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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당혹스러움. 여자는 자신 위에서 헐떡이며 환희에 찬 남자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자신을 감싸고 있던 열정이 순식간에 얼어 버렸다. 그러나 남자는 환희에 차서 그런 여자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으며, 그런 변화를 눈치채기엔 남자는 너무 술에 취해 있었다. 풀썩. 남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여자의 몸 위에서 절정을 느끼며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는 이내 나직하게 코를 골며 골아 떨어졌다. 여자는 언제 흐르기 시작했는지 미처 알지도 못했던 눈물이 축축하게 자신의 볼을 타고 흐르자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남자를 옆으로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뭇거뭇한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어렴풋한 사물의 영상들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는 벽을 더듬거려 간신히 방안에 불을 켰다. 어둠 속에 익숙해졌던 눈은 형광등에 불이 들어오자 눈부심에 놀라 잠시 눈을 감았다 떠야만 했다. 여자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현실은 자신이 막연히 생각했던 상황보다 훨씬 더 암울했으며, 참담했고, 끔찍했다. 호텔 방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서로에게 탐닉해 벗어버린 옷가지들이 방문에서부터 침대까지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으며, 자신들의 원색적인 몸짓에 한껏 구겨진 침대 이불은 침대 밑에 떨구어져 뒹굴고 있었으며, 벌거벗은 남자의 나신은 흉물스럽다 여겨질 정도로 퇴폐적인 모습을 하고 침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누워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를 절망하게 만든 것은 자신의 육체였다. 남자의 수염에 긁혀 울긋불긋해진 피부, 피가 묻은 하체, 그리고 그 피의 연장선상인 새 하얀 침대 시트의 핏자국과 난생처음 보는 남자의 남성에 묻은 피. 눈을 감아서 없어질 일이라면,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부정하면 없어질 일이라면 좋았을 그런 광경이 여자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24 살. 이런 비참함을 느끼기엔 아직은 어린 나이다. 하물며 7 년이란 긴 시간동안 짝사랑을 해온 남자에게 이런 대우를 받기엔 더더욱 어린 나이였다. 7 년 간의 세월의 보답이 이것이라면 세상은 그녀에게 너무 가혹했다. 그녀에게 죄가 있다면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에게 12 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겨 버린 죄밖에 없었다. 미련한 짝사랑, 그 사랑의 대가가 이것이라면 세월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잔인했다. 남자가 몸이 시린지 부르르 몸을 떨며 몸을 뒤척이더니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는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여자는 땅바닥에 뒹구는 시트를 들어 올려 소름이 바짝 돋은 남자의 나신을 가려 주었다. 이불이 몸에 감기자 남자는 엄마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어린아이처럼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얼굴에 웃음을 띄었다. 그랬다. 여자는 남자의 이런 모습이 좋았다. 남자의 대단한 가문도, 재력도, 외모도, 학력도 아닌 남자의 웃는 얼굴을 사랑했다. 그의 그런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고되기만 한 자신의 삶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여자는 남자의


웃음에 중독되었다. 그런 그는 언제나 사람들 틈에 있었고, 그 사람들 틈에서 그는 환한 광채를 내며 웃고 있었다. 그녀는 멀리서 그저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그녀를 돌아봐 주기를. 그에게 그녀는 단지 절친한 친구 일뿐이다. 그의 곁에 있는 수많은 친구들 중에 하나.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그들과는 조금 다르게 성별이 다르다는 것 정도? 그녀는 그에게 아주 베스트에 드는 친구일 뿐이었다. 다행이라고 하면 다행일지도 모를 그런 측근.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서 그것은 불행이었다. 너무나 가까이 있기에 보지 말아야, 듣지 말아야 할 것을 그녀는 너무 많이 알아 버렸다. 그의 사랑을, 자신과 같이 바라만 보고 있는 그의 외사랑을. 자신보다 더 길고 긴 사랑을 그는 하고 있었다. 감히 그녀로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그런 사랑을 그는 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 말했고, 그 여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다른 여자의 수호기사였다. 어떤 일에도 자신만만한 그 남자는 유독 그 여자 앞에서만 움츠러들었다. 그녀 앞에서는 그 여자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넓은지 핏대를 세우며 말을 하다가도 그 여자 앞에만 서면 아무런 말도 못하는 소심한 남자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아마도 그 여자는 그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모를 것이다. 그런 고백도 못하고, 바라만 보는 그 남자는 바보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며, 고백도 하지 못하는 그녀 역시 바보다. 그 여자가 있는 곳에 그 남자가 있고, 그 남자가 있는 곳에 그녀가 있다. 그녀는 그 남자를 바라보고, 그 남자는 그 여자를 바라본다. 그런 그가 조금은 야속할 만도 할텐데 그녀는 그런 그가 섭섭하거나 야속하지 않다.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시작한 일이기에 그런 남자가 밉지 않다. 오히려 그런 그를 사랑해 버린 자신이 미울 뿐이었다. 이런 힘든 사랑을 해버린 자신이 바보 같고, 한심스러울 따름이었다. 지금은 그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고, 그와 그 여자를 그녀는 모두 사랑했기에 그와 그 여자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랬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보상이 고작 이런 것이었다니. 잔인한 세상이여, 잔인한 사랑이여!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 밑에서 한참을 찬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잊자, 잊자, 잊어버리자. 그까짓 7 년간의 짝사랑 잊어버리자.' 여자는 그렇게 자신을 다그치며 7 년간의 짝사랑에 이별을 고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몸이 덜덜 떨리고, 온몸이 파랗게 질려 버릴 때쯤에서야 여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욕실을 빠져 나와 바닥에 떨궈진 옷을 하나씩 알몸에 꿰어 입기 시작했다. 옷을 다 차려 입은 여자는 곤하게 잠이 든 남자의 곁으로 다가와 한참을 남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짙은 속눈썹, 높은 콧날, 도톰한 입술. 너무나도 잘생긴 남자였다. 자신과는 다르게 모든 것을 소유한 남자. 처음으로 사랑한 남자. 자신이 처음으로 몸을 허락한 남자. 이제 이 남자를 잊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친구 사이로 돌아 갈 수 없다. 왜 이렇게 멀리 와 버린걸까? 그저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차마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마주 대할 자신이 없었다. 그가 잠에서 깨어 황당해할 모습도, 당황할 모습도 볼 자신이 없었다. 그저 여기서 끝내는 것이 더 이상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그냥 여기서 끝내 버리자. 그런데 너무나도 아쉽다. 7 년이란 세월에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지려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이렇게 나쁜 기억만 가지고 가기엔 너무나도 7 년 간의 세월이 아쉬웠다. 이렇게 아무런 흔적도 없이, 자취도 없이 포기하기는 너무나 아까웠다. 여자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물러설 순 없다. 그녀가 그렇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 순간, 갑자기 곤하게 잠을 자고 있던 남자가 잘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차며 이불을 밀어냈다. 그 순간, 다시 남자의 눈부신 나신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조금은 흉물스럽다고 여겨지던 남자의 나신이 그 부분을 제외하고 드러나자 여자는 그제서야 남자의 나신이 조금은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떡 벌어진 어깨며, 새하얀 피부, 납작한 젖꼭지. 남자의 하체는 몰라도 상체하나 만큼은 예술이었다. 잡티 하나 없이 새 하얀 남자의 가슴을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남자의 맨 가슴이 새 하얀 도화지 같다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반짝!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아주 맹랑하고도,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여자는 손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다가 결심을 한 듯 손을 움켜쥐고는 잠에 취한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다시 한번 손을 불끈 움켜쥔 그녀는 자신 눈앞에 펼쳐진 그의 가슴으로 천천히 입술을 가져갔다. '한 번' 그의 가슴을 입에 물고 세차게 빨았다. "으음." 그의 입에서 신음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남자는 눈을 뜨지 않았다. 다시 여자는 입술을 다른 곳으로 옮겨 다시 세차게 빨았다.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여섯 번이다. 7 년의 세월에 대한 대가는 이렇게 7 개의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울긋불긋 그의 가슴에 수놓은 듯한 키스마크가 자신을 수줍게 쳐다보고 있는 듯하다.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결과다. 뭐, 이 정도쯤은 7 년 간의 세월에 비해, 오늘 당한 수모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가방을 바닥에서 주워 들었다. 잠이 곤하게 든 남자의 얼굴을 다시 내려보던 여자는 훽하고 고개를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이제 다시는 그 남자를 볼일은 없을 것이며, 보지도 않을 것이다. 영원히 안녕! 여자는 이틀 후, 사람들이 '완벽한 남자'라고 부르는 남자가 2 년 2 개월의 유배를 무사히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1. 버림받은 남자 "후후후" 은재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무섭게 얼굴이 일그러진 지완이 은재의 웃음소리에 눈을 번뜩이며 째려보기 시작했다. "너 지금 웃는 거야?" "어." 무척이나 화가 난 목소리로 지완은 은재를 몰아붙였지만 은재는 여기서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아니, 지금 이 상황이 무척이나 웃긴 듯 그나마 자제했던 웃음을 지완의 질문에 더 크게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뭐가 그렇게 웃긴데?" 은재의 웃음소리에 잘생긴 지완의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한층 일그러졌다. "이런 광경 흔치 않잖아. 완벽한 남자 김지완이 약혼녀에게 바람맞다! 아니지. 유부녀에게 바람맞다! 어때? 캠코더라고 있었음 좋았을걸." "악담을 해라. 악담을 해. 그냥 두지 않을 거야. 저 두 사람 그냥 두지 않을 거야." 지완의 이글거리는 두 눈이 출구 쪽을 향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 순간, 지완의 머리에 알밤 하나가 작렬하며, 아픔이 찾아들었다. "뭐야!" "그만둬. 지금 넌 완벽한 패자야. 저렇게 사랑해 하는 연인들의 모습 네 눈엔 안 보여! 넌 방해꾼일 뿐이야. 완벽한 악당 그 자체야 3 류 조연이라고!" 은재의 말에 지완의 표정은 곧 시무룩해졌다. 아마 지완 역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15 년 간 키워왔던 짝사랑의 종말이 다가왔음을 은재가 그렇게 일깨워주지 않았어도 알고 있었으리라. 바보같이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사랑의 끝자락을 잡으려고 애쓰는 꼴이라니. 하기사 지금까지 자신의 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여자에게서 버림을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 하지만 그 게임은 이미 오래 전에 결론지어진 일이었다. 구차하게 지완이 그 끝을 잡고 몸부림 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모습은 그저 추해 보일 뿐이다. 이제는 물러나는 미덕을 보여 줄 때다. 생살을 찢는 듯한 아픔이겠지만 그래도 돌아설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은재는 지완의 어깨를 톡톡 쳐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것이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그나저나 이를 어쩌지. 한시간 후면 약혼식인데." 이제야 조금은 정신이 드는지 지완은 자신의 약혼식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랬다. 원래대로라면, 지완의 계획대로라면 지금 지완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 행복한 남자가 되어 15 년 간이나 짝사랑해 온 여자와의 약혼식을 앞두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은재가 염려했던 바가 현실로 나타났고, 지완은 지금 무참히 버려졌으며, 자신의 벌린 약혼식을 수습해야 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잘해보슈. 난 캠코더라도 구해보러 갈 테니까." 은재는 걱정으로 얼굴이 찌푸려진 지완의 곁을 스쳐지나가며 말했다. 그 순간 지완의 손이 은재의 손을 붙잡았다. "정은재! 너도 공범이야. 그러니까 이 사태를 수습하는데 일조 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왜!" 은재가 빽 소리를 지르며 지완의 말에 반감을 표시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지. 분명히 애초부터 이 약혼은 안 된다고 말린 사람도 자신이고, 안 되도 상관 않겠다며 방관한 사람도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일을 벌여놓고 공범이니 사태를 수습하는데 일조 하라고! 어불성설!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이다. "너! 이렇게 될 줄 알았잖아. 안 그래? 부인 할 셈이야!" 알았다. 이런 식은 아니어도 이 약혼식이 안 될 것이라는 것은 은재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말렸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떼를 쓰고 있는 이 인간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협력해. 오늘 내 약혼녀가 되어줘야겠어." 뭐시라고라! 지금 이 자식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은재는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지완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 말도 안 되는 사태에 당혹스러워하고, 화를 내던 인간은 어디 가고 평상시와 같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완벽한 남자' 김지완이 자신 앞에 서 있었다. 그 말인 즉슨, 지금 지완이 한 말은 진실이라는 것이다. "미쳤군." "그래. 나 단단히 미쳤어. 어쩔 도리가 없다. 도와 주라." 지완은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은재에게 사정을 했다. "싫다면?" 은재의 거두절미한 거절에 다시 지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곧 얼굴에 언제나처럼 익숙한 웃음을 띄며 은재를 응시했다. "네가 어렵사리 일궈놓은 '풍경' 알아서 해라. 너의 거절에 대한 대가는 그거야. 나도 이러고 싶진 않다만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다. 난 앞으로 일어나 사태에 대한 분풀이라도 할 생각이니까." 뭐? 순간적으로 은재는 깜짝 놀라서 지완을 쳐다보았다. 언제나처럼 빙긋빙긋 그의 얼굴엔 엷은 미소가 어려있다. 그러나 그의 말투는 칼날처럼 차가웠고, 눈매는 싸늘했다. "이 사태를 수습하고 봐야 하지 않겠냐? 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약혼녀 없는 버림받은 남자가 될 수 없잖아. 그런 '개쪽'이 어딨냐? 안 그러냐? 오늘만 어떻게 모면하면 바로 파혼해 줄게. 프리미엄 붙여서. 요즘 '풍경' 경기 안 좋다며? 어때 좋은 거래지 않아?" 싸늘한 눈초리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지완은 좀전의 장난스런 어투로 다시 실실거리며 은재에게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했다. 은재는 잠시나마 자신이 착각을 한 모양이라고 생각을 하고는 곧 지완의 그런 모습을 잊어버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고 어서 일 수습할 생각이나 해라. 나간다. 잘 해봐!" "거짓말 아니야. 정은재." 지완에게서 고개를 돌려 발걸음을 옮기던 은재는 다시금 차가운 목소리가 자신의 귀에 들려오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려 지완을 쳐다보았다. 누가 지금 내게 말을 건 거지? 은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른 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드레스 입고 약혼녀 행세 좀 해줘." 다시 건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지금 자신 앞에 서있는 이 남자의 얼굴이 은재는 그저 낯설게만 느껴졌다. "싫어!" "내게 있어서 '풍경'같이 막 자리잡기 시작한 조그만 출판사 하나 없애는 거 쉬운 일이야. 자금 줄 막고, 거래처들 끊어버리고. 아주 간단한 일이야. 네가 내 약혼녀


행세하는 것보다도 아주 간단한 일이야." 아무런 감정도 없는 로봇처럼 지완은 아무렇지도 않게 은재의 보물을 없앨 계획을 말하고 있었다. 지금 막 은재를 처음 본 사람처럼, 마치 은재가 자신의 적수라도 되는 듯이. "김지완, 너 농담도 참 웃기게 한다. 실없는 소리하지 말고 얼른 수습이나 해." 은재는 그저 지완의 그런 말을 농담으로 치부해 버렸다. 아니 농담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아는 지완은 이런 협박도, 이런 표정도, 이런 말투도 하지 않으니까. "농담하는 거 아니야. 아까도 말했다시피. 2 시간 정도의 봉사와 그 봉사에 따른 프리미엄인가, 아니면 네가 그렇게 아끼는 '풍경'의 부도인가? 이것이 지금 네가 선택해야 할 상황이야. 넌 똑똑한 여자니까 현명한 선택을 할거라고 믿어. 좀 있다가 보자." "야! 야~" 이제는 아예 은재의 대답도 거부한 채 지완은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봄바람 살랑이는 따뜻한 지완의 모습과는 다른 180 도 달라진 겨울의 혹한 같았던 지완의 모습에 그만 은재는 그 잘난 자신의 입도 놀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버렸다. 아무래도 실연의 충격이 너무 컸던가, 아니면 앞으로 한시간 후에 다가올 창피함을 도저히 지완으로서는 감당할 능력이 없는 모양이다. 하기사 아무래도 26 년 간 '완벽한' 모습을 구가해온 삶에서 이런 치욕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오늘의 충격으로 지완은 자신의 프라이드에 엄청난 타격을 받을 지도 모른다. '에라 모르겠다. 좋은 게 좋다고, 알았다, 알았어. 이 누님이 도와주지.' 알 먹고 꿩 먹는다는 이야기가 이런 경우를 빗대서 하는 거겠지? 여기서 약 2 시간 정도 저 놈의 약혼녀 행세만 하면 친구에게 좋은 일하고 거기에다가 지완이 말한 그 프리미엄이라는 것도 솔직히 은재의 구미를 당겼다. 부하게 자란 놈이라 그런지 평소에도 손이 큰 지완을 생각하면 자신을 일생일대의 위기에서 구해준 자신에게 줄 그 프리미엄이란 아마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거부를 하면, 자신의 전부라고 자신하는 '풍경'을 지완이 놈이 장난을 칠 것이다. 친구 사이니 자신이 협박한 대로하진 못해도 분명히 그냥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머리 아픈 일을 겪는 것보다는 전자가 훨씬도 탁월한 선택이리라. 지금 지완은 은재의 두 개의 약점을 가지고 쥐어흔들고 있었다. 은재가 '풍경'일에 목메고 있다는 사실과 은재가 돈이라면 사죽을 못 쓴다는 사실. 10 년이라는 세월 동안 저 넘은 너무 은재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 버렸다. 세월이 무섭긴 무섭다. 결정은, 못 먹어도 고다! "얼마 줄 건데?" 허락의 의미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니 거래를 해는 '이문'이 남는 장사를 해야 하는 법이다. 은재는 뒷모습을 보이며 멀어져 가는 지완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완이 은재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더니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한 장?" 가짜 약혼녀 행세에 천만원이라니! 역시 돈 있는 놈들은 다르다. 은재는 기꺼이 이번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주 성심 성의껏 아주 행복한 약혼녀의 모습을 보여 주리라. '2 시간에 천만원이라는데, 못할게 또 뭐 있겠어? 네 어머니 노릇도 하라고 하면 한다!'


순식간에 지완의 약혼녀는 "이예석"이라는 이름에서 "정은재"라는 이름으로 교체되었다. 약혼식장으로 들어가면서 사람들이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런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지완은 단 한마디로 묵살했다. "은재를 보호하기 위해서 친한 후배를 전면으로 부각시켰습니다. 우리 은재가 보기보다 마음이 여려서, 그런 언론의 집중 공격을 당해낼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그리 된 것이니 너그러운 맘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지완의 능글능글한 말이 끝나자마자 지완의 마음에 감격한 사람들의 탄성이 은재의 귀를 때렸다. 지완은 좀전의 그 바람맞은 처절한 인간에서 일약 약혼녀를 위해 살신성인하는 성인군자로 탈바꿈한 순간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탄성에 수줍은 척 머쓱해진 표정을 지으며 돌아서는 지완의 얼굴이란, 그야말로 가식 그 자체였다! 어쨌든 집안 식구들마저 완벽하게 속게 만든 지완의 연기력에 약혼식은 아무 탈 없이 끝낼 수 있었다. 은재로서는 그 점이 조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완의 가족들은 은재를 아무런 사심 없이 식구로 받아들였다. 불과 한시간 전에 만난 자신을 말이다! 아무래도 지완이 이 놈은 가족 복도 타고나서 가족들이 모두 비단결 같은 맘을 가지신 모양이었다. 자식의 말이라면 이렇듯 사심 없이 들어주시는 걸 보면 말이다. 복도 지지리도 많은 놈!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약혼식이 끝나고, 두 사람의 시간을 갖는다는 명목 하에 오늘의 계산을 끝내려고 만난 술집에서 은재는 자신이 손해보는 장사를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경악하고야 말았다. "너, 이게 뭐야?" "뭐라니?" 은재는 자신의 손에 들린 백 만원 짜리 수표 한 장을 들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나 자신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거드름을 피우며 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돈이 부족하잖아! 일시불로 주는 거 아니었어?" "일시불로 줬잖아." 입에서 그야말로 불을 뿜어대고 있는 은재 앞에서 지완은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은재의 얼굴을 흥미로운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한 장이라며? 한 장이 겨우 백 만원이야!" "그럼 겨우 2 시간 정도 약혼녀 행세 한 거 가지고 얼마를 바란 건데?" "이, 이, 사기꾼 같은 놈. 내가 너 같은 놈을 믿은 게 잘못이지. 내가 미쳤지." 은재는 앞에 놓인 맥주 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어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 은재의 모습이 웃긴지 지완은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좋다고 피식피식 웃는 거야?" "그냥 네가 없었으면 오늘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니까, 그냥 웃음이 나오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지완은 연신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병신 새끼. 아주 가관이었을 거다.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하고, 이 쥐꼬리만한 돈을 택한 내가 천추의 한이다. 한이야. 무비카메라로 찍어서 천년, 만년, 가보로 보관하는 건데. 아깝다. 아까워." 은재가 큰소리를 내며 말을 하자 지완의 얼굴엔 미소가 더욱 번져만 갔다. 그러나 일순간 지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더니 은재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근데 너 그거 아냐?" 웃음을 실실 쪼개던 지완이 갑자기 얼굴을 굳히고,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처럼 은재를


쳐다보자 은재는 바짝 긴장을 하고는 지완을 응시했다. "나, 오늘 실현 당한 남자야. 보기 좋게 차였지. 천하의 김지완이 여자에게 차인 역사적인 날이라고!" "그래. 역사적인 날이지. 그 역사적인 날에 나, 정은재가 함께 했다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 그래 그렇게 얼굴 좀 찡그려봐! 맨날 실실거리며 웃기나 하고 오늘 같은 날은 조금 얼굴 찡그려도 뭐라고 할 사람 없으니까 조금 찡그려봐!" 과장된 어투로 은재는 지완의 음울한 말을 받아치며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지완은 바닥에 시선을 응시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야! 짠 안 할 거야!" 은재가 지완의 팔을 툭툭 치며 말하자 지완이 얼굴을 들며 씨익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래. 짠이다. 짠이야! 이 못된 친구 같으니라고! 그렇게 내 불행이 너한테는 재밌냐?" "그럼. 이런 구경하기 쉬운 줄 아냐!" 허공에서 잔이 부딪혔다. 지완은 반이나 남은 술을 단숨에 비워냈다. 그리고는 또다시 은재를 보며 씨익 웃음을 터트렸다. "바보 같은 놈. 여자한테 채인 놈이 좋기도 하겠다." 빈정거리며 은재가 말을 꺼냈다. "좋다. '존나' 기분 좋다. 됐냐? 정은재!" "……" 아무 말도 없는 은재의 시선을 무시하며, 지완은 손을 들어 맥주를 다시 시켰다. 종업원이 다가와 지완의 손에서 빈 잔을 가져가고, 또 그 빈잔 가득히 시원한 맥주를 채워 올 때까지 지완과 은재는 서로를 무시하며 침묵을 지켰다. "다시 짠하자. 정은재." "그래 짠이다. 짠!" 술이 채워져 돌아오자 그제사 지완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희희낙락해서는 은재에게 농담을 건네기 시작했다. 그런 지완의 모습의 어찌나 안쓰럽던지, 은재는 자꾸만 자신의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저 바보 같은 지완의 모습이 마치 몇 년 전의 꼭 자기 모습 같아서, 슬픈 일이 있어도 무대에 서서 재주를 피워야 하는 광대 모습을 연상 시켜서 은재는 가슴이 아파 왔다. 평소에는 술 두 잔 정도만 마시고는 술잔을 내려놓던 지완은 아주 훌륭하게 '버림받은 남자' 라는 역을 소화해내기라도 할 것처럼 끊임없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결국 지완은 술이 곤드레만드레 되서는 은재의 어깨에 의지해서 술집을 빠져 나왔다. 은재는 그런 지완을 애써 말리지 않았다. 지완이 평소와 다르게 많은 술을 마셔도, 평소와 다르게 웃는 얼굴이 아니어도, 평소와 다르게 시무룩해도, 다 이해할 수 있기에 그런 지완을 옆에서 지켜봐 주었다. 은재는 간신히 택시를 잡아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지완의 집으로 향하자니, 오늘 약혼식을 치룬 남자가 이렇게 술에 만취해서 들어간다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자신이 없어 은재는 궁여지책으로 자신의 집으로 방향을 잡았다. 오늘따라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길은 멀기만 한 건지. 오늘만큼 고층에 사는 자신의 집이 이렇게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오늘에서야 은재는 자신의 집이 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은재야, 은재야~~" "우리 이쁜 은재, 내 약혼녀 이쁜이 은재."


그리고 이 "완벽한 남자" 김지완에게 이렇게 고약한 술 주사가 있는 줄 은재는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항상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술만 마시고 자기 절제를 하던 지완이었기에 10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지완을 알아온 은재였지만, 지완의 이런 모습은 낯선 모습이었다. 아, 딱한 번 이번 보다 더하게 술에 취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아예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으니, 주사 부릴 여유도 없어 이런 광경을 볼 수 없었으니 천만다행이라고나 할까! 그간 지완이 술을 못 먹는다고 사양을 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차마 자신의 평소 모습을 생각해서 이런 모습을 보여 줄 수 없었겠지. 김지완 너 오늘 그 너의 그 완벽함에서 마이너스 일 점이다! 빌어먹을, 정말로 빌어먹을이었다! 오늘은 화려한 약혼식이 되었어야 했다. 자신의 절친한 친구(?)와 사랑스런 후배의. 그러나 이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술에 취해 주사를 하는 남자의 꼬랑내 나는 양말 짝이나 벗기고 있는 빌어먹을 신세가 되어 버리다니.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는 건지. 은재는 연신 툴툴거리며 자신의 침대에 버젓이 누워 버린 남자의 양말을 힘겹게 벗기고 있었다. "김지완! 너 오늘 한 번뿐이다. 실연 당했다니까, 그러니까 이 누님이 한 번만 봐주는 거야! 알았어, 몰랐어!" 그러나 지완이 대답을 할 리가 없다. 이미, 이불에 코를 박고 잠들어 버린 지 오래였기에. 은재는 한숨을 폭 내쉬며 지완의 갑갑해 보이는 양복을 벗기기 위해 지완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지완이 남자다 보니 상의 한 벗기는 것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곰 같은 놈. 옷이나 벗고 자야 할 거 아니야." 은재를 기를 쓰고 지완의 한쪽 팔을 들어 한쪽 손을 벗겨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어찌나 힘든지 은재의 이마 위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인간. 내가 다시 너랑 술을 마시는 정은재가 아니라 김은재다, 김은재야. 어떻게 된 게 너랑 술만 마시면 뒷끝이 항상 안 좋냐! 너랑 나랑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생에 아주 악연이었던데 분명해. 그것도 철천지원수 사이." 투덜투덜 거리면서도 은재는 지완의 옷을 벗기기 위해 안간힘이었다. "너 혹시라도 마누라 될 사람 만나면, 절대로, 다시는 술 먹지 말아라. 아니 마시려면 왕창 마셔서 필름 끊길 때까지 마시던가, 아니면 지금까지처럼 절제 할 때까지만 마시던가 둘 중에 하나만 해라. 어중간하게 마시니까 꼴 사나와서 못 봐주겠다. 못 봐주겠어." 팔 두 쪽을 간신히 옷에서 벗겨냈다. 문제는 저 널찍한 등판에서 저 옷을 어떻게 꺼내는가가 문제였다. 그냥 둘 까도 생각해 봤지만, 지완의 성격상 아침에 정신이 들면 잔뜩 구겨진 자신의 옷을 보며 자신의 고생도 생각지 않고, 은재를 구박하리라. 그런 꼴을 보느니 이왕 고생한 거 조금만 더 고생해서, 조금은 덜 구겨진 옷을 주는 것이 나으리라. "휴~" 은재는 이마 위에 흐른 땀을 닦으며 지완의 한쪽 몸을 잡고 굴리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은재의 손에 잡히는 지완의 근육은 단단했으며, 야리야리하게 생긴 것과는 다르게 꽤나 무거웠다.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하야, 간신히 지완을 반쯤 틀어 눕히고서 은재는 바닥에 깔린 양복 상의를 보기 좋게 꺼낼 수가 있었다.


"돼지 같은 놈. 등짝 하나는 넓네." 은재가 지완의 등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그 순간 이상한 소리가 방안 어디에선가 들려왔다. "흐크크" 이게 무슨 소리래! 화들짝 놀란 은재가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그런 기괴한 소리가 나올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흐크큭" 다시 이상한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은재가 잠이 든 지완의 등을 쳐다보았다. "흐큭큭" 잠이 들었다고 생각한 지완의 등이 미세하게 들썩이고 있었다. 그 사실을 발견한 은재는 잠시동안 갈등에 빠졌다. 혹시, 지완이 울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한 맘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너 울어?" 남자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은재는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 눈물 흘리는 남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남자가 눈물을 흘리면 달래야 하는 건지,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하는 건지 은재는 알지 못했다. 하물며 그 자존심 세고, 당당한 지완이 눈물을 흘리다니. 정말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큭큭큭" 다시 지완의 어깨가 가녀리게 떨리고 있었다. "김지완" 조심스런 어조로 은재가 지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지완의 어깨를 돌렸다. 그리고 은재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웃음을 참으려 입을 앙다물고 애쓰고 있는 남자의 처절한 모습을. "너, 멀쩡했던 거야. 그러면서 이 누님을 그렇게 고생시켰단 말이지. 어디 한번 맛 좀 봐라!" 은재는 자신의 손에 잡히는 베개를 집어 들고 사정없이 지완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우리 은재~~" 느글느글한 목소리, 게슴츠레한 눈빛. 허공으로 베개를 들어 올렸던 은재의 손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우리 은재, 이 오빠한테 반했구나." "미쳤군. 드디어 실연을 당하다니 미쳤어. 미쳤어." 은재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지완은 그런 은재의 태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까 그랬잖아. 나의 넓은 등에 반했잖아. 맞지? 우리 은재~~" 버터를 바른 듯한 혀를 놀리며 지완은 손을 뻗어 은재를 끌어 당겨 자신의 품으로 끌어 당겼다. "우리 은재, 오늘 너무 예뻤어." 은재의 귓가에 따스한 숨결을 불어넣으며 지완이 속삭였다. 순간 은재는 뻣뻣하게 지완의 품속에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은재야, 은재야, 우리 은재야." 지완은 계속해서 마치 은재가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실제로 약혼녀가 된 것처럼 사랑스러운 여인을 부르듯이 속삭였다. 달콤한 코코아처럼 지완의 목소리가 달콤하다. 지완의 숨결이 점점 은재의 볼을 타고 은재의 눈으로 향했다. 점점 그 숨결이 은재의


숨결을 사로잡을 것처럼 아래로 향했다. "은재야" 순간, 은재는 지완의 목소리에 잠에서 깬 것처럼 잠시동안의 달콤했던 마술에서 깨어났다. -퍽 은재의 주먹이 지완의 가슴을 강타했다. "술이 취했으면 곱게 취해야지 이게 무슨 짓이야! 보자보자 하니까 이 놈이 별 짓을 다하네. 내가 널 하루 이틀 보냐. 너의 그 뻔한 수작에 넘어갈 거 같아! 천만에. 너 같은 놈 열 트럭을 갖다줘도 싫다. 여기서 잠자고 싶으면 얌전히 퍼질러 잠이나 자라." 은재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지완을 떨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쾅하고 문을 닫아 버렸다. "오늘 너는 정말 예뻤단 말이야. 정은재." 문을 닫는 소음 소리에 지완의 어눌한 목소리가 허공에 묻혀 버렸다. 2. 귀여운 남자. "은재야, 은재야, 우리 은재야" 쉴새없이 울려대는 차임벨 소리와 느끼함 음성. 며칠째 은재는 밤이 새벽으로 넘어가는 찰나엔 어김없이 이런 방문을 받아야만 했다. 그 악몽 같던 약혼식날 밤 이후, 은재는 다시는 지완과는 만나지 않기로 굳은 각오를 했었다. 쥐꼬리만한 돈을 주고 자신을 속인 나쁜 녀석, 꼬랑내 나는 양말을 벗기게 한 나쁜 녀석, 멀쩡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었으면서 땀을 흘리며 옷을 벗기게 한 나쁜 녀석, 그 나쁜 녀석 김지완을 다시는 보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은재의 그런 각오는 그 날 밤, 들려온 소음에 의해 무참히 깨지고야 말았다. 정령 벼룩의 낯짝이라도 있는 놈이라면 이래서는 안 된다. 27 살 처녀 집에 그것도 낮도 아닌 바에 아니 새벽에 조용히 들어와도 큰일 날 일이건만 그게 무슨 자랑이라도 되는 것 마냥 아파트 한 동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은재, 은재, 우리 은재" 노래를 부르며 소란을 피워대니 이것이 정령 머리가 있는 생물이 할 수 있는 짓이란 말인가! 하루, 첫째 날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보는 눈도 있고 하니 한시라도 빨리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순순히 문을 열어 벼룩의 낯짝도 없는 놈을 받아 들여 동이 터오도록 그놈의 주사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정신이 들어온 놈을 북어로 사정없이 패주고 다시는 아파트 근처에 얼씬도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틀, 둘째 날이다. 자신의 말은 삶아 먹었는지 볶아 먹었는지 그 화상은 어김없이 자신의 집인냥 찾아들었다. 버텼다. 옆집의 개가 짓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견디기로 했다. 그러나 웬걸 잠시 후 은재는 지구가 폭발해 버리는 줄 알았다. 고래고래 질러대는 소리와 차임벨, 그리고 그에 맞추어 연주를 하는 인근 주민들의 빗발치는 항의. 두 손, 두발 다 들고 흰 깃발을 흔들었다. 그리고 오늘로써 일주일째. 속수무책으로 은재는 지완에게 잠을 박탈당했다. 이젠 더 이상 저항할 힘도 없었다. 은재는 지완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대로 문을 열어주고 지완을 맞았다. "왔냐."


"은재야, 은재야, 우리 은재야." 징글징글한 인간. 이젠 지쳤다. 네 멋대로 지껄여 봐라. 은재는 머리에 손을 짚으며 돌아섰다. 오, 아부지!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은재는 난생처음으로 한 인간에게 살의를 느꼈다. 그 만큼 잠은 사람에게 중요하다. "은재야." 지완을 철저히 외면하며 방으로 향하던 은재는 지완의 부름을 돌아보지도 않고 시큰둥하게 "왜?"라는 단 한마디 말로 되받아 쳤다. 오늘밤은 꼭 사수하고 말리라! "우리 예석이 어디 갔니? 우리 예석이 어디 갔을까?" 자조적인 지완의 목소리가 엄숙한 거실에 퍼져나갔다. 은재가 서서히 몸을 돌려 침울한 표정을 한 지완을 얼굴을 쳐다보았다. "네 예석이를 왜 내 집에서 찾고 난리야!" "어디가면 우리 예석이 찾을 수 있을까?" "병신!" "헤헤……헤헤헤……" 은재가 내뱉은 말에 지완은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 "인간 김지완 참 많이 인생 구겨졌다.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일이라니까. 난 내가 너의 이런 모습 보게 될거라곤, 전혀 생각도, 꿈도 못 꿔봤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 아니 하느님까지도 생각 못 했을 거야." "헤헤헤헤헤" 술, 술이라는 거 정말 무서운 거다. 인간 하나를 이렇게 순식간에 바보로 만들어 버리다니. 아니 실연이 무서운 건가? "들어가서 잠이나 자!" "우리 은재야, 우리 예석이 좀 찾아 주라. 응? 은재야. 우리 예쁜 은재야." 아무래도 술만 먹으면 이 놈의 시력은 제대로 돌아오는 모양이다. 멀쩡한 정신일 때는 절대로 이런 소리를 하지 않는 걸 보면 필시. "알았다. 알았어. 찾아서 내 앞에 데려다 줄 테니까, 제발 잠 좀 자라." "정말 그래주는 거지? 아구구, 우리 예쁜 은재. 이리와 봐! 이 오빠가 뽀뽀 해줄게." 술에 취한 남자의 힘을 당해내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그야말로 은재는 얼떨결에 무지막지한 힘에 이끌려, 술 냄새 풀풀 나는 지완의 입과 부딪히고 말았다. "웁"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빼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고,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 지 깨달을 겨를도 없었다. 은재가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일을 깨달았을 땐 역겨운 술 냄새가 꾸역꾸역 밀려와 기절 할 것만 같은 순간이 다가왔을 때였다. 키스! 키스라는 거, 그건 영 할만한 것이 아니다. 코가 부딪히면 어떻게 하냐 걱정할 것이 아니라, 이 느물거리는 것이 휘젓고 다니는 그 역겨움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은재의 키스 경력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많은 남자를 사귀어보았지만 키스만은 은재가 극도로 싫어해서, 은재가 경험한 몇 번의 키스도 막무가내로 남자 친구가 밀어붙인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은재가 나서서 키스를 해본 적도, 즐긴 적도 없었다. "미친 놈!" 은재의 손이 날아가 지완의 뺨을 쳤다. 갑작스런 공격에 휘청대는 지완에게 은재는 발길질은 하며,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헤헤헤헤헤"


바보 같은 놈.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불리한 말이나, 대답하기 곤란하면, 지완은 히죽히죽 웃는 것이 요즘의 술버릇이었다. 이럴 때는 정말로 지완이 술에 취한 것인지 헷갈리는 은재였다. "달콤해. 우리 은재." "난 역겹다. 역겨워. 시궁창하고 키스한 느낌이다. 미친 놈." 은재는 쓱쓱 입술을 부벼 대며 궁시렁 거리곤, 다시 한번 지완을 향해, 저주의 말과 레이저 빔을 쏘아 대고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치카치카치카 -치카치카치카 "너어어버야?" "어?" 은재가 욕실에 들어가자마자 칫솔 가득 치약을 짜서 이를 닦기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비틀거리며 지완이 욕실로 들어오더니 은재가 하는 모양으로 똑같이 칫솔을 들고 은재 옆에 섰다. 그런 지완을 흘깃 쳐다보며, 은재는 거품 가득한 입을 열어 웅얼거렸으나, 자신이 들어도 뭔 말인지 못 알아들을 말이 흘러 나왔다. "워에와어냐?" "어?" 칫솔을 빼고 다시 얘기해 보지만, 거품 때문에 이번에도 쉽지가 않다. -칵~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은재는 거품을 뱉어 버리고 이를 헹구고는 다시 독기를 품은 눈으로 천연덕스럽게 칫솔질을 하고 있는 지완을 째려봤다. "왜 따라 들어왔냐고!" "네어바니까" 입안 가득 하얀 거품을 물고서 웅얼거리는 지완의 모습은 생소했다. 술이 조금씩 깨기 시작한 시점인지, 아니면 완전히 깬건 지, 아직도 취해 있는 건지 은재는 아직도 그것을 모르겠다. 하기사 언제 지완이 취한 모습을 봤어야, 이 놈이 취했구나 하긴 10 년이란 기간 동안 지완을 보았으면서 지완이 취한 모습은 고작해야 요 며칠 겪은 것이 대부분이니, 은재로서는 지완의 상태 파악이 쉬이 되지 않았다. 참 멀쩡한 것 같은 데도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걸 보면 취한 것 같고,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는 것이나, 자기 칫솔을 찾아서-일주일 전에 집에 침입을 하고 다음날 은재가 편의점에서 사다준-양치질을 하는 것을 보면 진짜로 멀쩡한 것 같기도 한데, 눈을 보면 썩은 동태 눈깔처럼 반쯤 풀린 것이, 도대체 정체를 모르겠다. "너 한번만 아까 같은 짓 하면 알아서 해. 아니다. 잠이나 자라. 술 취한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냐." 말을 하면서도 아직도 은재는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결국에는 멀쩡한 것으로 치부하고 화를 내려다가 눈을 깜빡이는 지완의 모습을 보며 하던 말을 멈췄다. '취했군, 취했어. 어쭈, 그렇게 거품 물고 있으니까, 조금 귀여운 모습도 있는데. 그래. 내일 이야기 하자. 오늘 이야기 안 한다고, 한 일이 없어지겠어.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 김지완.' 아직도 미심쩍은 듯 은재는 열심히 양치질을 하고 있는 지완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잠이 들었다. 오늘밤엔 기필코 잠을 자리라! 따뜻한 햇살이 방안으로 비추고 있다. 아니 따뜻하다 못해 이젠 찜통 같은 더위다.


아무래도 이번 여름은 에어컨 없이 버티기엔 조금 힘들 거 같다. 어젯밤엔 방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눕자마자 곧바로 잠이 들었다. 일주일간의 잠이 한꺼번에 은재를 덮쳤다. 그러나 은재는 그 날 밤 아주 무시무시한 악몽에 시달렸다. 시뻘건 불덩이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자신을 쫓아오는 것이 아닌가! 뛰어도, 뛰어도 불덩이는 계속해서 은재를 쫓아왔고, 밤새 은재는 땀을 뻘뻘 흘리며 불덩이를 피해 도망 다녔다. 결국, 오랜만에 단잠을 잘 수 있는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은재는 아침 7 시에 눈이 떠졌다. 아침인데도 숨이 턱턱 막혀오는 것이 아무래도 오늘도 무지하게 쪄댈 모양이었다. 이젠 숨도 쉬기 힘들……? '어라랏!' 순간, 은재는 입을 떡 벌리고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남자의 나신.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아직도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은재는 눈을 비비며 다시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봤다. 그러나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자신을 덩굴처럼 감고 있는 남자의 품속에서 빠져 나와보니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지완이었다! 우째 이런 일이! 분명히 양치질을 하고 있는 지완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문을 잠그고 침대에서 잠을 청했던 것 같은데. 어찌하여 이 화상이 버젓이 자신의 침대 위에 잠을 자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달랑 삼각 팬티 하나 입은 의심되는 포즈로?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눈알을 굴려봐도 은재로서는 미스터리였다. 자신이 몽유병이 있어 지완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이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혹, 지완이 문을 따는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으아악~~" 새액새액거리며 늘어지게 잠이 들어있던 지완이 기겁을 하며 허공으로 펄쩍 뛰었다. "뭐, 뭐야!" 지완이 자신의 맨 가슴을 비비며,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은재를 노려봤다. "설명해 봐!" "우씨, 아파 죽겠네. 왜 갑자기 곤히 자고 있는 사람의 젖꼭지를 꼬집는 건데? 너 미쳤어?" 정상이다. 완전히 정상이다. 이제사 "완벽한 남자 김지완"으로 돌아온 모양이다. 이제서야 조금 뭔가 말이 통할 것 같다. "넌 지금 이 상황이 정상이냐?" 은재의 말에 지완은 머리를 쓰러 올리며, 주변을 살펴본다. 그리곤 이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은재를 이상한 눈초리로 응시했다. "없는데." "없어." 멍청한 놈이 뻔뻔스럽기도 하지. 어제처럼 이 누나가 너그러이 용서해 줄 거라고 생각하면, 만만의 천만의 콩떡이다. "왜 매일 밤 사람 잠도 못 자게 쳐들어 와서 사람 미치게 하는 건데? 그리고 너 지금 이 상황이 지금 정상이냐? 너랑 내가 지금 한 침대에 한 이불 덮고 있는 상황이? 문은 어떻게 열었어? 분명히 어제 문을 내가 잠근 걸로 아는데?" "아아, 그거 때문에 그러는 거야?" 싱글벙글. 지완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지완이 막강한 미소를 날리면, 춘삼월에도 화려한 꽃잎이 날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지완의 미소는 막강하다. 그러나 은재에게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 하루 이틀 친구 한 것도 아니고, 이미 그 막강한


미소엔 익숙해질 되로 익숙해졌다. 암, 어림도 없다. 그러나 검게 그을린 건장한 상체를 드러내고 미소를 짓고 있는 지완의 미소는 지완의 정체를 익히 알고 있는 은재지만 뻑 갈 정도로 위력이 막강했다. "오랫만이네. 우리 이렇게 한 이불에서 잔 거? 안 그냐?" 은재는 순간, 지완의 말을 듣는 순간 뻣뻣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너,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은재는 음울한 표정을 지으며 지완의 얼굴을 외면했다. "mt 가서 그 작은 밤에서 술에 떡이 되가지고 한 이불에서 일어나고 그랬는데. 아, 그때가 재밌었지?" mt? 은재는 이야기의 흐름이 이상하다 느끼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역시나……. 그럼 그렇지. 그때 일을 지완이 기억할 리가 없다. "말 돌리지마. 이 방에 어떻게 들어 왔어?" "나도 몰라." 이번에는 지완이 은재의 시선을 피하며 다시 자리에 드러누웠다. "시치미 떼지마! 너 어제 기억나지. 그렇지?" "몰라.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른단 말이야. 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단 말야. 혹시, 혹시……" "혹시 뭐?" 지완이 다시 몸을 일으키며 은재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서서히 들이밀었다. "네가 나 잠자리로 꼬신 거 아냐?" "이, 이,……" 뭔가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던 은재는 말도 안 되는 지완의 말에 옆에 있던 물건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잡아 지완에게 던졌다. "가버려! 다시는 내 집에 오지마. 알았어! 나가! 나가 버려. 이 못된 자식아!" "항복! 항복!" 은재의 무차별 공격에 곧 지완의 손을 버쩍 들어올리며,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은재는 여기서 그만 둘 생각이 없었다. 결국, 그 날 지완은 은재의 집으로 출퇴근을 하던 일주일이 다되어 가는 그 날 밥 한술 얻어먹지 못하고, 그대로 쫓겨나 회사로 향해야만 했다. 일요일. 6 일간의 고된 일을 하시고, 하느님조차 쉬셨다는 그 일요일. 그런 하느님의 고귀한 뜻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지완은 일요일 저녁만은 은재에게 고요한 밤을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그 밤. 잠에 취해 꿈나라도 여행을 가야 했을 그 시각, 은재는 왠지 모를 허전함에 잠자리를 뒤척이고 있었다. '이 인간이 오늘은 아예 뻗어 버렸나?' '택시 타고 오다 무슨 봉변이라도 당했나?' 매일 자신의 집 드나들던 인간이 모습을 안보이니 후련할 만도 한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심정인지 자신의 집이 왠지 넓고 공허하게 느껴지면서 그 화상에 대한 걱정이 스물스물 피어나는 것이 아닌가? 은재는 더 이상 잠자기를 포기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전화기를 잡았다. -뚜르르 뚜르르


[여보세요. 김지완입니다.] 너무나도 멀쩡해서, 이상하게 여겨지는 지완의 완벽한 목소리였다. "나, 은재." 은재는 조금은 실망스런 맘이 드는 것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어쩐 일이야. 이 밤에 나한테 전화를 다 걸고?] "뭐, 하나 해서." 수화기 너머로 지완의 나직한 하품 소리가 나더니 다시 지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자는 데.] 픽, 하고 어디선가 김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그, 그래?" [뭐 할말 있어?] "아니" [그럼 이만 끊어도 될까? 요즘 통 잠을 못 자서 피곤하네.] "그, 그래." -딸깍 자상하기도 하지. 이렇게 전화도 예의 바르게 끊다니. 은재는 씩씩거리며 끊어져 버린 전화기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한숨을 내쉬며 은재는 걱정도 밀어버렸으니 이제 맘 편히 잠을 잘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좀처럼 잠은 은재를 덮치지 않았다. 아니 자꾸만 속이 뒤틀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까 이 자식 엄청 웃기네. 내가 그렇게 잔다고 할 때는 술 주정하면서 잠도 못자게 하더니, 자기가 잠이 오니까 이렇게 사람 전화를 무정하게 끊어? 너 인간이 그러면 못써. 오늘은 이렇게 아무런 용건 없이 전화했지만, 나중에 내가 무슨 급박한 일이 있어 전화 할 때도 이런 식으로 무성의하게 전화를 받을 거야. 필시 이 싸가지 없는 놈은!" 은재는 빈 허공을 향해 지완을 욕했다. 그러나 좀처럼 화는 가라앉지 않고, 포근하게 이불 속에서 잠이 들었을 지완을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 동안 자신이 하얗게 새웠던 밤들이 떠오르면서 자신이 너무나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은 지완을 위해 6 일이라는 시간을 할애했건만 그 인간은 자신을 위해 단 몇 분도 할애 할 수 없다는 지완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 은재는 다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주방으로 향해 걸어갔다.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꺼내고는 통째로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못된 놈. 어디 너만 잘 자겠다고? 어림없지. 어림없어!" 은재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다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거칠게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뚜르르 뚜르르 [김지완 핸드폰입니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지완의 절제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자냐?" 은재는 빈정거리는 말투로 깐죽거렸다. [아까 잔다고 말한 거 같은데. 안 그냐? 정은재?] 전화를 건 사람이 은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지완은 좀전의 긴장감을 풀어버리고 은재에게 짜증을 부렸다. "그래냐? 요즘 내가 귀가 잘 안 려서 말이지. 미안하다."


[왜 또 전화 한 건데?] "아! 용건? 음……" 은재는 한쪽 귀를 손가락으로 후벼파며 딴청을 부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 더하기 일은 뭐냐?" [뭐?] 당혹한 기색이 역력한 지완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진 고음이 되어 은재의 귀를 때렸다. 하지만 은재는 눈 깜짝하지 않고, 여전히 딴청을 부리며 말을 이었다. "일 더하기 일이 뭐냐고? 왜 몰라?" [내참, 한밤중에 뭐 하는 짓이야! 너 그렇게 할 일이 없어?] "모르는구나!" [이! 됐지. 이제 장난 그만하고 잠이나 자라. 정은재!] "그렇구나 고맙다. 역시 신화대학 수석 입학생은 다른데 그려. 잘 자라. 굿 나잇!] 은재는 지완의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들으며, 지완의 말도 듣지 않고 그대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라라라~" 은재의 입에선 절로 흥얼거림에 새어나왔다. 은재는 화장대로 다가가 색색깔의 매니큐어가 든 바구니를 꺼내 침대에 올라 빤히 매니큐어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다시 황급히 전화기를 손에 들어 빠르게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김지완입……] "넌 줄 안다." [왜 또?] 이제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도 않고, 지완은 은재에게 짜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은재가 아니었다. "지금 내 침대에 많은 매니큐어들이 널려 있는데, 어떤 매니큐어를 바를까?" [허.] 수화기에선 나직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은재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조용히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히히히히" 은재는 기괴한 웃음소리를 터트리며 웃어댔다. "왜냐고? 그, 냥! 히히히히" [너, 오늘 미쳤냐? 정은재?] 보인다. 보여. 꾹 참으려고 허벅지를 찌르고 있는 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은재는 계속해서 수화기에 대고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웃어댔다. "끊는다. 자라!" 이번에도 역시 은재는 조목조목 따져가며, 은재의 정신사태를 분석하려고 애쓰는 지극히 이성적인 지완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수화기를 내려버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통쾌하고 고소했다. 지금까지의 이미지가 있으니 차마 화는 내지 못하고, 억지로 참으면서 그 와중에도 조목조목 상황을 분석하고 있는 지완의 모습이 어찌나 웃기던지. 은재는 아예 배를 움켜쥐고 침대를 구르며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후, 다시 웃음기 가득한 은재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살그머니 전화기에 손을 뻗쳤다. -뚜르르 뚜르르 -뚜르르 뚜르르


-뚜르르 뚜르르 한참을 전화를 걸었지만 지완은 영 받을 기색이 없었다. 아마도 '완벽한 남자 김지완'의 한계 사항은 세 번이 고작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그만 둘 은재가 아니었다. 자신이 포기한 잠이 얼마며, 그 일주일간의 정신적 고통은 어땠는가? 겨우 여기서 끝나라고? 어림도 없다. 김지완. 내 오늘은 너의 그 더런 성질을 보고 말 테다. 언제까지 고귀한 척, 지성적인 척, 착한 척 가증을 떠는 지 보자. 한번, 두 번, 세 번, …… 은재로서는 급할 것이 없었다. 이미 한참 전에 성의 없이 전화를 받아 자신의 복장을 터지게 만든 어떤 인간 때문에 오늘 밤 역시 잠과 바바이 한지 오랜지라, 계속되는 신호음에도 하나도 급할 것이 없었다. [여보세요!] 처음과는 달리 많이 거칠어진 목소리.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안 잔 모양이네." 거드름을 피우며 은재는 입을 열었다. [너! 오늘 뭐하자는 거야!] 터졌다! 그럼 그렇지, 넌 성인군자는 못돼. 이게 네 진정한 모습이지. 아무리 네가 그렇게 사람들에게 웃음 실실 쪼개면서 화 한번 안내지만, 이렇게 놀려대는데 바보 아니고서야 화를 내지 않을 수 있겠어? 4 번, 4 번이 너의 한계다. 김지완. "복, 수!" 은재의 말에 어이가 없는지 잠시동안 지완의 씩씩거리는 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무슨 말도……] "잘 자라. 이 무성의한 놈아. 오늘은 그만 용서해줄게." 지완의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리자 후다닥 수화기에서 귀를 뗀 은재는 큰소리를 내며 말을 하고는 다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즐겁다. 지완을 놀리는 것이 이렇게 재밌다는 것을 지완을 안지 10 년 만에서야 알았다. 이렇게 지완을 놀리는 것이 재밌다는 것을 전에만 알았어도 살아가는 즐거움이 더 있었을 것을. 화랑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던 그해 입학식 날 자신을 제치고 신입생 대표로 단상에 올랐던 지완을 본 것이 은재가 지완을 처음 본 날 이었다. 소원그룹의 장남, 전교수석, 학급 반장 등등 지완은 모든 명패를 다 두른 완벽한 인간 그 자체였다. 2 학년이 되어 학생회 일을 하면서 좀더 가까이하게 된 지완의 모습은 예전에 자신이 생각했던 그 완벽한 인간상에서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바람 쌩쌩 부는 날에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머리, 반듯하게 매여진 넥타이, 빳빳하게 다려진 교복, 미스코리아처럼 항상 얼굴에 떠나지 않는 미소, 사람을 배려하는 너그러운 마음,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완의 모습은 모범적이고, 도덕적이며, 올바른 모습들뿐이었다. 그런 지완이 이 정도까지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을까? 아마 그런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지완의 모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참으려고 기를 쓰는 지완의 모습이 은재에게는 독특한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지완이 아무리 완벽하다고 치더라도 그건 언제나 상식 선에서 일일 것이다. 이것을 이제서야 깨닫다니. 너무 지완의 웃음의 마력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걸 이제서야 발견하다니. 이제 삶의 즐거움 하나를 발견했다. 김지완 이제 넌 내 밥이야! 오늘밤은 완전한 은재의 승리였다. 아마도 지금쯤 지완은 잠이 확 깨어서는 이를 득득 갈며 은재를 저주하고 있으리라. 그러나 차마 자신의 이미지 상 연락도 하지 못하고,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열심히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을지도.

