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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검은 비단처럼 고요한 훈풍이 부는 봄의 바다. 저 멀리 아득하게 불꽃을 뿌린 듯 화려한 도시의 야광이 손이 잡힐 듯 흔들 리고 있었지만 구룡 반도에서 두 시간이나 떨어진 이곳 남지나 해의 해면은 검 은 심연처럼 어둡기만 했다. 신비로울 정도로 커다란 만월이 천공에 요요롭게 떠 있는 평화로운 밤이었다. 그리고 하늘에 떠있는 밝은 달은 전설처럼 신비로운 푸른빛이었다. 너무나 맑은 밤하늘에는 떨어질 듯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이 흩어져 있엇고 그 수만큼 수면 위에도 유리 조각처럼 잘게 흩뿌려진 달빛이 흔들리고 있다. 그 평화로운 하늘과 바다 사이에 한가롭게 그냥 떠있는 하얀 요트가 있었다. 그리 고 그 배의 낮은 갑판 위에는 사이좋은 조손(祖孫)이 의자에 앉아 낚시 대를 걸 쳐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 보는 보름달이 저렇게 맑으니, 아마도 좋은 일이 생기려나 보구나. 데릭. 내가 말했더냐? 달이 피 빛이면..." "불길한 징조라고... 땅에는 전쟁이 일어나고 피가 흐른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저렇게 푸른 달을 보는 날에는 상서로운 일이 일어난다고... 나의 선녀가 하늘에 서 내려온다고 하셨어요." "녀석.. 어렸을 때 읽은 전설 이야기를 아직도 믿고 있는 게냐?" "...아뇨. 하지만... 정말 할아버지. 이런 신비로운 밤이면... 그 이야기가 진실일 것도 같아요. 그렇지 않으세요?" 소년이 빙긋이 웃었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침착하고 영리한 얼굴, 그리고 큰 키. 아직은 어린 나이지만 범상치 않은 깊은 눈매를 가졌고 물 흐르듯이 자연스 럽게 몸에 익힌 오연한 기품 같은 것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소년이다. 소년의 옆에 앉은 노인이 헛헛 웃었다. 키는 작고 체구도 왜소하지만, 푸른 수실로 비 상하는 호랑이가 수놓아진 소박한 중국 옷을 몸에 걸친 그 노인 역시도 어느 누구라도 함부로 하지 못할 강한 기질을 가진 대인의 풍모를 느끼게 하고 있었 다. 소년은 얼굴을 들어 그 깊은 눈으로 손에 닿을 듯 커다랗고 아름다운 보름달 을 취한 듯이 올려다본다. "어머니께서 밤마다 읽어주신 그 이야기가 전 너무 마음에 들거든요. 할아버 지. 푸른 달이 뜨는 밤에 어떤 운 좋은 남자가 있어 봉래산에 들어갔더니 아름 다운 선녀님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목욕을 하고 있더라구요. 그 남자는 그 달밤 에 자신이 평생 사랑할 수 있는 운명의 반려를 만나게 된다는 거죠. 정말 멋진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정말 그렇구나. 데릭. 오늘도 푸른 달이 떴으니, 네가 아마 네 짝을 만나려나 보다." "아이고 맙소사.. 제발, 할아버지. 제 나이 이제 열 두 살이라구요. 그런 끔찍 한 이야기는 제발 하지 마세요." 소년이 콧등을 찡그리며 몸서리를 쳤다. 노인이 헛헛 짓궂은 웃음소리를 냈 다. "인석아! 이 할아비는 아홉 살 때 정혼을 했어. 네 아비는 네 엄마하고 다섯


살 되던 해에 약혼식을 치뤘고 말이야. 열 두 살이면 장가를 들고도 남지! 추판 황제는 열살 때 이미 황후가 세 명이었다." "우웩!! 정말 잘 하는 짓이로군요. 그래서 그 황제는 자기 아내들하고 무슨 짓 을 했대요? 줄넘기라고 했대요? 아님 편먹고 가위바위보 놀이라도 했다던가 요?" 바로 그때이다. 갑판 아래에서 한 사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한 자세로 고개를 숙인다. 노인은 귀찮은 듯이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물었다. "뭔가, 리훙?" "대인. 황공합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서.. 타이푼 1 호가 무선을 보냈습니 다. 근처에 해적선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적당하게 겁을 주고 쫓아 버리라고 해. 오늘은 푸른 달이 뜬 상서로운 밤인 데 피를 보고 싶지 않군. 이 몇 년 '푸른 상어'가 해안 정리에 손을 놓았다 하더 니... 조무래기들이 이리 가까운 곳에서조차 설치고 있을 줄이야." "그 놈들이 아마 작은 여객선을 약탈 중인 듯 싶습니다만..." 노인이 쯧쯧 혀를 찼다 "망할 놈들. 시도 때도 없이 염치없이 굴고 있구먼. 내가 우리 손자하고 한가 하게 낚시라도 한다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 바다를 피로 물들여? 손을 좀 보 아주게." "알겠습니다, 타이쿤," 노인은 자신의 소매를 끌어당기는 손자를 돌아보았다. "뭐냐? 데릭. 할말이 있는 게냐?" "할아버지. 우리도 그쪽으로 가봐요. 감히 타이쿤의 명령을 어긴 그 망할 놈 들 얼굴 좀 보아두게요." "넌 너무 어린아이답지 않구나. 데릭. 호기심이 너무 많아도 좋은 건 아니란 다." "물론 그렇죠. 하지만 할아버지. 이 바다에서 타이쿤의 하명을 감히 저버린 자들에 대해서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하는 게 아닐까요? 리훙, 검은 용의 명을 어긴 자들은 어떻게 처결한다고 했죠?" "삼대 삼족의 뼈를 갈아버리고 그 피를 뽑아버립니다." 소년이 히죽 웃었다. 그러나 하얀 이가 드러난 소년의 얼굴은 열 두 서너살 된 어린애답지 않게 냉혹했고 노회한 노인처럼 권위적이었다. "가자구요, 그리고 그 놈들의 뼈를 갈아 버립시다!" "이 놈, 이거... 이 망할 놈이 이 할애비보다 더 지독하구먼. 아무래도 내가 이 놈을 잘못 키운 것 같단 말이지.. 어린것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렇게 설쳐 대대니.. 제발 그 건방진 말투는 네 에미 앞에서 감추거라. 니 에민 아직도 네가 잠자리 날개가 뜯겨진 것만 보아도 줄줄 우는 녀석으로 알고 있지 않니? 쯧쯧... 리훙, 게로 가 보세나. 이 놈이 순순히 제 호기심을 접을 염이 보이지 않으니... 에잇! 데릭, 이 망할 녀석!!" 그 중년 사내로부터 타이쿤이라고 불리운 그 노인이 소년의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뒤헝클어 놓는다. 그들이 웃음소리를 흩날리는 동안 허름한 낚시배처럼 보이던 그 작은 배는


마치 소형 순양함처럼 날렵한 속도로 검은 파도를 헤치며 어디론가 쏜 살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와우. 정말 볼만하군요." 소년은 여객선의 갑판위로 올라서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솔직히 갑판 위의 광경은 볼만한 것과는 멀어도 한참 먼 참혹한 광경이었다. 피 비린내가 심하게 풍기는 그곳의 광경은 섬약한 심장을 가진 사람들이 보 았다면 이미 구역질을 하며 기절을 해버릴 만큼 잔인하고 비참한 것이었기 때 문이다. 이미 살해당한 채 아무렇게나 쓰러져있는 시체들이 십 여구.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뿐이었다. 그리고 겨우 살아남은 몇 명의 남자들 은 죽지만 않았을 뿐이지 심한 부상을 당한 채 피를 흘리고 신음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살아남은 여자들도 형편이 나은 것은 아니었다. 해적들은 아마도 남 자들은 무차별하게 살해하고 여자들을 강간하고 폭행하기 위해서 살려놓았나 보다. 아무렇게나 뜯겨진 옷자락을 간신히 여민 여자들과 소녀들은 한 덩어리로 뭉쳐진 채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견뎌낼 수 없는 수치심과 경악으로 기절하여 있거나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심한 반항을 하다가 당한 것인지 그 무리 안의 두어 명의 여자는 허벅지에 피를 흘리면서 이미 죽어있었다. 그 여자들의 가녀 린 목은 예리한 칼로 난도질되어 있었다. 타이쿤의 안전을 위해 근처에서 낚시 배를 지키고 있던 함선 두 척에 타고 있던 사내들이 이미 여객선을 습격한 해적들을 전부다 짚단처럼 묶어 놓았다. 순순히 그 해적들이 투항한 것은 아닌 터이니 그들도 거친 사내들의 닥달에 오 지게도 얻어터지고 밟힌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아직도 자신들 을 이렇게 만든 인간들이 대체 누구인가 하는 의구심이 서리서리 어려 있었다. "타이쿤을 뵙습니다!" 소년의 뒤를 이어 리훙의 부축을 받으며 노인이 모습을 나타내자 검은 옷을 입고 최첨단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채 해적들을 감시하고 있던 건장한 십여 명 의 사내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저 놈들이 겁도 없이 이 바다에서 설쳐대던 놈들인가?" "그렇습니다. 타이쿤! 모처럼 휴식 시간인데 어르신의 심기를 어지럽혀 드려 서 죄송합니다." "나야 상관없지만 우리 데릭의 기분이 상했었지." "지금 막 <푸른 상어> 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타이쿤의 심기를 어지럽 힌 죄, 죽음으로 죄를 씻겠다고 하십니다. 이곳으로 직접 날아오시는 중입니다." 노인이 쯧쯧 혀를 찼다. 평생 피 비린내 속에서 살아온 노인이지만, 모처럼 한가롭고 기분 좋은 시간을 방해받았다는 성가심과 더불어, 참혹하게 잔인하게 살해된 난민들의 모습이 결코 기분좋은 것은 아니라는 속내의 심기가 그대로 드러난 표정이다. "돌아가자, 데릭. 오래도록 보고 있을 만큼 좋은 모습은 아니구나." "저 쓰레기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할아버지." "이 할애비를 대신해서 네가 정리 좀 해 주련? 이 할애비는 차나 한 잔 마시 련다. 모처럼 푸른 만월을 보아 기분이 좋았는데 피 비린내 때문에 기분이 상했


다." 노인이 먼저 몸을 돌이켜 다시 배에서 내려가 버린다. 사내들 중에 우두머리 인 듯한 청년이 더할 나위 없이 공경하는 자세로 소년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칭허 뮈렌." "응. 오랜만이야. 척. 작년 방학 때 서울에서 보고 처음이지?" 부하에게 대답하는 목소리는 여느 어린애와 다름이 없이 천진난만하다. 그러 나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발 아래로 굴러다니는 시체들에게 했던 것처럼 해적 두목의 얼굴을 구둣발로 짓이기는 그 소년의 눈빛은 웃는 입술과는 달리 몸서 리쳐질 정도로 무표정하고 냉혹한 것이었다. "도련님. 저 놈들을 어떻게 처리할까요?" 데릭은 한번 발로 툭하고 걷어차 주고는 돌아섰다. "쓰레기들을 쓰레기장에 보내야지. 작신 밟아주고 이 자리에서 처리해. 물고 기 밥으로 만들어 버려. 할아버지 낚시를 망친 괘씸한 놈들이니까! 피 비린내 나. 가능한 한 빨리 저 시체들이랑 다 처리하라고! 알아들었어? 보아하니 저 인 간들.. 밀항하는 보트 피플 같은데? 쯧쯧쯧.. 통행세를 내고 우리한테 부탁을 했 으면 이런 꼴은 안 당했을 거 아냐? 멍청하게도... 목숨보다 돈이 더 아까웠단 말이니까 당해도 싸!" "여자들하고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할까요?" "알아서 해. 수용소로 보내버리든지, 아님 노예로 팔아버리든지. 그것도 귀찮 으면 다같이 물고기 밥으로 쓸어 넣어버리든지... 헉, 뭐야, 이 꾀죄죄한 것은?" 데릭은 놀라 펄쩍 뛰었다. 겁도 없이 아무 것도 모르고 아장아장 다가와 소년 의 장화에 달라붙는 어린애가 하나 있었던 것이다. 남자애처럼 머리카락을 빡빡 깍은 그 아기는 이제 겨우 서 너 살 남짓 되어 보였다. "고야이.. 고야이.. 고야.." 데릭은 자신의 장화에 붙은 장식이 고양이 모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무릎을 끓고 해죽해죽 웃고 있는 아이를 번쩍 들어 안았다. 새카맣고 커다란 눈이 호수처럼 맑고 순수한 아기. 하얀 피부가 너무도 연약 해 파란 핏줄이 내 비추일 정도로 맑다. 남방계의 가무잡잡하고 이국적인 얼굴 과는 다른, 마치 한 송이 연약한 들국화같이 귀엽고 순수하게 생긴 아기의 모습 이 데릭의 마음을 움직였다. 외동아들로 자라 데릭은 늘 아기들에게 약했다. 소년은 얼음 뚝뚝 흐르던 표정을 바꾸며 아기를 강한 두 팔로 밤하늘로 번쩍 들어올렸다. 까르르 웃음소리와 함께 푸른 달 아래 아기가 몸부림을 치며 좋아 라 하다가 앙증맞은 두 팔을 내밀어 데릭의 목을 감는다. 그에게 딱 달라붙은 아기의 냄새. 솜털처럼 가벼운 아이의 몸무게였다 "이 애 어미가 누구지?" 대답이 없었다. 대신 심한 부상을 입고 저 쪽에서 신음하던 열 대 여섯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데릭에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것은 해적들에게 비참하게 강간당하고 칼로 난도질당 해 죽은 한 여인에게 가 있었다.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하얀 피부, 검은 머리카


락이 매력적인 여자. 아마도 그 색다름이 해적들 눈에 띄었겠지. 여자에게는 몹 시도 불행한 일이었을 테지만 제 엄마가 죽은 것도 모르는 듯 그 아이는 여전히 데릭의 장화만 손짓하면서 고야이.. 공야이 하고 옹알옹알하다가 방실방실 웃기까지 했다. "제발 우리 래인이는 해치지 말아요! 제발... 불쌍한 아이잖아요? 그냥 아무 것도 모르는 아기잖아요.. 제빌 살려 주세요!" 간절하게 그 소년이 애원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아마도 푸른 달의 마법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 달빛에 비추어진 한없이 해맑고 귀여운 그 아이의 웃음 때문이었 을 것이다. 데릭이 그들에게 흔치 않은 자비를 베풀기로 맘을 먹은 것은... 소년은 어깨를 으쓱하며 리훙에게 손짓했다. "뭐, 별로 맘에 내키지는 않지만 말이야. 상서로운 날에 더 이상 피를 볼 수 는 없지. 리훙. 저 인간들 모두다 안전한 곳에 내려 줘. 그리고 이 아이. 저 다 친 녀석과 함께 묶어서 돌봐 주라고. 그리고, 원숭이 너. 잘 들어! 죽을 때까지 넌 이 아이를 돌봐주어야 하는 거다. 알았나? 보아하니 이 아이 어미하고 네가 아는 사이 같은데, 어미가 죽었으니 이 아이 보호자는 앞으로 너라 이 말이다. 잘 키워! 언젠가 내가 이 아이를 찾아냈을 때 이 아이가 만약 엉망으로 되어 있 으면 내가 반드시 네놈 목줄을 따 줄 테니!!" 그리고 데릭은 자신의 장화에서 황금처럼 빛나는 고양이 장식을 뜯어 아기의 고사리 손에 들려주었다. 그렇게 모든 일을 지시하고 마치 노인처럼 뒷짐을 쥔 채 뒤돌아보지도 않고 갑판을 내려가 사라지는 소년의 등뒤로 푸른 달빛이 한없이 창백하게 어려 있 었다. 리훙이 신음하는 소년의 상처에 수건을 대주며 싱긋 웃었다. "너희들 모두다 오늘 운이 최고로 좋은 줄 알아. 도련님 기분이 좋을 때 너희 들 일을 처리하신 거니까." "..대.. 대체 당신들은 누구요?! 우릴 구해준 건 고맙지만... 당신들도 좋은 사 람은 아닌 것 같아요." 리훙은 자존심 강한 눈매가 빛나는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그 소년(아마도 그들은 미얀마나 캄보디아 난민들인 듯 했다)을 노려보며 입귀에 살짝 엄한 주 름을 지었다. "뼈가 강하군! 감히 우리 앞에서 잘도 입을 나불대다니... 잘 보았어. 우린 결 코 자비로운 사람들이 아니야. 하지만 잘 기억해두라고. 너희들이 홍콩에서 발 붙이고 살아가려면 우리들 힘이 없으면 절대적으로 불가능할 테니." "당신들이 그럼... 트..트라이어드?" "눈치는 빠르군. 너희들이 운 좋았다는 건 오늘 대 타이쿤께서 모처럼 손자분 과 함께 이 근처에서 낚시질을 하고 계셨다는 거다. 저 멍청한 놈들은 타이쿤께 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시는 것을 방해한 대죄를 지은 거야. 그래서 물고기 밥 이 되는 게 당연한 거지. 그래도 도련님께서 오늘 기분이 좋으시니 이 정도로 끝낸 것이지, 만약 저분의 심기가 사나웠으면 저 놈들은 이 자리에서 뼈가 갈아 졌을 거다."


"대체 누구요?! 저 어린애가.." "말조심 해!! 이 자식아. 그분은 우리의 어린 신이시다! 앞으로 십 년 후이면 대 타이쿤의 뒤를 이어서 전 세계의 밤을 지배하실 검은 용이시라고!" 소년은 망연하게 자신이 지금 얼마나 엄청난 비극을 당한 줄도 모르고 데릭 의 고양이 장식을 가지고 놀면서 방실방실 웃고있는 아기를 바라보았다. 소년은 팔을 내밀어 소중하게 아기를 품에 안았다. 억지로 참았던 눈물이 소년의 가무 잡잡한 볼 위에서 비로소 줄줄 구르고 있었다. "래인. 너 지금 들었니? 우리 둘 지금 죽다가 살아났단다. 넌 이렇게 아직 어 린데...너무 작고 연약한데... 내가 어떻게 널 지켜낼 수 있을까?! 우리가 살아남 은 게 과연 축복일까? 아님 절망일까? 래인아. 오빠가 널 지켜줄 수 있을까?..." 푸른 달이 조용히 내려다보는 그날 밤. 고양이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아기와 고양이라면 재채기부터 하는 소년이 우 연을 가장한 운명으로 그렇게 만났다. 이것이 앞으로 벌어질 그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다. <1 편> 용(龍) 용(龍), 죽겠지?! 3 월. 오후 두 시 반, 홍콩 국제 공항. 서울 발 홍콩 행 보잉기가 육중한 몸을 하고서도 날렵하게 바다로 뻗은 활주 로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노란 모자를 쓴 항공사 직원들이 분주하게 이동식 계단을 비행기에 가져다댔 고 얼마 후 오랜 여행으로 피곤한 얼굴을 한 승객들이 그 계단을 통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검정색의 티셔츠에다 같은 색의 진을 입고 부드러운 모카부츠를 신은 한 남 자가 그 승객 들 사이에 끼여서 천천히 공항 버스에 올라탄다. 햇살에 황금빛으로 윤기나는 검은 머리카락 아래 물처럼 잔잔하나 아득한 심 연처럼 깊은 눈매를 하고 조각처럼 수려한 이마를 가진 그 남자. 정무형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니 <트라이어드의>의 젊은 황제 검은 용께서 일년만에 다시 홍 콩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참 때인 남국의 햇살이 따가워 무형은 버스에서 내리면서 자켓 주머니에 구겨 넣은 골프 캡을 머리에 얹었다. 그리고는 선글라스를 꺼내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서 그는 천천히 화물을 찾기 위해 불이 반 짝이는 화물 이동 레일로 다가갔다. 수레에다 단단한 가죽으로 된 ABL 사의 마 크가 찍힌 노트북 가방과 골프채 세트. 그리고 간단한 짐이 든 트렁크를 찾아 실었다. 그리고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 걸음으로 천천히 게이트 쪽으로 걸어 나갔다. "리훙이 타이쿤을 뵙습니다." 푸른색 파오를 입고 석상처럼 서 있다가 그가 나타나자 더할 나위 없이 공경


하는 태도로 깊이 허리를 굽히는 조부의 비서인 리훙을 바라보며 무형은 천천 히 선글라스를 벗었다. "오랜만이군, 리훙." "일 년 만이지요. 제가 뉴욕으로 건너갔을 때 잠시 뵌 후 오늘이 처음입니 다." 별다르게 심각한 일이 벌어졌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인사 치레로 무형은 그로 하여금 홍콩으로 돌아오게 한 조부의 안부를 슬쩍 물었다. "그래, 할아버지는 어떠신가?" "퇴원은 하셨습니다만, 아직도 심기가 불편하신 듯... 의사는 절대안정을 하라 고 했습니다. 아무튼 타이쿤, 이번에는 정말 심하셨습니다." 약간의 힐난까지 섞인 리훙의 말에 무형은 씨익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다. 다 알면서 왜 그러냐는 뜻이다. 리훙은 한숨을 푹 쉬고는 그의 짐이 실린 수레를 끌고 그를 따라갔다. 아무리 해도 움직여지지 않는 완고하기 이를 데 없는 저 고집. 핏줄의 내력은 똑같은지 지금 빅토리아 가(街)의 저택에서 이를 갈며 무형이 도착하면 반쯤 죽 여놓으리라 작정한 채 펄펄 뛰고 있는 노인네나,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모든 일을 완벽하게 망쳐놓는 저 '망할 놈'의 젊은 인간이나 리훙의 주름살을 늘게 하는 골치 덩이이기는 똑같았다. "아, 덥군. 홍콩은 너무 더워. 그래서 늘 짜증스럽지." 지친 듯 해 보이는 젊은 주인의 말에 리훙은 서둘러 그가 홍콩에 돌아오면 언제나 타고 다니는 은회색 람보르기니의 문을 열었다. 무형이 스무 살이 되던 생일날, 대 타이쿤은 무형의 생년과 같은 연도의 이 은빛의 날렵한 자동차를 골동품 차 시장에서 구입해서는 선물해 주었다. 아마도 처음 소유하게 된 차라서 그런지 젊은 주인은 이 차를 유난히 아꼈다. 그래서 주로 전기 자동차나 태양열 자동차가 상용화된 지금도 그는 홍콩에 돌 아오면 굳이 이 구식 승용차만을 고집하곤 했다. 그래서 무형을 마중나오면서 리훙은 일부로 이 차를 몰고 나온 것이다. 더운 것에 딱 질색하는 그를 위해 이미 에어컨을 켜 놓았으므로 차안은 마치 가을날의 산 속처럼 서늘했다. 마치 무형이 아이인 양 안전벨트까지 매어주고 나서 리훙은 짐을 차 트렁크에 넣고 그리고 운전석에 올라타서 차를 출발시켰 다. 뒷좌석의 등받이에 편안하게 몸을 기대고 나서 비로소 무형의 입술이 벌어졌 다. "그래, 어때? 아운이 토머스란 놈과 같이 도망가고 나서 홍가(家)의 분위기가 초상집이 되었겠군. 그 괘씸한 년 놈들을 찾았나?" "....타이쿤께서 그들을 보호하고 계신 터인데 감히 누가 찾아내겠습니까? 이 제 제발 장난 좀 그만 치십시오! 이번까지 해서 벌써 세 번째인데 정말 노 대인 께서 숨이 넘어가실 지경이시랍니다!" 입이 튀어나온 채 불퉁한 어조로 리훙이 되받아 쳤다. 그러나 백밀러 안에서 마주친 리훙이 힐난 섞인 눈빛을 맞받으며 무형은 싱긋 웃었다. "이거 정말 생사람을 잡는구먼!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 거야? 일에 치여 밤 낮없이 바쁜 나를 놓아두고 내 비서와 내 약혼녀가 눈이 맞아 줄행랑을 쳐버린 것을 왜 내 죄라고 하는 거지? 난 최선을 다했다고! 아운을 뉴욕에 오게 해서 소원이라는 발레 스쿨에도 보내줬고 일주일에 한번씩 데이트도 했다고. 그런데


그 여자가 내가 아닌 토마스 놈의 매력에 넘어가 같이 그 놈의 침대에 누워있 는 것을 어쩌란 말야? 대놓고 날 뒷통수치고 나를 배신한 그런 여자까지 내가 꾹 참아주었어야 한다는 말이야? 그 암캐가 아무리 홍가의 금지옥엽이라고 해 도 말이지, 난 그런 꼴 못 봐! 검은 용의 자존심이 있지. 그런 헤픈 여자는 절대 로 검은 용의 아들을 낳을 수 없어! 그러니 그 망할 자식과 음탕한 홍가 계집을 잡아와! 홍가 늙은이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잘라버리고 개밥으로 던져줄 테니 까!" 무형은 음산하게 내뱉었다. 그랬다. 결국 그의 세 번째이자 가장 화려한 약혼도 결국 결혼식 사흘 전에 끝장이 나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지금 트라이어드는 다시 한번 완전히 뒤집혀 져 있었다. 세 번의 약혼. 또 그만큼의 파혼. 세상 사람들이 검은 용이라고 부르는 그 사내가 6 년 동안 눈 하나 깜짝 않고 해치운 일들이다. 처음에는 언제나 당장 결혼식을 치르기라도 할 듯한 그런 얼굴로 순순히 받 아들이지만 그러나 마지막 순간엔 늘 약삭빠르게 굴레에서 도망을 가버리는 남 자. 이번에도 그랬다 고르고 골라 모든 것을 그의 취향에 완벽하게 맞춘 여자로 주도면밀하게 준 비된 그의 약혼녀. 칠인회 장로들의 만장일치 결정에 의하여 검은 용의 배필로 결정된 여자는 트라이어드 조직의 2 인자인 홍가의 외동딸인 아운이었다. 그런데 고귀한 그녀가 지신이 약혼한 그 남자의 얼음같이 차가운 행동과 정 중함 속에 숨은 잔인함, 우아하게 표현하는 경멸과 모욕에 못 이겨 너무나 다정 하게 대해주던 그 남자의 비서와 줄행랑을 쳐버릴 줄이야. 그 것도 모자라서 약 혼자인 고귀하신 검은 용과 장로 몇몇의 눈앞에서 그 비천한 놈과 발가벗고 한 침대에 있던 광경까지 연출할 줄이야... 그 길로 결혼식은 끝장났고 다시 한번 트라이어드는 발칵 뒤집혔다. 마(魔)라도 끼인 것인가? 검은 용의 약혼은 이미 네 번째. 그런데 그 모든 약혼이 늘 끝에 가면 결혼식 직전에 파탄이 나고야 마는 것 은 대체 무슨 영문일까? 그의 첫 번째의 약혼녀이자 모든 이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했던 SLE 사의 브 라이언 윤 회장의 딸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채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그 남자에게로 날아가 버렸다. 청나라 마지막 황녀의 자손인 두 번째 여자는 앞으로 자신의 남편이 될 검은 용께서 너무 공사다망하시어 자기랑 안 놀아주고, 자신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 다고 줄줄 짜면서 지겹게도 사랑타령만 해댔다고 무형은 푸념했다. 그러더니 언 제부터는 배우가 되겠답시고 설쳐대다가, 도저히 그 것은 불가능이라는 것을 알 게 되고는 그만 절망해서는 자신의 삼층 침실에서 추락을 해버렸다. 척추 부상, 그리고 파혼.


지난번에 약혼한 유명한 첼리스트는 결혼보다 예술에 투신하고 싶다는 신념 으로 당당하게 파혼을 요구하지를 않나, 절대적으로 결혼식까지 가게되리라 기 대했던 이번 약혼녀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은 용의 비서와 줄행랑까지 치다 니, 젠장.. 게다가 또한 그렇게 감히 검은 용을 망신시키고 배신을 한 죄목으로 감금된 채 참혹한 벌을 기다리고 있던 그 두 년 놈이, 잠시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탈출을 감행해 온데 간데 없이 종적을 감춰버렸을 줄이야! 이런 저런 일이 계속되니 검은 용의 핏줄을 바라는 노인들이 밤잠을 자지 못 하는 것은 당연지사. 게다가 대 타이쿤의 나이는 이미 칠순이 훌쩍 넘었다. 하물며 무형의 나이도 이미 서른 하고도 넷이었다. 아이를 가져도 벌써 두 서 넛은 되어야할 나이. 그러나 아직 혼인도 하지 못한 검은 용의 문제 때문에, 잔 근심 많은 ?은 칠인회의 장로들은 머리에서 피가 마를 지경인 된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 어떻게 된 것이, 사랑하는 손자가 약혼을 하는 족족 끝내 는 파탄이 나는 이유가 뭘까 대 타이쿤께서 요모조모 따져 보았겠다? 그때 노인이 문득 깨닫게 된 참혹한 진실. 즉 불행하기 이를 데 없는 작금의 연속적인 파혼 사건에 숨겨진 흑막이 있다는 것이었다. 늘 약혼녀에게 버림만 받는, 그리하여 모든 사람의 동정을 한 몸에 받는 불쌍하고 슬픈 검은 용이 사실은 결혼하기 싫어서 이 모든 일을 은밀하게 주도 한 것이라는 바로 그 확신 말이다. "그 망할 자식을 당장 불러들여!~~~~~~~~~~~~~~~" 구룡 반도를 흔들리게 한 노인의 고함소리에 뉴욕에 있던 무형의 귀까지 다 소 간지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혀 양심의 가책없이 뻔뻔하게 버티고 있던 그에게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예전부터 심장에 이상이 있던 노인 이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병원에 입원을 했다는 소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리훙이 사정하듯이 무형을 바라보았다. "제발 이번만은 대인 앞에서 자중해 주십시오. 정말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다시 한 번 심장에 무리가 가면 정말 위험하답니다." "젠장! 노인네가 아직도 기가 안 죽어서 그래. 당신 뜻대로 뭐든지 움직여야 직성이 풀리시잖아... 어련히 내가 알아서 할까봐. 알았어, 알았다고! 조심하지. 나도 할아버지가 화내시는 건 아직도 무섭다고" 아이고, 어련하실까 봐?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거짓말을 하지... 리훙의 눈 빛에 무형은 실실 웃었다. 이 세상에서 당신 맘대로 안 되는 것이 없는 노인네가 딱 하나 못이기는 것. 그게 바로 이 망할 놈의 손자가 피우는 쇠심줄 고집이라는 것을 대체 누가 모 른다고 이런 말을 하느냔 말이다. 가자미눈을 뜨고 그를 흘겨보는 리훙이 귀찮아 무형은 싱긋 실금 같은 미소 를 지으며 그리고 눈을 감아 버렸다. 두 손으로 깍지를 낀 채 뒷통수에 대고 의자 등받이에 편안하게 몸을 걸친 무형은 혼자 실죽 웃었다. '이번엔 좀 심했나?' 심지어 조상신에 대고 맹세한 아운과의 결혼까지도 기어코 작파를 낸 것에 대


하여 노인이 펄펄 뛰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하다. 하지만 이 번 일이 홍가의 추악한 배신자들을 처단하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 을 안다면 노인도 더 이상 그를 탓하지 않을 것이다. 피 어린 충칭 항전의 그 날 이후, 10 여 년이 넘게 피 솟구치는 복수심과 배신 의 분노를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겉으로는 미소지으며 그러나 끊임없이 그들을 향하여 칼을 갈아온 무형이다. 그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무형은 근 10 년간 그들 머리 위로 그물을 늘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조직 안에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야쿠자와 손을 잡고는 그를 배신하고 잔인무도하게 그를 살해하려던 주범이 홍가 일당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는 그렇게 진득하게 이를 악물며 10 여 년을 참아온 것이다. 이제 그 그물을 잡아채서 옴쭉달싹도 못하게 그들을 완전히 말살하고야 말리라. 눈을 감은 무형은 슬며시 입 꼬리를 치켜올리며 혼자 미소지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도망가지 못할걸? 그 망할 인간들이 사사건건 내 일에 토를 다는 게 정말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이번 기회에 완전히 정리를 해버려야지. 건 방진 것이 겁도 없이 또다시 조직을 배신해? 감히 내가 없는 사이, 허락도 받지 않고 러시아와 무기 거래를 해? 그 돈까지 지 놈 주머니에 넣고 꿀꺽하셨다... 홍 푸센.... 네가 정말 죽고 싶어 발악을 하는구나. 보잘 것 없는 딸년 하나 내 침대에 밀어 넣으면 천 년 만 년 목에 힘주고 살 줄 알았나 본데 잘못 아셨 어...' 얼음 같은 푸른 미소가 슬쩍 다시 무형의 입가에 어렸다 사라진다. 소름끼치 도록 차갑고 잔인한 미소. 조용하고 냉담하지만 반드시 피를 보고야 마는 검은 용이 마침내 다시 돌아온 것이다. 도심에서 약간 떨어진 전망 좋은 언덕. 푸른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바다가 그대로 내려다보이고 울창한 푸른 숲으 로 둘러싸인 그 곳에 멋진 석조 주택이 웅장한 성인 양 서있었다. 하얀 색으로 칠해진 건물 주위로는 중국의 전통 양식으로 지어진 3 층의 고풍 스런 청 유리기와 건물들이 몇 채 그 하얀 집을 호위하듯이 위치해 있고 테니 스 코트, 수영장 따위가 늘어선 마당과 잘 가꾸어진 정원을 지나면 거대한 담이 그 집을 둘러싸고 있다. 그 담은 다시 온 담을 빙 둘러 파여진 좁은 연못을 사 이에 두고 상서로운 동물들이 새겨진 화려한 대리석 다리 하나로 도로와 연결 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그냥 어디에도 있을 법한 평범한 대부호의 저택같이 보이는 그 화 려한 건물에는 그러나 군데군데 감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고, 거리에서는 보이지 않게 위치한 초소에서 검은 옷을 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최신 무기로 무 장한 채 매의 눈을 하고 경계를 서고 있었다. 왜냐하면 바로 그 곳이 중국본토 와 동남 아시아의 밤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황제인 트라이어드의 대 타이쿤이 거처하는 곳이었으므로. 무형이 탄 차가 그 다리를 막 들어서던 참이었다. 바로 그 순간. 집안에서 앞도 보지 않고 빨강색 승용차 한 대가 무작정 저돌 적으로 달려나오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리훙이 반사적으로 핸들을 돌렸지만 달려오던 속도가 있으니 그 차는 무형의 차를 피하지 못하고 끼이익 쇠 긁는 소리를 내며 무형이 탄 람보


르기니의 옆을 박으며 간신히 섰다. 리훙은 리훙대로 좁은 다리에서 핸들을 마 구 돌렸으니 그만 차가 한바퀴 구르다시피 해서 다리의 난간을 들이박는 것으 로 해서 간신히 무형의 차와 그 차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을 간신히 면한 것 이다. 무형은 에어백 속에 파묻힌 자신의 얼굴을 천천히 들었다 "...내가 살았나?" "그.. 그런 것 같습니다요, 타이쿤. 괜찮으십니까?!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아직도 리훙은 제 정신이 아닌 듯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무 형은 두 눈을 잠시 깜빡깜빡하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교통사고로 죽을 뻔한 건가? 이 검은 용이, 일년만에 홍콩으로 돌아온 첫날에... 무형은 멍하니 자신의 차를 박을 뻔한 앞의 승영차를 노려보았다. 그 차의 운전석에 앉아 아직도 핸들을 꽉 움켜쥔 채 넋이 빠진 얼굴로 멍하 니 그를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 "젠장, 뭐야? 저거 여자잖아!" 빠지직. 무형의 입에서 이가는 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저 계집을 어떻게 죽여주면 잘 죽여줄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을 포함한 몇 분의 심오한 명상을 통해 간신히 정신 수습 과정을 거친 무형은 천천히 차 문 을 열고 바깥으로 나섰다. 그는 정말 인정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가 태어나서 가장 최악의 위험에 처했었다는 것을... 전 세계 의 암흑 세계를 통치하는 검은 용 칭허 뮈렌이 삼십 사 년만에 지지리도 폼 없 게시리 겨우 여자가 모는 차에 치어서 까딱했으면 돌아가실 뻔했다는 경악할 만한 사실을, 거기다가 간발의 차이로 죽음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무형은 아직도 몰랐다. 그 일이 그의 인생에 있어 도통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정말 지상 최악의 골치 덩어리이자 도무지 어떻게 감당할 수 없는 장난꾸러기 요정으로 성장한 그 고 양이를 좋아하는 아기 래인을 다시 만나게 된 하늘의 섭리라는 것을.... 래인은 자신이 방금 자신의 목숨과 더불어 멀쩡한 두 남자의 목숨을 죽음 일 보 직전까지 가게 했다는 경악할 만한 사실에 대해 엄청난 두려움과 더불어 자 책과 반성으로 머리를 쥐어듣고 있던 참이었다. 아이고, 난 죽었다... '이 일을 아시게 되면 아빤 당장 차 키를 빼앗아서 저 푸른 바다 속에 집어던 져 버리실 거야. 우제 오빠는 허락도 없이 자기 차를 몰고 나가서 박살을 낸 것 을 알면 아마 나를 산채로 뜯어먹으려 할텐데.. 엉엉엉.. 젠장. 어떡하지? 에구머 니.... 저 남자, 엄청 화난 것 같은데.. 설.. 설마 날 패 죽이려고 하는 건 아니겠 지?' 검은 모자에 검은 티셔츠. 그리고 검은 진에 감긴 늘씬한 다리. 그리고 햇살 이 반짝이는 검은 머리카락과 깊은 눈. 모든 것이 새카만 그 남자가 천천히 래인의 차에 다가오더니 아무 말도 없이 다짜고짜 다리를 들어 냅다 성한 쪽 헤드라이트를 걷어차 박살을 내버렸다. 그 리고 손가락을 까딱했다. 래인더러 좋은 말 할 때 내려오라는 뜻이다.


차 문을 열고 나갔다간 저 무시무시한 분노의 검은 오로라를 내뿜고 있는 사 내한테 맞아죽을 것이라는 위기감에 래인은 잠시 갈등했다. 도망을 가버릴까?! 아니면... 그냥 땅바닥에 엎드려 싹싹 빌어볼까?! 다시 차가 콰당 소리를 내며 덜컹거렸다. 그 남자가 다시 다리를 들어 냅다 래인이 탄 쪽의 차 문짝을 발로 걷어찬 것이다 "내가 끌고 나오기 전에 당. 장 내려!" "에, 에... 저.. 저요? 왜, 왜요?" 래인은 달달 떨면서도 끝까지 <배 째라!> 버전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가 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저걸 죽여, 말어? 이런 눈빛으로 래인을 노려 보던 그 사내가 손가락을 까딱했다. 그러자 어느새 나타나 래인의 차와 그 사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검은 양복 의 사내들 두 사람이 척 나서더니 아무 말 않고 래인이 탄 쪽의 차 문을 열었 다. 그러더니 그녀의 팔 하나씩을 잡아 질질.. 아니 사뿐히 들어서는 그녀의 의 지와는 상관없이 들어다가 그 남자 앞에다 가져다 놓았다. "너, 살인범이냐?" "에.. 그러니까... 저기요.. 저기, 제가요... 그러니까.. 너무 바빠서.." 어지간히도 겁을 집어 먹었나보다, 눈에 반은 눈물이 차서 찰랑찰랑한 채 그 여자는 무작정 두 손을 모아 빌기 시작했다. "제발 하,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저도 이런 짓 안하고 싶었단 말예요. 잉잉 잉.. 제 차 브레이크가 고장났다구요. 헝헝헝 엄마!!~~" 목놓아 눈물 반 콧물 반. 엄마를 부르며 훌쩍훌쩍 잘못했다, 한 번만 봐 달라 애원을 하던 그 여자가 갑자기 사람이 돌변한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형 의 아래위를 마치 사냥개처럼 훑어보기 시작한 것은 딱 삼분 후였다. "우와아... 이거야. 이거!! 당신 이미지... 오홋! 딱이네! 싸가지없고 잔인하고 난폭하고 얼음기 뚝뚝 흐르고... 정말 당신 눈 한번 죽인다아!~~ 이렇게 못 되 먹게 검고, 그러면서도 사악하게 멋진 눈동자 색은 처음이야! 당신, 내 모델 좀 해 볼래요?" 일단 사고를 친 여자가 죽여줍쇼 이러면서 눈물 반 콧물 반 울며불며 한번만 용서해달라는 데에 약간 누그러진 무형. 손가락을 내밀어 삿대질을 하며 운전은 어떻게 해야하는 지에 대해 당연하고도 점잖은 설교를 막 늘어놓으려고 하던 정무형. 뜬금없이 자신의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살펴보며 난리 블루스를 추는 여자 앞에서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완전히 기가 막히다 못해 당황해서는 돌이 되어버린 무형은 멍하니 자신의 어깨를 조금 넘는 키를 가진 그 황당한 여자를 멍청하게 내려다보았다. 찰랑찰랑한 검은 머리카락에 오렌지 빛과 은빛 브리지를 조금씩 넣고 언밸런 스 커트를 한 그녀는 어찌 보면 작고 어린 소녀같이 보였다. 그러나 티 한 점 없는 하얀 얼굴에 표정이 풍부한 눈동자. 오뚝 솟은 콧날과 붉은 입술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예쁜 얼굴을 가졌다.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것은 그녀의 맑은 눈이 었다. 푸른 기가 돌만큼 깨끗한 눈, 깊은 밤처럼 검고 또렷한 눈동자. 그가 영원 히 잃어버린, 그러나 사랑하기를 멈출 수 없어 괴로운 그 여자와 너무 닮은 눈. 자기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잇는지 전혀 인식이 없는 모양이었다.


언제 내가 눈물을 흘렸더냐 하듯이 일분 전까지만 해도 젖어있던 눈 밑이 보 송보송해져서는 여자는 마치 입가에 침이라도 줄줄 흐를 듯 탐욕스러운 얼굴로 정신 사납게 그를 빙빙 돌며 자신이 발견한 꽃미남의 아릿다운 자태를 감상하 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는 자신의 손목 시계를 보더니 다시 얼 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우ㅡ악!!!!!! 늦었다! 난 오늘 죽은목숨이야... 저기요, 잘생긴 아저씨. 저는 지 금 가야 하거든요!! 내가 당신을 위험에 처하게 했으니까, 당신 차와 당신의 정 신적인 충격에 대한 보상을 신청하려면 이리로 연락하세요. 난 바빠서 그만!! 담에 봐요!!" 그녀는 뭐라고 궁시렁궁시렁 하면서 핸드백을 뒤지더니 자신의 명함 한 장을 꺼내서는 황당해서 입을 못 열고 있는 무형의 앞가슴 주머니에 턱하니 끼워 넣 었다.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자신의 도리를 다했다는 뜻이리라. 아주 당당하고 뻔뻔하게 가라는 말도 안 했는데 다시 자신의 차에 올라타서는 척하 니 바이 바이까지는 하고 무엇에라도 쫓기는 듯 냉큼 사라져 버린다. 매캐한 먼지를 날리며 사라지는 빨강색 승용차 무형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귀신에 홀린 거지?" "아마도 그러신 것 같습니다만...." 누군가 연락을 했는지 안채에서 달려나온 척이 약간 곤란한 얼굴을 하고 무 형에게 대답했다. 얼렁뚱땅 정신을 빼놓고 사람의 이성을 어지럽히고는 미꾸라 지처럼 빠져나간 그 여자가 이 자리를 벗어나면서 깔깔거리며 자신을 비웃었다 는 데에 무형은 자신의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구미호가 환생을 했나... 내 가 뻔히 눈을 뜨고 내 차와 내 목숨을 위협한 저 망할 것을 놓쳐버리다니.. "들어가시죠 대인께서 기다리십니다." "이봐! 지금 내가 순순히 들어가게 생겼어?! 저 망할 여자를 잡아와야지!" 그가 이를 갈며 고함을 뻑뻑 지르자 난처한 듯 척이 머리를 긁적였다. "저 분, 내일이면 다시 오실 겁니다. 노 대인이 총애하시는 분이시지요. 날마 다 들어오셔서는 같이 지내십니다. 그러니 내일 오시면 타이쿤 앞에 고스란히 대령합지요." 무형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뭐야? 할아버지가 총애를 해? 하나님 맙소사! 그럼 아까 저 건방진 계집애가 할아버지 노리개란 말이야? 미치겠군. 주책스런 노인네 같으니라고! 낼모레면 벽에 똥칠을 할 늙은 양반이 무슨 첩 질이야? 그것도 손녀뻘인 어린 계집애를 끼고.. " "첩이라뇨? 마님께서 계시는데, 어떻게?... 타이쿤, 아까 그 분은 마님과 대인 께 책을 읽어드리는 분이라고 그러던데요. 지금은 삼국지를 다시 읽어드리고 있 답니다. 두 분이 아주 좋아하신답니다. 특히 마님은 래인 아가씨가 오기만을 손 꼽아 기다리시는걸요." 다시 한 번 보기 좋게 뒷통수를 얻어맞은 무형은 뻥 찐 얼굴로 척을 바라보 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책을.. 읽어주는 여자라고?" "예. 그렇습니다. 일주일에 네 번 저택으로 오셔서 대인께 책을 읽어주시는 분이라고 그러던뎁쇼? 아주 유명한 동화작가랍니다. 상도 많이 탄 분이라고 하 던데요. 직접 책의 그림도 그리고요... 아주 재주가 많은 분이라고 대인께서 칭 찬이 대단하셨습니다. "


그때 무형은 분명 용용 죽겠지 하는 그 여자의 웃음소리를 다시 들었다.

(2 편) 래인, 오빠한테 맞아 죽을 뻔하다. "뭐, 뭐야?~~ 래...래인아. 다... 다시 말해봐. 너 지금... 지,금.. 부..분명히... 람보 르기니라고 그랬냐?" 언제나 하루에도 한번씩 사고를 치지 않으면 온 몸에 가시가 돋는 말썽쟁이 막내 누이가 터뜨린 너무나 엄청난 폭탄. 더 이상 소리지를 기운도 없는지 루이 스(한국명 우인)가 정말 환장하겠다는 얼굴로 래인을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낮 은 목소리로 확인했다. 래인은 훌쩍거리다가 다시 한번 히잉 하고 콧물을 들여 마셨다. 그러면서 한 없이 애처로운 얼굴로 둘째 오빠인 루이스를 올려다보았다. "힝, 오빠, 그거 정말 비싼 차지? 응?! 내 저금으로 어림도 없겠지?!" "람보르기니? 맙소사!! 딴 것도 아니고 골동품 람보르기니!~~~~ 아후후!! 내가 돌아. 돌아! 이 망할 동생아. 사고를 쳐도 좀 싼 것으로 치지 어떻게 람보르기니 를 박살낼 수가 있는 거냐?!" "나..나도 죽을 뻔했단 말야! 씨이... 어떻게 그 좁은 다리에서 그렇게 속력을 엄청 내며 달려올 수 있냐고!" 래인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깠다. 좁은 다리에서 앞도 보지 않고 속력을 낸 당사자는 절대적으로 자신이 아니 라 그들이라고 말이다. 자기에게 불리한 진실은 언제든지 눈 하나 깜짝도 않고 싹 깔아뭉개는 버릇은 래인의 특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인은 쯧쯧 혀를 차며 한심스러운 듯 래인을 노려보았다. 곧 죽어도 자신은 잘못하나 없다 주장을 하는 래인이, 끝까지 자신이 피해자 라고 뻥을 까면서도 람보르기니가 망가진 것을 고쳐주어야 한다는 데서 그는 누가 가해자인지 눈을 감고도 눈치를 탁 꿴 것이다. 하느님을 속이지, 이 오빠 를 속이려 들어? 이 멍청한 바보 녀석... 우인은 한숨을 푹 쉬었다. 정말 거짓말도 뒈지게 못하는 게 끝까지 속이려고 든단 말야. 게다가 끝내는 그 수리비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나올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데서 우인의 분노는 더 커져가고 있었다. "야, 이래인. 네 그 쥐꼬리만한 저금, 백년을 모아봐야 네가 박살낸 그 람보르 기니 문짝 하나 살 것 같으냐? 엉? 아후우!!~" "힝, 오빠, 나 어떡해~~ 보험처리도 안 된단 말야. 나 무면허잖아! 이거 알려 지면 난 감방간다고요! 오빠, 나 한번만 봐 주라!! 히잉~~~" 울상이 되어 싹싹 비는 래인 앞에서 둘째 우인은 다시 한번 푹 큰 한숨을 내 쉬었다. 권위적이고 딱딱하기로 소문난 한국 검찰에서도 첫 손가락 꼽힐 만큼 냉철한 민완 검사 이우인도 이 여우같고 요정 같고 불리할 때만 멍청한(척 하는) 천사 같은 막내 누이한테는 꼼짝 못하는 것이다


"이구. 이걸 그냥 콱!! .....알았다. 내가 알아보마. 하지만 너, 다시 한번 면허도 없는 것이 함부로 차 몰고 나갔다간... 알지? 네가 제 도요타를 박살낸 걸 알면 아마 우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숨넘어갈 거다." "핏!~ 엘린 언니네 집 부자잖아!! 하나뿐인 사위한테 설마 롤스로이스인들 못 사줄 것 같으냐? 오빠가 장가가면 도요타는 바로 내 것이니까.." "그래서 우제 모르게 키 빼내서 무면허로 몰고 나갔다가 람보르기니하고 부 딪쳐서 박살이나 내놔? 이 망할.." "이제 그만. 우인! 래인이도 얼마나 놀랐겠어? 이 녀석이 이렇게 사고낸 것도 다 네가 빨리 오라고 난리를 쳐서 그런 거잖니! 이것 봐라, 애가 너무 놀라서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네. 우리 딸 다친 데는 없는 거지?" 두 사람의 말싸움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그들의 부친 이박사가 다가오며 가볍게 우인을 나무랐다. 제길. 우리 공주님의 든든한 응원군이 등장하셨구먼. 이렇게 래인의 버릇이 천방지축 없어진 건 바로 아버지와 큰형이 무작정 막 무가내로 어리광을 받아줘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젊은 검사 우인은 불퉁 하게 내뱉었다. "아버지. 말이야 바로 하자고요. 래인이 이 자식 얼굴이 이렇게 새파랗게 변 한 건 놀래서가 아니라 지 생돈 나가는 게 아까워서 그런 거잖아요? 이래인, 너! 이번 한번이니까 내가 도와주지만 담엔 국물도 없어! 알아들어? 람보르기니 가 뉘 집 이름이냐? 그건 고치는 것도 돈 엄청 든단 말야! 처벌 건은 내가 어떻 게 해보겠는데, 난 돈은 없으니까 네 저금통 털어! 검사 월급 쥐꼬리만한 거 너 도 잘 알지?" 칫, 매정한 오빠! 하나뿐인 누이동생의 곤경을 이렇게 외면해도 되는 것이냐? 입이 만발은 튀어나온 채 래인이 투덜투덜하고 있는데 아버지 이박사가 쯧쯧 하고 우인을 나무랐다 "이제 그만들 해라. 누가 고치든 이 집에 돈 버는 사람이 몇인데 차하나 못 고 쳐 주겠니? 오늘은 유진이 약혼하는 경사스런 날이야. 우리 다 같이 행복하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자 구나. 래인아, 아빠만 믿어라!" "힛히! 우리 아빠 최고!! 아빠 사랑해요!~~~~~" "어이구, 닭살... 으음.. 래인아. 오빠한테는 키스 안 해 주는 거야?" 입이 튀어나와서도, 그러나 끝내 막내의 애교에 항복한 우인이 부친이 받는 뽀뽀가 부러워 자기 한쪽 볼을 내밀며 보챈다. "해 줘야지! 결국 돈 나오는 주머니는 오빠니까.. 헷헤. 오빠.. 쪽!!♡♡ 내가 이 번 일 답례로 내 친구 중 정말 예쁜 애로 소개시켜 준다!!" "너, 정말이지?! 또 약속 펑크 내기만 해봐라! 그때 너 국물도.." 그때였다. "아가씨. 누구를 어쩐다구요?" 허거걱... 래인은 살며시 다가오며 웃는 둘째 올케 민하의 등장에 숨이 넘어갈 듯 놀라 캑캑거렸다. 우인도 기절할 듯이 놀란 얼굴로 당신 언제 왔어? 하고 괜히 헛기 침을 흠흠 했다. 이제 임신 팔 개월인 민하의 배는 보름달처럼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붉은 드


레스에 진주 목걸이를 건 올케의 아름다움은 너무나 완벽해서 화려한 파티장에 몰려와 있는 그 어떤 여자보다 찬란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강렬한 소유욕을 드러낸 얼굴로 우인이 자신의 아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민 하는 웃는 얼굴로 가볍게 남편에게 눈을 흘겼다. "우인씨, 바람피고 싶어요? 예쁜 아가씨를 소개받아서 뭘 어쩌겠다고 그렇게 놀라는 건데?" "그런 아가씨를 소개받으면 당신 비서로 줄게. 당신 임신한 이후로 일이 많아 서 피곤하다고 했잖아." "둘러대기는... 민하가 곱게 눈을 흘기며 남편의 팔 안에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우인도 두 팔로 자신의 아내를 감싸 그 머리 위에 자신의 턱을 얹는다. 말 한마디하지 않 아도 너무나 사랑해, 하는 그런 눈빛.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는 그 곳에만 빛이 가득한 느낌. 래인은 둘째 오빠 부부의 그 다정스런 모습을 보며 눈물이 날 것 같다. 너무나 어린 시절에, 스스로를 방어할 길이 없는 아이일 때에 남도 아닌 육친 으로부터 너무나 깊고 깊은 상처를 입어 아무도 그 가슴에 받아들이지 못하던 상처투성이이던 내 오빠가, 마음을 활짝 열고 온 삶을 다해 받아들인 단 한 사 람. 영혼과 영혼이 만나 온전한 하나가 된 사람들. "쳇! 애인하나 없는 어린 동생 앞에서 아주 염장을 질러라, 질러! 대체 큰오빠 는 왜 아직까지 안 오는 거얏? 때려죽어도 오늘은 온다더니.." 래인은 괜히 입을 툭 내밀면서 문 쪽으로 나가본다. 둘째 오빠가 올케한테 지 금 분명 키스할텐데 남사스럽게 어떻게 그걸 보고 있냐고요.. "리우가 온다고 했으니까 믿어 보자구나. 그 녀석이야 한다면 하는 녀석이 아 니니? 아프리카에서 날아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게다. 기다려 줘야지." 이박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치 말을 맞춘 듯이 문이 열렸다. 그리고 얼 굴이 새카맣게 탄 한 사나이가 그만큼이나 얼굴이 태양에 그슬린 한 여자와 함 께 들어왔다 "큰오빠!" "형! 어서 와!" "형수님! 고생이 많으셨죠?" 리우(한국명 우선)가 일일이 가족들과 함께 인사와 포옹을 나누고 마지막으 로 옷깃을 잡고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래인을 번쩍 안아 빙빙 돌렸다. 이십 년 전 바로 그 소년. 래인을 안고 혼자 울던 바로 그 소년이다. 이제는 사십을 바라보는 나이로 <글로벌 케어> 소속인 소아외과 의사인 우 선은 아프리카 잠비아 난민촌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만난 치 과의사인 한국 여자 우강혜와 함께. 그리고 그는 누가 무어래도 이박사의 가장 든든한 큰아들이었다. "자, 우리 식구들이 다 도착했으니, 식장으로 들어가 볼까? 지금 우리 식구들 이 왜 안 들어오나 우제가 아주 초조해하고 있을 게다." 이박사가 흐뭇하게 웃으며 한 쪽으로는 래인의 손을 잡고 또 한 팔로는 아내 인 유희의 팔짱을 낀 채 기운차게 소리쳤다. 그의 뒤로 우선과 우인이 자신의 아내를 에스코트해 화려한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드디어 이박사의 막내아들 이 우제의 약혼식이 거행될 참이었다


홍콩에서도 가장 전망이 아름다운 만다린 호텔의 소연회장. 지금 그 곳에서는 홍콩 성(聖) 조지 병원의 신경외과 과장인 이지원 박사 의 막내아들 유진(한국명 우제)의 약혼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유진은 런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호른 주자로서 같은 오케스트라 하프 주 자이자 영국의 유명한 기업 <엑슬린>의 상속자인 엘린과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완고한 여자의 집안에서는 유진이 유색인종이라는 것과 또한 그가 이 박사의 양자라는 사실 때문에 몇 년 동안 그들의 결합을 반대해왔다. 그러나 그 많은 반대와 시련 속에서도 두 연인은 사랑하는 마음을 끊어내지 못했고 결국 두 사람이 소울-메이트라는 것을 인정한 양가에서는 축복 속에서 그들의 결혼 을 허락해주기로 한 것이다. 이미 유진의 아파트에서 동거중인 그들은 몇 달 후 에 런던 근교에 새로 짓고있는 작은 전원 주택에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행복하세요, 아버지?" 이박사는 엘린과 우제의 아름다운 모습에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내면 적으로는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지만 그러나 본시 이박사 그는 아주 다정다감 한 사람이었다. 부친이 눈물을 닦아내는 것을 본 우선이 미소를 지으며 되묻는 다. 이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은 네 엄마와 함께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자랑이자 기쁨이란다. 이 제 유진까지 저렇게 짝을 찾았으니 내가 오늘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구나." 사실 그는 자랑스러워할 만 했다. 홍콩에서도 최고로 유명한 산부인과를 운영중인 아내 윤유희 박사와의 사이 에서 그는 세 아들과 한 딸을 두었다. 비록 자신들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들이었지만 이 박사 내외는 자신들의 모든 사랑과 헌신과 보살핌을 그들에 게 주었고, 그리고 그 사랑 속에서 아이들은 푸른 나무처럼 곧게 반듯하게 아름 답게 자라주었던 것이다 큰아들 우선은 전 세계적인 의료봉사 조직인 <글로벌 케어>의 중견 의사. 둘 째 아들 우인은 한국의 민완검사였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인 우제는 바야흐로 전 세계에 이름을 날리기 일보직전인 음악계의 당당한 신인주자였다 그리고 두 오빠 사이에서 상글 상글 웃고 있는 솜사탕같이 상냥하고 애교많 은 딸 래인. 이씨 집안 사람들 모두가 정말 사랑하는 귀여운 막내 고명딸인 그녀는 이미 홍콩과 한국 등지에서 몇 권의 책을 출판한 유명한 삽화가 겸 동화작가로 한참 이름을 날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박사는 부드러운 눈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자신의 가족을 바라본다. 치과의사로서 남편과 같은 길을 걸어가는 너무나 대견한 큰며느리 강혜. 부드 러우나 강하고 아름다운 둘째 며느리 민하는 실력있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다. 이박사와 윤여사는 자신들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보석인 세 아들과 딸을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 눈물을 멈출 수가 없을 정도로 감격스럽기만 했다. 저토록 늠름한 세 아들. 그리고 딸 래인. 그러나 그의 세 아들들은 얼굴빛도 다르고 인종도 다르고 태어난 곳도 다르 다 하지만 이박사 내외에게는 배아파서 낳은 친아들 딸과 하나도 다름없었다. 홍콘 근교 난민촌에 무료진료 봉사를 하러 갔다가 만난 우선과 래인이 그들


의 첫 아이들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삼년 후, 그들에게 온 둘째 우인은 친부가 친모를 살해한 다음 유 기한 어린애였다. 그들 부부가 처음 고아원에서 아홉 살이던 우인을 발견했을 때 그는 텅 빈 공허한 눈동자와 영혼이 소진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친부가 담뱃불로 지 져댄 깡마르고 상처투성이인 아이의 몸을 씻기며 그들 부부는 얼마나 울었던 가? 그때 꼬마 래인이 앙앙 울며 아파, 오빠?! 하고 작은 손으로 부드럽게 어루 만졌을 때 이박사는 그 공허한 아이의 얼굴에 반짝 빛나던 빛을 잊지 못한다. 우인은 그날 그렇게 껍질 속에서 갓 깨어난 어린애처럼 그들에게 다시 태어나 왔다. 막내 우제는 코카 키드였다. 마약 중독자인 흑인 소녀가 팔개월 만에 조산한 저 체중아. 소녀는 그리고 아 이를 쓰레기통에 버린 채 뉴욕의 어둠 속에 사라졌고, 그 아기는 천우신조로 청 소부가 발견할 때까지 피투성이로 쓰레기통 종이 봉투에 담겨 있던 아이였다. 성마르고 불안정하고 상처받은 어린 영혼. 그 아이를 구원해 준 것은 든든한 팔을 가진 두 형이었다. 햇살처럼 웃을 줄 아는 막내 래인이었다. 모두다 하나씩 깊은 삶에 할퀴어진 상처를 가진, 그래서 그 아픔을 더 잘 아 는 그들은 절대로 우제를 혼자 둔 적이 없었다. 이박사는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 쳤고 음악을 물처럼 들이키는 동생을 위해 형들은 다투어 용돈을 아껴 음반을 사주었다. 그리고 누이 래인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그에게 멋진 호른을 선물해 주었다. 언제나 퍼주기만 하는 가족들의 빛 같은 사랑 안에서, 그의 아 프고 찢겨진 영혼을 달래주는 음악 속에서 코카 키드인 저체중아 흑인 소년은 곧게 바르게 그리고 아름답게 성장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 가족을 끈끈하게 묶어준 빛의 존재는 바로 막내 래 인이었다. 언제나 웃을 줄 알고 행복해할 줄 알고 감사해할 줄 아는 래인. 위로할 줄 알 고 감싸줄 줄 알고 안아줄 줄 아는 작은 딸 혹은 누이동생 앞에서 그들은 모두 다 행복했다. 웃을 수 있었다. 사랑할 수 있었고 그리고 스스로의 상처를 뚫고 일어나 빛을 찾아 뻗어갈 수 있었다. 투명한 눈빛으로 그들을 아낌없이 믿어주는, 사랑해주는 작은아기 래인 앞에 서 그들은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한다는 소명을 느꼈으므로. 그들의 어린 래인은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행복해지게 하는 투명한 햇살의 아이였으므로... "으아악!~ 뭐, 뭐시라? 내, 내 차가?"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빛의 소녀 래인 때문에 부들부들 떨며 기절 일보 직 전인 한 남자가 있었으니.... "내 차. 내 차가.. 아직 할부도 다 못 갚은 내 차가... 바..박살이 나? 오, 마이 갓!!" 드디어 진실을 알게된 불쌍한 새신랑 우제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래인을 향해 물어뜯을 듯이 달려드는데.. 래인이 이렇게 오빠한테 엄청 깨어지고 있는 바로 그 순간, 그 차를 발길질로


완전히 박살낸 당사자 정무형은 침대에 누운 노인을 대면하기 위해 침실 문을 노크하고 있는 중이었다.

(3 편) 사랑은 과거가 아니다 "저... 저 망할 놈!! 당장 꺼져 버려!!" 무형은 자신의 얼굴 앞으로 날아오는 책을 살짝 고개를 들어 피했다. 젠장. 낼모레면 무덤에 들어가도 남을 양반이 아직도 성질은 불같으니 원... 저렇게 조그만 일만 있어도 펄펄 뛰는 다혈질이라서 그의 심장이 남아나지를 않는다는 것을 아직도 왜 모르는 걸까? "아이고, 여보! 제발 흥분하지 마세요. 노하시는 것이 심장에 제일 좋지 않다 고 의사 선생님이 신신당부를 했잖아요. 오랜만이구나, 얘야. 이리 다가와서 인 사를 해 다오." 은발의 인자한 노부인이 일단은 침대에 누운 영감을 윽박 지른 다음에 사랑 하는 손자에게 미소지으며 두 팔을 벌렸다. 무형은 미소지으며 사랑하는 할머니 에게 다가가 그녀의 작은 몸을 안아 두 볼에 키스했다. 그런 다음 씩씩거리며 눈을 치뜨고 있는 침대의 노인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돌아왔습니다, 할아버지." "태평양 물에 빠져 죽어버릴 일이지 왜 돌아와?! 아주 이 할애비 숨통을 끊어 버리려고 작정한 놈이! 꼴도 보기 싫어! 당장 나갓!!" "영감! 흥분하지 말랬지욧!" 노부인의 호통 소리에 노인이 찔끔했다. "아, 알았어, 임자. 그러니 화내지 말구려. 흥분 안 한다니까.." 천하를 호령하는 무서운 노 타이쿤이 사실은 사랑하는 마누라님의 치켜 뜬 눈만 보아도 경기를 일으키는 공처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무형은 싱긋 웃으며 뻔뻔하게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얼굴을 하고 대체 왜 저한테 이렇게 화가 나신 겁니까?! 하고 되물었다. "몰라서 묻냐? 엉?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고오!" "아하, 아운이 도망친 것 때문에 그러신 겁니까? 하지만 저더러 어쩌란 말입 니까? 그 두년 놈이 제 눈을 속이고 정분이 나는 것을 바쁜 제가 스물 네시간 지켜있을 수도 없고... 제발 오해는 마십시오! 버림받은 건 바로 저입니다. 결혼 식을 사흘 앞두고 약혼녀가 도망친 망신이 벌써 세 번째란 말입니다. 다른 사람 은 모르겠지만 할아버지께서는 저를 동정하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저 죽일 놈!! 다 네가 꾸민 일이잖아! 리니 일 빼고는 모두다 네 놈이 혼인 하기 싫어서 그 여자들을 교묘하게 조종해서 일을 작파낸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냐? 이 천하에 불효막심한 망할 자식 같으니라고!" 삿대질까지 하며 침을 튀기면서 흥분해서는 부들부들 떠는 노인 앞에서 무형 은 전 전혀 모르는 일인데요 하는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단정한 자 세로 앉아 끝까지 뻔뻔하게 아무 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있기만 하는 손자 앞에서 노인이 내가 미쳐! 하며 힘없이 침대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이렇게 무형이 입을 다물고 고집스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이 세상 어느 누구


도 그 입을 열게 할 수가 없다. 어렸을 때부터 원래 자신의 속내를 거의 드러내놓지 않는 무형이긴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 정도는 더 심해지고 있었다. 이젠 스스로조차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깊은 무심함. 6 년 전,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해 왔던, 그리고 진실로 얻기를 열망했던 가린 과 헤어지고 난 후 무형은 마치 갑각류의 짐승처럼 자신의 두터운 껍질 속에 더 깊이 숨어 절대로 다시는 스스로의 연약함이나 약점이 될만한 감정의 동요 를 내 비추인 적이 없었다. 그렇게 가린과의 결별은 무형에게 있어 너무나 깊은 상처, 그리고 상심이었 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바라보며 지켜왔던 그녀. 윤가린. 단 한번도 의심해 본 적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그녀를 무형 자신에게 길들여 가며, 지켜오며... 언젠가는 가린이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버진 로드를 걸어와 그의 손을 잡아주 고, 그의 옆에 서서 신부의 맹세를 하는 것을 상상했었다. 평생을 같이 하리라 생각했다.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 를 위해서라면 그에게 주어진 숙명까지도 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의 아들을 낳아주고 그가 가는 어디든지 같이 있어줄 가린을 생각하며 가슴이 뜨거웠던 그 시간들... 그렇게 무형은 가린을 자신의 단 한 하나 운명이라고 믿 었었다. 그랬다. 그의 마음에 아직도 박혀 있는 가시, 그녀 윤가린은 지금도 무형의 꿈이고 강 박관념이고 집착이었다. 아니 증오였고 미련이었고... 다함없는 사랑이었다. 이미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된 그녀. 너무나 행복하게 그 남자와의 삶을 꾸려가고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있는 데도.... 그녀가 낳은 아이들의 대부가 되고 그녀의 잘생긴 남편과 이제는 겨우 편안하게 마주 웃을 수 있는 친구 비슷한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도... 그런데 도 그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깊이 감추어둔 무의식이 드러나는 꿈속에서 아직도 무형은 그녀를 바라고 원 하고 집착하고 있었다. 심지어 여자들과 하룻밤을 보낼 때도 가린을 닮은 여자 들을 찾아낼 정도로.. 그 여자들을 안으면서 가린이라는 이름을 부르고 있을 정 도로... 그렇게 무형은 6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마음속에 어떤 여자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스스로의 마음을 누구에겐가 드러내고 개방하는 것이 두려웠다는 표현 이 옳으리라. 다시는 어떤 사람에게도 자신을 드러내거나 나누어주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형 자신이 모든 것을 다 걸고, 그토록 벗어나고자 애썼 던 피의 숙명까지 다시 불러들이며 얻고자 열망했던 그녀를 그렇게 잃어버리고 난 후 무형은 절대로 다시는 스스로를 절망케하고 고통스럽게 한 사랑 같은 것 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다. 가린을 잃어버린 후, 바람에 흔들리듯이 의미없이 견뎌낸 지난 세월은 무형에


게 있어 너무나 무의미하고 무감각한 자괴감뿐이었다. 아직도 피가 흐르는 심장 의 상처가 이제는 겨우 간신히 봉합되어가고 있었지만, 그러나 운명이라 여긴 여인을 잃은 후 살아가야 할 그의 삶은 다만 공허함뿐이었다. 실체도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는 그 괴물은 너무나 치명적인 독 가시를 감추 고 있어, 그 것에 스친 상처는 참으로 깊고도 아파 강하고 아름다운 한 남자의 내면을 완전히 황폐화시키고 절망에 중독시켰던 것이다. 정말로 속 터지고 환장하게 만드는 손자의 뻔뻔함에 현기증을 느낀 듯 노인 이 다시 갑자기 삿대질을 시작했다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봐라 이 망할 놈아.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말이라도 해 보라고! 아이고, 속 터져 나 죽겠네!! 임자. 임자! 약, 약." 무형은 수선스럽게 약알을 삼키는 조부를 바라보며 다시금 완벽한 입술의 꼬 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그 엷은 미소에 조부가 몸서리치는 것도 모르고... 이번 일도 뭐, 그런대로 무사히 잘 빠져 나온 셈이었다. 무형은 어깨를 으쓱했다. 무형의 재택 비서인 토머스는 자신이 모시는 상관의 명령에 못 이겨 감히 타 이쿤의 약혼녀와 도망을 치는 엄청난 불경을 저질렀지만, 그러나 호주의 모 처 에서 성형수술을 받으며 아주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진정 사랑하는 타이쿤의 여자였던 자신의 아내와 더불어. 무형의 힘이라면 그들 두 사람을 완전하게 새로운 신분으로 완벽한 삶을 만 들어주는 것은 껌을 씹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다. 아무리 홍가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그들을 잡으려 해도 이제 완전히 다른 얼굴로 완전히 다른 신분의 삶을 살아가는 그들을 건드릴 수는 없다. 아비의 야심에 희생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제 겨우 열 아홉인 아운은 착하고 순진한 여자였다. 무형은 토머스의 유혹에 잘 넘어간 준 공로로 홍가이 기는 하지만 아운만은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윽박지르고 고함치고 협박에 한 대 쥐어박아도 저 망할 놈의 고집스런 손자 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았나 보다. 다시 갑자기 노인이 벌떡 일어나 앉더니 이제는 아주 애처로운 목소리로 애 원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얘야, 데릭. 의사가 말했다. 내 심장은 이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는구나. 일 이 년이 무섭다는 게야. 데릭!! 제발 고집 좀 그만 부릴 수 없니? 네 나이 벌써 서른이 넘었다. 헌데, 넌 아직 혼인도 하지 않고 혈손하나 남기지 못하고... 만약 내가 갑자기 죽기라도 하면 대체 어쩔 참이냐? 응? 검은 용의 가장 기본 적이고 신성한 책무는 혈손을 보아 수천 년을 이어온 우리 정가의 기둥을 만드 는 데 있다는 것은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니? 아고... 아고... 숨이 차는구나... 난 아마 틀림없이 올해 안으로 죽고 말게다.." 엄살을 부리는 노인 앞에서 무형은 싱긋 미소만 지으며 그러나 눈 하나도 까 딱하지 않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속으로 뇌까렸다. '그렇겠지요. 의사가 말하기를 할아버지 심장은 한 이 십 년밖에는 견딜 수 없다고 그랬겠지요. 제가 장담하지요. 할아버지 심장은 앞으로 적어도 이십 년 은 튼튼하게 잘 뛸 테니 말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멈추면 인공 심장을 달 면 그만이니까요.'


