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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호] 11329 / 11888 [등록일] 98 년 06 월 10 일 01:46 Page : 1 / 4 [등록자] LJH1 [이 름] 이진현 [조 회] 526 건 [제 목] 해적의 여자 # 1 ─────────────────────────────────────── 폭풍이 가라앉은 새벽이었고 선원들은 모두 지쳐 있었다. 미례도 삼일 밤이나 뱃멀미에 잠을 이루기 힘들었으므로 물살이 조용해지자 어렴풋이 단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유타 국의 익숙한 시장 풍경이 꿈속을 지나갔고 곧 만나게 될 지모를 얼굴도 모르는 정혼자가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그녀를 보내기 싫어하는 할머니의 눈물 맺힌 얼굴도 잠시 나타났다. 정략결혼. 신라의 왕족이라는 남자에게 시집가게 되면 다시는 아유타를 찾을 수 없으리라는 건 미례도 알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고 부모님 곁을 떠나고 사랑하는 고국을 떠나 낯선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간다지? 미례는 폭풍으로 배가 심하게 흔들리기 전까지 제발 천천히 가락국에 도착하기를 마음으로 빌었다. 그녀의 여행도 자유로움도 소녀 시절도 이젠 끝임을 알기에... 그녀의 꿈만큼이나 밖이 어수선하였지만 미례는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다.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다급하게 흔들어 깨워 미례는 잠이 묻어 난 얼굴로 부시시 일어나 앉았다. "아기씨, 아기씨. 일어나셔요. 어서 옷을 입으셔야 합니다." 나이 든 유모가 미례를 잠에서 깨도록 계속 흔들었다. "유모... 왜 그래요?" "어서 옷을 입으시고 피하세요. 어서요." "아직 가락국에 도착하려면 며칠 더 있어야 하는 거 아녜요?" "미례 아기씨, 지금 밖엔 난리가 났습니다. 해적 놈들이 어느새 배에 올라서 노략질을 하고 있어요. 언제 이곳에 들어올지 모르니 어서 옷을 입고 숨으세요. 어서요." 정말 밖은 비명 소리와 싸우는 듯한 소리, 칼 부딪치는 소리, 발자국 소리로 요란스러웠다. 미례는 잠이 달아나자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해적들에게 습격 당한 적은 없으나 가락국이나 아유타의 포구에서 그런 소문들이 있다는 걸 들었었다. 해적들은 무식하기도 하고 잔인하기까지 해서 잡은 사람들을 모두 물고기 밥으로 던져 버린다고 했다. 가을 바닷물은 이제 제법 뼛속까지 차갑게 만들고 있었다. "유모, 어떻게 하면 좋아?" 미례는 유모의 가슴팍으로 안겨 들었다. 심하게 몸이 떨려 왔다. "자, 아기씨. 이걸 입으시고 어디 숨을 곳을 한번 찾아봐요. 아기씨 몸은 작으니까 좁은 틈바구니에 숨으면 그 놈들이 찾지 못할 겁니다. 어서 서두르세요." "유모 피할 데가 어디 있겠어?"


미례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면서도 유모의 말대로 서둘러 겉옷을 걸치고는 유모가 이끄는 대로 따라 나섰다. 다행히도 금세 그녀 일행은 선실 가장자리 좁은 틈바구니를 발견했고 작은 몸집의 가냘픈 미례는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여기서 꼼짝하시면 안됩니다. 숨소리도 크게 내시면 안돼요." 유모가 그 자리를 떠나려 하자 미례가 흐느끼듯 신음하며 그녀를 불러 세웠다. "유모 같이 있어요. 가지 말아요." "아기씨 혼자 몸을 숨기기에도 힘든 걸요. 조금만 참고 견디세요." 유모는 쏜살같이 선실을 나섰다. 한참 후 밖이 조용해졌는가 싶더니 왁자지껄한 낯선 말투가 들리며 거친 사내들의 발자국 소리와 함께 선실 문이 활짝 열렸다. 그들은 방안을 살피며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이게 무슨 냄새지?" 한 사내가 일행에게 물었다. "뭐가?" "이봐, 여기서 좋은 냄새가 나는데?" "여긴 누가 쓰는 방이야? 꽤 호사스럽군." 그들은 호기심으로 이것저것 손대며 뒤적이다 미례의 옷가지를 발견했다. "이봐, 계집의 옷인데? 좀 특이하지만 맞아, 분명 계집의 옷이야. 서역 상인들에게서 이런 것들을 본적이 있어." "그럼 여기 있던 계집은 어디로 간 거야? 벌써 토낀 건가?" 느물맞게 사내들이 웃었다. "뭐야, 아무도 없잖아." "제깐 것이 가면 어디로 갔겠어, 물 속으로 뛰어 들었겠나,엉?" 그들은 구석구석 물건을 뒤지며 미례의 흔적을 찾았고 결국 수염이 부리부리한 사내가 떨고 있는 미례를 찾아냈다. 그들은 서역의 여인을 발견한 기쁨에 눈을 빛냈으나 미례가 밝은 곳으로 끌려 나오자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서역 계집이 아니잖아." "그러게. 아직 어린 티를 못 벗은 계집이로군." "그래도 꽤 고운데?" 그들은 음흉하게 미례를 훑어보았고 미례는 떨리는 손으로 옷을 여미며 그들로부터 시선을 피했다. 이제 열 여섯 생일이 지낸 미례는 소녀 티를 벗지 못한 여자였다.

"이걸 여기서 맛볼거나?" 한 사내가 그녀를 보며 군침을 삼키자 또 한 사내가 말렸다. "이질금한테 얼마나 호되게 당하려구 그래? 어서 데리고 나가기나 하자구." "하긴." 그는 못내 아쉬운 듯 침을 흘리며 미례를 떠다밀어 선실에서 끌어냈다. "이질금, 여기 계집이 하나 있는뎁쇼." "팔면 꽤 돈이 될 거 같습니다." 그들이 크게 외치자 그들 무리의 한 사내가 갑판에서 그들 쪽으로 몸을 돌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는 미례를 쳐다보았다. "이리 데려와 봐." 선원들과 함께 붙잡혀 억류되어 있던 유모의 시선이 미례와 마주치자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곧 그녀가 이끌려 갔고 그녀 앞에 서서 그녀의 온 몸을 훑어보는 사내는 삼십이 채 안돼 보이는 약관의 젊은이였다.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동여맨 그는 더럽고 무식해 보이는 다른 사내들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다른 무엇보다 눈빛이 달랐다. 다른 사내들이 세파와 술과 노동에 절어 흐리멍덩하고 충혈된 눈을 가지고 있다면 그녀를 쏘아보는 이 사내는 차갑고 빛나는 눈빛을 갖고 있었다. "좀 있으면 꽤 쓸 만한 계집 노릇을 할거 같지않수, 이질금?" "볼품없군." 이질금이라 불린 그 사내가 한마디 던지자 그들 일행이 한바탕 웃어 제꼍다. "아, 그야 사스래에 비하면 볼품이야 없지." "서역의 노예 상인에게 팔면 그래도 값이 꽤 나갈게요." "그럴 거야, 암." "난 노예가 아녜요." 이제껏 그들의 눈길을 참아 왔던 미례가 차갑게 입을 열자 웃음기 묻어 나던 그들의 얼굴 색이 변하며 눈이 커지며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우두머리로 보이는 그 사내는 다만 눈썹을 치켜올렸을 뿐이었다. "난 노예의 신분이 아녜요." 미례는 그에게 확인시키듯 다시 한번 말을 했다. "그래, 귀족처럼 보이긴 해. 서역 옷을 가지고 있는걸 보면 가락국과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지." "그래도 제법 호기는 있는걸, 계집 주제에." 한바탕의 수군거림에 모욕 받은 미례는 다시금 그렁그렁한 눈물이 고인 크고 맑은 눈으로 이질금이란 그 자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난 노예가 아니예요." "처음부터 노예였던 사람은 없어. 노예이고 싶은 사람도 없지. 하지만 곧 받아들이게 될 거야."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난 가야의 귀족이예요. 내 아버진 당신들에게 노예 상인보다 더 많은 재물을 주실 수 있어요." "호오, 그래? 얼마나?" "거봐, 저 계집은 가락국 계집 일거라고 했잖아." 그들 일행이 다시 수군거렸다. 그러나 젊은 사내는 피식 웃었다. "내 아버지에게 서신을 보내 줘요. 난 곧 신라의 왕족과 혼인하게 될 거예요. 당신들은 정말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어요. 날 풀어 준다면 말예요." "이질금, 어때요? 저 계집 말대로 하면 정말 많은 돈을 얻게 될 거 같은데" "닻을 올려. 우리 섬으로 간다." 그가 성큼성큼 그들의 배로 돌아가며 생각의 가치도 없다는 듯 말했다. "이질금" "날 보내 줘요." 미례가 호소하듯 그에게 매달렸으나 그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기선 내가 법이고 내가 왕이지. 결정은 내가 해. 포로의 말을 들어줄 생각은 없어." "이질금, 저 계집을 데리고 섬으로 갈 생각이오?" "이 길로 노예 상인에게 가던지 가락국 근처로 가서 정보를 얻든지 하는 게.." "저 계집은 아직 노예 상인들이 혹할 만한 가치가 없어. 그렇다고 가락국에 알리는 것도 내키지 않아. 귀족의 계집을 건드렸다 간 우리만 골치 아파지지. 말 듣지 않았나? 신라의 왕족과 혼인할 여자라구. 가락국뿐만 아니라 신라와도 한바탕 붙고 싶나?"

섬에 가까워지자 배를 알아본 사람들이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이며 손을 흔들기도 했다. 그들이 포구에 다가갈 수록 소란스러움은 더해 갔다. 미례는 유모의 품안에서 몸을 숨기듯 웅크리며 떨고 있었다. 노예 상인에게 팔려 가느니 차라리 물고기 밥이 되는 게 나을 거야. 미례는 불안한 자신의 앞날에 눈물이 솟아났다. "소솜 아버지 몸은 괜찮수?" "모도리, 여기요 여기." "맹문아, 이 녀석 더 자란 것 같구나." 여인네들이 반색을 하며 제 식구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얼싸안았다. "이질금, 이번에 갔던 일은 잘 되었소?" 그의 어깨만큼 오는 키를 가진 통통한 여인이 배에서 내려서는 경휘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왜? 네가 원하는 분이며 사향 가루를 못 가져왔을까 걱정스런 거야?" 그가 퉁명스레 내뱉었다. 그녀의 눈초리가 슬쩍 치켜 올라갔으나 잠시 후 그녀는 아양떨듯 그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왜이리 심술이 났소. 내가 언제 이질금을 못미더워 합디까? 다만 복주가 옛날 같지 않다기에 교역이 잘 되었나 궁금해서.." "걱정 말아라, 사스래야. 흰둥이는 잘 있겠지?" "언제나 흰둥이만 먼저 찾는구려. 밖에 나가서는 어찌 지내오, 그리 보고 싶어서? 아예 배에 실어 끼고 다니지 그러우?" "그럴까? 그래, 다음에 나갈 땐 생각해 보지." 사스래는 자신의 입 방정을 후회하며 그의 곁을 따랐다. 그들이 포구를 빠져나가려 하자 한 사내가 그를 불러 세웠다. "이질금, 저 계집은 어찌할까요?" 미례와 유모의 눈이 커지며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쩌긴 뭘 어째. 비어 있는 광에 가두고 음식을 좀 줘." "묶어 두지 않아도 될까요?" "배를 저어 도망갈 텐가, 바다를 헤엄쳐 건너갈 텐가. 내버려두라구." "알겠수." 경휘는 집으로 돌아오자 그를 기다리는 마구간의 잘생긴 흰색 종마에게로 달려갔고 으레 그렇듯 그는 말을 타고 섬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사스래는 그럴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고


따라왔다가 멀어지는 그와 흰둥이를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그후 이틀 동안 경휘는 흰둥이를 직접 씻기고 털을 고르며 낮 시간을 보냈고 밤이면 사스래의 요염한 눈길과 몸짓에 히죽거리며 그녀를 약올리는 게 즐거워 그녀가 달아오르도록 내버려두었다. 사스래의 표정은 새침해졌다 뜨거워졌다 하며 자주 변했다. 그는 복주를 떠나기 전 기루에서 복주의 상권을 쥐고 있는 남궁가의 친구인 설민과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여인을 품었었다. 사스래와는 다른 중국의 기녀는 그의 외모와 돈 씀씀이에 홀딱 반해 최고의 기술로 그를 녹여 나갔고 다음날 늦게 서야 그는 배 위에 올랐었다. 그리고 그들의 섬에 가까워졌을 때 그들은 낯선 배 한 척을 만났고 으레 그렇듯 그들은 상선이 아닌 해적선으로 둔갑하여 배와 재물을 빼앗았다. 덤으로 아직 채 여물지 않은, 대담하기까지 한 계집도. 포로로 잡고 몸값을 받아 낸다구? 그건 그의 취미에 맞는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섬을 지키기 위해 그 주변을 지나는 배들을 겁주고 경고하려는 것뿐이었다. 이틀 동안 각자의 집에서 피로를 푼 그들은 다음날 저녁 무렵 경휘의 집 앞 큰 마당에서 잔치를 벌리며 실컷 먹고 마셨다. 경휘 역시 거나하게 취기가 돌았으며 삼일 째 약만 올리고 있는 그에게 온갖 색기를 뿌리며 파고드는 사스래를 보며 웃어댔다. 그 동안 사스래에게 끌려 다녔던 게 사실이었고 그는 그것을 만회해 보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오늘밤은 지고 말 것 같군. 실컷 사스래를 몸 달게 할 작정이었는데. 사스래의 부드러운 손이 조심스레 그의 가슴팍으로 들어와 맨 살을 가볍게 쓸었고 그는 일부러 외면하듯 다른 곳으로 시선을 보내며 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더 이상 견디기 힘든 그가 몸을 일으켰다. "어디로 가려는 거요, 이질금?" 그가 일어서자 그의 부하들이 이상히 여기며 물었다. 그들은 경휘와 사스래 사이에 감도는 긴장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바람 좀 쏘이고 와야겠어." "함께 가요, 이질금." 사스래가 냉큼 따라 일어섰다. 경휘는 뿌리치지 않고 피식 웃어 버렸고 그것을 허락으로 안 사스래가 활짝 웃으며 그의 팔을 잡았다. 그들이 몇 걸음 걸었을 때 소솜이 그에게 다가오며 낮게 말했다. "저, 이질금. 드릴 말이 있소." "뭐야, 소솜? 넌 술도 한잔 안했나 본데?" 경휘가 그의 얼굴을 보며 놀리자 사스래가 끼여들었다. "소솜은 술을 못하잖아요. 조금만 마셔도 얼굴이 서녘 하늘로 넘어가는 해처럼 달아오르는걸.."


"그렇군." 소솜이 얼굴을 붉히며 사스래를 외면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사스래가 못마땅한 듯 재촉하며 물었다. "저, 이질금. 광에 가둔 그..여인 말이오." "왜, 소리치고 대들기라도 하나?" 그가 재미있는 듯 물었다. 소솜의 표정으로 봐선 보통 애를 먹이는 게 아닌가 보군.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뭐야 그럼? 뜸들이지 말고 말할 수 없어?" 사스래가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소." "흥? 뭐 그런걸 갖고.. 내버려둬요, 이질금. 그러다 배고프면 알아서 먹겠지. 제깐게 몇 날이나 안 먹고 배기겠소?" 사스래가 쌀쌀하게 말하며 경휘의 팔을 끌었다. "그래, 내버려두게. 굶어 죽기야 하겠나?" 그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벌써 삼일 째 물도 입에 안대고 있소. 이러다간 송장 치게 생겼소, 이질금." "...제길." 소솜의 경고에 경휘는 화가 났다. 그는 허풍이나 떠는 사내가 아니었으므로 경휘는 더 그랬다. "죽으면 묻어 버리면 될게 아냐?" 사스래가 경휘의 표정을 살피며 앙칼지게 소솜을 향해 말했다. 그녀가 애써 유혹했던 사내가 다시금 그녀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곱게 보이지 않는 소솜이 더욱 미워지는 그녀였다. "이질금이 한번 가서 말 좀 해보면" 점점 더 미운 소리가 그녀의 부아를 돋궜다. "난들 별 수 있나. 억지로 먹게 할 재주는 없다구." "그래도 뭔가 ..얘길 해주면....돌려보내 주겠다고 설득하기라도 하면.." "나보고 거짓 약속을 하라고?" 경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질금" "아니. 난 싫어. 살을 찌워서 팔아 버릴 생각인데 그런 거짓 약속을 하는 건 싫어." "하여튼 이질금, 한번 가서 달래 보기라도 해보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스래가 소솜을 원망스럽게 쏘아보았다. 경휘는 사스래에게 잠시 들어가 있도록 하고는 바닷가를 혼자 거닐었다. 그래, 죽어 버리면 아무것도 아니지. 죽더라도 팔아 넘길 때까지는 살아 있는 게 나아. 못된 귀신이라도 되어서 이 섬을 떠도는 것보다 빨리 이 섬에서 치워 버리는 게 낫지, 암. 그는 빠른 걸음으로 그녀가 갇혀 있는 광으로 들어갔다. 아무것도 없던 그곳에는 어느새 소솜이 마련해 준 듯한 건초 더미 위에 이부자리가 펴져 있었고 하나도 입에 안댄 음식이 그대로 한쪽 구석에 놓여 있었다. 유모가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그가 들어오자 기대의 눈빛으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바람결에 나풀거리는 등잔불이 그녀 주위를 비추고 있었다. 그 어린 계집은 한쪽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꼼짝도 않고.


"나가 있게나." 그가 유모에게 말했다. 유모의 눈빛이 불안하게 멈칫거리다 할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 한참 동안 그녀를 쏘아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무슨 시위를 하는 거야 아니면 죽고 싶은 거야?" 그녀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죽고 싶다면 저 바깥에 있는 물 속으로 뛰어들지 그래?" "....." "노예로 팔려 가리란 생각을 하니 음식이 입에 넘어가지 않던가? 흐흠,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넌 지금껏 호사스럽게 살아왔잖아. 네 운이 나빠서 그리 된걸 어쩌겠어? 그게 네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여야지." ".....돌려보내 줘요." 그녀가 힘없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흐훗." 그는 순진하게 보이는 그녀에게 비웃듯 웃음을 흘렸다. "....돌려보내 줘요." "내가 그리 만만해 보이나? 내가 바보 천치 인줄 알아? 네 입으로 말했잖아. 가야의 귀족에다 신라 왕족과 혼인할 여인, 널 보내 주면 나나 이 섬사람들이 무사치 못하리란 걸 몰라?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야. 그런 소릴 하려거든 기운을 아끼라고." "..아무도 해치지 않을 거예요...아무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 보내 주기만 하면" "흐훗" 그가 다시 웃었다. "...제발" "어차피 돌아가도 넌 타국의 사내와 혼인 할 테고 몸을 섞고 애를 낳을 거야. 사내아이를 낳을 때까지 계속 그 짓을 해댈지도 모르지. 노예로 팔려 간들 다를 게 뭐야. 호사스럽고 부유한 사내들에게 귀염받고 자유롭게 밖을 쏘다닐 수도 있을 거야. 생각하기 나름이라구." "말도 안되는 그런 소리는 그만해요." 미례가 독기 어린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껏 그에게 그런 식으로 대든 사내도 없었고 죽일 듯 쏘아보는 여인도 없었다. "호오, 그래? 삼일을 굶은 계집의 목소리가 아닌걸. 꽤나 앙칼지군. 그래, 그 사내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왕족이라는 그 사내는 뭐 다를 줄 알아? 네가 이곳에 잡혀 있다 풀려났다고 하면 그가 잘도 너와 혼인해 줄 것 같애? 그렇게 고고한 척 하는 것들이 더 따지고 드는걸 몰라?" "그는 달라요. 그이는 당신 같은 비열한 사내와는 달라요." 미례 역시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그래, 그는 그렇지 않을 거야. 얼굴도 못 본 정혼자 이지만 그는 그런 사내가 아닐 거야. "비열한 사내라고? 잘도 그런 말을." 그가 크게 숨을 몰아쉬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화를 돋구면 아무리 계집이라도 그냥 두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더구나 그는


거나하게 마신 술로 이미 감정이 격한 상태였다. "당신은 도적일 뿐이예요. 그이는 왕족의 피가 흐르고 당신처럼 못된 짓도 하지 않아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다구요." 그는 빠르게 다가가 그녀를 때릴 셈으로 일으켜 세웠다. 한 손으로 옷을 휘어잡고 한대 치려 손을 치켜들었을 때 그는 보았다. 두려움 없이 당당한 그녀의 반짝이는 눈을, 고집스레 다문 작은 입술을, 칠흑같이 검지만 윤기 흐르는 긴 머리칼을. 새하얀 얼굴과 가녀린 목의 선을.

순간 그는 사스래가 지펴 놓은 욕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계집을 짓누르고 몸을 섞어도 그런 소리를 지껄여 댈까. 사스래처럼 그에게 안겨 들며 안달하지는 않을까. 그는 순간 결심을 굳히고는 이부자리 위로 미례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미례는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고 몸을 일으키려 바닥을 짚었으나 곧이어 그녀 몸 위로 올라오는 그의 힘에 놀라며 눈이 커졌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다른 여인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끌려드는 듯한 어떤 힘에 그는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발버둥치며 그를 밀어내려 애쓰는 그녀를 누르며 가냘픈 몸매가 드러나도록 거칠게 옷을 찢었다. 마르고 채 발육이 안된 듯 했던 그녀의 몸매가 드러났다. 의외로 젖가슴이 형태를 갖추며 자그맣게 솟아 있었다. 그는 숨을 들이쉬며 입술로 미례의 한쪽 가슴을 물었다. 미례는 그를 떼어 내려 여전히 발버둥쳤다. 삼일을 굶은 그녀의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으나 그녀는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욕정은 더 거세졌다. 최근 들어 그는 사스래도 찾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더욱 큰 불길을 일으키고 있었다. 치맛자락을 걷어올린 경휘는 참지 못하고 그대로 미례의 몸 위로 체중을 실었다. 애써 오므리는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든 그는 자신의 무릎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벌리고는 바지 끈을 풀며 이미 아프게 팽창된 자신의 양물을 그녀의 아무도 닿지 않은 곳에 갖다 대었다. 뜨겁고 불쾌한 이물감에 미례의 눈이 더욱 커지며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른 채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한쪽 손으론 여전히 미례의 가슴을 주무르며 그의 입술은 여전히 그녀의 다른 쪽 가슴을 정복하 고 있었다. 가슴에 머물던 손이 아래로 내려가 부드럽고 고운 그녀의 피부를 쓰다듬으며 작고 앙증맞은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미례가 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잇대어진 그녀의 몸 안으로 허리힘을 이용해 자신의 양물을 들이밀자 거센 저항이 느껴졌고 진입이 쉽지 않았다. 사스래나 중원의 기녀와는 달랐다. "흐읍.." 미례가 기겁을 하고 놀라며 신음을 토했고 몸을 비틀며 그의 손길을 피하려 했다. 미례는 더욱 깊이 안으로 침범하는 그의 손길을 피하며 자유로워진 팔로 그를 떠밀려는 노력도 했으나 허사였다. 그녀조차 몰랐던 그녀 안의 낯선 곳 안을 헤집는 생소하고 고통스런 느낌에 미례는 미간을 찌푸리며 버둥거렸다...................................................................... . .............................................생 략........................................................ ................................................................................ ...................................... ................................................................................ ...................................... (유니에서도 그랬지만 일반소설란을 들어오는 연령층이 다양하다보니 맘대로 써서는 안되겠 더라구요. 자진 삭제 합니다. 이부분을 빼고 올릴까도 생각했지만 미례와 경휘의 만남이 그러고 시작이 그러다보니 뺄수는 없더라구요. 이기회를 이용해 말씀드리는데요, 앞으로도 좀 야하다 싶은 부분은 생략처리 합니다. 지금처럼요. 호기심어린 클릭은 사양합니다.)................................ ................................................................................ .............................................. ..........................................................................미례는 생전 처음 당하는 낯선 고통에 숨을 참으며 몸을 비틀었다. 갓 잡아 올린 잉어처럼 팔딱대며 저항하는 미례의 몸에 그는 점점 더 숨이 거칠어지며 야성적인 호기심으로 히죽 웃었다. ............................................그녀의 몸 안에 길을 열며 탐색을 마친 그의 손에 의해 일거에 그녀 몸 속으로 삽입되며 눈앞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몸을 갈라놓는 것만 같은 심한 통증이 그녀를 덮쳤다.


"아~악" 참을 길 없는 비명이 미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무자비한 그의 몸은 한치의 틈도 없이 미례의 몸을 벌려 대며 깊숙이 들어갔다. 뜨겁고 둔탁한 칼로 아랫도리를 찢어 내는 것 같다고 미례는 느끼며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는 가늘 고 좁으며 물기 없는 그녀의 몸의 감촉과 심하게 떠는 미례의 몸에 잠시 의아했으나 이내 욕정을 풀기 위해 빠르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읍....흐음..." 미례는 경악할 만한 고통에 눈이 커졌고 비명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거칠게 숨을 몰아 쉬는 경휘와 눈이 마주쳤다. "자, 움직여 봐. 내게서 도망치려 바르작 거려봐. 난 너와 싸우는 게 즐거워. 네가 아무리 애써도 넌 날 피하지 못해." 미례는 심한 고통으로 신음을 토하며 몸을 움츠렸고 그의 눈을 피해 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경휘는 그녀의 엉덩이를 꽉 쥔 채로 빠르고 깊게 그녀의 몸 안에서 움직였다. 미례는 처음에는 포기하지 못한 듯 미약하나마 그의 가슴을 떠밀어 보았다. 그는 잠시 뒤로 물러나는 듯 하다가 다시금 거칠게 그녀 몸 속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그의 욕정을 자극하는 미례의 움직임이 어느새 사라졌다. ...............................................................그녀는 다만 고통과 수치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가끔씩 신음 소릴 흘리며 흐느끼고 있었다. 아주 작게. 짐승처럼 헐떡이며 참았던 욕정을 풀어낸 그는 더 이상 미례의 반응에 상관없이 거칠게 몸을 움직였고 높은 곳까지 이르러 탄성을 지르며 해방감을 만끽하며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한동안 의 여운을 즐기다 그녀 몸 위에서 떨어져 나오던 그는 잠시 의식을 잃은 미례의 몸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그에게 당하던 행위 그대로 다리가 벌려진 미례의 허벅지 주위를 물들인 피를 발견한 것이다. "너무 심했나?" 그는 약간의 죄의식을 느꼈다. 그만큼 술기운도 사라진 것이었다. 그는 사스래에게서는 볼 수 없던 출혈에 잠시 의아했으나 기절한 그녀 몸 옆으로 다가가 찢겨진 미례의 옷 조각으로 출혈의 흔적을 닦아주었다. 잠시 후 움찔거리며 그녀가 다리를 움츠렸고 정신을 차린 그녀는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또다시 날 아프게 할 어떤 짓을 하려는 걸까. 미례는 너무도 그가 두려웠다. 그런 고통이 있다는 것을 미례는 몰랐었다. 그는 아무런 말없이 미례의 다리를 벌리며 피를 마저 닦아주었다. 처음엔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던


미례의 표정도 어느새 체념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의 작은 주먹이 그녀의 입술 주위에 있었고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그가 조심스레 그녀 몸의 흔적을 닦아 내도록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문을 나섰다. 빌어먹을, 이러려 던게 아니었는데. 그저 음식을 먹게 하고 조금쯤 달래어 죽지 않도록 한 후에 팔아 버릴 셈이었는데. 그의 험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에 좀 떨어진 밖에서 서성거리던 유모가 불안스럽게 그를 보더니 그를 지나쳐 광 안으로 들어갔다. 미례는 몸을 웅크린 채 옆으로 누워 흐느끼고 있었다. 그가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미례는 간신히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유모는 광 안으로 들어서자 상황을 짐작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소중한 그녀의 미례가 결국 짓밟혀 버렸음을 알아 버린 것이다. 찢겨진 미례의 옷가지, 한쪽 구석에 버려진 피묻은 천 조각, 처연한 미례의 흐느낌. 그들에게 잡혀 올 때부터 그들이 작고 여린 미례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을 짐작했으나 아직은 어리고 소녀 티도 못 벗었기에, 아주 무지막지한 놈들이 아닌 이상 아직은 괜찮으리라 생각했었다. 더구나 섬에 당도해 보니 여인네들도 꽤 있었고 그들은 소박한 가야의 서민들과 흡사했기에. 그래도 여러 명의 사내에게 겁간 당한 것보다는 나은 거라고 유모는 애써 생각을 바꾸며 미례의 옷을 찾아 그녀를 일으켜 옷을 입히려 했다. 미례가 서럽게 흐느껴 울며 처음엔 유모의 손길을 피했다. "내버려둬요...날..그냥 놔둬." "미례 아기씨....그만 우세요. 아무것도 드시지 않은데다 이렇게 울면 더 지치십니다. 자, 날이 찹니다. 옷을 입으세요." "...유모...난..난 이제...가락국에 돌아가지 못 할거 같애.." "왜 못 돌아가세요? 아기씨, 희망을 잃지 마세요." "...하지만..그 사낸..날 보내 주지 않을 거야. 날..노예로 팔아 버린다고.." "미례 아기씨..자 그만 우세요." 유모가 이끄는 대로 옷을 입은 미례는 다시금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으며 울먹였다. "...유모...그가 날..아프게 했어...나 아파서...죽는 줄만 알았어." "압니다, 알아요. 아기씨....이제 됐어요." 유모가 미례를 끌어안으며 머리카락을 쓸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미례는 유모의 포근한 가슴으로 안겨 들었다. "너무..아파서...죽을 것만 같았어.." 미례의 작은 등이 가늘게 떨렸다. "..어차피 한번은...겪어야 할 일이려니 하세요, 아기씨...그냥 잊어버리세요."


경휘가 집앞 마당으로 오니 사스래가 그를 반기며 다가왔다. "이질금, 다들 술에 취해 버렸어요. 소솜만 빼고" 그가 주위를 둘러보니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든 녀석도 있었고 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이도 있었다. 잔치는 이미 끝나 가고 있었다. "피곤하지 않아요, 이질금? 그만 들어가서 쉬어요." 사스래가 요염한 눈짓을 하며 그의 몸을 더듬었다. 사스래야, 이미 늦었다. 경휘는 피식 웃었다. "그래, 그만 쉬고 싶으니 너도 가서 그만 자려무나." 사스래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지며 그를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이질금, 도대체 왜 그러오? 나 죽는 거 보고 싶수? 나한테 서운한 게 있으면 말을 해요, 이러지 말고." 사스래가 그의 앞을 막으며 따지고 들었다. 오늘만은 그냥 넘길 수 없다고 결심하는 그녀였다. 이번 뱃길에서 돌아온 그는 평소와는 너무도 달랐다. "하룻밤 그냥 잔다고 네가 죽을 거 같니? 어서 가려무나." "삼일 째 그러면서 하룻밤이라구요? 왜 이러는 거예요? 아까 까진 이러지 않았잖우." 그녀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은 혼자 쉬고 싶다니까." 그가 짜증스럽게 말을 던지고는 돌아서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의 고집을 아는 사스래는 더 이상 그의 앞을 막지 못하면서도 원망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내가 딴 사낼 본다구 욕하지 말아요. 이질금 아니면 어디 사내가 없는 줄 아오?" 그녀는 홧김에 그의 등에다 대고 소리쳤다. "맘대로 하렴." 그가 돌아보지 않고 걸으며 다시 피식거리며 웃었다. 오늘밤 널 받아 줄 사내는 아마 없을 게다. 다들 꿈자리에 들었을 테니. 혹시 소솜이라면 몰라도... 하긴 소솜은 사스래를 여인으로는 쳐다도 안보지. 그건 사스래 역시 마찬가지이긴 하군. 사내답지 못하고 유약한 소솜을 사스래는 드러내 놓고 싫어했다. 천성적으로 착한 그를 놀리며 심한 소리를 해대도 소솜은 그저 참고 있었다. 그건 사스래가 경휘의 여자 라서가 아니었다. 다만 남에게 모질게 굴지 못하는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경휘는 씻고서 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고 그는 온갖 떠오르는 잡생각을 떨치며 뒤척이다 간신히 잠이 들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경휘는 일부러 미례가 있는 광 쪽으로는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소식이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일을 풀어 보려고 간 것이 도리어 화가 되버렸으니. 경휘는 흰둥이와 함께 섬을 돌며 자신의 행동을 꾸짖었다. 그래도 아직까지 그녀가 죽었다는 소솜의 보고가 없는 걸 보면 살아 있긴 한 모양이었다. 칠일이 되어 가나. 계집이 사내보다 질긴 생명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처럼 작고 여린 계집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버티긴 힘들텐데... 경휘는 오늘쯤 소솜을 불러 그녀가 어찌 지나는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솜 녀석 부르지 않아도 한번쯤 나타날 만도 한데... 경휘는 자신이 술김에 화가 나 여인을 강제로 욕보이듯 가졌다고 생각하자 수치스러웠다. 더구나 그녀는 사스래처럼 그에게 안겨 들지도 않았다. 두려움에 떨며 아파하던 그녀의 질린 표정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가끔 자신도 못 말리게 화가 날 때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럴 때는 눈앞에 보이는 게 없어 그를 따르는 이들도 두려워 하지만 그가 꽁하여 언제까지나 그러고 있지만은 않다는걸 안다. 그는 천성적으로 누굴 괴롭히고 상처 내는걸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마을을 천천히 돌다가 흰둥이의 고삐를 쥐며 생각난 곳으로 향했다. 그는 그녀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의 궁금증을 풀어 줄 사람은 사스래나 지금 그가 찾아가는 인물밖에 없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사스래에게 물었다 간 괜한 강짜만 놓을게 뻔했다. 그가 원하는 곳이 다와 가자 흰둥이가 도리짓을 하며 걸음 폭을 좁히더니 제자리 걸음을 하다시피 했다. "이 녀석이 감히 꾀를 피워? 자 어서 가자. 그 노인은 널 잡아먹지 않을 거야. 내 약속하지. 어서." 흰둥이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떨구고는 천천히 작은 움집으로 다가갔다. 경휘가 내려서서 흰둥이를 매어 놓았다. 흰둥이는 그 움집에서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지며 고개를 돌렸다. 심술궂은 노파 같으니. 흰둥이를 어떻게 대했기에 이토록 치를 떨며 피하는 거야. 경휘가 움막 안으로 천을 걷으며 들어가자 어두컴컴한 움막 안에서 머리 하얀 노파가 킬킬거리며 그를 맞았다. "돌아온 줄 알았지만, 날 찾아 오리라곤 생각도 못했지. 그래, 웬일인가 이질금?" 경휘는 퉁명스레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했다. "그저...별일 없나 보러 왔지." "앉게나, 이질금." 그녀가 화로 옆 자신의 옆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움막 안은 여러 가지 약초와 이상한 물건들로 가득차 있었다.


천정 위에 달아 놓은 나물이며 약초들, 죽은 살쾡이, 족제비, 박쥐들. 그리고 그녀의 화로 위에서 끓고 있는 이상스런 냄새의 물 주전자. 한쪽 벽엔 번뜩이는 눈을 가진 험상궂은 사내들이 서 있고 그 가운데 그보다 약간은 나아 보이는 고운 여인의 모습이 담긴 그림도 걸려 있었다. 빨갛고 노란 천들과 손잡이 달린 방울도 있었다. 오래 전부터 그도 보아 온 때묻은 항아리도 한쪽 구석에 그대로 있었다. 풀솜 할머니. 경휘는 그녀를 보며 옛일을 되짚어 보았다. 자주 바다로 나가는 아버지는 어린 그를 그녀에게 맡겨 놓았었고 경휘는 소솜마저도 안길 어머니가 있는데 유독히 외로운 자신에게 화가 났고 아버지를 원망했고 얼굴도 못 본 어머니를 원망했다. 그녀는 외로움이 뼈에 사무친 경휘를 보며 다정하게 안아 주었고 투정을 받아 주었고 그가 알아듣기 힘든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그에겐 어머니나 다름없는 여인이었다. 경휘는 그녀를 풀솜 할머니라 불렀으며 잘도 따랐다. 어느 순간 변해 버린 그녀가 두려워지기 전까지. 나중에서야 경휘는 그녀에게 신기가 있고 신병을 앓느라 그랬다는 걸 알았다. 그를 달래기도 하 고 꾀기도 하여 골탕먹이고 좋아하는 그녀 안의 작은 계집아이의 웃음소리를 경휘는 치를 떨며 기억했다. 그 말라빠진 손을 가진 눈만 반짝이는 어린 계집아이는 경휘가 풀솜 할미에게 안기고 기대는 것을 샘내며 싫어했다. 그는 몇 번 되지도 않을 싸움을 했고 번번히 졌으며 그때마다 어린 그에게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이 따랐었다. 경휘는 지쳐갔다.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 주는 풀솜 할미는 차츰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는 하늘 눈을 가진 무녀 새타니 보다 그만의 풀솜 할미로 있어 주기를 바랬기에 이후로 그녀를 찾지 않았다. 마지못해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게 될 때도 그는 멀찌감치서 그녀에게 말을 전하고는 뛰어 달아났었다. 지금의 흰둥이처럼... 아예 그녀에게로 가는 심부름 인줄 아는 날에는 아침 일찍 도망쳤다가 저녁나절에나 집으로 들어가는 날도 있었다. "차 한잔 마시겠소, 이질금?" 그녀의 말에 경휘가 생각에서 벗어나 장난스럽게 히죽 웃었다. "무엇을 넣고 달인 건가 솔직히 말해 준다면 마시지." "걱정마시우. 옛날 풀솜 할미를 그리며 찾아온 휘아에게 내 그리 심하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니." 경휘는 그녀의 뛰어난 독심술에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가 건네준 차는 입안에서 구수한


향내를 풍기며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자, 말해보오. 이번엔 이질금답지 않은 일을 했다고 걱정들을 하던데 어떻게 할 작정이우?" 새타니가 그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새타니의 눈은 정말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볼 만큼 맑고 이 상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가끔 푸르게 빛나는 것을 경휘도 보았고 두려움을 갖기도 했었다. 경휘는 슬쩍 다른 곳을 쳐다보며 새타니의 눈을 피했다. "누가 뭐라 한거야, 새타니? 뭘 들었다는 거지?" "낯선 타국의 계집아이를 데려왔다고 합디다." "아이가 아니라 여인네지." 그는 못마땅하여 그녀의 말을 고쳤다. "아직 솜털도 못 벗은 아이라고 들었오." "여인이라니까. 누가 벌써 다녀간 거지? 가납사닌가?" "누구면 어떻소. 다들 걱정하고 있는데...어쩔 작정이오?" "팔아 버릴 거야."그가 망설이지 않고 격하게 대꾸했다. 새타니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젠장, 하필이면 그런 얘길 먼저 꺼내다니. 경휘는 망설이다 움막을 나서려 문 앞까지 왔다가 다시 몸을 돌려 새타니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 자존심만 조금 꺾으면 며칠 동안 그를 괴롭히던 궁금증도 풀릴 테고 잠자리도 편안할 거야. 여기 온 목적을 잊지는 말아야지. "궁금한 게 있는데, 새타니." "뭘 망설이오, 이질금?" 그는 용기를 내어 입술을 떼었다. "...몸을 섞고 나서 여인이 피를 보이는 건 왜지?"

"뭐라 했소?" 새타니가 경휘를 바로 보며 되물었다. 경휘는 안절부절하며 다시금 새타니의 눈을 피했고 그 자리서 이리저리 서성댔다. "사스래는 그런 적이 없는데....그 여인은 그곳에서...피를 흘렸어, 왜지?" 새타니는 그를 바라보며 속웃음을 웃었다. "누가 말이우?" "그건..알거 없고..그냥 대답만 해주면 안되나? 제길" 경휘가 원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나도 알건 알아야 하지 않겠수? 누구요, 그 여인이?" "알면서 뭘 묻는 거야?" 새타니를 바라보던 그가 벌컥 화를 냈다. 새타니의 입술에 웃음이 번지자 경휘는 그녀가


그가 말하는 게 누군지 알아챘음을 알았다. "솜털도 못 벗은 그 계집아이 말이오?" 짓궂게 웃으며 새타니가 확인했다. "...그래, 제길 할." 그는 마지못해 인정했다. 여인이라고 우겨 버리고 싶었지만 그 역시도 그녀가 아직 계집아이에 지나지 않다는걸 인정하고 있었다. "몸을 섞은 후에 말이우, 전에 말이우?" 웃음을 감추며 그녀가 다시 물었다. "...후였지. 옷을 벗겼을 땐 안 그랬거든. 몸을 섞기 전에 피를 흘리기도 하나?"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그에게선 호기심과 궁금증 외에 다른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차라리 말해 버리고 나니 오히려 물어 보기도 더 쉬운 것 같았다. "별걸 다 알려구 하는구려. 그래 그 아이의 나이가 어떻게 된다고 했수?" "잘 모르겠지만...사스래보다 턱없이 작고 어린것 같은데" 경휘가 그녀의 나이를 속으로 헤아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귀족이라 했소?" "제 입으로 그랬지. 자기는 노예가 아니라나.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노예이고 싶은 사람이 있던가? 생각 같아선 노예가 어떤 건지 어떤 대우를 받는지 당장 몸으로 겪게 해주고 싶었지." "그래서 그 여인넬 품은 게요?" "그런 게 아냐. 그 계집이 먼저 내 화를 돋궜어. 혼인하게 될 왕족인 사내에 비하면 난 하찮은 사내인 것처럼 날 쳐다봤다구. 당장 부하들과 갑판에 뉘여 놓고 재미를 볼 수도 있었는데 잘 대우해 줬더니 내게 그딴 짓이나 하는 게 참기 힘들었다구." "그 여인넬 차지하고 싶었던 게구려. 아마도 눈정이 든 게요." "그렇지 않아, 제길. 왜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하지? 얼마나 더 물어 볼 거야? 하늘 눈을 가졌다는 그대이기에 내 궁금증을 풀어 줄 줄 알았더니 헛소리만 늘어놓다니." 그가 난폭하게 몸을 돌려 험악하게 새타니를 쳐다보았다. "다 필요한 얘기였수, 이질금. 그렇게 분통을 터트릴게 무어요. 사실이 알고 싶은 게 아니었수?" 그녀가 노련맞게 그의 화를 가라앉혔다. "그래, 어서 말해보라구. 이유가 뭐지?" 새타니는 한숨을 내쉬더니 경휘를 보고는 대답을 했다. "아마도 숫색시였던 모양이오." "숫색시?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할 순 없어?" "사내와 한번도 교접을 해보지 않은 색시 말이우." "......." 그는 말을 잊었다. "귀족이고 나이 어린 여인이었다니 그게 맞을게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움막을 나서려다 말고 다시 새타니에게 한마디 던졌다. "혹...다음에도 그 여인과 몸을 섞는다면 그때도...피를 보일까?" 그는 그것이 두려웠다. 그녀를 상처낸 것이 두려워 그는 며칠째 그녀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말했잖우. 숫색시는 처음 사내와 몸을 섞을 때만 그러는 게요." "...그래?" "또 그 여인을 품을 생각이오?" "아니, 그저...그렇다는 거지." 그는 당황하며 얼버무렸다. 나가는 그의 뒤에 대고 새타니가 낮게 중얼거렸다. "사스래가 좋아하지 않겠구려." 새타니에게서 돌아와 그는 소솜을 찾았으나 소솜은 가납사니를 따라 고기잡이를 나갔으므로 그는 장부며 몇몇 물건들, 그들이 만들어 가고 있는 뱃길을 그린 지도가 걸린 방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어슴푸레 해가 지고 있었다. 소솜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시켜 그녀가 살아 있기는 한지 알아볼까. 경휘는 망설이다 직접 알아보기로 결심하고는 집을 나섰다. 바다가 보이는 길로 내려가다 보니 우물가에 물긷는 여인들이 바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사스래가 그곳에 있는지 슬쩍 살펴보았다. 정말 토라졌는지 사스래는 그날 이후로 그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다른 사내를 찾았단 건가. 경휘는 가끔씩 보이는 장난 섞인 웃음을 혼자 웃었다. 평생 그녀의 사내로 있어 줄 순 없다. 그 역시 혼인하고 제 여인을 맞는다면 어떤 여인이 그런 걸 곱게 봐줄 수 있을까. 어머니의 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경휘는 제 여인이다 싶은 여인에게 세상 부럽지 않은 정을 쏟아 부을 작정이었다. 그녀가 마음 아파할 일 같은 건 애초에 없을 것이다. 그의 오래된 외로움을 덜어 줄 것이고 그의 아이를 낳아 길러 줄 것이며 그런 그녀가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줄 것이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의 아이에겐 자신이 겪었던 그런 슬픔은 없을 것이다. 그는 그 동안 사스래와 정을 나누며 지내 왔다. 그러나 사스래를 평생을 함께 살 그의 여인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휘는 사스래가 다른 사내와 혼인 할 때까지는 그녀가 기댈 수 있는 사내로 남아 있어 주리라 생각했다. 경휘는 그가 가려는 곳에 가까워지자 가슴이 크게 소리를 내며 뛰는 것을 느꼈다. 살아 있기는 하겠지? 독기 어린 눈으로 쏘아봐도 좋으니 다 죽어 가는 얼굴만 대하지 않았으면


하고 그는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유모와 미례의 시선이 그에게로 쏟아지며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그는 일부러 무뚝뚝하게 성큼 안으로 들어갔고 내부를 살폈다.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나이든 유모의 원망 섞인 얼굴이었고 그녀를 지나치자 이부자리 펼쳐진 한쪽 구석에 빗으로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던 미례의 상한 얼굴이 두려움으로 변하며 움츠리는 게 보였다. 다행이었다. 경휘는 살아 있는 그녀를 안도하며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빗질을 하려고 노력하며 그의 시선을 피해 유모에게로 시선을 맞췄다. 창백하고 핼쓱한 모습이었다. 유모가 일어서며 그에게 다가와 무슨 일인지 물을 때까지 그는 미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잠깐 나가 있게." 그가 낮게 말하자 미례가 신음 소리인지 한숨 소리인지 모르는 소릴 삼키며 유모에게 고개를 저었다. "저..부탁이니 하실 말씀이 있으면 저 있는 자리서 하세요. 우리 미례 아기씨가 두려워하시니... 제발" 유모가 사정하듯 그에게 어렵사리 말을 했다. "그녈 해치지 않을 테니 걱정 말고 나가 있어." 그는 정말 그럴 작정이었다. 그는 지금껏 여인이 궁한 적도 없었고 아쉬운 적도 없었다. 미례? 미례라고 했나. 그는 미례가 두려워 할 어떤 일도 하지 않고 다만 말로써 자신이 그런 사내가 아님을 말하고 싶었다. 유모가 다시금 미례의 떨고 있는 애원하는 눈길에 그에게 사정하려 했으나 경휘의 차가운 눈길에 어쩔 수 없는 듯 무겁게 걸음을 옮겼다. 유모가 나가고도 오래도록 그는 그 자리서 미례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그땐 화가 났었다고? 술도 마셨고, 자신도 감당하기 힘든 화를 내게 만든 그녀를 이기고 싶었다고?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의 시선을 피하며 내리 깐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손을 내려 한 손엔 여전히 빗을 쥔 채로 치마폭 안으로 주먹을 꼭 쥐고 있는 그녀는 어미 잃은 짐승처럼 떨고 있었다. "죽을 생각은 아니었나 보군."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런 말이 나왔다. 미례가 흠칫 놀라며 몸을 웅크렸다.

미례가 흠칫 놀라며 몸을 웅크렸다. "...날 보내 주지 않을 건가요?"


미례가 여전히 시선을 피하며 용기를 내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아직도 그 사내에게 돌아갈 생각을 하나?"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흘러 내려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안됐군. 다시 말하지만 널 보내 줄 생각은 없어." 그의 속마음과는 다른 말이 자꾸만 튀어나왔다. "...차라리 날 팔아요. 당신을 보지 않을 수 있다면 난 그걸로도 족해요." "흐훗, 생각을 바꿨나? 노예가 아니라고 하더니 이젠 포기가 좀 되는 거야? 날 안보는 곳으로 가길 원한다구?" "....그래요." 가냘프나 지지 않고 미례가 대답했다. 그는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제길 할, 저 못된 것이 내 속을 뒤집어 놓을 생각이군. 그가 화를 삭이며 성큼 걸음을 옮기자 그녀의 눈이 놀랜 새처럼 변하며 화들짝 몸을 비키려 했다. "대담한 계집 같으니. 자, 어디 날 똑바로 보고 말해 봐. 내가 보기 싫으니 노예가 되겠다고 다시 말해 봐." 그가 그녀에게로 다가가 거칠게 머리카락을 치우며 그녀의 턱을 치켜올렸다. 버둥거리면서도 그녀의 눈이 그를 마주 보았고 그녀는 쌀쌀한 눈매로 쏘아보며 말했다. "당신은 도적일 뿐이예요. 이렇게 잡혀 있느니 차라리 팔려 가 노예가 되는 게 나아요." "흐흠, 그래? 노예가 되면 좀 나을 성싶은가?" "적어도 당신에게 못된 짓은 당하지 않을 거예요." 뭘 모르는군. 그가 피식 웃었다. 그녀의 순진하기까지 한 말에 그는 화가 누그러지는걸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분노와는 다른 감정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래? 그럼 뭘하게 될 거 같애? 팔려 가 노예가 되면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해?" "...집안을 깨끗이 하고...심부름을 하겠죠. 아이도 돌보고 말상대도 되주고.." "밥도 짓고 많은 빨래도 하고? 손이 거칠어 지도록 일 만하게 될 거 같애? 아니, 이런 일도 하게 될 거야." 그가 손을 뻗어 미례의 몸을 바닥에 뉘웠다. "흐음.." 미례가 놀라며 발버둥치고 그에게 빠져 나오려 저항했으나 그는 센 힘으로 그녀의 몸을 누르며 그녀의 양손을 잡아 그녀의 머리 위로 올려 그의 한 손에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자유로워진 한 손으로 빠르게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 찢었다. 별효과도 없이 그를 흥분시키기만 하는 미례의 몸부림에 그는 다시금 이성을 잃어 갔다. 그녀의 몸을 올라타고 있는 그는 그녀의 드러난 하얀 피부와 작은 젖가슴에 신음 소릴


내며 얼굴을 묻었다. "흐흑.." 어느새 반항하는 신음 소리가 흐느낌으로 변했으나 경휘는 개의치 않고 손을 움직여 나머지 그녀의 옷을 걷어 내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옷도 거칠게 벗었다. 지난번 그의 행위로 그녀 몸 여기저기에 멍이 들어 있었고 아직 채 가시지 않았다. 거세게 팔딱이며 움직이는 그녀의 저항은 그가 그녀 몸 속으로 들어가 움직이다 빠져 나오도록 계속되었다. 그의 거친 행위에 참기 힘든 비명 소리가 미례의 입에서 새어 나왔으나 그것은 점차로 잦아들었고 나중엔 서러운 흐느낌만 남아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미례에게서 몸을 일으켜 옷을 추스려 입었다. 그녀는 힘없이 그를 피해 옆으로 웅크리며 돌아누웠다. 그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울음을 참으며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한 달이 지났다. 어느 날 소솜과 함께 있는 경휘 앞에 사스래가 독기 오른 얼굴로 씩씩대며 찾아왔다. 거칠게 문을 열어제친 사스래의 기세에 소솜도 놀라는 눈치가 역력했다. 감히 이질금에게 대들다가 어찌 되려고.. 소솜은 걱정스러웠으나 경휘가 사스래를 심하게 대하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경휘는 뱃길을 살피다가 고개를 들고는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얘기 좀 해요." 사스래가 여전히 분함을 참지 못 하겠는 듯 숨을 고르며 말했다. "지금은 널 상대할 시간이 없어. 나중에 보자." "난 얘길 해야겠소." "사스래야, 나중이라고 했다." 그는 사실 사스래를 대할 마음이 아니었다. "언제 말이오?" "소솜과 일을 마치고 나서..섬을 좀 둘러본 다음에" "그러고 나면 그 계집에게 갈거 아니우? 날 눈먼 바보로 아시우?" 그녀가 언성을 높였다. 경휘의 눈썹이 못마땅하게 치켜 올라갔으나 사스래는 개의치 않고 그를 쏘아보았다. 분함을 참기 힘든 사스래의 두 눈엔 눈물마저 그렁그렁하니 고여 있었고 씩씩대며 가슴이 심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왜요? 아니라고 말할 작정이오? 본 사람이 있는데도 시치미를 뗄 작정이오?" 경휘는 속으로 당황하는 마음이 들긴 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퉁명스레 말했다. "뭘 보았다는 거야? 그 계집이 누구라는 거야?" 사스래는 기 막히다는 듯 그를 쏘아보며 따질 기세로 양팔을 허리춤에 올려놓았다. "정말 그럴 작정인가 보구려? 소솜! 이질금이 이젠 날 속이려 드는걸 봤지? 사내들은


다 저 모양인 거야? 그 자리서 들통날 일도 사내라고 한번 우겨 보는 거야?" 소솜이 사스래의 얼굴을 피하며 그들에게서 비켜섰다. "사스래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나가 보거라." 경휘가 딴청을 부리며 그녀를 무시하고는 말했다. "말 듣기 전엔 못 가오. 밤마다 그 계집아이를 찾아간다는 게 사실이우? 어서 말을 해봐요." 벌써부터 강짜로군. 경휘는 의자에 몸을 묻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한밤중 그 계집앨 찾아가는걸 본 사람이 있다는 데도 발뺌을 할 작정이오? 새벽녘 거기서 나오는 이질금을 본 이가 있다는 데도 말이우?" "헛소리들. 누가 보았다는 거야?" 경휘가 험악하게 반문했다. 그도 은근히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애초 이길 수 없는 싸움이긴 했으나 사스래에게 심하게 추궁 당하자 그는 부아가 치밀었다. "하! 말해 볼까요, 이질금? 이 마을 사람 중 이질금이 그 계집을 찾는걸 모르는 이는 아마도 바보 같은 맹문이나 나 하나 일게요.하나 더 있구려, 이질금도 몰랐소? 소솜, 너도 말 좀 해 봐, 마을 사람 중 모르는 이가 어딨는지. 자주 그 계집을 대하니 알 거 아냐?" "....." 소솜은 사스래의 추궁이 자신에게로 쏟아지자 무겁게 입을 다물며 화난 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외면했다. "소솜, 너도 뭔가 들은 게 있는 거야?" 경휘가 그를 살피며 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다들 알고 있다고? 경휘는 낭패감으로 속으로 저주의 말을 삼켰다. 소솜 녀석, 그런 얘기가 돌면 귀뜸이라도 해줄 일이지. 하긴 그런다고 그녀를 찾아가는 일을 그만두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잠시..나가 있겠소." 소솜이 그들을 피하며 문을 나서려고 사스래를 지나쳤다. 그때 사스래가 그를 붙들며 대답을 재촉했다. "이질금에게 말을 해주고 가, 소솜. 마을 사람들이 뭐라 하는지, 그 계집의 어디에 혹해서 이질금이 그러는지 다들 궁금해한다는 걸 말해 줘." "너도 들은 얘기가 있는 거야, 소솜?" 경휘가 다시 한번 그에게 묻자 소솜이 망설이더니 한마디 던지고는 사스래를 뿌리치며 문을 나섰다. "알고 있었소." 경휘는 화를 삭이며 숨을 골랐고 사스래는 여전히 독기 어린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말해 봐요. 정말 그 계집을 품은 거유?" 사스래가 한 가닥 희망을 놓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그래." 그가 사스래의 시선을 피하며 수긍했다.


"언제..언제부터 그런 거요? 배에서 내린 첫날부터 그런 거요? 그래서 날 그리 약올리며 뿌리친 거요?" "...그렇지 않아." "그럼 언제부터요? 내게 말을 해요, 이질금. 나 이 자리서 혀 깨물고 죽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시원하게 말해 보구려, 어서요." 경휘는 깊이 숨을 내쉬며 사스래를 슬쩍 보고는 낮게 말했다. "그런 일로 네가 죽기까지 할 일은 없을 거야. 그만해라, 사스래야." "어떻게 그럴 수 있소? 그런 조그맣고 말라빠진 계집아이가 어디가 좋다고" "그만 하라니까"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상처가 도지고 있었다. "왜요? 마을 사람들이 모이면 다들 그 일로 수군대는데 왜 나는 하면 안된답니까? 어디 시원하게 말이나 해보오. 그 어린 계집이 어디가 좋은 거유? 궁금증 난 그들에게 말이나 전 해 줄 테니 어디 한번 말해 봐요." "...네게 그런 말들을 할 필요 까진 없어." 그가 차갑게 말했다. "그래요?" "그래. 네가 나와 혼인 한 것도 아니니 그리 강샘할 필요도 없는 거지. 이질금인 내게 이렇게 대드는 것도 더 이상은 봐주지 않을 거야. 더 듣고 싶으냐, 사스래야? 네 처지가 그럴 입장이 아니란 걸 아직도 몰라?" 그의 돌변한 싸늘한 말에 사스래의 안색이 변했다. 지금껏 분함을 참았던 그녀는 그만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소리내어 울며 밖으로 뛰어 달아났다. 빌어먹을. 경휘는 화를 삭이며 욕설을 내뱉었다. 사스래에게 그토록 심하게 대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아도 사스래는 충분히 그녀의 처지를 알고 있었다. 가끔 욕심 사납고 철없이 달려들긴 해도 그녀 역시 사내에게 기대고 싶어하는 여인임을 알기에 경휘는 더더욱 지금껏 사스래의 투정도 받아 주었었다. 경휘는 소솜을 불렀다. 소솜이 가만히 문을 열고는 들어왔다. "사스래를 따라가 봐, 소솜." 경휘는 걱정스러움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별일 없을 거요, 이질금." 소솜이 그를 똑바로 보지 않고 비켜서며 대답했다. "내가..좀 심하게 말했어. 좀처럼 울지 않는 사스래를 알잖아." "진작에 이질금이 선을 그었더라면 헛된 꿈은 갖지 않았을 거요. 시간이 필요할 거요, 이질금." 그는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방안에 들어서면서 부터 계속 경휘와 시선을 맞추는 걸 꺼려하고 있었다. 경휘가 퉁명스레 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무어라 수군대는지 말해 봐, 소솜." 애써 시선을 맞추려는 경휘의 눈을 피하며 소솜은 문가로 슬쩍 걸음을 옮겼다. "사스래를 찾아보고 오겠소." "소솜, 내게 왜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어? 너라면 내게 마을 사람들이 무어라 하는지 귀뜸 해 줄 수도 있었잖아?" "...그런다고 달라질 이질금이 아니잖소? 누가 뭐라 해도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이질금 아니오?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린다고 미례 아기씰 찾지 않았겠소?" "뭐라고?" 자신을 비난하는 듯한 소솜의 대꾸에 경휘가 놀라며 물었다.

경휘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는 듯한 소솜이 내친 김인 양 용기를 내어 말을 했다. "난 이질금이 그런 사내라는 게 싫소." "날 욕하는 거야?" "그렇소. 게다가 미례 아기씰 그 지경으로 만든 게 나라고 생각하니 나 역시 싫소." "미례 아기씨? 소솜 그 계집은 단지 포로일 뿐이야. 곧 노예 상인에게 팔아 버릴 계집일 뿐이라구. 언제 팔려 가 사내들의 노리개가 되지 않을 거 같애?" "미례 아기씬 이질금에게 그런 대우를 받을 여인이 아니오." "흥! 귀족 출신이면 노예도 신분이 달라지나? 왜 그리 그 계집을 감싸고 도는 거야? 소솜, 너 역시 그 계집을 품고 싶었던 건가? 그래서 더 날 욕하는 거야?" "말도 안되는 소리. 경휘, 눈을 크게 뜨고 딴 맘 먹지 말고 한번 보시오. 미례 아기씬 아직 덜 자란 겨우 아로 만한 어린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아. 사스래를 옆에 두고도 아직 여인이랄 수도 없는 아이를 품고 싶은가 한번 제대로 보란 말이오. 미례 아기씨가 얼마나 겁먹고 있는지 한번 제대로 보라구, 젠장" 소솜이 말을 마치고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흘끗 보더니 쏘아보는 경휘를 뒤로 하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경휘 역시 화가 났으나 소솜이 쏟아 놓은 분노에 대한 놀라움이 더 컸으므로 그는 닫혀진 문을 노려보며 마음을 정리해 보았다. 경휘라고? 어려서 함께 자랐고 계집아이 같은 여린 성격의 소솜을 또래들이 따돌릴 때에도 경휘는 그를 감싸며 함께 놀았다. 경휘의 아버지가 물러나며 경휘가 이질금이 되면서 거리를 두고 조심스러워 하며 전처럼 이름으로 경휘를 부르는 일이 없던 소솜이 그에게 이름을 부를 정도로 화가 난건가.


아니면 옛날 친구로서 그에게 충고하는 것인가. 미례가 아로 만한 어린아이일 뿐이라고 했나? 뒤늦게 본 소솜의 어린 여동생, 아로. 소솜을 무척이나 따르던 그 아이는 열살 되던 해 병으로 죽었다. 소솜, 미례에게서 아로를 떠올렸었나. 그래서 그토록 음식을 입에 안 댄다고 죽을지도 모른다고 겁을 먹은 건가. 그날 밤 경휘가 미례를 품은걸 알고 그의 탓이라고 속상해 하는 건가. 소솜은 동쪽 산언덕 무덤 몇 개 자리한 갈대 숲에서 사스래를 찾았다. 그녀는 아직도 서럽게 흐느껴 울며 한 무덤 가에 무릎을 감싸안고 웅크리고 있었다. 거리를 두고 한참을 지켜보던 소솜은 해가 저물자 그녀에게로 다가가 곁에 앉았다. "그만 돌아가자, 사스래야." 사스래가 그의 기척에 눈물을 닦으며 쏘아 부쳤다. "너나 돌아가. 난 오랜만에 여기서 가라치 하고 지샐 거야." "날이 쌀쌀해서 안돼....이질금이 널 걱정해서 내게 찾아보라고 했어. 그만 돌아가자." "흥! 아마 이질금은 내가 콱 죽어 버렸으면 하고 바랄걸?" "그렇지 않은걸 너도 알잖아. 그렇게 매몰찬 사내가 아니야." "뭐가 매몰찬 사내가 아니야? 나한테 얼마나 심히 대했는데" "본마음이 아닌걸 알면서 그래. 네가 죽기를 정말 바랬다면 아마 3 년전 네가 바닷물에 뛰어 들었 을 때 죽게 내버려 뒀을 거야. 아직 넌 살아 있잖니. 게다가 이후로 이질금이 보살펴 줬잖아." "하지만 이제 다른 여인이 생겼으니 나 같은 건 귀찮아 진 거야." "너라고 잘한 건 없지. 생각해 봐, 이질금에게 그렇게 대들고도 아직 멀쩡한걸 보면 몰라? 감히 그렇게 대들 수 있는 사람이나 있어?" "흐흠" 사스래가 눈물을 훔치며 그의 말에 키득거렸다. 미례는 따라오라는 낯선 사내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유모와 눈을 맞췄다. 이제 팔려 가는 건가. 그 이질금이라 불리는 사내를 더는 안 봐도 되는 건가. 미례의 가슴이 크게 소리내어 뛰고 있었다. 희망을 가지라고 유모가 말하고 있었지만 미례는 밤마다 그녀의 몸을 탐하는 그의 행위에 절망하고 있었다. 정말로 노예로 팔려 가도 그런 일을 겪어야 하나. 미례는 떨려 오는 몸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아직도 그가 그녀를 아프게 할 때마다 미례는 있는 힘껏 저항을 하고 있었다. 유모가 깰까 봐 소리를 죽이며 저항했으나 언제나 그렇듯 지고 말았다. 어쩌다 하루 이틀을 빼면 그는 거의 매일 밤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서야 미례는 유모가 깨어 있었고 그의 행위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유모는 일부러 모른 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다 해도 그녀를 도울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섬에 갇힌지 한 달이 지나고 있었고 유모는 오늘 아침 미례에게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미례 아기씨, 그..이질금이란 사내 말입니다." 미례는 불에 덴 듯 놀라며 몸을 떨었다. "뭐..뭐예요, 유모? 왜 내게 그 몹쓸 사내 얘길 꺼내요?" "...미례 아기씨가 맘에 드는가 봅니다...그렇지 않고서야 밤마다..찾아오지는 않을 거예요." "알고..있었어요?" "...녜...아기씨..이런 말씀 드리기는 정말 힘들지만...그래도 아기씨" "...." 미례는 수치심으로 얼굴을 물들이며 유모를 피했다. "어차피..그리 된 일이고..그 사내가 수장인 듯 해 보이니...그에게 잘 보이면 노예로 팔려 가지 않아도 될 거 같습니다." "...잘 보이다니?...어떻게 하라는 거야?" "아기씨..어차피 그의 여인이 되셨으니..그에게 잘..대하시면..." "...그에게 대들지 말라고 하는 거야?" 미례가 여전히 시선을 외면한 채 수치심과 분노로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노예가 되느니 보단.." 유모가 미례를 살피며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노예로 팔려 가면... 유모, 정말...그런 짓들을 당하게 되는 거야?" "나쁜 주인을 만나면 그리 되기도..합니다." 그래도 그 도적에게 좋으라고 그냥 당하고만 있으라고? 싸우지도 못하고? 어차피 지는 싸움이긴 해도 미례는 지는 순간까지 그의 부아를 돋구었고 그렇게 힘없이 자신의 몸을 내주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이젠 다시는 그를 보지 않아도 되는 건가. 미례는 낯선 사내를 따라가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유모가 함께 따라 가겠다며 실랑이를 벌였지만 건장한 사내는 손쉽게 유모를 그녀에게서 떼어놓았다. 언제까지 이리도 운명이 자신을 잔인하게 내몰 것인지.. 미례는 서글퍼졌다. 주위에 상관없이 길을 따라 걷던 미례는 낯선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하며 서늘한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꼽다가 의아하게 앞선 사내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배가 있는 포구 쪽으로 가는 게 아니라 마을 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듬성듬성 있는 움막집이며 돌무더기로 쌓은 담들이 거의 엇비슷한 크기로 자리하고 있었다. 마을은 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듯 보였으며 얼핏 보기에도 100 호가 넘는 듯했다. 그들은 가야의 서민들보다 훨씬 표정이 밝았고 형편도 나아 보였다. 마을 가운데 자리한 우물을 지나 좀 더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자 아유타의 집 구조도 아니고 가야의 집과도 다른 낯선 형태의 커다란 기와집 한 채가 나타났다. 앞선 사내는 미례를 그리로 안내했다. 대문을 지나 넓은 안뜰을 지나서 어떤 방 앞에


도착하자 그가 미례를 돌아보며 멈춰 섰다. "여기로 들어가서 기다리시오." 그는 무례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은 말투로 말을 하고는 머뭇거리는 미례를 방안으로 들여보내고 문을 닫았다. 멀어지는 그의 발소리가 들렸다. 넓은 방 한쪽 벽을 차지한 목조로 된 큰 침상이 보였고 다른 한편엔 탁자와 의자도 깔끔하게 놓 여 있었다. 옷장으로 보이는 화려하지 않은 가구도 침상 옆에 ㄱ자 모양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미례의 키만한 가구의 윗 공간에는 비단천 위에 소나무와 냇가, 두 노인과 소 한 마리가 그려진 그림도 걸려 있었다. 미례는 불안하게 낯선 방안을 둘러보며 오래도록 그렇게 서 있었다. 소솜은 늦은밤 경휘에게 다시 나타났다. 경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풀 꺾였던 소솜이 돌아오자 힐끗 시선을 한번 주었을 뿐 다음 교역지에서 사고팔 물건을 셈하는 일로 집중했다. "저..이질금." 사실 소솜은 두려웠다.그를 따라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왔던 5 년전에도 그는 오라비에게 까르륵 웃으며 달려들던 아로가 나타나지 않아 가슴이 내려 앉으면서도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곧바로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들의 눈이 슬픔과 걱정으로 차있는 것을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깐 밖엘 나갔다오겠다고 하고는 집을 나서 갈대숲 무덤가까지 내쳐 달렸었다. 아닐거야,내 어리고 앙징맞은 아로는 이곳에 없을거야. 새로이 생겨난 작은 무덤앞에서 소솜은 한동안 망연하게 서있었다. 얼마전 사내잃은 사스래가 왔다가 그를 발견하고는 동병상련의 가슴으로 위로하며 안아줄 때까지. 사스래, 그땐 경휘의 여자가 되기 전이었다. 소솜은 아직도 그의 가슴 한쪽을 서늘하게 만드는 그때 기억을 떨쳐 버리고 싶었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간 소솜은 아버지에게 아로에 대해 묻지 않았다.그저 하루하루 살아지면서 소솜은 속으로 상처를 삭혀냈다. 갈대숲으로 달려가는 날도 차츰 줄었고 그렇게 그는 어린 여동생을 잊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작고 여린 가냘픈 몸매의 미례를 본 순간부터 소솜은 아로를 다시 떠올렸다. 그애도 자랐으면 저만할 텐데. 광안에 갇혀서 경휘에게 몸을 빼앗긴 후로는 더욱 핼쓱해진 미례의 모습은 소솜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미례를 살리고 싶었던 그의 염려가 오히려 그녀의 처지를 더 망쳐 버리고 말았다. 둥지에서 떨어진 어미 잃은 새끼 새처럼 미례는 겁을 먹고있었다. 아무것도 해줄 수없는 자신이 싫었고 밤마다 그녀를 찾는 경휘에게 화가 난 소솜은 요즘 일부러 경휘앞에 나서지 않았고


그가 찾아도 애써 감정을 죽이고 그를 바로보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저녁 사스래를 달래어 집으로 데려다 주고 걱정스러워 찾아간 광에서 소솜은 미례를 찾을 수 없었다. 유모만 덩그러니 남아 그를 보고는 울먹이며 낯선 사내가 와서 미례를 데려갔다고 전했다. 경휘가 사스래와 소솜에게서 마을 사람들의 수근거림이 있다는 것을 들은 이후에 생긴 일이었다. 사스래나 내말에 화가 나 미례 아기씨께 화풀이 하듯 팔아버린건가. 마을 사람들의 수근거림에 뿌리를 뽑으려고? 가납사니나 다른 장로들의 채근에도 경휘는 퉁명스럽게 한 두 마디만 던질 뿐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았었다. 이제와서 자신의 행동으로 비웃음을 사게 되자 애꿎은 미례를 없애 버리려는 건가. 그가 그렇게 모진 사내인가. 처음에 소솜은 화가 났었다.그러나 이질금이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면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일이었다. 소솜은 그래도 경휘에게 찾아왔다. 더이상 화가 나서도, 따지고 들려는것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사실을 알고 싶었다. 그래야만 편히 발 뻗고 잠을 이룰 수 있을것 같았다. 경휘는 아까일로 화난듯 그를 무시하고 있었다. "이질금...물어볼 말이 있소." 소솜은 다시한번 어렵게 입을 열었다. 경휘가 두루마리에서 눈을 떼며 소솜을 쳐다 보았다. 그는 소솜이 하고자 하는 말을 짐작했으나 그대로 쳐다보기만 했다.소솜이 이렇게 자기주장을 하기도 하고 그에게 따지기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미례 아기씨 말이오...어떻게 한거요?" "어떻게 하다니?" 그는 일부러 모르는체 약을 올렸다. "...알잖소. 미례아기씰 어디로 보낸 거요?" "왜? 다들 바라던 일 아니었나?" "....." "내게 그일로 따지러 온거야? 사스래와 둘이서 오늘 내 부아를 돋구려고 작정을 한거야?" "...그런게 아니오." "흠,그래? 그럼 노예 계집을 하나 팔아 버렸다고 내가 일일이 네게 알려야 하는거야?" 그의 빈정거리는 말에 소솜의 눈이 불안스럽게 흔들렸다. "정말 팔아넘긴 거요?" "왜? 안되나? 네게 줄걸 그랬나?" 소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미례 아기씬 그런 대우를 받을만한 여인이 아니오." "헛소리....어서 집으로 가보기나 해. 밤이 늦었어." "....." 소솜이 한동안 아무말도 못하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자리에 서있었으나 잠시후 문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문을 나서려다가는 다시 닫고 경휘에게로 돌아섰다.


"정말...어찌 한거요,이질금?" "팔아버렸다고 했잖아." "배도 나가지 않은걸 알고 있소. 다음 출항때문에 다들 수리하고 꼼꼼히 살피고 있잖소?" 경휘가 피식 웃었다. "지나던 설민의 배에 실어보냈을 수도 있지." "...그건 아닐거요." "나도 하나 물어볼까? 네가 그여인에게 그리 관심을 보이는 건 왜지?" "......" "마을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걸 알면서 왜 내게 말하지 않은거야?" "..이런 일이 있을까 두려워서였소.이질금은 화나면 앞뒤 가리지 않으니 그 불똥이 미례 아기씨에게 튈까 봐, 그래서 였소." "....." '그리고 미례 아기씰 그리 대하는 이질금이 보기 싫었소." 경휘의 입가에 다시 웃음이 번졌다. "앞으로도 네녀석 말은 더 듣기 힘들겠구나. 그 계집을 내 집으로 옮겨놓고 아예 눌러 앉힐 생각이니" 그의 말에 소솜이 놀랐다. "그럼 팔아넘긴게 아니었소?" "네 녀석이 그리 원하니 팔아버릴땐 꼭 알려주지, 내 약속하마." "허면...사스래는" 경휘의 눈썹이 슬쩍 치켜올라갔다. 마음에 안드는 모양이었다. "사스래는 뭐?" "미례 아기씬..." "사스래는 사스래고,미례는 미례지. 더 뭐가 알고싶은 거야?" "....아..아니오." 소솜은 물러서며 성급히 인사하고는 그의 집을 나섰다. 이질금다운 행동이라고 돌아가면서 소솜은 생각했다. 마을사람들이 뭐라 하든 이질금은 하고 싶은대로 할 것이다. 이젠 내놓고 보란듯이 미례를 그의 집으로 데려왔으니. @@@ 이야기 프로그램에 익숙치 않아 글을 못 올렸어요. 결국 지금도 인터넷으로 들어왔네요. 천리안 98 은 못쓰거든요. 며칠전 컴을 새로 포맷한 터라...영아씨, 나 파일 찾았어요. 확장자가 잘못 되어 있었어.

오늘은 힘든 날임에 틀림없었다. 다들 그의 뜻대로 따라 주지 않고 대들고 따져들기까지 했다,소솜마저도. 처음에 화가 난 경휘는 정말로 미례를 팔아버릴 생각이었다. 그의 눈앞에서 치워버리면 속이 시원할것 같았다. 처음부터 그의 마음대로 되지도 않을 여인임을 알았기에. 그러나 그 아닌 다른 사내가 미례를 만지고 몸을 섞는 생각을 하자 그는 갑자기 짜증스러워 졌다. 버리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갖을 수도 없고, 남에게 주기도 싫으면 어쩌란 말인가.


물론 미례는 나 아닌 다른 사내에게도 그처럼 앙탈을 부리고 화를 돋궈대겠지. 필시 언젠가는 성질 못된 녀석의 화를 돋구다 맞아죽을지도 모르지. 나만 하니까 그래도 아직 참아내는 거라구. 경휘는 자신의 방안에 있는 미례를 생각하며 천천히 일어나 방문을 나섰다. 이젠 밤마다 그녀를 찾아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마을 사람들의 수근거림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수근거릴 테면 수근대라지. 경휘는 여전히 무거운 발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을까? 저녁식사를 건네준 곁시의 말로는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고 물만 한모금 마시더라고 했다. 그는 일부러 미례가 지치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다. 앙칼지게 대들기라도 하면 더이상 참기 힘들것 같았다. 그가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가자 문 가까운 벽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미례가 그를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며 눈이 커졌다. 경휘는 그녀를 잠시 훑어 보고는 겉옷을 벗으며 침상가로 가서 걸터 앉았다. 밝은 불빛 아래서 미례를 보는건 생소했다. 어둠속에서 그녀를 찾아내 저항을 물리치며 몸을 빼앗기만 하던 기억속에서 그는 미례만이 가진 특유의 향내와 부드러운 머리칼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작은 입술이 깨물리더니 더욱 몸을 웅크리며 그를 피했다. 사스래처럼 달려드는 여인도 가끔은 피곤하지만 미례처럼 반응없는 여인도 그를 지치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이틀간 그는 미례에게 가지 않았으므로 그녀를 다시 대하자 충동이 일었다. "밤새 그러고 있을 작정이야? 그러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겠군. 이리로 와." 미례는 여전히 시선을 피한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노예로 팔려가는게 나을 뻔했나?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아니.그랬으면 네몸은 벌써 채찍자국으로 남아나지 않았을 거야. 자, 이리로 오라구." 그녀가 마지못한 듯 몸을 일으키려다가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빌어먹을,못된 계집 같으니." 풀어진 머리가 흘러내려 그녀의 얼굴을 덮었으나 모멸감과 고통으로 인해 낮게 신음하며 창백해지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경휘가 그녀에게 다가가 안아올려 침상으로 데려와서는 거칠게 그녀의 다리를 펴주었다. 작은 손으로 쥐가 난데다 무감각해지기까지 한 다리를 만지는 것을 본 그가 한숨을 쉬고는 힘있게 그녀의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오래지 않아 움찔거리던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돌아왔다. 그가 미례를 내버려두고는 몸을 일으켜 등잔불을 껐다. 그리고 다시 침상으로 가 미례에게 안으로 좀더 들어가도록 하고는 이부자리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겉옷을 벗어, 잠을 좀 자라구." 그러나 미례는 그가 닿지않을 만큼 떨어져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마음대로 하라구.


