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

1


목차 [디자인 올림픽] 자하 하디드보다 동대문 디자인 파크 디자인 잘하기 서울과의 대화 동대문 운동장에 대한 소개글 (한글) 동대문 운동장에 대한 소개글 (영어) 동대문 연대기 동대문 역사 + 사진 인터뷰 – 오스트리아 사람(Andreas-소개글 ) , 오상훈 학술자료 황평우 /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 : 동대문운동장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와 보존의 필요 이병수 / 체육시민연대 사무차장 : [스포츠인들에게 고함]동대문운동장의 운명은 우리나라 스포츠 역사의 운명이다. 최인기 / 전국빈민연합 사무처장 : 동대문 운동장 공원화 사업과 노점상 당사자와의 합의 최준영 /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 동대문운동장 철거의 문제점과 문화적 활용방안 모색의 필요성

2


리슨투더시티는 사라진 동대문 운동장, 그리고 장소가 지녔던 의미를 기념하며, 동대문 디자인을 다시 디자인 하고자 한다. 2006년 시민들을 대상으로 서울시는 동대문 운동장 공원화 시민 아이디어 공모전을 했으나 결과는 비공개 되었다. 왜 였을까? Listen to the City aims to produce a new design for Dongdaemun in honor of the erstwhile stadium and the meaning the location once held. In 2006, the city of Seoul held a contest soliciting citizen ideas for developing the stadium into a park, but the results were never revealed. Why?

3


[디자인 올림픽] 자하 하디드보다 동대문 디자인 파크 디자인 잘하기 ‘디자인 올림픽’ 은 서울시의 디자인 올림픽을 패러디 한 것이며, 동대문디자인 파크가 드러내고 있는 가치의 혼선을 서울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동대문운동장은 한 장소의 역사성의 보존과 새로운 역사의 시작, 서민들의 생존권과 새로운 건축적인 실험이라는 가치 의 파열이 일어나는 곳이지만 시민들은 그 문제에 대해 충분히 논의할 시간이나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 갈등은 어느덧 아득한 과거처럼 역사에서 사라져 가고 커다란 건물이 완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 동시에 용산에 대형 토목공사인 드림허브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또 그 기획이 100% 스타 해외 건축가에 의해 설계된다는 점에서 랜드마크의 의미를 도시민들과 이야기 하는 자리를 갖고자 합니다. 1) 자하 하디드보다 동대문 디자인 파크 디자인 잘하기 2011년 10월 29일 동대문디자인파크 홍보관에 2시까지 오셔서 자하 하디드의 디자인파크 보다 ‘더 멋있게’ 디자인 하시면 됩니다. 더 멋있게 혹은 더 좋은 디자인의 기준은 참가자들에게 있습니다. 동대문지역의 맥락과 역사에 신경 쓰지 않고 무조건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미래파적 작품을 하셔도 되고, 맥락과 역사에 집중한 작품을 만드셔도 됩니다. 디자인이나 건축 전공자일 필요가 없습니다. 종이(A3 size paper)와 드로잉도구는 리슨투더시티가 제공하지만 본인이 편한 재료를 가져오셔도 됩니다. 신청은 선착순으로 15분만 받고, 신청은 이메일로 해주시면 됩니다. 혹시 참여하고 싶으나 시간이 안 되는 분들은 이메일로 드로잉이나 스케치를 받습니다. (11월4일 마감) 원하시는 분에 한하여 모형을 만들 예정인데, 모형제작은 금천예술공장에서 함께 합니다. 같이 제작이 어려우신 분들은 모형을 만드셔서 11월 10일까지 제출해 주시면 됩니다. 모형제작이 자신 없으신 분들은 리슨투더시티가 도와드리거나 대신 만들어 드립니다. 결과물은 아트선재 센터 ‘city within the 4


city’ 전 에서 전시됩니다. (11월 11일 오픈) 2) 서울과대화 coversation with seoul 리슨투더시티는 동대문 디자인 파크의 건설 과정을 지켜보며 함께 생각해 볼 질문들을 정리하였습니다. ① 도시 행정부는 공동의 자산인 공공건물을 마음대로 처리할 권한을 갖고 있는 것인가? ② 문화 유적은 파괴의 대상인가 보존의 대상인가? ③ 노점상의 권리는 과연 보장 받아야 하는 것인가? ④ 신자유주의 조건 안에서 스타 건축가의 의미는 무엇인가? ⑤ 건축에서 사회적 맥락을 이해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형식 창출이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 내는 것인가? 추후에 질문을 추가하거나 공유하고 싶으시면 sns으로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parkeunseon@gmail.com , twitter: @listentothecity , http://www.facebook.com/urbandrawings 리슨투더시티 listentothecity.org

5


[Design Olympics] Designing a Better Dongdaemun Design Park than Zaha Hadid This project is part of Art Sonje Center’s City within the City feature exhibition, which will be starting on November 11. “Design Olympics ” was developed as a parody of Seoul’s Design Olympiad, having the aim of offering a setting for a dialogue with Seoulites over the confusion of values seen with Dongdaemun Design Park. Dongdaemun Stadium is the setting for a rupture of values―preservation of a location’s history, the start of a new history, the survival rights of the working class, and a new architectural experiment. But citizens have had neither the time nor the opportunity to give the matter enough discussion. The conflicts now seem to have disappeared from history, like something from a distant past, and the massive structure currently awaits completion. Given that the massive “Dream Hub” construction effort―also devised entirely by star overseas architects―is getting under way in Yongsan, our aim is to organize an opportunity to talk with citizens about the meaning of landmarks. 1) Designing a Better Dongdaemun Design Park than Zaha Hadid All you need to do is come to the Dongdaemun Design Park promotional center by 2 p.m. on Oct. 29 and produce a design that is more attractive than Zaha Hadid’s. The standards for “more attractive” or “better” are up to the individual participants. You may develop futurist works, producing utterly new forms without taking into account the context and history of Dongdaemun, or you may create works that focus on that very context and history. You do not need to be a design or architecture specialist. 6


A3 paper and drawing supplies will be provided by Listen to the City, but you can bring whatever materials you like. Participation is open to the first 15 applicants; you can simply send an email to apply. For those who are interested in taking part but cannot come at the scheduled time, we will accept drawings and sketches by email. (The deadline is November 4.) The schedule calls for those who are interested to create models, which will be built in conjunction with Geumcheon Art Space. Those unable to work together on model creation are invited to make their own and submit it by November 10. Those who are not confident about their ability to make a model can receive assistance from Listen to the City, or we can make it for you. The results will be exhibited at Art Sonje Center as part of the City within the City exhibition (scheduled to open on November 11). 2) A Dialogue with Seoul Listen to the City has watched the building of Dongdaemun Design Park and developed a list of questions for consideration. Answers can be submitted by Facebook or Twitter or at the Art Sonje lounge. ① Does the city administration have the right to do whatever it wants to with the common property of public structures? ② Is our cultural history something to be destroyed or something to be preserved? ③ Does the right to engage in street vending need to be guaranteed? ④ What is the meaning of “star architect” under the conditions of neoliberalism? ⑤ Is it truly important in architecture to understand the social context? Or does the creation of new forms produce a new context?

7


8


[Design Olympics] Designing a Better Dongdaemun Design Park than Zaha Hadid 2011.10.29. @ Dongdaemun Design Park Promotion Center 동대문 디자인 파크 홍보관

9


10


2차 모델 만들기 워크숍 – 2nd work shop for model making

11


동대문 디자인 파크 건립 배경에 관한 간략한 소개 리슨투더시티 2006년: 동대문 디자인 파크 기획의 시작 디자인 파크 플라자는 2006년 오세훈 시장이 당선된 직후부터 계획된 ‘디자인 서울’의 핵심 사업 중 하나로, 동대문 경기 활성화를 위해 동대문 운동장(야구장과, 운동장)을 철거하고 디자인 콤플렉스를 짓는 기획으로 원래 2010년 ‘디자인 올림픽’과, ‘디자인 수도 서울’ 행사에 맞추어 완공하려 했다. 그리고 2010년은 오세훈 시장 임기의 끝이자 새 시장 선거가 있는 해였다. 하지만 잦은 설계 변경 등으로 2012년 7월 완공예정이며 건설비는 애초 계획인 2400억의 두 배인 4800 억원이 들었고, 설계자 자하 하디드에게 지불한 설계비는 155억 7천만원이다. 설계공모는 지명설계로 진행 되었는데, 지명된 건축가는 국내외 최고의 건축가들이었다. 총 8명의 건축가가 초대 되었으며 국내 건축가는 조성룡, 최문규, 유걸, 승효상, 해외 건축가는 FOA, MVRDV, 스티븐 홀, 자하 하디드가 초청을 받았다. 2등을 수상한 조성룡의 작품은 동대문의 문화적 맥락을 잘 이해한 수작으로 평가 되었고 높은 순위에 거론 되지 않은 승효상 작품의 경우는 동대문 운동장을 대부분 그대로 남겨두는 계획을 제출했으며 MVRDV 의 작품은 이 곳이 과거 운동장 이었다는 정체성을 강조 하는 디자인이었다. 1등에는 이라크계 영국인 자하 하디드의 ‘환유의 풍경’이 당선 되었다. 그녀 작품의 컨셉은 ‘풍경과 어우러지는 형태’로 동대문 운동장의 역사적 혹은 과거 추억의 장소로의 위치보다는 청계천에 물이 흐르는 것과 사람들이 이동하는 동선을 파악하여 공원과 건물이 하나로 연결되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작품이다. “이번 디자인의 특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지 못한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디자인의 힘’에 관한 믿음에서 출발했다. 건축이 대중에게 특별한 영감을 불어넣고, 생각을 자유롭게 하며, 인생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라는 명제 아래 어떻게 하면 디자이너와 방문자 모두에게 좋은 경험이 12


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파크는 창조적 디자인 도시의 촉진제로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유 방법을 가르쳐줄 것이다.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시를 위해 대중과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한 건축 디자인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건축으로 도시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새로 갖는지 보여줄 것이다. 한국적 전통과 진화하는 미래적 디자인은 압축되고 통합되어 건축물에 투영될 것이다. 건축물과 공원이 나뉘지 않고 건물 내.외부 역시 물결처럼 연속적으로 이어지는데 이러한 전례 없는 건축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아이디어와 혜택을 제공할 것이다. 서울의 새로운 랜드마크는 각종 이벤트와 문화 행사, 2010년 세계 디자인 수도로서의 상징적 역할까지 수행한다” 라고 했다. 랜드마크의 형태가 도시민 사유의 방법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긍정적이고 계몽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보행자가 겪는 물리적 내’외부의 개방성과 상징적인 개방성은 동일시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외형적 유선형이 도시의 유기체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 이러한 형태의 특성을 곧 상징으로 생각하는 것은 해체주의 건축가들에게 고루 나타나는 오류이다. 분명 자하 하디드의 디자인은 개방적 형태를 지녔으나 그것이 개방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만약 그 건물이 개방적이여햐 한다면 무엇에 대한 개방인가? 18년전 한국을 한 번 방문한 적이 있고, 사찰에 대한 이미지 외에는 특별히 서울에 대한 기억이 없는 자하 하디드가 동대문운동장이 가진 장소성을 이해하기란 쉬운일이 아닐 것이다.. 서울에는 어느 도시에나 있는,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중산층의 대중도 있지만 특히 동대문 운동장에 얽힌 항일의 역사, 독재시대의 울분을 야구로 풀어냈던 관중들, 그 앞을 지나는 도소매 옷 상인들과 그 앞을 가득 메우던 노점 음식점들, 그녀의 건물을 위하여 사라진 그 곳에 더부살이 해오던 천여개의 노점상이라는 대중들의 존재를 알 고 있었으리 만무했다. 그러나 장소의 특수성과 역사성을 파악 할 수 없었던 것을 자하 하디드에 전가 할 수는 없다. 서울시가 초청 설계자들을 위해 만든 자료에는 동대문 야구장의 역사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으며, 노점상이나 풍물시장에 대한 언급은 없었기 때문이다. 즉 건축 발주처의 욕망은 과거와의 단절이었다는 것이 자하 하디드의 건축물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13


