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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재계 1 위 한영그룹 본사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중심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모든 금융권의 본점과 다른 대기업들의 본사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그곳에서 단연 돋보이는 건물이 바로 한영그룹이다. 마천루처럼 우뚝 솟은 건물은 이제 막 떠오르고 있는 아침 햇살을 받아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최첨단 시설로 새로 지어진 건물답게 주위의 다른 빌딩들을 자신의 몸에 비쳐내며 40 층의 웅장한 은빛 몸체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지만 한영그룹 빌딩 앞에는 수십대의 고급승용차가 줄을 지어 들어 오고 있었다. 모두 똑 같은 차종의 최고급 승용차로 이번에 한영이 새로 내놓은 신형 모델 이었다. 색상마저도 검정일색으로 마치 입에서 토해 내듯 사람들을 내려 놓고는 지하 주차장을 향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기를 수십 차례 어느새 길게 꼬리를 물고 있던 차들의 행렬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차에서 내린 수십명의 사람들은 마치 지옥입구에 발을 들여 놓는 것처럼 건물 안으 로 선뜻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서로의 눈치만 살피는 것이었다. 37 층 대형 회의실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던 세이치 쥰은 어이가 없어 굳어 있던 얼굴에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 그를 보고 곁에 나란히 서있던 비서실장 이민석은 기겁하여 숨을 들이켰다. 이민석의 다급한 숨소리에 세이치 쥰은 묻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물론 그의 얼굴에서 미소를 찾아 볼수는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은 가면을 쓴 것 같았고 냉기마저 감돌았다. 이것이 바로 지난 이십년 동안 이민석이 보아온 세이치 쥰의 본 모습 이다. 지난 이십년 동안 세이치 쥰이 미소 비슷한 것을 짓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기에 비록 비웃음이었지만 그가 웃었다는 사실이 마치 기적처럼 느껴졌다. 어디 웃음 뿐이랴. 민석은 세이치 쥰의 목소리를 들어 본적이 있는 지 기억조차 없었다. 그는 표정만으로 사람을 대하는 희한한 재주를 가진 사내였던 것이다. 175 정도의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세이치 쥰은 냉막한 표정만 아니라면 병약한 샌님 같은 타입으로 보일 것이다. 겉모습 만으로 그를 판단 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당황하던 일들을 하도 많이 봐와서 민석은 은근히 그를 어렵게 대했다. 자신보다 10cm 나 작고 몸무게도 20kg 이나 덜 나가는 그를 두려워 하는 것은 어린시절부터 느껴온 감정이 굳어 버린 탓도 있었다. "아니...그냥...쥰님이 웃는 모습을 처음 뵈서...." 여전히 묻듯이 쏘아보는 세이치 쥰을 향해 민석이 변명하듯 말을 더듬었다. 그의 시선 앞에서 열살짜리 아이로 돌아 간 듯 느껴져 당황스러웠다. 그런 민석을 비웃듯 또다시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37 층 아래로 돌리는 세이치 쥰이었다. '정말 저 아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여서 저러는 걸까?' 민석은 궁금했다. 저 까마득 한 아래에 개미마냥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검은 물체의 무엇을 보고 웃는 것인지.... 하지만 저 세이치 쥰이라면 가능한 이야기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보통사람들은 상상도 못하는 능력의 소유자 였기 때문이다. 짙은 색의 고급 슈트에 감싸 인 호리호리한 몸을 보며 오싹한 한기를 느끼는 민석이었다.


민석의 머리속 상상이 어떻게 돌아 가고 있는지 훤히 보이는 세이치 쥰은 또다시 웃음을 삼 켰다. 세이치 쥰 역시 인간이지 슈퍼맨이 아닌데 37 층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보일리 만무했다. 다만 수십명의 사람들이 개미 마냥 우글우글 모여 갈팡질팡하는 꼴이, 왜 그렇게 당황하고 있는지 짐작하고 있는 그이고 보니 우습기 그지 없었던 것이다. 무슨 초인간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되는 듯 대하는 민석을 볼때마다 한심스럽고 우습기 그지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받은 인상이 자라서 까지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었다. 그가 일부러 사람들과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열다섯에 처음 한국에 와서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자신의 발음이 이상해서 그들이 웃음을 감추는 것을 깨닳자 자존심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듣는 데는 문제가 없었으므로 간단한 고개짓으로 알아 들었다는 시늉만 표시했다. 이십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태어나 자란 일본보다 한국에서 지낸 시간이 더 많아 졌고 이제 는 억지로 이상한 점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상 그의 발음은 문제가 없었다. 물론 그가 끊임없이 노력한 덕분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삼갔다. 처음에는 자존심 때문에 입을 다물었지만, 사람들과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이 의외로 자신의 감정을 평온하게 유지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어느새 개미군단은 건물 안으로 줄지어 들어서고 있었다. 민석은 나직히 한숨을 내쉬며 그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그 작은 개미군단이 바로 한영그룹의 임원진과 계열사 사장들이었기 때문이다. 세이치 쥰은 뭔가를 당부하듯 민석에게 흘낏 시선을 던지고는 회의실 구석으로 다가가 지문 인식기에 손가락을 대었다. 자동으로 문이 열리자 그의 모습은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거대한 타원형의 회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자리에 앉은 그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불안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갑작스런 회의 소집은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새벽 1 시에 걸려온 전화는 아침 일곱시에 본사로 모이라는 그룹 총수의 명령을 전하고 일방 적으로 끊어졌다. 물론 전화를 건 사람은 이민석 비서실장이었지만 수화기를 내려 놓고 무슨 일인가 의구심과 불안에 떨며 밤 을 새운 그들이었다. '무슨 일 일까?' 그들의 머리속에는 똑 같은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평상시와는 다르게 회의 자료가 그들 앞에 놓여 있지도 않았고 음료수 잔이나 물잔도 보이 지 않았다. 이건 그냥 일반적이 회의 소집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십명이 모여 있는 회의실 이었지만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적막감이 감돌았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회장이 들어오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들은 마치 로보트 마냥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자리에 들 앉으세요." 상석에 몸을 깊숙히 묻고 앉은 회장이 정중하게 명령했다. 그들은 여전히 굳은 자세로 자리에 앉으며 총수의 눈치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의 총수는 고급 가죽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고 앉아 한명 한명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 노려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등으로 한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회장의 오른쪽에 자리잡고 서있던 이민석은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부하직원들을 호령하는 사오십대의 간부들이 새파랗게 젊은 회장의 시선을 받아 내지 못하고 절절 매는 꼴이라니. "이렇게 이른 시간에 갑자기 모이 시라 해서 죄송합니다." 회장의 사과 하는 말에도 그들은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꿀 먹은 벙어리마냥 조심스런 시 선을 회장에게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잘생긴 총수의 얼굴에는 차가운 냉기가 풀풀 날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들의 회장이 단단히 화가 난듯 싶었다. "제가 회장에 취임하면서 여러분에게 당부한 말이 있지요..." 무거운 침묵을 깨며 나직한 저음의 매력적인 음성이 회의실에 퍼졌다. 임원들은 움찔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정말 큰일이 생긴 모양이라고 그들은 걱정스런 시선을 주고 받았다. "모두의 기억을 살려 주는 의미에서 조세현사장께서 말씀해 주시지요." 지명 받은 한영종합금융사장은 사색이 되었다. 사십대 초반의 그는 임원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 하지만 뛰어난 능력을 인정 받아 작년에 사장으로 전격 임명되었다. "그....그건..."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한일을 회장이 알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지 못했기에 그는 더욱 당황했다. 그는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고 증거를 깨끗이 없앴다고 자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를 쏘아보고 있는 회장의 시선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음을 전해 오고 있었다. "이실장이 말해 보지요. 조세현씨는 기억이 나지 않나 보군요." 회의실에 순간 소리 없는 충격이 감돌았다. 그들은 더 이상 회장이 조세현을 사장이라 칭하 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그가...! 조세현을 향한 수십명의 시선은 경악 그 자체였다. "회장님께서는 삼년 전 회장직에 취임하시면서 분명히 말씀하셨지요. 회장님을 기만하는 사 람은 그누가 되었던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시겠다고요." 이민석은 잔인하게 말하며 조세현을 쏘아보았다. 뼈째 갈아 마셔도 시원찮은 놈이었다. 감히 누굴 속이려 들어. "네...회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기억 나는군요." 조세현은 증거도 없는데 회장이 자신을 어쩌지는 못할거라는 생각에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 이 한 짓을 부인해야 한다고 마음을 강하게 먹었다. "나한테 할말 없나?" 더 이상 계열사 사장으로 예우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회장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두려운 마음을 애써 누르며 부인했다. 여기서 무너질 순 없지. "데려와." 짤막한 명령에 회의실 구석에 위치한 문이 열렸다. 무표정한 사내가 한 젊은 여자의 팔을 잡고 나왔다. 세이치 쥰을 보자 죄지은 것도 없이 두려움에 떠는 임원들이었다. 세이치 쥰이 회장의 경호실장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회장 못지않게 두려운 존재였다. 오죽하면 한영그룹 직원들이 그의 뒤에서 사신이라고 수근거리겠는가. "이 여자를 모른다고는 못하겠지?" "회...회장님..."


자신의 비서(전직)를 보며 그는 평정을 잃어 버렸다. 해치웠다고 믿고만 있었는데...그놈들은 어떻게 일을 처리한 거야! "네 놈이 감히 나를 속여!" 의자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며 회장이 내지른 소리에 조세현은 의자에서 튕기듯 일어나 바닥 에 납작 엎드렸다. "죽...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제발...용서를...." 조세현은 벌벌 떨며 빌면서 울부짖었다. "이제부터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회장님." 세이치 쥰이 나온 방에서 세명의 남자가 갑자기 나타났다. 그중에 상급자인 듯한 이가 조세현에게 다가갔다. "조세현 너를 뇌물수수와 공금횡령 및 살인 교사로 체포하겠다." 그는 뒤이어 그의 권리에 대해서 주저리 읊어 주며 수갑을 채워 일으켜 세웠다. "나는 그 돈을 챙길 권리가 있는 사람이야. 이거 놔. 내가 한종금을 어떻게 살려 놨는데...날 이렇게 버릴 순 없어! 윤준호! 날 이렇게 대한 걸 후회할거야!" 조세현은 끝까지 발악하듯 악담과 욕설을 퍼부으며 검사와 경찰들에 의해 끌려 나갔다. 회의실에 남은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방금 겪은 일들을 믿을 없다는 듯 고개를 젖고 있었다. "조세현 전 한종금 사장은 감히 날 기만하고 자신이 한 짓을 감추기 위해 죄없는 여자를 죽 이려고 까지 했습니다. 또다시 여러분 중에 조세현 같은 사람이 나온다면..." 그는 말을 끊고 부하직원들을 한명씩 노려 보았다. "그때는 이번처럼 조용히 처리하지 않겠습니다." 세이치 쥰이 회장 옆으로 조용히 다가서자 사람들은 숨 쉬는 것 조차 잊어버렸다. 말을 끝낸 회장은 그대로 회의실에서 나갔다. "각자 자리로 돌아가 이번 일을 수습하십시오. 당분간 매스컴에서 시끄러울 겁니다." 비서실장의 말에 정신을 차린 임원들은 하나 둘 회의실을 빠져 나갔다. 아직 여덟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며칠은 지난 것 같이 느껴지며 피곤함을 느꼈다. 앞으로 이일이 잠잠해질 때까지는 쉬지 못할 것을 알기에 그들은 더욱 어깨가 쳐졌다.

"그놈을 너무 가볍게 처벌하셨습니다." 회장실에 들어서며 윤준호의 등뒤에서 세이치 쥰이 볼멘 소리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지금처럼 말을 하는 세이치 쥰을 본다면 비서실장인 이민석은 놀라 기절할 거라는 생각이 잠시 그의 뇌리를 스쳤다. 쥰이 대화를 하는 상대는 딱 두 명 뿐이었다. 바로 그와 그의 외조부. "이런 이런. 조세현은 충분한 처벌을 받을 거야. 공금횡령은 그렇다 쳐도 살인교사가 가벼운 죄는 아니란 말야. 우리나라 법이 그렇게 허술하진 않아." 윤준호는 쓰게 웃으며 책상 앞에 앉아 결제서류를 끌어 당겼다. "자네가 그 아가씨를 구해 주지 않았다면...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그 아가씨 증인보호 신청은 해 놨겠지? 조세현 그놈이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진 않군. " "노회장님이라면 이정도로 끝내지 않으셨을 겁니다." 쥰은 여전히 불만스럽게 그 문제를 고집했다. "이봐, 쥰. 자네가 조세현의 손가락이라도 자르고 싶어하는 심정은 알지만 제발 참아 달라구." 쥰이 외할아버지를 들먹이자 짜증이 난 그는 빈정거렸다.


"전, 야쿠자가 아닙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쥰이 화를 억누르며 쏘아 부쳤다.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미안, 내가 말을 실수 했군. 용서하게." 윤준호는 순순히 사과를 했다. 쥰은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지만 노여움은 풀린 것 같았다. "그 아가씨는 제가 데리고 있기로 했습니다. 믿을 만한 부하에게 지키도록 할 겁니다." 의외의 대답에 쥰을 바라본 그는 기억을 더듬어 그 비서란 여자의 외모를 떠올렸다. 빼어난 미모는 아니었지만 예쁘장한 얼굴에 몸매도 그만하면 괜찮은 편이었던 것 같다. 설마...저 쥰이? 말도 안 된다고 자신의 생각을 부인하며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자네 방에 가서 쉬게." 윤준호의 지시에 쥰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후 자신의 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회장실에 이어진 방이 그의 사무실이었다. "그래 자네는 무사지... 할복을 시키라고 할걸 그랬나?" 그가 사라진 방문을 보며 윤준호은 혼잣말을 던졌다. 사람들이 쥰를 보는 것만큼 그는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오히려 준호가 그를 달래야 할정도로 그는 악은 철저하게 징벌해야 한 다는 정의파였다. 천상 사업가의 기질을 타고난 준호와 무사의 피가 끓어 넘치는 쥰의 철저하게 다른 점이었다. 참 안어울리는 콤비라는 생각이 스쳤다. 두사람이 이십년을 함께 지내온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아니면 하늘의 도움 이던가. 윤준호는 세이치 쥰을 처음 만난 날을 잠시 회상해 보았다. 이십년전 준호의 나이 열살, 영문도 모른체 외할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갔을 때 였다. 쿄토의 오래된 전통 고가를 방문한 그는 세이치 쥰을 만났다. 세이치가는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사무라이 집안 이었다. 쥰은 세이치가의 차남이었고 열다섯으로 준호보다 다섯살이 많았다. 전통 있는 무사집안 후손답게 쥰은 검술에 능했다. 준호 역시 할아버지의 강요로 네살때부터 검도를 배워왔던 터라 그와의 대련을 기꺼이 받아 들였다. "세이치 쥰은 윤준호님을 죽는 날까지 주인으로 모시겠습니다." 대련은 쥰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는 준호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다. 어린 준호는 영문을 알 수가 없어 할아버지와 쥰을 번갈아 보았다. "네가 인복이 있나 보구나." 할아버지는 담담히 웃으시며 그렇게만 말씀하셨다. 나중에 커서 알게 되었지만 할아버지는 쥰의 아버지 목숨을 구해주신 일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좀더 젊고 쥰의 아버지가 소년이었을 때 사업차 도쿄에 들렸던 그는 홍수로 불 어난 강에 실수로 빠진 소년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것이다. 쥰의 할아버지와 쥰의 아버지는 언젠가 은혜를 갚겠다고 굳게 약조를 했다고 한다. 물론 할아버지는 그들의 말에 웃음으로 넘기셨지만. 나중에 그들은 윤준호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았기에 은인의 손자를 보호하기 위해 쥰을 기꺼이 내 놓았다. 그당시 준호는 납치와 유괴의 협박을 심심치 않게 받고 있었다. 쥰 역시 자신보다 어린 아이였지만 첫눈에 범상치 않은 인물이 되리라고 확신했기에 고국을 떠나 준호와 함께 한국에서 생활하게 되었던 것이다. 준호는 내심 쥰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어린 그는 아무것도 몰랐고 설혹 알았다