그는 미례를 무시하고는 눈을 감으며 잠을 청했다. 그가 잠이 든 후에도 얼핏 돌아누울때마다 미례는 흠칫거리며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른 아침, 경휘가 눈을 뜨니 그렇게 고집스럽던 미례가 그에게 등을 돌린채로 몸을 웅크리고는 누워 잠이 들어있었다. 이불도 덮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의 긴 머리가 침상 베게 맡에 펼쳐져 있었다. 경휘는 가만히 이불을 덮어주고는 침상에서 일어났다. 다음날 새벽에는 경휘도 더이상 참지못하고 여전히 그에게 떨어져 잠이 든 미례를 깨웠다. "흐음.." 겉옷을 벗기며 풀어헤치는 경휘의 손길에 얕은 잠에 빠졌던 미례가 낮게 소리내며 바르작 거렸다. 이젠 처음처럼 팔딱대며 거세게 반항하진 않아도 여전히 저항은 계속됐다. 이레동안 곁시를 따라 빨래며 밥 짓는일, 집안청소를 배우게 시킨 경휘는 거칠어진 미례의 손을 보며 그만하도록 말했다. 노예의 일이 어떤 것인지,그녀가 더이상 귀족이 아니란 걸 받아들이게 하고 싶었던 경휘는 아무 불평없이 일하는 미례를 보며 결코 즐겁지 만은 않았다. "내일부턴 그런 일 하지 않아도 돼." 무뚝뚝하게 그가 말하며 침상에 오르자 머리를 빗어묶던 미례가 마지못해 그를 지나쳐 침상안으로 들어왔다. 어떤 일을 시켜도 군소리없이 해내는 그녀이지만 아직도 그가 손을 뻗으면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를 거부한다는 사실이 요즘의 그를 화나게 만들고 있었다. 처음엔 상관없다고 생각했고 오히려 즐기듯 그는 그녀를 부추기며 저항하도록 만들었다. 내게서 달아나려고 해봐. 멀찌감치 떨어져서 잠을 자라구. 그런다고 네가 내 계집이 아닌건 아니야. 그는 화가 날때마다 그녀에게 쏘아붙였다. 난 너와 싸우는게 좋아.내가 이길걸 알거든.넌 한번도 날 이겨본 적 없어.너도 알잖아. 심술이 날때마다 그는 더 어기짱을 놓았다. 내게 대들어 봐. 내게서 달아나려 움직여 보라구. 난 너와 싸우는게 즐거워. 그는 일부러 그렇게 말했었다. 처음엔 그녀의 그런 반응들이 그의 흥분을 부추겼다해도 이제와선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밤을 보내고는 며칠씩 자신에게 화가 났고 결국 참을 수 없게 될때까지 그녀를 만지지 않고 있었다. 사스래에게는 그런 것들이 통했었다면 미례는 아니었다. 미례는 그가 손을 뻗어오면 흠칫 놀라며 여전히 앙탈을 부렸다. 제길, 빌어먹을. 오늘밤 경휘는 그녀와 작은 거래를 했다. 경휘가 미례에게 필요하다면 곁시를 두어도 좋다고 하자 미례가 유모와 함께 있고


싶다고 했다. "아직도 유모 품안에서 벗어나지 못한거야? 도대체 네 나이가 몇인데 유모가 필요한 거야?" 그것 역시 그에게는 상처였다. 미례는 다만 그의 시선을 피하며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잠자리에 들려던 그는 생각이 스치자 그녀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정말 유모와 함께 있고 싶어?" "....그래요." 내겐 어머니나 마찬가진 걸요, 미례는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괜한 비웃음까지 사고 싶진 않았다. "너도 한가지 약속을 해주면 유모와 함께 있도록 해줄께." "...." "잠자리서 내게 대들지마." 그는 빠르게 하고싶은 말을 해버렸다. "....." 미례가 그를 올려다 보았다. "억지로 좋은척 하라는 게 아냐. 그냥...대들지만 말라구." 그날밤 잠자리에 들었을때 확실히 미례의 몸이 조금은 달랐다. 습관처럼 새벽녁 그의 손이 닿자 잠결인듯 신음소릴 내며 울먹이고 뿌리치던 그녀는 그의 몸이 그녀속에서 움직이자 그를 떠밀던 손이 힘을 잃더니 요자락을 움켜쥐며 그대로 있었다. 이후로도 몇번은 무심코 그를 떠밀다가 이내 그가 몸을 열면 그대로 받아주었다. 아직도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그의 행위가 격해질 때면 아픈 신음소리를 내지만 그녀의 저항이 사라진건 확실했다. 며칠후 그는 약속대로 유모를 데려다 주었다. 표정 없는 생기 잃은 그녀는 그의 앞에서 유모를 보고도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방을 나서자 유모를 반기는 미례의 낮은 소리가 들리는 것을 경휘는 놓치지 않았다. 빌어먹을, 못된 계집. 경휘는 습관처럼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그의 앞에서 고맙다는 말은 안해도 유모를 반기는 웃음 정도 보여주면 안되나. 그렇게 무표정하게 있어야 하나. 시간이 흐르며 경휘는 대들지 않는 미례도 참기 힘들어졌다. 그의 몸아래서 그의 행위에 따라 흔들리는 가녀린 몸과 가끔의 신음소리를 제외 한다면 그가 살아있는 여인을 안는 것인지 조차 알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다시 저항해 보라고 해? 차라리 그게 낫다고? 그는 변덕스런 자신의 마음을 들키기 싫었으므로 할 수 없이 무감각한 미례의 몸을 참아내었다.

가을이 지나감에 따라 겨우살이 준비로 다들 분주했고 경휘는 배의 수리 진척을 살피며 식량과 모피, 연료등을 비축하고 겨울동안의 휴식을 위해 바다로 나갈 차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흰둥이와 함께 다시 새타니를 찾았다. 새타니의 집에는 가납사니도 먼저 와 있었다.


"어서 오시오,이질금." 가납사니가 반색을 하며 일어나 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새타니도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별일 없었소, 이질금?" 웃음기 머금은 새타니의 눈과 마주치자 경휘는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하늘 눈 새타니가 모르는 일도 없을 텐데 새삼스레 날 떠보는거야?" 그의 퉁명거림에 가납사니가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살폈으나 새타니는 그저 즐거운듯 킬킬거리며 웃었다. "집안에 여인도 들여 놨으면 좀 웃어야 하지않소, 이질금? 어디서 넘어지고 와서 어디다 심통이오?" "새타니, 요즘 이질금 심기가 좋지 않으니 그만 하게나." 가납사니가 새타니의 허리춤을 찔렀다. 그러나 새타니는 여전히 킬킬거리며 웃어댔다. "언제 떠나면 좋겠는지 알아봐 주기나 해, 새타니." 경휘는 새타니의 웃음을 무시하며 말을 건넸다. "가납사니도 그 말을 하더이다. 이 달 보름이 좋겠소. 그래, 얼마나 걸릴것 같소?" 새타니가 정색을 하고는 그에게 물었다. "가는데 사흘잡고 시장을 좀 둘러보고 흥정을 하자면 사나흘이면 충분하지. 늦어도 열흘이나 그 안에 돌아올거야." "겨울이 빨리 올거 같으니 서두르는게 좋을게요,이질금.바다 한길에서 역풍을 만나면 좋을게 없소." 가납사니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고 그들은 진지하게 복주와 미지의 서역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하자 새타니가 다시 짖궂게 물었다. "왜 여인을 집안에 들여 놓고도 좋은 안색이 아닌거요? 무슨 걱정이라도 있소?" 경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려다 생각을 바꿔 망설이며 그녀를 쳐다 보았다. "뭐요, 이질금? 말 못할 고민이 있는 게요?" 그는 결심하고는 새타니에게 그의 심기를 털어 놓았다. 유모를 데려온 후의 미례의 변화도 그는 털어 놓았다. "사스래는 제가 먼저 몸달아 안겨 들곤 했는데 미례는 죽은 듯 누워있는게 다야. 처음엔 대들고 바둥대는게 재밌었는데 이젠 그렇지도 않아. 살아있는 계집 같지도 않아. 꼼짝않고 가만 있다가는 떨어지기가 무섭게 구석으로 도망가는 걸 보면 죽여 버리고 싶어." 그는 정말 화도 나고 실망스러워 오늘 아침엔 등돌리고 누운 그녀를 때려주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다. 그의 말을 듣던 새타니가 배시시 웃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못참겠는듯 낄낄거리며 소리내어 웃었다. 가납사니도 처음엔 놀라는것 같더니 새타니를 따라 히죽거리며 웃어댔다.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인데 어렵사리 꺼낸 자신의 말에 그들이 웃어대자 경휘는 다시금 부아가 치밀었다. 못된 것들. 실컷 말을 하라 해놓고는 기껏 꺼내놨더니 조롱이나 하다니. 가납사니가 먼저 울그락 붉으락 하는 경휘의 표정을 살피며 웃음을 멈추고는 헛기침을 하며 새타니에게 눈치를 주었다.


"뭐가 우스운 거야? 실컷 비웃기나 하라고 얘길 꺼낸 줄 알아?" 그의 말에 가납사니가 다시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눈정을 앓는 사내나 다름 없었다, 그들의 이질금은. 아직 젊으나 사리분별 잘하며 패기 넘치고 활동적인 이질금을 다들 믿고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작고 보잘것 없어 보이는 여인 하나로 인해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젠장할. 뭐가 그렇게 재미난 거야? 응, 새타니? 나한테도 얘길 좀 해봐. 뭐가 그리 우스워?" "낄낄, 흠..흠. 이질금, 원해서 안기는 여자와 억지로 몸을 빼앗은 여자가 같을 수 있는게요? 그래, 그리 생각 된답니까?" 새타니가 눈물을 훔치며 아직도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그런거야? 가납사니, 자네도 그리 생각하나?" 조금은 누그러진 경휘가 가납사니의 시선을 잡으며 물었다. "흠..." 가납사니도 웃음을 참으며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이질금, 혹시 여자 다루는 기술이 떨어 지는거 아뇨?" "여자 다루는 기술? 하지만 사스래는" "사스래야 이질금 아닌 다른 사내라도 다를게 없을게요. 이미 사내를 아는 사스래야 별 기술이 필요 없지만 그 나이어린 여인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게 생겼습디다." 그는 다시 헛기침을 하고는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사실 소솜어미도 처음엔 발버둥치고 난리를 하더니 지금은 내가 바다에서 돌아오면 밤도 되기전에 달려드는게요. 맛을 알기 시작한 여인네야 별 기술이 필요없지, 암." "쓸데없는 소리." 새타니가 샐쭉하며 빈정거렸다. "그 기술이란게 어떤거지?" 경휘가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가납사니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걸 어찌 말로 한담." "아는 게 없는 게지." 새타니가 키득거렸다. "그래도 알아듣게 요령을 말하면 되잖아?" 경휘가 끈질기게 시선을 놓지않고 채근하자 가납사니가 난처한 기색을 했다. "에, 참....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흠흠..에이구 모르겠다. 사스래에게 가보시우. 가서 이질금이 어찌하면 사스래가 좋아하는지 보고 그걸 써먹으면 되지 않겠수? 여자란 다 거기서 거기지, 뭐 다를게 있나?" 경휘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새타니를 보았다. "새타니도 그리 생각해?" "그 여인이 좋아하지 않을게요." 새타니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허면 달리 방법이 있나?" "달래 보구려."


"어떻게?" 그는 정말 사탕을 조르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 여인이 좋아 하는걸 들어주고 같이 달구경도 하고 밀물가도 걸어보고.." "내게 말도 안하고 쳐다도 안보는데 그런 걸 좋아할까?" "아니면 한동안 시간을 두고 잘못을 빌어보구려." "잘못을 빌어? 무엇 때문에?" 그가 어이가 없는 듯 새타니를 쳐다보았다. "여인네가 마음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몸을 빼앗았으니 화가 났을게 아니오?" 새타니를 보는 경휘의 시선이 돌연 싸늘해졌다. "여기 있는 모든 건 내 말 한마디면 되는거야. 그 계집은 내가 잡은 계집이야. 그런데도 내 맘대로 못한단 말야? 잘못을 빌라구? 그 잘난 귀족계집에게? 아예 날 죽이라고 칼을 쥐어주지, 젠장." 경휘가 쌀쌀하게 일어서서는 바람소리나게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질금이 정말 눈정이 든 모양이오, 새타니." 가납사니가 그의 뒷모습을 보고는 중얼거렸다. "속정도 들어가는 모양인 걸." "저리 변덕이 심해서야 원, 이번 바다길은 어째 좀 불안하오." "자넨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릴 한겐가?" 잠시후 새타니가 그를 보며 책망했다. "내가 뭘 말이우?" '사스래에게 가보라고 한것 말이네. 되지도 않을 소릴 했더군." "그게 왜 되지도 않을 소리란 말이오, 새타니?" "그 여인네와 휘아 사이를 벌려 놓기만 할 뿐인걸 정말 모른다구? 이 섬의 모든 여인네가 휘아가 사스래집에 찾아간 걸 알게 되보게, 그 말이 그 여인네에게 안들어갈 성 싶은가? 그걸 알고도 잘도 휘아를 받아줄 성 싶은가?" "경휘는 이곳의 이질금이오. 그 여인도 이젠 할 수 없는 이질금의 여인인게요. 좋으나 싫으나 말이오." "쯧쯧, 사내들이란 무턱대고 부딪치면 되는 줄 아는게지? 그래 가지고서야 어디..." 가납사니가 새타니의 못마땅한 시선에 머리를 긁적였다. "....." "그래도 우리 이질금을 저리 사로잡을 여인이 나타났군. 말해보게, 그 여인이 어찌 생겼든가?" "그게 말이오, 새타니. 나도 잘 모르겠소." "모르다니? 자네도 보았을 것 아닌가?" "글세, 그게...그냥 어리기만 한 계집인데 뭘 보고 이질금이 저리 미쳤는지 모르겠다는 말이오." "아리따운가?" "아직 여인의 냄새도 나지 않습디다. 아리땁다고 하기는 좀 뭣하지만 다시 한번 보게 만드는 구석이 있긴 하오. 제법 따지고 들기도 할것 같습디다." "제 짝을 만난게지." "뭐라 했수? 이질금을 그 여인과 맺어 줄 작정이우?"


"자넨 달리 이질금의 짝이 될만한 여인으로 점찍어둔 사람이 있는가?" "그런건 아니지만 그리 말라빠지고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타지 여인을 이질금의 짝으로는 보지 않소. 애도 잘 못낳게 생겼습디다." "걱정 말게, 휘아는 여러명의 자식을 볼게야. 휘아보다 더 나은 이질금이 될 자식을 볼게야." "그 여인에게서 말이우?" "그건 아직 모르지." "자식은 사스래가 더 잘 낳게 생겼잖소?" "사스래는 아니야. 휘아는 사스래에게 정이 없어."

경휘는 흰둥이를 몰아 한참을 쏘다니다가 사스래에게로 발길을 돌렸다. 생각해 보니 가납사니의 말도 그럴듯 했다. 그 계집에게 잘못을 비느니 차라리 내키지 않더라도 사스래에게서 기술을 배워 실컷 달아올라 소리지르며 그에게 매달리도록 만들고 싶었다. 사스래가 그에게 찾아와 울고 간 이후로 그는 사스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아예 미례를 그의 집으로 끌어 들였다는 말을 듣고 사스래는 배가 아팠으나 약이 올라 두문불출하며 집안에서 지냈다. 그런 허여멀건 말라빠진 계집이 뭐가 좋다고. 사스래는 가끔씩 경휘를 욕하고 미례를 욕하며 집안을 쓸고 닦았다. 사스래의 독기오른 심술에 어쩌다 우물가에서 만난 아낙들이 한마디씩 했다. 시앗이 시앗 꼴 못본다구? 사스래는 부엌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열심히 솥을 닦다 말고 흰둥이에서 내려 그녀를 바라보는 경휘를 보고는 눈이 커졌다. 두달 가까이 날 찾지 않았던 이질금이 제 발로 찾아 오다니. 사스래는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달려 가다가 샐쭉해져서 웃음기를 거두며 차갑게 말했다. "무슨 일이오,이 질금?" 그가 피식 웃었다.속을 숨기지 못하는 사스래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널 보러 오면 안되는 거야?" "집에 모셔둔 여인도 있잖소? 내가 아쉬울 게 없을 텐데요?" "아직도 골이 난거야?" "내가 골낼게 뭐가 있겠소?" "그래? 그럼 같이 좀 걸어볼래?" 사스래는 마지못한듯 그러나 금새 웃으며 그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며칠째 경휘가 들어오지 않자 처음엔 그가 언제 올지 몰라 긴장을 하던 미례는 사흘째가 되어가자 마음 편히 잠을 이룰 수있었다. 겉옷을 벗으며 잠잘 채비를 하고 머리를 하나로 묶어 빗어 땋아내리는 미례앞에 유모가 들어왔다. "제가 빗겨 드릴까요, 아기씨?" 미례가 유모에게 따뜻하게 웃으며 되었다고 하고는 혼자서 마저 했다. "날이 좀 쌀쌀해지는게 정말 겨울이 멀지 않았네요. 마을 사람들이 겨우살이 준비를


하던데요?" "그래요?...사람들은 어때요, 유모? 나쁜 사람들 같지는 않아?" "다들 순박해 보이고 여물어 보이던 걸요....답답하시죠?" "...할 수 없잖아, 유모." "그 분에게 한번..말을 해보시지 그러셔요?" 유모가 미례를 살피며 넌지시 물었다. "싫어. 답답해도 그냥 참는게 나아." 그래, 밖에 나가도 괜찮겠냐고 그에게 물어보는 건 자신의 처지가 갇힌 신세임을 증명하는거나 다름 없잖아. 미례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먼저 말을 꺼내는 것도 미례는 내키지 않았다. "오늘도 안들어 오시려나 봐요." 유모가 미례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운을 띄웠다. 미례는 상관없는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거울로 시선을 맞췄다. 그녀가 처음 오던 날은 없던 것이었다. 며칠 후 머리를 매만지는 미례를 힐끗 보고 지나쳐가던 그가 사람을 시켜 들여놓은 상반신이 보이는 제법 큰 거울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날 혼자두면 좋겠어. 미례는 서글픈 자신의 처지를 돌이켜 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그의 손이 닿을때마다 미례는 의례 몸을 바로 누이며 바닥의 요를 움켜 쥐었고 다리를 벌려야 했다. 어느 날은 그가 움켜쥔 그녀의 손을 억지로 폈고 눈싸움을 하듯 그는 미례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었다. 난 무서워. 미례는 그를 보기만 해도 두려워 떨고 있었다. 무지막지하게 그녀를 아프게 했던 그 날부터 미례는 그를 보면 두려워서 따지거나 덤벼들 용기 같은건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저 숨죽여 그를 피하고만 싶었다. 매일 밤 그녀 위로 올라오던 횟수가 점점 줄어가자 미례는 처음 안도했었다. 어느 날은 닷새동안 그냥 자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날이 오래될수록 그 다음 그녀를 찾을때는 더 아프고 강렬했기에 미례는 그것조차 두려워했다. 유모 역시 처음에는 그가 싫기만 했다. 그러나 점차로 지나면서 젊고 사내다운 그가 미례에게 아주 부족한 사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나쁘지 않은 눈으로 요즘은 그를 대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아직 혼인한 부인도 없는듯 했다. 그런데 어제 그녀는 우물가에서 아낙네들이 수근대는 소리를 들었다. 이질금이 다시 사스래를 만나더라고 말하며 이제 새로 데려온 여자에게 지겹증이 난 모양이라고 했다. 유모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오늘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그로 인한 염려에 유모는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얘기를 미례에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미례 아기씨." "왜요, 유모? 피곤하지 않아요? 가서 쉬세요....유모와 함께 잘 수 있으면 좋을텐데.."


미례가 아쉬움을 담아 유모를 바라보았다. 유모의 입가에 언뜻 웃음이 돌았다. 그러나 곧 정색을 하고는 말을 꺼냈다. "아기씨, 요즘도...그 분을 꺼려..하세요?" 미례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이상한 듯 유모를 보았다. "...그럼 유모는 그 사낼 좋아한단 말야?" "저..아기씨.요즘도..잠자리에서.." "대드냐구?" 미례의 얼굴이 달아오르며 수줍게 말을 이었다. "...그러세요?" '아니....실은 유모를 데려오고 싶다고 했을때 그 사내와 약속을 했거든." "...약속요?" "음. 대들고 싸우지 않으면...유모를 데려다 주기로 했었어....요즘은 그러지 않아." "...견딜만 하세요?" 유모가 다시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미례의 작고 여린 몸에 비하면 그는 어른과 아이의 체격정도로 차이가 났고 미례의 키는 겨우 그의 어깨 정도에도 못미치고 있었기에 유모는 걱정스러웠다. "...처음만큼 아프진 않아도...아파." "...조금도...다른 느낌은 없으세요?" "아프기만 해...며칠씩 내버려 뒀다가 그런 날에는 더 그래....난 그 사내가 무서워, 유모." 유모가 걱정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왜 그래. 유모?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거야?" "아기씨...그 분에게 다른 여인이 있는 걸 아세요?" "....." 다른 여인이 있다니? 그게 무슨...미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사내들은...여인에게 바라는게 있는데요...아기씨. 아기씨처럼 차갑게 대하는 여인에게는..."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거야?" '조금만...따뜻이 대해 주시면...아기씬 그 분앞에서 웃지도 않아요." "무섭고 싫은 사람 앞에서 어떻게 웃는단 말야?" "...." "잘 됐어,유모. 아예,나한테 오지 말았으면 좋겠어. 날 그냥 내버려 두고 잊어버렸음 좋겠어." "아기씨" 미례는 유모가 나가고 나자 잠을 청하며 침상에 누웠다. 아프고 무서운 그 짓을 다른 여인에게 가서 한다고? 차라리 잘된거야. 다신 오지 말았으면 좋겠어. 미례는 길게 숨을 내쉬며 잠을 청했다. 배가 출발하기 전날 밤 경휘는 사스래에게서 떠나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불꺼진 방안에 달빛이 흘러들고 있었고 보름에 가까운 환한 빛에 침상 한쪽에 습관처럼 등돌리고 누워 잠든 미례가 보였다. 그녀의 목을 지나 가슴위로 하나로 땋은 머리채가 올려져 있었다.


그는 남김없이 옷을 벗으며 침상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향기로운 냄새가 코끝에 파고들었다. 그가 조심스레 매듭진 옷 저고리를 풀었다. 그녀가 그리웠다. 내일 떠나면 한동안 못보게 될 그녀를 밤새 끌어안고 기억하고 싶었다. 그가 앳띈 소녀같은 작은 젖가슴을 만지자 미례가 흠칫 놀라며 눈을 떴다. "흠.."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똑바로 누이려 하자 그녀가 저항을 보였다. 아직 잠에서 덜 깨었나. 그가 다시 그녀의 가슴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유두를 엄지손가락으로 쓸자 그녀가 놀라 일어나더니 그를 밀치고는 침상밖으로 내려섰다. 달아나는 그녀를 이상히 여기며 그가 따라 일어나는 사이에 미례가 뒷걸음질치며 문가로 물러섰다. 미례가 문앞에 이르자 경휘가 거센 힘으로 그녀를 벽에 밀어 붙이며 잡아챘다. "왜 이러는거야?" "...가 버려요." 미례가 그를 외면하며 고개를 돌리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뭐라구?" 그가 다시 벌어진 그녀의 가슴섶을 헤치고 몸을 누르며 양손으로 가슴을 쥐고는 민감한 부분을 쓸어 보았다. "날 만지지 말아요. 날 놔줘요." 미례가 그를 쏘아 보았다. 그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탄탄한 알몸이 미례를 도망치지 못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차가워 지더니 도전적으로 빛나며 천천히 미례의 목선을 더듬었다. 그의 입술이 목을 지나 가슴으로 내려가자 미례가 숨을 삼키며 그를 피해 얼굴을 돌렸다. 그녀의 양팔이 그를 떠밀려고 그의 어깨를 짚었으나 힘으로 그를 당할 수는 없었다. 그의 입술이 그가 점령한 한쪽 가슴을 베어물었다. 사스래의 풍만한 젖가슴과는 확실히 달랐으나 그만이 만질 수 있는 미례의 몸에 불만은 없었다. "흡.." 그가 유두를 살짝 깨물며 빨아대자 미례가 신음을 삼키며 한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그녀의 치마를 걷어 올렸고 그녀의 엉덩이를 감싸며 그녀의 몸을 들어 올렸다. 균형을 잃지않기 위해 그의 어깨를 잡은 미례는 그대로 벽에 밀어 붙여져 다리가 들어 올려지자 놀랐다. 그가 힘으로 미례를 찍어 눌렀고 그녀의 다리사이로 파고들며 가는 그녀의 다리를 그의 몸위에 감도록 했다. 털이 많이 난 그의 몸에 살이 닿자 미례는 미간을 찌푸렸다. 미례는 어느정도 체념하고 있었다. 익숙한 그의 성난 양물이 선채로 미례의 몸을 가르며 들어왔고 그는 허리힘으로 더 깊숙히 밀고 들어오며 신음을 토했다.


"하악..흡" 미례가 그의 거친 행위에 기절할듯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더이상의 어떤 저항도 그순간은 할 수 없었다. "헉" 그 역시 오랜만의 행위로 작고 여린 그녀 몸에 달아올라 탄성을 질렀다. "흐음...흐음..흐음.." 미례의 입에서 가녀린 신음이 몇번 새어 나왔다. 잘도 반응없이 누워 있기만 하던 그녀보단 차라리 아파서 물어 뜯어도 좋으니 소리라도 지르는게 낫다고 경휘는 생각하며 몸을 서서히 움직였다. 잠시 후 거의 실신하다시피 한 미례가 축쳐지며 그의 행위에 흔들리자 그녀의 엉덩이를 쥐었던 한 손으로 그는 그녀의 등을 받쳐 안았다. 땋아 늘어뜨렸던 미례의 머리칼이 거친 행위에 헝클어졌고 그녀의 얼굴이 그의 왼쪽 어깨에 힘없이 기대어졌다. 그는 행위가 여의치 않자 그녀를 받아 안으며 그대로 바닥에 미례를 눕혔다. 그사이 빠져나온 그의 양물이 성난 상태로 있었다. 다시 몸을 겹치며 그녀의 한쪽 무릎을 구부려 자신의 다리에 얽자 몸이 쉽게 개방되었으므로 그가 다시 몸을 결합하자 실신한듯 했던 미례의 몸이 움찔했다. 미례가 정신을 차렸을땐 이미 여러차례 그가 미례를 가진 다음이었다. 그가 침상으로 옮겨 이불을 덮어주었고 그처럼 미례 몸에도 실오라기 하나 붙어있지 않은 알몸이었다. 그가 한 팔로 미례를 감고는 그녀 가슴위로 손을 덮은 채 잠들어 있었다. 온몸이 욱신거리며 아파 왔다. 미례가 습관처럼 몸을 웅크리며 그의 팔 안에서 빠져나가려 몸을 움직이자 그가 깨었고 그는 다시 그녀를 바로 누이며 몸 위로 올라왔다. "흐음.." 미례는 절망하며 그가 하는대로 몸을 맡겼다. 그의 마지막 행위가 잦아든 건 새벽이 거의 밝아오면서였다. 미례는 그의 거친 행위와 얼얼하기까지 한 아랫도리의 무감각에 흐느낌을 삭히며 그의 몸을 뿌리칠 기운도 없이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이질금, 이질금. 배 떠날 시간이오. 오늘 떠나지 않을 거요?" "이질금" 경휘는 꿈결처럼 그를 부르는 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자신의 몸이 그녀의 등에 밀착되어 있었고 한쪽 다리가 그녀의 몸을 감고 있었다. "이질금, 아직 안 일어났소?" 가납사니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조심스레 들렸다. "..으음...곧 갈테니 준비하고 있어." "알겠소." 가납사니의 발소리가 멀어져 가자 경휘는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고 새 옷을 꺼내 입었다.


다시 침상으로 다가가 걸터앉은 그는 미례의 모습을 살폈다. 미례는 흐트러진 채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 털을 곤두세운 새끼 고양이처럼 대들더니 자는 모습도 비슷한 것 같군. 그는 피식 웃으며 이불 위로 드러난 하얀 살결을 만져 보았다. 드러난 살결 여기저기에 시퍼렇게 멍든 자국이 보였다. 도망가려는 미례에게 화가 났던 그였으나 어젯밤은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이불을 덮어주며 그가 충동적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만지며 주무르자 미례가 신음하며 눈을 떴다. 마주친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본 그가 낮게 소리내어 웃었다. 이미 옷을 입었고, 지금은 널 안을 생각 없어. 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더 자둬. 오늘밤은 널 괴롭히지 않을 테니. 내일도...한동안 바다로 나가 있을 테니 당분간 너 혼자 잘 수 있어. 다시 돌아왔을 때도 어젯밤처럼 모른 체하고 앙탈을 부리면 어찌 될 건지 생각해봐." "....." "필요한 게 있으면 곁시를 불러. 소솜에게 말해도 돼."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성큼성큼 걸어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미례는 일어나 앉아 이불을 걷어올려 몸을 감싸며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 "뭐야? 할말이 있어?" 그가 궁금한 표정으로 미례를 쳐다 보았다. "..밖엘..나가봐도 될까요?" "어딜 나갈 생각인데?" "...그냥..갑갑증이 나서.." "그렇게 해." "....." "흰둥이를 데리고 나가도 돼. 그 녀석도 바람을 좀 쏘이고 싶어 할거야."

그가 나가고 미례는 다시 잠에 빠졌다가 한나절이나 지난 후에야 침상에서 일어났다. 걱정스런 표정의 유모에게 물을 데워 달라고 했고 목욕물이 준비되었다는 유모의 말에 미례는 목욕실로 마련된 곳으로 갔다. 머리를 틀어 올리며 옷을 벗으려던 미례는 꽃잎을 띄워 놓은 목욕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머뭇거렸다. "유모, 나 혼자 할 수 있어. 나가봐도 되요." 유모가 못미덥다는 듯 활짝 미소를 지었다. "미례 아기씨, 새삼스레 왜 그러셔요, 갓난아기 때부터 아기씰 보아왔는데" "저...그래도.." "자, 어서 물이 식기 전에 들어가셔요." 미례는 잠시 망설였으나 할 수 없는 듯 옷을 벗어 놓으며 물 안으로 들어갔다. 미례의 몸을 보던 유모가 잠시 놀라며 숨을 삼켰다. "아니.."


고운 피부 여기저기에 시퍼렇게 혹은 거무스름하게 멍이 들어 있었다. 팔목과 가슴 주위는 더 심했다. 처음 몸을 빼앗기던 날도 이렇지는 않았었다. 미례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자

유모가 정신을 수습하며 가만히 물었다. "어찌된 일 이예요, 아기씨?" "...그러니까 나 혼자 하겠다고 그랬잖아." "아기씨" "알잖아요, 유모. 워낙 멍이 잘 드니까." "혹..아기씨께 손찌검을 한 건가요?" 유모는 미심쩍어하며 물어보았다. "아니...그렇지 않아." "허면 몸이 왜 이렇답니까?" "어젯밤은 밤새도록...날 놔두지 않았어. 나도..참을 수가 없어서 그에게 다시 대들었거든." "...아기씰 다시 찾으셨어요?" 미례는 더 이상 유모를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는 몸을 씻었다. 유두가 깨물려 쓰리고 아팠으며 그의 자국이 나 있었다. 미례는 얼른 몸을 가리며 조심스레 물을 적셔 씻어 내었다. 늦은 점심상을 물린 후에 미례는 유모에게 밖에 나가 보자고 말했다. 유모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여쭤 보셨어요? 그분이 허락하시던가요?" "....음" 소솜이 잠시 후 찾아왔고 흰둥이를 다듬으며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미례를 보고는 수줍게 웃으며 길 안내를 하겠다고 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내게 말을 하시오, 미례 아기씨. 이질금이 내게 당부하고 갔소." "...고마워요, 소솜." 미례는 그에게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미례는 소솜에게 믿음이 갔다. 아마도 이 섬 전체에서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인물은 유모와 소솜뿐일 것이다. 그녀를 해치지 않을 단 두 사람이라고도 생각되었다. 마구간 앞마당에서 흰둥이의 털을 고르는 소솜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미례가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자 흰둥이가 기분 좋은 듯 꼬리 짓을 몇 번 하더니 슬금슬금 미례에게로 다가왔다. 깜짝 놀라 일어서서 몇 걸음 뒤로 물러나려는 미례의 치마자락을 흰둥이가 물더니 잘근잘근 씹으며 다가왔다. 미례는 당황하며 흰둥이에게서 치마자락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흰둥이도 버티며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실랑이를 벌이는 와중에 흰둥이의 잇몸이 드러나며 힘주어 물고 있는 이빨도 드러났다. 그 모습이 마치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미례 아기씨가 맘에 드는가 보오." 소솜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물지 않나요?" "아기씰 해치진 않을 겝니다. 이 녀석은 사람을 가리는 편인데 아무래도 아기씬 예외인가 보오." 소솜이 휜둥이에게서 미례의 옷자락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잠시 후 흰둥이가 자신을 가지고는 다시 미례에게로 와 코를 벌름거리며 미례의 몸을 훑더니 미례의 머리카락이 닿자 재채기하듯 숨을 크게 날려 그녀의 머리카락을 불어버렸다. 미례는 흰둥이의 큰소리에 두려워하며 다시 몇 걸음 도망쳤다. 그러자 다시 흰둥이가 옆 걸음 으로 미례에게 다가왔다. 제 주인이나 마찬가지로 흰둥이도 미례에게 가까이 오는걸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겁먹고 도망치는 미례가 만만해 보이는 건지도 몰랐다. 소솜의 길 안내로 미례는 유모와 함께 마을을 지나 한적한 숲을 거닐었고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잠시 앉아 쉬며 미어지는 가슴으로 바다 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남쪽 끝 짙푸른 바다 저 너머에 나를 걱정하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텐데. 작은 뗏목 하나에 선원들을 실어 쫓아버린 경휘 일행에게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생사여부라도 전해줄 수 있을 텐데. 미례가 오래도록 그 자리를 떠나려하지 않자 소솜도 더 이상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열흘 남짓한 작은 평화기간 동안 미례는 흰둥이와 소솜과 더욱 친밀해졌고 매일같이 그 언덕으로 올라가는 것이 하루의 마지막 일과가 되었다. 가끔씩 마을 여인들의 따갑고 호기심 어린 눈들이 그녀를 훔쳐보는 것을 알았으나 미례는 애써 그들을 무시했다. 번 호 : 2 / 432 등록자 : LJH1 제 목 : 해적의 여자 16

등록일 : 98 년 07 월 31 일 19:05 이 름 : 이진현 조 회 : 728 건

배가 복주에 닿은 지 나흘이 지났다. 제각기 맡은바 대로 시장을 돌기도 하고 변화하는 판도를 알아보기도 했다. 경휘는 남궁설민과 서너 달만에 다시 얼굴을 맞대고 자주 가는 고급스런 기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복주의 상권을 쥐고 있는 남궁가는 관가와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대륙으로 이어지는 표국마저 손에 쥔 무시 못할 가문이었다. 그 표국을 운영하는 젊은 주인이며 남궁가의 재산을 물려받을 가주이기도 한 설민은 오래 전 경휘와 인연을 맺은 절친한 친구였다. "바람 앞의 등잔 마냥 다들 불안해하고 있네. 지난번 자네가 다녀간 후는 더하다네." 설민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전쟁이 곧 일 것 같은가?" 경휘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무심한 눈으로 시중드는 기녀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녀는 경휘에게 가까이 닿아 있으며 은연중에 유혹스런 눈빛을 보내며 그의 팔과 어깨를


스치고 있었다. 지난번에도 그와 밤을 보냈던 그녀는 경휘가 들어서자 속눈썹을 내리며 뺨을 붉히더니 굳이 그의 곁을 고집했다. 설민이 장난끼 어린 눈빛으로 경휘를 놀리듯 바라보았었다. "원성이 높은 것을 아니 녹을 먹는 대신들도 만류하고 있다지만 황제의 고집을 꺾기가 어디 쉬운가. 하긴 목에 가시 같은 존재이긴 하지만." "원정 준비를 하는 거야?" "그런 것 같아. 군량미를 거두어 들인지가 꽤 됐거든. 전쟁의 기미만 보여도 다들 치를 떨지. 싸우다 개죽음하느니 도망쳐 산 속에 숨어 도적질이라도 하는 게 낫다고들 한다네." 북조의 위나라와는 화친한 상태였으나 양나라는 끊임없이 국경부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중원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은 남북조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였고 틈틈이 마찰을 일으켜 왔으며 그때마다 민심은 동요되었다. 양자강 유역에 둑을 쌓고 수리시설을 돕는 공사가 잦아지면서 노역이 많아지자 안 그래도 불만이 쌓여 가는 힘없는 농민들의 원성은 컸다. 유목 민족인 선비족이 세운 위나라의 호전적인 기질에 밀려 내려온 한족들도 전쟁보다는 안정을 원했다. 위나라가 아주 미치지 않는 한 까닭 없이 아주 기울지 않는 양나라에 먼저 전쟁을 일으킬 리는 없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60 여 년 전에도 남방원정을 나섰다 참패하고 국력마저 흔들렸던 위나라는 쉬이 그 기억을 잊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민심이 흉흉해지겠군." "그건 그렇고...자네 중원 진출의 뜻은 어찌 되가나? 그 섬에 아예 눌러 살 거야?" "내 근거지인 건 확실하지. 나고 자란 곳인데.." "내 자네 중원 진출의 가교 역할을 해줄까?" "어떻게 말인가?" 경휘가 피식 웃었다. "자네도 알잖아. 한족이 아닌 이상 크게 힘을 쓰기는 어려워. 그러자면 자네 같은 기반과 힘을 필요로 하는 지방호족이나 귀족과 연계하는 거지. 혼인 말일세. 혼인할 나이가 지났는데 아직 이러고 있는 이유도 그런 야심 때문이 아닌가?" 흐훗, 경휘가 다시 웃음을 흘렸다. "아니면 조정과 손잡고 그들의 크고 작은 골치거리를 해결해 주는 방법도 있지. 황실이나 권력 있는 대신의 눈에 든다면 자네도 혹 아나? 등용되어 크게 쓰여질지.." "내가 그런걸 원하지 않는걸 알잖아. 난 매이고 싶지 않아. 이대로가 좋다구." "그래도 그게 좋은 방법인 건 사실이지, 원하는걸 얻자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후후, 내 증조부께서 그리했다가 어찌 되셨게..비수의 대전에서 공을 세웠지만 결국 그 싸움 에서 목숨을 잃으셨지. 섬의 장로들도 그후로 싸움은 질색이지. 피를 보면서 부를 가져오는 건 원치 않아.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고 내 아버지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말씀하셨네." "허, 그런데 자넨 왜 칼을 배웠나. 우리가 동문수학한 사이이니 자네의 실력이 뛰어 나다는 걸 모르지 않아. 강호의 웬만큼 이름 있는 자도 자네와는 상대가 안될 걸?" "자기 목숨쯤은 책임질 수 있어야지. 내 아버지가 원한 것도 그 뿐이야. 다른데 써먹길 원치 않으시지." "허면 방법은 한 가지 뿐이로군. 내 누이 설아와 혼인하여 남궁가의 사위가 되면 자네 입지도 탄탄할 테니.." 경휘가 어이없어 하며 웃었다. "자네 누이 말인가? 이제 겨우 열두 살 먹은 아이를 데려다 뭘 하라고?" 설민이 그를 따라 웃었다. 그는 정말 가끔 어린 누이동생이 좀 더 나이 먹었더라면 하고 바란 적이 많았다. 그는 경휘를 혈연으로 묶어 두고 싶을 만큼 그를 아꼈다. 경휘가 설아를 쾌히 받아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런 마음이나마 알아주기를 바랐으므로 그는 한번 떠보는 말을 했던 것이다. "사실은 낙양에 말일세, 그곳 유지인 사마 가문이 있네. 진나라의 왕족이었다고는 하지만 이제와선 별 이름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 나이도 자네와 비슷 할거야, 젊은 가주인 사마 혼 에게 골치덩이 누이동생이 있지. 낙양 제일 미라고는 하는데 콧대가 여간 센 게 아니야. 웬만한 귀공자들도 눈에 안 차는 모양이더군. 열 여덟이던가. 꽃다운 나이 아닌가. 다음에 낙양에 들리거든 한번 눈여겨보게." "자네 말이니 한번 생각해 보지." 빠르게 빠르게 섬으로만 달려가던 경휘는 막상 섬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다시금 혼란스러운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새벽같이 일어나 기루를 빠져 나와 포구에 이르러 일행들을 깨워 모았고 서둘러 복주를 떠나왔던 것이다. 애써 침착을 가장하며 배에서 내려서도 그는 일일이 지시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 약간의 두려움도 안으며 집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그를 기다리는 건 흰둥이 하나였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그를 기다리지야 않겠지만 그의 집엔 흰둥이 말고도 미례가


있는 것이다. 그는 생소한 설레임을 안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서둘러 침실로 들어간 그는 비어있는 방안을 살피며 실망하는 자신을 달랬다. 날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잖아. 그는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마구간의 흰둥이도 없었다. 갑갑증이 난다고 하더니 함께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유모가 물을 길어오다가 그를 보고는 놀라며 수줍게 인사를 했다. 그가 건성으로 인사를 받으며 돌아서자 유모가 미례는 아마도 바다가 보이는 남쪽 언덕에 올라갔을 거라고 말했다. 바다가 보이는 남쪽 언덕? 그는 어디인지 짐작이 갔다. 저녁을 든 그는 유모가 자리를 보아주고 나가자 아까부터 얼굴이 굳어져 있는 미례를 흘낏 보았다. 그녀가 흰둥이를 데리고 들어오면서 가늘고 웃음기 묻어난 목소리로 유모를 부르는 소리를 그도 들었다. 그를 발견한 순간 파르르 떠는 미례를 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다시금 웃지 않았다. 고개짓으로 의사표시를 하며 소리도 내지 않았다. 화도 나면서 아까부터 성을 내고 있는 자신의 양물 때문에 그 역시 굳어진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는 잘도 참고 있었다. 그러나 유모가 나가기가 무섭게 그는 미례를 집어 삼킬 듯 바라보고 있었다. 미례가 의례히 그렇듯 머리를 빗으며 하나로 땋아 내리는 동안 그는 속으로 그녀의 옷을 하나씩 벗겨내고 있었다. 그녀의 느린 손길에 그는 짜증스러워졌다. 침상에 걸터 앉아있던 그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퉁명스레 그녀를 채근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미례가 두려움을 담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리로 와. 그깟 머리 좀 있으면 헝클어질텐데 뭘 매만지는 거야?" 미례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머리를 마저 땋아 내리고는 그에게로 다가왔다. "옷가지도 별로 남아있지 않을 테니 그 옷이라도 온전히 하고 싶다면 벗어" 미례의 눈빛이 절망스럽게 흔들리더니 그에게서 돌아서서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번 호 : 9 / 432 등록자 : LJH1 제 목 : 해적의 여자 17

등록일 : 98 년 08 월 01 일 11:05 이 름 : 이진현 조 회 : 652 건

이윽고 알몸이 되자 새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미례는 애써 두 팔을 교차해 몸을 가리며 그를 지나쳐 침상 안으로 들어갔다. 가슴이 좀 커진 듯 한데? 그는 미례의 몸을 훑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약간 솟은 듯 만 듯 했던 그녀의 가슴이 정말 제법 살이 붙은 듯 보였다. 그도 급하게 옷을 벗고는 침상 안으로 들어오자 미례가 기어 들어가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불을...꺼야 잖아요." "기름이 떨어지면 저절로 꺼질 테지." 그가 피식 웃으며 아직도 수줍어하는 그녀를 보며 놀렸다. 그가 옆으로 누워 반쯤 몸을 겹치며 손으로 몸을 쓸자 미례는 시선을 피하며 눈을 감았다. 그가 작은 손으로 가리고 있는 그녀의 가슴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치우며 만져보았다. 미례가 숨을 들이쉬다 그대로 멈추며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잠깐동안 변한 듯한 미례의 몸을 더듬던 그는 다시 손을 내려 그녀의 살결을 더듬으며 허벅지를 벌리게 했다. 저항 없이 미례가 몸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손이 은밀한 곳을 만지며 충동적으로 손가락을 진입시키자 그녀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흐음.." 미례의 몸이 굳어지더니 사정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불을 꺼줘요." 어차피 수치스럽기는 마찬가지이나 그래도 어둠 속에서는 조금이나마 나을 것 같았다. 경휘는 잠시 그녀의 바램을 무시하려다 생각을 바꾸고는 침상에서 내려서서 등잔을 불어서 껐다. 어둠 속에서 침상으로 돌아와 다시 미례 곁에 몸을 누이고 손을 허리 아래로 움직이자 미례의 다리가 조금 더 벌어졌다. ............................................... ..............................................................(알죠? 자진삭제...)........ ..............그가 조금 더 부드럽게 손을 움직이자 곧 그가 원하는 대로 만족스럽게 되었다. 그는 손을 빼고는 그녀 몸 위로 올라가 처음엔 조심스럽게 그러나 나중엔 자신도 조절하지 못할 격한 움직임으로 그녀를 안았다. 낮은 신음소리가 끊임없이 그의 귀에 흘러 들어왔다. 밤새 몇 번을 더 그녀 몸을 갖고서야 그는 편안하게 잠이 들 수 있었다. 다음 날은 다시 잔치상이 차려졌고 다들 호탕하게 웃으며 하루를 먹고 마시며 지냈다. 겨울이 왔다. 사흘간의 추위가 지나고 따스한 겨울햇빛이 비추는 한나절에 미례는 유모에게 말하고는 바다가 보이는 언덕을 오르기 위해 문을 나섰다. 지난 며칠을 집안에서만 지냈던 미례는 답답한 마음을 털어 내려 애쓰며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이제는 왠만큼 익숙해진 마을이며 길들을 지나며 미례는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요 며칠 경휘는 무슨 일들을 하는지 아침나절 흰둥이를 데리고 나갔다가 들어와서도


낮이며 밤늦게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었으므로 미례는 그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었다. 마을을 빠져나가는 담 귀퉁이에 작고 앙징 맞은 한 계집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햇볕이 잘 드는 곳이긴 했으나 아이의 얼굴은 핼쓱하고 힘이 없어 보였다. 미례는 아이를 스쳐 지나다 말고 다시 돌아와 잠시 머뭇거렸다. 아이도 그녀를 올려다보더니 도로 고개를 숙이고는 땅 위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는 일에 다시 열중했다. "...왜..혼자 나와 있는 거니?" 미례가 아이의 곁에 다가앉으며 말했다. 집안에서는 유모 말고 달리 얘기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재잘대며 이야기하길 좋아하던 미례로서는 우울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처지에서 풍겨오는 외로움에 미례는 용기를 냈다. 아이가 다시 미례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마주친 아이의 맑은 눈망울이 흔들리는 것을 미례는 놓치지 않았다. "..함께 놀아줄 동무들이 없는 거니?" 아이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미례를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난 동무들 있는 데로 가면 안된 됐어요." "왜?" "...아파서..아직은 혼자 놀으라고..했어. 이제 다 나았는데" 아이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어디가 아픈데?" 아이는 손가락을 내어 보였다. 생인손을 앓는 듯 아이의 왼쪽 약지 손가락이 빨갛게 부풀고 곪아 있었다. 통통한 듯 했던 손등 여기저기에 벌레에 물린 듯한 발적이 몇 개 남아 있었다. "많이 아프겠구나." "이젠 괜찮아요, 뭐. 나도 애들이랑 놀 수 있는데.." "그래...그럼 언니하고 같이 놀까?" 아이가 환히 웃으며 미례를 따라 손을 털고는 일어났다. "어디로 갈 거예요, 언니는?" "음..저기 언덕만 넘으면 바다가 잘 보이는 곳이 있거든." "나도 알아요" "그래? 그럼 그곳에 가봤겠네?" 그러나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약간의 두려움도 묻어있는 표정이었다. "왜?" "그 위로는 새타니가 사는 곳이라 거기는 귀신이 나온다고 다들 안가요." '새타니? 그게 누군데?" 미례가 앞서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아이가 망설이면서도 그녀의 뒤를 조금씩 따라왔다. "하늘 눈 새타니요, 새타니를 몰라요?" 아이가 희한하다는 듯 미례를 올려다보았다. 아이가 아는 모든 어른이나 아이들은 모두들


새타니를 두려워했다. "...음." "언니는..? 귀신을 부리는 새타니는 무섭게 생겼대요." "그래?" 미례는 아이의 말에 미소로 대답했다. "거기는 가지 말아요. 귀신이 잡아갈지도 몰라." 아이가 뒤에서 미례의 치마자락을 붙잡으며 잔걸음으로 그녀를 말렸다. "음, 난 매일매일 그곳엘 올라갔지만 귀신은 한번도 본적이 없는 걸?" 미례가 자신있게 웃으며 말하자 아이의 눈이 커졌다. "정말 요?" "응, 정말. 소솜도 귀신이 나온다는 말은 한 적이 없었어." "소솜 아저씨..가요?" "응" 아이는 차츰 미례의 치마자락을 놓으며 따라 걸었다. "네 이름이 무어니?" 미례가 옆에서 따라 걷는 아이를 보며 물었다. "반하." "반아?" "아니, 반하요, 반하." "그래, 반하...몇 살인데?" "일곱 살요." 아이는 그보다 훨씬 작고 어려 보였다. 그러나 영리해 보이는 눈이며 생김새를 다시 보니 그 정도는 되어 보이기도 했다. "언니는 이름이 뭐예요?" "미례." "미래?" "아니, 미례." '음, 미래, 미래 언니." 아이의 발음은 정확치 않았으나 미례는 굳이 더 이상 되풀이해 말하지 않았다. 반하의 손을 잡고 언덕에 올라선 미례는 아이의 눈을 통해 주위를 바라보며 또다른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좀 흐르자 반하가 가끔씩 오들오들 떠는 것을 본 미례는 집에서 나올 때 유모가 둘러준 목도리를 풀어 반하에게 매어 주었다. 옷도 시원치 않게 입은 아이가 걱정스러웠다. 반하가 미례를 향해 멋적게 씨익 웃었다. 내려가는 길에 미례는 반하가 안스러워 등에 업었다. 아이가 미례의 목에 작은 팔을 두르며 업혀 들었고 등에 얼굴을 기댔다. 반하는 정말 가벼웠다. 병을 앓고 나서 더한 것 같았다. "반하야." 미례가 걱정스러워 길을 내려가며 물었다.


"응?" "잠들면 안된다? 언닌 반하네 집을 모르거든." 아이가 키득키득 웃으며 미례의 등으로 떨림을 전했다. 그들은 처음 만났던 그 담벼락 근처에서 헤어졌고 다시 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사흘이 지났다. 그날도 언덕으로 올랐던 미례는 싸늘한 바람과 함께 어둑어둑 해지는 하늘과 한 두 방울 떨어지는 빗물을 피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었다. 날이 많이 춥다고 느끼며 미례는 침상 한 켠 모퉁이에 웅크리고 누웠다. 밤늦게 돌아온 경휘는 멀찍이도 떨어져 잠이 든 미례를 한 번 보고는 실소를 지으며 자리에 누웠다. 가끔씩 미례가 몸을 떠는 게 느껴졌으나 경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새벽녘 미례가 가끔씩 고향을 그리며 훌쩍거리며 우는 모습을 보았었다. 또 병이 도졌군. 그는 이제 화도 나지 않았다. 저러다 제풀에 지치면 그러다 잠이 들 테고 시간이 흐르면 저러다 말겠지. 가끔씩 앓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으나 그는 흐느낌 인줄 알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잠결에 그녀에게로 손을 뻗은 경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녀의 옷이 축축해질 정도로 땀이 배어 있었고 몸이 아주 뜨거웠다. 그녀의 이마로 손을 얹은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이봐, 어디가 아픈 거야?" 간간히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고 그의 말에 낮은 흐느낌처럼 소리가 변했다. 정말 몸이 불덩어리처럼 끓고 있었다. 바보 같은 계집, 아프면 아프다고 말이라도 할 것이지 미련스럽게 혼자 앓다니.... 그는 미례를 바로 누이며 떨고있는 미례 위로 이불을 눌러 덮어 주었다. 아직도 이마며 온몸이 뜨거웠고 파리해진 입술과 이가 부딪치며 떨고 있었다.

번 호 : 12 / 432 등록자 : LJH1 제 목 : 해적의 여자 18

등록일 : 98 년 08 월 02 일 19:1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569 건

바보 같은 계집, 아프면 아프다고 말이라도 할 것이지 미련스럽게 혼자 앓다니.... 그는 미례를 바로 누이며 떨고있는 미례 위로 이불을 눌러 덮어 주었다. 아직도 이마며 온몸이 뜨거웠고 파리해진 입술과 이가 부딪치며 떨고 있었다. 그는 일어나 침상에서 내려서서 겉옷을 주워 입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 잠자리에 든 유모를 불러 깨웠다. 유모가 옷을 걸쳐 입으며 그에게로 왔고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퉁명스레 말했다. "미례를 가서 봐줘. 어디가 아픈 건지 온몸이 불덩이 같아." "예? 미례 아기씨가요? 저녁나절까지도 괜찮으셨는데..." 유모는 놀라며 그의 방으로 들어가 의식마저 흐릿하며 열에 들뜬 미례를 깨우며 품에


안았다. "미례 아기씨, 미례 아기씨? 어디가 아프신 겁니까? 미례 아기씨, 아프면 아프다 말씀을 하셔야지요? 미례 아기씨" 미례가 유모의 부름에 힘겹게 눈을 뜨며 유모를 확인하고는 낮게 흐느꼈다. "바보 계집 같으니..괜찮겠나?" 경휘가 따라 들어와 유모에게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열이 심하셔서 몸을 좀 식혀야겠습니다. 괜찮으셔야 할텐데...이리 심하게 앓으신 적이 없으셨어요. 옷이 다 젖었으니 옷을 좀 갈아 입혀 드려야 할 것 같고 찬 물수건을 좀 대드려야겠습니다." 유모가 조심스레 미례의 옷을 꺼내어 갈아 입히고는 밖으로 나가 찬물을 떠다 수건에 적셔 달아있는 미례의 몸을 닦아주었다. 찬 기운이 닿자 미례는 몸을 움츠리며 신음소리를 내었다. "..으음...으음..." 경휘는 그들 곁에서 서성거리며 불안스럽게 유모를 쳐다보았다. "의원을 불러야 할 것 같지 않나?" "..그러면야 좋지요마는 너무 늦은 밤이라..." "무슨 상관이야" 경휘가 다시 성큼 밖으로 나가 곁시를 불러 깨웠으며 새타니를 불러오도록 시켰다. "예? 새타니 요?" 잠결에 불려나온 그녀는 눈을 비비며 의아하게 물었다. "그래, 새타니. 말귀를 못 알아들은 거야? 가서 당장 새타니를 불러와." 경휘가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곁시의 표정이 질리며 울먹이는 얼굴로 경휘를 올려다보았다. "이..이질금, 밤이 깊었습니다. 전..전...그 길은 무서워서...제발..요..전 못 갑니다, 이질금." 경휘는 그녀의 두려움을 아는지라 더 이상 쏘아보는걸 그만두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다시 말했다. "그러면 의무려를 부르러는 갈 수 있는 거야?" "..예?..의무려요?" "그래, 의무려 말이다. 새타니를 부르러 가든지 의무려를 불러오든지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어서 냉큼 다녀오너라." "예..예..그러면...의무려를 불러오지요...뭐라 하면 되겠습니까, 이질금?" "미례가 아프다고 해. 온몸이 불덩이같이 뜨겁고 의식도 가물가물하다고, 어서 다녀와." "예, 이질금" 의무려는 만주인으로 어찌어찌해 중원을 떠돌다가 경휘의 도움으로 살아나고는 그를 따라와 이 섬에서 살고 있었다. 그가 머물기 전에는 집안의 사람이 아프거나 궂은 일이 생기면 새타니를 찾아가던 마을 사람들이


그가 어깨너머로 의원수업을 받았던 것을 알고는 침이나 간단한 처방을 원하는 경우에는 점차로 그를 찾아가곤 했다. 느물거릴 것 같은 생김새와는 달리 그는 순진한 면이 있는 사내였다. 크다는 뜻의 만주어인 의무려는 그의 부모가 그의 고향에 있는 의무려 산을 닮으라는 의미로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아예 의원을 본업으로 삼고자 중원으로 가끔씩 나가 경휘의 휘하에 있는 화평도방에 묵으며 이름난 의원 밑에서 제자로 지내곤 했다. 그것 또한 경휘의 배려였다. 새벽이 지나면서 미례는 더욱 심해졌고 유모는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미례의 몸을 연신 닦아주고 두 번이나 더 마른 옷으로 갈아 입혔다. 곁시를 따라 허겁지겁 달려온 의무려는 미례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켜보다가 약을 지어 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유모가 하던 대로 계속하도록 당부했다. "방을 좀 덥혀 주시오. 그저...스치는 몸살 정도라면 다행인데..." "왜 그런 것 같은가?" 경휘가 그를 채근하며 물었다. "아직은..그저 몸살 같은데 좀 지켜봐야겠소, 이질금." "오늘도 미례가 밖으로 나갔다 왔나?" 경휘가 유모를 쳐다보며 못마땅한 어조로 물었다. 유모는 그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플만도 하지. 찬바람이 부는데다 비도 오는 날에 그 언덕엘 왜 올라가는 거야? 죽고 싶다든 가?" "...비가 쏟아지기 전에 들어 오셨습니다..." 유모가 미례의 이마에 물수건을 다시 올려놓으며 작은 소리로 변명했다. "다시 또 올라가기만 해봐, 아예 집안에 묶어두고 꼼짝 못하게 해버릴 테다. 이게 무슨 짓이야? 제 몸 아프고 여러 사람 신경 쓰이게 만들고.." 그의 성질을 아는 의무려도 유모도 아무 말도 못하고 미례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잠시 후 혼자서 화를 삭힌 경휘가 의무려를 보며 말했다. "집으로 가지 말고 여기서 자고 아침에 다시 봐주게." "예, 그리 하지요." 경휘의 당부에 유모도 안심하는 눈치였다. 아침이 되자 미례의 목이 가라앉더니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그리고 한나절이 되면서는 걱정 스럽게도 온몸에 열꽃이 피기 시작했다. 미례의 숨소리도 상당히 빠르고 거칠어졌다. 의무려는 유모에게 미례가 어려서 홍역이나 마마를 앓은 적이 있는지 물었다. 유모의 눈이 걱정스럽게 변하며 고개를 저었다. "열이 심상치 않더니...큰일이구려, 홍역을 앓는 것 같소." "..홍역이라구요?" 유모가 놀라며 미례의 온몸에 돋아난 빨간 열꽃들을 바라보았다.


"어려서 앓는 경우가 많은데...다 자라서는 좀체로 드문 일이오." 경휘는 이틀 밤을 유모에게 미례를 맡기고 다른 방에서 잠을 잤다. 아침나절이면 미례의 상태를 보러 잠깐씩 들어왔으나 별 차도는 없어 보였고 열꽃만 더 심해졌으며 쉰 듯한 기침소리도 여전히 들렸다. 아직도 땀으로 온몸이 젖어들곤 했다. "찬바람을 쏘이지 않게 조심하오" 의무려는 유모에게 당부하고는 그날 저녁 무렵 돌아갔다. 그리고 매일매일 미례의 상태를 보러 왔다. 다른 방에서 혼자 잠을 청하던 경휘는 사흘째가 되자 새벽녘 일어나 앉았다.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크다고 했던가. 여자를 들인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제 그의 한쪽자리가 허전해 잠이 오지 않았다. 멀찍이도 물러서 잠을 자던 그녀의 자리가 허전하게 느껴졌다. 그는 은연중에 차지한 그녀의 자리가 싫어 내색하지 않았으나 드디어는 인정하고 말았다. 그는 사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래서 한번 여인을 알아버리면 이후로는 혼자 잠들기 힘들다고 한 건가. 홀아비 된 옥장이가 어느 날 그렇게 말했었다. 낮에는 그래도 견딜 만 하오. 아주 몹쓸 빈자리가 밤만 되면 보이는 게요, 긴긴 겨울밤은 더 하더이다. 씁쓸히 웃어넘기던 그의 말이 오늘따라 이해되는 듯 하다고 경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간간히 이어지는 미례의 기침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유모가 밤새 지친 얼굴로 미례 곁을 지키고 있었다. 어려서 앓는 홍역으로 죽는 아이도 있으나 자라서는 좀체로 걸리지 않는다며 미례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의무려는 고개를 갸웃했었다. 찬바람을 쏘여 몸살에 폐장까지 병이 뻗친 것 같다며 잘 넘겨봐야 할 것 같다고도 말했었다. 가끔씩 열꽃 핀 얼굴로 손을 올리는 미례의 움직임에 유모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지했다. "...이질금, 안 주무셨습니까?" 유모가 이른 새벽 들어서는 그를 보고 놀라며 물었다. "좀 어떤가?" "아직은 별 차도가 없으십니다." 낮에는 잠깐 곁시에게 맡기고 밤을 꼬박 새며 지키던 유모의 얼굴은 많이 지쳐 있었다. "가서 좀 쉬게, 미례는 내가 돌볼 테니" "아..아닙니다. 이질금." "아니긴, 몇 날 며칠을 더 새야할지 모르는데 자네마저 앓아 누우면 어찌 하라고..어떻게 하면 되는지 내게 말해주고 가서 좀 쉬라고. 어차피 잠도 오지 않는군." "...허면.." 유모는 마지못해 그에게 자리를 내어 주며 땀이 젖은 옷을 갈아 입혀주고 손으로


열꽃을 긁거나 만지려고 하면 손티 날지 모르니 절대로 못하게 해야한다고 당부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건너갔다. 그는 미례 곁에서 땀을 닦아주기도 하고 열꽃 핀 몸으로 올라가는 미례의 손을 제지하며 그렇게 아침을 맞았다. 미례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가끔씩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이곤 했다. 다음날 새벽에도 그는 미례 곁에 있었다. 아침 일찍 방으로 들어서던 유모는 천으로 감아 놓은 미례의 손을 보고는 놀라며 경휘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유모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대로 내버려두게. 온몸이 가려운지 자꾸 손을 가만두지 않는데 그러다 정말 손티라도 생겨보게. 별로 보기 좋은 꼴은 아닐 거야. 손톱으로 긁지 못할 테니 자네도 덜 신경 쓰일 테고." 유모가 소리 죽여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번 호 : 21 / 432 등록일 : 98 년 08 월 04 일 19:16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545 건 제 목 : [진현] 해적의 여자 19

"그대로 내버려두게. 온몸이 가려운지 자꾸 손을 가만두지 않는데 그러다 정말 손티라도 생겨보게. 별로 보기 좋은 꼴은 아닐 거야. 손톱으로 긁지 못할 테니 자네도 덜 신경 쓰일 거야." 유모가 소리 죽여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앓아 누운지 5 일째 되던 오후부터 차츰 호전되던 미례는 저녁 무렵엔 열도 떨어지고 숨결도 많이 안정되었다. 정신도 들어 미음을 받아먹고 편안히 잠이 든 미례를 한 번 보고는 경휘도 피로가 몰려옴을 느끼며 자러 가기 위해 방을 나섰다.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젠 그도 마음이 안정되어 편히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틀 후에는 열꽃도 많이 가라앉았고 기침소리도 가라앉은 쉰 듯한 소리는 아니었다. 다음날 정오에 미례는 두텁게 옷을 입혀준 유모와 함께 안뜰에 앉아 햇살을 받고 있었다. 흰둥이를 보고 가던 소솜이 미례를 보고는 가까이 왔다. "며칠 앓으셨다 하더니 얼굴이 많이 상하셨소." "...많이 좋아졌어요, 소솜."


미례가 미소를 머금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걱정했는데...그래도 이만 하시길 다행이오." 소솜은 미례의 병치레 소식을 듣고는 마음이 불안했었다. 죽은 여동생 아로의 생각이 다시금 퍼뜩 났었다. "고마워요, 소솜. 걱정해줘서.." "나뿐 아니라 반하도 걱정하더이다." "....만났어요? 건강해 보이던가요?" 미례가 반색을 하며 물었다. "좋아져서 이젠 아이들과 뛰어 놀고 있소." "다행이예요." "이질금이 알면 가만있지 않을 테니...반하 얘긴 하지 마시오, 미례 아기씨." ".....?" 미례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홍역을 앓으신단 말 듣고 언덕을 오르시던걸 못마땅해 하셨는데 반하를 만났었단 얘길 들으면 역정을 내실 게요." "...왜요?" "모르셨소? 반하가 얼마 전 홍역을 앓고 난 뒤였소. 반하 때문인 줄 아시는 날엔 아마도 불같이 화를 낼 겁니다." 경휘는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안뜰에 나와 햇빛을 쪼이고 있는 미례를 창을 통해 힐끗 바라보았다. 아직 걸음을 오래 걸으면 금새 피곤해져서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눈치를 살피며 내심 원하고 있는걸 그도 알고 있었다. 그는 소솜과 나지막히 말하며 미소까지 짓는 미례를 보며 약이 올랐다. 자신에겐 한번도 그런 미소를 지은 적이 없는 그녀였다. 하긴 어디 미소뿐인가, 그와는 눈도 안 마주치고 짧은 대꾸도 잘 하지 않았다. 아플 때 제 곁에 있던 게 누구였는데... 경휘는 창가 주위에서 서성이며 화를 삭혔다. 그러나 그녀만 미워할 수도 없는 노릇임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는 무슨 싸움이나 하듯이 말도 없이 몸을 탐하기만 했었다. 요즘에 와서야 그녀의 저항도 완전히 사라졌지만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행위를 나누는 그들 사이엔 다른 말 같은 건 몇 마디 오가지도 않았다. 미례는 그의 탓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경휘는 미례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차갑기 그지없는 여인, 무슨 말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그녀였다. 무슨 말을 한들 제대로 받아주기나 할까. 당신은 도적 이예요. 당신을 다시 보지 않을 수 있다면 노예로 팔려 가는 편이 나아요.. 어리지만 제법 앙칼지게 대들던 두려움 없는 눈빛과 의지 어린 목소리. 빌어먹을, 못된 계집. 경휘는 괜시리 더 화를 내다가 생각을 달리했다. 새타니가 그랬었다


"달래 보구려." 달래 본다구? 잘못했다 비는 것은 이제와 죽어도 할 수 없지만 조금은 부드럽게 달래보는 것쯤은 양보할 수 있잖을까. 그의 가슴 한 켠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제 밤 열에 들떠 흐느껴 울던 그녀가 안스러워 품에 안고 달래며 몸을 부드럽게 흔들어 주자 미례가 다정히 웃으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었다. "보고 싶었어요, 오라버니." 그녀의 천으로 싸맨 손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지며 눈물 맺힌 눈으로 한없이 다정하게 그를 바라보았었다. 다음 날도 그는 안뜰 햇볕 잘 드는 곳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는 미례를 스쳐 지나다가 용기를 내어 손을 내밀었다. 의아해 하는 미례에게 그는 언덕을 오르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고 미례는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흰둥이 위에 미례를 함께 태우고 언덕을 오르며 바람을 쏘였고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어색한 중에도 미례가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틀을 더 미례와 함께 언덕을 올랐다가 오래지 않아 데리고 내려왔다.

번 호 : 28 / 432 등록일 : 98 년 08 월 06 일 01:40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576 건 제 목 : [진현] 해적의 여자 20

어느 날 유모와 함께 안뜰을 거닐던 미례는 생각난 듯 배시시 웃으며 유모에게 말했다. "유모, 유모. 나 앓아 누웠을 때 말야." "앓아 누우셨을 때 뭐요? 아기씨, 그때 일은 듣고 싶지도 않습니다.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아셔요? 아씨께서 밖으로 나가면 넘어질까 혹 고뿔이라도 걸릴까 얼마나 귀하게 기르셨는데 홍역이 다 뭡니까? 아마도 아씨께서 이 일을 아셨더라면 많이도 맘 상해 하셨을 거예요. 낯선 이곳에서 아기씰 영영 잃어버리는 줄 알았답니다." "......." 미례는 유모의 말에 겸연쩍어 하면서도 어머니를 떠올리자 한없는 그리움이 밀려왔다.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인 눈으로 미례는 하늘을 쳐다보다가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유모, 나 그때 꿈결 중에 미루 오라버니를 만났어요. 오라버닌 내가 마지막 보았을 때보다 더 자라신 것 같았어. 내게 다정히 웃으면서 다시 보게 되서 좋다고 하셨어. 오라버니를 부르면서 손을 내미니까 오라버니가 날 안아 주었어. 다시 만날 줄 알았다고, 다시는 어디로도 보내지 않을 거라고 오라버니가 날 다독거려 주었어. 한없이 울다가 오라버니가 그리워 얼굴을 더듬어 만졌는데 꿈결 같지가 않았어. 마치 생시인 것처럼 오라버닐 만질 수 있었어. 살아 있으면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그런 날이 있을 거라고 오라버니가 말했어..." 눈시울이 뜨거워져 다시 넘쳐나는 눈물을 지우며 애써 웃음기를 띄려는 미례를 보고 함께 고국을 생각하며 눈물짓던 유모가 잠시 후 말했다. "아기씨는 열이 심하셨어요...이질금께서 밤마다 침상을 지키셨는데 혼몽 중에 이질금을 미루 오라버니로 잘못 보신 거 아니셔요?" 미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유모도 참...어떻게 미루 오라버니를...그 사내와 착각할 수 있어? 달라도 그리 다를 수가 없는데..." 그랬다. 두 살 어린 미례의 투정을 다 받아주고 놀아주던 한없이 다정한 미루 오라버니와 무섭고 무뚝뚝한 그를 어떻게 비교나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아기씨...아기씨 아프셨을 때는 참으로 잘 하시던 걸요. 늦은 밤이었는데도 의원을 부르러 사람을 보내고 제가 낮을 지키고 그 분께서 밤을 지키시면서도 싫은 내색 아니 하셨어요." "......" "땀으로 흠뻑 젖은 아기씨가 혹여 더 안 좋아지실까 자주 마른 옷으로 갈아 입히시고 열꽃 때문에 흉이라도 생길까 얼마나 조심하셨게요." "...그만해요, 유모. 그 사람 얘긴 듣고 싶지 않아." "..아기씨 자리에서 일어나신 후에도 잠자리가 불편하실까 봐 따로 주무시고 있는 걸요. 아직도 그리..미워하십니까?" "..병이라도 옮을까 두려운 걸꺼야." 미례가 유모를 피하며 토라진 채로 말했다. 그는 정말 미례가 자리에서 일어나고도 이레나 지나도록 따로 자고 있었다. 다정스러운 데라곤 찾아보기 힘든 그를 미루 오라버니와 혼동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미례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열꽃이라도 몸에 더 남아 있었더라면 좋았을 걸.


미례는 심술궂게 생각했다. 그랬더라면 그는 다시는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을 런지도 모를 일이다. 겨울동안 마을사람들은 가까이 고기잡이를 나가기도 하고 나무를 다듬어 배를 수리하기도 하며 한가하게 보냈다. 눈발이 제법 내린 어느 날은 낯선 배 한 척이 포구로 들어 왔고 마을 사람의 안내를 받아 경휘를 찾아왔다. 낯선 손님을 맞는 경휘의 표정은 환하고 밝았다. 설민이었다. "겨우내 꼼짝도 안 하니 어쩌나. 보고 싶은 내가 달려왔지." 귀족처럼 보이는 깔끔한 비단옷을 입은 그가 경휘를 대하며 반갑게 웃었고 경휘 역시 반가이 맞으며 귀한 손님대접을 했다. 설민은 곁시가 차를 내오고 나서 단둘이 있게 되자 본심을 드러내며 짖궂게 말했다. "자, 말해보게, 경휘. 어서 내게 털어놔 봐." 설민이 은근한 어조로 그를 떠보며 창 밖으로 안뜰을 둘러보았다. "음? 뭘 말인가?" "정말 이리 시침 뗄 텐가? 응?" "무슨 소리야? 통 알 수가 없군." 계속되는 그의 은근한 어조와 장난끼 어린 그의 눈빛에 경휘는 영문을 몰라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모른다고? 도대체 얼마나 빼어난 미인이기에 내게도 숨기는 거야? 내가 훔쳐 달아나기라도 한다 든가? 응? 정말 보여주지 않을 건가?" "무슨 소릴 듣고 온 거야?" 경휘가 그가 말하는 뜻을 알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발뺌할 생각 말게. 그날 새벽 달아있는 여희도 팽개치고 달려오게 만든 그 여인을 보고 싶네. 정말 내게 안보여 줄 생각은 아니겠지?" "그런 여인이 있다고 누가 그러던가?" "흥! 콧대높은 여희도 싫다하고 섬으로 달려올 땐 알아볼 일이지, 누굴 속이려고?" 설민은 계속 경휘에게 감춰놓은 여인을 내놓으라고 채근했고 경휘는 마지못해 기대할 만큼의 미인이 아니라고 털어놓으며 미례를 보여주길 꺼려했다. 며칠 묵는 동안 호기심에 찬 설민은 우연히 안뜰을 지나는 미례를 보고는 다시 경휘를 졸랐다. "멀리서 한번 뒷모습을 봤을 뿐이지만 미인일 것 같더군. 작고 아담하니 발도 작을 것 같아." 경휘는 다시 씁쓸하게 웃어넘겼다. "미례는 중원여인이 아니고 전족도 아니네." 하긴 그녀의 발은 작고 예뻤으나 중원 여인들처럼 터무니없이 조여 매어 만든 전족은 아니었다. 설민의 채근에 경휘는 결국 그를 보내는 저녁 송별연에서 미례를 한번 보여주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아침나절 바다 언덕을 오르고 내려오는 미례와 안뜰을 거닐던 그들은 마주쳤다. 호기심 어린 눈짓을 하며 미례를 살피며 설민이 인사를 건네자 미례는 외면하며 고개를 숙이고는 그들을 피해 지나갔다. 빠르게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미례의 뒷모습을 보며 설민이 믿기지 않는 듯 그에게 말을 건넸다. "뭐야, 정말 어린애나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 설아 보다 더 어린것 같군. 도대체 나이가 몇인가? 자네가 저렇게 어린 여인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군. 우리 설아를 꺼리는 건 남궁가문과 인연을 맺고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 아닌가?" 설민은 정말 놀라워하며 그를 놀렸다. 울그락 불그락 하던 경휘는 설민과 헤어져 부엌 일을 돕고 있는 미례를 찾아내 팔을 우악스럽게 나꿔채고는 침실로 끌고 들어왔다. 뒤에서 유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말릴 수도 없었다. "이 못된 계집, 그놈의 머릴 땋지 말라고 그리 말했잖아. 내 친구 앞에서 날 망신 주려 작정한 거야? 다시는 그리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내게 대들려는 거야? 좋아. 다시는 그놈의 머릴 땋지 못하게 머리채를 끊어버릴 테다." 한동안 그녀에게 화를 내지 않으려던 그는 그 동안 못마땅한 그녀의 태도며, 언덕을 다시 오르는 일까지 참아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설민에게 놀림을 받고 나자 그는 다시 화가 치밀어 두 갈래로 땋아 정말 어리게만 보이는 그녀를 침상가로 밀어 버리고는 머리채를 잘라버릴 생각으로 칼을 찾아 들었다. 미례는 갑작스럽게 화를 터트리는 그가 두려워 침상 가에 엎드렸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모르는 미례는 그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앓아 누웠던 그녀가 회복된 후로 그는 아직도 거리를 두며 이렇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그가 지금처럼 두 갈래로 땋은 머리를 싫어하는 것은 미례도 알고 있었다. 이전에도 몇 번 그녀의 땋은 머리를 보았던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마디 던졌었다. 그러나 화를 내는 목소리는 아니었고 그저 뭔가 못마땅한 듯한 말투였다. 양쪽으로 찰랑대는 느낌이 좋고 헝클어지지도 않아 미례는 두 갈래로 땋아 늘어뜨리는 것을 좋아했으나 그의 눈치를 보며 아주 가끔씩만 그렇게 할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끝이리라.


그가 그녀의 머리채를 끊어버리겠다고 마음먹었으면 누구도 말리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아무리 사정한대도 그는 원하는 대로 하고 말 것임을 알기에 미례는 그의 처분만 바라며 그대로 있었다. 그가 단도를 들고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지나 침상에 가지런히 놓인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채를 손에 들며 칼날부분에 가까이 대었다. 그는 아직도 화가 나서 씩씩대며 숨이 고르지 못했다. 당장에 머리채를 끊어버릴 작정으로 들어왔던 그는 엎드린 채로 미동도 않는 미례의 작고 여린 등을 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미례는 그를 피해 얼굴을 벽 쪽으로 돌렸다. 그녀는 이미 체념한듯 했다. 여인들이 머리칼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기녀들을 통해서도 그는 보았다. 미례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게다가 그는 미례의 머리칼이 부드럽게 그의 몸에 닿는 게 싫지 않았다. 그의 맨살을 간지르는 머리칼의 감촉도, 은은히 풍겨오는 향내도 그는 정말 싫지 않았다. 그녀의 목숨만큼 소중한 머리채를 끊어버리고 나면 그 머리가 다 자라도록 그는 가슴이 쓰릴 것이다. 순간의 화만 참으면 그는 그 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진 않으리라고 자신에게 되뇌이며 그녀의 머리채를 놓고는 침상에서 물러났다. 하긴 또다시 틀어져 버린 건가. 그 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번 일로 다시 그녀를 겁먹게 해버린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자 그는 자신에게 화가 나며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변했다. 그는 말없이 벽을 한동안 쏘아보다 고개를 돌려 미례의 모습을 훑어보고는 한마디 던지며 그대로 방을 나섰다. "다시 내 말을 어기는 날에는 정말로 머리채를 끊어버릴 테니 그리 알아." 미례는 떨리는 손으로 잠시 후 머리카락을 풀어 빗어 가는 목의 선이 드러나도록 틀어 올렸다. 미례가 밖으로 나가자 유모가 걱정스럽게 미례를 훑어보았다. 번 호 : 37 / 432 등록일 : 98 년 08 월 08 일 18:13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500 건 제 목 : [진현] 해적의 여자 21

저녁 무렵의 송별연에서 그의 곁에 앉아서도 미례는 표정의 변화 없이 그대로 있었다. 설민의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숙이던 미례는 어느 순간부터 설민을 몰래 훔쳐보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미례의 그런 시선은 경휘에게 들켜버렸다. 경휘는 술을 권하며 잠시 낯선 시선으로 설민을 바라보았다. 귀공자처럼 잘생긴 얼굴이며 체격도 좋은 편이었다. 경휘의 사내다운 느낌과는 달리


그에게는 편안한 느낌이 있었다. 항상 감도는 부드럽고 장난끼 어린 미소때문이기도 했다. 친절하고 여인에게 한없이 다정다감하며 화내는 법이 없어 기루의 여인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한참 후 다시금 설민을 바라보는 미례의 시선을 느낀 경휘는 애써 모른 채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미례가 사내에게 한 눈에 반하는 여인은 아니라고 경휘는 생각했다. 사스래였더라면 유혹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미례는 그렇지 않았다. 아직도 밤의 행위에서 격하게 안을 때마다 아픈 신음소리를 내는 그녀는 아직도 마지못해 그를 받아들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도적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아니고 귀공자인 설민이라면 그녀의 태도가 조금은 달라질까. 상상력이 그의 머리 속을 온통 차지하고 있었다. 다시금 설민을 훔쳐보다 경휘와 눈이 마주친 미례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했다. 경휘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어버렸다. 내 계집이 다른 사내에게 눈짓을 하는 건가. 거나하게 취해 가는 설민과는 달리 경휘는 점점 더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이후로도 한 두 번 경휘는 다른 사람을 보는 척 하며 미례를 살폈고 그녀답지 않게 경솔히 그녀는 이따금 경휘의 눈치를 살피며 설민을 훔쳐보곤 했다. 술자리가 파하고 설민의 잠자리를 봐주고 방안으로 돌아오면서 경휘는 다시금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오자 미례는 이미 자리옷으로 입은 채 침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침나절의 일로 아직도 그가 두려운 미례는 조심스럽게 옷을 여미며 침상 가에 걸터앉아 그의 눈치를 살폈다. 미례의 얼굴을 보자 그는 더욱 부아가 치밀어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던졌다. "다른 사내를 원해?" 미례는 생각지도 못한 그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불안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설민이 혼인하려던 그 왕족과 닮은 구석이 있던가?" 미례는 설민을 바라보던 자신의 시선을 그가 오해했음을 알았다. 미례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내일 떠나는 설민에게 널 선물로 줄 수도 있는데, 어때? 솔직히 말해 봐. 하긴 그 녀석 여인에겐 한없이 다정하니 일생동안 편안할 수 있겠지." 그의 말에 미례가 두 팔을 교차해 몸을 추스려 안으며 그를 향한 맑고 큰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 "늦기 전에 생각해 봐. 네가 좋다면 널 그에게 보내 줄테니."


