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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짜기의 백합 1 줄리아

프라이는 뒤로 물러서서 막

완성된

작품을

천천히

살펴봤다.

장난이

약간

지나쳤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그러면 또 어떠랴. 만일 파리의 코르동블뢰 요리 선생님들이 이 악취미가 여지없이 드러난 케이크를 보았다면 질겁을 하고 두손 들어 버리겠지. 하지만 이제는 채점 걱정 따위는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아니, 이게 도대체 뭐지?" 키가 늘씬한 금발의 남자가 주방의 자동문을 밀고 들어왔다. 줄리아는 그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오늘 밤을 위해 만든 케이크예요. 이름은 레지스탕스." "무엇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란 말이지?" 필립 랜돌프의 가장 큰 흠은 유머가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뉘우쳐 봐야 소용없습니다. 마샤 생일이니까 무엇이든 특별한 걸 만들라고 하셨잖아요? 이 케이크면 그녀에게 꼭 어울리지 않겠어요?" 필립의 사촌 여동생은 퍽 육감적이고 성질도 매섭다. 그 반면 필립은 성질이 지나치게 결벽한 데가 있어 결혼하자는 상대가 나타날지 어떨지조차도 잘 알 수 없다. 가련한 필립. 필립은 손톱이 말끔히 손질된 손가락으로 케이크 위쪽을 가리켰다. "내가 그렇게 주문했다고 하더라도… 글쎄, 거미까지 장식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니, 그게 언제 거기 붙어 있었지?" 줄리아는 일부러 놀란 투로 말했다. 그러나 필립의 갈색 눈동자는 줄리아의 파란 눈을 노려본 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할 수 없군요. 알았어요." 줄리아는 한숨을 쉬며 노랑과 파랑의 설탕옷을 입힌 조그마한 거미를 살짝 벗겼다. "전 좋아하실 줄 알았늘데… 보세요. 정말 귀엽지 않아요?" "천만에." 그녀의 고용자인 필립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당신 혹시 다른 데에도 거미를 숨겨 놓은 건 아니겠지? 이런 잎들 속에 말야." "그렇게 하려다가 그만두었답니다." 줄리아는 혼자 킬킬 웃으면서 수상쩍어하는 주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정말 사람 놀라게 하는군."


필립은 말쑥한 웃옷 소매에서 보이지도 않는 먼지를 가볍게 털어낸 다음 보기 좋게 손질한 콧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이건 또 뭐?" "폭탄입니다. 어마어마한 폭탄이에요." "어떻게 되는 거야? 입에 들어가는 순간에 폭발하나?" "그 비슷한 거죠. 아무튼 코끼리가 졸도할 만한 양의 브랜디가 들었으니까요." "당신은 마샤를 질투하고 있군." 필립이 놀리듯 말했다. "아마 내 관심을 끌고 싶은 모양이지?" "그럴지도 모르죠!" 줄리아가 밝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30 대 중반의 필립은 이미 뉴질랜드의 거물 실업인이 되어 있었고, 여성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탓인지 지나치게 자의식이 강한 데가 있어서, 줄리아는 그것에 제동을 거는 게 의무인 양 느끼고 있었다. "당신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도무지 모르겠단 말야. 나를 좋아하지 않나?" "물론 좋아하죠, 좋아해요. 다만 내 마음에 드는 형은 아녜요." 줄리아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유형은?" "으… 잘 웃는 사람, 나를 웃게 해주는 사람, 거무스레한 미남… 물론 키는 작아야 해요." 줄리아는 153cm 라는 키가 언제나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면 신경질적인 라틴계 남자가 좋겠군." 필립이 얄밉게 쏘아붙였다. "정답! 선생님이 안 계시는 동안 그런 사람을 물색하겠어요." 곧 필립은 또 해외출장을 할 계획이다. "부업 자리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나?" "네, 하지만 선생님의 해외출장이 다음달이니까 아직 시간은 있어요." 필립의 해외출장은 보통 한 달 이상 걸리므로 그동안 줄리아는 다른 데서 부업을 가질 수 있었다. 요리 전문가인 줄리아는 뛰어난 요리 솜씨로 일자리를 얻지 못한 적은 없었다. "그래, 나는 7 월 21 일에 떠나지. 당신의 부업 얘긴데, 말로 씨 댁에서 이야기가 있었어." "어머!" 줄리아는 환성을 올렸다.


"정말이세요? 장소는? 날짜는?" "크래머 별장에서 8 월 한 달 동안 만이야." "그 이야기는 어디서 들으셨죠?" "지난 주에 극장에서 코니를 만났을 때 내 출장 이야기를 했거든." "아이 참, 왜 당장 말씀해 주시지 않았어요?" 다른 요리사를 쓰기로 정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깜박 잊었어." 필립은 담담한 표정이다. 자기와 관계가 없는 일에 대해서는 참으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코니 말인데, 당신이 전화를 걸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 그럼 나는 가겠어. 점심은 필요없고, 다만 내일 여섯 명 초대한 파티가 있어." 필립은 낮에도 자주 파티를 열기 때문에 줄리아는 각종 요리에 도전할 기회가 많은 셈이다. 필립이 나가자 줄리아는 의자에 앉아 말로 집안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크래머 별장은 코로만델 반도에 있는 별장으로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가족들이 그곳에 모인다. 겨울이 한창인 8 월에 모이기는 드문 일이다. 줄리아는 재작년 크리스마스 때 가정부 겸 요리사로서 그곳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일은 힘들었지만 꽤 즐거웠었다. 코니 말로 부인은 뉴질랜드의 유명한 여배우이고, 남편 마이클 또한 이름난 무대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이다. 자녀들도 모두 예술관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일들을 마음에 떠올리고 있자니 줄리아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기분이 되었다. 당장 주방의 전화로 코니에게 연락을 취했더니 내일 만나러 와달라는 얘기였다. 이튿날 줄리아는 고물 폭스바겐을 몰고 수 km 떨어진 레 뮤어라에 있는 말로 집으로 갔다. 앞문이 닫혀 있어 집 뒤쪽으로 돌아갔다. 풀장 근처에서 대본을 읽고 있는 코니의 모습이 보였다. 이처럼 개인적으로 만나기는 꼭 일 년 만이다. 코니는 무대에서의 모습처럼 매끄럽고 붉은 머리와 파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반겼다. "어머 줄리아! 만나서 반가와요. 어서 이 의자에 앉아요. 마침 잘 왔어. 대본 읽기가 지겨워지고 있었거든." "또 새 무대에 서시나요, 말로 부인?" "이번에는 텔레비전 드라마지. 나를 그냥 코니라 불러요. 전에도 그렇게 하도록 부탁했었죠? 혹은 내가 노망을 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가?" "아니예요, 언제나 참 젊으세요." 줄리아는 스스럼없는 편안한 기분이 되었다.


"고마와. 하지만 지난 주로 마흔아홉 살이나 되었거든. 둘째 아들 리차드가 생일 선물로 무엇을 주었는지 알아요? 맙소사, 회춘용 화장품이었다우!" 코니는 생일에 가족들로부터 받은 선물에 대해 손짓 몸짓을 섞어가며 설명했다. 화사하고 우아한 코니가 두 쌍의 쌍동이를 포함해 여섯 명의 아이를 가진 어머니라고 한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더구나 변덕스럽고 들뜬 데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가 이 가족의 핵심인 어머니 역을 거뜬히 맡아서 잘 소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크래머 별장에는 올 수 있겠어요? 이번엔 전처럼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친척은 한 사람도 오지 않고 우리 가족뿐이거든. 아마 휴는 못 올 거야." 휴는 장남으로 줄리아는 아직 만난 적이 없다. 온 식구가 화려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휴만은 그와 대조적으로 변호사노릇을 하고 있는 수수께끼같은 존재다. "금년 크리스마스에는 크래머 별장에 모이지 않습니까?" 줄리아가 물었다. "올해만은 매년의 관례를 깨뜨려야 할 것 같다우. 크리스마스 때는 온 식구가 뿔뿔이 흩어질 모양이야." 코니는 한숨을 쉬며 손꼽기 시작했다. "남편인 마이클은 웰링턴에서 내 무대를 감독할 예정이라우. 이번에 그 각본을 크래머에서 쓸 참이니까 신경질을 부려도 좀 참아 주어야 해요. 그리고 리차드는 영화 로케를 하러 가고, 스티브는 연주 여행차 일본에 간다우. 로잘린드는 제 운을 시험하기 위해 런던 무대에 도전하고, 올리비아는 그 화가협회에 빠져 있는데 전람회를 연다는 거예요. 그리고 막내인

찰스까지도

친구와

함께

타우포에

간다고

야단이거든.

아이도

끝내는

크리스마스를 가족들과 떨어져서 지내고 싶어하게 되었다우!" 찰스는 형제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막내로서 아직 기숙학교에 다니는 열네 살 소년이다. 리차드와 스티브, 그리고 로잘린드와 올리비아는 각기 쌍동이 형제 자매이며, 모두 어머니를 닮아 머리가 붉은데 찰스만은 머리색이 다르다. "하지만 일 년에 한 번, 온 식구가 오손도손 모여 즐거움을 나누는 휴가를 나는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다우!" 코니가 힘주어 말했다. "그래 모두에게 야단을 쳐서 8 월에 억지 집합을 시키기로 했어. 찰스도 학교를 졸업하니까 8 월 한 달 동안 꼬박 크래머 별장에서 지낼 수 있지. 그런데 당신은 그렇게 장기간 우리 가족 모두를 견뎌낼 수 있을까?" "네, 물론이죠."


줄리아는 진심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댁의 식구들뿐이라면 브라베이지 부인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할 텐데요?" "지금 그녀는 요리에까지 마음쓸 겨를이 없다우. 바깥양반이 허리 수술을 받고 퇴원은 했지만 아직 몸을 움직이기엔 불편하거든. 진은 일단 매일 크래머 별장에 오게 돼 있지만 청소하는 게 고작일 거야. 그러니 당신이 꼭 와주어야 해요." 가정부인 진 브라베이지는 몸집이 뚱뚱하고 키가 큰데 거꾸로 남편 잭은 키와 몸집이 작다. 줄리아는 두 사람에게 동정을 보내며 말했다. "저를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후보자가 저밖에 없었던 건 아닌가요?" 코니는 그녀의 특징인 밝은 웃음소리를 냈다. "사실대로 말하면 필립을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이렇다 할 후보자가 없었다우. 그가 해외출장을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살았다 싶었어요." "일찍 전화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실은 어제야 비로소 필립 씨로부터 얘기를 들었어요." "그런 건 잊어버려요. 실업가가 어떤 사람들인가는 나도 잘 알고 있다우. 그리고 이번에는 어중이떠중이 친구들을 끌고 오지 않도록 모두에게 단단히 다짐을 해두었으니까 안심해요. 크래머 별장에 모인다는 사실도 누설하지 않도록 함구령을 내렸지. 리차드도 로잘린드도 텔레비전 연속 프로에 출연하고서부터 팬 클럽이 짜여졌고 스티브는 또 스티브대로 괴상한 팬들에게 밤낮없이 쫓겨다니고 있어. 머리를 핑크 색으로 물들이고 요란한 머리핀을 꽂은 사내 아이 팬들에게 시달리고 있다우!" 코니는 마음씨가 대단히 너그러운 여성이기 때문에 목소리는 마치 화난 듯했지만 그 파란 눈빛은 즐겁게 반짝이고 있었다. "팬들에게 쫓기는 건 로큰롤 스타의 숙명이에요. 그런데 부인도 전에 머리를 핑크 색으로 물들이고 머리핀을 꽂지 않았던가요?" "그건 무대 위에서의 일이에요, 줄리아. 그런데 저 아이들은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하고 있거든. 그건 그렇고, 크래머 별장에 와줄 수 있겠수?" 줄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코니가 말을 이어 나갔다. "아이들이 너무 커서 당신 일도 수월치 않을 거예요. 찰스만 해도 키가 180cm 나 된다우! 그 애는 학교 연극부에 들어 있는데 훌륭한 배우가 될 소질을 갖추고 있어요. 그래서 남편 연줄을 이용해 연극학교의 오디션을 받게 할까 생각중이라우!" 두 사람은 일에 관해 의논했다. 크래머 별장에는 줄리아가 먼저 가서 준비를 하기로 했다. 깊은 산속 골짜기에 별장이 있기 때문에 장보기 하나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제

모든

얘기가

끝났으니

안으로

들어가

커피라도

마셔요.

어쩐지

날씨가

이상해지네요." 코니는 이렇게 말하며 어두운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거실의 베란다에 닿기가 무섭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코니가 커피를 타러 간 동안 줄리아는 소파에 앉아 따뜻한 가정 분위기가 풍기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줄리아 프라이, 오, 이 성스런 아름다움, 나의 태양이여! 도대체 그 동안 어디 숨어 있었지?" "안녕하세요, 리차드?" 줄리아는 그에게 가볍게 키스를 했는데 키가 큰 미남 청년은 뜨거운 키스로 응했다. 리차드는 소파 옆에 걸터앉아 줄리아 어깨를 감쌌다 "또 우리 노예가 되기 위해 와준단 말이지?" "그럼요, 동경하는 스타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순 없잖아요?" 줄리아는 속눈썹을 깜박이며 그를 살짝 흘겼다. 두 사람은 환하게 웃었다. 차남인 리차드와 줄리아는 런던에서 서로 알게 된 이후 긴 공백을 두고 가끔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우정의 유대는 한 번도 끊기지 않았다. 그 무렵 줄리아는 런던 주재 뉴질랜드 대사관의 요리사로 근무하고 있었고, 리차드는 왕립 연극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리차드, 당신 대단히 유명해졌다며? 이번엔 어떤 엑스트라로 나와요? 대사는 한마디라도 있나요?" "천만에 말씀, 이번 영화는 내가 주연이야! 잘 알고 있잖아. 내게 축하인사를 해야지." "그럴까? 리차드, 당신이라면 멋진 로미오를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줄리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빠가 감독을 하시니까 실패하면 야단난단 말이야." 마이클 말로는 엄한 감독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아들이라 해서 특별히 봐주는 일도 없었고, 거꾸로 아들을 최적의 배역으로 생각하면 남의 중상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코니가 유모 역을 맡는다는데 줄리엣 역을 로잘린드가 맡으면 근사하지 않을까?" "아이구, 그렇게 되면 근친상간이야. 줄리엣 역으로는 아빠가 열여섯 살 난 예쁜 소녀를 찾아왔어. 그녀는 지금 내게 푹 빠져 있거든." 리차드는 대 스타인 양 뽐내며 콧노래를 불렀다. "우리 모두 당신에게 푹 빠져 있어요." 줄리아가 말했다.


"어쩐지 연기 과잉의 악취가 주방에까지 풍겨왔어." 코니가 말하면서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리차드, 오늘은 무대 리허설이 있는 날 아니니?" "난 착실하기 때문에 오늘은 풀려났어요. 팬에게 사인쯤은 해줄 시간이 있지요." 그는 줄리아의 어깨까지 내려온 금발머리를 쓰다듬으며 장난기 어린 눈길을 보냈다. "지난 번 연극은 참 좋았어요." "왜 무대 뒤로 만나러 오지 않았어?" 리차드가 뜻밖이라는 듯 소리를 질렀다. "그럴 수밖에. 열광한 팬들이 무대 뒤 출입구에 몰려서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믿어지지 않는 얘기로군. 리차드의 성격이 엉큼하고 게으름뱅이인 데다 제멋대로 노는 버릇없는 망나니라는 걸 알았다면 정나미가 떨어져 모두들 달아났을 텐데." "어머니는 대본이나 외러 가시죠. 나는 줄리아를 저녁식사에 초대할 테니까." "어머, 미안해요. 난 다른 일이 있어요." 줄리아가 매정하게 거절하자 코니가 깔깔 웃었다. "줄리아, 그런 식으로 하면 돼. 줄리아가 그런 식으로 한 달만 우리 집에 와 있어 주면 이 아이 콧대도 조금은 낮아질 거야." 코니가 대본을 가지고 나간 다음 줄리아는 일어나서 창 밖을 보았다. "비가 멎은 것 같군요. 이제 가봐야겠어요." 그렇게 말한 순간 리차드가 그녀를 홱 돌려세우며 왁 껴안았다. "줄리아, 달아나지 마. 내 방에 가서 함께 포도주를 마시자구." "안 돼요, 리차드! 나는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어. 이것 놔요, 리차드. 아이 숨 막혀!" 키가 큰 리차드 품에 줄리아의 얼굴이 파묻혀 있었다. 리차드는 그녀를 놓아 주며 슬픈 듯 노래 불렀다. 내 불타오르는 이 마음을 그대는 차가운 미움으로 끄려고 한다네 하지만 불길은 세차게 타오르기만 하네 줄리아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몇 주일 전에 리차드가 수많은 청중 앞에서 같은 대사를 읊는 것을 들었다. 그는 확실히 로맨틱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의 은밀해야 할 일을 남들 앞에서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흠이 있다. "오늘은 그만두지. 어차피 8 월이 되면 줄리아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당신 가족 모두의 마음대로 될 예정이에요." "그런데 최근에 스티브를 만난 적이 있어?" 줄리아가 그렇지 않다고 머리를 옆으로 흔들자, 리차드 얼굴에 그늘이 졌다. "나도 그래. 연주 여행으로 오스트레일리아에 갔다 온 이래 한 번도 보지 못했어. 꼭 나를 피하고 있는 것만 같단 말이야." 리차드의 쌍동이 동생인 스티브는 로큰롤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의 섹시 보이스 덕분으로 인기가

치솟고

있었다.

지난

텔레비전에서

연주를

보았는데

수척하고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요?" "아직 확실한 건 모르지만 아마 연주 여행에 싫증이 난 것 같아. 지난 2 년 동안 계속 여행만 했으니, 그룹 내부에서 말썽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스티브 녀석은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는 느낌이었거든…" "그렇다면 크래머 별장에서 한 달 동안 편안히 쉬는 게 제일 특효약이겠군."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비에 젖은 차도를 걸어 자동차 있는 쪽으로 갔다. 리차드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리며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 줄리아를 향해 말했다. "편안히 쉰다고 하지만 우리 가족 중 꼭 한 사람만은 그렇게 안 될걸." "아버님 말이에요? 각본을 쓰신다니까…" "아니야, 휴 형님." "어머, 왜요?" "이번에는 휴 형도 여기로 오게 돼 있거든." "코니 말로는 오지 않는다던데. 휴는 가족끼리 갖는 오손도손한 즐거움 따위에는 그다지 흥미를 못 느끼는 사람 같아요." "형은 온 식구가 모인다는 걸 모르고 있어. 법률 공부하러 얼마 동안 미국에 가 있었거든. 이번에 대학생용 법률 교과서를 집필하게 되는데,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크래머 별장에서 단숨에 쓰겠다는 거야. 8 월이 되면 그곳에서 어떤 비극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라." "왜요?" "줄리아는 형을 잘 모르지. 물론 형은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사랑하고 있지만, 모두가 모이게 되면 그 속으로 뛰어드는 데만도 몇 달 전부터 자기를 부추겨서 마음의 준비운동을 해야 할 그런 괴짜거든. 붙임성이 좋은 사람도 아니어서 크리스마스 때도 가족의 단란함을 이삼 일 정도 견디는 게 고작이야." 그런 사람이 말로 집안의 일원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일 때문에 진력이 나버린 건지도 몰라. 변호사는 온갖 사람을 다 만나야 하고, 심지어 그 사람이 기르는 개에게까지도 아양을 떨어야 한다든데…" "형은 그런 사람도 아니야. '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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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밤에

어디에

있었습니까?'라며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그런 맹렬 변호사도 아니지. 요컨대 맛도 없고 멋도 없는 상법관계 전문 변호사거든. 휴는 사람의 감정만큼 갈피를 잡을 수 없고 믿지 못할 건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당신은 휴를 싫어하세요?" "아니, 좋아하고 있지. 어릴 때 싸움을 말려 주는 사람은 형이었어. 나이가 너무 차이나 약간 어려운 느낌을 주는 형이기도 했지. 그 탓인지, 우리 동생들은 형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한 나머지 그가 가족의 테두리 밖으로 나가 버리는 걸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었어. 그 결과, 지금은 형이 감히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로 변해 버렸지. 휴 자신이 어느 가족에 속하는 누구인가를 언젠가는 한번 가르쳐 줄 참이야. 그렇지, 8 월은 좋은 기회로군. 한번 정신을 차리게 해줘야지!" 줄리아는 지금까지 휴를 페리 메이슨 탐정 비슷한 이미지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법관계 변호사라면 아마도 따분한 남자임에 틀림없다. "어머니 품에 안겨서 머뭇거리는 형의 따분한 얼굴을 어서 구경하고 싶은걸. 형은 우리 죄임으로부터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할 거야. 어머니가 용서하지 않으실걸. 형도 어머니 앞에서는 꼼짝 못하거든." 가련한 휴. 줄리아는 이런 생각을 하며 자동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리차드가 농담으로 그런 말을 지껄였다 하더라도 휴 본인이 정작 그 얘기를 듣는다면 충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2 필립이 해외여행을 떠날 때까지 줄리아는 리차드 말로와 자주 데이트를 했다. 리차드와 상대를 한다는 것은 약간 피곤한 일이기는 했지만, 데이트는 즐거웠고 줄리아의 생활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어 준 것만은 확실했다. 만약 그가 여느 남자라면 자주 데이트를 원하는 것으로 보아 사랑에 빠진 증거로 볼 수도 있었지만 리차드에 관한 한 그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어떤 여성에 대해서도 마음 깊숙이 불타오르는 일이 없는 사람이다. 필립이 떠나고 줄리아가 크래머 별장으로 갈 날이 다가왔다. 리차드는 먼저 그곳에 가서 혼자 생활하겠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형 휴보다 먼저 가 있는 게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 바람에 마음씨 착한 줄리아는 보존이 가능한 특제 도시락을 만들어 주기로 선뜻 약속하고 말았다. 금요일, 리차드는 도시락을 소중히 받아들고는 과장된 몸짓으로 몇 번씩이나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먼지를 하얗게 뒤집어쓴 지프 차에 올라탔다. "형이 운명의 날을 맞이하는 최초의 순간에 입회하고 싶거든." 그는 신나는 듯 이런 말을 던지곤 요란한 엔진 소리를 뒤에 남기고 멀리 사라졌다. 고약한 운전수라고 줄리아는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크래머 별장에 가는 도중에 부모님이 계시는 집에 들러 주말을 보낼 참이었다. 줄리아는 열여덟 살 때 뉴질랜드를 떠나 요리 공부를 위해 유럽에 갔었고, 그 이후 양친과 떨어져 살아왔다. 그러나 가족은 언제나 그녀를 따뜻이 감싸주는 마음의 기둥이었다. 토요일 점심 전에 집에 도착한 줄리아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부모로부터 근황에 관해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다.

몸매가

호리호리한

어머니는 또

딸의

결혼문제에 대해

근심걱정을 늘어놓았다. 체격으로 보아 줄리아는 아무래도 아버지 쪽을 많이 닮은 듯했다. 몸집은 작지만 살이 토실토실하게 쪄 있어 학생 때는 급우들에 비해 풍만하게 두드러진 곡선이 부러워 혼자 괴로와하기도 했었다. "줄리아, 너는 지금까지 얌전한 청년을 자주 데리고 왔는데 아직 정해 놓은 사람은 없니?" 어머니는 만날 때마다 하는 버릇대로 결혼문제부터 들먹였다. "엄마, 아직 아무도 없어요." "설마 리차드 말로와…?" "리차드는 말도 안 돼요." 줄리아는 이렇게 말하면서 아버지 쪽으로 넌지시 시선을 돌렸다. 눈치를 챈 아버지가 줄리아 편을 들었다. "아직 괜찮아. 여보, 우리도 서른이 넘어 만났지 않았소? 다만 줄리아는 너무 눈이 높은 것 같아. 하긴 꿈을 너무 낮게 가지는 것보다는 낫겠지." 나는 너무 높은 데만 바라보고 있는 걸까, 그날 밤 줄리아는 정든 침대에 들어가 곰곰 생각해 보았다. 이튿날, 줄리아가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동생 벤이 오토바이 소리를 내며 돌아왔다. "누나, 잘 지내고 있어?" 벤이 물었다. "줄리아가 어제 오후에 잔디를 깎아 주었단다."


아버지가 말했다. "아이구 맙소사, 잔디 깎는 기계의 엔진이 터지지 않았어요?" "비슷하지. 바퀴가 하나 빠져 버렸으니까." 벤이 큰소리로 웃었다. 줄리아가 기계에 약하다는 것은 가족들의 웃음거리가 되어 있다. 세탁기도 청소기도, 심지어 전자오락기도 일단 줄리아 손이 닿으면 묘하게 고장이 나는 것이다. 녹슨 폭스바겐과 요란한 소음을 내는 믹서만이 유일하게 줄리아 뜻대로 고분고분 움직여 주는 기계다. 그 믹서는 지금 독일제 고급 부엌칼 한 벌과 두툼한 요리책과 함께 여행가방 속에 들어 있다. 일요일 점심시간이 지나면 크래머 별장으로 떠날 예정이었는데 가족들과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에 시간이 벌써 4 시가 돼 버렸다. 줄리아가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탄 것은 한참 후였다. 가슴에 <야생 동물 보호― 키위를 소중히> 라고 적힌 몸에 꼭 끼는 스웨터를 입고 그 위에 검은 가죽 재킷, 밑은 검은 가죽 바지에 카우보이 부츠를 신었다. 머리카락은 운전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뒤로 모아서 한 다발로 묶어 놓았다. 벤이 누나의 작은 몸집을 눈여겨 보면서 말했다. "그런 옷차림으로 있으니까 꼭 10 대 오토바이 광 같애. 내 오토바이를 빌려 줄까?" "내가 항상 어리게 보이는 게 분한 모양이지?" 줄리아가 응수했다. 어리게 보이는 것은 키가 작기 때문만은 아니다. 달걀 모양의 작은 얼굴, 귀엽게 생긴 파란 눈동자,검은 눈썹이 어우러져 천진난만한 소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녀 같은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줄리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코로만델 반도를 향해 자동차를 몰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추위를 느끼기

시작했지만 자동차의 히터는

고장이다.

가죽

재킷과

바지를 입고

것이

다행이었다. 고물 딱정벌레인 폭스바겐은 코로만델 산맥을 가로지르는 꼬불꼬불한 좁은 길을 숨을 헐떡이며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의 전원풍경은 간데없고 사나운 대자연의 경관이 눈앞에 다가왔다. 울창한 우림(雨林)이 큰 천장처럼 대지를 덮었고 뉴질랜드에서도 희귀한 새와 동물들이 이곳을 천혜의 안식처로 삼고 있었다. 도시에서 자란 줄리아조차도 그 장엄한 아름다움 앞에서는 저절로 외경심이 우러나왔다. 딱정벌레는 천천히 오르막길을 기어올라 가지만 뒤에 오는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아 안심이었다. 길의 한쪽은 덤불이 우거진 급경사로 이어지고, 다른 한쪽으로는 눈이


아찔해지는 아래쪽 협곡의 덤불이 보인다. 도로는 대자연에 대한 인간의 보잘것없는 조그마한 도전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말끔히 포장이 되어 있고 곳곳에 길 안내판도 서 있어 편리했다. 가슴이 떨릴 만큼 가파른 오르막길에 들어섰을 때 자동차의 백미러에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낮게 소리를 질렀다. 회색의 큼직한 괴물이 사정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앞쪽으로는 꾸불꾸불한 길이 아직 많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뒷차가 안전하게 추월해 나갈 수 있는 장소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아마 속도를 늦춰 주겠지. 운전사는 남자임에 틀림없다. 여자라면 이 험한 길에서 저런 속도를 내어 제 운명을 시험하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나이는 속도를 늦추기는 했지만 금방 부딪칠 듯 바짝 뒤꽁무니에 붙어 따라왔다. 줄리아가 차를 세워 자기를 앞서가게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뒷차는 값비싼 외제 자동차인데 도대체 운전하는 버릇이 돼먹지 않았다.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조차도 모르는 경솔한 젊은이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별안간 딱정벌레의 보네트 앞쪽에서 무엇인가가 희게 빛나서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약간 옆으로 꺾었다. 그 순간 자동차 뒷부분에 충격을 느꼈다. 저 스피드 광이 끝내 충돌을 하고 말았구나! 줄리아는 좁은 길 가장자리에 차를 세웠다. 역시 내가 길을 비켜 주었어야 했다. 이런 고물 자동차를 가지고 염치없이 길을 독점한 것이 잘못이다. 그러나 법률상으로 뒷차에게 잘못이 있는 게 분명하니 내가 책임을 질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뒷차의 남자가 너무 핏대를 올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사이드미러를 통해 보니 잿빛 자동차의 문이 열리고 은발의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우선 안심해도 좋다. 돈 많은 노신사라면 폭력을 휘두를 염려는 없다. 줄리아는 창을 내려 도회지에서는 맛볼 수 없는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그러나 남자가 차에서 내려서는 것을 본 줄리아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은발의 머리가 점점 더 위로 올라간다. 대단한 키다리, 엄청난 거인이다! 어깨도 딱 벌어진 거대한 몸체가 마치 마술사의 구두라도 신은 양 성큼성큼 다가온다. 사이드미러 전면에 퍼진 그 얼굴은 노인이기는커녕 아직 30 대 사나이 같은 인상이다. 은발은 새치일까? 거인은 앞으로 몸을 굽혀 차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잿빛 눈동자는 차가왔다. 줄리아는 얼음같은 목소리가 귀에 박히리라 예상했다. "괜찮으신가요?"


줄리아는 멍하니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뜻밖에도 그의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에서는 따뜻한 기운마저 풍긴다. 대개 남자는 자기 자동차에 이상한 집착을 가지는 법인데 이 사나이는 너무나 태연자약하다. 정신병원에서 빠져나온 환자일까? "네, 네." 줄리아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헛기침을 했다. "네, 저는 괜찮아요. 선생님은?"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함께 보시지 않겠습니까?" 차에서 내리면 어떻겠느냐는 뜻이다. 사나이가 상체를 일으키고 두 팔을 밑으로 축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 손이 얼마나 큰지! 줄리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돌려 잿빛의 뒷차를 보았다. 호화판 외제 자동차를 보자 약간 마음이 놓여 마침내 차에서 내렸다. 굽이 좀더 높은 부츠를 신고 왔더라면 좋았을걸. 내 머리가 이 남자의 가슴께까지밖에 닿지 않는다. 하지만 키쯤으로 겁을 먹어서는 안 돼. 줄리아는 가슴을 펴고 우아한 잿빛 괴물의 앞쪽으로 걸어갔다. 검은색 범퍼는 상한 데가 한 군데도 없다. 흐를 듯한 곡선을 그린 보네트 위쪽에 은색으로 빛나는 마크가 붙어 있다. 고급차 마세라티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비싼 차라는 걸 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다. 이 사나이가 태연한 태도를 취한 까닭도 비로소 알 것 같다. 약간의 수리비쯤은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딱정벌레 쪽이 상처를 입었지만 그래도 범퍼가 조금 들어갔을 뿐이다. 거인은 육중한 발걸음으로 다가와 딱정벌레의 부상 정도를 살피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그 등 뒤에 서서 재킷에 덮인 넓적한 등을 바라보았다. 구두는 얼핏 보아도 이탈리아 제임에 틀림없다. 별로 시기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지만, 상대방 사나이의 유유한 태도가 약간 괘씸하다. "선생님은 바로 내 뒤꽁무니에 붙어 차를 모셨죠?" 줄리아는 분명히 말했다. "다행히 크게 상하진 않았군요. 물론 보험에 가입해 있겠지요?" 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물론입니다. 그렇지만 보험회사가 지불해야 할 일이 아닌 것 같군요." 거인은 아무런 말도 없이 천천히 안주머니에서 펜과 명함을 끄집어내서 명함 뒤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자기 자동차 쪽으로 돌아와 핑크 색 메모 용지에 자기 주소와 성명, 보험회사 이름을 재빨리 적었다. 그 다음 다시 거인 앞에 섰다. "여기 있습니다."


