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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남자 1 "탁.. 타탁..탁탁." 칠흙같은 어둠이 깔려 있는 방안, 어둠을 뚫는 한 줄기 빛과 함께 정적을 깨뜨리는 낯선 소리가 들린다. "음.. 수원에 사시는 김명희씨. 아름다운 사연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밤의 이야기' 는 청취자

여러분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사랑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나로 인해서 상대방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 이 아닐까요? 오늘 '밤의 이야기' 여기서 마치고요. 저는 내일 밤 열시에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지금까지 연출 정병준, 프로듀서 황병헌, 저는 김소연이었습니다... 오케이!" 방 한쪽의 커다란 소파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빠르게 자판을 두들기던 체리는 아침까지 보내기로 했던 오늘치 방송대본을 검토한 후 황병헌 PD 에게 E-mail 로 파일을 보내고 노트북을 닫았다. 창문 너머로 어슴푸레하게 새벽이 밝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기지개를 쭉 펴며 창문 쪽으로 걸어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다소 차가운 새벽 공기가 가득 밀려들어왔다. 체리는 항상 남들이 모두 잠든 시간, 새벽에 글쓰는 것을 좋아했다. 고요한 밤의 침묵 속에서는 그녀 자신이 글 속에 몰입되어 마음껏 그녀 안의 이야기들을 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밤새도록 신들린 듯이 컴퓨터를 두드려 댄 후 해가 뜨는 것을 볼 때의 뿌듯함. 상쾌한 아침공기를 들이마시며 산책하는 것은 그야말로 천국의 기분이었다. 근데 오늘 아침은 기분이 영 별로군. 체리는 널찍한 침대 위에서 시트를 휘감고 자고 있는 남자를 보며 찜찜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최상현. 최근에 사귀는 소위 잘 나가는 변호사이다. 키도 평균 이상은 되고, 몸매도 규칙적인 운동 탓인지 봐줄 만 하다. 말쑥한 얼굴은 기본이고 매너도 끝내주는... 한마디로 괜찮은 남자였다. 체리는 침대 가에 앉아 요리조리 그를 뜯어보았다. 이 남자가 내 마음에 안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건은 좋은데.. 그렇다고 기술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음.. 아니다. 좀 떨어지지. 한번도 오르가즘을 느껴 본 일이 없잖아. 하긴.. 내가 언제 그걸 느껴본 적이 있던가? 언젠가 그녀가 불만 어린 어조로 한번도 오르가즘을 느껴 본 일이 없다고 했더니 친구 정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그건. 진짜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잘 느껴져." " 난 진짜 사랑하는 사람과 해도 잘 안 느껴지던데?"


" 바보야, 넌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한달 만에 차버리고 금새 또 다른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나니?" " 기간이 뭐 그리 중요해? 하루든, 한달이든, 내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했으면 된 거 아니야? 내가 비록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그때마다 거짓된 감정으로 사랑을 꾸며낸 적은 한번도 없었어." " 그럼 그 많은 사람과 다 사랑에 빠졌었다는 말이야? 말도 안돼." " 말이 안 되긴, 별로 많지도 않어. 그리고 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사랑이 뭔데?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은 감정, 가슴 저리도록 서로를 소유하고픈 감정 아니니? 어느 한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 헤어지게 되면,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오는 거잖아. 평생 오직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말도 사실은 거짓이라구." " 그래. 니 말도 일리는 있지만 사랑이란 게 단지 그런 감정적인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야. 서로의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는 진지한 관계지. 넌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경향이 있어. 좀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니? " "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 감정을 속일 수는 없는 거잖아. 단지 매번 사랑에 빠지지만 금방 그 사람의 결점이 눈에 띄어서 헤어지게 된다는 게 문제지. 이를테면, 콩깍지가 금방 벗겨진다구." " 거봐. 넌 그게 문제야. 진실한 사랑이라면, 그 사람이 결점투성이라도 그 결점들을 다 이해하고 감싸안을 수 있어야 해. 너처럼 결점이 눈에 띄면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랬다. 체리는 어쩌면 정희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최상현이라는 남자의 단점이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그 사람은 그녀의 인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 또 콩깍지가 벗겨졌나 보군. 체리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꽤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지적이고, 추진력도 있었으며, 일에 대한 열정도 대단했다. 물론 그녀에게도 적극적으로 다가왔었지만. 그러나 두달이 지난 지금은 왠지 답답하고 짜증스럽기 그지없다. 대부분의 법조계 사람들이 그렇듯이, 권력 지향적이고 출세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하는 탐욕스러운 남자였다. 거기다 이미 여러 번 사랑을 나누었고 그의 오피스텔에 들락거리는 사이였지만 같이 있어도 때때로 느껴지는 섬뜩한 차가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체리는 성급하고 열정적이며 사랑이 넘치는 자신과 거의 반대의 성격을 갖고 있는 그가 서로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심지어 그는 사랑을 나눌 때조차 권위적이고 남성적 자만심에 꽉 차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항상 그 일이 끝나고 나면 나한테 얼마나 만족했는지 꼭 확인하곤 하잖아? 지난밤을 떠올리며 체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늘 그렇듯이 그녀에게는 별다른 배려도 없이 자신의 즐거움만 추구하며 그녀도 똑같이 즐거워할 것이라고 생각한 듯 거칠게 행동했다. 딴에는 그녀를 거칠게 다루는 것이 그의 남성적인 힘을 보여준다고 느끼는 모양이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체리에게는 그런 일방적인 유희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게서 마음이 떠나니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신체적 화학반응조차 모조리 소멸되어 버린 탓이다. 문득 그녀의 머리속에 한 남자가 떠올랐다. 최근에 체리의 신경을 건드리는 남자였다. 새로 온 PD 인데 같은 프로를 맡은 건 아니지만 같은 라디오 쪽이라서 왔다갔다하다 자주 마주치는 사람이었다. 이름이.. 백대승이던가? 그다지 잘생긴 남자는 아니었다. 곱상한 남자를 좋아하는 요새 여자들의 기준으로 보면 어쩌면 산적 같아 보이기도 할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섹시한 남자였다. 체리는 항상 남자를 볼 때 입술을 가장 먼저 보는데 그 남자는 도톰하면서도 키스하고 싶은 입술을 갖고 있었다. 맨 처음에 방송국 엘리베이터에서 그 남자와 마주쳤을 때 그 입술에 끌려 한참동안 뚫어지게 그 입술만 바라봤던 기억이 났다. 그 남자... 날 정말 이상한 여자라는 듯 쳐다봤었지.. 가만, 그러고 보니 이 최상현이라는 남자가 또 맘에 안 드는 점이 있군. 입술이 너무 얇잖아?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침대 위의 남자가 꿈틀대더니 눈을 뜨는 게 보였다. "으음.. 첼? 벌써 일어났어?" 드디어 일어나셨군. 그는 졸리운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 상현씨. 나 그만 가봐야겠어." 체리는 침대에서 일어나 가방과 노트북을 챙겼다. 이미 옷은 다 입고 있는 상태였다. " 더 있다가 아침 먹고 가지 그래? " 체리는 짐짓 웃으면서 상현에게 다가왔다. " 아니 생각 없어. 그리고 이거." 아무 생각없이 체리가 주는 것을 받아든 상현은 잠시 어리둥절한 듯 그 물건을 보더니 그것이 자신의 오피스텔 열쇠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동안 고마웠어. 상현씨." "체리? 이게 무슨 뜻이지? 그 동안 고마왔다니? " 조금씩 그의 인상이 구겨지는 걸 보니 이 상황이 이해가 되고 있는 듯했다. "이런.. 상현씨.. 무슨 뜻인지 알면서. 난 지금 최대한 친절하고 우아하게 내 의사를 전했어. 상현씨도 우아하게 받아들여 주면 안될까?" 사실 뜨거운 밤을 보내고 갑자기 이별을 선언한다는 건 좀 상식 밖의 일이긴 했다. 하지만 체리의 마음은 이미 정해졌고 정에 이끌려 쓸데없이 질질 끄는 건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 이유가 뭐지? 난 당신에게 충분히 잘해줬다고 생각했는데." 체리는 허리를 숙여 상현의 눈을 바로 들여다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냥.. 이제는 더 이상 밤마다 오르가즘을 느끼는 척 소리 지르고 싶지 않아서 그런다면... 이해가 쉽게 되지?" 말문이 막힌 채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남자를 뒤로하며 체리는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오피스텔을 나왔다. 그남자.. 자존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겠군. 하지만 그렇게 잘난 척 하더니 쌤통이잖아? 귀여운 남자 2 NSB 라디오 방송국으로 들어가는 체리의 발걸음이 가볍다. 8 월 말의 여름의 끝자락 날씨였으나 제법 아침 저녁으로는 차가운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방송국에 들어서자 체리는 잠그고 왔었던 흰색 칠부자켓의 앞 단추를 풀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NSB 라디오에서 매일 밤 10 시부터 두시간동안 방송되는 김소연의 '밤의 이야기' 의 메인 작가. 유체리의 직업이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바로 NSB 에 입사해서 지금까지 2 년여동안 각종 프로그램의 대본을 쓴 능력있는 작가였다. 그러나 글만 쓰는 일이 아까울 정도로 뛰어난 미모 때문에 다른 작가들에게 부러움의 눈길도 많이 받았다. 체리는 172cm 의 큰 키에 약간 가냘프다 싶을 정도의 마른 몸매를 갖고 있었지만 몸에 비해 풍만한 가슴과 힙 때문에 상당히 육감적으로 보였다. 카메라에 잘 받는 몸매와 얼굴을 가진 덕에 처음에 방송국에 들락날락 할 때는 모델이나 CF 같은 걸 해볼 생각이 없냐는 권유도 꽤 받았었지만 그녀는 그런 것 보다는 글쓰는 일이 훨씬 즐거웠다. 체리는 복도에서 마주치는 낯익은 얼굴들에게 일일이 환한 미소를 던지며 작가실에 들어섰다. 이미 여러 명의 작가들이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있다. " 좋은 아침!"


" 좋은 아침! 첼언니, 어서와요." 작가실의 막내이면서 NSB 의 간판 수다쟁이 미영이가 함박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 아침부터 웬 수다들이야?" 체리는 그녀의 책상 위로 노트북과 핸드백을 올려 놓고 쟈켓을 벗어서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놓았다. 눈썹을 치켜올리며 묻는 체리를 보며 그녀의 배꼽친구 정희가 웃으며 얘기한다. " 과년한 처녀들이 모여서 할 이야기라면 남자 얘기밖에 더 있니?"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책상에 기대 서 있는 체리에게 미영이 다가오며 자판기 커피를 불쑥 내밀며 말했다. " 첼언니, 언니두 알죠? 이번에 라디오 쪽으로 옮긴 백 PD 님 말예요." 아하. 그남자 얘기로군. "키도 크고 너무 잘생겼잖아요. 거기다 엄청 친절하대요. 정말 신사중의 신사라니까요." 체리는 흥미없는 척 책상위를 뒤적거리며 뚱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가 은근히 그 남자에 대해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 거기다가 글쎄 총각이래요." 결혼 안한게 뭐 큰 사건이라고 저렇게 떠든담? 체리는 여전히 시큰둥한 척 애꿎은 책들만 이리 놓았다. 저리 놓았다 하고 있었다. " 결혼 안했다고?" 정희가 물어보자 미영은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 아니요. 그 총각 말고, 진짜 총각." 체리는 관심없는 척 하던 태도는 집어던져 버리고 미영이 옆으로 다가앉았다. " 뭐? 그 총각은 뭐고 또 진짜 총각은 뭐야?" 미영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더니 누가 들을세라 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 그러니까.. 지금까지 한번도 여자 경험이 없는 총각이래니깐요. 흰 눈처럼 깨끗하고 순결하다구요." 순간 모여있던 작가들 사이에서 괴성이 쏟아져나오며 한마디씩 한다. " 미영이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 요새도 그런 남자가 있어?" " 몇 살이니?" " 여자친구도 없대?" " 그 사람 남자 맞니?" 체리의 비아냥거림을 끝으로 다시 잠잠해진 그들은 숨죽이고 미영의 입만 쳐다보았다.


" 백 PD 님 하는 프로에 제 어렸을 적 친구가 작가로 뛰고 있거든요. 걔가 백 PD 님하고 같은 과 선후배사이라서 그 사람에 관한 건 빠삭~ 해요. 그런데 백 PD 님 대학 때부터 유명했다네요.

자기는

결혼할

여자한테만

순결을

바치겠다고..

그때부터

공언하고

다녔었대요." 기가 차는 남자로군. 가끔 마주칠 때 보면 어딘지 모르게 순진해 보이는 구석이 있더라니.. 그래도 체리는 그가 여자 경험이 없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었다. 그 나이가 되도록.. 가만, 몇살이지? " 그사람 나이가 어떻게 되니?" "음.. 첼언니가 95 랬죠? 그럼.. 93 학번이래니까 스물 일곱살이겠다." 체리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물 일곱이 되도록 총각이라니? " 그사람 뭔가 문제 있는 거 아냐? 그러니까.. 그 물건이 너무 작아서 그걸 못한다든지.. 뭐 그런 거." 체리의 말에 모두들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 아네요. 제 친구가 그러는데 남자 선배들이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끝내준다던데요? 단지 백 PD 님이 정조 관념이 대단해서 진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몸을 지킨다는 거죠. 정말 멋지지 않아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정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 그래. 요새 남자들 남녀평등이다 뭐다 말하면서도 자기들이 결혼할 여자는 꼭 순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잖아. 자기네들은 온갖 방법으로 경험하면서 말야. 그런 남자들에 비하면 백 PD 님은 정말 괜찮은 남자 아니니?" " 맞아요. 정희 언니. 대학 때두.. 이쁘고 한 몸매 한다는 여학생들이 아무리 육탄 공격을 벌여도 꿈쩍도 안했대요." 미영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젊은 우리들'의 작가인 세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마디 한다. " 아무리 그래두 남잔데.. 우리 체리 정도면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까?" 그러나 미영은 여전히 고개를 흔든다. " 아니, 안될걸요. 아무리 체리언니가 NSB 의 섹시퀸이라 해도 절대 안될거에요." 섹시 퀸. 동료들이 붙여준 그녀의 별명이다. 그 별명이 사내 인터넷 홈페이지에 뜨면서 그녀는 체리라는 이름 보다도 그 별명으로 더 많이 알려졌었다. " 너 확신하는 거야? 우리 내기 할래? 백대승 PD 가 체리의 유혹에 넘어올지 안 넘어올지?"


점심 메뉴내기를 비롯해서 온갖 사소한 일에도 내기를 거는 김민희 작가가 잘 되었다는 듯 꺼낸 얘기에 다시 작가실이 시끌시끌해졌다. "난 체리한테 오만원 걸었어." " 난 백 PD 님!" 정작 내기의 화제로 떠오른 체리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서로 내기돈을 거느라 정신없었다. 그새 민희는 내기 장부에 각자가 건 내용과 금액을 꼼꼼히 적어넣고 있었다. 역시, 내기의 여왕 아니랄까봐.. 체리는 흥분해서 떠드는 동료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미영의 말에 은근히 자존심 상했던 체리는 그 내기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실 그 남자에 대해서도 흥미가 느껴졌다. 그 남자 덕분에 사귀던 사람하고도 헤어졌잖아? 체리는 자신의 생각을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며 말을 꺼냈다. " 기준이 뭐니? " 뜬금없는 체리의 말에 떠들던 작가들이 또 조용해졌다. " 그 백 PD 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나한테 넘어오는 기준 말야. " " 그거야... 총각 딱지 떼는 거겠죠? 하하. 그치만 넘 어려우면 그냥 키스 정도면 어떨까요?" 왠지 미영의 조심스런 말에 무시당한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체리는 미영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 아니. 어렵지 않아. 앞으로 두달안에 그남자를 진짜 남자로 만들어 주겠어." 체리는 장난스럽게 씨익 웃으며 놀란 작가들에게 브이 표를 그려 보이며 작가실을 나섰다. 그날 저녁, 체리는 오랫만에 일산에 살고 계시는 부모님을 찾아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방송국에 입사한 이후로, 그녀는 독립해서 방송국 근처의 조그마한 오피스텔에서 지내고 있었다. 원래 일주일에 한번씩은 꼭 집에 들렀지만 요 근래에는 방송대본 쓰는 일 외에도 대학 후배 부탁으로 대학 방송축전 대본까지 교정해 주느라 근 한달간 집에 갈 틈이 없었다. 체리는 엄마가 좋아하시는 오렌지와 아빠가 좋아하시는 시루떡, 동생 별이를 위한 삼국지 7 게임 CD 를 사들고 집으로 들어섰다. 몇년 전에 새로 이사한 집인데 엄마는 자그마하지만 정원이 있는 걸 매우 기뻐하셨었다. 지금은 손바닥만한 정원에 장미, 국화, 맨드라미 등등 온갖 꽃을 다 심고, 봉숭아도 심어 꽃잎을 따서 동생 별이의 손톱에 물을 들이기까지 한댄다. 체리는 계집애처럼 물을 들였다며 동생을 놀려대었던 기억이 떠올라 살포시


웃음지었다. 아직 그리 나이가 많이 드신 건 아니지만 소녀처럼 천진한 엄마가 빨갛고 탐스러운 봉숭아 꽃잎을 보고 옛날,

손톱에 곱게

물들이던

생각에 애꿎은

별이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체리는 단아하고 정다운 이층집을 바라보았다. 지난해 심었던 등나무가 여름이라 무성하게 잎을 뻗으며 이층을 향해 기어올라가고 있었다. " 엄마, 아빠! 저 왔어요." 현관문을 열어젖히니 마침 저녁식사 시간인 듯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 와아! 누나다!" 부모님보다도 먼저 뛰어나온 동생 별이는 그녀에게는 관심이 없고 사주기로 약속했었던 게임 CD 만 반가운지 그녀의 손에 들린 CD 를 낚아채 방으로 달려들어간다. 체리는 피식 웃었다. 고 2 라고 해도 덩치만 컸지 아직 어린애였다. " 한달만이구나. 뭐가 그리 바쁜거니? 자주 집에 오라니깐." 언제나 아름답고 우아한 엄마가 반가움에 미소지으며 딸을 껴안았다. " 요새 좀 일이 밀려서요. 와, 맛있는 냄새나네요. 밥 남았어요?" 체리는 오랫만에 먹어보는 음식다운 음식에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밥을 두 그릇이나 뚝딱 해치워버렸다. 설거지를 하고 거실로 나가보니 엄마 아빠가 녹차를 드시고 계셨다. " 한잔 마실래? 이번에 고모가 가져다 주신 건데, 향이 참 좋구나." 체리는 엄마가 건네주는 찻잔을 받아 들고 소파 깊숙히 몸을 묻었다. 평화롭고 마음이 편안해 진다. 가족이란 그런 것 인가보다. 같이 있기만 해도 한없이 편해지는, 마음의 안정을 느낄 수 있는 존재. 체리가 녹차의 향에 취해 눈을 감고 있는데 갑자기 아빠가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 우리 공주님은 밥 먹자마자 잠들어 버렸나? 살찔텐데." " 아우, 아빠두 참. 명상하느라고 눈감고 있었던 거에요. 잠자긴 누가 자요." 장난기 어린 아빠의 말투에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웃는 체리의 모습이 상큼하다. 그들은 이내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요새 가족들이 대화하는 시간이 부족하다고들 하지만 체리의 집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계신 부모님 덕택에 그들은 문제가 있다 해도 대화로 모든 것을 풀어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세대차이가 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가능한 한 그들의 자녀들을 이해하려 애썼고 체리나 동생 별이도 그런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 체리야, 최근에 니 남자친구 말이다."


한참 이야기하는 중에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엄마가 슬쩍 말을 꺼낸다. " 응. 상현씨? 왜요?" " 그래. 엄마는 어째 그 사람이 영 마음에 안 드는구나." 체리는 될 수 있으면 사귀는 남자들을 한번 이상은 꼭 집으로 초대해서 부모님께 보이려고 노력했었다. 이성교제에 관한 것도 부모님께는 알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얼마 전에 그 남자를 집에 초대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그랬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신 것 같다. " 그래요? 이제 헤어졌어요." " 그랬구나. 잘했다. 너하고 그 사람하고는 별로 안 어울려 보였어." 그녀의 엄마는 눈에 띄게 안도하는 모습으로 말씀하셨다. " 어떤 점이 안 어울려 보였는데요?" 체리는 향긋한 차를 한모금 입에 물고 있다가 급하게 꿀꺽 삼키고는 엄마를 향해 돌아앉았다. 지금까지 집에 데려왔던 그녀의 남자친구 예닐곱명 모두 다 엄마에게서 낙제 점수를 받았다. 물론 엄마가 마음에 안 들어 하신다고 해서 즉시 헤어진 적은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금방 싫증이 나서 결국은 헤어졌었다. " 일단은 그 사람하고 너하고는 성격이 너무 많이 틀려. 체리 니가 그 사람의 차가움을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단다. 그저 변호사라는 간판만 보고 경제적인 능력, 사회적인 지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 이상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넌 그런 걸 중요시하지 않잖니? 그리고 서로 생활하는 세계가 판이하게 다르지. 직업 말이다. 서로의 일, 생각, 가치관 등에 대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거야. 결국 단기간 사귈 수는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서로 상처입고 후회만 할 뿐이야. 더구나 내가 보기엔 사랑을 나눌 때도 상대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꼽만치도 안 할 것 같더라. 그렇지 않았니?" 체리는 엄마의 노골적인 질문에 뺨을 붉혔지만 사랑을 나누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그녀의 집에서는 자연스러운 화제였기 때문에 이내 엄마의 말에 동조를 표했다. " 응. 맞아요. 엄마 어떻게 알았어요? 처음엔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나중에는 정말 참을 수가 없더라구요. 난 사랑을 나눌 때 그렇게 이기적인 남자는 처음 봤어요." 한참 조용히 두 모녀의 말을 듣고 있던 체리의 아빠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

그러니까

체리야.

너한테는

아빠같은

남자가

어울려.

마음

넓고,

성실하고

믿음직스럽고, 무엇보다 사랑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남자. 널 소중히 여기고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너의 장점을 볼 수 있는 남자 말이다. 어서 나같은 남자 찾아서 결혼도 하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않겠니?"


체리는 아빠의 말에 피식 웃으면서도 문득 한 남자가 떠올랐다. 스물 일곱이 될 때까지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여자를 위해 순결을 지키고 있는 남자. 사랑을 쉽게 생각하고 육체적 쾌락에 물들어 있는 남자들과 달리 사랑을 믿는, 어찌보면 순정파 여인같은 남자. 가끔 마주칠 때마다 보았던 진지하고 깨끗해 보이던 눈과 답답하리만치 성실해 보이는 태도를 가진 남자가 생각났다. 어쩌면, 아빠 같은 남자일 지도 모르지. 체리는 그 남자를 유혹해 보고 싶었다. 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 대해서 좀더 알고 싶었다. 그 남자는 그녀와 잘 어울릴 지도 모른다. 정말 그 사람이 아빠가 말한 것처럼 그녀를 이해해 줄 수 있고 섹시한 겉모습으로 포장된 그녀의 순수한 내면을 꿰뚫어볼 수 있다면 그와 사랑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귀여운 남자 3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 체리는 옷장에서 이옷 저옷 꺼내입으며 무슨 옷을 입어야 할 지 고민하고 있었다. 오늘부터 그 남자를 유혹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본래 그녀의 취향으로는 이름처럼 산뜻하고 화사한 것을 좋아하지만 백 PD 가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하는 지 몰라서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입던 대로 하기로 결정하고 흰색 구부팬츠와 쫄티를 입었다. 평소에 수수해 보이는 백 PD 라면 화려하고 육감적인 그녀의 스타일을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아직까지는 개성없이 남자 취향에 맞추어 옷을 입을 만큼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평소대로 입기로 결정한 것이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노트북과 핸드백을 들고 나가려던 체리는 갑자기 멈춰서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이내 씨익 웃고서는 다시 옷장 앞으로 가서 옷을 뒤적거렸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작년에 샀던 검정색 원피스로 바꿔 입더니 콧노래를 부르며 밖으로 나간다. "어머, 첼 언니. 립스틱 색깔 정말 환상적이네? 너무 섹시해 보인다. 나두 좀 빌려주면 안될까?" 체리가 작가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를 본 미영이 호들갑스럽게 말하자 체리의 입술을 본 정희가 피식거리면서 미영을 놀린다. " 미영아, 빨강색은 아무한테나 어울리는 게 아니야. 특히 저렇게 새빨간 색은 너처럼 입술 큰 애가 바르면 얼굴에 입술밖에 보이지 않을 걸?" 그 말에 작가들이 까르르 박장대소를 하자 미영은 삐죽거리면서 커피나 뽑아 온다며 재빨리 도망가버렸다. 귀여운 미영의 모습에 웃음짓던 체리는 책상 정리를 하고 노트북을 꺼내 NSB 홈페이지에 있는 '밤의 이야기' 신청곡 코너와 사연이 올라오는 게시판을 확인했다. 그곳을


통해 방송에 대한 청취자들의 반응과 의견을 즉각즉각 파악할 수 있어 매우 도움이 되었다. 한참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친구 정희가 다가왔다. "체리야. 너 며칠 전에 하기로 했던 그 내기.. 혹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니? " 옆에 있는 다른 작가를 의식해서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정희에게 체리도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 글세. 왜?" " 난 그냥.. 네 반응이 평소와 다르길래. 원래 그런 거 별로 안좋아하잖아? " 정희는 어려서부터 체리를 보아왔기 때문에 거의 그녀의 생각을 꿰뚫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희는 지금 체리를 말리려고 하고 있다. " 그런 거라니?" 재미있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는 체리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진지한 얼굴의 정희는 낮게 속삭였다. " 사람 감정 갖고 장난치는 거. 그런 내기는 너한테나 그사람한테나 별로 좋은 영향 끼치지 못해. 혹시라도 그 사람이 너한테 빠져들었다가 내기 때문에 니가 접근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되겠니? "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체리는 정희가 말린다고 해서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 내기 때문에 그러지 않아." 정희는 체리의 책상 옆에 기대고 서 있다가 마침 옆에 앉아있던 윤세라작가가 자리를 비우자 그녀의 자리에 앉았다. "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설명 좀 해봐." 체리는 여전히 눈을 반짝이며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뭔가를 꾸미는 듯한 미소였다. " 내기 때문에 그 남자한테 접근할 생각은 아니라구. 백대승이라는 남자에게 흥미가 생겼어. 솔직히 내기 같은 건 어떻게 되는 상관없어. 이기든, 지든 별 의미가 없잖니." 정희는 의외의 대답에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당돌한 친구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오랫동안 알아온 친구지만 정말 예측불허,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럭비공 같았다. 체리가 그 순진한 남자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게 의아했다. 평소 체리가 즐겨 만나던 세련되고 일회용 사랑을 믿는 남자들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혹시 동정이라는 소리에 혹한건가? " 유체리. 너 또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고 싶은 거니?" 체리는 웃고 말았다. 정희가 아연해 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 아니. 말 한마디도 나눠보지 않은 남자와 어떻게 사랑에 빠지니?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던가 하는 특수한 상황도 아닌데, 아무리 내가 사랑에 잘 빠진다고 해도 그런 건 좀 너무했다." 체리의 말을 듣고 정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체리가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경향은 있었지만 단지 사람의 외양만 그럴 듯하다고 해서 무조건 좋아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항상 자신들에게 부족한 점을 갖추고 있는 이성에게 끌리듯이 체리도 그녀에게 부족한 침착하고 냉철한 이성, 합리적인 사고, 과묵한 입을 가진 남자를 좋아했다. 체리의 성격을 되짚어 보던 정희는 어쩌면 백 PD 가 체리에게 잘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걱정되는 것은 언제나 마른 장작이 타듯 뜨거운 열정으로 사랑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 상대방의 단점을 찾아내는 체리의 변덕스러움이었다. 그녀가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그 순진한 남자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을 터였다. " 그런데, 넌 아니라고 하지만, 민희 언니와 그외 내기에 돈 건 작가들이 내기를 그만 둘까?" 정희는 김민희 작가에게 생각이 미치자 걱정스럽게 말한다. " 아마도 어림없을 걸. 민희언니는 내기 거는 재미로 살잖아. 난 괜찮아. 신경 안써. 딱딱하고 타이트한 방송국 생활에 나라도 활력소가 되어 주면 모두를 위해 좋잖아." 정희는 못말리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 하더니 체리의 웃는 얼굴에 저도 모르게 같이 웃고 말았다. 귀여운 남자 4 체리는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송국 식당 앞의 복도 모퉁이. 조금 전에 식당에서 식사하면서 백대승 PD 가 스텝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아 두었던 터였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나오겠지.. 그녀는 손에 든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벽에 기대어 마음을 편히 가지려고 노력했다. 흘낏 모퉁이를 돌아보는 그녀의 눈에 훤칠한 백대승 PD 의 모습이 보이자 그녀는 유심히 그의 보폭을 살피고 다시 몸을 숨겼다. " 5, 4, 3, 2, 1, 지금이야." 가만히 그의 발소리를 들으며 보폭을 세던 그녀는 그가 막 모퉁이를 돌려고 하는 순간에 튀어나갔다. 아주 자연스럽게. " 앗 뜨거!"


교묘하게 계산된 솜씨로 그녀가 부딪히며 자신의 몸에 커피를 쏟자 검은 원피스의 가슴 부분부터 아래쪽으로 커피물이 범벅이 되어버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대승 PD 는 자신 때문에 옷을 망친 여자에게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 엇! 죄송합니다. 미처 오시는 걸 못 봐서.. 괜찮습니까?" 그가 재빨리 손수건으로 옷을 닦아 주었지만 이미 원피스는 입을 수 없을 정도로 커피물이 심하게 들어버렸다. 미안함과 당황스러움이 섞여 있는 그의 얼굴을 살짝 훔쳐보며 체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미영이가 말한 대로, 신사가 확실한 것 같군. " 어머.. 어쩌죠? 오후에 중요한 회의가 있는데..."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를 보며 머리를 긁적이던 백 PD 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실례지만 댁이 어디십니까? 회의시간이 좀 남았다면 제가 댁까지 모셔다 드리면.. 옷은 갈아입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 저 인천에 사는데 거기까지 갔다 오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요." 방송국 근처의 오피스텔에 살기 때문에 항상 걸어 다니는 체리였지만 시치미 뚝 떼고 애처롭게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데리고 방송국 근처의 자신의 오피스텔로 데리고 갔다. 그의 오피스텔로 가는 길은 왠지 그녀에게 상당히 익숙한 길이었다. 그는 오피스텔이 방송국과 가까워서 항상 걸어다닌다고 했다. 걸어다녀? 헥~ 내가 사는 오피스텔이잖아! 눈에 익은 20 층 건물을 올려다보는 체리의 표정이 순간 복잡해졌다. 사교성이 남달리 뛰어나서 경비 아저씨는 물론이고 옆집. 아랫집, 윗집 등 가리지 않고 친분을 쌓아뒀던 그녀는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만날까봐 간이 콩알만해졌다. 체리는 재빨리 뒤로 묶었던 머리를 풀어 커텐처럼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인채로 그의 뒤에 딱 붙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 아저씨에게 경쾌하게 인사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더욱 고개를 푹 숙인 체리의 눈에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쳐다보는 경비아저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15 층. 그는 15 층에 살고 있었다. 하나.. 둘.. 손가락을 꼽아본 결과 9 층에 사는 체리와는 6 층의 차이가 났다. 문을 열고 그의 집에 들어서자 집구조는 그녀의 집과 같았지만 좀더 남성적인 분위기로 꾸며진 인테리어에 의외로 남자 혼자 사는 집 답지 않게 깔끔한 실내 모습에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는 그가 웃으며 변명했다. " 어제 어머니가 다녀가셨거든요. 워낙 깔끔한 분이라 가끔씩 제가 집을 난장판으로 만든 후에 오셔서 온갖 잔소리를 다 하시면서도 이렇게 깨끗하게 치워 놓고 가시곤 하죠."


그는 어머니가 늘 잔소리 끝에 하는 장가가라는 말은 쏙 빼고 나머지 말만 들려주었다. " 저 혼자 사는 집이라서 방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제 침실이지만 전 여기 있을 테니 신경쓰지 마시고 옷 벗어서 주십시오. 건조기 있으니까 빨면 금방 마를 겁니다." 눈이 참 선해보이는 사람이었다. 체리는 그의 선한 눈빛과 자상한 마음 씀씀이가 맘에 들었다. 그녀는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는 그의 방으로 들어가 원피스를 벗어 문 밖으로 쑥 내밀었다. 그는 원피스를 받아 욕실로 가면서 체리가 들을 수 있을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 옷장 서랍에 제 셔츠가 있으니까 꺼내 입으시죠. 원피스가 검정색이라서 얼룩이 지지는 않겠네요." 그럼. 그러라고 검은색으로 입고 왔는 걸. 체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침대에 걸터앉아 방 구경을 했다. 침대. 옷장. 책상. 컴퓨터. 그리고 원서와 방송관계 서적이 가득 꽂혀있는 책장. 아주 능률적이고.. 편리하게 꾸며진 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승은 세탁기에 체리의 옷을 넣고 커피물이 빠질 때까지 돌린 후 건조기를 작동시키고 거실로 나왔다. 자신의 방문은 아까 그녀가 들어간 대로 닫혀져 있었다. 그는 일단 문을 노크했다. " 유체리씨.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네. 들어오세요." 안에서 그녀의 예쁜 목소리가 들려오자 대승은 가만히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 헉!" 체리는 그가 급하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를 듣고 창밖을 보던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휘둥그레진 눈과 눈만큼 동그랗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있었다. 그 여자는 벌거벗은 채 그의 침대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있었다! 아니.. 벌거벗은 건 아니지. 위아래로 하나씩 걸치고는 있으니까. 대승은 너무도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십칠년간 살아오면서 비디오나 사진이 아니라

자신의

눈앞에서

그렇게

옷을

벗은

여자를

적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당당하게 뒤쪽으로 팔을 받치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여자는. 그녀의 까맣고 긴 머리가 엉덩이까지 흘러내려 있었다. 커다랗고 맑은 두 눈에는 요염함 보다는 순수하고 깨끗함이 보였다. 어찌보면 장난기까지 느껴졌다. 반면에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검정색 속옷은 그녀의 하얀 피부와 어울려 그의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한편 체리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꼭 부모님 몰래 음란사이트 보다 들킨 십대 같았다.


이남자.. 정말 순진하잖아? 오랫만에 느껴 보는 신선함이다. 우락부락한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와는 달리 부끄럼 많은 소년같이 얼굴이 빨개진 게 정말 귀여워 보였다. " 내 몸매 맘에 들어요?" 영원 같았던 순간이 지나고 먼저 정신을 차린 체리가 웃으며 던진 말에 그는 그제서야 정신이 드는 듯 다시 숨을 들이키며 재빨리 뒤로 돌아섰다. " 저.. 저기.. 지.. 지금 뭐하는 겁니까?" 생긴 것 같지 않게 말까지 더듬는 그는 정말로 당황한 듯 싶었다. " 방 구경 하고 있었어요." 진짜로 구경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아주 흥미로운 표정으로 다시한번 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나오는 체리의 말에 기가 막힌 듯 한숨을 쉬더니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나 때문에 화가 났나? 체리는 잠시 멈칫 했으나 이내 빙글거리며 그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제 옷장에서 옷 꺼내 입으라고 했었는데 못 들으셨나 봅니다. 저기 있는 옷장 안에 셔츠가 있으니까..." " 옷장은, 백대승씨하고 더 가까이 있는 것 같은데요?" 그의 말을 자르며 웃음 띤 목소리로 체리가 말하자 대승은 옷장 쪽과 체리 쪽을 흘깃 보더니 문쪽에 더 가까운 옷장으로 옆걸음질 쳐 간 후에 커다란 대학 셔츠를 하나 꺼내 체리가 앉아 있는 침대 쪽으로 던졌다. 그녀가 쿡쿡대며 웃는 소리가 들리자 자신의 행동이 민망해진 대승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 저기.. 이제 뒤 돌아도 됩니까?" 잠시 후 머뭇머뭇거리며 대승이 묻자 또 웃음기 묻은 체리의 음성이 들려왔다. " 그럼요~" 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뒤로 돌았으나 어느새 그의 코앞에까지 와 있는 체리를 보고 더욱 놀라고 말았다. 그는 자신에게도 커다란 셔츠가 그녀처럼 가녀린 체구의 여자에게는 안 맞을 거라는 걸 생각 못했던 무지함을 탓했다. 목 주위는 너무 깊게 파여서 그녀의 동그스름한 한쪽 어깨가 살짝 보였고 길이는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왔으나 오똑하게 솟은 두 개의 언덕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셔츠는 그녀에게 썩 잘 어울렸다. 막 잠자리에 들려는 소녀 같았다. 소녀와 갓 피어난 여자의 중간 정도로 보이는. 몸의 굴곡을 보면 성숙한 여성이요, 뽀얗고 투명한 느낌이 드는 얼굴을 보면 순수한 소녀였다.


그가 충격 때문에 멍한 상태로 그녀에게서 달콤한 체리 향기가 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가느다란 팔을 들더니 그의 목을 확 끌어 당겼다. 그는 뭐가뭔지 모르는 상태로 입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녀의 입안에서도 달콤한 체리맛이 났다. 꼭 체리맛 사탕을 먹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녀의 혀가 능숙하게 입안을 훑고 다녔지만 아무런 제지도 할 수 없었다. 온 몸의 힘이 쭉 빠져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체리는 예상했던 대로 그와의 키스가 너무도 기분좋은 일임을 확인했다. 그녀가 점점 흥분해 입술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을 정도에까지 이르자 그녀는 살짝 눈을 뜨고 그의 반응을 보았다. 그런데 그는 아까처럼 계속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얼굴은 물론 귀까지 빨개진 채로. 체리는 머릿속을 스쳐가는 어떤 생각 때문에 그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거의 그가 숨막혀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입술을 밀어붙이다가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입술을 떼었다.

그녀가 뭐라고

말하는

같은데

어지러워서

웅웅거리는 소리로만 들렸다. 처음... 키스.. . 어쩌고 하는 말들이 조각조각 들렸다. " 백대승씨. 혹시 키스 처음 해봐요?" 그의 빨개진 얼굴과 어리숙한 반응. 휘둥그레 놀람을 나타내는 눈에서 그의 경험없음을 직감할 수 있었던 체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했다. " 이봐요. 그렇게 뻣뻣하게 서 있지 말고 날 안아줘야죠. 그리고 키스할 때는 눈 감고 하는 거예요. 알았죠? 다시 한번 해봐요. " 그녀는 귀여운 입으로 뭐라고 속사포처럼 쏘아대더니 다시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그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또 체리맛이 느껴졌다. 그녀가 눈을 감으라고 한 것 같아서

눈을 감았더니 체리맛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엉거주춤

늘어뜨려진 그의 손을 잡고 한쪽은 그녀의 등 뒤로 돌리게 하고 한쪽은 그녀의 셔츠 밑으로 넣게 해서 부드러운 살을 만지도록 했다. 이런 아찔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한참 정신없는데 그녀의 조그마한 손이 그의 몸을 아래위로 더듬다가 그의 청바지 속으로 쑥 들어갔을 때 그는 거의 혼비백산했다. 달라붙는 그녀를 억지로 떼어내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그는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 유체리씨! 도대체 지금 무슨 짓 하는 겁니까?" 그가 소리를 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순진하게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미소를 짓는다. " 지금 백대승씨하고 키스하는 중이잖아요." 그는 살다살다 이렇게 뻔뻔스러운 여자는 처음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입술을 빼앗더니 몸까지 빼앗으려 했으면서 아무짓도 안했다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그를 쳐다보는 여자라니.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속으로 열까지 천천히 센 후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팔짱까지 끼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 유체리씨는 처음 본 남자와 그런.. 깊은 관계에까지 가는 지 몰라도 저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유체리씨같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제게는 사랑없는 육체관계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유체리씨 옷은 한 30 분정도면 마를 겁니다. 전 바빠서 먼저 갈 테니 열쇠는 경비실에 맡겨두십시오." 그는 탁자위에 열쇠를 소리나게 내려놓더니 문을 열고 침착하게 나갔다. 더이상 그 여자와 한 방에 있을 수가 없었다. 체리는 그의 말에 어이없어 하다가 현관문을 여는 대승을 불러세웠다. " 저기요, 근데 아까 나랑 키스한 거.. 첫키스 맞죠?" 대승은 흠칫 하더니 그녀를 무섭게 째려보고는 쾅 소리가 나도록 세게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체리는 씨익 웃으며 다시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30 분후. 말끔해진 원피스를 다시 갈아입은 체리는 경비 아저씨 몰래 빠져나가 방송국 근처의 열쇠집으로 향했다. " 아저씨. 이 열쇠 두벌만 복사해 주세요." " 응, 그랴.. 근데 두벌씩이나 엇다 쓸라고?" 체리는 사람좋게 생긴 아저씨에게 생긋 웃어보이며 말한다. " 다~~ 쓸 데가 있지요." 대승은 씩씩거리며 방송국으로 들어섰다. 오피스텔 옆의 공원에서 한참동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왠지 그녀는 처음부터 불길한 느낌이 드는 여자였다. 3 주 전이던가 방송국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었다. 그날 그는 집에 놔두고 온 테잎이 있어서 잠시 집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7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막 문이 닫히려는데 웬 여자가, " 기다려요!" 하고 소리치더니 닫히는 문을 다시 열어젖히고 올라탔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듯 젖어 있는 긴 머리와 풋풋한 샴푸냄새, 엷은 화장에 하얀 원피스까지. 아주 청순해 보이는 여자였다. 그러나 그를 보자마자 그녀의 표정은 청순가련에서 섹시 에로틱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그런 까만 눈동자가 뜨겁게 타오를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거기다 민망하게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 시선 때문에 당혹스러웠다. 그들은 그렇게 한 마디 말도 없이 1 층까지 내려왔다. 남자는 얼굴에 홍조를 띤 채 안절부절 못하면서, 그리고 여자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남자의 입술을 쳐다보면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목 뒤가 찌릿했다. 처음부터 그녀는 그가 경계하는 모든 조건을 갖춘 여자였다. 일단 너무도 예쁘고 섹시했다. 섹시퀸이라는 별명을 처음에 듣고서 정말 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별명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옷차림도 그에 걸맞게 항상 몸에 달라붙는 옷만 입고 다녀서 복도에서 마주치면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 지 난처한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또 그런 류의 여자는 남자관계도 분명 복잡할 게 틀림없었다. 결론은, '그녀는 자신의 이상형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녀보다 좀더 다소곳하고 얌전하며 수수한 여자를 원했다. 그리고 다른 남자들한테 뺏기지 않을까 걱정되는 매력적인 여자 보다는 좀더 순수하고 자신만을 사랑해줄 그런 여자. 그리고 마음이 따뜻하고 남을 배려해 주는 마음씨를 가진 여자를 원했다. 유체리라는 여자는 어느 한 군데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너무도 매력적인 나머지 잘못하면 빠져들기 쉬운 여자라서 그가 기피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 이미 그는 그녀의 매력에 빠져서 입술을 빼앗긴 건 물론이고 강간까지 당할 뻔 했다. 아니지. 그녀는 내가 당황한 틈을 타서 비겁하게 덤빈 것 뿐이지. 내가 그녀의 매력에 빠진 건 아니야. 그는 애써서 자신을 위로하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방송국 로비에서부터 자신을 본 사람들이 수군대거나 몰래 웃어대는 것을 보고도 너무 흥분한 탓에 별 생각 없이 사무실로 들어선 그는 바쁘게 돌아가던 사무실이 순식간에 그를 보고 조용해 지자 뭔가 이상하고도 불길한 느낌이 뇌리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 " 어머? 백 PD 님. 입술에 그게 뭐에요? 오늘 체리언니가 바르고 온 립스틱 색깔이랑 똑같네요?" 심부름을 온 듯한 작가실의 이미영 작가의 경악에 가까운 외침에 사무실은 뒤집어지고 말았다. 그는 불시에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짓더니 머리를 쥐어 뜯으며 화장실로 달렸다. 정말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여자였다. 한편 숨도 안 쉬고 작가실로 달려온 미영은 한참 대본 짜느라 신나게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던 작가들에게 소리질렀다. " 빅뉴스! 첼 언니가 벌써 일 저질렀어요!" 그 소리에 작가들은 하던 일도 놔두고 미영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 뭐? 무슨 일이야?" " 벌써 백 PD 님하고 키스한 것 같아요." 헉헉거리며 숨을 내쉬던 미영이 상기된 표정으로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떠들기 시작했다.