미례가 그렁그렁하니 눈물이 고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를 피하고 싶고 마지못해 체념해 가는 미례였으나 또다시 그 아닌 다른 사내에게 몸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미례는 두려웠다. 호소어린 눈으로 미례는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분노에 찬 숨결조차 미례를 두렵게 하기엔 충분했다. 저 사낸 화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다시 낯선 곳으로 팔려가 몸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아.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릴 테야. 그 역시 한동안 미례를 쏘아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약간은 누그러진 말투였다. "그럼 말해 봐, 왜 설민을 그렇게 훔쳐 본 거야? 사내에게 혹한 계집처럼 왜 그렇게 몰래 훔쳐봤던 거야?" 미례가 그의 말에 모욕감을 느끼며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미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다시 화를 내며 언성을 높였다. 술자리에서 느꼈던 분노가 다시 타오르고 있었다. "말하지 못해? 이제 사내를 알 것 같으니 설민에게 안겨보고 싶었던 게 아니라면 왜 나 몰래 그 녀석을 훔쳐봤던 거야? 말을 하라고, 젠장. 네가 그리 원하면 오늘밤이라도 당장 설민에게 보내 줄 테니 어서 말을 해봐." "...그를 본 게 아녜요." 미례가 조그맣고 울먹이는 소리로 마지못해 그에게 해명했다. "그를 본 게 아니면? 그럼 뭘 봤다는 거야?" "......" "날 눈먼 바보 취급할 생각이야? 그를 본 게 아냐? 그럼 대체 뭘 봤다는 거야? 잘도 나 몰래 그 녀석을 훔쳐보는 널 내 눈으로 봤는데도 아니라고 말하면 대체 뭘 본 거냐구?" "...쌍어문 문양 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미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라구?" 그가 숨을 고르며 그녀의 말을 못 알아듣고는 되물었다. "...그의 목에 걸린 쌍어문 문양의 옥돌을 봤어요...내 고향을 가리키는 문양이예요." 그는 전혀 의외의 말에 잠시 말을 잊었다. 미례가 내친김 인 듯 조그만 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그가 어떻게 그것을 지니고 있는지..궁금했어요." 미례는 넘쳐나는 눈물을 옷자락으로 훔치며 그의 시선을 피하며 침상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침상 한쪽 구석에 등돌리고 누우며 훌쩍거리는 미례를 바라보았다. 제길, 오늘은 되는 일이 없군. 아침나절부터 그는 미례의 가슴을 꽁꽁 닫아거는 일만 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다시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답답해져오는 가슴을 풀기 위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번 호 : 44 / 432 등록일 : 98 년 08 월 10 일 01:27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499 건 제 목 : [진현] 해적의 여자 22

미례가 이곳에 끌려온 지 반년도 훨씬 지났다. 정확히 헤아려 보니 여덟 달이 지나고 있었다. 봄 햇살이 제법 따뜻한 날이 계속 되었다. 마을 사내들이 배를 타고 복주로 떠난 지 십 여 일이 지났다. 미례는 하루도 빠짐없이 바다 언덕으로 올라가 하염없이 바다 건너를 건네다 보기를 반복했다. 가끔은 반하와 함께 오르기도 했고, 반하는 제법 심심치 않은 말상대가 되어 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례는 우울해 하며 방안에서 두문불출했다. 이상히 여긴 유모가 미례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살피며 어디가 아픈지 묻자 미례는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유모, 몸에서...피가 비쳐."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그 사내와 처음 몸을 섞던 날 말고는...안 그랬는데...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침상에...혈흔이 있어서..." 유모가 안도하며 미례를 향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제 열 일곱, 첫 몸을 앓을 때가 되도록 자란 것이다. 채 여인이 되기도 전에 짓밟혀 사내와 몸을 섞고 살았어도 이제 겨우 여인이 되는 것이다. "아기씨, 그건..첫 몸을 앓으시는 거예요." "그게..무슨 말이야, 유모?" 미례는 유모의 환히 웃는 얼굴에 반쯤 안도하며 수줍게 물었다. "이제 진정한 여인이 되신 겁니다. 달거리라고도 하는데 달마다 삼사 일씩 몸에서 피가 비치지요. 그건 잘못된 게 아닙니다." "...그러면..?" "아기씨가 여인이 되었다는 증거죠." "달마다 피가 비치는 게...왜.. 여인이 되었다는 증거지?" "그건...이제 아기씨도 뱃속에 아이를 품을 수 있는 여인이 되었다는 표시랍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셔요."


"...그냥 저절로 멈추는 거야, 그럼?" "예." 복주의 화평도방 집무실에서 장부를 살피며 일에 몰두하는 경휘 앞에 방주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는 오십 오세의 인심 좋게 생긴 중년인으로 화평도방내의 많은 인물들이 그러하듯이 중원 말 외에도 백제 말에 능통했으며 제법 인덕을 얻고 있는 복주 내의 유지였다. "이질금, 광주의 도방에서 배가 도착했습니다." "그래? 오는 길에 별일 없었다든가?" "예, 서역의 상인에 관한 소식도 가지고 온 듯 합니다. 그들과 말이 통하면 곧 험한 육로가 아니 어도 서역의 길을 틀 수 있을 듯 합니다." 중원인들에게 있어 미지의 길인 해로보다는 북방의 흉노나 선비족등 다른 유목민들이 지키고 있 는 육로가 더 안전하다 하겠으나 지리적 여건으로나 해운에 통달한 경휘나 화평도방 사람들에게 는 해로가 더 손쉬운 길이 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복주는 어떤가? 지난번 파사의 상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포구에 왔었다고 들었는데" "예, 그들도 해로를 열어 교류하길 원하고 있는 듯 합니다." "좀 더 알아보고 유대를 쌓아보게." 방주도 서역 해로에 관심을 보이는 경휘와 생각이 같았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주는 육로를 통해 복주에 도착한 대식국 상인과 파사의 상인, 그리고 돈이 될만한 그들의 진기 한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으며 경휘도 호기심 어린 눈을 빛내며 진지하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아, 복건성 절도사가 무역을 위해 돈을 내놓을 생각이 있더군." 경휘가 문을 나서는 방주의 뒤에 대고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벌써 만나 보셨습니까?" 방주가 다시 그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음" "입번자를 구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지 얼마 안되었는데 벌써 진척을 보신 겁니까?" "남궁가를 통해 의중을 전해 왔더군." "선박과 본전을 대주겠다 하더이까? 얼마나 내놓을 생각이라 하더이까?" "금 100 만냥." 방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중원의 선박은 굳이 필요 없지 않을까요? 도방의 선박만으로도 가능할 터인데 굳이 그들의 배를 빌린다면 이익분배에서도 원하는 게 많을 테니 이쪽에서도 별 이득이 없을 듯 합니다." "내 생각도 그러네. 게다가 그들은 3.7 제를 원하고 있지만 어림없는 생각이지." "3.7 제요?"


"배와 자본을 대니 7 을 취하고 싶다는 거지." 온화해 보이는 방주도 기가 막힌 듯 경휘를 바라보며 불만을 토로했다. "도대체 이질금과 화평도방을 어찌보고 그런 씨도 안 먹힐 소리를.." "그들은 관이잖나. 우리를 번으로 보니 유세를 떨고 싶은 게지. 너무 흥분하지 말게." "뭐라 말씀 하셨습니까? 설마 그 제의를 받아들이지는 않으셨을 테고" "흐흠, 다른 이를 구해 보라 했지. 그의 요구에 좋아라 나설 자가 있긴 있을 테지." "지난번 그리 손해를 보고도 아직 정신이 덜든 게지요? 이 근방에 화평도방 외에 바닷길을 제대 로 열고 나갈 암해자가 있지도 않을 뿐더러 그들도 명성을 익히 알 터인데 감히 3.7 제라니요." 그랬다. 복건성 절도사 조융은 그 동안 축적한 금으로 더 많은 욕심을 내며 관을 사칭하여 무역 에 손을 댔고 그는 지난번에도 경휘가 그의 제의를 거절하자 다른 입번자를 구하여 무역에 나섰 다가 배가 난파하여 큰 손해를 보았었다. "오래지 않아 연락이 다시 올 걸세. 그 동안 나는 잠시 유유자적하니 중원이나 돌아볼 생각인데 연락이 오거든 내게 알려주게." "전대 이질금께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가 경휘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아니, 그곳은 예서 너무 멀잖나. 다음 번 출항할 때는 평주로 가볼 생각이니 그때 료허를 찾아가 는 것이 더 나을 거야. 이번엔 설민과 잠시 바람이나 쏘일 작정이야." "아마도 전대 이질금께서 이질금의 혼인문제로 채근을 많이 하실 겝니다. 지난번 인편으로도 한 걱정을 하시며 알아 보라 하시더이다." 경휘가 미간을 찌푸렸다. 방주도 그의 성미를 아는지라 더는 말을 못하고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내가 알아서 결정할 일이야. 괜한 염려 말게." "...예, 이질금." "돌아갈 배편을 준비하라 했으니 그 안에 전서구도 잊지 말게. 선원들도 서운치 않게 대우해주고" "예, 그리 하지요." 설민과 유유자적 한량처럼 지내던 경휘는 결국 다시 연락을 취한 조융의 한풀 꺾인 제의에 미소를 지으며 5.5 제의 계약을 취했다. 그리고는 복주 내의 도방 선박을 철저히 준비시켜 교관선을 띄웠다. 4 척의 교관선에 2 척의 회역선도 함께 따랐다. 그들은 강도와 평주를 지나 백제의 당은포까지 이르렀다가 돌아올 예정이었다. 배가 포구를 떠나기 전 경휘는 방주와 선원들, 암해자, 역어, 도장등과 함께 안전항해를 비는 관음사의 발원기도에 합류했다. 관음암은 복건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암자였으나 화평도방의 후원을 입어


배와 선원의 안전을 기원하고 순탄한 뱃길을 염원하는 선원들의 발원을 위한 사찰로써 지난해에 증축을 하 고 이름도 관음사로 바꿨다. 관음사의 입지가 커지는 것은 그만큼 후원자인 화평도방의 세력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경휘나 섬의 사람들은 새타니의 발원을 믿기에 사찰에 별 의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항시 죽음의 길이 될지도 모를 물위에 있는 다른 뱃사람들은 믿고 의지할 마음의 신적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경휘도 알기에 그는 필요한 만큼의 돈을 관음사에 내어주고 있었다. 부처가 있든 없든 간에 그들이 믿고 의지가 되어 안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경휘는 생각했다. 어느 날, 관음사의 주지선사가 그에게 화평도방의 본거지인 섬을 방문하고 싶다고 넌지시 의중을 떠보자 경휘는 그저 열없이 웃음으로 대꾸했다. 주지선사가 의아해 하며 재차 그의 의견을 묻자 경휘는 농조로 가벼이 대답했다. "화평도에는 말이오, 선사. 섬을 지키는 무녀가 있소. 하늘 눈을 가졌다 하는데 아마도 이일을 알면 꽤 분노할게요. 그녀가 죽기 전에는 선사나 그 어떤 스님도 들어가기 힘들 거요." "......" "내 알기론 쉬이 죽지도 않을 거 같구려." 선사도 이후로 경휘의 뜻을 알고는 더 이상 조르지 않았다.

번 호 : 45 / 432 등록일 : 98 년 08 월 10 일 01:39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558 건 제 목 : [진현] 해적의 여자 23

경휘 일행이 다시 섬으로 돌아온 것은 섬을 떠난 지 두 달이 지나서였다. 저녁 무렵 배가 포구에 닿자 마을이 술렁거렸으나 미례는 오히려 경휘를 대할 생각에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그가 바다에서 돌아온 날이면 어김없이 서너 차례 그녀를 품었기에 미례는 낭패감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미례의 예측대로 그는 늦은 저녁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그녀를 잡아먹을 듯 바 라보며 옷을 벗도록 명령했다. 미례가 애써 옷을 여미며 그에게 다가오지 않자 그는 생각지 못한 그녀의 반응에


의아하게 생각 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반년이 넘어가면서 미례는 단 한번도 그를 거역하며 대든 적이 없었다. 그저 수동적으로 꼼짝 않고 누워 그를 받아들여왔다. 그는 다시 혼란스러웠다. 불만스런 그의 난폭한 힘에도 미례가 마치 처음 몸을 빼앗기는 여인처럼 완강히 저항하며 재빠르게 그의 손안에서 빠져나가 한쪽 구석에 섰다. "...제발...오늘은... 이러지 말아줘요." 그에게 소리내어 애원하는 미례의 눈물 맺힌 얼굴에 경휘는 내심 놀라면서도 화를 터트렸다. "제길, 오늘은 왜 안 된다는 거야? 난 몇 날 며칠을 바다에서 보냈단 말야." "....제발 요.." 그는 이상스레 생각하면서도 다시 구석진 곳에 옷을 여미고 선 미례에게로 손을 뻗었으나 미례는 재빠르게 다른 구석으로 도망쳐 갔다. 한동안 씩씩대며 미례를 쏘아보던 그는 이내 화를 삭이며 침상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래, 하루쯤 널 품지 않는다고 내가 죽을 것도 아니지. 그러나 여전히 속에선 부아가 치밀었다. 다음 날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머리맡에 정성스레 놓여있는 그의 새 옷을보며 주위를 살 폈다. 미례는 밤새 자리에 눕지 않았던 듯 그의 옆자리는 조금의 구김도 없었다. 새벽같이 날 피해 도망간 모양이군. 그는 옷을 입으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유모를 따라 부엌일을 돕는 미례의 모습을 힐끗 살피며 그는 흰둥이를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갔다. 그날 밤도 거나하게 술에 취한 그가 미례를 안으려 했으나 미례는 죽을 힘을 다해 그를 거부했고 경휘는 성질이 날대로 나서 화를 내고 욕설을 퍼부으며 밖으로 나갔다. 셋째 날 그는 욕구불만에 미칠 것 같아 막무가내로 분통을 터트렸으나 미례는 지난 이틀 내내 했 던 말들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제발..오늘은 이러지 말아줘요.." "날 몸달게 할 작정이로군. 네가 날 미쳐버리게 만들 작정이야? 이 못된 계집, 이래서 좋을 게 있 을 것 같아?" 그가 분노로 씩씩대며 서성거렸다. 미례는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거의 흐느끼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가 다시 미례의 몸을 안으려 손을 댔으나 미례는 가늘게 떨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지 말아요...이러지 말아요.." "날 화나게 해서 좋을 게 없을 거야. 어서 옷을 벗어. 죽은 듯이 누워 있어도 좋으니 차라리 그렇 게 하라고." ".....그..여인에게 가세요...제발 부탁이니...그 여인에게 가보세요.."


경휘는 미례의 말에 충격을 받아 한동안 그녀를 쏘아보았다. 다른 여자에게 가보라고? 경휘는 그녀에게 한대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모욕을 느꼈다. 빌어먹을, 계집이 어디 저 하나뿐인 줄 아나..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큰소리를 내며 문을 닫고는 방을 떠났다. 옷자락을 꼭 여미고 있던 미 례는 잠시 후 그가 떠난 것을 알자 낮게 흐느끼며 옷 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그에게 자신의 상태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므로 미례는 끝까지 저항했다. 그녀는 화가 난 그에 게 손찌검을 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미례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루하루가 두렵고 길게만 느껴지는 미례였다. 다음날 저녁 미례는 안도하며 목욕을 마치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경휘는 어젯밤 화를 내며 나간 후로 아직까지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미례는 그의 자리를 비껴나 침상에 누웠다. 어제까지 마을사람들은 쉬쉬하며 경휘를 피하고 있었다. 그는 심술난 사람처럼 볼이 부어 못마땅한 얼굴로 퉁퉁거리고 있었다. 처음엔 이유를 모르던 사람들도 이내 그를 보고는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얼핏 잠이 들었던 미례는 새벽녘 바깥바람을 안고 들어온 그의 기척을 느꼈다. 사스래란 그 여인에게 가서 욕정을 풀었다 해도 상관없다고 미례는 생각했다. 다만 그가 좀 덜 화가 났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의 옷 벗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그가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그의 맨살이 살짝 미례의 자리옷에 닿았다. 이젠 그의 벗은 몸에 닿는 게 익숙해져 있었다. 바로 누워 잠을 청하는 듯 했던 그가 몇 번 몸을 뒤척였다. 그는 어젯밤 사스래의 집 앞까지 갔었으나 결국 그냥 돌아와 술로 새웠다. 거부당한 느낌은 아주 씁쓸했다. 정 안 된다면 힘으로도 안을 수야 있겠지만 그는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삼일 내내 그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다른 이의 웃는 꼴도 참기 힘들었다. 그는 등돌리고 누운 미례를 흘끗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는 욕구를 풀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미례는 바로 지척에 누워있었다. 오늘도 손을 댔다가 다른 여인에게 가보라고 한다면 어찌 한다지? 경휘는 머뭇거리다 한숨을 쉬며 결심하고는 미례의 어깨를 잡아 바로 뉘웠다. 오늘도 그를 거부하며 앙탈을 부리면 차라리 죽여버릴 작정을 하자 두려울 게 없었다. 더 이상의 금욕은 그에게 무리였다. 더구나 손만 뻗으면 품을 수 있는 그의 여자가 있는데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그가 이끄는 대로 미례가 바로 누웠다. 아직 차가운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 섶을 헤치고 들어오자 미례는 낮게 신음소리를 냈을 뿐 몸을 피하지는 않았다. 동글고 탄력 있는, 제법 살이 붙은 젖가슴이 그의 손안에 쥐어졌다. 부드러운 그녀의 피부 느낌에 경휘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더 이상 그녀가 저항을 보이지 않자 거칠고 조급하게 그녀의 작고 여린 몸을


가린 천 조각 을 풀어 헤쳤다. 자연스레 미례의 다리가 그를 맞으며 벌어졌다. 다행히 오늘밤은 거부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라고 경휘는 안도했다. 그의 성난 양물이 뜨겁게 그녀 몸에 잇대어지며 한 손이 엉덩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는 몇 번 그녀의 가슴을 빨아대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슬쩍 그녀의 엉덩이를 들어올리며 미례의 몸 안으로 거칠게 들어갔다. "흐음...아아.." 아직 준비 안된 그녀 몸은 메말라 있었고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미례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어쩔 수 없어, 네가 삼일동안 날 거절했잖아. ................................................................................ .................................... ................................................................................ .................................... ................................................................................ .................................... ............(이러다 정말 포르노 소설이라고까지 말 듣는거 아닌가 몰라....................... .............하여간 좀 야하다 싶어 삭제합니다. 더 야한데도 남아있는부분있어............. .............하시는 분들요, 남겨둔 부분은 글의 진행상 없어선 안될거 같기에............... .............왜냐면 미례의 변화를 말해야겠기에..).................................................... .................................................... ........... ................................................................................ ................................... ................................................................................ ................................... 아주 작은 변화였으나 그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지난 삼일동안 그를 지옥 속에 빠트렸던 미례였으나 지금은 그녀의 미미한 반응에 그는 구름 위를 떠있는 느낌이 들었다. 미례 역시 이상한 감각이 들긴 마찬가지였다. 어젯밤 비치던 피가 멈추자 미례는 안도하며 목욕을 하고 침상에 들었다. 얕은 잠에 빠져있을 때 미례는 그의 기척을 들었다. 경휘가 손을 뻗어 그녀의 몸을 바로 뉘었을 때에도 그녀는 이전처럼 몸만 빌려주리라 생각하며 그의 행위를 참아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녀 마음과는 달리 그와 결합된 부분에 열감이 느껴지며 간지러


운 듯한 느낌과 함께 그의 거친 행위에도 점차로 아픔이 느껴지기 보단 알지 못할 쾌감이 점차 밀려왔다. "하아...하아..." 미례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로 밀착되며 들어올려지는 몸의 움직임에 놀라며 제지하기 위해 숨 을 깊게 들여 마시며 버텨내었다. 그러나 그는 미례의 그러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고 뜨거운 손을 뻗어 미례의 한쪽 다리를 더 넓게 벌려 세우며 그의 어깨위로 걸쳐 올렸다. 미례는 순간 수치감에 입술을 깨물었으나 민감하고 보드라운 점막 안쪽으로 깊숙히 그의 양물이 비집고 들어오자 탄성을 질렀다. "하악..." 그의 허리가 빠르고 거칠게 미례의 몸을 압박해댔고 마침내 강렬한 움직임 뒤에 그녀의 몸 깊은 곳에 사정을 하며 몸을 떨었다. 한동안의 여운을 즐기며 그대로 있던 그가 들춰 메었던 그녀의 다리를 풀어주었고 자신의 몸을 옆으로 눕히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만족스러웠다. 이후로도 경휘는 잠이 들려는 미례를 두 번이나 더 안은 다음 깊이 잠들 수 있었다.

번 호 : 48 / 432 등록일 : 98 년 08 월 11 일 03:26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519 건 제 목 : [진현] 해적의 여자 24

며칠 후 느긋해 보이는 태도의 경휘에게 사람들이 안도할 무렵 그는 흰둥이를 데리고 새타니를 찾아갔다. 미례는 오후가 되자 언덕으로 올라가 있었다. 지나는 길에 그는 지치지도 않고 바다너머를 바라다보는 미례의 옆모습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 밤 이후로 미례는 다시 돌 계집인 듯 반응 없이 몸을 내주고 있었다. 새타니가 여전히 킬킬거리며 그를 맞았다. "왠일이오, 이질금?" 경휘가 성년이 된 이후로 요즘처럼 자주 그녀를 찾아온 적이 없었던 것이다. 경휘는 자신의 심사를 건드리는 새타니를 무시하고는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요즘 심기가 불편하다 들었소. 다들 걱정스러워 하는데 무슨 일이오." ".....별일 없나?" 그는 내키지 않는 듯 화제를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훗, 내게 별일이야 있겠소? 지켜주는 몸 주신이 있는데.."


그가 다시 말을 잊으며 새타니가 건네는 찻잔을 받아 들이켰다. ".....부탁이 있어서 왔어, 새타니." 그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무어요, 이질금?" "....약이 있다고 들었어." '어디가 아픈 거요?" '아니, 그게 아니고...여인을 달아오르게 하는...약이 있다고 해서" 새타니의 표정이 의외라는 듯 그를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그런 걸 어디에 쓰려고 그러오?" "그런 약이..있나?" "있기야 있습지요 마는.." 새타니가 말끝을 흐렸다. "그걸 내게 주게." "내가 그런 약을 짓는다고는 안 했소, 다만 그런 약이 있다는 게지요." "그래도 알고 있다면 약을 지을 수도 있지 않나?" "무얼 하려고 그러오?" "짖궂은 할망구 같으니. 그걸 내가 어찌할 것 같애? 내가 먹을 것 같나?" "킬킬킬, 꼭 심술난 아이 같구려." "제길." 쉽지 않은 새타니의 반응에 경휘의 볼이 부었다. 복주였다면 새타니를 통하지 않고도 쉽게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부탁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한마디 말로서도 충분했을 것이다. 다만 조금쯤 얼굴을 붉힐 수도 있겠으나 그들은 경휘의 명령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새타니처럼 이렇게 짖궂게 어디에 쓸거냐고 묻지도 않을 것이다. 사내로서 이런 부탁을 하러 새타니에게 오기까지 그는 힘들었다. 더구나 자존심 강한 그로써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례를 안은 밤 이후로 그는 우울해지는 심기가 조금은 펴졌으나 다시금 냉정해진 그녀를 대하며 경휘는 침잠해 가고 있었다. 경휘의 불안정한 심기를 눈치챈 가납사니가 며칠 전 그에게 다가와 아직도 여자를 휘어잡지 못 했냐며 은근한 어조로 그에게 운을 띄웠었다. 뜨겁게 안겨드는 미례를 품어볼 수만 있다면 그는 어떤 것을 내놔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그는 자존심을 꺾고 새타니를 찾아왔다. "무얼 하려고 그러오?" 새타니가 재차 그에게 물었다. "미례에게 쓸 작정이야." 그는 마지못해 털어놓았다. "미례 아씨 말이우?" 새타니가 놀라워하며 그를 바라보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약을 내게 지어 줘." 그는 무시하듯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미례 아씨라고?


새타니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미례를 그렇게 불렀다. 처음 그들의 호칭을 들었을 때 경휘는 코웃음을 쳤다. 노예 계집일 뿐인데 마치 그의 부인인양 그들은 깍듯이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 몇 번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냉소를 지었을 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도 잠자리에서 미례 아씨와 안 좋은 게요?" "대들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사스래처럼 안겨들지도 않아. 마치 돌 계집 같아. 그러니 내게 약을 줘, 새타니. 그 계집이 정말 돌 계집인지 아닌지 알아봐야겠어." 미미하나마 반응을 보이던 그 밤 이후로 다시 차가워진 미례의 몸을 견디는 일이 그는 더 싫어졌다. "미례 아씨에게 잘 대해 주긴 하는 거요? 괜시리 퉁퉁거리고 심술이나 부리는 게 아니오?" "더 이상 내 인내심을 시험하고 싶지 않아. 그 계집이 얼마나 차가운지.." "이질금, 그 약을 쓰고 나면 미례 아씨가 이질금을 더 싫어하게 될지도 모르오. 그래도 좋소?" "...어째서?" "말했잖수. 마음도 허락하지 않은 여인의 몸을 빼앗고는 마음을 안 준다고 약을 써서 억지로 마음을 움직인들 좋을 리 있겠소? 차라리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려 보오." "마음 같은 건 상관없어. 내가 원하는 건 다른 여인들처럼 내게 안겨드는 거야. 내가 원하는 건 그거라구. 마음 같은 건 상관없어. 혼인하려던 사내에게 가 있든 다른 사내에게 가 있든 난 알고 싶지 않아." 새타니가 다시 킬킬대며 웃었다. "그게 정말이오? 참말로 마음 따윈 상관없는 거요?" "몇 번을 말해야 해? 내가 원하는 건 잠자리서 내게 안겨드는 거야 . 한 두 번은 참아냈지만 이젠 더 참아내질 못하겠어. 그 계집 때문에 화가 치밀어 못 견디겠다구." "..더 좋은 수도 있잖소, 이질금. 굳이 차가운 미례 아씰 참아낼 필요가 뭐 있소." "..어떤? 달리 좋은 수라도 있단 말야?" "있다마다 요, 그리 차갑고 화나는 여인을 품을 필요가 뭐 있소? 다른 여인을 찾아보면 되잖소. 이질금이 어디 따르는 여인이 없겠소? 복주만 나가도 넘쳐난다고 합디다." 새타니의 말에 희망을 보이던 경휘가 그 말에 얼굴이 굳어지며 차가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 계집을 꺾어보고 싶단 말야, 새타니. 내가 뭘 원하는지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른 체 해서 내 속을 뒤집어 놓을 생각이야? 그 계집의 콧대를 꺾어 버리고 싶다고. 새치름한 얼굴로 쳐다보는 그 계집이 잠자리서 달아올라 까무러쳐도 좋으니 내게 안겨드는 걸 보고싶다고. 누가 다른 여인을 품을 줄 몰라 그러는 줄 알아?"


새타니가 그의 말에 쓰게 웃었다. "그러다 속정 들면 어쩌려고 그러오?" "흠, 그런 염련 할 것 없어. 달아올라 안겨드는 그 날로 노예로 팔아버리든지 다른 사내에게 주든지 할 작정이야. 그런 헛된 염려는 말라구." "...미움이 깊은가 보구려. 서로 생채기만 낼 뿐이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뭐 있소, 이질금" 그랬다. 그를 뿌리치며 다른 여인에게 가보라던 미례의 말이 생각날 때마다 그는 화가 나서 어떻게든 차가움을 벗어 던지고 안겨드는 날이면 보란 듯이 내팽개치기로 결심을 굳혔다. 지금껏 잘도 그를 괴롭혀 왔던 미례에 대한 분노가 깊었다. "어서 약이나 내게 줘,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아." 그가 퉁명스레 말을 던지며 새타니의 시선을 피했다. "...약을 써서 미례 아씨를 안는다고 이질금이 만족하겠소?" "무슨 상관이야, 어찌 되었든 안기만 하면 되는 거지." "보아하니 이질금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니잖소? 미례 아씨 스스로 안겨드는 걸 원하는 게 아니오?" "....." "아닌 거요?" "....그래, 빌어먹을." 그는 마지못해 인정했다. "허면 이질금, 미례 아씨 마음을 열어보오. 여인은 마음이 따라야만 사내에게 몸도 주는 거요." "...얼마나 오래 기다리라는 거야?" 그가 마지못한 듯 새타니를 쳐다보았다. "낸들 알겠수? 이질금 하기 나름이오, 그건." "...하룻밤만이라도 그 약을 써보면 안될까?" "생각지도 마오, 이질금.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요." "젠장." 새타니는 어린애처럼 생각대로 안 되자 토라지는 그의 모습에 속웃음을 웃었다. "하늘 눈 새타니의 주술로도 미례 마음을 돌려볼 순 없는 건가?" "여인의 마음을 움직이기가 어디 쉬운 줄 아오?" 경휘가 실망하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가 자리를 뜨려 일어서자 밖에서 흰둥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경휘를 재촉하는 소리 같았다. 새타니가 다시 속웃음을 웃었다. 키득거리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귀에 거슬린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경휘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 웃음소리. 오래 전 그를 질리게 만들었던 웃음소리였다. 그는 잠시 그 자리에 굳어졌다. 뒤를 돌아다보며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풀솜 할미를 내주기 싫었던 경휘를 잘도 괴롭히던 그 어린 못된 계집아이가 그곳에 있는 듯


했다. 아주 오랫동안 경휘는 그녀를 보지 못했었다. 그때 새타니의 목소리가 그를 불러 세웠다. "이질금, 내가 미례 아씨의 마음을 돌려준다면 내게 무얼 내놓겠소?" 그가 빠르게 돌아서서 새타니에게로 다가갔다. 그 어린 계집아이는 그곳에 없었다. 아니, 그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가 빠르게 새타니에게 다가가 밝아진 안색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래줄 수 있는 거야?" "내게 무얼 내놓을 거요?" 새타니가 배시시 웃으며 그를 보았다.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원하는 걸 말해 봐." 그가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대답했다. "흐흠, 그래요?" "정말 미례를 바꿔놓을 수 있는 거야?" "그건 모르오. 다만 옛날 풀솜 할미적 생각을 해서 이질금을 도와주려는 거요." 그의 얼굴에 실망이 어렸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한다면 머지않아 이질금이 원하는 걸 얻을 수도 있을 게요." "하라는대로 하겠어." "시간이 좀 걸릴 거요." "얼마나?" "한...서너 달은 필요할 거요." 경휘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더 빨리는 안 되는 거야?" "우물가에 와서 숭늉을 찾는구려." 새타니의 얼굴에 냉소가 스쳤다. "알았어, 믿어보지." "자, 그럼 내게 내놓을게 있지 않소?" "그래, 말해 봐. 새타니." "밖에 있는 녀석 말이우, 그 녀석을 내게 주오." "뭐? 흰둥이를?..그건" 그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버렸다. "왜요, 싫습니까?" 경휘는 낭패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새타니도 경휘가 흰둥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에게 흰둥이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다니. 어린 시절부터 정붙이고 키워 온 그 녀석은 서로 눈만 봐도 알만큼 서로를 이해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흰둥이가 가장 두려워하는 새타니에게 넘겨줘야 하는 건가. "싫으면 관두구랴. 가서 실컷 그 녀석이나 끼고 살아 보시우. 미례 아씨가 차게 굴면 좀 위로해 달라고도 해보시우." 그는 속으로 재보고 있었다. 미례와 흰둥이. 그녀와의 하룻밤을 위해 흰둥이를 팔아 넘기 게 되는 건가. 젠장.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바닥의 한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차가운 계집을 끼고 기분도 상하며 쓸데없는 힘을 허비하느니 흰둥이를 새타니에게


넘겨주고 피와 살이 있는 뜨거운 미례를 안아볼 수 있다면... 잠시 후 경휘는 미심쩍게 새타니를 쳐다보았다. "자신 있는 건가? 정말 미례가 잠자리서 달아오르긴 하는 거야?" "뭐하면 그 약이라도 지어 주리다. 한 달에 몇 번은 달아오를게요." "흰둥이를 어떻게 할 셈이야? 설마 잡아먹진 않을 테지?" "낄낄낄, 저 질긴걸 잡아먹어야 별 맛이나 있겠소?" "그럼 흰둥이를 뭐에다 쓰려는 거야? 새타닌 말을 타지도 잘 돌아다니지도 않잖아?" "그야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줄 거요 말 거요?" "...다른 걸 말하면 안되겠나? 서역에서 왔다는 귀한 보물도 있고 금이며 쌀도" "급하지 않은 거면 그냥 가시오. 흥정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기운 빼고 싶지도 않소." 새타니가 쌀쌀하게 말하며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는 잠시 망설였으나 곧 대답했다. "젠장. 주면 될 거 아냐. 좋아, 새타니. 흰둥일 가져. 하지만 알지? 흰둥인 내게 형제나 다름없다 고. 소중히 대하지 않으면.." "또 있소." 느닺없는 새타니의 말에 놀란 그는 하려던 말도 잊고 새타니를 쏘아보았다. "뭐라구? 흰둥이 말고도 더 뭘 달라는 거야?" "지금은 저 녀석 하나지만 나중에 생각나면 더 달라고 할 생각이오. 그래도 되오?" 뻔뻔하기까지 한 그녀의 요구에 경휘의 눈이 커졌다. "너무 하다고 생각되지 않나?" "미례 아씨와 지낼 밤을 생각해 보시구랴. 그만한 가치는 있을 게요. 이것도 옛날 휘아를 생각해 서 내 크게 생각해 주는 게요. 달리 방법이 있거든 그리로 가보시우." "......" 경휘는 씁쓸함을 안고 일어서 움막을 나오려다 말고 다시 그녀에게로 가까이 갔다. 흰둥이가 염려스러웠다. "새타니, 하나만 더 물어도 되나?" "또 뭐요?" "왜 흰둥이가 자넬 싫어하는지 알고싶어. 그냥 이대로 저 녀석을 남겨 두기엔 내 마음이 편치 않아. 알려주게, 왜 그러는 거지?" "낸들 아오? 난 저 녀석에게 못되게 군 적 없소. 세상엔 그저 까닭 없이 싫은 것도 있나보오." 새타니가 능청스레 대답했다. 그러나 경휘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저 녀석은 그저 까닭 없이 사람을 싫어하고 꺼리는 녀석이 아니야. 새타닌 알거야. 내게 말해 줘." "그런 일 없다지 않소. 고연히 트집 잡지 마오." "아니. 아는 걸 내게 말해 줘. 무슨 일이야, 새타니? 응?" 그는 계속 물러서지 않고 고집스럽게 새타니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지못해 그를 바라보던 새타니의 눈빛이 푸르게 변했다.


그리고 잠시 후 신경질적으로 쏟아져 나온 그녀의 목소리는 나이든 여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를 소름 돋게 만들었던 바로 그 새타니의 목소리였다. 어린 계집아이의 앙칼진 목소리. "바보 같으니, 그것도 몰라? 설마 날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니 녀석을 떼어버리려고 하던 날 몰라? 궁금하니, 경휘야? 그래, 내가 말해주지. 내가 그랬다. 네가 저 녀석을 아끼는 걸 알고 저 녀석을 좀 놀려줬지. 너만큼이나 저 녀석도 겁이 많더구나. 킬킬." 경휘는 그녀의 말에 부아가 치밀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고, 그 못된 계집아이의 존재와 대면하자 그는 치를 떨었다. "흰둥일 어떻게 할거야? 또다시 괴롭힐 거야? 말해두지만 그런 건 용서 못해." "걱정 말아라, 경휘야. 이젠 저 녀석하고 잘 지내볼 생각이야. 널 괴롭힐 이유가 없잖아." 옛날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아주 밉살스런 목소리였다. "흰둥이에게도 미례에게도 못된 짓을 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거야. 기억해둬, 난 예전에 네게 지던 어린 경휘가 아냐. 내 주위로 얼씬거리기만 해보라구." "얼씬거린다고? 흠! 그러면 어쩔 테야? 날 어쩌기라도 한단 말이냐, 경휘야?" 그녀는 무슨 짓을 할 수 있겠냐는 듯 변죽을 울리며 그를 약올렸다. "약한 자를 괴롭히는 못된 귀신쯤 없애 버릴 수 있어. 그건 너도 알거야. 그러니 너도 내게 다시 달려들지 못하는 거지." "흠!...날 어쩌려 다가는 네 풀솜 할미도 무사치 못할걸?" "그러니 하는 말이야. 넌 네 자리에 있는 거야, 지금껏 해왔던 대로. 내 주위로 나타나는 꼴은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테다. 두 번 다시 날 괴롭히는 짓은 통하지 않을 거야. 난 받은 만큼 꼭 돌 려 줄테니.." 경휘는 다시 한번 날카롭게 그녀를 쏘아보고는 그대로 일어나 움막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애원하는 눈빛의 흰둥이를 그대로 매어놓고는 터덜터덜 길을 내려갔다. 뒤에서 애처로운 흰둥이의 울음소리가 그를 아프게 부르고 있었다.

번 호 : 49 / 432 등록일 : 98 년 08 월 11 일 17:25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506 건 제 목 : [진현] 해적의 여자 25

한낮이 가까울 무렵, 미례는 유모가 빨갛게 잘 익은 앵두를 정성껏 고르며 씻어 작고 예쁜


항아리에 담는 것을 보고는 이상히 여기며 그녀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뭐하는 거예요, 유모?" "아기씨 곱게 만들려고 미안수를 만듭니다." 유모가 정겹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수요? 앵두를 가지고서?" "아기씨. 잘 익은 앵두를 깨끗이 씻어서 단지에 담아 밀봉해서 그늘진 땅속에 묻어 두었다가 반년이 지나 꺼내 놓으면 연붉은 앵도수가 생깁니다. 미안수로는 아주 좋아서 아씨도 여름이 되면 앵두를 구해두었다가 쓰시곤 했지요. 이젠 아기씨도 필요하실 겁니다." "향도 좋을 거 같은데요?" "몸에도 좋답니다. 오늘은 앵두화채를 만들어 볼까요?" "그래요, 유모. 나도 도울께요." 미례는 텃밭의 채소도 다듬고서 오후가 되자 혼자서 산책을 나섰다. 경휘는 오전부터 새로 만드는 배를 살피러 포구에 나가 선공, 번장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늘 가던 그 자리의 언덕 위에 앉아 있자 한 머리 하얀 노파가 그녀 뒤로 다가왔다. "여기 나와 계셨구려." 미례는 고개를 돌려 낯선 그녀를 바라보았다. 창백해 보이는 얼굴에 흰머리를 틀어 올렸고 제법 나이 들어 보이는 노인임에도 반짝이는 광채를 잃지 않은 특이한 눈빛을 하고있었다. 미례로선 처음 대하는 사람이었으나 그 노인은 그녀를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보였다. 미례는 그녀가 자신을 누군가와 착각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하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노인이 다가와 미례 곁에 앉았다. "미례 아씨, 고향 생각을 하오?" 노인이 다가와 앉자 미례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고 그녀가 자신을 알고 있음에 더욱 놀랐다. 미례의 놀라움을 아는 듯한 새타니의 웃음에 미례 역시 헛웃음을 지으며 다시 시선을 바다 너머로 보냈다. 하긴 이곳 섬사람들 치고 날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이곳에 잡혀와 수장으로 보이는 이질금이라 불리는 그 사내와 몸을 섞고 사는 처지이고 보면 남의 입에 오르내리고도 남겠지. "고향 생각이 나오?" 새타니가 다시 미례에게 물었다. 미례가 얼핏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타니는 작고 여린 선을 가진, 앳띈 소녀티를 못 벗은 미례를 꼼꼼히 훑어보았다. 가납사니가 한 말 그대로군. 클클거리며 새타니가 속으로 웃었다. 이질금이 왜 그녀에게 미쳤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웃하던 가납사니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그러나 새타니는 미례의 얼굴에서 귀하고 함부로 대하기 힘든 기품 같은 걸 발견했다. 그것은 단지 그녀가 귀족이어서 만은 아니었다.


맑은 기운이 있어. 새타니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직은 어리지만 휘아를 감싸줄 포근한 가슴을 지닌 여인이겠군. 경휘의 외로움을 아는 까닭에 새타니는 미례를 보며 안도했다. "이곳에 정 붙이기 힘든 게요?" "....." "한해가 다 되어가니 이제 우리 이질금을 받아 줄 때도 되지 않았소?" "...그와 무슨 관계인지 모르나 그는 내 낭군이 아니오." 새타니가 피식 웃었다. "한해가 되 가도록 몸을 섞은 사내가 낭군이 아니면 뭐라고 불러야 하오?" "그에게 물어보오. 난 다만..그의 포로이고 노예일 뿐이오." 미례가 굳어진 얼굴로 고집스럽게 말했다. "한낱 포로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감시도 없이 밖으로 내보내고 한답디까?" "....." 미례는 수치감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휘아에게 미움증이 많은 게지요?" "......." "숫색시였으니 처음엔 싫었다 해도 이젠 사내를 알 터인데 아직도 휘아를 내치는 게요?" 미례의 눈이 다시 놀라며 생소한 시선으로 새타니를 쳐다보았다. 새타니가 어떤 존재인지 속으로 재어보는 듯 했다. 그와 아주 가까운 친척이라도 되는 걸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낯선 노파는 너무도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새타니가 미례의 생각을 읽고는 다시 웃었다. "그걸 아오, 미례 아씨? 이곳 사람들이 미례 아씨 기분에 따라 울고 웃는다는 걸?" "그건...왜지요?" "이질금이 너무 변덕스러워 미례 아씨께 대우받지 못하면 심술을 내기 때문이지요." "......" 미례는 몰랐던 사실에 얼굴을 붉혔다. "이번 바닷길에서 돌아와서가 제일 험악 했다오. 다들 이질금을 보기가 무섭게 피해 다녔을 정도라오." "......" "우리 이질금이 그리 싫습니까?" 그녀는 이미 그의 이유를 알고있는 듯 말하고 있었다. "......" "우리 이질금이 못난 얼굴도 아닌데다 사내다워서 이 근방 여인네들이나 바다건너 복주에서도 더할 나위 없는 사내인데, 미례 아씨껜 가당치도 않던가요?" "그런 건...내게 아무런 소용없어요." 힘으로만 그녀를 차지하고 한해가 되어가도록 몇 마디 해보지도 못한 사내. 그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게 없듯이 미례 역시 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다만 변덕이 심하고 화를 잘 내며 가끔 웃기도 한다는 것 말고는. 어느 여인이


다정다감한 자신만의 사내를 원하지 않을까. 이미 아주 멀어진 이야기였으며, 겉으로 보이는 그의 모습은 정말 미례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새타니가 한참후 입을 열었다. "바리 공주 얘길 아시우?" 미례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 나라에 왕이 계셨다오. 왕비님이 바라던 왕자 대신 내리 공주 아기씨만 여섯을 낳았는데 일곱째는 왕자 아기씨를 기다렸건만 또 공주 아기씨를 낳으신 게요. 왕은 그만 화가 나서 왕비마마의 눈물 섞인 애원도 뿌리치고 일곱째 공주 아기씨를 내다 버렸다오. 그 가엾은 공주 아기씨가 바로 바리공주라오. 왕은 그만 자식을 내다버린 죄로 하늘의 노여움을 사 병이 들게 되었소. 신의를 불러도 병이 차도가 없자 영험한 무녀를 불러 점을 치게 되었다오. 무녀 말이 일곱째 공주를 버린 죄로 병이 들었다 하며 서역서천의 불사약수를 구해 마셔야만 병이 나을 것이라 했소. 그래 방방곡곡을 수소문해 일곱째 바리공주를 찾았다오. 이젠 불사약을 구하러 서역서천 먼 길을 가야 하는데 고이 기른 여섯 공주 모두 부모수양 아니하겠다 이리 두르고 저리 두르는데 바리 공주님 말씀이, 고이 길러주진 않았으나 뱃속에서 열 달 길러준 은혜도 은혜라며 먼 서역서천으로 불사 약을 구하러 떠났다오. 사내 복장을 하고 혼자 길을 나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기고 힘들게 불사약수를 찾았으나 그만 약수를 지키는 험상궂게 생긴 무장승을 만났다오. 나뭇짐 삼 년, 불 지피 기 삼 년, 물긷기 삼 년을 하는 동안 바리공주가 여인임을 알아챈 무장승이 아들 일곱을 낳아달라 했지요. 그래도 바리공주는 그리하겠다 했다오. 그리고 정말 몸을 섞고 아들 일곱 낳아주고 약수를 얻어 부모수양 마쳤다오." "......" '미례 아씬 그래도 행복한 게요, 바리공주에 비하면." 미례가 열없이 웃음을 지었다. "내겐 약을 구할 목적도 없고 앓아 누운 아비도 없오. 더..견디기 힘든 건 그에게서 놓여날 조건 도 없다는 거예요."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리며 미례가 한마디 덧붙였다. "차라리 아들 일곱을 낳은 후라도 좋으니 풀어 준다면 좋겠소." "그래서 휘아를 막 대하시는 게요?"


"난 그 사낼 막 대한 적 없어요." "휘아가 다른 여인넬 품으면 좋겠소?" "...날 그냥 내버려두길 바라는 게 뭐 잘못된 건가요?" "예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다른 사내와 혼인할 수 있을 거 같소?" "...난, 어떤 사내와도 혼인하지 않을 거예요. 평생 혼자 살아갈 거예요." 미례의 고집스러움에 새타니가 혀를 찼다. 세상사는 일이 어디 뜻대로만 되겠소? 새타니도 원망스럽기만 한 바다를 한동안 쏘아보았다. 그녀의 가슴에 만감이 교차하며 스쳐지나갔다. 절대 어찌 어찌하지 않겠다..하는 맹세는 쓸모 없는 것이라오, 미례 아씨. 새타니는 씁쓸하게 속웃음을 웃었다. "그래도 돌아가고 싶은 게요?....사내가 그리우면" 미례의 얼굴이 달아오르며 화들짝 놀라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런 일없어요. 난 그냥 혼자인 게 좋아요. 부모님이 계시고 언니 오라버니가 있는 고향으로 가서 살고 싶을 뿐 이예요. 그 사내가 날 풀어 주길 바래요." 고향의 바람소리, 바다 내음, 풀 냄새, 새소리까지 온통 그리운 걸요. 그리워서 죽을 것 만 같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요. 미례는 다시금 생생히 떠오르는 고향생각에 울먹이며 눈물이 차 올랐다. 눈을 깜박이며 기어이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고야 마는 미례를 보며 새타니가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한참 후 자리에서 일어서는 새타니가 미례에게 한마디 던졌다. "미례 아씨, 이 섬에서 이질금의 눈밖에 나면 말이오, 미례 아씰 찾지 않으면 미례 아씨 처지는 어찌 될 거 같소?" 물론 스스로 원하고 마음이 움직여 맺어진 사이가 아닌 줄은 새타니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례는 자신이 가진 게 무언지 조차 잘 모르고 있는 듯 했으므로 새타니는 일부러 상처 내는 말임을 알면서도 그 말을 내어놓았다. 이미 그녀의 사내인 경휘는 세상 어디에 내놔도 그리 모자란 사내가 아니었다. 이제 그만하면 마음을 열 때도 된 거 아니오, 미례 아씨? 손에 쥔 것을 잃기 전에 한 번이라도 제대로 휘아를 살펴보시구려. 새타니는 답답한 마음에 속으로 되뇌었다. 물론 그것은 풀솜 할미의 마음이었다. "......" 미례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번 호 : 55 / 432

등록일 : 98 년 08 월 12 일 19:19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제 목 : [진현] 해적의 여자 26

조 회 : 541 건

가끔씩 새타니는 미례에게로 와서 한마디씩 물어보기도 하고 다른 이야기들을 해주기도 했다. 새타니는 재미난 이야기꾼이었다. 점차로 미례는 새타니에게 마음을 열어가고 있었다. 경휘는 가끔씩 새타니를 찾아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묻기도 하며 떼를 쓰기도 했다. 그때마다 새타니는 그저 기다리라며 웃기만 했다. 그야, 이질금 하기 나름이지요. 새타니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리 문닫아 걸고 있는 미례 아씨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을 거 같소. 자신이 정말로 미례의 마음을 바꿔놓을 수 있다고 믿는 경휘의 생각에 새타니는 코웃음을 쳤다. 노력이야 해보겠지만 쉽지 않다는 걸 새타니는 알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돌리는 일이 세상에 가능키나 한 일인가. 그런 이가 있었더라면 아마도 그는 벌써 온 세상을 다 차지하고 제멋대로 부릴 수 있었을 것이다. 새타니는 다만 문닫아 건 미례의 마음을 조금쯤 누그러뜨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사실 그녀에게 딸아이가 있어 혼인을 시켜야 한다면 새타니는 망설임 없이 경휘를 택했을 것이 다. 어린 시절 외롭고 아팠던 그의 상처를 알지만 그는 제 여인을 울리지 않을 미더운 사내였다. 새타니는 그런 사실을 미례가 알도록 시간을 들일 생각이었다. 미례가 원하던 귀족의 사내가 아니더라도 그는 미례에 견주어 조금도 기울지 않는 사내라고 새타 니는 믿었으며 그 사실을 미례 역시 인정하도록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미 몸까지 섞은 사이에 속정이 붙는 것은 냇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당연한 귀 결일 것이다. 흰둥이를 내놓은 경휘였다. 그의 마음이야 이미 알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었다. 아직은 다만 경휘가 자신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세상에 무엇이 있어 그에게 흰둥이와 맞바꾸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다음 달에도 경휘가 몸을 앓고 있는 미례에게 손을 뻗자 미례는 기겁을 하고 놀라 피하며 도망쳤 고, 화가 난 경휘는 새타니를 찾아와 약을 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밤늦게 거절당하고 쫓겨 온 그는 잠자리에 들었던 새타니를 깨우며 불같이 화를 내었다. "제길, 도대체 아무런 변화도 없잖아. 게다가 이번에도 날 피해 도망치다니. 도무지 무슨 변화가 있어야 할거 아냐, 새타니?" "시간이 필요하다 했소, 이질금." "약을 줘. 그깟 마음 같은 거 필요 없으니 당장 약을 달라구. 한번만 제대로 품고


나면 내 속을 뒤집어 놓는 그 못된 계집 따위 눈앞에서 치워 버릴 테니 어서 약을 내놓으라고." "그러지 마오, 이질금. 조금만 참으면 될 것을 그리하고 얼마나 가슴을 치려고 그러오. 그러지 말 고 이리 앉으시우, 좀 진정되게 이걸 좀 마셔보구려." 새타니가 그를 달래며 몸을 움직여 차를 따라 그에게 건네주었다. 씩씩대며 분을 이기지 못하는 그를 달래던 새타니는 그가 조금 진정이 되자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이질금, 미례 아씨와는 말을 좀 하오?" "무슨 말을?" "그저...살아가는 얘깃거리들 말이오. 설마 한마디도 마주 건네지 않고 살진 않을 거 아니오?" "날 보면 웃지도 않아. 웃다가도 날보고는 그냥 쌀쌀해져.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있겠어?" "그래도 노력은 해봐야 하지 않겠소? 일에만 몰두할게 아니라 미례 아씨와 나들이라도 해보오. 미례 아씨가 매일같이 저 아래 언덕에 오르는걸 알고 있소?" "알아...제 고향으로 가고 싶은 게지." 그의 볼이 부었다. "그걸 뭐라 할 순 없을 게요. 누군들 안 그렇겠소? 억지로 매인 몸이고 보면." "그래서 날 보고 어쩌라는 거야? 미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집으로 보내주겠다 거짓 약속이라도 하라는 거야?" "나중에 말이오, 이질금. 이질금이 혼인할 여인이 나타난다면 그땐 어찌 할게요?" 새타니가 그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아." "전대 이질금도 자꾸 독촉하실 테고 나이 들어 혈육이 필요해지면 그땐 혼인해야 할거요." "그때 되면 생각해 보지." "...미례 아씬 어떻소?" "당치도 않아, 달아나지 못해 안달인 계집인걸." "...혹여 말이오, 이질금. 혹여 라도..미례 아씨가 이질금의 아이라도 가지게 되면 말이오, 그땐 어 찌 할게요? 그래도 내치실 거요?" "......" 경휘의 안색이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변하며 새타니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오? 한해가 되 가도록 몸을 섞었으니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뇨? 전혀 생각도 안 해봤소?" "...그건..." 그는 정말 그런 생각은 해보지 못했었다. 무슨 병처럼 그는 미례를 보면 몸이 달았고 그녀를 이 기고 싶었으며 이제 와선 그저 당연스레 품어왔다. 여인으로 반응하지 않는 그녀에 대한 오기마저 생겼던 게 사실이었다.


아직도 작고 어린 소녀 티를 못 벗은 모습 때문일까? 그는 그녀를 품으면서도 그의 자식을 낳아줄 수도 있는 여인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생소한 생각이 주는 낯선 느낌에 그가 빠져있자 새타니가 다시 타이르듯 나직하니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이질금, 내 말대로 해보오. 미례 아씨와 조금이라도 말을 해보시오." "....." "어느 여인이 잠자리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몸만 탐하는 사낼 좋아하겠소?" 잠시 후 말이 없던 경휘가 화를 삭히며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새타니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못 미더운 듯 고개를 젓고는 잠자리에 다시 들었다. 며칠 후, 해 저물녘 미례가 언덕에 앉아있자 새타니가 찾아왔다. 미례는 그녀의 기척을 느끼고는 시선을 잠시 돌려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미례는 어느새 친구처럼 새타니를 대하고 있었다. "지치지도 않소, 미례 아씨?" 미례가 고개를 저었다. "안색이 좀 나아 보이는구려. 좋은 일이 있었소?" 미례는 그저 미소를 짓기만 할뿐 말이 없었다. "이질금은 어떻소, 좀 낫게 대합니까?" 그 말에 미례의 미소가 일시에 걷히더니 새타니를 외면했다. 쯧쯧, 새타니가 혀를 찼다. 그리 가고도 미례 아씨에게 분풀이를 해댄 게로구먼. "아직도 두렵소? 이질금이 미례 아씰 해치기라도 한답니까? 그건 아니잖소?" "...." '이질금이 모질고 나쁜 사내는 아니라오. 아직도 처음 몸을 뺏길 때의 원망이 남은 게요?" "....." "우리 이질금을 도적의 수장 정도로 생각하오?" "그게 사실이잖아요." 여전히 외면한 채로 미례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싫은 게요? 미례 아씨 같은 귀족의 신분이 아니라서?" "...신분 때문은 아녜요. 하지만 그가 도적질을 하는 나쁜 사람인 건 확실하죠. 난 그런 사내의 여인으로 살고 싶진 않아요." "우리 이질금이 그런 무지막지한 도적이 아니라면 좀 나아지겠소?" "......" "휘아가 바다건너 복주에서 무얼 하는지 말 안 합디까? 해적 질을 하는 건 이 섬을 지키기 위해 서요. 그게 본업은 아니라오." "하지만 날..팔아 버리겠다고 했어요. 그런 게 해적들이 하는 짓 아닌가요?" "그래, 팔려갔소?" "하지만 정말로 날 위협했다구요. 그는 날 그의 친구에게 주겠다고도 했어요."


"아마도 휘아가 화가 났던 게지요." 경휘의 화난 모습이 어렵지 않게 떠오르자 새타니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미례는 의아한 눈으로 새타니를 바라보았다. 그는 정말 화가 났었다, 그녀가 다른 사내를 훔쳐보았다고 오해를 하면서. "새타니, 그에 대해 어찌 그리 잘 알아요?" "휘아를 잘 알지요. 어려서부터 내가 키우다시피 했소. 어미 정을 그리워하며 자라 많이도 외로워 했드랬소." "....." "휘아가 미례 아씰 아끼는 걸 아오?" "그렇지 않아요." "휘아는 자라면서 말수가 좀 적었다오. 여인에게 모질게 대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정을 주는 사내도 아니었소. 그의 어머니처럼 떠나갈까 두려워해서라오. 풀솜 할미로 따르던 나 역시도 그 애보다 신을 택했으니 더 외로움이 사무쳤지. 그래서 여인에게 깊은 정을 안 주는가 보오. 다들 떠나갈 테니.." 새타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온 그녀의 날들은 너무도 힘에 부쳐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았으나 무심한 바다를 보니 가슴 한 곳이 저리며 지난날이 스쳐갔다. 인다리 라고 했던가. 신기를 가지고서도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무녀에게 내리는 저주스런 신의 벌. 경휘의 풀솜 할미였던 그녀는 결국 신기로 인해 지아비도 자식도 다 잃어버렸다. 가슴에 한이 된 그녀를 아는 경휘의 아버지인 전대 이질금이 위로하며 가끔씩 경휘를 맡겼고 그녀는 어미처럼 믿고 따르는 경휘를 몹시 아꼈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경휘의 표정이 어둡고 음기가 서리더니 앓아 눕는 걸 본 그녀는 다시금 신의 저주가 시작되는 걸 알았다. 더는 앗아갈 무엇도 없노라 생각했던 그녀에게 경휘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달아지더니 어느새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오곤 하는 새타니의 존재를 느꼈던 것이다. 그 새타니는 어느 순간 그녀 안에 들어와 아무 것도 모르는 경휘를 혼란시키며 떨어버리려고 괴롭히고 있었다. 결국 경휘마저 잃고 싶진 않았던 그녀는 두 손 들고 신을 받아들였다. 이후로 결국엔 경휘를 잃었으나 그가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위로 받았으며 만족했다. "다른 여인이 있는걸 알아요."


새타니는 나직이 내어놓는 미례의 말에 옛 기억에서 벗어났다. "사스래 말이오?" "....그래요." "사스래에게 정이 있었다면 미례아씰 집안에 들이지도 않았을 거요. 휘아는 다섯 해 넘게 사스래를 알았드랬소. 젊어서 사스래는 홀어미가 되었지요. 돌아오는 뱃길에서 사고가 있어 그만 폭풍에 휩쓸려 버렸지. 휘아가 가라치를 구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오." "......" "휘아는 그 일로 상심하고선 홀어미 된 사스래를 돌봐주는 게요." 소솜이 그녀들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잠시 주위를 서성대다 새타니의 말이 끝나고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자 두어 걸음 다가오며 미례에게 말했다. "미례아씨, 그만 돌아가시지요." 새타니가 소솜을 돌아다보더니 자리를 털며 일어섰다. 소솜이 무언으로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갖춰 인사를 했다. 새타니가 그를 한 번 흘끗 보더니 미례에게로 한 마디 하고는 뒷짐을 지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미례 아씨, 다음에 심심하시면 내 집으로 한 번 찾아오시오." 미례도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서서 소솜을 따라 길을 내려갔다. "그가....날 찾아 오라 하던가요?" 그에게서 몇 걸음 뒤쳐져 걸음을 걷던 미례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소솜이 뒤를 돌아 그녀를 흘끔 보더니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유모가 보냈소." 크게 두근거리며 답답해지던 미례의 가슴이 안도하며 진정되었다. 그제 밤부터 가끔씩 이상스런 눈으로 경휘가 빤히 쳐다보곤 해서 미례는 당혹했었다.

번 호 : 58 / 432 등록일 : 98 년 08 월 14 일 09:43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552 건 제 목 : [진현] 해적의 여자 27

그제 밤부터 가끔씩 이상스런 눈으로 경휘가 빤히 쳐다보곤 해서 미례는 당혹했었다. 저녁을 물리고 초저녁인데도 일찌감치 침실로 들어선 그는 침상에 걸터앉아 바느질하는 미례를 건네다 보았다. 어색함을 느낀 미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그는 잠시 시선을 돌리더니 다시 미례가 일에 몰두하자 그녀의 자태를 훑어보기를 반복했다.


일찍 자리에 들려는 줄로 알아챈 미례가 바느질감을 미뤄놓고 침상에 들었으나 그는 팔 베게를 하고는 똑바로 누워 딴 생각에 잠긴 듯 했다. 한참 후 몸을 웅크리고 반대편으로 돌아누운 미례에게로 손을 뻗어왔으나 놀랍게도 그는 미례를 바로 눕히지도 옷을 벗기지도 않고 그녀의 몸 위로 올라오지도 않았다. 다만 약간의 거리를 두고 그녀에게로 돌아누워 한 손을 뻗어 처음엔 망설이는 듯 했으나 서서히 미례의 몸을 더듬어 만졌다. 굳어진 채로 미례는 숨을 참으며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그의 손이 얇은 자리옷 위로 솟아오른 가슴을 부드럽게 만졌고 점차 몸의 선을 더듬으며 엉덩이 의 선까지 더듬어 내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리고도 더 놀라운 건 그날 밤 그는 미례를 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미례는 그의 행위를 참아내려 체념하고 있었으나 왠일인지 그는 한동안 그렇게 미례를 만졌을 뿐 그대로 잠이 들었다. 지금까지 그는 몸을 섞기 위해서가 아니고는 그녀에게로 손을 대지 않았었다. 오늘 아침에도 미례가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그의 알 수 없는 짙은 눈동자였다. 그와 마주본 상태로 누워 잠이 깬 미례는 낯설게도 그녀를 뜯어보는 그의 시선에 적이 당황하며 몸을 일으켰다. 침상에서 내려서 그의 옷을 챙겨주고 머리를 매만지며 서둘러 밖으로 나온 미례의 가슴은 그에게 보여선 안될 부분을 보인 듯 어색하고 찜찜했다. 무언가 이상해. 미례는 요즘의 그의 태도에 적이 당황하고 있었다. 그런데다 언덕까지 그녀를 찾아온 소솜을 보자 혹시라도 그가 자신을 찾진 않았나 생각되며 가슴 이 무거웠었다. 유모가 보냈다는 그의 말에 안심이 되며 미례는 가늘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걸음걸이도 가벼워졌다. "소솜, 새타니 말예요. 혼자 살아요?" "그렇지요." "새타니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거 다들 알아요?" "새타니가 가진 힘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새타닌 이 마을을 지키는 무녀라오. 하늘 눈을 가졌다고 다들 따르고 또 두려워하지요." "첨부터 무녀였나요?" "아니오. 바다에 사내 잃고 자식마저 잃고는 혼자 살았댔소. 어려서 나도 경휘 따라 몇 번 새타니 에게 갔던 적이 있는데, 아! 하긴 그땐 새타니라고 부르지도 않았지. 경휘는 풀솜 할머니라


불렀는데 유난히 새타니를 따랐었소." "지금도 그가 새타니를 자주 찾나요?" 미례는 자신과 경휘에 대해 너무도 잘 아는 새타니가 놀라워 소솜에게 물었다. "왠 걸요, 새타니가 되고 나선 이질금은 그쪽으론 잘 걸음도 하지 않소. 다만 바다로 나가기 전 날을 받을 때나 마지못해 가거나 그것도 아니면 내 아비나 다른 사람을 시키오." 미례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솜을 다시 한 번 살피고는 말을 이었다. "소솜, 당신은 도적처럼 보이지 않아요." 소솜이 머리를 긁적이며 낮게 웃었다. "미례 아씨,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도적은 아니라오. 미례 아씨가 왜 그리 생각하는지는 알겠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각자 벌어먹을 생업이 있고 그리 살고 있소. 언제 한 번 살펴보시오. 마을서 만든 것을 내다 팔기도 하고 필요한 것을 뱃길로 나가 복주나 광주로 가서 사오기도 하고 교역을 해서 이문을 내기도 하오." "그럼 왜 배를 빼앗고 날 이리 데려온 거예요?" "그게..말이오, 미례 아씨. 다들 놀랐소, 이질금이 그리 결정해서 말이오. 이제껏 다만 겁을 주고 물건을 빼앗아 쫓아버리기만 했는데, 미례 아씰 섬으로 데리고 와서 말이오." 어느 날은 흐린 하늘에서 비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소나기처럼 큰소리를 내며 비가 쏟아졌다. 미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달리기 시작하다 언덕을 조금 올라 솟아있는 움집을 보고는 그리로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비를 피하기 위해 미례는 안으로 들어갔다. 새타니가 그녀를 보고는 환히 웃으며 들어오라고 했다. "어서 오오, 미례 아씨. 옷이 다 젖었구려. 이리 오시오." 새타니가 마른 수건을 주며 빗물을 닦도록 시켰다. 미례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몸을 닦으며 비에 젖어 축축 쳐지는 치마를 살짝 들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지나다 들렀어요. 폐가 되진 않았나요?" "별소릴 다 하는구려. 이리 불 가까이 오시오. 안 그러면 오뉴월 고뿔 걸리겠소." 미례는 낯선 물건들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이리 저리 둘러보았다. 새타니가 웃으며 뜨거운 차를 건네주었다. 새타니의 곁에 앉아 향기로운 냄새와 뜨거운 기운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미례는 한기를 쫓을 수 있었다. "내 고향에서도 차를 마셔요. 그곳에서 나는 황차는 인근의 다른 나라에서도 탐을 낼만큼 향도 맛도 뛰어나다고 해요." "그래요?" "이 차는 맛이 좀 색다르네요. 이상한 향기가 있어요."


"마음을 안정시키는데는 아주 좋다오. 머리도 좀 말려야 하지 않겠소?" 새타니의 말에 미례가 찻잔을 내려놓고는 틀어 올린 머리를 늘어트리고는 물기를 닦았다. "새타니, 밖에서 흰둥이를 본 거 같아요." "그렇소?" "흰둥이가 맞아요?" "....그럴 게요." "하지만 흰둥이는...그가 아끼는 말이라고 들었어요." "그렇지요. 어려서부터 정 붙일 데 없는 휘아를 위해 전대 이질금께서 사 주셨다오. 어미 젖 떨어 진 어린 망아지였지요. 그 후론 늘 붙어 다녔다오." "그가 흰둥이를 새타니에게 준건가요?" "킬킬...그런 게 있었소....그런 셈이오." 새타니가 음흉하게 웃었다. "새타니는 말을 탈 일도 없어 보이고, 또, 말을 탈수도 없어 보이는데.." "미례 아씨, 그 녀석을 동무 삼고 싶어하는 이가 있어서 걱정 안 해도 되오. 아마도 휘아에게 있을 때 보다야 못할 테지만 그래도 편안할 게요." 비가 그치고 새타니와 헤어져 나오면서 미례는 허름하게 지어놓은 마구간에서 비를 피하는 흰둥이에게로 다가갔다. 얼마 전부터 마구간에 흰둥이가 보이지 않는 걸 알고 있었으나 미례는 그에게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소솜 역시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미례가 다가가자 흰둥이가 그녀를 알아보고는 반가운 소리를 내며 그녀 가까이 머리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그녀의 몸을 훑으며 냄새를 맡았다. 미례가 웃으며 손을 내밀어 그의 콧잔등을 쓸어주자 그의 큰 눈이 물기 젖으며 반짝이는 게 느껴 졌다. "무슨 일이니, 흰둥아. 그가 널 왜 새타니에게 맡긴 거야?" 흰둥이가 가끔씩 귀를 털며 고개를 흔들어댔고 미례를 보내기 싫은 듯 그녀의 옷자락을 물고는 놓지 않았다. 한참을 그곳에 서있던 미례는 어두워지자 그를 달래며 발걸음을 옮겼다. 소솜이 소리 없이 들어와 장부를 살피다가는 경휘가 일을 끝내고 그를 쳐다보자 머리를 긁적이며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뭐야?" "복주에서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이질금." "그래?" 작게 접혀진 종이를 펼쳐 읽던 그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경휘가 다가서는 소솜에게 쪽지를 넘겨


주었다. "어떤 자들 일까요? 누가 있어 감히 화평도방에 대해 정보를 얻으려고 하는 건지..." "강도에서 좀더 알아본 후에 연락을 해오겠지. 조만간에 복주로 가봐야 할 것 같아." "혹시...이질금.." "혹시 뭐?" "..아..아니오.." "생각되는 게 있으면 말을 해. 너의 그 신중함이 내게 좋게만 보이는 게 아니니.." "아니오,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고 얘기하겠소." "그래?...배는 어찌 되가는 거야? 이번 뱃길에 나갈 수 있겠어?" "조금만 더 손보면 된다 합디다." "그래? 달리 할말은 없나?" "새타니가 이질금 보고 다녀가라 하더이다." 소솜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경휘는 다른데로 생각이 가 있는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조만간에 가봐야겠지."

번 호 : 64 / 432 등록일 : 98 년 08 월 16 일 11:08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527 건 제 목 : [진현] 해적의 여자 28

"저기요..." 옷을 추스려 입고 문을 나서려는 경휘의 등에 대고 미례가 망설이며 부르자 그가 멈칫하더니 몸을 돌려 미례를 바라보았다. 며칠 전부터 그에게 말을 하려 기회를 보던 미례였으나 도무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이 순간마저 놓친다면 미례는 그가 돌아오도록 다시 말을 붙일 생각에 심란할 것만 같았으므로 크게 용기를 낸 것이다. "저..." 미례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앉아 머리카락을 귀 뒤로 꼽으며 그의 살피는 듯한 눈길을 피했다. "무슨 할말이 있는 거야?" 그가 미례를 채근하며 물었다. "......." "다시 벙어리가 된 건가? 무슨 말이야? 내게 하고픈 말이 있어?" 하늘도 놀랄 일이로군, 경휘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아이들에게....글을 가르치고 싶어요.....그래도 될까요?" 그는 의외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생각대로는 되어 본 적이 없는 그녀이고 보면 무언가 어려운 말 일거라고 생각이


되긴 했 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확실히 그의 예상 밖이었다. 글을 가르치고 싶다고? 아주 나쁜 생각은 아니긴 한데... "어떤 아이들 말이야?" ".....반하 또래의 아이들요. 아이들도 그러고 싶어하고....내게도 달리 할 일이 있으면 해서..." "계집아이들에게?" "..........." "그애들 아비 어미가 좋아할 거 같아?" " .....아이들을 맡겨도 좋다고...일단 허락을 해주기만 하면..." "무얼 가르칠 생각이야?" "셈도 가르치고 또 글도 가르치고....그저 아이들에게 이야길 들려줄 수도 있구요...." "무얼 만들려고?" 그의 말이 무슨 뜻이지 모른 미례는 조금 커진 눈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계집아이들을 가르쳐서 무얼 만들 생각이냐고. 그 애들은 자라서 제 사낼 만나 혼인하고 자식을 낳고 기를 줄 알면 되는 거야. 집안 일을 살펴서 제 식구 먹여 살릴 줄 알면 되는 거라구. 좀 글 을 안다는 귀족 계집을 하나 아는데 그리 다소곳하지도 않고 바보 같은 구석도 있어서 별로 달갑 지 않아. 머리에 바람이 들어 배웠음네 하고 사내들을 무시하는 꼴을 보고싶진 않아. 이 섬의 사 내들은 안 그래도 배를 타고 나가 살아. 힘겹게 일하고 들어와 제 계집이 이래라 저래라 잘 낫다 고 떠드는 꼴은 보고싶지 않을 거야."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그리고 여인이라고 집안 일만 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건 옳지 않아요." "보라구. 너처럼 따지고 드는 꼴을 참아내야 한다면 다들 날 원망할거야. 게다가 그런걸 나 혼자 결정할 수는 없어. 이 섬의 사내들에게 온갖 원망을 들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구. 여인네들이 그리 하지 않았어도 지금껏 잘 살아왔어." "....앞으로는 더 잘 지낼 수도 있잖아요." "되지도 않을 소리." 그가 말을 마치고는 돌아서서 나가려고 문을 조금 열어 젖혔다. "....보셔요." 미례가 포기하지 못하고 침상에서 내려서며 한 걸음 그에게로 나섰다. 경휘가 다시 미간을 찌푸 리며 그녀에게로 돌아서자 미례는 주춤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언제까지 그리 부를 꺼야? 저기요, 보셔요. 내게도 이름이 있는 걸 알아? 언제까지 그리해도


받아줄거라 생각하지마." 그가 그 동안 거슬렸던 호칭을 문제삼자 미례가 머뭇거리며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기어 들어가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이질금." "훗" 그가 가볍게 웃더니 다시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한 이불 속에서 잠을 자고 몸을 섞는 사이에 네게서까지 이질금이라 불리고 싶진 않아. 너 역시 날 이질금으로 인정하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나 역시 내키지 않는다구." "........." "이번 뱃길에서 돌아오면서 생각해 볼 테니 너 역시 날 부르는 일에 익숙해져 봐." 그가 약속한 일은 꼭 지키는 것을 아는 미례는 반 승락으로 알아듣고는 더 이상 조르지 않았다. "......허면 뭐라고...." "흠...어쨌든 이질금은 내키지 않으니..그래, 경휘라 불러. 그게 내 이름이야."

섬의 사람들이 부지런히 겨우살이 준비들을 끝내갈 즈음 경휘는 복주에서 돌아와 새타니를 찾았다. "날 보자고 했다고, 새타니?" "그랬소, 좀 앉으오." "무슨 일로 날 보자 했어?" "요즘 미례 아씨와는 좀 어떻소? 좀 나아지셨소?" "좀 나아졌을 것 같은가?" "이질금 표정을 보니 좀 나을 것도 같은데, 아니오?" "후훗, 좀 나아졌다고 하면 나아졌다고도 할 수 있겠지. 그래도 가끔씩 속을 뒤집어 놓는 짓은 안 하니." "그래요?" "가끔씩 날 피해 도망가는 짓은 안 하니 그나마 참고 있는 거지, 더 나아지지도 않았어." "...흠.." "미례 얘길 물으려고 날 부른 거야?" "그건 아니오...이제 겨울이 오잖소, 이질금." "그래서?" "뭐가 그래서요? 이질금이야 추운 겨울밤에도 함께 누울 미례 아씨가 있지만 날 보오, 이리 썰렁한 움집에서 겨울을 나야 하잖소." "..이젠 내 집이라도 내놓으라는 거야? 아니면 방이라도 하나 내놓으라는 거야?" "킬킬,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 역시 이곳을 떠나긴 힘들 것 같소." "그러면?" "겨우살이 준비 못한 불쌍한 노인에게 따뜻하게 덮고 잘 이불을 양보하시오."


"이불?" "그렇소. 아직 젊으니 좋은 이불 몇 채 양보한다고 이질금이 얼어죽기야 하겠소?" "....정 그렇다면...사람을 시켜 준비하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군. 경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를 뜨려고 일어섰다. "다른 건 싫소. 새로 장만한 것도 싫소. 이질금이 가진 것이라야 하오. " "이젠 망령을 떨 나이가 된 건가? 아니면 못된 새타니의 심술인가?" "클클클, 아무렇게나 생각하시구려." 그렇게 돌아온 경휘는 사람을 시켜 겨우살이 이불 몇 채를 새타니에게 보내도록 사람을 시켰다. 유모의 걱정스러우면서도 조심스러운 얼굴이 미례를 염려하며 굳어졌다. 며칠 후 추위가 닥쳤을 때 경휘는 처음엔 못된 새타니의 심술을 원망했으나 다음날 아침 눈을 떠서는 나름대로의 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즐거운 마음에 아침부터 휘파람을 불었다.

번 호 : 72 / 432 등록일 : 98 년 08 월 18 일 01:25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528 건 제 목 : [진현] 해적의 여자 29

"요즘은 어찌 지내오, 이질금?" 어느 날 흰둥이를 살피러 들른 경휘가 움막 바깥에서 흰둥이와 정을 나누고 있자 새타니가 키득거리며 뒷짐을 지고는 나타났다. "그저 그런 거지." "혹 미례 아씬 고뿔이라도 걸리진 않으셨소?" "미례가 병이라도 걸리길 바랬나? 안됐지만 아직은 멀쩡하더군." "왜 내게 심술이오, 이질금. 이질금이야 내게 고맙다 해야 할 처지일 듯 싶은데.." 경휘의 짙은 눈썹이 활처럼 휘며 치켜 올라갔다. 음흉한 노파 같으니. 눈치는 빠르군. 사실 그는 요즘 아침을 맞는 일이 즐거웠다. 있는 대로 새침을 떨며 멀리 떨어져 잠이 들던 미례가 아침만 되면 그에게 꼭 달라붙은 채로 잠들어 있는걸 발견하기 때문이었다. 미례도 눈을 떠 그와 시선이라도 마주치면 빨갛게 달아오르며 떨어지려 했지만 그는 킬킬거리며 비웃었고 놓아주지 않았으며 이내 미례도 체념해가며 그의 품안에서 꼭 달라붙어 잠이 들곤 했다. 그는 찬바람 부는 겨울날이 결코 싫지 않았다. 미례는 어느 날 부엌일을 돕다가 유모에게 보리수단이 먹고 싶다고 졸랐다.