무형은 여유 자작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리훙이 곁에 놓인 트레이 에서 우아한 동작으로 홍차 한잔을 따르고 슬라이스 된 레몬 한쪽을 넣은 다음 그에게 잔을 건넸다. 아주 천천히 홍차의 향기를 음미하던 그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진정 원하시는 일인데 어떻게 제가 거역을 하겠습 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해가 가기 전에 결혼이라는 것을 해서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지요. 덤으로 검은 용을 감히 배신하고 망신시킨 후에 도망친 그 불경한 년 놈들을 반드시 잡아내 뼈까지 갈아버리겠다고 약속드립니다. 단, 저 도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무신 놈의 조건? 또 너, 그 교활한 머리통 굴려서 이 할애비를 속이려 고 그러는 건 설마 아니겠지?" 노인이 고함을 뻑 질렀다. "설마요!" 무형은 순진한 눈을 뜨고는 뻔뻔하게 조부를 바라보았다. "제가 감히 어떻게 대륙을 호령하는 대 타이쿤을 기만하겠습니까? 벼락을 맞 지요. 저의 조건은... 할아버님. 홍가의 생사 여탈권을 저에게 주시라는 겁니다." "홍가?" 뜬금없는 손자의 요구에 갑자기 노인의 표정이 노회하고 권위적이며 냉정한 보스의 그것으로 돌변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 속이냐? 그들이 뭘 어쨌길래 홍콩에 도?하자 말자 생사 여탈권을 들멱이는 거냐?" "그들이 칠인회 승인도 받지 않고, 할아버님이나 저의 지시도 없이 러시아 마 피아와 무기 거래를 했다는 것은 들으셨습니까?!" 무형 역시 웃음기를 거두고 냉정하게 조부를 건너다보며 되물었다. "소형 핵까지 포함해서 무려 사천만 달러짜리 거래였죠. 그 무기들은 고스란 히 공해상에서 선적되어 아프리카 키에브 정부로 넘어갔고, 대신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로 대금을 계산 받았어요. 그리고.." 무형은 마지막 홍차 한 모금을 천천히 음미하며 냉혹하게 내뱉었다. "그 돈은 그대로 한푼 여축 없이 홍가 놈 주머니로 굴러 들어갔죠." 그는 거의 고저가 없는 담담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입니다. 게다가 암캐 같은 제 딸년을 저의 아내로 밀어 붙인 것하며, 아무도 모르게 빼돌려 놓은 자금까지, 대체 그 개자식들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요? 교묘하게도 돈 세탁을 잘도 했더군요. 거기다가 그 놈 휘하 부하녀석들이 이라크 캠프에서 군사 훈련을 받는 위성 사진도 있어요." "홍가가.... 배신을 하려고 한단 말이냐?" "그들은 배신이 아니라고 생각하겠지요. 음... 아마도 추궁당하면 그 딸년이 낳을 나의 아들의 친위병으로 주려고 했다던가 뭐 이런 변명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홍가 노인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 아들인 홍 타이는 틀려요. 그 놈은 분명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긴 애초부터 그 인간인 평생 이 인자 로 만족하며 살아갈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요. 아버지께서 이 쪽 일에 손 을 떼고 한국으로 건너가셨을 때부터 그 놈이 딴 생각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전... 십 오 년 전, 충칭 습격 때 날 뒤에서 공격한 놈이 바로 그 자식이라고 생 각해요. 중국 정부에게 우리 정보를 흘린 것도 그 놈일 것이고요. 나만 제거되 면 정가의 혈통은 끊어지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홍가가 타이쿤의 지위를 승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난 살아 남았어요. 아마도 그래서 그 때 부터 제 딸년을 내 처로 들여서는 내 아들이 태어나면 후견인 자격으로 자연스 럽게 칠인회를 장악하려 한 것 같습니다." 노인이 끙하고 신음 소리를 흘렸다. 정가와 더불어 칠인회의 가장 큰 줄기를 이루는 홍가의 배신을 들은 지금 결코 노인의 마음은 편안하지 않을 것이다. 무 형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홍가가 이미 편가와 손을 잡은 증거도 포착되었어요. 그대로 놓아 두었다간 우리 칠인회 형제들이 분열되어 서로 총질을 하는 사태가 곧 벌어질 겁니다. 그 런 불행한 사태를 바라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이건 다 네 놈 탓이야!" 갑자기 노인은 다짜고짜 무형을 향하여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작금의 골치 아프고 곤란한 모든 일의 원인을 그에게로 돌리기 작심한 듯 고래고래 그 에게 로화를 퍼부었다. "이 모든 일이 다 네 놈이 홍콩에 있지 않고 쓸 데 없이 뉴욕에 쳐 박혀 있 어서 그런 것 아냐? 이젠 돌아와! 돌아와서 혼인도 하고 네 자리를 찾아! 알겠 냐? 그것을 약속한다면, 이번 홍가의 일을 네가 어떻게 처리하건 다 네 말을 들 어주마." "조만간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차피 중국본토에 ABL 지점을 개장하기로 계약 을 체결했으니 돌아와야지요." 무형은 일어났다. 창으로 스며든 석양을 받아 조각처럼 잘생긴 그의 얼굴이 피 빛으로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할아버지께서 물러나시고 제가 그 자리를 완전히 채우 시기를 바라신다면, 저에게 썩은 가지를 쳐낼 힘을 주십시오. 검은 용을 배신한 놈들은 말 그대로 삼대(三代)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것이 제 철칙입니다." 척이 무형의 자켓을 받아 들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돌아오시자 말자 피바람을 일으키시면... 다른 가문의 반발이 심하지 않겠습 니까? 게다가 홍가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때 일을 터트려야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거야. 그들이 나의 생각을 알기 전에, 서로 결속해서 나를 물어뜯 으려 덤비기 전에 내가 먼저 밟아버려야 하는 거다. 어차피 홍가나 편가 나부랭 이들은 내 눈의 가시였어. 십 오년 전 충칭 항전의 빚을 갚아주어야 하지 않겠 나?" 검은 셔츠를 벗어 던지며 무형은 싱긋 웃는 얼굴로 척을 돌아보았다. "그때 등뒤에서 칼침을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진 나를 들쳐업고 자넨 한시간 을 도망쳐 나왔지. 자네도 어깨며 허벅지에 총알을 박은 채로 말이야. 잊지 않 아, 충성스런 나의 친구여. 검은 용의 맹세는 영원 불변하다네. 은혜는 두 배 로..." "원한은 열 배로!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시기를..." 척이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푹 쉬십시오. 그리고 맛사지 사를 부르겠습니다. 아까 충격 때문에 몸이 아프실 것 같으니. 괜찮으십니까?" 무형은 목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괜찮군. 그러고 보면 비싼 돈주고 람보르기니는 탈만 하단 말야. 그


나저나 그 망나니 계집애가 내일 오면 나에게 연락해! 반드시 내 차 수리비는 받아 내고야 말 테니까." (4 편) 무형, 찍히다! "나중에는 어떻게 할래? 데리러 오랴?" 시내에 볼일이 있다는 우인이 저택까지 이박사의 차로 래인을 데려다주면서 물었다. "아냐, 됐어. 나 시내 서점에도 들러야 하고.. 버스타고 갈게." "잊지 말고 영수증 꼭 받아와! 알아들었어?" 무엇이든 맹하니 잊어먹기를 잘하는 래인인지라, 우인은 그녀가 차에 내리기 전에 다시 한번 반드시 차 수리비 계산서를 받아오라고 당부했다. 언제나 불리하거나 난처한 처지에 놓이면 써먹는 래인의 특기인 <엉엉 울다 지쳐 두 다리 뻗고 나 죽여요, 훌쩍훌쩍 눈물 작전>이 주효하여 두 오빠와 두 올케들이 약혼식 부조로 치고 우제의 차와 그녀가 박은 람보르기니 차 수리비 를 대 주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너 또 지난번처럼 짜가 영수증 끊어오면 죽는다. 알았어?" "어어... 으..응.. 아.. 알았어." 사실은 가짜 영수증을 끊어다가 오빠한테 용돈이나 좀 삥땅치려던 래인, 마치 그녀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우인이 먼저 오금을 딱 박자 우물거리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쳇. 검사생활 3 년만에 완전히 귀신 다 됐네. 어떻게 내 속을 그렇게 잘 알까 나?' 입이 불퉁 튀어나온 채 우인이 차를 돌려 대문을 나서는 것을 바라보다 래인 은 호주머니에 손을 푹 찌르고 천천히 정원을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오늘도 무척이나 더울 것만 같은 날이라고 생각하면서. 래인이 일주일에 네 번씩 이 저택에 사는 노인양반들에게 책을 읽어주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녀는 홍콩에 와 있는 반 년 동안 아버지 이 박사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봉 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글을 잘 읽을 수 없는 노인 환 자들을 위하여 잡지나 신문 혹은 책을 읽어주는 일이었다. 오랜 입원 생활 동안 찾아오는 사람도 잘 없고 또 눈이 어두워 그런 것들을 자주 접할 수 없는 환자 들에게 그녀의 책 읽어주는 봉사활동은 굉장히 인기가 많았었다. 마침 아버지 병원에 입원했던 이 집의 주인 정대인이 그녀의 감칠 맛 나게 글 읽는 솜씨에 아주 홀딱 반해 버린 것은 그녀에게는 어쩌면 굉장한 행운이었 는지도 모른다. 정대인은 심장에 갑자기 이상이 생겨 입원한 환자였는데, 래인 에게 자신이 퇴원하면 자신의 아내와 그를 위해 일주일에 몇 번씩 집에 와서 책을 읽어주는 아르바이트를 해줄 수 없느냐고 부탁을 해왔다. 보수는 섭섭하지 않게 계산하겠다고 말하면서... 마침 그 동안 쓰던 글도 다 마무리되어 출판사에 넘겼고, 또 노인이 약속한 보수가 충분했으므로 서너 달만 일하면 오랫동안 꿈꾸었던 호화 유람선을 타고 카리브 해 크루징을 할 돈이 모인다 싶어 그녀는 두 말 않고 승낙했다. 게다가 온화하고 기품있는 노인과 그의 아내는 마침 래인이 다음 작품으로


구상중인 중국의 옛날 이야기 <꾀꼬리>의 주인공인 노(老)화가 부부의 이미지 와 비슷해 그들을 스케치할 수 있다는 승낙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래인이 이 집을 드나들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래인은 걸어도, 걸어도 끝이 나지 않는 넓디넓은 정원을 지나 푸른 기와를 인 3 층의 본관 건물로 들어서기 전, 정원과 테니스 코트 사이에 있는 푸른 물이 넘 실거리는 수영장 앞에서 잠시 발길을 멈춰섰다. 끈끈한 더위가 내려앉는 오후 낮 시간이었으므로 시원한 물이 찰랑거리는 수 영장은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래인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잠시 부러운 눈초리 로 수영장의 푸른 물과 하얀 비치 파라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정작 집을 드나들면서 알게된 사실인데, 그 자그마한 몸집 을 가진 정대인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거부(巨富)였다. 홍콩에서도 부자들만 모여 산다는 호화 주택촌 빅토리아 가(街). 그곳에서도 가장 전망 좋은 곳의 가장 넓은 토지를 소유한 집이 바로 래인이 드나드는 이 집이었다.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호사와 편의시설이 완비된 그 집은 조금 만 과장을 보태면 황제가 머무는 궁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젠장, 지금까지는 아버지 어머니가 머무시는 50 평 아파트가 최고라고 생각했 는데.... 래인은 혼자 쩟쩟 입맛을 다셨다. 역시 세상은 넓고 부자는 많은 모양이었다. 딱 한 시간만 저 풀장에서 물장구나 치고 놀았으면 좋겠다. "에구머니나!" 문득 래인은 자신의 눈앞에 드러누워 있는 사람을 보고는 갑자기 얼굴이 확 붉어졌다. '저..저 남자. 어제 내 차를 발길질로 박살낸 그 남자 아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하필이면 그 집에 다시 들어선 래인이 제 일 처음 만나게 된 인간이 바로 어제 그 성깔 더럽고 무시무시한 남자일 줄이 야. 맹세코 그녀는 시원하고 차가운 푸른 물의 유혹에 넘어가 잠시 발길을 멈춘 것이었다. 결코 그녀의 눈 앞 정면, 파라솔 아래 드러누운 반라의 남자를 훔쳐 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황은 묘해서 래인이 그 남자를 곁눈질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 딱 알맞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 남자는 남의 이목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아슬아슬한 수영 팬티 하나만 걸 치고 데크 체어에 턱하니 드러누워 있었다. 선글라스를 낀 얼굴은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하얀 수영장 의자에 길게 방치된 그 남자의 몸매는 왕 죽였다. 군살이라고는 하나 없는 탄탄한 근육, 조각처럼 단아하고 멋진 늘씬늘씬한 팔 다리... '저 굵고 탄탄한 팔에 안기면 기분이 어떨까? 음음... 아아, 저 약간 구리 빛으 로 그을린 섹시한 몸매... 정말 안아버리고 싶네.. 햐아아~~~ 정말 예술이다, 예 술... 저 남자 몸매를 한번 그려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는데.' 자신도 모르게 래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솔직히 말해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녀가 만난 남자들 중에 지금 눈앞에 반라 로 누워있는 저 남자가 가장 근사하고 멋있다고 래인은 생각했다. 어제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사고에 대한 추궁을 당할까봐 너무 겁나고 무서워


서 제대로 작업을 걸지 못한 것이 너무나 유감스럽다고 그녀는 속으로 한탄했 다. 꽃 미남이라면 잠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선천적 꽃미남 밝힘증>에 <후 천적 꽃미남 따먹기>가 취미생활이자 특기인 그녀로서는 정말 이 앞에 누운 남 자는 완벽에 거의 가까운, 정말 놓치기 아까운 그림의 떡이었던 것이다. 래인에게는 정말 다행한 일이지만 그는 아마 낮잠이 든 모양이다. 고개를 약 간 옆으로 떨어뜨린 채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것을 보면.... 그가 잠이 들었을 것이다라는 확신이 들자 용기가 난 터로 래인은 본격적으 로 그 남자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어젠 겁이 나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진짜 엄청 멋있게 생긴 남자였지. 캬 하아~~. 죽인다. 죽여! 저 완벽한 근육! 저 늘씬한 몸매. 정말 모델처럼 잘 빠졌 구나야. 우인이 오빠처럼 가슴에 털만 났으면.... 쩝쩝.. 완전히 내 이상형인데..' "그래, 내 벗은 몸이 마음에 드나, 아가씨?" "으악!" 래인은 너무 놀라 그 순간 경기를 일으킬 뻔했다. 잠이 든 줄로만 알았던 그 사내는 잠이 든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검 은 선글라스로 눈을 가린 채 그 안에서 래인이 하는 양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 었나 보다. 그의 모양좋은 입술이 살짝 일그러지며 냉소적이고 비아냥거리는 선 을 그리고 있었다. 너무나 당황하고 놀라서, 또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민망해서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래인은 한동안 말도 못하고 발끝만 내려보며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아이구, 창피해. 내가 너무 노골적이었나 보구나... 하지만 어쩌란 말야? 난 꽃미남만 보면 저절로 입술에 침이 흐르는데..' 게으른 낮잠에 빠졌던 야생 짐승이 잠에서 깨어나듯이 그 남자는 느른한 동 작으로 기지개를 켰다. 나른하던 남자의 근육이 도약하기 직전인 맹수의 그것처 럼 팽팽하게 당겨진다. 그는 천천히 한 팔을 내밀어 비치 파라솔 테이블에 놓인 가운을 집어들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입술선을 심술궂게 비틀며 래인의 속을 북 긁었다. "아가씨 취미는 남의 차를 박살내는 것인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잠든 사내 알몸 훔쳐보는 것이었군." 무례한 자식! 억양하나 변하지 않고 래인의 속을 확 뒤집는 사내의 모욕적인 말에 래인의 눈이 새치름해졌다. 망할 놈의 자식이 빌어먹을 선글라스를 벗지 않으니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지가 뭘 그렇게 잘났다고 사람을 이런 식으로 씹는 거야? 열을 확 받아버린 래인은 눈을 치뜨고 새침하게 대꾸했다. "난 아무 남자나 훔쳐보진 않아요. 감상할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만 본답니다. 그런 점에서 그쪽은 나의 예리한 심미안을 통과했어요. 음, 정말 당신. 자랑할 만한 몸매를 가졌군요. 난 당신에게 93 점을 주겠어요" "93 점? 왜 하필이면 93 점이지?" 그는 가운을 몸에 걸치며 흥미롭다는 듯이 되물었다. 자신의 몸매에 엄청난 자신감을 가진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얄밉도록 침착하게 자신의 몸매에 점수를 매기는 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 릇이다. 래인은 그가 수백 번은 더 넘게 스스로의 육체미에 대한 여자들의 자지


러지는 찬사를 들었다는데 그녀 자신의 책에 대한 모든 판권을 걸 수도 있었다. '젠장. 그래, 나도 네 몸매에 침흘리는 그 여자들 중 한사람이다, 어쩔래? 자식 아.' 속으로 너무 잘난 척하는 오만방자한 그 남자에게 있는 욕을 다 하면서도 그 러나 완벽한 이중성격답게 래인은 최선을 다해 상냥하게 대꾸했다. "당신은 일단 섹시남의 기본 조건인 가슴털이 없으니 5 점 감점. 거기다가 발 가락 무좀에서 다시 2 점 감점. 오케이?" "재미있군, 하지만 난 무좀 같은 건 안 키워." "아무리 잘난 남자도 무좀은 다 있어요. 알아요? 이건 우리 아버지의 과학적 인 견해인데 말이죠. 전 인류의 98%가 무좀을 가지고 있대요. 확률 상으로 따 지자면 당신이 무좀이 있을 가능성은 거의 100%걸랑요. 그렇게 억울하면 의사 의 진단서 떼 와요. 2 점 올려 줄게. 됐죠? 섹시 오빠." 래인은 척척 걸어가 황당하다는 듯이 팔짱을 끼며 그녀를 째려보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리비 내역서 줘요!" "당신, 내 차 수리비가 얼마인지 알고나 이러는 건가?" "돈은 없어도 오빠는 많죠. 누이동생의 곤경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언제 어디 서든 자신의 지갑을 풀 오빠들이요. 영수증 줘요." "알았다고. 셈이 정확하니 그건 마음에 드는군." 코웃음을 치면서 그가 대답했다. 그 것을 끝으로 래인에 대해서 흥미를 잃었 는지 남자가 몸을 돌이켰다. 래인은 그 남자의 하얀 맨발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망설이며 저기요... 하고 말꼬리를 늘였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입매가 팽팽하게 당겨진 것을 보니, 아마도 귀찮다는 뜻 이리라.. "....저기 부탁이 있는데...." 처음에는 버벅거리며 시작했지만, 이왕 내친걸음. 에잇, 모르겠다 싶어 래인은 선글라스 안에 감추어진 남자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생긋생긋 그녀의 필살기 인 <녹아내리는 애교미소>를 지었다. "저기요, 그쪽에서 나에게 수리비 청구할 때 그 금액에다 백 달러만 더 올려 서 영수증을 써 주면 안돼요?" "내가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둘째 오빠한테 삥땅 좀 치게요. 울 오빠가 짠돌이라서 용돈을 잘 안주거든 요. 딱 백 달러만 더 올려서 써줘요, 네?" "내가 그렇게 해주면 그 대가는 뭐지?" 이 망할 남자! 싸늘하게, 아주 사무적으로 되받아치는 그 남자의 말에 래인은 속으로 눈을 흘겼다. '이렇게 상냥하고 귀엽고 애교많은 내가 상긋상긋 웃으며 부탁을 하면 당연 감지덕지하고 들어줘야지! 치사 쫀쫀하게 나 같은 가난하고 불쌍한 여자한테 대 가를 바란단 말야?.. 에잇 벼룩의 간을 내먹을 남자 같으니라고..' 그러나 칼자루를 쥔 쪽은 저 남자이니 래인은 치밀어 오르는 성깔을 꾸욱 눌 러 담으며 살짝 웃었다. "어떤 대가를 바라는 거예요? 당신처럼 멋있고 섹시하고 게다가 람보르기니 를 몰고 다닐 정도로 부자인 사람이 치사 팬티스럽게 나 같은 가난뱅이에게 대


가를 요구하다니.... 에잇, 당신 체면 구겨뜨릴 일 있어요? 아, 좋다구요! 정 그러 시다면야, 뭐... 이 정도면 어때요?"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래인은 무형의 차갑고 단단한 입술에 기습적으로 뽀 뽀를 하고는 그리고 줄행랑을 쳤다. 내 부탁, 들어주는 거에요 하고 소리치며! 이래인. 스물 다섯 살 반. 첫눈에 반한 남자에게 기습적으로 덤벼들다. 그리고 키스하다. 아아, 드디어 쓸쓸한 싱글이던 그녀에게도 꽃 시절이 도래한 것이다. 작정하고 쫓아다닐 멋진 남정네를 마침내 찍고 말았으니... (5 편) 내겐 너무 뻔뻔한 그녀 정대인은 래인을 반색하며 맞아들였다. "그래, 유진의 약혼식은 잘 끝났고? 어제 내가 너무 늦게 보내줘서 늦은 건 아니었는지 걱정했다구." "다행히 늦지는 않았어요. 아주 잘 끝났답니다." 시원한 느낌이 드는 푸른 관엽 식물들이 많이 놓인 안락한 거실에 정대인의 침대가 옮겨져 있었다. 아마도 답답한 침실이 싫었던 모양이다. 잠시 후에 노부 인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시원한 마실 것들이 올려진 트레이를 끌고 거실로 들어섰다. "어제 유진의 약혼식이었다는 데, 우리가 우리 생각만 하고는 무리해서 오라 고 한 건 아닌지 걱정했다우. 날이 더워요. 홍차? 아니면 레모네이드 어때요?" "주스를 마실게요. 오늘 아주 더워서 풀장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답니다. 당장 이라도 풍덩 뛰어들고 싶은 것을 참느라고 혼이 났어요." "마음이 있으면 얼마든지 수영하고 가도 좋아요. 우리 집이야 우리 늙은이 둘 뿐이니 여름이 다 가도록 수영장 한번 들어가기 힘들다우." 세 사람은 우제의 약혼식 이야기, 그리고 수영장과 가을이 되면 래인이 떠날 유람선 여행 등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마셨다. 차를 마시고 난 후, 래인이 기대에 찬 노인들을 위해 어제 읽다만 수호지 3 편 을 막 집어들던 그 순간이었다. 거실의 문이 열리고 검은 용이 비상하는 수가 놓여진 하얀 색 파오를 입은 아까 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단정하게 생긴, 그러나 마치 고대 황제처럼 오연하고 교만한 표정을 지은 남자였다. 래인은 아까 지은 죄(?)가 있어 그를 정면으로 응시하지도 못하고 곁눈질로 그를 살짝 바라보았다. 아까 그녀가 기습적으로 뽀뽀를 했을 때 순간적으로 붉은 기가 확 번지던 그 얼굴은 이제 물처럼 담담하고 차가웠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을 들어 그 는 노인들과 래인을 한번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없이 표범처럼 우아한 동작으로 거실을 가로질러 다 가와 대인과 노부인의 볼에 키스하고 똑같은 우아한 동작으로 앞에 앉은 래인 을 완전히 무시한 채 탁자 앞으로 가더니 커피포트를 들어 명대(明代)의 귀한 골동품 도자기 잔에 홍차를 따랐다. 그는 찻잔을 들고 돌아서더니 비로소 흥미롭다는 듯이 래인을 바라보았다. "누구죠? 이 아가씨는?' 노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소개시켰다. "데릭, 넌 이 아가씨를 처음 보는 거지? 래인양, 우리 손자라오. 뉴욕에서 어 제 도착했지. 보기는 무뚝뚝해도 다정한 녀석이지. 얘야. 데릭. 래인양이다. 우리 에게 책을 읽어주러 오는 아주 참한 아가씨란다. 우린 요새 래인양이 책 읽어주 는 것을 듣는 게 낙이란다. 인사들 나누렴." "정무형이오. 하지만 굳이 더 이상 나를 당신에게 소개할 필요는 없겠지. 그 래, 좋아. 우리 할아버지를 홀딱 반하게 했다는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이지?" 얼음이 뚝뚝 흐를 듯이 차갑고도 건조한 목소리. 마치 비수처럼 날카로운 눈 초리였다. 래인은 그가 묻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그는 아까 황당하게 자신에게 덤벼든 래인의 저의를 묻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무슨 목적으로 이 집을 드나들고 있느냐는 것이겠지? 어리석은 노인 들을 유혹해서 한 몫 단단히 잡으려는 여자로 보았다는 뜻이리라. 대답대신 래인은 탁자 위에 포개진 스케치북을 한 권 펼쳤다. 그리고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할아버지세요." 그가 두어 걸음으로 방을 가로질러 탁자에 다가와 래인의 스케치북을 받아 들었다. "난 동화 작가죠. 삽화도 직접 그리고요.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할아버 지를 알게 되었고 책을 읽어드리게 되었어요. 대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 을 그리는 거죠. 난 두 분의 이미지를 가지고 다음 동화책의 삽화를 그리고 있 어요." 무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때로는 연필, 또 때로는 붓, 혹은 크레용과 펜 등으 로 자연스럽게 그린 조부의 여러 모습들을 들여다보았다. 놀랄 만큼 자연스럽게 그리고 예리하게 그녀의 그림은 간단한 선 몇 개로 위엄있고 때로는 인자하고 또 때로는 교활하며 엄한 노인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건 아주 좋은 작품의 삽화로 탄생하리라고 봐요. 그리고 난 당신 도 내 모델로 쓰고 싶어요" "당신이 쓴다는 동화는 어떤 거요?" 대답 대신 무형은 되물었다. 래인은 매사에 의심 많은 그가 한심스럽다는 듯 이 바라보더니 한쪽 곁에 놓인 몇 권의 책을 내밀었다. 모두 다 래인의 이름이 박힌 동화책. "내 자랑 같지만, 내 책은 제법 인기가 있어요. 그래서 돈 많은 노인네들 등 을 치지 않아도 먹고 살만큼은 벌죠." 마치 그 말속에 가시하나를 숨긴 것처럼 쏘아 부치는 래인의 목소리는 차갑 고도 담담했다. 무형은 감히 그에게 대꾸하는 래인을 바라보며 잠시 눈썹을 치켜 떴다. 뻔뻔하리만큼 황당하고 엉뚱하다고 생각했더니 거기다가 당돌하기까지 하군.


그것이 래인을 바라보며 그가 느낀 감정이었다. 그러나 무형은 명백하게 그에게 도전해오는 래인을 무시하고 말없이 그녀의 책을 뒤적거렸다. "얘야. 래인양의 재주가 정말 놀랍지 않니? 다음 작품은 우리를 모델로 쓸 거 란다. 핫하. 우린 두고두고 그녀의 책 안에서 살아가게 되는 거야. 그 얼마나 근 사한 일이니?" "그렇겠군요. 좋으시겠습니다." 무성의하게 대답하면서 무형은 계속해서 그녀의 책을 뒤적였다. 젠장, 굼뱅이도 기는 재주가 있다더니 처음부터 끝까지 황당하고 뻔뻔한 기집 애가 쓰고 그리는 재주 하나는 타고났군 그래.. 무형의 마음에 든 그녀의 작품은 <비단 바다> 라는 책이었다. 그 것은 그림을 그리는 노인의 이야기였다. 욕심 많은 왕이 그를 감옥에 가두고 그가 그리고 싶지 않은 벌거벗은 무희 (舞姬)의 그림을 요구하자 아내가 넣어준 푸른 비단에 강을 그리고 그 강에 떠 있는 배를 그린 후, 아내와 함께 그 그림 속의 배를 타고 그림 속으로 사라진 화가의 이야기 어린 시절부터 미술품을 수집해왔던 우수한 콜렉터의 안목답게 무형은 금새 그녀의 재질이 엄청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래인을 철부지 말썽쟁이에다 사 사건건 황당한 일만 저지르는 멍청한 여자쯤으로 치부했던 터인지라 무형은 솔 직히 놀란 마음으로 그 책들과 래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금은 비록 소품이지만, 감출 수 없는 천재의 광기 같은 것이 그녀의 그림 안에 스며있었다. 만약 그녀가 정말 본격적으로 그림의 길에 뛰어든다면 아마 십 년 안으로 그 녀는 전 세계 화단에 파란을 일으키는 천재 신예로 소문나리라. 무형은 조만간 그녀의 작업실을 방문해서 그녀의 삽화 원판 전부를 사들이리라 결심했다. 래인은 맑고 단호한 얼굴로 그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오 초 이상 마주 바라보지 못한다는 무형의 찌르는 듯한 시선을 그녀는 아주 올곧게 받아내고 있다. "어떤가요? 이만하면... 내가 이 집을 드나들며 할아버님께 책을 읽어드릴 만한 자격이 있는 여자라는 것을 인정하시겠어요? 그리고 한가지 더. 당신이 궁금해 하시는 것 같은데... 전 이 아르바이트로 할아버님께 돈을 받아요. 전 다음 달에 유럽 행 크루징을 떠나거든요. 할아버님께서는 그 여비 반을 내 주시기로 했어 요. 이제 당신의 궁금증이 다 풀렸나요?" 무형은 문득 아까 자신의 단단한 입술에 부딪치던 그녀의 붉은 입술이 가지 고 있던 서늘하고 청결한 느낌을 떠올리며 손을 들었다. 적어도 이 여자의 눈빛을 보아하니 다른 계집들처럼 속 다른 저의를 가지고 있거나 혹은, 무엇인가 더러운 목적을 가지고 할아버지께 접근한 것은 아니겠 군. "아아, 실례했군. 아무래도 내 나이가 되면 사사로운 것에도 의심이 많아지는 법이라서... 래인양. 좋소. 환영하오. 두 분께 당신이 즐거움이라니 나 또한 손자 로서 당신에게 감사해야겠지. 이 집안에서 편안하기를 빌겠소. 하지만... 앞으로 는 절대로 차는 몰지 마시오!" "며...명심하죠!"


무형은 싱긋 웃었다. 보지 않아도 속으로 그를 향해 망할 자식!!하고 욕을 하는 것이 그 여자의 작 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보였기 때문이다. 투명한 유리창처럼 저 여자는 자신 이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낸다. 어찌나 자주 표정이 바뀌는지 그 얼 굴만 바라보고 있어도 하루 내내 심심하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 감성적이 고 투명한 목소리라니... 무형은 래인이 책을 읽어 주는 것을 직접 들으면서 비로소 어째서 노인들이 래인의 방문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듣기 편안한 맑고 청아한 목소리. 게다가 천부적으로 타고난 듯 풍부한 감성 이 흐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상황과 등장 인물에 따라서 백인백색(百人百色)으로 변한다. 거기다가 이야기의 리듬에 따라 완급을 조절할 줄 아는 그녀의 책읽는 솜씨는 그토록 무감각하고 초연한 무형 자신조차도 단번에 매혹케 할 정도였으 니 말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래인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무형은, 보이지 않게 거실 구석에 서 있던 리 훙과 척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거기다가 창밖에 서있던 보디가드들조차 제 임무를 잊어버리고 전부 다 창가로 몰려와 래인의 책 읽는 소리에 넋을 빼놓고 있는 게 아닌가? 제기랄!! 정말 저 여자는 도대체 이해 불가능한 마녀였다. 래인이 수호지의 양산박 주인공들이 형제의 맹세를 하는 대목에서 읽기를 마 쳤을 때, 벌써 시간은 한시간 이상이나 지나고 있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모든 사람들이 한숨을 쉰다. 아쉬운 눈초리로 내일 또 올 거지? 하고 조르는 듯한 조부의 목소리에 무형은 홀로 미소를 지었다. 천하 의 대 타이쿤께서 한갓 여자의 책 읽는 것에 도취되어 사탕 조르는 어린애처럼 굴다니... 하지만 무형 자신도 그녀의 책 이야기에 넋을 놓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만했다. 정말 이상한 여자. 무형은 그런 생각을 하며 래인을 다시 응시했다. 지금까지 그가 만난 그 어떤 여자하고도 전혀 다른 여자.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한 얼굴을 했지만 또한 너무나 어른스럽고, 엉뚱한 것 같 지만 차고 냉요하다. 따스한 얼굴과 미소를 지녔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과 일에 대해서 전적으로 책임을 질 줄 아는 진정한 프로. 그래서 정말 호기심나게 만드는 여자. 어려운 수수께끼를 대하듯이 무럭무럭 피어나는 그녀에 대한 호기심을 이제 는 인정하며 무형은 무심코 손에 들린 그녀의 스케치북을 다시 펼쳤다. "이제 그만! 전 제 작품을 남이 함부로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가 스케치죽을 펼치기가 무섭게 조르르 래인이 다가와 그의 손에 들린 스케치북을 빼앗았다. "자, 이제 손자 분은 나가 주실래요? 이젠 두 분하고 저만의 시간이랍니다. 두 분의 모습을 스케치해야 하거든요." "내가 나가기 싫다면?"


무형은 짐짓 고집스럽게 뻗대보았다. 래인이 한숨을 쉬었다. "어린애처럼 고집 피우기는... 그렇게 내가 이뻐요? 끝까지 고집 피우고 나가 지 않으려고 할만큼?" 으갸갸. 이 기집애가 나에게 감히 도전을 하신다?.. 무형은 팔짱을 끼고 느른하게 대답했다. "난 단지 당신의 그림 솜씨를 보고싶을 뿐이오. 그리고 난 스스로를 예쁘다고 자신하는 여자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으니 너무 그렇게 나에게 신경쓰지 않아도 좋소." 그래, 너 엄청 잘났다! 분명 그런 눈초리로 래인이 그를 째려보더니 똑같이 허리에 팔을 걸치며 되 쏘았다. "난 예민한 사람이라서 누가 내 작업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일을 못한다 구욧. 정말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올 건가요?" "그래, 데릭 이만 나가 보거라. 너 이 일말고도 바쁠 일이 많을 텐데 왜 그러 냐?" 침대에 누운 조부가 깐죽거린다. 그 것으로도 모자란 듯 조모까지도 래인 양 이 바쁘다잖니, 나가 봐라. 이러면서 그를 노골적으로 몰아내려 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만을 배제시키려는 듯 해서 무형은 갑자기 신경질이 나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왠지 모두다 협동해서 나만 왕따시키는 분위기잖아.. 무슨 오기일까? 무형은 그럴수록 더더욱 래인의 그림 그리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는 투지에 불타올랐다. "...내가 당신 작업하는 것을 보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요?" 내키지는 않지만, 타협은 해야할 것 같아서 무형은 마지못해 내뱉았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하자구요. 당신이 내 작업하는 것을 꼭 보고싶다면 나 에게 당신을 그리게 해줘요." 아까부터 눈을 반짝이며 개가 먹이를 앞에 두고 침을 질질 흘리듯이 탐욕스 런 눈초리로 그를 아래위로 바라보던 래인이 조건을 내걸었다. "사실 당신 같은 진짜 못되어 먹고 사악하지만, 멋있고 깊이있는 눈매를 가진 남자를 찾고 있던 중이었거든요. 지금 내가 다음 작품으로 구상하고 있는 글 삽 화로 써 먹게요." "내..내가 사악하고 막 되먹은 눈을 가졌다고?" 무형은 기겁을 해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래인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 개를 끄덕였다. "뭘 아닌 척 하고 그래요? 폼이야 잡고 있지만 정말 사납고 사악한 눈초리를 가졌으면서... 내 눈을 속일 순 없다구요. 당신, 겉보기로는 근사하지만, 사실 진 짜 나쁜 사람이죠? 내가 다 꿰뚫었어! 당신 같은 눈을 가진 남자는요, 싱긋이 웃는 얼굴을 하고서도 태연하게 사람 등에 비수 찌를 사람이에요." "난 등뒤에서 비수를 찌르는 짓 같은 것은 하지 않아! 정정당당하게 앞에서 짓밟아 버리지!" 무형은 냉담하고 단호한 어조로 자신만만하게 내뱉었다. 이 정도로 들었으면 꼬리를 말고 설설 기어야지, 그런데 이 여자는 허파에 바람이 든 것이 분명했 다, 아니면 간이 부을 대로 부었거나..


이맛살을 찌푸리는 무형을 향해 래인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는 듯이 호호거리 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크크크. 아~~ 정말 마음에 드네! 딱이야! 내가 상상한 이미지 그대로라니까! 흐흐흐... 어떻게 할래요? 나더러 당신을 그리게 해줄래 요? 대답해 봐요! 섹시 오빠. 그러면 오늘 이 방에 있는 것을 허락할게요!" 누가 보아도 이건 끝난 게임이었다. 이 세상 어떤 사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그 물처럼 냉담한 차가움을 변화 시키지 않던 인간 정무형이 단 오 분만에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여자한테 완 패를 당한 것이다. 속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며 무형은 입김을 불어 이 마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불어 올렸다. "좋소! 내가 당신의 모델이 된다고 치자고! 그런데 대체 내 얼굴을 그려서 무 엇에 쓰겠다는 거요?" 래인이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짓는다. 그녀의 작고 하얀 이가 그녀의 도톰하고 붉은 입술을 잘근 깨무는 것을 바라 보며 무형은 다시 한 번 아까 그녀가 한 짧고 가벼운 키스를 떠올렸다. 저 붉은 입술 위에 자신의 혀를 쓸어본다면 어떤 기분이 날까? 저 작은 이가 잘근잘근 그의 단정한 입술을 깨물어주고, 살며시 위치를 바꾸어서 그의 솜털돋 은 귓불과 쇄골의 선을 핥아 준다면 정말 기분 끝내줄텐데... '젠장! 내가 이거 무슨 주책 맞은 생각이야?' 무형은 어느 순간, 소스라치는 느낌으로 자꾸만 이상한 데로 흘러가는 상상을 억지로 부여잡았다. '내가, 이거... 여자가 필요한 때가 온 건가? 그러고 보니... 여자를 안은 지 벌 써 이주가 넘었군. 뉴욕에서 만난, 헐리우드의 떠오르는 신성(新星)이라는 여배 우 도나 카린과 하룻밤을 보낸 게 아주 전이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만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골치만 아프게 하고 황당하게만 만드는 이 작은 여자와 얽힐 생각 같은 건 무 형에게는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왜 자꾸만 그녀의 작고 붉은 입술에 시선이 가는 것인지... 왜 자꾸만 소매 없는 헐렁한 원피스 속에 감추어진 그녀의 몸을 상상하고 있 는 것인지... 무형은 자기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참동안 갈등과 고민의 표정이 래인의 투명하고 작은 얼굴에 번뜩이다 사라 지더니 마침내 그녀가 음... 하고 입을 열었다. 아주 작고 자신없는 목소리. "...왕이에요." "뭐라고? 왕이라고? 그건 나쁘지 않군!" 싱긋 웃으며 무형은 대답했다. 당연 나의 이 잘난 기품과 멋진 얼굴을 모델삼 아 그릴 내용이라면 용감하고 씩씩한 젊은 황제의 모험담쯤 되어야지. 그러나 래인이 싱긋 웃는 무형을 바라보며 황당하다는 듯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래인은 혀를 쏙 내밀고 그리고 할아버지 침대 뒤쪽으로 숨어서 고개 만 내밀었다. "왕이라뇨? 무슨!~~~~~ 오빠, 착각도 심하셔! 아닌데... 아주 사악하고 잔인한 마왕인데..."


무형의 얼굴이 순간 완전히 굳어졌다. 정무형. 이름하여 위대하신 검은 용. 서른 네 살 이 개월 팔일. 이래인이라는 뻔뻔한 한 여자의 말 펀치에 깔려 순식간에 마왕(魔王)으로 전 락하다.

(6) 당신은 마왕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아시나요? 손에 피를 묻히면 언제나 그런 터이지만 무형은 그날 밤에도 악몽을 꾸었다. 어느새 십 오 년이 다 되어 가는, 이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훌쩍 지나가 잊혀진 그 일. 충칭의 어둔 밤에 일어난 그 지독한 살육의 피 비린내 말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심장 속에서는 조금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 어둠 속에서 홀로 남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그림자가 새파랗게 날이 선 일본도를 휘둘러 자신을 내려치는 그 끔찍한 공포 의 기억들... 그 꿈을 꾸고 나면 무형은 언제나 미칠 것만 같았다. 아무리 해도 잊혀지지 무력한 공포, 혹은 지워지지 않는 상흔(傷痕). 태어날 때부터 트라이어드의 미래를 짊어질 고귀한 검은 용으로 선택되어 자 라오면서 무형은 단 한번도 그런 지독한 경험을 해 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날, 더러운 배신자들의 음모로 함정에 빠져, 부하들의 보호를 잃어버리고 홀로 떨어져 남았을 때, 그때 그 망할 놈이 나타났었다.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조 금도 움직일 수 없는 채로, 멍하니 눈을 뜨고서도 적의 손에 자신의 몸을 내어 주어야만 했던 그 때. 온 넋을 채우던 그 스스로에 대한 지독한 무력감을 무형 은 지금도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의 존재를 가름하던 고귀한 '자존심'이라는 것이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난 것이니까... 절대적으로 대항 할 길 없는, 모든 것에서 군림하는 검은 용이라는 자리가 사 실은 피외 위험과 공포로 점철된 고독한 배신의 길이라는 것을 알아 버렸으니 까.... 온 몸이 땀 투성이가 되어 무형은 침상에서 비명을 삼키며 벌떡 튕겨 올랐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몸에 감겨있는 이불이며 베개들을 사납게 바닥으 로 내던져 버렸다. 지금까지... 십 오 년 동안이나 안으로 삭히고 삭히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배신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나 돌아서서 손에 손톱이 박히도록 움켜 쥐며 복수를 다짐했다. 속으로만 담아온 그 분노와 증오심이 드디어 완전하게 응징이라는 이름으로 끝이 난 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꿈속에서는 여


전히 당하고만 있는 것일까? 무형은 자신도 모르게 두 팔로 스스로의 몸을 감 싸안으며 덜덜 떨리는 공포를 삭여 내려고 애를 썼다. 괜찮아, 괜찮아... 정무형. 괜찮아... 가린아... 가린아... 그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그 여자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나 좀 안아 줘.. 제발.. 나 좀 안아 주라, 가린아.. 그냥 아무렇지도 않다고... 다 괜찮을 거라고 말해 줘. 가린아... 난 죽지 않을 거라고, 살아날 거라고 말해 줘, 가린아... 온 몸을 난자 당한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그를 뒤늦게 달려온 척이 발견했다. 자신의 몸에도 총알이 몇 방이나 박힌 피 흘리는 그 몸을 하고도 초 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척은 그를 업고 세시간이나 충칭의 밤거리를 도망다닌 후에 간신히 탈출시켰다. 몇 번의 수술, 서너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병원의 중환자실에 누워 치료 를 받으면서도 그는 악몽으로 소리지르며 발작했다. 그런 그의 섬약한 마음을 감싸주고 그의 손을 잡아준 사람은 가린이었다. 가린은 언제나 말해 주었다. 따뜻한 손으로 그의 손을 잡은 채, 아니면 그의 얼굴을 쓰다듬어주며... 괜찮아, 괜찮아.. 오빠. 다 괜찮을 거야... 오빤 이겨낼 수 있어... 오빠. 길이 없는 어둠 속에서 방황하며, 무서운 악몽에 짓눌려 죽어가는 그를 다시 삶으로 끌어올린 것은 그녀의 그 따뜻한 손잡음이었다. 사랑스런 위로의 말 한 마디였다. 결국 무형은 반년이 넘은 긴 입원 생활을 견뎌냈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무형 은 그날, 검은 용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의 손을 잡은 채 지쳐 잠들은 가린의 모습을 바라보며 확인한 의지. 무형은 자신은 상관없지만, 이렇게 소중하고 귀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만은 그 무서운 어둠의 위험 안으로 들어가게 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트라이어드를 이어받게 되면, 싫든 좋든 가린 또한 적들의 그 마수를 피할 수 없을 것이기에... '넌, 안돼! 윤가린. 넌 그렇게 살게 하지는 않을 거야. 나 때문에 네가 그런 일 을 당하게 하지는 않아. 언젠가 네가 내 여자가 된다면, 넌 어둠 속에 있는 나 때문에 많이 울겠지. 많이도 불안하고 슬퍼하겠지. 그래... 널 위해서라도... 난 이제 이 위험한 어둠과는 손을 끊을 거야. 나의 일 때문에 너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어. 난 그렇게 하지는 않을 거야.' 무형은 한 손으로 이마를 괴며 쑵쓸하게 웃었다. '정말 아이러니컬한 일이지. 가린아? 널 위해서 내가 버린 이 자리를 결국은 너 때문에 내가 다시 이어받게 되었으니... 네가 없는 이곳에서 난 그런데 무엇 을 할 수가 있을까? 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난 너를 다만 그리워만 하면서... 평생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며 허수아비처럼 이 조직의 의지를 반영하 며 피에 손을 적신 채 살아가야 하겠지... 윤가린, 너 그거 알아? 넌, 정말 잔인 한 여자라는 거... 왜 넌... 나로 하여금 너만을 사랑하게 만들어 놓은 거냐? 왜 내 눈에는 너밖에 보이지 않게 만들어 놓은 거냐고.. 날 버리고 그 놈을 선택했


을 때, 넌 좀더 철저하게 날 버리고 짓밟고 갔어야 했어. 널 미워하도록.. 널 영 원히 사랑하지 않도록... 날 더 상처주고 더 아프게 하고 갔어야 했어.' 아니, 아니다. 무형은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가린이 그랬어도 그는 그녀를 미워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린을 사랑하 는 일은 그에게 있어서 숨을 쉬듯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기에. 이 세상 사람 같지 않게 투명하고 맑은 눈을 가진, 너그럽고 사려깊고 그리고 넉넉한 여자.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녀. 윤가린. 하지만 이제는 다른 남자의 사랑스러운 아내가 되어있는... 무형 그 자신이 대 부가 된 두 아이의 엄마가 된 그녀. 놓아주어야 한다. 이제는 그의 집착과 미련에서 그녀를 완전히 놓아 주어야한다는 것은 그 누 구보다도 명료한 그 자신의 이성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를 멈출 수 없어서 괴로운 그녀. 가린 역시도 자 신의 이런 슬픈 집착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를 볼 때마다 안타깝고 죄 책감 서린 눈을 하는 가린이 무형은 더 슬프다.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이 세상 그 어떤 여자보다... 환한 웃음을 지으며 아무 구김살 없게 그의 품안에서 행복했으면 했다. 그리 고 그것을 믿었다. '하지만... 넌 내가 아닌 그의 품안에서 더 행복하지. 가린... 난 해줄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을 다 네게 주는 그 남자를 그래, 난 이길 수 없다. 아무리 부인하 고자 해도 너에 대한 내 사랑은 그 남자보다는 못하다는 것을 아니까.. 난 널 상처주는 사랑을 했지만, 위험에 빠뜨리는 사랑을 하지만, 그 남자는 널 자유롭 게 해주고 널 꽃처럼 환하게 웃게 하는 사랑이니까... 날이 가면 갈수록 더 깊어 지는 너희 부부의 사랑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니까.... 난, 가린. 더 이상 널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무형은 새벽의 푸른 어둠 안에서 다시 한번 다짐한다. 너무나 사랑하므로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 슬픈 역설(逆說)을 말이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네게 해주는 나의 가장 큰 배려이니까. 널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니까 말이다. 가린...' 똑똑 노크 소리가 나더니 살며시 문이 열렸다. 다시 아침이 시작된 것이다. "차를 줘!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아." 시중을 드는 하녀와 척이 방에 들어서자 무형은 간결하게 명령했다. 그의 젊은 주인은 이미 오래 전에 잠이 깬 터인 모양인지, 아침 햇살이 비쳐 드는 테라스에 혼자 앉아 있었다. 물기가 아직도 남은 머리카락에 아침 햇살이 어려 황금빛으로 비추이고 있고 허리에 욕실 용 타월만 두른 채 그는 테이블에 놓인 노트 북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무엇인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척이 걱정스럽게 이마를 찌푸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허리를 굽혔다. "일찍 잠이 깨셨군요. 또 악몽을 꾸셨습니까?" "난 사람이 아닌가? 누구든지 손에 피를 묻히면 기분이 좋을 수는 없지. 난 조직을 위해 마지못해 이 일을 하는 거야. 누구든지 한 사람은 악역을 맡아야하


는 것 아닌가? 그러니 나더러 피에 굶주린 괴물이라고는 말하지 말게." 무형은 차가운 어조로 대답했다. 뉴욕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홍가와 편가를 작살내버린 무서운 피바람을 일 으킨 그에 대해 쑥덕거리고 있는 나머지 오(五家)의 반발을 단번에 깔아뭉개는 냉담하고 무심한 어조였다 얼마 후, 하녀가 뜨거운 물이 담긴 도자기 물병과 무형이 즐겨 쓰는 명 대의 찻잔, 그리고 슬라이스 된 레몬과 설탕 등이 담긴 접시들이 올려진 트레이를 끌 고 테라스의 그에게로 다가왔다. "찻잎은 조금 더. 오늘은 진하게 마시고 싶으니까." "알겠습니다, 칭허 뮈렌." 하녀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노인들과는 달리 무형은 영국식으로 밀크를 넣은 홍차보다도 레몬 티를 좋아했다. 차 맛에 까다로운 노인과 그의 취향을 고려해 서 실론에는 그들의 차만을 전문적으로 생산해주는 농장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하녀는 차를 정성껏 우려냈고 그리고 무형이 만족한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 이자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뒷발로 조용히 물러났다. 정성껏 우려낸 진한 홍차를 무형은 연거푸 석 잔이나 마셨다. 뉴욕에서 커피를 마시던 것과는 달리 홍콩에만 돌아오면 저절로 입이 홍차만 찾는 것은 역시 그의 피가 이곳의 것이 라서 그런가? 무형은 컴퓨터를 끄고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러면서 조용히 자신의 손을 들여다본다. 몇 번이고 몸을 씻었어도 지워지지 않는 피 냄새. 트라이어드의 검은 용인 정가의 혈육으로 태어난 이상 아무리 용을 써도 절 대로 피할 수 없는, 평생 동안 그가 두르고 살아야 할 숙명이고 업이다. 그 피 의 낙인은 말이다. 피할 수 없다면 더 잔인하리라. 더 철저하게 그것에 빠져 주리라. 어느 누구 에게도 다시는 배신당하지 않고 등뒤에서 칼침을 맞지 않게... 완전하게 철저하 게 지배자가 될 것이다. 그는 어젯밤 부로 공식적으로 제거된 홍가와 편가를 대신해서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화 가(家)와 사마 가문(家門)을 생각하며 싱긋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 다. 그러면서 아주 천천히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혼자 홍차를 마셨다. 어젯밤 소집된 칠인회에서 공식적으로 서열 이위인 홍가의 수장 <검은 악마 > 홍타이가 제거된 것이다. 그에게 동조한 편가의 수장 <공포의 바람> 편마우 린과 함께... 죄목은 무형도 모르게 러시아와의 무기 거래를 한 후 그 대금을 횡령한 죄이 지만 사실은 검은 용을 기만하고 견제하며 발목을 건 죄 때문이다. 아니 더 깊 은 이유는.. 무형은 입술에 싱긋 사악할 정도로 섬칫한 웃음을 물었다. 음란한 암캐 같은 제 딸년을 감히 겁도 없이 검은 용의 침대로 밀어 넣으려 한 불경죄이지. 아니, 십 육년 전 그를 동지라 믿고 배후에 둔 채 전쟁을 지휘 하던 내 등뒤에서 칼을 휘두른 그 개자식의 더러운 배신의 대가이지.. 물론 두 사람은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무형이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결정적인 증거가 제시되자 꿀 먹은 벙어 리처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고, 도편 투표에서 다섯 가문은 칠인회의 분열을 획책하고 검은 용의 위엄을 해치려한 죄목을 들어 그 들 두 가문의 해체와 수 장 두 사람의 제거를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결정이 내려지자 말자 검은 두건을 둘러쓴 사형 집행자가 나타나 가느다란 피아노 줄로 두 사람의 목을 감아 죄었고, 무형은 숨이 끊어진 홍타이의 가슴을 갈라 그의 심장을 꺼내 발로 짓밟아 십 오 년동안 감추어온 목숨의 빚을 갚았 다. 믿었던 자에게 배신당한 그 치욕을 그대로 돌려준 것이다. 찻잔에 다시 찻물을 따르며 무형은 눈 아래 대련장에서 부하들이 늘 하는 대 로 아침 무술 훈련을 하는 것을 내려다보다가 훌쩍 몸을 일으켰다. 그 서슬에 헐겁게 허리에 둘렀던 욕실용 타월이 흘러내리면서 미끈한 사내의 나신이 그대 로 아침 햇살에 드러난다.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한 근육, 마치 다비드 상처럼 유려한 선을 그리는 완벽한 무형의 몸에는 그러나 어깨와 등 쪽으로 많은 상처의 흉터가 나 있었다. 그 중 에서도 가장 참혹한 것은 등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곧바로 내려긋은 듯한 깊은 사선의 흉터였다. 그때 그는 그 충격으로 인해 내부의 장기(臟器)가 거의 상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었다. 잊을 수 없는 충칭의 그 밤에 어제 그가 심장을 꺼내 짓밟아준 배신자가 그 에게 남긴 선물이었던 것이다. 물론 성형 수술로 없앨 수 있었다. 그러나 무형은 그 것을 거부했다. 그 개자식에게 복수를 하기 전에, 그 배신자의 심장을 도려 내버리기 전에는 잊지 않으리라 맹세하며 남겨둔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더 커져 가는 증오심을 두고두고 키우기 위해, 세월의 흔적에 마모될 지도 모르는 치열한 복수심을 상 기하기 위해 남겨둔 흉터... 그리고... 가린이 두려워하고 무서워 한 그 상처 "내 옷을 가져와. 나도 한판 뛰고 싶으니까!" 무형은 돌아서며 차갑게 척에게 명령했다. '난 이제 더 이상 내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거다, 가린. 이건 내 숙명이니 까. 나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내 삶이니까.... 그래, 난, 조만간 이 상처를 두려워 하지 않는 여자를 만날 거다. 그 여자를 너보다도 더 사랑할 거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서 나의 피 어린 삶을 이어갈 아들들을 낳을 거다. 이제는 더 이상 너 를 그리워하며 불면하지 않을 거다.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너의 사랑에 목매달 며 혼자 아파하지도 않을 거다. 난 반드시 너를 잊을 거다! 가린.' 무형이 대련장에 나타나자 부하들이 일제히 한 무릎을 꿇은 채 인사를 했다. 무형은 턱을 치켜들고 뒤쪽에서 삐뚜름히 선 채 팔짱을 끼고 있는 한 부하를 지목했다. 그는 다른 가문에서 보내온 중간급 보스로 이 곳에 서 있는 부하들 중 어느 누구와도 대련해서지지 않을 격투기의 달인이었다 "한 판 붙을 텐가? 내가 내려다보니 자넨 오늘 몸을 풀지 않은 것 같은데.." "영광입니다, 칭허 뮈렌." 무형은 입귀에 살짝 얼음 같은 미소를 물었다. 나 같은 건 한 손으로도 없앨 수 있는 자신감이라... 재미있군... 좋아, 자신의 살기(殺氣)를 조금도 내 비추이 지 않는 부동심을 가진 자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상대를 제압하는 눈. 팽팽한 살기를 흘리는 한 마리의 맹수처럼 무형은 약간 허리를 굽히고 상대방의 눈을 노려보았다. 그 역시도 무


형의 헛점을 노리며 슬슬 잽을 질러보며 그의 주위를 돌아간다. 무형은 씨익 입 꼬리를 다시 비틀며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이 미치도록 멋진 긴장. 피 끓는 야성이 좋다. 양복과 문명의 서류 더미 속에 감추어온 무형 자신의 잔인함과 살기를 표면 으로 뛰쳐나오게 하는 이 무섭도록 흥분되는 수컷의 본능. 무형은 이런 때면 자 신의 몸 속에 잔혹하고 악마적인 그 무엇이 들어있다는 것을 소름끼치도록 생 생하게 실감하는 것이다. 예고도 없이 두 사내의 몸이 엉켰다. 아침 공기를 가르며 두 마리의 맹수가 맞붙듯이 살기를 흘리며 한치의 양보 도 없이 대련을 빙자한 격투를 하는 두 사내. 그리고 저만치 나무 그늘 속에 한 여자가 서서 그 것을 눈을 크게 뜨고 멍하 니 바라보고 있었다 "졌습니다! 대단하신데요! 조금도 몸이 녹슬지 않으셨군요!" 몇 번이나 그에게 치명적인 가격을 당한 채, 쓰러져서는 숨을 헐떡이며 마침 내 부하가 항복했다. 무형은 싱긋 웃으며 쓰러진 그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려 는 듯 하던 부하가 갑자기 예고도 없이 다시 공격을 시작한다. 그러나 무형은 의례히 그럴 것이라고 짐작한 듯 재빠른 동작으로 안면을 가격하려는 그의 팔 을 잡아 전혀 사정도 두지 않고 비틀어 버렸다. 우두둑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무형은 싱긋 웃으며 그가 고통의 신음을 지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을 들어 그의 가슴을 잔인하게 걷어차 쓰러뜨려 버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 의 심장 쪽을 향해 주먹으로 내갈겨 버렸다. 입에 거품을 물며 거의 숨이 끊어지려는 그에게 무형은 잔인한 미소를 지으 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렇게 되어야 게임 끝이지!! 적이 완전히 숨통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방심하지 말라고 가르쳐 준 게 바로 자네였어. 안 그런가? 그리고 넌 내게 반드 시 뒤를 조심하라고도 가르쳐 줬지. 바로 이렇게 말이야!" 무형은 몸을 팽이처럼 돌이키며 깨끗하고 군더더기 하나 없는 동작으로 방심 한 부하들 틈에서 갑자기 그에게 덤비는 덩치 큰 놈 하나의 턱을 발질차기로 날려 버렸다. 불시에 일격을 당한 사내가 입에서 피를 토하며 벌러덩 뒤로 넘어 갔다. 무형은 손을 내밀어 수건을 건네 받으며 척을 바라보았다 "홍가 쪽 놈일 거다. 제 주인이 제거된 데에 앙심을 품은 걸 거야. 척!" "네, 칭허 뮈렌." "지금 당장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그 죽일 놈의 개자식 본거지를 완전히 쓸 어버리고 다 끝장내 버려!! 화근은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야. 이 미 썩은 가지는 완전히 자르지 않으면 다른 가지를 또 병들게 하지. 홍가의 성 을 달고 있는 놈들은 다 내 안전(案前)에서 치워! 오늘이 가기 전에!!" 무형은 그러고서 돌아서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느른한 동작으로 닦으며 싱긋 웃었다. "오늘 다시 보게 되어서 반갑소, 래인양. 그래, 당신이 마왕이라고 부른 남자


의 솜씨가 어떤지?! 마음에 들었소?" 래인, 남자 앞에서 생전 처음으로 기절하다. 공포 때문에... <7> 얼음 마왕에게 작업 거는 법 1 (부제 : TOUCH) 래인, 남자 앞에서 생전 처음으로 기절하다. 공포 때문에.. .......가 아니라. 현기증 때문에.... 젠장! "끼아악!~~" 눈을 떴을 때 웃는 얼굴로 태연하게 자근자근 피투성이가 된 두 남자를 아작 내던 그 남자가 래인의 눈앞에 있었다. 래인은 자기도 모르게 그만 가냘프고 우 아한 비명을 질러버렸다. 눈앞에 아주 가깝게 다가온 그의 검은 눈이 정말 정말 멋있어서.. 서늘한 손으로 그녀의 며 몸을 움츠리자 순간 기회를 놓칠 소냐? 래인은 단단한 나무에 그리고 다시 기절했다. 흣흣호...

이마를 막 짚으려 하던 그 남자가 래인이 비명을 지르 아주 상처받은 눈빛으로 움찔했다. 그러나 어디 이 좋은 엉켜드는 넝쿨 식물처럼 그 남자의 손을 꽉 움켜잡고 아니 기절하는 척 했다.

이래인.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 번 연속 기절하다. 왜냐? 너무 좋아서... 래인은 눈을 살짝 떴다. 그 남자가 단단한 팔로 그녀를 안고 급한 걸음으로 집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래인은 축 늘어진 얼굴에 슬쩍 미소를 흘렸다. 크크크크. 아이 좋아 어쩜 남자에게서 나는 냄새가 이렇게 좋은 거야? 아잉. 취해 버리겠네 래인은 모르는 척 코를 벌름거리며 마음껏 그 남자의 체취를 들여 마셨다. 땀 냄새와 섞인 그의 체취. 이름은 모르지만 여하튼 끝내주게 멋진 향수를 쓰나보 다. 거기에 섞인 그의 청결하고 섹시한 체취가 래인의 머리를 어질어질하게 하 고 있었다. 기절한 척 하면서 래인은 그에게 안겨있는 상황을 적절하게 이용해 서는 좀더 깊숙하게 그 남자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오홋홋홋호... 이래인., 너 정말 대박터졌구나! 까무러칠 정도로 멋진 이 남자 하고 작업에 들어갈 너무 좋은 기회를 잡았는데, 내가 왜 이 기회를 그냥 지나 칠 것이더냐? 좋아, 이래인. 오늘 확실하게 이 남자에게 작업거는 거야. 오 예!~~~'


아까 래인은 너무 멋진 이 남자의 뒷발 돌려차기에 완전히 반해서 자기도 모 르게 발길을 멈추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래인은 처음부터 그녀의 속을 갉작거리기만 하는 유들유들한 그 남자가, 첫 인상으로는 성질만 더럽지 힘이라고는 하나 없는 책상물림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엄청 멋진 눈을 가진 키 큰 꽃미남 그 남자가 사실은 날렵한 뒷발차기 까지 할 줄 하는, 정말 끝내 주는 엄청난 무술 솜씨까지 갖추었을 줄이야. 사실 래인은 살벌한 킥복싱 관람에 반쯤 미친 여자였으며 게임을 해도 피가 튀고 살점 떨어지는 <스트리트 파이터>나 <헬 나이트> 같은 것만 좋아하는 여자였으니... 게다가 피 튀기는 싸움터에서도 유유히 살아 돌아올 수 있는 무술 솜씨를 가진 남자에게는 사족을 못 쓴다는 결정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다. '그런데 내가 찍은 저 남자가 예상치도 못하게 끝내주는 주먹질과 발길질을 할 줄 아는 남자였다니.. 아아~~ <내 남자>는 왜 이토록 처음부터 끝까지 멋지 기만 한 것이더냐? 정무형씨. 오빤 이제 나한테 정말 찍힌 거야! 오홋홋홋' 오늘 오후에는 어디 갈 곳이 생겨서 그렇다며, 오늘만 아침 일찍 방문해달라 는 안주인의 전화를 받고 걸어오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발견한 무형의 대련 모습에 래인은 한 눈에 완전히 맛이 가서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도 망각하고 침을 질질 흘리며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형이 두 명의 적(?)을 너무나 깨끗한 솜씨로 완전히 묵사발을 내 놓는 것을 바라보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던 그녀. 오호 통재라... 그런데 그녀가 미쳐 예상하지 못한 복병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녀의 우아한 지병인 저혈압이었다. 래인은 결코 오랫동안 햇살아래 오래 서있지 못하는 체질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침도 못 먹은 빈속으로 너무 오래 동안 햇살 아래 서 있었으니, 현 기증이 나서 기절하는 것이 당연하지. 그런데 그 남자는 아마도 래인이 자신의 잔인 무도한 모습을 보고 기절을 한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단걸음에 달려 와 안아 들다가 그녀가 비명을 지르자 불에 덴 듯 손을 떼는 것을 보면 말이다 '캬캬캬캬. 섹시 오빠. 당신은 나한테 딱 걸렸어.' 연약한 여자의 기절하는 모습을 외면하지 못한다는 당신의 약점을 확실하게 이용해 주겠다. 캬캬캬캬. 래인은 슬며시 혀를 내밀어 사악하게 입술을 축였다. 얼마 후, 적당한 시간이 지난 후 래인은 힘없이(?) 눈을 떴다. 그녀는 에어컨이 돌아가는 거실 침대 의자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하녀가 찬물 수건을 그녀의 이마에 올려놓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가증스럽게도 너무나 연약하고 가냘픈 목소리로 제가 기절했었나요? 하고 물었다 옆에 서 있던 무형이 약간은 곤란한 듯한, 혹은 씁쓸한 얼굴을 하고 아마 그 런 것 같소 하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래인은 가능한 한 공포에 질린 표정을 하고 떠듬떠듬 소리쳤다. "다.. 당신 정체가 뭐예요? 뭐가 이래요? 사람들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패지를


않나, 홍가를 작살내라고 명령하지를 않나... 나, 집에 갈래요! 여긴 너무 무서운 곳이야!! 히힝.... 나. 피를 보면 정말 기절하는데... 잉잉... 할아버지한테 말하고 다시는 안 올래! 이런 집인 줄 알았으면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해도 오지 않는 건데.. 잉잉잉. 엄마!~~~~" "젠장.. 울지 마시오!! "집에 갈래요! 집에 보내 주세요. 잉잉잉. 무서워 죽겠네! 다시는 안 올 거야!! 힝힝.." 정말 미치고 돌아버리겠네!! 하는 그런 얼굴로 무형이 안절부절 래인이 울어 제치는 것을 서투르게 달래려 했다. 그러나 어디 래인이 그 정도로 그칠 줄 알 았더냐? 래인은 속으로 메롱 하면서 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끅끅 헛구역질까지 하며 공포에 질려 통곡하는 하는 척 했다. "나 빨리 보내주세요! 힝힝... 여긴 너무 무섭단 말에요. 난 다시 여기에 안 올 거야!" 코를 핑 풀고, 다시 우는 척하면서 래인은 그 남자를 손가락 사이로 바라보았 다. '내가 이 곳에 안 오면 당신 할아버지하고 할머니가 아마 당신을 들들 볶아 죽이려 들걸? 헷헤... 빨리 빌라고. 이 아저씨야. 못이기는 척하고 내가 당신 도 와 줄 테니까.. 끅끅끅.' 아무라 달래고자 해도 래인이 울음을 멈추기는커녕 더 서럽게 통곡소리를 내 자 미치겠다는 듯이 무형이 한발을 굴렀다. "울지 말라고 했소. 울지 말란 말야.! 젠장!!" 무형이 이마에 늘어진 머리를 치켜올리며 고함을 쳤다. 래인은 깜짝 놀란 척 딸꾹질을 몇 번하고는 가증스러운 거짓 울음을 멈추었다 "무..무서워서 그러죠... 힝힝. 여기 이상한 집이야. 힝힝... 당신 폭력 조직 두 목이죠? 그렇죠? 잉잉.." "난, 그러니까..." "힝힝.. 할아버지도 좋은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힝힝. 당신 보아하니... 할 아버지도 조직 사람이죠?! 힝힝.. 나 무서워서 어떡해? 엄마, 잉이이잉... 또다시 훌쩍훌쩍 울던 래인이 다시 코를 팽하고 푸는 것을 바라보며 무형은 잠시동안 짧지만 깊은 고민에 빠졌다. '대체 저 여자를 어떻게 하지?' 무형은 정말 울고 싶은 것이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기절을 할 정도이니 얼마나 그의 잔인한 행동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말 안 해도 알만 했다. 아까 안고 집으로 들어올 때 그녀의 작고 가녀린 몸은 마치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 어찌 아니 그러겠어?' 그는 뒤돌아서 창가로 갔다. 동물들이 말을 하고 무지개 다리에서 아이들이 뛰어 놀고 사랑만으로 세상 전부의 곤란한 일들이 해결된다는 허무맹랑한 동화 나부랭이를 쓰는 여자이니 오죽할까? 세상 물정이라고는 하나도 모르고 사람들은 모두 자기처럼 안온하고 평화롭게 산다고 생각할 철부지가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그런 여자가 눈 하나 깜짝 않고 사람의 심장을 짓밟아 죽여버리는 광경을 백주 대낮에 목격을 했으 니 기절이 아니라 충격으로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한 일이지, 제기랄!


울며불며 래인이 다시는 무서워서 이 집에 오지 않겠다고 난리치는 것이 어 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무형은 정말 곤란한 지경이 빠졌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는 그의 근사한 옆모습을 래인이 손가락 사이로 침을 잴잴 흘리며 바라보는 것도 모르고서... 물론 무형이 느끼는 그 곤란함은 래인 때문이 아니었다. 무형은 그녀가 오지 않으면 실망할 것이 확실한 그의 조부와 조모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형은 조부가 래인에게 자신이 트라이어드의 타이쿤이라는 것을 일부로 감 추었거나 수치스러워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또한 일부러 그녀 에게 자신이 조직의 사람이라는 것을 말했을 리도 없다. 그냥 그들은 래인 같은 순진한 여자에게 평범한 노부부인양 보여지기를 원했을 것이고 아마도 지금까 지 그렇게 지내왔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친손녀처럼 노인들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래인의 모습을 보면 알 만한 일이었다. 조직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조부 앞에서 래인은 아무런 경계심이나 두려움 없이 매달리고 애교부리고 귀여움을 떨었으니까. 아마도 아니, 확실하게 조부나 조모 또한 래인을 마치 자신의 어린애처럼 귀 여워하고 있었으리라. 그녀 앞에서는 그 분들이 아무런 경계의식이나 사심 없이 웃고 즐거워하시던 것을 그의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늘그막에 하나 발견한 즐거움인 래인 그녀가 노인이 조직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두려워하며 떠나버린다면.... 아마 노인들은 깊이 상심하고 섭섭해할 것은 분명했다. 나이가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노인은 갈수록 어린애처 럼 변해가고 있었다. 쉽게 섭섭해하고 쉽게 상처받으며 쉽게 삐치기조차 하는... 지금까지 아무 것도 모르고 이 집을 편안하게 드나들었던 래인이 그의 경솔 한 행동으로 피에 젖은 이 집안의 내력을 눈치챘다면, 그래서 그녀가 다시는 이 집에 오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 두 노인에게 깊은 불효를 한 것이었다. 무형은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값을 치르고서라도 래인을 설득해야했다. 래인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아 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이 집을 드나들어야만 했다. 반드시! 무형은 마침내 생각을 멈추고 심각한 눈초리로 래인을 바라보았다. 래인은 하녀가 건네주는 찬물 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좋소. 당신이 그 울음을 잠시만 멈춘다면 내가 설명을 할 수 있소." "흑흑... 흑흑.. 무..무슨 말이오?" 래인이 일단 진정을 좀 하는 척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항복을 하시려 는구먼. 크크크. "먼저, 당신은 이 집에 계속 와야 하오!" "왜, 왜요? 난 이렇게 무서운 집에는 다시는 오기가 싫다구요!" "하지만 난 오기를 바라오. 당신이 오지 않으면.. 그리고 그 것이 오늘 나의 행동 때문이라는 것을 아신다면 두 분이 아마 나를 잡아 먹으려하실 테니까. 먼 저... 당신이 본 광경은 아주 특별한 경우라고 말해 두고 싶소. 다시는 이런 일 이 당신 눈앞에서 없을 거요! 약속하리다." '쳇, 아쉽다.' 그렇게 멋지고 신나는 광경을 다시 볼 수 없단 데에 약간 실망하며 래인은 속으로 아쉬워서 혀를 찼다.


<그녀의 남자>가 보여준 멋지고 섹시하고 깨끗한 뒷발차기는 정말 끝내줬는 데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절하는 건 잠시 참고 박수를 쳐줄걸 하고 후회 하며 래인은 연약한 얼굴을 한 채 무형을 가련한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저.. 저기요.. 한가지 궁금하게 있는데요... 할아버지도 당신처럼 무서운 분이 세요?" 사슴처럼 순진한 눈망울을 치켜뜨고 래인이 묻는 말에 무형은 잠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조부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는 이유를 달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할아버지는 상관하지 마시오. 그 양반이야 이미 손을 뗀지가 오래이니까. 당 신은 그냥 아무 것도 모르는 거요! 두 양반은 지금껏 당신이 알고 있는 대로 평 범하신 노인양반들이시니까! 자, 말해요. 약속해 줄 수 있소? 예전처럼 모르는 척하고 할아버지를 대하겠다고!" "아. 알았어요. 그렇게 하면 되잖아요. 힝힝... 하지만... 당신 화나면... 내가 당 신 비윗장 건드리면 나도 아까 그 남자들처럼 그렇게 팰 건가요?" "난 절대로 여자는 때리지 않아. 알겠어? 트라이어드는 대항할 길 없는 민간 인은 건드리지 않는다고! 젠장, 나를 뭘로 생각하는 거야?! 내가 뒷골목 양아치 인줄 알아?" 몹시 자존심상한 얼굴로 무형이 소리쳤다. 래인은 속으로 혀를 내밀었다. '오홋! 그 유명한 트라이어드라?. 이제야 알겠군... 엄청 부자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분명 이 집안은 트라이어드 조직 중에서도 최고 수장 가(家)가 틀림없 어! 카하, 멋있다. 이거야말로 내 낭군(이 될 님)은 말 그대로 보스가 아니더냐? 힛히. 나. 잘하면 보스의 마누라도 될 수 있겠는걸?' 그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래인이 여전히 못미더워 하는 눈초리로 무형에게 되물었다. "내.. 내가 어떻게 당신 말을 믿어요?" 무형은 머리에서 김이 나는 심정으로 꽥 소리쳤다. "그럼 대체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이 내 말을 믿어주겠소?"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형은 삽시간에 돌변하는 래인의 엽기적인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목격하고 만 것이니...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래인이 코를 휭하니 풀고 눈물을 닦더니 기운차게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너무너무 교활하고 음흉한 얼굴로 그를 살살 꼬시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계약서를 써야죠. 안 그래요? 난 무서워서 당신 말 못 믿어요! 문서로 작성 하자구요!" 정말 돌아버리겠네.. 이런 얼굴로 무형이 잔뜩 인상을 쓰더니, 그러나 하는 수 없이 뭘 바라는 거요? 하고 나직하게 다시 되물었다. 래인은 잠시 잠깐 드러낸 구미호적 본성을 다시 감추면서 순진하고 얼빵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같이 위험한 폭력조직 남자가 사는 집에 드나드는 건 보통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죠! 내가요, 할아버지 할머니 생각을 하면서 억지로 무서움을 참고 모르는 척 일은 하는데요. 당신네 같은 무서운 남자들 앞에서 일하는 것은 내 목숨 걸어놓고 하는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오늘부터 내가 아르바이트 비 받는 것에다 위험 수당을 더 얹어줘요."


"위...위험 수당?" 래인은 기가 막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그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위험 수당. 그러니까 내가 받는 아르바이트 비에서 1,5 배 더 얹어 줘요! 오케이? 그리고 말이죠, 힛히.. 나한테 키스 한번만 해줘요. 그럼 당신이 약속을 한 것으로 믿지요. 히힝.. 오빠... 키스 한번만... 그러면 오늘 벌어진 모든 일을 나 싹 잊어버릴게요! 네에?~~" 정무형. 철없는 호랑이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는 버전으로 부끄럽지도 않은 지 먼저 키스를 조르는 여자에게 난생 처음 부하들이 창 밖에서 다 들여다보는 곳에서 찐하게 키스당하다. 내가 미쳐!~~ 속으로 온갖 욕을 해대며..

