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u on Google+

chapter 1 ==재미있는 일을 발견하다!==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

"죽이는군,: 망원경으로 보이는 반대편 풍경에 남자의 입에서 탄성도,그렇다고 신음도 아닌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바로 앞 맞닿은 건물 안에서 뜨겁게 입술을 부딪치며 남자를 한쪽 벽으로 몰아가는 여자의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의외의 사건 전개로 밤낮 잠복근무에 시달려 몽환적이었던 정신이 무자비하게 깨어지자,남자는 망원경에 붙어 버린 시선을 떼지 않으며 성마르게 담배를 뽑아 물었다. 빛과어둠.그 단조로우면서도 강렬한 이질 공간속에서 맹렬한 담배 불빛만이 유일한 색채를 담아 뻐끔거렸고,한껏 고조된 긴장의 기름이라도 부을 듯 창문 너머 남녀의 행위도 점점 농도가 짙어갔다. 여인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한꺼풀,두꺼풀,잘도 벗어 나간다. 한껏 발정이 나 인간과 동물의 경계인 자제심마저 떨어내고 다급히 일어서는 남자의 배를 발가락으로 슬며시 밀며,자극적인 스트립쇼마냥 여인의 몸이 만들어 내는 멜로디가 꽤나 자극적이었다. "흠....매일 이런 쇼가 벌어진다면 잠복근무도 할 만하겠는데." 비꼬인 즐거움이 담긴 소리를 중얼대던 남자는 떨어지기 일보직전인 담뱃재를 털기 위해 망원경에서 눈을 뗐다.그리고 재떨이를 찾아 잠시 허둥대는 찰나. 탕!탕!탕! 정확히 세발의 총성이 드센 기세로 밤 휘장을 찢으며 울려 퍼졌다. 떨어진 담배가 허벅지를 짓이기는 줄도 모른 채,남자는 망원경으로 시선을 돌리며 바로 숨을 죽였다. 고요한 침묵,창문은 어느새 칙칙한 커튼에 의해 가로막혀 버렸고,어두운 골목 전역은 언제 총성이 울렸냐는 듯 슬그머니 적막의 베일을 두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거친 소리를 주절대며 남자는 회사 비품 중에서도 꽤 고가인 망원경이 제 샌드백이라도 되는 양 크게 한번 내리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바람 소리마저 포착해 낼수 있을 정도로 고요하던 대기를 가르는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그 여자다!스트립쇼의 주인공.


반사적인 감각으로 권총을 꺼내 들기도 전,여자는 크레오파트라를 연상시키던 ?은 가발을 쓱 벗어던지며 남자 쪽 창문으로 흘낏 비웃음을 던진 채 유유히 사라져 갔다. 쾅 쾅 쾅!! 그리고 남자는..... 쾅 쾅 쾅!! 그리고 남자는,남자는.....! "야!문 안 열어?" 문이 붙어 있는게 대견할 정도로 과격한 노크 소리에,신들린 듯 낡은 타자기 위를 오가던 손놀림이 거짓말처럼 멈춰 버렸다.또 시작이었다. 언제나 고상한 초인종 대신 살인적 기세가 가미된 주먹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사람의 등장.한껏 열이 오른 창작 욕구를 사그라뜨리고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던 분위기마저 단번에 깨어 버리는 바로 그 단 한 사람의 등장 말이다! "어라?안 열면 쳐들어간다?좋아,카운트 들어가지 뭐.하나!둘......!" 머리를 쪼개는 편두통을 몰아내기 위해 예은은 심호흡을 한번 뿌린 후 천천히 현관문을 향해 걸었다. "둘이라고 했어!둘 반,둘 반에 반,둘 반에 반에 반,둘 반에 반에 반에...." 문이 열리자마자 어마어마한 잔소리 돌풍이 들이닥쳤다. "있으면 기척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매번 너 왜 그래?이 몸이 너 때문에 죽도록 고생해서 위장약까지 먹는데 찔리지도 않냐?" "그만...." 두 눈 가득 애원의 빛을 담고서 예은은 최대한 피곤에 잠긴 소리로 제지했다. "들어와." 남들이 보면 남자라고 오인할 정도로 남정적인 친구 유희는 예은이 거래하고 있는 출판사의 편집부장으로, 마감 때마다 이 난동을 부리곤 했다.하지만 왜 하필 한참 글발이 오르려는 순간마다 초를 치며 등장하는 것인지.이말도 안 되는 타이밍을 도무지 설명할 재간이 없었다. "원고는 다 됐겠지?" 현관 경계를 지나자마자 날아든 뾰족한 목소리에,예은은 안경을 벗고 미간을 누르며 부러 더 어깨를 떨어뜨렸다.부정적인 대답의 한층 업그레이드된 그녀만의 표현법이었다. "커피 마실래?" "커피 대신 널 갈아 마시고 싶은 기분이다,어쩔래!"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쏘아대는 유희를 바라보던 예은의 입에서 포기가 담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너 오기 전까지만 해도 잘 나가고 있었어." "떠넘기기 작전은 이제 네가 뵈도 너무 식상하지 않냐?" 완벽한 편집부장으로 돌변해 버린 친구가 야속해,예은은 최후 수단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던져 보았다.


평소 너무나도 좋던 친구로서의 감정을 끌어내 보자는 작전이었으나,공과 사를 철저히 구별하는 유희의 성격에는 어림도 없는 방법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별 성과도 없는 잔머리 작전들을 좌다 포기한 채 예은은 솔직하게 고백했다. "사실 이번 소설로 징크스를 좀 깨보려고 했는데 역시 안될것 같아." "그래서 또 직접 경험해 보시겠다?아서라,그 말 같지도 않은 징크스 때문에 얼마나 더 고생을 하려고 그래?게다가 이번은 소설은 어깨들 이야기인데 무슨 수로 경험하겠다는 거야?" 일단 소설의 소재가 잡히고 나면 직접 그 일을 경험한 후에야 한 글자라도 써내려 갈수 있는 이상한 핸디캡 탓에,소질도 없는 플레이 걸에서부터 시체 닦기까지 해본 그녀였다. 그런 시한폭탄 같은 존재가 엄청난 기획 기간을 거쳐 준비한 대작이 바로 암흑계 이야기였으니,문서와 책에서 훔친 지식만으로는 어차피 될 이야기가 아니었다. "잘 들어.이 소설은 당분간 보류야." 확고한 결심이 담긴 예은의 선언에,유희는 기차 화통보다 더한 소리를 질러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가 어쩌고 어째?" "조금 더 정보를 모은 다음에 시작할게." "얘가 미쳤어,정말!" 정보를 모은다....그말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유희는 과감히 편집 부장의 얼굴을 벗어 버렸다.고집스럽다 못해 작가주의 정신만 강한 이 친구가 기어코 일을 치러야겠다는 의사를 당당히 밝히고 있는 지금,원고고 나발이고 어떻게든 말려야겠다는 사고뿐이었다. "그래 좋아,정보를 모은다고 쳐.근데 방법 있어?" 예은은 잠시 눈동자를 굴리다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사람을 이용할까 해." "그 사람?" 갑자기 유희의 머리속으로 요즘 들어 예은이 부쩍 관심을 보이던 한 사내가 스쳐 지나갔다. "너 설마....!HS 그룹의 그 6 대 장손을?" 예은의 두 눈 가득 피어오른 열정의 빛 가루가 이미 모든것들 설명하고 있었다. 이어 그녀의 입에서는 컴퓨터가 데이터를 뽑아내듯 어마어마한 정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Hs 그룹의 6 대 장손이자 현재 서울 주요 일대를 휘어잡고 있는 젊은 보스,이런저런 소문만 무성하고 사생활이나 모습은 전혀 공개되어 있지 않은 철저한 신비주의자로,알려진 건 통용되는 명칭이 흑사라는 것뿐.얼마 전 하루 그룹 막내 손녀딸과 약혼 문제로 조금 떠들썩해질 뻔했지만 다시 소리 소문없이 잠적. 이 사람이 적격인것 같아. 내 흥미를 마구 자극하고 있거든." 유희는 무슨 말이든 해볼 심사로 입을 벌렸으나 너무 당혹스러워 연신 입술만 달싹였다.자신의 글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각오할 정도로 필사적인 예은의 강한 열정을 아주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더불어 지금 이 사태를 결코 말릴수 없다는 사실 도한 자연스레 납득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겠다.마음대로 해!" 마침내 유희가 두 손을 번쩍 들고 포기 선언을 하자,예은은 활짝 미소를 그렸다. "재미있는 일이 될 거야.위험하지도 않을 거고,그러니 편집부장님께선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기나 하세요." 언제나 새로운 먹이를 찾아냈을때 느껴지던 전율이 예은의 몸을 휘감았다. 생동감 넘치는 기운이 전신을 감싸고도는 이 기분이 너무 좋았다. 물론 쉬울 거라 생각지는 않았다.철저한 벽에 가려진 것은 물론,손꼽히는 대기업의 6 대 장손인 동시에 엘리트 보스라는 최고의 타이틀을 지닌 인물을 상대해야 할 판이었으니 꽤나 버거운 전쟁이 될지도 몰랐다.게다가 요즘 한창 잘나가는 모양으로,대단히 잔혹한 냉혈한이란 이야기도 있었고 기자들이 뒤를 밟다 여럿 호되게 당한 적이 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하지만 게임은 이미 시작되었다.예은에게는 오로지 그것만이 중요한 사실이었다.

chapter 2 ==흑사 생포 작전 제 1 단계:주변에서 어슬렁거리기==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백곰의 유골이 도착했습니다." 부들부들 떨리던 은규의 손이 급기야 담배를 바스러뜨리자 수야는 그대로 말을 끊었다.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뿜어져 나오는 무언의 살기가 번뜩이는 칼날처럼 카지노 안쪽 방을 잔뜩 휘젓고 있었다. "형님..." 분노를 억제하기 위해 은규는 정확히 30 초 동안을 한곳만 뚫어지게 응시했고,무시무시한 침묵은 두 사람을 한 공간에 가둔채 무심히도 빠르게 시간을 거두어 갔다. 얼마의 시간이흘렀을까.침묵 속 냉랭 전선을 가르며 은규의 입이 묵직한 소리를 뱉어냈다. "백곰은 우리 식구 안에서도 극비 인물이었다.녀석이 당했다는 사실이 뭘 뜻하고 있는지 알겠지." 좀처럼 감정을 그러내지 않는 얼음 같은 보스가 이렇게까지 격분한 이유는 단순할 정도로 명확했다. 숨소리와 눈짓 하나에서도 그가 무슨 생각을 품고,또 원하는지 단번에 알아챌 정도로 민감한 오른팔이자 정신적 친구인 수야로서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자연스레 알수 있는 문제였다. "그건 우리 식구들 안에 배신자가 있다는..."


수야는 말끝을 흐리며 잠시 눈치를 살폈다.검은 분노에 가려진 은규의 얼굴이 어느때보다 무시무시한 기운에 잠겨 뺨에 난 칼자국을 더욱 강하게 의식하도록 만들었다. "형님...." 입을 닫은 채 요지부동으로 앉아 있던 은규는 더 이상 타오르는 격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세차게 책상을 내리쳤다. "어떤 놈인지 알아낸다.반드시 알아내서!내손으로 직접 처리하겠어.직접." 은규의 두눈 가득 날뛰던 살기가 전신으로 번져가고 있었다.웬만한 일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는 그가 행동 전선에 서겠다는 것은,이번 일의 심각성과 함께 그의 개같이 말릴수 없는 성질이 개어났음을 표명하는 것이었다. "HS 호텔은 어떻게 처리할까요?백곰이 형님 대리인 자격으로 재무에서 보안까지,굵직한 것들을 모두 관리해 왔기 때문에 자리가 빈 요즘 분위기가 영 어수선합니다.이 틈을 타 거치적거리던 신흥파 녀석들이나 어중이떠중이들이 콩고물이라도 집어 먹을까 싶어 달라붙으면 호텔 이미지가...." "당분간 내가 직접 관리하지.넌 애들하고 오늘부터 전면 방어체제에 들어가라.수상한 작자가 있다거나 내 뒤를 캐는 놈을 발견하면 즉각 보고하고,최근까지 백곰과 관계한 사람들 리스트를 작성해 와." "예,형님." 자리에서 일어서는 은규의 뺨 근육이 미세하게 실룩였다.그의 조직은 철저한 상하 구조나 사업적 성격으로 구성된 여느 조직들과는 달랐다. 큰형님으로부터 조직체를 물려받은 이후,그는 소년원 출신의 떠돌이나 앵벌이를 하던 어린 소년들, 혹은 단 한번의 실수로 설자리를 잃은 자들을 하나둘 받아들여 현재의 구성원을 만들어 냈다. 자신들의 구여과생활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주먹조차 함부로 쓰지 않았고,소매치기나 해결사 따위의 영역엔 절대로 관여하지 않으며 깨끗하게 버텨왔다.그랬기 때문에 이 더러운 구덩이 속에서도 오염되지 않은 채 차차 세력을 키워 나가,구성원 모두를 믿고 신뢰하며 한없는 사랑으로 보듬어 안을수 있었다. 그런데 배신이라니.입에 담기도 구역질나는 단어를 상기하자,가슴속에 커다란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공허한 마음이 파고들었다.그 공허함은 단 ? 초도 되지 않아 거대한 분노로 탈바꿈했다.믿었던 만큼 배신자를 향한 증오는 분량을가늠할수 없을 만큼 과하게 부풀어 올랐다. 동물에게도 믿음은 존재한다.


맹수 호랑이조차 사람의 손에 길들여지면 주인만큼은 절대 물지 않는 법이다. 하물며 사고할 수 있는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신을 거두어 준 윗사람을 배신 한다는 건 있을수 없는 일이요,납득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그는 평소'눈에는 눈,이에는이'라는 이해 타산적인 말을 무척이나 경멸해 왔자만,이번만큼은그 룰에 절대적으로 동감하고 있었다.신의를 져버린 자의 결말은 단 하나,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고 똑같은 모양새로 짓밟히는 것뿐이었다. "집으로 가시겠습니까?" 한참의 터울 끝에 들려온 물음에 은규는 가까스로 분노에 잠긴 자아를 끄집어냈다. "아니,호텔로 가자." 그늘에 가려진 얼굴로 코트 깃을세운 후 가죽 장갑을 끼는 은규의 거친 행동들이,당장이라도 폭발할 다이너마이트의 그것처럼 위험스런 기운을 한껏 뿜어내고 있었다.

똑똑똑. "룸서비스입니다."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대답이 없어 카드 키를 이용해 안으로 들어선 예은은 그만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세상에...." 시트는 모두 벗겨져 바닥까지 늘어져 있었고,이리저리 널린 술병들은 물론,지독한 담배 냄새에 엉킨 갖가지 악취들까지,실컷 욕을 퍼붓고 나온 아래층 방도 무색할 정도로 그야말로 전쟁터가 따로 없는 형국이었다. "대체 뭘 하면 방이 이렇게 될 수 있는 거지?" 꽤 많은 인원이 모여 한바탕 축제라도 벌인 모양이었다. 예은은 제일 먼저 창문을 열어 공기부터 환기시킨 후 술병들을 퍼리해 나갔다. 여기저기 흘린 술 자국이 고급 카펫 위에 얼룩져 요상한 냄새를 풀풀 풍겨댔다. 벌써 몇 번째 방인지,세고 또 세다 결국엔 포기하고 말았다. 지난주부터 유희의 엄청난 만류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황은규에 대한 정보를 캐기위해 분주히 뛰어다녔지만 처음 얼마간은 절망스러울 정도로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일주일 전에야 비로소 이 호텔리 그의 소유임을 알아내,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메이드로 취직한 참이었다. 그녀의 계획은 이랬다. 1 단계.이방 저방 돌아다니며 동료들로부터 황은규에 관한 소식을 주워 듣는다. 2 단계,그가 방문하는 날이 되면 우연을 가장한 자극적인 만남을 선사해 접촉에 성공한다. 3 단계,몇 번의 엇비슷한 시도로 호기심과 환심을 샀다고 판단되면 사실을 말하고 인터뷰에 들어간다. 이토록 원대한 꿈을 가지고 온갖 잡일까지 도맡았건만,그녀가 알아낸 것이라곤 그가 호텔을 자주 방문하는 편이 아니며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는 빌어먹을


사실뿐이었다. 게다가 어깨들의 어두머���로서 가질 수 있는 추잡한 행적이나 과거도 없었고,작정하고 은폐한 것처럼 철저한 베일뒤에 숨어 있어 사진 한장조차 발견하기 힘들었다. '너무 쉽게 봤어....' 좀더 적극적인 방법이 아니라면 그를 만날 기회 따위는 주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무한대의 두려움이 엉켜 그녀의 심장을 옥죄어 갔다. 복잡한 생각들로 머리를 고문하고 있던 예은은 쓰레기를 비우기 위해 휴지통을 집어 들다 주사기와 흰 종이들을 발견하곤 멈칫했다. '이게 뭐야.혹시 마,마약?' 설마 하며 넘기고 싶어도 광란의 바람이 지나고 난 풍경에 제법 잘 어울리는 단어인지라 무시가 쉽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진 예은은 손놈림을 빨리해 새 수건과 일회용 세면도구를 들고 욕실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갑자기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려와 잠시 밀랍 인형이 되고 말았다. '사람이 있었어.' 커다래진 눈동자 사이로 나체의 남자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는 것이보였다. '으악,버,벗었잖아!' 예은은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고 돌아서 다급히걸음을 떼었다. "넌 뭐야." "루,룸서비스입니다." 초점이 전혀 없는 눈동자로 사내가 다가오자,예은은 생생한 나체를 보지 않기 위해 질끈 눈을 감고서 다급히 도구를 챙겨 들었다. "죄송합니다......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남자의 손이 재빠르게 팔목을 휘어잡아 그녀의 걸음을 막았다.보는것과는 다르게 제법 억센 힘이 느껴져 불쾌감은 금방 공포로 뒤바뀌었다. "룸서비스라,그럼 개인 서비스도 해주나?" '개인 서비스?이거 미친놈 아니야?' 능글맞게 손목을 비벼대는 남자의 행동에 담긴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예은은 경멸 어린 시선을 흩뿌렸다. "이거 놔요!" "꽤나 앙칼진데?얼마면 고분고분해지겠어?" 순식간이었다. 예은은 붙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거세게 남자의 뺨을 후려쳤다.엄청난 공포와 분노가 합세해 평소보다 갑절이나 되는 힘이 흘러나갔고,그 충격에 남자는 손을 놓치며 잠시 비틀거렸다. "미친놈!" 스스로도 놀랄 만큼 악에 받친 욕설을 퍼붓고서 다급히 문으로 내달리던 예은은 문고리를 힘껏 돌리기도전,우악스런 손에 머리채를 휘어잡히고 말았다.


"네까짓 게 감히 날 쳐?" 머리카락을 쥐고 비트는 포악한 손길에 엄청난 통증이 파고들었다.고통에 흐려진 눈으로 흘낏 올려다본 남자의 눈엔 초점이 잡혀 있지 않았다.대부분 흰자위로 채워진 눈동자가 사악한 살기 안에 잠식된 일종의 살인 무기 같아 보였다. '이 사람 제정신 아니야.약에 취한 게 분명해...!' 가슴을 덮쳐오는 손길에 벼락같은 비명을 내질렀지만 금방 틀어막혀 버렸고,두 사람은 잠시 비틀거리며 치열한 몸싸움을 벌였다.주체할 숭 없는 욕지가 역류하는 기분에 그녀는 남은 힘을 모두 끌어 모아 남자의 손을 힘껏 물었다.피가 배어 나왔는지 입안 가득 비릿한 맛이 퍼져갔고,통증을 못 이긴 남자가 던지듯 밀쳐내는 통에 예은은 금방 힘없는 볏단마냥 내동댕이쳐져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쓰러졌다.웅 하는 소리와 함께 밀려들었다.하지만 허둥지둥 기어 문을 빠져 나오느라 아파할 틈 은 주어지지 않았다. "너 이년!거기 못 서!" 도망쳐야 된다는 생각 외엔 사고가 불가능한데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고함치며 달려오는 남자의 광기 어린 모습이 또렷한 시야로 잡혀오고 있었다. '움직여!일어나 뛰란 말이야!어서!'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나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예은은,미친개에게 쫓겨 달아나던 어린 시절보다 더 절박하게 달리기 시작했다.그러나 갑작스런 긴장과 공포로 움츠러든 허파가 더 많은 공기를 요구해 댔고,주책 맞은 다리는 다시금 휘청대고 있었다. 복도는 왜이렇게 긴 건지.오늘따라 왜 아무도 나와주질 않는 건지.나쁜 일이 벌어지려고 작정하면 호텔도 이렇게나 한적할 수 있는건지.도무지 이해할수 없는 것투성이었지만 현실을 가혹했다. 얼굴 없는 조종자를 피해 미로에 내몰린 희생양처럼,희망은 점점 어둠의 나락 아래로 추락해 갔다. '제발 누군가 나타나 줘.제발 누군가 도와줘.제발 누군가 모습이라도 보이란 말이야.제발...!' 마침내 다리의 힘이 완전히 풀리고 말았다.동시에 절망도 함께 풀어졌다. 훅훅대는 열기에 머리가어질어질했고,타오르던 모든 생존 욕구는 아득한 정신너머로 줄행랑을 쳐 버렸다. 그때,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던 예은은 빠르게 다가온 누군가의 손에 의해 위기를 모면했다. ?에 닿아오는 넓은 가슴과 함께 담배와 비누 냄새가 섞여든 향취가 훅 하고 끼쳐오자,예은은 다 죽어가던 눈을 번쩍 뜨고 무작정 손가락에 말려오는 코트 깃을 움켜쥐었다.


"하아 하아....도와...하아...주세요!저기,하아......미친 사람이!" 헐떡이며 고개를 든 예은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혀가 마비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날카로운 흑 빛 눈매 사이로 단단히 뻗어 앉은 코와,인정이나 자비같은 단어는 도무지 꺼내 본적이 없을 것처럼 일직선만 그리고 있는 입술.그러나 그녀를 정말 얼어붙게 만든 것은 그의 오른뺨 위에 자리한 칼자국이었다.광대뼈 바로 밑쪽에 새겨진 아루 오래돼 보이는 상흔이. 눈앞의 사내 역시 결코 안전한 상대가 아니라는 양 비아냥대는 것만 같았다. 하찮은 동물을 피하려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면 이런 기분이 들까. 입이 막혀 거친 호흡을 뱉고 마시는 것이 고작인 예은의 얼굴을 감정 없는 표정으로 내려다 보던 사내가 불쑥 입을 열어 말했다. "좀 비켜줬으면 고맙겠는데." 낮고 느릿한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본능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이 남자에게서 도움을 바라는 것은 절대 무리인 헛꿈이라고. chapter 3 ==흑사 생포 작전 제 2 단계: 만났을 때는 무엇보다 강한 인상을!!==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은규는 자신의 옷깃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는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두눈 가득 서린,뭔지 모를 기운이 미세하게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것은 공포였다.지금껏 숱하게 보아왔던,죽음과 위험이라는 극한의 상황을 눈앞에 둔 사람들의 그것과 동일한 공포.대체 무엇 때문에 위험할 게 전혀 없는 호텔 복도에서 낌새를 느낀 은규의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렇게 시간이 꽤 흘러 나름대로 판단을 내린 수야가 여자를 제지할 목적으로 슬쩍 앞서 나오는데, 웬 남성이 내지르는 고함소리가 고요하고도 적막한 호텔 복도 안을 삼키고 뒤흔들었다. "이년 어디 갔어!" 옷깃을 쥔 여자의 손에 좀더 강한 힘이 들어가자,호텔 복도 모퉁이를 돌아 파자마 차림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은규의 눈동자 속으로 전광 같은 번득임이 흘러갔다. "감히 날 치고 도망가?이 빌어먹을 계......!" 흠,이거였군. 냉철한 이성이 상황을 일깨워 은규의 입가에 싸한 미소를 그려놓았다.백곰의 부재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 벌써부터 저런 얼간이들이 몰려들다니,이런 식으로라면 호텔 명성이 추락하는 것쯤이야


시간문제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천일도입니다." 언뜻 보이는 미치광이를 살핀 수야가 짧게 언질을 주었다. "천일도?" 기억에 있지 않은 이름이었다.초점 하나 없는 눈으로 달려드는 꼴을 보며 남의 등이나 쳐 먹고 사는 조직 폭력배의 끄나풀이나 하수 같다고 묵묵히 짐작할 뿐이었다. "뭐하는 녀석이냐." "족제비라고,돈이 먼지보다 많다는 부산 마이더스의 사생아라 들었습니다.파주 신도시 유흥 단지 계획을 녀석이 지휘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 얼마 전,각 조직 중간급 보스들이 찾아와 파주에 있는 그의 땅을 팔라고 제안한 일이 있었다. 2 만 평부지에 엄청난 환락가를 만들 계획인데 그의 땅도 그 안에 속해 있다는 이야기였다. 지금껏 타 조직과 손잡는 일은 하지 않았고,얄팍한 이권 나누기에 힘을 보탤 생각도 없어 대꾸도 않고 돌려보냈지만 이런 식의 사업이 조용히 마무리될 리는 만무했기에 기분은 과히 좋지 않았다. 처음엔 자금과 세력 확보를 위해 웃는 얼굴로 손을 잡는것이보통이지만,더 이상 도움이 필요없다고 판단되면 무서운 적군으로 돌변하는 것이 이곳 생리였다.그 하루살이 같은 권력을 거머쥐기 위해 설쳐대는 또 하나의 얼간이라니,은규의 입가로 싸늘한 냉소가 찾아들었다. 얼굴을 알아볼수 있을 만한 거리까지 비틀대며 다가온 남자는 다짜고짜 거친 소리부터 지껄여 댔다. "넌 뭐야!" 진동하는 술 냄새가 몹시도 고약한 것은 물론,한껏 치켜뜬 눈동자 속에 싸움을 하지 못해 안달난 맹수의 광기가 내재되어 있었다.묵묵히 남자를 바라보고 있떤 은규의 한쪽 눈썹도 이내 오만하게 치켜 올라갔다.그것은 그의 신경이 약간 날카로워졌다는 무언의 경고였다. "후회할 짓 말고 돌아가십시오.당신이 상대할 만한 분이 아닙니다." 보스의 심경을 대번에 알아챈 수야가 재빠르게 끼어들자,날카로운 공격이 되돌아왔다. "상대할 만한 분이 아니라고?아,이년 기둥서방이라도 되는 모양이지?" 더 깊게 파고드는 삭막한 분위기 속에서 예은은 편안히 풀어져 있던 은규의 몸이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말을 함부로 하는 녀석이군." "너야말로 내가 누군지 알고 지껄이는 거야?" 이제 완전히 자극을 받아 버린 미치광이가 다급히 여며 입은 것이 분명한 파자마를 펄럭이며 덤벼들었다. 만취한 사람 치고는 제법 쓸만한 빠르기였다.순식간에 벌어진 공격에 수야가 나서려 했지만,은규의


오른손이 먼저 재빠르게 뻗어 나갔다. 일체의 움직임도 없었다.그냥 그 자리에 서서,심지어 왼손은 주머니에 그대로 찔러 넣은 채 오른손만 내뻗었을 뿐이다.고요한 침묵이 찾아들었다.죽은 듯 어깨를 웅크리고 있던 예은은 슬쩍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커다란 손바닥이 남자의 얼굴을 한손 가득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개새끼!놔! 안 놔?" 바둥대는 남자의 얼굴을 쥔 은규의 손에 더 강한 힘이 들어가자,고통스러운 신음과 발광은 한층 더 거세어졌다. "호텔에 왔으면 곱게 잠이나 자고 갈것이지,시끄러운 일을 왜 만드나." "윽,........네까짓 게 잘도.....으악!" 결국 남자는 주저앉으며 몸을 비틀었다. "달고 있다고 모두 남자는 아니지." 경멸 섞인 말을 마지막으로 은규가 남자의 얼굴을 던지듯 밀쳐냈고,힘없는 몸뚱이는 정확히 두번이나 굴러 늘어지고 말았다. "너 이 새끼,이러고도 무사할 줄......알아?윽....." 별 위협도 되지 않는 말만 쥐어짜는 얼간이가 한심해진 은규는 컴컴한 분노속에 얼굴을 숨겼다. "처리할까요?" "단속 좀 해야겠다." "예." 예은은 멍하니 서서 멀어져 가는 남자의 넓은 등만 바라보고서 있었다.누굴까,저사람은. 명령하는 것이 익숙해 듣는 이로 하여금 바로 순종하게 만드는 엄청난 카리스마를 갖고 있는 남자.너무 강렬한 느낌에 소설가로서의 직감이 예리하게 일어선 예은은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해 대뜸 소리치고 말았다. "저.....저기요!" 남자가 시선을 맞춰왔다.하지만 두눈 가득 들어오는 귀찮은 감정에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이든 해!남자가 기다리고 있잖아!' 갑자기 머리속에 백가루가 내려앉은 느낌이었다.은근하지만 강렬한 시선이 예은의 입술에 단단한 족쇄를 채우고 있었다. "뭐지?" 참다못한 은규가 지루한 기미를 담아 툭 내뱉었고,예은은 최대한 정중히 이야기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전............" "별로." "네?" 작가로서의 기질을 발휘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언어만 골라 진심을 전하려던 예은의 꿈은그렇게 흩어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별로 당신을 돕고자 한게 아니었어.녀석이 내 신경을 건드렸고,난 반응한 것뿐이니까 감사 따윈 받을 이유도,생각도 없다는 이야기야." 일말의 여운도 없이 은규는 모퉁이를 돌아 사라져 버렸다.

chapter 4 ==흑사 생포작전 제 3 단계? 만나야 실행을 하지..........== -예은의 메모 노트중에서초인종을 누른지 한참인데도 문이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은규의 손이 다시 한번 거칠게 초인종을 눌러댔지만 문안에서는 이런저런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다시 한번 말해 봐요!" 여자가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로 한껏 토라진 듯 말하자,킥킥 대는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여자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가 싶더니 다시 이어지는 침묵. '뭣들 하는 거야?' 더는 참을 수 없어진 그는 문을 부슬 기세로 주먹을 움켜쥐고 나서야 견고한 문이 딸칵 하고 열렸다. "어머!" 찌푸린 은규의 시야로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배를 한채 활기차게 웃고 있는 동생의 아내 새벽이였다. 빨갛게 부어오른 입술과 상기된 뺨이 방금 전까지 그들이 무얼 그리도 열심히 했는지 대충이나마 짐작케 했고,그 옆에서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서있는 동생은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것이 몹시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 끝을 올리고 있었다. "방해한 거냐?" 물고 있던 담배를 깊이 빨며 건넨 은규의 물음에 새벽의 입에서 얕은 기침이 흘러나왔다.그제야 자신이 습관처럼 담배를 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은규는 반도 태우지 않은 꽁초를 바닥에 뱉어 꺼 버렸다. 평소 여자라는 존재에 대한 배려라고는 도무지 해본 적이 없던 차라,임산부인 제수씨 앞에서 가져야 할 조심성들이 때때로 꽤 피곤한 기분에 젖게 했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형을 죽여 버릴지도 몰라." 언제나 그랬듯 동생의 신랄한 도전에 엔돌핀이 마구 치솟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더 끔찍한 소리를 뱉어줄 심사로 막 입을 벌리려는데,새벽의 입에서 흘러나온 새된 비명소리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아주머님 앞에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주머님......대체 저 호칭 장난질은 언제까지 우려먹을 생각인지,언제나 지루한 일상을 잊게 만드는 작은 제수에게서 그는 한번도 제대로 된 호칭을 들어본적이 없었다. "나를 졸지에 아줌마로 만들수 있는 사람은 아마 제수씨밖에 없을 겁니다." 동생 부부로부터 흘러나오는 행복의 기운이 줄곧 한 일자만 긋고 있던 은규의 입가에도은은한 미소를 전염시켰다. "무슨 일이야?" 소파에 앉자마자 평온한 얼굴로 물어오는 동생을 은규는 조용히 바라보았다.녀석의 모습에 변화가 있었다. 언제나 과묵한 슬픔에 젖어 있던 눈동자에서 언제부터인가 다른 감정도 읽을수 있게 되었다. 너무 충만해 밖으로 비치지 않고는 배겨낼수 없을만큼 넘치��� 감정.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수는 없었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동생의 모습이 과히 나쁘진 않다는 것이었다. 산넘어 수렁을 만나고,바다 건너 암초를 만난 끝에 결실을 맺은 동생의 사랑은 눈동자를바꾼 것도 모자라 세상을 보는 잣대마저 완벽히 변화시켜 버린 듯했다. 여새벽이라는 여자의 대단함을 다시 한번 느끼며 은규는 소파에 더욱 편히 자리를 잡고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의논할 일이 좀 있다." "뭔데?" "호텔 일에 내가 다시 관여를 해야 할 듯하다." 현석의 입에서 가느다란 탄성이 새어 나왔다. "아버지가 넘겨준 거라 쳐다보기도 싫어했으면서 왜?백곰이란 비밀 병기가 믿기 어려울 만큼 제대로 관리하는 모양이던데 누구한테 꼬투리라도 잡힌거야?" "녀석이 당했어." 음울한 목소리에 담긴 찝찔한 기운이 현석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둬갔다. "뭐야,그 말뜻은...." "우리 아이들 안에 배신자가 있다는 소리지." 비밀병기.은규에게 있어 백곰은 그런 존재였다.자신을 철저히 숨겨 절대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놀라울 만큼 효율적으로 호텔을 관리했었고,그것은 그가 컴퓨터와 숫자 천재였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은밀히 호텔 경영권을 쥐게 된 후로 백곰은 놀라울 만큼 빠르고 간결하게 일들을 진행해 나갔다. 고지식한 기존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로고부터 건물 내부 인테리어까지 모두 수정해 버렸고, 거대한 전산망을 설치해 컴퓨터와 전자 시스템만으로 손님과 직원들의 세세한 정보까지 모두 관리해 나갔다. "교통사고였어." "교통사고?"


"겉으로 보기엔 그렇다는 얘기야.소식 듣고 달려가 보니 차도,녀석도,흔적없이 다 타버렸더구나, 목격자도 가해자도 없어.형체 없는 피해자만 덩그러니 남았을 뿐이지." 현석이 조심스런 표정으로 반문했다. "확실히 수상하긴 한데,그냥 뺑소니 사고일 수도 있잖아." "차에 누군가 방화한 흔적이 남아 있었어.틀림없이 당한 거야." "집히는 사람이라도 있어?" 은규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땅 때문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파주에 있는?" "그래.전에 얘기했던 그 유흥 부지중에서 내것만 접수하지 못한 모양이야.상대도 않고 돌려보냈을때 이미 어느 정도의 싸움쯤이야 각오하고 있었지만 백곰의 존재를 알아냈다는 건 심상치가 않아.우리 쪽에 스파이가 있는 게 확실한 것 같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자신의 식구들을 목숨처럼 여겼던 형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현석이었기에. 배신자의 존재는 그에게도 제법 충격으로 다가왔다. "감히 누가 그따위 역겨운 짓을.............." 서로의 마음이 통했던지 형제는 잠시 시선을 나누었고,분위기는 점점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럼,의논할 일이란 건 호텔에 관련된 거겠네." "이미지가 많이 떨어졌어.대대적인 이벤트를 하나 열었으면 한다.자문이 필요해.경영에 있어서는 네 녀석이 나보다 한수위니까." "자선기금 파티나 콘서트 어때요?" 갑자기 뒤쪽에서 들려온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침침한 기분에서 벗어난 두사람은 얼른 시선을 모았다. 가느다란 몸에 볼록 나온 배를 하고서도 새벽은 절대 지치는 법을 몰랐다. "그건 좀 흔한 발상 아닌가.콘서트는 너무 대중적이고,협찬 정도면 모를까....." 은규의 혼잣말에 새벽은 감잎차를 내려놓으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그럼,콘서트는 관두고 자선기금 파티 쪽으로 의견을 모으죠.대신 좀 색다르게 하는 거에요.왜 있잖아요.만화나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가면 파티 같은거.난 그런 파티에 참석하면 꼭 한번 줄리엣이 돼 보고 싶었어요.식상할지도 모르니까 조금 파격적이 되는 것도 나쁘진 않을것 같아요.하얀 드레스 대신 빨간 드레스를 입고........" 새벽의 혼란스러운 말버릇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했다.끝까지 다 들어야 그 뜻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고,말 중간 중간에 쓸데없는 자기 생각들을 어찌나 많이 집어넣는지 결국엔 삼천포로 빠지고 나서야 끝을 맺곤 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설마 제가 호텔 이벤트라는 거대프로젝트를 제 개인 욕구를


위해 이용할까 봐서요?말도 안돼요.그냥 굉장히 색다른 이벤트가 될것 같아서 말씀드린 것뿐이에요.대부분 그런 파티는 특정인에게만 해당되잖아요.연예인들이나 재벌 모임,아니면 큰 시상식 같은데 말에요.하지만 이번 파티는 그걸 깨고 민간인들도 참여할 수 있게 하는거에요.평소 HS 호텔하면 너무 고급스러운 이미지라 다소 거리감을 느꼈단 서민들에게 친근감을 줄수 있는 기회가 될것 같은데,어때요?너무 터무니없나요?" 엄청난 빠르기로 말을 쏟아낸 새벽은 두눈을 깜빡이며 은규와 현석을 번갈아 주시했다. "자,사람이 열심히 머리 굴려 내놓은 의견을 들었으면 대답들을 하셔야죠?" 기애에 부푼 새벽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이 두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괜찮은데." 현석이 먼저 동의했다. "서민들을 겨냥한다면 여론은 자연적으로 형성되겠지.게다가 거둬들인 현금을 실시간으로 통계 내고, 파티 끝 시점에 직접 전달한다면 감동적인 장면도 좀 연출이 될테고 신뢰도 깨지지 않을 거야. 이미지 마케팅으로 아주 괜찮겠는걸."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던 새벽은 늦을 새라 덧붙였다. "꼭 가면 컨셉으로 가야해요.꼭이요!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별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음...... 어디까지나......그래!차별화를 위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차별화." 현석이 킥킥대고 웃기 시작했다. "형,어때?이사람 뜻대로 안해줬다간 큰일 날 태세인데." "괜찮을 것같긴 한데,예상했던 것보다 꽤 큰 이벤트가 되겠어." 생각에 잠긴 은규의 손이 습관처럼 담배 케이스를 열었다. "형,조카 건강 좀 생각하는게 어때?" 동생의 말에 불현듯 제수가 임신중이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한 은규는 그대로 담배를 손에 쥐었다. "몇 개월이지?" "너무한거 아니야?이제 6 개월에 접어드어,관심 좀 가지라고." 실랄하게 쏘아대는 현석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새벽의 눈을 흘겼다. "당신도 만만치 않았으면서 뭘 그래요?다 이몸이 나서서 사람답게 만들어 준 덕분이지.그러고 보면 사랑만큼 대답한 것도 없다니까요?뭐,아주머님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여러 사람 편할텐데,정말 만나는 사람 없어요?" 뚜쟁이로 나설 모양인지,요즘 들어 그의 여자 문제에 저극적이 된 작은 제수 때문에 여간 불편한것이 아니었다.결국 은규는 대답을 미루고 감잎차를 들이마시며 슬쩍 말을 돌렸다. "괜찮다면 파티 준비는 제수씨한테 맡길까 하는데." 현석이 발끈했다.


"형,이사람은 지금 임신중........." "제가 할게요!!하고말고요!!" 두눈 가득 반짝이는 열망을 담고 끼어든 새벽으로 인해 현석은 말을 다 마칠수 없었다. "당신 미쳤어?" "미치긴 누가 미쳐요?" "그런거 준비하는게 보통 일인줄 알오?" "보통 일이든 아니든 할거에요!!많이 움직이고 활동하는게 순산하는 길이란거 몰라요?옛날 사고방식대로 꼼짝없이 집에만 박혀 있다 엄청 뚱뚱해져서 아이낳는데 죽도록 고생하면 당신이 책임질것도 아니잖아요." "제길,형.어떻게 좀 해봐!" 자기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안 현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은 여자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라." "알 이유도 없지만 필요한 만큼은 알고 있어." "웃기지마.형 머리 속에 여자라는 존재가 있기는 해?앞으로어떤 사람을 만날지 모르겠지만 그 여자 앞날이 심히 걱정된다고." "괜한 걱정 접어둬.독신으로 살 생각엔 변함이 없으니까." "형,벌써 잊었나 본데 나도 예전엔 제법 콧대 세우고 살던 사람이야." 은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갈 채비를 했다. "누구처럼 여자 때문에 술 취해 우는 꼴은 보이지 않을 테니 걱정 붙들어 매시지.난 네 녀석하고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다." 표정은 미미한 미소를 담고 있었으나 그안에 담긴 무언의 강압이 그의 확고부동한 의지를 당당히 드러내고 있었다. chapter 5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줄리엣을 만나다.== -예은의 메모 노트중에서이렇게 화려한 파티는 난생 처음이었다. 평수를 가늠하기도 힘든 홀에 가득 모인 사람들 모두가 영화에서나 봄 직한 복장들을 한 채 가면까지 쓰고 있었다.정말로 이런 파티를 현실에서 경험하게 되다니,입이 쩍 벌어져 도통 다물어지지 않았다. "여기가 진짜 대한민국이 맞나 몰라." 이 특별한 파티를 취재하기 위해 온 기자들이 쏟아내는 플래시 탓에 몹시도 눈이 따가웠고,홀 중앙에 마련된 거대 오케스트라는 한국 악기와 외국 악기가 결합된 퓨전 형식으로 조화롭고 은은한 연주를 깔고 있었다. 모자란 일손을 메우기 위해 메이드 가운데 젊고 용모가 좋은 사람들도 오늘만큼은


서빙에 투입되었다. 그'젊고 용모가 좋은'사람들 중 하나로 뽑힌 예은은,사람들 사이를 마음껏 누비며 책 속에 써먹을 소재가 없을까 싶어 잔뜩 흥분해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진짜 흥분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황인규가 이 모임에 등장한다는 사실! 처음 그 소식을 접했을때,예은은 그동안 겪었던 온갖 수모와 고생을 보상 받기라도 한 사람처럼 10 분 동안을 깔깔대고 웃었다.아무래도 그를 만나려는 계획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차에 들려온 희소식이었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이 내려준 어떠한 계시와도 같이 여겨졌다. 지금쯤 호텔에 도착은 했을까?혹시 이안에 서 있는건 아닐까?또 말도 안되는 사정으로 불참하는 일은 일어나지 안겠지?그러기만 해봐라!정말이지,다엎어줄 테니까. 오로지 한가지 생각에만 빠져 넋을 놓고 있느라 그녀는 누군가와 거세게 부딪혀 쟁반을 놓치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쨍그랑! "어머!" 경쾌한 곡을 연주하고 있던 오케스트라 덕분에 소음은 묻어 둘수 있었지만 앞에 서있던 남자의 멋진 옷 일부를 적신 일은 무마할 수가 없었다. "죄,죄송합니다." 난감한 기색으로 살짝 고개를 들어 보니 훤출한 로미오가 눈에 들어왔다.가면 덕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들려온 목소리로 판단하건대 큰 소란을 일으킬 상대 같지는 않았다. "괜찮습니다." 느릿하면서도 정중한 목소리가 누군가를 연상시켰다.이렇게 멋진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라면 잊을리가 없는데. 그때 뒤쪽에서 웬 여인의 작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세상에!"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예은은,등에 까만 날개를 단 새빨간 드레스의 여인이 풍성한 머리를 휘날리며 달려오는것을 보았다. "무슨 일이에요!파티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는데." 유일하게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 여인의 커다란 눈이 곧장 훤칠한 로미오에게로 향했다.로미오와 줄리엣,복장으로보나 기분좋은 대화 소리로 보나 연인사이가 분명한 두사람의 표정에서 애정을 읽어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줄리엣의 말은 너무 빨라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로미오는 용케 알아들은 모양인지 고개까지 끄덕이며 가면을 벗고 있었다.


그 안에 담긴 얼굴을 확인한 예은의 눈동자에 감탄의 빛이 어렸다.지독히 잘생긴 얼굴 때문이기도 했지만,품에 안긴 여인을 주시하는 따뜻한 눈빛이 정말 매력적이었다. "별일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로미오의 은근한 목소리에 비로소 마음을 놓은 줄리엣은 안도의숨을 내쉬며 말을 멈췄다. "그럼,좀더 체크하고 올테니까 기다려요?" 남자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고 돌아서던 줄리엣은 바로 앞에선 예은을 보고 다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옷도 흠뻑 젖었네요." 그제야 예은은 자신의 치마가 붉게 얼룩진 채 푹 젖어 있음을 발견했다. "갈아입어야겠어요." "괜찮아요.물로 대충 빨던지,제가 알아서 처리...." "그 정도 갖고 가려질 얼룩이 아닌데요.뭘." 줄리엣은 결심을 굳힌 눈초리로 대뜸 예은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이끌기 시작했다. "정말 괜찮아요!" "포도주 얼룩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거 몰라요?이러고 계속 서빙을 할순 없잖아요.난 조금이라도 더 파티를 완벽하게 해야 할 사명이 있는 사람이니까 협조 좀 해주세요." 싹싹하게 말을 건네고 씨익 웃어 보이는 줄리엣의 미소에는 무의식적으로 따르게 할만한 최면 효과가 담겨 있었다.여기저기 구불구불한 코너를 돌고 계단을 오르기도 하면서 두사람은 호텔 한쪽에 마련된 방에 도달했다.문앞에 버젓이 '관계자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데도 줄리엣은 전혀 거침이 없었다. "여기 어딘가에 유니폼이 있을거에요.직원들 발품 조금이라도 덜 팔라고 행사장에서 최대한 가까운 룸에 임시 창고를 만들어 놨거든요." 분주히 움직이던 여인은 한참을 씨름 끝에 곤란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어떻게 하죠?메이드까지 서빙에 동원되는 바람에 여분의 유니폼이 남아 있지 않은것 같아요." "그냥 대충 빨아 입을게요.생각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미안한 웃음과 함께 허리를 굽히는 예은을 보며 줄리엣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이내 악동 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업무를 조금 바꿔 볼까요?" 예은은 눈을 깜빡이며 제대로 된 설명을 기다렸다. "적당히 거닐면서 직원들 친절도를 체크하는 거에요.원래는 제가 다 해야 하는일인데 조금 힘에 부쳐서요,도와줄래요?" "죄송하지만 같은 직원 입장에서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은데요." 마치 호텔 스파이처럼 느껴진 예은이 조심스레 거절하자 줄리엣이 손사래를 치며 말을


보탰다. "아,오해하지 말아요.깐깐한 상사처럼 직원들 점수를 매기라는게 아니라 가장 친절한 사원 하나만 뽑아달란 얘기니까요. 파티가 끝나고 주말쯤에 해당 사원이있는 팀에 회식비가 주어질 예정이거든요." "그 정도라면 상관없지만...." "좋아요.그럼 유니폼 말고 다른 옷을 한번 찾아보죠." 다시 돌아서 두리번거리는 줄리엣을 보며 예은은 마치 회오리 속에 말려든 사람마냥 멍한 기분으로 서 있었다. "이게 좋겠네요." 곧이어 줄리엣이 내민 드레스는 아주 얇은 천으로 만들어진 은은한 파스텔 연보라 톤으로,몸에 딱 맞도록 재단된 것이었다.여기저기 흩뿌려진 작은 보석 알갱이들이 반짝거려 지나치게 화려해 보이기도 했지만 색이 워낙 은은하고 자연스러워 천박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어째서 드레스를....." "눈에 띄지 않게 사람들 틈에 섞여야 하니까 적어도 손님처럼은 보여야죠." 보기만 해도 엄청난 가격이 예상되는 드레스를 바라보며 예은은 꼭 영화속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열심히 일한 대가로 주어진 물건 외엔 소유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조심스레 드레스를 밀어냈다. "죄송합니다.이렇게 고가의 옷은 입을 수가 없어요." 예은의거절에 호텔이 꺼질듯 한숨을 흘리던 줄리엣은 갑자기 배를 움켜쥐며 아픔을 호소했다. "아...!" "왜 그래요?어디 아파요?" 예은의 머리 속은 일순 대혼란에 빠져 버렸다. "어떻게 하지?아..침착하자.침착해.먼저 병원에 번호부터...." 발을 동동 구르며 냉정을 찾고자 애쓰던 예은은 문득 여인의신음소리가 멎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아섰다. "괜찮아...졌어요?" 줄리엣이 잔뜩 수르렸던 몸을 펴며 진지하게 말했다. "아이가 그러는데요..." 순간 당황, "아이가 말을 해요?" "네,아이가 그러는데요...당신이 드레스를 입으면 잠잠해지겠대요." 여인이 생긋 미소를 지어 보이자,예은은 갑자기 긴장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너,,,너무해요..정말 놀랐잖아요!" "자꾸 신경쓰이게 하면 진짜 아플지도 몰라요.마음속으로 암시를 걸면 정말 그렇게 되기도 하거든요. 회사 입장에서 빌려주는 거니까 깨끗이 입고 반납하세요." 기가 막혔다.다짜고짜 어딘지 모를 곳으로 데려와 엄청난 가격의 드레스를 내미는


것도 모자라, 아이를 앞세워 무시무시한 협박까지 늘어놓는 이여자,더욱 이상한 것은 거부감 따윈 느끼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활짝 웃고 있는 얼굴 탓일까,아니면 이 작은 여인에게서 풍기는 행복의 기운 탓일까.무엇보다 아이 같은 순수함이 경직되어 있던 그녀의 입가에도 미소를 옮겨놓았다. "당신 정말 독특한 사람이군요." "고집도 무지 세죠.더 시험해 보고 싶지 않다면 이제 그만 포기해요." 결국 예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갑자기 자신이 입고 있는 더러운 유니폼이 너무도 무겁게 느껴졌다. "난 뒤돌아 있을 테니까 얼른 입어요.아주 예쁠 거에요." 줄리엣이 돌아선 것을 확인하자마자 예은은 망설임 없이 옷을 벗기 시작햇다.맨살에 와 닿는 드레스의 감촉이 너무 부드러워 탄성이 흘러나올 뻔할 걸 겨우 참아냈다. 스르르 몸을 타고 올라오는 하늘하늘한 감촉과 몸에 밀착되는 타이트한 디자인. "이런...좀 작은가 봐요." 드레스가 드러낸 적나라한 곡선에 예은이 난감한 목소리를 내자,줄리엣이 핑그르르 돌아 잔뜩 흥분된 표정을 지었다. "작다니요.맞춰 놓은 듯 딱인데요?정말 예뻐요.그럼 이제 옷으 컨셉을 정하죠.뭐가 좋을까..." 귀여운 표정으로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던 줄리엣은 손바닥을 마주치며 외쳤다. "신데렐라!." 입가에 금방 함박웃음이 피어 오르는 것을 보니.자신이 생각해 낸 컨셉이 적잖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였다. "유리구두만 있으면 완벽하겠는데,기다려 봐요,찾아볼게요." "잠깐만요!잠깐..." 말릴 틈도 없이 줄리엣은 이미 몸을 돌려 뒷문으로 향했고 예은은 낯선 공간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꼴이 되고 말았다.지퍼도 채우지 못한 아슬아슬한 차림새로 멀거니 있자니 보통 불안한 생각이 드는게 아니었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무엇보다 줄리엣의 정체가 몹시도 궁금했다.언뜻 듣자니 이파티를 계획하고 준비한 사람인 것 같은데 주최자 황은규와도 연관이 있는 사람일까? '혹시...애인?' 그건 아닌 것 같았다.여인의 손엔 분명 반지가 끼워져 있었고,아까 본 훤칠한 로미오의 손에도 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던 것으로 짐작컨대 그들은 부부가 확실했다.그것도 곧 태어날 아이를 둔 아주 행복한 부부. 그다지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로미오 부부가 황은규와 관계된 사람들이란 사실은 아주 쉽게 유추할


수가 있었지만,홀로 남은 지 3 초도 되지 않아 또 한사람에게 생각을 집중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 바보처럼 느껴져 참을 수가 없었다. "후...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되는 거야." 서늘한 공기가 맨살을 자극해 영 기분이 좋지 않은데 뒷문쪽에서는 아직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렀을 즈음,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드디어 줄리엣이 돌아왔구나 싶어진 예은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웃음기를 담아 부탁했다. "저,지퍼 좀 채워 줄래요?등이 얼어 버릴 것 같아요." 하지만 대답 대신 들려온 묵직한 발소리에 등골이 다 서늘해졌다.작은 여인의 것이라곤 도무지 믿을수 없을 만큼 느릿한 걸음이 온몸의 혈관을 민감하게 치켜세우자,예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민감해진 귓가로 자극적인 목소리가 파고 들었다. "겁 없는 여자로군." 느릿하면서도 낮아 언젠가 기억 속에 저장해 두었던 낯익은 목소리. 상대를 확인한 순간,예은은 그만 책받침처럼 빳빳해지고 말았다. chapter 6 ==말발 쎈 남자는 정말이지,밥맛이라니까.== -예은의 메모 노트중에서빌어먹을,정신이 하나도 없다! 호텔앞,심지어 로비까지 모두 점령해 버린 가면 인간들의 모습이 안 그래도 피곤한 눈을 현란하게 어지럽히고 있었다.게다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수야까지 후크 선장 모습을 하고 나타나 선원으로 변장한 떡대들과 함께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거기다 한술 더 떠 그에게 피터팬으로 변장할 것을 은근히 강요하다니, 기가 차 말도 나오지 않았다. 파티는 무르익어 갔으나 도무지 즐길 만한 기분이 들지 않아 지루함 속에서만 헤매고 있던 은규는, 맘 편하게 담배를 태울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 지독히도 그리웠다. 무작정 담배를 하나 꺼내 물며 복도 깊이 들어서던 그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달린 문을 발견하고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저기가 좋겠군.' 모두들 파티에 정신이 팔려 있으니 저 문안의 세상만큼은 충분히 혼자 쥐고 누릴수 있을것 같단 만족감에 취한 은규는,담배 연기를 깊이 마시며 문을 열었다.희뿌연 연기가 한치 앞 시야를 가렸다 사라진 후, 확보된 시야 사이로 등을 훤히 드러낸 여자가 잡혀왔다. 누구?


의문에 찬 은규의 시선이 여인의 몸을 천천히 훑어갔다.머리카락이 길었다면 조금이라도 가릴수 있었을 테지만,어깨에서 찰랑이는 길이가 적나라할 정도로 등을 다 내보이고 있었다. 호텔 관계자 외에는 들어올 수 없는 방에 자리한 미지의 여인.덕분에 이곳에서도 혼자만의 자유는 누릴수 없겠다는 깨달음이 은규의 눈썹을 날카롭게 갈았다. "저,지퍼 좀 올려줄래요?등이 얼어 버릴 것 같아서요?" 휘었던 눈썹이 이번에는 날카롭게 치솟았다.지퍼를 올려달라?그 따위 부탁이 과연 낯선 남자에게 할수 있는 것인가. "겁 없는 여자군." 한껏 비난을 담아 내쏜 은규의 말에 깜짝 놀란 여인이 몸을 돌렸다.지독히고 작고 하얀 얼굴 어딘가에서 낯익은 기운이 느껴졌다. 은은한 화장기의 얼굴을,청명한 빛이 감도는 흑색 머리카락이 흩어져 감싸고 있었다. 한껏 꾸며 정갈한 여인들의 그것과는 다르게,눈앞 여자의 머리카락은 어깨 바로 위에서 뒤엉킨채 멋대로 뻗쳐 있었지만 지저분하다기보다는 자연스럽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세상에,....다,당신!" 눈이 마주치자마자 여인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삿대질을 해보였고,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수 없을 만큼 커다래진 눈망울 속에 담긴 놀라움이 두사람의 만남이 처음이 아니라는 의미를 강하게 피력하고 있었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던가." 그는 두눈 가득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차분히 질문했다.동시에 여인의 얼굴에 기묘한 표정이 자리 잡았다. 자신이 누군가의 기억에 오래 남을 만큼 특별한 미모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이견은 없었지만, 제법 인상적인 만남후에도 무감각하기만 한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왠지 맥이 풀리며 허탈해졌다. "다시 한번 상기래 줘야 하나.당신과 내가 만난 적이 있던가에 대해 물었을 텐데." 추궁하듯 무섭도록 딱딱한 목소리에 예은은 고개를 들었다. 입에 물린 담배에서 쉴새없이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정확한 표정과 눈빛을 가렸지만,약간의긴장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난......." 저도 모르게 발끈해 변명하려던 예은은 다시 입을 닫았다.특별한 뭔가가 오간 것도 아닌데 상대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녀 역시 묻어두면 그만이었다. "아니요,다만 놀라서..."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채 그가 다가오기 시작하자,벽전체가 조여드는 느낌에 숨이 다 막혀왔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지." 말하는 것으로 보아 남자 역시 호텔 관계자인 듯했지만 일반 관리자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맨위 단추를 풀어낸 헐렁한 스프라이트 셔츠에 무릎 위 부근까지 오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와 검정색 바지, 손에 끼고 있는 갈색 가죽 장갑과 거뭇한 수염 자국이 틀에 박힌 것들을 싫어하는 자유분방함을 그대로 분출해 내고 있었다. "그게...." 의구심으로 똘똘 뭉친 상대에게 과연 뭐라고 답변하는 것이 가장 현명할까.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에 서 있는 낯선 여자를 의심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냐마는,도둑으로 몰리는 기분은 영 즐겁지가 않았다. '정말 도둑으로 몰면 어쩌지?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불안하게 눈을 굴리다 남자를 훔쳐본 예은의 가슴으로 절망이 떨어져 내렸다.마음만 먹는다면 능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만큼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저 엄청난 눈초리에서 이미 짐작해 낼수 있었던 탓이다. 그렇다면 해답은 단 하나.어서 줄리엣이 나타나 해명해 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지만 한참이 지났는데도 그녀의 기척은 들려 오지 않았다. 구두를 만들러 간것도 아닐텐데 참 대책이 서질 않는 여자였다. "정말 수상한데.." 생각에 골몰해 있던 예은은 어느 틈엔가 제법 가까이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서로의 움직임이나 열기,그리고 긴장의 정도는 감지할 수 있으나 결코 친근감은 들지 않는 묘한 중립의 자리.그 거리 안에서 그는 서서히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난...나는....사실은요.." 속이 터질 정도로 답답한 이 목소리가 정말 나한테서 나오는게 맞아?늘 덜렁대 가는 곳마다 실수 연발이었지만 당당함 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도록 철저히 지키며 살아왔는데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바짝 쫄아 버린 지금의 모습은 전혀 그녀답지 않았다. 당당하자.당당할 권리가 있잖아.저 무례한 남자한테 전혀 주눅 들지 않는다는 걸 버젓이 보여주는 거야! 내면의 외침으로 자신을 추스른 예은은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서,당당하다 못해 표독스럽기까지 한 표정으로 오만하게 말을 흘렸다. "유리 구두를 기다리고 있어요." "유리 구두?" 지루함과 따분함만 그득하던 그의 눈동자로 흥미의 잔해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chapter 7 ==명색이 작가가 말싸움에서 밀리다니,죽어라.오예은!!==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꽤나 자극적인 신델렐라로군." 낮은 말을 흘려낸 그의 시선이 보란 듯 등을 한번 훑어 내리자,예은은 저 날카로운 시선으로부터 숨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느꼈다.무감감하지만 창끝처럼 예리한 눈빛은 제 아무리 겁없는 그녀라 할지라도 상대하기 벅찬 종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드러내긴 싫었다.약자에겐 한없이 약해지지만 강자에겐 더욱 강한 면모를 보이곤 했더 그녀의 성격이,이 엄청난 강적 앞에서만큼은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협박을 거푸 날리고 있었다. 그래서 좀더 당당해 보이기 위한 방편으로 꼿꼿이 허리를 편 채 가슴을 내밀었으나.공교롭게도 그 자세는 상대에게 더욱 적나라하게 자신의 몸을 살필수 있는 계기만 제공해 준 셈이 되고 말았다. 탐색하는 시선 앞에서 예은은 결국 무너져 내렸다.등 뒤로는 아무것도 거칠게 없는 맨몸이니 가르는 시선 앞에 움츠려 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으나 그런 사실들이 긁힌 자존심까지 되살려 주지는 못했다.적어도 자신에게 변명거리가 될 만큼의 여지는 지켜내고 싶어,예은은 다시 한번 당차게 대꾸했다. "신델렐라라고 한 적 없어요." 목이 잠겨 칼칼한 목소리가 흘러 나갔다. "그렇게 말한 거나 마찬가지지." 어디서 이런 엉터리 해석을! "유리 구두라는 단어가 꼭 신데렐라를 연상 시키는 건 아니죠.그건 이미 정해진 사고 안에서 내린 틀에 박힌 결론 아닌가요?" "그럼,말해 보지 그래." "뭘요?" "유리 구두라는 단어가 연상시킬수 있는 다른 것들을." 예상치 못한 반격에 미처 적응할 틈도 없이 더욱 날카로운 말들이 이어졌다. "자유로운 사고 안에서 내린 틀에 박히지 않은 대답을 한번 들어 보고 싶군." 예은의 입은 잠시 그대로 막혀 버렸다.서늘한 기운에 소름이 돋았던 몸에서 식은땀이 베어나기 시작했고, 지금껏 무수히 보아왔던 온갖 서적과 뇌에 저장되어 있는 지식까지 총동원해보았지만 도통 센스 있는 대답이 떠오르질 않았다.결국 그녀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의해 완벽한 덫에 걸려든 꼴이 되고 만 것이다. 허둥대며 당황하는 그녀의모습을 즐기듯 바라보던 은규는,중립의자리를 지나 좀더


가까이 걸어오기 시작했다. '뭐야....왜 다가오는 거야!' 고요한 침묵 가운데 울리는 묵직한 발소리가 먼지 하나에도 반응 할 것처럼 예민해진 그녀의감각을 뒤흔들었다. 비누향과 함께 얽혀든 담배 냄새의묘한 조화,그 혼합된 향취에 후각이 반응한 탓인지,공포는 곧 흥분으로 뒤바뀌어 좀더 힘차게 심장을 압박해 들어왔다. 그녀의 반응 하나하나를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은규가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빼냈다. 예은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며 우악스런 손아귀가 벌일 일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으나,한껏 열린 등 뒤에서 느껴진 것은 제법 부드러운 손길뿐이었다. 지퍼를 채우려던 것뿐? 훤히 벌어졌던 등이 아름다운 천 뒤로 사라지고 난 후,그는 서서히 손을 내리며 마지막 경고를 남겼다. "시시한 말싸움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예은의 마른 목구멍으로 어렵게 침이 넘어갔다. "그러기 전에 먼저 자신의 입장을 한번 돌아봐야지.여긴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이고 난 아직 아가씨가 왜 여기에 있는지,설명을 듣지 못했으니까." 낮은 어조로 중얼대고 멀어지는 그 모습에 두려움은 사라지고 전의가 솟구쳐 올랐다. 저 무뚝뚝하고 오만한 입술이 쩍 벌어질 만한 통쾌한 반격을 쏘아주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쪽이야 말로 무슨 권리로 나한테 그런 질문을 하는 거죠?내가 그 관계자 중 하나일지도 ���르잖아요." 거침없는 도전에 은규의 눈이 매섭게 가늘어졌다.어떤 여자도,심지어 남자들도 그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진 못했다.그의 얼굴에 자리한 상처와 시선 하나에도 슬금슬금 피하며 꼬리 말기에 바빴던지라 자연스레 그런 반응들에 익숙해져 왔지만,이 맹랑한 아가씨는 가면 같던 그의 얼굴에서 자꾸만 감정을 끌어내고 있었다. 그 사실이 지독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근본도 모르는 여자 하나 때문에 자신 안에서 그 어떤 식으로든 감정적인 변화가 이는 것을 허용할수 없었다. 그래서 분노로 높아지려는 목소리를 재차 가다듬었다. "다시 한번 묻지.여긴 어떻게 들어온 건지.뭘 하고 있었던 건지.아가씨 정체가 뭔지,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는다면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테니 각오해." 그의 입에 물린 담뱃불이 제 주인의 눈초리만큼이나 맹렬한 빛을 뿜어댔다.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훔친 게 없으니 어떻게든 우겨 도둑 신세는 면한다 할지라도 지금 당장 만족할 만한 대답을 주지


못한다면 호텔에서 쫓겨나는 신세도 각오해야 할것 같았다. '안 돼,그랬다간 끝장이야!' 지금까지 이날만 바라며 참고 또 참아왔는데 여기서 모든걸 어그러뜨릴 수는 없는 일,솔직하게 이야기하자고 다짐한 예은은 모든 전의를 죽이고 겸연쩍게 웃으며 말문을 열엇다. "그러니까 저는..." "늦어서 미안해요!" 때맞춰 들어온 커다란 여인의 외침에 예은은 말을 멈추고 돌아섰다.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줄리엣이 문을 닫으며 있는 대로 수다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좀 피할 사람이 있어서 그랬어요.아까 이리로 가는 것 같아서요.괜히 들키면 어디가냐,이건 뭐냐 꼬치꼬치 캐묻고 막 그런다니까요?뭔 의심이 그렇게 많은지,꼭 만족스러울 만큼 제대로 된 설명을 들어야만 물러나니 그것도 병...어머!" 한껏 조잘대다 돌아선 줄리엣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그녀는 정말 많이 놀란 것처럼 보였다. 남자의 모습에 기가 질려 버린 것일까,그래,그럴지도 모른다.작고 순수해 보이는 여자이니 남자의 상처까지 보게 되면 덜덜 떨며 자지러질 가능서도 없지 않았다. "설명을 들으려면 이쪽이 빠를것 같군." 잠잠이 서 있던 남자가 예은을 앞질러 줄리엣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그녀는 가녀린 몸을 쭈뼛대며 슬슬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막아야 돼!' 마음 좋은 줄리엣은 자신을 위해 뛰어준 것뿐이지 않은가. 게다가ㅡ맙소사,이제야 생각나다니ㅡ여자는 임신 중이었다. 악랄한 남자가 임산부에게 무슨 짓이라도 하기전에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예은은 재빠르게 돌진해 남자와 줄리엣 사이에 벽을 만들곤 양팔을 쭉 벌린 채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 아가씨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했다간 내가 가만히 있지않을 거에요!" 이상하게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목소리가 너무 작았나? "그리고 이 아가씨는 임신 중이라구요.설마 임산부한테 이상한 짓 할 생각은 아니죠?" 한순간 지독할 정도로 고요한 침묵이 흐르더니,뒤쪽에서 킥킥대는 줄리엣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왓다.예은은 당황한 나머지 비틀거리며 돌아섰다. "왜....왜 그래요?너무 놀란 거 아니에요?이봐요!" 급기야 줄리엣의 웃음은 배를 잡고 뒹굴 정도로 폭소로 돌변했고,남자는 못마땅한 표정을 굳이 숨기려 들지도 않고서 낮게 중얼거렸다. "대체 이여자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설명 좀 해주시죠."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예은이 울상을 짓자,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그가 한 마디를 보탰다. "제수씨"


일순,예은은 정지된 화면 속 캐릭터처럼 뻣뻣이 굳어 버렸다.제수씨라는 단어가 귀에 붙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그래서 바보같이 황당한 물음을 뱉고야 말았다. "이 여자 이름이 .....제수........인가요?"

chapter 8 ==하나님,제발 이 오만한 남자 대신 제게 황은규를 주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꼭 만나야 한단 말입니다.꼭이요!===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남자의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미인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그래도 만나왔던 대부분의 남자들로부터 받아왔던 시선은 흥미와 찬사,그리고 상냥함이었다.적어도 벌레취급은 아니었단 말이다! 그런데 바로 앞에 서 있는 얼음 인간은 미친 사람과 대면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면 같던 얼굴에 겨우 감정이 비쳤건만 그것이 고작 경멸이라니,그나마 남아 있던 콩만한 자존 심까지 모두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의사를 불러야겠군," 마침내 그가 담배를 물며 침묵을 깨자.발자적으로 이어지던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낸 줄리엣이 번개처럼 튀어나가 해명을 시작했다. "아주머님은 농담도...이 아가씨는 호텔 직원이에요.절대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는건 제가 보장해요." "오늘 하루 파티 책임자로 파견 온 사람이 호텔 직원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보장까지 합니까?" "글쎄,사정이 있었다니까요,정 의심스러우면 나가서 확인하면 될 테지만 사람을 그렇게 쉽게 의심해선 안 되죠.나중에 사실이 다 밝혀지고 난 후에.이 아가씨가 아주머님을 확 고발해 버리면 어쩌실 건데요?" 얼음 인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졌다. "다 좋은데,제발 그 아주머님 소리 좀 집어치울 수 없습니까?" "말 돌리지 마세요!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지독한 혼란을 느끼면서도 예은은 두 사람의 대화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전후 사정을 좀 알고 판단해 주세요.이 아가씨는 방금 전까지 골드 홀에서 열심히 서빙을 하고 있었다구요.그런데 밥도 못 먹고 너무 열심히 일한 나머지,잠시 현기증이 일어난 모양이에요. 오늘 아침부터 좀 바빴어요?결국 현석씨랑 부딪혀 버렸고,들고 있던 음료를 몽땅 뒤집어쓰고 말았죠." 과장이 심한 줄리엣의 상황 설명은 군더더기를 어찌나 많이 붙였던지 족히 20 분은


넘게 흘렀는데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급기야 예은마저 자신이 정말 그런 일을 당했던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할 정도였다. 슬쩍 얼음 인간의 표정을 살펴보니,검은 먹구름이 몰려든 것도 모자라 얼굴 전면 위로 무시무시한 해일이 내습하고 있었다.아마도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참다못한 그는 피곤한 목소리로 줄리엣의 말을 잘랐다. "그만." 소리치지도,윽박지르지도 않았다.그저 '그만'이라고 중얼거렸을 뿐인데 거짓말처럼 줄리엣의말은 뚝 끊어져 버렸다. "그럼 모두 이해하신 거죠?" "전혀." 줄리엣의 입이 쩍 벌어?다. "맙소사,그렇게 자세히 설명했는데도 모르시겠어요?시간도 없는데 참....저기 그럼 한번만 더 설명할 테니까 진짜 잘 들으셔야 돼요?오늘 이 아가씨가...." 막아야 해! 대책 없는 스토리가 또 한번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다행히도 절호의 순간,누군가 문을 열어 이야기는 다시 중단되었다.뜻하지 않은 구세주의 등장에 예은은 쾌재를 부르며 고개를 돌렸다. "여기 계셨군요." "제발 그 옷 좀 벗을수 없냐." 문가에 후크 선장 복장을 한 사내가 서 있었다.그를 향한 얼음 인간의 시선이 보통 고약한게 아니었다. "제 개성입니다." "개성 다 죽었군." 후크 선장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서렸다.이제 보니 일전에 호텔 복도에서 남자의 옆을 지키고 있던 바로 그 사내였다.건장한 성인 남자에게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순수한 미소에. 예은은 왠지 마주 웃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등장하실 차례입니다.모두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음 인간은 금방 따분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가지." 까다롭기 짝이 없는 아주버님의 퇴장에 줄리엣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예은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지만,문앞까지 걸어간 남자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다시 돌아서 삐딱한 시선을 던졌다. "충고 하나 하지." 날이 선 검처럼 그의 눈동자가 예은의 마음 중심을 예리하게 자극했다. "충고요?"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남에게 의존해 넘기려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야."


마치 나무라는듯,그의 입가에 묘한 비웃음이 어렸다. "다음부터라도 자기 입장 정도는 스스로 설명할 수 있도록 연습 좀 해두라고,나이가 다 찼다고 성인은 아니니까." 미처 대꾸할 틈도 없이 문이 닫히고,그는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뭐야 저 인간!' 이미 무너져 내린 예은의 자존심은 뼈째 갈린 생선가루가 되어 버렸다. "그게 정말이야?" "그렇다니까요." 캄캄한 어둠 속에서 현석의 팔베게를 하고 누운 새벽은,아이의 신변이 걱정될 정도로 깔깔대며 호텔에서 만난 여인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일명 호텔 비화, "이 여자 이름이 제수인가요? 세상에....대단한 재치가 아니고 뭐겠어요.그때 아주버님 표정은 정말 일회용 카메라라도 사서 찍고 싶을 정도였다니까요?" 현석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좀처럼 표정이 없는 사람인데,볼 만했겠어." 새벽은 현석의 벗은 가슴에 살짝 뺨을 비볐다. "있잖아요.....나....아무래도 재미있는 일을 발견해 버린 것 같아요." "재미있는 일?" "그 아가씨" 새벽은 곧 남편의 가슴에 장난기 어린 키스와 함께 작은 중얼거림을 흩뿌렸다. "그 아가씨 덕분에 뭔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같은 느김이 들어요.아주버님도 드디어....." 현석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괜히 나서지마,당신은 지금 임진 중이라고.요즘 들어 대체 왜 형여자 문제에 기를 쓰고 달려드는 거야." "안쓰럽잖아요.계속 저렇게 둘수도 없고,난 솔직히 아주버님 직업이 뭔지도 잘 몰라요.호텔이랑 딸린 카지노를 총체적으로 관리 한다고 알고는 있지만 뭔가 다른 일도 많이 하는것 같고....여하튼 계속 남자들 틈에서만 지내니까 여자한텐 도통 관심이 없는 거라구요." "당신이 신경 쓴다고 변할 사람이 아니야.형은 여자 문제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뒤틀린 사람이니까." "글쎄.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테니까 당신은 지켜보기만 해요." 현석은 잠시 엄격한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보았지만,히죽히죽 웃는 얼굴에 한숨을 내쉬며 포기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결혼 잘못한 거 같단 생각이 드는데." 그에 질세라 새벽이 대꾸했다. "늦지 않았어요.물러달라면 얼마든지 물러줄 수 있..." 대답 대신 현석은 아내의 입술을 키스로 막아 버렸다.


늦잠을 잤다. 배곯은 아이처럼 울어대는 핸드폰 소리만 아니었어도 아마 죽은듯 내리 잤을 것이다. "여보세요..." 온몸에 덕지덕지 들러붙은 피로 탓에 푹 잠긴 목소리가 흘러 나왓다. "중간 보고 하시지." 유희였다.방문하는 타이밍도,전하하는 타이밍도 언제나 정확한 친구.아직 달아나지 못한 잠이 못내 고팠던 예은은 다시 침대에 코를 박았다. "무슨 소리야." "능청은.어제 파티에서 황은규 만났어?" 순간,지난밤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예은의 기억 속으로 재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를 만나기는 했지." 유희의 목소리에 흥미가 감돌았다. "누구." 예은의 몽롱한 머릿속으로 얼음 인간의 오만한 얼굴이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몰라.호텔 관계자인 것 같았는데 생각하기도 싫은 인간이야." 피곤한 목소리를 끌어 모아 예은은 어젯밤 일을 대충 얘기해 주었다. "그래서 전달식까지 못 보고 그냥 빠져 나왓다?" "억울하게도 그렇게 됐어." 잠시의 침묵 후 이어진 유희의 목소리에는 고소해 죽겠다는 기미가 잔뜩 서려 있었다. "크크......죽을맛이지?" "약간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다 그만두고 조폭 영화나 실컷 때리자.한 100 편 정도 보고 나면 감 정도야 대충 잡을 수 있지않겠어?" 잠이 달아나 더는 침대에서 비빌수 없게 된 예은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난 아마추어가 아니야.프로라고.수박 겉핥기식의 글은 내가 용납 못해." 모를 리가 있나.글에 대한 예은의 열정은 어떻게 보면 집착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너 잘났다!" "작전을 조금 바꿨어.운 좋게도 호텔에서 빅뉴스를 하나 들었거든." "그건 또 뭐냐.괜히 겁난다, 야." 예은은 힘없는 다리로 거실을 가로 질렀다. "호텔에서 관리하는 카지노 말이야.거긴 꽤 자주 등장한대.오늘 밤에 가볼 생각이야." 동시에 귀청이 떨어져 나갈 만큼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뭐?카지노?야 이년아!너 제정신이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지금 유희의 얼굴이 어떠할지는,보지 않고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아....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다 안다구.하지만 하는 데까지는 해보고 싶어." 유희의 목소리가 탁해졌다. "너무 위험해.나 왠지 불안하다." 욕실로 들어서던 예은은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음성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위험한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게.위험할 것 같다고 판단되면 즉시 손 뗄 거고." "정말이지?"


"그럼 잘돼 가고 있어.그러니까 걱정 마." 긴 여운을 남기는 한숨과 함께 전화는 끊겼고,예은은 아직도 밋밋하게 전해오는 친구의염려를 느끼며 거울을 바라보았다.잠이 채 달아나지 않아 흐릿한 눈과 다소 기다란 입술은 지난밤의 피곤함이 그대로 묻어나 살며시 부어 있었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던가.' 문득 그의 첫마디가 생각나 다시금 기분이 언짢아졌다.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남에게 의존해서 넘기려는 건 좋지않은 버릇이야.' 어느 틈에 세면대를 꽉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얼른 손에서 힘을 뺐다. 지금 신경 쓸 사람은 그런 오만한 남자가 아니었다.조금 분하긴 했지만.지금은 숨을 쉬는 순간에도 오로지 황은규만 생각해야 할 때였다.아직 뒤통수도 보지 못한 그 인간 때문에 호텔에서 거의 보름을 뼈가 빠지도록 일하다 웬 미친놈한테 큰일을 한번 치를 뻔하고 어젯밤에는 자존심까지 잔뜩 구겨야 했다. 더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그랬다간 정말 크나큰 위험에 노출될지도 몰랐다.기회는 오늘 밤뿐이니 최대한 무장한 채 그가 관리한다는 카지노로 갈 생각이었다.호텔보다는 확실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장소 일 테지만 시작한 이상 끝장을 봐야만 했다. 작가의 긍지가 한껏 담긴 눈동자를 단단히 굳히며,예은은 옷을 훌훌 벗어던진 후 샤워기를 틀었다. 세찬 물줄기들이 머리카락과 몸을 축여 지난밤의 노곤함을 모두 벗겨 나갔다. 오늘 밤 그를 만난다......오늘밤. 다시금 피가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chapter 9 ==이런 악연이 있나.....== -예은의 메모 노트중에서지상 주차장에 차를 박아 넣고 난 에은은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멋대로 헐클어져 영 통제가 되질 않는 머���를 완벽히 틀어 올리고 공들여 화장까지 하고 나니, 밋밋한 얼굴도 제법 특색 있어 보였다. 하지만 평소 거울을 보면 늘 비치던 익숙한 얼굴 대신 어색할 정도로 한껏 멋을 낸 여인을 발견하자 괜히 멋쩍어진 예은은,백미러에 박혀 있던 끈질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네온으로 둘러싸인 카지노 전면이 눈에 들어왔다.활기찬 인파와 화려함으로 가득 찬 모습이 꼭 엘리스가 떨어진 이상한 나라 같은 인상이었지만,무엇보다 평소 카지노 하면 떠오르던


이미지와는 다소 차이가 있어 보였다.HS 호텔 내부에 있던 카지노를 따로 떼어 확장해 만든 곳으로,카지노 이외에도 극장과 놀이동산 그리고 낭만적인 테마 파크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환락과 도박의 공간이란 부정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가족들과 연인들도 쉽게 오갈 수 있도록 만든 오락 제국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실제로 카지노에서 사용할 수 있는 판돈도 극히 제한 되어 있다고 들었다.그래서 인지 연인이나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마치 스파이가 된 것마냥 날카로운 시선으로 카지노와 주변을 살피던 예은은 마음을 다잡은 후 차에서 내려섰다. 싱그러운 바람이 맨 어깨를 한번 훑고 지나 먼발치에 숨어 있던 두려움과 떨림을 한꺼번에 앗아가는 기분이었다. 좋아....시작이다! 지나치리만큼 몸에 붙은 검정색 원피스가 유난히 거슬렸다.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카지노로 들어서자, 후끈한 열기와 함께 벅적거리는 인파들의 소곤거림이 은은한 음악을 타고 들려왔다.좀더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살피기 위해 선글라스를 꺼낸 예은은 눈을 가두며 카지노 내부로 깊숙이 발을 옮겼다. 중앙은 블랙잭을 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한창이었고,왼쪽으로는 슬롯머신,오른쪽으론 간소한 룰렛 게임이 진행중이었다.정면 끝 왼편에 자리 잡은 뱅크(칩스,카드 등을 보관하는 사무실)앞 역시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고,바로 옆 모퉁이의 독립된 공간에 커다란 바가 하나 마련되어 있는것이 보였다.정말로 다른 세계 같았다. 사람들을 열심히 탐색하며 바를 향해 걸음을 옮기던 그녀의 눈에,뱅크 앞에서 낯익은 얼굴 하나가 잡혀왔다.기억을 더듬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자마자 두통이 밀려들어 관자놀이 부근을 쪼아댔다. 이놈의 건망증.필요할때 제대로 작동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여기까지 와서도 기어코! 생각이 나지 않으면 관두면 그만인 것을.그녀는 이러쿵저러쿵 끝없는 불만을 토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원래가 명확하지않은 것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성미이기도 했지만, 호기심과 궁금증에 관한 집착은 유난할 정도로 심각했다. 남자는 누군가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기밀사항이라도 되는지 표정이 꽤 심각해 보엿다. 심해져 가는 두통을 무시한 채 계속 머리를 쥐어짠 후 10 분쯤 흘렀을까.머리위로 전구가 번뜩이며 불투명했던 사실들이 명확해졌다.


맞다.후크선장! 커다란 키와 몸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아이 같은 미소가 여전히 인상적인 사내, 바로 그 후크 선장이었다.이야기를 마치고 2 층으로 오르는 그를 보며 예은은 다시금 깊은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저 남자가 왜 여기 있는거지?한가롭게 도박이나 할것 같은 사람은 아닌데.저 남자가 있다면 혹시 그사람도?'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음 인간의 모습이 떠오르자,예은의 온몸 가득 찌르르한 전율이 스치고 지나갔다.그것은 남녀간에 일어나는 에로틱한 흥분이 아니라,싸움꾼이 적을 만났을때 느끼는 적대감 같은 것이었다. 예은은 저도 모르게 다시한번 사람들을 훑어보았다.그가 있다면 많은 인파 속에서도 한눈에 띌 게 뻔하다는 계산 때문이었으나,이내 신경을 분산시켜 일을 그르치지 말자는 다짐과 함께 몸을 돌려 바(Bar)앞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고 있는 바텐더의 묘기가 꽤 볼만햇다.하늘로 치솟아 빙그르르 돌다가 이내 신비로운 색으로 합쳐지는 칵테일 제조 과정이 어느새 그녀의 입가에 흥미로운 미소를 사분히 심어 놓았다. "뭘 드릴까요?손님!" 현란한 동작을 선보이던 바텐더가 활기찬 목소리로 묻자,예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얼굴을 붉혓다. 바보같이 뭘 그리 당황하는 것인지,선글라스 뒤에 표정을 숨길수 있다는것이 천만다행으로 여겨졌다. "아....음....글쎄요..." 사실 그녀는 술을 전혀 마시지 못했다.밀밭 근처에만 가도 취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마따나 냄새만으로도 취기를 느낄만큼 알코올에 약했고,아는 술 이름도 소주와 맥주가 전부였다. 그런 입장이다 보니 전혀 문제 될게 없는 바텐더의 질문에 교수앞에 선 예비 신입생 마냥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것이었지만,이런 곳에 익숙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풍길 필요가 있었기에 선글라스 뒤로 불안한 눈을 감추며 의연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 좀 하고 오는건데.' 그때 뒤쪽에서 웬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혈액형이 뭐요?" 믿을 수 없게도 예은은 가슴팍까지 경직되는 느낌을 받았다.남자의 목소리가 큰 메아리처럼 그녀의


귓전에서 고동치다 혈관속까지 그 기운을 실어다 주고 있었다. '이 목소리는......설마..' 좀더 가까워진 남자로부터 담배와 비누 향내가 섞인 독특한 체취가 풍겨오자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어져 버렸다.청동처럼 굳어 버린 고개를 틀어 남자를 바라본 예은은 자연스레 호흡을 놓고 있었다. 빌어먹을 얼음 인간.그 딱딱한 얼굴을 다시 마주 대했을 뿐인데,왠지 모르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 이런 악연이 있나.... 수야를 찾아 아래층으로 내려온 은규는 형구가 만든 칵테일을 한잔 할 생각으로 바를 향해 걸었다. 언제나 그랬듯,형구는 거의 예술에 가까운 동작으로 사람들을 현혹 시키며 자기만의 작은 세계를 형성 하고 있었다.형구를 처음 거둬들였을 때를 상기하니 편안한 미소가 가뿐히 입가에 내려앉았다. 세상을 향한 불신으로 가득 찼던 불안덩어리가 지금은 삶을 향한 의욕과 생기 어린 눈동자로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그기운을 전달해 주고 있질 않은가.왠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들었다. 거의 만석이 돼 버린 바를 훑던 그의 시야로,한 여자 옆에서 유일한 빈자리가 발견되었다. 타이트한 검정색 원피스 아래 드러난 다소 자극적인 뒷모습에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저런 여자 손님에게는 언제나 음흉한 벌떼들이 모여들기 마련이었다.그렇게 되면 카지노 안이 시끄러워질 게 뻔했고,그런 종류의 소란은 그가 가장 달갑지 않게 여기는 일중 하나엿다. 그다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은규의 귓가에 당혹감 섞인 목소리가 닿았다. "아....음....글쎄요.." 아무래도 적당한 칵테일을 고르지 못하고 있는 눈치였다.그녀의 뒤쪽에 은규는 깍듯이 고개를 조아리는 형구를 손으로 제지하며 낮게 물었다. "혈액형이 뭐요?" 동시에 여자의 어깨가 정확한 각을 잡으며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어깨 너머로 작은 주먹이 꽉 쥐어지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은규의 얼굴도 잔뜩 찌푸려져 갔다. '내 목소리가 그렇게 끔찍한가.' 마치 소금 기둥이라도 된 것처럼 오랫동안 움직임을 잃고 있는 여인에게서 미심쩍은 기운을 느낀 그가 한마디를 더 보태려 하던 차에,서서히 고개를 돌린 그녀가 먼저 육감적인 입술을 열었다. "또 만나는군요." 그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않자 여인의얼굴 위로 실망의 기운이 스치는 듯하더니,좀 전의 목소리와는 판이하게 다른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도 기억 못한다고 말할 건가요?" 그 여자였다.선글라스와 화장 탓에 많이 달라 보였지만 호텔에서의 제수씨 사건을 일으켰던 장본인이라는 걸 그의 뇌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귀찮은 일이 있나....

chapter19 ==잘생긴 남자가 성격까지 좋길 바란다는건 무리겠지.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학인시켜 줄 필요는 없잖아?===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카지노에도 다니나." 담배를 문 입술로 대충 흘린 질문이었지만,예은은 일단 그가 자신을 기억한다는 사실에 감당 못할 쾌감을 느꼈다. "난 카지노에 오면 안 돼요?" 그런 대답도 뭣도 아닌 혼자만의 중얼거림이었다.이윽고 그가 위압적이도고 커다란 몸을 숙여 옆자리에 앉자 독특한 향내가 풍겨왔다.불쾌하지 않은 미세한 담배 향을 감싸고도는 향긋한 비누 냄새.더불어 그를 탐색할 수 있는 완벽한 거리와 각도도 조성되었다.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본 그의 옆모습은 한 마디로 '남자'였다.깜끔한 검정색 양복에 감춰진 긴 다리와 넓은 어깨는 분명 정갈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거칠고 야성적인 기운이 풍겨져 나왔고,양복 옷깃에 살짝 걸릴 정도의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뻗어 있었다. '선글라스가 이래서 좋네.' 자신의 시선을 숨길수 있다는 이점을 한껏 이용해 예은은 조각상 같은 그의 모습을 샅샅이 훑어갔다. 근접한 거리에서 차근차근 살펴보니 제법 잘생긴 얼굴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마와 콧날로 이어지는 선이 미술에서 일컫는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비율과 일치할 정도였고,속눈썹은 여자인 그녀 스스로가 부끄럽다고 여겨질 만큼 길고 풍성해 눈동자를 살짝 가리고 있었다. 뺨의 상처만 아니라면 흠 하나 없이 잘난 얼굴인데,과연 어던 경위로 생긴 것일까?거의 완벽에 가까운 얼굴에 당당히 자리 잡은 해묵은 상처가 그를 위험스러운 분위기로 몰아가는 가장 커다란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만 좀 보지 그래." 갑자기 들여온 나직한 목소리에 예은은 깜짝 놀라 재빨리 시선을 깔았다.선글라스 뒤로 완벽히 시선을 숨겼다고 생각했는데,역시나 이 남자에겐 역부족이었던 것일까.그렇다면 지금까지 보냈던 적나라한 시선도 모두


알고 있었다는 얘기인데......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오르더니 바짝 목이 탔다. 정말 왜 이모양인 것인지,스스로를 거듭 질책하며 냉정을 요구했지만 10 초도 지나지 않아 시선은 다시 슬금슬금 올라고 말았다.지독히도 표정이없는 남자,농담을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놀리는 건지. 그 낌새조차 알수없을 정도로 가면 같은 얼굴이긴 했어도,그 안엔 분명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범상치 않은 기운도 함께 내재되어 있었다. 예은은 한동안 그의 입에 비딱하게 물린 담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넋 나간 모양새로 바라보았다. "이봐 눈 떨어지겠어." "네?" 익숙한 동작으로 담뱃재를 털며 흘린 중얼거림의 속뜻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예은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날 갖고 놀고 있어!" 들끓어 오르는 감정을 가까스로 가다듬으며 그녀는 바텐더를 향해 시선을 돌렸고,금방 침묵의 기류가 두 사람 주위를 배회하기 시작했다.그가 딱히 예은이 동행인으로서 옆자리에 앉은게 아니었기 때문에 가벼운 대화조차 오갈 수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낯선 사내가 흘리는 숨소리 하나조차 민감하게 감지하고 있는 예은과 달리,그는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마음 안에 일고 있는 동요를 감추기 위한 방편으로 그녀는 다소 과장된 어투로 떠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아까 뭐라고 묻지 않았어요?" 그는 피우고 있는 담배 외에는 도통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혈액형을 물었지." "왜죠?" 그가 고갯짓으로 벽면에 새겨진 글귀를 가리켰다. '자신의 혈액형에 따라 특색 있는 칵테일을 골라 드세요!' "재미있겠네요.음...내 혈액형,뭘 거 같아요?" "관심없어." 예은의 얼굴이 진홍색으로 물들었다.이렇게 민망하기는 난생 처음이었다.딱딱한 분위기를 깨볼 생각으로 던진 질문이었는데 돌아온 대답이 어찌나 무참한지,민망함은 곧 가늠할수 없을 만큼의 분노로 이어졌다. "서로 얘기하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 돼요?살벌하네요." 처음으로 그의 눈동자가 정확히 예은을 향해 내려왔다.그 시선 하나에 당당함은 사라지고 묘한 떨림의 잔해 속에 갇히는 기분이었다.잠시 그렇게 담배를 손가락에 끼워 든 채 예은을 바라보던 은규는 바텐더를 향해 고개를 까딱해 보이더니 뭐라고 지시를 내렸다.


뭘 하려는 걸까?그를 만난 순간부터 계획이 틀어지고 있다는 것을 미처 의식하지도 못한 채 예은은 경이로운 바텐더의 손동작에 집중했다.사람들의 시선도 어느새 두사람을 향하기 시작했고,여러 쌍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의식하고 있자니 예은의 낯 역시 서서히 달구어져 갔다. 마침내 바텐더가 그녀 앞에 술잔을 하나 들이밀며 소리쳤다. "엘 프레지던트,분부대로 대령했습니다!" "엘...뭐라구요?" 이곳에 들어와 바보같이 놀라기만을 반복했다.익숙하지 못한 일련의 상황들에 맞설 대비책을 그녀는 미처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반응 없이 묵묵히 담배만 태우던 은규는,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칵테일을 독주처럼 바라보고 있는 예은에게 조용히 읊어댔다 "한번 마음 먹으면 그대로 밀고 나가는 완고한 의지의 소유자.이거다 하고 결정한 일은누가 뭐라던 밀고 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O 혈을 위한 칵테일.엘 프레지던트.이름만큼이나 제법 독하지." 예은의 눈동자가 그대로 튀어나오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커다래졌다. "표정을 보니 정확히 맞춘 것 같군." 정말 그랬다.혈액형은 물론 세세한 성격까지 맞아떨어졌다. 전혀 알지 못하는 타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들켜 버린 것처럼 고약한 기분에 휩싸인 색깔의 액체를 노려보다 단번에 넘겨 버렸다. "윽!!" 씁쓸하고 강한 향취와 함께 목구멍으로 싸한 기운이 밀려들더니 무섭도록 빠르게 어질어질한 취기가 퍼져 나갔다.정신이 몽롱해...머리 속이 뿌연 느낌. 달갑지 않은 징조였다.이럴 때면 잔뜩 흐트러져 실수나 연발하기 십상이었다. 신나게 유흥이나 즐기러 온 것도 아니고 거대 조직의 우두머리를 상대해야 할 역사적이고도 긴장된 순간에 제 몫을 해야 할 이성이 해롱대고 있으니.돌발적인 행동을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일 뿐이었다. 이곳에 온 목적을 되새기며 예은은 강아지처럼 머리를 흔들어 댔다.하지만 알코올 기운에 놀란 가슴은 쉬이 진정되지 않을 태세였다. "와,잘 마시는데요?"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취기와 애써 사우는 그녀의 속도 모른 채 바텐더가 칵테일을 한가득 더 부어 주었다. 예은이 흔들리는 시선��� 들자,바텐더가 내민 술잔을 받아 한 입 가득 털어 넣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좀전까지의 각성은 사라지고 비틀린 승부욕만 남아 은근히 그녀를 부추겼다.그대로 잔을 집어 든 예은은 단숨에 호박색 액체를 목구멍에 부어 버렸다.다시금 눈을 떴을 때,카지노 전체가 휘휘


돌기 시작하자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 떠보았지만,어질어질한 머리의 회전은 점점 더 속도를 높여갔다. '칵테일 두잔에 가버리다니...' 이래서는 계획대로 일을 진행시킬 수가 없었다.위기의식에 불안해진 예은은 푸들처럼 머리를 흔들다 있는 힘껏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아직 계획의 초반도 진행되지 않았잖아!' 아무리 스스로를 닦달해도 윙윙거림만 더 심해졌을 뿐 고약한 취기는 달아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젠장!왜 이렇게 꼬이는 거야? "그렇게 때려서 아플 리가 없지." 안 그래도 대단히 불편한 심기에 그가 기름을 붓고 있었다.예은은 선글라스를 벗어 들고서 흐릿하지만 날카로운 시선을 쏟아 부었다. "아프라고 때리는 거 아니에요!" 그러나 여전한 묵묵 반응에 이성은 완전히 달아나고 고함소리가 터져 나가려는 찰나,그가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기 학대가 아니라면 무슨 퍼포먼스라도 진행 중인가.별스러운 짓은 혼자 다 하는군." 어마어마한 분노속에 그녀를 가두어 둔 채.그가 건장한 몸을 일으켰다.속이 울럴거렸고 머리 속은 뒤죽박죽이었지만 만날 때마다 자존심을 박박 긁어대는 이 오만한 남자에게 예은은 재대로 된 반격 한 마디라도 하고 싶어졌다. "아....정말..."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혀가 굼뜨게 움직였고,관자놀이 부근을 정으로 쪼개는 양 엄청난 통증까지 합세해 더는 버티수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얄미운 남자는 몸을 돌려 이미 바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예은은 그의 귓가에 닿지도 못할 욕설만 웅얼대다 휘청거리다 데스크에 머리를 찧고 그대로 풀썩 무너져 내렸다.황은규라는 남자에 대해서는 아직 하나도 캐내지 못했는데,저 밥맛없는 인간한테 해줄 말도 아주 많고,그런데 이러고 있으면,.... 울렁거림,두통,나른함,고열.이 모든 기운이 한꺼번에 그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한계의 벼랑 끝에 도달하고 보니.체면이나 계획 같은 것들은 모두 공중으로 흩어지고 대신 무감각이 찾아들었다.결국 예은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공허한 느낌을 견디다 못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혀를 굴려 거세게 소리쳤다. "황은규,이 빌어 먹을 자식!" 계단을 오르려던 은규의 발이 그대로 멈춰 섰다.주정 비슷한 고함 소리가 그의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나쁜 자식.이게 다 너 때문이야...황은규,이 나쁜 노옴!!" 은규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형구 역시 놀란 표정으로 '하는 사람이었어요?'라고 입 모양으로 묻고 있었다.완전히 널브러져 황은규라는 이름을 향해 온갖 저주를 퍼붓고 있는 예은을 살피던 그의 표정도 점차 심각한 흑 빛으로 변해갔다. 모르는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다 가는곳마다 어김없이 그 여자가 나타난다.....? 그는 우연을 믿지 않았다.그런데도 두 번이나,제법 화려한 방법을 취해 나타난 예은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단순히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 때문이다.하지만 위험이란 녀석은 언제나 뒤통수를 치는 법. 그것도 아주 의외의 존재를 이용해 교활한 방법으로 다가오기 마련이었다.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어진 은규는 카지노 내부에 포진해 있는 식구들 중 하나를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형님." "수야 어디있냐." "위층에 계실 겁니다." 잠시 말을 끊고 담배를 길게 빨아들인 은규는 늘어져 있는 예은 쪽을 가리켜 보였다. "수야에게 전해.바에 수상한 여자가 있으니 거둬두라고." "예,형님!" 잠시 후,2 층에서 내려온 수야가 아무것도 모른채 잠의 나락에 떨어져 버린 예은을 향해 천천히 다가서고 있었다.

chapter 11 ==황은규 생포 작전에 납치는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지금 눈을 떠도 될까........? 결박당한 손목을 파고드는 밧줄에 아픔이 극심해지고 있었다. 입 속으로 살며시 혀를 움직여 마른 목을 축여 보려 했으나.,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는 것이 입술 안쪽이 찢어진 모양이었다. 예은은 벌써 30 분 전에 정신을 차렸지만 눈을 떠서는 안될 것같은 예감에 어설픈 연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옆쪽에서는 누군가가 내쉬고 있는 아주 느릿한 숨소리가 들려왔다.미세하지만 날카로운 존재감이 실린 숨소리, 그것은 마치 그녀가 정신이 든 걸 알려선 안 된다는 경고 종처럼 매우 규칙적이고 정확했다. 납치. 정확히 그 단어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예은은 평소 자신이 누군가에게 원한


살 만한 행동을 했는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보기에도 역겨운 옆집 개에게 설사약을 먹인 것 때문일까? 지난번 소설 속 주인공을 죽인 것에 대한 광기 어린 팬의 농간인가? 그것도 아니면 몇 번이나 데이트 신청을 거절당한 서점 주인의 마지막 발악? 아니다, 그는 확실히 미친놈마냥 두 눈 가득 광기를 담고 있었지만 납치를 저지를 정도로 돌아 버린 인간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왜, 어째서 납치 따위를……! 아까부터 묘한 열기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는 누군가를 향해, 예은은 두 눈을 번쩍 뜨고 달 려들고 싶은 욕구가 느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라는 조심스런 마음의 소리가 가까스로 그녀 를 막았다. 그것은 두려움도 공포도 아닌, 일종의 미적지근하고 끈끈한 망설임 같은 것이었다. 그래, 아직은 아니다. 잘못했다가는 지금보다 더 열악한 상황 속에 내몰릴 수도 있으니, 조급 함을 버리고 조금만 더 시간을 끌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머리 속은 온통 혼란이란 단어 로 짓눌려 버렸지만, 계속 열심히 굴려댄다면 앞으로의 일과 탈출 가능성 정도는 타진해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점점 심하게 손목을 짓눌러 오는 밧줄이 겨우 달래놓은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다. 통증이 한계에 다다른 것은 물론, 단단히 묶인 채 몇 시간을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져 있었더니 어깨 가 빠질 것 같았다. "이제 그만 눈을 뜨시지." 그때 아주 낮고 억양이 거의 없어, 감정이라고는 티스푼 하나만큼도 서려 있지 않을 것 같은 냉랭한 목소리가 예은의 귓가를 핥고 지나갔다. 목소리에 담긴 위압감에 번쩍 눈을 뜬 예은 은, 위험한 독사의 그것과도 같은 새까만 눈동자를 발견하곤 흠칫 놀랐다. 그 눈동자 안에는 상대를 주눅 들게 하는 묘한 공포가 잠재되어 있었다. "어설픈 연기 아주 잘 감상했지만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때 인 것 같군. 인내심이 바닥나기 일보 직전이니 괜한 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아." 거의 다 타 버린 담배를 입가에 문 채, 남자가 한 치의 군더더기도 없는 동작으로 일어나 다가 오기 시작했다. 통증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 당신……!" " 날 볼 때마다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데, 그 단어밖에 모르나." 그는 묵직하고 느린 걸음으로 거리를 좁혀왔다. 예은은 다급히 마지막 기억을 더듬어 보려 애썼지만 숙취와 두통 때문에 여의치가 않았다. 버티다 못해 두 눈을 감고서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생각을 돌이켜 보았다. 카지노 바에서 저 남자를 만난 후 칵테일을 연거푸 두잔 마셨다. 그리고……그리고……그리고 ……! 더 이상은 기억에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설마 나, 무슨 실수라도 한 거야?' 실눈을 떠보니 남자의 입에 물린 담배에서 천천히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였다. 조금 더 용기를 보태 완전히 눈을 뜨자 주머 니에 손을 찔러 놓고서 느긋하게 다가오는 잔인한 표정에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얼굴엔 잠시나마 바왔던 무표정 이상의 것이 서려 있었다. 완벽하지 않았으나 그나마 갖추고 있던 예의마저 말끔히 벗어던져, 상대로 하여금 묘한 공포에 떨게 만 드는 기운이 넘칠 만큼 가득했다. 다시 통증이 시작되었다. 손과 발등 아니, 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모든 감각들이 중추신경을 건들여 마비 증상으로 넘어가 는 중이었다. 천천히 다가오던 그는 예은의 정수리 부근부터 몸 전부를 훑으며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그 의 눈동자가 머문 곳으로 고개를 내린 예은은 그만 경악하여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원래 짧았던 스커트가 위험 수위 부근까지 말려 올라가 있었다. 간발의 차이로 속옷 차림은 면 할수 있었지만 망신살이 뻗치기엔 그다지 차이가 없는 모양새였다. 가슴 부위는 짓이기고 찢어진 채 절반이 다 드러나 웃지 못할 꼬락서니를 연출했고, 가뜩이나 노출이 심한 옷이 이리 말리고 저리 찢겨 옷으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수행해 내지 못하고 있었 다. 자꾸만 눈과 뺨을 간질이며 귀찮게 하는 머리카락으로 봐서는 예쁘게 틀어 올렸던 머리 마저도 헝클어져 제멋대로 엉켜 있을 게 뻔했다. '아, 정말이지 볼 만하겠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 앞에서 예은은 왠지 모를 열등감을 느꼈다. "왜 이러는 거예요……." 수치심과 공포로 끝내 눈물이 새어 나오려 하자, 그녀는 날카롭게 소리치고 말았다. 경찰서 취조실처럼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공간에 위험 전선을 물씬 풍기는 남자와 함께 갇혀 있다는 사실이, 강심장조차 떨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마침내 커다란 발이 예은의 면전에서 멈춰 섰다. 발마저도 위압적인 남자였다. "왜 이러는 거냐……?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예은의 두 눈 가득 독기가 퍼졌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늘어놓지 말고 납치한 이유나 밝혀요!" 은규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웬만한 여자라면 지금쯤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아내며


히스테리 증상을 보일 법도 한데, 오히려 당당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태도 때문이었다. 전혀 승산이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반기를 들고 있는 고집스런 눈동자에 괜히 더 화가 치솟는 기분이었다.그래서 더 표정이 굳었고, 목소리도 섬뜩할 만큼 차갑게 흘러 나갔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안 건지 말해." 너무나 싱거운 질문에 예은은 자신의 처지도 잊고서 그만 코웃음까지 치고 말았다. "무슨 헛소리예요? 내가 당신 이름을 어떻게 안다고. 본인이 유명하다고 착각하는 건 자유지만 난 그쪽 이름은 알지도 못하는데다가 별로 알고 싶은 마음도…." 주머니에서 불쑥 나온 손이 예은의 한쪽 팔을 거세게 움켜쥐는 통에 말은 거기서 끊겨 버렸다.손아귀 힘이 어찌나 강했던 지 팔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팠지만, 예은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눈동자로 대항했다.그의 뺨에 난 상처가 잠시 꿈틀대는 듯 했다. 그대로 얼어 버린 눈동자에선 서릿발 같은 냉기가 차고 넘쳤고, 굳게 다물린 입이 열리더니 그 한마디 면 모든 게 해명되는 양 이름 하나가 튀어나왔다. "황은규." 동시에 허울 좋은 성벽에 가려 있던 예은의 표정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당신이 그 이름을 어떻게……." "모른다고 할 셈은 아니겠지." 놀라움으로 벌어진 예은의 입술에서 다급한 쉿 소리만 새어 나올 뿐, 언어라고 할 만한 것은 그 어떤것도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혀가 마비된 것 같았다. 침조차 삼칠 수 없을 정도로 바짝 말라붙어 버렸지만 짧은 물음이라도 던지기 위해 예 은은 안간힘을 썼다. "호,호……혹시 당신이……." 그제야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황은규 소유의 호텔에서 이남자를 두번이나 만났고, 카지노에 서도 마주쳤었다. 명령이 익숙한 목소리에 거칠 것 없는 자태, 호텔에서 자신을 덮칠 뻔한 남 자를 처리하던 솜씨나 언제나 그의 옆을 지키고 다니던 사내의 존재까지. '바보였나 봐, 멍청이였나 봐. 이제야 깨닫다니!' 결론은 하나였다. 바로 이 사람이 그녀가 그렇게도 애타게 찾던 황은규라는 사실. 드디어 그를 만났는데도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Chapter 12 ==얼음 인간과 인조인간 중, 어떤 게 더 심한 말일까?== -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 -


"당신이었군요." 드디어 그를 만났다는 사실에 비로소 예은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바로 앞에 두고 내가 당신을 얼마나 찾았는지 알기나 해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듯하자, 표정이 전혀 없던 은규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담배를 깊이 태우며 그녀가 어떤 속내를 가지고 있든 휘말리지 말자고 자신을 더욱 바짝 긴장시켰다. 그녀는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꽁꽁 묶인 처지에도 불구하고 팔꿈치 와 무릎을 혹사시켜 그의 앞에 바짝 붙어 섰다. "생각보다 훨씬 젊군요! 음……설마 당신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생생히 느껴지는 열기에 은규는 한 발자국 물러서며 날카롭게 쏘아댔다. "무슨 속셈인진 모르겠지만 이산가족 같은 상황 연출하지 마." 하지만 예은은 어떻게 해도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돈을 교구하는 납치범의 인질 신세가 되어, 개에 뜯겨 죽을까 아니면 맞아 죽을까, 비장한 자세로 최후를 설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내가 황은규라면 얘기는 180 도 달라져 버린다. 정확한 신원이 밝혀진 후 안전하게 풀려 날 것은 물론, 설득에 성공해 인터뷰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인터뷰, 드디어!' 한참이나 앞서 가는 생각을 은규의 어두운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는 정말 한계에 다다른 얼굴이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예은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것부터 풀어주면 다 얘기할게요." 갑자기 무서운 기세로 그가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자 예은은 잠시 움찔했다. 단지 옆에 있던 의자를 움켜쥐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인데, 바닥난 인내심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금 나하고 장난하자는 거야?" 목소리가 어찌나 차가웠던지, 예은은 그대로 동상에 걸릴지도 모르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그래도 물러서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협상의 여지가 있을 때까지는, "온몸에 마비 증상이 오고 있어요. 이대론 기절할지도 모른다구요." 말에 신빙성을 보태기 위해 그녀는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힘을 빼고 푹 고꾸라지는 시늉을 해 보았다. 하지만 그가 코웃음을 쳐보이자 그만 강시처럼 발딱 일어설 뻔했다. "장담하지만 당신은 결코 기절할 여자가 아니야.그렇게 약해빠진 여자였다면 ���써 백 번은 하 고도 남았겠지.혹시나 나한테 약간의 예의라도 기대하는 거라면 꿈깨. 난 적일지도 모를 상대


에게 예의 따윈 갖추지 않아. 그러니 잔머리 굴리지 말고 어서 바른대로 말하시지." 얼음 인간, 아니 인조인간! 아무리 다소곳한 면이 없다 할지라도 명색이 여자에게 어찌 이리도 막 대할 수 있단 말인가! 기름칠이라곤 전혀 안된 로봇도 이보단 부드러울 것 같았다. "난 작가예요." "작가?" "이래 봬도 꽤 인기 있는 작가라구요!" 그녀가 히트 쳤던 작품들을 줄줄이 나열할 태세로 입을 벌리자 은규가 한발 빠르게 응수 했다. "충분한 대답이 아니야. 당신이 인기 작가인 것과 내 뒤를 캐고 다닌 것 사이에 연계성이 없어." 자신의 적이 무식하게 힘만 센 상대가 아니라 대단한 어휘력을 지닌 남자라는 사실을 상기하 며 예은은 제발 진실이 통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난 소재가 잡히면 직접 그일을 마스터 한 후에야 작품을 쓸 수 있는 징 크스가 있어요. 예를 들어 고양이 100 마리와 함께 사는 여인에 관한 글을 쓰고자 마음먹었으 면, 정말 고양이 100 마리를 키워 봐야 하는 논리죠." 은규는 기묘한 표정으로 그녀가 정말 고양이 100 마리를 키워봤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만큼 눈앞에 여자는 성격이 참 별나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 암흑계 얘길 다루게 됐어요. 고양이처럼 쉽게 경험할 수 있는 부류가 아니라 그냥 시도해 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글다운 글을 쓸 수가 없어서……." "날 이용하기로 했다?" 그가 말을 막자, 예은은 의미 일부를 약간 수정했다. "어감이 맘에 들지 않네요. 뭐, 이용이라기보다는 음……그냥 인터뷰를 하고 싶었다고 해두죠." 이쯤이면 됐겠다 싶어 요리조리 피하던 시선을 들었지만 그의 표정은 전혀 만족한 모양새가 아 니었다. 오히려 더 굳어져 버린 것 같아 불안해진 예은은 말을 덧붙였다. "그런 이유 때문에 호텔에 취직했던 거고, 카지노도 찾아갔던 거예요. 혹시나 당신을 만날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지, 다른 이유는 있지도 않고, 있을 건더기도 없어요." 예은은 침을 삼키며 은규의 기색을 살폈다. 망할!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만 있다면 이렇게 떨리진 않을 텐데 그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달하는건 그녀뿐이었다. 이 복잡한 상황이 그다지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다는 염려에서 오는 조바심. 마침내 필터까지 다 태운 담배를 벽에 던지며 그가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길고 강인해


보이는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침은 대책 없이 말라갔고, 새까만 눈동자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어져 버렸다. "한 가지만 묻지" 드디어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건가? 진심이 전해졌다는 생각에 예은은 살포시 미소를 머금는 여유를 보였다. "얼마든지요!" 한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마주보기를 수십 초 , 그의입가에도 살며시 미소가 걸렸다. 이젠 완 전히 마음을 놓은 예은이 마주 웃어 보이려는 찰나, 그가 작게 속삭였다.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보이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형님, 접니다." 은규의 강한 눈초리에 빨려 들어갈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문을 타고 들려온 묵직한 목소리 가 정적을 깼다. 은규는 예은의 넋을 빼 갈정도로 우아하게 구부렸던 몸을 일으켰다. "들어와라" 칼같은 대꾸에 문이 열리고 수야가 들어섰다. "알아봤냐" "예." 뭘 알아봤냐는 걸까? 그들의 대화를 하나라도 놓칠까 싶어 전전긍긍하며 예은은 거대한 두 남 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또렷이 지켜보았다. "경기도 일산 출신으로, 현재는 남가좌동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직업도 작가가 맞습니다." 아, 살았다! "그런데……." 마음속으로 연발 안도의 감탄사를 외치던 예은은 '그런데'라는 접속시에 주춤했다. "그날 밤 카지노에서 신흥파 녀석 한놈이 저 아가씨와 접촉하는 걸 민서가 봤다고 합니다." 사실 무근인 이야기에 넋이 빠진 예은은 다급히 은규쪽으로 시선을 옮겼다.그의 어깨가 한층 더 팽팽해지는 것이 보였다. "확실한 거겠지?" "예" 은규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예은을 향해 꽂혔다. "아……아니에요!난 모른다구요!" 다급히 고개를 가로젓던 예은은 얼핏 카지노에서 잠깐 접근해 왔던 기분 나쁜 사내를 떠올렸다. 혹시 그걸 접촉으로 오해한 걸까? "남자 하나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터질 것처럼 답답한 마음을 표현할 방도가 없어지고 나니,


거친 호흡 외에는 더 이상 입으로 나올 것도 없어져 버렸다.결단을 위해 생각에 잠겨 있던 은규는 수야를 향해 돌아서 가차 없이 명령했다. "여자를 데리고 양평 별장으로 간다." "감금하기엔 너무 느슨한 공간 아닙니까?" 감금? "외지고 인적 없는 곳은 거기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지.여자의 존재가 외부에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해." 아…안돼! "특별히 어디 있는지 모를 배신자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고,여자가 스파이라면 우리가 역이용할 수도 있을것 같다." 말도 안 돼! "지금 바로 차를 대기시키겠습니다." 수야가 재빠르게 자리를 피하고 나자,침침한 공간 안에 다시 두사람만 남게 되었다.속이 바짝 타 버린 예은은 은규의 견고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감금이라니…설마…농담이죠?" 담배를 꺼내 물고서 그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절망스러운 사실이긴 했으나 전혀 농담 따윌 하고 있는 눈동자가 아니었다. "당신 미쳤어요?감금이라니…인터뷰고 뭐고 다 포기할 테니까 그냥 보내줘요!" 묵묵히 담배 연기만 뱉어내는 그의 침착한 태도가 예은의 분노와 절망을 더욱 부채질했다. "뒤 좀 캐고 다녔다고 이렇게까지 나올 건 없잖아요.그럴 만한 위인으로 보여요,내가?천만에요! 난 겁이 많아서 그런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해요.그러니까…그러니가." "입 다물어." 낮게 깔린 목소리에 핑 하고 눈물이 돌았다.저 사내에겐 그의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거라는 살벌한 현실이 두눈을 질끈 감았다.거친 욕설을 주절대는 그녀의 귓가로 나직한 목소리가 와 닿았다. "충고 하나 할까." 약한 모습 따윈 보이고 싶지 않아 예은은 재빠르게 눈을 깜빡여 눈물을 지웠다.천천히 고개를 들자,. 담배를 입에 문 삐딱한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마치 잘빠진 안드로이드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까닭 없이.다시금 눈물이 비집고 나오려 했다.예은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울 수 없어.울 줄 알고?이겨낼 거야.어떻게든!' 하지만 밀려드는 두려움을 제어할 방도가 떠오르질 않았다.눈물은 벌써 강경한 주인의 의지를 배신하고 눈 밖으로의 일탈을 자꾸만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 "지나친 호기심은 위험을 가져오지."