메모지를 상대방에게 건네주고 명함을 받았다. 'G.B.H.월턴'이라고 박혀 있다. G.B.H.라니, 무슨 약자일까?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 웃고 말았다. "사고가 재미납니까." 또다시 겉보기와는 다른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 이쪽에서 안달이 날 정도로 침착한 태도다. "어머, 그렇지 않아요." 줄리아는 웃음을 멈추고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선생님은 정말 거인이세요!" 이렇게 생각나는 대로 지껄인 직후 당장 후회가 되었다. "나도 동감입니다." 거인이 말하며 줄리아의 메모를 천천히 훑어본 다음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의 몸놀림은 만사가 느릿느릿하다. 역시 몸집이 크면 머리가 온몸 속을 순환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는 걸까? "이 사고의 원인은 선생님께 있습니다." 줄리아는 사나이가 사고에 대해 무엇인가 한마디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말을 던져 보았으나 사나이는 고개를 약간 갸우뚱했을 뿐 아무 말도 없이 폭스바겐의 문을 열어 주었다. 줄리아는 체념하고 운전석에 앉았다. "그럼 법정에서 만나요." 줄리아는 마지막 말을 던졌다. 최후의 대사를 뒤로 남기고 멋지게 무대에서 퇴장할 참이었는데 일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5 분 후, 뭔가가 잘못된 듯한 엔진을 응시하고 있던 줄리아는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거인을 쳐다보았다. "도와 주실 수는 없어요?" "나는 자동차 정비공이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죠?" "근처 주유소까지 가면 되겠지요." 사나이의 말투에서 마지못해 하는 기분이 역력히 느껴졌기 때문에 줄리아는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 "폐를 끼치게 돼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가는 도중에 선생님을 덮치지는 않을 거예요. 그 점은 안심하세요."


그는 묵묵히 줄리아의 짐을 마세라티에 옮겨 짐칸에 다 집어넣었다. 줄리아는 폭신폭신한 가죽으로 덮인 조수자리에 앉았다. 줄리아는 지금까지 이런 고급차엔 가까이 가본 적도 없었다. 옆에 와서 앉은 거인이 가볍게 손을 움직이자 자동차는 들릴 듯 말 듯한 엔진 소리를 내면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차 안이 더웠기 때문에 줄리아는 가죽 재킷을 벗고 안전벨트를 매었다. 차는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창 밖을 보고 있지 않으면 오르막의 급한 커브를 돌고 있다는 것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차는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이 차는 마세라티군요." "그렇죠, 차종은 보라입니다." "성능은 어떤가요? 가령 스피드는?" 사나이는 계속 앞을 보는 채로 물었다. "정말 이 차에 대해 흥미가 있어요?" "나는 모든 것에 흥미가 있어요." "그럼 대답해야겠군. 이것은 4,719cc 의 4 륜구동, 4 기통, 출력은 335 마력, 매분 회전수는 6,000, 최고속도는 시속 270km 이상." "네, 그렇군요." 줄리아는 대답했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몰랐다. "지금까지 달려본 최고속도는?" "상당히 빠른 속도였지요." 줄리아는 한숨을 쉬며 다시 말했다. "나는 사복형사가 아니예요. 좀 쉬운 말로 해주실 순 없어요?" "160km 를 달린 게 최고속도였소." 이 사나이는 스피드에서 스릴을 느낄 그런 족속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너무 고지식해서 그런 것과는 인연이 먼 인간인 듯한다. "그때 기분은 어땠어요?" "재미있었지." 줄리아는 소리내어 웃었다. 이 사나이를 보고 있노라면 어떻게든 웃겨 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무표정한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싶어진다.

웃는

얼굴은

사람됨됨이를 반영하는 거울이고, 어떤 경우에 웃는가에 따라 그 성격을 알 수도 있다. 이 사나이에 관한 한 지금으로서는 그 겉모습밖에 아는 것이 없다. 키는 190cm 를 능히 넘을 것 같다. 얼굴 생김은 완강한 느낌을 주지만 살빛은 무척 창백하면서도 매끈매끈하다.


주름살이 적어서 꼭 가면처럼 보인다. 눈썹이 갈색인 것으로 보아 머리털도 전에는 같은 갈색이었겠지만 지금은 온통 은빛으로 변해 있다. 억센 머리털을 짧게 깎은 스타일이 아주 멋지게 보인다. "왜 제가 브레이크를 밟았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으시는군요?" 줄리아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왜 충돌하게 되었는지 궁금하시지도 않으세요?" "이유는 알고 있습니다. 찌르레기는 외국에서 들여온 새라는 걸 알고 있습니까? 그 새는 지금 너무 번식해서 바야흐로 해조로 되고 있습니다." "그럼 제가 그 중 몇 마리를 치어죽여야 이 세상이 살기 좋아진다는 뜻이에요?" 줄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날카롭게 나왔다. "미안합니다만 저는 어떤 생물이든 죽이는 건 싫어요. 해조든 익조든 생물은 생물이죠. 선생님 같은 분은 인간에 대해서도 같은 소리를 할 것 같군요." 사나이는 순간적으로 놀라는 표정을 지었고 줄리아는 감쪽같이 한방 먹였다고 속으로 기분 좋게 웃었다. 사나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신 말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찌르레기보다 사람 쪽을 더 소중히 여겨 주기를 바라겠소." "선생님의 운전 버릇만 좋았다면 그런 결정적인 순간 따위는 생기지 않았겠죠." 줄리아는 상대방에게도 일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어서 이렇게 쏘아붙였지만, 원래 마음이 정직한 그녀는 다시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리석은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새를

치어죽여서는

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당신 부모님은 딸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나 있을까요?" 뜻밖의 질문이었다. 그래서 줄리아는 그가 엉뚱한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속으로 웃었다. '꼭 10 대 오토바이 광 같다'고 한 동생의 말이 바로 맞은 셈이다. 어리게 보이는 외모 때문에 가끔 그녀는 난처한 처지에 놓이곤 했다. 특히 남자들이 그녀를 지나치게 감싸주고 선심을 쓰려 할 때가 그랬다. 한편으로 그것은 상대방을 깜짝 놀라게 해주는 효과도 있었다.


'몸이 작으면 철도 덜 든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족속들은 그녀가 겉보기보다 만만치 않은 성숙한 숙녀라는 걸 알게 되면 의레 놀라는 것이었다. 아마 이 사내도 내가 미숙한 탓으로 사고는 발생한 거라고 좋은 말로 슬슬 구슬러서 빠져나가려고 하겠지, 줄리아는 생각했다 "물론 부모님께서는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시죠." 줄리아는 짐짓 명랑하게 대답했다. "미리

말씀

드리지만

나는

틀림없이

운전면허도

가지고

있습니다.

열여섯

살은

넘었으니까요." "그렇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요." 길이 직선 코스로 접어들었다. 사나이의 잿빛 눈이 한순간 도로에서 벗어나 그녀의 건방진 표정을 힐끗 보더니, 스웨터를 봉우리처럼 위로 밀어올린 풍만한 가슴의 곡선으로 내려가고 이어 검은 가죽바지에 감싸인 통통한 허벅지 쪽을 훑었다. "내 모습이 마음에 드셨나요?" 줄리아는 상대방에 도전하듯 말했다. "당신은 어른 흉내내기 놀이를 하면서 혼자 좋아하는 어린애 같군." 그 사나이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녀는 또 속으로 웃었다. 그렇지, 천진난만한 얼굴에 풍만한 육체를 가진 여자는 언제나 백안시당하게 마련이지. "그렇지만 그런 놀이는 재미있잖아요. 성장도 빨라질 것 아니겠어요? 그건 그렇고 선생님은 뭘 하시는 분이죠?" 아마도 은행원이 아니면 회계사라든가 의사 따위의 딱딱한 직업일 것이다. "일을 합니다." 이 말뜻은 뻔했다. "물론 나도 일하고 있어요. 실업자 수당을 받는 사람은 아니랍니다. 지금 현재는 어떤 일을 끝내고 다음 일을 하러 가는 도중이지만…" "무슨 일이죠?" 두 번째 질문이다. 사나이의 무거운 입이 조금씩 풀리고 있는 듯했다. "가정부노릇을 하고 있어요." 그녀는 일부러 직업의 격을 낮춰 말했다. "나는 그 직업을 좋아하는데 어느 주인이나 다 내게 손을 대려고 하는 데는 정말 짜증이 난답니다." "그런 모습을 하고 쏘다니면 누구든 엉뚱한 생각을 품게 마련이지." 사나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참, 그리고 나는 브래지어를 한 적이 없어요." 줄리아는 심술궂게 지껄였다. "답답해서 숨이 막히거든요." "그렇다면 남자 주인들이 지당한 반응을 나타낸 데 대해 놀라지는 않았군." "솔직하게 말해 멋진 남자라면 나도 좋아해요." 줄리아는 자기자신도 놀랄 정도로 대담하게 대답했다. 거인이지만 속아 넘어가기 쉬운 사나이 같았다. "그런 일들을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부모님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아마 이런 얘기를 들으시면 펄펄 뛰며 화를 내시겠죠. 머리가 굳어진 옛날 분들이니까." 나도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구식 사고를 가지고 있는데…라고 줄리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사나이를 놀려 주는 데도 짜증난 줄리아가 자기 진짜 나이와 직업을 말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바로 그 순간 사나이가 노골적으로 따분하다는 투로 말했다. "현대의 윤리에 관해 얘기하는 것도 좋지만 음악을 들어도 상관없겠지?" 사나이는 줄리아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카세트를 틀었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클라식 음악이 자동차 문 속에 장치된 스피커로부터 고요히 흘러나왔다. 음악을 잘 모르는 줄리아 귀에도 달콤한 곡이었다. 줄리아는 하는 수 없이 시트에 몸을 기대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황홀한 기분 속으로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15 분쯤 지나 자동차가 속도를 늦추며 멈췄다. 줄리아는 비로소 눈을 떴다. 그곳은 주유소였다. 사나이는 그 큰 체격에 비해서 날렵하게 차에서 내렸다. 줄리아도 따라 내렸다. 사나이는 청색 작업복을 입은 주유소 직원에게로 다가가 줄리아의 어려운 처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줄리아를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로 취급하는 그런 태도였다. 줄리아는 화가 나서 두 사람의 대화 속에 끼어들었다. "자동차 수리를 부탁하는 일쯤은 나도 할 수 있어요. 미안하지만 선생님은 내 짐을 꺼내 주실 수 없겠어요?" 거인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순순히 차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로부터 해방이 되어 기쁜 듯이 보였다. 자동차 수리를 부탁한 다음 줄리아는 지금부터 어떻게 할까 생각했다. 크래머 별장까지 가려면 아직 20km 나 남아 있다. 그렇다. 리차드가 먼저 와 있을 게 아닌가. 전화를 걸어 여기까지 나를 데리러 오게 하자. 더 이상 저 거인 운전수의 신세를 지기는 싫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큰 트럭 한 대가 굉음을 내며 주유소 안으로 들어왔다. 높은 운전석 위에 앉은 사람은 존이었다. 존은 동생의 대학 친구다. 줄리아가 트럭 쪽으로 잰걸음으로 다가서자 존이 엔진을 끄고 창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아아, 줄리아. 참 오랜만이에요. 그런데 이런 산골짜기에서 뭘 하고 있죠?" 줄리아가 사정 얘기를 하자 존이 당장 말했다. "그러면 이 트럭을 타고 가면 어떨까요? 지금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조금 먼 길을 돌아서 가도 상관없어요." "그래 주면 정말 고맙지만 존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줄리아는 학생의 일거리가 얼마나 귀한가를 알기 때문에 약간 근심스러운 듯 물었다. "걱정마세요. 우리집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걸요. 짐을 여기로 옮겨 놓으세요. 나는 잠깐 내려 담배도 사고 식사 좀 하고 올게요." 줄리아는 기쁜 나머지 트럭에서 뛰어내린 존을 꼭 껴안아 주었다. 이어 그녀는 키 큰 사나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뛰어가 숨을 헐떡이며 신나게 말했다. "태워 주셔서 고마왔어요. 나는 여기에서부터 다른 차로 가겠어요." "조금 경솔하지 않을까?" 사나이는 무뚝뚝하게 한마디 했다. "선생님 신세를 지는 거나 다른 사람 차를 타는 거나 다를 게 뭐 있나요?" 이 사나이는 내가 존에게 매달리는 것을 보고 무엇인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트럭 운전사가 내 동생 대학 친구라는 걸 알 턱이 있는가. "그렇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셈이군." 거인은 트럭에 타지 말라고 설득할 의사를 포기한 듯했다. 어떤 일이든 말려들지 않는 것이 이 사나이의 특기인가 보다.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 떠나는 거인의 등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던졌다. 사나이는 마지못해 줄리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줄리아는 트럭 좌석에 여행가방 두 개와 핸드백을 올려 놓고 자기도 좌석에 앉아 존이 돌아오기를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드라이브는 즐거웠다. 높은 자리에 앉아 다른 차들을 내려다보는 기분도 좋았다. 존도 즐거운 말동무가 돼 주었다. 그는 가까운 읍내에 사는 숙모 댁에서 일박하기로 되어 있어 저녁을 함께 먹자고 초대했다. 줄리아는 기꺼이 초대에 응했다. 오늘 밤은 아직 리차드의 식사를 만들어 줄 의무가 없다.


"그렇지만 한마디 인사는 하고 가야겠어." 리차드를 걱정하게 하는 것은 좋지 않으니까. 크래머 별장 내부의 차도에는 잡초가 우거져 있었고 트럭은 너무 커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길가에서 내려 여행가방을 하나씩 들고 현관까지 걸어갔다. 별장은 1930 년대에 붉은색 벽돌과 목재를 써서 지은 아담한 이층이다. 주방이 넓기 때문에 줄리아에게는 참으로 즐거운 일터였다. 줄리아는 존과 함께 큼직한 현관 앞 넓은 층계를 올라가 두꺼운 나무문에 달린 육중한 손잡이로 계속 문을 두드렸지만 집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존, 차고 쪽을 살펴 줄래? 나는 주방문을 열어보겠어." 리차드는 외출했을지도 모른다. 뒷문 계단 옆에 놓인 화분을 들어올리니 코니 말대로 열쇠가 있었다. 부엌은 저녁 어스름에 싸여 고요 속에 파묻혀 있었다. 전등을 켰다. 다색과 황색으로 통일된 주방 내부가 따뜻한 불빛 속에 드러났다. 그러나 주방 내부 그 자체는 찬바람이 불 정도로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줄리아가 만들어 준 특제 도시락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때 존이 뛰어왔다 "차고는 몽땅 잠겨 있어요. 열쇠구멍에는 거미줄뿐이고." "내가 리차드의 침실을 보고 올게." 이층에 있는 리차드의 침실도 주방과 마찬가지로 텅텅 비어 있었다. 티끌 한 점 떨어진 것이 없고 난로가에는 장작이 쌓여 있었다. 옷장 속에는 옷이 한 벌도 없었다. 줄리아는 부엌으로 돌아와 거친 목소리로 내뱉었다. "정말 못 말려! 리차드는 아직 여기에 오지도 않았어." "아마 계획이 바뀐 거겠지." 존이 말했다. "아니야, 리차드는 처음부터 이렇게 할 계획이었어!" 그것도 모르고 나는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 얌전히 특제도시락까지 만들어 주지 않았던가. 지금쯤 리차드는 새 애인과 더불어 아기자기하게 그 도시락을 펼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도시락을 받아들었을 때 고맙다며 너무 지나치게 법석을 떨더라니. 왜 눈치를 못 챘을까? 두고 보자, 리차드 말로! 줄리아는 단단히 속으로 벼르며 주방 옆에 딸린 자기 침실로 짐을 옮겼다. 줄리아에게 할당된 침실은 구석에 간이 침대가 있고 화장실도 붙어 있다. 다만 목욕만은 이층 욕실을


쓰게 돼 있었다. 줄리아는 다부진 발걸음으로 방에서 나와 존과 함께 그의 숙모님 댁으로 향했다. 그날 밤, 존이 숙모의 승용차로 줄리아를 크래머 별장까지 데려다 주었을 때는 이미 밤 12 시를 넘어 있었다. 존을 보낸 줄리아는 주방문까지 종종걸음으로 뛰어가 화분 밑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런데 열쇠가 온데간데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밖은 온몸이 얼어붙을 정도로 춥다. 하는 수 없이 현관 쪽으로 돌아와 위를 올려다보았다. 창문 하나가 약간 열려 있었다. 달빛 속에 떠오른 하얀 창틀이 눈에 들어왔다. 리차드 방임에 틀림없다. 내가 떠나고 없는 사이에 들어와 지금은 단잠을 자고 있겠지. 미안하다는 생각 따위는 조금도 안했을 테지! 줄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벽에 붙은 나무로 된 비상계단으로 다가가 재빨리 오르기 시작했다. 발코니 난간을 넘은 후 살그머니 프랑스 식 창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는 이불이 사람 모양으로 솟아올라 있었다. 줄리아는 여기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복수의 쾌감으로 가슴이 짜릿했다. 한 번 심호흡을 한 다음 성큼성큼 침대 쪽으로 가 이불을 홱 벗겼다. 그리고는 소리를 질렀다. "리차드, 그리운 리차드!" 침대에 엎드려 있는 리차드의 몸을 뒤집어 반듯하게 뉘고는 그 위에 몸을 던져 신경질적인 소리로 애원했다. "달링, 오늘 밤에는 꼭 나를 안아주세요, 네? 나를 당신 것으로 만들어 주세요! 내 몸에 리차드 당신 이름의 낙인을 찍어 주세요!" 줄리아는 상대방의 벌거벗은 가슴을 손톱으로 찌르며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애를 먹었다. 그런데 느낌이 어쩐지 좀 다르다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리차드라면 지금쯤 펄펄 뛰며 화를 내고 있거나 깔깔거리며 웃고 있을 텐데. 게다가 분명히 리차드는 이처럼 가슴에 털이 많이 나 있지도 않은데… 줄리아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 오싹해져서 침대에서 몸을 빼고 물러섰다. 그 순간 침대에서 굵은 손이 뻗어나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 "실망시켜서 미안하오만, 나는 그 그리운 리차드가 아니오!" 줄리아는 그 자리에 장대처럼 우뚝 섰다. 이 목소리… 이 점잔 빼는 말투… 설마하니 그럴 리가! 검은 그림자가 벌떡 몸을 일으키고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 옆의 스탠드를 켰다. 줄리아는 눈을 의심했다.


회색의 마세라티를 운전하고 있던 그 거인! 그가 졸리운 듯한 눈으로 줄리아 자기를 노려보는 게 아닌가. 그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어쩐지 당신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 3 "당신은 여기서 뭘 하고 있어요?"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지르며 곰같은 팔을 홱 뿌리쳤다. "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나이는 침대에 두 팔을 짚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새털 이불이 허리 부분까지 내려가고 검은 실크 잠옷이 거대한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가슴 앞이 벌어져 조금 전에 줄리아가 만졌던 가슴털이 드러나 보였다. 참으로 굉장한 체격의 소유자! 마치 프로 레슬러 같다. "여기는 리차드 침실이에요." 줄리아는 방안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여기는 난로 준비가 돼 있는 유일한 방이기도 해." 그 거인은 재미있다는 듯 대답했다. "방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당신이 나갈 때 창문을 닫아 주지 않겠어? 외풍이 몹시 심하거든." 줄리아는 어깨를 꼿꼿하게 세우면서 창문 쪽으로 걸어가 쾅 하고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침대 쪽으로 돌아와 아직 잠이 덜 깬 얼굴을 향해 물었다. "당신은 리차드를 어떻게 했어요?"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질문이었다. 설사 이 사나이가 리차드를 굴뚝 속에 쑤셔넣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이 자리에서 순순히 실토할 위인은 아니다. 나 자신도 저 곰같은 손으로 한 방 얻어맞으면 뻗어 버릴 게 아닌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리차드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소. 첫째, 나는 리차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그런 건 어떻든 상관없어. 나는 지금 몹시 졸리니 잠을 좀 자게 해줘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잠에서 깨는 바람에 쉰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잘 때 몸부림을 많이 치는 편인 것 같다. 차 안에서 보았을 때는 턱수염이 깨끗이 깎여 있었는데 그 수염이 벌써 자라 까칠까칠해 보였다. 사나이의 그런 너저분한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줄리아의 마음도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사나이의 목소리가 줄리아의 기분을 뒤흔들어 놓았다. "당신들 꼬마 팬들에게도 소문을 퍼뜨려 주었으면 해. 지금 10 대 우상 리차드는 이 집에 계시지 않다고 말이야."


"꼬마라니!" 줄리아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린다. "나는

연예인

뒤나

쫓아다니는

그런

말괄량이

소녀가

아니예요!

리차드의

친구일

뿐이에요." "대개들 그렇게 말하지.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당신 부모님이 오늘 이 모습을 보셨다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사나이는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은 말로 씨 집안의 친군가요? 여기로 온다고 말해 주었으면 계속 차를 타고 왔을 텐데…" "내 행동 일정을 일일이 당신에게 보고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했지. 또 미남으로 생긴 젊은 트럭 운전사를 더 좋아할 것으로 보았거든." "그 트럭 운전사는 친구예요." 줄리아는 사나이의 의심스러워하는 얼굴을 노려보았다. "리차드와도 오래 된 친구 사이구요." "리차드는 그 따위 친구를 수천 명쯤 가지고 있을걸." 줄리아는 그 말을 되받아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당신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말로 부인께서 알고 계신가요?" 도대체 이 작자가 누구야? 말로 가족들은 아무도 초대하지 않기로 했다는데 벌써 그 약속을 변경해 버린 걸까? "아니, 모르고 있을 거요. 또 그녀가 알더라도 아무 걱정도 하지 않을 거고." 그럴까?

내일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해야겠다.

만약

내쫓으라고

한다면

가정부

브라베이지에게 부탁을 해야겠다. 그녀는 체격이 좋으니까 이 사나이와 충분히 맞서 싸울 수 있겠지. "당신은 누구죠? 이 집에는 어떻게 들어왔어요?" 줄리아는 끈질기게 물고늘어졌다. "열쇠로 열고 들어왔소." "화분 밑에 놓인 열쇠? 그래서 열쇠가 없었구나!" "그 말을 듣고 보니 당신도 얌전하게 문을 열고 들어올 줄 안다는 거로군. 자, 이젠 그 문으로 나가 주기를 바랄 뿐이오." "당신이 언제까지 이곳에 있게 될 거라는 말쯤은 해줘도 상관없잖아요?"


결국 내가 이 사나이의 식사를 만들게 될 것 같다. 내가 철딱서니없는 10 대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긴 그가 오해했다고 해서 그걸 따질 자격이 내게 있는 건 아니지만―. 거인은 체념한 듯 한숨을 쉬고 베개에 몸을 기대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불빛 속에서 그 얼굴은 창백하게 보였다. 사나이의 모습이 마치 흰 대리석 조각 같았다. 잠이 든 것 같았는데 무거운 눈꺼풀이 스르르 열리며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당신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지금이 몇 시인가를 생각해 봐요. 질문은 아침까지 기다렸다 해도 되지 않소?" "내가 무엇을 하러 왔는지 궁금하지도 않아요?" 정말 믿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이처럼 궁금증이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까. 내가 정신병자일 수도 있는데! "당신이 뭘 하러 왔는지는 알고 있어. 경솔하다는 것도 재확인한 셈이고." "아무튼 저도 여기서 머무르게 되어 있어요." 줄리아는 결국 자기 쪽에서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숙식 제공까지 받는단 말이지?" "여보세요, 난 스타나 쫓아다니는 말괄량이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나는 요리사라구요." 사나이는 다시 몸을 벌떡 일으키며 비꼬듯 말했다. "정말 놀랍군, 진. 아주 날씬해졌어." "내가 브라베이지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계시죠? 그녀 남편이 허리 수술을 했기 때문에 제가 대신 요리를 맡게 되었어요." "당신이 요리를 한다구? 이 빈 집에서? 물론 당신이 진짜로 요리를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지만." 자기 직업에 대해 힐난당하게 되자 줄리아는 화가 났다. "나는 코르동블뢰에서 요리를 배운 정식 요리사예요. 자격증도 틀림없이 가지고 있어요." "언제 어디서 자격증을 땄지? 요람에서? 에그즈 베네딕트의 조리법을 알아?" "뭐라구요?" 느닷없이 요리에 관한 질문을 받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저녁식사 때 존의 숙모님 댁에서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일가? "그, 그것은 달걀이에요, 달걀로 만드는 요리예요." 에그즈 베네딕트쯤은 수백 번도 더 만든 요리인데 대답이 쉽사리 나오지를 않다니! 사나이가 두 손가락을 퉁겨 딱 하는 소리를 냈다.


"알았어. J. 프라이의 J 는 자네트의 J 였구나. 브라베이지의 조카딸이지. 얘기는 많이 들었어. 리차드 방에 밤중에 드나드는 것도 상관없지만 숙모님에게 들키지 않도록 해야 돼." 줄리아는 기가

막혀서 상대방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브라베이지

아주머니는

언제나

자네트가 구제불능의 불량소녀라고 투덜거렸다. 그런 망나니 고교 퇴학생과 같은 취급을 당하다니 말이 되는가. "내 이름은 자네트가 아니라 줄리아예요." 줄리아는 화를 내며 바지 주머니에 두 없지손가락을 끼운 채 온몸을 흔들며 쏘아붙였다. "나는 아직 당신의 정체를 몰라요. 누구죠?" "거 참 귀찮은 아가씨로군. 내 이름은 휴라고 하오." "휴라니, 성은 뭐죠?" "허허, 리차드와 친하게 사귀는 데만 정신이 팔려 리차드 가족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단 말인가?" 상대방의 신랄한 말투에 줄리아는 흥분했다. 분명히 그 명함에는 G.B.H.라고 찍혀 있었다. 성이 말로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군요."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나?" 거인은 끄떡도 하지 않고 응수했다. "말로 집안 사람들은 모두 머리색이 붉잖아요?" "찰스는 그렇지가 않아." "그리고 그 가족들은 모두 날씬해요. 당신, 당신같이 탱크처럼 생기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또 당신은 너무 늙어 보여요. 아무리 젊게 봐 주어도 서른여섯은 넘어 보이는데요." 회색 눈동자 안쪽에서 웃음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나는 서른네 살이오." "그렇다면 나이보다 훨씬 겉늙어 뵈는군요." 줄리아는 덮어놓고 쏘아붙였다. "서른네 살이라고 한다면 당신이 태어났을 때 코니는 몇 살이었을까…?" 줄리아는 암산이 서툴렀기 때문에 여기서 침묵이 오래 계속되었다. "열다섯 살쯤 되었겠지." 그 사나이가 조용히 답을 가로챘다. "어떻든 내 집안 족보를 일일이 설명할 의무는 없소. 잠이나 잡시다."


이번에는 줄리아도 맞설 생각이 없었다. 그녀 자신도 피곤했다. 아무 말없이 방에서 나가기로 했다. 사나이는 줄리아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새털 이불을 끌어올렸고 줄리아가 문을 닫자마자 전등을 껐다. 줄리아는 달빛이 비치는 계단을 내려와 주방 옆에 붙은 침실로 갔다. 저런 바윗덩이같은 사나이가 이 집에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든든했다. 그렇지만 저런 사나이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이쪽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주방에서 물건 부딪치는 소리가 나 눈을 떴다. 아직 날도 새기 전에 저 사나이가 내려왔을까? 줄리아는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켜 두툼한 코르덴 바지와 스웨터를 입었다. 세면장에서 간단히 세수를 하고 머리를 매만진 다음 사뿐사뿐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줄리아, 안녕? 미안해요, 잠을 깨워서." 얼굴색이 붉은 뚱보 가정부 브라베이지를 만나자 줄리아는 반가왔다. "괜찮아요. 어차피 나도 일어날 시간이었거든요." "당신이 사놓으라고 적어 보낸 물건들을 다 갖다 놓았어요. 일찍 와서 일찍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거든요." 진 브라베이지는 소매를 걷어올리고는 굵은 팔뚝을 내보이며 신나게 남편의 건강에 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가 숨을 돌리기 위해 말을 끊었기 때문에 줄리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리차드가 먼저 와 있을 줄 알았는데요…" "정말 그래요. 애써 방까지 치워 놓았는데 전화를 걸어 주말은 친구들과 함께 지내겠다고 하지 않겠어요. 뻔하죠, 친구라는 게 여자 친구 아니겠어요?" 브라베이지 부인은 지겹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줄리아는 상대방에게 여유를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리차드 침실을 쓰고 있어요." 둥글고 큰 얼굴에 갑자기 환한 빛이 돌았다. "그분은 리차드 도련님과는 사람이 달라요. 주말에 별장에 갈 텐데 월요일까지는 도와 주지 않아도 좋다고 금요일에 전화로 미리 말씀하셨거든. 리차드 도련님 같으면 주말을 혼자 보낸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거예요. 리차드는 어쩔 수 없어요." "그런데 그분은 누구신가요?" "어머, 그분을 모르세요? 휴 도련님이에요." 그분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그래서 내가 준비해 놓은 방을 쓰시라고 말해 두었죠." 줄리아는 의자에 앉았다. 저 거인이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는 휴 말로가 아니죠?" 브라베이지 부인은 테이블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들의 포장을 풀면서 말했다. "네, 그분은 휴 월턴이라고 해요." 그러고 보니 명함에는 G.B.H. 월턴이라고 찍혀 있었다. "왜 성이 다를까요?" "휴 도련님은 양자로 오셨어요. 처음 여기 왔을 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그때가 열두 살이었는데 바짝 마른 꼬마였고 말을 할 때도 속삭이는 듯 쥐처럼 겁에 질려 흠칫흠칫 놀랐어요." "우리가 같은 사람 얘기를 하고 있는 거겠죠? 쥐라기보다 사자라고 부르는 편이 맞지 않을까요?" 브라베이지 부인은 온몸을 뒤흔들며 웃었다. "지금은 그렇게 되었지만 그때는 영양실조에 걸린 듯했어요. 음식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보기만 하면 맹렬한 식욕을 발휘해 마구 먹어치우곤 했어요! 그 덕분에 콩나물처럼 죽죽 자라났고 학교에서는 육상선수가 되어 이름을 날렸죠. 공부를 뒷전으로 미루고 운동에만 열중했다면 올림픽 경기에도 나갈 수 있었을 거예요. 학업에도 무척 뛰어났기 때문에 지금은 법률 사무소를 가지고 있고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책도 쓰고… 그분이 장차 수상이 된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거예요." 언제나 비관적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브라베이지 부인이 그 휴에 대해서만은 무조건 칭찬으로 일관했다. "그렇지만 정말 이상하네요. 말로 씨가 양자를 두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어요.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거든요." "두 내외분 모두 사생활에 관해 말을 퍼뜨리고 다닐 사람들이 아니예요. 그걸 무슨 큰 비밀로 삼고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그 일은 먼 옛날 얘기고 또 휴 도련님은 연예인이 아니라 점잖은 직업을 가지고 있거든요." 줄리아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브라베이지 부인은 연예인을 점잖은 직업으로 생각지 않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도 유명한 연예인 집안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큰 자랑거리로 삼고 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말로 집안 식구들이 모두 여기에 모인다는 걸 그에게 이야기했어요?"


"아뇨, 휴 도련님은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알고 계실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분이 여기에 오시겠다고 하기에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어요. 그는 좀체로 속을 터놓지 않는 분이거든요." "그는 혼자서 여기에 자주 오나요?" 줄리아는 그가 속을 터놓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고집스러운 데가 있다고 생각했다. 왜 휴는 그처럼 가족들을 피하려고 할까? 이만큼 다정한 대가족이 있으면 오히려 고마와해야 할 일이다. "옛날처럼 자주 오지는 않아요. 법률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는 여기에 자주 와서 공부를 하곤 했죠. 야단법석을 떠는 친구나 불량소녀들과 요란한 파티를 벌이는 일도 없었고, 술을 마시는 일도 없었어요." 브라베이지 부인이 누구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성장과정은 리차드나 스티브 쪽의 생활이 정상인 것 같기도 하다. 오직 공부만 하고 있는 청춘 따위는 올바르다고 말할 수 없다. "그가 양자로 왔을 때 리차드나 스티브는 아직 아기였겠죠?" "그 쌍동이 도련님들은 그때 두 살이었어요. 휴 도련님은 정말 착한 형노릇을 했어요. 동생들을 아주 잘 돌보곤 했어요. 시기를 하거나 괴롭히는 일은 한 번도 없었고, 정말 어질고 착한 아이였죠." 확실히 그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는 은근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매사에 관심없는 분위기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법률을 연구하려면 굳은 의지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착하고 어질다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휴를 브라베이지 부인은 착한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리차드는 가족들의 은혜를 저버린 매정한 변호사라고 평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짜 휴는 어느 쪽에 속하는 사람일까? "그런데 왜 남의 집에 양자로 왔을까요? 부모님은 어떻게 되었죠?" 줄리아는 큰 마음먹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수다장이 브라베이지 부인도 더 이상 폭로하는 게 두려운지 애써 모른 체했다. "나도 잘 몰라요. 아마도 돌아가셨겠죠." 벽의 괘종시계가 7 시를 쳤다. 줄리아 머리 속에 멋진 아이디어가 퍼뜩 떠올랐다. 그렇다. 이렇게 하면 사과를 겸한 증명도 된다. "그는 아침을 몇 시에 하나요?"


