괴인영을 본 것이었다. 그 인영은 금의를 입은 뚱뚱한 몸집의 마령궁주였다. 다행히 새벽 안개가 시야를 가린 탓인 지 그는 백천기를 발견하지 못한 듯 했다. 문득 한 검은 인영이 마령궁주 앞에 떨어졌다. 그는 흑의복면인으로 혈영마황전의 마령사자 가운데 한 인물이었다. 그 순간, 백천기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마치 증발이라도 한 듯 사라진 것 이었다. 마령궁주는 흑의복면인에게 물었다. "요극천에게서 무슨 낌새는 없느냐?" 마령사자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없었습니다." "흐음, 오늘이 바로 소종사님과 약속한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느냐?"


"네." "그래, 뭐라고 하더냐?" 마령사자는 복면 사이의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다만 아직 시간이 안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마령궁주는 음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다. 계속 그를 도와주며 행동을 감시하여 보고해라." "알았습니다. 궁주님." 마령사자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마령궁주의 신형은 안개 속으로 빨려들듯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게 된 마령사자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그는 몸을 날리기 위해 발을 움직였다. 그런데 이때였다. 바로 코 앞으로 흡사 유령처럼 한 인영이 스 르르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엇!" 마령사자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급급히 물러났다. "다, 당신은... 무슨 일이오?" 그의 앞에 나타난 인물은 다름 아닌 백천기였다. 순간적으로 마령사자는 이틀 전 백천기의 하인에게 자신의 동료가 단 일 초만에 날아간 것 을 기억해냈다. 그의 눈에는 공포심이 떠올랐다. 백천기는 그를 정시하며 기소를 흘렸다. "후후후! 내 너에게 볼일이 있어 왔다." "무, 무슨?" 마령사자는 다시 뒤로 물러났다. 바로 그때였다. 백천기의 동공이 갑자기 크게 확산되는 듯 하더니 신비한 광채를 발산해 냈다. "내 눈을 보아라." 한 가닥 괴이한 음성이 마령사자의 귓전을 울렸다. 그러자 마령사자는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그만 정신이 몽롱해지고 말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백천기의 눈으로 향했다. "으으!" 마령사자는 신음을 발했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더니 홀연히 의식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마령사자는 동공이 완전히 풀어진 채 멍청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 순간 궁량한 음성이 그의 마음 속으로 파고 들었다. "너는 지금부터 잠을 자야 한다. 깊은 잠을......." 마령사자는 마치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스르르 두 눈을 감았다. 그의 귀로 예의 음성이


들려 왔다. "네 앞에는 지금 네가 가장 존경하는 주인이 있다. 너는 그 주인의 의사에 모든 것을 맡겨 야만 한다." 마령사자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백천기와는 적대관계에 있는 마령사자가 이토록 고분고분하게 그의 말을 따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섭심마공(攝心魔功)이었다. 바로 구대마경 중 음양마유경에 기재되어 있는 미혼 공이엇다. 그것은 사람의 신지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신비한 수법이었다. "지금부터 몇 가지 묻겠다. 너는 바른대로 대답해야 한다. 만약 거짓을 말할 시에는 구천지 옥을 헤매게 될 것이다." 그 말에 마령사자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지금 온통 공포감에 차 있었다. "네 직책이 무엇이냐?" 마령사자는 무엇에 홀린 듯이 순순히 대답했다. "마령 제일호입니다." "이름은?" "소뢰(召雷)입니다." 백천기는 상대가 순순히 대답하자 실소를 금치 못했으나 계속 질문을 던졌다. "혈영마황전의 전주는 누구냐?" 마령사자는 응답하지 못했다. 그의 전신이 부르르 경련하는 것으로 보아 어떤 금기를 갖고 있는 듯 했다. "누구냐고 묻지 않았느냐?" 백천기의 추궁은 집요했다. 마령제일호는 마침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대... 종... 사......." 백천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종사의 이름은?" "모... 모릅니다......." "모른다고? 어째서 모른다는 거냐?" 마령일호는 기진맥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 분은... 매번 다른 모습으로 현신하시기 때문입니다." "음." 백천기는 신음을 흘렸다. '대종사란 자는 평소에도 철저히 신비를 가장하고 있는 모양이군.' 그는 잠시 생각하다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대종사 다음으로 신분이 높은 자는 누구냐?" 마령일호는 이번에는 바로 대답했다.


"소종사입니다." "그럼 다음 서열은?" "오궁주(五宮主)입니다." 백천기는 두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들에 관해 아는대로 말해 봐라." 마령일호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혈영마황전에는 도합 다섯 개의 궁이 있습니다. 사신궁(四神宮), 마령궁(魔靈宮), 귀혼궁(鬼 魂宮), 미혼궁(迷魂宮), 천성궁(天星宮) 등입니다. 각 궁에는 궁주가 있으며 그 아래로는......." 마령일호는 신지가 제압당한 상태에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혈영마황전의 내막을 줄줄이 쏟아내고 있었다. 백천기는 그의 말을 뇌리에 담아 두었다. 그는 들으면 들을수록 안색이 침중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그는 혈영마황전에 대해 어느 정도 내막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알아낼 것이 없자 손을 슬쩍 내저었다. 그러자 마령일호는 혈도를 짚인 채 맥 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백천기는 마령일호의 복면을 벗겨 버렸다. 그러자 오십 세 가량된 음침한 인상의 얼굴이 드 러났다. 그는 마령일호의 옷을 벗겨낸 후 바위틈에 밀어넣었다. 이어 그는 만용환영술을 펼쳐 자신의 얼굴을 마령일호와 비슷하게 바꾼 후 복면과 옷을 입 었다. 그렇게 되니 누가 보아도 마령일호와 똑같은 모습으로 탈바꿈되었다. 백천기는 주위를 훑어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흠, 지금부터 시작이다." 스슷! 옷자락 날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모습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옥현봉 서쪽의 봉우리. 한쪽 면이 온통 깎아지른 듯한 암벽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그곳에는 언제부터인가 두 인 영이 암벽의 이곳 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다름아닌 요극천이었다. 또 한 명은 흑의복면인이었다. 흑의복면인은 바로 마 령일호의 모습으로 변장한 백천기였다. 백천기는 마령일호의 임무를 대신 수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복면 사이로


날카로운 눈 을 번뜩이며 요극천을 향해 물었다. "요도주, 뭘 발견했소?" "음, 아직이네." "소종사께서 독촉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소?" 요극천은 고개를 돌려 하늘을 살피더니 음소를 흘렸다. "흐흐흐, 서둘지 말게. 아직도 네 시진이나 남았네." 그 말에 백천기는 코웃음을 쳤다. "이런 식으로는 네 시진이 아니라 사십 시진이 지나도 힘들겠소." 요극천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분노가 떠올랐다. 그러나 곧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는 표정을 풀더니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이것 보게, 내 자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네." "무엇이오?" 요극천의 음성이 은근해졌다. "자네는 평생을 남의 밑에서 썩을 셈인가?" 요극천의 말에는 심상치 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백천기는 흠칫하며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요극천은 암벽을 향해 서 있던 몸을 돌렸다. "흐흐흐! 내 솔직히 말하지. 자네가 만일 천궁석부의 보물을 얻게 된다면 장담하건대 결코 소종사에 못지 않는 권세를 누릴 수 있을 것이네." 백천기는 내심 놀랐으나 곧 노성을 발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 날 유혹하는 거요?" "유혹? 흐흐흐, 자네는 생각보다 순진하군." "뭐... 뭣!" "과연 소종사가 자네의 충성을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하나? 자네는 그저 이용물에 불과하다 네." "......!" 백천기가 아무 말 하지 않자 요극천은 코웃음치며 말했다. "흥! 그들에게 있어 자네 정도는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터... 터무니 없는 소리!" 백천기는 짐짓 반발을 보였다. 그러자 요극천이 어느 정도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흐흐흐, 한 번 잘 생각해 보게. 자네가 이번 기회를 놓치게 되면 평생 남의 심부름꾼 노릇 이나 하게 될 걸세." "음......." "만일 지금 이 자리에서 결심을 굳히면 자네는 천하제일의 갑부가 될 뿐 아니라


무림을 독 패할 수 있는 무공도 얻게 될 것이네." 백천기는 짐짓 당황한 듯 몸을 흔들었다. "그, 그럼 날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오?" 요극천의 눈이 괴상한 빛을 발했다. "날 도와주게." "그러면......?" "흠, 그렇게만 해주면 내 천궁석부의 보물 중에서 절반을 주겠네." 백천기는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여우같은 작자! 당신은 절대 그렇게 할 위인이 아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어눌한 듯 반문했다. "정말이오? 그 말이?" "물론! 날 믿게." 요극천의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하듯 말했다. 백천기는 짐짓 구미가 당긴다는 듯이 물었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의 힘으로 보물을 차지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텐데?" "흐흐! 노부는 벌써 천궁석부의 비밀을 알아냈네." 그 말에 백천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정말이오?" 요극천은 정색을 지으며 반문했다. "내 지금 와서 자네에게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나?" 마침내 백천기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그렇다면 나도 당신을 돕겠소." "흐흐....... 생각 잘 했네. 자네는 봉을 잡은 셈일세." 백천기는 득의만면한 요극천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내가 뭘 도와주면 되겠소?" 요극천은 선뜻 대답했다. "그야 간단하네. 자네는 단지 소종사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지켜본 뒤 수시로 내게 알려주 기만 하면 되네." "알았소. 그런 일 쯤이야......." 이때, 요극천은 문득 품 속에서 흰 단약을 꺼내더니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백천기가 의아하 여 물었다. "그게 무엇이오?" "이 알약을 복용하게." "아니 왜......?" 요극천은 스산한 웃음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내 자네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자넬 믿을 수가 없네. 매사를 확 실히 해두는 것이 안전하네." 백천기는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결국 날 못믿는단 뜻이로군." 그러자 요극천은 입가에 괴이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달랬다. "그게 아닐세. 자네도 알다시피 난 혼자의 몸이 아니지 않나?" 백천기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자 요극천은 답답한 듯 그를 재촉했다. "뭘 망설이나? 자네의 눈 앞에는 지금 부귀영화와 명예가 기다리고 있네." 그것은 실로 커다란 유혹이었다. 백천기는 한동안 갈등하는 듯 하더니 이윽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백천기는 알약을 받아 단숨에 삼켜버렸다. 그러자 요극천은 저으기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 다. "후후후, 자네는 진정한 영웅일세. 그것도 때를 잘 헤아리는 영웅 말일세." 이어 그는 다시 암벽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이제 그만 가보게. 그리고 한 시진마다 반드시 혈영마황전과 소종사의 동태를 알려주게. "알았소." 백천기는 순순히 대답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는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입을 벌렸다. 그 는 입 안에 있던 단약을 손바닥에 토해냈다. 그것은 방금 전에 복용했던 단약이었다. 백천기는 단약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살펴보았다. 그는 이미 맛을 보고 단약의 종류를 알아 낸 후였다. "음, 마감계(魔甘桂) 따위의 시시한 독으로 날 제압하려 하다니......." 다음 순간 그는 신형을 날려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하나의 기암(奇岩) 아래. 두 명의 흑의복면인이 마주보며 서 있었다. 그 중 우측에 서 있던 흑의복면인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우문낭자, 요극천이 그대의 목소리를 들으면 필시 의심하게 될 것이오. 그러니 항상 입을 다물어야 하오." 그의 왼쪽에 있는 흑의복면인은 체격이 왜소해 보였다. "명심하겠어요. 과연 그의 음성은 사나이가 아니라 맑은 여인의 음성이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백천기와 우문경이었다. 그들은 두 명의 마령사자로 변장한 것이었다. 우문경의 눈이 복면 사이로 반짝 빛을 발했다. "참, 대인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요." "말하시오." "이전에 장보도를 얻은 적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직접 들어가 보려고 하지 않는


건 가요?"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질문이었다. 백천기는 기소를 흘리며 말했다. "후후,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오." "때라니요?" "장보도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오." "......?" "우선 중추절(仲秋節)이 되어야 하오. 그것도 보름달이 뜨는 밤이 되야 가능한 일이오. 만월 이 떠서 옥현봉 정상에 이른 순간 그림자를 보고 입구를 찾아야 하오." 우문경은 그 말에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렇다면 아직 팔개월이나 더 기다려야 되는군요?" 백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래서 요극천을 이용하려는 것이오." 우문경은 다소 미심쩍은 듯이 반문했다. "하지만 그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요?" 백천기는 담담히 말했다. "그 자는 평생을 오직 기관지학과 신산지술(神散之術)에 바친 인물이오. 비록 무공 방면은 신통치 않으나 그 방면에서는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소. 따라서 그가 천궁석부의 비밀을 풀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오." 우문경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요극천에게 가봅시다." 두 사람은 나란히 신형을 날렸다. 잠시 후, 암벽 앞에 당도한 그들은 요극천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암벽 앞에서 죽통을 흔 들어 대며 무엇인가에 골몰해 있다가 두 사람이 나타나자 몸을 홱 돌렸다. "마령일호인가?" "그렇소." 백천기가 앞으로 나서자 요극천은 우문경을 쏘아보며 물었다. "이 자는 누구인가?" 과연 그의 눈에는 의심이 깃들어 있었다. 백천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마령삼호요. 평소 나와는 친하게 지내고 있소. 이번에 뜻을 함께 하기로 약속했소." 그 말에 요극천의 눈알이 이리저리 굴렀다. 그는 한동안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 다. "음, 자네가 추천한다면 내 믿을 수 있지. 이렇게 되면 방조자가 둘이니 한결 마음이 든든하 네." "소종사의 동태는 어떤가?"


백천기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고 있소." 그는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일은 어떻소? 진전이 있소?" 요극천의 입가에는 득의의 미소가 번졌다. "흐흐흐! 드디어 입구를 파악했네." 백천기는 흠칫 놀랐다. 그는 짐짓 흥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입구가 어디요?" "서두르지 말게. 곧 알게 될테니." 그러다 문득 요극천의 시선이 우문경을 향했다. 그의 눈에는 다시 의심의 빛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 친구는 왜 한 마디도 하지 않는가?" 백천기가 재빨리 대답했다. "이 친구는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오." 요극천의 얼굴이 문득 괴이하게 변했다. 그는 우문경의 아래 위를 살펴보며 말했다. "흠, 체격이 상당히 왜소한 친구군?" 백천기와 우문경이 흠칫하자 요극천은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나며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 노부는 마령사자들 중에 이처럼 체격이 작은 자는 보지 못했다." 순간, 요극천은 돌발적으로 손을 쭉 내뻗었다. "대체 네 놈은 누구냐?" 쉬익! 그의 손가락이 갈쿠리처럼 구부러지더니 곧장 우문경의 목을 잡아채 갔다. '앗!' 우문경은 깜짝 놀랐으나 신속하게 피했다. "엇? 제법이구나!" 요극천은 재차 공격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보법을 옮겼다. 그러나 이때, 옆에 서 있던 백천기 가 재빨리 그의 완맥을 낚아챘다. "무슨 짓인가?" 요극천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맥문을 잡히자 대경실색했다. 그러나 백천기는 그의 맥문을 쥔 손에 힘을 가하며 기묘하게 웃었다. "후후후! 요도주, 이제 연극은 끝났소." 요극천은 분노하며 외쳤다. "마령일호! 네가 감히......" 백천기가 음성을 바꾸며 그의 말을 끊었다. "후훗! 나는 마령일호가 아니외다." "뭐, 뭣이?" 요극천의 놀라움은 컸다. "그럼 대체 너는 누구냐?" 백천기는 냉막한 웃음을 흘렸다. "훗훗훗훗......!" 동시에 그는 자신의 복면을 벗어 버렸다. 그러자 추악하기 그지없는 검은 얼굴의 청년 모습


이 드러났다. 그 얼굴을 보자 요극천은 안색이 크게 변하고 말았다. "......?" 요극천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로서는 처음 보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자넨... 누군가?" "알 것 없소. 말해봐야 모를테니." 요극천은 침중한 신음을 발했다. "음! 귀계로 명성을 날리던 노부가 그대같은 애송이에게 이렇듯 감쪽같이 당하다니...... 백천기의 억양이 없는 음성이 그 말을 받았다. "요도주, 세상에는 한 가지만으로 안 되는 일이 너무도 많소." 요극천이 힐끗 그를 보며 물었다. "내게 원하는 게 뭔가?" 백천기는 간단히 말했다. "천궁석부의 비밀." 요극천은 어림도 없다는 듯 코웃음쳤다. "내가 쉽게 말할 것 같은가? 어림없는 일이다." 백천기는 우수를 들더니 그의 혈도를 몇 군데 쳤다. 몇 차례 가벼운 격타음과 함께 요극천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잠시 후 그는 안색이 변해 부 르짖었다.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이 수법은 참혼경맥술(斬魂經脈術)이라고 하는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고문술이지. 내가 십 일마다 한 번씩 혈도를 쳐주지 않으면 당신은 전신 근육이 오그라들고 뼈가 어긋나게 된다. 또한 하루종일 가공할 고통을 당한 끝에 온 몸이 절반 이상으로 줄어든 채 죽게 되지." "뭣이?" 요극천이 안색이 시커매지는 것을 보며 백천기는 슬며시 그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후후....... 믿기지 않으면 시험해 보아도 좋다. 열흘 후면 필경 당신은 지옥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으으......." 요극천은 비록 자유롭게 되었으나 신음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그의 표정이 쉴새없이 변화 를 일으켰다. 그는 자신이 완전히 당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향 한 자루 탈 시간이 흐르자 그는 힘없이 내뱉았다. "좋다." 백천기는 씨익 웃었다. "자! 어서 입구를 안내하시오." 그 말에 요극천은 순순히 몸을 돌렸다. 백천기와 우문경은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요 극천은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옥현봉에서 꽤 떨어진 한 계곡으로 접근해 갔다. "바로 이곳이다." 그가 손을 들어 가리킨 곳은 또 하나의 깎아지른 암벽이었다. 그곳은 좌우가 대칭을 이룬 채 마주 보고 있는 거대한 두 개의 괴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주변에는 그런 형상 못지 않게 온통 기암괴석(奇巖怪石)이 흩어져 있어 별로 주의를 끌만한 곳은 아니었다. 백천기는 암벽을 향해 안력을 돋구었다. 그러자 한쪽 바위의 표면에 희미하게 새겨진 일종 의 도안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서슴없이 그곳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이것이었군." 백천기는 도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지켜보던 요극천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했다. 그 의 눈에 득의의 빛이 솟아난 것이었다. 그러나 백천기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손을 떼며 말했다. "요도주, 한 가지 명심해 둘 것이 있소." 요극천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백천기는 그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갑게 말했다. "내가 이곳에서 죽는다면 당신 역시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왜냐하면 내가 쓴 수법은 천하 에서 오직 나밖에는 풀 수 없기 때문이오." "......!" 그 말에 요극천은 큰 충격을 받은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백천기는 다시 바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요극천의 다급한 음성이 그를 저지했다. "잠깐! 내가... 졌다." 백천기가 몸을 돌리자 요극천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체념한 듯 말했다. "그 도안 중에 거북이 형상을 한 곳을 눌러보게. 그럼 입구가 나타날 것이네." 백천기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안이 천궁석부의 기관을 움직이는 열쇠였구려." 요극천은 그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간단하다면 누군인들 이곳에 못들어 가겠는가?" 백천기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요도주, 당신은 자신에 대한 자만이 너무 크구려." "무슨 말인가?" "후후, 나 역시 이 도안이 천귀영미도해(天龜靈迷圖解)의 정석에 따른 것임을 알고 있다는 얘기외다." 순간 요극천의 안면이 무참할 정도로 구겨졌다. "그걸... 어떻게?"


"후후후! 다 아는 수가 있소." 요극천은 내심 일말의 공포가 깃드는 것을 금할 길이 없었다. '대체 이 자는 누구길래 날 훤히 꿰뚫어 보고 있단 말인가?' 그 사이 백천기는 거북이 모양의 도안을 손으로 힘껏 눌렀다. 쿠르르르릉! 굉음이 울리더니 나란히 솟아있던 두 개의 괴석이 양쪽으로 갈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 고 그 자리에는 어두운 통로가 마치 악마의 입처럼 드러났다. 백천기는 문득 뒤를 돌아보며 크게 외쳤다. "흑진(黑進), 우령(牛令), 나오너라." 그러자 두 개의 인영이 유령처럼 나타나 허리를 굽혔다. 그들은 다름아닌 전우진과 현무호 였다. 요극천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이미 백천기가 치밀한 준비를 해놓고 있다는 사실을 깨 닫게 된 것이었다. 백천기는 일행을 둘러보며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자, 이제 들어갑시다." 이어 그는 요극천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요도주, 당신이 앞장 서시오." 요극천은 이제 저항을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동굴 입구로 발을 들여놓았다. 백천기, 현 무호, 전우진의 순으로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우문경이 뒤를 따랐다. 쿠르르르릉! 그들이 모두 들어가자 굉음과 함께 동굴의 문(門)은 다시 좌우로 좁아지더니 원래대로 닫혀 버렸다. 암벽이 원래의 형태가 된 순간 세 가닥 인영이 그 자리에 떨어졌다. 그들은 당금 강북무림의 제일인들이라 할 수 있는 강북사마 중의 삼마였다. 설산신마, 흑풍 마번, 천마신조 등의 세 마두는 암벽에 새겨져 있는 흐릿한 도안을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이 고 있었다. 설산신마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흐흐흐, 놈들은 우리가 지켜보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흘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법이지." "자, 우리도 들어 갑시다." 그들은 각각 한 마디씩 지껄이더니 곧장 암벽 앞으로 다가갔다. 설산신마가 도안의 거북이 부분을 눌렀다. 쿠르르릉!


암벽은 전과 마찬가지로 동굴 입구를 드러냈다. 삼마는 지체없이 동굴 속으로 신형을 날렸 다. 다시 동굴 입구가 예전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그곳에 다시 수많은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 나타난 인영들은 수십 명이 넘었다. 그들은 바로 구파일방을 중심으로 한 정파군웅 들이었다. 각인대사가 암벽을 힐끗 바라보더니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과연 어떻게 해야 옳을지 모르겠구려." 그 말에 은창부의 부주인 패인도가 강인하게 말했다. "우선 들어가고 봅시다. 어쨌든 천궁석부의 보물이 사도 인물의 손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되 지 않소이까?" 강남제일보주 구궁산도 고개를 끄덕여 찬동의 뜻을 표했다. "패형의 말이 맞소. 기왕 여기까지 온 이상 끝까지 참여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오." 무당의 옥허자도 찬동을 표했다. "무량수불....... 빈도도 동감이외다." 정파군웅들의 뜻이 합쳐졌다. 마침내 각인대사는 합장불호를 외쳤다. "아미타불! 여러분께서 모두 찬동하신다면 빈승이 앞장 서 길을 열겠소이다." 그의 말에 반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천 년 이상을 정파무림을 이끌어온 소림(少林)이었 다. 비록 지금은 과거의 성세가 퇴락했다지만 아직도 영도자로서의 위상은 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각인대사는 은연중 군웅들의 지도자로 부상되고 있었다. 쿠르르릉! 굉음과 함께 동굴 입구가 드러나자 군웅들은 함성을 발했다. "와아!" 그 함성에는 흥분과 기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영귀도가 남긴 숱한 보화는 물론 무림의 수많은 비급들이 비장되어 있는 천궁석부의 문이 열린 것이었다. 이 사실은 무림인이라면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군웅들은 대오를 갖추어 차례로 동굴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한편, 그들 속에는 백원노인과 그의 두 손자손녀인 완아, 청아도 섞여 있었다. 완아는 초롱 한 눈망울을 굴리며 백원노인 두현상에게 묻고 있었다. "할아버지, 백대협께서는 왜 이곳에 오지 않으셨을까요?" 두현상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 "글쎄다. 아직 보이지 않는구나." 그 말에 완아는 물론 청아까지도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두현상은 그들의 등을 가볍게 밀었 다.