그래,틀린 말은 아니었다.이게 다 그놈의 소설 때문이었으니까.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자 예은은 처음으로 자신의 글에 대한 집착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그러나 뒤틀린 속은 더욱 꼬여만 갔고 현실 또한 변하지 않았다.분노와 절망과 아픔과 두려움에 갇혀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그녀에게 그는 살벌한 목소리로 빈정댔다. "앞으로는 궁금한 게 있떠라도 적당히 자제하는 법을 배워봐.모두 다 에디슨이 되는건 아니거든." 그의 날카로운 미소를 본 순간,예은의 커다란 눈동자에서 한 줄기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chapter 13 ==이 빌어먹을 인간!감금 놀이는 취미에 없다구…===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달리는 차 안 가득 부드러운 엔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예은은 경직된 몸으로 뒷좌석에 꼿꼿이 앉아,하도 울어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있었다.바로 옆쪽에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는 은규의 단단한 몸에서는 지독히도 강한 열기와 에너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아무렇게나 내뻗어진 길고 강인한 다리에 살포시 맞닿아 있는 자신의 다리가 그 어느 때보다 가늘고 나약하게 느껴졌다.예은은 한숨을 내쉬며 다부지게 몸을 감싸 안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의미 없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가로수와 흐릿한 사물들. 난 어떻게 되는 걸까? 두려움이 엄습했다.지금쯤 걱정에 휩싸인 유희가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그녀의 흔적을 찾을게 분명했다.그렇다고 친구의 충고를 듣지 않았던.자신의 고집을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극도의 두려움 탓에 잠시 시계 바늘을 몇바퀴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지만.그녀는 글을 사랑했고 좋은 작품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모험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전쟁터라도 나갈 표정이군." 오랜 침묵을 깬 중얼거림에 예은은 의미없이 창가에 두었던 시선을 돌렸다.그는 언제나 다른 곳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심지어 함께 차에 오른후 지금까지 한번도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그런데도 마치 모든걸 꿰뚫고 있는 전능자처럼 구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내 표정 따윌 어떻게 알아요?" 오만한 표정으로 그녀는 대답을 기다렸다.그는 거의 다 타들어간 담배를 힘주어 빨았다. "난 언제나 당신을 보고 있지." 거짓말.그러나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장님인 줄 알아요?"


잠시의 대화를 통해 깨달은 바가 있었다.황은규란 남자는 말을 할때 결코 여자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그래서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던 차였다. "난 당신이 도통 눈을 맞추지 않길래 내심 기대에 차 있었는걸요.탈출해도 별 탈이 없겠다,날 찾고 싶어도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테니가…" 은규가 창밖으로 담배를 집어던지고 살짝 몸을 움직이자,예은의 다리와 팔이 더욱 가깝게 밀착되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흠칫 놀라 몸을 움츠리는 그녀와 정확히 눈동자를 맞추었다. "그거 참 유감인데." 가까이에서 대면하고 있자니 마치 인생 전부를 들여다 보고 있는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깊은 연륜에 얼룩진 눈동자였다. 표정 없는 로봇 같다고만 생각했는데 온갖 감정의잔해가 흐릿한 연막에 싸여 조용히 숨쉬고 있었다. 강렬한 시선에 취해 예은은 잠시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긴장감 속에 서린 묘한 관계의 조각하나,이 남자도 감정을 느낄 줄 아는 사람임에 틀림없다는 이해의 정점을 발견하고 나니 내내 의식되어 오던 공포가 어느정도는 가시는 듯햇다. "그런데 유감…이라니요?" "탈출을 해도 내가 당신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거란 망상에 대한 대답이야." 이렇게나 맛있게 담배를 태우는 사람은 첨이었다.그녀가 너구리였다면 아마 연기로 자욱해진 이 동굴 안에서 벌써 질식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데요." "안됐지만 당신은 이미 내 기억 속에 똑똑히 박혀 버렸어.그러니 허튼 수작이나 기대 따윈 일찌감치 버리는 게 좋아." 예은은 천천히,그러나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 기억에 박혀 버릴 만한 짓,한적 없는데요." "적이니까." 예은의 눈동자가 커졌다. "난 적의 얼굴은 절대 잊지 않거든.그러니 탈출은 꿈도 꾸지 말라고." 그의 시선이 다시금 창가로 향하자,예은은 잠시라도 로맨택한 대사를 기대햇던 자신의 우둔함에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한대 콩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더 이상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두려워하는 것도 이젠 신물 났으니까. 천일도는 침대에 누워 능수능란한 안마사의 손길을 느끼고 있었다.권력이 얼마나 달콤하고 대단한 것인지,하루하루 몸소 체험하고 있는 중이었다.손가락 한 번 까딱하면 모든 것을 가질수 있는 권력.너무나 달콤해 점점 깊은 수렁 안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그는 어린 시절 만화를 볼 때마다 주인공들보다는 악당들에게 지대한 매력을 느끼곤 했다.만화의 종국에 이르러서 는 말도 안되는 권선징악의 법칙에 의해 패배의 쓴 기운을 맛봐야 하는 것이 악당이었지만,그들은 커다란 꿈과 야망을 위해


노력하는 그만의 우상이었다.지구정복.그것도 괜찮은 야망이긴 했으나 현실에선 아직 터무니 없는 이야기였고.고위 관부들 까지 좌지우지 할수 있는 이나라 권력을 노리는 아버지의 신뢰쯤이야 얼마든지 노려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영리한 두뇌가 속 삭이고 있었다.'부산 마이더스'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그의 아버지는 대한민국에 몇 안 되는 큰손으로 조만간 정계 진출까지 눈앞에 두고 있었다.그러니 은밀히 맡겨진 이번 유흥 단지 건만 잘 수행해낸다면,그 역시 아버지처럼 어깨들이 쥐고 있는 검은 세력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쯤이야 시간문제일 것이라 생각했다. 돈으로 조종하게 된 각 구역의 우두머리들만 해도 여럿 되었고,환락 도시를 건설할 최적의 토지도 거의 다 접수한 지금. 그가 무찔러야 할 적은 한사람으로 좁혀졌다. 서울 일대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자.황은규. 그는 아직 접수하지 못한 나머지 토지의 지주이기도 했다.단지 이름을 상기했을 뿐인데 온몸에 힘이 들어가 안마사의 손마저 멈칫하게 만들었다. 얼마전,HS 호텔에서 대단히도 건방을 떨었던 사내가 황은규란 사실을 그는 근래에나 알게 되었다. 진탕 퍼마신 술과 약기운에 취해 눈에 밟힌 여자와 여흥을 즐기려다그 돼먹지 못한 놈의 손바닥 아래 구른 기억,지금도 허리 부근에서 후끈한 통증을 생 생히 느낄 수 있었다.녀석이 먼지 하나 없는 바른 생활을 하고 있는 탓에 꼬투리를 잡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그는 이미 녀석 의 형님에게 등을 돌리고 스파이가 돼 버린 비련의 사나이가 올 시간이었다.황은규의 비밀 병기인 백곰의 죽음에 누구보다 지대한 공헌을 하며 계획을 짠 바로 그 배신자 말이다. 갑자기 흥분이 밀려들었다.천일도는 거침없이 여인의 손을 끌어당겨 욕정을 채웠다. 차에서 내려서는 예은의 입에서 낮은 감탄이 흘러나왔다. 탁 트인 시야에 넓게 자리한 호숫가에는 자그마한 배 한 척이 띄워져 있었고,심지어 오리도 파닥거리고 있었다. 넓은 마당에 깔린 잔디와 꽃에서 누군가 정성들여 가꾼 흔적이 보였고,커다랗게 드리워진 나무 한 그루가 운치와 함께 그늘을 제공하고 있었다.슬쩍 고개를 돌려 뒤쪽을 보자,그 옛날 '초원의 집'이라는 영화에서나 보았을 법한 하얀 나무들로 만들어진 2 층집이 보였다.무엇보다 1 층 앞뒤로 마련된 베란다가 인상적이었다.도저히 앞에 서 있는 사내와 감금이란 단어와는 어울릴 수 없을 만큼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별장이었다.은규와 잠시 무슨 말인가를 주고받던 수야가 차를 몰고 빠져나가자,예은은 감상에서 벗어나 한쌍의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감옥에 온 기분이 어때?" 흘러나온 담배 연기가 두사람 사이에 얇은 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가 내 방,아니 감옥인가요?" 예은은 억양 없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감옥 치고는 화려하지." 화려한 정도가 아니었다.소설 속에서나 서술했던 환상의 방이 그녀를 가득 담고 있었다.별장 구조에서 이국적인 냄새가 많이 풍겼고,여성스러운 느낌도 제법 강했다.한 마디로,그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었다. "루크 반 레이크필드라는 사내가 설계한 집이야.동생과 거래하고 있는 제휴 기업 사장인데 솜씨가 보통이 아니지." "그 사람은…아마도 행복한 사랑을 하고 있는 남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은규가 담배를 물다 말고 비웃었지만 예은은 개의치 않았다. "만든 사람의 애정이 깊이 묻어나 있어요." "안 어울리게 감상적인 면이 있군.하지만 감상이란 건 쓸모없는 종자에 불과해.중요한 순간에 실수나 하게 만들지.그러니 현실을 똑바로바,집은 집.방은 그냥 방일 뿐이야." 무료한 목소리에 예은은 붐어내는 모든 동작과 표정 속에 지독한 권태가 묻어 있었다.물에 동동 떠 있는 기름이나 하얀색 도화지 위에 떨어진 까만 잉크처럼,이 사랑스런 방안에서 그는 너무 동떨어진 존재로 비춰졌다. 왠지 그의 영혼이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왜 저렇게 계산적인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인지 이런 아름다운 별장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무엇 때문에 그 진가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그러다 제 처지를 상기한 예은은 주제넘은 상념에 빠진 자신을 비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아무리 아름다운 방이라고 해도 감금을 위한 목적으로 서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었다. "그런데 이집에 설마 우리 둘뿐은 아니겠죠?" 감상을 떨쳐낸 현실적인 질문에 그는 문틀에 기대섰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관리인 노부부가 있어.한 주에 몇 번 들러 관리를 하지." 긴장되었던 어깨를 풀며 그녀는 방황하던 시선을 커다란 창밖으로 돌렸다.어느새 날은 많이 어둑해져 있었고,아름답게 진 노을 빛깔이 방 안에 자연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날…고문하고 심문할 건가요?" 부드러운 어둠 속에서 예은은 내내 가슴에 담아두었던 질문을 했고 미세하지만 그는 멈칫하는 기색을 보였다. "겁먹을 것 없어.멍청한 짓만 하지 않는다면 거칠게 대하진 않을 테니까." 에은은 어렵게 고개를 들었다.어둠과 노을의 묘한 조화가 그의 얼굴 이곳저곳에 명암을 만들어 다소 부드러운 인상을 만들 고 있었다. "정말…이에요?" "난 거짓말은 하지 않아." 하지만 안도하는 마음도 잠깐.마음속으로 공허한 질문이 차올랐다. "이해하기 힘드네요.당신에게 난 스파이일 분이고,감금시킬 목적으로 데려온 거잖아요 사실대로 말하면 난 카지노에서의 그 쪽 방보다 더 퀴퀴하고 더러운 공간에 갇혀 있을 각오까지 하고 있었어요.그런데 지금 상황은 뭐랄까.혼자 여행을 즐기던


상황에서도 난 이런 멋진 집에서 묵어 본 적이 없다구요.거기다 거친 심문도 하지 않겠다니,난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가 아니 에요.세상의 그 어떤 호의도 대가 없이는누릴수 없다는걸 잘 알고 있어요.그래서 미리 묻는 거에요.당시의 신사적인 대접에 내가 치러야 할 대가가 대체 뭐죠?" 대답 대신 은규는 문틀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켜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그 틈에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들었던 명암이 사라 져 다시금 어두운 가면을 드리웠고 예은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쳐 물러났다.결국 침대 끝까지 미리려나,자칫 균형을 잃었 다가는 그대로 몸을 개방한 채 드러누울 판이 되고 말았다. 온몸을 바짝 굳힌채 꼼작도 하지 않은 그녀 앞으로 그가 다가와 멈춰 섰다. '흥분하지마.흥분하면 안 봬!' 허둥대는 자신을 향해 침착하라고 수없이 명령했지만 이성은 영 통제 불능 상태였다.그만큼 황은규라는 사내는 상대로 하여 금 너무도 강하게의식하게 만드는 묘한 재주를 지닌 남자였다.극도로 긴장한 나머지 그녀가 긴 한숨을 내쉬자,그의 입술이 슬쩍 비틀렸다. "신사적인 대접에 대한 대가라 …." 그의 눈동자가 좀더 짙게 변했다고 느낀 순간,거친 물음이 튀어나왔다. "뭘 줄 수 있지?"

chapter14 ==질문>첫 키스에 대한 느낌을 과일로 표현한다면? 의정부의 L 모양-달콤하고 부드러운 딸기맛. 광명시의 I 모양-상큼하고 탱탱한 오렌지. O 모 작가-이사람들 로맨스 소설을 너무 많이 봤구만…===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 은규의 눈동자에 압도되어 예은은 마른 목구멍으로 침을 삼켰다. '뭘 줄 수 있냐니,무슨 뜻이지?' 도톰한 아랫입술을 물고 손까지 비틀며,그녀는 은규의 노골적인 눈동자에만 시선을 박았다.무시무시하고 강인해 심장까지 꿰뚫을 듯한 시선을 당당히 마주 볼 수 있도록,미세하나마 어둠이 용기를 보태주고 있었다. 예은의 시선이 은규의 눈동자에서 입까지 옮아갔다.언제나 삐딱하게 담배가 물려 있는 입술이 매우 남자답고 아름답게 느껴 졌다.1 초가 급하게 점점 더 어둠 속으로 잠겨가는 전망 좋은 방에서 두 사람은 마력에 걸린 듯 서로의 눈동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 원하는 게 더 많은 것 같군." 영원히 단어를 잃어버린 것만 같던 혀를 움직여 예은은 겨우 대꾸할 수 있었다. "당,당신이야말로." 하지만 바보처럼 더듬고 말았다.평소의 자신답지 못하게 유독 허둥대며 재치 있는 말


하나 뱉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고 실 망스러웠다.그녀의 표정,숨소리.눈짓 하나하나가지 모두 관찰하던 은규는 주머니에 가두고 있던 한쪽 손을 꺼내 천천히 침대 기둥을 잡았다,아무런 의미도 담기지 않은 무의식적인 동작이었으나 그 자태가 어찌나 우아하던지 예은의 눈동자는 또 한번 매료되고 말았다.도통 눈을 뗄 수가 없었다.지금은 납치된 상황이고,앞으로 어떤일이 벌어질지 전혀 알 수 없다는 현실 마저 더 이상의 두려움을 몰고 오진 못했다.그가 자신을 해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그가 자신을 해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꿈같은 별장,로맨틱한 방 ,지나칠 정도로 신사적인 납치범까지 다소 불 안한 감은 있어도 극악한 현실의 자각 자체가 힘든 상황이었다. "대답을 듣지 못했어.대가로 뭘 줄 수 있냐고 물었을 텐데." 이리저리방황하던 예은의 눈길이멈추고 다시 그의 시선과 마주했다.묵묵하기만 하던 눈동자 속에 스치는 약간의 흥미.그 가 너무도 태연하게 현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깨달음에 몹시도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어떤 압력에도 부러지지 않을 쇠꼬챙이처럼 꼿꼿해진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 느겨진예은은 처진 어깨를 편 후 유연하게 손을 들어 허리에 얹었다. '고개 들고 눈을 날카롭게,머리에 책 열 권은 얹은 것처럼 도도한 자태만 유지!좋아…이제 멋지게 한방 먹이는 거야!' 자신을 향해 연신 '당당하게'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에은은 마침내 입술을 열었다. "딸꾹!" 그러나 난데없이 튀어나온 딸꾹질에 다시 무너지고 말았다.그의 한족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딸꾹!" 이런!! "딸꾹!" 긴장 할 때면 어김없이 터지는 이놈의 딸꾹질,언제 멈출지 기약할 수 없는 그녀의 고질병 중 하나였다. "딸꾹…딸꾹…." 가슴을 두드리며 예은은 당황한 눈동자로 은규를 바라보았다. "딸꾹,윽....딸꾹!" 새빨개진 얼굴로 가슴팍을 치는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던 은규는 살짝 몸을 틀어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주전자를 들고 천천 히 물을 따랐다. "숨 쉬지 말고 쭉 들이켜." 의외의 배려에 눈짓으로나마 감사를 전한 예은은,벌컥벌컥 물을 들이마신 후 숨을 죽인 채 잠시 정지했다. "아...멈췄,,,,,,딸꾹!" 그녀가 내려놓은 물 컵에 담배를 비벼 끄며 은규는 찌푸린 얼굴로 연기를 뿜어냈다.시끄럽게 이어지는 딸국질 소리가 방안을 온통 삼켜 버린 것도 모자라,불안해진 예은이 방문부터 침대 끝가지 종종걸음을 시작한 탓에 산만함은 극치에 달해갔다.


은규는 침대에 슬쩍 기대어 팔짱을 끼고 예은의 모습을 그대로 관람했다. "딸꾹.제길!" 기다란 입에서 터져 나온 엄청난 욕설들이 그의 귀를 자극했다. "왜 안 멈추는 ...딸꾹 .....거야!" 그는 이렇게까지 심하게 딸꾹질을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당장이라도 베란다에 몸을 던질 기세로 펄쩍 거리는 예은은 갑자기 자리에 멈춰서 코에 세 번 침을 발랐다. "아....딸꾹.착각했어요.딸꾹!" 절정에 달한 예은은 코를 꽉 움켜쥐고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숨을 멈췄다 몰아쉬기를 반복했다.하지만 딸꾹질은 더 거세어 만 갔다. "제발 딸꾹....멈춰줘." 진이 다 바져 버린 예은이 벽에 기대어 주저앉자,은규는 방관자의 자세를 버리고 침대 기둥에 기대었던 몸을 떼어내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정확하고 깜끔한 그 앞에서 또 이런 모습을 보이고 말다니,예은은 그만 죽고 싶은 심정이 되어 버렸다.불한당 때문에 호텔 복도를 운동장 처럼 달음질해 그를 향해 엎어진 첫 만남부터 시작해.등 뒤가 훤히 보이는 드레스 차람으로 낯 뜨거운 소리 나 지껄여 댄 두번째 만남,그리고 세 번째는ㅡ가장 최악이었다ㅡ밧줄에 꽁꽁 묶인 너저분한 모습으로 내동댕이쳐진 것도 모 자라 빌어먹을 딸꾹질까지. '오예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시시각각 표정을 바꾸며 가슴안에 한탄을 늘어놓던 예은은 어느새 그가 자신 앞에 멈춰 섰다는 것을 인지했다.도저히 올려다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한껏 차가워진 눈으로 비웃고 있을것만 같아 고개가 자꾸 자라목처럼 안으로 파고들었다. "언제까지 내가 이 시끄러운 소리를 참아야 하는 거지?" 예은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곧 ....멈출거에요." 이럴 때면 방심하게 한 다음 크게 소릴 질러대는 유희의 처방이 직방이었지만,그걸 바랄 수 없는 현 상황에서 그녀가 할수 있는 일은 오직 기다리는 것뿐이었다.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은규가 몸을 굽혀 그녀의 팔을 잡고 천천히 일으켰다.강한 힘에 이끌려 벽으로 옮아 선 예은은 목덜미 뒤로 옮겨진 커다란 손길에 다시 주저앉을 뻔하고 말았다.너무나 근접한 거리,그녀는 커다래진 눈동자로 그를 마주보다 가까스로 목소리를 입 밖에 냈다. "딸꾹,뭘....딸꾹,하려는 거에요?" 커다랗게 따뜻한 손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엄청났다.예은은 기절한 것처럼 긴장하는 자신의 반응에 놀라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그녀의 목덜미를 감싼 그의 손에 힘이 실리는가 싶더니 다른 손마저 주머니에서 빠져나왔다. 그 손이 대뜸 예은의 작고 예쁜 코를 틀어쥐었다. "딸꾹!뭐 하는 거 ...읍!"


숨이 막힌 예은이 입을 벌리자마자 그의 입술이 단숨에 그녀의 입술을 덮어 버렸다. 생각도,말도,행동도,더 이상은 불가능했다. 장난 혹은 징벌처럼 시작한 키스였다.은규는 여자에게 키스 따윈 해본 적이 없었다.그에게 있어 여자는 보아도 아무 감흥이 없는 돌덩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그래서 가능했다.이런 식의 키스가. 귀를 자극하는 딸꾹질을 잠잠하게 할 수단일 뿐.별다른 의미는 담겨 있지 않았지만 여자의 입술이 이렇게나 자극적일 수 있 다는 사실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도툼하고 촉촉한 감각이 냉정으로 무장한 그의 이성으로부터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숨이 막힌 그녀가 살짝 입술을 벌리자,은규는 이끌리듯 깊은 키스를 시도햇다.그녀의 혀가 깜짝 놀라 슬그머니 내빼는 것을 느끼면서도 웬일인지 더 거칠어지는 자신을 제어하기 힘들었다.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했던 욕구가 조금씩 그를 점령해 가는 가운데,은규는 예은의 코를 쥐고 있던 손을 놓으며 한쪽 벽을 짚고 좀더 확실한 반응을 요구했다.몇 번의 꿈틀대는 시도,잠 시의 미적거림과 탐색 작업.마침내 예은이 무너져 내렸다.목덜미 뒤로 느껴지는 그녀의 손에서 떨림을 감지한 은규는 주머니 에 박혀 있던 나머지 손을 빼내 그녀의 허리를 보듬어 안았다.뜻하지 않은 열정이 놀라울 만큼 빠르고 거칠게 두 사람을 삼 켰갔다. "흠흠...." 아슬아슬한 순간에 들려온 헛기침이 거친 질주에 제동을 걸자,열정이 급속히 후퇴해 갔따.단번에 예은의 입술에서 벗어난 은 규는 놀라울 만큼 침착한 눈동자를 들어 기척이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약간의 놀라움이 섞인 수야의 표정을 마주 보던 은규는 예은과 얽혀 있던 몸을 떼어낸 후 담배를 꺼내 물었다.조금전까지 두 사람이 정말 위험한 키스를 나눈것인가 의심스러울 만큼 침착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였다. "가져왔냐." "아래층에 있습니다.필요한 물건들은 전부 챙긴다고 서둘렀는데.확인하시고 더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다시 구비해 오겠습니다." 허리를 굽혀 보인 수야가 아래층으로 몸을 감추었다.다시 어두운 적막 안에 갇힌 예은은 숨을 가누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으 나,분하게도 은규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간결한 동작으로 담배를 불을 붙이고 있었다. "내려가지." 그의 뒷모습이 너무 야속하게 느껴졌다. "왜..........죠?" "뭐가." "무슨 뜻으로 나한테.키스를.." 그녀가 흘린 물음의 여운을 천천히 곱씹던 은규는 여전히 여유롭게 담배를 태우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끄러웠으니까."


"뭐라구요?" "그 딸꾹질." 어느새 딸꾹질은 거짓말처럼 멎어 있었다. "덕분에 멎었으니 감사나 하라고." 거침없이 걸어가 열린 문 밖으로 나서는 그를 보며 예은은 헛웃음을 흘렸다. '뭘 기대한거야?아니,언제부터 저사람한테 기대따윌 한건데?납치범과 인질 사이일 뿐이잖아.잊었어?머저리처럼 굴지 말라고!" 아..정말 왜 이렇게 되는 것인지,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진 예은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담배를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한 번의 키스로 완벽한 욕망 덩어리가 돼 버리다니,냉정을 가장해 문을 열고 나섰 지만 결국 이모양이었다.여자로 인해 손끝이 떨릴 만한 욕망에 사로잡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수야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디까지 폭주해 버렸을지 장담할 수도 없는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적의 스파이일지도 모르는 여자를 두고 뭘 어쩌자는 것 인지.그가 속한세계에서 감정은 곧 약점이 될 수 있었다.그래서 가면 속에 자신을 숨긴 채 살아오는 동안 심장도죽어 버린줄 로만 알았는데.���녀가 그의 심장에 잃어버렸던 욕망과 갈망이 라는 조각을 맞춰 버린 것 같았다. '세상 어떤 남자에게나 존재하는 욕구일 뿐,그 이상은 아니야.' 껄끄러운 기분을 털어 버리며 천천히 층계를 내려갔지만,입안 가득 남은 그녀의 감촉이 잠자는 욕망을 은근히 부추기고 있었 다, chapter 15 ==무료함으로 사람 죽이는 방법 1 단계:대답 안하기 아,대단한 발견이로다!!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 감옥에서의 첫날이 밝았다. 나무와 호수를 미롯한 자연의 향기가 캄캄하기만 한 수면의 세계를 어지럽히며 조심스레 예은의 눈을 열었다. 낯선 풍경,낯선 침대,낯선 천장까지,잊고 있던 모든 현실이 자연스레 표면 위로 떠오른다.익숙지 않은 잠자리에서 우습게도 그녀는 꿈하나 꾸지 않은 채 너무나 곤히 잤다.납치와 감금이라는 특수한 상황임에도 늘어지게 휴식을 취한 사람마냥 나른한 만족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날 수 있는 여자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자신의 뻔뻔스러움이 새삼 놀라울 뿐이었다. 베개에 코를 박으며 슬며시 몸을 돌리자,이미 중천에 떠 있는 태양에 눈이 따가웠다.누군가 저 커튼을 내려 빛을 좀 가려줬 으면 좋겠는데...예은은 다시 베게에 코를 묻었다.부드러움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키스.묵직하게 부푼 입술이 베게에 쓸리자


마자밀쳐두었던 기억의 잔해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다. '시끄러웠으니까.' 헛웃음이 났다.그가 로맨틱한 이유로 여자에게 키스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었지만,입 막음 따위로 그런 짓을 할 만큼 무모 하다고도 생각지 않았었다.사실 그런 건 순정 만화나 로맨틱한 소설에 나오는 단골 장면이 아니던가.현실 아닌 망상의 세계에 만 존재하는. "아,분해..."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원망스러운 기분을 누를 수 없었다.그저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만 싶었다.마침내 벌떡 몸을 일으킨 예은 은 수야가마련해 준 얇은 잠옷 차림 그대로 침대에서 내려섰다.까치집마냥 머리가 제멋대로 뻗쳐 있었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 았다.그녀는 그대로 방을 빠져 나갔다. 한바탕 부딪쳐 볼 생각으로 아래층까지 내려왔건만 집 안이 너무 고요해 조금 맥이 빠져 버렸다.침묵에 둘린 넓은 공간속에 홀로 내버려진 작은 돌멩이처럼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사람 흔적을 찾아 보아도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 '가만,아무도 없다는 건...나 혼자뿐이란 뜻?' 일시에 강한 흥분으로 뭉친 엔돌핀이 몸 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 올랐다.탈출 기회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너무 들뜬 나머지 그녀는 자신이 잠옷 차림이라는 것과 신발도 신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이곳의 자리 를 전혀 모르거니와 밖으로 나가 봤자 특별한 운송수단이 있는게 아니라는 이성의 울부짖음 또한,단순한 흥분과 기대에 가로 막혀 뇌까지 전달되지 못한 채 휘휘 날아가 버렸다.육중한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호수가 몰고 온 따뜻한 바람이 얇은 잠옷을 흘낏 제치고 지나갔다.문득 가공할 만한 허기가 밀려들었다.태양에 노출된 탓인지,아니면 갑자기 몸을 많이 움직인 탓인지 무한정 시야가 흔들리더니,맹수의 이빨처럼 날카롭게 활개 치던 흥분이 슬그머니 뒷전으로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거의 이틀을 굶었단 사실이 상기되었다.납치된 이후 줄곧 묶여 있었던 데다 어젯밤에는 껄끄러운 키스 사건이 준 적잖은 충격으로 방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러니 평소 밥도둑이라고 할 만큼 음식을 좋아했던 그녀로서는 제대 로 서 있는 게 용할 만한 상황이었다.극심한 허기 탓일까.어디선가 맛 좋은 냄새가 코를 자극하기 시작했고,저도 한 몫하겠 다는 듯 뱃속 위장들까지 우렁차고 길게 목청을 뽑아대는 통에 그녀는 이 천재일우 앞에서도 발길을 돌릴수밖에 없었다. 마음속 또 다른 자아는 지금 배고픔 따위가 문제냐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탈출에의 희망은 이미 조각나 버린 상태였다. 무작정 나간다고 되는 게 아니니,탈출도 하기 전에 굶어 죽고 싶지 않다면 좀더 냉정히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와......."


주방에 들어서자마자 예은은 탄성을 질렀다.정갈한 식탁 위에 지금껏 그녀가 대했던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 푸짐한 음식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예은은 그대로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망설임 따윈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별장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마련된 개인 테니스장에서 은규는 재법 상쾌한 기분으로 운동을 마쳤다.땀을 한껏 뺀 후에 태우는 담배 한 대의 맛,세계어떤 베스트셀러 작가가 이 느낌을 제대로 표현해 낼수 있을까.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뛰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나른한 만족감에 취해 니코틴을 보충하고 있던 은규는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맛있는 냄새에 걸음을 빨리했다.집주인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관리인 할머니가 일찌감치 다녀간 모양이었다. 입가에 미소마저 흘러들고 있었다.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불청객이 식탁을 온통 점령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상쾌했던 기분이 단번에 땅으로 내려꽂혔다. 잊고 있었다.....................저 골칫덩이 여자를. 그녀는 음식의 절반을 해치운 것도 모자라 포만감에 찬 배를 톡톡 두드리며 앉아 있다가,그를 발견하곤 멋쩍은 인사를 건냈다. "아....왔어요?" 그리곤 도무지 해석이 불가능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여 보였다.정장이 아닌 간편한 차림새의 그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져 그녀의 혼을 쏙 빼놓았다.큼지막한 흰색 나이키 반팔 터에 무릎까지 오는 남색 면 반바지.땀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평소 너무나 완벽해 로봇처럼 느껴지던 그의 인상을 완화시켜 주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대단히 매력적이라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었다.건강한 에너지와 함께 마구 분출되고 있는 페르몬이 다소 위험한 기운을 풍기긴 했어도,지나치게 완벽한 모습보다는 조금 흐트러진 지금의 모습이 훨씬 더 보기 좋았다. "크게 한판 벌인 모양이군." 반사적으로 시선을 떨어낸 예은은 자신의 차림새를 의식하곤 옅은 신음을 터뜨렸다.얇은 잠옷 차림에 자다 일어난 폭탄 머리. 감옥에서 치장 따위가 웬말이냐고 변명해 봐도 지나치리만큼 매력적인 그 앞에서는 구차한 변명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누구는 흐트러져도 벌 떼가 몰리는 꽃처럼 매력을 팍팍 풍기고 있는 반면,누구는 지하철 구석에 자리한 노숙자 꼬락서니라니 참으로 불공평한 세상이 아닌가.자괴감에 빠진 예은은 다채롭게 표정을 바꾸며 새삼 제 외모를 한탄했다. 그녀와 달리 그의 신경은 한바탕 폭격을 당한 식탁에 쏠려 있었다.정말이지,신랄하게도 먹어 치운 듯햇다.새벽을 버금가는 대식가가 지구상에 또 존재한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수가 없었지만,눈앞 식탁에 자행된 행태가 드러낸 사실은 다른 생각의 여지를 주지 않을 태세였다.그는 테니스 채를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건장한 몸을 숙이며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예은 쪽을


흘낏거렸다.문득 그녀의 정갈한 머리 모양을 본 일은 카지노에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는 사실이 상기되었다.하얗고 긴 목의 중간쯤에서 달랑거리는 단발머리는 충분한 빗질을 받지 못한 때문인지 언제나 불일치를 이루고 있었다.그녀는 확실히 세상 기준이 말하는 미인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그래도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미를 느낄수 있었다.작은 얼굴 주위로 컬 지며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얇은 쌍꺼풀이 진 길고 커다란 눈은 언제나 반짝거렸고,작지만 나름대로 기품있게 솟은 콧대와 적당한 비율 아래 자리한 길고 큰 입술이 독특한 관능미를 가능케 했다.그래.독특한 매력. 그것이 오예은이란 여자에게서 퍼져 나오는 느낌의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식사........안해요?" 은규는 그제야 자신이음식처럼 예은을 ?고 있단 사실을 깨달고 시선을 내렸다.그녀가 어떤 모습이건 그에겐 그저 조심해야 하는 적일 뿐,사치스러운 생각들로 현실 감각을 흐려놓지 말자고 다그치며 그는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하는 아침 식사라니,조금은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가끔 동생 부부나 수야와 함께할 때를 제외하고 그는 언제나 식탁 앞에서 혼자였다.아무래도 되도록 빨리 그녀의 뒷조사를 마치라고 수야를 재촉해야 할 것 같았다. '함께'라는 단어에 익숙해지면 여러 모로 골치 아파지니까. 몸이 근질거려 더 이상은 참을수 없었다. 가는 곳마다 따라붙는 그의 존재가 보통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신문을 보거나 책을 읽으며 자신만의 일을 굳건히 진행해나가 고 있는 듯했지만,실은 그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은은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4 시간 내내 같은 일만 반복하고 있었다.빈둥거리다 지루해져 말도 안 되는 탈출 게획을 세우기 시작했지만,숱한 계획들 중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깨달음에 머리가 지끈거려 별장 내부를 거닐었다.잠시 후엔 그것도 지쳐 다시 빈둥거렸고,결국 한계에 다다라 풀썩 주저앉아 죽을 기세로 그를 노려보았다.영양가 없는 일련의 행동들을 한나절이 지나도록 반복하고 있자니 그야말로 돌아 버 릴 지경이 되어 버렸지만,그는 여전히 느긋한 자세로 독서에 열중하고 있었다. 참다못한 에은은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식사 후 처음으로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 "날 죽일 거죠?" 대꾸조차 없었다.그래,대답할 리가 없지. "사람을 죽이는 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죠?가장 보편적인 살인 외에도 굶겨 죽인다든가 얼어 죽게 만든다든가,혹은 지겨워 죽게 만든다든가...." 은규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지겨워 죽는 사람은 없어." 시선은 여전히 책에 박혀 있었지만 그래도 그가 반응이란 걸 보이자,예은은 왠지 모를 승리감을 느끼며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이어갔다.


"왜요?지겨워 죽게 만드는 것처럼 쉽고 간편한 방법은 없을것 같은데,당하는 사람이야 최상의 고통이지만 말이에요." 다시 묵묵부답,어디까지 가나 해보자! "가르쳐 줄까요?좋아요.잘 들어둬요.무료함으로 사람 죽이는 방법 제 1 단계,대답 안 하기." 은규의 입에서 짧은 욕설이 튀어 나왔지만 예은은 멈추지 않았다. "뭔가 질문을 했는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면 사람은 기본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되거든요,그럼,혼자 또 망상을 하게 되죠. 왜 대답을 안 할까,내 얘길 듣긴 한 건가,혹시 날 무시하는거야?그렇다면 참을 수 없지.누가 이기나 해보자!이런식으로 말이 에요." "그래서 지금 당신이 지겨워 죽겠다는 소리야?" 마침내 그가 책을 덮었다.예은은 묘한 흥분을 느꼈다. "잘 아네요." 납치를 당한 주제에 어떻게 저리도 당당할 수 있는지,그녀늬 오만한 태도가 거슬린 은규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눅 든 채 두려워 떨다 누가 묻지 않아도 스스로 진실을 토해내며 이 감옥헤서 꺼내달라고 울부짖어야 할 판에,지겨워 죽겠다는 건 말도 안되는 반응이었다. '너무 풀어줬어.' 아직 물증이 없는데다 여자라는 사실을 감안해 나름대로 늦춰줬던 긴장이 도리어 역효과를 가져온것 같았따.은규는 고개를 들고 차가운 조소를 입가에 걸었다. "착각하지 마." 강한 눈초리와 함께 흘러나온 딱딱한 목소리에 생글 거리던 예은의 얼굴이 금방 구겨졌다. "뭔가 잊고 있나 본데,우린 여행이나 즐기러 온 게 아니야.당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내가 다시 상기시켜 줄 필 요는 없을 텐데." 예은은 고집스레 입을 다문 채 날카로운 눈동자로 은규를 바라보았다.꼭 이런 식으로 약자의 처지를 상기시켜 벽 속에 가두어 야 속이 시원한 것인지,그녀가 두려움을 잊기 위해 다소 과장된 행동을 한다는 걸 모른단 말인가! "나도 당신이 처한 상황을 똑똑히 일러줄까요?이봐요.당신은 아무 죄 없는 날 납치했어요." "하!" 기막힌 실소가 터져 나왔다. "당연한 권리?당신 인신매매업자였어요?몰랐네요!" "그럼 당신은 남의 뒤나 캐고 다니는 심부름센터 직원이었나?개인적인 사생활을 침해당한 인격체로서 진실을 바로 알고 싶어 하는건 당연한 내 권리야." 갑자기 눈물이 비집고 나오려 했다.답답하고 억울해 어딘가에 마구 소리치고 싶었다. '왜 안 믿어주는 거야.대체 왜!' 하늘에 맹세코 그녀는 결백한데,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으며 가만히 입 다물고 처박혀


있으라니.세상 어떤 바보천치가'네.알겠 습니다'하며 찌그러져 있을까.이성을 향한 문이 막을 내리고 질척한 감정에 지배당하기 시작한 예은은,무서운 기세로 자리에 서 일어나 충동적으로윗옷을 붙잡고 확 열어 젖혔다.심각하게 어그러지는 은규의 얼굴이 보이자 더 강한 분노가 그녀를 채근 했다.매서운 기세로 떨어져 나간 단추들이 바닥곳곳에 흩어졌고,방어막이라곤 브래지어뿐인 그녀의 하얀 가슴 골짜기가 훤히 드러났다. "차라리 내 배를 갈라요!" 예은의 표독스러운 목소리와 극단적인 행동을 은규는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 "무슨 짓이야." "내 배를 가르고 속을 뒤집어서 스파이의 시커먼 심장이 있는지,아니면 억울한 누명으로 바짝 오그라든 심장이 들어 있는지 직접 확인하라구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의사를 전하기 위해 은규는 몸을 일으켜 돌아섰지만,울분 섞인 그녀의 외침이 등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난 결백해요.누구한테도 부끄러울 만한 짓 한 적 없어요.오늘 여기서 그걸 증명하지 못할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어차 피 미쳐 죽을 테니까!" 예은의 두 눈 가득 퍼져 나가는 독기가 물빛 액체로 변해갔다.

chapter 16 ==야만인,야만인,야만인.....!===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좋아,원한다면." 갑자기 은규가 품속에서 잭나이프를 꺼내 들자,예은은 그대로 얼어 버렸다. 칼을 소지하고 있었어? 믿을 수가 없었다.얼굴에 감정의 잔해는 남아 있지 않았지만 눈빛을 가득 채운 위협이 최고조에 이른 대기를 두려움으로 달 구어 갔다.그는 전혀 거부감 없이 손 안에서 자유자재로 칼을 굴리며 벌어진 예은의 가슴팍을 무심히 바라보았다.딱히 다른 행동은 취하지 않고 있는데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잠시 동안의 객기가 사라지고 나자 한가득 몰려온 수치심에 정신이 얼얼했다.잘 차려진 밥상처럼 훤히 벌어진 가슴,그 치부에 정확히 꽂혀 있는 잔인할 정도로 강한 시선.얼굴이 달아오른다. 아니,온몸��� 열꽃이 피어올랐다.폭주하는 심장이 정상적인 호흡을 앗아가,애써 세우고 있던 어깨마저 거푸 흔들어 댔다. 마침내 그의 손이 움직였다.익숙한 솜놀림으로 치켜세워진 칼날이 정확히 그녀의 가슴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 남자 정말 찌를 건가 봐!억울해.적어도 누명은 벗어야 하잖아!'


그 언젠가 주인공이 칼에 맞는 장면을 쓴 적이 있었따.되도록이면 모든 걸 직접 경험한 후 활자로 옮기고 싶은 그녀였지만 덮어 놓고 칼에 찔려 볼수는 없는 노릇이기에,온전히 상상으로만 그 장면을 써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달랐다.칼을 마주한 순간의 절박감.그것은 단순히 공포나 두려움이란 단어로 납득될 만한 감정이 아니었다.먼저 시 간 개념이 없어져 버린다.일 초가 일 년이 되고 일 년이 십년으로 변해,공간 감각마저 상실시켜 온몸의 질서를 어그러뜨렸다. 그녀의 반응은 안중에도 두지 않은 채 그는 기어코 바로 앞까지 다가와 칼을 든 손으로 가슴 끝을 찔렀다.차갑고 날카로운 감촉에 열심히 돌아가던 몸속의 수레바퀴가 일순 정지했고,예은은 그렇게 잠시 죽은 자가 되었다. "명심해.당신이 원한 거야." 소름 끼칠 정도로 평이한 목소리와 함께 그가 손에 힘을 주었다. "앗!" 입술을 깨물고 두 눈을 감으며 예은은 돌덩이처럼 온몸을 굳혔다.머리 속을 새하얗게 비운 후 감히 예측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의 의 순간을 기다렸지만 아픔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대신 단단히 가슴을 감싸고 있던 브래지어가 스르르 풀려 발치 위로 떨어져 내렸다.순신간에 그녀는 적 앞에서 맨 가슴을 드러낸 꼴이 되고 말았다. '뭐....뭐야,이거!' 다시금 몸속의 수레바퀴가 움직여 새파랗게 질렸던 얼굴과 피부 조직을 빨갛게 달구었다.지금껏 살아오며 숱한 일들을 겪었 지만 이렇게 당황한 적은 없었다.정말 기막히다는 어원의 뜻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이가 갈리도록 치절하게 알 수 있는 순간 이었다. "내 앞에서 쓸데없는 객기는 부리지 않는 게 좋아,언제라도 정확히 심장에 꽂아줄 수 있으니까." 붉게 물든 망부석이 된 예은에게 날카로운 경고를 마지막으로 그는 보란 듯 칼을 접고 무참히 돌아섰다.아직도 펄펄 살아 날 뛰는 매서운 기세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빳빳하게 일어서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그저 움직임 없이 자리에 박혀 있었다. "가슴은 잘 봤어.생각보다 제법 괜찮군." 수치심으로 몸을 떨기 시작한 그녀를 비웃으며 그는 미련 없이 문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쿵쿵쿵쿵.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전화로 정리하며 담배에 불을 붙이던 은규는 소리 나는 쪽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칼부림 사건 이후 일주일이 지났다.그동안 그녀는 의도적으로 그를 피하며 어마어마한 탈출 시도를 감행했다.첫 번째 탈출 시도는 정말 어처 구니가 없었다.수야가 정기적으로 생필품을 싣고 들어오는 월요일 밤,배신자의 존재와 유흥 단지에 손을 댄 조직들의 낌새에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는 문득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었다. "무호한 짓을 하는군요.이런 데서 탈출이라니." 은규는 물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로 가보지." 밖으로 나가자마자 그는 수야가 몰고 온 자동차 트렁크를 향해 걸어갔다.이 바퀴 달린 물건 외엔 운송 수단이 전혀 없는 곳 이니,그녀가 숨어들었을 곳이란 눈 감고도 뻔했다.그의 예상대로 그녀는 트렁크 안에서 발견되었다.한 번 닫으면 안에선 다시 열수 없는 캄캄하고 비좁은 공간 안에서 그녀는 있는대로 몸을 구겨 넣고서 땀을 철철 흘리고 있었다. "술래잡기라도 하고 싶은 모양인데,나이를 생각해야지." 뒤로 다가온 수야의 입에서 애써 참고 있던 웃음이 흘러 나왔다. "어서 나와." 이미 탄로가 났는데도 죽도록 버티는 그녀의 고집 때문에 이후로 30 분을 더 소비해야 했다.두 번째 탈출 시도는 다음날 새벽 에 감행되었다.전날 전과에 대한 대가로 하루종일 수야의 감시를 당해야 했던 그녀는 머리가 아프다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모두 잠이 든 새벽 세 시쯤 슬그머니 일어나 또다시 밖으로 나갔다.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전력 질주해 별장에서 제법 떨어진 입구까지 달아난 예은은 인가라도 보일까 싶어 다급한 시선을 열심히 굴려댔다.하지만 별장 입구부터 숲 속 깊숙 이까지 발빠른 사냥개인 그레이하운드와 사냥의 명견 셰퍼드들이 포진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그녀는,어둠 속에서 검은 물체들이 등장하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으르렁대며 모습을 드러낸 무리는 늑대 못지 않는 커다란 몸집으로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이며 그녀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세상에..." 어린 시절 호되게 물린 기억 때문에 개라면 까무러칠 만큼 무서워하는 그녀였다.번뜩이는 사냥개들의 눈동자와 이빨이 톱날 처럼 그녀를 압박해 왔고,입가에서 마구 흘러내리는 침덩어리들이 살갗을 녹일 용광로처럼 끔찍해 보였다. "저....저리가!" 죽음에 직면한 공포가 준 마지막 힘을 다해 소리치자,주위에서 뱅뱅 맴돌기만 하던 사냥개들이 달려들 태세로 몸을 잔뜩 긴 장시켰다.결국 예은은 다 포기한 채 무릎에 얼굴을 박으며 거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사람 살려!" "앉아." 기도에 대한 응답처럼 적절한 순간에 그가 나타났다.살기로 털을 바짝 세우고 있던 사냥개들은 주인의 명령에 즉각 복종하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꼬리까지 살살 흔들어 댔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예은은 자신이 탈출 시도 중이었다는 사실도 잊고서 반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암흑 같은


분노에 휩싸인 얼굴을 보자 그만 자신의 처지를 상기하곤 숨을 죽였다. "그렇게 죽고 싶어?" "난..." "한 번만 더 이따위 짓 하다 걸리면 여자라도 용서 안 할 테니 알아서 해." 차디찬 밤공기만큼이나 냉랭한 목소리에 예은의 온몸 가득 소름이 돋아 올랐다. 그후,네 번의 탈출 시도가 더 있었지만,그의 심경만 잔뜩 뒤집어 놨을뿐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것이 먹혀들지 않자 지쳐 떨어진 것인지,어제부터는 방에 콕 박혀 얼굴도 내보이지 않던 그녀가 오늘은 또 온종일 쿵쿵대고 있었다.그 소리가 계단을 타고 가까워지는 걸 보니 그에게 용건이 있는 듯했다. 예상대로 서재 문이 열리며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빨갛게 상기된 얼굴과 잔뜩 헐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는데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느껴지는 건 도대체 무슨 조화인지 알 수가 없었다.찌푸린 시선을 그녀의 가슴 쪽으로 내린 순간,지난번 일이 떠오르 며 묘한 흥분이 찾아 들었다.반갑지 않은 기운이었다.괜히 화가 난 그는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이며 날카롭게 빈정댔다. "그렇게 뛰어다녀 봤자 집이 무너지진 않아." 여느 때와 다르게 그녀는 제법 침착한 태도였다. "들어가도 돼요?" "이미 들어왔잖아." 거만하게 소파에 몸을 묻고서 은규는 찬찬히 예은의 표정을 관찰했다.입술이 고집스레 닫혀 있는 걸 보니 뭔가 결심을 해도 아주 단단히 한 모양이었다.모든 걸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작정한 건가?그렇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갖가지 추측으로 그의 머리가 바삐 움직일 때쯤.그녀가 바로 앞에 다가와 섰다.아련한 비누 향기가 후각을 자극해 온다. 그것은 바로 은규 자신이 애용하는 비누 냄새였으나,낯선 여인에게서 자신의 체취를 맡고 나니 죽어 있던 감각들이 우왕좌왕 하기 시작햇다. "부탁이 있어요." "부탁?"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줄 건가요?" "들어 보고 결정하지." 예은은 잠시 멀뚱히 서서 그의 입가에 물린 담배를 뚫어지게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떨어뜨리며 간절히 염원을 담아 말했다. "타자기 좀......구해줘요." "안 돼." 예으느이 고개가 번쩍 들렸다. "왜요?내가 그 타자기로 당신 머리라도 후려칠까 봐서?" "그것까진 생각 못했는데 그럴 수도 있겠군,타자기는 외부에 소시기을 전달하는데 더 유용한 수단이지.어설픈 탈출 시도도


모자라 요즘 은근히 관리인 노부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 알아.그러니 타자기 외에 어떤 필기도구도 지급해 줄수 없어.당신 신상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확인될 때까지 참아." 그녀의 얼굴이 이제는 분노로 달아올랐다. "난 작가에요!나한테서 글마저 빼앗겠다는 거에요.지금?" "쓰지 말라고 한 적 없어." "타자기가 아니면 안 된단 말이에요!" 은규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별 조건이 다 있군.글쟁이라면 어디서든 쓸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쓸데없는 수작 부리지 말고 방에나 박혀 있어." 예은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참을 만큼 참고,구겨 넣을 만큼 구겨 넣었다.무료해 죽을 정도로 철저하게 없는 사람 취급 하는 이 남자의 무관심,정말로 참을만큼 참았단 말이다!그런데 고작 타자기 하나도 허락하지 못하겠다고? 지독해.질려 버릴 정도로 악질이야! 묶어놓고,심문하고,폭력을 행사하진 않았지만 그는 더 교활하게 사람 숨통 조이는 법을 알고 있었다.이제 정말 한계였다. 글 쓰는 기쁨마저,빼앗으려는 그 앞에서 어떻게든 봉하려 했던 온갖 감정들이 일시에 터져 나왓다. "이 나쁜 놈!" 폭주하는 기관차처럼,예은은 주먹을 치켜들고서 힘껏 달려 들었다.그리곤 가슴이고 얼굴이며 구분할 것 없이,있는대로 주먹을 휘두르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개도 안물어갈 나쁜 놈아!왜 자꾸 무시해?네가 무슨 자격으로 날 이런 취급하는 건데?집에 보내줘...엄한 사람 고문하지 말 고 그냥 보내달란 말이야!" 결국 예은은 은규의 발치에 주저않아 목 놓아 울기 시작햇다.푹 숙인 고개가 심히 떨어져 내렸지만,아직 절반도 터뜨리지 못했다는 듯 더 극심하게 울어댔다.처음으로 은규는 여자 앞에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알수 없는 기분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온 힘을 다해 우는 여자를 본적은 단 한 번,아버지란 인간에게 버림 받을 때의 어머니 모습뿐이었다.갑자기 예은의 모습이 어머니와 겹쳐 보였다.생각해 내면 벗어나기 쉽지 않아 차라리 기억 저편에 밀어두는 쪽을 택했던 어머니란 존재. 그 기억이 꿈틀하고 있었다. "그만 해." 자꾸만 아픈 기억이 솟아오르는 것이 싫어.은규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한 마디 했다.그러나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그녀 는 더욱 크게 절규하며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듣기 싫으니까 멈춰." 한층 더 거칠어진 은규의 음성에 울음이 가득 묻어난 예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 리가 없지...당신 따위가." "그치라고 했어." "당신은 눈물 같은 거 흘린 적 없지?남을 배려한다는 게 어떤 건지.외롭다는 공포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지도 못할 거야. 그러니까 자기 때문에 우는 여자한테 듣기 싫으니 입 다물란 말 따윌 지껄일 수 있는 거라구!" 물기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 가운데 자리한 극심한 고통과 분노가 그의 가슴을 신랄하게 질책했다. "당신이 불쌍해....." 은규의 얼굴 근육이 경직되었다. "하지만 그런 당신 인생에 말려든 나는,나는...." "한 마디만 더 하면 후회하게 될거야." 한계점에 다다른 은규의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막았지만,보란 듯 예은의 입에서 마지막 말이 흘러나왔다. "나는 더 불쌍해..더....!" 마침내 폭발한 은규의 강한 손이 예은의 얇은 팔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그리고 대뜸 그녀의 입술에 무자비한 이빨을 박아 넣으며 경멸 섞인 키스를 시작했다.그의 한쪽 팔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아프게 쥐어 당겼고,이빨로는 입술을 물고 혀에 생채기를 내며 자신의 더러운 기분을 몽땅 털어놓았다. 피 맛이 났다.비릿한 피 맛이.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은규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당겨 다시금 입을 떼어냈다. '망할' 에은의 입가에 흐르고 있는 피와아픔에 짓눌린 커다란 눈을 보자,그는 갑자기자신이 지독히도 사나운 동물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에몸서리를 쳤다.혼란스러웠다.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져 거칠게 돌아서 이성을 잃고 방황하는 맹수처럼 머리를 쓸어 올렸다.그의 등 뒤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예은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려 퍼졌다 "야만인......"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가 버리자,뒤에 남은 은규는 필터 반이 타들어 갈때까지 담배를 빨고 또 빨았다.자신 안에 있는야수의 성미에 본인조차 섬뜩한 순간이 있었지만 오늘은 가장 지독하게 느껴졌다.그녀의 입가에 흐르던 피가 눈동자에 박혀 자꾸만 아른거렸다.뭔가 따끔거리는 감각에 오른족 손을 펴보니,한 움큼의 머리카락이 살포시 카펫 위로 떨어져 내렸다. 아무리 강하고 힘 있는 여자라 할지라도 남자에게는 근복적으로 밀리는 법이다 .그런데 그녀에게 말로 제압당할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자 힘을 이용해 굴복시키려 했다. 야만인.....지금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단어가 아닌가.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울 때까지 그는 생각 속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다.30 분쯤 그러고 있었을까.겨우 마음을 추스르곤 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수야의 번호를 눌렀다. [예,형님] 묵직한 수야의 목소리에 그나마 안정을 찾은 그는 곧 망설임을 버렸다. "타자기 하나 구해와라."


chapter17 ==타닥,타닥,타다닥. 아,이 경쾌한 소리!!==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은규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호텔과 카지노 서류를 훑고 있었다. 사무적인 일에는 영 매력을 못 느끼는 탓에 언제나 대충 훑어본 후 현석에게 맡겨왔었다.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번엔 좀 꼼지락거려 줘야 할 듯 싶었다.다른때 같았으면 바쁜 동생에게 미안해 직접 사무실로 찾아 갔을 테지만,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품고 있는 지금 자리를 비운다는 게 영 내키질 않았다.그래서 부득이하게 현석에게 연락을 취했고 저녁쯤 에는 녀석이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오랜만에 동생과 함께할 수 있다는 은근한 기대감이,무료한 시간마저 견뎌낼 힘을 보태 주었다.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낡은 타자기를 힘겹게 안고 있는 예은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도 모를 감정에 이끌려 수야에게 지시를 내린 그날,그는 바로 번복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스파이일지도 모를 여자에게 쓸데없는 배려를 해서 어쩌자는 것인지.그래서 타자기를 구해와 내미는 수야에게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갖다줘.네가 구해온 걸로 해둬라." 무슨 영문이냐고 물을 법도 한데 수야는 언제나 침���해야 할 때를 잘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그는 은규의 심기가 무척이나 불 쾌하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서 자신의 호의인 양 예은에게 타자기를 건냈다. 놀랍게도 타자기를 손에 쥐자마자 그녀을 덮고 있던 먹구름은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믿을 수 없을 만큼 생생해진 예은은,그 길로 방에 틀어박혀 며칠째 타자기만 두드리고 있었다.기껏해야 고물 타이핑 기계인 것을 무슨 애완용 동물처럼 안고 다니니 별 취미도 다 있다 싶었다.저 자그만한 기계하나에 심술을 접고 얌전해진 것에 대해서는 다행스럽게 생각했지만,확실히 거친 세계에서만 살아온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여지가 많았다. "이 타자기,어디서 났는지 안 물어요?"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향해 예은이 가뿐한 걸음을 옮겨왔다. "어딘가에서 났겠지." 그가 짧은 대꾸 하나로 별로 알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명백히 하자,그녀는 탁자위에 쿵 하고 타자기를 내려 놓으며 턱을 치켜 들었다. "수야씨가 줬어요." 수야 씨? 저보다 세 배는 더 클 법한 사내의 이름을 친근히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상냥함이 스며 있 었다. "좋겠군." "네,보기와는 다르게 정말 사려 깊은 사람이지 뭐에요.누구처럼 벽창호도 아니고." 싸움을 걸었으니 뭔가 반응이 일기를 기대하면서 예은은 타자기 앞에 자리를 잡고


슬쩍 은규의 눈치를 살폈다.하지만 늘 그랬 던 것처럼 속 터지는 무반응뿐.아,정말이지 지독한 남자란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고 반복되는 그의 행동 패턴에 유쾌한 기분을 모두 상실해 버린 예은은.신경질적으로 타자기를 두드려 자신의 심경을 표현해 냈다. 타닥.타다닥. 그의 미간이 구겨지는 게 보인다. 타닥,타다다다닥!! 왠지 모르게 손가락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방에 가서 해." 굉장히 거슬린 모양인지 그가 마침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반응을 보였다. "방은 좀 답답해서요." 제대로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마당에 순순히 물러날리는 만무,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예은은 손가락을 더 힘껏 놀렸다. "가서 하라고 햇어."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그녀는 더 활달해진 목소리로 응수했다. "난 답답하다고 했어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은규가 노려보기 시작하자,그가 드리운 그림자에 갇힌 에은은 슬그머니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무슨......할말이라도 있어요?" 위험 전파가 곳곳에서 신호를 보내왔지만,예은은 애써 오만한 표정을 꾸미려 노력했다. "원래 그렇게 말귀 못 알아듣나." 짜증이 한껏 묻어난 목소리와 함께 그의 발이 탁자 끝에 도달했다. "그러는 당신은 원래 그렇게 아무나 의심하나요?" 한 치의 물러남 없이 예은은 제대로 맞받아쳤다. "적당히 해두는 게 좋을 거야." 섬뜩한 미소를 가장해 내던진 협박에 예은은 마음속 저편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오기에 몸서리를 쳤다. 흥,그깟 협박에 쪼그라들면 천하의 오예은이 아니지! "적당히 해야 하는 건 그쪽이요.나한테 한 짓을 좀 생각해 봐요.조금 의심스러우면 죄다 가둬두는 모양인데,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란 거 몰라요?" 그의 분노는 이제 적정 수준을 넘어 버렸다.이런 상황속에서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사교계에 데뷔한 17 세기 숙녀처럼 당당할 수 있는 그녀가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짜증도 밀려들었다.적조차 될 수 없는 하찮은 상대하나 좌지우지하지 못해 골치를 썩고 있는자신.우스꽝스러운 지금 의 현실,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뭘 믿고 그렇게 당당하지?" 한참 후 그가 호기심마저 묻어난 목소리로 묻자,예은은 마치 준비라도 해놓은 것처럼 망설임 없는 태도로 대꾸했다. "내 양심이요."


"양심?" 예은의 눈동자가 한껏 빛났다. "소설책 읽어 본 적 있죠?음...가령,소설을 읽을 때 결말이 해피엔딩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중간에 아무리 위험한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 해도 안심하고 즐길 수가 있죠.어차피 다 잘될 거란 걸 아니까." 뚱딴지 같은 소리에 은규의 입술 끝이 살짝 비틀어졌다. "바로 그 논리와 같아요.난 결백하고,당신이 실수했다는것 또한 잘 알고 있어요.세상이 참 각박해졌지만 아직 진실은 통한 다고 믿고 있구요.그래서 당당할 수 있는 거에요." 목소리만큼이나 대차게 자리에서 일어난 예은은 아까부터 시끄럽게 두들겨 댄 타자기 용지를 빼내 그의 손에 건넸다.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걸 느꼈거든요.내 예감이 틀리지 않기만을 바랄 분이에요." 무거운 타자기를 잘도 가슴에 안고 뒤뚱거리며 그녀는 서재를 빠져나갔다.뭔가크게 한방 먹은 것 같아 찜찜한 기분을 느끼던 그는 곧 손 안에 놓인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타자기 고마워요.당신이 직접 줄 용기는 없었나요?겁쟁이.ㅋㅋㅋ" 은규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그는 아무 죄 없는 종이를 단번에 구겨 쥐며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빌어먹을,마수야!당장 못 나와?" 수야는 벌써 한시간 전에 서울로 날라 버렸지만,그 사실을 상기하기에 은규는 너무 흥분한 상태였다.옆친 데 덮친 격으로 잠시 후 누군가 시끄럽게 현관문을 두드려 대자,그는 서슬이 시퍼래진 눈동자로 문을 향해 걸어갔다. "뭐가 이렇게 시끄...." "형..." 있는 대로 거친 소릴 뱉으려던 은규는,미안한 표정으로 서있는 현석을 보곤 바로 표정을 풀었다. "어,왔냐?" 그것도 잠깐,동생의 등 뒤로 빠끔히 고개를 내미는 새벽을 보자바로 혈압이 급상승해 버렸다. "아주머님.오랜만이에요!" 높은 톤의 목소리,세상을 다 가진 듯한 함박웃음.이런 상황에서는 절대로 상대하고 싶지 않은 부류의 인간이 눈앞에 버젓이 서 있었다. "이렇게 좋은 별장을 숨겨두고 계셨다니능력 좋으시네요.왠지위험하고 아름다운 로맨스가 벌어져야 적격인장소 같은데.저 완전히 뿅 갔다구요." 어느새 앞으로 다가온 새벽이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알만하단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혹시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는 거 아니에요?어라?표정 보니까 진짜인가 보네?" 가뜩이나 끓는 속을 잘도 쑤셔대던 새벽은 뭔가 재미난 걸 발견한 양 큰소리로 외쳤다. "어머!저거 뭐에요?세상에!오.....오리다.오리!어머,오리에요.오리"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회오리바람에 휩쓸린 사람처럼 귀도 머리도 다 멍했다.새벽이 호숫가로 전력 질주를 하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은규는,흐뭇한 미소를 품고 아내를 조시하고 있는 동생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미쳤어?제수씨를 데려오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배가 남산만 한데 혼자 두고 올 수가 있어야지.별일 없을 거야.내가 단속 잘할 테니까 그렇게 산송장 같은 표정 짓지 말라 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지금도 벅찬데 진짜 강적이 나타난 셈이니,이를 어쩐다?거실로 들어선 은규는 일단 새벽에게 예은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부터 침착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그러나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으려던 그의 노력은 너무 이른 예은의 등장으로 형체도 없이 부서져 버렸다.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에요?도대체가 글을 쓸 수가 없잖....!" 계단 중간쯤에서 그녀의 눈이 현석과 맞부딪쳤다. "어.....!" 안 그래도 볼 만하던 은규의 표정은 그렇게 대책 없이 허물어졌다. chapter 18 ==<언젠가 만나게 될 나의 애인,혹은 남편님께> 무시무사하고 포악한 조폭 두목과 계획에도 없던 연인 놀이를 하게 된 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그러나 이는 순전히 강제적인 것으로,단 한순간도 즐기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당신은..." 예은의 입에서 겨우 말이 터져 나왔다. "HS 호텔에서의 그 로미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현석은 대답 대신 살짝 웃어 보였다.그의 온화하고 친절한 미소에 예은은 무인도에 떨어졌다 사람 냄새를 맡은 것처럼 제대로 된 사고를 구사할 수가 없어져 버렸다. 사람이었다.얼음 인간,인조인간이 아닌 따뜻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 그녀의 사정을 이해하고 제대로 들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몸이 멋대로 반응했다.단번에 층계를 내려온 예은은 예수님처럼 웃고 있는 로미오에게 달려들어 소리쳤다. "도와주세요!" "아......" "이 사람이 날 납치해 가뒀어욧!정말이에요!" "이런." 당황한 현석이 형을 향해 어떻게 된 상황인지 해명하라는 눈짓을 보내자,은규는 거친 동작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경고햇다. "소용없으니 떨어져.녀석은 내 동생이야."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예은이 고개를 쳐들었다.


"정말.....이에요?" 왠지 미안한 표정으로 현석이 고개를 끄덕이자,예은은 빠르게 뒷걸음질치며 두 남자를 번갈아 노려보았다.엄청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저런 표정을 짓지는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만큼 그녀는 혼란스럽게 눈을 굴려대더니 절망적인 목소리로 재확인했다. "둘이 한패라구요?" 멋대로 부풀렸단 희망이 사라져,있는대로 소리치고 절규하는 예은의 모습이 현석의 눈에는 무척 억울하게 비춰졌다. "후.,,한패냐는 말 정말 듣기 싫은데,내가 언제부터 형하고 한패였던 거야?" "입 다물어.농담할 기분 아니야." "그러게.정말 심각한 상황인 것 같기는 한데,제대로 해명할 거리는 있는 거야?특히 새벽...." 현석이 말을 마치기도 전,꽥꽥대는 오리를 몰로 뛰어오는 새벽의 모습이 보였다.드디오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이것 좀 보세요.너무 예뻐요!" 긴 한숨을 내쉬며 은규는 새벽을 향해 돌아섰다.반갑지 않게도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예은에게 박혀 떨어질 줄을 몰랐고. 예은 역시 입을 헤 벌린 채로 파닥대는 오리를 안고 있는 새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말이 터져 나왔다. "후....." 은규와 현석의 입에서도 동시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너무 반가워요!그동안 잘 지냈어요?" 꽥꽥거리며 날갯짓하는 오리를 멀찌감치 던져 버린 새벽은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예은에게 인사를 건냈다.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는 양 반가워하는 분위기에 말려든 예은도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도 잘 지낸 것 같네요." "이 배 나온 것 좀 봐요.그때보다 5kg 이나 더 불었지 뭐에요.요즘은 정말 뒤뚱거리며 걷는다는 말이 뭔지 실감할수 있을 것 같아요.근데 아가씨는 살이 좀 빠진 것 같네요.어디 아프기라도 했어요?" 은규와 현석은 딱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앞의 여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길거리에서 만난 동창 대하듯 조잘대고 있는 모습을 일단 좋은 징조로 여겨도 무방할까. 그러나 미처 숨을 돌리기도 전,새벽이 던진 질문 하나에 형제는 다시 긴장으로 굳어 버렸다. "근데 여긴 어쩐 일이에요?저희 아주버님하고 아는 사이세요?" "아...아주버님이요?" 단어 하나에 예은은 비로소 모든 것을 기억해 냈다.여기 있는 사람들의 관계.그들이 모두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엉뚱해 보이기는 했어도 줄곧 친절한 미소로 사근사근하게 대해준 새벽을 좋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마,그녀도 한패인 걸까? "저기,난...."


자시느이 존재를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 예은에게 새벽이 환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어머.나도 참!물어 볼 걸 물어봐야지.미안해요." 알 수 없는 새벽의 발언에 예은은 물론 은규와 현석까지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성인 남자 별장에 아가씨가 머물고 있다면....뻔한 거잖아요." 뻔하다니.설마...." "너무 잘됐다!사실 그때 호텔에서부터 두 사람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는데,대체 언제부터에요?어떻게 저 얼음 같은 사람을 확 끌어 잡은 거에요?재주도 좋아." 짐작대로 새벽은 두 사람을 연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 난 저 남자한테 납...." 답답하고 기막힌 마음에 예은이 충동적으로 입을 떼자,은규가 재빠르게 말을 끊었다. "숨길 필요 없어." "숨기다니 뭘...." 예은의 황당한 표정을 은규는 의도적으로 무시햇다. "제수씨.소개가 늦었습니다.이쪽은 오...." 다급해진 마음 탓인지 갑자기 그녀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은규는 살짝 말을 돌렸다. "짐작대로 사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벌게진 얼굴로 반발하려는 예은을 이번엔 현석이 가로막았다. "아,소개를 받았으니 이쪽도 정식으로 인사를 해야겠군요.황현석입니다.이 사람은 제 아내고요." "이봐요.난..." 다시 한 번 해명할 목적으로예은이 입을 열었으나 새벽이 한발 빨랐다. "너무 잘됐어요!안 그래도 아주버님 때문에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오죽하면 이 몸으로 중매라도 할 생각이었다니까요. 진짜 잘됐다.이젠 두 다리 쭉 뻗고 잘수 있을것 같아요.저기 근데..이름을 듣지 못했네요.엄청난 일을 해낸 이 아가씨 이름 이 뭐죠?": 반짝이는 눈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새벽에게 은규는 끝까지 답을 주지 못했다.도리어 예은을 향해 무시무시한 눈길을 날리며 무언의 대답을 강요하고 있었다. 예은은 그야말로,정말 완벽하게.기막혀 하는 중이었다.졸지에 이 빌어먹을 조폭의 여자가 된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그가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니.자존심이 바짝 상해 버린 예은이 입을 꾹 다물고 노려보기 시작하자,새벽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곤 입에 달린 미소를 지웠다. 결국 예은의 옆으로 다가간 은규는 슬쩍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잠시 둘만 있고 싶은데." 그의 의도대로 새벽은 금방 의혹을 멀리 출장 보내 버렸다. "어머,죄송해요.주책없이 시간을 빼앗고 있었네.저희 짐 풀 방만 일러주세요.방해 안하고 죽은 듯이 있을테니까." 불현듯.은규는 제대로 쓸수 있는 방이 두개뿐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아무래도 동생 부부에게 자신의 방을 내주어야 할 듯


싶은데.그렇게 되면 예은과 한방을 써야만 했다.서재나 1 층 거실을 쓸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녀를 감시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골칫덩이 제수 때문에 앞으로 정신없어질 것은 뻔한 일이었고,그 틈을 타 그녀가 또 탈출 시도라도 한다면 영락없이 당할수 밖에는 별 도리가 없어지고 만다. 판단을 내린 은규는 현석 부부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한 후,연신 히죽대며 쿡쿡 찔러대는 새벽을 무시한 채 버티고 선 예은 을 억지로 방에 밀어 넣었다.그리고 문을 잠갔다. 달칵,지포 라이터가 열리고 화력이 센 불꽃이 담배 끝을 태웠다.시야는 금방 뿌연 연기로 가득해졌고, 그 사���로 잔뜩 골이 난 예은의 얼굴이 보였다.그녀의 몸 전부가 결투를 앞둔 쌈닭마냥 딱딱한 긴장으로 굳어 잇었다. "왜 이러는 거에요!" "목소리 낮춰." 동생 부부의 방은 바로 옆이었다.내키지 않는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비밀이 탄로 나지 않도록 그는 최대한 위협적인 태도를 취하자고 마음먹었다. "내가 지금 목소리 낮추게 생겼어요?" 그러나 예은은 전혀 따라줄 기색이 아니었다. "당신같이 잔인하고 멋대로인데다 인정머리라곤 토끼 똥만큼도 없는 사람하고 연인이라구요?지금쯤 나 때문에 안달하고 있을 식구들한테 연락조차 못하게 한 게 누군데,.뭐가 어쩌고 어째,,," 성큼 다가와 머리채를 움켜쥔 은규의 돌발적 행동 때문에 그녀는 말을 마칠수 없었다.그의 얼굴에 무언의 협박이 휘갈겨 있었다. "목소리 낮추라고 했어." 또다시 무너지는 자존심,무서웠다.그만큼 화도 났다.더 이상 물러나지 말자고 예은은 스스로와 타협했다. "이거 놔!" "마지막 경고야." 결국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억울하게도.....너무나 분하게도... "흑.나쁜 놈...." "멋대로 불러.다만 경고하는데 내가 당신을 납치해 가뒀다는 사실을 제수씨가 알게 해선 안 돼.그러니 동생 부부가 돌아갈 때까지 좋든 싫든 당신과 난 연인으로 지낼 수밖에 없어." "차라리 혀 깨물고 죽겠어요!" "마음대로 해.하지만 그것도 동생 부부가 돌아가고 난 후의 이야기야.허튼 수작 부린다거나 제수씨한테 납치 어쩌고 떠들어 대는 날엔 내 손으로 죽여줄 테니 그리 알아.시끄러운 여자 하나 죽이는 것쯤이야 나한테는 일상과도 같은 일이니까." 예은의 눈동자가 심하다 싶을 만큼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말은.....사람을 죽여 봤다는 소리에요?" 눈동자에 유독 강한 어두움이 스쳤다고 생각한 순간,그는 다시금 무감각 속에 표정을


가두었다. "나에 대해 꽤 많은 연구를 했을 텐데 그런 것도 모르나,당신이 여자란 이유 하나만으로 제법 인격적으로 대해줬지만 그렇다 고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잊는 오류는 범하지 말아야지.난 평범하고 만만한 남자가 아니야.매일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지." 믿을 수 없었지만,그가 한창 잘나가는 조직의 보스라는 것외에 정작 중요한 것들은 하나도 숙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인지되어 왔다.그의 말대로 정말 사람을 죽여 봤거나,돈을 받고 여러 사람 병신 만들어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더러운 깡패 자....!" 분노와 두려움이 합세해 엄청난 욕설이 터져 나가려는 찰나.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새벽이 조심스레 얼굴을 들이밀었다. "저기 잠시만 실례..." 간발의 순간,은규는 재빠르게 손을 뻗어 예은을 끌어당겼다.그리곤 거친 키스로 터져 나오는 말들을 막았다. "어머!" 새벽의 눈에 벼락이 꽂혔다. "미.....미안해요.하던 거 계속 하세요!" 그녀는 금방 귀까지 달아올라 문을 닫고 줄행랑을 쳤다. 새벽은 은규와예은의 방문 앞에서 입을 떡 벌린 모양으로 서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묵묵하다 못해 여자는 돌보다 못하다고 으름장을 놓던 사람이 저토록 열렬한 모습을 보이게 될 줄이야... 사실 약간의 의구심이 있었다.개인 별장에 여자를 들일 생각까지 했다면 필시 깊은 관계에 돌입했따는 뜻인데,그러기엔 기간이 너무 짧았다.다른 평범한 남자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겠지만 지금까지 보고 듣고 알아온 아주버님의 스타일로는 절대 무리인 이야기였다. 그는 그렇게 쉬운 남자가 아니었다.경솔한 남자도 아니었다.HS 호텔과 카지노 테마 파크를 운영한다는 것 외엔 그가 위험 천만해 보이는 거구들을 데리고 무슨 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그래도 그를 남편 못지않게 좋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믿음 때문이었다.이 무쇠 같은 남자가 만약 사랑에 빠진다면 그 한 사람만큼은 목숨을 다해 지킬 것이라는 철저한 믿음. 그래서 분위기나 살필 겸 문부터 열었는데 열렬한 키스 현장을 목격하고 나니 의구심은 모두 사라지고 히죽대는 웃음만 터져 나왔다. "호오,제법 열렬하잖아?" 방 벽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오던 거친 소리도 필시 사랑싸움이었음에 틀림없다.다시 한번 문가를 향해 웃음을 던지고 난 새벽은 옆방에 있는 현석을 힘껏 소리쳐 불렀다. "방금 내가 뭘 봤는지 알아요?"


그러고 나서도 오 분 동안을 킥킥대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chapte 19 ==자,지금부터 사전에 있는 단어를 전부 외우자! 그리고 저 오만한 인간의 입을 막아 버리는 거야!==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첫키스는 딸꾹질을 멈추기 위한 수단이었고,두 번째 키스는 분노에 찬 학대의 수단이었으며,세번째 키스는 위장용으로 이루 어졌다. 딸꾹질.학대.위장용. 이 얼마나 키스란 애틋한 용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인가.눈빛이나 마음을 나눌 여지는 전혀 없이 모두다 상황과 현실에 떠밀려 번개처럼 이루어졌다.그런데 이 위장용 키스는 그 기세가 좀더 강렬했다. 은규의 한 손이 묵직한 힘을 담아 예은의 허리를 당겨 안았고,그녀의 손은 그의 목에 살짝 휘감겨 있었다.누가 보더라도 열렬한 연인들의 자세였지만,키스에 익숙지 않은 두 사람은 열정만 끝없이 달아올랐지 숨을 제대로 쉴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공기가 부족해 머리가 핑 돌 지경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서로의 입술에서 벗어났다. 긴 키스의 끝.서로의 코끝이 닿을 만한 거리.그 안에서 두 사람은 아직 못다 한 뜨거운 시선을 나누었다. 거친 숨을 몰아 쉬느라 맞닿은 가슴들이 들썩였고 시선은 자꾸만 아래,서로의 입술을 향해 내려가는 중이었다. 말은 없었지만 예은의 표정에 담긴 의문이 자꾸만 키스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는 걸 알수 잇었으나,은규는 자신답지 못하게 달아올랐던 열기를 뒤로한채 침착한 목소리로 웅얼댓다. "의미 따윈 없어." 슬그머니 열정이 거두어지고 예은의 표정은 굳어갔다.아니,그보다는 상처받은 기색이 더 컸지만 그녀는 바로 자신을 추슬러 그 못지않게 잘 다듬어진 표정을 만들어 냈다. "적어도 난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데요."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그의 무감각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예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 키스.내가 당신을 정말 증오하기 시작했다는 걸 깨닫게 해줬어요." 예상외의 반격에 가슴 한쪽이 제법 묵직했다.은규는 구겨지는 표정을 가까스로 붙들어 무표정을 꾸민 후 비아냥거렸다. "당신은 증오하는 사람하고도 이런 식으로 키스하나." 순식간에 예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그제야 이 남자에게 말싸움 따윈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했지만 여기서 꼬리를 내릴 순 없었다.벌써 몇 번이나 자존심을 묵살 당했으니,이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회복을 요구할 참이었다. "말은 바로 해야죠.내가 언제 당신하고 키스를 햇다고 이래요?강제로 한 거니까 난 어디까지나 당한 입장이라구요."


은규는 어느새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강제,....?난 당신한테 칼을 들이밀거나 도망치지 못하게 묶은 기억이 없는데." 연기를 흩뿌리며 그가 걸음을 옮겨오자 예은의 온몸은 다시 굳어 버렸다. "그...그런건 아니지만 내 의사에 상관없이.원하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한 거니까 강제나 마찬가지죠." "원하지 않았다...." 다시금 서로의 숨결을 인지할 정도만큼 다가온 은규는 짙은 담배 향내를 풍기며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자꾸 자존심 건드려서 미안한데 당신이란 여자,강제로 키스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지 못해." 갑자기 콕 하고 심장이 찔리는 듯한 느낌에 예은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침착하자....침착해.하지만 쉽지 않았다.심장이 멋대로 가속하고 있었다. "언젠가 말했을 거야.난 말장난으로 이길 상대가 아니라고,더 밑으로 떨어지고 싶지 않다면 입 다물고 시키는 대로 해." 또 한번의 완패를 당하고 나자.예은은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이 남자를 무너뜨리고 싶다는 비틀린 충동을 느꼈다. 감정 앞에 쓰러져 철저히 짓밟히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영혼마저 팔아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결백이 밝혀져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이름도 생소한 신흥파인지 뭔지를 찾아가 정말로 스파이를 자청하는 게 어떨까?순간의 분노로 인한 단순한 생각이 아니었다.방법만 있다면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여리고 성처럼 견고한 이 빌어먹을 남자를 완벽 히 몰락시키는데 앞장서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신랄한 생각들에 날카로워진 눈을 빛내며 예은은 꼭 쥐었던 손을 내리 고 천천히 물러섰다.그리곤 이내 타자기 앞으로 걸어가 소리도 요란하게 자판을 두들겨 댄 후,종이를 잡아 빼들고 다시 다가 왔다. "당신 같은 사람하고는 더 이상 말 섞고 싶지 않아요.이제부터 정 할 말이 있으면 이런 식으로 하겠어요." 종이를 그의 손 안에 던진 후 그녀는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잠시동안 닫힌 문이 남긴 여운에 잠겨 있던 은규는 담배 연기를 마시며 종이에 박힌 글자를 천천히 읽어 나갔다. '지상 최대로 나쁜놈.' 은규의 입술이 툭하고 담배를 떨어뜨렸다. "그게 정말이야?" 현석의 눈썹이 미심쩍다는 양 휘어졌다. "정말이라니까요!" 얼굴 가득 성취감에 찬 미소를 머금은 새벽의 표정이 제법 진지해 보였다. "좀 수상해서 기습적으로 찾아갔는데 부둥켜안고 키스를 하고 있지 뭐에요.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진짜키스,가짜키스도 구분 못할까 봐서요?믿어요.당신 형.확실히 사랑에 빠진것 같으니까." 기뻐하는 새벽을 보며 현석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럴 리가 없는데...' 지금까지 그가 인생의 표본으로 삼으며 존경해 왔던 황은규란 사내는 결코 쉽게 사랑을 인정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형에게 있어 여자는 싸우고 경계해야 할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정상이 아니란 생각이 들만큼 아무리 멋진 여자를 보아도 욕정하나 느끼지 않는 통에,접근했던 여자들 모두 상처를 받거나 기가 질려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런데 열렬히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했다니,예은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듣진 못했지만 결코 사적인 관계가 아닐 것이란 단정은 내릴수 있었다.시간적으로 가까워질 여유가 없었을뿐 아니라,지금은 조직 내 배신자 문제로 잔뜩 날이 서 있을 시기 였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해요?당신은 안 기뻐요?"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눈에 초점을 잡자,싱글거리며 웃고 있는 예쁜 아내의 모습이 들어왔다.저 혼자 가누기도 힘들만큼 불룩한 배를 하고서도 그녀는 내내 형을 신경 쓰고 있었다.깊은 생각에 굳혔던 입매를 풀어 미소를 머금고 현석은 아내의 부드러운 뺨을 어루만졌다. "그렇게 형이 사랑에 빠졌으면 좋겠어?" "그럼요." "왜" "나 아주버님 사랑하잖아요." 저도 모르게 현석의 눈매가 경직되려는 찰나,새벽이 놀리듯 말을 이었다. "잊었어요?당신하고 나,아주버님 때문에 만나게 됐다는거....!" 아,그랬지.잊고 있었던 과거의 단편들이 조각조각 머리 위로 솟아올랐다.형이 아니었다면 그는 아마 새벽을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아내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가정은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럽고 아찔해지는 악몽이었다. "잊고 있었어." "돕고 싶어요.당신도 처음에는 아주버님하고 별다를 거 없었잖아요.어떤 면에서는 더 어려운 사람이었는지도 몰라요.이미 지난 사랑에 질려서 나란 사람은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까.우습게도,나 지금까지 아주버님 웃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어요.그래서 보고 싶어졌어요.그냥 미소 정도가 아니라 여기 귀에 걸릴 만큼 활짝 벌어진 진짜 웃음 말이에요.그게 당신 과 날 만나게 해준 아주버님께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현석은 문득 그녀가 너무 많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언제나 철부지 어린애 같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정말 한 아이 의 엄마가 될 자격을 충분히 갖출 만큼 마음이 커져 있었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아내.경이로움으로 감정이 흘러넘칠것 같았다. "고마워." 현석이 살짝 입을 맞추며 진심 어린 고백을 담자.새벽의 입가에 같은 의미의 웃음이 피어났다.그녀는 늘 아름다웠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을때 특히 더 빛나곤 했다.아내를 물끄러미 마주하고 있자니


현석은 갑자기 그녀를 안고 싶어졌다 그래서 ? 부근에서만 서성이던 손을 내려 어깨를 잡고 충동적으로 끌어당겼다.새벽 역시 현석의 허리에 손을 두르며 포근 히 안기려 했지만,튀어나온 배가 금방 두 사람 사이를 가로 막았다. "아휴...이제 마음대로 안을 수도 없는 거에요.우리?" 아내의 볼멘소리가 귀여워 현석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방법이야 만들면 되지." "어떻게요?" 그는 곧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형,얘기 좀 해." 새벽 1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아직 서재에 남아 잔 일거리를 처리하고 있는 은규에게 현석이 찾아왔다. "날씨가 꽤 덥네." "이제 곧 여름이니까." 대충 대답을 흘리고 잔을 들여다보니 반갑지 않은 감잎차가 눈에 들어왔다.은규는 한숨을 내쉬며 어렵게 한 모금을 삼켰다. "넌 이제 커피 끊었냐." "속에서 안 받아." "놀랠 노자로군." 동생에게 커피느 ㄴ단순한 차가 아니라 첫사랑이 남긴 상흔이었다. 그 흔적을 잊지 못해 집에 온실까지 만들어 커피나무를 기르고,가는 곳마다 커피 향을 맡아야 안심할 만큼 심각한 중독에 빠져 있던 녀석이 어느 순간부터 감잎차만 마시고 커피는 뒷전이었다.이 모든것이 다 작은 제수의 영향이었다.새벽을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그는 전혀 다른 동생의 면모를 새록새록 발견하는 일이 잦아졌다. "온실은 어떻게 했냐.설마 감나무로 대치한 건 아니겠지." "제대로 봤어.지금도 아주 잘 자라고 있지.감잎차는 5.6 월경의 연한 감잎을 체취해야 제 맛을 내거든." 이젠 제법 달인이 되어 감잎차 만드는 법에 대해 열렬히 떠들기 시작한 동생을 보며 은규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마침 입이 말랐던 참이라 차갑게 만든 차가 제법 잘 넘어가긴 했지만 전혀 취향이 아니었기에 동생이 떠들어 대는 감잎차 찬양에는 도무지 응해줄 수가 없었다. "이게 맛있냐.난 솔직히 잘 모르겠다.다른 건 제쳐두고도 일단 너무 달아." 고개를 들어보니 현석은 이미 차 맛에 완벽히 빠진 모습이었다. "이건 꼭 여새벽이란 여자 같거든.카페인처럼 인공적이고 강렬한 맛은 없는데 금방 중독된다고나 할까." "아예 시를 쓰시지.얼간이 공처가 주제에." "충고하는데,새벽이 앞에서는 무조건 맛있다고 해.안 그러면 엄청 괴롭힘 당할걸?" "접수한 지 이미 오래다." 건성으로 답하며 한꺼번에 찻잔을 비우는 은규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석의 눈동자에 살며시 안타까움이 내비쳤다.


자신과 조직 식구들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무감한 사내.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행복을 하나뿐인 형에게도 알게 해주고 싶었다. 언제나 긴장으로 굳어 있는 저 딱딱한 어깨 대신 사랑으로 한껏 치솟은 행복한 남자의 어깨를 보고 싶었고.굴뚝처럼 하얀 연기만 뱉어대는 저 차가운 입술 대신 사랑하는 여인을 생각하며 미소를 그릴 줄 아는 부드러운 입술을 보고 싶었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와 이름뿐인 아버지.그 안에서 현석은 그나마 형이 베풀어 주는 사랑에 만족하며 살아왔다지만 정작 형은 어떠한가.그 어디에서도 사랑 따윈 받을 곳이 없었기 때문에 거친 학창 시절을 보내며 일찍 어두운 세계에 바져들었고, 그가 담고 있는 세계에서 인간적이란 말은 죽음과도 같았기에 평범한 자신을 완전히 버리는 쪽을 택했다. 현석 앞에서만 그는 평범한 형으로 돌아와 익숙지 않은 사랑이라도 베풀어 주려 노력했다.하지만 이제 현석에겐 끊임없이 사랑은 주는 아내란 존재가 생겨 버렸고,그 때문에 그나마 남아 있던 은규의 마음속 작은 사랑의 공간마저 없어져 버린 게 아닌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열어놓은 창밖으로 밀려드는 훈훈한 바람을 느끼며 현석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동생의짙은 숨소리에서 뭔가를 눈치 챈 은규가 질문하자,현석은 혀끝에서 맴돌고 있던 말을 던졌다. "무슨 관계야?" 예은의 존재가 새벽의 바람 그대로 열애 중인 여자라면 오죽 좋을까마는,잠시의 대화를 통해 현석은 이미 어느 정도의 답을 유추해 내고 있었다. "스파이라고 의심하고 있는 여자다." "스파이?" 생각보다 심각한 대답이었다.현석은 진지해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얼마 전부터 내 뒤를 캐고 다녔어.카지노에선 신흥파 똘마니하고 접촉하는걸 민서가 봤다고 하고." "배신자하고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은규의 입에서 쉴 새 없이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여자 하나 가지고 이렇게 민감하게 굴지도 않아." "아직 확인은 안 된 상태고?" "신분만 확인된 상태야.작가라고 하더군.조직에 얽힌 이야기를 쓸 계획이라 잠시 내 뒤를 캔 것뿐이라는데.여자랑 접촉했 다던 신일파 녀석만 찾아내면 사실 여부가 드러나겠지.수야가 발 빠르게 뛰고 있다." "그럴 여자로 보이지는 않는데." "언제 그럴싸한 인간이 범인인 경우 봤냐.어떤 상황에서든 여자는 열외로 보는 게 이쪽 일이야.여자가 끼기엔 거칠고 위험 한 세계니까,하지만 덜미를 제공한 이상 확실히 밝혀내야 더러운 꼴 안 당해."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해 보이자,현석은 차를 한꺼번에 들이켜 타는 목을


축였다. "그런 와중에 새벽이를 데리고 왔으니 형이 화 낼 만하네." "당분간 연인처럼 굴기로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제수씨 되도록 빨리 데리고 가.눈치가 빠른 여자는 아니지만 일이 안 되려고 작정하면 어떤 수를 걸고서라도 뒤틀리는 법이야.제수씨 상처받는 거 보고 싶지 않다.내가 하는 일들,실상은 그렇지 않다 해도 세상 사람들 눈에는 더러운 조직 폭력배들이 하는 일과 다르지 않게 보일 거야.여자를 납치했단 사실을 알게되면 충격 받을 거고,여린 가슴에 상처로 이어지겠지.그 큰 눈에서 눈물 나오는 거 보면 가슴이 편치는 않을 것 같다." 무뚝뚝한 말 속에 묻어난 새벽에 대한 사랑에.현석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형이 이런 면모를 보일 때면 그가 누군가를 사랑해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일도 그렇게 먼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는 기대가 서리곤 했다. "전혀.....사적인 감정은 없는 거야?" 조금은 기대감 서린 질문에,은규는 눈썹 끝을 들어 올리며 새 담배를 물었다. "없어." 일체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대화는 그렇게 차단되었다. 잠을 이룰 수 없어 방안을 오가고 있는데 손잡이가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깜짝 놀란 예은은 놀라울 정도의 순발력을 발휘해 침대로 몸을 날렸다.웅크린 자세로 이불을 끌어안은 채 숨 쉬는 것도 잊을 지경으로 잔뜩 굳어 버린 그녀의 귓가로,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스르륵 옷가지들을 벗는 소리가 감겨왔다. 꼴깍,어둠 속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와 바짝바짝 입천장을 말렸고,터지기 직전으로 뛰고 있는 심장의 진동이 머리까지 올림을 전해 점점 더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혹시 침대로 다가와 비키라고 하진 않을까?이불도 베개도 주지 않고 아무 곳에나 퍼져 자라고 한다면?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종합해 볼때 능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게다가 그에게 있어 예은은 얄미운 적의 스파이로,한참 비참한 대우를 받아야 마땅한 포로이지 않은가.낮에 준 쪽지에 적은 글귀를 보았다면 단단히 자극을 받아 정말 지상 최대 로 나쁜 놈이 되길 자청할지도 몰랐다. '젠장!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거야!' 다시금 발소리가 이어졌다.예은은 좀더 몸을 웅크리며 이불을 꼭 움켜쥐었다.묵직한 소리가 정확히 침대를 향해 가까워지자.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어진 예은은,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서 질끈 눈을 감았다. 소리가 멎는 대신 바로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방금 샤워를 끝내고 온 건지 익숙한 비누 냄새도 흘러들었다. '눈을 떠야 하나?' 거북한 침묵에 잠시 갈등하던 예은은 이대로 잠든 척해 버리자고 결단을 내렸다.소리 지르고,협박하고,심지어 때린다해도 절 대 일어나지 말자......고.


"당신은 잠잘때도 슬리퍼를 신나." 맙소사!그제야 예은은 자신이 실내용 슬리퍼를 버젓이 신고 있음을 자각했다. "일어나시지." 젠장,도망갈 곳이 없었다. chapter20 ==새 영화 소식!한국판 '적과의 동침'제작 결정! 주장:엄청 불쌍한 여자 오예은, 엄청 못돼 먹은 남자 황은규. 장르:로맨스가 배재된 엄청난 난투극 만들면 무조건 대박이야!! -에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지대한 일격을 가한 은규의 한 마디에 예은은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다. 차마 눈동자가 올라가질 않았다.발에 걸려 덜렁이고 있는 실내용 슬리퍼를 뚫어져라 쳐다보며,이런 상황을 만든 그를 향해 한 되는 족히 될 만한 욕을 퍼부어 줄뿐ㅡ물론 속으로ㅡ할수 있는것이 아무것도 없었다.그나마 어둠에 기대 표정을 숨길수 있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으로 여겨졌다.하지만 금방 콘솔에 놓인 스탠드에 불이 들어와 그것도 오래 가진 못했다. 어쩔수 없이 희미한 조명을 따라 시선을 올린 예은은 그가 옷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기겁을 하고 말았다. 정확히 말해 상체만 벗고 있었을 뿐이지만,맨몸이 드러나 있다는 의미에서 별 차이가 없었다.훔치듯 본 그의 벗은 어깨는 넓었고,생각했던 것보다 곡선이 부드러웠다.무엇보다 놀란 것은 뺨에 자리한 칼자국에 비할 바가 못 되는 어마어마한 상처 들이었다. 또다시 현실이 인식되어 왔다.평범한 사내라면 결코 가질수 없는 상처들,그것이 은규란 남자의 진실을 대변하고 있었지만 두려워 하지 않기로 했다.대신 조직 폭력배 사이에 존재하는 약육강식의 순리대로,강하게 나가야 우습게보지 못 할 것이란 판단에 숙였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슬리퍼 신고 자는 사람 처음 봐요?" 입술을 깨물며 있는 힘껏 눈에 힘을 준 예은을 향해 은규는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처음 보는데." 뭐라고 해야 저 잘난 입을 막아줄 수 있을까.입 안의 살을 씹으며 잔머리를 굴려댔지만 돌아오는 건 공허하고 황망한 백지 한 장,모르겠다.무식해도 우기고 나가자란 결론을 내리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 혀에 힘을 줄수 있었다. "그럼,내가 시초인가 보죠." 이번엔 대꾸조차 없이 비웃음 섞인 눈빛만 날아들었다. 좋아,그렇다면 다시! "이해 못했어요?저기 그러니까,내 말이 뭐냐 하면...." 일단 질질 끌며 시간을 좀더 벌다가,


"생각보다 머리 나쁘네." 마땅치 않은 표정을 리얼하게 살려 절대 할 말이 없어 시간 끄는 게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준 후, "똑똑히 들어요." 대답을 해야겠다는 위기감이 들면 괜히 어려운 단어를 써가며 말을 쭉 늘어놓는 거다. "모든 일에는 시초라는 게 있잖아요.예를 들어 볼까요?콜라에 밥 말아 먹는거,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누군 가는 분명 시도를 했어요.비슷한 예로,벌레만 먹고 사는 사람에 관해서도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고 반문해 봤자 진짜 있거든 요.그런 괴짜 같은 사람이." 말을 대충 끊고 난 예은은 말똥말똥한 시선으로 은규를 바라보았다.그는 담배만 피워댈 뿐 딱히 대답할 태세가 아니었다. "내 말의 요점은 당신이 못 봤다고 그게 전부는 아니란 얘기죠.슬리퍼 신고 자는 사람이 있고 없고가 뭐가 중요해요?난 정말 슬리퍼를 안 신으면 발이 허전해 잠을 못 자는 걸요.단지 당신이 처음 봤다는 이유만으로 날 자는 척한 사람으로 몰면...." "누가 뭐라고 했나." 예은은 주절거리던 입을 다물고 시선을 올렸다. "당신이 그랬잖아요.'당신은 잠잘때도 슬리퍼를 신나. 일어나시지'라고." 목소리가 점점 기어 들어갔다,뭔가 말려든 분위기였다. "그냥 그렇게 말했을 뿐이지,당신이 자는 척했다고 말한 기억은 없는데." 물론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분명히 그의 말 속 진위는.... "지금 나하고 장난하자는 거에요?당신이 이방에 들어와 한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러줄 테니까 똑똑히 들어요.당신은 방에 들어와 옷을 벗고 침대 맡으로 다가와 날 한참이나 바라봤어요.그때부터 뭐 골려줄 방법이 없을까 꿍꿍이수작을 품고 있었 던 거겠죠.아니나 다를까 괜한 슬리퍼를 핑계로.." 은규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번졌다.그 미소에 담긴 불길한 예감에 예은이 말끝을 흐리자 그가 최강의 공격을 쏟아냈다. "내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옷을 벗고 한참이나 당신을 바라봤다?당신은 잘때 슬리퍼를 신는 것도 모자라 귀까지 열어놓나보지?" 헉,이런! "대단한 능력인데,한 수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야." 그를 만난 후,이렇게까지 단단히 입이 봉해졌던 순간도 없었다.이 남자 앞에만 서면 왜 이렇게 아둔해져 버리는 것인지,신랄 하게 자신을 저주해 보아도 일단은 위기를 모면하는 게 급선무였다. '뭐라고 답해야 좋을까?' 하도 잔머리를 굴려 이제는 더 굴러갈 자리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무시무시한 백지가 눈앞에 살랑였고,강타를 당한 자존심 은 이미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으니..그녀는 끝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침대까지 와서 사람을 깨웠으면 용건이 있어야 하잖아요.그것도 내가 오해한 건가요?" "아니." 짧은 대답과 함께 그가 손을 뻗어왔다.