"수단 요, 아기씨?" "음, 유모 우리 가락국에서 먹던 그 맛이 날까? 어젯밤 잠자리에 들려는데 갑자기 수단이 먹고 싶은 거야, 그래서 잠도 설쳤지 뭐야. 오늘은 유모에게 꼭 해달라고 해야지 했었는데 이제서야 기 억이 났어. 안 그랬음 오늘밤도 잠을 설쳤을 거야. 어때, 유모? 어려운 거야?" "뭐, 어렵지야 않지요 마는 갑자기 왠 수단이 드시고 싶답니까?" "몰라, 그저....고향생각을 하다보니 갑자기 생각이 나던 걸....." "하긴 뭐라도 좀 드셔야지요. 요즘은 통 맘껏 드시는 걸 못 봤습니다. 그래, 만들어 드리면 많이 드시렵니까?" "음. 약속해, 유모." 어느 날 경휘는 일찍 침실로 들어왔다가 미례가 온 신경을 쓰며 요즘 만들고 있는 바느질거리를 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반짓고리함 안에는 제법 정성 들여 만든 양말이며 턱받이며 정성 들여 수를 놓은 포가 담겨 있었다. 그가 자질구레한 물품이 들어있는 반짓고리함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미례가 들어서다가는 놀라며 물건들을 서둘러 치워 덮었다. "그게 다 뭐야?" 경휘의 퉁명거림에 미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무슨 비밀이라도 되는 양 그에게 보여주지 않으려는 미례의 태도에 심술이 났다. "...아..아무 것도 아니예요." "아무 것도 아니라구? 반하가 그리 작게는 안보이던데 제대로 대중은 할 줄 아는 거야?" ".......녜?" "아이들에게 주려는 게 아냐? 네가 가르친다는 아이들 말야." "....그래요...처음엔 잘..안되어서...." "제법 수는 놓는 것 같은데? 아주 보기 나쁘지는 않아." ".........." 이후에도 미례는 무언가를 하다가도 그가 들어서면 허겁지겁 감추기를 반복했으나 경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글을 못올리는 이유...................................................... 야해서가 아닙니다. 아직 수정볼 부분인데 손이 안가서..................... 후일을 기약하며(2 페이지 정도가 빌거라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뭐 내용상에 봅니다...................................

...큰

혼란은

없으리라고

어느 날 새벽 잠이 들었던 미례는 옆자리서 일어나 서둘러 나가는 경휘 때문에 깨었다. 밖이 몹시 소란스러웠다. "...휘..." 싸늘한 기운을 쫓으려 이불을 걷어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 미례가 불안해하며 그를 불렀다. "그대로 있어. 절대 밖으로 나오면 안돼." 낮지만 거역하기 힘든 목소리로 명령하며 어느새 그는 칼마저 꺼내들고 있었다. 갑자기 잠이 달아나며 가슴이 크고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가 바람처럼 방을 빠져나간 후에도 미례는 불안한 예감을 던져버릴 수 없었다. 안돼. 오, 세상에. 안돼. 미례는 겉옷을 걸쳐 입고는 떨리는 몸을 감싸며 유모에게로 갔다. 거의 흐느낌에 가까운 미례의 부름에 유모가 자리를 내어주며 감싸안았고 연신 등을 쓸어주며 미례를 달래었다. "유모, 나 무서워. 왜 이리 가슴이 두근거리지? 왜 이리 겁이 나는 거야? 무슨 나쁜 일이 있으려 고 이러지? 나 무서워, 유모. 이젠 나 어디로도 갈 수 없어. 이제 더 나쁜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진정하셔요, 아기씨. 괜찮을 겁니다. 좀 있다 밖이 좀 조용해지면은 곁시를 시켜 알아보기로 해 요. 아기씨, 이리 겁먹고 떠실 필요 없어요. 별일 아닐 겁니다. 진정하셔요." 그러나 미례의 불안은 맞아 떨어졌다. 포구 가까운 마을 입구에서 새벽녘 낯선 배 두 척이 소리 없이 다가왔고 번을 서던 이들의 태만 함이 더해져 뒤늦게야 대비하게 되었으므로 애궃은 몇몇은 채 싸워보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날랜 4, 50 여명의 침입자들은 점차로 경휘 쪽 사람들이 하나둘 대비를 갖추며 달려들기 시작하자 처음의 우세했던 위치를 잃어갔다. 결국 한 두 시진만의 싸움이 끝났을 때는 살아남은 침입자는 더는 없었다. 몇몇 미리 겁먹고 뒤로 도망쳐 살아남은 자가 있을지는 모르나 그 수는 아주 미미했다. 싸움이 끝났음을 알아챈 부녀자들이 제 식구가 무사한지 확인하려 하나 둘 몰려들었다. 경휘도 숨을 고르며 부하들이 침입자들의 시신과 동료의 시신을 나누며 확인하는 것을 한편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쪽의 피해는 10 여명에 이르렀다. 폭풍이 스쳐간 다음의 처음 몇 분인 듯한 시간이 지니자 작게 소리 죽인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 하더니 이내 더욱 커졌다. 채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에 생사의 길을 넘어 마주한 제 식구에 대한 아픔이 차 오르고 있었다. 피로 더러워진 칼날을 숙인 채로 피어오르는 분노를 접으며 경휘가 뒤처리를 지시하며 움직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의 지시대로 일사분란 하게 행동을 했다. 포구근처에서 배를 확인하고 시신을 수습하던 이들은 아직 목숨이 붙어있는 침입자중 하나를 발 견하여 경휘에게 보고했다. 경휘는 은밀하게 그를 옮겨 놓도록 지시하고는 목숨을 부지하도록 의무려를 보냈다. 이후의 이틀동안 경휘는 이질금으로서 장례준비와 남은 식솔에 대한 예우문제로 마을 장로들을 불러모았다. 가납사니를 비롯한 장로들은 경휘의 눈치를 살피며 번을 서는 일에 소홀했던 이의 책임을 엄히 물어야 차후에는 이런 일이 없으리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경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저으며 그 문제는 좀더 후에 알아서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장례를 마친 후에도 음울함이 걷히지 않은 마을분위기는 며칠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았다. 이 섬에 마을이 생기고 정착한 이후 최대의 변란이며 희생이었다. 비수의 대전에서 목숨을 잃은 그의 할아버지는 이미 그 스스로 목숨을 잃었으므로 이러한 난국을 접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겨울 바람은 뼛속까지 얼릴 정도로 차가웠다. 이제 봄을 맞을 계절이었으나 저녁바람은 아직 쌀쌀했다. 그러나 경휘는 그 차가운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늦게까지 바닷가에 나와있었다. 가슴을 눌러오는 답답한 무게를 가눌 길이 없었다. "이질금, 이러다 몸 상하겠소." 소솜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고통을 아는 소솜으로서는 달리 무어라 위로의 말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다들 걱정하고 있소....이질금은 혼자 몸이 아니니 이러지 마오." 그러나 경휘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위 위에 걸터앉아 검은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질금" "....땅을 파는 일이 쉽진 않았을 거야." 오늘 있었던 입관식을 두고 하는 말임을 아는 소솜은 나지막히 한숨을 쉬었다. 졸지에 당한 변고로 동쪽 무덤 가에 식구가 늘었다. 물론 경휘의 말대로 얼어붙은 땅을 파는 일이 쉽진 않았다. 미리 지펴 놓은 불로도 장정 여럿이 몇 번이나 땀을 닦아 내어야했다.


"너무......아파하지 마오, 이질금. 어차피 한 번은 건너야 할 강이니.....언제가도 가야할 인생이오." "....어린것들과 홀 어미된 이들은 어쩌고...." "....걱정 없이 먹고살도록 배려해 주었잖소." "그걸로 충분할까..." "시간이 필요하오, 이질금. 좀더 시간이 흐르면 잊혀질게요...그때 까진 넘쳐날 만큼 울어도 모자르겠지요." "..........." "미례 아씨도...불안해하는 눈치더이다. 아직 집에는 안 들어가 보셨소?" "........." "너무 마음 쓰지 마오, 이질금." "...맹문인 어찌하고 있어?" 애써 화제를 돌리는 경휘를 한 번 슬쩍 보고는 소솜이 일부러 가벼운 어조로 대답했다. "....풀죽어 있소." 맹문인 그날 번을 서던 청년이었다. 잠시 졸음을 못이기고 태만했던 순간으로 인해 많은 동료들 의 피를 흘린지라 그 역시 고개를 못 들고 집안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연민의 정은 있으나 사감은 접어두고 매섭게 본을 보여야한다는 장로들의 채근이 있었으나 경휘는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지 않았으므로 넘겨듣고 있었다. 누가 욕하고 패대지 않아도 맹문이 쓰린 가슴을 안고 있을 것을 아는 경휘로선 그에게 어떤 처벌 도 할 수 없었다.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테지, 누가 뭐래도. 얼마 전 복주에서 당도했던 서신과 살아남은 침입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경휘를 침잠 시키기에 충분헀다. 신라인들이라 하더이다. 노예시장을 전전하며 은근히 사람을 풀고 화평도방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려는 이들에 대한 조사 를 하던 복주의 방주가 전해온 소식을 들었을 때 경휘는 가슴속에서 불안스럽게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억눌러야 했었다. 사람을 찾는다 하더이다, 여인이라고 들었소. 오라비라는 자가 반년쯤 전부터 꾸준히 사람을 풀어 대고 있다고 하오 . 얼마 전 백제의 한 포구로 떠밀려 온 선원들과 소식을 접하고는 더 많은 사람을 풀고 있다하오 . 신라인은 아닌 것 같고 그래도 연줄은 있어 보인답니다. 살아남은 자의 입에서 나온 말도 거기에 조금 더 보태진 것이었다. 가락국의 귀족인 청년이 누이동생을 찾고 있었소. 강도에서 큰돈을 풀어 정보를 구하고 이미 죽었다면 시신이라도 찾아내길 바라더이다.


경휘는 다시 한숨을 크게 내쉬며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을 감내했다. 미례 때문이었다, 이 모든 소란의 근원은 미례를 찾기 위한 그녀 오라비의 노력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은 몇몇 안되었으나 경휘는 죄인 된 마음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없었다. 맹문이를 벌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연유 때문이었다. 누가 누굴 벌한단 말인가.

번 호 : 78 / 432 등록일 : 98 년 08 월 20 일 01:10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496 건 제 목 : [진현] 해적의 여자 30

미례는 어느 오후에 새타니를 다시 찾았다. "어서 오시오, 미례 아씨. 얼굴이 좀 상한게요?" 반기는 새타니의 인사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미례는 수줍음으로 자신의 뺨에 손을 대었다. "좀..오랜만인 거 같죠, 새타니?" "이리와 앉으시오, 미례 아씨. 안 그래도 요즘 궁금하던 차였소. 마을이 온통 심란하여 더 신경을 못썼구려. 어디가 아픈 건 아니오?" 새타니가 어두운 미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요즘 잠을 못 이뤘더니 그런가봐요...아프진 않아요." "쯧쯧, 그러면 안되지요." "....어디 나만 그럴까요? 요즘은 다들...." 미례는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더 이상은 마을에 닥친 불행의 그늘에 대해 말을 이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요."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미례가 주위를 살피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경휘는....휘는 여기 오지 않았나요?" "아니오, 어제 잠깐 들렸었소만. 왜 그러오, 미례 아씨?" "....오늘은 들르지 않았었나요?" "글쎄요, 이따 날이 저물면 혹 모르지요. 아직은 안 들렸소. 기다렸다 함께 가시려오?" "......며칠째 그를 보지 못했어요." 미례가 머뭇거리며 새타니에게 털어놓았다. "배를 수리해야하고 물건을 실어 나르는 것을 보러 갔을 게요. 이번 뱃길은 더 먼 길 일 테니 더 세심히 신경이 쓰일게요. 게다가 이번에 홀 어미된 여인네들도 감싸주어야 할 테고..좀 바쁘겠지요."


".....사스래처럼 그...홀어미들도 휘의 여자가 되는 건가요?" 새타니가 언뜻 미례의 근심스런 얼굴을 살피더니 어이가 없는 듯 웃었다. "이질금의 몸이 몇이라도 감당하기 힘들게요. 미례 아씨." "하지만 사스래는.." "사스래는 예외 입죠. 이질금이 젊은 나이에 혼자이다 보니 여인네가 필요했고 사스래도 홀로 되어 외로웠던 게요." "........" 다시 한참을 망설이던 미례가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새타니, 휘가 내게 관심이 없어지면....내 처지가 어찌 될 거 같으냐고 물었었죠?.....내가 물어 볼 께요. 그리되면 난 어찌될 거 같소?" "미례 아씨도 참...그런 염려는 할 필요가" 없다고 미례를 놀리며 웃으려던 새타니는 미례의 어두 운 얼굴에 한숨을 지으며 말을 삼켰다. "무슨 근심이 있는 게요, 미례 아씨?" ".........." "미례 아씨?" "그가...휘가 며칠째 돌아오지 않아요. 어디서 밤을 보내는지....낮에도 도무지 얼굴을 볼 수도 없어요." "미례 아씨가 이해를 해야겠지요. 이질금이 요새 몸이 몇이라도 모자르게 바쁘니" "그래도 잠은 자야 할거예요. 새타니, 아는 게 있다면 솔직히 말해줘요." 미례가 입술을 깨물며 새타니를 바라보고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어젯밤은 술에 취해 예 왔었소. 잠시 얘길 나누다가 피곤한 듯 쓰러져 잠들었기에 내 깨우지 못 했지요....오늘 아침 일직 나가던데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게요?" ".........." "미례 아씨, 너무 염려하지 마오. 이질금도 사람이니 왜 근심이 없겠소? 아마도 곧 돌아갈게요." 경휘는 소솜이 건네는 전서구에게서 떼어낸 서신을 읽고는 배를 띄울 준비를 하라고 낮게 명령 하고는 다시 바닷가로 발길을 돌렸다. 소솜이 그를 따라나서며 가서 쉬도록 만류했으나 그는 잠시만 혼자 있겠다고 말하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오늘 낮 그는 며칠만에 언덕길을 내려오며 포구 멀리서 잠시 머뭇거리며 서있던 미례의 모습을 보았었다.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그의 가슴에 찬 기운이 스미더니 무거운 통증이 잇 따랐다. 지금껏 그는 이유도 알려고 하지 않은 채 미례를 보면 그저 품고 싶었고 어렵지 않게 욕심을 채


울 수 있었다. 가끔씩 그의 뜻대로 되 주지 않는 미례가 미워 화도 내고 심술도 부렸지만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알고 싶지 않았었다. 귀찮더라도 그때 마음이 원하는 게 무언지,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원하게 하는지 알았더라면 좋 았을 거라고 그는 후회했다. 이젠 떼어버릴 수도 없는 존재로서 미례는 그의 가슴속에 있었다. 보낼 때 보내더라도 하루라도 더 그녈 품고 싶은 생각이 순간 치밀어 올라 그의 몸을 욱신거리는 고통 속으로 잡아당겼다. 그러나 경휘는 마음을 다잡으며 새로이 생겨난 동쪽 무덤가로 시선을 돌렸다. 옆에 두고도 이리 괴로우면 그녈 보내고 영영 보지 못할 때는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배가 준비되었다는 전갈을 받은 경휘는 덤덤하게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미례를 대면하기 위해 그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미례는 이미 저녁상을 물리고 억지로 다른 생각에 잠기지 않으려 바느질감을 가지고는 수를 놓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미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더니 얼른 시선을 피했다. 방 가운데 멈춰 선 그는 잠시 망설이며 미례를 살폈다. 미례의 표정은 반기는 기색도 싫은 기색도 아니었다. 미례 곁에 앉았던 유모가 고개를 숙여 인사 를 하고는 그를 지나쳐 방을 나갔다. 미례도 유모가 나가고 나자 반짓고리함을 정리하고는 말없이 몸을 일으켜 침상을 정리하며 이부 자리를 폈다. 그가 잠시 침상에서 시선을 피하자 미례가 이부자리를 펴고는 그를 슬쩍 바라보더니 머리를 틀어 올렸던 장식을 떼어내며 머리를 가지런히 풀어놓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겉옷을 벗었다. 미례에게 말을 하려던 그는 그녀의 행동을 보며 그 자리서 슬쩍 비켜섰다. 그는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는 미례가 오해하듯이 잠을 자려거나 그녀와 몸을 섞으려고 미례와 마주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숨을 쉴 때마다 느껴지는 그녀의 향내에 달아오르는 유혹을 떨치기 힘들었다. 하룻밤쯤 더 미롈 안는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경휘는 갈등하기 시작했다. 오늘이 미례와 보내는 마지막 밤이야.

번 호 : 82 / 432 등록자 : LJH1

등록일 : 98 년 08 월 21 일 00:06 이 름 : 이진현 조 회 : 498 건


제 목 : [진현] 해적의 여자 31

못내 그리며 살아야 할 많은 날들 가운데 오늘밤 기억을 부여안는다고 해서 잘못될게 있을까. 미례가 가지런히 옷을 벗어놓으며 침상 안으로 들어가자 그도 결심을 굳히고는 천천히 자신의 옷 을 벗었다. 미례의 시선이 수줍어하면서도 그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는 침상 안 이불 속으로 들어가 그를 기다리며 바로 눕는 미례의 몸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숨소리도 불규칙했다. 그것은 경휘 역시 마찬가지였다. 교역으로 섬을 떠나 있다 돌아온 첫날마다 그렇듯 그는 참기 힘든 욕정으로 신음하며 거칠게 미례의 몸을 탐했다. 그가 미례의 양쪽 다리를 자신의 허리위로 감게 하고는 그녀의 탐스럽게 솟아오른 젖가슴을 움켜쥐고 입안에 베어 물며 빨아들이고는 더 이상의 별다른 전희 없이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미례는 그의 거친 행위에 신음하면서도 달래듯 그의 등을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며칠간의 두려움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 사낸 다른 여인을 안지 않았어. 며칠이나 그녀를 불안하고 조바심 내게 했던 그의 행위는 여자가 급해 조급해 하고 있었다. 미례의 몸이 그를 달래며 자신의 몸 안에 깊숙히 수용된 상태로 뜨겁고 거칠게 성내고 있는 그의 양물을 부드럽게 조여댔다. 아직은 준비가 덜 되어 메마르고 아팠으나 미례는 견딜만하다고 느꼈다. "으음..." 그래도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그의 힘에 미례는 다정함을 갈구하며 신음했다. 그의 거친 숨결이 신음소리처럼 미례의 가슴 주위로 닿았다. "...휘...조금만 살살...흐흡..." 미례는 그의 몸 아래에서 점차로 그의 행위에 동조하며 몸을 움직였다. "휘.....제발......" 미례는 새벽녘에나 가능한 줄 알면서도 조심스레 그에게 자비를 구해보기도 했다. 빠르고 거친 움직임이 계속된 후 잠시 그의 몸이 굳어지더니 한동안 그 상태로 미례의 몸 위에 있었다. ................................................................................ ................................... .....................................여전히 미례의 두 팔은 땀이 배인 그의 등을 끌어안고 있었다. ".....무겁지 않아?" 잠시 후 그가 낮게 물었다. "아뇨."


숨쉬기가 버거운 게 사실이었으나 미례는 그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싫었으므로 그대로 있기를 고집했다. 그가 조금 몸을 움직이더니 미례의 옆으로 내려와 누웠다. 미례는 실망 섞인 한숨을 쉬며 그에게로 밀착되며 그의 옆구리에 안겨들었다. 그가 아무런 말없 이 미례의 몸을 쓸어안았다. 새벽녘 다시 한 번 그가 그녀 몸 위로 올라왔고 잠이 묻어난 상태이면서도 미례는 다정하게 웃으며 그를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몸을 만지며 적극적으로 그에게 몸을 열었다. 미례가 다시 잠들고 나자 경휘는 그의 가슴에 올려진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더듬어 만졌다. 그녀의 얼굴도 살짝 더듬어 보았다.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그가 뺨을 쓸고 얼굴 윤곽을 더듬자 미례가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네가 날 미치게 만들고 있는걸 알아, 미례? 그는 손을 아래로 내려 탐스러운 젖가슴을 감싸 쥐었다. 이젠 성숙한 여인의 젖가슴이었다. 널 보내고 며칠 밤이나 제대로 잘 수 있을까. 그가 안타깝게 미례의 고운 피부를 쓰다듬었다. 이제 겨우 여인이 되어 가는데. 그에 대한 미움증을 벗어버린 듯 요즈음의 미례는 간혹 그를 애태우며 요염한 몸짓을 하기도 해서 그를 즐겁게 만들었었다. 다른 사내에게 시집가겠지? 다른 사내 품에 안겨서도 내게 하듯이 달아오를까. 경휘는 순간 치밀어 오르는 불길을 억누르기 위해 애써 그 생각을 떨쳐버렸다. 가끔 키득거리기도 하고 깔깔대기도 하며 웃음소릴 내는 미례를 보았었다. 그 또한 최근의 변화 였다. 제길,......경휘는 미례의 몸을 부드럽게 만지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좀 이따가 준비해요, 유모. 그인 아직....많이 지쳤던 모양이야." 조심스럽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미례가 말을 하자 유모가 알겠다며 문을 닫았다. 미례는 발소리마저 죽이며 거울 앞으로 돌아와 앉아 머리를 틀어 올리며 고정시키다가는 침상을 바라보며 그의 존재를 확인했다. 어느새 조바심 내며 돌아오지 않는 그에 대해 몹시도 걱정하던 자신의 기억은 잊어버렸다. 그러나 미례에게는 걱정스런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지겹증을 내고 다른 여인에게 눈 돌린다면 하는 염려가 요즘의 미례를 몸달게 했다. 무섭고 싫기만 하던 사내였는데 이제와 조금씩 자리를 차지하는 그가 미례는 두려웠다.


다시 거울로 시선을 맞추며 자신의 모습을 살피던 미례는 낮게 한숨을 쉬고는 침상 쪽으로 다시 시선을 옮기다 언제 깨었는지 눈을 뜨고는 그녀를 바라보는 경휘와 눈길이 마주쳤다. "....피곤했던가봐요." 미례가 희미한 웃음을 보이며 그를 조심스레 살폈다. 그는 수줍어하는 미례에게서 시선을 피하며 일어나 앉았다. 그의 머리맡에는 그녀가 준비한 의복이 가지런히 개켜져 있었다. 그가 일어서서 옷을 다 입는 동안 미례는 어둡고 차가운 경휘를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세숫물 가져올까요?" 그녀가 일어나 문가로 다가가자 경휘가 고개를 저으며 만류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만둬." ".....허면...." 미례의 눈빛이 흔들렸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는 얼굴이었다, 그는. "유모를 불러, 미례." 경휘가 침상에 걸터앉아 마음을 다지고는 쌀쌀하게 말했다. "시킬 일이 있으면 내게 말해요." 경휘는 다시 미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야, 말 안 한다고 보내지 않아도 되는 것도 아니고.....이런 내키지 않는 일은 빠를수록 좋은 거야, 곧 그녀 얼굴에 화색이 돌겠지. "짐을 챙겨, 미례." 그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건성으로 그녀를 바라다보며 일부러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뭐라고...했어요?" 미례는 갑작스럽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짐을 챙기라구." 그가 낮게 되뇌었다. ".......왜요?" 미례가 떨리는 음성으로 그에게 다시 물었다. 뭔가 이상해, 어젯밤은 그를 화나게 할 어떤 잘못도 한 기억이 없는데. 아니, 다른 때 같았으면 미례의 반응에 기분 좋았을 그는, 휘파람이라도 불며 다정스레 히죽거리기라도 했을 경휘는, 오늘 너무도 달랐다. 다른 여인이 생긴 건가. 내게 지겹증이 난 건가. 미례의 가슴은 며칠 전부터 다가서던 정체 모를 두려움에 다시금 휩싸였다. 가슴이 크고 불규칙 하게 콩닥거리고 있었다.

번 호 : 87 / 432 등록자 : LJH1

등록일 : 98 년 08 월 22 일 01:24 이 름 : 이진현 조 회 : 549 건


제 목 : [진현] 해적의 여자 32

"집으로 보내 줄 거야." 경휘가 미례의 시선을 피하며 마지못해 말을 했다. 좋겠지, 꿈에도 그리던 곳으로 갈 테고 더 이상은 그녀의 언덕에서 하염없이 바다너머를 바라볼 필요도 없을 테니. "다른....여인이 있는 건가요?" 미례는 망설이다 이내 그 말을 입 밖으로 흘려내었다. 경휘의 눈길이 싸늘하게 빛나며 미례를 쏘아보았다. 빌어먹을. 그런 건 네가 알 필요 없어. 넌 떠나면 되는 거야. 이후 일은 내가 알아서 할 일이라구. 어떤 여인을 만나 몸을 섞고 자식을 낳고 살든지 그건 네가 알 바 아닌 거야. "짐을 싸라구. 미례. 사람을 보낼 테니 짐을 챙겨서 기다리고 있어." 그는 그 말을 던지고는 문가로 성큼 걸어갔다. "난 가지 않아요." 미례가 얼른 정신을 수습하고는 그의 등을 원망스레 쏘아보며 말했다. 생각지 못한 그녀의 말에 경휘가 돌아서서는 그녀를 마주보았다. "뭐라구?" 그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난 가지 않아요. 짐을 챙기지도 않을 거예요." "......." 그가 고집스레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고있는 미례를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여기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미례가 되뇌어 말했다. "내 말 못 알아들었어? 집으로 보내주겠단 말야. 네가 꿈에도 그리고 못 잊어 하던 가락국으로 보내주겠다는 말이야. 하루도 빠짐없이 올라가는 그 언덕배기에 더 이상 갈 필요가 없다고." "난 싫어요." "......." 그는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휘가 싫다면 더 이상 그 언덕에는 올라가지 않을게요. 고향 생각하며 울지도 않을게요." 그는 바보 같은 말처럼 들리는 미례의 애원에 가슴이 내려앉을 지경이었다. "아니, 그렇게 할 필요 없어. 넌 오늘 떠나게 될 거야. 저녁나절에는 네 고향 사람들의 배 안에서 웃으며 여기 일들은 다 잊어버리게 될 거야." "....난 안가요, 난 여기 있을 거예요." "고집 센 바보계집 같으니. 보내달라고 사정할 땐 언제고 이제와 맘이 바뀌어 왜 안가겠다는 거야? 내 속을 뒤집어 놓을 생각이야?" 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며 고함을 치자 미례의 큰 눈에 눈물이 고였다.


왜 그러는 거예요. 왜 이제와 날 보내주겠단 거예요. 미례는 고집스런 그의 태도에 원망 섞인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 보기만 했다. 유모가 밖에서 무슨 일인지 걱정스러워하며 문을 열고 그를 슬쩍 보았다가는 그의 성난 기세에 눌려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가 화를 삭히며 서성거리다가 유모를 향해, 닫히려는 문을 향해 명령했다. "유모, 당장 미례와 자네의 짐을 챙겨." "예?" 유모도 놀라며 그의 안색을 살피더니 미례를 쳐다보았다. "내말 못 들었나? 짐을 싸서 여길 떠날 준비를 하라고." ".....하지만 이질금, 미례 아기씨는..." "어디, 한마디만 더 해봐." 하기 싫은 소리를 반복하게 만드는 그녀들에게 짜증을 내며 그가 경고를 했고 그런 그의 기세에 눌려 유모도 아무 말 못하고 문을 닫으며 사라졌다. 잠시 침묵이 무게를 더하며 방안을 눌러왔다. 그는 씩씩대며 화를 삭이다 그대로 문을 나섰다. 좋다고 냉큼 짐을 싸는 그녀의 모습도 화나겠지만 안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미례도 그를 화나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참 후 출항준비를 마친 배 위에서 경휘는 미례 일행을 데려오도록 명령하며 사람을 보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배 안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는 다시 침착과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얼굴을 뒤덮은 먹구름에 나서서 물어보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갑판 위에 서 수평선 너머를 바라다보며 등을 돌리고 있었다. 잠시 후 미례에게서 돌아온 사내는 미례가 하나도 짐을 챙기지 않았으며 아무리 재촉해 보아도 꼼짝도 않고 집안에 있기만 하더라고 말을 전했다. 그는 다시금 분노가 치밀었으나 겉으로 성내지 않고 보폭이 큰 걸음으로 배에서 내려서서는 집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정말로 미례는 아침나절 그가 떠나던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침식사도 하지 않은 모양으로 음식 이 그대로 있었다. "또다시 단식 시위를 할 생각이야?" "......." 미례는 그가 방안에 들어섰음에도 표정 없이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땐 몸을 빼앗았지만 이젠 그러고 싶지 않으니 다른 방법을 써야겠군. 채찍 맛을 보고싶어?" "...차라리 날 그냥 죽여요. 난 여길 떠나지 않아요." "감격할 노릇이로군, 젠장." "내가 언제 사스래에게 간다고 당신에게 무어라 했나요? 다른 여인이 생겼음 그


여인에게 가요. 그래도 난 여기 있을래요." 그녀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경휘는 그 일로 미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숨을 고르고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다른 여인은 없어. 그래서 널 쫓으려는 게 아냐." 미례의 안색을 살피던 그가 조금은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서...짐을 챙겨. 널 보내려고 마음먹은 나도 마음이 좋기만 한 건 아냐." "....휘....제발..." "나야말로 제발 부탁이니, 짐을 챙기라구. 안 그러면 그대로 몸만 들춰 메고 배 안에 던져버리겠어." ".....왜요?.....왜 이제 와서 날 보내겠다는 거예요?" 미례는 고집을 꺾지 않는 그에게 눈물로 호소하며 물었다. "널 가지고 싶어서 내 눈엔 아무 것도 보이는 게 없었어. 지금도 맘 같애 선 널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럼 안보내면 되잖아요? 이질금인 당신에게 강요하거나 명령할 사람은 없잖아요?" "그래, 없지. 아무도 내게 널 보내라고 말하지는 않아. 하지만 미례야. 마을 동쪽에 무덤이 늘어갈 수록 내 맘도 무거워져. 널 품고 싶어. 널 다른 사내에게 보내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내 욕심 때 문에 내 식구나 형제, 친척, 친구나 다름없는 마을 사람의 피를 봐야하고 곡소리를 들어야 한다면 난 더 이상 널 안을 수 없어. 그들은 내게 너무도 소중한 사람들이고 내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야. 난 이곳의 이질금이라고." 미례도 놀라 깨었던 그날 새벽 이후로 마을사람 몇이 희생되었고 섬에 파견된 침입자들이 먼 신라의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신라인이 아니고 가락국의 사람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면서 미례는 돌아오지 않는 경휘를 걱 정했었다.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사람들을 잃었다고 미워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었다. 침입자들 가운데 혹여 그녀가 알만한 사람이 있는 건 아닌지 미례는 그 역시도 걱정이 되었었다. 그러나 그곳으로의 접근은 허용되지 않았고 유모도 그것만은 안 된다고 펄쩍 뛰었었다. 미례의 어깨가 가늘게 들썩이고 있었다. 좀체로 그의 앞에서는 소리내어 울지 않았던 미례였으나그의 의지는 너무도 굳은 것이었다. 미례는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져 흐느껴 울었다. 한동안 미례는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작은 울음소리를 간간히 내고 있었다. 그는 미례의 머리너머로 벽을 바라본 채 말을 이었다. "그들이 피 흘리고 죽어간다면 미례야, 난 더 이상 어젯밤처럼 널 품을 수 없어.


사내구실도 못해." 한참 후 흐느낌을 멈춘 미례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 미례야. 더 이상은 초라한 모습 보이지 말자. 그의 말을 들었잖아. 그에겐 나보다 더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걸. 더 이상은 이렇게 울며 매달리지 말자. 그리고는 그를 피하며 침상 가에서 반짓 고리함을 감싸안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이것만 가져 갈래요....다른 짐들은...필요 없어요." 그의 가슴이 다시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애써 표정을 감추며 말없이 문을 나섰다. "미례 아기씨..." 유모가 밖에서 모든걸 들은 듯 주저하며 미례에게 눈으로 많은걸 묻고 있었다. "....휘....유모에게 시간을 좀...줘요....포구로 따라 갈께요." "알았어." 그는 그들을 남겨둔 채로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갔다. "미례 아기씨.." "유모, 짐을 챙겨요. 고향으로 보내주겠대.....어서 떠나고 싶어." 미례는 이미 결심을 굳힌 듯 침착한 표정을 되찾고 있었다. "미례 아기씨." "어서 요." "왜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말 들었잖아요....그이에겐 나보다 더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 구요." "하지만 미례 아기씨가 말씀 하셨더 라면 이질금께서도 마음이 돌아설지도 모르는데..." "소용없어요." 미례 일행이 포구에 도착하자 가납사니가 손을 내밀어 배에 올려주었다. 경휘는 그녀 쪽으로는 시선도 안 두고 배의 갑판 한쪽에 등돌린 채로 출항을 명령했다. 침울한 배 안의 분위기 속에서 미례는 품에 있는 반짓 고리함을 꼬옥 안은 채 표정 없이 바닷물 만 응시했다. 그냥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어. 고향으로 돌아간들 부모님과 언니 오라버니를 어찌 본다지? 미례는 검푸른 바닷물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유혹을 느꼈다. 이제와 돌아간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천덕꾸러기처럼 집안에 숨겨진 여인이 되어 세상과 등지고 살아가야 하는 수모를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그냥 이대로 그의 앞에서 물로 뛰어들어 그의 가슴에 묻히는 여인이 되고 말까. 유모의 걱정스런 팔이 미례의 어깨를 감아 안았다. 미례가 생각에서 벗어나 잠깐 유모와 눈이 마주쳤다. 슬픈 눈을 한 미례의 마음을 아는 듯 유모 가 미례의 등을 위로하며 두드렸다. 이윽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배를 만난 경휘 일행의 배는 조심스레 배를 잇닿게 하고


미례를 건 네주었다. 그 순간에도 경휘는 먼 바다만 바라볼 뿐 미례에게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미례 역시 잠시 그의 뒷모습만 힐끗 바라보았을 뿐 더 이상 배 안에서 지체하지 않았다. 유모가 안전하게 건너오는 것을 돌아보던 미례는 자신에게로 한 발짝 다가서는 낯익은 얼굴을 확인하고는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번 호 : 96 / 432 등록일 : 98 년 08 월 23 일 23:14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535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33

꿈속에서도 그리던 그리운 사람이었다. "못된 일을 당하진 않았니, 미례야?" 어느새 알아보기 힘들게 더 자란 그의 품안으로 끌리듯 미례는 다가가 안겨들었다. "미루 오라버니." 그 동안의 그리움이 녹아든 미례의 울음마저 감싸안으며 미루가 그녀의 몸을 확인하듯 보듬었다. 한없이 재잘대며 삐치면 새침하던 귀여운 말괄량이 누이동생은 일년사이 성숙한 느낌을 내는 여 인으로 변해있었다. 미례의 소식을 접하고부터 내내 그의 꿈속을 괴롭히던 눈물 많은 어린 누이 동생은 아니었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서럽게 흐느껴 울며 그의 옷자락을 적시던 미례는 미루의 달래기도 하고 놀 리는 말투에 억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가는 멀어지는 경휘 일행의 배를 보고 다시 울음 을 터트렸다. "어째 나이만 더 먹고 자라기만 했지, 더 울보가 된 게로구나." 미루가 다독이며 미례를 놀렸다. 빠른 속도로 미례를 태운 배로부터 멀어지던 경휘 일행에게 작은 배 한 척이 다가왔다. 그들의 배였다. 이윽고 배가 가까이 닿자 새타니가 배를 가져다 대도록 말헀다. "아니, 새타니가 직접 왠 일이오?" 가납사니가 그녀를 부축하며 배로 인도하며 의아하게 물었다. 새타니는 혀를 차며 그들을 일별하고는 갑판구석에서 침울한 경휘에게로 다가갔다. "어리석은 짓을 했구려, 이질금." 다가서는 새타니의 핀잔을 들으며 경휘가 피식 웃었다. "이제 더 이상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없을 것 같으니 안된 모양이지? 내게서 뜯어갈


일이 없어지 니 서운한가, 새타니?" "쯧쯧.." 새타니가 경휘의 드러나지 않은 상처를 보고는 동정했다. "한발 늦었군 그래, 새타니. 그 말썽 많던 계집은 제 고향으로 보내 버렸지. 이젠 속이 시원하군." "마음에도 없는 소린 그만하구려. 그게 다 상처를 헤집는 소리요." "그렇지 않아." "방향을 바꾸오, 이질금." 새타니가 멀어지는 가락국의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림도 없는 소리." 경휘가 새타니를 외면하며 섬 있는 쪽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복주에 닿으면 오래도록 기루에 쳐 박혀 세상시름을 잊으리라 결심하는 그였다. 남궁녀석도 불러 밤새워 술을 부어야지. 섬을 떠나있는 아비처럼 그 역시 섬에는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을 알았다. 더구나 그녀가 오르던 언덕배기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으리라. "가납사니, 어서 뱃머리를 돌리게나." 새타니가 경휘를 바라보고는 혀를 차더니 가납사니에게로 다가와 명령을 내렸다. "새타니, 이질금은.." 가납사니가 새타니의 눈치를 보면서도 경휘를 가리켰다. "제 자식도 못 지키는 바보 같은 사내 말을 들을 생각인가?" 새타니가 싸늘하게 한마디 던지자 이해하기 힘든 그 말에 다들 어안이 벙벙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새타니?" 가납사니가 모르겠다는 듯 새타니에게 되물었다. "4 대 이질금이 될 아기씨가 미례 아씨 뱃속에 있단 말이지, 무슨 말이긴. 자네들은 바보 같은 휘아 때문에 다음세대 이질금을 가락국에서 키우고 싶나? 어서 배를 돌리라니까." 가납사니가 놀란 얼굴로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배를 돌리도록 명령했다. 경휘 역시 새타니의 말에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게...사실이야? 미례가...정말 아이를 가졌나?" 경휘가 일어서서는 빠른 걸음으로 새타니에게 다가와 확인하듯 물었다. 새타니가 입술을 삐죽이며 대답헀다. "미례 아씨가 순순히 가락국으로 돌아가겠다 하더이까?" "아니...그럼....미례가 그래서....?" "제 목숨처럼 아끼는 여인을 보내는 미련 곰 같은 사내가 어디 있소? 그것도 제 자식을 품은 여인을....쯧쯧...." 새타니가 다시 그의 얼굴을 살피며 혀를 찼다. 그래서 그토록 미례가 안가겠다고 우겼던 것인가? 경휘는 아침나절의 그 이해하기 힘든 실랑이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리고 무기를 가다듬으며 그는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바다에서 평생을 살아온 그들 일행의 솜씨를 가락국의 배가 당하지 못하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좀처럼 닿지 않는 미례를 태운 배를 바라보며 갑판 위를 서성댔다. 마침내 배가 닿았고 가락국의 배는 경휘 일행의 돌변한 행위에 놀람을 금치 못했고 순식간에 배를 점령당했다. 미례 역시 놀라움으로 그를 바라보는 사이 경휘가 재빠르게 그녀를 나꿔챘다. "...휘...." 당황하며 커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미례를 안심시키듯 그의 손이 미례의 뺨을 더듬었다. 하루종일 울다시피 했고 이제 겨우 울음을 그친 미례의 눈은 부어있었다. "왜...?" 그 순간 화살시위가 당겨지는 소리가 났고 미례의 비명소리와 더불어 경휘가 휘청거리며 왼쪽 어깨를 움켜쥐었다. "이질금" 가납사니를 비롯한 몇 명의 사내가 그를 감싸듯 주위를 둘러쌓았고 화살이 날아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새로운 화살을 재며 그들을 쏘아보는 미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배 안의 다른 사내들은 경휘 일행의 거친 태도에 목숨을 부지하려 대들지도 못하고 있었으나 미루는 다시 미례에게로 손을 뻗는 경휘를 보는 순간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죽여 버릴 테다. 다시 내 누이동생을 넘본다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미루는 비록 숫적으로 열세이고 싸울 의지에서도 열세임을 알았으나 이대로 미례를 다시 넘겨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미례를 빼앗긴다면 다시는 잠을 이룰 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밤을 자신에게 도움을 바라는 미례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잠을 깨었는지 그는 잠드는 것도 두려울 지경이었다. 아마도 벌써 어디론가 팔려갔거나 못된 해적 놈들에게 몸을 버렸을지도 모르니 찾아봐야 헛 일이라고 그를 만류하는 형제들에게 그는 미례를 찾아오고야 말 거라고 다짐했었다. 앓아 누운 어머니마저 미루의 결심에는 만류하며 그마저 잃고 싶지 않으니 제발 미례는 잊어버리 자고 말했었다. 미례를 태웠던 뱃사람들이 백제의 어느 포구에 닿아 몇몇이 목숨을 건졌다는 소식을 접하고부터 는 그는 더욱 열심히 미례를 찾아 수소문했다. 그리고 이제 미례를 품안에 안았으며 찾아냈는데 다시 잃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자신의 눈앞에 서는 안될 말이었다. 도적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경휘에게로 살 시위를 당기려는 미루를 보며 미례가 다급하게 외쳤다.


"안돼요, 오라버니. 안돼요, 그러지 말아요." 가까이서 화살이 몸에 박힌 사람을 처음 대하는 미례로서는 어찌 대해야 좋을지 몰라 두려웠으나 미례는 피 흘리며 낮게 신음하는 그를 부축하며 미루에게로 애원했다. "오라버니, 그러지 말아요. 그러지 말아요." 미례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차 올랐다. "미례야, 비켜서. 그자는 널 훔쳐냈던 못된 해적일 뿐이야." 마음 여린 누이동생이 피를 보고 두려워하는 줄로만 아는 그는 답답한 듯 미례에게로 소리쳤다. "그럴 수 없어요, 오라버니. 그럴 수 없어요." 미례는 그를 부축하며 안겨드는 미례를 보며 경악했고 잠시 후 활 시위를 내려놓았다. "오라버니, 미안해요.....미안해요....휘는 내 사람인 걸요. 이 사람을 해치지 말아요. 이 사람을 해치지 말아요." "....어떻게..." 미루는 너무도 놀라 말을 잊지 못했다. "오라버니, 부모님께 말씀 드려줘요. 미례는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다고....부모님을 그리고 뵙고 싶지만 이젠 돌아갈 수 없다고...미례는 이미 이 사람과 부부지연을 맺었으니....혼인하여 출가했다 생각하시고 잊으시라고....전해 주세요. 이 사람을 떠날 수 없다고....떠나길 원치 않더라고 말씀 드려주세요." "미례야." "가납사니, 내 오라버니를 해치지 말아요. 이 배를 그냥 두세요." 미례가 눈물을 훔치며 가납사니에게 애원했다. "저희는 미례 아씨를 모시러 왔을 뿐입니다. 미례 아씨만 이쪽으로 오신다면 저희는 아무도 해치지 않습니다." "....미례." 경휘가 고통 중에서도 미례에게로 고개를 들며 얼굴을 찡그렸다. "말하지 말아요, 휘. 자꾸 움직이면 피가 더 흘러요. 제발 그냥 내게 기대고 그대로 있어요. 가납사니, 좀 도와줘요...휘를 부축하게 좀 도와줘요." 가납사니가 신호하자 몇 명의 사내가 조심스럽게 경휘를 부축해서 그들의 배로 옮겼다. 미례는 경휘가 안전하게 배 안으로 옮겨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망연한 표정의 미루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오라버니..." "......." "...다시 만나게 되긴 힘들 거예요. 그죠?" 미례가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애써 웃음을 보이려 했다.


"너...정말...후회하지 않겠니? 이제라도 미례야, 네가 원한다면 함께 돌아갈 수 있어. 이게 네가 정말 원하는 거니? 응?" "오라버니...그인 내게 잘해요. 난...그의 아기도 가진 걸요. 오라버니와 이렇게 헤어지는 게 못내 속상하지만...그일 떠나는 것도 내겐 못 견딜 일인 걸요....그인...그저 무지막지한 도적이 아녜요. 오라버니가 염려하는 것처럼....아주 못된 사내도 아녜요." 미례는 어떻게든 다시 헤어져야만 하는, 못내 그리워하던 미루를 안심하게 해주고 싶었다. 정 많 은 오라버니이고 보면 그녀만큼이나 못 견뎌할 거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미례는 조금이라도 그가 마음의 부담을 덜며 그녀를 보내줄 수 있기를 바랐다. 오라버니가 오래도록 자신으로 인해 마음 아파하는 것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미례야." "오라버니도 좋은 인연 만나 행복하기를 바랄께요. 어머니, 아버님께도 잘 말씀 드려주세요. 오라 버닐 다시 보게 되서 정말 좋았어요." "미례야. 너 정말...." 미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미루의 가슴에 안겨들었다. "오라버닐 많이 그리워했어요...정말..." "내 꿈속에서도 널 많이 봤었다." "....내가 많이 그리워해서 그랬나봐요. 이렇게 오라버니가 날 찾아줘서 정말 좋아요. 이젠 염려하 지 말아요, 오라버니. 이렇게 잘 있는 걸 봤잖아요. 그죠?" "........" "돌아가는 뱃길 편안하도록 미례가 기원할 께요." "미례야" "....염려 말아요, 정말." 미례가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기자 미루가 깊은 한숨을 쉬며 미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미례가 경휘 일행의 배에 오르고 배가 떠나려 하자 유모가 다급하게 미례를 따라나섰다. "유모" "저도 따라갑니다, 미례 아기씨. 미례 아기씰 두고 돌아갈 순 없지요." "하지만 유모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잖아요." "미례 아기씰 두고는 못 갑니다. 제가 돌봐 드려야죠. 이제는 홀몸도 아니 신데..." "유모..." 미례가 반가움에 유모에게로 안겨들었다. 혼자 남겨진다면 미례는 정말 외로움을 많이 타게 되었을 것이었다.


번 호 : 107 / 432 등록일 : 98 년 08 월 26 일 04:46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506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34

가락국의 배와 결별하고 가납사니의 도움으로 배에 오른 미례는 걱정스럽게 경휘를 쉬게 한 갑판으로 다가가다 새타니의 존재를 알아차리고는 반가움에 울먹이는 소리를 내며 그녀에게로 안겨들었다. "새타니..." 새타니도 그녀의 마음을 아는 듯 미례의 등을 토닥여주며 달래었다. "못난 인연 만나 고생도 퍽이나 하오, 미례 아씨. 그래, 이질금이 가라 한다고 따라나섰소? 못 간다 버텨내야 하는 것도 모르는 게요?" "...하지만...." "그렇지요, 압니다. 내 왜 모르겠소. 워낙 사내들이 가끔 바보 같을 때가 있다오. 제 편한 대로 생 각하는 게 사내들이라오. 괜시리 미례 아씨 눈물 흘리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 곤욕스럽게 하더니 저 보오. 이질금마저 아니 흘려도 될 피마저 흘리잖소." 그녀의 말에 눈물을 훔쳐내며 미례가 고개를 들며 경휘의 상태에 대해 물었다. "화살을 뽑아내야 할게요. 한치만 아래로 화살이 꽂혔으면 이질금도 지금 저리 살아있지는 못했 을 게요." "괜찮을까요?" "좀 두고 보아야지요. 그래도 이질금 지금 죽을 운명은 아니니 괜찮을 게요. 더구나 한여름도 아니니 상처도 덧날 염려는 아니해도 되고." 경휘는 포구로 닿아 집으로 옮겨 화살을 뽑은 후에 정신을 잃었고, 간병하던 미례는 두려워하며 새타니에게 머물러 주기를 원했다. "새타니, 경휘를 데려갈지도 모를 못된 악귀가 범접하지 못하도록 곁에 있어줘요. 새타니라면 못된 귀신을 쫓을 수 있잖아요." 이틀 밤을 꼬박 새운 미례가 잠시 쏟아지는 졸음에 그의 곁에서 눈을 붙였다가 그녀의 머리카락 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깨어나 고개를 들었고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휘, 정신이 든 거예요?" "이렇게 밤을 샌 거야?" 미례는 안도하며 그의 물음에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이 높았어요....새타니를 불러올게요. 다들 걱정을 많이 했어요..." 미례는 눈가를 적시는 눈물을 훔치며 밖으로 나가 새타니를 불렀다. "유모..새타니...그이가 깨어났어요."


그의 상태를 알고자 했던 사랑채에 모인 사내들이 안도하는 한숨을 저마다 내쉬었고 그 동안 숨 죽여왔던 기운을 일거에 씻어내는 웃음도 나왔다. 새타니가 꾸부정한 허리에 뒷짐을 지고는 천천히 그의 방으로 들어와 상처를 살폈다. "됐소, 이제 괜찮을 게요." "고마워요, 새타니." 새타니의 눈흘김에 경휘는 겸연쩍은 듯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몸조리 잘하오, 이질금. 자주 보러 오리다. 이제 그 못된 성질도 좀 죽이오. 이제 이질금도 딸린 식구가 느는 게요." "......" 새타니를 배웅하고 다시 그에게로 돌아오며 미례가 문가에서 그를 향해 물었다. "이틀동안 아무 것도 들지 못해 기운이 없을 거예요....죽을 끓였는데 가져올 께요." 경휘는 죽을 가져와 그를 부축해 일으켜주며 떠 먹여 주는 미례를 그녀 몰래 바라보곤 했다. 그는 아무 말도 안 했으며 그로 인해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으나 미례는 그것을 그가 아프기 때문 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녁나절 곁시에게 잠시 지키도록 하며 그녀가 몸을 씻고 저녁식사를 하고 들어오자 경휘가 찡그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에게 오도록 손짓했다. "어디가 불편해요, 휘?" 미례가 놀라며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자 그가 낮은 음성으로 한마디했다.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마." 미례가 생각지 못한 그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잠깐이었는 걸요....이제 좀 쉬어야 할 테니..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요, 휘." "어딜 가는데?" "오늘밤은 유모와 함께 자려 구요." "왜?" "당신은 다쳤고 내가 옆에 누우면 상처를 건드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상처가 조금 아픈 게 나아. 이리 와서 옆에 누워." "하지만..." 미례가 망설이며 그 자리서 멈춰있자 그가 다시 퉁명스레 한마디 던졌다.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말라구." 미례는 처음으로 화내며 퉁명스런 그의 말투에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 같은 그의 태도에 웃음마저 나왔다. "날 보내려 했던 사람이 그게 무슨 말 이예요?" 미례가 짐짓 새침하게 말했다. "......알잖아.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어....그럴 수밖에 없었다구." 미례는 죽고 싶을 만치 고통스럽던 그 일을 떠올리며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훔쳤다. "죽는 줄만...알았어요...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다구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미례는 그때의 서러움에 멈추지 않는 흐느낌을 누르며 울먹였다.


"아비 없는 자식을 낳을까 걱정했던 건 아냐?" 그 조차도 생각지 못했던 말이 불쑥 튀어나왔고 한편으론 놀리는 듯, 달래는 듯한 그의 말에 넘쳐 흐르는 눈물로 인해 흐려진 시선으로 미례가 입술을 깨물며 원망스레 그를 쏘아보았다. "무슨...그런 말을..." 미례가 서러운 듯 더 심하게 흐느껴 울었다. "그럼 내겐 알려주지도 않을 작정이었던 게 아니었어?" "..........." "전서구라도 날려 내 자식이 태어났다고 알리긴 할 작정이었던 거야?" 마음과는 달리 미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줄 알면서도 그는 모진 말을 내뱉었다. 미례의 흐느낌이 더 거세졌다. 그 사실이 더 그를 화나게 했다. "내가 그 일을 몰랐더라면 넌 내 자식을 낳아 키우는데도 난 이 세상에 내 자식이 있는 줄도 몰랐을 거야. 그래도 되는 거야?" "......하지만 당신에겐....당신이 그리 말했잖아요, 형제나 제 식구보다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나보단....그들이 더 소중하다고.....그 사실을 털어놓은 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어요?" "왜 소용이 없어? 지금 네가 여기 남아 있는 이유가 무어라고 생각해?" "그..그렇군요....당신에게도 자식은...소중하군요..." 미례는 그에게서 시선을 피하며 옆으로 비껴 서서 옷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흐느낌을 삭였다. 그게 아니야, 경휘는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말을 하려했으나 미례는 새치름해지며 잠깐 나가보겠 다며 그가 말리기도 전에 문을 나섰다. "미례야." 그가 다급히 부르자 미례가 문밖에서 돌아보지 않은 채로 멈춰 섰다. "오늘밤은 여기서 자는 거야. 이리로 돌아와야 해." ".........." 미례는 빠르게 문을 닫고는 사라졌다. 바보 같으니. 자식 때문이 아닌걸 몰라? 난 네가 돌아가고 싶어 안달하는 줄 알았단 말이다, 미례 야. 자식 때문에 남길 원하는 게 아니길 바라는 내 마음을 넌 모를 거라구. 그는 닫힌 문을 향해 낮은 욕설을 입에 담았다. 아침마다 새타니가 찾아와 그의 상태를 보고는 약초를 으깨어 상처에 발라주었다. "이제 좀 견딜 만 하오?" "그래...좀 낫군." "그래, 이젠 무슨 일을 할 때도 내게 의논 할 테요? 아니면 또 이런 꼴을 당해보고 싶소?" 새타니가 빈정거리듯 그를 놀렸다. "알았어. 새타니에게 꼭 상의하도록 노력하지."


왠일로 그가 다소곳이 인정했다. "암, 그래야지요. 전대 이질금도 괜히 날 대우했던 게 아니라오. 내 이질금에게 조심하라 일렀던 걸 기억하오?" "...그래." 수긍하는 경휘이 말투와는 달리 그의 표정은 꽤나 굳어져 있었다. 미례는 불안스럽게 새타니를 바라보았다. "어디 아픈데라도 있는 게요? 안색이 좋지 않소." 새타니 역시 미례의 시선을 느끼고는 그를 놀리는걸 그만두고는 떠보듯 물었다. "아니, 아프지 않아. 잠을 좀 설쳤더니 그런가 봐." "그러면 안되지요. 좀 쉬도록 하오. 내일 다시 오리다." 새타니가 돌아가고 나서도 미례는 경직된 경휘의 표정을 살피며 그의 곁으로 가지 못하고 있었 다. 미례 역시 긴장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미례는 그제 밤 경휘가 잠자리서 화를 낸 이후로는 그와 몸이 닿는걸 애써 피하고 있었다. 그제 밤, 그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잠이 들었던 미례는 몸을 더듬는 그의 뜨거운 손길에 깜짝 놀랐다. "휘...당신은...당신은 아직 몸이 회복되질 않았어요. 이러면 상처가 도져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 그러나 그는 괜찮다며 미례의 몸을 만지며 그녀를 안으려 들었다. 미례는 옷 속으로 들어와 맨살을 더듬는 그의 손길에 피하지도 못하고 안타까움을 담은 걱정에 그대로 있었다. 곧 그가 미례에게로 몸을 겹쳐왔으나 거친 신음소리를 내며 굳어졌다. 그의 다친 어깨가 힘을 쓸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 봐요, 휘. 이러지 말아요." 미례가 조심스럽게 그를 부축해 그의 자리에 눕도록 도와주었다.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숨소리 또한 거칠었다. "아직도...아파요?" 심하게 오르내리는 그의 가슴과 악다문 입술을 살피며 미례가 일어나 앉아 물었다. "아니..아프지 않아." "휘, 그러지 말고 아프면 새타니가 두고 간 약을 들어요." "괜찮다니까." "하지만 당신은 아파 보이는 걸요." "그만 누워, 미례." 그가 미례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조금 떨어져 누웠다. "...휘." 미례는 할 수 없이 다시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달아나 버려 정신만 말짱해졌고 옆에서 가끔씩 숨


을 몰아쉬는 경휘가 걱정스러웠다. "...휘, 그러지 말고 약을 들어요." 미례가 그의 뒤척임에 참지 못하고 다시 말했다. "젠장, 그만 잠을 자라니까. 날 그냥 내버려두고 자라구." 그가 난폭한 어투로 쏘아붙이자 미례는 그만 기가 죽어버렸다. 하지만 이렇게 미련스럽게 구는 그가 이해되지 않는 미례가 작은 소리로 항의했다. "..휘가 옆에서 뒤척이면 나도 잠을 잘 수 없는 걸요." "그래? 잘됐군. 그럼 베게를 가지고 유모 방으로 건너가." "...휘." "바보 같으니. 내가 아파서 이러는 것 같아? 네 몸이 닿으면 미칠 지경이라구. 어서 가버려." 할 수 없이 미례는 그에게서 떨어져 유모 방으로 건너갔다. 유모는 놀라워했으나 미례는 모든 걸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둘러대듯 그가 아파해서 그의 상처 를 건드릴까봐 라고 만 했다. 다음날 저녁도 미례는 그의 자리를 봐주고는 유모 방으로 건너가려 하자 경휘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미례야, 오늘은 여기서 자." 미례가 그를 살피며 망설였다. 그의 변덕스러움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미례는 망설였다. "괜찮으니 여기서 자도 돼. 네가 있어도 네가 없어도 매 한가지니."

번 호 : 112 / 432 등록일 : 98 년 08 월 27 일 03:44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557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35

정말 그랬다. 어젯밤 경휘는 그녀에게 화를 내며 유모 방으로 쫓아 보냈으나 그녀가 나가고 나서도 한동안을 뒤척이며 잠들 수 없었다. 사스래 였더라면 그를 도와 욕구를 풀어줄 수도 있으련만 경휘는 차마 미례에게 그렇게 해달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욕구불만만 쌓여갈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숨길 수 없이 그 의 얼굴 위에 드러나고 있었다. "미례 아씨, 이질금과 다퉜소?" 그의 상처를 봐주고 방을 나서는 새타니를 배웅하며 미례가 따라나오자 새타니가 낮게 말을 꺼냈다. "아..아니오." "한데 이질금 안색이 왜 저렇답니까? 심술이 잔뜩 난 사내 같지 않소?"


"아픈 모양이예요. 약을 들라 해도 고집만 피우고, 점점 더 화만 내고 있어요."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으나 미례는 차마 새타니에게 말을 하지 못했다. 달아오르는 미례의 안색을 살피며 새타니는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흠흠..." 새타니가 이유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 키득거리며 안뜰을 지났다. 그렇지, 미례 아씨에게 대우받지 못할 때 자신에게로 달려와 약을 내 놓으라 하던 때의 경휘의 퉁명거림과 유사했다. 하긴 아픈 건 왼쪽 어깨이지 그의 다른 몸이 아니었다. 왠만큼 상처가 나아가는 지금, 그에겐 사내로서의 또 다른 욕구가 있을 것이었다. "새타니...얼마나 있어야 그가 거동할 수 있을까요?" "이질금 성질에 오래 누워 있지도 못하오. 아마 조만간에 털고 일어날거요." "누워 있기만 하니 답답한지 자꾸 짜증만 내요. 점점 더 감당하기 힘들어져요." "흠..하긴 미례 아씨 하기 나름이라오." "어떻게요?" "생각해 보오. 어찌하면 이질금이 좋아하겠나." "새타니." 며칠전의 그와의 실랑이를 떠올리며 그녀의 얼굴이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미례 아씨도 아주 모른 척 할 수는 없을 게요. 저리 두면 점점 더 대하기 힘든 사내가 되어갈 테니." "하지만 어떻게.." "미례 아씨가 먼저 다가가는 걸 이질금도 좋아하지 않겠소?" 새타니가 그 말을 남기고는 마구간의 빈자리를 한 번 둘러보더니 이내 대문을 나섰다. 달아오른 얼굴로 미례는 한동안 그에게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잠을 좀 자야겠다는 경휘를 두고 방을 나온 미례는 혼자서 산책을 하며 골몰히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미례는 아유타의 할머니가 건네준 책이 생각났다. 이번에 돌아가면 혼인하게 될 테고 그리되면 다시는 아유타로 돌아오기 힘들 테니 선물로 주겠다 며 요긴하게 필요할 것이라고 할머니는 의미있게 웃었다. 카마 수트라. _ 오래 전부터 내려온 지침서라며 생각날 때 읽어보도록 건네준 그 책. 미례는 지체없이 유모를 졸라 그들의 짐을 찾도록 했고 그 안에서 드라비다어로 된 원하던 책을 찾아냈다. 혼자 그의 사랑채로 건너간 미례는 눈을 반짝이며 책을 넘겼다. 이해를 도우며 간혹 그림도 곁들인 그 책은 미례의 얼굴을 다시 달궈놓았다. 이 섬에 오기 전이었다면 미례는 얼굴이 달아오르고 손이 떨려 감히 그 책을 다 읽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경휘와 몸을 섞고 그의 아이까지 가진 미례에게는 그래도 덜 충격적인 것이 었다. 운율을 맞추어 달콤한 시어처럼 적혀진 글들을 읽으며 미례는 도움이 될만한 부분을 여러 번


읽어 나갔다. 저녁을 마치고 그의 잠자리를 봐주며 미례가 물을 떠다 그의 몸을 닦아주었다. 그는 미례의 손이 닿는걸 피하는 듯 하면서도 한편으론 체념하는 듯, 한편으론 기대감을 가지고 그녀가 하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그가 침상에 앉아 다리를 내린 채로 걸터앉아 있었고 미례가 씻겨주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있었다. 발까지 닦아주고 나서 미례가 일어서니 그의 눈동자가 짙게 변하며 미례를 잠시 쳐다보다가 는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자리에 눕는걸 확인한 미례가 불을 끄고는 침상 안으로 들어왔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가 이상히 여기며 피하면 어쩌지. 미례는 막상 결심을 하고서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잠들지 못하고 다시 뒤척임을 보이자 미례는 작은 한숨을 쉬고는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으며 그의 가슴의 맨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흠칫 놀라는 그의 몸이 느껴졌다. 미례는 다시 용기를 내어 그의 가슴과 배의 피부를 부드럽게 쓸며 그에게로 몸을 밀착시켰다. "..뭐..뭐야, 왜 이러는 거야?" 그가 말까지 더듬으며 그녀를 떼어놓았다. 미례는 잠시 위축되었으나 더듬는 그의 말투로 미루어 아주 싫은 것은 아닌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는 일어나 앉아 옷을 벗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이 놀람으로 휘둥그레지는 것을 미례는 알았다. "날 죽일 작정이로군." 그가 거칠게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알몸으로 그에게 다가들며 미례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옷도 벗겨 주었다. 웃옷을 벗기는 일은 쉬웠으나 바지 끈을 푸는 미례의 손은 잠시 떨렸고 속으로는 많이도 망설였다. 미례가 그의 오른쪽 다치지 않은 어깨 안으로 파고들며 자리에 누웠고 그의 몸 위로 반쯤 겹치며 그의 목선을 더듬으며 손으로 그 뒤를 이어 입술로, 혀로 더듬었다. "흠.." 그의 입안에서 참았던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의 가슴이 빠르게 뛰었고 심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미례의 가슴이 그의 피부를 간지르자 그는 참을 수 없는 고문에 숨을 삼켰다. "뭘 하려는 건지 아는 거야?" 그가 미심쩍은 듯 물었으나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쉰 듯 잠겨 있었다. "...알아요." 작은 소리로 미례가 수줍게 대답했다.


"그래? 지금 뭘 하려는 거야?" 그가 짖궃게 미례의 대답을 요구했다. "...휘가 편히 잘 수 있도록...치료를 하는 중이잖아요." 미례가 여전히 수줍은 목소리로 낮게 속삭임을 되돌렸다. "흐훗." 그가 어이없는 듯 웃음을 지었다. 마음 한편에서는 또 다른 기대감과 설레임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아랫배를 지나 성내고 있는 그의 양물을 만지는 부드러운 미례의 손길에 그는 다시 앓는 신음소리를 내었다. 처음엔 망설이며 미례는 오후에 읽은 대로 부드럽게 그의 양물을 감싸쥐었다. 그녀가 노력할 필요도 없이 그의 양물은 이미 커질 대로 커져 있었다. 그는 그녀의 몸이 닿은 순간부터 그런 상태로 있었다. 미례는 처음 만져보는 그것의 크기에 놀라며 두려움을 느꼈다. "미례야.." 그가 망설이는 미례의 손길에 항의 섞인 신음소리를 내며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미례는 용기를 내어 결심을 굳히고는 몸을 일으켜 조심스럽게 그의 몸 위로 올라갔고 그의 거친 숨소리를 달래며 한 손으로 그의 양물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몸을 열며 그의 허리께로 서 서히 내려앉았다...................................................................... .................. 미례는 자유로워진 손으로 그의 가슴을 쓸며 진정시키려 했고 그때 그녀의 피부를 더듬던 그 의 오른손이 그와 닿은 미례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미례는 그의 요구에 맞춰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미례 역시 지쳐 그의 가슴 위로 무너지듯 상체를 겹쳤다. 미례의 긴 머리카락이 그의 어깨며 몸을 덮고 간지럽 혔다. 미례는 그녀의 몸 안에서 작아지는 그의 몸을 느끼며 잠시 후 옆으로 몸을 눕히려 했으나 그의 손이 미례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휘." "아직..움직이지 말아. 그대로 있어." "하지만..그러면 잠들기 힘들텐데.." "네 몸에 깔리기라도 할 것 같애? 아니, 넌 깃털처럼 가벼워." 미례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의 말투가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제 좀..편안해진 거예요?" "으음." "...다행이예요." 그녀의 몸 안에 남아있는 그의 양물은 힘을 잃었으나 미례는 어색함을 느끼면서도 그의 말대로 그대로 잠을 이루려고 노력했다.


미례는 그의 목을 감싸안으며 그의 오른쪽 어깨에 기대며 엎드린 채로 아이처럼 잠이 들었다. 경휘도 몇 번 그녀의 등을 쓸어 보다가는 오랜만의 단잠으로 빠져들었다.

번 호 : 114 / 432 등록일 : 98 년 08 월 28 일 12:51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539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36

오후가 되자 낮잠을 자던 경휘가 깨어서는 미례를 찾았다. 미례가 방안으로 들어오자 그가 말릴 새도 없이 침상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왜 그래요, 휘?" 경휘는 그제 밤 이후로 다루기 쉬운 사내가 되어 있었다. 그는 이전처럼 퉁퉁거리지도 심술을 부리지도 않았다. 미례는 두렵고 무섭기만 했던 그의 존재가 이젠 더 이상 두렵지 않음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옷을 좀 줘." 미례가 잘 개켜 두었던 옷을 꺼내 그에게 가져갔다. 그리고는 어깨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웃옷을 입는걸 도왔다. 그리고는 잠시 떨어져 돌아서자 그가 피식 웃고는 바지를 새로 입었다. "이제 돌아봐도 돼." 미례가 얼굴을 붉히며 돌아보자 그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물었다. "밖의 날이 어때?" "좋아요, 산들바람도 불고 햇살도 따뜻해요." "요즘도 언덕에 올라가나?" "아뇨, 요즘엔 통 짬을 낼 수 없었어요." 물론 그것은 경휘 때문이었다. 그녀가 잠시만 눈에 안보여도 그는 까탈스럽게 굴며 그녀를 불러내곤 했으므로 미례는 감히 산책 을 나갈 엄두도 못 냈었다. "그럼 함께 나가볼까?" 경휘가 미례의 의중을 떠보며 물었다. 미례의 표정이 밝아지다가는 이내 걱정으로 변했다. "하지만..휘.. 상처가 아직.." "이젠 좀 견딜 만 해. 어깨를 다친 거지, 다리를 못 쓰게 된 게 아니잖아. 갑갑증이 나 죽을 지경 이야." "괜찮겠어요?"


"그래." 미례와 경휘는 유모에게 집을 맡겨놓고는 대문을 나섰다. 미례는 오는 길에 새타니에게 들르기 위해 식량과 찬거리를 정성껏 쌓아 넣은 바구니를 들고나섰다. 미례는 오랜만에 오르는 언덕길을 그를 따라 걸으며 기쁨을 느꼈다. 여길 올라가는 길이 이토록 즐거웠던 적이 있었던가. 가락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 얼마나 절망스러워 하며 속울음을 울었던지, 미례는 그때 일을 다시 생각하자 눈물이 아른거렸다. 그 일이 있기 전에는 이 길이 마냥 그녀를 고향으로 안내하는 길인 듯 생각되던 미례였다. 억지로 이 섬을 떠나게 된 마당에서야 미례는 이 길 마저도 그리워졌었다. 경휘를 알아본 마을 사람들이 몸은 괜찮은지, 다들 걱정을 담아 물어왔고 경휘도 그때마다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때면 미례는 그보다 조금 쳐지거나 앞서 걸으며 그들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경휘와 헤어져 길을 가던 이들이 다시금 그들 모습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언덕길의 끝에 다다르자 미례와 경휘는 자리에 앉아 잠시 쉬면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좋으냐, 미례야?" 그가 여전히 바다를 향한 시선으로 미례에게 한마디 건넸다. 미례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고향으로 가고 싶지 않아?" 경휘가 미례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묻자 미례의 표정이 굳어졌다. "......." "고향이 그립지 않느냐고 묻는 거야, 널 다시 보내겠다는 게 아니고." "....그리워요." 조심스럽게 미례가 말문을 열었다. "이맘때면 사람들이 무얼 할까, 부모님과 오라버니들은 어찌 지내실까, 궁금해요." 그녀의 목소리 또한 그리움이 배어있었다. "이곳은 어때? 네 고향과 많이 달라?" "사람들도 순박해 보이고 다들 밝아요. 고기잡이며 농사짓고 사는 모습을 보면 고향과 비슷하기 도 해요. 좀 다른 것도 있구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바다로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낮지만 확신에 찬 말투로 그녀에게 약속했다. "혹 나중이라도 기회가 된다면 미례야, 네 고향을 여행하게 되면 널 데려가겠다고 약속할게. 훗날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네가 원한다면." "......" 미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경휘는 따뜻한 햇살 아래 미례의 시선을 잡으며 한동안 미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얀 살결에 짙고 긴 속눈썹을 가진 큰 눈과 작고 도톰한 입술이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아직도 소녀 같은 모습을 벗지 못한 그의 여인이었다. 미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으로 그는 미례의 턱을 살짝 쥐면서 그를 향해 마주하도록 했다. 미례의 시선이 그와 마주쳤고 웃음기 머금었던 눈빛이 그가 서서히 그녀에게로 접근하자 흔들리 더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경휘의 입술이 미례의 입술에 닿았다. 미례는 처음 겪는 입맞춤에 두근거리며 그대로 있었다. 한 해 넘도록 그와 몸을 섞었으나 요즘에 와서야 미례는 그것이 즐거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었다. 그는 미례의 젖가슴을 핥고 빨았던 적은 있어도 한 번도 잠자리서 입술을 부비거 나 이렇게 부드럽게 입술을 겹쳤던 적은 없었다. 미례가 긴장하며 숨을 멈추자 그가 달래며 혀로 입술을 핥으며 부드럽게 미례의 입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혀와 닿았고 입안의 부드러운 곳을 음미하며 미례의 숨결을 느꼈다. 낯선 그의 행위에 처음 긴장하던 미례는 곧 부드러운 그의 움직임에 눈을 감았고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였다. 숨이 차 오르자 그가 미례를 놓아주었고 잠시 후 다시금 미례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에 감미롭게 입맞추고는 떨어졌다. 생소한 경험이었으나 미례는 오히려 그와 몸을 섞는 행위보다 좀 전의 그 행위가 더 좋아질 것 같은 느낌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아직도 입안에서 그의 혀가 부드럽게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들어 미례는 확인하듯 혀로 그가 닿았던 부분을 핥아보았다. 새타니에게 들려서도 미례는 수줍어하면서도 그 몰래 그의 입술을 훔쳐보았다. 집으로 돌아온 미례는 경휘를 쉬게 하고는 유모에게로 달려갔다. 몸을 섞는 일이야 아직도 쑥스러워서 유모에게 무어라 말 못한다 해도 미례는 오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유모에게 말하고 싶었다. "유모 유모" 미례의 조르는 듯한 밝은 목소리에 유모가 안뜰의 화단을 만지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미례 아기씨?" "...뭐해요, 유모?" 미례가 유모의 옆에서 쪼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꽃나무를 심으려 구요, 집안이 크기는 한데 너무 적막하네요. 오랫동안 여인의 손길이 없었던


듯 해요. 이젠 미례 아기씨도, 저도 예서 살게 되었으니 좀 가꿔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요.." "어디, 밖의 나들이는 즐거우셨습니까?" "음, 다음엔 유모도 함께 가요." "얼굴이 밝아 보이시는데요." "유모, 유모" 미례는 막상 이야기하려니 쑥스러워져 얼굴을 붉히며 유모를 불렀다. "왜 그러셔요?" 유모가 미례의 표정을 보고는 이상한 듯 물었다. 미례가 밝게 웃으며 시선을 내리고는 물었다. "유모..유모도 그런걸 해봤어요?" "무얼 요?" "...휘가..휘의 입술이 내게 닿았었어요. 그이의 입술이 내게 닿았는데...유모...그 느낌이..뭐라 말해야 할까요?..정말..좋았어요." "산책을 가셨던 게 아니었어요?" "아니, 산책을 했어요. 그 언덕에 올라있는데 바다를 보다가 그이가...내게 다가왔어요. 입술이 닿았는데.." 미례가 그와 닿았던 입술의 감촉을 되새기듯 손가락으로 입술을 더듬어 만져보았다. "아니 그럼 이번이 처음 입맞춤이었단 말이오?" 유모가 놀라운 듯 약간 상기된 미례를 바라보았다. "그랬어요...입맞춤..그런 거였어요?" "아니 한 해 넘도록 잠자리를 같이 해온 사이에 그 동안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구요?" "음..헌데 유모, 난 그게 그리 좋은 건지 정말 몰랐었어. 다른 사람의 입술이 내게 닿고 혀가 입 안으로 들어 왔는데도 싫거나 역겨운 느낌이 없었어. 유모도 그런걸 해봤어요?" 유모가 달아오른 미례의 얼굴을 보며 히죽 웃었다. "자식까지 낳았던 사이에 그럼 안 해봤겠소?" "유모도 그렇게 좋았어?" "미례 아기씨도 이질금이 마음에 드는가 보오. 좋아하는 사내라야 좋은 게지, 어디 아무 사내 하 고라야 좋은 느낌이겠어요?" "...그런..그런 건..아냐." 미례는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번 호 : 123 / 432 등록일 : 98 년 08 월 30 일 11:22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501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37


다음날도 경휘는 오후가 되자 미례에게 산책하러 나가자고 말했다. 미례는 유모의 의미심장한 웃음을 뒤로하며 조용히 그를 따라 나섰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미례는 어제처럼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이야기를 나눴고 그가 다시 입맞춤을 위해 다가오자 수줍음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가 익숙하게 미례의 입안으로 들어왔고 부드럽게 입안을 탐색하고는 혀로 미례의 민감한 부분 을 애무했다. 미례가 작은 한숨을 쉬었고 그의 자유로운 한 손이 미례의 옷섶을 파고들며 봉긋이 솟은 가슴을 감싸쥐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점차 목선을 지나 미례의 옷을 풀어헤치며 드러난 젖가슴을 숨결로 간지럽히며 얼굴을 묻었다. 산들바람에 노출된 살결과 그의 체온에 미례는 어쩔 줄 모르며 미약하나마 그를 말렸다. "....휘.." "왜? 싫은 거야?" 그가 어깨까지 드러나도록 미례의 겉옷 자락을 벌리며 짖궃게 물어왔다. 미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시선을 돌려 불안하게 주위를 살폈다. "휘...누가..볼지도 몰라요. 난...두렵다 구요." "누가 본다는 거야? 여긴 아무도 없어, 우리 말고는"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드러난 미례의 탐스러운 가슴을 자유로운 한 손으로 감싸 올리며 바람결에 닿아 솟아오른 유두를 혀로 핥았다. "흐음..휘..이러지 말아요." "네 살결은 비단결 같애. 이렇게 희고 투명한 살결은 본적 없어. 아무리 쳐다봐도 질리지 않아." 미례는 다시금 수줍음으로 그의 노골적인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가 한동안 그녀의 가슴에서 떠나지 못하더니 가녀린 어깨도 더듬으며 입술을 댔다. 미례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추운 거야?" 그가 걱정스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아뇨." 경휘는 한 번도 이렇게 부드럽게 그녀 몸을 애무한 적이 없었다. 그저 힘으로, 주체 못할 충동으 로만 그녀 몸 속을 헤집었고 미례는 처음 너무도 큰 그의 양물에, 그것이 주는 고통에 의식을 잃기도 했었다. 그의 행위에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된 건 얼마 전부터였다. 그래, 첫 몸을 앓고 난 후에. 그전에는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고통스러워도 그저 힘겹게 요 자락을 움켜쥐고는 참아내었다. 참을 수 없는 비명이 가끔 터져 나왔지만 경휘는 어떤 배려도 없이 제 욕심을 채우기에 바빴다.


