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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묘약 1 줄리아는 연신 눈물을 훔치며 이건 분명 잘못된 일이라 생각했다. 그가 바람이 나다니, 그것도 자기 비서와. 그를 용서 할 수 없었다. 절대로. 그녀는 아직도 그랜드호텔 호화 객실에 나체로 누워 그녀를 바라보며 당황해 하는 그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옆엔 긴 다리를 그녀가 보란 듯이 내놓고 이젠 그가 자기 차지임을 과시라도 하는 듯 눈 꼬리를 치켜 뜨고 있던 쉘린의 사파이어 색의 눈동자가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뉴욕출장은 단 일주일이었다. 그 사이 그가 바람이 나다니, 그녀에겐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뉴욕출장 전 그의 프로포즈는 뭐란 말인가. 날 여태껏 가지고 놀았다는 건가. 그녀는 분에 못이기는 듯 핸들을 내리치며 잠깐 고개를 숙인 사이, 쿵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머리를 핸들에 찧고 말았다. 다행히 복잡한 중심지라 속도가 최하로 달리고 있을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저승길에 들어섰을 것이다. 젠장. 그녀의 입에선 욕설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차에서 내려 앞을 쳐다보자, 구식 검정색 세단을 보는 순간 줄리아는 그 남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의 차는 뒤 범퍼가 찌그러져 있었고 그녀의 차는 라이트가 깨져 버렸다. 그녀는 고급 푸른 스포츠 차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스물 일곱 번째 생일에 이 차를 선물했던 스캇이 떠오르자 깨져버린 라이트를 차버리고 말았다. 그때, 부드럽지만 약간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울려왔다. "고만 부수고 빨리 끝냅시다. 뒤에서 차들이 기다리고 있잖소." 그녀는 아주 의무적인 태도로 핸드백에서 명함을 꺼내들고 그제야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두터운 반코트 사이로 보이는 체크무늬의 남방으로 보아 도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중심지인 유니온 수퀘어엔 저런 남방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결코 찾아 볼 수 없을뿐더러, 지금은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회사를 출근하는 시간인지라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 두터운 코트차림의 물결이 도심지의 유니폼인 냥 입고 다니기 때문이었다. 줄리아는 그의 옷차림이 도시 외곽 쪽의 사람으로 짐작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직업다운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판단력이었다. 꽤 큰 키를 가지고 있는 그 남자를 보느라 그녀가 고개를 약간 더 들어야 했다. 그녀는 아침햇살에 눈이 부셔 눈살을 약간 찡그리며 손으로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헤이즐럿의 눈동자와 조화롭게 이루어진 갈색머리칼 자체만으로 차분하고 안정적이며 약간의 살집은 있었지만 그리 보기 싫은 정도는 아니였다. 말랐거나 근육질의 남자 였다면 그의 인상에서 주는 푸근함이 덜 했으리라 생각하면서, 문득 그녀는 작년에 어머니 곁으로 떠나 가버리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의 눈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사랑의 배신감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으로부터 목까지 차 올라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슬픔으로 복받쳐 왔다. 왜. 오늘 처음 만난 그에게서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지만, 향수병처럼 그리움이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었다. 그녀가 다섯 살 난 해 그녀의 어머니는 병으로 돌아가셨고 그때부터 아버지는 그녀 하나만을 위해 사셨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그녀는 더욱더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고, 그녀는 누구보다도 아버지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작년 이맘때쯤 그녀는 바쁘다는 이유 하나로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줄리아는 병원의 복도가 그렇게 길게 느껴졌던 건 처음 이었다. 아버지가 누워 계실 병실에 들어서며 그녀는 한꺼번에 늙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차디차게 식어버린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마음의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리고 오직 이 세상엔 자신밖에는 없다는 생각과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 때문에 한 참 동안이나 우울증에 빠져 삶의 의욕을 잃고 있을 때, 나타난 사람이 스캇 해밀턴이었다. 직장 상사이면서도 여직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가 그녀에게 자신의 어깨를 내밀어 준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줄리아는 한순간의 빛처럼 지나가는 옛 기억을 되살리며 주체 할 수 없는 떨림을 애써 자제하곤, 그에게 명함을 건네주자 헤이즐럿의 눈동자는 사뭇 걱정되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겠소. 안색이 안 좋은데... 혹 병원이라도...." 그의 목소리가 따듯하게 그녀의 귓전을 울리자, 그녀는 울컥 슬픔의 덩어리가 튀어 나와 모든 이성을 마비시키고 말았다. 줄리아는 누군 지도 모르는 남자의 품에 안겨, 그것도 복잡하기로 유명한 도시 한복판 출근시간에 그의 코트 안 붉은 색 체크무늬의 남방에 눈물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이렇게 기대어 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믿었던 사랑의 배신은 그 어떤 슬픔보다도 더 할 것이므로... 라엘은 갑자기 자기 품에서 울고 있는 구불구불한 웨이브에 붉은 머리 여자의 정수리를 쳐다보며 난감해 하고 있었다. 뒤에선 쉴 세 없이 경적을 울려대며 욕을 해대는 사람부터, 지나가며 가운데 손가락을 하늘로 치키며 무언의 욕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자니 라엘은 더 이상 이렇게 있다간 경찰 차가 곧 들이닥칠 거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저--" 그는 재빠르게 그녀가 준 명함을 이름을 짧게 훑어보고는, "줄리아 로스씨. 아무래도 우리가 교통체증을 더해 주는 것 같소."


줄리아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곤 코를 훌쩍이며 주위를 살피었다. 경적 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듯 울려대자, 그녀는 눈물도 훔칠 사이 없이 자기 차로 돌아갔다. '오. 세상에 이게 무슨 짓이지. 맙소사.' 그녀는 막 차 위에 오르려다가, "보험회사에서 알아서 잘 처리해 줄 거예요. ,문제 있으면 그쪽으로 연락하세요." 라엘은 고개를 까닥이며 갑자기 자기 품에서 울던 여자는 뒤돌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말을 하곤 자기 차에 오르는 것을 보고면서, 라엘은 작은 한숨을 쉬며 역시 도시는 자신에겐 체질적으로 맞지 않다는 걸 새삼 다시 느끼고 있었다. 라엘은 도시 한복판에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는 프렌스은행을 쳐다보며 안으로 들어섰다. 여느 은행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호화롭게 꾸며 놓은 이곳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제일 가는 은행임을 과시라도 하는 듯 했다. 라엘은 자신의 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은 푹신한 카펫을 바라보며 꽤 값이 나가는 카펫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음- 좋은 질감이군.' 라엘은 이번 양모의 수확은 적었지만 그만큼 질 좋은 양모를 얻을 수 있었다. 라엘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상담 창구로가 제임스 은행장을 찾았다. 그러자 은행장이 이층계단에서 총총걸음으로 재빨리 나와 그를 아주 반갑게 맞이했다. "라엘 밀러씨. 어려운 걸음 하셨군요. 제 사무실로..." 은행장까지 나와 허리가 굽을 정도로 인사를 하는 것으로 보아 골드리스트에 올라간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사람임을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은행장실 또한 호화스러운 은행만큼이나 잘 꾸며져 오는 이로 하여금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아시아 쪽에서 흘러나올 법한 도자기를 바라보며 라엘이 흥미를 갖자 은행장은 자랑스러운 듯 그에게 설명을 하였다. "이건 한국이란 나라의 도자기라는 건데 이 청아한 빛깔을 내기가 어렵다고 하던 군요. 저번 한국 출장 때 어렵게 구입한 거죠. 이건 중국 도자기로 한국 도자기처럼 단아함과 기품은 없어도 화려한 색채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 라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은행장님이 이런 예술품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군요." "네. 전 아름다운 걸 매우 좋아하죠. 특히 골동품 모으는 재미는 여간하지 않습니다." 은행장은 개인적인 이야기함으로써 고객과의 친밀을 도모하려는 사업상의 잔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보통 골든 리스트에 올려진 사람 중 골동품이나 예술품에 대해 한가지쯤은 관심이나 작은 박물관을 만들 정도의 열성적인 사람들도 있다는 걸 그가 모를 이 없었다. 라엘은 각가지 진기한 물건들을 잠시 둘러보고는 은행장이 권하는 가죽소파에 앉으며 이야기를 꺼내려 하자, "라엘씨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이번에 새로 주요 고객 상담을 따로 전담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전 늘 은행장님이 하시질 않았습니까." "네. 압니다만 저보다는 상담을 전담하는 사람과 얘기하시는 것이 더 이득이 되실 겁니다. 전 아무래도 은행을 돌보다보니 상품의 가치에 대해선 충분한 말씀을 드리지 못 한 것에


대해 고객 님들께 행여 작은 손실이라도 생길까하는 우려에 작년부터 주요 고객님들을 따로 전담하는 사람을 쓰게 됐습니다." 제임스의 눈동자가 빛을 내고 있었다. 그의 일에 대한 열성은 존경하지만 지나치리만큼 빈틈이 없어 보이는 것이 라엘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는 작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이자, 제임스는 잠시 일어서더니 인터폰으로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제임스는 눈웃음을 지으며 라엘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나가면서, "해년 마다 해오는 일이지만, 이번에도 우리 은행에서 만족하리라 생각하며 이만 저는... 혹 무슨 문제가 있으시면 상담원과 잘 타협을 봐서 해결하시죠." 제임스처럼 철저한 사람이 저런 말을 할 땐 그 사람의 신임도가 얼마나 높은지 라엘은 알 수 있었다. 밀러가의 재산을 맡아 운영해주는 프렌스 은행은 라엘의 조상 대대로 거래 해오던 은행이었고, 해 년마다 한번씩 보고를 받고 있었다. 사소한 일들은 전화 상이나 컴퓨터 상으로 해오고 있지만 전반적인 상황은 일년에 한번씩 그가 도심지로 나와 운영의 보고를 받아야 했다. 제임스가 밖으로 나오면서 대기하고 있던 줄리아를 스치면서, 무언의 말들을 그녀에게 쏟아 붓는 듯 했다. 이번 뉴욕출장의 성과를 힘입어 잘하길 바란다는 그의 눈빛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내리 누르는 듯 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서자, 소파에 깊숙이 앉아 있는 골드리스트 상단을 차지 하고 있는 남자의 뒷머리가 보였다. 그녀는 살짝 옷매무새를 다시 매만지고 그의 앞으로 가 상냥함과 친절함의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줄리아......."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놀라움과 당혹감으로 커지더니 말을 잊고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시외 각 쪽의 사람일 텐데.... 그것도 골든 리스트에....' 줄리아는 그의 헤이즐넛 눈동자를 주시하며 잠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었다. 라엘 또한 아침에 자신의 품에서 울던 붉은 머리의 여자를 보자 좀 어리둥절했지만, 묘한 인연이란 생각이들 자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 표정도 그가 미소를 짖기엔 충분했다. "아침 보단 안색이 많이 좋아 보이 것 같군요." "네. 네..." 줄리아는 그제야 자신이 지금 주요고객과의 미팅을 생각해 내고는 황급히 그의 앞에 앉아 서류들을 펼쳐 놓았다. '줄리아, 정신차리자. 아침에 일어났던 모든 나쁜 일들을 잊고, 지금 내 일에 충실해야만해.' 그녀는 자기 최면을 열심히 걸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안녕하세요. 줄리아 로스입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음음--- 반갑습니다." 그녀는 목소리를 다시 가다듬고, 그에게 한해 동안 밀러가의 돈을 얼마나 적절한 상품을 선택해 불려 놨는가. 투자한 상품에 대한 가치는 어떤가. 밀러 재단에 들어 간 돈과