"어쨌든 들어가 보자. 혹시 안에서 그를 만날 수도 있지 않겠느냐?" 두 남매는 그 말에 귀가 솔깃해져서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군웅들과 함께 동굴 안으로 들어 갔다. 그들의 뒤로는 신응녀(神鷹女) 임청하가 역시 무엇인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 었다. 그녀의 곁에는 한 명의 준수한 청년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따르고 있었다. 그는 신응수라(神鷹修羅) 임천룡(林天龍)이었다. 그는 임청하의 오빠로 하루 전에 이곳에 당 도했다. 그는 신응문의 소문주(少門主)로 대단한 야심가였다. 그들 남매의 부친인 신응노옹이 임청하를 향해 물었다. "하아야, 뭘 그리 찾느냐?" "아, 아니예요!" 임청하가 찾는 대상도 다름 아닌 백천기였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백천기의 모습이 보이 지 않자 그녀는 탄식하며 군웅들의 뒤를 따랐다. 군웅들이 모두 들어간 후에 동굴은 굉음을 내며 닫혔다. 그러나 꼬리를 물 듯 다시 암벽 앞에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우내오 마(中原五魔)였다. 그들 중 사도(邪刀)가 암벽을 바라보며 으스스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흐흐흐흐......! 천신(天神), 자네의 말대로 됐네. 이제 놈들은 천궁석부의 기관에 의해 전멸 을 하고 말 걸세." 그 말에 마안(魔眼)이 두 눈에서 괴이한 빛을 번쩍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북해 사태청에서 왔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지. 덕분에 일석이조(一石二鳥) 를 노릴 수 있게 됐네. 정사(正邪)의 고수들을 힘 하나 안들이고 몰살시킬 수 있게 됐으니 말일세." 혈승은 혈옥불장을 만지작거리며 득의의 웃음을 흘렸다. "크흐흐, 이제 사태청이 중원무림을 정복할 날도 멀지 않았군." 전신을 흰 천으로 휘감은 귀견수(鬼見愁)만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때 천신이 품 속에서 한 장의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영귀도가 남긴 천궁석부의 도해였다. "이 도해를 보고 들어가면 보물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혈승이 성급히 나서며 말했다. "그렇다면 뭘 망설이지? 우리도 빨리 들어가 보세." 결국 우내오마도 암벽을 눌러 동굴 입구를 연 후 그속으로 사라졌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암벽 주위에는 적막이 깔렸다. 이제 더이상 나타날 사람이 없는


듯. 그러나 다시 인영이 그 곳에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선두에 선 인물은 바로 혈영마황전의 소종사인 홍의청년이었다. "핫핫핫! 어리석은 우내오마, 너희들이 사태청에서 왔다는 사실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야말로 속고 속이는 암투가 전개되는 셈이었다. 홍의청년은 냉소를 짓더니 중얼거렸다. "너희들은 아직 멀었다. 그까짓 장보도 하나를 믿고 덤비다니, 우내오마란 이름이 아깝구 나." 그의 표정은 점차 음침하게 변해갔다. "비단 기관매복이 문제가 아니지. 천궁석부 안에는 그보다도 수십, 아니 수백 배 더 무서운 것이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후후후......." 홍의청년의 낮은 웃음소리가 야음을 타고 스산하게 번져 나갔다. - 다음 권에 계속 제 22 장 · 천궁석부(天弓石府) 동굴 안은 칠흑같이 깜깜했다. 누군가 코 앞에 칼을 들이댄다 해도 피부로 파고들기 전에는 알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백천기는 동굴 안을 대낮처럼 환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만년지극용란혈 로 인해 그의 안력은 천안의 경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굴 안에 들어선 인물들은 빛 한 점 없는 칠흑의 공간 속에서 당황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한들 소용이 없었다. 한편 요극천은 침착하게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한 알의 야광주(夜光珠) 였다. 그로 인해 사방이 뿌연 빛으로 인해 밝아졌다. "......!" 중인들은 야광주의 빛을 빌어 비로소 주위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통로는 바닥이나 벽, 천장 할 것 없이 온통 흑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따금씩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곤 했다. 백천기는 주위를 둘러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무척이나 음산한 곳이군." 요극천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렇다. 노부도 천하를 두루 다녀 보았지만 이런 곳은 처음이다." 현무호나 전우진, 우문경 등도 모두 안색이 굳어져 있었다. 어쩐지 으시시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휘이잉......! 문득 통로 안쪽으로부터 한 줄기 음풍(陰風)이 불어왔다. 그러자 우문경은 오한을 느낀듯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어, 어서 가요......." "노부를 따라오게." 요극천이 앞장섰고 그 뒤 일행은 조심스럽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통로는 처음에는 직선으로 뻗는 듯 했지만 갈수록 구불구불 해졌다. 때로는 위로 올라가는 가 싶으면 얼마 안가서 다시 아래로 급경사가 나타나곤 했다. 일행은 묵묵히 앞만 바라보며 걸었다. 얼마쯤 갔을까? 문득 요극천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부터는 위험지대다." 그 말에 현무현이 미덥지 않다는 투로 반문했다. "위험지대라니? 내가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요극천은 같잖다는 듯 냉소했다. "노부는 평생을 두고 진법(陳法)과 기관지학을 연구해 왔다. 자네가 뭘 안다고 그러나?" 백천기는 듣고만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무호는 인상을 찡그렸으나 더 이상 말 하지 않았다. 그러자 요극천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음, 이곳에는 만공화형진(滿空化形陳)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노부의 발자국 을 정확히 밟으며 따라와야 한다." 백천기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만공화형진을 즉시 알아볼 뿐 아니라 파진법까지 알아내다니 역시 대단한 자로구나.' 백천기는 귀진자(鬼眞子)의 귀진마전(鬼眞魔典)을 알고 있으므로 웬만한 진법이나 기관지학 은 거의 통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론상으로만 알고 있는 것과 실제 운용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요극천 의 행동에 은연중 많은 깨우침을 얻고 있었다. 요극천의 안색은 꽤나 진지해져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면서도 계속 무엇인가 를 계산하고 있었다. 일행은 그의 말대로 그가 남긴 발자국만 밟으며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 다.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디디면 무서운 벼노하가 일어날 것이다." 그 말에 중인들은 한층 더 긴장을 조였다. 요극천은 앞으로 몇 걸음 나가다가는 우측으로 꺾고, 또 그 다음 번에는 다시 좌측으로 돌았다. 이런 행보는 어찌 보면 장난을 치는


것 같 기도 했으며 혹은 일부러 골탕을 먹이려 하는 것으로도 보였다. 따라서 일행의 얼굴에는 차 츰 의심의 빛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백천기는 달랐다. '요극천, 이자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로구나.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정확히 만공화형진의 파 진법을 파악해 내다니.' 어쨌든 일행은 계속 앞으로 전진해 나갔다. 다행히도 그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략 한 식경 정도가 지났을까? 마침내 요극천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중인들을 돌아보았다. "이제 안심해도 좋다. 절진을 모두 벗어났다." 그 말에 중인들도 일제히 긴장된 안색을 풀었다. 요극천은 무뚝뚝하게 말한 후 다시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들은 하나의 석문(石門)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석문 위에는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음각(陰刻)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 천절참혼진(天絶斬魂陳)의 파해법을 모른다면 즉시 물러나라. 목숨은 한 개밖에 없는 법 (法)! 그것은 경고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협박이었다. 일행이 그 문구를 보고 섬뜩해하는 사이에 요극천은 냉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흥! 무영귀도! 겨우 천절참혼진 따위로 천여 년 동안 독보강호 했단 말이냐? 나 요극천 앞 에서는 너의 그 잘난 기관지학도 쓸모가 없을 것이다." 요극천은 날카로운 눈으로 석문을 살펴 보았다. 무엇인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석문 우측에 열두 개의 색이 틀린 구슬이 십자(十字) 모양으로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 요극천은 구슬 앞에서 한동안 침묵했다. 그의 눈알이 빠르게 왔다갔다하는 것으로 미루어 치밀하게 계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입가에 비웃음을 떠올리며 구슬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는 구슬을 하나씩 건너


뛰면서 누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막 절반 쯤 눌렀을 때였다. 쿠르르르릉! 돌연 굉음과 함께 좌우의 석벽이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앗!" 일행은 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정이오!" 현무호가 경악성을 발하며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이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육 중한 바위가 떨어져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일행은 고스란히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이, 이런!" 구구구궁......! 그 사이에도 좌우의 석벽은 계속하여 좁혀지고 있었다. 만일 석벽이 마주치면 한가운데 있 던 일행은 뼈도 못추릴 것이 분명했다. "어... 어떡하죠?" 우문경은 겁먹은 표정으로 백천기의 곁으로 바짝 다가들었다. 그녀는 설사 죽더라도 납작하 게 석벽 사이에 눌려 죽고 싶지는 않았다. "요도주! 여섯번째와 열한번째 구슬을 동시에 누르시오." 백천기의 외침이었다. 그러자 요극천은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온통 의혹이 떠올라 있었 다. "자네가... 알아냈단 말인가?" "시간이 없소. 어서 누르시오." "음!" 석벽은 이미 일행의 어깨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마 침내 요극천은 백천기가 시키는 대로 두 개의 구슬을 동시에 눌렀다. 끼끼이익......! 그러나 듣기 거북한 마찰음이 울리더니 석벽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아아......!" 중인들은 저마다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그그그긍! 게다가 잠시 후 석벽은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한편 그것을 바라보는 요극천의 얼굴은 온통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백천기를 바라보며 묻고 있었다.


"그, 그대는...... 어떻게 천절참혼진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백천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했다. "요도주, 당신은 경고문의 문구에 당했소." "당하다니?" "경고문은 일종의 격장지계였소. 공연히 오기를 자극하여 성급하게 행동하도록 한 안배인 것이오." "그럴 리가? 틀림없이 이곳에는......" "물론 이곳에 설치된 것은 천절참혼진이 틀림없소. 다만 진세가 거꾸로 배열되어 있을 뿐이 오." "그... 그럴 수가? 무영귀도 그 작자가......" 요극천은 그만 분노를 금치 못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백천기는 그를 바라보며 신비한 미소를 머금었다. "요도주, 당신의 능력은 정말 대단하오. 하지만 무영귀도를 상대로 일전을 결하려면 좀더 신 중을 기해야 할 것이외다." 그 말은 진법과 기관지학의 천하제일인이라 자부하고 있던 요극천의 자존심을 긁는 것이었 다. 요극천은 안색이 변한 채 멍하니 백천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이 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무림에 전혀 알려진 바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기관에 대 해서도 이토록 정통하다니.......' 요극천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가사의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애초의 적개 심이 점차 사그라지는 것을 은연중 느끼고 있었다. 그는 안색을 바로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어 그는 침착하게 구슬을 살펴본 후 아홉번째와 열두번째의 구슬을 동시에 눌렀다. 석문이 열렸다. 석문이 열리자 그곳에는 실로 기괴한 풍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수많은 목상 (木像)들이었다. 즉 나무로 깎은 목인(木人)들이 넓은 석전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던 것이 다. 더우기 목인은 그 크기뿐만이 아니라 이목구비까지도 인간과 똑같아 얼핏 보면 살아있는 인 간군상(人間群像)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또한 기이한 것은 그들이 하나같이 무기를 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각종 무기를 들고, 각각 다른 자세로 서 있는 목인들의 모습은 마치 전장(戰場)에서 싸울 준비를 마친 무인들과도 같았다. 전우진은 목인들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괴이하군." 현무호의 안색도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으음! 이 많은 목인형들이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하니 대단한 솜씨로군." 이제 일행은 석전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전전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일행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하고 있었다. 이때였다. 은령선자 우문경이 한 목인 곁을 지나다가 중얼거렸다. "호호, 옷까지 다 걸치고 있으니 정말 사람 같아요." 그녀는 짓궂게 아미를 살짝 찡그리며 목인의 어깨를 툭 쳤다. 그 광경을 본 요극천은 안색 이 홱 변하며 외쳤다. "건드리지 마라!" 그러나 이미 늦었다. 우문경의 손끝은 목인의 어깨를 두드린 뒤였다. 그그그긍......! 갑자기 이상한 소음이 일어나더니 우문경이 건드린 목인의 머리가 서서히 돌아가고 있었다. "어머!" 우문경은 깜짝 놀라 눈을 치떴다. 목인이 마치 산 사람처럼 그녀를 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우문경은 그같은 광경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때였다. 슈육! 갑자기 목인이 들고 있던 도끼로 그녀를 내리치는 것이 아닌가! "악!" 우문경은 뾰족한 비명을 내지르며 다급히 몸을 피했다. 그러나 그것이 시작이었다. 끼기기긱! 그그긍! 드르르르륵! 요란한 소리가 사방에서 동시에 울리기 시작했다. 이어 수백 개의 목인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요극천이 노화를 터뜨렸다. "빌어먹을! 똑똑히 알지도 못하면서......." 그 말을 그냥 들어넘길 우문경이 아니었다. 요극천의 핀잔은 그녀에게 수치심을 유발시킨 것이었다. "흥! 이까짓 나무인형이 뭐가 대단하다고?" 그녀는 날카롭게 코웃음치며 수도를 칼날처럼 세워 도끼를 든 목인의 목을 갈랐다. 팍! 그녀의 수도는 정확히 목인의 목을 쳤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목인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반면 우문경은 손목이 떨어져 나갈 듯한 고통에 신음을 발하며 뒤로 물러났다. 요극천의 분노성이 울렸다. "소용없다! 그 목인들은 안향신목( 香神木)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장력은 물론 창칼과 수화 (水火)가 불침이다." 중인들이 안색을 굳히는 사이, 요극천의 뒤에서도 목인 하나가 날카로운 갈고리를 휘두르며 공격해왔다. "헉!" 요극천은 다급히 옆으로 몸을 눕혀 피해냈다. 찌익! 그러나 그의 백의자락이 길게 찢겨 나갔다. 실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만일 목인의 쇠갈 고리에 정통으로 맞았더라면 그는 등뼈가 부서지고 말았을 것이다. 한편, 백천기를 가운데 두고 두 개의 목인이 좌우에서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그는 재빨리 쌍 장을 교차하며 좌우로 장력을 날렸다. 퍼펑! 그의 장력은 정확히 두 목인의 가슴에 격중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음!" 백천기는 팔꿈치가 시큰함을 느끼고 뒤로 서너 걸음이나 물러났다. 반면 목인은 요지부동이 었다. 마치 철장동벽을 친 느낌이었다. '이럴 수가!' 백천기의 안색이 변했다. 휙휙! 이제 장내는 온통 경풍소리와 병장기 휘두르는 소리, 목인이 움직이는 기관장치로 가득 차 게 되었다. 백천기는 잠종화영보를 펼쳐 그들 사이를 누비며 장내의 상황을 살폈다. 장내에는 수백 개의 목인들이 휘두르는 무기로 인해 온통 무시무시한 소용돌이의 기류에 휩 싸여 있었다. 반면 중인들은 이리저리 몸을 날려 피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도무지 공격이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를 보자 백천기는 은연중 노기가 치솟지 않을 수 없었다. 쐐액! 또 다시 정면으로 목인 하나가 철검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백천기의 짙은 눈썹이 홱 거슬 러 올라갔다.


"추풍인(秋風引)!" 그의 마혼백혈검이 섬광을 뿜었다. 절꺽! 하는 소리와 함께 달려들던 목인은 허리가 양단되며 벌렁 넘어갔다. '그럼 그렇지!' 백천기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 찰나, 한쪽 석벽이 덜컹 열리며 한 개의 목인이 튀어 나왔다. 그 목인은 서서히 이동하더니 방금 쓰러진 목인의 자리를 메워버렸다. "이럴 수가!" 백천기는 놀라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그때였다. 이번는 세 개의 목인이 폭풍같은 기세 로 덮쳐왔다. "절참파(絶斬破)!" 마혼백혈검이 허공에 눈부신 은망(銀網)을 만들었다. 파파파팟! 세 개의 목인이 일시에 모두 토막이 나 흩어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백천기는 마혼백혈검을 무섭게 휘둘렀다. 그는 닥치는대로 목인들을 베어 넘겼다. 하지만 아무리 베어버려도 소용이 없었다. 목인은 예외없이 한 개가 쓰러지면 다른 한 개가 곧바로 자리를 메꾸었던 것이다. "아악!" 문득 날카로운 비명이 중인들의 고막을 울렸다. 백천기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눈에 어깨에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는 우문 경의 모습이 들어왔다. "단운산(斷雲散)!" 냉갈과 함께 그는 검과 몸이 하나가 되어 날아갔다. 쩌쩡! 막 우문경의 가슴을 내리치던 목인이 쥐고 있던 검과 함께 네 동강이가 되어 무너져 내렸 다. 우문경은 생사간두에서 간신히 살아나게 된 것이었다. "대인......." 우문경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처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구였다. 백천기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자신감을 잃으면 안되는데.' 그는 고개를 돌려 현무호와 전우진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만면에 진땀을 흘리며 흔들리는 표정들이었다. 소위 황궁제일의 무신(武臣)으로 천하를 질타하던 그들이었으나 생명이 없는 목인을 상대로, 그것도 끝없이 공격을 당하다 보니 거의 넋이 나가버린 것이었다. 특히 무공이 약한 요극천은 이미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지칠대로 지친 나머지 그의


몰골은 실로 말이 아니었다. 백천기는 안광을 빛내며 목인들을 둘러보았다. 처음으로 그는 목인들의 진형(陣形)을 살핀 것이었다. 목인들은 수백 개였으나 공격에 나서고 있는 목인들의 숫자는 서른여섯 개였다. 백천기는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 이것은 삼십육 천강을목진(天 乙木陳)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때였다. 요극천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맨 처음 건드렸던 목인을 부숴야 한다!" 그 말에 백천기의 얼굴에 탄성이 어렸다. 그도 방금 그것을 생각해낸 것이었다. '과연! 요극천은 기인이로구나.' 이때, 그의 등 뒤로 세 개의 목인이 나란히 짓쳐 들어왔다. 위이이잉! 백천기는 빙글 돌아서며 왼손을 칼처럼 세웠다. 다음 순간, 그의 신수(神手)가 어지럽게 허 공을 베었다. 파파파팍!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신기가 연출되었다. 세 개의 목인은 그 형태를 잃고 스르르 가루가 되어 흘러내려 버린 것이었다. 백천기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는 몸을 허공으로 솟구쳐 올렸다. 날카로운 눈으로 목인들을 살펴본 그는 한 목인을 향해 날아갔다. 그것은 도끼를 든 놈이었는데 처음 우문경이 어깨를 건드렸던 놈이었다. 위잉! 이때 목인은 마치 그를 알아 보기라도 한 듯 들고 있던 도끼로 백천기의 정수리를 내리찍었 다. 그러나 백천기는 서슴없이 왼손을 들어 막아갔다. 그 광경에 요극천은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카캉! 귀를 찢는 듯한 금속성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요극천은 치를 떨며 눈을 떴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다만 그가 본 것은 자욱한 쇳가루가 휘날리는 것뿐이었다. "......?" 쇳가루가 걷히자 백천기의 손이 목인의 가슴을 꿰뚫고 있는 것이 보였다. 끼이이이.......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가슴이 꿰뚫린 목인이 마찰음을 내며 동작을 정지하는 것이 아닌가? 그 뿐이 아니었다. 수백 개의 목인들도 갑자기 조종하는 끈이 끊어지기라도 한 듯 스르르 동작을 멈춘 것이었다.


"......!" 장내는 일시에 조용해졌다. 방금 전의 일이 한 차례 악몽처럼 느껴지는 한순간이었다. 중인들은 모두 넋을 잃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갑자기 긴장이 풀린 바람에 모두가 맥이 빠 져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 만에야 전우진이 무거운 침묵을 깼다. "휴....... 마치 악몽을 꾼 기분이군." 그의 말은 중인들의 심정을 대변한 것이었다. 이때 요극천이 우문경을 쏘아보며 짜증스럽게 내뱉았다. "모두가 낭자 탓이다. 왜 허락도 없이 경박하게 손을 놀려 이 지경을 만드는가? 하마터면 우리 모두가 죽을 뻔 하지 않았소?" 그 말에 우문경은 안색이 구겨지고 말았다. 가뜩이나 고개를 들 수 없었는데 요극천의 그 말은 그녀를 더욱 궁지로 몰았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울컥 하는 심정이 된 채 코웃음을 날렸다. "흥! 그럼 현명한 당신이 미리부터 주의를 주지 그랬어요?" "뭣이!" 요극천은 더욱 분노했다. 이때 백천기가 나서서 그들을 만류했다. "그만들 하시오. 지금은 다툴 때가 아니오." 그제서야 요극천과 우문경은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났다. "어서 앞으로 가봅시다." 백천기가 서두르자 일행은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이 때였다. "아아악!" 한 줄기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이 그들의 고막을 울렸다. 백천기 일행은 크게 놀랐다. 그들은 맨 처음, 그것도 은밀하게 들어왔던 만큼 이곳에 자신들 외에 또 다른 사람이 있으 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백천기는 잠시 침음하다 입을 열었다. "어서 가봅시다." 일행은 나는 듯이 통로 끝 쪽으로 몸을 날렸다. 통로는 십 장쯤 지나서 좌우로 갈라져 있었 는데, 비명 소리는 그 중 우측으로부터 들려온 것이었다. 일행은 우측으로 방향을 꺾었다. 잠시 후 하나의 넓은 석실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은 그들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석실 안. 천장에 밝은 야명주가 박혀있어 그곳에서 대치하고 있는 삼남삼녀(三男三女)의 모습을


여실 히 보여주고 있었다. 백천기는 그들을 본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삼마(三魔), 즉 바로 강북무림의 패자인 설산신마와 흑풍마번, 그리고 철마신조 등이 세 명 의 여인들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세 여인은 다름아닌 비봉옥녀와 그녀의 두 시녀였다. 비봉옥녀는 매서운 눈으로 설산신마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두 명의 시녀가 상 처를 입은 듯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설산신마가 그녀를 노려보며 음침하게 말하고 있었다. "흐흐, 비봉옥녀! 이번엔 네 년 차례다. 감히 노부의 거처에 숨어들어 빙옥로(氷玉露)를 훔쳐 갔으니 죽어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비봉옥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냉소를 날렸다. "흥! 설산신마, 당신의 무공이 아무리 높다해도 뜻대로만은 안될 걸?"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철마신조가 짜증을 냈다. "애형(艾兄), 솜털도 안벗겨진 계집 갖고 시간 끌지 마시오. 빨리 해치워 버리고 떠납시다." 설산신마는 음랭한 괴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흐흐흐.......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오. 노부가 이 계집을 아주 도륙을 내고 말겠소." 그는 소맷자락을 떨치더니 기괴한 자세로 우장을 떨쳤다. 쉬익! 예리한 파공성과 함께 한 가닥 한풍이 날아갔다. 비봉옥녀는 이를 악물고 급히 피해냈으나 한 가닥 한기(寒氣)에 스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편, 그 광경에 백천기는 안색이 변하고 있었다. 그는 과거 금릉 부근의 한 동굴에서의 일 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그로인해 비봉옥녀는 한령마공(寒靈魔功)을 연성할 수 없게 되었었다. 결국 그로 인해 설산신마에게 몰리는 입장이 된 것이었다. '음, 의도야 어찌 되었든 이번 일에는 내 책임이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내가 한령 마공을 파해하지 않았다면 저 여인은 마녀는 되었을 망정 설산신마에게 저렇게 밀리게 되지 는 않았을 것이다.' 이때 그는 석실의 입구 위쪽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씨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천섬전(千閃殿)>


그것을 본 순간 그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렇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장보도가 맞는다면 이곳에는 천린화망진(千燐火芒陳) 이 설치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가슴이 섬뜩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천린화망진의 무서운 위 력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는 또 하나의 의문에 봉착했다. '그런데 어떻게 저 자들이 기관을 건드리지 않고 이곳까지 올 수 있었을까?' 그는 새삼 의혹의 눈길로 삼마를 바라보았다. '저들이 진법에 통달했단 얘기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대체......' 백천기의 회의는 길지 않았다. 불과 숨 한 번 들이쉴 정도였을 뿐이었다. 문득 그의 얼굴에 기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슬쩍 손가락을 퉁겨 천섬전이라 음각된 벽을 향해 지력을 날 렸다. 쿠르르르릉......! 그러자 굉음과 함께 바닥과 벽이 무섭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엇?" 석실 안에 있던 인물들은 피아를 막론하고 일제히 경악성을 발했다. 슈슈슈슉......! 문득 한쪽 석벽에 구멍이 뚫리며 십여 개의 불꽃 덩어리가 발사되었다. 더구나 그 화염덩이 는 정확히 삼마와 비봉옥녀를 향해 쾌속하게 발사되었다. 철마신조가 아연실색하여 부르짖었다. "조심해라! 누군가 기관을 작동시켰다!" 흑풍마번은 욕설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어떤 찢어죽일 놈이 기관을 건드렸단 말인가?" 슈슈슉! 그런다고 쏘아가던 불덩이의 기세가 약화될 리 없었다. 펑! 퍼펑! 그들이 급급히 피하자 반대편 석벽에 부딪친 불꽃은 다시 폭음을 내며 사방으로 화염덩이를 퍼뜨렸다. 이 돌연한 사태에 싸움을 계속할 멍청한 인간은 없었다. 설산신마와 비봉옥녀도 마찬가지였 다. 그들은 다급히 싸움을 중지하고 화염세례를 피하기에 급급했다. 슈슈슉! 슈슈슈슛! 화염은 이제 사방 벽으로부터 마구 날아오기 시작했다. "으헉!" 삼마는 경악성과 함께 이리저리 몸을 날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가운에 설산신마가 안색 이 퍼렇게 변한 채 외쳤다.