2007년: 풍물시장과 노점상인 자하 하디드의 새 작품이 발표 된 직후 서울시는 빠르게 동대문운동장 주변의 노점상들을 정리하고,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던 운동장의 내부의 ‘풍물시장’ 철거를 시작하였다. 풍물시장은 2004년 청계천 개발 때 일터를 빼앗긴 노점상인들이 어렵사리 얻어낸 대안적 장소였는데 2년만에 다시 강제퇴거 명령을 받은 것이다. 서울시는 상권이 전혀 형성되어있지 않은 청계9가에 상인들을 강제 이주시키려 했고, 100명의 노점상인들은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서울시가 고용한 용역 깡패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등 여러 고충 끝에 결국 대체지로 이주했다. 동대문 운동장 주변의 노점상인들도 마찬가지로 강제 이주 되었다. 문화재 위원들과 야구인들의 대안 이미 전 세계에 비슷한 모양, 규모의 건축물을 매년 3-4개 씩 짓고 있는 자하하디드의 작품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과연 찾아올 것인지, 동대문 디자인파크 건축물이 생긴다고해서 과연 갑자기 한국의 디자인의 질이 향상 될지, 동대문디자인 파크를 짓는 것이 그 안의 천 여개의 노점상의 생존권보다, 건물의 역사보다 중요한 것인지 시민들은 의문을 던졌다. 많은 이들이 건축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의견을 수렴할 시간을 갖자고 서울시에 제안했으나 묵살당했다. 2007년 8월 ‘동대문 운동장 철거 반대 100인 선언문’ 발표 공동대책위는 “1925년에 지어진 근대 최초의 체육문화시설인 동대문운동장은 역사.문화적으로 큰 가치가 있는 곳으로 철거해서는 안된다”면서 동대문운동장을 리모델링해 경기장과 스포츠박물관, 공원으로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2006년 11월 문화재청은 동대문운동장 등록문화재 지정을 위해 현장조사를 실시했다고 한다. 현장조사 후 조사자 세 명 중 두 명은 동대문운동장의 장소성과 역사성을 감안, 근대문화재로 존치시키거나 일부시설을 보존하여 사적공원으로 지정하면서 문화재로 등록시켜야 한다고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등록문화재 지정이 어렵다고 밝힌 한 조사자 의견만이 반영되었고 결국 올 10월에 있었던 동대문운동장에 대한 문화재청의 등록문화재 지정 심사에서는 안건으로 조차도 다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사업 공모 수상작 발표 며칠 14


전에 체육시민연대와 프로야구선수협회는 문승국 서울시 도심활성화추진단장을 직접 면담한 적이 있다. 두 단체는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사업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리모델링을 통해 개방형 공원으로 충분히 동대문운동장을 활용할 수도 있지 않겠냐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문 단장은 그 의견은 존중하지만 세계적인 건축가들을 불러놓은 마당에 일을 뒤엎는다면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할 수 있을 거라며 스포츠계의 이해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고는 8월 13일 이라크 출신의 건축가인 자하 하디드의 ‘환유의 풍경‘이라는 당선작을 언론에 대대적으로 발표, 홍보하였다. 서울시는 난지한강공원에 동대문운동장을 대체할 동호인 야구경기장 공사를 진행하던 중 서울지방국토관리청으로부터 공사 중단명령을 받았다. (2007. 10. 25 뉴시스) 하천관리법에 따르면 하천에서 굴착작업을 하거나 공장물을 지을 경우 국토관리청의 하천점용허가를 받도록 되어있는데 서울시가 허가를 받지 않고 땅을 파는 등의 공사를 강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서울시는 야구계와의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공사를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다 2008년: 하도감터의 발견 동대문 운동장을 철거하고 터파기 공사가 한창이던 2008년 9 월 잠시 공사가 중단되었다. ‘예상보다 너무 많은 문화재가 발견’된 것이다. 2008년 6월 발굴 이래 1만평 넘는 운동장 터 안에서 옛 한양성의 이간수문과 성곽터를 비롯해 조선 후기 군영인 하도감, 군수공방, 병사 숙소 등이 무더기 확인됐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동대문 운동장 터에서 발견된 유적들은 국보급의 가치가 있다. 하도감터와 어영청터는 조선시대 관청 유적으로 지금까지 흔적이 없던 것이 이번에 발견된 역사적으로 소중한 자료들이다. 이 유적들을 밀어버리고 디자인 플라자를 짓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고 했다. 도심 내에 이정도의 대규모 유적지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자하하디드의 건물은 취소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서울시와 자하하디드는 약간 수정된 그림을 선보였고, 사업은 속개 되었다. 노형석 한겨레 기자는 ‘성곽과 수문 일부 건물터를 제외한 다른 유적들은 옮겨졌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 지정 조건에도 규정한 것처럼 문화유산의 핵심은 15


장소성이다. 원형 복원을 아무리 강변해도 고유한 제자리를 떠나면, 역사 문화적 가치는 격감된다. 터 자체가 역사의 지층이기 때문이다. 동대문운동장 터의 하도감, 공방 유적 발굴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대형 도시 생활사 유적의 보존이라는 뜻깊은 선례를 남길 수 있는 기회였다.’ 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1) 유물은 동대문 역사 공원 한켠에 원형을 알아 보기 힘들게 옮겨졌고 비가 세차게 오면 마사토가 씻겨 내려가 위태해 보인다. 역사 공원 안에 들어가보면 유적터 발견 당시의 모형을 만들어 전시해 놓았다. 진짜 유물 대신에 우리에게 남은 것은 허섭한 점토 모형이다. 동대문 디자인 파크의 미래 서울은 동대문운동장 재개발의 경제효과에 대해 향후 30년간 생산유발 효과는 23조 원, 총 고용유발 효과는 20만 명으로 추정한다고 발표했다. 동대문 상권 매출 역시 10조 원에서 15 조 원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유동인구는 현재 1일 60 만 명에서 75만 명으로 늘어나고, 연간 외국인 관광객도 210 만 명에서 280만 명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전세계에 비슷한 건물을 수십 개 지은 자하 하디드의 건물을 보러 정말 외국인들이 몰려올 것인가. 서울에는 이미 세계적 건축가들의 건물이 많이 있다. 마리오보타의 강남 교보빌딩과 리움, 렘 콜하스의 서울대학교 미술관과 리움,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삼성동 현대 아이파크 사옥, 도미니크 페로의 이화여대 도서관등 한국에는 세계적 건축가가 지은 건물이 넘쳐난다.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유명한 건축가들의 작품들이 서울에 가득하지만 그것을 보러 일부러 서울에 왔다는 외국인을 본 적은 별로 없다. 더군다나 동대문 디자인 파크가 자하 하디드의 전 작에 비추어 볼 때 이 건물을 자신 최고 작품이라 꼽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자하 하디는 영국 AA에서 수학하며, 해체주의의 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밀도높은 드로잉 시리즈로 먼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녀 초기의 오스트리아 인스브룩의 스키점프대, 케이블카 정류장, 비트라 소방서같은 작품이 알려지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특유의 곡선과 예민한 조형적 비례 감각, 노출 콘크리트의 섬세한 사용은 그녀를 대가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특히 독일 복스브루그의 패노 어린이 과학 16


박물관은 외부와 내부 그리고 도시화 유기적으로 소통하는 좋은 수작으로 꼽힌다. 그런데 동대문 디자인 파크는 굳이 동대문 운동장 자리에 위치해야할 당위성이나 섬세함이 느껴 지지는 않는다. 대중이 물이 흐르듯 외부와 내부를 자유로이 통행하는 것, 그것을 액체와 같은 곡선으로 형상화 하는 것, 미래와 과거를 잇는 기획은 세계 어느 도시에서나 어울릴 수 있는 보편성을 띠는 디자인 컨셉이다. 그 보편성을 띤 양식은 프랑크 게리가 전 세계에 비슷한 모양의 건축을 투하하듯, 전 세계에 빠르게 보급되고 있다. 소위 해체 주의로 분류되던 페이퍼 아키텍트들의 건축은 글로벌시티의 붐을 타고, 신자유주의 도시들의 아이콘이 되어가고 있다. 해체주의 건축의 철학이 지역맥락과 내러티브를 무시하고 기능의 형식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모더니즘 건축의 기획과 차별점이 과연 존재하였던 것일까? 그들은 진보한 것인가?

1) 박은선, 서울- 스펙타클의 도시 , 2010년 리슨투더시티 웹진

17


A Brief Introduction to Dongdaemun Design Park Listen to the City 2006: Planning Begins The Design Park Plaza is one of the key efforts in Design Seoul, which was developed in 2006 just after Oh Sehoon was first elected as mayor. The plan was to revitalize the economy of the Dongdaemun area by demolishing Dongdaemun Stadium (baseball stadium included) and building a design complex in its place. Originally, it was supposed to be completed in 2010 in time for the Design Olympiad and Design Capital Seoul events. That year saw the end of Oh’s first term as mayor and an election for the next one. But repeated design changes resulted in the completion date being pushed back to July 2012, and the construction costs ballooned to 480 billion won―double the initially planned 240 billion won. Designer Zaha Hadid received 15,570,000,000 won for her design. The design selection was conducted through nominated designs, with the nominated architects coming from among the most outstanding in Korea and overseas. A total of eight architects or architectural firms received invitations: Cho Sung-ryong, Choi Moon-gyu, Yu Geol, and Seung Hyo-sang from Korea and FOA, MVRDV, Steven Holl, and Hadid from overseas. Cho’s runner-up design was viewed as a masterwork that showed a solid understanding of the cultural context of Dongdaemun, while Seung’s plan, which did not place very highly, would have left most of the stadium intact. MVRDV’s design placed an emphasis on the identity of the site as a former stadium. The winning selection was “Metonymic Landscape” by Iraqi-British architect Zaha Hadid. Her concept was a “form harmonizing with the landscape”―the goal being to create a new space linking park and building into a single whole based on an understanding of the flow of water 18


in the Cheonggye Stream and the movements of people, rather than the historical setting of Dongdaemun Stadium or a place of memories from the past. “This design makes people think about things they do not ordinarily think about. The project originated from a belief in the ‘power of design.’ Architecture provides a special inspiration to the public, frees our thought, and improves quality of life. Based on this thesis, I questioned what I could do to provide a good experience for designer and visitor alike. Dongdaemun Design Plaza and Park will serve as a catalyst for a creative design city, teaching people new ways of thinking. I plan to present an architectural design for a city that is like an organism, ever changing―one that takes into account a close connection with the public, and how many new possibilities the city gains with that architecture. Korean tradition and an evolving, futuristic design will be distilled and integrated into the structure. The structure and the park form a continuous wave without division between interior and exterior, and this unprecedented design will provide people with all kinds of ideas and benefits. The new Seoul lanmark will also play a symbolic role for the 2010 World Design Capital in various events and cultural activities.” The idea that the form of the landmark can change citizens’ way of thinking seems to represent a very positive and enlightened approach. But is it possible to equate the physical openness of interior and exterior experienced by the pedestrian with a symbolic openness? And will the streamlined exterior be capable of guiding an organismal change in the city? Perceiving such formal characteristics as symbols is an error that afflicts many deconstructionist architects. Hadid’s design obvious has an open form, but this does not necessarily signify openness. And if the structure should be open, then open to what? Given that Hadid only visited Korea once 18 years before 19


and had no particular memories of the city other than the image of temples, it would not be easy for her to understand the particular spatiality of Dongdaemun Stadium. Like other cities, Seoul is home to a middle class that is able to partake in culture, but Hadid could hardly be expected to have been aware of the history of antiJapanese resistance bound up in Dongdaemun Stadium, the crowds that vented their anger under the dictatorship through baseball, the retail and wholesale clothing merchants who passed by it, the streetside restaurants that packed the area, the thousands of street vendors who fed off this area that disappeared for the sake of her structure. We cannot blame her for failing to grasp the particularity and history of the setting. The materials developed by the city for the invited designers contain scarcely any mention of the baseball stadium’s history, and none at all of the street vendors or the local folk flea market. In other words, the commissioners wanted a break with the past, and this was reflected in Hadid’s structure. 2007: Flea Market and Street Vendors Right after Hadid’s design was unveiled, the city quickly went to work shutting down the street vendors around the stadium and demolishing the flea market inside the building, which was used as a parking lot. This market was a hard-won alternative for street vendors who lost their previous turf with the Cheonggyecheon development project in 2004; two years later, they were facing another demolition order. The city planned to forcibly relocate vendors to Cheonggye 9-ga Road, where no commercial area had been established. A group of one hundred street vendors fought until the end, but ended up relocating to the substitute location after enduring much hardship, including violence at the hand of thuggish “security workers” hired by the city. The street vendors around Dongdaemun Stadium were likewise forcibly relocated. 20