"왜 이래요!" 화끈 달아오른 빰이 무안하게,그의 손은 그녀의 솜털조차 건드리지 않고 비껴가 크고 푹신한 베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론 이불까지 꾸려 들고 있었다. "잠자리를 챙기려던 것 뿐이야." 이런. "불만이라면 둘 중에 하나를 택해.당신이 바닥에서 자든지,아니면 이불과 베개를 고이 양보하든지." 잠시 얄미운 그의 얼굴을 삼킬듯 쏘아보던 예은은 침대에 벌렁 눕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억울해 미칠 것 같았고 얼굴이 뜨거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지만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이불을 털어 바닥에 깔던 그가 다시 몸을 돌려 침대로 다가오기 시작했다.예은은 벌떡 일어나 신경질을 부렸다. "또 뭐에요!" 그는 보란 듯 콘솔 위 스탠드 스위치에 손을 가져다 댔다. "불을 꺼야 잠을 자지." 얼굴부터 발끝까지 새빨간 색으로 덧입혀져 그야말로 인간 홍당무가 된 그녀를 흥미로운 눈으로 훑던 은규는,필터까지 다 태운 담배를 마지막으로 깊게 빨며 낮은 목소리로 놀렸다. "뭔가 바라고 있는 것 같은데,아까도 말했듯이 당신은 욕구를 느끼게 할 만큼 매력적이지가 못해." 뿌옇게 번진 연기 사이로 한 일자만 그리고 있던 그의 입매가 슬쩍 풀어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 생각난 김에 한 마디 더 하지.당신,나하고 말 섞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었나?" 더 이상은 당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그는 가장 치명적인 마지막 총알을 남겨두고 있었다. "지키지 못할 말은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좋아,양치기 소녀가 되고 싶지 않다면." 스탠드 불빛이 사라지고 숨 막히는 어둠이 찾아 들었다. 완벽한 KO 패.... 정신이 아찔해졌다. 오전 11 시경,생필품을 들여오던 수야는 차에서 내려서자마자 귓가로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혀...형님." 거의 공포에 가까울 만큼 미간을 구기고 있던 수야가 넌지시 은규를 불렀지만,그는 여유롭게 담배를 태우며 슬쩍 미소만 지어 보였다.수야의 우직한 어깨가 낙담으로 축 처지더니 매가리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왓다. "작은 형수님 오셨군요."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이,문이 활짝 열리며 화제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어머,이게 누구야!수야 씨이~!" 볼록 나온 배고 아랑곳 않고서 두 팔을 벌린 채 달려오는 새벽을 확인한 순간,수야의 얼굴 위로 땀방울들이 흘러내렸다. "혀...형님."


어찌 할 바를 몰라 머리를 긁적이던 수야가 도움의 시선을 던졌지만,은규는 타자기 사건에 대한 복수라도 하려는 듯 가차없 이 별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수야의 입에서 끙 하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서 마셔 봐요." "지금 물을 많이 먹어서,나중에 먹을게요.작은 형수님." 위층에서 내려오던 예은은 이색적인 장면과 마주한 후 그대로 멈춰 눈앞 풍경을 관찰하기 시작했다.한 덩치 하는 수야가 한 외소 하는 새벽 앞에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글쎄,한 모금만이라니까요.먹기 싫어서 그러는 거 다 아니까 도망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새벽의 손에서 커다란 머그잔이 들려 있었다.아마도 그 안에 든 액체를 수야에게 강요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호기심을 참지 못한 예은이 슬쩍 끼어들자,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날아들었다.놀라울 만큼 비슷한 표정이었지만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수야가 탈출구를 찾은 양 희망에 가득찬 표정이라면,새벽은 새로운 먹이를 찾은 것처럼 잔뜩 기대에 부푼 모양이라도나 할까. "잘 내려왔어요!안그래도 방으로 찾아갈까 했는데." 새벽이 관심을 돌리는 순간을 틈타 수야가 급히 도망쳐 버렸고,예은은 아리송한 얼굴로 층계를 마저 내려왓다. "그게 뭐에요?" 예은의 눈동자가 새벽이 든 머그잔을 행했다. "한번 마셔 볼래요?" 놀라울 만큼 빠르게 다가선 새벽은 호박색 액체가 담긴 잔을 들이 밀었다. "차에요?" 새벽의 눈동자에 차오른 기대감이 너무 막대해 보여 예은은 차마 사양할 수가 없었다. "마침 커피 한 잔 하려던 참인데 잘됐네요.고마워요." 살며시 웃음을 흘리며 따끈한 차를 한 모금 마시자마자,독특한 향이 코끝으로 전이되며 입 안 가득 달콤한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 "아,이거 무슨 차에요?" 예은의 얼굴에 서린 감탄에 만족한 새벽이 한껏 턱을 들어 보였다. "감잎차에요.근사하죠?"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던 예은은 자연스레 이어진 새벽의 감잎차 찬양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주방으로 이끌려 갔다. 호텔 이벤크 성과에 관한 일들을 처리하고 나오던 은규와 현석은 주방에 앉아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여인을 발견 하고 잠시 멈춰 섰다.새벽의 입에서 감잎차 어쩌고 하는 소리가 흘러나오자,현석은 알 만하다는 양 웃으며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흐음,우리 새벽이가 저 아가씨도 꼬드겼나 보네.또 한 건 해냈군."


내심 반가운 기색이 실린 동생의 어투에 은규는 새로 문 담배에 불을 붙이며 중얼 거렸다. "불상하게 됐네." "뭐가?" "감잎차에 관심을 보였으니 앞으로 세 시간은 족히 시달려야 할걸,수야 녀석.제수씨 보자마자 울상 짓던 것도 다 그이유 때문 아니겠어." "웬지 통쾌해하는 것 같은데." 실은 그랬다.제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예은이 새벽의 엄청난 말 세례에 시달려 파김치가 되어준다면,불쑥 나타나 곤란하 게 만든 작은 제수씨를 그만 용서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다소 소박한 은규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머!아주머님." 어느새 두 사람을 발견한 새벽이 손을 흔들어 보였고,은규는 못 본 척 무시하며 다시 서재로 쏙 들어가 버렸다. 천일도는 부드럽게 움직이는 차에 앉아 입가에 방긋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얼마 전,심심풀이로 본 만화책에서 흑사를 처리한 방법을 발견해 낸 성과 때문이었다.그는 뭔가 큰일을 앞두고 있을 때 마다 긴장을 풀 겸 만화책을 보는 습성이 있었다.사실 사람들이 유치하다고 하는 만화책 속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진리나 세계관이 담겨 있어 의외의 사실들을 깨우쳐 주기도 했다. 제약과 거침이 없는 상황 속에 엮어놓은 사건들을 현실에서 잘만 이용하면 큰 이득을 볼 수도 있었다.실제로 그는 싸움을 테마로 하는 만화책 속에서 몇 가지 힌트를 얻어 큰일을 잘 치러낸 일이 적지 않았다. 이번에도 이른바'흑사 사냥'이라는 큰일을 앞두고 뭔가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 훑듯 탐독한 만화책에서 의외의 수확을 얻고 말았다.뻣뻣한 남자,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남자,잔인함을 본능 속에 숨기고 있는 남자,그럼에도 완벽히 악이란 소굴에 발 담그지 않는 영리한 남자,그게 바로 천일도가 분석한 황은규란 사내였다.무협지나 이쪽 이야기를 담은 무수한 만화에 나올 법한 완벽한 주인공 격이 아닌가. 그러나 그가 보아온 만화책들을 종합해 볼때 이런 사내들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마는 요소가 있었다. 바로 여자라는 존재.. 사냥을 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미끼가 필요했다.철저하게 적의 약점으로 이루어진 미끼.그나마 가장 손쉽게 구겨 넣을수 있는게 바로 여자였다.여자는 성적 도구일 뿐 아니라 독약으로도 써먹을 수 있는 아주 긴요한 무기라고 천일도는 확신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어젯밤 접촉한 스파이의 소식에 의하면 흑사가 최근 여자 하나를 붙들고 있는 모양이었다.제법 얼굴이 반반 하고 당차단 정보였다.어디 그 계집이 흑사로 통하는 사내의 독을 빼낼수 있을지.잠시 동태를 지켜볼 참이었다.


"잘하면 가만히 기다리고 앉았다 거저 먹을 수도 있겠군." 자구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천일도의 입술이 연신 씰룩대고 있었다. chapter 21 ==기회다!!!!!=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와,좋다!" 새벽은 두눈을 감고 잠시 맑은 공기를 음미했다. 수야가 일 처리를 위해 서울로 올라가고 네 사람만 남게 되자,새벽은 야외로 나가자고 은규를 조르기 시작했다.날씨가 너무 좋아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지만,아주버님과 예은에게 오붓하고 애틋한 시간을 주고 싶은 마음이 더컸다. 결국 그녀의 고집이 빛을 발해 별장 바로 앞에 자리한 호수에 보트 두 척을 띄워 작은 항해를 시작하게 되었다.호수가 그다지 크지 않아 천천히 노를 저으며 100m 남짓한 거리를 빙빙 도는 게 전부였지만,새벽은 좀처럼 입가에 서린 미소를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현석의 품에 안겨 잔잔한 호수를 감상하다 아이가 발길질을 하면 꺄악 소리를 지르며 부산을 떨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서로 행복해 마냥 히죽대다가 오리가 나타나면 손뼉까지 치며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다 힐긋 은규와 예은 쪽을 바라본 그녀는 금방 미소를 거둬들였다.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아 보였던 탓이다. "뭔가 이상한데?" "뭐가." "아주버님하고 예은 씨 말이에요.계속 지켜보면서 느낀 건데 도통 연인 같지가 않아 보여요." 현석은 돌연 긴장하며 위장 연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은규는 담배를 문 채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노를 젓고 있었고,예은은 등지고 돌아앉아 메모 노트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의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분위기 이상하죠?어떻게 연애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들이 1 년 묵은 우리 부부보다 뜨겁지 못할 수가 있어요?" "다퉜나 보지." "그럴수도 있겠지만 그 키스 사건 이후로는 별로 다정한 모습을 못 본 것 같아요.당신도 아주버님 성격 잘 알잖아요.어디 자기 별장에 여자나 데려올 사람이에요?그래서 예은 씨하고는 제법 깊은 관계가 아닐까 생각했는데.게다가...." 여기저기 눈치를 보던 새벽은 현석에게 코를 바짝 들이밀고 속삭였다. "방까지 같이 쓰잖아요.결혼도 안 한 남녀가 한방을 쓴다는 건 보통 관계가 아니란 뜻인데,도대체 저 분위기는 뭐냔 말이죠." 눈치 없는 새벽이 의심할 정도가 되었다는 건 저 위장 연인이 얼마나 연기에 충실하지 못했는지를 여실히 증명하는 대목이 었다.


"안 되겠어요.확인해 봐야겠어." "그만둬,연애하는 사람들이라고 무조건 희희낙락 좋은 분위기란 법은 없어,우리도 그랬잖아.더 진지한 관계로 가기 위해 서는 냉전 관계도 필요하다고.괜히 신경 쓰지마,우리 아이도 생각해야지.산모의 고민은 아이한테 안 좋아." "궁금한 건 못 참는 게 내 성격인 걸 어떻게 해요.그리고 말했듯이 삐걱대고 있는 거라면 돕고 싶다구요." 진지하고도 열의에 찬 아내의 표정을 주시하던 현석은 거센 한숨을 내쉬었다.형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새벽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아내가 아파하고 우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벅찬 일이었다. 새벽은 누구보다 순수한 여자였다.그래서 진실 너머의 것을 들여다 보고 좀더 깊이 이해하기에 앞서,눈에 보이는 사실 그 대로를 받아들인 후 아파하기부터 했다.그래서 형이 하는 일에 관해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현석은 누구보다 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하는 일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새벽까지 그럴 것이란 보장은 없었다. 만약 예은의 존재가 연인이 아닌 납치된 인질이란 사실을 알아 버린다면..."이후의 일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경고하는데,더 이상 신경 쓰지 마." 숱한 염려들이 합세한 탓인지,현석의 입에서 제법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현석 씨..." "형 어린애 아니야.자기 문제 정도는 충분히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당신이 자꾸 이러면 당장 짐 싸서 집으로 갈 거니까 몸조리 잘하고 즐길 생각만 해.우리 이렇게 여행와서 함께 있을수 있는 시간 흔하지 않잖아.이곳에서의 며칠.나한 테는 더없이 소중한 순간들이야.그러니까 당신하고 같이 있을 때 더 이상 형이 함께 있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만 바라보고 나만 신경써.그럴 수 있지?" 새벽은 걱정과 염려가 담긴 현석의 눈을 다소곳이 바라보았다. "미안해요.아주버님 때문에 당신한테 너무 소홀했나 봐요.그래도 내가 당신 많이 사랑하는 거 알고 있죠?" 눈에 걸었던 긴장을 푼 현석은,새벽을 품에 안으며 도저히 연인으로는 비춰지지 않는 두 사람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내가 좀 나서야겠어.새벽이를 위해서라도.' 아내를 안은 현석의 손에 강한 힘이 실렸다. 메모 노트를 손에 쥔 채 호수를 노려보고 있던 예은은 시작했다.그리곤 새 담배를 무는 은규의 눈앞에 하얀 종이를 쓱 들이밀었다. '돌아가고 싶어요.' 맛있게 담배 연기를 뿜던 은규의 입매가 굳어졌다. "말이 부정확해.단순히여기서 저 안으로,아니면 당신 집으로." 예은은 다시 열심히 펜을 굴렸다. '당연히 내 집이죠!'

마침내

뭔가를

적기


은규는 천천히 노를 저으며 대충 말을 흘렸다. "당신 결백만 밝혀지면 억만 금을 준대도 보내줄 테니 안심해." 예은은 종이가 뜯겨 나갈 만큼 억세게 메모 노트에 할 말을 적어 휘날렸다. '그놈의 비러머글 결백은언제 박혀지는 건데요.' 종이를 바라보던 은슈의 한족 눈썹이 살짝 휘어졌다. "작가라는 사람이 기본적인 맞춤법도 지키지 못하다니,점점 더 의심스러워지는군!" "으...." ?어오르는 화를 억누르지 못해 말을 주절거릴 뻔했지만,예은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억제하곤 메모 노트에 글을 적어 나갔 다. '자구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당신이 그렇게나 염려해 마지않는 제수씨한테 모두 말해 버릴 거에요!' 쪽지 안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 은규는 단번에 종이를 구겨 뭉개며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 "어디 한번 해봐!내가 어떻게 나오나." 목소리만으로도 목이 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예은은 침을 삼키며 의미 없는 낙서와 그림들이 나열된 메모 노트로 시선을 내 렸다.언제까지,정말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해야만 하는 걸까. 갑자기 노트 위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자신이 이런 어이없는 상황속에 내몰리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기에 가슴이 아주 많이 아팠다.지금껏 글을 위해 수많은 일들을 겪으며 위험 속에 내던져졌고 실제로 다친 적도 더러 있었지만,잘 극복해 냈고,그안에서 행복했다. 하지만 지금은..... 입안의 살을 질끈 깨물며 떨어지는 눈물샘을 막아낸 에은은,손가락에 겨우 힘을 주고 몇 글자를 더 적어 은규에게 들어밀었 다. '후회하게 될 거에요.당신......기필코.' 그는 잠시 글자들을 바라보다 여유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후회 같은 사치스러운 감정 가져 본 적 없어.판단대로 행동할 뿐이지만 당신을 놓아줄 수 있기를 바래.진심으로," 의문으로 가득찬 예은의 눈동자를 거부하며 그는 힘차게 노를 저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지만 관리인 노부부가 아들 집 방문을 위해휴가를 떠난 관계로 다른 누군가가 식사준비를 해야 했다. "제가 할게요!" 은규와 예은 사이에 흐르는 이상 기류를 간파한 새벽이 먼저나섰고,현석이 그뒤를 따랐다.둘만 남게 된 은규와 예은은 혹시 나 불숙 나타날지도 모를 새벽을 의식해 한 소파에 붙어앉아 있어야 했다.시간이 흐를수록 몹시도 자리가 불편해진 예은은 의연함을 꾸며내려 무던히도 애써 봤지만,가만히 있어도 피어 나오는 그의 영향력이 그럴 만한 여지를 주지 않았다. 포개고 앉은 긴 다리를 감싼 헐렁하고 오래된 느낌의 리바이스 청바지와 책을 읽기 위해 은테 안경이,뺨에 자리한 상처가


무색한 만큼 지적인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평소 예은이그리던 이상형의 외모와 아주 근접해 있었다.훤칠한 키뿐 아니라 전체적인 뼈대가 길었고,'남자답다'혹은 '섹시하다'라는 인상을 줄 만큼 적당한 근육질로 이루어진 몸을 가지고 있었다.무엇보다 이쪽 계통에 있는 사람이라고 믿기엔 놀라울 만큼 책을 많이 읽어 상식도 풍부했으며,말이 적고 행동이 간결했다. 그는 분명 예은이 썼던 소설 속 주인공과 흡사했지만,그때만 해도 과묵한 남자가 얼마나 피곤하고 재미없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여기서 나간 후 다시 작품을 집필하게 된다면 이런 스타일의 캐릭터를 악랄한 악당으로그려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바짝 붙어." 곰곰이 생각에 잠긴 예은의 어깨를 덥석 안으며 은규가 짧게 말하자,졸지에 그의 품에 안긴 꼴이 되어 버린 예은은 당차게 항의할 심사로 입을 벌렸다.하지만 낭랑한 새벽의 목소리 출현에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식사 준비 다 됐어요!" 그제야 이 돌발 행동이 무엇 때문인지 알게 된 예은은,한숨을 내쉬며 하고 싶은 말들을 삼켰다. 장장 세 시간에 걸친 식사 준비. 그다지 밥 생각이 없었던 예은마저 허기를 느끼며 반가운 마음으로 주방에 들어섰다.맑은 장국,꽁치 조림,계란찜.시금치무침, 불고기,과일 샐러드,눈이 휘둥그레질 만큼의 진수성찬이 식탁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정말 맛있겠는데." 먼저 자리를 잡고 식사를 시작한 현석을 따라 예은 역시 자리에 앉았다.두 사람을 향한 은규의 눈빛이 웬일인지 심상치가 않아 보였는데,기대에 찬 표정으로 밥과 국을 한술 뜨고 나서야 예은은 그 눈빛의 뜻을 알 수 있었다.언젠가 태국에서 먹었 던 것처럼 밥알이 입 안 곳곳을 굴러다녔고,국에서는 이상한 약초 맛이 났다. "어때요?" 새벽의 숟가락을 빨며 넌지시 물어오자,예은은 반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시금치 무침을 한 젓가락 입에 넣었다. "아주....색달라요." "다른 음식들하곤 맛이 조금 다를 거에요.몸에 좋은 한방 조미료로 만들었거든요.계속 먹다 보면 금방 익숙해질 테니까 좀더 들어와요.근데 아주머님은 식사 안해요?어서 앉으세요." 교묘히 빠져나가려던 은규는 새벽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이기지 못하고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차린 건 없지만 세 시간이나 준비한 거니까 남기시면 안돼요?수야 씨가 없는게 너무 안타깝다.수야 씨는 감기에 잘걸리니까 몸에 좋은 음식으로 보신 좀 해야 하는데." 감잎차만으로도 벌벌 떨며 꼬리를 내리던 수야가 생각나 예은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방긋 미소를 지었다.몇 수저를 더뜨고


보니 이 특이한 맛에 그런대로 적응해 갈 수가 있었다.새벽과 현석은 어찌나 맛있게 식사를 하는지 두 사람만 다른 음식을 먹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은규는 밥 한 술에 담배 한 모금을 반찬 대신으로 하고 있었다. "맑은 장국 정말 죽인다." 어느새 국을 다 비운 현석이 다소 과장된 어투로 말하자 새벽이 행복하게 웃었다. "세 시간이나 걸려 만든 보람이 있네." 두사람의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평소 그녀의 부모님들도 제법 애정 표현을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그건 일종의 닭살 수준 이었다.하지만 두 사람에게서는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과 주고받는 말 하나하나에서조차 깊은 애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왠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은규를 바라본 예은은 너무나 삭막한 표정에 얼른 미소를 지워 버렸다.표정 없는 얼굴과 딱딱한 행동들이,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콱 막히게 했다. "참 ,두 분 어떻게 만났어요?" 한참을 식사에 열중하던 새벽이 돌발 질문을 던지고 나서야,미약하나마 그의 얼굴 위로 표정이 찾아 들었다. "첫 만남은 물론 호텔 이벤트 행사 때였겠죠?" 예은의 시야로 단단히 굳은 은규의 얼굴이 보였다. "그런....셈이죠." 새벽의 눈동자가 흥미로 반짝거렸다. "그때는 전혀 눈치 못 챘었는데 다른 곳에서 다시 사적으로 만난 거에요?너무 궁금한 거 있죠.저 따분한 남자를 대체 어떻 게 사로잡았는지 모조리 말해주세요." 아무래도 예기가 영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위기감을 느꼈는지 침묵만 고수하고 있던 은규가 나서서 말을 끊었다. "제수씨,식사나 합시다." 평범한 주부들이 아주버님으로부터 이런 경고를 받았다면 대번에 상황을 파악하고 말을 돌렸을 텐데 새벽은 달랐다. 여전히 구김 없이 밝은 표정으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아주머님한테 물어 본 거 아니에요.그죠.예은 씨."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예은은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어서 얘기해 봐요.두 번째 만남,어디서였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기회가 좋았다.단순히 인터뷰를 위해 접근했는데 스파이 취급 받으며 납치당했다고 말할 수 있는 아주 자연스러운 기회.낮의 일도 그랬고 어젯밤 일도 그랬고,저 잘난 인간의 면상에 멋지게 한 방 날린후 가능하다면 집으로 돌 아갈 수도 있는 최고의 순간이 드디어 눈앞에 도래한 것이다.날카로운 시선으로 무언의 협박을 날리고 있는 그의 눈빛을 목격하자.충동적인 욕구는 더욱 팽창되었다. '그래 해 버리는 거야.먹힐지도 몰라.이 여자라면.....' 입안에 담긴 밥알을 열심히 씹어 삼킨 예은은,망설임을 버리고 가슴에 얹혀 있던 말을 토해냈다. "나.......................실은..........................납치당했어요."


은규의 입에서 심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예은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흥분을 접고서 간절한 눈동자로 새벽을 바라보았다.

chapter 22 ==안타깝습니다.오예은 선수. 눈앞에 굴러 들어온 기회를 그냥 걷어차 버리는 군요!==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잠시 동안의정적. 예은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모두의 얼굴을 살폈다.현석은 물을 마시기 위해 들었던 컵을 입에 대지도 못한 채 그대로 정지해 버렸고,은규는 여전히 기침 중이었다.언제나 완벽하고 간결한 모습만 보이던 얼음 인간이 당황하며 평정을 잃는 모습을 보니 잠시 동안의 후회는 사라지고 다시 강한 쾌감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쓰린 표정을 하고 있는 새벽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던 여인을 향해 납치 어쩌고 하는 소리나 지껄여 댄 자신이 불한당처럼 느껴져 기분이 묘했다. '뭐야,내가 왜 죄책감 따윌 느껴야 되는 거지?난 엄연히 피해자라구?' 말도 안 되는 감정들을 물리치기 위해 천사 행세해 봤자 나만 손해일 뿐이라고 중얼 거려 보아도,마음으로부터 되돌아오는 대답은 '안 돼'라는 확고한 단어뿐,그녀는 그만큼 모진 마음을 가진 위인이 되지 못했다. 예은은 재빨리 머리 속으로 시나리오를 수정하기 시작했다.잠깐이지만 얼음인간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았으니,일단은 그것으 로 만족할 수밖에..... "오해하지는 말아요,범죄에 해당하는 납치는 아니니까.그러니까 내가 말한 납치라는 건....." 예은의 부연 설명에 정지되었던 화면이 다시 재생되었다.현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남은 물을 다 마셨고,은규는 기침을 잠재운 후 담배로 입을 막았다.그리고 새벽은 다시 환한 미소를 되찾은 얼굴로 대뜸 외쳤다. "그럼,사랑의 납치?" 단어 선정이 무척이나 거슬렸던 나머지,예은은 더듬더듬 변명거리를 찾아보았다. "뭐,사랑의 납치라기보다는...." "세상에,아주머님께 그런 면이 있었단 말이에요?" 이미 멋대로 판단해 버린 새벽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며 은규를 향해 따가운 눈총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주머님,아무리 예은 씨가 탐났다고 해도그렇지,납치라니,너무한거 아니에요?" 말도 안 되는 가설이 상상력을 덧입어 무척이나 로맨틱한 스토리로 번져갔지만,은유는 많이 초조했던 순간 빠져나간 니코틴 을 보충하려는 듯 맹목적인 기세로 담배 연기만 빨아들일 뿐이었다.


"그러니까.호텔에서 첫눈에 반해 두 번째 만나자마자 대뜸 보쌈해 왔다?" 범죄에 해당하는 납치가 아니라는 말 한 마디를 이런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니,작가 못지않은 새벽의 상상력에 예은은 속으 로나마 찬탄의 박수를 보냈다.무엇보다 그녀는 정말 많이 흥분한 것 같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낭만적인 만남인데요?난 여태껏 이 사람하고 냈던 스캔들이 가장 멋지고 아슬아슬 하다고 생각했었는 데,어쩌죠,현석 씨?당신 형이 우릴 능가해 버렸어요." 꿈을 찾은 소녀마냥 좋아하는 새벽을 바라보며 예은은 살포시 미소 지었다.타인의 일일 뿐인데 이렇게나 인간적으로 맞대응해 준 상대는 별장에 온 이후 처음이었다.무인도에 살다 오랜만에 사람 흔적을 발견한 기분이 이럴까. 허했던 마음이 따뜻하게 달구어지고 있었다. 그때 은규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새벽의 멋대로 상상은 잠시 중단되고 말았다. "어,올라가시게요?" 아쉬움이 흠뻑 묻어난 새벽의 눈빛에도 그저 딱딱한 고갯짓만 해보인 그는 큰 걸음으로 주방을 나섰다. "그럼,예은 씨도 가야겠네요.아쉬워라.내일 자세하게 얘기해 주세요." "아,네." 지체했다간 골치 아픈 질문만 더 이어질 것 같아 예은 역시 다급히 일어나 주방을 돌아 나왔다.다행인지 불행인지 은규의 흔적은 이미 사라진 후였고,썰렁하고도 길게 이어진 2 층으로의 계단만이 눈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갑자기 방에 가고 싶지가 않아졌다. 이 계단을 오르면,또 다시 그와의 길고 긴 하룻밤이 시작된다는 생각만으로도 다리가 천근만근 무겁고 심장이 콱 눌리는 기 분이었다.그렇다고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는 건 더더욱 내키지가 않았다. "쳇,까짓 거." 움츠러들 이유는 전혀 없었다.엄밀히 말해,이건 자존심 싸움이었다.오기 반 억지 반의 감정으로 계단을 밟은 예은은,삐걱대 는 소리로 흔적을 남기며 단숨에 계단 꼭대기까지 올라섰다.하지만 어둠이라는 무형의 적이 먼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원래 2 층은 유난히 어두운 편으로,불을 켜지 않으면 초저녁만 되어도 귀곡산장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괴기스런 분위기에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더니,뱃속에 있을 때부터 들어온 각종 공포 괴담이 한 다스는 족히 되는 분량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예은은 질끈 눈을 감으며 방에 들어가 편히 있을 은규를 원망했다. '먼저 올라갔으면 불 정도는 켜둘 수도 있잖아!' 정말이지,배려나 매너라고는 겨자씨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이었다.예은은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 스위치를 찾아 손을 뻗 었다.한참을 더듬고 난 후에야 딱딱한 물체가 손바닥안에 감겨왔다. '뭐지?' 다소 놀라 시선을 돌리자 어둡고 커다란 사람의 형체가 흐릿한 실루엣으로 잡혀왓다. "까악!"


아주 크게 고함을 질러댈 요량으로 힘을 끌어 모은 예은은,강한 손아귀가 입술을 덮고 넓은 가슴팍으로 끌어당기는 통에 끽 하는 소리밖에 내지 못했다.그것도 모자랐는지 무형의 칩입자는 그녀의 몸을 벽에 밀어붙이며 꼼짝못하게 옭아매었다. "으,우우...." 예은은 짓눌린 비명을 흘리며 미친 사람처럼 발광하기 시작하다,문득 코끝으로 풍겨오는 익숙한 향내에 멋칫하곤 시야를 집중 해 보았다.그였다.목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고 모습을 확인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저 막연히 알수 있었다.은은히 풍기는 그만의 향기로,적당히 위압을 주지만 결코 공포는 주지 않는 손아귀의 힘만으로,이 어둠을 집어삼킨 침입자가 은규라는 것을 예은의 본능이 일깨워 주고 있었다.그 사실 하나에 긴장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하던 그녀는,은규의 손과 몸이 만들어 낸 강한 올무로 인해 간신히 버텨낼수 있었다. "음음..." 긴장과 공포의 순간이 지난 후 한결 안심한 표정으로 예은이 웅얼댔지만 그는 여전히 압박을 풀지 않은 채 묵묵히 그녀를 바 라볼 뿐이었다.신호를 못 알아들었나 싶어 다시 소리를 내자 천천히 그의 고개가 내려왔다. '뭐,뭐야!' 뜨거운 손에 입이 막힌 채 예은은 다가오는 은규의 얼굴을 잠잠히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앞에 다다 른 순간,약속이라도 한 듯 두사람 모두 숨을 멈추었다.한동안 잠잠한 정적이 흘렀다.어둠에 잠긴 그의 눈동자에서 조용히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을 엿보았다.초점이 흐트러진다.흘린 듯 그눈 안의 마력에 스스럼없이 빠져들어 갔다. 마침내 그가 예고도 없이 입을 막았던 손을 떼어내자,이때다 싶어진 예은은 신경질 담긴 시선을 쏘아대며 입을 벌렸다. "갑자기 뭐하는 .....!" 그러나 먹이를 포획할 순간만 기다리던 맹수처럼,거칠게 부딪쳐 온 그의 입술로 인해 그녀는 다시 자유를 잃고 말았다. 첫 키스는 초등학교때,아옹다옹 다투던 짝꿍이 전학 가기전 멋대로 훔쳐가 버렸고,두번째 키스는 고등학교때,만원 지하철에서 웬 극성 아줌마에게 밀려 베스트 프렌드 유희와 어이없이 해 버렸다.모두 살짝 입술만 닿은정도로,상황 탓에 벌어진 웃지 못 할 에피소드의 한 단락에 불과했다. 키스라고하기엔 너무 우스운,키스라고 하기엔 뭔가 밋밋한,키스라고하기엔 딱히 스토리가 없는것. 진짜 키스를 하게 된 상대는 바로 이 사내,황은규뿐이었다. 모두 로맨틱한 요소가 배제된 돌발 상황에 지나지 않았지만,예은에게는 제법 의미가 있었다.납치범과 다를바 없는 사내와 깊 은 키스를 하고 있는 지금조차 아무런 거부감 따윈 느낄수 없을 만큼 말이다. 다른 곳의 접촉은 업었다.예은을 벽에 가둔 그는 열에 들뜬 자신의 손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없도록 바짝 힘을 주었고, 속절없이 찾아드는 무절제의 감각 속에서 예은은 이미 평행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 잠시 후,벽에서 떨어져 나온 은규의 손이 예은의 목을 살짝 움켜쥔 후 잔뜩 움츠린 어깨를 훑고 내려갔다.그리고 이내 예쁘 게 굴곡진 가슴을 지나 잘록한 허리를 움켜잡았다.숨결이 거칠어졌다.위험하리만치 깊어진 입술들의 접촉만큼,은규의 손 역 시 지독히도노골적인 탐험을 시작하고 있었다. "젠장," 바로 거기서 그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욕설과 함께 키스를 멈추곤,예은의 눈동자로부터 살짝 비껴간 곳에 시선을 놓은 채 거친 호흡을 고르기 위해 애썼다.어느덧 어둠이 눈에 많이 익어 큼지막한 표정 변화는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흔들리는 눈빛과 감정의 폭주를 절제하기 위해,그는 벽을 짚은 커다란 손에 갑절의 힘을 담고 있었다. "또 이유를 묻겠지." 한참 후,은규가 불쑥 말했다.뭔가 답하기 위해 입을 벌렸던 예은은 그와 말을 섞지 않겠다던 다짐을 떠올리곤 그대로 침묵 했다.연막에 휩싸인 모호한 눈동자가 꽤 진지해 보였다. "고맙다는 의미야."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예은은 눈을 들어 질문을 되돌렸다. "말하고 싶었겠지,상황이 어찌 되었건 당신은 납치를 당한 상태고,이런저런 불만도 아주 많았으니까 제발로 찾아온 기회를 포기할 거라곤 생각지 않았어,그래서 고맙단 말을 하는 거야.적대적인 관계를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서 당신은 신의를 지켰 어.제수씨 마음을 밟지 않아줘서 고맙고.지금까지의 좋은 감정들을 지킬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예은은 너무 놀라 멀건 눈동자로 은규를 바라보았다.처음이었다.나긋나긋한 목소리도 그렇고,이렇듯 긴 말을 한꺼번에 쏟아 낸 것도 그렇고,무엇보다 눈동자 안에 담긴 진심이 엿보여 당혹스러웠다. "약속 하나 하지!" 예은을 가둔 손을 떼지 않은 채,그는 혼란으로 채워진 그녀의 눈을 또렷이 주시했다. "당신이 정말 평범한 작가라면 고이 보내주는 것은 물론,원하는 만큼 보상을 지불하겠어." 놀라움으로 예은의 눈동자가 두배나 팽창되었다.그 안에 담긴 기대감을 읽은 은규는 못다 한 말을 맺었다. "설사 당신이 스파이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해도 다치거나 신상에 위협이 가게 만들지는 않을 거야.인간에겐 실수란 게 있는 거니까.어떤 정보를 빼돌리려고 했든 오늘 일로 당신은 빚을 갚은 거야." 믿을 수 없는 소리를 쏟아내고서 그는 몸을 돌려 방으로 걸어갔다.뒤에 남겨진 예은은 허수아비처럼 서서 귓가에 흩뿌려진 말들을 곱씹어 보았다.믿을수가 없었다.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더니 그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 아닌가. 더구나 보상까지?반전이 너무 심했지만 모처럼 다가온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법.예은은 그가 방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활짝 개인 얼굴로 달려갔다.말을 섞지 않겠다던 맹세는 이미 휴지 조각이 돼 버린 후였다. "그 약속 정말이죠?" "난 거짓말 안 해." "다른 건 필요 없어요.내 결백이 밝혀지면 인터뷰를 해줘요.내가 원하는 만큼!" 은규는 예리한 시선으로 예은의 눈동자에 담긴 진심을 살폈다. "그렇게 하지." 갑자기 뒤바뀐 상황을 도무지 믿을 수 없어진 예은은,꿈이 아닐까 싶어 살짝 혀를 깨물어 보았다.정확한 통증이 퍼져오는 것을 보니 꿈이 나닌 것만은 확실했다. "문서로 남겨줘요.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계약은 계���이니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예은에게 은규는 주머니에서 꺼낸 담배 케이스를 내밀었다. "이걸 왜....." 예은은 잠시 세련되고 고풍스러운 느낌의 담배 케이스를 내려다보았다.푸른 빛깔로 남자의 실루엣이 새겨진 케이스 겉면 에서 그의 향기가 가득 묻어 나왔다. "나한테 제법 의미 있는 물건이니까 그걸로 대신해.어떤 식으로든 이 관계가 종료될 때 넘겨받도록 하지." 혼란속에 갇힌 예은을 남겨두고서 그는 방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둠이 가득한 서재 안락의자에 앉아 담배를 태우던 은규는,말할 거리를 잔뜩 안고 들어서는 동생의 얼굴을 보자 기분이 더 저조해졌다. "나가,잠시 생각할 게 잇으니까." 들은 척도 않고서 문을 닫은 현석은 대뜸 불부터 켰다.환한 빛이 눈을 찔러와 은규를 더 포악하게 만들었다. "나가라니까." "엄청 무시무시한데?" "까분다." "누구 앞이라고 감히 까불겠습니까.' 말꼬리를 잡는 현석을 쏘아보며 은규는 거칠게 담배를 비벼 껐다.검은 자위가 유난히도 깊은 흑색으로 물든 그의 모습은 꼭 흑사를 연상케 했다.저 눈동자 하나로 여러 사람 기절하게 만들었다는 다소 과장된 소문처럼,현석 역시 이럴때 형의 눈 은 조금 바라보기가 벅찼다. "그 눈 좀 치울 수 없어?" 은규의 눈썹이 휘어 올라가자 현석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난 형 동생이야.직업상 대해야 하는 적들 중 하나가 아니라고.적어도 내 앞에서만큼은 그냥 평범한 형으로 있어줬으면 좋 겠어." "잔소리꾼." "잔소리가 아니라 충고야." 은규는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용건이 뭐야.이 밤중에."


"경고해 주러 왔어." "경고?" "새벽이가 의심하기 시작했거든.오늘 저녁 식사때 조금 풀린것 같긴 하지만 앞으로도 지금처럼 티나게 굴면 나도 장담못해." "너 언제 갈 생각이냐." "골치 아픈 제수씨 빨리 떼어 버리고 싶다...?" "잘 아네." 은규의 표정을 살피던 현석의 태도가 진지하게 바뀌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근본적인 문제부터 해결해야지.어떻게 할 거야?그 여자." 대답을 미루며 담배를 빨아대는 은규에게 현석은 내심 안으로만 담아두었던 말을 쏟아댔다. "내 생각에 이번엔 형이 오버한 거 같아." 은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참다못한 현석은 좀더 앞으로 다가가 따졌다. "그 여자,스파이라고 믿기엔 너무 어설퍼.오늘도 봤잖아.세상 어떤 스파이가 굴러 들어온 기회를 차?우리가 여기 온 이후로 그 여자 혼자 내버려진 적도 있었는데,적어도 스파이라면 그런 기회를 놓쳤을 리 없잖아." "초짜인가 보지." "형,나하고 지금 농담해?" 은규의 얼굴 가득 골치 아프단 기색이 여실히 묻어났다.안그래도 자신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아닐까 혼란스러워 하고 있던 참이었다.그런 와중에 들려온 현석의 말이 확고했던 그의 의지를 뿌리째 흔들고 있었다.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아침 수야가 신흥파 녀석 꼬리를 잡았다고 했으니까 며칠 내에 사실 여부가 밝혀질 거야.그러니 미리 진 빼지 말자. 세상엔 언제나 예외란 법도 있는 거니까.난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배제하고 싶지가 않다.그게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수 있는 길이고 방법이야." 어두운 눈동자로 은규를 바라보던 현석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돌아섰다. "나도 모르겠다.마음대로 해.하지만 아무리 위장 연인이라고 해도 새벽이 앞에선 좀 노력해 줘.안그러면 내가 피곤하다고." 현석이 사라지고 다시 홀로 남은 은규는,지금까지 예은이 보였던 행동 전부를 돌이켜 보았다.술 먹고 주정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던 시작점부터 그다지 치밀하지 못한 평범한 탈출 작전.그리고 오늘 저녁 일까지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녀가 보였던 행 동의 편린이 가져다주는 결론은 단 하나였다. 그녀는 스파이 치고 너무 단순하다는 것. "돌겠군." 머리를 감고 샤워를 끝낸 예은은 옷을 집어 들다 그만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앗!" 재빨리 집어 들었지만 옷은 이미 축축한 욕실 바닥 물기를 모두 흡수한 채 늘어져 있었다.


"멍청하게 덜렁대기나 하고 ,휴..." 자신의 부주의함을 신랄하게 씹어대던 예은은 큰 수건을 찾아 수납장을 뒤적거렸다.개중에서 가장 커보이는 수건을 꺼내 몸에 둘둘 감아 보았지만 엉덩이만 겨우 가릴 수 있을 정도였다. "어떻게 하지?" 가슴을 반만 가리고 내리면 좀 나을까 싶어 그렇게 했더니,좀 전보다 더 아슬아슬한 여인의 몸체가 거울 한가득 눈에 들어왔 다.어쩔수 없이 욕실 문가로 다가간 그녀는 귀를 바짝 대고서 인기척이 있나 살펴보았다.다행히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 았다.한껏 쪼그라들었던 심장이 다시금 팽팽해지는 것을 느끼며 예은은 욕실 문을 열고 나와 옷장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다급히 손잡이에 손을 뻗는 순간,뒤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와 그대로 정지해 버렸다. '누,누구지?서.....설마.' 바빠진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대며 예은은 천천히 심호흡을 시도했다.익숙하게 풍겨오는 알싸한 담배 향내와 비누 냄새만으로 도 이미 침입자의 존재를 파악했지만,혹시나 하는 마음에 좀더 수건을 바짝 여미며 작은 목소리를 등 뒤로 던졌다. "누.....누구세요?"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chapter23 ==신이시여,왜 제 발은 230m 미만이 아닌가요?=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뜨거운 공기.날카로운 시선.팽창된 온몸의 혈관. 사형 집행을 위해 다가오는 간수의 그것처럼,느릿하면서도 위협이 실린 발소리가 예은의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긴장을 몰아 갔고,분명히 방금 샤워를 마쳤는데 식은땀이 솟아 다시금 몸에 끈기를 형성했다.낭패다.어마어마한 긴급 상황. 자칫 잘못했다가는 간신히 몸에 두른 짧은 수건이 올라가 엉덩이 선마저 드러내야 할 판국이었다.차라리 이대로 마네킹이 되고 말지언정 그런 사태만은 막아야 했다.그녀의 심경을 알리 없는 은규는 규칙적이면서도 지속적인 걸음을 옮기며 열기를 전해왔고,한껏 긴장한 탓에 평소보다 두 배나 빨리 뛰기 시작한 심장에서 아릿한 통증이 수반되어지고 있었다. 온몸이 조개탄처럼 활활 타올라 자제할 수 있는 제한 구역을 벗어나자 예은은 간신히 돌아서 고개를 들었지만 바로 앞까지 다가온 커다란 형체에 눌려 눈 하나 깜박할 수가 없었다.예외인 것이 있다면 그의 눈동자와 벼락이라도 맞은 모양 핑그르르 도는 그녀의 어질한 초점뿐. 눈에서 만났던 시선이 목으로 옮겨갔고,더 아래로 미끄러져 절반이나 드러난 그녀의 가슴 앞섶에 닿았다.그의 눈 색깔이 조금 더 짙어진 것 같다고 느낀 순간,시선은 다시 움직여 간신히 가려진 배 부위에


안착해 작은 불꽃을 피워냈다. 신음이 새어나갈 것 같아 필사적으로 목구멍에 힘을 준 예은은 끓어오르는 열기를 차단하고 거부했다.그의 눈동자는 거칠 것이 없어,속옷도 입지 못한채 수건으로 가린 예은의 몸통 부위를 투시경처럼 훑으며 벅찬 만큼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고열에 시달리는 환자마냥 머리와 목과 가슴,심지어 등뒤까지 흠뻑 젖어 버린 예은은,문득 그의 시선이 자신의 발끝에 멈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는 여자 치고 발이 제법 큰 편에 속했다,작은 키가 아닌 관계로 앙증맞은 크기가 더 불균형해 보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자신이 소유하지 못한 것이기에 작고 여성스러운 발은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었다.사춘기를 겪고 외모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는 어느덧 치명적인 콤플렉스로까지 발전해 버렸다. 그 발을 그가 뚫어지게 바라보자,열기는 달아나고 온몸이 경직되었다.엄청난 치부를 들켜 버린 것처럼 창피하고 죽을 것 같아 도무지 평정을 ?을 수 없게 된 그녀는 반사적으로 발을 오므리다가,그의 입가에 픽 하고 미소가 실리는 것이 보이자 발끈 하고 말았다. "비켜줘요." 역류하듯 그의 고개가 들렸다.상대의 숨통마저 쥐어틀 만큼 은근한 여행을 마친 얼굴에 이렇다 할 감정이 담겨 있진 않았 어도 숨을 내쉬는 가슴이 조금은 가빠진 것도 같았다.하지만 여전히 입을 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터지지 않는 목구멍을 겨우 열어 한 말인데 그가 무시로 일관하자,예은은 금방 신경이 예민해졌다. "비켜달라니까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뭐라구요?" 예은의 목소리가 날카로운 칼을 품고 흘러 나갔다.반나체의 꼬락서니로 여기까지 참아준 보람도 없이 도리어 비키란 말을 하다니.초인적인 힘으로 억제하고 있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그녀는 아슬아슬한 수건 아래 감춰진 몸에 대해서는 이미 말끔히 잊고서 마음껏 소리를 내질렀다. "나 거의 벗고 있는 거 안 보여요?기척도없이 멋대로 들어와서는 사람 속 긁는 것도 정도가 있지...옷 입어야 하니까 어 서 비켜요!" 흠씬 두들겨 주고 싶을 만큼 그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약간의 변화가 있다면 살짝 비틀린 입가 정도?무엇이 그리 우스 운지 보기 드문 모양새로 휘어진 그의 입술이 얼토당토않은 말을 흘렸다. "거기 옷장에 있는 옷을 입겠단 얘기야?" 예은은 마치 정신병자와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광분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으....왜 자꾸 뻔한 걸 물어요!" "언제부터 남자 옷 입는 취향을 갖게 된 거지...?" 틀림없는 한국말임에도 도저히 뜻을 파악할 수 없는 질문에 예은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반반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제대로 해석해 줘요." 은규는 턱 짓으로 그녀 뒤의 옷장을 가리켜 보였다. "말 그대로야." 그의 입술이 기분 나쁜 웃음을 그렸다. "거긴 내 옷장이거든.그 속에 있는 옷을 입을 생각이라면 좀더 신중하는 게 좋을 거야." 바짝 말라가던 목구멍에서 기침이 터져 나오는 바람에 예은은 가슴을 움켜쥐고 캑캑대기 시작했다.그 와중에도 사실 확인을 위해 뒤쪽을 살펴보니,자신의 것이라 생각했던 옷장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또 한칸의 옷장이 눈에 들어왔다. 한껏 벌어졌던 예은의 입술은 기침할 때를 제외하곤 다시 열리지 않았다. 지옥 같은 긴장의순간이 지나고,예은은 타자기 앞에 앉아 은규를 노려보고 있었다.표정 없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그에게서 묘한 여유와 우월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예은은 타자기를 두드리던 손에 곱절의 힘을 주었고 방은 금방 소음으로 채워져 갔다. "시끄러워." 어김없이 날아든 경고에 예은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렸다.답답했다.종일 타자기를 붙들고 있었지만 글은 고사하고 몇 미터 간격 뒤에 앉은 사내가 의식되어 골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머리라도 식힐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난 예은은 창문을 활짝 열고서 창틀에 걸터 앉았다.시원한 공기와 함께 자연의 향기가 풀풀 풍겨와 혼탁한 머리속을 금방 순화시켜 주는 ㅓ기분이었다.그녀는 아예 눈을 감고서 바깥을 향해 좀더 몸을 기울려 보았다. "그러다 떨어져도 책임 못져." 예은은 적지 않게 놀랐다.책을 펴들기 시작한 후 한번도 글자에서 시선을 뗀 적이 없는 사람이,그녀의 행동거지만큼은 모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일까.생각해 보면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눈을 맞추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걸어 다니는 내내 예은은 은규의 시선을 무던히도 느껴야 했다.그렇다고 눈동자에 욕망이나 흑심 비슷한 감정이 드러나는 것은 결코 아니 었다.그의 시선이 느껴지게 하는것들은 다분히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 정도였다. 가끔,아주 가끔 마주칠 때면 뭔가를 고심하는 기색이나 약간의 혼란 정도는 감지할 수 있었지만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그만큼 그의 가만 눈동자는 늘 모호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옷장 앞에서의 시선만큼은 달랐다.그녀의 몸 위에서 유연하게 탐험하는 뜨거운 눈동자가 납치와 감금이라는 상황을 잊게 할 만큼 깊고 뜨겁게 느껴졌다. 창틀에 걸터앉아 발을 대롱거리던 예은의 시선은 그렇게 또 은규를 향해 꿈틀 움직였다.묵묵히 책을 읽고 있는 커다란 남자,그에 관해 알고 싶었다.어떻게 살아왔을까,학창시절의 모습도 이랬을까.가족 관계는 어떻고,정말 사람들로부터 껄끄 러운 존재라 낙인찍힌 조폭 두목인지...궁금한 것 투성이었다.


어차피 결백이 밝혀지고 나면 이런 사소한 것 외에도 많은 정보를 흡수해야 할 텐데 조금 일찍 접근하는것도 괜찮지 않을 까 싶어진 예은은,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두드리곤 창틀에서 뛰어내렸다.그리고 배회하듯,탐색하듯,천 천히 거리를 좁혔다. "저기...있잖아요." 약간의 망설임이 묻어난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시선을 들었다. "뭐 좀 물어봐도 돼요?" "쓸데없는 질문이 아니라면." "아까 그랬잖아요.당신은 후회 같은 거 해본 적 없다고.그거 정말이에요?" "없어." "어떻게 그럴 수 있는데요?사람은 누구나 후회하면서 살잖아요.신이 아닌 이상,완벽할 순 없으니까 가끔 후회도 하고 그 러는 거 아닌가요?" "내 비누 썼군." 살짝 벌어진 그의 입에서 하얀 연기와 함께 엉뚱한 중얼거림이 튀어나왔다. "그냥,욕실에 있길래 썼는데 ....안 돼요?" 뿌옇게 서린 담배 연기 사이로 그가 찌푸린 시선을 던지며 피식 웃어 보였다. "나밖에 쓰지않는 비누라...당신한테서 내 냄새가 나니까 기분이 이상해." 예은은 잠시 넋이 나가 버렸다.그를 만나고 이런 웃음은 처음이었다.긴장이 풀리며 자연스레 찾아든 미소에 가슴이 다 떨려 왔다.지독히도 빠르게. 가끔씩 그의 뺨에 자리한 흉터를 잊을 때가 있었다.상처만 의식하지 않는다면 제법 매끈한 인상이었지만,갑자기 흉터가 의식되어 오면 그는 바로 흑사 황은규를 탈바꿈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좀 이상했다.거리가 가까운 만큼 어느 때보다 흉터가 자세히 들여다보이는데도,웬일인지 그가 평범한 남자로 느껴졌다.감정이 있고 다정할 줄 알며,대화하면 재미있고,입으론 금방 회사의 이런저런 일들을 내뱉을 것 같은 평범한 남자.웃었기 때문일까?그래 봤자 살며시 미소 지어 보인 것뿐인데 이런 변화를 느낄수 있다니 정말이지 신기할 일 이었다. "하나만 더 물어도 돼요?" 이상한 기운에 취한 예은의 입에서 다시 한번 질문이 흘러 나갔고,은규는 여전히 성의 없는 태도를 보였다. "대답은 기대하지 마." 하얀 연기가 가리자.예은은 망설임 없이 돌발 질문을 던졌다. "사랑....해본 적 있어요?" 힐끗,그의 시선이 생글거리는 예은의 얼굴에 박혔다.그리곤 잠시 진지한 표정이 되었던 ���의 입에서 의외로 시원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있어." 예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chapter24 =나도 모르게 이 묘한 납치범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위험해......==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예상조차 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돌덩이로도 부족해 쇠붙이에 견주어야 할 남자가 사랑해 본적 있냐는 질문에 예스라고 답하다니. '없어'라는 딱딱한 대답을 이미 정해놓고 한 질문이었다.그만큼 자신하고 있었다.이런 정도의 남자라면 여자는 많이 갖고 유린했을지 몰라도 결코 사랑이란 영역까지 다가가지는 않았을 거라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사랑이란 감정을 안다면 이렇게 차가울리 없었다.사랑이란 감정을 안다면 이렇게 묵묵할 리 없었다.사랑이란 감정을 안다면 대뜸 여자를 납치해 짐짝 취급은 하지 않았을 것이고,사랑이란 감정을 안다면 적어도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 하나쯤은 쉽게 보일 줄 알아야 했다.하지만 이사람은,이 남자는.... "놀랍....네요." 예은은 침착하고자 애썼다.엄밀히 말하자면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납치범의 연애 흔적 따위에 마음이 흔들리고 기운이 빠진다는 게 오히려 비정상적인 현상일 테니까. 거의 다 말라가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예은은 평소보다 조금 과장되게 웃어 버렸다. "나보다 낫네요.난 이렇다 할 사랑 한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데,어떤 사람이었어요?" 어쩌면 주제 넘을 지도 모를 질문을 던지며 예은은 조심스레 그의 표정을 살폈다.반 이상이 타 들어간 담배를 문 입술이 영원히 열리지 않을 족쇄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곤란한 질문인가요?" "아니 아주 간단한 얘기야.서로 첫눈에 반해 바로 사랑에 빠졌지." 이 인간도 첫눈에 반할 여자가 존재한단 말이야?대체 어떤 여자기에. "그래서여?" 그는 의외다 싶을 만큼 술술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결혼할 마음까지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내가 싫다고 하더군." 잠시 말을 멈춘 그는 필터까지 타 들어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꼈다. "그래서..." "그래서?" "죽여 버렸어." "뭐라구요?" 깜짝 놀란 예은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움직임을 잃었다.죽였다고?지금 사랑하던 여자를 죽여 버렸다고 한건가? 흥측한 사실에 정지해 버린 심장을 되살리기 위해 그녀는 다급히 산소를 흡입하기 시작했다.하지만 그의 얼굴에 담긴 묘한 웃음을 10 초쯤 뚫어지게 보고 나서야 이 모든 이야기가 지어낸 허구임을 깨달았다.


"너무해요!난 진지하게 듣고 있었잖아요." "진짜야." 그의 미소가 좀더 크게 번져갔다. "내가 바보인줄 알아요?그걸 믿게." "믿었잖아!" "아니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입에서도 웃음이 흘러나왔다.정말이지 오랜만에 현실을 잊고 활짝 어깨를 펼 수 있었다. 작가의 길에 들어선 후,그것이 인생 최대의 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웃는 법을 잊고 살아왔다.그녀에게 있어 펜과 종이와 타자기는 보기만 해도 심장이 반응하는 행복 제조기 였다.변변찮은 얘기 하나라도 시간이 허락하는 한 쓰고 또 다듬어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시키면,그날은 자신이 몸담는 곳이 바로 천국이 되곤 했다. 그때는 그랬다.심혈을 기울여 쓴 글이라고 해봤자 누가 봐주는 것도 아니고,타는 목을 달래줄 음료수 하나 포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었지만,펜과 종이를 쥐고 활자들을 조합해 나간다는 것 자체가 현재의 행복이요.미래의 꿈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신경 끝까지 발산되어 피어오르는 그 흥분과 기쁨을 잊고 살아왔다는 깨달음이 밀려들었다. 마감에 ?겨 벼락치기 식의 글을 쓰다 보면 스스로와 타협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이 정도면 훌륭해.괜히 붙들고 있어 봤 자 더 어그러질 뿐이야.라는 식의 자기변명. 아무리 남들에게 칭송을 받는다 해도 유명해진다 하더라도,자신의 글과 타협하는 순간 이미 그 작가는 죽은 것이나 매한가지라는 교수님의 말씀을 뼛속 깊이 새겼는데도 글쓰기가 밥벌이가 된 후로는 허울 좋은 명언으로만 여겨왔다. 예은은 종용히 은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비록 말도 안되는 오해를 받아 납치된 웃지 못할 상황이긴 했어도,따지고 보면 상황 자체를 그다지 의식하지 못하고 지낼 때가 대부분이었다.꿈속에서나 보았음직한 별장과 아름다운 자연 환경,그리고 맑은 공기,게다가 그는 놀라울 만큼 말과 행동을 절제 하며 배려 있는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놀라워요." 그에게서 겨우 웃음이 사그라질 즈음,예은은 촉촉이 젖어든 눈동자로 얕게 속삭였다. "뭐가." 은규의 눈빛도 더이상 모호함 속에 갇혀 있지 않았다.예은이 활짝 웃는 만큼 그의 눈동자도 묽게 빛나고 있었다. "당신도 농담을 할수 있다는게,너무 놀라워요." 그의 입술이 미소로 다시 비틀어지는 것이 보였다.최근 들어 그는 제법 자주 저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그럴 때의 이 남자 는 얼마나 해맑은지. "농담 안하는 사람은 없어."


"당신은 그냥 평범한 사람 같지 않았거든요." "날 무슨 괴물 취급이라도 하는 것 같은데." 이번엔 예은이 소리 내어 웃었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한 것도 사실이에요.뭐 이런 괴물 같은 인간이 다 있나 싶었죠." 그의 입에 미소 대신 담배가 물렸다. "지금은 좀 생각이 바뀌었겠지." "뭐 어느 정도는요." 담배 연기를 마시느라 흐릿해진 그의 시선이 예은을 향해 꽂혔다.갑자기 열이 오르고 맥박 수가 빨라진 느낌,그녀는 일부 로 더 주절주절 떠들며 긴장을 감췄다. "일단 마음 먹으면 자주 웃을수 있다는 걸 알았고,농담도 한다는 걸 알았고,무시무시하게 협박하면서 고문이라도 할줄 알았는데 의외로 신사적이었고,그리고..." 말을 멈추게 되면 어색할 것 같아 뭔가 더 생각하기 위해 애쓰던 예은은 손바닥을 마주치며 소리쳤다. "맞다 !타자기도 구해줬고." "그건 내가 구해준 게 아니야.수야 녀석이..." "방금 또 하나 발견했어요." "뭐?" "거짓말도 ...하네요?" 은규의 얼굴 위로 곤혹스런 표정이 스쳐갔다.저녁 식사 이후로 처음 보는 감정의 흔들림이었다. "수야 씨가 그랬어요.이건 형님의 배려로 마련한 거다.그러니 나쁜 수단으로 이용하진 말아달라구요." 낮은 욕설을 중얼대며 은규는 담배로 입을 막았다.말싸움에서 그를 이긴 것은 처음이었다.함께 있으면 답답해 죽을 것 같았고 지루함에 시달리다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 되곤 했는데 함께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가뿐해지다니. 이 평범한 밤에 그는 제법 색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때 묵직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마법에 걸린 듯 잠시나마 형성되었던 두 사람의 평범한 세계가 동강나 버렸지만 제법 다급해 보이는 수야의 목소리에 더 이상의 여유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형님 ,접니다." "알아낸 거냐." "예,형님." 은규는 문을 열고서 심각해 보이는 수야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딱딱한 목소리와 함께 간결한 대화 소리가 문틈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다시금 흑사로의 돌변,그렇게 마법은 풀어져 버렸다. "사실이냐." "예." 은규는 서재 전부가 잠식될 정도로 성급히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목숨 걸고 장담하냐."


"예,형님." 수야에게서는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신흥파 녀석,연락책일수 있는 지위도 아니었습니다.고등학교 때부터 똘마니 노릇 좀 하다 졸업하고 이제 막 가입한 피라미 중 하나인데다,클럽에서 사고를 친 모양인지 은신하는 바람에 찾는 데 더 애먹었습니다.주먹 몇 방에 바지가 흥건히 젖더 군요." 은규는 아무 말 없이 수야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오예은이라는 여자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답하더군요.몇번 더 박아주고 사진을 내미니까 카지노에서 잠깐 헌팅한 여자라며 겨우 기억을 더듬었습니다.그 카지노가 형님 소유인지도 모르는 눈치였고요." 희비의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에 대한 짜증과 그녀가 평범한 여자라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 복잡한 심정이었다. "어떻게 ?까요.여자를 풀어주고 원하는 만큼 보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침착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은규는 수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수고했다.나머지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넌 서울에 올라가서 천일도 패거리들 움직임이나 파악하도록 해.수습 하는 대로 나도 바로 올라가겠다." "그럼,서울에서 뵙겠습니다." 수야가 문 밖으로 나선 후에도 은규는 어두운 서재에 앉아 좀더 깊은 생각에 잠겼다.예은의 주장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오해 살 만한 행동을 했다는 점에서 그녀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었지만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아무 죄 없는 여자를 납치해 감금한 후 멋대로 취급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도 무마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젠장." 은규는 한숨을 내쉬며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별이 한창인 하늘이 왜 이리도 평온해 보이는 것인지,마치 자신의 상황과 입장을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인터뷰...해야 하나." 뿜어진 담배 연기가 유유히 창밖으로 흘러 나갔다. 전화를 끊은 현석은 옷가지를 벗으며 새벽을 향해 돌아섰다. "아무래도 내일 서울에 올라가야겠어." 초롱초롱 눈으로 그를 마주 보고 있던 새벽의 눈동자에서 금방 생기가 사라져 버렸다. "왜요?" "왜긴 왜야.백화점 때문이지.지금 황 실장이 독촉하고 난리도 아니야."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돼요?" 그녀는 곧장 볼룩 나온 배에 대고 하소연했다. "아가야,네가 아빠 좀 말려줄래?여기에 있으니까 얼마나 편한지 말햅봐." 아내의 행동에 웃음을 터뜨리며 현석은 침대로 다가갔다. "당신 내가 백수인 줄 착각하고 있나 본데,난 한 백화점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야." "그래요,당신 사장이잖아요.회사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휴가시간 하나 마음대로


못늘려요?그럼,사장을 왜 해요?안하고 말지." "자꾸 투정 부릴래?" 현석이 제법 엄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새벽은 얼른 그의 품에 안기며 칭얼댔다. "이런 여유,서울 가면 못 누릴 게 뻔하잖아요.당신은 또 바쁠거고 난..." "참견할 거리를 잃게 되겠지." 어리광 작전이 먹혀들기는 커녕 속내가 모두 드러나 버리자,새벽은 뜨끔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현석은 피곤한 눈동자로 아내의 머리를 차분히 쓸어 주어?. "서울 가면 형 여자 문제에 이러쿵 저러쿵 간섭할수 없으니까 이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자기 이기심 때문에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아기 핑계나 대고,잘한다." 정곡을 찔린 새벽의 입이 붕어마냥 튀어나왔다. "불안하니까 그렇죠.내가 보기엔 예은 씨만 한 여자 없어요.아주버님한테 딱이라니까요.괜히 관리 못해서 놓치면 그땐 아주 버님 진짜 결혼 못할 거에요.그나마 중간에서 좀 나서줘야...." "새벽아..." 현석이 진지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새벽은 말을 끊고 멈칫했다.그가 이렇듯 이름을 부를 때면,엄한 오빠 앞에 선 누이 마냥 왠지 모르게 차분해지고 마는 그녀였다. "왜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짓이 뭔 줄 알아?" "뭔데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가지고 고민하는 거." "하지만 난..." "그만 하자,다 좋아.형 일에 간섭하는 것도 애정에서 나온다는 걸 아니까 나도 아주 기분 좋다고,.하지만 옆에서 어떻게 해 줄수 없는 일도 있는 거야.우리 역시 그랬잖아.당사자들이 감정을 깨닫고 나서야 뭔 일이 나도 나는 거라고,두 사람이 정말 이어질 사람들이라면 누가 나서지 않아도 그렇게 되겠지.난 이미 당신이 그 촉매제 역활을 했다고 생각해." "정말 그럴까요?" "그래 이제 조용히 지켜보자.형이 과연 사랑에 빠져 느슨한 사람이 될수 있을지 어떨지.사실 나도 벼르고 있어.내가 당신 때 문에 괴로워할때 형이 많이 놀렸거든.이 짓을 왜 하고 있냐,나 같으면 집어치우고 만다 ,라는둥.그래서 나도 된통 놀려줄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고 있어." "음,,,듣고 보니까 우리가 이쯤에서 사라져 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단둘뿐인 게 무드 잡기도 훨씬 쉬울 테니까." 베시시 웃으며 새벽은 맘편하게 침대에 드러누웠다.현석 역시 옆자리에 누워 그녀를 보듬어 안고는 잠들기 전까지 중얼거렸다. "형이 여자 때문에 정신 못 차리게 되면 뭐라고 놀려주는 게 가장 좋을까?" 수야와 함께 서재로 간 그는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감시를 위해서라도 방을 비우는


일은 없었는데 닫힌 문은 아침이 오도록 열리지 않았다.한참이나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눈꺼풀이 자꾸 감기려고 들었지만,갑자기 떠나게 되었다며 짐을 꾸리고 나선 현석 부부를 위해 몇 번이나 하품을 참아야 했다. "너무 아쉬워요." 차에 오르기 전,새벽이 울상으로 돌아섰다.당혹스럽게도,예은은 마치 자신의 집에 방문한 오랜 친우를 떠나보내는 안주인 같은 심정을 느꼈다. "저도 그래요." "저희 아주버님,잘 부탁해요." 미처 당황할 틈도 없이 새벽은 이미 은규를 향해 또 다른 당부를 남기고 있었다. "아주머님도 예은 씨한테 잘해주시구요.영 진도가 안 나가는 것 같던데 이제 두분이서 오붓한 시간 좀 보내세요." 은근한 눈짓으로 갖은 사인을 보내는 새벽을 무시하며 은규는 무조건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럼,갈게요." "형 나중에 서울에서 봐." "그래." 떠나기 전,현석의 시선이 잠시 예은을 향했다.그녀가 가볍게 목례를 하자,그 역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차에 몸을 실었다. 차에 탄 후에도 고개를 내민 새벽이 연신 손을 흔들어 대는통에,예은은 내내 미소로 답해줘야만 했다. 마침내 차는 사라지고 납치범과 인질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로 얽힌 두사람만 남게 되었다.아무런 기척이 없어 살짝 시선을 돌려 보니,담배를 문 그의 시선이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하염없이 박혀 있는게 보였다.외부의 자극 없이는 도저히 움직일 것 같지 않은 자태였다.그러니 보니 아침부터 계속 이 모양이었다. 식사와 매일 나가던 운동도 거른 눈치인데.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자신의 상황과 자격마저 잊고서 예은은 걱정 어린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그녀의 시선을 느낀 은규가 시선을 맞춰왔지만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방어벽으로 채워진 눈동자에 왠지 모를 아쉬움이 파고 들었다.한숨을 내쉬며 돌아선 예은은 호수를 향해 몇 발자국을 옮겼고 답답함에 가슴이 터질 즈음에야 등뒤로 낮은 목소리가 닿았다. "축하해.당신이 ���겼어." chapter25 ==진실이 통하는세상, 캬~아직은 살 만하지 않은가!!==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무슨 소리에요.그게."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수습하며 예은이 물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말 그대로야.내가 틀렸다는 얘기지."


부메랑처럼 되돌아온 수수께끼,예은은 팔짱까지 끼고 버텼다. "당신이 틀린게 어디 한두 가지에요?일단 아무 죄없는 나를 스파이 취급한 것부터 시작해서.." "바로 그얘기 하는 거야."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낸 예은은 미미하게 남아 있던 미소를 지웠다.주머니 깊숙이 손을 찔러 넣고 담배를 문 그의 입매와 몸체가 제법 단단히 굳어 있었다.어느새 바람이 좀더 거세져 언제나 정갈하던 은규의 흑색 머리카락을 멋대로 헝클어뜨렸다.그 때문에 유독 초조해 보이는 것일까... "그러니까 날 스파이 취급한 거,그게 틀렸다는 걸 인정하는 거에요.지금?" 은규가 미세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예은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벌어졌다. "저....정말이에요?" "정말이야." "세상에!" 예은은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무표정한 은규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수야가 확인을 마쳤어." "그럼 어제 수야 씨가 급하게 온 건 바로 그 일 때문?" "맞아." 현실이 믿기지 않아 예은은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믿음은 있 었지만 그 이면엔 두려움도 섞여 있었다.세상에는 누명이나 오해라는 것도 있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거대 조직들 간의 싸움에 휘말려 괜한 희생양이 되는 건 아닐까.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 하직하게 되면 어쩌나,소설 같은 상상력을 발휘해 잠 못 이룬 밤들도 숱하게 많았다.별장에서의 시간이 길면 길어질수록 자신감과 확신은 아주 얕고 희미한 색으로 바래갔다. 하지만 최근에는 거의 잊고 있었다고 해야 옳았다.납치된 상황이라기보다는 그냥 잠시 쉴 만한 곳을 찾아들었다 범상치 않 은 사내를 만난 느낌?그런 착각 속에서 이 상황을 즐기기까지 한 그녀였다.작가로서뿐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어쩌면 평 생이 지나도 하지 못할 기괴하고 흥미로운 경험들을 이 별장에서의 시간들이 쌓아준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지금,여기서,그가 갑자기 현실을 일깨웠다.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상상 속 환영이 만들어 낸 꿈만 같아 덜컥 믿어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럼,이제 난 자유인가요?" 몰려드는 감정들을 추스른 후 예은이 다시 확인하려 들자,은규는 담배를 땅에 짓이겼다. "물론." "꺄아!" 그제야 예은의 입에서 아이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보는 이마저 그 기운에 전염 되어 버릴 만큼 화사한 미소가 그녀의


온몸 가득 퍼져갔다. "내가 뭐랬어요!난 결백하다고 했잖아요.세상에 어떤 멍청한 사람들이 나 같은 여자를 스파이로 쓴다는 거에요.?" 은규 역시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어떻게 저 여자를 스파이로 생각할 수 있었을까. "그럼,인터뷰에 응해주는 거죠?약속했으니까." 잊어버렸기를 바랐는데 대번에 인터뷰 얘기부터 챙기는 그녀의 프로 정신에 은규는 눈썹을 움찔했다. "다 좋은데 말이야." 또 무슨 소릴 하려고 저러나 싶어 예은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어 한 마디씩 뱉을 때마다,날아오는 직격탄에 어디 한두 번 입이 막혀 봤던가.뭐라고 발뺌하던지 인터뷰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다짐 하며 예은은 작은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얼굴에 담긴 표정 하나로 그녀의 고집과 집념을 모두 감지한 은규는 제법 오래 시간을 끌고 나서야 질책이 담긴 어투로 현실을 일깨웠다. "가족한테 연락부터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일순 예은의 눈동자 속 동공이 확 열리며 짧은 비명이 흘러 나왔다. "갑자기 실종됐으니 경찰에 신고하고 난리도 아니었겠지.아침에 전화 연결해 놨으니까 걸어 봐." "안 돼!" 부리나케 별장 안으로 달려가는 예은을 보며 은규는 옅은 한숨을 뱉어냈다.일단은 그녀의 신경을 인터뷰에서 분산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안도감에,한결 여유있게 담배 연기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후,....정말 단순하단 말이야." 어쨌든 이번에도 그의 한마디가 직격탄 역활을 톡톡히 해낸 셈이니 대충 만족이었다.이제부터 어쩐다..... 신호음이 이어지는 내내 예은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어떻게 잊고 있었단 말인가.유희에게 카지노로 가겠다는 의사를 밝힌 이후 집에 돌아가지 못했고,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더 흘렀는지 까마득하기만 했다.이곳에서 시간이란 관념 은 있을 수 없었고,오로지 공간 안에 갇힌 현실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 얼마 동안은 납치라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이외의 것에는 관심도 가질수 없었다.며칠이 더 지난 후에야 서서히 주변 사람들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새벽이라는 여자의 등장으로 그것마저 할 수 없었다.지금쯤 가족들을 비롯한 친구들이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지를 생각하니 한없이 기분이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왜 이렇게 안 받는 거야!" 조바심 때문에 온몸에 남아 있던 수분이 다 증발해 버릴 것 같던 순간,마침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유희였다. "나야!" 3 초 정도의 침묵 후,엄청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이년아!너 당장 못 돌아와?] 어라?실종됐던 친구의 전화에 대고 다짜고짜 욕이나 퍼붓는 경우도 있나?이상했다.이상해도 한참 이상했다. "야.김유희!너 너무한다?내 걱정 조금도 안 했나 보네?" [걱정?이게 아주 배부른 소릴 하고 있네.원고고 뭐고 다 중단해 놓고는 잠깐 여행 좀 다녀온다는 쪽지나 놓고 사라지면 만사가 다 해결될 줄 알았냐?] 예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쪽지라니.여행은 또 뭐고?이상한 기운은 곧 수상한 낌새롤 탈바꿈했다. "그러니까,내가 여행 간다고 쪽지를 남겼다?" [이 지지배가 지금 누구 놀려?허튼소리 말고 빨리 오기나해!성질나서 그냥 확 실종 신고하려다가 그만둔 줄이나 알아. 그랬으면 여행지에서 아주 꼴좋았겠지?] 기가 막혔다.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전개란 말인지.예은은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너 그럼,내가 쪽지 남겨놓고 여행이나 떠난 걸로 알고 있었다는 거야?" 유희의 목소리에서 얼마 남지 않은 자제심이 느껴졌다. [그럼.아니라는 얘기야?자그마치 한달이야,한 달!갑작스런 여행 치곤 너 너무 심한 거 아니냐?핸드폰도 없는 인간이니 연락 오기 전까지 이쪽에선 속수무책이잖아.] 예은은 그대로 치열한 생각에 잠겼다.유희는 분명 예은이 쪽지를 남겨두고 여행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는 듯했지만,그녀는 카지노에서 납치된 날 이후 집으로 갈 기회조차 없었다. 유희가 쪽지 내용을 그대로 납득했다는 것은 분명 그녀의 필체와 같았거나 구분하지도 못할 만큼 비슷했다는 얘기인데.... 젠장!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황은규,이 인간이! "나중에 다시 걸게.미안해!" [야,너 정말....!] 다시 터져 나오는 친구의 고함 소리를 과감히 자르며 예은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이미 다 손을 써놨으면서도 가족한테 연락 부터 하라고 등을 떠밀어?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날 갖고 놓았어."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예은은 거실을 나섰다. 쾅 하고 서재 문이 열리며 대뜸 예은이 들어섰다. "황은규 씨,여기 있어요?" 당장 싸움이라도 한 판 벌일 것처럼 소리친 그녀는 열심히 눈을 굴리며 그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부술 생각이 아니라면 좀 조심하지 그래." "정말로 부수기 전에 당신이나 그만 긁어요!"


은규는 눈썹을 찌푸리며 단단한 조약돌처럼 몸을 굳힌 예은을 바라보았다.뭣 때문에 저리 심통이 났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래,전화는 해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인지 잔걸음으로 달려온 그녀가 말을 잘랐다. "당신 짓이요?" "뭐가." "그 쪽지." 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날 납치한 다음에 바로 쪽지를 남겨놓은 거죠?그렇지 않으면 내 친구가 실종 신고를 할 게 뻔하고,경찰이 움직이게 되면 내가 스파이든 아니든 뒤처리가 곤란해질 테니까 미리 손을 쓴 거에요." 딱히 답할 거리가 없어 은규는 슬쩍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이미 다 조치를 취해놓고선 가족 한테 연락부터 하라니.그런 식으로 인터뷰 얘길 피하고 싶었나 본데 꿈도 꾸지 말아요!난 꼭 할 생각이니까." 잔뜩 화가 난 예은은 평소보다 더 다루기 힘들어 보였다.더구나 인터뷰를 향한 열의가 오기와 분노라는 감정과 합세해 전 보다 더 거세게 버렸으니 은규의 입장으로서는 여간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꼭 해야 하나...."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말투에 예은은 그만 발끈하고 말았다. "약속했잖아요!여기 증표까지 있는데 시치미 뗄 거에요?" 그녀가 주머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내 보였다. "당신 손으로 직접 준 거에요.모른다고 하진 않겠죠?" 은규는 한동안 말없이 담배만 뻑뻑 빨아댔다.빌어먹게도 그날 머리 한구석이 빗나갔던 게 분명하다.뭘 물을 지도 모르는데 인터뷰라니....조직 구성 망이라든가,더 달갑지 않게 나온다면 사생활까지 파고 들지도 몰랐다. 그런데 어쩌자고 담배로 예은을 바라보았다.달아날 구석이 보이질 않으니 최대한의 악조건을 만들어 지쳐 떨어지게 하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대신 규칙이 있어." "뭔데요." 해볼 테면 해보라는 양 팔짱까지 끼고 버티는 예은의 모습이 달갑지 않았다. "내가 내킬 때까지만이야." "질문 하나 받고 내키지 않느니 어쩌니 하면서 그만두려구요?" "사람 유치하게 몰지 마." 잠시 입술을 깨물고 갈등하던 예은은 불만이 가득한 모양새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당신이 내킬 때까지만 하죠." "두 번째." "또 있어요?" "사생활 침해는 금지." 예은은 허리에 손을 얹고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도 그럴 생각은 없으니까 염려 붙들어 매요.이제 됐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정말 너무하네." "곤란한 질문엔 답하지 않겠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예은은 은규를 노려보았다. "ㅓ지금 나보고 인터뷰를 하란 거에요.말란 거에요?" 해도 너무했다.내킬 때까지만이라는 기한을 정해둔 것도 모자라,사생활이나 곤란한 질문에 대해선 노코멘트라고?엄밀히 따지고 들자면 포기하란 소리보다 더 고약한 말이었다. "싫으면 관두던지." 그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요!" "그럼,잠자코 있어.어떤 환경이든,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고의성과를 낼수 있어야 프로라고 할수 있지.괜한 상황 탓하지마." 어찌나 사람 속 뒤집는 말만 늘어놓는지 저것도 분명 하늘이 주신 복일 테지만,그것이 의도적인 행동이었다면 대실패란 말 을 해주고 싶었다.확실히 짜증은 났어도 근성만큼은 길길이 날뛰고 있었으니까. "좋아요.점심 먹고 바로 시작하죠.더 이상 비겁하거나 유치하게 나오지 않길 바랄게요." 서재를 돌아 나오는예은의 온몸 가득 열의와 분노가 용솟음쳐 올랐다.프로라고 했던가?그는 오늘 진정한 프로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똑똑히 경험하게 되고 말 것이다. "당신 사람 잘못 건드렸어.일할 때의 난 그다지 물렁물렁하지 않다고." 예은의 숨결에서 오랜만에 그녀 특유의 정열이 묻어나고 있었다. chapter 26 =스톡홀름 신드롬(Stockholm Syndrome) 인질이 인질범에게 애정을 느끼는 현상. 아무래도 나 이 흉악한 병에 시달리고 있나 봐.==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어느덧 점심시간.달그락대는 소리에 은규는 주방을 향해 걸어갔다. 관리인 노부부는 분명 휴가 중인데 누가 주방에?답은 바로 나왔다.예은이 싱크대 앞에 서서 손을 씻고 있는 모습이 두눈 가득 들어왓다.그는 가만히 서서 예은의 뒷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머리가 제법 많이 자라 있었다.처음 만났을 때 들쭉 날쭉 멋대로 헝클어진 까만 단발머리에 유독 시선이 많이 갔던 기억이 나는데,하얗고 긴 목덜미가 드러날 만큼 짧았던 머리 카락 길이는 이제 절반을 가릴 정도까지 길어져 있었다.그대로부터 대체 얼마의 시간이 더 흔른 것일까.모든 것이 불명확하 기만 했다.자연스레 뻗친 머리카락 모양새가 꼭 말괄량이 여고생을 연상케 한다.그러고 보니 그녀의 나이가 가늠되지 않았다. 처음 수야가 보고할 때 언뜻 들었던 것도 같은데 딱히 기억에 담고 있진 않았던 탓이다. "언제 왔어요?" 작은 둑배기 그릇을 들고 돌아선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자,은규의 얼굴 위로


다시 퉁명스런 가면이 사뿐히 내려 앉 았다.그의 시선은 음식이 제법 잘 차려진 식탁 위로 돌려졌다. "당신이 차린 거야?" 예은의 손이 당당하게 허리에 얹혀졌다. "그럼요." "과연 먹어도 되는 건지...." 자리를 잡고 앉으며 중얼대는 그를 흘기며 예은은 앞치마를 두른 그대로 마주 앉았다. "독약 같은 건 안 탔으니 걱정 말아요.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인터뷰하기 전까진 살려둘 수밖에 없잖아요." 재치 있는 대답에 은규는 살짝 시선을 들었다. "말이 많이 늘었어." "당신 덕이에요.이래봬도 여자인데 말싸움으로 남자한테 말릴수는 없잖아요.이제 제법 상대가 되죠?" 버젓이 대답을 생략하며 은규는 수저를 들고 식사에 집중했다.새벽의 한방 조미료 식단과는 비교ㅗ도 할수 없을 정도로 근사 한 맛이 났지만,그는 아무런 내색없이 입속에 감겨드는 음식물을 천천히 씹었다.마치 뱃속에 일용할 만큼의 양식만 집어 넣으면 돌이라도 씹겠다는 듯 결연한 표정이었다.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고 있던 예은은 적지 않은 실망으로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놈의 인터뷰 때문에 무시도 침묵도 꾹 참고 그냥 넘기려 했지만,그래도 열심히 만든 음식인데 맛있다 없다 내색 이라도 좀 해주기를 기대했다.하지만 과대한 망상에 젖은 결과가 버젓이 드러나고 있었으니,맥이 쭉 빠지는 것도 참고 넘길 수밖에. "이제 인터뷰 시작할까요?" 그녀가 인터뷰라는 단어에 유독 힘을 주어 말하자,갑자기 목이 막힌 그는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며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식사 중이야." "그게 어때서요?들면서 하면 되잖아요.대개 많은 기자들도 인터뷰할때 식사 시간을 택한다구요." "난 식사 중에 말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 삐걱.���곡차곡 쌓아두었던 자제의 돌담이 첫 번째 어그러지는 소리였다. "진짜 한국 남자처럼 말하네.이봐요.말 안하고 죽도록 식사만 하면 그게 사람이에요?소지." 듣기 불쾌했는지 그의 까만 눈동자가 날카롭게 들렸다.예은은 금방 꼬리를 내리며 말을 정정했다. "그냥 질문에 답한 하면 돼요.편한 분위기 좀 만들어 보려고 일부러 점심상까지 근사하게 치려줬더니 먹고 땡 할거에요?" "먹고 땡?" "그래요.먹고 땡!" 에은은 신경질적으로 뺨 안쪽 살을 곱씹으며 불규칙한 호흡을 고르고자 애썼다. "당신이 나한테 한짓을 한번 생각해 봐요.그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짓인지 내가 설명해 줄까요?당신은 아무 죄도 없는 날


납치해서...." 은규는 갑자기 귀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그 맛 좋던 국도 반찬도 제 맛을 잃고 쓴 기운 하나로 몰리는 기분,결국 수저를 내려놓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만해." "그만 해요?" "그래.그만 해."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요?" "그만 하라면 그만 해." "협박하는 거에요,지금?" "..." "노려보면 어쩔 건데요!" "나 지금 한계야." 살기 어린 표정에 잠시 뜨끔,그러나 포기란 있을 수 없었다. "인터뷰 해주면 그만 할 의향도 있어요." "웃기지 마." "계속 웃기는지 안 웃기는지 어디 한번 해볼까요?" "마지막 경고야.그만 해." "인터뷰 해주면요." "알았으니까 그만 하라고!" 숨 막히는 대결 끝에 그의 입에서 승낙이 떨어졌다. "정말이죠?거짓말 아니죠?또 딴소리 하기만 해요?" "마음 변하기 전에 입 다물어."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서로 진 뺄 일 뭐 있어요?" 커다란 미소를 걸고 생글거리는 예은의 얼굴에서 시선을 내린 은규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벌써부터 기진맥진한 것이 피곤이 몰려드는 기분인데,오늘의 그녀는 불길할 정도로 끈질긴데다 악바리 근성으로 똘똘 몽쳐 있었다. "제길." 뒤틀린 속이 영 편치 않아 담배 연기를 깊숙이 흡입하는 그의 사야로,식탁 밑에서 꼬물거리며 소형 녹음기를 꺼내는 그녀의 손이 보였다.순간,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짜증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건 또 뭐야." "보면 몰라요?녹음기잖아요." 그의 얼굴이 속수무책으로 험악하게 굳었다. "꺼." 예은의 얼굴에도 속수무책의 날카로움이 서렸다. "인터뷰 해준다면서요." "빨리 꺼." "끄라면 꺼." 이 남자가 정말?얼굴에 머금었던 미소는 단번에 사라지고 한계에 다다른 표정만 그녀의 얼굴 가득 드러났다.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제 예은의 이성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구걸하는 처지가 된 자신은


물론,무성의하게 나오는 그의 행동에 더욱 화가 났다. 고소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보상금으로 억만금을 떼어내도 시원치 않을 판에,인터뷰 하나로 무마시켜 주려 했더니 이남자 하는 꼴이 영 탐탁치가 않았다.결국 예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번에 그의 입에 물린 담배를 잡아 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금!나!갖고!노는 거에요오-!" 이렇다 할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은규는 온통 붉은색에 잠겨 버린 예은을 바라보며 한동안 굳어 있었다.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껏 어떤 여자도 아니,남자들도 감히 그의 담배를 잡아 뽑는 짓 따윈 하지 않았다.그런 짓거리를 했다간 흑사라는 이름 으로 통용되는 이 짐승에게 어떤 꼴을 당할지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지도 못하는 양,좀 전보다 더 괄괄한 기세로 삿대질까지 해대고 있었다. "당신 고소당하고 싶어?아니면 돈 왕창 뜯기고 싶어?스파이로 찍혀 납치당하는 여자가 세상에 어디 흔한 줄 알아?잘 나가는 처녀 앞길에 먹구름을 드리웠으면 책임을 져야지.더한 것도 해달라면 다 해줘야 할 판인데 뭘 믿고 그렇게 왕 배짱이야. 왕 배짱이길!" 이미 그녀의 작은 머리 속에 이성은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하얀 목에 핏대가 서도록 소리치며 어깨를 들썩이던 그녀는, 믿을 수 없게도 손가락에 끼우고 있던 담배를 입에 처넣고 거칠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켁!콜록 콜록 콜록!" 아마도 얄미운 그의 얼굴 위로 멋지게 한방 뿜어줄 계획인 듯했지만 바로 터져 나온 기침에 목을 움켜쥐며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고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아,타 들어가던 담뱃재가 아직 숨도 가다듬지 못한 예은의 발등 위로 무참히 떨어져 내렸다. 새빨갛게 변한 발등이 너무 아파 체면도 분노도 다 던져 버린 채 예은은 눈물만 한 바가지 쏟아내고 말았다. "아야!" 은규가 약 묻힌 솜을 발등에 가져다 대자 예은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아직 손도 안 댔어." "따갑단 말이에요." "엄살 피우지 마." 그녀가 발등에 작은 화상을 입자마자 은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곧이어 약통을 들고 다시 나타나 그 큰 몸을 구부리고선 예은의 발을 덥석 움켜잡았다.자신의 콤플렉스를 들킬까 싶어 깜짝 놀란 예은은 빠져나갈 구석을 찾아 버둥거렸지만 묵묵한 그의 커다란 물집으로 변하기 직전인 발등 상처를 살피며 약을 발라주었다. 눈물이 찔끔 비집고 나올 만큼 쓰리고 아파 성화를 부리던 그녀는,싸한 기운과 함께


데인 부위가 시원해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잔뜩힘을 주고 있던 어깨를 풀었다. "아....살 것 같다." 예은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죽을 것 같은 고통이 사라지고 나니 제법 살만한 기분이었다. 발을 쭉 내민 자세로 미미한 통증마저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던 예은은 문득 그가 의식되어 다시 눈을 떴다.여전히 발치에 앉아 있는은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했다.언제나 꼿꼿한 자세로 깔보는 시선만 던지던 그가 자신의 아래에 있는 것을 보니 동동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동등?이 남자와? 눈동자가 오갔다.작은 스킨십이 몰고 온 미묘한 흥분과 긴장이 감돌고 있는 대기,그것은 납치라는 상황 혹은 스파이라는 오해에서 벗어난 두 사람이 정말 남자와 여자로서 서로를 인식하게 된 미약한 계기이자 신호였다. 예은의 발은 여전히 은규의 손 안에 있었다.살짝 시선을 내려 그 모양새를 바라보니,문득 못생긴 발이 부끄러워지고 마는 예은이었다.하지만 조금은 색다른 느낌이었다.언제나 너무커 남자 같다고만 생각했던 발이지만,은규의 커다란 손에 놓이고 보니 꽤나 아담하게 비춰지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그 미묘한 차이를 그녀는 이렇듯 불쑥불쑥 느끼곤 햇다.은규는 너무나 강인할 정도로 사내다웠기 때문에.그의 옆에 있을 때마다 예은은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뼈가 시릴 만큼 깊게 인지할 수 있었다.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주책 맞게 녀석도 한껏 흥분중인것 같았다.치료를 끝낸 후인데도 그는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서 그녀의 발만 한동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팽팽한 긴장,은근한 열기,지속적인 두근거림,오랜 정적 후에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그리곤 아주 진지하면서도 심각한 어조로 조용히 한 마디 했다. chapter27 ==이건 인터뷰가 아니야,전쟁이라구!!==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발 한번 크군." 와장창.순신간에 분위기는 깨어졌다. "내 신발 신어도 되겠어." 우당탕,예은의 자존심도 무참히 박살났다.무안해서 더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뚫어지게 바라보더니,뭔가 기대감에 부풀게 만들더니,기껏 한다는 말이 발 한번 크다?무디고 우악스런 남자란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여자한테 해서 되는 말이 있고,안 되는 말이 있다는 걸 정말 모르는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의도적인 게 분명하다.인터뷰도 내키지 않겠다.꽤나 가살스럽게 늘러 붙는 끈질김도 귀찮겠다.


펄펄 끓는 기세를 대번에 묵살시킬 단 한 마디의 폭격.그걸 노린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냥 넘어가 줄수 없는게 그녀의 입장이었다.낑낑대며 겨우 자존심 회복에 나선 상황인데 그가 바라는 반응을 보여 승리감을 안겨줄 수는 없는 법! 예은은 재빨리 마음을 가다듬고 얼굴 가득한 붉은 기를 지웠다 당혹감으로구겨진 표정도 빳빳하게 다리고,프로 정신으로 뭉친 작가로서의 긍지만 추켜세워 제법 긴 공백을 깨고 빈정댔다. "당신 발 그렇게 작아요?" 빙그르르-은규가 돌아섰다.완벽히 입막음을 했다고 생각한 상대에게서 여유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온 게 영 거슬린다는 모양새였다.예은은 거만하게 팔짱을 끼며 톡 쏘는 목소리로 다시 공격햇다. "발 작은 남자는 진짜 밥맛인데." 담배를 힘주어 빨며 은규는세상 건방은 제가 다 짊어진 것처럼 어깨에 힘을 준 예은을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기세는 더 팔팔한 기운으로 중무장됐을 뿐 수그러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 키에 이 정도 발이라면 엄청 불균형이잖아요.상상하니까 되게 웃기네.크크크." 은규는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햇다.붉어진 얼굴로 꽥꽥거리며 소리나 질러댈 줄 알았는데,제법 싸울 준비를 하고서 톡톡 거리는 의외의 반응엔 미처 대응할 방법을 준비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과장된 웃음을 터뜨리던 그녀는 눈을 빛내며 당당히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거대한 승부욕과 훨훨 날아다니는 자존심이 한눈에 보일 정도였지만,아직 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오늘은 그가 한방 먹은 것 같았다. 처음으로 맛본 패배.그 맛은 니코틴 뺀 담배만큼이나 형편없었다. "이름이 뭐죠?" 드디렁 인터뷰가 시작되었다.예은은 속옷 안에 몰래 녹음기를 숨겨두고 들키지 않도록 수첩에 펜 굴리는 시늉을 하며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이미 알고 있잖아." 예상대로 그는 불성실한 태도였다.그야말로 파란만장과 우여곡절이란 단어를 몸소 겪으며 따낸 이 금쪽같은 인터뷰를 예은은 정말이지 제대로 하고 싶었다.그래서 눈이 즐거우면 마음도 가벼워지지 않을까란 생각에,별장 밖 호숫가에 마련 된 간이 벤치로 그를 이끌어 다짐까지 받아냈다. 사내로서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달라,그러면 그의 실수로 납치당한 사실 따윈 말끔히 지워주겠다...라고.하지만 확연히 보였다.빨리 끝내고 서로 찢어지자는 귀찮음 가득한 열망이 그의 전신에서 넘쳐날 정도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본명을 묻고 있는 거에요." 일단은 인터뷰에 집중하자고 마음을 다잡으며 예은은 겨우 화를 억눌렀다. "본명이야." "나이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공백이 생기고,정확히 5 초후 대답이 이어졌다. "서른셋." 예은은 열심히 수첩을 끼적대다 놀란 눈을 해보였다. "그렇게 많이 먹었어요?" "그것도 질문이야?" "아뇨.그냥...나보다 무려 여섯 살이나 위라고 생각하니까 놀라워서요.그 정도로는 안 보이거든요." 은규는 비로소 그녀의 나이가 스물일곱이란 사실을 유추해 낼수 있었다.그저 어렴풋이 훨씬 어린 나이를 생각하고있었는데 꽤나 뜻밖인 숫자였다. "지금 내 나이 생각하고 있죠?" 예은에게 허를 찔려 버린 은규는 담배 연기를 곱절이나 먹고 말았다. "여자 나이 스물일곱이면 적다고할 순 없는 나이지만 그래도 작가들 사이에선 꽤 영계로 통한다구요.하긴 당신도 그쪽 계통에선 어린축에 속하겠네요?대개 형님소리 듣는 사람들,배 이따만큼 나오고 머리 벗겨진 기름 아저씨들이 대부분이잖아요." 꽤 공감 가는 표현에 입술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지만 그는 꾹 억눌렀다. "필요한 질문만 해.시간이 많지 않아." "아.그러시겠죠.또 그 대단한 심기님께서 불편해지시기 전에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게요.음...언제부터 이일을 시작한 거죠?" 자신의일을 누군가에게 이해시킨다거나 설명해야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은규는 간략하게 대꾸했다. "규칙에 어긋나." 예은의 눈썹이 꿈틀했다. "몇 번째 규칙이요?" "세 번째." "세 번째요?" 곰곰이 머리를 굴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곤란한 질문엔 답하지 않겠다던 규칙이 떠올랐다. "곤란한 질문이에요.이게?" 은규가 고개를 끄덕였다.한숨을 내쉬며 예은은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럼....음......조직 규모는 어느 정도나 되죠?" 이번에는 아예 대꾸도 없이 그가 손가락으로 3 을 꼽아 보였다.또 세번째 규칙에 어긋난단 소리였다. "이것도곤란해요?나 참...그럼,호텔에서 괴한 상대하던걸 보니까 싸움을 상당히 잘하던데 특별히 할줄 아는 운동이라도 잇어 요?예를 들어 태권도라든지." 말을 마치기도 전,그가 손가락 둘을 꼽아 보였다. 사생활 침해란 의미. "이게 어째서 사생활 침해에요!" "별로 영양가 있는 질문이 아니야." "그런 건 내가 판단해요!특별히 운동을 배워서 싸움을 잘하는 건지,아니면 몸싸움으로 자연스레 다져진 건지,두 상황에 따라 주인공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묻는 거에요.뭘 알고나 떠드는 거에요.지금?"


은규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 빌어먹을 소설에 나를 주인공으로 갖다 쓰려는 건 아니겠지?" 예은의 표정도 만만치는 않았다. "내가 미쳤어요?아주 잔인한 악당 놈이라면 모를까.절대로 주인공감은 아니니 안심해요!" "어떤 식으로도 끌어들이지 마.인터뷰는 인터뷰로 끝내.다른 생각이 있다면 더 이상 협조할 수 없어." 예은은 머리를 움켜쥐고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아냈다.지금껏 해왔던 인터뷰 모두 나름대로 힘겨웠지만 이런 거지같은 상황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충만했던 열정이 무서운 기세로 고갈되는 것 같았고.눈앞에 자리한 미경은 거무튀튀한 색으로 죽어 지옥 끝을 헤매는 모양 꿀꿀한 기분만 자꾸 부추겼다. '침착하자...넌 프로잖아.' 아차피 쉽게 응해줄 거라 생각지도 않았느니 그리 손해라 볼수도 없는 것이라며 그녀는 겨우 자신을 달랬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게요.조직 이름이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런 거 없어." 다시울컥했지만 예은은 한 번 더 잘 참아냈다. "그게 말이 돼요?조직들마다 이름이 있잖아요.명동파,막가파,전국구.뭐 이런 이름들 말이에요." 은규는 태평스레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없다면 없는 줄 알아.난 거짓말 안 해." 결국 예은은 입술을 깨물며 눈싸움을 시작햇다.던졌던 질문중 얻어낸 정보라곤 단 하나도 없어 깨알 같은 글자를 기다리던 수첩은 여전히 백지였고,무안한 펜은 몸만 열심히 굴려댈 뿐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당신이 왜 흑사라고 불리는지 알려줘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윽!" 갑자기 심장 부근으로 통증이 밀려들었다.답답함에 가슴이 터지고 눈은 어찌나 흘겨댔던지 그대로 돌아가 버릴 것 같았지만, 예은은 애송이처럼 벌떡 일어나 소리치는 대신 이를 갈며 낮은 대꾸를 돌려주었다. "당신이 모르면 누가 알아요?좀 성의 있게 답할 수 없어요?여기 이 수첩 좀 봐요.하나도 못 받아 적어 그래도잖아요." "그런 것들은 대개 시간이 지나고 이름이 알려지면서 상대를 비하해 지껄인 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들이야.곰 같은놈. 뱁새같은 놈,흑사 같은 놈,...이런 식으로 별뜻 없이 불리다 별명이 되는 거지.그런데 누가 지었는지 알게 뭐야." 인터뷰 시작 후 그가 가장 제대로 된 대답을 뱉어내자 예은은 그런대로 만족하며 좀더 구체적인 줄문으로 돌입했다. "정확히 하는 일이 뭐에요?" 이벵 물린 담배를 굴리던 은규는 문득 그녀를 골려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돈 되는 일이면 다 해." 초롱초롱하던 예은의 눈동자가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은규는 빨았던 담배 연기를 흠뻑


토해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구역을 침범해 오는 타 조직들 때문에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피 튀기는 싸움을 하지." "돈만 주면 사람도 대신 패줘요?" 어떻게 대답해 줄까 가늠하던 은규는 크게 과장해 버렸다. "물론,의뢰한 사람이 원할 경우 해외로 보내거나 적당히 몇 군데 못 쓰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 제법 겁먹은 표정으로 심호흡하는 예은에게 은규는 끔찍한 목소리를 박아주었다. "죽이기도 해." 폭탄을 던졌으니 이제 볼 만한 반응이 나올 거란 기대를 품고서 은규는 잠잠히 기다렸다.그녀는 분명 놀란 기색이었다. 두 배나 커진 눈동자와 수첩에 박고 있던 펜에 곱절의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니,놀라도 보통 놀란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입술이 꿈틀대는 것을 확인하며 은규는 사악하게 눈을 빛냈다.그래.여자다운 비명이나 몇 번 내지르고 포기해 버리는 편이 서로를 위해서 좋아.소설이란 것 자체가 상상의 창작물인 것을,이렇게 위험한 사람과 상대하면서까지 용쓸 일이야 없지 않겠어?그러나 놀랍게도 그녀는 예상 밖의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잘됐네요." 잘됐다?사람을 죽이기도 한다는데 잘됐다고?그녀의 말 속에 담긴 진위를 파악하기도 전,예은이 비밀스러운 목소리로 속삭 였다. chapter 28 ==진실한 글이란 게 대체 뭘까.==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나도 부탁하고 싶은 녀석이 하나 있는데..처리해 줄래요?" 진심인가 싶어 은규는 예은의 눈동자를 자세히 살폈다.조금전까지만 해도 가득했던 놀라움은 사라지고 악동처럼 빛나는 생기만 그득한 게 영 꺼림칙해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그 작은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고 예은이 닦달해 왓다. "왜 대답이 없어요?부탁하고 싶은 녀석이 하나 있다니까요." 무슨 속내를 숨기고 있는지 알지 못해 잔뜩 경계하는 그에게 예은은 심각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김유희라는 인간이 있는데,지구 끝에다 떨어내 준다면 발등에 키스라도 할게요." "이봐....." 원하던 반응은 고사하고 대화의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게 돌아가자 은규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지만 예은이 한발 빨랐다. "허풍쟁이." 놀라울 정도로 예은은 거침이 없었다. "사사건건,왜 무슨 의도로!장난으로만 답하는 거에요?겁먹고 달아나게 할 속셈이었다면 집어치워요.똑똑히 말해두겠는데.


난 프로에요.프로는 절대 일을 대충하지 않아요.자꾸 걸고 넘어지기 싫은데 또 한번 상기해야겠네요.황은규씨,당신은 분명히 나한테 빚을 졌어요.그 해결을 위해 우리는 인터뷰라는 합의점을 찾았구요.부탁했잖아요.적어도 사내라면 진지하게 대해달라 고.이게 진지한 태도라고 말할 수 있어요?당신이 규칙을 지킬 생각이 없다면 나 역시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아야죠." 선생님 앞에서 꾸지람을 듣는 아이마냥 은규의 얼굴이 뜨거워졌다.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끈기있게 바라보던 예은은 굳은 입매를 풀고서 한숨지었다. "내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죠?"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말,곧이곧대로 믿고 벌벌 떨 줄 알았죠?" 정말 그랬다. "여자가 한을 품기 시작하면 남자들은 감당 못해요.그러니 제발 적당히 좀 해둬요." 젠장.....이기양양한 그녀의 미소가 화나도록 거슬려,은규는 시선을 돌려 버렸다. 한참을 걸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얼핏 보이는 태양은 그 기세를 한층 꺽은 채였고,호흡할 때마다 몸속으로 퍼져오는 상쾌한 공기가 기 분을 유쾌하고도 차분하게 만들었다.그리고 바로 옆,나무처럼 꼿꼿한 은규가 있었다. 30 분가량 휴식한 후,예은이 잠시 걷자는 요구를 하자 그는 불만스런 표를 내면서도 군소리 없이 따라주었다. 그렇게 무작정 걸었다.대화나 시선 교환 하나 없이 그저 걷기만을 반복했다.약속이라도 한 듯 두사람은 보이지 않는 평행선 을 유지한 채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고,이렇게 된 이상 예은은 잠시 눈에 보이는 풍경을 감상하자고 마음먹었다. 별장은 은둔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숲 속 깊숙이도 박혀 있었다.하지만 정기적으로 관리한 손길이 묻어 있었고, 아름다운 주위 광경이 산책하기에는 최상의 조건들을 배려하고 있었다.누군가 공들여 만들어 놓은 구불구불한 길이 계속해서 그림 같은 풍경속으로 발을 인도해 갔고,그러는 동안 귀밑까지 치솟았던 불쾌지수들이 단번에 꽁지를 내렸다. 어느새 흐뭇한 미소를 품으며 예은은 아예 두눈을 감고 감상 모드로 돌입해 버렸다.인체의 모든 감각들이 민감해지더니 절로 영감이 떠오르고 있었다.뭔가 그럴 듯한 영상 하나가 아스라이 머리 위로 스르르...... 그 절정의 순간을 비집고 들려온 은규의 목소리가 애써 형성해 놓은 그녀의 세계를 무참히 거두어 갔다. "분위기 잡는 건 자유지만,대체 언제까지 걸어야 하는 거지?" "당신이 인터뷰 할 마음이 생길때까지요." "준비라면 이미 됐어." "정말이에요?" 힐끗 던진 서로의 시선이 중간에서 맞부딪혔다. "물론."