" 제가 좀전에 민희 언니 심부름으로 김 PD 님 만나러 갔었는데, 백 PD 님이 입술에 새빨간 립스틱을 덕지덕지 바른 채로 들어오시잖아요. 세상에... 얼마나 놀랬든지.." 작가들의 얼굴에는 제각각 놀라움과 감탄, 경악의 표정들이 떠올랐다. " 역시 유체리구나. 섹시퀸의 명성이 그냥 얻어진 게 아니었어. 이렇게 되면.. 내기에서 이길 확률이 커지는데?" 체리쪽에 돈을 걸었던 민희의 입이 귀에 걸린다. " 그렇게 벌써부터 좋아할 것 없어. 사실 확인도 아직 안해봤잖아." 정희가 신중하게 말하자 대번에 미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열을 내며 말했다. "

아니에요.

정희

언니.

오늘

아침에

첼언니가

바르고

립스틱

색깔이랑

똑같았대니까요? 제가 그거 색깔 이쁘다고 눈독 들였잖아요. 근데 첼 언니는 어디 갔어요? 궁금증 일으켜 놓고는.. " " 글세다.. 아까 점심때부터 안보이던데?" 그때 문제의 그녀가 아무일도 없다는 듯 콧노래를 부르며 작가실로 들어왔다. " 체리 너 어떻게 된 거야? 백 PD 님이랑 키스했다며? "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녀를 흘겨보는 정희의 말에 뜨끔해진 체리는 모여 앉아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열 쌍의 눈동자를 보며 당황했다. " 무... 슨 말이야?" 미영이 다시한번 아까 본 상황을 그대로 얘기했다. 미영의 얘기를 듣던 체리의 얼굴이 희극적으로 변하더니 쿡쿡거리다가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웃는다. 입술이 뻘개갖고 열내고 있을 백 PD 를 생각하니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정희는

신나게

웃어대는

체리의

표정에서

역시나

그녀가

사고를

쳤다는

알고

걱정스러웠다. 어려서부터 '오는 남자 안 막고 가는 남자 안 말린다.' 는 체리의 신조를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걱정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녀가 본 체리는 결코 헤픈 애는 아니었다. 단지 워낙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부모님을 둔 탓에 자신의 감정을 표현 하는 데 있어서 거침없고 솔직한 것 뿐이었다. 오전에 체리와 나눴던 대화가 떠오르자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흥미가 생겼다고 하더니 벌써 그 남자에게 다가간 것이다. 체리가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 남자의 자존심을 뭉개 버리면 별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듯 했다. " 야. 유체리. 웃지만 말고 어떻게 된 건지 얘기 좀 해봐." 정희가 정색을 하고 물었지만 체리는 새침하게 윙크해 보이며 단 한마디로 상황 설명을 끝내버렸다.


" 노코멘트!" 그러더니 불만 가득한 작가들의 아우성에는 아랑곳 않고 갑자기 또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핸드백을 뒤적거리다가 아예 책상위에 백속의 내용물을 다 쏟아놓고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드디어 원하는 걸 찾았는지 기쁜 미소를 지으며 미영에게 작고 동그란 화장품 케이스를 내민다. " 그사람 지금 어딨니?" 미영은 어리둥절한 듯 체리가 내민 통을 받아들었다. " 글세요? 아까 화장실로 달려가던데.. 아마 거기 있겠죠. 근데 이거 뭐에요? 샘플 받은 거에요?" " 음.. 그거 클린징 폼. 립스틱이 레끄바르에서 새로 나온 건데, 내가 워낙 털털하잖니. 맨날 립스틱 먹는다고.. 엄마가 강력한 걸로 사다 주신 거거든." 그제서야 미영이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 아~ 그거? 선전 봤어요. <물속에서도 지워지지 않아요. 강력한 파워 립스틱. 이젠 레끄바르와 상의하세요~> 이거죠?" 코맹맹이 소리로 선전을 따라하는 미영의 표정이 너무도 우스워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 맞어. 물로 씻어도 잘 안 지워지니까 백 PD 님한테 갖다 드리고 어떻게 지우는지도 가르쳐 드려." 10 분째 애꿎은 입술을 벅벅 문지르던 대승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어찌된 일인지 그 립스틱은 아무리 물로 씻어도 잘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번지기만 해서 입 주위가 벌개지고 말았다. 오늘따라 화장실에는 사람이 왜 그리도 많이 들락거리는지... 누가 들어올 때마다 손으로 입을 막으며 그를 이렇게 만든 체리를 저주했다. 여자들이란.. 도대체 왜 이런 걸 바르고 다니는 건지... 그는 벌건 입 주위를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남자들은 키스하면 이런 걸 어떻게 처리하는지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 자신처럼 칠칠맞게 립스틱을 묻히고 다니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는데.. 새삼 신기했다. 나중에 형한테 물어봐야 겠군. 대승에게는 형이 둘이나 있었는데 둘째형은 그와는 정 반대로 제비가 보고 울고 갈 만큼 대단한 카사노바였다. 그러다 다시한번 입술을 씻으려고 세면대 위로 고개를 숙이자마자 그를 부르는 여자 목소리에 대승은 다시 놀라서 손으로 입술을 막았다. 거울로 보니 화장실 입구에 이미영 작가가 애써 웃음을 참으며 서 있었다.


" 백 PD 님. 이거요. 체리언니가 갖다 드리래요." 체리가 갖다주랬다는 말에 상당히 의심스러웠지만 작고 동그란 통을 일단 받아들었다. " 그게요.. 클린징 폼이라고.. 화장품 지우는 거거든요. 속에 있는 거 조금 덜어서요. 비누처럼 거품 내서 씻으면 되요. 그 립스틱이 좀 특별한 제품이라 물에는 잘 안 지워지거든요." 친절하게 사용법까지 알려준 미영은 돌아서서 조그맣게 킥킥 웃으며 돌아갔다. 통의 뚜껑을 열어보니 하얀 연고같은 게 가득 담겨 있었다. 대승은 뭔가 이상한 게 아닌가 싶어 한참을 들여다 보다가 미영이 가르쳐 준 대로 손가락으로 내용물을 찍어 입술에 발랐다. 클린징 폼으로 입술을 씻으며 내일쯤에는 방송국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이 사건을 알게 되겠지.. 하고 생각하던 대승은 어느새 깨끗해진 입가를 보며 또 한번 감탄했다. 거 참 신기하구만... 내일까지 기다릴 것도 없었다. 화장실에서 나가자 마자 사람들이 그를 보고 웃어대는 통에 얼마나 당황스럽고 기분이 나빴는지 몰랐다. 체리에게 클린징 폼인지 뭔지를 되돌려 줘야 하는데 너무 창피해서 도저히 작가실에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결국 결심하고 클린징 폼을 움켜쥐고서 작가실로 향했다. 그가 들어가자 작가들은 저마다 책상 위로. 혹은 노트북으로 머리를 처박으면서도 곁눈질로 그를 보며 숨죽여 웃고 있었다. 그가 작가실에서 유일하게 그를 쳐다보지 않는 그 여자에게로 걸어가자 열 쌍의 눈동자가 동시에 그의 발걸음을 따라 갔다. " 흠... 흠.." 왠지 어색해진 그가 헛기침을 하자 체리가 고개를 들었다. " 풋~ " 체리도 역시 그를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린다. 대승은 그 순간 손바닥으로 그녀의 입술을 문질러 온 얼굴에 붉은 자욱을 남기고 싶을만큼 그녀가 얄미웠지만 여자란 보호해주고 보살펴주고 사랑해줘야 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간신히 참았다. 대신 그는 클린징 폼을 그녀의 책상에 탁 내려놓으며 그녀가 충분히 위압감을 느낄 수 있도록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 유체리씨.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하죠. 하지만 앞으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 조심해야 될 것 같습니다. 될 수 있으면 이제 방송국에서든. 밖에서든 마주치는 일 없었으면 합니다. 그럼."


아무리 건방진 그녀라도 이쯤 말하면 알아들었을 거라고 단정하고 씩씩하게 밖으로 나오는데 여우같은 그녀가 쪼르르 따라 나왔다. 그녀는 다짜고짜 그의 귀를 잡고는 자신의 입가로 잡아 당겼다. 정말 터프한 여자였다. 대승은 그녀의 따뜻하고 향기로운 입김이 귀에 닿자 온몸의 솜털까지 쭈뼛 서는 걸 느꼈다. 어디선가 들었는데 귀가 아주 예민한 성감대라고 하더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그녀가 뭐라고 귀에다가 대고 속살거리자 온 몸이 찌르르 한게 정말 묘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잠시. 그녀가 한 말이 신경을 타고 대뇌에 전달되자마자 그는 또 숨도 못 쉬게 놀라야 했다. 뭐? 저 여자가 뭐라는 거야? 내가 맘에 든다고? 날 갖고 싶다고? " 장.. 장난치지 마십시오." 한참을 씩씩대며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겨우 한마디 내뱉고 그녀를 노려본다. 체리는 농담 반.. 진담 반인 자신의 말에 변변히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당황해 하는 그의 모습이 정말 재미있었다. 가무잡잡한 얼굴이 또 홍조를 띄며 검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남자답게 잘 생긴 얼굴이 수줍음에 붉어진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일이었지만 부끄러워 얼굴 붉히는 소녀처럼 열꽃이 핀 얼굴은 왠지 너무도 귀엽고 신선해 보였다. 그래서 체리는 순간 아까부터 계속 머릿속을 맴돌던 말을 입밖으로 내어 말하고 말았다. " 백대승씨.. 정말 귀엽네요~ 혹시 별명 있어요? 없으면 내가 지어줄까요? 귀여운 남자.. 어때요?" 귀여운 남자 5 대승은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도저히 그의 머리로는 그 여우같은 여자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제길. 귀여운 남자라니. 그는 욕실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뜯어보며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생긴 걸로는 귀엽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데... 거울 속에는 약간은 험상궂어 보이기까지 한 남자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짙은 눈썹에 큼지막하고 우뚝한 코. 두툼한 입술을 가진 그야말로 남자답게 생긴 얼굴이다. 거기다 농구선수이셨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거의 185cm 에 달하는 큰 키를 가졌으며, 워낙 운동을 좋아해서 온몸이 군살하나 없이 탱탱했다. 어느 모로 보나 귀엽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 내가 참는다. 그런 여자. 상종 안하면 되지. 한참만에야 평정을 되찾은 그는 저녁을 먹기 위해 부엌으로 갔다.


그러나 그의 결심과는 달리 그는 거의 매일 체리와 마주쳐야 했고 그녀의 노골적인 유혹의 눈빛을 외면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출근해서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으면 으레 그녀가 나타나 " 좋은 아침이죠?" 하면서 놀라게 만들고, 식사 좀 할라치면, 건너 편 테이블에 앉아 윙크하고, 방송국 복도를 지나가고 있으면 갑자기 나타나 부딪히고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 운동하시나 봐요? 몸이 단단하네." 하면서 부끄럽지도 않은 듯 그의 가슴을 콕콕 찔러 본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그는 먼발치에서만 체리의 모습이 보이면 황급히 다른 길로 가든지 아니면 마주쳐도 고개를 돌려버리며 상대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아무리 고개를 돌리고 모르는 척 해도 그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이 뛰고 그녀의 체리향기만 맡아도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지는 게 점점 심각해 졌다.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원래 남자답고 시원시원한 성격에 여자를 대하는 데도 별 문제가 없는 남자였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여자들과 불필요한 육체적, 감정적 교류를 피해 온 것만 빼고는. 그런데 이상하게 체리만 만나면 소심해지는 것 같고, 말도 제대로 안나오는 것은 물론 난감한 신체적 반응이 자꾸만 그를 괴롭혔다. 대학 다닐 때는 그에게 반해 접근해 오던 여러 여학생들을 처리하는 데 별 힘도 들이지 않았었는데. 아무래도 여성 전문가인 형 백대협에게 상담을 한번 받아봐야 할 것 같았다. 체리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 남자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밥도 못 먹고 창밖만 내다보다가 그가 집을 나서면 따라 나가서 방송국 로비에서 우연인 듯이 마주치고 " 좋은 아침이죠?" 하고 기분좋게 인사하면 안그래도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떠서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가 하면, 점심 시간 때 불규칙적인 그의 식사시간을 기다리며 지루하게 있다가 마침내 그를 발견해서 반가움에 윙크했더니 무섭게 온 인상을 다 구기며 밥숟가락 놓아 버리고, 그가 나타나는 복도 모퉁이마다 숨었다가 또 우연인 듯이 부딪히고.. 정말로 우연히 그의 가슴이 단단한 걸 알게 되어 신기해서 몇 번 눌러봤더니 " 유체리씨는 할 일도 없습니까!" 하면서 버럭 소리지른다. 그렇게 몇 번 반응답지도 않은 반응을 보이고는 아예 그녀 모습만 봐도 홱 뒤돌아 가 버리고, 어쩌다 말좀 걸어볼려고 해도 고개를 싹 돌려버리며 못 들은 척 하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백대승이라는 남자.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가 조금만 관심을 보이고 한번 웃어주기만 해도 달려들던 다른 남자들과는 달랐다. 체리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스스로를 생각해 보아도 외모, 몸매, 성격 어느 것 하나 다른 여자들에 비해 처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녀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서도 몸을 사리며 피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체리는 그 남자를 보면 볼수록 호감이 느껴지고 가끔씩 방송국 복도에서 마주치면 신기하게도 설레이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사귀었던 남자들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믿음직스러운 구석도 있었고 아이처럼 순진해 보이기도 했다. 정말 그녀가 붙여준 별명처럼 귀여운 남자였다. 그런데 이 남자가 그녀의 생각만큼 쉽게 넘어오지 않아 짜증스러웠다. 이상태로는 도저히 안되겠는 걸.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해. 그의 냉담한 반응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쯤. 체리를 구원해주는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 체리야. 오늘 게시판에 가을 개편 소식 올라왔더라. 봤니? " 그날도 냉담한 백 PD 를 쫓아갔다가 헛물만 켠 체리가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데 정희가 와서 하는 말이다. " 아니. 벌써 발표 났어?" " 응. 게시판에도 있고. 개인별로 메일도 왔을거야. 확인해 보렴." 체리는 컴퓨터를 켰다. 새 메일... 음.. 이번엔 '주부시대'로 가게 되었군. 그럼 이제 아줌마 취향으로 바꾸어 써야 하나? 이번 PD 는 누굴까? '잠자는 왕자' 만 아니면 좋겠다. 아니. '공포의 소시지'도 안되지. ' 잠자는 왕자' 는 지난 번에 체리와 함께 일했던 황병헌 PD 로 유난히 초저녁 잠이 많은 그는 밤이었던 방송시간에 항상 졸아서 스텝들과 작가들까지 모두 잠이 든 PD 를 깨우느라 엄청 고생했었다. 거기다 '공포의 소시지' 는 '젊은 우리들' 의 PD 로 애들이 좋아하는 조그만 소시지 킬러라서 주위 사람들에게 괴로울 정도로 소시지를 사 날라야 하는 불편함을 끼치는 사람이다. 특히 방송시간처럼 긴장하고 있을 때는 꼭 소시지를 입에 물고 있어야 방송이 잘 되었으므로 작가들은 항상 방송 시간 전에 방송 대본과 함께 소시지까지 준비해야만 했다. 아무튼. 다행히도 '주부시대'의 PD 는 '잠자는 왕자' 도, '공포의 소시지' 도 아니었다. 체리의 노력에 감동했는지 하늘은 '귀여운 남자'를 PD 로 내려주었다. 대승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게시판에 붙어있는 자기 이름 아래에,

유체리라는

경악스런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렇게도 피해다니려고 애를 썼건만, 같은 프로를 맡게 되었으니 누구보다도


자주 부딪히게 되어 버린 거였다. 그는 사람이 별로 없는 휴게실로 갔다.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체리는 이 행운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다시한번 확인해 보려고 사내 게시판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게시판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몹시 괴로워 하는 백 PD 를 발견했다. 왜 저렇게 괴로워 하는 거지? 저 사람은 아줌마 취향이 아니라서 그런가?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그가 로비 구석진 곳에 있는 휴게실로 가는 게 보였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터벅터벅 걷는 폼이 세상 근심걱정 몽땅 짊어진 사람 같다. 무슨 걱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내가 가서 위로해 줘야겠군. 그리고 같은 프로를 맡았으니 뭐니뭐니해도 일단 서로 친숙해 지는 게 좋지 않겠어? 체리는 그런 깊은 생각을 가진 자신이 몹시 기특했다. 휴게실 까지 숨차게 쫓아온 체리가 밖에서 살짝이 들여다 보니 의자에 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는 모습이 무척 안쓰러워 보였다. 그래. 내 따뜻한 위로와 함께 약간의 즐거움도 선사해야 겠다. 체리는 블라우스 단추 두 개를 풀고 힘차게 문을 열고 휴게실로 들어갔다. 대승이 앞으로 이어질 고달플 나날들에 대해 한숨쉬며 걱정하고 있는데 휴게실 문이 벌컥 열렸다. 언제나 그렇듯이 상큼하고 활기차고 또 지나치게 열정적인 체리가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만면에 웃음을 띄고 들어온다. 또야? 그 망할 여자는 언제나 그가 있는 곳을 귀신같이 알아내서 나타난다. 어떻게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알고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 백 PD 님. 무슨 걱정 있으신가 봐요? 안색이 안 좋네요." 체리가 문에 기대서서 짐짓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은 그녀와의 거리가 그다지 가깝지 않다고 생각한 대승은 약간 마음을 놓았다. 이 안전거리를 지켜야 겠군. 여전히 그녀를 경계하며 대승은 조심스렇게 대꾸했다. "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서 일 보시죠." 그러나 그녀는 문에 풀이라도 붙여 논 듯 꼼짝도 않는다. " 새프로 때문에 걱정되시는 거죠?" 헉! 역시 족집게다.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꿰뚫어 보는 것만큼이나 그의 마음속도 꿰뚫어 보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의 놀란 표정을 자신의 말에 대한 긍정의 뜻으로 생각하고 체리는 계속 말을 이었다.


" 아줌마 취향의 프로라서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 거죠? 괜찮을 거에요. 요새 주부들이 얼마나 세련됐는데요. 젊은 감각으로 시도해 보는 것도 반응 좋을 것 같아요." 그녀의 이상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그녀가 다가왔다. 그녀가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때쯤 갑자기 그녀가 의자 다리에 걸려서 넘어졌다. 정확하게 그의 무릎 위로. " 앗!" 그녀는 운동신경도 대단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리도 정확하게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무릎위로 안기듯이 넘어진단 말인가. 그가 정신을 차려보니 눈앞이 깜깜했다. 뭐지? 굉장히 좋은 냄새가 났다. 꼭 어렸을 때 맡아 보았던 엄마 살냄새 같기도 하고, 아기용 파우더 '누크' 냄새같기도 하다. 그리고... 부드럽고 몽클몽클한 뭔가가 그의 얼굴을 누르고 있다. 작고 억눌린 듯한 신음소리에 화들짝 놀란 그는 얼굴을 들었다. 세상에... 그는 단추 풀린 체리의 블라우스 속에 보이는 작은 언덕 사이에 코를 박고 있었다! 온 몸의 피가 다 머리로 한꺼번에 몰려 드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녀의 가슴에 얼굴이 눌리게 되었는지 생각을 정리할 사이도 없이 그는 체리를 밀어냈다. 일단은 그녀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그러나 그가 미처 그녀를 일으켜세우기도 전에 그녀는 어디를 다쳤는지 아프다며 소리를 지른다. " 아얏! 아파요." 그녀의 표정을 보니 진짜로 아픈 표정이다. 아마도 아까 의자에 다리가 걸리면서 발이 삐었는지도 모른다. " 많이 아파요? 발목을 다친 겁니까?" 타고난 친절함 때문에 일단은 그의 목을 조이고 있는 그녀의 팔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그녀의 발목을 살펴보려 했다. 그런데 그가 잠시 그녀의 발목에 정신을 파는 동안에 그녀는 몇 번 그의 품에서 꼼지락 대더니 어느새 편하게 무릎 위로 걸터앉는다. 그것도 모른 채 그녀의 발목을 살펴보던 그는 별다르게 눈에 보이는 이상이 없자 고개를 들었다. " 그냥 근육이 놀라서 아픈 건가 봅니다. 삔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녀는 그의 말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뚫어지게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 대승은 그녀의 눈에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맑고 투명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왠지 빨려들 것만 같은... 아마도 그녀는 최면술까지 배운 모양이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오는데도 그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서로의 입술이 거의 닿을 만큼 가까이 오더니 분홍빛 혀를 내밀어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핥았다. 한번. 또 한번... 작은 새끼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그의 가슴 속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그의 아랫입술에 상당히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부드럽게 핥다가 하얀 이로 몇 번 깨물고는 입속으로 빨아들여 놓아주질 않는다. 첫키스와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정신도 못 차릴 정도로 거칠게 온 입안을 싹싹 훝더니 이번에는 황홀할 정도로 가볍고 부드럽다. 그녀의 키스에 넋놓고 있는 그의 정신과는 반대로, 그의 몸은 괴로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특히 그의 제 삼의 다리는 체리가 그의 무릎 위로 올라탔을 때부터 맹렬히 화를 터뜨리고 있어서 여간 난처한 게 아니었다. 거기다, 그녀가 아까부터 자꾸만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바람에 뻣뻣해져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이렇게 그를 괴롭히는 걸로도 모자랐는지 이제 이상한 신음소리까지 내고 있다.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에로틱해서 의자를 잡고 있던 그의 손에 관절이 하얘지도록 힘이 들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가 갑자기 그를 확 밀더니 발딱 일어섰다. 그녀는 휴게실 바깥을 슬쩍 보더니 허리를 굽혀 그에게 속삭였다. " 공공장소에서 하니까 더 스릴있죠?" 그랬다. 그들은 대담하게도 회사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는 휴게실에서 키스를 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일순간 사고 기능을 멈췄었던 모양이다. 또... 뺏겼군. 대승이 비로소 상황을 파악하고 영악한 체리에게 또 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막 화를 터뜨리려 하는 순간 누군가가 휴게실로 들어왔다. 눈에 익은 얼굴로 보아 연출이나 기술부 사람인 것 같았다. " 백 PD 님. 앞으로 잘해보죠. 그럼 다음주부터 보겠네요. 그때 뵙겠습니다." 체리는 새로 맡은 프로 때문에 미리 인사라도 하는 듯 천연덕스럽게 말하고는 깍듯하게 인사까지 하고 나간다. 체리의 깔끔한 뒷마무리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대승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까 체리가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넣어 새집처럼 흩뜨려 놓았고, 흥분해서 얼굴은 벌개진데다 바지 위로 불룩하게 솟아나온 애물단지 덕분에 누가 봐도 뭘 하고 있었는지 짐작이 가는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저 친구. 날 여자만 봐도 흥분하는 변태로 생각하겠군.


대승은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체리가 저쪽에서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걸음은 전혀 아픈 사람 같지 않다. 아예 연기자로 나서도 될 정도다. 그는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귀여운 남자 6 대승은 태어나서 그렇게 잘 넘어지는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바닥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어도 그녀는 잘도 넘어졌다. 그것도 꼭 그가 옆에 있을 때만. 자신 앞에서 넘어지는 여자를 못본 척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붙잡아주면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잠잠했던 가슴을 한바탕 휘저어 놓고는 생긋 웃으며 고맙다고 한다. 이쁘게 웃는 얼굴에 대고 성질을 낼 수가 없어서 어정쩡하게 넘기기는 하지만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그녀의 유혹이 싫지 않았다. 아니. 자신도 그런 유희를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녀는 경계 대상이었고 대승은 그녀에게 넘어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 들은 얘기로는 그녀는 10 명 남짓한 남자들을 사귀었으며 그들 모두 다 별 시답잖은 이유로 그녀에게 차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녀는 남자를 진지하게 사귀지 않고 좀 데리고 놀다가 싫증나면 차버리는 바람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난 그녀의 최근 장난감인 셈이지. 그는 그녀의 사랑방식이 싫었다. 너무도 쉽게 사랑을 하고 또 너무 쉽게 사랑을 버리는 것. 아직은 그가 그녀에게 빠지지 않아서 안달하는 것 같지만 그를 일단 차지하고 나면 금새 버릴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조그만 여우에게 마음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쉽게 그를 져버릴,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여자에게 속절없이 빠져들 수는 없었다. 그가 사랑할 여자는 그런 바람둥이가 아니라 한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는,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여자이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은 점점 그녀에게 빠져들어 갔다. 그의 처음 생각과는 달리 체리는 상당히 호감가는 여자였다. 같은 프로에서 일하기 때문에 그녀와 매일 만나게 되자 그전에는 몰랐던 사소한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우선 깍쟁이같고 새침떼기 같이 생긴 외모 이면에는 의외로 싹싹하고 인정 많은 여자가 숨어 있었다. 처음엔 그의 눈을 의식해서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잘 해주는 건가 하는 의심도 했었지만 이내 그녀의 성품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 주위에는 항상 웃음소리가 따라다녔으며 생긋 웃는 얼굴만으로도 주위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묘한 재주가 있었다.


그녀의 새침한 인상을 지우는 데는 그녀의 '수다'도 한 몫을 단단히 했다. 매일마다 보는 사람들에게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항상 누군가를 붙들고 재잘대는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그녀의 가장 큰 매력은 당돌함과 솔직함. 그리고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엉뚱함이었다. 그녀의 말로는 부모님의 우성 유전자와 자유로운 집안 분위기 덕이라는데 무슨 말을 하든지 솔직담백한 맛이 느껴졌으며, 도전적인 눈빛을 보면 경외감과 무조건적인 신뢰가 솟아났다. 물론 그를 유혹하려는 거짓말을 할 때는 생기던 신뢰도 사라지곤 했지만... 그러나 그 모습도 사실은 밉지 않았다. 사랑을 얻으려는 귀여운 몸짓이라고 생각하게 되니까. 며칠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점심 먹고 잠깐 은행에 갈 일이 있어 나갔었는데 우연히 그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테이블 앞에서 은행용지에 뭔가를 열심히 적어넣고 있었다. 방송국 안에서든, 밖에서든 유체리의 근처에 가면 꼭 난감한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호기심이 생겨 뒤로 다가가 어깨너머로 뭘 하는지 훔쳐보았다. 이진희? 같이 '주부시대'를 하고 있는 작가다. 용지를 보니 돈을 송금하려는 것 같았다. 그녀가 왜? 문득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뒤돌아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그 종이조각을 얼른 뒤로 감추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째려보았다. " 뭡니까.. 그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어보니 그녀는 예의 그 새침한 표정으로 상관 말라고 톡 쏘아 붙인다. " 이진희 작가한테 돈 보내는 겁니까? 뭐 빚진 거라도 있어요?" 이미 그녀가 뭘 한지 다 안다는 듯한 그의 말에 그녀가 눈에 띄게 당황한다. 그녀가 헛점을 보인 틈을 타서 그는 얼른 그녀가 쥐고 있는 종이를 빼앗아 읽어보았다. 200 만원. 이진희 작가에게 이백만원을 송금하는 용지였다. 그런데 보내는 사람 이름은 그녀가 아니었다. 박혜성? 이건 또 뭐야? 그가 무슨 일인지 묻는 시선을 보내자 그녀는 한숨을 포옥 내쉬며 말했다. " 진희 씨 어머님이 아프셔요. 자궁암이라는데, 곧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해야 한대요. 그런데 진희 씨네 형편이 좋은 것도 아니고.. 진희 씨 혼자 돈 버는데 동생이 셋이나 있거든요. 수술비는 친척들이랑 친구들한테 도움을 받아서 어찌어찌 마련한 모양인데요,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 써서... 앞으로 병원비랑 생활비가 막막한가봐요. 제 능력이 이거밖에 안 되지만 도와주고 싶어서요." 그녀는 이진희작가가 부담스러워 할까봐 그냥 모르는 사람의 이름으로 보내는 거였다. 대승은 눈물이 글썽해져서 사정 이야기를 들려주는 체리가 너무도 아름답게 보였다. 알면 알수록 놀라움을 주는 여자였다. 그 돈은 지난 일년간 적금 들었던 돈이라고 했다. 유리지갑을 가진 월급쟁이의 뻔한 월급으로 그녀 또한 그리 풍족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닐텐데 그녀의 입장에서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닌 액수를 선뜻 내놓는다는 것이 그에게 감동을 주었다. " 이거 비밀이에요. 알았죠?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돼요. 어서 약속해요. 지금 약속 안하면 여기서 키스해버릴 거에요." 역시 유체리다운 협박이었다. 그가 그녀에게서 가장 두려워하는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난번 휴게실 키스 사건 이후로 그는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체리가 가까이 가기만 해도 전전긍긍... 어찌할 바를 몰랐다. " 그래요. 약속하죠.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어요." 조건이 있다는 말에 그녀는 다시 긴장한다. 앞으로 따라다니지 말라거나 불필요한 신체적 접근을 금지한다는 그런 류의 조건이 아닌가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 이진희 씨한테 송금할 때 내 돈까지 같이 송금해 주는 겁니다. 체리씨 돈과 합쳐서요. 물론 내 돈에 대해서도 비밀 지켜줘야 하는 건 알고 있겠죠?"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그녀의 입매가 부드러워지면서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 그의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잠시동안의 회상에서 깨어난 그는 이진희 작가와 아무일도 없다는 듯 수다를 떨고 있는 체리를 보았다. 알수 없는 여자다... 대승은 생각을 접고 방송국을 나왔다. 집에 도착해서 보니 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여기 저기 벗어놓은 옷으로 난장판이 되어 있는 집 한 가운데서 웃통을 벗어부친 채 팝콘을 먹으며 TV 를 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 웬일이야?" 귀찮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을 밷는 대승이었지만 눈은 반가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 우리 귀여운 막내 보러 왔지. 어디 얼굴좀 보자."


대승을 보자마자 얼굴이 환해지며 반색을 하는 남자. 그의 형 스왈로우 백(swallow Pack) 이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미남으로 대승이 생각하기에도 신이 창조한 가장 완벽한 작품이었다. 바람둥이 기질만 없으면 완벽하겠지... 대협은 28 세로 대승과는 일년 터울이었다. 그만큼 어려서부터 많이 싸우기도 했고 말썽도 부렸지만 누구보다도 가깝고 서로 아껴주는 형제간이었다. " 그 귀엽다는 말 상당히 거슬려. 귀여운의 귀 자도 입밖에 내지 말라구." 대승이 인상쓰며 말하자 대협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대승의 배를 한번 치더니 이내 그를 꽉 끌어안았다. " 여긴 웬일이야? " 잠시 후 대승이 다시 한번 묻자 대협은 특유의 능글능글한 웃음을 짓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집안 한쪽 구석에 있는 커다란 여행가방을 발견한 대승이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올리자 대협의 웃음이 더 커졌다. " 니가 너무 그리워서 말야... 당분간만 같이 지내자구." " 뭐? 형이 그런말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는데... 솔직이 말해봐. 집에 무슨 일 있어?" 대승은 형이 앉아있던 소파에 앉으며 그가 먹던 팝콘을 집어들었다. 여자친구가 그리워서 여자친구 집에 갔다면 이해가 되지만 동생이 보고 싶다고 짐까지 싸갖고 올 인간이 아니었다. 대협은 난처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사실을 털어놓는다. " 사실은 집에서 쫓겨났다." 그럼 그렇지. 결국은 쫓겨났군. " 하필이면 여행가셨던 분들이 하루 빨리 올 게 뭐냐. 미정이하고 한참 행위예술을 하던 참에 들이닥치셔갖구. 아버지한테 농구공으로 몇 대 얻어맞고 쫓겨났다." 충분히 형이 벌일만한 일이다. 사랑에 관해 자신과 같은 신념을 갖고 계신 아버지의 눈에 형의 애정행각이 얼마나 난잡하게 보였을 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 미정이라면... 최근의 그녀인가? " " 아니, 최근의 그녀였지. 오늘 아침에 아버지한테 여성의 정조에 관해 일장 연설을 듣고 나더니 나한테 치를 떨면서 다시는 아는 척 하지 말라고 하더라." 대승은 박장대소를 하고 말았다. 그의 어머니는 항상 대협과 대승을 보고는 같은 배에서 난 자식이 어떻게 그렇게 다른지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었다. 어렸을 적부터 대승은 여자든 남자든 친절하게 대했으며 여자한테는 별 관심이 없었던 반면, 대협은 또래의 여자애들이건, 누나뻘이던, 동생뻘이던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괴롭혔으며 좀더 자라서는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한다는 듯 다양한 여자를 경험했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지금도 한달이 멀다 하고 여자를 갈아치우고 있었다. 대승은 못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젓다가 다시 정색을 하고 형에게 따져 물었다. " 우리 집에 침대 하나밖에 없는 거 알면서 왜 여기로 왔어? 큰형네 집이나, 아니면 형도 돈 많잖아." 대협은 이자식 미쳤나? 하는 눈길로 대승을 바라보며 열변을 토한다. " 임마. 그돈이 어떤 돈인데.. 여행 가야지. 너 내꿈이 남자 한비야인거 모르냐? 그리고 나 직장도 그만뒀어." 그랬다. 그의 형은 어릴적부터 세계여행을 하는 게 꿈이었다. 생긴 거랑은 다르게 남달리 모험정신과 도전정신이 뛰어났고 또

여행에

관한

열정도 대단했다. 중학교

때부터

무전여행으로 우리나라 곳곳을 다 돌아다녔고 세계 여행을 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직장에서 돈도 악착같이 모았다. 그런데 직장을 그만뒀다니? " 직장은 왜? 돈 모아야 한다며." " 흠..흠.. 한비야는 삼십대 중반에 직장을 때려치우고 여행을 떠났지. 그 여자는 겨우 삼년 돈 벌어서 육년동안 65 개국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했다구. 나도 삼년이면 충분해. 이제 나도 여행을 떠나야지." 대승은 혀를 내둘렀다. 겁도 없이 직장을 관두다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과감한 결단을 내린 형이 존경스러웠다. " 그럼 언제까지 있을 건데?" " 음.. 한 3-4 개월? 비자 나올때까지만 있으마." 어쩔 수 없었다. 침대 쓸 일 때문에 조금은 불편하겠지만 혼자 지낼 때처럼 외롭지는 않을 것 같았다. 체리는 최근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새로 맡은 '주부시대'의 일도 잘 되었고 백 PD 는 아직까지 반항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희망이 보이는 듯 했기 때문이다. '주부시대'의 방송대본을 쓰는 일은 매우 수월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일일이 적어주지 않고 전체적인 주제와 대략적인 내용만 알려주면 MC 들이 다 알아서 진행했다. 그전에 '밤의 이야기'를 할 때는 인사말 토씨 하나까지 일일이 신경써야 했기 때문에 일이 굉장히 많았지만 이번 프로에서는 베테랑급 MC 들을 만나서 훨씬 편하게 일하고 있었다. 단지 기획회의가 좀 많고 프로의 인기 때문인지 엄청나게 배달되어 오는 편지와 PC 통신, 인터넷


홈페이지 사연을 하나하나 다 읽어보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녀는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해 나갔다. 그리고 백 PD 를 매일마다 볼 수 있다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같이 몇번 방송을 해 보니 백대승이라는 남자가 여러 가지로 마음에 들었다. PD 들 중에는 '공포의 소시지' 나, '잠자는 왕자' 와 같은 별로 달갑지 않은 특이한 버릇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원만한 성격을 가진 그녀로서도 상당히 힘들게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백 PD 는 그런 고약한 버릇이나 징크스 같은 건 없는 것 같았다. 일처리하는 것도 깔끔하고, 회의 시간에도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재치를 바탕으로 생산적인 회의를 진행했다. 방송에 임해서는 진지하고 신중한 자세로 일관하는 모습도 참 보기 좋았다. 그리고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나 할 말이 있을 때는 서슴없이 하고, 조리있고 합리적인 말솜씨도 눈길을 끌었다. 그를 겪어보면 겪어볼수록 그녀의 이상형에 잘 들어맞는 것 같았다.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열정적이고, 합리적이고 공평한 생각을 갖고 있으며 침착했다. 거기다 여자를 대하는 것도 누구든 가리지 않고 정중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대했다. 가끔 그녀에게는 무례하게 소리지를 때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그럴 때는 뭔가 그녀가 그럴만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였다. 그리고 그녀를 대하는 것에 있어서도 순진한 건지. 바보같은 건지, 그녀의 유혹에 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좀 답답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그녀를 피하지는 않았다. 일부러 그가 옆에 있으면 넘어지는 척 해서 그의 품에 안기기도 하고 은근 슬쩍 그의 가슴이나 어깨, 팔 등을 만져보기도 하지만 그가 별로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역시 백 PD 도 남자라 스킨쉽을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와 신체적인 접촉을 할 때마다 은연중에 붉어지는 볼이라든지, 어울리지 않게 쭈뼛거리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더군다나

얼마

전에는

어머니의

병환으로

힘들어하는

이진희

작가를

도와주는데 돈을 보태 주기도 했다. 그 사람도 따뜻한 가슴을 가진 남자라 생각하니 더더욱 갖고 싶은 마음이 뭉클 솟아올랐다. 그런데 그녀가 아무리 자극을 해도 수동적인 반응만 보일 뿐, 그녀에게 사귀자던지, 좋아한다든지 하는 식의 적극적인 반응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존심 때문에 차마 먼저 좋아한다는 고백은 못하겠고, 사귀자는 말도 입이 떨어지지 않아 못하고 있었다. 그쯤 온몸으로 눈치를 줬으면 알아챌 만도 하건만 둔하기만 한 백 PD 는 전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것 같지 않았다.


그걸 보니, 이제 좀더 강도있는 접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키스나 가벼운 접촉 정도로는 그를 확실히 몰아붙일 수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더 친밀하고, 자극적이고, 대담한 방법이 필요했다. 체리는 최근의 프로젝트인 '귀여운 남자 차지하기' 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지 골똘히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니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황홀하게 났다. 체리는 폐 속 가득히 맛있는 향기를 채우고 만족스럽게 입맛을 다셨다. 집에 누군가 있으면 이렇게 좋단 말야. 흐뭇하게

미소지으며

거실을

보니

동생

별이가

뒹굴거리며

비디오를

보고

있다.

일주일전부터 별이는 그녀의 오피스텔에 같이 머물고 있었다. 결혼 26 주년을 기념해서 부모님께서는 한달 예정으로 제주도에 여행을 가셨다.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 별이는 아직 고 2 라서 부모님께서는 혼자 지내게 하기엔 마음이 안 놓이셨는지 체리에게 맡기고 가신 것이다. 체리에게 동색 식사도 꼬박꼬박 챙겨주고 아침에 학교 늦지 않게 깨워줘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하고 가셨으나 일주일이 지난 지금. 체리는 꼼꼼한 동생의 보살핌으로 아침에 늦잠도 안 자고 식사도 꼬박꼬박 하고 있었다. 정말 착하고 가정적인 동생이었다. 아침에 그녀를 깨워주는 것은 물론이고 기막힌 요리솜씨로 그녀의 혀와 위장을 즐겁게 해 주었으며 빨래, 청소를 비롯한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해 줘서 온 집안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별이의 취미는 요리하기 였다. 체리는 사내애가 그게 뭐냐고 핀잔을 주지만 별이는 오히려 이름난 요리사는 남자가 더 많다며 당차게 대꾸한다. 아무튼 그 취미덕에 체리는 매일 새로운 메뉴를 포식하고 있었다. 보충수업, 자율학습이 폐지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 덕에 별이는 자유시간이 꽤 있었고 공부보다는 요리하는데 더 시간을 많이 보냈다. 체리는 샤워부터 하고 거실로 다시 나왔다. 동생은 여전히 비디오 보느라 정신이 없는지 TV 화면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말한다. " 저녁밥 차려 놨으니까 먹구 그릇 설거지 통에 담아 놔. 이따 내가 설거지 할 거니까." 짜식, 기특하기는. 체리는 부엌 쪽으로 가다가 흘깃 동생을 바라본다. " 유별! 토요일인데 집에서 비디오나 보고 있니? 친구들이랑 영화관이라도 가지 그래?" 별이는 잠깐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가 싶더니 다시 TV 화면에 눈을 고정시킨다. " 돈이 튀냐?" " 뭐? 돈이 튀어? 그게 무슨 말이야?"