Alternative Suggestions from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Committee Members and Baseball Players Citizens began asking questions: would people come from around the world to see the work of Zaha Hadid, who has three to four structures of similar shape and size going up around the world every year? Would the quality of Korean design enjoy a sudden improvement simply by dint of the existence of Dongdaemun Design Park? Was the park’s construction really more important that the livelihood rights of the thousand or so street vendors in the area or the history of the building? Many people who were skeptical of the plan proposed that the city take some time to gather opinions, but the suggestion was ignored. In August 2007, a committee came together to issue a 100-person declaration of opposition to the stadium’s demolition. The signatories proposed remodeling the existing stadium for use as an athletic facility, sports museum, and park. “Built in 1925, Dongdaemun Stadium is of great historical cultural value as the country’s first modern athletic culture facility and should not be demolished,” they said. In November 2006, th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announced that it had conducted a survey of the site for designation as a registered cultural heritage. Following the survey, two of the three investigators argued that in light of the spatial characteristics and history of Dongdaemun Stadium, it should be maintained as a modern cultural property or partially preserved for cultural heritage registration through designation as a historical park. But the only opinion respected was that of the one investigator who thought it should not be registered, and the opinions were not even addressed at a review this October for the CHA’s designation of Dongdaemun Stadium as a registered cultural heritage. Meanwhile, the Civic Sports Alliance and Korean Professional Baseball Players’ Association met with Mun 21


Seung-guk, the head of Seoul’s urban revitalization team, a few days before the announcement of the winning submissions in the effort to develop Dongdaemun Stadium into a park. The two groups were not adamantly opposed to the park project per se; they merely asked whether it would not be possible to remodel the existing stadium for use as an open park. Moon replied that while he respected their opinions, he had to focus on the interests of the sports community, noting what an international embarrassment it would be if the effort were canceled after a call had been extended to world-class architects. On August 13, the selection of Iraqi-British architect Zaha Hadid’s “Metonymic Landscape” received large-scale reporting and promotion in the media. While the city of Seoul was building a club baseball stadium in Nanji Hangang Park to replace Dongdaemun Stadium, it was ordered to halt construction by the Seoul Regional Construction and Management Administration (as reported by Newsis on October 25, 2007). The reason given was that while the River Control Act required that its permission for private river use be granted when excavating or building a structure by the river, the city had gone ahead with the construction anyway, breaking the ground without the necessary approval. The city has nonetheless continued the effort, arguing that a promise to the baseball community left it with no other option. 2008: Discovery of the Hadogam Site The construction briefly came to a halt in September 2008, when the demolition of the stadium and digging for the new park was well under way. The reason was that a greater number of cultural relics than expected had been discovered. Since excavation began in June 2008, a great number of relics were found in the more than 33,000m2 area of the stadium: the Igansumun Sluice Gate and stronghold site from the old Hanyang Fortress, the 22


late Joseon military camp Hadogam, a munitions factory, and old barracks for soldiers. Korea Cultural Heritage Policy Research Institute director Hwang Pyung-woo said the relics discovered from the stadium site “have value on par with National Treasures. As relics of the Joseon era government, the Hadogam and Eoyeongcheong Army Post sites are historically invaluable materials that were discovered for the first time here after being absent to date. It makes no sense to plow over these relics to build the Design Plaza.” Since this was the first time such a large number of relics was found in the city, most believed the building of Hadid’s structure would be canceled. Surprisingly enough, the city and Hadid presented a slightly modified plan, and the project resumed. Hankyoreh reporter No Hyeong-seok lamented the decision, saying that “the relics other than the stronghold and part of the sluice gate site were relocated. As UNESCO states in its criteria for World Heritage designation, spatiality is a key characteristic of cultural heritage. No matter how much you talk about restoration, the historical and cultural value is dramatically reduced once it leaves its proper setting. The very location is a historical stratum. The unerathing of the Dongdaemun Stadium plot’s Hadogam and factory relics presented the opportunity to set a meaningful precedent by preserving great relics of urban life with few if any parallels elsewhere in the world.” The relics have been relegated to a corner of the History Park where they are nearly unrecognizable, and there is a danger that heavy rains will result in soil cement being washed away. Visitors to the History Park will find a model of the relics’ discovery―instead of the real relics, they are left with shoddy clay reproductions. The Future of Dongdaemun Design Park The city of Seoul has said the redevelopment of Dongdaemun Stadium will have an estimated production 23


inducement effect of 23 trillion won and total employment inducement effect of 200,000 jobs over the next thirty years. It predicts that sales in the Dongdaemun commercial zone will increase from 10 trillion won to 15 trillion won, foot traffic from the current 600,000 people per day to 750,000 people per day, and foreign tourism from the current 2.1 million visitors per year to 2.8 million. But are foreign tourists really going to flock to see a structure by Zaha Hadid, who has dozens of similar structures throughout the world? Seoul already has many buildings by world-renowed architects. The country is positively teeming with structures built according to designs by world architects: the Gangnam Kyobo Building and Leeum Museum by Mario Botta, the Seoul National University Art Museum and Leeum Museum by Rem Koolhaas, the Hyundai I’Park towers in Seoul’s Samseong neighborhood by Daniel Libeskind, and the Ewha Womans University Library by Dominique Perrault. Seoul is filled with work by the most famous architects on the planet, yet we have seen almost no foreign tourists reporting that they came to Seoul specifically to see it. Also, it is questionable whether the Dongdaemun Design Park could be called the best work Hadid has done. She studied at the AA in Great Britain and made a name for herself with a high-density drawing series based in deconstructionist philosophy. Her international reputation rose as people became aware of such early structures as the ski jump platform and cable car station in Innsbruck, Austria, and the Vitra Fire Station. Her characteristic curving lines, keen sense of proportion, and meticulous use of exposed concrete place her among the ranks of masters. In particular, the Phaeno Science Center in Wolfsburg, Germany, is viewed as an outstanding achievement with an organic linkage of interior, exterior, and city. Yet it is difficult to perceive any reason why the Dongdaemun Design Park must necessarily occupy the setting of the 24


former stadium, or any subtlely to the effort. The design concept of people freely moving between inside and outside like the flow of water, of giving form to this through liquid curves, of linking future and past―this is an universal theme suitable to any city in the world. It is a style that has enjoyed a rapid spread through the world, as evidence by the barrage of similar structures designed around the globe by Frank Gehry. The designs of the paper architects categorized as “deconstructionist” have enjoyed a boom in the world’s global cities and are becoming iconic features of neoliberal urban centers. Was there really ever a distinction between that philosophy and the designs of modernist architecture, which sought to create functional forms while ignoring the local context and narrative? Were these a step forward?

25


26


History of Dongdaemun Design Park Plaza, Seoul, South Korea 동대문 파크플라자의 역사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


61


62


63


64


65


66


67


68


69


70


71


72


73


74


75


76


77


78


79


80


81


82


83


84


85


86


87


이 글은 2007년 10월 열린 문화연대 공간·환경정책 월례포럼에서 발표 된 글을 김란기 선생님의 허락하에 실은 것입니다.

신개발주의 재림, 동대문운동장공원화사업

황평우 /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 : 동대문운동장의 역사적 ― 문화적 가치와 보존의 필요성 이병수 / 체육시민연대 사무차장 : [스포츠인들에게 고함]동대문운동장의 운명은 우리나라 스포츠 역사의 운명이다. 최인기 / 전국빈민연합 사무처장 : 동대문 운동장 공원화 사업과 노점상 당사자와의 합의 최준영 /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 동대문운동장 철거의 문제점과 문화적 활용방안 모색의 필요성

88


동대문운동장의 역사적 ― 문화적 가치와 보존의 필요성 황평우 /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

들어가며(서문)

국가나 개인이나 처절한 경쟁의 승리자는 상대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정신적 또는 형태의 상징물을 철저하게 파괴, 훼손한 후 물리적 승리와 정체성을 정복하는 이중의 전략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우리에게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행한 물리적 파괴와 정서의 침탈이 가장 심했다. 서울 도성은 1900년 7월 숭례문북쪽 성벽의 철거가 시작되었고, 이후 개화파와 대한제국을 좌지우지한 일본 제국주의가 추진한 경성 일대 도시계획에 의해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교통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철거 혹은 이전이 추진됐다.

그러나 근대적인 도시계획의 구상은 개화파인 김옥균이 1882년에 쓴 치도약론(治道略論)이다. 김옥균은 치도약론에서 도성내의 도로의 정비와 위생과 농업문제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개화파가 몰락하고 친일파가 득세하자 일제는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그 중 1916-1919년 제2대 조선총독으로 강압통치를 시행한 것으로 악명 높은 「하세가와 요시미치」 는 1904년 9월부터 1908년 11월까지 조선군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숭례문파괴를 주장했으나,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두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1562-1611)와 고니시 유키나가(?-1600)가 각기 이들 문을 통해 도성에 입성해 서울을 함락시킨 자랑스러운 전승기념물 이라 해서 보존된 것인 반면 서대문(돈화문) 등 다른 성곽은 일본왜구의 승리기록을 갖추지 못해 완전 철거되는 비운을 맞았다.

또한 평양의 경우 평양성의 현무문과 칠성문, 보통문, 모란대, 을밀대, 만수대 등은 모두 청일전쟁 때 일본군의 승리와 연관되는 전승기념물이라 해서 고적(古跡)으로 지정돼 보호받았다. 일제는 1943년 숭례문을 폄하해서 남대문, 흥인지문을 폄하해서 동대문 등으로 불리게 하며 조선 문화재 제1호로 등록했고, 해방 후 우리나라는 아무런 역사적 사실이나 문화재적 가치에 대한 조사나 연구 없이 일제잔재를 그대로 계승하여 숭례문을 국보 1호, 흥인지문을 보물 1호로 지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국내 학자에 의해서 밝혀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일본 도호쿠대학의 연구원인 오카 히데루가 2003년 “한국사론”이라는 연구 논문을 발표하며 세상에 알려졌다.

동대문 운동장의 역사성

1) 조선, 훈련도감( 訓鍊都監 )

89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후 선조가 환도한 26년(1593) 10월 이후의 일이다. 즉, 당시 삼도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 등의 건의에 의하여 기민구제 · 정병양성을 목적으로 하고 명 척계광(戚繼光)의 『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절강병법에 준하여 훈련하게 한 것이다. 훈련도감의 군대양성은 명나라 장수 척계광의 기효신서의 근본정신인 '治衆如治寡'에 입각하고 분수속오(分數束伍)에 중점을 두어 종래의 '군졸이 많으면 곧 적을 방어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던 대부대 단위의 편제에서 '책임이 분명하고 초대(哨隊)가 정연해야 한다'하는 부분연습의 소부대단위편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편제되었다.