<8> 얼음 마왕에게 작업 거는 법 2 (부제 KISS) 무작정 저돌적으로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술 박치기부터 하는 여자에게 떠밀려 얼떨결에 키스 씬 모드로 돌입한 정무형. 입술은 맞부딪치고 있는데, 멍한 눈을 뻔히 뜬 채 황당하다는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니, 자신이 어찌하다가 이런 처지에 휘말려들게 되었는지 아직도 이성적으로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래인은 더욱더 사악한 미소를 물었다. 잘난 남자가, 그것도 아주 냉정하고 카 리스마 만빵인 남자가 이성을 찾게되면 무척 곤란한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은 잘난 세 오빠들의 경우를 통해 지겹게도 보아왔다. 그래서 순조롭게 진행되던 일이 망쳐진 것이 어디 한 두 번이더냐? 그러니 이성을 되찾지 못하게 더욱 밀 어 부쳐야지! 좋아, 어디 이 남자의 혼을 완전히 빼놓는 작전 이 단계로 돌입해보자고! 검고 부드러운, 처음 보았을 때부터 한번 어루만져 보고 싶었던 무형의 윤기 나는 머리카락 속에 래인은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더욱 자 신의 가까이 끌어당기며 그녀는 아주 달콤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명령했다. "오빠, 키스하자고!~~ 입 벌려욧!" 래인은 살며시 촉촉한 혀로 단단하고 선명한 선을 그리고 있는 남자의 입술 을 핥다가 냉큼 벌어지는 그의 입안에 혀를 밀어 넣었다. '엄마, 기뻐해 주셔요!! 드디어 래인이 첫눈에 반해 콱 찍어버린 멋진 남자와 키스에 성공했습니당. 흑흑' 그런데 래인이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한 건 바로 요 대목에서부터였 다. 다짜고짜 무형의 입술을 덥친 래인의 혀가 그의 입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갑 자기 그 남자 눈에 번쩍 기이한 빛이 흐르더니 냅다 무형이 그녀의 뒷통수를 잡아 그녀의 얼굴을 거칠게 자신에게서 떼냈다. 그리고는 래인의 눈을 들여다보며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확인사살


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망할 아가씨가.. 젠장... 기가 막혀서!! 바른 대로 말해! 너, 키스 처음 해 봤지?" 허걱! 예리한 눈썰미. 래인은 가슴이 털썩 내려앉았다. '이씨, 이건 어떻게 안 거야? 맞아, 틀림없어! 별 별 여자랑 키스를 엄청 많이 도 해봤던 거야... 빠드득! 그러니 내 키스가 아마추어틱하다는 것을 당장 눈치 챈 거지. 쳇, 바람둥이!' 그러나 대담한 이래인 전혀 졸지 않고 거만하게 도전적으로 무형을 올려다보 며 되받아쳤다. "그렇다면요? 내가 키스를 한번도 안 해 본 것에 대해서 당신이 왜 신경질이 에요? 오히려 영광이지! 나처럼 순수하고 예쁜 여자의 첫 키스 상대라는 것이 당신으로서는 자랑스러운 것 아니에요? 사실은 좋으면서 괜히 그래!" 무형의 잘생긴 입술 끝이 살짝 일그러지더니 냉소적인 선을 그리며 내려앉았 다. 그가 허리를 구부려 래인의 눈과 자신의 눈을 맞추었다. 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검고 신비한 눈이 차갑게 래인의 눈을 찌르듯이 노려본다. 사냥감을 노리 는 매의 눈처럼 잔인하고 거친 빛이 무형의 조용한 눈빛 속에 확연히 드러나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무형의 그런 눈빛을 대하면 십에 십, 저절로 오금이 저리는 듯, 축축한 땀을 흘리며 먼저 우물쭈물 시선을 피하곤 했다. 그러나 이 기막힌 여자는 오히려 한없이 황홀한 눈빛을 하고 몽롱하게 웃으며 침을 잴잴 흘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손을 내밀어 무엄하게도 그의 단단한 얼굴을 살살 어루 만지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멋쟁이 오빠~~~ 가까이 보니 정말 더 잘 생겼다아!~~~~~~~ 난, 이렇게 당신 얼굴 바라보면, 정말 황홀한 거 있지?" 생긴 것은 날개 떨어진 자국도 아직 아물지 않은 요정같이 생겨 가지고는 무 작정 세상 전부가 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고 있는 듯 제 멋 대로인 이 여 자의 머리 속에는 도대체 뭐가 들었을까? 무형은 잠시 기가 막혀 다시금 말문 을 잃어버렸다. 어떤 것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고 더더구나 여자의 유혹이라는 것에 대하여 냉담한 무형이 아닌가? 그런데 어쩐지 이 조그만 여자에게서는 눈을 뗄 수 없 다. 자꾸만 돌 같이 차가운 그의 심장에 흥미라는 것을 생겨난다. 이 어리고 철없는 여자를 내가 어찌 할까? 그녀의 작고 보드라운 손길이 그의 뺨에 와 닿는 순간 어쩐지 아랫도리가 자 꾸만 근질거리고, 깊은 심장 언저리가 이상야릇해지는 느낌을 어찌할까? 가린과 헤어진 이후 어떤 여자에게서도 느껴본 적 없는 영혼의 작은 전율. 그 러나 무형은 그 낯선 흔들림을 확고하게 부인하듯이 나직하나 차갑고 오만한 어조로 래인에게 윽박질렀다. "네가 나한테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지만 좋은 말 할 때 이 손 집어치워. 난 너 같은 어린애의 철없는 연애놀음을 상대해줄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나 래인은 생긋 웃으며 오히려 남은 손을 더 가져와 무형의 볼을 두 손 으로 아기처럼 폭 감싸안는다.


"내가 왜 어린애야? 옛날 같으면 결혼해서 애를 다섯은 낳았겠구먼. 당신이 싫대도 내가 당신을 찍었네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반항 말고 그냥 내 품에 안 기시지, 잘생긴 오빠?" "정말 말 안 듣는 여자로군. 너, 정말 눈에 보이는 게 없... 읍!!" 무형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래인이 무형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냅다 다시 덤벼들어 그의 잘생긴 입술을 자신의 키스로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불의의 습격으로 무형의 말문을 효과적으로 막아버린 짧은 키스 후에 래인이 아주 유혹적으로 긴 속눈썹이 그늘을 드리운 눈을 깜빡깜빡하며 그를 부추겼다 "내가 당신더러 연애하자고 하는 게 뭐가 잘못이에요? 결혼 안 한 처녀 총각 이 연애 거는 거, 그거 잘못 아니죠, 그렇죠? 난 당신에게 반했고, 당신도 뭐 날 좋아하지는 않지만 싫어하는 것은 아니잖아? 연애 한번 겁시다, 오빠." "이, 이 망할 여자가!" "데릭. 내가 당신더러 결혼하자고 그랬어요? 아님 날 책임지라고 그랬어요? 그냥 우리 필(feel)이 꽂힌 김에 찐하게 한번 연애하자는 건데 왜 자꾸 빼요? 잘생긴 오빠. 좀 솔직해져 보라구욧!" 래인이 채 말을 마치기도 전이다. 이번에는 무형이 거칠게 래인의 몸을 휘감 아 끌어당겨 자신의 억센 팔 안에 가두었다. 헤아릴 수 없는 복잡미묘한 빛이 서린 차가운 검은 눈. 그러나 분명 그 깊은 곳에서 떠오르는 빛은 수컷의 격한 욕망이었다. 그의 시선이 마치 품평하듯이 래인의 반쯤 벌어진 입술과 열정에 서린 눈을 훑어지나 길게 벋은 하얀 목덜미 와 성적인 긴장으로 빳빳이 선 젖가슴 쪽을 돌아 내려간다. 무형은 나직하고 차가운 어조로 래인에게 최후 통첩을 했다. 아직도 기회가 있으니 빨리 자신에게서 도망가라는 뜻이었다. "넌 반드시 날 택한 이 날을 후회할 거다!" "내가 왜?" "난 절대로 여자하고 사랑 같은 건 안 하니까!" 래인 역시 오만하게 내뱉는 무형의 눈을 한치 양보 없이 쏘아보며 코웃음을 쳤다. "게임은 끝을 봐야 아는 거지!" "난 너 같이 보잘 것 없는 여자하고는 얽힐 생각 없어. 순진한 네가 남자에게 바라고 있을 결혼 같은 것도 할 생각 전혀 없고." "나도 당신하고 결혼할 마음 같은 건 없네요! 내가 미쳤어? 이 아까운 청춘에 당신 같이 성질 더럽게 생긴 조폭 두목하고 결혼하게? 난 당신하고 실컷 즐기 다가 나만 아는 일편단심형 남자하고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아롱다롱 잘만 살 거야!" 어떤 분노 같은 것, 혹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기분 더러운 어떤 것이 무형의 머리를 강타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래인의 입에서 너 같은 조폭 두목 같은 남 자하고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왔을 때였다. 무형의 심장 깊이 감추어진 상처, 혹은 아직도 지우지 못한 자괴감일까? 다시 터진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참혹함으로 무형은 래인의 어깨를 움켜쥔 손 에 힘을 주었다. 정말 사랑했던 여자를 그런 이유로 빼앗겼다.


그녀를 채어간, 정말 때려죽이고 싶도록 밉던 그 남자가 그를 향해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퍼붓던 그 지독하고 잔인한, 그러나 진실이던 독설(毒舌). -"잘난 척 해보았자 겨우 어둠의 자식인 주제에! 너 같은 폭력배가 대체 이 소중한 여자에게 무엇을 줄 수 있지? 성처(聖妻)? 웃기는군, 그래보았자 결국은 깡패 두목의 마누라라는 타이틀이 아닌가? 날이면 날마다 너의 적에게서 위해 나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하고, 마음놓고 거리한번 활보할 수 없고, 혹시 뒷통수를 노리고 있을지 모르는 암살자가 두려워 쇼핑 한 번 하자해도 부하들 에게 둘러싸여야만 가능한 그런 새장의 신세를 넌 사랑하는 여자에게 강요할 셈인가? 그 것이 네 그 잘난 사랑법인가? 하늘처럼 자유롭고 꽃처럼 아름다운 여자를 마른 종이꽃처럼, 박제된 새처럼 살라 어떻게 강요할 수 있는가? 사랑은 상대방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넌 네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만 으로 그녀를 그렇게 지독한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놓으려 하고 있지. 그러면서 넌 참으로 잘도 사랑이란 말을 사용하는군!"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무형에게 되 받아치던 그녀 가린의 연인, 아르젤의 말은 부인할 수 없는, 진 정 한치 거짓이 없는 진실이었으므로.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었다. 무형 자신에게 내려진 운명의 무서운 선고였다. 어둠의 자식인 그로서는 절대로 그 아름답고 선하고 순결한, 빛의 여신인 가 린을 탐낼 수도 없고, 탐내어서도 안 된다는 뼈아픈 진질. 그래서 손을 놓았다. 포기했다. 그녀에게 주어버린 심장 한 뭉텅이가 뚝 떨어져나가 콸콸 영혼의 선혈이 흐 르는 것을 보면서도 무형은 가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무형 자신이 줄 수 있는 사랑보다, 아르젤이 그녀에게 주던 사랑이 더 깊고 순정하고 절대적이라는 것을 인정했으므로... 아니, 어둠의 벌레인 그와는 달리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그 남자는 가린과 마찬가지로 빛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었으므로... 무형은 분노 섞인 시선으로 래인의 당돌하고 곧은 눈길을 쏘아보았다. 어느새 그의 입술을 맴돌아 독액처럼 스며 나오는 쓰디쓴 절망. '역시 너도 똑같군.' 무엇인가 좀 다를 것 같았던 이 여자, 천사 같은 얼굴에 황당한 뻔뻔함으로 제법 그를 호기심 나게 하던 이 여자도 어둠의 자식인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삶의 길도 다른 빛의 쪽 여자였다. 그녀가 가린보다도 솔직하다면 그녀는 미리부터 그와 같은 어둠의 존재와는 제 마음이 가는 대로 연애질은 하겠지만 삶은 엉키지 않겠다고 미리 배수진을 치는 것 하나일 뿐. 그래, 좋아 네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나도 널 그렇게 대해주지. 넌 아직도 모르는 모양인데. 곧 알게 될 거야. 이 철없는 아가씨야. 악마하고 는 섣불리 게임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무형은 아주 차갑게 푸른 빛 나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조용히 래인에게 속 삭였다. "아, 좋아! 절대로 그 말을 잊지 말라구! 네가 나하고 즐기겠다는 게 그 정도


라면야 나도 얼마든지 환영이야. 그렇지 않아도 홍콩에 와서 내 몸을 달래줄 새 로운 장난감을 찾고 있던 중이거든. 좋아. 우리 서로 쿨 하게 나누자고. 하지만 나중에 우리 관계가 끝이 났을 때 내 발목 부여잡고 헛소리하기만 해 봐!" "헛소리는 당신이나 하지 마시지! 지금 당신 엄청 잘난 척 하는데, 나중에 나 의 매력에 빠져 날더러 사랑한다느니 결혼해 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없어! 분명히 말해 두는데 당신은 연애나 할 남자지 결혼 상대자는 절대로 아냐. 알아? 그러 니까 우리 둘, 지금 실컷 즐기자고! 어때? 섹시한 오빠 하아 하아...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 신음 소리인지... 어느 사이 두 사람은 온 몸을 밀착한 채 열렬한 키스 모드로 다시 전환하고 있었다. 시작한 건 래인이었지만, 어느 사이 주도권은 무형에게로 넘어가고 있 었던 것이다. 역시 경험이란 건 중요한 것이었다 무형은 한 손으로 래인의 머리를 받쳐들고 또 한 손으로는 그녀의 얇은 원피 스 위에 봉긋 솟아난 젖가슴을 어루만지면서 아주 깊은 디프 키스를 래인에게 처음으로 가르쳐 주었다. 뭐, 네가 먼저 나에게 몸을 던졌으니, 굴러온 떡을 나도 더 이상 사양하지 않 으련다 이런 뜻이었다. 래인은 밀착된 그들의 입술과 몸 사이로 느껴지는 그 확확 달아오르는 열기 를 감당하기 너무 힘들었다. 젠장. 이 망할 남자는 정말 키스 하나는 끝내주었 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래인의 몸은 이미 무형의 팔 안에 담긴 채 거실의 소 파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녹아날 듯한 근사하고 뜨거운 키스로 래인의 이성 을 교란시키며 그녀의 몸을 감싼 원피스의 앞단추를 슬슬 풀어 내리고 있는 중 이었다. 그의 무례한 손이 그녀의 치마 자락 아래로 스며들어 한번도 타인의 손 길을 허락한 적 없는 래인의 깊은 곳을 더듬어 간다.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찔 러대는 딱딱한 이물감. 그 것은 무섭도록 흥분한 그 남자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나타내 주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문 쪽을 향해 있던 래인의 눈이 갑자기 반짝 빛났다. 불행하게도 한참 래인의 옷을 벗기는 것에만 골몰한 무형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래인은 알아차린 상황, 그것은 이제 일분 후이면 사람들이 이 방안으 로 들이닥칠 것이라는 확실한 예감이었다. "뭬이야? 래인이 기절을 했다고? 그건 안되지! 암, 안되고 말고!! 아이고, 불 쌍한 것. 어, 어.. 저..저거!!.." 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침묵. 거실 안의 이상 야릇 황당한 광경에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노인들이며 리훙의 멍청한 얼굴을 곁눈질 한 래인의 교활한 머리 속에서 파바박 불꽃이 튕겼다. 무형이 이성을 수습하고 일을 처리하기 전에 이 상황의 끝장을 봐야지. 암!! 래인은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몸 위에 겹쳐진 무형의 몸을 억지로 밀어내고 는 그리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좋으면서 왜 그래? 하는 눈빛을 하고 있는 그의 따귀를 있는 힘을 다해 후려갈겨 버렸다.


"이씨!! 나한테 이러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싫다는데 왜 그래?" 래인은 그리고서 황당해 하는 무형을 확 밀치고는 풀려진 옷자락을 움켜쥔 다음 문 앞에 멍청하게 서 있는 할머니 품에 달려들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엉엉엉.. 할머니!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데릭이 갑자기 나한테 키스하 잖아요.. 엉엉엉. 난 첫 키스인데.. 잉잉잉. 싫다는데.. 잉잉잉... 나한테 자꾸만 왜 저러는 거래요? 힝힝.. 딸꾹! 할아버지, 난 데릭이 너무 무서워요!!" 할머니의 품속에서 딸꾹질까지 해대며 래인은 아주 서럽게 하소연을 했다. 물 론 곁눈질로 무형의 얼굴을 살피는 것은 절대로 잊지 않고.

(9) 검은 용, 완전히 뒷다리 걸리다. 잠시 동안 래인의 훌쩍임만이 거실을 채우고 있는 한순간. 모든 것이 정지되고 오직 그 곳에 모인 사람의 시선 전부가 황당하다 못해 석상이 되어버린 무형을 향하여 칼날을 날려대는 것만이 남은 침묵의 한순간. "데, 데릭 이~~ 노~~옴!!~~~~~~~~~" 한 때 전 아시아의 밤을 벌벌 떨게 했던 전설적인 대 타이쿤 <검은 별> 노 인의 입에서 벽력같은 호통 소리가 터졌다. "너, 너.. 이놈! 너 오늘 죽어봐라! 이놈이 어디서 이런 망신스런 일을 벌이는 거엿? 이리 왓!!" 당장 저 싸가지 없는 놈을 패 죽여버리겠다는 결연한 표정을 하고 살기등등 하게 노인이 무형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아직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 지 못한 터로 여전히 황당하고 뻥 쪄서는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무형의 머 리통을 야윈 주먹을 들어 사정없이 패주기 시작했다. 훌쩍이며 처연스럽게 눈물을 훔쳐대면서 가슴팍에 파고드는 래인을 품안에 감싸 들이며 언제나 우아하시고 고상하신 안주인께서도 저런 놈은 아주 정신이 번쩍 나게 혼구멍을 내 주쇼!! 하고 난리 블루스를 쳐 댔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 거야? 무형은 머리통 위에서 난무하는 별들을 멍하니 방관한 채 사태의 추이를 비 로소 헤아리기 시작했다. 눈 한번만 내려 떠도 사람들이 벌벌 떨고 시선 한번만 바로 주어도 여자들이 먼저 자지러지고 달려드는 통에 귀찮은 사람이 바로 검은 용인 그가 아닌가? 그런 그가 뭐가 아쉬워서 저 빼빼 마르고 멍청한 여자를 강제로 덥치겠느냔 말 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지금 자존심 강한 검은 용인 그를 완전히 강간미수범쯤 으로 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신 차려라, 정무형. 눈만 끔뻑끔뻑하며 무형은 흥분해서는 침을 튀기며 그를 호령호령하며 후려 패는 조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이 노인양반이 뭐라고 떠들어대는 것인가? 그가 염치도 모르고 어지간 히 낯짝도 두꺼운, 겨우 두 번 본 여자를 강제로 덮치는 천하의 개망나니라고 욕하고 있는 것인가? '좋다고. 그러니까, 다시 한번 돌아보자고. 내가.. 이 정무형이... 지금 저 망할 여자의 사악하고 교활한 수단에 휘말려 완전히 개새끼가 된 거야?' 할아버지에게 무차별하게 얻어터지면서도 멍하니 생각에 잠긴 무형의 얼굴을 바로 그것이었다.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할머니 품에서 가증스럽게 흑흑거리면서도 얄밉게 무형 쪽을 바라보던 래인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무형은 정말 으악!! 비명 지르고 싶은 심정으로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꾹꾹 찔러 보였다. -"이 모든 게 내가 한 짓이라고?" -"당연하지!! 모든 정황증거가 다 그런데! 자긴 나한테 딱 걸렸어. 키키키. 홋호... 아이 재미있어." 새끈하게, 사악한 웃음을 날리며 그에게 혀를 날름 해 보이는 래인 앞에서 무형이 드디어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아고고! 하는 얼굴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무 너지듯이 소파에 주저앉아 버렸다. 무너진 그의 몸 위로는 여전히 열받은 노인의 주먹이 소낙비처럼 작렬하고 있었고.... "이 놈아!! 건드릴 애를 건드려야지, 어디서 망신스럽게 래인이한테 집적대는 겨? 얘가 놀라서 우리 집에 다시는 안 오면 니 놈이 책임질껴?! 엉? 이놈이 점 잖은 놈인 줄 알았더니 말이야. 그래, 이 놈아. 래인이가 그렇게 이쁘더냐? 좋으 면 잘해 줘야지 말이야. 선불맞은 산돼지처럼 덤비기부터 하면 되는겨? 에잇!! 더 맞아 봐라! 퍽퍽퍽!!" 젠장, 노인네 검은 속셈이 그 말 한마디로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무형은 조부에게 얻어터지면서도 노인이 바락바락 소리지르며 화를 내는 이 유가 단지 놀란 래인이 집에 다시 오지 않으면, 이야기 듣는 자신의 즐거움이 사라지는 데만 초점이 맞추어진 것에 대하여 혀를 쯧쯧 찼다. 아무 말도 못하고 노인에게 얻어터지는 무형의 침묵이 지금 벌어진 모든 민 망스런(?) 사건을 인정하는 것으로 굳어져 가는 바, 무형은 자신이 꼼짝없이 저 얄밉고 사악한 여자의 수단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뼈아프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 다. 천사같이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저 이래인이라는 여자는 정말 대단한 강 적이었다! 젠장. 무형이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무방비하게 노인에게 터지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나보다. 에고 에고, 착하기도 하지. 그렇게 자신을 놀래킨 무형이 그래도 불쌍하게 느껴졌던지, 어린 아이 다루듯 이 감싸안은 할머니 품에 안겨 방을 나서기 전에 래인이 너무나 애처로운 그러 나 애교가 살살 녹는, 사탕같이 간살거리는 목소리로 노인을 불렀다. "훌쩍, 훌쩍.. 저어, 할아버지... 데릭을 많이 혼내실 거예요? 훌쩍." "나 말리지 말아라! 래인아. 어이구, 우리 래인이 많이 놀랐지? 걱정 마라. 오 늘 이 할애비가 이 놈을 아주 죽여버릴 테니까, 이 할아비만 믿고 있거라, 알았


쟈? 임자, 저 애 데리고 가서 진정 좀 시키구랴. 어리고 순진한 것이 얼마나 놀 랬을고? 이 놈아! 어딜 봐! 저 애가 네 놈이 함부로 넘볼 애처럼 보이냐?" 보기 좋게 뒷통수를 친 저 망할 게집애를 어떻게 혼구멍을 내줄까 생각하며 힐끗 래인 쪽을 바라보던 무형의 머리통에 다시 노인의 주먹이 날아왔다. 래인 이 그 광경에 안타깝게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 할아버지 데릭 때리지 마세요 엉엉엉. 흑흑... 할아버지, 제가 잘못했 단 말에요. 저도.. 데릭이 좋아서요... 그래서, 데릭이 키스하는 거.. 좋았는데요.. 흑흑... 잉잉 데릭이 제 옷만 안 벗겼으면... 뺨은 안 때릴라 그랬거든요.. 잉잉.. 훌쩍 훌쩍... 할아버지. 저도 데릭이 좋아요.. 힝힝.. 그러니까 데릭 많이 혼내지 마세요. 훌쩍. 래인이도 책임이 있단 말이에요. 훌쩍" 그래, 오늘은 내가 완전히 졌다. 망할 여자야! 무형은 문을 닫고 할머니 품에 안겨 사라지는 래인의 뒷통수에 대고 허무한 웃음을 날렸다. 병 주고 약 준다더니 딱 그 말이었다. 제기랄! 천하의 오만한 검은 용을 두고 겁도 없이 감히 유혹 작전을 벌여 그의 이성 을 잃게 하고 자신에게 몰두하게 만든 래인의 그 솜씨에 그는 정말 박수룰 치 고 싶었다.. 저런 여자가 그의 부하여서 적을 상대로 미인계라도 쓴다면.... 오, 마이 갓. 백에 백, 승리를 할 것이다. 그 천진난만한 얼굴로 긴 속눈썹을 흔들며 유혹 한다면 어떤 사내놈이 넘어가지 않으랴? 게다가 무형 자신으로 하여금 힘없는 여자나 덮치는 천하의 개새끼로 만드는 것까지도 좋다 치자. 그러나 이 기집애는 정말 무형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또다시 말 한 마디로 그들 둘이 서로 좋아 같이 일을 벌렸다고 주장하다니. 무형을 변명해주던(?) 래인의 그 말 한마디로 무형과 래인은 첫눈에 불이 붙 어 주위도 돌아보지 않고 일부터 벌일 뻔한 열렬한 연인사이로 돌변해 버렸던 것이다. 아무도 보지 못했으니 무형이 부인하지 않는 이상, 래인이 주장한 것만이 사 실이 되는 것은 당연지사. 그렇다고 무형이 부인해도 누가 믿을 것인가? 이해 못한 미친 열에 들떠서 그녀를 타고 올라 불같은 키스를 퍼부으며 그녀의 옷자 락을 끌어내린 건 분명히 다른 누구도 아닌 무형 자신이었으니까. "아이고ㅡ 맙소사!" 무형은 한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 핫하... 힘없는 웃음소리를 냈다.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나 멍청하게 그녀의 기막힌 계략에 말려든 자신이 한심 스럽고 우스꽝스러워 무형은 다만 허탈하게 웃을 도리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의 웃음소리는 갈수록 엄청나게 커져서 거실 전체를 울렸다. 온몸까지 흔들어대며 미친 듯이 웃어 제치는 그의 행동에 무형을 마구 패던 노인과 노인을 말리느라 진땀을 빼던 리훙까지 멍해져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무형이 남들 앞에서 큰 소리를 내며 몸까지 흔들며 웃 음을 터뜨린 것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물처럼 담담하고 냉정함을 흔들리지 않는 그가, 감정 같


은 건 애초부터 느끼지 않도록 훈련된 그가, 인간의 희노애락(喜怒哀樂) 같은 건 전혀 느끼지 않는 기계처럼 훈육되어 철저하게 자신의 감정을 다스려온 검 은 용 정무형 그가 삼십 사 년만에 처음으로 이래인이라는 조그맣고 앙큼한 여 자 때문에 허파가 터져라 웃고 있었다. 물론 그의 웃음이 머리꼭지가 돌만큼 열 받고 난처하고 민망하고 기막힌 모 든 감정을 포함한 것이라 해도 중요한 것은 래인이 그의 단단한 이성이 만든 억제력을 단번에 무너뜨렸다는 것이었다. 손자의 웃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노인의 눈에서 번쩍 기이한 빛이 흐른 것은 그 때였다. "정신 차렸으면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무형은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득득 긁으며 심각한 얼굴을 한 조부를 건너다 보았다. "무슨 이야기요? 어차피 제가 무슨 말을 하든지 믿지 않으실 것 아닙니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사태의 추이를 캐 물으려하는 조부에게 무형 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조부는 들고 있던 부채로 다시 무형의 머리통 을 아프게 후려갈겼다. "그런 이야기는 관심도 없으니 신경 꺼! 네 녀석이 저 애하고 키스를 하건, 같이 자건 그건 네 놈이 알아서 할 일이 아니더냐? 중요한 건, 저 애.. 너 다른 여자들에게 하듯이 네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 양이면 나한테 죽는다!" "왜 갑자기 제 사생활에 관심을 가지시지요? 내가 저 여자랑 무슨 짓을 하든 할아버지께서 상관하실 바는 아니지요." 밀어내듯이 단번에 노인의 말을 잘라버리는 무형의 머리통에 다시 노인의 부 채가 탁 소리를 내며 작렬했다. "이 놈이!~~ 이 천하에 불효막심한 놈 같으니라고! 왜 상관할 바가 아니냐? 네가 저 애 데리고 놀다가 상처 주면 저 앤 우리 내외도 미워하게 될 것 아니 냐? 그래서 저 애가 우리 집에 안 오면 우리 두 내외, 네가 뉴욕 돌아가고 나면 심심해서 죽으란 말이냐? 엉? 그러니 약속해라. 데릭. <세 하늘>에 두고 맹세 해! 다른 애는 모르지만 래인이 저 애는 네 하룻밤 상대로 건드리거나 장난감처 럼 대해서 상처주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어서!" 빌어먹을 노인네. 무형은 너무나 한심해서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그저 이기적이고 당신 생각만 하는 양반한테 손자의 입장을 이해해달라고 요구하는 게 잘못이다. 젠장, 그 망할 계집애를 그러니까 공주님 모시듯이 귀하 게 여겨라 이 말 아닌가? 연애를 걸 양이면 진지하게 사귈 일. 하룻밤 섹스 파 트너로 삼아도 안되고 그게 안되면 근처에 접근하지도 말라 이 말이구먼. 아, 좋다구요. 소원대로 해드리지요. 무형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야무지게 대꾸했다. "저 망할 것을 다시 보지 않기를 바라는 건 내가 더 원하는 거라구요. 좋아 요. 그렇게 하죠! 저 망할 것이 나에게 먼저 다가와 꼬리를 쳐도 제가 먼저 백 리 밖으로 도망치겠다고 약속 드리죠! 이제 속시원하십니까?" 노인은 거실 문을 탁 닫고 돌아섰다.


사악하고 교활한 음모를 꾸민 노인의 눈이 아까 래인의 그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리훙." "네. 대인." "나랑 내기를 한 번 함세!" "내기라니요?" "저 망할 놈이 조만간 우리 늙은이에게 증손자를 안겨주는 것에 대한 내기 말일세. 난 일년 안으로 저 망할 놈이 래인이한테서 제 아들을 얻는 것에 십 만 불 걸지!" 리훙의 조용한 얼굴에 비로소 흥미로운 빛이 서렸다. 그러나 그는 신중한 눈 빛으로 고개를 돌려 닫힌 거실의 문을 돌아보았다. "글쎄요, 어르신. 도련님도 영리하기는 여우 못지 않습니다. 과연 순순히 어르 신의 덫에 걸려들까요?" "자넨 그래서 아직 눈이 모자란 게야. 저 놈 저거, 벌써 덫에 걸린 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나? 래인이 그 녀석이 여간내기가 아니란 말이지. 단번에 저 놈 속 을 뚫고 뒤집어놓지를 않았느냔 말일세 " "아, 그렇습니까?" 리훙이 그제서야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실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서야 데릭도 비로소 임자를 만난 걸세. 리니 그 아이를 잊지 못해 혼자 발버둥을 치는 것이 늘 짠했는데.... 이제 드디어 제 여자를 만난 게야.. 두고 보 게나. 래인이 저 아이가 아주 저 놈을 묵사발로 만들 테니... 처음부터 탐나는 아이라고 생각은 했는데.. 흣흣... 재미있군 그래. 그래, 데릭. 네놈이 얼마나 더 발버둥치며 도망을 갈지 어디 한번 보아주마. 네 시커먼 속을 내가 모를 줄 알 더냐? 래인이를 한번 데리고 놀 생각이었지? 하지만 이 놈아! 이번엔 어림없다! 내가 기를 쓰고 너희 둘을 방해해 줄 테니.. 크크크크! 아, 정말 오랜만에 인생 의 재미가 느껴지는군"

<10> 여자 셋이 모이면 남자 하나 잡는다 그렇게 하여 래인이 <칼 있으마> 만빵이라고 저 혼자 잘난 척 하던 정무형 의 뒷다리를 걸어 확실하게 자빠뜨린 그 다음날. 홍콩 섬 리펄스 래인의 부친 이 앉아 깔깔거리며 래인과 두 올케

만에 자리한 멋진 아파트 촌 49 층. 박사의 집. 단정하게 꾸며진 햇살 잘 드는 거실에 세 여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강혜와 민하이다.

우제와 엘린은 약혼기념으로 계림에로 여행을 떠났고 부친인 이 박사와 우선 은 같이 병원에 나갔다. 그리고 둘째 우인은 청도에 가는 모친 윤박사를 동행해 차를 운전하고 떠난 다음이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망중한(忙中閑)을 세 여인은 마음껏 즐기려고 작정한 터이 다. 그래서 래인은 오늘은 정대인의 집에 가지 못한다고 미리 전화를 걸어 두었 다.


방문약속을 취소하는 전화를 받은 집사는 래인이 그 집에 가지 못하겠다고 한 것을 어제 벌어진 사건의 후유증이라고 생각한 듯 했다. 그는 헛기침을 몇 번하더니 아주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저어, 래인 아가씨. 혹시... 어제 일 때문에 그러시는 것이라면, 걱정하지 마 십시오. 사실 우리 도련님은 정말 점잖으신 분입니다. 어제 일은 그러니까... 래 인님이 너무나 마음에 드신 나머지, 성급하게 행동하신 것으로 이해를 해주시면 안되시겠습니까? 앞으로는 도련님께서 래인님께 절대로 그런 실수를 하지 못하 게 제가 잘 보살펴 드릴 테니.... 오시지요. 래인 아가씨께서 못 오신다는 이야기 를 들으시면 어르신께서 몹시나 실망하실 겁니다. 그러면서 그는 어제 무형이 노인에게 엄청 깨졌다는 이야기까지 묻지도 않았 는데 잘도 털어놓는다. 냉담하고 고귀한 자존심을 가진 오만한 그 남자가 얼마나 황당했을까 상상하 며 래인은 전화를 끊고는 낄낄거리며 웃어 제쳤다. '힛힛히. 잘생긴 오빠. 그러니 미리미리 알아서 항복하시지. 쯧쯧.. 나 이래인, 한번 맘에 드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가지고야 말걸랑요. 오빤 이제 나한테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할 것이랍니다. 홋홍. 감히 내 첫 키스 를 가져가 놓고 나한테서 도망가시겠다!~~~~~ 웃겨, 정말... 언제 어디서나 살아 남는 이 래인의 행운과 고집을 뭘로 보고? 천리 만리 달아나 보라지? 어디엔들 안 따라가나? 뛰어 보았자 손바닥 안의 벼룩 주제에... 난 반드시 당신 연인이 되고 말 거니까 각오하시라구요. 미남 오빠. 저기는 내 거야. 트라이어드의 보스 사모님이 내 팔자라는데 내가 어쩌겠수? 힛히. 어디 두고 보자고요.' 래인은 이토록 짧은 시간 내에 정무형이라는 그 남자에게 홀짝 빠져버린 자 신을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지금까지 분명한 것 하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래인은 그 남자를 가져야한다는 것이었다. 정무형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남자는 지금껏 래인의 환상 속에서 존재하던 바로 그 남자였다. 신비하고 냉담하고 조용하지만 그러나 강하고 깊은 남자. 그 리고 무엇보다도 정말 아름다운 남자.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아주 어린 나이였기에 이제는 기억조차 희 미해져 떠올리기도 힘든 아주 먼 지난날에.... 푸른 달이 떠 있던 그 날밤 그녀 를 살려준 그 소년을 닮은 그 남자. 기억은 희미하다. 그때 래인은 너무 어렸으니까. 다만 푸른 달빛을 배경으로 그녀의 작은 몸을 안아 빙빙 돌려준 그 소년에게 서는 배를 가득 채운 피 비린내와는 달리 상큼한 비누 냄새가 났던 것 같다. 그 리고 몹시 포근하고 강한 팔을 가졌다는 느낌만 아련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헤어진 이후 다시는 소식을 알 수 없는 그녀의 생부에게서 느꼈던 그 체취, 그 감촉 마냥. 슬픈 땅 미얀마. 기아와 빈곤, 그 것도 모자라 정치적 갈등까지 겹쳐 일어난 피비린내 나는 내 전 속에서 래인의 생부는 보기 드물게 영국 옥스퍼드에까지 가서 의학공부를 하고 돌아온 상류층 인텔리였다고 했다. 영국에서 개업할 수도 있었지만 조국으 로 돌아오기로 결심한 그는 미술을 전공하던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귀국했다.


그녀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우선은 그랬다. 그가 만난 여자 중 래인의 생모만큼 아름답고 정숙하고 고운 여자는 지금껏 보지 못했다고. 그러나 나날이 격화되어 가는 내전의 포성 속에서 래인의 부친은 더 이상 사 랑하는 가족의 안전과 생존을 장담할 수 없게 되자 소중한 자신의 아내와 외동 딸을 먼저 탈출시킬 수밖에 없었다. "먼저 가. 여보. 반드시 따라갈게. 당신을 찾아갈게. 일년만 우리 헤어져 있자. 여기 일을 마무리 짓고 반드시 당신을 찾아갈 거야." 같이 있자고, 삶도 죽음도 당신과 함께 하고 싶다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던 아내에게 그는 마지막 작별인사를 그렇게 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내전의 와중에서 죽었을 것이라고 우선(리우)은 말했다. 그가 알고 있는 한, 래인의 생부는 탈출 기회가 생겼어도 절대로 병자를 두고 먼저 도망갈 사람은 아니었다. 우선은 그에게서 목숨을 구해 받은 이웃집 소년이었고 그리고 보은하는 의미로 생명의 은인인 그의 아내와 딸이 탈출하는 데 따라나선 것이었다. 그들 모녀를 보호하기 위해 서. 보트 피플만을 전문적으로 노리는 사나운 해적들이 나타나 약탈과 강간과 살 인을 저지른 그때, 래인의 아름다운 어머니는 운 나쁘게도 두목의 눈에 뜨여 강 간당하고 안간힘을 다하여 반항하자 잔인하게 목이 잘려 살해당했다. 해적들은 래인처럼 삑삑 우는 귀찮은 어린애 따위는 바닥에 패대기쳐 죽여버 리는 것이 취미라고 을러댔다. 그 배에 탄 어느 누구도 생명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던 경각의 그때, 그가 나타났다. 그리고 이름 모를 그 소년은 그들을 전부 살려 주었다. 지금도 래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보물인 고양이 장식을 장화에서 떼어 내 준 그 소년. 꿈을 꾸듯이 나타났다가 금새 사라진 목숨의 은인. 그래서 래인의 환상에서 늘 주인공으로 나타난 남자. 무형은 래인에게 바로 그 소년을 연상시켰다. 모든 사람이 다 벌벌 떤다는 그를 대하면서도 하나도 주눅들지 않고 너무나 친근하고 가깝게 느껴졌던 것은 무형이 래인의 꿈에 나타나는 그 남자와 너무 비슷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가씨. 어서 오세요. 커피 마셔요!" "네. 언니. 가요!~~" 래인, 강혜. 민하. 이씨 가문의 세 여자들은 지금 아침 일찍 나간 가족들을 배웅하고는 셋이서 함께 늦은 아침을 먹은 참이다. 느긋하게 푹신한 쿠션 하나씩을 안고 거실 바닥 에 반쯤 드러누워 그들은 어제 래인이 해치운 영광스런 첫 키스 사건에 대한 논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 잘 했어요! 아가씨. 그런 남자는 세상에서 제가 제일 잘난 줄 알고 있 거든요. 무작정 자기 앞에서는 굽신거리기만 하는 사람들만 만난 남자한테는 한 코 제대로 먹이는 게 최고거든요. 아이 재미있어. 정말 그 남자 얼굴 한 번 보 고 싶네. 홋호호. 아가씨, 정말 그 남자가 둘째 오빠처럼 멋있어요?" 래인은 민하에게 야유를 보내며 눈을 흘겼다. "에이. 설마~~ 언니. 댈 것을 대야지. 어떻게 내가 찍은 그 남자하고 못 생긴


감자 같은 둘째 오빠하고 비교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 남자는 정말... 진짜로... 환상적이라니까요! 정말 그림에서 바로 걸어나온 것 같아요. 왕 죽여. 끝내 준다 니까! 환상 속의 꽃미남 넘버원이란 말예요" "하지만, 아가씨. 정말 간도 크다! 그 남자 폭력조직 두목이라는데 그렇게 막 함부로 덤벼도 되는 건가요? 난 나중에 그 남자 때문에 아가씨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 되요." 그래도 맏이이니 셋 중에서는 제일 어른스러운 강혜가 래인에게 오렌지 알맹 이를 까서 내밀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상처받을 것이 두려우면 아무 일도 못하죠, 언니. 일단 난 저질러 보자 주의 거든요. 상처는 남더라도 그 남자를 내가 최선을 다해 사랑한 기억은 남을 테니 까... 정말 한 눈에 뿅 간 멋진 남자에게 정신없이 빠져들어 열심히 사랑했던 기 억이라면, 그 남자와 이루어지지 못하고 헤어진다 해도 난 후회하지 않을 것 같 아요. 시도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아무 것도 없어! 난 반드시 올해, 그 남자하고 작업 들어가서 끝장을 내고 말껴!" "아이구, 아가씨가 그렇게 정했으면 감히 누가 말려요? 아가씨에게 걸린 그 남자가 정말 불쌍해지네요. 그런데 아가씨. 내가 궁금한 건, 그런 남자에게 혹시 딴 여자가 없을까요? 아가씨더러 절대로 결혼 같은 건 안 한다고 그랬다면서 요? 엄청 근사하고 으리으리한 집안의 그런 남자라면 미리 정해둔 약혼녀 정도 는 있을 것 같은데." "있음 어때? 빼앗아버리면 되지!" 강혜의 말에 민하가 냉큼 말을 가로챘다. 우인에게 이미 사귀는 여자가 있었 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덤벼 사랑을 쟁취한 민하인지라 래인은 씩 웃었다. "선배님의 충고를 감사하게 받아들이죠. 근데... 언니. 우인이 오빠랑 약혼한 여자하고 붙어서 어떻게 그 여자를 해치웠어요?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좀 배 웁시다." "아가씨. 사랑과 전쟁에는 비겁한 수가 없다는 거 아시죠? 그러니까 딱 저 남 자다 싶은 필이 오면 별별 수단과 방법을 다 써서라도 연적을 해치워야 한답니 다. 일생을 두고 사랑할 운명의 반려를 만났는데 다른 여자 때문에 포기를 해 요? 그건 절대로 안되죠! 그리고 말이죠. 이게 중요한데... 강약(强弱) 조절이요. 이게 정말 중요한 거거든. 애원하고 훌쩍훌쩍 울고... 때로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제가 아파도 포기할게요 이런 식으로 감동을 주다가, 결정적일 때는 무식한 방 법도 써야 한답니다. 그 여자 머리채를 휘감아 뜯어 버려요! 어디다 대고 감히 내 남자한테 꼬리를 치는 거얏!! 이러면서. 그런 방법은 사람 많은 데서.. 음.. 대낮의 호텔 로비라거나, 혹은 명동 한가운데 거리 정도에서 해치우는 게 더 효 과가 커요! 알잖아, 아가씨도? 난 그 여자가 우인씨랑 약혼식 할 때 달려들어 뒤집어엎은 거." 세 여자는 동시에 허파가 터지도록 웃으며 뒤로 넘어갔다. 이렇게 래인이 두 올케로부터 남자를 해치우는 각종 비법에 대하여 진지한 강의를 듣고 있는 그 시간, 무형은 직접 승용차를 몰고 노인들을 태운 채 야마 테의 틴하우 사원으로 가고 있었다. 마침 그 날이 정 가(家)의 기일인지라 안노인이 사원에서 향을 피우겠다고 했 기 때문이다.


"대체 말이야, 엉? 네 녀석이 얼마나 그 애에게 겁을 주었길래 래인이 오늘 집에 안 온다는 거냐? 손자라고 하나 있는 것이 어떻게 된 게 이 할애비 마음 에 드는 게 하나도 없는 게얏? 이 망할 놈이 돌아온 다음부터 내 일이 되는 게 없어! " 아침 식탁에서도 조부에게 있는 대로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던 무형, 팔자에도 없는 운전수 노릇까지 해주는데도 노인은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또 잔소리를 시작했다. 아침에 래인이 집에 오지 못한다고 전화를 한 이후 노인은 지금까지도 상당 히 저기압이었다. 하기는 요즈음 노인의 유일한 낙이라고는 래인의 재롱과 책 이야기 듣는 것이었는데 그 기쁨을 박탈당했으니 신경질이 나실 만도 하지, 젠 장.. 망할 여자 같으니라고! 무형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내 눈앞에 있으나 없으나 지독하게 골치를 아프게 하는 여자로군. 대체 왜 오늘은 안 온다는 거야? 노인의 신경질이 이만저만이 아니로구먼. 일은 제가 다 벌여놓고 내가 화낼 것 같으니 무서워서 못 오는 건가? 에이, 설마!' 무형은 잘생긴 입술선을 희미한 냉소를 담고 일그러뜨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망할 여자는 절대로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무 서워했으면 감히 그를 상대로 그런 짓을 했겠는가? 뭘 믿고 그를 상대로 그 망 할 것은 그렇게 까불 수 있을까? 그런데 말이다. 바깥 노인이 신경질을 내면 안노인이라도 진정을 하셔야 하 는 것 아닐까? 닭살 돋게끔 금슬이 좋다고 티낼 일 있나? 바깥주인이 툴툴거리 기 시작하자 항상 무형에게만은 인자한 안주인께서도 바깥양반의 편을 들어 같 이 무형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어제는 네가 잘못했다, 데릭. 넌 정말 실수한 거야. 그렇게 순진하고 연약한 애한테 어떻게 그런 야수 같은 짓을 할 수가 있니? 그 앤 정말 요즈음 보기 드 문, 착하고 얌전하고 순진한 아이란다. 그러니 너도 그 앨 아껴줘야 해. 우리가 그 앨 친손녀처럼 생각하는 거 잘 알지?" "네.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잘 들었습니다. 검은 용의 명예를 걸고 그 망할 놈의 여자를 함부로 대하지 않겠습니다. 그 여자가 다가오면 제가 먼저 백 리 밖으로 도망가겠다고 약속하죠! 제길.. 이제 만족하세요? 그런데 두분, 친손자의 사정은 전혀 아랑곳 않고 저 망할 여자 편만 드시는 이유나 좀 말해보세요! 어 제 정말 그 일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우리가 궁금할 게 뭐가 있냐? 우리 눈이 멀지 않은 다음에야 본 그대로일 텐데. 내 다시 한번 경고하는데, 데릭. 래인인 안 돼! 알아들었냐? 그 앤 네가 잠시 가지고 놀다가 버릴 장난감이 될 아이가 아니라고! 맑은 하늘처럼 티 한 점 없고 그저 귀엽고 착하고 순수한 아이야. 천사가 따로 없지! 그런 애를 네가 함부로 대한다면 정말 너, 그 날부터 나와 네 할미 얼굴은 다시 볼 생각은 말아 야 할 것이다. 알겠냐?" 언제부터 이래인이라는 여자를 알아왔다고, 또 뭐가 그리 소중하다고 삼십 년 을 알아온 손자의 변명을 거짓이라 싹 잘라버릴 수가 있을까? 배신감에 치를 떨며 무형은 노인들을 사원에 내려주고 다시 차를 돌렸다. 그


래, 오늘 기분도 꿀꿀한데 회사로 들어가 칠칠맞은 인간들을 아주 박살내주어야 겠군. 속으로 결심하며 그는 홍콩에 있어서도 가장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빅토리아 하버를 향해 출발했다. 래인이 박살낸 그의 람보르기니는 아직 수리소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젠장, 그 기집애가 내 차를 박살낼 때부터 골치덩이가 될 것이라는 것을 딱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속으로 래인에 대해 궁시렁궁시렁 욕설을 퍼부으며 무형은 해안가에 즐비한 고층 건물 중에서도 가장 높고 웅장한 라펠 타워 앞에 차를 세웠다. 세계적으로 소문난 홍콩의 마천루들 사이에서도 각각 322 층과 304 층으로 이 루어진 거대하고 위압적인 황금빛 쌍둥이 건물인 라펠 타워는 홍콩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유명한 건물로 손꼽히고 있었다. 홍콩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라펠 마가 설계한 건물이어서 라펠 타워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건물의 주인은 바로 무형이 최대 주주로 있는 ALB 은행이었다. 무형은 문을 열어주는 도어맨에게 키를 넘기고 노트북 가방을 든 채 성큼성 큼 건물의 로비를 들어섰다. 일년만에 드디어 타워의 주인인 검은 용께서 돌아 오신 것이다. <11> 카리스마의 이면(裏面) 라펠 타워의 320 층 사무실에서 바라보는 저녁 노을은 아무리 평가 절하를 하 려해도 정말 미칠 만큼 아름다웠다. 멀리 맑은 하늘과 수평선을 가로 짓는 에메랄드 초록의 선이 황금빛 휘장으 로 물들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하루종일 찬란하게 빛나던 태양이 무겁게 바다로 잠겨 들어간다. 태양의 붉은 빛이 갈수록 투명하게 변하는 진보라 색의 바다 속으로 끌려 들 어가면 하늘은 더 넓은 주홍빛 여운을 안고 황홀한 빛의 향연을 벌리며 아득하 게 펼쳐진다. 가이없는 막막함으로. 혹은 광활한 여운으로... 와이셔츠 바람으로 팔짱을 낀 채 무형은 열려진 서쪽 창가에 노을을 바라보 며 서 있었다. 부드러운 저녁 해풍이 그의 머리카락을 흔들고 사라진다. 무심하 기 이를 데 없는 싸늘한 남자의 아름다운 옆얼굴에 노을이 비추어져 발갛게 보 인다. 아름다운 옆얼굴이었다. 무형이 느릿하게 돌아섰다. "남들은 홍콩의 야경이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난 이 곳에서 바라보는 일몰의 광경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해. 세계 어디를 가도 이런 느낌을 주는 노을은 없거 든." "동감입니다. 타이쿤." 하지만 척은 무형의 노을에 대한 감상이 대답을 들으려고 하는 이야기는 아 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느릿하게 말을 잇는 그의 얼굴은 어떤 범접할 수 없 는 깊은 자신만의 생각에 잠긴 것이었으므로. 척의 짐작은 맞았다. 왜냐하면 어쩐지 씁쓸하고 슬픔까지 깃들여 보이는 얼굴을 한 무형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무리 해도 잊혀지지 않는 한 여인에 대한 추억이었으므 로. 아아, 그랬다. 저 노을을 정말 사랑했던 적이 있다. 한 때 오롯이 그만의 것이었던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노을이므로. 비록 붉은 것을 보면 심층의 무의식에서 피 냄새라고 정직한 그의 마음이 비 명을 질러댔어도 억지로, 억지로 사랑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사랑하게 되는데 성공했었다. 하지만 그가 억지로 노력해서 노을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이미 그의 그녀는 그 노을보다 더 사랑하는 어떤 것을 발견한 이후였다. 그가 아닌 다른 남자라는 존재였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때도 후회했었고 지금도 여전히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은 언제나 이성적이고 담담하던 그의 정신 을 완전히 흔들어놓고 붕괴시킨 것이었다. 그때의 그는... 아아, 그래. 완전히 바 닥까지 망가진 미친 야수였었다. 연적이던 그 남자 아르젤을 최악으로 망가뜨리고 나락에 밀어넣은 것으로도 모자라서 그는 뱃속의 아기를 빌미로 강제로 협박해, 가린조차 마지막까지 몰아 붙였다. 사람들 앞에서 반 어거지로 그녀에게 그와 결혼하겠다는 맹세를 하게 만든 후, 무형은 그녀를 끌고 이 사무실에 섰었다. 그때도 이렇게 노을이 하늘에 가득했었다. 무형은 그리고 그날까지 단 한번도 남 앞에서 끓지 않았던 무릎을 끓고 그녀에게 애원했다. "제발 날 사랑해. 가린아." 하지만 유리처럼 텅 빈 눈을 하고 있던 그의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었 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맑은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서도 그러나 가린은 그에 대한 마음이 이제는 하나도 없음을 강하게 확언했다. "못해. 오빠. 나는 못 해! 난 오빠를 사랑할 마음이 없어. 내 영혼은 전부 아 르젤에게 주어버렸단 말야. 내가 오빠에게 줄 것은 이제 정말 아무 것도 없단 말야!" 애원했다. 전부를 걸고 매달렸다. 자존심도 위엄도 다 버리고, 흐느끼며 빌었다. "나를 사랑해 봐! 네 눈 아래 있는 세상 전부를 네게 줄 테니 날 사랑해." 아니, 아니다. 더 솔직해지자. 감히 사랑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바랬던 것은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것. 그의 옆자리에 있는 것이 마치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했던 존재. 그 아름답고 따스한 여자를 평생 바라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옆에 두는 것이었 다. "나를 동정해도 좋아. 나를 경멸하고 증오해도 좋아. 그냥 내 곁에 있어. 떠나 지만 마! 다른 놈에게 가지만 말아. 그 다음은 다 내가 할게. 사랑하는 건 내가 할게. 그러니까 제발 내 옆에만 있어."


하지만 어리석은 그는 그때 미처 몰랐었다. 사랑은 구걸하거나 탈취하거나 빼앗는 것은 아니었는데.... 그 사람이 정말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 더 큰사랑이라는 것을 이 제는 아는데... 철없던 그때는 정말 몰랐었다. 노력해서 그가 저 노을을 사랑하게 된 것처럼 사랑또한 서로 노력하면 좋아 질 수 있을 거라고... 시간이 가면 돌이킬 수 있다고 그땐 여전히 교만하게 확신 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아름다운 사람을 무형은 마침내 완전히 잃어버렸다. 뒤에 선 척은 젊은 주인의 깊은 생각에 잠긴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고 생 각했다. 이상한 일이다. 무심하고 오연한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을 하고 있는 무형을 바라 보면 척은 같은 남자이면서도 간간이 자신의 심장 박동이 유난히 빨라지는 느 낌을 받곤 했다. 아무 표정도 떠 올라있지 않은 무형의 도도하고 차가운 모습은 정말 신이 창조한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이었으므로. 그러나 사람들이 그에게 눌려 속절없이 빠져들거나 승복하게 되는 것은 그가 가진 외면적인 조건들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도 척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일단 기가 질리는 것은 무형이 깊이 감추어 둔 어떤 기이한 기세 때문이었다. 타고난 비범함일까? 아니면 검은 용으로 선택 된 갓난 시절부터 닥쳐온 쉽지 않은 삶의 굴곡이거나 피로 점철된 인생의 길을 넘어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깊이. 혹은 무심한 초연함이랄까? 어쩐지 그에게는 절대적으로 승복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느낌. 그냥 무작정 좋아서 죽을 지경이라 무엇이든 그에게는 해주고 싶은 그런 마 음. 부하들에게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충성심을 불러일으키는 유일한 존재. 갓난 아기였던 무형이 칠인회 장로들에게 검은 용으로 부름 받고 선택받은 이유는 그것이었다. 제왕은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다는 그것 말이다. 그러나 지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무형의 얼굴을 아름다운 가운데서도 어 쩐지 짙은 살기와 잔인함이 스민 요악(妖惡)한 것이었다. 아무도 보지 못한... 무 형이 남에게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 가장 정직한 맨 얼굴. 그것은... 거대한 <태 풍의 눈>처럼 잔잔하고 고요했지만 엄청난 피를 부르는 전조였다. 무형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창틀을 두들기며 아까 척이 자신에게 보고한 사항 을 다시 되물었다. "확실해?" "아마도... 아니, 확실할 겁니다. 홍 쉬핑은 분명히 탈출했습니다." "교활한 놈이군. 아니 영리해. 제 아비가 칠인회에 소집되자말자 제거될 것이 라는 것을 확신하고 사라진 것은 보면. 상처입은 여우 한 마리가 우리를 탈출했 군." "죄송합니다." 척이 실수를 인정하며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무형은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가 대신 사과할 필요는 없어. 일은 사람이 꾸미지만 성사시키는 것은 하 늘이야. 그 놈 운이 억세게 좋았던 게지. 아니면 명줄이 유난히 길거나...."


무형은 한 걸음 책상 앞으로 다가가 펼쳐진 신문을 집어들었다. 홍콩 일간지 일면마다 큼지막하게 박힌 기사며 사진들은 칠인회의 가장 큰 세력 중 하나이던 홍가의 조직이 어젯밤 완전히 궤멸했다는 사건을 분명히 알 려주고 있었다. 홍가 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개 한 마리까지 완전히 멸절한 그런 사건. 그러나 늘 그렇듯이 암흑 조직의 돈줄에 알게 모르게 젖어있는 매스컴들 은 늘 있어왔던 폭력조직간의 이권다툼 때문에 벌어진 어이없는 암투극 정도로 치부하고, 그런 기사를 써 갈기고 있었다. 그러나 눈과 귀가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 사건은 광기의 피에 젖은 검은 용이 다시 홍콩에 돌아왔다는 포고라는 것 을. 아니, 앞으로 감히 검은 용의 지배에 대항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무서운 시위(施威)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형이 잔인하게 밟아 죽인 홍가 놈들 중 하나가 교활하게 도 망을 쳤다는 아주 송구한 소식을 들고 척이 무형을 찾아온 것이다. 그 것도 홍 쉬핑, 홍타이의 네 번째 첩에서 난 가문의 서열도 낮은 서자이면 서도 약삭빠르고 영리해서 홍가의 세력 전부를 이끌고 있던 행동대장 격인 그 놈이 말이다. 무형은 싱긋 웃으며 신문으로 살랑살랑 부채질을 했다. "홍 쉬핑. 홍가의 반쪽자리 자식 주제에 제 아비를 그대로 닮았다니 정말 재 미있군. 이번엔 그물을 잘도 피하셨다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 지 궁금하군. 어디 쥐새끼 사냥을 해볼까? 그 놈 명줄은 하늘이 정해준 거겠지만 죽을 시간 을 정하는 건 나야. 음... 그렇지. 척. 그 놈의 바닥을 미리 쓸어버리는 것은 우 리가 할 수 있지 않겠나? 미얀마나 베트남 쪽으로 사람들을 보내. 그 자식이 아 편 밀수하면서 미얀마나 베트남 쪽으로 바닥을 넓힌 것은 알지 않나? 아마 도 망치려면 돈줄이 필요할 테니까 그 쪽으로 숨어들어 갔을 지도 몰라. 그 동네에 서 제일 거슬리는 두어 조직을 완전히 쓸어버리고 오라고. 어떤 놈이든 홍가를 도와주면 그 꼴이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 주고 오라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전쟁이 날지도.." 무형이 신문으로 탁하고 책상을 가볍게 쳤다. 척의 말문을 막아버리는 간결한 동작이었다. "내가 누구지. 척?" "위대하신 검은 용. 우리 트라이어드의 유일한 하늘이십니다." "그래, 그 사람이 바로 나야. 이 지역에서 나의 명을 거역할 사람은 없지. 더 이상 동남아의 작은 조직들은 우리 상대가 못돼. 뭐, 그쪽으로 손을 뻗친 야쿠 자 놈들이 다소 거슬리지만... 이번 기회에 그 놈들하고 한번 기세 싸움을 해봐 도 좋지 않을까? 야쿠자들을 몰아내야 한국하고 러시아 쪽에서 우리가 교두보 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게. 나가 봐!" 무형은 차갑게 명령했다. 척이 정중하게 허리를 구십도 각도로 굽혀 절을 하고 조용히 사라졌다. 얼마나 많은 피를 또 묻혀야 할까? 무형은 가만히 노을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끊임없는 피의 순환. 악연 과 복수의 사슬... 절대로 도망갈 수 없는 이 업의 숙명.


순간적으로 너무나 아뜩하고 막막해진 무형은 문득 거칠게 옷걸이에 걸린 양 복저고리를 잡아채 손에 들고 문을 박차고 나섰다. 지금까지 그와의 면담이나 결재를 기다리며 비서실에 앉아있던 ABL 사(社)의 간부들이 거친 그의 기세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내일!" 무형은 싸늘하게 그 한마디만 하고는 그들을 지나쳐 문을 열고 사라졌다. 그 리고 그런 그에게 불평하거나 그이 발길을 가로막을 간 큰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사무실을 박차고 나온, 치 떨리게 무서운 용께서 그러나 퇴근 후 정작 갈 데가 없는 불쌍한 몸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무형은 문득 로비를 걸어나오다가 황당해서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푹 쉬었다. 할 일도 없고 갈 데도 없고 친구도 없다. 이 좁은 홍콩 바닥에 600 만이 넘는 인간이 산다는데 그 중에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놈이 하나도 없단 말이더냐? 술 한잔 마시자고 불러낼 놈이 하나도 없 다니. 아, 물론 친구는 있었다. 문제는 그 친구란 놈이 대서양 건너 있다는 것이 문 제이지. 스스로가 비참한 그런 이상한 기분으로 무형은 하릴없이 빌딩을 나섰다.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그는 일단, 스타 벅스에서 커피 한잔을 사들 고는 어슬렁어슬렁 무료하게 다시 거리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무형은 문득 몇 미터 앞에 서 있는 낯익은 얼굴 하나를 발견하고 는 부르르 떨고서 슬쩍 몸을 돌이켰다. 응가는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 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봐요." 무형은 모르는 척 신문 가판대에서 홍콩 타임스 지(誌) 한 부를 사 들었다. -난 안 봤어!. 절대적으로 저 망할 이래인이라는 여자는 못 봤다고.. -누가 나를 부른다고? 설마!~~~~~~ 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못 들었다고. "이봐요, 말 안 들려요? 당신을 부르고 있잖아요." 무형은 감히 무엄하게 손가락으로 자신의 허리를 꾹꾹 찌르는 여자를 어이없 는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무작정 덤벼들어 키스만 하는 여자인줄 알았더니 이제는 겁도 없이 그의 몸 에 손까지 댄다. 이 망할 여자가 정말 죽으려고 용을 쓰는군. "치워! 건방진 그 손가락을 부러뜨리기 전에!" 그는 냉담하게 말하며 상인으로부터 잔돈을 받아들었다. 이 망할 여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테지만, 무형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를 비롯한 가족 제외한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병적으로 싫 어했다. 그건 아마도 어렸을 적의 참혹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아주 어린 날, 두어 살 쯤 되었을 때, 무형은 유모 품에 안겨 산책을 하다가 적들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다행히 뒤에 따르던 보디가드들이 제 때에 달려와 유괴되거나 목숨을 잃는 것은 면했지만, 그 대신 그는 난자당한 유모의 상처에서 끊임없이 흘러나


오던 피에 온 몸이 젖어 있어야 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손길이 몸에 닿은 것을 그가 지독하게 싫어하게 된 것은. 나이가 들면서 그 지나친 결벽증 같은 것은 조금씩 사라졌지만, 그러나 아직 도 무형은 남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대면 그때의 그 몸서리쳐지던 싫은 기억들이 의식 밖으로 밀려나와 견딜 수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건 심지어 발가벗고 여자들을 안는 가장 은밀한 시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자들이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절대로 여자들이 먼저 그를 애무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단 한 여자만 빼고는... 아 니 하긴 그 여자도 그를 먼저 건드릴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었다. 그가 먼저 그녀를 안았을 뿐. "헉." 그는 헛바람을 삼키며 무서운 눈으로 그 여자를 노려보았다. 이 망할 여자는 이제는 그를 손가락으로 찌르기를 포기하고 대신 그의 허리를 아프게 비틀어 꼬집어댔던 것이다. "대체 무슨 짓이야? 엉?" "내가 할 소리. 대체 당신, 남자가 뭐 이래욧?" 누가 화를 내야 하는 것인지 무형은 씩씩거리며 자신을 노려보며 앙칼지게 소리치는 래인을 마주 째려보면서도 잠시 헷갈렸다. "당신이 나에게 화를 내는 이유를 모르겠군. 너무나 공사다망한 내가 이렇게 당신한테 잡혀서 허리를 꼬집혀야 하는 이유를 말해 주겠나?" 그는 그 특유의 냉담하고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어조로 래인을 을러댔다. 아 무리 담대한 사람도 무형이 이런 표정을 지으면 얼굴이 하얗게 질려 뒷걸음질 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겁도 없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래인은 있는 대로 눈 을 치뜬 채 그를 노려보며 꾸짖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말이지, 아니 더더구나 남자가 말이지! 곤경에 빠진 아름다운 여자를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마땅한 도리죠! 그런데 당신은 그 의무를 다하지 못했으 니까 나한테 당해도 싸요!" "아름다운 여자? 곤경에 빠져? 누가? <곤경에 빠진 아름다운 여자>가 대체 어더 있는 거요?" 래인이 여전히 무형의 허리를 꼬집고 있던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상긋 웃음을 사악한 미소를 날리면서. "여기, 당신 앞에 서 있잖아요." "<아름다운 여자>가 곤경에 빠졌는데... 그게 바로 <당신>이다? 흠. 당신이 아름답다고 그토록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이 뻔뻔한 자신감이 어디에서 기인 하는지 말해 주지 않겠나?" 비아냥거리는 그의 말뜻을 헤아렸으면 저도 염치가 있어야지. 적어도 민망해 서 얼굴을 붉혀야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뻔뻔한 여자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는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태연히 양심의 가책하나 없는 얼굴로 그에게 자랑스럽게 대꾸했다. "나를 만났던 모든 남자들이 다 날더러 사랑스럽다 아름답다 말해 주었으니 그건 공인된 거죠! 그리고 솔직히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서 왜 시침떼 고 그래요, 괜히!.." "그럼 그런 남자에게 가서나 동정을 요구해. 바쁜 날 잡고 서 있지 말고. 난


널 조금도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무형은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그는 래인을 완전히 개무시하고는 신문을 펼치 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 순간, 사악한 그 여자의 목소리가 그의 뒷통 수를 때렸다. "흥, 맘대로 내 앞에서 도망가시겠다? 웃겨ㅡ 정말... 갈 때 가더라도 돈 내놓 고 가욧!" 난생 처음이었다. 길 가던 남자에게 돈 내 놓아라 생떼를 쓰고 그게 안 먹히니까 남자의 발을 뒤에서 걸어 제치는 엽기적인 성질머리를 가진 여자를 만난 것은. "어, 어.. 으악!" 철퍼덕! 인간 정무형, 태어나서 처음으로 개망신 당하다. 온갖 사람들이 오가는 붐비는 거리에서 여자에게 발이 걸려 완전히 '뻗었다, 개구리' 폼으로 엎어지고 말았으니까..... <12> 하나님, 내가 도대체 왜?~~~ "차비!" 무형은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상의 안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워털루 전투에서 항복하는 나폴레옹의 심정으로 의기양양한 얼굴을 한 래인의 손바닥에 조용히 그것을 올려놓았다. 마치 제 것인 양 무형의 지갑을 열던 래인이 신바람이 난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화이트 골드 카드. 시티은행 플래티넘 카드. ABL 사의 보증 수표. 우웩... 백지 수표군. 젠장... 뭐야, 이거? 전부 백 달러 짜리 뿐이잖 아? 이 씨, 부자는 이게 안돼! 동전 같은 걸 안 키우잖아, 제길. 망했다.. 헛 발 길질했잖아?" 래인은 투덜투덜하면서 지갑을 탁 소리나게 닫더니 다시 무형에게 내던졌다. 그리고 그녀는 앙칼진 목소리로 무형을 몰아세웠다. "인간이 되어서 어떻게 동전 하나를 안 키워요? 당신 진짜 부자 맞아요? 저 은행이 통째로 당신 거라며?" "동전.. 이 필요한 거야?" "그럼, 버스 타려면 동전이 필요하지 백지 수표가 필요한 것 봤수? 당신 외계 인 아냐?" 숨이 막힌다는 것은 바로 이런 때 필요한 말이리라. 무형은 겨우 동전 하나 때문에 자신이 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엎어져야만 했다는 경악할 만한 진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에잇, 정무형. 차라리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어라. 하린이 놈이 이걸 보면 날 더러 검은 용이 아니라 멍든 지렁이라고 말할 거다. 내가 정말 죽어야지.' 견딜 수 없는 심한 비애와 좌절감을 느끼면서도 그러나 무형은 또다시 무슨


봉변을 당할까봐 두려워 서둘러 아까 커피를 사고 남은 동전을 주머니에서 꺼 내 래인에게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에 놓인 동전을 보자 비로소 앙칼진 래인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풀려 내려갔다. 누가 뺏기라도 할 것처럼 래인이 냉큼 골동품 금화를 숨기듯이 니켈 하나를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아유, 드디어 버스비 구했다!! 방방 뛰며. "젠장. 정말 오늘은 최악이야. 짐은 무겁지, 지갑은 소매치기를 당했지. 휴대 폰 뱃터리는 나갔지. 어떻게 한꺼번에 이럴 수가 있는 거야?" 혼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투덜투덜하던 래인이 무형을 돌아보았다. "당신. 인심 쓰는 김에 한번만 더 쏴요! 휴대 전화도 좀 빌려주라구요." 이미 호되게 당한 무형은 서둘러 팔목에서 휴대폰을 풀어 래인의 손에 고이 올려놓았다. 며칠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무형은 이제 분명히 래인의 성격을 알게 된 것이엇다. 자신의 뜻대로 못하면 죽고 못사는 여자이고 또한 그 <제 맘대로>가 막히면 무자비한 응징을 반드시 하고야 마는 무섭고도 사악한 여자라는 것을 말이다. 래인은 자신이 들고 잇던 무거운 짐들을 당연하다는 듯이 무형에게 척 넘겼 다. 그리고는 그가 서둘러 풀어 던져준 손목시계처럼 생긴 은빛 나는 SLE 사의 최신식 휴대용 화상 전화기를 홀린 듯이 침을 질질 흘리며 바라본다. 무형은 그 녀의 탐욕스런 시선에서 조만간 그것을 그녀에게 탈취당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으로 은근히 진땀을 흘렸다. 무형이 지닌, 시계처럼 차게 되어있는 액정박막 컬러 동화상 휴대폰은 내년도 에 SLE 사(社)에서 발매할 시제품이었다. 아직은 정식으로 판매가 이루지지 않 는 제품이지만 하린이 우정의 기념으로 그에게 한 대를 보내준 것이다. 처음 본 물건이니 신기하기도 하겠지. 걸라는 전화는 안 걸고 래인은 마치 새 장난감을 얻은 어린애 같은 얼굴을 하고 전화기를 풀었다 뒤집었다 버튼을 눌렀다가 이러면서 난리를 쳤다. "미, 미안하지만... 제발 전화를 빨리 걸어 주겠어? 난 당신하고 노닥거릴 만 큼 한가한 몸이 아니라고." 애원(?)하는 무형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래인. 상큼한 파인 쥬스 맛이 날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전화기의 번호를 꾹꾹 누르더니 종알종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오빠니? 응, 나 래인... 나 거기 못 가, 오빠. 지갑을 소매치기 당했걸랑. 오빠 가 이리 오면 안되니? 여기? 음... 라펠 타워 앞. 거기 스카이 라운지에 가 있을 게. 응. 응? 힛히. 내가 누구냐? 아무 남자나 잡고 데이트하고 있을게." 래인이 얼굴을 찡그리며 수화기를 귀에서 일 미터나 떨어지게 하고는 입술을 삐죽였다. 수화기 속의 오빠라는 작자가 아마도 호통을 치고 있나 보다. 돌같이 단단한 깡다구에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기가 죽지 않는 강적중의 강적인 저 여 자를 향해 벼락을 내릴 수 있는 미지의 존재에 대해 순간적으로 무형은 굉장한 존경심을 느꼈다. 동시에 무형은 그런 생각도 했다. 삐죽이는 래인의 그 작은 입술이 너무 앙증 맞고 달콤한 체리 같아서 슬며시 빨아보고 싶다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그런 상 상 말이다. 으헉. 정말 내가 미쳤군!