의아한 표정의 체리가 묻자 별이는 어이없는 얼굴로 그녀를 보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 참내.. 누나 라디오 방송작가 맞아? 어떻게 그 유명한 표현을 모를 수가 있어? <전파는 웃음을 싣고>에서 얼마전에 방송된 건데." " 내가 그걸 어떻게 아니? 방송작가라고 하루종일 라디오만 듣고 사는 줄 알아? 얼마나 바쁜 일이 많은데." 넌 맨날 듣는지 몰라도 난 아니라구. 별이는 요리하기 외에도 한 가지 더 취미를 갖고 있었는데 바로 라디오 듣고 방송국에 편지 보내서 상품타는 거였다. 지금까지 탄 상품만 해도 각종 의류, 문화 상품권 여러 장에 도서 상품권, 케잌이나 꽃배달 서비스. 그리고 오디오까지 받은 적이 있었다. 유전적인 영향인지 별이도 글을 꽤 잘 쓰는 편이었고 상상력도 뛰어나 별 희안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서 방송국에 편지를 보낸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방송을 듣는 것은 기본이다. 별이는 뿌루퉁한 체리의 얼굴을 보더니 차근차근 설명을 해 준다. " 누나 튄다는 말 알지? 물방울이 튄다. 이런 거. 같은 의미로 <돈이 튀냐?>는 돈이 물처럼 튀어 넘칠 정도로 많냐는 뜻이라고 생각하면 돼. 인제 알겠어? 어휴~ 세대차이 나서 원." 체리는 기가 막혔다. 겨우 일곱 살 차이난다고 세대차이 운운하다니. " 얘가? 어디서 이상한 말만 줏어듣고 와서 세대차이라니!" 괜히 심술이 난 체리가 별이의 머리를 한방 쥐어박는다. 그리고는 TV 화면을 잠깐 보니 남자가 여자로 변하는 모습이 보였다. " 비디오도 이렇게 유치한 것만 빌려오니? 누가 어린애 아니랄까봐... 좀 수준 있는 걸로 봐라." 체리가 무시하는 투로 말하자 대번에 별이가 대꾸한다. " 아니.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가 얼마나 수준높고 재미있는데. 누나도 봐봐." 체리는 코웃음치며 수저를 들고 밥을 한숟갈 떴다. 그때였다. 체리는 식탁으로 고개를 숙이다가 다시 고개를 홱 쳐들었다. 비디오의 어떤 장면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다. " 별이야. 잠깐 비디오좀 돌려봐." 체리는 후다닥 TV 앞으로 달려갔다. 영문도 모르는 별이는 갑자기 호들갑을 떠는 체리를 한번 이상하게 쳐다 보더니 순순히 비디오를 앞으로 돌렸다. " 됐어. 그만."


체리는 비디오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앞 뒤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남자가 이쁘고 섹시한 여자로 변해서 그 여자가 다른 남자를 유혹하는 장면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유혹하는 장면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에 더 가깝지만... 웬 사무실에 두 남자가 탁자 맞은편 자리에 마주보고 앉아있고 그 여자가 두 남자 사이에 않아 있다. 여자가 새로운 향수 제품을 두 남자에게 선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남자가 향수냄새를 맡고 별로 신통치 않은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갑자기 탁자 아래에서 그 여자가 다리를 쭉 뻗어 그 남자 다리 사이로 발을 쑥 밀어넣자 남자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향수 냄새가 너무 좋다고 감탄했다. 그러자 반대편에 있는 남자도 향수 냄새를 맡아 보지만 별로 좋은 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녀는 다른 쪽 발로 똑같은 일을 되풀이했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 와~ 저 여자 대단하다. 양쪽으로 동시에 하다니.." 체리가 감탄 했으나 별이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 어렸을 때 무용했었나 보지 뭐." 체리는 회의실에 있는 긴 탁자를 생각하며 히죽 웃었다. 그 탁자에는 긴 테이블 보도 덮여 있어 아랫쪽이 잘 보이지 않았다. 체리가 방금 본 장면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생각하며 계속 히죽거리고 있는데 별이가 그녀를 탁 쳤다. " 누나. 지금 이상한 생각 하지?" " 뭐? 내... 내가 뭘?" " 있잖아... 그.. 야시꾸리한 상상.. 하는 거지?" 속마음을 들킨 그녀는 잠시 뜨끔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했다. 조그만 게 눈치는 빨라 갖구... 체리는 별이를 살짝 흘겨보고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식탁으로 가서 꾸역꾸역 밥을 먹으며 머릿속으로는 '귀여운 남자 자극하기'를 언제 하면 가장 좋을지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귀여운 남자 월요일 아침, 체리는 작가실에 잠시 들렀다가 가방만 던져 두고는 회의실로 달려갔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체리가 기억하는 대로 회의실 탁자에는 푸른색의 긴 테이블 보가 덮여 있어 탁자 밑은 고개를 많이 숙이지 않는 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회의실을 휘휘 둘러보더니 탁자 위로 척 하니 다리를 올려놓았다. 탁자는 직사각형 모양으로 가로는 폭이 넓고 세로는 좁았다. 체리가 다리를 올려놓은 쪽은 폭이 좁은 쪽이었는데 신기하게도 탁자 폭과 그녀의 다리 길이가 딱 맞았다. 예스!


이번에는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제 회의시간만 되면... 체리는 흥분해서 자신에게 덤벼드는 백 PD 의 모습을 상상하며 실실 웃었다. 대승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오전 방송내내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자신을 쳐다보며 실실 웃던 체리 때문이었다. 분명 뭔가가 있어... 남자의 날카로운 육감으로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난처한 일이 생길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유체리와 관련된 이상은 그가 아무리 피해가고 싶어도 항상 당하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며칠간 체리의 육탄 공격이 멈춘 것이 다행스럽긴 했지만 잠시 동안의 공백이 더 강도가 센 공격의 준비단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대승은 눈에 띄게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녁때가 다 되도록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퇴근 전, 기획회의 시간이 되자 대승은 한껏 느긋해져 있었다. 적어도 오늘은 무사히 넘어가겠군. 그는 느지막하게 회의실로 들어섰다. 스텝진들은 거의 와 있었고 물론 체리도 와 있었다. 그는 늘 그랬듯이 체리의 맞은 편 자리로 앉았다. 처음에 멋모르고 그녀 옆에 앉았다가 된통 당한 후로는 결코 그녀 옆으로는 가지 않았다. 첫 회의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했다. 그날 체리는 어깨까지 파인 탑에 허벅지 위로 10 센티도 넘게 올라온 초 미니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자신의 옆에 앉는 그녀를 이렇다할 핑계가 없어 밀어내지 못하고 그냥 회의를 진행했으나 바로 옆에 딱 붙어 있는 그녀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눈만 살짝 돌려도 옷 사이로 동그랗고 오똑 솟은 가슴이 보였으며 짧은 치마가 의자에 앉으니 더 짧아져 뽀얀 허벅지가 다 보이는데 다리까지 꼬고 앉아서 한쪽 다리로 그의 다리를 툭툭 건드려서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 후로는 그녀와 마주보고 앉든지 아니면 멀리 떨어져서 앉았다. 오늘도 그녀와는 마주앉아서 회의를 시작했다. 다음달에 있을 지방 공개방송에 관한 회의였다. 매년 '주부시대' 에서는 주부들의 생활을 담은 편지를 그때그때 특정 주제를 정해 편지쇼 형식으로 공개방송을 해 왔었다. 전국투어로 지난 해 대구에 이어 올해는 부산으로 정해졌다. " 이번 공개방송 때 방송될 편지 선별작업은 다 끝났습니까?" 대승은 계획서를 검토하며 체리에게 묻는다. " 네. 지난주에 이미 다 해놨습니다. 방송될 부분도 다 정리됐구요." " 수고했어요. 그럼 이번 공개방송에서 새로 만들 코너에 관해서..."


회의는 진지하고도 조용한 분위기에서 착착 진행되었다. 체리는 회의에 집중하는 척 하면서도 은밀히 백 PD 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오전의 경계하던 태세에서 벗어나 한결 여유롭고 평화스러운 모습이었다. 체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일이 잘 되려고 그러는지 백 PD 는 오늘 평소에 즐겨입던 청바지가 아닌 곤색 면바지를 입고 왔다. 청바지였다면 뻣뻣한 천이라 제대로 느낄 수 없었겠지만 면바지라면...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질 것이었다. 체리는 분위기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행동을 개시했다. 한참 MC 중 한명인 김성현 MC 가 부산의 지역적 정서를 반영할 수 있는 쇼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이었다. 원체 말이 많은 사람이라 한 20-30 분은 맘놓고 있어도 될 터였다. 체리는 천천히 한쪽 발의 구두를 벗고 다리를 들어올렸다. 의자에 부딪힐까봐 무릎을 살짝 굽히고 조금씩 다리를 들었다. 그의 다리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더듬더듬 발을 옮기다 보니 한순간 딱딱한 물체에 발가락이 닿았다. 툭 튀어나온 걸 보니 한쪽 무릎인 것 같았다. 백 PD 의 얼굴에 한순간 묘한 표정이 스쳐가더니 다시 잠잠해졌다. 체리는 발가락을 무릎 안쪽으로 미끄러 뜨리며 다리를 조금씩 폈다. 바지에 감싸인 그의 허벅지는 따뜻하고 , 단단했으며 힘이 느껴졌다. 그녀의 발이 그의 다리 안쪽으로 들어가 가운데

부분으로 점점 가까이

가자

백 PD

눈이

동그래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발끝으로부터 전해져오는 열기에 벌써부터 가슴이 따끔거렸다. 대승은 아무 생각 없이 김성현 MC 의 말을 어디서 끊어야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릎에 뭔가가 닿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놀랐지만 이내 누군가가 다리를 잘못 뻗어 부딪힌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아까의 생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곧 무릎에 닿아있던 뭔가가 그의 다리를 타고 허벅지 안쪽으로 천천히 미끄러지기 시작하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생경한 감촉이었다. 머리끝이 쭈뼛 섰다. 척추를 타고 흐르는 찌릿찌릿한 느낌에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체리는 계속해서 다리를 뻗으며 고지를 향해 발가락을 움직여갔다. 그녀가 다리를 거의 다 펼 무렵, 드디어 최종 목적지안 정자통로 근처의 정자동네에 발끝이 닿았다. 오른쪽에 하나... 왼쪽에 하나... 동네가 두개 있는 걸로 보아서 제대로 찾아온 듯 하다. 음... 완벽해! 그녀는 원하는 위치까지 정확하게 발을 뻗은 거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발목의 양쪽 복사뼈를 비롯해서 다리 전체에 약간의 통증을 느껴야 했다. " 헉!"


회의실의 모든 시선이 백 PD 에게로 집중되었다. 김성현 MC 가 얘기하는 도중 기묘한 소리를 지르며 경직되어 버린 백 PD 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에도 변명 한 마디 못하고 꿀먹은 벙어리마냥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는 너무도 놀라서 기절할 지경이었다. 역시, 오전에 그녀가 실실 웃으며 바라볼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그녀와는 가장 먼 곳에 앉았어야 했는데... 그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아까부터 다리에 느껴지던 이상한 느낌이 점점 몸 가운데로 가까이 오자 당황해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묘한 곳을 더듬는 느낌이 들어 펄쩍 뛸 뻔한 것이었다. 당황스런 마음에 다리를 꽉 오므렸는데 그러고 나니 그것이 누군가의 다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바로 맞은편에 앉아서 <난 아네요~>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앙큼한 여자라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정말 괴씸한 그녀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싶을 만큼 화가 났으나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까봐 아무말도 못하고 애써 아무것도 아닌 척 태연한 척 했다. " 백 PD 님, 왜 그러세요?" 그가 아무말도 못하고 있자 옆에 앉은 이진희작가가 물어본다. 대승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당황해 하며 헛웃음을 웃었다. " 하... 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시 머리가... 띵 해서요." 의아한 표정으로 백 PD 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다시 김성현 MC 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다시 진지해진 회의실의 분위기와는 정 반대로 대승의 머리속에는 세계 제 3 차대전이 터진 것 같았다. 다리를 오므려 그녀의 다리를 꼼짝 못하게 잡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발끝은 자신의 묘한 곳에 닿아 있었고 그곳은 머리와는 달리 이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어서 벌써부터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얄미운 그녀는 그가 도끼눈을 뜨고 노려봤으나 <왜 그러세요?> 하는 표정으로 바라볼 뿐 꼼짝도 하지 않는다. 체리도 겉으로는 순진한 척, 태연하게 있었으나 사실 흥분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대승이 화가 나 째려보고 있으면서도 속수무책으로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걸 보자 매우 즐거웠다. 그는 아직 당황해서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리를 꽉 오므리고 있으면 그녀가 아무짓도 못할 줄로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그녀를 더 편하게 만들어 주는 행동이었다. 나야 뭐.. 붙잡아 주면 다리도 안 아프고 좋지... 체리는 속으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다리를 잡혀 있는 상태에서 발가락을 꼬무락거리기 시작했다. 헉!


대승은 간신히 손으로 입을 막고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를 삼켰다. 젠장! 그녀가 발가락을 꼼지락대고 있었다. 평소에는 몸 중에서 가장 부드럽고 말랑말랑했던 부분이 지금은 어느 곳의 근육보다 더 단단해졌다. 그의 가슴이 요란하게 펌프질을 해 대고 있었으며 머릿속이 텅 비었는지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그녀를 바라봤으나 아예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계획서에 코를 박고 있다. 체리는 스릴과 짜릿한 기분을 마음껏 만끽하고 있었다. 그녀가 발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그의 얼굴에 스쳐간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웃음이 터질 뻔 했으나 간신히 참은 그녀는 계속해서 발가락을 움직이며 에로틱한 기분에 잠겨들었다. 백 PD 의 정자통로는 역시 듣던대로 강력한 것 같았다. 조금 자극했을 뿐인데도 팽창되서 그녀의 발끝을 밀어대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면 웃음이 터질까봐 일부러 계획서에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대승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등뒤로는 식은땀이 주르르 흐른다. 온 몸에 열이 나서 그대로 있다가는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는 계획서에 끄적끄적 낙서를 하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녀의 고개를 홱 들어올려서 자신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으나 그녀는 좀체로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계속 발가락만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굉장한 기술을 갖고 있었다. 발끝을 미묘하게 움직여 그의 통로 한쪽 끝에서 다른쪽 끝까지 구석구석 더듬었으며 가장 민감한 부위인 버섯부근에는 특히 오랜동안 감질나게 쓰다듬어 거의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그를 몰아갔다. 그는 이를 앙다물며 참았지만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고 연필을 쥐고 있는 손은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체리는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귀여운 남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해 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거의 폭발 직전처럼 보인다. 얼굴은 시뻘개진 채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 촉촉한 물기가 보였다. 힘든가 보네...? 한순간 이쯤해서 그만 봐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하는 김에 좀더 확실히 밀어붙여야 할 것 같아서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실 힘든 건 백 PD 만이 아니었다. 체리 역시 당장이라도 다리를 빼고 그에게 달려들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들만 없었어도 진작에 그랬을 것이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몸이 젖어들고 있었다.


대승은 자꾸만 나오려는 신음소리를 삼키며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그러나 문득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 심장이 땅으로 곤두박질 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꿀꺽 침을 삼키더니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이고 있었다. 그녀의 자그마한 혀가 그의 입술에서 움직였었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 뚝!!" 다시 회의실 안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저도 모르는 새에 손에 너무 힘을 주었는지 그의 손에 들려져 있던 연필이 부러져 있었다. 모두들 아연실색 하여 대승을 바라본다. 체리도 놀랐는지 그를 괴롭히던 발놀림을 멈추었다. " 어머, 백 PD 님 정말 많이 아프신가 보네.. 열 있으신가봐요. 얼굴도 빨갛게 열 오르고 식은땀까지 흘리잖아요." 이진희 작가가 그의 이마에 손을 짚어보고는 놀라서 말하자 모두들 걱정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았다. " 아무래도.. 몸.. 몸살기가 있나 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나머지는 내일 이어서 하도록 하고, 회의 마칩시다." 그가 꺼져가는 목소리고 겨우 말을 마치자 모두들 끄덕이며 일어났다. 사람들이 못내 걱정스러운지 그에게 병원에 가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데려다 주겠다, 하면서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는 끝내 정중하게 사양하고 모두를 내보냈다. 물론 체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다. 그가 아직도 그녀의 다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회의실에 정적이 흘렀다. 대승과 체리는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사람들이 나간 후로도 잠시 있었다. 대승은 아직도 쇼크상태여서 움직일 수가 없었고 체리는 대승이 다리를 놓아주지 않아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녀는 불편한 듯이 꿈틀댔다. " 가만히 좀 있어요!" 그녀가

움직이는

바람에

자극을

받은

대승이

호통을

치자

체리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움직이던 걸 멈췄다. " 불편하면 저 놓아 주면 되잖아요. 대승씨가 다리를 벌려야..."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신이 든 대승이 다리를 쫙 벌리자 그녀의 다리가 힘없이 떨어졌다. 그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벌떡 일어나더니 회의실 안을 왔다갔다하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아마도 화가 단단히 났나보다. 체리는 조용히 일어서서 탁자를 돌아 그가 서성이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가 체리를 노려보았다. 욕망과.. 분노가 섞어져 있는 눈빛이다. 그러나 욕망보다는 분노가 더 많이 보여서 체리는 당황하고 말았다.


어... 이게... 아닌데...? 비디오에서는 그렇게 당한 남자가 여자 발에 키스하면서 달려드는데 그런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원수 쳐다보듯이 그녀를 쳐다보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키스 정도는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 유체리씨, 나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도대체 왜 이런 말도 안되는 짓을 하는 거냐구요!" 그는 참고 참고 또 참았지만 거칠게 말을 내밷었다. 그녀는 움찔 놀란 것 같았다. " 기분... 나쁘셨나요?" 그녀는 그가 불같이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회의 시간이라 당황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자신의 행동이 그닥 기분 나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까닭이다. " 기분 좋으면 이런 말 하지도 않겠죠. 유체리씨는 왜 자꾸 내게 이상한 방법으로 접근하는 겁니까?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군요!" 체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상한 방법으로 접근한다니? 내가 무슨 스토커라도 되나? 자신을 그런 이상한 여자로 밀어붙이는 게 맘에 들지 않았지만 더 이상 오해하지 않도록 진심을 이야기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먼저 고백을 하려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원래 솔직하고 직선적인 체리이지만 남자한테 좋아한다고 먼저 말해본 적은 없었다. 그녀가 사귀었던 남자들이 거의 더 적극적이었기도 했지만 정말 그녀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 더 큰 이유였다. 그러나 지금 체리의 마음 속에는 백대승이라는 남자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녀는 자기 맘을 숨기고 밀고 당기는 게임을 하기에는 너무 솔직했다. 그래. 남자가 먼저 고백하든, 여자가 먼저 하든, 무슨 상관이겠어? 결과만 좋으면 되지. 체리는 결심하고 턱을 치켜들었다. 아직도 그는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 내가 왜 접근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내가 말했었잖아요. 당신이 맘에 든다고, 갖고 싶다고." 정말 그녀는 당돌하고 용기있는 여자였다. 그의 서슬에도 전혀 눌리지 않고 당당하게 그를 갖고 싶다고 말한다. " 난 당신이 좋아요. 어리숙하고 순진한 면이 마음을 끌어당긴다구요. 그리고 당신은 따뜻한 마음씨를 가졌죠. 육체적인 매력 또한 무시할 수 없구요." 대승이 여전히 아무말도 없이 노려보고만 있자 그녀는 답답한지 가슴을 탁탁 치며 말했다. " 당신하고 사귀고 싶어요. 무슨 남자가 이렇게 눈치도 없어요?"


그녀가 사귀자고 한다.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녀의 눈빛에 속아서는 안된다. 대승은 그녀에게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사랑을 대단치 않게 생각하지만 그는 진지했다. 그녀의 방식대로 사랑을 했다가는 상처입는 쪽은 그 자신이 될 것이었다. 체리는 초조했다. 그는 여전히 표정의 변화 없이 강렬한 분노를 담은 눈길을 그녀에게 보내고 있었다. " 체리씨, 좀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체리씨가 느끼는 감정은 단순히 성적 긴장감을 해소하려는 욕망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누차 말했듯이 저는 그런 관계는 싫습니다." "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백대승씨, 좀 솔직해져 봐요. 당신도 날 원하잖아요. 당신 머리는 아니라고 우길 지 몰라도 다른 부분은 적어도 당신 머리처럼 위선적이지는 않은 것 같네요." 체리는 아직도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듯 퉁퉁 부어 있는 그의 몸의 일부분을 의도적으로 쳐다보며 비아냥거렸다. 그는 정말 이상한 남자였다.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그저 그녀를 피하려고만 한다. " 제 몸은 체리씨에게 반응하는 게 당연한 일이겠죠. 체리씨는 예쁘고 매력적인 여성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체리씨가 만들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제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어요. 체리씨가 그 예쁜 몸으로 한 걸음 밀어붙이면 제 마음은 열 걸음 달아난단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그녀의 눈동자가 놀라움을 담고 커지더니 조금씩 흔들렸다. " 내가 싫은 건가요?" 체리는 눈을 내리깔고 나직하게 물어보았다. 도저히 그의 얼굴을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니, 그가 싫다고 할까봐 두려웠다. " 체리 씨를 좋은 동료로써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자로써는, 솔직히 말해서 체리 씨 같은 여자는 싫습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짙어졌다. 떨리는 입술을 애써 깨물어 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눈이 물기로 번들거린다 싶더니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체리는 너무도 비참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고백을 했으나 그녀의 마음은 꼬깃꼬깃하게 구겨져서 땅에 내동댕이쳐졌다. 여자로서의 자존심도 모두 버리고 진실한 그녀의 마음을 보여주었으나 그는 그녀를 거절했다.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던 체리는 결국 온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꺽꺽 울고 말았다.


" 야 이 나쁜놈아! 자존심도 다 팽개치고 좋아한다고 말한 건데... 나한테 싫다고 그렇게 잔인하게 말하면 어떻게 해! 이 천벌받을 놈아!" 목놓아 울면서 띄엄띄엄 늘어놓는 그녀의 말은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를 욕하는 말 같았다. 대승은 이미 그녀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릴 때부터 자신이 내밷은 말을 주워담고 싶었다. 사실, 그렇게 심하게 말하려던 건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행동에 화가 난 나머지 제멋대로 나오는 말을 막을 수가 없었던 거였다. 사실 그녀의 말이 어느 정도는 맞다는 것을 속으로는 인정하는 터였다. 그리고 그녀의 용기와 솔직함에 탄복하기도 했었다. 그가 아는 여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어떻게든 남자의 고백을 받아내면서도 자기 속 마음은 드러내지 않고 속이며 신비감을 주어 좀 더 남자를 안달나게 하려는 게 보통인데 체리는 그러지 않았다. 불필요한 감정 싸움은 하지 않겠다는 듯 어린아이같은 정직성으로 그녀의 감정을 표현했다. 그녀는 좋아한다고 말할 때 만큼이나 눈물을 흘리는 것도 가식적이지 않았다. 얼굴이 미워보일까봐 눈물만 흘리는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큰 소리로 딸꾹질까지 해 가며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운다. 그러나 그 모습이 전혀 밉지 않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는 우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입술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품에 안아 달래주고 싶을 만큼. 대승은 울고 있는 체리를 끌어당겨 달래주지 못하는 자신의 용기없음을 비웃어 주고 싶었다. 그녀가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뜨릴 때부터 그의 가슴 속은 그녀의 눈물로 인해 부식당하는 것 같았다.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을 지우고 예쁜 웃음을 떠올릴 수 있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그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누군가가 그를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 것 처럼.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체리는 자주 가는 술집 한 구석에 구겨져 앉아 있었다. 그녀의 전화를 받고 달려온 정희가 허겁지겁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꽤 마셨는지 테이블 위에 빈 맥주병들과 양주병까지 보였다. 정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체리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은 퉁퉁부어 반쯤밖에 떠져 있지 않았고 화장은 군데군데 얼룩져 있고 눈밑에는 시꺼멓게 마스카라 자국까지 나 있었다. 술은 또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테이블에 거의 엎드려서 무슨 말인지도 모를 말을 중얼중얼거리고 있다. 정희는 이렇게 흐트러진 체리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놀람보다도 걱정스러움이 앞섰다.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났음이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항상 밝고 낙천적인 체리가 이지경이 될 리가 없다. " 아우~ 술냄새. 왜 이렇게 많이 마셨니. 집에 가자. 얼른 일어서." 정희가 체리의 팔을 잡고 일으켜세우려 하자 체리는 팔을 뿌리치더니 오히려 정희를 의자에 앉힌다.


" 정희야. 나 괜찮아. 정신 멀쩡해. 보긴 이래보여도 안 취했어." 그래. 그럼 난 니 엄마다. 정희는 다시 한숨을 쉬고는 맥주를 컵에 따라 단숨에 마셨다. " 정희야. 나 벌받나봐. 지금까지 내가 사귀던 남자들. 내멋대로 사귀고 또 멋대로 차버렸다고 벌받나봐." 밑도 끝도 없는 소리에 아연해진 정희는 눈만 깜박거리며 체리를 쳐다보았다. " 이제야 내가 얼마나 못된 애였는지 알 것 같애. 난 그동안 나와 사귀었던 남자들의 감정을 갖고 장난쳤던 거야. 그 사람들은 진지했는데. 나 이제야 그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가." " 무슨 소리하는 거야? 좀 알아듣게 얘기해봐." 정희가 다그치자 체리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댄다. 정희는 재빨리 그 술잔을 빼앗아서 대신 마셔버렸다. " 후후...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좋아하는 감정을 느낀 사람한테 거절당했어. 내가 싫대. 내가 다가가면 도망가고 싶댄다." 쓸쓸한 체리의 말투에 정희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짐작이 맞다면 체리가 좋아한다는 남자는 백 PD 임이 틀림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체리가 싱글벙글하며 다닌 것을 보고는 뭔가 잘 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 정희야. 내가 그렇게 끔찍하니?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싫을 만큼?" " 아니야. 체리야 그렇지 않아.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지나치게 적극적인 여자는 좋아하지 않는 게 사실이야. 그 사람은 니가 적극적인 게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지. 보통 여자가 너무 적극적으로 다가가면 숨막혀하고 도망가고 싶어지는 게 남자들 마음이야. 반대로 여자가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면 더 안달하며 쫓아 다니는 거구.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자기를 좋아해주는 여자 보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흥미를 느껴." 체리는 화가 났다. 왜 여자는 남자가 다가올때까지 얌전히 있어야 하냐구.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누구든 먼저 얘기하면 그만 아닌가. 그녀는 그런 이상한 생각을 갖고 있는 백 PD 와 세상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의식을 잃어갔다. 귀여운 남자 8


체리는 깨질 듯이 아픈 머리를 움켜쥐고 신음했다. 입안은 말라 바싹바싹 타들어갔으며 눈은 퉁퉁 부어 떠 지지도 않았다. 아마 온 몸이 다 부었을 것이다. 어디선가 콩나물 국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동생 별이 솜씨인 것 같다. 오늘 아침 메뉴는 콩나물 국인가?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그녀는 다시 머리가 찌르는 듯 아파 도로 침대 위를 뒹굴고 말았다. 어제는 태어나서 가장 술을 많이 마신 날이었다. 몇 병인지 제대로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백 PD 에게 거절당했었지. 그 기억이 떠오르자 다시 불쾌해졌다. 쫌생이, 바보, 말미잘, 해삼, 멍게, 자기 마음도 모르는 멍청이! 체리는 한동안 머릿속에 온갖 욕을 떠올리며 침대에 앉아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들어 눈물이 찔끔 났다. 정희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여자가 다가가면 도망치는 웃기는 습성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가 싫어한다고 해서 이대로 포기하기엔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치를 않았다. 무슨 일이든 힘들다고 중간에서 그만두는 것은 유체리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의 눈길이 화장대 서랍 쪽으로 향했다. 비틀비틀 일어나 서랍을 열어보니 나중을 위해 복사해 두었던 열쇠가 반짝 빛나는 게 보였다. 그녀는 열쇠를 쥐고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번에도 거절당하면 깨끗이 잊어야지. 체리와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며칠간 대승은 안절부절 못했다. 그녀는 그와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고 완벽한 타인처럼, 단순한 직장 동료처럼 그를 대했다. 아무래도 그의 말에 충격을 많이 받은 듯 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사과하기도 좀 뭣해서 그는 그저 속만 끓이고 있었다. 며칠간 그녀와 접촉이 없는 상태에서 생각해 보니 자신이 그 말도 안되는 그녀와의 접촉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앙큼스런 눈웃음이 보고 싶었고 우연인 듯, 일부러 부딪히는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느끼고 싶었다. 그녀의 말처럼 자신도 그녀를 좋아하는 게 확실했다. 단지 버림받을 게 두려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것 뿐이지. 다시 주말이 돌아왔다. 토요일이라 방송국에서 일찍 나선 체리는 휘파람을 불며 오피스텔로 향했다. 그녀는 오피스텔 앞의 상가 슈퍼마켓에 들러서 매운탕 끓일 재료와, 과일, 싱싱한 야채를 몽땅 사서 한 보따리 들고는 뒤뚱거리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9 층 버튼을 눌렀다가 아차하는 표정으로 다시 15 층 버튼을 눌렀다. 그의 집.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 갔다. 집안은 저번에 한번 왔을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엄청나게 지저분해진걸 빼고는. 거실 사방에 벗어서


아무렇게나 던져 둔 옷들이 굴러다녔고 부엌에는 밥 먹고 설거지도 하지 않아 싱크대에 지저분한 그릇이 쌓여 있었다. 소파에는 먹다가 팽개쳐뒀는지 퉁퉁 불어터진 라면이 반쯤 그릇에 담겨 있고 팝콘 부스러기가 굴러 다녔다. 침실에도 상황은 비슷하다. 책상은 뭐하라고 있는 건지 침대 위에 책이 널려져 있고 뚜껑이 열려진 쓰레기통 안에는... 헥! 콘...돔? 체리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분명히 콘돔이었다. 새것도 아니고 다 쓰고 버린 듯한 콘돔. 그녀는 잠시 우뚝 멈춰서 있다가 이내 그의 책상서랍을 뒤져보았다. 있다. 파라다이스? 쳇. 천국의 느낌이라 그건가? 콘돔의 모양을 보니 보통 것과는 달리 표면이 울퉁불퉁하게 돌기가 있었다. 그는 평범한 것도 아닌, 울퉁불퉁한 표면으로 덮여진 제품을 사용하는 것이다. 체리는 기가 막혀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총각이라니 순 거짓말이잖아! 그 콘돔은 바람둥이나 사용할 법한 모양이었고 그녀도 한번도 그런 걸 사용하는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체리는 착잡한 기분으로 서 있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반응으로 보아 그가 이런 걸 사용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진짜 순진한 남자인데. 나중에 그가 오면 물어 보리라 생각하고 그녀는 일단 부엌 쪽으로 가며 팔을 걷어 붙였다. 대승은 피곤한 눈을 문지르며 방송국 밖으로 나왔다. 기획 회의가 길어져서 거의 저녁때가 다된 시간이었다. 체리가 아프다며 일찍 가버려서 약간 차질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며칠간 축 처져서 다니더니 기어코 병이 났나보다. 병문안이라도 가 보고 싶었으나 그녀가 인천에 산다는 것만 알고 있는 상태라 가 볼수도 없었다. " 띠리 띠리리리~" 오피스텔로 가는 도중에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 여보세요?" " 대승이냐? 나 진수. 너 소식 들었어? 형철이 아버님 돌아가셨대." 대승은 깜짝 놀랐다. 형철이라면 어려서부터 가장 친했던 친구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수영강사를 하고 있어서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항상 만나면 속내를 털어놓는 절친한 친구였던 것이다. " 뭐? 형철이 아버님 건강하셨잖아. 어떻게 된 거야?"


"

교통사고로 즉사하셨대.

오늘 새벽에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났나봐.

지금 형철이

정신없어서... 니가 좀 와줘야겠다." 형철이는 외동아들이라 어머니와 둘이서 슬픔을 이기는 데도 벅찰 것 같았다. " 그래 가야지. 어느 병원이야?" " 응. 연소대 병원 영안실이다." 대승은 그길로 택시를 잡아타고 연소대 병원으로 달려갔다. 체리는

음악을 틀어놓고 집안을 치우고

있었다.

비록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

청소하기와 요리하기긴 했지만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할 의향이 있었다. 아까 부엌의 그릇들은 비록 몇 장의 접시가 희생되긴 했으나 깨끗하게 처치했고, 이제 거실과 침실의 옷들을 모두 모아 세탁기에 넣고 있는 중이다. 옷들은 아무렇게나 벗어 놓아 구겨지긴 했지만 상당히 세련되어 보였다. 그새 취향이 바뀐건가? 평소에 백 PD 가 입던 소탈하고 수수한 옷은 아니었다. 사이즈는 같아 보였지만 패션 감각이 뛰어난, 마치 모델들이 입는 옷 같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세탁기를 돌리고 나온 체리는 거실 바닥에 굴러 다니는 비디오와 책들을 줏어모았다. 인도 여행기. 무굴 제국의 신비, 일본 맛보기. 유럽 일주 이렇게. 미국에서 꼭 가보아야 할 곳. 세계일주 다큐멘터리라도 찍을 생각인가? 각종 여행 서적과 비디오들이 다 모아 놓으니 책장을 하나 들여 놓아야 할 정도로 많았다. 일단 거실 한쪽 구석에 쌓아 두고 청소기를 돌렸다. 집안이 온통 반짝거리게 닦기까지 다 마치고 나자 벌써 저녁시간이 다 되었다. 좀 있으면 그가 돌아올 것이다. 체리는 후다닥 부엌으로 가서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역시. 별이에게 3 박 4 일동안 개인교습을 받은 효과가 있는지 곧 구수하고 얼큰한 매운탕 냄새가 환상적으로 풍겨나왔다. 남자들은 가정적이고 요리 잘 하는 여자를 좋아하기 마련이다. 거기다 예쁘고 섹시하면 금상 첨화지. 이렇게라도 해서 그를 사로잡으려는 자신이 왠지 불쌍하게 느껴졌지만 할 수 없었다. 저녁 준비가 다 되자 체리는 땀에 젖은 옷을 벗고 시원한 샤워기 물줄기 아래에서 몸을 씻었다. 그리고 며칠 전 구입했던 크림색 슬립만 걸치고 엷게 화장을 했다. 염색이나 파마를 한번도 하지 않은 까만 생머리는 크림색 슬립 위로 선명하게 흘러내려 청순하면서도 섹시한 이미지를 연출해 주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9 시였다. 그런데 그는 아직도 감감 무소식이다. 체리는 TV 를 켜고 소파에 앉았다. 눈은 TV 를 향해 있지만 정신을 딴데 가 있다. 그녀의 머릿속은 대승이 들어오면 어떤 식으로 유혹해야 할 지를 생각하느라 복잡했다. 10 시. 매운탕 냄새가 너무 나는 것 같아서 창문이란 창문은 몽땅 열어젖혔다.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회의는 끝났을 것이고, 아마도 친구와 약속이 있나보다. 체리는 다시 TV 앞에 앉았다. 11 시.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한다. 혹시라도 여자를 만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만약에 여자 향수냄새라도 달고 들어온다면 가만 있지 않겠다고 다짐해 본다. 바람이 차가와서 창문을 닫고 소파에 앉았더니 솔솔 졸음이 왔다. 낮에 내내 집안을 치우느라 피곤해진 탓이다. 12 시. 들어오기만 하면 주먹을 날려 주리라 생각하고는 있지만 너무도 졸리운 나머지 꾸벅꾸벅 졸고 있다. 간신히 졸음을 쫓으며 그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 보지만 웬 여자가 " 전화를 받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합니다." 하고

간드러진

목소리로

되풀이하여

말하는

통에

신경질이

수화기를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체리는 거의 반쯤은 자면서 더듬더듬 침대를 찾아 간다. 침대 한쪽 구석에 이불을 비집고 기어들어가니 그의 체취가 그녀의 온 몸을 감싸는 듯한 느낌에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자고 있으면 들어오겠지... " 쿵!" " 아얏!" 이놈의 아파트는 지낸지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새벽 2 시가 다 되어서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오던 대협은 경비실 근처의 쓰레기 통을 미처 보지 못하고 무릎을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술을 좀 마셨더니 정신이 없나 보다. 욱신거리는 무릎을 문지르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여자와 있다가 온 걸 들키면 좋은 소리 들을 일이 없었기 때문에 대승이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들어갔다. 어저께인가, 최근의 여자친구를 오피스텔로 데리고 왔다가 대승이 갑자기 들어오는 바람에 새로 산 '파라다이스'를 제대로 시험해 보지도 못하고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앞으로 또 여자를 집안에 끌어들이면 당장 쫓아내겠다며 펄펄 뛰었지. 아무튼 수도승같은 동생과 함께 살기란 이만저만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대협이 집안으로 들어가자 어둠 속에서 맛있는 냄새가 떠돌고 있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매운탕 냄새였다. 그는 코를 킁킁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기특한 그의 동생이 어떻게 형이 술 마시고 들어올 줄을 알았는지 얼큰한 매운탕을 끓여 놓은 것이다. 대협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일 아침에 매운탕 먹을 생각을 하며 욕실로 향했다. 피곤해서 대충 씻고 나온 대협은 늘 그렇듯이 벌거벗은 채로 잠자러 방으로 들어간다. 침대 한쪽이 불룩하게 솟아 있는 걸 보니 대승은 깊이 잠든 것 같았다. 짜식, 꼭 기집애처럼 쪼그리고 자는군. 대협은 침대 다른 한쪽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오전 7 시. 대승은 밤새 한숨도 못자고 영안실에서 친구 형철이를 위로하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집으로 들어왔다. 일요일이라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식탁을 보고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요리보다는 차려논 것 먹는 걸 더 즐겨하는 형이 웬일로 그가 제일 좋아하는 매운탕을 끓여 놓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께

형이

여자를

집에

끌어들여

한바탕

싸운

후로

쫓아내겠다는 그의 위협 때문에 이런 일을 한 게 분명했다.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형이었다. 방문이 닫힌 걸 보니 형은 아직 자는 모양이었다. 대승은 밤새 쌓인 피로를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대협은 코 끝에 맴도는 달콤한 체리향기에 눈을 떴다. 그의 눈 앞에 까만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는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어제 밤에 같이 놀던 여자... 집까지 데려왔던가...? 아니었다. 대협은 자신의 품 속으로 파고들어 있는 여자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분명히 이 여자는 이제 그만 방황을 끝내고 한 여자에게 정착하라고 하늘에서 보내 준 요정임에 틀림없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뺨을 타고 내려와 침대 시트에 펼쳐져 있었다. 굉장히 길다. 아마도 서 있으면 엉덩이까지 닿을 것 같다. 대협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져보았다. 손가락에 휘감기는 느낌이 병아리 털처럼 부드럽다. 머리카락과 뚜렷이 대조를 이루는 투명하고 깨끗한 피부. 살짝만 힘을 주어 잡아도 푸른 멍이 생길 것 같다. 눈을 감고 있어서 눈이 큰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눈썹이 매우 정갈하고 속눈썹도 굉장히 길었다. 그리고 오똑하고 모양좋은 코, 도톰한 입술. 입술이 벌어져 하얗고 귀여운 이가 살짝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피부만큼이나 깨끗해보이는 크림색 슬립을 입고 있었는데 슬립 위로 볼록한 가슴이 솟아올라 있어 그의 숨결을 어지럽혔다.


이 여자가 왜 침대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찌됐든 상관 없었다. 대협은 첫눈에 이 여자와 사랑에 빠졌고 다른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여자를 쳐다보는 것 만으로 가슴이 뛴 적은 처음이었다. 그는 살짝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부벼보았다. 한숨이 나올만큼 부드러웠다. 그는 입술을 뗐다가 다시 키스했다. 그는 그녀를 살짝 끌어당겨 가슴에 품고 그녀의 혀를 조심스럽게 빨아들였다. 그녀는 잠결인 듯 신음소리를 내더니 이내 안겨들었다. 대협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의 몸은 그와 딱 들어맞았고 살결에서 풍기는 체리향기는 그를 진저리치게 만들었다. 그는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가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그의 허리를 다리로 감싸고 엉덩이를 들어올린다. 그는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으나 그녀가 아직 깨어나지 않아서 참았다. 대신에 그는 그녀의 하얀 목선에 얼굴을 묻고 밤새 거칠게 수염이 돋아난 턱을 문질렀다. 체리는 잠결에 입술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을 느꼈다. 대승이 깨어난 것 같다. 그녀는 잠이 쏟아지는데 뭔가가 귀찮게 하자 불만의 신음을 내밷었으나 그녀를 끌어당기는 강한 손을 느끼고는 순순히 그에게 안겼다. 꿈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꿈이라면 끝날때까지 전혀 깨어나고 싶지 않앗다. 그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혀를 입 안으로 빨아 들인다. 그와 키스를 해본 건 단 두 번 뿐이었지만 두 번 만으로도 상당한 발전이 있는 것 같다. 그에게서 낯설은 스킨 냄새가 났다. 남성적이고 섹시한 향이다. 그녀에게 좋은 느낌을 주려고 스킨을 새로 산 모양이다. 이제 그는 그녀 위로 올라와 목에 키스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마음이 변하기 전에 꼭 붙잡아 두고 싶어서 그의 허리를 다리로 꽉 조였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몸을 조여들게 만들었다. 그가 그녀의 얼굴에 가볍게 키스했다. 이마. 눈. 코. 뺨 위로 살짝살짝. 언제 연습이라도 했나? 그는 정말 능숙해진 것 같았다. 체리는 그의 가슴에 손을 댔다. 쿵쿵거리며 제멋대로 뛰고 있다. 자신이 그에게 이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게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가슴도. 그전에 슬쩍 도둑질하듯이 몇 번 만져본 그의 가슴은 단단하고 야성적인 느낌이 들게 털이 나 있었다. 원래 그녀는 가슴에 털이 있는 남자가 너무 징그럽고 싫었지만 대승의 가슴에 난 털은 좋았다. 부드럽고, 포근하고, 섹시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슴이 매끈하다. 털을 깎아버렸나?