훈련도감의 조직체계가 마련된 것은 선조 27년 이후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이것이 정비 발족된 정확한 시기와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가 없다. 다만 도감이 성립된 지 8개월만인 27년 4월에 처음으로 연습이 있었다. 주둔 규모는 유사당상(有司堂上)이었던 이덕향(李德馨)이 선조의 질문에 답한 데 의하여 습진 군이 1,000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성룡(柳成龍)의 진관관병편오책잔권(鎭管官兵編伍 冊殘卷)에 의하면 훈련도감군의 편제와 같다고 생각되는 진관군의 편제는 대개 영(營) → 사(司) → 초(哨) → 기(旗) → 대(隊)로 편하고 1대를 1기, 3기를 1초, 3초를 1사, 5사를 1영으로 편제하여 기효신서의 편제에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훈련도감의 편제가 처음부터 포수 · 사수 · 살수의 삼수병으로 조직된 것은 아니었다. 훈련도감은 전략적인 면에서 처음 포수로서 설치되었다가 그 뒤 의용대를 살수로 편입하고 다시 수문장(守門將) 등의 학사지인(學射之人)으로서 편성하였다. 이처럼 삼수병이 완전 조직화한 것은 선조 27년 6월 이후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순차적인 삼수병 중심의 도감 설치는 우리에게 하나의 암시를 준다. 즉 임진왜란 이전의 전쟁은 활이 그 주 무기였는데 임난 후에는 포 · 총이 주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도감의 편제는 포수와 살수를 중심한 것이 되었고 종래 조선군대의 장기인 활 위주의 편제는 아니었다. 이른바 힘을 근간으로 하는 활 위주의 전쟁이 기를 근간으로 힘이 없이도 할 수 있는 포 · 살 위주의 전쟁체제 즉 전술로 바뀌게 된 것이다.

훈련도감은 군사훈련 뿐 아니라 서울의 포도 · 순탁을 주 임무로 하는 좌 · 우 · 전 · 후 · 중의 5영에 각각 배치되었다. 따라서 훈련도감은 뒤의 오군영제가 성립될 때까지 수도 방위를 전담하는 동시에 왕의 시위 및 지방군의 훈련 등의 임무를 지니게 되어 교사대(敎師隊)까지 두게 되었다.

선조일대에 있어서의 훈련도감은 권설아문(權設衙門)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감의 임시성, 경제기반의 불안, 평화도래로 인한 만심(慢心) 등이 작용하여 그 존립까지 문제되기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고난의 역정을 겪으면서도 그대로 존립했고, 점차 그 조직 체계가 정비 확대되어 갔다. 선조 39년 도감포수 등의 궁가투탁사건(宮家投托事件)이 있었을 때 나타난 도감의 조직을 보면 역시 사 → 초 → 대 → 오로 편성되었으며, 전 · 후 · 좌 · 우 · 중의 오사로 나뉘어져 있고 1사는 역시 5초(전 · 후 · 좌 · 우 · 중)로서 편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이와 같은 도감의 체제 안에는 교사대 · 별무사(別武士) · 아동대(兒童隊) · 농군(農軍) 등이

90


소속되어 있었다. 포수를 중심으로 조직 · 편제된 훈련도감은 여러 계층의 사람이 이에 편입되었다. 이는 전쟁수행을 위하여 부득이하게 취해진 조처들로 여기에는 위로 유생 · 한랑 · 서얼(庶孼)로부터 아래로는 공 · 사천, 궁녀 및 아동들까지 동원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항복해 온 항왜 중 약간의 기술이 있는 자 및 토적 중에서 성근자(性勤者), 당군방자모취지인(唐軍幇子募取之人)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것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양인과 노(奴)들이었다. 양인 중에서 뛰어난 자는 금군으로, 그 중 또 뛰어난 자는 상을 주고 노(奴)는 면천의 특전을 주었고, 서얼에 대하여는 허통사로(許通仕路)의 길을 터 주었다. 그러나 양인에 대하여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노나 서얼에 대하여는 당시 계급사회로서는 문제가 없을 수 없었다. 선조나 제신들이 국가의 운명이 위급할 때는 모두 사천(私賤)을 따지지 않고 모두 입속(入屬)케 해놓고 일단 일이 수습되자 주인을 배반하는 노(奴)가 있다는 이유로 사천은 병사로 할 수 없음을 내세워 그들의 계급적 우월을 앞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역시 당시의 사회가 양반지배를 위주로 하는 사회였고 도감군 급보(給保)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일어나는 양반이 노의 봉족이 되어야 하는 불합리에서 나온 조처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계급을 무시할 수 없는 사회적 고민이 어려 있음을 알 수 있다. 훈련도감의 경제기반은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급료와 정기적인 것은 아니지마는 시재(試才) · 연재(練才) 등에 의한 논상 및 의자(衣資)의 지급, 그리고 부방자(赴防者)에 대한 처료(妻料) 등의 지급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기본적인 것은 역시 급료였다.

권설아문의 범위를 벗어나기 전까지의 훈련도감의 경제적 기반은 대단히 위약한 것이었다. 도감 군이 설치될 당시에는 1개월에 6두의 급료를 지급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산상의 조처가 전혀 없었던 정부로서는 대부대의 급료 병에 대한 급료의 지급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어떻든 일단 기민구제와 정병양성을 위한 도감군의 유지를 위하여 호조는 양식의 조변 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호조는 계향(繼餉) · 급료 대책으로 둔전경작을 설정했는데, 그 시초는 선조 26 년 12월의 일로써 대부분이 경기도읍민이었던 도감 군들에게 군사훈련의 여가를 이용하여 황전을 개간케 하여 스스로 군량을 삼게 하였다.

둔전경작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즉, 하나는 도감 군으로 하여금 직접 경작에 종사하게 하는 것으로써 여기에 종사하는 자들을 도감농군(都監農軍)이라고 불렀다. 또 하나는 간접경작의 형태로서 도감에서 가을 이후 낭청(郎廳)을 파견하여 계수수세(計數收稅)케 했으나 뒤에는 이를 전담하는 감관을 두어 이에 대한 일을 관장하게 한 것이 그것이다. 정유재란이 끝날 무렵인 선조 31년 6월부터 백관 및 금군의 급료도 지급하지 못할 만큼 재정사정이 악화되었다. 이 때문에 도감으로서는 어떻게든지 양식의 자족 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이러한 자족책의 모색이 바로 급보문제(給保問題)로 대두되었다. 이 급보문제가 제기된 것은 정유재란이 끝난 이듬해인 32년 정월의 일이었지만 본격화한 것은 동년 5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급보문제는 여러 가지 난제를 내포하고 있었으므로 쉽사리 해결되지 않았다. 이 문제는 선조의

91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매듭을 짓지 못한 채 다음 왕대로 넘어가게 되는 데, 이의 대안으로 성립된 것이 삼수미(三手米)의 징수였다. 즉 선조 39년 9월 충청 · 전라 · 강원 · 황해 · 경기 등의 도에 수한전(水旱田)을 막론하고 대소미를 1결당 1두씩 거두어 삼수군의 방료로 급료를 지급하는데 사용하게 한 것이 그것이다. 이는 도감의 경제기반이 잡혀가기 시작하면서 부족하나마 항구적 대책이 마련되어 가고 있음을 뜻한다. 이를 계기로 이제 호조나 군향청의 영향 하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아울러 도감군의 숫적인 증가가 이루어지게 되었지만, 그 경제기반의 안정을 얻기에는 허다한 난제가 가로 놓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문제 해결책의 하나가 시발택시 등으로 나타난 것 같으나 실록 상으로는 이를 찾아 볼 수가 없다.

북벌계획을 추진하던 효종은 이완(李浣)에게 훈련도감 확장의 책임을 맡겨 그 증강을 꾀했다. 그 결과 효종 5년에 마군 1초, 9년에 보군 10초의 부분적인 증액을 이룩했지만 국가재정사정의 악화와 많은 반대에 부딪쳐 더 이상의 확장을 보지 못한 채 효종은 죽었다. 효종의 뒤를 이어 현종이 즉위하자 도감군 증액의 중단을 요구하는 주장과 도감을 혁파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되다가 현종 10 년에는 훈련별대(訓練別隊)의 창설로 그 귀결을 보았다.

훈련도감의 본청은 서울 서부의 여경방(餘慶坊)에 있었으며, 도감이 양곡 등 군수품을 공급하기 위하여 두었던 양향청은 남부 훈도방(薰陶坊)에 있었다. 그리고 뒤에 도감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북영 · 남영 · 북일영 · 서별영 · 동별영 · 하도감 등의 영사도 두어졌는데, 북영은 공북문 밖에, 남영은 창덕궁 돈화문 밖에, 하도감은 남부 명철방 훈련원 남쪽에 있었으며, 마포에 있는 서별영에는 강변에 읍청루가 있어 명소의 하나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수도방위사령부 격인 훈련도감의 최대 병영이 있던 이곳은 최초의 신식군대인 별기군이 훈련하기도 했으며 임오군란 때는 성난 군사들이 무기를 탈취해 봉기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는 병영을 철거하고 야구장을 지었다. 창경궁을 놀이터로 만든 ‘놀자판 서울 만들기’ 와 소위 문화로 가장한 정신침략이 이곳까지 이어진 것이다.

2) 일제강점기 조선 최초의 근대식 운동장, 경성운동장

동대문운동장이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과 울분의 호흡을 같이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82년 전인 1925년 10월15일이다. 그 무렵 지어진 건물로는 서울역사(1925년), 경성부청( 서울시청·1926년), 동아일보사(1926년), 지금은 헐리고 없는 조선총독부(1926년) 등이 있다. 그 시절 동대문운동장의 이름은 ‘경성운동장’이었고, 경성부 토목기사 오오모리의 설계로 경성부가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옛 훈련원 터 2만2700평에 15만5천원을 들여 지었다.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는 1925년 5월30일치에서 “운동장이 완공되면 고시엔(甲子園)에 이어 일본에서 두 번째 규모를 자랑하는 종합경기장이 된다”고 적고 있다. 식민지 반도의 옛 수도에

92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새 운동장을 지었던 것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었다. 경성부가 운동장 관리를 위해 만든 ‘조례’ 1조에는 “본 조례에서 경성운동장은 1924년 동궁(東宮) 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설치한 운동장을 말한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동궁은 영친왕 이은이 아닌 훗날 일왕의 자리에 오르는 히로히토를 뜻한다. 즉 조선인의 체육 증진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다. 일제는 근대 체육시설을 건립함에도 그 들만의 침략정서로 일관하였다.

준공 열흘 뒤 열린 개장 이벤트는 이름부터 침략의 의도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조선신궁봉찬경기대회(朝鮮神宮奉贊競技大會). 관변단체 주관으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한마당을 꾸미려는 계획은 민족진영의 보이콧으로 반쪽 행사에 그쳤다. 3·1운동 이후 출범한 조선체육회는 이 대회와 같은 날짜에 따로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전조선 야구대회를 열었으니 민족체육의 고난의 길을 택한 셈이다. 하지만 이듬해 축구장, 정구장이 완공되고 관중석도 정비되면서 경성운동장은 서울의 명물이자 체육인의 보배로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연희전문 학생 이영민이 처음 날린 장외홈런(외야석이 없었으므로 구장 너머 숲으로 공을 날려야 홈런이었다)에 전국이 들썩거렸고, 경평(京平)축구에는 2만여 명의 인파가 모여 일경(日警)을 긴장시켰다. 우민(愚民)정책을 위해 마련한 운동장이 민족 에너지의 분출구가 되자 일제는 1932년 학생야구를 제한했고, 1938년에는 조선체육회를 강제 해산시킨다.

광복 후 서울운동장이 된 이곳은 군중집회 장소로 변신한다. 반탁과 찬탁집회가 모두 이곳에서 열렸다. 1946년 노동절에는 우익은 축구장에서, 좌익은 야구장에서 집회를 갖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훗날에는 박스컵 축구대회와 대통령배 축구대회가 잉태됐으니, 이곳은 민초(民 草)의 함성과 정권의 책략이 교차한 아이로니컬한 공간이었다.