3. 사고 친 남자 입이 한치는 나와있을 지완을 위해, 혹은 주말의 휴가를 즐기고 다시 음주의 세계로 들어설 지완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은재는 친히 지완의 회사 앞까지 왕림하여 저녁을 거나하게 사주었다. 물론 그 돈은 지완의 약혼녀 행세를 하여 받은 돈이었지만, 어쨌든 자신의 수중에 들어왔기에 자신이 쏘는 것이란 은재의 인생관에 비추어보면 필시 저녁은 은재가 산 것이 되는 것이다. 저녁을 거나하게 먹은 두 사람은 잠깐 술이나 마시며 이야기나 할 요량으로 가까운 호프집으로 들어섰다. "삐쳤냐?" "아니." 어젯밤의 그 말도 안 되는 복수 사건으로 아무래도 삐치기는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그러나 곧 죽어도 화났다는 말도, 표현도 하지 않고 지완은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은재를 향해 잔을 들어올렸다. 은재는 그런 지완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새어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럼 그렇지. 마음 깊고, 넓은 태평양 같은 우리 지완이가 삐질 일이 뭐 있겠어. 이 누님이 장난조금 친 거 가지고." "……" "어랏! 말이 없네. 너, 너, 혹시 삐친 거 아니야? 설마……" 은재가 지완의 눈치를 살피며 말꼬리를 흐리자 지완은 뚱한 얼굴을 환한 미소 속에 감추며 얼굴을 들었다. "내가 삐칠 일이 어딨냐. 마시자, 마셔!" 화가 난 것이 분명한데, 본인은 아니라고 한다. 뭐가 그렇게 무섭고, 두려워서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속이면서 사는 건지. 그렇게 실실 웃고 다니며, 미소를 뿌리고 다니면 누가 상이라도 준다냐? 은재는 조소를 금치 못하며 지완의 장단에 맞추어 술을 마셔댔다. 아주 간단히 맥주 한잔만을 마시고 나선다는 술자리는 은재가 은근히 지완의 속을 긁어 대면서 밤이 깊어지도록 길어졌다. 예석 이야기에, 일 이야기에, 급기야는 고등학교 시절까지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은재와 지완은 술에 절어 서로의 어깨에 의지한 채 가까스로 호프집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오, 마이 갓!" 은재는 제법 스산한 바람이 자신의 몸에 부딪히자 한껏 몸을 웅크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다. 지금은 잠을 깨기에는 너무나 이른 시간이었다. "미쳤어. 미쳤어." 잠을 자려고 안간힘을 쓰는 은재의 귀에 아까부터 계속해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도 북적거리고, 웅웅 거리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고, 은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꺼풀을 살며시 들어올렸다. 조금씩 은재의 눈에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의 나신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가 보았던 아주 눈에 익은 광경이었다. 은재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은재는 눈을


깜빡이며 다시 그곳을 쳐다봤다.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나신이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콩콩 치고 있는 모습이 은재의 눈에 들어왔다. 꿈은 결코 아니었다. "뭐, 뭐야!" 은재가 입을 열어 소리치자 나신의 어깨가 깜짝 놀랬는지, 잠깐 떨리다가 경직되어서 조심스레 은재를 향해 돌아섰다. "헉" 은재의 입에서 헉하는 소리가 절로 새어나왔다. 남자의 근심 어린 눈빛이 은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은재는 순간 잠이 확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 나신의 정체는 바로 지완이었다. "오 마이 갓!" 은재는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며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아무래도 우리 일친 거 같다." 지완의 근심 어린 목소리가 방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확실한 거야?" 은재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지완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지완이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재는 지완의 몸짓에 자신의 몸을 훑어보았다.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에, 남자의 수염에 긁힌 것으로 보이는 흔적들……. 아무래도 지완의 짐작이 맞는 모양이었다. "어쩌지?" 지완은 고개를 숙이고는 은재에게 의견을 물었다. "뭘 어째?" 은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맨몸으로 바닥에 떨어진 속옷을 꿰어 입기 시작했다. "넌, 왜 이렇게 태평한 거야!" 은재의 그런 태도가 맘에 안 드는지 버럭 지완이 은재를 향해 소리를 치다가 은재가 맨몸에 옷을 입는 모습을 보고는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럼 어쩌라고?" 은재는 브래지어를 채우던 손을 멈추곤 고개를 들어 지완을 쳐다봤다. "저기, 그러니까……" 은재의 젖가슴을 훔쳐보던 지완은 화들짝 놀라선 지완답지 않게 말을 더듬거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뭐 문제 될 거 있냐? 너랑 나 어엿한 성인이고, 그렇다고 둘 다 결혼 한 것도 아니고, 그럼 너 어제가 처음이었냐?" 은재의 황당한 질문에 지완은 고개를 저었다. "하기사 네가 숫총각이라면 누가 믿겠냐. 이 누나가 질문을 잘못했다. 그럼 딱지 뗀 것도 아니라서 기억 안 나는 거 억울할 일도 없겠고, 나 역시 처음 아니니까 그렇게 죄책감 느낄 필요 없어." "하지만……" "왜 도저히 너희 고매한 인격으로는 이런 사태를 용납할 수가 없나보지? 그럼 어쩔래? 돈이라도 줄래?" 은재의 말에 기가 차다는 듯이 지완이 고개를 들고 은재를 째려봤다. 그러나 은재는 그런 지완의 반응은 무시한 채 옷 입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럼 일어난 일을 어떻게 해!" 지완의 버럭 소리를 지르자, 은재도 똑같이 버럭 소리를 질러 버렸다. "헛튼 소리 그만하고, 밥이나 먹고 가! 너랑 나랑 둘 사이에만 있었던 일이고, 솔직히 말에 결과만 있지, 과정은 기억도 나지 않잖아. 그러니까 너랑 나, 둘 다 사고였다고 생각하고 그냥 잊어버리면 그만인 거야." 은재는 그 말만을 하고는 욕실로 들어 가버렸다. 왜 이렇게 인생이 꼬이는지 모르겠다. 어쩌자고 다시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질러 버렸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저번처럼 그런 비참한 꼴을 안 봐서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저런 구차한 상황을 연출했으니 저번보다 더 상황이 꼬였다고 해야할까? "그지 같은 놈. 너는 술만 취하면 여자랑 자냐?" 은재는 옷을 벗고 샤워기에 물을 틀고는 문을 향해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런 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거지? 너 그렇게 가벼운 여자였니? 그래 처음에는 너도 원한 일이라고 쳐. 하지만 이건? 이건 아니잖아. 미쳤어. 정은재. 아주 단단히 미쳤다구!' 은재는 한없이 쏟아지는 물아래 서서 얼굴에 물을 맞고 서있었다. 어젯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가까스로 술집을 나온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은 가물가물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23 살의 그 치욕스런 밤 이후, 남자 경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번도 그날 밤 이후로 이렇게 황당한 일은 없었다. 하기사 남자와 자고서 기억을 못하는 일을 경험하는 여자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미쳤어. 정은재. 어쩌자고……" 지완 앞에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저 길에서 쉽게 일어나는 접촉사고쯤 되는 것 마냥 말했지만 은재는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하마터면 지완 앞에서 볼 상 사나운 모습으로 그 옛날 구질구질한 과거까지 꺼내 따지고 들 뻔했다. 도대체 너와 난 어떤 인연이기에 나랑 이렇게 꼬이는 거니? 자신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기 전에 지완이 자리를 비켜 줬으면 하는 것이 은재의 솔직한 심정이었건만 지완은 그럴 맘이 없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멍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안 씻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평소와 마찬가지의 어투로 은재는 지완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그럼 괜찮지. 왜 그깟 일로 손목이라도 끊을까봐?" 은재의 빈정거림에 화가 난 지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양복, 가지런하게 빗겨진 머리카락. 화가 난다. "왜 그렇게 빈정거리는 거야. 난 지금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묻는 거야! 너의 그 빈정거림을 듣자는 게 아니고." 지완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그 바람에 단정했던 머리가 헝클어졌다. "……" "어떻게 할까?" 평소에는 잘만 웃더니, 지금 지완의 입매는 단단히 굳어 있었다. 마치 화난 사람처럼. 지금 지완은 이 상황이 영 맘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약혼녀에게 채인 그날보다도 더 최악인 모양이다. 그때보다 더 지완의 얼굴은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이것이 지완의 얼굴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만 가 줘."


"뭐?" "이만 가 달라고. 네 얼굴보고 싶지도 않으니까 이만 가봐. 오늘 일에 대해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 너의 그 완벽한 인상에 누 끼치는 일 없으니까 걱정 말고 가라고." 은재는 지완을 무시하고 건넌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가 버렸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말이야, 해결이 아니라, 너의 그 놀란 것 같은 토끼 눈이 아니라, 너의 재촉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걱정이었단 말이야. 그냥 아무 말도 없이 안아주는 그런 따뜻함이었단 말이야. 그렇게 강한 척해도 은재도 여자였다. 하물며 잠시나마 사랑을 했던 남자에게 이런 대접을 받는데 괜찮은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때, 그렇게 너와의 질긴 악연을 끊어 버렸어야 했는데. 뭐가 그렇게 미련이 남아서 네 친구 자리라도 옆에 있길 원한 건지. 바보, 바보, 정은재 넌 바보다! 3 년 전 그때도 이런 일이 있었다.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그때 자신은 정신이 말짱했다는 것 뿐. 그러나 그때 은재는 깨끗이 자신의 사랑을 접고 돌아서려 했다. 친구도, 뭣도 이제는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고 지금처럼 반문을 할 지완의 모습을 볼 수가 없어 돌아서려 했었다. 그러나 백일 휴가에 나온 지완은 그때의 일을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지완의 모습에 용기를 얻었는지, 아니면 더 욕심을 내려 했는지 몰라도 그때 그 일은 그저 은재의 기억 속 이야기 일뿐 누구도 아는 사람 없이 잊혀져 갔다. 그리고 지금껏 지완의 곁에 있을 수 있었건만, 이 무슨 운명의 장난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난단 말인가? 잔인하고 잔인하기만 운명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은재가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방에서 나왔을 때 집안에서 지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퉁퉁 부은 얼굴로 어떻게 다시 지완을 볼 수 있을지 걱정을 하던 은재는 문을 열면서도 불안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지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그런 지완이 못내 서운하게 여겨지는 것은 또 무슨 상반된 심사인지. 은재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아무래도 이제, 지완과의 인연은 여기까지가 한계인 모양이었다. 4. 뻔뻔한 남자 '미치겠다. 미치겠어.' 지완은 자신의 머리를 사정없이 쥐어뜯었다. 무엇하나 잘 되는 것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번 연도 자신의 운세는 최악인 모양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 있단 말인가? 3 주전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맘속이 끊어질 듯 미여오고, 2 주전의 일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에 맘 한구석이 불편하고, 오늘 아침의 일을 생각하니, 아주 위 속의 쓴 물까지 다 넘어오려고 한다. 도대체 없는 약혼녀를 어디서 당장 데려오라는 말인가? 집안 호적에서 영구 제명? 그래 그것도 감수 할 수 있다. 가족들을 속인 죄 어찌 만회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사직을 내놓고 나가라고? 이건 말도 안 된다. 자신을 이사직에서 내몰고 동생인 유완을 이사직에 임명하겠다는 아버님의 말은 어불성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기타들고 딴따라가 되겠다고 설쳐대는 유완이 놈이 무슨 얼어죽을 이사? 차라리 우리 집 강아지 '아레스'에게 차라리 이사직을 맡기는 것이 낫겠다. 완전히 회사를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다. 그러나 문제는 할아버님이나 아버님이나 한번 하신다고 하시면 회사를 말아먹던


어쨌던 이행을 하실 분이니 그것이 문제로다. 오늘 내로 손주며느리를 데려 가지 않으면, 내일 부로 지완은 천애고아에, 쪽박 신세가 될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그 잘난 머리를 굴려도 이 신세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생각나지를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3 주 동안은 은재가 출판사 일로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가족들과의 만남을 피할 수 있었건만, 오늘 아침 식사시간에 할아버님은 단호하게 은재가 다니는 출판사를 인수하는 한이 있더라고 은재를 데려오라는 엄명을 내리신 것이다. 3 주, 하기사 많이도 참으셨다. 여기까지 참으신 것만 해도 용한 일이다. 그렇기에 오늘은 필시 은재를 데리고 가야 화를 면할 수 있다는 얘기다. 많이 참은 만큼, 그 화는 막강할 테니까. '은재한테 연락해서 부탁해 볼까?' 지완은 설핏 머릿속에 드는 생각을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부정했다. 벼룩에도 낯짝이 있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는데 다시 부탁을 한단 말인가. 그런 일? 욱씬욱씬. 다시 가슴이 저려온다. 생각나지도 않지만 모든 상황 증거는 자신의 죄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술 먹고 한 전적들을 생각하면 그 일은 100 퍼센트 일어난 일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술, 그놈이 원수다! 이를 어쩐다, 이를 어쩐다. 볼펜을 무의식적으로 돌리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화랑고 수석 입학, 신화대학 수석입학에 빛나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최상의 선택을 위해서. 날씨가 덥다고 이불을 걷어차고 잔 것이 화근인지 콧물이 찔끔찔끔 흐르는 것이 감기가 들려는 모양이었다. 여름 감기도 개도 안 걸린다는데 아무래도, 개만도 못한 인간이 되려는 모양이다. 은재는 자신의 말도 안 되는 생각에 피식 웃음 지으며 아파트로 들어섰다. 이번 주는 유난히 심적으로 피곤한 해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며칠째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 주말에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죽은 듯이 잠을 자야 할 것만 같다. 이것, 저것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미친 듯이 잠만 자야겠다. 은재는 이제부터 시작될 휴식 시간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은재의 달콤한 상상은 자신의 집 앞에 다가서는 순간, 무참히 깨지고야 말았다. 이 순간만큼은 절대로,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인간이 떡하니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멀리서 걸어오는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은재의 얼굴은 자신도 모르게 뻣뻣하게 굳기 시작했다. "이제 오는 거야?" "……" 은재는 능글맞게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남자를 무시한 채 가방에서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몇 번을 가방에 손을 집어넣어 열쇠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사리 열쇠는 자신의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럴 때 열쇠까지 자신의 뜻을 따라주지 않으니 은재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거칠게 가방을 뒤지던 은재는 가방을 잡고 있던 손을 놓치고 말았다. 그 바람에 가방에 들어있던 물건들이 좌르륵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버스 비를 내고 받은 거스름으로 받았던 동전들, 립스틱과 파우더 등의 화장 도구들, 버스 안에서 읽던 책, 심지어 껌을 씹고 종이에 싸놓고 가방에 구겨 넣은 쓰레기와 입에 물고 다니던 사탕봉지와 각종 지저분한 메모지 등등까지 한꺼번에 바닥으로 너저분하게 흩어졌다. 은재는 황급히 바닥에 주저앉아 손으로 대충대충 물건들을 가방으로 쓸어 담았다. "쿡쿡쿡"


순간, 은재는 자신의 귓가에 들리는 웃음소리에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남자가 이제는 아예 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화르륵, 은재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놈의 열쇠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은재는 남자를 무시하며 다시 엉망이 되어 버린 가방을 들어올려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주변이 어수선한 건 여전하구나." 남자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은재는 꾹 무시하며 가방을 뒤적거렸다. 도대체 이 빌어먹을 놈의 열쇠는 어디로 사라진 거야? 제기랄! "뭘 그렇게 열심히 찾으시나? 우리 은재." 능글능글한 지완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무시하자, 무시하자, 정은재. 저 그지 발사개 같은 놈하고는 다시는 상종하지 않기로 했잖아. 무시하자, 무시하자. 지금 저 놈은 너를 자극하는 거야. 참을 인, 참을 인, 참을 인……. -짤랑짤랑 이때 은재의 귓가에 쇠붙이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눈을 돌린 순간, 그 못난 화상이 자신의 열쇠 꾸러미를 은재의 눈앞에서 흔들어 대고 있었다. "내놔!" 은재는 자신의 열쇠를 낚아 채려했다. 그러나 휙, 남자는 손을 들어 열쇠를 은재의 손이 닿지 않게 올려 버렸다. "지금 장난 할 기분 아냐. 빨리 열쇠 이리 내놔!" 잇새로 은재는 나직하게 말을 내뱉었다. 이 인간과 다시는 말을 섞지 않으리라고 다짐했건만, 이 인간은 왜 또 찾아와서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건지. 은재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유유히 몸을 돌려 열쇠 구멍에 열쇠를 밀어 넣어 문을 따고 있었다. "어서 들어와." 그리고는 어이없어 하는 은재를 무시한 채 자신의 집으로 몸을 들여놓고 있었다. "김지완 이 개자식아,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은재는 지완의 등을 향해 자신의 가방을 냅다 던져버렸다. 털썩하고 자신의 가방이 바닥에 떨어진 것과는 다르게 지완은 그것에 상관없이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김지완, 너 지금 거기가 어디라고 들어가는 건데? 당장 안나와! 가택 침입죄로 고소 당하고 싶어!" 은재는 문을 닫고 들어서며 지완을 향해 삿대질을 해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렇게 가버리고 연락 한 번 안 하고, 그렇다고 찾아오지도 않았으면 그렇게 끝내자는 뜻 아니었어? 책임 질리 하기 싫어서 잊자, 잊어버리자 하고 친구 하나 없는 셈치기로 맘 먹은 거 아니었어? 그런데 뭐야?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기다렸다. 은재는 기다리고 기다렸다. 지완이 오늘쯤은 전화를 해줄까, 내일이면 찾아올까 가슴조리며 지완을 기다렸다.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실실거리는 웃음을 날리며 친구의 모습으로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착각임을 깨닫는 것은 며칠이면 족했다. "아니 네가 아니어도 너 같은 놈이랑은 친구 할 생각 없으니까, 빨리 내 집에서 나가!"


돈을 사주고 산 여자에게도 이렇게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돌아서서 내내 감감 무소식이더니 일주일이 지나서야 어슬렁어슬렁 얼굴을 들이밀다니. 이런 파렴치한 놈. 은재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거실로 올라와 지완을 향해 손에 잡히는 쿠션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나가, 당장 나가. 그놈의 얼굴 보기도 싫으니까, 당장 나가란 말이야!" "아야, 아야, 그만, 그만해 정은재." 제 집인냥 겉옷까지 벗어서 가지런히 옷걸이에 걸어놓고, 바닥에 앉아 있던 지완은 은재의 무차별 공격에 그저 손으로 이리저리 쿠션들을 막으며 아픈 시늉을 해댔다. 얼마나 지났을까, 더 이상 던질 쿠션이 남아있지 않자 은재는 털썩하고 쇼파에 주저앉았다. "얼렁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좀전과는 달리 많이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한 번만 봐 주라. 인간 김지완이 오늘 부로 천애고아에, 일자리도 없는 실직자 신세 된 처량한 인간이라고. 너 마저도 그렇게 날 미워하면 갈 때가 없다." "무슨 헛소리야!" 이제는 더 이상 화낼 기운도 없는 은재는 마지막 힘을 끌어 모아 소리를 질렀다. "3 주전에 약혼녀가 도망쳐서 대타를 백 만원 주고 세웠는데, 그 대타 약혼녀가 약혼자의 집에는 찾아오지도 않고, 어른들에게 인사도 없으니, 백 번 집안 어른들이 화가 나실 만도 하지. 이리 핑계되고, 저리 핑계되고 이제는 더 이상 핑계 될 것도 없는데 할아버님이 오늘까지 약혼녀 데려오지 않으면 집안 호적에서 빼버린다고 엄포를 놓으시고, 아버지는 회사에서 짤라버린다고 하시니 이를 어쩌면 좋으냐.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약혼녀 행방을 알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타 약혼녀에게 다시 부탁을 할 수도 없고. 시간은 9 시간 남짓 남았는데, 휴~ 어디 방법이 있어야지. 쫓겨나는 수밖에 방법이 있겠냐." 지완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그럴싸했다. 약혼을 했다는 놈이 약혼녀를 약혼식 당일 낼름 가족들 모르게 바꿔치기하고는 그 새 약혼녀가 약혼한지 한 달이 다되도록 집안 어른들을 찾아 뵙지 않는다면 그 어느 집구석이 세월아 네월아 하며 그냥 보고만 있겠는가? 잠시 지완에 대한 원한은 접어 두고 자구책을 마련해야 할 듯 싶었다.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집안에서 쫓겨나게 생긴 녀석을 외면할 만큼 은재의 성격은 모질지가 못했다. 그리고 그 일의 원인을 살펴보자면 자신도 조금은 일조한 면이 있고, 그 일에 따른 댓가를 받아 챙겼으니 팔짱 끼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은재의 성격상 용납할 수 없었다.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다른 여자라도 데려가야 할거 아냐." "……" 지완은 은재의 말을 무시하며 쇼파에 얼굴을 묻고 누워 버렸다. "배고파. 밥이나 주라. 오늘 한끼도 못 먹었어." "지금 밥이 문제야! 김지완 해결을 해야 할거 아니야. 해결을." "배고파." 지완은 은재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동문서답으로 음울한 목소리를 하고는 배고파 소리만 연발하고 있었다. 지딴에도 어떻게든 일을 수습하고자 동분서주하며 밥도 못 먹고 돌아다닌 모양이었다. 그런 지완의 모습이 안쓰러워 은재는 더 이상 지완을 채근하지 않고 조용히 부엌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부엌에서는 된장찌개 냄새가 솔솔 풍겨 나왔고, 송송송 도마 위에서 무언가가 잘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그제서야 지완은 쇼파에 묻었던 얼굴을 들고서 기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고 있는 된장찌개, 고슬고슬하게 지어진 쌀밥, 먹음직스럽게 무쳐진 나물,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생선, 퍼펙트 한 저녁식단이었다. 은재는 자신의 솜씨에 만족스러운 듯이 지완을 불러 식탁 앞에 앉혔다. "밥 먹어." 은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앉은 지완을 향해 걱정스런 듯 말을 건넸다. "밥 먹어. 배고프다면서." 은재의 재촉에 지완이 서서히 자신의 수저를 들었다. 그러나 이내 그 손은 떨궈지고 수심에 가득 찬 눈초리로 지완은 은재를 쳐다보았다. "못 먹겠어." "왜?" "내일부터 내 신세를 생각하니까, 차마 밥이 넘어가질 않는다. 나 때문에 이렇게 고생했는데 미안해. 도저히 못 먹겠어. 미안해. 은재야." "야~" 은재는 수저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지완을 불렀다. 정말 상황이 장난이 아니긴 아닌 모양이었다. 천하의 김지완의 저런 약한 모습을 보일 줄이야! "지완아!" 은재는 지완을 따라 거실로 나왔다. 지완은 쇼파에 누워 벽 쪽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소원 그룹의 장남이라는 타이틀도 버리고, 소원 엔터테이먼트 이사직도 버리고. 그럼 과연 내게 남는 건 뭘까? 의기소침한 지완의 목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설마 집안에서 널 그렇게 내치시겠어? 그냥, 협박하신 걸 거야. 이러지 말고 집에 가서 솔직히 말해. 그리고 용서를 빌어." "우리 둘째 작은아버지.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 대학 다닐 때던가, 망나니 짓 하고 다니다가 어떤 여자를 임신시킨 일이 있었어. 그 여자네 집에서 그 사실을 알고서 할아버지를 찾아오고 난리도 아니었지. 할아버지는 작은아버지를 불러서 책임 추궁을 하셨지. 여자를 책임지라고 하시면서. 작은아버지는 단호하게 거절하셨고, 그 뒤로 작은아버지는 집에 얼씬도 못하셔. 그나마 우리 아버지가 작은아버지 뒤에서 봐주고 계시니까 살고 계신 거지." "그건 조금 예가 틀리잖아. 작은아버지의 경우는……" 은재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지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할아버지가 분노하신 것은 작은아버지가 여자를 임신시킨 사실이 아니라 사건의 전모가 다 드러난 것도 모르고 작은아버지가 발뺌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우리 할아버지의 지론에 따르면 남자가 젊어서 그런 일을 할 수도 있지만, 자신에게 거짓말 한 것은 용서를 못하시겠다는 거야." "그러면……" "그래. 내가 대타를 세워서 약혼을 한 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족을 속이는 거짓말을 했다는 게 문제가 되는 거지. 휴~ 이제 어떡하지. 은재야?" "……" 은재는 지완의 질문에 아무런 답도 할 수가 없었다. 첩첩산중이었다. 그러게 그때 자진납세를 했다면 지금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놈의 자존심 지키겠다고 사태를 이 지경에 처하게 만들다니.


"그럼 오늘까지 약혼녀를 데려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렇지."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고민하던 은재가 눈을 반짝이며 지완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완이 대답이 나오자 은재의 얼굴엔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김지완, 그렇게 궁상맞게 있지 말고, 밥이나 먹자. 이 누님이 쫓겨날 일없게 해줄테니까, 밥이나 먹자고!" "어, 어떻게?" 지완이 고개를 돌리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은재를 응시했다. 불쌍한 인간 같으니라고, 그래 이 누님이 널 악의 구렁텅이에서 구재해주마! 음하하! 은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지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너의 집에선 내가 너의 약혼녀로 알고 있는 거 아냐?" "그렇지." "그럼 간단하잖아." "뭐가?" "내가 오늘까지 너희 집에 가주면 되는 거잖아." "……" 은재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굴리는 지완을 보며 다시 은재는 지완의 어깨를 힘있게 두들겼다. "나? 김지완 약혼녀. 간다고. 가준다고. 내가 오늘 너희 집에 가서 약혼녀 해주면 되는 거잖아. 어때? 해결 봤지? 그러면 너 집에서 쫓겨나는 일도, 이사직 내놓고 낙동강 오리알 신세 되는 일도 없는 거지?" 은재의 명쾌한 해석을 듣고서야 지완의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잦아들었다. "밥 먹자. 배 고프다." 은재는 자신의 배를 톡톡 두드리며 부엌으로 앞장섰다. 그런 은재의 뒷모습을 보며 지완의 두 눈이 만족스러운 듯 웃고 있다는 것을 은재는 알 리가 없었다. 은재의 해결책이 만족스러운 듯 지완은 말끔하게 밥 두 공기를 비우고서는 은재가 내온 과일을 디저트 삼아 유유히 TV 를 시청하고 있었다. 지금 은재는 자신의 집에 인사를 가기 위해 옷을 차려 입는 중이었다. 지완은 은재를 기다리며 만족감에 몸이 나른할 지경이었다. 아침의 그 난감했던 상황과는 360 도 달라진 이 상황이 지완은 몹시도 만족스러웠다. -딸깍 문이 열리고 분홍색 원피스를 차려입은 은재가 방을 빠져 나왔다. "어때?" 은재가 지완 앞에서 빙 돌며 의견을 물었다. "완벽해." "근데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슬슬 걱정이 되는데. 실수하면 어쩌지?" "아니야. 너라면 잘 할 수 있을 거야. 우리 은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잘 할 수 있을 거야." 그렇다. 은재가 어떤 여자란 말인가? 김지완 인생에서 첫 패배라는 것을 가르쳐 준 첫 사람이 아닌가? 고등학교 1 학년, 화랑 고등학교 전체 수석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당당하게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첫 모의고사에서 보기 좋게 2 등을 하고 말았다. 처음이었다. 지완이 시험이든 뭐든 간에 2 등을 한 것은, 그것도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여자에게 밀리다니. 그걸 시작으로 지완은 예전과는 다르게 1 등을 사수하기 위해서 부단히도 애를 썼다. 1 등을 하는 것이 예전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고등하교 시절 때였다. 그렇게 3 년을 그 여학생과 1 등 다툼을 했건만 졸업식 때 졸업생을 대표하여 답사를 읽은 것은 자신이 아닌 바로 그 여학생이었다. 바로 이 여자, 정은재, 정말 대단한 여자다! 그런 은재가 실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은재가 그런 자리에서 실수를 한다면 도대체 어떤 여자를 데리고 가란 말인가? 은재가 그럴 리가 없다. 은재를 믿는다. 지완의 은재에 대한 믿음은 이렇듯 확고했다. 이렇게 은재의 능력을 믿기에 지금도 틈만 나면 은재가 다니는 "풍경"을 때려 치고 자신이 다니는 소원 엔터테이먼트에 스카웃을 제의하곤 했었다. 지완의 생각엔 아무리 은재가 문학이 좋아서, 책 출판 편집인으로 "풍경"에 있지만 은재의 능력을 그런 곳에서 썩히고 있기엔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어서 은재가 원하기만 한다면 은재에게 큰 자리를 줄 생각이 있는 지완이였다. "퍼펙트 해. 너무 예뻐. 우리 은재." 은재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지완은 희희낙락이었다. 지완의 얼굴을 바라보며 은재도 기분이 좋아졌다. 아까는 울상이더니만, 얼굴에 아주 웃음꽃이 피었네. 그래, 김지완, 넌 웃는 게 낫다. 우울한 얼굴 못 봐주겠더라. 근데, 내가 조금, 아주 조금 그 얼굴에 초를 쳐야겠는데 말야. 은재는 잠시 지완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주 기분이 좋은 거 같은데, 근데 초쳐서 미안한데 말이지. 말해도 될까?" "뭐든지. 우리 예쁜 은재가 말한다는 데 못 들어줄건 또 뭐가 있겠어?" "이번일 공짜 아니다. 한 장이다. 에누리없이 한 장. 알았지?" "뭐?" 당혹스러워하는 지완의 얼굴을 즐기며 은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세상일에 공짜가 어딨어. 지난번과 금액은 동일. 단, 시간이 오늘을 넘어갈 경우에는 한 장 더 추가야. 이의 있어?" "없어." "그래. 멋진 친구 가자구! 적진으로! 아자아자!" 은재의 힘찬 구호와 함께 지완은 은재의 손에 이끌려 질질 끌려 밖으로 향했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정은재가 오늘 좀 수월하다 싶었다.' 소리 없는 지완의 중얼거림이 메아리쳤다. 5. 꼬이는 남자 순조로운 진행이었다. 아침 식사 때만해도 지완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집안 어른들이 은재를 앞세워 집을 들어서자마자 행동을 바꾸어 예전의 그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은재는 자신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어 집에 들어서자마자, 할아버님, 할머님, 아버지, 어머니를 살살 녹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달이나 넘도록 약혼자의 집에 오지 않는


은재가 못마땅하게 여기시던 할아버님도 은재가 고개를 숙여 사과 드리고 그간의 사정을 조리 있게 설명하며 아양을 떨자 달콤한 아이스크림처럼 단번에 녹아서는 은재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포로! 그렇다, 은재는 2 시간만에 지완의 식구들을 완전히 포로로 만들었다. 은재의 언변과 예의범절, 모든 것이 합격이었다. 은재의 활약으로 말미암아 지완의 지위도 자연스레 상승했다. 벌써부터 할머님과 어머님이 자신을 보는 눈길이 달라졌다. "어디서 요런 보물을 데려 왔누!"하시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이 내일 아침은 아무래도 진수성찬을 먹을 수 있을 듯했다. "일주일 동안 지완이 녀석이 은재네 집에서 있었다면, 하루 빨리 결혼을 서둘러야겠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그렇죠. 아버님 말씀대로 결혼을 서두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당신 말이 백 번 옳아요. 하루라도 표나기 전에 결혼식을 올려야지 신부가 배가 나와서 웨딩드레스를 입으면 태가 곱지가 못해요." "네, 일찍 서두르는 것이 좋겠어요." 10 시가 넘어설 무렵, 은재는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 흡족했다. 이젠 인사를 드리고 나가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지완의 할아버님과 할머님, 그리고 부모님들은 은재가 그리던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이었다. 너무나도 따뜻하시고, 가족들에 대한 사랑이 넘치시는 분들이었다. 이런 분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지완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지완의 약혼녀로 사랑을 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조차도 은재는 너무나도 부러웠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이분들을 만날 수 없겠구나! 상실감이 밀려들었다. 처음 만난 분들인데 왜 그런 감정이 드는 지 모르겠지만, 은재는 그 사실에 기분이 우울해졌다. 또한 그런 분들을 속이기 위한 자리라는 사실이 은재의 맘을 아프게 했다. 다른 식으로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은재의 마지막 마무리가 진행되기도 전에 갑작스레 할아버님은 지완과 은재의 눈치를 보더니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잠자코 사태의 진전을 살펴보니, 어른들은 은재가 마치 내일이라도 애를 낳을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상황은 결단코 은재나, 지완이 원했던 상황이 아니었다. "결혼은 내년쯤 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은재가 하는 일도 있고……" "다음달로 해라." 할아버님의 단호한 한마디 말에 지완은 다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집안의 실세는 할아버님이 단단히 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은재가 입을 열어 이야기를 하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그때 자신의 옆에 앉아있던 지완이 은재의 손을 슬며시 잡으며 만류했다. "그렇게 하는 걸로 알겠다. 사돈어른들과 만나서 날 잡도록 해라. 애비야." "네 아버님." 그 길로 지완과 은재는 피곤하다는 할아버님을 뒤로하고 물러 나왔다. 은재가 한숨을 푹 쉬며 돌아서는 순간, 할아버님의 기침소리와 함께 다시 근엄한 할아버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은재야!" "네. 할아버님." 깜짝 놀란 은재가 기겁을 해서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늦었으니, 자고 가라."


"네?" "다음 달이면 결혼할텐데 뭐 어떠냐. 지완이 녀석이 너랑 떨어지기 싫어서 안달인 모양인데 그 정도는 이 할애비도 이해해 줄 수 있으니까, 오늘은 지완이 방에서 자고 가거라." 너무나도 이해심 넓으시고, 자상하신 신세대 할아버지. but, 지완과 은재가 진정으로 연인 사이라면 이런 할아버지의 말을 감사히 여기겠지만, 지금 할아버지의 말씀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네, 네 할아버님." 이 집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할아버님의 말은 거절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은재가 대답을 하지 않고 멍하니 있으니, 지완이 다시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수 없이 은재는 내키지 않지만 긍정의 대답을 내뱉고 말았다. oh, my god! 너무 자유분방해도 이건 너무 하는 게 아닐까? 은재는 할아버지의 명령대로 시행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웬걸 아버님과 어머님도 쌍수를 들어 환영하시는 것이 아닌가? 아버님, 어머니의 환영을 받으며 은재는 지완의 방으로 들어섰다.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너희 집 어른들 너무 개방적이신 거 아니야? 지난번에 약혼녀가 바뀌었다는 소리에도 아무런 말씀 안 하시기에 설마, 설마 했는데 상상초월이야. 나보다 더 개방적이셔." "이런 일에는 조금 개방적이셔. 다들 전적이 있으셔서." "전적?" "할아버님은 할머니 보쌈해다가 결혼 하셨고, 아버님은 어머니의 아버지, 그러니까 외할아버지를 협박해서 결혼했거든. 그래서 결혼 전의 남녀 관계에 관해서는 비이상적으로 개방적이시지." "대단하셔. 그나저나 이 사태를 어쩔 거야?" 불편한 옷을 갈아입는 지완의 모습은 지극히 평화스러워 보였다. 아무래도 지금의 상황이 인식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어떡해. 나 정말 여기서 자고 가야 하는 거야?" "아마 그럴걸." "무슨 대답이 그래!" "편안하게 생각해. 고비는 넘겼잖아. 이젠 자연스럽게 너랑 헤어졌다고 말만 하면 만사형통이라고. 네가 침대 위에서 자. 내가 바닥에서 잘게. 어때? 됐지?" 깨나 큰 사건을 해결한 것 마냥, 지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스스럼없이 은재 앞에서 옷을 척척 갈아입었다. "안 불편해?" 당당히 자신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옷을 갈아입던 지완이 침대 끝에 앉아 있는 은재를 향해 물었다. "자, 이걸로 갈아입어." 은재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지완은 옷장에서 옷을 꺼내 은재에게 던졌다. "나 샤워하고 올 테니까 갈아입어." 지완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욕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될 때로 되라지. 은재는 원피스를 벗어 던지고 지완이 던지고 간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러나 웬걸 옷을 입기는 입었는데 그 꼴이 말이 아니었다. 분명 반팔일 터인데 팔꿈치까지 내려온


소매하며, 잡고 있지 않으면 쑥하고 내려가는 반바지. 은재는 최대한 소매를 접고, 바지를 움켜쥐고 서서 다시 거울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허리는 뭘로 묶어야겠는데. 은재는 방안을 이리저리 살피며 지완의 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티끌 하나 없이 말끔하게 정돈 된 지완의 방은 지완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어디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는 아주 투철한 녀석이었다. 은재는 털썩 침대에 누워 버렸다. 빌어먹을 놈, 어디 헛점이 없어요. 은재는 침대에 누워서 지완을 기다리다 어느새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지완의 식구들을 만나느라고 제 딴에는 너무 신경을 쓰고, 거기에다 지완과의 육탄전도 하고, 가히 몸 상태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무리를 한 탓이었다. 지완이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며 욕실을 나섰을 때 이미 은재는 자신의 침대에 댓자로 누워 잠이 곤히 들어 있는 상태였다. 지완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침대 맡으로 다가섰다. "정은재!" 지완은 은재의 이름을 부르며 살살 은재를 흔들어 깨웠다. 무슨 여자가 씻지도 않고 잠을 자는 거지? 씻지는 않아도 적어도 화장한 얼굴 정도는 씻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떡하냐고 걱정할 때는 언제고 쌕쌕 잘만 자네. 지완은 은재의 모습이 신기한 듯 쳐다보다가 이불을 덮어주고 물러섰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드러누워서 은재가 자고 있는 침대를 올려다보니 은재의 화장 끼 있는 얼굴이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화장 안 지우고 자면 얼굴에 뾰루지 생길텐데. 지완은 다시 몸을 일으켜 은재를 깨우기 시작했다. "은재야, 세수는 하고 자야지." 그러나 도무지 은재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은재가 잠에서 깨길 바란다는 것은 무리일 듯 싶었다. 아이구, 내 팔자야. 지완은 더 이상 은재 깨우는 것을 포기하고 욕실로 들어가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서, 수건을 적셔 은재의 얼굴을 살살 지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장은 지완이 생각처럼 잘 지워지지 않았다. 급기야 지완이 너무 힘을 주어 얼굴을 문지르는 바람에 은재가 잠에서 깨어났다. "뭐, 뭐하는 거야!" "앗, 차가워!" 은재가 놀래서 지완을 밀치는 바람에 이불 위에 올려놓았던 세숫대야가 넘어져 이불을 흠뻑 적시고 말았다. 두사람은 깜짝 놀라서 이불을 들춰서 털었지만 이미 침대 한구석이 흠뻑 젖어 버린 뒤였다. "뭐하는 거야!" "화장 지워 줄려고 했었지." 지완은 물에 젖은 수건을 들이밀며 말했다. 배시시 웃는 모습이 마치 개구쟁이를 연상시키는 듯했다. 은재는 자신이 화를 낸 것이 무안해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서려 했다. 그러나 순간, 스르륵 무언가가 자신의 하체를 내려가며 불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엄마야!" 잠결에 일어난 은재가 그만 허리가 큰 반바지가 내려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일어선


탓에 그대로 바지가 아래로 내려가고 만 것이다. 후다닥 은재가 바지를 끌어 모으고, 서서히 고개를 돌려 지완을 바라보았다. "봤지?" "아니. 못 봤어." "사실대로 말해." "저기 사실은, 안 보려고 했는데, 분홍팬티……봐 버렸어." "으아악~~" "내 것도 보여줄까?" 은재는 지완의 말을 뒤로 한 채 그대로 욕실로 직행해버렸다. 왜 이 놈 앞에서는 이렇게 추한 꼴만 보이는 건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은재는 창피했다. 잘 보여도 부족한 판에 이런 꼴들만 지완에게 보여주다니. 지완은 필시 허술하고, 실수투성이인 자신을 경멸할 것이다. 은재는 대충 몸을 씻고, 세수를 하고는 시무룩한 얼굴로 욕실을 나와 그대로 침대에 몸을 묻었다. "창피해 할거 없어. 어차피 지난번에 볼 거 안 볼 거 다 봤는데 뭘 그걸 가지고 그래."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가지. 아니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면 어디가 덧나나! 그래 너 잘났어. 잘났어. 은재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험악하게 말을 내뱉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잠이나 자셔." "오늘 고마웠어. 역시 우리 은재 밖에 없는 거 같아. 내가 너 사랑하는 거 알지?" "불이나 꺼." 지완의 입에 발린 소리에 기분이 울적해 지는 은재였다. 지완 딴에는 장난이라고 한 말일 테지만 자신의 입장에서는 결코 장난으로 들리지 않는 지완의 말에 은근히 가슴이 부푸는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났다. 지완이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방이 어두워졌다. "너 아니었으면, 나의 이 보금자리를 잃어버릴 뻔했어. 정말, 정말, 고마워. 은재야." "알았다니까. 공짜로 해준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고마워 할 필요 없어. 그런 고마움은 정확한 금액과 정확한 입금날짜로 확인시켜 주면 되니까." 은재의 말에 지완은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나저나 뒷처리 잘해. 너의 할아버님 성격 장난 아니시던데, 오늘 일 뒷처리 잘 하란 말이야. 깨끗이 헤어졌다고 잘 말하라고. 나중에 더 큰일 벌이지 말고." "알았어." "잘 자라." 은재가 몸을 뒤척이며 인사를 했다. "너도 잘 자. 우리 이쁜 은재. 내 꿈 꿔." 지완의 닭살스런 멘트를 뒤로 한 채, 은재는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반면, 침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운 지완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 몸을 움직여 편한 자세를 이리저리 취해봤지만 바닥이 배겨서 도무지 잘 수가 없었다. 씨발,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해야 하는 거야! 지완은 낮게 코까지 골며 잠이 든 은재를 올려다보며 신경질 적으로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섰다.


킹 사이즈 침대에 세상 모르고 잠이 든 은재를 보며 지완은 은재 옆의 넓다란 자리를 탐욕스럽게 쳐다보더니 기어이 자신의 베개를 들고 은재 옆자리에 누웠다. 전적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술을 먹은 상태도 아니니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테고, 은재 요 지지배가 아침에 펄쩍 뛰는 것만 막으면 되는데, 그거야 일찍 일어나서 아래 내려가면 될 테니, 아무 것도 자신의 결정에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침대 위에 몸을 눕힌 지완은 곧 잠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의 옆구리가 척척한 것을 깨닫고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은재 곁으로 몸을 밀착시키기 시작했다. 지완은 서서히 은재를 끌어안고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참새가 짹짹, 아침 햇살이 길게 늘어져 방을 비추고, 서늘한 바람이 창문으로 솔솔 불어왔다. 더없이 상쾌한 일요일 아침이었다. 은재는 조금만, 조금만 시간을 늦추며 눈뜨기를 밀고 있었다. 눈을 뜨면 일주일치 밀린 빨래와 집안 청소, 그리고 화분에 물 주기 등등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지금 꿈에서 깨버리면 오랜만에 만난 "해피"와도 이별이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살던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해피'.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항상 함께 했던 강아지였는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해피'가 사라져 버렸었다. 집을 나간 건지, 누가 훔쳐간 건지 이유도 모른 채 은재는 '해피'와 이별을 해야 했었다. 그렇게 헤어진 '해피'건만 '해피'는 가끔씩 은재의 꿈을 찾아와 은재와 놀다 가곤 했다. 바쁜 일에 시달려 요즘은 잠자리에 누우면 그대로 잠이 들어버려 꿈을 꿀 세도 없었는데, 지난밤에 '해피'가 찾아왔다. 몽글몽글한 털이 보드라운 '해피'. 은재는 '해피'를 쓰다듬으며 꼭 끌어안았다. 은재는 얼굴 가득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기지개를 폈다. 어제의 무겁고, 칙칙 늘어지던 몸이 개운한 것이 어젯밤에는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쥐죽은듯이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들었고, 꿈속에서 오랜만에 '해피'도 만날 수 있었으니, 실로 오랜만에 평온하고, 개운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컨디션이라면 일주일치 밀린 빨래는 물론이거니와 청소, 화분에 물 주기 등등 모든 것을 거뜬하게 해결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쾌한 기분에 저절로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나왔다. "으으음~" "그렇게 좋아?" 번쩍! 다시 한 번 늘어지게 기지개를 피며 몸을 늘이던 은재는 순간, 자신의 귓속에 들리는 나직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눈을 반짝 떴다. 그 순간, 자신의 눈앞에 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으아악!" 은재는 자신의 얼굴 앞에 드리워진 얼굴을 밀어대며 다시 한번 눈을 비볐다. "좋은 아침!" 꿈이 아니다. 꿈이 아니야. 그제서야 은재는 어젯밤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 내고는 꿈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자신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생물체, 김지완은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며 은재를 향해 꽃 미소를 흩날리고 있었다. 세상에, 막 잠에서 깨어난 지완의 모습이 어찌나 섹시하던지, 순간 은재의 눈은 아찔해졌다. 마치 그런 지완의 모습은 활 통을 어깨에 메고, 이리저리 장난을 치고 돌아다니는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에로스를 연상시켰다. 얼렐레, 근데 이놈은 왜 옷을 다 벗고 있는 거야!


그랬다, 지완은 이불은 다 걷어차고 달랑 트렁크 팬티 하나만을 걸치고는 은재 바로 코 앞에 대자로 누워 있었던 것이다. 어젯밤에 분명히 바닥에서 잔다고 한 거 같은데. 조금씩 신선한 바람을 쏘이며 정신이 들기 시작한 은재는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 늑대 같은 놈아, 이 뻔뻔이, 왜 여기서 자는 거야!" 은재는 옆에 있던 베개를 들어 지완을 쳐대기 시작했다. "아까 까지는 좋아하더니 왜 그러는 거야!" 은재의 갑작스런 공격에 지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은재에게 불평을 토로했다. "내가 언제, 언제 좋아했다는 거야!" "내 머리 좋아라고 쓰다듬으면서 웃던데 뭐. 그게 좋아한 거지 뭐야. 봐봐, 내 머리 흐트러진 거." 지완은 자신의 머리를 은재에게 들이밀며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 본 '해피'를 쓰다듬는 다는 것이 아무래도 지완의 머리를 주구장창 쓰다듬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내가 사랑스러웠어? 아무 사랑스러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쓰다듬고, 껴안고 난리도 아니던데? 그렇게 네가 날 사랑하는 지 몰랐어. 그래서, 꾹하고 참아줬지 뭐. 나 잘했지." 이제 보니 지완에게도 이런 어린 아이 같은 면도 있는 모양이다. 아니면 잠에서 깨면 늘 이 모양인가? 이런 모습을 보니 더더욱 장난꾸러기 에로스를 연상시키는 것이 아닌가? 안돼, 안돼. 여기서 저 놈한테 홀리면 안되지. "그래, 그럼 그건 그렇다 치자. 그럼 왜 그렇게 홀딱 벗고 있는 건데?" "더워서." 하, 말은 잘한다. "그래도 상황 판단하고 옷을 벗어야 할 거 아니야. 너 창피한 것도 몰라!" "내가 먼저 벗은 것도 아니다." "뭐?" 지완의 시선이 오묘하게 변하더니, 은재의 하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은재는 지완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시선을 내려갔다. 오마나! 훤칠한 다리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 어젯밤 입고 잤던 반바지는 보이지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셔츠가 자신의 볼 상 사나운 모습을 가려주고 있다는 점이랄까? 그나마도 잠을 자고 있을 때는……윽, 생각하기 싫다! "어쨌든!" 은재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어올리고는 여전히 누워서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는 지완을 째려봤다. "어쨌든 맘에 안 들어! 정말 맘에 안 들어!" 다시 은재는 베개를 들어올려 사정없이 지완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한참 동안을 실랑이를 하느라고 지완과 은재는 아침 식사시간에 턱없이 늦어 버리고 말았다. 은재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지완을 따라 부엌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미 어른들은 아침식사를 거의 마치고 있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형수님." 은재가 지완 곁에 앉아서 수저를 드는 순간, 명랑한 목소리가 은재의 귀에 들려왔다. 은재는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어깨에 닿는 머리를 회색 빛으로 염색하고, 한쪽 귀에는 앙증맞은 귀걸이를 하고, 눈썹에 있는 곳에 피어싱을 뚫은 어려 보이는 남자가 자신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 안녕하세요." "지완 형 동생, 김유완 이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형수님." 지완의 동생, 유완을 은재는 그때 처음 보았다. 지완에게서 동생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앞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말썽 많은 날라리 동생이 분명 이 사람이리라. 그러나 은재가 보기에 유완은 말도 서글서글하게 잘하고, 은재를 처음 보았음에도 편안하게 만들어주며, 무엇보다도 뛰어난 외모가 은재의 눈을 즐겁게 하고 있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은재는 유완 덕분에 자신을 요리조리 감시하는 어른들의 시선도 알지 못한 채 즐겁게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형수님, 근데요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습니까?" "글쎄요. 도련님을 제가 어디서 봤다면, 그 잘생긴 얼굴 때문에 잊기 힘들었을 거 같은데. 불행히도 그런 영광은 없었던 모양이에요." "이상하다 분명히 본 기억이 나는데. 제가 한 번 본 사람은 기막히게 기억을 하거든요." 유완은 머리를 긁적이며 뚫어져라 은재를 쳐다보았다.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유완이 1 학년만을 마치고 자퇴를 하는 바람에 은재를 보았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했다. 도대체 어디서 자신을 보았다고 말하는 걸까? 내 얼굴이 그렇게 흔한 얼굴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지완의 어머니를 도와 과일을 자르던 은재는 자신을 쳐다보던 유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지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지완은 낼들 알겠냐는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찾았어요. 찾았어. 형수님을 어디서 봤는지 찾았다고요!" 큰 소리를 내지르며 유완이 2 층에서부터 무언가를 들고 허겁지겁 달려와 탁자 위에 두툼한 물건을 내려놓았다. "기억나요? 왜 형이 당연히 졸업생 대표로 답사 읽을 줄 알고서 갔더니, 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것도 여자가 졸업생 대표로 답사 읽었던 거." "그래. 기억난다. 지완이 놈 고등학교 졸업식 때 말이지. 충격이었지." 유완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아버님이 말을 이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세상에 이 괴물 같은 놈을 이길 사람이 있다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더군다나 그 조그마한 여학생이." "맞아요. 그 여학생이 바로 형수님이라니까요. 봐요, 이 사진. 형수님 맞죠? 그렇죠. 형수님?" "예, 예." 지완의 졸업식 때 찍은 사진으로 판명되는 앨범을 유완은 펼쳐 보이며 고등학교 시절의 은재의 모습을 정확하게 찍어냈다. 어떻게 자신이 답사를 읽는 모습이 그 사진첩에 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분명히 그 사진첩엔 은재가 답사를 읽는 모습이 또렷하게 찍혀 있었다. 은재의 긍정의 말에 유완의 표정은 거의 그대로 넘어 갈 것처럼 놀라워했다. "난 찬성. 100 찬성. 찬성이에요. 찬성!"