하더라도 상황이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이치가는 은혜를 갚았다는 것이 중요했기에... 그리고 이제는 그가 없는 자신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이십년이었다. 장장 이십년 동안을 함께 동거동락하고 살아온 그의 지기였다, 세이치 쥰은. 세이치 쥰 역시 자신의 사무실에서 창 밖을 내다 보며 옛일을 생가하고 있었다. 그에게 윤준호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보호해야 할 주군이자 유일한 벗이었다. 비록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지만 모두면에서 그보다 뛰어난 인물이 바로 윤준호 였기에 그는 한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윤준호가 태어난 순간부터 그를 앞으로 모셔야 한다는 조부와 부친의 말씀을 귀에 못 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다. 어느 정도 성장하자 쥰은 반발심을 느꼈다. 가업을 이어야 하는 형을 대신해서 자신이 왜 십자가를 져야 하는지 원망도 많이 했었다. 그래서 윤준호를 만나 보고 자신의 인생을 맡겨도 될지 결정하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래서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그는 한눈에 윤준호에게 반해 버렸다.-그당시에는 그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고작 열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소년에 불과 했지만 그는 당당한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승낙하기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은 쥰이 아무리 무섭게 노려보아도 준호는 재미있어하는 표정뿐이었다. 그는 부모와 형제들조차 꺼려하고 두려워하는 자신의 능력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준호가 이해가 되지 않아 오기로 심술을 부려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치 자신이 윤준호 보다 더 어리게 느껴져 자신의 유치한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일본 검도계에서 천재라고 칭송이 자자한 자신이 윤준호를 대련으로 이끈 것은 자신의 유치 한 행동 중 최악이였다. 당연히 그는 윤준호를 이겼다. 아무리 윤준호가 실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나이가 다섯이나 많은-그의 부친조차 자신을 이기는 것이 쉽지 않는 실력의 소유자인-쥰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대련이 끝나자 호구를 벗어 겨드랑이에 끼운 준호가 싱긋 웃으며 악수를 청하자 그 는 무너질수 밖에 없었다. "정말 멋진 시합이었습니다. 제가 좀더 실력을 쌓은 다음 다시 도전하면 받아 주시겠습니까?" 그의 얼굴은 해맑은 미소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마음까지 따뜻하게 만드는 그의 미소와 졌어도 당당한 그의 당찬 모습에 그는 무릎을 꿇었 다. "세이치 쥰은 죽는 날까지 윤준호님을 주인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신의 결정을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 완벽한 주군을 모시는 행복한 무사였으니까.

그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윤준호는 퇴근을 했다. "아냐, 됐어. 집으로 먼저 들어가봐." 준호는 차문을 열어주고 그가 내리자 뒤를 따르려는 쥰에게 고개를 저었다. 조세현의 일로 피곤할 쥰에게 휴식을 주고 싶었다. 조세현의 비서가 살해 당할뻔한 상황에 우연히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 고 쥰은 잠시도 쉴 수가 없었다. 앞으로도 재판이 끝날 때까지 조세현의 비서를 보호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쥰에게 있었기 에 준호는 그에게 잠시라도 쉴 시간을 주고 싶었다. "괜찮겠습니까?"


염려스런 쥰의 음성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지만 애써 다잡았다. "괜찮아."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그 말을 내뱉고 걸음을 옮기는 준호였다. 그는 자신소유의 병원을 들어서며 냉정 하려 애썼다. 그는 병원이 싫었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곳이 있다면 바로 병원이었다. 아무리 자신 소유이고 국내에서 가장 알아주는 종합병원이라도 싫은 것은 싫은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 병원이기 때문에 싫은 것이리라. 그는 기억 속에서 빠져 나와 그를 아프게 만드는 잡념들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늦은 시각이라 병원에는 사람조차 뜸했다. 그는 바삐 걸음을 옮겨 로비를 가로질러 특별병동으로 이어진 긴 복도를 향했다. 윤씨 일가만 사용하는 특실이 있는 병동은 몇몇 간호사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간호사들은 그를 보자 정중하게 인사를 했지만 준호는 고개만 까딱 하고는 병실로 들어갔다.사치스럽고 쾌적하게 꾸며진 방은 병실이라기 보다는 여느 특급호텔의 스위트룸을 연상시켰다. "오셨어요, 회장님." 외조부의 개인비서는 퇴근한 듯 홀로 남아 있던 간병인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준호를 보더 니 일어나 인사를 한 후 자리를 비켜 주었다. 침대 옆 의자에 앉은 준호는 잠든 외조부의 야위고 주름진 손을 감싸 쥐었다. 희미한 온기가 전해지자 그는 마음이 놓였다. "준호 왔냐?" 어느새 눈을 뜬 외조부가 탁한 시선을 들어 손자를 응시했다. 노안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빛은 살아 있었고 그래서 준호는 안심했다. 벌써 연세가 여든아홉이었다. 외조부는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다고 하시지만 준호는 그의 죽음을 받아 들이 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그의 영혼을 갉아 먹는 잔인한 일이었기에. "네." "회사는 별일 없지?" "네. 걱정 마세요." "나라가 IMF 라고 난리던데..." "한영그룹은 전부터 준비해 왔기 때문에 염려 안 하셔도 되요." "그래. 네가 누군데...난 너만 믿는다..." 항상 같은 대화가 이뤄지는 조손이었다. 남들이 곁에서 듣는 다면 이상하고 정 없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이렇게 삼십년 을 살아 왔다. 윤준호는 남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회사로 나왔다. 외조부는 어린손자를 마치 중역을 대하듯 하며 그를 가르치고 의견을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그는 회사임직원들 사이에서 작은 회장님으로 통했다. 외조부는 그의 천재성을 키워주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고 모든 교육을 받게끔 했다. 그는 육개국어를 읽고 말할 줄 알았고 못하는 무술이 없었다. 태권도 검도 유도 쿵후 가라데... 두 조손간에 나누어 지는 대화는 회사이야기를 빼면 별로 할말이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은 회 사를 목숨처럼 생각했다. 특히 외조부에게 회사는 분신이나 다름 없었다. 외조부는 아기에 불과할 때부터 손자가 뛰어난 경영자가 되리라고 예감했고 그것은 적중했다. 준호는 직감적으로 돈 냄새를 맡고 위기를 느끼고 물러 설 때를 알았다.


그래서 남들은 IMF 로 허둥대며 어쩔 줄 몰라 할 때 재빠른 구조조정과 회생의 기미가 없다 싶은 계열사는 깨끗이 정리를 해서 군살을 없애는 대작업에 들어갔다. 만 이년 만에 회사는 정상적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아직도 정신없이 터지는 도산하는 회사들 속에서 한영은 세계로 더욱더 뻗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 세우는 자동차공장은 어떻게 되가지?" "준공이 몇 달 남지 않았습니다. 준공식에는 할아버님도 참석 하셔 야죠?" "암, 그래야지." 외조부는 노안에 물기를 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주무 세요." 한시간 남짓 회사 일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 주던 준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드리고 나 가려고 할때였다. "준호야," "네?" "네 애비는 만나고 있는 거냐?" 외조부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던 준호의 몸이 굳어 버렸다. "아뇨."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며 준호가 문을 닫고 병실을 나가자 외조부의 얼굴에 짙은 슬픔이 내 렸다. "불쌍한 놈." 그는 중얼거리며 애써 눈을 감았다. 병원 안에 위치한 공원으로 발길을 돌리는 준호의 몸에서 살기어린 분노가 뿜어져 나왔다. 부친에 대한 생각은 항상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너무나 큰 슬픔도.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며 그는 눈을 감았다. 지금도 십년 전 모친을 여의었을 때의 아픔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바로 이 병원에서 어머니는 눈을 감으셨다. 그래서 그는 이 병원이 싫었다. "준호야...네 아버지는...아버지는...아직...안오셨...니?...." 임종하시기전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부친을 찾던 어머니셨다. 그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울음을 애써 참아야 했다. 아버지는 왜 빨리 오지 않는 걸까? 그는 부친에게 원망하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결국 어머니가 눈을 감을 때까지 부친은 오지 않으셨다. "..호야...아버지를...부디...용서해....절대로...원망해선...안..." 눈을 감은 모친을 부둥켜 안고 그는 절규하고 또 절규했다. "호오빠? 무슨 일 있어요?" 갑자기 바람결에 실려온 어린 소녀의 맑은 음성에 그는 눈을 떴다. 하지만 가로등 불빛만이 어두운 공원을 쓸쓸하게 비추고 있을 뿐 이었다. 그의 망막에 어린 소녀의 영상이 맺혔다. 갸날프고 여리디 여린 소녀의 모습이 떠오르자 그는 왠지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리움 이었다. "연이가 안아 줄 께요. 마음껏 우세요." 짧은 생머리에 감싸 인 자그마한 얼굴도 떠올랐다. 요정같이 생기에 넘치던 그 아름답던 얼굴. 소녀가 밝게 웃으면 그의 슬픔도 어느새 사라져 버리곤 했다.


"연이라고 불러주세요. 중 1 이구요. 엄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계세요. 오빠는요?" 어머니가 입원해 계신 병원을 찾았다가 소녀를 이 공원에서 만났다. 그때도 그녀는 아름다운 미소를 얼굴 가득 담고 있었다. 준호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슬픔을 보았고 그녀가 비록 낙천적으로 행동하고 있지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내 이름은 준호. 대학교 1 학년이고 나 역시 어머니가 아프셔서 이 병원에 입원해 계셔." "와! 그럼 같은 학년이네요?" 중 1 과 대학교 1 학년이 같다고 주장하던 당찬 소녀였다. 소녀와의 첫 만남 이후 그는 병원에 올 때마다 공원에서 그녀를 만났다. 연이와 만나고 있는 동안에는 그는 모든 것을 잊을 수가 있었다. 부친에 대한 분노도 모친에 대한 아픈 마음도. 모친이 돌아 가시던 날 그는 이 공원에서 소녀의 가녀린 품에 고개를 묻고 울었다. 자신보다 일곱살이나 어린 소녀에게서 그는 위로를 받았고 그래서 힘을 내어 모친의 장례식 을 의젓하게 치렀다. 연이외에 그의 눈물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장례식장에서 냉정한 그의 모습을 두고 냉혈한이라며 사람들이 수근거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외조부의 가르침대로 남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주는 추태는 면할 수 있어 다 행이란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장례식이 끝나고 다시 찾은 병원에서 그는 연이를 찾을 수가 없었다. 모친이 퇴원을 해서 병원을 떠났던 것이다. 그는 병원기록에서 주소를 확인하고 찾아 갔지만 거짓 주소로 판명 났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소녀를 찾기 위해 쥰에게 도움을 청하기 까지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외조부의 제안대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바쁜 유학생활에서 그는 모친을 잃은 슬픔과 연이에 대한 그리움을 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짧은 단발머리의 하얀 얼굴을 가진 작은 여자를 대할 때면 가슴이 철렁 내려 앉곤 했다. 무의식 중에 군중들 속에서 연이를 찾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조만간 벚꽃이 흐트러지게 피게 되면 그향기에 더욱 생각나겠지. 그만의 작은 소녀가. 소년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던 시절의 그리운 추억이 바로 연이었다.

속으로는

쥰은 자신의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섰다. 준호의 집이 있는 성북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가 자신의 집을 구해 나온 지 벌써 일 년이나 되었다. 쥰은 성북동저택을 떠나는 것을 싫어했지만 준호가 끝까지 고집을 부려 그에게 아파트를 마련해 주었다. 서른이 넘도록 혼자인 쥰이 염려 되었던 것이다. 집을 가지고 있으면 그가 장가를 갈수 있다고 정말 생각했던 것일까, 준호는. "오셨습니까?" 조세현의 비서를 보호하고 있던 부하 직원들이 쇼파에서 일어서며 90 도 인사를 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으로 나가라고 명령했다. 그는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기에 두 명의 경호원은 아무런 내색 없이 집을 나갔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돼요?" 주방으로 들어간 그가 냉장고의 디스펜서에 컵을 대고 얼음과 물을 따를 때였다. 여자-이름이 뭐라고 했지? 아, 신미례.-가 주방입구에서 머뭇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그는 흘깃 여자를 쳐다보고는 묵묵히 물을 마셨다. 그리고 컵을 식탁에 내려 놓고는 거실로 나왔다.


신미례는 남자가 자신의 곁을 스쳐 지나가면서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화가 치밀었다. "이봐요, 당신이 벙어리라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지만 정말 그런 거에요?" 그를 뒤따라 거실로 나오며 신미례는 시비조로 물었다. 그녀 역시 한영그룹 직원 중에 하나였으므로 세이치 쥰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회장의 개인 경호원. 회사의 감찰사와 같은 직책. 그래서 부장급이상의 중역들은 그를 사신처럼 두려워했다. 그가 나타났다 하면 한바탕 사정바람이 불었기에 당연한지도 몰랐다. 그때문에 그녀가 그를 만나려 하지 않았던가. 조세현사장의 비리를 우연한 기회��� 알게 되었고 그가 그 사실을 알고 그녀를 협박하고 회 유하려 하자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세이치 쥰을 떠올렸다. 그를 만나야 겠다고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눈앞의 이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렵고도 힘들었다. 몇 번이나 연락을 취하고 만나달라고 애원하다시피 했지만 이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중요한 일이고 자신의 목숨이 달려 있다고 협박을 해도 어림도 없었다. 만약 그때 이 남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전율이 일었다. 그를 만나는 것이 여의치 않자 그녀는 미행을 했다. 물론 그녀를 미행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모르고 한일이었다. 미행하던 그를 놓치고 자신을 미행하던 놈들에게 납치를 당하기 직전에 이남자가 갑자기 나 타나 다섯명이나 되는 건장한 사내들을 한순간에 쓰러뜨려 버렸다. 그녀는 사람들의 과장이 전혀 허풍이 아니었음을 그날 알았다. 그는 사신이었다. 죽음의 냄새가 짙게 깔린. 혹시 이 남자 야쿠자아냐? 그런데 우리 회장님은 왜 이런 사람을 곁에 두는 걸까? "조세현도 잡았으니 전 이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녀의 조롱하는 말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달래듯 말했다. 그저 어서 이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비록 일주일 가까이 지내온 곳이라고는 해도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빨리 자신의 집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런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젖는 게 아닌가. "왜 안돼요? 아까 경찰들이 그를 잡아 가는 것을 당신도 보았잖아요? 그는 더 이상 나를 해 칠 수 없다구요. 아휴, 답답해 미치겠네.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난 내 집에 가고 싶어요. 날 더 이상 이렇게 가둬 두고 죄인 취급할 순 없어요. 내 말 듣고는 있는 거에요?" 물론 듣고 있지.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데 못들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쥰은 피곤함에 머 리를 쓸어 올리며 초조하게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는 지난 보름동안 그의 신경을 긁어대는 존재였다. 그녀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애를 쓴 것은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자신을 귀찮게 따라 다니는 여자들 중 하나인줄 알고 피하기만 했었다. 만약 그녀가 자신을 미행하는 것을 알고 그가 따돌린 후 이상한 예감에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면...이 여자는 지금 이렇게 서서 자신을 닥 달 하지 못할 것이다. 여자란 한없이 약하고 보살펴 줘야만 하는 존재라 귀찮다고 여기는 그에게 신미례는 조금 의외였다. 세상에 자신을 죽이려 드는 남자들과 싸우려 하는 여자라니. 더욱이 그가 그녀를 구하러 갔 을 때 저 작은 눈을 치켜 뜨고 그를 노려보던 모습은. "왜 이제 와요?"