자선단체의 기부금 등의 매입매출을 설명해야 했고, 그의 재산 회계까지 맡아 은행에서 하기 때문에 꽤 긴 시간을 그와 마주 앉아 이야기해야 했다. 줄리아는 작은 안경을 쓰고 영수증 내지 그에게 보여 할 서류 등을 뒤적이고 있을 때, 그는 잔털이 남아 있는 그의 턱을 문지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침엔.. 왜 운 거요." 그녀는 가져가려던 서류에서 손을 멈추고 안경 너머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가 말하길 기대하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 이며, "사적인 일입니다. 밀러씨가 들어야 할 정도로 대단한 일은 아니니. 제 이야기에 신경을 쓰셨으면 합니다." "신경이 쓰이는 건 당연한 일인 것 같은데.. 도시 한복판에서 이름도 모르는 남자 품에 운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잖소." "라엘 밀러씨. 부탁입니다. 곧 끝나니 집중해 주세요." 그도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의 말을 다시 듣기 시작했다. "지금 은행에 있는 금액과 나간 금액을 간추려서 대차대비표를 만들었습니다. 이 서류 보시고, 의문사항이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그리고 재단과 기부금은 여전히 같은 금액으로 나가고 있는데..." "한 10%로 더 올렸으면 좋겠소." "지금도 충분한 금액이라 생각하는데요." "음-. 그렇지만은 벌써 2 년째 그 금액으로 넣어 준다는 것이 맘에 걸리는군요. 내년부터 10%를 올려 주었으면 좋겠소." "알겠습니다. 참 너그러우신 분이군요." "네가 너그러운 것이 아니라 대대로 내려오면서 해온 일이지. 내가 한 일은 없소." 줄리아는 보기 드물게 겸손과 겸허가 갖추어진 순수한 사람을 만나게 되어서 잠시나마 자신의 복잡한 심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가 미소를 짖자 라엘의 심장이 한순간 뜨끔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보조개가 예쁘게 패인 미소였다. 줄리아는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서류를 챙겨 드는데, "혹. 오늘 저녁 시간이..." 줄리아는 손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멈추었던 손을 좀더 바쁘게 움직이며, "죄송합니다. 전 고객님과는 따로 밖에서 만나지 않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제가 혹 불쾌하게 했다면...." "아닙니다. 제 일에 대한 관리상이니 맘에 두지 마세요. 그럼 이만 내년 이맘때쯤 다시 뵙겠습니다." 그녀가 일어서자 그도 같이 일어났다. 줄리아는 서 있는 그를 뒤로하고 은행장 실을 나오며 긴장했던 신경들을 푸느라 긴 한숨을 쉬었다. '참, 사람의 인연이란 그래서 지나가는 거지한테도 함부로 하진 말라는 소리가 있나.' 줄리아는 아침에 일을 잠시 생각하며 막 가려하자 저만치 은행장 제임스와 스콧이 얘기를 하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줄리아는 갑자기 아침의 분노가 다시 치밀기 시작했다. 다음 은행장 자리의 유력한 후보자 스콧 해밀턴 그를 사모하는 여자직원들의 눈길 속에서도 그녀는 꿋꿋하게 그와의 사랑을 지켜갔건만.... 그녀의 완전한 착각 속에 살았다는 생각에 더욱 몸이 굳어지면서 재빨리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가려하자, 뒤에서 은행장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줄리아."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뜨곤, 그녀의 파란 눈동자가 더욱 짙은 색을 띄며 뒤를 돌아보았다. 스콧의 녹색눈동자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왔다. 그의 녹색눈동자는 그녀에게 해명의 기회를 달라고 아우성을 치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그를 외면해 버리곤 은행장을 쳐다보았다. "일은." "네. 잘 됐습니다." "밀러씨가 만족해하시던가." "그건 아마.." "음- 알겠네. 스콧 같이 들어가지. 꼭 인사해야 할 사람이거든. 대대로 이 은행과 거래를 맺고 있는 밀러가야. 줄리아 수고했어. 가보지." 제임스 은행장이 몸을 돌려 자기 사무실로 들어서자 스콧은 가려던 그녀에게 조용하고 재빠르게 말을 했다. "줄리아. 제발. 나에게 말할 기회를 줘. 오늘 당신 집으로 가겠소." 그녀는 큰소리로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보는 눈들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는 듯한 느낌에 그의 말을 무시하고는 자신의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벌써 소문이 퍼진 것이 틀림없었다. '쉘린.' 줄리아는 입술을 살짝 물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줄리아는 브랜디 반병을 비우고도 주체할 수 없는 배신감에 쓰라린 마음까지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서서히 오르는 취기에 어느새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 배신의 아픔을 같이 흘려 보내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울지 않았던 눈물이 왜 이렇게 서럽게 흐르는지. 그녀는 지금에서야 너무나 많은 걸 그에게 기대었다는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그가 채워준 만큼 그의 배신은 그녀를 온통 쥐 흔들고 있었다. 어둠 속에 한줄기 조명등 불빛만을 의지한 채 술잔을 비우고 있을 때, 찰칵하는 작은 소리가 그녀의 귀에 어슴푸레 들려 왔다. 그녀는 스트레이트 잔에 술을 따라 막 마시려고 하자 누군가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그일 것이다. 스콧 해밀턴. 그녀는 흐릿한 눈으로 어둠 속의 검은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눈을 감고도 그를 느낄 수 있다. 그만의 체취가 그녀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었다. "줄리아." "나...가.. 스콧. 당신 보고싶지... 않아..." 그녀의 맘 같이 않게 자꾸 혀가 꼬여 말이 재대로 나오질 않자,


"제...길, 내.. 맘대로 되는 게... 없군..." "줄리아. 미안해. 정말. 그렇게 될 일이 아니었는데..." 차라리 그가 이젠 당신이 지겨워 졌소. 하고 나가 버렸으면 했다. 더 이상 그에게 미련을 두고 싶지 않았다. 한동안 쓰리고 아프겠지만 미련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용서를 빌고 있지 않은가. 줄리아는 다시 술잔을 들자, 이번엔 그가 한입에 술을 털어 넣고는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렸다. 부엌 쪽의 불이 환하게 켜지면서, 줄리아는 눈이 부신 듯 두 팔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싫어. 꺼. 난 불빛이 싫어." "줄리아. 제발. 내 말 좀 들어 봐." "당신이 뭔데 나한테 이러는 거예요. 쉘린에게 나 가버려." 그녀는 단숨에 말을 하고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스콧은 지난 날 그녀를 다시 보는 것 같아 그 자신도 땅 밑으로 꺼져 버리고 싶었다. 아버지의 잃은 슬픔을 겨우 마음속에 묻어 두었는데 자신 때문에 슬퍼하는 그녀의 보고 있으려니 스콧의 마음 또한 괴롭고 답답할 따름이었다. 스콧은 문득 줄리아를 처음 만나던 순간을 생각했다. 차세대 은행장으로 물망이 오른 그에게 굽실대는 사람들과 그의 능력과 매력적인 눈웃음 한번이면 자신의 침대로 못 뛰어들어 안달이 난 여자들에게 길들여져 있을 때쯤, 그 앞에 나타난 붉은 머리 여전사 줄리아를 보는 순간부터 그는 끌렸었는지 모른다.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 찼던 그에게, 어느 날 자기 앞에 감히 서류를 뿌리듯 놓고 가던 줄리아를 생각할 때마다 자그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이후로 그들은 매일 만나면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대며 싸우기 바빴지만, 싸우면서 정든다는 다는고 했나. 스콧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줄리아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날도 스콧은 줄리아와 대출인 때문에 연신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화한통. 그녀의 얼굴은 잿빛처럼 굳어지고, 전화를 내려놓으며 쓰러질 듯 하자 스콧이 그녀를 부추겼다. 그리고 그녀의 한줄기의 눈물을 그는 보았다. 스콧은 아버지의 주검 앞에 그렇게 당당하던 줄리아가 허물어지듯 자신을 잃어 가는 모습에 그는 그녀의 상처를 치유하고 달래며 아물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자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녀가 없던 몇 주간의 사무실은 적막감이 들 정도로 그를 쓸쓸하게 했고, 그는 당장 그녀에게 달려가 그녀를 보자마자 안아버렸다. 반항할 줄 알았던 그녀는 잠시 놀라긴 했지만 어느새 그의 품에서 그렇게 서럽게 울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본 순간 스콧은 절대로 이 여자를 혼자 두지 않게 노라고 맹세했건만... 그녀는 흔들리는 몸을 가누며 그를 지나치려하자, 스콧이 그녀를 거뜬히 안아 버렸다. 그녀는 심하게 몸부림을 쳤다. 그리곤 눈물 젖은 눈으로 그를 흘겨보며 소중하고 고결했던 자신의 순결을 그에게 받친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그의 눈짓 하나면 침대 속을 따듯하게 해줄 여자는 얼마든지 있다는 걸 지금에서야 더욱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그녀의 순결 따위를 생각해 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녀는 스물 일곱 해를 소중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지켜 왔었다. 그런 자신의 순결을 스콧 해밀턴에게 주었던 다니.... 그리고 그의 프로포즈에 얼마나 기뻐했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줄리아의 몸부림은 더욱 거세어 졌지만 그녀의 힘으로 그를 당해 낼 수 없었다. 몸을 움직이자 취기가 더욱 그녀의 정신을 흐리게 하고, 이 남자를 증오해야함이 오른대도 줄리아의 마음 한편으로는 그가 와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자 잠시 자신에 대해 저주의 말들을 퍼붓고 있었다. "미안해. 줄리아. 이렇게 아파하리라 곤 생각하지 못했소. 내가 그때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그녀가 그의 가슴에서 울음을 터트리자 그는 미안한 마음에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미안해. 미안해...." 스콧이 그녀의 입술을 찾아 키스를 하며 그녀의 순결을 주었던 그날을 생각했다. 부끄러워하던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그 순간을 그는 가슴 깊이 새겨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안아 침실로 들어서자 그녀는 다시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힘 앞에 그녀는 다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의 감미로운 키스와 애무에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줄리아는 다만 술기운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의 애무는 늘 그녀의 모든 정신을 빼 놓을 정도로 황홀함을 가져다주었다. 그의 모든 것에 길들여져 버린 자신을 나무라면서도 점점 그의 애무에 반응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스콧과 그녀의 옷은 침대 밑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뒤엉켜 있었고, 그녀는 몽롱한 정신에 그의 모든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스콧은 그녀의 숨겨진 황홀한 나체는 언제나 그를 감탄케 했다. 유연한 몸매를 차갑고 조금은 냉소적이게 느껴지는 단순한 정장에 숨겼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스콧의 열정이 절정에 달하고 줄리아의 폭팔 적인 소리가 잦아들면서, 그녀는 그의 품에서 숨을 죽이며 잠 속으로 깊이 아주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줄리아는 지난밤 스콧의 열정적인 정사의 꿈을 잊지 못한 듯 살짝 미소를 짖고 눈을 떴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가혹하다고 했나. 그건 꿈이 아닌 현실로 그가 옆에 편안한 얼굴로 자고 있지 않은가. 줄리아는 두 눈을 껌벅이며 비몽사몽간에 그가 왔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제기랄. 줄리아는 작게 욕을 뱉어 내고 시트로 흐트러진 몸을 가렸다. 그러나 줄리아는 그의 모습에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곧고 진한 눈썹사이 청명하게 빛날 녹색 눈동자 콧날이 날렵하게 뻗어 있고 입술은 육감적으로 그녀의 입술을 기다리는 듯 했다. 그의 건강하고 운동으로 잘 다듬어진 어깨에서부터 배꼽까지로 이어지는 갈색의 고른 털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제의 열정적이었던 그와의 정사가 그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돌려 머리를 속에 손을 집어넣고는 어떻게 처신해야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줄리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어제 당신은 날 잊지 못했소." 흠씬 놀란 줄리아는 가늘게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청명한 녹색 눈동자는 장난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줄리아가 침대 밖으로 나가려 하자 그가 재빠르게 그녀의 손을 낚아채 그의 품으로 들어오게 했다. "스콧. 어제일은..." "술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싶소.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당신의 육체는 언제나 날 원해." "아니요... 하- 그래요. 하지만 육체뿐인 사람과의 잠자리가 당신은 좋던가요." 스콧은 이맛살을 찌푸리곤 몸을 반쯤 일으켜 비계에 몸을 실었다. "당신의 육체라면 언제라도..." 그가 매력적으로 웃고 있다. 줄리아는 정말 자신이 이렇게 바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손 놔주세요. 샤워나 해야 겠어요." 스콧은 그녀의 손을 놓자 재빠르게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줄기가 그나마 그녀의 정신을 맑게 해 주었다 싶었지만 욕실에 진열된 스콧의 물건들이 그녀의 시선을 잡고 있었다. 제기랄.... 그녀가 욕실에서 나오자 헤이즐럿의 커피향이 온방에 스며들고 있었다. 헤이즐럿... 줄리아는 갑자기 라엘 밀러가 생각났다. 그녀는 그 생각을 털어 버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나머지 머리를 닦기 시작했다. 그는 아래만 대충 가리고 커피를 가지고 와 그녀에게 잔을 넘기자, "샤워하세요. 그리고 빨리 내 집에서 나가주셨으면 좋겠군요." 스콧의 녹색 눈동자가 그녀를 보며 빛을 내고 있었다. 의기양양하고 콧대를 높이 세우는 걸로 보아 스콧이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녀의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럼 나에 대한 신뢰는.. 스콧은 그건 잠시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줄리아와 출근길을 나서기 전 스콧은 해명할 것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그가 비서인 쉘린과 호텔에 있게 됐는지를... "줄리아 아침부터 기분 나쁘게 하고 싶진 않지만, 이말 만은 꼭 해야겠소." 필시 쉘린과의 일일 것이다. 줄리아는 듣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돌리자, "제발, 내 자신도 어떻게 된 건지..." 줄리아는 그의 눈빛으로 봐서는 거짓을 얘기하지는 않은 듯했다. "당신이 출장에서 돌아오기 하루전날 밀레미엄 버그에 대한 세미나가 그랜드호텔에서 있다는 건 알고 있었을 거요."