갑자기 유완은 은재의 두 손을 맞잡더니 알 수 없는 소리를 외쳐댔다. "그만 호들갑 좀 떨지 못하겠어! 은재가 정신없어 하잖아!" 순식간에 화기애애하기만 하던 거실 분위기에 낯선 고함 소리에 의해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음, 음, 김유완, 그러니까 조용히 있으라고." "아, 알았어. 형." 은재는 순간 헉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일순간, 유완을 향해 고함을 치는 지완의 모습은 너무나도 생소했다. 발에 차인 양동이 마냥 일그러진 얼굴이며, 무서운 고함 소리,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왜 괜히 도련님한테 소리치고 그래." "아, 미안." 일그러졌던 얼굴이 펴지면서 다시 원래의 화사한 얼굴이 되어 지완은 은재에게 사과를 했다. 그제서야 잠시잠깐 동안 경직되었던 거실의 분위기가 사르륵 녹아 내리며 어른들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새어나왔다. 이상한 분위기. 은재는 잠시 잠깐 동안 집안에 감돌던 분위기가 이상했지만 그런 생각은 곧 할머님의 질문에 의해 곧 잊고 말았다. 지완은 은재를 집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제 힘겨웠던 일은 일단락이 된 셈이었다. 이젠 시간을 좀 보다가 은재와 헤어졌다고 말만 하면 모든 것은 만사형통일 것이다. 지완은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들어섰다. "지완아, 방으로 좀 들어와 봐라." "네. 할아버지." 지완은 할아버지의 호출에 2 층으로 올라가던 걸음을 멈춰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섰다. 할아버지 방에는 이미 아버지, 어머니도 굳은 얼굴을 하고 앉아 계셨다. "잘 데려다 주고 왔냐?" "네. 할아버지." "맘에 쏙 들더구나." 할아버지의 입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 칭찬이었다. 어젯밤 할아버지의 표정만으로도 대충 할아버지가 은재를 내심 맘에 들어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밖으로 들어낼 정도로 은재를 맘에 들어하실 줄은 몰랐다. 그런 사실이 지완으로서도 결코 싫지는 않았다. "10 달 후에 증손녀 볼 수 있는 거겠지?" "네?" "은재랑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음달 내로는 결혼해서 내게 증손녀를 보여줘야겠다." "……" "왜 말이 없냐?" "아이는 조금 늦게……" "떽, 네 할미나, 내가 살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증손녀 좀 보겠다는 데 그걸 거부해!" 지완의 머리 위로 할아버지의 마른손이 작렬했다.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힘써 볼게요!" 지완은 할아버지의 손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맞다가 마지못해 긍정의 말을 내뱉었다. 그제서야 할아버지는 만족스러운 듯이 지완을 때리던 손을 멈추고 지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나저나 너의 그 지랄 맞은 성격을 새 아가도 알고 있는 거냐?"


언제나 얼굴이 만연하던 지완의 얼굴이 아버지의 물음에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마, 알고 있을걸요." "아마?" "10 년을 알고 지냈는데……" "혹시라도 말 안 했으면 알려서 아가 데려와라. 지난번에 예석이처럼 네 지랄 맞은 성격 들켜서 차이지 말고. 결혼하고서 이혼이네, 헤어지네 우리 집에서는 절대 용서 못한다." 아무래도 집안 어른들은 지완과 예석이 헤어진 이유를 예석이 자신의 지랄 같은 성격을 알아 버려서 지완이 차인 줄로 알고 계신 모양이었다. 어쩐지, 난데없이 은재를 약혼녀라고 소개할 때도 어느 누구하나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어 지완 역시도 조금은 당황을 하긴 했었는데, 아무래도 어른들은 자체적으로 그 원인을 자신의 지랄 맞은 성격에 둔 모양이었다. 지완은 일부러 나서서 그런 어른들의 오해를 풀어줄 맘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는 것이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도 나을 듯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오해를 듣는 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알겠냐! 이 성질 드러운 놈아! 뭣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 데려와서 겁주지 말란 말이야!" "알았다니까요. 제가 알아서 해요!" "이 놈이 또 어디서 성질 부릴려고, 눈을 부라리고 있어. 눈 깔지 못하겠어." "에이씨! 그러게 그만 하시라니까요. 제가 알아서 해요. 제가 알아서 한다고요!" 가족 모두가 통탄해 마지않는 공인된 지완의 '지랄 맞은 성질'은 바로 이것이었다. 정말이지 예상을 하지 못한 곳에서 부지불식간에 뻥하고 터져 버리니 가족들로서는 완전히 뒷통수를 맞는 격이었다. 매일 실실거리며 웃고 다니니 도대체 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지 알아야지, 이런 못된 성질에 대비를 할텐데 그것도 평소에는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웃기도 잘하고, 말도 사근사근하니 어른들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집안 어른들은 이러한 지완의 완벽한 이중성에 모두가 혀를 내두른 지 오래였다. 그런 놈을, "이 놈은 성질이 더러운 놈이니, 조심하십시요라고" 말하고 다녀봤자 자신의 입만 아픈 것은 당연지사니, 자신들만 이러한 사실을 알고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이런 지완의 철저한 이중성에 감사를 하면서……. 왕년엔 저 놈 못지 않은 성질을 가지고 집안을 호령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형세가 역전되어 저 조그마한 놈이 성질을 바락바락 부려도 손끝하나 못 건드리고 그저 고함을 치는 것이 다인 종이 호랑이 신세가 된지 오래였다. 버릇장 머리 없는 놈 같으니라고! 지완의 할아버지 김석주 옹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자신 앞에서 대들고 있는 손자 놈을 나가라고 소리치며 몸을 돌리고 드러누워 버렸다.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어 버렸을까? 젊은 시절엔 자신이 소리만 질러도 산천초목이 벌벌 떨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 데 손자 놈의 못된 성질도 고쳐주지 못할 만큼 늙어버리다니. 이래서 늙어서 사람은 죽어야 하는 모양이었다. 에구에구~~ 돌아누운 영감의 뒷모습을 보며 지완의 할머니인 송수연 여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번번이 손자 놈에게 당하고서 끙끙거리는 자신의 남편을 보니 마치 유치원생 어린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어 좀처럼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그 언제부터였던가? 2 파전, 3 파전? 아마 10 년도 더 된 이야기인 거 같다. 손주 놈 성격 고쳐보겠다고 남편과 아들이 합심하여 손주 놈과 눈에 쌍심지를 켜고 붙었던 것이. 결국 조그마한 손주 놈의 능글능글 함에 뭐라고 변변한 반격 못해보고 제 풀에 꺾여 일단락을 짓고서 지금껏 이 모양이었다. 한 번도 지완이 녀석을 남편이나 아들놈이나 이겨본 적이 없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딱하고, 불쌍하던지 맘 같아서는 손자 놈에게 한 번 정도는 져주라고 부탁이라고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마나 다행인 것은 손주 며느리의 등장으로 남편과 아들이 새로운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는 점이다. 좀전의 상황에서 은재의 말에 그대로 꼬랑지를 내리고 사과를 하는 손자의 모습을 보며 반짝이는 남편과 아들놈의 눈을 보았다. 역시나 은재를 자신의 승부수로 띄울 모양으로 지금 남편과 아들은 손주 놈을 이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일거양득, 손녀딸을 안아보겠다는 간절한 의지가 부합, 지금 영감은 꿈속을 거닐고 있을 것이다. 자신은 시집을 와서 내리 아들 셋만을 낳았고, 은근히 딸을 바라고 있던 영감은 힘들어하는 자신을 위해 더 이상 아기 낳는 것을 포기하고, 며느리들에게 손녀딸 낳기를 부추겼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첫째 아들은 내리 아들만 둘, 둘째 아들은 내리 아들만 셋, 셋째 아들은 내리 아들만 둘을 낳았을 뿐 도대체 손녀딸을 안겨주질 않았다. 아무래도 이 김씨 집안에는 여자 씨가 마른 모양이었다. 5 대에 걸쳐 시커멓고 커다란 아들들만 줄줄이 낳았지, 여자아이는 태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 새로 들어온 손주 며느리에게 거는 기대가 그만큼 각별했던 것이다. 지완이 약혼을 하고 일주일이나 집에 들어오지 않고 은재의 집에서 머물렀다는 사실을 영감이 알았을 땐 거의 광분을 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송여사는 하도 남편이 난리를 쳐서 내일이라도 지완이 증손녀를 안고 데려올 줄 알았다. 그만큼 남편은 지완과 새 손주 며느리에게 거는 기대가 남달랐다. 아마도 손주 며느리는 들어오면 꽤나 고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천지신명이 돕지 않아 좀처럼 여자아이를 낳지 않게 된다면? 아무래도 힘 닿는데 까지 낳아야 할지도……. 송여사는 새로 들어올 손주 며느리에게 잠시 애도를 표했다. "아기라……." 지완은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워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할아버님의 그 기대에 찬 눈이란……. 지완이 할아버지의 증손녀에 대한 욕심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할아버지, 아직은 한참은 기다리셔야 할겁니다. 암요, 한참은.' 지완은 몸을 이리저리 굴리며 잠을 청해 보기로 했다. "나의 이 이중성을 은재에게 폭로하라고요? 아버님?" 다시 한번 공중을 향해 지완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폭로? 곧 그것은 자신의 사회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까지의 이미지 구축을 위하여 쏟아 부은 힘이 얼만데 이제와서 그 이미지를 제가 허물라고요. 말도 안됩니다여. 아버님. 특히나 은재의 경우는 지금 자신 곁에 남아 있는 유일무이한 여자친구였다. 남자 친구들이라도 자신의 성질을 알면 나가떨어질텐데 (실제로도 비공식적으로 이 지랄 맞은 성질 때문에 떨어져 나간 놈들이 몇 된다.) 하물며 여자인 은재가 자신의 성질을 알면? 그 다음은 생각하기도 싫다. 자신의 실체를 아는 세상의 여자는 자신의 할머님과 어머니면 족했다. 아까 전의 일을 생각하면 조금 아슬아슬 하기는 했었다. 자신도 모르게 유완과 희희덕 거리는 은재를 보며 화가 치밀었으니까! 유완이 녀석은 왜 은재의 손을 잡고서 부비며


난리를 치는 건지. 순식간에 떠져 버린 화를 자신을 쳐다보던 은재의 맑은 눈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유완이 녀석을 한 대 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앞으로 조심, 또 조심해야겠다. 은재와 결혼할 일은 없겠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정체를 폭로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아내로 생각한 여자는 지금껏 예석이 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물 건너 간 이야기도 혹시라도 미래에 아내가 생긴다면 성심 성의껏 잘 할 생각이기 때문에 그런 더런 성질을 보일 이유는 절대 없을 것이다. 절대로. '은재가 제 성질을 알리는 절대 없을 거예요. 은재에겐 전 착한 친구거든요. 무척이나 착한 남자. '

6. 결혼하는 남자 세상일이 다 자기 마음먹은 데로 된다면 누가 애써 고생하면서 살까? 삶은 지완에게 아주 고생 길 훤하게 자신의 계획을 보기 좋게 망쳐버렸다. 은재가 다녀가고 15 일이 지나서 쯤, 슬슬 지완은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주구장창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가 꼬장을 부렸다. 그 덕분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무지하게 맞아서 이마가 얼얼할 정도였다. 이제 사전 작업을 끝내고 본 작전 수행에 돌입하기 직전, 불길하게 울려대는 전화가 지완의 발목을 끌어 잡았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 입원을 하셨다는 말과 함께 할아버지가 은재와 지완을 간절하게 보길 원하신다는 것이었다. "이 꼰대는 왜 지금 쓰러져서 난리야. 잘되고 있었는데." 지완은 담배를 꼬나 물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저 조금 어디가 아프신거라고 며칠 입원만 하면 퇴원을 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연신 투덜거리며 홀로 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자신이 가볍게 여긴 것과는 다르게 상황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거의 죽어갈 것처럼 헐떡이는 할아버지와 의사는 지완과 아버지에게 준비하시는 게 좋으실 거라는 충고 아닌 충고를 했다. 그런 의사의 멱살을 잡으며 지완은 발광했다. 그런 지완을 말리는 가족들 때문에 가까스로 지완은 진정을 하고 할아버지 곁에 설 수 있었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넥타이는 어디로 갔는지 찾아 볼 수 없고, 단추도 두 개나 떨어져 나간 몰골을 하고 지완은 할아버지 곁에 앉았다. "꼴, 좋구나." 지완의 할아버지의 손을 끌어 잡고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희미한 할아버지의 음성이 지완의 귓가에 들려왔다. "괜찮으세요." "괜찮지 않으니까 이러고 있는 거 아니겠냐." "그러게 조심하시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다 늙어서 무슨 골프는 골프예요!" "다 죽어 가는 늙은이 앞에서 성질 내는 거냐!" "죄송해요." 처음이었다. 이렇게 지완이 할아버지와의 논쟁에서 먼저 꼬리를 내리고 죄송하다는 말을 꺼내는 것은. "근데 왜 혼자 왔냐? 은재는?" "아직 전화 못했어요. 놀래서." "오라고 해라. 보고 싶다. 우리 손주 며느리." "네."


대꾸를 하고도 그대로 앉아 있는 손자가 맘에 들지 않는지 김석주 옹의 얼굴에 주름이 더 깊게 패였다. "지금." "저기, 네, 잠시만요." 무언가 변명을 하려는 듯 하다가 입을 다물곤 지완은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그런 지완을 바라보며 김석주 옹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한 시간 쯤 지나서 은재는 걱정스런 얼굴이 되어 병실로 뛰어 들어왔다. 은재가 병실로 들어서자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내와 지완을 남겨두고 식구들을 다 물리고 은재와 지완을 자신 앞에 앉혔다. "이제 별로 남지 않은 거 같아."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지완의 화난 투의 말이 이어지고, 할머니는 급기야 눈물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임자 울지 말구료. 임자한테는 미안해. 이렇게 먼저 가서 미안해." 할아버지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는지 할머니는 자리를 뜨고 말았다. "건강해지실 거예요. 그러니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할아버지." 은재의 말에 할아버지는 그저 미소를 지었다. 한참동안을 말없이 병원의 천장을 쳐다보던 할아버지는 다시 힘들게 고개를 돌려 지완과 은재를 쳐다보았다. "마지막 저승길 가면서, 아무런 한이 없는데 너희들이 한없이 밟히는구나. 예쁘게 결혼해서 사는 것도 보고 싶었고, 예쁜 증손녀 안겨줬으면 원이 없을 거 같았는데. 그것도 보지 못하고 갈 거 같아서……. 욕심이 생겨서……." "……" "……" 눈시울을 적시는 할아버지 앞에서 지완과 은재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은재야." "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손을 내려 은재의 손을 움켜잡았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이 혼자 자랐다고. 힘들었겠구나. 그런데 잘 자랐어. 너무 예쁘게 자랐구나. 우리 지완이 놈이 고생 안 시켜야 할텐데. 나라도 옆에서 네 편 들어줘야 할텐데." "네. 그래 주세요. 얼른 건강 되찾으셔서 제 편 들어 주셔야지요." 은재의 뺨을 따라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희들 늙은이 욕심 하나 들어줄래?" "뭔데요. 말씀만 하세요." 지완이 눈가에 눈물이 어리며 할아버지의 손을 맞잡았다. 할아버지는 마주 잡은 은재와 지완의 손을 엮어주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증손녀는 볼 수 없겠지만 너희들 결혼하는 것만이라도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무리한 부탁이겠지." "……" "……" 은재와 지완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할게요. 최대한 빨리 결혼 날짜 잡을 테니, 힘내세요. 제 결혼식도 안 보시고 가시면 제삿밥도 못 드실 줄 아세요."


침묵을 깨고 지완이 대답을 했다. "빠르면 사흘, 나흘 후에 은재와 결혼식을 올릴 테니 힘내세요." "그래. 그래야지." 지완의 대답에 할아버지는 만족한 듯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곤 잠시 후, 평온한 얼굴로 잠이 들었다. 한참을 은재와 지완은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앉아 있다가 병실 밖으로 나왔다. "결혼해 줘. 아니 결혼하자. 아니, 아니, 결혼해야겠어." 은재를 집으로 데려다주는 차안에서 지완은 은재를 쳐다보지도 않고, 불빛이 형형한 거리를 보며 다짐을 하듯 은재에게 청혼을 했다. 결혼을 하자고 했으니 청혼, 청혼이 맞을 것이다. "네 처지는 안됐지만, 안되겠어." 은재는 지완의 청혼을 단번에 거절했다. "나보고,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지완은 차를 갓길에 세우며, 핸들을 손으로 쳐대며 소리를 질러댔다. "너의 입장도 곤란한 것도 알고,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 나도 들어드리고 싶어. 하지만, 이건 아니야. 돌아가시는 분을 끝까지 속이고 싶지 않아." "그럼 어떡할까? 지금까지 거짓말했어요. 은재와 저는 결혼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라고? 심장이 미쳐서 날뛰는 분한테 그렇게 말할까?" "……" "은재야~ 무리한 요구라는 거 알아. 근데, 제발 나 좀 살려 주라." "네가 시작한 일이야." "그래. 내가 시작했어. 그깟 자존심 지키려고 시작했어. 하지만 너도 이제 나랑 같은 배를 탔어. 이제 빼도 박도 못한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 "……"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도 있잖아. 눈 딱 감고 나랑 결혼하자. 할아버지 돌아가시면……그러면 이혼해 줄게." 말도 안 되는 청혼을 하면서 결혼도 하기 전에 이혼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남자. 은재는 지완의 할아버지 때문에 약해지려던 마음을 더 굳게 잡았다. "남자한테는 이혼이라는 거 그렇게 큰 흠이 아닐 지 몰라도, 여자한테는 큰 흠이야." "그럼 이혼 안하고 계속 살던가." 무심한 지완의 말에 은재는 속이 상해 버렸다. 다른 때는 그렇게도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지완이 이럴 때는 자신의 맘은 생각지도 않고 쉽게 말을 내뱉어 버리는 것이 영 섭섭했다. 지금 지완이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것은 알지만 섭섭한 것은 섭섭한 것이었다. "잘 해결하길 바래.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은재는 단지 그 말을 하고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스산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차가 휭휭 달리고 있는 길을 은재는 걷기 시작했다. "타!" 잠시 후 지완이 차를 옆으로 대며 창문을 내리고 은재를 불렀다. 그러나 은재는 지완을 무시하고 걸었다. "너까지 내 신경 긁지 말고, 어서 타라고 할 때 타란 말이야!" 분통을 터트리며 지완은 소리쳤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할아버지의 초췌한 얼굴을 보는 순간, 어느 것 하나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여러 해를 핏줄 새워가며 싸워댔지만, 한 번도 할아버지가 떠나실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몇 해 전 큰 수술을 마치고 입원하셨을 때도 적어도 저런 얼굴은 아니셨다. 그 창백한 새하얀 얼굴이란……. 지완은 눈앞이 컴컴해지는 느낌이었다. 겉으로 표현 할 수 없어도 지완은 할아버지를 누구보다 사랑했다. 꼬장꼬장하고 자기 주장이 강하신 분이시지만, 더할 나위 없이 손자인 자신을 사랑해주시고, 용기를 북돋아주신 분이 바로 할아버지셨다. 지완에게 정신적 지주와 같으신 분이 바로 할아버지였다. 그런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시라면, 지완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할아버지의 소원을 들어 들일 것이다. 그것이 은재라는 친구를 잃게 되는 일이더라도. "타. 한참을 걸어야 택시 잡을 수 있을 거야. 데려다줄게." 지완은 고집을 부리며 거리를 걷고 있는 은재 곁에 다시 차를 세우며 좀과는 다르게 부드럽게 말했다. "상관하지 말고 가." "너 정말……." 지완은 차를 은재 앞으로 거칠게 세우며 차 문을 열고 은재 앞에 섰다. "제발 부탁이야. 은재야." 애타게 지완은 은재를 불렀다. 그러나 은재는 입을 꼭 다물고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네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분이셔. 결혼이라는 표면적인 절차일 뿐이야. 약혼식과 다를 바 없어. 한번만 더 도와줘." "그만해. 너의 딱한 사정 알겠어. 하지만 역시 안되겠어. 여기서 그만 두는 게 좋을 거 같아. 너무 멀리 와 버렸어." "이렇게 빌게. 도와 주라. 은재야." 지완은 도로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은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결혼을 간청하고 하고 있었다. 잔인한 사람. 자신이 짝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청혼을 받고 있는 상황인데 자꾸만 화가 나려했다. 언젠가 한번은 이렇게 지완이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청혼을 하는 달콤한 상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적어도 이런 마지못해서 자신 앞에서 구걸을 하는 이런 상황은 아니었다. "싫어. 안 해. 안 할거야." 상처 입은 은재는 이제 더 이상 아무런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참함. 지금 은재가 느끼는 감정은 바로 그 것이었다. "역시 안 되는 거니?" "……" 아무런 말도 없는 은재의 행동에 지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고는 다시 차로 향했다. "데려다 줄게. 타라." 지완의 목소리는 무뚝뚝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한번도 지완의 웃는 낯을 보지 못한 것 같다. 맘 같아서는 지완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은재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면서 지완이 차를 타고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한다. 각오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지완은 은재에게 경고 장을 날렸다. "안 해. 무슨 일이 있어도 너랑은 결혼 안 해." "그 말 잊지 말아라. 푹 자두는 게 좋을 거야. 조금 바빠 질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지완은 은재를 집 앞에 내려두고 능숙하게 핸들을 돌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은재는 지완의 차가 단지를 빠져나가고도 한참이 지나서까지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은재의 두 뺨에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완의 말이 허언이 아님은 그 다음날 은재가 출근을 하고부터 여실이 드러났다. 커피를 마시고 자리에 앉자마자 울리기 시작한 전화를 시작으로 은재와 사무실 직원들은 진땀을 빼며 전화를 받아야 했다. 한꺼번에 전화를 걸어 결재를 요구하고, 출판사와의 거래를 끊겠다는 연락이 속출했다. 이게 무슨 영문이란 말인가? 처음엔 은재도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같이 일을 하는 정연 선배와 어리둥절해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쏟아지는 전화에 은재의 귓가에 지완의 경고가 생각났다. 그와 함께, 우스개 소리로 약혼을 해주지 않으면 '풍경'을 망하게 하겠다고 속삭이던 지완의 말도 생각났다. 이놈이 장난이 아닌 모양이었다! 씩씩거리며 은재는 시끄럽게 울려대는 전화벨을 무시하며 꾹꾹 지완의 전화 번호를 눌렀다. 한번. 두 번. 세 번. [김지완입니다.] 점잖은 지완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울려 퍼지자 은재의 입에선 욕설이 튀어나왔다. [욕을 할 정도로 한가 한가보네? 난 내 능력이 조금 되는 줄 알았는데.] "이, 이……." 수화기를 통해 지완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빨리 제자리로 돌려놓지 못하겠어!" [할아버지가 더 심해 지셨어. 어제 새벽에 다시 응급실로 들어 가셨어.] 침울한 지완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울려 퍼졌다. 은재는 잠자코 지완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마지막 소원을 들어드릴 수 없을지도 몰라.] "……" [아침에도 널 찾으셨어.] "……" [어젯밤 그렇게 널 협박했지만,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어. 그런데 그 창백한 얼굴로 눈도 뜨지 못하는 할아버지 얼굴을 생각하니까 화가 났어. 할아버지는 널 그렇게 예뻐하시는데 넌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도 들어주려 하지 않잖아.] "그래도 이건 옳지 못해. 나 하나 때문에 정연 선배한테까지 피해가 가잖아!" 은재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지완은 말을 하고 있었다.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했어. 어젯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이제까지 할아버지에게 효도다운 효도를 해본 적이 없는 거 같아. 마지막 소원까지 들어드리지 못하면 난, 완전히 불효자가 될 거야.] "휴~"


[그래서 이러는 거야. 이렇게 하는데도 네가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 생각 잘했어. 이러고 있을 시간 있으면 할아버지나 한번 더 뵈어. 이따가 나도 할아버지 뵈러 갈게. 그러니까, 빨리 이 사태를 원위치로 돌려놓으란 말이야." [네가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우리 할아버지는 나를 원망하시면서 돌아가시겠지? 그리고 난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되겠지. 그리고 너도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될 거야.] "무슨 개소리야!" [난 할말을 다했어. 너의 대답을 듣고 싶어.] "좋아.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싫다. 싫어. 죽어도 너랑은 결혼 안 해. 이따가 두고 봐. 할아버지한테 가서 네가 어떤 짓을 했는지 다 말해 버릴 테니까!" [아마도 그럴 시간이 없을 거야. 이제 폭탄이 터질 테니까.] 지완은 단지 그 말만을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30 분 후, 지완의 말대로 폭탄이 터졌다! 여기저기서 책을 반품하는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풍경'이 도산을 맞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울화통이 터지기 시작했다. 걸려오는 전화마다 고개를 굽신거리며 받는 것도 질려 버렸다. 은재의 입에서는 쉴새없이 욕설이 튀어 나왔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은재는 급기야 사무실의 모든 전화선을 뽑아 버렸다. "은재야!" 은재의 돌발 행동에 정연은 의아한 눈길로 은재를 쳐다보았다. "언니 미안해. 내가 해결할게." 은재는 그대로 몸을 돌려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사무실을 빠져 나온 은재는 거칠게 전화기의 버튼을 눌러 전화를 걸었다. "받어. 이 ×새끼야." 한번. 두 번. 세 번. [네. 김지완…….] "*새끼, *새끼, *새끼, *새끼, *새끼, …… ,*새끼." 지완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은재는 계속해서 똑같은 욕을 해주었다. 더 이상 숨이 차서 말을 하지 못할 때까지. [다 했어?] "아직 반도 못했다. 이 *자식아!" [내 선물이 맘에 들은 모양이네.] "입 닥치지 못하겠어. 이 *자식아!" 은재의 계속되는 욕설에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은재를 쳐다보며 지나갔다. 그러나 지금 은재는 그런 체면을 차릴 만큼 정신이 말짱하지 않았다. 머리의 뚜껑이 열려서 아주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빨리 원위치 시키지 못하겠어!" [대답은?] 거래를 성사시키는 기업가처럼 지완은 느물거리며 은재의 대답을 촉구했다. "……"


[이만 바빠서 말이야. 이만 끊…….] "알았어. 알았다고. *새끼야." [그 욕을 그만 두지 않으면 거래는 없던 걸로 하겠어.] "거래 좋아하시네. 이게 협박이지 무슨 거래야. *새……." [이만 끊도록 하지.] "미안. 미안. 알았어. 취소야. 취소라고!"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나오면야 너그러운 내가 용서 해줘야겠지?] "그럼~" 은재는 혀를 내두르며 마지못해 지완의 말에 대답을 해주었다. 역겨운 놈! [좋아. 그럼 너와 결혼 해 줄게. 흐흐흐.] "헉~" 수화기를 타고 지완의 기괴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 "첫째,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풍경'가지고 협박하지 않기!" [알았어.] "둘째, 서로의 사생활은 노터치!" [네가 무슨 사생활이 있어?] "이게 사람 무시하고 있어. 알았어. 몰랐어." [알았어.] "셋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그러면 깨끗하게 헤어지기." [……아, 알았어. 근데, 친구로는 계속 지내는 거지?] "봐서. 그때 기분 봐서.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잘 할거야.] "그때 봐야 알지. 암튼 내 조건은 이거야. 아차차! 보너스 한 개 더! 한 개 더 말해도 되지?" [내가 세 개까지 된다고 말한 적도 없어. 그러니까 한 개 더 말한다고 할말도 없지.] "그렇지? 가장 중요한 거, 물론 공짜는 아니다. 각오는 하고 있겠지? 위자료 왕창~" [그 말이 왜 안나오나 했다. 결혼식 걱정할 건 없어. 우리 집에서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이따 보자, 우리 예쁜 은재. 이제 진짜로 바쁘다. 일 쳐놓은 거 해결 보려면.] 그렇게 남자와 여자는 이틀 후에 결혼을 했다. 성대하기 그지없던 결혼식장에서 여자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댔고, 남자는 계속해서 미소 짓고 있었다. 7. 반한 남자 3 박 4 일 짧기 만한 신혼 여행은 무척이나 어이없고 황당하기만 했다. 부득불 할아버님은 지완과 은재에게 신혼 여행 가기를 강요했고, 할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하며 머뭇거리는 신혼 여행을 시작하였다. 첫째 날은, 무리한 결혼 일정에 심신이 피로한 탓인지 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침대에 누워 시체처럼 잠만 잤다.


둘째 날은, 은재는 서울에서부터 들고 내려온 자신의 일에 파묻혔고, 지완은 하루 종일 tv 앞에 매달려서 하루를 보냈다. 셋째 날은, 하루 종일 얼굴 가득 가식적인 웃음과 포즈를 취하며 제주도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의무적으로 사진을 찍었다. 권태롭기만 한 신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들을 반긴 것은 병원에서 퇴원을 하신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인공 심장을 다는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퇴원을 한 것이라고 했다. 한동안은 병원에 입원하여 그 상태를 더 두고봐야 했지만 할아버지의 고집에 그대로 퇴원을 하여 주치의인 민 박사님이 대신 왕진을 오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할아버지의 고집에 지완은 다시 불같이 화를 냈지만 그 누구도 김석주 옹의 고집은 꺾을 수가 없었다. 병원으로 돌아가서 더 치료를 받으라고 화를 내는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란, "은재랑 너랑 싸우면 은재 편 들어줘야지." 너무나도 황당한 이유였지만 할아버지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고, 할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할아버지가 성공률 반반인 수술에 희망을 걸고, 집에 돌아오길 바란 것은 모두가 손주 며느리 은재를 위한 모양이었다. 자신의 증손녀를 나아줄 손주 며느리를 위해 할아버지는 그 일념으로 버티시는 모양이었다. 지완으로서는 이러한 사태를 기뻐해야 할지 난감해 해야 할지 판단을 세울 수가 없었다. 좋은 게 좋다고 저렇게 은재를 보며 삶의 의지를 불태우시는 것을 보며 결혼을 한 것이 백 번 잘했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다. "너 화내니까 무섭더라!" 2 층으로 올라서던 지완은 은재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어……." "어는 무슨 어야? 화내니까 아주 딴 사람 같던데?" "어." 할아버지의 안위에 신경 쓰느라고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이 있었으니, 은재가 자신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그 못된 성질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이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무 방비하게 검은 오로라를 방출했으니……. 이제부터라도 이미지 관리에 최선을 다해야겠다. 지완은 슬금슬금 은재의 안색을 살피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아직은 자신의 본 모습을 알아채진 못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다면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자신을 보며 농담을 건네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뜻하지 않게 자신의 집에 들어와 살게 된 은재를 위해서 당분간 집에선 성질을 부리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담, 이 스트레스를 어디서 푼담? 어둠이 가시기 시작한 이른 새벽. 지완은 몸을 뒤척이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젠 밤낮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 새벽에는 이불을 덥지 않으면 추워서 더 이상 잠을 더 잘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불이 자신의 몸에 감겨들자 지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잠시 후, 요란한 벨소리와 함께 방에 불이 켜지고 사르륵 사르륵 옷깃을 스치는 소리가 지완의


귓전을 때리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출근을 해야 하는데 어제는 너무나도 고된 하루였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내내 운전을 해야 했으며, 할아버지와의 설전, 그리고 은재와의 기나긴 대화? 지완은 이제 더 이상 이 방이 자신의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정신을 차리고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완은 지완은 선녀가 선녀는

보았다. 자줏빛 치마와 녹색 저고리를 입고 살포시 돌아서는 선녀. 다시 눈을 비비고는 선녀를 응시했다. 사뿐사뿐 지완에게 걸어왔다. 은재를 닮아 있었다.

"잘 잤어? 시간 좀 남았어. 조금 더 자도 되는데." 그 선녀는 은재였다. 필시 은재였다. 닮은 것이 아니고 바로 그 선녀는 은재였다. "금방 불 꺼줄게. 조금 더 자. 조금 있다가 올라와서 깨워줄게." 지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은재를 응시하고 있었다. "야, 김지완. 멍하니 앉아서 뭐 하는 거야? 아직도 꿈꾸는 거야?" 선녀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나 식사 준비하러 내려가 봐야해. 더 잘 거야? 깨워 줄까?" 선녀가 자신 앞에서 맑은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네. 나 그럼 내려가 본다. 일어난 거지? 나 안 올라온다." 선녀가 자신에게서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사뿐사뿐, 마치 하늘을 걷는 것처럼. "은재야!" "어?" 선녀가 다시 자신에게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 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리 와 봐!" "왜? 늦었어. 빨리 가봐야 하는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선녀는 자신에게 다가와 섰다. "고개 좀 숙여 봐" "왜 뭐 묻었어?" 지완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선녀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어, 왜?" 지완이 손이 선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지완의 난데없는 행동에 경직하는 선녀의 몸이 느껴졌다. "너무 예뻐." 그윽한 눈길로 선녀를 바라보며 지완은 입술을 내려 선녀의 붉은 입술을 덮쳤다. -짝! "야! 이 *자식아!" 선녀의 달콤함을 채 다 맛보기도 전에 지완은 자신의 왼쪽 뺨을 부여잡고 신음을 삼켜야 했다. 선녀의 손은 맵다! 선녀의 입에선 욕도 나온다! -꽝 매섭게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지완은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 식사 내내 지완은 자신의 밥에 도통 관심을 줄 수가 없었다. 언제 그렇게 자신들의 가족들을 녹여 놨는지, 26 년을 살아오면서 자신이 해온 것보다 더 친근하게 식사시간에 가족들과 동화된 은재를 보며 다시 한번 지완은 은재의 능력에 탄복하고 말았다. 게다가 새벽에 자신을 그렇게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홀려 놓더니, 식사시간 내내 바로 코앞에 앉아서 밥을 떠먹고 있는 은재의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은재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 평소 여자가 한복 입은 모습을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으며, 은재가 한복 입은 모습을 처음 본 것도 아니었다. 그 언젠가, 아마도 고등학교 2 학년 때 였던 거 같다. 여학생들이 가사 실습인가 뭔가 하는 것으로 한복을 입고 예절 실습을 한다 했었다. 그때 은재가 한복 입은 모습을 보았었다. 반장이었던 은재가 대표로 나가서 한복을 입고 절을 하는 것을 시범을 보이는 것이었는데, 그만 옷고름에 발이 걸려 보기 좋게 넘어지고 말았었지. 그때 한복을 입은 은재의 모습은 선녀라고 하기엔 아주 거리가 먼 무수리였다. 파란 치마에 하얀 저고리. 어디서 구했는지 몰라도 그 모습은 영락없는 궁전의 무수리를 연상시켰었다. 그런 은재가 몇 년만에 환골탈태하여 선녀가 되어 버리다니! 믿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지금 자신 앞에 선녀가 콧노래를 부르며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선녀의 붉은 뺨이 다시 한번 지완을 유혹하고 있었다. 한 순간의 착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갑작스런 결혼으로 말미암아 밀린 일들을 처리하고 평소보다 조금 늦게 집으로 들어선 지완을 반기는 것은 거실에 모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는 가족들과 선녀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면 뿔뿔이 흩어져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가던 가족들이 어쩐 일로 거실에 모여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나 했더니만 그 이야기의 초점에는 역시나 선녀가 있었다. 지완은 잠자코 서서 선녀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감돌고 있음을 발견했다. 자신의 가족들 얼굴에 흐르고 있는 똑같은 미소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가족들은 잠잘 시간이 되었음에도 좀처럼 선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제 선녀는 하늘로 올라 갈 시간인데 말이다. "시간이 늦은 거 같은데요." 정적 감을 깨는 지완의 딱딱한 목소리에 일순간 가족들이 모두 마법에서 깨어난 느낌이다. 모두들 시계를 쳐다보고는 훌쩍 지나버린 시간에 놀란 눈치였다. 그러나 아쉬운 듯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하는 가족들을 보며 지완은 혀를 차며 선녀를 가슴에 끼고 먼저 2 층으로 올라와 버렸다. 끝까지 선녀를 놓지 못하는 눈길들이란~ 쳇! 그렇다고 내가 놔줄 줄 알고? 지완이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섰을 때 자신의 선녀는 방 한구석에 앉아서 무언가에 한참 열중을 하고 있었다. "뭐해?" "보면 몰라?" 대답이 뚱한 것이 아직도 아침 일에 화가 안 풀린 모양이었다. "재밌어?" "……." 은재가 자신과 결혼을 하면서 가지고 온 짐은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3 일 만에 지완의 방은 신혼 부부 방으로 탈바꿈해 있었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거의 대부분이 지완의


물건이었지 은재가 가져 온 것이라고는 옷가지와 화장품, 책 몇 권이 다였다. 그리고 10 개가 넘은 쿠션들이 전부였다. 지금 은재는 쿠션을 늘어놓은 카펫 위에 등을 대고 앉아서 열심히 십자수를 놓고 있는 중이었다. "심심해." "……" 반응이 없다. 한참을 은재가 하는 냥을 쳐다보고 있어도 은재는 좀처럼 눈길을 돌려 지완을 쳐다보지 않았다. 아래층에서는 그렇게 말을 잘하고, 웃음을 짓더니 방에 들어와서는 웃음은커녕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런 은재의 모습이 지완은 맘에 들지 않았다. "심심하단 말야. 이거 그만하고 나랑 놀자." 지완은 어린 아이 마냥 은재를 졸라댔다. 그러나 여전히 은재는 자신의 일에 열중이었다. 그런 은재의 반응에 뾰루퉁한 지완은 은재의 손을 끌어당기며 은재의 일을 방해했다. "방해하지 말고 심심하면 자면 되잖아!" "……" 은재가 화를 내며 소리를 치자 지완은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있던 다리를 펴고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그런 지완의 모습을 보며 은재는 다시 자신이 하는 일에 몰두했다. -딱 그러나 잠시 후, 시커먼 어둠이 찾아 들었다. "너 뭐 하는 거야?" 십자수를 놓던 은재는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지자 그제사 지완이 방의 스위치를 꺼버린 것을 깨닫고는 지완을 향해 소리쳤다. "난 환하면 못 자!" "너 지금 괜히 그러는 거지?" "아니. 피곤해. 무지 열심히 일하고 와서 피곤해." 어둠 속에서 은재의 나직한 욕설이 지완의 귀를 괴롭혔다. 그러나 잠시 후, 어둠 속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불 한쪽이 들리면서 침대가 흔들렸다. 은재가 더 이상 지완에게 대들기를 거부하고 차라리 잠을 자기로 맘먹은 모양이었다. 한 침대에서 잠을 자기로 합의를 본 것은 신혼 여행지의 호텔에서였다. 죽어도 바닥에서는 잠을 자지 않겠다고 서로가 버티는 바람에 결국에는 사고 칠 가능성이 제로라는 판단과 함께 한 침대에서 각각의 모퉁이에서 잠을 자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그 약속은 집에 와서도 충실히 이행되고 있었다. 죽어도 바닥에서 안 자는 대신에, 죽어도 서로를 건드리지 않기. 그것이 한 침대에서 동침하는 이유요, 조건이었다. "자?" "……" "집안일 힘들지 않아? 내가 어머니한테 말씀 드려서 빼 줄까?" "아니. 재밌어. 그러지 마." "난데없이 결혼하게 만든 것도, 시집살이하게 한 것도 미안한데 집안 살림까지 하려면 힘들잖아. 힘들면 말해." "아니. 정말로 괜찮아." "그래. 다행이다." "……" "……" 방안에 기묘한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자?" 다시 한번 지완이 은재를 향해 물었다. "아니. 왜 자꾸 귀찮게 묻는 거야?" "자나 해서. 근데 안 자고 뭐해?" "그러는 넌? 잔다고 불 끄고서 잠도 안자고 뭐 하는 거야?" 은재의 물음에 지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막상 자려고 누우니까, 잠이 안 와서 양 세." "뭐?"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 센다고. 넌 왜 안 자?" 순간의 정적. "음, 난 별 세고 있었지. 별 하나, 별 두 개, 별 세 개……." "쿡쿡쿡" "쿠쿠쿠" 지완과 은재의 웃음소리가 검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우리 이야기나 하다가 잘래?" "그래. 그러지 뭐. 별 세기도 귀찮은데." 은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지완이 은재의 곁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왜 징그럽게 옆으로 오고 난리야?" "음량이 딸리는지 잘 안 들려서." "말도 안돼." "우리 어머니가 시집살이 많이 시키시데?" 지완은 은근슬쩍 화제를 돌리면서 은재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니. 난 하나도 하는 게 없는 걸. 그냥 어머니랑 할머니가 하시는 거 구경만 했어. 하나도 손도 못 대개 하시는 거 있지." "왜?" "일하고 왔으니까 힘들 거라고 하시면서, 그냥 이렇게 하는 거다, 저렇게 하는 거다, 보기만 하라고 하시더라고." "그래." "좋겠다. 이런 좋은 가족들을 가지고 있어서 말이야. 그래서 오늘 조금은 네가 부러웠어." "……" 은재의 음성에서 묻어나는 우울함에 지완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10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알아왔지만 은재가 부모님이 없다는 사실을 이번에서야 알았다. 너무나 밝은 모습의 은재였기에 부모님이 계시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부럽다고 말하는 은재 앞에서 지완은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맘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지만 괜시리 미안한 맘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런 대가족이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 라고 늘 생각했었거든. 할머니와 단둘이 살아서, 아니 잊을 뻔했다. 해피까지 셋이서만 살아서 집안은 늘 상 깊은 산골의 암자처럼 조용했어. 그 침묵 감이 감도는 게 어린 나이엔 얼마나 싫었는지, 난 쉴새없이 떠들어댔지. 목이 쉴 때까지 말이야. 그래서 그 덕분에 이렇게 말 잘하는 지금의 정은재가 있는 거야? 알겠어?" 음울한 목소리를 떨치고 은재는 큰 소리를 치며 지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지완 역시도 은재의 장단에 맞추어 커다란 목소리로 대꾸를 해주었다.


"내가 강제로 결혼하자고 해서 아직도 내가 원망스러워?" 지완이 난데없는 질문을 은재에게 던졌다. "내가 널 원망 안 했으면 좋겠어? 그런 기대는 애초에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처녀의 혼삿 길을 막아놓고 그런 기대를 하면 안되지." "내가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 안 했지." "음, 글쎄. 가만 있어봐라. 안한 거 같은데. 미안함의 '미'자도 못 들어 본 거 같은데?"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어. 미안해.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해. 단순하게 생각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그저 지완은 이번 결혼을 결혼식만 올리는 단순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결혼식은 그 시작에 불과했다. 결혼식 뒤에 이어진 신혼여행과 호적신고, 그리고 결혼 생활! 단 한순간의 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가족들의 등에 떠밀려 여기까지 와 버렸다. 결혼이라는 것은 자신이 생각한 것만큼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느낄진데 자신의 집을 떠나서 새로운 환경에서 낯선 사람들과 생활하며, 살림을 배우게 된 은재가 느낀 혼란은 어떠할까? 그 정도는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완은 진심으로 은재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그저 결혼식만 올리면 된다고 생각했어. 그땐 할아버지에게 다른 방법이 있는 지 몰랐거든. 영락없이 끝이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이렇게 사건이 커져서 호적신고도 하고……. 암튼간에 실제 결혼처럼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진짜로 미안해." "알았어. 그만해. 공짜로 해주는 것도 아니고 낯간지러워서 더 못 들어주겠네. 네가 의도한 거 아니라는 거 아니까 1 절만 하세요. 하암~~ 졸리다. 나 이제 잘 거야. 덥다. 더우니까 네 자리로 돌아가. 안 그럼 덮쳐 버린다!" 은재는 지완의 어깨를 밀어대며 하품을 해댔다. 지완은 맘이 내키진 않았지만 마지못해서 자신의 자리로 몸을 옮겼다. 지완은 멀뚱멀뚱 눈을 뜨고 검은 천장을 응시했다. 조용하다. "자?" "……" 지완은 고개를 기울여 은재 곁에 대어보았다. 새끈새끈 숨소리가 들려왔다.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은재야, 나 오늘 아침에 선녀를 봤다. 정말 예쁜 선녀. 근데 그 선녀가 널 닮은 거 있지. 웃기지? 내가 생각해도 웃겨. 정은재 선녀라니 말이야. 잘 자라. 앵무새 신부!" 지완은 은재를 향해 속삭이곤 이윽고 잠이 들었다. 정말 기나긴 하루였다. 8. 탄로 난 남자 젠장 할! 모든 것이 엉망이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제 자리에 박혀 있는 것이 없다. 지완은 씩씩거리며 욕실을 나와 열심히 자신의 취미 생활에 몰두하고 있는 은재 앞에 당당히 섰다. "야! 정은재!"


"왜?" 은재는 얼굴도 들지 않은 채 대답을 했다. "정은재!" 한 옥타브 올라간 지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방안에 울려 퍼졌다. 지완의 화난 목소리에 그제사 은재는 놀란 토끼 눈이 되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 큰 소리 내고……." "이게 뭐야?" 지완이 손에 들린 것은 욕실에서 쓰고 있는 치약이었다. "그게 왜?" "이게 왜라니? 내가 한 두 번 말했어? 치약은 꼭 뒤에서 짜서 쓰라고!" "후후후"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정은재, 나 지금 정말로 화났어." 무시무시한 얼굴로, 콧바람을 킁킁거리고 있는 지완은 불을 뿜고 있는 검은 용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은재는 자꾸만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너 자꾸 웃을 거야?" "왜 계속 웃으면 어쩔 건데?" "이, 이……." 당돌한 은재의 말에 지완의 몸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때리기라도 할거야? 아님, 이혼이라도 할까?" "난 여자는 안 때려." 잇새로 가까스로 지완은 화를 억제하며 무뚝뚝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럼? 나갈까? 짐 싸 가지고 나갈까? 그럼 난 그놈의 치약 때문에 이혼 당한 그런 여자들 중에 하나가 되는 건가?" 은재는 과장되게 한숨을 폭 내쉬면서 하던 일을 멈추고 장롱 안에서 가방을 꺼내기 시작했다. "누, 누가 나가라고 했어?" 잠자코 은재가 하던 냥을 지켜보던 지완은 은재가 가방을 꺼내며 정말로 나갈 모양을 하자 빽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럼 뭘, 뭘 어쩌라고?" 지완의 말에 은재는 지완의 목소리보다 더 큰 목소리로 허리에 손을 짚고 크게 소리쳤다. "그러니까, 그래! 모든 게 엉망이야! 방 꼴을 봐봐,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물건들을 보란 말이야. 이 치약은 그것들 중에 하나에 불과하단 말이야. 왜 이렇게 여자가 칠칠맞아? 그렇게 살아 가지고 누가 퍽도 데려가겠다!" "좀 어질러져 있으면 네가 치우면 안돼? 여기 내가 어지른 것만 있냐? 넌 손이 없어 다리가 없어? 그리고 내가 칠칠맞던 팔팔맞던 네가 무슨 상관이야? 남이 사! 그런 더런 성질 머리 가지고 누가 널 퍽도 데려가겠다." "널 말 다 했어!" "그래. 다 했다!" "정말, 이……." 지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 동안 참고 참았던 화들이 한번에 끓어올랐다. 그러나 도무지 말로는 은재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화를 풀,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에이씨~"


지완은 급기야 자신의 발치에 떨어진 은재의 쿠션을 들어 침대로 던져 버렸다. "야! 너 지금 내거 던진 거야?" "그래. 던졌다. 그러니까 제 자리에 잘 두란 말이야!" 지완은 다시 다른 쿠션을 들어 던져버렸다. "너, 죽었어." 은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너, 너 그건 안돼!" 은재가 발견한 것인지 무엇인지를 깨달은 지완의 얼굴이 납빛으로 변했다. 그렇다고 해서 은재가 그만 둘 은재가 아니었다. 은재는 하나를 꺼내들어 머리 위로 치켜올렸다. "그거 만드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모르겠는데." 은재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예쁜 우리 은재야,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우리 그거는 놓고 얘기하자." "내 쿠션, 원 위치!" "알았어. 알았어." 지완은 은재가 들고 있는 것을 끝까지 쳐다보면서 자신이 던진 쿠션들을 제자리로 가져다 놓았다. "했어. 그러니까 이제 내려놔." "싫어." "왜! 하라는 대로했잖아." "나 화났어. 네 얼굴 보기 싫어. 이 방에서 나가." "내가 이방에서 나가면 어디서 자냐?" "네 맘대로 해. 안 나갈 거야?" 다시 한번 은재는 손을 치켜들었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지완은 은재의 눈치를 보며 침대에서 자신의 베개를 끌어안고 문 앞에 섰다. "진짜로 나간다" "어. 진짜로 나가." "진짜로 나간다니까?" "어. 진짜로 나가라고." 지완은 상처 입은 표정으로 다시 한번 은재를 응시했지만, 은재는 요지부동이었다. 긴 한숨 소리와 함께 지완은 방문을 열고 방을 나왔다. 지완이 방문을 열고 나가자 그제서야 은재는 들고 있던 "노이반슈타인 성" 모형을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지완의 취미는 참으로 고상하게도 종이 모형을 만드는 것이었다. 꽤 오랫동안 해온 취미인지 집안 구석구석에는 지완이 만들어 놓은 종이 모형들이 여기저기 전시되어 있었고, 그것들은 지완은 끔찍이도 아끼고 있었다. 자신이 자신들의 쿠션들을 끔찍이도 여기는 것만큼이나. 은재는 지완이 나가자 씽끗 웃으며 침대로 다가가 벌러덩 누웠다. 지완의 그 애처로운 눈길이란, 쿡쿡쿡 은재는 배를 움켜쥐고 웃음을 터트렸다. "은재야~" 빼꼼이 문이 열리고 지완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언제 웃었냐는 듯이 은재의 목소리엔 날이 서 있었다.


"나 들어가면 안될까?" "안돼." "은재야, 이쁜 은재야." "문 닫아." "……" "안 닫을 거야? 네가 만든 종이 모형들 던지고 밟아 버린다?" "아, 알았어." 다시 문이 닫히자, 은재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어디서 성질을 부려? 죽을라고!' 지완이 그렇게 숨기고 숨기려 했던 못된 성질. 그러나 은재는 알고 있었다. 시집 온 첫째날 근심 어린 표정으로 은재에 대한 걱정을 하시던 할머니와 어머니는 지완의 성격을 낱낱이 까발리며 조심하라는 충고를 하셨던 것이다. 처음에 은재는 이러한 어른들의 말이 무슨 말인가 하고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 조금씩 지완과 마주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 게 되었다.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기 위해, 욕실로 사라지거나, 운동을 한다며 밖으로 향하던 지완. 아무래도 무던히도 참으려고 한 모양이었다. 자신의 성질을 들키지 않으려고. 그러한 지완의 모습이 가상하여 은재도 모른 척하고 그런 지완을 보아 넘겼다. 그런데 기어이 그 못된 성질이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별 시답지 않은 것을 걸고넘어지면서 터트려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간 10 년 동안은 도대체 이 성질을 어디다가 숨겨놓고 그 실실거리는 얼굴을 들고 다닌 건지. 아무리 그때보다 많이 얼굴을 보긴 한다지만 일주일만에 터질 성질을 그간 숨기고 다닌 것이 은재로서는 그저 용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그간 10 년간에 저놈의 미소에 홀려서 그런 지완의 모습을 미처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자신 앞에서 화를 터트리는 지완의 모습이란, 무섭다기 보다는 놀라움이 앞섰다. 저렇게 잘생긴 얼굴이 화난 용처럼 일그러져서는 불을 뿜어내다니. 사람은 오래 살고 볼일이다. 이렇게 신기한 것도 구경을 하다니 말이다. 그러나 한참은 모자르다. 지완을 알고 지낸 게 한 두 해도 아니고 강산이 변한다는 10 년이다. 10 년 동안 그 얼굴에서 웃는 얼굴만 보아왔는데, 화가 난다고 무서울 건 또 뭐가 있단 말인가? 불을 뿜는 용이든, 실실 웃던 지완이던, 결국 본판불변의 법칙에 의하면 그놈이고 저놈이고 지완이지 뭐가 틀리단 말인가? 그러니까 결론은 무서울 게 없다는 것이다. 싸웠노라, 이겼노라, 내쫓았노라. 완벽한 은재의 승리였다. "문 열어." 바로 그 시간, 은재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미소짓는 동안 지완은 동생 유완의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 밤에 어쩐 일이야?" 유완은 볼펜을 들고 문을 열고 서있었다. 아무래도 작곡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가수가 되겠다고 설쳐되던 유완은 기어이 고등학교 1 학년 때 학교를 자퇴하고 언더밴드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밴드가 되겠다며


유완이 주축이 되어 '사일런스'라는 밴드를 결성하고 기타만 치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24 살이나 된 유완이 하는 일없이 그렇게 돌아다니는 것이 지완의 눈에는 영 거슬렸지만 가족들은 은근히 그런 유완을 반기는 눈치였다. 너무나 완벽해서 바늘에 찔려도 피 하나 나올 거 같지 않은 냉혈동물 같은 자신과는 천지차이인 유완을 보면서 사람 냄새를 느낀다나?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한 가족들의 방치아래 유완은 그 나이가 되도록 유유자적한 음악가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지완은 유완을 밀치고 들어가 침대로 가서 드러누워 버렸다. "나 잔다." "왜 여기서 자겠다는 건데?" "물어보지 마라." "형수님한테 쫓겨난 거야? 그런 거야?" 이 놈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당하는 것이 그렇게도 좋은 모양이었다. 하기사 고등학교 졸업식 때도 자신을 제치고 졸업생 대표가 된 은재를 보며 입을 다물지를 못했었다. 그때 그 환호하는 유완의 얼굴이란, 지금 뒤돌아보지 않아도 유완은 그때 그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맘에 안 드는 놈. "싸웠어? 형수님하고 싸운 거야? 형이 성질 부렸어?" "……" "도대체 뭣 때문에 싸운 건데? 형 때문에 혹시 형수님 울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할아버지, 아버지 앞에서 한 것처럼 화낸 거 아니겠지?" 은재가 울어? 개뿔이……. 자신이 화를 내는데도 실실거리며 웃고 있던 은재를 생각하며 지완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은재가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강심장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분노 수치의 90 프로가 넘게 발산했음에도 불과하고 눈도 깜짝 안 하다니. 자신이 화를 내도 기절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건지, 아니면 반대로 자신의 화는 씨알도 먹히지 않고, 도리어 협박을 당하면서 자신의 방에서 쫓겨난 사실에 슬퍼해야 하는 건지 지완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안 자는 거 다 알아. 형. 빨리 말 좀 해봐. 형수님이랑 싸운 거야? 그런 거야?" 그리고 또 하나. 자신 옆에 찰딱 붙어서 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어서 안달이 난 동생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가 알아서 뭐하게. 조용하게 잠 좀 자려고 했더니만." 지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베개를 들고 유완의 방을 빠져 나왔다. 한참을 자신의 방 앞에서 망설이던 지완은 자신의 처지가 참 처량 맞게만 느껴졌다. 오히려 잘못을 한 것은 은잰데 왜 어이하여, 자신이 방을 나와 떠돌아야 하는지. 화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더 화를 내면 자신의 애장품은 무자비한 은재의 손길에 의해 박살이 날 터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지완은 마음을 굳게 먹고, 방문을 살그머니 열었다. 그런 지완을 반기는 것은 무거운 침묵과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그렇게 무자비하게(?) 자신을 내쫓은 여자는 천하태평하게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지완은 멍하니 방안을 응시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어둠 속을 더듬으며 간신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 들었다. 폭신한 침대에 몸을 묻고, 어느덧 익숙해진 은재의 숨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으려는 찰나,


"누가 들어오라고 했어?"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던 은재의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나가!" "은재야~" "나 아직 화가 안 풀렸어. 나가." 은재는 몸을 일으켜 앉아서 지완을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갈 때가 없단 말이야." "그건 네 사정이고." "잘못했어. 잘못했어. 그러니까 용서해 줘." 지완은 무릎을 끓고 앉아서 은재에게 용서를 빌었다. "불 켜고 와봐." 지완은 즉각 일어나서 불을 켜고 다시 침대에 무릎을 끓고 앉았다. "잘못했어. 다시는 성질 안 부릴게. 그러니까, 제발 나 쫓지 말아라." "방 치워." 은재의 말에 지완의 눈썹이 치켜 떴다. "싫어?" "아니. 아니. 할게." 지완은 열심히 몸을 놀려 방안을 치우기 시작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청소기를 들고 방안을 치우고, 몸을 구부리고 앉아서 걸레질도 깨끗이 했다. 은재의 지시대로. "다 했어." "앞으로 방 청소는 네가 하는 거야. 알았어?" 지완의 얼굴이 잠깐 동안 찡그려졌지만, 곧 수긍을 한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치약은 내 꺼, 네 꺼, 두 개 갖다 놨으니까. 네 거만 써. 내가 치약을 뒤로 짜 쓰던 앞으로 짜 쓰던, 옆으로 짜 쓰던 상관하지마." "알았어." "그리고……" "응?" "그리고 오늘 속 썩였으니까, 좀 맞아!" 은재는 옆에 있던 베개를 들어 지완을 쳐대기 시작했다. 몇 분 후, 만족스럽게 매타작을 끝낸 은재는 피곤하다며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 지완을 발로 쳐대며 불을 끄고 오라고 명령했다. 성질 한 번 잘못 부렸다가 완전히 인간, 김지완이 노예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네가 이렇게 사악한 여잔 줄 처음 알았어."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을 때 지완이 입을 열었다. "나도 네가 이렇게 못된 성질을 가진 남잔 줄 처음 알았어." "사악 마녀." "하이드씨~" "하이드씨?" "하이드씨 말이야. 평소에는 지킬박사처럼 실실거리더니, 그 이면에는 하이드씨 같은 면이 있었다는 말이지. 오늘 김지완 10 년간의 이미지 와장창 무너졌다." "……" 그제서야 자신의 못된 성질이 폭로되었음을 절실하게 깨달은 지완은 은재의 말에 그저 깨갱 거릴 수밖에 없었다. 은재가 나가서 이 사실을 퍼트리지 말아야 할텐데.