"이 화염은 단순한 불덩이가 아니다! 사람의 뼈까지 단숨에 놓인다는 천린화망이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어이쿠!" 철마신조가 체신도 잊은 듯 기겁을 하며 펄쩍 뛰어 올랐다. 불꽃이 튀어 그의 옷자락에 그 만 불이 옮겨 붙은 것이었다. 그는 황급히 긴 손톱으로 옷자락을 잘라내야 했다. "이, 이런!" 놀랍게도 그의 옷자락은 잘려져 나가는 그 시각에 이미 제 형체를 잃고 있었다. 풀풀 날리 는 잿가루를 보며 중인들은 모두 만면에 두려움을 떠올랐다. 슈슈슉! 슈슉! 사방 벽으로부터 튀어나오는 화염 세례는 도무지 그칠 줄을 몰랐다. 급기야 설산신마가 당 황한 음성으로 외쳤다. "안되겠소! 도저히 이 천린화망에는 당해낼 재주가 없소." 한편 비봉옥녀의 낭패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연신 진땀을 흘리며 두 시녀를 앞 에 놓고 장력을 펼쳐 날아오는 불덩이를 받아내야 했다. 펑! 퍼펑! 장력에 부딪친 불덩이는 사방으로 폭발하듯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녀는 차츰 힘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내력이 고갈되어 갔다. 비봉옥녀의 주위는 온통 불바다가 된 채 후끈후끈한 열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녀는 전신 이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내심 절망의 외침을 발했다. '아! 결국 여기서 죽는구나. 아직 뜻을 이루지도 못했는데.......' 그녀의 고운 얼굴에는 구슬땀이 줄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슈슈슉! 다시 다섯 개의 불덩이가 꼬리를 물고 비봉옥녀에게 날아왔다. 그녀는 그야말로 혼신의 기 력을 짜내어 쌍장을 날렸다. 펑! 불덩이는 역시 폭발하며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하지만 나중에 날아온 두 개의 화염은 그녀 의 장력을 뚫고 그녀의 면전으로 날아들었다. 비봉옥녀의 눈이 크게 떠진 채 악마(惡魔)와도 같은 화염을 맞이했다. '이젠 틀렸구나!' 기력이 쇠진한데 막아낼 시간적 여유조차 없자 그녀는 마침내 체념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때, 믿지 못할 현상이 벌어졌다. 바로 코 앞까지 날아들던 화염이 갑자기


허공에서 피식 꺼져버린 것이었다. "아니?" 그녀는 실로 어리둥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연이은 화염의 공세에 흑풍마번이 목청을 돋구며 외쳤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모두 숯이 될 거요! 무슨 대책을 강구해야 하지 않소?" 철마신조도 당황한 음성으로 동조했다. "맞소! 이렇게 계속 버티다간 진력이 고갈되어 죽겠소." 설산신마의 안면이 보기 싫게 구겨졌다. 그는 뭔가 단안을 내리려는 듯 안색이 수 차례나 변화했다. 마침내 그는 탄식을 발했다. "음! 어쩔 수 없지. 이걸 사용하는 수밖에." 그는 품 속에서 하나의 옥병을 꺼내더니 매우 아깝다는 시선으로 내려다 보았다. 옆에서 검은 깃발을 바삐 흔들며 화염을 막아내던 흑풍마번이 물었다. "그게 무엇이오?" 설산신마는 침중하게 대꾸했다. "빙옥로." 다음 순간, 그가 빙옥로의 뚜껑을 열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스스스스....... 기묘한 음향과 함께 옥병으로부터 하얀 기체가 솟아나더니 금세 사방으로 확산되는 것이 아 닌가? 그 백기(白氣)는 곧 사방을 메웠고, 그렇게 되자 신기하게도 그토록 기승을 부리던 화염과 불덩이들이 삽시에 모두 꺼져 버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사방 석벽으로부터도 더 이상 화염이 날아오지 않게 되었다. 삼마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흑풍마번이 기쁜 빛을 띄며 말했다. "과연 애형의 능력은 대단하구려. 그 무서운 천린화망을 이렇듯 간단히 물리치다니 말이오." 설산신마는 쓴 입맛을 다셨다. "미안하오만 내 능력이 아니라 빙옥로의 힘이었소." 그의 얼굴에는 아깝다는 기색이 역력히 떠올랐다. "이것은 천지간에서 가장 음한한 기운의 결정체요. 지난번에 저 계집이 반 병을 훔쳐 간 뒤 마지막 남은 것이었는데 여기서 다 써버렸으니......" 그는 말끝을 채 다 잇지 못했다. 아쉬움을 대신하여 분노가 치밀어오른 것이었다. 좌우간 그의 심정이야 어떻든 석실 안은 백기에 의해 완전히 얼음구덩이가 되고 말았다. 사 방의 석벽에는 어느새 한 자 이상의 두터운 얼음이 덮혀 있었다. 덕분에 설산신마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갑작스레 뼈를 에이는 듯한 강추위를 느껴야


했 다. 심지어 흑풍마번이나 철마신조와 같이 내공이 심후한 고수들도 절로 몸이 떨려왔다. "으음....... 지독한 한기구나!" 흑풍마번이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읊조리자 천마신조도 푸르게 변한 입술을 겨우 놀려 응수 했다. "그렇소....... 정녕 빙옥로의 한기는 대단하구려." 그들이 이러할진대 비봉옥녀야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시퍼렇게 얼어가는 두 시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불현듯 두터운 얼음이 덮힌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쩌어억! 쩍! "아니! 이럴 수가......?" 중인들이 대경하는 사이, 벌써 석벽은 무서운 속도로 갈라지며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쿠르르릉... 꽈르릉! 설산신마가 안색이 햐얗게 질려 외쳤다. "아뿔사! 천린화망이 튀어나온다는 것은 결국 이곳 지하에 화맥(火脈)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이 아닌가? 그런데 그것이 갑자기 극성인 빙옥로의 한기와 부딪쳤으니......" 흑풍마번 또한 당혹해마지 않았다. "아! 뜨거운 것에 찬 것이 닿았다? 그럼?" 아니나 다를까? 쾅! 문득 한쪽 벽이 터지더니 일시에 수많은 돌과 얼음조각을 토해냈다. "허억!" 중인들의 비명이 난무하는 찰나, 흑풍마번은 수중의 검은 깃발로 어지럽게 날아오는 돌과 얼음덩이를 황망히 막아냈다. 비봉옥녀 역시 급급히 두 시녀를 가로막으며 쌍장을 날렸다. 그러나 그녀의 장력은 이미 힘 을 잃고 있었다. 한 개의 얼음조각이 그대로 장력을 뚫고 들어와 그녀의 어깨를 강타했다. "악!" 비봉옥녀는 어깨가 부서지는 듯한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곧 어깨로부터 전 신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가 몰려들어 그녀의 혈맥을 빠른 속도로 응고시켰다. 우르르릉......! 굉음은 이제 석실의 붕괴를 예고하고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석실 전체가 진동을


일으키는 것이 결코 심상치 않았다. "큰 일이다! 천린화망진에 이상이 생겼다. 이것은 폭발하기 직전의 현상이니 빨리 피해야 한 다." 그것은 밖에서 석실 안을 바라보고 있던 요극천이 부르짖은 것이었다. 그 말에 현무호도 평소의 냉정을 잃고 다급히 물었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오?" 요극천은 사색이 된 채 욕설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기관을 멋대로 부셔 버렸으니 난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소." 그것은 물론 백천기를 지칭한 말이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백천기는 막 쓰러지려는 비봉옥녀를 햐향해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우문경의 놀란 외침이 그 뒤를 이었다. "대인! 안돼요!" 그녀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를 뒤따라 몸을 날리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뜻을 이룰 수가 없었 다. 꽈르르르릉... 쾅! 그녀의 면전에서 그만 천장이 와르르 무너져내려 버린 것이었다. 그 바람에 우문경은 신형을 급히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돌무더기와 더불어 자욱한 먼지 가 일어나 더 이상 석실 정경은 볼래야 볼 수도 없게 되었다. "대인! 대인......!" 우문경의 울부짖음만이 공허한 메아리를 울릴 뿐, 석실 쪽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끼... 끼이익......! 이때 다시 괴음이 중인들의 고막을 울렸다. 이어 그들의 바로 옆 석벽이 저절로 좌우로 갈 라지며 하나의 통로가 열렸다. 요극천이 통로 안으로 달려들어가며 외쳤다. "죽고 싶지 않다면 날 따라와라!" 그러자 우문경이 다급히 외쳤다. "안돼요! 아직 대인께서 나오지 않았어요." 요극천은 몸을 돌리며 짜증을 냈다. "그를 기다리려다가는 전부 죽는다. 곧 이쪽의 천장도 마저 무너져 내릴 것이다." 우르르르......! 아닌게 아니라 그들의 머리 위에서는 이미 천장이 심각한 균열을 일으키며 돌덩이들을 쏟아 내고 있었다. 이때 전우진이 번개처럼 요극천의 앞을 막으며 외쳤다. "요극천! 헛꿈 꾸지 말아라. 너는 애초부터 우리와 함께 하기로 하지 않았느냐?"


요극천은 안색이 변했다. 그는 이미 눈 앞의 삼 인이 백천기를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삼 인을 물리칠 자신도 없었다. "자, 물러나라." 전우진이 그를 노려보며 걸어왔다. "으음!" 할 수 없이 요극천은 통로로부터 다시 물러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쿠르릉! 그들이 막 물러나왔을 때 통로는 다시 굉음과 함께 도로 닫혀 버리고 말았다. 요극천의 입 에서는 그만 절망어린 탄식이 흘러 나왔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우리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때였다. 무너진 천장 뒤쪽으로부터 한 줄기 낭랑한 음성이 들려와 그의 말을 받았다. "요도주, 인간의 목숨은 당신의 생각처럼 그리 쉽게 끊어지는 것이 아니외다." "오오!" 중인들이 저마다 탄성을 발하는 가운데 자욱한 먼지 속에서 돌더미가 움직이며 한 인영이 빠져 나오고 있었다. 백천기였다. 놀랍게도 그의 오른쪽 옆구리에는 비봉옥녀가, 그리고 왼쪽에는 두 명의 시녀가 끼여져 있었다. "대인!" 우문경의 마치 죽은 연인이 살아오기라도 한 듯 눈물을 머금고 환성을 발했다. 이때 비봉옥녀가 신음을 흘려냈다. "으음......." 비봉옥녀는 혼절상태에서 막 깨어난 듯 큰 눈을 들어 주위를 살폈다. 곧 그녀는 자신이 백 천기에게 안겨있음을 깨닫고는 부지중에 얼굴을 붉혔다. "공자, 저를 내려 주세요." "아! 그렇구려." 백천기는 빙긋이 웃으며 그녀를 내려 주었다. 두 시녀도 그녀에 이어 조심스럽게 바닥으로 내려졌다. 비봉옥녀는 신형을 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탈진한 상태였으나 시녀들이 염려되었는지 물었 다. "공자, 그 아이들은 어떤가요?" 백천기의 얼굴에는 훈훈한 미소가 떠올랐다. "안심하시오, 상처가 깊기는 하나 아직은 무사하오." 비봉옥녀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구해주신 은혜는 정녕 잊지 않겠어요." "천만의 말씀이오. 괘념치 않아도 되오." 백천기의 말에 요극천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 인사치레는 집어 치우시오. 죽음을 눈 앞에 둔 상황에 예의는 무슨......" 백천기는 고소를 지으며 닫혀버린 통로의 석벽을 바라보았다. "이 통로가 닫혀버렸기 때문에 지금 화를 내는 것이오, 요도주?" 요극천은 냉랭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내뱉았다. "이 석벽을 얕보지 마라. 이런 엄청난 진동과 폭발에도 끄떡없는 것을 보면 청강신옥석(靑 神玉石)으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백천기는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럼 필히 청강신옥석과 한판 승부를 해야겠구려." 동시에 그는 석문을 향해 신수(神手)를 날렸다. 꽈꽝! 놀랍게도 청강신옥석으로 만들어진 통로의 석벽은 여지없이 박살이 나고 말았다. "앗! 저, 저럴 수가......." 요극천의 검은 수염이 푸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태어난 이래 이처럼 놀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놀란 것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전우진, 현무호, 우문경도 입을 크게 벌린 채 넋을 잃은 표정이었다. 특히나 비봉옥녀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경악에 찬 눈은 백천기의 손에 가 있었다. '저 분의 손! 혹시.......' 그녀의 뇌리에 언뜻 지난 날 금릉 근처 동굴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당시 누군가가 자신의 한령마공을 파해하면서 빙벽에 남겼던 글씨가 생각에 잡혔다. 그녀는 망연한 표정으로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빙옥로로 인해 얼어붙어 버린 빙벽에 그토록 깊은 글씨를 새길 사람은 결코 흔치 않다. 하 지만 이 청강신옥석을 부숴 버릴 정도라면.......' 그녀의 가슴은 마구 뛰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분이 그때 그 사람이었단 말인가?' 이때, 자욱한 먼지가 가라앉자 뻥 뚫린 통로가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났다. "자! 이제 들어갑시다." 백천기의 말에 일행은 정신을 번쩍 차리며 통로 안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맨 마지막으로 현무호가 들어섰을 때였다. 꽈르르릉...! 꽈꽝......!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그들이 있던 곳이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아! 한 발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 했구나." 요극천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백천기를 향해 물었다. "삼마는 어찌 되었......소?" 은연중 그의 어투가 달라지고 있었다. 어느새 그는 백천기에게 경외감을 느끼게 된


것이었 다. 백천기는 담담하게 말했다. "흑풍마번과 철마신조는 죽었소. 하지만 설산신마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소." 그 말에 중인들은 모두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아! 천하에 위명을 날리던 삼마가 이곳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될 줄이야." 요극천의 장탄식에 중인들은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제 23 장 · 중첩(重疊)되는 위기(危機) 석실 안. 한 명의 노인과 귀엽게 생긴 소동, 그리고 아름다운 소녀가 서 있었다. 노인이 밝힌 화섭자로 침침한 석실 내부가 보였다. 석실은 사방으로 네 개의 문이 달려 있 는 장방형의 구조를 지닌 곳이었다. 그들은 백원노인(白猿老人)과 그의 손자 손녀인 완아와 청아, 즉 두소완(杜召宛)과 두소청 (杜召靑)이었다. 두소완이 두현상에게 불안한 듯 말을 건넸다. "할아버지,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나간 것은 잘한 일 같지가 않아요." 두소청도 초롱한 눈알을 굴리며 동감을 표했다. "누나 말이 맞아! 도대체 어느 문으로 가야할지 모르겠잖아." 두현상은 침착을 잃지 않고 두 손자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건 그렇다만 이 할애비는 왠지 모르게 군웅들이 가는 방향은 불안하게 느껴졌다. 이쪽으 로 와야만 백대협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었다." 두소완은 그제서야 두 눈을 반짝이며 수긍했다. "할아버지의 예감은 틀린 적이 없잖아요? 정말 그 분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두현상은 내심 탄식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는 틀림없이 이곳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두소완과 두소청의 기대어린 얼굴은 그에게 더없는 부담이 되고 있었다. 어쨌든 그가 불안 을 억누르고 다시금 사방의 문을 두리번거릴 때였다. 쾅! 느닷없이 한쪽 문이 열리더니 그 안으로부터 한 괴인(怪人)이 튀어 나왔다. 그자는 놀랍게도 전신이 시뻘겋게 불에 그을려 있었으며 심지어 머리카락조차 홀랑 타버려서 민대머리였다. 어디 그뿐인가? 화상으로 인해 흉하게 엉그러붙은 그의 안면은 끔찍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괴인을 본 두소완은 공포에 질려 전신을 떨었다. 그러나 괴인은 하필 그녀를 향해 괴성을


내지르며 다가왔다. "크으으으......." 두현상이 그를 보고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멈추시오! 당신은 누구요?" 괴인은 그 말을 못들었는지 멈추지 않고 비척비척 다가왔다. 입이라는 게 붙어있는지 구별 조차 힘든 그의 안면이 흉칙하게 씰룩이며 괴음을 토해냈다. "크으윽...... 악마(惡魔)의 불이 다가온다...... 크으으......." 두현상의 안색이 돌변하는 찰나였다. "죽인다! 죽인다! 으아아......!" "악!" 괴인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두소완을 덮쳐갔다. 두현상이 대경하여 그자의 앞을 막아섰다. "네 놈이 미쳤구나!" 동시에 그는 급히 쌍장을 모아 괴인의 가슴팍을 쳤다. 펑! "윽!" 그러나 뒤로 주르륵 밀려난 것은 오히려 두현상 쪽이었다. 분명 괴인의 가슴을 정통으로 가 격했건만 강한 반탄력에 의해 두 팔이 어깨까지 시큰했던 것이다. 괴인은 잠시 멈칫 했을 뿐 계속하여 다가오고 있었다. 두현상은 내심 부르짖고 있었다. '이 자의 무공은 정말 대단하구나. 대체 누구길래?' "당신은 누구요?" 그가 재차 물었으나 괴인은 대답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여전히 두 팔을 벌린 채 다가 올 따름이었다. "으으...... 죽어라!" 괴인이 양손을 기묘하게 교차하더니 쭉 내밀었다. 그의 양손에서는 차가운 한기를 동반한 흰 강기가 무섭게 뻗어 나왔다. 그것을 본 순간, 두현상은 크게 놀랐다. "현음신공(玄陰神功)!" 그는 부지중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나며 외쳤다. "그대는 설산신마와 무슨 관계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인의 걸음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설... 산... 신마..... 모른다....... 다 죽여 버리겠다. 모두... 으아아......!" 벼락같이 덮쳐드는 그를 보며 두현상은 순간적으로 생각을 굴렸다. '설산인마에게는 전인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자는 필시 어떤 충격을 받아 정신이 돌았을 뿐 틀림없이 설산신마 본인일 것이다.' 그 사이 차가운 두 줄기 한파가 밀려 들었다. 사태가 이쯤 되자 두현상도 급히 쌍장을 밀어


냈다. 펑! 폭음이 일자 두현상은 거센 충격으로 또 다시 뒤로 물러났다. '안되겠다. 이러다간 완아와 청아가 위험해지겠구나.' 하지만 그의 염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갑자기 괴인이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자 신의 가슴을 움켜 쥐었다. 그의 입가에는 검은 피가 주루룩 흘렀다. 그런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두소청이 뜻밖에도 괴인에게 쌍장을 휘두르며 다가들었다. "청아! 무슨 짓이냐?" 두현상의 놀란 외침이 울리는 순간, 두소청은 벌써 손바닥 환영을 어지럽게 환출해내고 있 었다. 그것은 바로 지난 날 백천기에게서 배운 유운청신장(流雲淸神掌)이었다. 비록 미쳤지만 무인(武人)의 감각을 일종의 습성처럼 달고 있는 괴인이었다. 그는 청아의 장 력이 변화를 일으키며 밀려오자 이를 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펑! 두소청의 쌍장은 정확히 그의 가슴에 격중되었다. "크윽!" 괴인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더니 두 눈에서 흉광을 폭사했다. "크크크...... 네 놈이 나를!" 그의 쌍장이 급기야 어지럽게 흔들렸다. 휘리리링! 뼈를 에일 듯한 한풍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밀려 나갔다. 보고 있던 두현상이 혼비백산하 여 외쳤다. "청아야! 위험하다." 두소청의 움직임은 그보다 약간 빨랐다. 이 대담무쌍한 소년은 별로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미리보법(彌鯉步法)을 펼쳐 마치 유영하듯 장력 사이를 비집고 몸을 피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두소청은 소매 속에서 한 자루의 소도를 꺼냈는데 그것은 섬뜩하게도 날 이 시퍼렇게 서 있었다. 게다가 두소청이 서슴없이 펼쳐낸 것은 영사반공십이식(靈砂半空十二式) 중 가장 무서운 영 사반공(靈砂半空) 초식이었다. 이때, 공교롭게도 괴인은 다시 고통이 발작한 듯 두 손을 허우적거리며 괴로워 했다. "크아아......!"


괴인은 괴성만 질러댈 뿐 두소청의 소도를 피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보고 있던 두현상의 안면이 굳어졌다. "저, 저런!" 그의 짐작대로 역시 이미 펼쳐진 살수는 회수가 불가능했다. 팍! 소도는 정확히 괴인의 심장에 깊숙히 박혀버리고 말았다. "크악!" 괴인의 가슴팍에서 한 줄기 피분수가 쏟아져 나왔다. "으....... 크크......." 마침내 괴인은 바닥에 고목처럼 쓰러져 버렸다. 그가 경련 끝에 축 늘어지자 보고 있던 두 소완은 충격을 받았다. "처, 청아... 너......." 하지만 두소청이라고 해서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었다고는 하나 살인 (殺人)이 어찌 산짐승 따위를 잡는 사냥과 같겠는가? "누, 누나....... 나는... 죽일 생각은 없었어. 이 사람이 당연히 피할 거라고 생각했지. 설마하 니......" 새파랗게 질린 채 더듬거리는 소년을 대신해 두현상이 길게 탄식했다. "그만 두거라. 다 이 할애비가 부족한 탓이다." 두현상은 곧 괴인의 시체를 향해 침중한 시선을 던졌다. '으음, 대체 그 어떤 무서운 일을 당했기에 천하의 마두인 설산신마가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두소완은 그때까지도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었다. "할아버지... 무서워요......." 그러자 옆에 있던 두소청이 갑자기 발작적으로 고함쳤다. "흥! 무서우면 애당초 오지를 말지, 여기까지 와 놓고선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그런 소년의 당돌한 모습에 두소완은 펄쩍 뛰었다. "너, 정말......." 그러나 두소청은 되려 화를 발칵 냈다. "흥! 누나는 백형님만 보면 그만이지? 만약 내가 누나같은 입장이었다면 누나는 무섭다고 구경만 하고 있었을 걸?" "뭐, 뭣?" 두소완은 그만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 그녀로서는 내심을 들킨 부끄러움보다는 노여움 이 한층 더 컸다. "너 이렇게 함부로 말할래?" 그녀가 장력을 내치자 두소청은 코웃음 쳤다. "흥! 누나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을 걸?"


소년은 실제로 유연하게 몸을 슬쩍 빼냈다. 펑! 두소완의 장력은 하릴없이 석벽을 때렸다. 그러자 실로 상상치도 못한 사태가 발생하고 말 았다. 슈슈슈슉!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석벽으로부터 수십 개의 화살이 섬전처럼 쏟아져 나왔다. "악!" 정면에 있던 두소완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와, 완아야!" 두현상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인 채 그 광경을 두 눈 뜨고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 순간, 유령처럼 날아드는 한 인영이 있었다. 차차창! 그의 등장에 수십 개의 화살이 일제히 사방으로 튕겨나가 버렸다. "아아!" 두소완은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장내에 갑자기 나타난 인물은 한 추악한 용모의 청년이었다. 그의 뒤로는 오십여 세 정도의 검은 수염을 기른 냉막하고 청수한 인상의 백의인이 서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백천기와 요극천이었다. 두현상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들에게 정중 히 포권했다. "고맙소이다. 소협이 아니었더라면 노부의 손녀는......" 백천기는 담담하게 손을 내저었다. "별 말씀을. 이런 상황하에서는 누구라도 그리 했을 것이외다." 그는 갑자기 안색을 엄숙히 굳히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온 이상 위험은 앞으로도 계속 각오해야 할 것이오." 그 말에 두현상은 침울하게 답했다. "알고 있소이다. 그 정도는. 하지만 지금은 진퇴양난이라 앞으로 나갈 수도 뒤로 물러날 수 도 없는 상황이니 난감하기만 하구려." 그는 두소완과 두소청을 돌아보며 솔직히 말했다. "철 모르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까지 온 노부가 잘못이었소." 백천기의 눈살이 슬며시 찌푸러 들었다. "당신은 의당 후회해야 하오. 대체 무엇 때문에 군마(群魔)의 위협은 물론 죽음의 함정이곳 곳에 도사린 이곳에 들어왔단 말이오?" 비록 내심은 이러 했으되 이미 엎질러진 물인지라 그는 안색을 부드럽게 풀며 말했다. "그렇다면 소생이 퇴로를 알려 드리겠소." "그게 진정이시오? 그렇다면 정말 백골난망이로소이다." 반색을 하는 두현상을 향해 백천기는 고소를 지었다.


"안도하기는 아직 이르오." 이어 그는 그 동안 자신이 겪은 여러 가지 위험한 기관에 대해서 상세히 말해 주었다. 또한 그곳을 거슬러 빠져 나가는 순서를 일일히 설명해 주었다. 두현상은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는 백천기의 말을 들으며 천궁석부의 가공 할 기관장치에 대해 모골이 송연해짐을 금치 못했다. 그의 능력으로는 한 걸음도 더 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아무튼 두현상은 그의 설명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가슴에 새겨두는 한편 내심 솟구치는 의 문을 금할 길이 없었다. '대체 이 청년은 누구길래 이런 호의를 베푼단 말인가? 보아하니 천궁석부의 내부를 잘 알 고 있는 듯 한데 그렇다고 이곳의 보물을 탐낼 사람도 아닌 듯 하니.......' 이때였다. 잠자코 그의 설명을 듣고 있던 두소청이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물었다. "잘 알겠어요. 하지만 어떻게 아저씨의 말을 다 믿죠?" 두소청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백천기는 그만 슬며시 웃음이 스며나왔으나 겉으로는 짐짓 엄중하게 나무랐다. "꼬마가 무척이나 맹랑하게 구는구나. 너는 어른의 말을 못믿는단 말이냐?" 그 말에 두소청은 물러나기는 커녕 발끈하고 나섰다. "흥! 당신 나이가 내 나이보다 얼마나 많길래 감히 꼬마라고 하는 거예요?" 백천기는 슬며시 눈썹을 찌푸려 보였다. "그럼 네가 꼬마가 아니면 어른이란 말이냐?" 두소청은 안색이 싸늘하게 변하더니 갑작스레 쌍장을 뻗어냈다. 그것은 조금 전에 실력발휘 를 했던 유운청신장이었다. 백천기는 냉소했다. "안됐지만 그 따위 시시한 유운청신장으로는 내 옷소매 하나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슬쩍 몸을 비틀더니 가볍게 공격을 피해냈다. 그러자 두소청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어? 이 자가 어떻게 유운청신장을 알고 있을까?' 두소청의 얼굴에는 커다란 의혹을 떠올라 있었다. '분명 백형님은 천하에서 이 장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는데?' 그러면서도 두소청은 입술을 깨물며 계속 공격을 해댔다. 휙휙휙! 그의 작은 손바닥은 마치 꽃잎이 날리듯 경쾌하게 환영을 그리며 날카로운 장력을 쏟아냈 다. 백천기는 계속하여 휘청거리는 듯 몸을 좌로우로 움직이며 가볍게 그의 공세를 피해냈 다.


"후후후! 제법이다마는 아직 화후가 부족하구나. 그럼 이번에는 내 공격을 받아보겠느냐?" 동시에 그는 식지와 중지를 구부려 슬쩍 두소청의 풍부혈(風府穴)을 찍어갔다. 쉬익! 그의 손가락에서는 날카로운 경기가 화살처럼 뻗어나갔다. "앗!" 두소청은 다급히 미리보법을 펼쳐 어지럽게 두 발을 교차했다. "하하하! 미리보법으로는 내 공격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이?" 두소청은 그만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이때 상황을 지켜보던 두소완의 안색이 변했다. '아! 저 사람은 백대협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고강한 무공을 지녔구나.' "악!" 문득 두소청의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는 결국 백천기의 두 손가락에 의해 풍부혈을 제압당하고 만 것이었다. 공포에 질린 소년의 귀로 한 가닥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청아, 이 녀석! 아직도 이 형님을 몰라보느냐?" 두소청은 깜짝 놀라더니 백천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어 소년의 총명한 눈에는 환한 광채가 솟아났다. "백형님! 백형님이셨군요!" 두소청은 백천기가 손가락을 떼자마자 펄쩍 뛰어 그에게로 안겨들었다. 백천기도 대소하며 소년을 받아 안았다. "하하하! 이 녀석, 대담하구나. 감히 겁도 없이 이곳까지 찾아오다니." 두소청은 그의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리며 원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백형님, 정말 날 놀라게 하고...... 이럴 수가 있어요?" 백천기는 호탕하게 웃으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하하, 미안하다. 소청." 하지만 두소청의 투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하면 다인줄 알아요?" 소년은 작은 주먹으로 백천기의 가슴팍을 마구 두드렸다. 백천기는 짐짓 엄살을 부렸다. "아얏! 그렇게 하다가는 이 형님의 갈빗대가 모두 부서져 버리겠다." "푸하하하!" "호호호......." 중인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 사이에는 금세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풍겼다. 잠시 후 두현상이 다가와 포권했다. "백소협, 정말 반갑소이다.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백천기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도 반갑습니다. 하지만 이런 위험한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두현상은 두 손자녀를 힐끗 보며 말했다.