체리는 말도 안 되는 생각에 피식 웃다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그녀의 눈앞에는 그녀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본 남자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잘 생긴 남자가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귀여운 남자가 아니었다! " 까아아아악!" 대승은 샤워를 마치고 맛있는 냄새가 떠 다니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냉장고 문을 열었더니 형이 사왔는지 냉장고 안이 여러 가지 음식으로 가득하다. 목이 말랐던 대승은 우유를 꺼내 유리컵에 가득 따랐다. " 꺄아아아악!" " 푸웃! 켁......켁!" 그는 갑자기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마시던 우유에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그의 방에서 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리는지 미처 생각해 볼 틈도 없이 대승은 기침을 해 대면서도 소리가 들리는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난 한달간 그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갖고 장난치던 그녀와 세상의 모든 여자가 다 자기 것인양 착각하고 있는 그의 형이 한 침대에 있는 것이다! 그것도 막 잠에서 깨어나 사랑을 나눈 듯한 모습으로. 그의 머리에서 김이 포실포실 솟아 올랐다. 그렇게도 피하고 싶었던 여자였지만, 그녀의 적극적인 공세에 도망가고만 싶었었지만, 그의 형과 같이 있는 모습을 보니 알 수 없는 분노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막 잠에서 깨어난 듯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있었지만 한입에 먹어치우고 싶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까만 머리는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그녀의 어깨 위로, 가슴 위로 흘러내려 있고, 입술은 붉게 부풀어 올라 키스의 흔적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또 곱고 하얀 피부 위에는 여기저기 붉게 쓸린 자국과 심지어는 작은 멍자국까지 보였으며 옷이라고 볼 수도 없는 작은 천쪼가리가 겨우 그녀의 몸을 가리고 있는데 그나마 한쪽 어깨 끈까지 흘러내려 곧 벗겨질 듯 보였다. 그녀는 놀랐는지 겁에 질렸는지 침대 시트를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이 꽉 붙들고 그의 형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그의 형을 보니 그쪽 역시 심란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머리는 까치집이 되어 있고 한쪽 뺨에는 누구의 것인지 분명한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그러나 형의 표정을 살피던 대승은 놀라고 말았다. 먹이를 앞에 둔 늑대의 표정이다. 약간의 틈만 보이면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한. 대협은 차지하고 싶은 여자를 발견하면 그런 표정을 짓곤 했다. 대승은 언젠가 그 표정을 본 적이 있었는데 형이 그런 표정을 보이고 나면 어떤


여자도 저항하지 못했다. 그가 원하는 여자는 십중팔구 그의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대협은 뺨에 난 손자국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의 앞에 있는 매혹적인 여자를 삼킬 듯 쳐다보고 있었다. 같은 남자가 보아도 그의 형은 매력적이었다. 완벽한 외모에 약간 마른 듯 하면서도 강단 있는 몸. 섹시한 미소는 성녀라도 유혹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외모뿐만이 아니라 대협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남자든 여자든 그를 알게 되면 그 싱그러운 웃음에 빠져들었으며,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말솜씨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지금 체리를 쳐다보는 눈길은 과거 어느 때와도 달랐다. 유혹의 눈빛이었으나 여느 여자를 대하는 듯한 장난기 섞인 유혹의 눈빛이 아니었다. 욕망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어떤 절실함과 꼭 차지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 승아. 니 여자친구냐?" 대협은 대승이 서 있는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뚫어지게 체리를 바라보며 묻는다. 대승은 한동안 머뭇거렸다. 형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거니와 사실대로 여자친구가 아니라고 밝히기도 좀 망설여졌기 때문이다. " 아니." 결국 그는 솔직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그러나 순간 대협의 눈에 스쳐간 감정을 보고는 후회했다. 그는 체리에 대해 형이 어떤 일을 하든 관여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 됐다. 그럼 상관 말고 나가 있어라." 여전히 체리를 강렬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손짓만 하며 말한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녀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범이 먹이에게 다가가듯이 느긋하게. 체리가 몸을 움찔 하는 게 보였다. 그녀도 위험을 감지한 듯했다. 그러면서도 빨려들 듯 대협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체리는 혼란스러웠다. 처음에는 대승인 줄 알고 열성적으로 달려들었지만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뒤로도 왠지 모르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본 남자 중에서 가장 매력적이기 때문인지 블랙홀처럼 빨려들 듯한 눈빛 때문인지 알 수 없다. " 가까이 오지 말아요!" 그 남자가 천천히 그녀를 덮칠 듯 다가오자 체리는 소리를 치며 엉겁결에 침대에서 튕기듯이 일어났다. 물론 시트를 꽉 끌어안은 채로. 이어서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체리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 남자는 속옷 한 장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던 것이다. 정말 아름다웠다. 흔히들 역삼각형의 멋진 몸매라고들 말하지만 그 남자처럼 넓은 어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허리가 늘씬한 남자를 본 적은 없었다.


그녀의 외침에 비로소 정신을 차린 대승은 황급히 바닥에 떨어진 형의 바지를 주워 침대로 던져주었다. 대승의 음성에서 시베리아의 냉기가 뚝뚝 떨어진다. " 체리씨는 내 직장 동료야. 형이 데리고 놀던 여자들과는 달라. 형이야말로 옷 입고 나가줬음 좋겠어." 두 형제는 각기 다른 감정을 눈에 담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대협의 눈에 담긴 감정은 방해 받은 데 대한 분노였다. 주제넘게 둘 사이에 끼어들지 말라는 경고였다. 이 여자는 다른 여자들과 다르다는, 단순한 열정 이상의 뭔가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보여주고 있었다. 반면에 대승의 눈에 담긴 감정은 형의 행동에 대한, 그리고 그 행동을 막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그녀를 함부로 대하면 가만 있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그녀를 여자친구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이 여자는 내 여자라는 소유욕을 드러내는 눈빛이었다. 대협은 낯설은 동생의 모습에 아연해졌다. 온몸으로 차가운 분노를 내뿜고 있는 남자는 평소의 동생이 아니었다. 항상 이성적이고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형에게 덤벼들지 않았던 동생과는 틀렸다. 대협은 동생의 눈을 보고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한 남자를 완전히 바꾸어놓을 수 있는 것, 바로 사랑이었다. 그의 분노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한 분노였다. 평생을 수도승처럼 살 것만 같았던 그의 동생이 드디어 사랑에 빠진 것이다. 대협은 천천히 바지를 입었다. 방해받은 것이 못내 불만스러웠으나 북극의 찬 얼음같은 냉기속에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숨기고 있는 동생의 눈 때문에 그는 일단 자리를 비킬 수밖에 없었다. 주먹을 꽉 쥐고 분노에 떨고 있는 모습이 당장이라도 나가지 않으면 형이고 뭐고 주먹부터 날아올 기세였다. 대협이 마지막으로 체리를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나서 밖으로 나가자 잠시 두 남녀는 아무말 없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 체리가 그때까지 손에 꼭 쥐고 있던 시트를 바닥에 동댕이치면서 화를 터뜨렸다. " 도대체 이게 뭐에요? 어젯밤에는 왜 안들어왔어요? 매운탕 끓여놓고 저녁 내내 기다렸단 말예요." 씩씩거리던 그녀는 대승이 한마디도 하지 않고 분노로 활활 타는 눈길을 보내자 금새 수그러들었다. 이사람 왜 이렇게 무섭게 노려보지?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야? " 아무 일 없었어요. 방금 나간 사람이 당신 형이라면... 당신 형하고는 진짜로 아무 일 없었다구요." 체리는 우물쭈물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녀가 하는 일은 왜 항상 꼬이기만 하는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대승은 당황해서 손을 내저으며 변명을 늘어놓는 체리가 귀엽게


느껴져 순간 웃음이 나오려 했으나 책상 위에 놓인 콘돔 케이스를 발견하자마자 풀리려던 인상이 도로 굳어졌다. 그의 시선을 따라 책상 위를 본 체리는 그의 생각을 짐작했다는 듯 펄쩍 뛰며 손을 휘휘 내졋는다. " 아네요. 내가 쓴 거 아니란 말예요. 저거... 당신 꺼잖아요." " 내꺼 아닙니다." 대승은 분노를 억누르는 듯 착 깔린 목소리로 뇌까렸고 체리는 그런 그의 말을 듣고 다시 어리둥절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누구...? 그녀의 머리속에 퍼뜩 아까 능글능글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남자가 떠올랐다. 그제야 이상했던 점들이 이해가 되었다. 지저분한 집안 꼴 하며 세련된 옷, 거실에 널려 있던 책들과 쓰레기통 속의 콘돔까지. 그럼 그렇지. 그녀의 귀여운 남자는 역시나 총각인 게 확실했다. " 그렇군요. 근데 어떻게 된 거에요? 밤에 왜 안들어왔어요? 그리고 당신 형은 왜 여기 있는거죠?" 고개를 끄덕거리던 그녀는 이내 또 다른 궁금증을 풀려는 듯 그에게 따져 물었다. " 그 질문에 대한 답이라면, 첫 번째는 친구 아버님이 어제 돌아가셔서 병원에 있는 친구와 함께 밤을 보냈고, 두 번째는 형이 여행가기 전에 한두달 머무르겠다고 해서 같이 지내는 것 뿐입니다. 그럼 그러는 체리씨는 왜 내 집에 와서 또 분란을 일으키는 겁니까? 집에는 또 어떻게 들어왔어요?" 그는 화가 단단히 난 것 같다. 체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냉정한 표정 앞에서 얘기하기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 어떻게 들어오긴요. 열쇠로 문 열고 들어왔죠. 음... 그리고 왜 왔느냐면 지난번 회의실에서의 일도 사과할 겸 저녁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 그녀의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그는 기가 탁 막혔다. 거기다 그녀는 부끄럼도 없는지 손바닥 만한 천쪼가리를 걸치고 있으면서도 가리지도 않고 당당히 그의 앞에 서 있다. " 열쇠는 어디서 난 겁니까? 그리고 아까 형 있을 때는 가리느라 정신 없더니 지금은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얼른 옷부터 입어요." 안 그래도 화가 잔뜩 나 있는데 그녀의 하늘하늘한 옷과 탐스러운 몸매가 더욱 화를 부추겼다. 그런데 그 맹랑한 여자는 갑자기 생긋 웃더니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그를 올려다본다. 가슴이 뻐근해졌다. 정말 꼬리가 몇이나 달린 여우인지 몰랐다.


" 열쇠집은 뭐하라고 있는 것 같아요?" 그녀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탁자 위의 열쇠를 가리켰다. 그가 복사본인 듯 보이는 열쇠와 그녀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말을 이었다. " 내 옷차림에 불만이 많은가본데, 어제밤에 대승씨가 하도 안 들어오길래 졸려서 잠옷 입고 잔거라구요. 옷을 다 입고 잘 수 없잖아요?"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이다. 대승은 사실대로 말하라는 듯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듯이 턱을 치켜 올리고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도도하게 그를 쳐다보던 체리는 점점 자신없는 표정을 짓더니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그의 비웃는 듯한 눈초리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속셈쯤은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체리는 두려웠다. 그녀의 앞에서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남자의 마음을 어떻게 해야 돌려놓을 수 있을지 알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다시 거절당하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렵다고 해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다시한번 상처를 입게 되더라도 그녀의 마음을 솔직하게 얘기해야만 했다. 요 며칠 사이에 이남자, 백대승을 좋아한다는 감정 이상의 뭔가를 느꼈기 때문이다. 체리는 내리깔았던 눈을 다시 치켜들었다. 생각을 알수 없는 그의 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그래요. 솔직히 말해서 지난번 일을 사과하려고 온 건 아니에요. 그리고 어제밤엔 잠만 자려던 것도 아니었구요. 그치만 당신 형하고 있었던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어요. 내가 유혹하고 싶었던 사람은 섹시한 남자가 아니라 귀여운 남자였거든요." 살짝 웃으며 그를 유혹하고 싶었다고 말하는 여자. 대승은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어서 그녀를 밖으로 쫓아내라고, 그리고 다시는 그의 인생에 들여놓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었지만 가슴 속에서는 그녀를 끌어안고 유혹을 받아들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녀와 마주치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그녀에게로 기울어져만 가는 그의 마음을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 유혹하고 싶은 남자 앞에서라면, 몸을 가릴 필요가 없잖아요?" 그녀는 까만 두눈 가득 가슴떨리는 미소를 담은 채로 그의 뺨에 손을 대었다. 대승의 가슴이 또 뛰기 시작했다. 부질없는 저항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체리의 손을 거칠게 떼어냈다. " 체리씨,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 안 듭니까? 누차 말하지만 이런 식으로 덤벼드는 건 거부감만 더 커지게 만들 뿐입니다. 지난번에는 제가 참았지만 집에까지 찾아오는 건 참을


수가 없군요. 사생활 침해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리고 남자 집에서, 그것도 주인도 없는 집에 마음대로 들어오고, 잠까지 잔다니 막되먹은 여자가 아니고서야......" 흥분해서 그녀에게 소리치던 대승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한방울 이슬을 보고 나오던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농염한 눈빛으로 그를 유혹하던 여자는 간데없고 자신의 말에 상처입어 눈물 흘리는 가련한 여자만 있을 뿐이다. 체리는 어느 정도 대승이 화를 낼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손님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짓밟아버릴 줄은 몰랐다. 그녀의 접근방법이 잘못된 건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육체적인 매력을 이용해 그에게 다가가려 한 일 자체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대부분의 남자에게는 맞아떨어질 방법이지만 백대승이라는 남자에게는 통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 사랑해요." 그녀는

정말 효과적으로 말문을 막히게

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유혹하듯 눈을

치뜨다가는 상처입은 여인마냥 눈물 흘리며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 당신을 사랑한다구요. 그래서 대승씨가 싫어하는 거 알면서도 접근했어요. 사랑을 표현하는 것도 잘못인가요?" 그 맑은 눈동자에 굵은 눈물 방울 떨구며 떨리는 목소리고 말하는 체리는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고백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너무도 쉽게 사랑에 빠지는 여자였다. 과연 그녀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 체리씨. 당신은 날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사랑하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여 있을 때 내가 체리씨 앞에 나타났을 뿐이죠.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구였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체리씨는 사랑을 몰라요." " 내가 사랑을 모른다구요? 당신도 마찬가지에요. 나한테 그런 말 할 자격 없어요. 대승씨는 자기 맘도 모르는 바보잖아요. 날 좋아하면서. 나한테 끌리면서도 자기 맘을 속이고 있잖아요. 좀 솔직해져 봐요."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사실 그랬다. 방송국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녀가 그의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던 첫만남부터, 그의 마음은 온통 그 귀여운 여우에게로 쏠렸던 것이었다. 단지 그의 이성이 그 마음을 가로막았을 뿐이었다. 조금씩 그의 마음속에 들어선 그녀의 자리가 점점 커져 이제는 부인하기조차 힘든. 그런 상태가 되어버렸다. 지금도 겉으로는 냉담한 척 하고 있지만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픈 손이 올라가는 걸 간신히 눌러참고 있다.


체리는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오열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이를 앙다물었다. 바보같이 눈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냉담한 그 남자를 보고 있자니 차라리 그녀의 사랑을 부정해 버리고픈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또 습관적인 사랑에 빠져 버린건지도 모른다. 순간적으로 확 타올랐다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그가 받아주지 않아도 그뿐이다. 열병 앓듯이 몇 주간 가슴앓이 하고 나면 씻은 듯 깨끗해 질 것이다. " 당신... 나 싫어 했었죠? 잊고 있었어요. 사랑은 강요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들 하더군요. 내가 그렇게 싫다면, 매달리지 않아요.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체리는 간신히 몸을 추스려 문으로 향했다. 거절당한 쓰라린 마음에 목놓아 울고 싶었지만 그 앞에서 더 이상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대승은 그녀의 눈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두려움. 당차고 제멋대로인 유체리라는 여성이 그에게 거절당할까봐 두려워 하고 있다. 그녀를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그녀의 눈에 어린 두려움의 빛을 지워주고 싶었다. 그녀는 두려움의 눈빛을 체념의 씁쓸함으로 바꾸며 그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그녀가 방을 나서면 다시는 그에게 다가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그의 인생 밖으로 사라지려 하고 있다. 대승은 그녀를 그대로 보낼 수가 없었다. 그녀를 붙잡아야 했다. 대승은 그녀가 방문을 열기 전에 그녀의 가느다란 팔을 강하게 휘어잡았다. 그는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의 감정은 그녀를 그대로 놔두라는 이성의 경고를 무시하고 말았다. 그는 더 이상 그녀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니, 막고 싶지 않았다. 체리가 한 말처럼 그가 그녀에게 끌린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대승은 그녀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미처 그녀가 팔을 잡힌 데 대한 항의의 말을 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를 끌어당겨 그대로 그의 품속으로 꼭 껴안았다. 갸냘픈 그녀의 몸이 그의 두 팔 안으로 딱 맞게 들어왔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란 체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 보았다. 채 마르지 않는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대승은 그전에 그녀를 울렸을 때 해 주고 싶었던 대로, 고개를 숙여 키스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떨리는 입술로 그의 입술을 가져갔다. 눈물 때문에 그녀와의 키스는 달콤짭짜름 했다. 체리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백대승이라는 남자를 정말 종잡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싫다고 내몰던 사람이 갑자기 껴안고 키스하다니 '남자의 마음은 갈대' 라는 말이 새로 나와야 할 판이다. 나를 놀리는 건가?


그렇지만 그의 진지한 표정은 전혀 장난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었다. 그녀를 받아들이겠다는 무언의 대답인 듯 싶다. 체리는 두 팔을 들어 그의 목에 두르고 꼭 껴안았다. 그의 심장 박동이 그녀의 가슴으로 전달되었다. 마음속이 따뜻해지는 느낌이다. 서로의 마음이 일치하는 기분. 비록 서로 상처를 주었지만 마주한 가슴 하나로 다 치유되었다. " 체리씨 말이 맞아요. 체리씨를 좋아하고 있었지만 그걸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내 마음이 가는 대로, 내 심장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어요." 그녀에게서 입술을 뗀 대승이 진지한 얼굴로 나지막히 속삭였다. 체리는 그의 눈에서 진심을 보았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 우리 그럼 사귀는 거죠?" 체리는 여전히 젖은 눈으로 활짝 웃으며 그에게 말한다. 대승은 성급한 그녀의 말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계속 달라붙어 있는 그녀를 부드럽게 떼어 놓았다. 떼쟁이 아이처럼 사귀자고 떼를 쓰는 그녀를 달래 주어야 했다. " 체리씨. 나도 체리씨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너무 앞서 나가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우린 아직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 것 투성이잖아요. 겉모습 만으로 사랑에 빠진다는 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죠. 일단은. 서로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 그래요?" 대승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앞으로 두어달 정도 '친해지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연인도 좋지만 우선 친구가 되는 게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체리는 그의 제안이 성에 차지는 않았지만 그가 옳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친구로서의 악수였다. 귀여운 남자 9 평화로운 집안을 한바탕 휘저어논 체리가 사라지자 대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부엌으로 들어섰다. 그는 체리의 존재를 받아들이기로 한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향하는 감정을 막고 싶지는 않았지만 과연 그가 원하는 진지하고 진실된 관계가 가능할지 의심스러웠다. 그녀로 인해 상처받는 일이 있을런지도 모른다. 어쩌면 금방 싫증내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도 있다. 그런데 왜 그는 확실하지 않은 관계 속으로 손을 뻗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합리적인 이유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왜 위험스러운 여자에게 끌리는 것인지. 왜 그녀의 눈물에 맥을 못 추고 무릎을 끓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대승은 식탁에 앉아 그의 형과 마주보며 무의식적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대협은 환상적인 매운탕 냄새에 연신 침을 삼켜가며 막 밥을 먹으려던 참이었다. " 챙!" 공중에서 두 개의 숟가락이 부딪혔다. 매운탕을 뜨려고 냄비 속으로 넣던 숟가락이 부딪힌 것이다. 두 쌍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도 또한 공중에서 부딪혔다. 그들은 한참을 서로 노려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매운탕으로 수저를 가져갔다. " 음. 이맛이 아닌데?" 한수저 가득 국물을 입에 넣고 음미하던 대협이 불만스러운 듯 이마를 찡그렸다. " 맞아. 뭔가 빠진 것 같군." 대승도 한 숟갈 맛을 보고 형을 마주보았다. 맛은 아주 좋았지만 뭔가 허전했다. 한동안 마주보던 두 형제는 동시에 소리쳤다. " 고춧가루!" 그랬다. 고추장과 간장으로 간을 맞춰서 맛은 좋았지만 얼큰하고 화끈화끈한 맛을 즐기는 그들 입맛에는 뭔가 빠진 듯 맹숭맹숭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내 고춧가루를 확 풀어 다시 매운탕을 끓였다. 역시 고춧가루를 뿌린 매운탕은 그들의 입맛에 딱 맞았다. 두 형제는 한마디도 안하고 화끈하고 뜨거운 국물에 땀을 뻘뻘 흘리며 앉은 자리에서 공기 두 개씩을 순식간에 비웠다. 세 번째 공기를 먹다가 문득 대협이 고개를 들고 동생을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배가 채워지고 나자 아까의 일에 대해 궁금해진 것이다. " 승아, 아까 그 여자 이름이 뭐냐?" " 유체리." 대승은 형을 한번 노려보고는 마지못해 대답해 주었다. 대협은 입안으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려 보았다. 유체리. 그녀의 이미지에 걸맞는 이름이다. 상큼하고 체리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운, 깨물면 향기로운 내음 풍기는 즙이 입안 가득 고이는 체리. 그녀의 부드럽고 하얀 살결이 떠오르자 다시 그의 몸이 꼿꼿해지는 것 같았다. " 체리씨 하고는 무슨 관계지? 아까 말한대로 단순한 직장 동료인 거야?" 다소 조바심섞인 음성으로 묻는 대협의 표정이 진지하다. 대승은 형은 쳐다보지도 않고 세 번째 공기의 밥을 묵묵히 입으로 넣었다. 자신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는 동생을 채근하듯 대협의 숟가락이 매운탕을 뜨려는 대승의 숟가락을 눌렀다. 그제서야 형에게 시선을 돌린 대승은 씹듯이 한마디 던졌다. " 말하고 싶지 않아."


대협은 초조해졌다. 아까 그를 방에서 몰아낸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으나 무뚝뚝한 얼굴로 밥만 먹는 동생에게서 한마디라도 캐내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방에서 보았던 대승의 눈빛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분명 그는 체리에 대해 보통 이상의 감정을 갖고 있었다. 아니, 사랑에 빠졌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아직 그의 동생은 인정하지 않을 지 모르나 대협의 눈에는 거의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28 년을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느껴본 감정을 그냥 묻어버리기엔 그의 가슴이 너무 뜨거웠다. 어려서부터 그 많은 여자들을 사귀면서도 사실 보는 것만으로도 설레이는 감정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둘이서 하는 격렬한 온몸운동을 하지 않으면서 가슴이 그렇게 쿵쾅거리는 것도 그에게는 낯선 경험이었다. 그의 앞에 누워 있는 체리를 본 순간 천사라고 생각했을만큼 그녀에 대한 첫인상은 강렬했고 그의 가슴속에 문신을 새겨놓은 듯 각인되었다. 동생 뿐만이 아니라 뜨거운 가슴을 가진 남자라면 누구라도 그녀에게 빠져드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대협은 그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동생이 좋아하는 여자를 뺏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의 마음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 체리씨한테 첫눈에 반했다. 그녀에게 데쉬할거야." 대승은 막 입에 넣으려던 밥숟갈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그가 염려했던 대로 형이 그녀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니, 관심이상이었다. 첫눈에 반했다니 형의 성격을 잘 아는 그로서는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 첫눈에 반한다는 게 말이 되? 어떻게 상대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랑에 빠진다고 할 수 있냐구." " 말이 되지. 너같이 꽉 막히고 답답한 녀석은 알 수 없겠지만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느낌이 통하면 얼마든지 사랑에 빠질 수 있어. 난 체리씨를 처음 본 순간 내가 사랑하게 될 여자라는 걸 느꼈다구." 대승은 불안해졌다. 형이 적극적으로 나오면 돌부처 같은 여자도 넘어오지 않을 수 없는데 체리같이 정열적인 여자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 내가 좋아하는 여자야. 신경 끊어 줬음 좋겠어." 대협은 움찔 했다. 동생의 눈동자가 폭발 직전의 고요를 담고 빛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접근하면 가만 있지 않겠다는 듯이. 그러나 대협도 그리 녹녹한 인물은 아니었다. " 체리씨 마음도 확실히 니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 그렇다면 나도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내 생각엔 아직은 확실히 네 여자는 아닌 것 같은데." 대승은 대꾸할 수가 없었다. 형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사랑은 아니었다.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체리는


아직 사랑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아이같은 소유욕과 정복욕이 강할 뿐이다. 그리고 그의 기준에서 그녀가 그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결혼을 했을 경우였다. 그가 체리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결혼이라면... 아직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그녀를 마음속에 들이지 않은 상태였다. " 나도 솔직히 니가 좋아하는 여자한테 다가서고 싶은 마음은 없어. 우린 형제고 난 여자보다는 내 동생이 더 소중하니까. 하지만 그녀와 너는 어울리지 않아.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고 있겠지? 너같이 진지하고 영원한 사랑을 부르짖는 남자에게는 잘 맞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어. 그녀는 나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것 같던데. 널 버릴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괜찮은 거야?" " 형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상관없어. 사랑에 대해 진지하고 신중한 자세를 갖고 있지 않다면 내가 갖게 해 주겠어. 그리고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도 내가 믿게 만들거야. 일단 그녀를 좋아한다는 내 마음을 알았으니 형이 방해한다 해도 물러서지 않아." 대승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형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그렇게 불꽃이 튀기는 듯한 눈길을 교환했다. 귀여운 남자 10 친해지기 1 단계 함께 밥을 먹는다. 체리는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방송국 근처의 시장 안으로 들어가는 대승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보다가 성큼성큼 저만치 앞서서 걸어가는 그를 따라잡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다리도 긴 편이었으나 그녀보다도 머리 하나가 더 큰 건장한 청년의 빠른 걸음을 뒤쫓으려니 힘에 부쳤다. 저 남자는 분명히 여자와 변변한 데이트 한번 못해봤을 거야.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여자야 따라오든 말든 혼자서 휘적휘적 가버리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체리는 속으로 툴툴거리면서 간신히 그와 보조를 맞추었다. " 지금 도대체 어디 가는 거에요? 밥 먹자면서요." " 따라와요. 좋은 곳으로 안내할 테니." 불만섞인 그녀의 물음에 최대한 간단히 대답한 그는 계속해서 시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시장 특유의 사람냄새가 물씬 풍겼다. 좁은 길 양 옆으로 과일가게, 생선가게, 야채가게, 쌀집, 방앗간 등등의 가게들이 죽 늘어서 있고 물건 하나라도 더 팔려는


장사꾼들이 손님을 부르고 있다. 찬거리를 사러 가끔 오는 곳이지만 그와 함께 있으니 왠지 그녀 혼자 왔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얼마나 들어갔을까. 그들은 장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매운탕 집 앞에 서 있었다. 그다지 큰 식당은 아니었으나 손님이 꽤 많은 듯 시끌시끌했다. 그는 식당 문을 드르륵 열더니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안쪽은 주인이 꽤 깔끔한 사람인 듯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으며 테이블과 의자도 깨끗했다. " 여기 가끔 오는데 매운탕을 참 맛있게 끓이거든요. 한번 먹어 보면 쉽사리 잊을 수 없는 맛이죠." 식당 한쪽 구석의 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싱긋 웃으며 던진 말이다. 체리는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남자 같았으면 마음에 드는 여자와 처음으로 데이트 하는 자리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근사한 곳으로 데려가 호감을 사려고 했을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시장통에 있는 매운탕 집이라...... 그의 멋적어 하는 듯한 웃음에 소탈함이 느껴졌다. 비좁고 사람 가득한 구식 식당 안에서 조그마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그와 앉아 있는 게 체리에게는 무척 편안했다. " 대승씨. 그런데 왜 나한테 아직까지 꼬박꼬박 존대말 하는 거에요? 연인들끼리 정중하게 존대말 쓰는 거 어색하지 않아요?" 체리가 대승의 집에서 자고 간 뒤로, 십여일 정도가 지났지만 그들은 제대로 된 데이트 한번 못했으며 여전히 존대말 써가며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어색하게 지냈던 거였다. 절대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잘못이 있다면 친구가 되자는 자신의 말을 너무도 잘 지킨 대승의 페이스에 말려 들어간 것 뿐. 그녀를 좋아한다고 으스러지게 껴안고 키스했던 일은 다 잊어버렸는지 그는 손목 한번 잡아보지도 않고 밋밋하게 그녀를 대했다. 더구나 요새는 월말에 있을 부산 공개방송 때문에 눈코 뜰새 없이 바빴기 때문에 데이트는커녕 방송국에서도 단둘이 있을 시간이 거의 없었다. 다행히 10 월 초까지 급한 일은 다 처리했기 때문에 비로소 데이트 할 시간이 났던 것이다. 그 동안에는 체리가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너무 기특할 만큼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다. 평소 스타일이라면 그가 친구가 되자고 하든 말든 하고 싶은 대로 다가갔겠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말을 존중해 주고 싶었다. 남자를 사귈 때도 제멋대로 관계를 끌고 나갔던 그녀가 그 정도로 양보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사건이었다. 그만큼 대승을 다른 남자들과 다르게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대승은 그녀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아는지 모르는지 별로 고마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존대말 섞인 어투도 멀게만 느껴져 그녀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 어색하다는 거 알고는 있는데, 여동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자한테 반말 해본 경험이 거의 없어서 생각처럼 편하게 말이 나오지를 않네요." 대승은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때 푸근하게 생긴 주인 아주머니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 오매, 총각 왔는가. 오랜만이구만. 자주자주 좀 들르제." " 하하, 요새 좀 바빠서요." 그는 주인 아주머니와 꽤 친한 듯 했다. 아주머니는 군대간 아들이 휴가라도 나온 듯 그를 반기며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 그라믄, 매운탕 묵을랑가? 좀 전에 팔딱팔딱 뛰는 놈으로 여러 마리 가져다 놨는디." " 네. 싱싱한 놈으로 하나 끓여주세요. 고춧가루 많이 뿌려서요." 고춧가루? 체리는 지난번에 대승의 집에서 매운탕 끓일 때 고춧가루를 넣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았으나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 매운탕에 고춧가루 많이 넣은 거 좋아하세요?" 체리가 조심스럽게 묻자 대승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열심히 대답한다. " 그럼요. 얼큰한 국물맛을 좋아합니다. 저 매운탕이라면 껌벅 가거든요. 지난번에 체리씨가 끓여준 매운탕도 잘 먹었습니다. 솜씨 좋으시던데요?" 체리의 입꼬리가 치켜올라가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칭찬에 속으로 으쓱해 하면서도 계속되는 존대말이 신경에 거슬렸다. " 대승씨. 이제 말 놓으셔도 되요. 어차피 제가 나이도 더 어리고, 우리 사이가 남처럼 존대해야 할 만큼 먼 게 아니잖아요?" 체리가 이렇게까지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승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말을 낮추었다. " 그래... 그럼 이제부터는 말 놓을게. 좀 어색하긴 하지만." " 어색하긴, 놓으니까 좋잖아. 이렇게 편한걸." 대승의 머쓱해 하던 표정이 순간 놀람과 황당함을 보여주는 듯 이상하게 변했다가 다시 굳어졌다. " 체리씨는 왜 반말하는 거지?" " 왜...? 왜라니. 대승씨만 반말해야 된다는 법이 어딨어?" " 그야 당연히 내가 나이가 많잖아." 체리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겨우 두 살 차이밖에 안 나면서 나이를 들먹이다니 말도 안되는 처사였다.


" 대승씨 이렇게 꽉 막힌 사람이었어?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겨우 두 살 차이난다고 존대말해야 해?" 대승은 기가 막히는 듯 탁자를 두들겨 가며 소리치는 체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그녀가 어느 정도 진정하는 기미를 보이자 침착하게 말했다. " 단 몇 초 차이로 태어났어도 형 , 동생을 가리는데 2 년씩이나 차이가 나면 엄청난 거 아냐? 그것만으로도 존대해야할 이유는 충분한 것 같은데." 대승은 할 테면 해보라는 듯 이마에 힘을 주고 도전적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한동안 그를 노려보던 체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들은 별 것 아닌 일로도 쓸데없이 목에 힘주고 자존심을 세우려는 기질이 있어서 골치

아팠다.

그녀는 어렵게

쌓은

좋은

관계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서 일단은 양보하기로 했다. 그래. 속 좋은 내가 참아야지. " 알았어......요." 남자들의 또 한가지 특성. 단순함. 그녀가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는 듯 하자 순식간에 굳어졌던 인상을 활짝 편다. 체리는 픽 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머니가 커다란 냄비 가득 얼큰한 냄새를 풍기는 매운탕을 내 오셨다. 매운탕을 그리 자주 먹지 않는 그녀의 코에도 정말 군침돌게 맛있는 냄새가 났다. " 자. 배고프제? 언능 묵어." 아주머니가 맛깔나게 보이는 반찬들과 밥, 매운탕을 탁자위에 늘어놓고 가시자 대승은 침을 꿀꺽 삼키며 수저를 들었다. 잠시 후, 체리는 또 한번 놀라서 입을 딱 벌려야 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국과 밥을 허겁지겁 퍼 먹는 모습이 일주일은 굶은 사람처럼 보였다. 심지어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가 밥을 먹는지 물을 먹는지 통 관심도 없고 오로지 탁자 위의 음식들에만 온 신경이 가 있는 것 같다. 체리는 매운탕을 한 수저 떠서 맛을 보았다. 맛은 그가 말한대로 한번 먹으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맛있고 얼큰한 게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그렇지만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앞에 앉아있는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음식만 보인다는 건 심각한 문제였다. 밥을 먹는 20 여분 동안 그가 한 말이라고는, " 아줌마, 여기 공기 하나 더 주세요." 이말 한 마디 뿐이었다. 그가 공기밥 두 그릇을 순식간에 쓱싹 치우고 세 번째 그릇을 먹기 시작하자 질린 표정을 짓고 있던 체리는 혼자서 킥킥대며 웃고 말았다. 매워서 화끈거리는지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서 밥그릇을 싹싹 긁어먹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귀엽게 보였다.


" 대승씨, 누가 안 뺏아 먹어요. 천천히 먹어도 되요." 그녀가 웃음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화들짝 놀란 대승이 고개를 쳐들었다. " 잘못하면 체하겠어. 한마디도 안 하고 꾸역꾸역 먹기만 하면 어떡해요?" 대승은 멋적은 듯이 공기 바닥을 긁던 수저를 내려놓았다. " 원래 매운탕 먹을 때는 말 안해." " 풋~ 왜요?" " 우리 집 식구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거든. 한번 끓이면 삼형제와 아버지, 어머니까지 달려들어 금방 없어져. 어릴 때부터 조금이라도 더 많이 먹으려고 빨리빨리 먹다 보니까 습관이 들었나봐. 식구들끼리 다른 음식 먹을 때는 안 그러는데, 매운탕 먹을 때는 아무도 말 안해." 체리는 기어이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다섯 식구가 빙 둘러앉아 조금이라도 늦게 먹으면 매운탕이 바닥날세라 눈치보며 한 마디 말도 없이 허겁지겁 먹고 있는 광경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큰 소리로 웃어대는 체리 때문에 무안해진 대승은 다른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그녀를 끌고 오피스텔 근처 공원까지 왔을 때도 여전히 그녀는 쿡쿡대며 웃고 있었다. 친해지기 2 단계 서로의 가족에 대해서 안다. 그들은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원에는 저녁 식사 후 바람 쐬러 나온 듯한 가족들과 연인들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서도 잠시 킥킥대던 체리가 대승이 앉아있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앉았다. 체리는 벤치 등받이에 팔을 쭉 펴서 얹어놓고 있는 그의 겨드랑이 쪽으로 파고들어 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그가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지만 다행히 피하지는 않았다. " 대승씨 식구들 참 재미있는 사람들인 것 같아요. 얘기 좀 해줘요. 어떤 분들인지." " 글쎄. 좀 특이하긴 하지. 그치만 굳이 얘기할 것 까지는..." 체리는 어물쩡 말을 돌리려는 대승을 똑바로 쳐다보며 딱 부러지게 얘기한다. " 서로의 성장 배경, 그러니까 가족에 대해 아는 것도 친해지는 과정에 필수적인 것 아닌가요? 친한 친구라면 친구의 가족에 대해서 잘 알지 않을까요?" 대승은 체리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관심을 가질까봐 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 그래. 아까 말한 것 처럼 우리 식구는 다섯명이야. 부모님, 형 둘에 나까지. 아버지는 농구 선수셨고 은퇴한 뒤로는 스포츠용품점을 운영하고 계시지. 어머니는 주부시고, 큰형은 회계사야. 지금 결혼해서 아들이 하나 있고, 둘째형은 저번에 봤지? 건설회사 다니다가 현재는 그만두고 해외여행 갈 준비를 하고 있지." 대승이 마치 소개서 읊듯 주루룩 이야기하자 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대승의 허벅다리에 손가락으로 의미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대승은 그녀의 손이 다리에서 왔다갔다 하는 것이 신경쓰였지만 잠자코 있었다. " 대협 씨에 관한 거라면, 좀 들었어요. 건설회사 팀장까지 진급했다가 그만 뒀다면서요? 체리는 대승이 갑자기 그녀를 확 밀쳐내는 바람에 벤치에서 넘어질 뻔 했다. " 앗! 왜 그래요?" " 형에 대해서 어디서 들은 거야? 혹시 형이 찾아왔었나?" 체리는 갑자기 화를 내는 대승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 어제 저녁때쯤 방송국에 왔었어요. 같이 저녁먹고, 잠깐 얘기하다가 헤어졌구요." 대승에게는 별일 아닌 듯 이야기했지만 어제 대협이 찾아왔던 것은 그녀에겐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퇴근해서 막 방송국을 나오는데 방송국 앞 도로 가로수에 삐딱하게 기대어 서 있는 대협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었다. 형제라 생김이 닮아있기는 했으나 동물에 비유하자면 대승은 공, 대협은 범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승과 비슷한 키였지만 다소 말라보이는 날렵한 몸에 딱 맞는 청바지와 흰색 니트를 걸치고 씩 웃는 모습에 그녀의 가슴이 떨렸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대승인데 왜 그의 형에게도 마음이 끌리는지 몰랐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매력적인 남자가 관심을 가져 준다면 넘어가지 않을 여자가 없을 거라는 건 당연했다. 그렇지만 체리는 대승의 매력적인 형에게 끌리기는 했으나 동시에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들 형제는 밤과 낮처럼 그렇게 확연히 틀렸다. 대승이 진지하고 보수적인 데 반해 대협은 진지한 구석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고 꽉 막혀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여자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완벽한 매너를 보여줬으며 세상에 여자라고는 오직 그녀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끔 행동했다. 그렇지만 체리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다는 대협의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하지만 껄끄럽고 당황스러웠던 첫 만남의 기억에 왠지 찝찝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 그의 마음을 거절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헤어졌지만 그녀 마음 속으로는 그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이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 혹시나 형이 찾아오더라도 될 수 있으면 만나지 말았으면 좋겠어." 체리는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의 눈을 들여다 보아도 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질투하는 건가? 요리조리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그녀는 이어지는 대승의 행동에 생각 자체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커다란 눈이 똑바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남자의 눈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쌍꺼풀 없는 둥그렇고 시원스럽게 뻗은 눈매가 흥분인지 설레임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까맣고 깨끗한 눈동자는 그녀의 허락을 구하듯 조심스럽게 묻고 있었다. 키스하고 싶다고. 키스해도 되겠냐고. 그녀는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에 풀이라도 칠해 놓은 듯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서 그녀 또한 그를 원한다는 허락의 뜻을 읽었는지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굳어져 있던 대승의 어깨에서 힘이 빠지며 안도하는 모습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체리는 두근두근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키스를 경험해 봤지만 이렇게 떨린 적은 처음이었다. 갖기 힘든 남자여서일까. 아니면 그에게 갖고 있는 그녀가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그 감정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정희가 말했었던 그 진정한 사랑에 가까운 감정이기 때문일까. 그녀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며 살짝 열렸다. 그의 입술이 서로의 숨결이 섞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주변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말소리,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와 개짖는 소리, 그들의 옆을 지나가며 킥킥거리며 웃는 여학생들의 소리도 모두 꿈결에 들리는 소리인 듯 멀리서 들려왔다. 그의 숨결에서는 편안함과 안전함, 그리고 포근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정체모를 부끄러움도. 체리는 그녀가 남자 앞에서 얼굴을 붉힌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감정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이성에 눈을 떴을 때도 이렇게 수줍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당당하게 사랑을 요구했었고 담담하게 받아들였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체리는 다가온 대승의 도톰하고 섹시한 입술을 보면서 경외감과도 비슷한 사랑의 감정에 흠뻑 취했다. " 눈감아야지." 그는 멍하게 그의 입술을 바라보는 체리에게 나직하게 속삭이고는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대었다. 너무도 부드럽고 눈물이 나올 만큼 사랑스러웠다. 살짝 닿아 있는 입술의 온기와 그의 숨결만이 그들이 입맞춤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 주었다. 그는 입술을 그녀의


입 주위로 옮기면서 부드럽게 비볐다. 그러다 입술을 떼고는 감은 그녀의 두 눈두덩 위로 감미로운 한숨을 내쉬며 스치듯 입맞추었다. 그녀의 예민한 눈동자가 감겨진 눈꺼풀 사이로 그의 입술을 느끼고 파르르 떨렸다. 다시 그녀의 입술로 돌아온 그는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입술을 혀로 어루만졌다. 체리는 갑자기 목구멍으로 뭔가 치밀어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 목이 메었다. 소중하게 다뤄지는 느낌. 깨질 듯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손길, 정말 사랑받고 있는 듯 했다. 그녀는 살짝 입술을 벌렸다.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새어 나갔나 보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은 낯설은 신음소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의 혀가 입술 주위를 맴돌다 살며시 입 안쪽의 부드러운 살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가지런한 이도 훑듯이 스쳐지나갔다. 두 사람의 혀가 부딪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만족스런 신음 소리를 냈다. 운동하고 난 후처럼 숨이 가빠오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누르며 좀더 깊이 침입해 들어왔다. 서로의 혀가 얽혀있는 느낌. 마치 진정으로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소설에서 보았던 것처럼 사랑을 나누다 절정에 올랐을 때 머릿속이 하얗게 비고 몽롱한 기분. 체리는 마주한 입술에서, 부드럽게 얽혀 있는 혀에서 감정의 극치를 느꼈다. 그녀가 다시 현실로 돌아온 건 그의 입술이 떨어지고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공원의 소음이 다시 그녀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대승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상기된 표정으로 두 눈을 빛내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 내가 정말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그 여자와의 첫키스를 이렇게 하고 싶었어." 체리는 아무말도 할 수 가 없었다. 가슴이 백대승이라는 남자에 대한 사랑으로 꽉 차올라 있었으므로. " 내 마음을 담아서 그녀를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겠다는 마음으로." 대승은 체리의 손을 잡아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심장도 주체할 수 없이 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그들이 나눈 것은 단순한 키스가 아니었다. 그것은, " 영혼의 교감이야. 키스라는 건. 내 영혼...... 느껴져?" 체리는 두 눈 가득 사랑이 녹아 있는 눈물을 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투명한 이슬이 한 방울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귀여운 남자 11 친해지기 3 단계 서로의 취미를 공유한다.