"하이드씨?" "어?" "다시 한번 내 앞에서 성질 부려봐. 오늘처럼 끝나지 않을 테니까." "어, 어떻게 할 건데?" "덮쳐 버린다. 헤헤. 지킬 잘 자셔. 우리 지킬씨 얼른 데려 오라고. 난 개인적으로 우리 지킬씨가 훨씬 맘에 드니까." "그래. 너도 잘 자." 은재가 금방 숨소리를 내며 잠에 든 것에 비해 지완은 그 뒤로도 한참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오늘의 패인(敗因)이 뭘까? 아무래도 은재의 성격을 너무 간과(看過)한 것이 오늘의 패인(敗因)인 것 같다. 그 언제였던가? 고 3 때던가? 은재와 친해지기 시작한 것은 고 3 때 자신이 회장을 하고 은재가 부회장을 하면서부터였던 거 같다. 알기는 학교 임원을 하면서 2 학년 때부터 알아왔지만 말을 섞기 시작한 것은 은재가 예석과 같은 문학 동아리를 하고, 자신과도 같은 임원을 담당하면서부터였다.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걸걸한 성격에 지완은 은재가 여자라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하고 친구가 되었다. 그런 은재가 남자들처럼 한 성질을 한다는 것은 그간의 은재를 겪어와서 알아왔던 사실이었다. 그 성질의 극치를 이룬 것은 깻잎파의 여자아이와 머리채를 붙잡고 싸우던 은재의 모습이었다. 무슨 연유로 그렇게 불량끼 다분한 여자아이와 은재가 싸웠는지 모르겠지만 평소와 다르게 이성을 잃고 은재는 깻잎파 여자아이와 싸우고 있었다. 반 아이들 모두가 보는 가운데, 싸움은 정말 장렬했다. 결과는 은재의 선방에 의해 여자아이가 넘어지고, 코피가 터지면서 일단락이 되었다. 그 덕분에 은재가 일주일간의 정학 처분을 받았었다. 그간 사회 생활을 하느라, 은재의 그런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심해야 할 것 같다. 보기보다 은재의 손은 무척이나 매웠다. 그나마 오늘은 베개로 맞았으니 다행이었다. 한번만 더 성깔을 부리면 그 손으로 때린다면? 으악, 생각하기 싫다! "난폭한 신부님,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손으로는 때리지마. 그리고 방에서 쫓지도 말고. 정말로 난 갈 때가 없단 말이야." 애처로운 지완의 말이 허공에 흩어지며 밤은 무르익고 있었다.

9. 이해 할 수 없는 남자 여자들은 기이한 요물(?)이다. 이때껏 살아오면서 아는 여자라고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빼고는 주변에 사촌들조차도 모두가 남자들뿐이라서 여자들을 알 기회라고는 자신의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만난 여자들과, 자신의 여린 꽃 예석이와 여자 같지 않은 은재가 전부였다. 요즘 은재가 자신의 집에 들어와서 하는 것들을 보며 지완이 느낀 점은 여자는 참으로 기이하면서도 신기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온 가족이 모여서 목욕탕을 찾은 어느 일요일인가는 아버지와 유완, 그리고 자신은 일찌감치 목욕을 마치고 목욕탕을 나선 지 한 시간이 넘었건만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은재는 도통 목욕탕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은재가 꺼낸 제안으로 이 집 남자들은 아프신 할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공중


목욕탕을 찾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어디 여자들과 목욕탕을 와 본적이 있어야지, 여자들이 목욕탕에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을 하면서 세 남자는 여탕 앞에 서서 난리를 쳤다. 그런 남자들의 생쑈와는 다르게 세 여자는 세시간이 지나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는 화기애애한 얼굴로 목욕탕을 나서는 것이 아닌가?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무슨 일이 난 줄 알았잖아?" 아버지의 선방이었다. 두 시간 내내, 목욕탕 앞에 쭈그리고 앉아 세 남자가 피어댄 담배가 한 갑이 넘는 상태였다. "평소보다 일찍 나온 건데." 어머니의 말에 그대로 남자들은 뒤로 넘어갔고, 다시는 여자들과는 목욕탕을 가지 말자고, 입을 모았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하루는 은재가 쇼핑을 가자고 제안하는 것이 아닌가? 토요일이라 딱히 할 것도 없고 은재를 따라 쇼핑을 나섰는데, 그런 결정이 실수였음을 깨달은 것은 은재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에 나갔을 때부터였다. 자신은 오랜만에 밖에서 은재와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야겠다고 맘먹고 나온 것이었는데, 약속 장소엔 할머니와 어머니를 대동하고 은재가 나와 있었다. 은재가 지완에게 쇼핑을 가자고 제안했던 것은 다름 아닌 차를 가진 운전기사와 짐을 들어준 짐꾼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차야 집에 있는 운전 기사가 대신할 수 있었지만 짐까지 들어달라고 하기엔 미안했던지, 지완에게 부탁을 한 것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세 여자를 따라 쇼핑을 나섰다. 아무리 봐도, 이거랑 저거랑 무슨 차이란 말인가? 은재가 할머님의 생신 선물을 해드린다며 스카프를 고르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지완 딴에는 스카프가 거기서 거기지 뭐가 차이라고 세 여자는 한 시간째, 한 곳에 서서 이것, 저것 대보고 난리가 아니었다. "지완 씨, 이건 어때?" 지완 씨, 이 호칭은 어른들 앞에서 은재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서로 호칭에 대해 별 의식이 없이 그저 예전대로, 지완, 은재 이렇게 어른들에게 부르다가 호되게 혼나고서 둘이서 합의 본 호칭이 이것이었다. 지완은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좋아, 라고 말해주었지만 자신의 의사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 뒤로도 30 분은 더 그곳에서 할머님의 스카프를 고르기 위해 세 여자의 설전이 진행되었으니까! 그렇게 세 여자들에게 5 시간을 끌려 다니다 녹초가 되어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는, 여자가 쇼핑을 한다고 같이 하자고 한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 가기로 마음먹었다. 하루는 아침이 되었는데도 은재가 도통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지완은 은재가 혹시 아픈 것이 아닌가 하고 은재의 이마를 짚어 보았지만, 별 이상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은재는 신음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은재야, 어디 아파?" "아니. 괜찮아." 괜찮다는 말과는 다르게 은재는 몸을 똘똘 말며 신음소리를 다시 내뱉었다. "병원 가자." 지완은 은재를 침대에서 일으켜 세우며 잠옷을 벗기려 했다. "그냥 나둬!"


"병원 가서 주사 맞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 이러다 병 키운다. 빨리 일어서 내가 옷 입혀 줄게." "그냥 나두라니까!" 은재가 큰 소리를 내며 지완의 손길을 피했다. "내가 간호사한테 주사 아프게 놓지 말라고 할 테니까, 걱정 마." 지완은 싱글싱글 웃으며 다시 은재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그게 아니란 말이야. 아픈 거 아니란 말이야. 조금 있으면 괜찮으니까, 나 건드리지 말란 말이야." "아픈 게 아닌데 왜 자꾸 얼굴을 찡그리고 신음 소리를 내뱉고 그래. 안 아프게 주사 놔 달라고 한다니까. 병원 가자." "그게 아니라니까. 마법에 걸린 거야. 그러니까 호들갑 좀 떨지마." "마법? 그게 뭔데?" 지완은 은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자기가 무슨 공준가, 마법에 걸리게? "이씨, 여자가 한 달에 한번 하는 거 있잖아." "아~아." 지완은 그제서야 은재의 말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았으면 조용히 좀 있어. 난 첫째, 둘째 날은 힘들단 말이야." "아, 알았어." 한참을 쥐죽은듯이 엎어져 있던 은재가 고개를 들어 지완을 찾았다. "지완아?" "어, 왜?" "부탁이 있어." "생각해 보니까, 그게 다 떨어진 거 같아." "그게 뭔데?" "마법에 걸릴 때 여자들이 필요한 거 있잖아." 은재의 얼굴이 붉어지며 은재는 그 도구를 설명해주기 위해 애를 썼다. "그래서?" "사다 줘." "내가?" 가까스로 그 도구를 이해시키는 데까지는 성공했는데, 얼굴이 시뻘개진 지완을 보니 그걸 사다달라고 설득하기엔 그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싫어?" "내가 그걸 어떻게 사다 줘. 창피하게." "그럼 내가 내려가서 사 올까? 그 멀리까지 가서? 내가 오죽하면 너한테 부탁을 하겠냐?" 성북동 꼭대기. 뭐 하나를 사려고 해도 차를 타고 내려가서 사와야 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땀까지 줄줄 흘리고 있는 은재를 쳐다보며 지완은 한숨을 폭 내쉬며 옷을 갈아입었다. "갔다 올게." "고마워." 지완은 차를 몰아 약국을 들어섰다. 그러나 도무지 그걸 자신의 입으로 말할 자신이 없었다. 첫 번째는 실패.


지완은 다시 다른 약국으로 들어서며 다시 용기를 끌어 모았다. "무엇을 드릴까요?" 약사 아줌마의 온화한 미소. 지완은 등뒤로 식은땀이 주루룩 흐르고 있었다. "저기, 그러니까, 그게,……" "네. 손님." "저기,……" 말도 못하고 버벅대던 지완의 눈에 자신이 사려고 하는 것들이 눈에 띄었다. "저거 주세요." 지완은 손을 가리켜 문제의 물건을 가리켰다. "뭘로 드릴까요?" 뭐? 은재가 종류는 말하지 않았는데. 에라, 모르겠다! "저기 있는 거 다 주세요!" 눈이 휘둥그레진 약사 아줌마의 시선을 뒤로 한 채, 지완은 한 보따리 가득 짊어지고 약국 문을 나섰다. "야~" 지완은 방에 들어서서 은재에게 들고 온 짐을 던졌다. "이게 다 뭐야?" "마법 도구" "뭘 이렇게 많이 사온 거야?" "씨, 담에는 이런 거 시키지마.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단 말야. 글구, 심부름 시키려면 잘 알려줘야지. 뭔 줄 알아야 사올 거 아냐. 그래서 다 사왔어. 두고두고 써. 다시 시키지 말고!" 그렇게 투덜투덜 거리면서도 지완은 자신이 사온 물건들을 꼼꼼히 챙겨서 수납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지완은 착한 양이 되어 그날 내내 은재의 착한 심부름꾼이 되어 주었다. 그때서야 지완은 처음 알았다. 마법에 걸린 여자는 무척이나 예민하고, 신경질 적이며, 아프다는 것을. 그리고 그 시기엔 특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조금만 불만스러우면 사정없이 베개가 날라 들었으니까. 암튼 결론은 여자들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요물이다! 어느 날인가는 집에 들어서니 집안이 쥐죽은듯이 조용한 것이 아닌가? 혹시나 또 할아버님이 쓰러지신 것은 아닌가하고 불길한 생각이 들어 미친 듯이 할아버지의 방으로 들어서니 이게 웬일? 할아버지, 할머니가 자리에 반드시 누워서 머리에 랩을 뒤집어쓰고, 얼굴에는 뭔가를 잔뜩 바르고 바나나를 먹고 계신 게 아닌가? "뭐, 뭐하고 계시는 거예요?" 잔뜩 놀래서 질문을 하는 지완을 보며 할아버지는 그저 손을 들어 나가라는 표시를 할뿐이었다. 황당한 얼굴로 할아버지의 방을 돌아 나와 아버지와 어머니 방으로 갔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안방에서도 할아버지 방에서와 똑같은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고개를 돌려 안방을 나왔을 때 지완은 자신의 의문을 풀어 줄 것 같은 사람을 드디어 만났다. 바나나를 입에 물고 종종 걸음으로 뛰어 다니고 있는 은재, 은재가 아무래도 이번 사건의 주범인 모양이었다. "지금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할아버지, 할머니 20 분 되셨어요! 미지근한 물로 닦으신 다음에 스킨 로션하고 크림 바르셔야 해요!" 은재는 지완의 질문을 무시하고,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서며 소리쳤다. 그러자 자신이 들어갔을 때는 그저 손을 들어 나가라고 손짓을 하시던 분들이 은재가 들어가자마자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 다음은? 은재는 역시나 마찬가지로 안방에 들어가자 아버지, 어머니가 부산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완전히 지완은 그 자리에 서서 투명인간 취급을 받으며 약 20 분간을 서 있어야 했다. "왔어요?" 은재는 20 분이 지나서야 비로소 지완을 아는 척을 해주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어른들이 지완에게 왔느냐는 인사를 건네주었다. 그날 저녁 식사시간의 풍경은 가히 더 인상적이었는데, "얼굴이 화사해 진 것 같지 않아요?" "10 년은 더 젊어진 것 느낌이야." "이 머릿결 봐요. 한 번 밖에 안 했는데도 찰랑찰랑 해진 거 같아요. 어머니" "손주며느리가 잘 들어와서 이런 호강을 다하는구나." 도통 수저 들 생각은 하지 않고 어른들은 자신들의 피부와 머릿결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지완이 들어올 때 그렇게 집안이 난리가 아니었던 이유는 은재가 어른들에게 헤어 팩과 얼굴에 팩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난생처음 그런 호강을 누려본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물론, 할머니와 어머니도 은재를 기특해 하시며 좋아라 하셨다. 그런 어른들을 보며 지완은 뾰루퉁해서는 쓸데없이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얼굴이 푸석푸석 해." 그날 밤, 방으로 들어선 지완은 대뜸 은재에게 얼굴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은재는 지완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다니 괜찮다는 말만을 하고는 노트북을 열고 회사에서 가져온 일에 열중을 했다. "아니야. 만져봐. 얼굴이 푸석푸석 하고, 이마엔 뾰루지가 났단 말이야. 이것 봐~" 지완은 노트북 앞으로 자신의 얼굴을 내밀며 은재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과 머리를 만지게 했다. "왜 이렇게 귀찮게 하는 거야? 괜찮다는데." 괜찮다고 자꾸만 말해도 지완은 곧 아니라며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어 은재의 일을 방해했다. 결국 은재는 참지 못하고 화를 벌컥 냈다. "왜 나는 안 해 주는 거야? 진짜로 팩이 필요한 사람은 노땅들이 아니라 바로 나라고. 빨리 나도 팩 해줘. 바나나 팩 해달란 말이야. 바나나도 먹고 싶단 말이야." "바나나 다 먹었는데." 은재의 말에 지완의 표정은 가히 볼만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기대감이 스르륵 빠지면서 상처받은 얼굴이란, 은재는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렸다. 지완은 입이 삐쭉 나와서는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다음에 해줄게." "……" 은재는 지완이 대답이 없자 자리에서 일어나 지완이 누운 침대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지금 하고 싶어?" "……" "바나나는 없지만 오이는 몇 개 있는데, 오이 팩 해줄까?" "……" 단단히 삐쳤는지 지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 할거야? 그럼 나나 해야겠네." 은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장된 목소리로 지완의 귀에 대고 말했다. 그때서야 지완이 꿈지럭거리며 이불을 젖히고 살포시 얼굴을 내밀었다. "그거, 바나나 팩보다 좋은 거야?" "그럼, 노화 방지에 모공 수축, 그리고 너 아까 뾰루지 났다고 했지? 이거 하면 한 방에 없어진다! 바나나 팩보다 10 배 아니 100 배는 효능이 좋은 거야!" "저, 정말?" "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하겠어. 하기 싫음 말아라. 나나 할 테니까." 몸을 돌려 나가는 은재를 쳐다보며 지완은 황급히 이불 속에서 빠져 나와 소리쳤다. "나 해줘. 할거야. 뭐하고 있을까?" 금새 반응을 보이는 지완의 모습에 은재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 "세수만 하고 있어. 금방 준비 해 가지고 올 테니까." "알았어." 은재는 욕실로 쪼르르 사라지는 지완을 보며 참았던 웃음을 토해냈다. 요즘 지완을 보면 마치 입체감이 살아있는 3D 영상을 보는 느낌이었다. 지난 10 년간은 웃고만 있는 평면적인 지완의 모습을 보았다면 요즘은 화내고, 삐치고, 질투하고, 어린아이처럼 희희낙락하는 여러 모습의 지완을 본다고나 할까? 지완에 대한 환상이 나날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지만, 김지완이라는 다른 남자에게 조금씩 매료되어가고 있는 은재였다. 얼굴 가득 오이 팩을 붙이고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실실거리는 지완을 보며 은재는 좀처럼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은재야?" "어?" "이리와 봐" "왜?" "내 머리 한 번 만져봐. 푸석푸석하지? 빗자루 같애." "왜 헤어 팩도 해달라고?" "아니, 뭐 꼭 해달라는 건 아니고, 해주면 좋고……" 딴청을 부리며 그 짧은 머리를 가지고 비비꼬는 지완의 모습은 엄마를 조르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이 집 남자들은 왜 이렇게 부러운 것도 많은 거야? 남자들이 헤어 팩을 해서 뭐 한다고. 할머님하고 어머님만 해드린다고 하니까, 할아버님하고 아버님도 너랑 같은 말 한 거 알아? 머릿결이 빗자루 같다느니, 살랑 살랑하는 머릿결이 탐난다는 둥, 그럴 땐 정말 다들 나이를 어디로 드셨는지 모르겠다니까?" "꼰대들이 노망이 나서 그래. 무슨 헤어 팩? 우리 은재 힘들게 그지?" "너도 똑같애!" "핏, 그래서 안 해줄 거야? "생각해 보고." 은재는 일부러 생각해 보겠다며, 선뜻 해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점점 갈수록


자신 앞에서 아양을 부리는 남자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꼰대들 흰머리는 찰랑 찰랑 할텐데, 내 머리는 빗자루 같으면 창피하잖아." 지완은 몸을 일으키며 은재에게 다가서려 했다. "어, 일어서면 안돼. 너 얼굴에 팩했잖아." "아차차." 몸을 일으키던 지완은 그대로 다시 침대에 누우며, 애처로운 눈길로 은재를 쳐다보았다. "은재야~" 지완은 긴 팔을 쭉 뻗어 은재의 옆구리를 찔러댔다. "왜?" "너 오늘 왜 이렇게 예쁘냐?" "웬 아부?" "아부 아니고 진짠데. 우리 은재, 한복 입고 있으면 너무 예뻐." 지완의 말에 은재는 눈을 흘기며 지완을 째려봤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하지 그래?" "아냐~ 정말이야~" "9 년 전에 생각 안나? 한복 입은 모습이 꼭, 궁전의 무수리 같다고 놀려댄 사람이 누구더라?" "아니, 그땐……." "헤어 팩 해줄 테니까, 그런 입에 발린 소린 하지 마셔!" "아닌데. 진짜로……." 은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은재 형편으로는 한복을 준비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동네 세탁소에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빌린 것이 파란 치마에, 하얀 저고리의 한복이었다. 세탁소 아저씨 말로는 누군가 맡겨두고 안 가져갔다는 말을 하면서 친절하게 늦어도 된다는 말을 하시며 은재에게 빌려주었다. 은재는 그 한복을 보며 안 가져 갈 만도 하다며 한숨을 폭 내쉬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들고 학교에 간 것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반장이 시범을 보이라는 선생님의 말에 쭈삣 쭈삣해서는 큰절을 하기 위해서 앉았다가 일어섰는데, 유독 큰 목소리가 자신의 귓전을 때리는 것이 아닌가? "제 무수리 같애." 은재는 순간,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그만 중심을 잃고 벌러덩 넘어지고 말았다. 친구들과는 자신의 한복을 가지고 우스개 소리도 하곤 했었지만, 그 애한테만큼은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정도로 좋아했던 아이, 김지완. 그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은재의 얼굴을 달아올랐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덕분에 그 많은 아이들 앞에서 벌러덩 넘어지는 쪽팔림까지 감수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은재가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괜시리 지완이 한복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잊고 싶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은재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헤어 팩을 해달라며 분위기 파악 못하고 자신의 옆구리를 찌르며 장난을 치고 있는 지완의 얼굴을 째려보았다. '이그, 이걸 죽여 살려?' 은재는 갑자기 지완의 팔을 끌어 당겨 꽉하고 물어 버렸다. "으아악!" 갑작스런 은재의 공격에 지완은 펄쩍 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뭐야?" "씻어. 시간 다 됐어." "왜 갑자기 사람을 물고 그래?" "애정 표현이야. 어서 가서 씻어." 지완은 얼굴을 한껏 찡그리고는 애정 표현도 유별나다며, 중얼거리며 욕실로 사라졌다. 벗기면 벗길수록 새살이 나오는 양파처럼, 지완은 이해할 수 없는 남자였다. 반강제적으로 시작한 결혼이지만, 뭐 이런 게 결혼이라면 한번 해 볼만하겠다는 생각이 은재의 머릿속에 들기 시작했다. 10. 키스하는 남자 "새하얗게 눈이 내린 날이었어. 차를 타고 집을 향하고 있었는데, 차창으로 까만 코트에, 하얀 털모자를 쓰고, 하얀 벙어리 장갑을 낀 여자아이가 집 앞에 서서 발을 동동거리며 떨고 있는 거야. 그게 예석이를 처음 본 날이었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를 본 느낌이었지. 그 커다란 눈망울하며, 새하얀 피부,……." "새빨간 입술? 아주, 어린놈이 음탕해요. 10 살 짜리 소녀를 보고 경건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꼭 그런 생각만 해요!" 침대에 누워 머리에 뒷짐을 지고 옛날 생각에 젖어 있던 지완은 은재의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뜨며 은재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왜 기분 좋은 상상을 망치고 그래?" "하도 들어서 귀가 따가워서 그런다. 다음 구절 외워 볼까? 차를 세워서, 황급히 소녀한테 뛰어가서 이름을 물어보았는데, 소녀가 와들와들 떨고 있더라. 맞지?" "어. 역시 우리 은재는 너무 똑똑하다니까." "레파토리를 좀 바꾸던가, 다른 이야기 좀 해봐. 그렇게 예석이랑 추억이 없냐?" 은재의 말에 지완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얘기? 많지. 어떤 얘기 해줄까?" "됐어. 그만 둬. 그렇게 할 일 없으면 아래층 내려가서 아이스크림 좀 갖다 줘."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그러니까 갖다 달라고 하지." "알았어." 지완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재빨리 문을 열고 사라졌다. 지완을 바라보는 은재의 얼굴에 근심 어린 어둠이 깔려 있었다. '바보 같은 놈. 너 싫다고 떠난 여자, 뭐가 그렇게 좋다고 매일매일 추억을 되씹는 부질없는 짓이나 하고.' 은재는 지완의 저런 모습은 제일 볼 상 사나웠다. 이게 무슨 추태도 아니고, 가끔씩 넋 나간 사람 마냥 중얼중얼 옛날 일을 회상하고 있을 때면 은재의 가슴에서 울화통이 터지곤 했다. 요 며칠은 잠잠하더니, 오늘은 아주 초저녁부터 레파토리를 자르르 읊을 분위기였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런 싹은 미리 잘라줘야 귀가 괴롭지 않았다. 지완에겐 미안하지만, 이젠 한번만 더 지완의 이야기를 들어주다가는 내가 미쳐 버리던가, 지완의 얼굴에 주먹이 날라 갈 것만 같았다. '한심한 놈하고는.' "은재야, 가져왔어."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지완이 쟁반에 아이스크림을 받쳐들고 들어왔다. 지완은 아주 말을 잘 듣는 아이였다. 가끔은 눈이 휙 돌아서 지킬 박사로 변신을 하긴 하지만 그럴 때는 제외하고는 은재의 말을 꼬박꼬박 듣는 편이었다. 은재보다 부지런하고, 몸도 빠릇 빠릇해서 부려먹기는 참으로 편한 인간이었다. "이리 와. 오랜만에 영화나 보면서 먹자." 지완은 침대 위에 자리를 마련하며, 화장대 앞에 앉아 있는 은재를 불렀다. "잠깐만." 은재는 막 샤워를 마친 터라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고 있었다. "안 발라도 예뻐. 아이스크림 녹는 단 말야. 빨리 와." "잠깐만." 은재는 손을 빨리 해서 화장품을 찍어 발랐다. 은재가 화장품을 다 바르고 돌아서자, 지완은 아이스크림 숟가락을 입에 물고는 은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 봐?" "화장 지운 여자가 더 예쁜 걸까?, 아니면 화장을 한 여자가 더 예쁜 걸까?" "지금 너 화장 지우니까, 무지하게 못 생겼다고 말하려고 하는 거야?" "아니. 난 지금까지 여자들은 다 화장빨이라고 믿었거든. 근데 우리 은재는 화장 지운 모습이 더 예뻐." "어쭈, 이제 아부하는 것도 좀 늘었는데?" 은재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침대로 다가와 지완의 곁으로 다가가 스푼을 들어 아이스크림을 스푼 한가득 퍼내서 입안에 넣었다. "달콤해." 은재의 입가에 미소가 한층 깊어졌다. 그런 은재를 바라보며 지완의 얼굴에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져나갔다. 지나치게 은재는 단 것을 좋아했다. 초코렛, 사탕, 아이스크림은 은재가 주로 군것질을 하는 품목으로 그런 은재 덕분에 지완도 없던 군것질 버릇이 생긴 터였다. 건강에 좋지 않다는 단점은 있었지만 그 재미가 솔솔해서 지완이 앞장서서 은재를 꼬신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왜 안 먹어?" tv 에서 나오는 코미디 영화에 한참을 깔깔거리던 은재는 지완이 아이스크림을 먹지도, 그렇다고 영화를 보고 있는 것도 아니란 것을 깨닫고는 아이스크림을 뜨던 손길을 멈추고는 지완을 쳐다보았다. "달콤할 것 같아." "뭐가?" "네 입술. 매일 매일, 초코렛, 사탕, 아이스크림만 먹어서 무지 달콤할 것 같아." 지완은 입맛을 다시며 은재의 얼굴을 뚫어질 것처럼 쳐다보았다. 은재는 지완의 시선에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난감해졌다. "은재야~" 어느 새 그들 앞에 놓여 있던 쟁반은 사라져 있었고, 지완은 애타는 시선으로 은재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 나는, 키스 싫어!" 은재는 질겁을 해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간, 강력한 힘이 은재의 손을 끌어 잡아 당겼다. "진짜로 달콤한 지 맛만 볼 거야!" 움찔거리는 은재의 손을 붙잡고, 지완은 마치 은재가 달콤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이라도


되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다가섰다. 차라리 은재는 자신이 아이스크림이었으면 좋겠다는 어이없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차라리 아이스크림이 되어 녹아 버린다면, 그 생각만 해도 역겨운 키스는 하지 않아……. 은재는 더 이상 생각을 하지 못하고 얼어 버렸다. 지완의 혀가 자신의 입가를 고양이처럼 살짝살짝 핥으며 은재의 입술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지완의 혀가 은재의 입안으로 들어와 이곳 저곳을 맛을 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지완은 은재를 모조리 맛 볼 셈인 모양이었다. 은재가 키스에 대한 기억은 역겹고, 불길하고, 더럽다는 인상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지완은 은재가 지금껏 가지고 있던 키스에 대한 인식을 한 순간에 불식시키고 있었다. 한달 전, 술에 취해 기습 키스를 하던 그 입술도, 며칠 전, 잠결에 일어나 장난스럽게 키스를 하던 그 입술도, 아니었다. 지금 지완의 입술은,……. "달콤해." 아쉬운 듯 지완이 은재의 입술에서 입술을 떼었을 때, 은재의 입에서 꿈결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달콤해. 무지, 무지 달콤해." 은재의 말에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지완이 대답했다. "또 해줘." "어?" "이번에는 내가 맛볼래." 지완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은재는 지완의 몸 위로 기어올라가서는 음흉한 시선으로 지완을 내려보았다. "이렇게 키스가 맛있는 건 줄 몰랐어." "좋았어?" "어." 은재는 대답과 동시에 얼굴을 내려 지완의 입술을 부딪혀 왔다. 그리고는 금새 지완이 했던 방식 그대로 지완의 입 속을 맛보기 시작했다. 아니, 지완의 입술을 이빨로 자근자근 깨물며 지완을 미치게 만들었다. "으, 은재야~" 신음소리 비슷한 음성으로 가까스로 지완은 은재의 이름을 불렀다. "왜?" 은재는 여전히 지완의 입술 맛을 보는 것을 멈추지 않고, 지완의 부름에 대답했다. "저기,……." 자신의 입술을 거칠게 탐하는 은재의 혀 때문에 지완은 좀처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할말 있단 말이야!" 급기야, 지완은 자신의 힘을 사용해, 전세를 뒤집어 은재 위로 올라왔다. 맘껏, 지완의 입술을 탐하던 은재는 갑작스럽게 지완이 움직이는 바람에 더 이상 지완의 입술 맛을 볼 수 없게 되자 뾰루퉁해서는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 그만 하자." "왜? 난 더 맛보고 싶단 말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단 말이야!" 지완의 이맛살에 빠직하고 주름이 생겼다. 아무래도 화가 슬슬 나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환상적인데 왜 이 놈은 화를 내고 그러지?


"내가 너무 오래 해서 그래? 그럼 이제 네가 해." "그게 아니라, 이제 더 맛보다가, 더한 것도 맛보고 싶어질 거 같아서 그래." "더한 게 뭔데? 이거 보다 더 좋은 키스가 있는 거야?" 입으로는 이 남자, 저 남자 만난 것처럼 말하고 다니지만 정작 남녀 관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몇 번의 섹스 경험과 진절머리 날 만큼 역겹던 키스에 대한 기억과 책에서 본 것이 전부인 은재, 그에 비해 평생 예석이라는 여린 꽃만 사랑했다고 주장하는 데 반해 그의 몸은 너무 여러 여자를 알아버린 지완. "키스 아니야. 너도 알잖아. 이거." 지완은 은재의 손을 자신의 남성으로 이끌었다. 부풀대로 부풀어 바짝 성이 올라 은재의 손이 닿자마자 미쳐 날뛰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이, 이제는 못 참아. 그러니까, 여기서 그만해." "키스만 하자." "키스만으로 못 끝내니까 그렇지!" 지완이 인상을 구기며 화를 내며 은재 옆으로 내려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은 키스만 하고, 내일은 그거 하자." "내일?" "어." 은재의 제안에 지완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곧 표정이 풀어져서는 실실거리며 은재를 쳐다보았다. "키스 조금만 더 하다가 하면 안될까?" "싫어. 난 오늘 키스가 땡긴단 말야." "그래도……." "싫어? 그럼 관둬. 나 잘래." "아니, 아니. 하자. 키스하자. 내가 먼저 할까?" "아니. 내가 먼저 할거야." 지완의 승낙에 은재는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해서는 지완의 입술을 덮쳐 버렸다. 은재는 만찬을 즐기듯 조금씩, 조금씩 지완의 숨결을 들여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황홀한 고문이 진행될수록 지완의 하체는 발광을 하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들아, 조금만 참아. 조금만. 내일, 내일이면……. 으윽…….'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그런 똑똑한 은재한테, 아무래도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친 것 같았다. 매일 밤 이렇게 달려들어서 키스를 하자고 하면, 이제 그 사태를 어떻게 책임을 진단 말인가? "이제 내가 해." 은재의 이 투철한 페어 플레이 정신! 그러나 지완은 전혀 이런 은재가 반갑지가 않았다. 지완은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지만, 마지못해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은재에게 키스를 하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기대감에 부풀어 반짝이는 눈동자, 지금까지의 열렬한 키스에 반지르르한 입술, ……. 아씨, 진짜 미치겠다! 지완은 은재의 입술에 머물던 입술을 떼어 은재의 눈으로, 볼로, 귓불로 혀를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재야~" 지완의 입술이 은재의 오른쪽 귓불을 핥다가 가느다란 목선을 따라 목을 한참을 괴롭히다가, 다시 목선을 타고 올라가 은재의 왼쪽 귓불을 핥기 시작했다. "은재야~"


"거기는, 하지마. 기분이 이상해." 키스에 안달을 하던 은재가 지완이 왼쪽 귓불을 깨물기 시작하자,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말을 내뱉었다. "여기가 네 성감댄가 본데?" 지완은 은재의 거부를 무시하며, 짓궂게 왼쪽 귓불만을 집중공략해서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자 금새 은재는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지완에게 매달렸다. "하아, 하아, 이, 이제 내 차례야." 은재는 지완을 가까스로 밀어내며 다시 지완이 하던 그대로 지완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 방법도 맘에 들어." 은재의 혀가 지완의 목덜미를 깨물며 말했다. 지완은 은재의 말에 끙, 하고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절규했다. "넌 여기가 성감댄가 보네." 지완의 신음소리에 은재는 기쁜 내색을 하며 지완의 목덜미를 더욱 집중적으로 핥기 시작했다. '오, 아부지. 내, 내일. 조금만 기다리면,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러나 그런 지완의 기대와는 달리 한참을 키스에 매달리던 은재는 제 풀에 꺾여 채 12 시가 되기도 전에 잠에 골아 떨어졌다. 12 시가 땡 치기만을 학수고대하던 지완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완이 은재를 깨우기 위해 아무리 용을 써도 눈 깜짝하지 않고, 단잠에 빠져 버린 것이었다. "일어나! 정은재, 일어나!" 지완은 분통을 터트리며, 은재를 찌르고 난리를 쳤지만 은재는 지완의 기대를 져버리고 점점 더 꿈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내일이란 말이야. 얼른 일어나. 정은재, 정은재!"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그 이름은 바로, 키스빨만 세우다가 잠이든 그 여자 바로 정은재였다. 지완은 더 이상 은재를 깨우는 것을 포기하고, 잠을 청하기로 맘먹었다. 그러나 그것이 영 쉽지가 않았다. 자기 욕구만 채우고 낼름 잠이든 은재를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라 분통이 터지고, 주제 파악을 못하는 자신의 아들놈은 사그라들 생각은 안하고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어느 것 하나 자신의 뜻을 따라 주는 놈이 없었다. 지완은 이불을 확 밀치고 일어나 욕실로 뛰어 들어가 옷을 벗어 젖히고 온몸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찬물을 뒤집어썼다. '정은재. 정은재. 정은재. 너 눈만 떠 봐.' 다다다, 떨리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지완은 전의를 불태웠다. 오늘밤은 아주 긴, 긴 밤이 될 것만 같았다. 어느 정도 미쳐서 날뛰는 아들놈을 진정시키고 밖으로 나왔을 때, 지완은 추위로 오돌오돌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불 속으로 뛰어 들었다. 여전히, 은재는 얼굴 가득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 은재의 모습을 보니 지완도 조금은 맘이 풀리는 듯 했다. 아기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잠이 든 은재의 모습은, 결혼을 하고 밤마다 자신보다 먼저 잠이 드는 은재를 보며 지완이 느끼는 하나의 또 다른 즐거움 중에 하나였다. 도대체 어떤 꿈을 꾸길래, 이리도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달콤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건지.


지완은 멀찍이 떨어져 잠이 든 은재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은재의 이마에 살짝 키스를 해주었다. "너 오늘 너무 심했어. 날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너만 잠들면 어떡하냐. 사악한 마녀 같으니라고. 정은재, 너 내일은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지완은 은재를 더욱 자신의 품으로 끌어 앉으며 나른한 하품을 내뱉으며 잠을 청했다. 11. 불타는 남자 "늦잠꾸러기, 빨리 일어나! 해가 중천에 떴어요!" 지완은 이불을 끌어당기며 이불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일어나. 안 일어날거야?" 그의 볼에 차가운 무언가가 다가왔다. 부드럽게 자신의 얼굴을 핥는 느낌. 지완은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일어났네." 이미 오래 전에 일어났는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은재가 침대에 걸터앉아 미소를 짓고 있었다. "키스해 줘." 꿈인가, 현실인가, 아직도 긴가민가해서 어리둥절해 있는 지완을 향해 은재는 그렇게 말했다. 지완이 아직도 어정쩡하게 눈을 껌뻑이고 있자, 은재가 대뜸 지완의 입술에 입을 맞춰왔다. "찜찜해." 짧은 키스를 마친 은재가 얼굴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치질하고 나서 할걸." 입맛을 다시며 일어서는 은재를 지완이 손을 잡았다. "내일." "어?" "내일이잖아." 지완은 그 말과 동시에 은재를 잡아끌어 침대에 눕혔다. "내일은 그거하자고 약속했잖아." 지완은 은재의 키스로 말미암아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어젯밤, 야속하게 잠이든 은재를 보며 잠을 뒤척이다가 결국 새벽에서야 잠이 들었는데 은재가 깨어나면 안겠다는 그런 야심 찬 계획은 밀려드는 잠으로 말미암아 도로아미타불이 되었고, 이제사 잠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지완은 은재의 허리에 매달린 앞치마를 푸르며, 은재의 왼쪽 귓불을 깨물기 시작했다. "느, 늦었어. 내려가 봐야 한단 말이야." "어차피 내려가도 보고 있잖아. 하루 정도는 안 내려가도 뭐라고 하진 않으실 거야." 지완은 앞치마를 풀러서 저 멀리 던져버렸다. 지완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 옷고름이 얼마나 풀러보고 싶었는지 알아? 얼마나 음흉한 이몽령이 되고 싶었는지 알아?" 지완은 음흉한 시선으로 은재의 옷고름을 재빨리 풀러내기 시작했다. "안돼. 늦는다니까." "금방, 할 거야. 금방." 지완은 은재의 거부를 무시하며 은재의 저고리를 벗겨냈다. 그리곤 은재의 목에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예뻐. 우리 은재." 지완은 치마의 끈을 푸르며 끊임없이 은재의 가슴 주변을 혀로 애무하기 시작했다. "뭘 이렇게 많이 입은 거야?" 드디어 치마를 풀어낸 지완은 치마를 집어던지곤, 다시 나타난 속치마와 속바지를 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진짜 늦겠다. 은재야, 너도 도와 줘." 지완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은재의 손을 끌어 자신의 잠옷으로 이끌었다. "빨리~" 머뭇거리는 은재의 손길을 끌며, 은재의 왼쪽 귓불을 핥으며 지완이 뜨거운 숨결을 뱉어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은재도 부끄러움을 떨쳐버리자 지완이 이끄는 대로 따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지완과 은재는 태고적 모습을 드러낸 채 서로의 몸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길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하얀 피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예뻐." 그의 목에서 허스키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도 예뻐." 이에 뒤질세라, 그녀는 그의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대꾸했다. 그녀의 손길에 그는 깊은 신음을 내뱉으며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왔다. 남자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가슴 위로 입술을 미끄러트려 핑크 빛 유두를 핥기 시작했다. 까르륵, 여자가 남자의 가슴을 부여잡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간지러워." "웃지마." 남자는 여자의 다른 가슴을 손으로 보듬으며 웃음을 터트리는 여자의 입을 자신의 입으로 막아버렸다. 남자는 여자의 몸을 따라 손을 내려 여자의 여성을 매만졌다. 촉촉하게 젖은 여자의 여성이 느껴지자 남자는 여자의 다리를 벌리며 자신의 하체를 밀착시켰다. "은재야~" 여자의 몸 속으로 파고들며 그는 애타게 그녀의 이름을 불러댔다. "하아. 하아." 곧 여자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은재야." 잠시 동작을 멈췄던, 남자가 여자의 몸 속에서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씩, 점점 빠르게 남자가 몸을 빨리 해 여자를 격정 속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펑펑! 폭죽이 터졌다. 그와 그녀는 동시에 절정의 환희를 맛보며 무너져 내렸다. 열정의 끝자락을 잡으며 그는 끊임없이 그녀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땀에 젖은 그들은 그 속에서 무한한 편안함을 느끼며 서로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서로를 안고 한참을 누워 있었다. "좋았어?" "어." 지완은 은재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은재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지완은 다시 한번 은재를 품안에 꼭 안아 주었다. 가슴 가득히 뜨거운 무언가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형!" 다시 지완이 은재의 귓불을 핥으며 불을 지피려는 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유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수님! 아직 안 일어나셨어요? 식사하……." "일어났어요. 금방 내려갈게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지완과 은재는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몇 시야?" "8 시 되기 10 분 전." "거봐! 내가 늦는다고 했잖아." 은재와 지완은 샤워기 밑에 함께 들어가 황급히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미안해." 지완은 비누 거품을 일으켜 은재의 몸을 씻겨 주며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그와 중에도 은재의 목에 키스를 퍼부으며. "늦겠다. 밥도 못 먹고 이게 뭐야." 은재는 화장대에 앉아서 화장을 황급히 하면서 지완에게 투덜거렸다. "데려다 줄게." "당연하지." 황급히 손을 놀리는 은재의 뒷모습을 보며 지완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이렇게 웃음이 계속해서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회사에 갈 시간이 턱없이 늦어 버렸는데, 아침도 먹지 못하고 출근을 하게 생겼는데, 왜 이렇게 맘은 여유롭고 행복한 기분이 드는지 지완은 도대체 그 연유를 알 수가 없었다. 20 분 후, 지완과 은재는 부리나케 현관을 빠져나가며, 외쳤다. "다녀오겠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어쩐 일인지 지완은 은재의 설거지를 도와주겠다며 마지막까지 주방에 남아 은재의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내가 씻을 테니까, 네가 물에 헹궈." "알았어." 은재는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러나 웬걸 도와주겠다고 말하던 지완은 그릇을 헹굴 생각은 하지 않고 은재 뒤에 찰싹 붙어서 은재의 왼쪽 귓불을 핥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저리 좀 떨어져." "싫어." 지완은, 은재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은재의 허리를 잡으며 더욱 가까이 다가섰다. "방해된단 말이야." "싫어." 계속해서 지완은 싫다는 말만 내뱉으며, 손 하나를 은재의 치마 속으로 밀어 넣었다. "너무 많이 입지 말란 말이야." 지완은 은재의 귓가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으며 투덜거렸다. "그만해." "뭘?" 지완은 입술을 은재의 목으로 미끄러뜨리며 딴청을 부렸다. "지금 일하고 있잖아. 그만 하라니까."


"해. 누가 뭐래?" 말과는 다르게 지완은 은재의 옷고름을 풀어 헤쳤다. "뭐 하는 거야?" 은재는 닦고 있던 그릇을 든 체로 화가 나서 지완을 향해 돌아섰다. 그 순간, 지완은 기다렸다는 듯이 은재의 입에 입을 맞춰왔다. "달콤하지. 밥 먹고 초코렛 먹었다. 잘했지?" 배시시 지완은 입술을 떼고 은재 앞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잘했다. 잘했으니까, 방에 올라가 있어. 설거지만 하고 올라갈 테니까." "싫어. 설거지 도와준다니까." 그러나 지완은 또다시 은재의 입술에 입술을 포개고 있었다. "어쩐 일로 형이 설거지를 다한다고 하나 했다~" -쨍그랑 긴 키스를 나누고 있을 무렵, 등뒤에서 유완의 장난스런 목소리가 들려오자, 유완과 눈이 마주친 은재는 깜짝 놀라서 들고 있던 접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접시는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고, 지완은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는 동생을 향해 돌아섰다. "김유완!" "왜?" "넌 눈치도 없어?" "……." "알아서 피해가도 모자랄 판에 분위기를 깨!" "미안해." 지완의 서슬 퍼런 고함 소리에 유완은 움찔해서 사과를 했다. "설거지 네가 해. 바닥도 깨끗이 치우고. 알았어?" "아니에요. 도련……. 어, 엄마야~" 은재가 지완의 말을 반박하며 유완의 편을 들어주려고 하자 지완이 번쩍 은재를 안아 올려 버렸다. "네가 해!" 지완은 유완을 째려보며 무시무시한 어투로 명령했다. "알았어." "우린 올라가자. 은재야." 금방 그렇게 화를 내던 사람이 은재를 향해서는 어리광을 피우며 즐겁게 말을 하고 있었다. "올라간다. 잘해." 다시 지완은 인상을 구기며 유완을 째려보며 말을 하고는 은재를 안고서 주방을 빠져 나왔다. "은재야, 나 잘했지?" 유완은 들었다. 그렇게 자신을 향해 화를 내고 소리를 치던 형이 주방을 빠져나가자마자 형수님에게 고개를 숙여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하고 있는 닭살스런 형의 목소리를. "잘하긴 뭘 잘해?" 유완은 또 들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형을 아이처럼 질책하는 어머니 같은 형수님의 엄한 목소리를. "밤이 짧아. 밤이 짧아."


유완은 또다시 들었다. 쿵탁쿵탁 소리를 내며 형수님을 안고 2 층으로 사라지는 음흉한 형의 목소리를. "휴~" 유완의 입에서 깊은 한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좋아해야 하는 건지, 싫어해야 하는 건지, 판가름할 순 없지만 단 하나 확실한 건 자신이 빠른 시일 내에 조카를 얻게 될 거란 사실이었다. "휴~" 수북하게 쌓인 그릇들을 보며 유완은 다시 한번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지완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은재를 침대에 앉히고는 재빨리 은재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급한지 지완은 한눈도 팔지 않고 은재의 옷을 벗기는 일에만 열중했다. 처음엔 지완의 행동에 거부를 하며 몸을 빼던 은재도, 지완이 너무나 심각하게 자신의 옷을 벗기자 그대로 지완이 하는 대로 두고 하고,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지완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지완은 은재가 속바지와 브레지어만을 남기고 침대 위에 앉아 있자, 그제서야 은재의 얼굴을 쳐다보곤 은밀한 미소를 짓더니, 자신의 옷을 빠르게 벗기 시작했다. 여전히 성급한 손길로 자신의 옷을 벗는 바람에 몇 번이고 셔츠의 단추를 여는데 실패를 하자 이제는 아예 셔츠 깃을 잡고 옷을 뜯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은재의 입에서 까르륵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어느새, 자신의 옷을 다 벗은 지완은 달랑 팬티 하나만을 걸친 채 은재를 침대 위로 밀쳐 버렸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여전히 싱글거리며 있는 은재를 내려다보며 지완은 으르렁거렸다. "네가 이렇게 서두르는 모습이 웃겨서."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웃기는." 지완은 입을 삐쭉거리더니, 은재의 가슴위로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가슴 위로 자잘한 키스를 뿌리며 지완은 차츰 은재의 입술위로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지완이 열기가 오르면서 은재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한 찰나,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완이 주는 열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던 은재는 익숙한 노랫소리에 지완을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화 왔나봐. 잠시만." "나중에 받아도 되잖아." 자신의 품안에서 빠져나가는 은재의 손을 붙잡고 지완이 벌컥 화를 냈다. "안돼. 중요한 전화일지도 모른단 말이야. 잠깐만 기다려." 활활 타오르고 있는 지완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여자는 지완의 손을 뿌리치고 얄미운 전화기가 놓인 화장대로 뽀로로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지완은 순간 허탈해져서는 침대 한 가운데 망연자실해서는 누워 버렸다. 어떻게 그 순간에 자신의 품을 떠날 수 있는 거지? 지완은 여전히 타 들어갈 것처럼 화끈거리는 자신의 하체를 물끄러미 쳐다보곤 벌떡 일어나 앉아 은재를 쏘아보았다. "너무 하잖아. 전화가 뭐가 중요하다고. 이렇게 버리고 가면 나보고 어쩌……." 그러나 그런 지완의 투정은 은재가 핸드폰의 수화기를 들면서, 손가락 하나를 펴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냄으로 인해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으이씨, 지완은 베개를 들어 침대 위를 내려치면서 화풀이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아, 엄마? 그럼 잘 있어요. 밥도 잘 먹고, 회사도 잘 다니고……." 은재는 지완에게 눈을 흘겨 떠 보이며 협박을 하고는 고개를 돌려 계속해서


전화통화에 몰두했다. 지완은 그런 은재의 눈흘김에 잠깐 주눅이 들었으나 곧 원기 회생하여, 침대 위에서 몸을 꼬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프린스 호텔, 2 시. 음, 알았어. 알았다니까." 한참을 통화를 하던 은재가 메모지를 꺼내 들어 무언가를 적더니,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몸 건강하시고요." 통화를 끝낸 은재는 한참을 멍하니 화장대 앞에 앉아서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은재를 침대에 앉아 쳐다보는 지완의 눈에선 불길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누구야!" "어. 음, 엄마." "엄마? 안 계신다고 했잖아." 지완의 질문에 은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음울한 얼굴로 지완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있어. 설명하긴 좀 복잡한데 그런 게 있어.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마라. 다친다 아그야~" 한순간 어두웠던 얼굴이 밝아지면서 은재는 고개를 돌려 뾰루퉁한 얼굴을 하고 침대 위에 베개를 괴고 앉아 있는 지완을 쳐다보았다. "어디까지 했더라?" 마치 중단했던 수업을 다시 하겠다고 선언을 하는 선생님처럼 은재는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다가섰다. 그런 은재를 보며 지완은 몸을 돌려 돌아앉아 버렸다. "삐쳤어?" "……." "미안." "잘 거야." 지완은 은재를 무시하며 그대로 베개를 끌어 앉고 픽 쓰러졌다. "진짜 그대로 잘 거야?" "찬물을 뒤집어 쓴 거 같아. 하고 싶은 맘이 사라졌어." "정말?" "그래." 무뚝뚝한 지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 그런데 어쩌지, 난 지금 무지하게 땡기는 데 말야." "피~" 지완은 콧소리를 내며 베개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아무래도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은재가 이렇게 구슬렸는데도, 화를 풀지를 않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물러설 은재가 아니었다. 은재는 돌아누운 지완을 보며 코웃음치더니 지완이 돌아누운 쪽으로 다가섰다. "하기 싫다는 사람한테 어쩔 수 없겠지만……." "너, 너 뭐 하는 거야?" 지완은 브래지어의 끈을 한쪽씩 내리면서 자신에게 다가서는 은재를 보며 지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혹하는 거지." 은재는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어 완전히 자신의 가슴을 노출시키곤, 브래지어를 지완의 얼굴로 던져버렸다.