"물론.....?" "그래." 정말이지.대답과는 정 반대의 표정이었다.굳이 애쓰지 않아도 그의 얼굴 위로 가득히 부상한 짜증과 귀찮은을 대번에 읽어낼 수 있었다. "후우,,," 예은은 꼿꼿한 어깨에서 힘을 풀어냈다. "인터뷰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그냥 예기나 해요." "준비됐다니까." 표정과 말이 완벽히 따로 놀면서?예은은 흘기는 시선을 던졌다. "입은 한 일자인데다 표정은 뭉그러진 두부처럼 잔뜩 구기고서 준비가 됐다?나 참 어이가 없어서,그게 어떻게 준비된 얼굴이에요?" "누가 작가 아니랄까 봐.표현 방식이 너무 적나라해." "난 프로라고 했잖아요.사실 지치기도 했구요.상대가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의 인터뷰는 별 의미가 없어요.형식적인 질문과 응답밖에는 될 수 없으니까." 은규는 주머니를 뒤져 새 담배를 찾았다. "인터뷰라는 게 원래 질문하고 답하는 거 아니야?" "틀려요.단순히 질문하고 답하는 거라면 심문하고 다를 게 없잖아요.난 그런 식의 인터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은규가 답답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자는 거야.대체." "말했잖아요.얘기나 하자구요.그냥편하게.인터뷰는 잊어도 좋아요."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 예은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후회 안 해요." 사실 그녀의 브래지어 안족에서 아까부터 켜놓은 소형 녹음기가 줄기차게 돌아가고 있었으니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형식에 얽매여 그가 솔직해질 수 없는 것이라면 분위기를 자연스레 만들어 보자는 계획 수정의 결과였다.이렇게 좋은 풍경 속을 거닐며 대화를 하다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가슴 저편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뭐,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속인채 인터뷰는 계속되는 셈이다.예은은 왠지 흥분 되었지만 차분히그슴을 식히고 자연 스러운 태도를 유지했다. "가족이 어떻게 돼요?" 그는 잠시 대답을 할까 말까 주춤했다. "동생하나." "부모님은요?" "없어." "HS 그룹 회장이당신 친부인 걸로 알고 있는데...." 은규의 눈동자가 금방 어두운 기운에 휩싸였다. "이름만으로 아버지가 될수 있다면 그렇겠지.하지만 아버지라는 건 그렇게 쉽게


얻을수 있는 이름이 아니야.어머니가 죽고 난 후 내 이성 체계에서 부모란 개념은 없어졌어." 그가 아버지와 별로 좋은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은 몇 번인가 주워들은 기억이 있는데 아무래도 사실인 듯했다.어쨌거나 그 나마 물렁해졌다고 생각했던 그가'아버지'라는 단어 하나에 다시 돌덩이가 되어 버리자,예은은 난감한 표정으로 화재를 전환했다. "그 아가씨 들으면 서운하겠다." "누구." "당신 제수씨 있잖아요.이름이 새벽.....이라고 했던가?" 놀랍게도 그의 눈동자에서 그늘이 사라졌다.예은 역시 새벽이라는 여자를 떠올리는 순간,입가에 미소가 감도는 것을 저지 할 수 없었다.그만큼 그녀는 강하고 경쾌한 느낌을 가진 사람이엇다. "그 아가씨는 당신을 가족이라고 여기는 것 같던데,그것도 아주 끔찍이요,동생뿐 아니라 제수씨도 이젠 가족으로 인정해 줘야 하는거 아니에요?곧 태어날 조카도." 은규는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는 입 꼬리를 숨겼다. "그런가." "그럼요.그 정도는 해줘야죠." 드디어 그의 말문이 트였다는 기쁨에 쾌재를 부르며 예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숲속이라 그런지 제법 쌀쌀한 기운이 느껴 졌고.맑던 하늘에 먹구름도 내비쳤다.곧 비가 올것 같았다. "당신 별장인가요.이곳?" 다 타 버린 담배를 털어 버리며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말 멋진 곳이네요.밤이되면 조금 으스스해진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누군가를 납치할 용도로 쓰기엔 너무터무니없는 장소에요." 예은의 놀리는 어투에 은규는 주머니에 박혀 있던 손을 빼 거칠게 머리를 쓸었다. "대체 언제까지 써먹을 거야?" "뭘요?" "그 빌어먹을 납치 얘기." "속이 확 풀릴때까지요." "끔찍하군." 제법 많이 등장하기 시작한 먹구름들이 충돌을 일으켜 우울한 천둥 소리를 만들어 냇다.하나둘 빗방울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 오려나 봐요!" 예은이 호들갑을 떨자 은규는 하늘로 시선을 옮긴 후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골치 아프게 됐군," 듬성듬성 내리던 빗줄기가 갑자기 굵어지더니 나무 사이를 뚫고 신나게 퍼붓기 시작했다. "엄청 쏟아질 모양이네.서둘러야겠어요!" 작은 손을 머리에 얹고 무작정 움직이는 예은의 팔을 은규의 커다란 손이 잡아 세웠다. "너무 멀리 왔어."


"그러니까 서둘러야죠." 놀랍게도 빗줄기는 매순간이 다르게 거세지고 있었다.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은규는 그녀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돌 아섰다. "따라와." 그가 이끄는 대로 예은은 무작정 달렸다.어느새 온몸이 흠뻑 젖어 버렸고.내리치는 빗줄기에 살갗이 쓸렸다. "어디 가는 거에요!" 그녀가 소리쳐 물어도 그는 대답하지않았다.시간이 지날수록 숨이 가빠왔고 머리는 어질했으며,추위로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도저히....더는..." 그때 자그마한 동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두사람이 간신히 비를 피할수 있을정도로 그다지 깊진 않은 동굴이었다. 그 안에 들어서자마자 예은은 그대로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축축한 곰팡내와 이끼 냄새.그 외에도 갖가지 묘한 향취가 코속을 옮겨 다니며 그녀의 감각을 민감하게 만들었다. 쏴아-하는 빗소리가 금방이라도 천장을 뚫고 더욱 거세게 퍼부을 것만 같았다.호흡은 많이 안정되었지만 흠뻑 젖은 옷 사이로 몸의 굴곡이 비쳐질까 봐 예은은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갑자기 대기중으로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발 뒤에 서 있는 은규에게서 은근한 시선도 느껴졌다. 잔뜩 몸을 웅크린 것도 모자라 덜덜 떨고 있는 예은에게 은규는 셔츠를 벗어 툭 내던졌다.깜짝 놀란 그녀가 바닥에 박혀 있던 시선을 들자,그는 축축해진 담배를 꺼내 어렵게 불을 붙이며 퉁명스레 말했다. "입어." 그의 벗은 상체를 멍하니 바라보던 예은은 기겁을 하며 거절했다. "괜찮아요." "내 눈이 괴로워서 그래." "네?" "당신 몸,그다지 감상할 만한 수준이 아니거든." 예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당신 정말....!" 그 어느때보다 맛있게 담배를 태우던 은규의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깃드는 것이 보였다.예은은 잔뜩 부은 얼굴로 바닥에 놓인 셔츠를 몸에 두르고 일어났다.그의 시선이 예은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한결 낫군." "어련하겠어요." 입술을 삐죽이던 그녀는 은규와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겨 자리를 잡고 앉아 젖은 머리카락과 옷들을 쥐고 물기를 짜냈다. "왜 그렇게 인터뷰에 집착하는 거지?" 얼굴 주위로 눌러붙은 머리를 흔들어 털던 예은은 차가워진 손을 호호 불며 생각에 잠겼다. "당신은 왜 그렇게 일에 집착하는 건데요?사람을 납치하는 위험도 감수할 만큼."


은규가 눈살을 찌푸리자,예은은 다소 긴장이 풀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당신 일에 갖고 있는열정과 내가 내이에 갖고 있는 열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뭐,자신의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겠죠.난 공부도 못햇고 운동은 말할 것도 없었는데 글은 조금 쓸줄 알았어요.아니.그냥 좋았어요 내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서 뛰노는 인물들을 훔쳐보는 재미도 쏠쏠했고.가끔은 정말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그 안에 투영 시킬수 있다는게 매력적으로 느껴졌거든요." 쭉 폈던 다리를 구부려 모으며 예은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인터뷰에 집착하는 건,사기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모르면서 아는 척.그게 아닌데 그럴 듯하게 꾸며서 독자들을 속 이고 싶지는 않아요.경험해 보고 쓰는 것과 먼발치에서 지켜본 걸로만 쓰는 글은 그 격이 다르거든요.난 진실하지 못한 글은 정말이지.쓰고 싶지가 않아요." 어느새 다 타버린 담배를 뱉어내고 그는 새 담배를 물었다.그녀의 이야기에 빠져 담배 맛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써보고 싶은 글이 잇어?" 예은이 방긋 미소 지었다. "사랑 이야기요." 은규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라이터를 켜다 말고 바라보자,예은은 고개를 수그렸다. "사랑이라는 거.....참 힘든 문제인 것 같아요.그래서 인지 지금껏 내가 썼던 소설안에는 사랑이야기가 없어요.교묘히 피해만 가죠.정말 멋진 사랑 이야기를 써서 사람들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 싶은데 난 전혀 경험이 없어요.하지만 언젠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그 시간을 통해 나름대로 정의가 내려진다면 꼭 써볼���에요.작가의 목표 치고는 좀 작을지 도 모르겠네요." 부끄러워하는 예은의 모습이 은규의 입가에 미소를 걸어놓았다.이 작은 공간이 그의 경계를 자꾸 느슨하게 만들고 있었다. "당신은 .....어때요?" 그의 미소를 훔쳐보던 예은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뭐가." "인생의 목표." 은규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인터뷰를 시도하는군." "아니에요.그런 거!봐요.기록할 도구도 전혀 없잖아요.그냥 나도 모든 걸 얘기했으니까 당신도 말해줬으면 해서..." 은규의 시선이 한참동안 예은의 얼굴 위로 내려꽂혔다. "기록할 게 아무것도 없다.....?" 아내 그의 시선이 그녀의가슴 부근으로 옮겨가자,예은은 기겁을 하며 셔츠를 꼭 여몄다. "뭐....뭐가 보인다는 거에요?" 집요한 그의 시선이 빨간 딸기처럼 예은을 달구었다. "녹음기."


이런. "거짓말을 아주 수준급으로 하는데.." 알고 있었던 거야? "진짜 스파이로 이용해 먹어도 되겠어." 준비했던 말들이 혀끝에서 모두 산산조각 나 버렸다.예은은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질끈 두눈을 감았다. chapter29 ==세상에서 분명 가질수 있는 것들과 가져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이 사람은 과연 내게 허락된 존재일까?==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어....어떻게 알았어요?" 잔뜩 기어 들어가는 예은의 질문을 무시하며 그는 화제를 바꿨다. "당신 가족은 어때." 목소리는 딱딱했지만 전과는 다른 친근감이 느껴졌다.비의 영향일까?게다가 녹음기에 대해서도 더 이상 언급이 없으니 예은으로서는 천만다행이지 않을 수 없었다. "별일이네요.당신이 나한테 궁금한 게 다 있고." "대답이나 해." 예은은 숨을 가다듬고 흩뿌려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쾌활하게 웃었다. "음.....일단 가족수는 넷이에요.엄마,아빠,오빠,그리고 나." "오빠?" "지금 미국에 있어요.엄청 잘난 오빠죠.키도 크고 잘생긴데다 돈도 많이 벌거든요." 예은은 자신의 오빠가 전직 경찰이라는 사실은 입 안으로 아꼈다.왠지 말해서는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빠가 있었군." 그는 꽤 의외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뭐 잘못된 거라도 있어요?" "아니." "표정은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버릇없이 사랑받으며 자란 외동딸 분위기라서 조금 놀란 것 뿐이야." 또 시작.싸움을 거는 그의 딱딱한 옆모습을 보며 예은은 문득 이 남자도 부드러운 말을 할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저 굳은 입매가 사랑의 말을 입에 담는 날이 과연 올까. "저기요." 은규가 힐끗 시선을 내렸다. "이상형 있어요?" 다소 놀란 양 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있지." 이번에는 예은의 입이 벌어졌다. "어떤....사람?" 그가 침묵하는 바람에 빗소리가 더욱 커졌다. "당신 같은 타입은 아니야."


"아......" 얼굴이 어찌나 화끈 달아올랐던지 예은은 저 빗속으로 그냥 뛰어들고 싶어졌다. "무척 실망한 표정인데." "그럼,이성한테서 '넌 내 타입이 아니야'라는 적나라한 소리를 들었는데도 실실 웃어야 해요?" "처음 듣는 소리도 아닐 텐데." 예은은그대로 입을 닫아 버렸다.무슨 대답을 기대했던 것 일까.이런 남자에게서. "오늘부터 기도할 거에요." 한껏 내려앉은 그녀의 목소리에 다시금 그의 시선이 내려앉았다. "더도 말도 덜도 말고 꼭 당신 같은 여자 만나 마음 졸이고 열병에 시달리게 해달라고,오늘부터 금식 기도 할 거에요.여자 한테 잘 보이려고 안달하는 당신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너무 통쾌하거든요." 퉁퉁 부은 얼굴로 입가에 힘을 주자,그녀의 뺨에 살포시 보조개가 파였다. "보조개가 들어가는군." 예은이 못마땅한 시선을 들었다. "몰랐단 말이에요?얼굴 마주 본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아...정말이지 비참한 소리만 하네." 예은은 입을 삐죽이며 뚱한 시선을 빗속에 박았다.다시 한번 쏙 들어가는 보조개가 흐릿해진 그의 시선을 한참이나 헤매 게 만들었다.그녀가 살작 고개를 숙여 발목에 묻은 뭔가를 떼어내는 통에 더 이상 보조개 관람은 할수 없었지만,대신 하 얗게 드러난 목 언저리에 새겨진 빨간색 하트가 눈에 들어왔다.은규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이거 문신이야?" 내리는 비의 풍경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던 예은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네?" 그의 시선이 예은의 목에서 떠나지를 않고 있었다. "그거 문신이냐고." 예은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문신은 아니겠지." "진짜에요.조그맣지만 새겨 넣는 동안 기절 직전까지 갔던 엄청난 고행의 결과물이죠." 은규는 고개를 기울이고서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예은을 살폈다. "왜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봐요?요즘은 젊은여자들도 문신많이 한다구요.물론 나는 작품 때문에 어쩔수 없이 한거지만..." "작품 때문에?" "문신 새기는 장면이 잇었거든요.비록 세 페이지뿐이었지만 그냥 쓸수가 있어야죠.그래서 한번 해봤는데 덕분에 상당히 리얼하게 쓸수 있었어요." "미쳤군." "모든 예술가들은 미쳐야 좋은 작품을 남길수 있다는 거 몰라요?화가는 그림에 미쳐야 하고,가수는 노래에 미쳐야하고, 작가는 글에 미쳐야 하고....그런 의미에서 난 아직 멀었다고 생각해요." 애맑게 웃는 예은을 보며 은규는 정말 알수 없는 여자란 생각을 했다.그는 언제나


자신의 일에 미쳐 있는 사람을 좋아하고 존경해 왔다.그에게 자신의 구역들을 내준 후,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큰형님이야말로'열정'이라는 단어 외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말들은 늘 살아서 은규의 삶 가운데 역사하고 있었다. '은규야,세월은 덧없고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실상 그리 많지 않다.매일을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온힘을 다해 그렇게 살아라.' 이상하게도 이 엉뚱한 여자에게서 큰형님의 모습 일부를 본듯햇다.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 대관절 어떤 작가가 작품중 세페이지를 위해 문신을 새길수 있을까.순간적이지만 그열정에 압도당할 것만 같았다. 언제나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시선조차 주지 않던 그의 시선이 오랫동안자신을 향해 있자,예은은 이가 달싹이던 추위도 가시고 온몸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했던 그의 벗은 가슴도 강하게 눈안으로 파고들었다. 긴장을 견딜수 없어진 예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너스레를 떨었다. "비가 보슬비로 바뀌었어요.이제 그만...." 그 역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앉아 있을때는 얼추 눈높이가 맞았던 이유로 잊고 있었는데,이 사람이 얼마나 커다 랗고 위험하 ㄴ남자인지 순식간에 의식하고 마는 그녀였다.그는 예은을 향해 의미를 알수없는 시선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게 당신 눈에는 보슬비로 보여?" 물론 아니었다.비는 여전히 거세게 내리치고 있었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잇을수는 없었기에 그저 우기기로 작정한 것뿐이었다. "곧,그치겠는데요.뭐." 때마침 커다란 천둥이 귀를 찔러왔다.마치 그녀의 생각을 비웃으려는 양, "봐.하늘이 노하고 있다고." 예은은 잠시 말을 잃고 그의 얼굴을 한참이나 올려다보았다.잘생겼다.아니,남자다웠다.얼굴에 새겨진 상처는그이 거친 남성미를 더욱 강조하는 요소로 작용할뿐,그 어떤 혐오감도 주지 않았다. 오늘 따라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멋져 보이는 것일까. 예은은 미세한 한숨을 내쉬었다. "열심히 조잘대던 입이 갑자기 닫혀 버린 이유가 뭐지?" "목이 아파서요." 은규의입술이 조금 더 큰 미소를 그렷다.예은의 가슴은 더 세차게 뛰었다.뭔가 변해 버렸다. 그것이 무언지 알수는 없었지만 그가 예은을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추.....춥네요.이제 그만 돌아...." 그가 바로 앞에 다가서는 바람에 예은은 말끝을 삼켰다. "아직도 빗줄기가 세." "하지만 난 정말 춥......." "확실히 춥기는 해.난 벗고 있으니까.." 갑자기 그의 손이 올라와 허리를 감싸 안는 통에 예은은 깜짝 놀라 숨을 멈췄다.


"뭐하는 거에요?" 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공생하자는 거지." 예고도 없이 그의 입술이 가까이 내려앉았다. '키...스 하려는 거야?' 예은은 온몸을 꼬챙이처럼 굳혔다. "이렇게 하면 추위는 사라질 거라고 내 장담하지." 그의 손이 그녀의 뺨을 쓸더니,고개를 좀더 왼편으로 기울렸다. '키스하려는 게 분명해!'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예은은 먹먹한 가슴으로 은규를 바라보았다.그의 손가락 하나가 슬며시 입술을 벌린 후 스칠 만 큼 가까이 접근해 왓다.거친 숨결이 뺨과 눈동자와 입안으로 흩뿌려지고 있었다. '키스하려는 거야....' 예은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가슴이 뛰고 전신의 피가 일제히 뺨위로 몰려드는 기분. '그래.키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크게 재채기를 해버렸다.멍해졌던 예은은 놀라울 만큼 빨리 이성을 찾아 한껏 풀렸던 눈동자에 초점을 잡았다.그리고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아요?"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은규는 거칠게 한 발자국 물러나 호흡을 고르기 시작햇다.갑자기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예은은 이를 꾹 다물고 간신히 참아냈다. "웃기만 해봐." 다시 한번 그가 재채기를 햇다. "아....안 웃어요." 입술은 꼭 다물어져 있었지만 자꾸 픽픽거리는 쉿 소리가 흘러나와 예은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크크크....미안해요.나는 그냥.................크크...단지....." 그가 엄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아차 싶어진 예은은 동굴을 빠져나갔다.차가운 비가 온몸을 때미며 흠뻑 적셔 버렸지만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그녀는 미친 사람마냥 빗줄기 아래 서서 배를 잡고 웃었다. 처음으로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았다고 생각했다.언제나 강하고 완벽한 그가 멋있어 보인것은 사실이었지만,언제까지고 다가갈수 없는 벽이 존재하는 것 같아 줄곧 아쉬웠었다. 그런 사람이 키스 직전에 재채기를 터뜨리다니,예은은 배를 움켜쥐고 자리에 주저앉아 마음 놓고 웃어댔다. 거의 바닥에 고개를 박고서 깔깔대는 그녀의 시야로 어느 순간 구둣발 하나가 들어왔다.어떻게 해도 꺼질것 같지 않던 웃음줄기가 단번에 꽁지를 내렸다.그녀는 다소 걱정스런 표정으로 발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인간적인 면모?소리없이 다가온 그는 완벽한 흑사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웃었겠다....."


"아니,저기...." "이 나를 보고...." "그게 아니라...." 그는 재빠르게 그녀의 팔을 잡아 올려 단번에 숨결을 앗아 멋대로 흡수했다.입술이 부딪치는 순간 이성과 정신은 이미 갈라서 버렸고,반쯤 감기려는 눈에 아무리 제동을 걸어도 그의 두손이 열렬한 기운을 전하며 등을 타고 내려가자 점점 참기 힘들어졌다.부드럽고 현란한 혀의 움직임이 그녀의 입안에서 맴돌며 숨겨진 욕망을 자구만 잡아 끌고 있었다. 다른 여자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키스를 했을까,아니면 그 이상가지 갔을까. 기분이 이상했다.그가 키스하고 그 이상까지 주고자 마음 먹었던 상대가 과연 얼마나 대단한 여자들이었을지 몹시도궁금 해 조바심이 솟구쳐 올랐다.이런 남자를 욕망이란 원초적인 도구에 휩둘릴 수 있게 만들 만한 여자가 정말 존재햇을까. 갑자기 피어오르는 이상한 기분에,예은은 힘을 잃고 흔들리던 손을 은규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아마도 이 키스가 끝나고 나면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표정 없는 얼굴을 한 채.서툴다는 말 따위로 일격을 가할지도 몰랐다. 다른 여자들과 동급이 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그렇고 그런 여자들과 한 범주 안에 속하는 것도 이제는 싫었다.그래서 멋대로 이끌리던 혀에 의지를 싣고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딱딱한 감촉이 전하는 고른 치열,부드러운 입천장,손바닥에 살며시 감겨오는 단단한 가슴까지 제 손으로 탐험해 갔다. '넓고 따뜻해.'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예은은 그의 목에 마음껏 손을 휘감았다.그녀의 반응에 자극을 받은 은규가 고개를 더 젖히고 격렬 하게 파고들어 세차게 그녀의 정기를 흡입했다. 예은의 혀가 다시금 의지를 잃었다.감히 따라갈 수조차 없는 은규의 열정에 휩쓸려 쾌락의 파도에 고개를 묻어 버렸다. 그의 손이 쓸고 간후 열기로 태워질 것 같던 그녀의 살갗은,뒤따라 흘러내리는 빗물에 의해 간신히 안정을 찾아갔다. 살짝살짝 비 맛이 섞여 들었다.사정없이 내리치는 빗줄기 속에 그의 거친 숨결도 섞여 들었다. '갖고 싶어....' 예은은 비틀린 욕망을 느꼈다.이 남자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웃음이 없고,말도 없고,여자에 대한 특별한 배려도 없 는 그를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 만들고 싶다는 위험한 욕망.그싹이 그녀의 심장 부근에서 꿈틀하며 자리를 틀고 있었다. 그래서 기도했다. '하나님.이 사람을 제게 주세요.' 그의입술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 사람이 마음 졸이고,열병에 시달리고,잘 보이려고 안달할수 있는 상대.' 그가 좀더 가까이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어쩌면 목숨까지도 내어줄 수있는 그런 상대...'


그가 입술을 데어내 그녀의 목으로 향햇다. '내가 되게 해주세요....' 예은의 손이 그의 고개를 꼭 움켜쥐었다. '내가 ....되게 해주세요.' 화답하듯 하늘이 울었다. chapter30 ==이 인간아,제발 감동할 틈을 좀 달라구!!==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길고도 짧은 감정 전이. 그 시간이 끝나고 두 사람은 마침내 집에 도착했다.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은 키스를 멋대로 끝내고 앞서 가는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예은은 사춘기 소녀처럼 두근대는 가슴을 깊이깊이 삼켜야 했다. 소유욕이 눈덩이처럼 불어갔다.힘들고 지칠때 저 넓은 어깨에 마음껏 기댈수 있는 영역의 사람이 되고 싶었고,그의 강한 손이 언제까지고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서만 존재했으면 하는 마음,욕심,착각에 몹시도 괴로웠다. 생각에 치중해 있느라 알아채지 못했는데 별장 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입에서 거친 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눈도 붉게 충 형된 채 기침을 끊지 못하고 있는 것이 몹시도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였다.그녀 역시 어질한 한기를 느끼곤 있었지만 빗속 에서 한참을 있었던 사람 치고는 말짱한 편이었다. "괜찮아요?" 예은의 염려에도 그는 대꾸 없이 2 층 계단으로 올라갔다.벗은 상체가 여전히 건재해 보였지만,기침할 때마다 들썩이는 어깨가 그녀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벗은 몸으로 축축한 동굴 속에 있었던 것도 모자라 그녀 때문에 그는 다시 빗속에 서 많은 양의 비를 맞아야 ���다. '감기에 걸린 거야.나 때문에.' 눈동자를 굳히며 그를 따라 올라서자,미처 닫지 못한 방문이 삐걱거렸다. "정말 괜찮은 거죠?" 문가에서 넌지시 물었지만 역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들어갈게요." 참다못한 예은은 일방적인 통보를 마지막으로 대차게 문을 열었다.침대에 누워 있는 거대한 몸체와,침대 맡에 아무렇게 나 벗어던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많이...안 좋은가 봐요." 쿨룩대던 그가 살짝 눈을 뜨고는 골치 아프다는 듯 겨우 웅얼거렸다. "나가." 하지만 강력한 원인 제공자로서 고분고분 따라줄 수만은 없는 것이 그녀의 입장이었다.불안할 정도로 치밀어 오르는 걱 정과 두려움을 책임감이라는 단어 하나에 죄다 몰아넣고서,예은은 그의 옆으로 다가가 이마를 짚어 보았다.


"세상에,무슨 난로 같잖아!" 더 이상 씨름할 힘도 없는지 그는 눈을 감은 채 호흡을 마시고 뱉어내는 단순한 행동만 반복하고 있었다.당혹스러웠다.열 이 끓는 남자와 단둘이었던 경험은 전무했으므로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를 어쩐다....?" 열이 상당한 것으로 보아 일단 체온을 내리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에 예은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수건을 목에 두르고 대야를 하나 찾아내 차가운 물을 담고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잠깐의 터울뿐이었는데도 그는 한층 더 아파 보였다.숨이 너무 거칠었고,얼굴도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예은은 손놀림을 빨리해 찬물에 적신 수건을 은규의 이마에 얹어 놓았다.냉기가 잠시 몸을 움찔했을 뿐,그는 별다른 움직 임을 보이지 않았다.30 분 정도 같은 동작만 반복했다.수건은 금방 뜨거워졌고,물도 미지근해져 수십 번이나 갈아야 했지만 허무하게도 그의 몸을 달군 열은 달아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점점 더 심해지네." 아무리 말을 걸어도 그는 무반응이었다.사람에게 고열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두려움이 스멀거리며 중추신경을 타고 올라왔다.다른 방도를 강구해야겠다는 판단을 내린 예은은 급히 아래층으로 내려왓다. "아스피린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빠른 걸음으로 구급약 상자라도 찾을까 싶어 서랍이란 서랍은 모두 뒤져 보았지만 쉽지 않았고.대개의 것들은 잠겨 잇었 다,발을 동동 구르며 대안을 생각하다가 냉장고로 달려가 얼음을 찾아보았다.다행히 충분한 양이 얼려 있었다. "됐어!" 산삼이라도 찾아낸 사람처럼 탄성을 지르며 에은은 그릇을 꺼내 얼음을 죄다 쏟아 넣은 후,틀에 다시 물을 채워 넣고 2 층 으로 달려갔다.그리곤 자신조차 놀랄 정도의 스피드와 신속한 손놀림으로 대야에 얼음을 붓고 휘휘 저으며 물 온도가 떨 어지기를 기다렸다. 그의입술이 바짝 말라 있는것이 보였다.기다란 입술의 아름다운 윤곽을 물기 어린 손가락으로 슬며시 쓸어 보았다.뜨겁고 거친 느낌.그 자극이 그녀로 하여금 두 번,세 번 같은 동작을 반복하게 만들었다. "뭘 하고 있는 거야.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잘났다.오예은." 자꾸만 비집고 올라오는 잡념들을 어렵게 밀쳐두고서 그녀는 그가 덮고 있던 이불을 허리 부분까지 끌어내렸다.불안정하게 들썩이고 있는 넓은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작고 미세한 상처들,왠지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가 평범하지 않은 남자라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무엇을 향해 급진하고 있는지도 모르던 희망이 푹 꺼져 버리곤 한다. 낯설고 반갑지 않은 감각이었다.


"집중하자.....열이 점점 더 오르고 있다구.." 자신을 나무라며 예은은 얼음물에 적신수건으로 그의 상체를 닦기 시작했다.그러나 열이 오르기 쉬운 부분부터 구석구석 열심히 찜질을 하다가도 매번 허리 부분에서 손이 멈췄다. 전신을 모두 닦아주어야 체온이 빨리 떨어질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감히 이불을 더 끌어내릴 용기가 없었다.지금은 흠 모하는 상대를 훔쳐보는 소녀처럼 가슴이 영 진정되지를 않는데 벗은 전신을 보게 되면 간호는 이대로 파장을 맞이하게 될 지도 몰랐다. 그래서 밤새도록 그의 얼굴과 상체,그리고 등만 닦고 또 닦았다.이마와 옷이 땀으로 흥건히 젖었고 잠이 몰려와 두분이 가물 가물했지만 여기서 그만두면 그가 죽어 버릴 것만 같아 그렇게 할수 없었다. 도저히 아플것 같아 보이지 않는 남자였는데,이렇듯 심한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사람이 얼마나 쉽게 죽을 수 있는지,얼마나 어이없는 방법으로 생의 끈을 놓아 버릴수 잇는지,20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며 깨닫게 된 그녀로서는 더욱더 마음을 놓을수 가 없었다. 숱하게 얼음을 빼고 다시 얼리는 동안,시간은 흘러 새벽이 찾아왓다.정선을 다해 그의 몸을 닦고 얼음이 떨어지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 반복된 행동 탓으로,그녀의 몸에 남아 있던 기운도 모두 소진되어 갔다. 새벽 다섯 시쯤,그의 체온이 내려가기 시작했다.호흡이 한결 편안해졌고,안색도 평소의 빛깔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예은은 오로지 자시느이 힘으로 그를 구해냈다는 과정된 착각에 안도하며 경직되었던 입술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내 그의 곁으로 다가가 풀썩 꿇어앉고는 침대 맡에 턱을 괴고 잠든 얼굴을 하염없이 들여다 보았다.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자,너무나 부드러운 느낌에 큰 소리 나게 웃음이 터질 뻔할 걸 겨우 참아냈다. 그의 얼굴 위에서 머물던 예은의 손가락이 뺨에 새겨진 상처를 향했다.매끈한 피부 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거친 흔적, 숱한 질문들이 떠오른다. 왜 이렇게 됐을까.무엇 때문일까?아픈 과거일까.증오스런 기억들일까.아니면,여자와 관련된 추억...? 자신과 관계없는 일로 머리가 터질 만큼 궁금해하던 예은은 결국 침대 옆 콘솔에 기대어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이제 막 턱 선을 지나 기다란 목을 덮기 시작한 머리카락들이 땀에 들러붙어 멋대로 헝클어져 버렸고,손에는 아직 그의 체온을 담고 있는 수건이 들려 있었다. 무의식중에 그녀는 그 체온을 꼭 붙들었다. 심하게 목이 타 눈을 떴다. 몸이 무거웠고 눈도 깔깔했지만,밤새 괴롭히던 고열은 말끔히 사라진 후였다.지금껏 한번도 정신을 잃을 만큼 심한 감 기 따윈 앓은 적이 없는데 그 정도 비에 맥을 못 추고 쓰러지다니,이게 다 마음


상태가 해이해졌다는 결정적 증거였다. 이 별장에 오고 난후,그는 너무나 물렁해진 자신의정신 상태가 지독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하지만 이제 다시 서울에 올라가면 이런 모습도 안녕이었다.다시금 흑사 황은규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테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걷으려던 은규는 콘솔 옆에서 둥그런 물체를 발견했다.눈살을 구기며 스탠드를 켠 그의 미간으로 깊은 주름이 잡혀갔다. '이 여자가 왜 여기에...' 대야에 담긴 물과 손에 움켜쥐어진 수건,그 작은 단서 하나로 그는 혼미한 미로 속을 걷던 지난밤 내내.몸이 뜨거워 죽 을 것 같던 순간마다 시원하게 몸을 쓸어주던 손길이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굳은 얼굴로 이불을 걷고 일어난 은규는 조심스레 옷장을 열고 대충 옷을 꿰어 입었다.그리고는 예은을 향해 돌아서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한다....? 언제나 단정한 적이 없던 머리카락들이자만,오늘은 유난했다.마치 마라톤이라도 완주한 사람의 그것처럼 심하게 엉켜 얼굴과 목 이곳저곳에 들러붙어 있었다.살짝 벌린 채 옅은 숨을 내쉬고 있는 입술로 시선을 옮기자마자 예기치 않게도 지난 밤의 키스가 떠올랐다.익숙지 않은 욕망의 기운이 그의 몸 안에서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은규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자못 불만 섞인 한숨을 토해냈다.왜 자꾸 그녀에게 키스하고 반응하게 되는 것인지 설명 불 가요,이해 불능이었다. 그녀만 보면 괜히 싸움을 거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았다.재치 있는 입담이 돌아올 때면 좀처럼 웃는 법을 몰랐던 입술 이 자꾸만 낯선 방식으로 휘어지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한다..... 은규는 천천히 예은을 향해 다가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가뿐히 안아 들었다.잠시 꿈틀했을 뿐,그녀는 여전히 숙면에 취 해 있었다. 여자를 배려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그다운 방식은 자신의 영역 안에 들어선 침입자를 깨워 방으로 돌아가 게 하는 것이지.행여 깰까 봐 조심스레 안아 침대에 누이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지금껏 한 번도 그는 자신의 침대에 여자를 눕힌 일이 없었다.아니,인생 가운데 여자를 위한 자리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 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조직 식구들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벅찼고,여자는 곁에 둬 봤자 약점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그런데 그녀는 이 냉정한 사내를 초췌한 모습이 되어 나가떨어지도록 보살펴 주었다. "후....." 이대로 있다가는 결론도 나지 않을 생각만 곱씹게 될 것 같아 은규는 어렵게 자리에서


돌아섰다.그리곤 고개를 들어 담배를 하나 집어 들다 문가에 서 있는 수야를 발견하곤 멈칫했다. "거기서 뭐하는 거냐." 수야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을 회피했다.그의 시선이 보스의 침대에서 잠든 예은에게 꽂혀 있었다. "멋대로 생각하지 마."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게 하는 일좀 그만둘 수 없냐." "형님께서 가르쳐 주신 걸요." 밉지 않게 미소 짓는 수야를 보며 은규는 거친 욕설을 중얼댔다. "아래층으로 가자." 은규가 먼저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잠시 예은의 모습을 더 바라보고 있던 수야도 이내 그의 뒤를 따랐다. "형님,빨리 서울로 와주셔야겠습니다." 은규의 입술이 하얀 연기를 뿜어냈다.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부터 말해봐." 수야가 얼굴을 굳혔다. "형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알게 모르게 아이들 경계심도 많이 흐트러졌고 천일도가 제법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땅 문 제 때문에 신흥파와 대진파에서 사람이 한 번 더 왔었구요.제가 처리해 돌려보냈지만 마지막 경고인 걸 알아두라고 협박 하더군요." "천일도라..." 은규의 기억 회로 속으로 언젠가 예은을 회롱했던 미친 사내가 떠올랐다. "말씀드렸듯이 부산 마이더스의 사생아지만 그간 아들 대접도 받지 못하고 살아온 듯합니다.전과가 꽤 여럿 있는 그저 그런 범죄자가 제 아비 돈줄 하나 믿고 설쳐대는 모양인데,그 꼬락서니야 보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지 않겠어요?파주 신도 시 유흥 단지에 연루된 각종 조직들에게 자금을 대주고 마치 자신이 보스인 양 군림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단번에 대강의그림이 그려졌다.벌이는 일마다 금덩이를 몰고 온다는 그 마이더스가 어째서 세상에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사생아를 이용하려 드는지.아마도 조만간 정계에 진출할 계획이라던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었다.제 손을 더럽힐 수 없는 그의 입장에선 뒤탈 없이 일을 성사시켜 줄 개가 필요했을 터,천일도란 작자가 어떤 그릇인지 알수는 없어도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모조품이니 믿어보자 결심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쉬운 상대는 아니란 판단이 들었다.제법 힘 있는 조직체들 까지 합세했다면 사람 피 보는 일쯤이야 개의치 않고서 땅을 접수하려 들 게 뻔했다. "내일 올라가마." 그제야 수야는 한결 든든해진 표정으로 어깨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먼저 가서 아이들에게 일러두고 있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수야를 바라보며 은규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이제 이곳에서의 생활도 끝이란 생각을 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서울에는 다시 빡빡하기 그지없는 일상이 그를 가다리고 있었다.어디서 들이닥칠지 모르는 적들에게 등을 보이지 않기 위해 머리끝까지 신경을 곧추세우며 살아야 하는 피곤한 일상. 그 전에 예은부터 처리해야 했다.그간 고생시킨 전적이 있으니 최대한 고이 모셔 집 앞까지 데려다 준다면 납치 해프닝 쯤이야 그런대로 일단락될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도,그녀를 보낸다고 생각하니 담배 맛이 텁텁하고 쓰게 느껴졌다. ;뭐지,이건?' 설명하고 싶지 않은 감정의 복합체가 언제나 냉정하게 식어 있던 그의 심장 부근에서 지분대고 있었다.생전 처음으로 피 우다 만 담배를 비벼 끄며,은규는 문손잡이를 열고 나서는 수야를 불러 세웠다. "예,형님." 그는 담배를 세 모금 더 빨았다.그리곤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수야를 향해 무겁게 웃어 보였다. "감기약 한 봉만 지어놓고 가라."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 예은은 잠시 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몸이 무겁지?"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묵직한 걸음으로 들어서는 은규의 모습이 보였다.눈동자 속에 갇혀 있던 잠이 확 달아가 버렸다.벌떡 일어나 앉은 그녀는 힘껏 소리쳤다. "내가 왜 여기 누워 있어요?" 표정 없는 얼굴로 다가선 은규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대충 설명했다. "깨어 보니 바닥에서 자고 잇더군,남자 방에 멋대로 들어오다니,간이 부었어." 예은의 입술이 꿈틀했다.열에 들끓던 그를 보며 잠시나마 걱정에 몸 달았던 자신이 너무나 바보처럼 느껴졌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저 혼자 살아난 줄 아는 격이 네요." 은규의 입매가 미소를 참기 위해 꿈틀했다. "속담을 멋대로 바꾸는 건 저작권 침해지." "또 괜한 시비 거는 걸 보니 살 만한가 보죠?" "그럼,그까짓 감기 하나에 내가 죽을 줄 알았어?" 그래요!예은은 가까스로 말을 삼켰다.감기 하나에 이 강한 남자가 어떻게 될 줄로 생각했다니.자신의 우둔함에 미치도록 화가 난 예은은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빗으며 신랄한 어조로 푸념했다. "내가 괜한 짓을 했다 싶네요.당신이 이렇게 배은망덕하게 나올 줄 알았다면 열이 들끓든 헛소리를 하든 모른척 하는건 데.얼음 때문에 몇 번이고 계단을 왔다 갔다 하느라 지금도 쑤시는 팔다리가 아주 민망해 죽을 지경이에요."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천천히 걸어와 뭔가를 툭 던졌다. "뭐에요.이게?" 의문이 묻어난 예은의 눈동자가 커졌다.하얀 약 봉투였다.


"먹어둬." "이걸 왜..." "비 많이 맞았잖아.갑자기 앓아눕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지니까 먹어두라는 거야." 예은은 슬며시 약을 집어 들었다.아직도 따뜻한 기운이 가득 스며 있는 봉투가 꼭 그의 마음처럼 느껴졌다.퉁명스럽고 딱딱한 말투와 달리,작고 미미한 배���도 느낄수 잇었다.그는 검은 배경 뒤에 속한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아가는 사내였지만, 소문처럼 냉혈한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눈물 날 지경이네요." 웬일인지 마음과는 다르게 비꼬는 어투가 나가고 말았다.요즘 들어 그녀는 점점 그의 말투를 흉내 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 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이끌리고 있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진실한 마음을 진실 아닌 것으로 포장하기 위해.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곧잘 튕겨 나가곤 하는 것이다. 그 역시 이런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진정한 속내를 숨기기 위해 언제나 딱딱하고 비뚤어진 말만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고사라도 지내?" 은규의 놀림에도 예은은 발끈하지 않았다.그의 행동 패턴에 대해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리고 나니,이런 시비쯤이야 도리어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는 곧 여러 개 되는 알약을 단번에 입 안에 털어 넣고 따끈한 물약을 삼켰다. "으.....꽤 쓰네." 싸한 기운이 혀끝으로 퍼져갔다. "당연하지." "뭐가 당연해요?" 눈살을 찌푸리는 그녀에게로 은규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왓다.사악한 눈동자만큼,흘러나온 말도 꽤 고약했다. "독약이거든." "네?" "독약이라고,당신이 마신약." 예은의 얼굴에 백색 가루가 내려앉았다. chapter31 ==당신만 보면 심장이 불규칙해져.열기의입 출입이 잦아지고 미친 사람처럼 헤죽거리는 웃음도 터져 나와.대체 이 감정의 본질이 뭘까.단순한 스톡홀름 신드롬.그게 아니면.....사랑?==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독약이라...." 금방 제 표정을 찾은 예은의 눈동자가 묘한 빛으로 번뜩였다. "독약을 먹였다 이거죠?" 은규의 입가에 맴돌던 미소가 금방 사그라지는 것을 보며 예은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리고는 콘솔 위에 던져놓았던


약병을 집어 입안에 마저 털어 놓은 후,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 올리며 우물거렸다. "그럼,같이 죽어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는 알수 없었지만,예은은 그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고 물약을 흘려 넣기 시작했다.씁쓸한 액체와 함께 그녀의 작은 웃음소리가 은규의 입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가 남김없이 약을 다 받아 마시자,예은은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재빨리 입술을 떼어냈다. "대범하군." 목에 둘린 예은의 손을 붙들며 은규가 짐짓 화나 보이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동신에 승리의 기쁨으로 가득 찼던 예은의 얼굴도 금방 그 기세를 지워 버렸다. "놔줘요." 미소를 놓친 예은의 입술이 달싹였다. "싫어." 사악한 미소를 되찾은 그의 입술이 화답했다. "그러게 누가 놀리래요?" 그가 만든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은은 몸을 한 번 크게 비틀었다.덕분에 그의 손힘만 더 강해졌을 뿐,달아날 틈은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너무나 간단히그에게 재압당한 꼴이 되자 갑자기 두려워진 예은은 엄격한 얼굴로 그를 책망했다. "여자를 힘으로 제압하는 건 남자답지 못한 짓이에요." "멋대로 키스하는 건 여자다운 짓이고?" 마침내 예은은 상황도 잊고 분노를 터뜨렸다. "말은 똑바로 해야죠!내가 한 건 키스가 아니라 복수였어요.남은 기껏 잠도 안자면서 간호해 줬는데,약 주면서 한다는 소리가 독약이라니.날 가지고 노는 게 그렇게도 좋아요?" 씩씩대는 예은을 보면서도 침묵만 지키고 있던 은규는 조금 더 강한 힘을 실어 그녀를 끌어당겼다.눈동자가 가까워졌고, 손목을 움켜쥐었던 힘도 느슨해졌다.하지만 보이지 않는 힘이 옭아매고 있는 탓에 도통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이거 놔요." 조용하지만 고집이 담긴 예은의 경고에도 그는 얄미울 만큼 흔들림 없는 표정이었다. "기습 공격을 받으면 독같이 돌려주는 게 이 세계의 도리야." 그의 고개가 조금 더 내려앉았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배로 갚아야 직성이 풀리지." 그렇게 키스가 시작되었다.아니,그것은 키스를 가장한 공격이었다.사납고 맹렬하고 원시적인 기세로 은규가 예은을 몰아붙 였다. '억울해.' 저항할 수 없는 이 나약함. '화가 나.' 기어이 반응하고야 마는 애물단지 육체. '하지만,,,,' 기분 좋았다.


'흥분되는걸.' 가슴이 떨려왔다.어느새 은규의 손은 예은의 허리로 내려와 모든 물리적 속박으로부터 그녀를 자유롭게 했지만,믿을수 없게도 예은은 스스로 그의 목을 바짝 끌어안고 있었다. 그는 분명 위험한 남자였다.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고 이유가 어찌 되었건 자신을 납치한 상대이기도 했다.그런데 어떻게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현실감 없는 세계가 그녀의 사고를 흔들어 바닥에 흩어놓았음이 틀림없다.그래서 평소에는 꿈도 꿀수 없었던 대범한 행동을 하게 만들고,자신이 창조했던 주인공들에게나 가능한 감정 전이를 그대로 느끼게 하는 것이리라. 어느새 부드러워진 혀가 가볍게 이를 두드리는 느낌에 예은은 순순히 입술을 열고 받아들였다.조금더 많은 것을 바라는 마음.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은 덧없는 꿈과 더욱더 많은 의미를 담은 사람이 되고 싶은 애타는 욕망. 그가 또 하나의 그녀를 깨웠다.처음 만났을 때와 다를 것 없이 조금도 변치 않은 모습이었지만,예은조차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자아는 멋대로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말았다. 은규의 뜨거운 입술과 숨결이 예은의 단정함을 삼키고 이성을 삼키고 사고마저 삼켜 버렸다. '이건 누구...?' 망설임 없이 그의 등을 훑는 손이 낯설었다.열렬히 화답하는 입술,감긴 채 뜨이지 않는 눈꺼풀과 주책없이 뛰는 심장도. '내가 아니야...' 평소의 예은이라면 이런 행동은 꿈도 꾸지 못했을 텐데,자의적으로 움직이는 각각의 자체들은 분명 그녀의 것이었다.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암흑계의 거물 황은규를 인지하고 사로잡아 인터뷰를 성사시키겠다는 계획.그것이그를 만나게 했다.이후로 온 힘을 다해 정보를 수집하고 주위를 맴돌며 목표물을 포획할 날만 기다리고 기다렸다.시작할 때 그녀는 분명 사냥꾼의 입장이었지만, 어느새 자리가 뒤바뀌어 포로가 돼 버린 자신과 대면하게 되었다. 자아를 잃고,생각을 잃고,그가 유도하는 대로 반응하고 움직이며 놀림감이 되었던 시간들.그때부터 에은은 객관성과 목표 마저 모두 던져 버리고 오로지 그와 있는 순간을 즐겼다. 열렬히 화답하던 예은이 숨 조절을 하지 못해 헐떡이고 나서야,은규는 살짝 입술을 떼어냈다.불규칙한 호흡은 여전히 그녀 의 귓가를 간질였고,미세한 순간이지만 그가 자신으로 인해 평정을 잃었다는 사실이 예은에게 작은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알수 없는 힘에 이끌려 예은은 은규의 조각 같은 턱을 쓸어 보았다.까끌까끌한 느낌에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좀더 깊게 눈을 들여다보자,열정은 사라지고 다시금 경계로 가득 채워진 흑 빛 눈동자가 마주쳐 왔다. 예은은 힘없이 손을 떨어뜨리며 서글프게 중얼댔다.


"억울해..." 은규가 쉰 소리로 반응했다. "뭐가." "첫 키스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었는데 납치범이랑 해 버리다니." 예은의 입술이 뿜어낸 한숨이 그의 뺨에 닿았다. "억울해 미치겠어요." 은규는 한동안 예은의 눈동자에 시선을 꽂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이유라면 나도 억울해야겠는데." 길고 긴 키스를 해 버렸으니 분명 굉장한 폭탄선언이 흘러나올 것이란 예감에.예은은 기다리지 ?고 선수를 쳤다. "그래요,무척 억울하시겠죠.나처럼 예쁘지도 않고 시끄럽기만 한 여자와는 죽어도 키스 같은거 하고 싶지 않았을 테데 한 번도 아니고 몇번이나 해 버렸으니,분명 본의가 아니었겠죠?지금껏 잘난 당신이 키스하고자 마음 먹었던 상대는아담한 발 사이즈에 문신 같은건 당연히 없었을 테고..." "당신 외에 키스한 여자는 없어." 그의 말속에 담긴 뜻을 정확히 파악할수가 없어 예은은 말을 끊고 생각에 잠겼다.순간,어떤 깨달음이 밀려와 몽롱 하게 덮였던 그녀의 눈꺼풀을 번쩍 들어올렸다. "설마,당신 남자한테 키스하는 걸 즐기는 건........그런 사람은 아니............겠....." 아,파노라마처럼 그간의 일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아무리 자제심 100%를 자랑하는 남자라 할지라도 정상이라면!폭 탄 아닌 여자와 한 방에서 자는데 그리 맘 놓고 쿨쿨 잘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뿐이랴.거의 다 벗고 있던 그녀와 마주쳤을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침착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가. '이런...!' 생각해 보면 그의 곁에 여자가 있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애인이 있었다면 꽁무니를 따라다닐 때 한 번쯤은 보였을 법도 한데,그는 언제나 수야와 함께였다. '그렇다면 혹시 수야.....그사람과?' 은규는 거품을 물고 쓰러질 지경이 된 예은의 생각을 꿰뚫고 어이없는 한숨을 흘렸다. "납치범에서 이제는 호모라...대단한 상산력이야." 예은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불편한 심기를 토로하자,은규는 그녀를 품에서 떼어놓았다. "말을 수정하지.난 지극히 정상적인 남자고,키스라는 거,당신한테 처음 해봤다는 이야기야." 예은의 눈이 커졌다. "당신도 첫 키스였다는 거에요.지금?" 이번에는 은규의 눈썹 끝이 살짝 올라갔다. "그래." "못 믿겠는데." "믿든 안 믿든 상관 없어.첫 키스의순정이니 뭐니 하면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예은은 미간에 주름을 잡고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은규를 관찰했다. "뭐야." 그녀의 시선이 영 거북하게 느껴진 은규가 날카롭게 쏘아붙이자.예은의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네.....첫 키스였다면서 어떻게 그리 능숙할 수가 있는지...." 살짝 붉어지는 예은의 얼굴을 확인한 은규의 입술이 웃음을 실었다. "당신이야말로 이상한데." "뭐가요?" "첫 키스였다면서 능숙한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그.......그건..!" 발근하려던 예은은 또다시 그의 패턴에 휘말리는 것 같아 입을 닫았다.저 매혹적인 입술에 키스하고,또 받았던 상개가 숱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할때마다,얼굴도 모르는 상대에게 은근한 질투를 느끼곤 하던 그녀였다.하지만 자신이 유일하고 독 보적인 존재였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없는 소유욕을 배가시켰다. 눈치 빠른 그에게 한껏 들뜬 심경을 들킬까 싶어 예은은 슬쩍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인터뷰는 어떻게 할 거에요.?" 은규의 표정이 티 나게 굳어졌다. "끝난 거 아니었어?" "뭘 했다고 끝이에요?난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난 내링 아침 일찍 서울로 떠나." 예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도망가겠다는 거에요.지금?" 그녀의 빈정거림을 은규는 애써 모른 척했다. "난 충분히 성의껏 답했어.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면 그건 당신 재량 탓이지.결코 시간 탓이 아니야." "뭐,재량 탓?이제 떠넘기기까지...정말 할 말 없게 만드네요." 한 마디라도 더 하게 되면 절제의 미덕을 잃게 될 것만 같아 예은은 그저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가져갈 게 있다면 미리 챙겨놔.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하니까." 힘껏 소리라도 질러 볼 생각으로 입을 벌렸던 예은은 그대로 축 늘어지고 말았다.이상하게도 그의 등을 보자마자 분노는 사라지고 아쉬움만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서울로 올라간다....내일이면. 그것은 곧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였고,다시금 그녀의 터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해방 메시지이 기도 했다.그런데도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더 이상 그와 얼굴을 맞대며 얘기할 수 없는 것은 물론,팽팽한 싸움조차 즐길 수 없게 된다는 깨달음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침울한 기색이 드리워진 표정으로 예은은 침대에 주저앉았다.돌연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으로 돌 아갈 수 있다면 뭐든 하겠다고 기도했는데,납치범에게서 풀려나게 된 지금은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니,많은 것들이


어그러져 있었다. "나쁜놈....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스톡홀름 신드롬인가?그래.그 듣도 못한 증후군이 시작된 것인지도 몰랐다.그렇지 않고서야 이 엄청난 감정의 모순을 설명할 다른 방도가 없었다. 거센 한숨을 내쉬며 예은은 두 눈을 꼭 감았다.가슴이 뛰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밤이 깊었다. 유난히도 별이 많은 하늘에 보름달가지 합세해 밤의 풍경을 충실히 비춰주었다.은규는 무심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1 년에 한 번,그것도 일주일을 넘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는 양평에 내려와 최소한의 휴식 기간을 가졌다.애초에 그럴 용도로 마련한 것이었지만 이곳에 오면 유난히 생각이 많아짐과 동시에 자신이 살아온 길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가 속한 세계는 너무나 오르기 힘들고,설사 올랐다 하더라도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가파른 언덕과도 같았다.오늘의 아군이 내일의 적군이 되기 십상이었고,믿음과 신뢰가 철저히 요구되지만,그것에 너무 의존했다가는 쥐도 새 도 모르게 목숨을 빼앗기고야 마는 최전방 무장지대. 비록 타인의 눈에는 '조폭'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테지만,그 자신은 철저한 법도를 지키며 나름대로의 정도를 걸어왔다 고 자부했다. 처음 큰형님으로부터 사업체와 딸린 식구들을 물려받았을 때는 돌아가는 판국이 지금보다 훨씬 거칠었다.서울 일대에 자 리한 큼지막한 클럽들은 최상의 이권을 자랑하는 곳이란 이유로 타 조직의 레이더망에 걸려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아 버지로부터 물려받은 HS 호텔은 클럽들을 관리하는 것의 열배의 힘과 경영 마인드가 요구되었다. 떠넘기듯 맡게 된 보스 자리와 함께 어쩔 수 없이 이 모든 것들을 관리 할 수밖에 없어진 은규는,일단 대대적인 물갈이에 들어갔다.눈빛이 사악하고 근성이 없는 조직원들을 잘라 버리는 대신.갈 곳이 없거나 상처받아 멋대로 몸을 굴리는 녀석들 중 근본이 뒤틀리지 않은 이드을 모아 조금 다른 유형의 조직으로 재구성했다.그리곤 주어진 구역들을 관리하며 별다른 움직임없이 조용히 지내자,다른 조직들 모두 경계를 풀고 그를 암흑계의 이단아로 인정하게 되었다. 물론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탄탄한 조직의 보스가 된 것도 모자라,그들의 세계에서 엘리트 노릇을 한다고 여겨 사사건건 시비를 그치지 않는 녀석들도 여전히 존재했다.그는 최근 백곰의 의문사가 그런 조직들 중 하나와 연결되어 이?고 굳게 믿고 있었다.뒷돈을 대고 있다던 천일도 역시 배제할 수 없는 상황에는 분명했다. 진실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백곰을 해한 인물이 밝혀���다면 두 배로 갚아주겠다고,그는 녀석의 유골 앞에서 피를 토하 는 심정으로 다짐했다.나름대로 깨끗이 지켜온 이손에 피를 묻히는 한이 있다 해도


주저하지 않겠노라고. 어느새 다 타 버린 담배를 창밖으로 던지던 은규는 어두운 눈동자에 초점을 잡았다. 예은이 시야 가운데로 똑똑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잔잔한 달그림자를 담은 호수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 이 세상 때를 모르는 소녀 같아 보였다. 누군가를 납치하거나 짓밟는 등 법에 저촉되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 조직 내 철직이었는데,백고므이 원수를 갚아주겠' 다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 그는 생전 처음 납치라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하지만 예은과 함께한 웃지 못할 공생 기간 동안 그는꽤 유쾌했다.그녀를 통해 비로소 여자의 생김새를 알았고,습관을 알았고,향기를 알았고,감촉을 알게 되었다. 모든 여자가 그런 것인지,아니면 오예은이라는 여자만의 독특함인즌 알 수 없었지만,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즐긴 만 한 존재라는 사실을 그는 최근에야 깨닫게 되었다.내링 아침 떠난다는사실이 조금은 아쉬울 정도로. 하지만 이런 감정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그에게는 많은 식구들이 있었고,풀어야 할 숙제도 가득 남아 있었다.백곰의 원 수와 배신자를 찾아 내는일.그 위험한 작업 속에는 더이상 여자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콧노래 소리가 얼핏 들려왓다.중간에 한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발랄하게 흥얼거리고,한 소절도 지나지 않아 또 한숨을 내 쉬는 모양이 뭔가 고민하는 눈치였다.저도 모르게 굳혔던 입술을 풀며 은규는 벽에 기댄 채 예은을 훔쳐 보았다. 놀리면 빨개지던 얼굴과 새침 떠는 표정을 지을때면 또렷이 드러나는 보조개,묘한 형태로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강단 있는 말투까지.그의 세계가 소유하지 못한 것들을 지닌 그녀가 꽤 많이 그리울 것이란 사실을 결국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것 같았다. 뭔가를 느낀 듯 예은이 돌아서는 것을 발견한 은규는 재빨리 벽에등을 기대고 몸과 시선을 숨겼다.마주치게 되면.감정과 생기가 팔팔 뛰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를 대면하게 되면,분명 이 아쉬움이 더 커질 것만 같았기에 암흑을 방패삼아 그녀 를 보고 싶은 욕심과 싸웠다. 다시금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을 때,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미친 놈,뭐하고 있는 거야.대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담배를 깊이 빨자,아쉬움 섞인 한숨이 연기를 가장해 흠뻑 흘러나온다.어이없는 웃음과 같이 새어 나왔다.

chapter32 ==이것도인연이라고 헤어진다는게 이리도 별스러운 느낌인데, 하물며,정말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은 얼마나 어려울까?==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


바람이 제법 훈훈했다. 예은은 창문을 열고 싱그러운 바람 속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답답한 차 속에만 갇혀 있었던 탓에 꽉 들어찼던 숨통이 한꺼번에 뚫리는 듯했다. "얼굴 내밀지 마.위험해." 한참 분위기를 잡고 있는데,정면만 응시하고 잇던 그가 불쑥 말을 꺼내 정신을 흐려놓았다. "아야!으..."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다 그만 차창 위쪽에 머리를 부딪친 예은은,도톰한 입술로 온갖 잡스러운 욕설을 뱉어냈다.옆자리에 안자 분주하게도 움직여 대는 그녀가 재밌었는지,은규는 눈동자에 웃음을 싣고서 이따금 힐끗 거렸다. "칠칠맞지 못하기는." 예은은 밉지 않게 눈을 흘리겸 못마땅한 표시를 해보였다. "뭐 보태준 거라도 있어요?" "안 보태줘도 알아서 잘 덜렁거리는데 뭘 더 바래." 마침 적신호가 떨어져 은규는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정차 시켰다.아직 못다풀린 분풀이로 그의 옆얼굴을 앙칼 지게 쏘아보던 예은은 엄청나게 정확한 비율로 이루어진 얼굴선에 그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전에는 발견하지 못한 것일까.아니면 익숙해진 탓일까.최근 예은은 은규를 볼때 마다 눈빛을 흐리며 한참이나 넋 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화들짝 놀랐다.그럴 때면 예민한 그가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한 조바심을 내며 신경도 쓰지 않았던 머리카락을 쓸기 바빠졌다. 별장이라는 한 공간에서 지내긴 햇어도,그는 철저하게 스킨십을 피해왔다.단 몇 번의 키스를 제외하고는 가까이 오는 것 조차 조심하며 늘 주위에서만 맴돌았는데,2 시간을 바짝 붙어 있다 보니 어깨에 실린 힘도 마음대로 풀수 없어 온몸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다시 신호가 바뀌자,은규는 익숙한 동작으로 차를 출발시켰다.거북한 침묵 대신 힘차게 돌아가는 엔진 소리가 주위를 둘 러쌌고,살짝 열린 창틈으로 들이치는 바람 소리가 규칙적이고도 묘한 소음을 형성해 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처음 별장에 끌려오던 날 역시 이 차를 탔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그때는 수야가 운전을 했고 냉기 만 팍팍 풍기는 이 남자 옆에서 손까지 묶인 채 한껏 불안에 떨었는데,채 한달도 안되는 시간동안 대체 무엇이 바뀌었기에 동일 인물 옆에서 두근거림을 느끼게 된 것일까. 고작해야 2 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서울.차가 막혀 아직 절반도 가지 못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도로에서 허비하고 있었 지만 조금도 지루하거나 아쉽지 않았다. 서울에 도착하게 되면 정말로 그외 이별하게 된다는 생각에,줄지어 나오는 차들이 도리어 반가웠고,공사 중이라는 푯말이라도 발견했으면 좋겠다는 그릇된 소망이 가슴


안에 들이치고 잇었다. '나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됐나봐.' 상식적이지 못한 마음의 모순 탓에 그녀는 괴로웠다.하지만 입만 다물면 생각은 늘 시계 바늘처럼 같은 방향으로만 돌아가 니,진퇴양난이란 말도 모자랄 판국이었다.그와의 말싸움은 항상 피곤했지만,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다간 머리가 어떻게 되 어 버릴 것만 같아 예은은 스스로 침묵을 깨 버렸다. "얼마나 더 가야되죠?" 표정 변화 없이그는 눈동자만 살짝 굴렸다. "계속 이 상태라면 2 시간 정도." 환호성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으며 예은은 괜히 입술을 삐죽였다. "지루해 죽겠는데,웬 차가 이렇게 막힌담?뭐라도 먹고 갈까요?" "점심 먹고 나왔잖아." "그게 언젯적 일인데 그래요?" "2 시간 전일이야." 사실 예은은 그다지 배가고프지 않았지만 시간을 좀더 끌고 싶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출출할때 조금이라도 더 먹어두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렇게 많이 먹고서 또 배가 고프다고?" "아사 직전이라구요." 그는 팔목에 감긴 시계로 시선을 내렸다 올렸다. "휴게소에 잠깐 들리지." 인심 쓰듯 말한 장소가 겨우 휴게소라는 사실에 예은은 입술을 삐죽이고 말았다. "좀더 근사한 데도 많은데..." "배만 채우면 될 거 아니야.괜히 꾸물댔다가 퇴근 시간 걸리면 골치 아파져." 이 둔해 빠진 인간아.그게 바로 내가 바라는 거라구! 그녀의 붉어진 얼굴과 들썩이는 어깨를 무시하는 건지,아니면 정말 못 본것인지,은규는 깝빡이를 켜고 차선을 바꾸었다. 한 손으로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는 남성다운 동작에 한동안 정신이 팔려 있던 예은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는 조금이라도 빨리 서울에 도착하고 싶은 눈치였다.웬지 서운한 걸.... "김밥 네줄,우동 한 그릇,훈제 달걀 다섯개,어머!맥반석 오징어 구이도 있네?이것도 주시구요.그리고..." 은규는 예은의 뒤쪽에 서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낯선 공간에 있을 때면 언제나 경계를 늦추지 않고 오가는 사람들을 살피던 버릇 탓이었다. "이봐요!" 갑자기 들려온 앙칼진 목소리에 은규는 방황하던 시선을 내렸다.한쪽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입술을 모으고 선 예은 이 사내대장부처럼 당당한 목소리로 질책했다. "정신을 어디가 팔고 있어요?" "그런 적 없어." "20 번은 넘게 불렀는데도 못 들어놓고 말은 잘하네요."


갑자기 짜증이 밀려들어 그는 얼굴을 구겼다. "다 골랐으면 빨리 먹고 가지." 지체 없이 돌아서는 은규의 옷자락을 예은이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뭐야." "혼자 들고 갈 수 없어서요.좀 도와줘요." 우동 ,떡복이.김밥,오징어 구이,훈제 달걀,오뎅,음료수 기타등등. 도저히 1 인분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잔뜩 시켜 놓고서 짐꾼 역활을 해달라?감히? "재주껏 들고 와." 아부성 미소까지 짓고 있는 예은을 무시하며 그는 거칠게 돌아섰다.안 그래도 해이해진 자신에게 단단히 화가 나 있는 지금. 음식이나 들어달라는 그녀의 풀어진 태도가 싫었다.이렇게 사사로운 일들을 부탁할 만큼 친근한 상대 또한 되고 싶지 않았다. "더럽고 치사해서 원,안 도와주면 누가 못할 줄 알고?" 뒤쪽에서 들려온 커다란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자,그 많은 음식을 전부 들고서 거북이 보다 느리게 걷고있는 예 은의모습이 보였다.입으론 연신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바로 앞 탁자들을 모조리 지나치는 것으로 보아 휴게소 밖 야외 벤치까지 들고 갈 모양이었다. 보기에도 안달이 날 만큼 아슬아슬한 전경이었다.몇 번에 걸쳐 안전하게 옮기면 될 것을,한꺼번에 들고서 입을 삐죽이는 행동은,필시 그가 보고 뜨끔하길 바라는 시위가 분명했지만 추호도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갑자기 담배 생각이 간절해진 은규는 품에서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를 뒤적였다.무신경하고자 애를 쓰곤 있지만 신경이 자꾸 뒤쪽으로 이끌렸고,그녀가 바로 옆을 스쳐 지날 즈음에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는 사실조차 잊고서 기막힌 묘기 행진에 넋을 놓고 말았다. "도와 드릴까요?" 왠 남성이 접근하며 물어도 그녀는 상냥하게 웃어 보이며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도와드려야 할 것 같은.." "혼 자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그만 휴게소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했고,은규는 다짐을 버리고 예은을 향하는 자신의 발을 저지할 수 없었다. "무슨 심보야?" 국물이 반이나 넘게 사라진 우동 그릇과 갖가지 것들을 손에 들며 은규는 날카로운 시선을 예은에게 꽂았다.그녀는 조금의 움찔거림도 없이 나머지 그릇들을 모두 그의 품에 떠밀며 턱을 치켜들었다. "진작 이렇게 나올 것이지." 탁탁 손까지 털고서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는 예은의 입술이 슬쩍 승리의 미소를 짓는 것을 보는 순간,은규는 거칠게 담배꽁초를 뱉어 버렸다.깔끔한 그녀의 판정승이었다.


족제비 천일도는 신흥파의 보스이자 대두라 통용되는 사내 정두익과 함께 소식통을 기다리고 있었다.일주일에 두 번,정 해진 시간에 흑사파의 소식을 가지고 방문하는 그를 이곳에서는 '유다'라는 이름으로 불렀다.예수를 은 삼십 냥에 팔아넘긴 배은망덕한 제자와 처지가 비슷하단 이유로,천일도가 비아냥 거리며 붙여놓은 별명이었다. "이 자식이 늦네...." 양주를 들이키던 천일도가 쓴 소리를 뱉자,대두 정두익은 뒤쪽에 서 있던 똘마니를 불러 미세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어투로 물었다. "연락 없었냐." "예,따로 연락은 하지 않았습니다.워낙 시간 약속은 철저한 친구라.." 그때 간결한 노크 소리가 두 번 들려왔다. "누고." "녀석입니다.형님." "들여보내라." 즉각 문이 열리며 유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늦었습..." 얼굴을 구기고 앉아 있던 천일도는 앞에 놓여 있던 잔을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똑바로 못해.새끼야?" 천일도는 원래 고약하고 막 되먹은 것으로 유명했지만 이 사내에게 유독 심한 면모를 보이곤 했다. "말해 봐.내가 너 같은 놈을 기다려야겠냐고!" 대면할 때마다 폭언을 퍼부어 천일도를 마주보던 유다의 주먹이 잠시 꽉 쥐어졌다 다시 풀어졌다. "죄송합니다." "병신 같은 새끼.지 형님 배신하고 스파이 노릇이나 하는주제에 알아서 기란 말이야!" 천일도의 개 같은 성질의 폭주할 조짐을 보이자,이를 막을 심사로 정두익이 끼어들었다.뒷돈을 대주는 것은 물론,파주 유흥 단지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이유로 머리 위에서 군림하려는 그의 행동이 영 탐탁치는 않았지만 마이더스의 자금줄은 무시 못할 정도로 막강한 것이었다. "그래.돌아가는 상황부터 펼쳐봐.예정대로냐?" 피어오르는 분노와 수치심을 억누르기 위해 잠시 이를 악물고 있던 유다는 억양 없는 소리로 보고했다. "오늘 여자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올 겁니다." 번뜩이는 천일도의 눈이 정두익을 향했다. "대두 형님,준비는 다 됐겠지요?뭐,주먹 좀 쓰는 애들이야 당장에라도 모을 수 있는 문제니,준비고 뭐고 할 것도 없겠지 만 말입니다." 정두익이 남은 양주를 다 들이키며 흥분된 얼굴을 들었다. "엔간한 애들 가지고는 안 돼.황은규 그넘아,괜히 흑사라고 불리는게 아니야.흑사가 계집질에 빠졌다는 얘기는 당최 믿을 수가 없지만서도 저 녀석 근거 없는 말은 안하니까 함 믿고 나가보는거지.그 물렁해진


면상 얼른 보고 싶기도 하고." 천일도의 족제비 같은 눈동자가 유다를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 "확실한 거겠지?" 유다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흠...좋았어.황은규,너 이 새끼 각오해.서서히 끝장을 내줄 테니까." 야비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천일도의 눈동자 속에 비틀린 희열이 가득했다. 은규는 연신 시계를 살피고 있었다.날은 이미 어둑해졌지만 그들은 아직 휴게소에서 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허겁지겁 혼 자서 그 많은 음식을 먹어댄 예은이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울고구르며 난리를 피운 탓이었다. "후...." 발아래 담배꽁초들이 수두룩해질 즈음,예은이 배를 감싸 쥐고 화장실에서 나왔다.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몰골로 터덜 거리는 그녀를 보자,화마저 낼 수 없어진 은규는 그저 한숨만 들이켰다. "죽겠다..." "지금 가지 않으면 오늘 안에 도착하기 힘들어." 한숨을 내쉬며 예은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너무나 완고한남자,그래서 다가가기 힘든 남자,이제 서울로 가게 되면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얼굴,조바심과아쉬움,그리고 알수없는 감정들이 합세해 그녀에게서 현실감을 앗아가 버렸다. "꼭 오늘 가야만 해요?" 놀란 기색이 만연한 은규의 눈동자가 예은을 향했다.갑자기 가슴이 콩닥거리는 느낌에 그녀는 벌어진 입술을 주체할 수 없 었다. "별로...상관없어졌어요.오늘 가든,내일 가든,아니면 좀더 있다 가든,...별 의미 없어졌다구요." 당돌하고도 조심스러운 그녀의 눈빛을 묵묵히 마주 보던 은규는 깊게 담배 연기를 빨았다. "무슨 의미야.그거." "그러니까...내 말은.." 막상 그가 직설적인 태도를 보이자,예은은 용기가 꽁무니 치는 것을 느끼며 잠시 머뭇거렸다. "본인조차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멋대로 말하지 마." 담배를 툭 뱉어내 짓이기는 은규의 발짓이 무시무시햇다. "충동적이고 순간적인 기분에 이끌려 말하고 행동하다 보면 후회할 일을 만들기 마련이야." 예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맞섰다. "충동적인 거 아니에요.설명할 수 있어요.나는 그저 당신과......" "가지." "기다려요 설명할 수 있..." "흥미없어.지금 출발 할 거니가 오기 싫으면 혼자 올라와." 망설임 없이 그가 차에 오르자,예은은 다시 배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밤 12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은규의 차가 에은의 집 앞에 멈춰 섰다.깨어진 가로등이 제 역활을 하지 못해 주위는 어둠 속에 잠겼고,곧게 내리뻗은 헤드라이트가 담벼락만 무심히 비추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은규의 라이터 열리는 소리가 들려왓다.미세하게 새어 나오는 가스 소리와 담배 빨아들이는 숨소리 후 다시 달칵,정적이 찾아들었다.열린 창문 틈으로 구불구불 흘러 나가는 담배 연기가 잠시 예은의 혼을 빼놓았다.연기 끝에 닿아 있는 그의 입술이 단단히 굳어 있다는 것은 어둠 속에서도 단번에 인지 할 수 있었다. 참을 수 없었다.이런 숨 막히는 침묵과 타오르는 소유욕은...이성을 버린 채 멋대로 날뛰는 감성의 폭주도 더 이상 참을수 없었다.참기 싫었다.참고 싶지 않았다. "단독 주택이군." 오랜 침묵을 깨고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기쁜 감정,슬픈 감정,떨리는 감정.모두 최 절정에 올려놓고는 고드름 같은 말 한 마디로 단번에 깨 버리는 재주.그의 특기중 하나였다. "뭐가 잘못됐어요?" "아파트나 오피스텔에 살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야.단독 주택이라....부자군." "내 집 아니에요.친구 친척이 해외로 떠나면서 맡겨둔 거라.돌아오면 언제든 비워줘야 하는 청지기 신세라구요." 창틀에 걸쳐 있던 그의 팔이 움직여 멋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한 번 훔쳤다.헝클어진 그의 모습이 담긴 풍경은 웬만해 선 볼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만 내리지." 침묵보다 더한 압박이 은규의 말을 타고 예은의 숨통을 조였다.그의 목소리 가운데 약간의 아쉬움이라도 섞여 있었다면 의외로 쉽게 한껏 잡고 있던 그녀의 자존심을 흔들었다. "여기서 내리면...다시는 당신을 볼수 없게 되나요?" 담배를 빨던 은규의 입술이 잠시 멈칫했다.답할 말을 찾으려는 듯 그는 끊임없이 연기를 빨고 뱉으며 무심히 핸들을 만 지작 거리고 있었다. "그렇겠지." 예상했던 답이지만 웬지 맥이 빠져 버렸다.한 번,두 번,뱉을수록 더 커져가는 한숨을 삼키며 예은은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가끔....만날수 없을까요?"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정적이 감돌았다.마치 모든 세계가 그의 대답 하나를 위해 정지해 버린 양 필사적인 혼돈 속에서, 은규는 줄곧 정면을 향해 있던 시선을 에은에게로 돌렸다. "우연이라도 그러지 않았으면 해." 심장이 내려앉았다.아니,영혼이 송두리째 절망을 향해 침몰하고 있었다.거친 호흡을 뱉으며 예은은 이를 악물고 평정을 찾고자 노력했다.부서진 자존심 따윈 문제가 되지 않았다.자존심이라면 그를 만난 순간 이미 몇번이나 조각났을 터,문제가 되지 것은 마음이었다.가슴이란 건 산산조각 나도 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왜..내가 ...그렇게 끔찍할 정도로 형편 없는 상대인가요?" 다 타버린 담배를 창밖으로 던진 은규의 손이 턱 언저리에 얹혀졌다.그의입에서 쉰 소리가 흘러나왔다. "끔찍하다거나 매력 없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야.당신과 난 사는 세계가 달라,난 별로 당신에게 이득이 될 사람이 아니고, 당신 또한 내게 그래." 예은의 목소리가 한층 커졌다. "당신은 이해타산 따져가며 사람을 만나요?넌 도움이 돼,아니,절대적으로 손해가 되는 존재야..그렇게 계산하며 사귄단 말 이에요?그럼,그걸 판단하는 잣대는 뭐죠?대단하고도 엄청난 당신의 그 이성으로?사람이라는 건,만남이라는건,지속되어 가면 서 반복되어 가면서 서서히 발전해 나가는 거에요.서로에게 도움을 줄수 있는지,없는지의여부는 오랜 시간과감정의 허비가 있고 나서야 판가름할 수 있는..." "그렇게 살아왔어." 쏟아져 나오는 예은의 말을 은규가 거칠게 잘랐다. "그런 식으로밖에 살지 못해.나는." 에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신처럼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지.교과서적이고 선생님다운 생각,나도 갖고 살던 시절이 있었어.하지만 그게 통하는 환경 이 있고,그렇지 않는 환경도 있는 거야.사람에 대한 신뢰가 목숨으로 연결되는 세계에서 사는 나 같은 사람에게 당신의 모 범적인 가치관은 자살 행위와 다를 바 없으니,물러 터진 소리로 훈계할 생각은 하지마.이걸로 좀더 선이 확실해지는데?철저 히 다른 사고방식,당신과 내가 계속 관계할 수없는 결정적인 이유야." 더 이상 그의옆에 있는 것이 버겁게 느껴진 예은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나 같으면 그런 거지같은 환경,발로 차고 나오겠어요.나도 사람이고,가족도 사람이고,아니,여기저기 온통 가득한 게 사람 인데 그런 존재를 믿지 못하면서 어떻게 살아갈 수있다는 건지 모르겠군요.확실히 내가 속할 공간은 없는 세계 같네요. 귀찮게 해서 미안해요."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현관문을 향해 걷는 예은의 뒷모습을 은규는 망연히쫓고 있었다.그러는 동안 천천히 가면이 벗겨 지고 감정이 드러났다.그녀의 마지막 말이,삼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켜온 그의 심장을 찔러왔다. 한결 친근해진 어둠 속에서 은규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이로서 모든 것이 종결되었는데 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것일까.그렇게도 그녀를 떼어놓고 싶어 안달했으면서도 정작 떠나야 할 때 꾸물거리는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 같지 않은 스스로를 책망하며 그는 단번에 사이드브레이크를 내린 후 기어를 1 단으로 옮겼다.그리곤 담배를 창밖으 로 내던지는데,우습게도 그녀에게 주었던 담배 케이스가 생각났다.인터뷰에 대한 증표로 주었다 받지 못한 그 케이스는 그 녀와의 대면을 피하기 위해 버려두기엔 너무 큰 의미를 내포한 물건이었다.


"젠장." 어쩔수 없이 밖으로 나온 은규는 망설이는 발길로 현관까지 걸어가 초인종을 눌렀다.한참 후에야 대답이 들려왔다. "누,,,,,구세요." 심한 헐떡임을 들은 것도 같았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나야." "돌아가요." "담배 케이스를 받으러 왔을 뿐이야." "나중에 줄 테니까 지금은 돌아가요." "나중은 없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쿵쿵대는 발소리,뭔가 부딪히는 소리,옅은 신음 소리가 거푸 이어지고 나서야 찰칵 하고 문이 열렸다. "뭘 그렇게 꾸물..." 순간,예은의 뒤쪽에서 반짝이고 있는 날카로운 쇠끝이 보였다.은규의 얼굴이 팽팽하게 경직되었다.

chapter33 ==친애하는 조직 폭력배님께. 그 큰 머리에 지식을 좀 쳐넣으시길 요구합니다. 이 몸이 흑사의 애인이라니요.어디서그런 발상을.... 안경도 하나 옵션으로 맞춰드릴까요?== -에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여기 있으니까 어서 가지고 돌아가요." 에은의 하얀 손에 들린 담배 케이스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은규는 재빠르게 그녀의 눈동자 속 진심을 살폈다.에은은 언제나 상대방과 정확히 시선을 맞추는 여자였다.입술을 잘근잘근 뜯거나 불안정한 숨을 뱉지 않았다. "커피 한 잔 하고 싶은데." 뭔가 마음에 걸려 일부러 시선을 끌자,그나마 가장하고 있던 예은의 표정이 허물어지며 식은땀이 목선을 타고 줄줄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다음에요.지금은 너무 피곤하고 정신이 없어서..." "다음은 없어." 참다못한 예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귀찮게 왜 이래요?어서 가지고 돌아가요."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맞부딪힌 두 쌍의 눈동자가 다급하게 번뜩였다. '돌아가요.제발...' 그녀의 눈동자가 속삭이는 듯햇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돌아가 줘요.' 시간이 지체될수록 에은의 평정은 눈에 띄게 흔들렸고,정체를 알수 없는 긴장감 또한두사람 주위를 감싸고돌았다. 뭔가가 있다.


주머니 속에 안착해 있던 은규의 손이 빠져나왔다. 분명히. 결론을 내린 은규는 에은의손에 들린 담배 케이스를 받아드는 척하다 대뜸 그녀의 팔을 움켜쥐었다. "앗!" 미처 비명이 새어 나올 틈도 없이 은규는 예은을 품에 끌어안는 동신에 문을 활짝 열며 힘껏 발을 찔러 넣었다.쿵,누군 가 나가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이내 장정 두명이 더 튀어나오자,은규는 재빠르게 예은을 등뒤에 가두곤 온몸을 바짝 경직시켰다. "이거였군." 낮고 깊은 울림을 뱉는 은규의 입술이 살짝 비틀렸다.등뒤로 착 붙어 옷깃을 붙들고 있는 예은에게서 미세한 떨림이 전 해져 왔다.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당당했던 그녀가 떨고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왠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왠 녀석들이야." 가장 덩치 좋은 사내가 한 발 나서며 빈정댔다. "알 거 없잖아.곧 죽을 녀석이." 은규의 옷깃을 쥔 예은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비열하게 빙글대던 사내는 어느 틈에 잭나이프를 꺼내 장난감이라도 되는 양,손 안에서 굴리기 시작했다. "원래는 여자를 데려갈 생각이었지만 직접 나타났으니 계획을 수정해야겠구만,황은규,같이 좀 가줘야겠어." 말끝에 살벌할 정도의 힘이 들어갔다고 생각한 순간,사내의 손에 들린 잭나이프가 번뜩이며 은규의 급소를 향해 들어왔다. 무방비 상태로 떨고만 있던 예은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벽 쪽으로 피했고,은규는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게 몸을 굽혀 칼날을 피했다. 숨 막히고 긴장되는 몸싸움이 이어졌다.세 명이나 되는건장한 사내들인데도,그들은 은규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다급하고 살기 어린 사내들의 실없는 주먹이 연거푸 빗나가는 반면,여유와 힘이 실린 은규의 주먹은 언제나 원하는 곳을 향해 정통 으로 먹혀 들어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가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도 에은은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어둠 뒤편에서 칼날 이 오가는 실제 상황 속 관찰자가 되고 보니,보이지 않는 어떠한 끈에 묶여 버린 것처럼 도총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온갖 감정을 담아 쥐어진 주먹들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살과 살이 마찰하는 소리,쓰러지고 일어서고 다시 부딪히며 만 들어 낸 소음들이 한 지점에서 만나 예은의 귀청을 어지럽혔다.은규는 체중이 실린 긴 다리 하나로 위압적인 칼날마저 무 용지물로 만들어 버렸고,우르르 달려드는 비겁한 사내들에게 주먹세례를 퍼부으며 싸움의 승패를 가르고 있었다.


마침내 괴팍한 신음 소리와 함께 헉헉대던 사내들 모두 의식을 놓고 바닥에 널브러졌다.그중 하나에게 다가간 은규는 거 칠게 멱살을 움켜쥐고서 조용히 읊조렸다. "족제비가 보내서 왔냐." 고통에 절은 눈동자를 하고서도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상대를 향해 은규가 주먹을 한 번 더 날려주자,사내는 겨우 고개를 향해 은규가 주먹을 한 번 더 날려주자,사내는 겨우 고개를 주억거리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그대로 정적이 찾아들었다. 공포와 긴장과 살기를 포함한 침묵이... 은규는 생각에 잠겨 잇던 몸을 일으켜 천천히 돌아섰다.그제야 예은은 귓전을 맴도는 거친 숨소리가 자신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자그마치 장정을 셋이나 상대한 사람 치고 그는 놀라울 정도로 가지런한 호흡을 뱉고 있었다. 심지어 머리카라고가 옷매무새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괘...괜찮아요?" 바쁘게 숨을 몰아쉰 탓에 허스키해진 목소리로 그녀가 묻자,은규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당신은." 얼떨결에 예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와." 예은의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은규는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일단은 그녀를 이곳에서 대피시키는 것이 최우선 이라는 생각뿐 이었다.멀거니 있다 한 방 먹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솟았고,천일도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예은의 존재를 알아냈다는사실 또한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그런 것들을 따지기 이전에 이 위험한 공간에 더 이상 그녀를 두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생각은 그 후에 해도 충분하다.일단 그녀가 안전하다고 느낄수 있는 곳으로 옮겨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현관문을 나서던 은규는 문득 예은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그녀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박혀 잇었다.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숨을 몰아쉬는 얼굴에 뭘 어찌해야 좋을 지 모를 난감하과 두려움이 고스란히 숨겨져 있었다. "뭐야, 왜 그래?"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은규가 거칠게 묻자,에은은 흐릿해진 눈동자로 그를 마주 보며 겨우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어요." 그러나 목소리가 작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눈살을 찌푸리며 한 발자국을 옮겨오는 은규에게 좀더 두렷해진 에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찔렸,,,,,다구요..칼에..." 은규의 마음에 여유를 잃었다.그녀를 차로 데려온 후 급한대로 셔츠를 찢어 지혈을


시작했지만,생각과호흡은 손놀림만큼 이나 바쁘게 굴러가고 있었다. 상처가 꽤 깊은 편이긴 했어도 급소가 아니었기에 천만다행이었다.목숨이나 건강을 해칠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앗 다.하지만 칼에 찔린 것만으로도 그녀의 정신 상태는 이미 심하게 위협받고 있을 터,저도 모를 감정의압박에 은규의 입술 이 악 다물렸다. 그들이 어떻게 예은의 존재를 알아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그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수야뿐.새어 나갔을 가능 성도 0%에 가까웠다.혹,믿고 있는 직계 후배들에게만큼은 그의 부재를 설명하기위해 약간의정보를 주었다 치더라도 매사에 신중하고 입이 무거운 수야가 긴장을 풀 상대였다면 더이상 정보가 확산되지는 않았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런데 천일도 쪽에서는 이미 모든 것을 간파하고 잇었다.그것은 배신자의 존재가 그들이 철저히 믿고 있는 사람 중 하나 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었다.쉽게 완화되지 않을 만큼의 엄청난 폭격이 냉철하기만 하던 은규의 머리를 거푸 내리쳤다. "아....파요." 심각한 생각에 잠겨 잇던 은규의 귓가로 예은의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살살 좀 하면 안 돼요?화끈거리고 쓰라려서 죽을 것 같단 말이에요." 혼자 생각에 너무 골몰했던 나머지,손에 지나치게 힘이 실린 모양이었다.그는 힘을 풀고 셔츠 끝을 두 갈래로 찢어 매듭을 만들었다. "이제 됐어.일단 지혈은 된것 같으니까 내일 아침 병원에 데려다 줄게." 고개를 끄덕이며 보조석에 몸을 묻은 예은은 고단한 한숨을 내쉬었다.은규는 널브러진 옷자락과 잡동사니를 뒷좌석에 던 져 넣고서 시동을 걸었다.차체가 미세하게 부들거리며 넓은 도로로 기어 나갔고,약간 문을 열자 기분 나쁜 공기와 비릿한 피 냄새가 한꺼번에 코끝에서 흩어져 버렸다. "어디로 가는 거에요?" 한참 후에 에은이 웅얼거렸다. "내 아파트." "친구 집에 가 있으면 돼요.정 아니면 부모님 집에라도..." 에은의 정색에 은규는 창문을 조금 더 열며 말을 막았다. "당신 집을 알아낸 녀석들이야.친구나 부모님 집이라고 못 알아낼 것도 없잖아." 순식간에 예은의 얼굴 위로 공포가 스며들었다. "그럼...내가 부모님 집에 간 줄 알고 쳐들어가면 어떻게 하죠?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부모님들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죽는 소리 좀 그만 해." "당신이 알아서 한다구요?" "그래 내가 알아서 해." 이상하게도.그의 단 한 마디에 숨통을 조이던 두려움이 흩날리는 담배 연기마냥 사라져 버렸다.예은은 깊은 고뇌가 서 린 은규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줄곧 이해할 수 없었던 질문을 했다.


"그 사람들이 왜 날 노리는 거죠?" "내 여자라고 착각한 거겠지." 휘둥그레진 에은의 눈동자 속으로 분노가 섞여 들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에 내가 위험에 노출된 거란 말이에요?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엄청 멍청한 자식들이네. 어딜 봐서 내가 당신 여자라는거에요?기가 막혀서." 다시금 원기를 회복해 중얼 거리는 에은을 보자,은규는 막혔던 가슴 한쪽이 뚫리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그리고 공포에 얼어붙은 그녀의 눈동자와 숨죽인 채 꾹 다물린 입술을 대면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부담스러운 일인지를 자연스레 납득하 고 있었다.그녀는 웃는 모습이 어울리는 여자였다.소리 지르고 화내고 토라지는모습도 제법 근사한 여자였다. 지켜주고 싶었다.그녀의 그런 매력들을.아니,지킬 것이라 다짐했다. 은규는 잠든 에은을 지켜보며 수야를 기다리고 잇었다.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인지 그녀는 줄곧 어지럼증을 호소하다 겨우 잠이 들었다. 자신의 침대 위에 에은이 누워 있다는 사실에 분노도,두려움도 아닌 묘한 기분이 들어 그의 발을 침대 맡에 꽤 오래 묶어 두었다. 서울에 올라오기만 하면 이 관계를 깨끗이 청산할 수 잇을 것이라 믿었다.그녀는 그녀대로,그는 그 나름의 일상으로 돌아 가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뒤틀리고 말았다.은규는 다시 에은을 떠맡지 않으면 안될 상황 에 봉착해 버렸고,그녀는 곁에 두기 버거운 존재였다. "형님." 문소리와 함께 그 음성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수야의 목소리가 들려와 그를 현실로 돌려 놓았다.수야의 눈동자가 침대 위 에 있는 에은을 훑었다. "녀석들이 움직였군요." 언제나 단호하던 수야의 눈빛이 살며시 흔들렸다. "저 여자와 나에 대해서,그리고 오늘 올라온다는 사실을 어딘가에 흘린 적 있냐." "죄송합니다.믿고 있는 녀석들에게만 살짝 귀뜀한 적이 있습니다." "일단 내 입에서 나간 말은 더 이상 비밀이 될수 없다.말을 옮기다니,너답지 않은 실수를 했구나.이제부터는 혼잣말도 조심하고 누구도 믿지 않도록 하자.살벌하지만 일단은 그렇게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어." "죄송합니다.형님.면목 없습니다." 굳어 버린 수야에게 은규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난 일은 주워 담을 수 없고,이미 일어난 일에 자꾸 미련을 두는 것 또한 내 방식이 아니다.이미 일어난 일에 자꾸 미련 을 두는 것 또한 내 방식이 아니다.잘 알고 있겠지." "예." "앞으로? 일을 좀 생각해 두었다.소식을 끌어다 주는 얼간이가 저 여자를 내


애인쯤으로 해석한 건지,천일도 졸개들이 집에서 매복을 하고 있더구나.납치해서 나를 끌어들일 생각이었을 거야." 표정 없던 수야의 얼굴로 거센 분노가 잠겨 들었다. "아주 단순한 생각이군요." "단순한 방법이 때로는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다.어쨌든,녀석들은 계속 꼬리를 찾고 다닐 거야.여자의 부모님 집이나 친구 집등을 철저히 관리해 줘라." "예.형님." 어느새 다 태운 담배를 비벼 끄며 은규는 금방 새 담배를 빼어 물었다.평정을 잃지 않고 무덤덤하게 얘기하고는 있지만, 재떨이를 가득 메운 수북한 꽁초들이 그의 초조함을 대변하고 있었다. "여자는 어떻게 하실 작정이세요?" 처음으로 은규가 대답을 회피했다.대신 침대 위에 고이 잠든 예은을 얼마간 바라보더니 피식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글쎄.어떻게 하면 좋겠냐." 생각에 잠긴 수야의 눈동자가 조심스레 은규의 얼굴을 살폈다.보스에게서 지금껏 단 한 번도 풀어진 표정을 본 기억이 없었는데,오예은이라는 여자는 놀라울 만큼 많이 그에게서 새로운 면모를 끌어내고 있었다.아무도 모르는 사이,그녀가 보 스의 가슴속 빈자리로 조금씩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아닐까. 수야는 조용한 어조로 은규를 불렀다. "형님." "왜." "여자를 지키고 싶으시지요?" 담배를 빨던 은규의 입술이 멈칫했다. "지키고 싶은가.아닌가의 여부는 중요하지않아.나 때문에 위험에 빠졌으니까 지켜주는 게 도리겠지." 수야는 그대로 에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자신에게 닥친 위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평온한 얼굴이 어찌 보면 순수 한 아이와도 같아 보였다.수야는 굳혔던 입매와 어깨의 힘을 풀었다.저도 모를 순간 긴장을 풀게 만드는 여자. 형님도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좋은 여자 같습니다.순진하고 발랄하고 상냥해 보여요.솔직하게 말씀 드리자면,여자가 다치는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가 않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냐." "아직 여자를 지킬 방법을 찾지 못하셨지요?" 은규는 침묵으로 긍정을 대신했다. "그리고 때론 단순한 방법이 가장 효력적일 수 있다고도 말씀하셨지요?" 팔짱을 끼우며 은규는 수야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렇다면 답은 이미 나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점만 말해." "여자와..." 겸손한 자세로 몸을 숙이며 내놓은 수야의의견에,은규의 이마위로 깊은 주름이


파였다. 낯선 침대에서 낯익은 향기가 난다? 예은은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심플하고 적당한 가구 배치로 꾸며진 넓은 원룸이 흐릿한 시야로 잡혀왔다.침대 역시 지나치다 싶을 만큼 넓었고,은규가 즐겨 쓰는 비누 향내도 풀풀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 사람 집에 온 거구나.나는..' 지난밤 일들이 꿈이 아니었다는 깨달음에 심장 박동이 빨라져 버렸다.마침 오른편에 있던 문이 열리며 은규가 모습을 드 러냈다. 젠장,멋져도 너무 멋졌다.샤워를 한 모양인지 금방 침대에서 맡았던 향기가 그와 욕실 내부에서 뿜어져 나왔고,헝클어진 머리카락들이 또 다른 면모를 드러내 과시하고 있었다.어찌 보면 소년 같기도 하고,또 어지 보면 섹시하기도 한.... "일어났군." 수건으로 대충 머리카락을 털며 그가 흘낏 시선을 옮겨오자,예은은 넋이 빠져 겨우 고개만 주억거렸다. "팔은?" 자기장에 이끌린 자석처럼 예은은 깨끗한 붕대로 감싸인 팔을 내려다보았다.어젯밤까지만 해도 곳곳이 묻어 있던 핏자국 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어?어제 분명 셔츠로 대충 묶었던 것 같은데.."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그가 다시 교체해 주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예은은 괜히 기분이 좋아 헤죽거렸다. "뭐,그다지 아프지는 않아요." "다행이군." 그는 수건을 아무렇게나 소파 위에 던지며 바로 담배를 빼어 물었다.촉촉한 머리카락과 목 언저리에 맺힌 물방울,솔솔 풍 겨오는 산뜻한 향내에 그만 취해 버릴 것만 같았다. '오늘 따라 왜 저렇게 페로몬을 팍팍 풍기는 거야?' 목이 마르고,심장이 쿵쿵거리고,혈압이급상승하고,호흡이 빨라지는 기분. '제발 가까이 오지만 말아라!'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그가 적당한 선에서 멈춰 선 후 더 이상 다가오지 않자,안도가 아닌 실망감에 젖는 자신이 창피해 예은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겠지."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아찔함을 느끼던 에은은,사무적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곤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당신 애인이라고 오해한 상대조직이 미끼로 이용하기 위해 납치하려고 했다..맞죠?" 위기감이라곤 전혀 없는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은규는 일단 무시하기로 햇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 투성이지만,어쨌든 상황이 만만치는 않아." "뭐,내가 당신 애인이 아니라는 것만 증명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어차피 아무 관계도


아니잖아요." "멍청한 소리만 골라 하는군." 은규는 높아지려는 언성을 가까스로 자제했다. "그걸 어떻게 증명할 건데?" "그거야..." "그들은 나와 달라.놈들한테 끌려가면 당신은..." 차마 뒷말을 잇기 힘들었다.예은이 그들에게 해코지를 당한 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덜컥대는 일이었다. "당신이 내 여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나 때문에 위험에 처했다는게 핵심인 거지.그리고 그건 내가 당신을 지켜 야 한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거고." 은규의 심각한 표정을 보며 예은은 얼굴에 담았던 여유를 지우고 무릎을 끌어 안았다. "정말 심각한 상황인가 보네요." "심각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누구도 칼에 맞지 않아." 세운 무릎에 턱을 대고 한숨을 내쉬는 그녀가 유난히 작아보여 은규는 못내 언짢아졌다.일을 저지르기 전에 조금만 더 신중을 기했더라면 그녀는 지금도 왕성한 욕구로 소설을 집필 흔들릴 위기에 처해 버렸다는 사실이 은규의 양심을 휘저었다. 앞으로 그가 상대해야 할 적들은 사회의 법 테두리에서 이미 벗어나 존재들이었다.그 모든 상황의 중앙에 그녀가 던져져 버렸고,번갈아 찾아드는 죄책감과 책임감이 자꾸만 은규를 선택의 기로로 내몰았다.급기야 단칼에 막아 버렸던 수야의 제 안이 머리 속을 헤집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습관적인 동작으로 은규는 담배를 빨아들였다.니코틴과 연기가 심장을 감싸고돌며 명철한 이성과 심장을 한번에 묶어두 는 기분이었다.그래서 어쩌면 인생 전부를 걸어 후회할지도 모를 제안을 하고 말았다. "할 생각 있어?" 맑은 눈동자에 의문을 담고서 그녀가 그를 마주 보았다. "뭘 말이에요." 몇 초,몇 분,혹은 몇 시간의 분량만큼이나 길게 느껴지는 침묵 후 은규가 짧게 말햇다. "결혼." chapter34 ==<특보!기네스 신기록> 세상에서 가장 무드 없는 청혼 남에게 코 낀 여자는 누구? 나이 27 세,미혼,대한민국 출신의 다 장르 작가.오예은!! 웃을 일이 아닌데 자꾸만 웃음이 난다.하하하.....===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물론이죠!" 망설님 없는 대답에 다소 놀란 은규는,미심쩍은 기색을 담아 피하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진심이야?"