그녀의 그 한마디에 그가 얼마나 속으로 웃었는지 이 여자는 모를 것이다. 그는 그저 얼굴을 한번 찡그리고는 그놈들을 해치워 버렸다. "와우, 역시 쎄네요. 진작 내 말을 들어줬으면 이 고생 안 했잖아요?" 대단한 강심장을 가진 여자였다. 피가 난무하는 가운데 여유 있게 그를 흘겨 보며 야단을 치다니. 그는 자신이 이 여자에게 느끼는 감정이 워낙 생소한지라 뭐라고 단정 지를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감탄하고 있는 것인지. 질려 버린 것인지. 그도 아니면 보호해주고 싶은 것이지. "내가 미쳐.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꼴이잖아." 그녀는 쇼파에 털썩 주저 앉더니 테이블에 놓인-미리 준비해둔 듯 했다.-종이와 연필을 그가 서 있는 쪽으로 밀었다. "말하기 싫음 관둬요. 대신 여기다 적어요. 날 언제 돌려보내 줄 건 지. 왜 날 여기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인지." 미례는 이남자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명령이 적힌 메모지를 건네는 것을 몇 번 보았던 터라 이 방법으로 그와 의사 소통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가 정말 말을 못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죽어서 말 못하는 귀신이 붙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 방법은 통하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예상대로 그는 맞은편에 앉아 뭐라고 끄적 거리는 것이다. 안도의 한숨이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드디어 그와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재판이 끝날 때 까지 여기서 지낼 것. 필요한 것은 경호원들에게 말하도록.' 강한 필체로 쓰여진 짤막한 명령조의 글귀에 미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싫어욧! 난 당장 내 집으로 갈 거에요. 여기에는 일분 일초도 있고 싶지 안다구요. 그깟 감 옥에 있는 조세현이 무서워 여기 숨어 있으란 말이에요?" 그녀가 쇼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반발했지만 쥰은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씩씩거리는 그녀의 귀에 그가 방문을 잠그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뭐 저딴 인간이 다 있어! 너 당장 나와! 빨리 나오란 말야!" 그녀는 방문을 발로 차며 악을 썼다. 그래도 방안에 들어간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례는 가망 없는 것을 알면서도 달리듯이 현관으로 갔다. 문손잡이를 잡아 돌리며 제발 열 리라고 기원했지만 소용 없었다. 저 남자는 자신의 집을 무슨 요새마냥 만들어 놓아서 안에서 나가지도 못했다. 그녀는 좌절감에 악을 쓰며 남자에게 욕을 퍼부었다. 내가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고발할거야. 하지만 이남자는 자신의 욕설을 듣지 못하는 지 방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말 벙어린가. 물론 쥰은 그녀가 자신에게 퍼 붇는 악담을 빠짐없이 들었다. 그는 침대에 엎드려 얼굴을 묻고 웃음을 참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에게 웃음소리가 들릴까 봐 차마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어깨만 들썩이는 쥰이었다. "당신을 어쩌면 좋을까?" 새벽녁이 되어 신미례가 자신에게 배정된 침실에서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쥰은 그녀에게 왔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팔다리를 뻗고 자고 있는 그녀 옆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그였다. 그는 얼굴에 땀으로 젖어 붙은 짧은 머리를 떼어 주었다. 매끄러운 볼에 자신도 모르게 손 이 갔다. 그는 자신에게 목매는 지긋지긋한 여자들로부터 도망치기 바쁜 남자였다. 하나같이 대단한 미인들이었지만 그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생리적인 욕구를 풀기 위해 여자가 필요할 뿐이었다.


그나마도 요즘엔 시들해 졌다. 서른다섯이라는 나이는 적은 나이가 아니었다. 단순히 잠을 자기 위해 여자를 필요로 하는 것도 지겨워졌다. 그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여자를 만나지 못 할거라고 단념한지 오래되었다. 그런데...신미례는 깊숙이 숨겨진 자신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안전할 때까지 이곳에 부하들과 남겨두고 자신은 피해 있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검찰에 증인보호요청을 하고 그녀를 맡기던가. 하지만 세상사가 쥰의 생각처럼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날 출근한 그에게 준호가 뜻밖의 말을 한것이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그는 눈앞의 윤준호를 노려보았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중이었다. "신미례양을 회장실 비서로 두기로 했다구."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윤준호는 여자비서를 두지 않았다. 비서실장을 비롯해서 비서실의 직원은 전부 남자였다. 여자들은 입이 가벼워서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신미례양을 언제까지 자네 아파트에 감금해 둘 수는 없잖아? 그녀가 이번에 세운 공을 생 각해서 결정한 일이야." "재판이 끝날 때 까지는 안됩니다." "이봐, 쥰. 재판이 시작 되서 판결이 내려질 때 까지는 몇 달이 걸릴 거야. 그 긴 시간을 여 자를 가둬두자구? 낮에는 여기서 일하고, 밤에는 자네가 보호하면 되잖아." 그게 말처럼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고 굳이 회장님의 방침을 바꾸면서 까지 비서실에 둘 필요는 없습니다." 밤만으로 부족해서 낮에도 그녀를 대해야 한다면 그는 미쳐 버릴지도 몰랐다. "그게 말야..." 말을 흐리며 쥰의 시선을 피하는 윤준호를 보며 뭔가를 감지하는 그였다. "다른 이유가 있군요." "그래. 이번에 수석 입사한 직원이 비서실에서 근무하고 싶어하는 게 바로 그 이유야." 한영그룹은 수석입사하는 직원에 한해 본인이 희망하는 부서에서 근무할 수 있는 특혜를 주 고 있었다. "그게 어때서요?"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쥰이었다. "그 직원이 여자야." "수석입사를 여자가?" 쥰은 정말 놀랐다. 한영그룹 입사시험이 그렇게 쉬워졌나. 나사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들었는데. "그렇다고 굳이..." "굳이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잖은가. 이곳에는 자네와 나 비서실장외에도 비서실 남자 직원 둘에 자네 경호실 직원들까지 남자들로 바글거리는데 어떻게 여직원 혼자 달랑 두란 말야?" 준호 역시 짜증이 나는지 말소리가 거칠어 졌다. 음, 단순히 짜증이라고 볼 감정은 아닌듯 했지만. "그냥 설득해 보면..." "지금 나보고 직원들과 한 약속을 어기라고? 여기서 일하다 보면 생각만큼 편한 곳이 아니 란 것을 알 거야.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야지 야근하기 일쑤지. 못 견디고 다른 곳으로 보내 달라고 할거야. 그때쯤이면 신미례의 신병보호도 끝 날 거구." "흠...그도 그렇겠네요."


어느새 동조하고 있는 쥰이었다. 그는 자신이 방금 한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는 꼴이었다. "회장님, 한지연씨가 와 있습니다." "들여보내요." 비서실장이 문을 열고 들어와 보고를 하자 준호는 쥰에게 눈짓을 보내며 지시를 내렸다. 쥰 역시 그 당찬 신입여직원이 궁금해져 자신의 방으로 물러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비서실장 이민석의 안내를 받으며 회장실로 들어온 여자를 보며 쥰은 놀라움을 감췄다. 준호의 이야기를 듣고 아마조네스 같은 여자를 은근히 기대했으나 예상이 빗나 갔다. 불면 날아갈 것만 같이 갸날픈 여자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보호본능이 솟구쳤다. 본래 쥰이 여자들을 보호해줘야 한다는 것을 마땅찮게 생각했던 것을 감안하면 천지가 개벽 할 일이었다. 새하얗다 못해 속이 비칠것처럼 투명한 피부에 새까만 긴 생머리를 허리까지 늘어 뜨린 여 자는 사람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수많은 미인들을 보았지만 이런 여자는 처음이었다. 과연 피가 도는 사람일까 싶었다. 혹시 천사가 날개를 잃어버리고 떨어진건 아닌가 하는 허황된 생각마저 들었다. 주먹만한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눈은 상대방의 영혼이라도 빨아 들일 것처럼 흡인력이있었다. 푸른빛을 띤 흰자위에 까만 눈동자가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오똑 솟은 앙증맞은 코 밑에 자리잡고 고운 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은 그 흔한 립스틱조차 바르지 않았지만 장미빛으로 사내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정신없이 여자를 훔쳐보던 쥰은 그녀가 생각만큼 작은 체구가 아니란 것을 깨닳았다. 자신보다 조금 작아 보였다. 그런데도 워낙 갸날프고 긴 팔다리 때문에 연약해 보이는 것이리라. 날씬한 몸매에 한 손으로도 쥘 수 있을 것만 같이 가느다란 허리 선이 시선을 붙들었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이제 막 삼월로 접어 들긴 했지만 봄은 봄이었다.-짙은 검정색 울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이세상 사람 같지 않은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뿜어대고 있었다. "같이 일하게 되어 반가워요. 열심히 일해 주세요, 한지연씨." 준호는 여자의 외모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덤덤히 인사를 나누었다. "네, 회장님.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고운 음성이 흘러나오는 입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비서실장의 모습이 보였다. 한지연을 비서실에 두려 한 것은 백번 천번 잘한 일이었다. 회사 내에서 세번째로 자제력이 있다는-더욱이 그는 두달 후면 결혼할 약혼녀가 두눈을 시 퍼렇게 뜨고 감시하고 있었다.비서실장이 이런 지경인데 다른 남자직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안 봐도 훤했다. 과연 윤준호는 보이는 것 만큼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 것일까. 쥰은 궁금했다. 준호의 입가가 약간 움찔 한 것 같이 느껴졌다. 눈가도 약간 떨리는 것 같고. 어, 이런. 역시 한영그룹 회장님답게 감정을 숨기고 계시는구만. 쥰은 왠지 즐거워졌다. 준호가 그의 작은 소녀를 잊고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돌리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었다. 십년이 지난 지금 쥰은 그때 그 소녀를 혹시 준호가 만들어 낸 상상 속의 인물이 아닐까 생 각했다. 그는 모친을 여윈 슬픔으로 제정신이 아닐 때 였으니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사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여중생을 찾아 달라고 준호가 부탁 했을 때 그의 정신 감정을 받 아 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곧 감정을 추스리고 유학을 떠났으므로 안심했던 쥰이었다.


뭐지 방금 내가 뭘 느낀거지. 준호는 감정적인 두려움을 느끼며 한지연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한지연과 마주 보고 인사를 하는 짧은 순간 그녀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했고 그는 자신 의 영혼을 빼앗기는 듯한 아니 그녀의 영혼을 훔쳐보는 듯한 아찔한 감정을 느끼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악수하기 위해 마주 잡은 손을 통해 온몸이 전기에 감전되는 듯한 짜릿한 전율 마저 느끼며 평상시의 자제심을 되찾으려 애썼다. 설마 이 여자가 정말 이세상 사람이 아니라 천사라서 사람들의 영혼을 훔쳐보는 능력을 가 진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쥰과 민석을 관찰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렇게 느낀 사람은 그뿐인듯 싶었다. 한지연과 악수하는 쥰의 태도에서 별다른 동요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한지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빛이 역역했을뿐. 민석 역시 넋을 놓고 한지연을 보고 있었지만 별다른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착각이었을 거야. 요즘 피곤해서 일시적인 혼란을 느낀 것 뿐이야. 하지만 인사를 끝낸 그녀가 회장실을 나가기전 그와 다시 눈을 마주쳤을 때 그의 숨을 멈춰 버렸다. 그녀가 문뒤로 모습을 감추자 겨우 숨을 토해내었다. 왜 이러는 거야. 아름다운 여자를 처음 만나는 것도 아닌데...수없이 많은 미녀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던 그가 이정도에 흔들리는 것은 가당치 않았다. 아무리 순수해 보이는 고결한 미녀라 해도. 그런데 왜 한지연의 얼굴위로 연이의 모습이 겹쳐지는 거지. "연이가 클 때까지 애인 만들기 없음. 자, 약속. 연이는 오빠한테 시집 갈 거야." 새끼손가락 걸며 연이가 밝게 웃었었지. "그래, 우리 연이 빨리 커라. 잘 먹고 쑥쑥 커야 해. " 환청처럼 연이와 자신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연이와의 추억을 떠올리면서도 그는 한지연의 생각을 지울수가 없었다. 아니, 그녀의 모습이 마치 각인이라도 된듯 뇌리에서 떠나지가 않았다. 제 2장 한지연은 억지로 울음을 삼켰다. 그녀는 눈에 힘을 주고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그녀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아무도 그녀가 울음을 터트리기 일보직전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오늘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정말 십년 동안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꿈꿔왔다. "정말 연이니? 우리 연이 맞아?" 꿈속에서 그는 놀라며 반가움에 그녀를 끌어 안아 주었다. 수없이 많은 상상 속에 이런 장면은 들어 있지도 않았었다. 설마, 그가 그녀를 알아 보지 못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십년 전 그를 만나 첫사랑에 빠진 그녀는 그와 만나는 날만 기다려 왔다. 그가 한영그룹 후계자라는 것을 우연한 기회에 읽던 여성지를 통해 안 날부터 그녀는 그가 나오는 기사는 전부 모아왔다. 그리고 그가 있는 이 회사에 들어오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던가. 그를 만나기 위해. 그가 자신을 알아 볼 것임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기에 그녀는 더욱더 절 망했다. "그래서 넌 지금 네 왕자님이 널 알아보지 못했다고 이러는 거야?"


같이 자취를 하고 있는 친구 미정이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있는 지연을 보고 기가 막혀 했 다. 그날은 중역들에게 간단한 인사만 드리고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저녁이 되어서야 미정이 돌아왔고 그때까지도 지연은 울고 있었다. "난, 흑...오빠가...날...흑..." 그녀는 목이 매어 말도 잊지 못했다. 미정은 얼른 주방에서 물을 가져와 친구에게 마시게 했다. "그렇다고 이지경이 되도록 울어? 넌 정말 바보 같다. 내가 계속 얘기 했잖아. 다 큰 남자가 잠시 만났던 어린 여자 애를 기억 하겠어?" "하지만...오빠는...흑...." "넌 모든 면에서 똑 부러질 만큼 똑똑한 애가 왜 그 남자 문제에서는 바보가 되는 거니?" 미정은 친구의 슬픔이 자신의 일인 양 너무나 속상했다. 지연과는 갓난아기 때부터 친구였다. 세상에 둘도 없을 만큼 사이가 좋은 두 사람 이었지만 지연의 오빠라는 사람에 대한 의견 만큼은 팽팽히 대립되어 왔었다. 결과는 미정의 염려대로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미정은 지연을 위해 그가 그녀를 기억해 주길 정말 간절히 기도해 왔었다. 그 나쁜 놈이 지연에게 상처를 주다니. 세상에서 지연이 만큼 착한 여자를 아직 보지 못했다.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양보하며 사는 아이인데. 이럴 줄 알고 그렇게 타일러 왔건만. 그놈의 오빠 타령은 시들 줄 몰랐다. 그 동안 지연이가 퇴짜 논 킹카들이 떠올라 아까운 생각에 미정은 속이다 쓰렸다. "미정아, 나 오빠 아니면 안 되는데...나 어떻게...아앙" 지연의 울음이 다시 터졌다. 미정은 이러다 애 하나 잡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지연아, 그만 그쳐. 네 오빠라는 사람이 널 못 알아 봐도 상관없어."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지연이 잠시 눈물을 그치고 미정을 바라 보았다. 눈물을 한 가득 담고 있는 두 눈과 빨간 코에도 불구하고 지연은 아름다웠다. 세상 참 불공평하지. 아름다운 외모에 뛰어난 두뇌. 거기다 착한 심성까지. 어디 흠을 잡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넌 정말 예뻐. 너 좋다고 쫏아 다니던 남자들을 생각해봐." "그래도...오빠는 날 좋아 하지 안잖아." 풀이 잔뜩 죽은 목소리에 미정은 속이 터질 것 만 같았다. "오늘 처음 만났는데 바로 결혼하자고 하는 남자가 어디 있어?" "그렇긴 해..." "이제부터 네가 그 남자의 마음을 사로 잡는 거야. 널 다시 좋아 하게 만들면 되잖아." "자신 없어. 미정이 넌 오빠가 얼마나 멋있어 졌는지 몰라." "그럼 이대로 포기하던가." 딱 잘라 말하는 미정의 말에 지연의 표정이 달라 졌다. 오기랄까 집념이랄까. "내가 오빠 마음을 사로 잡을 수 있을까?" 그녀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어리기 시작하자 미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넌 할 수 있어. 너 스스로 자신을 가져야지." "응. 노력해 볼게." 하며 언제 울었냐는 듯 해맑게 웃는 지연을 보니 웃음이 다 나왔다. "네 어머니 돌아 가셨을 때 평생 쓸 눈물 흘린 줄 알았더니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었어?" 말을 마치며 미정은 자신의 혀를 깨물고 싶을 만큼 후회 했다.