"가슴도 작으면서……." 지완은 투덜거리면서도 흘낏 흘낏 은재의 가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맘에 안 들어?" 은재는 지완의 바로 코앞에 앉아서 뚫어지게 지완을 응시했다. 그리곤 손을 뻗어 지완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이끌었다. 지완은 잠깐 동안 은재가 이끄는 대로 손을 가만히 있다가, 조금씩 손을 움직여 은재의 가슴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만 둘까?" 은재는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기 시작한 지완을 쳐다보며 요염하게 웃어 보였다. "아니."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지완은 은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은재를 침대로 밀어젖히며 황급히 은재의 몸에 걸친 나머지 옷들을 걷어 내버렸다. "요부!"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닌데." 지완이 은재의 왼쪽 가슴을 빨며 중얼거리자, 은재는 지완의 머리카락에 손을 파묻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후, 방안 가득 남자와 여자가 불러일으키는 열기로 가득 찼다. 남자의 기다란 손가락이 스치는 곳마다 곧이어 남자의 입술이 뒤따랐고, 남자의 손길에 여자는 연신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남자는 여자가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 인형이라도 되는 것 마냥 조심스레, 부드럽게 여자를 보듬어 안기 시작했다. "은재야" "은재야" 남자의 목소리가 애절하게 방안에 울려 퍼졌다. 그런 목소리에 대답해 여자는 열렬하게 반응하며 남자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곧, 남자와 여자는 절정으로 치달아,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로의 몸에 기대어 체온을 느끼던 남자는 자신의 가슴을 흥건히 적시는 액체에 놀라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우, 우는 거야?" "……." 지완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은재를 쳐다보며 어쩔 줄 모르고, 당황했다. "왜, 왜 울어?" "……" 여전히 은재는 눈물을 흘리며 아무 말이 없었다. 계속해서 지완이 은재를 쳐다보며 대답을 촉구하자 그대로 고개를 돌려 손을 올려 눈물을 닦아 낼뿐이었다. "은재야." "어?" "내가, 너한테 무슨 잘못……." "아니. 아니. 너 잘못한 거 없어.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네가 이렇게 부드럽게 안아주니까 옛날 생각이 나서." 은재는 눈물을 훔치며 애써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지완을 올려다보았다. "옛날 생각?" "내가 첫 경험했을 때, 갑자기 그때가 생각나서." "그 남자가 잘해 줬나보네." 은재의 말에 금새 지완은 팩 하고 토라져서는 돌아누워 버렸다.


"하이드씨, 그렇게 화낼 일이 아니네요." "그럼 그때 생각을 왜 해. 기분 나빠." 툴툴거리며 지완은 몸을 들썩거렸다. "대학 졸업하고 얼마 지나서 그런 일이 있었어. 전부터 호감을 가졌던 사람이라서 내 처녀성을 준다는 것에 대해서 별 망설임이 없었던 거 같아. 그 사람이 날 돌아봐 주었다는 사실에 난 기뻤으니까." "그만해. 듣고 싶지 않아." "그런데 막 사랑을 나누고 나서 절정의 순간에 다다랐을 때 그 남자가 부르는 이름은, 내 이름이 아니었어. 그 사람은 술에 취해서 내가 아닌 자기가 짝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어. 그때의 그 비참함이란……." "……" "네가……내 이름을 불러 주니까, 괜시리 옛날 생각이 나서 주책없이 눈물이 흐르는 거 있지. 나도 참, 분위기 파악도 못하지. 옛날 이야기를 꺼내서 어쩌자는 건지. 미안해." 은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끝맺었다. "병신 같은 새끼야. 그런 놈은 생각도 하지마. 어떻게 너를 그렇게 취급할 수 있어? 병신, 머저리, 쪼다 같은 새끼야. 잊어 버려. 그런 기억 잊어버려." 지완은 몸을 돌려 은재를 품안에 안아 주었다. "내가 아는 여자 중에서 너처럼 대단한 여자가 없어. 이런 보석을 못 알아보는 놈은 개천에 코 박고 죽어 버려야 해. 아니다. 어떤 새끼야. 내가 가서 두 다리를 확 뽀샤 버릴까 보다." "아니. 아니 됐어. 이걸로 됐어. 잊었는 걸. 벌써 잊어버린 지 오래인 걸." 은재의 목소리에선 쓸쓸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 은재의 맘을 알아차렸는지 지완은 더욱 힘을 주어서 은재를 품안에 안아버렸다. "첫 경험 그거 별거 아니야. 그렇게 가슴에 품고 있을 그런 대단한 것이 못된다고." "그런 건가?" "그러엄~ 난 어땠는지 알아? 고등학교 2 학년 때 친구 5 명이 모여서 만원씩 모아서 한 명씩 붉은 집에 보내주기로 했는데 말야." "성질만 더러운 줄 알았는데, 어렸을 때부터 음흉하기까지 했네." 은재의 빈정거림에 지완은 잠시 은재를 흘겨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제비뽑기를 했는데, 내가 가장 마지막에 걸린 거야. 그래서 5 주만에 내 차례가 왔는데, 글쎄 그 중에 한 놈이 7 천 원 밖에 돈을 안 가져온 거야." "그래서?" "그래서 뭐 어떻게 해. 그냥 붉은 집 가서, 사정사정 했지. 그랬더니, 늙은 창녀가 하는 말이 단골이라서 봐 준다나. 그래서 4 만 7 천 원에 동정을 잃었지 뭐야. 그 뒤로 친구 녀석들이 4 만 7 천 원, 4 만 7 천 원 하고 어찌나 노래를 부르던지. 그땐 그게 뭐가 좋다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에휴~~" "쿡쿡쿡" 지완의 말에 은재는 지완의 품속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웃는 거야? 너 금새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되는 지 알아?" "어떻게 되는데." "엉덩이에 뿔나지. 어디 좀 볼까?" "야아~" 지완과 은재는 엎치락뒤치락 하며 다시 침대 위에서 뒹굴기 시작했다.


방안 가득히 낭랑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12. 질투하는 남자 일요일 아침. 어젯밤은 아주아주 기나긴 밤이었다. 계속해서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은재의 모습을 생각하니 다시금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지완은 옆자리를 더듬으며 은재를 찾았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은재와 함께 방안에 틀어 박혀 온종일 햇살을 받으며 사랑을 나누리라. 벌써부터 지완은 그 은밀한 상상에 하체가 묵직해져 옴을 느꼈다. "은재야" 지완은 손을 더듬어 은재를 품에 끌어당기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아무리 손을 움직여도 빈 공간만 손에 짚일 뿐 좀처럼 은재의 몸이 손에 닿지 않았다. 지완은 욕설을 내뱉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지완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휑하니 빈 자신의 옆자리였다. "은재야!" 지완은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안을 휘 둘러보아도 은재가 보이지 않았다. "은재야!" 지완은 다시 은재의 이름을 불렀다. 그때, 딸깍 욕실 문이 열리며 은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입이 한발은 나온 뾰로통한 음성이었다. "일찍이라니, 지금이 몇 신데." "더 자자. 일요일이잖아." 지완은 하품을 하며 은재를 설득했다. "안돼. 나 약속 있어. 나가봐야 해." 은재의 말에 지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재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은재는 벌써 나갈 준비를 다 마친 듯 머리를 틀어 올리고, 정장을 쫙 빼 입은 모습이었다. 지완은 이맛살을 구기며 침대에 도로 드러누워 버렸다. "안 나가면 안돼. 나 심심한데." "안돼. 일주일전부터 있었던 약속이라서 나가 봐야해." "나도 갈래." 지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금새라도 은재를 따라 나설 것처럼 눈을 번뜩였다. "내가 어디 갈 줄 알고 따라온다는 거야?" "너만 재밌는데 가서 놀려는 거잖아." "아니야." "그럼 어디 가는 건데?" 지완의 끈질긴 질문에 은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 입을 열었다. "선 보러." "선?"


은재의 대답에 지완은 경악해서 입이 크게 벌어졌다. 순식간에 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그래. 선보러 간다고." "너, 너 유부녀야! 근데 무슨 선을 보러 간다는 거야? 너 미쳤어?" "알아. 근데 문제는 우리 엄마한테 난 그저 26 살의 노처녀일 뿐이거든." "안나간다고 해." "내가 선 자리에 나가서 좋은 남자 만나길 바라시는 게 울 엄마 소원이신데, 내가 어떻게 그러냐. 나도 뭐 그렇게 좋아서 이런 자리 나가는 건 아니야. 우리 엄마 안심하시라고 이렇게 나가는 거지." 은재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완을 바라보았다. 지완은 지금 이 사태가 정말이지 맘에 들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은재는 자신과 함께 하루 종일 방안에서 사랑을 나눌 예정이었는데, 이게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 람. 선? 선을 본다고? 아무리 시한부 결혼 생활이라고는 하나 엄연한 유부녀의 신분으로 선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나가지 마. 아니 못 나가." 지완은 소리를 버럭 질러댔다. 그리고는 문 앞에 두 팔을 벌리고 섰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지완의 목소리만큼 커다란 목소리로 은재 역시 소리쳤다. "뭐 하는 짓이긴, 말도 안 되는 짓거리 하러 가는 너, 그런 짓 못하게 막는 거지." "짓거리? 그런 짓? 너 말 다했어?" "그래 다했다. 그럼 네가 하는 일이 지금 정상적인 행동이야! 한번 어디 나가서 물어봐라. 유부녀가 선보러 간다는 게 말이 되는지." 지완의 말에 은재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김지완, 왜 남편처럼 핏대를 세우면서 난리야. 너와 나 아무 것도 아니야. 그저, 조건에 의해서 잠시 혼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라고. 잊었어, 우리 계약 조건? 그리고 그 두 번째,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는다. 넌 지금, 그 두 번째 조건에 위배되는 짓을 하고 있는 거야." "……" "할말없지? 저리 비켜. 약속 시간 늦는단 말이야." 지완은 은재의 밀침에 힘없이 옆으로 비켜섰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올 때 사다줄게." 고맙게도 은재는 문을 나서며 지완을 향해 질문을 해주었다. 그러나 지완은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보쌈 사다줄까?" "맘대로." "또 삐쳤어? 남자가 이렇게 잘 삐쳐서 어디다 쓸란가 몰라. 갔다 올게. 심심하면 방 청소 좀 깨끗이 해 놔." "알았어. ……일찍, 와!" 지완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말을 마쳤다. "알았어." 은재는 지완의 입에 입술을 맞추고는 돌아섰다.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지는 은재를 보며 지완의 가슴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다.


왜 이렇게 은재의 그 말이 자신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지 지완은 멍한 얼굴로 침대에 가서 누워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선을 보러간다는데, 자신의 아내가 되는 여자가 선을 보러간다는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서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입장이라니. 무언가 잘못 되도 한참은 잘못되었다. 기나긴 일요일 오후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형편없었다. 입을 열 때마다 하는 말이란 결국 자기 자랑뿐이었다. 거기에다가 은근히 자그마한 출판사에 다니는 은재를 비하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기름기 좔좔 흐르는 그 느끼함이란, 은재는 그만 먹고 있던 음식을 그대로 쏟아 버릴 뻔했다. -♪♬♩♪♬♩ 가까스로 남자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참고 있던 은재를 구해준 것은 때를 맞추어 울려댄 자신의 전화기였다. "잠시만요." 은재는 남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재미 좋아?] 지완이었다. 일요일에 자신만을 내버려두고 나온 것에 단단히 화가 나온 듯, 목소리는 무뚝뚝하기 그지없었다. "그냥 그렇죠 뭐." 은재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누군 좋겠다. 멋진 남자랑 만나서 맛있는 거 먹고.] "그렇게 좋지는 않아요." [난 침대에 누워 있는데. 아무 것도 걸친 게 없어. 섹시할 거 같지?] 지완의 얼토당토한 말에 은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거 같네요." [네가 올 때까지 이 모습으로 기다릴 거야. 네가 오면, 달려들어서 너의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길 거야. 나처럼 아무 것도 걸치지 않게.] "자, 잠시만요." 아무래도 통화가 길어질 모양이었다. 은재는 남자에게 사과를 하고 자리를 떠서 화장실로 향했다. "뭐 하는 거야?" [그리고 난 너의 왼쪽 귓불에 키스할 거야.] "김지완!"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내려 너의 온몸을 샅샅이 맛볼 거야.] "……" [네가 한 시간 안에 온다면, 내가 더 좋은 서비스를 해줄게.] "김지완, 그만해. 경고했어. 너 내가 집에 들어가면 죽는다!" 은재는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끊는다." 은재는 더 이상 지완의 말을 듣지 않고 전화기를 닫아 버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김지완!' 은재는 화끈거리는 뺨을 간신히 진정을 시키고 자리로 돌아왔다.


"죄송해요. 아는 언니가 전화를 해서……." 남자는 너그럽게 은재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시 자신의 자랑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몇 분이 흘렀을까 다시 벨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 [오일을 발라서 천천히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맛사지를 해줄게. 엄청 시원할 거야.] "잠시만요. 죄송합니다." 은재는 또다시 남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빠져 나왔다. [함께 목욕을 하고 너와 난 긴 사랑을 나눌 거야. 너의 온몸에 난 나의 낙인을 찍을 거야.] "김지완!" [오고 있는 거지?] "너 자꾸 전화해서 헛소리 할거야!" [너의 작은 가슴에 키스를 퍼부을 거야. 너의 작은 봉우리가 솟아올라 나를 갈구할 때까지, 끊임없이 너의 작은 가슴을 애무할 거야.] "너, 너……." [너의 작은 숲에 입술을 내려서 끊임없이 꽃물을 마실 거야. 너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겠지?] 은밀한 밀어를 쉼 없이 내뱉는 지완의 달짝지근한 목소리에 은재의 얼굴은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오고 있는 거지?] 사랑스러운 여인을 부르는 것처럼, 지완은 부드럽게 속삭였다. "안돼. 못 간단 말이야." [그만 하라고, 네게 사정할 때까지 너의 몸을 애무할 거야. 네가 나의 품에 안겨서, 안달할 때까지, 집요하게 널 괴롭힐 거야.] "갈 수 없단 말야." [오늘 밤 한숨도 잠을 못 자게 만들 거야. 끊임없이, 끊임없이 내 품에서 내 이름을 부르게 만들 거야.] "지완아~" 얼굴이 달아 오른 은재는 발을 동동 구르며, 화장실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출발했지?] "조금 있다가 갈게." [안 느껴져? 너의 입술에, 너의 가슴에 내 입술이 느껴지지 않아?] 얼굴이 화끈거리다 못해, 불이 일기 시작했다. [뜨겁지. 촉촉하게 젖어 들고 있지?] 속삭인다.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지완은 은재의 귓속에 은밀하게 속삭였다. [참을 수 없을 거 같아.] 에로틱한 목소리가 은재의 귀로 스며들었다. [오고 있는 거지?] 정말로, 지완의 말대로 촉촉하게 젖어 들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은재야~] 야시시한 신음소리와 함께 지완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더 이상 은재도 참을 자신이 없었다. 몹시도 지완의 품이 그리웠다. 지금 저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그 느끼하고, 자기 자랑에 여념이 없는 인간보다는 지완이 백 배, 천 배는 나을 듯했다. [은재야~]


다시 한 번 지완의 에로틱한 음성이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갈게. 지금 갈게." 은재는 황급히 전화기를 끊고, 자신을 기다리는 남자에게로 다가가 다짜고짜로 바쁜 일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남자의 표정을 보았지만, 그런 것을 배려할 만큼 여유가 있지 않았다. 은재는 호텔을 빠져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붉게 상기된 은재의 볼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집으로 들어선 은재는 자신을 부르는 아버님께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황급하게 2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찌나 서둘렀는지, 아침에 정성스레 말아 올린 머리는 어느새 풀어져 헝클어져 있었고, 어디서 부딪혔는지 스타킹도 올이 나가 있었다. 그러나 은재는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는 길이 오늘 따라 왜 이렇게 길게만 느껴지는 지. 시간은? 지완이 약속한 한시간에서 아직 10 분은 넉넉한 시간이었다. 택시 안에서 어찌나 택시 운전사를 재촉을 했던가? 헉, 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은재는 망설임 없이 방문을 열어 젖혔다. 은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 전화에서처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문이 벌컥 열리자 얼굴 가득 화사한 웃음을 머금은 채 은재를 향해 걸어오는 아주 아름다운 피사체였다. "너, 너 정말……." "맘에 들어?" 지완은 얼굴이 붉게 물들어서는 은재 앞에서 잠깐 서서는 멋진 패션 모델처럼 포즈를 취해 보였다. "맘에 들어. 무지하게 맘에 들어. 한번 뒤로 돌아봐." 은재는 작품을 감상하듯 지완의 나체를 샅샅이 눈으로 훑어 내렸다. 지완은 은재의 지시에 따라 잠깐 주춤했지만, 멋쩍은 듯이 뒤로 돌아섰다. "후후후" 은재가 지완에게 한발 다가서며 지완의 엉덩이를 찰싹찰싹 두들겼다. "1 등급이야." 은재의 칭찬에 금새 지완의 입은 함지박처럼 벌어졌다. 그런 지완의 미소에 은재의 얼굴에도 절로 미소가 어렸다. 항상 담고 싶었던 지완의 미소, 아마도 이 미소에 반한 모양이었다. 세상의 모든 시름을 덮을 만큼 막강한 미소의 위력. 그 미소에 은재도 언젠가부터 강하게 중독 된 모양이었다. "심술쟁이 하이드 씨. 꼭 그렇게 심술을 부려야 했어?" "난 착하게 기다렸어." 시치미를 뚝 떼며 지완은 은재의 상의를 벗기기 시작했다. "정말 착하게 기다린 거야?" 은재는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손을 내려 지완의 하체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지완의 입에서 헉, 하는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릴 적부터 음흉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변태기질까지 있는지 몰랐어." "나도 몰랐어." 지완은 어느새 은재의 상의를 다 벗겨서 은재의 가슴으로 입술을 내리고 있었다. "선 본 남자는 좋았어?" 지완은 끊임없이 은재의 가슴을 지분대며 손을 내려 은재의 치마를 벗기기 시작했다.


"무지 좋았지. 버터 바른 것처럼 느글대는 얼굴하며, 입을 열 때마다 자기 자랑을 끊임없이 해대는 멋진 남자였지." "사생활을 방해한 건가? 미안해서 어쩌지." "그렇지. 미안해야지. 근데 어째 약속한 서비스가 어째 시원치가 않다?" 은재의 말에 지완은 은재의 마지막 옷을 남김없이 벗겨내며, 은재를 번쩍 들어 안아 침대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지금부터가 시작입니다. 공주님~" 지완은 은재의 입술을 입으로 덮으며 환상적인 서비스의 첫 번째를 시작했다. 다시금, 은밀한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13. 분통 터지는 남자 지완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책상을 쾅쾅쾅 두드렸다. 손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너무나도 화가 나서 손이 아프다는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만큼 지완은 엄청나게 화가 나 있었다. 한달 전 말도 안되게 은재가 선을 보러간다는 말을 듣고, 분개했던 때보다 지금 지완은 훨씬 더 막강한 오로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겨우 한달 전이다. 은재가 선을 본다고 나갔던 것이. 그리고 그날 갖은 쇼를 해서 가까스로 은재를 늑대(?)로부터 무사히 보호를 했다. 그 뒤로 두 번 다시는 은재가 선을 보러 나갈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만큼 했으면, 아니 그 동안의 야릇한 밤들의 향연을 생각할 때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선을 보러 간다는 것은 절대로 다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웬걸 은재는 자신의 기대 아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일을 용감하게 오늘 해내고 있는 중이란다! 내참, 어이가 없어서. 어떻게 알았느냐……. 지금 자신의 화를 돋구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다름 아닌 은재가 이번에 선을 본 상대가 자신의 대학 동창인 김주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 장본인도 역시 그 빌어먹을 인간이었다. 인연이라고 했던가, 아니 천생연분이라고 했던가? 주원은 희희낙락해서는 오늘 낮에 은재가 선 자리에 나온 일부터 시작해서 미주알 고주알 모든 일들을 동영상 화면으로 지완에게 상세하게 보고해 주었다. 대학 1 학년 때부터 주원은 지완에게 은재를 소개시켜달라고 무지하게 매달렸었다. 그때, 지완은 주원이 은재에게 턱없이 부족한 놈이라는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그런 친구의 요구를 무참히 거절했었다. 그런데 오늘 은재가 자신의 선본 상대라면서 기뻐 날뛰는 친구를 보니 지완은 창자가 꼬이는 느낌이었다. 은재는 분명히 지완에게 말했다.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그리고 지완은 은재의 말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외출을 하며 자신에게 진한 키스를 날리고 가는 여자가 선을 보러 가는 여자라고 누가 의심이나 했겠는가? 속았다. 그 달콤한 표정에, 키스에 속았다. 방심했다. 은재의 달뜬 얼굴을 보며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방심했다. 지완은 주먹을 꽉 쥐고는 다시금 책상을 내리쳤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가 부족해서 선을 보러 나가는 건지, 왜 하필이면 하고많은 남자들 중에 오늘 선을 본 남자가 김주원인지……. 어느 것 하나 이해가 되는 것이 없었다.


'들어오기만 해봐. 정은재.' 지완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뚫어져라 시계만을 응시했다. -딸깍 문이 열렸다. 얼굴 가득 웃음을 띈 은재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잘 놀았어?" 은재는 한 손에 하얀 봉지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통닭 튀겨왔는데. 밥 안 먹었다면서? 배 안 고파?" 은재는 겉옷을 벗으며 지완에게 다가왔다. "어디 다녀왔어?" "친구 만나러 갔다 온다고 했잖아." "……" 묵묵무답인 지완을 보며 은재는 웃음을 터트리며 봉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지완의 뒤로 가 서서 목을 끌어않았다. "늦게 와서 삐쳤구나? 그래서 이렇게 먹을 거 사 가지고 왔잖아." "거짓말쟁이." 지완은 은재의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짓말쟁이!" 지완은 다시 한번 크게 은재의 얼굴에 얼굴을 들이밀고 소리쳤다. 갑작스런 지완의 행동에 은재의 두 눈이 동그래져서 지완을 쳐다보았다. 지완은, 마치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처럼 방안 이리저리를 돌아다니며 발에 차이는 물건들을 향해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 "김지완!" "……" 자신의 말에는 대답이 없고, 발길질을 하며 불을 뿜어대고 있는 지완을 향해 은재는 자신이 사들고 들어온 봉투를 던져버렸다. -퍽 "뭐 하는 거야!" 터져 버렸다. 은재가 던져 버린 봉투가 터져서 흉물스럽게 통닭이 흘러나왔고, 지완의 화가 급기야 뻥~하고 터져 버렸다. "어디다 화풀이야? 화나는 일 있으면 나가서 동네나 뛰다 와. 정신 사납게 남 앞에서 지랄하지 말고!" "지랄? 그래 나 지랄한다. 내가 지랄하는데 보태준 거 있어?" 돌아 버렸다. 지완은 은재의 말에 훽 돌아버렸는지 성큼성큼 은재 앞으로 걸어와 은재의 두 팔을 붙잡고 거칠게 흔들기 시작했다. "이게 정말 미쳤나!" 은재는 온힘을 다해서 지완을 밀어 버렸다. 그 바람에 지완은 벌러덩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새끼야, 미칠려면 곱게 미쳐" 은재는 손에 잡히는 쿠션을 들어 지완에게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재밌게 놀고 와서 기분 잡쳤잖아. 가끔씩 너 이상해. 혹시 주기적으로 발작도 하냐?" 은재는 빈정거리며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재밌었어? 그렇게 남 속이고 나가서 재밌었어?" 무슨 연유로 이렇게 날뛰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렇게 자신에게 당했으니 더욱 맹공격을 해올 거라는 은재의 예상과는 다르게 지완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야?" "오늘 누구 만났어?" 아까와 같은 질문을 지완은 똑같이 하고 있었다. "말했잖아. 친구들 만난다고." "친구 누구?" "너 몰라. 모르는 친구야." 꼬치꼬치 캐묻는 지완의 질문에 은재는 짜증을 내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주원이 *자식이 언제부터 네 친구였는지 모르겠네. 요즘 친구는 선보는 자리에서 만나나 보지?" 지완은 눈을 부라리고 은재를 쳐다보며 비꼬듯이 말했다. '어, 어떻게 안 거지?' 은재는 지완이 어떻게 자신이 선을 보았다는 알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떻게 알았어?" "김주원, 내 대학 때 같은 과 친구였거든." 어쩐지, 조금은 불안했었다. 주원이 같은 학교라는 말에 혹시 지완을 알지도 모른다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학교가 작은 것도 아니고 곧 불안을 떨쳐냈었는데, 우째 이런 일이! "그래서, 알면 됐잖아. 그런데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고 그래? 의처증 걸린 남편처럼?" "그것 때문이 아니라…….너, 너 왜 거짓말 해. 친구 만나러 간다고 하고서는……." "내가 선보러 간다고 했으면, 네가 얌전히 날 보내줬을 거 같애? 갖은 핑계되면서 붙잡아 두겠지. 그리고 선보러 갔다고 쳐도, 저번처럼 또 불러들이겠지? 어때 내 말이 틀려?" "……" "네가 왜 이렇게 내 사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지 모르겠지만, 다른 건 몰라도 선보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마. 내가 우리엄마한테 유일하게 효도하는 것이 그것뿐이니까!" "한 남자에 만족하지 못하는 건 아니고!" 지완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은재의 입이 쩍 벌어졌다. 지완 역시도 자신이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판사판이었다. 더 이상 참아낼 인내력이 지완에겐 남아있지 않았다. "밤마다 안아달라고 아양을 떨고, 밤새도록 내 품에서 신음하면서, 딴 남자를 만나러 나간다는 거, 그거 나로는 만족을 못하겠다는 소리 아니야?" "미친 새끼." 은재는 지완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날리더니, 그대로 지완을 무시하고 침대 위로 다가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돌아누워 버렸다. "정말 그래? 나만으로 만족 못해!" 다시 한번 지완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그래! 너만으로 만족 못한다. 이제 됐냐? 주원 씨 아주 죽여 주더만." 은재의 빈정거림에 지완은 주먹을 꼭 쥐고 이빨을 득득 갈기 시작했다. "집에만 안 들어와도 되면 더 진한 시간 보내는 건데, 아쉬워서 혼났다."


은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안에는 입에 담기 어려운 수많은 욕들이 난무했다. 그리고는 쾅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은재는 문소리가 나자마자 이불을 젖히고 방안을 휘 둘러 보았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래도 지완이 더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간 모양이었다. "병신 같은 새끼." 욕을 읊조리는 은재의 얼굴 위로 또르르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완이 다시 방안으로 들어선 것은 다음날로 넘어가기 20 분전의 아주 늦은 시간이었다. 침대 위에 앉아 신경질 적으로 십자수를 놓고 있던 은재는 바깥에서 둔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함소리가 들려오자, 십자수를 자리에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빌어먹을 자식, 들어오기만 해봐라.' 전의를 불태우면 은재는 주먹을 꼭 쥐어 보았다. 문이 열리고 지완은 유완의 어깨에 매달려서 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다리를 잘 가누지 못하고 휘청대는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술을 엄청나게 마신 모양이었다. 지완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역겨운 술 냄새가 확 풍겨왔다. "은재야~" 그래도 정신은 잃지 않았는지, 지완은 자신의 눈에 은재가 들어오자 은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놔. 이 *새끼야." 유완이 지완의 팔을 놓고 놓아주질 않자 지완은 발길질을 하며 유완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쳐댔다. 은재는 눈살을 찌푸리며 유완을 향해 놓아주라며 손짓을 했다. "혼자서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유완은 영 걱정스러운 듯이 지완의 손을 놓지를 못했다. "괜찮아요." "형이, 그러니까 술만 마시면 술버릇이, 좀 안 좋아서. 아시죠?" 머뭇거리며 유완이 은재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술만 먹으면 어린애처럼……. 그리고 조금 있으면……. 아, 아시죠?" 차마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 힘들 정도로 지완의 술버릇은 고약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몇 달 전 그때 그렇게 일주일 동안 술 먹고 이상스럽게 행동을 한 것이 모두 이 녀석이 술버릇이었던 모양이었다. "네." 은재는 유완이 안심할 수 있도록 얼굴에 미소를 띄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유완은 여전히 몸을 꿈틀거리고 있는 지완을 침대 위에 누이고는 고개를 숙이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은재는 뒤로 돌아서 벌떡 일어나 앉은 지완을 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화상, 아주 꼴 보기 싫어 죽겠다." 은재의 말에 히죽히죽 지완은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은재야, 우리 예쁜 은재야~" 지완은 흐느적흐느적 자리에서 일어나 은재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뽀뽀하자. 뽀뽀." 지완은 입을 삐쭉 내밀어 은재의 입으로 가져오기 시작했다. "싫어. 얼른 잠이나 자."


"은재는 나만 미워해." 입이 한발이 나와서 지완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은재는 나만 미워해. 매일 소리치고, 뽀뽀도 안 해주고." "내가 널 왜 미워해." 뾰루퉁한 목소리로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배배꼬는 모습이 영락없이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아무래도 유완이 말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은재는 지완의 비위를 맞추며 통통한 지완의 엉덩이를 두들겨 주었다. "근데 왜 뽀뽀도 안 해 주는 거야." "술 먹고 왔잖아. 나 술 냄새 나는 남자랑은 뽀뽀하기 싫어." "그래도 나 착하고, 예쁘니까 한번만 해 주라." 지완은 은재 앞에서 몸을 흔들며 어리광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런 지완의 모습에 그만 은재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쿡쿡쿡" "해 주는 거야?" 은재의 웃음을 허락의 의미로 알아들었는지 지완은 은재의 얼굴 바로 앞으로 얼굴을 들이 밀고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은재를 쳐다보았다. "좋아. 이번 한번만이야. 다시는 술 먹고 오면 뽀뽀 안 해 줄 거야." "응!" 씩씩하게 지완은 대답을 하더니 그대로 은재의 입술에 입을 부딪혀 왔다. 꽤 긴 시간이 흘러서야 지완은 만족스러운 듯 은재의 입술에서 입을 떼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달콤해. 우리 은재는. 솜사탕 같아." "좋아?" "어." "얼마만큼?" "땅만큼 하늘만큼." 이건 완전히 엄마와 어린 꼬맹이와의 대화 수준이었다. 은재는 한숨을 폭 내쉬며 지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자. 늦었어. 잠옷으로 갈아입어." "알았어." 말도 참 잘 듣지. 은재는 고개를 살살 돌리며 침대로 가서 자리에 누웠다. "다 벗었다!" 뭔가 큰일을 치룬 사람처럼 지완은 큰 소리를 치더니 다다닥 소리를 내며 침대로 뛰어 들었다. 그리곤 은재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너, 너 뭐야?" 은재는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 지완을 내려다보았다. 지완은 눈을 반짝이며 은재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옷을 홀딱 벗어서 나체의 모습으로 이불 속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잠옷 입으라니까!" "더워." 단지 그 한마디를 하고서, 지완은 은재의 품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내참, 아주 가지가지 한다. 알았어. 그럼 자. 가만히." "응"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곧바로 지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귀여운 놈. 은재는 살포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설핏 잠이 들었던 은재는 이상한 느낌에 다시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간질간질 한 것이, 가슴 위를 돌아다니며 은재를 괴롭히고 있었다. 은재는 손을 들어 가슴 위를 쓸어 내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무언가가 자신의 가슴위로 스물스물 기어다니고 있었다. "이씨~" 다시 은재는 자신의 가슴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내렸다. "우리 예쁜 은재." 몸을 옆으로 뉘이며 돌아서던 은재는 자신의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자르륵 온몸의 털 듯이 쭈빗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너 뭐 하는 거야!" 자리에서 일어난 은재는 자신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는 지완의 손을 쳐내며 냅다 발로 지완을 밀어 버렸다. "이 변태 새끼!" 씩씩 숨을 몰아쉬며 은재는 방안의 불을 켜고 지완을 째려보았다. "아, 아퍼." 지완은 바닥에 떨어져 엉덩이를 연신 부비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얌전히 자라고 했지." "우리 은재 이뻐해 줄라고." "허!" 기가 막히다는 듯이, 은재는 지완을 야려보더니 옆에 있는 베개를 냅다 지완의 얼굴로 던져 버렸다. "넌 술만 취하면 여자 이뻐하는 게 취미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지완이 하는 꼴을 보니 아무래도 술만 먹으면 옆에 있는 여자 건드리는 것이 이 녀석의 또 다른 술버릇 중에 하나인 모양이었다. 그 전례로 술만 먹으면 자신을 건드린 지완의 2 번의 실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지완의 술버릇에 당했다는 생각을 하니 괜시리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은재였다. "그 아래서 자!" "왜 나만 미워하고 그래." 볼멘 목소리로 지완이 베개를 내리치며 웅얼거렸다. "미운 짓만 하니까 미워하지." "가슴도 작으면서……." "너 뭐라고 했어?" 은재는 지완이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다시 되물었다. "아, 아무 소리도 안 했어." "점점, 이제 거짓말까지 해. 내 가슴 작아서 네가 보태준 거 있어? 어? 이게 아주 맞을라고!" 은재는 베개를 들고 침대 끝으로 다가가 베개를 들어 지완을 패기 시작했다. "내가 왜 보태준 게 없어. 매일 밤 커지라고 맨날 주물러 줬는데. 처음보다는 많이 커졌잖아!" "이게, 아주 못하는 소리가 없어! 넌 창피한 것도 몰라!" "몰라. 모른다! 내 말이 틀려!" 뻔뻔스럽게 지완은 은재의 가슴을 쳐다보며 당당하게 주장했다. 그럴수록 은재가


휘둘러 대는 베개의 강도는 강해질 뿐이었다. "저리가. 얼굴 보기도 싫으니까 저리가." 은재는 이제 베개를 휘두르는 것을 그만두고 손을 저어 지완을 구석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저기로?" "그래. 저기 쓰레기통 옆에 가버려." 꾸물꾸물 하더니 지완은 어기적어기적 기어서 방 한구석의 쓰레기 통 옆으로 가버렸다. 술을 먹으니 말 하나는 역시 잘 듣는 모양이었다. 술을 먹고 취하면 어린아이처럼 변해서 말 하나는 잘 듣는다? 단, 조금 음흉해지는 경향이 있다. 빙고! 은재는 음모를 모의하듯 야릇한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구석에 앉아있는 지완을 바라보았다. "손들어!" "이, 이렇게" 역시나 은재의 추측이 맞아 버렸다. 지완은 은재의 말에 따라 손을 들어 보였다. "아니. 바짝 더. 너 지금 벌받는 거야!" "내가 뭘 잘못 했는데?" "술만 먹으면 너 여자들 안고 그랬지? 그랬어, 안 그랬어?" "안 그랬어." 너무나도 당당히 지완은 대답을 했다. "조금 아까 내 가슴 쓰다듬고 그랬잖아." "은재한테만 그랬어. 은재 자는 게 너무 예뻐서." "암튼 그거 나쁜 짓이야. 그러니까 손 버쩍 들어." 그제서야 지완은 손을 버쩍 들었다. "그러고서 가만히 있어." "응" 대답 하나는 기막히게 잘한단 말이야. 은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지완을 쳐다보았다. 벌거벗은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있는 지완의 모습이란, 그야말로 해외 토픽 감이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고고한 척, 도도한 척, 있는 척, 잘난 척 다하던 김지완이 오늘날 이 모양 이 꼴로 쓰레기 통 옆에서 처참하게 무너질 줄이야! 은재는 기어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이불 속에 얼굴을 박고 웃음을 터트렸다. "은재 웃는다!" 은재는 지완의 말에 웃음을 멈추고, 험악한 얼굴 표정을 지으며 지완을 쳐다보았다. "누가 손 내리라고 그랬어!" 은재의 외침에 지완은 번쩍 손을 다시 들어 올렸다. "팔 아파." 한참을 손을 들고 있던 지완은 아픈 표정을 지으며 불평을 토로했다. 그런 지완의 모습을 보며 은재는 다시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용서해 줄까?" "응" 냉큼 냉큼 대답은 잘한다. 은재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으며 지완을 바라보았다. "좋아. 용서해 줄게. 대신 말이지……." 은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짐을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내가 사진 찍어 줄 테니까, 멋지게 포즈 취해야 한다!" "예쁘게 찍어 줘야해." 은재의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보처럼 지완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저 은재가 용서해준다는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잠깐만. 아, 됐다. 이제 손 내려." 은재는 만족스럽게 사진 한 장을 찍고, 지완에게 벌을 해제했다. "이제 멋지게 포즈 취해봐!" "알았어." 지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의기양양하게 포즈를 취했다. "멋진데~" "정말?" 은재의 칭찬에 지완은 활짝 웃음을 터트렸다. 은재는 지완이 포즈를 취할 때마다 폴라로이드 사진기의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그 포즈 있지? 분수대에 있는 아기가 쉬 누는 포즈." "오케이" 마지막 한 장. 지완은 은재의 지시대로 포즈를 취했다. 연신 은재는 웃음을 터트리며 즐거워했다. "은재가 행복해하니까, 나도 행복해." 은재의 용서로 말미암아 지완은 만족스러운 듯이 침대 위로 올라와 자신의 자리로 파고 들며 말했다. "그래? 나도 행복해." 행복하다 마다. 무지무지 행복해. 이 누님이 이번에 너의 그 술버릇을 확실히 고쳐 줄 테니까, 맘껏 이 행복함을 누리라고~ 은재는 키스를 원하는 지완에게 기꺼이 키스를 해주는 아량까지 베풀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지완은 기분이 엄청나게 좋은지, 계속해서 은재 앞에서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그런 지완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은재는 맘속으로 열심히 칼날을 갈기 시작했다. '술만 깨봐라. 김지완. 후후후' 드디어 은재가 고대하고 고대하던 날이 밝았다. 지완은 깨질 거 같은 두통에 머리를 싸안고 자리에서 좀처럼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일어났어?" 생글생글 은재는 미소를 지으며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지완 곁에 살포시 앉았다. "머리 아파?" "……" "자, 여기 꿀물." 평소와 다르게 다정한 은재의 모습에 지완은 의아해 하며 은재가 내미는 꿀물을 받아 마셨다. "내가 어젯밤엔 서비스가 좋았나보지? 이렇게 서비스가 좋은 걸 보니." 아직도 어제의 일로 화가 덜 풀렸는지 지완의 혀는 독설을 풀어놓고 있었다. "그럼, 아주 좋았지. 좋았고 말고!" 은재는 이를 악물고 말을 하면서 지완을 향해 무언가를 집어 던졌다. 은재가 던진 물건을 확인한 지완의 얼굴이 시퍼렇다 못해 파랗게 질려 버렸다. "어젯밤에 너무 너무 즐거웠어. 사진 잘 나왔지?" "이, 이게 뭐야?"


"점입가경이라고, 성질 더러워, 음흉해, 변태 기질 있어, 거기다가 아주 훌륭~한 술버릇까지. 퍼펙트 해. 아주, 아주 퍼펙트 해. 더 이상 깎을 점수도 없어요~" "빨리 내놔. 사진 다 내놔" "미쳤냐? 그 좋은 걸 주게!" 은재는 자리를 떠서 방문으로 향하며 혀를 낼름 내밀었다. "앞으로 잘해. 어제처럼 지랄하거나, 술 먹고 주정부리면 그날로 바로 인터넷에 올려 버릴테니까!" "너, 너!" "진지 드셔요. 서방님. 소녀 먼저 내려가옵니다." 분명히, 은재는 지완을 비웃는 듯한 웃음을 흘리며 문을 닫고 사라졌다. 황망히 사라진 은재를 보며 지완은 자신의 손에 들린 자신의 나체 사진을 보며 신음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으아악~" 어쩌자고 이런 실수를. 어쩌자고 술을 먹어서 이런 추태를 보였단 말인가? 아무래도 일상이 아주 많이 피곤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지완을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14. 가슴 아픈 남자 그날 부로 지완의 화려한 날은 사라지고, 암흑기가 바야흐로 도래하였다. 지금까지 지완이 획득한 사진은 2 장. 그날 아침 은재가 본보기로 날린 한 장과 며칠전 한 밤중에 떡볶이가 먹고 싶다는 은재의 심부름을 하고 획득한 한 장이 고작이었다. 앞으로 회수해야할 사진의 숫자는? 無. 모른다. 8 장일지. 18 장일지 아니면 폴라로이드 사진 외에 사진기로 따로 찍어놓은 것이 있어 무한대로 사진을 증식시킬 수 있는지 지완은 알 수 없었다. 단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은재에게 절대복종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덕분에 은재가 선을 보러 나가도, 주원과 만나도, 유완의 방에서 희희덕거리며 자신을 방치해도, 꼰대(?)들과 노느라 자신을 무시해도 잠자코 있어야만 했다. 낮은 자세로 포복하고 착한 아이가 되어야만 했다. 여기서 더 빌어먹을 사실은 은재에게 한번 반항해 보겠다고 심사로 친구 놈을 닥달해 난생처음으로 소개팅(은재 말로는 이제는 소개팅이 아니라 선이라고 하지만)이라는 것을 해보았다. 그러나 자신의 예상과는 다르게 은재는 지완의 말에 잘했다며 칭찬을 해주는 것이 아닌가? 결국 지완은 그날 소개팅을 한 승희라는 여자와 지금까지 은재의 절대적인 지지와 신임 아래 지속적인 만남을 유지하고 있었다. 순전히 은재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거기에다가 첩첩산중이라고 집안에 묘하게 감도는 분위기. 언뜻언뜻 들은 말들을 조합할 때 자신의 나체 사진이 고액으로 암암리에 암거래되고 있다는 것을 포착한 사실이었다. 은재에게 확인한 결과 절대 그런 일이 없다며 날뛰었지만, 은재가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왜 더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하기사 그간 은재가 돈이라면 사죽 못쓰는 현장을 여러 번 목격한 지완으로서는 은재의 말을 믿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니 믿음이 안가는 것이 당연지사(當然之事)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완에게 확신을 준 것은 요새 할아버님과 아버지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은 것이 이들 중에 한 명이 필시 일착으로 사진을 입수한 것이 분명했다.


오호, 통제라~ 어쩌다 오늘날 가족들의 눈치를 살살 살피는 신세가 되었는지. 요즘 지완의 입에서 늘은 것이라곤, 담배와 욕, 그리고 폐부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한숨소리가 전부였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휴하고 담배 연기를 뿜어낸 지완은 힘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김지완……." [지완아, 나 은재.] 빠직~. 지완의 이맛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은재가 이제는 회사에 출근한 지완까지 부려먹을 작정인 모양이었다. 일이 엄청 많이 밀렸다고, 어쩌면 오늘 집에 못 들어갈 지도 모른다고 핑계를 대야 할듯했다. "어, 왜?" [돈, 좀 빌려줘. 한, 1500 정도.] 다짜고짜 전화를 해서 돈을 빌려달라니? 그러나 지완이 정작 놀란 것은 은재가 다른 무엇도 아닌 '돈'을 빌려 달라는 소리에 너무나도 놀라 버렸다. 그렇게 돈이라면 사죽을 못쓰고, 물불 안 가리는 악바리처럼 굴었지만, 생전 지완은 물론이거니와 누구한테도 돈을 빌린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았어. 지금 통장으로 넣어 줄게." 얼마나 은재가 그런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는 것을 아는 만큼 지완은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고마워. 나중에 꼭 갚을게.] 평소와 다르게 무겁게 가라앉은 은재의 목소리. 다시 은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오늘 나 집에 못 들어갈 거 같은데. 너도 집에 들어가지 말고, 나랑 같이 여행 같다고, 어머님한테 전화 좀 해줄래.]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래? 지완은 전화기를 고쳐 쥐며 입을 열었다. "나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어. 나랑 같이 있는 걸로 해줘. 어른들이걱정하실까봐서 그래.] "그럼 나는 어디 가 있어?" [네가 가고 싶은데 가 있어. 내가 돌아올 때 전화할게. 미안해.] "은재야, 은재야!" 무언가 있다. 분명히 무언가 있다. 지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은재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것은 뚜뚜뚜, 전화기가 끊겼음을 알려주는 수화음이 전부였다. 지완은 다시 빠르게 은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전화기의 전원이 꺼져있다는 연결음 만이 냉랭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빌어먹을! 뭐야, 정은재. 도대체 뭐냐고!" 지완은 화가 치밀어 미칠 것만 같았다. 마치 자신이 사채업자라도 되는 냥, 이러 저러한 사정도 이야기하지 않고 돈만 빌리고 무참히 전화를 끊어버린 은재의 행동에 지완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런 지완을 더욱 분노케 한 것은 분명히 지금 은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 은재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서 지완을 철저히 배제했다는 사실이 지완을 더욱 분노케 하고 있었다. 은재의 지시로 말미암아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그렇다고 이렇다하게 갈곳도 없는 지완은 일찌감치 호텔에 방을 잡고 들어가 침대에 누워 버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지는 것이 지완은 몇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씩씩대며 침대에 누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 간 거야!" 몇 번이고 허공을 향해 같은 질문을 했는지 모른다. '혹시, 혹시…….' 말도 안되는 상상이 지완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세차게 지완은 머리를 흔들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럴지도 몰라. 은재, 그 지지배면 그럴지도 몰라. 주원이 녀석이랑 밀월여행 떠났을 지도 몰라. 그랬을지도 몰라." 주원과 선을 본 이후, 은재는 그 뒤로 몇 번인가를 주원과 만나는 눈치였다. 그리고 주원의 전화는? 아마 매일 저녁때마다 같은 시간에 주원의 전화가 울려대는 것 같았다. 가끔씩 지완에게 전화를 하는 주원의 전화 통화 내용이 대부분이 은재라는 화두임을 감안할 때, 이제는 꽤 친한 사이가 된 모양이었다. 이런 마당에 은재가 주원과 밀월 여행을 떠났다고 해서 하나도 이상할 것이 못되는 상황이었다. "김주원. 이 자식 죽었어." 이미 지완은 머릿속에서 모든 상황 판단을 끝내고 결단을 내렸다. 주원은 이제 죽은목숨이었다! -또르르 또르르 지완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신경질적으로 발을 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여보세요.] 몇 번의 통화음에 이어 주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드득, 으드득, 지완은 속으로 이를 갈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나야 지완"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지만, 처음부터 욕이 안나간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상황이었다. [어이, 어쩐 일이야?] 만난 모양이다. 하이 톤의 주원의 목소리에 지완은 주먹을 꼭 쥐었다. "어디야!" [아, 여기 경준데. 왜 무슨 일 있어?] 경주? 석가탑, 다보탑, 불국사, 첨성대, 계림……. 거기에 있단 말이지. 거기서 나 빼고 재밌게들 놀고 있단 말이지. "지금 갈 거야. 꼼짝 말고 가만히 있어." [여길 지금 온다고? 와도 같이 못 놀아 준다. 오늘 할머니 49 제라서 고향에 내려온 거 거든.] "뭐?" [와도 못 놀아 준다고!] "아니. 그 뒤에 한말." [할머님 49 제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주원의 말에 지완은 잠시 얼떨떨해졌다. 그러나 정확한 확신이 필요했다. "혼자 내려갔어?" [그럼 혼자 내려가지, 내가 무슨 여우같은 마누라가 있냐, 아니면 토끼 같은 자식들이 있냐. 괜히 실없이 전화해서 사람 염장 지르고…….] -뚝


이제 더이상 들을 가치가 없었다. 지완은 실실 웃음을 쪼개며 계속해서 말을 늘어놓는 주원의 전화를 무참히 끊어 버렸다. '그럼 그렇지. 은재가 어떤 앤데 너같이 골빈 놈한테 관심을 두겠어. 밀월 여행? 지나가던 똥개가 웃겠다.' 김주원을 골빈 놈이라고 하기엔 조금 어패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 3 학년 때 일찌감치 공인회계사에 합격하여, 지금은 아주 잘 나가는 회계사로 이름을 날리는 놈이었으니까. 어쨌든 지완은 그 한 통의 전화로 좀전의 걱정을 훌훌 털어 버리고 얼굴 가득 미소를 품고 자리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또 다른 걱정이 지완의 머릿속을 관통하기 시작했다. "그럼 도대체 어디 간 거야!" 다시 벌러덩 지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수화기를 미친 듯이 눌러대기 시작했다. "이씨, 이씨!" 원하는 은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수화기에선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소리만 들려왔다. "어딨는 거야. 정은재!" 신경질적인 지완의 목소리가 호텔 방안에 메아리쳤다. 왜 이렇게 불안한 거야. 어디에 간다는 말도, 어디에 있다는 말도, 연락도 되지 않는 은재가 이렇게 걱정되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거처를 몰라, 이렇게 가슴 졸이며 걱정했던 것도 퍽 오랜만의 일인 듯했다. 은재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그 뒤로 한참 뒤인, 새벽이 다가올 무렵이었다. 지완이 은재에 대한 걱정으로 잠 한숨 못 자고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상상하며 불안의 끝을 달리며, 급기야 경찰에 신고를 하겠다는 다짐까지 하였을 때 다행스럽게도 지완의 전화가 울려대기 시작했다. "어디야!" 굳이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지완은 직감적으로 이 전화의 주인공이 은재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완아] 힘이 하나도 없는 풀이 죽은 은재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통해 들려왔다. 그런 은재의 목소리에 지완은 치밀어 올랐던 화가 잦아들고 대신 물밀 듯이 걱정이 밀려들었다. "무슨 일 있어? 그런 거야?" [지완아. 지완아.…… 지완아.] 계속해서 은재는 지완의 이름만 불러대고 있었다. "그래. 너 어디야. 내가갈게." [나 무서워.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 다리가 후들거려서 자리에서 일어설 수도 없어.] "눈에 보이는 간판 없어? 그거라도 읽어봐.] 지완은 황급히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은재야! 은재야!" 그 사이 수화기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절박하게 지완은 전화기에 대고 은재의 이름을 불러댔다. [수원역……. 불빛이 크게 보여. 어느새 여기까지 왔나봐.] "그래. 그래. 잘했어. 내가 금방 갈게. 전화 끊지마. 알았지? 계속해서 들고 있어.


내가 금방 갈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거기 있어야 해." [……] 전화기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지완은 심장이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정은재, 정은재!" [빨리 와. 나 무서워 죽겠어. 무서워.] 아무래도 지금 자신이 통화하고 있는 사람은 은재가 아닌 지도 모른다.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찾는 은재는 이제껏 한번도 본적이 없었으니까. 아니 그만큼 극도의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은재야' 수원으로 내려가는 도중 몇 번이고 지완은 전화기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은재의 이름을 불렀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지, 사라지는 건 아닐지 생전의 모든 걱정을 이번에 다하려는 모양이었다. 35 분만에 수원역에 도착한 지완은 길거리에 차를 세우고 미친 듯이 은재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지완이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며 수원역을 돌아다니자, 몇몇씩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지완을 쳐다보았지만, 그럴수록 지완은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번쩍이는 네온불빛과 요란한 차들의 굉음소리. 절대로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는 그런 곳에 은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니던 지완이 은재를 발견한 곳은 수원역 앞의 계단 모롱이에 몸을 한껏 구기고 앉아 있는 은재의 모습이었다. "은재야!" 한달음에 지완은 은재 앞으로 다가섰다. 은재는 지완이 다가섰는지도 모르고 여전히 한 손에 전화기를 꼭 들은 체, 지완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은재야~" 다시 한 걸음 은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지완은 부드럽게 은재의 이름을 불렀다. 지완의 목소리에 은재는 그제서야 서서히 고개를 들어 지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미안해. 이렇게 오라고 해서 미안해. 근데 너밖에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어. 도무지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생각……." "바보야.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언제부터 이곳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걸까? 고개를 든 은재의 얼굴은 눈물로 인해 화장이 엉망으로 번져있었다. 마스카라가 번져 팬더 곰처럼 변한 눈가나, 립스틱이 번져 곳곳이 붉게 물든 뺨이나, 평소의 은재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지완은 은재를 품에 안으며 보듬어 주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지완은 은재가 사시나무 떨 듯이 오돌오돌 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얇은 옷 하나를 달랑 걸치고 있는 은재가 급격한 일교차에도 불구하고 이 곳에서 오랫동안 앉아서 떨고 있었을 생각을 하니 지완의 가슴이 저려오고 시작했다. 지완은 은재를 번쩍 안아들고 차로 향하기 시작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은재는 계속해서 지완을 향해 미안하다는 말만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텅 빈 눈동자. 솔직히 은재가 자신이 왔음을 인식하고 있는지 그것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은재는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거기에다 계속해서 무의식적으로 지완에게 미안하다는 소리만을 해대는 은재의 모습을 보니 지완은 속이 꺼멓게 타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차안의 히터를 최고로 올리고, 자신의 겉옷을 벗어 은재의 몸에 걸쳐주었지만 좀처럼 은재의 떨림은 멈추지를 않았다. 수원으로 내려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완은 최고 속도를 내서 자신이 잡아둔 호텔 방으로 은재를 안고 들어섰다. 호텔 방으로 들어선 지완이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는 동안, 은재의 몸에서 옷을 벗겨내는 동안에도 은재는 퀭한 눈으로 지완이 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줄에 매달린 마리오네뜨처럼 은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지완이 몸을 움직여 주는 대로 잠자코 따를 따름이었다. 목욕을 마친 은재를 욕조에서 꺼내 물기를 닦아주고, 침대 위에 이불에 쌓아 앉혀두고, 지완은 뜨거운 수프를 은재에게 먹였다. 수프 그릇을 탁자 위에 내려놓을 요량으로 지완이 침대 위에서 내려가려 하자 은재의 손이 지완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이제 좀 괜찮아?" 방에 들어와 은재가 처음으로 보인 반응이었다. 지완은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다시 은재에게로 돌아섰다. "나, 안아 줄래. 추워서 견딜 수가 없어." 애절한 은재의 눈빛이었지만, 지완은 걱정스러운 맘에 선뜻 은재를 안을 수가 없었다. 그저 지완은 은재를 끌어당겨 가슴에 안아줄 뿐이었다. 그러나 은재는 그런 지완의 행동을 허락의 의미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지완의 품에 안긴 은재는 다급하게 지완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은재야~" 뜻밖의 상황에 지완은 은재의 이름을 불렀지만, 은재는 어느새 지완의 상의를 벗기고, 바지 버클위로 손을 내리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지완의 남성은 자신의 의지로는 이제 통제불능의 상태가 된지 오래였다. 은재의 눈빛, 손길에 의하면 영락없이 반응을 보이며 일어서는 하체. 지금 역시도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고 은재의 손길에 의해 지완의 남성은 비명을 질러대며 무섭게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자신의 몸의 일부이기는 하나 그 통제권을 상실한지 이미 오래였다. 은재의 손길에 의해 불이 당겨진 지완의 육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은재의 몸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톡하면 터질 것 같은 꽃 봉우리를 만지듯, 한없이 부드럽게. 조심스럽게, 거미가 줄을 타듯, 한없이 조심스럽게. 바람이 불편 곧 날아가 버릴 민들레 홀씨를 안는 것처럼, 한없이 부드럽게 조심스럽게 지완은 은재를 안기 시작했다. 한 치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두 몸을 꼭 맞댄 연인은 완벽한 일치를 이루며 절정을 맞아 함께 무너져 내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지완은 끊임없이 은재의 얼굴을 보듬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은재의 입에서 거친 울음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를 내며 은재는 그렇게 서럽게 울고 있었다. 몸을 한껏 동그랗게 말고, 지완에게 몸을 돌린 은재는 봇물 터지듯 그렇게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쉬, 쉬. 은재야" 지완은 몸을 돌린 은재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아 달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은재는 지완의 품으로 온전히 안겨들었다. 한참을 무방비 상태로 울음을 터트리고 있던 은재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기 시작했는지, 띄엄띄엄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 우리 엄마 내가 얘기했었지."