"허허, 모두가 저 녀석들 때문이오. 어찌나 백소협을 보고 싶어 하는지 몇날 며칠을 졸라대 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주책인 줄은 알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오게 되었소이다." 백천기는 그 말에 가슴이 훈훈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순수한 사람들이구나. 겨우 한 번의 인연을 믿고 이곳까지 목숨을 도외시하고 찾아오 다니.' 백천기는 고개를 돌려 두 남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을 받자 두소완은 그만 얼굴이 빨갛 게 달아오른 채 급히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백천기는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나 곧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이곳은 오래 머무를 곳이 못됩니다. 불초도 곧 나갈 생각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그만 밖으로 나가도록 하십시오." 두현상은 왠지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소협 혼자 두고......" 백천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불초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 제 말을 따라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두현상은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렇구나. 우리가 있으면 백소협이 도리어 거추장스러워질 것이다.' 결국 그는 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럼 나가서 꼭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라오." "물론입니다. 두노협." 반면 두소완과 두소청은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두소완의 경우는 눈에 눈물마저 그 렁그렁해지고 있었다. 앳된 소녀의 순정(純情)이었다. 그것은 백천기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의 눈에는 두소완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는 끝내 한 마디도 못하고 마는 것이 들어오고 있 었다. '정녕 난감하군.' 이 순간에 그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이라곤 한 가지밖에 없었다. "자! 늦기 전에 그만 가보십시오." 그는 모른 척 그렇게 말했다. 두현상은 두 손자녀의 어깨를 잡고 돌아섰다. "그럼 훗날 뵙겠소. 백소협께서는 부디 신체를 보중하기 바라오." 그 말을 남기고 두현상 조손(組孫)은 어두운 통로로 사라져 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백천기는 이제껏 정물인 양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던 요극천을 향해 말했다. "요도주,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무엇이오?"


백천기는 두현상 등이 사라진 곳을 가리켰다. "저들의 뒤를 따라가 보살펴 주지 않겠소?" "하지만......." 요극천이 망설이는 표정을 짓자 백천기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후후, 내가 이곳에서 죽으면 당신도 생명을 부지하지 못할까봐 그러오?" 요극천은 응답하지 않았다. "염려마시오. 나 역시 이곳 기관에 대해서는 장보도를 미리 보아두어 자신이 있소." 요극천은 침중한 안색을 지었다. 실상 그의 마음에 가장 꺼려지는 것은 이곳 천궁석부에 들 어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나간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비단 이곳의 보물 때문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 더한 것, 즉 명예를 건 망자(亡 者)와의 싸움이었다. 무영귀도를 꺾고 그 위에 오르고 싶었던 것이 그의 최대의 꿈이었던 것이다. 백천기는 어느 정도 요극천이란 인물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무엇 때문에 망 설이는 것인지 짐작하고 말했다. 그는 부드러우면서도 엄숙한 음성으로 말했다. "요도주, 내 한 마디 하겠소. 들어 주겠소?" "무엇이오? 경청하겠소." 백천기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릇 인간의 욕망이란 끝이 없는 법이외다. 지난 날 천하제일의 도적이었던 무영귀도 또한 그 많은 보물들을 저승까지 가지고 가지는 못했소. 결국 욕망은 일시적인 물거품과도 같은 것이오. 진정한 가치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지 보물이나 헛된 명예 따위는 아닌 것 이라 생각하오." "......!" 요극천의 안색이 흐려졌다. 그는 꿈에도 이렇게 어린 사람으로부터 충고를 받게 될 줄은 몰 랐다. 만일 과거 같았으면 결코 이런 말을 듣고 참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천궁석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은연중 백천기 의 인품과 능력에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요도주의 능력은 이미 하늘을 꿰뚫을 정도요. 설사 무영귀도가 살아난다 해도 결코 그 적 수가 아닐 것이 분명하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곳에 미련을 가지는 것이오? 저


아이들을 보시오." 그의 시선은 두소청, 두소완 남매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극천의 눈길도 자연스럽게 두 남매 를 향해 옮겨졌다. 백천기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저 아이들이야말로 미래를 짊어질 존재들이오. 이런 흉험한 곳에서 채 피지도 못하고 꺾인 다면 무림의 장래는 어찌되겠소? 요도주가 저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 생각하오." "......!" "이곳은 보물이 묻혀있는 곳이 아니라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 묻혀있을 따름이오. 그러니 이 곳의 일은 내게 맡기고 저 아이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 주시오." 마침내 요극천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떠올랐다. 그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지고 있었다. "알겠소이다. 백대인." 요극천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그는 짧은 순간에 인생의 진리를 깨달은 양 완전히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갑시다." 그는 두현상을 재촉하여 먼저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현상 조손은 백천기를 향해 고 개를 끄덕여 보인 후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들이 사라지는 동안 백천기는 그 자리에 꽤 오래도록 서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과연 인간을 통솔하는 힘은 귀계나 지략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백천기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이어 그의 신형이 번쩍 하는 듯 하더니 곧 자취를 감추었다. 백천기는 컴컴한 통로를 질주하여 한 석실로 들어갔다. 석실은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는데 그곳에는 현무호와 전우진, 그리고 우문경이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문경은 그가 들어서자마자 불안한 음성으로 물었다. "대인, 그 쪽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백천기는 담담한 어조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별 일 아니었소. 그곳에 백원곡의 곡주와 그의 두 손자녀가 있었소." 이어 그는 그곳에서 일어났던 상황을 대충 얘기해 주었다. 마지막에 광인이 되어 비참하게 죽은 설산신마에 대한 얘기를 하자 일행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 그럴 수가......." 우문경이 문득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 완아라는 낭자는 예쁜가요?" 그녀의 말에 일행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백천기는 그만 실소를 지을 수밖 에 없엇다. 우문경이 얼굴을 붉히며 날카롭게 쏘아부쳤다. "뭐가 그리 우습죠?" 백천기는 그만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아니오. 아무 것도." 그가 우문경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두소완이란 어린 소녀에게도 질투심을 드러내 는 그녀를 보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한편 현무호와 전우진도 상황을 눈치챈 듯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우문경은 중인환시 리 자신의 불타는 연심(戀心)을 드러낸 셈이 되고 말았다.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그녀가 당 "비봉옥녀의 상세는 좀 어떻소?" 우문경은 표정이 어둡게 변하더니 침울하게 답했다. "상태가 안좋아요. 마치 얼음에 담근 듯 전신이 싸늘해 졌어요." 백천기는 내심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빙옥로의 한음지기가 뭉쳐진 얼음조각에 맞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쨌든 그녀에게 가봅시다." "네." 우문경은 앞장 서 석실의 다른 통로로 나갔다. 그 통로 끝에 또 하나의 석실이 있었던 것이 다. 그들이 석실 안으로 들어서자 상세를 어느 정도 회복한 두 시녀가 급히 허리를 조아리며 맞 이했다. "백공자님, 어서 오세요." 하화(夏花)와 추국(秋菊)이란 이름을 가진 소녀들이었다. 백천기는 그녀들을 향해 다소 무거 운 음성으로 물었다. "낭자의 상세는?" 추국이 안타까운 듯 고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위중해요." 두 시녀의 침울한 표정을 뒤로 하고 백천기는 지체없이 석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옷가지가 깔려있는 바닥에 비봉옥녀가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그녀는 의식을 잃고 있었는데 몸을 새우등처럼 잔뜩 구부리고 있었다. 또한 안색은 완전히 푸르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백천기는 그녀의 맥문을 잡아보고는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한기가 전신에 퍼져 있구나." 그 말에 하화와 추국은 눈물이 글썽해졌다. 추국이 눈물방울을 떨구며 처연하게 물었다. "공자님, 어떻게 해야 아가씨를 살릴 수 있을까요?" 그러자 하화도 애원했다. "공자님, 제발 아가씨를 구해 주세요." 백천기는 내심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과거 내가 한 일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그의 내심을 알 리가 없는 그녀들이었다. 이때 우문경도 석실 안으로 들어와 근심스 런 안색으로 비봉옥녀를 살펴 보았다. 백천기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는 천독마경에 기재되어 있는 의술편을 떠올렸다. 그러자 그의 뇌리에 하나하나 심오한 의학의 법리가 떠올랐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그는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하화, 추국, 그대들은 잠시 밖에 나가 있으시오." "네, 공자님." 그에 대한 두 시녀의 신뢰는 대단했다. 그녀들은 그의 태도에서 비봉옥녀의 치료방안이 마 련되었으리라 여기고는 안도하는 표정으로 흔쾌히 밖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한편 우문경은 그가 자신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인....... 저도 나갈까요?" 백천기는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낭자는 남아서 날 도와주어야겠소." "알겠어요." 우문경은 일단 대답은 해놓았으나 사뭇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치료하려는 걸까?' 이때 백천기는 비봉옥녀의 면전에 가부좌를 틀고 앉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비봉옥녀와는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문경은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아니, 왜......?" 백천기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문낭자, 그녀의 옷을 모두 벗기시오." "네엣?" 우문경이 놀라 뭐라고 반문하려 하자 백천기는 무거운 음성으로 재차 말했다. "시간을 끌면 위험하오. 그녀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 뿐이오. 어서 옷을 벗기 시오." "음."


우문경의 고운 안면이 묘하게 변했다. 그녀는 몹시 고민스런 표정을 지었다. '내가 꼭 이래야 하나?' 우문경은 내심 회의하면서도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백천기가 불필요한 일을 할 사람이 아 니라는 것을 믿었으므로 마침내 손을 놀려 비봉옥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비봉옥녀의 눈부신 나신이 드러났다. 우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손끝이 떨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같은 여인이라 해도 비봉옥녀의 비단같은 피부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도 남김없이 벗겨야 하오." 백천기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냉랭하게 말했다. "알... 겠어요." 이윽고 우문경은 마지막 남은 한 장의 천마저 비봉옥녀의 옥체로부터 떼어냈다. 마침내 석실 바닥에는 눈부신 여체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않은 채 드러나게 되었다. 비봉옥녀는 성숙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젖가슴은 발달할대로 발달해 있었으며 전신이 터질 듯이 무르익어 있었다. 눈처럼 흰 피부와 가냘프면서도 동그란 양어깨, 대리석처럼 곧게 뻗은 두 다리는 같은 여인 인 우문경이 보기에도 매료될만큼 아름다웠다. 특히 군살이라곤 한 점도 없는 아랫배에 움푹 패인 배꼽과 그 아래로 기름지게 살짝 구릉을 덮고 있는 비부의 방초(芳草)는 성숙한 여인의 내밀한 향기를 은은히 풍기는 듯 했다. "흠." 문득 우문경의 귀로 백천기의 기침이 울렸다. 우문경은 정신이 번쩍 들어 외쳤다. "다 벗겼어요!" 이렇게 외친 그녀의 내부에는 문득 한 가닥 의혹이 솟구치고 있었다. '만일 대인이 이 여인의 알몸을 대하게 되면 어떤 생각을 하실까?' "우문낭자, 진기를 손바닥에 모아 그녀의 양쪽 유근혈(乳根穴)을 누르시오." "넷......?" 갑작스럽게 들려온 백천기의 지시에 우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유 근혈이라면 여인의 소중한 젖가슴 아래 부분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백천기가 지시하는 대로 장심에 진기를 모은 후 손 바닥을 비봉옥녀의 젖가슴으로 갖다 댔다. 뭉클한 젖가슴이 손바닥에 감촉되었다. 그러나 온기(溫氣)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얼음을 접촉한 듯 싸늘한 냉기에 그녀는 어깨를 오스스 떨고 말았다. 바로 그때였다. 문득 그녀의 등 뒤 명문혈에 누군가의 손바닥이 닿더니 곧바로 뜨거운 열류 (熱流)가 경맥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우문경은 비로소 백천기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아! 격체전력의 수법을 쓰려고 하셨구나.' 이렇게 되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백천기의 뜨거운 진기를 받아들이자 전신이 후 끈후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접인도양의 수법으로 백천기의 진기를 받아들인 후 장심 으로 진기를 집중했다. 그러자 그녀의 손바닥은 불처럼 뜨거워졌다. "자, 이제부터는 추궁과혈(推宮過穴)의 수법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서서히 마찰하시오." 우문경은 더 이상 잡념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전심전력으로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녀는 손바닥을 비봉옥녀의 팽팽한 젖가슴 양쪽에 밀어붙인 채 추궁과혈하기 시작했다. 손바닥이 좌에서 우로 움직였다. 그때마다 터질 듯이 부푼 유방이 형태를 잃고 일그러지고 있었다. 더구나 뜨거운 진기를 유입하고 있었으므로 젖가슴은 그녀의 손바닥이 움직임에 따 라 더욱 부풀어 오르는 듯 했다. "......!" 우문경은 눈을 크게 떴다. 젖가슴 정상에 맺혀있는 두 알의 유실(乳實)이 또렷하게 일어서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얼음처럼 차갑기만 하던 비봉옥녀의 젖가슴에는 비로소 서서히 따 뜻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시 백천기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왼손으로는 옥당(玉堂)을, 오른손으로는 단중혈( 中穴)을 문지르시오." 우문경의 손바닥이 재빨리 비봉옥녀의 양쪽 젖가슴 사이, 혈도의 위치를 찾아 움직였다. "다음엔 거궐(巨闕), 기문(期門), 수분(水分), 장문혈(章門穴)을 차례차례 마찰 하시오." 백천기의 지시에 따라 우문경의 손은 차츰 비봉옥녀의 아랫배 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으음!" 우문경의 눈에는 비봉옥녀의 나신이 적나라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심지어는 비봉옥녀의 은 밀한 부위까지도 환히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녀의 손은 차츰 여인의 중지를 향해 문질러가는 셈이었다. 결국 우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백천기의 지시에 따라 손을 움직이고 있었으나 그녀는 묘한 환상에 빠지 고 있었다. 그것은 백천기가 마치 자신의 온몸을 애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음......."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신음이 흘러 나왔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녀의 손은 멈추지 않 았다. 백천기의 진기를 받아들여 뜨겁게 달아오른 손바닥은 어느새 비봉옥녀의 나신 위를 미끌어져 내려가고 있었다. "천추(天樞), 기해(氣海), 석문혈(石門穴)의 순으로 마찰하시오." 우문경의 얼굴은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마침내 그녀의 손은 비봉옥녀의 매끄러운 아랫배를 지나 배꼽 부근까지 내려가게 된 것이었다. "이번에는 단전(丹田), 중극(中極), 하회혈(下悔穴)을 문지르시오." 우문경의 손바닥은 마침내 비봉옥녀의 배꼽 아래로 미끌어져 내려갔다. 이젠 부드러운 방초 가 손가락 끝에 닿을락말락하고 있었다. "비궁(秘宮), 음천(陰泉), 용단혈(龍丹穴)을." "아......." 우문경의 입에서는 마침내 자신도 알 수 없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손은 바르르 떨리 고 있었다. 백천기가 지시하는 혈도는 바로 여인의 음부(陰部)와 다름없는 곳이었기 때문이 다. "지체하면 안되오!" 백천기의 음성이 우뢰처럼 귓전에 울려왔다. 우문경은 정신을 번쩍 차리고 마침내 손을 움 직였다. 그녀의 손바닥 가득 부드러우면서도 다소 가슬거리는 방초의 촉감이 느껴졌다. 우문경은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눈을 감은 채 그녀는 잡념을 떨쳐버리려 애를 쓰면 서 추궁과혈을 행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우문경에게는 마치 일수유가 억겁처럼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되었소. 이젠 그녀의 몸을 뒤집으시오." 백천기의 억양이 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우문경에게 더없이 잔인하게 들렸다. 그러나 이젠 생각하고 말고가 없었다. 그녀는 손을 움직여 비봉옥녀의 나신을 엎드리게 했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 곧 펑퍼짐 하면서도 탐스럽게 발달한 우윳빛의 둔부가 들어왔다. 그것 은 마치 두 개의 산봉우리를 보는 듯 했다. "이번에는 명문대혈(命門大穴)에 진기를 주입하시오."


우문경은 역시 시키는 대로 했다. "천호(千戶), 태부혈(太府穴)을 마찰하시오." 그녀의 손바닥이 앞서와 마찬가지로 아래를 향해 움직여갔다. 우문경은 극도로 흔들리는 정신을 다잡고 있었다. 그러나 손바닥이 매끄럽고 탄력있는 비봉 옥녀의 둔부에 닿았을 때였다. 그녀는 그만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그녀의 손바닥이 엉뚱한 위치로 이동하고 말았다. 그때였다. "앗!" 우문경은 일순 비명을 발했다. 손바닥을 통해 비봉옥녀의 몸이 바르르 경련하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비봉옥녀의 전신이 멋대로 뒤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어느 정도 온기를 회복했던 비봉옥녀는 다시 싸늘하게 냉각되면서 중추와 사지가 멋대로 뒤틀리 기 시작했다. "대... 대인! 어, 어쩌면 좋아요?" 우문경이 놀라 부르짖었을 때는 이미 비봉옥녀의 몸이 마구 뒤틀어지고 있었다. 문득 백천기의 진노한 음성이 울렸다. "무슨 짓이오? 이런 중대한 순간에 실수를 하다니!" 우문경은 그만 수치감에 얼굴이 새빨개진 채 한 마디의 변명도 하지 못했다. 백천기는 장탄 식하더니 말했다. "물러 나시오, 이젠 시간을 끌 여유가 없소." 우문경은 한 마디도 못하고 비봉옥녀에게서 떨어졌다. 그 자리를 백천기가 메웠다. 그는 재빨리 손가락을 퉁겼다. 동시에 십지(十指)를 비봉옥녀의 나신에 날려 혈도를 짚은 것 이었다. 그야말로 번개같은 수법이었다. 그의 조치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서슴없이 손을 뻗어 비봉옥녀의 나신을 뒤집었다. 그렇게 되자 여체가 고스란히 그의 눈 앞에 드러났다. "......." 백천기는 예리한 눈으로 비봉옥녀의 나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젖가슴은 물론 배꼽 아래 비부까지도 남김없이 투시할 듯 노려보았다. 잠시 후 그의 두 손이 마치 비파를 뜯듯이 현란하게 비봉옥녀의 나신 위에서 움직였다. 놀 라울 정도로 신속하고 정확한 타혈법(打穴法)을 전개한 것이었다. "으음!" 비봉옥녀가 갑자기 몸을 꿈틀하더니 신음을 발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니?' 지켜보던 우문경은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백천기가 느닷없이 취한 행동 때문이었다.


그는 갑 자기 비봉옥녀를 끌어안더니 그녀의 입술을 맞추었던 것이다. '무... 무엇을 하려고?' 우문경은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으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나 이때 백천기는 본신의 진기(眞氣)를 입을 통해 비봉옥녀의 체내로 불어넣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남녀가 뜨거운 입맞춤을 벌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은 이같은 행위 는 축융신군이 남긴 활화(活火) 요상법 중에서 토양혼음술(吐陽混陰術)이라는 것이었다. 남 녀의 입과 입을 통해 진기를 주고 받는 수법이었다. 백천기는 혀로 비봉옥녀의 굳어진 구강을 열고 있었다. 한음지기로 인해 그녀의 혀는 차갑 게 굳어져 있어 구강이 열리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의 혀가 얼어버린 비봉옥녀의 혀를 잡고 몇 차례 움직이자 구강이 열렸다. 구강을 통해 그의 뜨거운 진기가 노도처럼 밀려들어갔다. 우문경의 눈은 화등잔만해진 채 안색마저 파랗게 질리고 있었다. 그녀는 백천기의 행위를 지켜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고 있었다. '아아, 저 여인은 내가 넘지 못했던 성(城)을 먼저 점유해 버렸어.' 우문경의 뇌리에는 전날에 있었던 일, 즉 백천기와의 입맞춤이 미수(?)에 그쳤던 사건이 주 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가슴에는 씁쓸한 여운이 바람처럼 휘돌았다. 이때였다. "끝났소, 낭자......." 백천기는 비봉옥녀에게서 입술을 떼며 등을 돌리고 있었다. "옷을 입히시오. 곧 깨어나게 될 것이오." 우문경은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흩어진 옷자락을 모아 비봉옥녀의 나신을 덮어 주었다. 음 울한 그녀의 시야에 정상을 회복한 듯 화색이 감도는 비봉옥녀의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백천기는 조용히 몸을 일으키더니 홀로 석실을 나섰다. 그가 문 밖에 이르자 두 시녀가 초 조한 모습으로 서성이다가 반색했다. "공자님! 아가씨께는서요?" 백천기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치료는 무사히 끝냈소. 들어가 보시오." "아!"


두 시녀는 탄성을 발하고는 인사할 정신도 없는 듯 급히 석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행이군. 그녀가 혼자가 아니라서......." 백천기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아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과도한 진기가 소모되 었기 때문이다. 일주천을 마치자 소모되었던 진기가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의 내공은 이미 조화지경에 이르 러 있어 짧은 시간에 원상복구된 것이었다. 마침 석실 안으로부터 우문경과 비봉옥녀가 나란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비봉옥녀는 백천기 를 보자 깊숙히 허리를 숙였다. "백공자, 이 은혜를 어찌 갚아드려야 할지......." "아니외다. 당연한 일이었을 뿐이오." 백천기의 담담한 태도에 비해 비봉옥녀는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방 금 전의 상황을 우문경으로부터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아무튼 낭자의 완쾌를 축하하오." 백천기의 말에 비봉옥녀는 그만 목덜미까지 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잠시 후 그녀는 기어 들 어가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녀의 이름은 곽교운(郭嬌雲)이라고 합니다. 공자의 은혜는 가슴에 길이 새겨두겠어요. "곽교운, 아름다운 이름이구려." 비봉옥녀, 즉 곽교운은 주저주저하며 입술을 떼었다. "저...... 공자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녀는 약간 뜸을 들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자께서는 혹 금릉에 연고를 가지고 계신지......?" 백천기는 내심 흠칫 했으나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달 전 그곳을 지나쳤던 일이 있었소이다." "그렇다면..... 그때 그 분이 맞군요?" 곽교운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백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순간 곽교운의 얼굴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노출되었다. 그것은 비탄과 수치, 또한 원 망까지 담겨져 있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결국 모두가 지나간 일이 아닌가? 이제와서 과거를 탓해야 무엇하랴?' 곽교운의 얼굴에 체념이 어렸다. 그러나 문득 또다른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오직 그녀 자신만이 알 뿐이었다. 이때 은령선자 우문경이 그들 사이로 끼여들었다.


"의외로군요. 두 분께서는 벌써부터 아는 사이였군요?" "그렇소. 우문낭자." 백천기의 대답에 우문경은 내심 움찔했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여인인가? 그녀는 재빨리 화 제를 돌려 버렸다. "대인, 대체 언제까지 이곳에 머무를 참인가요?" 백천기의 입에서는 침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곳은 천궁석부의 기관의 중심부에 해당되는 곳이오. 따라서 다른 어떤 곳보다도 안전하 다고 할 수 있는 곳이오." 그는 우문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두 시진 이내로 우리는 이곳을 떠나야 하오. 어쩌면 그 안에 천궁석부가 폭발할지 모르기 때문이오." "폭발이라고요?" 우문경이 놀라 반문하는 찰나였다. 꽈르르릉......! 갑자기 바닥이 진동함과 함께 폭음이 울리며 석실 사방의 벽이 일제히 열리는 것이 아닌가? 모두 네 개의 석문이 활짝 열리고 있었다. 쾅! 콰쾅! 쿠쿵! 열린 석문의 안쪽으로부터 은은한 폭음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그 바람에 석벽이나 천장, 바 닥이 금세라도 무너질 듯 진동했다. 일행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순간 백천기가 침중하게 부르짖었다. "누군가 이곳의 기관을 파괴해버린 것 같소." "넷?" 여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침을 발하는 사이, 다른 석실에 있던 현무호와 전우진이 달려왔다. 그들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진 것을 보고 백천기는 몸을 움직였다. "가봅시다! 큰 변괴가 일어났을 것이오." 그는 우측의 석문을 향해 화살처럼 신형을 날렸다. 중인들은 지체없이 그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우르르르릉......! 석실의 진동음은 계속되고 있었다. 제 24 장 · 욕망(慾望)의 노예들 지하 광장이었다. 천궁석부의 거미줄같이 엉킨 미로들이 집결하는 중앙부에 있는 지하광장은 넓이가 한 마장 정도는 되어 보였다.


그곳에는 군데군데 횃불이 밝혀져 있어 장내의 상황이 환하게 보였다. 그런데 지금 그곳에는 엄청난 사태가 벌어져 있었다. 수백여 구에 달하는 참혹한 시체들이 온통 널려 있었다. 개중에는 팔다리가 잘린 자, 목이 끊어진 자, 복부가 갈라져 내장이 튀어나온 자 등, 시체들의 형상은 각양각색이었으나 한결 같이 처참무비하게 죽어 있었다. 이렇듯 아수라지옥도가 된 것도 부족한지 장내에서는 아직도 무시무시한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차차창! 펑! 위이잉! 수십 명에 달하는 무림고수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피아간에 구별없이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장내의 중앙에서 벌어지는 혈전이 가장 참혹했다. 일단의 무리들이 네 명의 괴인을 둘러싸고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펑! 꽈르르릉! "크아악!"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단말마의 비명이 연이어 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속속 죽음을 당하는 것은 다수의 무리들 쪽이었다. 그러나 수십 명의 인물을 참혹하게 죽이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안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 로 보일 것이 분명했다. 네 명의 괴인들은 바로 우내오마(宇內五魔) 중의 사마였다. 우내오마 중 천신(天神), 혈승(血 僧), 마안(魔眼), 사도(邪刀)가 각각 무시무시한 마공으로 인간도륙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속속 피를 뿌리며 날아가는 무리들은 각양각색의 인물들이었다. 그 들은 바로 구파일방을 위시한 정파 쪽의 군웅들이었다. 신응문(神鷹門)의 문주인 신응노옹이 노성을 발했다. "우내오마! 네 놈들의 손속은 너무도 잔혹하구나." 사도가 도를 멈추지도 않고 그 말을 받았다. "크흐흐흐....... 임가야! 잔소리는 집어 치워라. 경고하지만 이곳의 보물들은 건드릴 생각도 하지 말아라." 그 말에 신응노옹의 눈길이 절로 광장의 한쪽 벽으로 향해졌다. 그곳에는 거대한 서가(書架)가 있었는데 서가에는 수천 권에 달하는 낡고 빛 바랜 양피지 책자가 빽빽히 꽂혀 있었다. 서가의 위쪽에는 전자체(篆字體)로 쓰여진 편액이 걸려 있었다.