또한 경성운동장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울분을 달래는 창구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운동장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조선에는 배재학당·경신학교·휘문의숙 등 민족학교들의 운동장을 빼놓곤 운동 경기를 펼칠 만한 체육시설이 없었다. 그 때문에 축구나 야구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민가의 담장을 넘어 장독대를 깨뜨리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해방과 더불어 명칭이 서울운동장으로 바뀌었고 1984년 잠실종합운동장이 건립되면서 동대문운동장으로 다시 변경됐다. 동대문운동장은 잠실운동장에 `국내 대표 축구. 야구장'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각종 국가 대항전 축구. 야구 대회가 열려 우리나라 근대 체육의 역사를 담고 있다.

3) 우리나라 체육 역사

93


*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개최

전국체육대회는 1920년 7월 13일 조선체육대회가 창설된 후의 첫 행사로 그해 11월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개최된 제1회 전조선 야구대회를 기원으로 한다. 초기의 조선체육대회는 지금처럼 종합대회의 성격을 띠지 못했으나 회를 거듭하면서 체육활동의 폭을 넓혀 갔다. 그러다 1925년 서동 원두에 세워진 경성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에서 조선 신관경기대회가 종합대회의 성격을 띠고 열렸으나 이는 일본인에 의해 열린 경기어서 그 의미가 바랬다.

1934년 조선체육회 창립15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전조선종합경기대회가 우리 민족 종합체육대회의 효시라 할 수 있다. 다섯 종목의 실시와 보조경기장을 사용하였다. 이 경기가 치러진 후 매년 종목추가를 통해 경기수준이 향상되었고 나아가 많은 종목에서 일본을 앞지르게 된다. 그것은 당시 국민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한 “항일”의 의미를 일깨워주기 충분한 것이다. 1936년 전조선종합경기대회가 절정에 오르지만 2년 후 일본의 새로운 탄압정책에 조선체육회가 강제 해산당하고 대회 역시 중단되고 말았다.

* "조선"에서 "대한"으로

1945년 광복으로 인해 그해11월 조선체육회가 재기하고 12월에 자유해방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를 열어 끊어졌던 대회의 맥을 다시 잇게 된다. 그 다음해부터는 각 경기단체들이 조직 정비됨에 따라 경기활동이 본격화 되었다. 이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대회가 열렸는데 이때부터 “전국체육대회”로 개칭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모든 단체와 행사의 명칭이 “대한” 또는 “ 한국”으로 통일되었다. 또한 이 경기를 통해 건국이후 올림픽대회 첫 참가를 앞두고 여러 부문에서 우수한 기록들이 작성되었다.

* 마니산에서의 성화채화

전국체육대회가 틀이 잡힐 무렵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동란으로 31회 대회가 중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체육인들의 열정과 투지를 통해 1951년에는 전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광주대회를 치러내고 말았고, 이소식이 세계 스포츠 계에 알려져 뜨거운 격려가 이어졌다. 1953년 휴전이 되면서 체육대회도 대형화되어 갔고, 전국의 균등한 체육발전을 위해 지방순회개최를 실시하였다. 또한, 1955년 36회 경기부터 故이상백 박사의 제의로 단군의 전설이 깃든 강화도 마니산에서 채화한 성화를 대회장까지 봉송되었다.

* 대회의 거대화에 따른 소년체전 분리

1966년 5년 만에 개최된 47회 서울대회는 참가규모가 37회의 두 배에 달했고, 처음으로 대회표어를

94


제정하였다. 대회 표어는 그 후 매년 새로 제정되어오다 51회의 표어가 계속 사용되었다. 1967 년에는 카드섹션이, 1968년에는 입장상제도가 실시되었으나, 각 개최지에서 입장 상을 연달아 수상하는 문제가 이어져 61회 대회부터는 입장 상을 폐지하게 되었다. 다만, 군사정권의 영향으로 굳어 보이는 행동보법이 문제가 되어 64회 대회부터 자연스런 보법으로 정착되어갔다. 한편, 대회 50회를 기념하여 성화전국일주, 카드섹션의 동화 등장, 이북 5도 임원단의 입장식참가 등의 새로운 의견들이 나왔다. 52회 대회에서는 27개 종목, 16,000명에 달하는 참가인원으로 인해 대회운영에 문제점이 생기자 53회부터는 초등부와 중학부를 분리하여 전국소년체육대회를 별도로 개최하게 되었다.

*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의 주춧돌

소년체전 분리 후 지방대회가 활성화되었으며, 체육인구의 저변확대와 대중화에 커다란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는 후의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의 유치로 한국체육의 국제적 의상을 제고하는 주춧돌을 마련하게 된다. 이 두 대회에서 경기력의 놀라운 향상을 보여주며 체육선진국에 돌입하는 등의 결과를 낳게 한 것이 바로 전국체육대회인 것이다. 1989년으로 고희를 맞은 전국체육대회는 세계 각국의 교포들에게 한민족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자축하는 의미에서 세계한민족체육대회를 창설 전국체육대회와 병행 개최하였다.

90년대는 2만 명 이상이 대회에 참가하기에 이르렀고 74회 광주대회에서는 역대 최대인원을 넘어서면서 문제화되었고, 이에 따라 75회부터는 구기 종목을 중심으로 사전 예선제를 실시하였다. 77회에는 마스코트가 78회에는 야간개회식을 선보이게 되어 점차 마스코트사용이 정착되어가는 양상을 보였다.

79회에는 서울올림픽개최 10주년을 맞이하여 제주도에서 처음 개최 되어 전국을 일순하는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80회는 인천공항의 건설에 발맞춰 인천에서 치러졌으며, 20세기 마지막 대회인 81회는 부산에서 2002부산아시안게임의 리허설성격을 띄고 치러졌다. 기존시설의 활용으로 비용을 대폭 줄인 84회 대회는 전북지역에서 실시되었다. 제85회 전국체육대회는 충청북도에서 열리며 전 종목을 개최 시도에서 실시한다.

맺는 말

위의 여러 사료들과 언론 기사의 사실 취재 보도를 살펴보듯이 동대문운동장은 우리나라 근대 체육의 시발점이며 산실로 충분하다. 또한 이곳은 조선 건국과 아울러 서울 도성이 있던 곳(현 축구장을 대각선으로 관통)이며, 그 안에 도성을 경비하던 훈련도감이 있었던 곳이며, 우리 정치사에서 중요한 획을 긋는 사건들도 많았던

95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체육이 엘리트 체육이라는 비판이 있지만 세계 10위권의 체육 강국으로 발전한 것도 사실이며, 엘리트 체육이라는 이면에는 서울 시민이 쉽게 접근해서 즐기고 짜릿한 감동을 받은 곳도 동대문운동장이다. 즉 동대문운동장은 서민체육과 엘리트 체육이 공존한 보기 드문 공간 중에 하나이다. 혹자는 친일청산, 낡은 시설에 불과하다고 지적할 수 도 있다. 우리는 대개 문화유산 하면 국보나 보물, 가격은 얼마나 하겠는가만 생각하지만, 정반대의 것도 있다. 이를 부(負) 문화유산, 즉 네거티브 문화유산 이라고 하는데, 인류의 과오를 보여 주는 장소와 건물을 말하며 민족이나 개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건물이나 장소 즉 삼전도비, 조선총독부, 아우슈비츠, 바르샤바 역사 지구, 히로시마 원폭 돔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인류 역사상 더 이상 이런 비극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다.

또한 친일화가 고희동집, 친일과 권력주변의 해바라기 서정주의 집, 친일파 지식인 이광수의 고택 등을 보존하자는 것은 그 집과 사람을 기념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록하자는 것이다. 즉 기념관 과 기록관을 분명히 구분하고 당사자들의 모든 공과 오를 기록하여 역사교육의 자료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분명 동대문운동장은 불순한 목적으로 일제에 의해 지어졌지만, 그 내용만큼은 다르게 평가되어야 한다. 우리는 근대 체육 100년의 기록과 기념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1925년에 지어진 관중석에 해방 후 우리의 기술로 콘크리트로 포장은 되어있지만 그것 자체도 당시의 우리 기술로는 최고의 건물이다. 1960, 70년대의 콘크리트 체육시설 그 자체만으로도 보존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동대문운동장은 공공시설로 다시 확보되어야 한다. 그리고 장소가 가지는 역사성인 도성이 복원되어야한다. 서울시가 추진 중인 디자인센터는 또 다른 난개발 사업에 불과하다. 이는 문화적 감수성이나 역사성을 무시한 저급한 신개발주의 또는 우리의 진정성을 밀어버린 일제의 만행과 다름없다. 난잡한 청계천공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서울시의 디자인센터는 또 하나의 미끼상품에 불과하다. 디자인센터를 지은 후 서울시는 이 일대를 다시 재개발하려 할 것이고 동대문운동장 일대는 개발주의에 신음 할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축구장과 야구장 건물을 보존하고 위험 요소는 수리를 하고, 내부는 우리나라 근대체육 100년을 기록하고 기념하는 박물관으로 활용해야한다. 운동장은 엘리트 체육 공간이 아닌 서울 시민이면 누구나 즐겁게 누리는 공간 이어야한다. 다만 축구장은 도성 복원이 구체적으로 담보될 때 까지 현행 방식으로 사용이 존중되어야한다. 왜냐면 현재의 모습이 옛 훈련도감 터에 근무하던 약 1~2000명의 군사들과 이에 부속된 민중들이

96


어울려 생활하던 그야말로 사람 냄새나는 난장의 공간이었다. 지금처럼…….

서울 600년, 무엇이 이 거대한 공간의 정체성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있어야한다.

97


[스포츠인들에게 고함] 동대문운동장의 운명은 우리나라 스포츠 역사의 운명이다. 이 병 수 / 체육시민연대 사무차장

동대문운동장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

동대문운동장은 1925년 착공하여 1926년 3월에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체육시설이다. 건립 이후 1934년에 우리민족 종합체육대회의 효시인 ‘전조선종합경기대회’가 개최됐고 대회 이후 여러 종목에서 경기력을 향상시키며 일본 체육을 앞지르기 시작, 국민들 가슴속에 항일의 의미를 일깨워 준 곳이기도 하다. 1959년에 건립된 동대문야구장 역시 암울했던 시대에 민족의 아픔을 달래주었던 아마야구의 성지로서 지금도 대통령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청룡기 등 수 십년의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는 전국고교야구대회가 열리고 있으며 아직까지도 지방 고교선수들에게는 꿈의 구장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건립 후 82년간 한국 스포츠의 영웅인 손기정(마라톤), 이영민(야구), 김용식(축구), 조오련(수영) 등을 비롯해 현재 국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대부분의 스포츠스타들에 이르기까지 동대문운동장을 거치지 않은 선수가 없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곳에 관한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만큼 우리나라 스포츠사를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동대문운동장과 야구장인 것이다.

서울시의 무리한 동대문운동장 철거 음모

지난해 10월, 서울시는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사업을 발표한 이후부터 현재까지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기 위해 무리한 사업들을 강행하고 있다. 특히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는 조건으로 약속한 7개 대체구장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처절하리만큼 갖은 꼼수를 부려가며 국민과 스포츠인들을 농락하고 있다.