지연의 두 눈에 눈물이 한 가득 차올랐다. 한 달이 다 되어 가니 이제는 좀 나아 지나 싶었 더니. "그만 울어, 지연아. 너 이렇게 울고 있는 거 알면 네 어머니 편히 눈 못 감으셔." "그래, 그만 울거야. 울지 않겠다고 엄마하고 약속 했는걸." 하면서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지연이었다. 그날 밤. 미정은 자신의 침실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었지만, 지연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뒤척이던 그녀는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주방으로 갔다. 따끈한 밀크티를 한잔 타서 거실로 나온 지연은 낡지만 편안한 쇼파에 몸을 묻었다. 돌아가신 모친의 체취가 느껴져 한결 편안해 졌다. 이쇼파를 엄마와 함께 골랐었지. 너무나 편하다고 병원에서 퇴원하실때마다 침대 보다 이쇼파에서 계실때가 더 많았다. 그나마도 얼마 되지 않는 시간들이었지만. 얼마 전에 돌아 가신 어머니 생각과 준호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항상 몸이 약해 병원에서 살다시피 한 어머니였다. 시한부 인생을 살던 분이었지만 그래도 막상 돌아 가시자 지연은 가슴을 찢는 듯한 상실감 을 느꼈다. 오빠가 자신의 품에서 통곡 했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오빠에게서 위안을 받고 싶었다. 이세상에 혼자 남겨 진 것이 아니라고, 네 곁에는 내가 있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아픔과 슬픔을 혼자 이겨 내야 했다. 그래도 곧 준호를 만날 수 있 다는 희망이 있었기에, 준호만 만나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견뎌냈다. 십년이었다. 지난 십년 동안 그녀를 지탱해 주던 희망이었다, 윤준호는. 그런데 그 희망이 오늘 무너진 것이다. 다시 새로운 기대를 가져도 되는 것일까. 만약 그 기대마저 무너진다면 자신은 이겨낼 수 있을까. 아직도 자신의 품에서 울던 준호의 모습이, 감촉이 생생한데...지울 수 있을까.

다음날 쥰과 출근한 준호가 인사를 하는 직원들을 뒤로 하고 회장 전용 엘리베이터로 향할 때 였다. "한지연씨랑 동창이란 말이지?" 직원용 엘리베이터에 서있던 한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속삭이듯 묻는 소리가 귀에 와 꽂혔 다. 세이치 쥰은 갑자기 걸음을 멈춘 준호가 남자들 뒤에 서자 영문을 모르면서도 그의 옆에 멈 춰 섰다. "관심 끊어." 다른 남자가 야멸차게 쏘아부쳤다. "뭐야? 자네가 대시 하려는 건 아니지?" "내가? 웃기지마. 자네나 나나 상대도 되지 않는 아가씨라구, 한지연은." "아름답고 머리 좋은 건 인정하겠지만, 또 모르잖아." 두 남자는 준호와 쥰의 존재를 모르는 듯 둘만의 대화에 열중해 있었다. 입사한지 얼마 안된 두 사람은 자신들의 회장 얼굴도 모르는 듯 했다. 실물을 본적 없으니 당연했지만.


쥰 역시 한지연이란 이름 석자에 흥미를 느끼고 귀를 기울였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오자 네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두 남자는 15 층을 눌렀다. 총무과 직원이군. 쥰은 38 층을 누르고 뒤로 물러 섰다. 다행히 두 사람은 대화에 열중하느라 그들이 회장실이 있는 층에서 내린다는 사실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지연이 남자 있어." "뭐...뭐라구?" "어렸을 적에 정혼한 남자가 있다더라. 한지연은 우리 학교 여왕님이라구. 그런 여왕님께 대시하는 킹카가 없었는 줄 알아? 모두다 헛물만 켜다 물러 났다구. 춘향이 저리가라는 절개를 가졌다니까." 동창이라는 남자는 은근한 자부심을 가지고 장황하게 늘어 놓았다.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 가나. 두고 봐 내가 사로 잡아 볼 테니."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남자는 적당한 키에 호감 가는 외모를 가진 전형적인 셀러리맨형이었 다. 졸업하고 사회인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학생다운 객기가 남아 있었다. 두 남자가 먼저 내리고 준호와 쥰은 회장실이 있는 층에 내렸다. 비서실에 있던 직원들이 일어서며 인사를 해 왔지만 준호는 대충 인사를 받고 비서실장을 불렀다. "네, 회장님." "이번에 총무과로 배치된 신입사원 말야." "네?" 회장실로 들어서자 마자 갑작스런 지시에 민석은 어리둥절했다. 총무과에 배치된 신입사원 둘을 계열사로 보내라니. 이건 또 뭔 일인가 싶었다. 의아한 시선을 세이치 쥰에게 돌리다 그는 기겁을 했다. 세이치 쥰이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다니. 그는 당장이라도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표정으로 회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민석과 시선이 마주치자 싸늘하게 노려보는 쥰에게 놀란 그는 황급히 회장실을 나왔다. "유치해, 유치하다구." "알아, 아니까 아무 말 마.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마." "왜 그러셨을까?" 쥰은 놀리듯 말하며 웃음을 터트리고는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미쳤지, 미쳤어. 도대체 자신이 왜 이러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어제 그녀를 본 이후로 그의 머릿속에서 그녀가 떠나지 않았다. 한순간 머릿속에 각인된 그녀는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아 잠까지 설쳐야 했다. 설마 정말 영혼의 일부를 도둑 맞은건 아닐까하고 심각하게 고민까지 했다. 출근하자 마자 헛소리 하는 직원들 때문에 정말 유치한 짓을 해버렸다. 그들이 지연의 곁에 얼쩡거리는게 싫었다. 그녀의 이름을 말하는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이봐, 윤준호. 넌 그녀와 아무 사이도 아니야, 정신차려!

나쁜놈. 어차피 같은 회사에 같은 층에 문하나 두고 근무할걸 같이 출근하면 좀 좋아. 하지만 세이치 쥰은 여섯시도 안되어 혼자 나가 버렸다. 나는 자신의 똘마니들에게 맡기고. 물론 두 명의 경호원이 불친절하거나 이상하게 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세이치 쥰에 비하면 백배 천배는 나았다. 그들은 항상 그녀의 기분을 거스리지 않으려고 애썼고 즐겁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그에 비해 세이치 쥰은 어떤가. 항상 그녀를 무시하고 노려보기만 했다.


오늘부터 회장실로 출근하라는 그의 메모에 얼마나 설레였던가. 회장이 여자 비서를 두지 않는 것은 공공연한 이야기 였으므로 자신의 공이 정말 인정 받았나 싶었다. 일등공신이 된 기분이었는데... 신미례는 자신과 나란히 앉아 있는 한지연을 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든 한지연이 방긋 웃어 주었다. 여자인 자신도 그녀의 미소에 가슴이 설레이는데...남자들은 오죽 하겠는가. 두 여자에 의해 비서실에서 밀려나게 된 남자직원 둘은 자존심도 안상하는지 지연의 곁에서 맴돌며 친절하게 업무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미례는 한지연의 관심을, 미소 한번이라도 받기 위해 주인에게 애교 떠는 강아지 마냥 살랑 대는 두 남자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지연씨 제가 점심 대접 할께요." 점점...난 눈에 안보이냐. "아니에요, 김선배님. 미례언니랑 사내 식당에서 먹기로 약속 했는걸요." 내가 언제? 순진한 줄 알았더니 거짓말도 아무렇지 않게 하네. 그리고 미례언니? 내가 왜 네 언닌데? 물론 내가 나이가 좀 많기는 하지만...꼭 내가 너보다 늙었다고 티 내야 겠냐? 신미례의 속에서 부글부글 화가 끓어 오르고 있었다. "그럼 신미례씨도 함께 가도록 하죠." 마지못해 김선배-이름 따윈 외우고 싶지 않아!-가 말하자 한지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물론 그녀만이 느낄 정도로 미미하긴 했지만. "네, 다 함께 사내 식당으로 가면 되겠네요." 환한 웃음과 함께 지연이 말하자 김선배는 포기했다. 어쭈 보기보다 센데. 의외로 남자들의 관심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기는 모습을 보며 만만 찮은 상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장실로 통하는 문이 열리며 윤준호회장과 세이치 쥰이 모습을 나타냈다. 빛과 그림자. 두 사람을 두고 직원들이 수군대던 소리가 생각났다. 정말 딱 맞는 말이라고 그녀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각상 같은 완벽한 외모의 윤준호는 누구나 한번쯤은 뒤 돌아 볼만큼 잘생긴 남자였다. 거의 190 에 가까운 키에 근육질의 몸을 고급 맞춤 슈트에 감싸고 있는 그는 여자들의 꿈속에 나타나는 동경의 대상같이 생겼다. 그의 넓고 반듯한 이마와 매의 눈과도 같은 날카로운 눈빛. 높은 콧대는 성형외과 의사가 수술한다고 해도 저렇게는 만들지 못하리라. 넓은 입매는 육감적인 선을 그리고 있어 한번쯤 미소를 지어 보여 준다면 여자들이 까무라 칠 것이다. 한숨이 나올 만큼 잘생긴 사나이다운 남자였다. 그에 반해 세이치 쥰은 어떤가. 그는 평범한 키에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의 어두운 눈빛과 근접하기 어려운 공포감이 몸에 배어 있지 않다면 인상에 남지도 않으 리라. 물론 아주 평범한 것은 아니고 조금 잘생기긴 했다. 신미례는 개인적인 감정은 접고 그를 평가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 윤준호 보담 못하지만-아니 그와는 다른 매력이 있다.-세이치 쥰도 여자들의 눈을 끄 는 타입이라는 것을 인정해 주었다. 그의 분위기가 어두워서 가까이 못할 뿐이지 그에게 목매는 여자들도 많을 거란 것을 마지 못해 인정하는 신미례였다. 신미례는 윤준호와 세이치 쥰의 시선이 한지연에게 머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저 남자 들이란.


세이치 쥰마저 한지연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아 그녀의 마음이 왠지 무거워 졌다. 여자에겐 무관심한 남잔 줄 알았는데. 그에게 서운함 마저 느끼는 그녀 였다. 두 남자는 비서실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사무실을 떠났다.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심정으로 한지연을 사무실에 두고 나서는 윤준호의 마음은 무겁 기만 했다. "약속을 취소 할 순 없습니다." 그의 마음을 눈치 챈 듯 쥰이 옆에서 한 소리 했다. 준호의 입매가 단단하게 굳어졌다. 불쾌하다는 뜻이리라. "취소하고 싶은 생각 없어. 경제부 장관과 점심 약속을 깰 만큼 내가 무책임해 보이나?" "그저 상기 시켜 드렸을 뿐입니다." 회사 정문 앞에 대기 된 차에 오를 때 까지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게 관심 있나?" 침묵을 깬 것은 윤준호였다. 그와 나란히 뒷자석에 앉아 있던 쥰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한지연에게 관심 있냐구." 그제서야 질문의 뜻을 파악한 쥰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물론 관심 있지요." ���답지 않게 느물거리는 어투로 말하자 윤준호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회장님이 느끼시는 감정하고는 다릅니다." "뭐가 다르다는 거지?" "회장님은 한지연씨에게 남자로서의 관심을 느끼셨지요?"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단정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기에 윤준호는 침묵했다. "전 한 인간으로서 관심이 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엉뚱한 소린가. 그가 쥰에 대해서 잘 모른다면 자신을 우롱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십년을 알고 지낸 지기이기에 그는 화를 내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한지연씨는 색깔로 치자면 새하얀 색이지요. 눈처럼 아니 눈보다 더 깨끗하고 속이 훤히 들여 다 보이는 순수함을 간직한 사람이지요. 하지만, 저는..." 세이치 쥰의 음성에 아픔이 어렸다. "저는 검은색이지요.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검은색. 속을 들여 다 볼 수도 없고 들여 다 본다고 해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검은색. 검은색이 하얀색을 만나면 회색이 되겠지만 하얀색은 회색이 되어 본래의 색을 잃어 버리지요. 순수함 마저 파괴될 겁니다. 저 같은 남자는 같은 검은색이나 회색의 여자를 만나야 되지요." 만약 붉은 색의 여자를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쥰의 뇌리에 신미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럼 나는 무슨 색이라고 생각하나?" "회장님은 무채색이지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쥰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그가 그를 모시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자네는 언제라도 날 떠날 수 있어. 쥰, 자네가 떠난다면 언제든지 보내줄 준비가 되어있다네." "제가 회장님을 떠날 준비가 안 되 있습니다." 아마 영원히 떠날 준비가 안될지도 모른다는 말은 애써 삼켰다. "한지연씨에 대한 감정은 어떻게 처리하실 건가요?" 마치 점심메뉴를 고르듯 쥰은 물어 보았다. "아직 내 감정이 뭔지도 모르는데...자넨 너무 앞서가는군. 그리고..."


"그리고?" "난...연이에게 진 빚이 있어." 피곤한 듯 눈 주위를 문지르며 준호가 내뱉었다. 한지연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 빚은 아주 달콤한 빚이었다. 하지만...지금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아직도 그 연이라는 소녀에게 집착하십니까?" 십년 전 사색이 다되어 연이를 찾아 달라고 애원하다시피 했던 그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빚이 있다구. "집착이 아니야. 난 연이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어. 언젠가 그 아이가 날 찾아 올 거라고 느끼고 있어. 다만..." 다만 너무 늦게 오지 않길 바랄 뿐이야. 내 마음이 너무 멀리 가버린 다음에 온다면 어떻게 하나. "빚을 갚기 위해 그 연이라는 소녀와 결혼이라도 할 생각이십니까?" "그래야 되겠지. 그게 연이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럼 당신이 원하는 건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얼굴은 기억 나십니까?" "아니, 어렴풋이. 그저 느낌이...굉장히 따뜻하고 편안했던 느낌. 연이는 말야 굉장히 작았던 것 같아. 얼굴도 내 주먹만 했는걸. 하지만 꽤 예뻤던 것 같아. 아, 크면 미인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으니까. 그래도 키는 별로 안 컸을 꺼야." 오랜만에 연이의 모습을 떠올려 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한지연에 대한 생각이 그의 마음속을 전부 차지하고 있어서 그랬나 보다. 연이에게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사무실에 두고 온 한지연 생각이 났다. 지금쯤 비서실 남자 직원들과 점심을 먹으러 나갔겠구나 싶었다.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본사 건물 40 층 꼭대기에 위치한 사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신미례는 한지연이 보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남자들의 대화중에 그녀가 수석 입사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이 비서실에 근무하게 된 동기가 과연 공을 세워서 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지연씨는 왜 비서실에서 근무하고 싶었어요?" 김기준씨의 질문으로 그녀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윤준호회장님은 신화적인 인물이시잖아요. IMF 조차 울고 간 그분의 경영 방식을 가까이에 서 배우고 싶었어요." 똑 부러지는 대답소리에 신미례의 입이 벌어졌다. 한지연이-수석입사한 직원이-비서실에서 근무하길 원했기 때문에 자신은 덤으로 이 자리에 있는 거라고 생각하지 입맛이 썼다. 평소에는 자신이 옹졸하다고 생각해 보진 않았지만 이제는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영화배우 뺨치는 외모에-차라리 연예계로 진출하지 여긴 뭐 하러 왔냐고 따지고 싶은걸 참 았다.-뛰어난 두뇌에 남자들을 호리는 솜씨까지. 유치한 질투심에 가슴이 답답해 왔다. "커피는 미례언니와 단 둘이 마시고 싶어요. 괜찮겠지요?" 저렇게 화사한 미소 앞에 반대 할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될까. 홀리듯 한지연과 식당 아래 39 층에 있는 여직원 전용 휴게실로 향했다. 한영그룹은 직원들에 대한 복지가 잘되 있기로 소문난 기업체 였다. 39 층에는 식사를 마친 직원들이 쉴 수 있는 휴식공간은 물론 도서관 각종 운동시설이 즐비 해 있었다. 이층에는 기혼여직원을 위한 탁아시설 삼층에는 병원까지 필요한 것은 없는 게 없는 회사였다.