그녀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미나 건 때문에 비서인 쉘린도 같이 가게 됐고, 세미나가 끝나고 간단한 디너파티가 있었소. 그런데, 지금도 난 내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긴 거요." "그게 뭐죠." 줄리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묻자, 스콧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난 그날 술도 마시지도 안았고, 술 대신 쉘린이 가져다준 와인 한잔밖에는 마시지 않았었소. 그런데 갑자기 현기증 같은 것이 일면서 가슴도 답답함을 느끼자, 난 내가 몹시 피로해서 그럴 꺼라 생각하고는 잠시 쉴 곳을 찾았지. 며칠 동안 서류를 보느라 밤을 세웠거든. 난 쉘린을 불러 내대신 그 자리를 부탁하곤 밖으로 나왔지만, 타는 듯한 갈증과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열들이 예사롭지 않게 느끼고 있을 때, 쉘린이 걱정스럽게 와서는 안색이 안 좋다며 호텔 객실을 잡은 것이요. 그런데..." 스콧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자 잠시 일그러지는 것 같더니 다시 평온해 졌다. 그러나 그녀의 맘속엔 불같은 질투가 일고 있다는 걸 그는 아는지 모르는지. 하지만 그녀는 결코 얼굴에만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체 할 수 없는 열정이 일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어.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소. 난 그녀에게선 아무런 느낌도 갖고 있지 않다는 건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잖소. 당신보다 쉘린을 먼저 알았고, 지금도 가까이 있는 것도 쉘린이고, 만약 내가 쉘린에게 감정이 있었다면 그녀와 데이트를 했을 거야. 만약 그녀와 단 한번이라도 데이트를 했다면 내 감정에 그녀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녀는 단지 내 비서이고 학교 후배로밖에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오." 그는 할말은 다했는지 긴 한숨을 쉬었다. 줄리아는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아님 말아야 할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역시 용납되지 않은 부분이었다. "스콧 전 모르겠어요. 난 당신과 같이 있던 쉘린의 얼굴을 봤을 땐, 이미 당신과 모든 것을 정리하려고 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너무나 나답지 않게 당신에게 기대고 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내 자신조차 내 생각을 모르겠어요." "줄리아. 당신의 마음이 지금 당장 풀릴 거라 생각지는 않소. 그러나, 나도 이해 할 수 없었던 내 자신을 조금이나마 당신에게 얘기하고 싶을 뿐이오. 내 맘속은 당신으로 인해 지옥을 방불케 하니까. 당신에게 너무나 미안한 맘뿐이오." 스콧은 그녀의 집을 나오기 전 긴 키스로 그녀에게 깊은 애정을 표했다. 2 "은행장님. 그건 불가능한 일이예요." 줄리아는 웨이브진 긴 머리를 넘기며 신경질 적으로 그에게 대들고 있었다. 은행장은 더욱 깊숙이 푹신한 가죽의자에 기대며 손가락을 마주 대고 있었다. "전 그의 개인 비서가 아닙니다. 어떻게 제 의견도 물어 보시지도 않고 그런 결정을 내리 신거죠." "줄리아 로스. 너무 흥분하고 있군."


"제가 흥분하지 않게 됐어요." 줄리아는 그의 책상에 손을 얹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은행장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을 때 그 누구도 그를 꺽지 못한 다는 사실은 은행에서의 불문율이었다. "줄리아. 이번에 밀러 가의 재산을 충분히 파악했을 텐데.. 밀러가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면서 우리은행과의 거래를 한번도 끊지 않은 주요 고객 중 하나야. 은행 초기 때 거의 밀��� 가의 돈으로 운영을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걸세. 지금 그의 농장에서 나오는 양모와 가죽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품 중 하나임은 이미 줄리아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번에 새로 건립한 건물과 사업 때문에 일년에 한번 보고를 듣고는 사업을 해 나가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어쩌겠어. 우리가 편의를 봐주는 수밖에는." 줄리아는 책상에서 손을 떼고는 팔짱을 꼈다. "저 말고도 다른 사람도 많잖아요. 그에게 한 달에 한번씩 보고를 해야 할 정도로 전 한가하지 않습니다." "그가 원해. 줄리아 로스." 은행장은 이 한마디를 하곤 의자를 돌렸다. '정말 되는 일없군. 그 촌구석까지 가서 한 달에 한번씩 보고서를 해야 하다니.' 줄리아는 소리가 날 정도로 은행장실의 문을 닫고 나왔다. 줄리아의 푸른 스포츠카는 비포장도로를 먼지가 날리도록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 소리를 따라 부르며 그나마 맘을 달래곤 있었지만, 출렁이는 차 속에 선 신경이 더욱 곤두서고 있었다. 그녀가 노래의 클라이맥스를 막 따라 부르려 하다가 그녀의 눈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멈춰 버렸다. 그녀는 역사책에서나 봤을 법한 장엄한 고성을 바라보며 혹시 자기가 길을 잘못 들어서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라엘이 가르쳐준 지도와 길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지만, 틀림없는 이 길뿐이었다. '세상에.' 그녀의 입에선 탄성의 소리가 저절로 나오며 페달을 더욱 세계 밟아 고성의 앞으로 급히 내 달렸다. 고성 앞에 온 그녀는 서류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려 근처를 둘러보았다. 전체로 둘러 쌓였던 성지는 흔적만이 남아 있었고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는 옛 성은 보수를 한 흔적은 보이지만 아직도 그 건재함에 줄리아의 입에서 감탄의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녀는 천천히 문 앞에 있는 몇 개의 계단을 오르고 초인종 대신 문 옆에 있는 금빛 줄을 잡아당기자, 나무로 된 커다란 문이 열렸다. 그리곤 검은 정장에 희끗한 머리가 섞인 중후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줄리아 로스씨 되십니까." "네..."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리로."


"저기, 차는" "차는 알아서 주차장에 파킹 해 놓을 겁니다." 검은 정장의 남자는 그녀가 들어 갈 수 있게 몸을 피하자 그녀는 집안으로 들어서며 다시 한번 놀라움과 경이로움에 입가에서 작은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밖과 달리 안에는 현대와 미래의 조화가 여간 잘 어우러지게 꾸며 놓았다. 벽면의 그림이나 사소한 물건 등은 여전히 옛것을 그대로 해 놓은 반면 사람들이 편리하게 쓸 수 있게 끔 해놓은 전화나 팩스 그리고 컴퓨터까지 꼭 도서관과 박물관을 잘 접목해 놓은 듯 싶었다. 줄리아는 정신을 차릴 수도 없이 구경을 하다가 이층으로 이어지는 긴 층계와 커다란 홀은 메인 스타디움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간간이 그려진 그림과 골동품을 보고 있을 때 언제 사라졌다 왔는지 검은 정장의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로스양. 이쪽으로." "네. 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그 남자를 따라 이층계단을 올랐다. 그가 도착한 곳은 문에 이상한 모양의 동물이 새겨 있는 곳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그 남자는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곤 가버리자 그녀는 쉼 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는 굵고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 나오자 그녀는 묵직한 문을 열었다. 커다란 책상 위에 서류뭉치를 훑어보고 있던 라엘 밀러는 책상 너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오늘도 그녀는 깔끔한 정장에 깨끗하게 올린 머리를 바라보며 잠시 의자를 뒤로 재끼곤 퉁겨 나오듯이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줄리아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며 악수를 했다. "먼 곳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아니요. 이것도 제가 맡게된 일이면 해야죠. 우린 고객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는 면 그뿐입니다." 줄리아는 은행장에게 방방 뛰었던 자신을 생각하며 피식 웃고 말았다. 이렇게 되고 말걸 은행장과의 입씨름으로 그녀만 더욱 피곤하게 된 결과가 되어 버렸다. 그가 그녀에게 의자를 권하고는, "술은 그렇고 차가 좋겠군요." 그는 인터폰으로 차를 시키고 책상 옆에 앉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햇빛에 반사된 그녀의 붉은 머리가 태양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안경을 만지작거리는 손들은 그녀가 약간의 긴장됨을 말해 주는 듯 했다. 라엘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의 자리에 앉자, 그녀는 손에 들린 검은 가방서류에서 서류를 꺼내들었다. "잠시만. 너무 급하게 할 것 없소. 지금은 점심전이고 하니 천천히 해도 오후 2 시까지는 끝날게 아닙니까." "네. 그렇긴 하지만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압니다. 줄리아. 참 이름을 불러도 되겠소."


"편하실 대로.." "전 줄리아를 일 때문에도 만나려 했지만 꼭 그것만이 아니오." 줄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우리 성에 초대를 하고 싶었소. 초대한다고 하면 여기에 올 것 같지도 않아서 일을 핑계 삼았을 뿐이오." "왜. 저에게.."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냥,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오. 난 사람을 아주 좋아하는 편이오. 도시사람들은 제외지만..." "뭐랄까 그들은 늘 바쁜 나머지 자신밖에는 돌볼 줄 모르는 것 같소."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사람도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생을 허비하면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건 그렇소. 하지만, 여유가 없잖소. 맘을 편이 가질 여유. 난 당신을 본 순간 그걸 느꼈지." "저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죠." "음- 다른 사람이야 나를 만나지 못했으니. 이렇게 좋은 곳에 초대를 할 수가 없을 뿐이오." 줄리아는 약간 고개를 흔들며 웃음을 지었다. "전 밀러씨가..." "이름을 불러 줬으면 좋겠군요." "그럼, 라엘씨가 새로운 사업 때문에 일년이 아니라 한 달에 한번 보고를 받고 싶다고만..." "그것도 내겐 필요한 일이었소. 한 4-5 개월만 수고하면 될 것 같은데... 잠시 자리를 잡느라고 그러니 줄리아가 수고 좀 해 주었으면 싶소." "그거야. 내일이지만, 라엘씨는 또 다른 의미가 있잖아요. 전 그런 부분에선..." "부담 갖지 말아요. 일 때문에도 당신이 필요한 건 사실이니까." 줄리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생각하죠. 잠시 라엘씨 덕분에 일도 하고 휴식도 좀 가져 보구요." 라엘이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 싱그럽게 그녀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스물스물 그녀의 머리를 채우고 있었다. '왜. 그를 보면 아버지가 생각이 나는 것일까. 왜. 그의 따듯함 때문에.. 아버지로 인한 다른 사람의 기대로 커다란 아픔을 보지 않았는가. 이젠 정말 나 혼자의 홀로 서기를 해야한다. 홀로서기를...' 줄리아의 머릿속에 스콧이 잠시 지나쳤다. 어색해져 버린 그녀의 감정 따위는 생각지도 않은 듯 스콧은 에전의 모습으로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아니 전 보다 더한 열렬한 감정으로 직장 내에