그가 뱃길에서 돌아와 오래 떨어져 있을 경우엔 더 심했다. 그런 날 밤엔 미례는 미리 겁먹고 굳어졌으며 그래서 더 고통스러웠다. 작고 여린 부드러운 그곳으로 다정함이란 찾아볼 수 없이 밀고 들어오는 거칠기만 한 불 칼. 그가 거칠게 밀고 들어와 상처라도 내는 날이면 미례는 쓰리고 얼얼하기까지 한 통증에 다음날 하루종일 잘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어느 때부터인지 그것을 알아챈 경휘는 몸을 섞기 전 미례의 은밀한 그곳을 만지며 부드럽게 될 때까지 달래었으며 촉촉히 젖어드는걸 확인하고는 몸을 섞었다. 아픔은 덜 했지만 미례는 수치스러웠다. 그의 손길이 그녀 안에서 움직일 때면 미례는 억지로 다리를 벌린 채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는 행위가 끝나도록 눈을 뜨지 않았다. 이렇게 부드럽게 젖가슴을 희롱하고 입맞춤을 해주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널 처음 품었을 때 미례야, 네 가슴이 이리 크지 않았던걸 알아?" 그가 낮게 속삭였다. 그랬다, 겨우 가슴의 형태만 갖추며 약간 솟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의 손안에서 작고 앙징맞게 자리할 뿐이었다. 하루하루 여인으로 변해 가는 속에서 이제 미례의 가슴은 그냥 바라보기에도 탐스럽게, 그의 손안에 알맞게 감싸이고 있었다. "..휘..그만 요. 난..두려워요." "아픈 거야?" "..아뇨..그게 아니고..다른 사람이 볼까봐서.." "오늘밤도 지난번처럼 내게 해주면 그만둘 수도 있어." 미례의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그건..안돼요, 휘...그땐 어쩔 수 없었지만..더는 안돼요." "왜?" "그건.." "부끄러워하는 거야, 아직도?" "......." "할 수 없군. 너의 부끄러움을 없애기 위해선 남들 보는데서 널 자주 품어야겠어." "...휘, 안돼요..." 기어 들어가는 작은 소리로 미례가 항의했다. "오늘밤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줄 테야?" 그가 은근한 어조로 미례를 떠보았다. "그럴 수 없어요." "뭐야, 이도 저도 안 된다고만 하고." 그가 다시 손을 뻗어 미례의 옷자락을 벌렸다. "휘?" "여기서 널 가져야겠어. 지나는 사람이 있건 없건 니 알몸을 풀밭에 뉘어놓고 마음껏 널 가져야


겠어." "오, 제발 요...그러지 말아요." 미례의 얼굴이 당황스럽게 변하며 곧 울음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표정으로 변했다. 그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내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미례는 난감해졌다. "옷을 벗어, 미례야." "제발 요, 휘..집으로 돌아가요, 밤까지 기다려서.." "밤까지 기다리면 내게 어떤 즐거움을 줄 건데?" "...그 일은 안돼요." "그래?" 그의 표정이 고집스럽게 변하며 그녀에게로 손을 뻗어왔다. 미례가 다급하게 말을 이으며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아이를 가진 여인은...그리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뱃속의 아이에게 해롭다고..." 그가 손을 거두며 한동안 그대로 미례를 바라보았다. 미례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다시금 옷자락 을 여몄다. 그의 핏줄을 품고있는 여인. 경휘는 잠시 생소하게 미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아까 와는 사뭇 다른 어조로 담담하게 그녀 에게 말을 건넸다. "집으로 돌아가자." 언덕을 내려오는 미례의 얼굴에는 아직도 붉은 기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어느덧 괜찮다며 사랑채로 나가 일을 보기 시작한 그에게로 미례가 차를 내가자 그가 반갑게 웃으며 그녀를 맞았다. 잠시 가벼운 농을 하며 미례를 놀리던 그는 미례와 산자를 나누어 먹었고 곧 방을 나서려는 미례 를 그가 불렀다. 그의 눈이 즐겁게 웃고 있었다. "미례야." "왜요?" "이리 와봐." 미례는 그가 손짓하는 대로 다가갔다. 그가 책상을 지나 그가 앉은 곳까지 오기를 바랬다. 그녀가 다가가자 허리를 감싸안으며 그가 낮게 말했다. "입가에 붙인 게 있는데?" 미례가 뺨을 붉히며 손을 올리려 하자 그가 그녀의 팔을 제지하며 끌어당겨 그의 무릎에 앉혔다. 그가 이끄는 대로 무릎에 걸터앉으며 미례가 수줍게 웃자 그가 말했다. "내가 떼어 줄게." 그가 맑게 빛나는 미례의 눈을 바라보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미례는 그의 입술이 가까이 오자 기대감을 숨기지 못하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고 그의 혀가 그녀의 입가에 붙은 산자 조각을 핥아내었다. 약 올리듯 기대감만 갖게 하고 그대로 떨어지려는 그의 입술에 미례가 당황하며


갈망을 담아 그의 목을 끌어안았고 그는 곧 웃음기를 머금으며 그녀의 초대에 응했고 깊은 입맞춤을 나눴다. 그의 목을 감았던 미례의 한 손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졌다. 잠시 그들은 친근하고도 낯선 감각을 느끼며 그대로 마주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살짝 벌어지는 그녀의 입술에 유혹을 느끼며 그가 다가갔고 미례는 무언의 허락으로 눈을 감았다. "이질금 안에 없소?" 문을 열고 들어오는 가납사니의 기척에 둘은 화들짝 놀라 떨어졌고 미례는 불장난하다 들킨 아이 처럼 놀라며 달아오른 얼굴로 가납사니를 피하며 방을 나섰다. 놀라기는 가납사니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그는 흠, 흠 하며 헛기침을 하며 무안함을 감추었으나 방안의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미례가 나가도록 문가에서 몸을 비켜섰다. 방을 나서는 미례의 등뒤로 퉁명스런 경휘의 말투가 들려와 미례의 얼굴은 더욱 달아올랐다. "뭐야, 가납사니. 기척도 할 수 없나? 미례가 놀랐잖아." "기척이야 했지요. 누가 무릉도원으로 빠져버린 줄 알았답디까?" 그가 킬킬거리며 항의했다.

번 호 : 135 / 432 등록일 : 98 년 09 월 01 일 01:04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519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38

저녁상에 이틀째 오른 잉어 죽을 미례는 얼굴을 찌푸리며 바라보고는 수저를 들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유모 역시 미례의 원망하는 듯한 시선을 맞받으며 지지 않으려 했으므로 두 여인 사이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경휘가 미례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다시 유모를 쳐다보았다. "미례 아기씨, 어서 드세요. 다 드셔야 합니다." "...유모." 미례가 투정 섞인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자 유모의 안색이 쌀쌀하게 변했다. 미례 역시 할 말은 있는 듯 보였으나 차마 경휘 앞에서 말을 꺼내기는 난감한 듯 참고 있었다. "뭐야, 유모. 미례가 왜 그러는 거야?" 경휘의 물음에 유모가 반색을 하며 그에게 말했다. "이질금, 미례 아기씨가 다 드시도록 말씀 좀 해주셔요. 도무지 제 말을 들으려 하질 않으십니다." "몸에 좋은 건가?"


"그러믄 요. 미례 아기씨 몸 좀 보셔요. 요즘 통 드시질 않고 그나마 드신 것도 토하시는 통에 더 마르셨지 뭡니까?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 판이랍니다." 유모의 말은 좀 과장되었으나 그 역시 요즘 미례가 조금은 핼쓱해 졌다고 생각되었는데 그것이 입덧 때문임을 알았다. 안색이 밝아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으나 미례는 요즘 쉬이 피로해 하며 간혹 낮잠을 자는 경우도 있었고 몸도 전보다 더 마른 듯 했다. "몸을 생각해서라도 드셔야 하는데 저리 고집을 피우시니 참." "알았어, 내가 먹도록 시킬 테니까 걱정 말고 나가보게." "예, 그러지요." 유모는 득의 만만한 표정으로 미례를 보고는 방을 나섰다. 유모가 냉큼 사라지고 나자 미례는 찌푸린 인상으로 한동안 죽을 노려보고 있더니 이윽고 그의 눈치를 살피며 수저를 들었다. 한 두 번 억지로 입에 대던 미례는 다시 수저를 내려놓았다. "몸에 좋은 거라잖아." 그가 퉁명스레 다그치자 미례가 할 수 없는 듯 다시 몇 수저 뜨더니 울상이 되어 그대로 있었다. "더는 못 먹겠어요." "...그래?" 미례가 고개를 숙인 채로 끄덕였다. 잠시 후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자리에 놓인 먹다만 죽을 가져가 맛을 보듯 먹어 보았다. 미례가 놀라 고개를 들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음, 먹을 만 한데?" 그가 자신의 것을 그녀에게 미뤄놓고는 남은 죽을 다 비우도록 맛있게 먹어치웠다. "유모에게는 네가 먹은 걸로 하는 거야. 그렇잖으면 나까지 한 소리 들을 테니까." 미례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다. 이틀을 더 죽을 먹어치운 그는 그 다음날에도 상에 오른 죽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은 미례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얼마나 더 남은 거야?" 그가 투덜대며 유모에게 물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래?..자, 들었지 미례야? 마지막이라고 하니 오늘만 참고 먹으렴." 그러나 결국 그날도 죽은 그의 차지가 되었다. 그는 이내 상처가 아물자 복주로 떠날 준비를 했고 불안스럽게 바라보는 미례에게 걱정 말라며 아이가 잘 크도록 몸을 잘 돌보도록 당부했다. "곧 돌아오겠지만 그래도 다음에 돌아올 때는 배가 좀 불러 있겠지?" 그가 놀리며 미례의 몸을 훑었다. 그가 돌아올 때쯤이면 이미 다섯 달이 지나가는 그녀의 몸은


확실히 불어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 약간 부른 듯 만 듯 하여 아는 이 말고는 잘 알 수 없지만 그때 되면 다들 한 눈에 알아볼 지경이 되어 있을 것이다. 전서구를 통해 경휘의 부상소식을 들었던 화평도방 식솔들은 한 달도 채 안되어 멀쩡히 나타난 경휘를 보며 나름대로 시름을 더는 듯한 표정이었다. 다시 활기를 띄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설민도 미례의 회임 소식에 그를 놀리며 축하를 해주었다. "우리 설아보다 더 앳띈 여인으로 보았는데 그도 아니었나 보군. 여난을 겪었다고 들었는데 무사해 보이는군. 정말 괜찮은 겐가?" "괜찮지 않고. " "좀더 누워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누구 좋으라고?" "흠, 사랑스런 여인의 간병을 받으며 누워 있을 만도 하지 뭘 그러나. 복주가 그리도 못 미덥든 가? 하긴 자네의 퉁명거림이나 변덕스러움에 지쳐 빨리 바다로 나가라 등 떠밀었는지도 모르지." "그러길 바라는가 보군. 미안하네만 자네 생각이 틀렸네." "자네에게 잘 하나? 들리는 말로는 자네가 좀 애를 먹는 것 같다 하더구먼서도.." 설민이 그를 약올리며 킬킬거렸다. 이전 같으면 불같이 화내며 누가 그러더냐고 할 법도 한 경휘는 그저 씨익 웃을 뿐이었다. 설민은 좀 더 그를 놀리다 경휘의 시큰둥한 반응에 재미를 잃은 듯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위나라가 싸움을 할 듯 하더군." "그래?" "고구려와 국경 근처에서 신경전을 벌이고 있어. 호전적이기로 치면 다들 물러설 기세가 아니어 서 말이야. 양나라야 지켜보며 어부지리를 얻을 수도 있으니 관망하는 추세이긴 하네만." 지금은 위나라에 속한 장안은 이래저래 중원의 중심으로 손색이 없는 곳이어서 양나라도 노리고 있는 곳이다. 더구나 장안은 오래도록 한족이 차자하고 있던 곳이었다. 이제와 유목민이며 야만인 으로 치던 선비족이 세운 나라에 빼앗긴 곳이었으나 언제고 그들이 차지해야할 도시로 한족들은 여기고 있었다. 위가 고구려와 분쟁을 하고 군사력이 그리로 몰린 틈을 탄다면 쉬이 장안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경휘 또한 장안에 화평도방의 힘을 키울 수 있기를 바라왔기에 위나라의 변화에는 민감해질 수밖 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경휘는 낙양으로 향하던 중 위의 관리와 접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은 상인을 가장하여 고구려의 정세를 파악해 줄 세력을 은밀히 구하고 있었다. 경휘는 료허 근처와 백제를 통해 들어가 있는 화평도방의 사람을 풀어 은근히 알아보도록 시켰 다. 어찌하면 손쉽게 장안에 세력을 뻗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경휘는 섬을 떠난 지 한 달이 채 못 되어 섬으로 돌아왔다. 다음엔 직접 그가 평주까지 올라가 볼 생각이었고 너무 늦기 전에 아버지도 만나볼 생각이었다. 부자간에 내왕이 뜸한 것은 사실이었고 그것은 경휘의 어린 시절에 근거해 달리 정이랄 것도 없 이 자라온 탓이었다. 경휘는 아버지에게서 이렇다 할 부정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많은 시간 바다에서 보낸 그의 아버지에 대해 갖는 것이라곤 약간의 두려움뿐이었다. 가족이란 느낌을 받았던 것은 오히려 그의 풀솜 할미였던 새타니와 흰둥이 정도였다. 외롭던 어린 시절이 지날 무렵 그는 아버지의 배려로 섬을 떠나 복주의 화평도방에 맡겨졌고 설민과 동문수학하며 글을 배웠으며 좀더 나이 들어서는 강호를 떠나 은거하는 무인에게 사사 받아 칼을 배웠다. 그리고 그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전 몇 년간 아버지를 따라 나섰던 뱃길에서 그는 그나마 아버지에 대해 좀더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이 들어 만난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는 이유 모를 거리감이 있었고 무뚝뚝한 아버지만큼 이나 잔정 없던 그였으므로 그들 사이는 더 나아질 것도 없었다. 그래서였는지 늦게까지 혼인하지 않는 경휘에 대해 섬의 장로들이 걱정스러워 할 때도 그의 아버지는 이렇다 채근하지 않으며 제 인연 만나지면 알아서 가겠다 하며 채근하지 않았다. 핏줄이 당기고 필요하면 어디서든 만들어 데려오겠지. 그의 아버지는 냉소적으로 보이는 말을 무심하게 건네었었다. 그런 아버지였음에도 그가 삼십이 다 되어가도록 안주인을 들일 생각을 않자 작년부터 가끔씩 방주들을 채근하여 신부감을 구해 보 라 은근히 압력을 넣고 있었다. 이제와 가납사니나 마을 장로들이 마을에서 벌어졌던 불미스런 일들과 미례에 관해 낱낱이 전하 여 알고 있을 법한 그의 아버지는 아직 이렇다 할 반응이 없는 상태였다. 그래도 최소한의 자식된 도리라도 하자면 일년에 두어 번 들르는 인사치레 삼아 찾아볼 때도 되었다고 경휘는 생각했다.


고구려에 대한 정보를 빼내주고 그들을 치는데 보탬이 되어 준다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 리라는 타협안을 곰곰히 생각하던 경휘는 섬으로 돌아와 바로 새타니를 찾았다. 가납사니에게도 넌지시 뜻을 비쳤으나 그 또한 깊은 생각에 잠기며 새타니에게 한 번 가보라고 운을 띄웠다. 그러나 새타니의 반응 또한 어둡고 내키지 않는 듯 했다.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리 생각 안 하나? 지금 대륙은 정세가 어지럽지만 그래도 양나 라나 위나라는 큰 힘을 가지고 있지. 그들의 세력이 호응만 한다면 우리 역시 쉽게 중원으로 나아 갈 테고 그만큼 입지가 굳어지는 거야." "이질금." "뭐가 맘에 안 드는 거야, 새타니?" "...이전에 말이오, 저 대륙이 처음부터 그들의 땅이 아니었던 걸 아오?" "하늘이 열리던 시절에 말인가?" 경휘가 새타니의 말에 코웃음쳤다. "아주 오래 전 황하 하류에 동이족이 살았드랬소. 그들은 중류지역의 황제족과 염제족이 싸우는 동안 힘을 얻었다오. 이내 황제족이 그들의 세력과 부딫쳐 탁록에서 큰 싸움이 있었소." "그걸 어찌 알아? 누가 그런 소릴 하든가?" 그는 생소하고 낯선 말에 못미더워하며 물었다. "동이족의 수장이었던 치우님이 말이오, 내가 섬기는 분 중 하나요. 황제족이 거세게 싸움을 걸어 왔지만 치우님에겐 바람을 부르고 비를 일으키는 힘이 있어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소." "헌데 왜 지금은 그들이 사라지고 없는 거지? 그들과 싸워 이겼다면 지금쯤 큰 나라라도 가지고 있을 것 아닌가. 황하 강 근처에 그런 나라가 있었다는 건 듣지도 못했어." "싸움이 오래 되었소. 그들 황제족에게 발이라는 딸이 하나 있었소. 치우님은 그녀에게 속아 결국 사로잡혀 죽음을 당했소." "바보 같은 사내였군. 수장이라는 자가 그래도 되는 건가?" "그렇게 말할 수만은 없다오. 어찌됐든 수장을 잃은 동이 족들은 그렇게 황제 족에게 밀려나 남 으로 동으로 피해갈 수밖에 없었소, 우리 역시 그 동이 족의 후예요." "왜 내게 그런 얘길 들려주는 거야? 그래서, 동이 족의 후예니 어찌 하라고?" "동으로 간 동이 족이 세운 나라가 고구려요, 그 아래 몇 나라가 더 있다 하더이다. 그들의 기상 이 남다른걸 알지 않소? 치우님의 후예인 듯 그들은 아직도 대륙의 황제 족들을 위협하는 무시 못할 존재인 거요." "그래서? 내게 위나라 편을 들지 말라는 거야?"


"......" "상권이 오가는 중요한 일이야. 우리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고 다른 누군가가 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나. 고구려라고 했나? 동이 족? 그들이 우리가 위험에 처하면 달려와 도와줄 수 있나? 천 만에. 우린 우리 힘으로 살아야 해. 이 일은 그런 명분으로 처리할 일이 아니야." 경휘의 결심이 굳은 듯 하자 새타니가 다시 망설였다가는 말을 꺼냈다. "이질금, 그러지 마오." "내말 못 알아들은 거야? 우리에게 그런 명분은 헛 껍데기일 뿐이라고. 힘이 있을 때나 먹히는 소리야, 그런 건." "이질금, 그들에게 칼을 겨눌 때는 이 점도 생각해야 할거요. 고구려는...그대 어머니의 나라이기 도 하오." "...내 어머니가 고구려 여인이었다고?" 그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라고 혼란스러웠다. 새타니가 헛소릴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하긴 누구도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그렇소." "훗, 우습군. 왜 이제서야 내게 그런 얘길 해주는 거야? 그게 무슨 상관이냐구. 그렇다고 한들 내 어머니가 그곳에 살아있는 것도 아닌데" "...그곳에 살아 계시오." 새타니가 내처 말을 했다.

번 호 : 148 / 432 등록일 : 98 년 09 월 04 일 13:46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511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39

한동안 경휘는 새타니만 쏘아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한참 후 경휘는 굳어진 안색을 풀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못된 새타니가 이젠 별소릴 다하는군. 날 놀리려는 게지." "사실이오, 이질금. 그리고 새타니는 더 이상 그댈 속이고 괴롭힐 아무런 이유가 없소." 그 어린 못된 계집아이가 말인가. 경휘는 헛웃음을 웃었다. 그의 가슴에 차가운 바람이 일고 있었다. 다소 굳어진 그의 얼굴근육이 경직되어 있었다. "거짓말이야. 믿을 수 없어." 그래, 믿을 수 없다. 어린 시절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머니인데 나를 버리고 다른


나라에서 잘도 살아 있다니. 내 어머니는 그렇게 모진 여인이 아닐 것이다. 그가 방금 새타니가 토해놓은 한마디 말로 소용돌이 치는 감정의 격류에 휘감기고 있을 때 새타니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전대 이질금이 말이오, 왜 고구려 국경 근처에서 머무른다고 생각하오?" 그의 아버지는 료허에 살고 있었다. 더 이상 배를 타기를 싫어했고, 섬에서 보내는 것도 싫어했으며 그곳에 작은 화평도방을 경영하며 은거하듯 지내고 있었다. 그곳은 국경근처라서 중원인들 뿐만 아니라 타국의 여러 상인들이 제법 드나드는 자유로운 곳이었다. 고구려는 거기서 지척지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한 번도 그에게 어머니가 살아있다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새타니의 말이 맞다면 그는 부모에게 버려진 것이었다. 그는 견디기 힘든 사실에 믿을 수 없는 한숨을 뿜어내며 새타니를 쏘아보기를 반복하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왔다. 그후로 한동안 경휘는 새타니를 찾지 않았다. 그런 그의 주위엔 먹구름이 감돌았고 그는 가끔 생각에 잠기며 마음을 빼앗긴 사람 같은 얼굴로 짙푸른 바다너머를 바라보곤 했다. 이제와 습관처럼 되어버린 두 사람만의 산책길에서도 경휘는 미례와 걸으며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미례는 그의 변화에 의아해 했으나 그저 묵묵히 그의 곁에서 걸음을 함께 할 뿐이었다. 작고 가녀리던 미례의 몸이 변하며 치마폭에 감춰진 몸매 속에는 제법 부른 배를 하고 있었다. 미례를 알아본 반하와 또래 아이들이 미례에게로 달려와 즐거워하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언덕 위에 올라서도 미례는 그녀의 변한 몸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아이들이 순진하게 눈을 빛내며 만져보길 원하자 환히 웃으며 그러라고 했다. 작고 앙증맞은 아이들이 잠시 쉬느라 앉아있는 미례 곁으로 하나 둘 몰려들더니 손을 뻗어 미례의 배를 살짝 만져보고는 눈이 커졌다. "정말 이 안에 아기가 있는 거예요?" "음, 그렇단다." "아, 아기는 힘들겠다. 어떻게 뱃속에서 살아 있어요?" "반하 만큼 큰 아이가 아니고 아주 작은 아기니까." "아가야, 내 말 들려? 너 정말 거기 있는 거야?" 아이들이 제법 소란스럽게 그녀 주위에 몰려 앉아 재잘대며 그들 나름대로 가진 생각들을 열어놓았다. "청미래 엄마도 아기를 낳았는데 아기가 빨갛고 아주 못생겼어요. 청미래 보다 더


못생겼어요." "미례 언니 아기도 그럴까요?" "아냐, 미례 언닌 예쁘니까 안 그럴꺼야. 청미래 엄만 뚱뚱하고 못생겼단 말야." "미례 언니 아기도 우리랑 같이 놀게 될까요?" "음, 너희들이 귀찮아하지 않으면." "안 귀찮아 할 께요." "음. 나도." "나도 예뻐해 줄 꺼야." "아기가 조그맣고 울보일지도 모르고 그러면 너희들이 싫다고 떼어놓고 다닐지도 모르지." 아이들이 상상을 부풀리며 키득거리고 웃었다. 경휘도 그들 가까이서 건성으로 그들의 말을 흘려들으며 앉아 있다가 어느 순간 미례의 몸매를 훑어보고는 잠시 놀랐다. 어느새 미례의 배가 정말 눈에 띄게 불러있었다. 요즘의 그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미례조차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고 그는 아이들의 말을 들으며 그것을 새삼 깨달았다. 돌아가는 길에 그가 그것을 말하자 미례가 수줍음 담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요즘은 조금씩 움직이기도 하는 걸요." "그래?"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가끔씩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아주 미미해서 아직은 분명치 않지만 하루에 두 세 번은 그런걸 느껴요." 그가 부드러운 눈매로 미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밤잠도 설치며 가끔은 혼자서 바닷가로 나갔다 늦게서야 들어오기도 하는 그를 불안스러워 하던 미례는 어느 날 술에 만취되어 소솜과 다른 사내에게 부축을 받으며 들어서는 경휘를 맞았다. 미례는 놀라며 그들에게 경휘를 침상에 눕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그는 며칠째 그녀에게도 아무런 말조차 건네지 않았으며 눈길도 마주하지 않고 피했었다. "소솜, 겉옷도 벗는걸 좀 도와줘요. 유모, 따뜻한 물 좀 가져다 줘요." 소솜은 인사불성인 그를 달래며 옷을 벗겨주고는 침상에서 물러났다. 여인이 함께 머무는 방안은 고운 분 냄새가 은은하게 났으며 정감 있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소솜은 미례가 기거하면서 한 번도 이 방에 들어와 본 적이 없었기에 생소한 느낌을 가지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것은 따라 들어온 다른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쭈볏쭈볏 한쪽구석에서 미례가 물수건으로 익숙하고 부드럽게 그의 얼굴과 손을 닦아주는 모습을 감동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편안하게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며 일어서던 미례는 소솜과 눈이 마주치자 경휘를 바라보는


것과는 다른 시선으로 웃음기를 띄었다. "그만 돌아가도 되요, 소솜. 이이는 내가 돌볼 께요. 고마웠어요." 그들이 돌아가고 나자 미례는 낮게 한숨을 쉬고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 그를 이토록 힘들게 하는 것인가. 미례는 불안을 감추며 달래듯 작은 손으로 그의 얼굴을 더듬어 만졌다. 새벽녘 잠이 깬 그는 물을 찾았고 미례가 일어나 앉아 물을 건네주자 벌컥벌컥 물을 들이킨 그가 다시 자리에 누웠다. "휘, 안 좋은 일이 있어요?" 미례가 따라 누우며 걱정스럽게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걱정할 일은 없어." 그러나 다시금 그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찬 기운이 그를 감쌌다. 그는 참기 힘든 고통에 미례에게로 돌아누웠다. "미례야, 날 좀 안아 줘." 미례는 두말없이 그를 감싸안았다. 이 강한 사내를 이렇게 만드는 것이 무언지 미례는 정말 궁금했으나 더 이상 그에게 묻지 않았다. 물어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 "미례야, 넌 날 떠나지 않을 거지?" 한참 후 그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미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날 내치지 않는다면...난 당신을 떠나지 않아요. 아니, 이젠 날 내친다 해도 떠날 수 없어 요."

번 호 : 155 / 432 등록일 : 98 년 09 월 06 일 18:51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503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40

"내 어머니에 대해 더 말해봐." 오랜만에 새타니를 찾은 그는 대뜸 그렇게 말을 꺼냈다. 더 이상은 그를 아프게 하는 고통 속에서 살고 있지만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진실이 어떤 것이든 대면하고 이겨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새타니는 그의 상한 얼굴을 안스럽게 바라보았다. "내가 해줄 얘기는..별로 없소. 료허로 가거든 전대 이질금에게 여쭤보구려." "그 얘기가 사실이긴 한 거야?" "....그렇소." "왜 한 번도 내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은 거야. 왜 이제 와서 내게 그런 말을 꺼낸 거야?" "이질금이 평생토록 모르고 살아선 안될 것 같아서요."


"왜 좀더 일찍 그런 말을 해주지 않은 거야?" "지금도 이리 흔들리는데..그땐 어땠겠소. 그땐 시기가 좋지 않았소." "지금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도 우습군. 차라리 모르는 게 더 낫지 않았겠나." "이질금에겐 미례 아씨가 있고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나 자식도 있소. 이젠 세상에 누구도 부럽지 않을 거라 생각되지 않소?" "........" "내가 정말 괜한 얘길 꺼낸 거요? 차라리 안 듣고 몰랐으면 좋았겠소?" "말해봐, 내겐 돌아가셨다고 믿게 했던 어머니가...왜 고구려 땅에 살아 계신 건지." "운제 아씬 고구려의 여인이었소. 전대 이질금께서 중원대륙으로 나가셨다가 노예시장에 끌려 나온 운제 아씰 발견한 거요. 큰 돈을 주고 운제 아씰 사서 이곳으로 데려오셨소. 운제 아씰 아끼셨 던 이질금께서 이듬해 혼인을 하셨고 두 해가 지나 휘아를 가지셨소. 운제 아씬 이곳 생활을 힘들어 하시고 있었는데 휘아가 태어나고 나서도 정을 못 붙이셨소. 오히려 말수도 잃고 혼자 나가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오....이질금, 그냥 상처로 담아두지 마오. 부인께서 휘아를 아끼지 않으신 게 아니오. 다만 병이 깊으셔서 항시 고향 땅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흘리셨소. 전대 이질금도 바다로 나가실 때는 몹시도 걱정을 하셨다오. 헌데 휘아를 낳고 채 한 달도 안되어 지금 미례 아씨가 잘 오르던 언덕을 오르곤 하시더니 그만 물로 뛰어드셨소. 천만다행으로 전대 이질금께서 당부하여 운제아씨를 지켜보던 이가 있어 목숨은 건졌소만 돌아오신 이질금이 불같이 화를 내셨소. 자식을 낳고도 정을 못 붙이고 물로 뛰어들 바에는 송장 치기 싫으니 가고 싶은 곳으로 가버리라 하시고 선 정말로 운제 아씨를 배에 태워 보냈소." "어머니가 순순히 따라나섰나?" 경휘는 믿기 힘들어 물었다. "...이질금,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야 어디 이곳 만한 데가 있겠소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는 그곳이 그리운 게요." "날 내버려두고 아버지도 버리고 떠나길 정말 바라셨나?" "그건 아니오, 운제 아씨가 휘아를 데리고 가겠다 하셨지만 이질금이 허락하지 않았소. 여아였다 면 허락했겠지만 휘아는 이곳의 대를 이어야 할 테니 그럴 수 없다 했소. 눈물로 호소하다 결국 아씨께선 할 수 없다 포기하시고는 떠나셨소." "아버진 왜 다시-어미도 들이지 않으신 거지? 그런 어머니를 위해 자릴 남겨 놓으신 건가?" "그건...직접 물어보시오....몇 해 동안 누구도 이질금이 운제 아씰 다시 보길


원한다고는 생각지 못했소. 헌데 그분은 부득불 료허를 고집하시며 배에 내려서도 며칠씩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답니 다. 나중에서야 사람들도 알게 되었다오." "난 료허에서 아버지를 뵈었지만 여인이 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어." "한번...여쭤 보시오." 흠, 날 버린 어머니를 내 발로 찾아가 만나고 싶진 않아. 경휘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새타니에게라기 보다 그녀가 말하는대로 할지도 모를 자신을 경계하는 몸짓이었다. 새타니도 그런 경휘를 느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휘아, 그건 그런 게 아니오. 운제 아씬...여인네들 중 어떤 이는 산후에 안으로만 침잠하고 눈물로만 세월을 보내는 병을 얻기도 하오. 그건 운제 아씨만의 잘못은 아니라오. 운제 아씬 낯선 타국에 와서 더 병이 깊었던 것뿐이라오." "그럼 미례도 그럴 수 있다는 거야?" 그리로 생각이 미치자 그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새타니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내 그토록 미례 아씨께 다정히 대하라 이른 게요. 운제 아씨는 전대 이질금이 그리 아꼈어도 눈물로 세월을 보내셨는데, 휘아는 그나마도 힘으로만 미례 아씰 휘어잡으려 하는 게 못내 걱정스러웠소." "아이를 낳고 나면 미례도 그리 될 수 있다는 거야?" "그렇진 않을게요." "그걸 어찌 알아?" 경휘의 안색이 미심쩍어 하며 찌푸려졌다. "미례 아씨에게는 휘아에 대한 정이 있소. 다른 이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고향을 그리는 마음보다 앞서 있다고 보기 때문이오." "정말 그러길 바래. 혹 내 어머니처럼 물로 뛰어든다 해도 난 아버지처럼 자식도 내버리고 떠나라고는 결정하지 않아. 차라리 내 앞에서 죽는 꼴을 보는 게 나아." 그래, 죽어 없어지면 그땐 가슴에 묻기라도 하지. 떠나보내고 어찌 살아가는지 그런걸 염려하며 살진 않을 거라고, 절대. 점점 더 배가 불러오면서 미례는 잠자리에서 그를 받아주기가 힘들어 졌고, 그 역시 가끔씩 몸을 뒤척이며 힘겨워 하는 미례를 알기에 그저 안스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며 미례는 더욱 밤잠을 이루는 것도 힘들어했다. 간혹 그가 미례를 위해 잠들 때까지 부채질을 해줄 때도 있었고 찬 물수건을 대주기도 했으나 효과는 잠시뿐이었다.


선선한 아침나절에 그들은 산보 삼아 여전히 언덕길을 오르곤 했다. 일곱 달째가 지나가면서는 경휘도 점차 변해갔다. 그녀를 위하며 걱정스런 태도는 변함없었으나 그 역시 새벽녘까지 잠 못 이루기도 했고, 어느 날은 새벽 늦게 그녀가 잠들고 나서야 들어오기도 했으며, 또 어느 날은 자다말고 뛰어나가 찬물을 뒤집어쓰고서야 들어와 다시 잠을 청하기도 했다. 미례가 뱃속의 아이 때문에 힘들어하는 만큼이나 그 역시 욕구불만으로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아는 체 하기도 부끄러운 미례는 그저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그를 대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변화가 생겼다. 여느 날처럼 조금 늦은 시간에 들어온 그였으나 미례는 무언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최근 들어 보아왔던 긴장된 굳어진 안색이 아니었고 편안해 보였으며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심술 난 사내처럼 굴던 그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의아하게 그를 살피던 미례는 다정한 그의 말씨에도 안심이 되기보다는 울고싶을 만큼 속이 상하는 걸 느꼈다. 미례가 머리를 빗는 동안에 낮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 둘 털어놓던 그가 침상에 누웠다. 다른 때보다 더 천천히 머리 땋는 일을 계속하던 미례는 그녀를 지켜보던 그가 잠든 듯한 숨소리 를 내자 한숨을 내쉬고는 그제서야 손질을 멈추었다. 가슴 한 구석이 무겁게 내리 눌리는 기분을 느끼며 미례는 자신도 모르게 가만히 가슴을 쓸어 내 렸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그가 있는 침상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자신의 베게를 들어 가슴에 감싸안은 미례는 문가로 걸음을 옮겼다. "...어딜 가는 거야?" 잠든 듯 했던 경휘가 이상히 여기며 문 앞의 미례를 불러 세웠다. "..유모와 함께..잘래요." 미례는 미처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흠칫 놀라며 그에게로 돌아서지 않고 베게를 감싸안은 채로 약간 비껴서며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왜?" 그는 뜬금없는 그녀의 행동에 의아해 하며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 싶어요." "왜 그러냐고 묻고 있잖아." 그는 여전히 부드러운 태도를 잃지 않으며 다정스레 물었다. "........." 미례는 여전히 고집스레 반쯤은 문가로 몸을 튼 채로 그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있었다.


"미례야." 그는 정말 알 수 없었다. 그는 미례가 토라질 어떤 잘못도 한 기억이 없었다. 그가 은근하게 이유를 묻자 망설이던 미례가 작은 소리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당신에게서...다른 여인의 내음이 나요." 미례는 그 말을 하는 순간에서야 모욕감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으려던 목소리도 떨려나왔고 울먹이는 듯 했다. 편안해 보이는 그의 모습, 다른 이유는 없다고 미례는 짐작했다. 그는 분명 다른 여인을 안았던 것이다. 아주 긴 시간은 아니었으나 미례는 그 동안의 생활 속에서 그런 정도는 눈치챌 만큼 그를 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주 복잡한 성격의 사내가 아니었다. 그는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한 사내였고, 속내를 감추는 것도 잘 못했다. 그의 말수는 적었으나 미례는 그의 표정에서 그의 심중을 헤아릴 수도 있을 만큼 그를 알게되었다. 미례는 참을 수 없는 가슴의 통증에 숨을 고르고는 그대로 문을 열었다. 그 역시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그녀를 향해 다정스레 말했다. "문 닫고 이리로 와." "....유모 방으로 갈래요." 미례는 고집을 꺽지 않았다. 이대로 그의 곁에서 침상에 눕는다면 그녀는 오늘밤 한잠도 이루지 못할 것이었다. 그 역시 그것을 원하지는 않을 거라고 미례는 생각했다. "다른 여인을 안지 않았어. 다른 여자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구." 그가 한숨을 내쉬고는 내키지 않는 듯 조금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조금은 마음이 풀어진 미례는 반신반의하며 문을 닫고는 돌아서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당신은..." 미례는 짖궂게 눈을 빛내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에게서 시선을 내리며 더듬었다. 보이지 말아야 할 부분을 보인 듯 미례는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정말 내게서 다른 여자의 냄새가 나는 거야?" 그가 어이없어 하며 피식 웃고는 물었다. "......." 미례는 고개를 숙이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정말로 잘못한 것이 없는 듯 정면으로 말을 받아내며 반문하자 미례는 무어라 반박할 말을 잃었다. 사실 증거라고 반박할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느껴지는 여자의 육감 같은 것이랄까.. "내 아일 갖고 힘들어하면서 밤새 제대로 잠드는 것조차 쉽지 않은 널 두고 내가 다른 여인을 안았을 거 같애?" 그가 부드럽지만 비난하는 어조로 묻자 미례는 용기를 내어 대답했다. "하지만...당신은 오늘 너무도 다른 걸요. 편안해 보여요. 다른 이유는 생각할 수도 없는 걸요.." 그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새타니가 내게 흰둥이를 돌려주었어. 오늘 오후에는 흰둥이와 섬을 둘러보았다고. 이제 됐어? 아직도 날 못 믿어?" 미례는 잠시 후 천천히 베게를 가지고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의 눈이 즐겁게 웃고 있었다. 미례가 눕는 동안 그가 자리를 비켜주었고, 곧 그도 함께 누워 자신의 품안으로 미례를 당겨 안았다. "네가 싫어하는 일은 나도 하지 않으려고 해. 넌 그걸 믿어야 해." "...휘.." 미례는 부끄러움에 몸을 숨기듯 그의 품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번 호 : 49 / 263 등록일 : 98 년 09 월 30 일 19:53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55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41 (수정)

어느 날 새타니에게 사스래가 찾아왔다. 여름날의 끝에 다다른 듯 더위도 한풀 꺾이는가 싶었으나 그래도 아직은 제법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정오가 지난 시각이었다. 사스래는 쭈볏 쭈볏거리며 들어와서는 새타니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왠 일이냐, 사스래야? 안색이 좋지 않구나." "...부탁이 있어 왔소." 사스래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무슨 부탁? 내 너의 일로 뭇전 치는 일도 싫고 방자하기도 싫다 했을 텐데? 아직도 미례 아씨 일로 두억시니 라도 불러내 저주하길 바라는 게냐? 아직도 이질금에게 딴 맘 품고 있는 게야?" "...그런 게 아니오." 사스래가 볼이 부어 퉁명스레 대꾸했다. "아서라, 사스래야. 너도 이젠 네 사낼 찾아야지. 이질금이 네 사람이 아닌걸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그런 게 아니라고 했잖소." 사스래가 생각지도 않은 이질금에 대한 말에 화를 벌컥 냈다. "흐흠, 정말로 두억시니를 불러달라 온 게 아니란 말이지?" 새타니가 못미더운 듯 놀리는 어조로 물었다. "그렇대두요." "그래, 잘 생각했다. 이제라도 이질금이 제 인연을 만났다 생각하고 그만 잊어야지. 그나마 있는 정을 떼어내지 못하면 너만 다치는 게다. 그 동안 네게 잘해주었으니 그럴 만도 할 테지만, 제 인연이 아닌 건 아닌 게지." "그만해요, 더는 듣고 싶지도 않소. 새타니가 그 여인을 아끼는 거야 알지만 자꾸 그런 소릴 들으면 ] 내 속도 뒤집어진단 말이오. 난 사람이 아니라오? 여인이 아니라오?"


"그래...그래. 그만두자꾸나. 허면 왠 일이냐?" "...약을 지어주오." 불편스런 어조로 사스래가 말을 했다. "무슨 약?" "..몸이 좋질 않아요. 아침에 일어나도 찌뿌드드하고 척 가라앉은 느낌이오. 오후에는 미열도 있는 듯 하오." "몸살이 난 건 아니니?" "모르겠소. 요즘엔 무슨 일을 해도 손에 안 잡히고 가끔 힘이 쏙 빠지는 느낌이오." "끼니는 제대로 하는 게야? 혼자라고 거르고 하는 건 아니니?" "그런 건 아니오. 하긴 가끔 속도 안 좋긴 하지만 그래도 누가 있어 날 챙겨주랴 싶어 꼬박꼬박 챙겨먹고는 해요." "그래, 그래야지....그래, 사스래야 너도 이제 다른 사내를 만나야 하지 않겠니? 아무리 죽이네 살리네 해도 사내가 있어야 언덕이 되 주기도 해서 기대기도 하는 게다. 더 욕심 부리지 말고 새 사내를 만나려무나." "피이~, 관두구랴. 홀어미 되고 몇 해되니 이것도 그런 대로 익숙해져 이젠 옆에 누가 있는 것도 귀찮다 싶을 때가 있소." "이것아, 그것도 너 젊어 한때니라. 나이 들어보렴. 누가 나이 든 계집 예쁘다고 받아주겠니. 나중에 나이 들어 홀로 아프지 말고 착실한 사내 있거든 내게 말해 보아라. 내 특별히 네게는 재여리 되어 좋은 사내와 짝지어 주마." "누가 나처럼 박복한 계집을 좋다 하겠소?" "소솜은 어떠냐? 네 못된 성질 다 받아주고 너 기댈 언덕 되어주지 않겠니?" 사스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가는 곧 벌겋게 상기되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우...달리 사내가 없어 소솜이오?" "왜 싫으냐?" 새타니가 느물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그만두오..약이나 줘요, 그만 가보겠소." 새타니가 사스래의 새침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사스래가 그런 새타니가 못마땅한 듯 한참을 쏘아본 후에야 새타니는 웃음기를 거두며 구부러진 허리에 뒷짐을 지고는 몸을 움직여 천장에 걸어둔 약재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는 필요한 약재를 덜어내어 사스래에게 건네주었다. "...무슨 약이오?" "무어라 하면 네가 알겠니?....침향숙수로 아침마다 물을 부어 조금씩 마셔보거라. 위를 덥게 하니 속을 다스리고 편안하게 해줄게다." "...알겠소." 그러나 보름이 지난 어느 날, 사스래는 사색이 되어 다시 새타니를 찾아왔다. "새타니" 사스래는 새타니의 움막 천을 걷어올리며 들어서다가는 새타니가 혼자가 아닌 것을


알고는 흠칫 놀라며 그 자리에 굳어졌다. 사스래는 방안의 어둠이 눈에 익자, 먼저 와 있는 상대가 미례임을 확인하고는 굳어지듯 놀라며 반걸음정도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며 외면했다. "뭐냐, 사스래야? 천장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든? 이라 와서 앉아라." "아..아니오. 다음에 다시 오리다." 사스래가 재빠르게 몸을 돌리며 밖으로 나가려 하자 미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녀를 제지했다. "들어와서 얘기 나눠요, 난 곧 일어서려던 참이었어요." 미례의 말에 새타니가 어정쩡하게 문 앞에서 멈춰섰다. 미례는 어색한 공기가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도 새타니에게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는 그녀를 지나쳐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미례는 땀으로 젖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낮잠에서 깨어 천천히 침상에서 내려왔다. 아침 일찍 그가 일을 보러 나가는 것과는 다르게 하루하루 몸이 무거워 지자 낮잠에 빠지는 시간이 많았다. 발을 드리운 열린 문으로 가끔씩 바람이 들어오곤 했으나 미례는 숨조차 잘 내쉬기 힘들 정도로 힘이 들었다. 천천히 침상에서 내려와 잘 개켜둔 옷을 꺼내 들고는 침상에 걸터앉아 여밈을 풀며 겉옷을 벗어내자 한결 편안해지며 시원함을 느꼈다. 미례는 살결이 비치는 속옷의 여밈도 풀었다. 그러고 나니 부푼 가슴 선과 복부의 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미례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그대로 피부를 노출시킨 채로 자유로움을 느끼며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는 다른 손으로 부른 배를 만져보았다. 가슴도 더욱 부풀어있었고 또한 타원형으로 부풀어오른 복부로 인해 발치도 잘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이전에 날렵하게 몸을 움직이던 나였는지도 잘 모르겠네. 굼뜨기만 한 요즘의 자신을 비관하며 미례는 스스로에게 비웃음을 던지며 쓰게 웃었다. 유모는 그런 미례의 마음을 알아채고는 아이를 밴 여인의 모습은 또 다른 품위가 있다고도 위로 삼아 달래주었지만 미례는 반신반의했다. 자신이 그냥 내려다보기에도 우스꽝스런 모습인데 남들이 보기에야 더 말하여 무엇하랴. 그래서 미례는 가끔씩 경휘가 그녀의 몸을 훑어보기라도 할라치면 눈길을 피하며 옷자락으로 몸매를 감추었었다. 피부에 직접 바람이 통하며 와 닿자 미례는 그 낯선 감각이 싫지 않았으므로 즐기다 복부를 쓸어보았다. 뱃속의 아이는 제법 잘 자라며 가끔씩 그녀의 부름에 응하듯 발길질을 하곤 했다. 허리가 무겁게 아팠으므로 미례는 습관처럼 허리 께에 손을 얹으며 주먹을 쥐고는 가볍게 두드렸다. 그녀가 이대로


한나절을 있었으면...하고 있는데 인기척도 없이 사람의 그림자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흠칫 놀라며 미례는 새 옷으로 몸을 급히 가리고는 자세를 바로 잡으며 침상머리에 기대앉았다.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경휘였다. 그를 확인한 미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밝은 데서 그늘진 방안으로 들어서던 경휘는 미례가 낮잠을 자는 줄 알고 조심스레 들어서다가는 침상머리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는 의아한 기색으로 미례에게로 다가왔다. "어, 낮잠을 즐기고 있는 줄 알았는데, 잠꾸러기 미례가.." 그가 유쾌한 목소리로 말하며 더욱 뺨을 붉히는 미례에게로 다가왔다. 미례는 당황하며 겉옷자락 으로 드러난 피부를 조금이라도 더 가리려 했다. "저..무..무슨 일이예요, 휘...나..난.." 미례는 말이 잘 나오지 않자 입술을 축이며 그에게 물었으나 차마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어 시선을 그의 발치 께에 두고있었다. 그도 미례가 당황하는 것을 알고는 짖궃은 표정으로 변하며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너야말로 무슨 일이야, 뭘 그리 부끄러워하는 거야?" "...그..그렇지 않아요. 다만 좀 놀라서...나 난 옷을 갈아입으려는 중이었어요." "그래? 그런가 보군....나 역시 짖궃은 녀석들과 몸싸움을 좀 했더니 옷이 젖어버려서...들어왔다가 널 좀 보고 가려고 했지." "그..그러면..잠시만..기다려줘요.." 그의 의복을 챙기기 위해선 몸을 움직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자신부터 옷을 갖추어 입어야 한다는 생각에 당황스러워진 미례를 그가 저지했다. "그냥 있어. 너는 혼자 움직이는 게 아니니 " 그가 키득거리며 웃음을 웃고는 미례를 재미있어 하며 지켜보았다. "좀..돌아서 있어 주면 안되요?" 미례가 그의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당황하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하자 그는 장난기 가득한 시선으로 고개를 저었다. "뭐야, 내가 있어서 안될 게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네 벗은 모습을 못 본지도 꽤 된 것 같은데?"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미례가 그 동안 잘도 자신의 몸매를 숨겨왔던 때문이었다. 속옷을 여미며 더욱 몸둘 바 몰라하는 미례의 모습에 그는 더욱 호기심이 동한 표정으로 미례를 응시했다. "...이러지..말아요..난 난처한걸요." "왜?" 그가 다가와 미례의 바로 옆에 걸터앉았다. "..휘..조금만 돌아서 있어줘요, 제발.."


"그러지 말고 네 모습을 좀 보여줘. 어디 배가 얼마나 부른가 좀 보자." 그가 미례의 두 팔로 가리며 옷으로 가린 몸에 팔을 뻗으며 말했다. "아..안 되요.." 미례는 더욱 움츠러들며 그의 손길을 피해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그의 손길이 먼저 그녀의 옷 위로 다가왔다. "어디...음, 이녀석 먼저보다 더 자란 것 같은데?" 배 주위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의 손길을 피하지도 못하고 마지못해 가만히 있던 미례는 그의 손길이 좀더 위로 올라오자 불편스럽게 꼼지락거리며 미약하나마 저항했다. 그가 미례의 그런 저항을 무시하며 미례의 몸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마지못해 안겨든 그의 품에서 바닷내음이 난다고 미례는 생각했다. 그의 몸은 미례가 무게를 실어 기대도 편안하게 느낄 만큼 탄탄하고 힘이 있었다. 그는 그의 가슴에 기대는 미례의 옷 아래로 손을 넣어 가슴의 굴곡과 복부의 완만한 곡선을 부드럽게 더듬었다. "말해봐, 왜 네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는지." "......." "네 모습이 보기 흉하다고 생각해?" 그녀의 마음을 꼭 집어내는 그에게 미례는 무어라 말할 수 없어 그저 약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지 않은걸 몰라?" "난....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요. 이렇게...둔한 어미 소 같은 모습 말고..." "어미 소? 그것도 괜찮은데? 아니, 아냐. 네 모습은 새끼 밴 고양이만큼이나 탐스럽고 예뻐. 지난번에 보았지? 배가 땅에 끌릴 정도를 해 가지고는 느릿느릿 길을 건너던 고양이 말야." "........." "하여간 네 이런 모습도 나쁘진 않다고. 바람불면 날아갈 것 같은 버들가지 같은 모습보단 훨씬 낫지." "...정말 요?" 미례는 반신반의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번 호 : 50 / 263 등록일 : 98 년 09 월 30 일 20:00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28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42

며칠 후 미례가 다시 새타니를 찾았을 때도 미례는 사스래를 만났다. "....요즘은 ..자주 마주치네요?" 미례가 인사 치례로 그녀에게 말을 건네자 사스래는 곱지 않은 눈으로 미례를


쏘아보며 대꾸도 않고는 재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미례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새타니 곁에 앉았다. "사스래를 자주 보네요." 새타니가 떨떠름한 얼굴로 웃음 지으며 얼버무렸다. "..별 일 아니오. 아기씨는 뱃속에서 잘 놀고 있는 게요?" 새타니가 눈에 띄게 불러오는 미례의 배를 살피며 말을 돌렸다. "자주 깨서 움직이곤 해요." "이질금이 잘 대해 주지요?" "..그래요." 얼마전의 해프닝을 떠올리며 미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미례는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 생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미례가 문 앞을 들어설 때 얼핏 새타니와 사스래가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새타니" 미례의 표정이 어둡게 변하자 새타니가 걱정스레 미례를 살폈다. "뭐요, 미례 아씨? 왜 그러오? 몸이 안 좋은 게요?" "아뇨, 그런 게 아니고...하나만 물어봐요, 새타니." "말해보오." 새타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스래에게 태기가 있나요?" 새타니의 표정이 순간 변하더니 진실을 듣기 원하는 미례의 눈과 마주치자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얘길 들은 게요?" "일부러 그런 건 아네요, 새타니. 그저..큰소리가 나는 것 같기에...귀에 들려오기에.." "걱정스런 노릇이오." 한동안 미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망연하게 앉아 있었다. 얼마 전 그가 뭐라 했었더라. 힘들어하는 나를 두고 다른 여인을 품지 않았다고, 믿어야 한다고. 미례는 아프게 입술을 깨물었다. 미례는 정신을 수습하고는 새타니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피곤하여 집으로 가야겠다 하고는 언덕으로 나왔다.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는 미례의 마음 역시 검푸르고 우울하게 변했다. 몹쓸 사내. 사스래가 그의 여인인줄은 미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과 몸을 섞기 전부터 맺어온 사이인걸 알았으나 그가 다시 사스래를 찾는 줄은 몰랐었다. 미례는 사스래가 자신을 대하는 시선이 아직도 곱지 않은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여인이 자신의 사내를 빼앗아 갔다고 생각되는 여인에게 고운 시선을 줄 수 있을까. 미례 역시도 사스래를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미례는 한없이 우울해지는 마음을 달래며 작은 소리로 흐느껴 울었다. 한번 울음이 나고 보니 너무도 서러웠다. 이 낯선 땅에서 오직 한 사람만을 믿고 남은 것인데 자신을 두고도 다른 여인을 품고 그것도 모자라 아이까지 배게 만들다니. 미례는 분함과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더 이상은 눈물이 나지 않을 때까지 울고 난 미례는 마지못해 천천히 길을 따라 내려갔고, 집으로 돌아온 미례의 풀 죽은 모습에 유모가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미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늦은 밤, 돌아 온 경휘는 낮의 일로 피곤했는지 바로 자리에 누웠고, 눕기가 무섭게 깊은 잠에 빠진 듯한 숨소리가 조용한 방안에서 울리듯 들렸다. 따지고 들려고 마음먹기까지 했던 미례는 무심하며 밉살맞기까지 한 그를 한동안 쏘아보다가는 밖으로 나왔다. 어둠이 깊은 안뜰에 홀로 앉아있자 다시금 눈물이 그렁그렁하니 고였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풀벌레 소리만이 주위의 적막을 깨고 있었을 때 미례의 귓가로 낮 익은 그의 음성이 들렸다. "왜 안자고 나와 있어? 찾았잖니?" 돌아보는 미례의 가까이로 그가 어느새 다가서고 있었다. 미례는 어둠을 가리개 삼아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그를 외면했다. "무슨 일이야, 응? 우리 미례가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그가 피식 웃으며 미례를 달래며 품에 안으려 했다. "건드리지 말아요, 나쁜 사람." "응? 날 욕하는 거야? 내가 뭐라 했기에? 난 아무 기억도 없는데 나도 모르게 널 또 마음 아프게 한 거야?" "모르긴 뭘 몰라요, 이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내가? 하늘같은 제 사낼 두고 그리 말해도 되는 거야? 더구나 뱃속의 아이까지 가지고서?" 그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미례의 투정을 받아주며 웃어넘겼다. "날 속이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니겠죠?....아이처럼 잘도 속아넘어가니 내 눈을 가리는 것쯤 아무 것도 아니겠죠." 미례는 눈물 맺힌 눈으로 그를 쏘아보며 눈물을 훔쳤다. 그는 투정 섞인 미례의 그런 행동이 귀여운 듯 다시 끌어안으며 미례의 등을 토닥였다. "뭘 속였다는 거야?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뭔 줄 몰라? 응? 난 네 눈에서 이슬 같은 눈물 흘리는 게 싫어. 널 울리는 일이 제일 싫다고..자, 미례야, 말해봐, 뭘 가지고 그러는 거야. 응?" "....당신은 욕심 많은 호색한 사내예요, 못된 사람." 미례가 여전히 삐죽거리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미례는 다시금 그의 품안에서 빠져 나오려 버둥거렸으나 그는 쿡쿡 웃으며 미례를 그대로 안아 올리고는 아이를 달래듯 토닥였다. "그래,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그래서 미운 거야? 네게 욕심 내는 게


싫어서?" "얼버무리려 들지 말아요. 날 속이는 일은 쉬웠겠죠?...아무리...먼저 알았다 해도...이제 와서 이럴 수는 없어요... 이럴 수는 없다구요...어떻게 내게...이럴 수 있어요..어떻게..." 미례는 다시금 서러움에 복받쳐 소리내어 울음을 터트렸고 그녀의 말은 울먹임으로 재대로 그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응?...그만해, 미례야. 그만...이런 점점 더하는군...우리 울보아가씨가 아예 작정을 했군, 작정을 했어. 미례야, 미례야...그만 울어. 유모가 아는 날에는 또 내가 널 어찌 한 줄 알거야, 응? 이러지 말자구. 자, 그만 그쳐야지..응? 미례야, 그만해. 쉬이~. 그만 하자.." 경휘는 안아 올린 그녀를 아이처럼 흔들어 달래며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는 은근한 소리로 미례를 달래는 말을 계속했다. 아무리 달래도 미례는 울음을 그칠 생각을 안 했고, 한참을 그렇게 눈물을 쏟아낸 미례는 어느새 그의 달래는 말과 어우르는 반복되는 동작에 녹아들며 그의 품안에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새벽녘 눈을 뜬 미례가 편치 않은 몸을 들척이자 잠결에도 그가 낮게 웃으며 보호하듯 그녀의 몸에 팔을 둘렀다. 한번 깨고 나자 잠이 달아나 버린 미례는 어젯밤 실컷 울고 난 때문인지 어느 정도 속이 풀어져 있기도 했고 또 처음과는 달리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를 원망한다고 해서 돌이켜지는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이 되어지며 받아들이고 나자 미례는 사스래에 대한 동정이 일었다. "휘...자는 거예요?.." 미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가 낮게 웃음 웃으며 답하듯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미례는 그 느낌이 참으로 편안하다고 느끼며 그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다 운 거야, 이제?" 배시시 미례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 미례는 결심을 굳히고는 그에게 말했다. "....사스래요, 휘...집으로 데려와요." "음? 사스래를? 왜?" 그가 의아해 하며 미례의 표정을 확인하려고 자신의 품안에서 떼어놓았다. 미례는 그의 가슴께로 손을 올려놓고는 말을 이었다. "...언제까지..혼자 둘 수는 없잖아요." "제 사낼 만나면 혼인할 테고 평생 혼자 살진 않을 거야. 네가 걱정할 필욘 없어." 미례는 냉정하고 몰인정한 그의 말에 갑작스레 화가 치밀어 한숨을 내쉬고는 쌀쌀하게 쏘아붙였다. "자기 자식을 품은 여인을 다른 사내와 혼인하도록 내버려 두겠다구요?" "그게...무슨 소리야?" 경휘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는 방금 미례에게서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미례도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앉아 그를 마주보았다. "그럼 몰랐단 말예요?...사스래가 아이를 가졌어요." "그래서?" 그의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지더니 침상에서 내려서며 씩씩거렸다. 그는 점차로 어젯밤 서럽게 울어대던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가 어딨어요? 자기 자식을 가진 여인을 내치겠다는 몹쓸 생각이 아니라면 데려 와야죠." "훗,...그래서 어젯밤 그리 울어댔던 거야? 잘도 날 욕심 많은 호색한이라 욕하면서?..이런 제길.. 이 바보 같은 여자 같으니..." 그는 정말 화가 난 듯 방안을 서성대며 숨을 크게 내쉬었고 가끔씩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는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침상에 기대어 부른 배 위에 손을 얹고 있는, 연약해 보이는 미례에게 할 수 있는 심한 소리는 많지 않았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도 간신히 참고있는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례는 점점 더 그의 인내심을 자극하는 얘기만 하고 있었다. "당신에게...더 이상 뭐라 하지 않을 께요. 사스래를 데려와요...당신으로선 좋은 일이죠, 한해 사이에 자식이 둘이나 생길 테니.." "그만 두지 못해? 이 바보 같은 계집...그리도 날 못 믿어? 널 품고 나서는 한번도 사스래를 찾은 적이 없어, 한번도 다른 여인을 품어본 적이 없다구. 그리도 몰라? 그렇게 믿고싶은 거야? 응?" 그는 그만 화를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며 쏘아붙였다. 그의 예상 밖의 태도에 미례는 갑자기 당황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밤새 꿈을 꾸면서도 그 생각을 했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리라 여겼는데 그는 고마워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녀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사스래는...당신의.." 미례는 더욱 분노하며 그녀를 죽일 듯 쏘아보는 그를 대하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스래가 그리 말해? 내 아이를 가졌다고 그리 말했어?" "아..아뇨...그건 아니지만..." "그럼 누구야? 누가 그런 소리를 한 거야? 내가 사스래에게 아일 배게 했다고 누가 그러더냐구? 응?" 그의 다그치는 말에 미례는 그만 혼란스러워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어젯밤과는 다르게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 잠시동안 방안은 화를 삭이려 서성대는 그의 발소리와 거친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미례가 가만히 돌이켜 보니, 새타니도 사스래에게 태기가 있다는 것만 시인했을 뿐 그 아이가 경 휘의 아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다만 미례의 추측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화를 내는 그를 보니 아무래도 자신이 잘못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면...그 아이는...사스래의 아이 아버지는....누구일까요?" "그걸 내가 어찌 알아? 내가 사스래의 사내까지 일일이 꿰고 있어야 하는 거야?" 그제서야 씩씩거리며 화를 내는 그에게로 관심을 돌린 미례는 사스래에 대한 궁금증보다도 그의 화를 푸는 것이 우선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휘...미안해요...화내지 말아요." 미례는 기어 들어가는 작은 소리로 용기를 내어 그에게 한마디 건네었다. "지금 화 안 내게 생겼어? 밤새 옷자락이 젖도록 울어 젖히더니 새벽에 기껏 한다는 소리가 남의 아이 밴 여잘 집안에 들이라 하는데, 화 안 내게 됐냐구? 응?" "휘...제발...화 풀어요....미안해요.." 미례의 눈에 다시금 글썽이며 눈물이 고이자 그가 숨을 고르며 낮게 한마디했다. "난 사스래를 품지 않았어, 내 아이가 아니라구." "믿어요...이제 믿어요. 내가 잘못 알았어요." 미례가 얼굴을 붉히며 그에게로 미안함을 담아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미례를 쏘아보았다. 요즘 들어 제대로 그녀에게 화 한번 낸 적 없는 그였기에 미례는 더욱 미안해하며 몸둘 바를 몰랐다. "휘...정말로 미안해요...내가 잘못 알았다구요...음?....당신이 화내면 난...무서운 걸요....제발...이제 그만 화내고... 이리 와서 날 안아줘요, 음?" 그는 아직도 분이 덜 풀렸는지 고르지 못한 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아까처럼 아주 차갑지만은 않았다. "미안해요, 휘...정말 요..." 잠시 후 그가 머뭇거리며 다시 침상 안으로 들어왔고 미례는 아양을 떨듯 그의 품안으로 기어들었다.

번 호 : 51 / 263 등록일 : 98 년 09 월 30 일 20:05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23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43

"저기 요, 휘..." 다음 날 아침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옷을 주워입는 그의 기척에 깬 미례는 잠긴 음성으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침상에 기대앉는 미례를 보며 다정하게 미소지었다. "무슨 얘길 하고 싶은데 그리 망설여?" "사스래 얘긴데요...." "무슨?"


"....사스래의 아기 아버진 누굴까요?" "글쎄..." 그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사스래가 많이 힘들어하는 듯 했어요. 당신이 알아봐 주면...안되나요? 좋은 방향으로...어떻게.. 사스래 입장이 난처하잖아요" "그래...한번 알아보지." "정말요...휘."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 혼자 남은 미례의 마음은 어제와는 다르게 편안해졌다. 경휘 역시 사스래가 가진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몇 해 동안 그의 여인으로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쌀쌀하고 거칠기까지 한 사스래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이가 있었을까? 아이를 배게 해놓고도 나 몰라라 한다면 자신이 내버려두지 않으리라 고도 생각이 되었다. 사스래는 보이는 것만큼 표독스럽지도 강하기만 한 것도 아니란 것을 그는 알고있었다. 내가 딴 사낼 본다고 욕하지 말아요. 미례를 처음 품었던 날 그녀가 약이 올라 그렇게 쏘아 부쳤었다. 그럼 그때 이미 다른 사내를 알았다는 건가? 경휘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자 흰둥이를 데리고는 섬을 돌다가 사스래의 집으로 향했다. 사스래는 날랜 몸놀림으로 빨래를 널어 걸고 있었다. 흰둥이를 밖에 두고 집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뒷모습을 살피며 좁은 마당 한쪽에 털썩 앉았다. 그녀의 몸매는 아직도 아이를 밴 여인의 몸매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손 힘을 이용해 물기를 탈탈 털어 내어 줄에 널기를 계속하던 사스래는 돌아서다가는 경휘를 발 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뒷걸음질 마저 치는 그녀를 쓰게 웃으며 바라보던 경휘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뭘 그리 놀라는 거야? 그렇게 빠져서 일했던 거야? 사람이 오는 줄도 모르다니.." "어..어쩐..일이오?" 사스래가 못미더운 시선으로 가슴을 쓸어 내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흠...어쩐 일이긴..네가 보고싶으니 왔지." "피이~. 남산만한 배를 하고는 돌아다니는 그 계집애를 두고도 내가 보고 싶답니까? 맹문이도 비 웃을 일이구려." "미례에게 미움이 깊은가보구나." "미워 할 일이 뭐 있겠소. 이질금이 그리 말하니 그렇다는 거지요." "미례를 탓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텐데...그래...뭐..할 수 없는 일이지. 그래, 너는 잘 지내는 거야?" "잘 지내지요. 보면 모르겠소?"


"그래..." "흠, 그만 가보시구려. 이질금 볼일이 내게는 없으니.." "그래 야지." 경휘가 자리에서 흙을 털며 일어섰다. 안심한 사스래가 광주리의 물기를 털고는 그의 뒤를 거리를 두고는 따라나섰다. 흰둥이가 가까이 오는 그를 향해 귀를 털어 내며 눈짓을 하자 사스래 역시 곱지 않게 눈을 흘겼다. 못된 놈의 말 같으니, 저것도 뭘 안다고 사람을 구별하는 게지.. 사스래는 이전부터 경휘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흰둥이가 곱게 보이지는 않았으나 미례에게 순하게 구는 흰둥이를 보고는 더 미워하게 되었다. 그의 관심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하지 못해 안달하던 사스래에게 있어 연적이나 마찬가지 였던 흰둥이로 인해 그전의 심기가 편치 않았다면, 미례가 나타난 이후로는 더욱 편치 않았다. 그러나 흰둥이 입장에서 볼 때 그녀를 꺼리는 것은 그리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사스래는 경휘가 없는 틈을 타 평소에도 곱게 보지 않았던 흰둥이를 꼬집기도 하고 털을 쥐어뜯기도 했으며 맛이 독한 풀을 먹이기도 했던 것이다. 한 두번 속아넘어가던 흰둥이도 이제는 사스래의 독기 어린 마음쯤은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을 못하니 주인에게 못 이를 뿐이지 그저 참기만 하기엔 억울했던 흰둥이였다. 그러니 당연히 꺼리고 경계할 밖에.. 걸음을 옮기던 경휘가 어느 순간 갑자기 돌아서며 사스래를 바라보았다. 생각 없이 그를 따르던 사스래는 놀랐고 자리에서 멈칫하며 커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왜요?" 흰둥이를 쏘아보는 시선을 들킨 것 같아 겸연쩍어진 사스래가 말을 더듬으며 그를 바로 보지 못했다. "다른 사내가 있어?" 그가 살피는 시선으로 사스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무..무슨..말이오, 그건?" "다른 사내가 있느냐고 물었어." "치이..그게 무슨 상관이랍디까, 이질금과? 어서 가던 길이나 가요. 그 배부른 계집아이에게 가보라구요." "널 혼인시켜주고 싶은데, 네 마음에 차는 사내가 있느냐고 묻는 거야." "후훗..혼인 요? 지나는 개도 웃겠소. 쓸데없는 소린 그만두어요." "네가 내키는 사내가 없다면 내 마음대로 정해도 되는 거야?" 그가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사스래의 시선을 잡아두었다. 사스래의 시선이 흔들리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런 소린 듣고 싶지 않대두 그러오. 뭘 잘못 먹은 게요? 도대체 뜬금 없이 찾아와 날 놀리는


이유가 뭐냐구요?" "네 아이에게도 아비는 있어야 할거 아냐." 그는 심각한 어조로 사스래에게 쏘아 부쳤다. "뭐...뭐라구요? 무슨..그..그런.." "더는 발뺌하지 말아." "누..누가 그러오?..혹시..설마...새타니가...?" "그건 중요치 않아. 아이 아버지가 누구야?" "............." "그전에 다른 사낼 보겠다고 했던 건 그냥 한 소리가 아니었던 거지?" "...그런 게 아니오." "아니면? 언제부터 눈이 맞은 거야?" "..그런 것까지 이질금에게 말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오?" 경휘는 사스래의 태도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 그렇대도 아이 아비가 누군지는 말해야 할걸? 안 그러면 널 엉뚱한 사내에게 짝 지워 줄 테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말도 안될 건 없지. 내가 하는 일이야." 그는 부러 어기짱을 놓았다. 사스래는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사스래를 속으로 겁먹게 했다. "그러니 내게 말해." "싫어요." "그럼 할 수 없군." 그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돌아서서 흰둥이에게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사스래가 달려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설마..설마..이질금 정말로 그러지는 않을 거지요?" 이제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사스래는 두려움에 떨며 경휘를 대하는 태도를 달리했다. "두고 보면 알겠지." "그러지 말아요." 어느새 사스래의 말투는 애원하는 투가 되었고 울먹이기까지 했다. "그러니 말하라는 거야. 너도 그렇게 되는걸 원치는 않을 테니.." "안돼요, 말할 수 없어요." 정말로 사스래의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하니 고였다. 그것을 본 경휘의 심사는 더욱 뒤틀렸다. "네 마음대로 해. 나 역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 "이질금...제발.." "이 바보야, 아비 없는 자식을 낳고는 어찌하겠다는 거야. 응? 도대체 어찌 하겠다는 거냐고?" "그냥..이대로 살래요..그래도 난 상관없어요." "아이가 받는 손가락질은 어떻게 하고? 너만 편하자고 그렇게 하겠다고? 내가 그 꼴을 두고 볼 거 같애? 도대체 떳떳이 대지도 못하는 그 녀석이 누군지 말을 해봐, 이 바보야." "흐흑...난...싫어요, 싫다구요. 아무 말도 하고싶지 않아." 사스래는 기어이 울음을 터트리며 집안으로 달려들어갔다.


번 호 : 52 / 263 등록일 : 98 년 09 월 30 일 20:15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24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44

며칠이 지났다. 집안에서만 두문불출하던 사스래가 경휘에게로 찾아왔다. 경휘와 함께 안뜰의 그늘에서 몸을 기대어 쉬고있던 미례는 집안으로 들어서는 사스래를 보며 그에게서 팔을 거두었다. 미례의 배에 손을 얹고는 아이의 움직임을 느끼며 미례를 간지럼 태우던 경휘는 굳어지는 미례의 표정에 의아해하며 미례의 시선을 따라가다 사스래를 발견하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유모를 부를게, 잠시 혼자 있어도 되지?" "난 괜찮아요, 휘. 유모를 부르지 마요. 잠시 이렇게 있을래요." 그가 물러서다가는 미례의 몸이 편안하도록 부드러운 베게를 등뒤에 받쳐주었다. 산달을 두 달 남짓 남긴 미례의 몸은 보기에도 불안정해 보였다. 그는 뒤를 따르는 사스래를 데리고 사랑채로 건너갔다. 양피지와 퀘퀘한 종이냄새가 나는 어둡기까지 한 방안에 들어서자 그는 창문을 열어 공기를 통하게 했으며 밖을 통해 배 위에 손을 얹으며 한쪽으로 웅크리고 졸음을 쫓는 미례의 모습을 힐끗 살폈다. 그리고는 사스래에게로 돌아서서 묻는 시선으로 사스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스래의 표정이 망설이면서도 난처한 기색으로 울그락붉으락 하기를 반복하며 어떻게 말을 꺼낼지를 망설이는 듯 보였다. "내게 무슨 할말이 있는 거야?" 경휘가 안스러운 마음에 먼저 말문을 열었다. 사스래가 입술을 깨물다가는 마지못해 용기를 내어 말했다. "지난번...얘기 말이오, 이질금." ".....?" "....아직도 정말로 그럴 생각이오?" "네 아이 아비를 정해주겠다는 거 말이냐?" "그래요." "그래, 그럴 생각이야. 누구를 고를까 생각중이다 마는....왜? 네 스스로 고르련?" "......누구에게 그 얘기를 한 적이 있소?" "의논해볼 생각이지. 무엇이 알고싶어?" "아직은 아무에게도 말...안한 거지요?" "그래." 사스래의 얼굴에서 안도하는 빛이 스쳤다.


그는 의아한 기색으로 사스래를 쏘아보았다. 그녀가 숨기고 싶어하는 게 무언지 그는 꼭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달리 맘에 둔 사내라도 있는 거냐, 사스래야?" "제발..그런 소리는 하지 마오. 내가 아무리 박복하고 쉬운 계집처럼 보여도..아무리 속이 없어 보여도 아무려면 남의 아일 배고도 딴 사내에게 몸을 의탁해야할 처지는 아니오. 그렇게 뻔뻔하지도 못해요." "그래, 허니 어떻게 하랴, 네 입으로 그 아이 아비가 누군지 대면 혼인 시켜주겠다지 않니. 그게 그리 어려우냐?" "..그건 싫소. 그럴 수 있다면 내 이질금에게 이리 오지도 않아요. 제발..그런 생각일랑 그만둬줘요. 날 좀 편하게 내버려 두라구요." "의무려는 어떠니?" "뭐라구요?" "그가 널 좋게 생각하는 눈치더라. 그라면 널 한평생 맘 편히 살게 해줄 거라고 생각되지 않니?" "세상에 이질금...제발...그런 얘긴 그만할 수 없어요? 난 그렇게 못된 계집이 아니라구요." "그러면, 넌 어쩌고 싶은데?" "그냥..이대로...살고싶어요." "아이가 자라면서 아비 없는 자식이라 욕을 먹어도?" "........." "그리도 말못할 사내가 도대체 누구야? 누군데 네가 그리 감싸고도는 거야?" "그런 게 아니오." "허면, 이미 혼인해서 가정을 꾸린 사내인 거야? 그래서 네가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거야?" "무슨..그런.." 사스래는 그의 말에 펄쩍 뛰었다. 그리고는 점차로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니 고이기 시작했다. 그는 사스래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아프기 시작했다. "허면 이리 하자." "...어떻게 요?" "내 집으로 들어와." "뭐라구요?" "그렇게 되면 누구도 네게 뭐라 하지 않을 테니 네가 원하는 대로 편히 살 수 있을 거야." ".......그..그러면...이질금의 안사람이 가만히...있겠소?" "미례도 내게 그리 말한 적 있으니 더는 무어라 말하지 않을 거야. 허니 너만 좋다면 그렇게 하자." "...그건...." "안 그러면 내일쯤 장로들을 불러모아 네 일을 의논하던지, 아니면 의무려를 불러 너와 혼인할 의중이 있는지 내 물어볼 생각이니 그리 알아. 어디 네 입으로 어느 것이 좋을는지


들어보자꾸나." "........." "어찌 하고프냐?" 그는 사스래가 가고 나자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안뜰로 나왔다. 미례는 그사이 졸음을 참지 못하고는 곤하게 머리를 베게에 기대고는 잠에 빠져 들어있었다. 연약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데다 고운 우윳빛 볼을 발그레 물들인 채로 경계심 없이 잠든 모습은 너무도 사랑스러워 보였다. 반면 억척스레 살아온 사스래에게도 동정심이 일었다. 그의 결정은 어쩌면 미례의 마음을 상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스래를 보호해주자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의 의무이기도 하다고 생각이 되었다. 그는 한동안 미례 곁에 앉아서 질리지도 않은 듯, 아로새기듯 미례의 모습을 담아두고 있었다. 해야할 일들이 산적해 있었다. 복주에서도 무역에 관하여 결정을 다시 내려야 하고, 새로 만든 배의 사람을 채워야 하는 일이며, 암해자를 훈련시키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비록 위나라의 편은 들지 않더라도 언젠가를 대비해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어 정보를 알아내리라 마음먹고 있었으므로 료허에도 가보아야 했다. 우선은 아버지를 만나보고 그의 의중을 털어놓으며 아버지의 반응을 한번 보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더구나 생각하고 싶지 않은 어머니의 존재는 그를 아직도 혼란시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생각지도 않은 사스래의 일로 그는 근심을 하나 더 떠 안은 셈이었다. 제아무리 부처라도 돌아 안는다고 했던가. 미례는 물론 사스래를 거두어주라고도 했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그는 자신이 했던 말을 주워담아야 했고, 미례에게 그런 일을 하는 것이 그는 사실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사스래가 아이의 아비를 끝까지 밝히길 원치 않는다면 그가 아무리 다그친들 말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있었다. 굳이 사스래가 원치 않는 일을 하고싶지도 않았다. 그녀 또한 결코 쉽지 않은 세월을 살아왔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햇살이 뜨거워지며 그늘을 빼앗자 경휘는 더 이상 미례를 햇살 아래 두어선 안되겠단 마음에 조심스레 미례의 어깨와 무릎사이로 손을 넣어 안아 올렸다. 미례는 그가 안아드는 것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으나 집안으로 들어가려 몇 걸음 걷자 졸린 눈을 비비며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휘?" "안으로 들어가서 자. 살갗이 그을겠어." "으..음." 미례가 고마움을 담아 그에게 배시시 미소를 겨우 짓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무방비


상태로 천진스럽게 잠이든 미례의 길게 드리운 속눈섭이 파르르 떨리더니 곧 안정을 되찾았다. 미례의 몸은 처음보다 불어있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에겐 가벼웠다. 그는 미례가 편히 잠을 자도록 홑겹의 베 이불을 배 주위에 덮어주고는 밖으로 나왔다. 한번쯤 새타니를 찾아가서 의논을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요즈음 새타니를 찾지 않은 지도 보름이 넘었군. 경휘는 좋아라 반기는 흰둥이를 데리고 나오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번 호 : 53 / 263 등록일 : 98 년 09 월 30 일 20:18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30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45

"사스래의 아이 아비가 누군지 알면 말을 해봐, 새타니." 그는 다짜고짜 새타니를 보고는 말을 했다. 그러나 새타니는 여전히 노련맞게 응수했다. "흠. 흠..그런걸 내 어찌 알겠소. 귀신도 모르는 새 눈이 맞는 게 사내-계집사이가 아니오?" "정말 아는 게 없나?" "없으니 없다 하지요. 낸들 다 알기만 하겠소?" "...허면 사스래가 정말로 아무 말도 없었나?" "입을 열지 않으니 모를 밖에 요." "말 못할 사내가 도대체 누구기에...정말 답답하군." "이질금도 모르는 척 하시오. 굳이 다 알려고 하지 않아도 언젠간 알아지지 않겠소?" "어떻게 모르는 척 해? 이게 그냥 모르는 척 해서 덮어질 일이야? 제 신세나 태어날 아이 신세나 그 꼴이 참으로 우스울 텐데.." "그래도 어쩌겠소, 그 아이가 그리 원하니 내버려 둘 밖에 요. 좀더 기다려 보는 것도 좋을 게요." "...새타니가 정말로 아는 게 없다면..내가 거둬 들일작정이야." "그건 무슨 말이오?" "무슨 말이긴. 사스래를 그런 꼴로 내버려두고 싶지 않으니 내가 거두겠다고." "이질금의 집으로 들이겠단 말이오?" "그래." "미례 아씨는 어쩌고 말이오." "미례도 그리 하라 했어." "........." 새타니가 한숨을 내쉬며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가끔씩 비위가 틀어질 때마다 맛이 들린 담배는 이제는 점차로 그 횟수가 늘어가고 있었다.


가납사니나 그녀를 아끼는 마을 장로들은 물론 그녀의 그런 습관을 알고는 바닷길에서 돌아오면 의례 마을 청년을 시켜 가져온 잘 말린 담뱃잎을 한주머니씩 들이밀고는 돌아가곤 했다. 나이 들어가는 게지. 새타니는 그런 생각에 쓰게 웃었다. 경휘는 씁쓸한 웃음 삼키며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는 새타니를 못마땅하게 쳐다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어려서 그를 달래주던 새타니는 풀솜 할미라고는 불렀으나 그래도 젊은 나이였다. 그러나 요즈음 새록새록 늘어나는 그녀의 흰머리와 구부러져만 가는 허리를 보며 그 역시도 세월을 실감하고 있었다. 언젠가 관음사의 주지선사에게도 말했지만 화평도를 지키는 존재는 새타니였다. 그녀가 없는 화평도란 경휘에게 상상이 되지도 않는, 그런 존재였다. 비록 한동안은 자신을 버리고 신을 쫒은 그녀를 원망하며 미워했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일 뿐 그가 새타니에게 더욱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는 다만 섬을 떠나 살던 몇 년간의 어색함, 바로 그 거리감을 떨쳐내지 못한 때문이었다. 하루하루 늙어 가는 새타니를 보며 경휘는 안타까웠다. 겨우내 해소기침이라도 심하게 할라치면 그는 곰방대를 물고있는 그녀의 모습을 떨떠름하게 쏘아보곤 했다. 어느날은 정말로 그녀가 사라지고 없을까봐 안달하는 자신을 알고는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제라도 그는 자신의 마음을 새타니에게 털어놓아야겠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속에서만 맴돌 뿐 제대로 한마디 떼어놓지 못했다. "왜?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거야? 안될 이유도 없잖아. 어차피 내 아일 가졌다 해도 다들 믿을 터인데..오히려 잘된 거지." 경휘는 뻐끔뻐끔 연기만 내뿜는 새타니를 향해 말을 던졌다. 그녀답지 않게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 새타니가 의아스럽기까지 했다. 경휘는 이 섬에서 그녀가 두려워하는 인물이 있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 없었다. 그런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를 않다니...더구나 불만스런 눈빛임에도 체념 섞인 표정으로... "왜 그래, 새타니. 말을 해보라구. 그게 더 쉽지 않겠어. 사스래의 새 사내를 찾느니 내가 거두어 내 집으로 들인다면 남들도 쉬이 수긍할게 아니냐고." "그러니 문제지요. 미례 아씨가 받을 상처가 크지 않겠소? 미례 아씨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소? 게다가 전대 이질금은 또 어떠시겠소. 그냥 내버려두시진 않을 거요."