"저 때문에 많이 신경 쓰셨죠?" 커피를 뽑아서 들고 온 한지연은 맞은편 의자에 앉아 종이컵을 건네며 살포시 웃었다. 순수한 웃음에 꽁해 있던 신미례의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전 정말로 미례언니, 미례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기분 나쁘시면..." "아니, 괜찮아요." "고마워요. 미례언니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전 언니가 없거든요. 하긴 이제는 형제는 물론 부모님도 안계시지만요." 처량한 목소리에 슬픈 미소가 신미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직 어린데.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데...벌써 부모를 여의었단 말인가. 그녀는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떠올렸다. 그녀는 사남매 중 막내로 온갖 귀여움과 사랑을 독 차지하고 자라났다. "나도 동생이 없어서 지연씨가 내 동생이 되어 주면 정말 기쁠 것 같아." 그녀는 그 말만 겨우 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말에 한지연은 한결 밝은 표정이 되었다.

이러다간 전직원이 계열사로 쫏겨 가는 건 아닐까. 이민석 비서실장은 회장실 문을 닫고 나오며 침울하게 생각했다. 경제부 장관과의 점심식사가 회장의 기분을 상하게 한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번 주까지 비서실에 근무 하기로 한 남자직원 둘을 당장 발령 받은 부서 로 보내라니. 전에는 여자비서는 싫다고 노래를 부르던 양반이 왜 저렇게 변했을까. "오늘 저녁 약속 있어요?" "네? 네. 아버님 댁에 은경씨랑 함께 찾아 뵙기로 했습니다만..." "그럼, 경호실장과 넷이 가야 겠군." "넷이 가다니요?" "나와 경호실장, 그리고 새로 근무 하게 된 비서실 직원 두 분과 저녁을 먹을 수 있도록 예 약 좀 해줘요." 좀 전에 회장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전화기를 끌어 당겼다. 그는 회사 소유의 무궁화 다섯개 짜리 호텔 사장실에 전화를 넣었다. 호텔에 한바탕 소란이 일겠군. 그나저나 도대체 왜 안 하던 행동을 하시는 거지. 전에 비서실 직원들과 식사를 하신적이 있었던가. 윤준호를 알고 지낸 지 이십이년이 넘어가지만 요즘의 행동은 이상하기만 했다. 처음 그를 만난 것은 초등학교 입학해서 였다. 물론 그에 대해서 전부터 듣고 있기는 했다. 부친은 준호를 작은 회장님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실물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다니는 회사의 회장님들 손자와 같은 학교에 같은 반이라는 사실이 죽기보다 싫었었다. 선생님들과 반 아이들 아니 전교생이 그를 특별하게 취급하는 것이 못마땅 하기만 했었다. 그는 남들 시선을 피해 준호를 골탕 먹이는 장난을 즐겼다. 몇몇 그와 동조하는 짖굿은 남 자아이들과 준호를 괴롭히곤 했다. 하지만 애 어른 같은 눈으로 한심하다는 듯 노려보며 상대도 해주지 않는 준호에게 항상 자 존심 상했던 그였다. 무슨 일인지는 기억 나지 않지만 큰 싸움이 두 남자아이들 사이에 있었다.


그때 민석이 던진 유리병에 머리를 맞아 준호가 크게 다치는 사건이 있었다. 병원에서 머리카락을 일부 잘라내고 열 바늘 정도 꿰맬 만큼 큰 상처였다. 학교는 물론이고 두 집안이 발칵 뒤집어 졌다. "제가 먼저 잘못한 일입니다. 제가 민석이를 놀렸어요. 민석이가 홧김에 던진 병을 제가 미쳐 피하지 못했던 것 뿐입니다." 아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찾아가 사죄하는 부친에게 그를 변호해 주던 준호를 결코 잊지 못 할 것이다. 노회장님들도 손자의 간곡한 청-협박-에 화를 푸셨다고 부모님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어린것이 참 대범하네요." 그의 모친은 감격스럽다는 듯 말했다. "작은 회장님은 불쌍한 분이야." 아버지의 입에서 침울한 음성이 흘러나오자 그는 문에 귀를 더욱 가까이 대며 엿들었다. "아니 없는 것 없이 다 가진 그 아이가 뭐가 불쌍해요." 어머니의 말씀에 민석도 동감이었다. "걸음마 떼기도 전에 회장님 손에 이끌려 회사에 나오신 분이야. 우리 민석이 유치원 다니 며 뛰어 놀 때부터 회사 경영을 배웠구. 지금도 학교가 끝나면 회사로 곧장 오시지. 의무교육 아니면 학교도 안 보내실걸 우리 회장님은. 어른도 받기 힘든 교육을 시키는 데도 묵묵히 참고 견디시는 걸 보면.... 더구나 작은 회장님은 부모님 정도 모르고 자란 불쌍한 분이라구." "회장님 따님과 사위 분은 아직도 사이가 안 좋대요?" "작은 회장님 때문에 이혼만 안하고 계실뿐이지. 사실상 별거나 다름없지 뭐." 그때는 부친의 말씀이 전부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준호가 자신과는 다르게 산다는 것 에 관심을 가졌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커다란 외제 승용차가 와서 준호를 데리고 사라졌다. 그가 자신처럼 마음대로 뛰어 놀지 못한다는 것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에게 먼저 사과하고 다가갔다. 그리고 준호는 처음으로 마음을 열어 그를 친구로 받아 들여 주었다. 열살 때 세이치 쥰이 두사람 사이에 끼어 들며 조금 달라 지긴 했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변 함없는 우정을 나누었다. 그래서 준호가 회장으로 취임하며 자신을 부르자 한걸음에 달려와 비서실장 자리를 맡았다. 앞으로도 그를 위해 회사를 위해 그는 최선을 다 할 것이다. 사실 이 회사는 그의 가정이나 다름없었다. 자금담당이사가 그의 부친이었고 그의 약혼녀인 서은경은 홍보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약혼녀에 대한 생각에 이르자 그의 표정이 부드러워 졌다. 그들은 아름다운 계절 오월에 결혼하기로 날을 잡고 있었다.

하루 만에 대충이라지만 모든 업무를 인계 받는 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까다로운 회장의 명령에 불가능에 도전해야만 했다. 퇴근 시간이 넘어서 간신히 일을 끝낸 지연은 어서 빨리 집에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 고 싶었다. 일이 힘들기도 했지만 온 신경을 준호에게 쏟고 있었던 터라 온몸이 비명을 질러 댔다. "신미례씨와 한지연씨는 나와 함께 가도록 해요." 다른 사람들은-전임 비서실 직원 둘과 경호실 직원들이-퇴근하고 비서실장과 신미례와 한 지연이 남아 있는 사무실로 경호실장과 함께 나온 준호가 말했다.


비서실장은 미리 알고 있었던 듯 예약에 관해 뭐라고 보고했다. 경호실장인 세이치 쥰은 준호 옆에 조용히 서있었다. 한지연은 세이치 쥰이 조금 무서웠다. 하지만 준호 오빠가 가깝게 대하는 듯 해서 경계심은 갖지 않았다. "앞으로 같이 일할 거니 함께 식사라도 하면서 가까워지는 게 좋을 듯 해서 말이지." 누가 물어 본 것도 아닌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가며 준호가 알려 주었다. 모두가 퇴근한 건물은 고요하기만 했다. 네 사람은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탔다. 준호의 운전기사는 미리 퇴근 시켰는지 보이지 않았 다. 지연은 준호와 같은 차를 타고 신미례는 세이치 쥰과 한 차를 탔다. 식사 후 여자들을 바래 다 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근무해 보니 어때요? 힘들지 않았어요?" 여유 있게 운전하며 준호가 물어 오자 지연은 얼굴을 붉게 물들었다. 그의 자상한 말에 가슴이 설레였다. 준호 오빠도 나한테 호감을 느낀 것일까. "네." 길게 말하고 싶어도 뻣뻣하게 굳어 긴장한 입술이 거부했기에 겨우 대답만 했다. 지루한 여자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잡아 먹지 않을 테니 긴장 풀어요." 뜻밖의 농담에 그를 바라보니 웃고 있었다. 옛날처럼 환한 미소를 보여주는 그에게 가슴이 뭉클해 졌다. 혹시 나를 알아 봤는데 놀리려고 모른체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기대감에 심장이 터질 것 만 같았다. 지연은 애꿎은 핸드백 줄을 쥐어 틀었다. "나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닌데...무서워요?"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지연을 보며 준호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뇨." 모깃소리 만큼 작은 소리에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한영호텔에 도착하자 도어맨이 뛰어왔다. 그는 지연을 위해 문을 열어 주었다. 준호가 운전석에서 내려 차를 돌아 그녀 옆에 서며 키를 주차요원에게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남자는 정중하게 절을 하고 키를 받아 차로 갔다. 그들의 차 뒤로 세이치 쥰과 신미례가 탄 차가 멈춰 섰다. 그들이 호텔 안으로 들어가자 지배인과 직원들이 일제히 정열 해 그들을 맞았다. "갑자기 오셔서 준비가 소홀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배인이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준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안절부절 하는 모습이 우습게 여 겨졌다. 네 사람은 스카이라운지가 있는 맨 위층으로 올라갔다. 식당에 들어갈 때까지 네 사람은 침 묵했다. 음식과 와인을 주문하고 한숨 돌리던 지연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자신의 앞에 나란히 앉은 세이치 쥰과 신미례를 보며 지연이 무심결에 입을 열었다. "저....경호실장님께서는 말씀을 한마디도 안 하시네요?" 그는 음식을 시킬 때도 메뉴판을 손으로 가리켰을 뿐이었다. "아, 그는...한국말을 잘 못해요." 경악에 가까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신미례였다.


준호의 시선이 쥰과 미례 사이를 오갔다. 쥰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뭐지. 내가 모르는 뭔가가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건가. 준호는 자신이 뭔가 놓친 듯한 기분이 들어 왠지 기분이 찜찜했다. "경호실장님이 일본분이라고 들은 걸 잊고 있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지연은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제가 일본어를 좀 할 줄 아는데 식사���시면서 대화를 나누면 마음이 한결 가벼울 것 같아 요.대화에 빠지시면 왕따 당하시는 기분이실 것 아니에요?" 물론 이 말은 일본어로 하는 지연이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잘했지요 하듯 세 사람을 바 라 보았다. 나이가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신미례에게 들었다. 감히 세이치 쥰을 두고 왕따 운운하다니. 순진한 건지 내숭인지 구분할 수 조차 없어 당혹 스러웠다. "그렇게 까지 말씀해 주시다니 고맙습니다." 허스키한 음성의 일본어가 쥰의 입에서 흘러 나왔을 때 준호와 신미례 중 누가 더 놀랐는지 알 수 없었다. 저 세이치 쥰의 입을 열다니. 준호는 불가사의 하다는 표정으로 지연을 보았다. 세이치 쥰이 가진 능력 중 하나가 사람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지연의 말에 입을 열었다. '그녀는 하얀색의 여잡니다. 순수함을 간직한 여성.' 쥰의 말이 떠올랐다. 네 사람은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즐겼다. 다행히 신미례도 일본어를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세이치 쥰에게 화가 나서 별로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그렇게 시도 할 때는 들은 척도 안더니 한지연의 말 한마디에 저렇게 수다스럽게 떠 드는 남자로 변한 그가 미워 죽을 것만 같았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안나요?" 윤준호회장이 친절하게 물어오자 그녀는 뒤적거리던 접시에 포크를 내려 놓았다. "아닙니다. 다만 식욕이 일지 안아서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일부러 한국어로 대꾸했다. 한국말을 모른다고 변명해 주지 말걸 그 랬어. "미례언니가 몸이 좋지 않은가 봐요. 식욕이 없대요." 당사자를 옆에 두고 쥰에게 일본어로 수근거리는 지연에게 화낼 기운도 없었다. "제가 먼저 신미례씨를 집에 데려다 주겠습니다." 세이치 쥰이 자리에서 일어 서며 준호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신미례의 팔을 잡아 끌고 나가다시피 사라졌다. 준호와 지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거 놔요. 바람난 마누라 끌고 가듯 사람을 끌고 나오다니." 미례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자 낯이 뜨거워 그의 손길을 뿌리치려 애썼다. 하지만 쥰은 그녀의 팔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런 대접을 받아 마땅해. 도대체 뭐가 못마땅해 심술이지?" "심술?" "사람이 못났으면 대범하기라도 해야 할거 아냐?" "뭐...뭐라구요? 못났다구요?" 미례는 너무도 화가 치밀어 자신이 쥰과 한국어로 말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도 깨닳지 못했다. 세이치 쥰은 주차요원이 가지고온 차에 그녀를 구겨넣듯 태우고 운전석으로 갔다. "난 이런 대접 받을 만큼 잘못한 거 없어요."


그녀가 악을 쓰듯 덤벼 들었지만 쥰은 차에 시동을 걸고 거칠게 차를 출발 시켰다. 차가 속도를 심하게 내자 미례는 더듬거리며 안전띠를 찾아 매었다. 사고라도 나서 죽으면 나만 손해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물며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았다. 차를 아파트 주차장에 난폭하게 세운 쥰은 운전석에서 잽싸게 내려 차에서 내리려는 그녀의 팔을 다시 붙잡고 건물 안으로 끌었다. 12 층에서 내린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집안의 안전장치를 해제하는 버튼을 누르고 문을 열었다. "뭐가 문제지?" 집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그녀와 마주선 그가 씩씩 대며 따졌다. "죽을뻔 한 거 살려 가지고 여왕마마 떠받들 듯 모셔 줬잖아?" "그 잘난 당신 똘마니들 데리고? 당신은 나랑 말 한마디 안 하면서? 오늘 처음 본 한지연과 는 잘도 말하더라. 내가 한지연보다 못 한 게 뭔데?" 어차피 이판사판 공사판이라고 그녀도 막 나갔다. "내가 사람들과 말을 안 하는 것은 그들과 감정적으로 얽히고 싶지 않아서야." "누군 당신과 감정적으로 얽히고 싶대요? 내쪽에서 거절이네요!" 나중에 생각해 보면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녀를 벽에 밀어 붙이고 거친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다. 그녀가 반항하듯 고개 짓을 하자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고정시키고 억지로 입을 열 게끔 압력을 넣었다. 아픔에 그녀가 입을 열자 마자 그의 혀가 사정없이 파고 들었다. 자신인지 그녀인지 피맛이 났지만 흥분한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다른 한손으로 그녀의 블라우스를 열고 브래지어를 밀어 올리며 가슴을 움켜 쥐었다. 시간이 지나자 두 사람은 분노도 잊어 버리고 뜨겁게 달아 올라 버렸다. 미례의 손은 어느새 그의 머리를 붙들고 있었고 그의 자유로운 두 손은 그녀의 몸을 더듬으 며 바삐 움직였다. 만약 그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 대지 않았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그녀를 가졌을지도 몰 랐다. 계속해서 울려대는 핸드폰 소리에 미례에게서 억지로 몸을 뗀 그는 어느새 벗어 던진 양복 윗도리를 주어 올리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네." 그의 허스키한 음색을 들으며 미례는 떨리는 손으로 블라우스의 단추를 잠궜다. 그녀의 멍한 머리는 아직까지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태를 파악하길 거부했다. "아닙니다, 무슨 일이라도?....지금 바로 말씀입니까?....아닙니다, 바로 찾아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그는 혼란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미례를 바라보았다. "잠시 다녀올 데가 있어. 꼼짝 말고 기다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가 버렸다. "나쁜놈!"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 나왔다. 어떻게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말았는지 스스로 한심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나간 현관문을 노려 보던 그녀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문에 설치된 안전장치의 센서에 붉은 불이 들어 왔던 것이다. 왜 그러지?

세이치 쥰은 노회장의 갑작스런 부름에 의아했지만 곧 병원에 도착했다. "어서 오너라, 쥰."