"그분은 아침을 드시지 않아요. 기껏해야 커피와 토스트 정도죠. 그것도 손수 만드는 게 좋다고 하니까, 줄리아 당신은 아무 일도 안해도 돼요. 자, 이제 난 그분 방을 치우러 가야지. 또 새 책을 쓰신답니다." 휴의 방은 다락방으로 정해져 있었고 줄리아는 아직 가 본 적이 없다. 코니 얘기로는 휴 전용의 방으로 개조를 해서 욕실도 붙어 있고, 식사 이외의 일은 모두 거기서 할 수 있게 되어 있다고 한다. 법률 벌레의 둥지인 셈이다. 브라베이지 부인이 온몸을 흔들며 계단을 올라간 후 줄리아는 바쁘게 일을 하기 시작했다. 먼저 식탁 위를 치우고 요리도구들을 펼쳐 놓았다. 이어 돌로 만든 식품 저장소로 가서 계란 네 개를 가지고 왔다. 식빵 네 장을 구운 후 칩과 계란을 얹었다. 마지막으로 고물 믹서를 써서 재빨리 네덜란드 소스를 만들었다. 그것을 계란 위에 뿌리고 있을 때 브라베이지 부인이 창문 닦는 도구를 가지러 왔다. "위에 가는 길에 이것을 휴 방에 갖다 주시겠어요?" 줄리아가 말했다 "아이구, 조반은 필요없다고 말했는데…" "하지만 그분은 에그즈 베네딕트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적어도 화를 내지는 않을 거예요." "그건 그렇겠죠. 이건 계란반숙인가요?" "네, 그래요." 줄리아는 싱긋 웃었다. 브라베이지 부인은 간단한 요리를 좋아하니까. 30 분쯤 지났을까. 줄리아가 막 아침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씻고 있을 때 주방문을 가득 메우며 거대한 몸집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줄리아는 명랑하게 아침인사를 했다. "안녕." 휴는 조용히 대답하고 쟁반을 탁자 위에 놓았다. 접시는 말끔히 비어 있었다. "커피 드시겠어요?" "아니, 괜찮소." 줄리아는 손에서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그의 눈길을 마주 받았다. 이 사나이를 보고 있노라면 왜 그런지 자꾸 놀려 주고 싶어진다. "설마, 브라베이지 부인에게 경솔한 말씀을 하시지는 않으셨겠죠?"


"나는 절대로 경솔한 짓은 하지 않소." "아이, 그러면 재미가 없잖아요. 하지만 브라베이지 부인을 닥달한 결과 내가 불량소녀 자네트가 아니라는 건 아셨겠군요?" "브라베이지 부인은 침이 마르도록 당신을 칭찬했소, 아무튼 아침식사는 잘 먹었소. 그러나 나는 아침을 먹지 않으니까 만들어 줄 필요는 없었소." "그런 습관은 바꾸셔야 해요. 특히 몸집이 큰 분은 연료를 충분히 보급하지 않으면 점심때까지 견디기 어려울 텐데요." "나는 연료가 적게 드는 경제적인 차요." 줄리아는 그의 쟁반을 치우면서 약간 뽐내며 말했다. "내가 요리를 할 줄 안다는 걸 지금은 인정하시겠군요?" "그렇지. 계란반숙을 만들 수 있다는 것만은 인정하겠소." 줄리아는 소리내어 웃었다. 브라베이지 부인이 '계란반숙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쟁반을 내미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물론 휴는 그것이 에그즈 베네딕트라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선생님이 농담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만 알았어요." "어째서 내가 농담을 했다고 생각하오?" 별안간 자신을 잃은 줄리아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조금 전에 지껄인 말에는 다른 뜻이 전혀 포함돼 있지 않았을까? 농담이라고 생각한 건 나의 지레짐작이었을까? "선생님은 저에 대한 견해표명을 유보하고 계십니까?" 줄리아는 짐짓 점잖은 체하며 비누 묻은 손으로 코를 쓱 문질렀다. "아침엔 어려운 법률용어를 좋아하는 거요? 그렇지 않으면 나를 위해 특별히 쓰고 있는 거요?" "나도 모르게 입에서 나왔어요. 선생님이 꼭 판사님 같거든요. 가발을 쓰고 검은 법복과 검은 모자를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 한순간 그 잿빛 눈동자 속을 고뇌의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이 줄리아의 여린 마음씨를 흔들어 놓았다. 저 눈망울은 언제나 침착하고 태연자약해 보이지만 그것은 속이 깊기 때문이다. 겉만 보고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무 뜻도 없이 무심히 던진 내 말이 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든 마음을 편히 갖도록 해주고 싶다. "나는 리차드를 쫓아다니는 말괄량이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죠? 리차드의 진짜 친구란 말예요."


"친구인 까닭에 말괄량이 팬 중의 하나가 아니다라는 이론은 성립되지 않아요." 그는 가볍게 받아넘겼다. "어젯밤에는 주무시는 데를 덮쳐서 죄송합니다. 약간 장난을 치려고 했던 거예요. 선생님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이 내 잘못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내 탓만은 아니예요. 선생님은 정말 말로 집안의 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어요." "당신도 코르동블뢰의 요리사로는 보이지 않았소." "역시 그랬군요. 그게 제일 골칫거리예요. 나이는 벌써 스물네 살이나 되었는데…" "나이에 어울리게 행동하면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 아니겠소?" 줄리아는 쟁반을 다 씻은 다음 그를 향해 돌아섰다. "평소에는 나이에 어울리게 행동하고 있어요. 하지만 어제는 선생님이 너무 강압적인 태도로 나왔기 때문에 오해를 풀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사고를 낸 것이 마치 내가 어린 탓이라고 막무가내로 덮어씌우는 것 같았고 경찰에도 그렇게 신고할 것 같았으니까요." 휴는 깜짝 놀란 듯 말했다. "나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소. 그럴 생각조차 없었소." "하지만 요즘은 아무도 믿을 수 없잖아요…" 아니다. 이사나이만은 지구의 끝까지 가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몸집이 크고 직업이 변호사기 때문만은 아니다. 고지식하고 속이 깊은, 그야말로 굳센 의지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부터 내 아침과 점심식사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돼요. 일하는 동안은 틈을 내어 무엇이든 적당히 집어먹는 쪽이 편하오. 저녁만은 아래 내려와서 먹겠소." 휴는 창가로 걸어가 채소밭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진 브라베이지가 전처럼 일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조금만 참으면 된다는데 어머니가 일부러 대리 요리사를 고용할 줄은 몰랐소. 물론 당신 일이 없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 정도의 일을 위해 알뜰찬 어머니께서 돈을 쓰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어머니는 아무튼 모범주부시거든 … 당신은 왜 이곳에 왔소? 리차드와 사랑의 보금자리를 꾸미기 위해?" "천만에요!"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반론을 펴려다 이쪽으로 되돌아선 휴의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을 보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정을 설명하게 되면 리차드의 속셈을 폭로하게 된다. 지금으로서는 리차드와 나 사이에 어떤 일이 있는 것처럼 꾸며 놓는 편이 좋겠다.


"리차드는 그저… 말하자면 나는…" 거짓말을 꾸며대기가 거북해 그만 우물거리고 말았다. "역시 리차드 녀석이 장난을 쳤군." 휴의 눈매가 험상궂게 변했다. 그는 동생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줄리아는 기가 꺾였다. 어차피 휴가 브라베이지 부인에게 물어보면 당장 탄로날 일이다. 게다가 내가 리차드를 감싸주어야 할 의무 따위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리차드는 휴에게 한방 먹는 것도 괜찮다! 줄리아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식구 전원이 한 달 동안 여기서 묵게 돼 있어요. 금년 크리스마스 때는 모두들 바빠 모일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그것은 정해진 얘기요?" "나는 한 달 전에 코니로부터 부탁을 받았습니다." 거인은 욕지거리를 할 건가? 물건을 집어던치며 소란을 피울까? 아니면 이층으로 올라가 짐을 챙길까? "가족 전원이 함께 계획한 일이오? 그렇지 않으면 리차드 혼자 꾸며낸 장난이오?" "그래요." "역시 그렇군. 그래서 그 녀석이 한발 먼저 여기에 와 제 입으로 그 즐거운 소식을 내게 전할 참이었군." "그래요." 줄리아는 리차드가 불쌍해지기 시작해 그를 위해 한마디 변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리차드는 단순한 장난만으로 한 것은 아니예요. 리차드는 선생님이 가족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하도록 해야겠다면서…" 줄리아는 여기까지 말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휴는 눈으로 사람을 억누르는 것이 특기인가 보다. "내가 우리 식구를 잊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소." 주제넘은 참견은 삼가라는 투의 말이다. "그런데 당신은 내 동생의 계획과 어떤 연관이 있소?" "뭐, 별로." 줄리아

자신도

상대방을 위압하는 눈초리를 흉내냈다.

눈망울로 노려본들 무슨 위력이 있겠는가.

하지만

순진하고

초롱초롱한


"나는 그저 리차드한테서 얘기를 들었을 뿐이에요. 레뮬러에 있는 집은 개축공사를 하게 되어 있어 선생님이 그곳으로 피난갈 수는 없다고 했어요." 휴가 비로소 동요의 빛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디까지나 차분하게 물었다. "다들 언제 올 예정이오?" "오늘 내일 중이에요. 그런데 선생님은… 조금도 화를 내시지 않아요?" "속이 뒤집혀서 끓고 있소이다." 조용하면서도 노골적으로 털어놓은 말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난들 어쩌겠소." "왜 소리 소리 지르며 야단을 치지 않으세요? 그렇게 하면 조금은 속이 편해질 텐데…" "나는 일을 하는 편이 좋겠소. 그것이 훨씬 생산적이오." "하지만 말로 설명을 하지 않으면 남을 이해시키지 못해요.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가 뒤늦게 폭발한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만해요, 가족들이 도착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일을 해두는 편이 좋겠군." "그러면 계속 여기에 머무르시겠군요?" 줄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리차드 이야기로는…" "어떻게 말했는지 짐작할 수 있소. 녀석은 무엇이든 부풀려서 말하는 버릇이 있소. 내 방은 완전히 고립되어 있소. 방문도 하나뿐이고 가족들도 멋대로 출입하지 못하오. 매일 조금씩만 가족의 단란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 장애가 있으면 난 오히려 힘이 솟거든." 휴는 이렇게 말하고 주방에서 나갔다. 자기를 양자로 삼아 준 가족들에 대해 이 얼마나 냉정한 태도인가! 인생을 정열로 불태우고 있는 양부모님의 감화를 전혀 받지 않았을까? 이처럼 조용한 인간으로 자란 배경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휴 월턴이 본심에서 화를 내면 얼마나 무서울 것인가! 그는 오직 일에만 모든 정력을 쏟아넣고 있을까? 어쩐지 온몸이 잿빛 일색으로 덮여 있는 것 같다. 4 크래머 별장에 온 지 한 주일쯤 지나자 매일 하는 일의 순서가 정해져 줄리아도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폭스바겐은 다행히 수리가 빨리 끝나 며칠 후에


크래머 별장으로 왔다. 수리비가 쌌기 때문에 결국 보험회사에는 신고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기회를 보아 휴에게 이 사실을 전해 둘 필요가 있다. 휴는 저녁식사 때만 내려온다. 아침과 점심은 도대체 무엇을 먹고 있는 것일가? 얼어붙을 듯이 추운 목요일 아침, 줄리아는 조반 준비를 하면서 몸을 녹이기 위해 혼자서 댄스를 하며 라디오 음악에 맞추어 흥얼거리고 있었다. 마이클 말로의 모습도 거의 볼 수가 없다. 오늘 아침에는 줄리아가 솜씨를 발휘하여 만든 특제 멕시코 커피를 마시러 와서 얼마 동안 얘기하고 갔지만 지금은 서재에 틀어박혀 있다. 몸매가 늘씬하고 상냥한 사람인데 일단 화를 냈다 하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어떻게 달래야 할지 알 수 없게 하는 사람이다. 현재로서는 각본이 잘 씌어지고 있는 듯 기분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니다. 물론 리차드가 맨 먼저 도착했다. 그는 주방문을 살며시 열고 살금살금 기어들어와 머리를 조아렸다. 친구인 동창생 집에 오랜만에 들렀다가 붙잡히는 바람에 거기서 주말을 보내게 되었다고 쩔쩔매며 줄리아에게 사과했다. 줄리아는 그 친구가 누구인가를 묻고 싶지도 않았다. 리차드는 성가실 정도로 줄리아에게 달라붙어 아양을 떨었다. 휴의 일로는 리차드가 완전히 골탕을 먹었다. 휴는 가족들이 도착할 때마다 다정하게 맞이했을 뿐 아니라 리차드가 아무리 도전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줄리아가 속이 후련할 정도였다. "형이 무엇인가 말을 했을 거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눈치를 챘을 리가 없어, 줄리아. 아, 나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리차드는 혼자 속상해 했다. 말로 집안 사람들과의 재회는 즐거웠다. 쌍동이 자매인 올리비아와 로잘린드는 더욱 예뻐졌다. 막내인 찰스는 키가 줄리아보다 30cm 가까이 더 자랐고, 지난날의 수줍어 하는 버릇에서 벗어나 있었다. 리차드의 쌍동이 동생인 스티브만은 말수가 적고 우울한 모습이어서 무엇인가 혼자 고민하고 있는 눈치였다. 다만 줄리아에게만은 가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때도 있었는데, 그것은 줄리아가 가족의 일원이 아니고 스티브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요구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티브는 밤이 되면 주방의 허름한 식탁에 걸터앉아 줄리아가 다음날의 요리 준비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곤 했다. 그리고 공해니 핵무기니 하는 화제를 혼자서 띄엄띄엄 지껄인다. 리차드처럼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는 것도 아니고 물만 몇 컵씩 들이키며 줄리아가 잠자러


갈 때가 되어도 그대로 앉은 채 컵만 바라보고 있는 경우도 많다. 줄리아는 어떻게 해서든 그를 도와 주고 싶었다. 줄리아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주방에서 혼자 아침을 먹고 있는데 휴가 들어왔다. 점심 전에 안뜰의 작은 풀장 옆으로 차를 끓여 와달라는 주문이었다. 휴와 같은 대학에 있는 여자가 그의 원고를 받으러 온다는 것이다. "어떤 분이에요?"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휴가 굵은 눈썹을 위로 치켜올렸다. "상대에 따라 무엇인가가 달라져요?" "인도나 중국 여성이면 차의 종류를 바꿔야 하지 않겠어요?" 줄리아는 천진난만하게 시치미를 떼며 대답했다. "그녀의 이름은 앤 패로. 영국계 여성이고 대학에서는 컴퓨터 과학부 강사요. 홍차와 비스켓을 내기 위한 예비지식으로 이 정도면 충분한 거요?" "기혼인가요, 미혼인가요?" 라고 줄리아가 다그쳐 물었다. 휴가 잠깐 뜸을 들여서 대답했다. "미혼이오. 열한 시쯤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소." 그는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컴퓨터 전문가. 휴의 상대로는 안성맞춤이다! 두 사람은 사랑을 속삭이는 일도 없이 서로 자기들 프로그래밍에만 열중할 것이다. 휴는 침대에서는 어떤 사람이 될까? 그곳에서라면 저 자제심을 조금은 벗어던질까? 휴가 발가벗었을 때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아직 남자가 발가벗은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어쩐지 휴는 멋진 육체를 가졌을 것 같다… 코니가 아침식사의 운반차를 돌려보내러 왔을 때 줄리아는 손님에 관해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앤은 어떤 구실을 만들어서든 이곳에 오겠지 휴가 여기에 있으니까." 라고 코니가 대답했다. "좋은 분인가요?" "대단한 미인이에요. 지적이고 시원스럽고, 휴에게 꼭 맞는 여성이지. 솔직하게 말한다면 약간 따분한 여자같기도 해요. 앤은 휴의 지위와 재산에 매력을 느끼고 있고, 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휴에게는 앤이 도움을 주는 편리한 존재인 것 같아요."


휴가

여성에게서 구하려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

하나뿐이란

말인가. 참으로

고약한

생각이다! 휴의 손님을 위해 비스켓을 굽고 있을 때 리차드를 골탕먹일 멋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렇지, 그를 위해 특제 케이크를 구워 주자. 혀가 녹을 듯한 초콜릿 케이크. 그 속에는 가슴이 메슥거리는 각종 배합재료들을 집어넣는다. 다 구워진 케이크를 오븐에서 꺼냈을 때는 가슴이 뛰었다. 카레 가루와 겨자, 피클즈가 뒤범벅으로 섞인 묘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브랜디를 잔뜩 부은 초콜릿을 두껍게 입혀 고약한 냄새를 막았다. 그 위를 온몸이 떨릴 정도로 짠 크림으로 장식했다. 그리고 완성된 케이크를 식품 저장실의 맨 안쪽 선반에 반쯤 보일듯 말듯하게 얹어 놓았다. 먹보인 리차드는 버릇대로 밤중에 무엇인가 꺼내 먹으러 내려와 이것을 발견하면 큼직하게 잘라 당장 입으로 가져갈 것이다. 얼마 후 줄리아는 현관 홀에서 리차드와 마주쳤다. 리차드가 계단의 난간을 따라 미끄럼을 탈 수 있느냐고 묻자 줄리아는 당장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응했다. 그는 자주 이런 장난을 치자고

유인하기

일쑤다.

줄리아는

계단

위까지

올라가

난간에

걸터앉았는데,

아래쪽으로 눈을 돌린 순간 난간의 경사가 너무나 급한 데에 그만 질겁을 했다. "어서 내려와, 겁쟁이 줄리아!" 리차드가 계단 밑에서 놀렸다. "나는 백 번도 더 미끄럼을 탔어, 내가 여기서 받아 주지." 겁쟁이 줄리아라는 말을 들은 이상 뒤로 물러설 수는 없다. 단단히 각오를 하고 미끄러지기 시작했는데 예상 이상으로 속도가 나고 말았다. 줄리아는 눈을 감고 비명을 지르면서 맹렬한 속도로 리차드의 가슴을 향해 돌진했다. 붉은 모직 스커트가 마구 펄럭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뒤엉켜 현관 홀 바닥에 나뒹굴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숨을 몰아쉬며 뒤엉킨 손발을 서로 풀기 시작했다. 리차드 몸에서 간신히 해방된 줄리아는 몸을 조금 뒤로 뺐는데 무엇인가 딱딱한 것에 부딪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회색 바지를 입은 다리가 두 개. 그것을 따라 위를 쳐다보았다… 아아, 어쩌면 좋아! 줄리아는 그만 제일 가까이에 있는 리차드 목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앤, 소개하겠어. 리차드 밑에 있는 아가씨는 우리 집 요리사인 줄리아 프라이. 줄리아, 이쪽은 앤 패로." 휴는 두 사람 위를 넘어 복도 쪽으로 갔다. 줄리아 눈에 앤 패로의 모습은 발목의 복사뼈와 녹색의 하이힐밖에 비치지 않았다. 리차드가 온몸을 흔들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리차드, 당신은 상관이 없어요. 이런 짓궂은 장난을 친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으니까요."


"정말 휴다운 소개법이었어." 갑자기 리차드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이런 자세가 되었으니 이 기회에…" 그가 얼굴을 가까이 하며 줄리아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그만해요." 줄리아는 그를 밀어냈다. 그의 파란 눈동자에 깃든 뜨거운 사랑의 열기 같은 것이 지겹게 느껴졌다. 또 입장도 어색했다. "좋지 않아?" 리차드는 이렇게 말하며 줄리아 허리에 팔을 감았다. 줄리아, 그대를 갖고 싶다네 어서 내 품으로 와 주오 은빛으로 빛나는 그대의 발을 만나면 내 영혼이 그대 속으로 들어간다네 리차드는 이런 시를 읊으며 더욱 열렬한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기가 막혔다. "줄리아, 일이 다 끝나면 홍차를 부탁해요." 줄리아가 깜짝 놀라 목을 뒤로 돌려보니 휴가 라운지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눈살을 찌푸린 불쾌한 표정이다. "그리고 리차드, 너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를 골라보는 게 어떠냐?" 리차드는 태연히 웃으며 대답했다. "형처럼 중년이 되면 그렇게 하도록 힘쓰지. 지금 우리는 피가 끓는 젊은 세대니까 시간이나 장소 따위는 생각할 수 없어요." 줄리아는 허겁지겁 일어났다. 스커트가 말려 올라가 있었다는 것을 알자 토끼처럼 뛰어 주방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검은 레이스의 팬티가 온통 드러나 있었다니! 아아, 휴는 나를 어떻게 보았을까? 그러고 보니 앤 패로에게 소개할 때도 '셰프'라 하지 않고 '쿡'이라고 낮추어 불렀다. 남의 호감을 사는 데는 자신이 있는 줄리아이기 때문에 이 밝고 활달한 성격을 받아들여 주지 않는 사람이 나타나자 마음이 편안치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휴의 호감을 사자. 같은 인간으로서 존중받도록 하자. 어찌된 셈인지 이런 생각이 그녀 머리 속에 자리잡고 말았다. 줄리아는 혼자 생각에 잠기며 홍차 쟁반에 곁들일 장미를 찾으러 뜰 뒤쪽에 있는 오두막집 옆을 지나치려 할 때 안에서 물건 부딪치는 큰소리가 났다. 이상하게 생각돼 안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 막내인 찰스가 있었다.


"매일 아침 어디론가 사라진다 싶더니 이런 곳에 와 있었구나. 무엇을 하고 있었지?" 찰스는 기름이 묻은 손으로 코를 비비며 말했다. "놀고 있어요." 자세히 살펴보니 기계의 부품 같은 것들이 늘어놓여 있다. "무엇을 만들고 있어?" 찰스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자전거예요." "정말 굉장하구나! 어느 정도 만들어졌지?" 줄리아가 감탄과 존경의 눈길을 보내자 그때부터 말도 신나게 하기 시작해서 차고에서 부품을 발견했다는 것 하며, 친구 아버지가 수리공장을 경영하고 있는데 자기를 도와 주게 되어 있다는 이야기 등 지금까지의 경위를 설명했다. "그분 말씀이 나는 기계 만지는 재주가 있다고 해요." "그렇다면 내 자동차도 좀 보아 주지 않겠어? 어버홀을 해야 한다는데, 글쎄 어디가 어떻게 되어 있다더라… 모터암인지 무엇인지가 어떻게…" "모터암이 아니라 로터암이에요." 찰스가 뽐내며 정정했다. "정말 나를 믿어 주는 거죠?" 반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찰스라면 한번 맡겨 볼 만도 하다. 만약 제손으로 고치지 못하면 정직하게 그렇게 말해 줄 것이다. 줄리아는 명랑하게 웃었다. "당연하지 않아?" "그렇지만 줄리아, 이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해서는 안 돼요. 엄마가 좋아하시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장차 이 길로 나가기를 원한다면 어차피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 "그건 그렇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니예요. 엄마도 아빠도 스티브 걱정 때문에 정신이 없어요. 조만간 한바탕 소동이 벌어질 거야. 나는 더 기다려 보겠어요." 찰스도 이제는 어른이 다 되었다. "그렇군,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어. 맙소사, 휴에게 홍차를 가져다 주어야 하는데!" 줄리아는 잰걸음으로 본채 쪽으로 걸어가며 덤불을 가로질러 지름길을 택했다. 그러나 풀장 옆을 한번 보자 그만 그 자리에 못박힌듯 우뚝 서고 말았다. 맙소사! 휴의 테이블에 홍차


쟁반이 놓여 있다. 그가 손수 홍차를 놓은 것이다. 새삼스럽게 돌아설 수도 없어 줄리아는 시치미를 떼고 풀장 옆을 지나가기로 했다. 앤 패로는 코니가 말한 바로 그런 여성이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빈틈없이 우아했다. 그리고 몹시 건방지게 보였다. 줄리아는 대뜸 아니꼬운 생각이 들었다. 줄리아는 휴의 딱딱한 시선을 받으며 다가가 태연하게 말했다. "손수 날라 오셨군요." "머리에 잎이 붙어 있어요." 라고 휴가 냉정하게 말하자 앤이 엷은 웃음을 띠었다. 두 사람이 다 리차드와 줄리아가 덤불 속에서 어울리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쟁반에 얹을 꽃을 따러 갔었어요." "나는 장식보다는 알맹이가 풍부한 편이 더 좋지." 휴가 거침없이 말했다. 앤은 경멸하는 눈으로 줄리아를 쳐다보았다. 문득 쟁반에 눈길을 보낸 줄리아는 쟁반 중앙에 초콜릿 케이크가 보기좋게 놓인 것을 보고 질겁을 했다. "어, 어디서 그것을…" 자기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지르다가 곧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그 케이크는 사실 내일을 위해 구운 것입니다. 두 분을 위해서는 새로 비스켓을 구워 놓았어요." "이 케이크면 충분해." 잿빛 눈동자가 줄리아의 귀엽게 웃는 얼굴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내일 먹을 케이크는 다시 만들면 그만이야. 그것이 당신 일이지." 현관 홀에서 동생을 유혹하는 것이 네 일이 아니라는 말투이다. "하지만 비스켓이 참 맛있게 구워졌어요. 제발 그것을 잡수세요. 아야!" 살그머니 케이크 쪽으로 내민 손을 찰싹 얻어맞았다. "줄리아, 우리는 홍차를 마실 테니 당신은 냉큼 주방으로 가요." 줄리아는 망설였지만 휴의 찡그린 얼굴을 보자 실토할 생각이 솟지 않았다. 터벅터벅 몇 미터를 걸은 다음 뒤를 돌아보니 휴가 칼로 케이크를 자르고 있었다. 다급해진 줄리아는 어디든 숨을 곳을 찾았다. 그렇다. 풀이 안성맞춤이다! 줄리아는 몸을 날려 풀 속으로 뛰어들었다. 물이 얼음처럼 차가왔기 때문에 자연히 비명이 질러졌다. 두꺼운 옷이 물을 빨아들여서 몸이 자꾸 밑으로 가라앉았다.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며 물 위로 올라와,


"사람 살려!" 라고 소리쳤다. 그야말로 실감나는 목소리 연기를 보다 더 잘하기 위해 다시 한번 물 속에 들어갔다. 온몸이 저리기 시작했다. 허우적거리며 풀 가장자리까지 간신히 갔다. 휴가 케이크를 놓아 두고 도우러 와 있어 안도의 숨을 쉬었다. "내 손을 잡아요." 휴가 손을 내밀어 얼어붙은 줄리아 손을 잡았다. 몸이 조금 끌려 올라갔을 때 줄리아 눈에 패로의 모습이 비쳤다. 지금 막 케이크를 먹으려 하고 있지 않은가. 몹쓸 이기주의자! 사람이 물에 빠져 죽을지도 모르는 판에 모른 척하고 있다니! 다음에 일어난 일은 일부러 한 짓인지 아닌지 줄리아 자신도 잘 모른다. 별안간 휴의 팔에 매달렸기 때문에 그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휴가 몸의 균형을 잃었다. 그리고 마치 슬로 모션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풀 속에 풍덩 빠지며 큰 물보라를 일으켰다. 줄리아의 코 바로 앞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휴의 얼굴이 떠올랐다. "도대체 어떻게 할 참인가?" 그는 이를 악문 채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어떻게 된 거죠? 저, 정말 죄송해요." 줄리아는 이빨이 딱딱 부딪쳤다. 그러나 적어도 앤 패로를 케이크로부터 떼어놓는 데는 성공했다. 풀에서 올라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휴를 앤이, 보란 듯이 위로했다. "휴 선생님, 저는…" 여기까지 말했을 때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휴의 큰 손이 줄리아의 말문을 막았다. "이제 그만해요. 변명은 다음 기회에 듣기로 하지." 휴는 별로 떨고 있지는 않았지만 고급의 곤색 양복은 흠뻑 물을 빨아들여 후줄근했다. 줄리아는 옷이 찰싹 몸에 붙어 풍만한 곡선이 뚜렷이 드러나 매우 섹시하게 보였다. 휴는 상의를 벗으며 줄리아를 쏘아보았다. "옷을 갈아입어요." 냉정하기 짝이 없다. 줄리아는 죄송하다는 듯이 뒷걸음질치면서 재빨리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집어들었다. 앤 패로가 열심히 휴에게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날 저녁, 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혼자 초연히 앉아 닭튀김을 먹고 있었다. 줄리아는 마음이 놓였다. 낮에 있었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해주는 듯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 찰나에 리차드가 입을 열어 모든 것을 터뜨려 놓고 말았다. "줄리아, 당신은 오늘 아침 풀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어?" 리차드는 니스 풍 샐러드를 산더미처럼 퍼가면서 물었다. "당신이 풀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는데 수영복도 입지 않은 채 왜 그렇게 했지?" 온 가족의 시선이 줄리아에게로 모였다. "저… 약간 발을 헛디뎌서…" "아니야, 나는 차를 타고 가면서 백미러로 똑똑히 보았어. 당신은 분명히 뛰어들었어." 리차드는 히쭉 웃었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 나를 골탕먹이기 위해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뭐, 뛰어들었다고?" 휴가 천천히 말했다. "빠진 것이 아니라 뛰어들었단 말이지?" 그 순간 식당 안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평소에는 차분하지 못해 정신없이 떠들기만 하던 스티브마저도 눈길을 줄리아 얼굴에 못박은 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줄리아는 한 번 큰 숨을 몰아쉬고 웃는 얼굴을 들어 휴 쪽을 바라보았다. 험하게 일그러진 휴의 표정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나는… 나는…" 하고 줄리아는 머뭇거렸다. 가슴이 두근거려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고 우겨도 소용이 없어. 거북해하는 그 얼굴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그 까닭을 들어야겠소." 사태가 이쯤 되면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 줄리아는 가냘픈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장난이었어요." "무엇이? 장난으로 그런 짓을 했다고?" 아주 경멸하듯 내뱉는 휴의 목소리. "그래서 나를 풀 속으로 끌어당겼단 말이지?" 몇 사람이 놀라며 숨을 죽였다.


"대학 동료 앞에서 내 꼴을 엉망으로 만든 것도 장난으로 한 짓이란 말이지? 양복값 400 달러를 변상해 주겠소?" 휴가 화를 내며 펄펄 뛰는 통에 줄리아는 그저 숨어 버리고만 싶었다. "그것은 고의로 한 짓이 아니었어요." 라고 중얼거렸다.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온몸이 떨렸다. "그때 저는…" 쿵 하는 소리에 줄리아는 발딱 일어섰다. 휴가 큰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친 것이다. 식기가 달그락거리고 천장의 샹들리에가 흔들렸다. "거짓말 말아요! 그런 천사같이 착한 얼굴을 해도 나는 속지 않아! 당신 같은 사람을 누가 고용했는지 그 속을 알 수가 없어." 휴는 힐끗 곁눈으로 어머니를 쏘아보았다. 코니의 눈이 깜박거렸다. "시골길을 스피드 광처럼 질주하지를 않나, 알지도 못하는 남자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 오지를 않나, 그런가 했더니 이번엔 장난을 친 거라고? 리차드, 너도 웃을 자격은 없어. 두 사람이 한 통속이야. 줄리아, 당신은 어제 나무에 올라가 타잔놀이를 했지. 창가에서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 그리고 오늘은 사람을 풀 속에 끌어넣었어. 도대체 내일은 또 무슨 짓을 할 참인가? 불이라도 지르며 놀 작정인가!" 줄리아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타잔놀이는

리차드가

하자고

했던

것이고,

찰스와

로잘린드도 함께 끼어 있었다. 정말 신나는 건전한 놀이였다. 휴가 화를 내는 기분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엉뚱한 흠까지 잡힐 까닭은 없지 않은가. 줄리아는 야무지게 한마디 했다. "적어도 저는 웃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제 유머를 몰라 주셨지만 이 세상엔 선생님 같은 벽창호만 있는 게 아니라서 천만다행입니다. 풀 사건은 정말 죄송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나중에 설명을 하러 갈 참이었어요." "당신 말을 어떻게 믿어. 그렇게 우당탕거리며 노는 것을 좋아한다면 서커스단의 쿡노릇이 제격이야." "하지만 무엇을 보아도 재미없어 하는 사람에 비하면 그 편이 훨씬 좋겠어요! 나를 고용한 분이 선생님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에요. 코니는 저를 믿어 주고 있어요. 도대체 선생님처럼 치사할 정도로 고지식하게만 사는 것이 훌륭한 것은 아니예요. 훌륭하기는커녕 세상을 거꾸로 어둡게 만들고 있어요. 선생님 같은 엘리트들이 원자폭탄을 정당화하기도 하고 지구를 공해로 오염시키기도 해요. 아무튼 선생님께서 먼저 내 자동차를 추돌한 배상을 해주세요. 저는 그 옷값을 틀림없이 갚아드리겠어요!"