선 그는 키스도 조심하던 그가 지금은 그의 사무실 안에서의 애무나 키스로 그녀를 더욱 당황시키고 있었다. 그녀가 짧은 숨을 내쉬자, 그런 그녀의 모습을 라엘은 놓치지 않았다. "뭐가 당신을 힘들게 하는 거요." 줄리아는 고개를 들어 날카롭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 손으로 턱을 잠시 스치듯 만지더니, "당신모습이... 몹시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그건 제 사적인 일이예요. 라엘씨. 그런 건 묻지 않았으면 합니다." "애인 때문이오." 줄리아는 고개를 흔들며 이마에 흘러내린 한 올의 머리를 뒤로 넘기려 했다. "당신은 그 붉은 머리를 풀어 내린 게 더 예쁘오." 그녀는 머리를 올리려다 말고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헤이즐럿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차라리 그 보단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리며 미간에 줄음을 잡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꿍하고 있으면 될 일도 안될 때가 있소. 터놓고 얘기할 친구도 없는 거요. 여태까지 그 얼굴인 거 보면." 그는 보기보다 예리했다. '하기야 그래야만 이 방대한 사업을 하겠지.' 줄리아는 손에 있던 서류와 안경을 책상에 올리곤 일어섰다. 그리곤 한쪽 벽면을 메우고 있는 고서와 근래의 책들이 즐비하게 놓은 책장을 쳐다보며 잠시 서성였다. 그리고 결심이라도 한 듯, "라엘씨. 지금 당신은 제 고객이 아닌 친구로 대해 주실 수 있겠어요." 라엘은 그가 원하는 데로 그녀가 움직이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시골에서 자랐어요. 그것도 아버지 밑에서 아버지의 사랑만을 믿고 살았다고 해도 제 인생의 반을 차지하죠. 그리곤 전 도시로 나와 공부하고 제 나름대로 성공한 삶을 살고 있었죠. 그리고, 아버지가.... 아버지가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너무 힘들었죠. 너무나..." 그녀는 목이 마른 지 잠시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 차 한 모금을 마셨다. "그때, 스콧이 제 삶에 들어왔어요." 라엘은 스콧이란 이름에 지난번에 만났던 훤칠하고 샤프한 그 남자를 떠오르자 그의 눈빛이 흐릿해 졌다. 줄리아는 그에게 등을 보이곤 이리저리 걸어다니며 말을 이었다. "스콧.... 전 그 사람을 사랑했어요. 진심으로... 그런데, 그가그가 바람이 난 거예요." 라엘은 자세를 고쳐 안으며 흥미가 있는 듯 몸을 책상에 실었다. "그것도 자기 비서와. 전 모르겠어요. 그는 자기의 뜻이 아니었다고 하는데. 그럴 수도 있냐고요. 전 용서가 되질 안아요. 그렇다고 그에게 미련 없이 떠난 다는 건 아직 제 마음이 너무나 아프고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전...' 줄리아는 말을 털어놓고는 살며시 자신의 입술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헤이즐럿의 눈동자는 웃고 있었다. 넉넉한 웃음. "스콧 해밀턴이 당신 애인이었소."


줄리아는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담을 수 없었다. 흥분하다 보니 그의 이름이 툭 튀어나온 것이다. 그녀는 체념한 듯 양손을 들었다 놓으며 "그래요. 그가 제 애인이 이었죠." "지금은..." "모르겠어요...." "그가 그 비서를 사랑하는 것 같소." "그건 아니예요. 그가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그녀와 사귀고 있었겠죠." "그 비서는" "스콧에게 관심 없는 여직원을 없을걸요. 너무 잘난 애인을 둔 덕분에 이런 일이... 그때 아버지만 돌아가시지 않았던들 그에게 맘 적으로 기대진 않았을 거예요." "글세, 줄리아 꼭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줄리아는 더 이상 그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겨우 두 번째 만난 사람에게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를 하다니 자신의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점점 사리판단력이 흐려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줄리아. 그를 믿어봐요. 그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언젠가 당신의 맘도 풀릴 거요." 라엘은 줄리아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34 년 동안 그는 처음으로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애인이 있었고, 지금 그는 사랑하고 있다면 믿으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정말 한심스러운 남자라고 생각하며 잠시 안타깝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라엘은 그녀를 은행에서 본 순간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은행 문을 나오면서부터 그의 머릿속엔 그녀가 떠나질 않았고, 궁여지책으로 일을 핑계삼아 그녀를 끌어들인 것이다. 그는 그녀가 왜 이렇게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녀의 붉은 머리와 매력적인 보조개까지. 라엘은 사춘기 시절에도 그다지 여자에겐 흥미나 관심이 없는 자기 일에만 충실한 사람이었다. 도시에 나가선 공부에 전념했고, 집으로 돌아와선 사업에만 전념했다. 그런데 길 한복판에서, 은행의 상담역을 해준 그녀가 눈에 들어 온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운명이라 생각했다. 그녀와의 만남은 필연이라고.... 3 시를 알리는 개명 종소리가 어슴푸레 들려 오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자, 라엘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와 함께 서재를 나왔다. "제 차는 어디 있는 거죠." "차고에 있을 거요. 줄리아. 혹 말을 타 본적이 있소." "네. 꽤 오래 되긴 했어도. 어려서부터 말은 탈줄 알았죠. 아버지가 생일 선물로 조랑말을 사준 적이 있었거든요. 그 이듬해까지 전 말타기를 즐겼죠. 도시에 와서 한번도 타지 못했지만... 그런데 갑자기 말은.."


"난 이 시각쯤에 종종 말을 타곤 하지요. 혹 같이 타보시지 않겠소." 말이라... 그녀는 문득 어릴 때 아버지가 사주신 조랑말 스카이가 떠올랐다. 스카이... 그녀의 붉은 입술에 웃음기가 감돌자, 라엘은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고 마구간으로 가기 시작했다. "라엘씨 저기... 전..." 그러나, 그는 이미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고, 그녀는 그를 쫓아가느라 종종걸음으로 따라 가야만 했다. 마구간은 성 뒤편에 지어져 꽤 많은 말들이 마구간 칸막이에 서 있었다. 라엘이 마구간으로 들어서자 일을 하던 사람들이 그를 보고 정중히 인사를 하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짖고 있었다. 그리고 줄리아를 유심히 관찰하는 얼굴에서 쑥스러움까지 느끼고 있었다. "죠셉. 내 말과 화이트를 데리고 오게." "네." 죠셉이란 사람은 당장 달려가더니 칠흑처럼 검은 윤기 나는 말과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한 빛을 내고 있는 말을 가지고 왔다. 흑과 백이 나란히 걸어오는 말들을 보면서 줄리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라엘은 그녀에게 말을 타라고 권유했고, 그녀는 정장차림에 과연 말을 타야 하는지 생각이 들자, 라엘은 그녀의 생각을 안 듯, "괜찮소. 그리 멀리는 가지 않을 거요." "그렇다면..." 그녀가 말잔등에 오를 수 있게 라엘이 도와주었고, 라엘 또한 능숙한 솜씨로 말에 올라타고는 마구간을 나섰다. 사람들은 그들이 나가자 수근들 대며 미소를 짖고 있었다. 그가 데리고 간 곳은 양들이 있는 목장과 사람들이 그룹으로 살고 있는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그 옛날 영주의 모습이 라엘에게 있었다. 그들은 라엘의 농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의 식구로 그의 보살핌이 잘 되어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모두들 편안한 얼굴이었고, 행복해 보였다. 그의 안정적이고 밝은 모습이 그리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가 지나 갈 때마다 인사를 하고 그도 그들에게 안부를 물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줄리아는 꼭 딴 세상에 온 사람처럼 신기하게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고, 그들도 라엘과 같이 온 여자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이 모든 식구들을 챙기시려면 힘드시겠군요. 그리고 사업까지." "힘든 건 없소. 그들이 이루어 낸 것이지 난 다만 자금만 댓을 뿐이오. 순수한 그들의 노력이지." "당신이란 사람 이 세상사람 같지 않군요. 전 꼭 18 세기로 다시 돌아온 기분이에요. 당신은 영주고 이들은 당신만을 바라보고 사는 소작인들 같고요." 라엘은 잠시 침묵하더니,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소. 그들은 내 밑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같은 식구라고 생각하오. 서로의 일을 걱정하고 염려하고 기쁜 일은 다같이 나누는...." "오. 죄송해요. 전 다만..." "죄송할 것까지는 그렇다는 얘기요. 난 식구가 없소. 부모님은 지금 모든 것을 나한테 맡기시고 캘리포니아에서 여생을 보내시고 계시고, 친척들과는 종종 만나긴 하지만 서로들 사업들이 바빠서 제대로 보질 못하고 있소." "그럼, 형제들은.." "나 혼자요. 난 여기서 태어났고, 자랐지만 공부는 도시에서 했었소. 그러나, 이곳만큼 좋은 곳은 없었지. 난 공부를 끝마치고 이곳에 와 대대로 하던 사업을 물려받았고, 지금까지 잘 꾸려 나가고 있는 편이오. 다들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덕분이라 생각하고 있소." 줄리아는 새삼 그를 다시 보았다. 그의 헤이즐럿의 눈동자 속에 있는 진실함이 그녀에게까지 전해지는 것 같자,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행운을 얻은 것과 같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기를 포함해서... "그럼 결혼은..." "아직 인연이 없는지 나타나질 않고 있소. 그리고 사업에 바빠서 여자 만날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라엘의 눈동자가 빛나면서 줄리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줄리아는 반짝이며 헤이즐럿의 눈동자가 밝아짐을 느끼며, 한순간 자신의 가슴이 쿵 내려앉은 느낌을 받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드넓은 초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순간 불어오는 바람은 그녀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3 줄리아는 바쁜 스케줄 때문에 스콧과 부디 치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아 상담해야할 상품과 리스트에 적힌 사람들의 약속시간을 꼼꼼히 챙기고 있을 때, 인터폰이 울려 댔다. "네. 줄리아 로스입니다." "줄리아. 스콧이야. 오늘 저녁 시간 어때." 줄리아는 아직도 맘속이 껄끄러운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헤어지거나 정리를 하자고 말을 하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오늘 저녁---" 그녀는 말꼬리에 한숨이 섞여 나오자, 숨을 들이 마셨다. "오늘 저녁은 괜찮을 것 같네요." "그래. 우리 자주 가던 식당에서 만나 7 시쯤 어때." "좋아요. 그럼...." 인터폰의 버튼에 손을 떼고는 다시 서류를 훑어 봤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의자를 돌려 시내 도시가 보이는 유리창문으로 몸을 돌렸다.