"아버지는 상관없어." "뿐만 아니라오. 사스래는 어떻구요. 이질금이 그리 맘먹고 거두는 것은 뭐라 하지 않더라도 사스래도 여인인거요. 이질금이 거두고 그래서 평생을 돌본다 쳐도 그게 제 사내만 하겠소? 아웅 다웅 하며 살아가는 제 사내만 하겠느냔 말이오." "..마음 고생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야." "평생 미례아씰 대하듯 알음 하면서 말이오?" "......." "지금 당장을 모면하는 게 좋기만 한건 아니오, 이질금." ".........." "사스래도 생각이 있을 것 아니오. 설마..아무려면 제 자식인데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을걸 뻔히 알면서 나 몰라라 하지는 않을 거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소." "사스래도 그리 하겠다 했어. 도대체 그 몹쓸 놈이 어떤 녀석인지는 몰라도 밝히길 꺼려한다고. 차라리 내 그늘 아래 들어오는 게 낫다고 생각할 만큼 그 놈은 나서지 못할 상황인 거라구. 젠장 할." ".....허면 정말로 사스래를 받아들일 거란 말이오?" "그럴 거야." 경휘는 이를 악물고는 잇새로 대답했다. 휴우~하고 새타니가 한숨과 함께 연기를 내뱉었다. 답답해진 경휘가 새타니를 힐끗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툴게 그답지 않게 몸을 잘 돌보라는 인사치레를 웅얼거리듯 하고는 나가려 하자 새타니가 뒤에서 그를 불렀다. "뭐야" 경휘가 퉁명스레 대꾸하며 돌아보자 새타니가 희미하게나마 웃음기를 보이며 당부했다. "그러면 언제 사스래를 집으로 데려올 생각이오?" "빠를수록 좋겠지. 널린 게 방인데 방 하나 치우는 게 뭐 그리 어렵겠어." "미례 아씨도 아는 거요?" "바로 얘길 할거야." "미례 아씨 산달이 되 가잖소. 미례 아씨 몸 풀고, 그러고 나서 사스래를 불러들여도 늦지 않을 거 아니겠소?" "그게 그거지, 뭐 다를 게 있다고." "그런 게 아니오. 미례 아씨 마음 고생도 생각해 보오. 하여간 사내들이란..." 새타니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번 호 : 54 / 263 등록일 : 98 년 10 월 01 일 12:06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28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46

새타니에게 말했던 것처럼 미례에게 사스래를 집안에 들이겠다고 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벌써 새타니에게서 돌아온 지 며칠이 되었지만 경휘는 그저 생각만 많을 뿐 아직 미례에게 운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새타니 말마따나 만삭이 되어 몸도 무겁고 가뜩이나 힘겨워 하는 미례를 앞에 두고 자신의 말을 뒤집는 일은 여간 곤욕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몇 번 운을 떼 보려던 그는 그를 올려다보는 천진스런 미례의 눈빛에 그만 흐지부지 되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일은 결국 우연찮은 기회를 통해 미례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날은 가납사니가 아침부터 찾아와 복주의 절도사 조 융이 무역으로 재미를 보자 이참에 화평 도방에 떼어주는 반 몫을 아까워하며 직접 바닷길을 열기 위해 암해자를 꾀어내려 하는 일에 분개하고 있었다. "사람의 욕심이란 게 끝간데 없나보오. 제 놈이 얻은 그 이문만으로도 족할 텐데 그도 적다 하고 온 이득을 모두 차지하려 하다니 말이오." "그런 게지. 아무튼 이번 일을 기회로 암해자들을 잘 다독거려주어야지. 복주에도 전서구로 이미 알렸으니 조심할 테고." "그래야지요. 것 참...그런 죽일 놈이 있나..이질금 그런 놈은 내 보기에 오래 알아봤자 별로 좋을 게 없을 거 같소. 끝이 안 좋을 놈인 게 눈에 보이오." 이번 복주행에 그를 대신하여 지휘하여 다녀왔던 가납사니는 시시콜콜 한 것까지 경휘에게 보고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경휘는 그의 다혈질한 분개에 피식 웃음을 웃었다. 가납사니도 그런 경휘의 생각을 읽은 듯 잠시 누그러지더니 경휘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 듯 생소한 표정이 되었다. "갑자기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야?" 경휘가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묻자 가납사니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좀..변한 듯 해서 그러오." "내가?" "음...맞어. 확실히 변한것 같구려." "실없는 소리. 내가 나인거지, 변하긴 뭐가 변했다고." "아니오. 좀 변했소. 허긴 복주에서도 다들 이번 항해를 두고 놀라는 눈칩디다, 말은 없어도." "놀랄게 뭐 있다고." "이질금이 직접 오실 줄 알고 있었던 거요. 남궁 공자께서도 대뜸 화평도에 무슨 일이 있느냐 물으시더군요." "훗, 그래 뭐라 했나?" "뭐..그럭저럭 둘러댔지요. 섬에 일이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보니, 또 미례아씨가 염려스러우시니" "그래, 그 말을 믿던가?" "쉬이 수긍이 가는 일은 아닌 것 같았소." 사실 설민은 가납사니의 말에 다소 경박스럽다 싶게 낄낄거리며 한참을 웃어댔다.


그리고는 아무래도 경휘가 벌써부터 안주인에게 푹 빠져버린 게 아니냐고 집어냈다. 물론 가납사니도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으나 이렇다 하게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어찌됐든 경휘는 이질금이 분명하고 남궁 공자는 중원의 사람이 아닌가. 그런 얘기까지 모두를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거기까진 잘 모르겠다 둘러대었다. 분명 다음 번에 가면 한참동안 설민의 놀림을 사게 될 것이 뻔하다고 생각되자 경휘는 체념 섞인 어깨 짓으로 털어 버렸다. "미례 아씬 좀 어떻소?" "잘 지내지. 나날이 몸이 불어 가는 것만 빼고는." "음....헌데 돌아와서 이상한 말을 들었소. 이질금이 새사람을 들인다는 말이 사실이오?" "흠..." 그때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발을 걷으며 미례가 들어섰다. "어머, 가납사니였군요." 미례는 경휘와의 아침나절의 산책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섬을 둘러보러 간줄 알았던 경휘가 사랑채에 손님과 함께 있다는 곁시의 말에 기다리다가는 차를 내가는 일을 직접 하겠다며 걸음한 것이었다. 가납사니도 반가운 기색으로 환하게 웃으며 미례를 맞았고 그답지 않게 미례에게로 가 소반을 받아들었다. 가납사니만큼이나 불안정한 미례의 모습에 그녀에게로 달려가고픈 생각이 든 경휘였으나 덩치 큰 가납사니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우스워져 그대로 자리를 지키며 보고만 있었다. 미례는 가납사니가 찻 소반을 받아들자 편안한 걸음으로 경휘에게로 다가왔다. "이런 일은 곁시에게 시켜도 되잖아. 네가 직접 이럴 필요 까진 없어." 미례는 그의 불만스런 책망에 볼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대꾸했다. "함께 산책을 하고 싶어서요..더 기다려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일이 있는지 물으러 오던 길이었는걸요." "나도 미례 아씰 보니 좋은데 뭘 그러오, 이질금. 안 그래도 잘 계시는지 궁금해하던 차인데, 좋아 보이십니다, 미례 아씨. 다행이오." "가납사니도 한동안 못 뵈었어요. 건강해 보이시네요." 미례는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가납사니에게 고마움 담긴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경휘는 굳어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납사니는 그의 표정을 무시하고는 미례에게 말을 걸었다. "미례 아씨, 정말로 배가 많이 부르신 데요. 튼튼한 아들을 낳으실 것 같소." "아..아직은..잘 모르겠어요. 유모는 배가 많이 부른 것이 아들 같다고도 하지만 좀더 있?얘기 나누도록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사스래를 집안에 들인다는 게 사실이오? 허면 거처는 어찌하고...?" 미례가 나가기가 무섭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음을 던지던 가납사니는 경휘의


표정이 긴장하며 변하는 것에 말문을 닫고는 그의 시선을 따라 방문 쪽을 돌아보았다. 아직 미례가 그곳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어정쩡한 표정의 가납사니와 일순 긴장하는 경휘의 표정을 뒤로하고 미례는 동요되지 않는 자세로 방을 나섰다.

번 호 : 57 / 263 등록일 : 98 년 10 월 03 일 01:27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35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47

"네게 할 말이 있어." 미례의 걸음에 맞춰 느리게 오솔길을 걸어 올라와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앉아 한참을 쉬고 있다가 경휘는 마음을 다지고는 입을 열었다. 미례는 그가 산보를 가자고 하자 말없이 따라나섰다. 주위를 둘러보며 서로의 눈을 마주치는 것도 꺼려하던 그들은 그저 걸음만을 내딛을 뿐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아직도 꽤 덥군, 하고 그가 한마디했고 미례는 그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아까 가납사니의 말을 들은 거지?" 무뚝뚝한 말투로 그가 다시 운을 떼었다. 미례는 잠시 그의 시선과 얽히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피했다. "그래.....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다시 그가 입을 다물자 한동안의 침묵이 이어졌다. 지난번 새타니에게 다녀왔을 때 이야기를 꺼냈더라면 좋았을걸, 하고 경휘는 후회했다. 지금의 내키지 않는 고백은 죽을 맛이었다. 영웅호색이라고 꼭 천하에 영웅이 아니더라도, 사내가 여인을 좋아하는 것이야 사실 흉될 것도 없는 일이라고 자신의 앞가림을 하는 그였지만 어찌됐든 미례의 부른 배를 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죄인 같은 심정인 건 떨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흠....사스래가 아이를 밴 건 이미 알 테고...그래, 사스래를 내 집으로 들일생각이야." "........." 경휘가 묻는 시선으로 미례를 바라보자 미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차라리 지난번처럼 호색한 사내라고 욕이라도 하고 투정이라도 하는 게 낫다고 경휘는 생각했다. 다소곳이 받아들이는 미례의 태도는 그를 더욱 위축되게 했다.


"내게 할말이 없어?" 경휘가 미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없어요." "정말 없어?" "네,.....그만..돌아갈까요? 좀 피곤한 듯 해요." 미례는 얼른 화제를 돌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미례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도와주고는 미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인적 없는 길을 걸어 내려오며 경휘가 다시 말을 꺼냈다. "지난번에 사스래의 아이 아비가 누군지 모르겠다 했던 건 말야..." 경휘가 껄끄러운 그 말을 짚고 넘어가기 위해 어렵사리 다시 말을 꺼냈다. 이런 상황은 이번 한 번이면 족하다고 그는 생각했기에 해야 할말은 해치워 버리자고 마음먹었다. 미례는 힐끗 그의 표정을 살피고는 다시 먼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미례의 머리 속이 멍하고 답답한 것과는 달리 배속의 아이는 미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제법 활발하게 놀고있었다. 이미 그에게 사스래를 데려오도록 말한 적이 있었으므로 미례는 그 일에 대해 그다지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신뢰는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조금씩 조금씩 그에게 마음을 주고있던 미례는 아침나절의 상심을 달래려 무진 애를 쓰고 있었으나 쉬이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사스래가 가진 아이는 내 아이이기도 해. 지난번에는...그걸 잘 몰랐었어. 사실 사스래를 어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허니 그대로 너도 받아주리라 생각해. 미례 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으니 달리 생각 하리라곤 믿지 않지만...잘 지내주길 바래." "..........." "정말 아무 말도 안 할거야?" "......알겠어요." 그것만이 미례가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후로 미례는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돌아오면서 경휘 역시도 두 사람 사이에 알게 모르게 움터왔던 어떤 감정의 싹이 시들어버렸음을 알았다. 이후에도 경휘는 시간 날 때마다 미례와의 산보를 거르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가 소원해지자 경휘는 한 방편으로 흰둥이를 함께 데리고 나갔다. 흰둥이 역시 미례의 걸음에 맞추어 걷다가는 경휘가 고삐를 늦추어주는 사이에 저만치 앞서 나가기도 했고 뒤로 쳐져서 풀을 뜯기도 했으며 어느새 달려와서는 미례의 곁에 바싹 붙어서 몸을 비벼대기도 했다. 경휘는 미례가 흰둥이와 장난을 치기도 하며 쓰다듬기도 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걸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날 밤도 자리에 누웠을 때 미례는 저만치 떨어져서 누웠다. 그는 다만 짙은 눈썹을 한번 치켜 올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슴이 심하게 내리 눌리는 기분이 들었고 갑자기 울적해져서 미례는 눈물이 핑 돌았다. 잦은 뒤척임을 보이다 그에게 등을 돌리고 돌아누워서 미례는 입술을 깨물고 흐느낌을 참으며 잠을 청했다. 뱃속이 아이는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심하게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이 더욱 미례의 서러움을 부채질했는지도 모르나 어느 순간부터 미례는 훌쩍이며 울기 시작했다. 경휘 역시 잠을 청하다가는 미례의 울음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어둠 속에서 경휘는 잠시 가늘게 떨리는 미례의 어깨에 손을 댈까 망설였다. 그리고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처음엔 걱정스러웠으나 아파서 우는 게 아닌 건 분명했다. 그랬더라면 미례는 벌써 그에게 말을 했을 것이었다. 며칠을 눈에 띄게 말수도 줄고 표정도 어두웠던 미례였다. 뿐만 아니라 음식도 겨우 겨우 입에 대었다가는 손을 놓곤 했다. 그때마다 유모는 걱정스럽게 그녀를 부추겼고 그는 다만 한 두 번 시선을 마주치며 인상을 쓰곤 했다. 어쩔 수 없는 여자인 게지. 가끔씩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삐죽이기도 했다. 그는 미례가 걱정스러워지는 만큼이나 차츰 그녀에게 비춰질 자신의 모습이 짜증스러워졌다. 그는 이제껏 자신만만하게만 살아왔다. 누구에게도 당당하지 못하다 곤 생각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일로 자신의 말을 번복하면서 그는 미례에게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만큼이나 자신에게 짜증이 나고 있었다. 가끔은 사실대로 말하고 싶은 생각도 들긴 했다. 하루하루 어두워져 가는 미례의 안색을 대할 때마다 그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앞으로 사스래와 그녀의 자식은 제대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말하기를 그만 두었다. 물론 미례가 사실을 안다고 해서 사스래와 그 자식을 홀대하지야 않겠지만 그것은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시간이 흘러 미례가 익숙해지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그런대로 받아들이는 듯 했던 미례가 오늘밤은 흐느껴 우는 것을 보고 그는 가슴이 무겁게 짓눌리는 것을 느꼈다. 휴우~하고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는 쉽게 흐느껴 우는 미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지도 못하고 답답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거칠게 열고는 밖으로 나갔다.


미례는 그가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억눌렸던 감정을 드러내고는 서럽게 소리내어 울었다. 벌레우는 소리와 낮 동안의 더위를 밷어 놓는 듯한 풀내음 나는 안뜰을 서성이던 그는 울컥 치미는 화를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바보 같으니....다 이해하겠다고 했잖아. 사스래가 안됐으니 데려 오라 했잖아. 이제와서 뭐가 다르다고 저리 서럽게 우는 거야. 속 좁은 계집 같으니.." 그는 말도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미례를 원망하며 화가 풀릴 때까지 한동안을 서성거렸다. 처음부터 자신으로 인해 많이도 울게 했던 미례를 알기에 그는 이제는 왠만하면 더는 그녀의 눈 에서 눈물 보이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그가 억지로 미례를 억류한 것이 아니고 그녀가 자신의 의지로 남아준 이후로는 좀더 잘해주리라 결심했던 그였다. 그러나 오늘밤 미례의 눈물은 그의 상처 난 가슴에 소금을 뿌려대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달래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더 심사가 뒤틀렸다. 실컷 울어보라지. 그래, 실컷 울고 나면 앞으로는 덜할 테니 내키는 만큼 울려무나. 그는 그 순간 사스래도 밉고, 사스래에게 아이를 배게 만든 낯모르는 사내도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으며, 방안에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의 주인도 미웠다. 또한 그녀를 울게 만드는 자기 자신은 더욱 싫었다.

번 호 : 65 / 263 등록일 : 98 년 10 월 04 일 12:41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46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48

그는 한동안 그 자리서 서성대다가 울음소리가 그쳤는가 싶자 천천히 방안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미례의 어깨는 가늘게 떨고있었으나 울음소리는 확실히 잦아져 있었다. 가끔씩의 숨소리가 발작적으로 딸국질 하듯 겹쳐 들리는 것 말고는 울고있다는 증거는 없는 듯 했다. 여전히 그에게는 등돌린 상태로 들썩이는 어깨는 그녀가 자제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이제 다 운 거야? 그러고 나니 속이 좀 시원하냐, 미례야?" "........." 잦아들었던 미례의 울음소리가 다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자리에 누우려던 그는 순간을 참지 못하고 그만 분통을 터트렸다. "제길 할. 그래, 울고 싶거든 더 울어봐. 얼마든지 울어보라고. 오늘만은 봐줄 테니


더 해보라고. 뭐가 그리 서러운 거야? 네가 그리 말했잖아, 사스래를 데려 오라 말한 건 너였잖아. 그럼 그건 괜한 소리였던 거야? 그냥 한번 해본 소리였던 거냐고? 네가 이리 울 이유가 뭐 있는 거야? 응? 뭐가 그리 달라진다고 우는 거야? 응? 이 바보 같은 계집. 꼭 그리 울어서 내 속을 뒤집어 놓아 야 하는 거야? 그래야 네 맘이 편할 것 같으냐? 어디 실컷 울어보라고, 그래." 그의 분노에 찬 말에 미례의 어깨가 심하게 떨렸다. 잦아들던 흐느낌도 조금 더 커졌다. 옆으로 돌아누워 베게를 적시던 미례는 울음으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자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서도 그에게서 등돌리고 비껴 앉았다. 미례는 그가 쏘아붙이는 것처럼 꼭 그런 이유로 우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비난은 미례를 울리기에 충분했다. "그래, 울어. 더 울어보라고. 대신에 오늘밤 이후로도 그 일로 우는 꼴을 보면 가만히 안 둘 테니, 명심해둬." ".........흐흑..." 가끔씩 미례도 진정치 못하게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그는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미례의 등을 쏘아보며 씨근거렸다. "제길 할. 그러니 내 물었잖아. 할말이 없다고 대꾸했던 게 누구였냐고? 소리내어 말하랄 때 했으면 좋지 않냐고. 바보 같으니. 그러고 속에 담아두니 뭐가 좋으냔 말이다. 차라리 호색한이라고 욕해도 좋으니 욕을 하란 말이야. 응? 그리 울지만 말고." "...그 때문에.....우는 게 아녜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미례가 울먹이며 대꾸했다. 그는 미례의 대답을 되새기며 분을 삭였다. 그 때문이 아니라고? 그럼 뭣 때문이란 거야? 그는 숨을 고르며 잠시 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으나 미례는 흐느끼기만 할뿐 더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허면....뭣 때문에 그리 서럽게 우는 거야? 지금이 한밤중인 것도 몰라?" ".......아이가....심하게 놀았어요." 여전히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쉴새없이 훔치며 미례가 대꾸했다. 그는 미례의 둘러대는 말에 처음엔 어이가 없었으나 잠시 후 피식 웃고 말았다. 잘난 귀족계집인 줄로만 알았더니 그도 아니었나 보다. 아니면 정말로 터무니없는 그런 이유로 울 수도 있는 건가? 그러나 그 어이없는 대답에 경휘는 점차로 분노가 사그러 드는 걸 느끼며 숨결을 가다듬었다. 어쨌거나 자신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니 마음이 좀 편안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정말로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고?" "그래요.."


"지금도....아이가 심하게 놀아?" 조금은 겸연쩍어진 그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지금은 좀 나아요." 경휘는 천천히 침상으로 올라가서 침상머리에 기대앉았고 아직도 가늘게 떨리는 미례의 어깨를 끌어당겨 자신에게로 기대게 했다. 미례는 몸의 힘을 빼며 그에게 기댔다. 경휘가 미례의 어깨를 안지 않은 오른 팔을 뻗어 부른 배 위에 올려놓고는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천천히 미례의 왼쪽 팔이 반쯤 겹치듯 그에게로 올려졌다. "뱃속의 아이만으로도 힘들다는 것을 몰랐어." "......요즘은 그냥 시도 때도 없이 서러운 걸요..가끔씩은 소리내서 크게 울고싶을 때도 있었어요. 나도 모르겠어요. 그냥....서러워져서.." "게다가 내가 밉기도 했을 꺼야." "...그랬어요." 미례는 작은 소리로 고백했다. 가끔씩 미례의 어깨가 들썩이며 숨소리가 겹쳐지기도 했다. "못 믿을 사내처럼 보이기도 했을 테고.." ".........." "네게 무어라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알아...다른 이에게도 마찬가지지만 네게도 당당한 사내로 보이고 싶은 게 내 욕심이라면 욕심인 거지.....허니, 더는 그 일로 맘 상해하지 말고....그저...시간에 맡겨두고서....네가 그냥 한번 눈감아 주면 좋겠다. 사내들이 다 그런 거지 해도 좋고..." 미례는 억눌렸던 한숨을 내쉬며 편하게 자세를 고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스래를 들인다는 것 때문에 울었던 건..정말로 아녜요....다만...휘...당신을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이유가 더 했어요....거기다 뱃속의 아이는 심하게 움직이고...그냥 답답하고...눈물이 쏟아졌어요..." "..그래...그만해....그만 하자....울고 나니 속이 시원하냐, 미례야?" "조금 요...." 그의 말에 빙그레 웃으며 미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미례를 따라 피식 웃음을 지었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을 때는 간밤과는 달리 미례의 기분도 많이 풀어져 있었다. 유모는 아침상을 차리며 미례의 부은 눈을 보고는 눈쌀을 찌푸렸으나 미례는 시선을 피하며 배시시 웃음 지었다. 함께 산보를 나가기를 기대했으나 경휘는 새벽같이 일어나 벌써 한바퀴 둘러보고 온 눈치였으므로 미례는 은근히 실망을 했다. 그러나 미례는 그가 건네주는 빨간 능금하나로 그에게 미소를 되돌렸다. "아니 저렇게 잘 익은 능금이 있었나 보네요, 이질금."


유모가 미례의 밝은 미소에 안심하는 기색이 역력한 채로 미례가 들으라고 일부러 그에게 말했다. "숲에서 새로 만들 배에 쓸 나무를 정하러 갔다가 발견했지. 야생 능금이라서 그런지 더 탐스럽게 익은 것 같더군." "어쩌면 색도 저리 곱구요, 게다가 생김새도 아주 예쁜 걸요. 흠잡을 데가 없네요." "좋은 것만 보게 하고 예쁜 것만 골라 먹이라 하더군." 툭하면 눈물을 보이는 요즘의 미례가 염려스러웠던 그가 새타니에게 들렸을 때 새타니가 그리 말했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에게 먼저 들렸었던 경휘가 능금 몇 알을 남겨두었는데, 새타니는 잘 익고 모양 좋은 것을 고르더니 미례에게 가져다주라며 그에게 말했던 것이다. 미례는 탐스럽고 빨갛게 잘 익은 능금을 보고 군침이 돌았으나 쉬이 맛보려 하지 않고는 이리 저리 만져보며 귀한 것을 대하듯 아끼고 보기만 했다. "능금은 얼마든지 있으니 그렇게 아끼지 않아도 돼." 그가 미례의 모습에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다음엔 함께 가봐요, 휘..나도 주렁주렁 달린 나무를 보고싶어요."

@@@@@@집으로 가기전에 조금이나마 올려야 할것 같아서요....악녀님의 사스래 번외편 이후로 갈등중임을 고백합니다....길을 잃고 있는 느낌....악녀님이 책임져요.....ㅠ.ㅠ

번 호 : 95 / 263 등록일 : 98 년 10 월 15 일 21:14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53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49 "능금은 얼마든지 있으니 그렇게 아끼지 않아도 돼." 그가 미례의 모습에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다음엔 함께 가봐요, 휘..나도 나무에 달린 열매를 눈으로 보고싶어요." 수줍어하면서도 미례가 그에게 대꾸하자 경휘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음, 그건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미례야." "...왜요?" 미례가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동안은 집밖으로 나가는 일이 좋지 않을 것 같아." "....아침나절의 산보도 요?" "음. 정 답답하면 그냥 안뜰에서 산책 삼아 걸어보는 게 좋겠어. 어차피 몸을 움직이는 게 중요한 것이니까" "....왜요?"


"그게....밖의 사람과 접촉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다. 해산할 때까지는 조심해서 해될게 없어." ".....무슨 일인데요, 휘?...내가 알면 안 되는 건가요?" "안된다기 보단....그저 조심하자는 거야. 요사이 마을의 아이 몇이 죽었어. 돌림병일지도 모르니 괜시리 겁 없이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다는 거야, 너는 홀몸도 아니니...." ".....알겠어요." 미례는 그가 이전에 미례가 홍역을 앓던 일로 인해 더욱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그는 미례가 반하와의 접촉으로 인해 앓아 누웠던 일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그의 안색을 살폈으나 그는 이전의 일까지는 끄집어 내지 않을 듯 보였으므로 미례는 적이 안도했다. 미례는 그가 포구의 선착장에서 진행중인 배의 개삭과 새로운 모형의 조선작업에 장인들이 서로 제 방법이 옳다 주장하며 소리를 높이느라 일이 진척이 안된다고 투덜거리며 아직도 빨간 과일을 만지작거리는 미례를 남겨두고는 밖으로 나갔다. 늦게나 돌아올 것 같으니 기다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서. 미례는 사실 언제쯤 사스래를 데려올 것인지도 조심스레 묻고 싶었으나 속으로만 되뇌일 뿐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경휘는 개삭작업이 한창인 선착장으로 갔다. 개삭이라 함은 일정기간동안 배를 사용하고 난 후에 썩은 널빤지나 낡은 목정을 새것으로 경질하여 배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험한 뱃길을 자주 드나드니 배의 상태를 자주 점검하는 것이 필요했고 대륙으로 나갈 때나 서역의 기선들을 발견할 때마다 기술장인들은 그대로 넘기는 적이 없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보고 모방하며 장단점을 파악해 새로운 기술을 축적해 나갔다. 이제는 웬만한 폭풍쯤은 겁날게 없다고까지 그들은 자신하고 있었다. 아침나절부터 꾀부리지 않고 나와 일하는 그들 장인들 사이에 입씨름이 벌어졌는지 시끌시끌했다. 경휘가 그들 사이로 다가가자 그들의 말소리는 조금 줄어들었으나 불만스러움이 가득한 얼굴들이었다. "왜들 그러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목정을 쓰지 말고 철정을 써보자고 그러는 겁니다. 이질금." 철정을 써보자고 강력히 말하던 장인이 그에게 말했다. "지금껏 목정을 써왔는데, 그 바보 같은 중원 인들을 따라 철정을 쓰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배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것도 모르나? 따라할게 따로 있지. 지난번 삼나무로 만든 목정도 그랬지만 지금껏 잘 해왔던 것을 이유 없이 바꿀 필요가 무어냐고...에잇,"


나이든 장인이 불만스럽게 핀잔을 주었다. "이유가 없는 게 아니잖소. 철정을 쓰면 그만큼 다시 개삭을 안해도 되니 굳이 외판재를 두껍게 하지 않아도 되고, 그러면 선체도 좀 날렵해질 테고 저항을 덜 받아 그만큼 배의 속도도 빨라질 게 아니냔 말이오." 그는 다시 답답하다는 투로 나이든 장인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흥, 나이든 장인은 콧방귀를 뀌며 옆으로 비껴섰다. "지금껏 익숙해져있는데서 별문제도 없는데 고쳐본다는 건 좀 위험할 수도 있지. 이전의 방식으로도 잘 지내왔잖나." 경휘가 일단 나이든 장인의 말을 수긍하며 입을 열자 젊은 장인이 불만스런 기색을 띄다가는 수그러들었다. 나이든 장인도 자신의 말을 이질금이 인정해 주자 기분이 좋아져 표정을 바꾸며 다시 일로 돌아가자고 사람들을 격려했다. 경휘는 불만스럽게 따라가는 젊은 장인에게로 가서 은근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노인을 그 자리서 이기려고 하지 말아. 무얼로도 네가 질 것이 뻔하지 않나. 그간 쌓아온 경륜으로 보아도... 그걸 무시할 순 없지." ".....알겠소, 이질금." "그런데, 철정을 쓰면 좀더 속도가 붙을 것 같긴 한 건가?" 그간 배의 속도가 불만이었던 경휘도 그 말에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구 말구요, 지금처럼 외판재를 두텁게 하지 않아도 되고, 그러면 목재를 아낄 수도 있는 데다 선체의 앞모양을 좀더 가다듬으면 물살을 쉬이 헤쳐갈 수 있게 되죠." "그래?...흠....좀더 생각을 좀 해보지. 잘 될 것 같으면 한번 시도해볼 수도 있겠지...다음에 다시 얘길 해보자고." 경휘의 말에 그는 좋아라고 웃으며 알겠다고 말하고는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젊은 장인이 멀어지고 그들을 좀 떨어진 거리에서 보고있던 소솜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경휘가 물었다. "그의 이름이 무어지?....못 보던 자 같은데..." "후중이오, 광주의 화평도방에 나가있었소."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도 절친했던 마을 장로의 늦게 본 아들이었다. "그가 벌써 저렇게 몰라보게 자랐나?...하긴 광주에서는 자주 서역의 배를 보기도 했을 테지만, 배에 꽤 관심이 있어 보이는데?" "조금 지나치다 싶을 만큼 열의도 있고...헌데 너무 앞서가려고 하는 게 흠이오." "그 나이면 그럴 수도 있지...세상이 자기를 몰라준다고도 생각이 되고..." 경휘도 한때 아버지에게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어 몸살을 앓던 때를 생각하고는 피식 웃었다. 항상 침착해 보이기만 하는, 한번도 열정이라거나 빗나가는 짓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소솜과는 달리... "혹, 너도 그런 때가 있었을까?" 밑도 끝도 없는 던지는 물음에 소솜이 의아해하며 경휘를 쳐다 보았다. "무슨..말이오?" "후훗, 너라면...태어나면서부터 어른스럽지 않았을까 해서 말이야. 소솜." "그렇지 않다는 걸 알잖소." 소솜도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말해봐, 소솜. 누군가 마음에 품었던 여인도 없었어?" "...무슨..소리요?" "널 밤잠 못 이루게 하고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풋정 같은 것도 없었는지..묻는 거야." ".........."

번 호 : 105 / 263 등록일 : 98 년 10 월 26 일 03:38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36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50 "말해봐, 소솜. 누군가 마음에 품었던 여인도 없었어?" "...무슨..소리요?" "널 밤잠 못 이루게 하고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풋정 같은 것도 없었는지..묻는 거야." ".........." 후훗, 소솜의 울그락 붉으락 하는 표정에 경휘는 쓴웃음을 지었다. "가납사니도 널 혼인시키려고 몸이 달았을 텐데..어때, 소솜, 마음에 둔 여인이 있다면 내게 말하는 게...내 특별히 네겐 재여리 되 줄 수 도 있고..." "....그런 사람 없소." "흠, 정말?" "날 놀릴 생각이라면 그만두오, 이질금. 하나도 재미없소." 경휘는 다시 속웃음을 웃으며 개삭 중인 배로 향했다. 그들이 버리지 못하는 배가 한 척 있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가장 정성 들여 손질하고있는 배는 바로 그의 할아버지 시절부터 내려온 60 년이 다 되가는 배였다. 벌써 다른 배 같았으면 개삭은 커녕 폐기 처분 되고도 남았을 테지만, 비선(飛船)이라 이름지은 그 배는 아직도 그 위용을 자랑하며 오래도록 중원을 향해 나아갔었다. 중원진출의 조부의 꿈이 만들어낸 그 배는 비수의 대전에서 목숨을 잃은 한으로 제대로 만든 이의 꿈을 펼치지는 못했으나 그의 아버지 역시 조부를 대하듯 그 배를 아꼈다. 그리고 화평도를 떠나는 전대 이질금으로서도 아버지는 그에게 신신당부했었다. 비선은 절대 폐기해서는 안된다고.


얼굴도 본적 없는 조부가 만들어낸 그 배로 그들은 화평도에서만 만족하지 않고 바다건너로 그 꿈을 넓혀나갔다. 폭풍을 이겨내는 배 비선 이후로 그들은 물론 발전에 발전을 거듭 했으며 이제는 그보다 더한 배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나 그의 아버지는 꼭 비선을 고집했고, 그에게도 남겨진 그 배는 짐이 되는 경우도 있었 으나 경휘 역시 이제는 일년에 한 두 번 비선과 항해를 하곤 했다. 당시로선 상당히 거대한 배였던 비선에 귀한 물건을 가득 싣고 중원과 서역을 넘나드는 조부의 꿈을 이루어야 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눈앞에 보이는 그 꿈을 이루는 날 비선을 조부의 이루 어진 꿈과 함께 바다에서 산화할 것이었다. 그날까지 그는 보물을 지키듯 그의 눈앞의 오래된 배를 돌보아야할 의무가 있었다. 경휘가 한바퀴 둘러보는 동안 말없이 소솜도 함께였다. 원래 말이 없던 소솜이지만 더욱 음울해 보인다고 생각한 경휘는 다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거야, 소솜? 어째 안색이 더 안 좋아 보이는 거지?" "...아..아니오." "정말로 맘에 둔 여인으로 인해 상사병이라도 앓는 게 아닌 거 맞는 거야?" 실없는 농담처럼 경휘가 다시 물었다. 그는 사실 소솜이 미례에게 마음 쓰는 것을 보며 미례에게 마음을 둔 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색할 그도 아니지만 유심히 지켜보는 소솜은 미례를 대할 때 일정한 거리를 넘는 법이 없었다. "...저 이질금..사실은..." "무슨 말인데 그리 망설이는 거야?" "이번에 말이오, 이번....뱃길에 광주로 가게 되면...나도 그곳에서 좀 머물고싶소." "그건 무슨 말이야. 여길 떠나있겠다고?" 경휘는 생각지도 못한 소솜의 말에 자리에 멈춰 서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 "가납사니가 허락을 할 것 같아? 그보다도 소솜, 너야말로 평생 이곳을 떠나는 일은 원치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랬었소." "헌데..왜 마음이 변한 거야? 네가 화평도를 떠나서 얼마나 오래 머물 수 있는지 시험이라도 해보려고?" "그저...좀 바람이라도 쐬고싶고 새로운 것도 눈 여겨 봐두고 싶소. 이곳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답답하게도 느껴지고..." "미례 때문인 거야?" "미례아씨 요? 왜 그런..." 소솜은 경휘의 생각을 읽고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렇지 않다고?" "물론...그렇지 않소. 그건 이질금의 오해요. 나는 다만 미례 아씨를 보면서... 죽은 아로를 떠올리고 고향을 떠나있는 미례아씨가 안타까울 뿐이었소." "...그래?" "미례 아씨에게 딴 맘 품은 적은 한번도 없었소." "그럼 왜 이제껏 부러 떠나지 않고 지켜오던 섬을 떠나겠단 생각이 든 거지?" "말했잖소, 답답증이 나서 나도 좀 넓은 세상을 보고싶다고.."


"흐음..." 경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내 한번 생각해보지." "될 수 있다면 빠른 시일 안에 떠나고싶소." "나도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 소솜. 가납사니와 의논도 좀 해봐야겠고. 내 마음대로 널 보내줄 순 없어." "아버지껜 내가 잘 얘기하겠소." 경휘가 대꾸 없이 걸음을 옮겼고 그의 뒤를 따르던 소솜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어디로 가시려는 거요, 이질금." 경휘의 방향이 개삭 작업과는 반대쪽으로 향하자 소솜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흰둥이 말굽 때문에 대장장이에게 부탁해둔 게 있어. 따라오지 않아도 돼, 소솜." 영문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경휘는 그에게 대꾸하며 몇 걸음 걷다가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말을 하려 소솜을 돌아보았다. 그는 그 자리에 멍하니 돌아서서 바다건너를 응시하고있었다. 아무리 봐도 평상시의 침착하고 빈틈없는 소솜의 모습은 아니라고 경휘는 생각했다. "소솜, 오늘 저녁에 집으로 와서 좀더 얘길 나누자." 소솜은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참, 오기 전에 사스래에게도 한번 들려봐 줘, 잘 지내고 있는지 몸은 괜찮은지도 좀 살펴보고" "......알겠소." 마지못해 대꾸하는 소솜의 안색이 더욱 핼쓱하게 보이는 듯 하다고 경휘는 생각하면서 저녁 무렵에 좀더 많은 얘기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도무지 경휘는 그의 심경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번 호 : 107 / 263 등록일 : 98 년 10 월 28 일 09:34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37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51

소솜은 정말로 마지못해 사스래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끔씩 경휘 일행이 그만을 남겨놓고 복주로 갈 때마다 그는 섬의 많은 일들을 마을 장로들과 의논하며 지켜왔다. 그 중에는 물론 사스래를 돌보는 일도 함께였다. 그러나 지금처럼 그 일이 곤욕스러운 적은 없었다. 그래도 우유부단한 그는 경휘의 부탁을 모른 척 할 수 없어 사스래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스래의 집이 가까워 오며 그는 어쩌면 이것마저 이번이 마지막일 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마지막일지도 모르지. 화평도를 떠나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고 보면 사스래를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인지도...혹은, 이질금의 그늘로 들어가고 나면 더는 그녀를 돌본다는 명목


으로 마주치는 일조차 없을지도 모르지. 그는 텅빈 듯한 집안 좁은 마당에 망설이며 서서 사스래의 그림자를 찾아내려 노력했다. 깨끗하게 널린 빨래들을 보며 소솜은 그녀의 표독스러워 보이 기도 하는 일면의 모습들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사스래는 원래 처음부터 지금같은 여인은 아니었다. 어려서 부모 여의고 눈치 밥 먹고 컸지만 여리기 그지없는 처녀 시절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사내인 가라치가 풍랑에 목숨을 잃고 나서는 짖궃게 다가서는 사내들에게 쌀쌀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도 겉모습뿐이었다. 바닷물에 몸을 던져 모진 목숨 끊어내려다 경휘에게 구해진 이후로는 이전의 사스래는 사라지고 없었다. 욕심 많고 샘 많으며 거칠기까지 한 언사도 서슴치 않는 억센 여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소솜을 경시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있건 없건 그녀는 소솜을 향해서는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대했다. 소솜은 사스래의 모습을 찾아 집 근처를 배회했다. 그녀를 찾아냈을 때의 반가움도 잠시 두 사람은 서로 굳어진 얼굴로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았다. 난처한 상황이었다. 어두운 뒷 뜰 나무그늘 한구석에서 헛구역질을 하던 사스래는 소솜과 눈이 마주치자 새침한 시선으로 언제 그랬냐는 듯 쌀쌀하게 손으로 입을 가렸다. "속이 불편한 거니?" 마지못해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가 그녀의 쏘아보는 시선을 피하며 말을 던졌다. "흠, 나야 속이 불편하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내 주위에 나타나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무슨 일이야? 내가 네 그림자도 보기 싫어하는 걸 몰라?" "......." "이 등신아, 그렇게 구박을 받았으면 알고도 남아야 하는 거 아냐? 넌 바보천치거나 속도 없는 사내인 게 분명해." "...혼자 살며 아픈 것처럼 눈물나는 일도 없어. 그렇게 잘났으면 네가 알아서 몸을 돌봐야지." 그는 풀죽은 소리로 말하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너만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내 속이 뒤집힐 일도 없는 거야." 찬바람 돌게 사스래는 그의 등에 대고 쏘아붙였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소솜이 사스래를 돌아보았고 그는 정말로 슬픔어린 눈을 하고는 사스래에게 말했다. "그런 네 소원은 곧 이루어질 거야, 사스래야. 조그만 참으면 우린 어쩌면 다시는 만나지는 일 없을 지도 모르지."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쏘아붙이려다가 사스래는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그의 말에서 풍기는 이별의 느낌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이 섬에서 사는 한은 아주 안보고 살기도 힘들걸? 그런 날이 오긴 온다는 거야?" 소솜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 없이 그녀의 집을 나섰다. 사스래는 그의 뒷모습만 뚫어져라 쳐다보다가는 이상한 느낌에 그의 뒤를 따르며 재차 다그치듯 물었다. 괜한 불길이 가슴에서 욱하며 치솟아 올랐다. "어떻게 그런 날이 온다는 거야? 응?" 그러나 그는 몸을 잘 돌보라는 말만 남긴 채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왜 아무 짓도 하지 않는 사람이 미운 건지 그녀는 생각해보려고도 하지 않고 보기만 해도 짜증스러운 그에게 불편한 심사를 쏟아 붓고 싶은 마음으로, 돌아보지도 않는 그의 무심한 등에 대고 악을 썼다. "이 바보야, 말을 했으면 끝까지 해야지 왜 남의 염장만 지르고 마는 거냐구? 네 녀석 꼴을 안 봐도 되게 어디로 가버리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네가 그리 소원하니까 나도 더는 이 섬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말이야, 사스래야. 네가 원하는 대로 너나 나는 더는 한 하늘을 이고 살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소솜은 집과 바깥 길의 경계에 서서 씩씩거리는 사스래와는 달리 침착한 어조로 그러나 침울하게 말했다. "여전히 도망가는 짓은 잘도 하지. 그래, 어련하겠어? 그래 놓곤 얼마나 있다가 또 돌아오려고? 그렇게 돌아와서 또 남의 가슴은 얼마나 후벼파려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사스래는 올이 성긴 막치마를 움켜쥔 채로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질렀다.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사스래야." "잘도 그러겠다, 이 나쁜 놈아!!" 그러나 그녀의 속에선 달리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럴지도 몰라. 사스래는 그다지 언성을 높이지도 않는 그의 말이 맞을 거라고 생각이 되었다. 소솜은 약하긴 해도, 조금 비겁하고 겁이 많긴 해도 자신의 말은 칼같이 지키는 사내다. 그냥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사스래에게서 멀어지고 싶은 듯 걸음을 재촉하려 했다. 그의 말은 사실일 거야, 그는 정말 이번에는 아주 가고 말려나보다. 사스래는 그녀를 감싸고있는 공기가 갑자기 너무 무겁다고 생각이 되며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무섭고 떨리는 심정으로, 그러나 그녀 특유의 반응으로 사스래는다시 그에게 쏘아 붙였다. "그딴 헛소리를 하고싶어서 날 찾아온 거야? 내가 꽤나 좋아하겠다고 생각하면서 그 얘길 들려주고 싶어서?" "아니, 네가 잘 있는지 보고오라는 이질금의 뜻이었어." 이질금의 명령이 아니면 보러 올 일은 없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스래는 따귀라도 얻어맞은 듯 그 자리에 궂어져 한 발짝도 더는 떼지 못하고 얼어붙어 버렸다. 벼락맞아 죽을 나쁜 놈!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자 사스래는 주둥이 열린 술 부대 마냥 헛김이 빠져버려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번 호 : 110 / 263 등록일 : 98 년 10 월 29 일 18:28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38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52

경휘는 저녁상을 물린 미례와 마주앉아 곱게 들인 색실을 감는 일에 온 신경을 쓰는 그녀를 건너다 보고있었다. 고비를 넘기듯 미례는 실컷 울어 젖힌 이후로 경휘에게 냉담하지도 않았고 평상시의 모습을 되찾고있었다. 빨갛게 물들인 그녀 손톱의 꽃물이 손을 놀릴 때마다 그의 눈에 확연하게 들어왔다. 귀신을 물리치는 액막이가 된다며 굳이 물을 들여주는 유모에게 이끌려 미례는 좋아라고 꽃물을 들였다. 자리옷을 입은 미례의 몸매는 겉옷자락에 숨겨져 있을 때보다 더욱 눈에 띄게 불러있었다. 잘 모르는 그의 눈으로 보기에도 곧 산달이 되어 감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미례의 배는 많이 불러있었다. 산보도 마음대로 못해 답답해하는 미례에게 그는 오래된 소나무 숲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미례는 눈을 빛내며 그의 말을 듣다가는 엉긴 실과 사투를 벌였다. 한숨을 내쉬며 가늘게 뽑은 실들을 풀어내는 일에 짜증을 낼 것 같은 미례를 여유롭게 바라보던 그는 망설이다가는 피식 웃으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꼼꼼해 보이지도 않고 더구나 가치로운 일이라고는 조금도 여길 것 같지 않은 그가 그런 일에 관심을 보이자 미례 역시 실로 인해 곤두선 신경을 다스리며 미소를 지었다. "잘 안 되는 걸요." "이리 줘봐. 그대로 뒀다간 오히려 네가 더 신경질을 낼 것 같으니. 그럴 땐 다른 사람이 해 보는 것도 괜찮다고." 썩 믿음이 가지는 않으면서도 미례는 자리에서 일어나 산호로 만든 실패와 엉긴 실 꾸러미를 가지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오래지 않은 시간이 지나자 함께 머리를 맡대고 고민하며 풀어내고는 서로 만족 스러워 하며 웃음 웃었다.그러고 나자 경휘는 자연스레 미례가 가지고 있던 실패를 받아들었다. "정말로 그렇게 오래된 소나무들이 많아요?" 미례는 실을 풀어내며 호기심 어린 질문을 던졌다. "다음에 한번 데려가 보기로 하지. 사실 화평도의 육송은 설민도 탐낼 만큼 뛰어 나거든. 재질도 곧게도 뻗고 옹이가 많이 지지도 않아. 육송이 강하고 단단하니 좋기야 하지만 나름대로는 단점이 있었다면 많이 개량된 이 섬의 육송은 배 만드는 재질로는 뛰어나다고들 해." 미례는 그가 하는 말을 쉬이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가끔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이런 나를 봤더라면 뭐라고 한마디하고도 남았을 테지. 경휘는 자신의 모습에 조소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자에게 빠져서 여자들이 하는 실 감는 일이나 할 일없이 돕고있는걸 알면 그의 아버지는 그야말로 펄펄 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자신도 자신의 모습이라곤 쉬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경휘는 생각했다. 미례와 웃음 나누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 정도의 권위쯤이야 손상 되도 그만이리라. 그는 요즈음 몸을 섞는 상대로서의 미례가 아니고 그저 가까이 있는 여인 으로서의 미례를 다시 보고있었다. 미례와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은지는 벌써 몇 달이 되어갔다.몸이 달아올라 무조건 그녀를 안아야겠다는 욕심을 거두고 나니 실제로 그가 원하는 그녀의 굴복은 힘이 아니어도 이룰 수 있겠 다는 깨달음이 생겼다. 미례를 반응하게 하자면 그것은 힘이 아닌 다른 것이 어야 한다는 걸 그는 알았다. 그는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 충동적으로 그의 뒤를 따라나서는 미례의 허리에 팔을 감아 안고는 입맞춤을 했다. 처음 입맞추던 그날부터 미례가 그것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서투른 망설임조차 보이던 그녀가 어느 날은 모든 걸 잊고 그의 가슴에 기대며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려 그가 주는 감촉을 즐기다가는 정신을 수습하며 빨갛게 달아오르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가 그녀의 입술의 감촉을 상상하며 미례를 바라보는 사이에 곁시로 부터 사랑채에 소솜이 와 있다는 전언이 있었다. "소솜 요? 이 밤에 무슨 일일까요?" 미례가 의아해 하며 그를 올려다보자 경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불렀어, 하고픈 말이 있어서." "...무슨 일이 있는 건 가요?" "음, 네가 염려할 일은 없어." "소솜을 본지도 오래되었어요. 요즘은 통...." "네가 안부를 묻더라고 전할게." 그는 실패를 미례 손에 건네주고는 걸음을 옮기다가는 돌아서서 미례에게 말했다. "이야기가 좀 길어질지도 몰라, 미례야. 먼저 자도 돼." ".....알겠어요." 소솜은 겉돌고있었다. 그의 사랑채에 들어서서도 어느 한곳에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한동안 꼭 필요한 자리가 아니고는 이곳에 들르지도 않았다. 그 자신부터 마음의 정리가 필요했었다. 경휘가 들어와 그의 맞은편에 자리잡고도 소솜은 그를 정면으로 바로 보지 못했다. 그들은 책들과 두루마리, 각 도방의 보고서, 창고기록들로 가득한 경휘의 집무책상이 아닌 한 켠에 자리한 작은 평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곁시가 차를 내올까 물었으나 경휘가 그만두고 술을 내오도록 시켰다.


"술을 아주 못한다고는 하지 말아, 요즘 들어 그렇지도 않다는 걸 알고있으니." 경휘가 미리부터 엄포를 놓았고 소솜은 그저 쓰게 웃기만 했다. 술이 한 순배 돌고 나서도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그들은 연거푸 다시 한잔씩을 마셨다. "내게 말해봐, 소솜. 왜 그다지도 떠나지 못하는 이 섬을 떠나고 싶어하는지.." "........그..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요." "남들이 한번쯤 대륙으로 나가보겠다 꿈을 키울 때도 너는 그렇지 않았었지. 물론 지금도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소솜, 이제 그런 시기는 넘겼잖아. 다들 안정을 찾고 고향이 좋다고들 믿고있다고. 그런데 왜 너는 가고 싶은 거야?" "....늦바람이 나는 건가보오." 경휘가 다시 술을 권했고 점차로 소솜의 안색은 서 하늘의 노을처럼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가납사니에게도 그런 식으로 말을 한다면 소솜, 넌 광주로 가게 될 꿈은 접는 게 좋겠다. 꼭 가야 한다면 나를 납득시켜야 할거야. 그래야 가납사니도 이해 할 테니. 지금처럼 그렇게 말한다면 이도 저도 안되지. 말을 해봐, 소솜." "........." 경휘가 다시 술을 권했다. 평소의 소솜과는 달리 그는 경휘와 대작하면서 제법 술을 받아넘겼다. 가슴이 뚫리는 듯 하니 찬바람도 돌고 술은 마치 꿀처럼 목을 타고 넘어갔다. 평소에도 남에게 상처 주는 일에는 한없이 약해지던 소솜이었는데, 그는 아까 일로 사스래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그래도 그는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왔었다. 그러고 나니 술은 더욱 그에게 친근하게 다가왔다.

번 호 : 139 / 263 등록일 : 98 년 11 월 11 일 01:21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46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53

"미례가 네 안부를 물었어. 한동안 널 볼 수가 없었다고 궁금해하던걸." 경휘는 억지로 더 캐묻기를 그만두고 말을 돌렸다. ".....지난번 멀리서 뵌 적이 있는데 배가 많이 부르신 듯 했소. 밝은 날 한번 찾아뵈어야겠지요. 헌데 요즘은 통 밖으로 나오질 않으시는 것 같소. 몸이 안 좋으신 건 아니오?" "돌림병이 돈후로 바깥바람을 쏘이고 싶어하는걸 말리고 있어. 혹여라도....몸도 약한데 병이라도 옮아봐. 안될 일이지." 소솜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스래는 잘 지내고 있든?" 경휘가 생각난 듯 물었고 갑작스런 물음에 소솜은 이미 달아오른 얼굴로 그의 시선을 피하며 얼버무렸다. "...아, 아까 들렸었는데 잘 지내는 것 같습디다." "그래?"


"어...언제 사스래를 집으로 들일생각이오, 이질금?" "곧....그리 해야지." "빠를수록 좋을 거 같소. 혼자 사는 여인의 모습도 그리 좋지는 않습디다." "새타니는 그래도 미례가 해산을 하거든 들이는 게 좋지 않겠나 하더군." "하긴....그도 좀...그렇구려. 미례 아씨 입장에서도...썩 기분 좋을 일은 아니겠지요." "이미 못 믿을 나쁜 사내로 낙인 찍혔을걸. 후훗, 뭐...이제와서 그런 대도 더 달라질 것도 없겠지만..." 경휘의 말에서 씁쓸한 감정의 여운을 받은 듯 해 소솜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경휘는 여전히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 있었다. 소솜의 시선에 경휘가 술잔을 들어 다시 술을 권했다. 단숨에 술을 넘기며 잔을 내려놓은 소솜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나는 이질금이 미례 아씨를 아끼는 만큼 사스래도 아껴주길 바라오. 그렇지 못할 바에는 사스래를 거두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거라 생각하오." "내가 그리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질금이 미례 아씰 위하는 걸 알기 때문이오. 아마도 이질금은 미례 아씨만큼 사스래를 위하진 않을 것 같소." "......내가 잘못 하는 거라고 생각해?" "......." 소솜의 침묵은 그렇다는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사스래도 원하는 일이야." 경휘가 고집스레 대답했다. "이질금이 어찌 생각하는지 알면서도 말이오?" "그래."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소." "......다른 건 몰라도 사스래를 맘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건 장담할 수 있어. 그래서 내게로 들이겠다는 거야. 사스래를 더 아껴줄 다른 사내가 있다면...그래, 그게 더 나은 방법이겠지." "이질금이 그런 맘으로 사스랠 들이는 게 난 싫소. 차라리 지금처럼 지내는 게 더 낫지 않겠소?" "그래서 사스래의 아이가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받도록 내버려두라고?" 경휘는 참았던 분노를 드러내며 언성을 높였다. 물론 그것은 소솜을 향한 분노는 아니었다. "..아..아이라구요?" 소솜은 경휘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더듬으며 물었다. "그래, 그게 아니면 달리 내가 뭣 때문에 서둘러 사스래를 들일 거라고 생각해?" "사..사스래가 아이를 배었소?" "그래." "........."


유난스레 자신에겐 차게 굴던 그녀가 더욱 독이 올라 쏘아붙이던 모습이 떠오르자 소솜은 수긍이 가기 시작했다. 헛구역질을 하던 모습을 보고 속이 안 좋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던 건 그만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경휘가 사스래를 들이는 문제로 미례의 눈치를 보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사스래를 다른 사내에게 혼인시킬 생각도 했었지만...그건 사스래가 원하는 게 아니었어." "......." 혼란스러운 소솜의 머리 속에 경휘의 말까지 더하여 혼란이 더욱 가중되었다. "의무려 정도면 사스래를 아껴주리라 생각했지만 사스래는 싫다는 거야." "...다른...사내에게 떠맡길 생각이었단 말이요?" 경휘는 하던 말을 멈추고는 소솜을 쏘아보았다. 소솜은 사스래의 아이가 경휘의 자식인 줄로 알고있었다. "내 자식인줄 알면서 내가 그랬을 것 같아?" "..허면.." "난 사스래를 안지 않았어. 미례를 만난 이후로는 그런 적 없어." 그들은 다시 말을 잊은 듯 상대의 술잔이 비면 바로 술을 채워주면서 연거푸 술을 마셔댔다. 경휘는 숨을 고르며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고 후회했다. 사스래를 제외한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서 좋을 게 없었다. 미례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사실을 굳이 말하여 무엇하랴. 진실을 알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미례요, 또 하나의 인물이 있다면 그는 바로 사스래의 아이 아비였다. 이미 미례에게야 세상에 못 믿을 사내로 여겨졌을 마당에 경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그 일로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없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이미 그는 마음을 굳혀버렸다. 진중한 소솜이고 보면 섣불리 누구에게 발설할 리야 없겠지만 말을 아껴서 해될 건 없다고 생각하며 경휘는 입을 열었다.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한 것 같다. 못들은 걸로 해두는 게 좋겠어." "....알겠소." 어느 순간부터 소솜은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술을 마셔도 정신만은 맑아져 가고 있었다. 무겁게 내리 눌리던 가슴도 어느새 그 무게를 못 느낄 만큼 무뎌져있었다. "사스래가 아이아비에 대해 말하지 않은 거요, 이질금?" 어지러운 머리 속을 정리하며 잠시 후 소솜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하긴 그랬으니 가만있었겠지, 만약 사실을 알았다면 이질금 성격에 가만히 있지는 않았으리라. "훗, 그걸 알면 내가 사스래를 거두기로 맘먹었을 것 같아? 다른 사내에게 떠넘긴대도 말을 하지 않던걸. 너야말로 짐작 가는 자라도 있어?" "아..아니오...." "미례에게 내 꼴이 얼마나 우스워 졌는지 알아, 소솜? 훗...우스워졌지. 아니라고 펄펄 뛰다가 나중에는 내 말을 번복하는 꼴이 되고 말았어." 경휘가 자조적으로 읊조렸다. 그 역시 누구에게도 말은 안 했지만 그 일로 몹시 자존심이 상해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에게 말하곤 했다. "....미례 아씨도 상심이 컸을 거요." "그렇대도 이제 와선 할 수 없는 일이지.." 몸을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던 사스래는 밖의 인기척 소리에 선잠에서 깨었다. 문틈으로 조심스레 밖을 내다보니 사람의 그림자가 마당 한 켠에 있었다. 두려움이 그녀의 머리를 쭈볏하게 만들었으나 사스래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여차하면 방 한구석에 둔 참나무로 만든 방망이라도 들 작정이었다. 그러나 잠시 문밖에서 서성이던 사람의 그림자는 자세히 보니 아는 사람의 그림자였다. 오늘 저녘 그녀의 가슴을 후벼 파놓고는 무정하게 돌아섰던 바로 그 사내. 하긴 죽을 맘을 먹기 전에야 그 누가 있어 이질금의 보호아래 있는 자신을 넘겨다 보려고나 할까. 사스래는 문고리를 붙잡고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번 호 : 164 / 263 등록일 : 98 년 11 월 17 일 20:08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24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54

그는 문밖에서 한동안 검은 하늘만 올려다 본 채로 서있었다. 숨을 고르는지 그의 가슴은 들썩이고 있었다. 그냥 가 줘, 아까 일로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거라면 아무 말도 듣지 않을래. 사스래는 더욱 문고리를 틀어쥐며 눈을 감았다. 돌이켜보면 자신의 신세만큼 드센 팔자도 없을 것이다. 왜 안 그렇겠어. 어려서 만난 사내는 채 이쁨도 흠뻑 받아보지 못하고 풍랑에 물 귀신이 되어버리고 이후로 마음 준 사내는 소심하기 이를 데 없어서 얼마 되지도 않아 도망가 버리고, 사는 일이 뭐 그리 부질없나 싶어 미련 없는 몸뚱이 물로 뛰어들었으나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고 살아남아 새 사내 만났으나 그에게선 마음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눈앞에서 다른 계집에게 빼앗겨 버리질 않나. 이제는 이도 저도 아니게 아이 밴 몸이 되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방아에나 오르게 생겼으니.... 사스래는 생각할수록 가엾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한 자신의 처지를 비웃으며 웃음을 흘렸으나 그것은 웃음이라기 보단 열에 들뜬 신음소리 같았다. 눈물도 나 오질 않을 만큼 어려서 다 울어버렸다. 저 못된 놈이 또 무슨 소리로 내 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이 새벽에 찾아온 거야. 소심하고도 여린 사스래의 모습은 바로 사라져버렸다. 현실에 있어서의 사스래는 눈물이나 짜고 있는 바보 천치가 아니었다. 그녀 안에 또아리를 틀어버린 작은


사스래는 갑작스레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 우악스럽고 독기 어린 홀어미 사스 래가 그녀의 본 모습이었다. 바보 같은 놈. 도망쳐 버릴 양이면 아주 가서 오지 말 일이지. 무슨 억한 심정이 있어 내 신세만 우습게 만들어놓고 또 무슨 짓이 하고 싶은 거야. 얼마나 더 우 습게 만들고 싶은 거야. 점차로 비비 꼬이는 심사가 된 사스래는 밖에서 서있는 그를 쏘아보았다. 한동안 머뭇거리는 건지 마음을 가다듬는 건지 그 자리서 움직일 줄 모르던 그가 그녀의 방문 앞으로 다가왔다. 사스래는 문 옆 벽에 등을 기대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사스래야" 소리 죽인 그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나 사스래는 들리지 않는 척 외면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래도 여전히 가슴은 쿵쿵거리며 사정없이 뛰었다. 숨조차 가빠지고 어질어질한 기운이 돌만큼 그녀의 가슴은 사정을 두지 않았다. 잠시의 쥐죽은듯한 사이를 두고 그가 다시 그녀를 불렀다. "사스래야, 자는 거니?" "......." 바보 같은 놈. 뭘 원하는 거야, 이 새벽에. 깨어있으면 어쩔 건데? 참을 수 없어진 사스래는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무릎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아까 일로 화난 거래도 널 대면하고 싶어. 물론 이 밤중에 찾아와선 안 되는 줄 알지만 이 얘긴 해야겠어. 얘길 좀 나누자." 그는 가능한 한 감정을 삭이며 어둡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방을 향해 말을 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느 정도의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심이 담겨있는 듯 했다. "........" "문을 열어 줘. 이렇게 마주보고 얘기할 수는 없는 일이니." ".........." "사스래야, 문 열어." 그가 반응 없는 사스래에게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이 사스래의 성질을 건드렸다. 또 숨어있는 듯한 자신이 우습게도 여겨졌다. "니가 무슨 자격으로? 니가 뭔데 내게 이래라 저래라 야, 이 등신아!! 가버려, 아주 멀리 가 버리라구." 사스래는 분노를 드러내며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 이번엔 그가 침묵을 지켰다. "왜 내 속을 뒤집어. 니가 뭐 그리 잘났다고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야? 니가 내 서방이라도 되는 줄 알아? 남들 눈치나 보고 살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 너 잘 쓰 는 말로 이 새벽에 찾아오는 게 얼마나 우스운 건지 알아? 내가 그렇게 쉬이 보 여? 계집생각이 나거든 딴 데 가서 알아봐, 이 등신아, 난 언제까지 너만 기다리 는 바보천치 같은 계집이 아냐." "문 열어." 그가 감정을 삭이는 듯한 낯선 어투로 이를 갈 듯 말했다. "꼴도 보기 싫으니 죽어버려!"


사스래 역시도 분노를 드러내며 한마디 던졌다. "그러고 싶은 적도 있었어. 너만큼이나 나도 비참했다구. 누군 좋아서 이렇게 살 았는 줄 알아? 넌 날 비참하게 만들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래? 잘됐네. 피장파장이로구나." "........." 분노가 서렸던 그의 숨결이 가라앉으며 그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 머물렀다. "가버려, 니가 잘하는 짓 있잖아, 도망가 버리라구. 다른 하늘아래서 잘 살아봐. 눈 맞는 이쁜 계집 만나서 알콩달콩 살아보라구." 난 그 꼴 안 보면 그만이니 알게 뭐야. 배 아플 일도 없는 거지. 차라리 허튼 꿈 이었거니 하고 잊어버리게 가서 잘 살아보라고. "넌 못됐어, 사스래야. 그거 알아? 넌 아주 몹쓸 짓을 했어." "나 못된 거 이제 알았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네 그려." 사스래는 그의 말을 가볍게 비웃어 넘겼다. "문 열고 얘기해, 마주 보고 얘기 나누자고. 더는 이런 짓 하지 말자고." 이런 짓? 이런 짓이 뭔데? 대체 어떤 짓인데? "흥, 좋기만 한걸. 네 꼴을 안 봐도 되니 얼마나 좋아? 난 좋기만 하네. 할말 있 거든 거기서 하고 사라져버려. 내가 문을 열어줄 거라고는 꿈도 꾸지 말라고, 이 등신아." "......그래?" 긴 숨을 삼키며 그가 쥐어짜는 듯한 음성으로 나지막이 물었다. "그래, 어림도 없어. 그러니 저녁나절에 그런 것처럼 너도 썩 꺼져버려. 아니면 내가 마음이 홱 돌아서 문을 열어줄지도 모르니 그때까지 기다리던가." 흐흥, 사스래는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 내가 잘도 열어줄 건지 어디 한번 기다려보렴. 이 바보천치야. "거기 그렇게 꼭꼭 숨어서 핏줄도 속이고 애비도 뒤바꿔 다른 사내에게로 가는 건 잘하는 짓인 거야? 그래도 되는 거야? 응?" "....뭐? 무..무슨 소리야?" "왜? 정말로 귀신도 속여먹을 작정이었던 거니? 언제까지 그럴 작정이었던 거야?"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흐흠, 정말로 속여먹을 작정이었나 보네.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로 부쳐둘 작 정이었어? 니가 그렇게 굴 정도로 못된 계집이었던 거야? 그렇게 뻔뻔해도 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릴랑 작작해." 그러나 다시금 사스래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뿐인가, 철렁 내려앉았다. "나보고 비겁하다고 했어? 그러는 너는 어때? 너는 잘하는 짓인 거야? 그렇게 이질금에게 얹혀 살면 그건 맘 편할 거 같애?" "미쳤어. 미쳤어. 나한테 뭐라는 거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훗, 사스래야 정말 너답지 않구나...하여간 넌 못됐어." 그의 말은 허탈한 여운을 가지고 그녀의 머리 속을 맴돌았다. "가버려!!" 사스래는 쥐어짜는 음성으로 그에게 쏘아붙였다. 상처받은 자신을 더는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웃에 연한 집에서 인기척소리가 들리자 소솜이 불편한 어조로 소리 죽여 말했다. "네가 사내를 끌어들인다는 소문을 내고 싶지 않거든 어서 문 열어. 안 그러면


내일 아침이 오기도 전에 넌 곤욕스러워질 거야." "고양이 쥐 생각하는 꼴이지. 니가 가버리면 되잖아." 사스래 역시도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말투로 대꾸했다. "아니, 난 이대로 물러서지 않겠어." "흥..진작 그랬음 좋았겠지만 이젠 나도 그렇지만은 않아. 관둬, 지금까지도 이렇 게 살았는데 더 안될 게 뭐야." 사스래는 볼이 부은 어조로 말을 던졌다. 소솜은 묵묵부답으로 그녀의 행동을 기다리며 그 자리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얼마간을 고집스럽게 버티던 사스래는 결국 마지못해 문을 열어주었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그가 방안으로 들어왔고 사스래는 방구석에서 그를 외면한 채로 꼼짝도 안하고 있었다. 문을 열어주는 순간부터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후회 로 사스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익숙하게 방안 구석에 있는 등잔에 뱃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는 불씨를 살려 불을 붙였다. 아주 어두웠던 방안이 밝아졌다. 어둠 속에서 익숙해 있던 사스래는 더욱 위축되 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들어선 순간부터 방은 더욱 좁게만 느껴졌다. 가끔은 너 무도 적막하고 썰렁하게만 느껴졌던 방안이 후끈 열기가 도는 듯도 했다. 등잔에 길게 드리워진 침상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사스래를 한동안 바라보기만 하던 소솜이 어느 순간 한숨을 내쉬더니 그녀의 반대편 벽에 대각선으로 마주 보 이는 곳에 떨어져 앉았다. 가끔씩 내쉬는 깊은 한숨에 사스래는 무언의 힘에 이끌려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평상시의 그와는 무언가 조금 다르다고 느꼈으나 그녀는 그것이 술기운 때문이라 는 것을 처음엔 알지 못했다.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쓰잘데기 없는 헛소리들은 잊어버 려. 더는 내게 관심 갖지마, 나도 니가 없는 듯 그렇게 살아갈 테니 너도 그렇게 살어." 사스래는 나오지도 않는 말을 억지로 주워 삼켰다. 후훗, 소솜이 다시 허탈하게 웃었다. "우린 벌써 몇 년 전부터 안보고 살았어야 할 사람들이었어." 그녀의 말에 소솜의 입가가 비틀리며 다시 쓰디쓴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는 그 위에 힘없이 팔을 늘어뜨린 채로 그녀를 건너다보 다가 그녀 너머의 벽을 쳐다보고는 했다. "나도 이질금의 그늘로 들어가면 더는 너를 안보고 살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 너 도 새 계집 만나거든....자식 낳고 잘 살어." "....니가 밴 아이가 이질금의 혈육이라고 말하는 거야?" "그래." "넌 못됐어." "훗, 그걸 여태 몰랐어?" "넌 아주 못됐어." "그래, 난 그런 계집이야." 그러나 고집스럽게 인정하지 않던 사스래도 쏘아보는 그의 시선에는 끝까지 마주 보지 못하고 먼저 시선을 피해버렸다. "넌 이질금 그늘로 들어가지 못해." "흥, 니가 뭔데? 무슨 힘으로?"


"그 아이는 내 자식이야." "흐흥, 니가 어떻게 알아? 니가 삼신할미의 머리꼭대기에라도 올라가 봤다든?" "이질금은 널 찾은 적 없어." "흥, 다른 사내는? 어디 이 섬에 사내가 너와 이질금뿐이라고 생각해?" "니가 다른 사내와 잤어도 그 아인 내 자식이 맞아. 넌 이질금 그늘로 들어갈 수 없어, 그렇게 숨어버리게 놔 두지도 않겠어." "놔두지 않으면? 뭘 어떻게 할 수 있는데?" 사스래는 여전히 어깃장을 놓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혼인해야지." "잘도 그러겠다, 사람들 이목이 무서워 도망쳤던 게 누구였는데, 이제 와서? 왜? 상황이 좀 나아진 거야? 아니잖아, 오히려 더 우습게만 되었지." 그래 우습기만 한가? 비비꼬이고 틀어져 버렸지. 차라리 그때 어렸던 시절에, 가라치 말고는 그만을 알았던 시절이면 모를까 이제 와선 이질금에게 몸을 의탁한 마당에 그 누가 곱게 자신을 며느리로 들이고 싶을까. 서슬 퍼런 가납사니가 시퍼렇게 눈을 크게 뜨고 있는 한은 어림도 없지.

번 호 : 173 / 263 등록일 : 98 년 11 월 21 일 20:12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17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55

"...이질금에게 말할 생각이야. 너도 알고 있어야겠기에..그 말을 해주려고.." "그..그게 무슨..너..지금 제 정신인 거야?" "훗..사스래야, 지금 만큼 정신이 맑은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그의 입 꼬리가 슬쩍 치켜 올라가며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지난날을 후회해, 라 고 그의 눈이 말하고있었다. 그것은 수천 수 만 마디의 말보다 사스래의 가슴에 더 없는 무게를 가지고 얹혀졌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그 사실에 사스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말도 안돼. 내가 널 필요로 할 때 넌 내 곁에 없었어. 그런 네가 왜 이제 와서 겨우 결심을 굳혔는데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거야. "미쳤어, 미쳤어. 누가 네게 시집을 가기는 한다든? 어림도 없는 소리 마" "너무 늦은 시각이야, 다음에 다시 얘길 하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음을 떼어놓았다. 사스래는 급하게 일어나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는 쌀쌀하게 쏘아부쳤다. "지금이든 다음이든 그런 건 상관없어. 난 니가 하자는 대로는 하지 않을 거야." "밝은 날 다시 얘길 해. 날이 밝으면 이질금에게도 다시 갈 생각이야. 더는 숨기 지 않을 거야." 그는 정말로 결심을 굳힌 모양이었다. "거짓말이지? 응? 너 내가 겁쟁이라고 말하니까 괜시리 해보는 소리지? 네가 그 얘길 이질금에게 하고서도 멀쩡하리라고 생각지는 않는 거지? 응?" "두고 보면 알 거야." 그가 다시 사스래를 피하며 문을 향해 나서려고 하자 사스래가 다시 막아섰다. 넌 죽을 거야. 이질금은 널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사람들은 또 어떻고? 사람들 의 입방아에 올라 얼마나 우스운 꼴이 되려고. "난 죽어도 싫어, 난 싫다고. 알아들어? 난 너와 혼인하지 않을 거야. 날 그냥 내버려 둬. 난 지금 이대로가 편하니까 날 그냥 내버려두라고. 너만 내 옆에 얼 씬거리지 않으면 난 잘 살 수 있단 말야. 그냥 내버려두라고." "사스래야, 내 자식인데도 다른 사내에게 아버지라 부르고 따르는 걸 눈으로 보 면서 말야? 정말 그러면서도 잘 살 수 있다고? 네 마음이 편할 거라고? 넌 그렇 게 생각이 드니? 아니, 나는 싫어. 더는 싫다고. 난 그러고 싶지 않아." "........." "난 사스래야, 내 자식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가르쳐주고 싶은 것도 많아. 난 말야, 사스래야...그 동안....편치 않았어. 난 이제 도망치지 않을 거야, 더는 그러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도 맘 정하는 게 좋아." "잘도....잘도..." 서럽고 분한 마음을 눌러 참았던 사스래는 그만 더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 렸다. 바보 같으니. 왜 이제 와서 날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거야. 내가 가장 널 필요로 할 때는 잘도 멀리 멀리 도망가있더니.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 멀리 숨어버릴 때는 언제고 왜 이제 와서 엉망이 되 버린 날더러 얼마나 더 망가지라고. 날 얼 마나 비참하게 만들고 싶어서..더 어쩌라는 거야, 도대체. 사스래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었고 눈물을 그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우는 그녀의 모습은 그에게 아주 낯선 것이었다. 강하고 독살스런 말도 서슴지 않는 사스래는 한동안 그가 알아온 모습이었다. 한때는 수줍은 여인의 모습을 보기도 했었으나 그것은 아주 오래되어 기억에도 새로운 모습이었다. 그가 마지 막 본 그녀의 눈물은 미례로 인해 이질금에게 대들고 모욕당하여 훌쩍거리던 때 였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한동안 방안을 채웠다. 그는 망설이며 멍하니 서있다가는 천 천히 손을 올려 그녀의 머리에 가져다대었다. "울지마, 사스래야.....이제라도 우리....제대로 살자. 자식에게도 떳떳한 부모 노릇 하면서 남이 뭐라 해도 흘려들으면서..그렇게 살자." "흐흑...가버려, 가버리라구..너만 가버리면 그만이니 멀리멀리 가버리란 말야.... 흐흑..." "내게 겁쟁이라고 욕하던 사스래가 하는 말이니? 너 역시도 사람들 이목이 두려 운 게 아냐? 그래서 내게도 말 안하고 쉬운 길을 택한 거 아냐? 그게 나은 방법


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사스래야?" "흑흑..." 어깨를 들썩이면서 심하게 흐느끼던 사스래는 그의 손길을 피해 자리에 주저앉 아서도 무릎을 세우고 팔 안에 머리를 묻었다. 소리 죽여 울어보려 했으나 눈물 도 서러움도, 분함도 감춰지질 않았다. 사스래는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웠다. 독기 어린 말투에 뻔뻔스러운 홀어미 사스래의 모습은 그녀의 본 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덜 상처받은 듯 보이려는 그녀의 노력 때문이었을 뿐, 상처받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소솜에게도 그랬다. 도망치듯 떠나버린 그가 미웠고, 버려진 자신이 못 견디게 싫었고, 상처받은 나머지 죽음을 생각해서 물에 뛰어들었으나 채 몇 달이 지나 지 않아 돌아온 그에게 사스래는 이미 다가설 수 없는 상태였다. 버려진 아픔이 너무 커 그녀를 달래주던 이질금에게 몸을 맡긴 후였으므로.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이라고 더 나아질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여전 히 한번도 혼인 한적 없는, 누구의 가슴도 설레게 만들 사내였고, 자신은 이미 지아비 앞세운 홀어미에, 계명워리(행실이 단정치 못한 여자)라 불려도 할 말 없는 닳고닳은 여자였다. 한때는 그의 여인으로 살기를 꿈꾸었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럴 만큼 그녀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있었다. "잘못했어, 사스래야, 내가 잘못 했어. 이제는 네게 잘 할 테니 그만 울어. 더는 어디로도 도망치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사스래야, 약속해." 그가 다시 다가와 그녀 곁에 무릎을 꿇고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어루 만졌다. "이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야, 네가 뭐라 해도...또 사람들이 뭐라 해도...내가 잘못 했어. 응? 울음을 그쳐, 사스래야." "늦었어, 이 바보야, 넌 정말로 모르는 거야?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거야?" 사스래는 눈물로 흠뻑 젖어든 얼굴을 들어 쌀쌀한 말을 울먹이며 쏘아 부쳤다. 그러나 흐느낌 때문에 정확치 않은 어눌한 그 말은 자신이 듣기에도 그리 차갑 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내 아이가 네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한은 더 늦었다고 생각 안 해. 난 정말로 좋은 아버지가 될 거야, 사스래야."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하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건 네가 아니라 나일 테니까. 너야 바보같이 홀어미의 거미줄에 걸려든 가엾은 사내일 테고 나는 순진한 사낼 홀려낸 천하에 몹쓸 불여우 같은 계집일 테니까. "내게 기회를 줘, 사스래야." "...어림도 없는 소리야." 사스래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려 손을 올렸으나 그보다 먼저 그가 두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안고는 엄지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쳐내었다. 항의하려는 말이 사스래의 입안에서 맴돌며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그의 눈빛이 흐려지더니 서서히 그녀의 입술을 향해 그의 얼굴이 다가왔다. "싫어, 싫어." 사스래는 고개 짓을 하며 그를 피했으나 그는 어렵지 않게 그녀의 입술을 찾아 겹쳤다. 그의 손안에 이미 갇힌 상태로 그녀의 저항은 효과적이지 못했다.