정말 말도 안되는 상상 속에 빠져드는 어리석은 자신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 다는 생각을 하며 무형은 래인에게 주었던 눈길을 슬며시 돌렸다. '내가 정말 욕구불만인가? 이 망할 여자에게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니... 젠장. 오늘 반드시 여자를 부르겠어. 그 여자를 안고 실컷 뒹굴면 이런 미 친 생각이 안 들겠지.' 무형은 손에 든 커피를 쭉쭉 마저 마셨다 커피 향기와 더불어 이래인이라는 여자가 나타난 순간부터 그에게 생긴 두통, 심란하고 억울하고 황당하고 망신스 런 모든 기분이 저 눈앞의 여자와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알았어. 알았다고! 얌전하게 있을게. 언니 잘 모시고 나와. 그럼 있다 봐!" 전화를 끊자말자 서둘러 휴대폰을 거둬가려는 무형의 손을 래인이 탁 쳤다. 그 녀가 새파랗게 눈을 흘겼다. "쫀쫀하게시리.. 남자가! 한 통만 더 써요!" 이게 도대체 뭣 하자는 짓인지... 무형은 그의 전화기가 마치 제 것인 양 맘대로 번호를 눌러 이 십여 분이 넘 게 수다를 떠는 래인 옆에 우두커니 서서 잠시 자신의 우스운 꼴에 대하여 곰 곰이 생각에 잠겼다. 카리스마 만빵, 얼음 황제의 표본, 냉담함의 극치라는 정무형이 어째서 이 망 할 여자 앞에만 서면 제 정신을 잃고 멍청이처럼 휘둘리기만 해야 하는 것인지. 도대체 이해불가능인 이 사태에 대해서 말이다. '젠장. 도대체 알다가도 모르겠네.'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한숨을 내쉬던 무형이 문득 정신을 차려 사태를 파악한 것은 그때. 그러나 이미 늦었다. 무형은 래인의 종알거리는 입만 바라보며 새파 랗게 공포에 질려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이래인. 이 망할 여자. 그를 앞에 세워놓고 뻔뻔하게 그의 조부에게 전화를 걸어 그와 그녀가 데이트를 한다는 망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 죄송해요. 오늘은 정말 급한 일이 있었거든요. 아이, 아니에요. 하늘에 맹 세코 데릭 때문에 안간 것이 아니라니까요. 아이, 할아버지. 힛히... 설마!~~~ 그 렇다면 지금 데릭이 저에게 데이트를 하자고 하겠어요?.홋호호. 네, 데릭이랑 같 이 있어요. 거리에서 우연히 만났거든요. 보이시죠? 홋호호. 라펠 타워에서 저녁 사준대요. 힛히. 아이 좋아라!~~~ 네에 네! 맛있는 거 사달랄게요. 네. 그럼 내일 뵐게요." 내가 언제? 황당한 얼굴로 무형은 고함을 버럭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방방 고함지르려던 무형의 입은 래인의 하얗고 가냘픈 손가락에 의해 막혀졌다. 래인은 손으로 휴 대폰을 막고 살짝 눈을 흘겼다 "에이, 섹시 오빠. 왜 그래요? 사실은 나하고 데이트하고 싶으면서... 그리고 당신, 여자가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하는데 거절하는 졸장부는 아니죠?" 아후후~~ 미치겠네! 무형은 머리에서 쥐가 나는 느낌이었다 그 주책맞은 늙은이가 좋아하는 꼴이 눈앞에 선하군. 그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치마 두른 여자를 만났다는 말만 들어도 그저 좋아 난리를 칠 양반 앞 에서 내가 이 여자하고 엉킨 것을 보여준 것도 서러운데... 이제는 데이트를 신 청했다고 난리를 쳐 났으니 정말 돌아가시겠네! 어후. 그 노인네.. 당장, 경사났 네 하면서 결혼식장 알아보는 거 아냐? 이 망할 여자가 정말 나하고 원수가 지 쳤나. 왜 사사건건 날 발목을 잡고 난리인 것이야? 진짜 이걸 그냥..' 전화를 끊고 래인이 상긋 웃으며 무형의 팔짱을 턱하니 꼈다. "할아버지께서 내일 우리 데이트 한 이야기를 자세히 해 달래요. 내가 미리 경고하는데요, 만약 당신이 나를 지금 걷어차거나, 값싼 스타 벅스 커피 한잔으 로 떼 낼 생각이라면 당신은 반드시 오늘밤에 할아버지의 강력한 주먹으로 잔 인한 응징을 받게 될 거라는 사실을 말해 두겠어요." 이 망할 여자를 이번에는 반드시 가만 두지 않으리라 하고 주먹을 움켜쥐던 무형의 손아귀에 스르르 힘이 풀렸다. 절대적으로 신사인 척 하는 노인네는 남 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성에게 친절해야 하고 상냥해야한다는 것이 지론이었 다. 그것은 안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래인이 이미 무형 자신이 데이트를 신청했다고 뻥을 쳐 났으니 이 계집애에게 밥을 사주지도 않고 낭만적이지 못 한 행동을 하면 오늘밤에 집에 돌아가서 두 노친네에게 아마 맞아 죽을 것이다 빌어먹을... 이 망할 기집애가! 빠지직 이를 가는 무형의 이마에 적나라한 욕설이 쓰여져 있었던 모양이다. 래인이 상큼하게(무형의 눈에는 사악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미소지으며 무형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잘생긴 오빠, 우리 고운 말 좀 씁시다!" 무형은 자신의 무한한 인내심에 경의를 표하며 옆구리에 찰싹 껌처럼 붙은 래인의 팔목을 움켜쥐고 성큼성큼 발길을 옮겼다. 정말은 어디엔가 짱박혀 아후 후!~~~ 포효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면서.. 여자와 데이트라는 것을 해 본 적도 많이 없지만 말이다. 대강 여자를 만날 때면 무형의 코스는 인쇄물에 찍힌 <데이트는 이렇게> 라 는 목차처럼 완전히 정해져 있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근사한 일류 레스토랑에서 VIP 멤버로 적당히 우아 한 몇 백불짜리의 저녁식사를 하고 나서, 기분이 내키면 극장 일등석에서 오페 라나 뮤지컬을 감상하고는 그 시간 동안 여자가 부리는 적당한 교태를 적당하 게 참아준 다음, 깔끔하게 바이 바이였다. 뭐, 적당하게 즐길만한 수준의 여자라면, 아주 가끔 그녀의 아파트에 들리기 까지 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때도 그가 그녀에게 허용하는 시 간은 몇 시간을 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티파니의 블루 상자를 그녀에 게 배달시키고 굿 바이를 함으로서 그녀가 그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분명히 인 지시키고는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무형은 <우아한 데이트는 이런 코스로..>라든가 <성공하는 데이트 매너>라 는 책을 가지고 오지 않은 자신의 부주의함에 땅을 치고 싶었다. 그 책을 가지 고 왔더라면 이 미치광이 여자의 면상에 던져주고 나랑 데이트를 하려면 좀 더 매너를 배우고 왓! 하고 소리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머리를 다시 흔들었다. 우아한 쇼팽의 야상곡이 흐르는 일류 레스토랑에서 액체의 황금이라고 불리 는 샤토 르네 한 병을 까서 마시며 우아하게 칼질을 하고 있어야 하는 지금. 왜 자신이 사람들이 수없이 뒤엉켜 오가는 허름한 부둣가 골목. 더러운 함지 박에 담긴 비릿한 해산물을 마구잡이로 쌓아둔 냄새나는 행상들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 한단 말인가? "이 망할 여자야. 분명히 타워 스카이 라운지에서 바닷가재와 호주 산 최상급 양고기 스테이크로 우아한 저녁 식사를 하겠다면서?" 애원하듯이 툴툴거리는 무형의 말에 래인은 어떤 개가 짖느냐는 듯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잔말 말고 먹어욧! 하고 명령했다. "그 쪽 지갑 사정 생각해서 이리로 온 거니까 더 이상 잔말 말고 먹으라구요! 그래봤자 그 곳 해산물은 어제 들어온 거잖아요? 여기 것들은 불과 삼십분 전 에 들어온 정말 싱싱한 것들이라고. 그쵸, 판?" 어리광을 부리듯이 묻는 래인의 말에 무시무시한 칼질로 바다가재를 난도질 하던 주인이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심한 말더듬이인 그는 따뜻하고 선량한 눈 으로 래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그럼!! 래.. 래인. 우.. 우리 아. 아들이 가서 지금 잡아온 거야.. 머..먹어. 더 줄까? 말만 해." "들었죠? 그러니까 마음껏 먹어요. 여긴 외상도 되는 곳이니까, 내가 오늘 쏠 게." 그러나 무형은 솔직히 조금도, 개뿔 정말 조금도 반갑지 않은 식사 대접에 의 기양양해 하는 래인의 머리통을 한 대 후려갈겨 버렸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 각했다. 식사 대접? 망할! 식사는 기분이 좋아야지 말이야. 기껏 날 데려온 곳이 그런데 왜 이렇 게 구질구질하고 위생 상태도 엉망이고, 사방천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물컹거리 고 진득거리고 비릿하고 꿈틀거리는 것들만 가득 찬 곳이냐고오!~~~~ 무형은 천상의 음악과도 같은 목소리가 나오던 래인의 붉은 입이 날름날름 바다가재회를 잘도 집어먹는 것을 바라보며 위가 뒤틀리는 기분으로 캑캑 구역 질을 하고 싶었다. '저 여자는 인간도 아니다.' 한 접시 가득한 가재 회를 날름 다 먹어치운 래인이 이제는 아예 작은 생새 우 한 마리를 손가락으로 냉큼 건져내서는 머리통서부터 날름 삼키고는 와그작 씹어대는 것을 바라보며 내린 무형의 결론은 바로 이 한가지였다 회는 전혀 먹지 못하는 비위 약한 무형의 입장에서 꿈틀거리는 산 가재 회로 도 모자라서 생새우를 머리통에서부터 와그작 씹어 삼키는 래인은 인간의 형상 이 아니었다. 그는 래인의 입안에서 아작나는 생새우가 어쩐지 자신의 꼴과 비 슷하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나 그날 래인으로 인해 발생한 무형의 수난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지금 까지 당한 것보다 수십 배는 더한 악몽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어찌 몰 랐단 말이더냐? 혼자서 생새우 열 마리 이상을 먹어치워 무형을 기겁하게 만든 래인. 먹는 것 은 시원찮아도 후식은 폼나게 마셔야한다며 끝까지, 싫다는 무형이 옆구리에 찰


싹 달라붙어 대롱대롱 매달려 라펠 타워의 스카이 라운지로 갔겠다? 앞자리에 앉으라니까 곧 죽어도 그의 옆에 앉아야 한다는 래인의 고집. 의자를 세 번이나 옮긴 투쟁 끝에 마침내 지친 무형이 맘대로 해! 내뱉자말자 금새 히히덕거리며 딱 붙어 앉아 그의 팔을 어루만지는 래인. 생기발랄하게 긴 속눈썹을 감았다 떴다 하며 무형이 듣든지 말든지 신나게 이야기 보따리를 풀던 래인.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무심한 얼굴로 혼자 담배를 피우던 무형. 그러나 어느 새 자기도 모르는 새에 느긋해져서는 그녀의 수다에 싱긋 미소를 짓고 있던 무 형. 시간이 지날수록 <화기 애매> 모드로 돌입해서 누가 보아도 연애작업중이라 는 것이 뻔히 보이는 두 우리의 주인공. 바로 그때였다. "너 뭣하는 거야? 이.래.인." 갑자기 등뒤에서 천둥처럼 들려온 한 남자의 노한 목소리에 두 사람 다 순간 적으로 돌이 되어 버렸다. '난 오늘 죽었다...' 모든 세상 남자는 그의 천사 같은 동생을 타락시키는 악마라고 생각하고 그 놈을 무작정 아작내는 무식한 둘째 오빠의 눈앞에서 무형의 옆에 껌처럼 찰싹 달라붙어 사고를 친 자신의 무모한 어리석음에 대해 래인은 무한히 통탄했다. 그러나 우리의 래인. 용감하여라. 이를 앙 다물며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물론 눈은 꼭 감고서.. '에잇! 이판사판이다. 내가 한번 죽지, 두 번 죽냐? 내가 오빠한테 맞아죽을 양이면 무술 잘하는 내 남자가 막아 주겠지. 아잣! 쫄지 말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이 번쩍 튀어나오게 할만큼 아름다운 여자(그러나 보는 남자들이 몹시도 실망스럽게 그녀는 배가 불룩 튀어나온 만삭의 임산부였 다)와 당당한 소유욕을 드러내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은 한 장신의 남자가 음 산하게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래인은 그 순간 우인의 등뒤에 펄럭이는 검은 박쥐 날개와 입가에 번쩍이는 하얀 이를 분명히 본 것 같았다. "오.. 오빠.. 저기 말이지.. 그러니까.." "입 다물어!!" 차갑게 래인의 어물거리는 말을 잘라버린 우인의 눈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오연히 앉아 천천히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는 무형의 뒷통수에 달라붙어 떨 어지지 않았다. "여어, 이게 누구신가?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말이지. 이 인간은 내가 아 주 잘 아는 인간인 것 같은데 말야." 무형은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어젯밤 꿈자리가 어쩐지 몹시도 사납더라 니... 제길... 이 망할 여자의 막무가내가 누굴 닮았는가 했더니... 그래. 네 놈의 핏줄이었단 말이지? 꼼짝 않고 담배 연기만 흩날리고 있는 무형을 향해 우인이 계속해서 비아냥 거렸다. "세상은 정말 좁군, 홍콩 바닥에서 내 누이와 히히덕거리는 날건달이 감히 어 떤 놈인가 했더니 정무형 네놈이라니..."


무형은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무정하고 잔인한 운명과 맞닥뜨릴 준 비를 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돌아섰다. "빌어먹을 놈의 이우인. 이 지긋지긋한 놈!" "이 망할 개자식" 두 남자는 서로를 당장에 죽여버릴 듯 증오와 살기에 가득찬 눈빛을 하고 서 로를 꼬누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말릴 사이도 두 남자는 서로 엉켰다. "오랜만이다." "이 망할 자식. 연락도 없이 홍콩에 돌아오다니, 죽여 버린다!" 래인과 민하는 마치 죽었다 살아난 혈육을 반기듯이 엉켜 난리를 치는 두 남 자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고.... 이제 막 바다 위로 신비로운 푸른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13> 내 연적(戀敵)은 오빠? 라펠 타워 스카이 라운지. 고급 페르시안 융단이 깔리고 흑단 나무로 만든 단아한 테이블이 놓인 특실. 크리스털 유리잔과 아이스 바스켓. 그리고 주인이 맡겨둔 헤네시 XO 한 병이 안주가 담긴 은접시와 함께 급사의 손에 들려 날라져 왔다. 그리고 두 쌍의 남 녀는 편안한 얼굴로 술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우리 이거 얼마 만에 만나는 거지?" 우인이 무형의 잔에 얼음과 코냑을 채우며 물었다. 깎아 만든 듯한 콧날에 약 간 주름을 잡으며 무형이 대답했다. "일년이 넘었을걸? 석달 전에 내가 한국에 들어갔을 때는 네가 일본으로 연 수가고 없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제이슨하고 네 이야기 많이 했다." "참, 하린이 놈도 지금 서울에 있다. 한 일 이년 한국에 있을 생각이라는데. 넌 뉴욕 생활을 청산한 거냐? 완전히 홍콩으로 돌아온 거야?" "아마도... 조만간 그렇게 될 것 같아. 할아버지께서 심장이 많이 안 좋으시다. 아버지께서야 한국 생활 정리하기 쉽잖고... 내가 돌아와서 노인 옆에 있어야 할 것 같아." 무형은 에멘탈 치즈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으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우인이 무형의 옆 자리에 앉은 래인과 그를 번갈아 바라보며 핫하 웃었다. "정말 세상이 넓고도 좁은 거로군. 우리 래인이가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곳 이 네 집안이라니. 처음에 너를 보고 긴가 민가, 난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는 거 아니냐." "그래, 나도 유감이다. 네가 그 전에 입만 열면 침을 튀기며 천사라고 자랑하 던 네 누이가 바로 이 아가씨라니." "내가 어때서 그런 이상야릇 멜랑꼬리 애매모호한 어투로 말하는 건데요? 내 가 천사 맞지! 나 같은 무공해 순진 무구, 백 프로 천진 난만. 말 그대로 순수


그 자체인 여자를 어디 만나기가 쉬운 줄 알아요? " 래인이 무형을 쏘아보며 다다다 쏘아부쳤다. 무형은 다만 피식 웃으며 술잔을 들어 한모금 마셨다. 정말 줄기차게 착각도 잘 하시는 아가씨였다. 이 여자는. 무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루 종일 망할 여자 너 때문에 당한 망신이 어디 한 두 가지인 줄 알아? 순 진무구, 천진난만? 얼어죽을! 생새우를 머리부터 집어넣어 날것으로 아그작 삼 키는 여자가 천사라면 그럼 난 천사 할아버지다! 젠장.' 그러나 오랜 우정을 나누어 온 친구에 대한 의리의 표시로, 그가 사랑하는 누 이동생에 대한 비방은 잠시 삼가 하기로 결정하고 무형은 우인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넌 언제 한국에 돌아가는 거냐? 공사다망하신 검사 나리께서 이렇 게 한가하게 휴가를 즐겨도 되는 건가?" "우제의 약혼식 때문에 휴가를 받은 건데.. 그렇지 않아도 모레 서울 돌아간 다. 이 사람도 일이 많고. 넌 서울에 올 일이 없겠지?" "글쎄. 한번은 가보겠지만.. 오래는 못 머물 거야. 부모님을 뵙고 제이슨을 보 는 일 말고는 뭐... 이미 한국에는 볼일이 별로 없으니까. 그보다, 제수씨는 언제 출산입니까?" "제수씨라니, 이 놈이! 형수님이지! 출산까지는 두어 달 남았다." 끝까지 민하를 두고 형수님이라고 박박 우겨대는 우인의 말에 무형이 핫하 소리내어 웃었다. 너무나 보기 드문, 지나가던 사람조차 넋을 잃고서 바라볼 만큼 아름다운 사 내의 웃음이다. 차갑고도 단아한 얼굴에 문득 아침 햇살이 비추이는 듯 웃음 하 나로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밝고 환해지는 무형의 얼굴을 바라보며 래인이 입 을 헤벌레 벌리고서 침까지 뚝뚝 흘리는 것도 모르고 무형은 오랜만에 정말 아 무 생각없이 밝게 웃어보는 것이다.. 자라온 환경도 유별나고 성격조차 조용하고 차가운 편이라 무형은 친구가 그 다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천성 자체가 낯을 잘 가리고 남에게 더분더분 마음을 여는 편이 아닌지라 그가 벗이라 부를 수 있을만한 사람은 정말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대신 무형은 그 몇몇 되지 않는 친구들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나누어주는 그런 깊고 진실한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무형이 흉금을 터놓는 깊고 진실한 사귐을 가지는 몇 명되지 않는 친구 중 한 명이 바로 래인의 오빠인 우인이었다. 우인은 하린과 마찬가지로 무형의 중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러나 비범한 천 재이자 언제나 새로운 도전을 좋아하는 성격답게 하린이 중학교 3 학년 때 훌 쩍 미국의 예비학교로 날아가 버리고 홀로 남은 무형에게 친구가 되어준 사람 이 우인이었다. 자존심이 몹시 세고 무척이나 고집스럽고 집념이 강한 성격이 무형 자신과 꼭 닮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아주 헌신적이고 곧은 사람. 그것이 무형이 아는 우인이었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그들은 과제물로 본인들의 가상자서전을 쓴 적이 있었 다. 그때 우인은 검사가 된 자신의 미래를 썼는데, 그 글에서 보통 사람들이라면


입에 담기조차 꺼려했을 자신의 참혹한 어린 시절 상처를 공개적으로 드러냈었 다. 눈앞에서 생모를 죽인 생부에게 학대당하고 마침내는 그 손에 의하여 유기 당한 어린애. 생부에게 살해당할 뻔한 그 어린애는 거의 절망의 나락까지 떨어 졌을 것이다. 죽음에 이를 정도로 참혹하고 치명적인 영혼의 상처를 가지고 있 었을 게다. 그러나 우인은 그 글에서 그렇게 아프고 절망적인 자신의 상처를 전부다 드 러냈었다. <...상처를 낫게 하려면 공기를 통하게 하고 빛을 쏘여야 합니다. 그것이 흉하 고 아프다고 해서 붕대로 꼭꼭 싸고 감추기만 하면 그 상처는 곪을 대로 곪아 마침내 몸 전부를 아프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나와 내 형제들은 양부모님과 약속하기를 앞으로 살아가면서 절대로 그러지 않기로 했습니다. 신 은 인간에게 견뎌낼 수 있는 고통만 준다고 합니다. 내가 그런 고통을 견뎌냈으 므로 난 행복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난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므 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그런 고통을 준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 입니다. 이 세상에 만연한 그런 부당하고 끔찍한 일들을 조금이나마 없애려고 노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것이 내가 검사가 된 이유입니다.> 무형이 우인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벗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그나저나 넌 결혼은 언제할 거냐? 우리 동창들 중 결혼 안한 놈들은 몇 안 될걸? 제이슨이야 벌써 아이가 셋이라 하고... 넌 더구나 외동아들이 아니냐구." "결혼, 해야지.." "응, 이 사람 결혼 할 거야. 나하고!" 우인의 지나가는 한마디 말에 무형과 래인의 입에서 동시에 대답이 나왔다. 당돌하고 대담한 래인의 말에 우인과 민하는 황당해했고, 무형은 기가 막히다 못해 실소만 짓고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래인은 무형의 어이없다는 시선을 아무 렇지도 않게 받아내며 아주 의기양양하게 덧붙였다. "내가 무형씨 상대로 작업중이잖아. 우린 키스도 했고 방해만 안 받았으면 아 기까지 만들 뻔했거들랑. 오빠. 이런 정도인데 설마 오빠, 나더러 이 사람이랑 헤어지란 말 같은 건 안 할거지?" "...이래인. 이 인간하고 네가 만난 게 얼마나 되었지?" "사흘." 래인 대신 무형이 나른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나 래인이 큰일 날세라 냉큼 무형의 그 말에 덧붙였다. "<사흘이나> 됐어! 하룻밤 사이에 만리장성도 쌓는다는데, 그것으로 치자면 야 우린 만리장성을 세 번이나 쌓았을 시간이 지난 거라고. 미리 경고하는데 오 빠, 나 연애하는데 방해하지 마! 아무리 데릭이 오빠 친구라 해도 이 남자는 내 거야. 내가 찍었다고! "어련하겠어? 이래인이 시작했다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거는 내가 제일 잘 알지. 하지만 이건 네 혼자 마음으로 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네가 찍 은 상대가 유감스럽게도 정무형 이놈이라면 이 오빠가 간섭을 안 할 수가 없구 나."


우인이 차갑게 래인의 말꼬리를 잘랐다. 그리고 그는 래인이 무슨 말을 하든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 무형을 무 시무시한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정무형. 너, 내 동생이랑 사고 쳤냐?" "그건 네 철부지 누이동생의 희망사항이겠지. 내가 어떤 여자에 대해서든 별 관심이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텐데?" 무형의 담담한, 그러나 가차없는 말에 우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복잡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동정만도 아닌 괴로움만도 아닌 그렇다고 우려도 아닌... 무형은 오랜 벗의 얼굴에 스치는 그 복잡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척 했다. 그가 가린과 헤어진 이후 어떤 여자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고, 아직도 그녀를 잊 지 못해 방황한다는 것은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비밀이 아니 다. 하긴 그의 그 유명한 실연(失戀) 사건도 마찬가지이긴 했다. 닳을 대로 닳아버린 낡은 잡지에 나오는 기사처럼 너무나 통속적인 그 사연... 간간이 한번씩 다른 사람의 입에서 값 싼 술안주로도 씹히고 있을 법한 사연. 그러니까 한 남자가 한 여자를 홀로 외사랑했다는 거다. 그러다가 보기 좋게 걷어차였다는 것이다. 그 멍청한 남자는 그 여자를 얻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써보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더라는 그런 생뚱맞은 사연들 말이다. 생각해보면 사실 별 일도 아니다. 오늘 하루만 치더라도 이 지구상의 남녀들 수천 쌍이 그렇게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상처주고 눈물 흘리고 그렇 게 살아가지 않는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무형 자신의 그 상처도 역시 남들 전부 겪어내는 아픔이라 한다면 그것이 무엇 그리 큰 대수이랴? 그러나 결국 그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형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는 것.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녀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널 미워하리라 고, 반드시 잊어버리고야 말겠다고 맹세하곤 한다. 그러나 의지대로 되지 않는 유일한 것. 노력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오직 하나 그것, 그것은 바로 가린 그녀 에 대한 무형 자신의 집착이었다. 미련이었다.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절대적이고 유일한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괴물이었다. 그리고 이미 무형은 그 괴물에게 자신의 영혼과 심장을 빼앗긴 지 오래이지 않는가? "이제 그만 잊을 때도 되지 않았냐?" "아아, 그래. 맞는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있 어. 넌 알 거야. 불모지에는 어떤 꽃도 필 수가 없다는 것. 그리고 내 마음이 불 모지가 된 지는 오래거든." 손등을 잡고 어루만지는 것 같은 따뜻하고 나직한 우인의 말이다. 그러나 무 형은 우인의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방금까지 짓던 웃음 위에 살얼음 같은 냉기를 덧씌운 채, 마치 책을 읽듯이 감정하나 실리지 않는 그의 대꾸는 냉랭하 고 단호했다. 그의 말에 우인이 문득 안타깝다는 눈빛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그러


한 동정의 눈빛을 찰나적으로 감출 만큼 예의바르다. 하긴 정무형을 감히 누가 동정할 수 있단 말인가? 무형의 그 대단하고 유명한 자존심에 대면 가린의 이 야기를 꺼낸 순간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주먹으로 얻어맞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 지.. 두 남자 사이에 오가는 순간적인 눈빛. 영혼이 마주치듯이 짧게 그러나 그 깊 은 속내까지 읽어버린 시선 속에는 이해와 연민 혹은 안타까움과 자괴감 같은 것들이 담겨 있다. 우인은 더 이상은 입을 열지 않고 다만 새로 빼내어 입에 무 는 무형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을 뿐이다. "이거 뭐야? 이~씨.. 왜 두 사람만 아는 이야기를 하고 그래? 왜 내 남자를 앞에 두고 오빠가 더 친한 척 하는 건데?" 두 남자 사이에서만 오가는 공감(共感)과 이해. 같이 앉아는 있지만 완전히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것처럼 이방인이 된 그런 기분. 우인과 무형이 나누어 가지는 침묵의 여운에 서린 그 일체감이 질투난다. 섭섭하고 밉다. 결국 참지 못한 래인이 땡그랗게 눈을 치뜨고 억울하다는 듯이 우인에게 따 졌다. 사실 래인은 아까부터 열을 받아 죽을 지경이었다. 처음 오빠가 나타났을 때 난리가 나겠구나 생각한 것도 잠시. 알고 보니 무인 과 무형이 서로 허물없이 쌍욕을 주고받고 주먹으로 배를 내지르며 어깨를 감 싸안고 만난 것을 줄거워 할만큼 친밀한 사이라는 것에 일단 안도를 한 것도 잠시. 이 웃기는 두 남정네 작태를 보소? 래인이만 쏙 빼놓고 둘만 아는 이야기를 하면서 엄청 심각한 척 폼을 잡는 것이 아닌가? 누구보다도 감성적이고 또한 눈치는 빠른지라 래인은 우인과 무 형이 둘만 아는 이야기 속에서 그녀가 감히 범접을 할 수 없는 어떤 비밀의 냄 새가 난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우인이 래인의 말에 짙은 눈썹을 치떴다. 약간은 재미있다는 듯이, 그러나 능 청맞은 얼굴로 우인이 의혹이 서리서리 핀 표정을 과장되게 지으며 래인을 바 라보았다. "네 남자? 언제부터 이 망할 놈이 네 남자가 된 거냐? 래인아. 이 오빠가 그 것을 허락한 적 있냐?" "내가 아기냐? 내가 연애하는 것에 오빠 허락이 왜 필요하다는 거야? 내가 분명히 이야기하는데 우린 사귀는 사이니까 오빠라고 해서 감히 방해할 생각은 마! 만약 내 일에 초를 치면 삼 년 삼 개월 삼 일 동안 오빠를 저주해줄 거야! 민하 언니가 낳는 오빠 아기가 언니 말고 못생긴 감자 같은 오빠를 닮으라고 저주해줄 거라고!!" 누가 허락을 했다고? 그러나 무형의 한 쪽 팔을 구명 밧줄처럼 단단히 잡고서 래인이 우인에게 다 다다 쏘아 부쳤다. 끈끈이처럼 달라붙은 채 곧 죽어도 우리 둘이 연애 작업 중 이라고 강변하는 래인을 잠시 바라보는 우인의 눈빛에는 안타까움 같은 것이 서려 있다고 느낀 것은 래인의 착각일 것이다. 우인이 핫하 웃으며 이마에 늘어지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동생아. 이 오빠의 여린 가슴에 비수를 박다니 정말 잔인하구나! 사랑에 눈


이 멀면 가족도 버린다더니... 젠장. 천사 같은 내 누이동생이 그렇게 변할 줄이 야. 아아, 좋아. 네가 이 망할 놈에게 홀딱 반했다는 건 인정하는데.. 그런 이 놈 도 네 마음하고 같은 거냐? 이 오빠는 그것을 알고 싶구나." "보면 몰라? 이 남자는 내 꺼야! 그렇죠? 데릭." "설마!~~~ 이우인. 내가 너의 이 못생긴, 자칭 천사라 주장하는 이 아가씨에게 손을 댈 만큼 여자에게 굶주린 놈이라고는 믿지 않잖아?" 도끼눈이 되어 자신을 노려보는 래인을 무시하고 무형은 싱긋 웃으며 담뱃재 를 털었다. 우인이 분노한 표정을 과장하며 무형에게 윽박질렀다. "아아, 정말 고맙군. 정무형. 네 그 무관심이 오늘따라 더욱더 대견하구나. 좋 다고! 하지만 아마도 풋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듯 해 보이는 내 동생의 자존심을 위하여 내가 한마디 아니 할 수가 없어 유감이구나. 내가 지금 분명히 이야기하 는데 누이동생을 가진 오빠로서 경고한다. 너. 우리 래인이 건들면 내 손에 죽 어!" 무형은 대답 대신 다만 입가에 희미한 냉기만을 흘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자신의 팔을 놓지 않는 래인의 손가락을 천천히 하나하나 떼어내기 시 작했다. 아무 표정도 없이 그러나 너무나 차갑고 잔인할 정도로 무정하게. 가슴이 뚝 떨어지는 소리가 나며 래인 스스로가 자신도 모르게 그를 잡은 손 에서 스르르 힘을 빼게 만들만큼 확실한 암시. 이 것이 바로 래인의 물음에 대 한 그의 확실하고 단호한 대답이다 눈물을 핑 돌아 어쩔 줄 모를 만큼 상처받은 래인의 얼굴을 그는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의 감정 상태에 대하서 자신은 조금도 관심이 없고 상관하지 않겠 다는 뜻이다. 아니 그럴 사이조차 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확실한 암시이다. 무형은 래인 대신 우인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삽시간에 주변 공기가 얼 어버릴 만큼 나직하나 냉기에 찬 목소리가 그의 단정한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 왔다. "부디 말려주기를 바래. 이우인. 너의 이 천방지축 대책없는 누이동생이 제발 나에게 다가오지 않도록! 네가 더 잘 알다시피 난 여자와 사랑하는 것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거든. 보통 같으면 사용하다 버릴 휴지 대용으로 쓸 수도 있겠지 만 말야. 그나마 네 누이라니 내가 이 정도에서 물러서는 것을 감사하라고. 그 러니 괜히 내 앞에서 얼쩡이다가 호되게 당하는 일이 없도록 네 누이를 잘 감 시해! 널 만난 기념으로 술값은 내가 내지. 즐기고 돌아가도록!" "다 오빠 때문이야!!~~~" 미처 붙잡을 새도 없이 무형은 사라졌다. 무형을 혹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가 근무하는 빌딩 앞에서 일부러 어정댄 것이 세시간 째. 그런데 무형이 정말 나타났을 때 얼마나 쾌재를 불렀던가? 아직도 래인의 술수에 대하여 면역이 없는 그 남자의 어리버리한 상태를 이 용해서 그를 딱 구석에 몰아넣고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며 일보 전진을 위한 작전몰이를 시작했는데.. 젠장, 완전히 새 됐다! 닭 쫓던 개가 된 기분으로 괜히 애꿎은 우인만 원망하며 길길이 신경질을 부 리는 래인 앞에서 우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은 다만 무형이 걸어나 간 후 닫힌 문에만 박혀 있었다. "정말 하나도 변한 것이 없구나. 정무형. 집요한 놈..." "이 씨 물어내! 물어내라고! 오빠 때문이야! 다 잡은 고기였는데.. 칫. 저 남자


얼마나 접근하기 힘든 남자인 줄 알아? 간신히 기회를 잡아 네 페이스대로 몰 아 넣었는데.. 아후, 못살아. 오빠가 산통 다 깼어!!" "입 다물어!" 평상시에는 다정하지만 정작 우인이 정색을 하고 목소리를 깔고 을러대면 숨 이 막힌다. 래인은 찔끔해서 다다다 소리치려던 입을 두 손으로 꼭 막았다. 민 하가 우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보. 아까 그 분이 당신이 늘 이야기하던 그 친구?" "그래." "우리 아가씨가 정말 힘든 사람을 만났네요." 래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올케와 오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야? 왜 그래요? 언니도 데릭을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민하와 우인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래인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뭐야? 말을 해야 내가 알지. 데릭에 대해서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오빠는 알고 있는 거야? 말해 봐 오빠!" 사랑스러운 내 누이. 내가 널 어떻게 해야할까? 우인의 머리 속에는 지금 천가지 만가지 생각들이 소용돌이치고 치고 있었다. '아니, 아직도 죽음 같은 절망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음이 분명한 정무형 네놈 을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태양 같은 나의 누이가, 어떤 절망이든 아픔 이든 안아주고 감싸주고 받아들이는 내 누이가 어쩌면 빙하 같은 네 놈까지 구 원해줄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그런 것처럼 너 또한 이 아이의 웃음과 위로에 감싸진다면 너도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을 지도 몰라. 하지만 그 대신 이 아이 는 많이 아프겠지. 네 아픔이 줄면 대신 이 애가 상처받아. 너 같이 멍청한 외 골수는, 오직 하나밖에 받아들이지 못하고 볼 줄 모르는 바보는 내 누이같이 아 름답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얻을 자격이 없어. 이 아이가 너에게 남은 마지막 희 망이라고 해도 말이야. 이 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지고 사랑 받을 자 격이 있는 아이야. 넌 안돼. 이 애를 울리고 상처 줄 것이 뻔한 너에겐 내 동생 을 주지 못해.' 그러면서도 우인은 생각한다. 난 이기적이다 라고... 우정이 소중하다 생각했고 마음을 준 벗에게 모든 것을 다 헌신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가족문제와 결부되니 선택의 추는 두 번 생 각할 여지도 없이 래인이 받을 고통과 상처로만 돌아간다. '정무형, 네가 만든 지옥은 네가 깨야 해. 네 힘으로 걸어 나와! 이 앤 안 되 니까! 너 같은 마음의 불구인 녀석에게는 내 소중한 아이를 주지 못해. 네 입으 로 넌 이제 사랑할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했지. 네 절망의 바이러스로 내 누이까 지 감염시킬 순 없어. 욕심내지 마. 이 앤 안돼. 이 앤 삶을 온 몸으로 축복처럼 살아가는 아이야. 너 같은 산송장하고는 다르다고!' 한동안 침묵한 채 손으로 술잔을 돌리고 있던 우인이 마치 결심이라도 한 듯 이 그 술 한 모금을 삼키고는 탕! 하고 술잔을 내려놓았다. "이래인. 오늘부터 네가 저놈에게 접근하는 것을 금지한다. 그만 해." "왜? 이유를 말해!" 래인은 대차게 쏘아 부쳤다.


"아무리 오빠라도 내 인생에 간섭할 순 없지! 네가 선택한 사람이야. 내가 사 랑할 남자라고! 그런데 왜 오빠가 사랑하라 말라 간섭이야? 난 못해!" 강압이나 강요로는 절대로 래인을 설득할 수 없다. 억지나 폭력으로도 그녀를 절대로 꺾을 수 없다. 천사 같은 미소와 섬세한 외모로 인해 사람들이 가지는 오해 중 하나가 래인 이 마음까지 사랑스럽고 섬약할 것이라 믿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정말 그것은 오해였다. 이박사의 네 형제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바로 막내 래인이니까. 강하기에 웃을 수 있고 남에게 사랑을 줄 수 있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고 안아줄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인을 비롯한 세 오빠들은 래인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섬세하고 부드럽지만 절 대로 부러지지 않고 휘지도 않는 곧고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목 표한 것은 반드시 이루고야 마는 집요함과 추진력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래인이 정말 강하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다. 우인은 술잔을 다시 입에 가져갔다. 상처받아도 웃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자신이 실 패한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니, 최악의 상황 속에서 자신 의 가던 발길을 멈추고, 여기까지! 하며 단호하게 길을 바꾸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나 그의 누이 래인이 그러한 사람이었다. "왜 말을 못해? 말 해, 오빠! 내가 데릭을 사랑하면 안 되는 이유를 말하라 고!" 래인이 단호하고 확실한 목소리로 우인을 재촉하고 있었다. 래인이 저런 목소 리를 내면 아무도 말릴 수가 없다. 잘 다니던 학교를 때려치우고 동화를 쓰겠다 고 말하던 래인의 얼굴이 이랬었다. 그런 래인을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었 다. 우인은 문득 자신이 말리기에는 이미 늦은 것이 아닌가 절망한다. 하지만 겨 우 사흘이야. 무형을 만난 지 겨우 사흘이라는데 설마 삶을 통째로 내던질 만큼 이기야 하겠어? 그러나 우인의 갈등을 꿰 뚫어본 민하가 경고했다. "여보. 우린 한시간이었어요!" "그렇군..." 우인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잊어버렸다. 우인 자신과 민하는 만난 지 한시간만에 사랑에 빠져버렸 다. 운명으로 정해진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아주 짧은 찰나라도 가능한 것이다. 한시간만에 사랑에 빠진 자신도 있는데 사흘이면 래인의 말대로 만리장 성을 세 번 쌓고도 남을 긴긴 억겁의 시간일 수도 있었다. 도전적으로 입술을 내밀고 있는 래인의 얼굴, 투지에 불타고 있는 그 눈빛에 서 우인은 이미 래인이 정무형이라는 빌어먹을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버렸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렸다. 그러나 껍데기만 남은, 걸어다니는 유령인 듯 공허한 그 놈에게, 자신의 생을 망치기로 작정한 듯 절망의 끝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고 있는 그 멍청한 외골수 놈에게 이 소중한 아이가 불나방처럼 날아가는 것을 두고볼 수만도 없다. 결국


그 놈이 이세상과 사람들에 대하여 쳐놓은 단단한 유리벽에 부딪쳐 아름다운 이 아인 날개가 찢겨 죽고 말 테니까... 우인은 안타까운 눈초리로 래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넌 그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결심을 이미 한 것 같구나. 래인. 내가 무 슨 말을 하든지 네 귀에는 들리지 않겠지.' 우인은 래인의 작은 몸이 긴장과 분노로 팽팽하게 곧추 세워져 있는 것을 절 망스럽게 바라본다. 지금 래인은 온 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무형에 대한 어떠한 반대나 방해를 용납지 않겠다는 속내의 단호한 뜻을 말이다. 또한 그녀는 자신이 택한 그 남자에 대한 그 어떤 비난이나 추문도 다 받아 들이겠다 결심한 것이 분명했다. 그건 다시 말하자면 어느 누가 무슨 수를 쓰더 라도 무형에게로 가는 래인을 막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래인 자신과 무형 말고 는... 아니 어쩌면 무형조차도 이 작은 허리케인 같은 녀석의 무작정 몰아 부치 는 이 무모한 열정을 이기지 못할지도 몰라... 가슴에 돋는 아주 작은 0.001%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조심스럽데 우인은 입을 열었다. "첫째, 그는 너같은 평범한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는 위험해." "데릭이 트라이어드의 남자라서 그런 거야? 암흑가의 남자는 사랑할 권리도 없어? 그리고 이 홍콩 바닥에서 트라이어드하고 관련되지 않는 남자를 찾는다 면 그게 더 힘들어! 그리고 그 남자는 시시하게 사람들 패고 다니는 양아치가 아냐!" 신랄하게 되받아치는 래인의 말에 우인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가 아니다. 무형인 피라미가 아니다. 너도 알잖니? 그는 어쩌면... 이 홍콩을 지배하는 사람이나 다름없어. 하지만 안돼. 그놈은 반드시 널 상처 줄 거다. 래인. 넌 저 자식을 감당 못해. 그러니까 이 정도로 하고 여기서 이만 끝 내. 그 놈, 네가 상대할 만한 놈이 아니란 말야." "싫어! 상대하고 말고는 내가 정해! 오빠가 왜 그래? 내가 사랑하는 거야! 오 빠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누구도 나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처럼 사랑도 마찬가지야.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는 내가 정해. 거기서 실패해도 그 상처는 내 가 감당한다고!" "...난 무형일 알아. 넌 절대로 저 남자에게 사랑 받지 못할 거다. 넌 저놈 때 문에 많이 아파하고 괴로워해야 할거야. 그리고 그런다고 해서 네가 저 놈을 얻 을 가능성도 없어." "그 사람더러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어! 내가 사랑하면 돼! 사랑하는 건 내가 한다고! 어느 누구도 사랑에 이길 장사는 없어!" "그래도 안돼! 저 놈은 심장이 없는 놈이야." 우인은 손을 내밀어 떼쓰는 어린애처럼 콧김을 내뿜고 있는 작은 래인의 머 리카락을 부비적거렸다. 그의 눈에는 이제 감출 수 없는 래인에 대한 연민이 서 려있었다. 하필이면 왜? 그의 눈은 래인에게 묻고 있었다. 사랑하는 내 누이가 처음으로 사랑한다 말하고 아무 것도 돌아보지 않고서 불나방처럼 향일하여 달려가는 남자가 어째서 그 사람이냐고 그의 눈이 묻고


있었다. "래인. 들었잖아? 무형이 저 놈은 제 말대로 여자를 사랑할 수 없는 놈이란 말이다." "뭐야?... 그럼 그 남자... 호모니?" 젠장... 래인은 자기도 모르게 울상이 되었다. 내가 아무리 작업 걸어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게 이상하다 했어!! 오빠하 고 보자말자 엉키는 폼이 심상찮더니, 제길... 둘이서 사랑하던 사이였구나. 오빠가 언니를 만나서 결혼하면서 그 남자가 버림받았겠지? 그래도 아직 오 빠를 사랑하는 거야? 젠장. 딱 찍은 내 남자가 오빠의 옛 연인이었다니. 아이고, 내 팔자야. 하필이면 오빠랑 연적이 되다니... "아이고 맙소사! 넌 정말.." 무형이 호모냐고 되묻는 래인의 말에 우인이 기가 막혀 손으로 자신의 이마 를 쳤다 민하와 우인은 한동안 말도 못하고 실소했다. 래인의 머리 속에 오가는 온갖 심란한 생각이 그 작은 얼굴에 다 얼굴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엉뚱한 녀석. 생 각하는 게 어쩜 저렇게 단순할까? 너무 투명하고 정직한 아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다 생각한다고 믿는 이 단순철부지를 어찌할까?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래인아. 감정에 너무 정직한 너는 상처를 받아도 남들 보다 수천 배는 더 아프게 느끼고 받아. 그래서 그 놈에게 보낼 수가 없어. 미 안해.' 우인은 가슴에 묵직한 돌멩이를 하나를 얹는 그런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래인. 그놈.... 6 년 전에 실연을 당했었다." "그래서? 날마다 헤어지고 날마다 다시 만나는 게 남자와 여자야. 첫사랑을 못잊어하면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그게 뭐 그리 큰 대수 라 그래?" 이번에는 민하가 살며시 래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마치 위로라도 하듯이 "무형씨가 사랑한 여자는.. 아가씨.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떠나면 서 그의 심장을 완전히 깨뜨려 놓았죠. 무형씨는 그 여자만 사랑할 수 있는 사 람이었는데..." "사람 마음은 변해요! 사랑은 살아가는 일이야. 얼마든지 다시 할 수 있는 거 야!" 파들파들 떨리는 입술을 하고서도 래인은 끝까지 지지 않고 버틴다. 그러나 민하는 살며시 고개를 흔들며 래인의 어깨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절대로 변하지 않고 유일한 것도 있어요, 아가씨. 특히 사랑이라는 것은 더 그렇답니다." 우인이 손을 내밀어 래인의 볼을 건드렸다. "넌 모르겠지만 네가 만난 그놈과 내가 알던 정무형은 완전히 다른 놈이지. 저 인간은 다만 걸어다니는 좀비일 뿐이란다. 그녀랑 헤어지고 나서, 사랑이라 는 것을 할 수 있는 인간 정무형은 완전히 죽었어." <14>그 남자의 두 번째 여자가 갖추어야 하는 미덕에 관한 보고서


『제목 : 데릭 정의 실연과 나의 연애 작업에 관한 분석 작성자 - 이래인 <사전 조사> 정무형의 절대불변 연인(동시에 나의 연적)에 관한 리포터 이름 : 윤가린 주소 : 휘?성, 산 3 번지 아노와르 구, 프로방스, 프랑스 신분 : 제 27 대 부뷔에 가문의 백작부인(후작 부인의 승계를 받을 예정) 가족관계 : 남편 아르젤 드 벨랑 부뷔에 백작(참고로 니콜레의 수석 조향사 이며 초일류 호텔 체인의 소유주임. 매력이 철철 넘치는 왕 멋진 죽이는 남자 임. 젠장. 그 남자 유부남만 아니었음 내가 작업 한 번 걸었다) 두 사람의 슬하에는 아들 폴과 딸 기네비아가 있음(정무형이 아기들의 대부임. 왕 귀여움) <제 1 장> 문제의 발단 1) 정무형이 실연한 이유 : 윤가린이 그를 걷어차 버림 2) 윤가린이 잘난 정무형의 사랑을 외면하고 걷어차 버린 이유 첫째. 돈이나 야망 때문에(×) 둘째. 그냥 싫증이 나서(×) 셋째. 다른 사람 방해 때문에(○) ☞ 아르젤 백작이 실로 만만찮은 강적이었 음 넷째. 인연이 아니어서(○) ☞ 윤가린의 운명의 상대는 아르젤 백작인 것으로 판명남 다섯째. 더 좋은 사람이 생겼으므로(○) ☞ 완벽한 연인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은 여자들의 특권이자 본능이니까. 여섯째. 때가 아니었으므로(×) 기타 등등.. <제 2 장> 나, 이래인이 당면한 문제의 요지 첫째. 그 남자가 윤가린을 잊을 수 있을까? ☞ 절대 노! 임 둘째. 내가 그 남자를 얻을 수 있는 확률 ☞ 가능성 50% 셋째. 어떻게 공략을 할 것인가? ☞ 죄다가 풀어주고 달라붙다가 놓아주고 살살 따라다니다가 뒷다리를 걸어버린다. 무식하게 덤벼들다가 약삭빠르게 사라 진다. 기억하라! 나비처럼 다가가서 벌처럼 쏜다. 또는 지가 당하는 줄도 모르게 사부작 사부작 접근해서 경계를 허술하게 만들고 나를 익숙하게 인식시킨 다음 에 결정적인 순간을 만들어 단번에 해치운다. <제 3 장> 정무형의 공략에 관한 구체적인 플랜 첫째. 정무형이 절대로 윤가린이란 여자를 잊지 못한다는 점을 역이용해서 그 것을 중점 공격 목표로 삼는다.


둘째. 내가 아닌 다른 암컷 파리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철저히 차단한 다. 셋째.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최대의 원군으로 삼는다. 넷째. 기회만 있으면 그를 찔러본다(특히 나, 이래인의 이중성에 대한 면역이 무척 약하게 보이므로 그의 정신을 산란하게 만들고 혼란을 야기하여 승기(勝 氣)를 잡는다. 다섯째. 절대적으로 중요한 점인데, 공략의 강약을 조절한다.(정무형이 무척 영리하고 녹록치 않은 사냥감임을 항상 명심한다. 지피지기(知彼知己)이다) 여섯 번째. 가장 강력한 방해자인 우인 오빠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라! 첫 째도 조심, 둘째도 조심이다. 일곱 번 째. 몇 번의 거절, 몇 번의 상처로 시시하게 물러날 생각은 하지 말 라. 일생을 건 사냥감을 잡는데 몇 번의 실패는 당연한 것이다. 상처받은 척 울 며 나와서는 씨익 웃고 다시 시작한다. (가끔씩 그의 동정심을 자극하기 위한 쇼도 한다) 여덟 번 째. 기억하라! 그리고 명심하라. 내 사전에 포기란 없다.(힛히. 미스터 정무형. 내가 놓아준다고 좋아하지 말라고.) 이것은 이 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 퇴이니까.』 힘차게 인쇄지시를 위한 엔터 키를 치며 래인은 중얼중얼 했다. "나의 결론은 말이지, 인간 정무형이 윤가린이라는 그 여자를 놓친 이유는 아 주 간단명료하게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어. 그건 그 사람에게 그녀는 운명의 짝 이 아니었기 때문이야! 그럼 나는? 홋호" 래인은 사악하게 미소지었다. 무형이 지금 그녀의 얼굴에 스민 미소를 보았다 면 오싹 소름이 끼쳐 재채기라고 할만큼 사악하고 음흉했다. "운명의 짝은 태어나기도 하지만 만들어지기도 하는 거지. 진인사 대천명이라 는 말도 못 들어 봤어?" 래인은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를 프린터에서 집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으 며 읽어 내렸다. 우인과 민하의 이야기를 통해 래인은 그녀가 택한 남자가 당한 그 잘난 연애 사건과 요란스런 실연에 대하여 분명히 알게 되었다. 저엉말!!~~~~ 뜻하지 아니한 알찬 수확이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 아닌가? 상대에 대한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찌르기도 쉽고 공략을 하기도 편안한 법. 이틀밤낮을 앉아 정무형의 영혼을 소진시켜 버렸다는 그 잘난 실연사건을 조사한 후 작성한 보고서를 다시 넘기며 래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 남자, 제법 분위기 깔면서 다가가기 힘들게 하고 미스테리우스한... 아아 역시 너무 멋지지 않아? 정말 칼이 펄펄 넘치는군.. 멋진 남자라는 이미지 속에 잘난 실연사건 하나를 감추고 있었더군. 세상 남자들 다 겪는 실연 한번 당해 놓고 마치 인생을 다 산 것처럼 폼 잡는 것이 어쩜 그렇게 귀여울 줄이야. 홋홍 홍.' 우인은 래인을 앉혀두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정무형은 네 상대가 아니라고 설득 내지는 협박 내지는 애원을 했었다. 다른 놈은 다 되지만 그 놈은 안된다


나? 절대로 그 남자는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없게 된 놈이라나 뭐라나. '웃기고 있네! 정말.' 실연당한 충격으로, 또 그 여자에 대한 미련과 아픔으로 그가 완전히 다른 인 격으로 변해서 엉망진창으로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기를 작정하고 마구 함부로 살아왔다는 우인의 말에 래인은 정말 하품이 팅팅 나올 지경이었다. 솔직히 래인은 우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가 막혀서 죽을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래인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사람을 보는 눈도 더 나을텐데 어째서 정무형에 대한 평가에만은 우인 오빠는 어떻게 그렇게 눈이 없을까? 왜 우인 오빠 눈에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래인은 너무 이상하다. 무형이 실연사건으로 무척 깊은 상처를 받은 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래 인의 조사와 판단에도 그가 사랑했던 윤가린이라는 여자는 굉장히 매력적인 여 자였고, 또 그 남자가 가진 외골수 같은 성격에 잃어버린 그 사랑에 대하여 집 착하고 미련을 갖는 것은 당연하겠지. 그러나, 래인은 생각했다. '데릭을 그렇게 몰라, 오빠? 내 눈에 보이는데... 그 남자, 그런 것으로 자기를 망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강하다고. 그리고 찔러 볼 여지가 있어야 미련도 남 는 거야. 그 여자가 운명의 상대인 남편과 너무 행복하게 잘사는데 지가 곁에서 뭘 더 이상 어쩌겠냐고요. 정리를 하기는 해야하는데 습관처럼 사랑하던 버릇을 멈출 수는 없고, 그 것을 핑계로 우아한 독신생활을 잘 즐겨왔으니 얼마나 좋 아.' 래인은 훅! 이마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불며 보고서를 간추렸다. '캬캬캬. 지금은 그 남자, 온갖 인생의 시름을 혼자 짊어진 듯 폼은 잡고 있는 데 말이지. 사실은 독신인 홀가분한 삶을 즐기는 핑계로 그 여자를 이용하고 있 다는 생각이 자꾸 든단 말이지. 그 여자의 어디를 살펴보아도 그 남자가 찌르고 들어갈 틈이 없잖아. 완벽한 남편하고 완벽하게 사랑하며 완벽하게 잘살고 있는 여자한테 미련두면 지만 다치는겨. 이미 게임은 끝났는데 혼자 미련두고 코트에 서 뛰어보았자 소용이 없네 그려. 아저씨야. 그래. 이 래인이 그대를 불쌍하게 생각해서 구원해 주마. 실연의 아픔을 간직한 우수에 젖은 남자라는 배역에 충 실해 보라고. 뭐. 내가 실패한다고라? 웃기지 마셔!~~~~ 아직도 이 래인의 곧 죽 어도 잡고 떨어지지 않기, 혹은 맘에 들면 작정하고 본때를 보인다는 전법을 맛 보지 못한 모양이구만. 래인은 그리고 나서 책상에 흩어져있는 인터넷에서 검색한 여러 기사들과 사 진들을 폴더에 쓸어 담았다. 문명의 이기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잊어버려도 좋을 일들을 엔터 키 한 번으로 죄다 오늘 일처럼 알 수 있다는 것은 말이다. 하지만 그녀처럼 정보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파트너이지. 래인은 기특한 컴퓨터에게 손 키스를 한 번 날려주고 자신이 만든 스크랩을 주욱 넘겨보았다. "멋진 여자야. 정말 정말 매혹적이고 사랑스러운 여자군, 젠장.." 래인은 무형이 사랑했다는. 지금도 사랑한다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 을 쉬었다. 그녀의 스크랩 첫 번째 페이지에 붙은 사진은 두 장이었다.


그녀 윤가린과 두 남자. 한 장은 데릭 정과의 약혼설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사진으로 육년 전, 그녀가 결혼하기 전 무형과 그녀가 나란히 찍힌 유일한 사진이었다. 몇 년 치의 기사를 검색해보았어도 윤가린과 무형의 모습이 같이 찍힌 사진은 그것 하나였다. 파티장에서 나란히 서서 정무형 그와 웃고 그녀. 그러나 래인은 화가의 눈으 로 정확하게 그녀의 웃음을 판별할 수 있었다 바로 옆에 찍힌 사진의 웃음과 비교되어 더욱더 잘 드러나는 윤가린 그녀의 웃음. 너무 어색하고 슬픈, 마치 박제된 짐승의 그것과도 같은 웃음. 입술은 웃고 있는데 눈은 공허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와는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아프고 암담하게 웃고있는 여자. 하지만 무형은 오직 그 여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활짝 웃고 있었다. 사진 안에서 정무형은 래인이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너무나 진실되고 아름답 고 순정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가능하다면 그녀를 자신이 삼켜버리고 싶다는 그런 열정과 적나라한 욕망이 드러난 그런 표정으로 그녀를 향일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세상 모든 사람과 모든 것에 냉혈 동물처럼 냉담하고 무표정하던 그 남자가, 오직 그 여자 앞에서는 이렇게 웃는 남자였던 모양이다. "사랑했군요?" 래인은 마치 무형이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물었다. '아니 당신은 아직도 이 여자를 사랑하고 있을 거야. 알 것 같아. 당신은 오직 이 여자 앞에서만 이런 웃음을 짓는 사람인걸. 아마 당신은 이 여자를 얻기 위 해 당신의 자존심까지 굽히고 심장을 통 째로 꺼내 이 여자 앞에 갖다 바쳤을 거야.' 사진 속의 그를 보면서 래인은 어쩌면 정말 정무형이란 남자는 평생 윤가린 이라는 이 여자만 바라보는 해바라기라는 것을, 아니 정해진 운명처럼 그는 그 여자만 사랑하게 프로그램 된 남자처럼 보인다 생각했다. "하지만 당신은 또 알고 있지. 데릭.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했 어도 이 여자는 당신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래인은 옆에 나란히 붙은 또 한 장의 사진에 눈을 돌렸다 그 사진은 올해 초의 라이프 지(誌)에서 오려낸 것이었다. 윤가린 그녀가 니콜레의 일류 조향사인 남편과 더불어 니콜레의 신제품 런칭 쇼에 나타난 때의 사진이었다. 임신중인지 만삭의 배를 하고 하얀 드레스 차림 으로 아름답게 웃고 있는 얼굴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그녀 윤가린. 이래인의 불구대천 연적(?) '하, 이 지구상의 여자라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축복 받은 이 여자를 누가 모르겠어?' 래인은 심술궂게 얼굴을 찌푸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면 볼수록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을 지닌 그녀 윤가린의 사진을 노려보았다.


솔직히 윤가린이라는 그 여자는 바라보기만 해도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절세 미인은 아니었다. 아니 약간의 자만심을 가지고 평가한다면 일단 외모로 따지자 면 내가 훨씬 낫지! 래인은 심술궂게 다시 한번 입을 삐죽였다. 그러나 너무나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래인은 그것도 솔직히 인정하기로 했다.. 그녀가 가진 매혹을 래인은 화가의 눈으로 정확하게 평가했다. 기사에 따르자면 그녀는 로랑의 실크 드레스를 입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임신 8 개월의 임산부가 입어도 폼나고 눈이 부신 매혹을 나타낼 수 있는 디자인은 그리 흔치 않는데 윤가린 그녀는 그런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선택할 줄 아는 안목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패션 감각 합격. 우아한 엎 스타일의 헤어. 부드럽고 우아한 화장. 그리고 단순한 드레스에 걸 맞는 단순한 다이아몬드 목걸이(휘우우- 숨 넘어 가는군..)만 걸친 세련됨. 좋다 고, 유행 감각 이것도 합격. 중국 미인도의 여자처럼 초연한 선을 그리고 있는 눈매. 단정하고 맑은 얼굴. 그러나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그녀의 가장 큰 매력은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고 있는 눈빛이었다. 그녀의 눈빛 안에서는 어떤 남자이든 세상 최고의 남자가 되 리라. 무한한 신뢰와 사랑. 절대적인 믿음과 표현할 수는 없지만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느낄 수는 있는 그 남자에 대한 부드러움과 뜨거운 열정이 그녀의 시 선에는 고스란히 녹아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남편도 매혹적인 것은 마찬 가지였다 부드러운 담갈색 머리카락에 유럽인들 사이에서도 흔하지 않는 신비한 느낌 의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그 남자. 아르젤 드 벨랑 부뷔에 백작. 니콜레의 보물 이라고 불리는 전설적인 조향사(調香士)이자 유럽 최고 가문의 상속자라고 했 지. 사진 속에서 두 사람은 손을 잡고 활짝 피어난 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는 순금처럼 아름다운 웃음. 절대불변의 헌신적이고 완 벽한 사랑만 있는 그런 느낌의 눈빛이다. 어느 누구도 그 들 두 사람 사이에는 끼어 들 수가 없었다. 삼척동자라도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나누는 그 웃음과 눈빛 속에 담긴 깊디깊은 사랑을 느낄 테니까... 하긴 그렇다. 그건 이미 전설이 된 이야기가 아닌가? 래인의 화장대에도 애지중지 귀중하게 놓여있는 향수. 전 세계 여성들이 생일선물이나 결혼 기념일 선물로 애인이나 남편에게 가장 받고싶은 선물 제 1 번이라는 보석같이 비싸고 귀한 향수 <잃어버린 심장>을 만들게 한 것이 바로 이 사랑스러운 부부의 사랑이니까. 사랑하는 여자를 얻기 위해 자신의 피를 짜서 향수를 만든 그 남자. 사랑하는 그 남자로 하여금 전 세계에 <I LOVE RYN>이라는 깃발을 내걸 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여자. 이미 전설로 변한 그들의 완벽한 사랑 앞에서 무형은 전혀 대항할 방법이 없 었을 것이다. 그녀의 손을 놓고 그 남자에게 보내주는 수밖에는.. "마담, 당신은 행복하군요." 래인은 중얼거렸다. 그러나 다른 한 남자로 하여금 6 년 동안이나 죽음보다 더 깊은 절망에 빠뜨


린 여자가 바로 그녀였다. '다른 사람을 택한 당신이 버린 그 남자는 지금까지도 죽을 만큼 절망하고 고 통스러워한다는데... 사랑은 잔인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때때로 당신은 아마 이 남자 때문에 마음이 아플 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어느 누가 나 때문에 본의는 아니라도 아파하는 것을 당신은 참지 못할 만큼 착해 보이니까...' 세 남녀의 사진을 내려다보는 래인의 눈빛은 지금까지의 자신만만함과는 달 리 불안하고 공허했다. 버릇처럼 래인은 자신의 가장 큰 보물인 낡아빠진 고양 이장식이 달린 액자를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무서워... 그녀는 자신에게 아니 어둠을 향해 속삭였다. "데릭, 내가 어떻게 해야할까요? 지옥에 살고 있다는 당신을 내가 끄집어 내 줄 수 있을까요? 사랑의 상처는 사랑만으로 치유된다는 것을 나는 믿고 있지 만... 당신은 그것을 믿지 않죠. 고집쟁이 당신에게 그 진실을 인정시키기 위해... 난 많이 힘들텐데... 당신. 그 보답으로... 언젠가는 날 사랑해줄 수 있을까요? 내 가 당신을 얻기 위해 당신의 공허하고 냉담하며 절망뿐인 지옥에 들어가도 괜 찮을까요?' 똑똑 그녀의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래인. 큰오빠다. 들어가도 될까?" 래인은 고개를 돌렸다 나의 가장 유력한 조력자가 등장하시는군. 헷헤.. 좋아 좋아. 그녀는 미소지으 며 기운차게 대답했다. "들어와요, 오빠." <15> 사랑은 일방통행 우선은 손에 김이 나는 커피 잔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있었다. 래인은 열려진 문 틈 사이로 빼꼼 얼굴을 보이다 말고 사라지는 나머지 두 오빠와 올케들의 얼굴에 가득 잠긴 호기심과 근심 걱정 혹은 실긋거리는 웃음기를 바라보며 인 상을 썼다. "큰오빠가 대표니?"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어젯밤 필시 세 오빠들이 올케들과 둘러앉아 래인이를 말려보자 하는 결론으 로 간 것이 분명했다. '아고고, 멍청한 우인오빠가 그 주범이지 뭐.' 래인은 인상을 쓰며 문 쪽을 노려보았다. 보지 않아도 알만 했다. 래인이 그 어떤 사람보다 우선의 말에는 약한 것을 알고 있는 교활한 문 바깥의 인간들이 대표 선수로 그를 들여보낸 것이리라. 우선이 싱긋 웃으며 손을 돌려 문을 닫았다. 래인은 입을 풍선처럼 볼록이며 그가 내미는 커피 잔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캐물었다. "얼마나 알고 있어?" "그 녀석 이름 정도. 혹은 그 놈의 잘난 연애 사건에 관한 우인이 녀석의 장 황한 보고랄까 뭐 그 정도로 해두자." "큰오빠도 나를 말릴 거야?" "내가 말린다고 그만둘 거면 넌 시작도 하지 않았겠지."


우선이 싱긋 웃으며 래인이 작성한 보고서를 집어들었다. "참 아름다운 여자구나.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더 멋진 여자인데? 난 내 누이 동생보다 더 매력적인 여자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여자도 나쁘지는 않아. 그 렇지?" "솔직히 말해, 오빠. 내가 강적을 만난 거지?" "아마도... 아니, 이 여자보다도 그 놈이 더 무서운 놈이더군. 쉽지는 않을 거 다. 래인" "하지만 내가 사랑하게 됐어. 큰오빠. 내가 꿈속에서 늘 기다리던 바로 그 남 자라고. 그 사람을 가져야만 해. 이유는 모르지만 내 심장 깊은 곳에서 그렇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 그는 내 남자라고 말이야." 래인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었다. 우인의 말을 통하여, 또는 윤가린이라는 그 여자에 대하여 조사를 하면서 자신이 너무 힘겨운 사람을 선택한 것은 아닌가 후회를 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거짓말이리라. 무섭고 두려웠다. 마음의 표면을 스쳐 지나가게 했을 뿐, 그 어떤 남자에게도 깊이 흔들려 본 적 없는 래인 자신이 첫눈에 반해서 찍은 바로 운명의 남자. 그 럼에도 그녀가 잡은 사랑의 패는 안타깝게도 모든 사람이 실패를 확신하는 최 악의 것이었다. 하지만 알고 싶었다. 가까이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를 가지고 싶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그 남자에게 눈이 멀 듯 강렬하게 집착하게 되고 소 유하고 싶고 또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감정은 어디서 비롯한 것인가. 다른 여자를 사랑해서, 그 여자를 얻지 못해서 죽음 같은 절망을 겪었고, 아 직도 그 상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자신의 남은 삶을 서서히 망쳐 가는 남자 였다. 그런 남자를 선택한다면 분명히 죽도록 힘들고 아플 것이라는 것을 래인은 예감했다. 하지만 래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형에 대한 집착과 열망을 그만 둘 수 없 음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심장 속에 숨어 있던 활화산 같은 열정과 무 서운 의지가 그를 가지라 부추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름답지만 너무나 차갑고, 조그만 감정도 담기지 않은 유리알처럼 공허한 눈 동자를 가진 그 남자. 뭍에 부딪치는 파도처럼 저돌적으로 달려가는 래인의 어 떤 시도에도 눈 하나 끔쩍하지 않는 그 남자. 한 곳에 자신의 영혼을 모두 주어 버려 더 이상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말하는 너무 불쌍하고 외로운 사람. 그러나 그 차가운 남자에 대한 래인 자신의 욕망이 너무나 강하고 확실했다. 그녀 마음속에 일렁이는 작은 망설임. 후회, 주저와 슬픔들. 계산과 헤아림들을 단번에 쓸어버리는 무형에 대한 열정과 소유욕이 너무 컸다. 그녀는 그를 가져야 했다. 반드시! 우선이 열기와 단호한 의지로 가득한 래인의 눈을 내려다부았다.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열망과 의지가 래인의 눈 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환한 웃음이 리우(우선)의 입가에 그려졌다. 그의 작은 소녀는 이제 그가 없어도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는 어른이 된 모양이다. 삶의 무거운 무게와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감당해야하는 아픔과 책임 까지도 전부다 견뎌낼 수 있는 어른 말이다. 안심이었다. 지금까지 바람막이가 된 그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그의 작은 소 녀는 앞으로 남은 자신의 길을 흔들리지 않고 행복하게 걸어갈 것이니까...


우선은 한 손으로 래인의 머리를 살짝 어루만졌다. "넌 성공할 거다. 널 만나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반드시 널 사랑하게 될 테니 까.. 래인. 오빤 너의 선택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는다. 네 삶이야. 네가 선택하고 책임지고 감당하는 거다. 그리고 마음이 원하면 그 길로 가는 거다. 머리로 헤 아리고 계산적으로 망설이다가 놓쳐버린 것들을 후회하며 사느니, 부딪쳤다가 아프고 후회하는 것이 차라리 나으니까.. 그리고 우린, 그렇기 살지 않기로 했잖 아. 그렇지?" "응!" 이십 년 전에 이미 끝장이 났을 수도 있었던 그들의 삶이다. 그러나 푸른 달 이 내려다보던 그날 밤. 기적 같은 운명으로 살아남았다. 망설이고 지지부진하 고 게으르게 살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생을 다시 부여받았을 때, 리우는 래인을 안고 맹세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있음의 뜨거운 빛을 마음껏 누리겠다 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래인. 그 말을 잊지 말고, 절대로 네 마음의 끈을 놓아버리지 말아. 그것을 정말 간절하게 원하면 그 것은 반드시 네 손에 들어오 게 되어 있으니까. 알았지?" "응. 오빠."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온다." 래인은 어렸을 때처럼 리우의 팔에 매달려 깔깔거리며 웃었다. 얼음이 녹으며 봄이 온다. 언젠가 그 남자의 마음이 녹으면 그는 그녀의 것이 되리라. 래인은 차가운 바람이 불고 연중 얼음이 녹지 않는 동토(凍土)인 무형의 마음 에 꽃씨를 뿌릴 것이다. 대부분 싹도 트지 않고 얼어 죽어버리겠지만, 아주 짧 게 봄바람이 불면 얼음뿐인 시베리아 평야에도 다투어 기적처럼 꽃이 피어나듯 이 언젠가는 그 남자도 그녀를 사랑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올 것을 믿 어 의심치 않고 기다리고 노력하리라. 그는 래인의 운명이 정해준 그녀의 남자 이니까.

<16> 당신이 도망가면 래인이 따라간다 "데릭하고 데이트했다면서?" 다음날 아침 집으로 찾아간 노인은 래인에게 무슨 이야기이든 하고 싶어 입 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다. "그랬는데, 제가 걷어 차였어요. 아 글쎄. 인사도 안하고 혼자 휭하니 사라지 는 거 있죠? 할아버지. 여자에게 이렇게 쌀쌀맞아도 되는 건가요? 정말 사람 무 안하게 만들었단 말예요." 한숨을 내쉬며 래인이 무형의 만행에 대하여 고자질하자 두 내외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쯧쯧쯧... 그 망할 놈이 그렇게 정신을 못 차렸군." 무형이 래인과 데이트를 한다고 해서 이 놈이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바람직 한 연애작업을 시작했구나, 역시 우리 래인이 최고야! 하고 좋아라 한 것도 잠


시. 손자는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아침에 상심한 얼굴(?)의 래인은 대놓고 그 가 그녀를 무안주었다고 말하니 보지 않아도 어젯밤을 알만 했던 것이다. "걱정 마라, 래인아. 이 할아버지가 그 놈 정신이 번쩍 들게 지팡이로 패주 마." "당연하죠! 할아버지 한 백대는 패주셔야 해요. 어떻게 신사가 숙녀를 혼자 내버려두고 자기 혼자 내뺄 수 있어요? 게다가 세상에!~~ 저녁식사 값까지 제가 냈단 말예요. 데이트 매너가 이래도 되는 거예요?" 래인의 분개에 동시에 두 노인의 이마에 불끈 분노의 마크가 새겨졌다. "뭬이야? 그 놈이 그렇게 치사한 짓까지 했어?" "그럼요! 흥! 제가 말이죠.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야외식당(?)에서 싱싱한 바다가재랑 새우 요리까지 사주었으면 전 최선을 다한 거죠? 그쵸, 할아버지? 그런데 그 인간이 그래도 되는 거예요?" "죽여 버려!" "절대로 가만 냅두지 말고 처절한 응징을 하도록 해." 두 노인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래인은 손가락으로 V 마크를 만들어 보이며 헷헷 웃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앞으로 데릭과 자주 만나면서 여자들과의 올바른 데이트 매너에 대하여 심오한 학습을 시키도록 하죠! 자, 그럼 책을 읽을까요? 어디부 터 하지요?" 그런데 래인이 무형에게 데이트 매너, 혹은 <껌 붙이기 식 사랑>을 가르치기 로 결심했으면 무엇하나? 그날 이후로 무형의 코빼기도 볼 수가 없게 되었는데. 그녀의 엽기적인 이중 성격 플레이에 두어 번 당한 이후 무형은 아예 그녀 안전에 나타나지 않기로 작심했나보다. 빌딩 앞에 가서 지켜 서 있기도 해보고 온갖 핑계를 대며 그의 퇴근시간까지 노인의 저택에서 뭉개보기도 했지만 일주 일이 넘도록 래인은 무형의 그림자도 훔쳐 볼 수 없었다. 이미 하릴없는 일이지만 명색이 오라비의 의리로서 눈을 부라리며 래인을 의 심의 눈초리로 감시하던 우인도 한국으로 돌아간지 오래. 그들의 사랑(?)을 방 해할 그 모든 것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작업을 걸 대상자가 사라졌으 니 어이하랴? 마치 지구에서 증발한 것처럼 무형은 그렇게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보지 않으면 잊혀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면 귀찮은 그녀를 떼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거나... 그러나 멍청한 정무형. 그런 안이한 방법으로 래인을 자기에게서 잘라낼 수 있다고 믿었다면 그는 정말 래인의 성깔을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안 것이었다. 한번 작정하고 달라붙었다면 절대로 죽어도 떨어지지 않는 찰거머리 이래인. 제가 찍은 꽃미남은 어떤 방해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안 놓치는 지구 최고의 꽃미남 사냥군 이래인. 그녀의 전설적인 사냥 능력을 무시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이니. 어디 두고 보자, 정무형. 게다가 이번에 그녀가 찍은 사냥감은 또 어디 보통 사냥감이더냐? 이래인이 평생 곁에 두고 귀여워할, 혹은 평생 찰싹 달라붙어 비비적거리며 살아갈 그녀의 반쪽 바퀴벌레인데 그녀가 순순히 그를 놓아준다고? 웃기지 마 셔. 정무형 당신. 넌 절대로 내 꺼야!!