<천궁무고(天弓武庫)> 뿐만 아니라 편액에는 다시 글귀가 쓰여져 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 역대무림 각문파(各門派)의 무학(武學)들을 이곳에 모았으니 천궁무고야말로 지상에 존재 하는 모든 무학의 총체(總體)노라. 인연이 있는자 본고를 얻는다면 능히 천상천하유아독존 (天上天下唯我獨尊)하리라. "......!" 백천기는 뛰어난 안력으로 단숨에 그 글귀를 읽었다.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과연 그 문구가 사실이라면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공을 익힌 자라면 생명을 내버리고라도 천궁무고를 차지하려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우내오마가 눈에 불을 켜는 것도 극히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들은 무림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연(奇緣)을 결코 타인에게 양보할 리가 없었다. 또한 천하 무림인들이 천궁석부를 찾은 이유도 명백한 것이었다. 특히 구파일방 쪽에서는 천궁무고를 여는 것이야말로 자파의 숙원인 것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도난 당하거나 실전된 무학비급을 되찾음으로써 자파의 영화를 되살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크흐흐......! 모두들 헛꿈 꾸지 마라! 천궁무고의 비급들은 우리들의 것이다." 우내오마 중 혈승이 광오하게 외치고 있었다. 그러자 성질이 매우 급해보이는 한 화상이 그 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미친 작자! 부처님의 노여움이 두렵지도 않으냐?" 동시에 그는 선장(禪杖)을 휘둘러 혈승을 공격했다. 위잉! 선장이 일으키는 웅후한 경기는 가히 태산이라도 쓸어버릴 듯 했다. "크흐흐! 같잖구나!" 혈승의 수중에서 혈옥불장이 번뜩 환영을 그렸다. 쐐액! 혈옥불장에서 발출된 한 줄기 경력이 그대로 화상의 심장을 강타했다. "으아악!" 기골이 장대한 화상의 몸뚱이가 거짓말처럼 붕 뜬 채 뒤로 날아갔다. 어느새 그의 가슴에는 구멍이 뻥 뚫린 채 피를 콸콸 쏟아내고 있었다. 이 광경에 각인대사가 비통한 외침을 발했 다. "각지(覺知) 사제......!" 방금 생명을 잃은 화상은 바로 소림오로(少林五老) 중의 하나인 각지대사였던 것이다.


졸지에 불귀의 객이 되어 버린 그를 보자 각인대사도 더 이상 인내하지 못했다. 청정하기 이를데 없는 고승의 불심이 비분과 통한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혈승! 빈승을 보아라." 우우우웅! 마침내 소림 최고의 신공인 달마혜정신공(達摩慧淨神功)이 펼쳐졌다. 웅후한 진동음과 함께 각인대사의 승포자락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위잉! 승포자락이 휘둘러지자 마치 집채만한 바윗덩이가 날아가듯 무거운 경력이 혈승에게 밀려나 갔다. 그러나 혈승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마주 장력을 날렸다. 그의 장력에는 붉은 기운이 서 려 있었다. 콰앙! 주위를 진동시키는 엄청난 폭음이 울렸다. "음!" 핏빛 소용돌이 속에서 각인대사의 침중한 신음이 터졌다. 그는 뒤로 세 걸음이나 밀려나간 채 안색이 핼쓱하게 변해 있었다. 그에 반해 혈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저 어깨를 들썩였을 뿐이었다. 그는 만면에 살 기를 띄며 빈정거렸다. "크흐흐......! 돌중! 네 놈은 내 상대가 못된다." 꽈르르르릉! 그의 쌍장에서 다시 섬뜩한 홍광이 뻗어나갔다. 두 사람의 장력이 마주치자 폭음과 함께 각인대사는 대여섯 걸음이나 밀려나갔다. 그는 입 가에 흐르는 선혈을 느끼며 내심 불호를 외쳤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이 마두의 무위가 이러하니 오늘의 액난은 물리칠 수가 없겠구나.' 이때, 사도는 신응노옹과 사오 초를 주고 받고 있었다. "크흐흐, 죽어랏!" 그의 거무칙칙한 도가 허공을 갈랐다. 파츠츠츳! "큭!" 한 줄기 검은 피를 뿌려내며 신응노옹은 뒤로 일 장 가량이나 날아가고 말았다. 그의 가슴 팍은 한일자로 쫙 갈라진 채 피분수를 뿜어내고 있었다. 신응노옹의 노구는 고목처럼 넘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버님......!" 신응녀 임청하가 울부짖으며 달려갔다. 신응수라 임천룡도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 남매의 비통에도 아랑곳없이 신응노옹은 이미 저승으로 떠난 후였다. 강남제일보주 금검철선 구궁산은 처참한 장내의 상황에 이를 악물었다. "으으... 이럴 수가!" 그의 눈에 다시 한 정파 인물이 천신에 의해 피투성이가 되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자 는 화산파(華山派)의 절정고수인 파산신검(破山神劍) 옥도기(玉陶期)였다. 우내오마는 아수라귀인 양 좌충우돌, 닥치는 대로 도륙을 계속했다. "크아악!" 정파군웅들은 썩은 짚단이 넘어가듯 속속 쓰러졌으며, 이로 인해 광장은 그야말로 지옥을 방불케 했다. 가히 가공할 참경이었다. "멈춰라!" 문득 귀청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외침이 장내를 울렸다. 음성의 주인공은 바로 은창부의 부 주인 은창무적 패인도였다. 전신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 만면에 처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는 손에 한 개의 붉은 구 슬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것을 본 한 군웅이 놀라서 고함을 질렀다. "앗! 벽력뇌화주(霹靂雷火珠)다." 그 한 마디에 군웅들은 모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물론 우내오마도 예외는 아니었 다. 벽력뇌화주는 가공할 폭발력을 지닌 폭약으로 지금으로부터 사백 년 전 구대마왕 중의 한 명이었던 축융신군 화진걸의 역작(力作)이었다. 어떤 경로로 패인도가 입수했는지는 몰라도 그는 틀림없이 벽력뇌화주를 움켜쥐고 있었다. "우내오마! 네 놈들의 소행은 하늘도 분노할 것이다. 이제 이것으로 끝장을 내고 말겠다. 그 말에 천신이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멍청한 놈! 네가 그걸 던지면 이곳의 사람들은 물론 비급들까지도 전부 사라져 버린다." 패인도는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으핫핫핫......! 차라리 그렇게 되는 것이 낫다! 모두 함께 죽으면 그만이 아니냐? 으하하 하......!"


그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웃어제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미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눈에서는 분노가 불길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으핫핫핫! 네 놈들이 그토록 탐하던 천궁무고의 비급들과 함께 영원히 이 지상에서 날려 버리겠다." 우내오마를 비롯한 모든 인물들의 안색이 급변하는 찰나, 누군가의 입에서 공포에 질린 부 르짖음이 터져나왔다. "벽력뇌화주가 터지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 패대협은 경동하지 마시오!" 그러나 패인도의 폭갈이 그 말을 받았다. "목숨이 아까운 자에게는 미안하다만 먼저 죽어간 이들에게는 이것만이 도리다!" 그는 벽력뇌화주를 던져 버렸다. "안돼!" 군웅들은 대경실색했다. 그러나 상황은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패인도는 갑자기 뒤로 벌렁 날아갔다. 뿐만 아니라 벽력뇌화주도 폭발하지 않았다. 어느새 패인도의 이마에는 구멍이 뻥 뚫린 채 피화살을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본 우내오마는 일제히 부르짖었다. "무형살인지(無形殺人指)!" 장내에 한 인영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낸 자의 손에는 놀랍게도 벽 력뇌화주가 들려져 있었다. "저 자는......!" 나타난 인물은 바로 혈영마황전의 소종사인 홍의청년이었다. 휘휙, 휙! 연이어 바람소리가 일더니 몇 개의 인영이 날아와 그의 등 뒤에 늘어섰다. 그들은 사신궁주 사태극과 그의 수하인 사신(四神), 마령궁주와 마령사자들, 그리고 건곤혈마와 그의 일행들 이었다. 그들을 배후에 거느린 홍의청년은 우내오마를 쏘아보며 억양이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입 을 열었다. "우내오마, 너희들은 이곳의 보물들을 취할 자격이 없다." 그 말에 천신의 얼굴에 당혹이 스쳤다.


"그게 무슨 뜻이냐?" 홍의청년은 냉소했다. "후후후! 실상 아직은 본좌가 모습을 드러낸 시기가 아니었지. 다만 방금 전의 패가가 예정 을 조금 앞당겨 주었다." 천신의 안면이 크게 일그러졌다. "뭣이! 그럼 모든 것이 너의 계획이었단 말이냐?" 홍의청년의 얼굴에 득의의 웃음이 떠올랐다.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 어쨌든 너희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 그는 벽력뇌화주를 품 속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흠. 귀중한 시간 더 이상 낭비할 필요는 없지." 우내오마의 분기 어린 시선을 받으며 그는 냉랭하게 말했다. "그리 억울해할 것 없다. 본좌도 이미 그대들의 속셈을 알고 있으니까."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천신의 반문에 홍의청년은 코웃음을 날렸다. "본인은 너희들이 북해 사태청(邪太靑)의 오장로(五長老) 신분이라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설마 부인하지는 않겠지?" "네 놈이... 어찌 우리 정체를?" 우내오마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천신이 음산한 표정으로 응 수했다. "설사 네 놈이 그 사실을 알았다 해도 상황에는 변함이 없다. 분명한 것은 이곳의 물건들은 사태청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에 홍의청년의 곁에 서 있던 사태극이 냉갈을 터뜨렸다. "천신 늙은이! 어림없는 소리는 하지도 말아라." 천신은 두 눈에서 흉광을 폭사하며 대꾸했다. "사태극, 노부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지금 보여주마." 그는 쌍장을 교차하더니 허공에 두 개의 원을 그렸다. 우르릉......! 우뢰음이 일더니 가히 태산같은 장력이 뻗어나갔다. 사태극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는 성큼 앞으로 나섬과 동시에 쌍장을 마주쳤다. 콰앙! 폭음과 함께 무서운 기류가 주변에 일대 폭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단지 발이 한 자씩이나 돌바닥 밑으로 꺼졌을 뿐이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똑같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천신! 제법이구나." "크흐흐! 네 놈도 꽤 쓸만한 무공을 가졌구나." 그들은 다시 무섭게 격돌했다. 다만 이번에는 장력을 직접 부딪치지 않고 나름대로 기묘한


신법을 이용하여 숨막히는 초식 대결을 벌여 나갔다. 쉬쉭! 펑펑! 그들의 일전에 주위 십 장여가 삽시에 돌풍에 휘말리고 말았다. 고수대 고수의 대결! 그것 은 아차 하는 순간에 피가 튀고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살벌한 혈전이었다. 어느덧 그들의 결전은 십여 초를 지나고 있었으나 여전히 막상막하의 국면을 유지한 채 어 느 쪽도 쉽사리 우세를 보이지 않았다. "흐흐흐, 혈승! 우리도 한 바탕 어울려 보자." 마령궁주가 문득 비대한 신형을 날려 전권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자 혈승도 기다렸다는 듯 혈옥불장을 휘두르며 맞붙었다. 펑! 슈슈슉! 그들도 삽시에 혈전의 와중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그 사이에 건곤혈마와 그 일행도 신형을 날려 마안과 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건곤혈마는 일대 일로라면 결코 마안의 상대가 될 수 없었으나 백면음마와 삼지신마, 독각괴마가 합격 을 하니 그런대로 평수를 이룰 수가 있었다. 홍의청년은 상황을 냉랭하게 지켜보다가 명령을 내렸다. "마령사자! 너희들은 사도를 맡아라." "복명!" 십여 명의 흑의복면인들이 일제히 신형을 날려 사도를 에워쌌다. "훗훗! 이 따위 잡졸들로 나 사도를 막으려 하느냐?" 사도의 검은 도기(刀氣)가 허공에 원을 그렸다. 슈파파팟! "크아악!" 마령사자들의 비명이 연달아 터졌다. 애초부터 사도의 적수가 될 수 없었던 마령사자들은 단 일도에 허리가 절단된 채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 광경에 홍의청년은 내심 쓴 입맛을 다셨다. '음, 과연 사도답구나.' 다음 순간, 그는 신형을 날려 자신이 직접 사도를 상대했다. 우웅! 그의 권장(拳掌)이 날 때마다 웅후한 경기가 밀려 나갔다. 그에 따라 사도는 무형의 강기로 인해 전신이 으스러지는 듯한 압박을 느껴야만 했다. 슈슈슈슉! 사도의 흑도(黑刀)가 허공을 수십 갈래로 그었다. 실로 숨가쁘게 십여 초가 흘렀다. 그런 가 운데 사도는 자신의 도세가 차츰 위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문득 홍의청년의 냉랭한 음성이 울렸다. "사도, 이제부터 본좌의 무공의 진수를 보여주겠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줄기 지풍(指風)이 소리없이 사도의 이마를 향해 뻗어왔다. "무형살인지!" 사도는 대경하며 급히 신형을 날려 일지(一指)를 피해냈다. "후훗! 과연 계속 피할 수 있을까?" 조소가 섞인 홍의청년의 말에 이어 이번에는 삼지(三指)가 연속적으로 날아왔다. 슈슈슉! "크윽!" 연속해서 뒤로 밀리던 사도의 왼쪽 어깨에서 한 줄기 피화살이 뿜어져 나왔다. 홍의청년의 무형살인지가 그의 어깨를 관통했던 것이다. 비틀거리는 그를 향해 홍의청년이 냉혹하게 외 쳤다. "가라!" 다시 퉁겨져 나온 오지(五指)에 사도는 그만 눈 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만일 그것을 그대로 맞는다면 전신이 구멍 투성이가 되고 말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때, 그의 앞으로 한 인영이 유령처럼 내려섰다. "엇!" 홍의청년은 강한 충격을 받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손가락이 시큰해진 그의 눈에 한 인물의 모습이 들어왔다. 사도를 막아선 자는 다름아닌 우내오마의 마지막 서열인 귀견수였다. 그는 이제껏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었다. 홍의청년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지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귀견수가 무형살인지를 막아내다니, 그럼 사도보다 무공이 더 높단 말인가?' 전신이 헝겊에 감긴 귀견수가 으스스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종사, 방금 전 네가 말한 것처럼 너는 지금 나타나는게 아니었다. 흐흐! 너무 일렀다는 얘기다." "흐음!" 홍의청년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찰나, 귀견수가 우장을 불쑥 앞으로 내뻗었다. 홍의청년도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즉시 장력을 마주쳐갔다. 쾅! 일진 폭음이 울렸다. 그러자 홍의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강한 반탄력에 밀려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귀견수를 노려보며 괴상한 음성


으로 물었다. "너는 대체 누구냐? 무공으로 미루어 보건대 결코 귀견수가 아니다." 귀견수는 대답 대신 음산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흐흐흐......." 그 순간,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백포가 스르르 풀어지며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러자 중인들 앞에 드러난 그의 모습은 실로 공포스럽기 그지 없었다. 전신에 온통 하얀 서리가 덮혀있는 괴인이었다. 그는 피부는 물론이거니와 머리칼과 눈썹 등에도 서리가 잔뜩 엉겨있어 용모마저 파악되지가 않았다. 다만 기이한 빛을 뿜어내는 두 눈에서는 섬뜩한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유령을 보 는 듯한 느낌이었다. "크흐흐흣......!" 그의 으스스한 웃음소리는 마치 유부(幽部)에서 흘러나오는 음향인 양 중인들의 심금을 으 스스하게 이끌었다. "으으, 저 자가 사람이란 말인가?" 군웅들이 전율을 금치 못하는 사이, 괴인은 웃음을 뚝 그치더니 홍의청년을 향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소종사, 아니 단조룡(段眺龍). 네 놈이 은밀히 수작을 부렸듯이 나 역시도 자고 있지만은 않았다." 단조룡이라 불리운 홍의청년은 경악한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너는 누구길래 내 이름을 아느냐?" 괴인은 음침하게 웃었다. "크흐흐, 내 이름은 호목천(胡木天), 북해 사태청의 소주(少主)" "사태청!" 단조룡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했다. 그러나 장내 군웅들의 놀라움도 그보다 십배는 더했다. 북해 사태청. 천하에서 이 이름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자는 없었다. 과거의 사태와 자부의 참극을 아직 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군웅들은 하나같이 공포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혈영마황전의 소종사 하나만으로도 버거운 판국에 이제 다시 가공할 살성(殺星)이 더 추가 됐으니 그야말로 엎친데 덮친 격이었다. 이때 스스로를 호목천이라 밝힌 사태청의 소청주는 두 눈에서 투명한 백광을 흘려내며 음산 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단조룡, 네 무공은 제법 강하다. 그러나 예외는 없을 것이다. 너는 이곳에


무덤을 쓰게 될 것이다." 휘류류류......! 문득 장내에 음풍이 회오리쳤다. 그것은 호목천의 전신으로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백삼 자락이 온통 펄럭이면서 서릿발같은 냉기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장내는 온통 북극으로 화한 듯 빙음지기로 뒤덮여 버렸다. 호목천의 전신 피부도 점차 얼음처럼 투명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 광경에 단조룡은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부르짖었다. "빙혼마공(氷魂魔功)!" 그 말에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 빙혼마공이라면 무림사상 가장 강했던 구대마왕 중 하나 인 빙혼마녀의 독문무공이 아닌가? 무려 사백 년 전에 사라졌던 희대 마녀의 마공이 다시 재현한 것이었다. "크흐흐흐! 안목은 꽤 쓸만 하구나. 그렇다. 이것은 빙혼마공이다." 호목천은 서리가 허옇게 덮힌 손을 앞으로 뻗으며 음산하게 말했다. "그럼 알겠구나. 이제 네게 남은 것은 오직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때, 건곤혈마와 그 일행이 그의 뒤에서 몸을 이동했다. 한순간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일제히 호목천의 배후를 공격했다. "죽어라!" 하지만 호목천은 마치 뒷통수에도 눈이 달린 듯 괴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크흐흣, 불나방같은 놈들!" 뻗어졌던 그의 손이 뒤로 돌아갔다. 동시에 손끝으로부터 허연 기류가 발출되었다. 그 기류 는 삽시간에 암습자들의 몸을 휘감아 버렸다. "크아아악!"으--- 아--- 악---!" 네 명은 처절한 비명을 질렀으나 뒤로 날아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자리에 선 채로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전신은 얼음덩이로 화해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 았다. "저... 저럴 수가!" 중인들의 경악성과 함께 단조룡도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더 니 호기롭게 외쳤다. "좋다! 호목천, 너의 빙혼마공을 본좌의 제왕혈신공(帝王血神功)으로 상대해 주마." 문득 그의 전신에서 붉은 기운이 뭉클뭉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의 신형이 자욱한 혈무


속 에 갇히게 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전신에 서리를 뒤집어 쓴 인간과 혈기를 두르고 있는 인간의 대결! 그것은 일찌기 보지도 듣지도 못하던 괴이한 장면이었다. 중인들은 호흡이 멎는 듯한 극도의 긴장에 휩싸였다. 따라서 장내는 쥐죽은 듯이 고요해질 수밖에 없었다. 호목천이 침묵을 깨고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크흐흐흐......! 가라!" 그의 양손에서 하얀 기체가 뻗어나갔다. "냉혈무(冷血霧)!" 휘류류류륭! 백기는 무서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날아갔다. "혈륜노천(血輪努天)!" 폭갈과 함께 단조룡도 쌍장을 무섭게 휘둘렀다. 그의 쌍장에서는 홍광이 흡사 거대한 수레 바퀴가 돌듯 쏟아져 나갔다. 두 기류가 부딪쳐 맞닥뜨린 순간이었다. 꽈르르르릉......! 엄청난 폭음과 함께 백기와 혈무가 제멋대로 어우러져 회오리를 일으켰다. 그 속에서 호목 천과 단조룡은 각기 한 걸음씩 물러나고 있었다. 창백해진 단조룡의 안색에 비해 호목천은 여전히 냉담한 기색을 잃지 않고 말했다. "흐흐흐! 용케도 받아냈구나. 그러나 빙혈삼음장(氷血三陰掌)의 제이초인 빙혼살(氷魂殺)이 전개되면 너는 얼음조각이 될 것이다." 단조룡은 그만 호흡이 가빠지고 말았다. 뼈를 에일 듯한 한기가 전신을 조여들어 오는 바람 에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놈의 빙혼마공은 화경에 이르러 있구나. 그에 반해 제왕혈신공은 겨우 사성(四成)밖에 성취 해내지 못했으니.......' 그러나 현실은 그에게 생각할 틈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빙혼살!" 냉갈과 함께 자욱한 백무가 면전으로 회오리쳐 왔다. 단조룡은 다급히 제왕혈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쌍장이 전면을 향해 쭉 뻗어나갔 다. 콰르르릉!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회오리의 기둥이 수십개 씩이나 퍼져 형성되었다. 관전하던 중인들은 이 가공할 광경에 놀라 뒤로 급급히 물러났다. 그러나 채 피하지 못한


사람은 회오리 기류에 휘말린 순간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절명하고 말았다. 그들 역시 허연 얼음기둥이 되고만 것이었다. 한편 호목천과 단조룡은 뒤로 사오 장이나 밀려나갔다. 그런데 이때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단조룡의 가슴 옷자락이 빙혼마공에 의해 얼음조각이 되어 부서지며 품 속에서 무엇인가가 바닥으로 툭, 떨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벽력뇌화주였다. "앗!" 단조룡은 대경실색했다. 꿈에도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다급 히 벽력뇌화주를 회수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꽝... 꽈르르르릉! 엄청난 폭음과 함께 가공할 화염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축융신군 화진걸의 명성은 과연 헛된 것이 아니었다. 벽력뇌화주가 폭발한 순간 십 장이 넘는 폭의 불기둥이 솟구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사방으로 불의 폭풍을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실로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벽력뇌화주의 폭발에 군웅들은 삽시에 불덩이 속에 휘말 리고 말았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혈육이 터져 날아가고 가공할 화염이 석전은 물론 사방으 로 통로를 향해 폭풍처럼 밀려 나갔다. "오오! 신이여------!" 군웅들은 절망의 외침을 발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화염의 폭풍은 삽시에 천궁무고의 서가 를 덮쳤다. 그로인해 서가의 수백 수천 권의 무공비급들은 삽시에 불덩이가 되고 말았다. 무림인들이 그토록 열망하던 무공비급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은 그 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전신에 불꽃을 뒤집어 쓴 자 들이 각각 무공비급을 다투어 끌어안고 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들은 머리카락과 옷에 붙은 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만 무공비급 서너 권 씩을 끌어 안은 채 통로를 향해 미친 듯이 달아나고 있었다. 실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통로는 이미 화염으로 가득 찼고 그 속을 달아나는 군웅들의 전신 은 달리면서 숯덩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꽈르르릉... 우르르르릉! 연이은 폭발음과 함께 석전의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어디 그 뿐인가? 쩍... 쩌억... 쩍! 사방의 석벽도 틈새가 벌어지며 붕괴되고 있었다. 가공할 폭발이 시작된 것이었다.