작년 11월 문화재청은 동대문운동장 등록문화재 지정을 위해 현장조사를 실시했다고 한다. 현장조사 후 조사자 세 명 중 두 명은 동대문운동장의 장소성과 역사성을 감안, 근대문화재로 존치시키거나 일부시설을 보존하여 사적공원으로 지정하면서 문화재로 등록시켜야 한다고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등록문화재 지정이 어렵다고 밝힌 한 조사자 의견만이 반영되었고 결국 올 10월에 있었던 동대문운동장에 대한 문화재청의 등록문화재 지정 심사에서는 안건으로 조차도 다루어지지 않았다. (2007. 10. 25 연합뉴스) 98


한편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사업 공모 수상작 발표 며칠 전에 체육시민연대와 프로야구선수협회는 문승국 서울시 도심활성화추진단장을 직접 면담한 적이 있다. 두 단체는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사업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리모델링을 통해 개방형 공원으로 충분히 동대문운동장을 활용할 수도 있지 않겠냐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문 단장은 그 의견은 존중하지만 세계적인 건축가들을 불러놓은 마당에 일을 뒤엎는다면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할 수 있을 거라며 스포츠계의 이해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고는 8월 13일 이라크 출신의 건축가인 자하 하디드의 ‘환유의 풍경‘ 이라는 당선작을 언론에 대대적으로 발표, 홍보하였다.

지난 12일 서울시는 난지한강공원에 동대문운동장을 대체할 동호인 야구경기장 공사를 진행하던 중 서울지방국토관리청으로부터 공사 중단명령을 받았다. (2007. 10. 25 뉴시스) 하천관리법에 따르면 하천에서 굴착작업을 하거나 공장물을 지을 경우 국토관리청의 하천점용허가를 받도록 되어있는데 서울시가 허가를 받지 않고 땅을 파는 등의 공사를 강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서울시는 야구계와의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공사를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다.

지난 23일에는 동대문운동장의 대체구장 부지인 구의정수장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대부분의 언론과 시민단체들은 간이야구장 건립이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2010년 고척동 하프돔구장이 건립될 때까지 구의정수장을 모래로 덮어 보존하고 그 위에 천연잔디를 깔아 관중석 400석 규모의 간이야구장을 건립하겠다고 합의를 하고 말았다. 더 어이없는 사실은 문화재로 지정된 구의정수장을 개발하려면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전문기관의 구조안전진단, 과학적인 보존처리 과정 등을 거쳐야 함에도 서울시는 2개월 안에 이 모든 과정을 완료하고 간이야구장을 완공할 수 있으니 11월 중에 무조건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겠다고 배짱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오세훈 시장은 무슨 저의에서 문화재 전문가의 다수의견을 무시하면서까지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려 하고, 도대체 얼마나 돈이 많기에 최초 예산보다 1200억이 더 들어가는 3500억짜리 (2007. 9. 13 내일신문) 공원을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 또 서울시장에게는 어떤 권한이 있기에 정부기관의 공사 중단명령을 어겨가면서까지 간이야구장을 지으려 하고, 도대체 왜 다른 문화재를 흙으로 덮어가면서까지 그 위에 말도 안 되는 스포츠 시설을 짓겠다고 하는 것일까?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시설물을 보존하고 있는 사례들

축구의 변방 말레이시아에서는 70~80년대 유명했던 메르데카컵 축구대회가 열렸던 메르데카경기장이 콸라룸프르시의 도시개발계획에 의해 철거될 위기에 놓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시민들이 이를 반대하고 나서 철거는커녕 오히려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통해 전보다 훨씬 훌륭한

99


경기장으로 탈바꿈 시켰다고 한다. 동대문야구장보다 25년 먼저 지어진 일본의 고시엔구장 역시 겉으로 보기엔 촌스럽지만 시설개선을 통해 그들만의 명물이 되었다. 매년 고교야구대회 기간 중에는 프로야구 홈팀은 20여 일간의 긴 원정 경기를 떠나고, 예선을 통과해 운동장을 밟아본 고교 선수들은 흙을 기념으로 병에 담아갈 정도로 고시엔구장은 일본 프로야구는 물론이거니와 고교야구의 성지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05년 건립된 ‘공화춘’이라는 중국음식점이 한국식 자장면의 발상지로서 청나라 시대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고 하여 2006년 근대문화재로 등록되기도 하였고 이 밖에도 영덕의 송천예배당, 울진의 행곡교회, 화순농협, 서울공고 본관, 거제초등학교 본관, 한강 제1철도교 등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그 분야에서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시설물들이 대부분 등록문화재로 지정, 기념되고 있다.

스포츠인들의 무관심, 관심 받지 못하는 스포츠시설

서울시는 얼마 안 있어 국민과 체육인들의 추억과 감동이 서린 역사적인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려 들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화계 인사, 환경운동가, 철거민, 시민단체들이 앞장서서 동대문운동장 보존을 외치는 움직임은 자주 보이는데 반해 한국스포츠 발전의 산 증인역할을 해온 동대문운동장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대부분의 스포츠 스타들은 이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얼마 전 동대문야구장 대체구장 부지인 구의정수장이 문화계 인사들과 상수도학회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36년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정수시설이라는 가치가 인정된 것이다. 또 다른 대체구장 부지인 신월정수장의 경우도 환경운동가들이 자연생태계 파괴를 우려해 신월정수장 보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최근에는 문화재청이 조선 왕릉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태릉사격장을 일방적으로 폐쇄시키기로 했다.

이렇듯 문화계, 환경계, 수도학계 등 각 분야의 관련자 및 전문가들은 자신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시설물을 보존하고 심지어 문화재로 등록시키기 위해 발 벗고 나서고 있다. 그러나 스포츠인들의 무관심 속에 동대문운동장은 철거될 위기에 놓이고 태릉사격장은 폐쇄되었으며 장충체육관은 공연장으로 바뀔 운명에 처하는 등 스포츠 시설이 서울시 개발논리에 의해 변두리로 밀려나거나 허물어지고 있다. 스포츠는 문화이다. 그렇다면 스포츠시설도 문화재로서 충분히 가치를 가질 수 있다. 특히 최초의 근대체육시설인 동대문운동장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아무리 낡고 허름하더라도 대중문화의 한 축인 스포츠 역사를 기념하는 시설이라면 보수하고 리모델링해서 근대문화재로서 보존해야 마땅하다.

100


그러나 현재 서울을 문화도시로 만들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도심재창조 프로젝트 구상’에는 동대문운동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스포츠시설은 빠져있다. 오히려 고대 문화재를 복원한다는 명목으로 근대 스포츠시설은 괄시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것이 과연 88올림픽 4위, 2002 한일월드컵 4강, 월드베이스볼클래식 4강, 세계 10위의 체육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위해 지금껏 헌신해 온 스포츠계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는 것인가.

무관심에 대한 냉철한 반성

지난 3월 동대문야구장을 철거하는 대신 7개 대체구장을 약속받았다지만 오세훈 서울시장이 동대문야구장을 허문다고 했을 때, 무조건 철거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 외국의 사례처럼 경기장을 공원같이 리모델링 할 수는 없겠느냐고 처음부터 야구계, 아니 전 스포츠인들이 다 같이 주장했어야 했다. 과연 최신식 정수시설을 지어준다고 해서 문화계, 환경계 인사들이 구의정수장을 허물도록 놔두었을까? 아무리 최신식 돔구장을 지어준다고 한들 일본 야구인들과 팬들이 고시엔구장 철거에 찬성했을까? 아마 콧방귀도 안 뀌었을 것이다. 아무리 번질번질한 건물이라 해도 역사가 서린 공간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는 사진 몇 장, 기념탑 한두 개로 기억되는 추억거리가 아니다. 시설이 아무리 낡고 오래됐다고 해도 켜켜이 묻어있는 애환과 눈물, 환희와 감동은 기억할 수 있는 매개가 있어 존재하는 것이기에 쉽게 허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스포츠인들도 그랬어야 했다. 서울시가 동대문운동장과 야구장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공원을 짓는다고 했을 때 “그 곳은 이 땅 모든 스포츠인들의 추억과 역사가 서려있는 곳이니 굳이 허물지 않더라도 리모델링만 잘하면 시민들이 원하는 공원과 한국스포츠사를 기념하는 경기장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어야 했다.

대한민국을 빛낸 스포츠인들에게 고함

하지만 그동안 서울시가 보여온 작태를 보면서 지난 과오에 대해 스포츠인들이 후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간사한 꾀로 스포츠인들을 희롱한 서울시를 좌시하고 있을 수만도 없다. 대책도 없으면서 동대문운동장을 철거부터 하려들고 10,000명 넘는 관중을 400석에 앉히겠다는 터무니없는 계획으로 스포츠인들을 농락하는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또한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 아래 묻혀있는 성곽 복원을 위해 흙을 파내기 위함이라는데, 구의정수장은 보존하기 위해 흙으로 덮는다면서 동대문운동장은 다른 문화재를 복원하기 위해 허물고 흙을 파낸다는 기도 안찰 오세훈 시장의 반문화적 정책을 까부숴야 한다.

101


동대문운동장 철거 문제는 특정 스포츠계의 문제가 아니다. 오세훈 시장의 스포츠문화 자체에 대한 무지, 더 나아가 스포츠인들을 무시하고 스포츠시설을 업신여기는 인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스포츠계 전부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체육시설인 동대문운동장 철거라는 중차대한 문제를 노점계와 일부 야구계와의 양해각서 한 장으로 무마해 그들만의 문제로 왜곡하고 폄하하려 든 점도 그렇고 동대문운동장은 파헤치려 들면서 다른 문화재는 보호한다는 핑계로 흙으로 덮어 그 위에 말도 안 되는 스포츠시설을 지으려는 작태들을 보면 서울시가 우리 스포츠인들을 얼마나 깔보고 업신여기는지 능히 알 수 있다.

진정 이 나라 스포츠의 운명이 걱정된다면 동대문운동장부터 살려야 한다. 동대문운동장이 헐리고 나면 기념탑 하나 남는 게 전부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스포츠시설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나라 최초의 근대체육시설도 쉽게 허물어지는 마당에 장충체육관, 효창운동장 허무는 일이 대수겠는가? 동대문운동장 철거, 태릉사격장 폐쇄는 이제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동대문운동장이 헐린다는 것은 대한민국 100년의 근대 스포츠사가 송두리째 날아가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에 스포츠에 무지한 행정가에 의해 실추된 스포츠계의 위상과 스포츠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스포츠인들이 먼저 나서서 역사적인 동대문운동장을 반드시 수호해야 한다. 더불어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체육시설인 동대문운동장이 스포츠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이 땅의 스포츠 역사를 대대손손 추억하고 되새기게 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도록 실천에 나서야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체육시설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장면을 우리 세대에서 목격할 수는 없지 않은가.