사스래는 힘없이 늘어뜨렸던 두 손을 올려 주먹을 쥐고는 그의 가슴을 때렸다. "놔 줘. 네가 싫어, 난 싫어." 그가 잠시 놓아준 사이에 사스래는 그에게서 물러서며 쏘아 부쳤다. 그러나 도망칠 곳이 없었다. "이런 짓 싫어..." 그러나 그가 다시 다가서며 사스래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가까이 끌어안 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피하는 그녀의 뺨을 쓸어안았다. 다시 그의 입술이 맞닿은 순간 사스래는 약하게 나마 하던 저항을 멈추었다. 전해지는 뜨거운 그의 입김 속에서 사스래는 열기 오른 그의 몸을 느꼈다. 술 내음이 느껴졌으나 사스래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룻밤이라면 얼마든지 그를 받아줄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 그녀를 기다리는 건 끊임없는 마음의 상처, 상처뿐일 것이다. 수동적으로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안겨있던 사스래는 어느 순간 그에게로 안겨 들며 그의 모게 팔을 감았다. 그리웠던 그녀의 사내였다. 비록 그가 아닌 다른 사내와 함께 있어도 마음 한구석에서 느껴지던 실망감. 그리던 그와 함께인 지금 그녀는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아침이 밝기 전에 사라지고 없다해도 사스래는 그를 원했다. 그리고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도 모르게 자리에 누워 서로의 옷자락사이로 알몸 을 만지며 갈증을 채우던 그들 사이에 변화가 생겼다. 다시금 울먹이며 사스래가 그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그의 몸을 더듬던 손을 떼었고 그의 다리 사이에 얽힌 자신의 다리를 풀어내려 애썼다. 그러자 의아하게 여긴 그가 사스래의 탐스런 가슴에서 고개를 들고는 빤히 쳐다 보았다. 고개를 돌리며 그의 시선을 피하는 사스래를 향해 그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하다가는 그대로 다시 그녀의 가슴을 감싸안았다. 그리고는 민감한 유두 를 자극하고는 혀로 간지럽히다가는 강렬하게 흡입했다. "흐흡" 사스래가 신음소리를 내며 다시 그의 행위에 동조하며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애타게 그녀를 약올릴 때마다 불만족스런 신음소리를 내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그를 이끌었다. 아무래도 사랑의 행위에 있어 그보다는 그녀가 우위에 있었고, 그녀는 소솜마저 무아지경에 빠져 그녀만을 원하도록 그를 만지고 달래며 애태웠다. 그들이 사랑의 행위를 끝냈을 때 사스래는 더없이 만족스러웠고 그 또한 거리낌 없이 만족스러웠음을 고백했다. "정말?" 사스래는 못미더운 듯 그에게 되물었다. "음..." 그는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가까이로 사스래를 끌어안았다. "내가 너무...달라붙는다고 싫어했던 게 아니라구?" "흠..그건...그땐 좀 그랬었어. 난 어떻게 하면 네가 좋아하는지도 알지 못 했는데 넌..그때 좀...이젠 안 그래. 사스래야, 그것 때문에 주눅들지 않아도 돼." "........" 그가 그에게 밀착되어있는 사스래의 팔을 잡아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도록 들어 올렸다가는 다시 그의 가슴에 올려놓았다. "넌 빨판을 가지고 있는 여자 같앴어. 음..낙지처럼 달라붙어서는 사람을 놓지


않는..그게 그때는 날 두렵게도 만든 적 있었어." "....이젠 괜찮다고? 정말 두렵지 않아?" "음...참 우습지 사스래야, 널 떠나 있는 그 몇 달 동안에도 꿈속에서는 널 떨쳐 낼 수 없었어. 넌 날 두렵게 하면서도 한편으론 날 속절없이 잡아끌어." "..그래서 도망갔어?" 침울한 음성으로 사스래가 물었다. "...시간이 좀 필요했어. 사람들의 이목이 두렵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않을게. 게 다가 아버지에게도 널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하지만 돌아오고 나서 줄곧 후회 했어. 넌 날 죽일 듯이 쳐다보지, 게다가 넌 이미....이질금의 여자였지." ".......그래...지금도 우린 달라진 게 없어...우린 어쩔 수 없어. 그럴 운명인가 봐.." "........" 그가 잠이 들고서도 한동안 사스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의 몸을 쓸어안으며 서글픔을 달랬다. 아로의 무덤 가에서 그가 울던 날, 그녀는 위로를 한다고 그의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새로운 설레임을 안고서 그와 사랑에 빠졌으나 소솜은 그녀를 부담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었다. 그래도 그에게 의지하던 사스래는 어느 날 그가 기약 없이 복주로 떠나버렸다는 것을 알고는 깊이 상심했다. 버림받은 여인이 되어 하루하루 시들어가던 사스래는 결국 죽음을 떠안기로 결심 하고는 바닷물에 몸을 던졌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경휘에게 구해졌다. 이후로 경휘는 그녀를 걱정하며 자주 찾아주었고, 여자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사스래는 결국 경휘에게서 위안을 찾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사내가 있어야 해. 사스래는 떠나간 사내는 잊어버리고 남아있는 사내에게 마음을 주기로 작정하고 는 마음을 돌려먹을 수 있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이질금의 여인으로 사는 것 도 나쁠 것 없다는 생각으로 웃음을 되찾아 가던 사스래는 채 몇 달 되지도 않아 나타난 소솜을 보고는 경악했다. 자신을 지키는 길은 몇 겹의 옷을 입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이미 이전의 사스래가 아니었고, 그의 비난 따위는 두렵지도 않았다. 하루하루 그에 대한 증오가 쌓여 가는 사스래와는 달리 그는 너무도 침착했고, 사스래는 그럴수록 못 견디게 그가 미워져 제대로 된 시선으로는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났고 미례가 나타났으며, 이후로 이질금마저 그녀에게 걸음 하지 않던 어느 날 그녀의 상태를 보러 들르던 그와 티격태격 몸싸움을 하던 중 다시 또 그들은 밤을 보냈다. 그리고 그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는 몹쓸 것이라도 대하듯 새벽같이 떠나 버리 고, 그 하룻밤으로 사스래는 우습게도 아이를 배었다. 그런데 이제와서....꼬이고 꼬인 몇 년이 지난 이제 와서 무슨 혼인을 하겠다고. 지나던 개가 다 웃을 일이라고 사스래는 조소했다. 아침이 되었을 때 사스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의 옆자리는 비어있었고, 그가 왔었던 흔적이라고는 구겨진 빈자리와 가지런히 개켜진 자신의 옷가지뿐이 었다. 이제 겨우겨우 속은 편안해져 가긴 했으나 사스래는 아침마다 죽고싶을 만치 나른해지는 몸 때문에 다시 자리에 누웠다.


몸을 뒤척이며 잠을 청하려던 사스래는 갑작스레 느껴지는 불안감 때문에 벌떡 일어났다. 혹시, 정말로 그렇지는.... 그의 움직임에 얼핏 선잠에서 깬 그녀를 달래며 소솜이 속삭였었다. "좀 더 자둬, 사스래야. 오후에 다시 올게." 그때는 잠결이어서 그저 미소만 짓고는 그를 보내주었지만 정신이 든 지금에 와서는 그게 아니었다. 다시 온다고? 왜? 오, 맙소사, 정말로, 설마 정말로 이질금에게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가납사니에 게도...설마, 설마... 사스래는 옷 매무시를 다듬을 생각도 못한 채로 흐트러진 머리를 한번 손으로 빗어 올리고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도 못하고는 걸음을 재촉하며 내달 렸다. 번 호 : 174 / 263 등록일 : 98 년 11 월 22 일 11:18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14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56

헐레벌떡 이질금의 집으로 달려온 사스래는 안뜰에서 반갑지 않은 사람과 마주쳤다. 어색하나마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를 맞는 미례와는 달리 사스래는 굳어진 얼굴 로 미례에게서 시선을 외면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이 부른 몸을 하고도 미례의 표정은 그리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그런 모습조차도 사스래에게는 곱게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어떤 계집은 나면서 부터 귀족으로 나서 호사스럽게 살다가 붙들려와서도 고이고이 모셔지고 누구는 태어나면서부터 찬물에 손 담그고 거칠어지도록 일만 하다가 그도 부족해서 젊 어서 사내 잃고 드센 팔자로 제 사내 하나 변변히 갖지 못하다니, 세상은 참으 로 불공평하다고 사스래는 생각했었다. 지금도 사스래는 미례를 보는 눈이 고울 수 없었다. 그녀가 없었다면....사스래는 그런 생각도 해보았었다. 미례만 없었어도 그녀의 인생은 좀더 순탄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질금의 사랑채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주춤한 사스래는 미례에게로 돌아서서 서먹서먹하게 물음을 던졌다. "호..혹시..소솜을 보았..어요?" "아침 일찍 그이에게로 와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걸로 알아요...무슨 일 이라도 있나요? 사스래의 차림새가..." "아..아니오.." 사스래는 당황스럽게 다시 몸을 돌려 사랑채로 들어갔다. 미례는 염려스런 눈으로 사스래의 뒷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저렇게 흐트러진 사스래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옷 매무시뿐만이 아니라 머리카락도 단정치 못했고 잔 머리칼이 얼굴위로 흘러내린 모습도 그랬다. 어젯밤 늦게까지 소솜과 함께 술을 마시고 들어온 경휘는 느긋하게 쉬려던 생각 이었으나 아침 일찍 찾아온 소솜의 기별을 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제오늘 갑작스레 배가 많이 무겁고 쳐지는 느낌이 들었던 미례는 조심스레 안뜰을 혼자 거닐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사스래의 비명소리가 들리며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걱정스런 유모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는 달려나오다 안뜰의 미례를 보고는 안심하며 미례에게로 다가와 손을 꼬옥 쥐었다. "무슨 일이랍니까, 미례 아씨." "한번..가볼까 봐요, 유모. 소솜이 왔었는데..." 미례가 무거운 걸음을 옮기려는데 사스래가 달려나오다가는 미례를 보고 반색을 하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까 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어..어서..좀 말려 주세요, 이질금이..이질금이 소솜을 가만두지 않을 거 같아요." 사스래의 눈은 이미 젖어있었고 두려움으로 생각이 제대로 되질 않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사스래가 미례의 손을 쥐고는 사랑채로 이끌었으므로 미례는 그녀를 따라 서둘 러 사랑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퉁이를 돌며 사랑채로 향하는 벽을 지나자 마자 화가 난 경휘의 씨근덕거리는 모습과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전의를 상실 한 소솜이 보였다. 경휘에게는 미례나 사스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듯 했다. 그는 온통 소솜만을 쏘아보면서 주먹을 쥔 채로 소솜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다시 한 대를 치려고 했고, 사스래는 비명을 지르며 미례의 손을 놓고는 소솜과 경휘 사이를 막아섰다. 경휘가 험악한 눈으로 사스래를 쏘아보며 그들 사이에 있는 사스래를 떨궈내었다. "물러 서, 사스래야. 너 역시 다치고 싶지 않거든 물러서는 게 좋아." 경휘가 이를 악물고는 사스래에게 말했다. 그가 사스래를 떨궈내는 사이 그의 주먹이 소솜에게로 날아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소솜은 다시 또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제발...말려줘요. 저러다가는 소솜을 죽이고 말겠어요.." 사스래가 미례에게로 눈물어린 호소를 했고 미례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경휘에게로 달려가 입가에 피를 흘리며 엎드린 소솜과의 사이를 막아섰다. "..휘...이러지 말아요. 말로 해도 되는 것을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없잖아요. 소솜은 당신이 아끼는 사람 아닌가요?" "저리 가, 미례. 나서지 말라고." 화가 난 경휘는 미례를 밀치며 소솜에게로 다시 달려들 기세였으므로 미례는 그를 막아서며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가 밀치려면 얼마든지 밀칠 수 있었 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다만 아직도 화가 덜 풀린 거친 숨소리를 내며 소솜을 쏘아보았다. 사스래가 소솜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하며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바보...거 봐요, 내가 그랬잖아. 당신을 죽일지도 모를 거라구요, 바보같이 왜 이런 일을 겪느냔 말야. 이 바보 천치 같으니." 그녀의 말에 자극 받은 경휘가 다시 그들에게로 다가가려 했으나 미례가 힘을 주며 매달렸다. "휘...이러지 말아요. 제발...이러지 말아요." "너희 둘이 날 가지고 뭘 하자는 거였던 거야, 응? 날 우습게 만들어도 분수가 있지, 잘도 그런 짓들을...놔줘, 미례. 죽여 버릴 테다. 바보 같은 것들." 미례는 불안스럽게 그를 바라보며 그를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그의 숨결이 고르게 되자 그는 잊고있던 미례의 안전에 신경이 쓰이는 듯 미례


의 상태를 조심스레 살폈다. 미례가 안심을 시키듯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미례의 팔을 풀려는 기색을 보이자 미례가 다시금 웃음기를 거두고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놔도 돼, 미례야. 얘길 나눌 생각이야." "정말 요?" "음." 미례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그를 놓아주었다. 그는 사스래에게 부축을 받아 일어서는 소솜을 향해 곱지 않은 눈으로 쏘아보고 는 말을 건넸다. "그만 소솜을 끼고 돌아, 사스래야, 넌 속도 없는 거야?" 사스래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미례는 그제서야 무언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소솜과 사스래 는 앙숙이다시피 사이가 안 좋다고 들어왔다. 그런데 아까 소솜이 죽을지도 모 른다고 안달하던 사스래의 모습은 그것과는 다른 행동이었다. "소솜, 여인의 치마폭에 숨는 짓은 그만 하고 방으로 들어와, 하던 얘길 마저 나누자." 소솜이 묵묵히 아픈 턱을 문지르며 그를 따라 들어가려 하자 불안스런 사스래가 그들의 뒤를 따랐다. 다음날 경휘는 미례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소솜과 가납사니와 함께 배를 타고 근해로 나갔다. 불안해하는 미례에게 바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오늘은 꼭 나가보아야겠다고 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긴 한 미례였으나 몸이 이상하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가 꼭 나가봐야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례는 새벽부터 은근히 배가 아프기 시작했고 온몸이 저려오기 시작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종일 불안해하는 미례를 따라다니다 시피 하던 그가 바다로 나가고 자리를 비운사이, 정오가 지나면서는 미례도 참지 못하고 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울음을 울었고, 미례의 통증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된 유모는 미례를 침상에 눕히며 곁시를 시켜 산파를 불러오도록 했다. 하얗게 질리며 불안해하는 미례를 달래며 유모가 안심시켰으나 미례는 죽을 것 만 같은 고통에 질려 유모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 "유모...무서워...너무 아파서..죽을 것만 같아.." "진정하세요, 미례아씨..다들 한번은 겪는 일인 걸요. 음..자, 진정하시고 시키는 대로 하세요." 어린 나이에 감수하기엔 산고의 고통은 너무나 심했고, 너무나 오래도록 계속 되었다. 저녁 무렵에 지친 몸으로 돌아온 경휘는 집안에서 들리는 미례의 고통스런 울음 소리에 한걸음에 안채로 뛰어들었다. 염려스런 얼굴의 곁시가 밖을 지키고 있었 고, 안에는 유모가 미례 곁에 꼭 붙어 있었으며 산파경험이 많은 노인도, 새타니 도 함께 있었다. 미례는 한나절부터 다음날 날이 새기까지 내내 진통에 시달려 지쳐 버렸다. 지옥을 경험한다는 말이 맞을 거라고 생각하며 미례는 이제 지칠 대로 지쳐서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간신히 신음소리 내듯 흐느끼다가 진통이 가라앉으면 의식을 놓듯 꿈속을 헤매곤 했다.


그 속에서 미례는 보고픈 가락국의 어머니도 만나고 미루 오라버니도 만났다. 뒤섞인 공간을 만들어 냈는지 어느 순간에는 그녀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경휘가 함께 있었다. 그런 날이 있을까. 정말로 그런 날이 올까. 미례는 허탈하게 웃으면서 환영을 잡으려는 듯 손을 내밀어 허공을 휘젓기도 했다. 유모가 걱정스럽게 미례의 뺨을 때렸다. "미례 아씨, 제발, 정신차리셔요. 음? 그 꿈을 붙잡지 마셔요. 제발 눈을 뜨고 절 보셔요. 여기 미례 아씨를 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잊지 마시고 제발..." 찰싹 찰싹~, 가볍게 유모가 미례를 다시 때리고 나서야 미례는 눈물이 글썽이는 눈을 뜨고 유모를 쳐다보았다. "유모....어머니가 보고싶어...오라버니도..." "이질금께 보내달라 하셔요. 아기씨 낳으시고 몸 조리 잘 하시고서 함께 가자 하셔요. 음? 자 꿈속에선 그만 헤매시고 시키는 대로 하셔요." "졸리운 걸요...유모 그이는..." "밖에 계십니다. 걱정하지 마시고..제발 잠드시면 안됩니다. 기운을 내셔요. 어여쁜 아기씨 안고 가락국 어머님께도 가셔야죠." "정말...갈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올까요?" "그럼요, 희망을 잃지 마셔요. 이질금이 곁에 계신데, 미례 아씨 소원 못 들어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꼬박 다음날 하루가 지나서야 미례는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꽤나 우렁차게 들렸다. 다들 기뻐하며 좋아하는 소리도 미례 에겐 멀리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고, 다만 이젠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으리라는 사실만이 그녀를 안도하게 했다. 달고도 단 잠에 깊이 취해있던 미례는 어느 순간 눈을 떴고 그녀 곁에는 다정하게 그녀를 내려다 보며 그녀의 손을 잡고있는 경휘가 있었다. "..휘..." "그래..." "...나, 힘이 하나도 없어요.." "괜찮아...애써서 말하지 않아도 돼...많이 힘들었을 거야." "...아기는 요?....예뻐요?" 그가 미례의 땀에 젖은 머리칼을 넘겨주며 피식 웃었다. 그가 무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며 미례는 다시 무거워진 눈꺼풀을 이기고지 못하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래, 세상에서 그렇게 예쁘게 생긴 아이는 없지." 그가 안심을 시키듯 미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는 밖에서 지샌 하루동안 가슴이 조여드는 듯한 불안감에 제대로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미례의 소리가 그를 붙들고는 놓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 록 그녀의 소리는 약해져갔고 간간히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는 그를 더욱 안타깝 게 했다. 그는 살아있는 미례를 다시 볼 수 있을지 겁에 질렸었다. 그녀에게 자신만큼 아니 자신보다 더 아낀다는 말 한번 한적 없음을 깨닫고 그는 가슴 아팠다. 빼앗은 여인, 그녀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그는 못 견디게 알고싶었었다. 그러나 그는 묻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미례에게 바라는 많고도 많은 욕심 을 다 물리고 다만 건강한 아이를 낳아주었고, 그녀 또한 살아있어서 다행이라


고 안도했다. 살아있으니 두고두고 해야지. 네게 묻고싶은 것도 많고 하고싶은 말도 있지만 그건 언제든 말할 수 있으니, 꼭 지금이 아니어도 되는 거지.

번 호 : 175 / 263 등록일 : 98 년 11 월 23 일 00:59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36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57

치우를 낳고 한 달이 지났다. 치우는 시간이 되자 엄마 젖을 조르며 울어댔고 잠자리에 들려던 미례는 아이의 침상에서 치우를 안아들며 의자에 앉아 옷자락을 풀었다. 치우가 보드라운 손으 로 익숙한 그녀의 젖가슴을 더듬으며 허겁지겁 젖을 물었다. 아이가 젖을 빨 때 마다 욱신거리는 배의 통증도 줄었다. 잠시 후 경휘가 다가와 욕심 내며 힘있게 젖을 먹는 치우를 그녀 곁에 서서 내려다보았다. 치우는 미례와 눈을 맞추며 작고 앙징맞은 손을 펴서 미례의 젖가슴을 간지럽히며 만졌다. 한참을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던 경휘가 아이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고는 한마디했다. "네게 잠시 빌려주는 거야, 이 녀석아." 미례는 그의 것이었다. 이제 아주 강력한 경쟁자가 생겼지만 그것은 잠시뿐, 젖을 떼면 미례는 다시 그만의 여인으로 돌아오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사실 요즈음 아들을 얻은 이후로 두 가지 상반되는 감정에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다들 그를 볼 때마다 아들을 얻어 기쁘겠다 축하의 말을 하는 통에 그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잘 몰랐으나 치우를 보듬어 안고 젖을 물리며 예뻐하는 미례를 볼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은 이제와 무시할 수 있는 일만은 아니었다. 아들이 생겨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될 때마다 경휘는 참으로 생소한 느낌이 들며 한참씩을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묘한 감정의 뒤틀림이 생기곤 했다. 자신의 아들은 미례의 신경을 온통 다 차지해버리고 온갖 귀여움이며 사랑을 다 받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받아본 적 없는 경험..고구려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떠올랐다가는 사라지곤 했다. 미례가 치우를 재우고는 자리로 돌아와 그의 곁에 누웠다.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경휘는 미례가 곁에 눕자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향내와 젖 내음에 유혹을 느끼며 미례를 당겨 안았다. "...휘" 미례가 그에게서 느껴지는 열기에 놀라며 작은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제지 했다. 경휘는 말없이 그녀의 옷자락을 풀어헤치며 치우가 만지지 않은 다른 쪽 젖가슴에 입을 댔다. 몸을 푼 이후로 처음 보이는 그의 행동에 미례는 당황하는 마음도 들었다. 새타니의 주의대로 그는 애써 미례를 품고싶은 마음을 눌러 왔다. 그러나 오늘


밤 치우에게 젖을 물리는 미례의 모습을 본 순간부터 그는 드러나는 시기와 강렬한 욕망에 휩싸였었다. 젖가슴을 베어 문 그의 입안으로 달작지근한 젖이 넘어갔다. 그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고 미례를 바라보자 달아오른 얼굴을 한 미례가 웃음기를 띄었다. "..치우가...싫어할 거예요.." "아니...이젠 내가 널 차지할거야. 나도 양보할 만큼 양보 했다구." 그가 볼멘 소리로 말하며 그녀의 옷자락을 헤쳤다. 그는 이미 벗은 몸이었다. 항 의하려고 달싹거리는 미례의 입술을 막으며 그가 입술을 겹쳤다. 미례의 몸을 반쯤 누르고 있는 그의 몸은 이미 뜨겁게 달아있었다. 그녀가 거부할 수 없도록 경휘는 미례의 입안에서 미례가 좋아하는 민감한 곳을 찾아내 애태웠다. 어설픈 거부의 몸짓이 어느새 그치고 미례의 두 팔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탄탄한 등을 감싸기 위해 미례의 한쪽 팔이 그의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들 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미례의 입안에서 뜨거운 신음소리가 그의 입안으로 전해졌다. "하아...하아..."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은 더듬으며 입맞추더니 다시 목선을 따라 내려가자 미례의 신음소리가 더 커졌다. 조금만 건드려도 젖이 흐르는 가슴을 가볍게 핥고는 그의 얼굴이 더 아래로 내려갔다. 복부를 따라 배꼽을 지났다. 그는 입술로 낙인찍듯 입맞춤을 계속 했으며 혀로 핥기도 하며 더 아래로 내려갔다. 미례의 손이 그의 머리를 끌어 안았다가 그가 이끄는 대로 다리를 벌리자 그가 그녀의 허벅지아래 무릎을 꿇고는 앉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의 숨결이 그녀의 은밀한 곳에 닿자 움찔거리며 미례는 약하게 저항했다. 본능적으로 오므리려는 미례의 허벅지를 벌려 세우며 그의 뜨거운 숨결이 은밀한 곳을 덮은 부드럽고 무성한 숲을 갈랐다. "흡...흐윽.." 신음소리를 참으며 미례의 한 손이 입으로 올라갔고, 다른 한 손은 어쩔줄 모르며 자신의 가슴으로 갔다. 숱하게 몸을 섞었던 사이라도 이렇게 은밀한 부분을 직접 그가 눈으로 대한다고 생각하자 미례는 수줍음으로 몸을 뒤척이며 미약하나마 저항했다. 그의 자극을 참을 수 없어 가슴을 감싸쥔 손에 힘이 들어갔고 체온 정도의 따뜻한 젖이 피부를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흐읍...흐음.." 그의 입술이 은밀한 부분의 곳곳을 혀로 핥았고 자극을 주며 흡입하듯 힘주어 빨기도 했다. "흐읍...흐음....제..제발...휘...제발..." 미례의 입에서 애원하는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발..뭐?..미례야,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래? 응?" 그가 비밀스런 낮은 음성으로 부드럽게 미례를 떠보았다. "..제발...그..그만..." "그만 두라고?" "...그래요...흐읍.." 그가 다시 강렬하게 미례의 몸을 만지며 애무했다. 가늘게 떨기까지 하는 미례 의 몸을 느끼며 그가 나지막히 웃었다.


"네 몸은 다르게 얘기하는데?...날 원하는 게 아냐?" "흐음...제발...어서.." 미례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의 고문 같은 애무에서 자유로 워지려 몸을 달싹거렸다. 간지러운 듯한 느낌의 그녀의 몸 속 한 부분이 그를 원하며 자신을 괴롭히고 있 는 게 사실이었다. 별개인 듯한 그 부분은 미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하게 수 축하며 그를 맞아들이길 원했다. 그의 혀가 다시 그 부분을 애무하며 안으로 조금 들어갔다. "하아...하아...." 뜨거운 숨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스스로도 더 깊이 그를 느끼려 몸을 더욱 개방하며 미례는 자지러졌다. 더 이상 은 견딜 수 없을 것 같다고 미례는 느꼈다. 그녀의 내부는 이미 알고있는 그의 몸이 그녀 안으로 들어와 채워주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엉덩이도 달싹거리며 그 를 향해 들어올려졌다. "휘..제발...제발...내게로 들어와요.." 미례의 입에서 그가 고대하던 말이 나왔다. 그가 만족스럽게 환하게 웃으며 얼굴을 들어 다시 미례의 입으로 가져가며 몸을 겹쳤다. 그리고 가슴을 감싼 미례의 손을 치우며 가볍게 입맞추고는 가슴을 덮고 있는 손을 치우며 흐르는 젖을 혀로 닦아주었다. "휘..." 미례가 앓는 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가 한 팔로 몸무게를 지탱하면서 다른 손을 뻗어 미례의 손을 잡아내려 그의 양물을 쥐게 했다. 미례는 망설이면서도 달아오른 몸으로 그가 시키는 대로 그것을 잡았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응?...어서.." 그 역시 흥분할 대로 흥분한 상태였다. 그녀를 안지 못하는 동안 그의 머리 속에선 온갖 은밀한 상상력이 다 동원되었었다. 그의 한 손은 미례의 허리를 감으며 엉덩이 사이로 들어갔고 다른 손은 부드럽게 상체를 지탱하고 있었다. "흐음...휘...제발.." "어서, 미례...어서 날 네 안에 들어가게 해줘." 잠시 망설임이 있었으나 미례는 고통스럽게 그를 원하는 몸의 요구에 지며 그의 양물을 자신의 깊은 곳으로 잇대어주었다. "휘...휘...제발..." "거의 다 됐어...미례야...조금만 더.." "흐음..." ................................................................................ ......................... ........................오랜만이니까, 모....이해해주실거라고.............................^^ 미례는 숨넘어가는 신음성을 토하며 그에게로 달라붙었고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를 조여대는 몸 안의 변화와 열기에 빠져들었다. 점점 더 빠르고 깊게 들어오는 그의 몸에 희열을 느끼며 미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등을 할퀴었고 만족스런 신음소리를 토하며 자유로워졌다. 그의 몸이 무겁게 누르며 숨소리가 안정되고 나자 미례는 아직도 그의 몸이 자 신의 안에 들어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그의 몸을 감싸안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기분 좋은 휘파람 소리를 내며 옷을 입던 경휘가 갑자기 몸 의 움직임을 중단하고는 찡그리며 멈춰 서고는 미례를 불렀다. "왜요, 휘?" 미례가 이상히 여기며 그에게 다가가자 그가 벗은 상체를 돌리며 등을 내보였다. "등이 쓰리고 아픈데..좀 봐줄래, 미례야?" "그래요? 어디.." 미례는 그의 등을 살피다 손톱자국 선명한 붉은 상처를 보고는 그만 입을 다물 었다. 어젯밤 자신도 모르게 낸 상처였다. 무어라 말해야 할까, 미례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왜 그래, 미례야? 여기 이만큼이 아픈데 어때, 괜찮은 거야?" 그는 정확히 그녀가 낸 상처를 짚어내었으므로 미례의 뺨은 더욱 붉어지고 고개 는 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약을...발라야 할 것 같아요." 미례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하고는 몸을 돌려 그전에 남았던 약을 가지러 갔다. "상처가 났어? 다친 기억이 없는데.." 경휘가 이상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을 가져오며 미례는 겸연쩍어 하며 작은 소리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미안해요, 휘...어젯밤 나도 모르게 그만..." 그가 곧 짐작을 했는지 히죽거리며 웃고는 옷을 입었다. "약을 발라야죠, 휘." "괜찮아, 아프지 않아." 그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좀 전엔 아프다고.." "지금은 좀 나아. 참을 만 해." "상처가 덧날지도 몰라요, 휘." "상처가 아플 때마다 어젯밤의 널 떠올릴 거야. 이대로가 좋아." "...미안해요.." 미례가 작은 소리로 다시 그에게 사과했다. 그의 몸에는 벌써 그녀자신으로 인한 상처가 둘이나 된다고 생각하자 미례는 정말 미안한 마음에 몸둘 바를 몰랐다. 그가 그런 미례를 보고는 환히 웃으며 짖궃게 몇 마디 던지고는 성큼 성큼 밖으로 나갔다. "아니, 그럴 것 없어. 너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미례야. 나 역시 네 몸 어느 곳에 상처를 낼지 모르니." 뒤에 남은 미례의 얼굴은 더욱 달아올랐다.


번 호 : 191 / 263 등록일 : 98 년 11 월 26 일 00:34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23 건 제 목 : [진현/ 장편] 해적의 여자 57 - 2

넉 달이 넘도록 한곳에 머물러 있는 것은 경휘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는 미례와 아이를 지켜보며 느긋하게 세월을 보냈으나 가끔씩 조바심 을 내곤 했다. 가납사니나 다른 장로들이 그를 대신에 몇 차례 복주로 광주로 평주로 배를 통솔하여 항해를 했고, 보고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나 그 역시 머무는 것에 답답증을 느끼는 피가 뛰노는 젊은 사내였다. 결국 그는 폭풍으로 배를 잃었다는 복주의 보고를 받기가 무섭게 직접 출항할 결심을 했다. 아이에게 온 신경이 가 있다시피 한 미례가 그를 알은 척 해주지 않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이긴 했다. 심술난 사내처럼 볼이 부어있는 것은 그 자신에게도 좋지 않았다. 곁에 없어 보면 미례도 무언가 깨달아지는 게 있지 않을까. 이번 행로엔 가납사니도 소솜도 함께 가기로 결정을 했다. 사스래 일로 서먹서먹한 그들이 뱃길에 조금이라도 이야길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기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까짓 거 자식 한 놈 없다 치면 그만이오. 말을 듣지 않으며 고집을 꺽지 않은 소솜의 등에 대고 가납사니는 경휘에게 말을 했었다. 그날 경휘는 가납사니를 붙들고 술을 마시면서 무뚝뚝한 아버지에게서 자신이 받은 상처들을 털어놓았었다. 자식이 따라주지 않는 것 또한 아비 된 입장에서 볼 때는 맘 상하는 일이겠지만, 아비의 꿈에 못 미쳐 자식으로도 대우받지 못하는 그 심정은 좋은 줄 알아, 가납사니? 제대로 눈길 한번 받아 본적 없는 나는 티격태격하면서도 부자의 연으로 맺어져있는 사람들이 부러워. 난 그래도 자네와 소솜을 보면 부럽다고. 난 아버지와 가슴속에 있는 말도 한번 제대로 해본 적 없어. 왜 멀쩡하게 살아있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믿게 했는지도 원망스럽고, 그렇게 버리고 간 어머니도 원망스러워. 소솜이 자네 마음에 차지 않아도 가납사니,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아비가 부끄러워 없는 셈 치면 된다 하면 아비 된 입장에서 마찬가지 겠지만 그 말처럼 빈말이어도 가슴을 치는 소리는 없는 거라고. 가납사니를 위로한다고 만든 자리는 그날 경휘 자신의 상처를 되새김질하며 드러내는 자리가 되어버렸었다. 몸을 풀고 아직 푸석푸석한 얼굴로 여읜 듯한 미례는 가납사니의 부축을 받아 들어오는 경휘를 보고는 놀라며 걱정스런 표정이었고, 미례의 안색을 보며 쓰게 웃던 가납사니는 안심하라는 말을 미례에게 전하고는 그를 눕히고 어색한 자리를 피해주었었다. 그날 결국 마지막까지 그의 주사를 다 받아준 사람은 미례였다. 그는 혼잣말처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토해내었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드러냈으며 그러다가는 미례에게 다짐을 받곤 했다. 미례야, 넌 떠나지 않을 거지. 넌 언제까지나 내 그늘에 머물러 줄 거지?


물론이죠, 내가 어디로 갈 수 있겠어요. 당신과 아이를 두고. 미례가 안심을 시키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다시 또 같은 말로 미례 에게 묻곤 했었다. 휘 그만 자요. 어디로도 가지 않아요, 난. 후훗, 그는 씁쓸함이 묻어난 웃음을 한숨처럼 지으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하긴 어디로도 가지 못하지. 넌 내 아이의 어머니야. 난 내 아버지처럼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아. 널 보내느니 차라리 죽여버릴 거야, 알아, 미례야? 넌 날 떠날 생각을 하는 날이 죽는 날일 거라고. 쉿, 쉬이. 그만해요, 휘. 미례는 마음 한구석이 아려옴을 느끼며 그를 품에 안고는 아이를 달래듯 등을 토닥이며 달래었다. 내 어머니가 말야, 미례야. 아름다우신 내 어머니가 말이다, 미례야. 아버질 버 리고 나도 버리고 떠나버렸다는 거야, 그럴 수도 있는 거니. 자식도 버리고 그 럴 수도 있는 거야? 그는 그녀의 품안에서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있는 상처를 드러내었다. 드문드문 알아듣기 힘든 웅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는 맺힌 말들을 꺼내놓았다. 난 안 그래요, 휘. 우리 아기도..그리고 당신도..내겐 소중하니까요. 그러나 다음날이 되었을 때 경휘는 그 전날의 그가 아니었고 한발 다가섰다 생각했던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복주를 다녀오겠다는 말을 전했다. 미례는 쓰게 웃으며 그를 보내주었다. 그를 기다리는 일들은 쌓이고도 넘쳤다. 직접 돌아보고 손익을 헤아리며 복주의 화평 도방에서 지내던 경휘는 설민이 만나러 와서야 잠시 짬을 낼 수 있었다. 배를 띄우고 바람을 쏘이자는 설민에 게 경휘가 쓴웃음을 지었다. "누구처럼 유유자적 한 줄 알아?" "헛, 이런 몹쓸 친구를 봤나. 겨우 몇 달만에 나타나서는 코빼기도 안 비쳐 내 가 먼저 찾아왔더니 날 하릴없는 한량으로 몰아 부치긴가?" "그런 건 아니지." "아니면 일개 표국을 운영하는 나와는 다르다는 말을 하고싶은 거야?" 설민은 정말로 삐져 버린 듯 말에 가시가 들어있었다. "그런 말이 아닌 줄 알잖아." 이렇다 저렇다 부연하지 않는 그인 줄 아는 설민이 졌다는 듯 환하게 웃음을 웃었다. "사람이 좀 변하기도 해야지, 이리 재미가 없어서야...아마도 자네의 안사람은 정말로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겠군." "그러는 네 얼굴에 새로 생긴 상처는 너무 재미가 있어서 안사람이 만들어 준 건가 보군?" 설민의 왼쪽 볼에는 정말로 이제 겨우 흔적이 희미해지려는 긁힌 듯한 상처가 있었다. 설민이 그의 말에 고개를 내두르며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졌네, 졌어. 이런 면이 있었단 말이지?" 그들은 정말 오랜만에 회포를 풀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 이젠 아버지가 되니 기분이 어떻든가?" "흠...나이 먹어 가는 걸 느끼겠더군." "그것뿐?"


"새 생명이 신비롭기도 하고" "가슴에서 차 오르는 무언가가 안 느껴지던가? 그렇게 자식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더냐고?" "알면서 뭘 묻는 거야?" "후훗, 여전하군. 그러면 이제 그녀는 확실한 자네 사람일 테고...허면 이제 중원진출의 발판을 위한 결속 같은 건 물 건너간 건가?" "글세..." 경휘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직 낙양(洛陽) 제일 미는 주인이 없는 모양이던데...안됐군." 설민은 이후로도 찾아와 함께 유람이나 하자고 꼬드겼고 광주에서 들어오는 배 를 기다리던 경휘는 뒷일을 방주와 남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는 가벼운 차림새 로 길을 나섰다. 경휘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설민과 같은 중원인의 복장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지난번 관광하려다 만 용문 동굴을 목적지로 삼았다. "낙양서 좀 떨어진 이수(伊水)가에 말이야, 경휘. 강줄기를 따라 동굴이 있다네. 그런데 굴만도 1000 여개가 넘고, 곳곳에 불상이 모셔져있고 탑신만도 수십 개 가 넘는다네. 다들 놀랍다고들 하던걸, 나도 꼭 내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고." 번화한 낙양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서자 그들은 감탄 어린 찬사를 감추지 못했다. 복주가 양나라의 주된 항구로서 번화한 곳이었지만 이곳 낙양에는 비교할만한 것이 못됐다. 위의 효문제가 중원의 중심으로 차지하려 욕심 낼만 했다. 하긴 그 이전에도 낙양은 중원을 차지하려는 제국들이 눈독 들이는 곳이었다. 누런 황톳물 흐르는 황하강 위로 교통의 중심지답게 배들이 돛을 자랑하며 드 나들고 있었고, 마치 위세를 자랑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 화려한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피로를 풀기 위해 비교적 깨끗해 보이는 객잔에 방을 잡았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도시는 그 화려함을 드러내었다. 닫힌 시장판으로 길 이 생기더니 하나둘 어둠을 날리는 형형색색의 등불이 켜져 걸렸다. 금지되어 있음에도 밤의 강 위에 불을 밝힌 배가 적잖이 띄워져 있기도 했고 달밤에 비친 갑판 위에서 화려한 비단옷자락을 나부끼는 기녀가 춤을 추는 모 습도 보였다. "선이 곱군. 여희도 만만찮은데...그녀라도 데리고 올걸 그랬나." 야경을 감상하자며 경휘를 끌고 나온 설민이 느릿느릿 주위를 살피며 거리를 걷다가는 강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자랑하는 곱상한 얼굴에 새로운 흉터를 만들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 가보지?" 경휘가 그답지 않게 이죽거리자 설민이 키득키득 웃었다. "여희가 콧대가 좀 세긴 해도 너와 함께라면 싫다고는 않할 걸?" "난 관심 없어." "정말로? 영웅호색이라고 아름다운 여인을 싫다는 사내는 못 봤어." 흐훗, 경휘는 그저 열없이 웃어넘겼다. "아직도 그녀밖에는 보이질 않아?" 설민이 경휘를 떠보며 물었다.


경휘는 그저 설민을 쳐다보며 슬쩍 눈을 흘겼을 뿐이었다. "정말 그런가보군. 단단히 걸렸는걸." 설민이 믿기 힘든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쓸데없는 소리 말아." "좀....아름답긴 하지만 그 정도의 미인이야 많고도 많은 걸. 도대체 어떤 점이 그리 좋던가? 속 시원히 말이나 해보게." 한참을 졸라서야 설민은 경휘에게서 한마디를 끌어냈다. "그냥 끌려. 내 여자 같은 느낌이야." "단단히 홀린 게 맞는군." "그런 느낌을 모른다고는 하지 말아. 마음에 두었던 여인 때문에 밤새도록 내 옷자락을 붙들고 그녀가 아니고는 혼인하지 않겠다고 울던 사내도 있었어." 경휘의 그 한마디는 설민의 입을 막기에 충분했다. "잊어버리지도 않는군." 나중에서야 울그락붉으락 하는 얼굴로 설민이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아무 여인하고 잠을 자는 건 내키지 않아. 그런 건 천하의 바람둥이나 하는 짓이지 나는 아니라고." 오랜시간 말을 타고 여행을 해서인지 온몸이 무겁게 느껴졌으므로 그들은 돌아 와 일찍 자리에 누웠다. 그전에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여행을 즐길 수도 있던 경휘였다. 그러나 이제는 어느 곳에 있어도 미례의 모습이 눈에 밟혀 편안할 수는 없었다. 두고 다니는 게 싫으면 결국은 함께 데리고 다녀야 한다는 말인데... 경휘는 안될 일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화평도는 안전하기라도 하지. 중원이 어느 곳인데 데리고 다닐 수 있다고. 게다가 혹여라도 그녀가 고향으로 가는 배라도 타길 원한다면... 그는 아직도 미례를 못미더워 하는 자신을 깨닫고는 흠칫 놀랐다. 다음날 그들은 일찍 길을 떠났다. 말들은 밤새 잘 쉬었던 모양으로 팔팔하니 기운이 넘쳐 보였다. 거의 한나절이 못되어 그들은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위치한 소실산에 도착했다. 깊은 숲 속에 위치한 소림사로 들어서면서 설민은 조금이나마 무술을 배웠다는 품새로 숙연한 느낌이 든다며 아이처럼 흥분했다. 푸른 대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한 사이로 난 오솔길을 말에서 내려 걷는 사이 숲 속에 그런 곳이 있었나 싶게 공터가 나타났고 하늘을 찌를 듯이 웅장해 보이는 일주문이 보였다. 황색가사를 걸친 스님이 눈에 간간히 띄었고 방문객에게 공손히 합장하며 인사 하는 어린 동자들도 있었다. 불심과는 상관없으나 그들에게 인사치레를 되돌리는 경휘와는 달리 설민은 정말로 숙연해 보였다. 그는 대웅전 앞에 만들어진 소원을 빌기 위한 촛대에 불을 붙이면서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머리를 조아 렸고 주문 같은 몇 마디를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경휘는 그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뭘 하는 거야?" 경휘가 작은 소리로 그에게 묻자 그가 한쪽 눈을 뜨고는 의아한 경휘를 바라보 더니 다시 손을 모아 머리를 조아렸다. "자네도 불을 켜고 소원을 빌어." "무슨 소원?"


"이곳이 소원을 빌면 잘 이루어진다고 하는 유명한 곳이야." 그가 소리 죽여 대꾸했다. "그래서 자넨 무슨 소원을 빌었는데?" 경휘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설민을 바라보았다. "미인을 얻게 해달라고 했지." 설민이 장난스레 웃으며 말하고는 덧붙였다. "자네도 소원이 있잖나, 그 여인의 마음을 얻게 해달라고 하지 그래?" "쓸데없는 소리." 경휘는 시큰둥하게 일침을 놓고는 발길을 돌렸다. 오래된 사찰임이 분명한 흔적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그들은 사찰의 경내에서 나와 위쪽으로 좀더 올라갔고 수많은 거대한 탑신들이 자리한 숲을 보고는 감 탄을 금치 못했다. "이곳이 경휘, 역대로 유명한 스님들이 잠든 곳이라네. 더 가까이는 가지 못할 거야, 금역이라는군." 몇 십 년, 혹은 몇 백년 묵은 나무들 사이로 뾰족히 솟은 탑의 모습이 듬성듬성 보였다. "왜 소림사 불제자들이 다른 절과는 달리 한 손으로 합장하는지 아나, 경휘?" "글세." 경휘는 처음부터 마주치는 그들이 한 손만 앞세우고 예를 갖추었으나 그것에 대해 별로 의아하게 생각지는 않았었다. "사연이 있지, 그 유명한 달마대사께서 이곳의 주지였던 혜가 스님을 제자로 받아들여 주지 않자 갖은 정성을 다하던 스님의 정성에도 시큰둥하던 대사께서 약속을 하셨다네. 하늘에서 붉은 눈이 내리면 그때는 널 제자로 받아들여 주마, 하고 말야. 그래서 어느 눈오는 날에 혜가 스님은 자신의 왼팔을 잘라 그 피로 눈을 붉게 물들였다는 거야. 그것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선 오른 팔로만 예를 올리는 거지." "흠..괴팍한 스승에 그 제자로군." 숲을 빠져 나오던 그들의 뒤로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지?" 설민이 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경휘도 그를 따라 눈쌀을 찌푸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가던 길이나 가자고, 아직 네가 자랑하던 용문 동굴도 보질 못했어." "사내가 되서 위험에 처한 사람의 소리를 듣고도 그냥 가자고? 안될 말이지." 그는 벌써 경휘가 말리기도 전에 날쌔게 앞서 걸음을 옮겼다. "오지랖도 넓지." 경휘가 혀를 차며 그의 뒤를 따라 소리나는 숲 속으로 향했다. 마부는 이미 도망가 버린 작은 마차를 둘러싼 여러 명의 사내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안의 여인을 끌어내려는 사내들과 앙칼지게 대드는 여인의 가녀린 소리도 들렸다. 그들을 방해하며 나타난 설민에게 험악한 표정으로 칼을 든 장한 넷이 달려드 는 사이에도 그들 중 둘은 마차 안에서 장도를 뽑아들며 대드는 여인에게 곤욕 을 치르고 있었다. "바보 같은 녀석들. 상처는 내지 말고 끌어내란 말이다. 그깟 여자 하나 못 이 긴단 말야?"


우락부락하게 생긴 귀공자연한 옷차림을 한 사내가 발을 구르며 신경질적인 소 리를 질렀다. 경휘는 사태를 파악하며 사내들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바쁜 설민을 조금의 거리 를 두고 지켜보았다. "이봐, 경휘, 뭐 하는 거야? 녀석들을 혼내주지 않고?" 주춤거리며 물러서던 설민이 씩씩거리며 경휘에게로 소리쳤다. "네가 해결할 수 있는 거 아니었어? 난 그냥 어떻게 되는 상황인가 보러온 것 뿐 인데?" "이런...지금이 놀릴 때라고 생각해? 칼을 든 놈들이야. 나 혼잔 무리라고. 아무 리 너라도 마찬가질 걸?" "난 피를 보고 싶지 않아. 더구나 이곳은 중원 땅이고." "이 못된 친구 같으니. 내가 살아나면 네가 죽을 줄 알아." 키득거리던 경휘는 눈 깜짝할 순간에 마차 안에서 여인을 끌어내려 하는 사내 들에게로 다가갔고 순식간에 그들은 혈이 눌리며 그 자리에서 굳어지며 쓰러졌다. 설민을 상대하던 네 명의 사내들도 겨우 무술에 발을 들여놓기는 한 것 같았으나 자신들의 힘만 믿으며 달려드는 아직은 애송이정도였다. 그들은 설민으로부터 제법 만만찮아 보이는 경휘에게로 시선을 돌렸으며 경휘는 어렵지 않게 그들의 허를 찌르며 반격을 가했다. 그를 상대하던 둘이 나가 떨어지자 겁을 집어먹은 나머지 놈들은 쉬이 접근 할 엄두를 못 냈고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다시 뒤에서 싸움을 재촉하는 소리를 지르자 마지못해 전의를 내보였다. 그러나 경휘는 쓰러진 자의 칼을 주워들어서는 그들의 칼을 부러뜨려버렸고 그의 발이 어느 사이 빠르게 움직이며 그들 등뒤로 돌아서서는 가지고 있는 칼의 등으로 힘을 가하여 내리쳤다. 타닥. 경쾌하기까지 한 소리와 함께 그들은 전의를 잃고 쓰러졌으며 설민의 쏘는 듯한 시선이 그들을 조정하는 사내에게 쏠리자 그는 주춤거리더니 도망쳐 버렸다. "별것도 아닌 놈들이 설쳐대는 군." 설민의 쏘아보는 시선이 이번에는 경휘를 향했고 그는 아직도 가쁜 숨을 몰아 쉬며 경휘에게 다가와서는 곱지 않은 주먹을 날렸다. "널 믿었다니까." 경휘가 슬쩍 피하며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잘난 척이 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난 이런 일에 끼여들고 싶지 않았다고." 설민은 마차 안으로 다가가 이미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들을 훔쳐보고 있는 여인에게로 향했다.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아가씨?" 그녀는 사뿐히 마차 안에서 내려서며 그들을 향해 수줍은 모습으로 인사를 했다. "네, 은인께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그리 화려하달 수 없는 옷차림이었으나 단초롬이 빗어 땋은 머리며 행동 하나 하나에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가지고있었다. "마부가 사라지고 없으니 아가씨가 직접 마차를 몰수는 없을 거 같고..저희가 도와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녀는 설민을 향해 거부하기 힘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친절하신 분이십니다." 그녀는 수줍어하는 듯 하면서도 당차 보이는 구석이 있는, 자신의 매력을 충분 히 알고 있는 여인이었다. "댁이 어디십니까?" 설민이 마차를 손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낙양 시가에 살고 있습니다. 은인들께 차라도 접대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바랄게 없겠습니다. 존함이..." "복주에서 유람 차 온 남궁 설민이오." "저분은.." 그때까지도 말을 나누는 그들 사이를 거리를 두고 지켜보던 경휘가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의 말을 흘려버렸다. 정말로 당찬 구석이 있는 모양이라고 경휘는 생각했다. 다른 여자들 같았다면 지금쯤 혼비백산하여 은인들의 이름을 묻고있는 건 상상 도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함께 온 내 친구요. 하긴 친구인지 무언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겠지만," 푸훗, 그녀의 소매가 올라가며 입을 가리고는 설민의 말이 재미있는 듯 귀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마 월이라고 합니다." 그녀를 마차 안으로 들여보내고 고삐를 확인하던 설민이 자신의 곁에 경휘가 앉자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속삭였다. "내 소원이 벌써 이루어지려는 모양이지 뭔가?" "어째서?" 경휘가 의아한 눈으로 설민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누군 줄 아나?" "사마 월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래. 낙양 제일미지."

번 호 : 177 / 263 등록일 : 98 년 11 월 24 일 18:18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11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58

그의 배가 돌아오는 날이 되자 사람들이 제 식구들을 맞으러 포구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집안 일을 돌보던 유모가 미례 역시 안절부절 하는 모습을 보더니 마중 나가 보라고 말했다. "하지만...유모...그이가 싫어할지도 몰라." "싫어하셔요? 이질금께서 요? 안 그러신 걸 알잖아요. 두 달 동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치우 아기씨와 미례 아씨가 보고싶어 아마 한시도 못 기다리시고 재촉하셨을 걸요. 자, 어서 나가보셔요." "그럴까, 유모?" "그렇게 하셔요. 이런 일은 흉이 되는 게 아니랍니다. 치우 아기씨가 이리 자란


것을 보시면 아마 놀라실 겁니다." 미례는 아침부터 그를 맞기 위해 곱게 단장하고 있었으므로 거울을 한 번 보고 는 틀어 올린 머리를 다시 살핀 후 치우를 안고 집을 나섰다. 마을 아낙들이 미례를 보고는 환히 웃으며 인사를 했다. 미례는 아직도 그와 함께 하는 산보 외에는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으므로 마을 사람들과는 그리 자주 어울리는 편이 아니었다. 그녀의 수줍음 때문이기도 했고, 그녀 자신이 처음부터 그의 곁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반하 또래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부터 마을 여인들도 제 자식들을 통해 미례에 관해 많은 것을 알게되었고, 이제 와선 아들까지 낳은, 무시 할 수 없는 실질적인 이질금의 아내였다. 그녀들은 이미 미례가 이질금이 한번 안고 버리는 여인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이후로 그녀들은 미례를 두고 하던 말들을 그만두었다. 비록 혼인은 하지 않았으나, 그녀들이 생각하기에 미례는 확고부동한 이질금의 안사람이었다. "치우 아기씨가 벌써 이리 자랐답니까? 어이구, 꽤나 힘드시겠는 걸요." 미례는 그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아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근대는 그녀들의 접근에 미례는 아직도 혼란스러움이 남아있었다. 멀리서 보이던 돛이 점차로 다가오더니 미례가 포구가 보이는 언덕을 내려갈 즈음에는 배는 이미 포구에 닿았고 꽤나 소란스러웠다. 앞서 당도한 그들의 배를 따라 두 척의 배가 따라 들어왔다. 소솜이 웃으며 한쪽 포구 모퉁이에 있는 사스래를 보며 손짓하는 것이 미례에게 보였다. 사스래의 얼굴이 샐쭉해지는가 싶더니 희미하게 웃음을 보였다. 시기하고 독살스럽기까지 해 보이던 사스래의 성질이 요즘 들어 누그러지고 부드러워지다 시피 한 것은 누가 보기에도 소솜 때문이었다. 이제 그녀는 보기에도 제법 부른 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이목에 수줍어하면서도 서로를 아낀다는 것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미례는 그들을 바라보며 부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경휘가 사스래를 들이겠다고 하던 때에도, 다시금 소솜과 사스래를 이어주느라 가납사니와의 사이에서 곤욕스러워 하던 때에도 미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론 잘 되었다고 생각이 되었다. 미례는 그 두 사람의 이야기를 곁시를 통해 이야기를 주워들은 유모에게서 알게 되었다. 경휘에 대한 오해는 풀렸고 오히려 사스래를 거두겠다는 경휘의 행동에 미례는 적잖이 감동 받기도 했다. 그러나 미례는 직접 그에게는 운도 떼지 못했다. 그들은 좀더 친밀해지고 마을에서 생기는 일상사에 대해서는 간혹 말을 주고받기도 했지만 정작 가슴에 있는 말은 조금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휘에게선 언제나 일정만큼의 거리를 느끼곤 하는 미례였다. 사스래와 낮게 이야기를 주고받던 소솜이 미례를 보고는 사스래를 남겨두고 미례 에게로 아는 체 하며 다가왔다. 미례는 사스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그에게 인사했다. 사스래는 아직도 미례에 대해 풀리지 않는 감정이 남아있는지, 아직도 미례를 보면 피하며 굳어진 얼굴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잘 지내셨소, 미례 아씨?" "소솜도 별고 없었어요? 뱃길이 험하지는 않았나요?" "아니요, 미례 아씨 염려 덕분에..아니, 치우 아기씨가 이리 자란 겁니까?"


소솜이 반가운 웃음을 지으며 미례를 보고는 그녀가 안고 있는 아기에게로 관심 을 보이며 놀라는 기색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미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한번 안아봐도 되겠소?" 미례가 사람을 가리지 않으며 키득거리고 방긋거리며 웃어대는 치우를 소솜에게 건네주었다. 자유로워진 그녀의 어깨와 팔이 저려왔다. 정말 치우는 이제 미례에게는 벅찰 만큼 자라고 무게도 꽤 나가고 있어 미례는 밖으로의 나들이에 치우를 데려가 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제 태어난 지 네 달밖에 안된 아이치고는 골격이며 무게가 꽤 나가 보기에도 아주 탐스러웠다. 자라면서 경휘를 닮아가고 있었다. 새하얀 피부며 눈매는 미례를 닮았고 짙은 눈썹이며 사내다운 콧잔등은 그를 닮아있었다. 숱 많은 검은머리도 그와 유사했다. "미례 아씨에겐 힘이 부치겠는데요." "그래요." "아, 이질금을 마중오신 게지요?" 그의 물음에 미례는 얼굴을 붉혔다. "...그인...건강하지요?" "그럼 요, 미례아씰 보고싶어 몸살을 앓는 것 말고는 좋아 보이오. 손님이 함께 와서 아마도 시간이 좀 걸릴게요." "그래요?" 미례의 시선이 소솜을 지나 배 위에서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경휘를 찾아 헤 매었다. 다른 이들도 열심히 창고로 광으로 짐을 나르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잠시 후 그들 사이로 설민과 유사한 중원의 옷차림을 한 사내와 여인이 나타났다. 여인이 배에서 내려서며 경휘에게로 손을 내밀었고 경휘가 웃으며 그녀를 안아 내렸다. 보기에도 품위 있어 보이며 아름다운 그녀는 땅 위에 내려서며 경휘에게 생긋 웃어 보였다. 그녀의 미소가 경휘를 향하고 있음을 미례는 멀리서도 놓치지 않았다. 굳어지는 미례의 시선을 따라가던 소솜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이번 낙양에서 만난 호족의 딸인데 굳이 함께 오고 싶다해서 데려왔소. 그녀의 오라비도 함께 왔는데, 그녀에겐 꼼짝 못하고 녹아나게 하는 보기 보단 꽤 영악 한 여인이더이다." 미례는 그저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돌아와 소솜을 바라보고는 손을 내밀어 치우 를 받아 안았다. 치우가 좋아라 웃으며 미례에게로 안겨들고는 통통한 손으로 미례의 젖가슴을 간지럽혔다. 소솜과 헤어진 미례는 치우를 달래며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배를 향해 걸어갔다. 짐 나르는 일을 세심하게 잔소리해가며 지휘하던 가납사니가 미례를 보고는 다가왔다. "미례아씨, 오랜만이오." "가납사니, 건강해 보이세요. 뱃길에 고단하지는 않으신 가요?" "미례 아씨도 참...난 아직 팔팔하니 걱정 마시우. 치우 아기씨도 그 동안 많이 자랐구려. 몰라보겠소." "그렇죠?" 가납사니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며 미례에게로 한발 더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 "미례 아씨, 불여우 같은 것이 하나 따라왔는데, 이질금을 휘어잡을 심산인가


보오. 미례 아씨에겐 치우 아기씨도 있고 나나 다른 이들이 있으니 염려 말고 본때를 보여 주오." 미례는 제법 진지해 보이는 가납사니의 말에 웃음을 지었으나 가납사니는 걱정 스런 듯 다시 한번 다짐을 받으려 했다. "내 말 헛트루 들으면 안돼오. 어린 계집이 어찌나 영악스러운지 뱃길에 이질금 이 홀리면 어쩌나 걱정들을 했다오. 중원의 뼈대있는 집안의 계집이라고 그것 을 미끼삼아 이질금을 낚을 심산인가 보지만 어림도 없지, 이질금 맘이야 미례 아씨 것인 줄 모르니 어디 한번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시구려, 미례 아씨." 가납사니가 이리 말할 정도면 꽤나 위협적인 여인이었던 모양이라고 미례는 생각했다. 경휘가 오랜 뱃길에 그녀에게 마음을 뺏기기라도 했다면... 미례는 갑작스레 불안해지는 마음을 애써 달래며 치우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아이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미례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는 앙징맞은 손으로 간지럼을 태우고 있었다. "어서 이질금께 가보시오, 미례 아씨. 이질금도 좋아하실 게요." 미례가 가납사니에게 떠밀리다 시피 걸음을 옮기며 배 곁으로 나아가자 낯선 이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던 경휘가 고개를 돌리더니 거리를 두고 멈춰선 미례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음을 보였다. 그는 더욱 강인해 보였고, 오랜 햇볕에 그을어 있었다. 그의 미소에 답하며 미례도 근심을 버리고는 환하게 미소를 되돌렸다. 그가 일행에게 무어라 말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성큼 미례에게로 다가왔다. "휘" 미례는 목이 메어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손을 뻗어 미례의 하얀 살결을 더듬으며 뺨을 만지고는 비밀스럽게 슬쩍 입술을 스치고는 떨어졌다. "별일 없었어?" "네...뱃길도 험하지는 않았다구요?" "음. 그랬어. 헌데 이 녀석은 누구야?" 그가 자신에게 낯설어하며 그를 슬쩍 보고는 미례의 가슴팍으로 숨어드는 치우 를 보고는 장난끼 어린 말투로 물었다. "당신 아들 요." 미례가 경휘와 치우를 번갈아 보고는 배시시 웃었다. "어미 속 꽤나 썩였을 것 같군. 좀 있으면 널 이겨낼 것 같은데?" "지금도 그래요, 제 맘에 안 들면 얼마나 투정이 심한지...꼭 제 아버지를 닮았다 고들 해요." "어디..이리 줘봐...이 녀석, 어디 보자." 그가 미례에게서 치우를 건네어 그의 팔에 받아 안았다. 미례의 가슴 언저리에 놓여있던 치우의 손은 놀라며 미례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버둥거렸으나, 경휘 의 힘에 이끌려 그에게로 안기며 시선이 마주치자 빤히 경휘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두려운 모양이에요." 미례가 점차로 울음을 터트리려는 듯 일그러지며 삐죽이는 치우의 표정에 염려 하며 손을 들어 치우의 탐스런 손을 쥐자 치우가 기다렸다는 듯 미례의 손을 꼬 옥 쥐며 번갈아 가며 미례와 경휘를 바라보았다.


"치우에게 웃어줘요, 휘. 겁먹고 울려고 하잖아요." 그가 피식 웃으며 한 손으로 안으며 다른 한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치우가 씨익 웃으며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순간 미례는 너무나 감동 해서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경휘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보다 미례가 먼저 울 것 같은데?" 그가 놀리자 미례가 눈을 깜박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휘, 치우가...치우가 당신이 아버지라는 걸 안 거 같아요." "그럼 내 자식인데 그걸 모르겠어?" 그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으나, 속으로는 묘한 감동의 일렁임을 느꼈다. 그는 치우를 안지 않은 한 손으로 미례의 손을 잡아 올려 자신의 입술에 대고 눌렀다. "집으로 가자, 미례야." "그래요." 경휘는 가납사니에게 뒷일을 부탁하고는 미례의 손을 꼭 쥔 채로 집으로 걸어갔다. 그의 뒤로 마을 사람들의 흐뭇한 시선이 따랐다. 그들은 이제서야 그들의 이질금에게 기다려주는 여인과 아이가 있다는 사실에 경휘 본인 못지 않게 안도하며 기뻐하고 있었다.

번 호 : 192 / 263 등록일 : 98 년 11 월 26 일 00:43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19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59 오는 동안 어느새 잠이 든 치우를 자리에 눕히고 경휘가 침상으로 와 걸터앉았다. "네가 안고 다니기엔 꽤 무거울 것 같은데?" 그는 치우를 안았던 팔을 쥐가 나는지 문지르며 다정하게 미례에게 물었다. "첨부터 안아서 그런지...그래도 익숙해져서 좀 나아요. 팔 아프죠?" 그가 웃음을 지으며 그 동안 마른 듯한 미례의 몸매를 살폈다. "아이에게 진을 빼는 건 아냐? 어째 더 마른 것 같은데?" "아뇨...그렇지 않아요..씻고 나서 옷을 갈아입어요, 휘. 물을 데워 놨어요. 피로 가 풀릴 거예요." "네가 시중 들어줄 거야?" "...그럴 께요." "좋아." 그의 장난기에 그들이 목욕을 마쳤을 때는 미례 역시도 옷을 갈아입어야 할만 큼 젖어있었다. 그가 미례가 건네는 옷을 갈아입고 나자 미례가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휘, 이걸 좀 마시면 편안해질 거예요." 그가 미례가 권하는 대로 차를 마시고는 침상에 누웠다. 그가 함께 눕기를 원했으므로 미례는 침상안쪽 자신의 자리에 옆으로 누우며 그의 등에 가슴을 밀착시키며 다리를 겹쳐 누웠다. 그가 손을 뻗어 자신의 겨 드랑이 사이로 미례의 손을 끌어들여 꼭 쥐었다. 익숙한 그의 내음과 편안함이


미례에게도 느껴졌다. 그가 없는 세 달 동안 미례는 물론 치우와 함께였지만 그녀가 그 몇 달 동안 잊고 있었던 게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미례는 경휘가 이렇게 잠들고 싶어하는 이유 또한 알 것 같았다. 잠시 후 편안하게 잠이든 그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어느 때부턴지 잠이 들 때도 잠이 깰 때도 미례가 함께이길 바란다는 것 을 숨기지 않았다. 손님을 초청한 저녁 만찬이 준비되었고 해가 저물어 깊은 잠을 자고서 눈을 뜬 경휘는 기력을 되찾으며 몸을 뒤척이다가는 미례에게로 돌아누우며 그의 품안으로 미례를 끌어들이며 몸을 더듬었으나 미례는 가볍게 뿌리치며 그를 기다리는 손님을 상기시키며 기다렸다가 두 사람만의 밤을 갖기로 설득했다. 그는 잠시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미례를 안은 팔을 풀지 않았으나, 치우의 울음소리에 마지못한 듯 한숨을 쉬고는 놓아주었다. 미례가 치우를 안고 돌아와 의자에 앉아 젖을 물리자 그가 침상에서 몸을 일으 키며 손님들에 대해 말해 주었다. "낙양에서 제법 기반을 가진 호족이라 할 수 있지. 아직은 말단의 자리에 있지만 곧 힘을 가질 수도 있을 만큼 야심도 있고...날개를 달기 위한 기반을 원하지. 우리야 중앙에 기반을 가진 관리가 있으면야 더 없이 좋겠고. 사마 혼, 그는 얼마 전 부친을 여읜 젊은 가주이지. 같이 온 여인이 있는데, 그의 누이동생 이야. 이제 열 여섯인데 제법 당찬 구석도 있고, 귀여운 아가씨지. 처음 널 봤을 때의 모습을 다시 대하는 듯 해." 사마 월. 그녀는 경휘의 말처럼 그냥 귀엽고 당찬 아가씨가 아니었다. 그녀는 잠시 안뜰에서 스친 미례에게 싸늘한 경계심을 드러내며 경휘의 부인이냐고 물었다. 미례는 사마 월의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수 없었으므로 미간을 찌푸리자 그녀가 이번에는 천천히 놀리는 듯한 말투로 다시 물었다. "휘....가가의 부인...인가요?" 미례는 기분 나쁜 내색을 하지 않으며 옅은 미소를 지으며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그래요." 아직은 혼인하지 않았으나 누가 뭐래도 화평도에서 그녀의 위치는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미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까지 아무도 그런 식으로 물어 온 사 람은 없었다. 그것은 그들 사이를 모르는 사람이 섬 내엔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흠, 내가 듣기론 휘 가가는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고 하던데요? 정식으로 혼인 한 건가요?" 그녀는 미례의 아픈 곳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아직..혼인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요? 아까 데리고 있던 아이는 누구의 아이예요? 설마 다른 사내의 아이를 낳고 휘 가가에게 몸을 의탁하려는 건 아닌가요?" "휘의 아들이예요." 미례에게서 겨우 유지하고 있던 웃음기가 걷혔다. 이 어린 여자는 작은 예의라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냥 무시해 버릴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흠, 그렇다 해도 아직 정식으로 혼인한 사이는 아니니, 아직 모르는 거네요? 사실 난, 휘 가가가 맘에 들어요. 내 사내로 만들고 말 거예요. 당신에게도 말 해두는 게 좋겠죠? 난 비열한 싸움은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런..가요?" 미례는 사마 월의 당차다 못해 뻔뻔스러움에 말을 잊을 정도였다. 억지로 태연 함을 가장하며 미소지으려 했으나 그러지 못한 미례는 떨리는 손으로 치맛자락 을 움켜쥐었다. 무어라 말해야 할까. 미례는 점차로 가슴에 번져오는 은은한 통증을 견디기 힘들어졌다. 다른 여인에게서 아이까지 낳은 사내가 좋다고 상대를 밀치고 그 자리를 차지 하겠다는 여인이라니.. 미례는 도저히 그녀가 알고있는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중원 여인은 그토록 대범하고, 욕심 사나운 건가. 수줍음이라거나 살아가는 도리 같은 건 상관없는 건가. 그저 마음에 드는 자기 사내다 싶은 이에게는 그리 달려드는 건가. "당신은 저 아래 이름도 없는 하찮은 동이족 여인이라고 들었어요. 내게는 무얼로 보나 당신을 이길 수 있는 모든 게 있죠. 휘 가가가 중원에 세력을 얻고 싶어 하는걸 모르진 않겠죠? 나는 휘 가가에게 그것을 줄 수 있어요. 물론 당 신이 낳아준 그런 아들도 요. 무얼로 봐도 나는 당신에게 뒤질게 없어요. 좋게 물러서는 것이 좋을지도 몰라요. 덜 상처받으려면 요." "당신이라면 그렇게 할건가요?" 침착을 되찾으려는 미례의 얼굴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미례는 떨리는 손으 로 치마자락을 움켜쥐었다. 사마 월은 교태스럽게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잘 아는 것처럼 백옥 같은 피부의 작은 손을 뻗어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난 비참한 건 싫어요.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것도 싫어요. 내 힘이 닿지 않는 다면 난 그만 포기할 런지도 모르죠." "왜..그이가 당신을 택하리라 생각하죠?" 미례가 억지로 굳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말했잖아요, 내겐 그가 원하는 모든 게 있어요." "그..당신이 가진 배경 말고 다른 건 없나요? 그런걸 내세우다니 스스로에겐 자 신이 없는 가요?" "흥, 난 이래뵈두 낙양의 최고 미인이예요. 날 원하는 공자들은 줄을 섰지만 난 휘 가가가 맘에 들어요. 내 사내로 점 찍었다구요." 미례는 차갑게 웃으며 그녀를 무시하고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저녁만찬에 미례는 치우를 핑계 대고 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은 그녀, 사마 월을 다시 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 녀의 말에 싸늘히 돌아서서 집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으나 미례는 방안으로 들어 와 문을 닫고는 덜덜 떨며 자신의 몸을 감싸안았다. 혼인하지 않은 일은 미례에겐 두려움이었다. 사마 가문이 그가 나아가고자 하 는 중원에서의 도약을 위한 충분한 발판이 되 줄 것도 미례는 짐작할 수 있었 다. 경휘는 번이 아니라 중원의 주인이 되어 그곳에서 힘을 펼 수 있기를 바래 왔다. 그러자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혈연으로 이어지는 길 일 것이다. 그가 혼 인할 나이가 지나도록 아직 집안의 안주인을 들이지 않고 있는 것도 그 때문임 을 미례는 마을 여인이나 새타니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었다. 비록 그가 미례를 몹시 아끼고는 있다해도, 아직 한번도 그는 혼인 비슷한 얘 기도 꺼낸 적 없었다. 하긴 너무나 우습게도 그들은 첫 만남부터 혼인을 이야 기할 처지도 아니었고, 이미 얼마든지 그녀의 몸을 탐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굳이 혼인의 말을 꺼낸다는 것도 우스운 노릇처럼 보였다. 경휘의 태도는 사뭇 그녀가 알았던 처음과는 많이 달랐다. 화만 내는 그에게 두렵기만 했던 미례였으나 이제 와선 가끔 우스개 소리도 하 며 다정다감하다고 까지는 못할지라도 부드러운 사내로 변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미례는 그에게 혼인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은 자신의 입으로 죽어도 꺼 낼 수는 없다고 생각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녀의 가슴에 멍으로 맺힌 것을 그녀, 사마 월은 잘도 알고 끄집어 내 난도질을 하는 것이었다. 경휘는 사마 가문에 욕심을 내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경휘가 그리 쉽 게 이 섬으로 그들을 초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가납사니의 경고도 있 었다. 가납사니와 마찬가지로 미례가 본 사마 월은 그저 어리고 철없는 여인이 아니었다. 경휘는 그녀가 욕심 낼 만큼 좋은 사내일거라고 미례는 생각했다. 두려움을 벗 어 던진 미례에게도 그는 아주 믿음직한 사내였다. 더구나 치우의 아버지였다. 사마 월은 영악하기 그지없는, 경휘를 빼앗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할 여인이 었다. 그녀는 대담하게도 경고마저 하지 않았던가. 경휘는 아직 어떤 여인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고 있었다, 미례 말고는.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것인가. 언제 그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비록 아들까지 낳았다 해도, 그는 어쩌면 사마 월이 낳아주는 아들을 더 원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미례는 거울 앞에서 몸단장을 하며 자꾸만 무겁게 내려 앉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힘들었다. 미례야, 왜 이렇게 작아지는 거야. 널 바라보는 휘의 시선을 보았잖니. 그이에 겐 나밖에 없어. 그이에게 식구라곤 나와 치우 뿐이야. 그이가 얼마나 외로워하 는지 알잖아. 그이는 그렇게 모진 사내도 못돼. 너와 치우를 버리지는 않을 거야. 미례는 꽃잎을 띄워 목욕을 하고 아유타에서 가져온 향을 살짝 바르고는 잠든 치우를 한동안 곁에서 지켰다. 아직도 만찬은 끝나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미례는 용기를 내어 박으로 나왔다. 방안에만 숨어있을 수는 없는 일 이라고 미례는 결심했다. 그래, 치우를 위해서도 그래선 안되지. 미례는 괜시리 작아지는 자신을 추스리며 넓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앞마당에도 마을 사람들과 식구들, 아이들이 군데군데 모여 음식을 먹고 마시며 즐기고 있 었다. 술을 더 가져오라는 주문에 미례가 곁시에게서 상을 받아들고는 손님이 함께 자리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서자 사마 혼과 이야기를 주고받던 경휘 의 시선이 미례를 따랐다. 미례가 그에게 다가가 술병을 내려놓으며 속눈썹을 내리깔았고 슬쩍 그의 어깨 를 스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중원 여인과는 다른 미례의 이국적인 미모에 사마 혼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따 라왔다. 경휘가 그의 시선을 느끼고는 미례를 불렀다. 그러나 미례는 소란 중에 못들은 척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잠시 후 미례는 음식이 든 접시를 가지고 소솜에게로 다가갔고 역시 경 휘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외면하고는 다른 사람과 몇 마디 주고받고는 방을 빠


져 나왔다. 다들 술을 마셔 붉어진 얼굴이었으나 그래도 미례에게는 깍듯한 예 의를 보였다. 오래도록 전대 이질금도 혼자였고, 경휘 또한 혼자였으나 마을 장로들과 가납 사니는 미례에게 경솔히 대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미례를 가락국의 배로 보내려던 이후로 생긴 결정이었고, 치우가 태어 난 다음부터는 확고부동한 이질금의 안사람으로 대하고 있었다. 새타니 또한 미례의 태중의 아이를 가리켜 다음 대 이질금이라고 못을 박았던 때문이기도 했고, 치우라는 이름 또한 그들에겐 중원의 이루지 못한 꿈이 담긴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경휘가 혼란스러운 듯 말을 더듬었다. 아련하게 미례가 남기고 간 향이 그를 유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시선은 이미 방을 빠져나가는 미례에게로 붙잡혀 있었다. "이보게, 경휘." 사마 혼이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가는 그를 환기시키려고 불렀으나 경휘는 이미 저만치 멀어지는 미례에게서 헤어나지 못했다. "...자..잠깐...실례하겠네." 경휘는 빠르게 미례를 따라 방을 나섰다. 그의 아랫도리는 이미 미례가 방을 들어서던 순간부터 성을 내고 있어 사실 걸 음을 옮기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미례의 걸음은 느렸으므로 그는 쉽게 안뜰 로 들어서려는 미례를 따라 잡을 수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팔목을 잡아 미례 를 돌려세웠다. "어딜 가려는 거야?" "휘? 손님들은 어쩌고 이리 나왔어요?" 미례는 일부러 모른 척 하며 놀라는 체 했다. 미례는 그에게 자신이 미치는 영향력이란 걸 알고싶었다. 아직도 그는 그녀에게 가까운 사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미례는 생각했다. "어딜 가려는 거냐고. 이제라도 밖으로 나왔으면 손님들에게 인사라도 해야 지." "그냥...바람이라도 좀 쏘이려고요..방안이 후덥지근하여..." "치우는 자나?" "네, 좀 전에 잠이 들었어요. 배부르게 먹여 놓으니 곤히 자던걸요." "그래? ......이리로 와, 미례." 그가 미례를 이끌어 안채의 빈방으로 들여보냈다. "휘?" 미례는 그의 돌연한 태도에 놀라워하며 어두운 방안에 들어서는 그를 올려다 보았다. "날 좀 달래 줘. 아까부터 너 말고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어." 그가 미례를 벽으로 밀며 거칠게 옷을 벗겼다. "휘...사람들이 아직 집안에 있어요." 미례는 미약하게 저항하며 그에게 밖의 손님들과 마을 사람들을 환기시켰다. "그래서?...난 지금 미칠 지경이라구, 미례. 널 안아야겠어..더는 못 기다려." 그의 조급한 손놀림에 미례의 옷이 하나씩 벗겨져 내렸고 드디어는 달빛만


새어드는 방안에 하얀 살결의 미례 몸이 그의 눈에 드러났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급하게 자신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는 바지 끈을 풀며 미례 에게로 다가들었다. 미례도 서두르는 그의 조급함에 한숨을 내쉬면서도 거부하지 못한 채 그가 시키는 대로 그의 등을 끌어안으며 긴장을 풀어내려 노력했다. 그는 오랜만의 행위로 결코 다정하게 그녀에게 들어오지는 않을 것을 알기 때 문이었다. "다리를 내게 감아, 미례야." 그가 입술로 그녀의 젖무덤을 간질이며 부드럽게 명령했다. 그가 시키는 대로 미례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그에 의해 들어올려진 다리를 그의 허리와 허벅지에 감았다. "휘...아프지 않게...해줘요...흡.." 이미 그녀의 말이 나옴과 동시에 익숙한 그의 뜨거운 몸이 그녀의 은밀한 부분 사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맞닿은 그의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보드라운 미례의 점막 안쪽으로 그는 서서히 몸을 들이밀었다. "흐음...흡...휘....아아.." 거칠고 정열적인 그의 행위에 미례는 신음을 삼키면서 그의 어깨를 감아 안으며 달래려 했다. "헉.." 그가 거친 숨소리를 내며 미례의 안으로 깊숙히 들어섰고, 미례는 강인한 그의 몸에 흔들리며 그의 움직임에 보조를 맞추려 노력했다. 그가 미례의 엉덩이를 조여 안으며 자신에게로 한껏 밀착시켰다가는 약간 풀어주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그는 미례를 벽으로 밀어 부치며 빠르게 미례의 몸 안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밖으로 신음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자제하며 미례는 그의 몸에 밀착된 채로 잠시 후 그의 몸의 떨림을 감지해냈다. 그는 잠시 강렬한 움직임을 멈춘 채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고도 오래도록 그들은 몸을 결합한 채로 서있었다. 그의 숨이 제대로 돌아오며 그가 낮은 소리로 미례에게 물었다. "많이...아팠어?" 미례가 다정한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그는 아직도 미례를 대하며 침착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면서 작은 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리웠어요." 용기를 내어 미례가 속삭였다. 들릴 듯 말 듯한 그녀의 속삭임이 그의 귓전에 울리는 순간 그는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며 몸을 떨었다. 그가 이 몇 달간 몹시도 듣고 싶어했던 말이었다. 그가 따뜻함을 갈구하며 고개를 숙여 미례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련하 게 향내사이로 젖 내음이 났으며 경휘는 미례에게서 어머니의 느낌을 받았다. 미례 역시도 그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더욱 그의 몸에 안겨 붙었다. 서로 의 몸에 닿은 피부느낌이 좋았다. 탄탄한 그의 등 근육이 살결에 닿자 미례는 안도하며 부드럽게 그의 피부를 더듬었다. 잠시 후 그가 다시 흥분하는 것이 느껴졌다. 미례가 미소를 머금자 그가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미례로부터 떨어


져 바지를 추스리고는 미례의 옷도 입혀주었다.