체리는 대승이 말했던 '친해지기'의 의미를 점점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에게 반대되는 성을 가진 친구란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남자를 딱 세 가지로 분류했는데 하나는 가족, 하나는 애인, 그리고 나머지는 가족과 애인을 제외한 세상 남자들. 이렇게 세 부류로 나누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한 가지가 더 추가되었다. 친구. 남자와 육체적 친밀함이 없이도 가까워 질 수 있다는 것. 그녀에게는 신기하기만 했다. 대승에 대해서 점점 알아갈수록 그의 인간적인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겉보기에는 무뚝뚝하고 거만해 보이지만 단 30 분만 그와 이야기를 해 보면 온후하고 순수한, 뚝배기 같은 그의 인간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편안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처럼 어떻게 보일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에게는 그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었고 그도 마찬가지로 그 자신을 가식없이 내보여주었다. 그리고 체리는 그의 성격도 마음에 들었다. 가끔씩 남자답고 터프해 보이기도 하고, 그와는 반대로 이것저것 곰살맞게 챙겨주는 따스함도 보여준다. 언제나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공평했으며 무슨 일을 하든지 덜렁거리는 그녀와 달리 침착했다. 단 한 가지만 빼면. 답답함을 넘어서 짜증스럽기까지 한 순결관. 그는 정말 보수적이었다. 다행인 것은 자신은 할 것 다 해보고 여자에게만 순결을 요구하는 위선적인 대부분의 남자들과는 좀 달라서 상대방 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더 엄격하게 선을 긋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 난 남자든 여자든 순결해야 한다고 생각해.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고 진정으로 일생을 바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될 때까지는 몸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난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다면 내 생각을 강요하지는 않아. 내가 사랑하게 될 여자가 자신의 선택으로 그랬든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랬든 간에 순결하지 않아도 해도 그걸 나쁘게 볼 생각은 없어. 단지 순결해야 한다는 건 내 기준이고 내 생각이니까 내 쪽에서 진지하게 지킬 뿐이지." 그녀로서는 이해가 될 것도 같았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이 점 말고는 대체로 백대승이라는 남자가 그녀와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좋아하는 것들 중 많은 것들이 그녀가 좋아하는 것과 일치했으며 거의 모든 종류의 운동을 좋아하고 특히 수영과 스쿼시를 즐긴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체리는 그가 수영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바로 수영장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정해버렸다. 운동도 하고, 그가 그렇게도 꼭꼭 숨겨두고 보여주지 않던 그의 몸매도 볼 수 있는 일석 이조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황금같은 일요일 아침의 단잠도 포기하고 일찌감치 오피스텔 근처의 스포츠 센타에 나와 있는 것이다. 체리는 수영장 벽면에 달린 커다란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오전


8 시. 풀에는 아직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녀는 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아무생각 없이 발을 텀벙거리며 대승을 기다렸다. 기대감에 전날 저녁 뒤숭숭한 꿈까지 꾸며 잠을 설쳤던지라 약간 멍한 상태였다. 그녀가 밀려드는 잠을 쫓으려 고개를 흔드는데 풀장 끝쪽에서 다이빙을 하는 남자가 보였다. 몸매 정말 멋진데? 멀리서 봐도 미끈한 몸이 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물 속으로 마찰없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입수한 그 남자는 투명하게 맑은 물을 가르며 수영장 바닥으로 미끄러졌다가 이내 물 밖으로 치솟아 오르며 두 팔을 쫙 폈다. 버터플라이! 그녀는 빨려들 듯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접영으로 물살을 가르는 그 남자는 나비라기 보다 차라리 한 마리 독수리를 연상시켰다. 한번 한번 물을 치며 팔젓기를 할 때마다 어깨와 팔의 근육이 불끈불끈 솟아올랐으며 희뿌연 물보라가 사방으로 뿌려졌다. 또한 머리가 잠시 물 속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슬쩍 보이는 단단한 엉덩이, 유연하면서도 강한 허리의 연동운동은 그녀의 숨을 붙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는 순식간에 풀의 다른 쪽 끝까지 다다라서 물 밖으로 솟아올랐다. 물방울이 거대한 몸으로 흘러내리며 반짝였다. 그녀가 그 남자를 보며 침을 꿀꺽 삼키고 있는데 물안경을 머리로 밀어올리며 그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시원스런 이마. 뚜렷한 이목구비, 커다란 눈과 코. 그녀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가 그녀 앞에 서서 씨익 웃자 체리는 다시 한 번 침을 꿀꺽 삼켰다. 온 몸이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단단한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체리는 속으로 그 전에 대협의 몸을 보고 가장 아름다웠다고 했던 말을 더듬더듬 취소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덩치 큰 남자를 보기 전에는 대협이 가장 완벽하다고 생각했으나 그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떡 벌어진 어깨 하며 가무잡잡한 섹시한 피부, 배를 온통 차지하고 깊이 새겨져 있는 임금 왕( 王 ) 자의 근육과 가슴팍에 부드럽게 물결치는 까만 털은 그녀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의 좁은 엉덩이에 딱 맞는 삼각 수영팬티가 그의 몸을 꽉 조여 욕망의 근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어 숨이 막혔으며 수영복 아래로 보이는 길고 탄탄한 다리도 근육으로 뭉쳐져 있었다. 이 남자는 인간성 좋은 것 뿐만이 아니라 몸매도 좋단 말야. 체리는 환상적인 그의 몸매에 그저 눈만 깜박깜박 하다가 문득 생각난 듯 몸을 일으켰다. " 언제 온 거에요? 들어오는 거 못 봤는데." " 그거야, 사람이 오는지 가는지 관심도 없이 꾸벅꾸벅 졸고 있으니까 그렇지. 어제 밤에 늦게 잔 거야? 물 속에 발을 담그고도 졸다니."


대승은 즐거운 듯 체리의 이마를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이른 아침의 수영으로 그의 기분은 한껏 고조된 상태였다. 수영장에 들어왔을 때 풀 가장자리에서 발을 물에 담근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던 그녀를 발견하고서 깨우고 싶지 않아 몇 번 풀을 왔다갔다 했는데도 잠에서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 흔들어 깨우려고 다가가던 그는 이미 그녀가 깨어 있다는 걸 알고 싱긋 웃음을 지었다. 그가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녀는 얌전한 파란색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성격으로 보아서는 노골적으로 조그마한 흰색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와야 정상인데 의외로 그다지 노출이 심하지 않은 수영복을 입은 게 놀라웠다. 그렇지만 제 2 의 피부처럼 그녀의 굴곡진 몸에 딱 달라붙은 모습이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뭘 입어도 섹시한 여자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티 하나 없이 깨끗했으며 작은 활처럼 휘어진 또렷한 눈썹과 동그란 눈, 붉은빛이 감도는 입술은 그를 유혹하는 금단의 열매였다. 그는 애써 체리의 몸에서 눈길을 돌렸다. 계속 보고 있다가는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승은 근 한달간 그녀를 주의깊게 관찰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체리는 처음의 인상과는 많이 달랐다. 선입관은 말 그대로 선입관일 뿐이었다. 머릿속은 깨끗하고 외모에만 신경쓰는 여자 같아 보였으나 그가 아는 만큼이나 시사적 문제에 대해서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 답게 여러 가지 분야에 대해 상식 또한 풍부했다. 그리고 깔끔 떨 것처럼 느껴졌었지만 의외로 수더분한 구석이 있어 그가 지저분한 시장 안의 허름한 식당으로 데려가도 전혀 싫어하는 기색 없이 따라왔으며 식성도 그와 비슷해 곱창이나 산낙지 같은 것도 질색하지 않고 잘 먹는 게 특히 마음에 들었다. " 수영 꽤 잘하네요. 오랫동안 꾸준히 한 것 같아요." " 응. 초등학교 4 학년때부터 했으니까 굉장히 오래됐지? 수영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운동이라서 요새도 일주일에 두세번은 꼭 다니거든." 체리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동자를 한번 굴리더니 대승에게 애교 부리듯 말을 꺼냈다. " 대승씨. 우리 누가 빠른지 경주 한번 해 볼래요? 자유형으로 해요. 그리고 지는 사람이 이긴 사람 부탁 들어주기. 어때요?" " 글세? 당연히 내가 이길텐데. 지는 경기를 굳이 하고 싶은 거야?" 대승은 스스로 국가 대표 선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기를 하자는 체리의 말이 우습게만 들렸다. 그러나 체리는 전혀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 한다. "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죠."


그들은 풀 안에 섰다. 체리가 다이빙은 익숙치 않다고 물 속에서 출발하자고 했기 때문이다. " 하나, 둘, 셋, 출발!" 체리가 출발 신호를 외치자 대승은 바로 출발했다. 그녀가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 큰소리친 것 같아 방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있는 힘껏 팔을 돌렸다. 그러나 체리는 출발하지 않고 풀 안을 나누는 긴 레일을 풀었다. 그녀가 레일을 대승이 헤엄치고 있는 쪽으로 밀어내자 그는 이내 길다란 레일에 부딪혀 걸리적거리는 레일 덕에 계속 나아갈 수가 없었다. 체리는 싱긋 웃고는 특유의 가벼운 몸놀림으로 풀의 반대쪽 끝까지 우아하게 건너갔다. 도중에 방해를 받은 대승은 그녀와 간발의 차이로 도착했으나 이미 여우같은 그녀가 승리의 미소를 지은 뒤였다. " 거 봐요. 누가 이길지는 두고봐야 알 거라고 했죠?" 숨을 고르며 그녀가 말했다. 대승은 경주에서 졌지만 졌다는 억울함 보다는 깜찍하게 꾀를 쓴 그녀를 숨도 못 쉬게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 치밀어올랐다. 체리는 뻐기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요구사항을 말했다. " 내가 원하는 건, 아주 소박하고 간단한 부탁이에요. 키스해줘요. 많이도 안 바라고 딱 한번만." " 여기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체리를 보고 대승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어버리고 말았다. 사람들 왔다갔다하는 풀장에서 키스해 달라니 여간 대담하지 않고서야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 미쳤어? 사람들 다 보는데 어떻게......" " 그러니까, 아무도 못 보게 물속에서 하면 되잖아요." 체리는 손가락으로 그의 입을 막으며 간단히 그의 말을 잘랐다. " 무슨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물속에서 어떻게 키스를 해? 그리고 여기 물 맑아서 위에서 보면 다 보여. 어? 뭐하는 거야?" 대승이 채 하고싶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체리는 풀장 한쪽 구석으로 그를 끌고 가더니 다짜고짜 그의 목을 잡고 물 속으로 끌어들였다. 사실 힘으로 치자면 얼마든지 그녀를 뿌리칠 수 있었으나 워낙 당황한 상태라 그냥 그녀가 이끄는 대로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차가운 물이 눈동자에 와 닿았다. 미처 물안경 쓸 새도 없이 커다랗게 뜬 눈에 물이 닿자 생소한 느낌에 움츠러들었으나 투명한 물속에서 체리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장난꾸러기 같은 그녀의 표정에 그런 느낌은 지워지고 말았다. 그녀가 눈을 살포시 감으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대승은 물 속이라는 걸 잊고 하지 말라고 소리치려 입을 열었으나 입을 열자마자


수영장의 소독약 섞인 물이 밀려들어오는 바람에 한 바가지나 물을 먹고 말았다. 체리는 대승의 목을 확 잡아끌어 입술을 댔다. 그는 차가운 물 속에서 자신의 입술에 닿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이상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주위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물보라와 물결이 느껴졌지만 물 속에서는 아주 조용했으며 마치 둘 만의 세계에 푹 빠진 느낌이었다. 그의 입 속으로 부드러운 그녀의 온기가 전해졌다. 수영장의 차가운 물과 함께 그녀가 만들어내는 하얀 공기방울까지 뒤섞여 그의 입안을 간지럽혔다. 점점 숨이 가빠왔다. 그러나 그녀는 대승이 한 바가지의 물을 더 먹은 다음에야 겨우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었다. " 켁! 켁!" 물 밖으로 솟아오른 대승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기침을 해 댔다. 체리는 그런 그를 보며 쿡쿡거리더니 이내 신나게 웃어젖혔다. 물 먹어서 기침해대는 꼴이 우스워 보인 것이다. 대승은 체리를 한번 노려보고는 홱 등을 돌려 풀 밖으로 나갔다. 풀 밖에 놓여진 풀라스틱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으려니 체리가 쪼르르 따라와서 옆에 앉는다. " 삐졌어요? 아이...... 그런 것 갖고 삐지긴. 내맘대로 달려들어서 미안해요. 그치만 그런 경험.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라구요. 신선하고, 독특한 느낌 들지 않았어요? 난 너무 좋았는데."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늘어놓는 그녀의 모습은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었다. " 삐진 거 아냐. 나, 물 좀 먹은 거 가지고 기분나빠할 만큼 속 좁은 놈 아니야." 대승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의 말에 마음이 놓였는지 체리도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편안히 앉았다. 한동안 가만 있던 대승이 피식 웃으며 말을 꺼냈다. " 그런데 말야. 체리씨, 당신의 그 뻔뻔스러움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아니, 대담하다고 해야 하나? 이성에 대해 끌리는 감정을 솔직하고 거침없이 표현하는 건 좋지만 나한테는 좀 당황스럽기도 해. 나 스스로가 구애는 남자가 하는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체리씨가 나에게 하는 말, 행동, 이런 것들이 솔직히 좀 낯설고 당혹스러워. 뭐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고." " 그래요? 내가 대승씨한테 답답한 게 그거에요. 그 구시대적 사고방식.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여자들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으면 해야 한다구요. 마음에 드는 멋진

남자를

발견하면

여자도

낚아챌

있다고

생각해요.

여자들은

남자가

선택해주기를 한없이 기다리면서 눈물이나 짜고 연약한 척 주저앉아 있어야 해요? 용감하게 원하는 걸 쟁취할 수 있는 여자가 이상한 시선을 받지 않는 사회풍토가 만들어져야 되요.


난 어렸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서 그런지 남자들이 그런 한심한 소리를 해 대면 화부터 나요." 대승은 흥분으로 뺨을 붉히며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하고 있는 체리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는 그가 알아왔던 다른 여자들과는 다른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확실히 청순 가련형으로 생긴 외모를 갖고 있긴 했지만 그녀의 내부에서는 힘이 넘쳐흘렀다. 항상 당당했고 용감했다. " 그런 개방적인 사고방식은 체리씨 집안 내력이로군." "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내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들이 우리 부모님이시니까. 그분들은 내가 언제 어디서든 당당하기를 바라세요. 내가 옳다고 생각한 일은 굽히지 말고 소신껏 하라고도 하셨구요. 여자라서, 여자니까 못하는 일은 없다고, 남자나 여자나 동등하다구요." 대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는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 가져왔던 여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크게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체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성적인

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에요.

대부분의

커플들이

남자의

의도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연애하고, 결혼까지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패턴을 꼭 따라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난 선택되기를 기다리고 싶지 않아요. 내가 선택하고 싶어요. 그리고 저희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감정과 욕망의 표현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해주셨어요." " 감정과 욕망의 표현......?" " 네. 좋아하는 감정, 사랑하는 감정, 사랑하는 사람을 갖고 싶다는 욕망, 섹스를 즐기고 싶다는 욕망이요." 대승은 그녀의 노골적인 말에 얼굴을 붉혔다. 그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혹시 누가 듣기라도 하는 듯 주위를 둘러보며 체리에게 목소리를 낮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 내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부모님한테 입학선물과 함께 뭘 받았는지 알아요?" 대승은 계속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 아름다운 성... 정도로 말하면 될까? 아무튼 그런 주제를 담고 있는 책과, 피임기구요. 그전에도 성교육 같은 건 평소에 대화하면서 하긴 했었지만 좀 더 정확하고 확실하게 알게 하고 싶으셨나봐요. 주시면서, 정말 내 마음에 맞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거든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하라고 하셨어요.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이 합쳐져야 진정한 사랑을 완성시킬 수 있다구요. 사실 성에 관한 문제...... 쉬쉬한다고 해서 모를 것도 아니고, 잘못하다 사고라도 나면 서로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상처 입게 되잖아요. 안 그래요?"


그녀는 알게 되면 알게 될 수록 놀라운 여자였다.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겉으로는 무조건 감추려고만 들면서도 속으로는 타락해 썩어빠진 사람들에 비하면 그런 식으로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건전해 보였다. " 그렇긴 하지. 그래도 난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 졌을 때 육체적인 관계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 같은 문제라도 서로의 시각이 다른 일은 부지기수니까, 이해해요. 대승씨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건 그만한 이유가 또 있겠죠.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지금까지 순결을 지켜 온 것, 그것도 혹시 집안 가풍인가요? 대협씨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대승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눈에 순결을 지키는 남자가 이상해 보일 게 당연했다. " 어느 정도는. 아버지가 그런 생각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영향을 많이 받은 편이지. 그리고 둘째형은 돌연변이야. 어머니도 어떻게 당신 뱃속에서 그런 아들이 나왔는지 신기해 하실 정도니까." 체리는 그의 말에 동조했다. 대협은 그녀가 보기엔 카사노바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 될 기질이 충분했다. 유들유들한 말솜씨에 환상적인 외모,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과 타고난 매너까지. " 대승씨 부모님 얘기좀 해줘요. 함자는 어떻게 되요? 그리고 어떻게 만나셨대요?" " 응. 아버지는 백 오자 철자 쓰시고, 어머니는 장 숙자 희자 쓰셔. 우리 아버지, 농구선수 하셨다는 얘기는 했었지? 한참 선수로 뛰셨던 시절에 어머니와 만나셨대. 어머니는 그때 아버지가 몸담고 있던 팀을 응원하는 치어리더셨고.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경기 끝나고 어머니를 처음 보았던 순간에 ' 아! 이 여자다!' 하는 느낌이 왔다고 그러시더군. 결국 한달만에 결혼식 올리고 지금까지 행복하게 사시고 있지." " 우와! 정말 낭만적이에요. 그러면 대승씨 어머니는 아버지의 팬이었군요." 그는 그의 말을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는 체리가 사랑스러웠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시간 가는 걸 잊을 정도로 즐거웠다. 그녀는 친구로서도, 연인으로서도 합격이었다. " 자, 이제 휴식시간 끝. 이번에는 누가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수영하는지 시합해 볼까? 이제 건전하게 지는 사람이 점심 사기로 하자구. 어때?" 벽시계가 10 시를 가리키는 것을 보고 대승이 체리를 잡아끌었다. 체리는 생긋 웃으며 그를 따라 풀 안으로 들어갔다. 귀여운 남자 12


부산 공개방송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1 년에 한번 있는 큰 행사라 전 스텝진들의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였다. 대승은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까지 삼일분의 방송분을 미리 녹음해 두고 서울에서의 준비상황을 꼼꼼히 체크한 후 퇴근해 짐을 챙겼다. MC 나 초대가수들은 공개방송날인 일요일에 오겠지만 그를 비롯한 스텝진들은 하루 전에 내려가서 이것저것 방송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준비를 해야 했다. 간단하게 몇 개의 옷가지와 속옷, 양말을 가방에 넣고 방정리를 하고 있는데 현관문이 덜컹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빼꼼히 열고 밖을 내다보자 형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대승은 별 생각 없이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다 고개를 홱 돌렸다. 대협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뭔가 몹시 안좋은 일이 있었던 것처럼 얼굴색이 어두웠다. 아니, 어두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흙빛으로 변한 게 나쁜 일이 생겨도 단단히 생긴 것 같았다. " 형, 무슨 일 있었어? 얼굴이 안 좋다. 누구랑 싸웠어?" 대협은 걱정스런 얼굴로 물어보는 동생을 한번 건성으로 쳐다보더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캔을 하나 꺼낸 대협은 단숨에 하나를 다 마셔 버리고 다시 냉장고 속의 맥주캔을 꺼내 들었다. 형에게서는 지금은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가 짙게 느껴졌다.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대승은 조용히 형을 남겨두고 다시 방으로 왔다. 방 정리를 다 하고 거실로 나와 보니 형이 소파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대승은 소파에 대협과 나란히 앉아 형이 갖다놓은 여러개의 맥주캔 중 하나를 집어들어 한 모금 쭉 들이켰다. 두 형제는 한 마디 말도 없이 각자의 생각에 잠겨들었다. 대승은 부산 공개방송 하는 데 날씨가 좋을지 걱정이 되었다. 해운대에서 야외 특설 무대를 설치해 방송을 하게 될 텐데 비가 오면 큰일이었다. 일기예보에서는 구름만 많이 낀다고 했으나 워낙에 변덕스러운 게 날씨라 언제 비가 쏟아질 지 알 수 없었다. 날씨 생각을 하는데 비가 오면 비맞으면서 해변가를 뛰어다닐 거라고 했던 체리의 말이 떠올랐다. 주룩주룩 쏟아지는 비속에 팔짝팔짝 뛰어다니는 스물 다섯살짜리 처녀라... 사람들이 다들 혀를 차며 측은하게 쳐다보겠지. 충분히 상상이 가는 모습이었다. 대승은 입가에 웃음이 삐질삐질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녀라면... 정신이 이상해 진대도 예뻐 보일 것이다. 적어도 그의 눈에는. 대승은 스스로의 생각에 놀라고 말았다. 벌써 그녀를 마음속에 들여놨던가. 그녀와 부딪히기 시작한지 이제 겨우 두달. 60 여일이라는 기간 동안 그녀가 그의 마음속에 어떤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다른 여자들이 몇년동안 애썼어도 이루지


못한 일을 그녀는 단 두달만에 해낸 것이다. 대승은 혼란스러워졌다. 고개를 저으며 체리에 대한 생각을 몰아내려 했다. 공개방송 때 초대가수를 설훈도와 엄정하로 결정한 것이 괜찮을 지 걱정되었다. 설훈도 말고 나훈하를 부를 게 나을 걸 그랬나? 설훈도가

훨씬

공개방송의

분위기에

맞다는

체리의

주장

때문에

그를

초대하기로

결정했었다. 체리씨 어머님이 설훈도 노래를 좋아하신다고 그랬지. 그 말을 하면서 체리가 언제 시간있으면 일산에 있는 그녀의 부모님을 같이 찾아 뵙자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가 놀라자 그녀는 인사드리러 가는 게 아니고 단순한 저녁 초대라고 그를 안심시켰었다. 아... 또 생각이 그녀 쪽으로 흐르는군. 대승은 한숨을 푹 쉬었다. 매일마다 보는 얼굴인데, 이상하게 집에 와서까지 그녀의 생각이 나다니 정말 모를 일이었다. 방송국에서 나와서도 저녁에 가끔 마주치기도 했다. 얼마 전에 안 사실이지만 체리는 인천에 사는 게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 9 층에 살고 있었다. 지난주던가. 저녁 때 잠깐 수퍼에 가려고 나가는데 9 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서고 체리가 츄리닝 차림으로 쓰레기 봉지를 들고 탔을 때 그를 보고 놀라던 얼굴이란, 사진기로 찍어 두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는 친구 집에 놀러와서 친구 부탁으로 쓰레기 버리러 간다고 둘러대었지만 이마에 거짓말이라고 씌여 있는 것처럼 명백하게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경비 아저씨가 " 아이구, 903 호 처녀 아닌가? 지난번에 담아 줬던 파김치는 정말 잘 먹었어. 시집가도 될 것 같네그려. 어쩌면 그렇게도 솜씨가 얌전한지..." 한마디 던지고 나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거짓말임을 시인했었다. 그리고 그 파김치는 그녀의 남동생 솜씨라고 했었지. 자기는 요리랑은 담 쌓고 산다고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던 체리의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던지 꼭 깨물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대승은 새로운 맥주캔을 땄다. 의식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려 해도 자꾸만 그의 의지를 배신하는 가슴은 그녀 쪽으로 기울었다. 그녀는 자신의 말이 옳다고 주장할 때의 그 자신만만한 표정이 특히 예뻤다. 눈은 똑바로 상대방의 눈을 들여다 보고 턱은 치켜올려서 조금도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를 뚜렷이 나타냈다. 그리고 그에게 뭔가 부탁을 할 때나 유혹하려 할 때의 새침하면서도 눈으로는 가늘에 주름잡으며 눈웃음을 치는 표정도 그는 좋아했다. 그런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면 심장이라도 꺼내 주고 싶을 정도로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 주고픈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동그랗고 맑은 눈은 표정이 만들어내지 못하는 다양한 감정을 보여주었다.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환희의 감격도 보여주었고, 그를 난처한 상황에 빠뜨리는 장난을 칠 때의 장난기 가득한 심술궂음도 보여주었으며 때때로 깊은 슬픔에 젖어 한없이 심연을 헤매는 가여운 소녀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어다보면,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의 눈은 모든 것을 다 담고 있었다. 뻐꾸기 시계가 열 시를 가리키며 울었다. 대승은 시계를 흘끗 보다가 옆자리에 앉아 있는 형을 보았다. 여전히 한 마디도 없이 우울한 표정으로 술을 마시고 있다. " 형, 어떤 여자가 하루종일 시도때도 없이 생각 난다면, 왜 그런 걸까?" 대승은 형을 보지 않은 채 나직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대협은 동생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오늘따라 각진 옆 얼굴이 조각상처럼 멋지게 보였다. 그는 동생에게 질투심이 느껴졌다. 마음 속으로 그러면 안된다고 마음을 다잡기는 하지만 가슴속의 악마가 대승을 미워하라고 부추기고있었다. 동생은 그가 원하는 여자의 마음을 가졌다. 같은 남자 입장에서 대승이 미웠다. 그의 머릿속에 그날 저녁 어렵게 만난 체리로부터 들은 말이 맴돌았다. " 전 대협씨의 마음을 받을 수 없어요. 왜냐면 제 가슴 속은 이미 백대승이라는 남자가 점령하고 있거든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받아들일 정도의 자리는 없어요.아니. 빈 구석은 한군데도 없어요.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 대협씨에게 매력을 느끼기도 했어요. 그렇지 않는다면 여자가 아니죠. 지금도 여전히 내게 대협씨는 매력적이고요. 하지만 사랑이라는 거. 참 이상하잖아요? 대승씨가 확실히 대협씨 보다는 끌어당기는 매력이 없긴 하지만 저한테는 달라요. 그냥 끌려요. 편안하고, 대승씨와 함게 있으면 즐겁고, 꾸미지 않은 진정한 내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정말 미안해요. 대협씨. 그래도 확실히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얘기한 거에요." 몇 주동안 체리의 마음을 얻어 보려고 애썼지만 그녀의 마음은 굳건했다. 사실 동생이 좋아하는 여자이기 때문에 망설이기도 많이 망설였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끌리는 마음은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 형!" 여전히 말이 없는 그를 향해 대승이 소리쳤다. 대협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비로소 깨어난 듯 대승을 바라보았다. " 그거야 그 여자와 사랑에 빠진 거지." 운 좋은 자식.


대협은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사랑에 빠졌다고? 대승은 형의 말에 반신반의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면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녀를

굉장히

좋아했고,

하루종일

보아도

그녀가

보이지

않으면

보고싶었으며 함께 있어도 왠지 멀리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안타까왔기 때문이다. 그녀에게서는 밝은 기운이 느껴졌다. 활기차고 생명력 넘치는 , 건강한 여자였다. 신체적인 건강 뿐만이 아니라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건강미 넘치는 내면세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대승은 그런 그녀의 밝음을 사랑했다. 솔직하고 당당한 어찌보면 당돌하기까지 한 그녀의 자신감을 사랑했다. 가끔씩 보이는 그녀의 진지함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작은 일도 배려하는

고운

마음씨를

사랑했다.

대승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넘쳐

흘러

주체할수조차 없는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결국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될 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막상 사랑하는 감정을 깨닫게 되자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행복했다. 가슴 한 켠이 잃어버린 갈비뼈를 되찾은 것 마냥 벅차올랐다. 그녀를 사랑하게 됐군. 사랑이라... 대승은 이마를 문지르며 소파 뒤로 기댔다. 귀여운 남자 13 아침햇살을 받으며 오피스텔 입구로 걸어나오는 체리의 모습이 보이자 대승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노란색 울 니트와 색깔이 같은 노란색 칠부 면바지를 입고 길고 까만 머리를 허리까지 찰랑거리게 풀어놓은 그녀는 병아리처럼 귀여우면서도 고혹스러운 모습이었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였다. 대승은 그녀가 다가오자 그녀의 손을 꼬옥 잡고 방송국으로 향했다. 방송국에 도착해 보니 이미 스텝진들이 차에다 각종 방송장비를 다 싣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다 됐으면 출발하죠." 대승이 차에 올라타며 말하자 그들을 태운 버스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체리는 대승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허벅지와 그녀의 것이 흔들리는 차체 때문에 부딪혀 기분좋은 마찰을 빚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5 시간. 먼 거리였다. 한 시간이 지나자 아침 일찍 부터 부산 갈 준비에 수선을 떨었던 스텝진들이 하나 둘씩 꾸벅꾸벅 졸더니 대부분이 잠들어 버렸다. 대승은 모두들 잠들어 있는 버스 안을 둘러보고 역시 그의 옆자리에서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자고 있는 체리를 들여다 보았다. 옷 색깔처럼 노란 아이새도가 살짝 칠해져 있는 눈두덩이


흔들리는 차창과 함께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투명 립그로스를 발랐는지 물기를 머금은 듯 반짝이는 입술을 살짝 벌리고 뺨을 발그레하게 상기시킨 채 쌕쌕 자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또한 하얗고 긴 목과 파인 니트 사이로 아주 조금 보이는 가슴의 부풀음은 그의 가슴을 설레이게 만들었다. 대승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흰 목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입술 아래로 파닥파닥 뛰고 있는 맥박과 함께 익숙한 체리향기가 그의 폐 속 가득 밀려들었다. 이대로 그녀의 향기로운 내음을 맡으며 부드러운 피부를 느끼고 싶었다. 대승은 서서히 그녀의 목에서 입술을 떼고 팔을 들어올려 이마 가운데로 한가닥 흘러내린 까만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주었다. 너무도 가늘어 조금만 힘을 주면 부서질 것 같은 머리카락이 그의 손 안에서 간지럽게 흔들리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대승이 그녀의 머리카락 한 줌을 잡아 살짝 입을 맞추자 신호라도 받은 듯 감겨있던 체리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잠에 취해 있는지 아련하게 젖어 있지만 잠결에도 그의 행동을 알아챘는지 물기어린 눈동자가 수줍은 욕망으로 반짝거렸다. 부산시내는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는 검은 구름 때문에 한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스텝들의 얼굴에도 구름이 끼었다. 공개방송을 할 때 비가 오면 큰일이었다. 체육관이나 공연장 안이라면 상관없지만 야외에서는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너무 강한 햇빛도, 주룩주룩

내리는

비도,

강한

바람도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더군다나

해운대는

바닷가라서 평소에도 바닷바람이 많이 부는 편인데 비까지 오면 큰일이었다. " 문병도씨, 일기예보 다시 한번 알아봐요. 내일 날씨 어떤지." 대승은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음향담당기사에게 날씨를 물어보았다. 그는 기상청에 전화를 해 보더니 이내 어두운 낯빛으로 결과를 알려 주었다. " 내일 오후 늦게부터 강풍을 동반한 폭우가 예상된다는데요. 오전, 오후에는 구름 많이 끼고 흐린답니다. 방송 시작 시간이 1 시니까 방송 끝날 때까지는 괜찮겠지만 철수를 서둘러야겠는데요. <주부 비치볼 대회> 와 <가족 모래성 쌓기 대회> 같은 행사도 방송 후에 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대승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1 시부터 3 시까지 공개방송을 녹음하고 그 후에 '주부시대' 애청자 가족들과 즐거운 행사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날씨가 여의치 않을 것 같아 아무래도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 오전행사에 오후 행사까지 함께 하는 건 어떨까요? 오후 행사를 포기하는 것 보다는 좀 버겁더라도 오전에 한꺼번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던 이진희 작가가 입을 열었다. 오전에는 부산 해양대의 Rock 그룹사운드 샤우트가 축하공연을 하고 부산 시민 노래 자랑을 할 예정이었다.


" 그럼 이렇게 합시다. 예정대로 10 시에 행사를 시작하고, 샤우트 공연 시간을 40 분정도로 단축해 보고, 노래자랑도 1 시간 반으로 제한합시다. 그리고 주부 비치볼 대회와 가족 모래성 쌓기 대회를 한꺼번에 실시하고, 공개방송 시간을 한 시간 늦춰서 2 시까지 모든 행사를 마치고 2 시부터 4 시까지 공개방송 녹음을 하는 겁니다. 4 시 까지는 괜찮겠죠?" 스텝진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이야기를 끝냈을 때 차는 해운대에 도착했다. 대승은 차에서 내리기 전에 스텝들 각자에게 할 일을 다시 일러주었다. " 문병도씨, 음향 기계들과 스피커 같은 기계 상태 체크해 두고 옮겨두십시오. 내일 아침 일찍 설치할 거니까 보관에 특별히 신경 써 주시고요, 강성철씨, 부산 현지 자원봉사자들이 지금 도착해 있을 겁니다. 내일 오후행사를 오전으로 당길 거니까 차질 없도록 주의사항 철저하게 일러 두세요. 특히 오전행사와 오후행사 자원봉사자들이 섞이거나 혼란스러워 하지 않도록 신경써야 할 겁니다. 이진희씨, 내일 초대가수와 MC 들에게 확인전화 하는 거 잊지 말고, 방송시간 변경된 것도 알려 주십시오. 또 샤우트와도 사전 연락 취해 놓고, 반주 맡아서 해 줘야 하니까 샤우트 측에 악보와 예상곡목 목록 넘겨 주도록 하세요. 유체리씨는 내일 방송될 편지들, 다시 한번 검토해 두고 멘트 정리한 것도 다시 정리해서 MC 들에게 파일로 보내고 내게도 보여줘요. 그리고 내일 시그널 음악과 반주테잎, 행사 도중 틀 음악들 점검하고 바로 쓸 수 있도록 맞춰 놓으십시오. 그리고 안병철씨는 저랑 같이 무대 설치 좀 보러 갑시다." 스텝진들은 모두 차에서 내려 호텔에 짐을 풀 새도 없이 각자 맡은 일을 하러 바쁘게 움직였다. 무대설치는 부산 업체에 맡겼는데 그들이 도착해 보니 기본 뼈대는 세워 놓았고 무대 바닥을 깔고 있는 중이었다. 백사장에 세우는 거라 밀리지 않도록 하려면 여간 조심스럽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승은 여기저기 꼼꼼하게 살피고 의자를 놓으라고 지시했다. 방송은 낮에 하는 것이고 또 TV 용이 아니기 때문에 조명을 설치할 필요가 없어서 조명이 들어설 자리에도 의자를 놓도록 했다. 체리는 방송대본 수정한 것과 방송될 편지 내용까지 김성현 MC 와 양희영 MC 에게 보내고 테잎을 일일이 틀어 보았다. 백사장 저편으로 무대 앞에서 이것저것 지시를 하며 바쁘게 왔다갔다 하는 대승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 버스 안에서 그의 입술이 닿는 것을 느끼고 묘한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성적 자극 보다는, 유리잔처럼 깨질세라 조심스럽게 다루어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스쳐지나간 어떤 남자도 그런 식으로 그녀의 몸이 신성한 것이라도 되는 듯 어루만져 주지 않았었다. 그에게서 눈물이 날 만큼 부드럽고 감미로운 키스를 받았던 그날 저녁의 그 기분과도 흡사했다.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게 사랑일까? 그녀가 흔히 사랑이라고 불렀던 그 짜릿하고 가슴 찡한 감정 말고도 뭔가 다른 게 느껴졌다. 한참만에 체리는 잡생각을 몰아내듯 고개를 푹 숙이고 테잎에만 열중했다. 밤늦게까지 다음날 방송 준비를 하느라 잠을 못잔 스텝진들이 새벽에 맞춰놓은 알람소리에 마지못해 뭉그적거리며 일어났을 때는 창문 틈으로 아침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체리는 햇살에 눈이 부셔 온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뜨다가 벌떡 일어났다. 창문을 활짝 열어보니 하늘에 구름이 끼긴 했으나 구름사이로 햇살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서서히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가 옷을 챙겨 입고 호텔 밖으로 나오자 다른 스텝진들의 모습이 보였다. 모두들 좋아진 날씨탓인지 피곤해 보이는 기색 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일을 하고 있었다. " 날씨가 좋아져서 다행이에요." 체리가 대승의 옆으로 다가서며 인사를 건네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방송준비와 행사준비에 정신없이 아침시간이 지나가고 아침 일찍부터 해운대 백사장에 모여든 부산시민들이 참여하는 가운데 행사가 치러졌다. 일요일이라 나들이 나온 가족들도 많았으며 '주부시대 가을 편지쇼'를 보러 온 가족들로 해운대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다행히 고개를 내민 햇님은 공개방송이 시작될 때 까지도 계속 구름을 밀어내고 따사롭게 백사장을 비추고 있었다. " 주부시대 가을 편지쇼! 안녕하세요? 김성현입니다." " 안녕하세요? 저는 양희영입니다. 일년에 한번 있는 특별 공개방송! 주부시대 편지쇼가 올해는 이곳, 시원한 바다가 보이는 부산 해운대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 네, 지금 저희들이 있는 무대 오른편으로 푸른 바다와 하얀 파도가 보이구요, 양희영씨, 이 소리 들리세요? 파도치는 바다의 소리!" " 네 들립니다. 정말 멋지군요." 주부시대 시그날 음악에 맞춰 시작한 공개방송은 별 사고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소금기 머금은 짭짤한 바다바람이 코를 자극했다. 준비해간 의자가 모자라서 빽빽하게 무대 주위로 둘러서서 구경하는 시민들도 많았으며 키가 작아 무대가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들어오려 목마를 태운 채로 무대를 지켜보는 아빠들도 꽤 되었다. 주부들의 애환을 담은 편지 사연이 소개될 때마다 방청석에서는 글에 공감하며 웃고 울며 모두가 하나가 되어서 편지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2 시부터 조금씩 끼기 시작한 구름이 공개방송이 끝날 무렵에는 낮게 깔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우중충해졌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대승은 재빨리 각종 기계들을 철수시키라고


지시하고 뒷정리를 시작했다. 큰 비를 예고하듯 거센 바람이 몰아쳐 무대를 철거하는 바쁜 손길들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간신히 중요한 기계들을 옮겨놓자마자 하늘은 우르릉 쾅쾅 울려대며 비를 쏟아냈다. 모두 비에 흠뻑 젖었지만 방송을 성공적으로 끝냈다는 안도감에 마음은 한껏 여유로와져 있는 상태였다. " 자, 방송도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쫑파티라도 해야죠. 다 정리 되면 이따 9 시쯤 호텔 바에서 만나죠." 대승의 제의에 모두 흔쾌히 동의하고는 다시 정리작업에 들어갔다. 체리는 욕조의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며 정신없이 지나간 이틀을 뒤돌아보았다. 토요일에 도착해서부터 방송이 끝난 일요일 저녁까지. 잠잘 시간도, 식사할 시간도 잊고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피로가 몰려오지 않았다. 아마도 아직 방송의 흥분이 그대로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방송 편집은 서울에 돌아가서 하겠지만 그 외의 것들은 방송 끝나고 다 깨끗이 정리해서 개운했다. 이제 쫑파티만 하고 내일 집에 갈 일만 남았지.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진희 작가와 함께 아래층 칵테일 바로 내려가자 이미 MC 와 함께 한잔씩들 한 모양인지 얼굴이 벌개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12 시가 가까워오자 다들 거나하게 취해서 방으로 올라가고 체리와 대승만 남았다. 창밖을 보니 대야로 쏟아붓듯이 비가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둘 다 술을 꽤 마셨지만 정신은 말짱했다. 창 밖을 내다보던 체리가 꿈꾸듯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 대승씨, 우리 바닷가에 갈래요?" 대승은 뜨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기 전에 비 맞고 싶다고 했던 게 장난이 아니었나 보다. " 바닷가? 지금?" " 지금요. 우리 비 맞으러 가요! 나 비 맞는 거 좋아하거든요. 자, 어서요! 가요!" 반쯤은 제정신이 아닌 듯 신나서 그를 잡아끄는 체리를 멍하니 보다가 그도 일어났다. 그래. 그녀가 원하는데. 뭐 어때. 머리에 꽃을 꽂고 비 맞으러 가자고 해도 따라가 줘야지. 얼큰한 술기운에 그들은 우산 하나 없이 비가 쏟아지는 해변으로 나갔다. 어두컴컴한 밤이었으나 호텔에서 흘러나오는 빛 때문에 그닥 어둡지는 않았다. 백사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철거하다 둔 무대의 뼈대만이 덩그랗게 남아 있을 뿐. 체리는 신발을 한쪽에 벗어두고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깔깔대며 해변을 뛰어다녔다. 대승은


어이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잠시 후 신발을 벗어 그녀의 신발 옆에 두고 그녀와 함께 해변을 뛰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나온 거, 같이 정신나간 척 해 줘야지. 체리는 두 팔을 쫙 펴고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커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이 샤워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을 때렸다. 시원했다. 일상 속에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대승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녀 못지 않게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서로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 우리 이제 들어갈까? 이제 원없이 비 맞은 것 같은데." 가까스로 웃음이 잦아들자 대승이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체리는 그냥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신발을 손에 들었다. 그들은 비에 흠뻑 젖어서 맨발로 호텔 뒷문으로 들어섰다. 벨 보이가 그들의 꼴을 보면 들여보내 줄 것 같지 않아서 였다. 살금살금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서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히 올라탔다. 어두운 밖에서는 잘 몰랐는데 불이 환히 밝혀진 엘리베이터 안에서 보니 그녀의 몸에 옷이 딱 달라붙어 별로 반갑지 않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젖기 전에는 헐렁한 흰색 반팔 티였으나 비에 젖고 나니 피부색을 그대로 보여주며 그녀 몸의 모든 곡선을 샅샅이 보여주고 있었다. 대승은 재빨리 눈을 돌렸다. 그는 엘리베이터 번호판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녀에게 손을 뻗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숨막히는 어색한 침묵이 16 층에 다다른 엘리베이터의 벨 소리에 깨졌다. 그들은 나란히 붙어 있는 서로의 방을 향해 잠자코 걸어갔다. " 피곤할테니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보자." 그녀의 방 문앞에 서서 자꾸만 그녀에게로 손이 가는 걸 억지로 참고 대승이 겨우 말을 마치자 체리는 아무 말도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승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지 말았어야 했다. 숨길 수 없는 욕망의 빛을 띠고 그녀가 쳐다보고 있었다. 대승은 주먹을 꽉 쥐었다. 결혼할 때까지 순결을 지키겠다는 자신의 맹세를 깨드릴 수는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유혹적이라 해도. 하지만 그녀의 온몸이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에 젖어 매끈거리는 그녀의 뺨과 붉어진 입술, 오똑하게 일어선 가슴까지. 대승은 초인적인 힘으로 욕망을 억누르며 그녀에게서 돌아섰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몇 걸음을 떼어 그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막 닫으려는 문을 확 열고 그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등뒤로 천천히 문을 닫았다. " 딸깍!"