가장인 마이클 말로가 입속으로 무엇인가 중얼거렸지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휴가 거칠게 되받았다. "줄리아 프라이, 당신이 말했듯이 당신은 어머니에게 고용된 요리사일 뿐, 우리 가족은 아니야. 고용된 사람이면 그런 사람답게 행동해요." 그는 먹다 만 접시를 밀어내고 일어서더니 여느 때와 다름없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돌아와서 한마디 덧붙였다. "당신 히스테리가 좀 가라앉으면 사과의 말을 들어 주지." 방문이 쾅 하고 닫히더니 천장의 샹들리에가 또 흔들렸다. 소리없는 질문들이 방안에 소용돌이쳤다. "죄송해요. 먼저 실례합니다." 줄리아는 식당에서 뛰쳐나와 아무도 없는 주방으로 도망쳐 왔다. 정말 휴의 말이 옳다. 저녁 식탁에서 고용주의 장남을 모욕하다니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변명의 여지는 없다. 코니로부터 해고선고가 내릴까? 왜 공연히 버럭버럭 화를 냈을까? 그 자리에서 그만 와악 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면 조금은 동정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 아닌가. 이 일로 휴는 나에 대해 최악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확실히 나는 경거망동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리차드가 도전하면 당장 응하는가 하면 이상한 케이크를 굽기도 한다. 나의 행동은 아직 어린 티를 벗어나지 못했다. 조금 더 어른스럽게 행동하고 자제심을 길러야겠다. 결국 휴에게는 사과를 해야지. 30 분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코니가 주방에 들어왔다. "죄송해요.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만…" 줄리아는 맥풀린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아니예요. 우리 집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주의예요." 라고 코니가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렇긴 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된 거예요?" 진지한 표정을 짓고 줄리아의 설명을 듣던 코니는 이야기가 케이크와 풀장 사건 대목에 이르자 허리를 잡고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아아, 줄리아. 조금 더 평범한 연기를 생각해낼 수 없었어? 기절하는 것도 한 방법 아니었겠어?" 그녀의 목소리는 웃음으로 진동했다.


줄리아는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리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아이디어가 왜 그때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을까? "하지만 저는 배우가 아니기 때문에 끝까지 속여낼 수는 없었을 거예요. 게다가 그 미인 선생님은 제가 그 자리에서 죽기라도 하지 않는 한 케이크로부터 떨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 휴가 오늘처럼 화를 내는 것을 처음 보았다우. 그는 법률에 관한 전문적인 이야기가 아니면 남들과 좀처럼 입씨름을 하지 않고 또 일상적인 귀찮은 일은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주의지. 지금까지 오랜 세월을 수다스런 가족과 함께 지내왔기 때문에 웬만한 농담이나 고약한 장난쯤에는 이골이 나 있을 법도 한데 … 그런데 오늘은 보기 드물게 줄리아 당신을 사정없이 윽박지르지 않았어요? 그 모습은 이제야 그가 말로 집안의 가족이라는 느낌마저 주었다우!" "저는 사과하러 갈 거예요." 라고 줄리아는 말했다. "그렇게 하겠수? 그것이 좋아. 그래야 모든 것이 깨끗이 매듭지어지겠지." 코니는 이렇게 말하며 의자에 앉았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줄리아 당신에게 휴 이야기를 좀 해주려고 여기 왔지. 저 아이는 별로 웃는 일도 없고 붙임성도 없지만 절대로 냉혈동물 같은 멋없는 인간은 아니예요. 다만 그는 어릴 때부터 티없이 천진난만하게 놀아본 경험이 한 번도 없어. 그런 탓인지, 어른이 된 지금껏 웃거나 장난을 치며 노는 일에 어색한 것 같아. 휴가 양자라는 것은 알고 있지? 그는 아주 비참한 가정에서 자랐다우. 그래서 우리 집에 왔을 때는 사람에 대해 깊은 불신감을 갖고 있었지. 우리가 정성을 다해 보살피고 애정을 쏟았지만 끝내 과거의 상처를 지울 수는 없었나 봐. 그런 사정도 있으니 휴를 너무 원망스럽게 생각하지 말아요, 줄리아. 휴도 제 결점을 익히 알고 있다우. 줄리아같이 성격이 밝은 사람과 매일 만나고 있으면 휴도 반드시 그런 결점을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아아,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가 한 말이 그의 마음에 얼마나 상처를 주었을까…" 줄리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비참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것도 모르고 나는 사정없이 그의 아픈 데를 마구 찔러댔다. 어떻게 해서든 그의 기분을 돌아서게 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손발이 닳도록 용서를 빈다면 거꾸로 더 수상하게 여길 것이 아닌가. 줄리아와 코니 두 사람이 그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것을 그가 알게 되면 그의 자존심은 다시 상처를 입을 것이다. 코니가 좋은 말로 줄리아를 달랬다.


"휴는 둔감한 편이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또 줄리아 당신이 말한 것도 대부분이 사실이라우. 휴가 아까처럼 보기 드물게 화를 낸 것도 그 때문인지 몰라. 젊은 금발의 아가씨가 자기 정체를 간단히 꿰뚫어 본 데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을까, 줄리아?" 줄리아는 힘없이 웃었다. "어떻든 저는 사과를 하러 갈 수밖에 없군요.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 "힘을 내야지, 줄리아. 휴도 지금쯤은 고함친 것을 후회하고 있을 거예요. 그럼 잘 다녀와요." 5 다락방으로 통하는 좁은 층계를 올라가는 것은 독수리 둥지로 다가갈 때와 같은 용기와 결단력이 있어야 했다. 휴는 문을 열어 주었지만 그 큰 몸집으로 입구를 가득히 메우고 딱 버티고 선 채 팔장을 끼었다 "저…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어요?" 줄리아는 마음을 굳게 먹고 간신히 물었다. "안 돼." 그녀의 용기는 더욱더 움츠러들었다. "제가 여기 온 것은… 저…" "당신이 온 이유는 알고 있소. 여기서 얘기하지." "그런 투로 말씀하시면… 저는 오히려 말문이 막혀 버려요." "말하려는 것인지 아닌지 빨리 정해 주었으면 좋겠소." 지겨운 느낌이다. 이런 태도로 나오는 상대방을 동정하라는 것은 무리다. 그렇지만 휴는 쉽사리 남을 믿지 않는 유형의 인간인 데다가 상대방이 줄리아다. 그리고 호락호락하게 자기만의 소중한 성 안을 구경시켜 줄 턱이 없다. 도대체 그는 어떤 방에서 기거하고 있는 것일까? 꼭 한번 보고 싶어진다. "여기는 추워요. 안에 들어가 천천히 얘기 했으면 좋겠는데…" "안 돼, 용건부터 먼저 말해요." "용건은 선생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당신 입으로 듣고 싶은 거요." 용건을 털어놓고 나면 그는 대뜸 문을 닫을 것이다―. 그것이 싫어서 나는 지금 꾸물거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줄리아는 느끼지 못했던 자신의 속셈을 깨닫자 적이 당황하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케이크를 가지고 나온 것이 애당초 모든 사건의 발단이었어요. 그 케이크는 리차드가 먹게 하려고 구웠던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을 풀에 빠뜨리게 되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코니 말대로 제가 그 자리서 실신하는 연기를 한바탕 벌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때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질 않았어요. 모든 원인은 리차드에게 있어요. 리차드가 미워 죽겠어요?…" "아직 얘기가 남았나? 나는 할 일이 많은 사람이야." 줄리아는 정신을 차려 찬찬히 휴를 지켜보았다. "그런 눈초리로 쳐다보지 말아 주세요. 단지 저는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고 싶을 따름이에요." "이제야 겨우 그 말이 나왔군. 사과의 말은 틀림없이 받아들였어. 그럼 잘 자요." "안 돼요!" 줄리아는 급한 김에 휴의 팔을 꽉 잡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그렇게 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던가를 들으셔야 해요. 제발!" 휴는 그녀의 작은 손을 천천히 떼어 놓았다. 두 사람은 잠시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마침내 휴 입에서 어쩔 수 없이 졌다는 듯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의 자세는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험악한 표정은 사라졌다.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할 수 없군. 그럼 그 경위라는 것을 들어 주지. 어째서 그런 일들이 벌어졌지?" 휴는 속수무책이라는 표정으로 줄리아의 설명을 참을성있게 들어 주었는데 케이크가 어떤 물건이었던가를 알게 되자 기가 막힌 듯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짓이지? 우리 집안에 어릿광대는 한 사람만으로도 족해." 얼마 동안 침묵이 흘렀다. 기가 죽어 있던 줄리아 얼굴에 살그머니 웃음이 떠올랐다. "우리 집안이라고 하셨죠? 그럼 선생님도 말로 집안의 한 사람이라는 잠재의식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당신은 심리학자가 아니고 요리사니까, 쓸데없는 참견은 말고 어서 이야기나 계속해요." 휴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줄리아의 웃음은 얼굴 전체로 번졌다. "제가 다시 쿡이 아니라 버젓한 요리사로 승격되었군요! 그럼 오늘 있었던 일을 용서해 주신 거죠?"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성미 고약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나?"


"저는 자신이 없었어요. 선생님은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을 주는 분이에요. 저를 해고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구요." "당신은 나를 별로 좋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군!" 줄리아는 상냥하게 웃었다. 기쁜 나머지 가슴이 뜨거워졌다. "방안에 들어가 서로의 결점에 대해 좀더 차분하게 이야기할 수 없을까요?" "아니, 그건 그만두지." 이번에는 별로 기분 나쁘게 거절하는 태도가 아니어서 줄리아는 마음을 놓았다. "그럼 다음 기회에…" "그러지. 잘 자요, 줄리아." "안녕히 주무세요, 휴. 친절하게 용서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줄리아는 발돋움을 하여 휴의 되도록 높은 곳에 키스를 했다. 그래도 그녀의 키는 휴의 목 언저리까지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맥박이 입술로 전해 와서 묘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줄리아는 몸을 휙 돌리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맹렬한 속도로 계단을 뛰어내렸기 때문에 주방에 도착했을 때는 머리가 아찔했다. 그날 밤 늦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스티브가 주방에 그 모습을 나타냈지만, 줄리아는 그날 따라 말을 적게 했다. 스티브는 두 번이나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는 줄리아를 책망하고 세 번째는 줄리아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컵까지 깨뜨리는 소동을 벌였다. 스티브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몹시 화를 내고 있는 것을 보고 줄리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좋은 말로 달래 보았지만 그는 걸음 소리도 요란하게 주방에서 나가 버렸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여는 때 같으면 내가 얘기를 듣는둥 마는둥 해도 별로 화를 내지 않았는데… 똑딱거리는 어렴풋한 소리가 귀에 거슬려 줄리아는 눈을 떴다. 아직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면서 시계를 본다. 아침 여섯 시. 이번에는 딱딱딱 하면서 무엇인가 창문에 부딪친다. 별수없이 일어나 온몸을 떨면서 침대 위쪽 창문을 열었다. 리차드가 새벽의 어스름 속에서 쥐었던 돌멩이를 내버리고 두 팔을 크게 펼쳐 보였다. 신바람이 난 얼굴이다. 눈을 뜨라, 눈을 뜨라, 수치를 알라 찬란한 아침 날개에 깃든 하느님 모습을 보라 새하얀 빛으로 대지를 덮는 오로라를 보라 잠에서 깨라, 나의 다정한 늦잠꾸러기


아침이슬이 엮는 풀과 나무를 보라 "빨리 없어져요!" 줄리아가 창 밖으로 쿠션을 내던지자 리차드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그것을 받아 되던졌다. "지금이 몇 시인지 알고 있어요? 지금부터 한 시간은 더 잘 수가 있었는데. 도대체 거기서 뭘 하고 있어요?" 리차드는 댄스의 스텝을 밟아 보였다. "산책도 하고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인생을 즐기고 있지. 빨리 나와서 해돋이를 보지 않겠어?" 줄리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싫어요. 왜 나를 깨웠죠?" "오늘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외출하시잖아. 그러니까 우리도 해안에 놀러 가자구." "날씨가 어떨는지 모르겠어요. 어제는 잔뜩 구름이 끼어 있었는데." "비가 오기에는 너무 추워. 나와 봐. 지금 여기는 서리까지 내렸어, 이 잠꾸러기야." "그럼, 나갈게요." 줄리아는 두 손을 들고 하품을 했다. 그렇다. 하루쯤 별장을 떠나 보는 것도 좋다. 기분전환이 될 것이다. "그럼 그렇지. 당신이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어. 오늘은 신나는 하루가 될 거야." 가려는 리차드를 향해 줄리아가 소리쳤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해서 다 함께 가요." "다른 사람들이라니, 누가 또 있어?" 리차드는 기분좋게 휘파람을 불면서 사라졌다. "또 걸려들었구나!" 줄리아는 창문을 쾅 닫았다. 최근에는 리차드의 애인놀이가 도를 지나쳐서 줄리아는 단둘이서 만나는 것을 되도록 피해 왔다. 그의 행동이 점점 부담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오늘 리차드는 마음껏 애인놀이를 즐길 참이겠지만 그런 수작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 어젯밤 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다음부터 줄리아는 어떤 용기를 가지게 되었고 힘이 솟았다. 약속시간에 현관으로 나간 줄리아는 웃음을 머금고 리차드를 훑어보았다. "오늘 지프 차는 좁아서 다 탈 수 없을 것 같군요." "걱정없어. 도시락은 트렁크 속에 넣으면 돼." "하지만 우리는 트렁크 속에 들어갈 수 없잖아요."


로잘린드가 올리비아와 스티브를 데리고 나타나 줄리아에게 재미있다는 듯이 윙크를 보냈다. 그 순간 리차드는 입을 꾹 다물고 그들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스티브의 차가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찰스는 어디 있어? 그 녀석도 불렀겠지?" 리차드가 화난 듯이 말했다. 줄리아는 웃음을 참느라고 애를 먹었다. "찰스는 집에 있겠답니다. 당신이 걱정할까 싶어 찰스 점심도 틀림없이 마련해 두었으니까 안심하세요." 찰스는 지금 줄리아의 폭스바겐을 수리하는 일에 몰두해 있다. 줄리아도 재빨리 리차드 곁을 떠나 스티브 옆의 조수석에 기분좋게 앉았다. "출발해도 좋지?" 스티브가 말했다. 스티브는 어젯밤에 거칠게 굴었다는 것을 잊어버린 듯 상쾌한 표정이었다. 줄리아는 안심했다. 오늘 아침은 긴장이 풀린 느긋한 표정이고 애교도 만점이다. 해안에 도착하여 줄리아는 작은 목소리로 로잘린드에게 물었다. "로잘린드, 로건인가 뭔가 하는 사람은 누구지?" 올리비아가 말끝마다 들먹거린 이름이 로건이었던 것이다. 로잘린드는 깔보듯 어깨를 으쓱했다. "로건 퍼스트라는 작자죠.

올리비아가

참여해

있는

화가협회의

창설자인데,

회원들

사이에서는 하느님 같은 존재예요. 중년의 아저씨 같은 인물인데 올리비아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거든. 저 애는 세상을 몰라서 탈이에요." 올리비아와 로잘린드는 쌍동이 자매인데 로잘린드는 제법 언니 같은 말투를 쓴다. "당신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군요." "그 사람은 엉뚱한 사기꾼이에요. 지난 번 개인 전람회만 해도 그래요. 화랑 벽을 온통 검은색으로 칠하고 거기에 흰 캔버스를 걸었을 뿐이었죠. 그것은 남이 하지 않은 묘한 짓을 해서 세상을 놀라게 해주겠다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고, 테크닉도 상상력도 전혀 필요없는 미친 짓이에요. 그것은 뻔뻔스런 독선에 불과해요." 줄리아도 속으로 동감을 표했다. "하지만 당신이 그의 작품을 싫어한다는 것과 그가 올리비아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과는 별개 문제가 아닐까요?" "그 사람은 올리비아에게 맞지 않아요! 올리비아는 그 따위 협회에 참여해서는 안 돼요. 그녀는 로건 따위보다 훨씬 더 풍부한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사나이 밑에


있다간 올리비아는 그 재능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좀먹고 말 거예요. 로건은 호색적인 위선가예요. 나에게까지 유혹의 말을 걸어왔다니까. 아마 협회의 모든 여자들에게 마수를 뻗치고 있을 거예요. 그런 주제에 여성은 순결해야 한다고 떠들어대니 정말 꼴불견이에요." "올리비아 스스로 느끼고 깨닫지 않으면 모르지 않을까?" 로잘린드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요. 제일 좋은 방법은 휴가 올리비아에게 타일러 주는 것인데…" "어머, 휴는 식구들의 고민 따위엔 눈을 감고 지내는 듯하던데." "그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정말로 휴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되면 틀림없이 나타나 이야기를 들어 주어요. 말하자면 휴는 문제를 잘 처리해 주는 사람이에요." 저녁식사 때 입씨름이 벌어지면 분명히 휴는 중립적인 입장에 서서 양편 이야기를 잘 절충하여 그 자리를 수습하곤 한다. "그러면 당신이 휴에게 의논해 보면 어때요?" "그런 짓을 하면 올리비아가 나를 죽이고 말 거예요." 줄리아는 곰곰 생각했다. 휴는 역시 본성이 착한 사람이다. 남달리 강한 데도 있고 남달리 마음씨 고운 데도 있는 그런 사나이다. 결혼을 해서 아이가 생긴다면 얼마나 좋은 아버지가 될까… 해안에는 아무도 나온 사람이 없었다.

여자 셋이서

환성을

올리며 흰

모래사장을

뛰어다녔다. 리차드만은 기분이 울적한 듯 물가에서 잔돌을 던지고 있다. 지금까지 옹졸한 태도를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는 리차드가 오늘 아침에는 이상하게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취하고 있다. 그렇다고 어쩔 것인가. 줄리아는 그를 본체만체하고 스티브 쪽으로 다가갔다. "도시락을 먹기 전에 이 근처를 조금 걷지 않겠어요?" "좋지. 함께 갈 사람은 없나?" 스티브가 소리쳤으나 아무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두 사람은 토라진 리차드의 시큰둥한 시선을 받으며 파도가 치는 물가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졌을 때 스티브가 입을 열었다. "리차드는 왜 저럴까." "나와 둘이서만 여기 오고 싶었던 거예요." "그랬구나. 그런데 당신은 그것이 싫었고…" "요즘 리차드가 왜 갑작스럽게 내 꽁무니를 따라다니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줄리아는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지금까지 6 년 간이나 친한 친구로 지내왔잖아요. 친구 이상이 되려면 벌써 그렇게 되었을 거예요." "리차드는 그런 녀석이야. 별안간 확확 타오르기 시작하지." "그것은 나도 알고 있어요. 지금까지 스스럼없이 재미있게 지내왔는데, 앞으로도 계속 저런 식으로 나온다면 그와 함께 있어도 조금도 즐겁지 않을 거예요. 다시 옛날의 친구로 되돌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리차드는 정말 당신을 사랑하게 됐는지도 모르지. 당신은 머리도 좋고 미인이니까, 리차드가 사랑에 빠진 것도 무리는 아니야." 줄리아는 인사치레의 말을 적당히 흘려보냈다. "그가 진심으로 나에게 다가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지금도 아마 리차드만의 독특한 사랑놀이를 혼자서 즐기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지 않으면 욕구불만에 빠져 있는 것일까? 리차드의 곁에는 여자들이 떠나질 않았는데 가족 아닌 여자로는 주위에 나 한 사람뿐이니까… 그래요, 리차드는 지금 여자 금단증상을 일으키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 순간, 스티브의 온몸이 얼어붙는 것처럼 느껴졌다. 또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역력히 알 수 있었다. 그 가늘고 길쭉한 옆얼굴에 고뇌의 빛이 짙게 깔리면서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들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눈 가에 보일듯 말듯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 그것을 본 순간 줄리아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스티브…" 그는 멍한 눈을 줄리아에게로 돌렸다. "이제 알았겠군?" "네 … 전에 런던에 있었을 때 같은 방을 쓰던 친구도 그랬어요. 법학부 학생이었는데 공부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잠이 안오는 각성제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 다음에는 잠을 자기 위해 수면제를 먹었고. 그런데도 공부는 조금도 향상된 것 같지가 않았어요." 스티브가 거친 웃음을 하늘에 날렸다. "그 느낌, 나는 뼈저리게 알 수 있지." "리차드, 설마 헤로인을 쓰고 있는 건 아니겠죠?" "그래, 헤로인은 아니야. 단순한 약이지." 리차드는 자조적인 말로 대답했다. "나는 절대로 깊이 빠지지는 않는다고 자신만만했지. 암페타민은 물리적인 중독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약이고 정신적인 것은 내 스스로 이길 수 있으리라고 믿었거든 … 얼마


동안만 쓰다가 괴로운 고비만 넘기면 끊겠다고 생각했던 거야. 흔히 하는 이야기들이지. 그렇지?" "지금은 어느 정도 그 약을 쓰고 있어요?" "지금은 끊었어.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처럼 안정을 찾지 못하고 초조해하고 있겠어? 약을 쓰지 않은 지가 벌써 3 주일이나 되지만 조금도 몸이 편해지지가 않는단 말이야." 이 마지막 말은 거의 비명에 가까왔다. 여러 달 동안 속에 간직했던 말을 단숨에 토해낸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스티브는 날마다 리허설, 취입, 공연 등 눈코뜰새 없는 스케줄에 쫓기고, 밤에는 또 밤마다 그룹을 위해 창작곡을 잇달아 작곡하는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마침내 그는 피로와 싸우기 위해 마약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차차 좋은 곡이 나오지 않게 되었고 목소리마저 마약중독으로 좀먹게 되었다. "지난

번에

가졌던

오스트레일리아

공연은

최악이었어.

내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했는지조차도 생각이 나지 않아. 그 이후 제대로 된 곡이라고는 단 한 곡도 만들지 못했어. 정신집중이 안 되거든. 지금은 작곡을 시작하는 일조차 겁이 나서 손을 댈 수가 없게 돼 버렸어." "그런 일을 누가 아는 사람은 있나요?" "그룹 동료들이야.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모를 것이고 가족들은 아무도 몰라. 가족들에게는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아. 이 문제는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해결할 생각이야." "리차드도 도움이 안 될까?" "리차드는 아무 힘이 되지 못할 거야. 그 녀석은 어릴 때부터 원래 강한 인간이야. 힘이 되어 주기는 하겠지만 약 따위에 매달리는 인간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줄 만한 위인은 못돼."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애당초 잘못이다. 그가 처음부터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는 것이 잘못이고, 지금 이 지경이 된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다. 그렇지만 지금 그런 소리를 해보았자 스티브가 수긍할 것 같지가 않다. 줄리아는 명랑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이길 수 있을 거예요. 3 주일 동안 참았잖아요. 조금만 더 견디면 이길 수 있을 거예요." 스티브는 열띤 눈초리로 줄리아를 쳐다보았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더 고통스러워지지나 않을까 싶어 두렵기만 해. 스스로 이겨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도무지 자신이 없고 두렵기만 해서…" 훌쩍이며 우는 듯한 절망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부들부들 떨고 있다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스티브, 당신은 반드시 이길 수 있어요. 꼭 이겨낼 수 있어요. 그렇지만 … 부모님에겐 말씀드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마이클도 코니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따뜻하게 받아들여 주실 거예요. 설사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해도, 스티브… 괴로울 때는 언제나 제가 곁에 있지 않아요?" 스티브는 두 손으로 줄리아 얼굴을 감싸고 눈물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마와. 리차드가 당신에게 향한 기분을 알 것 같아. 당신은 참으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여자야. 그런데 나는 어젯밤 그런 몹쓸 짓을 했으니…" 스티브가 막무가내로 입술을 포개왔다. 절망에 쫓겨 무엇인가 확실한 것을 구하려는 굶주린 키스였다. 줄리아는 그것을 뿌리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천천히 모두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키스 장면을 본 듯 로잘린드와 올리비아 두 사람이 마구 놀렸고, 리차드는 더욱더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줄리아는 잘됐다 싶어 일부러 스티브와 친한 듯이 더 다정하게 굴었다. 스티브도 덩달아서 줄리아에게 호의를 보였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그 효과는 거꾸로 나타났다. 쌍동이 형제가 다투어 줄리아의 환심을 사려고 노골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에게 이기고 말겠다는 열기도 그들이 쌍동이인만큼 더욱 치열했다. 스티브는 지금 상처입기 쉬운 괴로운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리차드를 대하듯 매정하게 물리칠 수가 없다. 만약 줄리아마저도 제 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스티브는 어떤 행동으로 나올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줄리아는 몹시 두려웠다. 어느 날 아침, 줄리아는 두 형제의 끈질긴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혼자서 물건을 사러 가기로

하고

주방에서 살짝 밖으로 나왔다. 그때

타고 가야

폭스바겐이 아직

수리중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안타까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주방으로부터 리차드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줄리아는 하는 수 없이 현관 쪽으로 걸어갔는데, 가는 도중에 하마터면 마세라티에 부딪칠 뻔했다. 줄리아는 숨을 헐떡거리며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쇼핑하러 시내로 가시는 거예요? 저도 데려다 주지 않겠어요?" "나는 휘티앙 시로 가는 길인데." 마세라티의 주인 휴는 이렇게 말하며 줄리아 얼굴을 쳐다보다가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쇼핑은 휘티앙 시에서도 할 수 있소?" "그럼요." 줄리아는 이렇게 대답하며 서둘러 옆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점심때까지는 돌아와야 해요." "그렇게 되겠지." 마세라티가 앞으로 굴러나갈 때 입을 벌리고 멍하게 서서 이쪽을 보는 리차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줄리아는 그에게 손을 흔들고 휴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정말 오랜만에 선생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보는군요. 얼마 만인가요?" "그런 일이 자주 있으면 곤란해." "제가 그토록 지겨운 짐이었어요?" "짐이었다고 한다면 소화물쯤 되겠지?" "어머, 선생님도 농담을 하시네!" "나는 절대로 농담을 하지 않아. 당신이 말한 대로 웃음을 모르는 인간이야." "그

일은 이미 사과드렸잖아요. 저도

다시 생각하기로 했어요.

선생님은

틀림없이

유머감각도 가지고 있어요― 다만 그것이 조금이긴 하지만." 지난 번 저녁식사 때 휴에게 지나친 말을 퍼부은 것이 머리에 떠올라 줄리아는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선생님 성함의 G.H.는 무슨 약자예요? 설마 억센 도깨비라는 글의 머리글자는 아닐 테죠?" 휴의 입술이 꿈틀 움직였다. "조지 버나드야." "선생님 어머니는 버나드 쇼의 팬이었나요?" "내 생모는 희곡이라는 것을 단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을 거요."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을까?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 하지만 어두운 과거를 되새기게 하고 싶지는 않다. "저는 휴라는 이름이 퍽 마음에 들어요. 덩치 큰 사람에게 정말 어울리는 이름 같거든요." "당신은 내 몸집에만 관심이 있군."


"저도 그것을 알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몸집이 큰 남자에게 혼이 난 일이 있거든요." 로마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그 집주인이 거인이었는데 남을 꼬집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줄리아는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나는 그런 버릇이 없으니까 안심해도 좋아." "알고 있어요." 휴는 버릇없이 굴 사람이 아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저는 그 주인에게 스파게티 접시를 냅다 던져 주었어요. 그 주인이 재빨리 몸을 피하는 통에 접시는 그 아내에게 명중해 버렸지 뭐예요. 그 부인은 굉장한 뚱뚱보였는데 유머라는 걸 조금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저는 레스토랑 손님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당장 나가라는 해고 선언을 받았어요. 하지만 체면은 깎이질 않았어요. 그 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저에게 박수갈채를 보냈지 뭐예요. 차를 좀 세워요!" 휴는 즉각 브레이크를 밟고 줄리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왜 그래? 기분이 나쁜가?" "선생님이 웃었어요!" 줄리아는 새로운 발견에 가슴이 뛰었다. "선생님의 웃는 얼굴, 처음 보았어요." "그거야 아무리 당신을 위해서라 할지라도 하루 스물네 시간 줄곧 웃고만 있다면 미친 사람이잖소." "전혀 미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아요. 정말 귀엽게 보였는걸요, 뭐." 이번에는 함빡 웃는 얼굴이 되었고 줄리아는 황홀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휴의 얼굴 전체가 확 변했다. 눈가에 잔주름이 잡히고 잿빛 눈동자는 비가 갠 뒤의 파란 하늘처럼 엷은 청색을 띠었다. 약간 일그러진 웃는 얼굴이었기 때문에 풍부한 입술과 깨끗한 이가 돋보였다. 상대방도 저절로 웃음을 선사하고 싶어지는, 참으로 남자답고 시원스럽게 웃는 얼굴이다. 줄리아는 살그머니 놀려 주었다. "역시 그렇군요. 그 딱딱한 모포 밑에 사랑스러운 새끼곰이 숨어 있군요." 휴는 줄리아의 목적을 알아챈 듯한 눈길을 던지며 다시 시동을 걸었다. "당신은 체념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소?" "그럼요, 내 몸은 작지만 끈질긴 성격이 있거든요." "그것은 이미 알고 있어요."