'줄리아. 도대체 넌 뭘 하고 있는 거니. 이건 너의 방식이 아니야. 언제나 확실한 너의 성격이 이렇게 흐지부지하게 지낼 수 없잖아. 지금 스콧에게 마지못해 끌려가고 있는 거니. 아님 그를 정말 사랑해서니...' 그러나 줄리아는 해답을 찾지 못했다. 오늘이야말로 그녀의 맘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했다. 끝내던지 아님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던지.... 식당은 많은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잔잔한 조명은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안정적으로 보이게 했고 잔잔한 클레식은 그녀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기엔 충분했다. 둘은 예약 석에 앉아 음식을 시키고 마주 보고 있었다. 스콧은 그녀의 파란 눈동자가 좋았다. 파란 구슬과 같은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온통 그녀에게 빠져들어 갈 것 같았다. 이렇듯 여자에게 맘을 주기는 그녀가 처음인가 싶었지만, 요사이 그녀의 태도에 그는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줄리아는 그의 녹색 눈동자가 흐릿해 지면서 그녀의 온몸을 훑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런 그의 눈을 바라보며 그의 입술을 탐하였을 텐데 지금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음식이 나오고 둘의 식사는 조용하게 이루어 졌다. 마지막 디저트가 나오자 스콧은 긴 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품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줄리아는 상자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살며시 상자 안을 열어보니 너무나 아름다운 다이아몬드반지가 빛을 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녹색 눈동자는 잔득 긴장한 듯 쳐다보고 있자니 그녀 또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녀의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워 주었다. "줄리아. 나와 결혼해 주겠소. 이젠 당신의 대답을 듣고 싶소." 줄리아는 뉴욕출장 전 그가 한말을 떠올리며, 그때 일이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스콧...." 그녀는 크리스털에 담긴 물 한 모금을 마시곤, "아직 내 마음 잘 모르겠어요. 시간을 더 주세요." "당신 아직도 그일 때문에 그러는거요." 스콧의 녹색눈동자가 점점 짙은 암녹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차갑게 변해 가는 눈동자를 보자 그녀의 마음도 얼어붙는 듯 했다. "줄리아. 그건 정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나도 망막하오 하지만, 난 이건 만은 분명해. 난 당신과 결혼을 생각 할 만큼 사랑하고 있소. 진심이오." "알아요. 하지만, 하지만... 스콧 전 아직..." "휴----" 그의 긴 한숨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울렁이게 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선 뜻밖의 소리가 나왔다. "알겠소. 당신이 정 지금은 날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다면 더 이상 당신을 재촉하진 않겠소. 하지만, 여전히 난 당신이 돌아올 것을 믿어요. 그때의 충격이 너무 컸나보군.


하기야 나도 그랬으니까. 나도 내가 미치지 않은 이상 사랑하지도 않은 여자와 잤다는 건 내 자신도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오. 당신이 이 말을 믿든 안 믿든 간에 그건 당신의 선택이겠지. 하지만, 나도 당신을 기다리다 당신을 원망할지도 모르오. 두 달간의 여유를 주겠소. 그 안에 당신이 그 반지를 나에게 돌려주면 당신을 놓아주리다. 그렇지만 난 당신이 돌아올 날만 기다리고 있겠소." 줄리아는 멍하니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들이 천천히 그녀의 귓전을 울리며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스콧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자, 줄리아 일어나겠소." 줄리아도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 가 있었다. 줄리아는 희미하게 미소를 짖자 그의 눈빛에 미소가 어렸다. 줄리아는 그를 만난 이후 그런 슬픈 미소는 처음 보는 듯 했다.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줄리아는 자기 손에 어색하게 끼워진 반지를 한번 쳐다보았다. '정말 이렇게 만든 자신이 잘한 것인지....' 4 줄리아는 성에 앞에 차를 세워 두고 차에서 내렸다. 조금은 을씨년 하게 보였지만 그대로 멋이 긷든 건물이었다. 그녀가 막 계단을 오르려 하자 라엘이 말을 타고 그녀 쪽으로 오고 있었다. "어머, 이른 시간에 말을 타셨군요." "마을에 잠시 일이 생겨 다녀오는 길이오. 들어갑시다. 줄리아." 그는 성안에 있는 마구간으로 말을 두러 간사히 그녀는 거대한 현관문 옆 황금 줄을 잡아 당겼다. 그러자, 켐이 문을 열며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켐은 지난번 그녀를 안내했던 그 성의 안의 집사였다. "켐 안녕하세요." "로스양 어서오세요. 지금 주인님이..." "방금 만났습니다." 켐이 뒤를 쳐다보면서 라엘이 오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라엘이 오자 켐은 둘이 들어 올 수 있도록 몸을 정중히 비켜섰다. "켐 오늘은 좀 쌀쌀하군. 불 좀 더 피워요. 서재 페치카에 불은 충분한가." "네. 내실을 좀 더 따듯하게 하겠습니다. 그럼..." 켐이 바람처럼 사라지자 라엘과 줄리아는 이층서재로 발길을 옮겼다. 그녀는 서류가방을 내려놓고, 그에게 일상적인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중반쯤 보고를 하고 있을 때, "오늘이 벌써 마지막이군요." "네. 이 정도의 보고서로 대충 일년 돌아가는 금액을 아실 겁니다. 사업하시기 엔 불편함도 없을 거구요.'


문득 줄리아는 이번 달에 스캇에게 반지를 돌려줄지 말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이렇게 빨리 지나가건만 그녀는 반지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로엘은 보고가 시큰둥한지 창 밖을 내다보며 담배 파이프를 물었다. "로엘씨 마저 보고서를 보셔야죠." "그 반지 스콧이 해 준 것이오." "네. 네..." "그럼 결혼을..." "아니... 아직..." 줄리아는 이런 사생활을 고객한테 한다는 자체가 큰 이변이었다. 그가 아버지와 같은 포근한 면에서 그녀는 또 한번의 아버지란 이름으로 실수를 하고 말았다. "저-, 라엘." 그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엔 알 수 없는 그것보다도 슬픈 눈동자의 움직임을 그녀가 놓칠 리 없었다. "라엘씨..." "미안하오. 일에 자꾸 방해만 하는 군. 오늘은 이쯤 하는 것이." "아직 반밖에는..." "이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 서류만 놓고 가면 되오." "네.." 줄리아는 조금은 아쉬운 마음으로 몸을 일으켰다. 한 달에 한번씩 들리긴 했지만, 사람들이 워낙에 친절하게 그녀를 대했고, 라엘의 부드러운 미소와 마음씨에 그녀는 그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가끔씩 타던 화이트란 말도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자꾸 서운한 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짧게 숨을 내쉬고 용기를 내어 말을 했다. "저- 라엘씨. 가끔 놀러와도 괜찮을까요." 라엘은 듯하지 않은 소리에 반가워하며 흔쾌히 허락했다. "언제 한번 스콧과 함께 올게요." 줄리아는 스콧을 힘주어 얘기하며, 라엘에게 뭔가를 심어 주는 듯한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이 갑자기 우스웠다. 도대체 왜 그런 말을.... 줄리아는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가볍게 그에게 인사를 하고 막 밖으로 나가려 하자, "줄리아." 그녀가 문을 열다말고 뒤를 돌아보자 그는 어느새 그녀 앞에 와 있었다. 그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숨소리까지.... "라엘씨."


그녀가 당황해 하자 라엘은 그녀를 팔 안에 가두 워 버렸다. '그녀를 이대로 보내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어쩜 이대로 가면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될지도 모른다.' 라엘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지만, 현실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란 걸 그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입술을 갖고 싶었다. 매일처럼 꿈꾸던 그녀의 모든 걸 갖고 싶다는 욕망이 그로 하여금 이런 큰 용기를 내게 한 건지도 모른다. 줄리아가 막 그를 밀려하자, 그는 갑자기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덮고 말았다. 심한 거부를 할 줄 알았던 줄리아는 가만히 그가 움직일 때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곤 라엘이 입술을 떼자, "이별의 인사 치곤 너무 길군요. 라엘씨. 줄리아는 빙긋 웃었다. "정말, 당신이란 여잔... 내가 사랑..." 줄리아는 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막았다. "더 이상의 이별인사는 받지 않겠어요. 라엘씨. 전 이만 가볼게요. 나오실 필요 없고요." 줄리아는 다시 눈인사를 하며 밖으로 나와 어떻게 차까지 왔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그에게 말했는지 자신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차에 앉아 잠시 멍하게 입술을 만졌다. 참 따듯했다. 그의 입술은... 줄리아는 잠시 핸들에 머리를 기대고 라엘를 생각하고 있었다. 라엘..... 5 제임스 은행장은 년말에 초청할 인원을 꼼꼼히 체크하고 있었다. 골든 리스트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초대장을 보낸 상태였고, 다른 사람들은 일일이 체크해 가며 리스트를 작성하고 있었다. "은행장님. 스콧 해밀턴씨와 줄리아 로스양입니다." "음- 들어오라고 해." 둘이 은행장 실로 들어서자, "자리에 앉아요." 제임스는 앞에 두 사람을 앉혀 놓고 연말행사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줄리아. 이번 상담한 사람들 중에 은행에 중추가 될만한 사람 있으면 나에게 작성해 올리도록 해요. 그리고 스콧. 이번 연말은 의미가 더 특별하다는 걸 알거요. 2000 년 21 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해이니 만큼 준비 철저히 하고 밀레미엄 버그에 각별한 신경을 쓰도록. 그리고 이번 연말행사는 호텔보다는 우리 집에서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데.." "은행장님 집에서요." 스콧과 줄리아는 서로 짧게 쳐다보고는, 은행장을 쳐다보았다. "이번엔 좀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하고 싶어서 말이야. 호텔에서 쭉 해왔지만 이번 해도 해이니 만큼 중요사람들만 초청해 하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게 더욱 좋은 듯 싶고.


그리고 우리 집이야 구경할 것도 많이 준비되어 있고, 항상 같은 분위기가 지루하게 느껴져서 이번엔 좀 지루한 감을 없애려고 말이야." "은행장님이 괜찮겠습니까. 아무래도 초청을 하려면 100 명은 넘을 듯 싶은데요." "그래서, 골드리스트와 중요고객이 될 사람만을 초청하려고 합니다. 그건 줄리아가 맡아주고, 전 이미 골드 리스트에 올려진 사람에겐 초대장을 보냈어요. 스콧은 그렇게 알고 일을 처리해 주고 줄리아는 빨리 리스트 명단을 올려주도록." 줄리아와 스콧은 은행장 실을 나오며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열성적인 은행장 밑에서 일 한다는 건 정말 피곤한 일이었지만 그만큼 성과도 높고 진취적이긴 했다. 스콧은 줄리아를 쳐다보며 의미 있는 시선을 보냈다. 이 달이 마지막 달이라는 것을. 그녀의 손에 곱게 끼어진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며 스콧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o¿¤ ¹Ð*?´A E²±Y1/2ºÆ1/4A¿°¡ °o°O ºU¿(c)Aø AE´eAaA" ¹U¶oº¸°i AO3/4u´U. 좀처럼 도시 쪽으로는 발을 들여놓지 않은 라엘이지만 프렌스 은행장의 초대장을 바라보며 그의 가슴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곳엔 틀림없이 줄리아가 있을 것이다. 그곳엔.... 그는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하게 된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과 곧 결혼할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괴로워했다. 왜 하필 그녀를 도시 한 복판에서 만나야 했을 운명을 저주까지 했다. 그의 삶이 점점 메말라 가고 있다는 걸 그녀는 모르리라. 켐은 점점 실의에 빠지고 있는 주인을 쳐다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자꾸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두려워했다. 그는 사람 좋은 주인이었고, 이곳을 먹여 살리고 있는 지주인 셈이었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그는 한시도 잊지 않은 맘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사���의 열병으로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켐의 불안감은 점점 더 해 가만 갔다. AU¸(r)3/4Æ´A 3/4i±u°¡ μa*?³ Eo ¿øCC1/2º¸| °n¶u´U. 허리선이 강조되어 그녀의 가녀린 몸매가 한층 풍성해 보이게 해 주었고 밑으로 퍼지는 치마는 그녀의 다리를 더욱 날씬하게 보이긴 충분했다. 그녀는 머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의상과 맞추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녀는 붉은 머리를 그냥 느슨하게 큐빅이 박힌 머리핀 몇 개로 올려 고혹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립스틱을 덧바르며 마무리를 했다. 그녀가 막 나가려 하자 초인종이 울려 왔다. 스콧일 것이다. 그녀가 신발을 신으며 종종 걸음으로 문을 막 열자, 그의 훤칠한 모습에 그만 넋을 놓았다. 그는 양복보다는 검은 정장이 훨씬 그를 돋보이게 했다. 무스로 깔끔하게 넘긴 머리하며 잘 잡힌 몸매는 누가 보아도 훌륭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의 녹색눈동자가 잠시 그녀의 모습을 훑어보더니, "정말 파티에 가야 하는 거요. 난 당신과 있고 싶은데." 스콧의 장난기 어린 미소가 그녀를 잠시 당혹하게 했다. 그의 모습을 보는 어느 여자라도 그의 침실에 뛰어들지 않고는 못 베기 리라. 그녀는 얼굴을 약간 숙이곤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입구부터 음악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지며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둘은 차에 내려 보이에게 열쇠를 맡기고 현관문안으로 들어서자 화려하기 그지없는 집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골동품이나 예술품에 조회가 깊은 건 알았지만, 작은 미술관을 따로 차려 놓은 듯 한 집안 인테리어에 잠시 벌린 입을 다물지 못 했다. 그가 굳이 자신의 집에서 년 말 파티를 하자고 한 까닭을 알겠다는 듯 둘은 서로 쳐다보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집은 넓은 거실과 작은 거실로 나뉘어 져 있었고, 이층으로 된 계단까지도 사람들이 서서 그의 그림을 구경하느라 분주했다. 그 둘은 은행장을 찾았고, 은행장은 골든 리스트 중 한사람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은행장이 스콧과 그녀를 발견하자, "어서 오게 스콧. 안 그래도 자네 이야기를 하던 중이야. 참, 줄리아. 레이첼씨를 잘 알고 있지." "네. 오랜만이군요. 레이첼씨. 요새 공장은 잘되는지요." "덕분에..."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저만치에서 라엘은 그녀를 놓치지 않고 쳐다보고 있었다. 훤칠한 키와 잘생긴 얼굴을 지닌 그의 애인 또한 그의 눈을 자극하며 그의 마음속에 질투의 불들을 피어오르게 하고 있었다. 난간에 서 있던 라엘의 손은 더욱더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 속에서 나와 따로 인사를 하고 돌아 다녔다. 그리곤 그녀 또한 라엘 밀러를 찾고 있는 듯했다. "잘 있었소." 줄리아는 그의 목소리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라엘 밀러씨. 반갑군요. 그 동안 잘 계셨겠지요." 줄리아는 그의 정장차림을 보고 잠시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항상 체크무늬의 남방에 면바지 아니면 청바지 차림을 좋아하는 검소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런 정장이 잘 어울릴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와우. 멋진데요. 라엘씨" "당신이야말로 정말 아름답군. 눈이 부실 정도요." "감사해요. 라엘씨. 그런데 좀 살이 빠지신 것 같군요." "이 옷을 입으려면 다이어트를 좀 해야 될 것 같아서..." 줄리아가 호탕하게 웃자 라엘은 들고 있던 잔에 약간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 그녀를 다정스럽게 부르며 다가서는 스콧이 보이자 그녀가 손을 들었다. 그는 서슴없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그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십니까. 밀러씨." "네. 해밀턴씨. 역시 멋있군요." "감사합니다. 밀러씨야 말로.."