그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노회장은 병약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았다. "몸이 안 좋으신 건가요? 회장님을 부를 까요?" 그의 성급한 물음에 손사래를 치며 말리던 노회장은 자리에 앉도록 지시했다. 침대 옆에 자리 잡고 앉은 그는 조심스런 시선을 던졌다. 노회장이 자신을 따로 부를 때는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준호가 따로 만나는 아가씨가 있는 것 같더냐?" 노회장의 물음에 그는 별다른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안도하는 한편 질문의 의미를 알 수 없어 긴장했다. 쥰은 한지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워 버렸다. 아직은 준호의 감정이 진지하지 않다고 판단했기때문이다. 물론 끌리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연이라는 소녀에게 연연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지는 안은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아직도 결혼할 생각은 없는 것 같냐?" "글쎄요..." 연이가 나타나면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말해 다오. 제 부모들 일로 그 아이가 혼자 살 것 같아 걱정이 되는 구나. 나도 얼마 살지 못 할 테고...죽기 전에 증 손주를 보고 싶은 노인네 욕심이 생겨서 말야." 노회장의 짓무른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자 쥰의 가슴이 메어졌다. 친할아버지보다 더 가깝게 느끼는 그였다. 노회장의 아픔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는 노회장의 아픔과 고통을 그대로 느끼자 가슴이 답답해 졌다. "쥰이 넌 내 심정을 잘 알 거다. 아마 나 자신보다 내 감정을 더 잘 느끼고 있겠지." 노회장은 이해해 주길 바라는 감정을 담고 그를 보았다. "아직까지 회장님께서 마음을 정한 상대는 없습니다. 최근에 만나고 있는 여배우 김희진양 과는 단순한 관계일 뿐입니다. 또 새로 들어온 여비서에게 끌리고 계신 것 같긴 하지만 그 이상의 감정은 아직까진 아닙니다. 그리고...오늘 제게...십년 전 만났던 연이라는 소녀에게 진 빚이 있다고...그래서 그 소녀를 만나면...그녀가 원하면 결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준호가 사실을 알고 화를 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쥰이었다. 우선은 노회장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먼저 였으므로. 쥰의 가슴을 쥐어 뜯을 것 같은 아픔을 무디게 해야 했다. "연이라는 소녀?" 노회장 역시 준호가 십년 전 그 소녀를 찾기 위해 애쓰던 것을 기억해 냈다. 연이라...

제 3장 세이치 쥰과 신미례가 갑자기 떠나고 남은 두 사람은 조용한 가운데 식사를 마쳤다. 후식은 커피만 주문한 두사람은 적당한 화제를 생각하느라 어색하게 잔을 입에 가져 다 대 고 있었다. "아직도 내가 어려워요?" 갑작스런 그의 질문에 지연은 사래가 들릴뻔 했다. 간신히 기침을 삼키며 물잔을 입에 가져 다댔다. "정말 내가 무서운가 보네요?" "아니에요. 갑자기 물어 오셔서..."


"쥰과 신미례씨가 있을 때는 얘기도 잘하더니...나 그렇게 못된 사람은 아닌데." 그가 조금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지연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짓고 말았다. "웃으니까 정말 예쁜데...종종 웃어줬으면 좋겠어요." 지연은 준호와 농담을 하며 웃고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안았다. 준호가 자신과 있다. 항상 꿈꿔 왔던 일이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자 욕심이 생기는 그녀였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게 되기를. 자신이 십년동안 그를 생각하고 그리워 하며 사랑을 키워 왔 듯이 그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랬다. "앞으로 일이 힘들고 괴로울 때도 있을 거에요. 회장이라는 남자를 집어 던지고 싶을 때도 있을 거구요. 그래도 즐겁게 회사 생활을 해주길 바래요. 만약 비서실 일이 너무 힘에 부친다 싶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요. 원하는 부서로 보내 줄께요." 그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에 감격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자신을 떨구어 내려 하는 것에 화를 내야하는 걸까. 지연은 그와 가깝게 다가 갈 수 없는 현실이 슬퍼졌다. "일이 힘들 다고 비겁하게 도망 치지는 않을 겁니다. 앞으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걱정 끼쳐 드리는 일 없을 겁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당당하고 다부지게 대꾸했다. 비록 가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뛰고 있지만. "지금의 패기 잊지 말아요. 그럼 이만 갈까요?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손목시계를 들여 다 보던 그녀는 깜짝 놀랐다. 벌써 열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가 계산을 하는 동안 지배인과 종업원들이 옆에서 불편한 점이나 못마땅한 점이 있지는 않았는지 안절부절 못했다. 준호는 배웅하러 나오려는 그들을 제지 하고 지연을 데리고 나왔다. 스카이라운지를 나온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안에서 사람들이 나오 자 한쪽으로 비켜 서려던 준호에게 누군가가 달려 들었다. "어머! 준호씨! 자기를 여기서 보다니...요즘 연락도 뜸하고..." 귀엽게 앙탈을 부리는 여자를 보던 지연은 숨을 삼켰다. 심장에 이상이라도 있는 듯 아픔이 느껴졌다. 얼마 전 준호와 스캔들 기사가 났던 김희진이었다. 새롭게 떠오르는 스타로 실물을 보니 정말 아름다웠다. 볼륨 있는 몸매를 들어낸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매력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 만만 했다. 준호는 자신의 팔에 달라 붙는 그녀를 떼어 냈다. 그는 흘낏 지연을 보았다. 창백해 보이는 것은 자신의 착각일까. 그런데 왜 바람 피는 장면을 부인에게 들킨 공처가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일행이 기다리잖아. 다음에 보도록 하지." 차갑고 무뚝뚝한 준호의 말에 김희진은 어색하게 몸을 떼었다. 그를 만난 지 이개월이 지났지만 이런 태도는 처음이었다. 항상 젠틀 하던 윤준호였다. 김희진의 시선이 한켠에 서있는 지연에게 향했다. 차갑게 빛나는 그녀의 눈빛은 자신을 밀어낸 여자에 대한 증오심을 담고 있었다. "내 서비스가 만족스럽지 못했다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새로운 여자를 찾기 전에 말이에 요." 달콤하기만 하던 김희진의 말투가 아니었다. 그녀의 말에는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만 가보지." 그녀를 노려보는 준호의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김희진이 아니었다. 그와의 관계가 끝난 것이다. 자신의 뒷배경 하나가 줄어 들었다. 김희진은 질투심에 지연을 갈갈이 찢어 버리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고개를 까닥이며 경망스럽게 인사를 한 후 뒤돌아 일행에게 걸어갔다. 그녀의 뒤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사람 한영그룹 윤회장이지? 실물은 더 잘생겼다. 희진이 네가 푹 빠진 것도 이해


가 된다. 맨 날 배불뚝이 노친네만 상대 했으니...신선했겠는데?" 동료 연기자의 말에 김희진이 눈을 부라렸다. 자신과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는 최진선이었 다. "그런데 아까 같이 있던 여자는 누구니? 굉장한 미인이던데...새로운 신인인가. 조만간 인기순위가 바뀌는 거 아니니? 더구나 너 한영그룹 안주인 자리는 네 꺼라고 큰소리 쳤잖아...??...어쩌니...닭 ?던 개 지붕 쳐다 보는 꼴이네...내가 전에 충고 했잖니...그 남자...윤준호 회장은 한 여자랑 삼개월이상 안 가기로 유명하다고. 그렇게 자신 만만하게 너는 틀리다고 장담하더니...안됐다. 이번에 너는 삼개월도 못채우고...너 자존심 많이 상하겠다." 위로해 주는 척하며 있는대로 속을 긁어 대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뽑아 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는 김희진이었다. 이대로 물러날 줄 알아. 그런 젖비린내 나는 계집애 한테 밀려 나다니...천하의 김희진이름 석자를 걸고 본때를 보여 주리라.

지연의 집으로 가는 차 안은 조용하기 그지 없었다. 김희진과의 만남으로 지연의 기분이 최 악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성인 군자가 아니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신문 연예란과 각종 여성지에 그와 여자 연예인과의 스캔들이 얼마나 심심찮게 오르내렸는가. 그와 염문설이 있던 여자들만 한 트럭은 될것이다. 스캔들 기사를 볼 때 마다 속상해 했던 그녀였다. 그래도 실제로 보는 것 하고는 틀렸다. 그때도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여기서 내려 주시면 걸어 갈께요." 아파트 근처 버스 정류장이 보이자 지연이 입을 열었다. "집 앞까지 데려다 줄께요. 부모님하고 같이 사나요? 형제는 몇이나 되요?" 대화할 화제 거리가 생기자 준호는 덥석 물었다. 왠지 지연이 화를 참고 있는 것 같아 묵묵히 운전만 하던 그였다. 물론 그가 사귀던-사귀는 중인가. 무슨 상관인가 오늘로 그녀와는 끝인데-여자를 만나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 한지연과 자신은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않는가. 단지 집에 너무 늦어 걱정이 되서 그럴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설득하는 자신의 기분이 비참 한 까닭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왜 죄책감을 느끼며 그녀에게 미안해하는 지도 역시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신경을 지연의 인사 기록카드에 적혀 있던 내용을 떠올리려는 데 애썼다. 하지만 그녀의 사진만 바라보다 끝났던 것이 생각났다. 사진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진만으로도 시선을 끌기 에 충분했었다. "친구랑 같이 살고 있어요. 부모님은 돌아가셨구요, 형제는 없어요." 준호는 그녀가 천애고아라는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가 그리 행복하게 성장하지는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지연이 사는 아파트 앞에 세우고 차에서 먼저 내려 조수석에서 내리려는 그녀를 도와 주었다. "같이 들어 가실 필요 없어요." 그가 성큼성큼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가자 당황한 지연이 말했다. 하지만 그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그녀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만 가보세요, 회장님." 그녀의 입에서 회장이라 불리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같이 산다는 친구가 오해 할 까봐 그러는 건가요?" 그녀에게 정혼자가 있다던 남자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강한 질투심을 느끼는 자신이 우스웠 다.


"네? 미정이가 왜 오해 하는 데요?" 천진한 그녀의 대답에 준호는 같이 사는 친구가 여자라는 것을 알고 안도 했다. 더불어 그런 자신이 지긋지긋하게 여겨졌다. 지연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편집증 환자처럼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요."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그는 그녀를 들여보내며 인사를 하고 문이 닫히기도 전에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자신의 유치한 질투심에 스스로가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그가 뒤를 돌아 그녀를 보았다면, 그녀의 큰눈에 담긴 눈물을, 슬픔을 보았다면 그렇게 뒤돌아 가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걸어 차로 갔다. 차에 이르자 핸드폰이 울렸다. "네." 수화기 건너 전해오는 쥰의 음성에 준호는 놀라움에 몸이 굳어졌다. "아직 행방을 모르고 있나?" "부하들을 시켜 찾고 있습니다." "자네답지 않은 실수를 했군." "죄송합니다." "잘잘못을 가릴 때가 아니지. 우선 신미례씨가 안전한지 확인부터 해야지. 조세현 쪽 동정은?" "아직 까진 잠잠합니다. 그쪽에서 데리고 갔다면 연락이 올 겁니다." "지금 어디에 있나?" "제 아파틉니다. 회장님께서는 댁에 가 계십시오. 연락이 오는 대로 전화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으며 세이치 쥰은 머리를 쥐어 뜯었다. 이런 실수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한 실수 때문에 미례가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절망감에 미칠 것만 같았다. 조세현이 질이 안 좋은 조직 폭력배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자신이 미례를 방 치하는 실수를 저지르다니... 그녀를 잃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에게 품고 있는 특별한 감정을 부정한 벌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네!"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마자 잽싸게 받은 그는 부하직원의 보고에 분노하고 말았다.

미례는 오랜만에 누려보는 자유에 희열마저 느꼈다. 드디어 그 감옥에서 벗어난 것이다. 세이치 쥰이 누구의 전화를 받고 그렇게 나갔는지는 몰랐지만 서두른 그가 문을 제대로 잠 그지 않고 나간 덕분에 탈출 할 수 있었다. 지금쯤 그는 그녀가 도망간 것을 알고 화를 내겠지. 흥! ? 와도 다시 갈 생각은 없다구요.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 집으로 다시 돌아 갈리가 없지.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환기가 되지 않아서 인지 탁한 냄새가 났다. 그녀는 우선 창문을 전부 열어 환기부터 시켰다. 세이치 쥰의 아파트에 비하면 초라하지 그지없는 오피스텔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천국처럼 느 껴지는 자신만의 공간이었기에 열심히 청소를 하고 냉장고에서 상한 음식들도 치우며 바쁘게 움직여 자신이 비운 흔적을 지워냈다. 땀을 흘리고 먼지를 뒤집어 쓰고 나니 씻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허브 오일을 섞은 욕조에 몸을 담그고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온몸의 신경이 풀어지는 것을 느끼며 만족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퍽도 기분 좋겠군."


비아냥거리는 남자의 음성이 가까이에서 들려 오자 반쯤 잠이 들었던 그녀는 기겁하여 눈을 떴다. 세이치 쥰이 욕실 문에 느긋하게 기대 서서 그녀를 노려 보고 있었다. 총을 가지고 있다면 그녀를 당장이라도 쏘아 버리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이 밤에 미친놈들처럼 남자들을 뛰어 다니게 만든 주인공 치곤 느긋하시군." 그의 시선이 그녀의 가슴과 그 아래를 오가자 그녀는 손으로 가려보려 애썼다. "당장 내 집에서 나가요." 신미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당장 나올 사람은 당신이야. 일분 주지. 밖으로 나와. 시간 안에 안 나오면 내가 끌어내 주 지." 오히려 당당하게 말한 사람은 쥰이었다. 말을 마치자 몸을 돌려 나갔다. 미례는 허둥지둥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말대로 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머리를 미리 감아 두길 다행이라 여기며 목욕가운을 몸에 걸쳤다. 쭈뼛거리며 미례가 나오자 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에게 잘못된 일이라도 생기지 않았을까 얼마나 걱정하며 가슴 졸였던가.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목욕을 즐기고 있다니. 비록 향긋한 향이 그의 신경을 누그러뜨리기는 했지만 그는 여기서 화를 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 했다. 자신이 한 짓이 얼마나 무모한지 가르쳐 주어야 두 번 다 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그녀의 몸매가 아무리 유혹적이라 하더라도 그는 덤덤하게 행동해야 했다. 발정 난 황소마냥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상기 시켰다. "두 번 다시 이런 짓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의 말에 미례의 얼굴에 분노가 스쳤다. "이런 짓이라뇨? 내가 내 집에 오는 걸 말하는 건가요? 뭔가 착각하나 본데...이봐요, 두목씨. 당신은 내게 아무런 권한이 없는 사람이에요. 당신이 내 아버지나 뭐 남편이나 된다고 착각하고 있나 본데...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살 거에요." 그녀의 일장 연설에도 그는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그가 성큼 성큼 다 가왔다. 미례는 남자가 한 손을 들자 자신을 때리려는 줄 알고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눈을 떠." 그의 한 손이 그녀의 턱을 잡아 올리며 명령했다. 미례는 억지로 눈을 떴다. "분명히 말하는 데, 두 번 다시 이런 짓 하지마. 내가 어떤 짓을 할지 나도 모르니까." "싫어요." 그녀는 고집스럽게 반항했다. "조세현 재판이 끝날 때까지 당신이 위험 할 수도 있어." "지금 절 걱정해 주는 건가요?" "유일한 증인인 당신이 없으면 안되니까." 그의 말에 상처 받는 자신이 싫어 그녀는 잔인하게 입을 열었다. "유일한 증인이 당신의 보호를 받는 게 싫다면요? 당신하고 있는 게 지긋지긋하다면 어쩔거 죠? 그래도 날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가둬 둘 건가요?" "나에 대한 감정이 그건가?" "그래요! 당신이 끔찍하게 싫어요. 지긋지긋하다구요." 쥰은 그녀의 말에 분노가 치밀어 턱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아픔이 미례의 얼굴에 스쳤지만 그녀는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끼치는 영향의 반만큼이라도 그녀에게도 자신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일방적인 자신만의 감정이란 것이 자존심 상하게 했고 패배감마저 들게 했다. 처음부터 그녀를 멀리 했어야 했다. 납치범들에게 둘러싸여 당당했던 그녀를 본 순간부터 그의 심장은 그의 명령을 거부 했다. 그때 그녀를 멀리 했어야 했다. 아니, 지금까지는 멀리 하려고 노력했었다. 문제는 오늘 그가 자신이 정해 놓은 선을 넘어 버린 것이다. 절망감이 그를 짓눌렀다. 절망감을 떨쳐내기라도 하듯 신음을 내뱉으며 그녀의 턱을 치켜 올려 거세게 입술을 부딪혔 다. 미례는 고집스럽게 입을 꼭 다물고 그를 거부하며 노려보았다. 쥰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아랫입술을 혀로 ?았다. 이어 이빨로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미례는 그의 뜻밖의 애무에 놀라 숨을 들이켰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혀가 침입해 들 어 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와 입술 안쪽 등을 헤매며 애무하다 그녀의 저항이 누그러지자 혀를 얽히며 격렬하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목욕가운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가슴을 감쌌다. 엄지로 유두를 가지고 놀던 그는 갑자기 고개를 숙여 다른 쪽 가슴에 입을 대고 빨기 시작했다. 그의 격렬한 애무에 그녀의 몸이 뒤로 젖혀지자 가운을 벗겨 버리고 안아 올려 침대에 뉘였 다. 자신의 옷을 벗는 와중에도 그는 입과 혀로 그녀의 몸을 쓰다듬으며 계속 불을 지폈다. 덕분에 미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되새겨 보기도 전에 알몸으로 마찬가지로 옷을 다 벗어 버린 그의 몸 밑에 누워 그의 애무에 자신을 맡겨 버렸다. 그녀에게 격렬하게 키스를 퍼부으며 한 손으론 그녀의 가슴을 애무하고 다른 손은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미끄러뜨렸다. 허벅지 안쪽의 부드러운 살을 매만지던 손이 좀더 은밀한 곳으로 움직여 그녀의 여성을 만졌다. 축축해진 그곳을 느낀 그는 손가락 하나를 그녀 안으로 밀어 넣어 만져 보았다. 미례는 그의 뜻밖의 행동에 움찔 했지만 거부 하지는 않았다. 이미 달아 올라 버린 그녀의 몸은 스스로도 자제 할 수가 없었다. 물론 남자와의 관계가 처음은 아니었다. 대학교 1 학년때 첫사랑에 빠져 버린 과선배에게 순결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와의 강압적인 관계로 그녀는 첫사랑, 아니 풋사랑에서 깨어 났다. 그녀를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던 그와 무슨 미련이었는지 일년을 끌어 왔던 시간은 처참한 상처 끝에 끝났고 그녀는 다시는 남자를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겠다고 영원히 혼자 살겠다고 결심 했었다. 지금도 그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쥰에게는 육체적으로 끌리는 것이다. 몸이 원하는 만족을 시켜 준다면 시들어 버릴 감정이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그의 교묘한 손놀림에 온몸에서 열기를 느끼며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를 끌어 당겨 스스 로 열렬하게 입을 맞췄다. 그녀의 반응에 힘을 얻은 쥰은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그의 동작에서 미례는 온 몸이 근질거리는 듯한 느낌에 진저리를 쳤다. 감질나게 하는 그를 재촉이라도 하듯 그녀의 허벅지가 그의 허리를 조였다. "눈을 떠. 나를 봐, 미례." 그의 말에 자신이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을 깨닳았다. 그녀는 겨우 눈을 떠 그를 보았다. 그의 얼굴이 땀으로 젖어 있는 것도 처음으로 알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넘기고 땀을 닦아 주었다.