"진심이고 뭐고 할 게 뭐 있어요?" 그의 말문이 막혀 버렸다.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일시적인 열정 이상은 아 니라고 생각했었다.게다가 그의 실수로 이런 상황까지 오고 말았는데 말을 꺼낸 지 1 초도 지나지 않아 들려온 대답이 이 모양이니,확실히 원하고 기대하던 반응은 아니었다. "하겠다는 거지...."결혼이라는 걸." 제정신이냐며 있는 대로 소리나 칠 줄 알았다.그러면 일단 자신이 할 도리는 다 했다는 만족감에 젖어,밀려드는 죄책감을 훌훌 털어 버릴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햇다.하지만 의외의 대답에 달아날 구석을 잃어버린 은규는 당혹스런 시선으로 에은 을 바라보았다. 결혼...결혼이라... 갑자기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생각해 보면 애초부터 이 상투적인 단어에 큰 의미를 둔 적도 없 었다.그저 자신의 일에 득이 될 리 없다는 판단에 언제까지고 배제해 왔던 것뿐이니 못할 이유도 없었다. "좋아,하지.결혼.." 결재 서류에 사인하듯 내린 은규의 결단에,예은은 눈을 동그렇게 뜨고서 반문했다. "네?" 그녀의 얼굴 가득 황당하다는 기색이 만연했다. "결혼하자고." "당신이,아니면 내가?" 이쯤 되고 보니 은규의 얼굴에도 슬슬 짜증이 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혼자서 하는 결혼도 잇어?" 예은이 훅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그러니까,당신 말은,,,,,나와 당신이..." 눈을 깜빡이며 더듬거리던 에은은 겨우 나머지 말을 토해냈다. "결혼하자는 거에요?" 완벽한 동문서답에 은규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금방 동의해 놓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 거야." "결혼할 생각 있냐고 물었지,당신과 하자고 한 게 아니잖아요.난 앞으로 계획이 있다는 의미에서 대답한 거라구요." 은규는 할 말을 잃고 에은의 다채로운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하겠다는 거야.말겠다는 거야?" "당신과는 안 해요?"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지 예은은 무릎 위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 참,기가 막혀서...생애 처음으로 받은 프로포즈가 뭐 이 따위야?무슨 적선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때 같았으면 혼자 종알대는 그녀의 모습을 잠시 그대로 즐겼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조직체들과 손을 맞잡은 천일도가 또 다른 일을 벌이기 전에 그도 대책을 세워야 했다.무엇보다 아직 윤곽조차 잡지 못한 소식통의 존재가 거슬려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은규는 거칠게 머리를 ?러 올리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가지만 묻겠는데 살고 싶어.죽고 싶어?" "제발 말 같은 소리 좀 해요.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에요?" "당신과 난 다른 사람들처럼 낭만적인 기분에 젖어 결혼 얘기 할 처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겠지.우리가 결혼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해.당신이 다치지 않기 위해서야." "훗!" 예은이 코웃음을 쳤다. "당신과 결혼하면 내가 안전하다는 거에요?미안하지만 별로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데요?" 그녀의 빈정거림에도 은규는 짜증을 잘 참아냈다. "제발 현실을 좀 직시하지 그래?이제부터 당신은 나한테서 떨어질 수 없게 됐다고." "꼭 결혼해야만 당신 옆에 있을 수 있는 건 아니죠." "기한도 없는 시간 동안 한집에서 생활해야 할 뿐 아니라 어딜 가든 붙어 ���녀야 돼.나나 수야의 경호 없이는 바로 앞 마 트에도 갈 수 없이 대부분을 이 집에서 지내야 한다고." 처음 계획과는 다르게 자신이 왜 이렇게 필사적인 자세가 되었는지 알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인내심을 모두 꺼 내 그녀를 이해시키고자 노력했다. "무엇보다 현재 상황은 내 동생들에게조차 극비 사항이야." 예은의 눈동자에 있던 단순한 의문이 의혹으로 바뀌었다. "왜요?" "말할 수 없어." "날 신뢰하지 못한다면 나도 당신을 신뢰할 수 없어요." 은규는 잠시 예은의 앙다물어진 입술을 바라보며 갈등하다 포기의 한숨을 내쉬었다. "식구 중에 이곳 정보를 빼돌리는 녀석이 있어." 예은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진짜 스파이?"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다고만 예측할 뿐,누구인지 단서조차 잡지 못했지.아무도 믿을 수 없는 거지같은 형국이라,되도 록이면 조용히 일을 진행할 수 밖에 없어.지금껏 여자를 한번도 곁에 둔일이 없기 때문에 녀석들은 갑자기 나타난 당신의 존재를 궁금해할 거고,난 이런저런 설명 없이 당신을 곁에 둘 구실이 필요해." 예은이 심각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래도 그렇지.결혼이라는 건..." "굳이 결혼이 싫다면 자연스럽게 동거하는 사이로 행동해도 상관은 없겠지.솔직히 말해 나로선 그쪽이 훨씬 편하지만 당 신,나와 동거하는 사이로 보여져도 괜찮겠어?" 예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당연히괜찮지 않죠!지금껏 늑대 같은 남자들에게서 철저히 나 자신을 지켜왔는데 동거라뇨.깨끗한 사생활은 내 자존심이 자 명예였다구요.그런데 당신 때문에 그걸 깨 버려야겠어요?아니,내가 왜 그런 희생까지 감수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은규의 정곡을 찔렀다.그는 자신의 한 실수에 대한 대가로 여기면


그만이었지만,예은의 입장은 분명 달랐다.납치 당했다가 풀려난 것도 모자라 그 상대와 결혼이나 동거를 해야 할 판이니,이 얼마나 당치도 않은 얘기인가. 그는 동거라는 것에 그다지 크게 신경쓰지 않았지만 그녀는 입장이 다른 듯했다.하긴,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 혼전 동거 라는 건 색안경의 대상이 되는 일이니 연애 무경험의 여성에게는 충분히 무리수로 작용할 수도 있는 문제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혼하자고 하잖아." 은규는 최대한 예은의 명예를 지켜주고 싶었고,합법적인 관계를 맺어 잡소리가 생기지 않길 원했다. "당신한테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결혼한다고 해서 지금과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남편 형세는 하지 않을 거고,당신 역 시 아내로서의의무는 하지 않아도 돼.그저 나 자신에게 암시가 될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형식적이고 계획적이 될수밖에 없지만,그래도 당신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면 난 단순히 내가 한 일에 대한 책임감 외에 조금은 필사적인 감정으로 당신 을 지키게 될 테니까." 예은은 잠시 은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진지했다.그와 만난 후 처음 보는 간절함도 얼핏 스며 있었다.더 이상 선택의 여지는 보이지 않았다.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지금은 주어진 현실 안에서 모든 것을 결정 해야 될때였다. "당신은 나한테서 정말 많은 것들을 빼앗아 가네요.첫 키스,낭만적인 프로포즈,우습겠지만 그건 여자들이 갖고 있는 최대 의 환상들이라구요." 은규가 미세한 한숨을 내쉬며 놀라울 만큼 진심이 담긴 사과를 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완벽히 저자세로 나오는 그의 행동이 예은에게서 모든 전의와 원망을 앗아가 버렸다.그녀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최대한 가볍게 웃으며 분위기를 풀었다.그렇게 하지 않으면 울음을 터뜨리게 될 것 같았다. "확실히 지켜줄 수 있어요?" 대답없이 살짝 고개만 끄덕였을 뿐인데도 예은은 묘하게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을 느꼈다.마치 천천만만의 군대를 얻은 듯,두려움과 걱정도 일시에 사그라졌다. "정말 남편 행세 같은거....안 할 거죠?그러니까 내 몸에 손을 댄다거나 하는..." 예은의 조심스런 물음에 은규는 장난기 있게 눈을 빛냈다. "당신이란 여자,그렇게 매력 있지 않다고 얘기했을 텐데." 할 말을 잃고서 예은은 은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정말 얄미운 남자라니까. "뭐?너 제정신이야?" 유희의 목소리가 고막을 위협할 정도로 크게 울리자 예은은 얼굴을 찡그렸다.은규와의 결혼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어 전화를 건 지 1 분도 지나지 않아 그냥 끊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다니,정말이지 대단한 친구였다. "제정신이니까 걱정 붙들어 매." 유희의 목소리에서 염려가 묻어났다. "어쩌려고 그래.그 사람은 황은규야,황은규!" 그가 마치 악덕 거물처럼 묘사되자 예은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잔인하고 무식한 조폭아니야.아마 너보다 책도 훨씬 많이 읽을껄?"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완전히 뻑 갔구나?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래?인터뷰 한다고 꽁무니 쫓아다니다가 쪽지 놓고 사라지더니 이젠 결혼까지? 너 혹시 그동안 그 사람하고 같이 있었던 거 아니야?" 한순간 모든 것을 털어놓을까도 생각했지만 예은은 가까스로 참아냈다.사랑 때문에 하는 결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가만 있지 않을 친구의 성격은 물론,위험한 이야기는 대체로 흘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여간 너한테 제일 먼저 보고하는 거야.축하는 바라지 않지만 악담은 하지 마."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한풀 꺾인 목소리가 들려왓다. "너,진짜 그 사람 사랑하는 거야?" "그래." 푹 하고 양심이 찔려온다. "그 사람도 당연히 같은 감정이겠지?" "당연한 걸 왜 물어!" 찔린 양심에서 피가 솟구쳤지만,예은은 천연덕스럽게 웃어 보였다. 사업 제휴와 다를 바 없는 결혼에 합의한 후,두 사람은 예은의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일산으로 향하고 있었다.그는 평 소 여러 스타일의 옷을 입곤 했지만,오늘은 누구도 아닌 자신의 부모님을 위해 정장까지 했다는 사실이 자꾸만 그녀의 어깨에 힘을 보탰다. 긴장을 잊어 볼 생각으로 지나치는 가로수의 숫자를 세고 있던 예은은,얼마 지나지 않아 또 옆자리를 흘낏거리고 말았다. 여전히 멋졌지만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빠진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언제나 입에 물려 있던 하얀 막대가 보이지 않았다.이 엄청난 스모커가 거의 반나절을 담배 없이 보낸다는 건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이상하네요." "뭐가." "이거 말이에요 이거." 예은은 손가락 두 개를 입가에 대며 담배를 피우는 시늉을 해 보였다. "정말 어색하군."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요." "원래 어른 만나러 갈 때는 안 피워." "오...당신도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해요?의외로 쓸모 있는 구석이 있네.뭐,솔직히


말해서 오늘 당신 스타일 꽤 멋져요. 정장도 그렇고,그렇게 머리 다 올리니까 엄청 분위기 있어 보이는 게 꼭 젊은 대부 같거든요." 예은이 치켜세우기 시작하자,놀랍게도 그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햇다. "입 다물어." 괜히 창문을 열고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는 그의 행동에 예은은 착한 아이에게 상이라도 주는 양 머리를쓰다듬어 주고 싶 은 이상한 충동을 느꼈다. '그랬다간 아마 날 죽이려 들겠지?' 그렇게 죽고 싶진 않았으므로,예은은 입술을 막고 킥킥대기 시작했다. 그녀의집은 빨간 벽돌의 평범하고 아담한 주택이었다. 상기된 표정으로 앞서 걷는 예은을 쫓으며 은규는 분주히 시선을 움직였다.넓은 앞마당 구석에 일궈놓은 밭이 인상적이었다. 고추,방울토마토,상추,파 등등 거의 소꿉장난 소준으로 심어놓은 채소들이었지만,그것들로 인해 정말 사람사는 공간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초인종 소리에 은규의 시선이 다시금 예은에게로 돌아갔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한쪽 발을 까딱거리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철부지 소녀 같았다. 결혼을 목적으로 여자의 집을 찾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지.꼬일대로 꼬인 상황을 생각하자 담배 생각이 간절해진 은규는 허전한 손을 주머니에 가두고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그러나 굳게 닫힌 문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자,난감한 표정으로 예은이 돌아 섰다. "아무도 없나 봐요." "연락 안 했어?" "했는데,우리가 너무 일찍 왔잖아요.잠깐 어디 나가신 것 같은데....아,맞다!" 뭔가 생각해 낸 것인지 그의 옆을 지나 텃밭으로 달려가 예은이 밭 주변에 둘린 돌덩이 하나를 힘겹게 들어올렸다. "있네!" 그녀의 손에 딸랑이는 열쇠 꾸러미 하나가 들려 있었다. "여기가 비밀 장소거든요.여분의 열쇠는 항상 이곳에 보관해 두곤 했는데,여전하네요." 비밀 장소,그의 집은 언제나 가정부가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필요치 않았다.어느 정도 자란 후로는 집에 들 어가지 않는 날이 더 많았고,아버지라는 인간은.... 달칵,문 열리는 소리에 그는 상념을 거뒀다.그녀는 이미 집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얼마 만에 오는 거야?역시 내 집이 최고다!" 그 역시 모든 잡념을 접고서 활짝 열린 문으로 발을 들였다. "잠깐 둘러보고 있어요.방에 좀 갔다 올게요." 예은은 급히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고,은규는 낯선 집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마땅히 할 것이 없어진 그는 여유롭게 발을 옮기다가 한쪽 벽면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흥밋거리를 발견했다.꼬마에서 대학생까지


그녀의 성장 과정이 모두 담겨 있 는 사진들이 걸려 잇었다. 지금 모습 그대로를 축소시켜 놓은 듯,예쁘고 아기자기한 얼굴들이 그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배꼽이 다 나온 비키니 차림으로 울고 있는 사진은,어서 찍고 달려가 안아주고 싶은 사진사의 마음 탓인지 초점이 약간 흐트러져 잇었다.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그는 사진들을 향해 바짝 다가섰다.그때 뒤쪽에서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낮은 목소리가 들 려왔다. "웬 놈이야?" 이런. 느낌만으로도 알수 잇었다.자신의 등에 반갑지 않은 물건이 겨누어져 있다는 사실을.. chapter35 ==사랑하는 부모님께. 쓸데없는 참견,질문,돌발행동 탓에 평생을 애물단지로 살아놓고 결국은 결혼식까지 사기를 치게 됐으니... 불효자는 그저 웁니다!!==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웬놈이냐고 물었어." 침착하고 낮지만 명령에 익숙한 목소리가 은규의 등을 매섭게 찔렀다.상대로 하여금 묘한 위축을 느끼게 하는 압박의 완 급 조절 역시 보통 남자의 솜씨가 아니었다. 한 번도 적이라고 생각되는 상대에게 등을 보인 일이 없던 그가,뒤로 다가온 사내의 기척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예은의 사진에 깊이 빠져들고 말았다.자리가 자리인 만큼 시끄러운 일은 막고 싶었지만 선택의 폭이 넓지 못했다.은규는 온몸의 경계를 바짝 치켜세우고 사내의 빈큼을 기다렸다. "왜 대답이 없어?어떤 녀석이길래 내 여자 사진을 훔쳐보고 있냐고." "내 여자?" 민감한 단어에 은규는 제 처지도 잊고 슬쩍 고개를 돌렸고,동시네 조금더 심한 총구의 압박이 전해왔다.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정말 당겨 버릴지도 몰라." 다급한 시선으로 은규는 예은을 담고 있는 방문을 바라보았다.안 그래도 복잡한 상황에 그녀마저 합세한다면 정신이 흐 려지는 것은 물론,일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질 가능성이 농후했다.그러니 예은이 나타나기 전에 침입자를 처리해야만 했다.하지만 공교롭게도 최적의 타이밍에 예은이 방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미안해요.많이 기다......어?" "젠장!" 깜짝 놀라는 예은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은규는,잠시의 틈을 이용해 팔꿈치로 사내의 가슴을 한 번 가격한 후 재빨 리 돌아서 발을 뻗었다.강한 반동으로 뻗어 나간 그의 발이 정확히 사내의 손에


닿자,총은 포물선을 그리며 현관문 바로 앞에서야 떨어졌다.쐐기를 박을 셈으로 사내의 면전을 향해 막 움켜쥔 오른 주먹을 강하게 내지르려는 찰나.예은이 소리 치며 앞을 가로 막았다. "그만 해요!" 단단하게 쥐어진 은규의 주먹이 그녀의 얼굴 앞에서 정지했다.온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무슨 짓이야?저리 비켜!" 은규는 날카로운 눈동자를 들어 예은이 보호하고 나선 사내를 바라보았다.주먹으로 살아온 사내가 틀림없었다.흑사로 통 용되는 칼날 같은 시선을 덤덤하게 마주 볼수 있는 당당함,그것은 평범한 사내가 보일 만한 방응이 아니었다. 게다가 잠시 후엔 흥미롭다는 듯입술 끝을 움직여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하,웃어? 분노로 배나 힘이 들어간 은규의 주먹에서 뼈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사내의 손은 어느새 예은의 어깨에 아주 친근히 놓여 있었다, "그 손 치워." 신원을 알수 없는 사내가 예은을 만졌다는 사실에 감정의 브레이크를 풀어낸 은규는 움켜쥔 주먹을 그대로 날렸고,놀란 예은 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은 바람에 미처 피하지 못한 칩입자에게 정통으로 먹혀 들어갔다. 실로 엄청난 소리를 내며 사내가 무너져 내렸다. "오빠!" "오빠?" 예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요!우리 오빠라구요!" 엄마에게 꾸지람을 듣게 된 말썽쟁이 소년처럼,은규는 커다란 사내에게로 시선을 내렷다.오빠라고?이 남자가?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오누이를 번갈아 보며 그는 얼굴을 잔뜩 구겼다. "이게 웬 소란이야?" 그리고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들려온 목소리에 현관 족으로 시선을 돌리자,손을 꼭 잡고 서 있는 중년의 남녀가 보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한꺼번에 예은의 가족 모두와 대면하게 된 은규는 잠시 양해를 구하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와 해명을 요구했지만 예은은 다 짜고짜 언성부터 높였다. "무슨 남자가 뭐든 주먹으로만 해결하려고 해요?사정은 알아보지도 않고?" "먼저 총을 들이민 건 그 자식이야." "그 자식이 아니라 우리 오빠에요!" "오빠가 집에 있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잖아!" 결국 은규도 참고 있던 화를 터뜨렸다. "다짜고짜 총을 들이대는데 어떤 사람이 사정부터 알아보려고 하겟어?누군가 당신과


내쪽을 힐끔거리기만 해도 얼굴이 굳어 지는 판국에 총이 말이나 되냐고!당신은 지금 상황이그저 재미있고 스릴 있나 본데,난 전혀 즐길 만한 기분이 아니야.당 신이 다칠까 봐 온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피로하고 힘들어!" "난..." "입 좀 다물어!한 번이라도 좀 고분고분해질 ��� 없어?" 그가 이렇게 감정을 터뜨리는 일은 본 적이 없어 당혹스러웠지만,화 속에 묻어난 염려가 예은의 기분을 단번에 63 빌딩 꼭 대기까지 올려놓았다. "내가 다칠까봐...신경이 곤두서 잇어요?날 걱정한 거에요?" 좀 전까지의 짜증과 분노는 모두 잊은 모양 그녀가 차분해지자,은규는 바로 말을 바꾸었다. "얘기했잖아,당신한테 책임감 느낀다고." "아,책임감..." 고작 단어 하나일 뿐인데도 애틋한 기대감을 짓밟기엔 충분햇다.순식간에 63 빌딩 꼭대기에서 지하로 추락한 기분이었지 만 예은은 애써 신경 쓰지 않기고 햇다.자꾸 뭔가를 바라게 되면 실망도 커지게 될 것 같아서 였다. "오빠 일은 사과할게요.원래 장난이 심한 편인데다 전직 경찰이라 낯선 사람들에 대한 의심이 많아요." 그제야 은규는 그녀가 동굴에서 얼핏 오빠에 대해 했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기동 수사대로 경찰청에 꽤 오래 있었어요.한번 크게 다쳐서 그만둔 후로 경호 회사 차려서 2 년 정도하다가,제발 위험 한 일 좀 그만 하라고 부모님이 한탄을 하시는 바람에 친구한테 맡겨두고 미국으로 건너갔어요.엄청 무신경해서 전화도 잘 안하고 그래요.오늘만 해도 아무 연락 없이 불숙 귀국한 모양인데,언제나 저런 식이라니까요." 범상치 않은 사내라는 것쯤이야 일찌감치 느끼고 있었지만,막상 경찰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보니 상대하기가 꺼림해졌다. 그 자신은 법에 저촉되는 일을 피하고 있다 해도 과거 큰형님이 이끌던 당시에는 다른 조직의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지금도 시끄러운 일에 휘말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직도 권총을 소지한 채 아무렇지 않게 겨눌수 있는 강단이라면 여동생 일에도 그리 호락호락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아직 멀었니?식사 준비 다 됐는데." 문 밖에서 예은의 모친이 넌지시 묻는 소리가 들려와 은규는 복잡한 생각의 고리들을 잠시 묻어놓을 수 있었다. "자세한 얘긴는 나중에 해줄 테니까 이제 얼굴 좀 풀어요." 문 쪽을 힐끔거리며 예은이 먼저 웃어 보였다. "알고 있죠?당신은 지금 내 신랑감 후보로 왔다는 거.우리 오빠 눈치 무지 빠르니까.나한테 푹 빠진 척 연기 잘해야 돼요." "바랄 걸 바래." "아님 뭐,멋대로 해요.퇴짜 맞으면 결혼이고 뭐고 없던 얘기가 될 테니까."


어깨에 힘을 주고서 그녀가 배짱을 부리자,은규의 굳은 입매에서도 옅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정도 표정이면 평균 점수는 맞을 수 있을 거에요.나가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은규의 옆을 지나치던 예은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발견한 양 눈썹을 찌푸렸다. "꼴이 이게 뭐에요?" 고개를 내려보니 멋대로 풀린 넥타이가 보였다.담배 생각이 간절해질 때마다 괜히 들쑤신 결과였다. "가뜩이나 인상도 무지 좋은 사람이..." 어느새 앞으로 다가온 예은이 거침없이 넥타이로 손을 가져 가더니,입술을 살짝 깨물고서 꼼꼼하게 고쳐 매기 시작했다. 익숙한 비누 냄새가 풍겨왓다.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기고 중얼 거렸다. "또 내 비누 썼군." 예은이 눈동자를 들어올렸다.그리고 그렇게,두 사람의 시선은 잠시 얽혀들었다. "어쩔 수 없잖아요.당신 집엔 바디 샴푸가 없으니까..." 그녀가 마른 입술을 한번 핥는 것이 보였다.초초한 것일까.넥타이를 쥔 손에서 잔잔한 떨림도 느껴졌다. 은규는 문득 예은이 가지고 있는 여유로움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다른 여자들 같으면 이 모든 상황을 몰고 온 그를 원망하다 눈물이나 뿌렸을 텐데,그녀는 시종일관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으며 도리어 그의 기분까지 조종하고 잇었다. 갑지가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어떻게 그럴수 있는지가. "당신은 전혀 불안해 보이지가 않아." 넥타이와 셔츠 매무새를 살피던 예은이 살짝 시선을 들었다. "당연하죠." "당연한 건가." "지켜준다고 했잖아요.당신이.그런데도 불안에 떨어야 해요?" 활짝 미소 짓는 예은을 보며 은규는 발끝까지 퍼져가는 따뜻한 기운을 느꼈다. 죽을 맛이군. 은규의 입에서 거센 한숨이 빠져나왔다.소년,소녀처럼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예은의 부모님,그리고 대각선 방향에서 날카로운 눈빛을 던지고 있는 그녀의 오빠 덕분에 음식이 쇳가루라도 되는 것마냥 입 안이 텁텁하기 그지없엇다. 마침내 눈치만 보고 있던 예은의 모친이 남편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신호를 보내자 질문이 시작되었다. "그래, 내 딸과 결혼 하겠다고?" 물을 들이키려고 은규는 잠시 멈짓햇다.가족 관계나 직업등 상투적인 이야기가 먼저 오갈 것으로 생각했는데,단도직입 적인 질문에 머리가 어수선했다. "예." 겨우 대답하고 단번에 물을 들이키려던 은규는 또다시 이어진 질문에 그만 사레가 들릴 뻔했다. "대체 우리 예은이 뭐가 마음에 들었나?내 딸이지만 내세울게 하나도 없는 아이인데


말이야." "아빠!" 새빨개진 얼굴로 예은이 소리쳤지만,그녀의 부친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다.은규의 등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웬만한 일에는 당황하지 않는 그에게도 이 괴상한 가족들은 만만치 않은 강적이었다. "자,어서 말해봐.우리 폭탄을 떠안겠다고 마음먹게 된 이유가 뭐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은규의 본능은 이 장난스런 질문 안에 담긴 거대한 함정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아직 예은에 대해 모르는 것 투성이었기네 구체적인 부분을 들어 매력을 꼬집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그녀의 부친은 아마도 그걸 노린 것 같았다.어느날 갑자기 불쑥 나타난 낯선 사내가 딸의 얼마나 작은 부분까지 품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물 컵을 내려놓으며 시간만 버는 은규를 보고 있자니 예은은 왠지 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왜이런 얼토당토않은 질문으로 가뜩이나 딱딱한 분위기를 더 살벌하게 만드는 것인지 짓궂은 아버지가 야속했지만,그녀도 내심 그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 었다. "사실,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한참이나 미적대다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예은의 어깨가 바닥에 끌릴 만치 폭삭 주저앉아 버렸다.평소 다정한 말 한 마디 할줄 모르는 사람이니 어떤 대답이 나올지 대충 짐작이 갔지만,딸을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앉은 자리에서까지 이럴줄 은 정말 몰랐다. "식사나 하죠." 기막힌 마음에 헛웃음을 흘리며 예은은 입안 가득 밥을 퍼넣고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그러나 다시 이어진 은규의 낮은 대답에 그만 식욕이 목구멍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chapter36 ==사해는 요단강으로부터 받은 물을 아무 곳에도 흘려보내지 않아 그 어떤 생물도 살수없는 죽은 호수가 되어 버렸다.감정 역시 가두기만 하면 분명 사심이 되고 말테니,이제부터 마음껏 말하고,마음껏 표현하고 마음껏 쏟아내자!!==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사랑말고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목에 걸린 음식을 삼키기 위해 예은은 분주히 목젖을 움직였다. "생각할 틈도 없이 찾아오는 거죠.사랑이라는 건,제게 그렇게 다가온 것 같습니다." 진심인지 거짓인지,그런것 따위는 상관 없었다.그저 가슴이 너무벅차고 뜨거운 느낌에 당혹스럽게도 눈물이 핑 돌기 시작했다.다급히 고개를 숙인 예은은 몇 번이나 두눈을 깜빡여 비집고 나오려는 눈물을 말리려 노력했지만 결국 한방울 이 식탁 위로 떨어져 내리고 말았다.


아....어떻게 한담.이놈의 눈물샘이 고장 나 버렸나. 바보 같은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물을 막낸 그녀는,연이어 히죽대는 웃음이 터져 나와 일순 당황했다. 결국 한동안 식탁 유리로 비치는 자신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았지만,그래도 좋았다. 늦은 밤. 차에 앉아 에은을 기다리고 있던 은규는 내내 고팠던 담배를 태우기 위해 창문을 내렸다.그녀의 부모님이 당혹스럽고 아찔 한 질문을 던질 때마다 한 대 피우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는 한 번도 어른 앞에서 담배를 문 일이 없었다. 그것은 바로 큰형님이 남긴 흔적이었다.젊은 시절의 방탕한 생활과 심하고 잦은 주먹 싸움 덕분에 건강이 좋지 않았던 큰 형님 앞에서 그는 절대로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어느 순간 버릇이 되어 버렸다. 불을 붙이려고 주머니를 뒤적이던 은규는 철컥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문제의 그 권총이 또다시 코앞에 들이밀어져 있었다.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예은의 오빠 시준의 소행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수 있었다. "그렇게 삭막한 표정 지을 것 없어."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물고서 시준은 예고 없이 방아쇠를 힘차게 당겼고 동시에 총구에서 거센 불꽃이 터져 나왔다. "맛있게 한 대 피우라는 것뿐이니까." 라이터? 은규의 표정에서 기막힘을 발견한 시준의 얼굴에 더욱 확실한 웃음이 번져갔다. 빌어먹을,라이터였다니! 깜빡 속았다는 깨달음에 은규의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특별히 제작한 호신용 총이지.고객들에게 제공하는 건데불꽃의 세기 조절이 가능해 실생활에서도 긴요하게 활용할 수 가 있어.크기,디자인,무게,모두 진짜 같아서 다들 깜빡 속아 제값을 톡톡히 하고 있는 효도 상품이라고." 은규는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빨며 분노를 숨기고자 애썼다.입은 확실히 웃고 있는데 눈은 전혀 그렇지 못한 이 사내가 정 말이지,마음에 들지 않았다.뭔가 다 꿰뚫고 있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도 보통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주먹을 좀 쓰던데,하는 일이 뭐야?" 거기다 반갑지 않은 질문마저 툭툭 내던지고 있으니,예은의 등장이야말로 이 반갑지 않은 상황에서 빠져나갈수 있는 유일 한 돌출구라는 생각에 그는 문쪽을 힐끔거리며 대충 둘러댔다. "운동을 좀 했습니다." "이거 왜 이래?운동으로만 단련된 몸놀림이 아니던걸,실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으로 봐서는 평소에도 꽤 휘둘러 본 솜씨 야.태권도 10 단보다는 막 싸움 100 단이 더 무서운 법이지." 일상적인 대화를 하면서도 두 사람 사이에 강한 스파크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게 중요합니까?"


감정을 꾹꾹 누르고 있던 은규가 눈썹을 들어 올리자,시준은 다시 빙글 거렸다. "물론 중요하지.내가 사람 보는 눈이 꽤 있거든.솔직히 말해 난 그쪽이 마음에 안들어.미심쩍은 부분도 많고 도대체가 우리 글쟁이를 전혀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아서 말이야.아니,기본적으로 자네 같은 남자는 대게 여자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 누구에게도 대답을 강요받아 본 적이 없는 그가,단지 예은의 오빠라는 이유만으로 이 마땅치 않은 사내를 잠자코 견뎌내 야 한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참기 힘들었다.그런 은규의 심장에 불을 지필 생각인지 시준이 계속 지분거렸다. "경고하는데,난 그리 호락호락한 오빠가 아니야.녀석이 다 컸으니 결혼하겠다고 한다면 말릴 수야 없는 입장이지만,바람 을 핀다거나 울면서 친정집에 전화를 걸게 한다거나 이혼 같은 걸로 호적을 지저분하게 만든다면 가짜 총 따위가 아닌 진 짜를 들고 쳐들어가 줄 테니 그리 알라고." 감히 누구에게 같잖은 협박 따위를! 은규는 삐딱하게 담배를 물고 욕설을 삼키며 거칠게 쥐어지는 주먹을 잠재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렸다. "미안해요.많이 늦었죠?" 마침 뒤쪽에서 들려온 예은의 목소리에.두사람 모두 날카롭게 오가던 시선을 거둬들였다.지금껏 예은의 목소리가 이렇 게나 반갑게 들린 적도 없었다. "빨리 타." 잔뜩 뒤틀린 그의 표정에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예은은 양손 가득 들고 있던 짐 보따리를 뒷좌석에 실었다. "두사람,무슨 얘기하고 있었어요?" 시준이 천연덕 스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그냥...이런 저런 남자들만의 대화지." "정말이야?" 연기를 뻑뻑 뿜고서 한껏 굳어 있는 은규의 옆얼굴로 짐작컨대 건전한 대화가 오간 것 같지는 않은 눈치였다.오빠의 성격 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예은으로서는 더욱 그런 의심을 지울수가 없엇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에게 접근했던 남자들은 모두 시준에게 협박이나 괴롭힘을 받아왔따.평소에는 그답지 다정한 오빠가 아니면서,유달리 그녀의 남자 문제에 있어서마?ㅁ은 심하다 싶을 만큼 간섭을 해왔다.그런 인간이 총의 위협에도 전혀 움찔 하지 않고 위험한 분위기나 풀풀 풍기는 흑사파 보스와 대면했으니,전직 경찰로서의 직감이 발동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빠가 뭐라고 한 거 아니죠?" 조용히 눈치를 살피는 예은에게 몸을 돌려 다가온 은규는,안전 벨트를 버클을 손수 채워주며 귓가에 뜨거운 입김을 토해냈다. "한계야." 그의 숨결이 귓속을 간질이는 느낌에 예은의 정신이 혼탁해졌다. "네...?"


"당신 오빠란 사람한테 한 방 휘두르기 일보 직전이라고." "아." 다소 실망감을 느끼며 예은은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는 은규의 손을 바라보았다. 한계.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내포한 단어인가.대부분의 남자가 여자에게 이 단어를 얘기할 때는 상대여성을 향한 욕망의 표현으로 이용할 때가 많았다. '나 이제 한계야.' 혹은. '더이상 당신을 가만 둘 수 없을 것 같아.' 더구나 평소답지 않게 잔뜩 욕구불만인 표정으로 다가와 속삭이기에 조금 다른 방향의 대답을 기대했건만 여지없이 빗나 가고 말았다. '잘났다 오예은.아주 잘났어!' 기대하지말자고 다짐했건만,아무것도 바라지 말자고 스스로와 타협했건만,자꾸만 이상한 방향으로 치닫는 감정을 속수 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어진 자신의 신세가 유난히 기구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결국 예은은 괜히 창밖에 선 오빠를 흘겨보며 소리쳤다. "뭘 봐!" 팡팡! 은규가 아파트 문을 열자마자,폭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꽃종이들이 수북이 내려앉았다. "형님,오셨어요." 수야가 민망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뒤쪽에 서 있던 한 무리의 사내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큰형님!" 기묘한 광경에 넋이 나가 있던 예은은 은규의 어깨가 딱딱한 각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된 거냐." 목소리 하나만으로 그의 심기가 영 불편하다는 것을 감지한 수야는,연신 폭죽을 터뜨리면 수선을 떨고 있는 사내들을 향 해 제지의 눈빛을 보냈다. "형구 녀석이 조만간 형수님 모시게 됐다고 이야기를 흘리는 바람에 자기들끼리 케이크,풍선,선물까지 준비한 모양입니다. 한 덩치 하는 체구들이 아이처럼 기뻐하는데 차마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형님도 왠만하면 녀석들 기분 좀 맞춰주세요.형수 님을 볼수 있다는 생각에 몹시 흥분한 눈치니까요." 수야의 조용한 설명을 다 듣고 난 은규와예은은 고개를 들어 앞쪽을 바라보았다.정말 어울리지 않게도 모두들 터진 폭죽 을 하나씩 들고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그리 작은 평수가 아닌 ㄴ원룸 내부 전역에 알록달록한 풍선들도 대롱거리고 있 었다.한껏 찌푸리고 있던 미간의 주름을 지우며 은규가 부드럽게 경고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잇어."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마냥 호기심 어린 시선에 노출되어 있던 예은은,민망한 표정으로


은규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소리에요?" "녀석들 수다는 당신을 능가하거든." 눈을 반짝이며 그는 곧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거실로 나아갔다. "형수님,반갑습니다.한잔 받아주세요!" "다음은 저에요." "그 다음은 접니다!" 끝없이 들이밀어진 잔을 벌써 몇 번째 들이켰는지 셀수도 없었다.그녀가 술에 약하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모양인지 그들 이 내민 것은 거의 알코올이 없는 샴페인이었지만,그것도 적정수준을 넘기고 나니 어질어질한 취기가 퍼져갔다. "저희들밖에 모르는 큰형님을 대체 어떻게 꼬신 거에요?저한테만 살짝 좀....하하!" "얌마!꼬시다니.형수님 앞에서 죄송합니다.이놈이 중학교도 못 마친 녀석이라 좀 개념이 없습니다.널리 이해해주세요." "샤꺄!형수님 앞에서 쪽팔리게.넌 나보다 얼마나 잘나서 그래?" "난 중학교 졸업장은 땄어.인마.억울하면 다시 학교 다니던지." 자기들끼리 티격태격하는 덩치들을 뒤로한 채 예은은 슬며시 벽 쪽으로 피신했다. "휴...정말 정신없네." 겨우 한숨을 돌린 후에야 이리저리 둘러볼 수 있는여유가 생겼다.은규는 수야를 비롯한 여러 남자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스피드가 보통이 아니었다.안주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고서 그는 연신 잔만 들이켰다. 흥미로운 눈동자로 예은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이는 은규를 바라보았다.넥타이는 이미 사라져 버렸고,셔츠도 단추가 세 개나 풀어진 채 바지춤에서 아무렇게나 빠져나와 있었다.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눈가까지 미치는 밝은 웃음이었다.그를 제대로 알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조직원들을 가족처럼 아끼고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안에 그를 배신한 스파이가 잇다는 거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전형적인 조폭의 이미지를 그대로 닮은 사내들이었고 배움이 짧아 보이는 몇몇은 얼굴이 화끈거 릴 만큼 말을 걸게 했지만 모두 아이 같이 순수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누군가를 죽이고.때리고,뒤통수를 칠 만큼 잔혹하 고 비열한 사람들이 가질 수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상념을 깨고 들려온 목소리에,에은은 진지한 생각에서 벗어났다.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 눈에 담겨왓다. '누구였더라....' 그녀의 표정에서 난감함을 읽은 사내가 먼저 웃어 보였다. "카지노에서 만난적 있죠?엘 프레지던트라는 엄청 독한 칵테일을 만들어 드렸는데,백형구라고 합니다." "아,그 바텐더!" 맥주를 들이키며 싱긋 웃어 보이는 그의 천연덕스러운 모습에 예은 역시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리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이 사람은 꼭 작은 사야 씨같다는 생각을 했다.많이 배운 티가 났고 정중했으며,무엇보다 은규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형수님하고 형님의 사정,저도 알고 있습니다." 오르기 시작한 취기와 훈훈한 기운에 한껏 풀어져 있던 예은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 "놀라지 않으셔도 돼요.다른 건 몰라도 저 입 하난 무거운 사람입니다." 하긴,입단속 하는 법을 몰랐다면 그 정도 신임도 받지 못햇으리라. "나중에 다시 한번 카지노에 들러주세요.새로 개발한 칵테일을 만들어 드릴 테니까요." "독하지 않은 걸로 부탁해요." 그렇게 형구와 눈약속을 나누고 잇는데 갑자기 익숙한 비누향내가 옮아왓다.고개를 들어 보니 은규가 서있었다. "큰형님." 뻔히 보이는 핑계를 대며 형구가 자리를 비켜주자,은규는 문쪽으로 고개를 까딱해 보이며 제안했다. "잠깐 나갈까." 어느새 완전히 만취해 원룸 아무 곳에나 쓰러진 사내들을 보며 에은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무작정 걷던 두 사람은 슈퍼에서 맥주 몇 캔을 더 사들고 아파트 단지 앞 벤치에 앉았다.새벽이라 인적은 거의 없었고,조 용히 쏟아지는 가로등 불빛만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아파트 안에 있을 때만 해도 약간 어질한 정도였는데 맥주 한 캔을 더 마시고 나니 오락가락 불안정한 정신이 현실과 꿈의 세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후..." 신발도 벗어던진 채 다리를 쭉 뻗으며 에은은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기다란 한숨과 함께 긴장이 풀리며 온몸으 로 나른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힘들어?" 완전히 흐트러진 그녀를 바라보며 그가 물어왔다.예은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의자에 완전히 몸을 기댔다. "조금...태어나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 본 건 처음이거든요." 은규는 아직도 맥주를 마시고 잇었다.정말이지,대단한 주량이란 생각이 들었다. "녀석들 때문에 정신없었겠지." 이상하게도 그의 말속에서 다정한 냄새가 묻어났다.술기운 탓일까? "아니요.조금 황당한 면도 없진 않았지만 아주 유쾌했어요." 은규의 입가에 미소가 몰려들었다. "좋은 녀석들이야.더없이." 하지만 그중에 당신을 배신한 사람이 잇는거죠?그래서 당신은 슬픈 거죠? 목구멍까지 올라온 질문을 예은은 애써 참아냇다. "선입견이라는 건...참 무서운 것 같아요."


의미를 묻기 위해 내려온 그의 따뜻한 눈동자를 마주보고 있자니,이성이 흐트러지고 목소리가 착 가라 앉았다. "대부분 조직 하면 엄청 삭막하고 무서운 분위기를 떠올리잖아요.그런데 오늘 만난 사람들은 너무 순수하고 다정했어요.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도 쉽게 해치지 못할 만큼 정이 넘치던 걸요." 어느새 다 비운 캔을 찌그러뜨린 후 그는 담배를 찾아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하지만 다들 한 주먹하는 녀석들이야.아픈 사연들도 많지.21 세기라는 엄청난 숫자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구질구질한 추 억만 갖고 있는 녀석들이 대부분이고." 자꾸만 감기려는 눈에 겨우 힘을 보태며 예은은 그의 낮은 목소리에 집중했다. "과거 큰형님이 이끌던 구역을 지금도 그대로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들을 그렇고 그런 조폭 정도로밖에 취급 하지 않지만,적어도 녀석들은 양심에 꺼리는 일은 피하며 살아왔어.내가 그렇게 가르쳤고,앞으로도 그럴 거야." 어느 때보다 감미롭게 가슴 안으로 스미는 음성에 예은은 더 이상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어졌다.어느새 살포시 눈꺼 풀을 내려 시야를 차단하고는,더욱 세세히 느껴지는 향기와 움직임을 만끽했다. 그렇게 분위기에 도취돼 버렸다.술기운 하나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며 에은은 저도 모를 소리를 내어 속살거렸다. "음,....당신 냄새가 좋아요.담배를 피우는 모습도.." 다소 놀란 은규가 시선을 내렸을 때..그녀의 의식중 이미 절반은 꿈나라로 향하고 있었다. "당신에 대해 알면 알수록 나.....점점......빠져 들어가요." 은규의 눈동자가 옅은 빛깔로 흐려져 갔다. "하지만 자꾸 뭔가를 바라게 되는 내가 싫어요.당신은 주지 않을 게 뻔한데,그래서 겁나고,그래서 화가 나요." 어느새 완전히 늘어진 그녀가 스르르 미끄러져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내가 당신을 의식하는 만큼,당신도 날 의식해 주면 좋을 텐데." 익숙한 비누 향이 후각을 마비시켰고.목덜미를 자극해 오는 따뜻한 숨결에 정신이 다 아찔해졌다. "그렇지만 난 전혀 예쁘지 않고 매력도 없으니까.....당신을 탓하지는 않아요." 쉰소리가 섞여 관능적인 느낌을 풍기는 그녀의 목소리와 팔에 닿아오는 봉긋하고 부드러운 가슴이 주는 자극,자극,또 자극. "그래도 가끔은 말이에요..."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잠속에 빠져 버린 예은이 그를 예상치 못한 욕망속에 가두어 버렸다.무의식중에 계속 꿈틀대다 어깨에서 가슴으로 내려와 고개를 파묻는 예은을 내려다보며 은규는 한동안 죽은 듯 앉아 잇었다. 조금만 움직이면,그렇게 되면,그녀를 어떻게 해 버릴 것만 같았다. chapter 37 ==거짓말이란 건,사람 생명을 단축시키는 모양이다. 정말이지,못할 짓이라니까.==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


예은을 품에 안고 아파트에 들어섰을때.안은 이미 말끔히 비워진 상태였다. 수야가 널브러진 녀석들을 깨워 다급히 숙소로 몰아낸 것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그들 모두는 대개 고아이거나 가족에게 버림받아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카지노 테마 파크안에 마련된 숙소에서 함께 지냈다. 한동안 녀석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했고,복잡한 상황이 몰고 온 스트레스를해소하기 위해 과하게 술을 퍼마신 관계로 정신 이 해이해져 있었지만,벌써 한참 전에 나가떨어진 예은을 옮기기 위해 그는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고 겨우 집에 들어올수 있었다. 하지만 줄곧,꼼지락대며 가슴 부위에 입술을 대고 옹알대는 그녀 때문에 그의 몸은 영 익숙지 않은 욕구 불만에 시달리고 있었다.아무래도 이 애물단지를 침대위에 내려놓자마자 찬물로 샤워한 후 한동안 베란다에 나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어쩌다 여자에게 잠자리까지 내주게 되었는지 알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은규는 조심스레 예은을 침대에 눕혔다.그 녀가 깰까 싶어 전전긍긍하며 몸놀림을 최대한 부드럽게 하고 있는 자신이 몹시도 낯설었다. 예은은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폭신한 매트리스가등에 닫자마자 꿈틀대며 그의 목을 휘감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덕분에 은규는 균형을 잃고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쿵.쿵. 규칙적으로 뛰는 그녀의 심장 소리가 심장을 뚫고 전이되어 왔다. "제길."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난감한 상황에,은규는 옅은 욕설을 중얼대며 천천히 몸을 떼고자 노력했지만,예은은 더욱 거세게 그를 끌어 당길뿐이었다. 한계다. 뜨겁게 흐르고 잇는 혈관들도 외쳐댔다.한 번도 이런식으로 여성과 접촉하지 않았던 그의 몸이,불붙은 다이너마이트처럼 급격히 타 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욕망이 달아날 수 있도록 눈을 감고 배신자의 존재를 생각했다.안타깝게도,효능은 그다지 기대할 수 없었다. 유다의 발이 조심스레 은규의 침대와 맞닿아 갔다. 부부 혹은 연인과 다를 바 없는 자세로 얽혀든 남녀의 몸체가 침대 위에서 곤한 잠에 취해 있는 것이 보였다.모로 잠든 여자의 온몸을 은규의 커다란 품이 뒤에서 감싸고 있었고,여자의 목덜미에 박힌 그의 입술에는 미소마저 걸려 있었다. 정말로 빠져 버린 건가? 이 여자에게? 그녀는 확실히 평범한 여성상과는 거리가 있어 묘한 매력과 귀염성이 조화를 이루고 잇는 여자였지만,황은규같은 사내를 휘어잡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다.흑사의 인생에 있어 여자는 단 한 평조차 자리할 공간이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엿다.


그래도 이젠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마음을 둔 여자가 아니라면 천하의 흑사가 제 품을 내어준 채 함께 잠들었을 리 만무했고,침대 맡까지 접근한 침입자의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다는 것은 그만큼 날카로움과 긴장감을 많이 상실해 버렸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유다는 잠시 더 두사람의모습을 바라보다 소리없이 문가로 사라졌다.오늘 본 광경을 천일도에게 흘린다면 그 면상이 얼마나 포악하게 일그러질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 짐승은 웃는 모습이 가장 흉측했으니까. '이....이게 뭐야....' 숙취에 골골대다 어렵게 눈을 연 예은은 난처한 기색으로 이를 물었다.목 부근에 놓인 은규의 입술에서 거친 숨결이 흘러 나오고 있었고,가슴 위에는 버젓이 그의 손이 올려져 잇었다. 머리속이 복잡해졌다.같이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아슬아슬하게도 필름은 거기서 딱 끊 겨 버렸다. '혹시 술김에 일 저지른 거 아니야?' 들고 일어서는 아찔한 생각에 예은은 황급히 고개를 내려 옷차람을 살펴보았다.다행히 두사람 다 완전히 옷을 입은 채였 고,몸 구석 어디에서도 남자와 정사를 나눈 느김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힘겨운 사투 끝에야 겨우 몸을 돌려 그와 마주 보고 눕는데 성공했다. "휴,,," 그의 얼굴이 이리도 완벽해 보이는 것이 정말로 미남이기 때문인지,아니면 그녀의 눈에 환상 꺼풀이 덧입혀졌기 때문인지 알수가 없었다.무엇보다 가슴이 넓고 따뜻했다.어린 시절 안겼던 아버지의 품 역시 그러했지만 이런 설렘은 느껴 보지 못 했다.이것이 바로 남자의 품이라는 것일까.세상 모든 것을 안은 듯.머리 위로 바윗덩이가 굴러 떨어진대도 전혀 두렵지 않을 만큼 안전한 기분. 이 순간만큼은 언제나 큰 벽으로 가려졌던 그가 더할 나위 없이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고,심지어 진짜 결혼을 앞둔 연인 이 된 것마냥 행복감도 새록새록 피어나고 있었다. '깊이 잠들었나 봐.' 자리를 잡느라 심하게 뒤척였는데도 은규에게서 전혀 움직임이 없자,예은은 반짝이는 눈으로 그? 얼굴을 탐험해 갔다.짙 은 속눈썹에 남자다운 코,그리고 섹시한 입술.세세한 부분까지 모조리 눈에 새겨 넣은 후,손을 들어 슬쩍 뺨의 상처를 건 드려 보았다. 어떤 경위로 생겨 난 것일까. 실제로 만져 보니 생각보다 깊고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손바닥을 펴 상처를 가리자,느낌이 많이 달라져 훨씬 부드러운 인상으로 변했다.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풀어지는 것을 느끼며 상처 부위를 쓰다듬는데,잠에 취해 있다고 믿었던 그가 갑작스레 손을 움켜 쥐었다.깜짝 놀란 그녀는 상처에 박혀 있던 눈을 황급히 들어 올렸다.피곤한 기색이 머물러 흐릿해진 눈동자가 마주쳐 왔다. "아무 말 하지 말아요." 예은은 먼저 선수 쳤다. "나 지금 엄청 창피하니까.그냥 꾹 입 닫고 있어줘요." 수줍음이 묻어난 요청대로 그는 예은의 손을 움켜쥔 채 약 5 분동안을 움직임 없이 있었다.하지만 침묵은 숱한 말보다 더 한 긴장을 강요하며 그녀를 옥죄어 갔다. "당신,나한테 관심 있어?" 집요한 시선을 던지던 그가 불쑥 거만한 질문을 던지자,예은은 푹 꺼졌던 고개를 쳐들었다. 이미 알고 잇으면서,굳이 이런 상황에 대 노고 묻는 것은 무슨 심보란 말인가. 이렇게 된 이상 될 대로 되라지!몰래 ���쳐보고 쓰다듬는 꼴을 들켜놓고서 내숭을 떠는 건 그녀의 성격상 맞지 않았다. "있으면 어쩔 건데요?" 은규의 표정은 인쇄된 그림마냥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예은의 손 역시 여전히 그의 손 안에 쥐어져 있었다. "그게 대답이야?" 붙들린 손에서 땀이 솟기 시작했다.붉어진 얼굴만으론 모자란 것인지 온몸이 합세해 제 상태를 알리지 못해 안달하자,목 소리만이라도 제대로 내고 싶어진 예은은 수줍게 입을 열었다. "알고 ....있잖아요." 은규의 눈동자가 꿈틀햇다. "난 속마음 숨기고 밀고 당기는 거.그런 거 잘못해요." 어느새 그의 눈에 남아 있던 미미한 잠기운이 모두 걷혀 버렸다.훨씬 더 검어진 눈동자에 붙들린 예은의 시선도 불안정 하게 흔들려 갔다. "난 당신하고 결혼하기로 마음먹었어요.아무리 위험에 처했다고 해도 당신에게 관심이 없었다면 절대로 결혼까지 하고자 마음먹지는 않았을 거에요." 은규의 눈동자가 어찌할 바를 몰라 자꾸만 달싹이는 그녀의 입술로 내려왓다. "나 같은 놈한테 정착할 생각하지 마." "무슨..." "당신,그러기엔 꽤 괜찮은 여자야." 미처 대꾸할 틈도 없이,그는 오랜 시간 붙잡고 있던 예은의 손을 놓고 일어났다. "저녁 7 시쯤 동생 집을 방문할 예정이니까 시간 맞춰 준비하고 있어." 단호하고 딱딱한 목소리에 조금씩 피어오르던 친근한 감정이 싹둑 잘려 나갔다. 신흥파의 보스 정두익은 천일도를 기다리고 잇었다.유다가 소식을 가지고 오는 오늘.정기 모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어렵게 유지해 오던 마약 루트가 막힌 이후로 신흥파는 대단한 자금 압박에 시달리고 잇었다.신흥파 구역의 유흥업소


들은 상권이 좋지 않아 매출이 시원찮았고,아는 형님이 뒷거래를 통해 개입한 주식에 손을 댔다가 엄청난 액수의 손해만 보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 알게 된 천일도의 유흥부지 건설은 로또 복권 못지않게 구미가 당기는 사업이었다.천일도란 인물 자체는 전 혀 미쁘지 못했으나,뒷배에 있는 물주가 마이더스란 사실에 전혀 얘기가 달라져 버렸다. 마이더스,그가 누구인가.온갖 불법적인 일들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법의 울타리를 잘도 피해 여기까지 이른 뒷동네의 신화같은 존재가 아닌가.자금줄과 인줄,그리고 뒷배경이 엄청난 이 거물의 사생아와손을 잡기로 한 이상 신흥파는 더 이상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없었다.그래서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패륜적인 성격을 드러내며 히스테리를 부릴 때도 슬슬 눈치 봐 가며 달랠 수밖에 별 재간이 없는 것이었다. 일전에 새 명이나 되는 장정들이 흑사에게 당하고 온 사건이후,천일도는 유독 저기압 상태였다.그리고 사사건건 신흥파 사업에 간섭을 하며,내키지 않을 시엔 이 사업에서 열외시킬 수도 있다는 협박까지 하고 있었다. "큰형님,일도 형님 오셨습니다." 문 밖에서 들려온 보고에 정두익은 깊은 생각에서 벗어났다.문이 열리고 천일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일도 왔는가." 날카로움을 숨기며 인사를 건넸지만 그는 건방지게 소파에몸을 풀고 담배부터 뒤적였다. "이 새끼,아직도 안 왔구먼." 유다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현재 신흥파의 처지를 일깨우기 위해 그가 더욱 건방을 떤다는 것을 알면서도 솟구치는 분노를 가두기 힘이 들었다.이 사업에 관여하게 된 타 조직 보스들 앞에서도 마찬가지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진흙탕에서 뒹구 는 미꾸라지처럼 내내 감방이나 오가던 녀석이 어쩌다 권력의 맛이란 걸 봤으니,이렇듯 방자한 꼴을 보이는 건 지극히 당연 한 일인지도 몰랐다. 다시금 노크 소리가 들려와 정두익은 문가로 시선을 보냈다.유다가 들어서고 있었다. "뭐,흥미로운 것 좀 알아냈냐?" 천일도가 담배 연기를 뿜으며 먼저 운을 띄웠다. "흑사의 여자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란 부탁을 하셨지요.놀라운 사실을 알아냇습니다." 천일도의 눈이 번뜩였다. "뭔데?" "오시준이라고 기억하십니까?" 대번에 천일도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그 짭새 새끼를 내가 어떻게 잊어?그 개새끼 때문에 평생 빵에서 썩을 뻔했는데." "흑사의 여자가 바로 오시준의 여동생입니다." "뭐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치던 천일도는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흑사의 여자가 철천지원수의 여동생이라...이거 일이 점점 더 재미있게 돌아가는데?" 빅뉴스를 전해 들어 기분이 좋은지,천일도는 다시 자리에 앉아 제법 부드러운 태도를 보였다. "흑사와 여자는 어떻게 돼 가고 있지?" "곧 결혼할 모양입니다." 이번엔 정두익 역시 흥미를 나타냈다. "결혼.?" "처음에는 여자의 위험을 견제한 위장결혼일 것이라 생각했는데,아무래도 아닌 것 같습니다." 천일도가 입술 끝을 올렸다. "그럼,천하의 흑사란 놈이 진짜 사랑에 빠지기라도 했다?" "아직 깊다고 볼수는 없지만 시작된 것만은 확실합니다." 천일도의 입에서 연이어 통쾌한 웃음이 터져 나왓다. "아,이거 오늘 진짜 대박이구만." 정두익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표정으로 천일도를 바라보았다.흑사 소유의 땅 접수가 시급한 마당에 여자 타령이나 하고 있는 그의 심중을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근데 말이야.흑사놈 청춘사업이 우리 계획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건가?" 궁금증에 시달리던 정두익의 물음에 천일도가 어느새 웃음을 지웠다. "거참,머리 안 돌아가시네.가장 잔인하게 짓밟아 줄수 있으니까 이러는 거 아닙니까." "가장 잔인하게?" "정말 아끼고 있던 물건을 빼앗기는 것처럼 분한 일은 없죠.녀석에게 먹물 먹이는 방법이야 허다하게 많겠지만,난 그새 끼 가슴안에 척 들러붙어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내 흔적을 남기고 싶다 이 말입니다.뭐,다행히 그여자도 이젠 나와 뗄 수 없는 악연으로 묶인 것 같고 오라비란 녀석에게 갚아야 할 부채도 더러 있으니일석삼조의 효과까지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무엇보다 홍은규 그 후까시 새끼.한번도 사랑같은거 해본적이 없다죠?그런 꼴통들이 도 의외로 순진합니다. 가장 처음 마음을 준 상대한테 정신이 팔려 동오줌 못 가리다 피보게 된 놈들 허다하게 봐왔죠.저 혼자 잘난 줄 아는 새끼 니,제 여자가 곤란에 처하게 되면 무너지는 건 시간 문제라고 내 장담합니다." 생각만으로도 흥이 났는지 천일도의 입술 끝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 녀석 아니겠어요?물심양면으로 키워 준 제 식구 놈한테 배신까지 당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후후. 그 잘난 면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내 꼭 두고 볼겁니다." 천일도의 비겁하기 짝이 없는 계략에 유다의 얼굴이 굳어졌고,정두익마저 혀를 내둘렀다. "언제 그렇게 치밀한 계획을 짜논 거야?역시 천일도구만.내 이래서 일도와 있으면 늘 마음이 든든하다니까.가만있자. 그럼 결혼식 날 일을 시작하면 되는 건가?" 정두익이 있는 대로 추켜세우자 천일도는 금방 우쭐해하며 건방지게 탁자위에 다리를 올려놓았다. "형님도 참.머리 좀 굴리라고 했잖습니까.머리요.이 무거운 게 폼으로 달려 있는줄


압니까?" 갈수록 도를 넘나드는 그의 언행에 불이 끓어올랐지만 정도익은 잘 참아냇다. "난 결혼식 날 해치우는게 가장 좋을 것 같은데...." "더 빠져 들 때까지 기다려야죠.결혼하고,마음도 주고,감정이 커질 때까지 커져서 주체할 수 없을 지경에 달했을때 녀석 은 아마 감각이 무뎌져서 앞에 닥친 위험조차 알아채지 못할 겁니다.그때가 적격인 거에요.아시겠습니까?" 교활하지만 설득력 있는 주장에 정두익은 고개를 끄덕엿다.새 담배를 꺼내는 천일도의 입술이 슬며시 비틀어졌다. "오래 걸리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말이야.이거 엄청 흥분돼서 말이지." "축하해요!" 은규가 간결하게 결혼 발표를 하자,눈에 뛸 정도로 배가 부른 새벽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현석 씨,들었어요?당신 형이 결혼한데요.결혼을!와아,믿을 수가 없어!너무...너무 잘됐어요." 순수한 마음으로 제 일처럼 기뻐해 주는 새벽을 보고있자니,예은은 마치 큰 죄를 짓는 것마냥 가슴 한쪽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애써 미소를 피우며 새벽의 화사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 마음은 은규도 같은 모양이었다.가볍지만 그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를 똑똑히 들을수 있었다. "이런 엄청난 희소식을 듣고도 가만히 있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지.예은 씨,같이 밖에 좀 다녀올래요?케이크랑 와인이 랑 이것저것 좀 사고 싶거든요." "아니,뭐 그렇게 할 것까지야..." 예은은 난감한 표정을,은규 형제는 제발 좀 자중하라는 표정을 보냈지만 새벽은 코웃음 하나로 무시하며 턱하니 예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제수 씨는 정말 변함이 없군." "미치겠다니까.하도 이것저것 참견하고 돌아다니느라 배만 나왔지,살은 하나도 안 붙었어.참다못해 제발 몸조심 좀 하라 고 한소리 했다가,살만 쪄서 애 낳는데 고생하면 책임질 거냐고 빽빽거리는 통에...정말이지.시한폭탄이 따로 없다니까." "그런 점에 끌린거 아니야?" "그렇기는 하지만 가끔 지나칠 때가 잇어." 멋쩍게 피식거리며 현석은 새벽이 가져다 놓은 감잎차를 한모금 넘겼다.그렇게 잠시 침묵이 흘렀고,화제는 자연스럽게 전환되엇다. "그런데....형 결혼한다는 거.진심이야?" "내가 그런 거 갖고 거짓말할 인간이냐." 현석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왓다. "그만둬." "어째서." "몰라서 물어?"


많은 의미를 내포한 질문이었다.분노와걱정과 제지와 단호함까지.은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어젖힌 후 품에서 담배 를 꺼내 물었다. "네 말 한 마디에 그럴 수 있었다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럼,정식으로 해." "미안하지만,이 일에 있어서만큼은 네 관심이 반갑지 않아." 은근히 자신을 밀어내는 발언에 현석은 그만 발끈하고 말았다. "왜 이렇게 끌려 다니는 거야? 결혼이 이 일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건 형이 더 잘 알고 있잖아." 오랜만에 필사적인 된 현석의 모습에 은규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결혼하는게 그렇게 못마땅하냐." "형이 저 여자를 사랑한다면,그래서 하는 결혼이라면 나도 새벽이처럼 온 맘을 다해 기뻐해 줄수있어.하지만 난 모든 사정을 알고 있잖아.그런데도 가만있어야 돼?" "그래주길 바란다." 현석이 코웃음을 쳤다. "이 사건이 시작된 계기부터가 마음에 안들어.별로 예감이 안 좋다고.형같이 철저한 사람이 저런 여자를 스파이로 오해 했다는 것도 이해가 안되고,왠지 ...뭔가 단단히 꼬이기로 작정한 것 같아 영 불안 하단 말이야.그리고 형의 태도 말인데, 저 여자에 관한 문제라면 별로 냉정하게 처신하지 못하는 것 같아.무엇보다 못할 짓이잖아.말도 안되는 납치를 당한 것도 모자라서 사랑 따윈 철저히 배제된 계약 결혼이나 해야 한다니,가혹해도 한참 수위를 벗어난 거라고 생각 안 해?" 은규 역시 잘 알고 있는 바였다.거기다 그녀는 이 형식적인 결혼에 감정까지 담이가고 있는 눈치였으니,이쯤에서 다른 방 도를 생각해야 할는지도 몰랐다.그러나 녀석들의 목표에 예은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안 이상,그는 결코 그녀를 곁에서 떠 나게 할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마가 될지도 모를 시간 동안 빛과 그림자처럼 함께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그녀를 지키고 알아가고,때론 권력도 행사할 수 있는 아주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방법.결혼이라는 제도 밖에는 도무지 다른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현석아." 오랜 시간 침묵으로 입을 봉하고 있던 은규는 깊은 울림이 담긴 목소리로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렇게 목소리를 깔아?"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가슴이 허해지려는 순간마다 유일하게 가족이라는 이름을 느끼게 해주는 너하? 늘 감사하고 있고.하지만 이일은 지금껏 내가 해 왔던 방식대로 해결하고 이 현상황을 해결해 주는건 아니야.난 어떤일이 생기든 후 회와 자책보다 해결 방안을 먼저 찾아왔고,문제점의 해결을 위해 서로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석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서로의 희생?사랑이 결여된 결혼을 그렇게도 부를 수 있겠군.정말 갖다 붙이기 나름이야." 더이상의 말을 아끼며 은규는 얼마 남지 않은 담배를 마저 피웠다. "근데 저 아가씨 집에서도 알아?" "인사 다녀왔어." "허락했단 말이야?"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은규를 보며 현석은 믿을수 없다는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지한테도 말했고?" 고작 단어 하나가 첨가되었을 뿐인데도 은규의 얼굴을 구기기엔 충분했다. "어차피 형식적으로 하는 결혼인데 노인네가 알게 되면 일이 시끄러워져." "아버지뿐이겠어?명색이 HS 그룹 장남이 결혼을 한다는데 매스컴들도 엄청난 이슈거리로 떠들어 댈 거야.그럼 어떻게 할 건데?어르신들 상견례 같은 거 말이야." "그쪽 집에서는 날 고아 출신으로 알고 있어.최대한 간단하게.조용히 치르게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어." "그래서 그렇게 해주겠대?" "부모님들 사고가 굉장히 개방적이야.딸의 선택을 신뢰하는 것 같고 무엇보다 고아라는 단어에 얽매이는 속물이 아니라는 게 마음에 들어." 오빠라는 인간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더 이상 대화가 늘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 마음에 은규는 그냥 침묵했다. "뭐 하나 묻고 싶은데." "말해 봐." "만약 저 아가씨가 이 결혼을 진짜로 만들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그러니까.형을 사랑하게 된다거나 하는 일이 생기면."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만약이라고 했어.그리고 난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형은 멋진 남자니까." 은규는 손사래를 치며 연거푸 이 위험한 가정을 거부했다.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아." "그럼 약속해." 현석이 약속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이야기를 꺼낸 때마다 은규는 한 번도 거절하지 못했다. "뭐야." "어차피 책임감 하나로 이러는 거라면,여자가 형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이결혼을 진짜로 만들겠다고 말이야." 거칠게 연기를 토하며 은규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어서." 현석이 재촉을 하고 나서야 그는 마지못해 약속했다. "좋아.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글쎄.내 생각은 조금 다르지만 뭐,시간이 답을 주겠지." 현석의 입가로 만족스런 미소가 퍼져 나갔다. *************<2 권에 계속>****************


chapter 38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게 해 주세요... 사랑하고 싶지 않습니다.사랑하고 싶지 않아요.== -에은의 메모 노트중에서-

대책 없을 만큼,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지나치게 조용하고 평화롭고 순조롭기 짝이 없는 일상들.그기간 동안 은규는 차근차근 결혼식을 준비했고.에식은 내일로 다가와 있었다. 잠시후면 그가 도착할 것이라는 생각에 예은은 자꾸 문으로 향하는 시선을 저지할 수 없었다.일이 있다며 새벽부터 집을 나선 은규가 벌서부터 많이 보고 싶었다. "나도 참 큰일이다.어떡하니,오예은" 요즘 그녀의 행동 패턴은 멜로 영화 속 주인공 감이었다.은규의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올 대면 전신이 붉게 물들었고,가 끔씩 느껴지는 시선에 호흡 곤란 증세까지 보이곤 했으니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심장에 떨어져 내린 작은 씨앗이 어느 틈 엔가 커지고 커져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 것 같았다. 상념에 젖어 있던 예은은 전화밸 소리에 모든 생각을 잘라 버리고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나야,10 분안에 도착할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 "아..." 두 사람은 오늘 그녀의 집으로 갈 예정이었다.결혼식 전날 신랑 될 사람이 신부 집에서 묵는다는 건 별로 격식에 맞지 않 았지만,이런 때에 그녀를 떼어놓는 일은 다소 위험하다는 판단에 은규가 넌지시 그녀의 부모님께 부탁을 넣었다.가족 하 나 없는 고아의 신분으로,결혼식 전날 밤 혼자 있고 싶지 않은 사내의 모습을 꽤나 리얼하게 연기해 깐깐한 오빠마저 홀딱 넘어가 버렸으니,가만 보면 그도 제법 엉뚱한 구석이 있는 남자란 생각이 들었다. "알았으니까 빨리 와요." "아무한테도 문 열어주지 말고 조용히 기다려." 목소리에 정이라곤 전혀 묻어 있지 않았지만,딱딱한 어절속에 담긴 염려와 걱정을 예은은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그게 바로 이 남자의 방식이었다.쉽게 감정을 드러내진 않아도 껍질 속에 들어 있는 진심을 느낄수 있게 해주는 사람.그가 바 로 황은규 였다. 타인과 다름없는 남자와의 동거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즐길 만한 구석은 제법 있었다.그녀가 손수 만든 음식을 다 비우는 그를 지켜보거나,이제 막 샤워를 끝내고 나온 욕실에 들어가 비누 향에 취해 버리는 일.그가 돌아올 때를 대비해 스탠드를 살짝 켜놓곤 선잠이 들었다가 조심스레 집안을 걷는 인기척을 느끼는 등,새롭고 흥분되는 순간들은 그녀의 삶 속


에서 새록새록 돋아나고 있었다. 은규는 너무나 선이 확실한 룸메이트였다.필요한 이야기를 나눌때 외에는 가까이 접근조차 하지 않았고,낮 시간의 대부 분을 밖에서 보내며 개인 시간을 많이 주고자 노력했다. 그럴 때면 언제나 수야나 형구를 말 상대로 보내주었는데수야는 너무 말이 없어서,형구는 너무 짓궂어서 부담이 되기 도 했지만 은규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데는 지대한 공헌을 했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말끔한 양복 차림의 은규가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며 가슴이 심히 들썩였다.요즘 그녀의 심장은 그의 목소리를 듣거나 인기척만 느껴도 안절부절못하는 망아지처럼 미친 박동만 거듭하고 잇었다. 은규는 식탁 위에 키를 내려놓으며 양복 상의를 벗고 그녀의 흔적을 찾아 두리번거렸다.욕실 근처로 가 귀를 기울이다가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자 표정이 조금 험악해져서는 창가 옆쪽의 턱이 진 곳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예은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춘기 소녀처럼 긴장해 타자기 옆에 있던 책을 집어 들고,거친 소리를 내며 우뚝 서는 은규 에게 놀란 표정을 해보였다. "왜 그렇게 쳐자봐요?" "사람이 들어오면 기척이라도 좀 내." 웬일인지 그가 조금 지쳐 보였다. "책이 너무 흥미진진해서 그만,...미안해요.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예상과 다르게 예은이 다소곳한 대답에 미소까지 보이자,은규는 잔뜩 긴장시켰던 근육들을 한꺼번에 풀어냈다. "식사 안했죠?내가 좀 만들어 놨는데 지금 들래요?아니면 우리집에 가서 들래요?" 잠시 망설이는 기미를 보이던 은규는 머리를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가지.당신 오빠나 식구들이 빤히 쳐다보면 돌 씹는 기분이 들거든." "그럼,먼저 씻고 와요.차려놓을 테니까." 활기차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예은은,앞을 잔뜩 막고 서 있는 은규의 몸 때문에 잠시 멈칫했다.한쪽 벽에 손을 의 지한 채 비스듬히 서 있는 커다란 몸이나 살짝 풀어진 셔츠 틈으로 보이는 맨살들,그녀는 때때로 이렇게 뜬금없이 이남자 를 의식하곤 했다. "아저씨,좀 비켜줄래요?" 동요를 숨기기 위해 일부러 장난스럽게 이야기하자,은규는 슬쩍 몸을 틀어 출구를 만들어 주었다.그의 옆을 지나며 닿은 손끝이 따끔하게 아려왔다. 그도 느꼈을까? 같은 기분 일까? 당장이라도 꼬꾸라질 것 같았지만 예은은 가까스로 기운을 내 주방까지 걸었다.그제야 은규도 몸을 돌려 욕실로 들어갔다. "휴,,,,,죽겠다.정말." 특별한 대화나 접촉 없이,그저 한 공간에 몸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 모양이었다.몇 번의 심호흡으로 애써 마음을 추스른


에은은 지개를 데우기 위해 가스레인지 스위치를 눌렀다. 한꺼번에 터지며 타오르는 불꽃이 그를 향해 커져가는 자신의 욕망과 흡사해 보여 또다른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역시 같은 느낌이라면 좋을 텐데. 실없는 생각인 걸 알면서도 가슴은 끊임없이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어서 오게,우리 사위!" 다소 불편한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던 은규는 가식 없는 미소로 반기는 예은의 가족을 보고 그만 머쓱해졌다. "죄송합니다.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딱히 함께할 가족이 없어서 무리한 부탁을 드렸,,,," "무슨 소리!불편해 말고 어서 들어오게.사위도 아들이라고 했는데 그런 소리하면 섭섭하지." 예은의 부친이 정이 흠뻑 담긴 표정으로 어깨를 끌어안자.은규는 다시 한번 익숙지 않은 감각에 사로잡혔다. "아,너무하네,이제 딸은 보이지도 않는다 이거에요?나도 좀 봐줘요!" 뒤에서 투덜대는 예은의 목소리에,'우리 사위'를 연발하고 있던 그녀의 부모님이 환한 웃음을 터뜨리며 딸을 끌어안았다. 갑자기 가슴이 벅차올랐다.이상적인 가장이 가꿔낸 진실한 가정의 모습.오늘 하루만이라면 이런 편안함에 젖어 긴장을 푼다 해도 세상이 끝나지는 않겠지. "그럼,들어가겠습니다." 은규는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한바탕 술판이 벌어졌다.자고로 남자는 술을 먹여 봐야 그 됨됨이를 알수 있다고 늘 주장하던 아버지였기에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괜히 끼어들어 미운 말만 던지는 오빠의 행동은 정도를 벗어나도 한참이었다.사람속을 묘하게 자극하는 날카로운 시선과 살짝 올라간 그의 입술은 함께 살아온 식구들 조차 받아내기 힘든 부분이 있었는데,오늘은 제 3 자가 보기 에도 확연할 만큼 작정하고서 은규를 긁어대고 있었다. "후...." 한동안 묵묵히 침만 넘겨댔던 목구멍으로 한숨이 흘러나왓다.굳이 결혼식 전날 저렇게 떡이 되도록 술판을 벌여 보이지 않는 전투를 벌일 건 뭐람. "정말 일생에 도움이 안 된다니까." 그러나 덕분에 그를 훔쳐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으니 그리 손해라 볼순 없었다.베란다 쪽 긴소파에 앉아 힐끔거리는 엿보기 놀이가 스릴 만점인지라,아빠와 오빠의 술판 프로젝트 정도는 너끈히 눈감아 줄수도 잇을 것 같았다. 여하튼 대단한 인내심이었다.꿍꿍이를 숨긴 부자가 넘치게 따라주는 술을 넙죽 받아 마시는 저 남자.눈가의 붉은 기로 미루어 보아 어느정도 취기가 오른것이 분명한데도 안주에는 일절 손길도 주지 않은 채 무서울 만큼 바른 속도로 병을


비워 나갔다. 게다가 연신 축이는 입술과 무릎을 툭툭 치는 행동으로 볼때.담배 생각에 절반쯤은 정신이 나가 있는 게 분명했다. "우리 막둥이 눈 빠지겠네?" 모든 신경이 한곳으로 쏠려 있던 예은은 갑자기 들려온 속삭임에 그만 기겁을 하며 시선을 거둬들였다. "놀랐잖아!" 과일 접시를 내려놓던 그녀의 엄마가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웃고 잇었다. "아이고.미안합니다.놀라게 해드려서요." 그러고 나서도 뭐가 그리 우스운지 연신 뺨을 실룩대다가 배를 한 조각 입에 물고서야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왜 그렇게 웃어?기분 나쁘게." "글쎄..." 약이 올라 눈살을 구긴 탓에 예은의 양 미간이 붙어 버렸다. "진짜 말 안 할 거...." "그렇게 좋니?" "무슨 말이에요.그게." 예리한 엄마에게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예은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수그렸다. "내가 눈 뜬 장님인줄 아니?너 여기 와서부터 종일 한 사람만 보고 있잖아.아주 침 떨어지는 것도 모르지." 젠장, 그 정도로 표정 관리가 허술했단 말인가. "침은 무슨..." "이제 내일이면 보기 싫어도 평생 마주봐야 할 테니까 적당히 해둬."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무슨 걱정일까 싶었다.보기 싫어도,지긋지긋해도,희로애락을 같이 늙어갈수 있다면 얼마나행복하고 근사할까.아무것도 모르고 딸의 행복을 딸의 행복을 믿어 의심치 않는 부모님을 생각하니 갑자기 기운이 쭉 빠져 버렸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오래오래 같이.엄마랑 아빠처럼." 죄송한 마음에 예은은 조심스레 시선을 무릎으로 떨어뜨린 후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그 웃음 속에서 뭔가 알싸한 느낌 을 전해 받은 그녀의 엄마는,꺼질 대로 꺼진 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정말 많이 좋아하는 모양이네,우리딸." 예은은 어린 시절부터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걸핏하면 사건을 만들거나 소동을 부리고,한번 생긴 궁금증은 어떤 식으로든 풀고 나서야 밥을 먹고 잠이 들던 애물단지였기에,그래서 식구들 모두 마냥 결혼이 늦어질 줄로만 알고 있었다.그런데 대뜸 훤칠한 사내와 나타나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했을 땐,엄마로서 안도와 염려라는 상반된 감정을 느껴야 했다. 사실 두 사람이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내일이 결혼식이란 실감조차 할수 없었다.너무 갑작스러웠던 만큼,불어나는 걱정에 마음의 안정을 찾기 힘들었던 것도 솔직한 심정이엇다. 하지만 다행히도 예은은 남편 될 사내를 많이 사랑하고 있는듯했다.표정,눈짓,숨소리 하나에서조차 순수한 감정이 고스란 히 묻어나고 있었으니,이제야 비로소 숨을 쉴수 있을 것 같았다.시작하는 시점에 있는


것이 넘치는 사랑이라면.나머지는 살면서 쌓아가면 될 문제였다. "예은아." "..." "지금 네가 느끼고 있는 감정.잊지 마." 예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뭐든지 처음 마음만 같으면 되는 거야.시간이 지나면 분명 지금처럼 간절하고 떨리는 감정은 느껴지지 않겠지만,그렇다고 사랑이 없어지는 건 아니란다.난 말이지,한번도 네 아빠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어.여러 형태로 달라 지는 것뿐이지,절대 없어지는 게 아니야.한번 가슴 안에 박은 사랑이라는건.어떻게 해도 떼어낼 수 없다는 거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알겠니?" 괜히 눈물이 핑 돌아 예은은 입술을 깨물었다.가려진 시야로 인자하게 웃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얼핏 스쳐왔다. "처음 사랑만 잃지 않으면 되는 거야.첫 사랑만 잊지 않으면...." 그녀는 결국 엄마의 품에 안겨 아이처럼 훌쩍이기 시작했다. 사실 많이 두려웠다.내일이면 결혼식인데 남편 될 사람의 마음은 어딘지도 모를 곳에 있었고,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조차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런 와중에 엄마의손길과 따뜻한 미소를 대하자,울컥하고 치미는 감정을 더 이상 저지 할 수가 없어져 버렸다. 여기서 제동을 걸지 않으면 맘 편하게 술이나 마시고 있는 그에게 들릴 만큼 한바탕 울게 될것 같아 예은은 따뜻한 품속 에 코를 묻으며 겨우 속삭였다. "오늘 엄마랑 잘 거야..." 예민해진 그녀의 귓가로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왓다. 술판이 파장을 맞은 것은 새벽 2 시,세사람 모두 취해 도움없이는 방에 들어갈 수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아빠랑 오빠는 내가 맡을 테니까 넌 황 서방 네 방으로 데리고 가." 지시를 내린 후 거뜬히 넘편 몸을 가누는 엄마를 보자 설레설레 고개를 돌아갔다.아마도 함께 살아가는 동안 이런 일쯤 이야 숱하게 반복해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후...." 잡념을 버리고 고개를 내리자,탁자 위에 엎어진 은규의 모습이 보였다.다짜고짜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이 거구를 어떻게 옮긴담." 그가 이렇게 인사불성이 될 만큼 술을 마신 건 놀라운 일이었지만,그만큼 그녀와 식구들을 믿어주었다는 의미로 생각하 니 뿌듯하기도 했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여기서쿵 저기서 쿵,은규의 몸을 이끌고 겨우 방 안에 들어선 예은은 점점 더 짓누르는 무게를 애 써 참으며 침대로 다가갔다.


한치 앞도 볼수 없는게 인생이라고 했던 말처럼,생각할 수록 알수 없는 전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하의 흑사 황은규를 자신의 침대에 눕히게 되는 날이 오다니,하긴 내일이면 결혼까지 해야 할 판에 이깟 일쯤이야 뭐 대수로울 것이 있을까. "은근히 무겁네." 마른 듯하지만 단단한 근육질의 몸이 온전히 기대오자 바윗덩이에 밀리는 기분이었다.어느새 맺혀 뚝뚝 떨어지는 땀도 닦지 못한 채 예은은 가공할 만한 힘을 발휘해 그를 침대에 눕힌 후 옆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알수 없는 혼란과 두려움.그것들을 온전히 묻어둘수 있도록 이 남자의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이 아프도록 피어올랐으나 가슴 한편에 고이 접어두었다.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이제 다 큰 어른인 만큼,현실을 직시하고 이기적인 욕망쯤은 잘라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 자요...." 못내 차오르는 아쉬움을 담아 그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고 나서야 예은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그러나 갑자 기 튀어나온 손이 팔을 끌어 잡는 통에 깜짝 놀라 다시 고개를 내렸다.베게에 고개를 묻고 엎드린 채.불안정한 호흡을 거듭하는 은규의 모습이 보였다. 한동안 술기운을 묶어두기 위해 무척이나 괴로워하던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 잤.......어요?" 얼굴이 확 달아올라 민망해진 예은은 괜히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딴청을 부렸다. "잠깐 앉아 봐." 지금껏 남자가 섹시하다고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알코올과 잠기운에 묻힌 그의 눈빛과 목소리는 정말 자극적이었다. "왜...." "앉으라니까." 그가 많이 피곤해 보이는 것 같아 예���은 말없이 따라주었다.은규는 곧 엎드렸던 몸을 굴리며 거친 목소리로 부탁했다. "좀 일으켜 줘." 이 남자가 도움을 필요로 할때가 다 있다니,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죽겠으면 그냥 자요." "잔소리 말고 빨리 일으켜." 한숨을 내쉬며 그의 목 뒤로 한팔을 집어넣던 예은은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려 적잖이 당황했다. "히,힘 좀 줘봐요." 괜히 핀잔을 주며 나머지 손으로 허리 부근까지 부여잡자 그가 어렵사리 몸을 일으켰다.잠시 숨을 고르는 은규의 모습을 지켜보던 예은은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자꾸만 낯선 감정을 깨우는 그가,아니 황은규란 사내에게 너무나 약해져 버린 자


기 자신이 무한정 두려워졌다. '갖고 싶어...' 소유욕이 차오른다. '이 남자를 갖고 싶어...' 차올라 넘실대는 감정을 더 이상 이길 방도가 없었다. "가까이 와봐." 많이 안정을 찾은 그가 중얼대는 소리에,예은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자꾸 왜 그러는데요." 대답 대신 주머니를 뒤적이던 은규의 손이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보였다. "어?" 설명은 필요 없었다.반지가 분명했다. "열어 봐." 손이 떨려 제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한참 만에 상자를 열자.사파이어 빛 백금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비싼 건 아니야." "왜 이런걸...." "약혼반지라고 해두지.어머님,아버님께도 그렇고,뭔가 하나 보일 만한 건 있어야 하니까." 결혼반지는 좋든 싫든 식을 위해 마련해야 하는 필수품에 불과했다.그래서 내일 손가락에 끼운다 해도 별다른 감흥을 느 끼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하지만 이 반지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이유를 막론하고 그가 마음이 동해 마련해 준 첫번째 선물이지 않은가. "당신이 직접 골랐어요?" 예은의 눈동자에 피어오른 기대를,은규는 건조한 대답 하나로 잘라 버렸다. "아니." 어차피 그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늘 그랬던 것처럼 수야가 움직였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실망하기보다는 기뻐하고 싶었다.그에게서 받은 첫번째 선물이 주는 지금의 이 기분을 쓸데없는 생각들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끼워줘요." 에은이상자를 불쑥 내밀자,은규는 베개를 세워 기대며 외면햇다. "그런 닭살 돋는 짓 못해." 차츰 기분이 깨어져 갔다.아무리 반지에 의미를 부여한다해도 이 사내의마음까지 의미를 갖추는 건 불가능하다는 현실 의 깨달음이 꽤나 가혹하게 느껴졌다. "갈게요." 소리나게 상자를 닫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예은이 많이 실망하고 상처 받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은규는 무시하는 쪽을 택했 다.언제 끝날지 모르는 관계였고,사랑이나 진실 같은 군더더기 감정은 끼어들 여지조차 없다고 믿었기에,끝까지 줄수 없 는 것은 처음부터 끊어 버리는 편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깐."


아플 지경으로 머리를 굴려대던 은규는 결국 예은을 불러 세우고 말았다. "또 왜요." 여전히 등을 보인 채 서있는 그녀를 보자 점점 더 마음이 약해졌다.술기운 때문일까?그래,그렇다고 해두자,사실 뭐라고 해도 상관없었다.책임을 전가할 상대가 필요한 것뿐이었드니까. 다시 예은을 앉히며 몸을 일으킨 은규는 상자를 열었다.기분이 이상했다.반지를 꺼내 그저 끼워주기만 하면 되는 것을 좀처럼 손이 움직이지 않아 애를 먹었다. "쭉 펴봐." 참으로 예쁜 손이란 생각이 들엇다.가락이 길고 손톱은 일자 모양.감촉도 보드라웠고.무엇보다아주 많이 따뜻했다.조금 더 그녀의 손을 바라보던 은규는 천천히 반지를 끼워주었다. "다행히 꼭 맞....." 멋쩍은 마음에 중얼대던 은규는 그대로 말을 삼켰다.마주 잡은 손등위로 떨어져 내린 물방울 때문이었다.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눈물 범벅이 된 예은의 얼굴이 보였다.분명소리는 나지 않고 있는데 커다란 눈에서 굵은 물줄기가 연신 흘러나오고 있었다. "미안해요..." 죄책감,연민,당혹감,그 외에 알수 없는 감정들이 은규를 잡고 놓아주지 않앗다.설명할수 없었지만 가슴이 아팠다. 혹사당하고 있는 심장에서는 미세한 열기도 느껴졌다. "나,많이 두려워요.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당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그냥 많이 복잡해요." 은규 역시 알고 있었다.그래서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한 가지만 약속해요." "말해봐." 잠신 목소리로 답하는 그에게 예은은 애써 눈물을 참아 보였다. "부부로 사는 동안만큼은 나한테 충실해 줘요.나와 지내면서 당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든,그게 죄책감만 아니었으면 좋겠 어요." 고개를 끄덕인 은규는 커다란 손으로 예은의 눈물을 닦으며,알수 없는 힘에 굴복해 서서히 얼굴을 숙였다.밀착된 코와 입술이 흘리는 숨결이 뜨거웠고,거센 팔에 둘린 그녀의 허리 근육이 미세한 경련을 일으켰다. '이사람을 사랑하지 않게 해 주세요.' 가슴이 아팠다. '사랑하지 않게 해주세요.' 아주 많이.

chapter 39 ==나,실은 엄청 밝히는 여자인지도 몰라.==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


쿵쿵,쿵쿵.심장이 뛴다. "기분이 어때?" 교회 청년부실을 대기실 삼아 앉아 있던 예은은 불숙 들려온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모르겠어.아무 생각도..." "제대로네,거기 앉아서 온전한 생각을 할수 있다면 그거야 말로 이상한 거지." "엄마도 그랬어?" "나?말도 마라,얼마나 떨었는지 청심환을 두개나 먹었는걸." 예은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터져 나오자,그녀의 엄마는 딸의 작은 얼굴을 보듬어 안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결혼이라는 건,백지와 연필의 만남과도 같아.어떤 것이든 지금부터 그려나가면 되는 거야.하지만 각자의 인생을 살아 오면서 갖춘 생각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나는 산,상대는 하늘을 담고 싶어할지도 몰라,그럴때 산과 하늘을 함께 담을 수 있도록 서로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것,그게 결혼 생활이란 거야." 예은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엄마의 진심 어린 조언에 거짓 결혼이 심히도 부끄럽게 느껴졌지만 애써 떠오르는 생각들을 지웠다. "나...은규 씨 많이 좋아해,엄마.아주 많이." 목이 칼칼해 더 이상의 말은 불가능햇다. "잘 .....살게요." 자신 없는 약속.그러나 지킬수 있기를 바랐다.간절히. 우아하다. 에은을 본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아버지의 손을 잡고 성전 복도를 지나오는 그녀에게서 순백의 신부다운 기백이 풍겨왔다.언제나 멋대로 뻗어 각각의 개성을 자랑하고 있던 머리카락이 예쁘게 틀어 올려져 있었고,어깨가 다 드러나 꼭 붙는 상의와는 다르게 겹겹이 둘려 화려하게 퍼진 드레스 디자인이 때 묻지 않은 그녀의 몸 전체를 감싸주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보라색 부케였다.야생화로 엮어 만든 부테가 드레스 뒤쪽에 매달린 꽃 장식과 묘한 조화를 이루 어 독특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멍해졌던 시선을 돌려 예배당 안을 훑던 은규는 굳어가는 얼굴을 수습할 수 없었다.조촐한 하객들의 얼굴이 포함한 공통 된 감정 때문이었다. 축복. 갑자기 양심이란 녀석이 꿈틀하더니 일체의 동요도없던 심기를 완벽히 뒤틀어 놓았다.이 자리는 정말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는 깨달음,누군가를 소중히 품어낼 가슴이 없는 이 냉정한 사내는 사랑받고 행복해야 할 그녀의 권리 를 빼앗을 자격이 없다는 강한 압박감.... 그만두자. 일이 더 커져 버리기 전에 여기서 되돌리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가 깨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안전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행복해지려면 일단은 살아 있어야만 했다.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는 그녀를 양심 운운하며 떼어버린 다는 것 또한 온전한 해결 방법이라 볼 수 없지 않은가. 제길! 달아날 구석이 없었다.오해하고 납치한 순간부터 예은은 이미 그에게 있어 가시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복잡한 생각에 잠긴 고개를 드는 순간,바로 앞에 다가온 예은과 장인이 눈에 들어왔다.얼떨결에 정중히 인사를 건네자 이제 곧 사위가 될 사내의 눈동자를 지긋이 바라보던 그녀의 부친은 꼭 붙잡고 있던 딸의손을 넘겨주었다. 돌기둥마냥 꼿꼿해진 은규는 다가오는 하얀 손을 치열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이 손을 넘겨 받으면 그녀는 이제 자신의 인생에포함되는 것은 물론,뿌리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터울 안의 사람이 되고야 만다는 생각에 망설임이 극에 달했다. "....빨리 안 잡아요?" 멍한 침묵을 뚫고 들려온 예은의 질책에 은규는 겨우 정신을 끌어 모았다.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요!" 얼떨결에 그는 에은의 손을 넘겨 받았다.이상하게도 마주 잡안오는 손아귀 힘에 헐거워졌던 나사와 볼트가 맞물린 것처럼. 흩어진 모든 아귀가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은규는 예은의 손을 이끌어 목사님이 계신 곳을 향해 걸어갔다.결혼식 도중 처음으로 부딪친 두사람의 눈동자에서 알수 없는 스파크가 일었다. 목사님의 주례사가 시작되었다.때맞춰 태양도 고개를 내밀었다. 적당한 빛을 뿌리고 있는 하늘과 딛고 있는 땅 모두가 그대로인데,큰 덩어리 하나가 변해 버렸다. 그의 아내가 된 것. 딱히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에 휩싸인 예은은,이제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인생에 포함된 은규의 팔을 잡고 교회 를 빠져나왔다.제일 먼저 부모님과 오빠가 보였고,유희와 출판사 식구들.현석 부부와 수야의 모습도 차례로 눈에 담겨왔다. 그외에 혹시 발생할지 모를 사태를 대비해 그의 조직원들이 근처 곳곳에서 정황을 살피는 중이었다. 결혼식은 놀라울 만큼 조용하고 소박했다.은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녀 쪽 식구들도 친척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몰래 하는 도둑 결혼인양,하객들은 거의 없다고 해야 옳았다. 그래서인지 생각할수록 억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삭제된 것이 너무 많아 완성되지 못한 엉성한 문장처럼 그녀의 단 하나뿐인 결혼식은 99% 부족한 것뿐이었다. 프로포즈?물론 받은 기억이 없다.사랑?그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청첩장.넘쳐나는 하객들.피로연.신혼여행.세상 모든


여인들이 누리는 결혼식의 추억을 도난당한 것도 모자라 스스로 만들어 가는 인생마저 포기해야 할 판이었지만,예은이 원하는것은 어차피 이런 절차나 허례허식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진실을 원했다.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계약과 상황에 몰린 작위적인 관계보다는 진실로 채워진 눈동자를 들여다 보고싶었다.단기간이라도 상관없었다.함께 지내는 순간순간 아내와남편이란 이르미 줄수 있는 교감을 나눌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다소 소박한 바람일 뿐인데도,결혼식 내내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감정까지 훔치는 것은 무리라는 사실만 깨닫고 말았다.아버지의 손을 놓고 그의 손을 잡을때.잠시 흐려졌던 흑색 눈동자는 빠르게 감정을 지워 버리고 견고한 빗장을 채워 버렸다. "행복하세요!" 어느새 다가온 새벽이 예쁜 미소와 함께 꽃가루를 뿌려 금방 두사람 머리 위로 형형색색의 꽃비가 내려앉았다.수차례의 덕담이 이어졌다.죄책감을 뒤로한 채 예은은 활짝 핀 미소로 신부의 가면을 뒤집어 썼다. 신혼여행지는 양평의 별장으로 정해졌다.예은의식구들과 그외의 사람들에게는 일주일간의 국내 일주 예정이라고 말했지 만,태평스레 여행이나 즐길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혼여행마저 거짓으로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은규의 식구들이 차에 달아준 장식들은 지나치리만큼 화려해 수심에 잠겨 있던 예은의 입에서 웃음을 자아냈고,트렁크에 매달린 끌려오는 깡통 소리가 규칙적인 룰을 타고 차 안 가득 한 긴장과 침묵 사이를 기웃거렸다. 바로 이 차를 타고서.이 남자와 함께.이 거리를 몇 번이나 오갔는지 모른다.때마다 상황은 달랐고 그녀의 마음가짐도 달 랐지만,유독 같은 것이 잇다면 황은규라는 사내의 태도뿐,한팔을 창밖에 내놓은 채 흡연을 즐기는 그의 입술은 웬만해서 열릴 기색이 아니었다. "후...." 답답한 마음에 얘기라고 꺼내 보려던 예은은 다량의 한숨밖에 뱉어내지 못했다. 정말이지,대단한 남편과 죽이는 신혼여행기 아닌가. 커피가 써 눈살이 찌푸려진다. 이래서 영 카페는 체질이 아니라고 중얼대며 시준은 시계를 바라보았다.약속한 시간에서 20 분이 더 흘렀으니 슬슬 녀석이 모습을 드러낼 차례였다. 경찰청 근무 시절 꽤 두터운 친분을 두고 있던 옛 동료를 만날 생각에 쓴 커피조차 그런대로 괜찮게 느껴지다니,사람의 정이란 게 이래서 무서운 것인가 싶었다. "어이.오 형!" 걸걸한 목소리에 시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누구야!정말 그 빼빼로 김 형사가 맞아?" 몰라보게 풍채가 좋아진 동료와 강한 포옹을 하며 시준은 환하게 웃었다. "이야,팔자가 좋은가 봐?살이라곤 생전 안 붙을 것 같던 사람이." 늘어진 턱살을 실룩대고 웃던 김형사는 품에서 무전기를 꺼 내놓으며 한숨을 돌렸다. "이게 다 스트레스 살이지 뭐겠어.지금도 잠복근무하다철수하고 오는 길이야.삼일밤을 꼬박 샜더니 제정신 아니다." 투박한 무전기를 생명 줄인 양 움켜쥐고 있는 동료를 보니.영락없는 형사 양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 옆자리는 자신의 것이었지만 이젠 아련한 추억에 불과했다. "형사라는 건 어쩔수 없나 봐.이것저것 붙여 변장을 해놔도 어딘가 모르게 수갑 냄새가 나니.원." 시준의 놀림에 김 형사가 입을 삐죽였다. "구린내 나는 것들은 유독 그 철 냄새에 민감하지.분명 개같은 새끼들이라 코가 민감한 거라고." 그제야 시준은 동료가 무척 지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재미난 사건이라도 있어?" 시준의눈에서 흥미와 기대감을 읽어낸 김 형사는 시원한 냉수를 시키며 으르렁 댔다. "그래.아주 재밌다 못해 죽겠다 죽겠어!" "뭔데 그래?" "내년이면 파주 신도시 개발 공사도 다 끝나잖아.산업 단지니.아파트 분양이니.죄다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는걸 보니 일산을 능가하는 신도시가 될 모양이야.아,대학교도 하나 짓고 있다지?거의 완성된 것 같던데." 시준은 벌써 동료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어느 정도 짐작 하고 잇었다. "깍두기들 엄청 몰려오겠군." "소식통에 의하면 가장 중심지에 유흥업소 밀집 지역이 생기려나 봐.10 층짜리 빌딩 하나가 들어설 예정인데,거기가 전부 나이트.색시 집.주점.러브호텔 같은 걸로 꾸며진다더라고." "10 층 빌딩이 전부?" "그나마 와화시켜 겉으로 드러낸 게 그 정도지,술 같은 건 기본이로 깔아놓고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노름판도 벌어지 고 마약도 오갈 거야.매춘이야 말할 것도 없고.21 세기형 소돔과 고모라를 제공하고서 돈 좀 긁겠단 수작인데.10 층 빌딩 전 부가 그 모양이라면 이권이 어마어마하지 않겠어?일단은 자금줄이나 권력 확보 때문에 여러 조직들이 손을 잡은 것 같은데 막상 뚜껑 열면 그것도 어떻게 뒤바뀔지 모르지.하여간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는 땅 주인인데.지주가 허락을 안 해서 그 지역 일부를 접수 못한 것 같더라고." 시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건달들이 그만큼 모였다면서 땅 주인 하나 어떻게 못한단 말이야?그거 놈들이 밥 먹듯 하는 짓이잖아." 피로에 잠겨 있던 김 형사의눈동자에 처음으로 생기가 돌았다. "땅주인이 보통내기가 아니거든." 시준은 침묵으로 이야기를 재촉했다.


"오 형 옷 벗고 나서 서울도 물갈이가 좀 됐어.승승장구하던 신흥파는 마약 루트가 막히고 중간 보스급까지 죄다 잡혀 들어가는 바람에 조만간 다른 덩어리에 접수될 모양이라 발악하는 중이고, 유리파는 이영학이 죽고 흑사가 보스로 올랐지. 바로 이 녀석이 땅 주인인데..." "흑사?" "지금 완전 뜨는 별이라니까.젊고 똑똑해서 이 바닥에서는 엘리트로 통하는데,볼수록 참 묘한 구석이 있어." 왠지 모르게 구미가 당겨 시준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커피를 한잔 더 시켰다. "탁 까놓고 말해.이 녀석은 조폭이 아니야.내 이런 조폭들만 있으면 사람 대접 해준다." "그렇게 물건이야?" "이영학이 죽고 나서 한동안 난리도 아니었지.이리저리 눈치 보던 것들.자리 바꾸고 갈아타고 배신 때리고.하여간 보통 시끄러운 게 아니었어.우리도 바짝 긴장하고 있었는데 잠잠히 있던 이 흑사 녀석이 슬슬 움직이더라고 물려받은 조직체를 싹 갈아 치우기로 작정한 모양인지.알곡하고 쭉정이 가리듯 양아리 근성 못벗는 악질들을 죄다 내쳐 버렸지 아,뭔가 꿍 꿍이가 있구나 싶어 주시하고 있는데,웬 고아원이라도 차릴것처럼 소년우언 몇 번 들락거리며 폐인 직전이던 녀석들을 하나 둘 모으는 거야.소문 듣고 어중이떠중이 점점 모여들더니 번듯하게 체계가 잡히고,이제까지 제 구역만 정확히 관리하면서 아주깨끗하게 놀고 있다.시비 거는 것들하고 몇번 싸우는 일 외에는 교통 위반 딱지 하나 안뗐을 정도로 생활이 말끔 해.게다가 녀석 배경이 어떤지 아냐?" 시준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흑사 녀석이 바로 HS 그룹 6 대 장손이라는거 아니야." 시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뭐?" "수도권 내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조직 대빵이 HS 그룹 6 대장손이다....이거 매스컴에서 이용하면 완전 대박인데,황 회장이 있는대로 압력 넣어갖고 다들 쉬쉬하고 있어.불거지면 그룹 망신이다,뭐 그런 얘기지.어때 진짜 물건 아니냐?" 시준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커피에 각설탕을 세 개나 넣었다. 남자로서의 매력이라고나 할까.왠지 그 흑사라는 인물에 마음이 동했다. HS 그룹이라는 대단한 배경을 버리고 거친 세계에서 스스로의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는 건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다.무엇 보다 어깨들과 함께 살면서도 함께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게 놀라웠다.그만큼 자기 관리가 철저한데다 배짱과 가치관도 뚜렷 한 인물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런 인물이 땅 주인이니 만만하겠냐?함께 협조해 세력을 키워 나가자면서 접근했던 모양인데.이 세계에서 협조라는 말 이 어디 씨알이나 먹히는 말이어야지.본격적으로 영업 들어가면 이권 다툼 때문에 큰 싸움 한번 벌어지고도 남을 텐데.똑


똑한 흑사 녀석이 그걸 모를리 없잖겠어.절대 손잡을 수 없다면서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있단다." "10 층 빌딩 유흥가라...돈이 떼로 보이는군." "그 엄청난 계획을 땅 때문에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니..." "녀석들이 이대로 가만있진 않을 텐데." "맞아 아주 안달 나서 소리없는 싸움을 키우고 있어.조만간 큰건 하나 터질지도 모른다." 시준은 무의식적으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땅을 다 접수한다고 해도 허가 내기가 쉽지 않을 텐데?" 이제 더 이상 김 형사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한쪽에 흑사가 있다면 다른 쪽엔 족제비란 놈 하나가 버티고 있지.너도 알걸?부산 거물 마이더스라고." "당연히 알지.조만간 정계에 진출한다면서?" "족제비가 그놈 사생아야.든든한 백그라운드를 끼고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데.어떤 녀석인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 고 있어.내 장담하는데 이 엄청난 시나리오의 대빵은 마이더스가 분명해.뻔하지 않냐?제 놈은 정계 진출 때문에 가면쓰고 있는 입장이라 손에 똥 묻히는 일은 할수 없고.호적상으로 완전 남인 애새끼나 이용하자.이런 꿍꿍이겠지.안전하잖아." "그렇게까지 하고 싶을까?" "그 속물들 머리통 속을 낸들 알겟냐.이놈의 양아리들만 없어도 내가 아주 살맛 나겠다 진짜."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는 시준의 눈동자가 생생한 빛을 발하자 김 형사는 코웃음을 치며 넌지시 떠보았다. "하여간 이런 얘기만 나오면 눈이 초롱초롱한 게.수갑이나 잡고 살 팔자인 사람이라니까?어때.진짜 복귀할 생각은 없는거야?" 시준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옷 벗기 전에 맡았던 마지막 사건.그때 어머니가 보통 놀라신게 아니라서.복귀하면 천하의 못된 불효자식이 되고 말거야." 딱하다는 듯.김 형사가 혀를 찼다. "그렇다고 천직을 버리고 살아지냐?" "진짜 사나이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가슴에 묻어둘 줄도 알아야 하는거야.경호업도 나름대로 할 만해.어떻게 보면 두 직업 사이에 상당한 연계성이 있으니까.게다가 이렇게 가끔 만나 구미 당기는 소식을 퍼다주는 동료도 있고,이만하면 행복한 인생이지.안 그래?" 생긋 웃어 보이는 시준에게 김 형사는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말이나 못하면,그래.동생이 결혼했다면서?진작 연락좀 주지 그랬냐?" "조촐하게 했거든.평생 책이나 부둥켜안고 살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가니 좀 허무하네." 예전부터 동생 이야기가 나오면 유난히 팔팔해지곤 했던 시준의 모습이 기억나.김 형사는 장난기 있게 웃으며 놀렸다. "동생 남편한테 괜히 심술부리고 그러지 마라.그거 아주유치한 짓이다." 허를 찔린 시준은 그저 맹하게 웃어 보였다.


기분이 좋았다.추억의 공간은 언제나 감정을 고조시킨다. 가만.추억의공간.....? 납치되어 감금당했던 장소를 그런 식으로 부를 수 있단 사실이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었지만,지금 이 순간에도 여기 저기서 터지는 지난 기억들에 가슴이 설레고 있었다. 침묵 선언 후 그와 함께 작은 보트를 띄울 수 있었던 호수,딸꾹질 때문에 이루어졌던 첫 키스의 장소.과묵한 그를 꾀어 어떻게든 정보를 얻기 위해 거닐던 산책로,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해 숨어들었던 동굴.....생각해 보니 꽤 낭만적이고 자극적인 기억의 장소가 곳곳이 비치되어 있었다. 가방을 내리는 은규와 수야를 보며 예은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남편,내 남편... 계속 중얼거려도 아직은 입에 설기만 한 단어였다.마주보며 웃을 줄도 모르고,살가운 말 한마디 하면 머리가 어떻게 되는 줄로만 아는 막대기 같은 사내였지만,자의건 타의건 이제 남편이란 이름으로 옆자리에 서게 되엇다. "저...." 말을 건네는 수야의 낮은 목소리에,예은은 흐릿해진 눈동자에 초점을 잡았다. "네?" "형님 이미 들어가셨습니다.언제까지 거기 서 계실 건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몇 시간 전에 남편이 된 사내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후...열나네." 좀처럼 꿈쩍하지 않던 수야의 눈가에 웃음이 찾아 들었다.왠지 민망해진 예은은 괜한 허세를 부리며 은규의 뒤를 밟았다. 세상이 제 빛을 잃고 어둠에 잠겨갈 즈음,깨어난 예은은 밖으로 나왔다.결혼식 내내 긴장했던 탓인지.짐도 채 풀지 못하 고 쓰러져 무의식이 보내는 갖가지 영상에 된통 시달려야 했다. 겨우 정신을 추스르고 호수 근처를 기웃거리는데,웬 노부부가 함께 주변 정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엿다.아마도 일주일 에 몇 번씩 들러 별장을 관리한다던 분들 같았다. "안녕하세요." 불쑥 인사를 건네는 낯선 여인을 알아볼 심사로,노부부는 시력이 다한 눈을 찌푸리며 돋보기 너머 유난히 커보이는 눈동 자를 분주히 굴렸다. "뉘신지...." "아,저는..." 일단 입을 떼기는 했으나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수가 없어 붕어마냥 뻐끔대고 있는데 뒤쪽에서 뭔가를 발견한 듯 할머니 가 소리쳤다. "아,주인 양반 왔구만!" 예은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은규가 황급히 담배를 뱉으며 걸어오고 잇었다. "안녕하셨어요."


정중한 인사에 노부부가 껄껄대며 웃었다. "우리야 뭐 늘 그렇지.주인 양반도 안녕하셨는가?" "덕분에 마음 놓고 집을 비웁니다." 그 역시 웃었다.마치 어린 소년처럼 편안한 미소로. "아 근데.요 이쁜 처자는 누구래?" 늘어진 살 때문에 많이 덮여 있었지만 할머니는 유난히 속눈썹니 긴 눈을 반짝였다. "혹시 애인 아녀?" 옆에서 거드는 할아버지의 추론에도 은규는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다. "아,맞구먼!" 그의 미소를 대답으로 간주한 할아버지가 무릎을 탁 치며 소리치자,할머니의 눈동자가 좀더 집요하게 예은을 훑었다. "우리 주인 양반 눈이 높네 그려.어디서 요로코롬 참한 처자를 골랐을까 그래?어디 보자...내 이래봬도 사람 보는 눈 이 좀 있는디." 돋보기를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들이대는 할아버지의 행동에 예은은 자못 당황해 머리를 만지작대며 실실 웃었다.한참을 살피던 노인이 제법 심각한 어조로 말햇다. "꽉 잡어.물건으로 따지자면 명품이여 명품!" 신빙성 있게 들리진 않았어도 예은은 괜히 기분이 좋아져 얼굴까지 붉히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이후로 한참이나 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아이쿠 이런!벌써 시간이 이리 됐나?" 1 시간 정도 흘렀을까.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며 노부부가 먼저 돌아섰다.약속이라도 한 듯 은규와 예은은 나무 에 둘린 비탈길을 내려간는 그들의 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반쯤 내려갔을때 돌부리에 걸렸는지 할머니가 한번 휘청하자,면박을 주면서도 슬쩍 잡아 일으켜 주는 할아버지의 행동이 눈에 띄었다. 따뜻해.... 심장까지 푹 녹아드는 느낌에 예은은 얼굴 한 가득 미소를 피워냈다. "멋지지 않아요?" "뭐가." "정말 몰라서 묻는 거라면 당신 확실히 문제 잇는 사람이에요." 잔뜩 삐죽였던 예은의 입매가 손을 꼭 잡고 멀어지는 노부부로인해 다시 풀어?다. "부부처럼 묘한 관계가 있을까 싶어요.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짧으면 몇달 길어야 몇년 남짓인 사랑에 혹해 평생의 시간을 묶어 버리죠.정말 많이 봤어요.심하다 싶을 만큼 유난 떨며 결혼했던 사람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흉한 꼴 보이며 갈라서는 모습.돌아설때 보면 정말 남보다 더 살벌하더라구요." "당연한 이치야.다른 환경.다른 가치관 속에서 다른 성별을 가지고 살던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을 나눠 쓴다는 건 전쟁 못지 않은 고문일 수도 잇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 이제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노부부의 여운을 곱씹으며 예은이 속삭였다. "그러니까 저분들이 멋지다는 거죠.그 모든걸 극복하고 가장 초라한 모습이 된 서로를 품으며 살아가고 있는 셈이니까요.


나도 그럴 수있었으면 좋겠어요 적어도 한 남자를 사랑해 평생을 약속했다면 끝까지 지켜야 도리 아니겠어요?그래야 나 자신에게도 실망하지 않을 테구요." 그녀는 이미 서약을 햇다.이 남자를 남편으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섬기겠다고,목사님과 하느님 앞에서 굳게 약속하고 말았다. 지킬수 있기를 바랐다.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고 서로의 버릇과 세월까지 보듬어 안으며 함께 늙어갈 수 있기를. 예은은 스르르 눈을 닫고서 백발에 주름투성이가 된 모습을 한 채 손을 맞잡고 이 별장을 거니는 그와 자신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았다.난감하게도 노인이 된 그의 모습을 도무지 그릴 수가 없었다. 발아래 나무 계단이 삐걱거렸다. 방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던 예은은 몇 번이고 머리를 쓸어 올렸다.두 사람이 지나기에는 다소 비좁은 계단.등 뒤로 느껴 지는 은규의 온기와 인기척에 모든 세포가 반응하고 잇었다, 태열에 시달리는 아기마냥 달아오른 것은 필시 얼굴만이 아닐 터,숨이 막혀왔다.안타까운 마음으로 견우를 바라보아야 하는 직녀처럼,가질 수 없는 그를 그저 느껴야 하는 현실이 무서울 만치 소유욕을 부풀어 올렸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나란히 붙어 있는 방문 두개가 보였다.굳게 닫혀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꼭 자신의 처지와 비슷해 보였다.생명력 없는 문 따위와 견주어지는 입장이 되고 말다니.아....이렇게 비참할 수가. "후..." 이제 곧 그와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묘한 아쉬움이 찾아들었다.1 년 365 일 가운데 그저 그런 날이 아닌.신혼여행 첫날 밤인데 정말 이렇게 보내야 하는 것일까. '평범한 결혼이 아니잖아.그래도 결혼은 결혼이지.잠깐만 더 같이 있자고 할까?아...못해!엄청 노골적인 여자라고 생각 할지도 몰라." 갈등.자꾸만 솟구치는 소유욕.그를 갖고 싶다는 욕망에 머리도,영혼도.심장도 모두 터질 것만 같았다. "내일 수야한테 전화 넣을 생각이니까 필요한 것들 미리 생각해놔." 어느새 문가에 이른 그가 먼저 침묵을 갈랐다. "알았어요." 완벽히 감정을 숨긴 눈매가 일체의 움직임도 없이 그녀를 마주 보고 없었다.담담하게 다문 입술에서 아쉬움의 흔적은 발 견할 수 없었다.그에게도 오늘은 분명 신혼여행지의 첫날밤일 텐데.어떻게 저리도 차분할 수 있을까? "문단속 잘해." 형식적인 말을 마지막으로 그가 문손잡이를 잡았다.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동그란 손잡이를 망연히 바라보며 예은은 조바 심에 입술을 살짝 물었다.