그녀가 문을 잠그는 소리가 그의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와 뒷걸음질치는 그를 현관 옆 벽까지 몰고 갔다. 등이 벽에 닿아 더 이상 물러설 수 없게 되자 그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체리는 계속해서 서로의 몸이 한 치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까지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이미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바위처럼 단단해져 있었던 그의 가운뎃다리가 그녀의 배를 찔렀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뺨에 약간의 홍조만 띤 채 그의 몸에 기대었다. 그녀의 부드럽고 몽클몽클한 가슴이 그를 자극했다. 젖은 옷의 차가움을 뚫고 마주한 살갗의 뜨거움이 서로에게 전해졌다. 대승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신 건 아니지만 체리와 몸을 맞대고 있는 지금, 그녀의 향기에 취하고 말았다. 심장의 미친듯한 펌프질이 알코올 성분으로 인한 것인지, 나긋나긋한 여체와의 접촉으로 인한 것인지 잘 구별이 가지 않았다. 체리는 늘어뜨리고 있었던 두 팔을 천천히 들어올려 그의 몸을 쓰다듬었다. 근육이 긴장으로 뭉쳐진 팔을 타고 올라가 정신없이 뛰고 있는 가슴을 지나 심하게 들먹거리고 있는 목젖까지. 그녀는 그의 목뒤로 팔을 돌려 깍지를 끼고 발돋움을 해 고개를 쳐들고 그의 입술 가까이에 붉은 꽃잎 같은 그녀의 입술을 댔다. " 대승씨, 난 지난 한달간 대승씨의 부탁을 존중했어요. '친해지기'. 기억나죠? 친구가 되기 위해서 정말 꾹꾹 참았다구요. 이제 대승 씨 차례에요. 대승씨도 날 존중해 줘요. '익숙해지기'. 우리의 새로운 관계에 대해 내가 붙인 이름이에요." 귀여운 남자 14 대승은 숨을 멈추고 있었다. 숨을 쉬는 정도의 조그만 움직임이라도 그들이 마주보고 있는 그 순간을 깨뜨려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를 유혹하겠다고 대담하게 선언한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가 조금이라도 싫다는 내색을 표현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무리 그가 벗어나려 해도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목에 팔을 감은 채 발돋움을 하여 고개를 젖히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대승은 유혹하듯 반쯤 내리뜬 눈 사이로 뜨거운 불길을 담고 한쪽 입가에 주름을 잡으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흘리는 그녀의 모습에 온 몸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익숙해지기라...... 대승은 참았던 숨을 뱉아냈다. 깜찍한 그녀를 갖고 싶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잡고 있던 숨을 놓아주자마자 그를 감싸고 있는 아련한 그녀의 향기가 맡아졌다. 짭짤한 바다 바람 냄새, 시원한 빗물 냄새,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체리 냄새, 그리고 손에 잡힐 듯


뚜렷한 욕망의 냄새... 그의 입술과 단 1cm 도 떨어지지 않은 그녀의 붉은 꽃잎이 살짝 벌어지는가 했더니 작고 귀여운 혀가 쏙 빠져나와 그의 입술을 건드렸다. 그때문이었을까. 그를 위태롭게 잡고 있던 자제심의 끈이 툭 끊어져 버렸다. 그는 짧게 숨을 들이키고는 체리의 허리를 우악스럽게 휘어잡아 한 손으로 그녀를 들어올렸다. 그에 비해 너무도 가볍고 가냘픈 몸인 까닭에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그녀를 그의 키만큼 들어올릴 수 있었다. 대승은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받치고 강하게 입술을 밀어붙였다. 그녀에게 부드럽게 대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저 본능에 따라 뭉개질 듯 입술을 짓누르는 거친 몸짓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녀는 다행히도 연약한 피부에 멍을 들이고 있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 하나가 되려는 듯 꼭 달라붙어 부드러운 몸을 그에게 밀착시켰다. 그녀의 욕망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보였다. 대승은 거칠게 파고드는 그의 혀를 부드럽게 어루어 주면서 동시에 섬세하고 도발적으로 움직이는 그녀의 혀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들은 창밖에 내리는 비처럼, 거센 바람 맞고 포효하는 파도처럼 격렬하게 입술을 부딪혔다. 그 순간 만큼은 그녀를 멀리해야겠다는 생각도,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깡그리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냥 그녀가 주는 달콤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 체리......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침묵속에 뜨거운 열망만이 감싸고 있던 그들의 세계가 창밖의 천둥 소리에 깨지고 말았다. 우르릉거리는 하늘의 소리에 비로소 정신이 돌아온 대승은 떨어지지 않으려 계속 부딪혀 오는 체리의 입술을 외면한 채 그녀의 이마에 이마를 마주대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두 남녀의 뜨겁고 거친 숨소리만이 이미 뜨거워진 방안 공기를 더욱 더 달구어 놓았다. 대승은 마음속의 악마와 싸우고 있었다. 사실 체리가 원하는 일을 하는 건 간단했다. 그녀가 원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가 그녀를 가진다고 해도 죄스러울 이유 하나 없다. 그냥 그녀를 안고 있는 자세 그대로 침대로 가기만 하면 된다. 가서 그녀가 원하는 대로 사랑을 나누고 즐기면 된다. 그러나 대승은 침대쪽으로 갈 수가 없었다. 체리는 그가 사랑하는 여자였다. 그렇게 한순간의 욕망으로 즉흥적인 유희를 벌일 만큼 함부로 대해도 되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결혼한 상태도 아니었고 미래에 대한 확실한 약속을 하지도 않았었다. 그리고 그는 아직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질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욕망에 굴복해 후회할 일을 저질러서는 안된다.


대승은 천천히 미끄러뜨리듯 그녀를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젖은 옷 사이로 오똑하게 솟아오른 그녀의 가슴이 그의 몸을 자극하면서 미끄러졌다. 하지만 그녀를 바닥에 내려 놓고도 여전히 미련 많은 그의 손은 그녀의 등을 헤매며 남아 있는 욕망을 부풀렸다. " 내가 아직 제정신이 남아 있을 때 돌아가." 그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는 그의 기분만큼이나 잠겨 있었다. " 왜죠? 내 말을 무시하는 건가요? 우린 충분히 친해졌잖아요. 난 대승씨가 매운탕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까만콩을 못 먹는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화가 나면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리고, 뭔가를 깊이 생각할 때는 손가락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있다는 것도 알구요. 그것뿐인가요? 거의 모든 운동에 익숙하고 스쿼시와 수영은 수준급이죠. 성실하고 지나치게 진지한 성격에 앞 뒤 꽉꽉 막힌 로맨티스트이기도 하구요. 대승씨도 나만큼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이제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는 거 아닌가요?" 대승은 흥분해서 그의 가슴을 콕콕 찔러대며 빠른 말투로 불만섞인 음성을 쏟아내는 그녀를 잔잔한 미소를 띠고 바라보았다. 사실 그녀의 불 같은 성미로 한달간을 정말 무던하게 견딘 게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녀에게는 이런 말로 그를 재촉할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변함없었다. " 체리씨 말도 일리가 있어. 맞는 말이야. 하지만 이런 거 생각해 봤어?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떤 사고도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거." " 난 내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어요.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성인이라구요." " 아니. 그렇지 않아. 만약 우리가 사랑을 나눴는데 아이가 생긴다면 어쩔 셈이지? 생각해 봐. 부모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아마 아닐걸? 그리고 우린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잖아." 체리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결혼이라니? 마치 한번만 사랑을 나누면 아이가 생길 것처럼 얘기하는 것도 어처구니없고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로는 사랑을 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투로 얘기하는 것도 기가 막혔다. " 아이 말인가요? 아주 다양한 피임법이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요. 그리고 꼭 결혼하고 나서야 그 일을 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체리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겼다. " 어떤 피임법도 100% 의 효과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리고 내 경우에 있어서는 2 세를 얻기 위한 준비운동은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좋다고 생각해. 물론 그걸 강요할 생각은 없어. 단지 아이를 갖기 위한 일이 아니라 사랑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니까 꼭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게 소중한 여자를 순간의 감정으로 갖고 싶지 않아. 모든 준비가 다 된 다음에 완벽하게 합쳐지고 싶어." 어느새 체리의 등에서 맴돌던 그의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체리는 잠시 멍 해져서 그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항상 그렇듯이 진실되고 진지한 표정이다. 방금 그 말...... 결혼하자는 말인가? 결혼해야만 이 남자를 차지한 수 있다는 말...? 체리는 당황했다. 결혼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제 겨우 스물 다섯 살. 그녀보다 일찍 결혼하는 여자들도 많았지만 체리는 아직은 결혼이라는 족쇄로 한 남자에게 묶이고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대승의 말로 미루어 보아 결혼하기 전에는 그와 사랑을 나눈다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게만 느껴졌다. 인간문화재로 지정해서 박물관에라도 보내야 하는 거 아니야? 체리는 답답하기는 했으나 한편으로는 그가 소중히 여겨준다는 사실에 이상한 희열감이 느껴졌다. 그런 기분 처음이었다. 보잘것 없는 유체리라는 여자를 그렇게 소중한 여자인양 대해 주는 그에게 고마웠다. 대승이 그녀의 턱을 치켜올렸다. 따뜻한 눈빛이다. 체리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 시간이 늦었어. 피곤할 텐데 가서 자." 대승이 그녀를 놓아주고 방 안쪽으로 수건을 가지러 들어갈 때까지도 체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가 수건으로 체리의 머리를 닦아주려 그녀에게로 다가오는데 나지막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싫어요." 고개를 든 그녀의 표정이 위험스러워 보인다. 대승은 뒷덜미가 쭈뼛해져 멈춰서고 말았다. 결국은 그의 말이 먹혀들어가지 않은 모양이다. 체리는 귀여운 눈망울을 굴리며 입가에 매력적인 주름을 만들었다. " 걱정 말아요. 덤벼들지 않을 테니까. 사랑을 나누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그것 말고도 서로의 몸에 익숙해지는 방법은 많아요. 예를 들면, 지금 우리처럼 뼛속까지 흠뻑 젖어 있는 상태에서는 따뜻한 샤워기 물줄기 아래에서 잠시 함께 있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안 그래요?" 함께 샤워하는 방법은 썩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았으나 딱히 반대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대승이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체리는 그의 손을 잡아끌어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부산에서도 일류에 속하는 하얏트 호텔이라 욕실 내부도 넓고 우아한 디자인으로 꾸며져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대리석 욕조와 하얀 유선형의 세면대. 한쪽 벽면 전체를 덮고 있는 거울과 세면대 앞의 거울 때문에 그들의 모습이 수십 개로 반사되어 어지러웠다. 잠시 그들은 어색한 침묵 속에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 체리가 대승의 바지 혁대로 손을 뻗치자 그는 화들짝 놀라 펄쩍 뛰었다. " 뭐 하는 거야!" " 뭐하긴요. 옷을 벗어야 샤워를 할 거 아네요. 내가 하는 대로 가만 있어요. 명령이에요." 콧잔등에

조그만

주름을

잡으면서

으스대는

어조로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하는 대로 두고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벨트를 풀고 위로 손을 뻗쳐 그의 남방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감질맛나게 느린 손길에 그의 몸이 달아올랐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머리에서 달콤한 향기가 풍겼다. 이름을 알수 없는 향이었으나 꽃향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조그맣고 가녀린 손가락이 단추를 풀며 중간중간 그의 가슴에 스칠 때마다 심장의 박동이 더욱 빨라져 이러다 심장이 고장나지 않을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그녀의 느린 손이 겨우 단추를 다 풀고 그의 어깨 너머로 옷을 젖히자 차가운 공기가 젖어있는 가슴에 와 닿아 부르르 떨렸다. 이제 그녀는 그의 바지로 손을 뻗고 있었다. 지퍼를 내리는 그녀의 손이 잠시 멈칫 하다가 단호하게 움직였다. 물을 먹어서 뻣뻣해진 바지가 몸에 붙어 있어 그녀가 무릎을 꿇고 앉아 끌어내려야 했다. 대승은 스스로 벗으려 했으나 가만있으라는 그녀의 호통소리에 그냥 그녀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체리가 무릎을 꿇고 있어 바로 그녀의 눈앞에 속옷을 뚫고 나올 듯 팽팽하게 부풀어 꿈틀거리는 원통의 윤곽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신경쓰였다. 난생 처음으로 그 부분에 대해 걱정스러워졌다. 혹시라도 그녀가 실망스러워 하거나 싫어한다면, 야만스럽게 보인다거나 징그럽다고 질색한다면 가슴이 아플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다가 그의 속옷 가운데 부분으로 손을 가져갔다. 대승은 그녀가 손을 뻗치기 전에 붙잡았다. 그녀의 손길이 닿으면 그대로 폭발해 버릴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가슴 속까지 꿰뚫을 듯이 강렬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귀가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말 한마디 없이 서로 올려다 보고 내려다 보는 상황이었으나 백마디, 천마디 말이 오간 것 보다 더 서로의 생각을 또렷이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체리는 여전히 시선을 그에게 둔 채로 손을 들어올려 그의 속옷 양쪽에 손가락을 걸쳐 단숨에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한동안 그와 시선을 마주치던 체리는 천천히 눈을 내려 그녀의 얼굴 앞에 우뚝 솟아 펄떡거리는 원통을 바라보았다. 묘한 감동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그의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그 남자의 가장 은밀한 곳을 본 최초의 여자였다. 그리고 동시에 마지막 여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치밀어 올라 당혹스러웠다. 그의 몸은 기대 이상이었다. 온몸의 피가 몰린 듯 붉게 달아올라 있는 모습에 계속 시선을 주며 그녀가 몸을 일으켰을 때 대승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다시 대승의 얼굴을 쳐다보니 그는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우물쭈물 하고 있었다. 수줍음...... 그의 눈에서 수줍음과 당황스러움이 보였다. 그의 기분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그에게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생소할 테니까. 그렇지만 온몸으로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이며 가무잡잡한 피부를 검붉은 색으로 물들이는 그의 순진함이 귀여웠다. " 저... 내가 좀... 거칠게 생겼더라도......" 아래쪽을 힐끔거리며 더듬더듬 말을 잇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남자경험이 없는 처녀였다면 다소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체리는 그의 귀를 잡아당겨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또렷하게 속삭였다. "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워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의 눈이 커졌다가 눈꼬리에 주름을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 자, 이제 대승씨 차례에요." 잠시 서로를 쳐다보다 먼저 정신을 차린 체리가 그를 재촉했다. 그는 그녀의 젖어있는 티셔츠를 머리 위로 끌어올렸다. 빗물 때문에 수이 벗겨지지는 않았으나 그녀가 팔을 들어올려 도와 주어서 이내 벗길 수 있었다. 그녀의 하얀 피부를 타고 몇 방울의 물이 흘러내렸다. 대승은 심호흡을 했다. 무심한 모습으로 서 있는 그녀에게서 참을 수 없는 욕망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그녀의 가슴을 가리고 있는 조그마한 천 조각을 제거하기 위해 그녀의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어 등 뒤의 후크를 열어보려 애썼다. 하지만 언제 구경이라도 한 적이 있어야 그 후크라는 걸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알 텐데 처음으로 만져보는 여자의 속옷은 수수께끼 그 자체였다. " 이거 어떻게 하는 거지?" 엉거주춤 그녀를 끌어안은 자세로 한참을 끙끙대던 그가 결국 도움을 요청하자 체리는 피식 웃으며 등뒤로 손을 돌려 간단하게 후크를 풀었다. 대승은 의외로 매우 간단하게 열리게


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이마를 찡그리며 툴툴댔다. 하지만 천을 걷어내고 난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의 온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그는 그녀의 사랑스런 가슴에서 애써 눈을 떼어내며 반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쭉 끌어 내렸다. 그녀의 모습이야 말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까만 머리와 하얀 피부의 조화는 신비로움과 육감적인 기운을 뿜어 냈으며, 흠 하나 없는 도자기같이 매끈한 살결은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듯 가늘게 물결치고 있었다. 대승은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따뜻한 물이 쏴아 쏟아졌다. 그녀의 몸에 물이 쏟아지자 온 몸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눈이 부시다. 맑은 물방울이 그녀의 얼굴에, 어깨에 , 가슴에 부딪혀 사방으로 뽀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튀었다. 그녀의 어깨에서 튀어오른 물방울이 욕실 불빛에 반사되어 무지개 빛으로 빛났다. 대승은 홀린 듯 그녀의 동그란 어깨를 움켜쥐었다. 물안개 가득한 벽면의 거울 속, 하얗게 반사된 여체에 검은 손만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녀가

손을 내밀어 그를 샤워기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들은

밀착된

상태로

함께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에 몸을 맡겼다. " 머리 감겨줄게." 잠시 후, 대승은 손에 샴푸거품을 가득 묻힌 채 체리의 머리를 감기고 있었다. 머리결이 너무도 부드러웠다. 불빛에 색이 반사되어 빛나는 거품들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그녀의 눈으로 거품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서 머리를 헹구어 내고 바디 클린저를 들고서 그녀의 몸 위에 뿌렸다. " 바보! 이거 거품 내서 몸에 문지르는 거에요. 무식하게 몸에 뿌려 대는 게 아니라." 어이없이 그를 보던 체리가 킥킥대며 말하자 무안해진 대승의 볼이 달아올랐다. " 거품 내서 문지르는 거나, 문질러서 거품 내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쑥쓰러운 듯 헛기침을 해 대며 그는 손으로 슥슥 그녀의 피부를 문질렀다. 그의 손이 지나가는 자리 아래로 거품이 보글보글 솟아올랐다. 잠시 거품내기에만 여념이 없던 대승은 문득 눈을 감은 채로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체리의 얼굴을 보고 손을 멈추고 말았다. 심장이 바닥에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손길을 즐기는 그녀. 그의 손에 자지러질 듯 반응을 보이는 그녀의 몸. 그리고 그녀의 반응에 행복해 지는 그. 그의 손 아래에서 그녀의 심장이 팔딱팔딱 뛰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에 딱 맞게 들어오는 자그맣고 동그란 가슴은 미끄러운 거품을 타고 슬쩍 그의 손을 빠져 나가고 두손에 잡힐 듯 가느다란 허리가 그를 끌어당겼다. 그는 미끈거리는 여체를 살며시 그의 몸에 가져다 대 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닿은 뜨거운 피부에 놀란 듯 감고 있던 눈을 뜨더니 다시 눈을 감으며 그에게 교태롭게 몸을 비볐다.


그녀의 몸에서 넘치던 거품이 그에게 옮겨졌다. 대승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거품에 감싸인 여자의 몸이 이렇게 부드러운 줄은 정말 몰랐다. 힘주어 잡아도 이내 미끄러지며 그의 손을 빠져나가 다시 그의 가슴으로 부딪혀 오는 그녀의 몸에 미칠것만 같았다. 두 팔에 힘을 주어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분수 모르는 그의 불기둥이 미끈미끈한 그녀의 다리 사이로 슬그머니 기어들어갔다. 순하게 안겨드는 그녀는 허리의 뼈까지 없어진 듯 그가 이끄는 대로 허리를 휘며 다가갔다. 위태로왔다. 이대로 그녀를 안고 있다가는 그의 의지를 배반한 미련한 살덩이가 그녀의 몸 속으로 빨려들어갈 지도 몰랐다. 그는 거칠게 그녀를 돌려세웠다가 도로 꽉 껴안았다. 가슴에 그녀의 매끄러운 등이 느껴졌다. 잠시 부드러운 배 위로 헤매이던 손길이 가슴으로 올라와 작지만 오똑한 봉우리를 힘있게 쥐자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나왔다. 대승은 동그랗고 귀여운 그녀의 귓바퀴를 살짝 물었다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귓전에서 그녀를 자극하는 그의 거친 숨소리 때문인지, 가슴을 감질나게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 때문인지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허리를 활처럼 휘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신음소리를 삼키는 그녀를 보고 욕망이 솟아올랐다. 고개를 젖히고 있는 그녀의 얼굴 위로 그의 고개가 숙여졌다. 대승은 그녀의 입술에 그의 입술을 갖다 대며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를 대신 삼켰다. 잠시 후, 그녀의 배를 감싸고 있던 다른 한 손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 다리 사이로 사라졌다. 그곳은 거품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미끈거렸다. 그의 손길이 닿자 체리의 몸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대승은 그녀의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동시에 그의 손가락도 뜨겁고 미끈미끈한 그녀의 몸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녀의 온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한동안 뜨겁게 키스하던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 체리는 힘없이 그의 가슴에 기대었다. 무릎이 후들후들 떨려 서 있기가 힘들었다. 아직도 그녀의 몸속에서 감미로운 마찰을 일으키고 있는 그의 손가락 때문에 말 한마디 꺼내기도 어려웠다. " 치...... 샤워 하자고 한 건데..... 딴 짓만 하고..." 숨을 몰아쉬며 띄엄띄엄 말하는 체리의 얼굴은 불만스런 말투와는 달리 생선을 잔뜩 먹은 고양이처럼 나른하고 만족스러웠다. 대승은 한숨을 쉬며 겨우 그녀의 다리 안쪽에서 손을 빼내고 그녀를 놓아주었다. 샤워기를 틀자 따뜻한 물이 그들의 몸을 씻어주었다. 굶주린 표정으로 무섭게 여자를 노려보는 남자와, 다소곳이 눈을 내리깔고 있지만 눈동자 가득


만족스러움을 담고 있는 여자가 뿌옇게 흐려진 거울에 비친다. 체리의 긴 속눈썹 위로 고여있는 물방울이 불빛에 비쳐 반짝 빛났다. 귀여운 남자 15 " 자, 다들 돈 내놔요." " 돈? 무슨 돈? 나 돈 없어." " 아이, 그러지 말구. 약속은 약속이잖아요. 분명히 언니 내기 장부에 두달이라고 되어 있을걸요? 오늘이 정확히 두달째 되는 날이니까 약속대로 돈 줘요." 미영은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치뜨며 민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10 월 31 일. 그들이 체리와 백 PD 를 두고 한 내기의 기한인 두달이 정확히 지난 날이었다. 날짜 줄어드는 걸 세어가며 손꼽아 기다리던 미영은 정확히 두달이 되는 날 아침. 내기를 기록했던 민희에게 장부를 꺼내 놓으라고 닥달하는 중이다. 체리에게 돈을 걸었던 민희는 내기가 뭐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딴청만 피웠다. 민희처럼 체리에게 돈을 걸었던 세라와 진희 역시 매우 바쁘게 책상을 뒤지며 뭔가 할 일이 있는 듯 부산을 떨었다. 미영은 모른 척 하는 선배들을 보더니 도톰한 입술을 고집스럽게 꼭 다물며 팔짱을 끼었다. 언니들이 아무리 발뺌을 해도 소용없다. 미영은 살금살금 민희의 뒤로 접근해서 책상 한쪽 귀퉁이에 놓여 있는 민희의 가방을 낚아챘다. " 어! 미영이 너, 무슨 짓이야! 이리 내놔!" 민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미영을 쫓았으나 고양이처럼 약삭빠르고 날랜 미영을 잡기는 역부족이었다. 미영은 어느새 가방 안에서 민희의 내기장부를 꺼내 들고 바로 문제의 그 내기를 찾았다. "

봐요.

여기 이렇게 분명히 적어져

있잖아.

민희언니,

세라언니,

진희언니 각각

체리언니한테 5 만원씩. 2 달 기한. 발뺌하기 없기에요." 민희는 통통한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들기더니 세라와 진희를 바라보았다. 세라는 헛기침을 흠흠 하며 방송대본을 뒤적이는 척 하고 있었고 진희는 난처한 표정으로 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 하지만, 이번에 부산 가서 2 박 3 일간 있다 왔잖아.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시 아니? 우리한테는 말 안했지만, 그런 거는 원래 말 하기가 곤란하잖아." 대본을 뒤적이던 세라가 옳다구나 하며 입을 열었다. 원래 가까운 사이가 되더라도 여자 입장에서는 함부로 밝힌다는 게 힘든 법이다. " 체리 언니가 어제 무슨 얘기 했던가요? 안 했잖아요. 원래 그런 게 말하기 곤란하다고는 하지만 체리 언니 성격에 숨기고 내숭 떠는 건 절대 못하는 거 다들 아시잖아요."


미영의 말이 옳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면 했지 절대 숨기거나 부끄러워 할 체리가 아니었다. "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체리하고 백 PD 님이랑 사귄다고 했었는데. 잘 됐는지도 모르잖아." 실날같은 희망이라도 걸어 보는 민희였지만 여전희 미영은 자신만만했다. "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두사람 사귄다는 말은 했었지만 난 그동안 둘이서 손이라도 한번 잡는 거 본 적이 없다구요.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그때 작가실 문이 열리고 체리가 쑥 들어왔다. 상쾌한 아침 바람을 몰고 들어온 그녀가 환하게 인사를 하자 모두 웃으며 인사했다. " 방안 분위기가 묘한 걸? 무슨 일이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체리가 의아한 듯 묻자 여태껏 한쪽에서 피식거리며 얘기를 듣던 정희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었다. 체리는 조그맣게 킥킥 웃더니 시원스럽게 결말을 내 주었다. " 그 내기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나한테 돈 걸었던 분들은 돈 내놓아야 하는데. 백 PD 님은 아직도 깨끗한 총각이거든." 그 말에 미영은 환호성을 지르며 팔짝팔짝 뛰었고 돈을 내야 하는 세 사람은 체리를 노려 보았다. " 사실, 이런 거 재미로 하는 건데,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자. 그 내기돈으로 이번 주말에 나이트에나 가면 어때? 다 같이 말야." 백 PD 에게 돈을 걸어서 미영과 함께 내기에 이긴 정희가 대안을 내놓자 모두 반가워하며 그렇게 하기로 했다. 미영은 다소 불만스런 표정이었으나 체리가 그녀도 돈을 내겠다고 하며 부킹 잘 해주는 곳을 안다고 하자 이내 얼굴을 폈다. "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 방송 들어가야 해. 진희씨. 가자구." 9 시 30 분을 가리키는 시계를 본 체리는 서둘러 진희와 함께 스튜디오로 향했다. 스튜디오 안은 막 방송 시작하기 전의 활기와 어수선함이 어우러져 있었다. 그녀는 대본과 편지를 검토하며 MC 들에게 오늘 진행할 코너에 대해 다시한번 언급을 했다. 그녀가 스튜디오에 들어설 때부터 얼굴에 홍조와 머쓱함을 담은 채 기계 상태를 점검하던 그녀의 귀여운 남자도 대충 확인을 마쳤는지 문병도씨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체리는 대승의 옆모습을 보며 비밀스런 미소를 지었다. 같이 샤워를 했던 그날 밤. 그는 매우 힘들어 했지만 결국 커다란 수건으로 그녀를 깨끗이 닦아 주고선 방까지 데려다


주었다. 착한 아이처럼 침대에 누워 그가 덮어준 이불 자락을 꼭 쥐고 이마에 입맞춤을 받는 기분이란, 뭐라 말할 수 없이 포근하고 보호받는 느낌이었다. 사랑일까.......? 보고싶고, 함께 있고 싶고, 소유하고 싶은 것. 체리에게 있어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닌 것 같았다. 뭔가 더 있다. 그녀는 고운 이마를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 띠리리리." 체리는 방정맞게 울리는 휴대폰 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놀라서 휴대폰이 들어 있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대승이 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고 밖으로 나가는 걸 보고 도로 손을 꺼냈다. " 여보세요?" 대승이 스튜디오에서 나와 통화버튼을 누르자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어, 형. 무슨 일이야? 나 곧 방송 시작하는데." " 급한 일이야. 어머니가 당장 전화하라고 하셔서." " 알았어. 핵심만 빨리 말해." 방송

시작하기 20

분 전이다.

빨리

들어가야

하는데

수화기

저편으로

쿡쿡거리는

웃음소리만 들려왔다. 대승이 성마르게 재촉하려는데 묘하게 뒤틀려진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 오늘 저녁 7 시. 그랜드 호텔 1 층 커피숍. 이유진." " 뭐? 대체 무슨 소리야?" " 핵심만 말하라면서. 축하한다. 너 장가 가라고 어머니께서 아가씨 한명 봐 두신 모양이더라. 오늘 저녁에 만나보래." 대승은 놀란 나머지 한동안 입만 뻥긋거렸다. 그전부터 선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지만 그저 괜히 하는 말씀이려니 하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의 착각이었나 보다. " 가만 있자. 그 아가씨 휴대폰 번호가... 적어뒀었는데. 아 , 여깄다. 011 에..." " 잠깐. 형. 나 오늘 못가. 아니, 안가. 선 안볼거야. 전화번호 부를 필요 없어. 나 지금 방송 들어가야 해. 끊어." 대승은 거칠게 폴더를 닫아버렸다. 그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약속까지 정해버린 어머니가 야속했다. 체리와 사귀고 있는 상태에서 다른 여자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사귀는 여자가 있다고 말씀드리면 내일이라도 당장 결혼시키려 하실 텐데 그럴


수는

없었다.

그로서는 언젠가는 체리와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었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준비가 되지 않았을 거였다. 대승은 스튜디오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막 문고리를 잡는데 그의 휴대폰이 다시 울었다. " 여보세요." " 승아. 나다." 대승은 숨을 들이켰다. 그의 아름다운 어머니, 장숙희 여사였다. 형에게 전화하라고 하시고도 그새를 못 참아 득달같이 전화를 하신 거였다. " 내 친구 정숙이 알지? 나 고등학교 때 동창. 정숙이 딸이 올해 스물 셋인데. 유진이라구. 아주 참한 아이다. 오늘 만나보면 알겠지만..." " 어머니, 그만 됐어요. 저 선 안봐요. 제 의견도 안 물어보고 약속 정하시면 어떻게 해요. 그리고 아직 형도 있는데 하필 왜 제가 선을 봐야 하냐구요." " 니 형이 선을 잘도 보겠다. 협이는 포기했어. 올해 세계일주던가 뭔가를 간다고 앞으로 적어도 5 년간은 국내에 안 들어올거라는데 어쩌니. 너라도 어서 장가 가야지. 유진이 그 애가 엄마 친구 딸이래서가 아니라 정말 복 있게 생기고 마음씨도 비단결이야. 그리고 4 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다지 않니. 일단 생각 없더라도 만나 보렴. 이미 약속 정해놨는데 안 나가면 엄마 면목 없어진다. 장소랑 시간은 알지? 엄마는 나갈 걸로 믿고 이만 끊는다." 대승은 변변한 대꾸 한 번 못해보고 전화를 끊었다. 정말 그로서는 내키지 않는 자리였지만 이미 약속이 되었다니 할 수 없었다. 퇴근시간. 체리는 저만치 앞에서 걸어가는 대승을 발견하고 날 듯이 가볍게 뛰어가 그를 붙잡았다. " 대승씨. 집에 가는 거에요? 같이 가요. 우리 저녁 같이 먹을래요?" 대승은 그의 팔에 매달려 녹을 듯이 달콤한 미소를 짓는 그의 연인을 난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를 속이고 다른 여자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녀 성격에 그가 선을 본다고 하면 당장에 난리가 날 것 같았다. " 어... 나 일이 좀 있어서 잠깐 들를 데가 있는데 먼저 가." 망설이는 그의 태도가 좀 미심쩍었는지 잠시 그를 날카롭게 쳐다보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안녕하십니까? 백대승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유진이에요."


고풍스런 원목 탁자를 사이에 두고 푹신한 쿠션이 놓여진 소파식 의자에 두 남녀가 마주앉아 있다. 다소 어색한 침묵이 깔렸다. 창 밖은 해님이 자취를 감춘 듯 벌써 어두컴컴해져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호텔 안은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에 대낮같이 밝았다. 대승은 마주앉아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자를 찬찬히 관찰해 보았다. 어머니가 복스럽게 생겼다고 한 말처럼 전체적으로 둥글다는 인상을 주는 여자였다. 적당히 튀어나온 이마가 둥근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인위적으로 깎거나 다듬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운 눈썹이 예뻐보였다. 약간 작지만 귀엽고 동그란 눈에 보이는 까만 눈동자는 만화에선가 본 곰돌이 푸우의 순하디 순한 눈동자를 연상시켰다. 통통하게 살이 붙은 두 뺨은 분홍빛으로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어 두 손으로 비벼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정도로 귀여웠다. 그녀는 분홍색의 발목까지 오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헐렁한 옷 때문에 몸매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약간 통통한 정도의 보기 좋은 몸매를 가진 것 같았다. 그리고 가장 눈길을 끈 것은 기다란 머리였는데 허리 중간정도까지 내려오는 길이에 자연스럽게 오렌지 빛이 부드럽게 흘러내려 있는 찰랑찰랑한 머리결을 갖고 있었다. " 저... 굉장히 여성스럽고 조용하신 것 같네요." 정말 그녀는 말이 별로 없는 조용한 성격인 것 같았다. 처음에 커피숍에 들어서서 만나던 순간부터 커피 한 잔씩을 앞에 두고 있는 그때까지 고개를 다소곳이 숙인 채로 묻는 말에만 조심스럽게 대답하고 있었다. 외모나 성격, 말하는 것도 그의 체리와는 많이 틀렸다. 어른들이 좋아하시겠군. 대승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말을 해야 이 착한 여자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적당하게 끝낼 수 있을지 고민스러웠다. 유진은 익숙하지 않은 하이힐 안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가만히 앉아있으려니 좀이 쑤셔 미칠 지경이었지만 마주 않아 있는 남자가 그녀를 보고 여성스럽고 조용한 것 같다고 한 말을 듣고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틀어막느라 불편한 상태를 잠시 잊었다. 사실 엄마의 절친한 친구 아들과 선보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다소곳이 앉아있지 않았을 터였다. 엄마 체면 때문에 집에서 귀가 닳도록 얌전히 행동하라는 말을 듣고 나와서 다행히 아직까지는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았다. 아까 그를 만나기 전에 호텔 회전문에 이마를 부딪힌 것 빼고는. 유진이 보기에 백대승이라는 남자는 참 듬직해 보였다. 책임감 강하고, 성실하고, 전형적인 모범생 스타일. 호감가는 남자임에는 틀림없지만 사귄다거나 결혼까지 생각하기엔 어딘가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긴, 내가 언제 결혼하고 싶은 남자를 만나 본 적이 있어야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남자들을 보아 왔지만 한번도 가슴 떨리거나 찡한 사랑의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호감이 가는 남자들을 가까이 해 보려고도 했는데 친구 이상으로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 아뇨. 별로 여성스럽지는 않은데... 참. 요리하는 건 좋아해요." " 그렇습니까? 좋은 취미를 가지셨네요. 가정적이시군요." 그들은 이런 식으로 다소 어색하지만 말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중하게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갔다. 어느새 시계는 9 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들의 대화도 한결 편안하게 이어졌다. "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유진 씨를 알게 되서 기쁘구요." " 네, 저도 마찬가지에요." " 저, 그런데..." 대승이 말을 꺼내놓고 잠시 머뭇거리자 유진은 가만히 그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그는 매우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유진씨께 정말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사실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건 어머니께서 저한테 아무런 말씀도 없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하셔서 어쩔 수 없이 나왔습니다. 약속을 했다가 나오지 않으면 실례가 될 것 같아서요. 그런데 전 지금 이미 사귀는 여자가 있거든요. 아직 때가 아니라서 어머니께 말씀을 안 드렸다가 이런 일이 생기게 됐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유진씨도 멋진 여자이지만 이미 사랑하는 여자가 있기 때문에... 제 말, 이해하시겠지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유진은 거듭거듭 사과하는 그에게 난처한 듯 손을 내저였다. " 네에. 괜찮아요. 어차피 저도 엄마 닥달에 못 이겨 나온 거니까요. 전 그냥 대승씨를 알게 된 게 기쁠 따름이구요. 애인이 있으시다니 이해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부모님께는, 좋은 사람이지만 서로 잘 안 맞는 것 같다고 말씀드리면 이해하실 거에요. 너무 부담갖지 마세요." 휴우. 다행이다. 유진은 그가 애인이 있다는 말에 안도감이 느껴졌다. 사실 그가 괜찮은 남자라는 건 느꼈지만 역시 친구 이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겨우 스물 세 살 밖에 되지 않은 나이로 결혼을 생각한다는 것도 끔찍했다. 아직은 하고 싶은 일도 많았고 한 남자에게 묶여 살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 남자는 매우 친절했다. 그의 집과는 정 반대 방향임에도 불구하고 저녁 시간이라 위험하다며 집까지 데려다 주고 갔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대승은 체리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그녀가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시원한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환한 미소와 그에게 달려드는 귀여운 몸을 안아볼 수 있다면, 뭔가 양념이 빠져 싱겁거나 짜더라도 그녀가 만들어주는 음식을 먹고 매일아침 같이 눈을 뜰 수 있다면, 그의 인생이 행복해질 것 같았다. 그녀의 예쁜 재잘거림을 매일 듣는다 해도 전혀 싫증날 것 같지 않았다. 대승은 그녀의 마음을 얻어 빨리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택시는

앞에

와서

멈추었고

대승은

익숙한

엘리베이터에 올라 그의 집으로 들어섰다. 꽤 늦은 시간이었는데 형이 나갔는지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대승은 거실에 놓인 전화를 잠시 바라보다가 수화기를 들고 체리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늦은 시간이라 만날 순 없었지만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신호음만 계속 들릴 뿐 뭘 하는지 받지를 않았다. " 체리씨. 이제 그만 마셔요. 벌써 몇 병째인지 알아요?" " 싫어요! 더 마실 거야. 이리 내놔요." 대협은 소주병을 등 뒤로 숨기며 달려드는 체리를 겨우 떼어 놓았다. 두 시간여만에 깡소주 여섯 병을 비우고 일곱 번째 병을 병째로 마시려다가 대협에게 소주를 뺏긴 것이다. 대협은 괜히 체리를 데리고 나왔다고 후회했다. 초저녁때부터 계속 집으로 대승을 찾는 전화를 하더니 9 시쯤 집으로 쳐들어와서는 대승이 어디 갔는지 캐묻는 통에 할수없이 선 보러 갔다고 이야기해줄 수밖에 없었다. 핏기가 가신 얼굴로 힘없이 소파에 주저앉은 그녀를 위해 냉수 한 컵을 떠 오는데 전화기 옆에 놓여져 있던 메모지를 집어 들고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녀가 물어봤었다. " 이유진... 이 여자인가요?"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한참 후 작은 목소리로 술 마시고 싶다고 속삭이듯 말하는 그녀가 너무 애달파 근처 소주방으로 데려왔던 것이다. " 왜 이렇게 힘들까요? 전에는 그런 생각 한번도 해보지 않았어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거. 이렇게 아프고 힘든 건가요?" 체리는 막무가내로 다시 뺏은 소주병을 입에 대고 한 모금 길게 마시고는 다시 넋두리하듯 중얼거렸다. " 그 사람은 날 그냥 한때 갖고 놀다가 버리는 장난감이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너무 잔인해요. 난 그 사람을 위해서 내 자유를 포기하려고까지 생각했었는데. 그 사람이 결혼하자고 하면, 결혼 같은 거 아직 하고 싶지 않지만 기쁘게 자유를 포기하려고 했단 말에요. 그런데 선을 봐? 연애 따로, 결혼 따로 라는 거로군요."


대협은 그렇지 않다고, 계속 동생을 위한 변명을 했지만 이미 취해버린 그녀는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스스로 추리하고 결론까지 다 내린 듯 하다. 결국 대협은 변명하기를 포기하고 그녀가 하는 대로 놔 두었다. 체리는 몽롱한 머릿속으로 부산에서의 마지막 밤을 생각했다. 그때는 말료 표현하진 않았지만 그가 정말 그녀를 사랑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부산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다른 여자를 만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배신감이 느껴졌다. 아름다웠다고 생각했던 육체적 접근도 불결하게 느껴졌다. "

차라리

내가

대협씨를

사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랬다면

내가

자존심

꺾어가면서 접근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이렇게 바보같이 가슴아파 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녀를 향한 대협의 눈에는 동경과 갈망이 엿보였다. 그녀가 분명히 선을 그었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하지만 아직 그의 마음이 그녀를 향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체리는 손을 뻗기만 하면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유혹에 넘어가고 싶었다. 힘들게 쫓아다니지 않아도 그녀만을 바라봐주는 사람이 옆에 있는데 다른 데서 상처입고 싶지 않았다. " 체리씨. 취했어요. 이제 갑시다." 대협은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잠시 그녀가 약해진 틈을 타서 그녀를 차지 하고도 싶었다. 그녀의 눈빛이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냉정한 얼음벽을 깨고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그녀를 그가 원하는 대로 유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두시간동안 주정하듯, 쏟아 낸 그녀의 말에서 그녀가 얼마나 대승을 사랑하고 있는지 절절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는 그녀를 껴안 듯이 부축하고서 술집을 나온 대협은 아예 그녀를 들쳐업고 오피스텔로 향했다. 대협은 이상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경비 아저씨를 모른 척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그녀의 집까지 들어가 텅 빈 침대 위에 그녀를 눕히고 신발과 자켓만을 벗기고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대협은 잡시 그 자리에 서서 잠든 체리의 모습을 들여다

보았다.

무심하게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아기처럼

쌕쌕

자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는 살며시 체리의 장미빛 뺨에 입을 맞추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대협이 집에 들어온 것은 1 시가 다 되어서였다. 대승도 늦게 들어왔는지 온 집안에 불이 켜져 있었다. " 형. 어디 갔다온 거야? 말도 없이. 걱정했잖아."