둘은 악수를 하면서도 서로의 눈을 떼지 못했다. 스콧은 남자다운 직감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라엘의 눈동자에서 질투의 시선이 느껴진 것이다. 스콧은 몇 달 그의 집에 드나들던 줄리아를 생각하며 잠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스콧. 왜 그래요." "아니오. 참 은행장님이 찾아요." "그래요. 라엘씨 그럼 좋은 저녁 되세요. 나중에 또 뵙죠." "그래요." 스콧은 그녀의 허리를 살며시 잡고 같이 가면서 짧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헤이즐럿 눈동자는 여전히 줄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쉘린은 야하게 파진 보라 새틴의 긴 원피스를 입고, 스콧과 줄리아가 다정스럽게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잔뜩 거머쥐고 있었다. 그녀의 매력적이고도 도발적인 눈썹을 치켜세우며, 줄리아를 죽일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절대로 뺏기지 않을 거야. 너 한데는 절대로. 줄리아 로스." 그녀는 아름다운 몸을 휙 돌려 그녀의 계획을 실행에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줄리아는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누느라 점점 몸이 지쳐가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들려진 빈 잔을 바라보며 펀치라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곤 음료수가 놓인 곳으로 가자, 쉘린의 보라색 원피스가 보였다. 줄리아는 심하게 미간을 좁히며 그녀의 뒷통수를 쳐다보았다. 줄리아는 천천히 그녀 옆으로 다가서자, 쉘린이 살짝 그녀를 쳐다보았다. "안녕 쉘린. 그 동안 잘 지냈어. 그래 스콧은 좀 넘어 온 것 같아." "흥. 알 것 없잖아." "그래. 알 것 없겠지. 알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쉘린 그것만은 알아도 스콧이 사랑하는 사람은 나지 네가 아니야. 추잡하게 몸까지 던져 가며 사랑을 구걸하지는 마." 쉘린은 의외로 당당하게 줄리아를 쳐다보며, "과연, 스콧이 아무 감정도 없는 나를 품었겠어. 그도 조금은 나에게 관심은 있었겠지. 줄리아 같은 몸매 보단 내 육감적인 몸매가 더 안기에 그만이지." 둘은 서로를 노려보다가 줄리아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와인을 바라보았다. 두 잔이 들려져 있는 걸로 봐서 스콧에게 갖다줄 것이 뻔했다. "스콧한테 접근하지마. 너만 괴로울 뿐이야." 줄리아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와인 한잔을 빼앗듯 한꺼번에 마셔 버리고 탁자에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스콧은 이런 와인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쉘린." 그러곤 줄리아는 뒤돌아 불쾌한 마음이 되어 가버렸다. 쉘린은 자기 손에 들려 있던 붉은 술이 담겨졌던 와인 잔을 바라보았다. 쉘린은 당황해 하며 그녀가 갑자기 그 와인을 마실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끝까지 방해만 되는 줄리아. 일단 스콧과 떨어져 있게 해야해. 사랑의 묘약을 마셔 버리다니. 아니야 잘된 일일지도 몰라. 그녀가 일단 다른 남자와의


정사를 직접적으로 스콧에게 보여 주는 거야. 그럼....' 쉘린의 붉은 입술이 가녀리게 웃고 있었다. 쉘린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콧을 잠시 그녀 곁에 붙잡아 둘 것이다. 그 사랑의 묘약은 그녀의 친구로부터 들었던 얘기로 그녀는 스콧의 마음을 잡으려고 차이나타운을 뒤져서 까지 겨우 얻어낸 약이었다. 일단 복용만 하면 정사를 나누어야만 그 약의 효력을 떨어지게 극약이기도 했다. 만약 정사를 하지 못할 경우 심장이 약한 사람은 심장이 터져 죽을 수도 있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해독제는 정사를 해야 살수 있는 극약이었던 것이었다. 쉘린은 스콧을 그녀보다 빨리 찾기 위해 몸을 재빠르게 움직였다. 줄리아는 잠시 어지럼증을 느끼며 벽면에 잠시 기대었다. 술도 마시지 않았건만 현기증까지 일어나는걸 보면 요사이 리스트 작성에 신경을 너무 쓴 탓이리라 생각했다. 줄리아는 스콧을 찾아 눈을 돌리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대도 없었다. 또한 그도 여러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가 방해가 되긴 싫었다. 그녀는 쉴만한 곳을 찾기 위해 고개를 재빠르게 저으며, 이층으로 올라가 빈방 하나를 찾기 시작했다. 마지막 방을 여니 어두운 방안엔 아무도 없는 듯 했다. 그녀는 조용히 들어가 방문을 옆에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심한 목마름과 타는 듯한 갈증으로 그녀는 몸을 주체 할 수 없었다. '왜이러지. 아 더워 점점 몸이 더워지고 있는 것 같아.' 그녀는 목에 걸려 있던 진주목걸이 까지 귀찮게 생각되자 벗어버리고 탁자 위에 올려놓자 갑자기 자그만 조명등이 켜졌다. 그녀는 놀라 소파에서 일어서자, "줄리아. 나요. 라엘 밀러." "아- 라엘씨 놀랐어요. 그런데 이런 곳에...." 줄리아는 그가 이런 곳을 결코 좋아할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 간만에 나오셨잖아요. 사람들과 어울려 보시지 그랬어요." 그의 손에 들려진 와인을 바라보며 줄리아는 마른침을 삼키었다. "글세. 익숙지가 않아서..." 라엘은 그녀가 들어서자 너무나 놀랐다. 그녀는 지금 스콧이란 작자 옆에서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을 텐데, 왜 여기에... "당신이야말로.." "네, 좀 피로해서요. 저- 라엘씨 와인 한 모금만 먹을 수 있을까요. 이상하게 목이 마르네요." "네가 가서 새 걸로.." "아니에요. 한 모금만..." 라엘은 그녀에게 와인 잔을 내밀자 그녀가 받아 들곤 한 모금을 마시곤 다시 한 모금 그리곤 와인을 다 마셔 버렸다. "아. 안돼 갰어요. 몸이 아픈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전 가봐야..."


줄리아가 휘청 이며 일어서자 라엘은 그녀의 몸을 받쳐들었다. 줄리아는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욕망을 자제 할 수 없었다. 아니야. 내가 왜 아 더워 미칠 것 같아.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그녀는 라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그녀를 절실히 원하고 있는 듯 했다. '안돼 줄리아 정신차려야 해.' 하지만 그녀의 손은 이미 라엘의 머릿속을 헤집고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하고 있었다. 열정적인 그녀의 키스에 라엘은 잠시 놀라고 있었지만, 유연하게 감싸오는 그녀의 육체는 너무나 달콤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떼자 라엘은 아쉬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줄리아는 잠시 숨을 돌렸다. 그리곤 갑자기 스콧의 말이 떠올랐다. 타는 듯한 몸과 자신도 이해 할 수 없는 욕정.... 쉘린이 준 와인..... 쉘린이 들고 있던 와인.... 세상에 그녀가 뭘 탄 거지. 줄리아는 그 틈에도 머리 속이 퍼뜩 깨어났다. 이런.. 이럴 수가... 스콧을 찾아야해. 그를.' 그녀가 라엘를 힘없이 밀치고 나가려 하자, 라엘은 등뒤에서 그녀를 굳게 안았다. "줄리아. 당신을 사랑하오. 내 가슴이 다 타 재가 될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소." 줄리아의 몸은 점점 열정으로 타올라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오-, 라엘. 전 전 사랑..." "알고 있소. 내가 얼마나 부질없는 사랑을 하고 있다는 걸.." "라엘 제발 절 놔줘요." 그는 등뒤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있어줘요." "안돼요." 그녀는 그를 밀어내려고 등을 돌렸지만, 그의 눈빛을 본 후, 그녀의 이성은 이미 약에 의해 사라진지 오래었다. 줄리아는 라엘의 입술에 뜨거운 입맞춤을 하고 있었고, 라엘 또한 그녀의 입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거친 숨소리가 온 방안에 가득 차고, 줄리아는 자신의 옷을 찢을 듯 벗고 있었다. 라엘은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당황했지만 줄리아만 곁에 있어 준다면 이런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속옷만 걸치게 되자, 줄리아는 이번엔 라엘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라엘은 잠시 멈짓 했지만 그녀의 손길을 거부 할 수 없었다. 그와 그녀가 알몸으로 서 있었다. 줄리아가 서두르는 것 같았지만, 라엘은 아무래도 좋았다. 줄리아와 라엘은 부드러운 카펫위에서 뒹굴며 서로를 탐하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욕정에 라엘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라엘 나에게 들어와요. 빨리." 그러나 라엘은 잠시 그녀의 나체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서두르고 있다는 것 알아요. 하지만, 나중에 얘기해요. 그러니 빨리..." 라엘은 머뭇거리듯 얘기를 꺼냈다. "줄리아. 난... 난... 당신이 첫 여자요."