한편, 백천기는 통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천궁무고에서 일어난 폭음은 그의 귀에도 역력히 울려오고 있었다. 그는 조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소!" 백천기는 그렇게 외치며 더욱 신형을 빨리 날렸다. 그의 뒤에는 일행이 역시 침중한 안색으 로 달려가고 있었다. 쿵... 쿵쿵! 우르르르르......! 달릴수록 폭음이 더욱 잦아졌다. 그와 함께 바닥과 석벽이 금세라도 무너질 듯 진동하고 있 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그그긍! "엇?" 일행은 급격히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통로가 진동하더니 석벽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 뿐 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마찰하는 음향과 함께 좌우의 석벽이 멋대로 위치를 이동하는 것이 아닌가? 쿠쿠쿠.... 쿠쿵! "어, 어찌된 거죠?" 우문경이 당황한 음성으로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닌게 아니라 통로는 석벽의 이동으로 인해 멋대로 틀어져 있었다. 백천기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며 침중하게 말했 다. "방금 전의 폭발로 인해 기관장치가 멋대로 작동하는 것이오. 이제 아무리 기관의 대가라 해도 이곳을 통제하기는 불가능하게 되었소." "그, 그럼 어떡하죠?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단 말인가요, 대인?" "그야 운을 믿을 뿐이오." 백천기는 앞으로 걸어갔다. 직각으로 통로가 여러번 꺾어지고 있었다. 때로는 석벽 사이에 좁은 공간이 벌어져 있기도 했으며, 어느 곳인가는 아예 바닥에 꺼져 있기도 했다. 얼마쯤 전진했을까? 그들은 반쯤 열려있는 한 석문 앞에 당도했다. 석문은 균열이 나 있어 이미 기관이 망가진 것 같았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석문 안으로 들어갔다. "......!" 안으로 들어간 순간 일행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은 하나의 커다란 석전이었던


것이 다. 석전 안을 둘러보던 일행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석전의 사면 벽과 천장에 벽화(壁畵) 가 가득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과 짐승들을 포함한 천지자연(天地自然)의 온갖 형상들이 정교한 화법(畵法)으로 새겨 져 있었다. 실로 오묘무쌍한 느낌을 주는 벽화들이었다. 한동안 벽화를 바라보던 중인들은 하나같이 넋을 잃었다. 벽화는 보면 볼수록 사람의 마음 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문득 백천기의 나직한 탄성이 들렸다. "아, 이 벽화는 보통 벽화가 아니라 일종의 무공도해(武功圖解)로구나." "넷!" 우문경이 놀라 부르짖었다. 그녀는 이해가 안간다는 듯이 벽화를 보고 또 보았다. 그러나 벽 화의 어디에도 무공초식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백천기는 그들의 의문은 아랑곳하지 않고 벽화를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이따금 그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탄식하기도 했다. 그는 마치 삼매경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되자 다른 사람들도 벽화에 온통 정신을 팔게 되었다. 처음에는 복잡하고 어지러운 삼라만상에 대한 그림인 듯 했으나 들여다 보면 볼수록 알 듯 말 듯 오묘한 조화(造化)를 느끼게 하는 그림이었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백천기는 벽화를 더듬어 가다 비로서 한쪽 구석에 시선을 멈추었다. "......!" 그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하나의 포단 위에 한 구의 백골(白骨)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백천기는 백골을 향해 다가갔다. 백골은 가부좌를 틀고 있었는데 무릎에 한 장의 양피지를 놓고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리키고 있는 자세였다. 백골은 어찌나 오래 되었는지 살이란 살은 모두 썩어버려 용모를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뼈 에 퇴색한 장포만을 걸치고 있었다. 백천기는 백골의 무릎에 놓여있는 양피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깨알같은 글씨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있었다. <...... 노부는 무영귀도(無影鬼盜)다. 노부가 평생에 걸쳐 수많은 보물을 훔친 것은 나름대로


뜻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상 그 보물들을 대부분 빈민을 구제하는데 사용해 왔다. 그런 연유로 만년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노부에게는 재물이라고는 특별히 가 진 것이 없게 되었다. 다만 남은 것이 있다면 천하무림에 존재하는 각파의 무공비급과 무가 (武家)의 보물들 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노부는 무림의 공적으로 낙인 찍혀 협공을 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노부는 중상을 입고 쫓기다가 이곳을 발견하게 되었다. ...... 중략(中 略)....... 노부는 이곳에 노부가 얻은 물건 중 가장 귀중한 네 가지 보물을 비치해 놓았다. 연 자(緣者)여! 부디 이 물건들을 옳은 일에 사용하여 호생지덕(好生之德)을 베풀기 바란다. - 무영귀도(無影鬼盜) 절필(絶筆).> 백천기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는 무영귀도에 대한 소문과 실제가 다르다는 사실에 기이한 느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희대의 도둑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도둑은 도둑이되 의도(義盜)였구나.' 이때 그를 따라왔던 일행은 여전히 벽화에 온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백천기는 빙긋이 웃 으며 석전을 둘러 보았다. 그러다 석전 한 벽면 가까이 붉은 색의 옥향로(玉香爐)가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천부단옥향로(天府丹玉香爐)> 향로에는 고대의 갑골문(甲骨文)으로 그같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 이름을 본 순간, 백 천기의 얼굴에는 언뜻 희색이 스쳤다. 만권경서를 읽은 그의 뇌리에 천부단옥향로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수만 년 동안 지화정(地華精)을 품고 있던 단옥(丹玉)으로 만든 향로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향로는 향을 피우지 않아도 저절로 담담한 향이 발산되어 사람의 정신을 맑게 하며 혈기 의 순환을 도와주는 영험한 능력이 있는 것이었다. 천부단옥향로는 옛 선인이 연단할 때 사용하는 영품으로 알려져 왔었다. 비록 높이가 한 자 정도에 불과한 물건이었으나 그 가치는 일개 성(省)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인세의


보물이 었다. 그러나 지금의 천부단옥향로는 그저 비어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건... 만년단정향(萬年丹精香)!" 문득 백천기는 탄성을 발했다. 천부단옥향로 속에 세 자루의 붉은색 향자루가 꽂혀있는 것 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만년단정향은 만 년(萬年) 이상 묵은 단향목(丹香木)에 백 가지 이상의 온갖 영초(靈草)를 배합하여 만든 선문(仙門)의 무가지보로 알려져 있는 것이었다. 만년단정향이 타면서 내는 향기를 쐬이면 천하의 어떤 독(毒)이라도 해소시킬 수가 있을 뿐 더러, 향을 피운 상태에서 운공(運功)하게 되면 내공이 급증하게 되며 만독불침(萬毒不侵)의 체질을 이룰 수가 있었다. 백천기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옥향로 옆에는 한 권의 낡은 책자가 놓여 있었다. 그는 책자를 집어 들었다. <무천현록(無天玄錄)> 표지에 쓰여진 글귀를 읽는 순간 백천기는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그 이름은 난생 처음 들 어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호기심에 이끌려 책장을 넘기는 순간이었다. "아니......?" 그는 놀란 탄성을 발했다. 표지를 넘기는 순간 책자가 그대로 가루가 되어 흘러내려 버리는 것이 아닌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가루를 보며 백천기는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무천현록은 천삼백 년 전의 인물이 남긴 무공비급이었다. 무천자(無天子)란 도문(道 門) 제일의 인물이 남긴 도가사상 최고의 무공비급이었다. 그러나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양피지가 썩어 만지는 순간 가루가 되버린 것이었다. '아깝구나. 무영귀도가 이렇게 따로 보관한 것을 보면 대단히 귀중한 것일 텐데 허무하게 되었구나.' 백천기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는 구대마왕 의 무공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으므로 무공에 관한한 별다른 욕심이 없었던 것이다. 이때 현무호와 전우진이 그에게 다가왔다. 백천기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두 분께서는 저 향로와 향을 거두시오."


바로 이때였다. "아미타불....... 소시주, 잠깐만!" 문득 불호성이 울리더니 좌측의 통로로부터 세 개의 인영이 날아들었다. 백천기는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바로 혈영마황전의 소종사와 함께 있던 세 명의 괴승(怪僧)들이었다. 세 괴승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들의 가운데 에 서 있는 괴승이었다. "소시주, 물건들을 제 자리에 두시오. 그처럼 귀중한 영물은 그대 같은 속인(俗人)이 취할 바가 못되오." 비록 합장한 채 정중하게 말했으나 함축된 의미는 뻔한 것이었다. 백천기의 눈썹을 꿈틀하 며 반문했다. "그렇게 말하는 노화상께선 과연 얼마나 탈속(脫俗)했는지 모르겠구려?" 그러자 괴승의 말투가 거칠어졌다. "무엄하군!" 백천기의 얼굴에 한 가닥 냉소가 그어졌다. "무엄하다고?" 그는 피식 실소하며 말했다. "후후, 겉으로는 불도 운운하며 실제로는 탐욕으로 가득 찬 그대들에게 본인은 예의를 갖출 필요를 느끼지 못하오." "뭣이?" 세 괴승은 일제히 분노의 표정을 지었다. 그 중 오른쪽의 괴승이 거칠게 외쳤다. "정말 겁없는 놈이군! 감히 극십찰단(克什刹丹)의 삼법사(三法師)에게 말대꾸를 하다니?" 백천기의 눈썹이 성큼 치켜 올라갔다. "극십찰단?" 문득 그의 뇌리에는 지난 날 강남제일보에서 자신의 손에 의해 죽은 소면마수 나하율이 떠 오르고 있었다. 가운데 있던 괴승이 자신들의 소개를 했다. "노납은 대법사(大法師)인 오가륵(烏羅勒)이다. 그리고 이법사(二法師) 오미천(烏彌天), 삼법 사(三法師) 오나륜(烏羅輪)......." 오가륵은 백천기를 노려보며 위협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노납은 부처님을 대신해 너에게 교훈을 내려야겠다." 백천기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말했다. "불존(佛尊)을 함부로 들먹이지 마시오. 더 이상 신성한 불존을 빙자한다면 본인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소." 이어 그는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극십찰단이 어떤 단체인지는 몰라도 나하율이란 자의 행위를 볼 때 대충 어떤 집단인지는 짐작이 가는 바요. 그러니 본인의 앞에서는 위선의 탈을 벗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 말에 오가륵의 안색이 홱 변했다. "네... 네가 어찌 나하율 사질을 아느냐?" 그러다 문득 깨달은 듯 그는 사나운 기세로 외쳤다. "이제 보니 네가 바로 나사질을 죽인 놈이었구나." 백천기는 간단하게 잘라 말했다. "그렇소." 오가륵의 눈에서 흉광이 뻗었다. "노납이 사질의 원한을 갚아 주겠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그의 우측에 서 있던 이법사 오미천이 벼락같이 승포를 펼치며 공 격했다. 우우웅! 강맹한 경기가 날아왔다. "하하! 불도인답지 않은 짓이오!" 백천기는 낭랑한 웃음을 터뜨리며 가볍게 우장을 뒤집었다. 펑! 폭음이 울리자 장력의 소용돌이 속에 두 사람은 각기 한 걸음씩 뒤로 후퇴했다. 오미천의 얼굴은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내심 경악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럴 수가! 고작해야 약관에 불과한 어린 놈이 노납의 백 년 내공을 받아내다니.' 한편 백천기도 어지간히 놀라고 있었다. '음, 이 자는 무림에 나온 이래 만난 자들 중 가장 강적이구나.' 오미천은 두 눈에서 살광을 폭사하며 괴상한 음성으로 외쳤다. "어린 놈! 노납이 밀종의 대수인(大手印)을 보여 주겠다." 그는 쌍장을 서서히 앞으로 뻗어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은 점차 시뻘겋게 변하더니 급기 야 솥뚜껑 만하게 커진 채 팔뚝 부분이 한 자가 넘게 길게 늘어났다. "안되었소만 그 정도의 무학으로는 본인을 상대할 수 없을 것이외다." 그는 음양마유공(陰陽魔幽功)을 전신에 운기했다. "받아랏! 어린 놈!" 노갈과 함께 솥뚜껑만한 붉은 손바닥이 흡사 하늘을 가릴 듯이 밀려왔다. 백천기는 음양마 유공을 구성(九成)까지 모아 받아쳤다. 꽝! 천지를 뒤바꾸는 듯한 폭음이 일어난 순간 오미천은 강한 충격을 받으며 뒤로 두 걸음이나 밀려나갔다. 그의 얼굴은 경악으로 완전히 일그러지고 말았다.


"이럴 수가......? 대체 무슨 무공을 쓴 거냐?" 백천기는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설사 알려준다 해도 그대의 짧은 견문으로는 중원 무학의 박대정심함을 십분지 일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오." 그 말에 오미천은 분기탱천했다. "건방진 놈!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구나! 그렇다면 이번에는 노납의 천룡구장(天龍九掌)을 받아 보아라." 그는 다시 쌍장을 어지럽게 휘두르며 공격해 왔다. 우르릉! 우뢰음이 진동하며 강맹한 경기가 마치 노도처럼 뻗어나왔다. 그야말로 광풍폭우(狂風暴雨) 와도 같은 공격이었다. 그러나 백천기는 추호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응수했다. 펑! 퍼펑! 연속적으로 폭음이 울렸다. 백천기는 가볍게 어깨를 흔들며 염두를 굴렸다. '극십찰단의 무공은 정말 대단하구나. 과연 안하무인이 될 만하구나.' 어느덧 두 사람의 싸움은 칠팔 초가 경과했다. 처음과 달리 두 사람의 승부는 백중(伯仲)한 듯 했다. 그러나 기실 백천기는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음양마유신공의 분심술(分心術)을 발휘하여 한편으로는 방어를, 다른 한편으로는 오미 천의 천령구장을 분석하고 있었다. 그것은 백천기만이 지닌 뛰어난 오성(悟性)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상대의 장법을 고스 란히 배워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그는 우장을 기묘하게 꺾더니 오미천을 향해 장력을 날렸다. 우우우웅! 장력이 파도처럼 겹겹히 밀려 나갔다. 그 순간, 오미천의 안색은 그만 흙빛이 되고 말았다. "이 수법은 천룡회선(天龍廻旋)! 네... 네가 어찌 천룡구장을 아느냐?" 백천기는 낭랑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하하하하! 그럼 이것도 받아 보시오." 이번에는 그의 신형이 빙그르르 회전하더니 쌍장을 교차하여 뻗어냈다. 파파파파팟!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마치 한 마리의 용이 몸을 꺾으며 꼬리로 후려치는 듯한 공세가 가 해졌다. "헉! 그건... 천룡타미(天龍打尾)!" 오미천은 귀신에라도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관전하던 오가륵과 오나륜의 얼굴


도 경악으로 인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저럴 수가!' 그들은 가슴 속으로 찬바람이 이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때 오미천이 갑자기 신형을 멈추 었다. 그의 눈에서는 온통 비장한 빛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백천기는 일순 전세가 심상치 않게 변화해가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 까? 오미천의 붉은 승포자락이 바람도 없는데 무섭게 펄럭이기 시작했다. 백천기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이때 오미천의 눈으로부터 자줏빛 광채가 솟아나오고 있었다. 또한 그의 승포는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채 전신에서 자광(紫光)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윽고 오미천은 으스스한 냉소를 터뜨리며 몸을 움직였다. "애송이 놈! 노납의 자전마공(紫電魔功)을 받아보아라." 동시에 그는 쌍장을 번뜩 앞으로 내쳤다. 자색 기운이 전광(電光)처럼 뻗어 나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일이었다. 이에 맞서 백천기의 양손이 괴이하게 움직였다. 그의 양손에는 은은한 노을빛이 어리고 있 었다. "잔(殘)!" 츠츠츠츠....... 괴상한 음향과 함께 노을빛 잔영이 그의 쌍장에서 흘러나왔다. "오미천! 피해라!" 관전하고 있던 오가륵이 다급히 외쳤다. 그러나 이미 오미천의 자전마공과 백천기가 격출해 낸 노을빛 잔영의 강기( 氣)가 서로 충돌한 후였다. 쿠르르... 쾅! 뇌성과도 같은 굉음이 석실을 진동했다. "으윽!" 비명과 함께 오미천은 뒤로 날아가 버렸다. 오미천은 석실 벽에 부딪치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의 입에서는 피화살이 뿜어져 나 오고 있었다. 오가륵이 경악성을 외쳤다. "어린 놈! 방금 그 무공은 사백 년 전 축융신군의 잔소양패혈옥장(殘 兩覇血玉掌)이 아니 냐?" 그의 안목은 정확했다. 백천기가 펼친 노을빛 강기는 축융신군의 잔소양패혈옥장 중 제일초 인 잔(殘)이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오미천이 숯덩이가 되지 않은 것만 해도


천행 (天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오미천의 무공이 워낙 높았기도 했지만 백천기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백천기의 입가에 기소가 번졌다. "후후후, 당신은 무공보다 견식이 오히려 낫구려." 그것은 모욕이나 다름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오가륵은 화를 내기에 앞서 안색이 급변했다. "그... 그렇다면 정말 축융신군의 무공이란 말이냐?" 삼법사의 얼굴에는 공포감이 떠올랐다. 문득 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 받았다. 다음 순간 그 들이 벼락같이 백천기에게 덤벼 들었다. "죽어랏!" 콰콰콰......! 그들은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합공을 펼쳐 백천기를 상대하기 로 한 것이었다. 그들의 합공은 실로 가공무비했다. 백천기는 태산처럼 밀려오는 경력을 느끼며 양손을 기묘하게 뻗어쳤다. 차경미기(借勁彌氣) 의 일수였다. 순간 두 줄기 기이한 역도(力道)가 삼법사의 공세를 차단했다. "크윽!" 폭음과 함께 세 마디의 신음이 울렸다. 삼법사는 서로의 장력에 맞아 뒤로 비틀거리며 밀려 나가고 말았다. 그러나 백천기는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끄떡도 하지 않고 있을 따름이었다. "으으... 이럴 수가!" 삼법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전율을 일으켰다. 특히 오가륵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어린 놈의 무공이 어찌 이렇게 고강하단 말인가?' 그는 간신히 신형을 바로 잡긴 했으나 마음 속으로 공포심이 치솟는 것을 금할 길이 없었 다. 이때였다. 어디선가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흐흐흐흐......" 중인들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극십찰단의 중놈들! 어서 물러나라." 좌측의 통로로부터 두 명의 괴인이 장내로 날아들었다. 그들은 얼굴에 온통 주름살이 가득한 자들로 바로 잔혼(殘魂) 두 마두였다. 잔결마 서자기와 마혼신 냉여초였던 것이다. 잔결마가 삼법사를 노려보며 냉혹하게 내뱉았다.


"꺼져라! 중놈들, 중원에는 네 놈들이 설 땅이 없다." 그 말에 삼법사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오가륵은 분광을 뿜으며 외쳤다. "대체 네 놈들은 누구길래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잔결마가 광소를 터뜨렸다. "크핫핫핫! 이 어르신을 알고 싶다면 극십찰단의 대법왕(大法王)에게 가 물어보면 안다." "뭣이?" 삼법사는 그만 가슴이 철렁해지고 말았다. 그들은 잔결 두 노마를 바라보며 의혹을 금치 못 했다. '대체 이 놈들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그러나 그들도 천축에서는 내노라하는 고수들이었다. 마침내 삼법사는 화살을 잔결이마에게 로 돌렸다. "허튼 소리하지 마라, 늙은이들!" 콰르르릉! 삼 인의 합공이 전개되었다. 잔결마는 괴소를 흘리며 마주 받았다. 그의 하나밖에 없는 팔이 쭉 뻗어 나갔다. "크윽!" 비명이 터졌다. 불행히도 삼법사는 다시 한번 뒤로 밀려나가 석벽에 부딪쳤다. 마침내 그들 의 얼굴은 썩은 돼지간빛이 되고 말았다. 두 차례나 연속 타격을 입은 그들의 입과 코로는 선혈이 비어져 나오고 있었다. 잔결마의 냉랭한 음성이 그들의 귀를 울렸다. "꺼져라! 목숨만은 살려 주마." 그 말에 자존심이 완전히 뭉개진 오가륵은 이를 갈았다. "으으....... 두고 보자." 잔결마는 냉소했다. "크흣! 영원히 보지 않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오가륵은 안색이 몇 차례나 변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음, 패자유구무언이다만 네 놈들의 이름만은 알고 싶구나." 잔결마는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흐흐, 너희들은 잔혼이란 말을 들어 보았느냐?" "잔혼!" 오가륵 뿐 아니라 삼법사 모두가 놀라 부르짖었다. 그들의 안면은 무섭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잔결마의 냉막한 웃음이 귓전을 울렸다. "크흐흐....... 알았으면 꺼져라." 그 말에 삼법사의 몸이 날아갔다. 그들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통로를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나는 것이었다. 제 25 장 · 강시여인( 屍女人)들 백천기는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들도 비급을 얻기 위해 왔소?" 잔결마는 냉소했다. "꼬마 놈, 웃기지 마라. 아무리 많은 비급이 있다 해도 우리들에게는 한낱 쓰레기에 불과하 다." 백천기는 씨익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이곳에는 무엇 때문에 왔소?" 잔결마는 기광을 번뜩이며 말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옥향로와 만년단정향이다. 그 두 가지만 순순히 내놓는다면 말없이 물 러가마." 백천기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싫다면?" 잔결마의 표정이 홱 변했다. "싫다고?"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마혼신과 마주 보았다. 이번에는 마혼신이 백천기를 향해 괴상한 음성으로 물었다. "꼬마야, 너는 우리가 누군지 모르느냐?" 백천기는 조소어린 표정으로 반문했다. "천하에서 잔혼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 말에 마혼신은 더욱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런데도 싫다고?" 백천기는 문득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마혼신! 모든 것은 상대적이오. 다른 사람들은 당신들의 이름을 들으면 놀라겠지 만 내게는 조금도 놀라운 것이 못되오." 그 말에 마혼신은 대노했다. "건방진 놈! 머리에 피도 안마른 놈이 능멸하려 들다니!" 동시에 그는 대뜸 외팔을 떨쳤다. 슈웅! 무서운 경력이 칼날처럼 뻗쳐나왔다. 그러나 백천기는 즉시 응변을 취했다. 그가 마주 일장 을 뿌리자 허공에서 두 줄기 역도가 충돌했다. 순간 폭풍의 소용돌이가 일더니 그 속에서 백천기는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음!" 이어 그는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순간 내심 그는 경악을 금치 못해 부르짖었다. '이... 이자의 내공이 이토록 높다니!'


마주 선 마혼신은 단지 어깨를 한 번 흔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역력히 떠올라 있었다. 잔혼! 그들은 실상 이미 백 년 전에 천하를 주름 잡던 무서운 마두들이 아닌가? 나이로 치 면 모두 백오십 세가 넘은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공력은 이갑자(二甲子)가 훨씬 넘었다. 백천기의 내공은 만년지극용란혈의 복용으로 인해 역시 이갑자가 넘은 셈이었다. 그러나 잔혼에 비하면 역시 내공 방면에서는 다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때, 마혼신은 백천기를 노려부며 괴소를 흘렸다. "후후후... 꼬마야, 제법이구나. 그러나 이번에 노부가 펼칠 일장은 조금 다를 것이다." 이어 그의 왼팔이 기묘하게 흔들렸다. 순간, 파파파팟......! 무서운 파공성과 함께 한 줄기 화살같은 경기가 쏘아져 나왔다. 백천기는 안색이 급변했다. '이것이 바로 마혼신 최고의 무공인 수라초혼공(修羅招魂功)이겠구나!' 순간 백천기는 급히 음양마유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렸다. 이어 쌍장을 내뻗었다. 꽝! 엄청난 진동음이 울리고 폭풍이 휘몰아쳤다. 뿐만 아니라 석실 전체가 뒤흔들렸다. 백천기는 가슴에 둔중한 통증을 느끼며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마혼신은 만면에 경악의 빛을 띄고 있었다. '이... 이놈이 나의 십성 공력을 받아 내다니......!' 그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초리로 백천기를 노려보았다. 한편 경악하기는 잔결마도 마찬 가지였다. 이때, 마혼신은 분노가 폭발한 듯 전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옷차림이 마치 바람을 맞은 듯 팽팽히 부풀어 올랐다. "꺼져랏! 꼬마놈!" 슈우우웅! 실로 가공할 경력이 백천기를 압박하는 듯 밀려나갔다. 백천기는 안색이 변해 부르짖었다. '부딪치면 위험하다!' 순간 그는 급히 차경미기 중 해자결(解字訣)의 심법을 운용하게 쌍장을 갈라쳤다. 스스스스...... 묘한 음향이 울렸다. 동시에 마혼신이 탈출해낸 가공할만한 장력은 수천수만 가닥으로 분해 되더니 자취도 없이 소멸되고 말았다. 마혼신은 그야말로 경악이 넘쳐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으으, 미... 믿을 수 없다......!"


그는 그만 망연자실해 버렸다. 도대체 자신의 백오십 년 내공을 받아낼 수 있는 자가 무림 에 존재하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제 겨우 약관의 청년이 자신 의 장력을 와해시킬 줄이야. 한편, 백천기는 기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처음 펼친 차경미기의 해자결 (解字訣)에 대해 탄복하고 있었다. 실상, 사백 년 전 귀진자(鬼眞子)의 무공은 구대마왕 중에서는 가장 뒤지고 있었다. 그러면 서도 그가 구대마왕의 대열에 들수 있었고 또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닌 두 가지 무공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차경미기(借勁彌氣)와 잠종화영보였다. 그 두 가지 무공은 주로 방어를 위주로 한 것이었다. 그 중에는 특히 차경미기의 오묘함은 가히 절세적인 것이었다. 차경미기의 특성은 자신의 힘을 소모하지 않고 남을 격파한다는 데 있었다. 즉 이화접목의 수법으로 공격을 역이용 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해자결은 상대의 내공이 자신의 두 배가 되지 않는 한은 안전하게 자신을 방어할 수가 있었다. 이때, 한쪽에서 관전하고 있던 잔결마가 살기띈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흐흐흐, 꼬마야! 우리가 널 너무 얕보았구나. 그러나 이번에는 네 놈에게 진짜 무공의 진수 를 보여주마." 동시에 잔결마는 앞으로 나서더니 외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자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다. 그의 장심에서 돌연 찬란한 백광이 뻗쳐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 백광은 실로 눈을 뜨지 못 할 정도로 눈부신 것이었다. "크흐흐흐......! 꼬마야, 극천반광장(極天返光掌)이다." 잔결마의 으스스한 음성이 떨어졌다. 백천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순간에도 백광은 더 욱 눈부시게 뻗어나와 그는 상대의 모습을 조금도 볼 수가 없었다. 오직 눈 앞에 찬란한 백광만이 가로막은 느낌이었다. 백천기는 등줄기로 식은 땀이 흘러내 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내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잔(殘)!" 폭갈과 함께 그는 잔소양패혈옥의 일초를 발출했다. 츠츠츳츳......! 하는 괴음향과 함께 노을빛 잔광이 뻗어나왔다. 두 줄기 광채가 부딪친 순간이었다.


콰... 앙! 엄청난 뇌성이 울렸다. 그 속에서 두 사람은 똑같이 뒤로 튕겨나갔다. 두 사람의 모습은 각 각 달랐다. 백천기는 입고 있던 백의가 갈갈이 찢어져 있었다. 또한 머리칼은 마구 헝클어진 채 낭패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상처는 없었다. 반면 잔결마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가슴에는 시커멓게 탄 자국이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그는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경악하여 내심 부르짖었다. '이... 이놈의 무공은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이때, 그의 안색이 급변했다.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 것이었다. "윽!" 그는 비명을 지르더니 신형을 비틀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마혼신은 깜짝 놀라 그를 부축 했다. "자기(子奇)! 왜 그러는가......?" 그 말에 잔결마 서자기는 부르르 떨며 말했다. "오... 오시(午時)가 된 것... 같네......" 그말에 마혼신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급히 잔결마의 명문혈(命門穴)을 두드리며 외쳤다. "정신차리게! 정신!" 그러나 잔결마는 고개를 흔들며 절망적으로 말했다. "여초(如哨)! 트... 틀렸네. 오... 오늘이 꼭 백 년 째... 되는... 날....... 모... 모든 것이 끝났 네......." 이어 그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죽으면 안되네! 절대... 절대로....." 마혼신은 처절하게 부르짖으며 잔결마를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잔결마는 의식을 잃어 버리 고 말았다. 그의 얼굴에는 차츰 검은 사신(死神)이 덮이고 있었다. 마혼신은 그를 바닥에 눕힌 후 황망히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게! 조금만...... 내가 옥향로와 만년단정향을 빼았아 오겠네!" 이어 그는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백천기를 향해 외쳤다. "꼬마야! 어서 내놓아라!" 이때 백천기는 상황으로 미루어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한쪽에 놓인 천부단옥향로 (天府丹玉香爐)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옥향로와 향은 당신들에게 무척 필요한 것 같구려?" 그 말에 마혼신은 두 눈에 무서운 살기를 띄며 외쳤다. "이놈! 잔소리하지 말로 어서 내놓아라!"