'그래, 당신도 나의 집요하고 사랑스러운 추적을 피하여 잠시 숨돌릴 시간이 필요하겠지. 며칠 참아주마. 내 성질 터지기 전에 당신, 조용히 나타나라. 그럼 내 용서해 주마.' 그러나 래인의 관대한 처분을 무시하기로 작심한 이 간 큰 남자 정무형. 열흘 이 지나도 래인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겠다? 활화산처럼 터지는 성질머리를 꾹꾹 눌러 담으며 버림받은 독수공방의 슬픔 을 참아낸 래인. 마침내 열흘만에 겁도 없이 그녀를 거부하고 내치는 무형의 버 릇을 단단히 고치기로 작심했다. 덧붙여서 그녀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말없이 도망가는 그의 비겁한 작태에 대하여서도 단단히 철퇴를 내려치기로도. "정무형, 너 이제 죽었어!" 용감한 우리의 이래인. 마침내 그녀를 피하여 도망간 자신의 사냥감 정무형을 찾아 지구 반대편까지라도 출동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니..... 바로 그 순간 호주 브리지번 공항에서 막 시드니로 출발하려던 무형은 어쩐 지 오스스 한기를 느끼며 에췻!!하고 크게 재채기를 했다. 책읽기 아르바이트를 끝낸 다음 핑계를 대며 저녁시간까지 기다려보았지만 그날도 무형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내 래인은 낯뜨거움을 무릅쓰고 리훙에게 물었다. "리훙 아저씨, 오늘도 데릭이 보이지 않네요? 잠시 만나고 싶었는데." "아아 래인양. 유감입니다만, 이제 도련님은 이쪽 집에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회사 앞의 아파트에 머무르시지요. 하버 쪽에 도련님 개인 아파트가 있거든요." 가면 같은 표정에 아무 것도 담기지 않은 오십 줄의 그 사내는 정중하게 대 답했다. 래인은 콧등을 찡그렸다. "하지만 가끔씩 할아버님을 뵈러 올 것은 아니에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럼 그이가 오늘은 집에 올까요?" "글쎄요. 그것에 대해서도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리지 못하겠군요. 그것은 도 련님 마음이라서... 꼭 필요하다면 제가 도련님 개인 전화번호를 알려 드리지요. 아니면 아파트 주소를 가르쳐 드릴까요?" "음. 그래 주실래요? 자기를 그려도 좋다고 허락한 지가 언제야? 그런데 내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나더러 어쩌란 말야?" 래인은 스케치를 핑계로 당장 무형의 아파트로 쳐들어갈 작정을 하고 전의를 불태웠다. 오늘밤. 무작정 쳐들어가서 요절을 내버리고 말리라. 여자가 한번 맘을 먹으 면 하늘이 무너져도 이루어야 하는 법. 정무형, 넌 내 꺼야. 언젠가는 반드시 너 를 먹고 말거닷! 그런데 래인의 전의가 무색하게 방문이 열리고 안주인이 유감스럽다는 표정 으로 말했다. "그리로 가도 소용없어요, 래인. 데릭은 일주일 전에 호주로 출장갔어. 적어도 보름은 그 곳에 머무를 텐데?" "뭐라구요? 내 허락도 받지 않고 제 맘대로 해외 출장을 가?" 순간적으로 드러난 래인의 살기가 너무 무서워 심지어 옆에 선 리훙마저도 움찔할 지경이었다. 래인은 이를 아드득 갈았다. "아, 이 남자. 정말 안되겠네! 아니, 장기 해외출장을 가려면 나한테 허락 받


고 가야지 왜 제 맘대로 혼자 가는겨? 이 남자가 정말 내 성질을 건드리네! 감 히 잠자는 이래인의 코털을 건드려?" "어머. 무섭구나, 래인.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 흥미 있다는 듯이 되묻는 안노인에게 래인은 사악하게 웃었다. "할머니. 데릭이 어디에 머무르는지 아시죠?" "아마도." "주소 주세요." "뭘 어떻게 하려고?" 래인은 으스스한 미소를 예쁘게 머금으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가서 데릭의 귀를 잡고 끌고 돌아와야죠. 할머니." 그녀는 무시무시한 눈꼬리를 치켜 뜨고 호주가 있는 남쪽을 노려보았다. "시간 많고 돈 많고 미모 뛰어난 제가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내가 찍은 남 자가 혹시 출장가서 바람이라도 피는 지 검사해야죠. 전 제가 찍은 사냥감이 딴 짓을 하는 것은 절대로 눈뜨고 못 보거든요." "비행기표 사줄까?" 안노인의 한술 더 뜨는 말에 래인은 더욱더 사악하게 웃었다. "그래주시면 더 좋구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안노인이 손짓을 했다. "들어와요. 래인. 잠시 나하고 이야기 좀 하게."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며 노인은 전혀 망설임 없이 직접적으로 그녀에게 물었 다. "그래, 래인. 우리 데릭을 따라다녀서 어찌할 셈이지?" "꼬셔서 제가 가질려구요. 저 데릭 좋아하잖아요." 래인인 상냥하게 미소지으며 딱 잘라 말했다. 그녀도 찻잔을 입에 가져가며 다시 미소지었다. 하지만 늘 인자한 빛만이 넘실거리던 그녀의 맑은 눈에 분명 히 어떤 경고 같은 것이 서려있었다. "래인. 왜 데릭이 좋은 거지?" "그냥요." "래인이 그럴 거라고 믿지는 않지만, 우리 애가 가진 재력이나 지위나 외적인 조건들이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지." "할머니.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데릭이 가진 그런 조건들을 제가 무시한다고 말하면 그것도 거짓말이죠." 래인은 상긋 웃으며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러나 안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애의 조건이 겉으로 볼 땐 그럴 듯 하지.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고. 데릭 은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이야. 우리 집안 남자들이 트라이어드의 수장을 맡고 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니 허심탄회하게 말하기로 하지. 데릭 그 앤 평생 드러난 겉 얼굴과는 다른 어두운 그늘의 얼굴을 또 하나 지고 살아야 해. 불법적인 일들. 손에 피를 묻히는 일들. 추악하고 더러운 일들도 해야하는 사람이야. 그것을 상식적인 래인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제가 여쭈어 볼게요. 할머닌 어째서 그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 그런 분 의 반려로 평생을 사신 건가요?"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아주 어린 나이에 난 그 사람의 짝으로 결정되 었고 또 나의 의견 같은 것은 우리의 혼인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었지. 다


만 그 운명에 순응하는 수밖에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런 결혼을 했어도 난 운이 좋았어. 저 양반은 나만을 사랑했고 또 최선을 다해 날 보호했지. 그리고 정말 상냥하게 대해주었어. 그런 사람 앞에서 그가 단지 폭력조직에 몸담고 있 다 해서 그를 미워하고 내치고 경멸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지. 난 그의 위안이 되고 그의 안식처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고 결심했고 그리고 그 렇게 했어. 다른 사람 눈에는 그 사람이 나쁘고 사악한 사람으로 보였다 해도 나에게는 둘도 없는 끔찍한 사랑을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지. 여자는 그래. 남들 이 뭐라 해도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구석이 있거든." "저도 그런데요." 래인은 솔직담백하게 대답했다. "데릭이 하는 일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가능한 한 그런 피어린 삶에서 내 남 자가 벗어났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기도 하구요." 래인은 한 마디 한 마디를 주의해서 선택하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데릭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지금 와서 부인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 다고 날 선택할 거냐, 조직을 선택할 거냐 묻는 것도 웃기고요. 그 삶조차 데릭 의 일부인데 나로 인하여 그것을 부인하게 하면 사실 전 데릭의 삶 일부를 부 정하는 거잖아요. 사랑이란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곁에 있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데릭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자리에 있건 전 그 사 람을 원해요. 그를 가지고 싶어요.". "그말 믿어도 좋을까?" "믿어주세요. 제가 그의 그 삶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를 원할 수도 없지요.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어떻게 사랑을 한다 말 하겠어요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없지. 할머니. 데릭은 정말 잘난 남자예요. 아시 잖아요? 저 같이 평범한 여자는 그저 하늘에 뜬 달처럼 바라보고 외경만 해야 하는 남자라구요. 하지만 전 그 달을 따고 싶어요." "왜지?" "내 거니까요." 래인은 망설이지 않고 당당하게 확언했다. "웃으셔도 좋아요. 하지만 데릭은 제 남자예요. 왜 그런 생각이 드는 지 그 이유를 저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제 마음 속 깊은 영혼이 그렇게 말해요. 그는 내게 정해진 남자라고. 그를 제 것으로 만들 작정이에요.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만만치 않을텐데?" "일이 너무 쉬우면 재미가 없죠. 그리고 데릭은 제가 충분히 고생해서 얻을 가치가 있는 남자라구요. 할머니. 제 연애사업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세 요!" 안노인이 찻잔을 탁자에 놓았다. "래인도 한가지만 약속해주면 나도 적극 래인을 도울 수 있어." "뭔데요?" "........어떤 경우에도 데릭을 단념하지 않겠다고. 그애를 사랑하고 네 남자로 만들겠다는 결심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내게 맹세해 줄 수 있을까?" "네." 망설이지 않고 시원스럽게 대답하는 래인 앞에서 안노인이 활짝 웃었다. 작은


격려처럼 그녀가 래인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럼 그애를 얻을 수 있게 도와주지." 몇 시간 후 리훙이 가져온 것은, 그 다음날 새벽에 출발하는 시드니 행 비행 기표였다. "도련님께서는 아마도 시드니 리전트 호텔에 머무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방 번호가 어떻게 되죠?" "그것까지야 제가 알 수는 없지요." "알았어요, 찾아가면 되지. 근데 그 사람은 시드니에서 며칠이나 묵을 거래 요?" "적어도 나흘은 계실 겁니다. 그곳의 은행 지점 회계 감사를 하셔야 하거든 요." 여행 가방을 싸면서 래인은 안노인이 말 해준 것을 생각했다. -"래인. 그 애, 데릭은..... 정말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어. 아니 지금도 잊지 못 하고 있지. 아니 래인을 다시 사랑하고 설사 아이를 낳고 혼인을 한다해도 아마 그 앤 그녀를 잊지 못할 거야. 그녀하고 헤어진 이후, 우리 앤... 완전히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었지. 옆에서 바라보기에도 참혹할 정도로... 그 일 이후 그 앤 안에서부터 마음의 빗장을 걸고 절대로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지. 어떤 것으 로도 그애를 흔들 수 없었고 어떤 사람도 그애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 지. 지난 6 년 동안 데릭은 다만 걸어다니는 유령이었을 뿐이었어." 보스로서 성처(聖妻)를 맞이하여 트라이어드의 후계자를 생산한다든지 그런 것은 사실 뒷전이었다. 안노인이 정말 근심한 것은 메말라버려 다시는 감정을 싹틔울 수 없는 무형의 참혹한 절망이었다. 윤가린을 다른 남자에게 보내주고 돌아서던 순간부터, 그의 남은 삶은 완전히 어둠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다시 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고 마음을 열어 기댈 수도 없는 철저한 버림받음 그리 고 절대 고독이었다. "유일하게 사랑하고 온 마음을 다 주어 원했던 그 한사람을 그 앤 잃었어. 그 리고 그 애의 다정하고 정상적인 삶도 끝장이 나버렸지. 아, 그렇다고 내가 데 릭을 버린 그녀를 원망하는 것은 아냐. 리니가 뉴욕에서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 고 데릭을 버리고 유럽으로 도망쳤을 때... 난 무엇인가 일이 잘못되어간다는 것 을 눈치챘었지." 그건.. 그냥 운명이 엇갈린 거였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사랑하지만 같이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그건 운명이 정해준 인연 의 사슬이 얽혀있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토록 사랑했다는 윤가린을 무형이 얻지 못한 것은 바로 서로가 그 운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래인도 알다시피 데릭은 무감각해. 절대로 자신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지. 하 지만 래인이 나타나고 나서.. 래인과 함께 있으면 그앤 사람다운 얼굴을 해. 웃 기도 하고 화도 내고 멍청한 짓도 곧잘 하곤 하지. 지금까지 아무도 못한 일을 래인이 며칠 사이에 이룬 것이라고. 그래서 우리 내외는 래인에게 희망을 걸기 로 했지. 제발 래인이 우리 애의 마음을 다잡아 이제는 좀 쉬게 해주고 웃게 해 주고 행복하게 해주었음 해. 이런 내 맘, 알겠지?" "걱정마세요, 할머니. 제가 누굽니까?" 푸른 해무(海霧)가 자욱히 낀 공항으로 달려가며 래인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


다. '전 한번 마음먹으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이래인이라구요. 반드시 데릭을 제 매력의 포로로 만들어 따먹고야(!!) 말겠습니닷! 캬캬캬.' 바로 그 순간, 시드니. 호텔 방에서 시트를 알몸에 감고 아직도 깊은 잠에 빠진 무형. 꿈속에서 푸른 촉수를 뻗어오며 발목을 잡아채는 식인식물에 온 몸이 휘감겨 먹히는 악몽으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17> 조강지처의 생 쇼 실력 약 두 시간에 걸쳐 호텔 카운터의 직원과 실랑이를 벌였다. 얼굴에 1 미터 짜리 철판을 두른 이래인. 당당하게 인간 정무형의 아내라고 소개하며 객실 열쇠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지만 카운터의 직원은 아무 것도 들 리지 않는다는 얼굴로 귀만 파며 먼 산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결국 열쇠를 얻는데 실패한 래인. 열이 뻗을 대로 뻗쳐 좋다, 어디 두고 봐라 하는 얼굴로 로비의 정문 옆에 의자 하나를 갖다놓고 턱하니 버티고 앉아버렸 다. "내 남편이 돌아오면 당신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어디 두고 보라고!!" 도도하게 한마디 엄포를 놓고 래인은 힐끔힐끔 쳐다보는 호텔 직원들. 들며 나며 그녀를 마치 구걸하는 거지인 양 불쌍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손님들이 있 거나 말거나 씩씩거리며 애꿎은 바나나 우유만 쪽쪽 빨았다. 원기가 부족할 때 그녀의 에너지원은 바나나맛 우유였기 때문이다. 두통의 바나나 맛 우유를 마시며 울분을 삭히던 이래인. 막 우유 두통을 다 해치운 바로 그때. 호텔 정문 앞에 검은 승용차가 멎었다. 그 차에서 서둘러 앞 문을 열고 내린 사람은 무형의 수행원인 척. 그는 내리자말자 무형을 위해 뒷문 을 열어주었다. 유리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래인은 그녀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자신 있는 표 정인 <활짝 웃으며 무한한 애교떨기>표정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침착하게 의자 에서 일어서서 절대로 그녀를 환영할 리 없는 쌀쌀맞은 연인의 경악과 박대에 대비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녹아나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무형을 향하여 소리쳤 다. "데릭! 나 왔어요! 데리...... 어쭈구리! 빠드득!!"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리게 하는, 여자의 한 품은 이 가는 소리가 빠드득 시드 니 리젠트 호텔의 로비에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래인의 눈에 푸른 불꽃이 확 피어오르는 순간. 온화한 저녁공기. 부드러운 음 악이 흐르던 로비에 갑자기 뭉클뭉클 검은 안개가 퍼지며 체감온도가 약 이십 도 쯤 내려갔다. 차에서 내린 무형은 이상하게 등골이 서늘하게 식어 내리는 그런 기분에 고 개를 갸웃하면서도 차에서 내리는 매혹적인 금발의 여자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팔을 내밀었다. 무형의 뒷통수를 노리고 정확하게 날아온 운동화 한 짝이 그의 얼굴을 가격 한 것은 바로 그 순간. 평소 같으면 다른 사람의 살기를 느끼는 본능적인 감각


으로 날아오는 그 무엇을 막았을테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신발짝으로 그를 공 격하는 인간은 처음이었기에 그만 무형은 볼썽사납게 냄새나는 운동화 짝으로 얼굴을 얻어맞고야 만 것이다. "당신, 죽었어! 빠지직. 척, 나 말리지 말아요! 경고했어. 말리면 당신도 같이 죽여줄 테니!! 이 망할 자식!~~~ 마누라 놓아두고 혼자 출장가는 게 이상하다고 했다. 그래, 이 나쁜 자식아. 그 며칠을 못 참아 바람을 피냐? 너 죽고 나죽자! 엉엉엉 할머니! 할아버지! 데릭이 날 두고 바람피워요! 엉엉엉. 죽여버릴껴! 야, 너!" 너무나 황당해서 석상이 되어버린 무형 앞에 다짜고짜 달려들어 그의 양복깃 을 붙잡고 흔들다가 또 난폭하게 가슴팍을 잡아뜯으며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기선제압을 하며 난리블루스를 쳐댄 래인. 손에 들고 있던 다른 운동화 한 짝을 들고 무형만큼이나 황당해서는 멍청하니 서있는 금발의 여자에게 겨누었다. "너, 노랑머리 여우! 감히 엇다 대고 남의 신랑한테 꼬리를 치는겨? 한번 죽 어 볼껴? 나 말야. 천사같이 생겨 보여도 성깔은 더~러~운 여자야. 내가 아무리 맘이 좋대두 내 남편이 바람피는 것까지 봐줄 줄 알았냐? 오늘 너 죽고 나 살 자! 이년아!!" 빌어먹게도 예쁜(윽. 제길. 열이 더 받는군.) 금발 여자를 향해 분노와 질투를 담아 더러운 운동화 짝을 휘두르려는 래인의 팔을 막은 것은 이제서야 간신히 충격에서 벗어난 무형이었다. 한 손으로 래인의 입을 콱 틀어막고, 다른 팔로는 그녀의 몸을 휘어감아 움직 이지 못하게 고정시킨 다음, 무형은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미세스 킨. 이 놈이 좀 버릇이 없어요. 그리고 아주 제 멋대로 죠. 오늘의 무례를 대신 사과드립니다." "아니에요. 미스터 정. 멋진 애인을 두셨군요. 전 자기 남자를 지킬 줄 아는 여자를 좋아한답니다. 먼저 올라가세요. 전 로비에서 제 남편을 기다려야겠어요. 내일 은행에서 다시 뵙죠." 재미있다는 미소를 지으며 금발 여인은 무형의 손에 입을 막힌 채 바둥거리 는 래인을 바라보며 상냥하게 대답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무형은 호주 ABL 은행의 또 다른 대주주인 아나이 스 킨 부인에게 목례로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아까 한 남자를 둘러싼 두 여 자의 볼만한 치정극(?)을 구경하기 위하여 둥그렇게 만들어진 사람들의 서클을 헤치고 성큼성큼 엘리베이터로 걸음 옮겼다. 두 팔로는 요동치는 래인의 작은 몸을 단단히 움켜잡아 가볍게 어깨에 둘러매고서.. 한동안 패닉 상태에 빠져 나오지 못해 멍청하게 입만 벌리고 서 있던 척이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래인의 운동화 한 짝과 배낭을 챙겼다. 그리고 무형을 따 라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데, 데릭.. 저어,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한마디만 더하면, 아래로 던져버린다." 래인은 무형의 어깨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 유리 엘리베이터 아래로 보이 는 까마득한 바닥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살아야지. 일단 살아야 후사를 도모하지. 그래 입 다물자. 엘리베이터가 28 층에 멎었다. 복도로 나서서야 무형은 비로소 래인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실눈을 뜨고 음산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 래인은 자신이 지금 과연 잘하고 있는 짓인가 심각한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잘 돌아가는 이래인의 머리가 짧은 몇 초간 파바박 불꽃이 튕기기 시작했다. 무형의 얼굴을 곁눈질로 힐끗 살핀 바에 따르자면, 이 남자의 표정 어디에도 그녀의 단순무식지랄, 소위 말해 <단.무.지>과적인 공격이 먹혀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그녀가 로비에서 그런 소동을 피워댔으면 좀 뭔가 인간답게 분노라든가 기가 막힘이라든가 황당함이라든가 이런 것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런데 그녀를 지긋이 내려다보는 그 남자의 눈에는 아무 것도 나타나있지 않았 던 것이다. 긴 여행중이라 간편하게 청바지에 반팔 티셔츠를 입어 마치 여고생같이 보이 는 래인의 모습을 훑어내리던 무형이 조용히 물었다. "여긴 왜 왔어?" "자기 보러." "뭐?" "나 버리고 허락도 없이 혼자 출장 핑계대고 도망갔잖아, 뭐!" "우리가 허락이 필요하고 말고 한 사이였던가?" 어쩐지 좀 무안해서 래인은 비비적거리며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무형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결정해." "뭐, 뭘?" 우리의 용감한 래인. 사실은 엄청 졸아들었지만 여자가 칼을 뽑았으면 연필이 라도 깎아준다는 명언을 되새기며 눈을 땡그랗게 뜨고 최강방어전법인 <뻔뻔 몰라 배째!> 모드로 돌변했다. 무형이 히죽 웃었다. "지금 여기서 나에게 한 대 맞고 조용히 꺼질래? 아니면 끝까지 버티다가 아 래로 떨어져 죽을래?" "어머, 데릭.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너무 섭섭하지!" 래인은 끝까지 땡그랗게 뜬눈을 내리지 않고 마주 무형의 시선을 받으면서 해죽 웃었다. <아저씨, 대체 왜 그러셔요? 난 몰라요!> 전법으로 전환하면서. "나더러 너무 그러지 마. 원래 개새끼도 말이지, 자기의 밥그릇 빼앗기면 주 인도 문다더라, 뭐. 안 그래요? 내가 콱 찍은 남자를 나보다 더 예쁜 여자에게 빼앗길까봐 야~~악~~간 이성을 잃고 다소 과격한 행동을 보였다고 하더라도 말 이야. 바다같이 넓은 이해심을 가진 자기가 날 이해해 주어야지 당신더러 사내 대장부라고 하지 말야. 스톱! 나 여기 그냥 온 거 아냐!!" 무형의 주먹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담고 래인의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래인은 해죽 웃으며 두 팔로 그의 목을 딱 끌어안아 버렸다. "해피 버스 데이 투 미! 데릭." "뭐?" 래인은 상글상글 웃으며 긴 속눈썹을 깜빡깜빡 했다. "오늘이 내 생일이야. 생일선물로 호주 관광 티켓 선물 받아서 여행온 나를 이런 식으로 무자비하게 패거나 어두워지는 이국의 거리로 쫓아낼 생각은 하지 않을 거지? 응?" "이, 이.."


"생일선물로 다른 건 필요없으니 뽀뽀나 해 주라. 데릭." 래인은 그가 다른 생각을 하기 전에 얼른 입술부터 밀어붙였다. 처음에는 저항하는 듯도 하던 무형. 꼭 다물린 차가운 입술에 무방비하고 전 부다 내던지는 여자의 치명적이고 달콤한 유혹이 다가가는데 지가 사내라면, 이 런 관능에 끝까지 저항할 수야 없지. 이 밤의 환상을 위하여 그녀는 <키스의 모든 것>을 다섯 번이나 읽고 왔는데 말이다. '일단 키스로 이 남자의 정신을 혼미하게 한 다음 생일인데 선물 안 줘? 혹은 저녁 사주라 이런 분위기로 동정심 유발로 들어가서 식사를 하러 가는겨. 그리 고 술 사달라고 살살 꼬셔서는 한 잔 먹고 퍽 취한 핑계를 대는겨. 잘하면 오늘 밤 이 남자를 살살 꼬셔서 베드 인 해 가지고....이힛히히. 반드시 따먹고야 말리 라! 아잣!' 그런데.... 그런데... 옆에 붙기만 하면 서로 이해할 수 없고 주체못할 불이 타오르는 우리의 두 주인공. 반드시 오늘밤, 얼음탱이 이 남자를 따먹고야 만다는 결심으로 가득 찬 래인. 내가 정말 미쳤지, 한탄하면서도 그의 팔에 꼭 알맞게 감겨오는 나긋하고 부 드러운 여체의 향기에 취하여 격한 욕망으로 그녀의 입술을 유린하는 무형. 그 두 사람이 서로 끌어안고 미친 듯이 키스를 하고 있는 바로 그 곳. 건너편 객실 문이 열리고 갈색 머리에 뇌쇄적인 절세미인이 하나 나타난 것이다. 고개를 든 무형과 여자의 눈이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쳤다. "도나? 어떻게 여긴..." "데릭, 자기? 왜 이렇게 늦었어요? 어머나.." 서둘러 그녀를 밀쳐내는 무형의 품에서 고개를 든 래인은 살기에 가득찬 도 끼눈을 뜨고 무형과 래인이 찰싹 붙어있는 모습을 노려보는 그 여자를 마주 째 려보았다. 그 미인이 갑자기 히스테리컬하게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세상에!~~~ 데릭. 자기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어요? 뉴욕에서 우리 같 이 사랑을 속삭인 기억을 벌써 잊었어요? 난 자기를 만나려고 스케줄까지 망쳐 가며 여기로 찾아왔다고요. 그런데 이 멍청하게 생긴 여자는 뭐죠? 어떻게 당신 나를 이렇게 배신할 수 있어?" "도나, 대체 여긴 왜 나타난 거지?" 무형은 이해 못하겠다는 어조로 되묻자 갑자기 도나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데릭, 이 나쁜 남자!!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자신을 사랑한다 말한 남자가 바람피는 배신의 현장을 잡은 여자의 역할을 그녀는 무리없이 연기하는 듯 했다. 광란의 눈물과 비탄, 원망, 질투의 히스테리 를 벌이는 헐리웃의 떠오르는 신성(新星) 도나 카딘의 가증스런 악어눈물을 지 켜보며 래인은 역시 배우란 위대한 인간이로구나 하는 커다란 깨달음을 다시 얻었다. 이래인 자신의 생쇼도 대단했지만 사나이의 심금을 울리는 저 가련하고 아픈 눈물의 연기를 펼치는 도나의 연기는 거의 완벽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보라색 커다란 눈동자에서 쉴 새 없이 떨어지는 주먹만한 눈물 방 울들, 그러면서 원망 가득한 눈동자를 살포시 들어 무형을 바라보며 관능적으로 유혹하는 저 뇌쇄적인 포즈.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래인을 향하여 보내는 결정적


인 경고의 살기. '캬하, 역시 도나 카딘 너. 내 꽃미녀 리스트 순번에 올라갈 만 하단 말야. 내 언젠가는 너를 예뻐해 주겠지만 말이야... 그러나 오늘은 안되겠다. 뭐 좋아. 네 생 쇼는 아주 우수하니까 그 정도로 하고 이번에 내 생 쇼 맛 좀 보지 그래?' 래인은 도나의 눈물에 반쯤 넘어간 듯 해 보이는 무형의 팔을 힘없이 밀어내 고는 조용히 돌아섰다. "잘 있어요, 데릭. 난 갈게. 정말 당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여기 기다리고 있었 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도나가 회심의 미소를 붉은 입술에 짓는 것이 눈앞에 그려진다. 하지만 마지 막에 웃는 여자가 진짜 승리자인 거지. 도나 너. 두고 봐라. 래인은 상처받고 풀죽은 얼굴을 하고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듯 엉거주춤 선 척에게서 배낭과 운동화를 받아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 이터에 올라탔다. "잘 있어요, 데릭. 내가 잘못 찾아왔나 봐.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게. 미안해 귀찮게 해서. 안녕." "이, 이봐! 야, 꼬마! 이래인! 이 망할 여자가!! 이래인! 거기 서! 기다리라 고!~~" 문이 반쯤 닫히는 엘리베이터 사이로 당황한 무형이 고함치는 것을 들으며 래인은 마지막 양념으로 눈물 한 방울을 뽀샤시하게 떨어뜨려 보여 주었다. 슬픈 듯 안타까운 듯, 혹은 미안한 듯 미련에 가득찬 듯, 그러나 당당하게 물 러설 줄 아는 그런 얼굴을 하고서 래인은 조용히 그 곳에서 퇴장했다. 속으로는 구백미호의 가증스런 미소를 머금은 채....

<18>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부하들을 풀은 지 삼십 분만에 무형은 래인이 맨발로 혼자 터벅터벅 해안도 로를 걸어가고 있더라는 소식을 들었다. 연신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면서... 척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어째서 그녀를 찾았다는 안도감보다 가슴이 서늘하게 식어 내리던 미안함이 먼저였을까? 엘리베이터가 닫히기 전, 본 래인의 마지막 표정에서 스민 그 상처, 혹은 도 대체 형언할 도리가 없는 무참함 같은 것이 그의 가슴을 쳐서 무형은 그녀에게 그런 상처를 준 자신이 너무나 비열하게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참으려 애 써보지만 기어코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 한 방울이 곧바로 커다란 충격으로 그의 가슴에 박혀 버렸다. 게다가 생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가 이 곳에 머물고있다는 이야기에 환영받지 못할 줄 뻔히 알았겠지만 그 래도 불원천리 방긋 웃으며 나타난 그녀가 결국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처연히 사라지던 모습은 평생 동안 잊을 수 없으리라.


가시처럼 박혀버린 죄책감 - 아무 것도 아니라 생각했고 절대로 관계를 가질 생각조차 없다 도리질 친 그 여자의 눈물 한 방울이 그토록 무심한 그의 가슴 을 순식간에 적시고 미여지게 할 줄이야. 강한 척 당돌한 척 해도 여리고 섬세한 여자이다. 그런 연약한 여자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감과 상처를 주었다는 깊은 자책감으로 무형은 결국 직접 래인을 찾아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래인을 찾아 나서기 전, 무형은 허락도 없이 나타나서는 이 모든 소동을 피운 도나에게 다시 한번 자신의 안전에 나타나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면 가만 두지 않겠노라고 분명히 경고해 주었다. 자신이 객실로 돌아오기 전에 시드니에 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살아가기 힘들 것이라고도 말이다. 오페라 하우스가 건너다 보이는 도로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해안가의 카페 비치 파라솔 아래에 래인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발 안 아파?" 래인은 무형을 바라보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어쩌다 보니 그녀는 한 손에 운동화 한 짝을 들고 맨발로 걷고 있었던 것이 다. 무형은 무릎을 꿇고 더러워진 그녀의 발을 어루만져 주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그렇게 무작정 뛰쳐나가면 어떤 일을 당할 지 알고나 있는 거야?" "잔소리 할 거야?" 큰 눈에 눈물을 반쯤 담고 래인이 속삭였다. 노을을 옆얼굴로 받고 앉은 그녀 의 볼에 구르는 눈물이 어찌나 아픈지 무형은 문득 그녀를 끌어안고 자신의 품 에 다독거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한숨처럼 대답하고는 무형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운동화 한짝을 래인의 발에 신겨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아직도 손에 꼭 쥐고있는 운동화도 빼앗아 마저 발 에 신겨 주었다. "신데렐라야. 그렇지?" "뭐라구?" "자기가 나에게 신발 신겨주었잖아. 왕자님이 신데렐라에게 유리구두를 신겨 주고 아내로 맞이했어." "넌 재 투성이도 아니고 구박덩이도 아니잖아. 이 친구야." 비로소 마음이 풀린 듯이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자 그제서야 얼어있던 무형의 마음도 따뜻하게 풀려간다. 그는 웨이터를 손짓해 불렀다. "오늘 생일 맞은 아가씨를 위해 멋진 칵테일 한잔을 부탁하죠." 그리고 그는 한 손을 내밀어 볼에 묻은 래인의 눈물을 살짝 닦아주었다. "해피 버스 데이 투 유, 래인." 이미 래인의 생일이 지난 지가 반년이 훨씬 넘었다는 죽어도 알리 없는 무형. 속으로 래인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더 처량맞게 가증스런 악어눈물을 흘리며 그의 동정심을 자극하는 줄도 모르고 꽃 파는 아가씨를 불러 분홍색 장미다발 까지 사서 그녀 손에 들려주었다. "홍콩으로 돌아가면, 더 좋은 선물을 사줄게." "데릭." 그이 말을 듣지도 못한 듯이 래인이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미안해." "뭐가 미안하지? 호텔에서 그 소동 피운 것?" 무형의 말에 래인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니. 그것 말고.... 당신 사랑하는 여자하고 만나는데... 내가 눈치없이 나타 나서... 정말 미안해." "도나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아냐." 무형은 잘라 말했다. "내가 그랬지. 난 어떤 여자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 여자 역시 나에겐 아무 것도 아냐. 자기 혼자 난리를 치는 거지. 그러니 미안할 것 없다." 래인이 무어라고 다시 속삭였다. 너무 작아서 알아들을 수조차 없는 목소리. 무형은 기운없이 떨구어진 래인의 얼굴을 들게 하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 했다. "뭐야? 정확하게 말해." "......해서 ...안해.." "뭐?" "....나, 그런데...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무형은 고개를 돌려 노을이 떨어지는 바다를 응시했다. 이토록 솔직하고 이토록 맑은 여자. 아주 많이 다르지만 그러나 이럴 때 보면 그의 가린과 너무 닮은 곧고 당당하고 정직한 여자 래인. 가슴 한구석이 싸르르 간지러운 것도 같고 고통스러운 것도 같고 또 미안하 기도 한 그런 이상한 기분이다. 숱한 여자들의 어떤 고백에도 전혀 흔들림 없었 던 무정하고 무심한 그의 심장이 가늘게 전율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날 미워하도록 해. 날 사랑하면 너만 상처받는다고 했지." "그 여자를 아직도 사랑하나요?" 무형은 고개를 흔들었다. "도나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라고 말했잖아! 왜 자꾸 그 여자 이야기가 나와야만 하는 거지? 그 여자는 뉴욕에서 잠시 데이트하던 사이일 뿐이야! 나의 감정하고는 전혀 상관없어. 자기 혼자 난리치는 것이라고." 말을 하다보니 어쩐지 변명조가 된다. 무형은 자기가 왜 기를 쓰고 래인에게 이런 설명을 해야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하튼 절대로 도나는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에게 인지시켜야만 한다는 사명감으 로 열을 내며 소리쳤다. 래인은 휴지로 코를 핑 풀고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니, 도나 그 여자 말고 윤가린 그 여자. 말야. 아직도 그 여자를 사랑해서 당신 여자들에게 냉정한 것, 나 다 알아." 엷은 먹물이 스미듯이 어둠이 내리는 거리. 하나 둘 네온사인이 켜지고 가로 등이 빛나기 시작하는 어스름한 그 시간. 사랑하지만 사랑받지 못해 상처입은 두 영혼이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앉아있기만 한다. ".......리니 일은 어떻게 안 거지? 우인이란 놈. 입이 가벼운 놈은 아니라고 생 각했는데.." 이윽고 씁쓸한 어조로 말하며 무형은 앞에 놓인 마티니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사랑, 해요? 아직도?"


래인은 눈물젖은 눈을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형은 한 손을 들 어 이마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것이 사랑일까? 잊는다 잊었다 맹세하지만 밤마다 그녀를 잊지 못하고 그리운 그 이름을 부 르며 혼자 아파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는 그녀를 아직도 사랑하는 것이다. 행복하기를, 누구보다 행복하기를 바라면서도... 그를 버리고 간 그녀가 지독 히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이율배반이 사랑이라면 그는 그녀는 사랑하는 것이다. 천번 만번 마음에서 베어내면서도 아직도 그녀의 그림자에 갇혀 그녀를 닮은 여자를 찾아 헤매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다. 가이없는 갈망. 그러나 채울 수 없는 그리움. 절대로 끊어내지 못하는 미련과 집착의 다른 이름이 사랑이라면..... 무형은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래인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왜 나의 과거에 대해서 너에게 이야기를 해야만 하지?" "왜냐하면, 지금부터 내가 당신의 현재 여자가 될 거니까요." "사양해." 무형은 간결하게 잘라냈다. 더 이상 말도 붙이지 못하게 무정하고 단호한 동 작으로. 그러나 래인은 집요했다. 아니 필사적이었고 간절했다. "제발, 데릭... 언제까지 이미 남의 여자가 된 사람을 추억하고 생각하고 사랑 하기 멈추지 못할 건가요?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당신의 미래를 망칠거냐구 요! 제발 그만 해요. 내가 사랑할게. 난 당신을 사랑한다고. 내가 당신 사랑하고 위로해주고 안아주고 편히 쉬게 해 줄게요. 사랑하는 일은 살아가는 일이라고 했어요. 당신이 한번 사랑을 잃었다고 해서 삶이 끝난 것이 아니듯이 당신이 살 아가는 한은 두 번째 세 번째 사랑이 다시 오는 거라구요. 그러니까 마음을 무 작정 닫아걸지만 말고 나에게도 좀 열어 줘요. 내가 더 노력할게. 당신도 날 사 랑할 수 있게 내가 노력할 거야. 데릭." "그만." 무형은 담담한 어조로 손을 들어 래인의 입을 막았다. "그만 하자고 했어, 이래인. 망치는 것도 내 삶이고 망가지는 것도 내 미래야. 너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내가 유일한 남자로 택 한 사람이에요. 난 당신의 운명이 아닌 터로 잃어버린 여자 때문에 당신의 삶을 망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 내가 구제해줄게요! 내가 당신을 사랑한 다는 거예요. 우린 행복할 수 있을 거예요." "아직도 착각에 빠져있군. 철부지 아가씨야. 난 너와 <우리>라고 불릴 만큼 엮인 관계나 인연 같은 건 가진 적이 없어" 전혀 동요가 없는 무정한 무형의 대답에 래인이 격렬한 어조로 소리쳤다. "당신, 나랑 키스했잖아요! 당신도 사실은 나를 원하잖아요. 왜 정직한 당신의 감정을 부인하려 하는 건가요?" 무형이 싱긋 웃었다. 잔인하고 어두운 검은 미소였다. "그래서 널 아직도 철부지라고 말하는 거야. 이 아가씨야. 사내는 언제 어디 서든, 마음이 있든 없든 수컷의 본능을 발휘할 수 있어. 내가 너하고 키스한 것


이 사랑해서라고 설마 착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사랑은 아니더라도 그럼 나에게서 욕망은 느낀다는 건가요?" 당차게 되 찔러오는 래인의 말에 무형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래인은 투명하 고 곧은 눈동자로 무형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직한 그의 감정을 읽어내려 는 듯한 그런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좋아요, 사랑은 아니라 욕망이라고 해도 좋다구요. 난 당신이 나에 대하여 그런 감정을 느낀 것만으로도 우리 사이에 희망이 있다고 믿는 여자니까.... 그 런데 왜 그런 자신의 정직한 감정도 당신은 부인하려 할까요?" 래인은 비통한 어조로 되물었다.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래인은 고가를 흔들다가 무형을 응시했다. "한가지만 물어볼게요. 데릭. 당신은 다른 여자를 사랑하면 사랑했던 그녀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해요?" ".....그만 하지." "아뇨.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라구요! 난 말이죠.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정말 비겁하고 나쁜 남자라고 생각해요!" 지독한 무형의 인내심도 마침내 한계에 달했다. 무형은 이를 악물며 래인을 마주 노려보았다. "네가 뭘 알아? 네가 리니나 나의 일을 얼마나 안다고 감히 이따위로 함부로 우리 일에 대하서 찧고 까불어대는 거지? 대체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 야?" "당신은 지고지순하게 그녀만을 사랑하고 평생 그녀만을 그리워하면서 죽어 가는 것이 사랑의 완성이고 전부라고 믿지요? 하지만 아니요. 천만에! 당신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버린 것을 그녀에게 복수하고 있다구요!" "닥쳐!" 그러나 격렬하게 쏟아져내리는 래인의 말은 멈출 줄 모른다. 조금도 기죽지 않고 그녀는 앙칼지게 소리쳤다. "죽어도 이 말은 하고 죽을래요! 당신도 이제는 알아야 한다구요. 데릭. 너무 잘난 정무형씨. 당신이 이렇게 그녀를 잊지 못하고 집착한 채 당신의 삶을 망쳐 가는 것이 오히려 그녀를 무척이나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을 당신, 사실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잖아요? 당신은 지독히도 이기적인 사람이에요! 당신 이 그녀를 잊지 못하고 아파하면 할수록 그 여자도 역시 당신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으로 불행해진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죠. 당신을 스스로 학대하고 괴롭 히고 불행해지면 그녀 역시 평생 당신에 대한 미안함으로 당신을 잊지 못하고 당신의 그림자에 묶여 불행해진다구요. 당신이 정말 바라는 것은 그것이잖아 요!" "닥쳐. 닥쳐. 닥쳐!!" "사랑한다면... 정말 사랑하다면.... 그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바래야 하는 거잖 아요. 그런데 어째서.... 왜 당신은... 당신 자신을 포기하고 망가뜨림으로서 그녀 까지 불행하게 만들고 있지요? 그렇게 당신을 버린 그 여자가.... 당신. 미운가 요? 그렇게 증오스러워요? 그래서 이런 식으로 아직도 그녀를 벌주고 있는 건 가요?" 단 한번도, 세상의 그 누구도 그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가린 을 잊지 못하고 그녀에게 미련하고 그녀와의 추억에 집착하는 그 것이 사실은


사랑이 아니라 증오라고. 그를 버리고 도망친 그녀에게 주는 모질고 잔인한 형 벌이었다고. 그러나 무형은 래인의 매서운 말을 반박할 수 없어 아팠다. 부인할 도리가 없 었으므로 괴로웠다. 그랬으니까. 그 것이 사실이니까. 그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로 도망친 가린을 그는 끝끝내 무의식 속에서는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래서 벌을 주고 싶었다. 자신을 망쳐가면서도 그 애가 그를 잊지 못하도록, 그로 인하여 눈물 흘리고 아파하도록 스스로를 학대하고 고통과 절망 속으로 몰아넣었다. 사랑스럽고 상냥한 그 애는. 타인의 아픔을 자기 것처럼 느끼며 아파할 줄 아 는 그 애는 자신으로 인하여 무형 그가 어둠과 절망 속에서 부유하며 나락으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견뎌내지 못해 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그늘없는 삶을 누리면서도 가린은 그들의 사 랑으로 인해 심장 한쪽을 잃고 고독과 절망 안에서 상처입은 짐승처럼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그의 모습때문에 눈물 흘리고 상처받고 아파하고 있을 것이다. 무형은 그렇게라도 가린이 그를 잊지 않기를. 이어지는 아픔의 끈으로라도 그녀 를 영혼 안에서 소유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젠장! 그런 눈으로 날 보지마" 일그러진 얼굴을 한 무형이 이를 악물며 무뚝뚝하게 소리쳤을 때야 래인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흐르는 줄도 모르고 맑은 눈물이 볼을 적시며 뚝뚝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해요?" 눈을 흘기며 코를 푸는 래인에게 젠장! 그가 가볍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는 의자를 쓰러뜨리며 일어나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다가와 무형은 래인의 떨리 는 몸을 꼭 끌어안았다. "울지 말라고! 네가 울면 난 마음이 흔들려. 어쩐지 견딜 수가 없어진단 말 야." ".....나더러 당신 사랑하지 말라고 하지 말아요!" 래인이 경고했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내 것이야. 그 사랑을 받아주고 안 받아주고는 당신 몫이지만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내 자유라고. 그러니까 내 사랑의 감정까지는 부인하지 말아요!" "당신은 강해." 무형은 그녀의 머리 위에 턱을 올려놓고 조용히 말했다. "그래요 난 강해요." "래인 당신은 말야. 나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자격이 있어" "그래요. 난 나의 소중한 사랑을 인정하지 않으려 별별 발버둥을 다 치는 남 자 따위는 필요없어요. 난 더 귀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구요. 그러니까 이 팔 치워요! 날 안지 말라구요. 날 동정하는 이런 위로 따윈 필요없어. 난 당신의 동정이나 위로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바래요. 사랑이 아니라면 나라는 여자에 대한 진짜 관심과 열정이라도 원한다구요! 그런데 당신은 나에게 그 어


느 것도 줄 의사가 없잖아? 그러니 날 안지 말아요. 당신 날 안을 권리 없어!" 사랑에 대한 거절은 그가 먼저 했는데 어째서 그가 버림받은 기분이 들까? 매몰차게 그의 팔을 쳐내는 래인에게서 팔을 풀며 무형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 다. 그러나 무형은 몸을 떼내어 그녀 곁에서 물러났다. 어차피 심각해지기 전에 이렇게 마무리되어 다행이라 자위하며. 뭐 그럭저럭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사랑한다고 울며불며 고백하고 매달리는 여자들은 많았지만, 돌아서면 그 여자들의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는 것처럼 폭풍처럼 그에게 맹목적으로 달려 들어온 이 매혹적인 작은 여자도 금새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한 겹 어둠이 깔린, 살얼음처럼 차가운 무형의 눈과 애절하게 젖어있는 래인 의 눈이 다시 만났다. 그녀의 눈빛이 스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절대로 난 안 되는 거죠? 그렇죠. 데릭?"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나직해서 아주 주의깊게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알아 차릴 수조차 없었다. 무형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이 정도로 끝내자고, 철부지 아가씨. 난 너하고 더 이상 사랑 놀 음같은 건 할 생각이 없으니까 난 너에게 아무 것도 줄 것이 없고 또 줄 생각 도 없어."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하고 미묘하고 복잡한 침묵이 어둠처럼 내려앉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주르르 래인의 몸이 무형의 품안으로 다시 미끄러져 들어왔다. "데릭.... 흑흑흑" 래인은 두 팔을 그의 목에 감은 채 애절하게 올려다보았다. "사랑하게 해줘요. 그냥... 당신 사랑하게 해줘요. 난 당신 사랑하고 싶어. 당 신하고 사랑하며 살고 싶어. 데릭. 사랑하는 건 내가 할게. 당신이 그냥 거기 서 있기만 하면... 내가 다가갈게요. 내가 당신 사랑해줄게!" "........미안해. 래인." 그때 가린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했을 때 그의 심정도 그러했다. 그냥 내 옆에 있어만 달라고. 바라보기만 해도 좋으니 그냥 사랑하게 해 달라고 하지만 그녀는 안돼 하고 거절했었다. 무형도 지금 래인에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의 가린처럼 지금의 그도 래인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으 므로. 사랑도 아닌, 열정도 관심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런 설명할 수 없는 어쩡 쩡한 마음의 흔들림 하나로 그는 새로운 발을 내디딜 수 없다. 그러기에는 그는 너무 비겁하고 겁쟁이였다. 척을 시켜 래인을 호텔로 데려가라고 말하고는 무형은 아스라이 어둔 바다를 멍하니 응시했다. 사랑?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래인의 눈물이 아무리 그를 아프게 흔든다 해도 그것 을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 이미 죽어버린 마음을 가진 그가 삶의 다른 이름인 사랑 같은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다니... 어리석은 여자... 하지만 래인의 눈물은..... 그는 쓸쓸하게 웃으며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그는 아까 흘렸던 그녀의 눈물이 얼마나 아프고 외로운 것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6 년 전. 그 또한 사랑했던 사람 앞에서 그런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었기에.... 하지만 무형은 차에 타자말자 래인이 단숨에 눈물을 닦아 버리고 척을 상대 로 무형의 일정을 달달 꿰는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19> 이판 사판. 달덩이 따먹기 이주일 만에 호주에서 홍콩으로 돌아온 무형은 오랜만에 조부를 보기 위해 회사 일을 끝낸 다음 빅토리아 가의 저택으로 차를 몰았다. 그가 달리는 해안도 로 옆으로 황금빛 노을이 길게 선을 긋고 있었다. "어서 오너라. 고생 많았지?" 노부부는 진심으로 그를 환영해 주었다. "너도 출장 가고, 래인이도 한국에 가버린다고 하고 정말 심심해서 우리가 낙 이 없구나. 이젠 자주 들러줄 거지?" "래인이.. 한국에 간다구요?" 이제는 더 이상 상관없을 그 여자의 이야기에 어째서 이리도 민감하게 반응 이 되는 것인지, 무형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조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마도 부친이 한국에서 세미나가 있다고 했지? 그래서 따라간다고 하 더구나. 모레쯤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아마도 그 애를 보기 힘들 것 같구나. 한국에서 두어 달 있다가 바로 유람선 타고 유럽 간다고 했거든. 아마 도 내년이나 되어서야 돌아올 것 같구나." "아, 네...." 내년에 돌아온다고.... 아마도 그가 시드니에서 그녀를 거절했던 데에 마음을 다친 것이리라. 그래서 그와 연관된 이 곳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형은 정원의 푸른 나무 우듬지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잠시 했다. 어쩐지 마음 한구 석이 욱씬 당겨오며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나는 듯 했다.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몰라. 서로가 얼굴을 마주 보며 난처하고 민망한 것 보다는 낫겠지. 그리고 돌아오면 그녀는 이미 다 정리가 끝났을 테고 나 역시 그렇겠지. 잘된 일이야.' 참! 하면서 조모가 탁자에서 누런 봉투를 집어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어제 래인 그 애가 마지막으로 우리 집에 오면서 사람들에게 다 선물을 가 져왔더구나. 너에게도 가져 왔더라. 참 우리가 받은 선물을 보겠니?" 싱글벙글 미소지으며 조모는 벽에 걸린 작은 그림 하나를 손짓했다. "그 애는 절대로 자기 그림을 남에게 주지는 않는데 우리에게는 특별히 저 그림을 한 점 가져왔더구나. 그리고 나에게는 따로 초상화도 그려 주었지. 그건 내 침실에 걸었단다. 가서 한번 보렴, 데릭. 래인이 그앤 정말 천재야! 그렇지 않니?" 무형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래인이 그에게 남긴 선물이라는 누런 봉 투를 열었다. 그에게도 작은 그림쯤 남긴 것일까? 가능했다면 그녀의 화실을 한번 방문하고 싶었지. 그녀가 그린 그림을 전부


보고 싶었다. 그녀에게 어쩌면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허락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조금만 더 시간을 가지고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면 말이다. 봉투 속에 든 것은 파일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무형은 그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래인은 초록색 패티큐어를 엄지발가락에 바르며 이제나 저제나 벨 소리가 울 리기를 기다렸다. 한시간 전쯤에 퇴근했을 것이다. 조부 댁에 가서 차를 마시고 나서.. 할머니가 그 것을 그에게 전달할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 멍청한 남자는 그 봉투를 생각없이 열어보겠지? 그리고 나면.. 래인은 깔깔거리며 다른 발가락에 노랑색 패티큐어를 칠하기 시작했다. "어디 한번 나하고 붙어 보자고요, 정무형씨." 그가 그녀의 선물(?)을 보고 당장 그녀에게로 달려온다는 데에 래인은 책 판 권을 전부 걸 수도 있었다. 래인은 면봉을 들고 곱게 삐져나온 페티큐어를 지우 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데릭. 당신은 아직 내 성깔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내가 악어과라는 것을 기 억해 두시라고. 내 눈물로 당신 마음을 반쯤 흔들어놓았으니 이제는 몸 대 몸. 나의 마지막 승부수를 받아보셔! 아직도 자긴 모를 테지만, 난 한번 사냥감을 정하면 절대로 안 놓치는 여자거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해치우는 여자다 이 말씀이지. 어디 우리 둘, 오늘 밤 잘난 기 싸움을 한번 해보자고요.' 그날 저녁, 정확히는 무형이 조모로부터 래인이 전해달라 맡긴 종이봉투를 열 어본 지 한시간 십 육분 후에, 시퍼얼게 열이 뻗친 무형이 래인의 집 현관에 나 타났다. 사나운 사자처럼 콧김을 내뿜으며.. 래인은 언제나 물처럼 냉정하고 흔들림이 없던 그 남자가 거의 이성을 잃고 분노한 얼굴을 한 모습을 바라보며 정말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빈틈 하나 없고, 정말 바늘 끝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게 완벽한 그 남자의 유일한 약점이자 인간다운 감성을 건드리는 그것. 그리고 래 인이 투명한 한 겹 빙하에 싸여있는 그 남자의 심장을 치고 들어갈 수 있을 단 하나의 아이콘이었다. 그녀, 윤가린. 래인은 그에게 마지막 이별의 선물이랍시고 그녀가 모은 윤가린에 관한 모든 자료와 사진첩을 무형에게 스크랩해서 보냈던 것이다. <추억을 끌어안고 평생 행복하기를..>이라는 친절한 메모까지 붙여서 말이다. "너, 대체 내게서 원하는 게 뭐냐?" 내 남자는 카리스마도 왕 죽이지. 크크크 이 남자, 정무형. 래인의 부모님이 입을 쩍 벌리고 선 가운데 부친 이박사의 호령 소리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씩씩거리며 잡아죽일 듯한 눈빛으로 다짜고짜 래인의 팔을 끌어내 차에 태우고는 곡예 운전을 해서 사우스 피크까지 왔으면


좀 더 낭만적이고 근사한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겨우 한다는 말이 이런 재미없는 협박이었다. 원하는게 뭔지 몰라서 묻는 거니, 이 남자야? 래인은 하도 재미없어 하품을 쩍 하며 손가락으로 귀를 팠다. 자신의 말을 두고 완전히 개무시하는 래인 앞에서 드디어 무형이 성난 용처 럼 눈에서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 망할!! 입안으로 쌍욕을 하던 그가 사납게 래인의 어깨를 잡고 뒤챘다. "날 가지고 장난치지 말랬지? 그런데 감히 네가. 네가.." 아이고 맙소사. 순진한 남자하고는... 래인은 너무 열을 받아 말도 채 잇지 못하고 헐떡헐떡 숨이 넘어가는 얼굴을 한 무형앞에서 해죽해죽 속없는 여자처럼 웃으며 다정스럽게 그의 팔짱을 꼈다. "데릭. 아이, 자기~~ 왜 이렇게 내숭까고 그래요?" "내숭? 뭐, 머얏? 내숭이라니! 나더러 내숭이라니?~~~" 컥 하고 목이 졸리는 얼굴을 한 무형이 완전히 숨이 넘어갈 듯 이성을 잃어 버렸다. 차마 래인을 향해 주먹은 날리지 못하고 구둣발로 철책을 걷어차며 고 래고래 고함을 치기 시작하는 무형을 바라보다가, 래인은 이렇게 난리를 치는 그를 그대로 놓아두었다가는 소란죄로 두 사람이 경찰서로 끌려가게 될 것임을 깨달았다. 게다가 더 지독한 일은 약 50 미터 앞에서 이미 플래시를 비추며 경찰 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청춘 남녀의 사랑싸움에 관대한 홍콩 경찰이라고 해도 말이다. 공공기 물을 파손하는 사람에게까지 관대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아는 래인. 마음 이 은근히 급해졌다. 그래서 래인은 에라 모르겠다. 하고 급한 김에 자신의 입 술로 무형의 고함소리를 막아버렸다. 그리고는 기가 막혀 석화(石花) 현상을 일 으킨 무형을 향해 다 알면서! 하는 눈빛으로 생긋생긋 미소를 날리며 콕콕 그의 단단한 가슴을 찔렀다. "당신이 사랑한다는 여자 이야기를 많이 모아 주었잖아요! 그래서 날이면 날 마다 그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실연의 상처를 보듬고는 우수에 찬 실연남 흉 내를 내며 멋있는 척, 잘난 척 하라는 건데 왜 이렇게 화를 내냐고요. 내가 며 칠이나 고생해서 윤가린씨에 대한 모든 자료를 수집해서 보냈으면 감사하다고 말해야지.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요? 속으로는 좋으면서 괜히 그래!" "우..으..아.. 악악! 이, 이 망할 것이!!!~" 다시 이 남자, 헐크로 변해 난리를 치려는 순간. 래인은 갑자기 바닥에 픽 쓰 러지며 배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구르는 척 했다. "아이고, 배야!!!! 데릭. 나 배 아파 죽겠어! 아이고 엄마야! 래인이 죽어요 오!~~~~" 아무리 열받았다 해도, 자기 눈앞에서 사람이 배아파 죽는다 바닥을 구르는데 끝까지 화만 낼만큼 강심장인 사람이 있을까? 정말 이 여자가 지랄맞은 성질을 못 이겨, 혹은 그의 화산 같은 분노에 쫄려 심리적인 충격을 받아 혹시 위경련 이라도 일으킨 것은 아닌가 무형은 잠시 긴가민가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마음 만 먹으면 위경련은 물론 심각한 두통과 치통까지 일으킬 수 있는 재주를 가진 래인은 정말 실감나게 눈물까지 찔금찔금 흘리며 나 죽네!~~~~를 연발했다. 결국 살기등등하게 래인을 찾아와 완전히 요절을 내려고 작정했던 정무형. 자 기도 모르는 새 또다시 래인의 술수에 걸려 그녀를 등에 업고 차에로 달려가 그녀를 조수석에 눕혀두고 신호위반까지 해가면서 병원에로 달려가는 추태를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또다시 이래인의 잔머리에 정무형 참패. 아무래도 난 귀신에 홀린 것이 분명해. 밤에 그 생쇼를 하고 아파트로 돌아온 무형은 거의 넋이 나가 비틀비틀 침대 에 쓰러져 코까지 골며 정신없이 잠이 들어버렸다. 비로소 그의 정신이 맑아진 것은 아침 나절. 커피를 마시던 때. 갑자기 그는 용처럼 코로 입으로 커피를 뿜 어냈다. 오 마이 갓!! 그 계집애 순전히 나한테 추궁당할 것이 무서워 생쇼를 한 거 아냐? 냉철하기로 따지자면 걸어다니는 인간 컴퓨터요. 사람들이 등뒤로 감춘 속내 를 헤아리기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검은 용> 무형이 새파랗게 어린것 에게, 그것도 한 손으로 목줄을 틀어쥐면 그대로 꺾여질 것만 같은 야리야리한 계집애에게 한번도 아니고 번번이 발을 걸려 넘어져? 무형은 화가 나다 못해 어리석은 자신의 멍청함에 허탈해져서는 아구구, 하면 서 머리를 타조처럼 침대에 박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정무형이 한번 더 뒤로 넘어져 거품을 물 일이 또 생긴 것 이다.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하녀가 들어와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칭허 뮈렌.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무형은 반사적으로 벽시계를 올려보았다. 아침 일곱 시 사십 분. 손님이 찾아 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 아닌가? 게다가 감히 <검은 용>께서 휴식을 취하 고 있는 사저(私邸)에 겁도 없이 찾아온 인간이라고? "내가 이 시간에 손님을 만난 적이 있던가? 돌려보네." "정.... 정말 죄송합니다. 칭허 뮈렌. 하.. 하지만... 보통 손님이 아니셔서.." 집안의 모든 고용인이 이미 조부 정대인으로부터 래인이라면 이유 여하를 막 론하고 무조건 집에 들이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줄 모르는 무형은 이맛살을 찌 푸리며 느릿느릿 거실로 나섰다. "안녕? 자기?"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래인이 햇살드는 테라스 의자에 앉아 홍차를 홀짝홀짝 마시며 그를 향해 살랑살랑 웃고 있었다. 어젯밤에 당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새벽부터 집까지 쳐들어와 <자기>라는 코 맹맹이 소리를 흩날리며 눈썹을 깜빡깜빡하는 래인의 수작질에 완전히 돌아버 린 무형. 가당치도 않아 숨이 막힐 지경이 된 터로 래인을 향해 "당장 나갓!!~~" 하고 고함을 지르려는 찰나였다. 마치 입을 맞춘 듯이 하녀들이 이인 분의 아침 식사가 차려진 트레이를 밀고 거실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죄, 죄송합니다. 칭허 뮈렌. 손님께서도 조반전이라 같이 식사를 준비했는데 요." "아이, 배고파, 데릭. 고마워요, 아가씨들. 거기 놓아줘요. 자기이!~ 우리 아침 먹어야죠?" 마치 그 집의 안주인라도 되는 것처럼 래인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는 삿대질을 하려다가 하녀들 앞에서 품위없다 싶어 잠시 멈춘 무형 앞에 다가 와 아주 다정스런 동작으로 그의 팔짱을 턱 끼는 것이 아닌가?


순간적으로 석화(石化)가 된 것은 무형만이 아니다. 지금껏 사람들 눈앞에서 여자에게 그 팔을 내어준 주인을 본적 없는 하녀들도 마찬가지이다. 래인은 절대로는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 정무형이란 얼음 인간-오늘은 반드 시 기.필.코! 따먹고 만다! 수없이 맹세한 나홀로 연인을 향하여 치명적인 필살 기인 <여우 꼬리 살랑살랑 흔들기> 전법과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전법 을 능숙하게 구사한 후에 마지막 양념으로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무구 얼빵 얼굴가면을 쓴 배 째!>전법을 날렸다. "어제 정말, 정~~~말 미안해요. 내가 아프지만 않았어도 자기랑 같이 밤을 지 새우며 자기의 슬픈 실연담(失戀談)을 온몸으로 들어주고 위로해줄 수 있는 진 정한 우정을 보엿을텐데... 미안. 일이 그렇게 전개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자기. 일단 식사나 하고 우리 어젯밤에 하려던 일을 마저 하자구요. 그래서 내가 새벽 이 되자말자 달려온 거잖아. 자기이!~~" 참으로 듣자 하니 끈적끈적한, 듣기에 따라서 가능한 한 괴이하고 묘한 상상 을 하기에 충분한 래인의 한마디. 비로소 정신을 차린 무형이 다시 고함을 지르 려 하자말자, 냅다 래인이 다시 무형의 섹시한 입술을 향하며 막무가내로 입술 박치기를 해버렸다. 그의 머리통을 쥐어박을 듯이 오금까지 박아가며. "자기이! 키스할 때는 입 벌려라 그랬죠?" 분명 이 여자는 마녀가 틀림없었다. 아니면 전생에 그의 천적(天敵)이었든 지.... 저항했지만... 도대체 제어가 되지 않는 망할 여자의 막무가내 유혹 앞에서 대 체 어떤 사내가 당하랴? 어느새 점점 더 농밀해져 가는 래인과의 키스에 슬슬 빨려 들어가 이제는 적극적으로 그녀의 머리을 한 손으로 받쳐들고 그녀의 달 콤한 입술 안으로 자신의 혀를 거칠게 밀어넣으며 무형은 그런 생각을 했다. 왜 이 망할 여자 앞에서는 지겹도록 차가운 그의 냉엄한 이성이 작동하지 못 하는 것인지.. 난 아무 것도 몰라요 하는 그런 얼굴을 하고 무작정 저돌적으로 덤벼들어 그 의 염장을 질러대고 살랑살랑 웃어대는 이 여자. 시시각각 딱 죽여 버렸으면 하 는 생각이 하루에 열 두 번도 더 나는데, 이상하게도 또 이 망할 것의 웃는 얼 굴을 보면 그런 생각은 불 앞의 아이스크림처럼 흐물거리며 녹아버린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지 나에게 불리한 이야기는 절대로 안 들을래! 이런 얼굴 을 하고 있다. 무작정 그를 콕콕 찌르고 제 멋대로 그의 마음을 파헤치고 거칠 것 없이 그에게 다가오는 이 여자. 도대체 감당하기 버거운 이 여자의 존재. 젠장. 하지만 이 망할 것하고 하는 키스는 정말 좋구나. 두 사람의 거칠 것 없는, 노골적이고 민망한 모습에 새빨간 얼굴이 되어 서둘 러 사라지는 하녀들은 본체 만체 하고 무형은 래인의 입술을 거칠게 물어뜯으 며 그녀를 난짝 안아 자신의 침실로 걸어갔다. 그래, 네가 원하는 것이 이것이 라면 깨끗하게 이것으로 여기서 끝장으로 내자고 난 더 이상 너에게 휘둘리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젠장, 이 망할 것은 밥도 안 먹고사나? 몸무게가 내가 키우는 애완견 보다도 적을 것 같군. 좀 더 먹여서 살을 찌우지 않으면 날 제대로 받아들이기 라도 하겠어? 그리고 그는 뒷발로 문을 차서 닫았다.


"한번 해보자는 거야?" "못할 것도 없지! 어차피 여기에 내가 왜 왔겠어? 당신 따먹으려고 왔지!" 하찮은 짐 뭉치처럼 침대에 내팽개쳐진 래인이 한 팔로 비스듬히 누워 몸을 지탱한 후 그 앞에 선 무형을 향하여 눈 꼬리를 치켜 뜨며 앙큼한 어조로 쏘아 부쳤다. "당신만 그런 줄 아니? 나도 이판사판이야. 왜 이러셔? 아 그래. 좋아 당신 마음속에 든 연인 못 잊는다, 절대로 날 사랑 못한다 치자고. 하지만 말야. 당신 하고 사랑 못해도 좋은데 그냥 물러나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 못해. 당신을 단 념할 때는 단념하더라도 끝장을 보고 가야겠어.' "이 망할! 입 닥치지 못해? 그래서 날더러 어쩌라는 거야? 날더러 어쩌라고 너, 이런 식으로 날 미치게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엉?!" 고함지르는 무형의 시퍼런 빛이 튀기는 눈빛을 올려다보던 래인. 갑자기 용수 철처럼 몸을 일으키더니 무형의 셔츠 깃을 확 잡아 당겼다. 여자의 힘이라고는 하나 방심하고 있던 터라 무형은 얼떨결에 그녀의 몸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래 인이 자신의 입술 가까이 다가온 무형의 잘생긴 귀를 꽉 깨물었다. "하잔 말야!" "뭐, 뭣?" "하자고! 단념할 때는 단념하더라도 일단 당신 따먹어야겠어. 여자가 자기 마 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알어? 평생 가도 한번이 힘들어! 이 남자야. 그러니까 당신 바라는 대로 내가 당신 단념해 줄 테니까, 귀찮게 안할 테니까. 해. 해줘. 당신을 한번이라도 가져봐야 내가 한이 풀리겠어. 나랑 하잔 말야!" 다치지 못해 안달하는 너. 나에게 상처받고 싶어 죽을 만큼 노력하는 너, 결 국 나에게 유린당하고 버림받으려고 작정하고 덤벼드는 너. 함부로 그의 상처인 가린에 대하여 건드리고 겁도 없이 그것을 그에게 들이 미는 여자. 죽을 만큼 패버렸으면 딱 좋은 이 건방진 계집애. 그런데 왜 미치 도록 사랑스럽게 보일까? 왜 이 팔 안에 가득 담고 오래도록 너의 몸에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너의 달콤한 샘물을 마시고 싶다는 욕망으로 내가 떨고 있을 까? "알아? 넌 아마도 전생에 나를 지독히도 괴롭히던 웬수 덩어리였을 거다." 무형은 가운 속에 작은 손을 밀어넣고 단단한 그의 근육을 음미하는 래인을 내려다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도 저도 아니면 어지간히도 그의 피를 빨고 다닌 모기나 빈대가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더 분명한 한가지는, 그때도 지금처럼 그는 꼼짝못하고 그녀에 게 피를 빨렸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처럼... 무형은 래인의 청결하고 보드라운 붉은 입술에 깊숙이 자신의 그것을 밀어넣 으며 그녀의 몸을 감싼 옷가지를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이판사판? 그도 마찬가지였다. 이 망할 여자의 입술을 맛보는 순간부터 시작된, 배출을 욕망하는 무서운 아 랫도리의 욕구불만을 해결하기 전에는, 막무가내로 짓밟고 괴롭히고 망가뜨려서 그의 몸 아래서 흐느끼며 애원하는 래인의 건방진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그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닫힌 채 오래도록 열리지 않던 문이 마침내 열린 것은 오후 무렵. 형편없이 지친 얼굴을 한 위대하신 검은 용님께서 머리카락에 뚝뚝 흐르는 물기를 털며 비로소 모습을 나타내셨다. 그는 비틀비틀하는 걸음걸이로 침실에 서 나오더니 다 식어빠지...지는 않은(- 왜냐하면 하녀들이 혹시나 해서 십 분마 다 한번씩 음식접시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아침식사 (점심 아냐?) 트레이를 끌 고는 다시 침실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은 그 다음날 아침이 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왜 안 먹어요? 자기? 맛만 있구먼, 먹어야 힘이 나지." 냠냠냠 맛나게도 갓 구운 빵에 듬뿍 딸기쨈을 바르고는 보기에도 즐겁게 아 침식사를 하던 래인이 멍하니 커피 잔만 들고는 그녀를 괴이한 눈빛으로 바라 보는 무형에게 톡 쏘았다. 월요일이다. 출근을 해야하는 무형은 단정한 양복 차 림. 그리고 창피하게 남자의 집에서 외박을 한 래인은 헐렁한 무형의 가운을 알 몸에 걸치고 있었다. "이야기 좀... 하지." "먹고 나서. 먹을 때는 개도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랬죠?" 래인이 짜증난다는 듯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톡 쏘았다. 냉담한 얼굴을 하 려고 애를 쓰기는 하는데, 어쩐지 불안한 빛을 감추지 못하며, 대체 먹고 나서 이 여자가 지난밤의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또 그의 뒷통수를 후려박을까 눈치 를 살피는 무형의 눈빛은 아랑곳하지 않고 래인은 마음껏 맛난 음식을 즐겼다. 사랑을 하는 데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는 것을 그녀는 어제 몸소 체 험한 것이다 앞으로는 절대로 굶고서는 남자와 사랑을 하지 않으리. 하물며 그 녀의 사랑스러운 연인 검은 용의 지칠 줄 모르는 스태미너와 정력을 감당하자 면 그녀는 아마도 앞으로 뱀탕이나 보신탕을 즐겨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나더러... 책임져라 하지 마. 네가 원한 거잖아?" "알아. 안 해!" 래인은 커피를 마시며 언제 그 말을 할까 눈치를 살피던 남자의 궁상맞은 한 마디에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무엇인가 난처하고 불편한 지. 자꾸만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 락을 쓸어올리며 그녀의 눈을 피하려는 그녀의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한마디만 물읍시다." "뭐?" "나 애인으로 끼고 자기 괜찮았어?" 어흑!! 입이 막히는 모양이다.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남자라곤 그 몸에 한번 도 받아들인 적 없는 오리지널 숫처녀 이래인. 오늘 아침에는 온 몸에 남자의 따가운 수염과 입술이 남긴 붉은 흔적을 그 몸에 가득 붙인 채 부끄러움도 없 이 묻는 것이 이랬다. 무형은 이 여자가 정신 나간 것 아냐? 이런 얼굴로 그녀 의 뻔뻔한 얼굴을 아래위로 훑었다. "처녀치고는 뭐,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고 해두지." 지나치게 뜨겁고 지나치게 나에게 잘 맞아 탈이지. 젠장. 그는 그 말을 덧붙 이려다가 속으로 욕을 하며 그만 두었다. 게다가 순진하고 여릿한 그 몸을 하고 도 선수인 그를 미치게 할 정도로 마구 조여대는 데는 정말 숨 넘어가는 줄 알


았지. 순식간에 중독이 될 정도로 매혹적인 몸을 가졌다고는 절대로 저 망할 것 에게 말 못한다. 지금도 가운의 허리띠만 당기면 드러날 아름답고 하얀 몸을 안 고 미친 듯이 질주하고 싶다고도 절대로 말 못한다. "음.. 그래요? 다행이네."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요새는 처녀들이 사내에게 제 순결을 내주고 그렇게 뻔뻔하게 되묻는 게 유행이야?" "뭐 어때? 이왕이면 내가 남자에게 멋진 느낌을 주는 여자라는 것이 훨씬 좋 지. 새 애인 찾기도 좋잖아. 그 남자도 나랑 같이 자면 당신처럼 끝내준다고 하 겠지?" 커헉!! 무형이 커피물을 코로 게워냈다. 래인은 왜 그래? 하는 어리버리한 얼 굴로 무형을 응시했다. "왜 그래? 당신은 나 싫다며? 나 사랑 안 한다며? 책임 못진다며? 그래서 내 가 새 애인 찾겠다는 데 그것이 그렇게 충격이야?" "망할!! 너 그게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감히 네가 지금 내 앞에서, 딴 놈하 고 뒹굴겠다고 말하는 거야?" "그게 뭐 어때서?" 그날 래인은 사람의 눈과 입과 코에서도 새파란 불길이 화르르 새어나는 것 을 처음 보았다. "잘 들어! 이 망할 여자야! 죽고 싶으면 그 짓을 감히 해봐! 내가 안은 여자 가, 천하의 검은 용인 나 정무형이 안은 여자가 다른 놈의 정액받이가 된다고?! 그런 생각조차도 하지마! 딴놈하고 눈이라도 마주치기만 해봐, 이 예쁜 머리통 을 짓이겨놓을 테니. 그 개자식은 아주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겠어!!" 시퍼런 불길을 확확 내뿜으며 펄펄 뛰는 무형을 향해 래인이 아무렇지도 않 게 코를 후볐다. "어머머, 그러니까 이것은 무슨 말이니? 즉 이 발언은, 내가 절대로 다른 남 자에게 가면 안 된다. 안기기는커녕 눈도 마주치면 안 된다. 나는 앞으로 계속 해서 당신에게만 안겨야 하는 거다 즉, 당신만이 나에 대하여 독점권을 행사하 겠다고 나서는 말씀이니?" 천하의 정무형. 제 발로 끄덕끄덕 걸어 들어가 구백미호 이래인에게 목줄 들 이밀고 코가 꿰는 순간이었다.

<20> 우리는 연인 - 사랑싸움도 한다네 귀찮다 폼을 세우며 잘난 척 해보았자 그래도 너 남자지? 깨끗하게 떨어져 주는 조건으로 한번만 같이 자자는 데 고자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거절하겠어? 하지만 말야. 싫든 좋든, 나한테 일단 따먹히고 나면 넌 내 손아귀 새다. 이 남자야.


유난히도 자존심 강하고 고귀하신 위엄을 갖춘 검은 용 님의 그 잘난 소유욕 과 자긍심을 미루어 보면 말이다. 자신이 안은 여자에 대하여 애정 같은 것은 손톱 끝만큼도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자신이 처음 차지한 여자가 다른 사내에 게 안기는 것을 좋아할 리는 없을 것이다 래인은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추측은 불행하게도(!!) 정확했다. 그리하여 그날 이래인의 도박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 것이다. 네가 날 버리면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날자 말자 다른 놈을 찾아 진탕하게 노 골적으로 몸 비비면서 뼈와 살을 태울 테다. 네가 딴 여자랑 바람 피워도 마찬 가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한번 해 보자고! 소위 말해 격장지계의 전법. 만약 그것이 잘 안 먹히면 삼십 육계 줄행랑도 있지 않아?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을 하고 먼저 몸을 던져 그 남자에게 덤빈 이래인. 비록 보드랍고 은밀한 그 곳은 좀 쓰라리고 아프지만, 그 남자에게 휘둘리고 깨물린 젖가슴이며 허벅지는 다소간 좀 보기 민망한 흔적이 남았더라 해도, 뭐 소중히 간직한 순결을 잃어버린 것은 좀 아쉽다 해도 어찌되었건 그녀는 정무 형이란 커다란 용을 단번에 낚아 그 남자의 연약한 목줄을 작은 손에 드디어 틀어잡게 되었으니 손해는 아니다. 집으로 돌아온 래인은 일단 하루 낮으로도 모자라서 그날 밤까지 꼬박 새우 며 그 남자에게 적응하고 길 좀 들이느라 피곤하고 지친 몸을 침대에 내 던지 고 쿨쿨 잠을 잤다. 원기 회복에는 뭐니뭐니 해도 잠이 최고인 것인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솔직히 깊은 잠에 들지는 못했다. 꿈속에서도 그녀는 계속해서 그 남자에게 안겨 난생 처음 경험한 그것. 황홀한, 동시에 끔찍한... 격렬한, 동시에 부드러운..... 몸이 찢어지는 고통. 그러나 동시에 몸이 분해되는 쾌락의 그것들로 온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고 흥분하고 달콤하게 흐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를 소유한 그것. 그 남자가 그녀에게 준 흔적은 너무나 깊고 치명적 이고 잔인해서 - 절대로 그를 그녀 인생에서 몰아내지 못하게 뜨거운 불로 지 져버린 화인(火印)이어서, 래인은 잠을 자면서도 그것의 달콤한 가시에 찔려 꿈 자리를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직 하나. 래인은 무형의 것이 되었지만, 동시에 무형 또한 래인의 것이 되었다는 사실. 래인은 꿈속에서 울다가 웃다가 절망했다가 행복에 겨워 비명질렀다. 그녀는 검은 용의 성처(聖妻)가 될 것이다. 그의 후계자를 낳을 것이다. 그는 그녀의 것, 그는 그녀의 인생. 그는 그녀의 모든 것. 그는 그녀의 남편이지 보호 자이자 친구가 될 것이며 그녀의 큰아기가 될 것이고 무엇보다 그녀의 영원한 연인이 될 것이다. 그 것은 봇물이 터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단 래인에게 뒷다리를 잡힌 정 무형. 그 역시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이 든 것 일까? 어차피 갈 데 까지 간 사이. 맘 맞아 잠시동안 즐기면 안 되는 일이 무엇 있으랴 이런 생각이 들었나 보다. 그날 이후부터 두 사람은 기회가 생기면 서로 에게 안겨 서로를 탐닉하기에 정신이 없어진 것이다.