줄리아는 머리를 굵직한 방망이로 얻 맞은 듯, 잠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팔꿈치로 몸을 약간 일으켰다. "뭐라고요. 처음이라고 했어요. 당신 나이가 몇인데..." 그는 부끄러운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세상에.... 내가 동정을 갖고 있는 사람과 뭘 하고 있는 거지." 라엘은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줄리아는 등을 휘며 욕정에 사로 잡혀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쉘린 정말 가만 두지 않으리라.... 줄리아는 일어나 그를 바닥에 눕히곤 소중히 그를 안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에 키스하곤 그의 온몸을 애무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고, 라엘은 소중하게 지켰던 자신의 동정을 그녀에게 주게됨을 행복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줄리아는 엉덩이을 들고 그의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숨을 멈출 듯한 호흡과 신음에 그녀가 더욱 빠르게 움직이자, 라엘은 그녀의 육감적인 엉덩이를 움켜잡고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자기의 분들 들을 그녀의 몸 속에 퍼트리고 있었다.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자자들면서 힘없이 그의 몸에 기대었다. "미안하오. 줄리아. 이렇게 빨리..." "아니에요. 제가 미안할 따름이예요. 당신이 소중히 지켜두었던 동정이었는데 더 소중한 사람에게 주었어야 했어요." 줄리아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그의 몸을 타고 내려왔다. 라엘은 그녀의 눈물의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자신이 더욱 불행해 질 거란 걸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 한 몸이 되었다는 건만으로도 라엘은 그 불행을 이길 거라 생각했다. "아니오. 난 그 동안 지켜왔던 내 몸과 마음을 당신에게 주어서 행복하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만큼..." "바보.. 바보 같은 사람." 그리고 한동안 줄리아는 그의 품에서 울고 있었다. ´UA1/2³?, 스콧은 그녀의 사무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줄리아는 들어서다 말고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줄리아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스콧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줄리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어젠 왜 혼자 가버렸소." 줄리아는 입술을 물다가 놓았다. 그리고 책상에 핸드백을 올려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사뭇 걱정스런 녹색눈동자였다. "몸이 안 좋아서요. 당신을 찾았는데 없어서." 줄리아는 라엘과 몰래 빠져 나와 그가 집까지 데려다 준 어젯밤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안색이 안 좋군. 오늘 쉴걸 그랬소."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스콧은 그녀를 살며시 안고는 아침 키스를 짧게 끝내고 밖으로 나가려하자, "스콧 할 말이 있는데..."


스콧의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지금." "아니요. 점심때 하죠." 스콧이 나가고 그녀는 무너질 듯 자리에 앉았다. 세상에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난 거지. 그녀는 오전 내내 일을 잡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점심때가 되고 그녀는 겨우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한적한 공원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스콧." 스콧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생긴 것이다. 어제만 해도 희망적이었는데 그녀가 오늘 아침 그늘진 얼굴로 그를 부르고 있었다. "스콧." 그녀는 주저하며 그의 이름만 부르고 있었다. "편안하게 말해. 줄리아. 난 마음의 준비 다 되어 있소." 줄리아는 결심한 듯 "당신과 쉘린..." 그는 고개를 숙였다. 역시... "같이 잔일 나 이해 할 수 있어요." 그가 고개를 바짝 들고 기뻐하는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정말이오. 고마워 줄리아. 그럼 결혼..." "스콧. 정말 미안해요." "뭐가. 미안한 건 나잖소." "아니요. 저도 미안해요. 당신을 이해 할 수 있다는 건...." 그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져 가고 있었다. "이해 할 수 없군. 줄리아." "쉘린의 짓이었어요." "쉘린." 그는 의아하게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쉘린이 어제 당신에게 와인을 가져다주려던 걸 제가 마셨버렸어요." "왜. 그게 어때서...." 줄리아의 눈동자엔 물기가 잔득 머물러 있었다. "세상에 쉘린이 와인에 이상한 약을 탓군. 하느님 맙소사." 그는 얼굴을 두 손에 파묻고 괴로워했다. "왜. 진작 날 찾지 않았지." 괴로움에 떨고 있는 그의 목소리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당신은 어디에도 없었다구요." 스콧은 어제 쉘린이 굳이 하지 않아도 돼는 일을 팩스실까지 가면서까지 일을 하게 만든 것이 이상하게 생각됐지만 쉘리는 유능한 비서였고 그만한 실력으로 개인의 비서를


한다는 자체가 아까울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그런 줄말 알고 쉘린을 쫓아 잠시 컴퓨터 작업을 했던 것이.....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뛰기 시작했다. 그가 사무실에 도착하자, 쉘린은 결재 파일을 챙겨 그의 책상에 놓고 있었다. 쉘린의 환한 미소가 공포로 바꾸어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스콧의 화난 얼굴을 몇 번 보았긴 했지만 지금은 살인이라도 낼 사람처럼 그녀를 노려보며 다가서고 있었다. 스콧은 그녀의 뺨을 세차게 치자 그녀는 나동그라지며 쓰러졌다. "넌 지금 몇 사람을 불행에 몰아 넣었는지 알아. 쉘린. 넌 당장 해고야." 쉘린은 입가에 맺힌 핏자국을 닦아내며 스콧을 쳐다보았다. "스콧 해밀턴 선배님. 절 이렇게 대하실 순 없어요." "뭐라구." 스콧은 서서히 일어서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 선배를 7 년 동안이나 당신만을 지켜보며 살아 왔어요." "쉘린. 난 널 본적도 없어." "그렇겠죠. 전 원래 뚱보에다 치아교정까지 달고 있었던 얘였으니깐 요. 당신 눈길한번 받아보는 것이 제 소원이었어요. 그런데, 선배는 눈길은커녕 절 경멸하듯 쳐다보셨죠. 전 공부밖에는 할 줄 모르는 얘 었고, 멋이라곤 눈 씻고 찾아 볼 수 없었던 걸요. 그때 저는 결심했어요. 당신을 내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겠다고, 졸업 후 전 일년동안 날 가꾸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고. 그 결실이 당신의 비서가 된 거죠. 제 능력을 여기서 썩히긴 아까웠지만 당신이 내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전 상관없어요." "미쳤군." "그래요. 전 사랑에 미쳤어. 당신이 나와 열정적인 잠자리를 하면서도 줄리아를 부를 때마다 전 내 살을 깎는 아픔으로 당신을 받아 들였죠. 하지만 이젠 그렇게 하진 않을 거예요. 이미 당신은 내 안에 있으니..." "뭐라고..." 쉘린은 멋진 몸뚱이를 흔들며 문이 부서져라 닫고는 나가버렸다. 스콧은 두 손을 머리에 묻고 소리를 질러댔다. 줄리아는 먼 곳에서 고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잘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어째든 그에게 더 이상의 상처를 줄 수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고성을 쳐다보고는 모래에 치러질 결혼식에 신경을 써야만 했다. 6 결혼식은 생각보다 조촐히 치러지고 있었다. 그녀의 친척 몇 분과 스콧의 일가만 초청하여 조용하게 지내자고 스콧과 합의를 봤던 것이다. 줄리아는 신부 대기실 벽면 거울에 우아하게 앉아 있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서두르는 결혼식이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와의 결혼은 그녀가 더 기다리고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 서두르는 감이 있다니..... 그녀는 애써 한쪽 가슴에 스물스물 기어드는 라엘의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젖고 있을 때


신부입장이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 사이를 걷고 있었다. 그때 눈에 띈 라엘 밀러가 우울하게 웃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웨딩드레스를 밟을 뻔했다. 그녀는 곧 남편이 될 스콧을 쳐다보았다. 그가 초청한 것이다. 왜. 왜. 그를.... 문득, 스콧의 말이 떠올랐다. <그를 사랑하나. 아니지. 그건 사랑해서 관계를 갖는 게 아니었지. 아무튼 그래도 확실하게 하고 싶군. 난 쉘린을 사랑하지 않소. 그럼 당신은...> <전... 저도 아니에요..> 줄리아는 그때처럼 확신이 서지 않은 말은 없었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감정도 때론 있으리라. 그녀는 눈앞에 신부의 얼굴만을 뚫어져라 보며 걷고 있었다. 라엘은 천상에 내려온 천사도 그녀만큼은 아름답지 안으리란 걸 확신하고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는 한쪽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를 얻지 못하는 아픔이 그녀를 이렇게 떠나 보내야만 하는 아픔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젠 볼 수 없는 여인의 마지막을 보면서 라엘의 가슴을 그렇게 울고 있었다. 신랑과 신부의 성혼 세례를 읊고, 신부가 마지막의 말을 하기 전 목청을 다시 가다듬고는 "신랑 스콧 해밀턴과 신부 줄리아 로스의 결혼에 이의를 가지고 있는 분 지금 말하시오." 조용한 성당.... 푸드득 비둘기 나는 소리만 성당 안을 울렸다. 라엘은 고개를 숙이곤 눈을 감았다. "그럼, 이 두부부가 합법적인 부부가 됐음을...." "이의 있습니다." 조용했던 성당 안에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가르고 있었다. 다들 놀라 뒤를 돌아보니 쉘린이었다. 검은 망사모자와 검은 정장차림은 장례식 때나 입을 옷차림이었다. 술렁이는 사람들 사이에 선 그녀는 너무도 당당했다. 줄리아와 스콧은 너무 놀라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신부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누구시오. 이름을 말하고 이의가 있다면 지금 말하시오.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타당한 이의라면 받아들이겠으니." 그녀는 스콧과 줄리아 사이를 가르며, 신부 앞에 뭔가를 내놓았다. "이건." "안을 보시죠." 신부가 봉투 속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흰 종이엔 병원의 이름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임신이란 증표입니다. 전 스콧 해밀턴의 아기를 가지고 있어요." 다들 입들이 벌어지고 스콧을 쳐다보고 있었다. 줄리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기라니.... 스콧은 신부에게서 종이를 빼앗아 들더니 찢기 시작했다.


"쉘린, 내 아기인지 아닌지 난 알 수도 인정 할 수도 없어. 이런다고 널 사랑하리라고 생각지 마 더욱 너에게 질릴 뿐이니까." 쉘린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스콧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럴까. 신부님 제 이의가 받아 질 수 있습니까." 신부는 잠시 스콧과 줄리아를 쳐다보더니 "당신의 이의를 받아들이겠소. 이 결혼은 무효입니다. 스콧은 그녀와 책임질 일을 했다면 그 결과를 보고, 그녀가 거짓임이 드러난 다면 그녀를 법적 절차에 따라 행하시오." 줄리아는 믿기 지 않은 결혼식을 바라보며 긴 웨딩드레스를 잡고 뛰기 시작했다. '이건 현실이 아닐 거야. 이건 악몽일거야. 빨리 깨어나고 싶어. 빨리....' 그녀의 머리에서 면사포가 떨어지고 라엘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같이 뛰어나가자 스콧 또한 쉘린을 밀치고 뛰어 나갔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녀는 흰색의 웨딩드레스 자락을 날리며 하늘로 붕 떠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남자는 동시에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줄리아~~~" 줄리아는 눈을 떴다. 누군가 그녀의 앞가슴을 헤치고 차가운 것을 대고는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그녀는 싫은 듯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신이 드세요." 음성이 울리긴 했지만, 들을 순 있었다. 줄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그녀의 팔뚝에 주사를 놓더니 이내 잠 속으로 다시 빠져들었다. 스콧과 라엘은 그녀를 가운데 두고 서 있었다. 스콧은 예복 차림으로 라엘은 체크무늬 남방으로, "이젠 가주시죠. 라엘씨. 줄리아가 정신을 차렸으니..." "아니요. 이젠 내가 줄리아를 지킬 거요." "웃기는군. 줄리아를 지킬 사람은 나뿐이오." "지킨다는 것이 줄리아를 이 꼴로 만들었소." "뭘 모르면 가만 히나 있어. 네가 우릴 사이 어떻게 안다고 간섭이야." 스콧이 먼저 이성을 잃고 얘기를 하자, "그녀는 당신을 부담스러워 했소. 사랑은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당신에게 기댈 뿐이었단 말이오." "흥, 웃기는군. 어쨌든 그녀 옆엔 내가 있었으니 당신은 필요 없소." "나도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줄리아를 놓칠 수 없소." "뭐라구." "그리고 난 줄리아가 나의 첫 여자요. 그녀는 소중히 나의 동정을 받아주었소. 너무도 소중하리만큼." 질투의 여신의 스캇의 온몸을 점령해 들어갔다. 그는 주먹을 쥐고있었지만, 얼굴만큼은 여유 있게 웃고 있었다. 라엘은 그의 얼굴에 흔들림이 없는 것이 더욱 애가 탔다.