대승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형에게 말을 걸었다가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는 형을 보고 움찔 했다. 형의 옷자락에서 술냄새가 나는 것이 친구라도 만나 술을 마신 모양이다. 대협은 잠시 한번도 동생에게 보인 적 없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동생을 노려보다 낮게 한마디 던지고는 욕실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으며 들어갔다. " 임마, 너 행동 똑바로 하고 다녀!" 귀여운 남자 16 다음날 아침. 스튜디오에 혼자 가만히 앉아 있던 체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주먹을 불끈 쥐고 스튜디오 밖으로 뛰어나갔다.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구석진 복도 창가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어제 저녁 이후로 끊임없이 그녀의 머릿속을 돌아다니고 있는 그 번호를 꾹꾹 눌렀다. 대승의 집 전화기 옆에 놓여 있던 메모지. 이유진이라고 써진 이름 밑에 있었던 열 자리의 휴대폰 번호. 어찌나 뚫어지게 봤는지 들이붓듯 마셨던 술 덕분에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으나 그 이름과 휴대폰 번호는 뇌리에 각인되어 잊혀지지 않았다. 어제는 너무도 급작스런 일에 혼이 쏙 빠질 정도로 당황해서 배신감에 눈물 흘렸지만 지금은 달랐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서 내 남자를 뺏긴다면 유체리가 아니지. 체리는 다시 주먹을 불끈 쥐고 휴대폰을 귀에 갖다댔다. " 여보세요?" 마녀 같이 끔찍하고 못된 여자를 상상하고 있었던 체리는 수화기를 타고 전해지는 귀엽고 애교가 뚝뚝 흘러 넘치는 목소리를 듣고 순간 당황했다. " 이유진씨 맞죠?" " 네, 그런데요." " 어제 백대승이라는 남자하고 선 봤죠?" 요새 입찰 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유진은 가뜩이나 정신없는 아침 시간에 걸려온 전화에 짜증이 났다. 더구나 이 여자는 예의도 없는지 자기가 누군지도 밝히지 않고 다짜고짜 남의 사생활을 묻는다. " 이보세요. 도대체 누구신데 그러는 거에요?" " 난 백대승씨 애인인데, 선 한번 봤다고 해서 그 사람과 결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하고 있다면 꿈 깨라고 말해주려고 전화했어요." 유진의 표정이 천천히 변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운이 나빴다. 며칠간 야근을 하는 통에 잠이 모자라 비몽사몽 꿈 속을 헤매다가 사무실 책상 모서리에 엉덩이를 부딪혀 멍이 들


정도로 아픈데다가 커피를 타던 도중 잘못해서 엎지르는 실수를 저질러 블라우스가 갈색으로 변하는가 하면 이상한 여자가 전화를 해서 부아를 돋군다. 워낙 덜렁대는 그녀다 보니 여기 저기 부딪치고 실수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선 봤던 일은 그녀 잘못도 아닌데 마치 그녀가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추궁하는 목소리는 그녀의 부아를 충분히 돋굴만한 것이었다. " 그쪽 말대로 선 봤어요. 하지만 뭘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선을 왜 보는지 알아요? 결혼하려고 보는 거라구요. 선 봐서 마음 맞으면 결혼 하는 거에요. 아무리 애인이 있다고 해도 그 상태에서 선 보는 건 그쪽한테 이미 마음이 떠났다는 말 아닌가요?" 그녀가 예의바르게 물어 보았더라면 사실대로 어제 있었던 일을 말해줄 수도 있었다. 솔직히 그녀에겐 나쁜 감정 없으니까. 그리고 유진 역시 대승에게 그다지 끌린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얘기해 줄 수도 있었지만 너무도 안하무인격인 말에 화가 나 되려 쏘아주고 말았다. " 그... 그렇다면 이유진씨는 결혼할 마음이 있다는 건가요?" 아까보다는 기가 많이 죽은 듯 더듬거리는 음색이 가늘게 떨린다. " 그럴수도 있죠. 대승씨는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니까. 그리고 우린 집안끼리도 매우 친하거든요." 체리의 몸이 떨렸다. 애당초 전화를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런지도 모른다. 그 여자의 말을 들어보니 이미 집안끼리는 얘기가 끝난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대승을 포기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막아야 했다. " 이유진씨, 우리 만나요. 두 사람 결혼해서는 안돼요. 만나서 내가 그 이유를 알려줄게요. 오늘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 유진은 절박하게 말하는 상대방의 목소리에서 뭔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도 같았다. " 좋아요. 8 시쯤 만나죠." 체리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끊고 이를 앙다물었다. 나쁜놈! 유진은 한적한 카페에 앉아 따뜻한 코코아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오전의 발끈했던 기분이 가라앉자 후회가 밀려들었다. 사실 선 본 일이 별로 대단한 사건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쏘아붙일 필요가 없었던 거였다. 차근히 생각해 보니 그 여자 입장에서는 애인이 선을 봤으니 그렇게 흥분할 만도 했다. 그녀가 좀더 마음을 너그럽게 가졌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역시 난 성격이 너무 급해서 탈이란 말야. 카페 문에 달린 종이 경쾌하게 울렸다. 소리를 따라 문 쪽으로 옮아갔던 유진의 시선이 다시 창 밖으로 돌려졌다. 카페에 들어온 사람은 임신 7-8 개월은 되었음직한 임산부였기 때문이었다. " 이유진씨죠?" 유진은 오전에 한번 들어본 섹시하고 톡톡 튀는 목소리를 알아듣고 고개를 돌렸다가 눈이 동그래져서 벌떡 일어났다. 방금 들어왔던 임산부가 걷기에도 힘들어 보이는 배를 불쑥 내밀고 허리에 손을 짚고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정말 같은 여자인 유진이 보기에도 예뻤다. 티 하나 없이 우유같이 뽀얀 피부에 예술적인 곡선을 그리고 있는 가느다란 눈썹, 오똑한 코에 육감적인 입술까지. 어린애같은 외모에 둥글거리는 그녀에 비하면 진짜 성숙한 여자 같아 보였다. 몸매도 불룩하게 솟아있는 배 부근을 제외하면 환상적이었다. 모든 여자가

한번쯤

꿈꿔봤음직한 여자였다.

그녀는

밝은

노랑색의

종아리

중간정도까지

내려오는 임부복을 입고 굽 낮은 단화를 신고 약간은 힘든 표정으로 허리를 짚고 서 있었다. " 저기... 앉으세요." 유진은 놀란 나머지 눈을 어디다 둬야 할 지 몰라 하며 눈앞의 임산부에게 자리를 권했다. 체리는 둔한 동작으로 자리에 앉았다. 배가 부르다는 건 꽤나 귀찮고 힘든 상태였다. 자리에 앉아서 찬찬히 맞은편의 여자를 살펴보니 아직 앳되 보이는 게 그녀보다도 어려보였다. 잘해봐야 스물 하나? 화장기 없는 동그란 얼굴에 통통한 몸매가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스무 살짜리 같아 보였다. " 내 이름은 유체리에요. 아까 전화할 때는 제가 좀 무례했었죠? 사과드릴게요. 하지만 더 이상 저같은 피해를 입는 사람이 없게 하고 싶다는 생각에..." 유진은 말을 꺼내자마자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훌쩍이는 여자가 너무 불쌍해 보인다는 생각을 하며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 피해라니요?" " 보시다시피 지금 팔개월째에요. 그 사람은 저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던 거에요. 흑흑. 그저 제 외모만 보고 잠시 데리고 놀다가 헌신짝처럼 버렸어요. 전 임신한 것도 모르고 있다가 5 개월째 되서 배가 불러오는 바람에 뗄 수도 없고... 흑... 그런데 그 나쁜 사람이


내게는 걱정말라고 안심시켜 놓고 바람을 피웠어요. 거기다 이젠 선까지... 전 정말 참을 수가 없었어요. 저 같은 피해자가 또 생길까봐..." 유진의 얼굴이 붉그락 푸르락 해졌다. 그렇게 진실해 보이던 남자가 사실은 속이 시커먼 놈이었다니...... 유진은 조그만 주먹을 꼭 쥐고 탁자를 쾅 내리쳤다. 컵이 흔들거리며 물방울을 튀겼다. 체리는 울다가 흠칫 놀랐다. 보기보다 좀 과격한 아가씨인 것 같았다. " 세상에 그런 죽일 놈이 있단 말이에요? 체리씨, 그런 놈은 다신 상종도 하지 말아야 되요. 어휴. 그런 놈을 가만 두다니..." 단순하고 정의감에 넘치는 유진은 자기 일처럼 분노하고 화를 냈다. 연약한 여자를 이용하고 헌신짝처럼 버리는 놈들은 용서해서는 안된다. 성격이 급해서 뭐든 생각하기 전에 일부터 저지르고 보는 성미라, 유진은 당장에 그 천인공노할 놈을 붙잡아다 놓고 버릇을 고쳐 주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애처롭게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여자를 달래는 일이 우선 급할 듯 싶었다. " 자, 울지 말아요. 다 좋은 방향으로 해결 될 거에요. 아기한테 안 좋으니까 울지 마시고, 자. 이거 마셔요. 그리고 마음 편안히 갖고. " 유진은

어느새 상냥한 여인으로 돌아와

체리에게

코코아를

권했다. 체리는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를 쓰는 귀여운 유진을 슬쩍 쳐다보며 벌어지는 입을 컵으로 가렸다. " 다녀왔습니다." 유진은 씩씩거리며 현관 문을 들어서서 의아하게 바라보는 엄마의 눈길을 알아채지 못한 채 쿵쿵거리며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 한쪽 구석에 핸드백을 휙 내던지고 침대 위에 철퍼덕 앉았다. " 나쁜놈. 임신한 여자를 내팽개치다니. 참을 수 없다!" 혼자서 흥분이 미처 가라앉지 않은 목소리로 소리친 유진은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애꿏은 침대를 주먹으로 몇번 내리쳤다. 생각하면 할수록 괴씸하고 화가 났다. 그런 나쁜 놈을 착하고 성실하게 봤다는 자신의 눈이 한심했고 그에게 잘 보이려고 얌전하고 조신한 척 했던 게 화가 났다. " 누가 임신한 여자를 버렸다고? 무슨 일이니?" 딸이 보통이 아니게 화가 나 있는 걸 보고 걱정스러워진 그녀의 엄마가 들어와서 묻자 유진은 저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 누구긴 누구야. 어제 내가 선봤던 그 파렴치한 놈이지. 여자친구가 임신했는데 나 몰라라 하고 선 보러 나오다니!"


" 뭐라고? 숙희 아들이 말이니? 대승이가? 여자친구가 임신했는데 선을 보러 나왔단 말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모전여전인지 유진에게 급한 성격을 물려준 엄마는 역시 딸처럼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화를 벌컥 냈다. 믿었던 절친한 친구에게서 배신당했다는 기분이 그녀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 숙희가. 어떻게 나한테 이런 짓을... 이럴 때가 아니지. 내 당장에 숙희 집에 가서..." 유진은 흥분해서 벌떡 일어선 엄마를 만류했다. 그녀보다도 다혈질인 엄마가 그렇게 화가 난 상태에서 친구를 찾아가면 결과가 어떨지는 뻔했기 때문이다. 분명 집이 떠나가라 다투고 절교하시겠지. " 아니야. 엄마. 내 일이니까 내가 해결할게요. 백대승인가 하는 남자 집이 NSB 방송국 옆 신우 오피스텔이랬죠? 몇 호실인지 알죠 엄마? 내가 내일 아침에 당장 가서 따질거야. 자기가 한 일에는 책임을 저야지. 엄마는 가만 있으세요." 유진이 계속해서 엄마를 말리고 난 후에야 겨우 진정한 그녀의 엄마는 침통한 표정으로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유진은 그날 저녁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타입의 남자는 바람둥이,

곧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지지

않고

내빼는

족속들이었다. 생각만 해도 이가 갈렸다. 그녀의 주변에서 친구들이 그런 못된 놈들에게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그런지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 딩동! 딩동! 딩동!" 대협은 일요일 새벽부터 벨을 성급하게 눌러대는 누군가에게 욕을 퍼부으며 일어났다. 아침 일찍 대승은 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집으로 가 버렸고 그는 전날 늦게까지 CNN 을 보느라 잠이 모자라 베개로 머리를 누르며 잠을 청했으나 워낙 끈질기게 벨이 울려대는지라 비틀비틀 일어났다. 느릿느릿 청바지에 다리를 꿰고 하품을 하며 거실로 나오는 새에도 벨은 계속 울렸다. 잠긴 문을 끄르고 문을 확 열자 매우 화가 나 있는 듯한 웬 조그만 여자가 있었다. 귀여운데? 그의 오래된 습관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느릿느릿 감상하고 난 뒤 내린 결론이었다. 길다란 머리를 하나로 질끈 동여맸는데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나는 오렌지 빛이 너무도 고왔다. 매직 스트레이트 한 건가? 눈으로 보기만 해도 찰랑찰랑 거리고 빛이 반짝반짝 나는 게 아마도 꽤 솜씨 좋은 미용실에서 한 것 같았다. 눈을 천천히 내리니 시원스레 드러난 이마 아래로 모양좋은


눈썹과 까맣고 조그마한 눈이 도전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오똑한 코도 동글동글한 곡선 덕에 부드럽게 보였고 통통한 볼은 한번 깨물어 보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헐렁한 노랑색 긴팔 티셔츠와 물 빠진 청바지를 입은 모습을 보니 열 아홉이나 스무 살 정도로 보였다. 아니. 스물 두 살은 되어 보이는군. 통통한 몸매였으나 오똑 솟은 가슴과 그 아래로 유선형을 그리는 허리와 엉덩이를 보고 생각을 수정했다. 요새 빼빼 마를 때까지 다이어트를 해서 뼈가 툭툭 튀어나온 여자들에 비하면 보기좋게 살이 붙은 모습이 훨 나아 보였다. 짙은 화장을 덕지덕지 한 육감적이고 마른 여자들만 봐서 그런지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도 왠지 신선하고 청량제 같았다. 한편

유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

앞에서

말문이

막혀

멍하니

있었다.

원래

사근사근하고 붙임성이 있어서 누구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재잘재잘 할 말은 하는 편인데 웬일인지 입이 딱 붙어 버렸다. 그녀가 항상 읽는 로맨스 소설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실제로 그녀의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 남자는 조각상 같았다.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듯 헝클어진 머리에 졸리운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하품을 할 것 같은 모습이었으나 조지 클루니도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섹시했다. 반듯한 이마 위로 멋대로 흘러내린 앞머리가 잔바람에 이리 저니 흩날렸으며 짙은 눈썹과 굵고 선명하게 쌍꺼풀 진 눈, 나른해 보이면서도 날카로운 지성이 느껴지는 눈동자였다. 그리고 그 눈동자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적나라하게 그녀의 온 몸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 눈길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유진은 눈 앞에 있는 남자가 여자 경험이 많은 바람둥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싫어하는 타입의 남자였다. 그렇지만 160cm 밖에 되지 않는 그녀에 비해 20cm 는 넘게 커 보이는 다부진 몸에 다소 마른 편이었지만 넓직한 어깨와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리는 환상적인 근육은 그녀의 넋을 빼앗았다. 거기다 늘씬한 허리에 좁은 엉덩이로 딱 달라붙은 청바지는 너무도 섹시해 입안이 바짝바짝 마를 정도였다. 유진은 정신없이 그녀 앞에 서 있는 완벽한 남자를 쳐다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찌릿하니 벼락을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그런 느낌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었다. 그녀가 지겹도록 기다려 왔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천지가 흔들리고 주위의 모든 풍경이 아스라이 꿈처럼 희미해지면서 그 사람의 모습만이 뚜렷하게 보이는. 유진은 그 남자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될 것 같아.


유진은 꿈 속을 헤매듯 몽롱한 상태로 그를 쳐다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 남자는 그런 시선에 이미 익숙한 것 같았다. 아름다운 모습에 홀딱 반해 그를 바라본 여자들이 많았을 거라는 건 당연했다. 그녀가 보기에도 그가 왜 영화배우나 모델이 되지 않고 이런 곳에 있는지 의아했으니까. " 꼬마 아가씨. 감상 끝났으면 이 새벽부터 남의 집에 와서 자는 사람 깨운 이유가 뭔지 말해봐. 난 아침에 막 일어나면 좀 사나와지는 경향이 있거든." 그녀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듯 오만하고 거들먹거리는 음성으로 깔보듯이 내밷는 말에 유진은 그에 대한 환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생긴 것만 번지르르 하고 속 알맹이는 별로 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여전히 속절없이 가슴이 두근거려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 여기 백대승이라는 사람 안 살아요? 그 사람 만나러 왔어요." " 아. 승이. 아침에 아버지가 불러서 집에 갔는데. 근데 승이는 왜 만나려고 하지? 혹시... 이자식 양다리 걸치나? 아무리 그래도... 좀 심하군. 어떻게 이렇게 생긴 여자를..." 유진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를 위아래로 마땅찮은 듯 쳐다보며 왜 이리 못생긴 여자와 만났을까 하는 식의 혼잣말은 그녀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뭉개 버렸다. 그래도 남자들 사이에서 귀엽고 깜찍하다고 인기가 꽤 있는 편인데 이 무례한 남자의 말 한 마디로 아주 못생긴 여자로 전락하고 만 거였다. " 쳇. 기생오래비같이 생겨가지고 남말은......" 빈정대며 중얼거리는 소리에 대협의 잠이 멀리 달아났다. " 뭐? 기. 생. 오. 래. 비? 아니. 이 여자가... 생긴 건 꼭 곰팅이처럼 생겨갖구 어디서 기생오래비 운운 하는 거야?" 유진은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깜짝 놀랐다. 내 별명을 어떻게 알았지? 귀신같은 남자다! 실제로 곰처럼 커다랗고 미련하게 생긴 건 아니지만 조그맣고 동그란 눈매와 통통한 몸이 아기곰 푸우와 닮았다 해서 그녀의 별명은 푸우였다. 친한 친구들은 푸우대신 곰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곰팅이란 말을 들어도 별로 화가 나지는 않았지만 처음 보는데도 계속 반말을 해 대며 무시하듯 말하는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 기생오래비같이 생겼으니까 그렇다고 하죠. 여자같이 곱상하게 생겼으면서. 난 내 귀중한 시간을 댁하고 영양가없는 대화 하면서 보내고 싶지 않아요. 백대승씨는 언제 오는 거죠? 따질 거 있는데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유진은 혼잣말하며 대화를 끝맺고는 또롱또롱한 눈으로 어이없어 하는 잘 생긴 남자를 바라보았다. 대협 역시 자존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에게 기생오래비같다는 치욕스러운 말을 들은 거였다. 그를 보고 홀딱 반하지 않는 여자가 없었는데 이 조그맣고 통통한 여자는 달랐다. 단순, 무식, 과격, 이 세 박자를 골고루 갖춘 여자 같았다. " 언제 올지 몰라. 곰팅이 아니랄까봐 어디 같는지 아까 말해줬는데도 잊어버리다니. 그런데 따질 일이라니. 뭐지? 내가 그애 형인데 급한 일이면 나한테 대신 말해." 유진은 눈을 하얗게 치뜨고 얄미운 남자를 째려보았다. 계속해서 반말에 무시하는 투로 말하는 게 기분나빴다. 그러다 그녀는 퍼붓듯이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설명하다 제풀에 화가 난 그녀가 주먹을 공중에 휘두르거나 발로 땅을 쾅쾅 구르는 것을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던 대협은 그녀의 설명이 끝나자 배를 움켜쥐고 웃어젖혔다. " 하하하하. 체리씨가 배가 남산만 해서 펑펑 울더라 이거지? 역시. 그녀다운 해결 방법이군." 역시. 유체리답게 깜찍한 속임수를 썼던 거였다. 임신 팔 개월의 임산부라...... 술 마시며 가슴아파 울먹이는 약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그 다음날엔 기가 막힌 방법으로 멋지게 상황을 바꾸어 놓는다. " 그렇다면 아가씨가 이유진씨로군? 그 일이라면 내가 오해를 풀어 줄 수 있겠어. 자. 거기 그렇게 서 있지 말고 들어와." 유진은 신나게 웃다가 돌연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그를 뭐가 뭔지 헷갈리는 표정으로 보며 따라 들어갔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간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체리씨? 지금 집이에요? 잠깐 좀 올라와야겠어요. 체리씨가 만나볼 사람이 있는데... 아뇨. 대승이는 아버지 호출 받고 집에 갔어요. 언제 올지 모르죠 뭐. 네. 그래요." 그는 그녀가 어제 만났던 유체리라는 여자에게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 체리씨 만나 보면 오해가 풀릴거야. 임신이라니 원. 그런데, 그건 그렇고 이유진양. 내가 그렇게 곱상하고 유약하게 보인다니,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그녀와 다시 마주서자 아까의 기분나쁜 말들이 떠올랐는지 다시 그가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 무뢰한과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진 유진은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고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귀여운 남자 17


익숙한 골목길을 들어서는 대승의 눈이 진지한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아무리 주말이라도 꼭두새벽부터 집에 들어오라는 말씀은 거의 하지 않으시는 편인데, 오늘따라 6 시도 되기 전에 전화를 넣으시며 가능한 한 빨리 집에 오라는 아버지의 음성이 심상치 않아 아침도 먹지 않고 후다닥 달려오는 길이다.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니 낯익은 수퍼 아저씨가 수퍼 앞 골목을 쓸고 계셨다. 항상 부지런한 아저씨다. 대승은 가볍게 아저씨께 인사를 건네고 계속 골목을 들어갔다. 고만고만한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네. 그 중에서도 아주 평균치에 해당하는 넓이의, 아담한 마당이 딸려 있는 1 층짜리 주택이 그의 부모님께서 머물고 계시는 집이었다. 파란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어머니가 가꾸시는 조그마한 텃밭에서 파릇파릇한 채소들이 고개를 쑥쑥 내밀고 있는 모습이 평화로왔다. 대승은 잠겨 있지 않은 현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부모님께서는 방에 계신 것 같았다. " 아버지 , 어머니, 저 왔습... 아악!" 힘차게 인사를 하던 대승은 어디선지 무지막지한 속도로 날아오는 농구공을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얼굴에 맞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말썽을 하도 피워서 아버지께 늘 농구공으로 얻어맞던 형은 바람을 가르는 공의 소리도 감지해낼 만큼 귀신같은 감지력과 민첩한 몸놀림으로 공을 잘도 피했지만, 한상 착한 아들이었던 대승은 거의 맞아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약간 어설픈 듯 날아온 공에도 맞을 수 밖에 없었다. 눈앞에서 별이 왔다갔다 하는 걸 감상하다가 겨우 일어나서 눈을 떠 보니 아무리 화나는 일이 있어도 우아함을 잃지 않던 어머니, 장숙희 여사가 붙잡는 아버지를 뿌리치며 불같이 화를 내고 계셨다. " 아이고, 이 나쁜 놈아. 니가 그러고도 내 아들이냐!" 대승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는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왜 어머니가 죽일놈 살릴놈 하면서 화를 내시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라도 말보다는 손이 먼저 나가는 아버지와 달리 조용하고 차분하게 대화로 모든 일을 풀어가시는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의 소리치는 모습은 매우 낯설었다. 어머니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으시며 여기 저기 손 가는 대로 그를 때렸다. 아기. 임신. 애인... 파렴치한 놈? 무슨 소리지? 처음에는 어머니를 뜯어말리시던 아버지도 나중에는 포기하셨는지 어머니 분이 풀릴 때까지 그대로 놔 두셨다. 어머니는 계속해서 그를 때리며 나쁜 놈을 연발하셨고 그는 어머니라 밀쳐 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피하지도 못해서 고스란히 매를 맞으며 당황해 하기만 했다. " 어머니, 그만 하시고 왜 그렇게 화가 나셨는지 차근차근 말씀을 해 보세요. 다짜고짜 나쁜놈이라며 때리시기만 하면 어떡해요."


한참을 맞다가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어머니의 팔을 붙들고 사정하는 대승을 보고 어머니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시더니 팔을 뿌리치고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아들을 노려보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대승은 아버지에게 묻는 시선을 보냈지만 아버지 역시 폭풍 전야의 고요함을 방불케 하는 태도로 그를 외면하며 방으로 들어가셨다. 대승은 잔뜩 움츠러들어서 쭈뼛쭈뼛 방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니 역정이 나도 보통 나신 게 아닌 듯했다. 눈에서 푸른 불을 뿜는 느낌이었다. " 내가 협이가 그랬다면 그나마 이해라도 하겠다만, 승이 니가 그럴 줄을 꿈에도 생각 못했다. 내 배에서 나온 놈이 그런 파렴치한 짓을 했다니..." 어머니는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눈물을 훔치셨다. 대승은 어쩔 줄을 몰랐다. " 어머니, 제가 무슨 짓을 했다고 그러시는 거에요?" " 승이 너, 바른 대로 얘기 좀 해봐라. 사귀는 여자 있지?" 그건 어떻게 아셨지? 대승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 세상에, 그 아가씨를 임신시켜 놓고는 헌신짝처럼 버리는 게 무슨 경우냐! 그러고서도 뻔뻔스럽게 선을 보란다고 옳다구나 하고 나가?" 다시 흥분한 어머니가 그의 등짝을 내리치며 소리치시자 대승은 아연했다. 임신? 체리씨가? " 아니에요. 어머니. 임신이라뇨. 말도 안되요." 대승은 억울했다. 임신을 커녕 같이 밤을 지낸 적도 없는데 그가 이렇게 당할 이유가 없었다. 터무니없는 누명이었다. " 유진이가 직접 그 아가씨를 만났다는데 계속 변명할 것 없다!" 장숙희 여사는 어제 밤 늦게 전화통이 싸늘하게 얼어붙을 정도로 냉기가 흐르던 친구 윤정숙 여사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새록새록 분노가 되살아났다. 어떻게 친구인 자기한테 이럴 수가 있냐며 화를 내는 정숙 보다도 아들에 대한 배신감이 더 컸다. 그렇게 여자 알기를 함부로 알고 행동하도록 가르치지 않았건만, 보기좋게 아들에게 한방 먹은 것이다. " 뭔가 오해가 있었겠죠. 전 결백해요." 어머니의 싸늘한 눈빛에 가슴이 아팠다. 친구분에게 모진 소리 듣고 얼마나 아들에 대해 실망하셨을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부모님께 결백을 입증해야 했다. 분명히 체리가 꾸민 일이다. 그가 선 본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영악한 그녀라면 충분히 그를 함정에 빠뜨릴 만 하다. " 여러 말 할 것 없다. 그 아가씨와 날짜 잡거라."


계속 입을 무겁게 다물고 계시던 그의 아버지가 마침내 입을 열고 쇄기를 박듯 결론을 내 버리자 대승은 깜짝 놀랐다. 너무 갑작스러웠다. " 저, 아버지. 아직 그럴 단계가..." " 시끄럽다! 사내 자식이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설령 니 말대로 그 아가씨와의 관계가 결백하다고 해도 이미 임신했다는 말이 난 이상은 그 아가씨한테도 혼삿길 막힐 정도로 치명적인 거야. 그런 일이 생긴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니냐!" 대승은 호통을 치시는 아버지의 서슬에 눌려 한 마디도 더 하지 못했다. 부모님까지 알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싫다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설득해 보아야 했다. " 그리고 말 난 김에 그 아가씨 한번 봐야겠다. 집이 어디냐?" " 네? 오늘요? 오늘은 너무 갑작스럽고, 나중에 날 잡아서 인사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대승은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연신 닦으며 아버지를 만류했으나 이미 마음을 정하신 건지 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 아니다. 오늘 꼭 만나봐야 해. 임신을 했으니 하루라도 빨리 식을 올려야지. 어서 앞장서거라." 입이

닳도록

결백을 주장해도 소용이

없었다.

두분

모두

이미

그녀가

임신했다고

단정지으신 것 같다. 대승은 무거운 걸음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나왔다. 오피스텔로 가는 도중 계속해서 체리에게 전화를 했지만 뭘 하는지 신호음만 무심하게 갈 뿐이다. 체리는 욕조 속에서 거품을 일으키며 장난을 치다가 벌떡 일어나 샤워를 하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오전 내내 거품목욕으로 피로를 싹 풀고 나니 기분이 좋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문득 휴대폰을 보니 부재중 9 통이나 전화가 왔었다는 표시가 있었다. 누구지? 체리는 이내 휴대폰을 침대로 던져 놓고 춤추듯 사뿐사뿐 옷장으로 가서 탱크탑과 미니 스커트를 꺼냈다. 그녀는 아침에 대승의 집에서 어제 보았던 이유진이라는 아가씨를 만나고 와서 기분이 매우 좋아진 상태였다. 대협의 전화를 받고 올라가 그 아가씨를 본 순간 놀라고

당황했었지만 그

아가씨 만큼은

아니었다.

그녀의

납작한

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 도대체...... 아기를 어떻게 한 거죠?" 하고 경악에 차 소리지르는 모습은 당황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웃음보를 터지게 만들었다. 체리는 할 수 없이 사정 설명을 하고 속인 거 정말 미안했다고 머리 조아려 사죄했다. 처음에는 속은 것에 대해 몹시 분개하던 그 아가씨는 화가 가라앉자 그 상황이 말할 수


없이 재밌다며 깔깔 웃어대면서 사실 선 보러 갔을 때 대승이 이미 사귀는 여자가 있다고, 할 수 없이 나온 거라고 이야기 했었다고 말해 주었다. " 제가 보기에는요, 대승씨가 체리씨를 굉장히 아끼는 것 같던데요. 잘 해 보세요." 그녀보다 어린 아가씨였지만 속도 깊고 매우 호감가는 타입이었다. 체리는 싱글벙글 웃으며 옷을 입고 화장을 했다. 그녀를 두고 한 내기돈으로 오늘 나이트에 가기로 했었는데 밤늦게 놀면 다음날 회사에서 지장 있을 것 같아 낮에 만나 쇼핑이나 하기로 약속을 바꾼 상태였다. " 딩동, 딩동." 준비를 다 하고 막 나가려는 찰나에 초인종 소리가 들려 그녀는 그대로 문을 활짝 열었다. 문앞에는 그녀의 귀여운 남자가 이마를 잔뜩 찡그리고 서 있었다. " 어머. 대승씨? 어서와요." 반가운 마음에 폴짝 뛰어 그의 목에 매달려 진하게 키스하는데 그가 우악스럽게 그녀를 떼어냈다. 밀어내는 그의 손길에 기분 나빠진 그녀가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자 그는 뭐가 못마땅한지 그녀를 있는대로 흘겨보았다. 그제서야 그의 커다란 덩치 뒤쪽에 그에 못지않은 덩치를 가진 사람이 민망한 듯 흠흠거리는 게 보였다. 체리는 그의 부모님으로 보이는 두 분을 보고서 적잖이 놀란 듯 말까지 더듬거리며 그들을 집 안으로 안내했다. 지금 상황만 해도 충분히 안 좋은데 그녀의 날라리같은 옷차림과 떠들썩한 환영인사는 상황을 더 골치 아프게 만들어 놓았다. 거실 소파에 다소 불편하게 앉은 그의 부모님은 짧은 치마를 애써 끌어내리고 있는 체리를 한심하게 바라보셨다. 대승은 속으로 하느님, 부처님을 비롯한 온갖 신을 다 부르며 제발 부모님이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시길 기도했다. " 이름이 뭔가?" 한참동안 그녀의 치렁치렁한 머리와 배꼽이 다 보이는 탱크탑, 허벅지 위로 껑충하니 뛰어오른 치맛자락을 보시던 아버지가 입을 열자 별로 어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체리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 유체리라고 합니다. 아버님." 슬몃

벌어지려는 입을 다시 굳게 다무는

아버지의

표정이,

그녀가 말꼬리에 붙인

아버님이라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던 것 같다. " 이름이 참 예쁘네. 그 동안 고생 많았지? 무심한 이녀석 때문에 마음 고생이 얼마나 심했겠어. 빼빼 마른 걸 보니 입덧이 심한가 보네.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녀가 안쓰러운 듯 손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표정에 뜨악해진 체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험상궂게 노려보는 대승을 보며 알겠다는 듯 얄미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대승은 왠지 불안한 기운이 등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 오르는 것 같아 불길했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그의 결백을 증명해 주기는커녕 더욱 난처하게 만들 것 같았다. "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어머님. 대승씨가 잘 해주긴 하는데 좀 눈치가 없는 편이라서요. 차차 나아지겠죠." 아니나 다를까. 마치 나쁜 일은 다 그가 저지른 것 같이 교묘하게 상황을 몰아가는 그녀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어느새 두 여자는 의기투합을 해서 백씨 집안 남자들은 원래 좀 둔하다느니, 여자들이 교육을 잘 시켜서 무식함을 개선시켜줘야 된다느니, 하면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대승은 눈을 한바퀴 굴리고는 어이가 없는 듯 천장을 쳐다보다 어머니와 체리를 쳐다보다, 아버지를 바라보니 재잘대는 두 여자가 귀엽다는 듯 웃고 계셔서 더더욱 기가 막혔다. " 자, 그럼 본 김에 날 잡고, 다 정해 버리자. 여자들 수다는 말리지 않으면 끝도 없이 이어진단 말이야. 예단이니 뭐니 다 최소한도로 줄이고 한달 안에 다 해치워 버려. 아이를 위해서 하루라도 빠른 게 낫지." " 아버지! 아이라니요. 그게 아니라..." 아버지는 대승이 끼어들 틈도 주지 않고 모든 결정을 다 내려 버리시고는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 저 아이. 젊은 시절의 니 엄마와 꼭 닮았구나. 맘에 든다." 집을 나와서 아버지는 대승에게만 들리게 말씀하시고는 돌아가셨다. 대승은 부모님을 바래다 드리고 그녀와 한판 붙을 생각으로 사납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전화기를 들고 그를 돌아다보는 체리의 모습에 맘껏 퍼부으려고 했던 말들이 목구멍 안에서 꿀꺽 삼켜져 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손바닥만큼이나 그녀의 몸을 가려줬던 탑과 치마가 소파 한쪽에 구겨져 뒹굴고 있고 그녀는 간신히 위 아래로 하나씩만 걸치고 있었다. " 지... 지금 뭐하는 거야?" 전화기를 내려놓고 그에게 요염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그녀를 밀어내며 말하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 뭐하긴요. 오늘 약속 있었는데 못간다고 방금 전화했어요. 대승씨가 나랑 할 말도 많은 것 같고 해서요." " 일단 옷이나 좀 입고 나와. 무슨 여자가 부끄러워할 줄도 몰라?" 체리는 대승이 핀잔을 주는데도 아랑곳 않고 그의 귀를 잡아당겨 그의 온 얼굴에 립스틱 자국을 남겨놓고 나서야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 자 , 할말 있으면 해봐요."


" 도대체 무슨 일을 벌여논 거야? 체리씨는 언제 임신을 한 거고, 유진씨는 또 언제 만난거야?" 그녀가 나오자마자 대승은 질문을 퍼부었다. 평화롭게 지나갈 수 있었던 주말이 그녀 덕분에 엉망진창이 되어 버려 그는 몹시 기분이 나빴다. " 대승씨가 나한테 그렇게 큰소리칠 이유가 있나요? 애초에 나한테 쉬쉬 숨겨가면서 선 보러 간 사람이 누군데요?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자리였다고 해도, 나한테 이러이러해서 선을 봐야 할 것 같다. 하고 말해주지도 못하나요? 나로서는 오해를 하게 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대승씨, 내 성격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임신한 척이라도 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게 나한테는 최선이었단 말예요." 역시. 말 잘하는 여자와는 싸우지 말라고 했던가. 논리적으로 척척 말하는 그녀 앞에선 할 말도 콱콱 막혀 버리고 말았다. " 그런 그렇다고 치더라도 오늘 부모님 앞에선 사실대로 아니라고 밝혀 줬어야지. 나는 도대체 뭐가 돼? 우리 아버지 말씀하신 걸로 봐서는 진짜 한달 안에 결혼식 올리게 될 거야. 체리씨는 그래도 괜찮은 거야?" 체리는 다그치는 그의 말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고개를 외로 꼬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실 그녀도 아까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혼... 이라? 이 남자와 결혼할 수 있을까? 그와 두달여간 가까이 지냈지만 과연 그에게 평생을 맡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를 정말 사랑하는지도 잘 모르는 상태였고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를 아직은 진심으로 받아들일만한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렇게 모든 게 불확실한 상태였지만 대승이 원한다면 기꺼이 자유를 포기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그녀를 좋아하는 만큼 그녀도 다른 데 눈 돌리지 않고 그만을 좋아할 자신이 있다는 거였다. " 결혼이라는 거... 그렇게 따질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살다가 나이 적당히 먹으면 적절한 상대와 하는 거잖아요? 우리 둘이 결혼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요? 일단, 우린 같은 직종에 종사하고 있으니까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고, 서로 도울 수도 있어요. 그리고 취미도 잘 맞고, 성격도 맞는 편이죠. 집안도 비슷비슷한 중산층이고, 어른들도 우리가 결혼하는 걸 달가와 하시구요, 또 2 세에 대해서도 외모나 지능 같은 건 우리 두 사람 다 자신있는 부분이니까 걱정 없고, 결혼하고 나면 법적으로 인정되는 사이가 되니까 마음대로 사랑을 나누는 일도 가능하잖아요. 이리 저리 따져 봐도 별로 나쁜 건 없잖아요."


체리는 속으로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입으로는 줄줄 결혼해도 괜찮은 이유를 말했다. 대승은 다시 이마에 내천자를 새겼다. 정말 못말리는 여자다.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만 골라서 한다. 결혼이 무슨 물건 사는 거래인 것처럼 생각하다니. " 체리씨는 그런 이유로 나와 결혼하려는 거야? 그렇다면 방송국에 있는 다른 누구와도 할 수 있어. 두 남녀가 결혼을 결정하는데 그런 것들만 필요한 거야? 체리씨가 말한 그런 조건들만 갖추어지면 다 결혼해? 그럼 굳이 임신했다고까지 속이고 결혼하겠다는 이유는 뭐야? 어차피 할 거라면 허겁지겁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냐." 그녀의 방정맞은 입 때문이었다. 그녀의 귀여운 남자가 화를 내고 있는 이유는. 체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그랬다. 결혼하는데 그런 이유들만으로도 가능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말에는 앙꼬없는 찐빵처럼 가장 중요한 감정이라는 요소가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입에 담기는 힘든 일이었다. 그녀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감정, 그가 생각하는 사랑과는 좀 틀리다는 것을 이제서야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알지는 못했다. "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렇게라고 해서 빨리 결혼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변해 버릴까봐 그랬어요. 사실, 나 힘들게 결심한 거란 말예요." " 하지만, 체리씨 마음은? 사랑은? 그런 건 무시할 거야? 나도 사실 이 결혼 하고 싶어. 하지만 체리씨가 말한 그 이유들 때문은 아니야. 난 유체리라는 여자를 사랑해. 겉보기에는 세련되고 영악한, 그리고 제멋대로인 것 같아도 그 껍질 안의 순수하고 자유분방하며 심성이 고운 당신의 영혼을 사랑해. 난 당신과 함께할 나날들이 내 마음속 빈자리를 행복으로 가득 채워 줄 거라 믿고 있기 때문에 결혼하려는 거야. 당신과 함께하면 반쪽짜리 내 인생이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거든. 난 그렇게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고 싶어." 대승은 흥분으로 얼굴을 상기시킨 채 진지하게 말했다. 체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는 그의 진심을 그녀 앞에서 말했고, 그녀가 아직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결혼해서 차차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모른다면 그가 직접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귀여운 남자 18 결혼이라는 게, 아무리 간소하게 치른다고 해도 이것 저것 신경쓰이는 게 많은 법이다. 게다가 여자한테는 더 복잡하지.


체리는 오전부터 엄마와 함께 가구 매장이란 곳은 다 뒤지고 다니며 돌아다닌 탓에 뻐근해 오는 다리를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결혼을 한다는 설레임 보다는 , 빼앗긴 일요일 아침의 늦잠이 아쉬웠고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녔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고르지 못한 게 짜증스러웠다. " 엄마. 그냥 아무거나 이쁜 거 고르면 안될까? 오늘 웨딩드레스도 보러 가야 하고, 저녁 때 오피스텔 짐 정리도 해야 된단 말예요." 하얀 등받이가 있는 더블 침대를 만져보고 있던 엄마는 짜증으로 날카로워진 딸의 음성을 듣고 알겠다는 듯 웃음을 지어보였다. " 그래도 특별한 새출발을 위한 가구인데, 이왕이면 멋진 걸 골라야 하지 않겠니?" 딸 보다도 더 들떠서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엄마를 보며 체리는 누가 결혼하는 건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사실, 대승과 함께 결혼 허락 받으러 집으로 찾아갔던 지가 한달도 지나지 않았으나 지금도 도무지 결혼한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엄마는 대승을 척 보자마자 매우 마음에 들어 하셨다.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집으로 데려왔던 남자친구들은 아무리 좋게 봐달라고 해도 딱 싫다고 잡아떼던 엄마가 대승을 보고서는 대화도 나눠보기 전에 손까지 잡으시며 좋아하시니 놀랠 노자였다. 아빠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 자네, 우리 아이 사랑하나?" 이 한마디 물으시고 그의 주저없는 대답을 듣고는 흔쾌히 결혼을 승낙하셨던 것이다. 그 뒤로부터는 모든 일이 그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착착 진행되어 버렸다. 양가 부모님과 함께한 상견례도 후다닥 치루어 버리고, 반지 맞추고, 방송국이 가깝다는 이유로 새집 대신에 오피스텔을 치우기만 하고 계속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그녀의 집은 팔기로 했고, 대승의 집은 지금 한창 새로 도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독신자 아파트라 원체 작은 크기여서 들여놀 가구도 딱히 없었지만 침대와 소파, 옷장, 책장 등을 바꾸기로 했다. 그녀를 위한 화장대와 오디오 시스템도 새로 들여놓기로 했다. 나머지는 그대로 있는 걸 쓰려고 하긴 하지만 그녀로서는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아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니었다. " 엄마, 이거 어때요? 색깔도 맘에 들고, 스타일도 좋은데?" " 그래. 내가 보기에도 이게 제일 나은 것 같다." 원목으로 된 우아하면서도 예쁜 더블 침대를 발견한 체리가 엄마의 팔을 잡아 끌며 이야기하자 엄마도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승은

아이보리색 벽지 뒷편에 풀칠하면서 형을

넘겨다봤다.