자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화제가 바뀌었다. 휴는 대등한 입장에서 말 상대가 되어 주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바뀐 셈이다. 줄리아는 달콤한 승리의 쾌감을 맛보았다. 시내에 도착한 두 사람은 우체국 앞에서 헤어지며 한 시간 후 선창가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줄리아는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다 산 다음 약속대로 선창으로 갔다. 갈매기가 떼지어 하늘을 날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선이 들어온 것은 확실했다. 싱싱한 참돔과 아직 팔팔 뛰는 왕새우통 앞에서 줄리아가 값을 깎고 있을 때 휴가 나타났다. 그는 바로 줄리아의 곁으로 오지 않고 배를 매는 쇠기둥에 몸을 기댄 채 먼 발치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줄리아는 교묘한 말솜씨로 어부를 추켜세우면서 자꾸 값을 깎았다. "언제나 그런 식으로 물건을 사는 거요?" 휴가 줄리아 짐을 들어 주면서 물었다. "그럼요, 덤까지 빼앗아 온 걸요!" 줄리아는 왕새우를 담은 플라스틱 통을 마세라티의 짐칸에 넣었다. "이 차는 얼마 동안 비린내가 날지도 모르겠어요. 폐가 되지 않을지…" "할 수 없지 않소." "그렇지만 제가 엄지손가락 하나만 위로 올려도 생선이고 뭐고 몽땅 합쳐서 태워 주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거든요." "그야 당신은 덤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으니까…" 줄리아는 슬쩍 휴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선생님도 육체라는 것을 가지고 계시잖아요. 사람은 너나없이 말로만 의사전달을 하는 것은 아니예요." "그러나 당신처럼 노골적으로 하지는 않소." "어처구니없군요! 선생님이야말로 노골적이에요. 선생님이 입을 꼭 다물고 그 자리에 우뚝 서서 한번 노려보기만 해도 우리들을 기가 질려 버려요." "아무렴, 당신도 그 우리들 속에 자기를 끼워넣을 정도로 뻔뻔스럽지는 않겠지?" "그럼요, 아무튼 저는 돌려서 말하는 성격은 아니예요." 휴의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줄리아의 입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풍부한 입술은 연지로 윤곽을 그려 놓지 않았어도 아름답게 다듬어진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줄리아는 여느 때와는 달리 자기를 의식하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휴가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며 엔진을 걸었다. 줄리아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랠 수가 없었고 그렇게 된 자신에게 당혹감마저 느꼈다. 돌아오는 동안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줄리아는 그가 자기에 대한 오해를 푼 것을 느끼고 기뻐했다. 그러한 이야기 끝에 휴가 가족들 문제로 화제를 돌려 줄리아가 두 형제를 싸우게 하며 혼자 즐기고 있다는 말을 꺼냈다. "즐기고 있는 쪽은 제가 아니고 그 두 사람이에요. 제가 추파를 던질 필요는 전혀 없어요." "당신 같은 여성에게는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호흡을 하는 것과 똑같이 자연스러운 일이거든. 그러니까 더 적극적으로 자기를 억제할 필요가 있소." 그의 일방적인 말투에 줄리아는 화가 났다. 가족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는 리차드에게도 스티브에게도 너무 노골적인 태도로 쌀쌀하게 대하지 않기 때문에 휴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본인들만 있을 때는 자신의 의사가 전달되도록 분명히 행동하고 있다. 게다가 휴는 스티브가 어떤 곤경에 처해 있는가도 모른다. "남자들은 여자가 눈앞에 있기만 해도 유혹을 느끼는 사람이 많거든요." 줄리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입을 꾹 다물고 가면을 쓰고 있어야 하나요?" "그렇게 하는 게 우리 가족이 조금은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되는 방법인지도 모르지." 화가 날 정도로 침착한 목소리다. "먼저 당신 쪽에서 리차드와 스티브 두 사람 중 하나를 선택하면 돼. 그러면 퇴짜맞은 한 사람도 진흙 속에서 기어나올 수가 있어." "저는 두 사람이 다 싫어요. 그들도 속으로는 저를 원하고 있지 않아요. 단순한 사랑놀이를 하고 있을 따름이에요." "당신은 그것을 재미있는 게임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나 그 두 사람은 그렇지가 않아.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을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소? 리차드와 스티브는 여자 때문에 싸운 적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노골적으로 불꽃을 튀기기는 처음이오. 이대로 가다가는 당신 때문에 두 쌍동이 사이에 영원이 금이 갈까 그것이 두려울 정도요." "지나친 걱정이에요. 그렇게 심하지는 않아요." 줄리아는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자기 변호를 했다. "두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쌍동이 아니예요?" "당신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소. 그 둘은 예전부터 경쟁의식을 갖고 있었지. 같은 직업을 택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둘은 닮았지만 어디까지나 각기 개성 있는


인간이오. 만약 당신이 진심으로 두 사람을 모두 바라지 않는다면 그렇다는 사실을 본인들에게 철저히 알려 줘야 해. 대립이 커지기 전에 손을 써야 해요." 휴가 말한 대로일까? 나는 그들과 너무 가깝게 지내는 탓으로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 줄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적어도 리차드는 본심에서 하고 있는 짓이 아니예요. 그가 진심으로 하고 있는 일이 이 세상에 있을 것 같아요?" "있구말구. 일이 있지." "그것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어요?" "리차드는 자기가 맡은 배역을 실생활 속에서 연습하는 거요. 그것이 그 아이의 테크닉이지. 다음 무대에서 무슨 역을 맡았는지 알고 있소? 그렇지. 로미오 역이오. 그러니까, 당신을 줄리엣으로 보고 있는 셈이지. 지금 리차드는 자기가 당신에게 사로잡혀 있다고 열심히 자신에게 타이르고 있는 중이오." 줄리아는 기가 막혔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이 납득이 간다. 바로 어제 베란다를 치우고 있을 때 리차드가 밑에 나타나 저 유명한 사랑을 구하는 장면을 한바탕 연기하지 않았는가. 따끔하게 꼬집는 말을 던져 보았지만 리차드는 끄떡도 하지 않고 끝끝내 그 대목을 연기해 내고 말았다. 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스티브는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개인적인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아마도 당신은 그에게 사실을 털어놓게 한 후 자기 품안에서 스티브를 울게 했을지도 모르지." 휴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동정하는 것도 적당히 해야 하오. 동정과 사랑은 혼동되기 쉬운 것이지. 만약 당신이 천방지축인 걷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조심을 해야 하오." 줄리아는 이를 갈았다. "저에게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당신이 타고난 그 본능을 스스로 억누르면 되는 거요." "정말 뻔뻔스럽게도 잘난 체하시는군요!" 마침내 줄리아의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꼭 제가 닥치는 대로 유혹하고 돌아다니는 꼴이군요. 하지만 그것은 당치도 않은 말씀이에요. 제게도 좋은 사람과 싫은 사람을 가리는 분별은 있어요. 제게 설교를 하고 그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이에요. 선생님이 가족들 일을 더 따뜻한 마음으로 보살펴야 해요. 만약 선생님이 스티브에게 형다운 도움의 손길을 뻗쳤다면 스티브도 저에게 의지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만약 당신이 멀리 떨어져 남처럼 구경만 하고 있지 않고 문제의 와중에 뛰어들었다면 당신은 스티브를 능히 구할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당신은 끌려 들어가기가 싫은 거예요. 자기 집안 사람들 일에 대해 그럴 수가 있나요?" "그만해요, 줄리아." "그만할

수가 없어요.

선생님 식구들은

모두

선생님을 걱정하고 있어요. 선생님도

가족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 주어야 해요." 줄리아는 끄떡도 하지 않는 남자의 옆얼굴을 노려보았다. 마침내 무거운 침묵에 자기자신이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왜 말씀이 없으시죠? 꼭 돌부처처럼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나는 지금 운전을 하고 있소." 휴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자신을 돌부처가 아니라 엉터리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엉터리예요." 줄리아는 소리쳤다. "만약 눈동자가 움직이고 있지 않다면 당신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거예요. 당신의 생명은 어디에 있죠? 법률 책 속에 있나요? 저 다락방 감옥 속에? 정확하게 움직이는 미인 로보트와 함께?" "벌써 도착했소, 줄리아." 말이 끊긴 것은 다행이었다. 차는 이미 서 있었다. 휴가 조수석 문을 열기 위해 돌아왔지만 줄리아는 스스로 문을 열고 그를 옆으로 밀어젖혔다. "아무튼 선생님은 가족이나 가족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르고 있어요. 사랑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문제에 대해 저에게 설교할 생각은 마세요. 제 생활태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참견하지 말아 주세요." "당신이 내 생활태도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참다못한 휴가 지겹다는 듯이 대답했다.


발끈 화를 낸 줄리아는 자동차 문을 힘껏 닫고 그 자리에서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소름끼치는 신음 소리를 듣고 발을 멈추었다. 그의 손가락을 자동차의 문 사이에 끼워 넣고, 문을 닫은 것이다. 줄리아는 충격으로 까무러칠 뻔했다. "오오!… 이 일을 어쩌지!" 말이 나오지 않았고 목이 막혔다. 급히 문을 열어 주자 휴의 왼쪽 손가락 세 개가 새하얗게 변해 있다가 순식간에 피가 통하는 것이 역력히 보였고, 그와 동시에 찢긴 피부 사이로 피가 솟구쳐 나오며 한 줄기를 이루어 땅바닥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손톱 밑으로도 검붉은 피가 부풀어 올라왔다. 얼마나 아플까! 줄리아는 손을 내밀었다. "빨리 약을 발라야…" "손대지 마!" 휴가 뒷걸음질을 쳤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주방으로 오세요, 빨리. 얼음으로 식히면 조금은 좋아질 거예요." "내 손으로 치료하겠소." 휴는 신음하듯 말하고 왼손을 잡고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뒤를 쫓아갔다. "미안해요, 휴. 너무 화가 치밀어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문을 닫아 버렸어요." "당신은 언제나 그래. 도대체 어디로 가면 내가 편안해질까?" "주방으로 오세요. 거기서라면 절대로 실수를 하지 않을 거예요. 휴, 부탁이에요." 눈물이 왈칵 솟는 기분이었다. 휴는 주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홱 돌아서며 줄리아를 노려보았다. "안 돼! 저리 가요. 빨리 저리 가!" 그는 혼자 주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줄리아는 잠시 그 자리에서 망설였다. 안으로 들어가 조금이라도 잘못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그를 돕고 사과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들어가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차가 있는 데로

되돌아와 산

물건들을 끄집어냈다. 그의

손가락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줄리아, 무슨 일이 있었어?" 마이클 말로가 서재의 큰 창을 훌쩍 뛰어넘어 밖으로 나왔다.

상처에

생각이

미치자

몸이


"꼭 비극의 여왕 같은 얼굴이군. 무슨 일이 터진 모양이지?" "제가 휴의 손가락을 자동차 문 사이에 끼워 넣고 말았어요. 그런데 휴는 오지 말라고 하며 저를 주방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해요." 줄리아는 단숨에 털어놓았다. 잘못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나타나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그랬어? 하지만 제 발로 걸어갈 수 있을 정도라면 걱정할 것은 없겠지. 그렇게 마음 졸일 것까지 있나, 줄리아. 휴는 어릴 때부터 언제나 저랬거든. 상처를 입으면 짐승처럼 제 굴 속에 틀어박혀 버려. 누구의 위로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어. 내가 나중에 얼마나 다쳤는지 알아보면 돼. 그건 그렇고 줄리아, 안색이 좋지 않군. 내 서재로 와서 브랜디라도 한 잔 마셔 두는 것이 어떨까?" 휴가 혼자서 고통과 싸우고 있을 모습이 떠올라 줄리아 마음은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언제나 그에게 골탕만 먹이고 있어…" 마침내 견디지 못하게 된 줄리아는 발치에 왕새우 통을 놓아 둔 채 울음을 터뜨렸다. 마이클은 소리내어 우는 줄리아를 따뜻하게 껴안아 주고 조용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6 그날 밤, 휴는 저녁식사 때 밑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운 채 굶주림을 참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니 줄리아는 애가 탔다. 그러나 식사가 끝난 후 마이클이 살짝 귀엣말로 알려 주었다. 환자는 붕대를 감고 아스피린을 먹는 등 마이클에게 잔뜩 일을 시킨 모양이었다. "통증은 심했을까요?" 줄리아는 조마조마하며 물었다. "아프다는 말은 없었어. 하지만 몹시 언짢아하고 있더군." "아! 어째서 나는 언제나 이런 실수만 저지르는지…" 새삼 후회하는 마음이 더욱더 깊어갔다. "아무래도 성격이 잘 맞지 않는 모양이지. 다른 아이들과는 잘 지내면서." 마이클은 아무 것도 모른다. 탈없이 잘 지내는 상대는 막내 찰스 한 사람뿐이다. 쌍동이 두 형제에게는 이제 질렸다. 며칠 지나는 동안 두 쌍동이의 대립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역시 휴가 말한 대로이다. 로미오는 막무가내로 열을 올리기만 하고, 스티브는 또 그런 색마의 마수로부터 줄리아를 지켜 주는 것이 제 인생의 의무인 양 행동하고 있다. 두 사람 사이의 불꽃 튀는 줄리아 쟁탈전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까지 악화되었다. 다만 스티브는 옛날의 정열을 되찾아 다시 작곡을 시작했다.


"줄리아, 당신에게 바치는 노래야." 라고 스티브는 말했다. 그러나 아직 금단증상이 깡그리 사라진 것은 아니다. 리차드와 스티브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고 교묘히 이 어처구니없는 사랑싸움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없을까?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다 그들과의 우정마저 잃기는 싫다. 휴의 충고를 순순히 따라 행동했더라면 지금쯤은 속시원히 끝장이 나 있었을 것이 아닌가… 어느 날 오후, 줄리아는 마음을 굳게 먹고 쌍동이의 초대를 받아들여 그들과 함께 핫 워터 해안으로 가기로 했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두 사람이 체념하도록 만들어 주리라.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앉은 줄리아는 쉴새없이 지껄여서 가끔 벌어지는 말다툼이 크게 발전되지 않도록 막았다. 해안에 도착하자 쌍동이 형제는 다투어 삽을 쥐고 좋은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뛰었다. 두 사람이 한동안 티격태격 하더니 마침내 장소가 정해지고 두 청년은 맹렬한 기세로 모래를 파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한숨을 쉬며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구멍이 깊어지면서 밑으로부터 온천수가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두꺼운 양말을 벗고 그 속에 발을 담갔다. "아이, 뜨거워!" 두 청년은 말없이 바다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일에만 골몰해 있다. 구멍이 더욱 커지고 온천수는 점점 더 많이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타월을 쥐고 가까운 벼랑 밑 바위 뒤로 가서 보라빛 비키니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찬바람 속을 온몸을 떨며 뛰어돌아와 뜨거운 탕 속에 들어가 다리를 길게 뻗고 누웠다. 너무도 기분이 좋아 자기도 모르게 소리가 나왔다. 둘레를 돌아다보니 다른 곳에저도 여러 사람이 마찬가지로 온천수 속에 들어가 있다. 지금이 여름이라면 눈앞에 펼쳐진 바닷속에 자주 뛰어들어가 몸을 식혀야 할 것이다. 리차드와 스티브도 수영복을 갈아입고 왔다. 리차드가 줄리아 곁에 나란히 누웠다. 스티브는 그 반대쪽에서 다리를 내밀어 두 사람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말없이 상대방을 노려보고만 있는 형제를 상대로 줄리아는 드디어 얘기를 시작했다. "두 사람이 다 들어 주세요. 제가 오늘 여기 온 것은 두 사람의 노려보기 싸움을 구경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는 노려보고 있지 않아. 스티브가 날 노려보고 있지." 리차드가 대뜸 반론했다. "도대체 오라고 하지 않았는 데도 염치없이 따라와 시무룩한 얼굴로 남의 기분을 망쳐 놓으니 괘씸한 노릇이야."


"줄리아의 기분을 망쳐 놓는 사람은 형 쪽이야. 고리타분한 대사 따위를 읊조리며 각본에 적힌 대로 줄리아에게 접근하는데, 형은 혹시 줄리아를 멍청한 여자애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줄리아도 피가 머리로 몰렸다. "당신들은 왜 내 얘기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아요? 처음부터 제멋대로 지껄이기만 하고!" "재미가 좋은가?" 세 사람은 입을 딱 벌리고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휴가 아닌가! 두툼한 외투의 깃을 세운 그 모습은 그야말로 바로 거인의 모습이었다. "최고다!" "황홀해!" 아래에서 두 동생이 큰소리를 질렀다. 줄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멍하니 넋을 잃고 휴를 우러러보고 있는 자태는 꼭 마녀 사이렌을 작게 축소한 것 같은 느낌이다. 불룩하게 솟은 젖가슴은 탕 속에서 새하얗게 빛나고, 물기를 머금어 오그라든 금발은 홍조를 띤 얼굴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다. "어떻게 여기까지?" 제정신을 차린 줄리아가 물었다. "급한 전갈이다!" "누구에게?" 쌍동이가 동시에 물었다. "스티브, 네 매니저한테서 연락이 왔어. 새 앨범의 일부를 재녹음해야 된다는 거야." 휴가 말했다. 스티브는 입술을 깨물었고, 리차드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빙그레 웃었다. "뒤로 미루면 안 될까?" 스티브가 물었다. 앨범 발매일이 다가오고 있는데 스티브는 일의 중대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그럴 수가 없다더라. 그리고 리차드, 너에게도 전할 말이 있어. 영화감독이 급히 연락을 해달라는 거야. 스케줄이 바뀐 모양이야. 자세한 얘기는 올리비아에게 물어보면 돼." 리차드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하는 수 없지. 그럼 줄리아,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내고 돌아갈까? 내일 또 오기로 하지." 줄리아가 후유하고 살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을 꺼내려고 했을 때 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줄리아까지 끌고 돌아갈 필요는 없어. 뒤에 내가 데리고 가지." "하지만…" 리차드도 스티브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줄리아, 당신도 찬성이지?" 줄리아는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네, 네. 저도 그렇게 하는 게 폴아요." "그렇다면, 자, 너희들은 빨리 돌아가도록 해라. 여자 친구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지지." 휴가 그 독특한 새끼곰같은 미소를 줄리아에게 던지고 줄리아도 미소로 받았다. 휴의 웃는 얼굴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이다. 쌍동이가 떠난 다음 줄리아가 입을 열었다. "덕분에 살았어요. 내일 새벽에 결투라도 벌어질 것같이 험악했어요." "내가 충고를 하지 않았소?" "그건 알고 있어요. 어머, 어디로 가세요? 설마 절 여기에 버려둔 채 혼자 가버리는 건 아니겠죠?" 줄리아는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가슴 사이로부터 뜨거운 물이 소리를 내며 아래로 흘러내렸다. 휴는 잠시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다가 두 형제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 바위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도 저기 가서 옷을 벗고 오겠소." "그럴 수가, 설마!" "걱정 말아요. 옷 속엔 수영복을 입고 있소. 기왕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당신처럼 수영복이라는 이름만 붙은 천 조각이 아니라 내 것은 아주 점잖은 것이오." "아무렴, 그러시겠죠, 점잖은 양반!" 줄리아는 다시 탕 속으로 몸을 뉘었다. 수영복을 입은 모습은 어떤 느낌을 줄까? 줄리아는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서 고개를 돌려 탕 속에 누운 채 바위 쪽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쌍동이 형제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손을 흔들며 돌아가고 휴가 모습을 나타냈다. 줄리아는 바짝 긴장하여 숨을 죽였다. 거인이 다가오고 있다. 줄리아는 후닥닥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확실히 그의 수영복은 천을 많이 쓴 것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줄리아가 보기로는 점잖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붉은색의 경기용 팬티는 몸에 찰싹 붙어 몸을 가려 주기는커녕 오히려 강조하고 있었다. 배 부분은 바짝 죄어져 있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근육이 꿈틀꿈틀 힘차게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딱 벌어진 어깨, 앞으로 내민 가슴, 나무랄 데 없는 멋진 균형. 살빛은 줄리아보다 흰 편인데 가슴뿐만 아니라 팔도 다리도 온통 검은 털로 덮여 있다. 만약 그가 같은 나이 또래의 친구라면 휘파람을 불며 놀려 주고 싶은 심정이다. '줄리아, 너는 침착해야 한다'며 자기를 진정시켰다. 나는 몸집 큰 사나이를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 이 거인은 나쁘지 않다. 휴가 탕 속으로 들어왔다. 근육질의 긴 다리가 살짝 줄리아의 다리에 닿았다. 줄리아는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바람이 잦아지고 가랑비가 내리며 탕의 김과 어우러졌다. 줄리아는 머리를 뒤로 기댄 채 맑고 달콤한 빗방울을 맛보았다. "아이, 참 기분이 좋아요. 탕이 너무 식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젖은 속눈썹을 올려다보니 휴가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선생님이 여기 오셨죠? 올리비아가 그 연락을 받았다면 그녀가 올 수도 있었잖아요." "그때 마침 내가 아래층에서 쉬고 있었소. 그래서 이 전갈을 맡았지." 휴가 쉬고 있었다? 희한한 일도 있군. 줄리아는 탕 밖에 내놓은 휴의 손에 감긴 붕대를 보자 불안해졌다. "많이 아팠죠?" "그야 그럴 수밖에. 아직도 조금씩 욱신욱신 쑤실 때가 있소." 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버지한테서 들었는데 그날 당신이 몹시 울었다지?" "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옷을 적셔 보고 싶어요." 줄리아는 가볍게 받아넘기고 빙긋 웃었다. "그런 실수를 저질러서 얼마나 죄송스러웠는지… 그런데도 선생님은 제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아 더욱더 견딜 수가 없었어요. 만약 선생님이 왼손잡이라면 글도 쓸 수 없게 될 것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워지기만 했어요." "나는 오른손잡이요. 하긴 지금까지 원고는 타이프라이터로 썼소." "그러세요? 그 왼손을 쓰게 되려면 며칠이 더 걸릴까요?" "적어도 일주일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소. 꽤 심한 상처였으니까." "어쩌죠?"


휴가 똑바로 쳐다보는 바람에 줄리아는 마음의 안정을 잃고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수면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얼마 동안 휴식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그 덕분에 오늘 저는 궁지에서 벗어났었구요. 리차드와 스티브는 서로 상대방에게 이겨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어 제 얘기에는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거든요. 역시 선생님 말씀을 따랐어야 했어요." "내가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건가?" "네, 인정해요." 줄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리차드는 로미오의 화신처럼 행동하고, 스티브는 또 스티브대로…" 여기서 줄리아는 약간 망설이다가 곧 마음을 정했다. 휴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성급한 짓은 하지 않고 냉정하게 판단해 주리라. 스티브의 믿음을 배신하는 결과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줄리아는 스티브의 고민과 그 때문에 그의 기분을 매정하게 잘라 버리지 못하는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휴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휴는 끝까지 조용히 들어 주었다. "스티브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고 마음의 여유도 있을 거요. 스스로 마약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한 것부터가 그 증거 아니겠소?" "그럴지도 몰라요. 어쨌든 그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는 방법으로 거절을 해야겠어요. 리차드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이에요. 저 두 사람에게 당장 효과가 있으면서도 아프지 않는 충격요법을 쓸 필요가 있어요." 줄리아는 입을 다물고 휴의 반응을 기다렸다. "내 생각을 듣고 싶은가?" 잠시 후 휴가 입을 열었다. "애써 당신을 위해 좋은 충고를 해줘도 또 골탕을 먹이면 어떻게 하지? 손은 이제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소."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아무튼 무슨 좋은 아이디어는 없을까요?" "제 삼의 사나이를 등장시키면 어때?" "네? 제 삼의 사나이라구요?" 줄리아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런 짓을 하면 점점 더 수습할 수 없게 돼요." "두 쌍동이가 무조건 물러설 만큼 충격을 받게 되고, 또 아주 순하고 착한 남자가 등장하면 만사가 잘 풀릴 거요." 줄리아는 머리를 갸우뚱했다.


"그런 편리한 남자가 주변에 있을까요? 물론 찰스가 있긴 하지만 그는 아직 어리잖아요. 어린이를 유혹했다고 오히려 욕을 먹게 될 것이고, 그 외에는 남자가 한 사람도 없어요." "말 다 한 거요?" "네? 어머, 그런 뜻이 아니예요." 줄리아는 킬킬 웃었다. "그런 뜻은 아니예요, 다 알고 계시면서. 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뜻이에요." "내가 어째서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단 말이오? 체격은 별개 문제로 치고." 줄리아는 뒤로 몸을 젖히며 깔깔 웃었다. 온몸이 떨리며 수면에 잔물결이 일었다. "선생님과 저? 생각만 해도 우스꽝스러워요!" 줄리아는 계속 웃어댔다. 휴의 표정이 알게 모르게 바뀌었다. "당신이 나를 묘한 인간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소. 하나 우스꽝스러운 인간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은 미처 몰랐소." "선생님을 우스꽝스럽게 보고 있는 게 아니예요… 선생님과 제가 짝이 되면 우스울 거예요, 그렇죠, 선생님? 상상해 보세요. 선생님도 우스꽝스럽게 느끼시게 될 거예요." 목소리가 떨렸다. 간신히 웃음을 그칠 수는 있었지만 손으로 입을 막아도 소리 죽인 울음같은 묘한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이번에는 웃다못해 눈물까지 나왔다. "당신이 그처럼 계속 웃고만 있으니 내가 얼마나 멋있는 남자로 변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고 싶어지는데…" 정신이 오싹해지도록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로 휴가 말했다. 줄리아도 마침내 정색을 했다. 휴는 여전히 조용하게 드러누워 있지만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전과 달랐다.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만은 분명했다. 일이 묘하게 틀어진 데 대해 줄리아는 당혹감을 느꼈다. 꼭 나침반도 없이 태평양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쳐진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설마 선생님이 진담으로 그런 말을 하셨을 리가 없잖아요. 선생님과 저와의 컴비네이션을 누가 믿겠어요. 저라면 절대로 아니예요. 지금까지 요란한 일들이 너무 많이 얽혀 있거든요." "그럴까?" 휴는 빙그레 웃었다. 처음으로 보는 위협적인 엷은 냉소가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성격이 다른 사람일수록 서로 상대방에게 끌린다는 말도 있소. 우리도 지금까지는 다투기만 했으나 이제 겨우 화해를 한 것처럼 꾸미면 돼. 다른 사람들을 믿게 하기는 쉬운 일이오. 우리 가족들은 세 끼의 밥보다도 로맨스를 좋아하거든." 줄리아는 의아한 눈초리로 휴를 넌지시 쳐다보았다. "설마 절 놀리고 있는 건 아니겠죠. 손에 상처를 입힌 앙갚음? 진담일 리가 없어요. 선생님과 제가 열렬히 사랑하는 체하다니." 또 웃음이 터져나왔다. 휴가 별안간 몸을 줄리아 쪽으로 홱 돌렸다. 큰 독수리가 물보라를 날리면서 갑자기 덮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줄리아는

작은

비명을

질렀다.

굵은

팔이

줄리아의

목을

휘감았다.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쳤으나 넓은 가슴에 부딪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휴, 왜 이래요?" 줄리아는 충격과 가슴설렘을 동시에 맛보았다. 진작부터 속으로는 이 꿈틀거리며 솟아오른 근육을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장난은 그만해. 나는 남의 놀림감이 되는 걸 좋아하지 않아." 휴는 이렇게 말하며 줄리아의 목을 살짝 깨물었다. "휴, 이러면 점점 더 웃음만 나와요. 저는 간지럼을 몹시 타요. 특히 목은 약해요." 휴가 얼굴을 들었다. 웃고 있다! 휴가 웃고 있다. 꿈만 같다. "참으로 다루기 어렵군."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입은 어때? 입술도 간지러운가?" 줄리아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벌써 키스가 시작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잊고 휴의 짜릿한 키스 속에 푹 빠져들었다. 고개를 뒤로 젖혀 더 깊은 키스를 유도하자 휴의 몸이 한순간 굳어졌다. 그러나 곧 온몸의 힘을 빼고 가슴을 가만히 맞춘다. 젖은 가슴털이 풍만하게 솟아오른 줄리아의 가슴을 간지럽혔다. 목에 감았던 팔을 내려서 줄리아를 부드럽게 껴안았다. 그의 두 어깨에 손을 얹은 줄리아는 근육의 매끄러운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휴의 키스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감미롭게 계속되었다. 그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면서 가슴이 아래위로 움직이고 탕의 김이 흔들렸다.


줄리아는 그의 내부로 녹아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에 빠졌다. 몸이 너울너을 흔들리는 것 같고 몸무게도 전혀 느껴지지 않아 휴가 전혀 무겁지 않았다. 그는 그 큰 체격과는 정반대로 퍽 섬세하고 감미로운 애무를 계속했다… 키스가 끝났다. 줄리아는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휴와 키스를 하고 자기도 그것에 적극적으로 응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이런 키스 법을 어디서 배웠어요?" "마음에 들지 않았어?" "대학에서 법률뿐만 아니라 키스 법의 학위도 딴 것 같군요." 휴가 몸을 떼고 옆에 길게 드러누워 줄리아의 장난기 어린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족들을 믿게 하는 방법론에 대해서도 A 학점을 받을 수 있겠군." 휴의 쌀쌀맞은 대답에 줄리아의 기분은 상하고 말았다. 분위기에 압도되어 앞뒤 가리지 않는 돌발적인 키스로 생각하고 싶었는데… 그저 이지적인 사나이가 이성을 잃은 충동적인 키스로 여기고 싶었다. "그렇군요. 적어도 키스 법은 A 학점이니까 선생님의 안을 실행해 볼 수도 있겠어요. 그런데 선생님 자신은 거기서 무엇을 얻죠? 단순히 마음씨 착한 자원봉사자처럼 보이지는 않아요." "실은…" 이렇게 말하면서 휴는 눈을 아래로 돌렸으나 우연히 비키니 수영복의 곡선이 눈에 띄는 바람에 급히 고개를 들었다. 줄리아는 문득 그의 귓불이 엷은 핑크 색으로 물드는 것을 보았다. 휴의 마음을 알아내는 열쇠는 이것일지도 모른다. 귀가 그 표시다. 그렇다면 그는 겉보기만큼 무뚝뚝한 사나이가 아니란 말인가? 휴는 아무 것도 못 본 척 시치미를 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 "제 도움을? 선생님이?" 기쁨과 동시에 의심스러운 마음이 소용돌이쳤다. "어떤 일이에요? 키스 연습용?" "내 일은 스케줄이 꽉 짜여 있어 몹시 바빠요. 한 장을 다 쓸 때마다 출판사로 원고를 보내야 해. 지금 상태로는 타이피스트를 구하지 않는 한 마감시간에 맞출 수 없을 것 같거든. 전날 밤 당신은 아버지 각본을 조금 타이프해 준 일이 있었지. 이번에는 날 좀 도와 줘요. 그러면 일석이조가 될 거요." "어째서 일석이조죠?"


"줄리아, 당신이 밤마다 내 방에 와서 타이프를 치고, 가족들에겐 당신이 무엇을 하는지 멋대로 상상하게 하면 되는 거야." "당신이 고용자와 체신없는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누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어요? 적어도 나라면 믿지 않겠어요. 게다가 만약 리차드와 스티브가 나를 끝내 단념하지 않는다면…" "그 두 사람 문제는 내게 맡겨. 방해하게 하지는 않을 테니." 휴의 말투로 볼 때 그것은 성공하리라. 그래도 줄리아는 망설여졌지만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느낀 기쁨 또한 잊을 수 없다. 입을 다물고 있자 휴가 넌지시 말했다. "물론 보수는 틀림없이 지불하겠소." "천만의 말씀. 무료로 봉사하겠어요." 빙그레 웃는 휴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 순간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보기 좋게 그의 술책에 말려든 셈이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휴는 능청스럽게 왼손 붕대 쪽으로 눈을 돌렸다. 줄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그럼 해보죠. 언제부터 시작이죠?" "빠를수록 좋지. 그리고 오늘 밤은 당신과 데이트를 하기로 하지." "데, 데이트라뇨?" 줄리아는 소리를 질렀다. "놀다 갈 시간이 없어요." "오늘 밤은 일을 쉬도록 해요. 어머니께는 이미 말씀드렸어. 그렇게 화낼 것까지야 없지 않소. 여동생들도 있으니 아무도 굶을 사람은 없을 거요. 자, 슬슬 옷을 갈아입을까?" "분부대로 거행하겠나이다, 전하." 줄리아는 보란 듯 큰절을 했다. 7 줄리아는 원고 페이지를 한 장 넘기고는 한숨을 쉬었다. 줄곧 타이핑을 했기 때문에 손가락이 아프다. IBM 의 타이프라이터는 처음 보았을 때 무서운 괴물처럼 느껴졌고 건반은 이빨을 드러낸 악어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계에 대해는 아무 것도 모르는 줄리아가 희한하게도 지금까지 아무 탈없이 순조롭게 사용하고 있다. 휴가 있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다갈색 가죽을 씌운 의자에 앉아 열심히 원고를 쓰고 있다. 바하의 브란덴 부르그 협주곡이 조용히 흐르며 방안의 침묵을 메우고 있다. 멋진 방이다. 휴가 장시간 이곳에 파묻혀 있을 수 있는 것도 당연하다.


장방형의 이 방에는 욕실과 주방도

따로 있다. 전에는

고용인들의

방이었지만

칸막이들을 치우고 개조를 한 듯 지금은 거인에게 알맞는 쾌적한 방으로 바뀌었다. 천장에는 이동하는 조명등이 달려 있어 줄리아가 쓰는 큰 책상 위에도 노란 불빛을 던져 주고 있다. 반대쪽 구석에는 희미한 불빛 속에 커다란 네 기둥식 침대가 놓여 있다. 깃털 매트에 깃털 베개, 그 위로는 무늬 없는 누비이불이 펼쳐져 있다. 이런 침대에서 잠잘 수 있는 휴가 부러워진다. 줄리아는 휴식 시간만 되면 침대로 뛰어가 엎드려 쉰다. 휴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쳐다본다. 침대는 꼭 그 주인을 닮았다. 특히 큰 사이즈, 주위를 압도하는 당당한 위풍, 그러면서도 깊이 알게 될수록 뜻밖의 따뜻함과 고운 마음씨가 전해 온다. 휴의 타이핑을 돕기 시작한 지 오늘로 사흘째가 되는데 그가 조금씩 경계심을 풀기 시작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처음에는 꼭 소형 폭탄을 다루듯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거리를 두고 대했다. 그러나 줄리아가 열심히 일을 하고 여느 때와는 다른 침착한 면을 보여 주자 그의 태도도 달라졌다. 두 사람이 데이트를 하러 간 날 밤에는 가족 모두가 입을 딱 벌리고 보내 주었다. 두 사람은 온갖 것을 모두 화제로 삼았다. 그 결과 두 사람의 성격 차이는 더욱 뚜렷해졌다. 줄리아는 록 음악 팬이고, 휴는 클래식 음악파. 독서도 줄리아는 닥치는 대로 아무 책이든 읽는 편이데, 휴는 논픽션만 읽는다. 줄리아는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 사고를 가진 데 비해 휴는 보수적이다. 그래도 줄리아는 즐거웠다. 서로 다르다는 것이 자극이 되었고, 휴의 논리에 자기의 정열적인 생각으로 대항해서 조금도 지지 않고 입씨름을 벌이는 것도 즐거웠다. 그들의 음모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살짝 쳐다보곤가볍게 닿고, 문득 웃는다. 단순히 그런 몸짓만으로도 그것이 가족들 눈에는 정열적인 포옹처럼 비치는 것이다. 키스를 해보일 필요가 없어서 줄리아는 약간 실망했다. 바닷가에서 맛본 그의 입술은 참으로 기막혔다. 하지만 그것은 그때 한 번뿐… 줄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오늘 밤은 이제 충분히 일했다고 말하고 싶은가?" 고개를 들어 보니 휴가 물끄러미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6 장 끝부분이 끝나지 않았어요. 벌써 11 시가 되었지만." 줄리아는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휴가 언짢은 듯 무엇인가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요리사예요. 타이피스트가 아니랍니다."