동시에 그는 다짜고짜로 외팔을 휘둘러 공격해왔다. 그의 오른손은 무서운 속도로 회전했다. 위이잉! 위잉! 하는 굉음과 함께 엄청난 돌풍이 생겼다. 백천기는 그것을 보자 탄성을 터뜨렸다. "정말 훌륭한 회회사선공(廻廻邪選功)이오!" 파파파파팍! 하는 소리와 함께 무서운 경기가 회오리를 일으키며 날아왔다. 순간 백천기의 신형이 아른 거리는 듯 하더니 마혼신의 시야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백천기는 귀진자의 이대절기 중 하나인 잠종화영보를 펼친 것이었다. 그의 신형은 어느새 마혼신의 등 뒤로 돌아가 있었다. "엇! 이 놈이......!" 마혼신은 번개같이 몸을 돌리며 다시 회오리의 강기를 펼쳤다. 슈욱! 매서운 강기가 칼날처럼 뻗어나갔다. 그러나 백천기의 몸은 흐릿한 안개로 화해 그의 시야 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마혼신은 그만 당황과 초조를 금치 못했다. 이렇게 되니 자연 마음이 흩어져 그의 공격은 사방으로 닥치는 대로 뻗어나갔다. 우릉! 꽝! 펑! 석실의 사면 벽에서 돌먼지가 날았다. 백천기의 일행은 급히 몸을 날려 그 기세를 피했다. 그들은 손에 땀을 쥔 채 사태의 추이를 관망했다. 백천기는 마치 한 마리 나비처럼 가볍게 그의 공격과 공격 사이를 교묘히 비집고 움직이고 있었다. 마침내 마혼신은 초조의 극에 오르고 말았다. 바로 그때였다. "우욱!" 하는 소리와 함께 혼절해 있던 잔결마가 한 모금 검은 피를 울컥 토해냈다. 순간 마혼신의 눈에서는 당황과 안타까움의 빛이 흘러나왔다. 그는 처절하게 외쳤다. "안돼! 죽으면 안되네!" 다음 순간 그는 노성을 터뜨렸다. 혼신의 힘을 다해 백천기를 공격했다. "이놈! 죽어라!" 우르릉... 쾅! 그의 장력은 다시 석벽을 쳐 자욱한 돌먼지를 일으켰다. 그러나 백천기는 이미 좌측으로 피 해낸 후였다. 문득 그는 급히 외쳤다. "잠깐, 멈추시오!" 그 말에 마혼신은 얼결에 손을 멈추었다. 백천기는 뒤를 향해 외쳤다. "전영반!" 그 말에 급히 전우진이 몸을 날려 다가왔다.


"옥향로와 만년단정향을 내주시오." 백천기의 말은 너무도 뜻밖의 것이었다. "넷?" 전우진은 안색이 대변했다. 뿐만 아니라 상대하고 있던 마혼신도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하... 하지만 백대인......?" 전우진은 선뜻 몸을 움직이지 않으며 더듬거렸다. 백천기는 담담하게 말했다. "전영반, 아무 말 하지 말고 넘겨 주시오." "......." 전우진은 그 말에 입을 다물더니 곧 한쪽 벽에 놓여 있는 향로를 들었다. 그는 마혼신에게 다가와 향로를 내밀었다. "자, 받으시오. 백대인의 명이오." "......!" 마혼신은 멍한 표정이었다. 그의 눈에 복잡한 빛이 마구 교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말없 이 향로를 받았다. 이어 고맙다는 말 한 마디도 없이 급히 향로를 잔결마 서자기의 앞에 내 려 놓았다. 마혼신은 화섭자를 켜 세 개의 만년단정향에 모두 불을 붙였다. 이어 그는 잔결마의 몸을 일으켜 앉혔다. 그의 왼팔은 잔결마의 등 뒤 명문혈에 붙여졌다. "......." 중인들은 침묵을 지키며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때 불이 붙은 만년단정향에서 세 가닥의 향연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석실 안은 온통 그윽한 향으로 가득찼다. 그 향을 맡은 순간 중인들은 정신이 한층 더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때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마혼신이 진기를 잔결마의 명문혈로 주입하자 돌연 잔결마가 입을 떡 벌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였다. 그런데 만년단정향의 향연이 기이하게도 그의 벌 린 입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 중인들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때 속속 향연이 잔결마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자 잔결마의 검었던 안색이 차츰 혈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마혼신은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온 정신을 운공에 기울이고 있었다. 어느덧 그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고 있었다. 보고 있던 백천기는 감탄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으음, 저들의 의리는 실로 대단하구나! 사악한 마두인 줄로만 알았는데 예상외로 좋은 면이 있군......." 이때, 잔혼 두 사람의 몸에서 흰 안개같은 것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만년단정향은 모두 타 버리고 없었다. 뽀얀 안개는 그들 두 사람의 몸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실로 기이한 현상이었다. 그것을 보자 백천기는 가슴이 섬뜩함을 느꼈다. 그는 경악하여 부 르짖었다. "저들의 내공은 극치에 이르렀구나. 이미 오기조원(五氣調元), 반박귀진(返樸鬼眞)의 경지에 도달했을 줄이야!" 그 말에 중인들도 모두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좀체로 잔결마와 마혼신을 뒤덮은 백무는 사라질 줄 몰랐다. 중인 들은 긴장한 채 계속 안개덩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돌연 괴이한 음향이 그들을 일깨웠다. 저벅, 저벅, 저벅! 그것은 발자국 소리였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괴이한 느낌이 드는 소리였다. "......!" 중인들의 표정은 긴장에 싸였다. 만약 이 순간 외부에서 약간의 충격만 받아도 잔혼은 저 세상으로 가버릴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잔혼을 호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괴이한 발자국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발자국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온다는 점이다. 백천기는 눈썹을 짙게 찌푸렸다. 그는 발자국 소리로 미루어 다가오는 자들이 조금의 경공 도 없다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묵직하고 불규칙한 발자국 소리가 바로 그 점을 말해주고 있었다. 다만 이상한 점은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 질수록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끔찍한 살기가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으음, 대체 누구이길래.......' 백천기는 은연중 움켜쥔 주먹 속에 축축한 땀이 배이는 것을 느꼈다. 중인들의 얼굴에도 만 면에 감출 수 없는 공포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바로 이때였다. 꽈르릉! 꽝! 돌연 엄청난 폭음과 함께 사방 벽이 일제히 무너지며 구멍이 뚫렸다. 그와 동시에 자욱한 돌먼지를 뚫고 흡사 유령처럼 구멍 속으로부터 인영들이 걸어나왔다.


그런데 나타난 자들은 하나같이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은 온통 백색 마의(麻衣)를 전신에 휘감고 있었다. 더구나 기이한 것은 얼음장같이 싸 늘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안색은 밀랍처럼 창백했으며 표정조차 전무했다. 마치 시체처럼 굳어있는 여인들이었다. 다 만 그녀들은 한결같이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 광경에 중인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 대체 저 여인들은......?' 중인들의 가슴에는 짙은 의혹이 밀려 들었다. 이때, 열두 명의 여인들이 중인들에게 다가왔 다. 사방의 벽으로부터 걸어나온 그녀들은 자연히 중인들을 포위하는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중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여인들이 걸어온 돌바닥에 깊이가 한 치 가 넘는 족인(足印)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봉옥녀 곽교운이 떨리는 목소리로 백천기를 향해 말했다. "백공자님......! 대체 저 여인들은 무엇이길래......" 그 말에 백천기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릴 뿐 대답하지 못했다. 실상 그로서도 아는 바가 전 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전우진이 괴녀들을 향해 노갈을 터뜨렸다. "멈춰라! 너희들은 대체 누구냐?" "......." 그러나 괴여인들은 한결같이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전우진은 그만 대노하고 말았다. "요망한 계집들!" 냉갈과 함께 그는 번쩍 검을 날렸다. 슈파앗! 그러나 괴녀들은 전혀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결국 전우진의 검은 정통으로 한 괴여인의 정수리에 적중했다. 쨍! 놀랍게도 금속성 음향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크게 놀란 것은 전우진이었다. 그는 손목이 시 큰함과 아울러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한 것이었다. "이...... 이럴 수가?" 전우진은 그만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이때 백천기가 급히 외쳤다. "전영반, 물러 서시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강시요!"


"넷?" 전우진을 비롯하여 중인들은 대경실색했다. "강시......!" 백천기는 침중한 음성으로 중인들에게 다시 말했다. "강시는 강시되 일반적인 강시들이 아니오." "......?" 중인들은 그 말에 모두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백천기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기관이 파괴되면서 이곳에 잠들어 있던 시신들이 드러난 것 같소. 게다가 누군가 이 여인 들의 혼령을 불러 일으킨 것이오." "아...... 그럴 수가?" 중인들은 모두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였다. "크크크크......" 하는 괴이한 음향과 함께 돌연 한 여강시가 손을 뻗었다. 그 강시는 현무호를 공격하고 있 었다. "헉!" 현무호는 다급한 신음을 터뜨리며 급히 몸을 피해냈다. 펑! 강시의 손은 그대로 석벽에 적중되어 폭음을 일으켰다. 그러자 놀랍게도 석벽에 돌먼지가 피어오르며 구멍이 뚫리는 것이 아닌가? 중인들은 모두 이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현무호는 더욱 놀라 내심 부르짖었다. '이...... 이 계집들의 힘은 도저히 인간의 것이 아니다.' 이때 다시 한 명의 여강시가 아직도 바닥에 앉아있는 잔혼을 향해 뻣뻣하게 걸어갔다. 백천기는 흠칫했다. 잔결마와 마혼신은 비록 백무는 모두 걷혀진 상태였으나 아직도 운공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므로 만약 강시가 그들의 몸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두 사람은 그대로 절명할 판국이었다. "멈춰라!" 하는 폭갈과 함께 백천기는 신형을 날려 잔혼의 앞에 내려섰다. 동시에 그는 일장을 들어 마주 오는 강시의 가슴으로 날렸다. 웅우한 파공성과 함께 정통으로 여강시의 가슴에 적중되었다. 펑! "끄악!" 강시는 괴성을 내지르며 뒤로 주르르 밀려 나갔다. 그 바람에 강시는 입고 있던 마의가 갈 기갈기 찢겨져 나갔다. 그러자 실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여인의 몸매가 드러났다. 찢겨 날아간 옷 속으로


매끈한 피 부와 팽팽하게 솟아있는 젖가슴이 여지없이 드러난 것이었다. "......!" 백천기는 이 광경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강시는 여전히 무표정하기만 했다. 또한 그 녀의 살결은 희다못해 푸르스름하게 느껴져 육욕을 느끼기는 커녕 공포심을 느끼게 할 정도 였다. '이번의 장력에는 적어도 구 성의 내공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정통으로 맞고도 끄덕 없다 니...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이때 강시는 화가 난 듯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덤벼들었 다. 상체를 벌거벗은 강시여인은 두 팔을 갈고리처럼 구부린 채 마구 휘둘러왔다. 쉭! 쉬이익! 매서운 파공성이 음풍과 함께 밀려왔다. 백천기는 표정을 굳힌 채 내공을 십일 성까지 끌어 올려 다시 장력을 날렸다. 꽝! 이번에는 더욱 큰 폭음이 일었다. 강시는 다시 가슴을 얻어맞고 뒤로 삼 장이나 밀려 나갔 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강시는 괴성을 질렀을 뿐 멀쩡한 것이었다. 이때였다. "백대인! 위험해요!" 곽교운의 날카로운 음성이 울렸다. 백천기는 흠칫했다. 소름끼치는 한기가 느닷없이 등 뒤로 밀려온 것이었다. 더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백천기는 잠종환영보를 펼쳐 몸을 피했다. 과연 한 명의 강시가 그를 공격한 것이었다. 이때 장내에는 이미 혼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펑! 펑펑! 연이어 폭음이 울리는 가운데 중인들의 장력이 여강시들을 강타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강시는 그때마다 괴성을 질렀을 뿐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계속 팔을 휘두르며 공격해 오 는 것이었다. "아... 이럴 수가!" 중인들은 당황하여 계속 밀렸다. 그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단지 간신히


몸을 이리 저리 날려 강시녀들의 공격을 피하기에만 급급할 뿐이었다. 백천기는 상황을 살핀 후 안색이 변해 내심 중얼거렸다. '이러다간 모두 당하고 말겠구나.' 그의 안색은 침중하게 변했다. 이때 문득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는 지그시 이를 물었다. '좋다.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한 번 모험을 해보는 수밖에 없겠구나.' 그는 돌연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천령귀혼강시대법을 사용할 수밖에!" 천령귀혼강시대법은 흑라오격찰의 만사경(萬邪經)에 기재된 극악한 대법이었다. 백천기는 어 쩔 수 없이 그 대법을 펼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백천기는 입술을 움직여 나직이 주문(呪文)을 외우더니 오른손 식지를 이빨로 질끈 깨물었 다. 이어 그는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를 빨았다. 잠시 후 그는 허공을 향해 훅! 하고 뿜어냈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자욱한 혈무가 뿜어져 나왔다. 혈무는 삽시에 허공을 뒤엎어 버렸다. 자 욱한 피안개가 온통 시야를 가려버린 것이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ㅈ다. 강시들이 갑자기 행동을 딱 멈추어 버린 것이었다. 바로 그때 백천기는 두 눈에서 괴이한 광망을 발산하며 음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는 염라대왕에게서나 나옴직한 으스스한 음성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구천(九天)의 악귀령(惡鬼靈)들이여! 무엇 때문에 명부(冥府)로 가지 않고 이 삭막한 세상 을 방황하느냐?" "크크크크크......" 문득 괴이한 소리와 함께 십이 강시녀들이 서서히 백천기의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 중인들은 너무도 놀라 멍청해지고 말았다. 그들은 실로 세상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감 히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이때 다시 백천기의 귀기어린 음성이 석실을 울렸다. "가거라! 어서 명부로 떠나거라! 이 세상에 너희들이 남아있을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 음울


한 세계에서 서천(西天) 노을의 빛처럼 영원히 스러져 가라!" 그 말이 끝나자 강시들은 모두 멍청한 표정을 보였다. 이윽고 그들은 하나 둘 스르르 눈을 감기 시작했다. 뒤이어 그들의 얼굴에는 지극히 평온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중인들은 모두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겨우 한숨을 돌린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돌연 한 줄기 금속이 부딪치는 듯한 날카로운 음향이 어디선가 울려 왔다. 철컥! 딱! 딱딱! 그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섬ㅉ하게 만들었다. 백천기 일행은 일제히 안색이 변했다. 이때 십 이강시녀들이 돌연 전신에 전율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들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녀들의 눈에서는 다시 무시무시한 살기가 폭사되고 있었다. 백천기는 놀라 외쳤다. "누군가 이들의 마성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구나!" 이때였다. 문득 한 인영이 석실로 날아들었다. 그는 새하얀 백발이 발끝까지 늘어져 내린 괴노인이었 다. 그는 무성한 백발 사이로 두 눈만 빠금히 보이고 있었는데 눈에서는 푸른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괴노인은 백천기를 향해 부엉이 울음소리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크흐흐...... 꼬마 놈! 네놈이 감히 나 냉혈시존(冷血屍尊)의 십이천시(十二天屍)를 잠재우려 하다니." 그는 아직도 우뚝 서 있기만 하는 강시녀들을 향해 괴이한 음성으로 외쳤다. "십이천시! 너희들은 피맺힌 원한을 잊었느냐? 깨어나라! 원한의 강물은 아직도 흐르고 있 다!" 그 말이 떨어지자 강시녀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동시에 두 눈에서 더욱 짙은 살기가 쏟 아져 나왔다. 백발노인은 다시 처절한 음성으로 외쳤다. "저주하라! 인간을 저주하라! 목이 찢어지고 심장이 터질 때까지 인간을 저주하라!" 그러자 실로 무시무시한 광경이 벌어졌다. 백발괴인의 백발이 모두 위로 거슬러 올라간 것 이었다. 드러난 그의 얼굴은 그야말로 악귀의 현상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두 눈이 하나 도 없었다. 단지 눈이라고 짐작되는 부분의 움푹 꺼진 곳에서 푸른 녹광만이 번뜩이고 있었 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는 코도 없었고, 입술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날카로운 이빨 만이 군데 군데 솟아있는 것으로 그곳이 입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 중인들은 그만 소름이 오싹 끼쳐 경악성을 내질렀다. 너무도 끔찍스런 얼굴이었다. 아니 그 것은 사람의 얼굴이라고 말할 수 조차 없는 귀신의 얼굴이었다. 우문경과 곽교운, 그리고 하화, 추국 등 여인들은 그만 더 이상 보지 못하고 얼굴을 돌려버 리고 말았다. 이때 스스로를 냉혈시존이라 말한 괴노인은 다시 괴성으로 부르짖었다. "십이천시! 노부의 얼굴을 보아라! 백 년의 원한으로 인해 얼룩진 저주의 이 얼굴을 보아라! 그래도 잊어버리겠느냐? 그래도 잠들겠느냐?" "크크크크크......" 문득 괴성을 흘리며 십이천시가 서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백천기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들의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폭사되고 있었다. "끄아아아!" 괴성과 함께 강시녀들은 일제히 백천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슈우우욱! 날카로운 한풍이 백천기를 갈기갈기 찢어발길 듯이 몰아쳐갔다. 백천기는 급히 음양마유공 의 분심술을 사용하여 하나의 마음으로는 만사경에 기재되어 있는 천령귀혼강시대법(天靈鬼 魂 屍大法)을, 다른 하나의 마음으로는 만사경 최고의 무공인 백골강시공(白骨 屍功)을 운기 했다. 그러자 그의 신체가 변화를 일으켰다. 돌연 그의 두 눈에서 무시무시한 녹광이 뻗치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머리칼도 온통 녹색으로 화하고 말았다. 피부 또한 소름이 끼칠 정도로 푸르게 변하더니 녹색 광망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형상은 마치 희대의 마존으로 화하고 만 것이었다. 동시에 백천기의 입술이 괴이하게 움직이며 음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십이천시라 했느냐? 본좌는 만사지존(萬邪之尊)이다! 영혼을 다스리는 유부(幽府)의 제왕이 니라. 너희들은 지금부터 본좌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러자 냉혈시존은 얼굴 근육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그 음성은......? 그 음성은? 오... 네... 네가 어찌 백골강시공을......?" 이어 그는 두 눈의 녹광을 더욱 무섭게 번뜩이더니 목청을 높여 처절하게 외쳤다.


"십이천시! 현혹되지 마라! 너희들의 주인은 나 냉혈시존이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백천기의 음산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십이천시. 본좌를 따라라. 명부의 세계가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다. 나 만시지존을 따르라!" 이어 백천기는 더욱 음산한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피곤하지 않느냐? 너희들은 이제 쉬어야겠다. 연기와 같이... 연기와 같이... 장엄한 주토(朱 土)의 세계로... 세계로... 돌... 아가자....... 나... 만신지존도 너희들이... 오기를... 오기를... 기다 리겠다....... 피곤하다... 피곤하다......" 그의 말에 십이강시녀들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들은 어느 쪽의 말을 들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 가운데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때 백천기의 몸에서 돌연 녹색기루가 뻗치고 있었다. 스스스스...... 녹광은 괴이한 음향과 함께 점차 십이강시녀들을 감쌌다. 그러자 강시녀들이 변화를 일으켰 다. 그녀들은 전신 근육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어 푸르등등한 근육이 일제히 수축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오그라들더니 점차 부피가 줄기 시작했다. 실로 놀랍고도 무서운 일이었다. 강시녀들의 몸은 점차 수축되더니 마침내 흐물흐물하게 녹 아내렸다. 이어 살은 전부 달아나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해골이 되고 말았다. 그 광경은 실로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이때 냉혈시존은 그만 미친 듯이 괴성을 내질렀다. "으... 아... 아아아!" 그것은 처절한 광성이었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한 줄기 피화살이 분출되었다. 그는 녹광을 뿜는 음푹 꺼진 눈으로 백천기를 노려보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배... 백 년의 공을 수포로 만들다니......!" 이어 그는 허공으로 치솟더니 미친 듯이 백천기를 공격했다. 백천기는 싸늘하게 일갈했다. "영혼을 농락하는 자여! 나 만사지존이 명부의 법으로 네 놈을 심판하리라." 그는 쌍장을 쭉 뻗었다. 콰르르릉! "크아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허공에서 우박같은 피가 쏟아져 내렸다. 냉혈시존은 퉁겨져 나가 석벽 에 부딪쳤다. 그는 어느새 양팔이 절단되고 없었다. 양쪽 어깨로부터 분수같은 선혈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냉혈시존은 처절한 광성을 터뜨렸다. 그러다 문득 그는 우측의 어두운 통로를 향해


몸을 날 렸다. 백천기는 서서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달아나 자 신형을 날리며 외쳤다. "멈춰라! 냉혈시존!" 삽시간에 그의 모습은 석문 안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제 서야 정신을 번쩍 차리고 뒤따라 몸을 날렸다. "백대인! 백대인......!" 그들은 다투어 통로를 향해 날아갔다. 석실 바닥에는 이미 냉혈 시존이 남긴 두 개의 육괴가 된 팔,그리고 흥건한 선혈만이

그는 냉혈시존이 통로로

석실에 남아있던 중인들은

해골로 화한 십이강시녀와 고여 있었다.

제 26 장 · 천궁비화(天弓秘話) 한편, 냉혈시존은 계속 통로로 달아나고 있었다. 백천기는 그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냉혈시존의 잘린 두 어깨에서는 더 이상 피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백천기는 섬ㅉ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저 자는 이미 전신의 피가 모두 흘러나온 셈이다. 그런데 피 한 방울 없이도 움직일 수가 없다니, 정말 무서운 자로구나.' 그는 문득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렇다. 어떤 신념과도 같은 것이 저 자의 육체를 움직이게 하고 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백천기는 이런 생각이 들자 더 이상 공격하지는 않은 채 조용히 뒤를 추격하기만 했다. 냉 혈시존은 그가 쫓아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한 석벽 앞에 당도했을 때였다. 돌연 그는 신형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석벽에 몸을 부딪치는 것이 아닌가? '아니?' 백천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냉혈시존은 머리를 앞세워 세차게 벽에 부딪쳐 버린 것이었 다. 퍽! 섬ㅉ한 음향과 함께 피와 살이 사방으로 튀었다. 냉혈시존의 몸은 완전히 피떡이 되고 말았 다. 실로 가공할 일이었다. 석벽에 구멍이 뚫리며 냉혈시존은 그 안으로 떨어졌다. 백천기는 전율을 금치 못하며 구멍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곳은 또 하나의 석실이었다.


석 실 바닥에는 냉혈시존이 피투성이 육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의 형상은 실로 참혹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가슴의 뼈가 등 뒤로 튀어나와 있었으며, 복부는 갈라져 내장이 비어져 나와 있었다. 또한 머리는 박살이 난 채 허연 뇌수 가 보였다. "......!" 백천기는 흠칫 놀랐다. 뜻밖에도 석실 안에는 두 명의 괴인이 있었던 것이다. 한 명의 깡마 른 노승이 정좌하고 있었으며, 그의 옆에는 금의를 입은 중년인이 우뚝 서 있었다. 노승은 회색가사를 입고 있었는데 나이를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늙어 보였다. 그의 안색은 마치 백 년 이상 햇볕을 보지 못한 듯 밀랍처럼 창백했다. 한편 금의중년인은 냉막한 인상이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냉혈시존을 내려다보며 전 신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이때였다. 죽은 줄만 알았던 냉혈시존이 문득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괴성을 발했다. "크... 으... 으......." 그러자 금의중년인이 떨리는 입술을 떼었다. "네째... 어... 어찌된 일이냐?" 그러자 냉혈시존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크... 으... 복수를... 큭!" 결국 그는 다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비소로 몸이 축 늘어지며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때 깡마른 노승이 두 눈을 떴다. 순간 실같이 가느다란 두 눈에서 번갯불같은 안광이 날 카롭게 뻗어나왔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그는 냉혈시존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네째 사제. 잘 가게나...... 아미타불......." 이때 금의중년인은 백천기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넷째를 저리 만들었느냐?" 그 말에 백천기는 냉랭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화를 자초했기 때문이오." 금의중년인은 돌연 음산한 괴소를 터뜨렸다. "크흐흐......! 아무튼 놀랍다. 현 무림에서 넷째를 죽일 수 있는 인물이 아직도 있었다니......!" 이어 그는 차갑게 외쳤다. "노부는 지옥마존(地獄魔尊)이다. 바로 천궁오존(天弓五尊) 중의 셋째다." "천궁오존......?" 백천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금의중년인, 즉 지옥마존은 두 눈에 살기를 띄며 거


칠게 말했다. "자세한 것까지는 알 것 없다. 네가 넷째를 죽인 이상 내 손에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는 양손을 좌우로 뻗치더니 번개같이 모아 뻗어냈다. 백천기는 안색이 변하며 급히 반격 했다. 펑! 하는 굉음과 함께 백천기는 비명을 터뜨렸다. "으윽!" 그는 뒤로 다섯 걸음이나 연달아 밀려나갔다. 그는 가슴이 마구 진탕하는 것을 느끼고 내심 부르짖었다. '무서운 내공이다. 상상도 못할 만큼......!' 이때 지옥마존은 괴소를 터뜨렸다. "크흐흐, 애송이놈! 놀랍게도 네 내공은 이갑자가 넘는구나. 그러나 그 정도로는 약과다. 이어 그는 만면에 흉광을 떠올리며 음산하게 외쳤다. "이번에는 지옥다라공(地獄多羅功)으로 네 놈을 황천으로 보내주마." 말과 동시에 그는 쌍장을 들어 올렸다. 그의 쌍장에서 귀청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금광이 뻗어나갔다. 쐐액! 백천기는 전력으로 잠종화영보를 펼쳐 그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우르르... 꽝! 지옥마존이 뻗어낸 금광이 석벽을 치자 석벽은 그대로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지옥마존은 크게 놀란 듯 부르짖었다. "아... 아니.... 그건 잠종화영보......!" 이어 그는 고개를 치켜들더니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으핫핫핫......! 놀랍다, 놀라운 일이야! 그토록 구대마왕(九大魔王)을 만나고 싶어 했는데 이런 곳에서 군마천웅보(群魔千雄譜)의 아홉번째 인물인 귀진자의 무공을 보게 될 줄이야!" "......!" 백천기는 그의 말에 안색이 변했다. 지옥마존은 괴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크으으, 네 놈의 잠종화영보를 노부의 지옥파천황(地獄破天荒)의 경공으로 파해해 버리겠 다." 파팟! 문득 경미한 파공성과 함께 지옥마존의 신형이 사라졌다. 동시에 백천기는 살벌한 음풍이 사방으로부터 자신을 죄여오는 것을 느꼈다. '이... 이것은......?'