"그래. 얘기했었어. 네가 시집가길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시라고 했었지." 지완은 이불을 끌어 은재의 벌거벗은 몸을 가려주며 은재의 말에 호응을 해주었다. "그래. 바보처럼 나의 행복만 바라시는 우리 엄마. 근데, 우리 엄마가 아파. 효도다운 효도 해본 적이 없는데, 아니 10 년이란 기간동안 엄마 얼굴 제대로 본적이 없는데, 우리 엄마가 아프데." "……" "쓰러질 때까지 미련한 우리 엄마, 자기가 아픈 지도 몰랐나봐. 수술비가 없어서 수술도 하지 못하고 방치한 채 병실에 누워 있는 우리 엄마를 보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어. 그렇게 자신의 몸을 혹사시킨 엄마도, 그렇게 엄마를 고생시킨 엄마의 남편도, 그리고 아무런 죄 없는 엄마의 자식들도. 모두가, 모두가 원망스러웠어. 그런데……." 다시 설움에 복 바친 듯 은재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 엄마를 가장 고생시킨 것은, 엄마의 남편도, 자식들도 아닌, 바로 나였어. 기생충처럼 엄마의 등골을 파먹은 것은, 다름 아닌 나였어.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엄마 집에 들어가 살면서 엄마의 남편을, 난 못 견뎌했어. 그 자그마한 아이들한테도 한번도 살갑게 대해준 적이 없었어……. 그런데도 엄마는, 내게 그 동안 나를 위해 모아두었다며 아파트에 학비까지 대주었는데, 난, 난 엄마에게 한번도 다정한 딸이 되지 못했어." 신부님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듯이 은재는 눈물에 범벅이 되어 자신의 잘못을 지완 앞에서 털어놓고 있었다. "한 달에 한번씩 부치는 돈과 엄마의 소원을 들어주는 셈치고 나가는 선 자리. 그제 고작이면서 그것을 위안 삼아, 나는 퍽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엄마를 원망만 했어. 자격도 없으면서 정작 엄마 곁에 있었던 엄마의 남편이나 동생들을 원망했어." "……" "병원 비를 들고 가면서도, 원망했었어. 무능력한 엄마의 남편, 엄마에게 무거운 짐들만 되는 동생들. 돈을 들고 가는 나는 꽤 의기양양했어. 너희들보다는 내가 낫다. 너희들보다는 내가 낫다하고 자만심에 빠져 있었어. 수술실로 들어가는 엄마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난,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엄마에게 해준 게 없었다는 걸 깨달았어. 난 아주, 거만하고, 철없는 딸에 불과하다는 걸." "아니야. 그렇지 않아. 넌……." 지완은 은재를 끌어안으며 은재를 위로하려 애썼다. "내게 지금까지의 나를 반성할 기회가, 있을까?" "있을 거야. 우리 은재는 착하니까, 반드시 그럴 기회가 있을 거야." 지완은 은재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며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자기 몸이 아픈 지도 모르고 바보처럼 일만 하다가 쓰러진 울 엄마한테, 바보 같은 내가 딸 노릇을 할 기회가 정말 있을까?" "수술 하셨으니까, 괜찮으실 거야. 금방 괜찮아지셔서, 네가 귀찮아 할 정도로 많이 선 자리를 주선해주실 거야. 우리 할아버지처럼, 네가 시집가는걸 보고 싶으셔서라도 쾌차하실 거야." "그렇겠지. 그렇겠지." "그럼." 누군가의 확신이 필요했다. 은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확신이었다. "흑흑흑……." 또 다시 은재는 지완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수술실에 들어간 엄마를 기다리면서, 깨달은 그 사실에 은재는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병원을 뛰쳐나와 달리고 또 달렸다. 엄마를 잃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 동안 엄마에게 잘못했던 지난날들에 대한 회한, 그 모든 것들이 은재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한참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 미칠 것같이 생각난 사람이 다름 아닌 지완이었다. 지완이라면, 그 완벽한 지완이라면 자신을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줄 거 같은 막연한 기대감이었는지, 혼란스러운 은재의 머릿속에 생각난 이름이라곤 바로 지완 뿐이었다. "그럼"이라고 확신에 차서 말을 하는 지완의 그 한마디에, 그만 그 불안들이 한 걸음씩 물러서기 시작했다. 거짓말처럼, 은재를 감싸고 있던 검은 구름들이 서서히 물러서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평온한 감정이 찾아오면서, 모든 것이 지완의 말처럼 이루어질 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 그 순간, 은재의 울음소리를 뚫고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은재의 심장이 전화벨 소리에 맞추어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은재는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올려 지완의 눈을 응시했다. "내가 받을까?" 은재의 눈동자가 무섭게 떨리기 시작했다. 은재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무서워." "아니야. 괜찮을 거야." 지완이 손을 뻗어 은재의 전화기를 손에 들고 끌어 당겼다. 지완은 은재의 눈을 바라보며 살며시 전화기를 은재의 손에 안겨 주었다. 그러나 한사코 은재는 전화기를 손에 쥐려하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은재의 손. 지완은 대신 자신의 손을 뻗어 은재의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전화기를 고쳐 쥐고 전화기를 받겠다고 시늉을 했다. 그 순간, 은재는 지완의 손에 들린 전화기를 빼앗아, 던져버렸다. 전화기는 여전히 요란한 벨소리를 내며, 카펫이 깔린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전화벨 소리가 잦아들었다. "안 받아. 안 받을 거야." 고집쟁이 어린아이처럼, 은재는 바닥에 떨어진 전화를 보며 말했다. -삐빅 삐빅 바닥에 떨어진 전화기가 소리를 내자, 은재는 깜짝 놀래서 다시 지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지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기를 주워 들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음성 메시지가 들어온 모양이야." "……." 침묵. 은재는 전화기를 무슨 흉물처럼 피하고 있었다. 그런 은재를 대신하여 지완은 전화기를 열고 은재를 빤히 쳐다보았다. "비밀번호?" "1, 2, 3, 4" 꾹꾹. 거침없이 지완은 전화기의 버튼을 누르고 음성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은재는 차마 지완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눈을 꼭 감아 버리고 말았다. "은재야." 눈이 뜨기 싫다. 그러나, 알아야 할 사실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은재가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려 눈을 떴을 때, 은재의 눈에 들어온 것은, 지완의 화사한 미소가 담긴 얼굴이었다. "수술 성공하셨대."


다시, 은재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지완은 다시 전화기의 반복청취 번호를 눌러 은재의 귓가에 전화기를 대 주었다. -누나! 저 상연이에요. 누군 줄 ……아시죠? 엄마, 수술이 무사히 끝나셨어요. 의사 선생님 말로는 계속해서 물리치료만 받으시면 괜찮으실 거래요. 일찍, 전화하고 싶었는데 누나 전화 번호를 알지 못해서, 이제서야 해요. 엄마가 깨어나셔서야 누나 전화 번호를 알았거든요. 엄마가, 누나 걱정 많이 하세요. 내일, 병원……오실 수 있죠? 띠띠띠 동전이 다 떨어졌나봐요. 누나, 내일 꼭……. 그렇게 음성 메시지는 끝나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은재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래. 울어. 맘껏 울어. 우리 은재를 위해서 내 가슴은 원 없이 빌려 줄 수 있으니까." 은재는 넓은 지완의 가슴에 맘껏 울음을 토해냈다. 이제 걱정도, 회한의 눈물도 아닌 기쁨의 눈물이며, 새로운 다짐이며, 희망을 약속하는 그런 눈물이었다. "고, 고마워. 지완아." 은재는 울먹이며 지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지완은 손을 들어 은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독이고 있었다. 항상 강해 보이기만 했던 은재가 이렇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고 자신에게 의지한다는 사실이 이렇게 자신의 가슴을 뿌듯하게 만들 줄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런 은재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렇게 우쭐하는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 처음이었다. 은재에게 의지할 수 있는 남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 그것이 지완은 못내 자랑스러운 그런 날이었다. 다음날, 지완은 은재와 함께 은재의 엄마가 입원하신 병원을 찾았다. 비록 지완의 입장이 입장인지라 병실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로비에 서서 은재를 기다렸지만, 지완은 그것 하나만으로 만족스러웠다. 조금은 은재에게 가까워졌다는 충만감이 지완을 만족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먼발치에 서서 은재가 은재의 동생이라 여겨지는 두 고등학생들과 웃고 있는 것을 보는 것도 지완으로서는 색다른 즐거움을 맛보게 했다. 한참이 지나도록 홀로 지완은 병원 로비에 앉아 있었지만, 불만을 느낄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가슴에 훈훈한 온기가 차오르기가 시작했다. 멀리서 얼굴 가득 햇살을 담은 은재가 걸어오고 있었다. 지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은재를 향해 걸어갔다. "잘하고 왔겠지." "그럼~" 예전과 같은 명랑한 은재의 모습이다. 안심이다. 지완은 손을 뻗어 은재의 허리를 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상이야." 살포시 지완의 입술이 은재의 이마에 내려와 앉았다. 순간의 정적과 함께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순간, 둘 사이에는 예전과는 다른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상이 뭐 이래? 쪼잔하게." 장난스런 말을 하며 그런 분위기를 깬 것은 은재였다. 은재는 지완의 가슴을 팍 치고서는 지완을 지나쳐 앞장서 병원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잠시 멍해 있던 지완은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은재를 쫓아가며 은재의 어깨에 팔을 휘두르고 은재의 귀에


고개를 숙였다. "맛보기라고 생각하면 돼." "기대해도 되는 거야?" 지지 않고 은재가 지완의 말을 받아쳤다. "그럼~" 지완의 과장된 어투에 은재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지완 역시도 은재를 따라 웃음을 터트렸다. 따뜻한 오후의 햇살이 들어오는 그 문으로 다정한 연인이 맑은 웃음소리를 내며 햇살 속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15. 고백하는 남자 주말 오후의 이 황당한 더블 데이트는 지완의 말도 안 되는 발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은재가 주원과 통화를 하는 것을 엿들은 지완은 며칠을 낑낑거리며 고민을 하다가, 아무 것도 모르는 주원과 속닥거린 결과물이기도 했다. "주원 씨!" 약속 시간에 늦어 버린 은재가 멀리 서 있는 주원을 발견하고, 뛰어가다가 점차 주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만 걸음을 멈추고 주원 옆에 낯선 여자와 생글거리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왜 여기 있어?" 다짜고짜로 은재는 여유 만만한 웃음을 짓고 있는 지완을 향해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시간 전만 해도, 두 사람은 방안을 뒹굴 거리며 있다가 은재가 해온 볶음밥을 먹으며 장난을 치다, 은재가 약속 시간을 핑계 삼아 서둘러 나왔던 것이다. 그런 자신을 보며, 뾰루퉁해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던 지완이었는데, 어째서 이 자리에 이렇게 있는 건지? 은재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뮤지컬 보러." 지완은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은재에게 대답했다. "승희 씨, 들어가죠." 지완은 고개를 돌려 자신 곁에 서있는 여자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지완이가, 갑자기 전화를 해왔는데, 어째어째 시간도 맞고, 그래서 이렇게 같이 뮤지컬 보자고 했어요. 지완이가 여자 친구 있다고 하니까, 저도……." 주원은 자신이 말하기가 영 어색한지 말끝을 흐리며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 그래요." 주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며 은재는 자신의 앞에 걸어가고 있는 지완의 뒷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뮤지컬 공연을 보러 들어가는 사이, 잠깐동안 은재와 지완이 이야기 할 틈이 생겼는데, 은재는 쌍심지를 켜고 지완을 째려보았다. "뭐 하는 짓이야?" "뭐 하는 짓이긴, 더블 데이트지." "더블 데이트?"


"주원이 녀석이 너한테 잘하나 감시도 하고, 승희 씨도 너한테 소개도 시켜주고. 겸사겸사.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미리 알아두는 게 좋지 않겠어?" "무슨 속셈으로 이러는 지 모르겠지만, 이건 확실히 내 사생활 침해야." "사생활 침해? 음, 그래. 그래 인정. 인정한다. 대신 밤에 찐하게 보답할게." 무섭게 화를 내고 있는 은재에게 지완은 고개를 숙여, 은재의 왼쪽 귀에 은밀하게 속삭였다. "너, 너 정말……." 은재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지완의 어깨에 핸드백을 들어 난타하려는 순간, 저 멀리서 팜플렛을 들고 웃음 지으며 걸어오는 주원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은재는 슬그머니 들었던 백을 그대로 내리고 얼굴에 웃음을 띄었다. 지완은 은재가 자신에게 백을 휘두를 것이라고 짐작하고 손을 뻗어 막으려는 자세를 취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무안해진 손을 내리며 지완은 앞에 서있는 은재를 응시했다. 웃고 있다. 방금 전에는 자신을 한입에 꿀꺽 삼킬 것처럼 화가 나있더니, 몇 초도 안되서 은재의 얼굴엔 살짝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은재의 눈동자에 담긴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주원 이었다. 그때부터, 지완은 자신이 꾸민 모든 것이 꼬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음을 깨닫고 가슴을 부여잡고, 지완은 후회에,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지완의 계획에 따르면, 주원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자신의 매력을 발휘하여, 은재가 주원에게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할 심산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이벤트를 계획한 것이었다. 그런데 웬걸, 은재가 자신의 매력으로 말미암아 주원에게 관심을 돌리기는커녕, 자신의 억장 무너지는 장면만 연속해서 자신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아가씨와 건달들"? 오늘 이들이 보러온 뮤지컬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지완, "아가씨와 건달들"의 내용 아무 것도 모른다.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자신의 자리를 원망하며, 눈을 치켜 뜨고, 승희 건너 주원, 주원 건너 은재를 쳐다보느라, 목이 뻐근할 뿐 뮤지컬의 내용이 뭔지 절대, 모른다. 공연장으로 들어서면서 당연히, 당연히 지완은 은재 곁에 앉으려고 했다. 자신의 오른쪽엔 은재를, 그리고 왼쪽에는 자신의 파트너인 승희를. 그런데 웬걸 그 덜떨어진 주원 놈이 냉큼 은재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것이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지완은 그나마 은재와 가까운 주원이 놈 옆에 앉았다. 그러나 이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주원이 놈이 실실 웃음을 쪼개며, 자신은 꽃밭 사이에 앉고 싶다나, 뭐 어쨌다나 갖은 핑계를 대더니, 기어이 승희 역시도 자신 옆에 앉히고 마는 것이 아닌가? 좋다. 그 것까진 쇼맨십으로 참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공연 도중, 주원과 은재가 고개를 숙이고 서로의 귓가에 무슨 말인가를 서로 주고받는 장면을 보는 지완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참았다. 무지무지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과부 수절하듯 참고 또 참았다. 그리고 드디어 공연이 끝났다. 이제 고통은 끝났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털썩 주원의 손이 은재의 곱디 고운 손을 잡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나도 못해 봤는데. 키스도 해봤고, 그거보다 더 찐한 것도 많이 해본 지완이지만 어디 밖에 나가서 은재와 손 붙잡고 다닌 기억이 없는 지완이었다. 눈에 불이 일었다. "식사나 하러 가자."


앞장서서 가고 있는 은재와 주원을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며 지완은 승희의 말 때문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흐느적흐느적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아마 주원은 오늘 열 백 번은 더 죽었을 것이다. 사람 눈빛엔 그런 기능이 없다는 사실, 지완으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 어느 영화에서처럼 하늘에서 냉장고가 내려와 저놈의 머리 위에 뚝 떨어 졌으면……. 그러나 하늘은 잠잠하기만 했다. 고기를 써는 것인지, 아니면 아주 갈고 있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지완은 음식이 나오자 마자 고기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그런 지완을 세 사람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응시하고 있었지만, 지완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지완이 하는 말이란, "요즘 이가 좀 안 좋아서." 단지 그말을 내뱉고 또다시 지완은 무슨 원수라도 되는 듯이 고기를 자르기 시작했다. 적어도, 지완의 눈에 앞에 놓인 스테이크의 한가운데는 동실동실 웃고 있는 주원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은재 씨, 알아요? 나 대학교 1 학년 때, 은재 씨 처음 봤었어요. 지완이랑 함께 다니는 모습. 그래서 몇 달을 이 녀석한테 은재 씨 소개시켜 달라고 난리를 쳤었죠." "그래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처음 듣는 얘긴데." 스테이크 한 조각을 썰어 은재는 입안에 넣어 오물거리며 주원의 질문에 답변을 했다. "글세, 이 녀석이 은재 씨를 당최 소개를 시켜 줘야 말이죠. 너 솔직히 말해봐, 은재 씨한테 내 얘기했어, 안 했어?" 줄창 고기만 썰어대던 지완은 주원의 질문에 도끼눈이 되서 주원을 째려봤다. "근데, 왜 이 집 고기는 왜 이렇게 맛이 없는 거야!" 지완은 투덜투덜 거리며 포크를 이리저리 휘둘러 갈기갈기 찢겨진 고기를 입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승희 씨 진짜 맛없죠?" "네" 레스토랑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승희를 향해 건네는 말이었다. 수줍음을 타는 듯 승희는 지완의 말에 입을 가리고 조용히 말했다. "김지완, 너 왜 내 얘기엔 대답도 안하고 딴 얘기야? 대학 때 내 얘기 은재 씨한테 했어, 안 했어?" "안 했다." "어, 이 놈 봐라. 뭘 잘했다고 이렇게 당당해?" "내가 너 같은 놈을 우리 은재한테 왜 소개시켜 주냐?" 지완의 말에 주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잠시, 주원은 다시 화끈 거리는 얼굴을 수습하며 지완에게 말을 건넸다. "어쩜 그것 때문에 은재 씨랑 내 만남이 극적인지도 모르겠다. 승희 씨, 그랬는데, 글쎄 은재 씨가 저랑 선보는 자리에 나온 게 아니겠어요? 이런 걸 가지고 천생연분이다 하는 거 아니겠어요?" "오버하지 마!" 지완은 이제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주원의 말에 타박을 주고 있었다. 그런 지완의 예의 없는 행동으로 말미암아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냉각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분위기를 만든 장본인 김지완은, 그것과 상관없이 실실거리며 맛없다는 스테이크를 싹싹 비워 내고 있었다. "은재 씨, 제가 집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주원이 은재에게 제안했다. "네. 그러죠." 은재도 흔쾌히 주원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그런 은재의 대답에 지완이 쌍심지를 켜고 은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잠깐 실례할게요." 은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오는 순간,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지완이 좁은 통로에 버티고 서 있었다.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뭘?" 은재는 지완의 메마른 질문에 무심하게 되물었다. "주원이 녀석이 집에 데려다 준다는데 우리 집에 데려와서 뭐 어쩌려고?" "누가 너희 집으로 간데?" "그럼?" "내 아파트. 뭐 가지러 갈게 있었는데, 데려다 준다니까 겸사겸사 들렀다가 집에 들어갈게. 그러니깐 넌 승희 씨나 집에 잘 모셔다 드려." "맘에 안 들어." 지완은 은재의 말이 영 맘에 안 드는지 퉁퉁거렸다. "뭐가 또 그렇게 맘에 안 들어? 이미지 관리 해. 어째 오늘은 이미지 관리가 부실한 거 같애." "상관하지마." "넵, 그러죠." 은재는 두 손을 쫙펴서 내밀어 보이더니, 그대로 지완을 두고 자신의 자리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은재의 뒷모습을 지완은 얼굴을 구기고 한참을 응시하고 서 있었다. 다시 한번, 주차장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은재는, 나랑 같은 방향이니까 내가 데려다 줄게." 식당에서 그렇게 합의를 보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지완이 무슨 심보인지 다시 딴 소리를 하며 은재를 데려다 주겠다고 나섰다. 말도 안되는 지완의 억지에 은재가 살짝 이맛살을 구기며, 지완을 째려보았지만 지완은 주원과 무슨 눈싸움이라도 하는지 주원과 눈을 마주치고 서 있었다. "너 자꾸 이렇게 분위기 파악 못하고 이럴 거야. 김지완!" "내가 뭘 그랬다고 그러는 거야!" 드디어 속 좋은 주원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트리고 말았다. "보자보자 하니까, 너 도와주지 못할 망정 너무 하는 거 아냐! 넌, 승희 씨한테나 신경 써." "도와주긴 뭘 도와 줘!" 지완도 주원의 말에 바락바락 대들며 주원의 화를 부추기고 있었다. "그만, 그만해요. 주원 씨. 지완아, 너 먼저 승희 씨랑 가라. 난 주원 씨랑 갈테니." 조금만 더 지켜보고 있으면 지완과 주원 사이에 주먹질이라도 오갈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에 은재가 중재에 나섰다. 그런 은재의 모습에 주원은 주춤거리며 물러섰지만, 더욱 기를 올리며 다가서는 것은 지완이었다. "주원 씨, 우리가 먼저 가요. 아무래도 맛없는 스테이크가 지완이 녀석, 신경을 건드린 모양이예요. 승희 씨, 죄송해요. 저희 먼저 갈게요." 은재가 주원의 허리에 손을 두르며 주원의 차로 다가가자 지완의 눈이 확 뒤집혀


버렸다. "너한테 은재가 가당키나 한 줄 알아? 네 주제를 알아라!" 이제 지완은 주원이 자신의 친구라는 사실도 망각할 만큼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지완의 눈에 주원은 그저 적이라고 간주되고 있을 뿐이었다. "뭐라고 이 자식이!" 은재의 손에 이끌려 자신의 차로 다가서던 주원이 지완의 외침에 정색을 하며 돌아섰다. "무시해요. 오늘 지완이 기분이 영 아닌가 봐요. 그냥 가요." 은재는 그런 주원을 달래, 그대로 차에 올라탔다. 그런 은재와 주원을 보며 지완은 성큼성큼 주원의 차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냥 출발해요." 머뭇거리고 있는 주원을 향해 은재가 말했다. 그러자 주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완을 무시하고 그대로 차를 돌려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은재는 잠자코 앉아서 백미러로 조금씩 멀어져 가는 지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못난 모습 보여드려서 죄송해요." 시내로 빠져 나오며 주원이 조심스레 먼저 은재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아뇨. 오늘은, 지완이 잘못인 걸요." 은재의 말에 주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얘기한 거 진짜예요. 대학교 1 학년 때부터 은재 씨한테 일편단심 민들레였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다시 은재씨 만나고부터, 은재 씨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 "지완 녀석 말대로, 제가 은재 씨한테 한참은 부족한, 그런 놈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뇨. 그런 말하지 마세요. 주원 씨는 충분한 저보다 더 멋진 여자 만날 자격 있으세요. 오히려 제가 부족하죠." 은재의 말에 주원은 불안한 시선으로 앞을 내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거절인가요?" "전, 그럴 자격이 없는 거 같아서요." "제가 이렇게 서둘러서 그런 거라면,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전, 누군가를 사귄다거나, 결혼이라는 거 아직도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아직 제가 준비가 안된 것이지, 주원 씨가 맘에 안든다거나 그런 게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자격이 없다고 말한 거예요." 주원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담배 한 대만 펴도 될까요. 도저히……." 은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원은 담배를 찾아 입에 빼어 물었다. 그런 주원의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옛날엔, 처음 은재 씨를 만났을 때는, 지완이 여자친구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요. 멀리서 보기에도 두 사람은 퍽 잘 어울렸거든요. 지완이 입에서 그저 친구라는 말이 나왔을 때도 의구심이 들 정도로, 은재 씨와 지완이 멋진 그림이었어요." "……." "언젠가 한 번, 지완이 자신이 좋아한다던 후배와 함께 대학 교정을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어요. 그때 물론 은재 씨도 지완이 옆에 있었죠. 그때 은재 씨의 표정을 보면서 알 수 있었죠. 지완이 넘을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나 서러워서, 너무나


애처로워서, 차마 더 이상 볼 수가 없었죠. 그 앞에서 실실거리며 웃고 있는 지완의 얼굴이란." 주원이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창문 밖으로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욕심 냈습니다. 그때 이후로 은재 씨 포기했었는데, 선을 보러 나온 은재 씨 모습 보면서 다시 욕심을 내봤습니다. 선까지 보러 나올 정도면, 포기한 게 아닐까, 포기는 아니더라도 뭔가 새로운 시작을 하려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대상이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고. 그런데, 아닌 모양이네요." "……." "그렇게 죄지은 표정 지으실 필요 없어요. 그냥, 패배자의 푸념이라고 가볍게 넘기세요. 하하하" 주원은 담배를 비벼 끄며 호탕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곧 국수나 먹을 수 있게나 해주십시오. 저렇게 지완이 날뛰는 걸 보니 그리 먼 일은 아닌 거 같긴 하지만." "……." 주원의 말에 은재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묘한 침묵 속에 주원은 은재의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힘없이 돌아서는 주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은재의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한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은 가슴이 아픈 일이었다. 속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주원을 속이고만 셈이었다. "휴~" 왜 이렇게 요즘은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엄마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회복되고 있었고, 엄마의 남편과도 조금씩 말을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있었고, 동생들, 쌍둥이 상연, 하연과는 무척이나 많이 친해진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완과는 그날 그렇게 자신의 과거를 한꺼번에 쏟아내는 것을 계기로 한 발짝 더욱 가까워진 관계가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은재는 자신의 과거, 약한 부분은 철저히 숨기고 살았다. 그것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그러한 자신의 과거 때문에 자신을 동정하는 사람들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지완 앞에서 완전히 무장해제 시켜 버렸다. 그것이 과연 잘한 일인지, 어떤지도 아직까지 은재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이렇듯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요즘처럼 평온한 생활을 보낸 적이 없었다. "행복하다"는 나른함이 하루에도 수십 번 씩 은재의 몸을 따뜻하게 감싸곤 했다. 그러나 목게 칼칼하게 걸린 생선뼈처럼 무언가 매끄럽지 않고, 불안한 맘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순간 순간, 불현듯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은재를 덮는 공포. 그것이 무엇인지 은재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그것은 존재했다. 어느 날 갑자기, 잠자리에서 눈을 뜨시지 않았던 온화하게 잠든 할머니의 모습처럼, 그것은 여실히 존재하고 있음을 은재는 믿었다. 갑자기 은재는 온몸이 오싹한 기분을 느끼며, 두 팔을 감아서 몸을 감싸 안았다. "힘내자. 정은재. 그런 일 없을 거야." 실로 오랜만에 은재는 자신의 집을 찾고 있었다. 뽀얗게 쌓여있을 집안의 먼지와 냉랭한 집안을 생각하니 은재의 이마가 절로 구겨지고 있었다. 승희를 데려다주고 집으로 들어온 지완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빠르게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정은재!"


문을 벌컥 열고 지완은 은재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정적. 그리고 어둠. 당연히 환하게 밝혀져 있어야 할 방안은 컴컴한 어둠으로 휩싸여 있었다. 자신이 승희를 데려다주기 위해서 강남까지 넘어갔다 왔다면, 은재는 설사 자신의 아파트를 드렸다 온다고 해도, 당연히 돌아와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은재는 방안에 없었다. "제기랄!" 지완은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젠장, 젠장,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자신을 무시하고 사라지는 주원의 차를 보며 자신의 차를 얼마나 걷어찼는지, 차의 옆면이 움푹 우그러지고 말았다. 가까스로 진정을 하고 승희에게 사과를 하고 승희의 집으로 향하는 길, 무서운 속도로 지완은 강남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경찰에게 잡혀 딱지를 끊기도 했다. 그렇게, 미친 짓을 하며 달려서 왔건만, 집에 당연히 와 있어야 할 은재가 없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그런 말도 안 되는 발상으로 더블 데이트 운운하며 약속을 잡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은재가 주원이 녀석을 만나지 못하도록 침대에서 걸어나가지 못하도록, 만들었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 지완은 거칠게 옷을 풀어헤치고 핸드폰을 꺼내 은재의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핸드폰이 꺼져있어……. "젠장!" 지완은 으스러져라 핸드폰을 쥐어 잡고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뭐 하느라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지완은 다시 핸드폰을 열고 이제는 주원의 전화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핸드폰이 꺼져있어……. "이 씨발! 이것들이 정말로!" 지완은 들고 있던 핸드폰을 던져 버렸다. -털썩 핸드폰은 장롱에 맞고, 털썩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으아악!" 지완은 방안을 돌아다니며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도저히, 이러지 않고는 맨 정신으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 그렇게 은재를 차에 태워 데려 와야 했었다.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체면을 차릴 것이 아니라. 주원이 그 늑대 같은 놈의 차에 태워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지완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연락이 되지 않는 은재와 주원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완은 속이 시커멓게 타서 재가되어 버릴 지경이었다. 은재가 좋다고 환장을 하고 있는 주원 곁에 은재가 있다! 그 생각만으로 지완은 심장이 오그라들 지경이었다. 은재가 방에 들어선 것은 그 뒤로도 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은재는 들어오면서 지완이 집에 들어온 것을 어머니께 들은 터라 방문을 열면서 집에 들어오는 내내 입안에서 되 뇌였던 말을 쏟아냈다. "김지완, 너 오늘 매너 꽝 이었어. 어떻게……." 짐짓 엄한 목소리로 지완을 타이를 작정이었던 은재는 문을 열자마자 엉망으로 어질러진 방안의 모습에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딱 벌리고 서고 말았다.


"도대체 방 꼴이 이게……." "생각보다 일찍 들어왔네. 왜, 주원이 녀석이 생각보다 별로데?" 은재의 말에 지완은 으르렁거리며 은재에게 달려들었다. 거칠게 은재의 입을 덮고 무자비하게 은재의 입을 벌려 은재를 탐하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거야. 이 *새끼야, 안 놔, 안 놔!" 은재는 지완의 어깨를 손으로 때리며 반항했지만, 지완은 은재의 그런 반항을 무시한 채 그래도 은재를 들어 침대 위로 던져 버렸다. "너, 너 왜, 그래. 또 발광하는, 거야?" 은재는 슬금슬금 침대 위로 몸을 피하며 발을 버벅거렸다. "내가 어디가 그 놈보다 못나서. 내가 어디서 그 놈 보다 못나다고!" 성난 범처럼, 지완은 은재를 향해 손을 뻗어 거칠게 찍어눌렀다. "내 꺼야. 안 줘. 안 줄 거야." 지완은 성급하게 은재의 겉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좀처럼 진정을 하지 못하는 지완의 손에 부드럽게 단추가 벗겨질 리는 만무했다. 지완은 욕을 지껄이며 옷의 양쪽끝을 잡고 뜯어 버렸다. 단추가 뜯어지고 옷이 벌려지자 지완은 성급하게 은재의 옷을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야, 이 자식아, 이게 얼마짜리 옷인지 알아?" 지완은 그런 은재의 말을 무시하고 은재의 치마를 걷어올리고 스타킹과 속옷을 끌어내리기에 바빴다. "저리 비켜. *새끼야. 안 해. 안 할거야." 막무가내로 자신에게 덤비는 지완을 보며, 은재는 다리를 휘저어 지완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은재의 시도는 지완이 은재의 허벅지를 두 손과 자신의 강한 몸으로 누르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는 해. 나는 할거야." 다짐을 하듯, 지완은 은재의 눈동자를 쳐다보며 무섭게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증명하듯, 바지를 내린 지완은 무섭게 은재의 몸 속으로 파고들었다. "싫어. 싫어. 싫단 말야." 은재의 몸부림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 지완은 은재의 옷을 하나씩 벗기며 은재의 몸 속으로 들어와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끼. 너, 가만 안 둘 거야." 은재는 끊임없이 지완의 어깨를 손으로 치며 반항을 했다. 급기야, 은재는 지완의 어깨를 이를 세워 꽉 물어 버렸다. "아야!" 지완이, 정색을 하며 하던 동작을 멈추며 고통스러운 듯, 은재의 몸 위에 쓰러졌다. "*새끼, 미친 새끼. 돌았어. 돌았어." 은재는 지완을 밀어내며 계속해서 소리쳤다. 은재는 아주 자리에서 일어나 끙끙거리고 있는 지완의 어깨를 발로 밟아대고 있었다. "미친 놈. 뭘 잘했다고 지랄이야. 너 지금 뭔 짓 했는지 알아? 이거 강간이야. 강간! 알아!" 한참을 널부러진 지완을 밟아대던 은재는 옷을 추스르며 침대에서 내려서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그 순간, 벌떡 지완이 고개를 들고는 은재의 팔을 잡아당기며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싫어. 싫다고 했지." 그러나 은재는 그런 지완의 입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미안해." 침대 끝에 앉아 일어서려던 은재의 허리를 손으로 휘감으며 지완은 그제사 정신이 들었는지, 부드럽게 은재에게 속삭였다. "저리 손 치워. 이 강간범아!" "미안해. 내가, 잠시 이성을 잃었었나봐. 미안해. 정말 미안해." "지금 어떤 말도 소용없으니까, 저리 비켜. 네 얼굴 꼴도 보기 싫으니까."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은재야, 용서해 줘." 애처로운 목소리로 지완은 은재의 귀에 계속해서 속삭였다. "잘못했어. 잘못했어." 지완의 손이 부드럽게, 가까스로 은재가 붙잡고 있던 블라우스 속으로 손을 밀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지완은 곧 은재의 가슴을 한손 가득 붙잡고 부드럽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은재의 귓볼에 계속해서 사과의 말을 중얼거리며. "다시는 그러지 마." "알았어. 알았어." "다시 해봐. 이번엔 부드럽게." 은재의 허락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완은 은재의 몸에 고개를 숙여 블라우스를 헤치고 은재의 하얀 가슴에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이번만 용서해 주는 거야. 다음에는 감방 갈 생각하고 있어." 지완은 환락이 지나 간 후에도 여전히 은재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은재의 향을 들여 마시고 있었다. 평온함, 아까의 미칠 것 같은 분노는 사그라들고 지금 지완의 가슴은 따뜻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알았어. 잘못했어." 지완은 고개를 들어 은재의 말에 대답을 하고는 다시 은재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났던 거야?" 은재는 지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물었다. 살짝살짝, 은재의 가슴을 핥던 지완의 얼굴은 은재의 질문에 다시 무섭게 일그러졌다. "너랑, 주원이 같이 있는 거, 맘에 안 들어." "그것 때문에 이 난리를 친 거야!" "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너 오지 않고, 주원이랑……." 지완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돌아누웠다. "주원 씨랑 섹스를 하는 줄 알았다! 이 말이야!" 미처 지완이 하지 못한 말을 은재가 마져 해버리자, 지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그래." "아직도 그 생각 변함없어? 내가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아니." "오해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은재의 물음에 지완은 다시 은재를 향해 돌아서더니, 은재의 볼에 입술을 맞췄다. "널 안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이렇게 잘난 나를 두고 은재가 다른 남자를 안을 리 없다, 뭐 그런 생각이 들었지." "자신 만만 하기는." "은재야~" "응?" 지완은 손을 내려 은재의 가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은재의 이름을 불렀다.


"은재야~" "응?" "우리 이대로 그냥 살면 안될까?" 지완은 은재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으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선 같은 거 더 이상 보지 말고, 그냥 나랑 이대로 살면 안될까? 너의 어머니, 네가 결혼하길 원하신다고 했잖아. 그리고, 나도 솔직히 예석이 아니면 별로 다른 여자랑 결혼하고 싶은 맘도 없다." "……." "나 솔직히 너 싫지 않아. 그리고 우리 지금까지 잘해 왔잖아. 그냥 이대로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싫어." 은재는 지완의 말을 단번에 거절해 버렸다. 은재는 지완의 손을 자신의 몸에서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은재의 거절이 예상 밖이었는지 지완은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며, 은재를 따라 일어섰다. "너, 여자한테는 한번 이혼한 게 커다란 흠집이 된다면서. 그런 것까지 생각해서 난 이런 제안하는 거란 말이야. 그렇게 생각도 하지 않고, 말하지 말고 한번 잘 생각해 보고 얘기해. 난, 난 진짜로 심각하단 말야." "싫은 건 싫은 거야.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어." "왜 나보다, 주원이 놈이 더 좋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아니. 주원 씨한테는 더 이상 만나지 말자고 오늘 얘기했어." 은재의 말에 지완의 얼굴에 희색이 띈 것도 잠시, 지완은 분통을 터트리며 은재를 쳐다보았다. "그럼, 그럼 왜 이러는 건데." "난, 친구랑 결혼하고 싶은 맘 없으니까. 이 이야기는 그만 하자. 난 네가 어떤 말을 해도 내 생각에는 변함없으니까." 은재는 더 이상 지완의 말을 거절한다는 확실한 어조로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샤워하고 나올 테니까, 나올 때까지, 방 확실하게 치워 둬." 엄한 어투로 지완에게 청소를 명하고 욕실 안으로 사라지는 은재의 뒷모습을 보며, 지완은 허탈한 듯, 그대로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16. 돌아서는 남자 지완의 고백은 단번에 딱 잘라 거절하는 은재의 말에 그대로 허공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지완은 은재의 그런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날 이후 은제에게 두 번 다시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시기상조일까? 아무래도 여전히 은재는 자신을 친구로 밖에는 인식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조금 더 쳐서 테크닉 좋은 섹스 파트너 정도. 아니 그런거면 친구 이하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지완은 심기일전(心機一轉), 절치부심(切齒腐心)하여, 그 동안 은재에게 추락된 자신의 이미지를 고양하기 위해 이미지 관리에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하였다. "넘 넘 귀여워." 은재는 대청소를 하다말고, 책장에서 발견한 지완의 어린 시절 앨범을 펼쳐보고는 그


자리에 앉아서 청소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앨범 보는 일에 쏙 빠져버리고 말았다. 다른 한켠에서 청소기를 돌리고 있던 지완도 은재가 하는 냥이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섰다가 청소기를 내려놓고, 은재 곁에 앉아서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이건 나, 국민학교 3 학년 때, 수학 경시대회에서 1 등 먹었을 때 사진." 지완은 한 장, 한 장씩, 앨범을 넘기며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이때부터 내가 1 등이 얼마나 좋은 건지를 알게된 시기라고 할 수 있지. 그때부터 줄곧 1 등만 했었는데, 고등학교 들어와서 첫 모의고사, 통지표에 2 등이란 숫자보고 나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 "그랬어?" "그래. 그것도 날 이긴 녀석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사실. 나 며칠 동안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고민했었다니까." "나고 쇼크였어. 난 당연히 내가 화랑 고 입학 수석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차석이라니. 나도 무지 쇼크였다고." "3 년 내내 1 등 하려고 기를 쓰고 공부했다. 1 등 하는 게 힘들다는 것도 첨 알았고. 그리고 하다보니 너랑 경쟁하는 것도 재밌더라고. 3 년 내내 우리가 주거니 받거니 1 등 했었잖아. 그러고 보면 우린 너무 똑똑한 거 같아. 그지?" "잘난 척은." 은재는 지완의 코를 장난스레 잡았다 놓았다. 앨범의 다음 페이지를 넘기자, 지완의 아기 시절의 사진이 펼쳐져 있었다. "너무 귀엽다." 은재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럼 누군데, 귀엽지 않겠어?" "그런데 어린 시절 사진을 보니까, 그때는 솔직했던 모양이야. 성질 내고 있는 사진이 많을 걸 보니 말이야." 은재의 짓궂은 농담에 지완은 자신을 자랑하던 때와는 다르게 입을 다물고 말없이 앨범을 넘기고만 있었다. "이야~ 잠깐만, 잠깐만……." 사진을 내려다보던 은재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어디론가 뛰어갔다가 다시 자리를 돌아와 무엇인가를 펼쳐 보였다. "많이 자랐는데." 다름 아닌 은재가 가져온 것은, 은재의 나체 사진이었다. 은재는 나체 사진을 지완의 돌 사진에 갔다대고 비교를 하고 있었다. 그 돌 사진 역시 나체 사진이었던 것이다. "차, 창피하게." "이런 창피한 짓 한 게 누군데?" "내 놔!" 지완은 은재의 손에서 세 번째 자신의 나체 사진을 획득하였다. "이제, 몇 장 남았어?" "비밀!" 은재는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대답을 원하는 지완의 간절한 소망을 무시하고 다시 고개를 내려 사진들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건 예석이랑 유완이." 뾰루퉁하게 은재를 쳐다보던 지완이 다시 사진들을 가리키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국민학교 졸업식 때, 사진이야. 고모님 댁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봐. 그렇지 않고서야 예석이 졸업식 때 집에서 아무도 오지


않았겠어." "그래." "그래서 내가 예석이 데리고 와서 우리 유완이랑 계속해서 사진 찍어주고 그랬어. 잘했지?" "그래. 잘했다. 잘했어." 은재의 칭찬에 계속해서 지완은 예석과 있었던 일들을 시시콜콜 늘어놓기 시작했다. "난 도무지 예석이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겠어. 그런 딸이 있으면 나는 매일 매일 업고 다녔을 텐데 말이야." "다 각자가 가진 척도대로 사람들을 보기 때문에 그럴 거야." "그래도 정말 예석이 아버지, 맘에 안 들어. 내가 울 아버지 회사 물려받으면, 확 밀어 버릴 거야. 황룡전자. 우리 예석이 고생시킨 그 아저씨, 진짜 맘에 안 들어." 지완은 어금니를 깨물며 험악한 인상을 지으며, 예석의 아버지를 욕하기 시작했다. "혹여라도 그러지 마. 예석이 아버지, 나도 맘에 안 들지만, 황룡전자 직원들은 무슨 죄니?" "그런가? 그럼 어떻게 그 아저씨, 정신 바짝 들게 해주지? 똑똑한 우리 은재가 말해봐." "글세. 나도 그것까진 모르겠다." "차차 생각하지 뭐." 지완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굴을 피고 방실방실 웃으며 사진들을 넘기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은재는 멍하니 그런 지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고등학교 입학식 때. 멋지지? 이때 나한테 반했다고 따라다닌 여자들이 연필 한 다스는 넘……. 정은재?" "어, 어?" "뭘 그렇게 멍하니 있는 거야?" "아냐. 아무 것도." "이거 봐봐. 여기 너도 있다. 우리 고등학교 축제 때 말……." 지완은 은재의 손을 끌으며 다시 사진 속으로 이끌고 있었다. "지완아!" "응?" "지완아!" 사진을 보고 있던 지완은 은재의 부름에 계속해서 사진에만 고개를 쳐박고 도통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지완아!" "어, 왜?" 계속해서 은재가 지완을 부르자, 그제서야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요즘엔 예석이 생각 안 해?" "왜 안 하겠어. 어디 가서 밥은 잘 먹고 있는지, 건강은 한지, 늘 상 이 심장 속에서 걱정중이지. 우리 예석이는 다 완벽한데, 그놈의 남자 보는 눈이 영 황이라서 문제야. 어쩌자고 나 같은 남자를 두고, 그 양아치 같은 놈이 좋다고 하는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지완은 장난스럽게 말을 하며 앨범을 뒤척이고 있었다. 그런 지완을 바라보는 은재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랑한다는데, 그 양아치 같은 놈이 좋다는데 어쩌겠어. 행복하길 빌어줘야지. 나도 우리 은재랑 행복하게 살아야지. 그치, 마누라?"


지완은 은근슬쩍 은재에게 다시 수작을 걸어오며 은재의 맘을 떠보고 있었다. "예석이, 행복하지 않으면……아니, 아니다." "무슨 말을 하다 말아?" "아니. 아니야. 말실수 한 거 같아." 은재는 지완의 눈을 피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정은재?" 은재의 불안한 눈동자는 의식적으로 지완의 검은 눈동자를 피하고 있었다. "은재야!" 지완은 은재에게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자신을 피해 일어서는 은재의 손을 잡아챘다. "너, 오늘 이상해. 뭔가 있지. 왜 갑자기, 예석이 이야기를 꺼내고……." "아냐. 아무, 것도 아냐. 그냥, 사진, 보다가 예석이 생각나서. 처, 청소 마져 하자. 늦……." 평소의 은재와는 무언가가 달랐다. 지완의 말에 당혹하는 기색이 역력한 은재의 모습은 평소의 모습과는 확실히 달랐다. "너,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 "……." "예석이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는 거야?" "몰라. 난 몰라." 은재는 가까스로 말을 내뱉고는 황급히 지완에게서 몸을 돌렸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 오기 시작했다. "예석이랑 연락되는 거야? 행복하지 않은 거야! 그런 거야!" "……" "정은재! 대답해. 그런 거야, 그런 거냐고!" 지완은 은재의 팔을 잡고,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난 알아야겠어. 예석이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정은재! 정은재!" 지완은 이성을 잃고 은재의 몸을 흔들며, 대답을 촉구하고 있었다. 이런 지완의 모습은, 그때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말년 휴가를 나와서, 그 동안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예석이를 휴가 나올 때마다 찾던 지완의 모습이 안타까워, 힘들게 예석의 안부를 털어놓았을 때도, 지완은 이렇게 미친 듯이 은재를 향해, 소리쳤었다. 마치, 예석이 지완을 두고, 결혼을 하게 된 것이 은재의 탓이라도 되는 것 마냥, 은재를 향해 폭언을 서슴지 않았었다. 얼마 전의 그 고백으로 말미암아, 은재는 설레였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청혼을 했지만, 조금은 지완이 자신을 가슴에 담지 않았을까, 아니 담을 여지가 생기지 않았을까 하고 기대를 했었다. 그렇게 모진 말로 거절했지만, 은재의 가슴은 그때부터 설레이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저,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신은 예석의 대타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예석이 내 아파트에 있어." 은재의 찢어질 듯한 맘과는 다르게, 은재의 입에서는 차분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언제, 언제부터? 왜? 혼자서?" 완전히 지완은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물어봐. 그리고 나 귀 안 먹었어. 조용히 말해." "넌 언제 알았어? 그런 거 알았으면, 즉시 말해줬어야지!" "주원 씨가 집에 데려줬던 날. 내 아파트에 가서 알았어." 은재의 말에 기가 막힌 듯, 지완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침대 위에 무너져


내렸다. 그날 밤, 주원과의 대화로 착잡한 심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오랜만에 들르는 아파트 문을 열었을 때, 은재를 반기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이 아닌, 놀란 표정으로 빛을 등지고 서있는 예석의 모습이었다. "너, 너 왜 여기 있는 거야?" 은재가 처음 예석을 대할 때의 심정은 놀람 그 이전에 의구심이었다. 분명히 예석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쫓아 지완과의 약혼식장에서 나가버리지 않았던가? 그런 이유로, 은재는 예석이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그 동안 살아왔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어딨어?" 은재는 집안으로 들어와 두리번거리며 예석의 남자의 그림자를 찾았다. "그 사람 여기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 예석은 더 이상 대답을 거부하고, 부엌으로 들어섰다. "언니 뭐 마실래?" 그때, 비로소 은재는 예석의 몸의 변화를 볼 수가 있었다. 불룩하게 솟아 오른 배. 예석은 홀몸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예석, 너, 임신했어?" 은재의 떨리는 음성에 예석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예석아!" 은재가 예석에게 다가서 팔을 붙잡자, 그제사 예석의 눈가에선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개자식이, 날 버리고 도망갔어. 사랑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자고 일어나니까, 달랑 편지 하나 써 놓고 중국으로 날라 버렸어……. 살던 집에 가보니, 어머니도 돌아가셨다고 하고, 그렇다고 집에 돌아갈 수도 없고……." 예석을 눈물을 쏟아내며 그동안의 일들을 은재에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2 달이라는 기간 동안, 살던 집에서 남자를 기다렸지만 끝끝내 오지 않고 죽을려고 맘을 먹었다는 예석이의 말에 은재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래도, 목숨 끊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조금 지나서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 아이, 이 아이만 아니었으면, 아마 나 지금 살아있지 않았을 거야." "그런 무서운 소리하지 말아." "언니 집 찾아왔는데, 언니는 도통 오지 않고, 전에 언니가 준 열쇠로 들어와서 지내게 됐어. 언니 미안해." "그래. 잘했어. 잘했어." 은재는 예석을 품에 안고 대견한 듯, 다독여 주었다. "빨리 연락하지 그랬어. 바보같이 혼자서, 고생하지 말고." "내가 언니한테 어떻게 그래. 이렇게 아파트에 있는 것도 미안한데."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난 네가 연락 안한 게 더 섭섭해." "난 언니한테 너무너무 미안해. 지완 오빠하고, 약혼하려고 했던 거, 나 진심 아니었어. 그때는 될 때로 되라하고……. 미안해. 언니. 정말 미안해." "그게 왜 나한테 미안한 일이야. 됐어. 그만하자. 그나저나 몇 개월 된 거야? 꽤 배가 부른 거 같은데."


"7 개월." 예석은 배에 손을 얹으며 얼굴을 붉혔다. "그나저나 언니 어디 가 있는 거야? 이렇게 아파트는 비워두고." "어. 사정이 길어." 은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은재는 대충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무관심하게 자신의 일을 이야기하고 일어서는 은재의 뒷모습을 보는 예석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내려 앉았다. "잘 된 거잖아. 언니, 지완 오빠,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잘 먹고 있는 거야? 아기 가졌으면 잘 먹어야 하는데. 아유, 냉장고가 다 비었네." 은재는 예석의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부엌을 돌아다니며 이리저리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은재는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며 시시콜콜 참견을 하며, 예석의 건강을 걱정했다. 결국 그날 은재는 슈퍼를 차릴 것처럼 많은 것들을 사 가지고 와 냉장고며 찬장 여기저기를 먹을 것으로 채우고, 예석에게 필요한 생필품이며, 아기 용품 등을 사들고 와서 가득 채우고서야 집을 나섰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은 은재가 예석을 걱정스런 표정으로 쳐다보며 손을 끌어 당겼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알지? 이대로 둬도 괜찮을 지 모르겠다. 지완이……." "아니. 지완 오빠한테는 얘기하지마." "지완이가 걱정할 거야." "아니. 그러지 마. 언니. 내가 편하지 않아." "하지만……." "언니가 지완 오빠한테 얘기하면, 나 여기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 예석의 단호한 말에 은재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당분간은 그럴게. 하지만, 계속 비밀 유지할 수 없다는 거 알지?" "응. 알았어. 가봐 언니. 조심하고. 언니 집은, 이예석이 확실히 지키고 있겠습니다!" "그래. 그래. 몸 조심해." 은재는 그렇게 예석을 멀리하고 집을 빠져 나왔던 것이었다. 그날 그렇게 지완이 은재가 늦은 이유를 물어도 대답을 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런, 예석의 부탁 때문이었다. "가봐야겠어.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멍하니 자리에 앉아있던 지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뭐해. 너도 빨리 옷 입어." 털썩 자리에 앉아서 그런 지완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은재는 지완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지완을 쳐다보았다. "무슨 연유로 그걸 한달 동안이나 나한테 숨겼는지 모르겠지만, 은재 너의 혼자 생각은 아니겠지. 예석이가 부탁한 거겠지?" "……" "내가 가서 문 열어달라고 하면 문 안 열어줄 거 아니야. 그러니까 같이 가." 지완의 말에, 은재는 조용히 일어나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아무리, 예석이가 말하지 말라고 했어도, 넌 나한테 말했어야 했어. 너한테 실망했어. 정은재." "나, 너한테 그런 말들을 정도로 잘못한 거 없어. 그렇게 죄인 취급하지 마. 그런 말 들어야 할거 오히려 나야. 너와 예석이 둘 사이의 일로, 항상 피해보는 건 나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은재는 지완의 말을 톡 쏴붙이고는 방문을 열고 걸어나와 버렸다.