"말해. 나를 원한다고. 어서 말해." "당신을 원해요." 어서 그가 주는 열정에 빠지고 싶어 순순히 대답했다. "당신이 원하는 게 뭐지? 응?" 그래도 여전히 그는 그녀에게 채근했다. 그녀가 아까 한 말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보다 자신이 더 죽을 지경이면서도 자제 하고 있었다. "당신을 원해요. 세이치 쥰. 당신을 원한다구요." 그가 이러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그녀로서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 끝을 보고 싶었다. 온몸이 특히 그녀의 여성이 미지의 열망을 원하며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대답이 끝나자 마자 그가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테이프를 끊기 전의 마라토너처럼 혼신을 다해 그녀와 자신을 빠르게 몰아 갔다. 미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쥰은 그녀에게 자신을 쏟아 내며 울부짖었다. 두 사람은 하늘 끝까지 올라 갔다 땅속 깊이 떨어져 내리며 환희감에 몸을 떨었다. 쥰은 미례의 머리에 얼굴을 묻고 숨을 골랐다. 아직도 그의 몸은 그녀 안에 그리고 그녀 위 에 있었다. 그녀에게서 떨어 지고 싶지 않았다. 어느 여자와도 이런 일치감을 맡보지 못했던 그였다. 자신이 그녀에게 느끼는 특별한 감정이 이뤄낸 작은 기적과도 같이 느껴졌다. 문득 그녀가 힘들 거라는 생각에 고개를 들던 그는 피식 웃었다. 그의 품에 안긴 그녀가 잠들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몸을 움직여 그녀 옆에 누워 자신의 품안에 그녀를 가뒀다. 비록 잠이 들어도 그녀와 떨어지기 싫었다. 이제는 어떻게 한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만족한 나른함을 느끼며 그는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물론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꿈을 꾸며. 미례와 쥰은 이날 늦은 출근을 해야만 했다. 새벽녁에 그녀를 깨워 다시 사랑을 나눈 쥰 탓도 있었지만 덕분에 두 사람 다 늦잠을 자버 렸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빨리 결혼한다고." 결정적으로 늦어 허둥대는 그녀 뒤에 그가 던진 말에 두 사람은 다투기 시작했다. "누가 누구하고요?" "당신하고 나." "당신 미쳤어요? 내가 왜 당신하고 결혼해야 하는 데요?" 그녀의 반문에 정말 미친 사람은 그녀라는 시선을 보내는 쥰이었다. "그걸 몰라서 물어?" "당연히 몰라서 묻지요. 난 결혼 같은 거 안 해요. 당신이 무슨 생각에서 신사인 척 구는 지는 모르겠지만....아, 당신 혹시 내가 처녀라고 착각하는 거 아니에요? 당신만큼 경험 많은 남자가 설마 그것도 모를리가 없을텐에요?" "당신이 처녀 인 것과 결혼이 무슨 상관이지?" 쥰은 인내심이 바닥 난 것 같은 표정으로 쏘아 부쳤다. "그럼 아닌가요? 내가 처녀라고 착각하고 결혼하자고 하는 게 아니라면 왜..." "당신이 처녀가 아닌 것은 알고 있어. 그리고 결혼하자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 야." 짜증이 날대로 난 그가 소리를 질렀다. "그럼 왜 그러는 데요?"


그녀의 반문에 그는 할 말을 잃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내가 그녀와 결혼 하고 때문이라고...그녀와 같이 살면서 아이도 낳아 기르고 보통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녀는 뭐라고 할까. 아, 맞아 아기. "난 어제 밤과 오늘 새벽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어. 임신했으면 어쩔 건데?" 그의 말에 사색이 되는 그녀를 보면서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아직 모르는데...그리고 임신했다고 꼭 당신과 결혼 할 필요가 있나요?" "그럼 임신하면 아일 지울 거야?" "물론 아니죠!" 두 사람은 아직 배지도 않은 아이문제로 한시간을 실강이를 벌였다. 그래도 결론을 맺지 못한 그들은 점심 시간이 지나 서야 출근을 하게 되었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세요?" 눈 ���이 검은 그녀에게 지연이 걱정스럽게 물어 왔다. 그녀의 큰 눈에 걱정이 가득 담겨 있 었다. 그녀가 좀 늦을 거라는 회장의 말을 전해 들었다며 무슨 일인지 걱정이 되었다던 한지연이 었다. 으이그. 저 착한 순둥이. 미례는 지연이 거짓말은커녕 계략 따위는 생각지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느끼 고 있었다. 한없이 착하고 깨끗하기 만한 그녀에게 자신이 어젯밤 경호 실장과 밤을 보냈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잠시 실없는 생각을 해본 그녀 였다. "아니, 그저 피곤해서 그래." "몸이 안 좋으신가 봐요. 그냥 하루 쉬시지." "근무 이틀 만에 결근하라구?" "아니...그냥 제 말은..." "알아, 무슨 뜻인지. 그리고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나 저나 별일 없었어?" "네." 두 사람은 대화를 끝내고 일하기 시작했다. 그녀들 사이에는 부드러운 공기가 흘렀다. 물론 문 넘어 넓고 고급스럽게 꾸며진 회장실 안에는 경악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무의식 중에 어린 시절 그를 대했던 말투가 흘러 나왔다. 그만큼 그가 놀랐다는 뜻이리라. "신미례와 결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녀도 허락 했고?" "아니요. 하지만 조만간 해결 하겠습니다." "이봐, 쥰. 이건 자네 결혼이야기야. 무슨 범인을 잡는 문제가 아니라." 그의 경직된 태도에 웃음을 참지 못하며 준호가 면박을 주었다. "그녀를 사랑하나?"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는 데 세이치 쥰이 세상에 거칠 것 없는 세이치 쥰이 결혼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녀에게 끌립니다. 그녀가 눈에 안보이면 초조하고 불안하구요. 그녀를 지켜 주고 싶습니다."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나?" "네?" "청혼하며 그렇게 말했냐구."

싶기


답답하다는 듯 준호가 물었다. 내가 청혼을 했던가. "그냥 결혼하자고..." "당신을 지키고 보호해주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으니 결혼해 주십시오-도 아니고 그냥 결혼 하자고 했다구? 형 제정신이야? 세상에 어느 여자가 그런 청혼을 받아 들여!" 놀랍고 그의 무지에 분노마저 느낀 그는 삼년 전 회장으로 취임하며 쥰이 부탁한-당부였 나.-일도 잊고 그를 형이라고 불렀다. "쥰이라고 부르십시오." "지금 호칭이 중요해? 지금은 개인적이 이야기 중이잖아. 그놈의 존대말 좀 집어 치우고 편 하게 말해. 형은 결혼이 회사 합병하듯 조건 제시하고 수락해서 계약 체결하면 다 되는 줄 알아?" "좋아. 그럼 편하게 물어 보자.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겠어?" 쥰이 따져 물었다. "차라리 여자들이 잘 보는 애정 소설이나 한 권 사서 읽어. 그게 빠르겠어. 형은 아무리 이야기 해줘도 소용 없을 것 같군." 쥰은 뭔가를 따지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다시 입을 다물었다. 세상에 나보고 애정 소설을 읽으라구? 서른 다섯이나 된 성인인 남자 보구.- 두고 보자는 심정이 생겼다. 연구하고 노력해서 여성 심리에 대해 박사 학위를 따더라도 준호에게 충고해 주지 않겠다고결심했다. 나중에 도와 달라고 싹싹 비는 꼴을 꼭 보고야 말겠어. 마음속으로 벼르고 벼르는 그였다. 삼월 둘째 주도 끝나고 토요일이 되었다. 별다른 탈 없이 한 주가 지나고 지연은 오랜만에 친구 미정과 느긋한 주말 오후를 보냈다. 그동안 어머니가 돌아 가시고 학교를 졸업하고 한영그룹에 들어가 준호를 다시 만나는 등 일들이 많아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있던 그녀 였다. "빨래는 이게 다야?" 청소를 하고 있는 지연에게 다 된 빨래를 통에 담아 베란다로 나르던 미정이 물었다. "응." "그런데...언제까지 검은 옷만 입고 다닐거야? 회사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 안 해?" "아니. 그냥 검은 색을 좋아 하나 보다 해. 어머니 49 제만 끝나면 안 입을 거야. 그저 그때 까지는 입고 싶어.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그나 저나 49 제 때 절에 갈 거야?" "가야지. 휴가 내고 갈 거야." 살아 생전 잘 다니시던 절에 어머니를 모시고 돌아 오던 날 세상이 무너 질 것만 같이 울었 던 지연이었다.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났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두 모녀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기에 정이 각별했던 것이다. "네 이모님도 참석 하신데?" "아니...내달에나 한국에 오실 건 가봐. 영화제가 끝나야지." "맞아! 내 정신 좀봐. 지성오빠가 오스카상 후보로 올랐지?" 지연의 사촌 이야기가 나오자 미정의 눈이 빛났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한국은 물론 세계에 서 그를 흠모하고 숭배하는 여성팬들이 부지기수 였다. 미정 역시 사촌 오빠를 열렬히 사랑하는 팬이었다. "우리 왕자님이 상 받았으면 좋겠다." "이모님 말씀이 큰 욕심 내지 않으신데. 헐리우드에 처음 진출해서 거둔 성과로 만족 하신 다고 그러시던걸 뭐."


"그렇긴 하지만...참, 그럼 너 혼자 절에 가야 하는 거잖아?" "그게 어때서?" "너 혼자 힘드니까 그러지. 너 또 펑펑 울 텐데...내가 그냥 MT 빠지고 따라 갈까?" 지연과 미정은 동갑으로 배꼽 친구였지만 생일이 1 월인 그녀가 일곱살에 학교에 들어 가서 학년이 달랐다. 미정은 올해 4 학년으로 내년에나 졸업한다. "싫어. 그냥 나 혼자 갔다 올게. 그리고 너 빠지면 안 된다며... 과 대표가 빠져서 돼?" "그렇긴 해. 나 안가면 못 간다는 남성팬들이 발끝에 채인 다니까." 미정의 너스레에 지연이 살포지 웃었다. "너 그럴 때 얼마나 애간장 녹이게 예쁜 줄 알아?" "뭐가?" "그렇게 웃으면 안 넘어올 남자 없겠다. 세상 불공평해." "또 왜 그래?" "빨래나 널어야 겠다구." 두사람의 대화는 일이 다 끝난 저녁에 이어 졌다. 두사람은 쇼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한 주 동안 있었던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다. 미정은 새로 들어 온 신입생들이 얼마나 싱싱하고 예쁜지에 대해서 한참 늘어 놓더니 결국엔 자기 비하로 이어졌다. 자신이 너무 늙었다는 그녀에게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면 다시 싱싱해 질 거라고 위로해 주 었다. "...그래서 네 왕자님하고는 잘 돼 가고 있어?" 한참을 말을 돌리던 미정이 넌지시 물어 왔다. "그냥..." "그냥 뭐?" "겨우 몇일 일했을 뿐인걸 뭐. 얼굴 보기도 힘들어. 어떨 땐 비서가 아니라 운전기사로 취직할 걸 그랬다는 생각마저 든 다니까. 최소한 차 타고 있는 동안 만은 얼굴이라도 보지." "사무실에서 못 봐?" "잠깐씩. 대부분 밖에서 지낼 때가 많아. 뭐가 그렇게 바쁜지 회장실에 있을 때도 얼굴 보기 힘들다니까. 차 심부름 할 때 잠깐 보구...대부분 비서실장님하고 경호 실장님에게 지시 내려." 미정은 엄마에게 일러 바치는 어린 아이 마냥 미주알고주알 말하는 지연을 다정하게 바라 보았다. 그녀의 희망과는 달리 그 회장이라는 남자는 목석인가 보다. 이렇게 예쁘고 심성고운 지연 에게 첫눈에 반하지 않다니. 아니면 벌써 사랑하는 여자라도 있던가. "혹시 사귀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 "그런 사람 같지는 않지만..." "있구나? 누구야?" "너도 알지 김희진이라고...왜 그 인형처럼 예쁜 탤런트 말야." 알고 말고 얼굴을 뜯어 고치다 못해 아에 상판을 갈아 치운 여자를 왜 몰라. "알아. 요즘 주가가 높은 신인이잖아. 그런데...너네 회장하고 무슨 사이야?" 지연은 얘기하기 싫었지만 미정에게 비밀로 하고 싶지 않아 준호와 저녁을 먹고 나서 김희 진을 만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듣던 미정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별거 아닌데 뭘. 걱정 마. 너네 오빠한테 스쳐가는 바람도 안 되는 여자야." "정말 그럴까?" "그래. 걱정 마. 내 말 믿어." 어쩜 생각보다 그 카리스마 회장이 속내를 감추고 있는 지도 모른다고 미정은 생각했다. 아직까지 신입비서 여직원 저녁을 사주고 일부러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는 대기업 회장을 보