한국에 왜 가? 애인하고 연애걸어야지 유람선 여행? 좀 있다가. 확실하게 자빠뜨린 애인을 길들여 쓸만한 사람으로 좀 만들어놓고도 새로운 꽃미남 사냥을 떠나도 늦지는 않으리라. 래인은 무형의 아파트 침대에 드러누워 스케치를 하며 느긋하게 미소지었다. 치명적인 중독. 무형에게 있어서도 래인은 그랬다. 한번 맛을 본 그녀의 모든 것은 냉철하고 차가운 그의 이성을 혼미하게 만들 고 방심하게 만들고 그리고 망각하게 만들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남자하고 자는 맛을 알아버린 처녀 래인이 어 찌 된 것인지 더 밝혀 날뛰는 통에, 너무 잘난 검은 용 무형께서 나이 어린 연 인을 만족시켜주느라고 힘을 다 뺀 통에 홀쭉해진 얼굴로 다리를 후들거리며 사무실로 출근하는 불상사가 생길 정도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도 그 날이 었다. "돌아왔습니다. 칭허뮈렌." "잘 돌아왔어. 수고했군." 욕조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이 앞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자욱하게 안개인 듯 서린 욕실. 그가 돌아오면 주인이 어디에 있든 들어오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던지라 하녀 는 검은 옷을 입은 사내를 한시간 전에 주인이 아가씨를 안고 들어간 침실 안 의 욕실로 안내했다. 척이었다. 무형의 명령을 받아 태국과 미얀마의 마약지대에 혹시 숨어 들어갔 을 지도 모르는 홍쉬핑을 추적하기 위한 행동대원들을 이끌고 작전을 수행하러 갔던 그가 돌아온 것이다. 보통의 서민 아파트 크기 만한 호화스런 욕실은 크게 마사지를 받기위한 침 상이 놓인 작은 대기실 겸 휴게실. 핀란드 소나무로 만들어진 사우나 부스. 그 리고 엷은 방수천으로 가려진 한 계단 높은 곳에 위치한 욕조로 이루어져 있었 다. 욕실 안의 불빛도 희미하고 자욱하게 김까지 서려 있었지만, 그러나 눈이 밝은 척은 장막으로 가리워진 저 안쪽의 욕조 안에 드러누워 있는 주인이 어떤 여자를 벌거벗은 가슴에 끌어안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욕조를 가린 장막이 반쯤 열리고 나신의 무형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 며 바닥에 한발 내려섰다. 그가 척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내 가운을 좀 주겠나?" 물기 뚝뚝 떨어지는 건장하고 아름다운 사내의 알몸. 사내인 척이 보아도 눈 부실 정도로 균형잡히고 단단한 마치 조각같이 아름다운 무형의 몸. 그러나 그 의 등에는 바라보기만 해도 소름끼칠 정도로 적나라한, 예리한 칼로 난도질당한 무서운 흉터자국들이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공손한 자세로 척이 무형의 가운을 입혀주었다. 무형은 힐끗 아직도 혼자 욕 조 안에서 물장구를 치는 여자의 희미한 나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루종일


그림을 그려 근육이 뭉쳐 아파 죽겠다고 어리광 피우는 래인의 피곤을 풀어주 기 위해 마사지사를 불렀다. 그리고 뜨거운 물 안에서 그녀의 근육을 풀어주기 로 했지만, 그 안에서 한 것이라고는 언제나 둘이 붙기만 하면 미친 듯이 탐닉 하게 되는 격렬한 섹스였을 뿐이다. "데릭. 나 오렌지 주스." 마치 아기처럼 칭얼거리는 래인의 목소리가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 무형은 싱 긋 입가에 미소같은 것을 머금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그가 척에게 고개를 돌렸 을 때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미 보고는 들었어. 그 쥐새끼는 사라지고 없더라고?" "네. 송구합니다. 칭허 뮈렌." 무형은 탁자 앞으로 다가가 의자에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잘 했어. 그 정도의 시위면 홍가 놈을 도와주려는 미친놈은 이제 없 을 거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어차피 숨어버린 놈을 이 바닥에서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게다가 그 놈은 홍가의 실세였어. 자기가 도망갈 구멍쯤은 수십개 마련할 수 있는 놈이라고. 그 놈을 초조하게 하고 쉬지 못하게 만들어야 언젠가 는 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겠지. 그 놈을 추적할 암살단을 선발해." 그의 등뒤에 서서 수건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말려주던 척이 네. 하고 짧게 말 했다. "일본의 하나죠가 본토의 이권 문제로 두령의 회담을 제의했다." "아, 그렇습니까?" "회담을 받아들이는 대신, 충칭의 그 일에 관련된 조직의 두목들을 전부 끌고 오라고 해. 그게 우리 조건이다." "알겠습니다." 무형은 바라보기만 해도 손이 베일 것 같은 하얀 웃음을 이 사이로 물었다. 지독히도 요악(妖惡)하고 시린, 어쩐지 엄청난 피바람이 불 것만 같은 그런 미 소. "그 것들은, 죽여." "네." "그리고 그 모가지는 가족들에게 소포로 보내." 마치 아침밥 메뉴를 정하듯이 무형은 아주 쉽게 살인을 지시했다. 그 것으로 십 오년 전, 그가 당한 참혹함에 대한 빚은 전부 청산되리라. 하녀가 시원한 음료가 담긴 트레이를 끌고 나타났다. 무형은 크리스털 병에 담긴 오렌지 쥬스를 잔에 따르며 덤덤하게 말했다.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야? 퉁퉁 불어서 터져 버릴걸?" "뭐야? 나더러 외간 남자 앞에 알몸을 하고 나타나란 말야?" "척은 외간 남자가 아니다. 나의 다른 몸이지. 나와, 래인." 고집스런 침묵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두 사람이 알몸으로 엉켜있는 욕실까 지 사람을 맞이하는 염치없는 그의 옆구리를 어지간히도 꼬집은 래인이었다. 아 마도 그의 옆구리는 시퍼런 멍이 들어있으리라. "나오지 그래? 래인. 이 정도까지 왔는데 아직도 안 어울리는 수줍음을 떨 거 야?" 무형은 한숨을 쉬고는 래인의 가운을 집어들고는 욕조의 장막을 확 제쳤다. 깜짝 놀란 얼굴을 한 래인이 비명을 질렀다. 까딱했으면 앞으로 성처가 되실 고귀한 여인의 알몸을 보는 불경을 저지를 뻔한 척이 재빨리 몸을 돌이켜 시선


을 피하는 것이 보인다. "뭣하는 짓이야?!" "나오라고, 난 오늘밤에 퉁퉁 부풀은 찐빵 같은 여자를 안기 싫다." 바라볼 땐 그다지 크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커다란 손에 딱 들어 오는 알맞은 크기. 탄력좋은 공처럼 잡으면 퉁겨나갈 것만 같은 탐스럽고 어여 쁜 젖가슴을 두 손으로 끌어안으며 래인이 이 변태야!! 하고 고함을 질렀다. 무형은 가소롭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 떴다. "변태?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그가 씩 사악하게 웃었다. "허기는 아버지나 할아버지 다 그러셨다고 하더군. 검은 용의 잠자리에 들어 오는 여자는 절대로 홀로 두면 안된다고. 사내가 가장 무방비할 때는 바로 그때 이거든. 그래서 검은 용의 침대 곁에는 늘 유모와 경호들이 지키고 서 있지. 나 랑 같이 계속해서 이러고 싶다면 너도 그것에 익숙해져야 할걸?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침대에서 섹스하는 것 말이지" 거친 동작으로 무형이 팔을 내밀어 래인의 어깨를 잡아 자신에게로 끌어올렸 다. "나가." "네. 칭허 뮈렌." 척이 돌아보지도 않고 짧게 말하는 무형의 명령에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화 급히 문을 열고 사라졌다. 무형은 거칠게 래인의 목덜미에 이를 박으며 물이 뚝 뚝 떨어지는 여체를 안아 맛사지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그리고 무어라 말할 사 이도 없이 그녀의 하얀 두 다리를 양손으로 잡아 벌려 자신의 허리에 감고 벌 어진 꽃잎 같은 그녀의 몸 안으로 깊숙하게 파고 들어갔다. 래인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비명 같은 신음 소리가 마치 그를 더욱더 달구는 최음제라도 되는 그는 거칠게 몸을 움직이며 그녀를 천국으로 다시 몰고 갔다. "내 후계자를 낳아. 래인" 침대에 지친 얼굴로 엎드려 누운 래인의 등줄기를 손가락으로 섬세하게 쓰다 듬으며 무형이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마도 자정 무렵이었을 것이다. "다른 여자에게서 아이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 네가 낳아." 래인은 독사처럼 고개를 발딱 치켜들었다. 그녀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고 그 에게 삿대질을 했다. "피임하는 거 잊지 말라고 내가 그렇게 주의 줬는데 또 잊어버렸단 말야?" "아이, 내 아이 낳으라고. 래인." 이 여자가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거야, 뭐야? 검은 용의 위대한 책무 중 하나 인 후계자를 볼 자궁으로 그녀를 선택했으면 좋아서 감격의 눈물이라도 흘려야 지. 무형은 약간 신경질 적으로 소리쳤다. "내 말 못 들었어? 아이를 낳으라고!" "내가 왜?" 검은 눈을 말끄러미 치켜 뜨고 되묻는 래인 앞에서 말문이 막힌 것은 무형이 었다. "내가 지금 몇 살인데 애를 낳으라는 건데? 양심이 있으면 그런 말을 하면 안되지 당신! 내 인생의 계획이 얼마나 찬란한데 지금 나더러 아이를 낳으라는 거야? 그렇다고 나하고 정식으로 결혼할 것도 아니면서, 지금 무슨 망말이니,


당신?" 다다다 쏘아부치던 래인이 말을 하자 더 화가 난다는 품으로 발딱 일어나 삿 대질을 해댔다. "이게 지금 사랑하는 연인을 대접하는 당신만의 방식이얏? 진짜 웃겨! 결혼도 안 해 주면서 나더러 미혼모의 신분으로 사생아를 낳으라니. 어쩜 그렇게 당당 하게 뻔뻔하냐?" "그게 뭐가 어때서?" 무형은 태연하게 되물었다. "너 같이 평범한 여자에게서 내 후계자를 보겠다는 결심이 나로서도 쉬운 줄 알아? 우리 장로들이 들었다면 하늘이 무너질 일이야. 영광인 줄 알아야지. 검 은 용의 피를 받은 아이를 네 몸으로 낳는다는 것은 네 일생의 책무야." "웃기고 자빠졌네! 못해! 딴 년 알아봐!" 래인은 딱 잘라서 거절했다. 이 망할 남자가 며칠 좀 봐주었더니 금새 기어 오르려고 해? 웃기시네. 주제에 나더러 미혼모가 되어 사생아를 낳으라는 요구 를 무슨 큰 은혜 베풀 듯이 말하고 있잖아? 구역질나게끔... 이 인간 버릇을 좀 가르쳐줘야겠군. 너무나 당돌하고 딱 자르는 래인의 거절에 무형의 눈썹이 활처럼 휘었다. "못해?" "못해!" "싫어도 해야할걸?" "미쳤어?" "한달, 아니 두 달 주지. 임신해. 내 아이를 낳아. 만약 거절하면 네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주지."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섞이지 않은 낮은 목소리. 화딱지가 난 래인이 손톱을 치켜들고 무형에게로 덤벼들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래인의 손톱에 무형의 단단 한 볼에 손톱 자국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난생 처음, 여자의 손톱에 할퀴어져 피를 본 정무형. 너무나 황당하고 기막히고 자존심이 상한 채 래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 이..망할 것! 정말 고루고루 하는군. 감히 내 얼굴에 손톱 자국 내놓고 무 사할 줄 알았어? 정말 버릇을 고쳐야겠군! 다시 한번 내 앞에서 말에 토달고 손 톱 치켜 들어봐, 죽여버릴 테니!" 귀엽다 보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무형의 눈빛이 시퍼렇게 불이 돋았다. 단 한번도 누구에게도 이렇게 자신을 건드리고 다가오도록 방심한 적 있었 나? 래인에게 분노한 것 반은 바로 무형 자신에게 가는 것이다. 언제 그가 이렇 게 이 여자에게 많은 것을 허용했던가? 어느새 그는 이 여자를 마음속으로부터 생의 반려로 인정하면 어떨까 생각했었고 마음에 잠시 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거절당했다. 바람 소리가 나도록 세차게 무형의 손이 래인의 빰에 작열한 것은 바로 그 순간. 목이 꺾이도록 그에게 세차게 따귀를 얻어맞은 래인. 눈에 눈물이 핑 돌 았지만 끝까지 지지 않고 핫! 하고 실소를 머금었다. "말로도 논리로도 안되니 폭력인가? 정말 재수없는 남자군! 난 나를 존중하지 못하는 남자하고는 못 사귀거든. 내가 아무리 당신에게 목매달고 사랑한다 해도 말야, 자존심도 없는 줄 아니? 이봐요, 데릭. 우리, 쫑 깝시다. 끝장 내자고!" "닥쳐!"


분노한 무형의 주먹이 래인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침대의 헤드보드에 가서 박힌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21> 단단한 달덩이 깨트리기 와장창 무엇인가 깨어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도 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5 분 후, 단 한번도 태풍을 맞은 적 없는 검은 용님의 사저. 그것도 가장 은밀한 침실이 지금 말도 아니게 난장판이 되는 참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맞은 적이 없는 래인. 남자에게, 그것도 사랑 하는 연인에게 연약한 몸을 하고 따귀를 얻어맞은 것도 서러운데 이 인간이 끝 까지 그 더러운 성질머리를 감추지 못하고 또다시 폭력을 행사해? 정무형, 너 오늘 죽. 었. 어. 열을 받은 이래인. 힘이 약하니 대놓고 그를 팰 수는 없었다. "넌 주먹이지? 하지만 난 튼튼한 이가 있다, 이 망할 자식아!" 앙칼지게 눈을 치켜 뜬 그녀는 냅다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무형에게 달려들어 강철처럼 튼튼한 그의 팔뚝을 꽉 물어뜯어 버렸다. "아얏! 이, 이 망할!!" 어지간한 아픔 따위로 무형은 비명 같은 건 지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건 여자 에게 그것도 방금까지 침대에 같이 누워 정열적인 사랑을 나눈 연인 래인에게 당한 것이 아닌가? "이 망할 것이! 너 정말 죽고 싶은 거야?" 정말 이상한 일이다. 길길이 날뛰며 삿대질하고 고함을 치면서도 어쩐지 후련 하고 즐겁다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영문일까? 그녀의 하얀 볼에 붉은 자국이 남는 순간부터, 그녀의 검은 눈에 눈물이 잔뜩 맺히던 그 순간부터 후회는 시작되고 있었다. 무엇을 보듬어주고 안아주고 위로 하기보다는 파괴하고 더럽히고 피를 묻히는 것에 익숙한 그의 손. 그것이 결국 은 이 사랑스러운 여자에게도 바람소리를 나며 날아가던 순간, 무형은 자신의 본성 속에 숨은 지독한 어둠의 뿌리. 격하고 폭력적인 성향을 더욱더 절망하고 있었다면 과연 누가 믿을까? "이 씨.. 죽여 버릴거얏!~~~~" 정말 이 여자가 미치긴 미쳤나보다. 그를 물어뜯어 피를 낸 것도 모자라서 분해서 어쩔 줄 모르며 펄펄 뛰더니 래인은 냅다 침대 가까이 놓인 수만 달러 짜리 명 대(代) 골동품 도자기를 들어 바닥에 던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으 로도 모자라 래인은 길길이 날뛰며 눈에 보이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그의 침실에 놓인 물건들을 전부 걷어차고 던져버리고 난리를 부렸다. 그녀가 덤벼들기는커녕 오들오들 떨며 저항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질질 눈물 만을 흘리고 있었다면 기분은 더 더러워졌으리라. 이렇게 차라리 그녀가 그에게 덤벼들어 물어뜯고 방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는 불같은 성질을 지닌 것이 무 형은 오히려 좋았다. 그가 가장 아끼는 15 세기 골동품 크리스털 문진을 들어 냅 다 래인이 화장대 거울을 날려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ㅡㅡ;; "여자는 안 때린다며? 엉? 치사하게 뒷골목 양아치가 아니라면서? 근데 날 왜 때려? 왜 때리느냐고오!~~" "아 그것? 뻥이었어"


펄펄 뛰는 래인을 향해 무형은 순진하게 그 것을 믿었냐는 듯이 자신의 말을 뻔뻔하게 뭉갰다. "이제 그만 해. 시끄러우니까." 한눈에 보기에도 무지 비싸 보이는 골동품 서너 개를 그 남자의 정강이를 까 듯이 작살내고 탁자에 올려진 것들을 다 손바닥으로 쓸어 박살을 내고 나서 또 무엇을 해치울까 두리번거리는 래인에게 그 남자 하는 말이 그랬다. 패 죽여도 시원찮을 망할 남자 같으니라고. 그래 니 주먹 센 줄 내 안다! 이 자식아. 주먹으로 냅다 침대 헤드보드를 내질러 뻥하고 구멍을 뚫은 것으로 충분히 자신의 분노를 발산했는지,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일어나 장식장의 술 병을 꺼내온 그 남자. 난리 블루스를 치는 그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침대에 아 무렇게나 놓여진 래인의 잠옷을 휙하고 던졌다. 잠옷은 정확하게 그녀의 머리에 맞아 바닥에 떨어졌다. "입어. 발가벗고 난리치지 말고." "왜 당신 맘대로 해?! 뭘 믿고 날 맘대로 하는 건데? 엉? 내가 당신 애 낳는 도구냐? 뭘 믿고 그따위 말을 함부로 하는 거얏?~~~~" "일분 후에 내 부하들이 이 침실로 뛰어들어올 건데 네 알몸 보여주고 싶으 면 계속하고." 술병을 열어 병째로 두어 모금 쉬지 않고 마신 무형, 마치 밥이나 먹자는 어 조로 내뱉었다. 허리에 팔을 걸치고 그를 잠시 노려보며 이를 갈던 래인, 가운 을 줍는 대신 척척 옷장 쪽으로 가더니 문을 활짝 열었다. "말리지 마! 난 이 집을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 그리고 당신. 내가 분명히 말해 두는데 난 맞고서는 못살아! 알아들어?!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하 고 나는 쫑깐 거야! 난 이 길로 나가서 아무 남자나 잡아서 같이 자고 바람 확 피워버릴 거야! 당신같이 포악하고 잔인하고 매너없는 남자는 안 키우겠다고!!" 무형이 말한 대로 그의 침실 문이 열리고 척을 비롯한 부하들이 달려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일분 후. 그러나 그들은 문 앞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석 상이 되어 눈알만 굴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방안. 깰 수 있고 어지를 수 있는 것은 전부 내던지고 박살을 내버린 침실에서, 그들의 주인 이 무형이 어제까지만 해도 장중보옥처럼 아끼고 바람이 불세라 비가 올세라 애지중지하던 래인 아가씨의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가서는 사납게 침대에 내팽개치는 광경을 목격해 버린 것이다. "저, 저, 칭허 뮈렌." "아무 일도 아니다. 나가." 주인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럽고 나직했다. 그러나 그의 성질머리를 아는 부하 들 등골에는 식은땀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 정말 화가 나면 무형의 목소리는 더 부드러워지고 더 침착해지기 때문이다. "안 들리나? 나가라고 했다!" 무형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침대에 내던진 래인의 몸을 누가 보든 말든 타고 올랐다. "다시 한번 말해봐." 잔인한 성질머리가 터진 주인에게 어떤 봉변을 당할까 두려워하며 부하들이 우르르 몰려나간다. 무형은 아주 부드럽고 섬세하게 손가락으로 래인의 얼굴선


을 따라 내려가며 다시 한번 나지막하게 물었다. "이 집을 나가서 뭘 어떻게 해?" "당신하고 쫑 낸다음 이 집 다시 안 온다고 했어, 왜? 다른 남자 찾아서 바람 핀다고!!~~~~~~~~" 래인이 고래고래 소리지른다. 무형은 아주 조용하게 웃었다. 손을 대면 벨 것 만 같은 새하얀 미소. 바로 검은 용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정복해아? 하는 자신의 적에게 보여주는 미소. 그가 래인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넌 내 아들을 낳을 거다. 그리고 평생 이 집에서 한발자국도 못나가게 될 거 야. 내 약속하지. 다른 남자를 만나? 나 아닌 다른 수컷이란 TV 화면에서나 보 게 되겠지. 이 세상물정 모르는 철없는 아가씨야. 네가 너에게 싫증나면 우리 관계가 끝나는 거야. 그건 네 결정사항이 아니라고!" "망할 자식! 뭐든 제 마음대로 해!" 무형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다물지 않고 종알거리는 건방진 래 인의 입술을 깨물어버렸다. '네 버릇을 내가 어떻게 가르치는지 보여주지. 오늘이 지나면 넌 나에게는 반 드시 복종만 해야 한다는 것을 법을 배우게 될 거다. 이 건방진 여자야!" 서로에게 분노한 것은 사실 서로에게 열광하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오직 서로에게만 상처받고 서로의 존재와 말 한마디 때문에 감정을 상하고 가 슴이 아프고 화가 나는 것은.... 서로에게 있어 서로가 오직 유일한 그 단 한사 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젠장, 날 가만 안 둬? 하지 말란 말야! 주먹 휘두르고 나서 몸으로 비비면서 용서바라는 남자 난 무지 경멸한단 말야!" 래인이 몸부림치며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무형이 그녀의 예쁜 귓볼을 살며시 혀로 핥았다. "미안해서 어떡하나? 난 그게 취미생활인데..." 그것은 가장 잔인한 고문이다. 아니 가장 관능적인 벌이기도 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서로의 입술에서 떨어 져 헐떡이며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아까는 왜 서로 싸운 거지? 무엇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죽이지 못해 난리를 부린 것일까? 아까는 왜 서로를 죽이고 싶도록 증오스러웠을까? 이토록 사랑스러운 사람을 두고서..... "이.. 이번 한번만이야! 다.. 다시는 국물도 없어! 나에게 주먹 휘두르기만 해 봐라! 죽여 버릴 거야!" 래인이 끝까지 자존심을 세우려는 듯이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찌르며 짱하 니 고함을 쳤다. "명심하지, 아가씨. 하지만 그 전에 난 할 일이 있어!" 몸을 일으킨 무형은 인형처럼 그에게 매달린 래인의 두 손을 침대 헤드보드 에 묶었다. 그리고 뒤에서부터 그녀의 몸을 타고 올라 그녀를 단번에 관통했다. 강제로 능욕당하는 노예의 모습을 하고 거대한 그를 마음껏 받아들이며 래인이 미칠 지경으로 쾌락에 젖어 온 몸을 비틀며 신음한다. "날 죽일 참이야!~~~ 제발, 데릭!~~" 래인이 히스테릭하게 소리질렀다. 그러나 그는 땀에 젖은 그녀의 젖가슴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비틀며 잔인하게 미소지었다.


"아직 멀었어! 이 망할 것아. 아직도 넌 내게 더 당해야 한다고!" 그는 어쩌면 전생에 사디스트였는지도 모른다. 비명지르며 앙탈하는 그녀의 모습이 더 사랑스러워 보이니 말이다. 무형은 매끄러운 래인의 어깨에 단단한 이를 박으며 고함질렀다. 그녀가 반항하면 할수록, 앙탈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더 큰 자극을 느낀다는 것을 이 망할 여자는 꿈에도 모르겠지. 그래서 그가 더 욱더 그녀에게 눈을 뗄 수 없다는 것을, 그녀가 더욱 더 사랑스러워진다는 것 을. 빅토리아 거리에 있는 정대인의 저택에서도 난리가 난 것도 바로 그 시간이 었다. 무형의 아파트 다른 방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곤히 잠을 자다가 졸지에 주 인의 침실에서 들려오는 날벼락 같은 소란통에 소스라쳐 깨어난 척이 건 한 통 의 전화 때문이었다. -방 문 안의 일이 어쩐 지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폭주하기 시작한 검은 용님 께서 래인 아기씨를 죽이려는 것 같다. 지금 살기어린 분위기가 장난 아니다. 어헉, 방금 래인 아가씨가 비명을 질렀다. 헉스! 또 한번 와장창 무엇인가 깨어 지는 소리가 들린다. 에구머니,. 래인 아가씨가 비명지르며 엉엉 울고 있다. 이 런 이런.. 혹시 검은 용님이 분노해서 검이라도 휘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암 암, 그러고도 남지! 당신의 말을 거역하는 인간은 살려두는 법이 없는데, 어쩐지 래인 아가씨가 좀 건방지게 굴었다. 오늘 기필코 살인 나는 날이다. "그 놈 어디 있냐?" 척이 덜덜 떨며 안쪽의 침실을 손짓했다. 무형의 고함소리, 래인의 비명소리. 흐느끼며 애원하는 래인의 울음소리. 이것은 정말 살기어린, 분명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키 작은 노인의 눈썹이 역팔자로 치켜 올라가기 시작했다. 데릭, 그 망할 놈이 정말 가련한 아이를 제 말을 안 듣는다고 짓이겨 죽이는 것이 분명했다. "이.. 이 패 죽일 놈! 제 입으로 래인이는 소중하게 대하겠다고 절대로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고 맹세해놓고 이런 짓을 해? 너 오늘 죽었다!" 지옥에서 온 저승사자인양 음산한 살기를 흘리며 노인은 쾅쾅 지팡이로 바닥 을 찧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침실 문 앞에 다가갔다. "열어!" "저, 저.. 타이쿤 하지만.." "열어, 이 멍청한 놈아!" 노인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척을 겨냥했다. 좋은 말 할 때 열라는 뜻이다. 안 그러면 이 지팡이로 네 머리통을 날려 버리겠다는 뜻이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죽는 것은 똑같다구?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 덜 덜 떨며 척이 눈을 딱 감고 침실문을 열어 제쳤다. 그리고... "너 지금 뭣하냐?" shit!! 험한 욕설을 내뱉으며 서둘러 무형이 한 손으로 시트를 걷어 래인과 자신의 알몸을 가렸다. 졸지에 아무런 대비도 없이 중인환시(衆人環視) 리에 두 사람의 거시기한 응응응 장면을 목격당한 래인, 가능한 한 조그맣게 몸을 말고 무형의


넓은 가슴 아래로 몸을 숨기려 애썼다. 아이고 쪽팔려라... "이 놈아, 너 지금 뭣하냐고?" 당장 그를 잡아먹을 듯이 눈을 치켜뜬 채 지팡이를 휘두르며 달려들 품새인 조부를 향해 무형은 뻔뻔한 얼굴로 태연하게 대꾸했다. "보면 모르십니까? 할아버지께서 간절히 원하는 후계자를 만들고 있는 중 아 닙니까?" 잠시 벙찐 할아버지. 엉망진창이 된 침실 안과 참대 위에 함께 엉켜 누운 무 형과 래인을 한심하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그럼 이 엉망진창 꼴은 다 뭐냐?" "이 여자가 내 볼에 상채기를 내놓고 겁이 나니까 자해를 한 거죠." 무형은 한 손으로 래인의 입을 막으며 요동치는 그녀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꾹 눌렀다. "가만있어, 이 여자야! 조금 있다가 죽여줄 테니까 그만 보채라고!" 잠시 눈알을 굴리던 할아버지. 천장을 한번 올려다보고 패 죽여도 시원찮을 능글맞은 손자의 민망스런 꼴을 한번 노려보고.... 그리고는 조용히 돌아섰다. "계속혀. 더 죽여." 이윽고 거실 바깥에서 흘러나온 처절한 비명소리.리리~~~. '죽인다' 는 것에 대한 심오한 설명과 더불어 그런 것 하나 눈치빠르게 해결 하지 못하고 날 여기까지 쪽팔리게 달려오게 만들었느냐는 대 타이쿤의 부아치 민 지팡이 질에 척 이하 무형의 보디가드들이 전부다 맞아죽었다는 소문이 돈 것은 그 다음날 아침의 일이었다.

<22> 이별의 홍콩 부두가 그날로부터 이틀 후. 볼이 부을 대로 부은 래인. 이박사 네 아파트의 양지바른 방. 그녀의 화실로 정해진 방에 앉아 무형에게 얻어맞은 볼에 얼음주머니를 대고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에 잠기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심각한 고민의 정체는? '정무형, 널 어떻게 죽여주지?' 이를 앙다물며 래인은 신경질적으로 얼음주머니를 내팽개쳤다. 젠장, 무지막 지한 힘이로군, 딱 한 대 맞았는데 입안이 다 터졌잖아.... 그녀는 거울 속에 비 친 자신의 얼굴을 요리조리 돌려보았다. 그래도 하루종일 얼음주머니를 대고 있 었던지라 겉으로 보기에는 이제 부기가 다 빠지고 얼굴이 제대로 돌아왔다. 래 인은 다시 이를 갈았다. '검은 용, 아니 검은 지렁이! 내가 너에게 목매달고 덤비니 나를 아주 우습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말야.... 인간아.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고 귀엽다 봐주는 것도 정도가 있다. 감히 여자를 향해 제 성질머리 못 이겨 주먹을 휘둘러? 앞으 로도 내가 네 비위장머리 안 맞추어주면 또 그럴 거란 얘기 아냐? 그 싸가지 없는 버릇을 어떻게 아작 내주지? 함부로 주먹질하는 버릇은 애초에 안 잡으면


평생 고생이란 말야. 사람 귀한 줄 모르고 아직도 까불고 난리야. 제길..'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이 떠오른 듯 래인은 눈을 빛냈다. 착상 앞에 세워진 스케줄 표를 뒤지던 그녀, 사악한 미소를 머금으며 수화기 를 들었다. "여행사죠? 전 9 월에 카리브 해 유람선 여행을 예약한 사람인데요. 예약을 변 경할 수 있을까요?" 무형의 전화가 온 것은 래인이 전화를 끊자 말자였다. -"사무실로 와. 같이 저녁식사하자." 하기 싫은 의무라도 수행하듯이 그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어떤 사람도 그의 사무실에 감히 근접도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래인. 그런 그가 그녀를 자신의 사무실로 초대했다는 것에 대하여 나름대로 자존심이 좀 회복되었지만 아직도 신경질이 덜 풀린 지라 대놓고 단번에 튕겨버렸다. "싫다면?" "끌려올래? 네 발로 그냥 걸어올래?" "흥!" 래인은 해죽 웃었다. 비록 그가 수화기를 막았지만 누군가가 그의 머리통이라 도 패고 있는지 투다닥 그를 후려갈기는 소리와 대차게 얻어맞은 그가 아구구 신음하는 소리까지 그녀의 눈치빠른 귀에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오, 그 래? 보아하니 할아버지에게 단단히 당하고 계신 모양인데... 그래. 잘난 인간. 너. 더 당해 봐라. 인간이 복에 겨워 사람 귀한 줄 모르고 뭐든지 제 멋대로 하는 버릇을 내가 반드시 고쳐주마. 내가 한번 봐 주었다간 평생 이 모양, 이 꼴일 거다. 너, 죽었 어! "오라고! 알아들어?" "내가 안가면, 자기. 할머니한테 맞아 죽지?" 내가 다 눈치 꿰고 있다고! 래인의 꼬드기는 간살거리는 말에 무형이 이를 갈 며 그래, 하고 조용히 대답했다. 무형이 래인을 후려갈겼다더라. 맘에 안 든다고 완전히 짓이겨 사람 구실도 못하게 만들었다더라. 그것을 보다못한 불쌍한 척이 무형을 말리려다가 반쯤 병 신이 되었다더라.... 이게 빅토리아 가의 저택에 알려진 한밤중의 사건에 대한 경악할만한 진실이 었다. 간도 크기도 하지. 무형이 무자비한 주먹을 연약한 래인에게 휘둘렀다더 라는 말 한마디에 심장마비에 걸릴 뻔한 할머니. 당장 손자를 호출해 손으로 탁 자를 내려치면서 장장 한 시간동안이나 잔소리를 늘어 놓았것다? "그 불쌍한 애를 어쩜.. 흑흑흑. 데릭. 너 이 할머니 망신을 꼭 이렇게 시켜야 겠니? 난 그래도 널 신사로 키웠다고 자부했단다. 흑흑흑. 그 애에게 사과해. 무 릎꿇고 싹싹 빌어. 알아들었니? 네가 그 애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난 죽을 때까 지 널 다시 보지 않을 거다." 할아버지가 줘 패지, 할머니가 눈물을 닦으며 정신적인 죄책감으로 고문을 하 지... 완전히 돌아버리기 일보직전인 정무형, 마침내 이틀만에 고이 항복선언을 하고 래인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내가 자기 체면 보아서 가주기는 하는데 말야. 인생에 공짜는 없어! 그거 알 지?" "원하는 게 뭐야?"


만약 그녀가 앞에 있었다면 뼈라도 갈아 마셔버리고 싶다는 음산한 어조로 그가 내뱉았다. 래인은 쿄쿄쿄 사악하게 웃었다. "무릎꿇고 빌어야 해. 다시는 나에게 주먹 휘두르지 않겠다고 각서를 써. 그 리고...." "그리고?" "달덩이 만한 다이아몬드 사내 놔!" "패 죽일.." 래인은 눈썹을 치켜 뜨며 건방진 어조로 무형의 말을 치받았다. "아니, 못하겠다는 거야? 당신 아기 낳으라며? 명색이 검은 용의 후계자를 낳 아줄 여자에게 해만큼은 아니더라도 달덩이 만한 다이아몬드는 줘야하는 거 아 냐? 사회적 체면이 있지 말야. 난 그것 받아야겠어!" ".....절대로 이익 챙길 기회는 놓치지 않는군!" "그러엄!~~~~ 누구 여잔데?" 다시 얼음주머니를 볼에 대며 래인은 사악하게 웃었다. "좋아, 내가 양보해서 달덩이 만한 것은 말고 물방울 만한 것으로 해. 됐지?" 백만불 짜리라는 홍콩의 야경. 그 불꽃 중에서도 가장 밝고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라펠 타워. 래인은 무형의 사무실 테라스에 차려진 저녁 만찬 테이블에 새침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핸드백 속에는 지금 다시는 주먹을 휘두르 지 않겠다는, 무형이 사인한 각서가 들어있다. 지금 무형은 마치 하인인 듯 무릎을 끓고 그녀의 가녀린 발목에 다이아몬드 가 박힌 화이트 골드 발찌를 채워주고 있었다. 그녀의 목에도 같은 디자인의 다 이아몬드 목걸이가 걸려있다. 방금 전 그가 걸어준 목걸이이다. 래인은 두 손을 들어 무형의 검은 머리결에 손을 박고 부드러운 그의 머리카 락 감촉을 음미했다. 감히 어떤 여자가 위대하신 검은 용의 무릎을 끓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음핫 하하하. 좋아. 내가 이번만 한번 봐 주지. 내가 당신 용서하는 것은 절대로 이 멋지구리 보석 셋트 때문은 아냐, 알지? 고개를 든 무형과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래인의 시선이 마주쳤다. 래인은 고 개를 숙여 부드럽게 그에게 키스했다. "배고파." "난 네가 더 고파." "어떻게 알았어? 나도 지금 당신을 먹는 일이 더 급하다는 것 말야." 그리고 두 사람은 홍콩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무형의 책상을 식탁삼아 서로를 게걸스레 먹어 치웠다. "지금 몇 시?' "일곱 시 반이야. 아직 일러. 더 자." 무형은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래인의 눈시울에 자잘한 키스를 퍼부으 며 제 멋대로 그녀의 잠옷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또. 아이, 또?" 래인이 잠에 취한 채 귀찮다는 듯이 칭얼거린다. "그래. 또." 무형은 래인의 말 그대로 똑같이 대답하며 단단하게 솟은 진분홍빛 유두를


입안으로 달콤하게 머금었다. 무형은 래인처럼 달콤하며 솔직하고 또 생기차고 그에게 딱 맞는 몸을 가진 여자. 그로 하여금 마치 전지전능한 신(神)이 된 듯한 자신감을 주는 여자는 처 음이었다. 그도 남자이니 동정을 준 첫사랑 가린과의 경험 말고도 정부(情婦)라 이름 붙 인 장난감들을 가졌었다. 피를 본 날이면 그 광기를 식혀줄 도구로써 미친 듯이 여자와의 섹스에 탐닉했던 것도 사실이었고. 그러나 단순한 배설의 쾌감 외에는 준 것이 없는 의미없는 섹스를 빼고는 그 가 사랑을 나누었다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추억은 아스라한 기억의 서랍에 황금 빛 보물처럼 간직된 가린과의 정사뿐이었다. 가린이 뉴욕으로 건너오고 나서 일주일 후였다. 그의 아파트. 가린이 고른 신 혼 침대 위에서 수줍게 두 사람은 서로를 처음으로 소유했었다. 그러나 그 기억 은 황홀한 기쁨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안타깝고 슬픈 것이기도 했다. 둘 다 첫 경험이었던 터라 무형은 가린에게 기쁨을 주지 못했다. 그에 대한 사랑과 믿음 으로 자신을 내어주고 그가 주는 고통까지도 사랑한다 말하던 가린이었지만, 그 러나 무형은 언제나 가린에게 미안했다. 그는 그녀를 꽃피우지 못했었다. 그녀 를 아프게 하고 그녀를 울게 했다. 아르젤에게서 억지로 가린을 빼앗아 온 후의 날들. 무형은 그 때의 두 사람 일은 영영 기억에서 봉인해 버렸다. 가린은 그를 용서했을 지 몰라도 그 스스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일. 그는... 그 아름다운 여자를 깨버리고 짓밟고 강제 로 사랑한다 말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의 생명을 담보로 잡고 비 겁하고 최악의 저질스런 방법으로 그녀를 소유했었다. 그는.. 말 그대로 미친 짐 승이 되어 소중하고 소중한, 차마 아까워 손도 대지 못하고 이십 년을 지켜온 그의 유일하고 소중한 꽃송이를 짓밟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여자. 래인. 이 여자를 안고 있으면 그 날의 처참한 기억들이 전부다 잊혀진다. 아프고 미안해서 더 잊혀지지 않는 그 날의 자신을 용서하고 싶어진다. 때때로 상처받은 사랑이 절망이라는 이름의 잔인하고 광포한 야수로 깨어날 때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정말 소중한 그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진다. 무형은 그녀의 작은 샘으로 슬며시 단단한 손가락 하나를 밀어 넣었다. 래인 은 유난히도 예민한 감각을 지닌 여자였다. 그가 젖가슴만 어루만지고 애무해도 절정에 도달해 신음하며 촉촉하게 젖어들 정도로. 그가 주는 육체의 기쁨을 억 지로 부인하지 않고 솔직하게 황홀하다 말해주며 달뜬 신음을 흘리며 그에게 달려드는 여자였다. 아니 먼저 그에게 자신의 아름다운 몸이 줄 수 있는 모든 쾌락을 선사하려고 하는 여자였다. 한 두 번이면 끝나버린 다른 여자와는 달리 이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를 평생도록 소유하고픈 욕심은 그의 심장에 이미 무 섭게 솟구치고 있었다. 지난 밤, 그의 열정과 욕망을 마음껏 받아들인 그녀의 은밀한 꽃잎은 비에 젖 은 나뭇잎처럼 싱싱하게 부풀어올라 따뜻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겨우 손가락 하 나를 밀어 넣었는데도 죄어드는 느낌. 그는 싱긋 미소지으며 아직도 비몽사몽인 채 침대가에 툭 떨어져있는 래인의 손을 잡아 단단하게 치솟은 자신의 그것을 감싸게 했다. "들어가도 돼?'


"망할 인간. 잠도 못 자게 해!" 그러나 래인의 투덜거림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했다. 무형이 입술로 건방지게 덤비는 래인의 입술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무형은 래인의 손에 단단히 손가락을 단단히 깍지 끼웠다. 그에게 맞춘 듯이 딱 들어맞는 그녀의 단단하고 뜨거운 샘. 갈증에 허덕이는 사람처럼 그는 그것 의 향기와 샘물을 거칠게 들여마셨다. 래인의 하얀 몸이 이미 절정을 맞이해 발 갛게 달아올라 전율하며 진동하고 있었다. "아이, 낳을 거지?" 그는 음흉한 어조로 래인의 귀에 대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래인이 게슴츠레 눈을 뜨고는 최면에 걸린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아. 내가 봐줬다. 당신 아이 낳아주지. 하지만, 당신도 다시는 날 상대로 주먹 휘두르기만 해봐! 애 떼버릴 거얏!" "이 망할!!" 그러나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래인의 팔이 그의 목을 끌어안고 세차게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그녀의 몸 안에서 붉은 입술 안에서, 달콤한 체취 안에서 유영하는 동안, 무형은 그리고 한 마디도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넌 정말 이상해." 래인의 하얀 위에서 얼굴을 묻은 그가 잔뜩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 다. 그녀에게가 아니라 자신에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 "넌 이렇게 작은데도... 너무 강하고 한없이 넓고 그리고 날 자꾸 초라하게 만 들어. 그리고 넌 나를 아주 작은 소년으로 만들어 버리지." 지칠 대로 지쳐 땀에 젖은 발간 얼굴을 하고 잠이 든 듯 해보이는 래인을 내 려다보며 무형은 소리내지 않은 마지막 말을 혼자 삼켰다.. 어쩌면 넌 내게 온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너하고라면 사랑을 삶을 다시 시 작할 수 있을 지도 몰라. 그래서 내가 미칠 것 같이 욕심나. 이래인. 가지면 가 질수록 더 갖고 싶어. 하지만 그는 그녀를 반드시 상처주게 될 것이라는 게 문제였다. 무형은 몸을 일으켜 한 손으로 자신의 단아한 이마를 짚었다. 눈부신 아침 햇 살 안에서 잠이 든 래인의 얼굴이 너무 투명하고 아름다워 그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는 사랑스럽게 그녀의 머리타래 한줌을 잡아 자신의 코에 가져다댔 다. "널 어떻게 해야할까? 널 어찌하면 좋을까?" 완전하게 사랑할 수 없어서... 완벽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주었던 한 여자를 평 생 잊어버릴 수가 없어서.. 무형은 그에게 다가온 이 빛 부신 여자가 죽을 만큼 두렵다. 아니 무엇보다 이 곧고 바르고 용감한 여자에게 어울리는 빛의 삶을 자신은 줄 수 없기에 무형은 래인을 안으면서도 갈수록 더 힘들고 아프다. 그의 곁에 머물게 되면 항상 조롱 속에 갇힌 부자유스러운 삶을 살아야만 한 다. 검은 용의 성처(聖妻)라는 그럴듯한 이름 속에 포장된 지독히도 답답하고 숨막히는 일생. 쇼핑 한번을 하려 해도 등뒤를 두려워해야 하고 언제 어디서든 적의 총알이 날아올 지 몰라 전전긍긍해야만 한다. 방심 한 번하게 되면, 재수 없이 이 여린 몸에 피를 묻게 할지도 모른다. 그가 겪었던 것처럼 피로 점철된 삶을 살게 해애 하므로 그는 래인이 안타깝다.


"정말 널 어찌하면 좋을까?" 놓아주어야 할까? 이 정도로만 하고 그만두어야 할까? 이미 넘치도록 이 여자가 가진 욕망의 샘물을 마셨다. 이것으로 만족하고 그 녀를 떨쳐내야만 할까? 그러나, 그는 작은 꽃송이처럼 그의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이 든 래인의 발간 볼에 입을 맞추며 이를 악물었다. 못해. 그는 래인의 작은 몸을 자신의 팔 안에 감았다. 이 여자는 그의 아들을 낳을 것이다. 사랑인지 욕망인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이 여자는 그의 곁에 있을 것이다. 누 가 무어라 해도 그가 손에서 놓을 때까지는 이 여자는 그의 것이다. 그의 곁에 서 이 여자가 상처받더라도, 어둠의 자식인 그로 인해 그녀가 조롱 속에 사는 답답한 새가 된다 하더라도, 이 여자는 그의 삶에 편입되어 같이 할 것이다. "널 원해. 내 곁에 있어. 내 아이를 낳아." 무형은 래인의 귀에 대고 처음으로 자신의 내밀한 마음을 드러내어 속삭였다. "널 지키려고 노력하겠지만... 만약... 네가 나 때문에... 죽어야 한다면.... 그래 도.. 내 옆에서 죽어!" "그래?... 뭐 좋아. 그러지 뭐." 꿈을 꾸듯이 반쯤 눈을 감고 몽롱하게 대답하던 래인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 다. 흐릿하던 그녀의 눈빛이 갑작스럽게 초롱초롱 빛이 나더니 래인은 벌떡 몸 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자, 잠깐!! 몇 시라고? 데릭?" "여덟 시 십분." 대체 왜 이 여자가 잠자다 말고 이러는 지 영문을 몰라 어리버리한 얼굴로 무형은 래인을 따라 일어나며 시계를 가리켰다. "으악, 늦었다. 아홉 시까지는 부두로 나가야 하는데!! 으악, 미치겠네!!" 냅다 욕실로 달려간 래인. 중얼중얼 무어라 혼자 중얼거리며 초스피드로 얼굴 을 씻고 양치질을 하고 나와서는 바닥에 떨어진 - 무형이 벗겨 던진 자신의 하 얀 선드레스를 주워 입었다. "몇 시지? 여덟 시 이십 오 분? 젠장. 또 과속해야겠네! 잘 가면 간신히 타기 는 하겠네. 그럼 잘 있어요, 데릭. 나, 다녀올게!" 의자에 앉혀놓은 작은 짐가방(어제 그것을 들고 올 때 무형은 그녀가 그의 집에서 며칠 머무를 작정을 하고 챙겨온 것이라고 생각해서 사실 무지 흐뭇해 했다.)을 들고 모자를 쓰고 래인이 문 앞에 가더니 이제서야 게으르게 침대에 한 팔을 짚고 몸을 일으키는 무형, 아직도 이것이 어찌된 영문인지 정신을 차리 지 못하는 불쌍한 연인에게 명랑하게 작별인사를 했다. "나 유람선 크루징 하고 올게. 한달 걸릴 거야! 에게 해로 해서 북유럽까지 가는 거야. 나 없는 동안 바람피지 말고 외롭다고 질질 짜지도 말고 잘 지내! 난 더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돌아올 테니까. 짜이찌엔(再見)! 데릭." 급한 김에 래인은 문을 닫을 정신도 없이 그리고 무형이 무어라 소리치기도 전에 휭하니 내뺐다. 열정적인 사랑을 나눈 지 채 오 분도 되지 않았는데, 삼분 전만 해도 그의 품 안에서 달콤한 숨결을 흘리며 잠을 자던 연인이 사전에 말 한마디 없이 한달


동안이나 유람선 크루징을 한다고 그를 버려 두고 내빼? 졸지에 버림받은 무형.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황당하고 기가 막혀 바보처럼 눈만 끔뻑끔뻑 했다. 그러니까 이것이 무슨 일이더냐?! 천하의 정무형이 지금 애인에게 버림을 받은 것이냐? 약 일분간에 걸친 심오한 명상(?) 끝에 자신이 래인에게 버림받은 것이 확실 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정무형. 자신이 벌거벗은 몸인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테 라스로 뛰쳐나가 고개를 내밀고 아래를 향해, 그의 은빛람보르기니에 올라타는 래인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이, 이.. 말도 안 되는... 야, 이 망할 여자야!! 안 돌아와? 죽여 버린다!! 죽여 버릴 거라고오!~~~~~ 이래인! 돌아와! 다리 몽뎅이를 확 분질러 버리기 전에 돌 아오란 말야!~~~~~" 그러나 열심히 애절하게 무형이 간절한 마음으로 고함치면 무엇하나? 이미 래인이 탄 자동차는 시속 이백 킬로의 속도로 부둣가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데.. 미친 듯이 옷가지도 대강 걸치고 냅다 척을 걷어차면서 무형이 시속 삼백킬 로로 부둣가로 달려갔지만, 래인이 탄 유람선은 항구에서 백여 미터는 떨어져 유유히 멀어져가고 있는데... <23> 새가 된 무형 으드득... 헉스. 이것이 무슨 소리다냐? 무형의 등뒤에 서 있던 척이 몸을 움찔했다. 이 며칠 사이. 몹시도 심기가 불편하신 주인에게 뻑하면 얻어터지고 걷어차이 고 쪼인트 까이고 날아오는 살기어린 시선에 죽을 맛인 척. 오늘은 또 무슨 일 이 벌어진 것인지 하상전화를 노려보는 무형의 눈썹이 벌써 역팔자였다. 단정한 붉은 입술, 벨벳 같은 웃음까지 물려진 그의 입에서 새어나온 것은 그 런데... 분명 벅벅 이를 가는 소리 맞지? 아고고, 오늘 또 죽었네... 벌써부터 간이 떨리고 눈앞이 캄캄하고 입에 마른침이 고이는 척. 불쌍한 척. 달달 떨고 있는 덩치 큰 사내는 본 척 만 척 하고 무형은 또다시 시퍼런 살 기를 피워 올리며 화상 안의 사람에게 상냥하게 윽박질렀다. "좋은 말 할 때 꺼져라, 제이." -"미안하지만 그렇게 못 하겠는데?" 송곳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목석 같고 얼음 같은 이 놈의 염장을 지르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즐거움인데 날더러 이 기막힌 기쁨을 포기하라고? 뉴욕의 하린은 사무실 의자를 빙 돌려 창가로 향하며 음산하게 웃 었다. 어림없다, 친구야. 오늘 내가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지 보여 주마.. 크크크. -"할말이 있다고 그랬잖아. 이 놈아. 난 아주 진지하게 남아메리카 유전에 대 한 투자 자문을 너에게 하고 있는 거야. 나 같은 우량 투자자를 이렇게 괄세해 도 되는 거냐? 맘에 안 들면 내 돈 다 확 빼 간다." 너 내 옆에 있었다면 오늘 죽었어. 윤하린. 투자 자문? 얼어죽을!!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도 맡고 사업에 관한 한 머리통 좋기로 세계


에서 제일 가는 인간 윤하린이가 나 같은 소인에게 투자 자문을 하신다? 그러 면서 왜 날 바라보며 실실 얍삽한, 도대체 해독 불가능한 웃음을 쪼개는 건데? 무형은 주먹을 움켜쥐고 눈앞의 화면에 떠오른 하린의 얼굴을 잡아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망할 놈이 남의 염장 질러놓고 그렇게 재미있는가? 무형의 새 애인인 래인이 현명하게도 그에게 걷어차이기 전에 먼저 그를 단 번에 걷어차 버리고 혼자 유람선 세계 일주를 떠났다더라. <세계는 넓고 꽃미 남은 많다>라는 아주 빌어먹을(!!) 인생관을 가진 그 아가씨는 유람선을 타자말 자 로맨스 그레이인 선장부터 시작해서 선상의 모든 남자 (거기에는 기저귀를 찬 수컷 아가까지 포함되었음.)를 매혹시켰다더라. 밤이면 밤마다 파트너를 바 꿔가며 즐기는 품이 아아, 인생의 행복이 절정에 다다랐더라. 아마도 홍콩에 홀 로 두고 온 자기 옛 애인(-검은 용인지 검은 지렁인지 모르지만 여하튼 엄청 잘난 척 폼잡는 그 남자) 생각은 정말 요만큼도, 진짜 눈곱만큼도 안 하는 것 같더라. 래인의 뒤를 따라 허겁지겁 다음 기착지에서 유람선을 탄 무형의 부하가 보 내온 보고와 무형의 염장 지르는데 또 일가견이 있는 래인의 오래비 우인이 갉 작거리는 말을 종합하면 지난 이 주일동안 이래인이라는 망할 여자의 행적은 대강 바로 이런 천인공노할 배신 때리기였다. 그런데 어찌된 것이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답시고, 무형이도 잘 모르는 래인 의 행적과 입도 벙긋하지 않았는데 완전히 새된 무형의 실연(?)을 저 망할 하린 이 자식까지 어찌 알고 있느냔 말이다! 무형은 다시 한번 이를 갈았다. 기필코 이 전화를 끊자말자 서울로 가겠다. 날 말리지 마. 그리고 입싼 싸가지 이우인이란 빌어먹을 그 개자식을 완전히 밟 아버리고야 말리라! -"언제 어디서든 투자자의 자문에 성실하게 응해주는 것이 은행가의 기본적 인 자질 아냐? 정무형?" '제길. 망할 지식.' 하린은 담배도 피우지 않으면서 괜히 척 시거를 뽑아들고 불을 당기며 무형의 눈앞으로 구둣발을 올려놓는다. 제 마누라가 시거 피우는 남자가 멋있게 보인다 는 말 한마디를 하자말자 쿠바의 담배 농장을 통째로 산 무식한 놈이 바로 저 인간이다. 내가 기어코 저걸 못 죽이면 내 성을 갈고 말지...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무형은 하린의 입을 쥐어박듯이 오금을 박았 다. "인간 윤하린이 투자한 돈 아니라도 내 은행은 잘도 굴러가니까 걱정 말아. 그러니 더 이상 헛소리 작작하고 끊어. 골다멘 유전? 잘해봤자 15 년에 최하급인 데 썩은 돈 있음 꼬나 박던지 막든지 네가 알아서 할 일. 내가 너처럼 바보멍청 이가 아니라면 돈 안 되는 유전을 쑤시기보다는 네 아우가 밀어 부치는 화성 탐사에 더 돈을 붓겠다. 망할 놈아. " -"데릭, 요즈음 네 밤이 무지 외롭다면서? 날세운 송곳 하나 보내주랴?" "....윤. 하. 린!" 하린이 싱긋 송곳니를 드러내고 웃었다. 저 죽일 놈. 명색이 친구랍시고 하나 있는 놈이 하는 말이라고는 이토록 싸가지없고 느끼하다는 것을 내가 왜 미처 몰랐던 거지? "밤이 오는 것이 두려울 것 아냐? 내 우리끼리라서 하는 말이지만, 말야. 또


우리가 정력하면 세다 못해 넘치는 인간들 아냐? 그런데 한껏 땀 빼고 맘 맞아 끼고 자던 애인이 그렇게 날아가 버리고 나면 사실 무지 허탈하지. 송곳으로 허 벅지 찔러가며 참아는 보는데 그거 쉬운 일 아니잖아? 다른 장난감 찾아봐도 꼴도 보기 싫고 허탈하기는 마찬가지고, 눈앞에는 아리삼삼한 그녀 모습만 떠오 르고.... 한시간 한시간이 그토록 지루하고... 하늘만 바라보아도 예쁜 그녀 모습 만 떠오르고.... 솔직히 말해라. 데릭. 미치겠지?" "...제이, 이거 무지 비정상이지?" 아픈 데만 골라 푹푹 쑤시는, 그러나 자기도 몰랐던 자기의 증세를 시원하게 까발기는 하린의 말에 무형은 비로소 감춰둔 싸나이의 피눈물을 푹푹 흘렸다. -친구야 잠시나마 미워해서 미안해. 역시 넌 내 하나뿐인 진정한 친구야. 말 하지 않아도 내 얼굴만 보고서 내 증상을 다 아는구나. 사실 나 무지 슬픈 거 있지? 내 인생에 여자를 버렸어도 버림을 받은 적은 없잖냐? 그런데 말이야. 오 분 전까지 내 품에 안겨 사랑한다고 신음하던 여자가 발딱 일어나더니 눈곱 떼 고 양치질하고 나서 자기하고 사랑하는 것도 좋은 데 말야. 난 나 혼자 세워둔 새로운 계획이 있걸랑. 더 넓은 세상 구경 좀 하고 올게 이러면서 바이 바이하 는 거, 너 본적 있니? 흑흑. 하린이 안타깝고 불쌍해서 못살겠다는 표정을 하고 쯧쯧 혀를 찼다. -"불쌍한 데릭. 완전히 중증이구나." "하루에도 열 두 번 씩 내가 헬기 타고 날아가서 그 망할 것 머리채 휘여잡 고 오려다가도, 꾹 참는 중이다." 무형이 비장하게 말했다. 하린이 끅끅 괴이한 신음소리를 내며 친구의 너무 큰 아픔을 같이 했다. -"데릭. 네 그 증상 그거, 무지 치명적인 거야. 아무래도 넌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러브 바이러스에 감염이 된 것 같으다?" "사랑? 내가 사랑에 빠져? 핫! 웃기네! 야 제이 그것은 말야..." 부인하듯이 실소를 날리는 무형의 입을 가로막듯이 화상안에서 하린이 손을 들었다 -"잘 생각해 봐. 네가 가린이를 사랑했던 것과 그 여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무 엇이 다른지. 네게 온 사랑의 모습이 다 똑같다고 생각하지 마. 데릭. 받는 사랑 도 있고 주는 사랑도 있지. 물 같은 사랑도 있고 불같은 사랑도 있어. 모습이 다르다고 사랑이,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잖아? 데릭. 넌 그녀를 이미 사랑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녀가 널 버리고 떠난 것이 그렇게 큰 충격인 거야. 단순한 자존심의 훼손이 아니고 말이야.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 봐. 차오!"

<24> 스며드는 느낌 -사랑해? 내가 그 망할 계집애를? "말도 안되지!"


-사랑한다고? 내가 가린이 말고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있다고? "진짜, 진짜 말도 안돼! -이미 내 마음은 리니가 다 가져갔다고. 다른 여자가 스며들 수가 없어! "당연하지!" -어떤 여자도 그 애를 대신할 수 없어. 난 리니 말고는 어떤 여자도 원하지 않 아! 그러나, 그러나였다. 무형의 문제는 그것이었다. 서슴치 않고 당연하지! 라는 대답이 이제는 그 부 분에서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무형은 어두워져 가는 해안을 바라보며 팔짱을 낀 채 하염없이 서 있기만 했 다. 간간이 그가 머리를 흔드는 것은 어지럽게 달려드는 회의, 자신에 대한 통 렬한 질문, 혹은 미망(未亡)에 대한 아픔을 벗어나보려는 미약한 시도이다. 사랑의 모습은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는 하린의 말은 그를 번쩍 정신나게 할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마치 그의 뒷통수를 세차게 갈기듯이 매서운 지적. 살아 가면서 만나는 사랑은 정말 여러 갈래일까? 정말 사랑은 유일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인 것일까? 가린을 사랑했다. 더 이상 어떻게 더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 다. 기억할 수 없는 어린 시절부터 가린만이 무형의 단 한 여자였고 운명이었을 뿐이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걸어가야 할 삶의 길까지 버릴 수 있다 믿었 고 실제로 무형은 그렇게 했다. 한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그의 것이라는 것을. 또한 그녀에게로 가는 자신의 사랑을 의심한 적 없듯이 그녀 또한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절대적 으로 믿었다. 아아, 하지만 다시 떠올리면 무엇하나. 한 계집의 앙큼하고 간교한 술수 하나 로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운명이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 줄이야. 그의 심장이엇 던 가린을 그 스스로 다른 사내에게 내어주고 마는 일이 생길 줄이야. 그 것이 운명이라는 것이었다. 인간인 그의 힘으로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발 악을 하고 거부해 보아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 운명 중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라는 것은 가장 비애스럽고 아픈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 6 년. 붉은 피가 흐르는 인간 정무형은 죽은 것이라고. 남은 것은 끝없는 폭력과 어 둠가 피로 점철된 검은 용으로서의 삶. 감정없고 공허한 눈동자로 세상을 내려 다보며 몸서리쳐지게 차가운 명령을 내리는 꼭두각시만이 남은 것이라 생각했 다. 그런데 래인, 그녀. 무형은 돌아서서 천천히 테라스에 마련된 소파에 몸을 길게 걸쳤다. 그는 손 가락으로 양미간을 가볍게 누르며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몹시도 피곤했다. 깊이 잠을 자지 못한 것이 벌써 몇 날인지.... 재


잘대는 파랑새와도 같은 래인의 귀여운 수다를 들으며, 그의 팔 안에 꼭 맞게 들어오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예쁜 그 몸에 입 맞추다 그를 항상 미치게 만드는 래인의 몸 안으로 파고들어 넘치도록 욕망과 쾌락의 샘물을 마신 다음 노곤하 고 안락한 잠에 빠지고 싶다. 사랑이 아닌데.. 더 이상 사랑 같은 것은 그의 메마른 마음에 남아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도 무형은 래인이 그리웠다. 보고 싶었다. 이 이해할 수 없고 미친 감정의 이름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이 든 자리는 모르는데 난 자리는 안다고 했다. 곁에서 귀찮게 하고 무작 정 달려들어 그의 속을 잘도 뒤집어놓을 때는 하루에도 열 두번씩 래인의 머리 채를 휘어잡아 저 구룡반도 앞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었는데.... 그런데 정작 래인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그를 버려둔 채 그의 허락 도 받지 않고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오겠다고 훌쩍, 기분 좋게 떠나버린 후 무형 은 솔직히 너무 심심했다. 너무 외로웠다. 아아, 이제야 느끼는 것이다. 래인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 그를 다시 웃게 했다는 것을.. 그로 하여금 잠에 서 깨어났을 때 오늘 또 하루도 어떻게 살아야 하나 쓸 데 없는 걱정 따윈 하 지 않게 했다는 것을. 그녀 옆에만 있으면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우울할 일도 없었다. 외로울 일도 없었다. 무슨 일이 어떻게 또 터질까 조마조마 했다. 저 망할 기집애!! 라고 욕 을 하면서도 무형은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의 염장을 잘도 지르는 래인의 말솜씨에 휘둘려 어릿광대 짓을 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즐기기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어느새. 그만큼 무형은 래인에게 그를 내어준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 망할 계집애를 사랑하는 것은 아냐!" 그러나 무형은 절대로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운동선수처럼 다시 한번 속으 로 뇌까렸다. 스스로에게 굳은 다짐을 하듯이 무형은 다시 한번 소리내어 절대로 그가 그 녀를 사랑할 리는 없다고 중얼거렸다.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기 시작한다면, 다른 여자를 그의 심장에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그가 굳게 맹세한 그것. 절대로 널 잊어버리거나 사랑하는 것을 그만두 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녀 가린에 대한 무형의 절대적인 외사랑에 대한 배신이 기 때문이다. 그냥 곁에 두면 심심하지 않는 그 기집애를 평생 내 곁에 두고 싶다고 생각 하는 것일 뿐이야. 무형은 마음속으로 비겁하게 타협한 자신에게 변명했다. '어차피 후계자를 보아야 하는 것은 검은 용으로서의 내 책무. 이왕이면 다른 계집보다는 내 마음에 그래도 흡족한 그 기집애에게서 아들을 낳으면 좋잖아? 싫증날 때까지 데리고 살다가 아이만 데려오면 돼. 그러면 되는 거라고.' -그것이 전부인가? 그러나 바로 그때, 다시 한번 누군가가 그에게 준열하게 묻고 있었다. -정말 래인에게서 바라는 것은 예쁘고 멋진 그 몸과 그녀의 자궁에서 얻을 아들뿐인가? 무형은 거칠게 이마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겨우 그것뿐인데 너는 어째서 그 애를 놓아주는 대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너의 곁에 잡아두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왜 이렇게나 그 애를 그리워하며 잠도 자지 못하고 일도 하지 못하는 것인가? 왜 그애가 죽더라고 너의 곁에서 죽기를 바라는가? 그것은 이미 네가 그애와 함께 하는 일생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무형은 그 질문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한편 수에즈운하를 지나 지중해로 접어든 유람선 퀸 빅토리아 호. 홍콩에 버려 둔 그녀 래인의 연인. 독수공방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며 날마 다 상심과 배신감에 치를 떠는 검은 용이 그런 심각한 고민에 잠겨 있을 때 우 리의 래인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더냐? 인생은 즐거운 것. 세계는 넓고 꽃 미남은 많다! 바야흐로 래인은 그녀의 인생에 있어 최고의 절정을 맞고 있는 중이었다. 꽃미남 꽃미녀 수집이 취미인 그녀. 그 넓은 유람선을 헤집고 다니면서 아무 도 저항 할 수 없는 매혹의 긴 속눈썹 깜빡거림과 은종이 울리는 듯이 투명한 웃음소리. 해맑은 천사 같은 사악한 미소로 온 승선객을 다 자신의 포로로 만들 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날이면 날마다 방으로 운반되어 오는 넘쳐나 는 선물들. 거절하기 바쁜 식사 초대. 심지어 래인의 순진 무구한 눈빛에 반하여 깊은 첫사랑에 빠진 한 소년은 자 기 용돈을 다 털어 래인에게 붉은 장미꽃을 사 선물한다고 배에서 내렸다가 까 딱하면 다시 타지 못하고 미아가 될 뻔한 사건까지 있었으니 무엇하랴? -"즐거워?" "응, 말도 못하게 잼 있어! 너무 행복해!" 분명 저 남자 눈에서 뻗쳐 나오는 게 푸른 불길이렸다? 래인은 무형이 화상 안에서 노려보나 나마 붉은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며 명랑하게 대꾸했다. -"젠장. 날 버리고 혼자 훌쩍 떠나서 온갖 수컷들 다 찝쩍이고 다니면서 행복 하다는 말이 나와? 빌어먹을!!" "욕하지 마세요! 누가 듣겠네. 상스럽게... 위대하신 검은 용님께서 그런 천박 한 말투를 써도 되는 거야? 품위없게. 전화 끊어! 나 시간 없단 말야. 오늘밤에 갑판에서 벌어지는 댄스 파티에 가야한다고. 참. 자기, 이 드레스 어때? 오늘 입 을 건데?" 래인은 해죽 웃으며 무형이 보고나 말거나 화장대 앞에서 입고 있던 가운을 훌훌 벗어 던지고 나신이 그대로 드러나는 슬립 차림으로 침대에 펼쳐 놓았던 검은 이브닝 드레스를 자랑스럽게 들어 보였다. 마치 아슬아슬한 쇼 룸에서 옷 을 벗는 누드 쇼를 하듯이 래인은 무형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며 얇디 얇은 검 은 드레스를 매혹적으로 몸에 꿰었다. 당신. 요거를 보고 코피 날 거다! 크크크. 그녀의 이브닝 드레스는 차라리 벗느니만 입는 것이 더 야하다는 것을 확실 하게 보여주는 디자인이었다. 허벅지까지 트임이 있어 하얀 속살과 허벅지가 훤 히 드러나 보이는 치마 자락. 손가락 하나만 대면 그대로 끊어져 흘러내릴 것만 같은 가느다란 끈 두 개로 간신히 지탱한 얇은 천. 그녀의 드레스는 래인의 균 형잡히고 근사한 몸매의 매혹을 충분히 드러내다 못해 아주 줄줄 흘러내릴 지 경이었던 것이다.


래인은 말도 못하고 격렬한 투기심과 질투로 분노해서 부들부들 떨고만 있는 화상 전하기 속의 애인에게 자신의 멋진 차림을 보여주기 위해 방안을 한 두 번 정도 춤추는 듯한 걸음걸이로 원을 돌았다. 그런 다음 달콤한 입슬에 손가락 을 대고 그에게 멋진 키스를 날렸다. "멋지죠? 요거 입고 오늘 난 영국의 백작하고 춤추기로 약속했단 말야. 데릭, 안녕. 파티 끝나고 나서 다시 통화해요!" 래인이 선실문을 닫고 사라진 그 순간. 홍콩의 라펠 타워에서 때아닌 지진이 일었다. 캬르르, 캬오오!~~~~~ 울부짖는 외로운 야수 한 마리 때문이었다. 그날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갑파에서 담수 수영을 즐기고 칵테일 한잔을 마신 래인. 피곤한 김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즐거운 오수에 빠졌다. 낮잠이 들어버린 그녀, 항구에서 헬기 한 대가 날아와 유람선 기착장에 내려앉은 것도, 그 안에서 검은 비단 파오를 입은 한 남자가 눈에서 불을 뿜은 채 주먹을 움켜쥐고 서두르는 걸음으로 내렸다는 것도 미처 몰랐다. "열어!" 쩔쩔 매며 급사는 그에게 항의하려 애썼다. "죄송합니다. 손님. 신분을 확인할 수 없으면 문을 열어드릴 수 없습니다!" 무형은 동남아 출신인 듯 해 보이는 가무잡잡하고 작은 몸집을 지닌 급사를 한 손으로 가볍게 집어들어 벽에다 밀어붙이고 정신이 들게 머리를 쾅쾅 ? 번 박아 주었다. "열어! 내 마누라다." 창문을 가린 커튼 때문에 어두컴컴한 선실. 무형은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깊 은 잠에 빠진 듯 해보이는 하얀 여체를 바라보며 싱긋 사악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가 그녀의 몸을 뒤채 입술을 훔치며 단번에 잠옷자락을 쫙 찢어버렸다. 다짜고짜로 한 손은 그녀의 탐스러운 젖가슴을 움켜쥐고 또 다른 한 손은 거침없이 그녀의 달콤한 다리 사이로 밀어 넣던 그는 반짝 눈을 뜬 래인에게 심술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여기까지 나타날 줄은 몰랐지? 너 제멋대로 바람 피우는 것도 오늘이 끝이다, 이 망할 여자야! 이런 의미가 담긴 무형의 얼굴 앞에서 그러나 래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푸른 바다처럼 상큼한 미소부터 지었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죠? 데릭?" "젠장! 내가 여기까지 올 줄 알았던 거야?" 래인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두 팔로 죽을 만큼 보고싶었던 그 남자의 목 을 끌어안았다. 어이없다는 듯이 무형이 shit! 하고 욕설을 내뱉았다. 그러나 래 인은 무형의 입을 다시 달콤한 키스로 막아 버렸다. 여기까지 왔으면 죽여주는 멋진 사랑이나 나눌 일이지 왜 또 복잡한 머리통 을 굴리고 그러는 건지, 원. 멍청한 남자 같으니라고! 이성도 생각도 헤아림도 다 사라진 순간. 오직 격렬한 헐떡임과 열정, 서로를 갈구하는 뜨거운 입술과 몸짓만이 남은 시간. 그녀의 탐스러운 젖가슴을 유린하


던 무형의 입술이 더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가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가 온 몸을 부르르 떨더니..... "에..에에췻!!~~~~~~" 있는 대로 재채기를 하던 무형이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불을 확 켰다. "제길!! 아주 날 죽여라! 망할 놈의 고양이. 어디 있어?" "고양이? 왜?" 여기. 사랑을 나누다 말고 갑자기 재채기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함치는 애인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래인은 침대 아래 잠을 자던 페르시안 고양이를 사랑스럽게 안아 들어보였다. 며칠 전에 초상화를 그려준 보답으로 인도의 마하라쟈 부인이 선물한 순백의 페르시안 고양이다. 래인 눈에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 고양이를 보던 순간, 무형의 얼굴이 말 그대로 시퍼렇게 변했다.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삿대질을 하며 콧물 눈물 재채기를 있는 대로 하며 그가 아우성을 쳤다 "이, 이!... 이래인!!! 너 하루라도 날 골탕 먹이지 못하면 잠이 안 오는 여자 지?!" 빨랑 그 털뭉치 치워!! 치우란 말야!!!~~~~~ 에췻!! 난 고양이 알레르기라 고! 에취. 에취! 아이고 내 팔자야.." <25> 그대는 나의 운명 유람선의 의무실에 다행히도 애완 동물 알러지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상비약 이 준비되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이리 와." 이제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지라 면회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의무실 침대에 드러누워 창 쪽을 바라보고 있던 무형이 문가에 서 있는 래인을 바라보지도 않 고 말했다. 래인은 쭈뼛쭈뼛 그에게 다가갔다. "미안... 해요." "미안해야지!" 갑자기 래인이 무형의 품에 엎어져 말릴 사이도 없이 엉엉엉 큰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나.. 나는 정말 몰랐단 말야! 엉엉. 다, 다 큰 남자가... 어어어.... 어.. 어떻 게.... 고. 고... 양이 털이 날려서 죽을 뻔하냐고! 엉엉엉." "너도 몰랐잖아. 그만 울어." 무형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가드다란 등골을 살그머니 쓸어 내리며 중얼거렸 다. 생각해보면 그도 기가 찰 노릇이었다.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그것도 다른 사 내들보다 훨씬 더 단련되고 강한 남자가 하찮은 애완 동물의 털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 아무리 해도 고칠 수 없었다. 무형은 모든 동물, 특히 고양이의 털에 알러지 가 아주 심했던 것이다. 고양이만 만지면 온 몸이 벌겋게 붓고 가렵고 재채기를 하고 심하면 호흡곤란으로 죽을 수 있을 만큼. 그래서 약물 주사를 맞지 않고는 그는 어떤 동물도 만질 수조차 없었다. 개를 무척 좋아했지만 집안에는 들일 수


없고 바깥에는 놓아기르는 사냥견이나 겨우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털뭉치 어떻게 했냐?" "못 데리고 있잖아. 도..돌려줘야지 뭐. 힝힝. 훌쩍 훌쩍... 힝, 너무 귀여웠는 데.." 래인이 코를 핑 풀며 대답했다. 그로 인해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게 한 것이 이것이 처음. 그러나 어쩌면 갈수록 더 많아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 것이 무형은 순간적으로 너무 미안했다. "....내려가서.... 네가 좋아하는 고양이 인형을 열 마리 사줄게." 단 한번도 그가 먼저 래인의 마음을 헤아려 무엇인가를 준 적은 없다. 그의 말에 래인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고인 눈물은 쉽사 리 마르지 않았다. "나 때문에 자기를 위험에 빠뜨려서 정말 미안한데.." "괜찮아. 이제 그만해." 무형은 그가 낼 수 있는 가장 상냥한 목소리로 래인을 위로했다. 사실 그녀 죄도 아니다. 동물을 참아내지 못하는 그의 유약함이 문제일 뿐이지. 그러나 래 인은 무형의 서툰 위로에도 불구하고 펑펑 울고 싶어 못 견디겠다는 그런 얼굴 을 하고 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자기야. 내가 자기랑 사는 한은.. 힝힝. 난 평생 고양이는 못 키우 는 거잖아? 그렇지? 힝힝, 억울해!" "이. 래. 인!~~~~~~~" 인간 정무형. 다시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패 죽여도 시원찮을 망할 여자 같으니라고... 그의 가슴 위에 엎어져서 울고불고 하길래 자기 애인이 까딱했으면 고양이 한 마리로 인해 죽을 뻔한 것을 비관해 울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었 다. 래인의 서러움과 눈물은 순전히 무형의 증상과는 상관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고양이를 키우지 못하는 것이 서러워 울고 있었던 것이다. "너, 너.. 정말...." "힝힝, 고양이 그거 얼마나 이쁜데... 힝힝. 이름도 지어 줬다고! 프린스. 얼마 나 이뻐? 엉엉엉. 매일 밤마다 내 침대에 재우겠다고 마하라쟈 부인에게 맹세를 했단 말야, 엉엉엉." "망할!! 우는 척 그만 해. 절대로 안돼." 무형은 잘라 말하고 갑자기 다시 아파지기 시작하는 머리를 다시 베개에 눕 혔다. 웃기고 있네. 누구 맘대로 우리 침대에 함부로 딴 것을 올려? 게다가 그 놈의 고양이는 수컷이라며? 미쳤어? 내가 우리 침대에 나 아닌 수컷을 재울 것 같 아? 그러나 래인은 계속 훌쩍훌쩍 울었다. 고양이를 돌려줘야 하는 것이 못내 아 쉬운 것이다. "대체 왜 그래? 왜 그렇게 고양이에게 집착하느냐고! 넌 내가 죽어도 고양이 가 더 좋아?" 무형은 신경을 건드리는 래인의 울음소리에 마침내 참지 못하고 고함을 빽 질렀다. 래인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응."