갑작스럽게 들어 닥친 지완과 은재로 인해서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던 예석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거실에 서 있었다. 지완은 예석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다자고짜 예석을 품에 안아버렸다. "그러게, 그 자식한테 가지 말라고 했잖아!" 예석을 품에 안았던 이상한 느낌에 예석을 떼어 내고 예석의 배로 서서히 시선을 내렸다. "너, 너……." 지완은 예석의 얼굴과 배로 시선을 내렸다, 올렸다 하며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예석이 놀래겠다. 그만하고 자리 앉아." 그런 지완을 은재가 나서서 진정을 시켰다. "그 개자식 어디 갔어!" 지완은 으르렁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지완은 아파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 자식 어디 갔어?" "없어." 예석의 말에 지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 "없어. 그 사람 없어." 지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한 손을 들어 눈을 비비고는 다시 예석을 쳐다보았다. "사라졌어." "씹~ 그 개자식 잡히기만 해봐라." "욕하지마. 그 사람한테 나만 욕할 수 있어. 오빠라도, 그 사람한테 욕하는 거 참을 수 없어. 그러니까 하지마." "그 자식이, 뭐가 좋다고! 내가 그랬지. 그 자식은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고! 이게 뭐야!" 지완은 예석을 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아니. 행복해.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예석의 꿈꾸는 듯한 표정에 지완의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어떻게 살려고. 미혼모 되서 어떻게 살아가려고!" "……." "내가 책임져줄게. 결혼하자." 지완의 선언에 예석과 은재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그러나 곧 은재는 예석의 눈동자를 피하고, 자리에서 일어서 주방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은재의 눈에 눈물이 스미기 시작했다. 심장이 짜르르 아파 오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주방에 들어가 식탁에 앉은 은재는 그제서야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9 개월 전,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 자신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예석에게 청혼을 하던 지완, 그리고 그런 지완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신. 왜 이렇게 자신의 운명은 짓궂기만 한지. 서럽고도 서로운 자신의 운명에 은재는 그만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당연히 거절해야 하는 제안인 줄 알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제안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너무나도 행복한 7 개월의 시간에, 자그마한 꿈을 꿨었다. 자신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한 남자와 조그마한 아이들.


그러나, 지금 운명은 그 꿈을 비웃듯, 산산이 그 꿈을 부셔 버렸다. 아니, 어쩌면 헛된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다. 운명은 은재에게 오히려 그것을 일깨워 줬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그만 두라고, 부질없는 짓 그만 하라고. 그런데 사람 맘이라는 게, 그것이 그리 쉬울까. 은재는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눈물을 닦고 주전자에 물을 받아, 가스렌지에 올리고 불을 켜고 자리에 앉았다. 마주 잡고 있는 손이 계속해서 부들부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강한 은재, 씩씩한 은재, 강한 은재, 씩씩한 은재.' 옛날, 할머니를 잃은 그날처럼, 은재는 맘속으로 계속해서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강해지기 위한 주문, 씩씩해지기 위한 주문을, 은재는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17. 웃고 있는 남자 오늘도 지완은 밤 늦게야 집에 들어섰다. 침대에 누워 있던 은재는 지완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왔어?" "안자고 있었어. 먼저 자라고 했잖아." "예석이는 좀 어때?" "싫다고 하는 걸 억지로 횟집 데리고 갔었어. 그래도 오늘은 꽤 먹더라고." "그래. 잘 됐네." 지완은 옷을 갈아입고,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침대 위로 올라섰다. "걱정이야. 일하는 아줌마를 붙여놨는데도, 걱정되서 죽을 거 같아." "뭐가 그렇게 걱정인데?" "배가 산만해서, 금새라도 애가 나올 거 같아. 그래서 내가 회사 가있을 때 나오는 건 아닌지, 잠을 자고 있을 때 나오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 해." 지완의 말에 은재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2 달 반 가까이 남았어. 애가 아무 때나 나오는 줄 알아?" "그래도……." "걱정하지마. 너도 있고, 일하는 아줌마도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그렇겠지. 잘 되겠지?" "그래." 지완은 은재의 말에 안심이 되는지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 누웠다. "아기가 뱃속에서 꼼지락거려. 그렇게 신기한 건 첨 봤어." "예석이랑 사이는 좀 나아졌나 보네. 배까지 만지고 온 걸 보면." "아니. 예석이 잘 때 몰래 만져 봤어. 예석이는 아직도 나 가까이도 못 오게 해. 오늘도 일하는 아줌마가 문 열어줘서 들어간걸." 지완은 은재 앞에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예석이 지완의 청혼을 거절한 그날부터 지완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예석을 찾아갔다. 그러나 예석에게 받는 것이란 냉대와 홀대뿐이었다. 예석에게 받은 그런 섭섭한 대우를 지완은 집으로 돌아와 은재에게 풀어놓으며 자신의 섭섭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었다. "예석이는 왜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 "네가 예석이를 포기하기 힘든 만큼, 예석이도 그 남자를 포기하기 힘든 걸 거야. 단 시간 내에 예석이 맘을 어찌하겠다는 맘은 버리고 천천히 다가가도록 해." "알았어. 그렇게 할게. 참, 이것 봐라!"


지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봉지 하나를 들고, 다시 침대로 올라왔다. 그러고 보니 지완이 방에 들어설 때 들고 온 봉지였다. "뭐야?" "짜잔~" 지완은 봉지를 거꾸로 들고, 침대 위에 봉지 안에 들은 물건들을 쏟아냈다. "이게 다 뭐야!" "이건 아기 옷, 이건 아기 신발, 양말, 딸랑이, 모빌, 손수건 등등 하여튼 많아." "뭘 이렇게 많이 샀어. 지난번에도 내가 사준 거 있는데." 은재의 말에 지완은 배시시 웃음을 터트렸다. "오는 길에 아기용품점이 보이잖아. 근데 밖에 보이는 모빌이 너무 예뻐서 저것만 하나 사가야지 하고 들어갔는데, 맘에 드는 게 너무 많잖아. 그래서 사다보니까, 이렇게 많아 졌어." "귀엽다." 은재는 그 중에 아기 옷 하나를 들어올려 자신의 몸에 대보고는 활짝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봐!" 지완은 물건들을 헤치고 모빌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게 맘에 들어서 사러갔는데, 이렇게 많이 사왔지 뭐야. 예쁘지?" 지완이 들고 있는 모빌에는 하얀 아기 천사들이 달려 있었다. "예쁘다." "오늘 우리도 천장에다 이거 달고 잘까?" 지완은 은재의 대답도 듣지 않고, 모빌을 봉지에서 꺼내 침대 위의 천장에 철썩 붙였다. 지완이 줄을 잡아당기자, 쩔렁쩔렁 종소리가 흘러나왔다. "야하하, 이것 봐!" 허공에서 아기 천사들이 날아다니고, 종소리가 맑게 울려 퍼지자, 지완은 계속해서 어린아이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지완의 모습을 보는 은재의 눈가에 촉촉이 눈물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자자." "나 좀더 보고픈데." "늦었어. 낼 출근해야지." "맞다. 낼 아침에 예석이한테 들렸다 가려면 일찍 자야겠다." 은재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눈물을 감추며 방의 불을 껐다. 다음날 아침. 은재는 환한 불빛에 더 이상 잠을 자지 못하고, 눈을 뜨고 말았다. "더 자." 은재가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예석이한테 간다니까." "아, 그래." 은재는 시계를 쳐다보곤 다시 이불을 덮고 자리에 누웠다. 아무래도 눈물샘이 고장이 난 모양이다. 아침부터 또다시 눈가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예석이에게 맨 처음 청혼을 하고 허락을 받았던 그 다음날 아침에도, 지완은 새벽부터


붉은 장미꽃을 들고 예석을 찾아왔었다. 그날 밤, 밤을 꼬박 지새운 은재의 고민을 비웃기라도 하듯 지완은 환하게 웃으며 수줍게 예석에게 장미꽃을 내밀었었다. 오늘도 지완은, 자기가 산 선물을 가지고,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수줍은 듯 선물을 내밀겠지……. "나 갔다 올게." 준비를 끝마쳤는지, 지완은 은재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은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나보네." -딸깍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스르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은재는 이불을 내려 멍하니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바보, 칠푼이 같은 놈. 확 애라도 가져서, 이혼 안 해 줄까보다." 어느새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은재는 중얼거렸다. 집으로 오르는 은재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어차피 집엘 들어가도, 지완은 없을 터였다. 예석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매일 지완은 퇴근을 하고, 예석을 찾아가곤 했다. 그래서 은재가 요즘 지완을 볼 수 있는 시간은 늦은 시간의 잠깐 몇 분과 출근 할 때의 잠깐이 고작이었다. 은재는 한숨을 푹 내쉬며 집을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삑삑~ 헤드라이트 불빛이 은재를 비추는가 싶더니, 요란한 경적소리가 은재의 귓가에 들려왔다. "형수님!" 은재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도련님!" "지금 집에 가시는 길이세요?" "네." "타세요. 집까지 타고 가세요." "아니. 도련님 먼저 가세요. 전, 조금 걷고 싶어서." "무슨 일 있으세요?" 걱정스런 표정으로 유완이 은재를 쳐다보았다. "아니요. 그냥요. 분위기 좀 잡아 보려고요." 은재는 힘겹게 웃음 지으며, 유완을 안심시키려 애썼다. "형수님! 오늘 저한테 시간 좀 내주실래요?" "네?" "지금 형수님한테, 저 데이트 신청하는 거예요." "쿠쿠쿠." 유완은 차를 옆으로 세워, 차에서 내려섰다. "허락하시는 거죠?" "네, 그러죠. 좋아요." 은재는 유완의 제안을 흔쾌히 허락하며 차에 올라섰다. "어디로 모실까요?" "도련님, 저 오늘 술 좀 사주실래요?" 은재의 말에 유완의 두 눈이 검게 흐려졌다.


"형수님,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음음, 아니요. 그냥, 갑자기 뜨끈한 오뎅 국물이 생각나면서, 한잔 생각이 간절해서요. 안될까요? 도련님?" "아, 아뇨. 어느 분의 부탁인데 제가 거절하겠습니다. 출발합니다." 유완은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차를 출발시켰다. 길거리에 서있는 포장마차에 들어서며, 은재는 집에 전화를 드리고, 유완과 자리에 마주 앉았다. "도련님이 사시는 거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 생각보다 많이 먹어요. 도련님, 주머니 걱정 좀 하셔야 될 거예요." "차를 팔아서라도 우리 형수님을 위해선 사드립니다.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뜨거운 오뎅 국물에, 소주 한 병을 시켜놓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유완은 그저, 자신의 형수님이 보물처럼 느껴지고, 고마울 뿐이었다. 형을 한 손에 휘어잡고, 가족들을 똘똘 뭉치게 하신 자그마한 형수님이 유완에겐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요 며칠, 형수님이 영 기운이 없는 것이, 걱정이 되었는데,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은재에게 기운을 내게 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갈수록, 형수님의 말은 줄어들고, 술잔을 들어올리는 횟수가 늘어가고 있었다. "형수님, 너무 많이 드시는 거 아니세요?" "오늘만 봐주세요. 도련님. 오늘만." 걱정스런 표정으로 유완은 그런 은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걱정스런 표정 짓지 마세요. 회사에서 조금 속상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한번만 봐주세요." "네. 드세요." 유완은 은재의 빈 술잔에 술을 따르며, 은재의 기분을 맞춰주기 시작했다. "제가 형수님, 세상에서 젤루 존경하는 거 아시죠?" "……." "저 고 1 때까지는 세상에서 우리 형이 제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었어요. 근데 형 졸업식 때, 형을 물리치고, 일등으로 졸업한 형수님 보면서, 형수님을 평생 존경하기로 했답니다. 형 앨범에 있던, 졸업식 사진 중에 반이 형수님 사진인 거, 그거 제가 다 사진을 찍어서 그래요." "그래요?" "네. 그리고 우리 형을 꽉 붙잡고 사셔서, 저희 가족들이 얼마나 요즘 편하게 살고 있는지 모르시죠? 그래서 다시 한번 우리 형수님 존경합니다." 유완은 과장된 목소리로 은재를 칭찬하기에 바빴다. "전, 그렇게 대단하지 못해요. 전……." 은재는 하던 말을 멈추고, 다시 술을 단순에 마셔버렸다. "전, 바본걸요. 좋아하면 좋아한다, 싫으면 싫다, 말도 못하는 바본걸요. 그렇게 도련님이 존경할 만한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해요." "……." "아구~ 분위기 이상해졌네. 어서, 도련님도 쭉 드세요." 결국, 그날의 술자리는 밤이 무르익도록 계속 되었고, 은재는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버리고 말았다. 유완이 아무리 은재의 이름을 불러도 은재는 좀체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유완은 은재를 업고 택시를 타고 가까스로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간신히 침대에 몸을 눕히고 유완은 땀을 훔치며 방의 불을 끄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지완아, 지완아……." 유완은 그저 은재의 고민이, 단순히 형수님이 말 한대로 회사 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술에 취해, 몸을 뒤척이며, 형의 이름을 부르는 형수님의 모습을 보니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요 며칠 계속해서 밤늦게 퇴근을 하고 있는 형의 모습을 보니, 예전의 모습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하루라도 형수님을 못 보면 큰일 날 것처럼, 줄창 방에 붙어서 무엇을 하는지 한시도 떨어져 있으려 하지 않던 형이었는데, 늦은 퇴근은 물론이거니와, 주말에도 집에 있지 않고 자주 외출을 하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거기다, 이상한 말을 늘어놓는 형수님의 모습과, 술에 취해 형의 이름을 부르는 형수님.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다. 의구심을 뒤로 한 채, 유완은 방에 불을 끄고 방을 빠져 나왔다. 살금살금 이층으로 올라서던 지완은 이층 거실에 환하게 불이 밝혀진 것을 보고는 무슨 일인가 하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거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거실 한가운데는 어쩐 일인지 유완이 자신을 보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잠도 안자고 뭐해?" "지금 오는 거야?" 무뚝뚝한 유완의 목소리가 지완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엄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보면 모르냐."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아니 없는데." 지완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러나 유완은 그런 지완에게 믿음이 안 가는지,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지완을 째려봤다. "형, 바람 펴?" 어버버~~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래? 지완은 유완의 뜬금 없는 질문에 입이 떡 벌어졌다. "무, 무슨 실없는 소리야!" "형, 요즘 이상해. 매일 매일 늦게 들어오고, 도통 얼굴 구경을 할 수가 없는 것이 암튼 수상해. 아니라고 하니까 그냥 이대로 물러서는데, 형수님한테 신경 좀 쓰란 말이야!" "은재가 왜?" "회사에서 안 좋은 일 있으셨대. 나랑 술 좀 마시셨는데, 조금 많이 드셨어. 아무래도 엄청 속상하신 일인가 봐. 형이 위로 좀 해드려. 요즘 형수님 얼굴이 우울해서, 집안 분위기도 우울해진 거 같단 말야." "아, 알았어. 들어가 봐라." 지완은 유완의 말에 기분이 침울해져서 방으로 들어섰다.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술 냄새가 풍기는 것이, 유완이 말 한대로 조금 마신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웬 술을 이렇게 마셨어. 정은재." 지완은 불을 켜고 은재에게 다가섰다. "은재야, 옷은 벗고 자야지." 불편하게 옷을 입고 드러누워 잠을 자고 있는 은재 곁에 다가선 지완은 조심스레 은재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목 말라." 지완의 손길에, 언뜻 잠이 깼는지, 은재는 몸을 뒤척이며 중얼거렸다.


"목 마르다고? 잠깐, 잠깐 기다려." 지완은 은재를 내려놓고, 부리나케 부엌으로 내려와 시원한 물을 한잔 따라 가지고 올라왔다. "은재야, 물." 지완은 은재의 몸을 떠받치고 은재의 입에 물을 흘려주었다. 조금씩, 시원한 물이 입에 들어가자 은재는 조금씩 정신이 드는지, 눈을 뜨고 지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깼어?" "꼴도 보기 싫어. 저리 가!" 무슨 힘이 이리도 센지, 은재가 두 팔로 지완을 밀어버리자, 지완은 꽈당하고 침대 밑으로 떼굴떼굴 떨어지고 말았다. "아야, 아파라! 왜, 왜 그래!" 엉덩이를 비비며 지완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침대 위로 올라와 은재의 얼굴을 쳐다보니, 웬걸 은재는 다시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잠이 들어 있었다. 무언가, 은재에게 하고픈 말들이 참으로 많은 지완이었지만, 잠에 골아 떨어진 은재가 자신의 말을 들어줄 리도 없고,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이 잠자코 잠을 자는 수밖에 없었다. "아구~ 머리야~" 은재는 깨질 거 같이 아파 오는 머리에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러게 웬 술을 그렇게 마셨어." "……." "잠깐만 기다려봐." 지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뽀르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은재는 얼굴을 찡그리며, 머리를 감싸안았다. "왜 먹긴, 속썩이는 화상 때문에 먹었지. 메롱~ 아구 머리야~" 아무래도 오늘은 출근하기가 힘들 듯했다. 하도 오랜만에, 그것도 빈속에 술을 퍼부었더니,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짜잔~" 문이 열리고 지완이 쟁반에 무엇인가를 받치고 들어섰다. "뭐야?" "꿀물~ 자 마셔." 지완은 생글생글 웃으며, 은재에게 다가서 그릇을 내밀었다. "어머니한테 뭐라고 말했어?" "술에 떡이되서 들어와서, 제정신이 아니라고 그랬지."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은재가 쌍심지를 켜며 지완을 노려보자, 지완은 웃음을 터트리며, 은재를 품에 안고 그릇을 입에 대 주었다. "잘 말씀 드렸어. 그러니까, 걱정 말아. 꿀물이나 드셔." 지완은 은재의 입에 그릇을 대어주고, 친밀하게 속삭였다. "나 혼자 먹을게." 은재는 지완의 품에서 빠져 나오며, 그릇을 받아들었다. "어, 그, 그래." 갑작스럽게, 은재가 자신을 밀어내자 지완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말을 머뭇거리며


손을 빼냈다. "회사 일이 뭐가 잘 안 풀려?" "아니. 괜찮아." "힘들면, 말해. 도와줄게." "고맙지만 사양할게." 은재의 거절에 약간은 기분이 상한 지완이 투덜거렸다. "잘할 수 있다면서, 속상 하다고 술은 왜 그렇게 마셨어." "상관하지마. 술도 가끔 마실 수 있는 거지, 왜 그런 거 까지 참견이야. 피곤하게 그러지마. 그나저나 어때, 예석이랑은 조금 진도가 나가?" 싸늘한 은재의 어투에 지완은 은재를 빤히 쳐다보다가, 예석이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이 시무룩하게 변해버렸다. "아니. 이젠 오지도 말래." "……." "너무너무 속상해. 우리 예석이 딱해 죽겠어. 빨리 집에다 데려놔야지, 혼자 있는 거 보려니까 가슴이 아파 죽겠어. 근데 도통 내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니, 어떻게 하지, 은재야?" "……." "말 좀 해봐. 우리 똑똑한 은재야." "아유~ 골 땡겨 죽겠네. 네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출근 준비 안 해!" 은재의 핀잔에 그제사 지완은 어기적어기적 자리에 일어나서 출근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넌 출근 안 해?" "조금 늦게 할려고." "팔자 좋다." "그게 동업자의 특권이지." "그래. 쉬는 김에 오늘 하루 푹 쉬어. 얼굴이 많이 상했다." 지완은 손을 내밀어 은재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순간, 찰나의 순간이지만 은재는 그런 지완의 손을 피해 얼굴을 돌려 버렸다. "왜……." "늦었어. 나가 봐." 지완은 자신의 손을 피하는 은재의 기색을 느끼며, 입을 열었지만 그런 지완조차도 은재는 고개를 돌리며 밀어내고 있었다. 묘한 시선으로 그런 은재를 응시하던 지완은 찜찜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지만,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나서고 있었다. "잘 다녀와~" 은재의 맑은 목소리가 지완의 몸을 잡았다. 은재가 손을 흔들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착각이었나? 지완은 잠시 잠깐의 묘한 기분을 떨쳐내며 은재를 향해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술을 먹어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었다. 지완은 은재의 환한 웃음을 보며 석연치 않은 생각을 떨쳐내고 출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18. 이혼 당하는 남자 이제 더 이상 지완의 푸념도 웃는 낯으로 들어줄 자신이 없고, 지완과 같은 방에서


머문다는 것도 이제 무의미한 일이며, 결정적으로는 이제 결혼을 유지할 마지막 끈까지도 끊어져 버렸다. 머리로는 아니다, 아니다 하면서 가슴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인지라 그렇게 지완의 온 정신을 가져가 버린 예석이 미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이 너무나도 추악해서, 은재는 이제 그만 두기로 했다. 아무리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 목석 같은 남자를 택하기보다는, 어차피 떠나고자 마음먹었다면 자신이 예뻐하던 후배에 대한 마음을 남기기로 했다. 사랑보다는 우정? 아니 짝사랑보다는 우정, 이 말이 맞는 말일 경우다. 이러한 경우에는. 짧다고 하면 짧은 결혼 생활, 길면 길다고 할 수 있는 6 개월간의 결혼 생활. 후회는 없었다. 그저 짝사랑으로 끝낼 사랑에, 더 많은 추억을 가지고 갈 수 있게 만든 결혼이었고, 너무나도 소중한 가족을 만났고, 가족의 사랑을 알게 해준 결혼이었기에. 다만 한가지, 그 가족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은재의 결정을 힘들게 만들었지만, 지완의 사랑을 얻지 못했다면 그것은 모두가 무의미한 일이기에 힘겹게 그 미련을 떨쳐 내기로 했다. 처음부터, 자신의 몫이 아님을 알기에. 밤새 한잠도 자지 못하고, 은재는 이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곤하게 잠이 들어 있는 지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은재의 가슴은 아파 오기 시작했다. '다시는 볼 수 없겠다. 이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네.'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지완과의 마지막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김지완, 이제 일어나!" 은재는 지완의 등을 쳐대며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자자. 오늘 일요일이잖아. 조금만, 조금만……." 지완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몸을 움츠렸다. "안 돼. 오늘 할 일 많아. 빨리 일어나!" "조금만, 조금만 10 분만 더 잘게." "안 돼. 빨리 일어나!" 은재는 지완이 돌돌 말고 있는 이불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지완은 이불의 끝을 잡고 버티기 시작했다. "예쁜 은재야, 조금만 더 자자. 응?" 안 돼. 다른 날이라면, 해가 질 때까지 자도 되지만, 오늘은 안돼. 은재는 뿌옇게 흐려지는 시선을 돌리며 지완이 잡고 있는 이불을 끝까지 잡아 당겼다. "금방 다시 자게 해줄게.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던 지완은 은재의 말에 잠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을 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11 시도 안됐잖아. 뭔 일로 이렇게 깨우는 거야. 이리와, 은재야, 더 자자. 내가 자장가 불러 줄게." "안 돼." 은재는 단호하게 말을 하고 지완에게 무언가를 집어 던졌다. "이혼 서류야. 내 거는 다 작성했으니까, 네 것만 작성해서 접수하면 돼." "뭐, 뭐라고?"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하루라도 일찍 너와 내가 이혼해야지 예석이 데려오는 게 쉽지 않겠어?" 잠이 덜 깨서 그런지, 지완은 어리벙벙해서는 갑작스런 은재의 말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눈만 비비고 있었다. "하, 하지만 할아버지 건강이……." "아, 그거? 어제 할아버지 종합검진 받으신 결과 나왔는데, 아무 이상이 없으셔. 지난번에 쓰러지신 것도, 수술했다고 하신 거, 사실은 너 결혼시키려고 어른들이 짜고 연극하신 거래. 종합검진 결과 나온 거 보고 의사 선생님 얘기가 조금 혈압 높으신 거 빼고는 무지 건강하시대." "말도 안돼!" "얼굴 구기지마. 할아버님이 얼마나 증손녀가 보고 싶으면 그러셨겠냐? 그냥, 이번엔 넘어가 드려." 은재의 말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지완은 믿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나마 그 자리에서 뛰쳐나가 할아버님을 다그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나 할까. "이제 이혼을 어떻게 한다. 그것이 문젠데. 결혼도 결혼이지만 이혼도 문제다. 그지?" "벌써부터 그럴 거 없잖아. 언제 할건데?" 지완은 은재의 이혼이라는 말에 정신을 차리고 은재가 집어던진 종이를 펼치며 건조하게 물었다. "오늘.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늘 해 버릴려고. 이혼도 날 잡아서 하는 그런 거 아니잖아." "뭐 오늘?" 잠도 덜 깬 상태에서 지완은 두 번의 펀치를 맞고 있었다. 그것도 강펀치를. "네가 요즘 예석이 때문에 심란한 거 같아서, 내가 다 준비했어. 그러니까, 넌 그냥 서류만 접수하면 돼." "……." "아무래도 악역은 내가 맡는 게 낫겠지? 나가는 사람은 나고, 넌 계속 이 집에서 어른들하고 부딪혀야 하는데. 내가 그 동안 어른들한테 쌓아놓은, 이미지가 아깝긴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지 뭐. 자, 이제 시작해 볼까?" 그 말과 동시에 은재는 옷을 걷어 부치고는 눈을 반짝이더니,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잘 정돈되어 있는 물건들을 바닥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깨끗했던 바닥이 책과 휴지, 인형, 쿠션, cd 등등의 물건으로 덮히기 시작했다. "음, 이건 그래도 좀 아까운데. 하기사 위자료가 있는데 하나 사지 뭐." -쨍그랑~ 은재는 그 말과 동시에 화장대에 있는 화장품들을 바닥으로 하나씩 던지기 시작했다. "너 뭐 하는 거야!" 멍하니 은재가 내민 이혼 서류에 코를 박고 정신적 공황 상태에 있던 지완이 갑작스런 소음에 고개를 들고 은재를 쳐다보았다. "바보야! 이혼을 어떻게 그냥 하냐! 빌미를 만들어야지." "빌미?" "내가 바람을 핀 거야. 그래서 내가 너에게 헤어지자고 요구하는 상황이지. 그런데 넌 안 된다고 화를 내면서 방안에 있는 것들을 집어던진 거야. 너의 그 더런 성질에 이 정도는 해야 어른들이 믿지 않겠어? 미안하지만 김지완 이번에도 다시 한번 차여야겠어. 상황 이해했지?" 은재의 말에 기가 막힌 지 지완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난 싫어. "싫어도 어쩔 수가 없어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 상황밖에는 생각이 안 나니까.


뭐 어때. 그냥 한번 차이는 건데. 진짜로 그러는 것도 아닌데. 맘에 안 드는 배역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까……." "난 싫어. 싫단 말야. 너랑 이혼하기 싫단 말야!" 지완은 들고 있던 서류를 바닥으로 던지며 소리쳤다. 그러자 은재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김지완!" "왜!" "너 지금 장난해!" 은재는 들고 있던 물건을 바닥으로 던지며, 지완 앞에 섰다. "나랑 이혼 안 하면 뭐 어쩔려고? 왜 예석이도 탐나고, 나도 탐나? 미안하지만 아저씨, 이 나라는 일부일처제랍니다. 정신 좀 차리세요~" 은재는 지완의 얼굴을 쳐다보며 빈정거렸다. "아니, 난……." "헛소리하지 말고, 어여 도와. 큰 소리 좀 내고." "난, 난 정말로 은재야……." "나 오후에 어디 가봐야 해. 그러니까 얼른 상황 종료하고 나가봐야 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좀 부지런히 움직여." 은재는 지완의 말을 자르며, 부지런히 움직이며 방안에 있는 물건들을 땅바닥으로 집어던지고 있었다. "정은재, 이러지 말고 우리 좀 얘기 좀 하자." "……." "은재야, 난 너와 이런 식으로……." -쨍그랑 은재가 tv 의 리모콘을 들어 화장대의 거울을 향해 던져 버렸다. 거울은 충격으로 말미암아, 양쪽으로 금이 가버렸고, 리모콘은 땅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예술인데~ 스트레스 해소로 괜찮은데." "정은재, 나랑 얘기 좀 하자고!" "무슨 얘기? 이것도 던져도 될까?" 은재는 이제 오디오를 손에 들고, 지완을 향해 물었다. "맘대로 해. 그런데 정말 우리 얘기 좀 하자." -쾅 은재는 지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손을 높게 들어올려 오디오를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얘기 해." 손을 탁탁 털면서 씽끗 웃음을 지으며 은재는 지완을 쳐다보고는 다시 침을 질질 흘리며 컴퓨터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있잖아, 은재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거 같애. 난 말이야, 이렇게……." "모니터는 던져도 괜찮겠지?" "내말 좀 들어보라니까!" "듣고 있어. 계속 얘기해봐. 모니터는 조금 무섭다, 프린터는 괜찮겠지." 은재는 끙끙거리며 코드를 빼고는 기어이 프린터를 들고 그것 역시도 바닥으로 내동댕이 쳤다. "장농도 멀쩡하면 안되겠지?" "야~ 정은재!"


"듣고 있다니까!" "이씨!" 정말로 자신의 말을 듣고는 있는 건지, 은재는 장롱문을 이리저리 열고 장롱에 들어있던 옷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런 은재의 모습에 지완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옷을 입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그런 지완의 모습을 보는 은재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털썩 미친 듯이 방을 어지럽힌 은재는 바닥에 앉아서 참았던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누구는 이렇게 미친년처럼 미친 짓하고 싶은 지 아냐?' 이제 원 없이 울어도 된다. 모든 것이 이제 끝났다. 행복했던 날들은 오늘로서 이제 마지막이었다. 은재는 그동안 참고 참았던 눈물을 그 자리에 앉아서 한꺼번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미리 챙겨두었던 가방을 들고 대문을 나서는 은재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너무 울어서 퉁퉁 눈은 그렇다 쳐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마른 몸과 공허한 눈동자는 그런 은재의 신세를 더욱 처량 맞아 보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방에서 울음을 터트리고, 가방을 들고 방으로 나오며, 무슨 일인가 싶어 거실에 모인 어른들께 인사를 하고 나오면서도 은재는 다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정말로 그분들께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되돌릴 수 없었다. 방을 나서며 어찌나 입술을 깨물었는지, 입가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은재는 모지게 맘을 다잡아먹고 아래층으로 내려섰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은재의 모습을 보시는 어른들이 은재에게 지완이 뛰쳐나간 이유며, 은재가 가방을 들고 나오는 이유를 물었지만, 그저 은재는 죄송하다는 말만을 되풀이하고 무릎을 끓고 사죄를 드리고 나왔다. 그런 은재의 모습에 쓰러지시던 할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니 다시 은재의 마음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육중한 철문이 닫히고, 은재는 대문 앞에 서서 집을 올려다보았다. 다시금 눈물이 샘솟기 시작했다. "꼭 그렇게 해야겠어?" 계단 맨 아래, 지완이 담배를 피어 물고 앉아 있었다. 은재는 지완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훔치며 계단으로 내려섰다. "들어가서 잘 말씀드려. 내가, 바람을 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는 건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그리고 한 몇 달 있다가 예석이 데리고 들어가면 될 거야. 조금, 반감이 계시겠지만 곧 예석이 받아들이실 거야. 마음이 한없이 따뜻하신 분들이니까."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서 난 어떻게 이 일을 받아 들여야 할지 모르겠어. 이혼이라는 거 생각해 보질 않아서, 나 너무 혼란스러워. 너무 갑자기……." 지완의 말에 다시 한발짝 은재는 계단 아래로 내려서 지완 옆에 섰다. "갑자기가 아니잖아. 처음부터 이러기로 했었던 거잖아." "하지만……." "오늘로서 깨끗하게 계약 이행한 거다. 돈은 내일 부로 내가 알아서 입금해. 얼마 넣어라까지 내가 말 안해도 많이 넣겠지? 아! 홀가분하다. 역시 유부녀는 힘들다니까. 나간다." 은재는 가방을 들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며칠 고생 좀 할거야. 그래도 다 예석이 위해서 고생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해. 좋은


소식 기대할게." "은재야!" 지완이 담배를 끄고, 은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응?" "연락할게. 진정되면, 이 머릿속 혼란이 정돈되면 연락할게. 도저히 나 이대로는 뭐가 뭔지 모르겠어." "뭘 뭐가 뭔지 몰라. 이제야 제대로 돌아온 건데." 씽긋, 다시 은재가 웃으면서 돌아섰다. 순간, 은재의 그 웃음이 왜 이렇게 지완의 눈에는 서럽게만 비쳐지던지, 지완의 가슴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들어가 봐. 가서 마무리 지을 일 많을 거야. 어른들도 상대해야 할거고, 방도 치워야 할 거고. 이렇게 일이 많을 줄 알았으면 늦게 깨울 거 그랬나?" "은재야!" 갑자기 지완의 은재의 손을 잡았다. 순간 허공에서 지완과 은재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아마도 퍽 오랜만에 서로의 눈을 쳐다보는 듯했다. 그러나 순간, 은재가 지완의 눈길을 피하며 몸을 돌렸다. "가 볼게. 나 오후에 약속 있어." "은재야, 나 정말……. 연락할게." 지완은 미처 말을 잇지 못하고, 바보처럼 연락한다는 말만 계속해서 되풀이했다. 스르륵, 지완의 손에서 은재의 손이 빠져나갔다. 그 순간, 지완의 마음속에서도 스르륵, 무언가가 빠져나간 듯, 마음이 뻥 뚫려 버렸다. 차가운 바람이 그런 지완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꼭 전화 받아. 알았지?" 조금씩 멀어져 가는 은재를 향해 지완이 외쳤다. "아니. 그러지 말자. 지완아. 우리, 이제 더 이상 연락도, 만나지도 않는 게 좋을 거 같아." 은재의 말에 지완의 심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왜!" "이유는 나도 몰라. 하지만, 그게 너와 예석이를 위해 최선일 거 같아. 우리 그러자. 그렇게 하자. 행복해라." 그 말을 끝으로 은재는 발걸음을 빨리 해 지완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은재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은재가 자신 앞에 선 택시에 몸을 실었다. 은재가 탄 택시가 차츰차츰 지완의 시선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털썩, 지완은 온몸이 힘이 빠져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지완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마구 헝클어진 실뭉치처럼, 어디가 처음이고 끝인지 모르게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랬다. 모두 은재의 말이 맞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결혼을 하자했고, 계약대로 모든 것이 잘 되어 이혼을 하자고 했다.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지? 이성적으로 모든 것은 완벽했다. 은재가 말 한대로. 그런데, 그런데, 이 정체 모를 아픔과 공허감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터벅터벅 집안으로 들어선 지완을 반기는 것은 지완을 향한 원망의 눈초리와 할아버지, 아버님의 고함 소리 뿐이었다. 은재의 말대로 변명을 해야 하는데, 지완은 그럴 기운이 없었다. 그런 가족들을 뒤로 한 채, 지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은재의 등뒤로 무언가가 털썩 부딪혔다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빌어먹을 자식.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은재가 집을 나가!" 아버님이 소리를 치며 신고 있던 실내화를 지완의 등뒤로 집어던진 모양이었다. 지완은 천천히 가족들을 향해 돌아섰다. "저도, 저도 뭐가 뭔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가족들을 향해 고함을 친 지완은 그대로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엉망으로 변해 버린 방안의 풍경은 마치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평화로워야 할 주말에, 지금 지완은 지옥을 보고 있었다. 지완을 두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바닥으로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지완의 머릿속은 온통 검정으로 물들어 아무런 생각도 나지가 않았다. 은재가 떠났다. 은재가 떠났다. 단 한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느 덧, 해가 저물어 방안은 어둑어둑한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지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에 불을 밝히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마치 태풍이 쓸고 지나간 것처럼,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방을 쳐다보며 지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은재한테 혼나겠다." 이리저리 몸을 바삐 움직이며 지완은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몸을 놀려 방을 치우니, 그제사 어느 정도 방안이 정돈 되어가고 있었다. 못쓰게 되어 버린 오디오와 프린터를 버리고 들어와 방안을 돌아보니, 아침과 마찬가지로 방안이 깨끗해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지완의 눈에 가득 들어오는 금이 간 화장대의 거울과 빈자리만 남아 있는 화장대를 보며 지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우리 은재, 화장대 다시 사줘야겠네." 그러나 지완은 알았다. 다시는 은재에게 화장대를 다시 사줄 일도 방이 어지럽혀 있다고 은재에게 혼날 일도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달은 사실에 지완의 가슴이 찌리릿 아파 오기 시작했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까르륵 웃음을 짓던 은재의 모습이 지완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음을 짓던 은재의 모습은, 매번 보는 얼굴이지만 지완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었다. 이제 그런 은재의 모습도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갑작스럽게 지완의 가슴에, 크나큰 해일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은재와 함께 침대에 누워 비디오를 누워 깔깔거릴 일도, 밤늦게 아이스크림을 들고 서로 싸울 일도, 얼굴 가득 팩을 하고 누워서 오이를 먹을 일도, 이제,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이제는 모두 과거가 되었고, 추억이 되어 버렸다. 지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뛰어 들어가 찬물에 얼굴을 씻기 시작했다. 정신 좀 차려보자. 김지완.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정신 좀 차려보자. 얼굴을 가린 얼굴을 쓸어 올리며 지완은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김지완, 너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거니!" 비틀비틀 지완은 몸을 돌려 수건을 찾았다. 그러나 수건은 욕실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은재야, 수……." 아뿔사! 무의식 중에도 지완은 자신도 모르게 은재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바보 같은 놈." 그런 자신의 모습에 지완은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제서야 지완은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단순히 은재가 떠나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은 은재를 잃어 버렸다는 것을. 은재를 잃어 버렸다. 은재를 잃어 버렸다. 지완의 공허한 웃음소리가 욕실 안에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19. 헤매는 남자 그녀가 없는 첫째 날. 늦잠을 잤다. 밤새도록, 허전한 옆자리를 쳐다만 보다가 잠을 설쳐서인지, 늦게까지 잠을 자고 만 것이었다. 은재와 살 때는 늦잠을 자는 일이 없었는데, 한참이나 지나버린 시계를 보며 다시금 은재를 생각했다. 어머니는 밥을 먹으러 식당엘 들어가도, 지완에게 아무런 눈빛도 주지 않으셨다. 어머니 뿐 아니라, 가족 모두가 적의를 가지고 지완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밥 먹기를 포기하고, 냉수 한 컵만을 마시고, 올라와 뒤늦은 출근 준비를 했다. 손수 옷을 꺼내 입고, 넥타이를 매는 데 갑자기 울컥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다정스럽게 넥타이를 매주던 은재의 손길이, 몹시도 그리웠다. 회사에 출근을 해서도, 그저 볼펜만 잡고 있을 뿐, 일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결국, 퇴근 시간도 채 되기 전에 자리를 떠, 은재의 회사를 찾고 말았다. 그저, 은재의 모습이나 볼까하고 걸음을 했는데, 막상 은재의 회사까지 오니 은재와 말을 하고 싶어졌다. 자신이 오늘 집에서 대한 냉대에 대해 은재에게 하나도 빼놓지 않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지완의 기대는 우연을 가장하여 들어선 '풍경'의 사무실을 들어서는 순간, 무참히 깨어지고 말았다. 덩그라니 비어있는 은재의 자리. 혹시나 일이 있어 잠깐 자리를 비운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런 지완의 생각을 비웃듯 정현 선배는 은재가 이주일간의 기나긴 휴가를 받았다는 말만을 해줄 뿐이었다. 결국 지완은 은재를 보지 못하고 터덜터덜 길거리를 걸어다니다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섰다. 그녀가 없는 둘째 날. 결국 오늘도 늦잠을 자고 말았다. 밤새도록 멍하니 침대에 누워 은재 생각을 하느라 새벽에서야 겨우 잠에 골아 떨어졌었는데, 또 늦잠을 자고 말았다. 어제 생각을 해서 그대로 샤워를 하고 회사를 향했다. 역시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다가 퇴근시간이 되자마자 은재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일을 하고 있는 아주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일하는 아주머니의 말에 의하면, 은재는 오지 않았다고


했다. 재차 몇 번을 확인해도 같은 말만 되돌아오고 있었다. 거짓말일 것이다. 지금 아주머니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주머니에게 협박을 했다. 지금 거짓말을 한다면 당장 해고라고! 그러나 돌아오는 말은 은재는 없다라는 말뿐이었다. 역시나 은재는 집에도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 어디에 간 걸까? 아무리 머리를 쥐여 짜고 생각을 해봐도 도통 은재가 갈만한 곳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11 년, 은재를 알아온 지 꽤 오랜 시간이었는데, 왜 은재가 갈만한 곳, 하나 알지 못하는 걸까? 왠지 그런 자신의 모습에 지완은 화가 나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가는 것이 죽기 보다 싫었다. 은재가 없는 그 넓은 방에 들어가 하는 일 없이 멍하니 앉아 있을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위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술이나 마실까하고 생각해보았지만, 은재가 또다시 자신의 사진을 가지고 협박할 것이 두려워, 하는 수 없이, 비디오방에 들어가 액션 영화를 빌려보았다. 영화나 무척이나 따분했고, 시간은 몹시도 더디 흘러갔다. 그녀가 없는 삼일 째. 다행이 늦게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예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에 늦게 일어날 염려가 없었다. 샤워를 하고, 옷을 꿰어 입었다. 잔뜩 구겨진 와이셔츠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서 와이셔츠를 다려줄 리는 만무했으니까. 요 며칠째 자신이 밥 먹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쳐다보시는 어머니신데, 와이셔츠를 다려주실까. 하는 수 없이 구겨진 와이셔츠를 그대로 입고 출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루한 하루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힘없이 터덜터덜 집으로 향해 돌아왔다. tv 를 보며 무료한 시간을 채우다가 저녁 식사시간이 되어 부엌으로 내려왔다. 식사시간은 짜증이 날만큼 엄숙했다. 며칠 전 만해도, 떠나갈 것처럼 화기애애했던 식사시간이 무거운 침묵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도통 입맛이 돌지 않았다. 밥알을 세듯 깨작깨작 거리고 있을 무렵, 문이 거칠게 닫히고 유완이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부엌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형수님이 집을 나가셨다고요!" 유완의 말에 아무도 대답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형, 정말 내가 경고했지! 바람피지 말라고 했잖아!" 유완의 말에 집안 어른들의 입이 떡 벌어지고, 숟가락을 들었던 손들이 모두 허공에서 멈추고, 쨍그랑 쨍그랑 숟가락, 젓가락들이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10 개의 날카로운 시선이 지완을 향해 날아들었다. 지완 역시 들고 있던 수저를 내리고, 가족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잘에서 일어나 부엌을 걸어나왔다. "어디 입이 있으면 변명이라도 해봐!" 유완이 다시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애써 그런 유완을 무시하며 지완은 걸음을 떼었다. "개자식!" 거칠게 유완은 지완의 손을 잡아채 돌아 세우고, 험한 욕설과 함께 주먹을 날렸다. 유완의 육중한 주먹은 정확히 지완의 왼쪽 눈에 작렬했다. 지완은 순간, 정신이 몽롱해졌다. "어떻게 그 착한 형수님한테 이럴 수 있어! 정말로 형은……." 윙윙윙~ 귓속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그 착하디 착한 동생이 자신에게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주먹까지 날리다니!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잠시 잠깐, 유완의 폭탄 선언으로 말미암아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던 어른들이 우르르 부엌에서 빠져 나와 지완을 향해 욕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지완은 그 자리에서, 지금껏 살아오면서 먹었던 욕보다 더 많은 욕을 들을 수 있었다.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지완은 때마침 걸려온 전화로 인하여 가까스로 자신의 방으로 피신을 할 수 있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지완은 가족들에게 받은 폭설과 냉대, 야유 그리고 유완의 폭력보다도 더 무서운 상실감을 새삼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방을 열자마자 자신에게 밀려오는 어둠과 싸늘한 공기, 턱없이 넓어 보이는 방, ……은재가 없는 방. 차마 방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지완은 문고리를 잡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안으로 힘겹게 발을 밀어 넣었다. "휴~" 털썩 침대에 주저앉으니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 기나긴 밤을 지새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걱정이 절로 생겼다. "왜 이렇게 방이 넓은 거야!" 자신이 기억을 하기 훨씬 전부터 생활을 해온 방으로, 좁으면 좁았지 한번도 넓다라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요 며칠 새 방은 너무나도 크게만 보였고, 침대의 넓이는 자신의 기대보다도 훨씬 드넓기만 했다. 침대에 드러누워, 다시 빈 허공을 향해 있던 지완은 옆에 있던 베개를 힘껏 끌어안았다. 하지만, 이 알수 없는 허전함이 채워지질 않았다. 지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 켠에 쌓여있는 은재의 쿠션들을 하나, 둘씩 가져와 빼곡이 침대 위에 쌓기 시작했다. "흠~" 눈을 감고, 베개 위로, 쿠션 위로 코를 킁킁거리며 향기를 찾기 위해 애를 썼다. 너무나, 너무나도 그리운 은재의 향기를 찾기 위해서. 그녀가 없는 사일 째. 출근을 하지 못했다. 회사에는 지독한 독감에 걸렸다는 말을 하고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워서 은재의 베개를 끌어안았다. 한참을 망설이다, 전화기를 손에 들어 너무나도 익숙한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은재의 목소리를 듣길 원했는데, 자신의 바램과는 달리 전화기는 꺼져있다는 맥빠진 소리만 들려왔다. 지완은 그대로 전화기를 내려놓고, 은재의 쿠션 속에 자신의 몸을 폭 담가보았다. 한참이 지나서 다시 용기를 내 은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 꺼져있다는 소리뿐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음성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 버튼을 누르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은재야, 저기 난데, 나 지완인데, 너 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지완은 그대로 전화기를 닫아 버리고 말았다. "바보, 멍청이, 팔푼이……." 지완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머리를 침대에 계속해서 박았다. 좀더 멋진 목소리로, 말을 해야 하는데 바보같이 그 어눌한 목소리란. 지완은 한참을 자신을 구박하다가 다시 전화기를 잡았다. "나야, 지완이. 너 어딨어? 할말이 있……." 지완은 다시 전화기를 닫아버리고 침대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그렇게 강압적으로 말하면 돼. 최대한 부드럽게, 나긋나긋하게 말해야지. 너 정말로…….' 심기일전, 지완은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음음!"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은재야, 나 지완이야. 잘 있지?……." 지완은 또다시 자신의 머리를 콩콩 쥐어박으며 전화기를 내려놨다. "이건 너무 명랑하잖아!" 음성 메시지 남기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지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살금살금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은재에게 말을 한다는 것이 힘든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아니, 요 며칠간 은재를 만나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항상 곁에 있던, 은재의 얼굴과 목소리. 지금, 지완은 그것이 몹시도 보고프고, 듣고 싶었다. 가슴 졸이고, 전화기를 붙들고 어떻게 말하면 은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은재의 얼굴을 볼 수 있을지, 고민을 할 정도로. 냉장고에 물병을 집어넣으며, 지완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동글동글한 날달걀이었다. 지완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달걀 하나를 들어 한쪽 모퉁이를 깨고 쪽쪽 달걀을 마시기 시작했다. "아! 아!" 한층 매끄러운 음성이 부엌에 울려 퍼졌다. 지완의 얼굴이 만족스러운 듯 한쪽 입가가 올라갔다. 지완은 부리나케 다시 방으로 들어서, 힘차게 전화기를 들었다. 뚜르르, 뚜르르 신호음이 가고, 전화기가 꺼졌다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안내음. 지완은 버튼을 누르고, 호흡을 다지고 '삐' 소리가 나자 입을 열었다. "은재야, 나 지완이야. 잘 지내고 있어? 난, 잘 못 지내고 있어. 집안에서 나는 완전히 역적이 되었어. 밥 한 톨을 먹어도 가족들 눈치를 보며 먹고 있고, 오늘은 유완의 놈이 날린 주먹에 왼쪽 눈을 맞았어. 그래서 지금 빨갛게 부어오른 게 내일이면 파랗게 멍이 들 거 같아. 집안에선 내가, 바람을 폈다고 생각하셔. 그렇게 다들 생각하시기로 한 모양이야……." 한번 말이 터지가 계속해서 지완은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간혹 가다 지완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면서, 평소 은재를 향해 말을 하던 것처럼 수화기를 붙들고 계속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은재야, 어딨니? 나 있잖아, 요새 며칠 계속해서 잠도 잘 못 잤어. 회사도 계속 지각했고, 오늘은 회사도 못 갔어. 네 얼굴이 동동 떠올라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있어. 네가, 너무, 너무……보고 싶어. 어디 있는 지 전화해 줄래? 그럼, 이만 끊을게. 꼭, 꼭 연락 줘야 한다. 기다릴게." 몇 번이고 지완은 기다린다는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조금은 기분이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지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은재의 베개를 끌어안고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없는 오일 째 하루종일 은재의 전화를 기다렸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꺼져있다는 소리뿐이었다. "나야, 지완이. 너 어딨어? 어딨는 거야? 걱정되서 미치겠어. 메시지 받는 대로 바로 전화 줘. 알았지. 은재야! 꼭, 꼭 전화 줘야 한다." 지완은 금새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간곡히 메시지를 남겼다. 그녀가 없는 육일 째. 오늘도 은재에게선 전화가 없었다. 은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얼마 전 그때처럼, 무방비한 상태로 어디선가 혼자서 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또다시 꺼져 있다는 소리만을 되풀이하고 있는 전화기. 그러나 그것만이 은재와 연결해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은재야, 제발 너 어딨는 거야. 어디에 있다고, 그것만 그것만이라도 알려줘.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그렇지? 잘 있다고, 단지 그 한마디라도 좋은니까, 제발 전화 좀 해줘." 지완은 전화기를 붙잡고 아주 사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없는 칠일 째.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아무런 응답이 없는 전화기에 대고 지완은 계속해서 한마디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움푹 패인 눈, 거칠거칠한 얼굴,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턱, 헝클어진 머리. 어느 것 하나 멀쩡한 것이 없었다. 출근도 하지 않고 방안에 틀어박혀, 계속해서 전화기에 대고 한마디만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없는 팔일 째. 비틀비틀, 오랜만에 집을 나선 지완은 거칠게 차를 몰고 은재의 아파트로 향했다. 더 이상 은재의 전화기는 지완의 목소리마저 담아놓길 거부했다. 메시지가 가득 차서 저장을 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나오자, 미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난 지완은 차를 몰아 은재의 아파트로 향한 것이었다. 난데없이 몰골로 나타난 지완의 모습에 일하는 아줌마는 기겁을 하고 놀랬고, 지완은 은재의 아파트로 들어서자마자 코를 킁킁거리며, 아파트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드디어 은재의 방. 지완은 은재의 침대에 몸을 뉘이고 맘껏 은재의 채취를 느끼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보고 싶은 은재의 향기가, 이 방에서는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미친놈처럼, 해죽해죽 웃으며 은재의 침대에 코를 박고 누워 버렸다. "오빠, 오랜만이네." 남산처럼 커다란 배를 뒤뚱거리며, 예석이 은재의 방안으로 들어섰다. 예석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지완은 고개를 들고 예석을 쳐다보았다. 그제서야 지완은 자신이 꽤 오랫동안 예석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안해. 그 동안 찾아오지 못해서." 지완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죽기보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 괜찮아. 난, 오빠가 안 와서, 정신 좀 차렸나 했지. 은재 언니는 잘 있고?" 예석의 입에서 은재의 이름이 나오자, 지완의 안색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은재, 떠났어." "무슨 소리야?" "나랑 이혼하재. 그런데, 이 집에도, 회사에도 없어. 전화도 없고, 걱정되서 미치겠어." 지완의 음울한 목소리에, 예석의 눈이 반짝거렸다. "잘됐네. 오빠가 바란 거 아니었어?" "난, 난……." 예석의 말에 지완은 입을 열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나랑 결혼한다면서? 그럼 은재 언니랑은 이혼해야 가능한 거 아니야?" "……."