줄리아는 일어서서 그의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 휴가 고개를 들지 않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의 발치 끝에 앉아 목을 흔들어 피로를 풀었다. "무엇을 하고 계시죠?" "고치고 있어." 금빛 만년필이 소리도 없이 미끄러지고 있다. 줄리아는 목을 길게 뽑아 그의 무릎 위를 보았다. "어머나! 이건 내가 어제 타이핑해 정서한 원고 아녜요? 또 전부 다시 쳐야 한다면 6 장을 끝까지 칠 필요가 없겠어요." "생각을 바꾸었어. 원고 내용을 일부 고쳐야 해." 줄리아는 두 무릎을 안고 휴를 올려보았다. "휴, 당신은 정말 완전주의자군요. 그 완전주의를 만족시켜 줄 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거예요. 당신 자신도 그렇게 하기는 무리일 거고요. 이렇게 나가면 영원히 수정만 계속할 것 같군요." "완전을 추구하는 것은 법률의 숙명이오." "완전한 법이 생기면 까다로운 조문을 법률가에게 통역시킬 필요도 없게 될 것이고, 그러면 맨 먼저 휴 당신이 실업자가 될 거예요." 휴가 일에 몰두해 있을 때는 일부러 그를 놀려서 일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고 싶어진다. 지금도 그의 얼굴에는 하루종일 일에 몰두한 나머지 피로가 역력히 나타나 있다. 휴는 고개를 들었다. 장난스레 춤추고 있는 줄리아의 파란 눈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만년필을 놓았다. 줄리아의 기분은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좋아하는 법률이 업신여김을 당한 이상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휴는 마음만 먹으면 놀랄 만큼 말이 많아진다. 잘 울리는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가 바하의 곡과 멋지게 어우러져 줄리아는 무릎에 턱을 괸 채 황홀한 기분이 되어 귀를 기울였다. 휴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줄리아는 눈을 뜨고 꿈결인 양 미소지었다. "당신은 대학에서도 인기가 있겠어요. 여학생들에게 동경의 대상이겠죠?" 휴의 지적인 넓은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줄리아, 당신은 무엇이든 좀 진지하게 생각할 수 없어요?" 줄리아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당신은 찬사를 이해하지 못하시나요? 당신 이야기는 지금 하나도 빼지 않고 다 들었고 대충 이해도 했으며, 나 자신의 의견도 가지고 있어요. 다만 그것을 입으로 말할 만한 지식이 부족할 따름이에요."


사실대로 말한다면, 휴의 서가에서 뉴질랜드 법에 관한 책을 한 권 꺼내 법률의 어떤 부분이 그를 그처럼 사로잡고 있는가를 탐색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휴에게 들키기를 바라지 않는다. "어쨌든 나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많아요." "예를 들면?" 처음부터 믿지 않는 말투다. "자기의 일에 대해서죠. 요리는 과학이자 예술이에요. 훈련도 지식도 센스도 있어야 해요. 저도 요리를 좋아하고요. 하지만 괴로운 일도 많아요. 특히 레스토랑 일은 장시간의 노동으로써 몹시 고되죠. 그런 경험을 여러 해 쌓아온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즐길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 세상은 참혹하고 공평하지 못해 울고 싶어지는 일이 많거든요. 웃을 수 있을 때는 웃고 지내고 싶어요." "알고 있소. 그런데 아무래도 알 수 없는 일이 있거든. 내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당신은 유난히 유머감각을 발휘하는 일이 많은 것 같은데…" 줄리아는 깜짝 놀랐다. 그는 줄리아가 자기를 별로 존경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휴는 그렇게 자신이 없는 것일까?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그에게 있어 그리 중요한 문제가 될까? 아아, 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줄리아는 조용히 그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저는 절대로 소홀히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반대인걸요. 당신의 일에 대한 정열이나 명석한 두뇌에는 다만 탄복할 따름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말을 마구 하고 있는 거예요.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놀려 주지 않거든요. 그 점에서 선생님은 굉장한 표적이에요. 선생님께서 속으로는 싱글벙글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나라는 인간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믿고 있소?" "아니예요. 이제 조금씩 알기 시작했어요. 어때요, 6 장의 나머지 부분은 내일 점심 후에 하면 안 될까요? 아래층에서 질문공세를 피하려고 신경을 쓰기보다 여기서 타자를 치는 편이 훨씬 편해요." 휴가 의자 등에 몸을 기대며 두 다리를 앞으로 쭉 뻗었다. 줄리아의 손 밑에서 근육이 힘차게 꿈틀거렸다. 이 억센 다리를 어루만져 보고 싶다… "동생들은 꽤 얌전해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줄리아는 마지못해 그 무릎에서 손을 내려놓았다. "네, 리차드도 스티브도 전처럼 피투성이의 경쟁은 안하게 되었어요. 그 대신 저에게 질문공세를 퍼부어 못 살게 굴어요. 당신은 이 방에 틀어박혀 있으니까 편하시겠지만 저는


호기심의 표적이 되어 어려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끝까지 거짓말을 하기란 어렵거든요. 모두가 기대하고 있는 것과 다른 대답을 자신도 모르게 해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물론 당신만 지장이 없다면 내일 점심 후에 와줘도 좋아. 미리 알려 주기만 해요." "아이 싫어. 휴 당신은 왜 그렇게 사람을 싫어하죠?" 줄리아는 그를 놀려 주었다. 마음내킬 때면 언제라도 이곳에 와서 마음대로 지껄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이 와주지 않으면 곤란해. 지루한 일이 돼서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런 당치도 않은 얘기는 하지 마세요. 내용은 좀 딱딱하지만 당신이 쓴 문장이라고 생각하면 흥미가 솟아요. 당신은 이 일을 마음속으로 사랑하고 있죠. 저와 요리와의 관계도 그래요. 말하자면 연애관계예요. 일에 관해 말하고 있을 때의 당신은 참으로 생기가 넘치거든요. 이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다음부터는 조심해야겠군. 그렇게 내 속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는 줄 미처 몰랐어." "어째서, 그것이 나쁜가요?" "좋은 변호사는 무표정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야 해. 상대방에게 자기 속을 절대로 보여서는 안 되지." "당신이 그 무표정한 얼굴을 조금만 무너뜨려 주면 저도 아래층에서 지내기가 훨씬 수월할 텐데." 줄리아는 일부러 큰 제스처를 써가면서 한숨을 쉬었다. "왜?" "그렇지 않겠어요? 도대체 남들이 절 볼 때 당신의 어디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뭐라 할까요? 당신은 쌀쌀하고 냉담하며 빈틈이 없고, 내 순진한 청춘을 망쳐 놓고 있어요. 나이도 너무 많고 진지하기만 해요. 내가 구하는 그런 식의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특히 이 마지막 말은 리차드가 귀찮게 여러 번 강조한 부분이다. "당신은 아마도 적당한 대답으로 얼버무렸겠지." "그렇게 했어요. 당신만큼 멋진 키스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말해 줬지요. 등줄기가 짜릿해지는 키스를 경험한 이상 다시는 휴의 입술만으로도 참을 수 없게 되었다고 말이에요."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휴가 소리없이 웃고 있었다. 저 웃음을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없을까?


"하지만 당신 키스는 정말 멋졌어요. 리차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못하게 되었고, 그 후론 당신이 내 아버지쯤 되는 나이라고 놀리진 못하게 되었어요." "리차드의 질문 내용에 대해서는 그것 아니고도 한두 가지 반박해야 할 대목이 있어. 왜 당신이 순진하다는 인상을 받았는지, 나는 그것을 모르겠거든." 줄리아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야말로 휴다운 신랄하고도 유머가 넘치는 말이 아닌가. 그는 여전히 줄리아를 헤픈 여자처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런 오해를 풀게 하고 싶지는 않다. 만약 줄리아가 아직 처녀라는 것을 알면 휴는 멀리 달아나고 말 것이다. 경험이 있는 여자로서 남아 있어야 그도 마음 편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난로에서 장작이 타면서 불꽃이 튀었다. 달콤한 몽상에 젖어들고 있던 줄리아는 움찔했다. 기분전환을 위해 일어나 기지개를 켜자 그녀의 풍만한 육체가 곡선을 그렸다. 그 율동을 휴가 조용히 지켜보았다. "어머, 벌써 늦은 시간이군요. 내려가서 밤참을 준비해야지." 줄리아는 바쁘게 방에서 나왔다. 휴가 안녕이라고 던진 말도 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대로 공상의 여운 속에 젖어 있었더라면 휴에게 달려들어 안겨 버렸을지도 모른다. 줄리아는 주방으로 돌아와 물을 끓이고 둥근 머핀을 오븐 속에 집어넣고 있는데 코니가 쌍동이 자매를 데리고 왔다. "어머, 줄리아. 아직 이층에 있는 줄로 알았어. 그래서 대신 일을 할까 하고 왔는데." 비난하는 목소리는 아니다. "휴는 내려올까?" "아뇨, 그는…" 아직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을 하려다가 우물우물해 버렸다. "그는 일을 조금 더 해야 한 대요." "원고는 잘 나가고 있어?" "조금씩 나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에요." 내일은 타자를 다시 쳐야 한다. "그것이 좋아." 코니는 말했다. "휴가 무리를 하지 않는 것은 좋은 일이야. 그 아이는 전부터 만사를 끈기있게 파고드는 성질이 있거든. 잠시 일을 잊고 기분전환도 해야만 해." "그렇다면 줄리아만한 적임자도 없어요." 로잘린드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눈을 깜박거렸다.


"얘들의 농담에 신경을 쓰지 말아요, 줄리아." 코니가 말했다. "휴가 좀더 긴장을 풀고 마음을 터놓도록 만들어 준다면 참으로 기쁘겠어. 그 아이가 사실은 아주 정열적인 남자라는 것도 줄리아는 벌써 알았을 거야. 그 네 기둥식 침대를 어떻게 생각해요?" 단지 화제가 바뀌었을 뿐인 데도 올리비아는 엉뚱한 연상을 한 모양이다. "엄마! 그런 말은…" "왜?" 코니가 멍청하게 딸들을 쳐다보았다. "아이구, 올리비아! 너는 뭘 생각하고 있어? 줄리아는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아. 그렇지, 줄리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줄리아는 빙긋 웃었다. "그 침대는 정말 굉장해요." "그렇지. 휴는 그것을 어떤 저택의 경매에서 샀다우. 그 애는 가구 따위에 전혀 관심이 없는데 그 침대에 대해서만은 묘하게 애착을 느끼는 것 같다우. 어머, 줄리아. 머핀이 타고 있어. 저렇게 연기가 나도록 태워도 좋을까?" 줄리아는 당황해서 머핀을 꺼냈다. "이 정도 구워야 바삭바삭해서 맛이 있어요." 로잘린드가 줄리아를 감싸주었다. 두 쌍동이가 홍차를 준비하는 동안 줄리아는 머핀에 버터를 듬뿍 바르면서 반성했다. 휴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거기에 정신이 팔려 실수를 저지르다니. 조심해야지. 코니는 숨도 돌리지 않고 얘기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해. 그 침대에서 아이를 열세 명이나 낳았다지 뭐야. 거기서 사랑을 하면 아이 부자가 될 것 같거든." 코니는 이 말을 끝내자 잰걸음으로 주방에서 나가 버렸다. "대단하지?" 올리비아가 킬킬 웃으면서 말했다. "저 원맨 쇼의 박력, 단숨에 지껄이는 호흡법. 게다가 하는 말의 내용도 또 굉장하거든." "하지만 여자는 모두 어머니를 닮는다고 하지 않아요?" 줄리아는 아직도 얼굴을 붉힌 채 말하며 웃었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로잘린드가 말했다. "엄마를 닮았다면 뉴질랜드 제일의 여배우 뒤를 잇는 사람은 바로 내가 될 게 아냐. 아아, 영국에 건너가게 되면 몹시 집이 그리워질 것 같아. 엄마는 물론 누구와도 만날 수 없게 되니. 올리비아, 정말 같이 영국으로 안 가겠어?" "돈이 없다고 말했잖아." "상업미술로 아르바이트를 조금만 하면 돈은 당장 모일 텐데…" "하지만 로건이 있어." "이제 그만해. 어차피 안 될 일이니까." "로건을 버릴 수는 없어… 전람회가 다가오고 있고." 힘없는 목소리였다. 어쩐지 올리비아가 로건과 헤어질 구실을 찾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줄리아는 여느 때와 똑같이 라운지의 난로 옆에 앉아서 밤참을 먹었다.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족들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스티브가 옆에 와서 앉았다. "오늘 아침 드디어 노래가 완성되었어. 내일 그것을 들어 주겠어?" 스티브가 물었다. "글쎄, 오전중에는 휴의 일을 하러 가야 해요." "듣기만 해주면 돼. 정말 좋은 곡이 나왔거든." 스티브는 이렇게 말하며 방 한구석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긴 리차드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나는 지금까지 머리가 약간 이상해 있었지만 이젠 정신을 차리게 됐어. 이제부터는 줄리아 당신을 괴롭히지 않겠어. 그러니까 노래를 들어 주겠지?" 줄리아는 휴우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경계심을 풀었다. "좋아요, 그러고 보니 다른 문제도 잘 풀린 것 같군요." 맑고 푸른 눈동자에 매력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아무튼 그 노래 <줄리아>를 들어 주면 다 알게 돼. 그리고 당분간 일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어. 내 마음이 내키게 될 때까지 아무 것도 안하겠노라고 매니저에게 선언했지. 그건 그렇고, 당신과 휴 사이의 문제인데 정말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어? 공연히 리차드와 나 때문에 그러는 것 아냐?" 줄리아는 한순간 망설이다가 자기도 모르게 본심을 토로하고 말았다.


"아니, 당신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 때문이에요. 나는 휴를 무척 좋아해요. 너무너무 좋은걸요." 줄리아의 붉게 상기한 얼굴을 본 스티브도 이해를 했다. "그 말 들으니 나도 기분이 좋아." 왜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줄리아는 자기자신에게 물어보았다. 휴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은 이미 의심할 여지도 없다. 휴도 나를 미워하지는 않지만, 그는 다만 깊이 빠지기가 싫은 것이다. 서로의 성격이 극단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휴에게는 큰 장애로 비치고 있을 것이다. 그는 감정에 좌우될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자기 감정에 충실한 삶을 추구하고 싶다. 이런 감미롭고 현란한 사랑의 설레임은 가꾸어 나가지 않으면 손해다. 이 사랑은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크지만 지금은 그런 것일랑 잊고 휴와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자. 다만 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끌어당길 수 있도록 힘껏 노력하면 그만이다. 그런 결심에 따라 이튿날 아침, 줄리아는 오후에 타이핑을 하겠다고 말했다. 휴는 고맙다며 자기는 오후에 외출을 한다고 덧붙였다. 하는 수 없이 줄리아는 그가 없는 방에서 우울한 기분으로 타이핑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스티브 방에서 빨리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줄리아>라고 이름 붙여진 그 노래는 외기 쉽고 인상적인 가락이었다. 냉혹한 배신을 원망하는 노래가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30 분쯤 타이프를 치고 있는데 갑자기 글자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리본을 새 것으로 갈아 끼워야 한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지만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우선 기계를 만져보기로 했다. 그러나 몇 분 후 줄리아는 멍한 눈으로 리본 통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디서 어떤 고장이 났는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볼펜 끝으로 여기저기 콕콕 찔러 보았다. 그러자 별안간 리본이 30cm 정도 밖으로 튀어나왔다. 간신히 리본 통의 뚜껑을 닫고 잉크가 잔뜩 묻은 원고를 치우는 등 진땀을 흘리면서 뒷처리를 하고 있는데 큰 벽시계가 울렸다. "아아, 어떻게 할까!" 아래에 내려가 매리네이드를 만들어야 할 시간이다. 오늘 밤은 스티브의 새 노래와 마이클의 각본이 완성된 것을 축하하는 특별한 날이다. 줄리아는 휴보다 먼저 이층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하고 일단 방에서 나왔다. 주방에서 손을 깨끗이 씻고 먼저 닭고기를 알맞게 썰어 접시에 담는다. 고추와 생강과 양파를 조금씩 믹서에 넣고 물과 간장을 적당히 타서 스위치를 누른다. 믹서 돌아가는 요란한 소리. 스위치를 끄고 뚜껑을 열어 속에 든 것을 꺼내려고 했다. 그때였다.


"무엇인가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어머나!" 줄리아는 손이 미끄러져 뚜껑이 열려 있는 믹서의 스위치를 다시 누르고 말았다. 뚜껑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끈적끈적한 내용물이 튀어나와 온통 주방 전체에 흩어졌다.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는 줄리아와 휴의 전신에는 말할 것도 없고 천장에까지 붉은 방울이 튀었다. "스위치를 꺼야 해!" 믹서의 굉음보다 더 높은 휴의 고함소리. 그리고 그가 뛰어와서 스위치를 눌렀다. "어떻게 된 거야! 당신은 주방에서라면 절대로 실수하지 않는다고 장담하지 않았어!" 줄리아는 심하게 콜록거리기만 했다. 입을 멍하게 벌리고 있었기 때문에 매리네이드 방울이 입 속까지 날아든 것이다. 간신히 눈물을 닦자 화를 잔뜩 낸 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당황해서 눈을 밑으로 내리자 그의 옷이 보였다. "혹시 그 옷은…?" "바로 그 옷이오! 풀장에 빠졌을 때는 클리닝을 해서 원상복구할 수 있었지만 이번만은 전액을 변상해야 돼. 정말 당신은 경망스럽기 짝이 없는 여자로군!" 화를 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비싼 고급 양복이 온통 매리네이드를 뒤집어썼다. 미안해라… 독한 냄새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고 얼룩이 진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다.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윽고 탁자에 기대어 온몸을 뒤틀며 마구 웃어댔다. 또다시 눈물이 나온다. "미안, 미안해요." 웃음이 멈춰지지 않아 쉰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당신 얼굴은… 꼭 홍역에 걸린 사람 같아요?" "나는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텐데…" 큰 손이 줄리아의 허리를 잡고 위로 치켜들었다. 줄리아는 몸의 균형을 잃고 휴의 몸에 부딪쳤다. 그녀는 급히 휴에게 붙잡혀 있는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왜 이러세요?" 숨을 헐떡거리며 물었지만 대답은 이미 알고 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할 참이오." 휴가 중얼거리며 줄리아의 몸을 가볍게 끌어올려 입술을 포갰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키스는 줄리아의 전신을 기쁨의 화염 속으로 던져 넣었다. 그녀는 두 팔을 들어 휴의 목에 매달렸다.


휴가 천천히 줄리아를 내려놓았다. 두 사람의 몸이 서로 부딪치자 줄리아는 점점 더 뜨겁게 타올랐다. 큰 손이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오고 긴 엄지손가락이 가슴 아래쪽으로 파고들었다. 줄리아도 그의 옷 속으로 손을 밀어넣어 억세고 당당한 등을 꽉 껴안았다. 열렬한 키스가 계속되었다. 줄리아의 몸은 차차 활처럼 테이블 위로 휘어졌다. 끝내는 등이 테이블에 닿고 거기에 묻은 메리네이드가 스웨터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줄리아는 그런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스웨터 속으로 밀고 들어와 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신음하듯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휴의 큰 손에 알맞은 풍만한 가슴을 가지고 있어 정말 다행이다… 상대방을 이처럼 뜨겁게 원해 보기는 난생 처음이다. 이성이나 상식의 테두리를 뛰어넘은 뜨거운 정열이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알았다. 지금까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 휴는 능숙하게 애무를 계속했다. 줄리아는 관능의 기쁨으로 몸을 떨었다. 휴가 고개를 들어 줄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이 다 얼굴에 붉은 매리네이드를 묻힌 채 똑같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나 휴가 먼저 호흡을 가라앉혔다. 귓불만이 아직도 불그스레한 홍조를 띠고 있었다. 휴는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긴 시간 키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입술은 붉게 상기되어 묘하게 탐스럽다. "당신은 너무 정열적이어서 꼭 불을 먹는 기분이야." 휴는 허리를 굽혀 그녀의 얼굴을 옆으로 돌려 부드러운 귓불에 입술을 댔다. 짜릿한 쾌감에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가쁜 숨을 토하고 다른 한쪽 귀에도 키스를 해달라는 뜻으로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그때 눈에 무엇인가 가물가물하게 비쳤다. 눈을 깜박이며 다시 보았다. 주방 뒷문에서 주방 안을 들여다보는 얼굴이 있었다. 찰스! 8 줄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휴의 두터운 가슴을 힘껏 밀어붙였다. 휴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돌아보았다. 그는 찰스를 발견하자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침착하게 줄리아의 스웨터 속에서 손을 뺐다. "누군가가 잔뜩 화풀이를 했나 보죠?" 찰스는 싱글싱글 웃으며 지저분한 주방 바닥으로 들어섰다. 찰스도 어른이 다 되었나 보다. 2 년 전만 하더라도 그는 허둥지둥 달아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거꾸로 줄리아가 홍당무가 되어 구겨진 스웨터를 바로 했다. "별안간 믹서 스위치가 켜졌어." 줄리아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랬군. 어디 다친 데는 없었어요?"


찰스는 줄리아가 기계에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믹서를 고쳐야 되겠어." 휴는 침착한 태도로 말을 거들었다. 줄리아는 애무의 여운을 가라앉히려고 안간힘을 썼다. "내게 할 말이 있어서 왔지?" 찰스에게 물었다. 찰스는 폭스바겐의 수리를 다 끝냈으니 시승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자동차 수리 면허증의 소지자는 아니다. 뜻밖에도 휴가 대신 운전을 해보겠다며 그동안 줄리아는 주방 청소할 것을 제안했다. 찰스는 기뻐하면서 휴와 나란히 주방에서 나갔다. 줄리아는 어쩐지 따돌림을 당한 듯한 기분이 되어 약간 화가 났다. 그때부터 정신없이 바빠져 휴의 타이프라이터 건은 까맣게 잊고 말았다. 이윽고 저녁식사 준비가 끝나 가족 모두가 축배를 들기 위해 거실에 모였다. 줄리아도 뒤따라 들어갔는데 휴 모습을 본 순간 타이프라이터 건이 머리에 떠올랐다. 휴는 셰리 주를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었다. 그는 일이 있을 때는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타이프라이터는 고장이 난 채 그대로 팽개쳐져 있는 것일까? 살짝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는데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잿빛 눈이 줄리아를 잡았다. 긴장한 줄리아가 웃음을 던지자, 그것을 계기로 그가 다가올 기미를 보였기 때문에 오히려 후회하고 말았다. "줄리아, 참 멋진 드레스군요." 올리비아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그 나비 무늬는 손으로 그린 것이잖아요? 어디서 샀어요?" "오클랜드에서 샀어요. 손으로 그린 독특한 무늬의 실크 드레스를 전문으로 파는 가게가 있어요." 줄리아는 정신없이 대답했다. "그 드레스의 독특한 아름다움도 입고 있는 여인보다는 못하군." 리차드가 달콤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아아, 요정의 볼에 걸려 있도다… 이디오피아 여왕의 귀에서 반짝이는 보석…" "해릭의 시라면 더 알맞은 것이 있을 법한데, 리차드." 휴가 이렇게 말하면서 옆으로 왔다. 줄리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휴는 다친 손으로 잔을 들고 있었다. 그 손목이 약간 더러워져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타이프라이터의 잉크일까? 다른 한쪽 손이 뻗어나와 줄리아의 팔을


잡고 휴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 잔뜩 긴장한 줄리아 귀에 뜻밖에도 휴의 달콤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비단을 몸에 감은 나의 줄리아 그대가 걸음을 옮길 때 비단도 물결치네 애타게 떨리는 빛이여 왜 이다지도 나의 속을 태우는가 줄리아는 황홀한 도취경에 빠졌다. 잿빛 눈동자는 실크 드레스의 가슴 위에 멈추어 있다. 주방에서 맛본 애무의 감촉이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형도 대단하신데. 이번에는 무대에서 한번 하시면 어때요?" 리차드가 분한 듯이 말했다. "줄리아에게 알맞는 시는 일반대중 앞에서 낭독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아." 휴가 대답했다. 저녁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휴는 계속 이런 태도를 취해 리차드가 줄리아의 관심을 끌려 할 때마다 그 콧대를 꺾어 놓았다. 그 태도가 너무 노골적이었기 때문에 줄리아는 차츰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가족들은 이 뜻밖의 사랑싸움을 즐기고 있는 눈치였다. "적당하게 해두지 않으면 남들이 의심을 하게 돼요." 식탁에서 일어섰을 때 휴가 뛰어와 의자를 끌어주기에 줄리아는 작은 목소리로 타일렀다. "다들 좋아하고 있어." 휴가 귀엣말로 속삭였다. "그리고 리차드를 좀 봐. 녀석은 이제 완전히 포기상태가 됐어. 만약 내가 그런 시시한 감상적인 시에 빠지기 시작하면 녀석도 당해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거든." 시시한 감상이라니! 그렇게 애달프게 아름다운 시를. 만약 그 시구가 휴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줄리아는 낭만적인 상상에 젖으면서 주방으로 돌아와 커피 준비를 했다. 거실로 돌아가는 도중에 식당에서 나온 리차드와 마주쳤다. "그러면 안녕, 사랑하는 이여! 나가기 전에 한 번만 나에게 키스를." "이제 그만해요, 리차드."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지 말아요, 나의 사랑. 나는 패배를 인정하겠어. 바이런의 말을 알고 있어? 우정이란 날개 없는 사랑이래." 줄리아는 반신반의하면서 어쩐지 울적한 듯한 리차드를 쳐다보았다. "그럼, 우리들은 마치 키위 같군요."


키위는 뉴질랜드에만 살고 있는 날지 못하는 새다. "그렇지. 나는 바로 키위야. 하지만 당신과 휴는 날개를 가진 새 같군." "두 사람 다 거기 서서 밤새도록 얘기만 할 작정인가?" 휴가 거실 입구에 서 있었다. "지금부터 스티브와 아버지를 위해 새로 건배를 들기로 했어." 휴는 지나가려는 줄리아를 붙들어 세우고 샴페인 글라스로 건배를 하게 했다. 놀리고 있는 듯한 그의 태도에 화가 난 줄리아는 커피 서비스가 끝나자 그 자리에서 선언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오늘 밤 먼저 자겠어요." "마침 잘됐군." 휴가 커피 잔을 놓으며 말했다. "그렇게 해요. 내 각본이 완성된 밤이라고 해서 여느 밤과 다를 건 없으니까." 마이클은 스스럼없이 말했다. "그런 거북한 말은 하지 마세요." 남편에게 핀잔을 준 코니는 줄리아와 휴를 향해 꼭 오래 된 부부를 대하는 투로 말했다. "두 사람은 이층으로 가요. 이 양반은 각본이 완성되고 나면 언제나 엉망으로 취해 버리니까. 마지막에는 취해 쓰러지지만 리차드와 스티브가 있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도울 수 있겠지." "우리도 여기 조금 더 있다 가지…" "안 돼요, 저는 싫어요." 줄리아는 더 이상 연극을 계속하는 것이 지겨워 거칠게 휴의 말을 가로막았다. 기세 좋게 일어서는데 휴가 재빨리 두 팔로 줄리아를 껴안았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로잘린드가 빙긋 웃었다. "흠, 알겠어요. 다만 엄마가 말한 주의사항만은 잊지 말아요." 휴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줄리아는 그를 끌고 다락방으로 가서 맹렬히 대들었다. "당신은 리차드보다 더 나빠요! 일부러 가족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꾸미고." 휴는 재미있다는 듯 웃고만 있었다. 여느 때 같으면 그 웃는 얼굴을 황홀한 기분으로 쳐다볼 줄리아지만 지금은 그것이 더 얄미웠다. "그런 색광 같은 태도를 보일 필요는 없잖아요?" "왜 이러지? 당신은 자기가 장난감이 되었을 때는 재미가 없는가 보지?"


역시 휴는 나에게 보복하기 위해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그러나 내게 있어 휴에 대한 감정은 장난도 연극도 아니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다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이야! "줄리아, 당신의 그 빛나는 유머감각은 어디로 가버렸지? 내가 너무 진지하기만 하다고 말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 아니었소? 당신만큼 명랑할 수 있는 사람의 기분을 이제 조금은 알게 되었겠군." 그는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론의 여지조차 없어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타이프라이터가 보였다. 잉크가 묻은 흔적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책상 위는 말끔히 정돈되어 있다. 줄리아는 이때다 싶어 화제를 바꾸었다. "타이프라이터에 대해서 보고할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정말이에요. 리본을 바꾸려고 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당신이 기계에 약하다는 말은 찰스에게서 들었어. 다음부터 이런 일이 있으면 내게 맡겨요." "잘 알았어요." 줄리아는 얌전히 대답했다. 다음부터라는 말은 당장 내쫓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줄리아는 안도감과 함께 대담한 질문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찰스는 수리공이 되고 싶다는 말을 당신에게 하지 않았어요?" "음, 들었어." 휴의 눈에 경계의 빛이 돌았다.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할 참이에요?" "내가 어떻게라니?" "네, 당신 말이에요. 그렇잖아요? 당신은 장남이고 변호사로서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찰스가 내 차를 훌륭히 수리한 사실을 알고 있죠?" "그건 알고 있지. 그 문제는 생각해 보지." "생각하다니, 뭘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겠다는 뜻이야." "그러면 올리비아 일도 좀 신경쓰셨으면 좋겠어요." "아직 가지 않고 있어? 당신 가슴은 매달리기에 아주 좋은 가슴인 것 같군." "당신 자신이 내게 매달리기 싫다고 해서 그렇게 비웃을 것까지는 없잖아요?" "내가 당신 가슴을 빌 때는 울기 위해서가 아니오."


휴가 눈길을 줄리아의 가슴으로 보냈다. 줄리아는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안정을 잃어 몸이 흔들렸다. "그리고 저… 올리비아 얘기인데…" 목이 쉬었지만 일단 사정을 모두 설명했다. "당신은 남의 사생활에 참견하는 명수로군. 나는 다행히 그런 취미를 가지고 있지 않아." "하지만 달리 사는 방법도 있다는 걸 가르쳐 주는 게 어째서 참견인가요? 올리비아는 협회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핑계를 찾고 있는 듯했어요."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오. 나를 끌어들이지 말아요." 목소리가 점점 짜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럴까요? 지금의 당신은 바로 변호사의 화신 같군요. 자기방어를 하고 싶을 때는 언제나 변호사로 변하는군요." "너무 무리한 요구는 하지 말아요. 찰스의 일만으로도 충분해. 당신 속셈은 알고 있어.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소. 나는 말려들고 싶지 않아." "당신은 이미 말려들었어요." 줄리아는 신나게 말했다. "오늘 밤의 자신을 떠올려 보세요. 그걸 당신 자신이 즐기고 있었어요! 스스로 알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조금도 즐겁지 않았지만. 됐어요, 잘 알았습니다. 나가겠습니다. 나가면 되죠?" 줄리아는 두 팔을 들고 뒷걸음질치다가, 휴의 모습에서 그가 울화통이 터지기 직전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오늘 밤의 그는 자기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밤부터 두 사람의 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줄리아는 농담을 할 때도 절도를 지키게 되었고, 휴는 싹싹하게 줄리아를 자기의 세계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휴는 줄리아에게 고전음악의 좋은 점을 일깨워 주었다.줄리아가 곡의 아름다움에도 취해 혼자서 춤을 추어도 싫은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페르시아 융단 위를 빙글빙글 도는 줄리아 모습을 그는 의자에 걸터앉아 눈을 반쯤 감고 음미하듯 바라보았다. 줄리아가 머리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음악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휴 자신도 귀에 익은 곡을 재발견하는 즐거움까지 맛보고 있다. 휴의 손은 거의 다 나아서 타자를 치는 데는 아무런 지장도 없었지만 서로 그 문제는 건드리지 않기로 말없는 암시가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 일을 천천히 하게 되고 그만큼 서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많아졌다. 드디어 휴도 줄리아를 믿고 그 성격을 이해하게 되었다. 줄리아는 그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지만 그의 마음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가끔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 때가 있다. 휴도 어느 정도 줄리아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어느 날 밤, 휴의 방은 난방이 너무 잘되어 몹시 더웠다. 줄리아는 긴 안락의자에 푹 기대앉아 졸린 눈으로 휴를 바라보고 있었다. 휴가 일어서서 와이셔츠 단추를 풀고 뻐근한 어깨를 움직이며 피로를 풀기 시작했다. 근육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줄리아는 하품을 했다. "어떻게 해서 그처럼 좋은 체격을 갖게 되었지요? 가정부 브라베이지 얘기로는 옛날엔 여위고 바싹 마른 소년이었다고 하던데." "몸을 단련시켰지. 학교 다닐 때 골목대장에게 구박받지 않으려고 한 것이지." "복싱? 혹은 유도?" 휴는 줄리아 앞에 우뚝 서서 자기의 큰 손을 바라보았다. "나는 폭력을 좋아하지 않아." "그럼 아이가 생겨도 때리지는 않겠군요."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한마디 던져 본 말인데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는 것을 보자 줄리아는 움찔했다. "그런 가상적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어."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는 걸까? 그렇지만 휴가 아이들을 남달리 좋아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독신주의를 지키겠다는 걸까? 그래도 좋다. 달리 어떻게 할 길이 없지 않은가… 휴는 줄리아를 단념시키려는 듯 매정하게 얘기를 다른 데로 돌렸다. "보디 빌딩을 했지." 줄리아는 눈을 휘둥그래 뜨고 말했다. "어머, 굉장하군요. 쇳덩이를 들어올렸나요? 그럼 여러 가지 포즈도 취했겠네요?" "아니, 대회에는 나가지 않았어. 나는 주로 역도를 했거든." 그것은 그야말로 휴다운 짓이다. 체육관에서 홀로 자기 육체와 고독한 싸움을 하며 땀을 흘렸겠지. 줄리아는 몸을 일으켜 의자에 단정한 자세로 앉았다. "보여 주세요." "무엇을?" "근육을 움직여 보세요."