번 호 : 193 / 263 등록일 : 98 년 11 월 27 일 01:36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20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60

열흘 남짓 지났다. 그사이로 사마 월은 간혹 미례를 약올리며 경휘를 독차지하려 했고 미례는 차 분하게 반응하며 자신의 속내를 내보이지 않았다. 그제 밤부터 치우가 자주 칭얼거리며 깼고 달래는 미례조차 지칠 정도로 심하 게 보채며 울었다. 젖을 물려도 조금 빠는 듯 하다가는 이내 도리질을 하며 짜증스럽게 울어 제꼈다. 미례는 이미 삼일 밤이나 잠을 설쳤고 경휘도 자주 깨어 피곤이 묻어난 미례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간신히 잠재웠던 치우가 다시 칭얼거리는 기척이 나 자 미례는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경휘가 몸을 뒤척이며 돌아누웠다. "쉿..쉬잇! 치우야, 도대체 왜 이러는 거니? 이러지 않았잖아. 응? 잠투정을 하 는 거니? 어디가 편치 않은 거니? 쉬잇~, 아가야." 미례가 치우를 침상에서 올려 안으며 몸을 다독이며 달래었다. 그러나 치우는 미례의 젖가슴에 얼굴을 부비기도 하고 손으로 미례의 피부를 더듬기도 하다 머리카락을 휘어잡기도 하며 보채고 칭얼거렸다. "쉬이~. 치우야, 착하지. 그만 자자꾸나, 음? 우리 아가야, 그만 자야지." 미례의 다독거림에 잠을 청하는 듯 하던 치우가 다시 칭얼거리며 울음소리를 냈고 미례는 그렇게 한시간이 넘도록 방안을 서성이며 안고있었다. 겨우 잠이 든 것 같아 자리에 뉘자 치우는 다시 칭얼거렸고, 한숨을 내쉬며 아이 침상으로 가려던 미례는 옆자리의 경휘가 벌떡 일어나 앉아 그녀를 제지하자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휘.."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 거친 숨결을 내뿜으며 성큼 방안을 가로지르더니 방문을 열어 젖혔다. "유모, 유모." 그가 화난 기색으로 소리를 질렀고, 미례는 영문을 몰라하며 놀라 더 크게 울 어대는 치우에게로 달려갔다. 그가 두 번을 더 부르자 유모가 자리옷 차림으로 달려왔고 문을 열고는 상황을 살폈다. "부르셨습니까, 이질금?" "그래. 어려서부터 미례를 길렀으니 아이에 대해 잘 알지?" "...그렇습니다마는.." 경휘가 거칠게 몸을 돌려 그의 돌연한 행동에 한쪽 구석에서 치우를 안고는


떨고있는 미례에게서 치우를 빼앗아 들고는 더 크게 우는 치우를 유모에게로 떠넘겼다. "이 녀석을 좀 봐줘, 벌써 삼일 째 칭얼대고 보채서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어. 미례 꼴을 좀 보라구. 아이에 치여 쓰러질 지경이야. 어서 데려가." 미례가 그의 말에 놀라며 신음소리를 내고는 아이를 받아 안으려 유모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러한 미례의 행동은 그녀와 치우 사이를 막아서는 경휘의 팔로 인해 저지 당했다. 그는 미례의 몸을 감싸며 그의 팔 안에 가두고는 더 이상 유모에게로 미례가 다가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휘, 이러지 말아요, 날 놔줘요.." 미례는 두려움에 떨며 그에게 자비를 권하는 애절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유모도 미례의 치우에 대한 각별함을 아는지라 안타까워하면서 치우를 받아 안고는 울음을 달래려 부드럽게 토닥이며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러면서도 또한 경휘의 단호함을 알기에 유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떻게든 치우를 달래는 것뿐 이었다. "어서 아이를 데려가, 유모." "휘, 그러지 말아요. 난 괜찮아요. 치우를 데려가게 하지 말아요." "아니, 넌 쉬어야 해. 이러다가는 치우 때문에 네가 병이 나게 생겼다고. 넌 좀 쉬어야 해. 내 말 들어. 뭐 해, 유모. 어서 데려가라니까. 이제부턴 자네가 치우 를 돌봐 줘. 아이 침상도 내일 옮겨 줄 테니 그렇게 하라고." "...예, 그렇게 하지요." 유모가 미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휘, 제발 치우는 내가 돌볼 수 있어요. 그러지 말아요." 미례가 그의 결박에서 풀려 나오려 버둥거리며 그에게 사정했다. "유모도 제대로 돌볼 수 있어, 자 어서 데려가라구." 그가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유모가 방을 나가도록 눈짓했다. 미례의 울음소리에 가까운 신음소리에 걱정스런 시선으로 바라보던 유모가 치우를 안고 사라지고 나자 미례는 허탈해졌다. 버둥대며 그의 팔 안에서 빠져 나오려던 그녀였으나 그 순간 기운이 빠진 미례는 그가 자신을 구속하던 그가 팔의 힘을 거두었음에도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아이가 사라진 방문 쪽을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물론 잠이 부족한 미례도 치우가 칭얼거릴 때마다 간혹 꾀가 나기도 하고 피로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휘의 처사에 미례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가 바다로 나가있는 동안 미례는 치우를 믿고 의지하며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다. 이젠 아이의 자리 가 너무 커서 치우 없이는 잠을 이루기도 힘들었다. 경휘와 미례의 침상에서 미례는 치우를 안고 잠들었으며 한번도 눈앞에 보이지 않는 곳에 치우를 둔 적 도 없었다. "어서 와서 자." 경휘가 침상으로 돌아가며 냉혹하게 미례를 불렀다. 미례는 힘없이 아이가 누웠던 침상으로 다가가 빈자리를 쓸어보았다. "미례야." 서러움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고 미례는 소리 죽여 어깨를 떨며 울었다. 그의 명령이 다시 번복되지 않을 것을 아는 까닭에, 그의 고집을 아는 까닭에


미례는 더 이상 그에게 매달릴 수도 없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미례에게로 다가왔고 흐느껴 우는 미례를 확인하고는 그대로 침상으로 안아들었다. 눈물이 닦아도 닦아도 자꾸만 흘러내렸다. 그가 옆으로 누우며 미례를 품에 안았다. "그만 울음을 그쳐, 미례야. 유모에게 맡긴 거라구. 널 키워낸 유모야, 못 믿는 건 아니지? 응?" "....치우를 데려오고 싶어요." 울먹이는 소리로 간신히 미례가 말하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미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건 안돼. 이젠 떨어질 때도 되었어." "치우는 이제 겨우 네 달이 지났을 뿐인 걸요." "어서 자. 네겐 잠이 필요해. 삼일동안 제대로 눈도 붙이지 못했잖아." "...휘..제발.." "쉿!...자라구.." 어떻게 치우를 떨어뜨려 놓고 잠을 자란 말예요. 왜 이렇게 잔인한 거예요.....어 미에게서 아이를 떼어놓다니... 미례는 흐느낌으로 말이 되어 나오지 않자 서럽게 흐느껴 울었고, 그는 여전히 단호하게 그러나, 그녀를 품안에 감싸안으며 달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미례는 그가 반복적으로 토닥여 주며 낮은 소리로 달래는 말에 어느새 흐느껴 울다가는 잠이 들었다. 어젯밤 그의 큰소리에 치우를 유모에게 보냈다는 소식을 사마 월도 들은 모양 이었다. 다시금 스치다 만나진 그녀는 영악한 미소를 지으며 미례의 아픈 곳을 후벼팠다. "아이를 유모에게 넘겨 주었다구요?" "......." 미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녀를 지나치려했다. 그런 미례의 등뒤에서 다시 사마 월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 엄마가 더는 필요 없어진 모양이지요? 당신에게서 아이를 떼어놓으려는 게 아닐까요?" 미례는 걸음을 빨리 하여 그 자리를 벗어났으나 그녀의 가슴속에서는 사마 월 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었다. 그래, 혼인하고 싶은 여인이 나타났고, 아들은 아들대로 원하는 사내의 욕심이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그녀 안의 또 다른 미례가 말하고 있었다. 더구나 요즘 들어 복주에서 돌아온 이후로 그는 미례와 몸을 섞고 싶어하지도 않는 듯 보였다. 그는 가끔씩 못마땅한 표정으로 치우와 미례를 바라보곤 했었다. 다음날 밤 미례는 그가 잠든 기척이 보이자 조심스레 침상에서 내려섰다. "어딜 가려는 거야?" 그의 비난 섞인 말투에 미례는 흠칫 놀랐다. "...치우가...우는 것 같아요..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좀 보고 올께요." "이리로 와" 그가 싸늘하게 명령했다. 미례는 망설이다가는 마지못해 돌아서며 그에게 사정했다.


"...휘...치우가 우는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가서 한번만 보고 올께요...자는 모 습이라도.." "자리에 누워. 아이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아. 네 생각일 뿐이야." "휘...제발...치우를 보고 올께요." "젠장, 그만 하라구. 아이를 내버려두란 말이야. 네가 확인하지 않아도 잘 있을 테니 그냥 유모에게 맡겨 두라구." "하지만..." "잠이나 좀 자라구, 미례. 내 화를 돋구지 말고 그냥 자란 말이야." "......" 미례는 그의 기세에 눌려 하는 수 없이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한참 후 미례는 그가 다시 잠드는걸 살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그가 험악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거칠게 미례를 침상에 눕히고는 그녀 위로 올라왔다. "빌어먹을, 몹쓸 여자 같으니. 그냥 자라고 했잖아. 아이는 괜찮으니 내버려두 라구. 아이를 생각하는 반만큼만 날 생각해봐. 다른 사내에게 못 가 안달 난 계 집처럼 그리 달려가고 싶은 거야? 그 반만큼 만이라도 좋으니 날 생각하라구. 응?" "....휘" 미례는 그의 거친 언사에 놀라 신음소리를 내었다. 한동안 그에게선 볼 수 없 었던 행동이었다. 그는 거칠게 미례의 옷을 잡아 찢었다. 그리고는 난폭하게 미례의 다리를 벌리 고는 거칠게 그녀의 몸 안으로 파고들며 몸을 섞었다. 마치도 벌을 주려는 듯 한 태도였다. "흐읍.." 미례가 그의 행위에 흔들리며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내었으나 그는 미례의 몸을 거칠게 벌려대며 행위를 계속했다. 그가 진정되고 잠이 들고난 후에도 미례는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옆으로 몸을 돌려 웅크리고는 흐느껴 울었다. "다시 아이를 배는 날에는 그 아이를 내다 버릴 테다." 그가 미례의 몸에서 떨어지며 차갑게 말하고는 돌아누웠던 것이다. 사마 월의 위협은 더 이상 위협으로만 그치는 게 아닌 것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앞으로 미례에게서 자식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내가 싫어진 거야. 사마 월의 말이 맞는지도 몰라. 미례는 가슴의 통증으로 숨조차 쉬기 어려웠으나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멀찌 감치 그에게서 떨어져 흐느껴 울었다. 다음날 늦게 서야 눈을 뜬 미례는 그가 나간 빈자리를 보며 다시금 심한 고통 에 눈을 감았다. 밤새 울어 눈이 심하게 부어 있었다. 미례는 화장으로 그것을 감추며 단장을 하고는 한나절이 지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례가 방에서 나와 유모 방으로 가자 유모가 웃으며 치우를 달래고 있었다. "치우 아기씨, 어머니께서 오셨네요. 늦잠꾸러기 어머니가 요." 미례가 수줍게 웃으며 유모에게 다가가 치우의 젖살오른 통통한 뺨을 애정을 담아 쓰다듬었다. "밤에 보채고 울지 않았어요?" "아니요....미례 아씨, 치우 아기씨가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


유모가 웃으며 미례를 보았다. 미례는 고개를 저으며 사랑스런 아이의 손을 잡아 자신의 뺨에 비볐다. "자 어디 웃어보셔요, 치우 아기씨. 어머니께 보여주자구요." 유모가 치우의 볼을 간지르자 아이가 웃으며 잇몸을 내보였고 신기하게도 아래 잇몸에 하얗게 두 개의 이가 나오려 하고 있었다. "어머, 세상에.." 미례가 어제까지 못 보던 아이의 변화에 신기해하며 아이의 잇몸을 확인하고는 활짝 웃었다. "근질근질 하고..아프고...이가 나오려니까 힘이 드셨던 게지요. 우리 착한 아기 씨가요...이젠 좀 덜 하시네요." "오, 유모....너무 믿어지지 않아요, 어쩌면...어쩌면.." "너무 좋아하실 것 없답니다. 이제 조만 간에 이가 더 나면 젖을 빨 때 이로 깨물 테고 아파 보셔요, 그런 말씀도 안나올걸요." "...그래도 너무 예뻐요, 유모." "그렇죠?..헌데..어젯밤도 잠을 못 이루신 거예요? 안색이 좋지 않으시네요? 우셨습니까?" "....." 미례는 그저 애매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치우만 바라보았다. "치우 아기씨는 제가 잘 돌볼 테니 염려 마시고 이질금께 잘 대하셔요. 이질금 께서 미례 아씨가 너무 치우아기씨만 신경 쓰시니 좀 서운하신 모양이예요." "........."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으나 미례는 그저 애써 웃음만 지었다. 번 호 : 194 / 263 등록일 : 98 년 11 월 28 일 06:41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23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61

미례가 안뜰을 지나는데 그늘 아래 편안히 앉아 사마 월과 함께 담소를 나누는 그가 보였다. 그는 미례에게서 등돌리고 있었으며 사마 월은 멈칫하며 그늘 아래로 몸을 숨기는 미례를 발견하고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경휘에게 물었다. "휘 가가, 만약에 말이어요, 치우와 부인이 물에 빠져 구해야 한다면 요, 어떻 게 하실 거예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어디 있어? " 그는 사마 월의 물음에 피식 웃으며 대답을 하려 하지 않았다. "흠, 그러니 만약이라고 하지 않아요? 만약에 말이어요, 휘 가가. 음? 어떻게 하실 거예요? 만약에 그런 일이 있다면 요.." 그는 그저 웃음으로 얼버무릴 뿐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교태스럽게 굴던 그녀가 새침하니 삐지는 표정으로 쏘아 부쳤다. "흠, 휘 가가는 월아의 말이 우습기만 한 거죠? 그냥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이 무어 그리 어렵다구요" 그러자 그가 마지못한 듯 한마디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물 근처엔 가지 못하게 할 테니."


그의 대답에 반쯤은 포기했던 사마 월이 활짝 웃으며 채근했다. "그래도 요, 꼭 물이 아니어도 만약 둘 다 위험하다면 누구를 먼저 구할 건가 요?" 미례는 그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고의로 미례를 상처 내려 말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미례는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생각 뿐, 그녀의 발은 멈춰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정말로 그런 일이 있다면 그는 어떻게 할까. 미례 역시 그의 대답이 궁금했다. 물론 자식이 먼저일까, 혹은 그래도 자신을 더...? 상상하고 싶지도 않고 사악하다 싶은 사마 월의 물음이었지만 미례는 정말로 그의 대답이 궁금했다. 또한 그의 대답이 두려웠다. "휘 가가, 어서 요, 말씀해 보셔요, 네? 어서 요.." "그런 일은 없다니까." "만약에 말이어요, 예? 만약이라 가정하고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다면 어찌 하실 거냐구요.." 사마 월의 떼쓰다 시피 강요하는 물음에 그가 마침내 한마디했다. "흠..다른 사내들이나 마찬가지겠지..그야 물론." "다른 사내들은 어찌할 것 같은데요?" 집요하게도 그녀가 그의 말끝을 잡고는 놓지 않았다. 미례의 가슴도 두근거렸다. 그녀의 그 말도 안 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몹시도 기다려졌다. 경휘는 사마 월의 물음에 쉽게 대답하지 않았으며 그저 웃음으로 얼버무리려 하고 있었다. "네? 휘 가가. 다른 사내들은 어찌 할 것 같으냐고요? 예? 한번 말해보셔요." "월아, 그걸 알아 무얼 하겠다는 거야, 뭐가 그리 궁금한 거야? 응?" "흠, 사내들의 심사가 어떤 건지 궁금하니 그렇지요, 휘 가가. 말씀해 보셔요, 예?" 그가 다시 유쾌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미례는 그만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혼자가 되어서도 미례는 그의 말이 자꾸만 맴돌아 우울해졌다. 다른 사내들과 마찬가지겠지. 다른 사내들과 마찬가지... 그는 얼마 전에는 이렇게도 말했었다, 아이를 배는 날이면 그 아이를 내다 버릴 테다 라고. 다른 사내들이나 마찬가지.... 미례는 눈에 띄게 수척해졌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경휘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미례는 점차 그의 눈치를 보며 치우를 자주 찾지 않았고, 그가 손님이나 다른 이들과 어울려 밖으로 나갈 때나 집을 비울 때에만 유모 방으로 가 치우를 안아주었다. 그러자 가끔씩 경휘가 치우를 데리고 사마 월과 안뜰에서 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미례가 그즈음 다시 바다언덕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경휘는 모르는 듯 했다. 정오가 지나면 몰래 유모에게만 말하고 빠져 나온 미례는 다시금 푸른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우울한 자신을 달래곤 했다.


그날도 언덕에 앉아 앞이 어둡기만 한 미래를 염려하며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지나던 소솜이 미례를 보고는 놀라며 다가왔다. "아니, 미례 아씨, 혼자서 이곳에 나와 계십니까? 아직 날이 찬데.." "소솜" 미례는 슬픈 눈을 들어 그에게 힘없는 억지 웃음을 지었다. "고향 생각이 나신 겁니까?" "아뇨...그저..좀...답답해서.." 미례의 말에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치우아기씨 때문에 요즘은 통 이곳에 나오질 않으신다 싶었는데...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그냥..한번 나와봤어요. 바람을 좀 쏘이고 싶어서요.." "이질금이 혹 서운한 말씀을 하신 건 아니구요?" "그런 일은....아뇨, 그런 일은..없어요. 알잖아요, 소솜..그이는 요즘..내게 잘하는 걸요.." 그는 못미더운 기색이면서도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후 미례는 망설이며 그에게 물었다. "소솜, 만약에 말예요." "예?" 좀 떨어져 미례를 바라보는 그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냥 실없는 얘기지만..소솜, 만약에 사스래와 사스래의 아기가....물론 그럴리 없지만 요, 둘 다 물에 빠져 위험에 처한다면...그럴 경우 소솜은 누굴 먼저 구하게 될 거 같아요?" "무슨 그런 말씀을.." "소솜, 한번 생각해 봐줘요.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소솜은 어찌 할 것 같은지..." "...둘 다 구해와야겠지요." 그가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는 정말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하나만 구할 수밖에 없다면 요?" "에이..그런 일은..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소솜이 어이없어 하면서도 진중하게 대꾸했고, 유쾌한 분위기를 거두지 않았다. "소솜, 그저 ...만약에 그렇다면 요, 네? 어찌할 것 같은지, 대답해줘요." "흠...글쎄요..." 그런 말은 그때 가봐야 아는 것 아니냐고, 별 도움이 안 될 거라고 웃어넘기려 던 소솜은 진지하게 그를 올려다보는 미례의 눈빛에 그만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마치도 미례에겐 중한 결정인양 그녀는 묻고있었던 것이다. "..뭐..그렇다면...아무래도 아이가 헤엄을 못 칠테니 아이를 먼저 구하게 되지 않을까요?" "다른...사람에게 물어도 그리 대답할까요?" "그야..모르는 일이지요, 미례 아씨. 부인에게 정이 많다면 야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아이를 위한다면 야 그건 또 다른 얘길 테고..아마도 미례 아씨, 그건 그 때 가봐야 할 것 같소." "...그래요?" "헌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냥...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그런 생각이 나서 요.." 며칠 후에도 미례가 바람을 쏘이고 마음을 가다듬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니 경휘와 아이가 방안 침상에서 자고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례는 조심스레 그들 곁으로 다가가 오래도록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무겁게 짓눌리며 저릿저릿 하더니 자신도 모르는 새 눈물로 시야가 흐려 졌다. 장난치다 잠이 든 듯 치우는 경휘의 배 위에서 엎드린 채로 곤하게 색색거리며 자고있었다. 포동포동한 살이 붙은 작은 손은 경휘의 목 근처에 닿아있고 또 다른 손은 주먹을 쥔 채로 엄지손가락을 입안에 물고있었다. 가끔씩 볼이 실룩 거리며 움직였고 그때마다 아이는 젖을 빠는 꿈을 꾸는지 미소를 짓는 듯 해 보이기도 했다. 경휘는 한 팔을 뻗어 치우의 몸에 가볍게 걸치고 있었고 한 팔 은 자연스레 침상에 내려져 있었다. 아이의 피부가 뽀얗고 흰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피부는 햇볕에서 일하며 자 연스레 그을러 있었으나 그것은 그가 더욱 강해 보이도록 만들뿐이었다. 두터 운 손마디 역시 그가 거친 일을 해왔다는 것을 말해주었지만 미례는 그의 손길 이 그저 보이는 만큼 거칠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도 알고있었다. 그가 미례의 몸을 어루만지며 쓰다듬곤 할 때는 한없이 부드럽게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오래된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언제부턴가 미례는 그가 다시 두려워졌다. 아주 낯선 타인인 것처럼도 여겨졌다. 미례는 자신의 처지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미례는 마을 사람들이나 유모가 생각하듯이 그들의 이질금의 안사람이 아니었다. 편의에 따라 그렇게 보여질지라도, 적어도 공인 받은 자리는 아니었다. 그가 자신에게서 더 이상 함께 잠자리에 들고싶은 매력이 없어진다면, 그것으로 끝인 거라고 미례는 생각했다. 그런 이유들로 미례는 요즈음 침울해졌다. 깜박거리며 눈물을 수습하다 그것으로 잘 안 되자 미례는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쳐냈다. 그는 중원진출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바닷길이 그려진 해도를 보며 그는 가끔씩 중원진출의 꿈을 말하곤 했었다. 미례야, 이 길이 완성되고 좀더 우리가 땀흘리면 우린 저 도도한 한인들이 지 배하는 대륙으로 나아갈 거다. 해로를 장악하고 무역에 힘을 써 변화하는 세상 에 뒤쳐지지 않으면, 하나로 모아진 힘을 쥐고 있는 한 그들도 우릴 무시하진 못하는 거야. 선비 족이든, 한인이든, 그 누가 나라를 새로 세우든 우리는 나름 대로의 세계를 가지고 함께 나아가는 거야. 우리의 힘을 그들은 절대 간과할 수 없는 거야. 어찌됐든 세상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것은 금이고, 돈이고, 지식 이니, 그런 것이 힘이 되어 누가 황제가 되든 간에 세상을 움직이는 건 우리가 되는 거라고. 그 관건이 되는 게 바로 지금 중원으로 나가는 거지. 중원을 차지 하는 자가 나머지도 차지하게 되는 거야. 봐라, 미례야, 지금은 비록 화평도방의 힘이 그리 크다 할 순 없지만 그들이 번으로 인식하지 않게 되면 그때 부턴 변할 거라고. 번...이...자신들의 풍습을 따르지 않는 변방의 세력들에게 붙여주는 이름. 경휘는 지독히도 그것들을 모욕적으로 생각하며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과 아이만을 선택해 달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대담한 것이란 것도 미례는 알고있었다.


어느새 치우의 감긴 속눈썹이 파르르 움직이는 것 같더니 부시럭거리지도 않으 며 가만히 눈을 뜨고는 마치도 미례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을 알고나 있었던 것 처럼 미례와 시선이 얽혔다. 눈을 깜박깜박 거리며 사랑스런 그 아이는 잠시 후 까르르 소리내며 눈을 빛내 고는 웃으며 미례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은 입안에 들어있던 아이의 손 가락도 입에서 떨어져있었다. 미례가 눈물을 훔치며 아이의 손을 잡자 치우가 안아달라며 거부할 수 없는 웃음을 던져왔다. 경휘가 깰까봐 눈치를 보며 미례는 조심스레 치우를 안아 올렸다. 기다렸다는 듯 미례의 가슴팍으로 파고들며 좋아라 속 웃음을 웃던 치우는 숨을 헐떡거리 며 젖을 찾아 가슴에 얼굴을 부벼 댔다. 요즘 들어 부쩍 자신을 찾지 않으며 유모와 잘도 지낸다고 생각했던 미례였으나 그것은 아이 역시 잘 안아주지 않는 자신에게 적응했던 것뿐이라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다. 애정을 담아 쓰다듬으며 보채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눈을 맞추며 웃음을 되돌리는데, 어느 순간 미례는 그런 그들 모자를 바라보는 경휘의 시선을 느끼고는 굳어졌다. 미례는 철렁 내려앉는 가슴으로 급하게 그의 시선을 피하며 변명하듯 둘러댔다. ".....치우가.....젖을 찾아서..."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미례의 젖무덤을 간질이며 탐욕 스럽게 젖을 빠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이가 많이 올라왔더군."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요." 미례도 아이에게로 시선을 맞추며 대답했다. 한동안 그들은 그렇게 자리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아이의 기분 좋은 신음소리 만 그들 사이에서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경휘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느라 풀어헤쳐진 미례의 가슴으로 시선이 끌리는걸 애써 외면하며 부드럽게, 그러니 약간의 비난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도 내버려두고 요즘 어디를 나가는 거야?" "...그저....바람을 좀..쏘이려고..." 미례가 더듬으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그의 얼굴이 굳어지며 변했다. "다시 병이 도진 거야? 아이에게서 놓여나니 이제 다시 고향생각이라도 나는 거야?" ".........." 그런 게 아니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미례는 시선을 아래로 두고만 있었다. 미례의 대답을 기다리던 그는 잠시후 기다리지 못하고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그러라고 아이를 유모에게 맡긴 게 아냐." 거짓말! 그럼 왜 내게서 치우를 뺏는 거예요. 내가 더는 필요 없어진 게 아닌가요. 당장 묻고싶은 말이 입안에서 머물렀으나 그저 속으로만 되뇌어질 뿐 미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번 호 : 196 / 263 등록일 : 98 년 11 월 29 일 00:54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35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62

어색한 그 시간이 지나고 밤이 되어 아이를 재우고 자리에 눕자 그가 미례에게로 손을 뻗어왔다. 흐음, 미례는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수동적으로 몸을 바로 누웠다. 그가 부드럽게 입맞추며 미례의 몸을 더듬어 만졌으나 미례는 그저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몸을 내맡겼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 싶었던지 욕구를 참지 못하고 그는 미례의 위로 올라왔고 몸 안으로 들어왔으나 미례는 흠칫 놀라며 메마른 상태로 그를 받아들였다. 순간 그가 경직되는 것을 미례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었을 뿐 곧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그는 미례의 몸을 탐했다. 격한 몸짓으로 미례의 몸을 당겨 안으며 그녀 안에서 사정을 하고 나서도 그는 잠시 미례의 몸 위에서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낮부터, 눈을 뜨고 치우를 안고있는 미례를 본 순간부터 그녀를 안고싶은 욕구를 참아왔었다. 한동안 차가워진 듯한 미례에게 다가가지 못했던 그는 미례가 치우와 오후를 보내도록 내버려두고는 조금이나마 자신에게도 다정해 지기를 바랐으나 그것은 자신의 헛된 바램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미례와 치우의 사이처럼은 아닐지라도 그는 미례가 조금은 자신에게도 아이를 바라보는 것 같은 애정이 담긴 시선을 나누어주길 바랬었다. 그러나 현재 그는 예전의 그녀나 다름없는 차가운 미례의 몸에서 떨어져 나오며 한숨을 내쉬었으나 그녀를 향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밤 이후로도 몇 번 그는 미례를 안았으나 미례의 몸은 뜨거워지지 않았고 어쩌다 그가 짜증이라도 내는 날이면 억지로 팔을 그에게 감으며 반응하는 척 했으나 그녀의 내부는 여전히 메말라있음을 경휘는 느낄 수 있었다. 제길, 어떻게 된 거야. 경휘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치우를 빼앗아 유모에게 맡긴 밤부터 였나. 생각해보니 그때 즈음부터 그에게 대들기라도 하듯 미례는 몸을 열지 않고 있었다. 자신에게 소홀하고 치우에게만 신경을 쓰는 미례가 미워 그는 아이를 빼앗아 유모에게 넘겨주었다. 갈수록 말라 가는 미례가 안스럽기도 했으나 주된 이유는 치우를 시기했던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내를 아는 여인으로 반응하던 미례가 다시 차가워져 버린 것이다. 며칠 전부터 그는 바다언덕에서 한참을 보내는 미례를 알고도 일부러 모른 척 하고 있었다. 이제 아이도, 자신도 중요하지 않은 건가. 아버지도 버리고 자신마저 버렸던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처럼? 미례는 참을 수 없는 슬픔이 자신을 갉아먹고 있음에 시름시름 여위어갔다. 어느 날은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 새타니를 찾아갔다. 유모도 걱정스런 빛이 역력했으나 미례는 차마 유모에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모 또한 걱정으 로 한숨을 내쉴게 뻔했으므로.


"어서 오시오, 미례 아씨. 어째 치우 아기씨는 놓고 오셨소?" "...이젠 유모에게 맡겼어요." "그래요? 허면 안색이 좀 나아져야 할텐데 왜 그리 더 기운이 없어 보인답니까? 이질금도 돌아오셨고, 잘 대해 주실 텐데요." "그저...좀...피로한가봐요." 미례는 가까스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혹..다시 수태하신 건 아니오?" 미례는 새타니의 짐작에 하얗게 질리며 화들짝 놀랐다. "..아..아녜요, 새타니." 미례의 반응에 새타니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불에 덴 사람처럼 놀라는걸 보니..혹 모르지요. 뭐, 다시 수태 하셨대도 누가 뭐라 하겠소? 아마도 형제 없이 외롭게 자란 이질금도 좋아하실 거요." "........" "차를 좀 드시겠소?" 미례는 새타니가 권하는 찻잔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뜨거운 기운이 넘치는 차를 한 모금 넘기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요즘...통..잠을 못 자요, 새타니." "이질금도 곁에 있고 치우아기씨도 있는데 어째 그러오?" "........." 미례가 슬픔이 가득한 눈을 들어 새타니를 올려다보았다. 새타니의 투명한 눈이 걱정스레 미례의 모습을 살폈다. 정말로 미례에게선 얼마 전까지 사내에게 사랑 받고 아이를 키우는 여인의 행복으로 가득한 표정 같은 건 찾아보기 힘들었다. "새타니....내게 자식이 몇이나 있는지 봐주겠어요?" 미례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자 새타니가 피식 웃었다. "그게 궁금하오?" 미례는 열망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새타니가 손을 내밀어 미례의 오른손을 달라는 몸짓을 해 보였다. 미례는 두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새타니가 고운 미례의 손등을 한 두 번 쓰다듬더니 손바닥을 위로해서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살폈다. 세심하게 손바닥의 선을 이리 저리 살피는 새타니를 보며 미례가 물었다. ".....휘와의 사이에....다른 아이가 있나요?" 미례의 말에 새타니가 다시 아이처럼 키득키득 웃었다. "왜 그러오. 이질금이 아기씨를 많이 원한답니까? 그래서 걱정인 게요?" "........" 미례는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며 새타니의 시선을 피했다. "걱정 마시구려, 미례아씨. 미례 아씨가 원하는 만큼 많은 자손을 볼 테니." "정말 요? 정말로 그런 거예요? 날 위로하려 그저 하는 말이 아니구요?" "흐흠, 미례 아씨를 위로 할 일이 뭐 있겠소. 남부럽지 않은 지아비에 아들까지 있는데.." 그러나 미례는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미례는 새어나오는 울음을 울었다. 걸어두었던 마음의 빗장이 풀린 듯 미례의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새타니는 당황했으나 한동안 미례가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미례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고, 그 정도면 충분 하다 생각될 만큼 시간이 흘렀을 때 새타니는 토닥토닥 미례의 등을 두드리며 달래기 시작했다. "아니, 미례 아씨. 뭐가 이리 서러운 게요? 응? 이질금이 뭔가 서운하게 한 거 요?..허허...참...이 섬에서 제일 행복한 여인네가 이리 서럽게 울어도 되는 게요? 그만 하시구려. 음? 자. 그만 우시오. 미례 아씨. 서럽기로 치면 이 늙은이 따라 올 사람도 없을 게요. 자, 그만 하시구려." 미례는 새타니의 품안에 안겨 한참을 더 운 다음에 새타니가 이끄는 대로 속의 말을 털어놓았다. 혼인하지 않은 자신의 위치, 아이를 떼어놓으려는 경휘의 행동, 자신을 위협하 는 사마 월의 존재, 그녀와 비교하여 하나도 나을 것이 없는 자신의 처지, 그리 고 얼마 전 그녀의 가슴을 후벼팠던 경휘의 한마디. "허허..." 새타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탄식하고는 다시 차 한잔을 권하며 들게 했다. 잠시 후 참을 수 없는 잠이 쏟아지자 미례는 새타니가 시키는 대로 자리에 누 워 잠깐 눈을 붙였다. 좀 전까지 울었다고는 생각이 안되게 편안하게 잠이 든 미례의 표정을 살피며 새타니가 혀를 찼다. 이제는 자신이 끼어 들지 않아도 자신이 원하는 여인을 아프게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건만 경휘는 아직도 미례를 울리고 있었다. 바보 같은 이질금 같으니. 언제쯤 가야 제 여인 하나 울리지 않고 건사하려는지.... 쯧쯧.... 어둠이 내리는 저녁 무렵이 지나고 나자 새타니가 생각했던 대로 흰둥이의 소리가 밖에서 들리더니 보폭이 큰 걸음으로 그가 움막 안으로 들어섰다. 미례는 가끔씩 한숨을 내쉬며 몸을 옆으로 웅크리고는 깊이 잠들어있었다. 아이 어머니라고 하기에는 자그마한 체구며 호리호리한 선이며, 어린 티가 아직도 물씬 풍겼다. 그는 들어서면서 바로 움막 안을 휘 둘러보더니 미례를 찾아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미례가 여기서 잠들어 있는 거야?" 경휘가 굳어진 얼굴로 새타니를 쳐다보며 퉁명스레 물었다. "심기가 약해있어 내 차에 약을 좀 섞었소. 자고 나면 좀 풀어질 거요. 요즘 통 잠을 못 이루신다고 합디다." 알고 있었는지 묻는 새타니의 눈초리에 그는 묵묵히 그녀를 바라 볼뿐 대답하지 않았다. 꺼칠어 지는 얼굴이며 하루하루 여위어 가는 모습을 보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낮게 욕설을 내뱉고는 새타니의 곁에 앉았다. 처음엔 화가 나기만 했으나 요즘 들어서는 이유가 뭔지 도무지 알 수도 없고 묻는 것도 짜증스러웠던 그였으나 이제라도 이유를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미례만큼이나 그 역시도 우울해지려하고 있었다. "요즘도 미례 아씨 마음을 아프게 하더이다." "내가?"


그는 짐작 가는 것이 있었으므로 못마땅하게 대꾸했다. "치우를 유모에게 맡겼던 것 말인가?" "그게 아니오." "허면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 "미례 아씨 맘을 그리 모르오? 집에 들여놓은 손님 말이오. 미례 아씨 가슴을 도려내는 줄 정말 몰랐던 말이오?" "누가?......월아가 말인가?" "그 여인이 이질금을 어찌 생각하는지 정말 모르는 거요?" "귀여운 누이 같을 뿐 내겐 아무 의미도 없어. 왜? 그 때문에 미례가 속상해 하나?" "공공연히 이질금과 혼인하겠다고 미례 아씨를 약올린 모양이오." "그래서? 미례가 가만히 있었단 말이야?" 그가 코웃음을 쳤다. "중원의 뼈대있는 가문의 여식이오, 이질금에겐 더할 나위 없는 여인일지도 모르니 왜 안 그렇겠소?" "미례에겐 치우가 있잖아." "흠! 그나마 치우아기씨마저 어떻게 했소? 미례 아씨에게서 떼어놓으려 했잖소. 그게 미례 아씨 눈에 어찌 보였을 거 같소?" 경휘는 기가 막혔다. 미례가 정말로 그렇게 오해하고 있었나? "그건, 그래서가 아니었어. 날 소홀히 하고 치우만 위하는 게 보기 싫어서... 떼어놓으면 좀 덜할까 한 건데.." "이질금, 그냥 힘으로 그리 하면 미례 아씨가 그 속을 어찌 헤아린답니까. 참 답답도 하오." "허면 요즘 다시 밖으로 나도는 것도 고향생각이 나서가 아니란 말야?" "이질금 같으면 그래, 그 집안에 있고 싶겠소?" "그래서....잠자리에서도...그리 대하는 건가..."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새타니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그를 책망했다. "쯧쯧...여인의 가슴에 못을 박아놓고도 잘도 잠자리에서 받아줄 거라고 생각 했소? 그래, 이질금 같으면 그럴 것 같소? 무어라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게요?" "내가 미례에게 뭐라 했다고?" "다시 아이를 배는 날에는 그 아이를 내다 버리겠다 하셨다 하더이다. 그래, 미례 아씨 속이 온전하겠소? 정말 그리하고도 모르겠소?" "그..그건..." "..왜 그런 소리를 한 거요? 그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 줄 정말 몰랐답니까? 그러고도 잠자리에서 미례아씨가 잘도 받아주기를 바랄 수 있는 거요?" "치우 하나로도 날 그리 소홀히 대하는데 아이가 더 있으면 내게 더 그럴 것 아닌가. 홧김에 맘에 없는 소릴 했는데...그걸 기억하고 있었단 말야?" "쯧쯧..." 새타니가 혀를 찼다. 미례는 얕은 꿈결같은 잠 속에 빠졌다가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새타니의 배려이기도 했다. 한동안 티격태격하며 말을 주고받던 그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미례를 깨워야겠어. 그만 내려가 봐야겠군." 그러고도 좀더 시간이 흐른 뒤 경휘는 정말로 내려갈 작정으로 미례에게로 가


어깨를 가볍게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아직도 잠이 묻어난 미례를 흰둥이 위로 안아 올리며 언덕을 내려가면서 경휘는 어떻게 말을 꺼낼지를 망설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언덕으로 올라가는 미례를 두고볼 수 없다 싶어 그는 따라왔었다. 차라리 그리 밖으로 나돌고 싶거든 치우에게 치여 쓰러져도 모르니 집안에만 있으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미례가 몸을 열지 않는 것을 안 이후로 경휘는 애써 미례를 가까이 하지 않고 있었다. 미례만큼이나 그 자신도 상처받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다시 어두워져 가는 미례를 대하며 경휘는 속상해하고 있었다. 얼토당토 안 한 이유로 혼자 앓고있 었다는 것을 그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아직 약 기운이 남아있는지 미례는 가끔씩 졸리운 몸을 가누지 못하며 그의 가슴에 닿았다가는 흠칫 놀라며 떨어지곤 했다. 그럴 만도 하지. 경휘는 미례가 밤잠을 못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잦은 뒤척임과 한숨, 낮에 대하는 피로가 묻어난 안색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경휘가 고삐를 한 손에 옮겨 쥐며 자유로워진 한 손으로 미례의 몸을 안아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했다. 미례는 그가 이끄는 대로 살포시 기대왔다. 바보 같은 여자. 아직도 내 눈엔 너밖에 보이지 않는걸 모른단 말야? 경휘는 미례를 당겨 안으며 입안에서 중얼거렸다. 미례는 수줍음도 잊고 규칙 적으로 오르내리는 그의 가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번 호 : 198 / 263 등록일 : 98 년 11 월 30 일 22:36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18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63

미례는 오랜만에 편안히 잠을 잤으며 그녀의 몸 위로 눌러오는 익숙한 몸과 냄새로 치우를 확인하고는 눈을 뜨며 미소를 지었다. "자 치우야, 네가 고대하던 어머니가 이제야 눈을 뜨셨구나. 잘 보이면 오래지 않아 젖을 물려주실 것도 같은걸?" 미례가 그의 말에 눈을 비비며 배시시 웃었다. 치우가 까르륵거리며 미례의 가슴으로 파고들며 얼굴을 부볐다. 항상 떨어져 있지 않다가 요즘 유모에게 맡기면서 치우는 미례의 가슴으로 한번 파고들면 즐거운 기색으로 미례를 놓 으려 하지 않았다. 암죽을 먹이며 유모가 밤에 미례를 깨우지 않으려 했으므로 치우는 젖 내음만 맡으면 좋아라 자지러졌다. 익숙한 그의 손놀림이 미례의 옷섶을 풀었고 곧 탐스런 가슴이 드러나자 앙징맞은 치우의 손이 피부에 닿으며 오른쪽 젖가슴 을 찾아냈다. 미례가 젖을 물리기 좋게 치우의 머리를 받쳐 안았고 아이는 다급하게 소리를 내며 젖을 빨았다. 치우의 다른 한 팔이 미례의 또 다른 젖가슴을 간지럽히며 만졌고 미례는 그


감촉을 즐기며 다시 잠결로 빠져들었다. 치우의 손위로 침상에 걸터앉은 경휘의 손이 겹쳐지자 미례가 다시 눈을 떴다. 경휘가 치우와 미례를 따듯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미례의 젖가슴을 감싸 쥐었다. 미례가 수줍게 미소를 머금었고 그 역시 답하듯 미소를 지었다. "잘 잤어?" 미례가 어리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좀 화색이 도는군." 치우가 무언가 아는 듯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잠시 후 다른 쪽 젖을 물리려 미례가 몸을 움직이며 일어나 앉아 치우를 팔 안에 안았고 얼굴 을 찡그리던 치우가 만족스럽게 다시 젖을 물었다. 그가 치우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며 말했다. "치우야, 네 어머니 손가락에 있는 게 무어냐?" 그의 시선을 따라 미례가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에 끼워진 옥으로 된 가락지 한 쌍을 발견하고는 놀라며 경휘를 바라보았다. "...휘.." 미례의 손안에 끼워진 그 가락지는 푸른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그냥 보기에도 그것은 꽤나 귀중한 것처럼 보였다. 그가 손을 뻗어 미례의 손을 잡았다. "내 어머니가 가지고 계시던 거야. 이 집안의 안주인에게 물려주는 것이기도 해.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니 소중히 간직해야돼." 미례가 눈가에 이슬이 맺히며 미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소중한 의미를 지닌 옥환 한 쌍이었다. "한 번 네게 준 것이니까 치우가 자라서 고를 아이에게 물려주기 전 까진 네 것이야. 다시 빼앗는 일은 없을 테니 마음 놔도 돼." "...소중히 간직할 께요." 그가 말하는 의미를 알아챈 미례가 대답했다. "어머니에겐 약지에 맞았다고 하시던데 네겐 중지에도 헐거우니 조심해야겠다." "...그럴께요." 경휘는 이후로도 사마 월에게 친절히 대했으나 미례는 더 이상 마음쓰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아는 까닭에 더는 그녀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어느 날 한나절이 지난 오후에 경휘는 미례와 함께 안뜰의 자리에서 차를 마시며 햇살아래 있었다. 꿀을 바른 한과를 그에게 먹여주던 미례가 손에 묻어난 꿀을 닦으려 하자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미례의 손을 잡아 꿀이 묻은 미례의 손가락을 그의 입안에 넣으며 아주 천천히 빨아내었다. 미례는 수줍고도 낯선 그 느낌에 당황하며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그는 꿀을 다 닦아낸 후에도 미례의 손가락에서 입을 떼지 않았으며 미례 역시 그의 뜨거운 입안의 느낌에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저절로 입술이 어떤 갈망을 담아 벌어졌다. 그와 입맞춤 해본지도 꽤 오래 전인 것 같다고 미례는 생각했다. 그의 눈길이 그것을 놓치지 않았고 미례의 손가락을 놓아주며 살짝 벌어진 입술로 고개를 숙였다. 그가 미례의 아랫입술을 자극하더니 놓아주고는 다시 윗 입술을 스치듯 자극하자 미례의 입안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것이 무슨 신호라도 되는 듯 경휘의 혀가 미례의 입안 깊숙한 곳으로 파고


들었다, 강렬함을 담아.. 그가 더 강렬한 접촉을 원하며 미례를 당겨 안았고, 미례는 그의 무릎 위에서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그의 입맞춤에 녹아 들어갔다. 오래도록 그들은 서로 의 몸을 끌어안은 채로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안뜰로 나오던 사마 혼과 누이도 그들의 모습을 보고는 당혹스러워 하며 발길 을 돌렸다. 얼굴이 울그락 붉으락 하는 누이동생을 달래며 사마 혼이 말했다. "월아야, 그는 네 사내가 아니니 그만 단념하거라." "그럴 수는 없어요, 저 여자는 비천한 동이 족 여자일 뿐이라구요, 난 내가 원하는 사람을 저런 여자에게 빼앗기지 않아요." "저들을 보고도 모르겠니? 그의 아들을 낳은 여인이야. 그가 끔찍이도 아끼는 여인이고. 그에겐 무엇으로도 저 여인을 떼어놓을 수 없을 거 같구나." "흠...어림없어요. 난 물러서지 않을 거 라구요. 내가 택한 사내란 말이어요." "낙양으로 돌아가자. 널 사모하는 공자들이 줄을 섰으니 그중 한 명을 고르거라. 경휘보다 더 낳은 사내를 찾을 수 있을 게다." "내가 원하는 건 휘 가가 라구요, 다른 사내는 싫어요." "그렇다고 사마 가문에서 일개 섬의 도주인 경휘에게 널 둘째 부인으로 시집 보낼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 넌 둘째 부인으로 만족하며 살 수 있겠니?" 네 성질에 어림도 없지, 라고 사마 혼은 속으로 덧붙였다. "내가 왜?...저 동이 족 여인을 쫓아버릴 거예요, 그럴 거라구요." "아서라, 월아야. 그가 얼마나 저 여인을 아끼는지 보고도 모르겠니? 이미 아들까지 낳아준 여인과 저리 빠져들 때는 다른 누구도 뵈지 않는 게다." 유모 방으로 건너가 잠든 치우를 확인한 미례는 유모가 데워놓은 물로 목욕을 마치고는 침실로 들어왔다.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은 미례의 몸을 훑어보는 경휘의 시선에 광채가 났다. 그들은 이레 넘도록 몸을 섞지 않고 있었다. 미례의 차가움에 경휘는 참을 수 있는 만큼 미례에게서 멀리 떨어져있었다. 나흘 전 새타니에게서 돌아온 후에도 경휘는 그저 따뜻하게 감싸 안을 뿐이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다시 또 미례가 몸을 열지 않는다면 그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제 오후 입맞출 때는 미례도 그 못지 않게 뜨거웠었다. 침상 안으로 들어오는 미례의 몸에서 얼핏 경휘는 그를 자극하는 향내를 맡았다고 생각되었다. 그의 몸이 미례를 원하며 욱신거리고 있었다. 어두운 방안에 누워서도 경휘는 망설이고 있었다. 잠은 달아나 버렸다. 미례가 습관처럼 그의 왼쪽 겨드랑이 안으로 파고 들어와 그의 어깨를 감싸며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잠깐동안 마음의 동요와 싸우던 경휘는 거친 한숨을 내쉬고는 오른손을 뻗어 미례의 가슴을 더듬었다. 미례는 그가 자신의 몸을 더듬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숨죽이고 누워있었다. 점차로 그가 미례의 눈치를 보며 옷 안자락으로 손을 넣어 맨살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이 매끄러운 미례의 피부를 더듬어 내려갔다. ".....널..만지고 싶어." "........"


낮은 소리로 그가 망설이며 속삭였다. 미례는 무어라 대답하기 힘들어 당황스 러워 하면서도 그가 만지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널 품고싶다고, 미례야.....싫으면.....싫다고 말해도 돼." ".....휘...." 미례는 정말로 당황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껏 한번도 그녀의 의사를 물어본 적이 없었다. 다만 미례를 품고싶을 때마다 손을 뻗어왔고, 미례의 몸을 가졌었다. "싫은 거야?" ".....아...아뇨..." 아주 작은 소리로 미례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고 그는 그제서야 겨우 자제하 고 있던 자신의 욕망을 풀어놓았다. 그는 성급하게 미례의 가슴을 세게 쥐었다가는 미례의 신음소리에 놓아주고는 엄지손가락으로 유두를 쓸며 자극을 주었고,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어설프게 그의 몸을 끌어안고 있던 미례는 그녀의 옷자락을 풀어헤치는 그의 손길에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미례는 아직까지도 그가 자신을 안지 않 는 것이 조금은 두려웠었다. 하룻밤에도 몇 번씩 몸을 탐하던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아주 오래 전 이야기 이고 요즈음은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어느 때는 그가 이미 자신에게서 관심을 잃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냉정하다고 까지 생각되는 적도 있었다.

번 호 : 199 / 263 등록일 : 98 년 12 월 01 일 02:20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19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64

그들 사이에 방해가 되는 옷자락을 사이에 두고 미례의 몸을 더듬던 그가 침상에서 내려서더니 옷을 벗고는 드러난 알몸으로 부딪쳐오자 미례의 숨소리도 역시 거칠어졌다. 그의 성급한 손길은 미례의 젖가슴과 드러난 피부를 만족할 만큼 주무르더니 점차로 가슴에 머물던 한 손이 아래로 내려가 부드럽게 만졌다. 미례의 무릎 이 저항없이 그의 침입을 받아들였다. 그가 미례를 바로 누이고는 한 팔로 몸 무게를 지탱하며 베개에 펼쳐진 미례의 긴 머리칼을 쓸어주더니 고개를 숙여 미례의 입술을 찾아 내려왔다. 미례는 서서히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기다리며 입술을 축였고, 뜨겁고도 열정적으로 그는 미례의 입안을 헤집었다. "....휘"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몸을 떼었을 때 미례는 그가 시키는 대로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낮게 한숨처럼 그를 불렀다. 미례의 한숨 섞인 애원에 반응하듯 그의 몸이 서서히 미례에게로 겹쳐졌고 미례의 무릎사이로 파고들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미례의 무릎이 벌어졌다. 익숙했던 느낌을 갈망하며 미례의 숨이 가빠졌고, 경휘는 몸을 지탱하지 않는 다른 손으로 조심스레 미례의 몸을 확인했다.


그녀의 몸은 이미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있었다. 부드럽고도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휘..." 부끄러움으로 미례가 그를 재촉하자 그가 미례의 목덜미를 뜨거운 숨결로 간질이며 나지막히 웃음 지었다. 그의 단단하고도 흥분된 양물이 닿았다고 미례가 느끼는 순간 그것은 만족스럽게 미례의 몸 안으로 서서히 들어왔다. "흐음..." 단단한 그의 몸이 들어오는 순간 미례의 몸이 여자로서의 반응을 보이며 그의 몸에 감겨들었다. 그 역시도 사내의 욕구로 그녀 몸 안 깊숙히 들어가기 위해 미례의 엉덩이를 조여 안으며 닿을 수 있는 곳까지 깊이 파고들었다. 헉 하며 그는 절제된 신 음소리를 내었다. 치우를 낳았음에도 그의 몸은 아직도 그녀에게는 둔통을 일으킬 만큼 부담스 러웠으나 그 순간 만큼은 미례도 만족스러웠다. 익숙한 통증이 오히려 희열 이 되고있었다. 뜨겁게 맥동하며 부피감을 전하며 그녀 안에 머문 그의 양물은 잠시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서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주름 벽을 자극하기도 하고 혹은 강렬하게 출입하기도 하며 미례를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희열로 이끌었다. "하아...하아..." 숨소리와 겹쳐져 미례의 신음소리가 거칠어졌고 스스로 무릎을 벌려 세우며 그를 맞아들이려 했다. 그가 서서히 그러나 힘있게 미례의 몸 안으로 자신의 양물을 다시 밀어 넣었다. "흐읍...흐읍..." 앓는 듯한 신음소리가 미례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렇게 몇 번을 그녀의 몸 안을 서서히 출입하던 그는 더 이상 삽입하기 어려 울 때까지 미례의 열린 몸 안으로 들어갔고 교묘한 몸놀림으로 그는 미례를 자극했다. 그의 등을 감싸안고 그의 다리에 자신의 다리를 감은 미례는 그의 자극에 더욱 신음하며 견디지 못하고 그의 엉덩이를 잡았다. 더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휘...휘....그만...그만..해요...모..몸이...이상해요." "쉬잇, 걱정하지마, 미례야...너와 함께 즐거움을 맛보고 싶어." "...휘...제발 그만....몸이..몸이...이상해요, 휘...흐읍..그..그만..." "날 믿어, 미례야...날 믿어...." "....휘....몸이 이상해요...." "긴장을 풀어...그래도 돼....널 해치지 않아." "휘..." 미례는 그의 격하고도 감미로운 행위에 불안감을 느끼며 눈이 커졌고 그런 미례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깊숙하게 움직이다 몸을 부비기도 하고 원을 그리듯 돌리기도 하는 그의 행위에 세게 그를 조여대며 풀어주지 않고 욕심 사나운 자신을 느끼며 미례는 낯설고도 당황스러웠다. "휘...나..좀 이상해요..." "괜찮아, 미례야...그대로 내버려둬...날 만져봐, 미례야. 날 안아..."


"흐읍....흐음....아아" 경련하듯 어느 순간 미례는 그를 끌어안으며 의식을 놓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와 결합된 부분에서는 빠르게 수축하며 그의 몸을 풀어주지 않았다. "괜찮아?"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미례가 낮게 한숨을 쉬며 그에게로 파고들자 경휘가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물었다. 미례는 알몸으로 여전히 그에게 반쯤 겹쳐져 그의 무게를 느끼며 그의 팔 안에 안겨있었다. 미례는 무방비상태의 생소한 느낌을 받으며 눈을 깜박여 그를 바라보았다. "...휘...." "좀...진정이 됐어?" 가늘게 경련하며 흐느끼듯 신음소리를 내던 미례의 모습을 돌이켜보며 그가 물었다. "....그래요." "다행이군, 걱정했어." "...그게 뭐였어요, 휘?" "뭐가?" 그가 다정하게 웃으며 등을 쓸어주었다. '...나..무언가 이세상 것이 아닌걸 본 것 같아요....당신도 느꼈어요, 휘?" "그래." 그가 웃으며 대꾸했다.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지난번에도 비슷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이런 적은 없었어요." "...괜찮았던 거야?" "...음....그저 그런 것만은...아니었어요." '또 느끼길 원해?" "...좀 두려워요." "왜?" ".....당신을 상처 내게 될 거 같아서요." "그래. 네가 날 할퀴었어." ".........." "그래도 난 자주 네가 그러길 바래. 그냥 반응 없이 날 받아주는 건 날 못 견디게 해." ".........." "널 안는걸 두렵게 만들어." ".....그럼....그래서....그 동안..." "그랬어." "날 원치 않았던 게 아니었어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미례야." "난...당신이...내가 싫어진 줄 알았어요." "약속해, 미례야. 나 몰래 혼자 생각하고 우는 일 없기야. 다시 한번 그런 널 아는 날에는 그냥 참지 않을 거야." "....알았어요." "내게 궁금한 것이 있거든, 서운한 게 있어도 다 말해야 해."


"그럴 께요." "다른 여인 앞에서 주눅들고 마음 상해서도 안돼." "...그래요." "너에겐 치우가 있잖아, 넌 내 아이의 어머니야, 그런 여인은 이 세상에 오직 너 하나 뿐이야, 알아?" "알았어요, 다신 안 그럴 께요." "난, 샘이 많은 사내야. 아무리 내 자식이라도 네가 날 소홀히 한다고 생각되면 싫어할 거야." "....안 잊을 께요." "그리고 미례야, 아무리 화가 나도 내게 몸을 열어야해, 그게 안되면 내게 말을 해야 해. 다시 널 상처 내는 일이 난 싫어. 널 처음 안았을 때의 기억은 그만 접어두고 싶어." "알겠어요.." 경휘는 다소곳하게 대답하는 미례를 부드럽게 쓸어안았다.

번 호 : 200 / 263 등록일 : 98 년 12 월 01 일 02:31 등록자 : LJH1 이 름 : 이진현 조 회 : 139 건 제 목 : [진현/장편] 해적의 여자 65 (END)

뒷 이야기..... 치우에게만 신경을 쓰는 척 하며 설민과 경휘가 서역으로 가는 비단길에 대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은 미례는 먼 기억 속의 아유타를 떠올렸다. 조금 성급하게 걸음을 떼어놓으려는 치우가 그게 잘 안 되자 씩씩거리며 얼굴 이 달아올라 화를 내는 모습에 속 웃음을 웃으면서 미례는 경휘의 표정을 살 폈다. 그도 치우의 모습이 우스운 듯 말을 멈추고 쓰게 웃었다. 제 맘대로 되지 않는 것에 화를 내는 치우의 모습은 아무래도 경휘를 닮은 모 양이라고 새타니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입을 모았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오, 미례 아씨. 휘아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보는 것 같구려." 제게로 오길 바라는 새끼 고양이가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자 볼이 부어 가까이에 있는 물건을 집어 힘껏 던지자 새타니가 말했었다. "가끔은 휘와 무슨 경쟁을 하는 듯도 해요." 좋은 부자처럼 보이는 그들은 정말 우습게도 상대가 안 되는 것이 뻔한 경휘 를 상대로 치우는 미례를 향한 소유를 주장하며 서로 눈싸움도 했고, 그가 미례를 만지는 꼴을 못 보며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웃어넘기며 부러 치우를 자극하기도 하는 경휘는 치우의 소유욕이 너무 심할 경우 아이를 번쩍 들어 안고는 유모에게로 떠넘기기도 했다. 어이없는 그의 행동에 당황하는 미례가 그러고 돌아오는 경휘를 상대로


한마디라도 할라치면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뚱한 소리로 말하곤 했다. "뭐야, 무슨 할말이라도 있는 거야?" 미례는 고개를 젓고는 그저 한마디 한심스럽게 말하곤 했다. 어쩜 부자가 그리 똑같을까요. 피가 섞였으니 당연하지. 그 역시 지지 않고 한마디했다. 설민이 쉬러가고 치우도 떠 먹여 주려는 미례의 손을 뿌리치고 제 혼자 난장판을 치며 배불리 저녁을 먹고 나서는 포만감에 졸다가 잠이 들고나자 유모 방에 데려다 눕히고 나서 미례는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경휘의 눈치를 살피며 어렵게 그녀의 생각을 말했다. 미례는 비단길을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경휘의 표정은 굳어지며 싸늘한 목소리로 단번에 거절하고는 더 이상 얘기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휘...." 애원하는 눈빛으로 미례가 그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더욱 미간을 찌푸리며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되지도 않을 소리." 미례는 상심했으나 바로 포기하지 못하고 그에게 졸랐다. "휘, 부탁 이예요. 함께 가게 해줘요." "그럴 수 없어. 그런 얘긴 더 이상 듣고싶지 않아." "왜요? 난 아유타에 대한 지리도 알아요, 그곳의 말도 할 줄 알아요. 그곳의 교역에 도움이 된다구요. 당신이 조금만 생각해 준다면, 그게 이득이 되리라는 건 불을 보듯 명확한 걸요." "안된다고 이미 말했지. 그만 하자구." 주눅들었던 미례는 그래도 용기를 내어 망설이며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말해줘요, 휘. 그리 안 된다고 하는 이유를 듣고 싶어요. 이유가 합당하다면 더 이상 당신께 조르지 않을 께요." 미례가 뜻을 굽히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보자 경휘는 한동안 그녀를 쏘아보다 가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는 자리에 누웠다. 그는 정말 상관없다는 듯, 그 자 리에 서있는 미례에게는 한마디도 건네지 않고 등돌리고 누웠다. 미례는 원망스럽게 그를 바라보며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에 불편함을 느낀 경휘가 몸을 뒤척이더니 미례를 힐끔 쳐다보았다. "밤새 그러고 있을 작정이야?" "말해줘요, 휘. 왜 날 못 데려가요? 혹 그곳에 숨겨놓은 여인이라도 있나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렇지 않은걸 알잖아." 그는 불편한 듯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미례를 쏘아보았다. "그럼 왜 그래요? 당신의 머리 속에선 벌써 손익계산을 해보았을 거예요. 우 린 함께 있을 수도 있고,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날 데려가고 싶을 거예요. 다른 여인이 있는 게 아니라면 대체 왜?" 미례는 그것이 억지임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말을 이으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제길 할, 꼭 그렇게 따져 물어야겠어?" 그가 화를 벌컥 내며 언성을 높이며 미례를 쏘아보았다. 미례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한번만 더 심한 소리를 하는 날에는 미례의 눈에서 눈물 방울이 쏟아질 것임을 경휘는 알고있


었다. 그가 숨을 골랐다.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그녀는 정말 밤새도록 그러고 있을 지도 몰랐다. 미례가 그렇게 있는 다면 그 역시 편히 잠을 잘 수 없음은 자신 이 더 잘 알았다. "이유를 알고싶어?" 그가 한풀 꺾인 조금 낮은 소리로 물었다. 미례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이유를 말해주면 더 이상 조르지 않겠다고 약속해?" 미례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잠시 후 덧붙여 작은 소리로 말했다. "타당하면 요.." "이리로 와, 미례야." 그가 침상의 그녀자리를 가리켰다. 미례가 다소곳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배에는 암약이 있는데 미례야, 여인을 태우지 않는 거야. 네 생각엔 부당하다 생각될지 몰라도 배에 여인을 태우면 뱃길이 험해진다고 믿고있어. 나뿐 아니 라 다들 꺼리고 있어. 그건 아주 오래 전부터 지켜져 온 거야." 그가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이고는 미례의 몸을 쓸어안았다. ".....하지만 당신은 이질금이잖아요, 당신 말 한마디면 그들은 이해할 거라구요." 미례는 조심스레 그에게 대꾸했다. "그래, 그럴 거야. 헌데 미례야, 혹시라도 뱃길에 풍랑을 만난다면 그야 물론 널 태워서가 아닐 수도 있지만 만약 그리된다면 사공들이나 다른 뱃사람들은 너 때문이라고 생각할 테지. 난 그런걸 감수하고 싶지는 않아. 그들은 작은 일 에도 쉬이 사기가 꺾일 수 있거든. 그들이 그렇게 믿는다면 뱃길을 헤쳐나가 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것도 너는 모르지 않을 거야, 그렇지?" "...날 데려가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거예요."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것 말고도 이유는 더 있어. 중원은 위험한 곳이야, 미례야. 비단길도 마찬가지야. 도중에 네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 고, 난 그런 위험에 널 내보내고 싶지 않아." "내가 여인이라서 요?" "그래. 널 항상 내 곁에만 붙여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가 사내복장을 하고 가면 되잖아요, 당신 눈에 띄는 곳에 있겠다고 약속하면..." "미례야" 그는 미례의 조름에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난 비단길을 가보고 싶어요, 아유타의 할머니도 보고 싶구요. 비록 가락국으론 돌아갈 수 없지만 아유타 마저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기 전에 한번만이라도 가보고 싶다구요." 기어코 미례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낌을 참아내는 미례가 안스러워 경휘는 하마터면 함께 가자고 말할 뻔했다. 그러나 경휘는 그렇게 하는 대신에 다만 다정하게 위로하며 미례를 가슴에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미례는 한동안 그의 품안에서 흐느껴 울다가 지쳐서야 잠이 들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미례는 그 밤 이후로 다시는 경휘에게 비단길 여행에 데려가 달라고 조르지 않았으므로 경휘는 안심했다. 그러나 어느 날 늦게까지 일을 하고 돌아온 그를 대하는 미례는 무언가 감춰


놓은 것이 있는 여인의 표정이었다. 피곤에 지쳐 돌아온 경휘가 의자에 파묻히듯 앉자 미례가 다가와 염려스러워 하며 씻도록 말했다. 그리고는 직접 따뜻한 물을 받아 그의 발을 씻겨주었다. "어깨도 좀 주무를까요?" 미례의 상냥함 속에서 무언가를 눈치챈 그는 굳어지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일이야? 뭔가 조르고 싶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그런 건 정말로 그녀답지 않은 일이었으나 경휘는 왠지 그녀의 태도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녜요, 휘. 그저 피곤해 보여서.." 그래, 아니겠지, 네가 그런 여자가 아닌 건 알고있었으니까. 그래도 가끔은 무언가 사달라고 조르며 달라붙기도 하는 그런 모습이길 원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는걸 알아? 경휘는 아직도 가끔씩 몸을 사리며 어색해 하는 미례를 대할 때마다 그녀가 신중한 여인이기보다는 가끔은 사스래처럼 앙탈도 부리고 여인만의 사치품에 욕심도 낼 줄 아는 여인이기를 바라기도 했다. 어느 날부턴가 미례 특유의 향내가 사라졌다고 그가 느꼈을 때, 그가 물어서야 미례는 마지못해 아유타에서 가져온 향유를 다 쓰고 없음을 말했고 그는 그녀의 일에 신경 써주지 못했음을 미안해하기 보단 교태스럽게 조르지 못하는 미례에게 더 화를 냈다. 물론 먼저 챙겨주지 못한 데에 미안해하는 마음이 더했지만 그는 자신의 그런 마음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만큼 화가 났다. 이후로 그는 중원으로 나갈 때면 새로운 귀중품이며 향료며 분 등의 물건 등을 미례에게 건네주었다. 물론 미례는 그때마다 어색해하면서도 받아들었지만 가끔씩 그것들을 아끼며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만족스러웠다. 신중하고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우며 말수도 적은 미례에게 그는 불만스러웠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생소할 정도로 애교스럽게 다가서는 것도 그에겐 낯설기만 했다. 사람이 바뀌려면 천천히 변해야지 어느 날 순식간에 바뀌어 버리면 그것처럼 낯선 것도 없는 것이다. 그의 발을 정성 들여 닦아주고는 굳이 싫다는 그에게 로 다가와 어깨를 주무르겠다는 미례의 태도가 그랬다. "오래 살고 볼일이군." 그가 미례의 태도를 빗대어 한마디했고 미례는 얼굴을 붉혔다. "치우는?" 평소에는 그가 들어올 때까지 치우와 함께이던 미례가 오늘은 혼자였던 것에 의아해 하며 묻자 미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일찍 잠이 들었어요." "그래? 낮에 실컷 놀았던 모양이지?" ".....어깨를 주무를 께요." "됐어. 자리에 들면 돼." "어깨가 딱딱한 걸요, 목도 뻣뻣하고....이러면 쉬이 잠도 안 오잖아요." 미례가 벌써 그의 뒤로 돌아가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렀다. 미례의 부드러운 자극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정말로 등과 어깨가 뻣뻣하고 굳어졌던 경휘는 잠시 미례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작고 부드러운 미례의 손이 적절하게 힘을 가하여 그의 어깨를 주물렀다.


경휘는 그녀의 손이 지나간 자리의 근육이 편안해 지는 느낌이 들었으므로 그 감촉을 즐기듯 스르르 눈을 감으며 그대로 있었다. "...휘" 조심스러운 미례의 목소리가 한참 후 들렸을 때에야 그는 다시 미례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탁을 하리란 느낌에 경직되었다. "뭐야, 미례? 무슨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로군." 미례는 대답 없이 굳어진 그의 어깨를 다시 주무르며 그의 긴장을 풀어주려 노력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야?" 미례의 대답을 기다리던 그가 퉁명스럽게 다그쳤다. 요즈음 점점 더 여우가 되어 가는 미례를 감당하기 힘들어 지리라는 생각을 하며 경휘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저기요, 휘....지난번 그 얘긴 데요." "어떤 얘기?" "화내지 말아요, 휘. 실은...가납사니에게 물어봤더니 당신만 허락을 한다면...날 배에 태워 주겠다고 했거든요....뱃사람들도 날...꺼려하진 않을 거라고....그래선 데요...." 사실 그 일이 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미례의 부탁에 가납사니는 마지못해 승낙을 하면서도 말 끝에 덧붙였다. "이질금이 허락해야만 하오, 미례 아씨." 미례는 그의 염려에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가납사니. 이질금은 가납사니나 다른 이들이 허락한다면 배에 태워주겠다 했거든요." 미례의 대답에 가납사니는 이상한 듯 의아해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질금이 정말 허락했단 말이오?" "그렇다니까 요." 그러나 그는 못미더운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글세, 난 모르겠소. 하여간에 이질금의 허락을 꼭 받아야 하오. 괜한 불똥이 우리에게 튀어서는 안됩니다. 이질금이 화나면 얼마나 불같은지 미례 아씨도 잘 알 거요." 미례는 걱정스런 가납사니와는 달리 자신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납사니 는 그런 미례를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선 시선으로 한동안 바라보았다. "왜요?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미례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으며 그에게 물었다. "아..아니오, 미례아씨" 가납사니가 급히 시선을 거두며 대꾸했다. "아니긴 요, 왜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날 쳐다봤는데요?" 미례가 조르자 그가 마지못해 말을 했다. "미례 아씰 처음 봤을 때 말이오, 그때와는 아주 딴 여인이 된 듯 싶어서... 사실 이질금이 무엇 때문에 미례 아씨에게 빠졌는지 다들 이상하게 생각했었소." "그래요? 지금도 다들 이상히 생각하나요?" "아니, 그렇지 않을 거요." "왜요?" "미례 아씬 이제 막 피어나는 꽃과 같소. 아마도 이질금은 그걸 미리 본 게지요."


미례는 얼굴을 붉혔다. 정말 미례에게는 다른 여인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아름 다움이 있었다. 게다가 요즘의 그녀는 재잘거리며 새로운 것에 궁금증을 내며 묻기를 좋아했다. 자주 웃기도 했 다. 그들은 미례의 소녀에서 여인으로 넘어가는 매력을 눈으로 보고있었다. 미례가 편히 그들을 대한다고 해서 다른 이들도 그녀를 쉬이 대할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함부로 못할 기품이 있었다. "이질금의 허락을 얻기는 힘들게요, 미례 아씨. 이질금은 미례 아씨가 어디로 도망갈까 속으로 걱정하고 있다오. 늙어 할머니가 되면 모를까 미례 아씰 데리고 중원으로 가지는 않을게요. 내 장담하오." 정말로 가납사니는 그렇게 굳게 믿고있었다. 물론 경휘는 중원이 위험하다고는 했지만 그렇게까지는 말한 적 없었고 미례는 배를 탈수만 있다면 비단길을 가보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오늘 경휘에게 다시 한번 말해보리라 생각한 미례는 초저녁 일찍 치우를 재우 고는 그에게 어찌 말을 할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경휘의 태도로 보아서는 가납사니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길에 데려가 달라고?" "...그래요." "그 얘긴 이미 끝났을 텐데? 다시 한번 실랑이를 벌이고 싶은 거야? 또다시 밤새도록 펑펑 우는 널 달래야 하는 거야?" 미례의 손길이 여전히 다정하게 그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아뇨...지난번에 당신이 했던 얘긴 다 알아들었어요." "그래? 그럼 더 이상 할말도 없겠군." 그는 잠시 안도했다. "당신이 날 데려가지 않으려는...진짜 이유를 알아요." "그런 게 있었나?" 경휘가 피식 웃었다. "휘, 이번에 당장 함께 데려가 달라고 말하는 게 아녜요." "이번이든 다음 번이든 그런 건 없어. 나와 흥정을 하려는 모양인데 어림도 없어." "아들을 원하죠?" 그는 전혀 다른 화제를 꺼내는 미례의 의도가 뭔지 몰라 잠시 의아했다. "그렇죠?" 다정스럽게 미례가 재차 확인했다. "....그게 이일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아들을 몇이나 갖고 싶어요?" 그녀는 경휘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물었다. "그야 많을수록 좋겠지." "그래도 몇이나 원해요? 셋이요? 아님 넷?" 그건 너무나 유혹적인 제안이었다. 경휘는 홀로 외로웠던 어린 시절을 겪으며 자식에겐 많은 형제가 있기를 바래왔다. "그래, 넷 정도가 좋을 거 같아." "그래요? 그럼요, 휘. 약속해요.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좋으니까 아들 넷을 낳아주면 날 배에 태워 주겠다구요."


"......." 경휘는 김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이 불여우 같은 마누라 같으니. 그녀는 그를 구름 위로 띄워 놓았다가는 다시 땅 위로 내려놓으며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을 다시 맛보고 싶으냐고 묻고있었다. 그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그의 허탈한 웃음에 미례가 의아해하며 손길을 잠시 멈추었다. "....싫어요?" 다시 그의 어깨를 만지며 미례가 물었다. "날 약올리는 군. 하지만 미례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너와 굳이 약속하지 않아도 난 내가 원하는 아들을 가질 수 있는데" "...아뇨. 그럴 수 없을 거예요." "어째서?" "다른 여인을 통해서라면 모를까 내게선 그럴 수 없을 거예요." "널 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거야, 지금?" 그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였다. 그는 그런 식의 좌절이나 타협을 원치 않았다. "그건 아녜요. 어차피 힘으로도 난 당신 상대가 안되잖아요." "그러면...?" ".......아이를 갖지 않는 법을 배웠어요." "뭐라구?" "....잠자릴 해도 아이를 갖지 않는 방법을 배웠다구요." "누구에게서?"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건...말할 수 없어요." "새타니로군, 달리 누가 있겠어? 그 못된 노파 같으니 라구." 경휘가 화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잘도 미례에게 무기를 쥐어주는군. 그 못된 할망구 같으니. 참견할게 따로 있지, 이런 일에까지 끼어 들다니. "아녜요, 새타니가 아녜요, 휘." 미례가 그와 눈을 맞추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누구야? 새타니 말고 달리 누가 네게 그런 걸 가르쳐 준단 말야? 응? 누구야, 그 못된 것이?" 그의 얼굴이 울그락 붉으락 하니 변하고 있었다. 미례는 잠시 불안했으나 이내 웃음을 참으며 그를 피해 고개를 돌리고는 입술 을 깨물었다. "웃음이 나오나? 날 비웃는 거야, 미례?" 미례가 그의 화난 음성에 화들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나 그에게 잡힌 눈가에 담긴 웃음기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잘도 웃음이 나와?" 그가 이를 갈며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제발 요, 휘, 제발 그렇게 화내지 말아요. 무섭단 말예요." 미례가 정색을 하고는 애원하는 눈으로 그에게 다가가 그를 다시 의자에 앉도록 권했다. 마지못해 그가 의자에 앉았다. 미례가 다시 그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말해봐, 그런걸 가르쳐준 사람이 도대체 누구야?"


"당신이 그렇게 화내면 더 말할 수 없어요." 그는 화를 삭이며 숨을 골랐고 미례는 한동안 그의 뭉친 어깨근육을 풀어주는 데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약속하지 않으면 정말 내 자식을 낳아주지 않을 생각이야?" 한참 후 경휘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럴지도 몰라요." 미례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다른 여인에게서 자식을 봐도 된다구?" 그의 말투가 놀리는 듯 하게 변했으나 여전히 진지하게 말했다. "...정히 그러고 싶다면 요." 미례는 생각지 못한 그의 반격에 체념하듯 대답했다. 그러나 경휘는 미례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서 다른 여인에게서 자식을 보고싶진 않았다. "일곱으로 하지."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뭐라구 요?" "아들 일곱을 낳아준다면 그땐 너를 데리고 비단길을 가겠다고." 아들 일곱? 아마도 미례는 그 사이 약속 같은 건 까마득히 잊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미 치우가 있으니 여섯을 더 낳는다 해도 임신기간만 하더라도 족히 여섯 해는 넘게 걸릴 것이다. 해마다 아들을 낳는다 해도 앞으로 일곱 해 동안에는 그를 조르지 못할 것이다. 경휘는 그렇게 염두를 굴리며 만족스럽게 타협안을 내놓았다. "약속하는 거죠?" 미례가 기쁨으로 환해진 얼굴로 어쩔 줄 모르며 그에게 다시 확인했다. "약속해. 아들 일곱을 낳아주면 널 배에 태워줄 거야." "후에 다른 말하기 없기예요." "아예 글로 써줄까?" 그가 웃으며 미례를 놀렸다. "아녜요. 당신은 약속한 이상 그걸 지킬걸 믿어요.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아마도 아들들의 반짝이는 눈을 볼 때마다 가슴 한 켠이 아플 거예요." 경휘는 흐뭇하게 웃었다. 미례는 남은 햇수 같은 건 상관없는 듯 당장 다음달 에 떠날 수 있는 것처럼 기뻐하며 좋아했다. "자리를 펼까요?" 미례가 그에게 물었다. "그래, 그만 자도록 하자." 미례는 여전히 즐거워하며 자리를 펴고는 머리를 빗어 땋고는 자기 자리로 와서 누웠다. 경휘가 불을 끄고는 돌아와 그녀의 곁으로 들어왔다. 그의 곁에 바로 누웠던 미례는 잠시 후 경휘가 말없이 그대로 잠들려는 기색 을 보이자 몸을 뒤척였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는 작고 부드러운 손을 뻗어 경휘의 맨살을 조심스레 더듬었다. 그는 그녀의 따뜻한 손바닥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잠들려던 그는 잠시 놀랐으나 미례가 자신의 몸을 만지도록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빠르게 뛰고있었다.


미례가 먼저 손을 내민 건 그가 부상당해 체중을 지탱하지 못하고 욕구불만에 빠졌던 그때 뿐이었다. 그때도 그녀는 원치 않았으나 그를 편안하게 해주기 위 해서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었다. "왜 이러는 거야?" 경휘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짖궂게 물었다. "아들을 갖고 싶지 않아요?" 경휘는 달아오르는 몸을 달래며 키득거리며 웃었다. 앞으로의 잠자리는 편치 않겠군. 경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더는 참지 못하고 미례의 유혹에 뛰어들었다. 땀에 배인 그의 몸을 감싸안으며 편안해진 숨소리를 내며 미례가 잠들려고 하자 경휘가 확인하듯 그녀를 불렀다. "미례야." "음.." 잠결에 미례는 그의 품안으로 파고들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아들만 일곱인 거다. 딸을 낳아놓고 그때 가서 딴소릴 해도 안 되는 거야." "...알고있어요...걱정하지 말아요." 잠이 묻어난 미례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었다. 미례가 잠이 들고도 오래도록 경휘는 그런 미례의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 건 지 알지 못했고 몹시 궁금해졌다. 어느 날 스쳐 가는 말처럼 그는 미례에게 그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 세상 누구보다 널 아껴. 너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 생은 지금처럼 빛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어. 그러나 그들이 함께 할 긴 세월 속에서 그는 마음속으로만 깨달을 뿐 소리 내어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 미례 또한 그를 알기에 굳이 그에게서 확인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이 알음 받지 못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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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호] 11329 / 11888 애써 오므리는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든 그는 자신의 무릎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벌리고는 바지 끈을 풀며 이미 아프게 팽창된 자신의 양물을 그녀의 아무도 닿지 않은 곳에 갖다 대었다. 뜨겁고 불쾌한 이물감에 미례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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