백천기는 급히 전력으로 잠종화영보를 펼쳐 신형을 연기처럼 흐트러뜨렸다. 그러자 사방에 서 죄여들던 압력이 한층 격감되는 것을 느꼈다. 지옥마존은 더욱 공력을 끌어올려 지옥파천황을 전개했다. 그러자 그의 신법은 믿을 수 없 을 만큼 빠르게 백천기를 따라붙었다. "......!" 백천기는 위기를 느꼈다. 그는 다시 신형을 급변시켰다. 그러자 그의 신형은 차츰 분리되더 니 서른여섯 개의 환영으로 나뉘어 졌다. 어느 것이 실(實)이고 어느 것이 허(虛)인지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자 음 풍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옥마존의 경악성이 울렸다. "아니?" 그러나 곧 괴소성이 울렸다. "크흐흐흐......! 과연 군마천웅보의 아홉번째 인물의 경신술답구나. 그러나 지옥파천황을 벗어 나지는 못할 것이다." 이어 그의 신형이 더욱 빨라졌다. 파파파팍! 문득 사방 석벽에서 불꽃이 튀었다. 지옥마존의 몸에서 발산되는 강기에 석벽이 깎이기 시 작한 것이었다. 실로 가공스런 신법이었다. 이렇게 되자 백천기는 삼십육 개의 환영으로도 방어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더구나 석실은 그가 다시 환영을 분리하기에는 너무도 비 좁았다. '안되겠다.' 그는 신형을 허공으로 솟구쳤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마혼백혈검을 뽑았다. "차앗!" 낭랑한 기합성이 울리고 허공에 눈부신 백광이 어지럽게 난비하기 시작했다. 백천기는 검마 잔유성의 절기인 마혼칠검(魔魂七劍)을 전개한 것이었다. 삽시간에 그의 마혼백혈검은 마혼 칠검의 검초를 쏟아냈다. 파파파팟! 엄청난 검기에 지옥마존은 대경했다. "마혼칠검!" 이어 그의 신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안색은 경악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네... 네 놈은 검마 잔유성의 무공까지 익혔느냐?"


"......." 백천기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지옥마존은 놀람이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도대체 너는 얼마나 많은 무공을 익혔느냐?" 백천기는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이 알 필요가 있을까?" 이어 그는 마혼백혈검을 더욱 무섭게 전개했다. "추풍인(追風引)! 절참파(絶斬破)! 단운산(斷暈散)!" 그는 마혼칠검의 세 검초를 연속 쏟아내었다. 그러자 가공할 검기가 우박처럼 발출되었다. 쏴쏴아악! 그것은 검기의 바다요, 그물이었다. 지옥마존은 대경했다. 그러나 그는 밀리지 않고 냉갈을 터뜨렸다. "차앗! 지옥다라장(地獄多羅掌)이다!" 그의 쌍장에는 패도적인 장력이 연속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펑! 펑! 펑!...... 폭음이 연속하여 석실을 무너뜨릴 듯 진동시켰다. 그것은 가공할 검기 대 장력의 격돌이었 다. 백천기는 계속하여 마혼칠검을 펼쳤다. 츠츠츠츠츠......! 가공할 검기가 석실을 가득 메웠다. 콰... 쾅! 지옥마존의 장력은 그에 따라 더욱 배가되며 폭풍을 일으켰다. "천마잔(天魔殘)!" 백천기의 냉갈과 함께 허공에 백광이 번쩍였다. 그것은 마혼칠검의 제육초였다. 파팟! 그것은 이제까지의 검법과 판이할 정도로 무서운 위력을 발산했다. 지옥마존은 안색이 변해 쌍장을 더욱 무섭게 격출했다. 백천기는 내심 무거워지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 는 마혼칠검의 마지막 초식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마혼인(魔魂人)!" 순간 허공에 백룡(白龍)에 춤추는 듯 무서운 검기가 선을 그렸다. 더 이상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헉!" 다급한 신음이 터졌다. 찌익! 하는 옷자락 찢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검기가 걷힌 후 장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지옥마존은 앞가슴 옷자락이 좌에서 우로 길게 찢겨진 채 피가 번져나오고 있었다. 그는 안 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얼굴 근육을 씰룩이고 있었다.


"......." 두 사람 사이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지옥마존이었다. 지옥마존 은 두 눈에 살광을 뻗치더니 괴소를 흘려냈다. "크흐흐흐......! 애송이 놈이 노부를 능멸하다니......" 다음 순간 그의 몸에서 자욱한 혈무(血霧)가 일어났다. 지옥마존은 음산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제왕혈신공(帝王血神功)으로 네놈을 가루로 만들어 주마!" 기이한 일이었다. 제왕혈신공은 혈영마황전의 소종사 단조룡이 익힌 신공이었다. 그런데 지 옥마존이 제왕혈신공을 알고 있다면 그가 혈영마황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뜻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백천기는 제왕혈신공을 알지 못했다. 다만 그는 지옥마존의 몸에서 발산되는 혈무에 무서운 압력을 느끼고 전신에 마염신공(魔焰神功)을 운기했다. 마염신공은 축융신군의 독문신공이었다. 실상 백천기는 그동안 꾸준히 마염신공을 연마해왔 던 것이었다. 그가 마염신공을 운기하자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다. 화르르르르......! 갑자기 그의 몸에서 불꽃이 발산되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시뻘건 화염에 휩싸이고 말았다. 백천기는 화인(火人)이 되고 말았다. 혈무가 내뿜고 있는 지옥마존과 화염을 발산하는 백천기의 대치! 그들 사이에서는 질식할 것만 같은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제왕현신(帝王現身)!" "잔(殘)!" 각기 다른 두 마디의 폭갈이 석실을 뒤흔들었다. 혈광과 화광이 동시에 부딪쳤다. 꽈르르르릉! 실로 엄청난 폭음이 일어났다. 폭음 속에서 두 마디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은 각기 엄청난 충격을 느끼며 뒤로 퉁 겨나갔다. 지옥마존과 백천기의 안색은 다같이 핼쓱하게 변해 있었다. 이때 지옥마존의 신형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제왕풍운(帝王風雲)!" 그러자 허공에서 수천만 개의 핏빛 손바닥이 떨어져내렸다. 백천기의 안색은 침중해지고 말 았다. 엄청난 압력이 온몸을 눌러 그대로 압살될 것만 같은 위기를 느낀 것이었다. 그는 그는 쌍장을 치켜올리며 짧게 일성했다. "소(炤)!" 마침내 백천기는 축융신군 화진걸의 최강의 무공이었던 잔소양패혈옥장 중 최후의


초식을 펼쳤다. 과거 구대마왕의 대혈전에서 천독마제 갈천후도 바로 이 초식에 의해 죽음에 이르 는 중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백천기의 쌍장에서는 백광이 번쩍 일어났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제까지 정좌한 채 조용 히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노승이 다급히 고함을 질렀다. "위험하다, 셋째! 그것은 축융신군의 잔소양패혈옥장이네!" 그러나 이미 백천기의 쌍장에서 뻗어나간 백광은 지옥마존의 혈장과 부딪치고 있었다. 그 순간 깡마른 노승이 번개같이 신형을 날렸다. 이어 그는 쌍장을 위맹하게 내뻗어 비스듬히 백천기의 장력을 후려쳤다. 세 줄기 장력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꽈르릉... 꽈... 꽝! 엄청난 폭발음이 석실을 무너뜨릴 듯 울렸다. 백천기는 순간 자신의 장력이 무산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를 악문 그의 몸이 선풍처럼 회전했다. "혈(血)... 천(天)... 마(魔)... 각(角)!" 그의 입에서는 그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양팔을 벌리자 수중에서 다섯 줄기의 붉은 광채가 뻗어나갔다. 그것은 가공할 만한 속도였으며 무서운 경기를 사출(射出)하고 있었다. 붉은 광채는 그대로 깡마른 노승과 지옥마존이 내뻗은 강기를 뚫고 들어가 버렸다. "크아악!" 각각 다른 세 마디의 비명이 울렸다. 그리고 정적이 찾아 들었다. 삼 인은 각기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지옥마존은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의 가슴 앞은 완전히 새까맣게 타 있었다. 게다가 손바닥 한가운데에는 혈천마각이 깊숙이 꽂혀 있었다. 그는 결국 백천기의 잔소양패혈옥장에 격중당하고 만 것이었다. 그와 함께 혈천마각도 피하 지 못한 채 손으로 받아버린 것이었다. 한편 깡마른 노승은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승포자락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편 그는 피투성이가 된 손에 무엇인가를 각각 움켜 쥐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두 개의 혈천마각이었다. 노승은 일그러진 시선을 손 안에 든 혈천마각을 내려 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것은... 군마천웅보의 첫번째 서열인 천독마제 갈천후... 그의 혈천...


마각......!" "......." 백천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를 주시했다. 노승은 혈천마각을 내려다보며 공허 한 웃음을 흘렸다. "결국... 이렇게 결단이 났구나......." 이때 지옥마존의 처절한 광소가 울렸다. "크하하하......! 후극생(侯克生)! 그 놈의 심장을 꺼내보기도 전에 내가 먼저 죽다니......" 지옥마존은 서서히 뒤로 넘어가며 처절한 비명을 터뜨렸다. "크아아아악!"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옥마존은 이승을 하직하고 만 것이었다. 이때 깡마른 노승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허망한 눈으로 지옥마존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결국 그는 탄식을 터뜨리고 말았다. 백천기는 그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노승은 문득 이 상할 정도로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자네...... 이름은 무엇인가?" 백천기는 흠칫했으나 곧 대답했다. "백천기라 하오." 노승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혼자 중얼거렸다. "백천기...... 좋은 이름이군......." 노승은 울컥 한 모금의 검은 선혈을 토해냈다. "이... 모든 것이... 연기같이 사라지는구나......." 백천기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노승은 그를 바라보며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내...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는가?" "......?" 백천기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노승은 탄식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안되겠다면... 할 수 없지......." 백천기는 문득 그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어떤 것인지 말해보시오. 가능하다면 해보겠소이다." 노승은 힘없이 입을 열었다. "그것은... 내 이야기를 들어 달라는 것이네." 백천기는 어리둥절한 느낌이 들었다. 최후의 부탁이라는 것이 고작 얘기를 들어달라는 것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노승은 스르르 눈을 감더니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고 있었다. "지금부터 사백 년 전... 무림에 한 젊은이가 있었네......." 그의 이름은 독고령(獨孤令)이었다. 그는 십여 세 때 당시 중원무림의 정도제일인이었던 천 산삼로(天山三老)의 제자가 되었다.


천산삼로는 당시 무림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절대고수들이었다. 독고령은 그같은 명사(名師) 밑에서 무학을 배웠으므로 일취월장의 기세로 나날이 무학이 발전되어 갔다. 더구나 그는 타고난 총명이 하늘을 덮을 정도의 기재였으므로 한 가지를 배우면 열 가지를 깨우칠 수가 있었다. 그는 천산삼로의 무공을 불과 오 년도 못되어 완전히 터득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는 십오 세 때 광세기연(廣世奇緣)을 만나 백 년의 내공을 얻고 상고시대(上古時 代)의 비급을 얻어 마침내 스승인 천산삼로를 능가하는 무공을 익히게 되었다. 이십 세가 되니 독고령의 무공은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무림에 출도(出道) 했다. 당시 무림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무림에는 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든 개세적인 아 홉 명의 대마두들이 무림을 어지럽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대마왕(九大魔王)이 바로 그들이었다. 천하의 어떤 고수도 그들 아홉 명의 마두들 앞에서는 견디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 다. 실로 그들 개개인의 무공은 고금미증유의 것이었다. 독고령은 무림에 나온 이후 구천마왕을 굴복시키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 여 중원천지를 헤맨 끝에 결국 구대마왕 중 제일인자인 천독마제(千獨魔帝) 갈천후에게 도 전했다. 그것은 바로 천태산(天台山) 정상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갈천후는 처음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쳤다. 그러나 독고령이 계속 도전해 오자 할 수 없이 상대해 주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너무나 비참했다. 독고령은 단 오 초도 못넘기고 허무하게 패배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독고령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결국 그는 실의를 안고 그 길로 심산에 은거를 해버렸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무림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은거한 채 이를 악물고 무공을 연마 했다. 그의 뇌리에는 오로지 복수의 일념만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날 이후로 그는 침 식을 잊은 채 무공연마에 들어갔다. 하루가 가고, 일 년이 가고... 다시 십 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미파(峨嵋派)가 참화를 입는 대사건이 발생했다. 참화를 일으킨 장본인은 바로 구대마왕의 한 명인 축융신군 화진걸이었다. 독고령은 태을산(太乙山) 죽검봉(竹劍峯)에서 화진걸을 만나 도전장을 던졌다. 그는 이번에 는 어느 정도 자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십 년 전에 비해 자신의 무공이 엄청나게 증 진됐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독고령과 화진걸은 죽검봉이 초토화가 될 정도의 공전의 대결을 벌였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버틸 수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독고령은 축융신군의 최고 무공인 잔소 양패혈옥장(殘消兩覇血玉掌) 중 제 일초인 잔(殘)에 의해 죽음 직전에 이르는 중상을 입고 말았다. 그 후 독고령의 스승인 천산삼로는 역시 구대마왕의 일원인 귀진자(鬼眞子)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 사실은 독고령으로 하여금 가공할 원한을 품게 만들었다. 그는 절곡(絶谷)에 숨어 자신의 상처를 간신이 치료한 후 그 길로 귀진자를 찾아갔다. 사실 귀진자는 구대마왕 중에서도 가장 무공이 낮은 인물이었다. 독고령은 자신의 무공이 절대로 귀진자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그는 귀진자와 채 일합도 싸워보지 못한 채 그의 암계(暗計)에 걸려 천애의 절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귀진자의 무서움은 실상 무공이 아니라 그의 각종 귀계에 있었다는 것을 미처 몰랐기 때문 에 어이없이 당한 것이었다. 절벽으로부터 떨어진 독고령은 불행중 다행으로 한쪽 다리가 불구가 된 채로 간신히 구사일 생할 수 있었다. 절벽 아래의 한 비곡(秘谷)에 떨어진 그는 절망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불구자의 몸으로는 더 이상 구대마왕에게 복수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야인이 된 채 비곡 속 에서 실의에 잠긴 야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이었는가? 그는 우연히 비곡의 한 고동(古洞) 속에서 한 장의 양피지를 얻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당 (唐) 시대의 대도(大盜)였던 무영귀도(無影鬼盜)가 자신이 평생 모은 무공비급과


보물을 숨 겨둔 곳을 가리키는 장보도였다. 독고령은 일생일대의 기연을 만난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는 불구의 몸이었으므로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비곡을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독고령은 장보도를 얻은 날부터 다시 불타는 집념을 발휘했다. 결국 그는 온 정신을 집중하여 다시 무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로 살을 말리고 뼈를 깎는 고련이었다. 다시 세월이 화살처럼 비곡의 빠끔하게 뚫린 하늘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로부터 오십 년 흐른 후, 마침내 독고령의 무학경지는 극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다만 한 가닥 미풍의 힘만으로도 몸을 날릴 수가 있게 되었다. 결국 그는 비곡을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장장 오십 년만에 다시 무림에 나온 것이었다. 그러 나 어찌 알았으랴? 정작 재출도한 무림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천하를 주름잡던 그의 불공대천지 원수인 구대마왕조차 자취도 없이 무림에서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이럴 수가! 구대마왕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독고령은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었다. 그 후 그는 중원천지를 휩쓸며 구대마왕의 행적을 찾 았으나 결국 허탕을 치고 말았다. 독고령은 탄식을 금치 못하며 마침내 포기하고 말았다. 그 날 이후 그는 무영귀도가 남긴 장보도를 따라서 남안탕산의 옥현봉을 찾아갔다. 과연 그 곳에서 그는 수천 권에 달하는 무공비급들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무림에 대한 의욕을 상실해 버린 그는 그곳에 잠적한 채 다시는 무림에 나오지 않았 다. 그러나 독고령의 야망은 완전히 소멸된 것이 아니었다. 자부심이 유난히 강했던 그는 자신 을 능가했던 구대마왕에 대해서만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무영귀 도가 남긴 수천 권의 무공비급들을 앞에 두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 무림이 생성된 지 얼마던가? 그 동안 숱하게 많은 기인고수(奇人高手)들이 영욕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 중에는 반드시 구대마왕을 능가하는 무공을 지녔던 인


물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독고령은 그때부터 수천 권의 무공비급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비급들은 천하 각문파와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의 무공을 총망라한 것들이었다. 독고령은 무공비급들을 면밀히 연구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가장 강 한 무공부터 차례로 열거해 나갔다. 그러나 실로 통한을 금치 못할 일이었으니, 그토록 많은 무공들 속에서조차 끝내 구대마왕 을 능가할 만한 무공은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그렇다면 구대마왕은 고금사상 가장 강한 자들이었단 말인가?" 독고령은 처절한 심정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그는 다시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라고 천하최강의 무학을 만들어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도 반드시 새로운 무 학을 창안하여 그들을 누르고야 말겠다......!' 그날부터 그는 침식을 잊을 정도로 광세무학(廣世武學)의 창안에 몰두했다. 백 년이란 세월이 다시 흘러갔다. 독고령은 무념무아의 경지에 잠긴 채 백 년이란 세월을 무공창안으로 보낸 것이었다. 사람 의 집념이란 가히 무서운 것이었다. 결국 그는 이백오십 세란 경이적인 고령에 달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인간의 경지를 벗어나 선인(仙人)에 이르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도리를 깨닫고 스스로를 천궁자(天弓子)라 칭했다. 또한 무영귀도가 남긴 동부를 천궁석부(天弓石府)로 명명한 뒤 기관지학을 총동원하여 동부를 개 조했다. 그로 인해 천궁석부는 천하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곳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었다. 노승은 여기까지 얘기하고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의 안색은 더욱 백납같이 변해 있었다. 한 편 백천기는 경악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인간이 이백오십 년을 살 수가 있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오." 그는 또한 천궁석부가 무영귀도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노승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분은......" 독고령, 즉 천궁자는 마침내 개세적인 무학을 창조해 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무공이 후세에 이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크게 염려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다시 무림에 나갔다. 그것은 전인(傳人)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삼 년여를 돌아다녔으나 마음에 드는 전인을 구할 수가 없었다. 도무지 눈에 드는 기재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다섯 명의 자질이 꽤 비범한 소년들을 거두게 되었다. 비록 그가 원하는 천하기 재는 못되었으나 그런데로 자질과 오성이 뛰어난 아이들이었다. 그는 소년들에게 그간 창안한 무학을 전해주며 더욱 발전시킬 것을 당부하고는 우화등선(羽 化登仙)하고 말았다. 그 후, 오 인의 인물들은 천궁자가 남긴 무학을 익힌 후 강호에 등장했다. 그들은 머지않아 천하에 자신들의 적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한편 그들의 뇌리에는 사부인 천궁자가 남긴 유시가 생생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 이 스승은 생애를 통해 오직 구대마왕을 꺾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던 차 말년에 이르 러서야 비로소 독자적인 무학을 창안해 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내가 창안 한 무학이 그들을 능가할 것이라는 자신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계속 대를 이어 이 스승의 무학을 연구하여 발전시키기 바란다. 언제고 구대마왕의 무학은 다시 무림 에 나타날 것이다. 그때 필히 그들의 후인과 대결하여 이 스승의 염원을 풀어주기 바란 다....... 오 인의 제자들은 천궁자의 유시에 의혹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림에서 적수를 찾 을 수가 없자 다시 천궁석부로 돌아 왔다. 그때부터 그들은 스승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무 학의 연구에 들어갔다. 천궁자가 남긴 것은 근 백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무학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범위가 넓어 한 사람이 익히기에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다섯 제자들은 다시 무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시 백 년을 기 한으로 삼고 스스로를 천궁오존(天弓五尊)이라 일컬으며 식음을 잊어가면서 연공에


몰두했 다. 그들의 무학연구의 진도는 빨랐다. 그로부터 육십 년이 되던 해, 그들은 드디어 가공할 개세 무학을 공동으로 창조해 내게 되었다. 그들은 그 무학을 모두 열두 권의 책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제왕혈신경(帝王血神 經)이란 것이었다. 제왕혈신경이 완성되자 천궁오존은 희열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이제 구대마왕 쯤은 충분히 이길 수 있으리라 자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찌 알았으랴! 그때 천궁오존 중에서 한 명의 배신자가 생기고 말았다. 실로 불행 한 사태였다. 공공신승(空空神僧), 제천신군(帝天神君), 지옥마존(地獄魔尊), 냉혈시존(冷血屍尊), 천은상인 (天殷上人) 등으로 이루어진 오 인의 사형제 가운데서 둘째인 제천신군이 배신한 것이었다. 제천신군은 천궁석부를 드나들 수 있는 비도를 지닌 채 달아나 버렸다. 남아있는 천궁사존은 대노했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천궁석부의 불가사의한 기관장치는 비도가 없이는 빠져나가기가 불가 능한 것이었다. 비록 천궁오존이 천궁자의 직계제자로 육십 년 이상을 석부에 머물렀지만 기관장치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제천신군은 달아날 때 산공산(散功散)이라는 독(毒)을 그들에게 뿌렸기 때문에 천궁 사존은 체내의 독을 몰아내는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오 년 후, 독을 완전히 몰아낸 다섯째인 천은상인이 모험을 무릅쓰고 기관을 뚫고 석부를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천은상인이 진정으로 탈출에 성공을 했는지 또는 실패했는지의 여부는 남은 사람들 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천은상인이 그후 다시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그의 행운을 빌 뿐이었다. 백천기는 여기까지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득 귀검(鬼劍)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그가 알기로는 귀검이 바로 천은상인의 제자 였기 때문이었다. 이때였다. 노승, 즉 공공신승은 떨리는 손을 들어 한쪽 석벽의 돌출된 부분을 눌렀다. 끼끼익! 묘한 마찰음과 함께 석벽에 사방 두 자 크기의 구멍이 나타났다. 그는 구멍


속으로부터 커 다란 함을 힘겹게 꺼냈다. "......?" 백천기는 의혹의 눈으로 함을 쳐다보았다. 공공신승은 허무한 눈으로 함을 내려보다가 이윽 고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함 속에 백여 권의 책자가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백천기의 눈은 맨 위에 놓여 있는 책자의 표지를 내려 보았다. <군마천웅보(群魔千雄譜)> "......!" 백천기는 마음이 절로 진동함을 금치 못했다. 공공신승은 그 책자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것은...... 군마천웅보란 책이오......." 그의 눈길은 가는 경련을 일으켰다. "이것은 스승인 천궁자로부터 물려받은 백 권의 비급과 그 동안 강호경험을 통해 무림사 이 래로 존재했던 가장 강했던 고수들에게 서열을 매겨놓은 것이오." "아......!" 백천기는 절로 탄성을 터뜨렸다. 공공신승은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제왕혈신경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될 수도 있소....... 그것은 이 기록 속에 천 명에 달하는 고수들의 각종 무공내용이 기재되어 있으며, 또한 그 파해법(波解法)까 지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오." "......!" "이 군마천웅보는 우리 천궁문(天弓門)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오." 공공신승은 그 말을 하는 순간 창백한 얼굴에 일말의 자부심이 떠올랐다. 백천기는 새삼 기이한 심정으로 군마천웅보를 내려다 보았다. 공공신승은 그런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했다. "이것을 그대에게 주겠소. 그러나...... 한 가지 부탁이 있소." "......!" 백천기는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이어 그는 입을 열어 나직이 물었다. "무슨 부탁이오?" "제천신군을 죽이고 제왕혈신경을 없애주시오." "......!" 백천기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천신군을 죽여달라는 말은 얼핏 이해가 가는 일이었으나 그들이 수백 년에 걸쳐 완성한 제왕혈신경을 없애달라는 말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공신승은 그런 눈치를 챘는지 힘없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노승의 말에 수긍이 가지 않는 모양이구료......?" "그렇소이다." 공공신승은 탄식하더니 말했다. "물론 우리도 천궁문의 최대보물인 제왕혈신경을 없애버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었소. 그러나...... 제왕혈신경이 비록 천궁문의 위대한 업적이라고는 하나...... 그것에 수록된 무공은 너무나 패도적(覇道的)이라오. 그것이 만일 악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면 무림은 가공할 혈풍의 소용돌이 속에 말려들고 말 것이오. 그러므로 혈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영원히 제왕혈신경을 없애달라는 것이오." "......." 백천기는 묵묵히 들다가 마침내 승낙하고 말았다. "좋소이다. 내가 힘이 닿는 한 대사의 부탁을 들어 드리겠소." 그러자 공공신승은 일시에 허탈감이 몰려든 듯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모든 것이 꿈만 같도다. 결국 일이 이렇게 끝날 것을......."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런데 바로 이때, 벽에 뚫린 구멍으로부터 한 인영이 홀연히 날 아 들어왔다. 그는 얼굴이 거무스름한 윤기를 내고 있는 흑의인이었다. 그는 바로 혈영마황전의 사신궁주인 사태극과 싸운 바가 있었던 귀검(鬼劍)이었다. 귀검은 내려서자마자 황급히 공공신공 앞에 무릎을 꿇고 부르짖었다. "사... 사백(師伯)님!" 그 말에 공공신승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이어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백이라니? 그대는... 누구길래......?" 귀검은 떨리는 목소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