"그 나이 되도록 여자 한번 안지 않았다니. 대단도 하구려. 하지만, 줄리아의 첫 남자가 누구였는 줄은 아시오. 그녀의 순결을 갖은 자가 누구인지 아냔 말이오." 라엘도 지지 않으려는 듯 주먹을 쥐었다. "그게 바로 나지. 그녀는 순결한 영혼과 몸을 나에게 주었다구. 아시겠소. 참, 잘 알겠군. 동정을 줄리아에게 주었으니, 그 맘이 어떠리라는 걸. 그녀는 날 선택했소. 아시겠소." 라엘이 막 말을 하려고 하자, 줄리아의 신음 소리가 들려 왔다. 둘은 날카롭게 시선을 오간 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눈을 뜨자, 두 남자의 눈동자가 한꺼번에 들어 왔다. 너무나 매력적인 스캇의 녹색눈동자는 너무나 염려스러워 했고, 그리고 헤이즐럿의 눈동자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스캇." 그녀가 스캇의 이름을 먼저 불렀다. "스캇. 내가 여기에... 여기에 웬일이죠. 무슨 일이.." "당신 교통사고 났었소." "교통사고.... 그럼 뉴욕 출장은 요...." "뉴욕출장이라니..." "뉴욕출장을 다녀와야 하는데..." 라엘과 스캇은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스캇이 급하게 의사를 찾으러 나가고 있었다. 줄리아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헤이즐럿 눈동자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너무나도 슬픈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았다. "저- 죄송하지만 누구 신지..." "오- 세상에...." 그는 괴로운 듯 자신의 머리를 쥐고 있었다. 그가 머리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서자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 그의 손은 그녀에게 가보지도 못한 채 뒤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문간에서 다시 한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불꽃처럼 붉은 머리칼 오똑선 코, 붉은 입술 그리고 예쁜 보조개까지 라엘은 괴로운 얼굴로 병실을 나오고 말았다. 줄리아는 한 달이 다되도록 통근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그사이 스콧과의 결혼식은 잠시 미루어 졌고, 그녀는 스콧과 함께 뉴욕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은행장이 갑자기 뉴욕지사로 발령을 내린 것이다. 줄리아는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뉴욕지사에 한번쯤은 근무하고 싶었던 차라 두말 안고 그와 같이 뉴욕으로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유능한 비서인 쉘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자기에게 좀 차갑게 굴긴 했지만, 그만큼 유능한 비서를 찾기란 쉽지 않을 텐데..... 스콧은 한사코 그녀가 왜 퇴사를 했는지 말을 해주지 않고 있었다. 줄리아는 뉴욕출장 직전의 기억밖에는 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다지 신경을 쓰고 있진 않았다. 어차피 스콧과 결혼할 것이고 그녀의 주의 사람들도 모두들 그녀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있을뿐더러, 일에 큰 지장을 초래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줄리아는 스콧의 야근 때문에 집에 먼저 들어와야만 했다. 그녀의 교통사고 후, 스콧이 그녀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녀가 집에 들어서면서 스위치를 올리자 전원이 나갔는지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줄리아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플래시를 가지고 전원 스위치가 있는 베란다 쪽으로 갔다. 문을 열고 막 스위치가 있는 집을 열려고 하자 검은 손이 뒤에서 차츰 다가서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에 흠씬 놀라 입에 문 플래시와 함께 뒤를 돌아다보자 검은 물체가 그녀를 덮치고 말았다. 그녀는 몸부림을 치며 목을 조르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을 허우적거리며 밀쳐 내려 했다. 그녀의 힘만으로는 밀쳐 낼 수 없었다. 교통사고 이후 허약해진 몸으론 그검은 사람을 상대하긴 무리였다. 그녀는 손을 더듬거려 떨어진 플래시를 찾아 목을 조르는 사람의 얼굴에 비추자 그는 눈이 부신지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주변의 물건을 더듬거리며 찾았다. 베란다 구석에 있던 골프채가 그녀의 손에 잡히자 그녀는 긴 골프채를 들고 검은 사람을 위협했다. 검은 사람은 잠시 주춤하더니 다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손을 들어 내리기도 전에 검은 사람은 몸을 날려 그녀를 덮쳤다. 줄리아는 있는 힘껏 그의 머리를 내리치자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줄리아는 재빨리 전원 스위치를 올리자 거실이 환해지면서 검은 복면을 한 사람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는 다시 골프채를 단단히 거머쥐고 옆으로 누워 있는 그를 발로 툭툭 건드리자 검은 사람은 힘없이 앞쪽으로 쓰러졌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검은 복면을 벗겨 냈다. 그 복면 뒤엔 쉘린이 이마에서 피가 흘리고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지 않은가. 줄리아는 훅하고 숨을 들어 마신 뒤, 갑자기 온몸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힘들게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쉘린이 왜... 왜.... 왜.... 7 줄리아는 그녀의 고향. 아버지를 묻은 댄버행 비행기표를 티켓팅 하곤 잠시 자리에 앉아 비행기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줄리아는 이젠 도시가 싫어졌다. 그녀는 일단 아버지의 고향으로 발길을 돌리곤 가서 천천히 미래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는 어젯밤 쉘린의 처절한 목소리가 귓전에 아직도 생생하게 들리는 듯 하자 잠시 귀를 막고 있었다. <난 그의 아이를 갖고 있어. 그는 날 외면하지만 뱃속에 자란 애만큼은 부정하지 못 할거야. 유전자 검사라도 해서 그의 아기임을 꼭 밝힐 거야. 줄리아.> 기억을 잃어버린 저 끝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그녀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지만 쉘린의 눈엔 스콧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어찌할 수 없이 쉘린을 겨우 돌려보내곤 짐을 쌓기 시작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그는 책임질 아이가 생기질 않았나. 그녀는 머릿속을 누가 온통 휘저어 놓은 것 같았다. 그때,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그녀는 깜짝 놀라 받아 보았다. 그리고 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고성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몰려 왔다. 어둠이 점점 내려앉은 그곳 풍경은 너무나 경이로울 만치 아름답고 황홀했다. 그녀는 커다란 성을 바라보며 천천히 들어서자 커다란 현관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 옆에 있는 황금 줄. 줄리아는 천천히 줄을 잡아 당겨 기자,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켐..." '내가 이 남자 이름을 알고 있다니.' 그녀의 잃어버린 시간들이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줄리아양.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비켜서자 그녀는 점점 안개 속을 헤쳐 나가는 것처럼 모든 기억들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어지러움에 옆에 있던 탁자에 몸을 기대었다. "죄송합니다. 줄리아양. 몸이 아프단 말은 들었지만, 저희 주인님 때문에..." "주인님..."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맑아지며 켐을 쳐다보았다. "라엘..." 켐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노인네의 눈물을 보자 줄리아의 마음까지 아파 왔다. "지금 어디에.." "서재에 계실 겁니다." 줄리아는 천천히 이층으로 올라가 이상한 동물의 문양이 있는 문 앞에 섰다. 그리고 그 문양을 만져보고는 무겁게 열리는 문을 열자, 어두운 방안엔 그의 가쁜 숨소리만 들리는 듯 했다. "켐. 더 이상 날 가만히 놔도. 모든 게 다 귀찮다 했잖나." 그는 술을 마시는 듯 잠시 말을 끊고 급하게 숨을 내쉬었다. "켐. 내가 나갈 때까지 들어오지 말라는 말 거역하지 말아주게. 제발 나 좀 가만히 내버려둬." 그녀가 책상 위에 있는 작은 스탠드를 켰다. 그는 책상과 등을 지고 창 문가에서 어둠이 내려 안기 전 산을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꺼. 켐. 난 빛이 싫어. 그녀가... 없..는 세상을...보고 싶지.. 않아. 켐." 그는 울고 있는지 아님 술 때문인지 어눌하게 이야기를 하며 손에 들린 술병을 다시 입으로 가져가자 그녀는 그의 손을 막았다. "켐. 나 죽는 꼴보고 싶지 않으면 이 손 놔. 날 그냥 내버려둬. 제발 내가 나갈 때까지 그냥 두란 말이야. 제발...." 그의 목소리는 거의 짐승의 울부짖음이었다. 그녀는 할말을 잊고 차마 그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살며시 입을 막고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고개가 꼬꾸라져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있었다.


"켐. 내 꼴이 우습지.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여자 하나 때문에... 그것도 도시한복판에서 내 코트 깃을 잡고 울고 있던 여자한테... 말이야. 사랑이 이런 것이었다면... 이런거 였다면... 난 꿈도 꾸질 않았을 걸세." 라엘이 술병을 들고 마시기 위해 고개를 들자 그는 이젠 자기가 진짜 미쳐 버렸는 줄 알았다. 그녀의 환영이 이렇게 뚜렷하게 그 앞에 나타날 줄이야. 그는 먹었던 술까지 깨는 것 같아 술병을 천천히 내리고 떨리는 손으로 환영을 만지려 하자, 줄리아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 당신인 거예요. 세상에. 라엘...." 그의 몰골은 비쩍 말라 거의 라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의 눈은 퀭하니 들어가 고통의 빛이 역력했고,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렇게 고통스러웠으면 전화라도 아님 다시 나에게 한번이라도 오시지 그랬어요." 그는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 따위는 개의 치 않았다. 그녀의 붉은 머리가 빛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지 않은가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만져진다. 진짜 그녀가 내 앞에 있는 것이다. "줄.. 리..아.." 그녀는 그의 손을 얼굴에 부벼대며 한없이 울고 있었다. 너무나 앙상하게 변해버린 그의 손이 그녀의 마음을 후벼대고 있었다. "당신이오. 정말... 내가 사랑하는 당신.." "내가 뭔데 내가 뭔데 당신이 이렇게...." "오. 줄리아. 내 사랑 줄리아." 라엘은 그녀의 머리를 껴안고 이것이 진정 꿈이 아니길 바라고 있었다. 신이 그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를... 8 스콧은 뉴욕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줄리아를 쳐다보았다. 너무나 청명한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쓰라렸다. "정말 나와 같이 안가겠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콧, 당신은 나말고도 많은 사람이 있잖아요. 가까이는 쉘린도..." "쉘린 얘기는 꺼내지도 마." "아니 스콧. 타의 던, 자의 던 그녀는 당신의 아이를 가지고 있어요. 아이에 대한 책임은 둘의 합의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스콧은 그런 사람이란 걸 전 잘 알고 있고요." "줄리아. 난 당신 만한 여자를 만나지 못 할거요." "스콧. 그런 소리 마세요. 당신 같은 남자에겐 더욱 좋은 여자 만날 거예요." 줄리아가 스콧과 막 포옹을 풀자, "줄리아."


그녀를 힘차게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라엘이 손을 흔들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만 가봐야 겠어요. 그이가 날 부르네요." 스콧은 잠시 표정이 어두워지기는 했지만, 이젠 진심으로 그녀가 행복하길 바라며 출구로 들어섰다. 그녀가 총총걸음으로 라엘에게 다가서자, 그는 불안했던 얼굴을 피며 그녀를 안았다. "왜 이렇게 늦은 거요." "왜요. 제가 스콧을 따라 나설까봐서요." 줄리아가 짓궂게 웃자 라엘은 밉지 않게 그녀를 흘겨보았다. 그러자, 줄리아 농염하게 그에게 안기며, "라엘. 이젠 사랑의 묘약 따위는 필요치 않겠죠." 라엘의 얼굴이 붉어 졌다. 줄리아는 이렇게 사랑스러운 남자는 처음이다. 그를 안고 싶은 마음이 그녀를 흥분시키며, "라엘 빨리 집으로 가야겠어요." 라엘은 재빠르게 그녀의 농후한 입술에 키스를 하며, 둘은 행복한 보금자리로 발길을 재촉하며, 그녀의 웃음소리가 샌프란시스코의 하늘에 한없이 행복하게 울려 퍼졌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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