"포즈를 취해 본 적은 없었다고 말했잖아?" "거짓말이에요. 당신은 아무도 없을 때 혼자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해 보았을 거예요." "올해 들어 역도를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어."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지금도 굉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는데." 줄리아는 안락의자에서 재빨리 일어나 그의 와이셔츠 단추를 잡았다. "보여 주세요. 남자가 근육을 움직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안 돼, 줄리아…" 휴가 줄리아의 손을 잡았다. "부끄러워할 것 없어요. 와이셔츠를 벗는 것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잖아요? 더 많이 벗은 모습도 보았는데. 그래요, 휴. 부탁해요." 휴의 수영복 차림을 생각하니 다시 한번 그의 몸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불현듯 솟아났다. 줄리아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와이셔츠 앞을 벌리고 발돋움하여 벗기려고 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실랑이를 했으나, 결국 휴가 졌다. 그는 새하얀 작은 손이 맨가슴을 어루만지는 바람에 힘이 빠진 듯했다. 줄리아는 그의 와이셔츠를 등 뒤로 내던지고는 개선장군처럼 웃었다. "보여 주세요." 쉰 목소리가 나왔다. 다만 근육을 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흥분으로 눈이 충혈된 줄리아 앞에서 휴는 진지한 표정으로 천천히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다. 탐스러운 근육이 갖가지 형태로 뒤엉키며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어 나갔다. 줄리아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의 육체에서 뿜어내는 체온이 뒤에 있는 난로의 열기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다. 정적 속에 은밀한 기대가 넘쳐 흘렀다. 줄리아는 이상하게 떨리는 손을 내밀어 솟아오른 그의 가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아, 참으로 부드러운 살결 … 단단한 근육 … 꼭 떡갈나무 숲 같아요. 당신만큼 아름다운 남성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어요." 오로지 나 한 사람을 위해 이 약동하는 힘을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휴는 한순간 꼼짝도 하지 않고 섰다가 이윽고 그녀의 손을 잡아 자기 가슴에 갖다 댔다. 짙은 가슴털을 통해 힘차게 뛰는 심장의 고동이 줄리아 손에 느껴진다. 줄리아의 심장 역시 숨이 막힐 정도로 빠르게 고동치고 있었다. 휴의 입술이 다가왔다.


"평소에는 솔직하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번거롭게 굴지? 당신이 원하고 있는 건 이게 아닐까?" 줄리아는 대답 대신 얼굴을 파묻었다. 휴는 넓은 가슴으로 그녀를 껴안았다.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릴 듯한 뜨거운 키스가 시작되었다. 줄리아도 굶주린 듯이 응했다. "내 품속에 있는 당신은 꼭 어린아기 같아… 작고 몹시 깨끗하고 귀여워." 휴가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지금 갓난아기 같은 기분이 아니예요." "그렇다면 어른이라는 걸 증명해야지." 휴는 그녀의 귀쪽으로 입술을 옮기면서 큰 손으로 살며시 블라우스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정말 그렇군. 갓난아기라니 천만의 말씀이지." 그의 손이 풍만한 가슴을 덮었다. 피가 줄리아의 온몸 속을 내달았다. 다시 달콤한 저음이 들렸다. "벌써 침대로 갈 시간이 온 것 같군." 무릎 뒤쪽으로 굵직한 팔을 느낀 순간, 줄리아의 몸은 둥실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는 새털이불 위에 살며시 뉘어지고 휴의 뜨거운 몸이 몸 전체에 느껴져 왔다. "리차드가 나더러 너무 나이를 먹어 침대에서 포옹하는 게 무리라고 하더군." 줄리아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리차드가 뭘 알겠어요? 당신은 굉장한 정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들이 믿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증명을 해도 좋아요." "당신이라면 정말 그렇게 할지도 모르지." 휴는 이렇게 말하면서 줄리아의 블라우스를 벗기고는 스커트로 손을 넣었다. 줄리아는 애정과 즐거움으로 터질 것만 같은 자신을 느꼈다. 이 첫경험 앞에서 육체뿐만이 아니라 대화로도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무척 기뻤다. 스커트가 벗겨지고 팬티스타킹도, 속옷도 내던져졌다. 기대로 온몸이 떨리고 뜨거운 욕망은 처녀의 수줍음을 잊게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휴의 기분을 한층 더 크게 고조시켰다. 그는 욕정에 달아오른 길고 뜨거운 키스를 퍼부은 다음 몸을 뒤로 빼어 줄리아의 나체를 유심히 살폈다. 흰 살결은 가슴에서 육감적으로 솟아오르고 부드럽게 물결치는 복부는 갓난아기 같은 솜털로 덮여 있다.


나의 이런 모습을 본 남자는 아직 한 사람도 없다. 휴가 그 첫사람이 된 것이 얼마나 기쁜가. 언제나 굳게 닫힌 잿빛 눈동자가 지금은 나를 보고 정열로 불타고 있다. 줄리아는 자랑스러운 기분을 만끽했다. 지금부터 일어날 일이 조금도 두렵지 않다. 휴는 살며시 줄리아의 몸에 손을 댔다. 줄리아가 낸 신음 소리를 듣고 휴는 뺨과 귓가에 붉게 물들였다. 휴는 줄리아의 얼굴을 옆으로 눕혀 부드럽게 입술을 포갰다. 아주 부드러운 키스였다. 줄리아는 점점 참을 수 없게 되어 스스로 온몸을 휴에게 밀착시켰다. 그때부터 뜨거운 키스가 시작되고 휴는 줄리아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이 뜨거운 설레임,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휴의 입술이 귀에서 목으로 옮기더니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가슴 둘레에서 천천히 원을 그리는 키스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견디지 못하게 된 줄리아는 두 손으로 휴의 머리를 잡았다. "제발, 휴…"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 줄리아." 줄리아는 현기증을 느껴 다시 눈을 감았다. 쾌감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사향 냄새를 풍기는 그의 체취가 콧속을 간지럽히고 깃털이불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줄리아 자신도 어느덧 그의 부드러운 살결을 애무하고 있었다. 휴의 입술이 가슴에서 밑으로 옮겨갔다. 놀란 줄리아는 그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눈을 뜨고 응시하는 줄리아를 휴는 한순간 의아하게 보고 있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기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군, 나만 두껍게 옷을 입고 있었군…" 휴의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 그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재빨리 옷을 모두 벗었다. "이제는 됐지?" 그는 다시 줄리아 옆에 와서 누웠다. 휴는 부드럽게 속삭이며 애무를 계속했다. 휴야말로 나의 순결을 바치기에 알맞은 남성이다. 고조되는 도취감 속에서 줄리아는 말했다. "사랑해요, 휴… 나를 사랑해 주어요, 제발." "나를 갖고 싶다, 이 말이지?" 휴가 건성으로 물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당신을 사랑…"


줄리아는 황홀한 기분으로 그 말을 되풀이했다. 그 순간 휴의 몸이 살짝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 본심이 아니겠지? 마음에도 없는 사랑의 말 따위는 우리에게 소용없어. 지금은 즐기기만 하면 돼."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내가 이렇게 할 수 있겠어요?" 휴가 고개를 들었다. "솔직히 말해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봐. 나는 당신 몸을 갖고 싶고, 당신도 나를 원하고 있어. 그것뿐이야." 휴가 몸을 빼려 했기 때문에 줄리아는 다급하게 그를 붙들었다. "제발, 가지 마세요." "앞에 한 말을 취소하겠어?" 그는 이런 상황에서 그만둘 수 있다는 걸까? 함께 만족하는 기쁨을 중단하면서까지 사랑과 행위의 관계를 구분한단 말인가? "아뇨, 취소하지 않겠어요." 휴의 전신에 고뇌의 그림자가 깔리고 얼굴에는 땀방울이 흘렀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바닥에서 바지를 집었다. "그럴 수가 있어요? 내가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고 그만두다니 믿어지지 않아요." "아니, 당신은 이러한 남녀간의 미묘한 관계를 잘 알고 있을 텐데." 휴는 지금도 줄리아가 풍부한 경험을 가진 여성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옷을 다 입자 어색한 발걸음으로 난로 옆으로 다가가서 꺼져가는 불꽃을 거칠게 휘젓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침대에서 내려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난로의 불빛이 흰 살결 위에서 춤추었다. "당신은 무서워하고 있군요? 내가 무슨 요구를 할까 봐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거죠?" "아니야! 자신의 잘못을 위장해서는 안 돼. 어서 옷을 입고 나가줘." "왜요? 어째서? 나는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은데…" "지금은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대를 하게 될 거야, 줄리아. 이것은 잘못이었어. 나는 빠지고 싶지 않아. 당신도 그것이 좋을 거야." "이미 때가 늦었어요. 나는 깊이 빠져들고 말았어요." 줄리아는 휴 앞으로 돌아가 금발머리를 흔들었다. "휴, 사랑해요!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해요. 당신도 이 사실만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휴는 눈부신 줄리아로부터 억지로 눈을 뗐다.


"옷이나 입어!" 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헛수고라는 점은 분명했다. 줄리아는 말없이 옷을 입었다. "알았어요. 난 가겠어요. 하지만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꿀 수 있을 거로는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이 변화해 주기를 바라지도 않겠어요. 아마도 나는 상처를 받겠죠. 하지만 이미 각오가 되어 있어요. 당신은 그 어느 것도 희생시킬 필요가 없어요." 휴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가 지친 듯 입을 열었다. "그만해요, 줄리아." 줄리아는 어깨를 떨구고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9 이튿날, 줄리아가 잠에서 깼을 때는 방안 가득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침대에 누운 채 창 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지금 자신이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는가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상황이 비극적이라는 것을 조금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어젯밤은 세상 모르게 깊이 잠들었고, 지금도 베개가 눈물로 얼룩지기는커녕 희망으로 부풀어 있다. 의기소침해 있어야 하는데 묘하게 낙관적인 기분만 든다. 어젯밤, 휴의 둥지에서 보낸 시간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황홀해질 정도로 멋진, 잊을 수 없는 순간… 결정적인 순간에 휴에게 거부당했지만 나는 이대로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다. 만약 그가 나를 소홀히 생각했다면 나의 사랑의 고백을 들은 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목적을 관철했을 것이 아닌가. 사소한 사랑의 속삭임이 마음에 걸려 그것을 깊이 생각하는 남자는 별로 없다. 그만큼 휴는 자기뿐만 아니라 나의 자존심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증거다. 그가 사랑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 인간의 감정을 믿지 못하게 된 것이리라. 그 강한 자제력, 남과의 유대관계를 이상하게 두려워하는 강박관념, 감정에 대한 경멸, 이 모든 것이 그의 과거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애정이 넘치는 말로 집안의 양자가 되어 많은 세월이 흘렀는 데도 아직 아물지 못한 깊은 상처가 남아 있는 것이리라. 나는 사랑을 고백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는 감동의 절정에 이르러 있어 고백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휴는 나의 사랑을 거부했지만 내가 크래머 별장에서 지낼 수 있는 시간은 아직도 7 일이나 남아 있다. 그 동안 어떻게 해서든 휴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하리라. 위협하지 않고도 연인이 될 수 있는 성숙한 여성이라는 사실을 그에게 납득시키는 거다. 그렇게 하면 그도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와 깊은 인연으로 맺어지는 데서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지만 만약 휴가 나에게 육체의 기쁨밖에 줄 수 없는 남자라고 한다면 그래도 나는 참을 수 있을까? 아니다. 그 정도로 다정하고 따뜻한 애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정신적인 사랑을 전혀 할 수 없는 사나이는 아닐 것이다. 나는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 그의 얼굴로부터 웃음을 끌어내고 냉철하게 정돈된 생활태도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어 주고 싶다. 어젯밤, 마지막 순간에 본 그 광기 어린 듯한 험악한 표정을 지워 주고 싶다… 줄리아는 천천히 주방으로 나가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크루아상도 케제리 푸프도 와플도 훌륭하게 만들어졌다. 줄리아는 설레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 평소의 배를 먹었다. 조급하게 덤벼서는 안 된다. 휴는 강요당하는 것을 싫어하니까, 천천히 시간을 들여 서서히 무르익게 해야 한다… 조반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가정부인 브라베이지가 빨랫감을 산더미처럼 안고 주방을 지나갔다. 다시 주방으로 돌아온 그녀가 지나치면서 말했다. "오늘은 휴의 방도 치워야지. 일할 때는 방해가 되기 때문에 외출했을 때가 제일 좋은 기회라우." 줄리아는 닦고 있던 식기를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다. "안 계시다뇨? 어디 나가셨나요?" "오클랜드에 가셨다고 마님께서 그러던데." "며칠 예정으로?" "글쎄요, 삼사 일쯤 걸리지 않을까?" 진 브라베이지는 큰 등을 흔들며 나갔다. 휴가 떠나 버렸다! 작별의 인사도 없이! 어젯밤 일이 원인일 수는 없으니 아마도 일 때문이겠지. 삼사 일이나 떨어져 있는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닐는지? 이처럼 허공에 뜬 어중간한 상태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머리가 이상하게 될 것 같다. 혹시 휴는 나를 만나지 못하는 데서 외로움을 느낄까? 제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런데 뜻밖에도 휴는 그 이튿날 돌아왔다. 모두가 거실에 앉아 포도주를 한 잔씩 마시고 있을 때 밖에서 마세라티가 멈추는 소리가 났다. 줄리아는 술잔을 쥔 손이 떨려오는 것을 의식하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거실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먼저 나타난 사람은 휴가 아니라 고상하게 차려입은 앤 패로였다. 줄리아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코니가 맨 먼저 충격에서 벗어나 몸을 일으키고 뒤따라 들어온 장남에게 어찌된 영문이냐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어머, 휴! 빨리 돌아왔구나!" "어머니, 앤을 데리고 왔습니다. 앤이 며칠 동안 여기서 묵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럼, 좋고말고." 코니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두 사람 다 이리 와서 이걸 마셔요. 밖은 춥지?" 앤은 미인만이 갖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사의를 표하고는 휴의 팔에 끌려 긴 안락의자 쪽으로 갔다. 두 사람이 무릎이 닿도록 가깝게 앉는 것을 보자, 줄리아는 머리 속이 핑 돌았다. 꼭 두 사람이 모두에게 공동작전을 펴고 있는 것 같다. 앤이 말했다. "다행히 이번 주에는 강의가 없어요. 캠퍼스의 긴장감에서 해방되니 마음이 편하군요. 그래서 휴가 초대를 했을 때도 두말없이 받아들였답니다." 줄리아는 속이 울컥했다. 모두가 조금씩 말문을 열기 시작했지만 줄리아만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만약 지껄이기 시작하면 무슨 소리를 외쳐 댈지 알 수 없었다. 남을 질투해 보기는 생전 처음이다. 하지만 휴의 목적은 뻔했다. 앤을 방패로 삼아 나를 내몰려는 심보이다. 그 증거로, 내가 쏘아보낸 시선을 휴는 가볍게 받더니 엷은 웃음을 머금은 채 눈을 다른 데로 돌려 버리지 않는가. 참으로 냉정한 남자! 확실히 앤은 휴와 똑같은 세계에 살고 있고 세련되어 있고 또 분별도 있다. 하지만 내가 그리 쉽게 물러서리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휴가 짐을 방에 갖다 놓겠다며 라운지에서 나갔다. 줄리아는 치울 일이 생각났다는 핑계를 대어 그의 뒤를 따랐다. 급히 층계를 올라 이층 중간쯤에서야 그를 붙잡았다. "휴!" 그는 다음 층계에 한쪽 발을 얹은 채 돌아보았다. "왜 그러지?" 줄리아는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았다. "오늘 밤도 타이프를 치러 갈까요? 일이 예정보다 늦어지고 있죠?" "아니, 괜찮아요. 앤이 교정을 도와 주기로 했소." "어머, 그럼 그녀는 일을 돕기 위해 여기 왔군요." 줄리아는 빈정거리며 말했다.


"내가 교정을 보면 안 되나요?" "당신은 영어학 학위를 가지고 있소?" "그녀는 컴퓨터가 전문이 아니예요?" "영어학 학위도 가지고 있지." 줄리아는 뾰루퉁해져서 말했다. "하지만 타자 정도는 나도 칠 수 있어요." "좋아요, 타자는 나도 칠 수 있소." 휴는 왼손을 들어 손가락을 움직여 보였다. "그러니까, 이제 당신 일은 끝났소." 그는 층계를 올라서려고 했다. 줄리아는 서너 계단을 단숨에 뛰어올라 그의 앞을 막았다. 처음으로 얼굴이 휴와 같은 높이에 위치하게 되자 자신감이 솟았다. 거꾸로 휴는 침착한 표정 이면에 긴장을 감추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할 건지 얘기해 주세요." "나는 트렁크를 방에 가지고 가야 해. 무슨 할 말이 있소?" "있어요. 없을 줄 알았나요? 왜 저 여자를 데리고 왔죠?" 피가 머리에 오른 줄리아는 대뜸 쏘아붙였다. "저 여자라니, 앤 말이군. 그럼 대답하지. 그녀는 내 친구이고 또 일도 거들어 주게 돼 있어. 데리고 올 만도 하지 않나? 도대체 내가 친구를 초대하는 데 일일이 고용인의 허가를 받아야 하오?" "당신이 비꼴 줄도 아시다니 희한하군요. 혹시 당신은 고용인을 유혹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시시한 소리는 그만해." "그렇다면 왜 나를 피하려고 하죠? 도둑처럼 살짝 밤중에 달아나더니 컴퓨터 여사를 호위로 데리고 오다니. 하긴 나는 보잘것없는 무식한 요리사예요. 재능과 미모를 겸비하고 말주변 좋은 재원은 아니예요. 하지만 나는 줄리아예요. 그리 간단히 물러서리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일걸요." 줄리아는 사납게 대들었다. "도대체 무엇을 물러서지 않겠다는 건가? 앤이 온 것과 당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소. 당신을 중심으로 이 세계가 돌고 있는 건 아니오."


줄리아는 멈칫했다. 그러나 휴가 자기에게 끌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피부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허세를 부리고 있을 따름이다. 그것이 틀림없다… "그토록 앤의 도움이 필요했다면 왜 전에 왔을 때 붙잡지 않았죠?" "그때는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었소. 그런데 내가 왜 그런 질문에 일일이 대답을 해야 하지?" "정직하게 대답해 주면 돼요. 내가 두렵다면 그 현실을 똑바로 보세요. 말해 보세요. 내가 죽도록 두렵다고 말이에요." "또 심층심리분석인가? 좋아, 당신 말대로 하지. 당신이 죽도록 두렵소. 그리고 저녁식사는 두 사람분을 추가하는 것을 잊지 말아요." 휴는 냉큼 이렇게 말하고는 멍하니 선 줄리아를 그 자리에 남겨 둔 채 층계를 두 단씩 뛰어올라 사라졌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줄리아의 마음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 채 빠져나오지 못했다. 앤 패로는 스스럼없이 가족들 속에 녹아들어 갔다. 그녀라면 어떤 환경에 처해도 멋지게 어울려 갈 것 같다고 줄리아는 분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렇게 머리가 좋으면서도 개성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너무 갈고 닦은 바람에 다 닳아 없어졌겠지. 하지만 앤과 휴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기 때문에 보면 볼수록 화가 났다. 두 사람이 다 키가 큰 미남 미녀들인 데다가 오래 사귄 탓으로 한눈에 보아도 스스럼없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저녁식사 때도 두 사람은 남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무엇인지 어려운 이야기만 나누고 있다. 그 바람에 쌍동이인 리차드와 스티브가 다시 줄리아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과 달리 두 사람은 좋은 친구로서 줄리아의 마음을 넌지시 위안하는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 넓은 시야로 보면 앤 쪽이 휴에게 어울릴지도 모른다. 줄리아는 약간 자신을 잃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두 사람 사이에서 정열의 불꽃이 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말없는 속삭임 따위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앤이 감정의 노예가 되리라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녀는 모든 것을 두뇌로 냉철하게 해결하는 형이다. 그러나 휴는 그렇지가 않다. 그가 여성에게 구하는 것은 맹종도 아니고 지적인 자극도 아니다. 휴에게 필요한 것은 그의 이론무장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그런 여성이다. 예컨대 나와 같은…


어느 날 오후, 줄리아가 채소밭에서 양배추를 뽑고 있을 때 앤이 느닷없이 나타났다. 앤은 마세라티의 조수석에 앉을 때 이외에는 별로 집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줄리아는 깜짝 놀랐다. "흙 만지는 일이 즐거운 것 같군요." 앤이 웃으며 말했다. 줄리아는 일어서며 억지웃음을 보냈다. 자기의 지저분한 바지와 팔꿈치에 구멍이 난 스웨터가 거북했다. 앤의 옷은 주름 하나 없고 선은 칼날처럼 뾰족하게 서 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은근하면서도

경계하는

듯한

태도였지만

적어도

요리

솜씨만큼은

인정했으리라. 지난 사흘 동안 온갖 재주와 정성을 다해 음식을 장만했다. 전날 밤의 메그레드카나르 요리는 모두들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잘되었다. 귀한 오리고기를 잘게 썰고 여기에 비어네즈 소스와 보르들레즈 소스를 뿌린 요리다. 곁들이로 가리비와 네덜란드 소스를 사이에 끼운 녹색 채소. 디저트도 일품으로써 리쾨르인 티아마리아로 데운 파인애플, 그리고 막 빻은 후춧가루를 친 바닐라 아이스크림. 과연 앤도 이 요리들 앞에서는 탄성을 올릴 뿐이었다. "당신은 며칠만 더 하면 여기 일이 끝나겠군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떠나나요?" 앤이 슬그머니 물었다. 하지만 일부러 줄리아를 찾아 채소밭까지 온 것은 틀림없다. "네." 줄리아는 거칠게 양배추를 쑤셔댔다. "물론 나는 휴와 함께 여기 남아 일을 좀더 돕기로 했어요. 휴와 나는 오랜 친구예요." "코니한테서 얘기 들었어요." 줄리아는 힘없이 대답했다. "어머 그랬어요?" 줄리아는 당장 알아챘다. 앤과 휴 두 사람만 이곳에 남게 되면 지금 사이보다 더 발전할 것은 확실하다. 코니가 그걸 말없이 양해한 것으로 앤은 알아들은 듯했다. 앤으로서는 좋은 기회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애써 채소밭까지 찾아와 머리 나쁜 요리사에게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휴가 앤과 결혼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있을 수도 있다. 결혼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마음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휴의 타이핑을 도와 줘서 고마왔어요." 앤이 간사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휴의 손을 자동차 문틈에 끼워 넣었다면서요? 휴는 몹시 화가 났을 텐데 당신의 사과를 받아들였다니 참으로 그다운 멋진 태도였어요."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그는 펄펄 뛰며 소리소리 질렀어요. 나를 죽이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줄리아는 지금도 무섭다는 듯 파란 눈을 크게 떠보였다. 앤의 표정이 희미하게 굳어졌다. 화를 낸 휴의 모습을 본 적이 없으리라. 그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줄리아는 우월감을 맛보았다. "그 다음, 그는 나를 억지로 끌고 가 타이핑을 시켰지 뭐예요? 정말 막무가내였어요. 하지만 그렇게 거친 일면을 가진 남자는 매력이 있죠." "휴는 남달리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어요." 앤이 단호히 말했다. 휴의 알려지지 않은 이면을 취소하고 싶은 것이다. "휴 같은 사람에게는 일이 인생의 중심이니까, 당신도 그것을 이해해야죠." 도도한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는 일과 관련해서 항상 자극을 받을 필요가 있어요. 따라서 집으로 돌아오면 조용한 휴식이 필요해요. 정신이 흩어지면 안 되겠죠. 게다가 그는 장차 그 나름대로 사회적 책임도 져야 할 위치에 놓여 있어요. 정계로 나갈 가능성도 있거든요." 줄리아는 우울한 기분으로 고무장화의 흙을 털고 양동이를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앤은 옆에 따라오며 끝없이 강의를 계속했다. 앤은 휴를 일밖에 모르는 로보트 같은 존재로 믿고 또 그것을 좋은 것인 양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남자는 아니다. 나는 그 점을 믿었기에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같은 한 남자를 보는 데 있어 어떻게 이다지 다르단 말인가? 어느 편이 옳은지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앤도 나도 자기자신에게 편리한 대로 휴를 보고 있을 뿐, 진짜 휴는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그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러면 지금과 같은 애매한 생각도 깨끗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휴는 사람을 피하는 명수여서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드디어 크래머 별장을 떠나야 할 날이 내일로 다가왔을 때 코니가 답답한 얼굴로 줄리아에게 말을 걸어왔다. "설마 휴가 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지금까지 그가 하는 일은 대개 짐작이 갔는데 요즈음은 통 알 수가 없어요. 나는 휴가 꼭 줄리아 당신과…" 여기서 코니는 말꼬리를 흐리며 줄리아를 쳐다보았다. "어머, 앤은 여러 사람과 잘 어울리고 있을 텐데요."


"솔직히 말해 앤이 지껄이는 소리를 들으면 말끝마다 내 신경이 곤두선다우. 앤은 전통있는 가문의 규수로 태어났다고 말로 집안을 상식에서 벗어난 가족들로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요즘 세상에서 시시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여자가 아니겠어? 앤은 오직 휴의 장래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아. 만약 그것이 실현되어 휴가 정계에 나가기라도 한다면, 영화배우인 어머니와 록 음악 가수인 동생을 가진 사람이 뉴질랜드 수상이 된다는 것도 어쩐지 조금 이상하지 않아?" 줄리아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코니 아주머니도 휴를 닮아 가끔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래? 그 애 성격이 옮은 걸까? 그건 그렇고 앤이 우리 집안에 들어온다면 우리와 어울릴 수 있을까? 주인공인 휴가 요즈음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니, 원…" "앤이 아교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으니까!"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제 저에겐 말도 건네지 않아요." "앤은 불안한 거야. 아르마딜로처럼 단단한 갑옷을 입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이 없는 거야. 감수성이 예민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도 겉치레에 지나지 않아. 줄리아, 혹시 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앤을 얼마 동안 떼어놓아 줄까?" 코니가 슬쩍 물었다. "그래 주시겠어요? 나는… 그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이대로 지난다면 나는 너무 달구어진 오븐처럼 폭발하고 말 것만 같다. "그렇겠지. 그렇다면 오늘 점심식사 후에 봐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맡겨 둬요." 점심식사 후 코니는 앤을 붙들고 마이클의 서재로 가자고 끈질기게 물고늘어졌다. "당신은 영어를 전공했으니 저 양반의 각본을 꼭 한번 읽어 주세요. 기계와 인간의 대립이 테마인데 퍽 재미있는 작품이에요…" 앤이 서재 안으로 들어설 무렵, 줄리아는 이층 방문을 노크했다. "앤? 어서 들어와요." 짜증스러운 목소리다. 앤도 언제나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줄리아를 본 휴의 눈이 휘둥그래졌지만 곧 안정을 되찾았다. "무슨 일이지? 지금 바쁜데…" "그럼 기다리겠어요." 줄리아는 난로 옆 휴의 의자에 앉아 신을 벗고 두 무릎을 팔로 감쌌다. 휴는 한숨을 쉬며 만년필을 놓았다.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당신과 내 이야기, 그리고 저 여자 이야기. 저 여자는 아니꼬와서 역겨울 정도예요." "앤은 머리가 대단히 좋은 여자야." "더욱이 미인이시구요. 대단히 머리가 좋고 얄미운 미인. 당신들 단둘이 있을 때는 아마 좋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겠죠. 서로의 자아를 시원하게 긁어 주며 즐기고 있겠군요." "그런 어린 아이 같은 소리는 그만해. 당신과는 벌써 끝났어." "끝나지 않았어요. 당신이 현실에서 도피했을 따름이에요. 왜 자신에게 좀더 정직할 수 없어요?" 휴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정직하게 행동했어. 다만 당신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따름이오. 당신에게서 뭐랄까, 어떤 매력을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 깊이 빠지진 않았소. 그 일요일 밤에 있었던 일로 당신도 잘 알았을 거요. 그날 밤은 마음의 일시적인 착란에서 생긴 일일 뿐이오." "일시적인 착란이었다구요?" 줄리아는 휴의 냉담한 말에 분통을 터뜨렸다. "우스갯소리 작작해요. 두 사람이 발가벗은 채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어요. 끝까지 가지 않은 것은 당신이 자기 욕망의 깊이에 겁을 먹었기 때문이에요. 그렇지 않다면 당신을 아무 경험도 없는 사람으로밖에 볼 수 없어요. 그러나 당신의 솜씨로 보아선 그렇다고 믿어지진 않아요." "줄리아, 성가신 얘기는 이제 그만하지." "나는 당신을 갖고 싶어요. 당신도 나를 원하고 있어요.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성가시죠? 단순한 이야기잖아요." 줄리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계속 지껄였다. "당신은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경험이 없고 둔감한 것 같소. 당신이 원하고 있는 것을 나는 줄 힘이 없소." "내가 원하고 있는 것이 어쨌다구요? 중요한 건 당신이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줄리아는 소리쳤다. "그럴까?" 휴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고쳤다. "지독한 말씀을 하는군. 하지만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여자와는 아예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기로 하고 있어."


믿고 있다?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기로 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런 경험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줄리아는 분한 마음을 억누르고 부드러운 말로 바꾸었다. "알았어요. 그럼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만이겠군요." "그것은 불가능해." "왜요?" "당신은 벌써 다른 즐거움을 찾아냈을 텐데?" 휴는 별안간 나무라는 듯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줄리아는 깜짝 놀랐다. "뭐라구요?" "그저께 밤, 당신은 리차드 방에서 나왔지?" "스파이 짓을 하고 있었나요?" 줄리아는 가슴이 뛰었다. 휴는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일까? "지나치는 길에 보았소." "또 나를 말괄량이 팬으로 부를 생각은 하지 마세요. 리차드와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관계를 맺은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내가 당신한테 몹쓸 짓을 당하고 있어서 그가 나를 위로하고 있을 뿐이에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리차드도 잘 알고 있어요." "아니야, 당신은 스스로 만들어낸 공상 속에 빠져 있을 뿐이오." "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공상 속의 휴는 현실의 휴보다 훨씬 융통성이 있어요. 하지만 나는 당신의 고집과 고지식까지 모두 사랑하게 돼 버렸어요." 아무리 완고한 휴도 여기에 이르자 한순간 말이 막혔다. "그렇다면 나를 가족의 테두리 안으로 밀어넣으려고 한 당신의 눈물겨운 노력은 어떻게 된 것이지? 나를 다른 인간으로 개조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그런 형의 남자로 바꾸고 싶었던 거지?" "그런 생각은 없어요. 다만 당신의 참모습을 보고 싶을 따름이에요. 당신은 과거에 있었던 어떤 일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당신을 과거로부터 해방시켜 드리고 싶었어요." "당신은 도대체 내 과거를 얼마나 알고 있어!" 무시무시한 고함소리에 줄리아는 몸이 오싹해졌다. 휴는 거칠게 일어섰다. 그의 의자가 책상에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냈다.