102


동대문 운동장 공원화 사업과 노점상 당사자와의 합의 최 인 기 / 전국빈민연합 사무처장

경과

이글은 지난 2003년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현 오세훈 서울시장에 의해서 추진되었던 청계천복원 사업과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사업과 관련하여 청계천 주변부에서 생계를 이어오던 당사자들 노점상들의 상권이 어떻게 변화 되었는가를 살펴보고 서울시와 노점상간의 합의는 제대로 이루어 졌는가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참고로 우리사회는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기점으로 이후 정치적· 경제적 차원뿐만 아니라 각 지역별로 다양한 형태를 띠고 갈등이 양산되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서울을 중심으로 갈등이 중첩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곳이 청계천 주변부 이며 이곳은 60-70년대 청계천 복개공사와 그 위를 가로지르는 고가도로 건설 세운상가, 삼일아파트, 삼일 빌딩 등이 건설되면서 서울의 근대화가 관통되는 중요한 입지적 상징성을 갖고 있는 만큼 과거부터 갈등이 집합적으로 나타난 곳이다. 대표적으로 지난 2003년 청계천 복원을 둘러싸고 노점상들은 이 명박 전 서울시장과의 대규모 투쟁이 전개된 바 있으며 당시 일방적인 개발과 공사를 둘러싸고 여론이 악화되자 이 시장측은 동대문운동장 내 노점상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기반시설의 구축과 동대문운동장 홍보까지 서울시가 맡아서 해주겠다는 약속을 구두로 하며 서둘러 3년만에 복원공사를 마쳤다. 서울시의 주장에 따르면 청계천 복원공사가 끝나고 2주년이 흐른 지금 5천만 명(이 숫자도 의심스럽지만)이 넘게 다녀온 국제적인 명소가 되었다고 주장하며 21세기 서울 발전을 선도할 중심 문화벨트로 육성되는 한편 디지털로 상징되는 서울의 브랜드로 거듭날 예정이라는 장밋빛 청사진을 서울시민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청계천변은 여전히 다양한 문제들이 지적되고 있다. 개천은 수억씩 들여 한강 물을 끌어올려 흘려보내고 있으며 문화제들을 둘러싸고 있는 초고층 건물들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고 있다. 수표교는 아직도 장충단 공원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고 광교조차 원래와는 다르게 복구되었다. 하지만 서울시는 청계천 주변부 도심의 비효율적인 토지이용을 문제 삼고 있으며 경쟁력 약화를 운운하면서 부적격산업의 집단이전으로 영세상인들은 오랜 삶에 터전에서 밀려나고 있으며 세입자와 철거민들은 재개발로 어디론가 이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이 떠난 자리는 고층건물로 대체하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은 서울의 국제경쟁력 강화, 첨단산업화, 도심의 경쟁력 회복 등으로 포장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해 보일지 모르나 삶의 공동체는 파괴되었고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는 건물은 건설 자본가들의 이윤을 보장하는 공간으로 뒤바뀌고 있다. 한편 이 짧은 시간동안 노점상 약 9백 50여명과의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서울시에서 약속한 운동장내 장사터전도 애초의 약속과는 다르게 절반밖에 내주지 않았으며 햇빛과 비바람을 막아주는 차양막 공사는 당장 절실한 문제였기에 하루 벌어먹고 사는 노점상들은 1년 가까이 십시일반 약 6억원 이라는 돈을 투자하여 차양막 공사비용을 비롯한

103


생계기반을 스스로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서울시는 갖은 홍보와 선전을 통해 청계천변의 이해당사자와 끝없는 대화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고 청계천 복원 공사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선전을 해대고 있다. 하지만 송파구 장지동으로 이전을 앞두고 있는 상인들의 문제, 주변 재개발 철거민들의 문제, 최근 세운상가 세입자들의 문제까지 종합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해결되지 못하고 산적한 이 모든 것은 은폐되어 있다. 2007년 상반기 들어 오세훈 현 서울시장은 ‘서울 산업 경쟁력 제고방안'을 발표하였다. 이 자리에서 동대문운동장의 2 만 7천 평 부지 일부를 `월드디자인 플라자'로 건립하는데 활용하겠다고 밝히면서 이어 ‘노점상은 권리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동대문풍물벼룩시장은 서울시가 배려한 것이며 배려는 배려일 뿐이다.’ 또는 ‘항구적으로 영업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시각’을 내비친바 있으며 청계천 노점상을 강제 철거하겠다는 입장을 공공연하게 밝혀왔다. 그러다 지난 8월 21일 언론을 통해 숭인여중 부지에 서울시 예산 약 30억을 들여 청계천 풍물벼룩시장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내오고 있다. 그렇다면 노점상 문제는 이제 모두 해결이 된 것 인가?

서울시의 동대문 운동장 디자인 월드플라자

현재 서울시는 동대문운동장을 허물고 2010년까지 6층 규모(연면적 1만2천 평)의 디자인 월드 플라자를 세운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작년 10월 오세훈 시장이 취임 100일을 맞아 ‘시정운영 4 개년 계획’의 첫 사업으로 발표한 이 사업은 ‘동대문운동장 공원화’로 더욱 잘 알려졌던 사업이 수정되어 발표되었다. 디자인 월드 플라자 랜드 마크로 동대문 패션타운을 도심관광의 필수코스로 만들어 나갈 구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11월에 철거공사를 착수하겠다는 계획대로라면 디자인 월드 플라자는 2009년 하반기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현재 동대문축구장안에 풍물벼룩시장은 철거와 함께 또다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청계천 황학동 벼룩시장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곳은 50년대 60년대 추억의 물건을 다듬어 소비하고 유통하는 공간이다. 오래된 카메라, 전축과 LP판 등, 다양한 각종 민속품과 골동품, 생활용품 등 쉽게 접하기 힘든 물품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곳의 물건은 영화소품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중 장년층에게는 잃어버린 과거의 추억을 끄집어 내주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의 자녀들에게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꺼리들을 선사하고 있으며 외국관광객들 이색적인 볼거리의 제공은 물론 한국인의 근면 성실함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기존의 동대문 의류시장들은 청계천을 따라 동서로 이어져 있으나 운동장은 낙산중심으로 동대문을 거쳐 횡적인 확장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주변은 영세 상가를 중심으로 노점상들이 운동장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다. 이는 강한 기존의 백화점이나 쇼핑 센타가 입구를 중심으로 정면적으로 배치되어 도로와 경계를 짓고 중심영역 서 특성과는 사뭇 다른 형국이다. 따라서 기존의 쇼핑몰에서 발견되는 흐름을 유도하는 방향성과 연속성은 이곳에서는 관철되지 않는다. 다소 복잡해 보이는 이곳의 상점들은 가로 공간을 중심으로 개방적이고 유연한 공간을 연출하며, 적지 않은 노점상들이 상권을 오랫동안 형성하며 공존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에 지어진 건물 역시 이러한 건물 밖의 환경을 고려하여 전통적인 시장 배치 방식에 조응하고

104


있다. 24시간 주기로 차별화된 상권별 영업시간은 시간대별 공간 형성을 달리하고, 평일과 주말에 또 다른 시장의 모습을 연출한다. 주말이면 신흥소매상권을 제외하고는 많은 상가들이 문을 닫기 때문에 동대문 운동장 주변의 도로와 인도는 물류 재고를 처리하기 위한 ‘떳다방’이나 노점상 중심의 이른바 ‘땡처리 시장’이 형성된다. 이 같은 주말 장터는 짧은 유통기한으로 인한 의류시장의 재고처리 부담을 덜어주고, 소비자에게는 값싼 이월상품의 구입기회와 동시에 시골스러운 전통 재래장의 경험도 제공한다. 또 평일엔 인도만 점유하고 있던 노점상도 일요일이 되면 동대문운동장 주변 일대의 차도와 인도를 완전히 점유한다. 일시적으로 용도 변경되는 이러한 현상은 시장의 자율적 운영시스템에 의해서 인정되는 위반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시장의 가로 공간은 개연성 없는 일시적 이벤트를 수용하고 야기하는 원천으로서 더욱 다양한 활동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동대문 운동장 주변에 존재하는 노점상들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환기 시켜주는 사례라 하겠다.

비공식적이고 기만적으로 운영된 노점상 발전협의회

과거와는 달리 우리사회에서도 공공의 갈등 문제를 당사자들의 참여 속에 합리적으로 처리하려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이미 보수적인 연구자들에 의해 청계천 복원 과정 속에서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고 예상되는 갈등 및 분쟁을 해소 하였다는 주장이 제시된 바 있으며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서울시는 디자인 월드플라자를 건설하기 위해 좀 세련된 모양으로 접근하는 듯 했다. 2007년 초 서울시는 동대문 운동장 풍물벼룩시장 발전협의회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발전협의회와 같은 기구는 실질적으로 오세훈 서울시장 측에서 대사회적인 명분을 삼으려고 구성한 것으로 파악이 된다. 합의절차 문제가 거론이 되면 845여 차례 노점상 당사자들 간의 논의와 합의가 있었다는 식으로 대응을 해왔다. 하지만 과거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 시민위원회가 파행적으로 운영이 되었고 관련된 당사자 단체들이 배제되었듯이 발전협의회 조차 비공식적으로 기만적으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기만적인 운영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지난 2007년 1월 16일 동대문풍물벼룩시장과 서울시 간에 1차 발전협의회를 들 수 있다. 당시 발전협의회 회의는 노점상 대표로 한기석 부의장 외 5 명과 서울시 정동진 건설국장 외 5명의 만담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동대문운동장 공원화사업은 오세훈 서울시장의 공약사항으로 일차로 동대문야구장은 금년 안에 철거 하고 대체구장을 건설할 계획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밖에 서울시 균형발전본부 측은 동대문 공원화사업에 대하여 2006년 12월 28일 마감된 시민아이디어 공모전의 결과를 발표했으며 자료위원회에 통보했고 5 월 경 설계를 완료할 예정이라는 이미 언론을 통해 보도된 뻔한 이야기로 일관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노점상 측에서는 현재로써 지원방안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피력했고 이를 위해 동대문풍물벼룩시장 활성화 방안, 즉 적극적인 홍보 및 이벤트 사업추진과 편의시설 관리에 대한 신속한 지원을 요구하였다. 이밖에도 도난방지 및 화재방지를 위하여 용역경비에 대한 철저한 관리를 촉구했다. 발전협의회가 건설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서울시의 계획안에

105


동대문풍물벼룩시장 노점상의 생존권을 분명히 보장하는 방안을 가지고 협의가 추진되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2월 27일 2차 발전협의회 부터 서울시 차원의 기만정책이란 것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발전협의회는 노점상 철거반대 방침이 관철될 수 있는 기구가 아니며 서울시의 사업방침을 일방적으로 전달받는 기구에 불과 했다. 뿐만 아니라 논의 대상을 선별하기 시작하였다. (전노련 중앙의 참석을 배제) 나아가 서울시는 동대문풍물벼룩시장과 사전협의를 통해 운동장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파기하고 ‘동대문 디자인월드플라자’ 건설계획을 일방적으로 언론에 흘려보냈다. 급기야 지난 2월 27일 2차 발전협의회가 있기 직전에도 ‘서울시 노점대책’ 이라는 기자회견을 독자적으로 개최하여 노점시범거리 조성과 노점개선자율위원회를 결성을 통해 시민들을 현혹하고 노점상을 분열시키려는 음모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단 두 차례의 회의를 통해 발전협의회는 유명무실한 기구가 되었다. 그러나 서울시는 그동안 발전협의회라는 합의기구를 비공식적, 비공개적으로 운영을 하다 2007년 8월 21일 동대문운동장철거반대 공대위 기자회견이 실시되자 다음날 전격적으로 숭인여중 부지 ‘청계천 풍물벼룩시장’ 대책 안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현재 동대문 풍물벼룩시장은 전노련 소속 지역이기에 전노련의 자체 의결기구인

운영위 회의를 통해 결정된 사항은 동대문 운동장 지부장 전체 결의를 받고 전체 회원의 80%가 찬성해야만 숭인여자중학교로 옮길 수 있다는 결정을 한바 있다. 이제 서울시는 노점상을 숭인 여자중학교 부지로 노점상 9백 50여 명을 이주 시켜야 할 과제가 있으며 이과정속에서 노점상간의 합의문제가 있다.