아까부터

사진을

들여다보며 킬킬거리고 있다. 같이 도배하는 거 도와준다고는 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것 같다. " 형. 그 사진 속에 뭐가 있길래 그렇게 눈을 못 떼는거야? 나도 한번 보자." 대승은 사진을 보여주지 않으려 뒤로 숨기는 형을 잡아 누르고 사진을 뺏았다. 사진 속에서는 그가 몇주전에 선을 봤었던 유진이 잘 생긴 흰색 진돗개를 꼭 끌어안고 혀를 쏙 내민 채 아웅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개를 키운다고 했었지... 그녀가 키우는 두 마리의 개중 한 마리인가보다. 조그만 눈이 웃으니 실같이 가늘어져 쏙 내민 혀와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보기만 해도 웃음이 톡 터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 유진씨잖아? 형 혹시...?" " 아니야 임마, 내가 어디 여자가 없어서 이런 여자를... 절대 사귀는 거 아니야. 단지 좀 흥미가 있을 뿐이지." 의심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대승에게 버럭 화를 낸 대협은 어색한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사진을 집어넣었다. " 그래? 별로 특별하게 생각 안한다 이거지? 그런데 비자 나온지도 꽤 됐는데, 왜 아직도 안 뜨고 있을까?" 대협은 동생을 노려보았다. 비자 나온지도 한달이 되어가지만 왠지 아직은 여행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 그거야, 니 결혼 보고 가야 하니까 그렇지, 절대 내가 유진이를 좋아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오해하지 마." " 내가 뭐라고 했나? 왜 자꾸 강조를 하는 거야? 그런데 요새 부쩍 유진씨하고 자주 만나는 것 같던데 만나서 뭐해?" 대승은 쩔쩔매는 형이 우스웠다. 몇주 전, 그가 체리에게 결혼하자고 했던 날이 떠올랐다. 부모님과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나중에 체리와도 한판 붙은 그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왔을 때, 형은 묘한 표정으로 유진의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보고 있었다. 그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대협은 웃는 듯 마는 듯 입가를 실룩거리며 말했었다. " 이 조그만 여자가 날 자극했어. 내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줬는데, 그 여자한테도 잊을 수 없는 교훈을 남겨 줘야겠어." 그러더니, 그 뒤로 하루가 멀다하고 유진을 찾아 다니는 것 같았다. 만나서 뭘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동안의 느낌으로, 형이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 뭐해? 풀 마르겠다. 어서 붙여야지." 대협은 괜히 말을 돌리며 분주하게 벽지를 들고 의자 위로 올라섰다. " 예식장은 예약했어? 여행사에는 연락했고?" " 응. 정신이 하나도 없어. 하도 서두르니까 이젠 정말 체리씨가 임신한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니까." 대협은 벽지를 붙이다 말고 허리를 꺾어가며 웃는다. 성인군자같은 동생이 그런 오해를 받다니 넌센스였다. " 그건 그렇고, 형 언제 출국할거야?" " 너 결혼식 끝나고 바로. 유진이 준비되면." 대승은 풀을 칠하던 손을 딱 멈추고 형을 쳐다보았다. 농담하는 거 아닌가 했지만 웃음기도 없이 농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 유진씨랑 같이 가? 여행을?" " 이거 비밀이다. 유진이가 알면 안간다고 할거야. 둘이가는 거지만 둘이 가는 거 아니야. 여행 동호회 회원 스무명 남짓 되는 사람들과 함께 가는 거라구, 일주일 기한으로." 대협은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빠르게 내밷고는 다시 벽지 바르는 일로 관심을 돌렸다. " 일주일? 5 년 이상은 나가 있을 거라며?" " 거 참. 말 못 알아듣네. 일주일만 여행 가는 걸로 되 있지만 그게 아니라구. 가 보고 가능하면 5 년 정도 돌아다녀야지." 대협은 자꾸만 떠오르는 생각을 부정했다. 왜 갑자기 유진과 같이 여행을 가고 싶어졌는지 그 자신도 잘 몰랐다. 처음에는 그저 그녀를 골탕먹이고 싶은 마음에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끔찍했던 첫만남 이유 그녀가 그에게 반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무시하는 데 화가 난 나머지 그녀를 찾아갔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쥐뿔도 잘난 것 없는 여자가 계속해서 튕기고 그의 유혹에도 흔들림 없이 넘어오지 않는 걸 보고 오기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녀는 정말로 그를 싫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미스테리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처음엔 그랬다. 장난 반, 오기 반으로 그녀를 계속 쫓아다녔다. 그녀가 다니는 회사에도 갔고, 야근하느라 고생하는 그녀를 도와주기도 했다. 거의 한달간을 그렇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녀의 손조차 잡아보지 못했다. 백대협 체면이 말이 아니군. 대협은 고개를 흔들며 애써 그녀의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했다. 같이 여행을 가게 되면 상황이

바뀔

것이다.

의지할

데라고는

하나밖에

없는

낯선

땅에서는

아무리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그녀라도 태도를 좀 바꾸어야 할 것이었다. 대협은 속아넘어간 것에 화가 나 펄펄 뛸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며 히죽히죽 웃었다. 귀여운 남자 19 유진은 부러움 섞인 시선으로 순백색의 신부를 바라보았다. 처음에 봤을 때도 느낀 거지만 체리는 특별한 여성이었다. 겉모습도 물론 아름다웠지만 그녀 안에서 느껴지는 에너지와 솔직담백한 성격이 더욱 더 그녀를 빛나게 만들었다. 어깨가 많이 파인 드레스를 입고 하얀 면사포를 쓴 얼굴은 초조함과 설레임이 뒤섞여 다소 얌전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 빛나는 눈동자에서는 약동하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유진은 결혼식에 오면 왠지 그녀도 결혼하고 싶어졌다. 사실 아직가지 하고 싶은 일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은 그녀는 결혼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행복한 모습으로 결혼하는 신랑 신부를 보면 결혼하고 싶은 기분이 울컥 치밀어 오를 때가 있었다. 저 사람하고 결혼한다면 어떨까? 유진은 몇 자리 건너 앉아서 결혼식을 보는 것보다는 그녀를 향해 눈을 찡긋거리는 대협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 남자는 그녀가 항상 옆에 끼고 사는 로맨스 소설 속에서 방금 뛰쳐나온 듯 매력적이었다. 외모와 신체적 조건에 있어서는 확실히 그녀의 이상형이었다. 여자를 함부로 생각하는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긴 했지만. 거의 한달간 그를 뻔질나게 만나면서 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저 노는 데만 관심있는 바람둥이라고 생각했었으나 의외로 능력있고 인생에 대한 뚜렷한 목표와 확신을 갖고 있는 남자였다. 거기다 그 역시 건설회사에 다녔다고 했다. 입찰 건 서류정리를 갖고 골머리를 앓고 있던 그녀를 보고는 하루 저녁에 뚝딱 해결해 준 것은 그에 대한 그녀의 삐딱한 시선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치만 저 남자 앞에만 가면 이상하게 실수만 하게 되는 걸. 유진은 다시 눈을 돌려 주례 앞에 서서 사랑의 맹세를 하는 신랑 신부에게 눈을 고정시켰다.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대협과 마주치기만 하면 생각과는 정 반대로 행동하게 되어서 난감했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알쏭달쏭 한 게, 꼭 마음에 들거나 그녀가 좋아하는 감정을 갖게 되는 남자에게는 싫은 내색을 한다든지, 밉살 맞다는 듯 쏘아대게 되는 것이다. 다른 여자들은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는 가면을 쓰고 꼬리 여럿 달린 여우가 된다는데 그녀의 경우는 정 반대였다. 지금까지 연애다운 연애 한번 못해본 게 다 그녀의 별난 성격탓이었다. 고치려고 해도 그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이것저것 생각을 하는 새 어느덧 식이 끝나고, 기념촬영을 하고 예식장 밖으로 나왔다. 피로연을 한다는 것 같았지만 저녁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에 곧장 집으로 향했다.


" 곰팅아! 이따 5 시까지 공항으로 나와. 늦으면 안돼." 유진은 붐비는 예식장 주차장에서 큰 소리로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홱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녀는 몰지각하게 사람 많은 대로에서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든 유들유들한 남자를 있는대로 째려보고는 바람소리가 나게 획 돌아서서 차를 몰고 나와 버렸다. 만 4 년간 몸 담았던 직장을 얼마 전에 그만 두고나서 가뜩이나 기분이 싱숭생숭해 있는데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거리며 그녀를 놀리는 대협이 얄미웠다. " 칫! 아저씨나 늦지 말라구요." 유진은 백미러를 통해 보이는 커다랗고 잘 생긴 남자를 향해 혀를 쏙 내밀었다. 체리는 멍하니 비행기 창문을 통해 서울의 밤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최근의 한달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밥 먹을 새도 없이 바쁜 나날들이었다. 방송국 일에 결혼 준비까지 함께 하려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다행히 일주일간 휴가를 낼 수 있어서 신혼여행은 여유 있게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 체리씨, 괜찮아? 많이 피곤하지?" 옆에서 대승이 다정한 말투로 챙겨주었으나 귀찮기만 하다. 체리는 여전히 창 밖으로 조그맣게 보이는 지상을 바라본다. 밤에 보는 서울은 아름답구나. 김포공항에서 이륙한 제주행 비행기가 유선형을 그리며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돌아 방향을 잡는 동안 아랫쪽의 반짝거리는 불빛이 눈길을 끌었다. 수많은 건물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빛, 도로에 끊임없이 줄을 지어 기어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번화가의 화려한 네온사인,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정확히 구별도 가지 않는 수많은 불빛으로 어두운 땅을 수놓고 있었다. 비행기가 고도를 높여 더 이상 지상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때서야 체리는 고개를 돌려 걱정스레 그녀를 들여다보는 한쌍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따뜻했다. 하루종일 긴장된 상태로 밥 한술 넘기지도 못했던 그녀의 신경이 대승과 눈을 마주하자 팽팽했던 긴장을 풀고 느긋해졌다.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지만 그들은 편안하게 서로를 응시하며 침묵을 즐겼다. 이 남자와 함께 있으면 행복해. 체리는 살며시 대승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피곤한 눈을 감았다. 며칠간은 막바지 결혼식 준비와 휴가 동안의 방송국 일을 미리 해 놓느라 거의 잠도 안 자다시피 했었다. 결혼식 끝나고 피로연을 할 때까지만 해도 피곤한 줄 모르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비행기에 올라와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둘만 남고 나니 며칠간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 체리씨, 다 왔어. 일어나."


체리는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겨우 눈을 떴다. 제주도에 다 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졸리운 눈을 뜰 생각도 않고 대승의 팔에 매달려 비칠비칠 비행기 밖으로 걸어나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체리의 두 뺨에 닿자 화들짝 눈을 뜬 그녀는 공항버스를 타서도 꼬박꼬박 졸다가 대승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 앞으로 삼박 사일동안 한번도 안 깨고 잠만 잤으면 소원이 없겠네..." 호텔로 가는 택시를 잡아 타고서도 체리는 그의 어깨에 기대고 잠꼬대하듯 중얼거렸다. 대승은 잠든 아내의 보드라운 뺨을 쓸며 미소지었다. 한달간 강행군을 했으니 피곤한 것도 당연했다. 긴장이 풀린 게지. 대승은 그녀가 기운을 차릴 때까지는 괴롭히지 말고 곤히 자게 내버려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잠든 그녀를 두 팔에 안아들고서 차에서 내렸다. 제주 그랜드 호텔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신혼여행 때 잠자리 만큼은 멋졌으면 좋겠다며 별 다섯 개짜리 호텔로 가자는 애교섞인 요구에 이곳으로 오기로 결정했었다. 그들이 묵을 방으로 들어서서 그녀를 침대 위로 살짝 내려놓을 때까지도 체리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키스라도 해야 깨어나려나? 대승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그녀의 입술에 입맞추려는데 그녀가 반짝 눈을 떴다. 동그랗게 열린 그녀의 눈동자에서 조그만 욕망의 불씨가 보였다. 순간 그들을 둘러 싸고 있던 공기가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체리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대승은 숨을 훅 들이쉬며 일어섰다. " 흠... 흠. 샤워하고 올게. 쉬고 있어." 단 둘만의 자리가 어색한지 대승은 헛기침을 하며 황급히 욕실로 들어갔다. 체리는 잠이 싹 달아난 표정으로 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흰색과 아이보리색으로 꾸며진 고급스럽고 깔끔한 방이었다. 테라스에는 타원형의 예쁜 탁자가 놓여 있었고 멀리서 바닷가의 소금기 섞인 바람 냄새와 파도 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그전에도 단둘이 있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으나 지금 기분하고는 좀 틀렸다. 왠지 처음 데이트하는 것처럼 어색하고 낯설었다. 긴장해서 그런건가? 체리는 짐을 대충 정리해 놓고 침대에 앉았다. 욕실에서 나는 물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웃음이 피식 났다.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인데 아닌 척하며 따로 샤워하려는 게 우스웠다. 달칵. 문이 열리고 샤워가운을 입은 대승이 나왔다. 하얀 가운에 감싸인 채 언 듯 보이는 가무잡잡한 피부가 묘한 감정을 일으키게 했다. 체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가 방금 쓰고 난 욕실은 하얀 김과 열기로 가득했다. 체리는 하루종일 갑갑하게 피부를 덮고 있던 화장품을 깨끗하게 걷어내고 바디샤워로 거품을 내어 가볍게 샤워했다. 대승씨도 긴장하고 있을까? 남자와 사랑을 나눈다는 것. 생소한 일도 아니었으나 떨렸다. 첫경험을 앞두고 있는 처녀의 심정이랄까. 몸은 아니였지만 그녀의 마음은 쉽게 상처받는 처녀의 마음이었다. 만약에, 이번에도 다른 남자들과의 관계에서처럼 맹숭맹숭하다면 어쩌나 걱정되기도 했다. 만약 그런다면 또 좋은 척 연기해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대승은 방 안을 왔다갔다하며 손을 비틀고 있었다. 초조했다. 자신의 남성적 능력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처음이라는 두려움이 그를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었다. 만약 체리가 실망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기본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랑을 나누는 것도 즐거울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경험이 많은 체리가 다른

남자에

비해 그가 못하다는 생각을

가질까봐

두려웠다.

솔직히

다른

남자와

비교된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 체리가 머뭇거리며 욕실에서 나왔다. 커다란 가운에 온 몸이 묻혀 얼굴과 손, 발만이 겨우 보였다. 수줍음인지 욕실의 열기 때문인지 뺨을 복숭아빛으로 붉히고 그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이 천사같았다. 체리가 그의 바로 앞에 와서 서자 향기로운 냄새가 훅 끼쳤다. 하얀 얼굴이 깨끗하다 못해 투명해 보였다. " 이제 당신은 합법적으로 내것이 된 거죠? 여기도, 그리고 여기도..." 체리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그의 얼굴부터 아래쪽까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 앞에 있는 남자를 손끝으로 확인하면서 비로소 결혼했다는 것이 실감났다. " 그래. 다 당신거야." 대승은 그녀를 침대로 이끌었다. 그녀의 가운을 천천히 벗겨내자 눈부신 나신이 드러났다. 그전에도 한번 본 일이 있었지만 그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이자 아내의 몸이었다.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경외감이 느껴졌다. " 지금쯤... 대협씨는 뭐하고 있을까요?" 대승의 손길에 이끌려 침대에 누우며 문득 생각난 듯이 체리가 말했다. 대승은 피식 웃었다. " 아마 비행기 안에 있겠지." 비행기 안에 있기는 했다. 멍들고 욱신거리는 몸으로 주위사람들과 승무원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 대협은 그가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의 옆에는 입이


있는대로 튀어나온 여자가 인상을 구기며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 밖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 비행기에 탈 때까지만 해도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었다. 길이 막혀서 다소 늦게 온 유진을 늦었다며 다그치면서 수속 밟고 , 세관 거쳐서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별 의심없이 그를 따라왔다. 같이 가기로 한 동호외 회원들은 어디 있냐는 물음에 이미 탑승했다고 그가 둘러댔던지라, 그가 이끄는 대로 어디로 가는 비행기인지도 모르고 올라탔던 것이다. 그녀는 전에 의논했던 대로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인줄로만 알고 있었다. 4 년여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기분전환으로 가까운 곳으로 여행이라도 가고 싶다고 지나치듯 흘렸던 말을 듯고 대협이 중국으로 가는게 어떻겠느냐고 권했던 게 2 주 전의 일이었다. 해외여행이라 절차도 복잡하고 해서 망설였는데 대협이 자기도 여행 동호회에서 함께 중국에 가기로 했다며 비자나 비행기 표를 비롯한 모든 절차는 단체로 하게 되니까 자기한테 맡기라고 해서 그러라고 믿고 맡겼던 거였다. 그런데 비행기에 올라서 이륙을 하고 나자 그때서야 그 망할 남자가 사실을 말했다. " 동호회 사람들은 어딨어요?" " 동호회? 무슨 동호회?" " 같이 간댔잖아요. 스무명 정도." " 그런 거 없어." " 뭐에요? 그런 거 없다니. 날 속인 거에요?" " 날 믿었던거야? 그러니까 곰팅이지. 이거 영국 가는 비행기야. 영국 갔다가. 유럽 일주하고, 인도랑 동남아시아 쪽으로 갔다가, 캐나다, 미국을 지나서 멕시코까지 잠깐 들르고 중국으로 갈 생각인데." " 일주일간 중국으로 간다고 했잖아요!" " 그래. 내가 앞에 말했던 곳 다 들렀다가 일주일간 중국 둘러보고 올거야. 천천히 다닐 생각이니까 몇 년 걸릴걸?" 그 대화가 끝난 뒤로 거의 한시간여동안 유진이 난동을 부렸다. 당장 집에 돌아가겠다며 그를

꼬집고,

때리고

소리질러대는

바람에

평화롭던

기내가

시끌벅적해졌다.

결국

스튜디어스들이 몰려와서 뜯어말린 뒤에야 겨우 진정되었다. " 영국에 도착하면 당장 돌아오는 표 끊어서 집에 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이 한마디를 끝으로 그녀는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그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대협은 욱신거리는 팔과 옆구리를 연신 주무르며 그녀를 데려온 걸 후회했다.


" 유진씨는 순하고 착한 아가씨니까 형이 좀 속임수를 썼더라도 그다지 화내지는 않을 거야." 대승은 그가 묻는 말에 다소곳하게 고개 숙이며 조용하게 대답하던 유진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 글세요? 과연 순순히 따라갈지는 의문인데..." " 쉿! 다른 사람 생각은 이제 그만하자구.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체리가 흥분해서 탁자를 쾅 내리치던 유진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하자 대승이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속삭였다. 체리는 입꼬리를 밀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옆에 누운 대승이 그녀의 입술 위로 그의 것을 부비며 입맞춤을 시작했다. 그는 그녀를 껴안지 않고 팔로 버티며 고개를 숙여 입술만 맞닿게 했다. 그와 닿아 있는 부분은 오직 입술 뿐이었지만 온 몸이 화끈 달아오르는 느낌에 몸을 옴찔거렸다. 그가 입술을 살짝 벌리고 그녀의 가지런한 이를 혀로 부드럽게 쓸었다. 꿈결처럼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깃털처럼 가볍게 찰싹찰싹 와 닿는 그의 혀와 감칠맛 나는 움직임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는 이제 조금 더 입술을 벌리고 그녀의 도톰한 입술을 빨아들였다. 서로의 타액이 섞이고 가느다란 신음 소리도 섞였다. 그의 혀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 안쪽 부드러운 살을 더듬으며 들어가 그녀의 혀와 얽혔다. 부드러운 만남. 언제나 그렇듯이 그는 부드럽고 다정한

입맞춤을 해 준다.

소중하게

감싸주는

느낌이

들어

가장

그녀가

좋아하는

방식이었다. 사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이런 키스가 있다는 걸 알지도 못했었다. 오직 육체적 관계를 갖기 위한 전단계로 거칠고 뜨겁게 입을 겹쳐와 벌주듯이 비비적거렸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체리는 그의 목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의 몸을 느끼고 싶었다. " 잠깐, 가만히 있어봐.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대승은 성급하게 그를 잡아당기는 체리의 손을 부드럽게 풀며 속삭이고는 입술을 옮겨 그녀의 온 얼굴에 키스했다. 이마, 눈, 코, 뺨, 그리고 귓불. 귓불 아래로 맥박이 파닥이고 있는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그는 향기로운 그녀의 살냄새를 맡았다. 은은한 체리향. 조그마한 그녀의 신음소리가 그의 귀를 자극했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뽀얀 살결을 쓰다듬으며 들먹거리는 동그란 어깨로 입술을 옮겼다. 그의 손이 팔 안쪽의 부드러운 살을 만지작거리자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가 만지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팔 안쪽에 그의 입술이 느껴졌다. 살을 간지르는 그의 숨결에 솜털까지 일어서는 듯 했다. 체리는 눈을 떴다. 그가 뚫어지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욕망이 묻어 있는 자신의 몽롱한 눈동자가 비쳤다. 아니. 어쩌면 그의 눈이 욕망으로 짙어진 건지도 모른다. 대승이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왔다. 그녀가 무거울까봐 조심스럽게 팔로


체중을 버티며 그녀의 오똑한 가슴에 입술을 댔다. 체리는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가슴을 빨아들이는 그를 홀린 듯 쳐다보았다. 기분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짜릿한 느낌보다도 그녀의 가슴을 경배하는 그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녀는 허리를 휘어 가슴을 조금이라도 더 그에게 가까이 가져가려 내밀었다. 동시에 그녀의 늘씬한 다리가 그의 허리를 감싸며 그를 자극했다. 그녀가 간절히 원하던 그의 몸이 불끈거리며 그녀의 다리 안쪽에서 요동쳤다. 아무런 말도 필요없었다. 그들은 뜨거운 눈으로, 손으로, 안달하는 몸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방 안에는 체리의 가느다란 신음소리와 대승의 거친 숨소리만이 가득차 있었다. 가슴에서 한참 머무르던 그의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편평한 배를 지나 떨리고 있는 그녀의 허벅지 안쪽으로 그녀의 양쪽 다리를 왔다갔다하며 키스하던 그의 입술이 뜨겁게 젖어 부풀어 오른 곳에 닿자 체리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 대승씨, 빨리... 나 미칠 것 같애요. 어서..." 체리는 곧 터질 것 같은 가슴의 심장박동을 느끼며 그를 재촉했다. 그 역시 그녀만큼이나 흥분해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체리는 그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기분처럼 키스를 하는 그녀의 입술도 사납게 그를 공략했다. 그는 얼마간 그녀의 입구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며 그녀를 애태웠다. 체리는 온몸으로 그를 몰아붙이며 그녀 안으로 들어오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바깥에서만 맴돌 뿐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 대승씨... 뭐해요. 빨리..." " 저기... 그런데..." 대승의 입에서 흥분으로 거칠어진 목소리가 쥐어짜듯 흘러나왔다. 체리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커다란 눈 속에서 당황스러움이 엿보였다. " 그런데... 어디로 넣어야 하는지... 못찾겠어." 그의 붉은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더 붉어졌다. 다리 사이라는 건 알지만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가 없어서 계속 허탕만 치고 있었던 거였다. 체리는 순간 멍해져서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푸하하 웃고 말았다. " 제길... 웃지마. 해본 적이 있어야 알지." 이마를 찡그리며 그녀의 귀여운 남자가 투덜거렸다. " 내가 할게요."


계속 킬킬거리며 체리는 그의 성난 몸을 붙들고 정확한 위치로 인도해 주었다. 그는 한번의 단호한 동작으로 그녀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의 몸이 그녀를 가득 채우자 뜨거운 흥분이 몰려들었다. 목이 메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보다도 그녀의 귀여운 남자가 더 정신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낯설은 느낌에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끙끙거리는 게 아픈 것 같기도 하다. " 아파요?" 체리가 걱정스럽게 물어보자 대승은 말도 못하고 고개만 흔들었다. 그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뭔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다른 남자들과 할 때와는 기분이 틀려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손에 잡힐 듯 분명한 그의 반응 때문인지도 모르고. " 황홀해. 이대로 죽어도 좋을 만큼." 그녀의 몸 안에서 힘차게 움직이며 황홀할 표정을 짓는 그를 보니 그녀도 덩달아 황홀해지는 기분이었다. 행복했다. 그는 너무 흥분한 탓인지 그녀보다도 먼저 절정에 올라 힘없이 그녀 위로 쓰러졌다. 그의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이 그대로 그녀의 가슴에 전해졌다. 땀에 젖은 그의 머리를 쓸어올려주며 체리는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그와 사랑은 나누면서 절정을 느끼진 못했지만 가슴벅찬 기쁨을 느꼈다. 그가 행복해 하는 것만으로도 같이 행복해질 수 있었다. " 휴우, 미안해. 나 혼자만 흥분해서... 너무 빨리 끝냈지?" 그가 정신이 드는지 몸을 굴려 그녀를 배 위로 올려놓고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첫 관계는 그녀를 위해서,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말았다. 사실 사랑을 나눈다는 게 이렇게 황홀한 느낌일 줄은 정말 몰랐다. 지금까지 그가 살아왔던 세상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에 발을 내딛는 것 같았다. " 괜찮아요. 나도 좋았는걸요." 대승은 녹을 듯이 달콤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에게 다시 입을 맞추었다. "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 마치 음악처럼 들렸다. 그는 그녀를 살며시 침대에 다시 눕히고는 티슈로 부드럽게 그녀의 다리 사이로 흘러내린 사랑의 결정체들을 닦아 주었다. " 샤워할까?" " 음... 그것보다도, 욕조 안에 몸을 좀 담갔으면 좋겠는데. 대승씨, 그거 알아요? 욕조 안에서도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거. 그전부터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생각 있으면 들어와요."


체리는 대승에게 윙크해 보이고는 욕실로 들어가 문 밖으로 고개만 쏙 내밀고 손가락을 까닥까닥하며 그를 불렀다. 대승은 씩 웃으며 기꺼이 그녀의 유혹을 받아들였다. 귀여운 남자 20 공항은 우중충한 유진의 기분보다도 더 우중충했다. 낯선 공기, 낯선 건물, 그리고 낯선 사람들. 유진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어디서 표를 끊어야 할지 찾으려 애썼다. " 곰팅이, 뭐해? 짐 찾아왔으니까 가자."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의 남자가 그녀의 등을 탁 쳤다. 유진은 눈을 세모꼴로 뜨고 낯선 이국 땅에서 단 한 사람의 낯익은 남자를 노려보았다. " 나 집에 갈 거에요. 표 끊게 돈 줘요." 회비를 걷어서 단체로 관리한다는 말에 속아 바보같이 여행 비용을 다 대협에게 건네 주었던 유진은 비행기표를 사고 싶어도 돈이 없었다. " 표? 뭐하러 집에 가? 여기까지 왔으면 런던이 어떻게 생겼나 구경이라도 해보고 가야 할 거 아냐. 따라오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대협은 무정하게 한마디 툭 내던지고 성큼성큼 공항 밖으로 걸어나갔다. 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에 속아서 여기까지 따라온 게 억울했다. 하지만 현재 그녀에게는 비행기 표 끊을 만큼의 돈은 없었다. 그가 돈을 줄 때까지는 그를 따라다녀야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확 일 저질러 버려? 유진은 그의 돈을 몰래 꺼내서라도 집으로 도망을 칠까, 아니면 못 이기는 척 하고 그와 여행을 다닐까 고민에 싸였다. 백대협이라는 남자는 그녀에게 있어 달콤한 유혹이었다. 첫눈에 홀딱 반해 그와 함께 있는다는 것 자체가 가슴떨리는 사건이었지만 그녀의 유별난 성격 탓에 그와 잘 될 거라는 확신도 들지 않았고 그녀가 그의 바람기를 잠재울 수 있을지도 의문스러웠다. 로맨스 소설에서는 아무리 심한 바람둥이라도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일편단심 민들레로 변하고 말지만 그녀가 처한 상황은 현실이었다. 그녀는 예쁘지도 않고 남자를 끌 만한 매력도 없었으며, 피곤하고 후줄근한 모습으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땅에 서 있는 거였다. 의지할 데라고는 서양 미녀들에게 눈이 휙휙 돌아가는 능글맞은 바람둥이밖에 없는. 유진은 어느 순간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대협을 찾아 공항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쁜놈! 진짜 혼자 가버리면 어떡해! 유진은 총총걸음으로 공항을 빠져나와 저만치 앞서 걸어가고 있는 대협을 쫓아갔다. 그녀로서는 모험을 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 이야. 새색시 오셨네." " 신혼 재미는 어때?" " 쳇! 당연한 걸 왜 묻니? 깨가 쏟아지겠지 뭐." 일주일만에 방송국에 돌아온 체리를 향해 동료들이 한마디씩 환영인사를 건넸다. " 그런 거 묻지 말고, 이런 거 물어봐야지. 첫날밤에 어땠어? 진짜 총각 맞는거야?" 민희가 짖궂게 물어보자 여기저기서 야유가 터졌다. 체리는 그저 빙긋 웃으며 그녀의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그녀의 귀여운 남자와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 어? 부끄럼타나 봐. 말 못하네?" 민희가 계속해서 그녀의 옆구리를 찌르며 놀려대자 모두들 와아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체리는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4 박 5 일의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주말까지 친정과 시댁을 비롯해서 여기저기 인사드리러 다니느라 바쁘게 보냈지만 방송국에 다시 출근한 오늘까지도 신혼여행의 기분에 젖어 있었다. 4 박 5 일간 그녀는 지난 5 년동안 겪었던 육체적, 정신적 사랑의 경험을 모두 합한 것 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운 경험을 했다. 대승은 그의 생각에 별로 신통치 않았던 첫날밤을 보상이라도 하듯 매일 저녁마다 열과 성을 다해서 그녀를 즐겁게 해 주었다. 그와의 밤을 떠올리는 체리의 뺨에 홍조가 떠올랐다. 그는 정말 사랑의 행위에 서투르면서도 열심이었다. 그 자신의 즐거움 보다도 그녀를 먼저 배려해 주었으며 그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신기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그녀에게 덤벼들었다. " 김민희씨, 궁금해 하지 말고, 그대도 결혼해 보시지 그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으니까." 그녀의 말에 모두 키득키득거렸다. 체리는 여전히 농짓거리를 해 대는 작가들을 피해 밖으로 나와 휴게실로 향했다. 따끈따끈한 캔커피를 하나 뽑아들고 손 안에서 굴리며 온기를 느끼고 있는데 정희가 다가왔다. " 행복하니?" 체리는 그녀와 같은 캔커피를 뽑아들고 뺨에 대어보는 친구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다. " 그래. 행복하다니 나도 기뻐. 백 PD 님이 잘해주는 모양이구나. 그런데... 밤에는 어때? 그거... 느꼈니?" " 그거...?" 체리는 캔을 따서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길게 들이켰다. 약간은 씁쓸하면서 달콤한 커피맛이 입안에 배었다.


"

그거.

니가

항상

궁금해

하던

느낌.

한번도

오르가즘을

느낄

없었다고

불평해댔었잖아." 체리는 그 전에 정희와 그 일로 언쟁했었던 걸 떠올렸다. 그때 정희는 그녀에게 진정한 사랑이 뭔지 모른다고 신랄하게 그녀를 비판했었다. 체리는 향긋한 커피 한 모금을 입 안에 머금고 혀를 굴리다가 꿀꺽 삼켰다. " 아니. 못 느꼈어. 하지만 다른 건 느꼈는데. 혹시 들어봤니, 정신적 엑스타시라고?" " 정신적 엑스타시?" 체리는 눈을 동그랗게 뜬 정희가 우습다는 생각을 하며 말은 이었다. " 육체적으로 절정에 이르진 못했지만 감정적으로는 그랬단 말이야. 대승씨가 기뻐하니까 나도 기뻐한다는 거지. 나로 인해서 그 사람이 행복해 한다는 게, 나로써도 행복한 일이거든. 감정적인 일치감이랄까?" " 너... 사랑하는구나." 체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사랑일까? " 잘 모르겠어. 내가 지금까지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좀 틀린 것 같아. 이런 기분 처음이야." 정희는 심각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친구의 표정을 살폈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얼굴이다. 그녀의 친구가 오랜 방황을 끝내고 드디어 진정한 짝을 만난 것 같다. 정희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는 체리를 흐뭇한 얼굴로 보다가 그녀를 뒤로 하고 스튜디오로 향했다. 체리는 방송을 하는 도중에도 계속 그녀의 감정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뭔지 정확히 정의내릴 순 없지만 대승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까지 그녀 안에 있었던 감정과는 좀 틀린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그녀는 방송이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고 생각에 잠긴 채 작가실로 들어갔다. 작가실 안은 밖에서도 다 들릴 만큼 큰 목소리로 언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 말도 안돼요! 이미 끝난 일을 가지고 다시 억지 부리는 게 어딨어요!" 미영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민희에게 대들고 있었다. 통통한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서 잘 익은 사과 같았다. " 왜들 그러는거야? 점심 먹으러 안가?" 체리가 미영과 민희의 중간에 끼어들자 민희가 장난스럽게 고개를 까닥거리며 말했다. " 이미 끝난 일이라니. 그건 끝난 게 아니라 진행중이었다구. 사실 두달이란 기간은 너무 불합리한 거였어. 안 그래? 어떻게 두달 안에 한 남자의 마음을 차지해서 결혼을 하느냐구."


체리는 피식 웃었다. 민희가 내기 이야기를 다시 꺼냈나 보다. 그녀는 그들의 언쟁을 좀 더 두고보고픈 생각이 들어 말리지 않았다. 그녀가 한쪽으로 비켜서서 재미있다는 듯 팔짱을 끼고 그들의 지켜보자 미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 난 정말 이해가 안되요. 처음에 내기할 때 분명히 민희언니가 내기 장부에 적었잖아요. 체리 언니가 백 PD 님 총각딱지 떼는 데 2 달 기한이 걸릴 거라고. 그래서 나랑 정희 언니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데 걸고, 나머지 분들은 다 가능하다는 데 걸었죠. 그렇죠? 그리고 그 기한 정한 것도 체리언니였다구요. 두달이면 충분하다고. 언니 그랬었죠?" " 그랬지." 대승은 막 작가실로 들어가려다가 안에서 쩌렁쩌렁 들려오는 미영의 목소리에 그 자리에 딱 멈춰섰다. 그는 체리가 눈 앞에 안 보이는 잠깐을 못 참고 그녀가 보고 싶어 작가실에 온 거였다. 곧 점심시간이 된다는 핑계로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는 생각으로. 하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그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 두달 지나고, 부산 공개방송 갔다온 다음에 체리 언니가 그랬잖아요. 성공하지 못했다고. 백 PD 님은 아직 총각이니깐 내기에 졌다고. 그래서 그때 내기돈 걷어서 같이 놀았잖아요. 그런데 이제와서 그걸 뒤집어 엎는다는 게 말이 되요?" 석달 전, 의도적으로 체리가 그에게 접근해왔던 일이 떠올랐다. 그녀가 커피를 쏟아 그의 집까지 가서 그에게 키스했던 일, 그 이후 노골적으로 그를 유혹했던 일들이 빠르게 머릿 속을 스쳐갔다. 처음에는 그저 그를 유혹해 육체적인 관계를 가지려 했었다. 그가 그녀에게 끌리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그녀와 사귀게 되었을 대도 그녀는 그의 바램대로 감정적인 교류보다는 그의 몸에 더 관심을 보였었다. 그리고 결혼을 한 지금도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승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아무리 내기를 했다고 해도, 그의 몸을 갖기 위해 결혼까지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그를 사랑하면서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 그에게 접근했던 게 내기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되자 그녀를 이해하기 보다는 가슴이 야속한 그녀 때문에 저려왔다. " 아니야. 그건, 솔직히 생각해 봐. 결혼하기 전에는 절대로 몸을 허락 안 하는데, 결혼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많이 걸리니. 겨우 한달 초과했을 뿐이잖아. 결과적으로는 체리가 성공한 거라구. 충분히 뒤엎을만한 이유가 된다고 봐. 안 그러니, 체리야?" 민희가 열변을 토하자 모두 깔깔 웃어댔다. 체리는 이미 지난 일을 갖고 왈가왈부 하는 게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민희가 워낙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잠자코 있었다. 처음에 내기에 응한 건 자존심 때문이었지만 금새 그 내기에 관한 건 잊어버리고 있었다. 친구 정희에게 말했듯이, 그저 잠깐의 기분전환이 될만한 오락거리로 생각하고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역시 돈이 걸려있는 일이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사실은 백대승이라는 그 남자 자체에 매력을 느껴 그렇게 열심히 쫓아다녔던 건데 민희 말대로라면, 내기에 이기기 위해서 결혼까지 불사하는 열성을 보인 것 같아 영 기분이 찜찜했지만 그녀는 그냥 웃고 말았다. "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방법이야 어찌 됐건, 결국은 대승씨의 총각 딱지를 떼 준건 나니까. 하지만..." " 어머? 백 PD 님, 여긴 웬일이세요? 체리 만나러 오셨어요?" 안에서 내기 이야기로 한창 열올리고 있던 작가들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세라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체리는 가엾을이만치 놀라 얼굴이 하얘졌다. 작가실 밖으로 나오자 대승의 얼음보다 더 차가운 분노의 눈길을 정면으로 받은 그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대승씨. 저... 그게 아니라..." 그의 표정을 보건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은 것 같았다. 체리는 당황한 나머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더듬거렸다. 그가 안절부절 못하는 그녀를 놔 둔채 찬바람이 쌩 나게 돌아서서 가버렸다. 체리는 재빨리 그를 쫓아가며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그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체리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간신히 그를 붙잡았다. 그녀가 다시 변명을 하려 입을 열었으나 너무도 차가운 그의 태도에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찌르기만 해도 금새 폭발할 것 같았다. 대리석처럼 굳어버린 얼굴에 움직이는 건 분노로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 뿐이었다. 그가 이렇게 화난 모습은 처음 보았다. 체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 대승씨, 기분 이해해요. 하지만 사실은..." 그녀가 겨우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어 사실을 말하려 했으나 그는 팔을 잡고 있는 그녀를 매정하게 홱 뿌리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 버렸다. 체리는 닫혀 있는 엘리베이터 문만 망연자실하게 바라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후 내내 체리는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 책상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일이 그렇게 된 데에 죄책감을 느낀 민희와 미영이 와서 사과를 하고 위로해 주었으나 그녀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퇴근 후 체리는 머릿속으로 그를 달랠 온갖 계획을 떠올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대승이 이미 집에 와 있는지 방에서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어본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행가방을 꺼내 놓고 집을 싸고 있는 것이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 마자 별거를 하려는 건가? 체리는 절박한 심정으로 옷을 가방에 넣는 대승의 팔을 붙들었다. " 대승씨, 어딜 가려고 그래요. 내가 잘못했으니까 나가지 말아요."

대승이

커다란


하지만 대승은 간단하게 그녀를 뿌리치고 계속해서 짐을 쌌다. "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 " 뭐라구요?" " 당신이 나가. 날 두고 내기 따위나 하는 여자와는 하루도 같이 있을 수가 없어. 어디로 가든 나가서 충분히 반성할 때까지는 집에 얼씬도 하지 마." 그러고 보니, 그가 싸고 있는 짐은 모두 그녀의 옷과 물건들이었다. 기가 막혀서 그를 말리지도 못하고 멍하게 있는 새에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는 커다란 여행가방과 함께 문 밖으로 쫓겨나 있었다. " 너무해! 내가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내를 내쫓는 남편이 어딨어. 이 엄동설한에..." 12 월 초순이라 찬바람이 쌩쌩 부는 저녁때 집에서 쫓겨난 체리는 기가 막히기도 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서 한참을 문 앞에 서 있었다. 고집불통인 그녀의 남편이 아무리 기다려 봐야 문을 열어주지 않을 건 뻔했고, 계속 밖에서 추위에 떨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집으로 전화했다. " 엄마, 나 집에 가두 돼? 응? 아니, 안 싸웠어. 그냥. 안 싸웠대니까. 진짜. 어? 엄마? 엄마!" 엄마는 부부싸움 하고 피난처로 친정 오는 거 아니라며 매몰차게 끊어 버리셨다. " 치이! 잘못한 거 있으면 싹싹 빌으라구? 왜 내가 잘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체리는 폴더를 탁 소리나게 닫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가방을 들고 낑낑거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 아니. 아가. 이 시간에 웬일이니?" 장숙희여사는 늦은 시간에 큰 가방을 끙끙거리며 들고 들어오는 막내 며느리를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찬바람에 뺨이 차게 얼어붙은 체리는 일단 따뜻한 집안으로 후다닥 들어왔다. " 네에. 어머님. 저 며칠만 여기 있을게요. 밀린 일 때문에 오늘부터 며칠간 철야할 것 같다고. 대승씨가 어머님 , 아버님이랑 같이 며칠만 좀 지내래요." 체리는 생글생글 웃으며 둘러댔다. 신혼여행 갔다오자마자 싸운 걸 여기 저기 알리기 싫어서 시댁으로 와 버린 거였다. " 빈 집에서 혼자 자는 것도 싫고 , 분가해서 사니까 자주 찾아뵙지도 못할 텐데, 이런 핑계라고 대서 아버님 어머님하고 며칠만이라고 같이 지내면 좋을 것 같아서요. 저 여기 있어도 되죠? "


" 그럼. 우리야 언제나 환영이지. 편히 지내다 가렴. 참 저녁은?" 체리는 따뜻하게 그녀를 맞아주시는 시어머니가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찔끔 나려고 했다. 그녀는 넉살 좋게 시어머니가 차려주시는 저녁 배부르게 먹고 뜨뜻하게 보일러 튼 방에서 편안하게 누워 잠을 청했다. 배도 부르고 졸립기도 했지만 막상 자려고 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제멋대로 흘러가는 상념 속에서 어느덧 그녀는 신혼여행 때로 돌아가 있었다.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키스해 주던 그. 바닷가에서 사진 찍으며 그녀와 키스에 몰두하다가 사진사에게 핀잔 들으면서도 싱글벙글 웃던 그.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나중에 다시 태어나도 그녀와 결혼할 거라고 진지하게 말하던 그. 사랑일까? 체리는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았다. 그녀는 사랑이 뭔지 몰랐다. 하지만 만약, 대승이 아니라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면 끔찍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하지 않는 생활은 상상할 수도 없어. 이런 기분이 사랑일까? 그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거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조건이 아니라 그녀 자체를 사랑한다는 . 그런걸까? 체리는 그녀가 왜 그를 계속해서 유혹했었는지 이유를 떠올려 보려 애를 썼다. 처음엔 자존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내기에 대해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를 갖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에 사로잡혔었다. 왜 다른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를 갖고 싶었을까? 알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때부터 그녀 자신은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를 사랑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온갖 술수를 부려 그를 차지하려고 했던 게 이치에 맞지 않는다. 체리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진정한 사랑... 영원한 사랑이라... 그녀가 믿지 않았던 사랑이라는 감정, 특별한 상대와는 그게 가능한 걸지도 모른다. 그녀에게는 그 특별한 사람이 바로 백대승이라는 남자였고. 화 많이 났을 텐데... 어쩌지? 체리는 머리를 굴렸다. 어찌나 골똘히 생각했는지 머리 굴리는 소리가 또르르 들리는 것 같았다. " 아. 머리 아프다. 그만 생각해야지." 체리는 소리내어 중얼거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은 그녀의 감정상태를 정리하는 것만도 벅차고 혼란스러웠다.


다음날 아침, 체리는 일찍 일어나 약간 이르다 싶게 방송국 앞에 도착했다. 차가왔지만 상쾌한 아침공기에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방송국 정문을 들어서는데 저만치 앞에서 걸어가는 그녀의 귀여운 남자가 보였다. 체리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그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속삭이고는 시치미 뚝 떼고 그를 지나치면서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 백대승씨. 그렇게 골 내고 있어도 소용없어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포기하는 건 유체리 답지 않은 일이죠. 당신을 다시 유혹할 거에요. 남자라는 동물은, 유혹에 약하니까. 그리고 당신이 내 유혹에 넘어오면 그때 말해줄 거에요. 사랑한다고. 영원히 당신을 나한테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들 거라고." 끝!!!!! 감사합니다!!

c50  

체리는 널찍한 침대 위에서 시트를 휘감고 자고 있는 남자를 보며 찜찜한 기분을 느껴야 " 그건. 진짜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잘 느껴져."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나로 인해서 상대방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 이 아닐까요? 오늘 했다. 최상현. 최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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