"저기요..." 은규의 고개가 살짝 틀어져 그녀를 향했다.잠시 자신이 그를 불렀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예은은 쏟아지는 시선에 어색해져 손가락만 비비 틀었다. 오늘 따라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지.설레는지.안달하는지.도통 이유를 알수 없었다. "얘기해." "그게..." 마지막 순간까지 두 마음과 싸우던 예은은 발끝으로 시선을 내리며 웅얼거렸다. "....해요." "뭐?" 언제나 명확한 해답을 듣지 못하면 슬쩍 올라가던 그의 눈썹이 여지업이 기다란 기���자를 그렷다. 나무토막 같은 인간이 엄청 둔하기도 하지.신혼여행 첫날 밤.침실을 눈앞에 둔 신부가 이렇게 망설이고 있다면 그 이유야 뻔한 것 아닌가. "제대로 얘기해 봐." 거하게 한숨을 뿜어낸 예은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필요하다구요." 은규는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을 거두며 완전히 몸을 돌렸다. "그러니까.뭐가." 화가 날만큼 스스로가 답답하게 느껴진 예은은 어깨를 펴고 곧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주사위는 이미 던져?다.

chapter 40 ==제대로 된 게 없다.하나도...==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살짝 벌어진 은규의 입술이 천천히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자정을 넘긴 시각에 의도가 뻔히 보이는 발언을 들었으니 난감할 만도 할 터.제정신이 돌아온 예은은 있는대로 얼굴을 붉 히고 눈을 피했다. "부끄럽기는 한 모양이지." 한참 만에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예은은 눈을 흘겼다.애매한 발언으로 교묘히 빠져나갈 구멍을 파기 시작하는 그의 태도 에 화가 났지만 민망하고 창피한 기분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 나마 심보가 어찌 이리 고약한지,집요한 질문까지 보태기 시작했다. "그래,이 사간에 날 가져다 뭐에 쓰려고?" 순식간에 예은은 귀까지 벌건 기운으로 달아 올랐다.이게 바로 황은규라는 사내의 방식이었다.진지해지거나 감정의 교류 가 이루어지려던 순간마다 독설 섞인 농담을 던져 상황을 반전시키는 것.오늘만큼은 다르기를 바랐던 스스로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이봐,설마 눈 뜨고 잠든 건 아니겟지." 이런 상황에도 아무렇지 않게 농담이나 할수 있는 그를 이해할수 없었지만 그녀는 순발력을 발휘했다. "일꾼으로 좀 부리려구요." "......" "짐 정리,아직이거든요.침대 다리 한쪽도 좀 이상하구요." 자신을 또렷이 바라보는 검은 눈을 향해 예은은 여유 있는 목소리를 덧붙여 주었다. "왜요...뭐 다른 거라도 기대한 거에요?" 비참하긴 했어도 자존심은 건질 수 있었으니 대충 만족이었다. 아귀가 어긋난 침대 맡에서 은규가 숙련된 솜씨로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그 넓은 어깨에서 도무지,어떻게 해도,시선이 떨어지질 않았다.목이 굵은 나마는 질색인데 적당히 커트한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 선이 의외로 곱달 만큼 꽤 근사했다. 군살하나 없이 평평한 등과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커다란 손.아...또다시 망상이 차오르는 것을 저지할 수가 없었다. 저 넓은 가슴에 언제든 안길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일에 몰두한 그의 머리카락을 아무렇지 않게 쓸어 볼수 있는 사람이 될수 있다면,수고했다며 등을 힘껏 안아 볼수 있는 사람이 될수 있다면,크고 사내다운 손에 모든것을 맡길수 있는 그의 여자가 될수 있다면... 결혼식 후라서,혹은 신혼여행 첫날밤이기 때문일까?왜 자꾸 그에 대한 소유욕에 몸서리치게 되는지 헤아릴 수가 없었' 다,다만,알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가 한없이 멋져 보인다는 것뿐.슬쩍 찌푸린 얼굴과 입술 한쪽에 삐딱하게 물린 담배. 심지어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망치까지도 그냥 다 특별해 보였다. 마침내 수리를 마친 은규가 커다란 몸을 일으키자,예은은 뜨겁게 쏟아내던 시선을 거두고 앞에 놓인 옷가지들을 집으며 딴청을 부렸다.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눈동자나 표정 교환 없이 단지 시선만 느꼈을 뿐인데 온몸이 후끈 달아올라 숨통이 막혀 버렸다. 산소를 넣오 볼 심사로 몸을 돌려 시서늘 피하려던 예은은,바로 앞 거울을 통해 그와 정면으로 마주치곤 그개로 굳어 버렸다. 불꽃을 보았다.은근하지만 숨죽여 타오르는 갈망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맹렬한 기세로 호흡하고 있었다. 혼자 분주한 시계는 자정을 넘겨 새벽을 향해 달렸고,시간과 생각들이 차단된 감각의 공간 안에서 두 사람은 솔직하게 마음을 드러낸 서로의 시선만 한없이 붙들었다. "저...." 용기를 낸 예은이 한마디 하려 하자 그가 감정을 차단했다. "늦었어,그만 자."


같은 것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명백한데도 굳게 철문을 내리겠다는 뜻.... '안 돼.이렇게는 못 물러나!' 순간의 분노에서 용기 이상의 힘을 얻어낸 예은은 다급히 그의 옷을 붙잡았다.손가락에 휘감겨 오는 부드러운 면의 촉감 에 눈을 감자,뻣뻣한 목구멍으로 갈라진 말들이 흘러나간다. "같이....있고 싶어요." 미세하게 내쉬는 그의 한숨이 귓가에 닿았다. "대체 왜 이래,오늘." "몰라서 물어요?" 모를 리 없다는 것을 두사람 다 명백히 알고 있었지만,그는 주머니에 손을 가둔채 기둥처럼 방문만 바라보았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아요.그냥...왠지 오늘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니까.얘기라도 해요.이제 부부가 됐 는데 적어도 서로에 대해 알건 알아야 하잖..." 은규가 예고 없이 돌아선 이유로 예은의 입술은 자연스레 단어를 잃었다. "밤새 얘기나 하자..?" 그가 한 발자국 더 떼어내는 통에 예은은 같은 거리만큼 물러났다.감질날 만큼 느릿한 걸음을 옮겨 오던 그는 어느 순간 적정선을 넘어 코앞까지 다가와 섰다. "좋아,이제 무슨 대화를 할까?"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열기로 채워진 시선이 예은의 호흡을 앗아가 버렷다. 새벽 두시에 신혼여행지 침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대화는 뻔했다.그런데도 두사람은 최후의 적정선을 그어놓은 채 서 로의 눈동자만 바라볼 뿐,어느쪽 하나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예은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충분히 내보였다고 생각했다.그런데도 좀처럼 다가오지 않는 그에세 창 피하고 분한 감정을 느꼈지만,그중 가장 커다란 것은 슬픔이었다. 그녀의 얼굴위로 나타난 감정 전이를 지켜보던 은규 역시 옅은 한숨을 흘렸다.여자에게 유혹이 묻어난 하룻밤 제안 같 은 것이야 숱하게 받아 새로울 게 없었는데,서투르고 풋풋한 그녀의 초대는 왠지 차별된 느낌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거칠게 살아온 그는 또래 남성들과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달랐다. 언제나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며 살아왔고,자신과 조직 식구들에게 해가 될수 있다고 판단되는 모든 것들을 눈앞 시야에 서 지우는 쪽을 택했다.그런 책임감과 의식이 너무 커,여자들과 있어도 성적으로 의식한다거나 보혼본능을 느껴 보진 못 했다.하지만 그녀는 은규에게 숱한 변화를 인지하게 만들고 잇었다. "그만 자." 한번더 알수없는 갈망과 충동을 죽이고 돌아서려던 그는,눈꺼풀을 내리며 꽉 쥐는 예은의 주먹을 보았다.이어 터져 나온 목소리 또한 심상치 않았다. "나 혼자만 이런 거에요?" 무슨 생각을 한것인지,예은은 대뜸 그의 목덜미를 두팔로 껴안으며 눈동자를 들었다.


"이래도,정말 아무 느낌 없어요?" 커다란 눈망울에 차오른 물빛.미세하게 떨고 있는 손의 촉감과 꼭 다문 입술.바짝 밀착된 가슴에서 느껴지는 열기를 고통 스러울 만큼 깊게 의식하고 있던 은규는 주머니에 있던 손을 빼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묻었다. 그리고 무너져 내렸다. 강하고 거친 압박에 못 이긴 예은의 몸이 균형을 잃엇고.두 사람은 자연스레 바닥에 쓰러져 얽혀들었다.딱딱한 바닥에 그 녀의 머리가 부딪치지 않도록 은규는 순발력 잇게 손바닥으로 감싸 쥐며 촉촉한 입술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혀가 의지를 잃는 기분에 예은은 그의 옷깃을 꼭 붙들었다.무서운 기세로 휘어 감는 강한 열정이 나약해진 감성을 압도해 갔다.육체 또한 다를것이 없었다.닫힌 눈꺼풀이 굳게 자물쇠를 걸었고,축 늘어진 두손은 그의 목덜미조차 움켜쥘 힘을 끌어 모으지 못했다. '이런 거구나...그래.이런 느낌이구나.' 아득하다.이성이 저만치 밀려 나간다.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기분,너무 놀라 심장이 뛰고 있는지,멎었는지조차 모를 지경의 무아 상태.온몸이 중력을 잃고 육체 안에 갇혀 있어야 할 감각도 중심을 잃었다. 산소가 모자란 허파는 숨을 걸게 만들었고,공중에 떠오른 것처럼 전신에서 에너지가 빠져나갔다. 예은의 턱을 쓸고 내려간 은규의 입술은 딱딱한 이로 목언저리를 자극한후 가슴으로 미끌러져 내려갔다.그의 뜨거운 손 역시 그녀의 상의 속으로 파고들어 부드러운 배를 훑고 브래지어 앞까지 이르러 망설임 없이 봉긋한 맨가슴을 움켜쥐었 다.깜짝 놀란 예은은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움츠렸다. "아,저...." 믿을수 없게도 은규는 예은의 작은 거부의 몸짓을 묵살한 채 민감해질 대로 솟아오른 가슴을 거칠게 한입 가득 물었다. 예은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상황탓이 아니라면 가벼운 스킨십조차 하지않던 사람이,걷잡을수 없는 격정으로 자신 을 몰아세우고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까지 엄습해 들었다. 마침내 은규의 손이 배꼽을 지나 바지 속으로 들어오자,예은은 황급히 몸을 닫으며 소리쳤다. "안돼요!" 청각을 잃은 사람처럼,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금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어 댔다. "아.....안....." 머리는 분명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데,닫혀 있던 몸이 스르르 빗장을 풀었다.부드러운 혀로 예은의 입술을 가득 메운 은 규는 단번에 팬티 속에 손을 넣었고,거센 마력에 휩쓸린 것처럼 닫혀 있던 그녀의 눈이 다시 한번 번쩍 열렸다. "그만 해요!"


두려움이 묻어난 예은의 외침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모....못할 것 같아요.더 이상은!" 거세게 뺨을 자극하고 있는바람,그것은 누구도 아닌 은규의 숨결이었다.지금껏 한번도 볼수 없었던 방법으로 그는 힘겹 게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뺨으로 몰아치는 뜨거운 바람이 조금씩 차가운 기운을 담아갔다.은규는 양팔에 힘을 실어 몸을 일으켰고.예은은 안도와 아쉬움이라는 두개의 감정 안에서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끝까지 갈 자신도 없으면서 허세 부리지 마." 예은의 온몸이 차디차게 식어 버렸다. "당신은 욕망이 뭔지 몰라,원한다는게 뭔지 몰라.그저 그런 소녀 같은 감성으로 예쁘게 포장해 생각하면 그만이겠지만 똑똑히 알아둬.누군가를 원한다는 건 말초적이고 원초적인 감정이야.그러니 끝까지 갈 생각이 없다면 애초에 자극해서 괜 한 사람 지치게 하지 마.알아듣겠어?" 폭풍처럼 가슴을 휘저어 놓고서 그는 문을 열고 사라져 버렸다.홀로 남은 예은은 들끓어 올랐던 공기와 육체가 천천히 식 어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두려웠던 것뿐인데,잠시 겁이 났던 것뿐인데.스스로의 욕망조차 책임지지 못하는 어린애 취급을 받고 말았다. "한심해.." 최악의 첫날밤.예은은 지친 팔을 들어 시큰해져 오는 눈을 가렸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옷통을 벗어던진 은규는 방 한쪽에 딸린 욕실 문을 열고서 다짜고짜 찬물을 틀엇다.이성을 배신한 육 체가 이쯤에서 분위기 파악좀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얼음장 같은 물줄기 아래 온몸을 들이댔다. 왜 그랬을까. 혐오스러울 정도로 달아올랐던 몸속으로 으스스한 한기가 파고든다. 대체 왜 그랬을까. 뿌옇게 돌아온 이성을 향해 그는 끊임없는 질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욕망이 뭔지 모르는 쪽은 자신이면서,누군가를 원하는 건 말초적이고 원초적인 감정이라며 있는대로 폼을 잡고 말았다.성인 남성 누구나 느끼는 욕구 불만쯤이야 주기적으로 찾 아들지만 그걸 달래기 위해 여자를 필요로 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욕망이 무엇인지,평소의 자신을 잃을 만큼 여자에게 열중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관심조차 없 었다고 해야 옳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녀에게 다가가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그래서 나름대 로의 데드라인을 형성한 후 사방팔방 그어놓고 금조차 밟지 않으려 조심하고 또 노력한 것인데.... 밟아 버렸다.그 눈금을,맛보고야 말았다.금단의 열매를.


이제 아내라는 자격으로 한 공간에서 부대끼며 살아야 할 처지였으니,전처럼 적정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어려울 것은 분 명한 사실이었다. 온몸이 흠뻑 젖어 한가기 찾아들 무렵 은규는 욕실을 나와 창문을 열었다.기웃거리는 바람이 휘몰아치는 욕망을 달래어 가자,허해진 마음만큼이나 담배 생각이 절실해졌다.그는 곧 침대 옆 탁자로 다가가 무거운 몸놀림으로 케이스를 집어 들다가 뭔가를 생각해 낸 듯 잠시 주춤햇다. 백곰이 남긴 유일한 유품 '형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상흔으로 얼룩진 눈을 하고서 녀석은 그렇게 그의 인생에 찾아 들었다. '갈 곳이 없습니다.이런 비렁뱅이들 구제해 주시는 아비라기에 무작정 찾아왔습니다.주먹은 쓸줄 모르지만 컴퓨터와 숫 자라면 조금 다룰 줄 압니다.' 이상할 정도로 강하게 녀석에게 끌렸었다.근본도 모르거니와 눈동자에 박힌 생채기가 위험천만해 보이는 인물이었는데도 아무 말 없이 그날로 백곰을 거둬들였다. '이제부터 형님 담배 담담은 접니다.언제나 옆에서 가득 채워드릴게요.' 그렇게 받앗던 케이스.이후로 이 안에는 언제나 담배가 빼곡히 담겨져 있었다. 처음으로 케이스가 비어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 순간,그는 백곰의 죽음을 가장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녀석..." 은규는 작은 소리로 웅얼대며 창틀에 걸터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해야 할일.해결해야 할일들이 많았다.파주 신도시 부 지는 경멸하는 아버지로부터 물러받은 것이라 관심도 없었지만,왠지 나쁜 목적으로 쓰이는 것은 더 용납할 수 없었다.더 구나 백곰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고 확신하는 천일도와 그 패거리들이 추진하는 일이었으니 그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도 협 조할 수 없었다. 수야를 통해 계속 조직내 일정한 정보를 밖으로 흘리고 있었고.현재까지의 물밑 작업을 통해 배신자로 추정되는 인물 리스트를 조만간 녀석이 뽑아올 예정이었다. 중요한 시점이었다.그 어느 때보다 정신을 집중해 실수가 없어야 할 절호의 순간인데도 그의 머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단 하나,백곰도 천일도도아닌 오예은이라는 여자였다.아내가 되어 버린 여자.이제 어떻?ㄴ 지켜내야만 하는 여자. 그녀가 조금씩 그의 시야 가운데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창틀에 걸터 앉아 담배를 피우는 형님의 모습이 무척이나 고독해 보인 이유 때문인지, 여러 감정이 들락거렸다.아니.이제 흑사라고 해야 하나,세기의 배신자인 가롯 유다가 되기를 자청한 몸이었으니,감히 형님이라 부를 수도 없는 기분이었다. 언제나 황은규라는 사내를 흠모해 왓다.저 정도 위치에,재력에,훤칠한 외모까지 겸비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목이 뻣뻣해


질 만도 한데 그는 도무지 교만이란 단어를 모르는 사내였다. 여자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어도 절대 계집질 따위엔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고,불쌍한 몰골로 찾아와 거둬달라 말만 하면 누구든 거부하지 못하는 자상함도 갖추고 잇었다.그래서 존경햇다.사랑했다.온 맘을 다해 윗사람으로서 섬겼다. 하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면... 무음으로 해두었던 핸드폰 램프가 깜빡이자,그는 생각에서 벗어나 조용히전화를 받았다.족제비 천일고의 목소리가 날카 롭게 파고 들었다. "상황이 어때?" 제가 가진 권력을 이용하지 못해 안달할 뿐,인래라곤 찾아 볼수 없는 인간,그런 버러지의 수하에서 종노릇이나 하고 있 는 스스로가 혐오스럽게 느껴졌지만, 일단 마음을 가다듬었다. "별다른 건 없습니다." 예상대로 천일도의 목소리가 훨씬 더 거칠어졌다. "둘이 일 치렀어?" "아직 그 정도 단계는 아닌 듯합니다." 듣기 싫은 욕설이 한바탕 귓전을 때린다.최근 족제비는 흑사의 여자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곤 했다.하루빨리 땅을 접 수해야 할 긴박한 상황에 협력하고 있는 조직체 보스들마저 점차 신뢰를 거둬가는 실정이었으니,이런 히스테릭 증상을 전 혀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당하는 입장에선 여간 짜증나는 일이 아니었다. "말 돌리지 말고 정확하게 대답해.지금 시점에 여자가 위험해지면 흑사가 행동할 것 같으냐?" 제가 상대해야 할 적조차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멍청한 인물이 뒤 배경과 잔인함 하나로 이만큼의 권력을 쥐고 있다는 생각에 쓴웃음이 다 솟아낫다.자신과 관계된 사람이 위험에 처하면 죽을지언정 제 손으로 해결하는 사내가 바로 흑사였다. 그러니 상당수 마음을 주고 있는 여자의신변에 위해가 가해진 다면 전의를 다해 싸울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닌가. "왜 대답이 없어!" 이미 결론을 내렸지만 갈등이 혀를 굳게 만들었다. "이 새끼 너 죽고 싶어?뭘 그렇게 생각해?" "아직 이르다는 판단입니다." 다시 한번 듣기 싫은 욕설 후 전화가 끊어졌다. "후..." 왜 거짓말을 했는지 알수 없었다.자신을 추호도 의심치 않은 아비와 같은 존재를 이미 뱃ㄴ해 놓고,이제와 어설픈 감상 따위에 젖어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은 바로 이곳이 특수한 장소라는 자각 때문이었다.형님의 신혼여행지까지 잠입해 몰래 관찰하는 일만은 되도록 피하 고 싶었고,이 순간만큼은 형님이 모든 현실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랐다. "잠시 즐기세요."


나란히 불이 켜져 있는 방을 바라보며 그는 낮은 소리로 ?조렸다.의심할 여지없이 이제 두사람은 점차 서로에게 빠져 들어갈 테니,여자가 보이는 것만큼 현명하고 인품이 좋은 사람이라면 거센 세계 가운데서도 형님께 크나큰 안식처가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그것을 앗아가겠지.망쳐 버리겠지.그리고 평생 죄책감에 물들어 지옥 속을 헤매겠지. 아버지를 생각했다.마음이 약해질 때마다,황은규라는 사내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싶어질 때마다,필사적으로 아버지를 떠 올렸다.그럴 때면 또 다른 죄책감이 파고들어 약해지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추스를 수 있었다. 끝없이 물고 늘어지는 생각들을 접으며 그는 조심스레 숲 속 어두운 곳을 향해 발을 옮겼다.기도할 자격 따윈 없는 악인이 었지만 마음은 간절히 누군가를 향해 빌고 있었다. 형님이 여자에게 너무 빠지지않게 되기를.잃는다 해도 금방 회복할 수 있을 만큼의 마음가짐이기를. 돌아서는 무거운 걸음을 따라 사냥개 하나가 꼬리를 흔들며 반겨왓다. 가슴이 답답해 밖으로 나선 예은은 은규의 방을 올려다 보앗다.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잠이 오지 않는 것일까.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라면 그래야 마땅하다.이런 상황에서도 그가 숙면을 취한다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옅은 한숨을 내쉬며 그다지 깊지 않은 범위 내의 숲을 거니는데,사냥개 사육 쪽에서 커다란 형체가 보였다.인적이 없는 곳 에서 발견한 사람의 흔적인지라 순식간에 등골이 오싹해 졌다. "거기 누구..." 주춤하는 예은의 시야로 걸어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수야였다. "수야 씨!여긴 어떻게..." 은규의 말대로 내일이나 물품을 챙겨올 사람이 어째서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일까. "형수님이야말로 밤중에 어쩐일로 나와 계세요.위험합니다." 다른 때와 다르게 왠지 그가 불안정해 보였다.그저 느낌 탓인가. "잠이 안 와서요.언제 올라온 거에요?" "방금 도착햇습니다." 거짓말....천하의 수야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밖으로 나오기 전 현관 안쪽에서 무작정 보름달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차 가 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이곳에 올 수 있는 수단은 자가용밖에 없었다. "아,그래요?" 수야가 왜 거짓말을 하는지 이해할수 없었고.힐끗대며 불안해하는 눈동자가 평상시와 너무도 달라 보였지만 일단은 모른 척하기로 했다.그는 은규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내였으니,거짓말을 한대도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 쪽이 오히려 마음 편했다. "은규 씨 만나러 온거라면 방에 있어요." 의심을 털어 버린 예은이 활기찬 목소리로 말하자,수야가 미미하게 웃어 보였다.


"실패하셨군요." 거기다 우스갯소리까지. "실패요?" "형님 유혹하는 거 말입니다." 예은의 얼굴이 심하게 붉어졌다. "나,누...누가 유혹을 한다고 그래요." 당황해 말까지 더듬는 예은을 수야는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고만 있었다. "조급해하지 마세요." 생각해 보면 이 남자가 큰소리 내는 모습은 본적이 없었다.그는 언제나 안정적인 톤으로 나긋하게 이야기하는 사내였다. "두분 결혼,누구보다 축복하고 있습니다.다른 녀석들도 모두 형수님이 생겼다고 흥분하다거나하게 취해 쓰러져 버렸어 요.저도,녀석들도 외롭다는 게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더구나 형님은 저희들을 위해서 많은걸 희생하며 살 아오셨으니까 누구보다 행복해지셔야 할 분이세요." 이 사람이 이렇게 말 많은 사내였던가.예은은 입을 벌리고서 수야의 입술이 전하는 진심을 듣고 잇었다. "형님을 사랑하고 계시죠?" 난데없이 터져 나온 질문엔 자못 당황해 버렸다. ".......음,좋아는 하고 잇어요." 수야의 입술에 다시 한번 미소가 번졌다. "형님의 진심,조만간 아시게 될겁니다.오래는 아니지만 손수 모셔온 제 인생을 걸어 말씀드릴 수 있어요.형님은 결코 상황 탓으로 결혼하신 게 아닙니다.진실로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면 다른 방법을 택하셨을 거에요." 생각지도 못한 상황 속에서 수야의 말이 전하는 위로가 예은의 가슴을 따뜻하게 쓸어주었다.그녀 역시 그렇게 믿고 있었 지만 혼자 생각하는 것과 그의 측근으로부터 사실을 확인하는건 의미의 차원이 틀렸다. "어째서 나한테 이런 말들을 해주는 거에요?" 한번도 재대로 대화해 보지않은 상대이기에 더욱 궁금햇다.수야는 잠시 눈길을 땅으로 내려 생각을 곱씹다가 이전보다 훨씬 낮아진 음성으로 속삭였다. "두 분이 잘되길 바라고 있으니까요." 따뜻한 목소리. "아니,정확히 말하자면 형님께서 행복해지셨으면 합니다.저희들을 위해 더 이상 인생을 허비하게 만들고 싶지 않거든요." 그리고 따뜻한 미소. "체계라면 어느정도 잡혔고,녀석들도 스스로 뭘 해야 할지 알고 있습니다.솔직히 말해 형수님이 어떤 분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형니므이 마음을 움직인 유일한 분이시니 그것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식구로 받아들여진다는 것,기분 좋다는 말로는 표현할수 없는 느낌이었다.


"고마워요.엄청 힘이 나는데요?" 놀랍게도 수야가 한 발자국 더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지켜드리겠습니다." 그의 손에 묵직한 힘이 들어갔다. "두분 행복,지켜드릴게요." 수야의 눈동자에 웬일인지 묘한 슬픔이 젖어 들어 있었다. chapter41 ==이 남자를 의식하지 않게 되는 날이 과연 올까. 아,그립다.........이전의 내가.== -에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줄곧 머리가 아팠는데,침대 맡에 앉아 있는 수야를 보는 순간 복잡함까지 가세했다.녀석이 아 무 연락없이 이곳에 와 있다는 건.리스트를 뽑았다는 이야기가 된다.그래서인지 표정이 침울해 보였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담배를 물고 은규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형님." 조용한 목소리로 수야가 이야기할 채비를 했지만,은규는 아무 대다도 하지 않았다.할수 있는 한 오래 시간을 끌고 싶었다. 각기 형태는 다르지만 그의 가족 안에는 하나라도 버림받지 않은 녀석이 없었다.상한 갈대처럼,혹은 금방 꺼져 버릴 촛불 처럼 위태로운 그들을 거둬들여 모두 이 가슴으로 품어냈다. 그런 무리중에 배신자가 있다니,형님.아우하던 백곰의 목숨을 비롯해 안식처요.피난처가 되었던 이 공간을 피바다로 물들 어 버릴 기생충이 존재한다니. 분노와 상실감이 앞다투어 찾아들었지만 일단은 모든 것으로 부터 피해 눈과 귀를 닫고 싶었다. "형님..." 그의 기분을 통감한 수야는 침통한 표정으로 입술 끝에 걸린 담배를 바라보았고,은규는 약해바진 마음을 다잡기 위해 노력 했다.어차피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연민과 아픔보다는 분노를 치켜세우고,더러운 꽁지는 그 싹부터 잘라 버려야 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담배를 깊게 들이마신 후 은규는 포커 페이스를 찾았다. "이름만 대."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생각에 잠겨 있던 수야는 뭔가 치밀히 계산하던 눈동자를 내리고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의심이 가는 녀석은 하나뿐입니다." "말해 봐." 두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쳤다.보이지 않는 강압을 담은 은규의 시선이 수야의 입에서 마지막 한 마디를 뽑아냈다. "형구.......입니다." 은규의 눈동자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형구?" "예,형님." 그리고 보니 최근 녀석이 이상했다.언제든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쾌활 주의자였는데 근래 형구의 미소를 본 기억이 드 문드문했다.몇 번인가 할말이 있는 것처럼 불러놓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칵테일을 대신 내밀기도 했고,교대를 서줄 바텐 더를 구해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었다. "형구가...녀석이..?" 일순,분노라는 감정이 사라져 버렸다.복수심으로 들끓던 열의도 죽어 버렸다.싸늘히 비어진 마음속에 슬픔만 덩그러니 남아 생각과 언어를 앗아가 버렸다. 형구가 누구인가.수야 못지않게 믿어 예은의 말동무까지 시키지 않았던가.헌데 녀석이 불랙리스트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 라는 건 믿을 수가 없었다.아니,믿고 싶지 않앗다. "확실한 건 아닙니다.아까도 말씀드렸듯,의심이 간다는 것뿐입니다." 은규의 동요를 지켜보던 수야가 뒤늦게 덧붙였다. "이유가 뭐냐." "형구의 행동이 달라진 건 형님께서도 몇 번 언질 하셨던 부분이니 넘어가겠습니다.녀석이 요즘 카지노 바를 자주 비웁니 다.다들 그저 여자가 생겼거니 생각하는 눈치라 뒤를 밟아 보았습니다.주기적으로 찾는 주점이 있는데 형님도 아시다시피 형구가 술을 만들긴 해도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잖습니까.취향이 바뀌었거나 무슨 고민거리가 있어 방황할수도 있으니 그 점은 그다지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그런데..." 잠시 말을 멈춘 수야를 주시하며 은규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 주점을 몇 달 전에 천일도가 인수한 모양입니다." 은규의 입술에 물린 담배가 맹렬히 타올랐다. "천일도라.." 한번 들어가면 몇 시간이 지나서야 나오는데 술은 입에도 대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불안하게 힐끗대며 경계를 취하는 것이 영락없이 누군가와 내통하는 자의 행동거지였고요.다른 아이들은 의심할 만한 점을 조금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그럴 만큼 영악한 녀석들이 없단 말이 더 정확하겠지요." 은규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형구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 "귀도 얇습니다." 잠시 침묵이 찾아들었다.은규는 그대로 담배를 두대 더 태웠다. "계속 뒤를 밟아 봐.앞으론 형구에게만 정보를 흘리고 새어 나가는지 지켜보자.확실한 증거가 잡히면 다시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일어서기 전,수야는 잠시 더 은규의 얼굴을 살폈다. "더 할 말 있냐." "아닙니다." "근데 왜 이렇게 미적대?"


"그냥...마음쓰지 마시고 형수님께 신경이나 써주시라구요.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싱겁긴.그래,어서 가봐." "쉬세요." 끝까지 어두운 기색을 버리지 못한 수야가 문을 닫고 나가자 마자,은규의 포커 페이스는 허물어졌다. "망할." 떨리는 손을 들어 창문을 열었지만,따사로운 햇빛이 더럽게 얼룩진 현실을 조롱하는 것같아 견디기 힘들었다. 백곰의 뼛가루가 담긴 상자를 들고 뿌린 사람은 다름 아닌 형구였다.웃음 외엔 볼수 없었던 얼굴을 바짝 일그러뜨리며 아이처럼 울던 녀석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해 지워지질 않고 있었다. 그런데... "형구,너라면 절대 용서 못한다...절대로." 은규의 손이 창틀을 꼭 움켜쥐었다. 나직한 목소리에 예은은 눈을 열었다. 아침 식사때 잠깐 마주친 은규와 수야 두사람의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아 괜히 거실에서 어정거리다 나른한 날씨에 깜빡 잠이 들고 말았던가 보다 부스스 눈을 뜨자,흐릿한 시야로 은규의 넓은 등이 잡혀왔다.누군가와 통화중인지 그는 간간히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곳에서 유선 전화로 외부와접촉한 일은 한번도 없었는데 급한 일이 생긴 것일까?예은은 숨까지 멈추고서 그가 하는 말 에 집중했다. "진작 연락을 드렸어야 하는 건데 경황이 없었습니다.네,아직 자고 있어요.피곤했나 봅니다." 아직 자고 있다...?내 얘기인가? "돌아가면 씨암탉 잡아주시는 건가요?이런,기대되는데요.장인어른께도 안부전해주세요.또 연락들리겠습니다." 아무래도 부모님께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정작 아내 된 사람에게는 찬바람이나 쌩쌩 날리면서 새 신랑이 해야 할 도리는 척척 해내고 있으니.기버해야 할지 울먹여야 할지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화기애애한 통화를 마치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은규를 보며 예은은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아직 마주할 용기를 갖추기 못 했는데도 바로 앞에서 그의 기척이 느껴지자,호흡이 멋대로 걸게 흘러 나갔다. 침착하���...제발. "일어나." 깨우는 소리인지,잠든 척 위장한 것을 알고 하는 소리인지 분간할수 없어 예은은 일단 버텨 보기로 햇다. "깬거 알고 있으니까 일어나라고." 마지못해 예은은 눈을 열고 흘기는 시선을 던졌다. "눈치 하난 빨라 가지고,좀 모른 척하면 안돼요?무지 무안하잖아요." "무안할 짓을 왜 해."


시간이 지날수록 말싸움으로 이 남자를 이기는 건 거의 불가능이란 생각이 들었다. "수야 씨는요?" 더 이상 할말도 없고 해서 슬쩍 말을 돌리자.미세하지만 그가 눈썹을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아침부터 그는 꽤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서울." "무슨 ...일 있어요?" "일이야 항상 즐비하게 일어나지." "피곤해 보여요." "누구처럼 마음 편한 사람이 아니라서." 순식간에 걱정스런 마음이 싹둑 잘려 나갔다.남이 염려를 해주면 달갑게 받아들일줄은 모르고 어쩜 저리 정 없는 소리 만 툭툭 뱉어낸단 말인가.예은은 신경질적으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햇빛이 비쳐드는 창가로 걸어갔다. "지금 당신 표정이 어떤 줄 알기나 해요?" 담배를 찾아 주머니를 뒤적이던 은규가 눈짓으로 질문을 되돌렸다. "좋진 않겠지."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꼭 사철탕 집에 끌려간 똥개 같아요." "뭐?" 라이터를 열던 은규가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입술 끝을 올렸다. "그나마 최대한 완화해서 표현해 준거니까 고맙게나 생각해요.그리고 경고하는데..." 떡하니 허리에 손을 얹고서 경고 어쩌고 운운하는 그녀를 보니 진창을 빠진 것마냥 꿀꿀했던 기분이 조금씩 흩어져 가는 것을 느낀 은규는 어디 해보라는 양 팔짱을 꼈고,에은은 바짝 약이 올랐는지 귀뿌리까지 벌겋게 물들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여긴 당신하고 내 신혼여행지라는 걸 똑똑히 기억해요.평범한 결혼이 아니고 당신 기분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하지만 어째요.우리가 결혼 한것,이게 현실인데.되돌릴 수 없고 물릴수도 없잖아요.나,신부가 가지고 누릴수 있 는거 죄다 포기했어요.그러니까 여기서만큼은 좀 기분 내게 해줘요.안 그럼 미쳐 버릴지도 모르니까." 양심이 자극을 받아 그녀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어진 은규는 난생 처음 먼저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누구 때문인데,내가 누구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그저 그런 푸념만 늘어놓으려던 에은도 결국 눈물까지 비추고 말았다.아무것도 함께하지 않으려는 그의 태도에 마냥 가 슴이 아파왔다.그렇다고 훌쩍이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기대어 안길 가슴을 빌려줄 사람도 아닌데 칭얼대 봤자 추태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나 좀 쉴게요." 고개를 수그리고 거북한 자리를 빠져나가려던 예은의 팔을 은규의 커다란 손이 잡아챘다.그녀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그는 한결 수그러든 기세로 턱 밑까지 시선을 내리며 조용히 말했다.


"나갈까."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서 그는 먼저 앞서 나갔다. 침묵이 감돌았다.불편한 고요함이었다. 언제나 재잘대던 여자가 입을 꼭 다물고 있으니 꼭 역삼각형위에 올라간 것처럼 감정의 평형감각을 찾을수가 없었다.사 실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살살거리며 따뜻한 말은 할수 없어도,원망받고 책망 받아야 할 이 사내를 탓하지 않 고 인격적으로 대하는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미안한 마음 반반 이었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그녀가 화를 토해냈다.아니,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것처럼 보였다.늘 그랬던 것처럼 입술을 삐쭉 내밀고 투덜대거나 시비나 걸었다면 오히려 무시할 수 있었을 텐데,힘껏 내지르는 목소리 안에 담긴 떨림과 슬픔이 그럴 수 있는 여자를 앗아가 버렸다. 그래서 걷자고 말했다.일단 불편한 기류가 흐르는 장소로부터 그녀를 빼내고 싶었기 때문이다.하지만 무작정 끌고 나왔] 을뿐,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수가 없었다. 우스웠다.흑사파의 보스라 일컬어지는 사내가 뭘 해야 할지 몰라 어정거리고 있다니,수야나 다른 녀석들이 본다면 박장대 소를 하고도 남을 일이었다.언젠가 현석이 지적했던 대로,오예은이라는 여자에 관련된 일이라면 이성으로 판단하기 전에 혼란부터 비집고 들어오니 온전한 생각을 할수 있을 리 만무했다. 얼마나 무턱대로 겯기만 했는지 별장을 둘러싼 숲 제법 깊숙한 곳까지 들어서고 말았다.예쁜 꽃들 사이에 자리 잡은 전시 용 물레방아를 지나,언젠가 비 오던날 두사람이 잠시 피해 있었던 동굴도 눈에 들어왔다.이때다 싶어진 은규는 오랜 침 묵을 깨고 겨우 한 마디를 꺼내놓았다. "잠시 앉았다 가지." 제법 서늘한 동굴 안으로 묵직한 그의 발소리가 진동했다. 은규는 일부러 에은을 햇빛 가까운 곳에 앉게 하고서 자신은 그늘 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한 번,두 번,세 번,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태양이 정 중앙에서 조금 비켜날 때까지 침묵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불편함도 함께 쌓여갔다. 조금씩 좀이 쑤셨다.이제 그만 그녀가 먼저 입을 열어주었으면 좋겠는데....동굴 안으로 비쳐드는 태양이 따사롭게 뺨 을 간질여 슬쩍 눈을 돌려 오느새 예은의 입매도 많이 풀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당분간 더 이렇게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은규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서울에 가고 싶어요." 대뜸 푸념 같은 소릴 던져놓고서 예은은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이야기할 때면 성가실 정도로 눈을 맞추던 사람이 정말이지 이상했다. "어차피 진자 신혼여행도 아니니까 이젠 올라가도 상관없잖아요.이 정도면 구색 맞추기론 충분해요.슬슬 각자 본업으로 돌아가야죠."


이런 식으로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처음이었다.뭐랄까.힘이라곤 하나도 담겨 있지 않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기도 전 공 중으로 휙휙 흩어지는 것만 같았다.늘 생기로 가득해 지나치다 싶을 만큼 씩씩했던 그녀였기에 더욱 별스럽게 느껴졌다. "갑자기 왜 그래." "따분하고 불편해." 은규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따분.불편.그녀의 말이 계속 귓전에서 춤추고 있었다. "놀러온 게 아니잖아." 저도 모르게 목소리에 짜증이 배어 나갔다.그녀는 마침내 폭발했다. "그러니까 가자구요!" 다소 놀란 은규는 담배가 덜어질 만큼 입술을 벌렸다. "누가 같이 놀자고 했어요?얘기했잖아요.구색 맞추기 신혼여행은 이제 끝내도 상관없다고.당신만 바쁜줄 알아요?나도 일 있는 사람이에요.여기는 너무 조용하고 심심해서 있던 생각도 다 달아나 버리는 기분이에요.그러니까 올라가요.나는 나,당신은 당신,그렇게 멋대로 살면 되는 거잖아요!" 어깨를 들썩일 만큼 흥분해 버린 그녀는 총알처럼 빠르게 말을 뱉어낸 후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섰다.잠시 숨을 고르며 알 아들을 수 없는 말을 몇번 중얼대고 나서야 다소 진정된 목소리를냇다. "당신하고 있으면,,,어린애가 된 기분이야.당신은 자꾸 날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평소의 내가 아닌 기분이 들게 한다 구요." 은규의 입에서 연기와 함께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거칠게 머리를 헝클어드리며 그는 익숙지 않은 말들을 골라냈다. "이런 상황에 끌어들인 거.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흠칫.그녀가 놀라는 게 느껴졌다. "진심으로." 슬쩍,그녀가 돌아섰다.눈동자에 엷은 물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금방 끝날 거야.내가 그렇게 해.당신 시간 오래 붙잡아 둘 마음은 전혀 없어." 다시 무거운 침묵이 찾아들었다.뭐가 또 뒤틀린 것인지 그녀의 표정이 과히 좋아 보이진 않았다. "기가 막혀서..." 한참을 조용히 있던 예은이 웅얼대는 소리에 은규는 애써 피하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되도록 금방 끝내주겠다?그걸 지금 사과라고 하는거에요?" 그는 찌푸린 표정으로 더 정확한 해석을 요구했고,예은은 팔짱까지 끼며 조잘댔다. "미안한 거야 당연하죠.이게 뭐 보통 미안해서 될 일인줄 알아요?하지만 난 원래 지난 일에 미련 두는 타입이 아니에요 아무리 거지같은 상황이 닥쳐도 일단은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낙천주의자라구요.그래도 짧든 길든 당 신에게 저당 잡힌 내 시간이 지금처럼 따분하고 답답할 거라면 난 아마 미쳐 버릴지도 몰라요." 은규는 갑자기 확 하고 열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 정도야?"


"....?" "내가 그렇게 따분한 인간이란 말이지." 예은은 잠시 남편이 되어 버린 잘생긴 사내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뛰는데,익숙한 비누 향기만 맡아도 얼굴이 화색이 도는데,따분할 새가 어디 있담. 괜히 화가 나서 한 소리였다.자신은 이렇게나 깊이 의식하고 있는데 그는 도무지 일 생각밖에 없는 것 같아 분통이 터져 한 말이었다. "알아서 생각해요." 포기 상태에 다다른 예은이 애매한 소리를 하자,은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하면 되겠어?" 다시금 동굴 안으로 그의 묵직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떻게 하다니 뭘..." 어느 틈에 그가 바짝 다가와 서자 생각이 흩어져 버렸다.냉정함도 당당함도 슬그머니 꽁지를 내리고 잇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냐고 물었어." 가슴은 얌체 공처럼 뛰고 있었지만 예은은 차분함을 가장한 채 슬며시 말을 흘렸다. "반응해 줘요." 동굴에 들어선 후 처음으로 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와 눈을 마주했다. "좋다 싫다,것도 아니면 표정만으로라도 반응해요.없는 사람 취급 받는거.그것만큼은 정말 못 참겠어요." 놀랍게도 은규의 입술이 풀어져 옅은 미소를 그렸다.그의 미소를 대할 때면 예은은 항상 여자인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늘 그래왔다고 생각하는데." 해가 구름 뒤에 숨어 따사로운 햇살을 거둬가 버렸고,동굴 안으로 찾아든 습한 공기가 예은의 몸을 민감하게 만들어 그에 게서 풍기는 열기만 깊이 의식하게 만들었다. "말장난이라면 나 별로 하고 싶지 않....." 갑자기 은규가 손을 들어 예은의 드러난 쇄골 부분을 쓸었다.당황한 그녀는 한동안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하다가 이내 뒷걸음질 쳤다. "무슨 짓이에요!" 그의미소가 좀더 크게 번?다.비웃음이나 냉소 다위가 아닌 의미 그대로의 미소였다. "내가 반응하길 원한다면 당신도 도망쳐선 안 되지." 갑자기 어제 일이 떠올라 서늘한 동굴 안 공기마저 후끈 덥혀 버렸다. "있는대로 들쑤셔 놓고 정작 본인은 한 발자국 물러나 버려." 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나란 인간,웬만한 일엔 반응하지 않지만 한 번 터졌다 하면 누구도 감당하기 쉽지 않아." 쏟아져 내리는 은규의 눈동자가 유난히 더 검게 느껴졌다. 아,이래서 이 남자를 흑사라고 하는구나. 그제야 예은은 깨달았다.이 눈빛에 한번 걸려들면 이런 기분이 되어 버리는구나,라고 "어때,감당할 수 있겠어?" 많은 의미를 내포한 질문이 가슴 안에 박혀와 예은은 잠시 깊은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난 정말 이 남자를 감당할수 있을 까.여러 의미로 쉽지 않은 사람을 이작은 가슴으로 포용할수 있을까. '못할 것도 없지!' 또 하나의 마음이 바로 화답햇다.할수 있는가의 여부를 떠나 물러선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잠시 흔들렷던 마음을 다 잡으며 예은은 뾰족한 턱을 치켜 올렷다. "있는대로 들쑤셔 놓고 슬쩍 한발 빼는거.그게 내 특기에요.작품 때문에 하루에 열명이 넘는 남자들도 유혹해 본적이 있거든요.아,뭐였더라,,,,꽃뱀 비슷한 작업을 가진 여성이 주인공이었는데." 은규의 입술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며 예은은 여유있는 목소리로 경고했다. "당신이 건드린 여자가 누군지,어떤 여자의 남편이 된 건지.당신이야말로 똑똑히 알아둬요.내가 마음먹고 덤비면 감당할 수 없는 건 그쪽이 될 테니까." 겁없이 도전해 오는 예은에게 잠시 멍해진 것은 사실이었으나 예상했던 반응과는 반대로 행동하는 그녀가 꼭 청개구리처 럼 느껴졌다. 남자였다면 제법 괜찮은 아군이 되었을텐데,아쉽게도 예은은 여자였다. 어떤 적보다도 벅찬 여자라는 것이 예외라면 예외일까..... chapter 42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가. 왜 그의 이름이 떠올랐을까?==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새벽의 배를 살살 문질러 주던 현석의 표정이 전화 한 통에 어두워졌다. 부드럽기만 하던 남편의 손길이 제법 딱딱하게 굳어가자,새벽은 걱정 어린 눈길로 통화 내용에 집중했다. "이제 좀 그만 하세요." 아무래도 그의 아버지인 듯했다.가끔 잊고 살던 남편의 과거 모습을 돌이킬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단 한 사람뿐이었다. "형은 어차피 아버지하고 반대로 움직이는 사람이잖아요.감당할 자신이 있다면 어디 한번 뜻대로 해보시죠." 현석이 말을 마치자마자 새벽의 귀에까지 들릴만큼 격한 욕설이 전화선을 타고 들려왓다. "이만 끊습니다." 현석은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후.."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던 그가 곤한 한숨을 내쉬자,새벽은 어느틈에 멈춰 버린 남편의 손을 잡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버님께서 ......아신 거에요?" "아들이 멋대로 결혼했는데 모르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아무래도 조만간 시끄러워지겠어."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새벽은 그늘진 현석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었다. "예상못한 일 아니잖아요."


"그렇지." "당신 형,아버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충분히 잘 아는 사람이구요." "그래." "그런데 뭘 걱정해요?" 고심에 차 있던 눈을 들어 아내를 바라본 현석은 굳은 입매를 풀었다. "인생은 언제나 시끄러운 것,이런 일,저런 일도 있는것 .그렇잖아요." 이 결혼이 가짜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새벽의 순수한 마음에 미안하게도,현석이 걱정하고 있는건 독불장군 형 따위가 아니었다. "예은,,,아니 형수가 걸려서 그래.형이야 아버지란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누구보다 잘 알지만 형수는 얘기가 다르잖아." 누구보다 형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피붙이의 입장으로 판단해 평생 가질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형수란 존재였다.그래서 더이상 그녀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참으로 묘한 감정이었다.연민 따위가 아닌 자연스런 이끌림. 형 옆에 그녀가 서있는 풍경이 생각보다 보기 좋았고,가끔씩 이나마 형의 눈동자에 감정이 내비칠수 있게 된것을 확인하 며,할수 있다면 그녀를 진짜 형수로 모시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정식 결혼도 아닌 상대의 아버지로부터 갖은 모욕을 당한다면 견딜수 있는 여자가 얼마나 될까. "여보." 나긋한 목소리에 현석은 다시 시선을 들었다.새벽은 정말이지,추호의 걱정도 없이 편안한 표정이었다. "예은 씨 그렇게 만만한 사람 아니에요.당신 형이 어디 보통 사람이에요?그런 사람이 택한 여자고,지금도 잘 감당하고 있잖아요.그러니까 난 걱정 안 해요." 현석 역시 그렇게 믿고 싶었다.언제나 긍정적인 아내처럼 모든 것을 편하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나도 못 믿는건 아니야." "언젠가 정재 삼촌이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당신을 떠나 내가 힘들어 할때,이루어질 사랑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이루 어지지만 안될 사랑은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거라구요.그냥 믿고 있을래요.두 사람의 인연은 전자 쪽이라고." 현석은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아내의 한마디에 이렇게나 마음이 편해질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될까.아내의 미 소를 바라보며 모나리자를 떠올릴 수 있는남자는 또 얼마나 될까.자신이 새벽을 얻어 행복한 만큼,형도 어서 안식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래.믿고 있자.제 삼자의 인간이 할수있는 일은 언제나 한정되어 있기 마련이니까. 현석은 미소 지으며 끓어오르는 감정들을 조용히 다스린 후.다시금 부드럽게 아내의 배를 쓸기 시작햇다. 문을 열고 들어서려던 천일도는잠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전폭적인 지지로 협조를 아끼지 않던 여러 조직체들이 뒷말하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도대체 땅은 언제 접수가 된다는 거야?" "그러게,그 땅 덩어리 하나 때문에 일을 진행 못하고 있다는게 말이나 돼?" "정말 이대로 손 놓고 있어도 되는 겁니까?퍼다 부은 돈이 얼마인데." 문 앞에 서 있던 천일도의 얼굴이 냉소로 일그러졌다. "새끼들이 겁도 없이 떠들고 있구만." 그는 곧 큰소리 나게 문을 열고 일제히 찾아든 정적을 즐겼다. "일도 왔는가." "오셨습니까.형님." 좀 전까지 뒷담화 놀이에 여념이 없더니,이 녀석들 하는 꼴이 영 달갑지 않았다.아무런 말없이 중앙의자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각 조직 보스 급들을 훑던 천일도는 눈썹을 바짝 추켜올렸다. "우리 탁 까놓고 얘기합시다.뒤에서 조잘대는 거.그거 피라미들이나 하는짓 아닙니까." 여기저기서 헛기침이 흘러나왔다.천일도는 좀더 여유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명색이 거물 양반들 그릇이 이렇게 작아서야 쓰겠습니까?우리 손바닥 뒤집기 좀 그만하죠.한번 믿기로 했으면 끝까지 가야지.참새들처럼 입방아나 찧고 있는데 될 일도 안 되겠습니다." 모두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이래봬도 한가닥 한다는 조직의 임원들인데,얼마 전까지만 해도 콩밥이나 먹고 있던 녀 석 하는 꼬락서니가 영 고깝게 보이질 않았던 탓이다.누구보다 그들의 심리를 잘 아는 천일도는 일부러 더 거진 말들을 골라냈다. "이제부터라도 구린내 좀 풍기지 맙시다.이번 사업 물주가 누군지는 망각하지 말아야죠.여기 계신 분들이 걷어낸 푼돈 마무리 모아봤자 나 천일도가 댄 액수에 비하겠습니까"안 그래요?" 이 일의 배후에 마이더스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그런데도 있는 생색.없는 생색 다 내고 있으니 족제비란 이름이 어디서 붙여졌는지 모두 짐작하고도 남을 따름이었다. 그래도 일단 침묵할 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사생아 이긴 했어도 이곳에서의그는 마이더스의 아들 자격이었다. "서론은 이것으로 접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흑사 소유의 땅만 접수하면 이 사업,문제 될게 없습니다.전체적인 구도도 다 잡아놓은 상태고 넉넉잡아 두달이면 결론이 나니까 여기 계신 분들은 지금처럼 그냥 즐기다 인력 지원 정도만 해주 시면 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차일피일 미뤄온 것이 꽤 되었기에 모두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다.그렇게 다른 마음을 품은 상태 로 회의가 지속되어 가자,천일도 역시 더이상 일을 미룰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시키는 대로 따라야 할 꼭두각시 들이 의심을 품기 시작했으니,시간을 끌었다간 뭔가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질 모양새였다. 아버지를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이번 일이야말로 마이더스의 아들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지금껏 대접 이라는 말과는 정반대의 삶만 살아왔다.하수구에 박혀 악취에 물들고.빛이라곤 일절 볼수 없었던 개 같은 인생 속에서 겨우 벗어나 권력의 참맛을 보았다.아주 약간 맛보았을 뿐 아직도 굶주려 있었고,삶에 대한 개대치는 솟을 대로 뻗어 올 라가 있었다. '조만간 유다 녀석을 족쳐야지 안 되겠어.' 내가 죽든 남이 죽든 결론은 하나,어떤 이유로도 실패는 있을수 없었다. 날이 정말 좋았다.적당한 햇빛과 기분 좋을 만큼 건조한 공기와 부드러운 바람까지.신혼여행 마지막 날로서는 더할 나위 없을 만큼 좋은 날씨였다.일주일의 기한을 채우려면 아직 사흘이나 더 남아 있었지만 두 사람은 내일 이곳을 떠나기로 했 다.한정된 공간에 둘만 있으려니까 자꾸 집착만 늘어나는 것 같아 그녀가 내린 결론이었다. 때마침 유희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새로운 일거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방송국에서 운영하는 한 애니메이션업체 피 디가 한번 만났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학교를 졸업한 후 한창 썼던 동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모양인데,적당한 일거리란 생각이 들었다.각 색 정도라면 징크스에 얽매이지 않아도 될 테고.글쓰느라 에너지를 쏟다 보면 그에 대한 끝없는 갈증도 어느 정도 가실것 같다는 계산이었다. 조용한 문ㅅ리와 함께 은규가 거실로 들어섰다.어느새 후각에 각인되어 버린 향기와 묵직한 발소리에 본능이 먼저 그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냥 늘 같은 자리에 서 있는데도 이렇게까지 끌리는 이 남자,만약 마음먹고 한 여자를 사랑하고자 행동한다면 어떻게 될지 두렵기까지 했다.어떤 상황에서도 자아를 잃고 싶진 않았지만 점점 자신감이 상실되어 갔다.그의기척을 느끼자마자 분주히 움직이는 모든 세포들이 그녀의 염려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호수쪽으로 크게 난 창틀에 걸터앉아 예은은 흘러 들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겼다.이 동요를 마냥 감추고만 싶었다. "여름이 되면 여기정말 근사하겠어요." 은규가 곁에 서자 비누 향속에 섞여든 알싸한 담배 향이 가득 풍겨왓다.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두 사람의 데드라인 금 바 로 밖에 그가 서 있었다. "여름에는 와 본적 없어." "그렇게 등한시할 거면 이렇게 좋은 집을 뭐하러 샀어요?나 같으면 아예 한 살림 차리겠다." "언젠가는 그럴 게획이야." 예은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이 별장에서 평범하게 노니는 그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았다.옆자리에 왜 자신의 이미지 가 자연스레 떠올랐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상상이 안가요.당신과 당신 가정.어떤 식으로도 상상할 수 없는 걸요." 그는 바람같은 사내였다.안정과는 거리가 먼 사내였다.하지만 시간이 흘러 정말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면 분명 정착이란 걸 할수밖에 없게 될 테고,축복 받는 결혼을 해 이 평온한 별장에 아기자기한 살림살이도 꾸미게 될것이다.그리고 아이도 낳게 되겟지.... 이상햇다.가슴이 ....괜히 답답했다. "이런 가짜 말고 진짜 결혼할 생각은 없어요?" 은근슬쩍 상대의 심중을 떠보는 약아바진 행동에 스스로가 비겁하게 느껴졌지만 에은은 멋대로 벌어지는 입술을 막을 수 없었다. "이미 했잖아."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얼굴을 봐야 알것 같았기에 예은은 호수에 묶어두었던 시선을 들엇다. "원래는 이것도 예정에 없었지만 이미 해 버렸고,다시 할 생각은 더더욱 없어." 당신이 이미내 아내니까.이말 하나가 더 보태졌다면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한 문장이 되었을 텐데 은규는 거기서 말을 잘랐다. 정감을 찾아볼수 없는 말투.사랑한다는 벅찬 말도 그의 입을 통해 나오면 '배고파'이상으론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심리 테스트 하나 할래요?" 괜히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것을 막아 볼 심사로 예은이 제안하자,은규는 편안하게 창틀에 기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 "왜." "그런 건 애들이나 하는 거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은규의 입술 끝이 올라갔다. "가끔은 애들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의 말 하나에 분위기의 흐름이 달라지자.예은은 미소 지으며 가장 흥미로울 만한 테스트를 골라냈다. "이건 FBI 에서 범죄자들에게 하는 테스트인데요." "나한테 범죄자 테스트를 하겠다...?" "몰랐어요?당신 납치범이잖아요." "그놈의 납치 애긴 불리할 때마다 써먹는군." 에은이 밉지 않게 웃어 보였다. "일단 들어나 봐요." 그녀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서 이순간을 즐겼다.정말 평범한 여인이 된것처럼 편안하면서도 설레는 느낌이 잠식해 들고 있었다. "괭장히 사이좋은 자매가 어느날 친척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아요." 은규는 창틀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켜 벽 쪽으로 옮겼다. "두 자매는 장례식에 참석해 한 남자를 만나게 되죠." 예은의 눈길이 은규의 전신을 한번 훑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그리고 검은 정장을 한...."


꼭 당신 같은 남자를.. 그녀가 마음으로 속삭인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은규의 눈썹이 꿈틀 하는 것이 보였다. "불행하게도 언니는 남자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아요.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잊지 못할 만큼 깊이깊이 빠 져 버리고 말죠." 예은이 말을 멈추자 조용한 침묵이 찾아 들었다.은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서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결국,그날 밤 언니는 동생을 칼로 난도질해 죽이는 꿈까지 꾸게 돼요.평소 동생을 너무나 사랑했던 언니는 그런 꿈을 궜다는 사실조차 수치스럽고 당황스러웠죠.자,여기서 질문할게요." 예은은 은규에게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당신은 언니가 왜 그런 꿈을 꿨다고 생각해요?" 은규가 새 담배를 물었다. "오래 생각하면 안돼요.심리 테스트는 질문 듣자마자 바로 떠오르는 걸 답으로 해야 더 정확하거든요." "남자가 사신이었던 모양이지.죽음의 사자 같은거." 예은은 쿡 하고 웃음을 흘렷다. "이런 대답은 처음인데요?" 알 수 없는 사이.은규는 이 테스트에 상당한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테스트에 해답 같은 건 없다고 아는데." "물론 그렇죠.하지만 대부분 대답은 하나거든요.동생이 남자를 좋아하게 될까봐,혹은 남자가 동생을 좋아하게 될까봐. 꿨다고 생각하죠.그런데 이상하게도 살인자들은 모두 한결같은 대답을 한다고 해요." 어느새 은규의 새 담배가 다 타 버렸다.그가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한 이 순간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에은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 남자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뭐?" "또 다른 장례식이 필요했던 거죠.그 남자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은규의 눈썹이 삐죽 치켜 올라갔다. "섬뜩하죠?" "다행인데." "뭐가요?" "살인자와 같은 대답을 하지 않아서.납치 이야기도 걸핏하면 들먹이는데,살인자 취급까지 받으면 골치 아프지." 활짝 열린 창을 타고 신선한 바람이 불어와 단발 길이에서 벗어난 예은의 머리카락들을 작은 얼굴 위로 흩어놓았다.그의 미소에 빠져 온몸을 늘어뜨리고 있던 예은은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잠시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재빠르게 다가온 은규의 손 이 중심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창 아래로 곤두박질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만 내려와.위험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더할 나위없이 평온했던 공기가 다시금 타닥타닥 불을 지피고 있었다.


"괜찮아요." "날 진짜 살인자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빨리 내려와." 어쩔수 없이 그가 이끄는 대로 창틀에서 내려선 예은은 어느순간 두 사람이 데드라인 안으로 들어와 있음을 깨달았다. 흐릿해진 은규의 눈빛이 그녀를 향해 쏟아져 내렸고,바람이 다시 한번 불어와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알수 없는 힘에 이끌려 에은은 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그리고 좀더 깊이 감촉을 음미하기 위해 시야를 닫았다. "사실은요,당신이 정말 극악무도한 살인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은규가 옅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영화에서 나오는 조폭들 있잖아요.머리는 깍두기 모양에다 덩치는 산만 하고 여자나 밝히면서 말 막하는 전형적인 두목 들,당신 모습도 딱 그런 이미지였어요." 예은의 손이 은규의 머리카락에서 미끄러져 목덜미로 향하자 그의 웃음소리가 잦아 들었다. "살짝 유혹해서 정보만 뜯어내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조폭 두목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여자에 굶주려 살진 않아,그런 사내가 당신 유혹에 넘어갈 거라 기대했단 말이지?" 예은이 살짝 눈을 떴다. "나...그렇게 형편 없어요?" "첫눈에 반할 외모는 아니지." "흠..." 추녀는 아니었지만,그렇다고 특별히 아름다운 외모도 아니라는 건 27 년이란 시간 동안 충분히 인지하고도 남았다. 그래서일까.이 남자에게서 이렇게나 반응을 끌어내기 힘든 이유.소설이나 만화에 나오는 여주인공들처럼 한 가닥하는 미모였다면 이야기가 조금은 달라졌을까? 왠지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좋아요.그런 소리 한두번 듣는 것도 아니고,얼굴로 먹고 살 이유도 없으니 난 이정도 외모에 만족하고 살..." 무안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 쉴새없이 주절대던 예은은 귓가로 나직이 들려온 목소리에 말을 뚝 끊어 버렸다. "매력이라면 있어." "..." "돈만 있으면 외모야 얼마든지 가꿀수 있는 세상이지만 매력은 가꾼다고 되는게 아니야." 그가 막상 진지한 태도로 나오자 예은은 입 하나 달싹일수 없었다. "이것 봐.당신은 내가 반응하면 언제나 달아나기부터 하지." 아쉽게도 은규는 바로 말을 돌려 버렸다. "식사나 하자고." 짐을 다 챙겨놓고 예은은 잠시 밖을 거닐었다.이제 다시는 이곳에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운한 감정이 심장 부근을 배회했다.


서울에 올라가면 일에 묻혀 살 게획이었고,그 역시 조직내 배신자 문제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보내게 될것 같앗다.그 러니 이런 평온함도 오늘로서 마지막이었다.가능한 오래 가슴에 새겨 넣고픈 마음뿐이었다. 해는 이미 산 머머로 기울었지만 아직 어둡지는 않았다.예은은 숲 입구에서 조금 더 안으로 발을 옮겼다.정말이지,이렇 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는 사실에 거듭 감탄만 흘러나왔다.화폭 하나를 그대로 재현해 낸 듯 환상적인데다 인적 또한 별로 없었기 때문에.이런 상황만 아니었어도 멋진 글 한 편 완성해 내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을 만한 최상의 환���이었다. "아,가기 싫다." 바스락. 그때 어디선가 기척이 들려와 고개를 돌려 보니,좀 전보다 훨씬 어두워진 숲 속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그만 돌아가야겠 다는 판단을 내린 에은은 풀었던 경계심을 되살리고 별장 건물 쪽을 향해 걸었다.하지만 또다시 들려온 소리에 숲속 입구 에서 다시 몸을 돌렸다가 그대로 하얗게 얼어붙고 말았다. "세상에....!" 100m 남짓한 곳에서 사냥개가 돌진해 오고 있었다.이곳에서 지내는 기간 동안 사냥개는 제 주인 곁에 있는 그녀를 동료 로서 인정해 한번도 공격해 오지 않았다.오히려 그녀가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며 꼬리를 흔들기까지 했다. 그런데 왜....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채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사냥개를 바라보며 그녀는 극치의 두려움에 떨 뿐 거동조차 할수 없었다. 그래서 말라붙고 마비된 목구멍에 온갖 힘을 담아 겨우 한 마디를 외쳤다. "은규 씨!" 그녀의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방에서 짐을 꾸리고 있던 은규의 귀까지 날아가 박혔다.

chapter 43 ==신은 인간에서 감당치 못할 시험은 주지 않는다고 하는데....난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에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멀다.너무나 멀다. 문 밖으로 내달린 순가.그레이하운드는 (이집트 원산의 수렵견)이미 예은의 50m 근방까지 접근해 있었다.전력질주를 한 다 해도 그녀를 구해낼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거리였다. 그래도 무작정 뛰었다.움직일 수 있을 만큼 다리를 뻗어 전차처럼 달려나갔다. "피해!" 겨우 터져 나온 외침에 에은이 고개를 돌리자,은규는 죽음을 맞닥뜨린 인간의 공포를 볼수 있었다.왠지 모르게 심장이 바짝 조여들어 갔다.


"이쪽으로 와.어서!" 그의 고함 소리에 에은은 겨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그녀는 그녀대로,그는 그대로,서로를 향해 죽음힘을 다해 달렸지만 스피드로 유명한 사냥개 앞에서는 턱없이 모자랐다. 마침내 먹이를 포획할수 있을 만큼 근접한 그레이하운드가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날려고,은규 역시 있는 힘껏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끌어 잡았다. "바짝 붙어!" 야리야리한 여체를 최대한 몸 뒤로 숨긴 은규는 오른팔을 뻗어 낙하하는 사냥개의 목덜미 부근 급소를 비틀어 움켜쥐었다. 동시에 눈알이 하얗게 뒤집힌 사냥개의 이빨이 송곳처럼 날카롭게 살을 뚫고 들어왔다. 후두두,얇은 옷가지 위로 번진 피가 그의 옷을 타고 발등과 거친 땅 위로 쏟아져 내렸다.팔이 절단 난것 같은 고통을 참 으며 은규는 더욱더 손에 힘을 주었지만,온몸으로 흐른 땀이 자꾸만 시야를 가렸다. "안 돼요!" 인형처럼 서 있던 예은은 쿨럭쿨럭 솟아나는 선혈에 놀라 비명을 지르곤,견고하게 자신을 덮고 있는 그의 몸에서 벗어나 려고 안간힘을 썼다. "움직이지 마!" 사냥개만으로도 족했다.반으로 조각 난 것처럼 고통스러운 육체의 한계화 싸우는 지금,그녀만큼은 잠잠하길 바랐지만 예 은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슨 짓이에요!이 미친개가 당신 팔을 먹어 치우게 놔둘 거에요?" 한계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팔은 더욱 엉망이 되어갔다. "제발 좀 조용히 해!당신이 물어뜯기고 싶어서 이래?" "그래요!" 그녀가 울부짖었다.하옇게 질린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수도 꼭지처럼 콸콸 눈물을 쏟아냈다. "차라리 내가 당하는 편이 나아요.흑...저 미친개가 당신 팔을 먹고 있잖아요!어떻게 해...제발 제발 좀 피해요!" 평소 그녀를 참 강한 여자라고 생각해 왔다.어떤 상황에서도 이런 식으로 울수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그런데 지금은 자신 때문에 울고 있다는 생각에,한계를 넘나들던 통증마저 말끔해지는 느낌이었다. "비켜!이 미친개가....내 남편 팔 놓으란 말이야!" 에은의 마지막 절규가 암울한 공기를 가른 순간,탕!하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이 사냥개의 몸을 관통했다. 두사람 다 놀랄 틈도 없이 녀석은 게걸스레 몸을 뒤틀다 축 늘어져 버렸고,그대로 무거운 침묵이 찾아들었다. 수야가 도착했나 싶어 은규는 잠시 숲속을 향해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총을 쏜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그는 곧 재빠르게 회전하는 머리로 상황을 간파한 후,바짝 끌어안고 있던 예은의 상태를 확인했다.


"괜찮아?"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얼굴도 입술도 눈물에 젖어 파랗게 질려 있었다.그의 왼팔을 힘껏 쥐고 있는 손에서는 극심한 떨 림도 느껴져 왔다.은규는 분노로 표정을 굳힌 채 예은을 안고서 별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피....당신 팔에서 피가..."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어서 팔을..." "가만히 좀 있어!" 결국 은규는 소리치며 몸을 돌려 버렸다. "망할..." 사냥개가 그를 공격한 일은 한번도 없었다.최고급 조련사에게 정기적으로 훈련을 받은 것은 물론,이곳에 머물 때면 그 가 손수 먹이를 주며 틈틈이 훈련을 시켰다.게다가 예은도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각인시켜 주었는데 어째서 이런 일 이 ..... 괜한 곳에 화풀이를 하는 자신이 경멸스럽게 느껴졌지만,솟구치는 분노를 절제하기가 너무 힘들고 벅찼다. "생각이란 게 있으면 현실을 똑바로 봐.이 상황에서 누굴 걱정하는 거야.지금." "그러는 당신은요!" 지지 않고 소리치는 그녀의 목소리에 은규는 멈칫했다. "누가 위급한 상황인지 판단이 안 서요?" 어느 틈에 예은은 콘솔 위에 놓여 있던 구급상자를 품고 그의 몸뒤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피....내가 보기 싫어서 그래요.제발 팔 좀 보여줘요." 하는 수 없어진 은규는 침대에 앉아 순순히 팔을 내밀었다. "세상에." 상처는 심각할 정도로 깊었다.드라큘라에게 물리기라도 한 모양 선명한 이빨 자국에서 피가 용솟음 치고 있었다. "지혈부터 해야겠어요." 이런 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학교 다닐 때 배웠던 교련 실습을 떠로리며 예은은 욕실에서 수건을 가져와 상처 부위 를 힘껏 눌렀다. "미쳤어....." 한참을 피로 얼룩진 수건만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속삭였다. "사냥개한테 무작정 덤벼드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그것도 맨손으로 천하의 흑사양반께서 이렇게 무모해서야 쓰겠냐구요." 에은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죽는 줄 알았어....죽는 줄 알았다구요." 그 역시 자신이 무모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런 대책없이 무조건 덤벼들고 보는 건 열의에 들뜬 애송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자신이 그런 일을 저지르고 야 말았다. 하지만 그만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성인이 되고 나서는 무슨 일이 닥쳐도 먼저


해결책을 강구한 후 행동해 왔는데 오 늘은 그럴 만한 여지가 없었따.그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급한 상황에,평소 인정받고 자랑하던 냉철한 이성 모두가 무 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많이 놀란 거 알아.당신 얼굴에서 그런 공포를 봤...." "내 얘길 하고 있는게 아니에요." 말을 끊고 끼어든 예은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은규를 바라보았다. "당신 얘길 하는 거에요.죽는줄 알았어요.당신." 피로 흥건해진 수건 위로 예은의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그리고 문득 은규는 한가지를 깨닫고 있었다.그녀는 우는 모습이 아주 많이 예쁘다는 사실을, "나 때문에 당신이 죽을 뻔했어요.물론 고마워요.구해줘서 죽을 만큼 고마운데,너무 미안하잖아요.내가 괜히 당신 이름을 불러서 ....하지만 당신밖에 생각나지 않았어요.이상하게도 그 순간 당신밖엔 떠오르지 않았다구요." 또다시 익숙지 않은 감정이 찾아 들어 냉랭하게 조여들었던 은규의 심장을 따뜻한 기운으로 덮어갔다. "피가 멈추질 않아요.당신 팔 이대로 못 쓰게 되면 난,나는..." 원하지도 않는 결혼으로 인생을 망치고 사냥개에게 개죽음을 당할 뻔한 건 그녀인데,원망으로 물들어야 할 입술은 거푸 사 과만 반복하고 있었다. 과분해. 그녀는 너무 과한 여자였다. 이런 사내의 곁에서 무시당하고 거절당하고,위험에 노출되어 살아가기엔 참으로 아까운 여자 였다.눈물이 흘러내리는 예은의 뺨에 손을 대자 뜨거운 감촉이 흘러들었다.은규는 그대로 손을 펴 그녀의 한쪽 ? 전부를 보듬었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야." 다소 잠긴 목소리에 감겼던 그녀의 눈이 열렸다. "이제 알겠어요.당신과 내가 처한 상황,장난이 아니란 걸." "불행 중 다행이군." "조심할게요." 아직도 스며 나오고 있는 피를 확인한 예은이 공포 어린 눈동자로 웅엉댔다.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 때문에 죽는 건...당신한테 너무 가혹한 일이잖아요." 다시 한번 손에 압력을 가하며 예은이 고개를 숙였다.은규는 그녀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에 힘을 실었다. "이 정도 상처로 죽진 않아." "하지만 죽을 수도 있었어요.나 때문에." 자신이 겪었던 죽음의 공포보다 죄책감에 더 괴로워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은규의 가슴을 움직였다.그는 지혈을 하고자 애쓰고 있는 예은의 손을 붙들고 품안에 끌어당겨 안았다. "안 돼요.피가!" 기겁을 하며 예은이 벗어나려 했지만 은규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그녀의 턱을 붙들고 시선을 맞추었다.묘한 힘을


발산하는 새까만 눈동자에 붙들려 버린 예은은 더 이상의몸부림을 접어 버렸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살며시 쓸었다. "나야말로,당신이 다치거나 죽는다면 견디기 힘들 거야." 예은의 눈동자 위로 여러가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책임감 때문이겠죠." 반짝이는 눈동자에서,꼭 다문 입술에서,은규는 그녀의 마음을 읽었다.사랑을 원하는 갈급한 마음. "책임감 하나로 목숨 거는 남자는 없어." 은규의 발언은 폭탄이 되어 예은의 작은 가슴 안으로 던져졌다.하지만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걸어갔다. "서울 갈 준비해." 왠지 모를 아쉬움에 쓴웃음이 솟아났지만,예은은 있는 힘껏 턱에 힘을 주었다. "상처부터 치료하고 가요.그렇게 방치했다가는 피가 모자라 죽을 거에요." 그는 벌써 상처에 대충 붕대를 감고 있었다. "1 초라도 빨리 떠야 돼.더 이상 이곳도 안전하지 않아." 너무 아름다워 어둠이라곤 공존할 수 없을 것 같던 이 별장 마저 단번에 시커먼 구름에 휩싸여 버린 이 현실이 너무나 가 혹하게 느껴졌지만,그녀는 아쉬움이 깊어지기 전에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켰다. 안녕,추억의 공간이여..... 새벽녘에야 두 사람은 겨우 서울 집에 도착했다. 한꺼번에 몰려온 피로에 쓰러져 잠든 예은을 침대에 눕히고 생각들을 정리한 은규는 조용히 전화를 넣어 수야를 불렀다. 오랜만에 녀석이 평정을 잃는 모습을 보았다.간추려서 들려준 이야기에 입술을 한 일자로 다물고서 수야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누군가 약물을 투여한 게 분명합니다.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개가 주인을 공격하겠습니까." 은규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사건을 일으킨 놈은 내가 나설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처음부터 누구도 죽일 생각은 없었어.몰래 숨어 지켜보다 위 험한 순간에 총을 쏴 상황을 종결시킨 걸로 알 수가 있지." 수야의 눈동자가 흔들렷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던 게 분명해.더불어 내가 믿고 있는 장소가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걸 일깨우고 싶었을 테고,마음만 먹으면 네가 보호하고 있는 여자쯤 갈가리 찢어 죽일수도 있다는 협박까지 담겨 있던 행동이라고 본다." 핏기를 잃을 만큼 수야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형님...." 담배에 불을 붙이는 은규의 얼굴도 옅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래." "그 별장에 대해 아는 사람은.." "너와 형구뿐이지.사냥개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도 너희 둘뿐이다."


언제나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던 수야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날 너무 잘 아는 녀석의 행동이었다.너무나 잘 아는 녀석." 철저할 정도로 감정이 배제된 은규의 목소리가 수야에게서 왠지 더 슬프게만 느껴졌다.나를 너무나 잘 안느 사람에게 배신 당한 아픔,그 텁텁한 기분을 왜 모르겠는가. 그를 비롯한 조직 식구들 모두 진창에 빠진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세상이 쓰레기 혹은 패배자라 규명 지은 자들을 구하 기 위해 자신의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마다 않고 오로지 신의와 사랑만을 보여준 이영혼의 아비를 감히 배신한 아들이 있다는 냉혹한 현실.그 상실감을 어찌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전....의심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한참 만에 수야가 갈라진 목소리로 질문하자,은규는 그저 웃어 보였다. "너는 곧 나야." "형님." "누구보다 널 가장 잘 안다." "형님..." 아무런 이유도 설명도 필요 없는 맹목적인 믿음.은규의 눈동자에서 과분할 정도로 넘쳐나는 신뢰와 의지를 읽어낸 수야 는 두 주먹을 움켜쥐며 격하게 어깨를 떨었다. "가끔,형님의 이런 마음에는 어떤 식으로도 보답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전 그다지 좋은 놈이 아닌데,형님은 언제나 맹목적으로 절 믿어주시는군요.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어째서 절 이만큼이나 신뢰해 주시는지." "너야말로 왜 내 옆에 있는건지 물어도 되겟냐?" 대답 대신 돌아온 질문에 수야는 당황했다. "그건..." "넌 나와 함께 큰형님을 섬겼던 유일한 사라미고,큰형님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그에 따른 실패까지도 모두 목격했지.큰 형님께서 내게 조직체를 물려주셨을 때.아무런 이유없이 내곁에 있어준 것도 바로 너였다,내가 널 먼저 신뢰한게 하니야. 네가 날 먼저 포용한 것이지.그리고 난 한번 잡은 손은 절대 먼저 놓지 않는다." 은규가 희미한 미소를 보이자,수야는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곤 고개를 숙였다. "오늘 들려주신 말씀 가슴에 새기겠습니다.배신자는 꼭 제손으로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할테니.형님께서는 오로지 형수 님만 신경 써주세요.오늘 일도 감당하기 벅차셨을 겁니다." 은규의 눈썹이 살짝 인상을 그렸다. "호칭이 바뀌었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야는 예은을 그저 '여자'라고 칭했다. "형님 아내니까요." "다른 녀석들이라면 모르지만 모든 배경을 다 알고 있으면서....무슨 궁꿍이야?" 지친 기색이 역력한 예은을 바라보던 수야는,굳어 있던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실었다. "결혼식 이후 형수님을 대면했을때 자연스럽게 이 호칭이 흘러 나왔을 뿐입니다.듣기 거북하시다면....."


"됐다." 낮가림이 심하고 경계심도 엄청난 녀석들 모두 아무 이견 없이 예은을 형수님으로 받아들여 적잖이 놀랐는데 수야까지 의 외의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그녀가 자신의 인생에 꽤 깊숙이 발을 들여놓았다는 깨달음이 밀려들었다. "피곤하실 텐데 좀 쉬세요.오후까지는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그래,부탁한다." 수야가 물러가고도 한참을 그는 거동 없이 앉아 잇었다.다친팔이 욱신됐지만 가슴의 통증에 비할바가 아니었다.별장과 예은의 존재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수야와 형구뿐이었다.그러니 이 사건으로 형구가 스파이라는 추론에 결정 적인 심중 하나가 더 보태어진 셈이었다.하지만 녀석은 어째서 이렇게 뻔히 보이는 사건을 저질러 버린 것일까.마치 일부 로 얼룩진 윗도리를 벗어 휴지통에 처넣고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잠시 멈칫했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침대에 여인 하나가 누워 있는데도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는 스스로가 신기하게 느껴졌다.원룸 이라고 해도 공간이 많은 편인지라 혼자 잠들 침상 하나쯤이야 얼마든 더 만들수 있었고,그렇기 때문에 그녀와의 접촉은 되 도록 피할 생각이었는데 오늘 일로 그럴 여지를 잃고 말았다. 그녀가 위험에 처하는 일은 다시 만들고 싶지 않았다.혹 일어난다 해도바로 손쓸수 있는 거리 안에 있고 싶었다.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 채 새우잠이 든 예은을 바라보던 은규는 조심스레 옆자리에 몸을 뉘였다.익숙한 비누 향이 예민한 후각을 자극했고,규칙적으로 내쉬는 숨소리는 활짝 열린 청각을 자극했다. 호흡이 걸어진다.이성과는 다르게 온몸이 예은의 체온에 반응하고 있었다. "후..." 평소 자제력 하나만큼은 자신해 왔던 그에게도,그날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고 후끈한 밤이었다.

chapter 44 ==다행이야.당신 과거속에 다른 여자가 없다는것. 이제부터는 내가 당신의 과거.현재.그리고 미래가 될수 있을까?== -에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배고파. 눈을 뜨기도 전에 코끝에서 맴도는 냄새가 허기진 배를 뒤흔들었다.지글지글 뭔가 기름에 튀겨지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 더니,달그락달그락 그릇들이 부대끼며 여러 종류의 소리를 만들어 낸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 은규는 앞치마를 두른 모습으로 주방을 활보하고 있는 예은을 보았다.그녀의 손길을 따라 뭔지 모를 음식들이 뜨거운 김을 풍기며 식탁 위에 한가득 차려 지고 있었다.


그래.결혼을 했었지. 조용한 집에서,싸늘히 식은 침대에서,언제나 홀로 눈 뜨는 아침에 익숙했건만 제집인 양 분주한 예은을 보자 절로 현실이 실감났다. "언제 일어났어요?" 어느 틈에 다가온 그녀가 생각 속에 잠겨드는 그를 깨웠다. 허기진 탓일까.예은에게서도 맛있는 냄새가 나는 듯했다. "방금." 그녀가 들고 있던 국자를 내밀었다. "간 좀 봐줄래요?" 난감한 표정으로 은규는 눈앞에 들이밀어진 국자를 바라보았다. "치워." "하도 많이 먹어서 그런지 혀에 감각이 없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녀에게 익숙한 일들이 그에겐 언제나 생소하고 어렵기만 햇다.부모님께 어리광 부리며 아무렇지 않 게 안겨드는 그녀와 달리,그는 아버지와 거의 절연 직전이었고,불쑥불쑥 국자를 내미는 행동은 못 말리는 제수씨조차 감 히 시도래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녀를 만난 후,익숙지 못한 상황들의 연속이었다.공간을 공유하고,침대를 공유하고,비누마저 공유했지만,그 모든 일 들 가운데 어색함을 발견할 수 없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나 팔 떨어져요." 예은이 한번 더 재촉하며 고개를 살짝 기울여 보이자,믿을수 없게도 그는 아이처럼 국자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맵고 짭 짜름하면서도 달콤한 맛을 담은 국물이 혀를 지나 목구멍 깊은 곳으로 퍼져갔다.왠지 그녀의 맛이 생각났다. 금단의열매.그맛이. "어때요?" 이런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 어색해하는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져 은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녹슬지 않았다니까?" 만족한 얼굴로 돌아선 예은은 또다시 분주히 움직여 뜨거운 물이 담긴 대야와 구급상자를 들고 쪼르르 달려왓다. "또 뭐야." "밥 뜸 들 때까지 좀 기다려야 하니까 상처부터 소독해요." 그녀는 곧 그의 발치에 앉아 손을 턱 내밀었다. "......?" "팔,소독한다고 했죠?" 눈을 깜빡이는 예은의 모습이 꼭 바비 인형 같았다. "됐으니까 저리 가." "사람 성의 무시하지 말고 빨리 팔 보여줘요." "도움 같은거 필요 없어.그런 거 익숙하지도 않고." "그럼,지금부터 익숙해져요.난 참견하는 걸 무지 좋아하니까." 은규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해맑게 웃는 예은의 얼굴에 이끌려 팔을 내밀었다.상처에


응고된 피가 붕대와 붙어 버린 관 계로 한참이나 고전해야 했다. "아파도 조금만 참아요." "아들 하나 키우기로 작정했어?" 심각한 표정으로 붕대를 살피던 예은이 픽 하는 웃음을 뱉어 냈다. "아,진짜다.이러고 있으니까 꼭 말썽쟁이 아들과 엄마같죠?" 저도 모르게 은규의 입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 나갔다. "까불지마." "당신이야 말로." 폭풍 같은 기억들,생각하면 너무 아파 외면하고 싶기만 한 현실들,그 모든 것들이 예은의 환한 웃음 뒤에 숨어 버렸다. 저 미소에 자꾸 익숙해지면 안되는데,기대서도 안되는데.머리만 이해할뿐 가슴이 따라주질 않았다. 수야에게 예은을 맡기고 잠시 카지노에 들어선 은규는 정중히 인사하는 동생들에게 고갯짓을 해보인 후,바(bar)를 향해 걸음을 옮겻다. 그곳에는 언제나 형구가 있었다.기분이 좋지 않은 사람,돈을 잃어 몸과 마음 모두 빈털터리가 된 사람,모두 녀석의 미 소와 칵테일 쇼 하나에 금방 미소를 되찾곤 했다.신기한 재주였다.도저히 열다섯의 나이에 살인을 저질렀다고는 믿기 힘들만큼.... 너무 어린 나이에 손에 피를 묻히고 만 상처 덩어리.형구는 그런 녀석이었다.집단 따돌림과 연이은 구타에 곯아 버린 영 혼이 발칵 뒤집혀 급기야 살인이라는 강을 넘고 말았지만,정상 참작으로 3 년간의 소년원 생활 끝에 다시 세상에 토해졌다. 그러나 학교에 가지 못하는 청소년에게 세상은 이미 전과 같을 수 없었고,녀석은 점점 더 빠져나올수 없는 시궁창으로 발 을 들여갔다. 이곳 카지노에서 처음 형구를 만났었다.전문 소매치기에게 카지노라는 화려한 무대가 뿌리치지 못할 유혹으로 작용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게임에 집중한 손님들의 지갑이나 금품을 훔치던 형구는 시찰을 돌던 은규의 눈에 발각되었다. 아직은 앳된 소매치기의 형태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은규는 녀석이 카지노를 나서기 전에야 조용히 불러들였다.하지 만 허세로 가득 찬 겉모습과는 다르게 너무나 맑아 두려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눈동자에 이끌려 충동적인 말을 뱉고 말았다. '사람 만들어 줄 테니 여기서 지내라.' 그렇게 형구를 거둬들였다. 손놀림이 빠르고 좋은 녀석인 만큼 손으로 하는 일에 소질이 있을 것 같아 전문가를 붙여 칵테일 제조를 가르쳤다.계산대 로 녀석은 훌륭한 바텐더가 되어갔다. 사람을 죽인 손,피로 얼룩진 붉은 손,다른 사람들의 돈과 보석.어쩌면 인생의


조각까지도 훔치던 약탈자의손으로 이렇 게 멋진 일을 할수 있다는 사실에 녀석은 놀라면서도 감격스러워했다.그리고 1 년동안 틈틈이 준비한 검정고시를 패스해, 그렇게나 소원하던 고등학교 졸업장까지 따내고야 말았다. 너무 일찍 날개가 꺾여 하늘을 날지 못하던 길 잃은 작은 새.은규가 한일이라곤 그 날개를 치료해 준 것뿐인데 스스로 너무나 높고 아름답게 날아 버리는 법을 터득한 영특한 아이,그가 바로 형구였다. "형님 오셨습니까?" 보조 바텐더가 씩씩하게 인사를 하자,칵테일 제조에 빠져 있던 형구가 고개를 들었다. "어?형님이 어떻게 ....신혼여행은 어쩌시고요." 사건이 일어났던 날,녀석이 카지노에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수야로부터 전해 듣자마자 직접 만나지 않고는 견딜수 없 을 것 같아 바로 걸음을 옮겨왔다.이유를 막론하고 녀석의 눈동자를 들여다 보면 뭔가 해답이 나올것 같았다. "일이 있어서 며칠 당겨 올라왔다." 변한 것은 없어 보였다.기운이 가라앉은 기색외엔 이전과 다를 바 없는 형구였다. "한잔 드릴까요?" 은규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술독에 빠져 무아지경에 이르고 싶은 요즘이었지만,그런 나약한 방법으로 얻어지는 것 들은 지독한 숙취와 공허함뿐이었다. "너 보러 왔다." 깜짝 놀라는 형구의 눈동자 속으로 여러 감정들이 스쳐 지나간다.그 안에는 분명 두려움과 불안도 포함되어 있었다.흔들 리는 신뢰를 움켜잡으며 은규는 쓴웃음을 삼켰다. "요즘 바깥 출입이 잦다고 들었다." 다시 한 번 형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자 생겼냐." "여자는요..." 말을 흐리는 형구의 손이 연신 데스크를 닦아댔다.불안하다는 증거였다. "형구야." "네,형님." "백곰.....보고 싶지 않니." 번뜩이는 은규의 눈동자를 피하며 형구는두손을 꼭 움켜쥐었다.눈에 띄게 평정을 잃은 모습이었다.신뢰가 조각나고 불 투명한 것들이 점점 더 확실해져 갔다.의구심도 커져갔다.설마,혹시,그래도,하고 희망을 품었던 가슴속으로 쓰디쓴 배신 의기운이 젖어 들고 있었다. "난 그립다.....녀석이,너무 그립구나." 형구가 고개를 숙였다.뭔가 말하고 싶은 것들이 한가득인데 애써 참고 있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부디 최후까지 이르지 않기를 바라며 진실을 토로할 기회를 주었지만 형구의 입술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잘게 부서지기 시작한 심장을 움켜쥐고서 은규는 이를 꽉 물었다.그리곤 서서히 감정으로 흐트러졌던 얼굴을 지우고 견고 한 표정을 채웠다.


"녀석의 원수.내가 꼭 갚을줄 거다.이 손으로 직접." "형님..." "네가 원하는 것도 바로 그거겠지.누구보다 녀석의 죽음을 아파하던 네 모습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이내 몸을 돌리는 은규를 형구가 다급히 불러 세웠다. "저,형님..." "뭐냐." 형구의 얼굴 위로 다시금 망설임이 겹쳐갔지만 마지막 순간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아닙니다.조심히 가시라구요." "그래." 천근만근인 발을 움직여 바에서 벗어나는 은규의 가슴으로 먹먹함이 찾아들었다.사람들의 소리,훈훈한 연기,모두 다 버 겁게만 느껴졌다.동생들의 인사도 받는둥 마는둥 하며 빠른 걸음으로 카지노를 나선 은규는 담배 케이스를 꺼내 또 한참 을 들여다 보았다. 용서 못한다......형구 너라면,절대 용서 못해.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신뢰의 미세한 조각마저 산산히 흩어지자,영혼이 아픔으로 신음했다. 하도 떠들어 더 이상 말할 기력도 없었다. 마치 짐짝 맡기듯 수야레게 몇 마디 중얼거리고 외출해 버린 무정한 남편 때문에 예은은 지상 최대의 어색한 상황에 봉착 하고 말았다. 정말이지.늘 느끼는 사실이지만 이렇게 말 없는 남자는 처름이었다.엄밀히 따져 은규 역시 하나 나을건 없었다.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그와 함께 있을 때는 긴장과 흥분이라는 감정 때문에 어색함 따윈 느낄수 없는 것이라고나 할까. '또 무슨 말을 하지?' 날씨 얘긴 이미 했고,조직 식구들 근황이라면 진즉 물어보았다.그때마다 수야가 한 대답이라고는 '예''아니오''그렇습니 다'식의 단답형이 전부였지만,그나마도 떨어지고 나니 한계에 다다른 머리가 돌 굴리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끼지 않으셨군요." 고전하고 있는 예은의 마음을 가상하게 여긴 것인지,수야가 먼저 말을 꺼냈다.그것도 두 어절씩이나! "뭘 말이에요!" "결혼반지 말입니다." "아..." 예은은 허전한 손가락을 내려다 보았다. "별로,의미를 찾을수 없잖아요.호적상으로 난 여전히 미혼인데다 딱히 디자인도 마음에 들지 않거든요.영락없는 결혼반 지라는 느낌이랄까..." "왜,그런 거 있잖아요.고지식하면서 틀에 박힌 디자인.의미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


지만,어쨌든 결혼반지보다는 약혼반지가 더 마음에 들어요." 수야의 눈썹 끝이 살짝 올라갔다. "약혼 반지요?" "본인이 고르고도 몰라요?알이 꽃 모양으로 조각된 사파이어 백금 반지 말이에요.그러고 보면 수야 씨 참 센스 있는 사 람 같아요.옷 입는 것도 그렇고,헤어스타일도 그렇고,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빈티 나지 않는 게 어쩜...." 수야가 미간을 모았다. "형님께서 약혼반지를 주셨습니까?" "네?" 예은은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 "수야 씨가 사온거....아니에요?" 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적 없습니다.그러고 보니 형님께서 여자 반지에 대해 잠시 물으신 기억이 나는군요." "그사람이?말도 안돼....요 직접 골랐냐고 물었지만 분명 아니라고 대답했는데." 뭐라고 설명 할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힌 예은은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제 말 믿으시겠습니까?" 놀라움과 흥분으로 뒤섞인 머리를 정리하느라 예은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조금씩 다가가고 계세요." 수야의 얼굴이 편안한 미소로 풀어지고 있었다. "아마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깊은 마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사실 저도 놀랐습니다.마음으로 많이 아끼고 계신 작 은 형수님께도 선물 같은 건 하신 적이 없는 분이세요.그런데 직접 반지를 골라주셨다는 건,조금의 과장도 없이 100 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일입니다." 안 그래도 부푼 가슴을 수야가 자꾸 부추겨 쉬이 진정이 되질 않았다.하지만 괜히 큰 의미를 부여했다가 나중에 실망하고 싶진 않았다. "글쎄요.그 사람 만난 후에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으니까 그것들에 대한 보상 정도가 아닐까요?" 수야가 좀더 큰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그런 마음이셨다면 저를 시키셨겠지요.하지만 형님은 언급조차 하지 않으셧습니다.한번도 뭔가 숨긴 일이 없으신 분이 저한테까지 비밀로 하셨다는 건,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 섞였기 때문이라고밖에는 볼수가 없습니다." 조용조용히 이야기하는 수야를 바라보며 예은은 이 사람이 불과 몇분전까지만 해도 입에 꿀을 바르고 있던 사람이 맞나 싶었다. 줄곧 말을 아끼다가도 한번 입을 열면 마음이 치유될 정도로 듣기 좋은 소리만 실어다 주니,참으로 묘한 사람이었다. "고마워요,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어요." "형수님..." 부드럽게 자신을 부르는 수야의 목소리에서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졌다.


"네,말해 보세요." "형님께서 많이 힘들어하십니다." 환하던 예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책임감이 강한 분이라 표 내지는 않으실 겁니다.하지만 지금 형님 마음,말이 아니에요." "알고 있어요." 예은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래봬도 한 공간에서 ���내는 사이인데 그 정도는 충분히 인지할수 있어요.하지만 그저 느끼는 것뿐.할 수 있는게 없네요." "그저 지금처럼 웃어주시면 됩니다." 흔들림 없던 수야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그것만으로도 형님께는 많은 위로가 될 겁니다." 웃음 하나로 그의 상처를 치유할수 있을 만큼 의미 있는여자가 되라,마치그런 뜻으로 들려왔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웃는 거라면 자신 있는데." 하지만 왠일인지,그 쉽던 미소조차 더 이상은 지어 보일수가 없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식탁에 엎드려 잠든 예은과 그옆을 지키고 있는 수야가 보였다. "늦으셨습니다." "침대로 옮기지 그랬냐." "감히 형수님 몸에 손대기가 뭣해서요." 수야가 멋쩍게 웃었다. "싱거운 녀석,종일 수고했다." 은규의 표정을 살피면서도 수야는 형구와의 만남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눈빛과 말투만으로도그가 지독히 힘든 상태라는 걸 인지한 까닭이었다. "그럼,들어가 보겠습니다.쉬세요." 은규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나서야 수야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사라졌다. "후...." 어느 때보다 영혼이 피로한 하루엿다.그래서 인지 문을 열자마자 반겨줄 거라 생각한 여인이 늘어져 있는 모습에 왠지 모 를 아쉬움이 샘솟았다.그는 곧 식탁으로 다가가 잠든 예은을 안아들었으나,아이처럼 품에 감겨드는 부드러운 여체에 갑자 기 훅 하고 열이 달아올랐다. 또 찬물로 샤워를 해야 하나. 묵직한 고통에 신음하며 걸음을 옮기는 중 꿈틀대던 에은의 눈이 살짝 뜨였다. "어머!" 그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에은은 얼굴을 붉히며 당혹감을 그대로 드러냈다.그런 솔직함이 좋았다.금방 변화하며 감정을 표해내는 그녀의 얼굴처럼,보이는 것만이 진실인 세상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려줘요!" 은규의 품에서 벗어나자마자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예은이 어색하게 웃엇다. "깜빡 잠들었나 봐요.저녁 아직 안 들었죠?" 그녀는 바로 주방으로 달려가 뚝배기가 올려진 가스레인지를 켜고 구급상자를


챙겨왓다. "찌개 끓기 전에 잠깐만 봐요.." 그녀가 이상황을 어색해하고 있다는걸 눈치 챈 은규는 순순히 소파에 앉았다.그 역시 오늘만큼은 신경을 혹사시키고 싶지 않았다. "우리 아들 오늘은 얌전하네." 침묵이 깃들자,예은이 쿡쿡대며 장난을 걸어왔다. "내일은병원에 가요.그대로 두면 흉터가 남을 것 같거든요.흉터 많은 남자는 여자한테 사랑 못 받는다는 거 알죠?" 보기 좋지 않은 상처인데도 예은은 꼼꼼히 소독을 했다.어떨 땐 제 나이 값도 못할 만큼 어린애처럼 보이다가 또 어떨 땐 존경스러울 정도로 현명해지곤 하니,어느쪽이 진실된 모습일까 궁금해졌다. "그런데 말이에요..."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예은이 머뭇거렷다. "왜." "어떻게 생긴 거에요?얼굴의 그 흉터.." 지금까지 뺨의 흉터를 그다지 의식하지 못하고 살 때가 대부분이었다.그런데 갑작스런 예은의 질문에,그는 처음으로 매 끈한 얼굴에 자리한 상흔이 몹시도 신경 쓰였다. 그녀는 이 흉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칼에 긁혓어." "그 정도는 나도 알수 있어요.왜 그랬느냐가 궁금한 거죠.그리고 단순히 긁힌 것만으론 보이지 않는데요?" "아버지와 멋지게 결별하며 생긴 훈장이지." 예은의 시선을 따라 은규는 팔의 상처로 시선을 내렸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을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멋대로 정해놓은 학교에 들어가라고 우기는 통에 하루가 멀다하고 시끄 럽게 싸워댔어.그땐 노인네가 호텔 일에 매달려 있을때라 만나기도 쉽지 않았지." 잠시 옛 생각에 잠긴 은규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참다못해 단판을 지을 생각으로 호텔 회장실까지 찾아갔는데,호텔 직원한테 칼로 위협을 받고 있더군." "칼이요?" 예은은 깜빡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임 지배인이라고,호텔리어들 사이에 평판이 아주 좋던 사람이었어." "그런 사람이 어째서..." "사람이 너무 정직해서 바른 소리,쓴소리 마다 않다가 노인네 눈밖에 난거지.평생을 바쳐 헌신한 직장에서 부당 해고를 당한 나머지,눈이 뒤집혔던 모양이야." "그래서 당신이 나섰군요.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 단어 선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은규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한사람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끽 소리도 못하고 있던 사람이 내가 나타 나자마자 등 뒤로 숨어서는 저 놈 잡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내 아버지지만 그렇게 역겨워 보인적도 없었어."


은규의 입술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때 생긴 상처야,임 지배인은 내뺨에서 피가 쏟아지는걸 보자마자 어쩔 줄 몰라하다 주저앉았고,이때다 싶어진 노인 네가 경비들을 불렀지.회장실에 칼까지 가지고 들어왔을땐 분명 독한 마음이었을 텐데.어차피 사람 찌를 배짱도 없었던 거야." 이해한다는 듯 예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뭐가." "여자 때문에 생긴 상처가 아니라서." 은규의 눈썹이 삐죽 치켜 올라갔다. "좀 로맨틱한 상상을 하고 있었거든요.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생긴 상처라든지..." "멋대로 영화 찍지마." 예은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왠지 안심되는데요.지워지지 않는 상처에 여자와의 추억이 얽혀 버리면 볼때마다 떠올리게 될거 아니에요.당신이 다른 여자한테 마음 준다고 생각하면,,,속이 뒤틀려 버려요.나,못됐죠?" 어색하게 웃던 에은이 고개를 숙이자.흘러내린 머리카락들이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멋대로 움직이는 손을 가두지 못한 은규는 손을 들어 그 풍성한 머리채를 한 움쿰 쥐어 보았다. 부드러운 느낌.좋은 냄새.이대로 눈을 감고 혹사당한 영혼을 달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많이 길었죠?좀 잘라야 할까봐요.정리도 안되고 지저분..." "보기 좋아." 예은의 손이 움직임을 잃었지만 그는 더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아무리 듣기 좋은 말도 그런 표정으로 하면 전혀 진심으로 안 들린다는 거 알아요?" 어느새 소독을 마친 예은이 붕대를 꺼내 들었다.그 틈에 그녀의 약지 부근에서 뭔가를 반짝이는 것을 은규는 놓치지 않았다. 반지....? 그의 표정에서 질문을 읽어낸 예은은 일부러 더 상처에 집중하며 조잘댔다. "아.이거요?끼우라고 준 거잖아요.결혼한 사람이 맨손으로 있으면 괜한 의심 살수도 있구요."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붉게 물든 그녀의 얼굴 위로 행복한 기운이 퍼져갔다. "그런 이유라면 결혼반지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데." 한껏 퍼졌던 예은의 얼굴위로 약간의 슬픔이 깃들었다. "싫어요,결혼반지는." 다소 풀어졌던 은규의얼굴도 서서이 굳어갔다.결혼식 때까지만 해도 제법 긍정적이었던 그녀가 요 며칠 사이 많이 따분 해 하고 힘들어 한다는걸 눈치 채고 있었다. 후회하고 있는건가. 그래,이런 작위적 상황을 떠올리는 반지 따윈 끼고 싶을리가 없겠지. "이제 됐어." 묵직한 침묵이 거북해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은규를 예은이 슬쩍


붙들었다.그리고는 주머니를 뒤적여 작은 상자를 하나 꺼내 보였다. "선물이에요." 발개진 얼굴로 그녀가 상자를 열자,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은규는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밖에 나갔었단 말이야?" 반지는 본척도 않고 바깥 타령부터 하는 그의 반응에 예은은 얼굴 가득하던 붉은 기를 지?다. "수야 씨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자꾸 정없는 말만 툭툭 뱉지 말고 좀 받아줄래요?내 손 무지 부끄러워하고 있다구요." 이 반지를 손에 끼우면,쓸데없는 의미만 더 갖다 붙이는 꼴이 될것 같아 은규는 망설이믈 접지 못했다.하지만 참다못한 그녀가 손수 반지를 끼워주자,도둑 키스를 당한 소년처럼 온몸이 화끈거렸다. '젠장.기분이 왜 이렇지?' 뜨거웠다.반지와 손가락이 벌겋게 달아오른 쇳덩이처럼 느껴져 은규는 자못 당황하고 말았다. "이제야 계약 성입!" 그가 평정을 찾기도 전에 예은은 활짝 웃으며 뺨을 내밀었다. "자요,도장 찍어요." 얼마나 더 놀라게 해야 그녀는 만족할수 있을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농도로 붉어진 예은의 뺨이 멋대로 그의 몸을 이끌어 갔다.그녀와 함께할 때면 자꾸만 느슨해지는 자신을 알기에 몇번이고 선을 그어댔지만,오늘은 이가슴 안에 잊고 싶은 기억을 모두 묻고 싶단 욕망에 무너지기 일보직전 이었다. 가려진 머리키락 사이로 보이는 예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뺨 근처까지 얼굴을 내린 은규는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잡았다.그리고는 방향을 바꾸어 거칠게 입술을 덮었다. chapter45 ==소유욕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상처도 늘어가는 법. 더 많이 갖고자 한다면 그만큼의 아픔도 각오해야 하지 않을까.==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자세가 뒤바뀌었다. 묵직한 몸으로 예은을 내리누르며 은규는 온몸으로 그녀의 열기를 느꼈다. 잊자,위로받자,살벌한 현실을 이 따뜻한 몸체 안에 묻어버리자. 그녀가 당황하는 기색을 역력히 느낄수 있었으나 이미 타오르기 시작한 도화선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잔뜩 오므린 예 은의 다리가 힘없이 벌어져 그의 몸을 더 가까이 받아들였고,딱딱하게 굳어있던 입술도 뜨겁게 몰아치는 혀와 입술에 스르르 문을 열었다. 흐느적거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며 예은은 혼란스러운 생각에 잠겼다.