도시빈민 정책에 대한 서울시 방안들

결국 노점상과 같은 도시빈민에 대한 서울시의 대응책은 겉으로는 합의적 성격을 띄고 있으나 내용적으로는 과거와 다를 바 없는 집단이주 정책과 배제 정책이 변형되어 현재에도 적용하고 있다. 간략하게 살펴보면 청계천 노점상을 동대문 운동장 유도구역으로 이주했던 바와 같이 과거에도 노점상들에게 노점상 유도라는 명분으로 이주정책과 비슷한 취지의 정책을 진행한 바 있다. 대표적으로 영등포 신도림역 근처와 서초 강남지역의 방배동, 이밖에도 원주지역의 풍물시장 등을 들 수 있다. 최근 들어서는 2003년 청계천 복원공사에 따른 청계천변 노점상에 대한 동대문풍물시장 이주정책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집단 이주 정책은 당면시기에 진행되는 개발사업을 관철시키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진행되는 측면이 있다. 이러한 사업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과거에는 합법성과 공식성을 부과하기 보다는 구두 합의 등을 통하여 임시방편으로 사업이 추진되고 해당 자치단체장의 임기가 끝난 후 후임 자치단체장은 수수방관하거나 회피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여론을 의식하여 부분적인 합법성을 부여 하고 있다 그러나 시정책은 언제나 사회적 변화와 여론의 향방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이주정책은 일시적으로나 제한적으로 제도권 안으로 포섭하는 정책을 쓰지만 도시빈민 배제정책은 노골적인 탄압을 전제로 하고 있다. 노점상의 경우 이주정책을 병행하며 한편에서는

106


탄압을 노골화하기도 하는데 이를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분열을 통한 배제를 들 수 있다. 대표적으로 청계천 복원당시 노점상 또는 철거민들에 대하여 다양한 이해 당사자들을 조직하고 이를 통해 분열을 촉진했던 경험을 들 수 있다. 최근 들어 동대문풍물벼룩시장의 경우에도 비슷한 양상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우려스러운 것은 다양한 입장과 주장이 있을 수 있고 자연스런 상황일 수 있지만 자칫 분열로 이어질 수 있으며 개개인의 각기 다른 실리적인 이득을 선별하여 서울시에서는 취할 수 있다. 다음은 노점상 고사작전을 들 수 있다. 서울시에서 약속한 숭인여중 부지 노점상 풍물시장에 대해서도 계약조건, 주체, 장사입지와 여건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로 주변지대의 상승과 여건의 변화에 따라 상권을 붕괴시키고 고사시키는 정책을 시도 할 수 있다. ( 최근 가로가판대 축소움직임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보라.) 노점상의 생리상 하루 벌어 근근이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상권을 무력화시켜 쉽게 새로운 생계방안을 찾아 백기를 들게 하겠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방법은 일차적으로 동대문운동장 주변부에 대한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이 마련되는 즉시 입체적으로 파상적인 공격을 감행 했듯이 다양한 이데올로기(시민 여론과 환경)을 운운하며 언론을 통해 역기능을 흘려보내거나 동시에 갈등을 조장하거나 분열을 획책하는 방법이 뒤따를 것이다. 결과는 당연히 노점상 고사작전으로 귀결된다.

결론

우리는 청계천 복원 추진 과정에서 지금까지 이곳에서 생계 터전을 일구고 있는 이들과의 합의 과정을 통해 생존권을 가장 우선시해야하며 더불어 제대로 된 친환경, 그리고 올바른 역사복원이 반드시 이루어 져야 한다고 일관된 주장을 하였다. 과연 서울시는 800억원을 투입, 2008년 착공해 2010년까지 준공할 계획인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사업'이 누구를 위한 사업인지 밝혀야 한다. 청계천변의 사람들은 그동안 정부 정책의 지원 없이 스스로 그곳에 삶의 터전을 일구고 살아 왔다. 각각의 독립된 업종들이 군락을 형성하거나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촘촘히 엮인 그물망처럼 삶의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몇 년 동안 서울시의 정책은 이들의 삶의 터전에 일대 변환을 일으키고 있다. 그 하나는 청계천 복원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치러진 대규모 공사였으며 또 다른 하나는 최근 동대문 운동장 철거방침과 이에 연장선에서 계획되고 있는 주변부 정비와 개발사업이다. 도시는 필연적으로 공간 확보를 위한 치열한 경쟁을 낳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청계천은 한국의 개발과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장소성, 역사성은 계속해서 유린당하고 있으며 삶의 공동체가 파괴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지금과 같이 경제적 가치만 운운하는 것은 너무 서글픈 일이지 않은가? 한편 이번 숭인여중 부지에 노점상 생존권을 위한 대체 부지를 마련한다는 발상의 이전에 서울시의 정책은 투명했어야 했다. 이러한 공개적이고 투명한 행정을 통해 상호간의 신뢰를 구축하고 파트너십을 이루어 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업계획과 구상은 청계천에서 동대문운동장으로 이전해 온 노점상은 물론 이려니와 이 일대에서 새롭게 생계를 이어보려고 발버둥을 치는 사람들의 생계를 제대로 복원하겠다는 계획 속에서 전개되어 야 한다. 이는 비단 동대문운동장 풍물시장안의 노점상을 넘어 복원사업 이전부터 운동장 인근에서

107


생계를 꾸려온 노점상, 나아가 청계천 일대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벼룩시장의 노점상들의 생존권까지 수천 명이 넘는 노점상의 생존권을 유린해서는 안 된다.

108


동대문운동장 철거의 문제점과 문화적 활용방안 모색의 필요성 최 준 영 /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체육계와 문화계를 포함한 시민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는 동대문운동장 철거를 기정사실화 한 채 사업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 올해 초 동대문운동장(야구장, 축구장)을 허물고 그 자리에 ‘디자인 월드 플라자’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서울시가 발표한 직후부터, 체육계와 문화계에서는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분명한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할 것이 아니라 이를 문화적으로 활용할 것을 제안해왔다. 또한 여기에는 동대문운동장에 추억을 담고 있는 많은 시민들이 동대문운동장을 보존하자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서명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1.이 같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환경시장’의 이미지를 갖고 있던 오세훈 서울시장의 거침없는 신개발주의 행보는 마치 전임 ‘불도저’ 시장 시절을 연상시킬 정도이다. 비단 동대문운동장 철거문제 뿐 아니라, 오세훈 시장의 한강르네상스, 서울시 신청사 건립계획, 세운상가 철거계획 등은 이명박 전 시장이 ‘뉴타운’이라는 이름으로 생태전원주택단지인 한양주택을 파괴하고, 뉴타운 개발지역 일대의 세입자들을 몰아낸 것과 맥을 같이 한다(세운상가 앞을 가득 메운 플랭카드를 보라!). 이명박 시장 시절부터 계속된 이러한 서울시의 개발사업은 ‘신개발주의’라는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 조명래 교수는 논문을 통해 “신개발주의는 신자유주의와 결합한 개발주의”로 정의하고, “겉으로는 환경을 배려하고 제도적 절차를 존중하는 듯 하면서도 과거보다 더 철저하고 조직적으로 개발·성장 중심의 경제논리를 관철시키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즉 ‘새로운 자유주의’로서 신자유주의가 겉으로는 세계적인 자유시장의 형성, 경쟁과 효율의 강화를 통한 경제성장 등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회복지 정책의 철회, 고용과 해고에 대한 기업의 자유 강화, 금융화로 인한 양극화의 심화라는 효과를 가져오고 있는 것처럼, ‘새로운 개발주의’로서 신개발주의는 표면적으로 도시개발에서의 생태·문화적 가치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도시의 환경을 파괴하고,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사회문화적 네트워크의 파괴 등의 폐해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환경과 생태 그리고 문화를 걸고 진행되는 개발사업으로 인해 오히려 시민들의 생존권과 환경권, 문화권이 파괴되는 역설이 바로 신개발주의로 인한 폐해이다.동대문운동장 철거문제가 바로 그러하다. 이미 여러 차례 지적된 바와 같이, 동대문운동장은 그 역사성이나 상징성 등을 고려할 때 서울시의 문화적 자산으로 보존이 필요한 건축물이다. 서울시가 추진하는 공원화 사업이 이른바 ‘랜드마크’로서 전 세계의 관광객을 얼마나 끌어모을 지는 모르겠으나, 이로 인해 사라지는 시민의 문화교육공간(근대체육의 역사, 근대건축의 역사를 배울 수 있는)이자 시민들의 생활문화공간으로서 동대문운동장의 가치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이 보다는, 그 동안 시민사회가 제안한 바대로, 동대문운동장의 원형을 보존한 가운데 이를 ‘공원 +생활체육시설+박물관’ 등으로 활용하는 것이 ‘공원화와 랜드마크 조성’이라는 서울시의 계획과 동대문운동장의 문화적 가치를 모두 살릴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일 것이다.2.대표적인 신개발주의

109


사업이라고 볼 수 있는 서울시의 일방적인 동대문운동장 철거계획은, 그 취지가 ‘공원화’에 있다고 할지라도 공간정의와 공간환경과 관련한 심각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그 공간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배제한 채 진행되는 동대문운동장 철거계획은, 공간적 ‘불의’(동대문운동장의 경우, 그 문화적 가치를 활용하지 못한 채 사실상 방치하고 있었다!)의 내용과 성격, 관계를 규명하지 않은 채 ‘철거’라는 공간적 ‘불의’를 확대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문화적인 공간, 문화적인 도시를 만드는 일은 그 과정 자체부터가 문화적인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파괴와 건설’이라는 천편일률적인 개발마인드와 ‘반대의견 묵살’이라는 비민주적인 절차로 얼룩진 이번 계획으로 탄생하는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사업>은 결코 문화적인 공간이 될 수 없다. 이렇게 공간의 주체들을 인정하지 않고 공간조성 계획을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공사를 강행하는 것은 ‘친환경성’ 이라는 이름의 힘과 결합하면서 맹목성과 폭력성을 증폭시킬 뿐이다. 혹자는 이를 ‘그린 파시즘’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울시는 ‘문화도시’를 지향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과연 ‘문화도시’ 란 무엇인가? 문화연대에서는 문화도시의 궁극적인 목적을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리한 바 있다. 1) 기본이 바로 선 도시, 2) 고유한 자기정체성을 가진 도시, 3) 공공성이 확장되고 보장되는 도시, 4) 삶이 문화가 되는 도시, 5) 문화도시를 위한 접근이 문화적인 도시. 즉 문화도시라고 해서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시설과 이벤트가 풍부한 도시’라거나 ‘예술적 행위가 넘쳐나는 도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를 ‘삶의 양식의 총체’라는 광의의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문화도시란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문화적인 도시, 기본권으로서 시민의 문화적인 권리가 보장되는 도시, 그리고 도시의 운영 자체가 문화적인 도시를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문화도시를 조성하기 위한 도시계획에서는 도시를 살아가는 시민, 도시의 역사와 환경 등 지역 고유의 사회·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고려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문화시설의 건립, 문화이벤트의 유치 등은 시민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과정과 방법의 하나일 뿐이다. 문화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시적인 지표 이전에 시민들의 생활의 측면이 충실하게 반영될 필요가 있다. 서울을 예로 든다면, 천만 명이나 되는 서울시민의 (문화적) 삶과 600년 역사를 통해 조성된 문화유산, 그리고 미래를 위한 생태적 가치 등이 도시계획의 중요한 고려사항인 것이다. 동대문운동장 철거계획은, ‘문화도시’의 개념과 방향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사업이다.3.결국 서울시의 동대문운동장 철거 계획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역사성, 서울시민의 문화적 삶, 미래를 위한 생태적 가치 등을 모두 거스르는 반문화적인 신개발주의 사업이자 ‘그린-파시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보다는, 앞서 언급한 대로, 동대문운동장의 원형을 보존한 가운데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활용방안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에다 공공디자인, 도시디자인의 요소를 추가하는 것이 동대문운동장 일대의 문화적 가치를 모두 살릴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시민공간, 생태공간으로서의 공원을 만드는 것이 반드시 기존의 건물을 철거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서울시의 일방적인 동대문운동장 철거계획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

110


1) 서울시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서울600년사를 참조하였다. 2) 한겨레 21 길윤형 기자와의 필자는 동대문운동장에 관심을 가지고 자주 토론을 하고 자료를 모았다. 김준석(동아)의 글도 참고하였다. 3) 200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체육역사 전문인용 4) 서울시 홍보지 서울사랑 9월호 5) 조선일보 2006년 10월 18일 6) 손선화 : 재래시장의 자생적 프로그램 특성을 반영한 동대문운동장 리모델링 계획에 관한 연구. 7) 조선일보 8월 22일자 ‘동대문풍물벼룩시장 신설동으로 옮긴다’. 8) 동대문풍물벼룩시장 신문 3호 9) 중앙일보를 비롯한 각일간지 사회면 9월 2일

111


116


117


118


119

ddp-working120718  

ddp-working120718. test.

Read more
Read more
Similar to
Popular now
Just for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