헉! 이 치열한 배신감. 무형은 부르르 온몸을 떨었다. 위대하신 검은 용 정무형이 굴러다니는 털뭉치 고양이 한 마리보다 못하단 말이더냐? 그는 훌쩍이다가 다시 그의 옷자락을 쥐고 코를 핑 푸는 래인을 내려다보며 그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자존심을 최악으로 훼손한 저 여자를 죽여버 려야 할지, 아니면 고양이보다 못한 처지로 전락한 자신의 인생을 비관해서 그 자신이 바다에 뛰어내려 죽어버려야 하는 것인지 잠시 심각한 고민을 했다. 그는 화르르 돋은 질투와 분노의 불꽃을 잠재우려 최대한 애쓰며 래인에게 질문했다. 이건 정말 아주 중요하고 심각한 사안이었다. "나보다.... 고양이가.... 더 좋은 이유는 뭔데?" "첫째 고양이는 말을 잘 들어." "..나, 나도 네 말 잘 들어주잖아!" 웃기고 있네! 무형을 올려다보는 래인의 눈초리는 분명 그것이었다. 당신이 내 말을 잘 듣는다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아나 뒤바뀌면 또 모르지. 당신 무릎 한번 꿇게 하려면 내가 얼마나 잔머리를 많이 굴려야 하는데. 래인이 새침한 얼굴로 시트 자락을 손가락으로 빙빙 꼬았다. "두번째는.... 당신보다 고양이가 더 예뻐. 귀족적인 하얀 털, 사파이어 같은 파란 눈. 아아, 그 도도한 자태. 우아한 걸음걸이. 당신 머리카락도 예쁘지만 프 린스는 거의 완벽한 아름다움이라고." "완벽한 아름다움? XX!" 무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적나라한 상욕에 대하여 래인은 눈을 흘겼다. 이 남자, 갈수록 인간성 드러나네. 비단과 금으로 몸을 감은 위엄 넘치는 황제인 줄 알았더니 하는 짓이 갈수록 뒷골목 양아치로 변해가잖아. 고쳐서 데리고 살 으려면 한참 힘들겠군, 제길.. "수컷인 주제에 예쁘면 뭣하냐? 수컷은 수컷답게 힘차고 강하고 그래야 하는 거다." "흥, 설마 자기가 그런 존재라는 건 아니겠지? 고양이 털 날린다고 죽을 뻔한 사람이 뭐가 강하고 힘차다는 거야? 그리고 프린스는 자기 키보다 수십 배나 높은 곳에서도 잘만 뛰어 내리더라. 자기는 그럴 수 있니?" 한마디 말로 무형의 입을 꿰매버린 래인은 턱을 고인 채 무형을 진지하게 바 라보았다. "이건 정말 중요한 건데, 데릭. 내가 고양이라면 사죽을 못쓰는 이유는 말이 지, 고양이는 내 행운의 부적이란 말야." "고양이가 행운의 부적이라? 무슨 뜻이야?" 푸른 달이 떠오른 그날 밤. 한 소년이 그녀를 구해주었다. 아버지의 기억을 닮은 상쾌한 비누냄새가 나던 그 소년. 까마득하게 키가 크고 밤처럼 깊고 검은 눈을 가진 소년. 다리에 달라붙은 아기 래인을 안아 푸른 달이 떠오른 하늘로 빙빙 돌려주었지. 그리고 자신의 신발에 붙은 고양이 모양의 장식을 탐내하는 래인에게 그것을 떼서 주었다. "내가 보트 피플이었다는 거, 자기도 알지? 그때 우린 해적을 만났었대. 내 엄마는 그때 살해당했었지.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 배에 탄 모든 사람이 다 죽었을 거야.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나 같은 어린애는 그 자리에서 바닷물 속에 던져졌을 거구. 그런데 그 사람이 왔어." 래인은 뇌리 속에 각인 된, 그 소년의 희미한 영상을 떠올리며 나직하게 말했


다. 그 소년을 떠올리는 순간, 지금 그녀의 표정이 얼마나 아련하고 애틋해졌는 지도 모르는 채. 그것을 바라보며 무형이 얼마나 질투로 속을 끓이고 있는 줄도 모르는 채. "우릴 그 사람이 구해 줬대. 그 사람 덕분에 우리 모두는 안전한 육지로 도착 했고 우선 오빠와 난 운 좋게도 아버지가 근무하는 난민수용소에 가게 되었어. 그리고 아버진 나와 우선 오빠를 입양했고 말야. 그러니까 지금 여기 앉아있는 이래인이라는 사람은 그날 그 사람으로 인하여 존재하게된 거야. 그는 나와 우 선 오빠에게 생명을 준거지. 그때 그 사람은 자기 신발에 붙은 고양이 장식을 나에게 줬거든. 그때부터 고양이는 나에게 행운의 존재였단 말야." 래인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무형이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얼굴이었 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주 기묘한 표정이 된 그가 래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기막힌 운명의 조우 앞에서 차마 이 모든 것을 믿지 못 하겠다는 그런 얼굴. 그 가 손을 내밀어 문득 래인의 얼굴을 만졌다. "맙소사. 이래인.... 네가 그때 그 꼬마였냐?"

<26> 푸른 달빛의 선녀 "푸른 달이 뜨는 날에, 데릭.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온단다. 봉래산에 들어갔던 나무꾼은 평생 사랑할 운명의 여자를 그렇게 만나게 되었지." 잠이 들락 말락 하는 어린 소년의 머리맡에서 물이 흐르듯이 다정하고 조용 한 목소리로 동화책을 읽어주던 어머니. 소년의 눈에는 항상 잘 익은 노란 월병 (月餠)처럼으로만 보이는 달이 어떻게 푸르게 빛날 수가 있을까? 고개를 갸웃거 리며 눈을 비비며 그러나 그런 신비로운 밤에 사랑하는 반려를 만난 나무꾼의 행운에 대한 이야기를 사랑하는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거짓말이야! 하고 고함을 지르기는 했지만 그러나 정말 푸른 달이 뜨는 날이 면 하늘에서 날개옷을 휘날리며 천녀가 땅으로 내려올 것도 같았다. 그에게 뽀 뽀해주기 위해. 그를 사랑해 주기 위해. 서슬 푸른 칼날에 한발을 딛고 평생 살아가야 할 그를 이해하고 그와 운명을 함께 할 아름답고 고귀한 여자가 그에게 올 것만도 같았다. "뭐.. 뭐야? 그러면... 그 사람이.. 바로 자기였어? 자기가 그때 그 사람이었 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만 무형의 품에 와락 안겨버리는 래인의 여린 몸을 두 팔로 마주 안으며 무형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렇다. 놀랄 정도로 생생하게 그때의 모든 것이 다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었 다. 피 비린내 나는 참혹한 살육의 현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전쟁터에 핀 한 송이 작은 들국화 같은 얼굴을 하고 듣는 사람들까지도 즐거운 웃음을 머금게 하는 순진한 웃음소리를 내던 꼬마. 푸른빛이 돌 정도로 맑은 눈 속에 요요로운


달빛을 가득 담고 그를 올려다보던 꼬마 요정. 정말 하늘에는 푸른 달이 뜬 날이었지. 평화롭고 적요한 밤바다에는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훈풍이 불고 있었다. 장 화 한 짝의 무게도 나가지 않을 것 같은 솜털처럼 가벼운 아기의 몸을 안고 빙 빙 돌려주며 무형은 그 아기의 눈 속에 담긴 푸른 달을 똑똑히 보았었다. 꼬마 래인의 운명과 생명은 그날부터 무형의 것이었다. "에잇! 이 높은 콧대를 확 뭉개 버려야 내 속이 시원할 텐데.." 래인은 그녀의 침대에 드러누워 깊이 잠이 든 무형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주 먹을 들어 그의 얼굴 위 0,1 센티 앞에서 휘둘렀다. "건방지고 망할 남자 같으니라고. 아후!~~ 진짜 짱나. 이제 내 약점을 완전히 잡았다 이거지? 이제부터 얼마나 잘난 척 할까?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네.." 그날 래인과 우선의 생명을 구해준 이가 바로 정무형 그였다는 것이 밝혀진 순간, 너무너무, 구역질날 정도로 오만한 얼굴을 하고 무형은 래인을 내려다보 며 씩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네 생명을 구해준 구원자다 이 말이야. 인정하지?" "그건 인정하는데.... 왜 그렇게 음흉하게 웃는 건데?" 어쩐지 등골이 오싹하고 무엇인가 약~~간 불안해지기 시작한 래인은 한 발짝 그에게서 멀어져서 꼬나보며 따졌다. 무형은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며 어깨를 으 쓱했다. "아니, 뭐... 그냥..." "웃는 이유 말 안 해?" "아. 별건 아니고.... 우리 트라이어드의 철칙이 생각나서 말야." "그게 뭔데?" 무형은 손가락을 깍지끼어 뒷통수를 받치며 편안하게 드러누웠다. 그리고는 껌 껍질을 벗기듯이 아주 쉽게 내뱉었다. "은혜로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라는 거지." 무형은 히죽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찾았던 목숨의 은인 앞에서 마냥 자존심을 치켜세우고 싸움닭처럼 덤벼들기도 뭣해서 래인은 몇 발자국 그가 누운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무형이 씩 웃었다. 그 전과는 다르게 고분고분해지고 말 잘 듣는 꼭두각시처 럼 착해진 래인이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는 그런 눈 빛. 그가 긴 팔을 내밀어 그녀의 어깨를 잡아채 자신의 몸 앞으로 끌고 왔다 "우리, 셈은 정확하게 하자고. 내가 너와 네 오래비 생명을 구해 주었으니, 넌 나에게 목숨 두 개를 빚진 거야." "그, 그래서?!"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느릿느릿 뜸을 들이며 겁을 주는지. 래인은 오싹 떨며 더듬거렸다. 망할 이 남자, 정무형. 래인이 무슨 애 낳는 기계냐? 아주 포악하고 음흉한 미소를 귀까지 걸고는 한다는 말이 이랬다. "은혜는 두 배로 라는 것 알지? 내 아이 넷만 낳아주면 네 빚은 탕감해주지." 그가 구해준 목숨 값으로 새 생명 넷을 낳아내라? 지금 내 나이가 얼만데? 한창 꽃 피어나는 스물 다섯 살의 나더러 인생의 모


든 즐거움과 스릴과 꽃미남을 꼬실 기회를 버리고 제 정부(情婦)가 되어 애를 넷이나 낳으라고? 인간아, 너 그러면 안되지! 분개하다 못해 확 돌아버린 래인이 바락 고함을 지르려고 하는 찰나, 무형이 손가락을 들어 래인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그가 까무라칠 정도로 매혹적이고 동 시에 지독히도 타산적인 미소를 지어 보인다. "우리 사이에 이자까지 따지기는 그렇고 말이지. 아이 넷만 낳아. 그것으로 모든 것을 탕감해 주지. 이십 년 동안의 목숨에 대한 이자까지 받아낼 양이면 너, 나한테 갚아야 할 빚이 더 많아지잖아?" 이 인간을 그냥 확!! 앞으로 너무나 창창한 멋지구리 인생을 계획하고 있는 나 이래인의 미래를 빽 빽거리는 애나 낳고 똥 기저귀나 빠는 데에다 바치게 해놓고 저는 천사처럼 잠 을 자고 있구먼. 그냥 베개로 내려 눌러 죽여버려? 래인은 잠시 갈등했다. '콱 죽여 버리는 거야. 이래인.' 그러면 네 인생은 피는 거야. 앞으로 전세계를 누비며 꽃미남 미녀들를 수집하 며 울랄라라 삶을 즐기며 살아 갈 수 있다고. 그러나, 그.러.나... 그 놈의 의리가 무엇인지, 그 놈의 정이란 것이 무엇인지... 래인은 무형을 베개로 눌러 죽여버리는 대신.... 그의 겨드랑이 안에 파고들어 그의 든든한 팔을 베개 삼아 작은 곰돌이처럼 몸을 말고 새근새근 잠을 자기 시작했다. 역시 사랑하는 님의 곁에서 그의 섹시한 체취를 맡으며 자야 하는 것 이다. 뭐니뭐니 해도 술은 님의 <입술>이 최고이며 베개는 님의 <팔베개>가 최고가 아니더냐? 음냐 음냐....... "좋은 말 할 때 그만 졸라. 내가 안 된다고 했다." "힝힝힝.. 데릭. 내가 이 유람선 여행을 얼마나 손꼽으며 기다린 건데... 하지 만 자기 땜에 중도작파하고 돌아가는 거 아냐.. 힝힝힝. 이런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힝힝힝힝" "가짜로 우는 버릇 고치라 그랬다. 이래인. 말했잖아. 다음에 내가 일 년 짜리 티켓을 끊어준다고." 식탁에 앉아 급사가 날라 온 은제 커피포트의 뜨거운 커피를 따르며 무형은 차갑게 래인의 훌쩍거림을 잘라버렸다. 정무형이, 위대하신 검은 용 칭허 뮈렌께서, 사랑하는 연인을 내버리고 훌쩍 떠나서는 온갖 수컷들의 껄떡거림에 부합하여 별별 사악무도한 배신행위만 때 리고 용서하지 못할 바람만 피운 이 괘씸한 작은 여자 하나 잡아가려고 국경을 넘어 여기까지 왔으면 말야. 양심이 있어야지. 조용히 목줄 잡혀 끌려가며, 제발 당신의 너그러운 처분만 바랄게요. 홍홍홍. 다시는 자기 허락 없이는 자기 침대 에서 떠나지 않을게용, 이렇게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뭐시라고라? 유람선을 떠나는 기념으로 라스트 탱고, 아니지 라스트 스퍼트를 해야 한다 나? 마지막으로 바람피운 수컷들을 전부 모아놓고 뻑적지근한 파티를 해야하겠다 고 저렇게 양심에 철판 깔아놓고 설쳐대는 것이다. "데릭, 말이지. 내가 한가지만 물어봐도 돼?" 눈물 작전으로 해결이 될 성싶지 않은 것을 감 잡았는지, 래인이 보송보송한 눈두덩을 싹 문지르고는 살랑살랑 엉덩이를 흔들며 무형의 무릎에 냉큼 올라앉


으며 하는 말이 이랬다. 이 것이 또 무슨 잔꾀를 부려 나를 홀리려 드는 것이더냐? 차가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면서도 무형은 방금 샤워를 마친 래인의 머릿결에서 풍겨나는 달 콤한 샤넬의 향기에 자신이 이성이 속절없이 마비되는 것을 느끼며 끙 신음을 흘렸다. 래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형을 바라보며 그의 목에 하얀 팔을 감았 다. "자기야. 있잖아. 사람은 사람의 도리를 다해야 사람인 거지?" "그렇... 겠지?" "그럼 예절바른 것은 당연한 사람의 도리겠지?" "아마도." "그럼 자기야. 자기 연인이면서 잘하면 검은 용의 성처가 될 지도 모르는 내 가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예절바른 사람인 게 좋아? 아니면 말할 수 없이 무례 하고 싸가지 없는 게 좋아?"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당연히 품위있는 여자여야 하는 거지." 무형은 커피 잔을 놓으며 어이없다는 어조로 대답하자 말자였다. 너 딱 걸렸 다, 이런 눈초리로 갑자기 래인이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면서 가차없 이 그의 어리숙한 심장을 푹 찔렀다. "어머, 말은 그렇게 하면서 왜 그럼 나를 한없이 싸가지 없고 버릇없고 무례 한 사람으로 만드는 건데, 데릭?" 래인은 긴 속눈썹을 깜빡깜빡 떴다 감으면서 아무 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무 형에게 다시 대차게 쏘았다. "그래도 여기 유람선 사람들, 나랑 이 주일이 넘게 같은 배를 타고 항해하면 서 무척 친하게 지낸 사이야. 그런데 어떻게 작별 인사 한번 안하고 그냥 사라 질 수 있겠느냐고? 안 그래?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작별인 사도 없이 훌쩍 사라지는 건 너무 한 거지. 아냐? 적어도 당신이 나의 체면과 예절바름에 대하여 눈곱만큼의 배려만 있어도 말이지. 이런 식으로 날더러 당신 따라 훌쩍 사라지자 말할 수는 없다고 봐!" "이.. 이...." 또다시 딱 걸린 정무형, 졸지에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연인으로 하여금 사람의 도리도 다하지 못하게 만드는 천하의 사악무비한 놈으로 전락한 것이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으며 래인이 산들산들 웃었다. "난 말이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말이야. 오늘 밤 거한 파티를 당신이 내 이름으로 열어줘야 한다고 봐. 그것이 연인과 헤어져 홀로 쓸쓸히 유람선을 탄 불쌍한 나를 감싸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보살펴 준 모든 분들에 대한 당연한 대 접이라고 봐!" "젠장!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그건 말이야." 래인은 헤죽 웃으며 무형의 입술에 쪽하고 키스했다.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선 언했다. "당신은 날 사랑하니까 내가 원하는 건 다해 줘야 하거든. 그것이 나를 사랑 하는 연인의 참다운 도리라고 봐." 그날 밤, 열심히 에게 해를 헤엄치고 있는 호화 유람선 퀸 엘리자베스 호 갑 판 라운지에서는 유람선의 귀염둥이 넘버 원. 선상의 화려한 꽃 이래인이 주최


한 파티가 거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오늘 역시 래인의 잔머리에 뒷다리가 걸린 정무형. 몹시도 못마땅한 얼굴로, 그러나 이번 파티만 참석하고 당신을 따라 얌전하게 홍콩으로 돌아가 잠옷 차 림으로 침대 위에서 열심히 발가락에 패티큐어나 칠하며 그를 기다리겠다는 래 인의 하늘에 두고 맹세한 감언이설에 마지못해 그녀의 연인 자격으로 파티에 참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형은 금새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의 주시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한번만 보아도 한숨이 절로 나올 듯이 아름다운 사내의 얼굴, 묵청색 비단 위에 살아서 금새 움직일 듯한 검은 용이 수놓인 중국 옷을 입고 등뒤로는 검은 양복을 입 고 절도있는 동작을 하는 건장한 사내 너덧을 거느린 그 앞에서 여인들은 야릇 한 한숨을 쉬며 눈에 분홍빛 하트가 그려지던 것이었지만, 남자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위압감을 느끼며 한발 물러서곤 했다. 정체불명의 그러나 엄청나게 멋진 그 남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유람선의 천 사이자 모든 남성들의 히로인인 이래인의 연인이라는 소문이 퍼지자말자, 남몰 래 어둠 속에서 실연의 눈물을 흘렸던 남자들이 그 얼마였을까? 흑흑흑. 번잡하고 부산스런 파티란 딱 질색인 무형은 엷은 휘장이 쳐 진 구석의 자리 에 앉아 사람들이 파티를 즐기는 장면을 바라보기만 했다. 물을 만나 고기인 듯 파티장에 들어서자 말자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며 입맛을 다시는 래인. 예의상 한번 무형에게 춤을 추자고 말해 보았다. 원래 뻔뻔 래인의 인생관 중 하나가 잡은 물고기에는 밥을 주는 것이 아니란 것이지만, 그러나 이번에 잡은 물고기 는 뻑하면 래인의 연못에서 벗어나 딴 짓을 하려는 좀 골치아픈 물고기였으므 로 이거 먹고 떨어져라 심정으로 새우깡 하나를 던져준 것이다. 역시나 래인의 예상대로 같이 춤을 추자는 래인의 유혹에 무형은 손사래를 저으며 일단 뒤로 물러났다. '야속한 여자 같으니라고!' 한 번만 더 떼를 쓰며 졸라댄다면 못이기는 척 하고 나가서 파트너가 되어 주려고 했더니, 그가 거절하자 말자 래인은 새치름하게 돌아서며 그럼 다른 파 트너를 찾아야겠네! 하며 나폴 나폴 날아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분명 파티장에 들어올 때부터 찍어둔 것이 분명했다. 무형의 눈앞에서 검은 연미복을 멋지구리 하게 입고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을 가진 초록 눈의 꽃미남에게 다가가 래인이 단 일초만에 그 남자를 낚아채 춤을 추기 시작하는 것을 바라보며 무형 이 얼마나 싫다고 거절한 자신의 입을 쥐어박았는지는 오직 신만이 아시리라. 그리고 무형은 마침내 확인하고야 말았다. 그의 아들을 낳아줄 성처 후보 이 래인이 사실 한 남자만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수컷이라면 다 좋아 하는 엄청난 바람녀라는 것을 말이다!! 홍콩에 앉아 우인과 부하의 말로 종합하여 상상만 했을 때도 열불이 나서 참기 힘들었던 무형. 그것을 정작 제 눈으로 목격한 후에는 그 분노와 질투의 불꽃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너울거리기 시작하는데..... 탁자를 잡은 그의 손에 힘줄이 돋으면서 슬슬 숨결이 거칠어져 가는 무형. 슬 슬슬 척 이하 그의 보디가들이 주인에게서 한발 한발 물러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마침내 래인이 열 세 번째 파트너인 금발의 청보라색 눈을 가진 굉장히 아름


다운 미소년과 춤을 추기 시작한 그때, 무형의 인내심은 한도를 넘었다. 나이도 어린 주제에 건방이 코끝까지 선 그 망할 녀석은 무형의 눈앞에서 래 인의 허리를 끌어안고 마치 그녀가 제것인양 주무르는 것도 서슴치 않더니, 마 침내 춤이 끝나자 무형의 눈앞에서 래인의 볼에 쪽 하고 키스를 하는 극악무도 한 죄까지 저지른 것이 아닌가? 빠드득.. 가장 가까이 무형 옆에 서 있던 척은 주인의 입술 사이로 터져나온 이빨 가는 소리에 두 눈을 감고 오늘 밤 반드시 바닷물 속에 떨어져 상어 밥이 될 그 아 름다운 꽃미남에게 애도의 뜻을 표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내 꺼에 손대지 마!" 분명히 독심술을 익힌 게 분명했다. 손가락을 흔들어 저 망할 놈의 뼈를 갈아 놔! 하고 명령을 하려는 무형에게로 다가오며 래인이 경고했다. "잰 내 꽃미남 리스트 제 4 번에 오른 애란 말야. 내 꺼에 손댔다간 당신, 앞 으로 살기 힘들어진다. 내가 분명히 경고했어!" 빠드득 빠드득. 방금 전 연인의 눈앞에서 다른 놈하고 서로 끌어안은 채 별별 짓을 다 저지 른 후임에도 불구하고 겁도 없지. 래인이 상글상글 웃으며 의자에 앉는 대신 무 형의 무릎 위에 턱하니 앉았다. "물론 제일 앞 1 순위는 누군지 알지? 바로 자기야. 헷헤." 바로 그 순간, 척 이하 무형의 보디가드 여섯 명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두 손으로 눈을 세차게 비볐다. 불과 1 분 전까지만 해도 화룡(火龍)처럼 불을 뿜던 그의 주인이 갑자기 장미 꽃이 피어나는 화사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 정말이냐?" "그러엄!~~~~~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 봤어? 잠깐만 기다려. 자기야." 래인이 내가 요럴 때 당신을 꼬시고자 장만해 둔 게 있지 하는 얼굴로 의기 양양하게 탁자 앞에 세워둔 스케치북을 열었다. "이것 봐. 내 스케치북에 누구뿐인지? 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만 그리 거든." 그녀가 펼친 스케치북 한권에 그려진 사람은 전부다 그녀의 연인 무형이었다. 언제 그의 그런 모습을 다 포착했던 것일까? 그가 웃는 얼굴, 화내는 모습.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모습. 아이스크림을 먹는 얼굴.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는 옆모습. 알몸을 드러낸 채 아슬아슬하게 아랫도리만 시트로 가린 무형이 침대 위에서 허트러진 모습으로 잠이 든 얼굴. "난 요게 제일 맘에 들어. 당신 너무 사랑스럽단 말야." 얼빠진 멍청이처럼 굳혔던 얼굴근육을 펴고 좋아서 그냥 히죽거리고만 있는 무형 앞에서 래인이 잠이 든 그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 사랑스럽게 입을 쪽 맞 추었다. "당신이 생각날 때마다 당신을 그렸어. 어떻게 보지도 않고 그렸냐구? 당신의 모든 것은 다 나의 뇌리에 찍혀 있거든. 난 당신이 멀리 있어도 그래서 쓸쓸하 지 않아. 데릭. 왠줄 알아요? 나의 영혼 속에 당신이 들어있거든. 당신을 사랑하


니까. 난 당신의 여자니까." 이토록 사랑스러운 말을 들은 적 없다. 이렇게 가슴 깊이 파고드는 사랑고백 을 받은 적 없다. 무형은 래인의 장미꽃잎 같은 입술을 바라보며 가슴이 벅차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랑인가? 그래. 사랑이었다. 무형은 이제 어찌할 수 없이 항복하고 말았다. 곧고 당당하고 일념인, 저 하 늘처럼 다함없고 그 무엇과도 비길 데 없는 래인의 사랑 앞에서 그는 달콤한 항복밖에는 할 수 없다고 마침내 인정하고 만다. "젠장. 당사자가 앞에 있는데 왜 그림에 입을 맞추냐? 살아있는 내가 훨씬 더 좋지 않아?" 무형이 래인을 거칠게 끌어당기며 음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여자는 내 것이다, 그러니 다가오면 죽어! 하는 그런 오만한 동작으로 무 형은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거칠게 래인을 끌어당겨 소유욕 가득찬 키스를 퍼부었다. "이번만 용서해. 하지만 넌 오직 내 것이다. 다시 한번 다른 데 눈 팔기만 해." "그러면 어쩔 건데?" 래인이 장난기 가득찬 눈빛을 하고 하얀 팔로 그의 목을 감은 채 캐물었다. 무형은 히죽 웃었다. "그 놈 눈앞에서 네가 누구의 여자인지 가르쳐 주지. 지금처럼 이렇게!" 잠자리 날개처럼 얇고 부드러운 래인의 드레스 끈을 어깨 아래로 끌어내려 하늘에 뜬 만월처럼 풍만하고 아름다운 하얀 젖가슴에 입술을 가져다대며 무형 은 온 몸이 녹아 내릴 듯한 관능적이고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여기서....너를 욕심내고 있는 사람들이 다 보는 데서... 내가 널 가져버 린다는 거다" "서..설마 지금 정말 그러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숨이 막히는 듯 래인의 목소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처럼 어지럽게 살랑거 렸다. 그녀의 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 자국을 낙인찍듯이 하나 남긴 후 고개를 든 무형은 씩 웃었다. 그가 래인의 귓불에 대고 속삭였다. "Why not?" 흐릿한 조명 아래 엷은 어둠이 깔리고 그 들의 테이블 앞에 시선을 가리는 얇은 장막이 쳐졌다고는 하나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다가올 수 있고 바라볼 수 있는 공개된 장소에서 설마 그녀를 그가 가지겠다고 나설 줄은 몰랐다. 어지 간히 대담한 래인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반사적으로 그를 밀어냈다. 그러나 무형 은 그를 밀어내는 래인의 팔을 잡아당겨 그 팔의 안쪽 부드러운 살갗을 혀로 핥았다. "내가 여기서 널 가지지 못할 이유를 세 가지만 대 봐." "이.. 이 망할 남자! 연인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까지 남의 눈앞에 공개하는 취 미가 있었단 말야? 변태 아냐, 당신?"


"내가 널 소유하는 건 언제 어디서든 내 맘이 내킬 때야." 그가 그녀의 보드라운 살갗을 살며시 이로 물었다. 래인의 입에서 절로 앓는 듯한 관능적인 신음이 배어 나온다. 무형은 손을 움직여 래인의 손을 잡아 자신 의 옷자락 안으로 밀어 넣었다. "널 원해서 지금 죽을 것만 같은 날 이대로 내버려 둘 거야? 응? 너의 연인 을 동정해달라고. 나의 래인." 그녀의 작은 손안에 뿌듯하게 잡히는 사내의 욕망은 적나라하게 곧추 서 있 었다. 그녀의 손을 겹쳐 덮은 자신의 손을 움직여 무형은 능숙하게 래인으로 하 여금 자신을 애무하고 자극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입술과 다른 한 손 은 래인의 입술과 젖무덤을 어루만지고 간지럽히고 자극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나의 래인. 그의 속삭임 하나가 그토록 큰 행복일 줄이야. 그녀에게 나의 것이라고 속삭 이는 무형의 말 한마디에 그만 래인의 영혼은 이미 천국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에게 몰입한 래인과 무형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의 하나로 엉켜 미친 듯이 서로를 갈구하고 서로에게 몰입해 천국으로 날아가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하나의 사악한 시선을. 파티가 끝나고, 그들을 위해 날아온 헬기 안으로 무형이 잠이 든 래인을 가볍 게 안고 사라졌다. 본인은 느끼지 못했겠지만 이 세상에 가장 사랑스럽고 소중 한 것을 안고 있다는 그런 얼굴을 한 무형이다. 그러나 사랑에 취한 그는 그만 항상 열어두었던 본능의 감각을 멈추어 버렸 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몰랐다. 그 누군가가 증오에 가득 찬 눈빛을 하고 살기 를 띈 채 그들이 탄 헬기가 밤하늘로 사라지는 것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앞으로 다가올 피바람을 예고하는 그 징그럽고 잔인한 시선을... <27> 성처가 되기 싫은 성처 그렇게 하여 넓은 세상에 널린 꽃미남. 미녀들을 수집하러 떠난 래인의 회심 찬 방랑은 홍콩에서 날아온 검은 용이 걸어버린 딴지로 인하여 일단 소기의 목 적을 달성치 못하고 중도작파가 된 것인데... 꽃미남 수집이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것. 그 대신. 래인은 다른 것을 확실하게 배우고 완벽하게 마스터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도대 체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바로.... 지나간 20 세기의 영원한 고전 <엠마누엘 부인>의 그 명장면. 비행기 안에서의 삐리리에 대한 직접경험이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라. 모든 것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며 대령되는 호사스런 개인전용 기 후미에 마련된 널찍한 침실 안, 거대한 침대 위에서 사랑하는 남자와 벌이는 환상적인 응응응을..... 원래 목적인 꽃미남 수집은 겨우 다섯 인간밖에 못했으되, 그러나 래인은 그 다지 억울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며 벌거벗은 연인의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마치 고양이가 주인의 가슴에 안겨 가르랑거리며 아양을 떠는 것과도 같은 래인의 나직한 신음에 싱긋 미소를 물며 그녀의 연인이 땀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얼굴이 키스하고 지친 목소리


로 중얼거렸다. "두 시간만 자자. 그러면 홍콩 도착이다." "사랑해. 데릭." 언제나 무표정하고 냉담하던 무형의 차가운 입술이 보기좋게 위로 휘었다. 온 몸이 녹아 내릴 것만 같은 아름다운 남자의 미소이다. 그가 팔을 내밀어 자신의 몸 위로 래인의 작고 부드러운 몸을 끌어올렸다. 두 사람의 이마와 이마가 마주 쳤다. "나의 래인. 내 작은 연꽃." "사랑해. 데릭." "넌 내 심장이야. 네가 내 것이어서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사랑한다니까, 데릭!" 끝까지 사랑한다 말하지 않으려 하는 고집세고 오만한 연인의 입술을 물어뜯 으며 래인은 앙칼지게 말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제는 너에게 항복한다는 듯이 무형이 래인의 눈시울에 키스를 했다. "워 아이 니. 래인." 이 남자가 입 밖으로 내어 사랑한다고 말했다면 그것은 맹세이다. 절대로 변 하지 않는 심장의 각인이다. 래인은 행복하게 미소지으며 그의 목을 감았다. 마 주 미소짓던 무형이 그녀의 가녀린 척추를 따라 손으로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홍콩으로 돌아가면 내 성처가 되어야만 해. 래인." 몽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작은 손으로 애무하던 래인이 고개를 발딱 치켜든 것은 그때였다. "그건 싫은데?" 공항에서 래인과 무형을 맞이한 리훙은 예상과는 달리 아주 요상하고 찬바람 도는 분위기에 지레 질려서는 척에게 눈을 끔뻑끔뻑했다. 뒤에서 짐가방이 든 트레이를 끌고 나오던 척은 죽을상을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비행기를 탈 때만 해도 좋아죽었던 두 사람. 여섯 시간 동안 꼼짝도 않고 비 행기 후미에 마련된 침실 안에 틀어박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척 심란하게 만들었던 거친 헐떡임과 민망한 신음과 비명소리를 내며 사랑만 나누었다. 누가 보아도 천생연분, 서로에게 미쳐서 눈에 보이는 것 없다는 표현이 딱 맞 았던 두 사람. 그런데 정작 비행기가 홍콩 공항에 도착하고 난 후, 옷을 챙겨 입고 침실 문을 열고 나오는 두 사람 얼굴이 하나같이 얼음 씌운 듯이 냉랭하 기 이를 데 없는 것이 아닌가? "잘 가. 즐거웠어. 흥!" 공항 문을 나서자마자 래인은 척의 수레에서 자신의 작은 가방을 달랑 집어 들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택시에 손을 들더니 냉큼 올라타고 사라져버렸다. 무어라 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말이다. 졸지에 버림받은 몰골을 하고 이를 갈며 래인을 태운 택시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무형의 얼굴에 피어나는 살 기가 너무 무서워서 모든 사람이 숨쉬는 것도 잊은 채 어정쩡하게 서서 무형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것인데.... "잘 가? 즐거웠어? 흥이다! 망할!! 그래 나도 흥이다!! 젠장." 이를 갈며 꿍얼거리던 무형이 마치 화풀이를 하듯이 거칠게 문 앞에 대기되어 있는 람보르기니 문짝을 걷어차 버렸다.


"안갈 건가? 집으로 가자고!" "네? 넷!!" 두 대의 차에 나누어 탄 무형의 일행이 하버에 있는 그의 아파트로 가는 동 안 무형이 한 말이라고는 딱 한마디였다. "이제부터 그 망할 것이 전화를 걸거나 내 집에 찾아오면 국물도 없다고 해!" 래인이 홍콩으로 돌아온 지 이주일 되던 날 아침이다. 영국에서 셋째 우제 내 외가 모처럼 바쁜 스케줄을 조절해서 부모님을 뵈러 와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이박사 내외와 래인. 우제 내외 다섯 사람이 정답게 아침식사를 하고 있던 참이 다. "나. 데릭이랑 같이 살까봐." 마치 옷이나 한 벌 사러 갈까봐 하는 말처럼 아주 태연하고 대수롭지 않게 아침 식탁에서 불쑥 내 뱉은 래인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이박사네 집안에 침묵 이 휭 돌아나갔다. 어머니 윤유희 박사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하고 래인에 게 다시 되물었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 그 남자랑 동거를 하겠다는 말이냐?" "네." 래인이 찍은 그 남자는 아주 위험한 남자라고 - 트라이어드의 수장이자 이미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터라 절대로 다른 여자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자인데도 그렇게 맹목적으로 마음을 빼앗겨 무작정 겁도 없이 달려든다고, 제발 저 애 좀 말려주세요! 하고 날이면 날마다 전화를 걸어 난리치는 우인이 때문에 이박사 내외에게 있어 무형은 래인의 짝으로서는 기피 대상 제 일호였다. 그런데 이번에 유람선 여행을 다려온 이후, 래인에게서 무형이 바로 이십여 년 전, 우선과 래인의 목숨을 구해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연후에 다소 반감이 사라지기 했지만 그래도 아직 이박사 내외는 무형에 대하여 그다 지 호감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윤박사나 이박사는 그야말로 애지중지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 을 막내 고명딸을 감히 거절하고 잘난 척하는 건방진 녀석에게는 내 딸 못 준 다는 기본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땅히 우리 딸하고 결혼하려면 집에 찾아와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절하고는 바닥을 기는 저자세로 "따님과 제발 사귀게 해 주십시오" 구걸하면서, 앞으로 결혼을 시켜 놓으면 래인을 위하여 불철주야 노력하고 온몸을 불태워 봉사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마당쇠 기질을 보여야지 말이야. 이 놈의 인간은 제 집에 버 티고 앉아 손가락 까딱여 래인더러 오라가라 명렁하는 천하의 오만방자하고 싸 가지 없는 놈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얘, 너 지금 제정신이니? 그런 놈하고 혼전동거를 하겠다고 여자인 네 가 먼저 나서다니. 래인을 바라보는 모친 윤박사의 눈은 분명 그런 비난을 담고 있었다. "연애도 아니고 동거라니... 그건 좀.." 아무리 부모 말 듣지 않고 제 맘대로 하는 세상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건 좀 심하지 않냐? 이런 어조로 충고를 하려는 찰나. 그가 뭐가 문제가 되겠느냐는 얼굴로 래인이 부친 이박사를 바라보며 태연하게 덧붙였다. "뭐 지금처럼 가끔 만나고 밤을 같이 보내고 신나는 연애나 걸까도 생각했는 데 말이죠. 내가 조금만 눈을 돌리고 관리를 안하면 이 남자가 딴 짓을 하려고


해서요. 이 참에 다잡아 버릇을 좀 들여야 할 것 같아서요." "그 놈이 내 딸하고 결혼은 못한다던?" 분개한 이박사의 항의에 래인은 버터 나이프를 들어 빵을 푹 찔렀다. 그리고 그 빵에다 버터를 듬뿍 바르며 콧방귀를 뀌었다. "아빠. 그런 걸 귀찮게 왜 해요?" "이래인!" 우제와 이박사가 동시에 고함을 막 치려는 찰나 래인이 눈을 깜빡깜빡하며 되쏘았다.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 데릭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구요. 명색이 트라이어드 의 계승자고 그 커다란 조직을 지휘하는 심장 같은 사람이란 말예요? 그 남자 의 성처가 되려면 여러 가지 걸리는 게 너무 많단 말이죠. 아버진 제가 그 남자 와 혼인해서 가고 싶은 데도 못 가고 하고 싶은 일도 못하는 그런 삶을 살기를 바라세요? 답답해서 전 그런 조롱 속의 새는 되기 싫어요. 하지만 전 데릭을 사 랑한다고요! 어떤 년한테도 못 줘! 그러니 그 남자 얻는 법은 결혼은 하지 않고 그냥, 이러고 살면서 그 남자의 아이를 낳고 사랑하고 살면 안되는 거예요? 결 혼해서 서로 구속하고 간섭하고 지지고 볶고... 아휴! 짜증나.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같이 살고 싶으면 같이 살고 떨어져 있고 싶으면 떨어져 있고.... 자유롭 게 사는 게 낫지 않아요? 남녀관계가 꼭 결혼을 해야 한다는 법이 있나요?" "이래인!" 이번에는 모친 윤박사가 경고의 의미로 래인의 이름을 불렀다. 래인은 오렌지 껍질을 벗기며 모친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엄마. 결혼은 인륜지 대사인데 함부로 결정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잘 알면서 그럼 너와 결혼도 하지 않으려는 남자와 동거하겠다는 경솔한 결 정을 하려는 거니?" 윤박사의 지적에 래인은 새침하게 오렌지를 깨물었다. "그 남자가 나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누가 그랬어? 내가 결혼을 할 지 안 할 지 모르겠다는 거지." "그럼 그 인간이 최소한 너에게 청혼은 했단 말야?' 이번에는 우제(유진)가 캐물었다. 래인은 당연하지 하는 의미로 고개를 까딱 했다. 그럼 그렇지.. 어떤 남자든 내 딸에게 걸린 이상은 빠져나가기 힘들지. 만약 그 놈이 내 딸을 농락하고 따먹고도 청혼도 안 했다면 오늘 당장 메스 열 개를 들고 쳐들어가 갈기갈기 내장까지 다 해부를 해놓으리라 작심했던 이박사와 윤 박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가 래인에게 다시 캐물었다. "그럼 데릭이 너더러 결혼하자고 했단 말이냐?" "아마도." "아마도? 그런 대답이 어디 있냐?" "나더러 직접 결혼하자고 말을 한 건 아니지만 나더러 검은 용의 성처가 되 어야 한다고 했어. 그걸로 이야기는 끝난 거지. 그리고 나더러 평생 자기하고 같이 살자고 그랬어. 자기 아이 넷 낳아주고.. 그것을 청혼이라고 볼 수 있지 않 을까? 엄마?" "그런데 넌 왜 그 사람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고 동거를 하겠다고 나서는 거 니?"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며 래인이 윤박사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바보 아


냐? 이런 표정이었다. "나 참! 결혼은 살아보다가 할 만 하면 하는 거지 꼭 해야하는 건 아니잖우? 데릭이 내 남편감으로 적당한 지 같이 살아보면서 결정하겠다는 거야. 연애하고 결혼은 다른 거라며? 같이 살아봐야 아는 거라며? 그래서 그 남자 버릇이며 마 누라 대하는 태도며 하는 짓 검사 좀 하고 결혼을 할 지 안 할 지 결정하겠다 는 건데 왜 그러는 건데?"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유진의 아내 엘린이 래인이 두 번째 오렌지를 집어 드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마디 했다. "래인 아가씨. 임신했죠?" 같은 시간. 빅토리아 가 대 타이쿤의 저택. 모처럼 한국에서 휴가를 내어 홍콩으로 다니러온 무형의 부모와 타이쿤 내외. 그리고 무형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노 타이쿤이 도끼눈을 뜨고 밉살스러워 죽겟다는 눈초리를 하고는 무형을 꼬나보았다. "그래. 이제는 래인이가 결혼하겠다고 허락했냐?" "....아니오." 다 잡은 고기를 뜰채로 뜨지 못해 번번이 놓쳐버리는 손자의 어리석음과 능 력없음에 대하여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으로 노 타이쿤은 에잉! 하고 몸을 홱 돌이켜 버렸다. "에잇! 이제부터 너더러 검은 용이라 하지 말고 검은 지렁이라고 해야겠다. 누가 보아도 나무랄 데 없는 성처감을 발견하고 꼬시기까지 했으면 정신 차릴 새도 없이 몰아붙여 안주인 자리로 들여앉혀야지. 대체 뭣하는 짓이야? 너 그러 다가 닭 쫓던 개가 되는 수가 있다, 이 놈아!" "그런데 그 앤 왜 네 아내가 되기 싫다는 거냐?" 너무너무 궁금하다는 듯이 무형의 부친 정박사가 물었다. 그 말이 나오는 순 간 갑자기 무형의 몸에서 뭉클뭉클 살기가 돋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의 몸에 서 뻗어 나온 검은 살기에 온 식당에 숨죽인 침묵으로 뒤덮이는데... "개 폼 잡지 말고 대답이나 해, 이 놈아! 여기서 네 살기에 눈 하나 깜짝 할 사람이라도 있다고 그러냐?" 노 타이쿤이 가소롭다는 듯이 젓가락을 들고 쌀죽 그릇을 탁탁 치며 무형의 살기를 눌러버렸다. 아랫배에 힘을 주고 무형이 어금니 사이로 조용히 내뱉었 다. "....세계는 넓고 꽃미남은 많답니다. 기회를 놓치기 싫다는군요." 한순간의 정적과 침묵. 갑자기 크크크 무형의 모친이 냅킨으로 입을 막은 채 괴이한 웃음소리를 내 기 시작했다. 점잖은 얼굴로 허공만 바라보던 부친 정박사 또한 결국은 참지 못 하고 푸핫하하하!~~~~ 하고 대소를 터뜨린 것은 그 다음. 오로지 슬픈 눈빛으로 애인에게 거절당한 손자를 감싸주는 사람은 인자한 조 모뿐이다. "불쌍한 데릭..., 얘야. 그러니까 넌 그애한테 걷어차인 거지, 그렇지? 홋호호 그런데 그 애는 어쩜 그렇게 하는 짓마다 그렇게 깜찍하게 멋지니? 나도 못해 본 그 명 대사를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네 앞에서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해 치우다니." 우헷헤헤... 켈켈켈... 크하하하. 피식피식..


맨 마지막 것은 창가에 서 잇던 리훙과 척의 것이었다.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본능으로 그들은 최선을 다해 주인의 망신스러운 실연 사건에 대하여 비웃음을 참으려 애썼지만, 그러나 이 세상 어떤 여자도 발가락 때처럼 여기며 오만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다니던 주인이 된통 걸린 것에 대 하여 쾌감이 아니 생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무지 쪽팔린 무형. 등뒤에서까지 들려오는 비웃음이 분명한 소 리에 고개를 들렸다. 척과 리훙이 움찔하더니 다시 무표정한 부동자세로 돌아갔 다. 무형은 너 죽여! 이런 시선으로 창가에 서 있는 두 사내를 슥 훑었다. 그렇 지 않아도 기분이 무지 꿀꿀 했는데 너네들, 두고 봐라. 뼈마디 스물 여섯 군데 를 아작내 줄 테니.... "정말 대단한 여자를 찾아냈구나. 데릭. 네가 그 애를 성처로 만들려면 만만 치 않겠는걸?" 웃다가 웃다가 눈가에 눈물까지 맺힌 무형의 모친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 며 말했다. "정말 래인인 그 앤 딱 너의 성처야. 목석 같은 널 웃게 만들고 화를 나게 만 들고 게다가 이 집안에 웃음소리를 나게 만드는 애잖니?" 게다가 네 마음속에 말뚝으로 박힌 가린을 잊게 만든 아이잖니? 무형의 모친 은 그 말은 가슴속에 삼켰다. 그러나 노 타이쿤이 쯧쯧 혀를 찼다. "웃을 일만은 아니다. 아무리 늦어도 내년 춘절에 이 놈의 성처가 어떤 여자 인지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다." 무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때까지 제가 어떻게 해 볼테니 걱정 마시지요. 설마 제가 그때까지..." "그때까지 뭐?" 네 쌍에다 두 쌍을 더한 열 두 개의 눈동자가 무형에게로 다가왔다. 무형은 우아한 동작으로 찻잔을 들어 마시고는 탁 소리가 나게 잔을 탁자에 놓았다. "...반드시" "반드시?" "그 망할 말괄량이에게 쌍둥이로 임신시키고야 말테니까요!" 그때였다. 하녀의 안내를 받아 들어서는 사람. 화려한 연꽃이 가득 꽂힌 소반 들 들고 나타난 래인이 전지전능한 신처럼 자신만만하게 내뱉는 무형의 말에 찬물을 확 끼얹었다. "미안하지만 어떡하나요? 쌍둥이가 아니라는데." 밉살맞게 등장한 래인에게 눈을 흘기면서도 자리에 일어서서 의자를 빼주는 무형이하 모든 사람에게 래인이 상냥하게 웃으며 발표했다. "저 임신했어요. 데릭. 축하해. 자긴 금새 후계자를 갖게 될 거야. 그런데 쌍 둥이는 아냐. 애 하나래." 약 삼초 후, 대 타이쿤의 고함소리가 빅토리아 가를 뒤흔들었다 "심. 심봤다!~~~~~~~~~~~~~" 그해 12 월 말. 한국. 서울. 출판사에서 갓 도착한 따끈따끈한 자신의 책을 바라보던 래인은 만족스러운 한숨을 쉬고는 책표지에 입을 쪽 맞추었다.


"에고, 에고. 하지만 이제부터 고생이로구나. 200 권에 사인을 어떻게 다 하 지?" 오빠 우인은 같이 근무하는 검찰청 사람들에게, 또 올케 민하는 사업체에서 거래하는 사람들에게 송년 선물로 그녀의 책을 주겠다고 했다. 음핫하하. 드디어 둔한 우리 식구들도 내 작품의 천재성과 작품성을 인정하기 시작했구먼 좋아한 것도 잠시. 그들이 래인의 책을 선물 목록에 올린 것은 순전 히 돈이 덜 먹혀서였다나... 게다가 이 인간들은 한술 더 떴다. 한국 출판계의 미래와 작가들의 작품 발전 을 도모하는 의미로 서점에 가서 제 값 주고 책을 사야지 말이야. 사악하기 이 를 데 없는 이 인간들은 불쌍하고 연약한 막내에게 밥을 안 주겠다느니, 한국에 나와 있는 동안 빈대치는 값을 내놓으라느니 협박하면서 그녀로 하여금 출판사 에서 작가 예우 차원으로 40% 씩 할인해주는 <작가 할인본>으로 200 부나 구 매하게 해놓고는 "오늘 저녁까지 다 사인해 놔!" 협박하고는 유유히 출근을 한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해 발매된 그녀의 새로운 그림책 <마왕(魔王)이 착해졌어 요?>는 삼주일 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열린 국제 아동서적 전람회에서 이등 상으로 당선되는 영광을 안았다. 세계 18 개국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동시에 발매된 그녀의 새로운 동화 책은 <아름다운 그림과 환상적인 이야기. 아동들의 마음에 반드시 포함되어져 야만 하는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21 세기의 걸작>이라는 평을 받는 중이었다. 현재 아동서적 베스트 셀러 4 위를 달리고 있는 이 책이 많이 팔리면, 음핫하하 하. 이번에는 반드시 달기지 관광을 가고야 말리라. 래인은 생각만으로도 몸이 비비꼬일 만큼 기분이 좋아 사인을 하는 손목의 속도에 더욱더 가속도를 붙였다. 우주 비행사들이나 달 기지에 근무하는 남정네들이 또 한지성 한몸매 한터프 하는 근육질 미남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 '크핫하하. 이제 나의 꽃미남 수집목록은 이제 유니버샤~~알 하게 확장되는 구나.' 래인은 문득 사인을 하던 손길을 멈추고 다정하게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알았어, 알았다고. 넌 안 데리고 갈 테니 걱정 말란 말야. 왜 발로 걷어차고 난리인 거니? 너도 네 아버지 닮아서 사나워지려고 그런 거니?" 임신 7 개월 말. 래인이 임신했다는 소식에 달나라로 솟구치던 무형의 기분은 그러나 그 자리 에서 래이이 꺼낸 그녀의 새 동화책을 보던 순간 완전히 지하로 추락하고 말았 다. "내가 말이지. 네가 어지간하게 날 골탕먹이면 이해를 하겠는데 말야. 어떻게 내가 발가벗고 목욕을 하는 장면을 세상 사람들이 다 보는 동화책에다 넣을 수 가 있는 거야?" 유람선에서 래인이 그의 모습이 담긴 스케치북을 보여주면서 자신을 사랑하 고 기억하며 그렸다고 뻥쳐서, 연악한 남자의 마음이 설레었던 것도 잠시. 스케 치북의 그 그림이 사실은 래인의 신작 <마왕이 착해졌어요?>의 삽화로 쓰여졌 다는 경악할 만한 진실을 알게된 검은 용 나으리. 입에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 갔다.


게다가 제목이 그게 뭐냐? <마왕이 착해졌어요?> 라니! 세상에 트라이어드의 검은 용이 착한 것 봤어? 사람을 타락시켜도 말이야. 어느 정도 분수있게 타락을 시키고 사람 위신을 추락시켜야지. 무형의 눈에 열불의 불꽃이 돋는 순간. 이 패 죽여도 시원찮을 얄미운 여자. 인세 받았어요 하면서 모든 식구들에게 선물 하나씩을 내 놓는 것 이 아닌가? 그런데 무형에게 준 거라고는 겨우 연필 한 자루였다. "자기, 사람들하고 투자 상담할 때 가끔 손가락으로 돈계산 하더라? 이젠 손 가락으로 하지 말고 연필로 종이에 쓰면서 해요." 이 망할 여자가 제 연인의 초상권을 마음대로 침해하여 제 책의 삽화로 쓴 것까지는 좋다고 하자고요. 그렇게 남의 잘난 얼굴을 사용해서 인세를 무지 받 아놓고는 그에게는 돈 한 푼도 안주고 제가 다 착복하고 연필 한 자루로 입을 싹 닦는 행위는 너무 심한 거 아냐? 이보쇼, 이래인? "내 개까지도 니나 리찌 마크가 달린 개줄을 선물받는데 왜 네 책이 팔리게 된 데 지대한 공을 세운 나는 연필 한 자루냐?" "에이, 데릭. 그러지 마. 자기 것이 내 것이고 내 것이 내 것인데 왜 쫀쫀하게 그래? 대신 자긴 가장 큰 선물 받았잖니? 내 아기. 그리고 당신과 동거하겠다는 나의 지엄하신 결정. 이것으로 그만 만족해요. 사람은 언제나 갖고 싶은 모든 것을 다 갖고 살수는 없는 거지. 불공평하지만 그게 인생이야." 래인이 임신을 했다는 것을 알게된 순간부터 무형은 마치 병아리를 돌보는 어미 닭이 되 버린 듯 했다. 임신을 한 것이 무슨 대사라고, 마치 그녀가 중병을 앓는 사람이라도 된 양 그녀가 조금만 움직이려고 해도 난리를 치며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전화를 걸고 별별 수선을 다 피우는 것은 차라리 애교라고 하자. 세 명의 하녀들이 달라붙어 머리 빗는 것까지 대신해 주는, 그야말로 숨도 못 쉴 정도로 지독한 과보호에 시달려서 어쩌다 그녀가 아파트 앞 하버에 나가 차 한 잔을 마실려해도 경호원들 수십명이 우르르 달라붙는 나날을 래인이 견뎌낸 것 은 단 일주일. 죽었으면 죽었지, 사람이 이렇게는 못산다 싶어 래인은 동화책의 한국 출판을 핑계로 대고 냅다 서울로 우인의 곁으로 도망을 오고 만 것이다. 전화벨이 울린다. 보지 않아도 그 일 것이다. 래인은 한숨을 쉬고는 휴대전화 의 폴더를 열었다. 미치고 환장하겠다는 듯이 무형이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헝 클어뜨리면서 고함을 빽 쳤다. -"당장 안 돌아와?" "안 가." -"대체 어떡하려고 그러는 거야? 내가 피 말라서 죽는 꼴을 보고 싶어?" "자기는 대체 왜 그래? 임신한 것은 나야. 세상 여자들 수천만 명이 겪는 아 주 평상적인 일이라고. 그런데 왜 이러는 건데?" 래인은 손을 들었다. "또 한번만 더, 이 애는 검은 용의 후계자라서 이 누추한 아파트에서 기거하 면 안 된다는 둥, 누가 우리를 해치려고 암살자를 보낼 지도 모른다는둥 이런 공상과학 소설 쓰기만 해봐! 전화 끊어버린다!!"


-"대체 넌 왜 그렇게 매사 제 멋대로인 거냐? 한번만 내 말을 좀 들어주면 안되는 거야?" 마침내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낸 무형. 참다 못해 화상 안에서 벌컥 화를 내며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 박았다. 래인은 수화기를 책상에 내려놓고 책 한 권에다 다시 사인을 했다. 수화기 안에서 무형이 뻑뻑 고함을 지르거나 말거나... -"네 불만이 무엇인지 말을 하란 말야 말을!" "아직도 당신은 반성을 안했구나?" -"반성? 얼어죽을 반성? 내가 뭘 반성해야 하는 건데? 내가 널 만난 것? 내 가 널 내 여자로 만든 것? 내가 널 임신시킨 것? 내가 널 사랑해서 혹시나 네 가 잘못될까봐 걱정이 되어서 미칠 것 같은 것? 그것을 반성해야 하는 거야? 망할!" 래인은 수화기를 다시 들고 화면 속의 무형에게 혀를 쏙 내밀었다. "당신 정말 바보야! 당신하고 다시는 말 안 해!" 화상 전화기의 OFF 버튼을 눌러버린 래인은 깔깔거리고 웃으며 다시 사인을 시작했다. "당신이 날 데리러 와야지 데릭. 그리고 이 멋진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야 하지 않겠어? 우리 셋이서.." 아파트 현관에서 벨이 울렸다. 래인은 느릿느릿 실내화를 끌며 현관으로 걸어나갔다.

<28> 레드 크리스마스 -"저, 저 멍청한 놈. 쯧쯧쯧!" 대체 그 망할 여자가 정말 그에게 원하는 것이 뭘까? 래인이 서울로 가버린 이후 한 달 동안 무형으로 하여금 정말 미치고 환장하 게 만든 것은 바로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좋다는 것 다 해다 바쳤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게 시중들게 했어. 임신 한 기념으로 여자들이 좋아 까무러친다는 달덩이 만한 보석 셋트도 선물했어. 과도한 사랑은 태아에 좋지 않다는 믿을 수 없는 래인의 주장에 같은 침대에 자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는 초인적인 인내도 발휘했다. 사나이 사랑 이 이 정도면 되는 것 아냐? 그런데 이 사악하고 잔인하고 야속한 여자는 단 일주일만에 눈물겹도록 지극 정성인 무형의 사랑을 박차고 팔랑팔랑 제 일을 핑계대며 서울로 날아가 버렸 던 것이다. 아무리 애원하고 빨리 돌아 오라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보아도 하늘 같은 서방님(이 될 남자)의 말을 도대체 들어 먹어주지를 않으니 이를 어찌하란 말인가? 도대체 래인이 그에게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궁리, 궁리 끝에 그래도 해답을 찾지 못할 바보팅이 무형은 결국 지푸라기라


도 잡는 심정으로 의리 빼면 시체인 이 시대의 진정한 사나이. 진짜 우정이 무 엇인지 항상 보여주는 빌어먹을 놈의 윤하린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망할 놈의 친구라는 것이 다짜고짜 하는 말이라는 것이 이런 욕이 라니. 이래도 되는 거야? 파바박 이마 위에 퍼런 심줄이 돋는 무형을 바라보며 화상 안에서 하린이 이 지독히도 답답하고 멍청한 친구 좀 보소! 하는 얼굴로 건방지게 다시 혀를 찼 다. -"네가 그 따위로 답답하게 굴어대니 이 놈아. 네가 래인씨한테 꽉 잡혀 바람 을 못 피우는 거다. 알겠냐?" "망할, 요점만 말해! 임마! 그렇지 않아도 열불 나 죽겠는데... 요점만 말하라 고!" 하린이 그런 것은 공짜로 못 가르쳐 주지롱!~~ 하는 얼굴로 여유 만만하게 생 수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는 화상 안에서 그를 바라보는 하린의 얼굴에 잠긴 미소가 어쩐지 불길하다. "래인씨에게 버림받지 않고 사랑받는 방법을 확실하게 가르쳐 줄 테니, 다음 달에 호주에서 열리는 요트 대회에 네 <타이푼(무형의 요트)> 빌려줄 거지?" "이.. 이....!!" 무형은 빠드득 이를 갈았다. 내가 목숨 다음으로... 아니지 이제는 래인이와 그 뱃속의 아기가 생겼으니.. 그 다음으로 아끼는 것이 타이푼인 줄 뻔히 알면 서 그것을 빌려달라고라? 임마, 넌 네 마누라를 빌려달라면 빌려주겠니? 악마보다 더 사악한 놈! 절대로 제 이익을 챙길 구석은 놓치지 않는 약아빠진 놈!! "아, 싫음 말고!" "이.. 이 썩을! 비.. 빌려주면 될 것 아냐? 임마!" 마지못해 대답은 하면서도 딱 목을 졸라 죽여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얄미운 하린의 낯짝을 발길로 걷어차듯이 무형은 대신 책상다리를 걷어차 주었 다. -"당신 정말 짓궂네요. 그만 해요. 여보. 안녕하세요. 무형씨?" 하린의 등뒤로 나해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마도 잠이 들 차비를 하고 있었나 보다. 나이트 가운 차림의 그녀는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면서 무형을 바 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상냥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당장 가요, 데릭." "네?" "당장 서울로 가라구요. 래인씨는 지금 당신이 서울로 찾아와 자신을 데려가 기를 바라고 있다고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 깜찍한 아가씨는 지금껏 당신에 게 당한 것을 당신에게 그대로 돌려주면서 복수를 즐기고 있는 거라구요. 당신 이 사랑한다고 덤비는 그 아가씨를 피해서 이리 저리 도망다녔다면서요? 래인 씨도 지금 그대로 하고 있는 거야. 서울로 가요. 가서 정말 사랑한다고 무릎 꿇 고 빌고서 데려와요. 아마 그녀도 그것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아아, 그것이 정답이었나? 무형은 잠시 말을 잊고 책상 끝을 내려다보았다. 사실은 아직도 무엇인가 부족한 얼굴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불안했다. 그를 사랑한다 말하고 기어코 그의 심장을 뺏어가더니.. 결국 그의 소중한 아이 까지 가지고 있으면서도 늘 작은 새처럼 더 넓은 곳으로 날아가려고만 하는 그


녀. 가둬 놓기에는 너무 생기발랄하고 자유롭고 약동하는 생명이어서 그래서 더 손에 가둬놓고 싶었다. 왜 모를까? 래인은. 불모지였던 그의 심장에 다시 와 박힌 그 사랑이 너무 귀하고 아까워서, 그에 게 다시 삶을 주고 미래를 준 그녀가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서.... 그만큼 눈 앞에 두어도 불안하고 손을 마주 잡고 있어도 안타까운 그의 마음을. 소중해서, 너무 소중해서 혹여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하얗게 지레 질려오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그의 절실한 사랑을. 그래서 화가 났다. 그래서 더 가두고 싶었다. 그의 품안에서만 행복했으면, 그 를 바라보며 그로서만 충분하다 말하는 여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래인은 항상 그의 곁을 떠나 자유로운 삶과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 안달하여 무작정 그 가 쳐 놓은 굴레 속을 벗어나 날아가려고만 한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라 한다. 그가 그녀를 약탈하러 오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이번에는 그가 먼저 그녀에게 다가올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고, 그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라 한다. "세상에... 어떻게 그것을 모를 수 있지?" 혼잣말을 하듯이 무형은 세상에서 가장 정다워 보이는 친구 부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저를 사랑한다는 것을 왜 모를 수 있냐고? 이미 내 사랑과 심장은 자 신의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그것을 다시 증명하라고 하는 거지?" 하린이 씩 웃었다. 애인에게 버림받은 외로운 사내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진 리.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도망치는 여자들은 사실 남자들이 쫓아오기를 바라는 심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게 여자거든." 잘난 척 한마디 툭 던지는 하린의 말에 다시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한 무형이 한참 후에 고개를 들어 하린을 바라보았다. "제이 내 한가지만 물어보자." "뭘?" 거드름을 피우며 느긋하게 아내의 어깨에 팔을 걸친 그에게 무형이 전혀 아 무 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되쏘았다. "너도 그럼 이혼당하고 나서 제수씨 앞에서 무릎꿇고 빌었냐? 돌아오라고?" "임마! 나를 뭘로 보고!" "당연하죠!" 나해와 하린이 동시에 대답하는 것을 바라보며 무형은 느긋하게 발을 책상에 올렸다. "알았다고. 여자 마음 무지 잘 아는 잘난 윤하린이가 그런데 왜 이혼당했을까 항상 궁금했거든. 그러고 나서 너 엄청 질질 짜면서 방황할 때가 있었지. 그때 내가 널 위로하느라 소개시켜준 여자들이랑 내가 낸 술값만 기억해. 흠.. 흠.... 그래봤자 저도 마누라 앞에서 무릎꿇고 빈 주제에 되게 잘난척해. 망할 놈!" 무형은 그러고서 언제 내가 그랬냐고, 당신이 그러지 않았느냐고 말싸움을 시 작하는 친구 부부의 꼬락서니에 대고 혀를 한번 내밀어준 다음 화상 전화기 off 버튼을 눌러버렸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기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무형은 창가에 선 척을 바 라보았다.


"서울로 간다. 한시간 후에." "알겠습니다. 칭허 뮈렌" 공항에 가기 전 무형은 래인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비한 작은 상자를 꺼 집어냈다. 그녀의 배 안에서 놀고있을 자신의 후계자에게 줄 선물로 산 하얗고 작은 테비 베어. 그는 녀석의 목에다 자신이 그녀에게 줄 선물로 준비한 다이아 몬드 팔찌를 걸어놓았다. 이런 것으로 그녀를 구속할 수 있을까? 영원히? "난 좀 쉬겠다. 어떤 전화도 연결하지 마. 할아버지가 찾아도 지금 내가 연락 이 안 된다고 해." 그리고 무형은 비행기 후미에 마련된 침실 문을 닫았다. 택배가 왔다는 말에 의심없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어떤 사내가 그녀 입을 막 았고... 까악!!!!!!!! 래인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눈을 뜰 수가 없다. 그녀의 앞은 그저 아득한 어둠뿐이었다. 그녀의 악몽은 꿈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납치되어 두 눈이 가려진 채 사지는 묶여서 붙박이 옷장처럼 의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혹시 널 해치거나 납치할 미친놈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무형의 말에 공상과 학 소설 쓰지 말라고 고함친 지 단 삼분 후, 그녀는 정확히 그런 꼴을 당했다. 아이고 내 팔자야. '가지가지 다하는군, 누가 내 애인이 트라이어드의 남자가 아니랄까봐서. 젠 장. 그보다 너 괜찮은 거니?' 래인은 가만히 자신의 몸을 살폈다. 다행히 그녀 몸 안의 아이는 어미가 당한 꼴을 알지 못하는 듯 조금씩 조금씩 작은 손으로 그녀를 건드리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를 납치한 인간들은 그녀를 마취시켜 끌고 오기만 했지 아 직까지는 심한 짓을 하지 않은 모양이다. 차라리 앞을 보지 못하니 두려움이 덜 하다. 래인은 천지사방 조용한 이곳이 어디일까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의식이 있었더 라면 그나마 머리 속으로 이곳이 어디쯤일까 가늠이라도 할 것인데 그러지 못 했느니 그녀가 납치되어 갇힌 이곳은 완전히 미궁인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 래인은 자신이 참혹하게 살해를 당할 거라거나 심하게 다칠 거라거나 이런 생각이 어째서 하나도 들지 않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분명 그녀는 아주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아마도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런데 왜 하나도 두렵지 않을까? '당신이 날 구하러 올 거라고, 악당들이 날 해치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이야. 데릭.' 적막한 공간. 어쩌면 삶의 끝이 될지도 모르는 그 곳에 묶여 앉아있으면서도 래인은 홀로 미소지었다. '하지만, 당신. 지금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까?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을까? 당 신 때문에 내가 괴로움을 당한다고 생각할 테니 말야. 그리고 내가 만약 무사히 돌아가면 당신. 나를 그 전보다도 더더욱 숨도 쉴 수 없이 보호하려 하겠지 무 작정 안전한 당신의 등뒤에 숨기려고만 하겠지. 하지만, 데릭? 그거 알아요?' 안전한 삶이란 그 어느 곳에도 없다는 것을. 숨는다고 해서 살아가는 일이 더 없이 안정되고 평화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직도 그 멍청한 남자는 모


른다. 하지만 지금 만약 반대의 경우라면 어떠할까? 문득 래인은 지금 그녀가 당한 일을 무형이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그녀 는 어떠할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갑자기 눈앞의 어둠이 더더욱 캄캄해지면서 그녀가 딛고 바닥에 무너지는 기 분이었다.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이 래인의 눈에서 눈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아프고 가슴 메여지고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 지는 그런 기분이 들 수 있다니... 그녀의 영혼과 사랑을 전부 가져간 생명 같은 그 사람이 더 이상 이 지구상 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토록 아름답고 강인한 그녀의 연인을 다시 볼 수 없다면? 신처럼 강하고 완벽한 그 사람이 하찮은 악당들에게 능멸을 당하고 차디찬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 구르고 있다면? 그 역시 이런 기분일까? 래인은 문득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무형을 떠올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아마 도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으니 그에게 범인들이 연락을 했을 것이다. 그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얼마나 절망하고 아파하고 있을까? 래인이 이런 일을 당한 것은 바로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하고 있겠지? 이제야 알 것도 같다. 래인은 눈가리개를 적시고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감 추지 못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는 평생동안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다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과 고통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림이었다. 어려서부 터 그는 이런 일을 당하고 산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그녀더러 조심하라 당부하고 숨이 막힐 것 같은 과보호와 감시를 붙인 것일까? 일단 우인의 집안에 들어가는 이상은... 무형은 공항에서 우인의 아파트가 있는 서초동으로 출발하면서 헛헛 헛기침 을 몇 번 했다. 꼴도 보기 싫은 빌어먹을 그 놈이지만, 여하튼 래인의 보호자요 오라비이니, 내가 죽는시늉을 해야지. 젠장.... 일단 둘이만 되면 무릎을 끓고... 그러나 무형은 굳은 얼굴을 한 우인이문을 열어주는 그 순간 이미 무엇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현관머리에 서서 우인을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지? 루이스?" 래인이 납치되었다는 것, 그리고 무형이 보낸 경호원이 아파트 주차장에서 사 살된 채 발견되었다는 말을 우인이 끝낼 때까지 무형은 팔짱을 낀 채 말 한마 디 없이 듣고만 있었다. 방금 범인들로부터 무형을 찾는 전화가 왔다는 이야기 에 다만 눈썹을 한번 찌푸렸을 뿐이다. "아마도.." 무형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결국 그 놈들은 나하고 볼일이 있다는 이야기군..." 그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솜씨 좋기로 소문난 내 부하를 소리 소문없이 제거하고 여간한 사람들은 출 입조차 할 수 없는 검사 나리의 아파트에 유유히 침입해서 여자를 납치했다. 이


건 보통 솜씨가 아냐. 그리고 한 놈 소행도 아니고." 아직도 그의 손에는 앙증맞은 하얀 곰돌이가 들려있다. 물처럼 흔들림 없는 그의 목소리와 냉철한 표정에 모든 사람들은 속았지만 그러나 척만은 알고 있 었다. 지금 그의 주인의 심사는 막 터지기 일보직전인 무서운 휴화산이라는 것 을.. 그건 곰돌이를 움켜쥐고 있는 무형의 손에 솟은 시퍼런 심줄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그가 흥분하고 당황해보았자 해결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 기에 그는 다만 자신의 정직한 감정을 억지로 억지로 끌어내리고 있는 것일 뿐 이다. "루이스. 잠깐만 나 혼자 있게 해줄래? 그리고 네 컴퓨터 좀 쓰자." 그리고 무형은 더 이상 말도 없이 우인의 서재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살얼음 같은 침묵만이 깔린 아파트 실내. 삼십 분 후, 무형은 다시 방문을 열 었다. "들어와 우인. 할 이야기가 있다. 척도." 무형은 컴퓨터 화면에 뜬 지도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래인은 여기 있어." 무형이 짚은 지역은 춘천에서 좀 못 미치는 강변가였다. 무형이 손가락으로 짚은 그 지점에 빨간 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우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 의 눈에는 불신이 담겨 있었다. "래인이 여기 있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하린이에게 부탁해서 그 놈 회사의 인공위성 탐지기를 사용했다. 내가 래인 의 목걸이에 추적 칩을 집어넣어 놨거든. 혹시 이런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 해서 말야." "눈이 많이 와서 차로 그 곳까지 가려면 몇 시간은 걸립니다." 척이 조용히 지적했다.. "차는 안돼. 30 분 이내로 그곳까지 가야한다." 그 놈들이 안심하고 있을 때, 아직 그들이 무형이 서울에 와 있는 것을 알기 전에 서둘러 그들에게로 가야했다. "헬기를 타고 이 지점까지 진입한다. 그런 다음 여기서부터 래인이 갇힌 곳까 지는 가능하면 조용하고 감시를 피해 접근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 해. 소리나 지 않고 빠르고......" 무형은 몸을 돌이키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척을 바라보았다. "무동력 행글라이더." "알겠습니다. 준비하지요." 무형은 우인과 척에게 간단하게 자신의 작전을 정리했다. "이 지점에서 일단 척과 내가 행글라이더를 타고 먼저 진입한다. 그런 다음 네 차례야. 알겠나 우인? 시끄러운 것은 싫다. 네가 지휘하는 경찰팀과 내가 데 려온 아이들만 끌고 오는 거야." 여러 번의 범죄소탕 작전을 지휘한 바 있는 민완 검찰로 소문난 우인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무형의 작전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시작하지. 삼십 분 안으로 그 곳까지 가야 해." "헬기는?" "데이빗이 준비했을 거다. 자기 회사 헬기를 이용하게 수배해 두었으니 그 쪽 빌딩으로 가면 돼."