'이래도 되는걸까?' 아직 그를 온전히 알지 못한다.마음을 공유한 일도 없다.무슨일 때문에 고민하는지,오늘은 왜 의외의 소유욕을 보이고 있는지,도무지 알길이 없었다.그런데도 이남자는 어느틈에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제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빠르고 다급한 손길로 가슴을 쓸고,거칠게 몰아치는 입술로 귓볼을 물고,턱 선 아래로 이어진 쇄골을 핥고 있는데도 거부 하는 숨소리 하나 낼수가 없는 난 뭐지? 이렇게까지 자신을 내주고 싶을 만큼 깊게 의식하게 된 그가 너무 두려웠다.그리고 아팠다.마음은 주지 않으면서,작은 조 각 하나조차 보여주지 않으면서.이런식으로 구는 행동의 의미를 알수 없어 불안했다. "그만....해요." 죽을 힘을 다해 겨우 연 예은의 입을,은규의 입술이 다시 막았다.머리 속이 몽롱해지고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왠지 이용당하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수 없었다. "싫어요...!" 그의 손에 붙잡힌 두손을빼내기 위해 애쓰던 예은이 소리치자,은규가 고개를 들었다.슬픈 눈동자,열정으로 뒤덮인 눈동자. 그 한편에 살아 숨쉬고 있는 뚜렷한 고뇌와 아픔이 엿보이고 잇었다. "달아나겠다고?" 그의입에서 뜨거운 숨결이 쏟아져 나왓다.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서 또 달아나겠다...." 그가 거친 손가락으로 바짝 일어선 유두를 문지르자,아찔한 충격이 온몸을 관통했다. 헝클어진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고전하던 예은은 가깝게 겹쳐진 은규의얼굴을 애처롭게 바라 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게 분명해.' 눈을 통해 더 확실히 느낄수 있었다.그는 지금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어떤 일들로부터 달아나기위해 그녀를 안고자 하는게 분명했다. "순수하게 날 원한다고 말할수 있어요?" 서글픈 예은의 음성에도 그는 거친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더 확실히 보여주길 원한다면 가만히 있어." 예은은 두눈을 감으며 은규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흘려넣었다.이 남자가 자신의 몸을 만지는 장면을 숱하게 그려 왔지만 적어도 이런식은 아니었다.어설픈 장난으로 시작했던 별장에서의 그날 이후,다시 한번 그에게 이 몸을 내어줄때 가 온다면 그땐 이미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가 될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이용하지 말아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예은이 작은 속삭임을 흘리자,은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의미야." 노기에 사로잡힌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예은은 기다란 손가락을 펴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당신이 정말 원한다면 나,달아나지 않아요.반응해 달라고 한건 나니까.비겁하게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구요.하지만,..... 하지만 말이에요,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당하는 건 참을수 없어요.내가 진지하다는거.이 결혼 안 에 마음까지 담고 있다는거,당신을...많이 좋아한다는거 알고 있잖아요.그런데도 이런식으로 이용하는거 너무 잔인하다 고 생각 안해요?" 은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감정으로 격해진 예은의 눈에도 물방울이 맺혀 들었다.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나 뽑아댈 만큼 약한 성격이 아니었는데,왠일인지 이 남자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이 싫었다. "나 일회용 물품 아니에요.언제든 원하는 걸 뽑아갈수 있는 자판기는 더더욱 아니에요.평소 당신이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여줬다면,무슨 일 때문에 힘들고 아픈지 비춰줬더라면 당신 감정을 털어 담는 쓰레기통 역활쯤이야 얼마든 가수했을 거 에요,하지만 당신은 이결혼,진심으로 생각안하잖아요.되도록 빨리 끝낼 생각만 하고 있잖아요.그러면서도 나한테 이런 식으로 구는 거,스스로 용납할수 있어요?" 어느새 줄기를 이룬 눈물이 예은의 뺨을 타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적셨다. 은규는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 알수가 없어 한참동안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다가,뜨러워진 손바닥을 펴 기계처럼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만지지 말아요!아용당하는것만큼,동정 받는 것도 싫어요." 가녀린 팔로 몸을 감추려 애쓰는 에은에게서 수치심을 읽어낸 은규는,바닥에 널린 자신의 웃옷을 집어 덮어준 뒤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미안해." 그녀가 눈물을 깨물어 참을수록 자신이 지독한 기생충처럼 느껴져 참을 수가 없었다.설명할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은 규는 욕실로 숨어들어 찬물 아래 역겨운 욕망을 달랬다. 비열한 놈. 가슴 한구석에 자리한 양심이 조롱했지만 허물어진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겁쟁이. 너무 정확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생각을 들키고야 말았다.의식하지 못한 순간.이 각박한 현실을 쓸어 담을수 있을 만큼 예은의 가슴이 넓어 보여 잠시 이용하려 했었다.그런 식으로 안을 만한 여자가 아닌데.이성과 감정이 분리되어 자꾸만 의외의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정신 차려.' 콸콸 쏟아져 내리는 냉수 속으로 더 바짝 머리를 들이댔다. '휘둘리지마.' 누군가를 지킨다는 건 엷은 마음가짐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감정이 깃들게되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분별력을 일기 때문에 겉���속으로 연결되어 있는 모든 사족을 잘라 버려야만 했다. 더 이상 물이 차다는 감각이 없을 때까지 샤워기 아래 서 있었지만 체온은 떨어지지


않았다.그녀가 지펴놓은 불이 너무 거세게 타올라 스스로 욕구를 해결하고 싶다는 어리석은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돌아 버린게 분명해.' 그래,그는 확실히 미쳐가고 있었다. 잠이 올리가 없지. 어둠에 가려진 은규의 등에 집착하던 예은은 미세한 한숨을 내쉬었다.그가 곁에 없기 때문일까,어느 때보다 침대가 넓고 차갑게 느껴졌다.신혼여행 이후 언제나 한 침대를 써왔는데 한참만에 욕실에서 나온 은규는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대화를 차단했다. 한 공간에서 지낸 몇주동안 그는 전혀 의식하는 기색없이 평소처럼 지내왔다.그런 깔끔하고 신사적인 행동에 다행스러운 마음을 가져야 할 텐데 오히려 자존심이 상했고 조금은 기가 질리는 기분이었다. 대부분의 시간동안 그는 그녀를 짐짝만냥 수야에게 떠넘긴 후 볼일을 보러 나갔다.평범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 었기에 적당한 시기가 되면 밖에서의 일들과 진척 상황을 이야기 해주지 않을까 싶어 조용히 기다렸지만,무거운 그의입술 은 쉬이 열리지 않았다. 예은은 모든 혼란과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피에로 가면을 뒤집어쓴 채 배시시 웃어야만 했다.이 사람에게도,저 사람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하지만 언제나 한계는 있는 법,그 모든 감정들이 마침내 오늘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언제 끝날지 모를 작위적인 관계라고 말한 주제에,육체를 요구한 그의 심중을 도무지 이해할수 없었다.잠시 현실을 잊고 위로받고 싶었다면 도움을 청하고 대화로 풀어 나가면 될 일인 것을.... 묵직하게 가슴을 누리는 상념에 한숨을 뿜어내며 예은은 필사적으로 잠을 청했다.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소파에 누워 있는 그에게 다가가 소리치며 추한 꼴을 보이게 될 것 같았다. 얼마나 더 시간이 흘렀을까? 예은의 숨소리가 잠잠해진 듯하자 은규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이던 그녀가 널찍한 침대위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곧 소파에서 일어나 담배를 찾았다.화력이 센 라이터가 가스 소리와 함께 열렸다 닫혔고,그의 시야는 금방 희뿌연 연기로 가득해졌다. 한 공간 안에서 지낸 시간이 그리 길지도 않건만 옆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없다는 사실에 이리도 진한 허전함을 느낄줄은 미처 몰랐다.사실 은규는 언제나 잠이 든 양 위장하며 몸을 돌리고 있다가 예은이 지쳐 눈을 붙이면 다시 돌아 한참을 바라보곤 했다. 어둠,그리고 얼마간의 거리.이 미세한 장벽뒤에 있는 그녀를 관찰할 때마다 각종 갈망들이 살아 꿈틀댔지만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잘 다스려 왔다고 생각했다.그것은 그녀에게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명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많은 것들이 예전과 같을수는 없다는것.그리고 그 사실 하나가 감정적으로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될지,그는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 낯선 단어를 상기할 때마다 묘한 감정이 차오른다.그 어떤 형태로도 아내라는 존재를 곁에 둘 생각은 없었는데 결국 여기 가지 오고야 말았다. "마음대로 되는게 없군." 어차피 인생은 소나기 같은 것이 아니던가.예고도 없이 멋대로 쏟아 부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맑게 개는것.구 름 한점 없이 맑은 하늘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가는 사정없이 내리치는 비의 폭포에 흠뻑 젖기 마련이었다. 줄담배를 피우던 은규는 조심스레 침대 곁으로 다가가 예은을 바라보았다.어서 이 소나기가 그치고 태양이 비추기를. 간절한 기도가 허전한 가슴으로 헛돌았다. chapter 46 ==시아버님과의 첫 대면을 칼부림으로 시작한 며느리가 지상 천지에 또 있을까.==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은규가 현관을 나서기 전,예은이 통보했다. "일을 맡게 됐어요." "무슨 일." "나 작가잖아요.설마 잊은건 아니겠죠?" "집에서 하는 거라면 상관 없어." "그럴 순 없어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문 밖으로 나서려던 은규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글이라고 앉아서 마냥 쓰면 되는 줄 알아요?정기적으로 미팅도 해야 하고..." "이봐." 은규의 입술에서 담배 연기와 함께 피로와 짜증이 짙게 흘러 나왔다. "당신이 일을 하든 말든 난 상관없어.하지만 당신 입으로 분명히 얘기했지.현재 상황 장난이 아니란 걸 알겠다고." 아직도 붕대에 감겨 있는 은규의 손을 보자,별장에서의 공포가 되살아났다.지금은 일할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지만,언제나 빡빡하게 이야깃거리로 채워졌던 머리속이 그를 생각하는 공간만 넓혀가는 판국이었으니 이런 식으로 가다간 자시늘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압감에 견딜 수가 없었다. "일하지 말아라,나가지고 말아라,그럼,난 대체 뭘 해야 하는거죠?" 예은의 얼굴 위로 지친 기색이 찾아 들었다. "나 글쟁이에요.연필을 쥘수있게 된 순간부터 이것저것 쓰지 않고서는 못 견딜만큼 활자에 중독된 사람이라구요.하 지만 당신을 만나고부터는 단 한줄도 써내지 못했어요.이런 상태가 작가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기나 해요?" 속이 타는지 은규가 새 담배를 입에 무는 것이 보이자,예은의 눈동자가 물빛에 잠겨갔다. "나와 당신이 관계하게 된 원인,거기엔 분명 내 실수도 있었어요.그걸 인정하기 때문에 지금껏 당신이 원하는대로 따 랐던 거구요.하지만 이 이상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거죠?다른 건 양보할수 있지만 글만은 안돼요.이야기 를 써 나갈 수 없는 난,살아 있는 의미가 없다구요.그러니 이번엔 당신이 양보해 줘요." 아무래도 예은이 쉽게 물러날 것 같지가 않아 은규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현관에 비비며 거칠게 중얼거렷다. "왜 이렇게 거슬리게 굴지?" 믿을수 없을 만큼 냉랭한 그의 눈동자에 당당히 뻗어 나가던 예은의 시세가 뚝 끊어져 버렸다. "일이 빨리 끝나길 바란다면 적어도 방해는 하지 말아야지.당신이 일한답시고 돌아다닐 때 꽁무니 쫓아줄 시간도,여력도 없어.' 예은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당신 문제가 아니라도 난이미 복잡해.진창도 이런 진창이 없을 만큼 넌더리가 나는 중이라고.하지만 내가 저지른 일이고, 당신을 끌어들인 책임이 있으니까 이렇게 부서져라 뛰고 있는건데 자꾸 이러면 달아나고 싶어지는게 보통 사람 심리아니 겠어?적당히 좀 해둬." 믿을수 없는 말만 뿌려놓고서 그는 문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거슬려... 그의 말 한마디,한마디가 심장에 박혀 머리속을 하얗게 비워낸 탓에,어느 틈에 다가온 수야가 문 밖에 서 있는것이 보이 는데도 눈인사 하나 할 기력이 없었다.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수야가 문을 닫고 자리를 비키고 나서야 그녀는 마음놓고 표정을 허물어뜨렸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대한 책임감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틀린 말이 아니었고,그가 자신에게 갖고 있는 감정이 책임감 이상이라고 기대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아파? 알고 있던 사실을 당사자의 입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했을 뿐인데 왜이리 가슴이 조여드는지 이유를 알수 없었다.기대 하지 말자,기대해선 안된다,늘 최면을 걸고 있었지만 그의 입술이 잦은 미소를 줄 때마다,가벼운 농담을 건넬 때마다,기 대라는 허영심에 싸여 현실을 잊어버렸던 것일까. 핸드폰이 열번 가까이 울리는데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완벽히 정신을 놓고 있던 예은은,도통 끊이지 않는 벨 소리가 소음 처럼 느껴지고 나서야 겨우 몸에 찾아온 마비를 풀수 있었다. "전화 좀 일찍 받을수 없어?" 유희였다.


"미안,못 들었어." "약속 정하려고 걸었다.프로덕션 기획 피디가 또 연락해 왔어.오늘이라도 당장 만났으면 하는 모양이야." 예은은 잠시 갈등했다. "글쎄..." "글쎄는 뭐가 글쎄야!신혼 재미가 그렇게 대단하냐?천하의 오예은이 일을 다 마다하고 말이지." 공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사람들 눈에는 이 상황이 그저 달콤한 신혼의 일상 이상으론 보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미치 도록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알았어." 그래서 충동적으로 결정해 버렸다. "당장은 힘들고,토요일 오후 3 시쯤으로 해줘."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불안에 젖어 있었지만 입을 뗄수록 오기가 불어났다.결국 약속 장소를 정하고 전화를 끊고 난 후에 야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나간담? 수야가 있는 한 홀로 외출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따돌릴수 있을 만큼 만만한 상대도 아니었다. "형수님,이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마침 밖에서 들려온 수야의 목소리에 예은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미안해요!" 현관문을 급히 열며 일단은 생각을 접어두로 했다.토요일까지라면 시간이 충분하니까 무슨 대책이라도 서겠지. HS 호텔,여러모로 싫은 곳이다. 아버지로부터 억지로 지분을 물려받은 후,그는 유난히 호텔에 관심이 많았던 백곰에게 경영권을 넘겨주었다.컴퓨터와 숫자 천재였던 백곰은 체계적이고 진보적인 방법을 사용한 네트워크 시스템을 도입했고 덕분에 은규는 많은 부분 호텔에서 신 경을 거둘수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죽어 버렸다.아무런 예고 없이 이땅에서 제 흔적을 지워 버렸다.지금은 현석이 잠시 서포터 역활을 해주고 있었지만 백화점만으로도 바쁜 동생에겐 늘 미안한 마음뿐이었다.그래도 딱히 부탁할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고,현석 역시 탁월한 경영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안심할 수 있을것 같아 그렇게 했다. 적임자가 나타난다면 언제든 손을 뗄 준비가 되어 있었다.하지만 현재 아버지 다음으로 가장 많은 호텔 지분을 소유한 사람은 그였기 때문에,오늘처럼 이사회가 있는 경우 등한시 할수만은 없는 입장이었다. 회전문을 열고 들어서자,당장이라도 백곰이 '형님'하고 웃으며 맞이해 줄 것 같아 못내 언짢아?다. '역시 안 맞아.이 호텔하고 난.' 찌푸린 얼굴로 로비를 걷던 은규는 주로 이벤트 행사가 열리는 골드 홀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그러고 보니 이 호텔에서 처음 예은을 만났다는 사실이 상기되었다.오로지 그와의 접촉을 위해 겁도 없이 메이드로 취직한 무모함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지만,그녀에 관해 어느 정도 파악을 하고 보니 충분히 납득이 가고도 남았다. 지금쯤 어찌하고 있을 까 아침에 다툰 일을 떠올리자 마음이 좋지 않았다.그녀의 기분이나 입장이라면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지만,그의고집으로 묶어두고 있는 땅 문제로 예은이 희생양이 되는 건 원하지 않았다. 힘을 합쳐 적이 되어 버린 조직체들 모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예은이 표적 안에 포함된 것은 이미 증명된 사 실이었다.두번이나 그녀를 노렸으니 앞으로 또 그러지 않을 거라 ㄴ보장도 없었다.이런 판국에 일 어쩌고 하는 그녀를 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리고 적당한 선에서는 도무지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아 거칠게 쏘아 보았다. 어쩌면 하지 말아야 할말까지 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거슬린다는 말을 듣자마자 하얗게 질리던 그녀의 얼굴이 지금도 또렷이 뇌리를 자극햇다. "이게 누구야." 생각에 잠겨 있던 은규는 불쑥 등에 박혀온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예은의 오빠 시준이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매제 아니야?" 갑자기 불쾌지수가 치솟았다.저 위험한 인간을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아무래도 오늘 일진은 영 아닌가 싶었다. "처남이야말로 어쩐 일입니까." "고객이 여기서 숙박 중이라,매제는?" 은규는 일부러 시준을 호텔 구석으로 이끌었다.누군가 그를 알아채 이사님 어쩌고 한다면 일이 복잡해질 요지가 다분햇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약속이 있습니다." 대충 얼버무린 은규의 대답이 시준의 눈빛이 반짝 거렸다. "그러고 보니 작은 사업을 하나 한다고 했었지?무슨 사업인지 물어봐도 될까?이제 한식구인데 스무고개 좀 그만 하자고." 이사회 시간은 앞으로 5 분,걸려도 된통 걸렸단 생각이 들었다. "그냥...식품 쪽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궁색한 대답이 아닐수 없었지만 레스토랑을 보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말이 흘러 나갔다. "식품?무슨 식품?" 끈질긴 질문에 인내심이 모두 바닥나려는 찰나,하늘이 도운 것인지 시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전화번호로 시선을 내 리는 그의 얼굴이 아쉬움에 젖는 것을 또렷이 볼수가 있었다. "이런,주요고객이야.아주 고약한 인간인데 제법 돈이 돼서 무시할수가 없어.사업한다니까 무슨 소린지 잘 알겠지?" "그럼,일 보시죠.전 약속 시간이 다 되어서 이만," 이때다 싶어 돌아선 은규는 큰 걸음으로 레스토랑을 향해 걸었다.그를 알아본


직원들이 경직된 자세로 인사를 건넸지만 눈짓으로만 대충 답하고 재빨리 지나쳤다.잠시 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슬쩍 돌아보니,살살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통화에 집중하고 있는 처남의 모습이 보였다. "골치 아픈 인간." 원래는 레스토랑 내부까지 들어가 후문으로 슬쩍 빠질생각 이었지만,회의 시간을 이미 10 분이나 넘겨 버린 터라 바로 방향을 틀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어라?저 친구.." 앞족 유리창을 통해 모든 것을 목격한 시준은 얼굴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끊었다. "흐음,,,," 미스터리 매제에 대해 뭐 좀 알수 있을까 싶어 잠시 연기를 했을 뿐인데 의구심만 더 키우고 말았다.레스토랑에 들어가지 않은건 다른 볼일이 생각났을 수도 있는 문제니 이해할수 있었지만,그를 향해 인사하는 호텔 직원들은 무엇으로도 설명되 지 않았다. 수상해. 지금까지 직감이 틀린적은 한번도 없었다.그 감각이 동생의 남편이 된 저 사내가 아주 수상쩍다고 말하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시준은 핸드폰 폴더를 열고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김 형.나야." [어.오 형.무슨 일이야?] "사람 하나 좀 봐줄 수 있을까 해서?" [아,이친구.꼭 곤한한 부탁만 한단 말이야.누군데 그래.]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흥미를 보이는 동료에게 시준은 심각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이름은 황은규." [뭐?황은규?] 김 형사는 놀라는 걸 보니 왠지 더 불안해졌다. "왜,벌써부터 느낌이 와?" [인상착의 한번 말해봐] "키가 크고 몸이 좋아.수상한 구석이 한두가지가 아닌데 가장 큰 특징은 뺨에 있는 상처야.내 눈 정확한 거 알지?그 거 분명 칼자국이라고" 몇 시간 후,메일로 정보를 받아 본 시준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가 모니터에 머리를 박아 버렸다. "머저리 같은 동생이 드디어 일 쳤구만!" 엄청난 발소리가 들려왔다.과히 킹콩 수준이었다.아파트 복도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제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 안달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진 예은은,무의식중에 사과를 깎던 과도를 그대로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어떤 인간이 이렇게 엄청난 소리를 내는거야?" 가만히 들어 보니 한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함부로 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뒤쪽에서 수야가 조심스레 충고했지만,예은은 칼 쥔 손을 휘휘 저으며 단호히 엄포했다. "성격상 저런 인간들한테 꼭 한마디 해줘야 직성이 풀려요.하다못해 무식한 면상이라도 좀 봐야겠어요." 수야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기세좋게 문을 연 예은은,투박한 주먹을 번쩍 치켜들고 있는 험상궂은 비계 덩어리를 보자, 기절할 것처럼 놀라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손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 막 문을 두드리려 한 모양이었다. 예은은 금방 전의를 되찾았다. "누구세요?" 질문엔 대꾸도 않고서 뱀 같은 눈동자의 주인공이 그녀를 한번 훑어 보았다.그의 육중한 몸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진 않았 지만,금바아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갈비씨 중년 사내가 뒤쪽에 서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며 서 있었다. "누구냐고 물었어요." 어느 틈에 등 뒤로 다가온 수야의 입에서 헉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혹시 상개편 조직 보스쯤 되는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천하의 수야가 저렇게 몸을 사리고 있을리 만무했다.경직된 손에 들고 있던 과도를 모아 쥐고서 예은은 협박 비슷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마지막 기회에요.어디서 온 누구인지,정확하게 밝혀주세요." "혀...형수님..." 수야의 저런 표정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수야마저 겁에 질려 있단 말인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마침내 침입자가 걸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예은은 다시 한번 과도를 치켜들었다. "신원을 밝히지 않겠다면 경찰을 부르겠어요.남의 집 앞에서 뭐하자는 거에요?" "너야말로 내 아들 집에서 뭐하는 게야?" 어라?아들?누가? 혼란에 잠겨 눈치를 살피던 예은은 겨우 터져 나온 수야의 대답을 듣곤 호흡을 잃엇다. "오셨습니까,회장님." 실수투성이 인생이었고,그 대문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만,이렇게까지 난감했던 적은 없었다. "아......아버님...?" 겨우 상황을 파악한 예은이 고개를 수그리며 인사를 건네자 벼락같은 고함소리가 복도 안을 가득 메웠다. "그 칼이나 저리 치워!" "아,죄...죄송합니다." 예은의 손에 쥐어져 있던 과도가 힘없이 바닥위로 나동그라졌다. '난 몰라.어떻게 해...' 시아버님과의 첫 대면을 칼부림으로 시작한 며느리가 지상 천지에 또 있을까. 예은은 그대로 주저앉아 울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chapter 47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다.가진 것이 풍족할수록,사람을 포용하고 이해할수 있는 가슴도 넓어질 수는 없는 것인지.==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자리에 앉아." 명령에 익숙한 목소리가 뼈 속을 파고든다. "차라도 한잔 하시면서..." 시베리아 돌풍이 몰아치고도 남을 만한 분위기였지만,웃는 얼굴엔 침 못 뱉는다는 명언을 떠올리며,예은은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가차 없었다. "아가씨가 타준 차 마실 생각 없으니까 잔말 말고 앉아." 칼부림 사건도 그렇고,몰래 한 도둑 결혼도 그렇고,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는 죄인이 되어 예은은 최대한 얌전하게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HS 그룹을 여기까지 일으켜 세운 재력가답게 정말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온몸이 실감하고 있었다. "이 결혼,무효라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난데없이 터져 나온 결혼 무효설에 예은은 멍한 표정으로 황회장을 바라보았다. "확인해 보니 혼인 신고도 아직 안 했더구먼,둘이서 무슨 짓거리를 했든 법적으로는 흔적 없게 ?내줄 테니 다행인줄이 나 알아,어디 어린 것이 겁도 없이 도둑 결혼을 해?" 공격 받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쏟아진 폭격이라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수가 없었다. "아버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당연히.." "그 호칭 듣기 거북해.난 아가씨 아버님 될 생각 추호도 없어." 화끈,얼굴을 달군 열에 혈압까지 치솟아 예은의 혀를 멋대로 조종해 버렸다. "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시잖아요." 황 회장의 눈썹이 바짝 치켜 올라가자 사나운 눈매가 더욱 매서운 각을 그렸다. "난 HS 그룹 회장이고,내 아들은 6 대 장손이야." 마치 그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설명 된다는양,황 회장이 눈을 부라렸다. "그래서요?" 일말의 표정 변화없이 예은이 그대로 맞받아치자,황 회장의 거대한 몸이 분노로 꿈틀하는 것이 보였다. "지금껏 아가씨 같은 거머리들이 한두번 달라붙었던 게 아니란 이야기야.그 시커먼 속 훤히 뚫고 있으니 가면일랑 벗어 버리지 그래?" 저도 모르게 예은은 얼굴이 경직되는것을 느꼈다. 이 노인네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실룩대던 황회장의 입술이 조소를 담았다. "아주 발칙한 아가씨구만.좋아.내 탁 까놓고 얘기하지.내 아들 돈 보고 달라붙은 거 아니야?"


예은은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 모욕,받지 않은 걸로 하겠습니다." "내 앞에서 가면 뒤집어써 봤자 소용없대도.현실을 직시해.혼인 신고가 되어 있지 않은 마당이라 위자료도 뭣도 요구할 수 없는게 아가씨 입장이라고 하지만 조용히 사라져 준다면 심심치 않을 만큼 보상은 해주지." 지금껏 은규는 아버지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았다.잠깐 언급한 적이 있어도 늘 노인네라는 표현을 써 과히 좋은 관계가 아니라는 것만 짐작케 했을 뿐이다.그래서 약간의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이런 사내를 낳고 키운 아버지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결론은 경멸스런 인간이란 것이었다.HS 라는 거대 그룹의 대표라는 ㄴ작자가 어찌 이리도 근본이 없고 무지막지한지 어이 가 없을 정도였다. 비록 살이 많이 찌긴 했어도 커다란 체구나 중후한 외모에서 은규의 모습이 많이 묻어났지만.그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 형이라는 것을 단 몇 마디의 대화를 통해 알수 있었다. 그리고 예은은 황 회장의 눈동자에 서린 살기를 통해 비로소 아버지에 대한 은규의 증오가 무엇 때문인지 짐작할수 있을 것 같았다.이런 시선을 받으며 자라난 자식이라면 그 누구도 아버지를 향한 존경이나 애정을 품고 있을리 만무했다. 뱀처럼 날카로운 눈동자를 또렷이 마주하고 있던 예은은 당당히 어깨를 폈다.약육강식의 논리대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약자로 비춰지는 것은 곧 패배를 의미했으니 세게 나갈 필요성이 있었다. "제가 선택한 사람은 HS 그룹의 6 대 장손이 아닙니다.제가 선택한 사람은 아무 수식어도 붙지 않은 황은규란 인간 자체일 뿐이에요.그사람이 아버님 말씀처럼 그렇게 대단한 배경을 가졌는지 저야 알수 없는 일이고.알바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염려하시는게 재물 부분이라면 저 역시 나름대로 만족할만한 수입을 가지고 있으니,남에게 기생해 살아가는 인간 취급 은 하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황 회장이 코웃음을 쳤다. "녀석의 인간 자체를 봤을 뿐이다?작가라더니 입만 살았군.HS 그룹을 떼어낸 녀석은 깡패 두목일 뿐인데도 그런 입에 발 린 소릴 하겠다는 거야?" 예은의 눈동자로 서글픈 기색이 찾아 들었다. "아버님은 아들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시네요.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한번이라도 헤아려 보셨어요?HS 그룹 이라는 배경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해 성공한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셔야죠." 황 회장의얼굴이 까맣게 타 들어가는 것이 보였지만 예은은 독설을 멈추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겉모습이나 형태만으로 그 사람을 단순한 조직 폭력배 취급할수 있어요 당연해요.저역시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아버님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죠.아버지잖아요.누구보다 은규씨를 잘 아는


사람.아버님이시잖아요.자신이 아파 낳은 아들인데 그렇게도 자신 없으세요?황 은규라는 사람을 사랑하고 결혼해 아내가 된 여자의 마음을 HS 그룹이라는 배경과 매 치시키는 것 외엔 할수없을 만큼,아버님 아들이 그렇게 매력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갑자기 가슴이 메어와 코끝이 시큰해진 예은은 말을 멈추고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갑자기 은규 씨가 참 가엾단 생각이 드네요.왜 그렇게 아버님 얘기를 꺼려했는지도 알수 있을것 같구요.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니 사랑이란 걸 알리가 없겠죠." 마침내 황 회장의 가면이 조각나 버렸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육중한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뭐하는 겁니까?" 마침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아파트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를 경직시켰다. "은규 씨..." 언제 들어왔는지 그가 험악한 표정으로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마침 잘 왔다.네가 고른 여자가 얼마나 요망한 혓바닥을 가졌는지 좀 봐뒀냐?" "헛소리 말고 나가요." 은규는 온몸에 바짝 힘을 주고 있었다. "큰소리 칠 입장이 아닐 텐데?" "다 엎어 버리기 전에 어서 나가란 말입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화내는 모습은 처음이었지만,예은은 그 안에 묻어난 슬픔을 또렷이 느낄수 있었다. "난 에 애비다!" 은규의 입술에서는 비웃음이 쏟아져 나왔다. "불리할 때면 하는 그따위 소리.귀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네놈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피로 연결된 관계는 쉽게 자를 수 없는법이지.누가 뭐래도 넌 우리 집안 대를 이을 6 대 장손 이고 언젠가 모든 사업도 물려받아야 할거다." "노인네가 망령이 났나.수백 번을 말해줘도 영 못 알아들으니..." 혼자 중얼거리던 은규는 어른 앞에서는 절대 태우지 않던 담배를 꺼내 버젓이 입에 물었다. "그나마 갖고 있던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싶다면 지금 당장 사라지시죠." "내 저...저....!" "회장님!" 삿대질을 하며 소리치던 황회장이 뒷목을 잡으며 고통을 호소하자 은규는 있는 힘껏 입술을 비틀었다. "그놈의 뒷골은 어째 할말이 없을때마다 아프답니까?지금쯤이면 청심환 타령하면서 병자 행세를 해야 정상인데.이봐요 윤 비서.청심환은 안 챙겨왓어요?" 말 속에 경멸이 뚝뚝 묻어 나오고 있었다.어쨌거나 아버지 인데,아무래도 부자 사이에 파인 골의 깊이가 어마어마한 듯 싶었다. "네놈하고 말을 섞었다 하면 내 수명이 10 년은 줄어드는 느낌이다!마지막으로 일러두는데,네 결혼 상대는 내가 정해."


이내 독사 같은 황 회장의 눈이 예은을 향해 날아가 박혔다. "아가씨도 명심해.빈털터리로 쫓겨나고 싶지 않다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라고,알았어?" 심한 모욕감으로 예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그 모습을 본 은규는 들고 있던 외투를 벽에 팽개치며 소리쳤다. "헛소리 말고 내 집에서 당장 나가!" 그의 눈에서 한번도 볼수 없었던 증오가 활개 치고 있었다. "당신 눈이 썩어 빠졌다고 세상 사라마 모두를 쓰레기 취급해선 안되지.윤 비서.존경해 마지않는 회장님 쓰러지는 꼴 보 기 싫으면 빨리 수습해요.마수야,너도 거들어라." "아,예!" 땀만 뻘뻘 흘리고 있던 윤 비서와 수야는 버티고 있는 황회장의 거대한 몸을 살살 어르며 겨우 현관까지 이끌었다.그러나 문을 열고 나서기 전,황 회장은 마지막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어차피 넌 돌아올게 돼 있어.놀아도 상대 가려가며 적당히 놀란 말이다." 그렇게 문이 닫히고 정적이 감돌았다.예은은 폭풍의 잔해에 묻힌 은규의 등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묘한 기쁨을 느끼고 있는 자신이 속물처럼 느껴졌지만,내내 제 페이스를 유지하며 아버지 약을 올리던 그가 그녀의 개입 하나에 평정을 잃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을 들뜨게 했다. "와,정신이 하나도 없네!" 오랜 침묵을 깨고 예은이 가볍게 입을 열자 마침내 은규가 몸을 돌렸다.심각한 눈동자 속에 담긴 조심스러움이 그대로 전해오고 있었다. "괜찮아?" 엄청난 언어 폭격에 마음 상하지 않았냐는 의미였다.예은은 최근 들어 거의지을수 없었던 미소로 그의 염려에 답했다.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의 입술이 서서히 풀어지는 것이 보엿다. "그래,이런 일로 훌쩍일 여자가 아니지.당신이 강적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어." 예은은 떡하니 팔짱을 끼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거 칭찬이에요,욕이에요?" "마음대로 생각해." 애매한 말로 표정을 숨긴 은규는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욕실로 향하기 전이면 늘 하는 버릇같은 행동이란 걸 알 면서도 왠지 민망함을 감출수가 없엇다. "내 앞에서 훌렁 훌렁 벗지 좀 말아요!"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셔츠를 벗다가,어디다 시선을 둘지 몰라 당황하는 예은을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다행이군." "뭐가요?" "이제야 내가 알던 오예은 같아." 근 며칠,그리고 오늘 아침,쌓이고 엉켰던 감정 때문에 오늘 하루는 또 어지 버텨낼지 줄곧 고민하고 있던 예은이었다.


그런데 한바탕 폭풍을 몰고 온 그의 아버지 덕분에 어느덧 분위기가 자연스레 풀어져 있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 그래,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헤쳐 나가다 보면 그의 마음을 얻는 일도 그리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라는 희망이 예은의 입가에 웃음을 번져놓았다. '아무래도 일,거절해야겠어.' 고통을 참으며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그와의 평화를 위해 그정도 희생쯤은 감수할 수도 있을것 같았다. 에은은 타자기 용지와 먹지가 떨어졌다는 핑계로 수야의 호위를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일을 거절하기 위해 유희에게 전 화를 걸었다가 욕만 잔뜩 먹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깨 냄새 팍팍 풍기는 신혼이래도 그렇지.공과 사도 구분 못하냐!아,나도 몰라.미루고 미루다 겨우 약속 잡은 건 데 죽어도 깨졌단 소린 못하겠다.네가 알아서 처리해!' 은규 몰래 배려해 준 수야의 마음을 배반하기는 싫었지만,일단 저질러 놓은 일을 수습하려면 잠시 그를 따돌려야만 할 상황이었다. "더 필요한 게 있으세요?" 아,착한 남자 같으니. 누구에게 닮으라고 하고플 만큼 그는 늘 사려가 깊었다.하지만 수야에게도 의외의 구석은 있었다.평소 무뚝뚝하기는 해 도 전혀 위험한 사람���라고느끼진 못한 탓에,이렇게 마냥 좋기만 한 사람이 어찌 흑사의 오른팔이라고 하는지 의심을 품 었던 것도 사실이다,그러나 몇 번,그것도 길지 않은 외출을 통해 확실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사람들 틈으로 섞여들때 수야의 눈빛은 은규의 것을 많이 닮아,저 순한 눈이 어찌 저런 식으로 변할까 의아해질 만큼 매 서운 기운을 가득 풍겼다. "화장실에 좀 가고 싶은데..." 소리가 날 정도로 머리를 뱅뱅 굴리던 예은은 은근슬쩍 운을 띄웠다.너무 뻔한 방법이긴 했지만 그가 따라오지 못할 유일 한 장소로 화장실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행히 수야에게서는 아직 의심하는 기색을 찾아볼수 없었다. 하긴 납치된 상황도 아니고,이젠 엄연히 은규의 아내가 된 몸인데 도망칠 것이라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겠 다. "저 건물이 좋겠어요." 가까운 빌딩 앞에 멈춰 선 수야는 조금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패스트푸드 점이 더 낫지 않을까요,제가 밖에서 지킬수도 있고요." "무지 급하단 말이에요!" 사실이 아닌데도 왠지 낯이 달아오른 예은은,얼굴을 붉히며 수야에게 노란 봉투 하나를 덥석 넘겼다.


"잠깐이면 되니까 여기서 기다려요." 형수의 입장을 생각한 것인지 수야가 순순히 양보를 했고,예은은 있는대로 다급한 기색을 꾸며 빌딩 안을 가로질렀다. 어지나 가슴이 뛰는지 헉헉대는 소리가 목구멍에서부터 흘러나와 손끝까지 저릿한 떨림을 전했다. "미안해요.수야 씨,금방 돌아올게요." 왠지 큰일을 벌이는 것처럼 부정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에은은 빠르게 후문을 찾아 움직였다. "안녕하세요.김준철이라고 합니다." 약속 장소에 도달한 예은은 상대가 건넨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지오 비쥬얼.기획 PD 김준철.' "반갑습니다.오예은이에요." 가만히 있어도 웃고 있는 얼굴이 인상적인 사내였다.눈매 때문인가?무테의 유리알 너머로 보이는 눈이 반달 모양을 그 리고 있었다. "만나 뵙기가 정말 힘들더군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았는데,예은은 어느새 마음을 놓고 있었다. "최근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있었기 대문에 일할수 있을 만한 여건을 만들수가 없네요.사실,이 말씀을 드리려고 나왔어 요.죄송합니다." 비즈니스 상 첫 대면한 상대에게 쉽게 보여 봤자 손해일 뿐인데,저 웃는 얼굴 때문에 도무지 경계를 취할 수가 없으니 큰일이었다. "우선,저희 회사에 관한 자료부터 보고 얘기했으면 합니다.그 정도 시간은 내주실수 있으시겠죠." 그녀의 의사를 가볍게 거절하며 김 피디는 두꺼운 뭉치 하나를 건넸다. "저희 회사는 애니메이션 프리 프로덕션입니다." 나긋나긋한 말소리에 왠지 모를 신뢰가 묻어났다. "프리 프로덕션이라면 기획만 한다는 말씀인가요?" 김 피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애니메이션 업체들은 주로 해외에서 하청 받은 일들만 취급합니다.미국이나 일본에서 히트한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동화나 작화 작업을 국내에서 했다는 사실은 일반인들도 어느정도 알고 있는 사실이죠." 예은은 눈앞에 주어진 자료들을 대충 훑어보았다. "저희 프로덕션은 결코 하청을 받아 하지 않습니다.능력 있는 인재를 통한 노하우로 기획만을 전담하고 있습니다.작품 테마.캐릭터 디자인,BG 설정.시나리오까지 안고 갑니다." 그의 입에서 한국은 물론,해외에서도 크게 히트한 국산 애니메이션 타이틀이 쏟아져 나왔다. "방금 말씀드린 작품 모두가 저희 프로덕션에서 기획한 것들 입니다." "대단하네요." "이번 프로젝트는 저희 회사 입장에서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일본의


폭력적인 작품들에 빠진 어린이들은 물론,동심을 잃어버린 어른에게도 어피할수 있는 작품을 기획하게 되었거든요.시간이 별로 많지 않아 어느 정도 스토리 기반이 나와 있는 작품을 컨텍하다가 오 작가님의 동화를 접하게 된겁니다." 김 피디는 잠시 말을 끊고 한동안 예은을 주시하다가,여전히 반달 모양을 그리고 있는 눈매로 조용히 부탁했다. "극장판 시나리오를 써주세요.70 분 정도면 됩니다.동화 속에 묻어난 작가님의 생각들이 변치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 각색 되든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난감했다.당신이 아니면 곤란하다고 말하는 눈동자 속 진심이 굳혔던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지금은 일을 할수 가...." "부탁드립니다.도움이 필요해요." 애니메이션이라면 전부터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장르였다.하지만 시나리오는 소설과 달라,감독과 제작진들의 의견 수렴 을 위해 끊임없이 함께 의논해야 하는 작업이었다.외부와의 접촉을 최대한 차단해야 하는 그녀로서는 극도로 피해야 할일 중 하나인 것이다. "저야말로 부탁드릴게요.지금은 여건이..." 에은의 곤란한 목소리에도 김 피디는 변치않는 표정이었다. "시간을 더 드리죠." "아무리 그러셔도 저는..." 그만... 김 피디의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안 된다는 말만큼은 제발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일 얘기는 접고 차나 들죠.부담을 드리고 싶지는 않군요." 예은은 힐끗 시계를 보았다.5 시 5 분전 ,지금쯤 수야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맡겨놓은 봉투 안의 쪽지는 확인했을까. 숱한 걱정들이 밀려들었다.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예은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아니요." "자꾸 시계를 보시기에." 조금은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김 피디가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커다란 사내가 우유라니,왠지 웃음이 났다. "그건 뭐죠?" 우유를 반쯤 꿀꺽대던 김 피디가 그녀의 옆자리에 놓인 봉투를 가리켜 보았다. "별거 아니에요.타자기 종이하고 먹지.집필할때 필요한 것들을 좀 샀어요." "타자기를 쓰세요?" "버릇이에요.타자 소리를 들으면 묘하게 마음이 안정되거든요.다들 노트북 끼고 다니는 시대에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겠 지만 옛날부터 그렇게 해와서인지 전 이게 더 편해요." "낭만적인데요." 예은이 손사레를 쳤다.


"마감 직전 타자기 앞에 있는 절 보면 그런 소리 안나올 거에요.귀신이 따로 없다니까요." 상상을 한 것인지 김 피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순간 예은은 자신이 낯선 남자에게 너무 허물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함께 일할지의 여부도 확실치 않은 공적인 상대에게 왜 자꾸 풀어진 반응이 나가는 것일까. "이만 가봐야 할것 같아요." 안 되겠다 싶어진 예은은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김 피디의 안경 너머 눈동자로 조용한 아쉬움이 깃들 고 있었다. "시간 오래 뺏어서 죄송합니다." 그녀는 자연스레 내밀어진 손을 마주 잡으려다 잠시 멈짓했다 새끼손가락이 없었다.대수로운일은 아니었지만 워낙 학구 적인 분위기의 남자인지라 유난히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럼.실례했습니다." 돌아서는 예은의 등뒤로 김 피디의 시선이 뜨겁게 내리꽂혔다.에은은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하며 카레 문을 나섰다. "죄송합니다.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벌써 100 번은 넘게 같은 소릴 주절대는 수야에게 은규가 살벌한 말을 박았다. "시끄러워." 그의 손안에서 잔뜩 구겨진 종이가 형체를 잃고 너덜거렸다. '6 시까지는 들어갈게요.은규 씨에겐 비밀로 해주세요. -예은"몇 번이냐." 수야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주어나 형용사가 삭제된 말을 할 때는 그가 많이 화가 나 있다는 증거엿다. "함께 외출한 일은 두번뿐입니다.형님께 반지를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을 때와 오늘..." "누가 너더러 이 띠위 짓 하라고 했지?" "죄송합니다.드릴 말씀이..." "앵무새 흉내나 내려면 입 다물어!" 담배를 꺼내 무는 은규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며 수야는 어두운 눈동자를 바닥에 박았다.화가 난 그의 모습이 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빠삭할 만큼 액숙했지만 오늘의 반응은 전연 새로운 것이었다. 분노 속에담긴 조바심과 약간의 두려움 수야는 한번도 보스에게서 저런 모습을 발견한 일이 없었다.한숨과 잔 동작들이 늘어갈수록 재떨이 한 가득 담배꽁초가 쌓여갔다. 긴장이 미세한 신경 속까지 파고들 즈음,현관문 따는 소리가 들려와 두사람 모두 경직된 어깨로 문을 바라보았다.단 2 초 도 지나지 않아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선 예은이 사태 파악도 하지 못한 채 신발을 벗으며 속삭였다.


"미안해요.은규 씨 아직 안들어..." 그러나 고개를 들고서 그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그녀는 얼음 동상이 되어 버렸다. "당신!어떻게 벌써....8 시 넘어서 들어온다고....!" 이미 수북해진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은규는 수야에게 한마디 햇다. "그만 가봐." "형님..." 망설이는 수야에게 은규는 날카로운 눈동자를 들이대며 윽박질렀다. "어서!" "그럼,나가 있겠습니다." 수야는 예은의 옆을 지나치며 걱정스런 표정을 던져 보인 후 문을 ㄹ열고 사라졌다.조용한 대기 속으로 뭔지 모를 긴장감이 하나둘 쌓여갔다.자리에서 일어난 은규는 서서히 몸을 돌려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저..." 철저한 흑암에 갇힌 은규의 눈동자를 읽을 수 없어 에은의 불아는 더 육중하게 쌓여갔다.뭐라고 해야 할것 같은데 입이 척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게..." 마침내 은규는 예은의 바로 앞에 우뚝 섰다. '아...어떻게 하지?엄청 화났나봐.....' 말할수 없는 위압감에 머뭇대는 그녀를 바라보며 은규는 주머니에 가두고 있던 손을 빼내 들었다.그리고는..... 철썩! 그대로 뺨을 내리쳤다. chapter 48 ==알고 보면 당신은 너무 다정해.....==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철썩! ?이 화끈거린다.전신이 화끈거린다.어깨가 덜덜 떨렸고 호흡이 가빠만 갔다. "아파?" 차가운 목소리가 귀를 조롱햇지만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극심한 충격ㄱ에 아픔을 느끼기는 커녕.홱 돌아간 고개조차 들어 올리지 못할 만큼 신경이 바짝 마비된 상태였다. "아파요..." 한참 후에 예은은 겨우 웅얼거렸다. "여기가.,심장이.찢긴 것처럼 쓰려요." 고개를 들자 은규의 입술에 걸린 비웃음이 눈을 찔러왔따. 이렇게까지 냉혹한 모습은 일찍이 본적이 없었기에 현재의 상황과 그속에 담긴 그의 분노를 인정할 수 없었다. "감히 그정도로 아프다고 말하지 마." 놀라울 만큼 빠르게 조소를 지운 은규가 냉랭한 시선을 쏟아냈다. "목숨 가지고 장난질할 마음 가졌을 때,이 정도 아픔쯤은 예상했어야지." 예은은 차마 입을 떼지 못한 채 시선을 피했다.은규의 목소리는 더욱 극심한 분노로


타 들어갔다. "당신이 쪽지 하나 남기고 사라졌을때 수야의 기분이 어땠을지 생각해 봤어?" 예은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개처럼 지랄하는 나 때문에 벌벌 떨면서,당신이 뿌려놓은 흔적 하나라도 찾을까 싶어 진종일 발품 팔아야 했던 내동생 들,그 애들 생각은 해봤냐고!" 결국 예은은 고개를 떨어뜨렸고,은규는 감정의 진창에 빠져 질척이는 소리로 그녀를 질책했다. "아무생각 없었겠지,그러니까 이런 짓거릴 해놓고도 버젓이 아프단 소릴 할수 있는 거겠지,집에 들어서자마자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수야를 발견했을 때,있어야 할 자리에 당신이 없는걸 확인했을 때,그때 내 심정이 어땠는지는 안중에 도 없었을 거야.나나 수야,아니 그 누구도 장난하고 있는게 아니야.괜히 엄한 사람 붙들어 쉴 틈 없이 경호해 주고 있는 게 아니라고!주을 수도 있어,당신.내일 당장 아무렇지 않게.누구도 모르게 개죽음 당할수도 있어.협박,폭력,살인,강간. 이 모든 것들을 전부 겪을 수도 있단 얘기야,알아들어?"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지만 일방적인 비난을 마주하고있자니 심기가 들끓어 올랐다.일을 거절하기 위해 잠시 외출했던 것뿐인데 자기 입장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이기주의자 취급하다니,이 누명을 마냥 뒤집어쓰고 있을수만 은 없었다. "당신이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요.마치 날 굉장히 걱정한 것처럼 얘기하는데,우리 한번 탁 까놓고 얘기해 보죠.정말 나한테 무슨 일 생기면 당신 슬프기나 할것 같아요?우리두사람 아무 관계도 아니잖아요.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한부 관계일 뿐이라고 당신 입으로 직접 얘기했잖아요.네!그 잘난 책임감 때문에 이러는 거 알아요.짐짝처럼 떠맡아 버린 날 어쩔수 없이 품어 버렸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요.그러니까 그렇게 내 신변이 걱정돼 미칠 뻔했다는 표정으로 말하 지 말아요.당신이 화내는 이유,멋대로 행동한 나 때문에 망가진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 아니에요?" 일단 입을 열자,멈출수 없을 만큼 많은 말들이 쏟아져 버렸다.하지만 금방 후회가 말려들었다.정말로 알수없는 감정에 잠겨 버린 그의 표정 때문이었다. "날 어떻게 보고 그 따위 소릴 지껄이는 거지?" 한기가 느껴질 만큼 차가운 시선이 그녀를 한계 끝으로 떠밀었다. "글러먹었어.근성 자체가 썩어 버렸어.지금 사람 목숨 앞에서 자존심 얘길 하고 있는거야?" 은규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이 칼날이 되어 예은의 양심을 뼈째 갈라놓고 있었다. "목숨 가지고 장난하려거든 당장 돌아가!이렇게 안일하고제 생각만 하는 사람 지킬 만큼 나 한가한 인간 아니야.누군가를 지킨다느느건,서로의 신뢰가 전제되었을 때만 가능한 얘기지.그 신뢰,당신이 깨 버렸으니 당장 눈앞에서 사라져.이 거지


같은 관계 끝내 버리자고."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굳을 대로 굳은 어깨와 입매가 그의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내 증명해 보이 고 있는 현 상황에서,이렇게까지 일이 커질줄 몰랐다는 말이나 기나긴 변명들이 면죄부가 되진 못할 것 같았다. 은규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면서도 연신 머리를 가로저었고,몇번인가 연기를 뱉고 마신후에야 다스리던 감정을 흘리며 툭 한마디를 던?다. "당신한테 정말 실망햇어." 냉정하게 돌아선 은규는 두사람만의 공간을 벗어나 베란다로 향했다.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이럴까.겨우 좁혔던 거리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벌어진 것을 통감하면서도,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적응할 만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베란다 옆쪽에 마련된 작은 공간을 발견하자마자 예은의 표정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밖이 가장 잘 보이는 위치로,그녀가 생각을 하거나 뭔가 구상할때면 늘 기대섰던 곳에 병풍식 가리개로 나눈 공간이 하 나 마련되어 있었다.작은 데스크와 무드 램���가 꼭 작은 카페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해 냈고.데스크에 놓여 있는 타자기와 벽쪽에 붙어 있는 작은 서랍장 속 책들은 모두 그녀의 체취를 흠씬 담고 있는 물건들이었다. 일하고 싶어하는 그녀의 마음을 위해,너무 심하게 말해 버린 지난밤 일에 대한 사과로 그가 마련해 놓은 작업 공간이 분명햇다. '아,어떻게 하면 좋아...'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확연히 깨달은 예은은 촉촉해진 눈동자로 은규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손수 물건들 을 마련해 집으로 돌아와 손색없을 만한 작업 공간을 만들어 놓은후,수야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설 그녀를 무작정 기다렸 을 그의 모습이 눈앞에 훤히 그려지고 있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내.은규는 언제나 그런남자였다.그런 와중에 뒤집히는 마음이야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인 지도 몰랐다. '사과해야 돼.' 집에 들어서자마자 차분히 자초지종을 설명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한 것은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자존심 탓이 었다.하지만 더 이상 그런 어처구니 없는 감정만 앞세웠다가는 영원히 그와의 관계를 돌이킬수없게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마음을 굳힌 예은은 천천히 베란다로 다가갔다.심장에서 시작된 떨림이 전신으로 번져갔지만 겨우 토닥이고 나서야 온갖 진심을 담아 겨우 한 마디 할수 있었다. "잘못했어요.,....." 반응이 없엇다.예은은 그의 옷자락을 살짝 당기며 한번 더 시도했다. "잘못했다구요."


은규의 입에서 담배 연기와 함께 거센 한숨이 흘러나오자,예은은 그의 등에 머리를 박으며 진심을 토해냈다. "용서해 줘요.뉘우치고 있으니까.더 이상 나한테 등 보이지 말아요." "어디 갔었던 거야." 다행스럽게도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대화의문이 터졌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하며 예은은 작게 속삭였다. "전에 말했던 그 일...정식으로 거절하러 갔었어요." 은규의 입술이 거센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그래서." "거절했어요." 예은은 살며시 고개를 돌려 따뜻하고 넓은 그의 등에 마음껏 뺨을 비볐다. "정말 욕심나는 일이었지만,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이 관계에 도움이 안되는 욕심 따윈 접어둬야 한다고 생각했 어요.그러니까...그러니까.용서해요.누구든 실수는 할수 있잖아요.나 지금 당장은 은규 씨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등을 보이고 날 신뢰하지 않으면 더 이상 어떻게 버티라고 이래요.은규 씨.화 풀어요." 야속하게도 은규는 그의 옷자락을 생명줄마냥 붙들고 있는 예은의 손을 잡아 내리곤 한 발자국 물러나 몸을 떼어냈다. 뺨에 닿았던 체온이 사라지고 금방 서늘한 바람이 부딪쳐 오자 그녀는 비참한 기분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나 이런거 싫은데...." 그때,그가 천천히 몸을 돌려 붙들고 있던 예은의 팔을 끌어 당겼다.따뜻하고 넓은 품에 파묻힌 예은은 담배 향 저편에서 묻어나는 익숙한 비누향기에 안정을 찾으며 그의 허리 부근에 단단히 팔을 둘렀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라고 약속해." 은규의 목소리에 짙은 감정들이 묻어나고 있었다. "맹세해요." 많이 걱정했기 때문에 격렬히 화내고 소리쳤다는 걸 알수 있어 기뻤다.이기적이라고 해도 어쩔수 없을 만큼,끓어오르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스스로도 제어할수 없었다. "고마워요." 한참 만에 은규의 가슴에 코를 박으며 예은이 속삭였다. "뭐가."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가 나긋하게 귀에 감겨든다.대답대신 예은은 고개를 돌려 그가 만들어 놓은 작업 공간을 바라보 았다.놀랍게도 은규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햇다. 이 남자가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게 되다니.믿기 힘든 반응이었다. "오늘 같은일 저지를 까봐 나름대로 생각한 대안인데 선수를 빼앗겼어." 예은의 입에서 즐거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왓다. "고마워요.너무 감격해서 저기에 엉덩이만 걸쳐도 술술 글이 나올것 같아요." 이제 제법 우스갯소리까지 할수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호전된 듯하자,은규는 예은을 품에서 살짝 떼어낸 후 넌지시 바라 보았다 이런 시선 하나에 어렵게 풀린 긴장이 얼마나 금방 다시 격렬해지는지 이


사람은 알까. 무슨 생각을 한것인지,그는 손을 들어 살며시 그녀의 뺨을 쓸었다.그리고 눈에 띄게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슬쩍 입을 열었 다. "뺨은....괜찮아?" 예은의 가슴으로 뜨거운 바람이 휘감겨 들었다. "괜찮아요." 마주 돌아온 미소가 그녀를 불 앞의 버터마냥 형체도 없이 녹여 버렸다. "은규 씨도....약속 하나 해줄래요?" 예은은 자꾸만 감기려는 눈에 억지로 힘을 불어 넣었다. "말해 봐." "다시는 나한테 등 보이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요.함께 하는 동안만큼은 절대로 당신 등이 만든 벽을 마주 보고 싶지 않아요." 은규는 살며시 입술을 틀어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당신이 먼저 돌어서지 않는다면." 긴장했던 입매를 풀어 웃음 을 담아낸 예은은 제법 대담한 요구를 햇다. "키스....해줄래요?" 그의 눈썹이 삐죽 치켜 올라가는가 싶더니,가차없는 대답이 흘러나왓다. "싫어." 예은은 고집스럽게 입 꼬리에 힘을 주었다. "그럼,말을 좀 수정하죠.키스해도 될까요?" 은규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예은은 그의 귀를 붙잡고 힘껏 끌어내려 일방적인 키스를 시작햇다.어디서 이런 대담함이 흘러나왔는지는 알수 없었다.그저 몸이 먼저 이끌렸을 뿐,본능의지지를 받으며 예은은 은규의 섹시한 입술 선을 혀끝으로 더듬었다. "젠장,그만...." 그가 웅엉댔지만 그녀는 혀를 얽어 감는 것으로 화답했다.그리고 이내 머리카락 속으로 흘러 들어와 단단히 휘어잡는 커 다란 손길 하나에 분위기가 급반전되었다. 그는 거부할수 없는 강한 힘을 이용해 예은의 고개를 기울였고,덕분에 키스는 이도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칠고 열정적 이 되어 버렸다. 아랫입술을 슬쩍 뜨거운 혀의 스침,잘근잘근 물 때면 느껴지는 딱딱한 이의 자극.거침없이 입 안으로 파고 들어와 이성과 의지마저 무용지물로 만드는 공격적인 혀의 놀림. 갑자기 몸이 번쩍 들렸다고 느낀 순간,에은은 단단하고 강한 품에 안겨들었다.정신이 몽롱하다 못해 마비될 것처럼 아 찔한 키스를 흩뿌리며 그는 단 네 걸음도 지나지 않아 침대 앞에 우뚝 섰다. 위험해. 등으로 느껴지는 폭신한 매트리스의 감촉이 그녀의 감각 선에 경계령을 내렸다. 더 이상은.... 하지만 멈출수 없었다.남아 있던 생각과 고집의 한 자락까지 서로를 향한 욕망에 모두 불타 버렸다.


쾅.쾅.쾅! 이제 막 그녀의 육체 위에 자리를 잡으려던 은규는 갑자기 들려온 무지막지한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거친 숨결로 가득 채워진 원룸 내부 한가득,요란한 목소리가 울려 퍼?다. "어이,글쟁이!오빠다." 예상치도 못한 골치 아픈 인간의 등장에 은규의 모든 근육이 굳어 버렸다. "당신이 불렀어?" "아....아니요" 어렵게 몸을 일으킨 은규는 거친 숨을 고르기 위해 몇번이고 심호흡을 거듭하더니,상체를 드러내고 누운 예은에게서 눈 을 돌리며 낮게 한 마디 했다. "옷." 그제야 자신이 반 벗은 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개달은 예은은 벌떡 일어나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으나 쉽지가 않았다. 마음은 급한데 손가락은 떨리고,오늘 따라 왜 유난히 단추가 많은 옷을 입은 것인지 별 시답잖은 것들을 향한원망까지 치 솟고 있었다. "뭣들 하고 있는 거야?" 다시 한번 요란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예은은 대충 옷을 챙겨 입고서 현관문을 향해 달려갔다.은규의 손이 잠시 이를 저지했다. "그 꼴로 오빠를 만나겠다고?" 그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뒤죽박죽 기워진 단추들이 보였다.분명 침대에서 한바탕 뒹군 여인네의 모습이었다. "이리 와." 그가 손을 들어 단추를 하나둘 풀기 시작하자,에은은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슴 위로 거친 손길 이 닿을 듯 말 듯 스쳤고,가슴 골짜기가 드러나자 은규의 호흡 역시 다시금 걸어졌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야심한 밤에 초인종까지 무시하며 소란을 떠는 침입의 존재를 자각해 애써 열정을 어둠 속으로 밀 어 넣었다. 무사히 단추들이 제자리를 찾고 나자 그는 헝클어진 머리카락까지 매만져 주었다.가슴을 지나 심장 속으로 따뜻한 기운 이 흘러드는 느낌에 예은은 눈으로 웃으며 그의 손을 꼭 붙들었다. "침착하게." 은규는 천천히 현관으로 그녀의 등을 떠밀며 뒤쪽에 붙어 섰다. "초인종 놔두고 왜 주먹질이야?" 등뒤로 느껴지는 온기에 페이스를 되찾은 예은이 문을 열고 소리쳤지만,시준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장난스런 미소와 함께 감탄사를 흘렸다. "와우.....무지 바빴나 보네." 성적인 의미가 짙게 밴 농담에 예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부드러운 손길로 동생을 밀쳐낸 시준은 은규 앞으로 다가 가 전신을 한번 훑어보았다.


"이봐 매제,이 한밤중에 내가 왜 왔는지 알겠어?" 은규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다소 건방진 태도로 응수했다. "글쎄요." 시준의 눈동자에서 장난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쓰나.잘난 흑사 양반께서 말이야." '흑사'라는 단어에 은규의 눈썹이 바짝 치켜 올라갔다. 원룸 안으로 들어서서 두 사람이 만나 여기까지 오게 된 계기를 다 듣고 난 시준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선언했다. "내 동생 데려가겠어.이의 없겠지?" 은규는 잠시 시준의 얼굴을 또렷이 바라보다가 낮고 짧게 답했다. "곤란합니다." "조폭 새끼들 주먹 싸움에 내 동생이 굴러다니게 할순 없잖아.너라면 그렇게 하겠어?" "그렇기 때문에 보낼수 없는 겁니다." "뭘 믿고 그리 꼿꼿해?" 표현은 하지 않았어도 은규의 태도를 보며 시준은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저 느긋한 여유가 과연 흑사라 통용되는 사내답다고나 할까.하지만 사랑하는 동생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니만큼 물러설수는 없었다. "긴 말 안 해.내 동생은 내가 지켜.데려갈 테니 그리 알아." "곤란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한판 붙자는 거야?" "다들 그만둬요!" 낮게 으르렁대는 사내들의 싸움에 분통이 터져 버린 예은은 발개진 얼굴에 핏대까지 세우며 중재하고 나섰다. "두 사람 다 내가 무슨 물건인줄 아나 본데 특히 오바,똑똑히 들어.여기 있는거 ㄴ순전한 내 의지야.그러니까 무슨 납 치당한 사람 취급 말라고!" 시준은 엄격한 시선으로 동생을 쏘아 보았다. "네 지긋지긋한 그 호기심엔 두손 두발 다 들었지만 이번엔 안 돼.네가 어떤 상황에 휘말린 건지 알고나 떠드는 거야?" 예은은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맞섰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하는 소리야." 그녀의 눈동자로 슬픈 기색이 찾아들엇다. "지난일 자꾸 들춰서 뭐해?내가 겁도 없이 이 사람 들쑤시고 다녀서 오해산거고.결국 여기까지 와 버렸잖아,상황이 어찌 되었든,나 이제 이 사람 아내가 된 몸이야.사람들 앞에서 정식으로 떳떳하게 식까지 올렸다구,그런데 갑자기 집에 돌아가 부모님께 뭐라고 설명하라는 거야?걱정 끼쳐드리기 싫어." 시준은 어이없다느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서워서 이렇게 위험한 인간이랑 동거를 하겠다고?내가 널 그렇게 놔둘것 같아?" 줄곧 시준을 관찰하던 은규는,언제나 예은에게 놀리는 말만 툭툭 던지던 이 사내가 실은 누구보다 동생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자신에게 여동생이 있어 지금과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그역시 다르지 않게 행동했을테니,절 박한 시준의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그래서 되도록 부드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 사람을 집으로 보내도 안전하다는 확신이 선다면 전혀 망설임 없이 보낼 의향이 있습니다.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녀석들은 저와 관계된 사람들 모두를 약점으로 잡고 조종할 건수만 찾고 있습니다.이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면 위 험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로 번지게 됩니다.장인어른,장모님,그리고 처남까지 녀석들의 레이더망에포함되는 겁니다." "내가 지켜,직원 모두를 동원해서라도..." "경호원들이 상대할 만한 적이라고 생각합니까?직장과 직원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사람들이 지킨다는 의미를 알리 없습니다. 정해진 근무 시간,정해진 월급.그에 따라 일할 뿐이죠." 침통한 표정으로 예은을 바라보던 시준은 한참 만에 이상한 질문을 했다. "이 녀석을 사랑해?" 굳어 버리는 은규의 몸을 예은은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오빠!" "대답해.이 녀석을 사랑하냐고." "사랑하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시준의 눈동자가 가늘어?다. "어째 그리 대답이 쉬워?" "지금 상황에 감정은 방해가 될 뿐입니다.경호업을 하시니 잘 아시겠군요.사람의 안전을 지키는데 사저긴 감정이 얼마나 위험한 요소로 작용하는지 말입니다." 예상했던 대답인데도 예은은왠지 서글픈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오빠,이제 그만 할 수 없어?" 예은의 어두운 표정을 지켜보면서 시준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사적인 감정은 도움이 되는니 안 되느니 밥맛없는 소리만 지껄여 대는 저 딱딱한 인간을,아무래도 동생은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듯했다. "좋아,힘을 보태지." 은규와 예은의 시선 모두가 시준에게로 쏠렸다.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말해 봐.우리끼리 싸워 봤자 깡패 새끼들 속만 편하게 해주는 꼴이 될테니 이쯤에서 협상 하자고." 은규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의외의 복병을 얻게 된 이 기회를 그녀를 위해 활용하고 싶었다. "이 사람이 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던 예은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직 외출은 위험 부담이 크다고 판단해 겨우 포기시켰는데 처남이 호위를 맡아준다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것 같군요." "은규 씨.." 반짝거리는 예은의 시선을 은규는 모른척 했다. "아내가 외출할 때마다 처남이 직접 뒤를 봐준다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저나


수야도 좀더 자유롭게 다른 일들을 볼수 있을 테고요." "좋아 그렇게 하지." 이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눈뒤 새벽쯤에야 자리에서 일어난 시준은 문을 나서기 전 은규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경고했다. "건드리지 마.내동생." 그리곤 언젠가 한번 속았던 권총 라이터를 꺼내 그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랬다간 죽을 줄 알아." 두 사람 사이에 강한 스파크가 일고 있었다. 예상 외 인물의 등장이군. 유다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처음부터 ���시준이라는 사내 역시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하고있었지만.꼭꼭 숨은 흑 사의 존재를 이렇게 빨리 알아채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그래서 형님,아니 흑사가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 낼지 흥미로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적으로 삼는다면 골치 아프고 버거울 사내를 그는 교묘히 아군으로 만들어 버렸다. 무음으로 해두었던 핸드폰 램프가 깜빡이는 것을 확인한 유다의 얼굴이 굳어갔다.한껏 예민해진 족제비 천일도에게서 최 근 귀찮을 정도로 많은 주문들이 쏟아지고 잇었다. "예." [데리고 와!] 거칠고 다급해 보이는 천일도의 목소리에 유다는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황은규 여자 납치해 오라고!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어.] 핸드폰을 쥔 유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한껏 취한 음성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마이더스와 접촉을 한 모양이었다.제 아 버지로부터 싫은 소리를 듣고 불안해질 때마다 이 소심한 인간은 늘 이런 반응을 보이곤 햇다. "아직은 이릅니다." [그런 개소리지껄이지 말고 당장 내 앞에 데려다 놓으란 말이야!어쨌거나 제 마누라니까 없어지면 무슨 행동이라도 보이 겠지,안 그래?] 천일도라는 사내를 겪으면 겪을 수록 도무지 형님과는 상대가 될수 없는 인물이라는 깨달음밖에 얻어지는 것이 없었다. "책임감은 이성까지 묶어둘수 없습니다.지금 여자가 납치되면 흑사는 분명 분노하겠지만 충분히 머리를 굴린 후 행동할 겁니다.그렇게 되면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것들에도 한계가 생기지요.하지만 사랑이라는 건 사람의 이성까지 마비시킵니 다.지금은 다급한 마음에 당장 일을 치르고 싶더라도 조금 더 시간을 들여 두 사람 사이가 끈끈해지길 기다린다면,부수적인 행동없이 여자를 납치하는 것만으로도 우린 바라는 것들을 쉽게 얻을 수 있게 될 겁니다.이게 바로 지금껏 당신이 주장하던


것 아닙니까?" 몇 번을 주입시켜도 그때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유다는 되도록 천천히 천일도를 설득햇다.경멸스러운 인간이긴 해 도 이해할수 있는 부분이 하나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아버지를 향한 감정, 그가 이 모든 일을 시작한 것이 아버지 때문인 것처럼,저 불쌍한 인간도 마이더스의 애정과 신뢰를 얻기 위해 지나칠 정 도로 발악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한다는 거야?생각외로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잖아.] "애초에 가망이 없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이제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합니다.흑사는 분명 여자를 사랑하게 될 겁니다." 이미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죠.마지막 말을 유다는 가슴 안으로 삼켰다. [좋아,한 번 더 믿어 보겠어.대신 필요한 서류들은 빈틈없이 갖춰놓아야 돼.때가 되면 여자를 쉽게에려올수 있는 구멍도 뚫어놓고!]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내며 유다는 두눈을 감앗다. 달아나고 싶다... 천일도와 접촉한 후로 유난히 더 황은규라는 사내의 인덕을 떠올리는 시간이 잦아졌다.그가 얼마나 현명하고 따뜻하며 견 고한 버팀목의 사내인지,날이 갈수록 사무치게 실감 할수 있었지만 이제 너무 멀리 와 버렸다.가슴속에서나마 홀로 불렀 던 형님이라는 호칭조차 버릴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의 본능은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죄송합니다.형님... 닿지도 못할 사죄와 속죄의 말을 중얼대며 유다는 고통스럽게 머리를 움켜쥐었다. chapter 49 ==가끔씩,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삶과 고난의 무게에 놀라곤 할 때가 있다.강해져야 해.그무게를 함께 나눠 질수 있을 만큼......나도 강해지고 싶어.== -에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시준이 돌아가고 잠자리에 든 시각이 새벽 4 시쯤,미세한 공간을 두고 한 침대에 누운 두사람은 쉽사리 눈을 붙이지 못했다. 조금만 몸을 돌리면 얼굴을 맞대고,몸을 부딪치고,체온을 나눌 수 있는 한 침대라는 공간,예은은 일부러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몸을 돌리고 죽어라 눈을 감았지만,어제부터인가 잠이 든다는 건 전쟁을 치르는 것만큼이나 치열하고 피곤한 일이 되어 버렸다. 양을 수천 마리 불러 모으던 것도 모자라 작품 속 주인공들의 결말 뒤집기 같은 시답잖은 생각에 골몰할 즈음,은규의 조용 ㅎ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생일 파티가 있어."


등 뒤로 옮아오는 싸한 담배 향은 그가 줄곧 깨어 있었다는 증거엿다. "누구 생일인데요?" "3 개월마다 녀석들 합동 생일 파티를 열어줘." 예은은 슬쩍 몸을 돌렸다.그는 한쪽 팔로 머리를 받치고서 천천히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합동 생일 파티라니,꼭 유치원 같다." "다들 은근히 민감해.생일이 언제인지 몰라서 이곳에 들어온 날을 태어난 날로 정한 녀석들도 있어.미역국은 얻어 먹어본 일이 없을 뿐아니라 축복 받아 본 적도 없는,그야말로 버려진 삶만 살아온 미아 같은 존재들이 한 가득이야.일일이 챙겨줄 수는 없지만 녀석들이 나에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려주고 싶어 시작했는데,단 하루만으로는 아마도 무리겠지." 예은은 조금 더 몸을 굴려 거리를 좁혔다.왠지 모르게 어둠 끝에 있는 그의 모습에서도 굉장히 고독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 었다. "당신도 외로워 보여요." 담배를 쥐고 있던 은규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고보니 난 은규 씨 생일도 모르네요.다른 건 몰라도 미역국 정도는 끓여 줄수 있는데." 은규의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서렸다. "생일날 죽고 싶진 않는데." "이거 왜 이래요?내 음식에 이제 좀 길들여졌나 했더니." 그의 옅은 미소에 도취되어 에은은 조금 더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요즘 들어 자주 웃네요?" 자연스레 풀어졌던 은규의 입술이 다시금 어색하게 굳었다.예은은 저도 오므게 한 손을 뻗어 그의입술 선을 손가락 끝으로 훑어보았다. "그러지마요.웃을 때 당신,정말이지 굉장하니까." 갑작스런 접촉으로 인해 어렵게 유지하고 있던 평정이 불균형을 이루기 시작했다,그의 표정에서 감정의 변화를 눈치 챈 에은은 서서히 손을 거두었다.아무런 사심없는 이 평온함 속에서 평범한 부부가 나눌 수있는 대화의 시간을 조금 더 갖고 싶은데,욕망이라는 녀석은 언제나 이성을 젖혀두고 몸의 반응만을 강요한다.얄미운 녀석. "안아...줄래요?" 은규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오해하지 말아요.그냥 다른 감정들은 다 접어두고 순수하게 안아만 달라는 의미니까.잠이 올것 같지 않아요.기댈수 있는 뭔가가 필요한데 지금 내 옆엔 당신밖엔 없네요." "그러지 않는게 좋겠어." 안고만 있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지만,그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겨우 삼켰다.하지만 그의 진심을 모르는 예은은 단 칼에 잘려 나간 자신의 바람에 서운함을 품고 서글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알았어요.잘자요."


맥이 탁 풀어진 모습으로 에은은 다시 침대 끝으로 가 웅크렸다.몸을 돌리기 전 그녀의 얼굴에 담겨 있던 슬픔이 은규의 신경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젠장. 단단한 마음가짐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은규는 예은을 향해 다가가 뒤쪽에서 끌어안았다.잠시 몸을 굳혔지만 그녀는 곧 편안하게 등을 기대곤 허리 부근을 지나 가슴 한쪽에 놓인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요."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이는 예은을 보며 은규는 온갖 자제심을 다 끌어 모아야 했다.순수하게 안기길 바라는 그녀의 바람 과 달리 짐승 같은 생각들이 속수무책으로 솟아올랐으나,몸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했다가는 그녀의 맑은 미소를 다시 볼 면 목이 없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코 속으로 스며 들어오는 비누 향과 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하얗고 가는 목선이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마주 대한 아담처럼 그를 애타게 만들었다. 태평스럽게도 예은은 어느새 고른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자신을 믿고 이렇게나 편안히 무방비 상태로 들어간 아내 옆에서 바짝 열 올라 버린 자신이 색골처럼 느껴졌지만,알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는 천천히 예은의 머리카락 속에 코를 묻었다. 그리고...그녀가 깨어날 때까지 잠들지 못햇다. "Happy Birthday To You ㅡ!"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나자마자 폭죽 세례와 함께 파티는 무르익어 갔다.한달에 한번 카지노 테마파트가 휴업하는날.생 일 파티를 위해 바(Bar) 근처에 모인 거구들은 아이처럼 케리크를 던지며 몸싸움을 했고,형구는 술을 만들어 나르느라 분 주했다. "한 잔 받으세요.큰형님!" 빌 틈도 없이 채워지는 잔을 은규는 아무말 없이 말끔히 비워냈다. "형수님도 한 잔 하셔야죠." 이번엔 예은 쪽을 향해 달려드는 거구들을 은규가 제지했다. 형수는 봐줘라.이 파티 준비하느라고 아침부터 고생이 많앗다." "그럼,큰형님이 형수님 흑기사 하십쇼!" 동생들에게 끌려가는 은규를 보며 예은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이 사람드로가 있을 때면 너무나 편안하게 자신을 풀어놓 는 그의 모습이 보기 좋앗다. 한 사람,한 사람이 그의 삶 가운데 얼마나 큰 축복이 되는지 느끼게 해주고 싶어 이 파티를 시작했다고 은규는 말했다. 그 바람 때문일까.피를 나눈 친형제들도 울고 갈 만큼 돈독한 애정 전선이 그들 주위에 둘려 잇었다. 하지만 이 안에 배신자가 있어...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예은의 입술 근육이 경직되었다.이렇게나 따뜻하고 커다란


가슴과 울타리로 품어온 사람들 안에 그 를 위험에 빠뜨린 배신자가 있다니.제 3 자인 그녀조차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데 그의 심정은 오죽할까.누구인지 알 수만 있 다면 지금 당신히 하고 잇는 일이 얼마나 역겨운 일인지 아느냐고 진종일 설교라고 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자꾸만 마음이 가라앉자.예은은 기분 전환겸 준비해 온 꽃을 전해주기 위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 시작햇다.이내 수야 와형구의 것만 남아 두 사람을 찾아 한참 두리번 거리는데,수야가 카지노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시야에 잡혀왔다. "수야 씨!" 그는 옆쪽에 마련된 건물 지하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술 창고였다. "벌써 술이 다 떨어졌나?" 계단을 내려간 예은은 살짝 열린 문틈으로 들어섰다가 들려오는 이야기 소리에 멈칫하며 다시 물러났다. "바쁘냐." "수야 형님이 여긴 어쩐 일로..." 형구가 놀란 기색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있었다. "취기가 오르는 것 같아 바람 좀 쐴 겸 둘러보는 중인데 네가 이리로 들어서기에 들렀다." 그대로 돌아선 형구는 술병 몇 개를 챙겨 들었다. "와인 좀 가지러 왔어요.형수님이 드실 수 있게 순한 걸로." 이야기 속에 자신이 언급되자 왠지 뜨끔해진 예은은 벽 쪽에 붙어 문틈에 바라보았다. "거짓말 할 생각이라면 그만둬.핸드폰이 울리자마자 바삐 술 창고에 들어서는 널 보고 따라왔는데,숨기는 걸 보니 뭔가 비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구나." 낮게 깔린 수야의 음성이 술 창고를 가득 메웠다. 흠칫 놀란 형구는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으로 돌아서서 소리쳤다. "형님이야말로 거짓말을 하고 계시잖아요!" 수야의 목소리가 한층 더 험악해?다. "무슨 뜻이야." "전 다 알고 있어요." 술병을 든 형구의 손이 바들거렸다. "뭘 알고 있다는 소리야."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형님께서 잘 아실 텐데요?기회가 있을 때 그만두세요." 형구의 눈에서 빛나고 있는 원망과 책망의 기운이 예은을 당혹스럽게 했다.수야의 목소리는 너무 낮아 제대고 들리지 않았다. "너....날 의심하고 있구나." "형님께선 절 의심하고 계시죠?큰형님께도 이미 보고하셨다는거 다 알고 있어요." 질식할 것 같은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수야가 거칠게 속삭였다. "속고 있는 거야." 형구가 웃으며 빈정댔다. "누구한테요?"


"네가 더 잘 알 텐데." "진실은 곧 밝혀져요.,전 이만 충고 드렸으니 옳은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수야를 지나쳐 형구가 문 쪽을 향해 걸어오자,예은은 재빨리 계단을 올라 건물 뒤에 몸을 숨긴 후 숨을 골랐다.마치 엄 청난 일을 목격한 모양,두 사람의 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혼란스럽고 난감했다. '혹시 둘 중 하나가?' 그렇게 믿고 싶지는 않았다.진심 어린 눈동자로 형님의 행복을 지켜달라던 수야와,형수님이 되어주셔서 감사한다며 칵 테일 쇼를 벌여주던 형구의 해맑은 미소,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생각할 순 없었다. 의심하지 말자. 확실한 뭔가가 잡힐 때까지는 두 사람중 누구도 의심하지 말자고 굳게 다짐했지만 그렇게 할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잠시후,술 창고에서 나온 수야는 카지노 앞 계단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져 들었다.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 옆선이 심각한 고통의 기운에 잠겨 있었다. "어디 갔다 온 거야?" 적당히 취기가 오른 얼굴로 은규가 물었다. "그냥 화장실 좀..."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금방 표정이 허물어 내린다.만약에 수야나형구중 하나가 배신자라면,누가 되었던 간에 이 사람은 많이 아파하겠지.자괴감에 빠져 들겠지.....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무거웠다. "무슨 일 있어?" 평소보다 말수가 줄어든 예은에게서 이상한 느낌을 받은 은규가 바짝 다가섰다. "일은요,무슨," 꿰뚫을 것처럼 시선을 쏟아내던 그는 그녀의 팔을 붙들고 어디론가 향햇다. "어........어디 가요!" 말없이 카지노 내 휴게실에 예은을 들여보낸 은규는 소리나게 문을 닫으며 엄격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말해." "글쎄,뭘...!" 평소처럼 굴어야 눈치 채지 못할 텐데 그의 얼굴을 보자 또 다시 가슴이 뭉클해 도저히 말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저 사람들 안에 당신을 배신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견딜 수 없어졌어요." 술기운에 흐려졌던 은규의 눈동자가 금방 치열한 기세로 타올랐다.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왜요?저기 있는 사람들,당신뿐 아니라 이젠 내 인생에도 연관된 사람들이에요.함께 이야기하고 호흡하고 오늘 아침부 터 점심까지 난 저 사람들을 위해 구슬땀 흘리며 파티를 준비했어요.그래서 배신자의 존재를 생각하면 나도 가슴이 답답해 져요.당신과 비교하면 감히 고통이라고 할수도 없겠지만 나름대로 많이 아프다구요." "잊고 있는 중이야."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은규의 손길이 거칠고 투박했다. "녀석들과 함께 있을 때만큼은 최대한 생각을 지워.그렇지 않으면 웃으면서 대할수 없게 돼." 가슴이 아팠다.이렇게나 온 마음을 다해 자신에게 주어진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는데,그에게 주어진 현실이 왜 이렇게 가혹하기만 할까. "은규 씨." 헝클어진 그의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예은이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옆에 있다는 거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어찌 될지 모르는게 인생이라 많은 걸 장담할 순 없지만,다른건 몰라도 한가지만은 약속할 수 있어요.나..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 버리지 않을 거에요.실망시키지 않을 거에요.그러니까 내앞에서만큼은 어깨의 짐좀 내려놔 줄래요?" 은규는 그윽한 시선을 던지며 잠시 예은의 손길을 느꼈다. 그리고 한참 후,눈을 감으며 건조한 소리를 토해냈다. "그렇게는 안 돼." 다시금 밀려났다는 생각에 슬쩍 고개를 내리는 예은의 귓가로 은규의 낮은 음성이 흘러들었다. "너무 무거운 짐이라 나눠줄 수가 없어.이 작은 어깨가 부러져 버리면 곤란하니까." 아,이 남자는 어쩜 이렇게 사람 마음을 제대로 뒤흔드는 것일까. 은규의 손이 그녀의 턱을 잡고 슬며시 들어올리자,차오르는 벅찬 감정을 숨기기 위해 예은은 억지로 밝게 웃엇다.무뚝뚝 한 표정 뒤에 숨겨둔 배려와 다정함을 발견할 때마다 그를 너무 갖고 싶다는 소유욕이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밀려들 었다. "그럼,같이 들면 되잖아요." 은규의 섹시한 입술에 물린 담배를 뺏어 들며 예은은 까치발을 들었다.그리고 그의 입술에 키스하며 웅얼거렸다 "나 이래봬도 팔 힘만큼은 무지 세거든요." 그는 이미 헐거워진 어깨의 가벼움을 느끼고 있었다. 아버지와의 유일한 연락 수단인 핸드폰이 울리자,천일도는 다급히 폴더를 열었다. "아버님!" [회장님이라고 불러라.] 냉기가 철철 흐르는 목소리였지만 천일도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흥분 상태였다. [다음 달부터는 출마 준비로 정신없을 거다.나에 관한 뒷소문도 일절 들려서는 안 돼.그러니 이번 달 안에 땅 문제를 완 결 지어라.] "이번 달까지요?" 시간이 너무 촉박했지만 아버지의 믿음을 저버릴수는 없었다.이제 곧 정계의 유력한 인물이 될 사람의 아들로서 철저히 인정받을 만반의 기회를 갖춰야 했다.


"걱정 마세요.이번 달 안에 그 땅 모두 아버님 소유가 될 겁니다." [믿어도 되겠지?] 걸걸한 목소리에 담긴 의미심장한 뜻이 천일도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물론입니다." [이번일 맡길 끄나풀쯤이야 얼마든 있지만 굳이 너에게 기회를 준 내 뜻을 잘 알거라 믿는다.말 많고 탈 많은 깍두기들 을 모아 상까지 차려줬으니 멋지게 해치우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노파시메 다시 한번 말해두는데,이번 유흥 단지 건만 멋 지게 성사시켜 보인다면 정식으로 호적에 올려주마.] 천일도의 발끝부터 머리 끝까지 전율이 일기 시작했다. "아........아버님!" [내가 그다지 인내심이 많은 인간이 아니란 건 알고 있을 테고.시간이라면 충분히 줬다.이번 달 안까지도 교통정리가 안 되면...] "꼭 해보이겠습니다.맡겨주세요!" [기회는 단 한번뿐이다.확실히 해보이라고.] 전화를 끊는 천일도의 손이 숱한 욕망과 기대감으로 후들거렸다. 사생아,전과자,이 지겹고도 증오스런 단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드디어 눈앞에 도래했다.무시당하고 짓밟 히면서 사내에게 권력이 얼마나 큰 무기가 될수 있는지 뼈에 새겨질 만큼 통감햇다. 교도소에서조차 살아남기 위해 그 세계 안에서 가자 힘있는 자의 개가 되어 자신을 죽여야 했던 나날들.그 모든 인간들 에게 복수할 수 있는 '권력'리 바로 눈앞에서 아른대고 있는 지금 무슨 일이 있어도 일을 그르치게 할 순 없었다. '안 되겠어.내가 좀 나설 수밖에.' 천일도의 목젖이 울리며 괴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왓다. chapter 50 ==그의 아이를 갖고 싶단 생각을 하다니. 신이시여,제 머리를 대체 어떻게 만드신 건가요!==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쓰디쓴 커피를 마시며 시준은 예으의 맞은편에 앉은 사내를 주도면밀히 관찰햇다.무테안경 너머로 시종일관 반달 모양을 그리고 있는 눈매가 선한 인상을 풍겼고,연신 끄덕대는 고개는 상대의 이야기에 세심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향한 궁금증에 동그래진 눈만 할줄 알았던 동생이 저리도 진지하고차분한 자세라니,녀석도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골칫덩이가 흑사라 통용되는 사내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눈에 보듯 빤한데 상대의 마음을 모르겠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아무리 책임감 때문이라고 해도 결혼까지 한것을 보면 전혀 무감각하지만은 않은것도 같은데 남자대남자로서 판단한 황은규는 쉽게 사랑에 빠질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게다가 그를 둘러싼 현재의


상황 속엔 사사로운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었다. 갑자기 장난기 가 발동한 시준은 사랑하는 동생을 이런 사황에 빠뜨린 매제를 좀 골려주고 싶어졌다.그래서 핸드폰을 들 고 은규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무슨 일입니까.] 탐탁지 않은 목소리에도 굴하지 않으며 시준은 짐짓 심각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이봐 매제,경계해야겠어.기획 피디란 인간이 모델 뺨치게 잘났거든.우리 글쟁이 표정 관리가 전혀 안되고 있다고." 핸드폰 너머로 은규가 짓고 있을 표정이 궁금해 시준은 한참이나 예은에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형님." 생각에 잠겨 있느라 은규는 수야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어,그래." "무슨 일 있으세요?" 은규는 그저 미간만 찌푸려 보였다.처남의 장난 전화 때문이라고는 주거도 말할 수 없었다. "얘기 계속 해라." 배신자의 존재로 형구가 지목된 이후 그는 한동안 일에 관련된 사항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마음을 추스르며 생각을 정리 할 시간이 필요했고.수야 역시 말없이 기다리며 그의 심기를 살폈다.비로소 오늘 처음 이 더러운 현실을 다시 입에 담고자 마음을 먹은 것인데 이렇게 중요한 순간 자꾸만 생각이 흩어지다니,평소의 자신이라면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짜증스런 기분을 감추기 위해 은규는 담배를 꺼내 물며 수야의 목소리에 집중햇다. "지시하신 대로 오늘 부터 사흘간 형님께서 홀로 양평 별장에 묵으신다는 정보를 형구에게만 흘렸습니다." "잘했다." 녀석이 정말 스파이라면 천일도 쪽에 정보가 들어갈 테고,몸이 달은 그들은 홀로 별장에 있는 그를 노리거나 여기 남아 있는 예은을 노리거나,둘중 어떤 행동이라도 취할 것이란 계산에서 흘린 정보였다. "오늘 부터 형구의행동을 철저히 감시해라,녀석 혼자 이런 대담한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거라고 확신한다.사람에게는 각 자 맞는 그릇이 있는 법이고,미련할 정도로 욕심이 없는 형구는 그럴 만한 그릇이 아니야.분명히 형구 말고도 우리 측근 가운데 또 다른 배후 세력이 있을 거다.자신들이 하는 일에 쥐새끼가 필요했던 누군가,그 배후 세력을 찾아야 해." 과연.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믿었던 사람이 준 배신감에 눈이 멀고 가슴이 막혀 한동안 누구도 믿지 못해 방황해도 모자랄 판국에,은규는 입을 닫고 지낸 단 며칠을 통해 사사로운 감정은 잘라 버리는 즉시 명확하게 정리한 생각들을 나열해 보이고 있었다. 닮고 또 닮고 싶어서 언제나 마음속 이상형으로 품고 있었지만 도무지 흉내조차 낼수


없는 사내.그런 남자를 형님으로모 시고 있다는 사실에 수야는 문득문득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님..." "왜그러냐." 흔들리는 눈동자로 수야는 이상한 질문을 했다. "형구마저 꼭두각시로 부리며 스파이 노릇을 한 그 눈군가가.정말 형님께서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인물이라면 어쩌시 겠어요." 은규는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동자로 불안에 잠긴 수야를 마주 보았다. "누구든 다 같은 마음일 거다." 수야의 주먹이 꼭 쥐어졌다.그는 필사적으로 뭔가를 알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제 말뜻 아시잖아요.손가락을 깨물면 분명 더 아픈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형님께서 감히 생각 속에서조차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인물이 배신자로 밝혀진다면,그때도 이렇게 평정을 유지해 주실수 있겠냐고 묻고 싶은 겁니다.저는," 은규는 말없이 담배를 깊게 빨다가 뼈 있는 말을 뱉어냇다. "너만 아니면 돼." 수야가 흠칫 놀라는 것이 보엿다. "날 무너뜨리려면 배신자가 너 정도 인물이라는 반전이 있어야 할 거야.그러니 안심해." "형님..."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거야.그렇지?" 은규는 새 담배를 물며 쓰게 웃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반갑지 않은 인간이 손을 들며 반긴다. "어이,매제 늦었군." 대하면 대할수록 저 인간과 손을 잡은 것이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는 의구심만 치솟아 올랐다.시준의 인사를 은근히 무시 하며 은규는 예은의 흔적을 찾았다.이상하게도 집에 들어서자마자 늘 반기던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지독히도 마음 이 불안해졌다. "우리 글쟁이 지금 화기애애한 통화중이니까 왠만하면 방해하지 마.굉장히 즐거워하는 중이거든." "안 가십니까."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방글대는 시준이 못마땅해 은규는 표정 관리마저 포기해 버렸다. "내 동생한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허튼소리로 듣지 마.내 생전 저렇게 즐겁게 일하는 녀석 얼굴은 본적이 없으니까." 시준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은규는 한참을 현관만 바라보다,주머니 속에 감춰진 자신이 주먹이 꼭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홱 돌아섰다. "아,정말인가요?" 그녀는 베란다에서 무척 즐거운 표정으로 통화에 빠져 있었다. "그럼요,평소 좋아햇던 분이세요.아,각색 작업 마치기도 전에 너무 앞서 나가는 거


아니에요?에이,아무리 그래도 접대용 멘트는 곧이들리지 않는다구요." 접대용 멘트? 은규는 베란다 바로 앞에 서서 담배를 물고 통화 내용을 집중했다. "스튜디오 방문 계획은 시나리오 작업을 마친 후에 잡는 게 좋지 않을 까요?" 상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예은의 입가에 다소 부끄러운 듯 한 미소가 번졌다. "이제보니 김 피디님,사람 듣기 좋은 말을 아주 잘하시네요.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그런 말에도 안 넘어간..." 갑자기 속에서 뭔가가 끓어올라 은규는 휴 하고 담배 연기를 뿜어 버렸다.그 틈에 돌아선 예은은 깜짝 놀라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 "이런!이만 끊어야겠어요,"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긴요한 이야기를 방해받은 사람마냥 서둘러 끊으려는 모습이 바람난 아가씨의 모습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왔어요?" 입을 열면 좋지 않은 소리가 나갈것 같아 그는 그대로 침묵했다. "왔은면 기턱이라도 내지.왜 귀신처럼 거기서 어슬렁거리고 있어요?깜짝놀랐잖아요." 귀신처럼 어슬렁거려?가뜩이나 한껏 아래로 내려간 기분이 땅바닥까지 추락해 버렸다. "무슨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중이었나 보지?" 그의 목소리에서 시비의 기운을 감지한 예은의 눈썹이 오만한 반달 모양을 그렸다. "일 ?기 중이었어요." 담배를 문 은규의 입술이 비웃음을 담아 살짝 비틀렸다. "일 얘기를 참 화기애애하게도 하는군,1 초마다 웃던걸." 예은은 허리에 손을 얹고서 턱을 치켜들었다. "즐거우니까요.난 즐겁지 않은 일은 하지 않거든요.그나저나 말꼬리나 툭툭 잡아채는 걸 보니 심심한가 봐요?" 예은의 따가운 눈동자에 담긴 질책을 발견한 은규는 자신의 행동이 한심해져 시선을 돌려 버렸다.그녀가 누굴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하던 상관할 바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과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알수없는 소리를 하며 평소답지 않게 굴던 수야 때문인지,쓸데없는 소리나 지껄이며 염장을 지르던 매제 때문인지,그것도 아니라면 처음으로 그녀가 일 때문에 자신 을 밀어낸 탓인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핸드폰이 울려 곤한한 상황에서 벗어난 은규가 폴더를 열자마자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뭐?" 그는 잠시 상대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알았어.침착해.지금 갈 테니까.별일 없을 거야." "왜 그래요.무슨 일 있어요?" "제수씨가 병원에 입원했다는데." 깜짝 놀란 예은의 눈이 동그래?다. "새벽 씨가요? 왜..." "가봐야 알것 같아.현석이 녀석.횡설수설하고 있어.서둘러." 방금 전까지의 분쟁도 잊고 급히 현과으로 향하는 은규를 보며 예은은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제나 완벽한 무표정으로,어찌 보면 인조인간마냥 차가운 소리만 해대는 남자였지만 동생의 전화를 받자마자 금방 얼굴 에 감정을 드리우는 모습이 그도 평범한 인간이라는 깨달음을 주고 있었다. 운전을 하는 내내 은규는 말없이 담배를 세 대나 태웠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현석은 새벽의 손을 잡고 앉아 기도를 읊조리고 있었다.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누가 죽기라도 했냐." "형..." 익숙한 지분거림에 현석은 비로소 굳혔던 어깨를 풀었고,침대에 누워 있던 새벽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어 렵게 입을 열었다. "이 사람 좀 말려주세요.난 괜찮다는데도 자꾸만 이러고 있네요." 예은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그녀의 기억속에 있던 여새벽이라는 여자는 100m 전방에 있는 사람에게도 들릴만큼 씩씩하게 이야기하는여자였고,말하는 도중 상대의기분까지 밝아질 정도로언제나 맑은 미소를 보태며 장난기로 눈을 빛내는 여자였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은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목소리는 마치 바람소리 같았고,말할 때마다 움찔거리며 호흡도 어렵게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에요?" 걱정에 찬 예은의 물음에 현석이 갈라진 목소리로 설명했다.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쓰러졌어요.양수가 모자란다고 합니다." 은규는 담배가 피우고 싶은지연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이는." "아직 8 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수술로 꺼내야 한대.양수가 거의 바닥나서 아이 생명이위험할 수도 있다고..." 괴로움에 몸서리치며 현석이 새벽의 손을 다시 한번 꼭 붙들었다. "아이한테는 미안하지만 새벽아,난 언제나 네가 우선이야.알지?" 잠시 아픔을 잊은 듯 새벽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나 그렇게 약한 사람아니에요,8 개월 동안이나 지켜온 아이를 쉽게 내줄 것 같아요?걱정 말아요.나도 아이도 포기할 일은 없을 테니까." 예은은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평온한 인생 가운데 가끔 찾아들어 심술을 부리는 악마에게 대항할수 있는 무기 는 칼도 방패도 아닌 서로를 향한 애정뿐이라는 사실을 두���람이 몸소 가르쳐 주고 있었다. 1 시간 후,새벽은 수술실로 들어갔다.현석은 병원 복도에 앉아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렸고,은규는 딱딱한 표정으로 줄기차 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지금 이 순간 가장 힘든 사람은 누구도 아닌 그녀의 남편일 터,공포와 고독 속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을 현석에게 작은 위로라도 보태고 싶어진예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옆으로 다가갔다.그리곤 살포시 어깨에 손을 얹어 보았다. 축축한 땀과 떨림,붉은 토끼 같은 눈초리로 현석이 고개를 들었다.예은은 최대한 따뜻한 목소리로 마음을 전햇다. "있죠,인간에게는 감당할수 있을 만큼의 시험만 주어진대요." 현석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집사람이 연관된 것이라면 제겐 시럼이란 개념 이상이 돼버립니다." 말 한마디,한 마디에서 그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 지가 절절할 정도로 묻어나고 있었다.이기적이지만 너무나 부 럽다는 생각을 지울수 없었던 예은은 무거운 고개를 돌려 은규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사랑받고 있는데 잘못될 리가 없어요."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난 오리혀 이정도 시험쯤 감사히 감당할수 있을 것 같은걸요..가슴 안으로 말을 묻으며 예은은 현석의 어깨에 놓인 손에 강한 힘을 실었다. "뭐든 쉽게 얻어지는건 가치도 낮게 매겨지잖아요.어렵게 얻은 만큼 분명 가치 있는 녀석이 태어날 테니 두고봐요.난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데요." 자신의 진심이 마음 안의 위로가 그에게 전달되길 바라며 예은은 최대한 크게 웃어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웃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으니까. 간밤의 수술 끝에 새벽은 예쁜 공주님을 낳았다.간호사의 말에 의하면,열달도 다 채우지 못하고 나온 성미 급한 아이 답게 울음소리가 꽤나 우렁찼다고 한다. 8 개월마에,그것도 양수가 턱없이 모자라 억지로 꺼낸 아이치고는 몸무게도 괜찮아 인큐베이터 행도 면할수 잇었다.이것 은 매우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며 의사와 간호사들 모두 행운을 갖고 태어난 것 같아 기쁘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몇 시간 전과 판도가 어찌 이리 바뀌었는지,현석의 입가에는 이제 생글거리는 미소가 만연했고,새벽의 얼굴에도 제법 화색이 돌고 있었다.그렇게 어영부영 아침을 맞았고,지쳐 잠이 든 새벽을 뺀 세사람은 아이와의 첫 대면을 위해 신생 아실로 향했다. 유리창 너머로 딸과의 만남이 시작되자,현석은 도무지 믿을수 없다는 표정으로 유리창에 붙어 아이의 모든것을 일일이 관찰해 나갔다. "세상에....고작해야 내 손바닥만 하잖아!" 아이는 정말 작았다. "난 잘 모르겠는데 누굴 닮은 것 같아?눈은 새벽이를 닮은 것 같고 코는 날 닮은것 같은데,가만,입술 선이 빨간게 저것도 새벽이를 닮앗지?" 뒤쪽에서 힐끗대며 조카를 바라보던 은규는 아이마냥 잔뜩 흥분한 동생에게 야유를 보냈다. "눈은 뜨지도 않았는데 어딜봐서 제수씨를 닮았다는거야?"


"옆으로 길게 찢어졌잖아.분명 샙벽이처럼 클 거야.손가락도 길고 발가락도 길고 젠장,속눈썹도 길잖아!아.....어떻게 하지?꼭 작은 새벽이 같다!" 조금은 유별난 부녀의 대면 장면에 예은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적당히 좀 해라.팔불출 같은 놈." 싫은 소리를 중얼대고 있었지만 유리창 안에 박힌 시선을 떼지 못하는 건 은규 역시 마찬가지 엿다. 솔직하지 못하긴.... "아기 예뼜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예은은 넌지시 그의심중을 떠 보았다. "글쎄,아직은 그냥 핏덩이던걸." 병원에서 보충하지 못한 니코틴을 단번에 채워 넣을 생각인지,은규는 맛나게도 담배를 피워댔다. "아이,좋아해요?" "좋아해." 창문을 조금 더 활짝 열며 그는 핸들을 조심스레 꺾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쳐다보는 게 전부지만," 아이를 안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은규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흥미로웠지만 그의 아이를 품에 안아도 그럴까 싶었다. 자신의 핏줄을 갖게 된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이....갖고 싶단 생각 해봤어요?" "생각이야 해봤지." 의외의 대답에 두 사람 사이로 묘한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다소 의미 있는 침묵안에서 정말 충동적이지만 은규는 자신의 아이를 안고 있는 예은의 모습을 떠올렸다. '무슨 망상을 하는 거야? 다소 당황한 나머지.핸들을 쥔 그의 손에 필요 이상의힘이 실렸다.사실,동생 부부의 애정과 그 결실로 태어난 아이를 바 라보는 내내 예은을 의식했었다.그리고 현석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은근히 견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햇다. 일찍이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애정 없이 자랐던 두 사람은 언제나 서로를 먼저 생각하고 챙기며 성장했지만,어느 틈에 생명을 나눌 만한 반려자를 찾은 동생은 이미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행복을 거머쥐었다. 그에 비해 자신은 어떠한가.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고 사랑했던 조직 식구들 가운데 배신자를 키우게 된 것도 모자라 위장 결혼이나 하고 있는 입장이었으니,자괴감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몰랐다. "무슨 생각해요?" 은규는 묘한 심정으로 예은을 주시했다. "나도 나이를 먹어가는가 싶어서." "그럼,혼자서만 시간을 비껴갈 수 있을 줄 알았어요?그 대단한 진시황도,엘리자베스 여왕도,시간 앞에서는 굴복할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죠." 곧이어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예은을 보며 은규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어느 틈엔가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녀의 존재 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때때로 위안과 즐거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 익숙해져서는 안돼.잠시 잠깐 임대한 것들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래도 이제 그녀 없는 일상은 도무지 상상이 가지를 않으니 큰일이었다.

chapter 51 ==쉽게 인정하지않고,쉽게 고백하지도 않고. 기다리고 인내하다 보면 정말로 그의 뜨거운 가슴을 볼수 있게 될까.==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오늘도 외출하나." 예쁘게 차려입고 거울 앞에 서 있던 예은은,이제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은규를 애써 보지않으려 노력했다. "이번 주 내내 바쁠 거에요." 그녀는 곧 돌체 앤 가바나 라이트 블루를 몇 번 뿌렸다.상큼하고 시원한 향이 코 속으로 스며들어 마음을 한결 가볍게 했다. "향수는 왜 뿌려?" 무엇이 불만인지 은규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기분 전환이에요.이 향기를 맡으면 컨디션이 상승되거든요.그녀는 꼭 소녀 같아 보였다.한쪽 어깨가 보이게 디자인된 타이트한 입술 넥 니트에 다리선을 훤히 드러내는 진한 나팔 청바지 머리에는 터번 형식의 두건을 둘렀고,훤하게 드러난 목에는 하늘하늘한 천으로 만들어진 얇은 머플러가 한번 둘려 있었다. 예뻤다.패션 감각이 독특한 그녀는 자신을 꾸밀 줄 아는 멋을 지닌 여성이었다.새삼 자신의 아내가 남자들의 시선으로부터 그다지 자유롭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밀려들어 기분이 저조해진 은규는 괜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쏘아댔다. "누가 보면 소풍 가는 줄 알겟어." "왜 괜히 골내고 그래요?" "헛소리 말고 빨리 나가." 외구심 섞인 눈동자로 은규를 바라보던 예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문을 열고 사라졌다. "미친놈,뭐하자는 거야?" 그는 담배를 물고 웅얼대며 컨트롤하기 힘들어진 감정 상태를 다스렸다.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그녀는 하루 중 절반이 라는 시간을 밖에서 보내고 있었다.각색 작업을 시작하기 전,전체 스토리와 신 별 시놉시스를 짜야 하는 이유로 김 피디라 는 인간과 하루 3 시간 기힉 회의를 한다고 말했다.