"나랑 언제 결혼할 거야? 애 낳고 해야겠지? 오빠 생각은 어때?" "난, 난 은재랑 이혼하기 싫어." 가까스로 지완은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래! 나는 은재랑 이혼하기 싫어." 지완은 고집스럽게 다시 말했다. "그럼 난 어떡해?" "넌, 넌……." 예석의 질문에 다시 지완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런 지완의 모습을 보며 씽끗 예석이 웃음을 터트렸다. "후후후, 오빠 색맹이야? 아님 바보야?" "무, 무슨 소리야?" "아님, 왜 이렇게 색깔 구별을 못해?" "오빠, 은재 언니 사랑하지?" 사랑? 내가 은재를 사랑한다고? 그 순간, 지완의 눈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알 수 없었던 답답함과 불안함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이 은재를 사랑해서 은재의 빈자리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지고, 은재가 없어서 불안하고, 은재가 없어서 세상이 끝난 것처럼 무의미하고, 은재가 없어서 금단현상에 걸린 사람처럼 우왕좌왕하며 헤매인 것은 모두가, 은재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것이 모두, 은재를 사랑해서, 은재를 사랑해서 그런 것이었다. "그래 나는 은재를 사랑해." 지완은 마치 다짐이라도 하는 듯, 한 글자 한 글자씩, 꾹꾹 새기며 말했다. "그런데 오빤 어떻게 했어?" "나, 난 너한테 결혼하자고 하고, 너한테 와서 하루종일 있고, 너한테 사랑한다고 말하고, 너한테……. 이런 죽일 놈!" 그 동안 자신이 한일을 생각하니, 욕이 저절로 튀어 나왔다. "잘 아네." 지완의 모습에 예석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지만, 예석아 나 너에 대한 마음도 진심이었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지완이 예석에게 천천히 말했다. "알아. 오빠 맘 진심이라는 거. 내가 말했지. 오빠 색맹이냐고. 단지 오빠는 색깔 구별을 잘못한 거야." "……." "오빠의 나에 대한 사랑은 무색이야. 그리고 오빠의 은재 언니에 대한 사랑은 정열적인 붉은 색. 무슨 소린지 알겠어?" "……."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그냥 내가 임의로 붙였을 뿐이니까. 오빠는 날 친 여동생처럼 사랑한 거야. 가족들을 사랑하는 것 마냥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말이야. 그래서 바라지 않는 무색. 하지만 그에 비해 은재 언니에 대한 사랑은 정열적인 붉은색, 오빠의 사랑이 진하면 진할수록 더 붉게 타오르지. 하지만, 오빠의 사랑이 식으면 붉은색은 바라고 말아. 무슨 소린지 알겠어?" "어." 지완의 안색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넋 놓고 있을 거야? 은재 언니 찾으러 가야지." 예석의 말에 지완의 얼굴은 한층 더 굳어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없어. 은재가 날 사랑해줄지 자신이 없어. 난, 지금까지 은재한테 나쁜 짓만 했는데, 은재가 날 받아들여 줄까?" "그건 나중에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싫다고 하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요. 오라버니." "그래. 그래야겠지. 근데 어디서 은재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어." 지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자, 이거!" 예석이 지완은 향해 뭔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은재 언니, 부모님 댁, 전화 번호." 예석의 말을 듣는 순간, 지완은 무릎을 탁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맞아. 맞아!" 지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감돌며, 예석을 존경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내 옆에 있는 여자들은 왜 이렇게 다 똑똑한 지 모르겠어." 지완의 말에 예석은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에야, 비로소 지완은 일주일 동안 무겁게 자신을 누르는 중압감을 조금 덜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은재를 사랑해. 나는 은재를 사랑해. 지완은 계속해서 그 말을 반복하며, 은재의 침대 위에 누워 맘껏 그녀의 향취를 들여 마시기 시작했다. 그녀가 없는 구일 째. 말끔하게 면도를 하고, 구겨진 옷을 다려 입고, 최대한 멋지게, 멋지게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수원으로 향하는 길은, 무척이나 가슴 설레는 길이었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커다란 과일 바구니 하나를 사들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이제 은재를 볼 수 있다! 룰루랄라, 절로 콧노래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은재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그런 지완의 기대는 다시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은재는 이곳에도 있지 않았다. 자신을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보시는 은재의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고, 점수를 따는 것으로 은재가 없는 아쉬움을 달래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없는 십일 째.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은재의 어머니께, sos 를 요청했다. 어머니는, 지완이가 만족스러운지, 아니면 자신의 딸이 결혼을 한다는 사실에 만족스러우신 지 흔쾌히 지완의 부탁을 들어주셨다. 드디어 지완에게도 아군이 생겼다. 장인어른, 장모님, 그리고 두 쌍둥이 처남, 처제까지. 은재가 없어 가슴이 휑하기만 했는데, 조금 가슴이 따뜻해져 왔다. 그녀가 없는 십일일 째. 기다리다.


그녀가 없는 십 이일 째. 기다리다. 그녀가 없는 십 삼일 째. 드디어 전화가 오다. 은재에겐 아무런 일도 없었다. 단지, 여행을 갔다라는 말에 지완은 그제서야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 장모님은, 지완과의 사전 약속대로 아주 훌륭한 연기를 해주셨다. 우리 장모님 브라보! 그녀가 없는 십 사일 째. 은재가 서울로 올라왔다. 아직 은재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같은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완은 기분이 흐뭇해졌다. 그녀가 없는 십 오일 째. 은재가 부모님 댁에서 머물고 있는 모양이었다. 은재가 몹시도 보고픈 나머지, 수원으로 무작정 차를 몰았다. 한참을 은재의 집 앞에서 머물다가 돌아섰다. 그녀가 없는 십 육일 째. 오늘도 역시, 수원을 향해 차를 몰았다. 하루, 하루가 너무 길기만 하다. 그녀가 없는 십 칠일 째. 은재의 집 앞에 서서 또다시 한참을 머뭇거렸다. 왜 그런 약속을 한 걸까? 지금이라도 당장 집으로 들어가 은재 앞에 무릎 끓고 자신의 잘못을 빌고 사랑을 고백하고 싶었다.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서 간신히 발걸음을 떼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미치도록 은재가 보고 싶다. 그녀가 없는 십 팔일 째. 장모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작전 완료! 그녀가 없는 십 구일 째. 드디어 내일이다! 그녀가 없는 이십일 째. 작전 개시! 사랑을 되찾으러 간다!

20. 청혼하는 남자 그저 무작정 서울을 떠나고 싶은 맘뿐이었다. 지완의 집을 나서자마자 기차역으로 향했고, 그 시간에 가장 가까운 기차표를 끊었다. 기차를 타고 보니, 광주행. 해가 뉘엿뉘엿 할쯤, 기차는 광주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광주역에서 내려 터벅터벅


거닐다, 또 우연히 생각난 곳이 땅끝 마을이었고, 광주고속터미널에서 또 무작정 해남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말았다. 그저 땅끝이라는 곳엘 가면 뭔가가 있지 않을까, 답답한 맘을 확 뚫어줄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에 선택한 곳이었다. 그러나 막상 땅끝이라는 곳에 도착해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았을 때, 은재의 가슴은 더욱 답답하기만 했다. 무엇을 기대하고 이곳을 왔는지 모르지만,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저 지완에 대한 그리움만 더해 가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이곳에 오면 끝이라는 이미지와 연관시켜 자신의 사랑에도 종지부를 찍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은재는 자신의 생각에 픽 웃음을 터트리며 바다를 뒤로하고 돌아섰다. 이 얼마나 황당한 발상이란 말인가? 땅끝 마을에서 돌아오는 길, 이미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저물고 있었고, 은재는 가까운 민박집에 짐을 풀기로 했다. 카페와 민박을 함께 하고 있는 멋진 별장식의 건물로, 바로 앞에는 넓은 바다가 보이는 아주 멋진 곳이었다. 은재는 그곳에서 멋진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와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오늘은 심신이 너무나 피곤한 하루였다. 그 다음날부터 은재는 카페 앞의 바닷가를 거닐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11 년간의 지완과의 추억들을 버리기로 했다. 하나씩 가슴 깊은 곳에 숨어있던 지완과의 추억을 꺼낼 때마다 은재의 가슴에는 핏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오후 4 시. 잔잔하던 바닷물이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은재의 공허한 시선은 여전히 넓은 바다를 향해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바닷물이 갈라지고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모세의 기적!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에 은재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왔을 뿐인데, 이곳이 바로 그 모세의 기적이 이루어진다는 그 바다인 모양이었다. 이런 우연이 어디 또 있을 수 있을까? 은재는 바닷물이 양쪽으로 갈라지자 조심스럽게 드러난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싸늘한 바닷바람이 양쪽에서 은재를 향해 몰아치기 시작했다. 양옆으로 물러선 바닷물이 거칠게 출렁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바닷물이 들어오면 어떨까?'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길 때마다 은재는 지완과의 추억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빳빳한 교복을 입고 단상 위로 날렵하게 올라서던 고등학교 입학식 때의 지완의 모습에서 항상 얼굴에 웃음을 달고 다니던 지완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은재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기 시작했다. '널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할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오고갈 때 없는 신세가 된 은재는 할 수 없이 엄마의 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엄마는 갑작스런 새 아버지의 부도로 말미암아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고, 새 아버지는 날마다 술에 취에 집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기 일수였다. 그곳에서 은재는 이를 악물고 1 년을 살았다. 그저 앞만 보고 살았다. 자신을 따뜻하게 대하는 엄마도, 쌍둥이 동생들도 무시하고 은재는 독불장군처럼 그렇게 지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험을 치러 무작정 서울로 올라섰고, 이른 나이에 독립을 하게 되었다. 집안 살림도 힘들고, 무엇보다 밤마다 소름끼치게 찾아드는 어둠의 공포에 은재는 학기초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런 은재에게 단 하나의 즐거움이 있었다면, 태양을 삼키기라도 한 듯 환한 웃음을 짓고 다니던 지완의 웃음이 바로 그것이었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자신


맘까지도 훈훈하게 만들던 그 환한 미소. 그 미소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은재는 양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렇게 이별을 말하고 뒤돌아서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연락도 얼굴도 이제는 볼 수 없다. 이제 영원한 안녕이다. 우정, 이젠 그것으로 묶고 있기엔 자신의 욕심이 너무나도 커져 버렸다. 달콤한 키스를 나누던 그 순간부터 지완과의 사이는 다시는 우정이 될 수 없었다. 너무나도 멀리 와 버렸다. 예석이를 위해서라며 핑계를 대며 돌아섰지만, 결국엔 모두 자신을 위해서였다. 자꾸만 욕심이 나는 자신의 맘을 억제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을 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그 말을 믿는다. 아니 믿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은재는 하루하루, 바닷길을 걸으며 지완과의 추억을 버리기 시작했다. 추억들을 바닷물에 하나씩 버릴 때마다 은재는 하루하루 말라가기 시작했다. 오일 째. 무심코 켠 핸드폰에는 지완의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차마 은재는 다 말을 듣지 못하고, 삭제 버튼을 눌러 버렸다. 육일 째. 혹시 하는 마음에 다시 핸드폰을 켰다. 역시나 지완의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삭제를 해야 한다고 다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도 오랜만에 듣는 지완의 목소리에 넋 나간 사람처럼 계속해서 지완의 목소리를 듣고 말았다. 칠일 째.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단지 이말 뿐이었다. 꽉 찬 음성 메시지에 들어와 있는 말이라고는 지완의 애절한 목소리 뿐 이었다. 퍽 오랜만에 은재는 지완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단꿈에 빠져들었다. 오늘로서, 벌써 일주일 지완이 몹시도 보고팠다. 나머지 일주일 동안, 은재는 더욱 모지게 자신의 마음을 몰아 부치며 지완을 잊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그렇게 맘을 모질게 먹으면 먹을수록 아픈 것은 자신의 맘뿐이었다. '어떻게 해야하니.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니?' 은재의 이 답답한 심정을 알기나 아는지 구름은 무심히 흘러가고 있었다. "서울에 올라가면 당장 선을 봐서, 그 사람과 결혼 할거야. 그 사람이 배불뚝이 아저씨던, 대머리던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너보다 빨리 결혼 할거야!" 은재는 바다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은재는 알았다. 그렇게 수많은 선을 보았지만 매번 실망감을 가지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자신의 눈에 차는 인간은 인간 김지완 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아무리 대단한 인간이 나와도 웃는 것이 맘에 안 들어서, 머리 스타일이 맘에 안 들어서, 심지어 손가락 하나도 핑계를 대며 선을 본 남자들을 퇴짜를 둔 이유가 모두가 김지완이라는 남자와 달라서라는 것을 은재는 못내 인정해야만했다. "휴~ 왜 이렇게 잘난 놈을 좋아해서 웬만한 놈들은 눈에도 안 들어오겠다!"


은재는 다시 바다를 향해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는 실실거리다가, 뒤돌아서면 성질 더러운 하이드 씨로 변해도, 어릴 적부터 음흉하고 야한 것을 밝히는 기질이 있어도, 괴상한 술버릇을 가지고 술만 먹으면 옷을 훌러덩 벗어 던지고 여자를 밝혀도, 언제나, 언제나 은재의 맘속에 자리잡은 지완의 모습은 '완벽한 남자' 그 자체였다. 지완과의 결혼으로 지완의 단점들을 하나 하나 발견할 때마다 은재의 가슴속에 드는 생각은 지완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 소솔한 즐거움이었다. 남들은 모르는 지완의 비밀을 자신이 알게 될 때마다 묘한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 은재였다. 얘도 이런 면이 있었구나, 하며 손바닥을 치며 즐거워하던 적이 있을 정도로 은재는 지완의 단점들도 사랑했다. "아주 콩꺼플이 단단히 씌었구나 정은재!" 살아가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는 쉽다. 거리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누가 잠깐 스쳐지나 가는 사람에게 나쁜 인상을 주려고 할까? 그런 사람은 별로 많지가 않다. 오히려 사람들은 사귀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서로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랑이라 것, 우정이라는 것 그런 것들은 그 사람에 대한 단점도, 장점도 모두 받아들일 때만이 가능한 감정이라고 은재는 생각했다. 세상에 장점만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맘으로 은재는 지완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아니라 한다. 나는 아니라 한다. 서울로 올라가는 마지막 날, 은재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은재. 잠시만 기다려 봐!" 은재는 수화기를 들어 바닷가를 향해 손을 쭉 뻗었다. -철썩철썩 "엄마 들려? 여기 바다야. 바다 소리 오랜만에 들어보지? 이번 여름 휴가 때는 아, 아버지랑 상연이 하연이랑, 꼭 바닷가로 휴가 가자!" 처음으로 은재의 입에서 나오는 아버지란 말에 엄마는 잠시 말을 잊지 못하고 울먹이는 듯했다. "엄마!" 은재의 부름에 그제서야 엄마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은재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통화가 거의 끝날 무렵, 엄마는 다시 은재에게 선 자리를 잡아 놓았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고, 은재는 기분 좋게 엄마의 청을 받아 들였다. 아직, 그래 아직은 지완을 잊지 못했지만 세월은 지완을 차츰 잊게 해줄 것이다. 아주 운이 좋다면 엄마가 소개해준 선 자리에서 지완 보다 멋진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될 줄 누가 알겠는가? 사람의 앞날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은재는 이주일 간의 짧은 방황을 끝내고 아직은 깨끗하게 정리하진 못했지만, 후일을 기약하며 힘차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2 주간의 기나긴 휴가 때문인지, 일주일 내내 은재는 밀려드는 일에 취해 아주 파김치가 되었다. 거기에다 엄마의 집에서 하는 출퇴근으로 말미암아 은재의 몸은 극도의 피로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몸을 이끌고,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은재는 선을 보기 위해 프린스 호텔로 향하고 있었다. 약속 시간 5 분 전. 아무리 고개를 기웃거려도 엄마가 얘기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전화도 없는 것을 보니,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매너하고는…….' 은재는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손을 괴고 창 밖을 쳐다보았다. 따사로운 햇살과 난방의 열기에 은재는 슬슬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설핏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고개가 아래로 추락하는 느낌에 깜짝 놀라서 주변을 돌아보던 은재는 괜히 머쓱해져서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돌아볼 때, 은재는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남자의 모습에 잠이 확 깨버리고 말았다. 한 발짝, 한 발짝, ……, 우뚝 자신 앞에 남자가 섰다. "어쩐 일이야!" 은재의 목소리엔 칼이 서 있었다. "선 보러." 전화기 아닌 직접 목소리를 듣는 것은 삼 주만의 일이었다.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선 보러 왔으면, 선 본 여자한테 가면 되지 왜 이리로 오고 그래?" "여기 맞는 거 같은데." 남자는 뻔뻔하게 말을 하고는 은재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버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김지완입니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꾸벅 지완이 은재에게 인사를 했다. 그런 지완의 행동에 어이가 없는 은재는 혀만 차고 앉아 있었다. "장난치지마. 김지완." "아냐. 맞아. 나 너랑 선보러 나왔어. 장모님한테 부탁했거든!" 장모님! 지완의 말에 은재는 숨이 꼴깍꼴깍 넘어갈 지경이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지 모르겠지만, 하나도 재미없거든. 이만 가볼게." 은재는 지완의 말에 그대로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 순간 지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냉큼 은재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겨 은재의 앞길을 막아 버렸다. "나 너랑 정말로 이혼하고 싶지 않아!" "왜? 예석이가 너랑 결혼하기 싫다고 해서?" "……." "것도 아니면 이혼딱지 붙을 내 처지가 불쌍해서? 미안하지만 난 너무 잘나서 그까짓 이혼딱지 붙어도 따라 다니는 사람 많네요!" 그 동안 은재는 지완에게 쌓인 것이 무지하게 많은 모양이었다. 지완이 고백을 했던 때의 말을 그대로 내뱉으며, 은재는 싸늘하게 말하고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니야. 그래서가 아니야!" "그럼. 너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사랑하니까, 널 사랑하니까 이혼하고 싶지 않단 말이야!" 지완의 말에 은재의 얼굴 표정은 아주 가관이었다. 놀람, 의아함, 기쁨, ……, 온갖 표정이 순간 은재의 얼굴에 스치고 지나갔다. "예석이는 어쩌고?" "내가 사랑한 건 예석이가 아니야. 아니 예석이도 사랑해. 하지만, 새, 색깔이 틀려. 내가 예석이를 사랑한 건 무색이야. 그래서 내가 우리 가족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지." "……." "음음,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감정은 여자와 남자가, 가, 가지는 그런 정열적인 빨, 아니 붉은색이지. 난 널 그렇게 열정적으로 뜨겁게 사랑해. 그 동안, 난 바보같이,


그래 색맹처럼 색깔 구별을 하지 못하고 여동생 같은 예석이를 사랑한다고 착각했던 거였어. 네가 사라지고, 내 감정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어." 지완은 힘겹게 말을 건네고 은재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은재의 반응을 살폈다. "푸하하하!" 난데없이 터진 은재의 웃음소리에 지완의 얼굴이 찡그려지기 시작했다. 적어도 지완이 기대한 것은 은재가 자신의 말에 감동을 하며 자신의 품안에 쓰러지길 원했었다. 그런데 웃음이라니! "누가 이런 말을 가르쳐 줬어?" "아니, 그건 내, 내……." 꿰뚫을 듯한 은재의 시선이 지완을 쳐다보고 있었다. "너 대학때, 예석이 따라서 가입한 문학 동아리에서 시화전 때 낸 시 기억해? 첫 시가 뭐였더라." 은재는 잠시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을 하더니, 조용히 입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제목 바다. 바다는 파랗다. 바다는 파랗다. 바다는 넓다. 바다는 넓다. 바다는 넓고 파랗다. 맞지? 이래도 내가 한 거라고 할거야?" "정말로 내가, ……." "제목 하늘. 하늘은 파랗다. 하늘은 파랗다. 하늘은 넓다. 하늘은 넓다. 하늘은 넓고 파랗다." 다시 은재는 웃음을 머금고 시를 외웠다. "이래도?" "이건 정말로 내가……." 입술을 깨물며 고집스럽게 지완이 주장했다. 그러나 좀전의 기세등등한 주장과는 다르게 한풀 꺾인 모습이었다. 그런 지완의 얼굴을 씽끗 쳐다보며 다시 은재는 시를 읊기 시작했다. "제목, 하늘과 바다. 하늘은 파랗다. 바다도 파랗다. 바다는 넓다. 하늘도 파랗다. 바다와 하늘은 친구인가 보다. 초록은 동색이다~ 이래도 자꾸 네 머릿속에서 나온 거라고 주장할 거야? 너의 그 형편없는 작문 실력을 내가 아는데도?" 은재의 다그침에 쭈빗쭈빗 지완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예, 예석이가 힌트를 줬어." "그럼 그렇지." "하지만 내가 널 사랑한다는 것만은 진심이야. 사랑해. 너무나도 사랑해. 이제서야 깨달았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 지. 네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단 말이야. 믿어 줘." "안 돼. 이제 너랑 나는 더 이상 안돼!" 은재의 단호한 거절에 지완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왜 안 되는 건데? 도대체 왜……." "왜냐구? 왜냐면 내 첫 경험의 상대가 너니까! 나를 안으면서 짝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을 부른 병신, 머저리, 쪼다 같은 새끼가 바로 너니까!" "마, 말도 안돼!" 지완의 얼굴에 절망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너 군대가기 전에 모임에서 필름이 끊기게 술에 취했었지. 집 방향이 같아서 같이 택시에 탔는데, 오바이트를 하는 바람에 택시에서 내렸는데, 다시 택시를 잡기도 힘들고 하는 수 없이 여관에 들어갔었어." "하지만, 난 아무 기억…….아, 그때 그 키스마크?"


얼굴을 감싸고 있던 지완은 그제서야 그때의 기억의 파편이 하나 떠올랐다. "맞아. 내가 그랬어. 하도 분하고, 비참해서. 뭔가 복수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거든." "그 키스마크 때문에 내가 얼마나 훈련소에서 고생을 했……." "어쨌든 그래서 우리는 안돼. 나 같은 보석도 못알아본 개천에 빠져 죽을 놈이 바로 너거든. 어디 다니면서 김지완이라는 놈 만나면 조심해라. 너 만나면 아주 다리를 뽀샤 놓는다고 했거든." 은재는 지완을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은재가 통로를 향해서 걸어나갈 때 지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재야, 안되겠지? 나 같이 못된 놈은 역시 안되겠지?" "……." 자리에서 일어나서 소리치는 지완의 말에 카페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은재와 지완에게 모아지고 있었다. "이혼할 수밖에 없겠지. 그렇겠지?" 지완의 말에 은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거 같아." 지완의 빠른 체념에 은재는 조금 서운한 맘이 들었다. 자신을 사랑한다면서 이렇게 지완이 쉽게 포기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지완의 말에 은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페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정은재!" 다시 지완이 은재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결혼해 줘!" 지완의 청혼에 은재는 서서히 몸을 돌려 지완을 쳐다보았다. 빠르게 지완이 은재를 향해 걸어왔다. "내 잘못이라서, 할 수 없이 이혼한다지만 다시 결혼해 줘. 이번에는 잘할게. 예전에 내가 잘못했던 일까지 결혼해서 평생 봉사할게. 그러니 제발 나랑 결혼해 줘." 무릎을 끓은 지완은 은재에게 꽃을 내밀었다. 어디서 꽃이 났나 하고 주변을 돌아보니 아무래도 탁자 위에 꽂힌 꽃을 뽑아온 모양이었다. 갑작스럽게, 카페 안에서 벌어진 해프닝에 카페 안의 사람들은 이 커플을 주목하며, 은재가 과연 허락을 할지, 안 할지 온 신경을 기울이고 숨죽이고 있었다. 드디어 은재의 눈이 반짝이며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싫어!" 은재의 말에 여기 저기서 낮은 탄식 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도대체 왜……." 지완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흐리고 있었다. "한번 결혼한 남자랑 무슨 재미로 또 결혼하냐? 안 그래? 나간다. 안녕~" 은재는 몸을 돌려 카페를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지완은 앞으로 넘어지며 은재의 손을 잡았다. "제발 결혼해 줘. 제발, 제발……." 한 남자의 애타는 절규 속에, 카페 안에는 조용하게 웃음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21. 완벽한 남자 "은재야, 제발 결혼해 줘. 제발, 제발……." 매일 퇴근시간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지완의 절규 소리.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소리가 되어 은재의 귀를 즐겁게 하고 있었다.


"싫어." "사랑해. 사랑해. 은재야. 결혼해 줘." 그 커다란 몸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은재에게 통사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 지완을 무시하며 은재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지완은 그런 은재의 모습에 익숙해졌는지, 계속해서 등뒤에서 결혼해달라고 사정을 하며 은재를 따라오고 있었다. "할머니는 머리 싸매고 누우셨고, 할아버지, 아버지는 나만 보면 고개를 돌리셔. 어머니는 밥도 차려주질 않으셔. 그리고 또 유완이 놈은 나만 보면 패질 못해서 안달이야. 집에 들어가기 무서워서 죽겠어. 은재야. 제발 나 좀 살려 주라." "잘 됐네." 은재의 무심한 말에 지완은 풀이 죽었다. "두 달이 넘었어. 조금은, 조금은 좋아한다고 해 주라." "싫은데~" 은재가 얼굴에 웃음을 띄며 돌아서자, 지완은 시무룩해서는 땅바닥을 쳐다보고 있었다. "밥 먹으러 가자!" 은재가 지완의 손을 이끌며, 삼겹살 집으로 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은재의 그런 반응에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이 지완은 다시 실실거리기 시작했다. "장모님이 해주는 된장찌개가 제일 맛있어." 고기를 먹으며 나오는 된장찌개를 한 숟가락 입으로 가져간 지완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왜 우리 엄마가 너한테 장모님이야?" "우린 결혼할 거니까." 당연한 듯 말하며 지완은 고기 한 접을 집어 은재의 입에 넣어주었다. "내가 요즘은 장인어른, 장모님, 처남, 처제 때문에 산다니까. 우리 집에선 아주 나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지, 우리 마누라는 매일 튕기기만 하고, 살맛이 안나." 그날 이후, 지완은 아주 은재의 집을 자신의 집처럼 드나들며 톡톡히 사위 대접을 받고 있었다. 사근사근한 지완이 몹시도 맘에 들었는지, 엄마는 김 서방, 김 서방하며 지완을 떠받들어 주고 있었다. 은근히 아버지도 지완이 맘에 드신 듯 바둑이다 낚시다 하며 지완을 이리저리 불러서 앞장 세워 다니셨고, 상연이와 하연이도 덩달아 신이 나서 지완이 들어서기만 하면 은재보다 지완을 더 반기며 달라붙었다. 요즘 따라 여기 치이고, 저기 치이고 삶의 낙을 읽어버린 지완으로서는 이런 은재의 집은 아주 천국이 따로 없었다. 지완이 집에 들어서기만 하면 찰싹 붙는 처남, 처제들과 상다리가 부러져라 상을 차려주시는 장모님, 그리고 무뚝뚝하신 듯 하면서도 은근히 자신을 기다리며 바둑판을 깔고 계신 장인어른. 은재가 톡톡 말을 쏘면서 자신을 무시하는 것은 조금 맘에 안 들었지만 은재의 집에만 들어서면 지완의 얼굴은 헤벌쭉 벌어지곤 했다. 하룻밤 새 자신의 집에서 받은 멸시와, 은재에게 받은 아픔, 그리고 회사 일까지 모든 스트레스를 은재의 집에서 풀고 있는 셈이었다. "다 먹었지. 일어서." 꿈결 같은 표정을 지으며 지완이 자리에 앉아있자, 은재는 가차없이 지완의 등 짝을 치며 환상에서 빠져 나오게 만들었다. 계산을 하고 거리를 나서자, 은재는 집에 가기 위해 전철을 타기 위해 몸을 돌리고 있었다. "나 집에 갈 거야." "어, 그럼 나도. 차 저기 세워놨어. 같이 가자." 지완이 은재의 손을 이끌며 주차장으로 향하자 은재는 눈을 치켜 뜨고 지완을


째려봤다. "밥 먹었잖아. 근데 우리 집엘 왜가?" "또 먹을 수 있어." 고기 2 인분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은 것이 채 5 분도 되지 않았는데, 또 먹을 수 있다고? 말도 안 된다고 중얼거리는 은재의 말을 무시하며 지완은 은재를 끌어 차에 태우고 기분 좋게 차를 출발시켰다. "너 정말로 먹을 수 있어? 너 온다고 하면 우리 엄마가 또 한 상 가득히 밥을 차려 놓으실 텐데?" "응. 먹을 수 있어. 장모님이 주시는 밥 먹는 위 하나, 다른데서 먹는 거 위 하나. 가능. 가능." 연신 지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 지었다. "맘대로 해라. 배가 터지든 말든 올챙이가 되던 말든. 명심할 건, 난 배나온 남자는 진짜 싫어!" "그래?" "그래. 올챙이처럼 배 뽈록 나온 남자는 진짜 싫어~" "알았어. 배 왕자 새기면 좀 예뻐해 줄 거지?" "봐서." 은재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완은 뽀르륵 전화를 빼어 들어 체육관에 예약을 하고 있었다. 그런 지완의 모습에 은재는 깔깔깔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 지완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한참을 웃던 은재는 자신의 울려대는 핸드폰을 집어들면서도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여보세요?" 은재가 웃음을 멈추고 전화를 받자, 지완은 힐끔힐끔 은재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 알았어요. 지, 지완아, 차 돌려! 빨리, 빨리!" 전화를 받으면서 사색이 된 은재의 모습에,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은 지완은 차를 황급히 유턴하고 은재를 쳐다보았다. "무, 무슨 일이야?" "예석이, 예석이 병원에 갔대. 한국 병원, 빨랑, 빨랑 밟아!" "아, 알았어." 최고 속도로 지완은 추월, 과속을 서슴지 않고 한국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들어선 지완의 얼굴은 마치 자신이 아기를 낳기라도 할 것처럼 사색이 되어 있었다. "괜찮겠지. 괜찮겠지?" 지완은 자꾸만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하고, 은재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래. 괜찮을 거야. 예석이 용감한 애니까, 괜찮을 거야." 은재는 지완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지완을 위로해 주었다. "우린 애기 낳지 말자. 불안해서 죽을 거 같애. 동생이 애 낳는데도 이렇게 불안한데, 네가 애 낳으러 가면, 아마 나 초조해서 미쳐버릴지도 몰라." 그렇게 지완은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 예석이 애를 낳고 나올 때까지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런 지완의 마음을 아는지, 계속해서 은재는 지완의 손을 맞잡아 주고 있었다. 기나긴 시간이 흐르고, 기절을 한 예석이 창백한 얼굴이 수술실에서 모습을 보이자 지완은 털썩 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다. 아무래도 온몸에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에 힘이 쭉 풀린 모양이었다.


"잘 참았어. 우리 공주님이 아무래도 잘해낸 모양이야. 멋진 왕자님을 낳으셨대." 은재의 말에 지완은 은재를 얼싸안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한참이 지나 은재는 병실에 홀로 앉아 예석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석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살며시 눈을 뜨고 있었다. "수고했어. 우리 아가씨." 은재의 말에 예석은 살며시 얼굴에 웃음을 띄었다. "고마워. 언니." "힘들었지. 잘해냈어. 장하다, 우리 예석이." "내 아기 봤어? 예쁘지. 그 사람도 우리 아기 봤으면 좋아했을 텐데. 왜 이렇게 애가 외계인 같아, 입을 삐쭉대며 좋아했을 텐……." 더 이상 예석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기운 내. 곧 돌아 올 거야. 분명히 그 사람도 네 곁으로 돌아올 거야." 은재는 예석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예석의 가녀린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그런 예석을 보는 은재의 가슴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은재의 품에서 울던 예석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손으로 훔치며 씨익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바보 같은 짓 했다. 그지?" "알면 됐네요. 아줌마!" 은재와 예석은 서로를 바라보며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지완 오빠는? 요새 계속 언니 졸졸 따라 다니는 것 같던데."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안 그래도 지금 병실 문에 귀 쫑끗 거리고 있을 거야. 하도 긴장을 하고 있길래, 조금 안아줬더니, 내가 허락이라도 한 줄 알고 그새 더듬잖아. 그래서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은재의 말에 예석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그만 용서해 줘. 불쌍하잖아." "그럴까?" "저, 정말로? 나 용서해주는 거야?" 은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문이 콰당 열리며, 지완이 들어 닥쳤다. "저렇다니까!" 쯔쯔쯔, 은재는 혀를 차며 손가락질을 했다. 그런 은재의 모습을 보며 예석은 웃음을 터트렸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 머쓱해진 지완도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후, 지완과 은재는 신생아 실 앞에서 예석이 낳은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예쁘다." 은재는 간호사가 안고서 보여주는 아기를 보며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진짜 예쁘다." 은근슬쩍 지완은 은재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다가섰다. "예석이도 벌써 저런 아들을 낳았는데, 우리 너무 늦은 거 같아. 우리도 빨리 힘써보자." 지완이 은재의 귓가에 속삭이자, 은재는 도끼눈을 뜨고 지완을 쳐다보았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무서워서 아기를 낳지 말자고 말 할 때는 언제고, 너무 늦은 거 같으니 서두르자고? 하여간 남자들이란. "떨어져."


"아이~ 은재야~" 지완은 그런 은재를 더욱 끌어안으며 다가섰다. "저거 봐봐, 손가락이 너무 작아!" 능청스럽게 말을 돌리며 지완은 은재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애썼다. "떨어지라고 했다. 김지완!" 그와 동시에 은재는 발을 들어올려 지완의 다리를 걷어 차버렸다. "아얏!" 그와 동시에 지완은 은재를 넝쿨처럼 감싸던 팔을 풀고 자신의 다리를 감싸쥐었다. "성희롱 죄로 감방 가기 싫으면, 떨어져. 음흉스런 놈!" "어, 얼만큼 떨어져." "일 미터." 은재의 말에 지완은 다리를 낑낑거리며 멀어졌다. "됐어?" "어." "은재야?" "왜?" 지완은 일 미터 떨어진 곳에서 과장되게 손을 모으고 크게 소리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사랑해!" "……." "사랑한다고!" "……." 은재가 아무런 말이 없자, 지완은 손살같이 다가와 은재의 얼굴을 붙잡고 키스를 퍼부었다. "너, 웁웁~" 은재가 지완을 등을 때리며, 입을 열자, 그 틈을 이용해 지완은 은재의 입 속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한참을 그렇게 은재의 입 속을 맛보던 지완은 은재의 힘이 거의 약해져, 더 이상 자신을 때리는 것을 멈추자 입맛을 다시며 다가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부리나케 은재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아암~ 맛있다!" 지완은 꽁지 빠져라 도망을 치면서도 큰 소리로 소리쳤다. "너, 너 거기 안 서!" 은재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지완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은재의 모습을 보며, 지완은 기를 쓰고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넌 내 꺼! 정은재 내 꺼! 하하하!" 지완의 웃음소리가 병원 복도에게 명랑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런 지완의 뒷모습을 보며 은재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은재야, 결혼해 줘." 오늘도 지완은 초비굴모드로 은재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결혼을 갈구하고 있었다. 은재의 바로 일 미터 뒤에서. "은재야, 나 잘 할거야. 하이드 씨 안되고, 항상 지킬 박사처럼 다정다감하고, 말 잘 듣고,……." 지완은 두 달간 읊고 또 읊은 대사들을 다시 늘어놓기 시작했다.


"김지완!" "응?" 갑작스럽게 은재가 발걸음을 멈추고 지완에게 돌아섰다. "너 진짜로 나랑 결혼하고 싶어?" "그럼,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너랑 결혼하고 싶지 않다면 미쳤다고 이 짓을 하겠어?" "그래. 그럼 더 미친 짓이라도 해봐. 네가 얼마나 잘난 남잔지 자기 PR 을 내 앞에서 해봐!" 은재의 말에 지완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 PR. 몰라? 나는 이러이러한 남자입니다 하고 내 앞에서 소개를 해보랍니다. 내 맘이 혹하게." "어, 어떻게?" "내가 너의 키스를 조금 좋아하니까, 100 번의 진한 키스와 네 잘난 점들을 나한테 한가지씩 말해봐. 그러면 내가 너하고 결혼해줄 지 알아?" 은재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말이 나오자, 지완의 눈동자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성큼, 지완은 은재에게 다가섰다. "할게." "그래? 그럼 어디 해봐!" 은재의 말에 지완이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여, 여기서 해야 해?" "그럼. 어디서 하게?" "여기는 좀……." 지완은 말끝을 흐리며 다시 주변을 힐끔거렸다. 그렇다. 여기는 명동 한복판,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거리였던 것이다. "하기 싫으면 관둬. 너 아니어도 결혼 할 사람 많으니까." 지완의 망설임에 은재는 팩 톨아져서 뒤돌아 섰다. "누, 누가 안 한다고 했어!" 지완은 은재의 팔을 끌어당기며, 입을 맞췄다. "한 번, 난 너무 잘생겼어." 입을 떼고, 지완이 속삭였다. "너무 조용해서 뭐라고 했는 지 잘 안 들려." 능청스럽게 은재가 소리쳤다. "두 번, 난 너무 잘생겼다고!" 지완도 이제 오기가 생겼는지, 주변은 아랑곳하지 않고 은재의 입에 입을 맞추고 소리쳤다. "너보다 잘난 남자가 쌔고 쌨어. 김지완, 그것밖에 자랑할 게 없어?" 지완의 입술이 씰룩이기 시작했다. "세 번, 난 무척 똑똑해." "난 너보다 더 똑똑해.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 걸." 지완의 미간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네 번, 난, 난 은재를 사랑해." "음……." "다섯 번, 난 은재를 사랑해." 명동 거리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이 희한한 남녀가 벌이는 괴상한 해프닝에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빙 둘러서서 관찰을 하기 시작했다. "서른 번, 난 은재를 너무 사랑해." 계속되는 키스와 사랑 고백. 숨을 죽이고 사람들은 이들을 쳐다보며 짓궂은 농담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오빠, 그 언니만 사랑하지 말고, 우리도 좀 봐주세요" 교복을 차려 입은, 여고생들이 입을 모아 합창을 해대고 있었다. "서른 다섯 번, 난 은재만 사랑해." 마치 여고생들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지완이 고백을 바꾸어 소리치자, 까르륵 여고생들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남자 말고 나는 어때요!" 사람들의 격려와 박수 소리 속에서 다시금, 짓궂은 남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말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지완은 좀전과는 다르게 더욱 농도 깊은 키스를 은재의 입술에 퍼부었다. "마흔 네 번, 은재도 나만 사랑해." 지완의 대답에 순식간에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 와중에도 지완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은재를 끌어안고 계속해서 키스와 자기 PR 을 성실히 수행 중이었다. 여든 번이 넘어가자, 점점 지완의 몸에서는 힘이 빠지고, 목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대신해 줄 수도 있어요!" 휘청거리는 지완의 모습을 보며, 여기저기서 늑대들이 소리쳤다. 그런 늑대들의 모습에 분노를 느낀 지완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은재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여든 네 번, 은재는 내 꺼야. 탐내지마!" 명확한 경고였다. 지완의 목소리는 다시 원기를 찾은 듯 우렁찼다. "아흔 아홉번째. 김지완은 정은재를 사랑한다!" 지완은 숨을 헐떡이며, 은재에게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드디어 한 번, 지완의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지완은 은재의 입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순간,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숙연해지기 시작했다. 지완과 은재의 키스는 몹시도 길기만 했다. 긴 입맞춤을 끝낸 지완은 무릎을 끓고 은재의 손을 잡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백 번, 은재야, 나와 결혼해 줄래?" 꼴깍꼴깍, 여기 여기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완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등도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런 지완의 모습을 보며, 은재는 새초롬하게 눈을 뜨고 지완의 손을 뿌리치고 의아한 눈초리를 한 좌중들을 물리치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허탈감. 자신의 손을 뿌리치고 돌아서 걸어가는 은재의 모습을 보며 지완은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아무래도 자신은 영영 가망이 없는 모양이었다. 은재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자신했었는데, 그것은 자신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지완은 차디찬 땅바닥에 무너져 내려,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 어쩐다, 이제 어쩐다……. 끝을 모르는 절망감이 지완을 덮쳐 오기 시작했다. 지완은 그래도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웅성웅성. 갑자기 주변이 시끌시끌해지기 시작했다. 땅바닥에 드러누워 버린 지완은 그저 눈을 감고, 좌절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 시끄러운 소음을 뚫고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지완의 귀에 들려 오기 시작했다. "김지완!"


내 여자의 목소리다. "김지완!" 내 여자가 날 부르고 있다. 지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엉거주춤 일어섰다. 저 멀리 은재가 서있었다. 가버린 줄 알았는데, 저 멀리서 은재가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은재와 지완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이 둘러싸고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김지완!" 다시 손짓을 하며 은재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한 발짝, 한 발짝, 지완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김지완, 너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오늘 한말 잊으면 안 된다!" 들린다. 그제서야, 은재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지완의 귀에도 똑똑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지완은 걸음을 빨리 해 은재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사랑해!" 지완은 은재를 끌어안으며 외쳤다. 까르륵 은재가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에워싸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러대고, 박수를 쳐대기 시작했다. epilogue -두 번째 결혼식 "tv 에서 보니까 말이야, 번지점프를 하면서 결혼하는 이색적인 결혼식도 있더라고. 아니면 스카이다이빙을 하면서 하는 것도. 아! 수중 결혼식은 어때?" 지완은 배를 깔고 드러누워 은재가 십자수를 놓고 있는 것을 쳐다보며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결혼 계획 짜는 거야." "너 누구랑 또 결혼해!" 은재의 무심한 말에 지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은재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내가 너랑 결혼하지, 누구랑 결혼하냐?" "결혼했잖아." "할아버지 땜에 조촐하게 했으니까, 이번에는 성대하게 할거야. 장인, 장모님, 처제, 처남도 부를 거고." "뭘 번거롭……." "할 거야! 더 이상 말하지마.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이건 안돼. 이렇게 넘어가면 장모님이 얼마나 서운해하시겠어. 절대로 안 돼!" 지완은 은재의 말을 딱 잘라 말하고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듯 손사래를 치기 시작했다. "내가 결혼식 준비는 다 할 테니까, 너는 결혼식날 웨딩드레스 입고 들어오기만 해. 알았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은재도 더 이상 지완의 말에 거부를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은재 자신도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두 동생들이 못내 자신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가슴에 앙금으로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렇게 선뜻 지완이 나서준다고 하니, 고맙기 그지 없었던 것이다.


"은재야, 그건 어때? 어디서 보니까 결혼식장에 거미를 풀어서 거미가 결혼식장 가득 거미줄을 치며, 그 위에 금가루를 뿌리는 거야. 어때, 멋질 거 같지?" 지완의 황당한 말에 은재는 그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면 너의 웨딩드레스에 다이아몬드를 주렁주렁 박는 거야! 어때, 어때!" "김지완!" "어, 왜?" 한창 상상력을 부풀리며 환상에 젖어 있던 지완은 은재의 목소리에 고개를 숙여 은재를 쳐다보았다. "너 그렇게 돈이 썩어나?" "나 돈 많아. 우리 은재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래?" "어." 지완의 엉덩이에서 꼬리가 살랑살랑 보이는 듯 하다. "지갑 가져와 봐." "내 지갑?" "그래." 은재의 명령에 지완은 뽀르르 달려가 지갑을 들고 은재에게 내밀었다. "왜~ 더 예쁜 사진 넣어 줄라고?" 지완은 눈을 반짝이며 은재의 손을 쳐다보았다. 은재는 그런 지완의 시선을 무시하고, 열심히 손을 놀려 지완의 지갑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 후, 반짝 반짝이는 카드와 하얀 수표들을 꺼내 손에 들었다. "이 카드들 중에 맘에 드는 거 하나 골라봐!" 지완은 은재가 무슨 게임이라도 하는 줄 알고, 심각하게 생각하더니, 하나를 집어들었다. "이거." 은재는 지완이 집어든 카드 하나만 원래의 지갑 속에 넣고 도로 지갑을 지완의 손에 내밀었다. "다른 것들은?" "압수야!" "압수?" 은재는 수표와 카드들을 서랍 속에 넣으며 지완을 향해 돌아섰다. "이제부터 모든 경제 실권은 나야. 월급 계좌 내 통장으로 옮기고, 다달이 카드 쓴 거 체크할 테니까 알아서 해. 예전부터 너 그렇게 물 쓰듯 돈 쓰는 거 진짜로 맘에 안 들었거든. 불만 있어?" "아, 아니. 불만은 아닌데, 나같이 있는 사람이 돈을 써줘야 나라 경제에 이바지를……." "됐네요. 그 돈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나 쓸려니까, 금가루를 뿌린다느니, 다이아몬드를 박느니 쓸데없는 소리만 해봐라." "하, 하지만……." "더 할말 있어?" 은재가 눈을 흘기며 지완을 쳐다보았다. "결혼식은 화려하게 할거야!" "왜!" "그래야, 그래야 기자들이 다 오고, 신문에 다 날거 아니야!"


"왜 그래야 하는데? 난 싫어. 나 조촐하게 할거야." 은재의 말에 지완의 얼굴은 곧 울상이 되었다. "싫어. 싫어. 화려하게 할 거야. 우리 나라 모든 신문에 도배하게 할 거란 말이야!" 떼를 쓰는 아이처럼 지완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싫어. 조촐하게 준비해." "구질구질 하게 하면 누가 알겠어. 누가 우리 은재 결혼한 줄 아느냔 말이야!" "무슨 소리야?" "너 이혼녀 되도 따라 다니는 남자 많다면서? 그런 놈팽이들한테도 다 알려줄 거란 말이야. 정은재, 김지완 마누라라고, 전국에 알려야 한단 말이야!" 지완이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결혼 이벤트를 계획한 것은 은재의 가족들을 위한 배려라는 이면 뒤에는 이러한 모종의 검은 속셈이 숨어있던 것이었다! 발까지 동동 구르며 은재를 설득하려 애쓴 지완의 노고는 결국 은재의 뜻을 꺽지 못하고, 조촐한 결혼식을 실행해야만 했다. 결혼식 당일. 그러나 그런 지완의 걱정과는 다르게 소원 그룹의 후계자의 결혼식이라는 사실만으로 많은 취재진이 붐비고 있었다. 은재와 지완의 첫 결혼식은 너무나도 급하게, 번갯불에 콩 구어 먹듯이 치룬 참이라 그다지 세간에 알려지지도 않은 터라, 대중들은 이번이 처음 결혼식으로 알고 있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또한 동생 유완이 성공적인 가수 데뷔 이후, 처음으로 결혼식 축가를 부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결혼식장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수많은 취재진들과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을 보며 지완의 얼굴에선 시종일관 벙글벙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두 번째, 결혼을 하는 새 신랑의 여유라고나 할까? 그러나 웬걸 아침에도 한 침대에서 일어나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던 남자가, 신랑 입장을 하면서도 실실거리더니, 웨딩마치가 울려 퍼지며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은재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어나오는 순간, 꾸벅 아버지 앞에서 절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시작으로 지완은 동서남북 방향으로 몸을 틀어 넙죽넙죽 절을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절을 하며 내뱉는 신랑의 말에 좌중은 순식간에 웃음의 도가니탕이 되어 버렸다. 절을 마친 지완은 한 발짝 다가서 은재를 아버지로 넘겨받는데, 갑자기 또르르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시작한 눈물은 주례사가 시작되는 와중에도 계속 넘쳐흘러, 주례사가 끝날 쯤 해서는 아예 손을 들어 눈물을 닦을 만큼 흠뻑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급기야, 은재가 손을 들어 지완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이르렀다. "왜 울고 그래. 바보 같이." 은재의 소곤거리는 말에, 봇물 터지듯 참고 있던 지완이 엉엉 울음소리를 내며 은재를 끌어안았다. "행복해서. 너무 너무 행복해서. 네가 내 신부가 된다니까, 너무 너무 행복해서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나와." 따분한 주례사 도중, 주책없이 그새를 못 참고 끌어안은 신랑, 신부를 보며 다시 한번 결혼식장은 웃음으로 가득찼다. 연신, 흠흠, 목을 가다듬는 주례 선생님을 무시하며 신랑, 신부의 애정 행각은 한참이나 계속되었고, 연신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도 하객들은 참으로 해프닝이 많았던 결혼식으로 이날의 결혼을 기억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떠난 두 번째 신혼 여행. 기억하고 싶지 않는 첫 번째 신혼 여행과는 다르게 카리브 해로 떠난 신혼 여행은 꿈결같은 일주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그 신혼여행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의 2 세가 잉태되었다는 사실, 이름하야 허니문 베이비. 정말이지 환상적인 신혼 여행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랑해 당신을 "사랑한다, 유채야." "사랑한다, 은채야." 은재는 아기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들의 아이들을 보며 키스를 보내 주었다. 생후 10 개월의 두 아이들은 어른들의 사랑을 엄청나게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6 대 만에 그것도 여자 아이 둘을 한꺼번에 낳은 은재는 이 집안의 복덩이었으며, 유채와 은채는 증조 할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빠, 삼촌은 물론이거니와 김씨 집안 전체의 사랑을 한꺼번에 받고 있었다. 그 덕분에 은재가 쌍둥이를 낳아서 육아 문제로 고민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두 딸들을 보기 위해 쟁탈전을 부리는 어른들 덕분에 아이들을 가끔 못 볼 경우가 있을 정도로, 두 딸들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힘들 정도였다. 오늘처럼 두 딸이 이렇게 자신들의 방에서 잠을 자는 것이 얼마 만인지. 유채는 증조 할아버지와, 은채는 할아버지와 자는 것이 태반인지라, 지완과 은재는 자신의 딸들과 자는 것도 퍽 오랜만이었다. 두 딸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침대로 다가선 은재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지완의 얼굴을 대할 수 있었다. "왜 나한테는 안 해줘?" "뭘?" "사랑한다는 말." 지완의 말에, 은재는 씽끗 웃음을 지으며 지완을 향해 미소 지었다. "내가 언제. 잠잘 때마다 해준다니까." "거짓말. 그 말 믿고, 매일 잠도 안자고 자는 척 했는데, 잠만 쿨쿨 자더라! 해줘. 사랑한다고 해 주라." "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줄 알아. 이렇게 온몸으로 내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도 부족해?" "가끔은, 가끔은 말로도 사랑을 확인하고 싶단 말야." "그럼 너나 많이 해." 은재는 불을 끄고는 돌아누워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은재야, 한번만, 딱 한번만." 지완은 은재의 몸 쪽으로 얼굴을 내밀며 사정하기 시작했다. "싫어." "나, 사랑하지 않는 거지? 그런 거지? 그래서, 결혼하고도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 안 해주는 거지!" 지완은 툴툴거리며 이불을 차기 시작했다. "유채하고 은채한테는 매일 매일 사랑한다고 해주면서, 나한테는 사랑한다는 말도 안 해주고." "해줬잖아."


"언제? 내가 사랑한다고 하면 나도, 이하동문, 그게 고작이었잖아!" 그 동안 아주 지완은 그것이 불만이었던 모양이었다. 계속해서 지완은 쌓였던 불만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싫어?" "아니. 누가 네가 싫대. 그냥, 사랑한다고 말해 달란 말이야." "싫은데?" 은재의 말에 지완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런 지완의 얼굴을 쳐다보며 은재는 숨죽여 웃기 시작했다. 결혼을 하고 한번도 은재는 지완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해준 적이 없었다. 그것을 늘 상 지완은 불만으로 토로했지만, 지금까지도 은재는 그것에 눈 깜짝하지 않았던 것이다. 복수! 11 년 간 자신을 그렇게 속태우게 하고, 짝사랑만 하게 만든 곰 같은 남자에 대한 은재의 조그마한 복수였다. 치사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 이렇게 분통을 터트리는 지완을 골려주는 것이 은재의 조그마한 기쁨이기도 했다. "그럼, 노래, 노래라도 불러 줘." "무슨 노래?"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워워워~ 이렇게 하는 노래 있잖아. 그거 불러 줘." 은재가 사랑해 소리를 해주지 않는다니까, 지완은 잔머리를 굴려 노래를 불러 달라고 꾀를 쓴 것이었다. 그런 지완의 속셈을 모를 은재가 아니었다. "알았어." "저, 정말이지?" 지완의 눈이 기대감으로 번뜩이기 시작했다. "정말로 해준다니까." "빨리 빨리 해봐." 지완은 은재를 재촉하며 눈을 감았다. "으음음, 음음음. 음~……." "이게 뭐야!" 은재가 허밍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지완의 얼굴은 그야말로 똥 씹은 얼굴처럼 일그러졌다. "노래 부르고 있잖아." "너, 너 정말 이럴 거야! 나 삐쳤어. 삐칠 거야!" 지완은 부르르 손을 떨더니 등을 돌리고 누워 버렸다. "지완아~" 은재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지완아~" 은재의 부드러운 손길이 지완의 등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정하게 지완은 은재의 손을 떨쳐 버렸다. "진짜로 삐친 거야?" "사랑한다고 말해줄 때까지, 삐쳐 있을 거야." 지완의 반응에 은재는 철썩 지완의 몸에 자신의 몸을 붙이고, 비비기 시작했다. "말이 뭐가 중요해. 이렇게 온몸으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말야~" 허스키한 목소리로 은재가 지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나 웬걸 즉각 반응이 올 거라고 생각했던 지완은 그런 은재를 용감히(?)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으로


내려가 드러눕는 것이 아닌가? "김지완!" "……." 아무래도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오늘은 기어이 그 말을 들을 모양이었다. "알았어. 항복! 말해줄게. 그러니까, 이리 와!" "정말?" 은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완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방실거렸다. "한번만 말해 줄 테니, 잘 들어. 다음에는 10 년 뒤에 말해 줄 거야." "알았어." 연신 지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귀를 쫑긋거렸다. "사랑해. 김지완." "나도 너무너무 우리 마누라 사랑해." 지완은 은재를 품에 안으며 사랑해, 사랑해를 연발하고 있었다. 깊은 밤. 자신의 사랑스런 세 여인들이 깊은 단잠에 빠져 있을 그 시각, 남자는 살금살금 침대에서 기어 나와 침대 머리맡에서 무언가를 빼들고 살그머니 방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주방으로 들어선 남자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사랑해. 김지완" "사랑해. 김지완" 딸깍, 딸깍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사라졌을, 단 한번의 고백이 소형 라디오 안에서 쉴새없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남자는 계속해서 반복 버튼을 누르며, 미친 사람처럼 실실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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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보상이 고작 이런 것이었다니. 잔인한 세상이여, 잔인한 사랑이여! 그의 사랑을, 자신과 같이 바라만 보고 있는 그의 외사랑을. 여자는 이틀 후, 사람들이 '완벽한 남자'라고 부르는 남자가 2 년 2 개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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