"나는 지금의 나대로 있는 것이 좋아. 알지도 못하면서 끼어들지 마. 내 인생 속에 뛰어들 필요는 없어! 그 고약한 호기심은 혼자서 즐기면 되는 거야!" "호기심이 아니예요!" 줄리아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침착하게 이론으로 따져 거부당하는 것보다 소리를 질러 주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당신을 해방시켜 드리고 싶은 거예요. 어릴 때는 별로 행복했던 것 같지도 않고…" 휴는 사납게 웃었다. "당신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연민도 소용이 없어. 나는 내멋대로 살아갈 뿐이야. 딱하게 여겨 줄 필요는 없어!" 줄리아는 일어서서 그에게 다가갔다. "딱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니예요! 하긴 바싹 야윈 열두 살짜리 꼬마에겐 동정심이 가겠지만 지금의 당신을 딱하게 볼 생각은 없어요. 더구나 당신은 남달리 자기를 단련해서 동정심 따위는 소용없는 사나이로 변했으니까. 나는 지금 현재의 당신이 불만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사랑 따위는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자기를 속이지 마세요. 사랑이 없었다면 오늘의 당신도 있을 수 없어요. 사랑을 부정한다는 것은 코니와 마이클, 여동생이나 남동생들을 모두 부정하는 꼴이 돼요. 당신도 그렇게 하긴 싫죠? 요컨대 당신은 사랑을 가지고 싶지만 그것을 인정하거나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싫은 거죠, 그렇죠? 휴, 무슨 말이든 해요, 휴!" 줄리아는 모든 것을 잊고 단숨에 말을 쏟아놓은 다음, 입을 꽉 다문 채 있는 휴에게로 다가가 주먹으로 철판같은 가슴팍을 두들겼다. 휴의 온몸에 경련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분노와 고뇌가 주먹을 통하여 줄리아에게도 전해진 듯 줄리아의 몸에도 경련이 뚫고 지나갔다. 휴는 멍한 눈으로 줄리아를 응시하다가 이윽고 두 팔을 천천히 올려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그 팔에 힘이 가해지고 줄리아의 허리는 꽉 죄어졌다. 그것은 꼭 사랑을 짜내려는 동작과도 같았다.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 팔을 얹고 휴의 얼굴을 끌어당겨 발돋움을 해서 입을 맞추었다. 휴는 뼈가 으스러지도록 줄리아를 억세게 껴안았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거기서 껴안은 채 정신없이 상대방의 입술을 탐했다. 마침내 휴가 굽힌 것이다. 줄리아가 승리를 확신한 순간 별안간 그는 몸을 떼었다. 고뇌와 두려움이 뒤범벅된 얼굴이었다. "안 돼. 두 사람이 다 나중에 후회하게 돼. 나는 안하겠어!"


휴는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내고는 소리내어 문을 닫고 방에서 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줄리아는 미래에 가로놓인 어둠을 멍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10 "조금 살이 찐 것 같군." 필립 랜돌프가 주방에 들어와 슬쩍 줄리아를 훑어보았다. 필립은 디너 파티 손님을 막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그는 3 주일 전 귀국한 이후 밤마다 파티를 열었다. 줄리아로서는 눈코뜰새 없이 바쁜 것이 무척 고마운 일이다. 지금까지는 요리야말로 삶의 보람이라 느끼고 살아왔는데 이제 그것은 단지 기분전환거리의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난생 처음 겪는 일이다. 그래도 기분전환의 효과는 조금도 없는 것 같다. "맛을 보는 것도 내 일 중의 하나니까요." 줄리아는 빈정대듯 대답하고 남비를 쾅 놓았다. 필립은 놀라 퇴각전술을 썼다. "그렇게 화를 내면 쓰나. 당신을 비웃는 것은 아니야. 글쎄… 퍽 건강해 보인다는 말을…" "사장님이야말로 약간 살찐 것 같군요. 해외출장 동안 기름진 음식만 잔뜩 잡수셨죠?" 필립은 아차 싶은 듯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나?" 줄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농담이었어요. 여전히 스마트하신걸요." 필립은 적이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줄리아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흘러간 기억들이 떠올라 마음이 괴로워진다. 왜일까? 그런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이다. 꼭 휴의 마음을 열 수 있으리라 믿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의 마음속에 파고들 방법이 발견되기도 전에 주어진 시간이 끝나고 말았다. 왜? 어째서? 휴는 상처입는 것이 그렇게 두려웠을까? 아니다. 그는 다만 신중할 뿐 겁쟁이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휴에게 상처를 입힐 그런 여자가 아니라는 것은 직감으로 느끼고 있었을 것이 아닌가. 마지막 본 휴의 모습이 처음 만났을 때와 너무 달라져 있었다는 것은 얄궂은 운명 탓이었을까? 크래머 별장 내의 차도를 벗어남에 따라 백미러에 비친 그의 모습이 차츰 작아지다가 커브를 돈 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그 순간까지 휴가 나를 그대로 보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기대였다! 휴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 것이 큰 착각이었다. 현관에 나란히 서서 떠나는 가족들을 배웅하는 휴와 앤 패로의 모습은 그림처럼 멋진 한 쌍으로 보였다. 나는 오클랜드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울기만 했고 가끔 차를 세워 온통 젖어 버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야 했다. 휴를 미워할 수 있게 되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하지만 미워한다는 것은 내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이 넘쳐 흐르는 사랑을 휴에게 바치고 싶다. 그가 마음만 활짝 열어 준다면 두 사람의 인생을 풍요롭게 가꿀 수 있으리라. 오클랜드에 돌아온 지 얼마 후 필립이 귀국하여 나는 다시 옛 직장으로 복귀했다. 필립이 날마다 디너 파티를 열기 때문에 정신없이 바쁘다. 그래도 사랑의 상처는 아물지 않고 요리에도 몰두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직업 요리사로서 풍부한 경험을 쌓아 놓은 덕분에 정신집중 없이도 손이 기계적으로 움직여 주어 요리는 언제나 일품으로 마련된다. 그녀

주변에는 온통 봄내음이 가득하다. 프리지어도

단아한

꽃을

피우고

앙상하던

떡갈나무에서는 연록색 새싹이 조그맣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향기롭고 부드러운 봄바람의 애무. 모든 것이 새로와지는 계절이다. 하지만 나에게만은 이 봄도 눈물의 계절일까! 줄리아는 고민 끝에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휴에 대한 사모의 정은 세월과 더불어 퇴색할지도 모르지만 평생토록 소중히 간직하리라. 보답을 받지 못했다고 그 사랑을 버릴 수는 없다. 프리지어 꽃이 덧없다고 해서 그 아름다움이 죽은 것은 아니다. 떡갈나무 잎도 이윽고 시들겠지만 그것은 자연의 신비를 느끼게 해준다. "이런 상황인데 줄리아는 어떻게 생각하지?" 필립이 물었다. "네?" 줄리아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영문이지? 내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으니!" 필립은 화를 냈다. "나는 카리브 해 쪽에 영주하기로 했다는 말을 하고 있었어." "요컨대 나를 해고하겠다는 말씀이군요?" "정신을 차려요. 당신도 함께 그곳으로 가자고 말하고 있는 거야. 아까부터 계속 그 이야기를 했어요!" 두 달 전이었다면 줄리아도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카리브 해와 휴 사이의 거리가 먼저 머리에 떠올랐다. 여기 오클랜드에 있는 한 언젠가는 휴가 찾아올지 모른다. 그러나 카리브 해로 가버린다면 가냘픈 희망의 불빛마저도 꺼지게 된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군." "네, 조금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렇게 해요." 언짢은 목소리다. "수속을 하려면 여러 가지로 복잡해서 실제 이사를 가는 것은 내년 4 월 이후가 될 거야." 줄리아는 사과하듯 말했다. "카리브로 가는 것은 좋지만 …

가족들이 모두 이곳에 살고 있는 데다가 … 저 자신이

지금까지 계속 외국으로 돌아다녔기 때문에…" "마치 중년여자 같은 소리를 하는군. 줄리아, 요즘 당신은 좀 이상해요." "봄이잖아요." "원인은 리차드 말로겠지. 만약 내가 줄리아라면 그 따위 사내를 절대로 믿지 않겠어. 당신도 성급한 짓을 저질러서 나중에 울지 않도록 조심해요." 필립은 그 이상 카리브 해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 대신 색깔도 선명한 여행안내 팜플렛을 넌지시 집안의 여기저기 놓아 두곤 했다. 줄리아는 아무래도 진지하게 생각할 기분이 솟지 않아 그것을 펴보지도 않았다. 말로 집안 사람들로부터는 그 이후 아무런 소식이 없다. 줄리아도 연락을 취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소식은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꽤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리차드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리허설이 시작되어 바쁠 것이다. 스티브의 록 음악 그룹은 일본 연주 여행을 취소했고, 스티브는 록 음악 오페라 작곡에 몰두해 있는 것 같았다. 이 오페라가 완성되면 오클랜드의 상업극단과 합동으로 공연할 예정이라 한다 미술잡지 기사에 의하면, 올리비아는 장학금을 타서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해 일 년 동안 파리로 유학을 간다고 한다. 어떤 익명의 독지가의 기부금이 왕립예술원의 장학금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휴가 기부를 했을까? 시기적으로도 맞고 일부러 익명으로 거금을 기부했다는 것만 보아도 틀림없는 일이다. 아아, 마음씨 착한 휴…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누구와 함께 있을까? 앤 패로에 생각이 미치면 화가 치민다. 그러나 휴가 그런 여자와 깊어질 턱이 없다. 두 사람은 성격이 바탕부터 다르고 크래머 별장에서도 아마 내내 입씨름으로 지새웠을 것이다―. 물론 침대는 따로따로 썼을 것이고. 이런 일만 생각하고 있으면 안 된다. 휴의 나쁜 점만 골라서 생각하도록 하자. 좀처럼 터놓으려고 하지 않는 그 비밀주의, 특히 가끔 드러내는 차가움, 남을 무시하는 듯한 그 태도, 게다가 또…


아무리 애써도 헛일이다! 나는 그 커다란 손의 애무를 마음에 새겨 두고 싶다. 피부로 느꼈던 그와 따스한 입김, 억센 근육,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웃기도 하고 절망도 했던 때의 일들… 아아, 그런 추억에 젖어 지내고 싶다… 두서없는 생각 속을 헤매고 있던 어느 날 밤, 현관 벨이 울렸다. 문을 열자 거기에 리차드가 서 있어 줄리아는 깜짝 놀랐다. 리차드는 명랑하게 인사를 하면서 안으로 들어와 무대며 가족들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줄리아가 끼어들 틈도 주지 않는다. 이윽고 그가 한숨을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잘 지내고 있겠지? 아주 통통하게 살이 찌고 안색이 좋군." "그렇죠?" 음식을 마구 먹어치우고 또 조깅을 한 탓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의심하는 듯한 리차드의 시선과 마주쳤다. "아이, 싫어! 그렇지 않아요! 생각만 해도 우스워져요." "아니야, 어떤 양가집 규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잖아." "하느님이 상대가 아닌 이상 불가능해요." "뭐라고?" 민감한 리차드는 당장 알아차렸다. "줄리아! 설마 당신이 아직 처녀라는 얘기는 아니겠지?" "그렇게 놀랄 것은 없잖아요. 아까 임신인줄 오해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이네요?" 줄리아는 어찌할 바를 몰라 불만스럽게 대답했다. "그래도 나는 틀림없이… 또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렇게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어요. 나는 가까이 가려고 애를 썼지만." 욕망을 모르던 네가 불타고 있다 얼음이었던 네가 불꽃으로 변했다 또 리차드의 인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동정과 보살핌으로 가득차 있어 줄리아는 그만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걸 보면 당신도 약간은 기운이 나겠지." 리차드는 저고리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여느 때 같으면 여러 가지 일을 꼬치꼬치 캐물을 그였지만 오늘 따라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이거야. <로미오와 줄리엣>의 첫날 표 두 장. 금요일 밤이야. 이걸 주기 위해서 왔어. 어머니가 꼭 만나고 싶다고 말씀하셨어. 옆자리는 쌍동이 여동생들이 앉을 거야. 공연이 끝나면 파티도 있어." 줄리아는 그가 내민 표를 겁먹은 눈으로 지켜보았다. "휴는 오지 않아." 리차드가 냉큼 말했다. "형은 이번 주말에 또 크래머 별장에 가서 편집인지 무언지를 하는 모양이야." 크래머 별장으로? 아아, 그는 가까이 있으면서도 나에게 아무 소식도 전해 주지 않는구나. 희망의 불빛은 더욱더 작아졌다. "이건 뭐지?" 리차드가 여행안내 팜플렛을 발견했다. "푸른 대자연 속으로 도피할 작정이야?" 줄리아가 설명을 하자 리차드가 당장 화난 듯이 말했다. "갈 거야?" "어쩌면 가게 될지도…" 줄리아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지금까지 그녀는 우유부단과는 동떨어진 성격이었는데 요즘은 조깅 코스 하나도 명쾌하게 정하지 못한다. 리차드가 돌아간 후 줄리아는 공연히 쓸쓸한 기분만 깊어간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지금까지 얼마나 홀가분한 인생을 살아왔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자기 성격이 얼마나 강한가를 시험할 수 있는 고민이나 고통을 한 번도 맛본 적이 없다. 그것이 이번에 모두 하나로 뭉쳐 큰 파도가 되어 줄리아 자신을 덮친 느낌이다. 휴에 대해서는 마약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스티브처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제 힘으로 금단증상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 성공을 한다 할지라도 불안감을 지울 순 없다. 만약 내가 평생에 단 한 번밖에 사랑을 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면 … ? 과연 장래에 다른 남자와의 행복을 찾아낼 수 있을까? 줄리아는 혼자서 극장에 갔다. 로비에서 올리비아와 로잘린드, 그리고 스티브와 오랜만에 만났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대성공이었다. 막이 내리자 관람객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어 파티가 있었는데, 파티가 끝날 무렵 코니가 줄리아의 팔을 잡고 극장 무대 뒤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갔다. "자아, 우리 앉아서 이야기 좀 해요."


코니가 먼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줄리아, 당신 살이 좀 쪘군요. 건강한 것 같구. 내 아들과의 일이 슬픈 결말을 가져와서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리차드와의 관계 말씀인가요?" "아니, 휴와의 관계를 말하는 거예요." 줄리아는 눈앞이 아찔해서 쥐고 있던 커피 잔을 탁자에 놓았다. "줄리아, 나는 당신이 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다만 휴가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기 태문에 머리가 아프다우. 당신과 함께 잠자리에 드는 것을 피하는 것도 사랑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기 때문이야." 잠자리라는 말에 줄리아는 얼굴을 붉혔다. 그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다시 머리에 떠오른다. 그 억센 팔, 그 부드러운 살갗 … 코니의 말이 다시 이어져 줄리아는 현실의 세계로 되돌아왔다. "사람이 너무 아픈 상처를 입으면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 감추려고 하지. 그 아이는 너무 깊은 상처를 입어 다시는 그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고 현실의 사랑에서 도망치려 하고 있다우. 불쌍한 휴…" 불쌍하다니? 불쌍하게 상처를 입은 사람은 휴가 아니라 나 줄리아다! 코니의 말이 이어졌다. "휴의 성장과정에 대해 당신에게 설명해야겠어요. 그래야 당신이 휴를 이해하게 될 거야. 휴는 태어난 순간부터 불행을 타고 났었지.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로서 의지가 박약한 비열한 사나이였어. 날마다 술에 취해 아내를 못살게 굴었다우!" 아버지가 술에 취해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그런 나날이 계속되었다. 어머니와 아들에게 있어서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그러한 환경에서 자란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상상할 수 있어?" 코니가 조용히 물었다. "어린 휴는 엄마가 아버지에게 얻어맞는 광경을 매일 보고만 있어야 했어. 아버지는 또 아들인 휴까지 괴롭혔어요. 그의 장난감을 보란 듯이 부수고, 말을 듣지 않으면 혁대를 풀어 마구 때리고…" "그만하세요." 줄리아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코니는 계속했다.


"어느 날 밤 다시 아버지가 폭력을 휘둘러 휴의 어머니는 머리, 갈비뼈 할 것 없이 온몸에 골절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어. 그런데 폐에 구멍이 뚫려 당장 폐렴에 걸리고, 또 온갖 합병증이 생겼어요.

무리도 아니겠지.

휴도 어머니도 심한

영양실조

상태였으니까.

어머니는 그 병원에서 결국 숨을 거두었는데, 죽기 전에 경찰에서 집안 사정을 털어놓고는 휴를 다시 그 아버지에게로 보내지 말도록 부탁했다우!" 아, 불쌍한 휴… 줄리아는 마음속으로 비통한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휴는 사회복지 사무소를 통해 코니에게로 왔다. "휴는 우리 집에서 탈없이 자랐어. 공부도 잘했고 자존심도 강하고 침착했지만 어른이 된 이후 여자인 내가 볼 때 무엇인가 하나가 빠진 것 같았어.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겠지, 줄리아?" 줄리아는 코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랑이었어. 그는 남을 믿지 않고 또 남을 사랑하려고도 사랑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고독한 자기 세계 속에서만 살려고 했어. 그 아이는 이제 사나이로서 여성을 사랑하고 여성을 믿을 줄 알아야 돼. 그래야 남자로서 성숙해질 수 있는데, 문제는 여자의 사랑이라는 것을 믿지 않으려 하고, 또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스스로 두려워하는 데 있거든. 줄리아, 앤 패로 같은 여자는 휴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해요." "코니…" 줄리아는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코니의 팔을 잡았다. 코니 역시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거부하는 것을 제가 억지로 강요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줄리아, 그렇지가 않아. 그 아이도 속으로는 사랑을 목 마르게 기다리고 있고, 또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자신을 거부한 거야. 내 이야기를 곰곰 생각해 봐. 휴는 자기가 사랑하던 것을 몽땅 빼앗겼기 때문에 어떤 것에도 사랑을 쏟지 않으려는 거야. 사랑이 두려운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저를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잖아요." "그럴까? 그 해답은 당신 자신이 구해야 해. 휴는 일요일 밤 오클랜드로 와요. 그때 만나러 오세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 아이를 위해서. 그래서 휴의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어. 그 무뚝뚝한 가면 같은 얼굴에 속지 말아요. 그 가면 밑에는 누구보다도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어요." "하지만…" 줄리아는 불안이 앞섰다.


코니가 줄리아를 북돋아 주었다. "자신을 갖고 해봐요. 휴를 사랑한다면 다시 한번 그의 문을 두드려요. 만약 성공한다면 당신은 무엇보다도 훌륭한 진주를 손에 넣게 돼요.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존심보다 휴 쪽이 훨씬 값어치가 있지 않을까? 당신은 휴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11 줄리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폭스바겐의 고물 차체 틈새로 찬바람이 스며들어 온다. 차갑고 물기 어린 축축한 바람이다. 코니의 부추김에 앞뒤 생각도 없이 휴가 있다는 크래머 별장으로 가기로 하고 이렇게 나섰지만 억지로 짜낸 용기가 추운 날씨를 만나 자꾸만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줄리아는 빗속에 파묻힌 하우라키 평원을 창 너머로 바라보았다. 봄이 왔다고 누가 말했는가. 오늘은 한겨울 날씨다. 오클랜드를 출발했을 때부터 줄곧 얼어붙을 듯이 세찬 비가 내렸고, 그 자연의 맹렬한 위력 속을 작은 폭스바겐이 헤치고 나아간다. 줄리아의 몸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쳤다. 휴가 이틀 후 오클랜드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줄리아는 기다린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틀을 기다리기보다 당장 내 운명의 결판을 내자. 휴인가, 그렇지 않으면 카리브 해인가를 … 그래서 줄리아는 이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뚫고 지금 휴가 있다는 크래머 별장으로 향하는 중이다. 코니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휴가 볼 때 나는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인간으로 비쳤을까. 흔해빠진 인생관을 보란 듯이 지껄여 대고 사랑은 모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늘어놓지 않았던가. 휴가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어머니의 사랑은 너무나도 무력했다. 휴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달콤한 이야기나 사랑의 속삭임은 아무 소용도 없다. 생각나는 대로 덮어놓고 뛰어들어 그 자리에서 결판을 내는 수밖에 없다. 코푸 시까지 왔을 때 타푸 시 경유로 가는 지름길이 막혀 버렸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차피 줄리아는 먼 길을 우회해 갈 계획이었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비는 계속 퍼부었고 그 속을 달리는 줄리아는 이제 지칠 대로 지쳤다. 타이루아 강을 지날 때 줄리아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강물은 무섭게 불었고 탁한 물결이 사나운 소리를 내며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산비탈 여기저기서 사태가 일어났고, 좁은 도로 위에 흙이 쌓인 곳도 있다. 줄리아는 안전운행을 위해 온 정신을 쏟았다.


해안도로에서 옆으로 꺾어 골짜기 안으로 들어왔을 때에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너무 추워서 이가 부딪칠 지경이었지만 크래머 별장도 멀지 않다. 왜 나는 이 빗속을 가고 있을까? 휴의 아늑하게 가꾸어진 생활을 휘젓는다면 그야말로 이번에는 산산조각이 나도록 당해 버릴지도 모른다. 두 번이나 그로부터 거부당하지 않았는가. 지금이라도 온 길을 되돌아갈 수는 있다. 그러나 잔뜩 불은 강물, 산 사태, 도로에 쌓인 흙더미 등을 생각하니 되돌아설 용기도 솟지 않는다. 차는 마침내 크래머 별장의 차도 안으로 들어섰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났다.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줄리아는 차에서 내려 지붕 쪽을 쳐다보았다. 다락방 굴뚝에서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창문 커튼은 열려 있는데 인기척은 없다. 손목시계를 보니 1 시! 여느 때 같으면 세 시간 반이면 올 수 있는 거리를 다섯 시간이나 걸려 간신히 당도했다. 차고 쪽에서 어떤 사람이 큰 우산으로 비바람을 막으며 줄리아의 차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줄리아는 빗속에서 소리쳤다. "휴!" 휴는 제 눈을 의심하듯 줄리아를 쳐다보았다. "줄리아, 어떻게 된 일이지?" 그때 우르릉 하는 큰소리가 하늘을 찢고 땅바닥을 흔들었다. 줄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휴에게로 뛰어갔다. "지금 친 게 벼락이었어요? 바로 머리 위에 떨어진 것 같군요." 휴가 하늘을 우러러보았을 때 다시 맹수가 울부짖는 듯한 천둥소리가 터지고 천지가 흔들렸다. 휴가 우산을 내던지고 줄리아를 질질 끌며 별장 안으로 뛰어갔다. "저 소리는 무슨 소리예요? 어떻게 된 거죠?" 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줄리아를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묵묵히 창 밖을 내다보았다. 줄리아도 숨을 헐떡이며 밖을 내다보았다. 빗물에 씻기는 유리창 너머로 무시무시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산더미같은 흙이 쏟아져 내려와 나무들을 성냥 개비마냥 꺾어 놓고 있었다. 산비탈에서 쏟아지는 물이 차츰 불어 별장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밀려오고 있었다. 줄리아는 숨소리를 죽였다. "저 물이 여기까지 올까요?" "걱정할 건 없어. 여긴 지면이 높아 물이 올라오지 못할 거야." 줄리아는 그리운 휴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황급히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물이 나오죠?" 휴는 몸을 홱 줄리아에게로 돌리며 말했다. "벼락과 홍수가 어떤 원인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해? 지난 24 시간 동안 430mm 의 비가 쏟아졌어. 그 물이 어디로 빠지겠어? 지금 이 반도는 온통 물속에 잠겨 있어. 도로도 모두 통행불능이고, 이제 우린 완전히 고립상태야." "정말이에요?" 줄리아는 난로 앞으로 가서 몸을 녹였다. "이런 빗속을 헤매고 다니다니,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어. 무엇 때문에 왔소?" "당신을 만나러 왔어요. 몰라서 물으시나요?" "그럼 오늘 아침에 출발했겠군." "그래요. 이 물지옥을 뚫고 왔어요." "바보같으니라구! 당신 같은 바보는 없을 거야. 만약 내가 여기에 없었더라면 어떻게 할 참이었지?" "당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왔어요." "바보같은 짓을. 오다가 물에 빠져죽었으면 어쩔 뻔했어?"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어차피 전 바보니까요. 내가 죽어 주면 당신은 홀가분하겠지요?" "어린애 같은 소린 그만해요." 휴는 줄리아의 두 어깨를 꽉 쥐고는 마구 흔들어 댔다. "그렇게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안 돼.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어요." "다른 옷들은 다 자동차 안에 두고 왔어요." "그러면 동생들 옷이 있을 거야. 찾아올 테니, 샤워부터 해요." 줄리아는 뜨거운 샤워 속에서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그의 단단한 껍질을 반드시 깨버릴 것이다. 코니의 멋진 벨벳 가운을 몸에 걸친 줄리아는 난로 앞에 앉아 치즈를 끼운 토스트를 먹었다. 휴는 의자에 앉아 난로의 불빛을 응시하고 있다. 줄리아는 초조해 하는 듯한 휴의 표정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두 사람만 이 집에 갇혀 있게 되었는데 어떻게 그 시간을 때우죠?" 줄리아가 의미심장한 눈길을 휴에게 보내자 휴는 화가 난 듯 일어섰다. "그만둬. 나를 괴롭히기 위해 이 빗속을 왔군!" "휴, 내가 왜 당신을 괴롭히겠어요?"


줄리아가 일어서서 휴에게로 다가가다가 가운 자락에 걸려 앞으로 넘어지면서 그의 품속으로 쓰러졌다 "줄리아, 경솔한 짓을 하면 안 돼!" "상관없어요. 어차피 저는 바보니까요. 당신도 나와 함께 바보가 돼요." 줄리아는 뺨을 휴의 가슴에 비벼댔다. "안 돼, 줄리아!" 줄리아는 요염한 웃음을 띠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언제쯤에나 저항하지 않겠어요? 나는 당신을 원하고 당신도 나를 원하고 있어요. 아무리 감추려 해도 당신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줄리아는 몸을 그에게 밀착시켰다. 휴가 줄리아를 뿌리쳤다. 줄리아는 더욱 대담하게 나왔다. "난 당신을 만족시켜 줄 수 있어요. 내 베드 테크닉은 일품이라고 리차드도 말했거든요." "닥쳐!" 휴는 줄리아를 밀쳐냈다. 줄리아는 계속 딴청을 부렸다. 휴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갑자기 줄리아의 떨리는 입술에서 작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곰이 주먹을 불끈 쥐고 비틀비틀 다가온다. 이마에 혈관이 솟아오른 무시무시한 모습이다. 줄리아는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사랑을 믿어야 한다! 휴는 지금 벼랑 끝에서 흔들리고 있다… 줄리아는 분노로 떨고 있는 큰 주먹을 잡아 자기 턱으로 가지고 왔다. "나를 때리고 싶어요? 그럼 때리세요. 나를 죽도록 패보아요. 속이 시원해지고 자기자신이 남자라는 것도 알 수 있게 될 거예요!" 속박의 밧줄이 탁 끊어졌다. 외마디 울부짖음과 함께 휴의 몸이 줄리아 위에 무너져 내렸다. 줄리아는 그를 꽉 껴안았다. "나는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나를 때리지 못할 것이라고 … 나는 당신의 그 완강한 벽을 뚫기 위해 거짓말을 했어요." "알고 있어. 그러나 아까는 당신을 죽이고 싶었어. 그렇지, 당신을 죽이겠어. 다른 방법으로!" 줄리아는 휴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온몸이 떨린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휴는 줄리아가 걸친 가운을 재빨리 벗겼다. 줄리아의 흰 알몸이 불빛에 드러났다.


정열적인 키스가 시작되었다. 휴는 아무 거리낌없이 줄리아의 입술을 탐하고 풍만한 가슴을 애무했다. 낡은 껄질을 벗어던진 휴의 손길은 자유로왔다. 밖에서 소용돌이치는 홍수처럼 줄리아의 내부에서도 기쁨이 용솟음쳤다. 휴의 애무가 점점 더 열기를 띠어 가자 줄리아는 흥분을 가누지 못했다. 그는 옷을 벗어던지고 난로 앞 방바닥에 줄리아를 눕혔다. "정말 아름다운 몸이로군…" 휴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줄리아의 어깨며 부드러운 가슴에 입술을 갖다 댔다. 긴장감에서 해방된 두 사람은 격렬하게 서로를 요구하고 함께 기쁨의 절정으로 치달았다. 줄리아는 휴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휴는 오래도록 줄리아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줄리아. 리차드가 당신에게 말한 것처럼 난 역시 나이가 너무 많아. 게다가 너무 고지식해서 당신 뜻을 따르지 못할 거야. 당신이 바라는 사랑을 주지 못할 것 같아."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세요." 휴는 처음으로 주위를 살펴보고 얼굴을 붉혔다. "중요한 이야기를 할 테니까 잘 들어요." 휴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당신의 앞일을 걱정하고 있어. 당신 덕분에 내가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문제는 아직 남아 있어. 당신과 내 성격은 정반대야. 지금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만일 내 어두운 성격이 귀찮아지면 어떻게 하지? 성질이 괴팍한 나라는 남자와 날마다 얼굴을 맞대고 살 수 있겠어? 당신은 현실을 무시하고 만사를 즐겁게 지내려고 하겠지만 나는 그런 용기가 없어. 역시 당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당신은 내 인생에 비쳐든 한 줄기 빛이었어. 반짝거리는 따뜻한 빛이었지. 그러나 난 차라리 당신 없는 인생을 택하겠다고 몇 번이고 자신에게 다짐했는지 몰라."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았어요. 나도 이곳으로 돌아왔고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휴. 당신도 지금 나와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하고 또 나를 아껴 주고 있어요. 그 이상 더 무엇이 필요하겠어요. 새 인생의 출발로써는 그것만 있으면 충분해요. 그런 사랑도 없이 결혼하는 사람도 많은데…" "내 과거에 대해서는 누구에게서 들었지?" "코니가 이야기해 주었어요." 휴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은 마음이 약해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참지 못하고 단숨에 뛰어왔군. 정신과 의사가 되어 보려고…" 줄리아는 긴장했다. 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잘못됐나요? 달려온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아요." "잘난 체하면 안 돼! 나는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 지금까지 살아온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는데 당신이 나타나 모든 것을 바꿔 놓고 말았어!" 휴는 줄리아를 천천히 뜯어보았다. "당신에게 타자를 부탁한 것이 잘못의 시작이었지. 그 이후로 나는 혼자 있지 못하게 됐어. 그래서 당신의 유혹과 함정에 빠지기도 하고…" "내 유혹이라뇨? 내가 당신을 유혹했어요?" "시치미를 떼면 안 돼." 휴의 얼굴이 별안간 밝아졌다. "당신은 처음부터 유혹을 뿌리고 다녔어. 천진난만한 그 눈, 웃음이 끊이지 않는 그 입, 경쾌한 유머감각, 잇달아 실수를 저지르는 경솔함… 그런 것에 나도 모르게 이끌렸지. 그날 밤, 나는 당신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는데, 당신의 사랑은 너무나 뜻밖이었어. 고생이 너무 심할 것 같았지. 그러나 지금은 달라. 줄리아, 나와 결혼해 주겠어? 고생이 많겠지만 둘이서 힘을 써보자구." "네." 줄리아는 그의 마음이 변할까 봐 급히 대답했다. "네, 결혼하겠어요. 결혼해요, 우리는 성격이 다르지만 서로 사랑한다면 이 세상은 우리 것이에요." 줄리아의 눈에 눈물이 가득 괴었다. 휴는 그녀의 눈물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당신이 한 가슴 아픈 말들은 모두 잊을 거요. 당신은 나의 부족을 용서해 줘, 줄리아. 당신을 사랑하오." "아아, 휴…" 육체의 쾌감보다 더 깊은 정신의 도취경 속으로 줄리아는 빠져들었다. 줄리아의 웃음소리가 방안에 가득찼다. 휴도 함께 웃었다. 언제까지라도 그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좋겠다고 줄리아는 혼자 생각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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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악취미가 여지없이 드러난 케이크를 보았다면 질겁을 하고 두손 들어 버리겠지. 하지만 "당신은 정말 사람 놀라게 하는군." 지나쳤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그러면 또 어떠랴. 만일 파리의 코르동블뢰 요리 선생님들이 결벽한 데가 있어 결혼하자는 상대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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