덕분에 그는 훨씬 자유롭게 시간을 활용할수 있었다.가끔씩 전화를 걸어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했지만 그녀의 오빠가 눈 크게 뜨고 동생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으니 일 보는 동안에도 전처럼 신경이 분산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함께 시간을 보내려 했었다.스파이에게 거짓 정보를 흘린 상태이기 때문에 오늘부터 이틀동안 그는 양평 별장에 있는것으로 되어 있었다.사사로이 외출을 할수가 없는 상황인지라 오랜만에 예은과 같이 지내 볼 예정이었는데 바 쁘다고 쌩 나가 버렸으니 하루종일 혼자 있어야 할 지경에 놓이고 말았다. 은규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서 잠시 신문을 뒤적이다가 글자들이 통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TV 를 켰다.시네마 채널에서 총 싸움이 치열한 액션 영화가 진행 중이었지만 역시 집중할수 없어 다시 꺼 버렸다. 30 초 동안을 그렇게 담배만 태우고 있자니 갑자기 헛웃음이 흘러나왔다.언제나 혼자 있는 것에 익숙했는데 홀로 남은 지 20 분도 채 되지 않아 뭘 해야 할지 알수가 없었다. 끔찍할 만치 고요한 정적 속에서 기세 좋게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하자 은규는 생각을 접고 모처럼 반갑게 폴더를 열었다. [어이.매제!] "연애라도 하자는 겁니까.전화가 잦군요." 짜증이 묻어난 은규의 목소리에도 시준은 굴하지 낳고서 지분거렸다. [이거 왜 이래,매제도 은근히 궁금할 거 아니야.아내가 외간 남자를 만나고 있는데.] 안 그래도 거북하던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은규는 어렵지 않게 참아냈다. "이만 끊습니다." 핸드폰을 귀에서 내리고 폴더를 닫으려던 그는,마침 들려온 여자의 익숙한 웃음소리에 멈칫했다. 다시 핸드폰을 귀에 가져 다 대자,진지해진 시준의 목소리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아침에 보니 우리 글쟁이가 향수를 다 뿌렸더라고.] 은규의 눈썹니 움찔했다. [녀석이 향수를 뿌렸다는 건 심경에 대단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증거거든.뭐 저렇게 반반한 인간하고 있다면 가슴 안 떨리 는 여자가 이상한 거겠지만] 은규는 그만 열려진 베란다 너머로 핸드폰을 집어던질 뻔했다.이 얄미운 인간의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일일이 신경 쓰고 있는 자신이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능구렁이 같은 놈!" 한동안 혼자 안달하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더 이상 이 답답한 공간안에 홀로 있고 싶지가 않앗다. "바래다 드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회의를 마치고 갈 채비를 하는 예은에게 김 피디가 정중히 말햇다. "괜찮아요.들를 곳도 있구요." 안경 너머로 방긋 웃는 그의 눈이 멋졌다. "데이트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상냥하기 그지 없는 저 미소에 대고 '이미 유부녀에요'라고 말한다면 어떤 얼굴이


될까 궁금해졌다.그러고보니 이 사람과 만나 대화하는 동안 제대로 된 눈 모양을 본 일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어디선가 너무 잘 웃는 사람은 조심하라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은데.이 눈웃음 속에는 도무지 같이 해죽거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다음 미팅 때는 제가 맛있는 걸로 꼭 쏠게요." "기자리고 있겠습니다." 김 피디는 함께 카페 밖으로 나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었고 주차장이 있는 지하 2 층까지 동승해 주었다. "재미 좋았냐?"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시준은 예은이 다가와 문을 열자 반색을 하며 놀렸다. "좋지,그럼." "집으로 가면 돼?" "아니,병원 좀 갔다가." 시준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왜.어디 아파?" "내가 아프다고 병원 가는거 봤어?" "그럼 왜?" "은규 씨 동생 부인,그러니까 동서라고 해야 하나?아기를 낳았거든.어떻게 하고 있나 살필 겸 아기도 보려고." 시준은 꼭 악동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째,너 은근히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다?" 괜히 뜨끔해져 예은은 과민 반응을 했다. "나 원래 어떤 상황에도 적응 잘하는 인간이잖아.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 안에서 즐길 만한 구석을 찾아야지. 어차피 나중에 쓸 소설의 소재를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 모든 일이 편해져." "너무 빠지면 곤란하다.너랑은 좀 다른 길을 걸었고.앞으로도 그럴 사람이니까." 예은은 갑자기 기분이 착 가라앉은 것을 느꼈다. "알아." 무거워진 공기가 어깨를 짓눌렀다.신호에 걸려 차를 세운 시준은 물끄러미 동생의 옆 얼굴만 바라보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 로 확인했다. "벌써 선을 넘어 버린 건 아니겠지?" 예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미쳤어 오빠?" 너무나 리얼한 거부 반응에 시준은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었다. "진짜 아무 일 없었다면 너 여자로서 문제 있는 거다.사람들 앞에서 결혼까지 한 여자가 한집에서 사는데 어떤 남자가 가만두겠냐?그렇게 안봤는데 그 녀석 혹시 불능...." 망설임 없이 날아온 예은의 주먹에 신음으로 뒷말을 대신했다. "못하는 소리가 없어.동생 앞에서!" 온몸을 붉혀가며 부끄러워하는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새삼 황은규라는 사내에 대해 존경심이 솟아올랐다.그가


자신의 책임하에 들어온 것들은 상처 하나 나지 않게 잘 지켜 내리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동생을 맡겼던 것이지만 예은은 꽤 매력적인 여성이었다.그런 여자와 신혼여행을 다녀온 것은 물론,한 공간 안에서 밤을 지새우면서도 선을 넘지 않았다는 것은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닮고 싶은 자제심이구만,아니면 정말 불능이던지.훗...." 홀로 생각에 잠겨 히죽대는 시준의 뺨으로 예은의 따가운 시선이 쏟아져 내렸다. 병실에 들어섰을때 새벽은 침대에 일어나 앉아 남편과 소곤대며 이야기 하고 있었다.두 사람의 모습이 그림처럼 너무 예 뻐 예은은 잠시 거동도 하지 못한 채 눈에 넣을 듯 보고만 있었다. "어머.예은 씨!" 새벽이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는 감격스러울 정도로 열렬히 반겼다. "아휴.이제 형님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영 익숙지가 않네요.제가 원래 촌수 호칭에 대한 개념이 좀 없어요." 그런 거라면 아주버님을 아주머님으로 바꿔 부르며 즐길 때부터 진즉 예감했었다. "오셨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슬며시 고개를 숙이는 현석의 얼굴 가득 충만한 행복감이 서려 있었다.갑자기은규의 얼굴이 서서히 떠 올랐다가 사라진다.그의 표정도 저런 감정을 품을 수 있는 날이 왓으면 좋겠다는 열망이 강하게 솟아 올랐다. "내 정신좀 봐!어서 앉으세요.좀 전에 식구들이랑 아버님이 다녀가시는 바람에 정신을 다 뺏겼거든요.엄청난 대 식구 들이라." "은규 씨 아버님이요?" 예은은 문득 새벽이 그 보통 아닌 노인네를 어떻게 감당해 내는지 몹시도 궁금해졌다. "네,혹시 아버님 만나 보셨어요?" "아,뭐....네." 왠지 민망해져 멋쩍게 웃는 예은을 보며 현석을 슬쩍 일어나 두사람이 편하게 대화할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주었다. "일단 좀 앉아 보���요." "괜찮아요.곧 가봐야..." "그런 섭섭한 말씀이 어디 잇어요.얼마 만에 보는 건데." 새벽이 애원하는 낯으로 옆에 있는 의자를 툭툭 두드리자,예은은 어쩔수 없이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버님이 좀.....괄괄 하시더라구요." 더 과격하게 얘기하고 싶은 욕구를 죽이고 최개한 순화된 표현을 쓰자 새벽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우리끼린데 뭘 눈치를 보고 그래요.괄괄 정도가 아니죠.괴짜지.목청은 확성기 수준이지..." 예은은 저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돈이면 다 되는줄 아는 물질 만능 주의자에다 입도 거칠고,거기다 엄청 비만이야!" 열에 들꺼 한껏 떠든후 정신을 차려보니 떡 벌어진 새벽의 입이 보였다. "우와.....엄청 쌓인게 많았나 봐요.?"


"아.뭐.....조금." "안 봐도 훤해요.아버님이 상처 되는 말 많이 하셨죠?" "새벽 씨 한테도 그랬어요?" 목이 타는지.새벽은 탁자 위에 놓인 물을 한 컵 마셨다. "아실지 모르겠지만,현석 씨하고 저도 순탄하게 결혼한 케이스는 아니거든요.사실 저는.." 말을 하다말고 새벽은 잠시 ?느의 눈치를 살폈다. "아주버님과 약혼한 사이였어요." "네?" 예은의 눈이 휘둥그레?다. "어느날 할아버지께서 떡하니 통보하시는 거에요.'넌 HS 그룹 6 대 장손과 혼인하기로 되어있다'하지만 어떤 여자가 사랑 없는 결혼 결정에 고분고분할 수 있겠어요." 옛일이 생각나는지 새벽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침 HS 백화점에서 사장 비서를 뽑는 다는 사실을 알고 전 무작정 가출했어요.그리고 면접을 봤죠.거기서...현석 씨를 만나게 된 거에요." 수줍게 미소 짓는 새벽에게서 예은은 자신의 모습 일부를 본것 같았다.부당하게 정해진 결혼과 싸우기 위해 가출을 한 그 녀와,은규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메이드로 취직을 했던 자신,ㅅ름 끼칠 만큼 동일한 기질이 두사람 가슴 안에서 숨쉬고 있음이 느껴졌다. "존경 스럽네요.그 작은 몸으로 여기까지 이겨내다니.새벽 씨는 참 강한 여자에요." "당치도 않아요!내가 뚫을 수 있었던 벽이니까 예은 씨도 분명 해낼수 있을 거에요.아버님은 분명 만만치 않은 분이시지 만 두사람은 이미 결혼을 했고.아주버님이 아이 낳고 마음잡고 사는 모습 보시면 분명 인정해 주실 거라고 생각해요.그러 니 기운내요." 말하지 못한 많은 부분들이 있었지만 예은은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새벽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꿀 겸 화제를 전환 했다. "그나저나,신혼 재미 좋아요?" 새벽의 눈동자에 차오른 순수한 궁금증에 가슴이 쓰려왔다.바라는 마음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어 더욱 감당하기가 벅 찼다. "그냥 그렇죠 뭐." 다른 의미로 붉어진 예은의 얼굴을 제 멋대로 해석한 새벽은 눈을 흘기며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기는,소식 없어요?" 갈수록 태산이라더니,예은의 등 뒤로 한 줄기의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결혼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기는 좀..." "경험자로서 이야기하는 건데요.아기는 무조건 빨리 갖는게 좋을 것 같아요.우리 두사람만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연결 고리가 생긴 느낌이라고 할가?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어요.그냥,전보가 지금 더 남편을


사랑한다는 것밖에는요." 사랑받은 여인의모습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지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넘치는 자신감과 모든 것을 초월한 평온함이 새벽에게서 흠뻑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부러워... 현석의 모습을 보며 은규의 행복을 기도했던 것처럼,자신 역시 지금 앞에 있는 이 작은 여인과 같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얼마 좋을까. 속적없는 갈망에 가슴이 요동쳤다. "있죠.전 빽백대면서 우는 아이 안고 어쩔 줄 몰라하는 아주버님 모습이 너무 보고 싶어요 예은 씨 아니,형님이 꼭 그런 날 오게 만들어 주세요.꼭이요,그래야 아버님께 대항할 엄청난 무기도 얻는 셈이라구요." 두사람의 아이를 안고 있는 은규의 모습은 분명 자극적인 그림이 될 것 같은데 도무지 그려 볼 수가 없었다. "이만 가볼게요.몸조리 잘해요." 좀더 머물렀다가는 죄책감을 비롯한 온갖 기대와 환상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아 예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호의 의심도 없이 두사람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새벽의 마치 백지처럼 느껴졌고,자신은 그 앞의 까만 잉크통 같아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병실을 나오자마자 통화에 전념하고 있던 현석이 눈짓으로 인사해 보였다.아마도 급한 회사 업무를 지시하는 모양이었다. 새벽의 말로는 저 사내 역시 은규 못지않은 막대기 인간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도무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애정 표현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아내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모든것을 짐작케 했다. "벌써 가십니까.형수님." "네?" 예은은 자못 당황했다.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그가 어째서 형수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일까. "새벽이가 형수님을 많이 따르는 것 같아 안심입니다." 이런 저런 설명 없이 그는 형수님이란 단어 하나로 그녀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다.예은은 그만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주 들를게요." 두 사람은 잠시 병원 복도에서 묘한 이해가 담긴 눈빛을 주고 받았다.먼저 침묵을 깬 쪽은 현석이었다. "그 말씀 명언이더군요." "무슨..." "쉽게 얻는 건 그 가치도 낮게 매겨진다던 말씀 말입니다." "아,네." "새벽이가 아이를 수월하게 낳았다면 이런 감격과 기쁨까지는 느끼지 못했겠죠,짧은 순간이지만 아내에 대한 내 마음과.


자식을 안기까지의 수고로움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느낄수 있었던것 같습니다." 현석이 미소 짓자.은규의 얼굴 일부가 나타났다. "형수님과 형의 관계.새벽이만큼 저도 지지하고 있습니다." 예은은 다소 당혹스러워 얼굴을 붉혔다. "아시다시피 우린 그런 사이가 아닌..." "어렵게 얻는 것은 분명 그 가치도 더 높아질 거라 하셨지요." 천천히 예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부부도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변치 않는 마음을 갖게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뜻하고 차분한 음성이 예은의 심장까지 전이되고 있었다. "형은 분면 쉬운 사람이 아닙니다.하지만 형에게도 분명 저와 같은 심장이 존재 합니다." 현석이 거리를 좁혀 바로 앞에 다가와 섰다.그는 자신의 형과 흡사한 얼굴을 하고서,은규에게서는 한 번도 볼수 없었던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쉽게 인정하지 마세요.쉽게 고백하지도 마세요.그런 감정은 금방 소멸되기 마련입니다.기다리고 인내해 키우다 보면 세상 에서 가장 뜨거운 남자의 가슴을 보게 되실겁니다.형은 그런 사람입니다." 한 번 더 웃어 보인후 병실을 향해 돌아서는 현석의 모습을 예은은 잠시 그대로 지켜보았다.짧은 대화였지만 엄청난 위로 를 받고 말았다.마치 그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진 것처럼 뭐든 잘될 거란 착각도 솟아나기 시작했다. "오길 잘했어..."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녀는 신생아실을 향해 걸어갔다.갓 태어난 아기는 좀처럼 대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인지,볼수 록 신기하고 신비로운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어떻게 변했을까.애들은 하루가 다르게 큰다고 하던데.' 기대감으로 걸음을 재촉하던 엥느은 뭔가를 발견하고서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신생아실 유리 앞에 서 있는 한 사내의 뒷모습 때문이었다.주머니에 손을 넣은 자세로 간호사의 가슴에 안긴 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그 녀의 남편이었다.관심 없는 척,귀찬은 척.꾸몄던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그저 조카를 향한 애정과 흐뭇함만이 그의 표정 안에 살아 숨쉬고 있었다. 차마 다가갈수 없어 한참을 마냥 서서 바라보았다.그리고는 다시 발길을 돌렸다. 아이를 바라보는 내내 어째서 오예은이라는 여자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동생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웃는 새벽을 보? 왜 또 그녀를 떠올렸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자신은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현석이 어느 때보다 커보인 것도 사실이었다.그저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여자로부터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끌어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그는 아마 평생을 가도 알 수 없을지 모른다.


이번 사태를 온전히 마무리 짓는다면 더 이상 예은과 함께 있을 구실 따윈 사라져 버린다.다시 자신의일상으로 돌아간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진짜 결혼식을 올리고,이런 멋없는 사내와의 기억쯤이야 말금히 잊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이도 낳게 되겠지. 갑자기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올라 차 키를 쥔 손에 바짝 힘이 실렸다.다른 사내와의 사랑으로 생긴 아이를 안고 있는 예은 의 모습은 생각속에서조차 품기 힘들었다. '무슨 개소리야?' 자신은 결코 마음을 줄 생각이 없으면서,혼인 신고도 하지 않은 남남 주제에,정작 그녀가 다른 사내로부터 사랑받을 기 회는 막고 싶어하는 추악한 이기심이 혐오스러웠다. 꼿꼿한 척하며 추호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사내의 모습을 만들어 갔지만,마음 안에서 일고 있는 거대한 돌풍은 감당할 수 없는 갈망이 되어 그를 삼켜가고 있었다.어떤 여자에게도 사사로운 감정을 품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에 위장 결혼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인데,그때와는 상황이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바위보다 굳은 표정으로 운전석에 앉은 은규는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답답한 자신과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 도록 무작정 달리고 싶은 마음에,평소 익혀두었던 지름길 입구를 향해 핸들을 꺽었다.길이 다소 거칠기는 했어도 막아서 는 차나 장애물이 없어 시원스럽게 달릴 수 있는 최상의 코스였다. 무념속에서 한동안 질주에만 집중하고 있던 은규는 문득 속도를 너무 높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브레이크를 밟았다.그러나 속도계가 내려가지 않았다.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관통했으나 평정을 잃지 않고서 노력하며 액셀에서 발을 떼어냈다. 이제 곧 내리막길인데 붙어버린 가속도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고.설상가상으로 저 멀리서 차 한대가 들어서는 것이 보 였다.부딪친다면 그대로 박살나 버릴 조그마한 경차였다. 침착하자. 은규는 온몸의 근육을 바짝 긴장시킨 후 안전벨트부터 풀어냈다.이내 핸들을 오른편으로 꺾어 과감하게 차 방향을 틀어 놓고서 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돌부리에 걷어 채이고 굴곡이 심한 내리막길을 여섯바퀴쯤 구른 후에야 중심을 잡은 은규는 다급히 일어나 도로 위 상황을 살펴보았다.다행스럽게도 경차는 무사히 길을 지났고 도로를 벗어난 그의 차만 나무와 충 돌해 잔뜩 찌그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괜찮아요?" 깜짝 놀라 달려 나온 경차 주인의 외침에 은규는 팔로 고개를 내렸다.개에게 물려 꿰맸던 자리가 터져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chapter

52


==어느 곳을 가도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면, 신경 전달 물질 도파민이 한몫 하고 있다는 증거. 그를 보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혈압이 높아진다면, 아드레날린이 분출되고 있다는 증거. :난 이 모든게 과다분출 중이야.......==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묘한 타이밍에 일어난 브레이크 고장. 피를 흘리면서도 한참을 생각에 잠긴 끝에야 은규는 수야를 불렀다.급히 차를 몰로 온 수야는 그야말로 사색이 되어 있었다. "먼저 집으로 가자." "병원부터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 들어." "이럴 때마다 형님이 너무 야속합니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던 수야의 입에서 불평이 쏟아져 나오자 은규는 조용한 목소리로 질책했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래?" "형님 피 앞에서 저 다운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 정도로 죽진 않으니 오버 좀 그만 해라." "형님이 무적인 줄 아세요?이젠 제발 자기 몸부터 좀 챙기시란 말입니다." 수야의 표정과 격양된 목소리에서 염려를 읽어낸 은규는 가슴이 따뜻해져 잠시 팔의 통증조차 잊을 수 있었다.내부 인물 중 누군가 자신을 벼랑으로 몰고 있는 요즘,이런 마음은 보약보다 더 힘이 솟구치게 하는 명약이었다. "알았으니까 적당히 해." "어느새 집 앞에 도달한 두 사람의 시야로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시준의 차가 보였다.그제야 은규는 긴장을 풀어냈다. "이제 병원으로 가도 되겠습니까?" "소원대로 해라." 수야조차 평정을 잃을 만큼 상처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솟구치고 있었지만,그가 가장 먼저 걱정한 것은 예은의 안전이었다. 그래서 병원도 마다한 채 집부터 들렀던 것이고.버젓이 주차되어 있던 시준의 차를 확인한 후에야 제 몸을 챙길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어쩌다 같은 부위를 또 다쳤나.뼈에 금이 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야." 진찰실에 들어서자마자 주치의 김 박사의 나무람이 시작됐다.어느덧 흰머리가 수북해 나이 지긋한 노인이 된 그는 큰형님 의 절친한 친우였다. "위험한 일 하고 다니는 거 아니지?" 오랜 투병 생활을 하던 친구를 끝까지 지키지 못한 것이 너무나 죄스럽다고 그는 늘 입버릇처럼 되뇌곤 했다.그래서인지 친구가 아들처러 여겼던 은규의 안전과 건강에 대해서 유난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가벼운 접촉 사고가 좀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데도 김 박사는 용케 침묵해 주었다.


"일절 물 안 닿게 하고 꾸준히 치료만 받는다면 3 주 내로 어느 정도 아물겠지만,어디까지나 내 지시 사항을 철저히 지켰 을 때의 얘기야." "예.말씀하시는 대로 고분고분 잘 따를 테니 염려 마세요." "말은 잘하지!" 치료를 마친 후에도 한바탕 잔소리를 듣고 나서야 은규는 다시 집으로 향할수 있었다. 수야는 수야 대로,그는 그 대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느라 자동차 내부는 온통 무거운 침묵뿐이었다. "뒷수습은 하라는 대로 잘했냐." 한참 후에야 들려온 은규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차는 견인해 카센터에 맡겼고,브레이크 부분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도 내렸습니다.일단 조작한 흔적이 보인다고는 하는데 자세한건 내일 들러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별장 쪽에 누군가 접근한 흔적은." "없습니다." 아마도 스파이는 그가 양평으로 떠났다는 정보가 함정이란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덕분에 일이 터져도 정보를 흘린 양 평 쪽에서 터질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가 완벽히 허를 찔리고 말았다. 이번 일은 경고로 끝났던 사냥개 사건과는 차원이 틀렸다. 만약 그가 운전 신경이 둔한 사람이었거나 고속도로에 나가 과속이라도 했더라면,제 아무리 뛰어난 반사 신경을 가졌다 한들 살아날 수 없었을 것이다.죽일 생각이 아니었다면 결코 저지를수 없는 일이었다. 조직들 간의 밥그릇 싸우메 불과하다면 모두들 힘을 합쳐 상대해 주면 그만이었다.하지만 한 배를 탄 아군 속에 숨은 적 을 상대해야 하는 지금은 전의조차 생기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사생결단을 내고자 하는 결심으로 형구를 불러들여 두들긴다면 또 다른 배후 인물쯤이야 알아낼 수도 있을 테지만,어디까 지나 그건 최후 수단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팔 전부를 살리기 위해 썩기 시작한 손가락부터 잘라야 하는 완벽한 함정 상태.적들이 구현해 놓은 쥐덫을 걸려들어 이렇 다 할 행동조차 섣불리 취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한없이 무력하기만 했다. "속도 좀 높여라." 쉬고 싶었다.생각도 머리도 오늘만큼은 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집에 도착해 쓰러질 것처럼 지친 마음으로 문을 열자,어김없이 같은 자리에 서서 반기는 예은의 환한 얼굴이 눈 에 들어왔다.순간 깨달아지는 사실이 있었다. 오늘 하루 내내 이 웃음이 무척이나 그리웠다는 것. 뭉쳐 있던 마음이 풀어지며 훈훈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치워." 눈앞에 내밀어진 반찬을 보자마자 은규는 잘생긴 얼굴을 잔뜩 구겼다.하지만 그녀는 좀처럼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먹어요,어서!" 망할!그의 팔을 보자마자 예은의 과보호가 시작되었다.당신 때문에 살 수가


없다느니,덤벙대는 애처럼 사건만 일으킨다느니,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다 나을 때까지 오른손은 사용금지란 신신당부도 잊지 않았다.그리고는 식사중인 그 앞에 떡 버티고 앉아 친히 반찬까지 대령하고 있으니,살 수 없는 건 대체 누구인지 똑똑히 일러두고 싶었다. "어서 먹어요.왼손으로 젓가락질 까지 할 순 없잖아요.자.아...." 반찬을 내미는 그녀의 모습이 꼭 말썽꾸러기 자식을 둔 엄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왠만해선 통 물러설 것 같지 같아 머리 를 굴리던 은규는 낯간지럽게 입을 벌리는 대신 밥이 담겨진 숟가락을 들었다. "그냥 여기다 얹어." 뭐가그렇게 재미있는지 예은은 쿡쿡대고 웃으며 숟가락 위에 마른 반찬을 살포시 얹어 주었다. "부끄러워하긴." 숟가락을 입에 넣던 은규가 눈썹을 치켜 올리자,예은은 그냥 넘어가자는 양 손사래를 치며 말을 돌렸다. "다음 반찬은.....계란말이?" 고개를 숙이며 슬그머니 또 웃고마는 그녀를 보며 은규는 바짝 약이 올라 버렸다. '저 미소를 하루종일 그리워했다고?머리가 어떻게 되었던게 분명하지.' 괜한 화풀이로 그는 입 안에 담긴 음식물들을 포악하게 씹어댔다. '난감하군.' 마음 편안게 반신욕을 하라며 예은이 준비해 둔 거품 욕조가 손짓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옷이 벗겨지질 않았다.벌써부터 이 모양인데 과연 혼자서 샤워까지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옷을 벗는데 성공한 은규는 오른팔이 물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며 거품 욕조 안에 들어앉았다.뜨끈한 물과 함께 터져 나오는 수증기가 굳혀진 돌 근육 이리저리로 스며들었다. 딸칵. 10 분쯤 온기에 심취해 있던 은규는 문 열리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수야냐." 이 시간에 녀석이 올 리 없었지만 그 외엔 들어올 만한 사람이 없었다.아무런 대꾸가 없자 근육들이 일제히 팽창하기 시 작했다.각종 불길한 상상들도 파노라마처럼 뇌 속 구석구석을 휘저어 댔다.그런데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너무도 가뿐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떠오르는 가정들을 애써 부정하며 욕조 문을 바라본 은규의 시야로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들어왓다. "뭐하는 거야?"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팔까지 걷어붙인 예은이 거품 위로 드러난 그의 단단한 상체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도와주려구요." 저 여자,미친 게 분명해. "필요없어!"


예은의 대담함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왼손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에요,자,부끄러워 말고..." "내가 알아서 해.어서 나가!" 엄격한 소리로 말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대신 스펀지에 비누칠을 한후 거품을 내며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팔에 물 닿지 않게 신경이나 써요.지금 부상이나 당하고 있을 때 아니잖아요.어차피 당신한테 나 매력 없는 여자 아니 에요?뭘 그렇게 의식하고 그래요." 그녀는 곧 그의 가슴에 스펀지를 가져다 대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바짝 말라붙은 핏자국들을 찾아 문지르기 시작햇다. "이놈의 붉은색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질 않는다니까..." 꼭 깨물고 있는 입술과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숨결 하나에서조차 그녀의 걱정이 묻어나고 있었다.집에 들어선 후 줄곧 보였던 그녀의 장난기 넘치는 태도를 모두 걱정과 놀람을 숨기지 위한 위장술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런 순 수한 마음 앞에서 잔뜩 열이 올라 버린 자신이 싫었지만,얼마남지 않은 자제심이 이 자극적인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돌아앉아요." 그의 생각을 비웃듯 예은은 사무적일 정도로 딱딱하게 주문하곤 그가 돌아앉자마자 등 곳곳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이성이 흐려진다.심장이 질주한다.근육들이 경직되고 호흡이 불규칙해졌다.도망치는 소리가 들려왔다.이성이.인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며 재빠르게 후진하고 있었다. "후..." 최악의 최악까지 버티던 은규는 몸을 틀어 예은의 팔을 붙들었다.그리고는 어렵게 입을 열어 후끈해진 공기를 거칠게 갈 랐다. "그만 해." "그냥 날 엄마라고 생각해요." 이런 순간에 농담을 건넬 수 있는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가만,언제부터 상황이 이리 뒤바뀐 것일까.안달하는 그녀의 감정을 밥맛없는 소리로 잘라대며 인조인간 취급받던 건 언 제나 그 자신이었다.그런데 지금 우는 소릴 하는 건 젠장 맞게도 그녀가 아니었다. 얄팍한 예은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이 손을 당겨 그대로 욕조 안으로 초대하고 싶은 욕망이 밀물과 썰물처럼 반복해 드나들었다. ?! 최적의 타이밍에 그녀가 그의 머리 위로 한 바가지의 물을 부어 버렸다. "이제 머리 감을 차례에요.' 젠장.정신 차리라는 소리였다.은규는 조용히 예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눈 감아요."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손가락들이 그의 머리카락위에서 조몰락대기 시작했다.샴푸 냄새가 진동을 하며 욕실


내부를 채웠고,뒤를 어루만지는 손가락에서 친절과 염려가 한가득 묻어났다. "물 뿌릴게요." 다시금 머리와 온몸 위로 미지근한 물이 흩뿌려졌다.예은은 어느새 수건을 꺼내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손수 물기까지 짜 주었다.수건과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숨길 수 있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이었다.지금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되면,그렇게 되 면.... 또 다시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욕실 밖으로 사라졌다.그제야 욕조에서 일어난 은규는 묵직한 고통에 신음하며 찬물을 틀었다. 가슴이 쉬이 진정되질 않았다. 두 눈을 감고서 욕실 문에 기대어 선 예은은 빠져나간 힘을 보충하기 위해 천천히 호흡하고 있었다.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넓은 어깨와 촉촉한 물기에 젖은 견고한 가슴.그리고 적당히 윤곽이 잡힌 근육들까지,그는 정말 섹시한 남자라는 사실을 지나칠 만큼 의식하게 만들었다. 거품 경계에 숨어 있을 배꼽 아래쪽은 감히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자꾸만 멋대로 그려지는 영상은 시야를 닫는다 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그래서 마음속으로 우스꽝스런 동요를 몇번이나 읊어댔는지 모른다. 혹,이 감정 상태를 들킬까 싶어 전전긍긍하기에 바빠,언제나 절제 있게 행동하던 그가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은 즐길 사 이도 없었다.마치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숨을 바짝 들이마신 사람처럼,호흡 한 번 잘못 내쉬었다가는 거대한 사건이 일어 날것만 같았다. 욕실 문으로 다가오는 묵직한 걸음 소리에 예은은 깜짝 놀라 재빨리 침대로 몸을 날렸다. 잠깐.내가 왜 침대에 누웠지?하며 어이없어 해도 생각이 결여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다른 때처럼 그가 목석이 되어준 다면 감정을 얽어매는 일이 훨씬 수월할 텐데 오늘의 은규는 조금 이상햇다.이렇게 된 이상 이대로 잠드는 편이 여러 모로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도,이성도,수면이란 이름 아래 모두 정지시켜 버릴 수만 있다면,,,, 예은은 눈을 질끈 감고서 정신이 몽롱해지길 기다렸지만,시야가 차단돼 예민해진 귀는 그의 기척만 더욱 생생히 전달해 줄 뿐이었다. 저벅저벅,그가 걷는소리.수건으로 머리를 털어 말리는 소리.냉장고 문을 여는 마찰음에 이어 달칵.켜지는 소리.... '오예은,너 뭐하는 거야!' 다시 한번 눈을 감아 보아도 정신은 왜이리 더 말짱해지는 것인지.정말이지 울고싶은 심정이었다. 곧이어 침대로 다가오는 그의 발소리에 생각의 봇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티내면 안 돼.잠들지 않았다는 걸 눈치


채게 해선 안돼.격렬할 정도로 읊조리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폭주하기 시작한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것만 같았다. 그가 앞쪽에 우뚝 서자,예은의 얼굴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후.... 다시 한번 숨소리가 들려오더니 익숙한 담배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오랫동안 그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고,실눈이라도 떠보고싶은 마음에 그녀의 가슴이 안달했다.결국 갑자기 다가와 살며시 입술 윤곽을 훑는 거친 손길에 움찔하며 예은은 스르르 눈을 열고 말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향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chapter 53 ==열정,충족감,나른함,아플 만큼의 강렬한 쾌락... 소녀와 여자라는 갈림길에서 이제까지의 나와 이별했다.==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모르겠다.정말로 모르겠다... 이 끌림의 근원이 무엇인지,어디까지 허락해도 좋을는지,단순한 욕망이든,그보다 생명력이 좀더 긴 진보된 감정이든, 중요한 것은 한계에 도달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깨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애써 잠을 청하고 있다는 사실도.하지만 냉수를 뒤집어써 온몸이 시베리아에 다녀온 사람마냥 바짝 얼어 버렸는데,도무지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는 묵직한 고통앞에서 그녀의입장 이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괴로웠다.힘겨웠다.마음껏 풀어 이제좀 편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키스했지만,일단 시작하고 나니 멈출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당겼던 방아쇠를 놓는다고 이미 날아간 총 알을 다시 거둬들일 수 없듯,그녀를 향한 끌림 역시 절제구간을 지난 지 이미 오래였다.서툰 욕망에 투박해진 몸으로 작 고 순결한 예은의 몸 전부를 덮어 버린 순간,냉기가 사라진 보드랍고 작은 얼굴을 소중히 감싸 쥐며 은규는 숨결과 타액과 열혼이 오가는 키스를 퍼부어 댓다. "으,,....은규 씨...." 작은 헐떡거림과 함께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지만 이내 다른 쪽 귀로 빠져나갔다. "당신 팔....괜찮...." 바보 같은 여자.포효하는 동물의 감각을 내세워 자신을 삼키려 하고 있는 약탈자의 팔이나 걱정하고 있는건가.지금? 그러나 그녀도 모르고 있다.여기서 멈추게 되면 이깟 팔의 통증과는 비교도 할수 없을 만큼 가슴이 많이 아프게 될것이란 사실을. 살기 위해 그는 멈추지 않았다.시작하기까지는 백 번이고 천번이고 생각하며 신중을 기하지만, 한번 마음먹으면 거침없이


폭발하는 인간이었기에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예은이 미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은규는 허기진 혀로 그녀의 입안을 가득 채우며 얇은 티 쪼가리 안에 손을 넣고 속옷 을 벗겨 내렸다.단 몇 초 만에 눈앞에 드러난 새하얀 가슴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그녀를 여자로 강하게 의식하게 만들었다. "은규 씨..." 끌어올려진 옷 사이로 드러난 가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은규는 살포시 들려온 떨리는 목소리에 처음으로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그리곤 바로 후회하고 말았다.혼란스런 기색을 가득 담은 눈동자가 불도저 같던 마음에 강한 브레이크를 걸었기 때문이다. "마음 없이 이러는 건 짐승이나 하는 짓이에요." 짐승?그럴지도 모른다.이렇게 심한 말을 들어놓고도 여전히 그녀를 갖고 싶어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으니 짐승과 다를게 무에 있을까 "그래서 묻고 싶어요.당신 이러는거.정말 순수하게 날 원하는 마음 때문이에요?" 일단 대답을 해야 하는데 구사할 수 있는 단어들이 머리 속 구석구석으로 흩어져 버렸다.설사 할수 있다 하더라도 정이 묻어난 소리를 상냥하게 전하는 데 익숙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말을 아끼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원하는 상대에게 얼마든 제공되는 커피 리필처럼 몸을 쉽게 굴리는 여자가 아니었으니,상대의 마음을 확인한다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되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손을 들어 은규는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작은 얼굴에서 치워주었다.그리곤 잔뜩 쉬어 버린 목소 리로 겨우 입을 떼었다. "당신이 처음이야." 예은의 눈동자가 커졌다. "처음...?"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한 여자,갖고 싶다고 생각한 여자." 믿기 어렵다는 듯,예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이요하지 말라고 했었지,하지만 그것조차 처음이야.여자를 품어 현실을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그 어떤 순간에도 해본적 없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욕망은 기하급수적으로 부풀어 고통은 배가 되었다.하지만 그녀가 멈춰 있는 지금,혼자서 앞 으로 나아갈 수는 없었다.그것이 아직 이성이 남아 있다는 미세한 증거였다. "이런 마음이 순수한 건지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어.당신이 정해." 정상적인 호흡을 하지 못한 채 거친 숨을 토해내는 은규를 보며 예은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이미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 카락과 목덜미가 무언의 답을 들려주고 있었기에,그녀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움켜쥐고 있던 손을 펴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처음.....이에요,나." 잠시 동안 멍한 표정으로 예은을 내려다보고 있던 은규는 잔뜩 쉰 소리를 냇다. "마찬가지야." 생각의 끈이 잘려 나가고 나니 자꾸만 틈을 만드는 옷이 거치적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단번에 그녀의 상의를 벗겨낸 은규는 다리 사이 공간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간편한 흰색 반팔티를 던져 버렸다. 바닥 위로 옷가지들이 ���나둘 쌓여 가기 시작했다.그녀의 바지,그의 바지,벗은 몸을 유일하게 방어하고 있던 그녀의 작 은 팬티,그리고 그의것도. 겨우 솔직한 모습이 된 두 사람은 거친 호흡과 열정으로 서로의 몸을 삼킬듯 바라보았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군." 그녀의 옷을 벗길 생각은 없었는데,그 안에 숨겨진 속살을 확인하고픈 마음도 없었는데,여자와남자라는 구별이 없었던 그의 인생관에 그녀가 처음 여자로서 발을 내딛은 순간부터 어쩌면 이미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좀처럼 떨어질 것 같지 않은 흡입력으로 예은의 입술을 탐닉하던 은규는 고개를 살짝 틀어 귓가에 숨결을 불어 넣었다. 동시에 방안 가득 신음 소리가 울려 퍼졌고,두사람 모두 열정의 도가니 안에서 흠뻑 젖어 버렸다.그녀의 하얀 목을 핥고 깨물던 은규가 입술을 녀려 가슴을 물자,다시 한번 자극적인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젠장,이 여자 목소리가 이렇게 섹시했었나?발끝까지 이찔한 신호가 퍼져 하마터면 시작도 못하고 끝낼 뻔했다. "은규 씨.."" 그녀의 목소리가 자꾸만 욕망을 증폭시켰다. "천천히...천천히 해요." 하지만 생각과 몸은 이미 오래전에 분리돼 버렸고,이 엄청난 고통 끝에 자리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에 열심히 오 르고 또 오를수 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브드럽고 향긋한 가슴,평평한 배와 잘록한 허리,기다란 배꼽,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것들...그녀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를 잡고 쉬이 놓아주지 않았다.시가과후각과 청각을 뒤흔드는 유혹을 가장한 공격..이건 정말이지 엄청난 고문 이었다. 슬며시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온 그녀의 손에서 미세한 떨림의 잔해를 느끼며 은규는 좀더 확실히 예은의 다리사이로 자리를 잡았다.처음이라고 말한 그녀에게 최고의 기억을 만들어 주고 싶은데 그 역시 경험이 없었기에 본능을 믿고 따르며 줄곧 피해왔던 예은의 여성을 손가락 끝으로 느꼈다. 몸을 뒤틀고 움찔하며 그녀가 무언의 속삭임을 보내온다. 어서 시작해요.이제 그만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줘요... 다시 한 번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덮으며 은규는 묵직한 욕망에 잔뜩 성이 난 자신의 몸 일부를 그녀 안으로 어렵게 이끌 었다.


'젠장,이건 또 뭐지?'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픈 쾌감이 그의 몸을 관통했다.아직다 온전히 그녀 안으로 들어서지 못한 채.은규는 주먹을 움켜 쥐고서 온갖 자제심을 끌어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천천히,제발 천천히...' 그러나 뭔가 엷은 막이 앞을 가로막은 느낌이 다시 멈출수 밖에 없었다. 처녀막,아니,지금까지의 그녀를 잃어버리게 만들 판도라의 상자. 땀으로 흠뻑 젖어 붉게 달아오른 예은의 몸 위로 은규의 땀방울이 쏟아져 내렸다.이 막을 찢어야만 하는데,얼마나 아플 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 겁이 났다.죽어도 그녀를 아프게 하고 싶진 않았다.여기까지 끌고 와 버려 미안한 마음만 가득했 기에 관계를 통해 느낄수 없을 만큼 막중한 무력감을 동반해 왔다. "나...죽을 것 같아요." 들썩이는 예은의 젖무덤에서 배꼽까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녀 역시 온몸의 신경과 근육을 건드린 자극이 끝까지 차올랐는데 해소하는 방법을 알 수 없어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조금만 참아."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한 손을 내려 경직된 여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약속했다. "곧 끝내줄게." 말을 마치자마자 은규는 간결하고 빠르게 그녀의 막을 찢었다.날카로운 신음을 흘리며 본능적으로 다리를 오므리는 예은 이 안쓰럽게 느껴져 조심스레 얼굴을 보듬어 잡고 이마에 키스를 흩뿌렸다.조금 더 기다려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의 몸은 벌써 본능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예은의 눈이 열렸다.물기와 혼란에 젖어 흐릿해진 눈동자가 마치 지금 자신과 몸을 섞는 사애가 누구인지 똑똑히 확인하겠 다는 듯 애절하고 긴박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그래...나야." 그녀의 입가로 살포시 미소가 걸려들었다.은규는 저도 모르게 움직임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고 제동을 걸어 보았지만 이 젠 정말 어쩔수가 없었다. "미안,미안해..." 매번 더 깊이 예은의 따뜻한 속살 안을 파고들며 은규는 잔뜩 조갈난 사람마냥 멋대로 그녀를 시음했다.그래도 모자랐다. 더 세게끌어안고,더 거칠게 몸을 부딪쳐 풍족할 정도로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싶었다.본능적으로 커다란 손을 그녀의 엉 덩이로 가져간 은규는 살짝 들어 올려 조금이라도 가깝게 그녀를 안기 위해 노력했다. "은규 씨..."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예은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그래서 그녀가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했던 쇄골 부분에 고개를 묻곤 힘 껏 빨아 흔적을 남겼다.침대가 삐걱대도 스프링이 꺼질 만큼 그의 움직임이 빠르고 격해지자,등 뒤로 그녀의 손톱이 어깨 위론 딱딱한 이의 자극이 느껴져 왓다. 30 년을 넘게 참아왔던 욕망,아니 그녀를 알기 전까지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던


욕망,이제 그 끝이 보였다. 조금만,조금만 더... 몸을 들썩이던 예은이 긴 다리를 그의 허리를 휘어 감았고,덕분에 은규의 몸은 뿌리째 그녀 안으로 담겨갔다.세상에 존재 하리라 생각지 못했던 강하고 극렬한 쾌락에 그는 기꺼이 이성을 버리고 폭주하는 맹수가 되었다.점점 더 옥죄어 오는 육체와 땀내에 섞여든 아스라한 향기는 쾌락조차 넘어선 부서질 듯한 통증이었다. 예은은 이전까지와 전혀 다른 소리를 내며 온몸을 떨었고,이 욕망의 끝 세계에 먼저 도달한 양 근육을 수축시키며 괴롭 고도 행복한 이중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망할,이제 몸을 배내야 했다.그렇지 않으면 그녀 안에 자신을 뿌리게 되고 말 거라는 경각심에 자제심을 끌어 모았지만 어떻게 해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도리어 더욱 깊숙이 파고 드는 본능적 욕구에 그의 몸은 중심을 잃고 멋대로 삐걱댈 뿐이었다. 따뜻하고 향긋한 예은의 목덜미에 이를 박아 신음을 억누르며 은규는 마침내 자신을 풀어 버렸다.그간의 고통과 염려,배 신과 사리사욕에 물든 현실에 긁힌 상처,앞으로도 혼자 이고 가야 할 고뇌와 무게와 책임,그 모든것들이 한데 풀려 이 연 약한 여인에게로 전이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땀으로 뒤덮여 무엇으로도 풀 수 없는 고리 안에 갇힌 두사람의 육체는 함께 호흡하며 기다렸던 세계의 끝에 도달했다. 흐느끼고 소리치던 예은의 다급한 손을 들어 그의 몸을 껴안았고,기진맥진한 팔로 그녀를 마주 안으며 은규는 아플 정도로 강렬한 쾌감에 압도되어 두눈을 감았다. 첫 여자... 그녀가 그의 첫여자가 되었다.알 수 없는 행복감에 도취된 그는 남아 있던 순결의 한 조각마저 기꺼이 그녀에게 바쳤다. 부드럽게 이마를 쓸어주는 누군가의 손길에 예은은 살며시 눈꺼풀을 열었다. 은규의 손이 그녀의 이마를 매만지고 있었다.담배를 문 채 저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는그를 감상해 볼 양으로 예은은 잠시 엎드려 있기로 했다. 온몸 구석구석 쑤시지 않은 곳이 없는데다 엄청난 에너지 소비로 속이 텅 비어 버렸지만 왠지 이 침묵을 깨선 안될 것 같 은 기분이 들었다. 꼬르르륵, 하지만 이런 순간에 사고를 치지 않으면 오예은이 아니지.어두운 정적을 가르며 힘차게 울린 소리에 그가 시선을 내렸다. "미안해요.." 은규는 잠시 화롯불이 되어 버린 예은의 뺨을 주시했다. "뭐가." "그게,방해한 것 같아서.." 여전히 침묵한 채 그는 꽤 오랜 시간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리곤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몸은." "네?" "괜찮냐고." 일시에 길고도 격렬했던 지난밤이 떠올라 예은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당신은...요?" 그제야 굳어 있던 은규의 입매가 미세하게나마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덕분에." 예은 역시 환한 미소를 보내며 자신의 머리카락 위를 배회하고 있는 은규의 손을 살며시 붙들었다.순간,그의 눈동자가 얽 혀 있는 두 사람의 손길로 내려앉았다.마치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는 듯 놀란 기 색이었다. 뭔지 모를 어색함이 기웃거렸다. "아,배고프네요.뭐라도 좀 먹을..." 달아날 생각으로 몸을 일으키던 예은은 다리 사이로 느껴진 통증에 주춤했다. "왜 그래." "아니에요,그냥 맥이 좀 풀려서." 알 수 없는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던 은규는 한숨을 흘리며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먹고 싶은 게 뭐야." 예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해줄...거에요?오른손은 쓰지도 못하는데." 그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어렵사리 바지를 갖춰 입고 있었다. "괜히 오버하지 마 손가락 정도는 쓸수 있어." 가슴이 따뜻해졌다.그의 배려에 목이 멜 것도 같았다. "음,,,뭐가 좋을까.' 어느새 어색한 분위기를 떨쳐 버린 예은은 장난스레 눈을 굴렸다. "랍스터!" "뭐?" 어이없어 하는 은규의 반응에 예은은 슬쩍 말을 돌렸다. "....가 아니고,연어 스테이크!" "꿈 깨." "그럼 ,야끼소바!" "국수 빼고 뭐가 들어가는지도 몰라." "탕수육은요?" "시켜줄 수는 있지." 예은은 그대로 팔짱을 끼우며 눈을 흘겼다. "그럼,대체 뭘 할 수 있는데요?" 바닥에 널브러진 면 티를 탁탁 털어 어렵사리 뒤집어쓰며 은규가 입술 끝을 들어올렸다. "지금 상태라면 라면 정도," "엑!" 예은은 웃음을 터뜨리며 냄배에 물을 붓는 그의 모습을 열심히 눈으로 쫓았다.믿기


힘든 풍경 안에 자신의 첫남자가 서 있다는 사실이 따뜻한 피를 들끓게 햇다. 그의 품에 안긴 내내 소중한 존재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몸을 찌르면 녹색피가 흐를 것처럼 냉랭하던 사람.아무리 두 드려도 대답이 없는 암벽 같던 사람.그가 자신 때문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다.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다. 그래서 세상을 얻은 것보다 더한 충족감에 빠져 자아를 상실한 채 날뛰는 요부가 되고 말았다. "몇개면 돼." "두개요." 은규의 눈썹이 삐죽 올라갓다. "욕심 부리지 말고." "글쎄.두 개라니까." 그의 눈이 웃었다. "뱃속의 거지는 빨리 처단하는게 좋지." "한눈 팔지 말고 물 양이나 제대로 맞추시죠." "그런 건 기본이라 눈 감고도 해." 이상으로 삼아왔던 가정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 속에서 솔솔 풍기는 라면 냄새를 맡고 있자니,예은은 문득 행복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쩌면 행복이라는 건 거창한 게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그 자체가 아닐까. "다 됐어." 은규가 식탁 위에 상을 차리자,예은은 시트로 몸을 휘감은 채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다시주저앉고 말았다. "아...." 따끔 거리는 아픔은 고사하고 한껏 풀린 다리에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다시금 어두워진 표정으로 예은을 물끄러미 주시하던 은규는 작은 상을 꺼내 라면과 김치를 옮기곤 침대로 걸어와 그녀의 무릎께에 내려주었다. "아직도 출혈이 있는거야?" 머뭇거리며 들려온 질문에 예은의 목까지 새빨간 색으로 덧입혀졌다. "아니요!" 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왓다. "다 먹고 나서 뜨거운 물에 좀 들어가 있어." 예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아프면 얘기하고." 몸은 조금 괴로웠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개운하다는 걸 그는 알까. 예은은 활짝 웃는 얼굴로 라면 가닥을 쪽쪽 빨며 아이처럼 소리쳤다. "라면 맛 죽인다!" 다시 잠든 예은을 또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 여자가 진짜 내 아내라면 어떨까.....' 평범한 일상들을 한번 상상해 보았다. 아침 8 시면 출근해 하루종일 직장 일에 힘쓰고,잠시 잠깐 집에 전화를 넣어 서로의


신뢰를 확인한다.그러면 아내는 고 생하는 남편을 위해 친히 장을 본 후 찌개와 반찬을 준비하고,녹초가 되어 퇴근한 남편은 구수한 냄새와 그 앞에서 분주한 아내를 보며 활짝 미소 짓는다.. 여느 집안에나 있을 법한 가정의모습.누군가 미행하거나 술수를 부리지 않을까 싶어 전전긍긍할 이유가 없고,아내가 검은 손들에 휘말려 찢기고 상처날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일상들. 가정을 소망했던 적은 없었다.밑바닥까지 추락해 흉한 꼴만 보이다 결국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을 냈던 부모님의 결혼 생 활을 통해 남녀의 사랑만큼 부질없는 것이 없으며,판이한 인생을 산 두 인격체를 한 공간 안에 몰아넣는 결혼제도가 사랑 이란 약발이 떨어진 인간을 얼마만큼 추한 꼴로 몰아가는지 진저리나게 실감하고 눈에 넣을만큼 넣었다.그런데 그는 이미 그 결혼이란 형식안에 속한 것도 모자라,진실을 담고 싶단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어느 틈에, 무엇 때문에, 가질 수 없는 것들을 향한 소망을 자꾸 일으켜 세우는 그녀가 너무 크게 느껴져 겁이 났다.현재 생활에 불만은 없었다. 심지어 백곰이 곁을 떠났을 때조차 이 길에 들어선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그런데 요즘 들어 그는 뒤돌아서서 지나온 길을 곱씹는 일이 잦아졌다.저 여자가,작고 작은 여자 하나에게 무슨 힘이 담겨 있기에..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는 통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잠결이지만 소리가 거슬리는지 예은이 한 번 꿈틀했다. "여보세요." [여전히 나무토막 같군 그래.] 한순간 은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정재....?" 온몸 구석구석 따뜻한 기운이 퍼져가기 시작했다.여정재.그는 샙겨의 작은 아버지인 동시에 학업을 같이 한 동기 이상의 친구로,새벽의 결혼식을 올린 직후 여씨 가문의 자부심이자 부의 근원인 하루 그룹 미국 지사로 발령이 나 떠났다. 몇 달에 한 번 꼴로 짧은 통화는 했지만 근 반년 동안은 통소식이 없어 섹시한 금발 미인 하나 건졌나 싶었던 차에 뜻하 지 않게들려온 목소리는 구겨졌던 안면이 확 펴질 만큼 반가운 것이었다. "너야말로 무사하냐.난 또 하도 연락이 없어 테러라도 당한 줄 알았지." 전화기 저편에서엄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왓따. [말도 마라,아버지가 어찌나 달달 볶아대는지 멸치 다 됐다니까] 워낙 몸이 좋던 친구라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말이었다. "참,제수 아기 낳은 거 알지?" 은근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제 조카딸을 마치 여동생처럼 사랑해,새벽이 택한 상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현석과 힘 들때 적극적으로 도와준 장본인이었기에 그에게 아이 소식은 아마도 남다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예뻐??새벽이 많이 닮았든?]


어쩔 수 없는 흥분과 기대감이 서린 목소리에 은규는 밉지 않게 핀잔을 주었다. "정 궁금하면 날아오면 될 거 아니야." 핸드폰이 날아갈 만큼 엄청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누구 놀리냐?갈 수 있는 상황이면 내가 왜 여기서 엉덩이 붙이고 있게?하루에도 수십번을 눈에 아른거려 꿈까지 꿀 정도인데] 은규의 표정에 미세한 염려가 서렸다. "그렇게 바쁘냐." [벌려놓은게 좀 많아야지.당장 내가 없으면어긋나는 일들 뿐이라 팔다리,온몸,다 묶여 버린 형편이다.] 은규가 피식 웃자,정재가 넌지시 물어왔다. [그나저나 내가 진짜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들어서 그러는데 확인 좀 해도 되겠어?] 본능적으로 이어질 질문을 간파한 은규는 얼버무렸다. "또 무슨 소리 하려고 그래." [결혼했다며.] 은규는 잠시 침묵했다. [새벽이가 엄청 흥분해서 얘기하는 바람에 재대로 못 들었는데 뭐야?진짜냐 그거?] 괜한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 그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래." 낮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왓다. [얌마,나 진짜 쇼크 먹었어.천하의 막대기 황은규를 무너뜨린 여자가 드디어 나타났단 말야?어떤 여자인지 무지 궁금 하네...이야...] 예쁘냐.아니면 꼭두각시처럼 고분고분하냐....대포처럼 터져 나오는 질문에 은규는 침대로 시선을 돌렸다. 저 여인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다.빨간색.하얀색.노란색.다 갖춘 여자를. "궁금하면 직접와서 확인해.대답하기 귀찮다." 한바탕 우는 소리를 지르며 씩씩대던 정재는 제법 진지해진 목소리로 확인했다. [당연한 질문이지만 ,사랑해서 한 결혼이겠지?] 갑자기 말문이 막혀 버린 은규는 한동안 담배만 뻐끔뻐끔 피우다 뿌옇게 흩어지는 연기를 혼란스런 시선으로 쫓았다. "사랑이 뭐냐...난 아직 잘 모르겠다." [불합리한 제도니,전쟁이니.읊고 또 읊어댔던 결혼이란 거 그걸 할 마음이 생긴게 바로 사랑인 거지 별거냐.쨔식.] 닮고 싶을 만큼 명쾌한 목소리였다.

chapter 54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방법은 그리 어려운게 아니야. 내가 상대의 약점이 되고 말았다는 깨달음,그거 하나로 충분하거든.실은 아주 간단한 거야.안그래?==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


어떻게 해도 감출 수 없는 흔적에 거의 30 분을 씨름했다. 머플러를 둘러도 가려지지 않는 교묘한 위치 곳곳에 자리한 이 흔적들은 사랑을 나누던 밤,그가 격렬히 빨아댄 훈장이었 다.미팅을 위해 곧 나가 봐야 하는 처지인지라 조바심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지만,그렇다고 이 날씨에 목까지 올라오는 옷을 입을 수는 없는 일.소품 상자를 뒤져 멋은 없지만 최대한 길고 두꺼운 머플러를 골라내 깁스 환자 마냥 목에 둘둘 감는 것으로 대충 합의를 보았다. 그 밤 이후,그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최대한 일찍 외출해 최대한 늦게 귀가했고 그녀가 잠든 후에야 멀찌감치 침대에 들었다.사랑을 나누던 밤,친히 음식을 대령하고 몸상태를 체크해 주던 그는 강렬한 태양 빛에 말라 공기 중으로 흩어진 것 같았다. 아마도 무언의 방식으로 자신의 뜻을 전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날 일은 충동적인 실수였으며 다시는 반봅할 생각이 없다는 의지의 표명. 고작 한 번의 관계로 그가 발치에 무릎을 끓고 사랑의 세레나데를 읊는 로맨티스트가 되리라 생각했던 것도 아닌데 이렇 게까지 흔들리는 자신이 한없이 어리석게만 느껴졌다.아직도 뚜렷한 그의 흔적이 사지에 자리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대우를 받아야 하는 함량미달의 여성스러움이 그저 원통할 따름이었다. "목 다쳤냐?"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차에 올라타는 그녀를 보자마자 시준의 얼굴 위로 염려가 스쳤다. "아니,왜?" "뭘 그렇게 둘둘 말고 있어?날도 더운데." 이 눈치 삼단 인간에게 거렸다가는 일이 꽤 재미없어지고 말테니 조심하자며 예은은 스르로에게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나 우널래 뭐 두르는거 좋아하잖아.감기 기운이 있는지 좀 으슬으슬하기도 하고." 어색하지 않도록 콜록대는 기침도 한 번 찔러 넣어주자 시준은 아무 말 없이 운전에 집중했다. "달력에 빨간 표시는 해놨냐." 갑자기 뒤바뀐 화제에 어리둥절했지만 바짝 켕기는 목에서 관심을 돌릴 수 있었으니 일단 안심이엇다. "무슨 소리야?" "너 귀 빠진 날이잖냐.22 일." 전혀 깜깜이라는 듯 예은이 멀뚱거렸다. "우리 글쟁이가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네.연중행사를 빼먹다니." "그거 졸업한 지가 언젠데 그래?": '연중행사'라 함은 매년 새로운 달력이 나올 때마다 생일 날짜를 찾아 알록달록 꾸며놓는 일을 뜻했다.양력 생일이야 잊 어버릴 이유가 없지만 음력 생일을 챙기는 사람은 매년 확실히 확인해 두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기 십상이었다. "22 일이구나.이번 년도 내 생일..."


요란하게 친구들을 불러 파티할 나이는 지났지만,그와 함께 맞이하는 첫 생일인지라 기분이 남달랐다.피에 굶주린 뱀파이 어에게 한 번 빨리고 버림받은 신세와 다를 바 없었고,누군가 귀뜀해 주지 않는다면 그가 알 턱도 없었지만 마음이 들뜨 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 현상이었다. 팔짱을 끼고 앉아 생각하는 로댕이 된 누이를 흘낏거리던 시준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남편에게 생일 정보를 어찌 흘릴까 고민하는 눈치인데 어쩐다,이 몸이 나서줘? 뭐,생일 선물로 쪼르르 말을 옮기는 쥐가 되는 것쯤이야 별 어려움 없이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무엇보다 제 아내의 생일을 알고 난 후 보일 흑사의 반응이 더욱 궁금했다. "감기라도 걸리셧습니까?" 김 피디는 줄곧 예은의 머플러를 곁눈질하고 있었다.꽤나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아,네 약간." "그렇다면 그건 식은땀이군요." "뭐,그렇죠." 제발 이난감한 화제에서 좀 벗어났으면 좋으련만 오늘따라 날은 왜 이리 후텁지근한지 머플러가 둘린 목 부근에 땀띠가 돋을 지경이었다.하지만 어떻게든 결연해 보이기 위해 무리하며 오빠 앞에서처럼 몇 번 콜록대 보이자,놀랍게도 김 피디 의 반달눈이 제 모양을 찾았다. "뜨거운 차라도 드시는게 좋겠어요." 차라리 날 죽이시지! "아니.됐..." 그러나 그는 이미 아주 뜨겁게 달군 특제 유자차를 주문한 후 염려하지말라는 듯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고마........워요." 비록 표정은 돌 씹은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어렵사리 감사의 뜻을 전하는 그녀에게,김 피디는 다이어리와 각종 아이디어가 적힌 문서들을 내려놓고서 컨디션이 좋지않아 보이니 일이야긴 여기서 접자며 화제를 돌렸다. "애인 있으십니까." 의외라는 표정으로 예은은 안경 너머 반달눈을 바라보았다. "나이가 있으니까요." 혹시라도 이 사내가 자신을 여성으로 의식하고 있을까 싶어 일단 거짓으로 선을 그었다. "어떤 남자인지 궁금하네요." 웃을 땐 말할 것도 없고,웃지 않을 때 이사내의 눈은 묘하게 매력적이었다.쌍거풀이 있는것도 아니고 특별나게 큰 것도 아닌데 서구적인 느낌으로 깊고 시원햇다.게다가 자세히 보니 동양인의 눈으로선 지나치나 싶을 만큼 투명한 갈색 빛까 지 머금고 있었다. "제가 한번 추측해 봐도 될까요?"


있지도 않은 애인 이야기를 하려니 왠지 겸연쩍어져 예은은 시큰둥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만약 신상 명세나 생김새에 대해 자꾸 캐물어 곤란해지면 흑사양반을 잠시 빌리는 수밖에... "일단 말이 없을 것 같군요.감정 표현을 잘 안 할 테고." 제법 들어맞는 추론에 예은의 눈동자가 커다래?다. "무척 남성다운데다..헤비 스모커?" 마치 은규를 알고 있는 것처럼 그는 끔찍하리만치 정확하게 짚어냈다. "어?김 피디님,점쟁이였어요?" 반달눈이 고개를 저었다. "오 작가님과 정반대의 사람을 그린 것뿐입니다.사람은 원래 자신과 다른 종류의 인간에게 끌리는 법이거든요." "그럼,담배는?그 사람 정말 무지 피워대거든요." "말없는 남자들 중 대부분은 애연가죠.시종일관 입을 틀어 막고 있어야 하니까요.게다가 가끔 오 작가님한테서 담배 향 내가 날 때가 있습니다.피우지 않으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애인이구나,라고 생각했죠." 꽤 그럴싸한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는 ?느을 보며 김 피디는 반달눈을 지우곤 기습 질문을 했다 "사랑하세요?옆에 있는 그분." 누구나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었으나 예은은 가슴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깊은 생각의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그를 어떤 감정으로 대하고 있나.그 사람에게 있어서 나는 어떤 존재일까.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였다.아니,은연중에 뒷전으로만 미뤄왔었다.머뭇거리는 그녀에게서 곤란함을 눈치를 챈 김 피디는 유자차를 한 번 더 재촉햇다. "컨디션이 좀 나아지신 것 같으니 일 얘기를 계속할까요?" 억지웃음을 피우며 예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새벽과 현석.그리고 아기를 뒤에 태운 채 은규는 조심스레 운전대를 잡았다.오른손이 자유롭지 못했지만 기어가 오토라 운전하는 데는 큰 영향이 없었다. "고마워요.아주머님!베스트 드라이버 운전 솜씨에 우리새현이.세상모르고 자네요." 저놈의 아주머님 소리는 몇 년을 들어왔는데도 영 귀에 익질 않았다.백미러로 보이는 새벽의 환한 미소와 입이 쭉 찢어진 현석의 모습이 꼭 파라다이스에 떨어진 단란한 가족의 구성원 처럼 보였다. 형구의 말이나 행동 하나까지 살피느라 수야는 요즘 수족이 묶여 있는 형편이었고,가슴에 뭉쳐 썩고 있는 고민으로 인해 은규역시 여간 정신이 사나운 게 아니었다.우습게도 그중 가장 큰 고민거리는 배신자의 존재도 뭣도 아닌 오예은이란 여자 였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하룻밤.그의 거친 행동으로 인한 휴유증에 시달리면서도 내색 않으려 애쓰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고문이었다.하지만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그녀의 상태를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금 충만히 안고 싶어한는 미개한 욕망 덩어리를 단번에 토해 내치고 싶었다. 지금은 단순히 거리를 두는 것으로 이겨내고 있었지만 언제까지 버틸수 있을지 자신이 그다지 자제심이 강한 사내가 아니 라는 깨달음을 얻고 나니 하루하루가 고역이요.치열한 투쟁일 뿐이었다. 그 참에 새벽이 퇴원한다는 소식이 들려와 제 발로 운전기사를 자처했지만,아무래도 잘못된 판단인 듯 싶었다.잡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티내지 않고 조카를 훔쳐볼 좋은 기회라고만 여겼지.저 닭털 날리는 한 쌍까지 참아야 한다는 사실은 미처 계산에 넣지 못했다. "어?눈 떴다!" 하늘이 쪼개지기라도 한 것처럼 현석이 크게 소리쳤다. "눈이 정말 왕방울만 한데!" 엄청난 과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은규의 시선 역시 자꾸만 룸미러를 흘낏거렸다. "세..세상에!지금 웃었어요,그죠?우리 새현이 웃은 거 맞죠?" "조금있으면 엄마라고 했단 소리도 나오겠군."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웅엉대면서도 은규의 눈은 전보다 더 오래 룸미러에 박혀 있었다. "형도 아이 갖고 싶지 않아?" 그의 마음을 눈치 챈 것인지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하는 현석 때문에 은규는 그만 급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아니." 룸미러 사이로 형제의 시선이 마주쳤다.현재 그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녀석이 왜 저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나 싶었다.덕분에 아이에게 빠져 있던 새벽의 주의도 금방 은규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렇게 거짓말하지 않으셔도 아주머님이 우리 새현이를 힐끗힐끗 보고 있다는거.다 알고 있어요." 은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그렇게 티가 났단 말인가. "그러니 아주머님 자식이 생기면 오죽하겠어요?예은 씨 아니.형님도 바라고 있던데 이참에 그냥..." 은규의 발이 이번엔 정말로 급브레이크를 밟아 버렸다. "형!" "아주머님!" 깜짝 놀라 아이를 부둥켜 안고 소리치는 닭살 부부를 무시한 채 은규는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새벽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렇게 말햇습니까.집...사람이 아기를 원한다고." "아니 뭐,그냥 눈치가 그렇다는 거죠.헤헤..." 터무니없는 대답에 눈살을 구기는 은규를 보며,현석은 뭐가 재미있는지 잔뜩 억누른 웃음을 흘렸다. 젠장,담배가 피우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저 뻔뻔한 부부의 부추김에 놀아나고 싶진 않았으나.그날 밤 피임을 하지 않 았다는 사실 하나로 은근한 기대에 젖는 자신이 너무도 낯설어 견딜 수가 없었다. "안 돼요.그건."


거실을 지키고 있던 시준과 배턴 터치를 하고 들어서던 은규는 들려오는 통화 소리에 멈칫했다. "글세.그럴 수 없다니까요!" 제법 흥분한 목소리였다..그는 옷 벗는 것도 잊은 채 작업공간에 앉아 있는 예은을 향해 다가갔다. "눈치 챌 거에요 분명히." 그녀의 핸드폰을 통해 미세하지만 남자의음성이 들려왔다. "최대한 비밀스럽게 만나야 해요." 심상치 않은 통화내용에 머리털이 삐쭉 솟는 느낌이었다. 은규는 어느 틈엔가 조심스레 병풍식 가리개 바로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김 피디님 마음 모르는건 아니지만 서두를 문제가 아니에요.오랜 기다림 끝의 만남이 더 기쁘다는 말처럼..." 이여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애틋함이 담긴 말을 외간 남자와 주절대고 있는 예은이 그의신경을 머리 끝 치명 점까지 끌어 올렸다. 그는 분노를 포함한 각종 힘으로 가리개에 손을 가져다 댄 후 거센 기세로 젖혀 버렸다. "글쎄.무슨 일이 있어도 캔돌이와 아루미의 만남은 미루어야...!" 그러나 덧없이 쌓아올린 상상은 우스꽝스런 이름 앞에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왜...왜 그래요?" 우뚝 선 은규를 발견한 예은은 어느 때처럼 서둘러 전화를 끊고,다소 놀란 표정으로 널브러진 가리개와 그의 안색을 차례 차례 살폈다. "무슨 일 있어요?표정이 이상한데." 올라오는 붉은 기운을 감추기 위해 은규는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나가떨어진 가리개의 모습이 꼭 자신의 처지 같아 민망해졌다.유선으로 작품 회의를 하고 있는 그녀를 두고 불경스런 상상에 이성을 잃을 뻔하다니.더 웃 긴건 자신에게 그럴 만한 권리가 있느냐 하는 사실이었다. 결혼식을 올린 것은 분명하지만 혼인 신고는 하지 않았으니 설사 그녀가 외간 남자를 만나 즐긴다 해도 법적으로 전혀 하 자가 없는 아주 도덕적인 상황이었다. '왜 이렇게 멍청하게 굴어?' 그녀를 안았던 밤 이후.조바심은 더욱 크게 증폭되었다.처음이 어렵지.두세 번은 쉽다고 했던 말처럼 수면에 빠진 그녀 에게 손을 뻗고 싶은 욕망에 해골이 다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욕���이란 게 이렇게 무서운 것인지.집요할 만큼 끝장을 보자며 물고 늘어지는 것인지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타 조직과의 문제라면 언제든 해결할 수 있었다.하지만 가족 안에 숨어든 스파이를 가려내는 일은 숩지 않았다.어느 때 보다 머리를 차갑고 냉철하게 식혀 사리판단을 할수 있어야 더 이상의 상처를 막아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 앞에만 서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둔감해지고 있었다.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하지 않는 짐승의 욕구가 어렵게 식힌 머리통을 뜨겁게


달구었고.어부들을 홀려 죽음에 이르게 했던 시이렌처럼 예은은 서서히 은규의 평소 습관들을 헝클어뜨리고 있었다. "무슨 일 있는거죠?그렇죠?" 주먹을 꼭 움켜쥐고서 생각의 틀에 갇힌 그를 향해 예은이 속삭였다.언제나 저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다정한 여자.그 녀의 장점을 발견할수록 뾰족하고 울퉁불퉁한 자신과 이세계와는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은 여자란 깨달음만 밀려들었다. "아니야." 평소처럼 대화의 선을 잘라 버리고 옷가지를 벗는 그의 등뒤로 그녀가 천천히 다가와섰다. "도와줄게요." 그러나 그가 몸을 움찔하며 슬쩍 뒤로 물러나자 예은은 힘없이 팔을 늘어뜨렸다. "혼자 할수 있어." 욕실로 사라지는 은규를 가만히 눈으로 쫓던 엥느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피하고 있어....' 가끔씩 목 언저리에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시선을 돌리면,자신이 남긴 흔적이 보기 싫은 듯 퉁명스레 돌아선 그의 등을 발견하기 일쑤였다.이전과는 다르게 꽤나 자유로어진 성 문화 가운데 살고 있었지만,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지고 소중히 지켜온 순결마저 내던진 사내에게 이런 취급이나 받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참기 어려웠다.혹,책임감을 느낀다거나 매달 릴까 염려되어 몸을 사리는 것이라면 면전에 대로 한바탕 비웃어 주어야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았다. 비장한 표정으로 욕실 문을 열자,한족 손으로 타일 벽을 짚고 서서 샤워기 아래 몸을 맡기고 있는 건장한 몸이 보였다. "얘기 좀 해요." "왜 이래." 그는 뭔가 올라오는 감정을 꾹 누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몰라서 물어요?내가 왜 이러는지.정말 몰라요?" 예은의 눈동자에서 원망과 비난의 기운을 발견한 은규는 거센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일단 나가." 예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달아날 생각하지 말아요.당신이란 남자한테 더 이상 실망하기 싫으니까." 마침내 은규도 폭발하고 말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화를 하자는 거야?" 반사적으로 내려간 예은의 시선은 욕망으로 팽창된 은규의 몸을 보고 혼란으로 물들었다. "어서 나가." 예은은 잠시 입을 다물고 은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차분하다 못해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질문했다. "남자는 아무런 감정 없이 욕구만으로도 여자를 안을 수 있다는 들었어요.당신도 그래요?" 그의 눈동자 색이 짙어짐과 동시에 엄격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런 적 없어.내가 단순한 욕구 해소를 위해 한 번 품은 상대라도 어느 순간 날 노리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날 안았어요." 은규는 차마 예은의 눈동자를 또렷이 바라보지 못했다. "왜 그런거죠?이제 와서 철저한 당신만의 룰을 깨고 날 안은 이유,대체 뭐에요?우리 사이를 명확히 하고 싶어요 당신 날... 어떻게 하고 싶어요?" 다시 한 번 그의 입에서 거센 한숨이 터져 나왔다. "글쎄,어떻게 하면 좋을까.당신을 ...당신과 나를." 이끌림을 더 이상 거부하지 못한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한 번 쓸었다.눈동자에 슬픈 기색이 가득 흘러넘치고 있었다. "난..당신한테 부담스러운 여자는 죽어도 되고 싶지 않아요.그날 일로 책임지라고 할 생각도 없구요.다만 ,다만 말이 에요...벌레취급은 받고 싶지 않아요.내가 당신을 만질 때마다 움찔거리며 피하는 거.그게 얼마나 더러운 기분이 들게 하는지 알아요?얼마인지도 모를 시간 동안 우린 지금처럼 함께 있어야 해요?당신 품에 안겼던 일,이미 나한테 소중한 추 억이 돼 버렸지만 그 일 때문에 남아 있을 우리 시간들이 엉클어진다면,난 백번이고 천번이고 그 기억들을 삭제시켜 버릴 수 있어요." "당신은 이미 충분히,나란 인간한테 부담스러운 여자야." 부담이란 단어에 반응한 예은의 눈초리와 어깨가 축 처져 버렸다.은규는 입술을 비틀어 자신을 비웃으며 차근차근 현재의 감정 상태를 꺼내 보였다. "내 삶은 너무 치열해.피 끓는 복수심이 난무하지.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도 있어.잠시도 숨을 놓을 수 없고 한눈 팔아서 도 안되는 고단한 과제." 예은은 쉬지 않고 내리치는 물줄기로 인해 자신의 몸이 완전히 드러났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난 소중한 걸 가슴에 품어서는 안되는 사람이야.흥미를 가져서도 안돼.그게 바로 내 아킬레스건이 돼 버리니까." 순간 몰려온 엄청난 깨달음에 예은의 눈동자가 대책없이 흔들렸다.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줄곧 자신을 노렸던 이유.명목상 이긴 해도 엄연히 흑사의 아내로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그의 약점으로 간파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떻게 모를 수 있었을까. 치열한 싸움 중에 있는 은규에게 언제나 도움이 되고 싶었다.그런데 도리어 방해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모든 전의가 사그 라지고 마는 예은이었다. "아....그래요.아킬레스건..." 불안하게 시선을 떨어낸 예은은 푹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물줄기 소리에 묻혀질 만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해요 당신,나같은 여자 상대할 시간 없다는거.그런 여유 일찌가미 포기한 채 살아온 사람이라는거.그걸 잠시 잊었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던 그녀가 무너져 내리자 은규는 묘한


상실감을 느꼈다.무엇보다 확연히 보이는 상처의 기색이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는 이 육체를 자꾸만 그녀에게로 이끄는 기분이었다. "만화 영화를 언제나 위급한 상황에 넘어지거나 다쳐서 주인공을 위험해 빠뜨리는 여자 캐릭터들이 있었죠.정말 싫었어요. 멍청해 보였거든요.도움이 되지 못할 바엔 차라리 따라나서지를 말지.주인공은 지금 저 크나큰 적만으로도 벅찰 텐데.." 예은의 입술이 허무하게 비틀어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어요.좋아하는 상대에게 짐이 될 정도로,방해가 될 정도로 나약한 사람은 되지 말자,곤한한 상황 에 처하지 않도록 주체적인 존재가 되자.그런데...그런데 내가.나 역시..." 괴로움을 감추기 위해 예은이 눈을 꼭 감자,더 이상 냉정을 가장하고 있을수 없어진 은규는 한껏 수그러든 그녀의 턱을 들 어 올렸다. "이러는 거 당신 답지 않아." 다정하게 빛나고 잇는 은규의 눈동자에,예은은 그만 눈물을 쏟을 뻔했다.자신이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그는 생명이 오가 는 치열한 싸움에 지칠 대로 지쳐 있을 텐데 쓸데 없이 까탈부리며 사랑 놀음이나 하자고 부챈 격이니....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진 에은은 그의 손을 살짝 뿌리치며 애써 차분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동정은 필요 없어요.당신뿐 아니라 누구의 인생에 있어서도 방해물 따윈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에요.나." "방해 된다고 말한적 없어." 다소 험악해진 은규의 목소리에.예은은 진이 다 빠진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미 깨달아 버렸다는게 중요하죠.시간 뺏어서 미안해요.계속 씻어요." 웅크린 몸을 틀어 다급히 욕실을 빠져나가는 그녀를 보며,은규는 당장이라도 따라 나가려는 성급한 발과 몸을 묶어두기 위해 있는 힘을 다 끌어 모았다.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대하는 이미 어그러져 버렸고,무슨 말을 해도 그녀는 자신이 짐스 런 존재란 생각으로 귀를 막은 채 듣지 않을 것 같았다.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그녀를 안은 게 아니었다.그에게 있어 예은은 첫 여자 이상이었다.냉정을 유지해야 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앞뒤,옆,가릴것 없이 일을 저질러 버리게 만들만큼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존재였고,조카를 훔쳐보거나 동생부부 의 행복한 모습을 볼 때면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이 끝날 때까지는 기다려야 했다.당장 내일이 어찌 될지도 모를 판국에 더 이상의 기대와 약속은 무의미할 뿐, 앞에 놓인 과제를 해결하고 그녀를 위험 속에서 제대로 건져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거리를 두며 자신을 죽이자고 그는 타는 가슴을 움켜쥐고서 다짐했다. 만약,그렇게 하지 않으면....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게 될지도 몰랐다.판단력과 이성을 마비시켜 사람을 얼간이로 만드는 그 감정만은 막아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CHAPTER 55 ==왜......왜 하필 당신인 거야.어째서......==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왜그랬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유다는 천일도의 아파트 앞까지 찾아가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글쎄,흑사가 운전 미숙으로 죽을 뻔한 걸 왜 나한테 와서 묻냐고!" 유다의 입술이 냉기고 얼어붙었다.은규의 사고 소식을 접하자마자 이 얼간이가 꾸민 짓 이라는걸 간파해 연락을 취했지만 좀처럼 만날 수 없었다.멋대로 행동한 것도 모자라 보란 듯 실패했으니,슬슬 피하며 무마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이 일에 협조하기로 한날,누구도 다치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우린 분명 합의를 했습니다.특히 흑사의 생명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약속한 사실을 기억하실 텐데요." 평소와는 조금 다른 유다의 모습에 불안해진 천일도는 눈을 부라리며 성질을 부렸다.할 말이 없을 때마다.보이는 뻔한 행 동 패턴이었다. "이 새끼가 누굴 가르치려 들어?쓸데없는 소리로 사람 염장 지르지 말고 꺼져!일이나 제대로 해결하란 말이야!" 유다의 입술 위로 천천히 미소가 스며드는 것을 보며 천일도는 일종의 한기를 느꼈다.이 인물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쯤이 야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에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지만,다루기 힘든 존재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기 에 더욱 섬뜩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당신은 흑사 소유의 땅만 얻으면 되는 거고,저는 아버님의 자유와 hs 호텔만 소유하면 되는 겁니 다.이 과정에서 협박이라는 수단은 얼마든 허용할 수 있지만,그 이상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여자를 이용하자는 계획도 행여 여자가 다치는 일이 일어난다면,그럴 요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더 이상 일을 진행하지 않겠습니다." 속이 부글부글 ?어 올랐지만 상대로부터 흘러나오는 뭔가 모를 위압감 때문에 천일도는 다른 때처럼 섣불리 행동하지 못했 다.말 잘 듣는 개처럼 반항 한번 하지 않던 녀석이 제가 정한 룰이 지켜지지 않자 전혀 다른 인간성을 보이고 있었다. "이 새끼가 지금 누굴 협박하는 거야?" "협박이 아니라 같은 편이라는 걸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약속을 지키지 않는 상대와 손잡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생각을 품고서 두 사라망ㄴ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보았다.자신이 고용한 상대로부터 협박을 받게 된 이 상황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지만 천일도는 일단 한 발 물러나기로 작정했다. 녀석은 아직 이용 가치가 있었고,입으로 하는 약조쯤이야 어르는 차원에서 얼마든 할


수 있는 문제였으니,일단은 미끼를 손에 넣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이었다. "좋아,대신 너도 일을 서둘러." "이번 주 안으로 여자를 넘기겠습니다.감시는 제가 합니다.흑사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은 후 이 손으로 직접 돌려보내겠습 니다.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여자는 미끼일 뿐입니다." 자신을 감방으로 들이밀었던 오시준의 여동생이란 이유만으로도 여자에게 갚아줘야 할 빚이 있었지만 그것 역시 후에 생 각하면 되는 일,천일도는 다시 한 번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기대하고 있겠어." 기대감이 마구 치솟아 오른다.이제,이제 끝이 보인다. 예은이 차려주는 밥상이 처음으로 미역국이 올라왔다. 은규는 평소 맑은 종류의 국은 별로 좋아하질 않는데다 어린시절 미역국을 먹고 큰 탈을 당한 일이 있어 이후론 입에 대지 않았다. "왠 미역국이지?" 거의 이십년 만에 식탁에서 미역과 재회를 하자,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밥 한 술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예은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오빠 편에 보내주셔서요.왜,미역국 싫어해요?"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고문 수준이었지만,은규는 아무말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요즘 그녀의 마음 상태가 어떠할 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는데도 늘 아침상을 차려주는 정성을 생각 한다면 이 정도 고문쯤이야 뭐 대수일까 싶었다. 입 안으로 퍼지는 간간한 국물 맛과 코 속으로 퍼져오는 미역 특유의 냄새가 벌써부터 민감한 위를 자극했지만 은규는 그 런대로 잘 참아냈다.그렇게 한참 동안 조용한 식사를 하고 있는데.젓가락을 쥔 예은의 손가락에 있어야 할 약혼반지가 보 이지 않았다. "반지....끼지 않았군." 거의 혼잣말 수준에 가까운 목소리였지만 그녀는 용케 알아듣고서 짤막하게 반문했다. "당신도 끼지 않잖아요.내가 준 반지." 분명 웃으며 말하고 있는데도 전과는 느낌이 달랐다.요즘 그녀는 대부분 글 작업에 시간을 할당했고 필요한 이야기를 해야 할 때 외에는 말을 아꼈다.마치 어딘가로 떠나기 전,정을 떼는 사람 같아 보였다. 언제나 자신이 그녀에게 보였던 행동 패턴이었고,그러는 편이 냉정을 유지하는데 훨씬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과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아니,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초인종 소리가 조용한 침묵사이를 두드렸다.상대하기 골치 아픈 인간 시준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내가 나가지." 자리에서 일어난 은규는 굳은 얼굴로 문을 열었다.분명 능글거리는 미소를 가득 머금은 처남의 끔찍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수야가 반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쩐 일이냐." "오늘은 제가 모시기로 했습니다." "어째서." "형수님께서 오빠 분이 중요 고객과 약속이 있다고 오늘 하루만 좀 빌려달라는 전화를 주셨거든요.뭔가 눈치 챈 모양인 지 요즘 형구도 통 움직이지를 않고,하루쯤 자리를 비워도 될 것 같다는 판단에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침 뒤쪽에서 예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야 씨 왔어요?" 무척이나 반가워하는 목소리였다. "안녕하십니까,형수님.오랜만에 뵙습니다." 정중히 인���하는 수야에게 예은이 활짝 웃어 보였다. "부잣집 마나님 대하듯 하지 말라고 했죠?하루이틀 본 사이도 아닌데 이제 좀 편해질 수 없어요."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예은을 보며 은규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두사람이 저렇게 친밀한 느낌을 풍길만큼 가까웠었나.수야 가 여자를 향해 저런 미소를 지을 수도 있는 사내였던가.온갖 잡스러운 생각들이 튀어나와 머리속을 휘저어 댔다. 그래,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도 만만치는 않다,자신의 부재시간중 언제나 수야가 그녀의 호위를 맡았고,그때마다 자연스레 일어났을 대화나 느낌들은 자신이 끼어들 수없는 시간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잠깐 들어와서 기다려요.가방만 챙기면 되니까." 생기있는 목소리로 말한 후 소파로 다가간 예은은 가방안에 여러가지 것들을 챙겨 넣기 시작했다.수야는 거실로 들어서 잠시 집 안을 훑어보다가 식탁에서 미역국을 발견하고는 놀란 눈으로 은규를 바라보았다. "미역국 드셨습니까?" "그래." "형님 미역국은 못 드시..." 그때 예은이 쪼르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은규가 매서운 눈초리를 보내며 저지했다. "입 닫아.듣는다." "아...예." "가요!" 어느 틈에 다가온 예은이 상큼한 향기를 흘리며 말하자,수야는 은규에게 박힌 시선을 거둬들였다. "다녀오겠습니다." 두 사람이 사라진 후에도 은규는 한참이나 현관 앞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무시 당하는 기분이 이런 거였나.속절없는 깨달음 이밀려들었다.그녀는 언제나 이런 기분을 느끼면서도 쉴 새없이 대화를 시도하며 웃으며 이 목석같은 인간이 반응하기를 구걸했던 것일까. 갑자기 담배 생각이 간절해진 은규는 침대 옆 콘솔로 다가가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이미 계획은 틀어져 버렸고 정말이지,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예은과 시작 다인만 해도 그는 그녀를 곁에 두고서 물건 다루듯 이용할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그땐 모든 것에 있어서 넘쳐날 만큼의 자신감이 있었다.어떤 환경이 닥쳐와도 감정을 컨트롤해 함정 따위엔 빠지지 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그것이 엄청난 착각이자 오만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씩 알것 같았다. 인간이 어찌 자의로 가슴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저지할 수 있단 말인가.생각에 따라 흩뿌릴 수 있는 감정의 농도 조절이 가능하고 이익이 될 사람,해가 될 사람 구분하고 관계를 맺는다면,그게 어찌 사람 사는 모양새라고 할수 있을까. 지금껏 그런 로봇 흉내나 내며 자신이 강하다고 자부해 왔던 그는,그녀의 말마따나 피와 살이 돌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은규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예은으로부터 받았던 반지를 꺼냈다.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은줄에 끼워두고 있었는데,더 이상 이렇게 두었다가는 왠지 그녀가 달아나 버릴 것 같아 망설임을 접고서 목에 걸었다.달랑이는 반지로부터 묵직한 무게가 전해져 왔다.그 묵직함이 마치 그녀의 마음처럼 느껴져 가슴이 뜨거워졌다. 담배 하나를 거의 다 태울 즈음,핸드폰이 울려 액정으로 시선을 내리자,시준의 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미역국은 잘 먹었나?] "용건이 뭡니까?" [왜 밥상에 미역국이 올라왔는지 궁금하지 않아?] "무슨 의미입니까?" 쯧쯧,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무심한 남편이 있나.불쌍한 글쟁이.제 손으로 미역국을 끓이며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꼬.] 그제야 말뜻을 알아차린 은규는 그대로 담배 연기를 삼켰다. [우리 어머니,한 번도 자식들 생일을 그냥 넘긴 적이 없는데,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맞는 생일이니까 녀석 기분이 저조할 거야.오늘 하루중 아직 절반도 지나지 않았으니 이벤트 하나 거나하게 준비해서 최고로 만들어 주라고,알 았어?] 폴더를 닫으며 은규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제길,생일이었다니!그런 줄도 모르고 왠 미역국이냐는 소리나 뱉으며 잔뜩 인상을 쓰고 말았다. 연달아 담배를 네 개비나 더 태운 은규는 어두운 표정으로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우울한 생일이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느 창에 아무렇게나 몸을 기댄 예은은 휙휙 지나치며 일그러지는 사물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형님하고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녀의 태도를 이상하게 여긴 수야가 넌지시 물어왔다.예은은 금방 발그?게 얼굴을 꾸미곤 시치미를 뗐다. "아니요.왜요?" "오늘 유난히 저를 반기셨습니다.마치 형님께 보이기 위한 행동 같았어요." 이번엔 진짜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정 떼는 중이거든요." 이것저것 다 포기한 예은이 한숨을 섞어 고백하자,수야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째서.." "경멸하던 만화 속 여자 캐릭터는 되기 싫으니까." 예은은 왠지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었다. "그 사람한테 장애물 같은 존재는 되고 싶지 않아요." "형수님..." "나도 그 사람 못지않게 현실을 똑바로 볼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어떤 일이 닥쳐도 누군가에게 기생하며 연명하 지 않도록,최소한 내 몫은 해야 한다고." 예은의 눈가에 슬픈 기색이 스쳤다. "생각해 보면 말이에요.그 사람 만난 후 난 언제나 일만 만들었고,은규 씨는 묵묵히 뒤치다꺼리를 해준것 같아요.처음 호텔에서는 괴한으로부터 구해줬고,납치라는 명목아래 별장에 서도 자기 시간 다 버리고 함께 있어줬어요.서울로 돌아오던 날 집에 숨어 있던 사람들에게서도 구해줬고,신혼여행 도중엔 사냥개에게 한팔을 주면서까지 날 지켜줬어요.이렇게 심각한 일들만 잔뜩 있었는데 난 너무 무신경하게 풀어져 있기만 했지 뭐에요.언제나 은규 씨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으니까 현실 감각 같은 건 애초에 챙겨둘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어느 틈에 약속 장소에 도달해 수야가 차를 세우자,예은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도착했네요!오늘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기다리는데 지루하지 않겠어요?" "그럴 리가요,마음 편히 일 보고 오세요.형수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슬퍼할 사람이 많습니다." "고마워요.엄청 힘 나는데요?" 사실 형구와의 대화를 엿듣고 난 후,예은은 은근히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이렇게 좋기만 한 사람을.... 미안한 마음에 양심이 쿡쿡거렷다. "수야 씨한테는 정말 못할 짓을 하는것 같아요 .내가 좀더 강해서 날 지킬 만한 힘이 있었다면 이렇게 여러 사람 곤란하 게 하지 않아도 될 텐데." "형수님." 조용히 듣고만 있던 수야가 조금은 날카로운 어투로 그녀를 불렀다. "자괴감에 빠지는 것이야말로 사람을 약하게 만듭니다." 평정을 가장하고 있던 예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형수님께서 형님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믿음을 보여주세요.지금 형님의 현실은 자신의 상황에 따라,이 익을 위해 이리저리 둥지를 갈아트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형수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형님을 믿어주셔야 해요."


온몸 가득 따뜻한 기운이 퍼지는 것을 느끼며 예은은 살며시 미소지었다.문득 이사람의 이렇듯 맹목적인 형님 사랑은 어 디에 근거한 것인지가 궁금해졌다.아마도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바쳐 곁에 붙어 있을 만큼,황은규란 사람은 남자로서 도,인간으로서도 강한 매력을 지닌 사람이란 뜻이 아닐까. 가방을 챙겨 들고 차 문을 여는 예은의 얼굴 표정이 무게를 덜어 한결 가벼워졌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사람 배신하지 않아요.그러긴엔 너무 깊이 왔거든요." 굳어 있던 수야의 표정도 비로소 풀어졌다. "그리고...수야 씨도 있잖아요.언제나 은규 씨 옆에서 믿고 따라줄 사람.그렇죠?" 그것은 미미하게 남아 있는 의심 가운데 마지막 한 조각까지 떨쳐내기 위한 그녀 스스로를 향한 질문이었다. "오늘은 스튜디오를 방문하도록 하죠." 예정에 없던 김 피디의 말에,예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요?" 벌써 오후 3 시였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다들 만나 뵙고 싶어해서요.늘 미루기만 하셨잖습니까." 하긴,집으로 돌아가봤자 아무도 없을 테고 혼자 청승 떨며 생일 촛불을 켜느니 일에 빠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잠시 전화 좀 할게요." "기다리겠습니다." 예은으 수야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이런,통화중이네." 이후로 3 번의 연결을 더 시도했다.여전히 반복된 멘트만 흘러나와 망설이던 그녀는 결단을 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가죠." 나중에라도 알리면 될 것이란 계산으로 일어서는 예은을 향해 김 피디가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가시죠." 갑자기 걸려온 형구의 전화로,통화는 벌써 20 분 째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양 떠들어 대는 형구의 나직한 목소리에 수야의 온몸이 경직되었다. [곧,큰형님도 아시게 될 겁니다.가장 믿었던 사람이 웃는 낯으로 무슨 일을 꾸미고 있었는지 말이에요.] 그가 미행을 시작한 이후로 형구는 바깥출입을 일절 금한 채 카지노 바에만 붙어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 기에 전화까지 걸어 횡설수설하는 것일까.뭔가 미심쩍은 냄새가 한가득 풍겨왔다. 수야는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작정하곤 장단을 맞춰주었다. "너야말로 속고 있다는 걸 왜 모르는 거냐." 형구가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한테 속고 있다는 거죠?큰형님을 속이고,백곰형님을 죽게 만들고,이젠 형수님까지 납치하려는 주제에.오늘이 적격


이었겠죠.하루 종일 형수님을 손에 쥘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으니까.] 수야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무슨 소리야,너!" 언제나 조용조용한 어투를 지켜오던 수야가 길길이 날뛰자 형구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언제까지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선량한 가면만 뒤집어쓰고 있을 겁니까?전 분명 형님께 기회를 드렸습니다.형 님을.....많이 따르고 좋아했기 때문에,누구든 실수는 할 수 있는 거니까 몇 번이고 발 뺄 기회를 드린 겁니다.하지만 끝 까지 절 실망시키시는군요.큰형님이 아시면,.....] 형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햇다. [어떻게 큰형님께 이러실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큰형님...우리에겐 목숨 같은 분이시잖아요.] 목이 타고 답답한 마음에 수야는 두 눈을 꼭 감고 중얼댔다. "형구야,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하나도 못 알아먹겠단 말이다.젠장!" 잠시의 터울 후,이어진 형구의 목소리엔 얼음 조각 같은 냉기가 서려 있었다. [결국....끝까지 발뺌하시는군요.좋습니다.전 제 할일을 다 한 것 같으니 이만 끊겠습니다.우리가 통화하는동안 형수님은 제 쪽에서 모셨으니.어이없는 납치 계획일랑 집어 치우세요.형수님은 오늘 무사히 형님 품에 안겨드릴 겁니다.그리고 혹.집에 돌아올 용기가 있으시다면 각오하세요.놀랄 만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수야는 전화가 끊기고도 한참을 멍하니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제길!" 그는 다급히 차를 출발시켰다. 쾅쾅쾅!! 초인종도 무시한 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자,예은을 기다리던 은규와 조직 식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형수님이세요?" "형님,접니다.수야!" 베란다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던 은규는 너무나 급박한 수야의 목소리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곤 현관문을 향해 걸었다. 그녀의 생일을 알고 어찌할까 고민하다 동생들에게 전화를 넣어 생일 파티 준비를 도와달라고 말했다.녀석들 모두 기쁜 마음으로 역활 분담을 해준 결과,넓은 원룸 안은 온통 풍선과 음식들,그리고 그녀가 오면 보여줄 촛불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수야의 목소리 하나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하던 그 모든 것들을 마구 쓰러뜨리며 은규는 단 몇 초 만에 현관문을 열었다. "형님..." 얼마나 급히 달려온 것인지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된 수야는 털썩 주저앉으며 가까스로 목소리를 내었다. "혀...형구는......어디 있습니까." "몸이 안좋다며 아까 들어갔습니다." 누군가 뒤쪽에서 대신 답했고,수야는 치열한 눈동자로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형수 어디 있냐." 다짜고짜 들려온 은규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수그리며 주먹을 꼭 쥐었다. "형수 어디 있냐고 물었다." 낮게 깔린 음성에 담긴 노기와 강압에 원룸 안은 금방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고,수야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잠겨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다시 한 번 묻는다.형수 어디 있지?" "형님...." 맨 바닥에 꿇은 수야의 무릎 위로 굵은 땀들이 방울져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그 어떤 말보다도 명백한 뜻을 표하는 한 마디의 폭격이 은규의 몸에서 핏기를 거둬 갔다. "제대로 설명해." 악 다문 이 사이로 겨우 터져 나온 은규의 명령에,수야는 형구와의 통화 내용을 모두 설명했다. "형님 말씀대로 형구 역시 이용을 당한 것 같습니다.오히려 제가 배신자라고 철저히 믿고 있었어요.전화가 끊기자마자 그 일대를 몇 번이고 샅샅이 훑었지만,형수님의 모습은...보이지 않았습니다." 눈앞이 핑 돌아 은규는 잠시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했다. "형님...늦은 감이 있지만 제 의견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은규의 입에서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쉰소리가 흘러나왔다. "말해 봐." "그동안 형구를 미행하고 혼자 소식을 수집하러 다니면서 마음에 걸리는 사람 하나가 있었습니다.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말 씀드리지 않으려고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만,,.." "그게 누구야." "형님과 형수님의 신혼여행 기간 중에도,형님 모르게 별장 주변에서 잠복을 했었습니다.별장 치아나에 중요한 역활을 하는 사냥개들 식량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사육실에 들렀는데 블랙토리가 보이지 않더군요.평소 녀석의 구역인 숲 후미 쪽으로 가서야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그런데....껌을 먹고 있더군요." 은규와 수야의 눈동자가 공중에서 맞부딪쳤다. "블랙토리는 예전부터 유난히 껌을 좋아했죠.한 번 목에 걸려 죽을 뻔한 사건 이후로 형님이나 전 더 이상 주지 않았지만 저희 몰래 가끔 블랙토리에게 껌을 주곤 했던 사람이 있었잖습니까.꼬리를 흔들며 따라올 때면 주지 않고는 못 배긴다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짐작하신 대로입니다.제가 의심하고 있는 사람은..." 신중한 표정의 수야에게서 흘러나온 이름을 듣는 순간,은규의 눈동자가 짙은 흑 빛으로 물들었다. "네 형수와 마지막까지 같이 있던 사람이 누구냐." "김 피디란 사람과 미팅 중이셨습니다." 아무 말 ���이 바닥만 뚫어지게 보고 있던 은규는 곧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자신이 털어놓은 이름을 듣고도 무너지기 보다는 이성을 차리기 위해 애쓰는 보스의 모습에 수야의 가슴이 뜯긴 듯 아파왔다. "처남,접니다." [어,매제!생일 파티 준비는 잘 되고 있겠지?] 아무것도 모른채 맘 편한 소리를 하는 처남에게 은규는 다소 성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그 김 피디라는 작자,.어떻게 생겼습니까." [뭐야,질투놀이 하기엔 너무...] "대답해요,.어서!" [무슨 일 있어?]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김 피디란 사람에 대해 빠짐 없이 말해주셔야 합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시준이 목소리에서 장난기를 지웠다. [키가 크고 마른 체격이야.안경을 썼는데 눈웃음 때문인지 인상이 아주 좋아 보였어.] "눈웃음이요?" [예은이도 그게 인상적이었는지 그 사람을 반달눈이라고 불렀거든.] 핸드폰을 꽉 쥔 은규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또 다른 특이 사항은 없습니까." 한참을 생각한 끝에 시준이 대답했다. [참,손가락 하나가 없어....그러니까 새끼 손가락,엘리트한 분위기에 뭔가 언밸런스한 느낌이었지,언제나 우유를 시켰고 또,,,,,왠손잡이야.] 은규의 손에서 핸드폰이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던 그의 이성이 흉측한 형태로 꼬여 버렸다. ".....이런." 모두 걱정스러운 눈동자로 주시하면서도,어떻게든 무너지지 않기 위해 떨림을 자제하는 은규에게 섣불리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형님.." 수야가 답답한 심정을 담아 겨우 입을 떼자.은규가 잔뜩깔린 목소리를 토해냈다. "형구 불러와.지금 당장!" 우레와 같은 고함 소리가 모두의 움직임을 이사불란하게 만들었다. 차에 타자마자 졸음이 몰려오더니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오고 나니 등 뒤로 딱딱한 바닥과, 귀로는 누군가의 기척이 들려왔다. 그 언젠가와 비슷한 상황.... ...납치가 분명했다. 하지만 누가? 마지막 순간에 함께 차를 탔던 사람은 김 피디뿐이었다. '말도 안돼! 그 사람이 어째서 날.......' 눈을 뜨기가 두려웠지만 인기척의 주인공을 확인해야만 했던 예은은,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을 이겨내고 서서히 눈꺼풀을 들 어 올렸다. 쓰다 버려진 듯한 폐허 공간, 쓸모없이 널브러진 자재들, 그리고 바로 앞 의자에 앉아 있는 사내의 모습이 천천히 시야 안


으로 들어왔다. "깨어나셨군요." 반달눈. 이제는 섬뜩하게 느껴지는 친절한 목소리가 온몸을 쓸고 지나는 느낌이었다. "당신....."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소름이 돋아 올랐다. 마치 상황이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는 양 여전히 정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그가 흡사 사이코드라마 의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스튜디오가 참 허름하군요." 비웃음이 담긴 예은의 차가운 눈초리에, 반달눈이 차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취급 받게 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주 잠시만 조용히 있어주시면, 아무 탈 없이 집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예은은 자신 앞에 있는 사내를 바라보며 차오르는 감정을 억눌렀다. '저 사람이야.........' 은규의 신의와 믿음을 저버린 채 모든 정보를 빼돌린 배신자. 어느덧 그녀에게 있어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되어 버린 한 남 자를 아프게 하고, 고민하게 하고, 들쑤셔진 상처에서 피고름을 빼내게 한 장본인. 그래놓고도 죄책감 하나 없이 차분한 표 정이라니, 예은은 저 가면 같은 얼굴에 담긴 미소를 힘껏 찢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당신, 은규 씨 밑에 있던 사람인가요?" 경멸에 찬 예은의 눈초리에 반달눈이 제 모양을 찾았다. 기다랗고 날카로운 눈동자에 뭔지 모를 감정들이 넘치도록 담겨 있 었다. "그렇습니다." 가슴이 콩콩 뛰었지만 예은은 잠시 숨을 몰아쉰 뒤 조바심 섞인 소리로 재촉했다. "이름을 알고 싶어요. 나한테 그 정도 알 권리는 있지 않나요?" 그는 잠시 침묵했고, 예은은 치열한 눈동자로 대답을 기다렸다. "형님께서는 저를....." 숨소리 하나 나지 않는 고요 속에서 충격적인 이름이 그녀의 귓가에 꽂혔다. "백곰이라고 불렀습니다." "하..........!" 엄청난 쇼크로 인해 예은의 눈동자 속 동공이 확대되었다.

chapter 56 ==사랑은 쇼핑과도 같아. 좋은것을 사려면 그만 한 값어치를 지불 해야 하거든. 당신이란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내가 치러야 할 대가는 과연 얼마일까. 아니, 치를 수 있는 대가란 게 과연 존재 하기는 할까?== -예은의 메모 노트 중에서은규는 아무 말 없이 한 갑 분량의 담배를 다 태웠다. 수야는 안타까운 눈동자로 이를 지켜보고 있었고, 그 앞에 형구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백곰이 살아 있었단 말이지." 헛웃음을 흘리다 주먹을 움켜쥐는 은규의 분노가 원룸 내부를 저릿하게 휘감았다. "백곰과 네가 연계된 경로에 대해 자세히 말해." 꿇은 무릎 위에 올려진 형구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백곰 형님께서 돌아가신 줄 알고 제가 많이 방황했던 일은 큰형님도 아실 겁니다. 그런데 사건이 터지고 한 달 정도 후, 카지노에 든 웬 손님이 쪽지 하나를 건넸습니다. 백곰 형님의 필체였습니다." 형구의 긴 고백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명동 부근의 한식집이다. 약도를 동봉하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너 혼자 찾아와라. 올때까지 기다리마.' -백곰쪽지를 쥔 형구의 손이 폭우 앞 볏단마냥 바르르 떨렸다. 사망 소식을 접하고 뼛가루를 건네받아 이 손으로 직접 뿌린 후 몇 날 며칠을 울었던 기억이 생생한다, 이건 의심할 여지도 없이 분명한 백곰 형님의 필체였다. 치열할 정도로 머리를 굴리던 형구는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꾸미고 나와 명동으로 향했다. 약도를 꼼꼼히 살피고 헤맨 끝 에야 뒷거리에 있는 아주 작은 한식집을 찾아낼 수 있었다. "후......." 입이 마르고 긴장으로 손끝이 쿡쿡대 10 여 분이나 서성이다 어렵게 문을 열자, 믿을 수 없는 존재가 시야 한가득 들어왔다. "혀......형님!" 미소로 반달 모양이 된 눈,인자하게 올라간 입술 끝,매끄럽고 하얀 피부,다소 많이 자란듯 한 생머리. "오랜만이구나." 소리 없는 눈물을 쏟으며 유령처럼 테이블로 다가간 형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살아 계셨으면서...어째서.." 형구를 달래 겨우 자리에 앉힌 백곰은 음식들을 시켜 구색을 갖춘후 심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형구는 백곰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우리 식구안에 스파이가 있다." "네?" "시간이 없어서 자세한얘기는 못한다.조직들이 힘을 모아 엄청난 규모의 유흥 사업을 벌이려고 땅을 접수하고 있는데, 그 안에 형님 소유도 속해 있는 모양이야.입장이 난처해진 조직들이 제법 큰 돈을 미끼로 손을 내밀었지만,형님께서 이를 거절하셨다.그 때문에 협박을 받고 계셔." "그렇다면 스파이는..." "상대 조직에서 심어놓은 거겠지." 형구의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게 누굽니까."


백곰은 타는 목으로 물을 한 모금 넘기고 나서야 익숙한 이름을 흘렸다. "수야다." "설마.." "날 죽이려 한 것도 녀석이야.내가 의심하기 시작한 걸 눈치 채곤 사람을 고용했다." 형구의 눈동자 속으로 혼란이 가득 차올랐다. "그럴 리가...수야 형님이 그럴 리가..."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야.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나를 인근 교회 목사님께서 구해주셨고,난 잠시 죽은 사람이 되 기로 작정했다." 시켜놓은 찌개가 식고,윤기 흐르던 밥알이 굳어갔지만,두 사람 모두 손하나 대지 않았다. "형구야.네 도움이 필요하다.내 편에 서줄 수 있겠니?" 간절한 목소리가 형구의 이성을 마비 시키고 있었다. 울음 섞인 형구의 목소리를 듣는 내내 수야는 몇 번이고 이를 악 무는 은규의 모습을 확인해야 했다. 사고 당시 백곰의 시체는 불에 타 얼굴을 알아 볼수 없을 정도로 많이 훼손돼 있었지만,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절더러 도와달라고 하셨습니다.수야 형님의 정체를 밝히고,배후 조직들 형태와 게획까지 파악할 수 있도록 힘쓸 테니,때 때로 큰형님 근황이나 가족들 정보를 내 달라구요.앞뒤가 맞지 않는 것들 투성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저는 너무 기뻐서, 백곰형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꿈만 같아 모든 의심을 접고 온종일을 울었습니다." 감정이 차오른 형구가 팔을 들어 아무렇게나 눈가를 훔치자 수야는 손을 들어 떨리는 어깨를 살며시 두드려 주었다. "수야 형님,정말 죄송합니다.괜히 형님을 의심하고 미워했습니다." 푹 잠긴 소리로 수야는 형구를 위로했다. "누구라도 그랬을 거다." 형구의 두 눈 가득 죄책감을 감돌았다. "전 형님을 의심했는데....그런데도 형님은..." 잠시 침묵이 찾아들었다.형구가 흐느끼는소리와 담배 연기를 가장해 뿜어내는 은규의 한숨만이 간간이 정적 속을 가를 뿐이었다. "백곰과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언제냐."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은규가 마침내 입을 열자,형구는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 애쓰며 차근차근 대답했다. "오늘 오후 3 시쯤에 했습니다.갑자기 전화를 거셔서는 수야형님이 형수님을 납치할 꼐획인 것 같으니 당장 전화를 넣어 시간을 끌어달라고 하셨습니다.그러면 그 틈에 형수님을 안전하게 모시겠다고요.저녁쯤에 형수님과 함께 직접 큰형님을 만나 뵈러 오신다는 약속을 저는 굳게 믿고만 있었습니다." 은규의 입에서 쿨럭쿨럭 하얀 연기가 흘러나왔다.


"전 정말 백곰 형님을 믿었습니다.큰 형님과 형수님,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에게 도움이 되길 바랐던 것뿐인데,모두를 위험 에 빠뜨리는 앞잡이 노릇을 제가 하고 말았습니다.제가.." 고개를 조아린 형구에게 다가간 은규는 말없이 어깨를 살짝 두드려 주었다.다만 믿었을 뿐인데,자신이 진실이라고 생각한 것을 끝까지 붙들었을 뿐인데,이 순진한 아이를 어찌 탓할까? "큰형님....흐흑." 그 어떤 말보다 더 확고히 전해온 용서가 형구를 오열하게 만들었다.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형구는 고통에 찬 절규를 끊지 못했다. 쾅! 그때 큰 소리 나게 문이 열리며 시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