헬기 안에서 무형은 양복을 벗고 모터 싸이클을 탈 때 입는 것과도 같은 검 은 색 전투복을 갈아입었다. "그리운 느낌이야. 그렇지 않나?" 그는 척이 건네주는 소형 자동 소총을 받아들며 명랑하게 중얼거렸다. 보기에 는 장난감처럼 가볍지만 웬만한 장갑차도 그냥 뚫어버리는 강력한 성능을 자랑 하는 최신형이다. 빌어먹을 홍쉬핑 넘이 바로 이 것을 러시아에서 밀매해 아프 리카 군부독재국가에 팔아 넘겼다. 그리고도 남은 수백 자루의 기관단총은 그 놈의 집 지하에 묻혀 있었다. 척이 연락한 조직의 연락책이 살상무기들과 그들 이 원하는 전투장비가 담긴 상자를 실어준 것이다. "척." "네, 칭허 뮈렌." 무형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척을 바라보았다. ".....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놈들을 살려!" "네?" 얼떨떨한 척이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죽이라고 명령하는 대신 그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을 살리라니? 무형이 시리도록 하얀 미소를 입가에 물었다. 손을 대면 벨 것만 같은 살기 번뜩이는 요악한 미소였다. "래인을 납치한 그 놈들. 만약 내가 폭주해서 그 놈을 죽이려고 해도 자네가 그것을 막으란 말이다." "아, 네." 홍쉬핑. 무형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마치 낙인찍듯이 떠오른 이름 하나. 그는 래인이 납치되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그의 심장이자 영혼인 여자를 노리는 검은 그림자가 그 뜯어 죽일 홍가 놈일 것이라는 것을 본능처럼 느꼈다 그것은 설명할 수는 없는, 그러나 절대로 틀릴 수 없는 확신 같은 것이었다. 교활하고 잔혹한 그 놈이라면, 무형의 유일한 섬약함이자 약점이 무엇인지 파 악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게다가 무형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자신을 파괴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상처입은 늑대 한 마리라면 말이다. 감히 검은 용의 아이를 가진 성처를 해치고자 충분히 날뛸 수 있을 것 이다. '홍쉬핑.. 네 애비와 일족이 당한 것보다 천 배는 더 잔혹하게 찢어 발겨주마. 오히려 죽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네 놈에게 반드시 가르쳐 주겠다.' 무형은 싱긋 웃으며 검게 빛나는 기관단총의 총신을 가볍게 혀로 핥았다. 참 으로 오랜만에 검은 용의 내면에 숨은 잔인한 살기와 피에 미친 광기가 바깥으 로 새어나와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현란한 조명과 네온사인이 어지럽게 춤추는 명동 SEL 사의 옥상에서 중형 헬기 두 대가 떠올라 곧바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어두운 밤. 검푸른 강물에 낀 살얼음 위로 하얀 눈이 내려 쌓여 천지는 조용하고 그저 순백이다. 춘천에서 조금 못 미치는 곳. 강변에 위치한 고급스런 별장들이 드문드문 보


인다. 인적이 없이 불이 꺼져 있거나 크리스마스 휴가를 맞이하여 즐거운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담소 소리가 들리는 너덧 집을 지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거대한 별장. 그러나 그 집만큼은 죽은 듯한 침묵과 어둠보다 더한 긴장으로 뒤덮혀 있었 다. "아직도 그 놈에게서 연락이 없나?" "네. 보스" 부하의 보고에 쌍욕을 퍼부으며 사내는 이를 갈았다. "망할! 그 놈이 나타나야 하는 거다. 그 놈이 나타나지 않으면 다 소용이 없 어!!" 꼬리를 끊고 또 끊고 도망다녀 보았지만 지독스러울 정도로 집요하게 그의 바닥을 쓸어버리고 항상 그의 생각을 읽어내기라도 하듯이 그가 숨어드는 곳마 다 촉수를 내미는 무서운 추적. 반년이 넘는 긴 도피 생활동안 남은 것은 이제 같이 죽자는 이판사판의 집념 뿐.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는 시퍼런 원독만 남은 사내의 눈빛이 무엇인가 일이 꼬여간다는 느낌으로 번들거렸다. 사내는 이를 갈며 하얗게 눈이 쌓여 신비롭게 빛나는 강 쪽을 응시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문하나 사이에 두고 어렵사리 납치에 성공한 그 계집년이 설마 검은 용의 여 자가 아니라는 말인가? 사내는 고개를 흔들며 음산한 눈빛을 끔뻑거렸다. 그럴 리는 없었다! 저 계집은 분명 검은 용 정무형 그 빌어먹을 애송이의 여자가 분명했다. 그것 도 하룻밤의 상대가 아닌 그 놈의 성처가 될 소중한 여자 말이다. 그랬으니 어지간해서는 눈 하나 끔쩍도 하지 않는 빌어먹도록 오만한 그 놈 이 저 년을 데리러 직접 유람선까지 날아왔겠지. 지금껏 사내는 단 한번도 검은 용이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 거나 또 타인이 감히 그의 내심을 읽도록 방치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는 시선을 지닌 그 놈 앞에 서기만 하면 사내 는 늘 온 몸이 움찔 떨리는 듯한 기이한 패배감으로 등골이 오싹하곤 했다. 그 것은 검은 용으로 태어난 자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트라이어드의 정례 모임 때 간간이 모습을 드러낸 그가 노 타이쿤의 옆에 서 서 오만한 동작으로 마치 커다란 시혜를 베풀 듯이 손을 내밀 때 그의 손에 무 릎을 꿇고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고개를 들면 무엇을 생각하는지 조금도 읽혀 지지 않는 캄캄한 무저갱의 검은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마다 사 내는 그가 자신의 내장 속까지 훑어 내리고 있다는 두려움으로 떨어야만 했다. 하물며 감히 검은 용에 대한 반역과 배신을 획책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말이다. 어떤 것도 그를 흔들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엇으로도 그 냉담함과 초연함을 깨뜨리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서.... 그런 그를 거역해서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대적인 두려움. 그것이 검은 용의 존재에 대한 트라이어드의 조직원들 의 기본적인 감정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를 거역하거나 배신해서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와 관계가 있는 인간들 전부가 다!


그런데 그런 그가 옆방의 저 조그만 계집에게 홀려 천지분간 못하고 빠져있 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육로나 항공편을 이용하는 것보다 오히려 여행객인 척하고 유람선을 타고 빠 져나가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해서 숨어든 참이었다. 그런데 그 것이 생각하지 도 못한 커다란 수확을 가져다줄 줄이야. 처음에 사내는 무형이 부하들을 이끌 고 갑자기 나타났을 때 자신을 잡아죽이려고 직접 나타난 줄로만 알았다. 그런 데 그것이 아니었다. 몸서리쳐지도록 무감정하고 오만한 그 놈이 저 계집년에게 홀려 별별 추태를 다 부리는 광경을 목격하게 될 줄이야. 그때 사내는 직감적으 로 검은 용의 목줄을 틀어쥘 마지막 기회를 자신이 잡은 것을 알게 되었던 것 이다. 게다가 그 이후부터 줄기차게 옆방의 계집년에게 감시를 붙인 부하의 보고를 보아도 저 년은 분명 검은 용의 후계자를 잉태한 연인이 틀림없었다. 그 얼음 같은 놈이 안달복달하며 여자 앞에서 천하의 멍청이처럼 구는 꼬락서니는 처음 이었으니 말이다. 돌처럼 굳은, 푸른 피가 도는 그 사내의 영혼과 심장을 소유 한 여자가 마침내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검은 용을 파멸시키는 치명적인 함정이 될 것이다. 사내는 몸을 돌이켜 휴대전화를 들고있는 부하에게 다시 사나운 어조로 소리 쳤다. "다시 연락해 봐! 그 놈에게 직접 되지 않으면 저년 오라비라는 인간에게 다 시 해! 그 놈은 반드시 온다. 저 년은 용의 성처야. 게다가 용의 후계자까지 잉 태한 여자이니 그 놈은 싫어도 반드시 오게 되어 있다!!" 사내는 돌아서며 이 사이로 내씹었다. 그의 이복누이, 검은 용의 성처로 결정 되었다가 놈의 비서와 줄행랑을 친 천하의 더럽고 패역무도한 계집에 대한 저 주였다. "빌어먹을 아운년! 그 년이 제대로 그 놈을 유혹하기만 했더라도 내가 이 지경 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그 놈이 감히 우리 가문을 건드리지도 못했 을 거야. 그 년도 죽기 전에 반드시 찾아내서 박살을 내야 내가 속이 시원할 텐 데.. " 사내는 거칠게 부하가 건네주는 술잔을 단번에 마셔버리고 잔을 벽에다 내던 져 박살을 내버렸다. 어째서 그 놈의 명줄을 틀어쥐고 있는 사람은 그들인데 왜 자꾸만 덫에 갇힌 것이 자신들이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기만 하는 것일까? 올해 초만 하더라도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홍가의 고명딸이 검은 용의 성처 로 결정되었고 그가 지휘한 무기 밀거래는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조직의 눈을 피하여 빼돌린 마약은 밀약을 맺은 야쿠자에게로 그대로 넘어갔고 그 대신 그 만큼의 달러가 그의 비밀 계좌로 입금되었다. 그러고 보면 정말 신기할 정도로 그 치밀하고 빈틈없는 검은 용의 눈을 잘도 피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그들이 고스란히 뒷통수를 맞고 당한 것이긴 하지만... 그 빌어먹을 놈은 사내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그들 가문 전부를 엮 어들일 올가미를 늘어뜨리고는 잡아챌 준비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내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일 이년만 더, 생각만 해도 구역질나는 오만한 정가의 눈치를 보는 척 하며 납작하게 엎드려 비굴하게 눈속임을 한 채 등뒤로 정가의 반대파들 세력을 규


합해가며 준비한 모든 일들이 계속되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 놈의 목을 베 어버릴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을 것이다. '빌어먹을 놈. 더럽게도 운도 좋아. 충칭에서 완전히 명줄을 끊어버렸어야 하 는 거였는데..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갔지.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사고는 잘도 웃으며 십 년을 기다렸던 거야. 그 것에 관련된 우리 가문과 편가 를 몰살시키려고 기다리면서.... 지긋지긋하게 집요하게 지독한 놈..' "저 년 눈을 벗겨!" 찍 소리가 나며 래인의 눈을 가렸던 수건이 풀렸다. 갑자기 밝은 빛을 본 터 로 눈이 부셔 래인은 눈을 곧바로 뜨지 못하고 한동안 끔벅거리기만 했다. 그녀는 가구라고는 하나도 없는 텅빈 방에 앉혀져 있었다. 저벅저벅 다가온 건장한 사내가 홱 하고 래인의 머리타래를 휘어잡아 위로 얼굴을 치켜들었다. 문 앞에 서서 명령을 내린 중년의 사내가 래인을 바라보며 입맛을 쩍 다셨다. "흠. 보면 볼수록 반반하게 생긴 계집이로군. 그러니 더럽게도 건방진 그 어 린놈이 제 여자로 삼았겠지만." 교활하고 잔혹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강팍한 얼굴, 그리고 번들거리 는 눈빛. 그의 뱀 같은 끈적한 시선이 옷자락 사이로 가려진 래인의 아랫배로 가서 머물렀다. "보아하니, 계집. 임신을 했구먼. 검은 용의 아이겠지?" "흥, 알면서 왜 물어요? 돼지 아저씨?" 래인은 생글생글 웃으며 당차게 대꾸했다. "내 뱃속에 든 아기 애비를 알자고 날 납치한 건 아닐 테니까 본론만 말하자 구요. 당신들 원하는 게 뭐야?" "뭐야? 이년이!" 래인의 머리타래를 휘여감고 있던 사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거렸다. 래인 은 그 놈을 향해서도 살랑살랑 웃어 주었다. "내 몸에 손댄 놈 너. 나중에 네놈 손모가지 잘라주고 네 마누라랑 애새끼 몸 뚱아리에 곱게 칼질을 해줄 테니 그렇게 까불지 마! 대체 검은 용의 성처를 뭘 로 보고 이따위 수작질이야?" 문 앞에 선 사내가 히죽거렸다. "역시 성처답구만. 그 건방진 애송이가 아무 여자나 끼고 자지는 않으리라 생 각했지만 이렇게까지 당차고 대담한 아가씨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하지만 얌 전하게 있으라고. 아가씨. 내 부하들은 네 비위만 맞춰주는 멍청이들이 아니거 든. 좀 거친 사내들이지. 함부로 까불다간 큰 코 다치는 수가 있어!" "큰 코를 다치든 작은 코를 다치든 그건 나중 문제고, 난 내 문제를 해결해야 겠어. 이봐 아저씨. 날 화장실에나 좀 데려다 줘. 명색이 성처가 될 나더러 당신 들 보는 여기서 응가를 하게 놓아둘 셈은 아니겠지? 홀홀단신, 무기도 없고 연 약한 임산부의 몸으로 내가 여기서 뭘 어쩌겠어? 얌전하게 내 애인이 날 데리 러 올 때까지 기다려 주지. 그러니 화장실에나 데려다 달라고. 내가 여기서 응 가를 해버리면 당신들이 치우기도 좀 곤란하지 않겠어?" 잠시 기가 막힌 듯 사내들이 눈알을 굴리더니 문 앞의 사내가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있던 사내가 래인의 발목을 묶은 줄을 풀어 주었다. '제발 빨리 와요. 데릭.'


래인은 일단 제일 급한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고 나서 잠시 턱을 괸 채 화장 실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오빠가 데릭에게 연락을 하고... 그가 홍콩에서 서울로 오고.... 에고... 아직 멀 었구나. 적어도 앞으로 한나절은 더 기다려야겠네.' 그러나 그녀의 연인은 지금 그녀가 갇힌 별장 지붕 위를 나르고 있었다. -"척 들리나?" -"넷." 무형은 팔목에 부착된 소형 무전기에 대고 속삭였다. 인체의 열을 감지해서 적의 위치를 알려주는 적외선 보안경 안으로 붉은 점이 깜빡이고 있었다. -"마당에 둘. 이층 테라스에 하나. 일층 거실에 다섯. 이층 왼쪽 방에 넷이 다." -"보입니다." -"바깥과 일층은 자네가 맡아. 이층은 내가 책임지지." 무형은 아마도 래인이 이층 방에 감금되어 있으리라 예측했다. 척과 무형이 탄 행글라이더에서 던진 고정갈퀴가 가볍게 별장 지붕의 솟아난 굴뚝에 걸렸다. 몇 번의 흔들림으로 균형을 잡은 무형은 행글라이더에서 지붕 위로 고양이처럼 부드러운 동작으로 몸을 날렸다. 래인을 다시 의자에 묶은 사내가 홍쉬핑의 명령에 따라 다시 전화를 걸었지 만 여전히 통화불능이라는 소리에 고개를 흔들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사내는 이를 갈았다. "이대로는 안되겠어. 마냥 이렇게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우리가 보낸 전화발신 추적으로 한국 경찰에게 꼬리를 잡힐 거다. 이 년의 오빠가 검사라는데 질질 끌 다간 우리 모두 개죽음을 당할 거야." 사내가 등뒤에 선 남자를 돌아보았다. "이년 귀 하나를 하나 잘라 오라비에게 보내. 그러면 그 놈이 무슨 수를 써서 라도 건방진 그 놈에게 연락을 취하겠지." 보스의 명령에 날카로운 단도를 꺼낸 사내가 히죽 웃으며 래인 앞으로 다가 왔다. "유감인걸. 이 예쁜 귀를 자르게 되어서 말야. 하지만 네 팔자라고 생각하라 고,. 어쩌다가 그 지랄맞은 검은 용의 여자가 되어서 이렇게 고생을 하시나 그 래?" 열을 받은 래인은 이를 악물며 사내의 얼굴을 향해 침을 퉤 뱉었다. "미친놈들!! 내 귀를 잘라봐! 난 네놈들 X 를 잘라버릴 테니! 트라이어드의 강 령이 뭐지 알아? 더러운 자식들아!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야!! 내가 죽 어도 우리 데릭은 네 놈들 삼족까지 추적해서 뼈를 갈아버릴 테니 어디 맘대로 해 봐!" 바로 그때였다. 사내가 들고 있던 휴대전화가 울린 것은. 래인의 예쁜 귀에 섬뜩한 칼날이 다 가오던 순간이었다. "핫하하, 이게 누구신가?" 여유만만한 목소리로 사내가 히죽 웃으며 래인을 돌아보았다. 사내가 래인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수화기 화면을 그녀 얼굴 쪽으로 돌렸다. 화면 가득히 들


어온 무형의 얼굴. 그의 눈빛이 뚫어질 듯이 래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괜찮아? 그는 그렇게 묻고 있는 듯 했다. "이게 보이시나? 칭허 뮈렌? 자네의 예쁜 여자가 우리 손에 들어왔거든." "용건만 말해." 딱 부러지는 무형의 목소리. 래인은 오열이 솟구칠 것만 같은 입술을 꽉 깨물 었다. 검은 용의 여자는 절대로 울면 안 된다. 죽을 때는 죽더라도 적에게 애원 운하고 비겁하게 질질 짜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내가 그녀를 돌아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래인의 옆에 서있던 다른 사내가 래인의 하얀 목줄기 아래에 단도를 가져다댔다. 당장 휘둘러 그녀의 목을 댕강 잘라버릴 것처럼 "뭐 소문에 듣자하니 검은 용의 소중한 아이를 가지신 몸이라고? 건방진 애 송이! 네 놈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 여자는 죽는다. 내 말이 거짓이 아니란 뜻으 로 이년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 이 년의 오라비에게 보내주지. 네 여자와 네 세 까릴 죽이고 싶지 않으면 내 앞에 나타나 무릎을 끓어!" 화면 속의 무형이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차고 냉혹하고 잔인한 미소. 단 한 번도 래인이 본 적 없는 무형의 진짜 얼굴. 전혀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 얼굴을 한 그가 웃자 보기좋게 가지런한 치아가 하얗게 드러난다. 아주 쉽게 그가 이 사이로 씹어냈다. "죽여!" <29> 달콤한 항복 설마 그런 말이 무형의 입에서 나오리라고 생각하지도 못한 것일까? 황당해 서는 서로를 마주보며 낭패했다는 얼굴을 하는 사내들을 응시하며 그가 다시 웃었다.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요악한 미소였다. "죽이라고! 그 여자 말고도 내 아들을 낳아줄 여자는 많으니까." 그리고는 그 쪽에서 먼저 OFF 스윗치를 눌러 버렸나보다. 핏 소리를 내며 새 까매지는 화상을 응시하다가 그 사내가 불 맞은 산돼지처럼 길길이 날뛰며 휴 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져 박살을 내버렸다. 래인은 홀로 미소지었다. 역시 그녀의 남자였다. 절대로 흔들리지 않고 허약한 감정으로 자신을 자학하지도 않고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깨끗이 가려내 가차없이 쳐낼 수 있는 잔혹함을 가진 남자. 제왕 으로 태어나 제왕으로 길러진 내 남자.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내 연인. 바로 그때였다. 바깥에서 쉭쉭 귀를 찢는 듯한 소음 - 정신도 차릴 수 없을 만큼 시끄러운 총소리가 나기 시작한 것은. 당황한 사내들이 정신을 수습할 틈도 없이 래인이 묶여진 의자 뒤, 바깥으로 통하는 유리창문이 와장창 깨어지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번개처럼 온 몸으로 유리파편을 맞으며 방안으로 달려 들어온 한사람이 손에 든 기관단총을 마구 휘두른 것도, 래인 옆에 서 있던 사내와 벽 쪽에 서 있던 또 다른 부하 하나가 온몸과 머리통을 관통당한 채 뇌수와 선혈을 내뿜으며 더러운 걸레처럼 바닥에 나동그라진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죽여. 죽일 수 있다면 말야!" 무형은 손가락으로 방금 전 두 명의 머리통을 깨끗하게 관통한 소음기가 달 린 MP5 기관단총을 사내의 머리통을 향해 조준한 채 씩 웃으며 이 사이로 뱉 어냈다. 엉겹결에 권총을 빼들기는 했지만 자신의 이마를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는 무 형의 기관단총 때문에 사내는 석상처럼 굳어져서는 두려움과 증오에 번들거리 는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마치 스키 고글 같이 생긴 열 추적장치가 달린 적외선 안경을 벗으며 그는 래인에게 고개를 돌려 히죽 웃어 보였다. "기분이 어때?" "나빠요. 구역질 날 것 같아." 그럼 네가 이런 경우를 당하면 기분이 좋겠니? 래인은 눈을 내려 깔며 새치 름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가 잠시 한눈을 팔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사내의 몸이 잠시 움직이려했다. 그러나 무형은 차갑게 경고했다. "멍청한 놈! 트라이어드의 훈련 강령을 아직도 모르다니! 트라이어드의 눈은 셋이다." 무형은 한 손으로 래인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얼마나 부드 러운지, 얼마나 안타까운지 래인은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가 래인의 코 를 살짝 비틀었다. "잠시만 기다려 줘. 저 더러운 벌레부터 처리하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자고." "알았어요. 빨리 끝내요. 난 당신에게 안기고 싶어 미치겠단 말야." 무형은 한발짝 앞으로 걸어나오며 자신의 등으로 래인의 몸을 가렸다. 홍쉬핑 은 부들부들 떨며, 그러나 최후의 발악처럼 몸을 억지로 가눈 채 그를 원독에 가득 찬 불타는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주, 죽여버리겠다!!" 무형은 빙긋이 웃었다. "그래? 네 머리통이 먼저 날아갈 텐데?" "어차피 이판사판이야! 네 놈은 죽이지 못할 테지만 네 놈의 여자는 함께 지 옥으로 데려갈 수 있겠지. 덤으로 네 자식놈하고 말이지." "네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를 하얗게 드러내며 무형은 다정하게 속삭였다. 홍쉬핑의 눈에는 마치 지옥 에서 올라온 악귀처럼 무서운 미소. 그가 한발 더 다가가자 사내는 무의식중에 한발 뒤로 더 물러났다. 그의 손에 들린 권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무형은 다시 히죽 웃었다. "몹시 마음에 안 들어. 감히 너 같은 벌레가 내 앞에 무릎도 꿇지 않고 나를 노려보는 게 말이지." 갑자기 쉿쉬 하는 뱀이 또아리를 트는 듯한 소음이 빗발치며 사내가 선 뒤쪽 의 문이 박살났다.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무형이 발을 휘돌려 사내의 손에 들 린 권총을 차내고 그리고 그의 턱을 차올렸다. 바깥과 일층의 적들을 해치운 척 은 홍쉬핑의 무릎에 총알 하나씩을 박아 준 것도 그때였다. 위대하신 검은 용 님의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는 사내에게 응징을 내리듯이 말이다. 비명을 지르 며 사내는 바닥에 무너지듯이 널부러졌다..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한 채 무형은 구둣발을 들어 홍쉬핑의 얼굴을


짓밟아주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벌레처럼 잘도 숨어 기어다니더니 결국 이런 데서 만나는군. 홍가의 비루먹 은 개." "이 빌어먹을 개새끼!! 죽여버릴 테다! 반드시 복수하고 말 테다!" "그래? 어떻게 날 죽일 수 있을 지 아주 궁금하군. 넌 지금 그렇게 잘난 척 할 처지가 아닌 것 같은데 말야. 감히 검은 용 앞에서 눈 부릅뜨고 헛소리를 얼 마나 지껄일 수 있는지 한번 두고 보자고!" 무형은 살기어린 미소를 머금으며 혀로 푸른 날이 선 단도를 살며시 핥았다. 감히 내 여자를 건드린 놈. 소중하고 소중한 저 여자를, 아깝고 귀해서 나조 차도 손을 대기 힘든 나의 심장을 네놈 같이 천하고 더러운 놈이 감히 협박하 고 핍박하려 들어? "어리석은 홍가의 천한 개. 넌 잘못 건드렸어 저 여자는 감히 네 놈이 건드릴 여자가 아니다. 알아들었나? 네 더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무딘 칼로 위협할 여자 도 아니란 거다." 척이 밧줄을 풀어주자 굳어져버린 팔다리를 문지르면서도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는 래인을 무형은 돌아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봐. 자기. 그렇게 재미난 구경하듯이 빤히 바라보지 말고 우리 아기 태교 를 위해 잠시 눈을 감고 있는 게 어때?" "싫어." 래인은 톡 쏘았다. 그녀는 몇 발자국 다가와 발을 들어 홍쉬핑의 머리통을 툭 걷어찼다. 그 동안 그녀가 당한 분함을 풀기라도 하듯이 "아주 박살을 내버려!! 데릭 저 망할 자식이 날 바라보면서 끼고 자면 맛이 좋을 거라고 헛소리를 했단 말야! 이 자식 진짜 변태 아냐? 배부른 임산부를 보 고 성욕을 느끼게?" 무혀은 씩 웃으며 손을 내밀어 래인의 어깨를 끌어안고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비부비 해 주었다. "이봐, 아가씨. 그건 네가 너무 예뻐서 그래. 나도 너만 보면 끼고 자고 싶어 환장한다구. 나더러도 변태라고 할거야?" "그거하고 이건 다르지. 우린 사랑하는 사이니까 서로를 보기만 하면 불타 오 르는 건 당연하잖아. 하지만 이 개자식은 날 강간하려고 한 것 아냐?" "그래? 듣고 보니 몹시 기분이 나빠지는군. 감히 검은 용의 성처가 될 여자를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본 것도 기분 나쁜데 게다가 흑심까지 품고 침까지 흘 려? 래인. 이 놈을 어떻게 해줄까?' "눈알을 파버리고 혀를 잘라버려요" 래인은 매몰하게 내뱉었다. 무형은 역시 내 여자야 하는 대견스럽다는 눈빛으 로 미소지었다. "그것으로 만족해?' "뭐 그 정도면.. 아, 어지러워.." 그리고서 그 정도쯤 해서 래인은 우아하게 무형의 품안에서 기절했다. 하루 종일을 먹지도 자지도 못한 터로 극심한 긴장이 풀린 후였기에 비로소 그녀의 품위있는 지병인 저혈압이 도진 것이다. 래인을 품에 안은 채 무형은 손목에 감 긴 무전기를 켰다. "우인. 어디쯤 온 거냐?" -"5 분 후면 도착한다. 어떻게 된 거야?"


"작전 끝. 래인은 아무 탈도 없어. 안심하고 빨리 오라고. 술 한잔 같이 해야 하니까." 무형은 래인을 척에게 넘기고 손에 든 단도를 빙글빙글 돌렸다. 그의 구두 발 에 밟힌 홍쉬핑의 눈에는 극도의 공포와 증오 그리고 절망이 너울거리고 있었 다. 무형은 시퍼렇게 날이 선 군용단도를 들어 사내의 목줄에 가져다 댔다. "감히 용의 후계자를 잉태한 내 여자를 건드리고 나의 권위를 훼손한 홍가의 천한 개. 널 홍콩으로 데리고 가 일벌백계의 본보기로 삼을 거다. 천년 만년이 지나갈 때까지, 우리 트라이어드의 이름이 계속되는 날까지 홍가의 씨를 받아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내 손에 죽는다!" 크아하학!!!!!!!!!~~~~~~~~ 적막한 밤하늘. 평화롭기 그지없는 크리스마스의 밤에 절망과 고통에 가득찬 사내의 비명소리가 터졌다. 무형이 아무런 망설임없이 홍쉬핑의 한 눈에다 시퍼 런 단도를 박아버린 것이다. "너무 재미없잖아? 홍가의 개. 이런 짓을 감히 저지를 양이면 다음부터는 좀 더 담을 키우고 시작하라고!" 무형은 사내가 뱉어내는 비명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개가 너무 시끄럽게 짖으면 주인이 곤란하지." "아..안..돼...애....제.. 제발..." 무형이 그를 상대로 어떤 짓을 하려는지 본능적으로 눈치챈 듯 한 눈에 단도 가 박힌 채 피를 철철 흘리던 사내는 공포와 절망에 가득찬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너무 지독한 고통과 공포에 이미 사내의 바지 앞섶 이 축축해져 있었다. 너무 큰 공포로 오줌을 싸버린 것이다. 무형은 히죽 웃었 다.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Why not?" 무형이 단도를 빼내는 서슬에 사내의 한쪽 눈알이 피투성이가 된 채 도르르 굴러 떨어졌다. 무형은 사내의 머리카락을 잡아 뒤챘다. "무엇부터 잘라줄까? 네 놈의 나불대던 혀? 아니면 홍가의 씨앗을 내갈기던 이것? 말만 하라고. 순서대로 떼 내서 짓이겨 줄 테니!" 두 눈이 파내어지고 혀도 잘리고 피 흐르는 입에 자신의 잘려진 성기를 문 채 피투성이가 된 사내가 혼절해서 넝마뭉치처럼 내팽개쳐져 있는 것을 뒤로 하고 무형은 일어섰다. 그는 척에게 턱짓을 했다. "죽이면 안돼. 지혈시켜서 살려. 그리고 홍콩으로 싣고 가. 이번 춘절의 트라 이어드 총회에서 저 개를 끌어내도록. 검은 용의 귄위에 도전한 놈은 이렇게 된 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알겠습니다. 칭허 뮈렌." "래인은?" "건넌방 침대에 눕혀 드렸습니다." 문을 나가려는 무형에게 척이 등뒤에서 한마디했다. "많이 관대해지셨습니다. 칭허 뮈렌." 무형은 씩 웃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해 두자고!"


우인들이 탄 경찰의 패트롤카와 무형의 부하들이 탄 트럭이 헤드라이트를 비 추며 별장 앞에 도착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래인이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어제 아침의 그때처럼 우인의 아파트. 그녀가 쓰 는 작은 방 포근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누운 침대 옆 의자에 무 형이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유리창을 깨고 들어올 때 상처를 입었나보다. 그의 볼에는 실금 같은 붉은 상처가 하나가 나 있었다. 안타깝고 미안해서, 또 가슴아파서 래인은 손을 내밀어 무형의 볼을 어루만졌다. "래인.." "쉿!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데릭." 그녀를 구하려 왔을 때만 하더라도 그리도 당당하고 냉혹하던 그녀의 황제가 이제는 너무나 섬약한 얼굴을 하고 죄책감 서린 불쌍한 눈빛을 하고 있는 게 래인은 너무 싫었다. 평생 피에 손을 적시고, 위험과 불안 속에서 살아야하는 것이 그의 숙명이라면, 그를 사랑하여 그의 곁에 평생 머물고자 하는 래인도 그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아니, 이미 받아들였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까? 래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가 온전하게 뛰고 있는 그녀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게. "살아가는 누구나 다 죽음을 등뒤에 두고 살아요. 데릭. 당신의 여자여서가 아니라 형태는 다르지만 누구나 다 이런 일을 겪고 산다고." "알아. 하지만.... 내 옆이 아니면 그 가능성은 훨씬 적어지겠지." 그가 고개를 들었다. 무형은 두 손으로 래인의 얼굴을 감쌌다. "래인." "응?" "....죽도록 두려웠어. 이십 년 전 충칭의 그 밤처럼.... 나, 죽을 만큼 무서웠 어." ".....나도 무서웠어. 당신을 보지 못하고 죽을까봐.... 이제 막 움직이기 시작한 우리 아기를 당신에게 주지 못하고 우리 둘 다 죽을까봐..." "널 잃게 될까봐.... 널 다시 보지 못하게 될까봐.. 널 사랑한다고 다시 말하지 못하게 될까봐.... 죽도록 두려웠어.." 래인이 갇힌 방으로 뛰어들었을 때 그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일까? 혹시 이 미 죽어버린 그녀를 볼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두려움을 이겨내며 절망을 넘어 그 곳에 나타났던 것일까?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가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탄식처럼 슬픔처럼 그가 중얼거리며 래인의 깨끗한 이마에 입맞추었다. 래인 은 독사처럼 발딱 고개를 치켜들고 무형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만약, 이번 일로 날 당신 곁에서 몰아내려고 하면 당신. 죽여 버릴 거야!" "래인." "더 많은 경호원을 내게 붙여요! 아니 내가 바깥에 나가지 않으면 되잖아? 그 렇지? 당신 시키는 대로 언제나 당신의 보호와 당신의 눈길이 미치는 곳 안에 서만 살아가면 되잖아요. 그것이 뭐가 문제가 되겠어요. 그러니 당신 때문에 내 게 앞으로도 똑같은 위험이 닥칠지 몰라 날 놓아준다는 헛소리 따윈 하지 말란 말예요! 알아들었어요?" 그가 깊은 눈을 들어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넌 작은 새처럼 너무나 자유롭고 생기 가득찬 사람인데.... 답답한 조롱 안의 삶이 행복할 것 같아, 래인?" "어디 가든 당신이 없다면 난 행복하지 않아, 데릭. 당신 곁에 평생 있을 수 있다면 우리가 사랑하고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난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당 신의 굴레 안에 기꺼이 들어갈 거야, 알잖아요? 그리고 잊었어요? 난 글을 쓰는 작가라구요. 한달 두 달도 칩거한 채 글을 쓰는 작가인데 집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그다지 큰 고통이겠어요? 그러니 지금,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 나에게 미안스러워 하는 것 다 잊어버려요. 당신의 여자로 살면서 당신의 아이를 낳고 키우고 당신을 평생 소유할 수 있다면..... 난 죽어도 행복해." 래인은 무형이 갈등할 틈을 주지 않기로 했다. 도대체 쓸 데 없는 생각만 많 이 하고 어울리지도 않는 고뇌에 사로잡힌 이 멍청한 남자를 그냥 놓아 두었다 간 <널 더 이상 위험에 빠뜨릴 수 없어. 우리 헤어지자> 혹은 <나로 인해 네 가 갇혀 사는 것도 못 봐. 널 자유롭게 해 줄게 > 뭐 이런 개 껌 씹고 하마가 하품하는 이야기를 할 것이라는 것을 감을 탁 잡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래로 떨어져있는 무형의 손을 잡아다가 아이가 놀고있어 미약한 태 동이 느껴지는 그녀의 아랫배로 가져갔다. "느껴져요? 우리 두 사람의 아이야. 내가 낳을 당신의 후계자야. 데릭. 이런 우리를 당신 곁에서 떼 놓고 당신, 행복할 수 있어요?" 한참동안 그녀의 눈을 응시하던 무형이 아주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래인은 한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죽을 땐 죽더라도 당신 곁에서 죽으라며? 그렇게 할게. 이번처럼 당신이 날 지켜줄 거라고 믿어. 사랑해요, 자기. 그러니 날 자기 곁에서 떠나 보낼 생각 같 은 건 절대로 하지마! 응?" "사...랑해! 그러니 평생 내 옆에 있어." 래인은 활짝 웃었다. 바로 그때 그녀의 배 안에서 아기가 움직였다. 한 손을 그녀의 배에다 대고 있었으므로 무형도 아이의 움직임을 느꼈나 보다. 무엇인가 를 묻는 듯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경이와 황홀함 혹은 무한한 자부심 같은 것이 스며 있었다. 어쩌면 아주 경건하기까지 한 엄숙한 표정으로 무형은 가만히 그녀의 아랫배 에다 입술을 가져갔다. "느껴져요?" 래인의 속삭임에 무형이 중얼거렸다. "음." "아기가 뭐래요?" "글쎄... 잘 안 들리는 걸.... 음... 그래? 아항... 그렇구나.... 그랬어? 알았다." 무형이 고개를 들고 싱긋 웃었다. "똑똑한 우리 아이가 두 가지가 궁금하다는군." "이 녀석이 뭐래?" "올해 크리스마스 선물이 무엇이냐고 물었어." 무형은 의자 옆에 놓아둔 하얀 곰돌이를 래인에게 내밀었다. 래인은 행복한 표정으로 활짝 피어난 꽃처럼 웃었다. 무형은 그녀의 팔목에 팔찌를 채워주었 다. 그리고 따뜻한 입술로 그녀의 손금을 따라 키스했다. "그래요? 다른 건 뭔데?" 고개를 든 무형은 씩 웃었다. 손바닥에 다가온 아주 가벼운 키스만으로 이미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래인을 탐욕스럽게 바라보며 그는 래인의 봉긋 솟은 가슴 언저리에 손을 가져갔다. "그런데 말야, 래인. 당신 혹시 나더러 피만 보면 기절한다고 말하지 않았 어?" 무형의 느물거리는 말에 래인은 새침하게 웃었다. "아, 그거? 나도 뻥이었어." 두 사람에게 점심 먹으라는 말을 하려던 우인은 문안에서 새어나오는 야릇한 신음 소리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몸을 돌이켰다.. 아마도 저 방안의 인간들은 식사 따위는 필요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부끄러움도 없이 배부른 임산부를 덮치는 저 개망나니에게 내 누이동 생을 정말 주어야만 하는 걸까? 그는 나중에 다시 한번 심각한 고민을 하기로 하며 갈비찜 국물에 밥 비벼먹을 생각을 하며 입맛을 다셨다.

(30) 멍든 닭 무형의 구혼과 결혼식에 관한 비화 제 1 장 입덧이 끝난 지는 분명 오래된 것으로 아는데, 떨어져있던 그 동안 못 부린 응석을 제대로 부릴 심산이었나 보다. 래인은 아침부터 곱창구이 타령을 하며 무형을 들들 볶기 시작했다. "서울 떠나기 전에 먹고싶은 것은 다 먹고 갈 거란 말야!~~ 오늘 점심은 곱창 구이. 오늘 저녁은 닭갈비. 내일은 간장게장에 밥 비며 먹을 거고, 저녁때는 광 화문 욕쟁이 할머니집 홍어회 먹을 거야. 다 사줘! 다 사줄 거지?" 냄새 나는 것, 물컹한 것, 진득거리고 징그러운 것은 가능한 한 입에 대지 않 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깔끔한 미식가(?) 정무형, 래인이 기를 쓰고 반드시 먹 어야겠다는 음식들의 이름을 듣는 순간, 마치 그가 임신해서 입덧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우웨웩 토해내고 싶다는 충동을 느껴야만 했다. 그러나 긴 속눈썹을 깜빡 깜빡 하면서 내가 먹고 싶은 것이 아니고 <우리 아 기가 먹고싶대>를 강조하는 그의 여자를 앞에 두고 무엇을 더 어찌 반항(?) 하 랴. 그리하여 정무형, 닭살이 돋아 대패로 팔을 득득 긁는 우인의 눈총을 아랑곳 하지 않고 인터넷 맛집 사이트라는 것은 다 뒤져가면서 찾아낸 유명한 논현동 곱창집에 고이 래인을 모셨겠다? 먹는 시늉만 하면서 연신 돌 판에 징그러운 곱창을 구워내서는 래인의 접시 앞에 놓아주는 무형의 몸바친 서비스에 맛갈스런 부추 김치와 풋고추까지 상추 에 얹어 곱창 한 조각에 된장 듬뿍 찍어 냠냠냠 맛있게도 먹는 래인. 기분 최고 다 이런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 앞에 천천히 먹으라고 물 한잔까지 떠다주며 무형은 물었다. "그런데 말야. 결혼식은 언제가 좋을까?" 입이 찢어져라 곱창 두 쪽 넣은 상추쌈을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며 래인이 맹 한 얼굴로 되물었다 "겨호이?(결혼식) 무은 겨호시(무슨 결혼식)?"


"당연히 내 결혼식이지. 우리 둘이 하는." 간신히 주먹만한 쌈을 꿀떡 목안으로 넘긴 래인이 동그랗게 눈을 치뜨고 어 머 별꼴이야 하는 얼굴로 탁 쏘았다. "자기야. 근데 내가 당신하고 결혼한다고 했니? 난 허락한 기억이 없는데... 이상하다." 노릇노릇 기름기 빠진 곱창을 지글거리는 불판에서 접시로 옮겨주던 무형의 손이 순간적으로 허공에서 딱 멎었다. "에이, 데릭. 그런 심각하고 심오한 문제는 신경 꺼. 결혼해서 같이 살면 지금 보다 더 좋아지는 것 있니? 없지? 그렇지? 우린 미친 듯이 사랑하고 있고 난 당신 애를 낳아 줄 거고 우린 내 아파트와 당신 아파트를 오가면서 맘 내키는 대로 같이 살 거야. 그것으로 만족할 일이지 왜 자꾸만 쓸데없이 귀찮은 결혼이 야기는 꺼내는 거얌? 신경끄고 밥이나 먹어요! 아!~~~ 역시 이 집 곱창 맛은 환 상이다. 아줌마 곱창 일 인분 추가요, 그리고 밥 볶아 줘요!" '이 망할 여자가 지금 무어라고 말하는 거야?' 무형은 하도 기가 막히고 황당해서 래인을 노려보며 잠시 부들부들 떨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현재 스코어, 배속에는 분명히 "나 여기 있어요" 라고 말하듯이 사랑스럽게 움직이기까지 하는 내 아이를 담고 있고, 사랑해서 미친다 고 말하며 절대로 날 버리지 말라고 애원하며 그의 품에 안겨 오늘 아침까지 응응응을 한 사람은 누구란 말이더냐? 나 정무형. 검은 용의 명예를 걸고 무릎까지 꿇고는 사랑한다 고백하며 평생 내 곁에 있어라 말하였고 저도 분명 그것에 대하여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 덕였으면 말이다,. 자기 말에 책임을 져야 여자지! 물론 순서야 다소 바뀌긴 했지만 배가 더 나오기 전에 다음 순서로 말하자면, 당연히 장엄한 웨딩마치에 맞추어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입고 버진 로드를 걸 어와 그의 손을 잡고 영원의 맹세를 해야하는 것 아냐? 그런데 이 여자 이래인. 결혼 이야기를 하자말자 그렇게 웃기는 이야기를 처 음 들어본다는 듯이 손을 훼훼 저으며 그의 말을 반동강으로 딱 분질러 버리는 것이었다. "이. 래. 인" "왜? 내게 할말 있어요? 왜 또 분위기 깔고 무섭게 살기 피워올리고 그러는 건데? 밥 좀 먹읍시다. 내가 놀라서 체하면 좋겠어요?" 개뿔! 체한다면서 곱창 이 인분 반을 혼자 다 먹어치우고 밥까지 볶아 먹으려 고 숟가락 치켜들고 있냐? 무형은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이를 갈 듯이 조용히 되물었다. "왜 나랑 결혼은 못한단 거야?" 래인은 새침하게 김치 볶음밥 누룽지를 숟가락으로 득득 긁으며 봉숭아 씨앗 이 터지듯이 가벼운 어조로 톡 쏘았다.. "그야 물론 당신이 청혼하지 않았잖아?" "뭐, 뭐?" "전도 양양하고 멋지구리 잘 나가던, 앞으로도 잘 나갈 것이 분명한 아름답고 파릇파릇한 내 청춘을 다 바쳐 당신에게 주는데 말야. 당신이 양심이 있으면 나 에게 눈물 쏙 빠지는 감동적인 청혼을 해야할 것 아니냐고요, 이 남자야. 그것 도 몰라?"


래인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무형의 입에다 김치 볶음밥 한 숟가락을 푹 밀어 넣었다. "내가 감동해서 당신하고 결혼할 수 있게 멋진 청혼 한번 해봐. 그럼 내가 결 혼해 줄게." "어... 어.. 그래? 그럼 좋다. 청혼해 보지 뭐. 결혼, 하자. 이래인." "싫은데?" 래인은 분개한 얼굴로 숟가락을 탁 집어던지며 일어섰다. "허름한 곱창집 드럼통을 앞에 두고 장미 한 송이도 주지 않고 김치 볶음밥 먹으며 청혼하는 남자에게 누가 예스라고 대답하겠어? 불합격이다! 젠장!!" 신년 1 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전 열 한시. 홍콩. 척이 한 눈에 척 보기에도 그 주인은 엄청 큰 충격을 먹은 것이 분명했다. 비 틀거리는 걸음으로 이마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차에 오르는 무형의 참혹한 얼굴을 차마 돌아볼 용기는 없었던 척, 쓰러지듯이 차의 좌석에 무너져 버리는 주인의 모습을 백 밀러로 곁눈질하며 뻣뻣하게 어깨를 굳힌 채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 "아파트.... 아니, 조부에게로." 힘이 빠진 목소리로 무형은 간신히 대답을 하고는 무거워진 어깨를 푹신하게 받쳐주는 차 시트에 몸을 말았다. <청혼의 길은 멀고도 험하며 결혼 허락은 더욱더 어렵고 심란하다.> 이것이 이 보름동안 인간 정무형이 뼈저리게 느낀 삶의 진리였다. 아무리 래인을 꼬시고 협박하고 들들 볶고 화를 내봐도 요지부동. 눈 새초롬히 내려 깔고 그림만 그리다가 무형이 발광을 할 지경이 되면, <아 이, 자기 때문에 태교에 지장 있어! 당신 땜에 우리 아기가 성질 더러운 애로 태어나면 책임질껴?> 하며 서슬 푸르게 그를 몰아내치는 래인 앞에서 인간 정 무형, 정말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꼭 결혼해야 해? 그냥 이렇게 살면 안돼? 답답하게 결혼이란 구속을 왜 가져야하는지 모르겠어. 그냥 우리 이렇게 같이 살자, 자기야." 살랑살랑 웃으며 솜사탕이 녹듯이 그를 살살 꼬드기는 말에 무형은 정말 그 냥 속아넘어갈 뻔했다. 그러나 그 며칠 후, 무형은 죽어도 결혼식은 못하겠다는 래인의 말에 감추어진 앙큼하고 얄미운 비밀의 그늘을 눈치채고 만 것이니...... "아이, 새 언니는?~~~ 홋홋호. 왜 귀찮게 결혼을 해요? 이 어린 나이로 제가 한 남자에게 얽매여서 수없이 널린 꽃미남 꽃미녀들을 그냥 놓아두고 침만 삼 키며 살아야겠어요? 오호홋홋홋홋~~~ 난 언제든지 가능성 있는 생활이 좋아." 사랑하니까, 동거나 하면서 미혼의 몸으로 유유자적 살아보자는 래인의 주장 에 숨은 진실, 그것은 다름 아닌 절대로 포기 못하는 자신의 환상적인 취미생활 을 즐기겠다는 앙큼한 계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동거나 하면서 법률적으로는 자유로운 미혼의 몸으로 맘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살다가 흥나면 훌쩍 그를 버리고 떠나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그 의 눈을 속이고 <꽃미남 수집>을 합법적으로 해보겠다는 얄미운 속셈. 그런데 그 속셈을 래인이 한국의 올케에게 전화질을 하는 것을 무형이 들어버렸던 것


이다. 이 망할 여자야! 감히 나를 놓아두고 내 아기까지 밴 주제에 네가 결혼도 하지 않고 벌써 바 람부터 필 생각을 해? 그래.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방법이 있지. 이를 으득득 갈며 무형이 기껏 생각해 낸 것이라는 것이.... 청혼할 때 장미꽃 안 준다고 래인이 난리를 치던 교훈을 바탕삼아 날마다 장 미꽃을 보내며 결혼해 줘 징징거리는 짓이었다. "에고~~ 한심하다, 데릭. 이러니 어떻게 천하무적 엽기발랄 래인씨가 너에게 넘어 오겠냐? 이 형님이 한수 비법을 전수해줄 터이니 좀 잘 해봐, 짜슥아!" 이 시대의 마지막 의리남, 항상 진정한 우정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윤하린 군이 혀를 차며 엄청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퉁박을 주면서 가르쳐 준 비법. 바로 래인의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막히면 돌아가라 하는 전법도 있지 않은가? 일단 래인의 가족들에게 자신의 좋은 이미지를 선보이는 사전공작부터 해야 한다고 연애박사인데다가 머리좋은 하린이 충고를 해주었겠다? 그래서 무형은 일단 첫 삽을 뜨는 심정으로 피 같은 돈 삼십만 유로를 래인 의 큰오빠 우선이 잠비아에 새로 짓는 병원 건축비로 기부를 했다. 얼마나 통 크고 멋진 일이더냐? 거기다가 래인의 납치 사건 이후 사사건건 도끼눈을 뜨고 그들을 방해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우인에게 설탕을 바르는 뜻으로 무형은 그 가 추적하고 있는 범인, 거액의 세금을 탈세하고 고의 부도를 낸 후에 홍콩으로 달아난 망할 놈을 그의 눈앞에 고이 모셔다 주었다. 덤으로 다리 두 개를 부러 뜨려서. 무형은 세금을 안내는 자가 자기 말고도 또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상 당히 분개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래인의 아버지 이박사에게는 그가 오래도록 간직한 보물 같은 귀한 와인을 선물했지, 래인의 어머니 윤박사에게는 꽃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해 서 날이면 날마다 병원으로 장미꽃다발을 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오늘 아침. 래인의 모친 윤박사가 식사라도 같이 하자는 연락을 해 왔 을 때 무형은 의기양양 드디어 결혼 승락을 받게되는구나, 이 래인 너 딱걸렸 어! 이런 생각을 하며 목에 힘을 주고 약속장소로 나간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인색하기도 하지. 겨우 게살 수프 한 그릇을 준 후에 래인의 부친 이박사와 모친 윤박사는 당장이라도 메스를 꺼내들고 그를 회칠 듯한 살벌한 눈초리를 한 채 그에게 래인을 줄 수 없는 이유 서른 일곱 가지를 한 시간 동안이나 읊 어댔다. 뭐, 표현하는 방식이야 다 틀렸지만 그들이 딸을 무형에게 줄 수 없다는 이유 는 딱 한가지였다. "자넨 너무 건방지단 말이지." 역겨울 정도로 거드름을 피우며 딸 가진 유세를 엄청 지겹게도 하는 이박사 내외의 말 요지는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 내외는 말이야. 우리 고명딸 래인이를 시집보낼 때 신랑감 고르는 조건 을 딱 하나만 보기로 했다네. 그건 우리 딸 일이라면 잠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수 있고, 우리 딸에게 온 몸과 마음을 바쳐 충청을 다하는 마당쇠가 될 수 있느 냐 하는 거란 말이지. 그런데 자네가 우리 래인이를 만난 이후 해왔던 여러 가 지 <작태>들을 보고 들어온 바에 의하면 따르자면, 자네는 죽었다 깨어나도 마 당쇠는 될 수 없다는 결론이란 말이지. 자넨 너무 잘나고 너무 오만하고 너무 건방지단 말이야 이런 자네에게 우리 딸을 보냈다간 우리 딸은 마당쇠 거느린 아씨 마님은 커녕이 평범한 보통 마누라도 될 수 없다는 결론이야. 자네가 우리 딸 목숨을 구해준 공적을 염두에 둔다고 해도 안되겠어. 우리가 이십 년 넘게 애지중지 길러온 고운 딸을 자네와 결혼시키면, 우리 딸은 여왕대접을 받기는커 녕 어째서 평생 조롱 속에 갇혀 자네 시중이나 드는 하녀 노릇이나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까나? 그 문제에 대하여 답변을 속시원하게 해주지 않는다면, 내 딸과 자네 결혼은 절대적으로 불가일세!" "..제가 따님과 결혼한 이후에 어떻게 행동한다고 대답드려야 두 분 마음에 드시겠습니까?" 울컥울컥 치솟아 오르는 성질머리를 꾹꾹 발로 눌러 담으며 무형은 최대한 정중하고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협상에 나섰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래인의 모친 윤박사가 아주 심각하고 냉정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각서를 쓰지. 정군." "각서요?" "그래. 각서! 우리 딸하고 결혼하면 절대로 어떤 경우에도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게 해 준다는 거. 아 참, 목욕하고 수영할 때는 빼야겠구나. 그리고 자네 애는 몇 명 낳을 건가?" "우리 가문은 대대손손 손이 귀한 집입니다. 그래서, 저로서는 가능하다면 다 다익선(多多益善)인데요?" 뻔뻔한 무형의 대답에 이박사와 윤박사 내외가 동시에 눈을 세모꼴로 한 채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머시라? 이 이기적인 인간 같으니라고! 하고 소리 쳤다. "아니, 그냥 집에서 살림을 사는 애도 아니고 온 몸을 바쳐 위대한 예술의 길 을 걸어가야 할 아이더러 뭐시라고라? 주렁주렁 애를 많이도 낳으라고라? 자네 너무 뻔뻔한 것 아닌가?" "아이마다 각자 유모와 가정교사, 그리고 하녀를 붙이지요. 그러면 되겠습니 까?" 쯧쯧쯧 윤박사가 혀를 차며 그를 한 대 팰 듯이 손을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무형의 안면을 가격하듯이 빵을 퍽퍽 찌르며 누가 산부인과 전문의 아니랄까봐 출산과 육아에 관한 심오한 강의를 시작했다. 결국 그녀의 발언 요지는 아이는 부모가 키워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물론 <진짜> 사랑스럽고 <정말> 착하며 <진정> 모성애 강하고 도대체가 나무랄 데 없는 우리 딸은 당연히 아기를 사랑하겠지. 하지만 우리 앤 말이야. 내가 아까도 말했지만 심오한 예술의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창작가란 말이지. 예술가들이 손을 놓아버리면 창작 생활에 얼마나 심대한 곤란을 겪는지 자넨 모르겠지? 하지만 나는 안다네. 그러니 자네가 아이를 많이 원한다면 이 문제도 해결을 해야 한다고 보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간단해. 자네가 키우게. 뭐 분업적 협동관계라고 해도 좋겠지. 래인이가 애를 낳으면 자네가 전적으로 육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거야. 한 명은 낳고 한 명은 키운다. 이거야말로 환상적인 부부의 역할 분담이 아니겠나?" "그리고 한가지 더!" 아주 심각한 문제인 듯 윤박사가 반드시 각서에 넣어야한다고 주장한 항목은 바로... <기저귀> 문제였다. "환경보존과 아이의 배변 습관을 위하여 반드시 기저귀는 천 기저귀를 써야 한다는 걸세." 생각하면 할수록 진정 치욕적이고 너무나 굴욕적이며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뼈아픈 서러움을 불러일으키는 각서 사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각서를 쓰고만 무형, 위대하신 검은 용의 형편없는 몰락에 대하여 무형은 자신의 별명을 이제 <검은 용>이 아니라 조부가 말한 대로 <검은 지렁이>로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닌지 심각한 고민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고민은 바로 다른 것이었다. 그런 얼뜨기 짓을 하면서, 세상에 비길 데 없이 닭털 날리는 팔불출 짓을 하 면서도, 그는 정말 래인과 혼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설사 래인이 낳은 자신의 아이가 싼 똥 기저귀를 손으로 빨더라도, 아이를 등에 업고 사무실을 나가게 되 는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무형은 래인과 결혼하고 싶었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그녀석이 나 좋다 따라다닐 때 조금만 덜 건방 지게 굴걸. 그냥 못이기는 척하고 받아줄걸. 괜히 폼잡다가, 잘난 척 튕겼다가 내가 한 그대로... 아니지, 몇천 배로 돌려 받는구나. 아이고, 내 팔자야.' 생각하면 할수록 아파지는 머리를 흔들다가 무형은 주인의 심란한 상태(이렇 게 되면 어떤 불벼락이 떨어질 지 모르므로) 앞에서 긴장을 풀지 못하고 뻣뻣 하게 얼어서는 운전만 하는 척의 뒷통수를 노려보았다. "이봐, 척." "넷. 칭허 뮈렌." 앗, 드디어 천둥벼락이 치기 시작하는구나. 제발 오늘도 심기 불편하신한 주인의 지랄맞은 성질을 견뎌 빅토리아 가로 무사히 돌아가기만을 기윈하며 척은 군기가 뻣뻣이 들어간 목소리로 대꾸했다. "....자네 생각은 어때?" "뭘 말입니까?" 척이 백밀러로 힐끗 살펴본 주인의 모습은 그러했다. 아주 심각한 고민에 잠긴 버릇 그대로, 집게손가락으로 찌푸린 미간을 쓸어 내리며 그는 갈등서린 목소리로 푸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갓난아기의 배변 습관을 좋게 만들기 위하여 반드시 천 기저귀를 써야한다는 학설에 대해서 말야. 가끔씩.... 그러니까... 일주일에 한 이틀정도는 종이 기저귀를 쓰는 것도 안될까?" 쿠어헉! 그날 척은 너무 황당하고 놀라서 핸들을 잘못 돌려 애꿎은 승용차를 그대로 바다 속으로 밀어 넣을 뻔했다는 후문이었다. <31> 멍든 닭 무형의 구혼과 결혼식에 관한 비화 제 2 장


-"알로?" 마치 추운 겨울날, 바깥에 막 돌아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벽난로 앞에 앉 아 따끈한 차 한잔을 마시는 듯한 목소리가 대답을 하고 있다. 무형은 화상 안 에 드러난 사랑스러운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가린? 나다." -"어머, 무형 오빠?" 그녀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 수화기를 들고 무형은 이제 막 지기 시 작하는 붉은 노을이 아스라히 수면 위로 펼쳐진 창가로 갔다. "우리, 오랜만이구나. 건강한 거니?" 햇수로 7 년이다. 무형이 스스로 가린을 아르젤에게 보내준 후로 그만큼의 세월이 지나 갔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지나 겨울이 다가 와도.... 또 새로운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가고 다시 겨울이 왔어도... 사랑하는 그녀가 자신의 남편을 꼭 닮은 아들을 낳고, 또 그녀보다 더 고운 딸까지 낳고.. 처음 사랑했던 그날처럼 여전히 서로를 절대적으로 사랑하며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가슴 무너지도록 행복하게 사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어도... 가린이 낳은 아이들의 대부 노릇까지 자청하며 했었어도... 그래도 무형은 가린을 집착했다. 마음속으로 그녀를 놓아준 것이 아니었다. 그의 피 솟구치는 심장 속에서 가린은 여전히 그의 여자였다. 때때로 무형은 무 의식이 지배하는 꿈속에서 가린의 남편인 아르젤을 잔인하게 죽여버리고 그녀 를 다시 빼앗아오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끓어오르는 살의(殺意)로 몸을 떨 며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했으니까 말이다. -"그럼. 나야 늘 잘 지내지 뭐. 알도 아이들도 다 건강해요." 화상 안에서 그녀가 입가에 빙긋이 잔주름처럼 웃음을 물며 대답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의 가슴을 처연하게 만드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미소. 눈물 나도록 사 랑스러운 얼굴. 하지만 이제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 그녀와 같은 빛깔의 미소 를 물고 그녀를 당당하게 응시할 수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도 다 편안하시다고 들었어요. 오빠도.... 괜찮은 거죠?" 무형은 구김살 없이 웃었다. 그것이 가린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자 아직도 그에게 미안해하는 그녀에게 주는 아름다운 대답이었으므로. "그래." -"....오빠 웃음을 본 것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 아, 어떡하지? 벌써 눈물이 나오려고 해. 오빠, 행복해 보여서. 너무 아름답게 웃어서... 나 너무 행복한 것 있지?" 이 녀석.. 무형은 콧날이 시큰해서 잠시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더 이상 피 냄새로 느껴 지지 않는 노을이 그의 옆얼굴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것을 느끼면서. 절대로 도려낼 수 없는 청춘의 기억.


평생 잊혀지지도 않고 버릴 수도 없지만, 그러나 이제는 자유롭게 놓아줄 수 잇게된 내 아름다운 첫사랑의 여자. 나의 무서운 집착과 이기적인 독점욕으로 많이도 상처받았지만 그러나 먼저 용서하고 배려하고 그를 위하여 밤마다 기도 할 줄 아는 내 첫사랑. 가린. '이제는 나도 널 버린다. 가린.' 무형은 노을이 물든 바다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두운 복수심 으로, 검은 미움과 증오가 아니라 이제는 햇살 같은 사랑으로 나 널 추억의 서 랍 속에 집어넣을 거다, 가린아. 그들은 사랑했었다. 지나간 청춘의 시절. 서로가 운명이라 여기며 서로에게 속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짓궂은 운명이 서로에게 정한 것은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 '그리하여 끝끝내 손을 잡을 수 없었던 너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집착 하고 욕심내고 추하게 독점하려던 나를 그러나 넌 이해했고 용서했지. 내가 널 잊지 못한 것까지 넌 같이 아파해 주었지. 그렇게 넌 나를 사랑해주었던 거지. 날 용서해 주었던 거지.' "가린, 내가 너에게 전화한 것은.." 가린이 먼저 미소지으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하린 오빠에게 들었어. 무형 오빠, 결혼한다고?" 무형은 쑥스럽게 웃었다. "축하해 줄거니?" -"그걸 말이라고 해? 오빠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제일 기뻐한 사람은 이 세상 에서 바로 나일 거야. 지금 오빠 얼굴이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지 알아?"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해 줄 줄 알았다. 나 역시도... 이런 소식. 너에게 제일 먼저 알려야할 것 같아서 말이다. 그래. 다음 주에 결혼할 거야." 가린이 눈물고인 눈으로 활짝 핀 장미꽃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축하해, 무형 오빠. 오빠가 정말 행복해 보여서 좋다. 아, 정말 좋아. 정말 축하해 오빠." 고개를 돌린 가린이 손으로 볼에 굴러 떨어지는 눈물을 지우고 있었다. 무형 은 아릿하게 젖어드는 마음으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러나 끝까지 구김살 없이 환하게 웃었다. "내 결혼식에 초대하고 싶지만.... 올 수 있겠니?" "아르젤과 의논해 볼게. 가능한 한 참석하도록 노력할 거야. 그보다, 무형 오 빠. 내가 오빠에게 결혼 선물 하나 해도 돼?" -"이 녀석, 그럼 맨입으로 그냥 넘어갈 생각이었단 말야? 난 네 결혼식 때 엄 청난 선물 줬다. 잊지 않았지?" 짐짓 윽박지르는 무형의 말에 가린이 은방울처럼 잘랑거리는 웃음소리를 냈 다. "물론 알고 말고. 우린 오빠에게 평생 갚지 못할 빚을 졌잖아. 오빤 우리에게 휘젤성을 통째로 선물로 주었으니까 말야." "잘 간수해. 내가 언제 변덕이 나서 다시 그 성을 빼앗을 지 모르니까. 네 신 랑더러 돈 많이 벌라고 해. 널 고생시키기만 해 봐! 그때 한 짓 보다 더 심한 일도 할 수 있어!"


그때 서로 주고받았던 상처가, 지독한 고통과 절망들이 가벼운 농담과 웃음 안에서 스르르 녹아버리고 있었다. 햇살 안에서 반짝이는 수증기처럼 흔적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가린은 무형을, 무형은 가린을 놓아주었다. 서로를 용서하고 마음을 잘라주었다. 미련을 접어주었다. -"오빠. 신혼여행, 물론 우리 호텔로 올 거지?" "초대해 줄 거니?" -"그럼! 예약 손님 다 쫓아내서라도 오빠를 맞이해야지! 꼭 이리로 와요. 아 이리스 룸을 줄게. 그 방에서 자는 모든 부부는 평생 행복해진대." "너희 부부처럼 말이냐?" 가린은 대답대신 웃었다. 무형은 바늘 가는데 실 가는 것처럼 언제나 가린의 옆에, 그녀를 감싼 아름다운 공기처럼 흔들림없이 지켜선 그녀의 남편 아르젤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알로, 데릭. 축하해." "고마워, 알. 우리를 초대해 줘서 고맙군. 자네 부부처럼 행복해지기 위해서 라도 반드시 신혼 여행을 그리로 가야겠어. 하지만 그때 예전처럼 나에게 장난 쳤다간 가만 두지 않을 거야. 경고하네!" 그저 웃기만 하는 아르젤의 신비로운 황금빛 눈동자에 슬쩍 비쳤다 금새 사 라진 것은 분명 못 말릴 장난기였다. 무형은 속으로 저 능글능글한 인간을 반드 시 손 한 번 봐주리라 작심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좋아지지 않는 인간도 있단 말야, 제길. -"기쁜 마음으로 자네 부부를 기다리지. 다음 주에 결혼식이라면 아마도 참석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폴이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다리를 부러뜨렸거든. 대신 휘젤성에서 다시 한번 결혼식을 올려주지. 내 장미 정원에서 말이야." 가린과의 전화 통화를 끝내고 무형은 팔짱을 끼고 창가로 가 섰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기에 아래 주차장에 척이 운전하는 무형의 승 용차가 도착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문을 열고 뛰어내린 척이 래인을 위해 차 문을 열어 주고 있다. 노랑 임부복을 입은 만삭인 래인의 모습은 뒤뚱거리는 어 미 오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무형의 눈에는 이 세상 어떤 여자보다 귀하고 소 중하고 아름답게만 보일 뿐이었다. "아마도 데릭. 래인이는 네 마음을 아직도 믿지 못하는 구석이 있나보다." 정말 서럽고도 치욕적인 각서 사건에 대하여 울분을 토로하며, 결혼하기가 이 렇게 어려워서야 어디 혼인이라는 것을 해 먹겠느냐고, 치사하고 더러워서 내, 안하고 만다고 길길이 날뛰는 그의 푸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조모가 한마디 오 금을 박은 것을 그때였다. "얘야. 데릭. 래인이 결혼하자는 네 말에 요리조리 빼는 것을 그렇게 화만 내 지 말고 다르게 생각해보면 안되겠니? 그 애가 정말 겁내 하는 것은 결혼 때문 에 자유가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에 대한 불안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러니까, 데릭. 네 마음에 과연 래인이 그 애만 들어 있느냐 하는 근본적인 문제겠지. 한번이라도 가린이에 대해서 그 애와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니? 없다


면, 넌 아주 큰 실수를 하고 있다고 말해 주고 싶구나. 어떤 여자도 다른 여자 를 맘에 담고 있는 남자와 자신의 일생을 같이하고 싶진 않을 게다." ".....그런가요?" 사무실에 들어서자 말자 래인은 심기가 불편하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그 를 구박하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허리를 받치며 뒤뚱뒤뚱 걸어간 그녀는 편안 한 소파에 자리를 잡고는 매섭게 그를 흘겨보았다. "한참 낮잠 자는 사람을 다짜고짜로 깨워서는 이리로 와! 말 한마디하고는 냅 다 끊어버리면 어떡하란 말야? 내가 당신이 부르면 오고 가라면 가는 강아지 냐? 젠장!" "내가 그랬어?" "그래! 내가 어제 글쓴다고 새벽 두 시에 잔 것 알지? 그런데 피곤해서 낮잠 좀 자겠다는 사람을 이렇게 못살게 들들 볶아야 하냐? 우리 애도 내가 잘 자야 잘 큰단 말야!" "알았어, 알았다고. 다음엔 네가 낮잠 잔다고 하면 그냥 조용히 전화 끊을게. 됐지?" 일단 저자세로 나간 무형,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마나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일단 래인의 옆에 다가가 자리를 잡고는 그녀의 아랫배에서 놀고 있는 자신의 아들(초음파 검사로 그들은 이미 래인의 배 안에 든 아이가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을 한번 어루만져 주 었다. 출산이 가까워져 오면 올수록 뱃속의 아이는 엄마가 잠도 자지 못할 만큼 심하게 움직여댔다. 지금도 아이는 겉의 옷자락이 흔들릴 정도로 힘차게 엄마의 배를 걷어차며 놀고 있는 중이었다. "할말이 있어." 무형은 래인의 아랫배를 살살 어루만지며 가능한 한 태연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무슨 말?" "우리 신혼 여행을 어디로 갈 건지 결정했다." "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얼어죽을 신혼여행이야?"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래인이 톡하니 되쏘았다. 그러나 무형은 그녀의 말은 무시하고 자신이 해야할 말을 게속했다. "다음 주가 춘절이다. 그때 우린 결혼식을 올릴 거야" "웃기지 마쇼. 오빠. 누가 당신하고 결혼한대?" "그리고 신혼 여행은, 휘젤성으로 갈 거야." 깜짝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래인이 홱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신혼여행을 휘젤성으로 간다고 했다. 이미 가린이에게 연락해서 예약해 두었 다. 가린이 우리에게 특별히 최고로 전망 좋은 방을 준다고 했어."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당사자인 내가 당신하고 결혼한다는 허락도 안했 고..." 무형은 손을 들어 래인의 볼을 살며시 감싸 안았다. 그는 도전적인 불꽃이 튕 기는 래인의 눈 속에 담긴 은밀한 불안함, 혹은 아픔 같은 것을 비로소 보았다. 아아, 왜 미리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그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제발, 입 다물고 내 말부터 좀 들어봐, 그리고 나서 고함을 치든 날 할퀴든 맘대로 하라고. 알았지?"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는 무형의 눈빛이 부담스러운 듯 꼼지락거리며 그럼에도 마지못하고 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다 진실이야. 이제부터 난 너에게 절대로 거짓말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야. 날 믿어줄 거지?" 래인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아래 그녀의 작은 얼굴이 가늘게 떨리 고 있었다. "리니..... 가린이를 내가.. 몹시도 사랑하고 결혼하기를 원했다는 것, 너도 알 고 있을 거야." "당신의 유일한 사랑이자, 운명의 여자였지." "하지만 지금은 네가 나의 사랑이야. 과거는 아니었지만 나의 현재와 미래는 너의 것이야. 래인. 우리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오는 동안 우린 전혀 다른 경험 들과 생각들과 삶의 자취들을 밟아왔지. 만난 사람도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 우 린 드디어 만났어. 그리고 난 지금 너를, 너만을 사랑해. 나의 운명이 정한 여자 는 다름 아닌 바로 너라는 것을 난 이제 비로소 알게 되었다구. 가린을 내가 그 토록 사랑하고 원했지만 가질 수 없었던 것은 그 애가 나의 운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아. 우린 결혼할 거야. 삶과 죽음을 함께 해야 하니까 말이 야. 그리고 신혼 여행은 반드시 휘젤 성으로 가야해. 왜냐하면..." 무형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래인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나같이 멋진 남자를 차버린 과거의 여자한테 복수를 해야하거든." 래인이 킥킥 웃었다. 무형은 따라서 행복하게 웃었다. "나란 인간. 한번 품은 앙심을 쉽게 버리는 인간이 아닌 거 잘 알지? 이래인. 날 버린 윤가린이 염장 퍽퍽 질러보게 나 좀 도와 주라. 그녀에게 걷어차인 내 가 이렇게 멋지고 예쁘고 능력있고 잘난 여자 만나 결혼해서 그녀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꼭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난 정말 그녀에 게 치열한 복수를 하고 싶단 말야. 도와줄 거지?" 래인이 두 팔을 내밀어 그의 목을 감았다. 그녀는 진지한 눈빛에 빛을 가득 담고 도도하게 선언했다. "물론이지, 데릭! 사랑해. 당신의 복수를 도와줄게. 당신을 버린 그 여자가 질 투날 정도로 당신이 정말 행복해지게 당신을 사랑해 줄게!." 일주일 후, 춘절의 세 번째 날 밤. 홍콩 빅토리아 가. 대 타이쿤의 저택.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검은 옷을 입은 수백 명의 젊은 사내들이 눈을 빛내며 그 집 근처에 다가오는 차들과 사람들을 노려보며 삼엄한 경계를 펼치는 그 시 간. 저택과 도로를 잇는 다리로 쉴새 없이 중후한 승용차들이 집안으로 굴러들 어서고 있었다. 일년에 한번 있는 트라이어드의 공식적인 대 집회. 중간급 보스 이상의 모든 간부들이 대 타이쿤을 방문하고 조직의 우의와 결 속을 다지는 날이었다.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신년 폭죽놀이를 즐기는 소음들이 시끄럽게 들려오고 있었고 해안가에서는 화려한 용춤 행렬이 끝난 후 행사의 마지막 마무리로 화


려한 불꽃놀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대 타이쿤이 거처하는 빅토리아 가의 대 저택은 많이 사람들이 오가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숙하기 이를 데 없는 침묵으로 뒤덮여 있었다. 승용차에 내린 건장한 사내들은 차례로 하인들의 안내를 받아 집안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그들은 옷깃을 다시 여민 채 평소에는 열린 적 없는 중후한 비밀 문을 통해 차례로 어두운 지하 광장으로 사라져 가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 형제들이 이렇게 다시 모여 새해의 시작을 축하하게 되어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다 같이 축배를 들기로 합시다!" 조직원들간의 질서정연한 신년 하례가 끝나고 대 타이쿤이 축배를 선창했다. 다같이 잔을 든 수 백 명의 사내들이 <구오니앤하오(過年好)>를 외쳤다. 술잔을 비운 노인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새해를 맞이한 기쁨과 더불어 형제들에게 더없이 기쁜 소식을 전하 게 되어 내 기분이 무한하게 흥그럽습니다. 우리의 뿌리. 우리 트라이어드의 기 둥인 나의 손자 검은 용이 드디어 성처를 맞이하여 조만간 후계자를 얻게될 거 라는 소식을 전합니다." 노인의 갑작스런 한 마디에 조용히, 그러나 물결 퍼지듯이 커다란 웅성거림이 파문처럼 퍼져나갔다. 노인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무형이 일어섰다. 그리고는 휘장을 젖혔다. 그 자 리에는 대 타이쿤의 반려인 인자한 인상의 노부인과 함께 만삭의 몸을 한 아름 다운 여자가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무형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어깨를 감 싸안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나 검은 용의 성처가 될 여자요. 그녀는 보다시피 조만간 검은 용의 후계자 를 낳을 겁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트라이어드 조직의 모든 가문들 수장이 모인 그 자리에서, 조직원들의 눈앞에 서 단 한번도 굽혀진 적이 없는 검은 용의 무릎이 그 의자에 앉은. 만삭의 한 여자 앞에서 접혀졌다. "자신의 여자 앞에서 꿇는 무릎은 비겁한 것이 아니라지? 나의 래인? 그대에 게 청하노니, 나 검은 용의의 성처가 되어 나의 후계자를 낳고 나의 반려가 되 어 평생 나와 같이 삶을 같이 하겠소?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순식간에 넓은 지하실에는 분노와 경악의 침묵이 가득 찼다. 감히 저 조그만 여자가 무릎까지 끓은 검은 용의 청혼을 거부하다니. 졸지에 모든 조직원들 앞에서 개망신을 당하게 생긴 무형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눈썹을 치켜 뜬 채 의자에 앉은 래인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억지로 미소짓는 래인의 얼굴에 송알송알 맺 힌 땀방울을 보았을 때 그는 무엇인가 아주 잘못 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앞으로 픽 쓰러지려 하며 래인이 두 손으로 무형의 어깨를 짚었다. 그녀는 힘 없이 그에게 중얼거렸다. "미.. 미안한데, 자기야. 아무래도... 지금 아기가 나올 것 같거든. 양수가 터진 것 같아. 나, 지금 병원으로 가면 안될까?" 약 일분 후, 지하실에 모인 모든 트라이어드의 조직원들은 차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 없고, 여하한 일에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던 돌심장. 위대하신 검은 용 무형이 얼굴이 해쓱해져서는 구급차를 부르라고 난리를 쳐대 며 허둥지둥하는 꼴 말이다. 아랫배를 잡고 신음하는 성처 래인.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그러나 절대로 그녀의 몸에 어떤 사람의 손 하나 대지 못하게 하고 직접 그녀를 안고는 바람처럼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은 그날부터 트라이어드의 권력구조가 개편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트라이어 드에 군림하는 자는 검은 용이되 그 위에 군림하는 자는 바로 성처 래인이라는 것을. 아아, 여자, 그 위대한 이름이여.....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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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비단처럼 고요한 훈풍이 부는 봄의 바다. 저 멀리 아득하게 불꽃을 뿌린 듯 화려한 도시의 야광이 손이 잡힐 듯 흔들 리고 있었지만 구룡 반도에서 두 시간이나 떨어진 이곳 남지나 해의 해면은 검 은 심연처럼 어둡기만 했다. 신비로울 정도로 커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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