지 못했으니까. "저녁에 뭐 먹을 까?" "글쎄...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네가 만들어 주는 해물스파게티 먹자. 오랜만에 먹어 보고 싶다." "그거 가지고 돼?" "피자도 만들어 주면 좋구. 대신 장은 내가 봐 올게. OK?" "OK." 미정이 슈퍼로 시장을 보러 간 사이 지연은 야채들을 씻어 놓았다. 초인종이 울리자, 벌써 올 리가 없는데-하는 의아심을 가지고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미정이 너 지갑 안 가져 갔지?" 문이 열리며 장난스럽게 소리치던 지연은 순간 홍당무가 되었다. 윤준호가 문 밖에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저...어떻게..." 간신히 입을 열던 그녀는 자신의 옷차림에 신경이 쓰여 더욱 얼굴을 붉혔다. 집에서 평소 입던 대로 반소매티에 츄리닝바지 차림이었던 것이다. 맨발인 것도 신경 쓰였 다. "병원에서 집으로 가던 길에 생각이 나서...지나가다 보니 지연씨네 동네길래 저녁이나 얻어 먹을까하고 들렀어요." 준호 역시 꼼지락 거리는 지연의 발가락에 시선을 빼앗기며 미리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어디 아프세요?" 병원이라는 말에 지연이 걱정스럽게 물어 오자 그의 마음에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아니에요. 외할아버님이 종합검진 하시러 입원해 계시거든요. 그런데...들어 가면 안되나요?" "아, 아니에요. 어서 들어 오세요. 정신이 없어서 그만." 허겁지겁 그를 집안으로 맞아 들였다. 그가 쓰는 회장실 보다도 작은 아파트에 신경이 쓰였 지만 이미 준호는 집안으로 들어와 거실 쇼파에 앉아 있었다. "집이 아담하게 꾸며져 있네요. 여자분들이 사시는 곳이라 아기 자기 하나 봐요." 다행히 준호는 그녀를 기쁘게 하는 말을 해 주었다. "좀 작지만 미정이와 제가 쓰는 데는 지장이 없어요. 방도 두개고 거실도 있고." "작다고 흉 안 볼께요. 됐어요?" 그의 놀리는 듯한 말에 지연은 다시금 얼굴을 붉혔다. 하얀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드는 것을 보는 것은 작은 기쁨이었다. 물론 그녀의 귀엽고 작은 발도 마음에 들었다. "내가 방해가 된 건 아니죠?" "네, 네. 미정이가 스파게티랑 피자가 먹고 싶다고 장보러 나갔어요." "배달 해 주는 데가 없나 보죠?" "아니에요. 사실은 제가 직접 만들 거거든요." 지연은 수줍게 고백했다. 솔직히 그녀는 베테랑 요리사였다. 병약한 어머니와 살며 일찌감치 가사에 뛰어 들었던 그녀 였기에 당연했지만. "기대가 되네요." "저...말씀 낮추세요. 나이도 한참 어리고 부하 직원이잖아요." 지연은 과거 만났을 때처럼 허물없이 대하는 그를 보고 싶은 마음에 말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 보지." 단숨에 말투를 바꾸는 준호였다. "왜 문이 열려 있는 거야? 지연이 너 혼자 있을 때 문단속 잘하고 있을 라고 했잖아. 널 노 리는 늑대들이 얼마나 많은데...손님이 오셨니?"


그래도 할말은 다하고 준호를 발견한 미정이었다. "안녕하세요. 윤준호라고 합니다." "아, 네. 지연이 오...회사 회장님이시죠? 전 최미정이에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반갑네요." "저도요." 그와 악수를 나누며 미정이 멍하니 지연과 준호를 번갈아 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 지 묻는 눈치였지만 지연은 어깨를 으쓱여 자신도 모르는 일임을 밝혔다. "저녁 드시고 가시라 했어." 준호는 자신이 권한 것처럼 친구에게 말해서 그의 체면을 세워주는 지연에게 새삼 따스한 감정을 느꼈다. 처음 그녀를 보고 판단한 자신의 생각이 모두 맞았다. "잘했어. 네가 안 했으면 내가 했을 거야. 기쁜 마음으로 초대할께요." "고마워요." 한사코 말리지만 기어코 거들겠다는 준호까지 세 사람은 함께 저녁을 준비했다. 즐겁고 유쾌한 대화가 오가며 식사를 마치고 커피까지 마시고 난 준호가 지연의 집을 나간 것은 열시가 다 되어서 였다. "즐거운 저녁 고마웠어요." "언제라도 오세요, 환영합니다. 그럼 지연아 오...회장님 배웅해 드려." 미정이 먼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지연은 그와 함께 엘리베이트를 타고 차가 세워진 아 파트 앞 주차장으로 갔다. "지연씨 덕분에 맛있는 저녁 먹었네요.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입맛에 맞으셨다니 기뻐요." "음...그런데...흠흠..." 그의 차에 다다르자 헛기침을 하며 무척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것이었다. "무슨 달리 하실 말씀이라도?" 준호가 그녀의 집을 그냥 들른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용건이 있는 듯 싶었다. "지연씨, 오페라 좋아해요?" "네? 오페라요?" 느닷없는 질문에 지연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무슨 오페라? 그의 의도를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괜찮다면, 내일 함께 오페라 보러 가지 않을래요?" 준호의 물음에 지연은 잠시 할말을 잃었다. 이거 데이트 신청 맞아? "아, 부담된다면..." "아, 아니에요. 좋아해요. 가고 싶어요." 그가 데이트신청-지연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을 취소할까봐 황급히 대답했다. "그럼 내일 봐요. 저녁 다섯시쯤 데리러 올께요. " "네, 준비하고 기다리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머뭇거리던 준호가 차에 올라 손을 흔들고는 떠나 갔다. 지연은 허전한 마음에 팔짱을 끼며 가슴을 감쌌다. 내일은 금방 올텐데 뭘. 더구나 준호오빠가 데이트신청을 했잖아. 그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자. 비참해질지도 모르니까. 준호 역시 지연이 또다시 보고 싶어졌다. 지연의 집을 방문하면 안 되는 이유를 수없이 대며 자신을 설득했지만 어느새 그녀집의 초 인종을 누르고 있었다. 그녀를 안지 고작 몇일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끌리다니...스스로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먼저 관심 같고 다가가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항상 여자 쪽에서 다가왔고 아름다운 외모의 그녀들을 뿌리칠 이유가 없던 그였다. 기꺼이 그녀들과의 육체관계를 즐겨왔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의 관계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를 거쳐 갔던 수많은 여자들에겐 지연에게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느껴보지 못했다. 물론 육체적으로도 끌리고 있었다. 지연처럼 그의 욕망을 자극하던 존재도 없었기에 밤마다 그녀를 갖는 꿈을 꾸고 또 꾸었다. 십대 사춘기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대화하고 싶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고 싶었고 그녀의 관심을 독차지 하고 싶었다. 다른 사내들이 그녀에게 관심 갖는 것이 싫었다. 그녀가 다른 사내들과 웃으며 말하는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았다. 지연을 온전히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에 그는 미칠 것만 같았다. 역시, 정상이 아니야. 이런 감정은 위험했다. 준호는 스스로를 설득하려 애썼다. 금방 타오른 불은 쉽게 꺼진다. 얼마 안되어 자연 소멸될 감정일거라 생각하려 애썼다. 그런데...그��� 생각들도 지연의 집으로 향하는 그의 발길을 막지 못했고 더더구나 내일 함께 오페라를 보러 가자고 데이트신청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불안과 초조감을 느끼며 처음 데이트하는 사춘기 소년마냥 어색하게 행동한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더더구나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여자와의 데이트를 기다려 보기도 처음인 준호였다.

제 4장 아침부터 시작된 지연의 옷입기 전쟁은 미정이 기억하기로 지연이 가지고 있는 옷은 모두 입어 보고서야 끝났던것 같다. 결국 지연은 따뜻하면서-삼월이라도 아직은 추웠다.-심풀한 디자인의 울드레스와 한벌인 코트를 걸쳤다. 드디어 결정이 나자, 옷차림에 어울리는 핸드백과 구두까지 챙겨주며 미정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미정이 알기로 지연이 남자와 데이트를 하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러니 이정도 수선을 피우는 것은 눈감아 주자며 스스로의 희생정신을 고무시켰다. "어떻해? 나 괜찮아?" 초인종이 울리자 지연이 연하게 화장한 얼굴을 찡그리며 울상이 되었다. 화장하는 것이 처음이라 자신의 얼굴이 너무 이상해 보였던 것이다. "예뻐. 예뻐 죽겠으니까, 네 오빠 기다리게 하지 말고 빨리 갔다와. 재미있게 보내고 알았 지?" 지연을 대신해 현관문을 열고 준호를 맞아 준 미정은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친구의 등을 떼밀어 내보내며 인사를 했다. "너무 늦지 않게 우리 지연이 돌려 보내 주세요." 준호를 향해 애교스럽게 외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늘 볼 공연은 푸치니의 라보엠인데...괜찮아요?" 그녀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운전석에 앉은 준호가 시동을 걸며 물어왔다. "네, 전에 한번 본적 있어요. 그땐 어려서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지연은 떨리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잘됐군요. 다시 한번 보면 더 재미있을거에요. 이해하기도 쉽고." 공연장을 향하는 차안에서 준호는 라보엠에 대한 전체 줄거리와 작곡가 푸치니에 대해서 자


세히 설명해 주었다. "공연 시작하기 전까진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저녁식사를 먼저 할까요? 공연이 끝나면 시 간이 늦을거에요." "네, 가볍게 먹는게 좋겠어요." 잔뜩 긴장한 자신의 위가 과연 음식을 받아 들일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지연은 그렇게 말 했다. 진짜 처음으로 데이트하는 지연이나 수없이 많은 여자들과 데이트를 즐겼던 준호나 긴장하 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떤 의미에서 준호에게도 오늘이 처음으로 데이트를 하는 날인지도 몰랐다. 그에게 아름다운 여자들과 데이트하는 것은 함께 저녁을 먹고 시간을 보내는 거외에는 더도 덜도 아니었다. 물론 그뒤 함께 잠을 자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대신 그와 사귀는 여자들은 값비싼 옷과 보석들...고급스런 선물들을 받았다. 그는 사귀는 동안에는 인심이 후한 연인이었으므로 비록 짧은 기간 동안이라도 그와 사귀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녀들의 생각에 자신만은 그를 붙잡을수 있을거라는 속셈이 있는 것을 모르지 않는 그는 매달리려 하는 기미가 보이면 칼같이 정리해버렸다. 비록 지연에게 느끼는 감정이 여느때와 다르다는 것을 잘 아는 그였지만 삼개월정도만 지나 면 다른 여자들에게 질리듯 자신의 관심이 식어버릴거라고 생각하려 노력했다. 그때까지만 즐기면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설득력이 없었다.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지연과 즐겁고 가벼운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푸치니의 라보엠은 시인 로돌프와 수놓는 아름다운 처녀 미미 그리고 화가 마르첼로와 거리 의 처녀무젯타의 슬픈 사랑을 그리는 작품이었다. 로얄석에서 준호와 나란히 앉아 작품을 감상하며 그들의 슬픈 사랑에 지연은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4 막의 마지막 장면에서 미미의 죽음과 슬퍼하는 로돌프를 보며 지연은 손수건을 눈가에 대 고 펑펑 울고 말았다. "죄송해요." "아니에요, 감성이 풍부한 지연씨랑 함께 봐서인지 아주 신선했어요." 그말은 사실이었다. 그와 함께 공연을 보러 오는 대부분의 여자들은 로얄석에 앉은 사실에 우쭐해 하며 우월감에 취해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둘러 보기에 바빴고 막이 내리면 눈가에 손수건을 가져다 대는 시늉만 하곤 했었다. "시간이 괜찮다면 차라도 마시고 들어가겠어요?" 그와의 작별이 아쉬웠던 지연은 기꺼이 동의 했다. 함께 차를 마시며 작품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들어주기도 하며 그렇게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자정이 다되어 지연을 집으로 데려다준 준호는 그녀의 집문앞까지 바래다 주었다. "정말 즐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나중에 또 공연보러 가자고 하면 응해주겠죠?"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던 지연은 한순간 심장이 내려 앉는 줄 알았다. 갑자기 준호의 얼굴이 다가왔던 것이다. 그가 키스라도 하는 줄 알고 눈을 질끈 감던 지연 은 가볍게 이마에 와 닿는 따뜻한 입술의 감촉에 살짝 눈을 떴다. "좋은 꿈 꿔요." 여유있게 웃으며 몸을 뗀 준호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지만 지연은 한참을 이마에 손을 가져 다 대고 서있었다.

설레임에 가득찬 데이트를 가진 준호와 지연과는 달리 미례와 쥰은 결코 편하지 못한 주말


을 보냈다. 두 사람은 계속 다투었던 것이다. 물론 쥰도 연애박사라는 것이 돼 보려 노력했다. 그가 직접 산-낯뜨거워서 부하 직원을 어떻게 시키겠는가.-연애 소설은 열페이지도 채 읽어 보지 못했다. 사실 읽어 보려고 노력했지만 수면제라도 뿌려 놓았는지 어느 순간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이드 테이블에 놓여 있을 그 책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더불어 연애박사가 되어 준호를 골려 주려던 계획도 포기 했다. 다행히 자신의 오피스텔에 머물겠다는 그녀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그걸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그가 자신도 그녀의 오피스텔에서 머물겠다고 엄포를 놓자 그녀가 마지 못해 포기 했던 것 이다. 하긴 그의 아파트에는 방이 네개에 넓은 거실 욕실도 두개나 되지만 그녀의 오피스텔은 달 랑 침대하나에 욕실하나가 전부였으니 그를 피할 수가 없을 거라는 계산이 그녀에게 섰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그녀의 집에서 지낼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그였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따로 방을 쓰 며 신경전을 벌이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 결혼 얘기 좀 안 하면 안되요?" 함께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던 미례가 소리 치다시피 말했다. 요 몇일 동안 그녀를 볼 때마다 결혼의 필연성에 대해 늘어 놓는 그에게 질렸던 것이다. 그를 잘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그녀를 사랑해서 그러는 줄 알 것이다. 차라리 나도 그를 잘 몰랐다면 편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그랬다면 그가 자신과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그녀가 아는 세이치 쥰은 사랑이란 단어를 아에 모르는 로봇 같은 남자니까. 더욱이 그가 뭐가 아쉬워 그녀와 결혼하겠는가. 틀림없이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이상한 의무감에 사로 잡혀 저러는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었 다. 그도 아니면 성적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곁에 있는 그녀를 편리하게 이용하려는 것이던가. 물론 그녀 역시 그와 관계하는 것을 바랬다. 문제는 그가 결혼하자고 노래를 부르는 상황에서 덜미를 잡히고 싶지 않았기에 피할 뿐이었 다. 빨리 임신이 아닌 게 확인이 되어야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을 텐데.

조세현은 눈앞의 사내를 죽일 듯이 노려 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비정상적인 번뜩임이 어렸 다. "1 차 공판이 열리기 전에 계집을 처치하란 말야.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 들어. 그년이 있으면 재판에서 불리하다구." "하지만 그녀는 세이치 쥰이라는 작자가 보호하고 있다니까...그가 없을 때도 네 명 이상의 남자들이 경호하고...어쨌든 잡기가 힘들어." 조세현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변호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에게서 풍기는 폭력의 냄새가 너무 짙었다. "변명은 집어 치워! 내가 나 혼자 지옥에 떨어 질줄 알아? 내가 끝장 나면 너도 함께 가는 거야. 넌 나를 이렇게 방치 할 수 없을 텐데?" 사내 역시 조세현의 협박을 무시 할 수 없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지만 억지로 눌렀다. "너와 네 조직도 나와 함께 무너 지는 거야. 명심해 둬." 감히 자신을 협박하는 조세현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년 입만 막으면 일이 반은 해결 된다구. 그리고 그 윤준호 놈의 뒤통수만 칠 수 있다면 횡령 고소를 취하 하도록 할 수 있을 텐데. 그놈의 야킬레스건을 찾아봐. 날 빼내란 말야! 뒷짐지고 먼


산 불구경 하듯 하지 말고!" "알았으니까 쓸데없이 불러 내지나 말아. 검사 놈이 눈치 챌 수도 있어." "절대 눈치 못 채. 네 일 이나 잘해." 사내는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리다 나갔다. 조세현은 문을 노려 보며 이를 갈았다. 죽여도 시원찮을 그 세 연놈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주차 된 차로 다가 가자 조수석에 있던 부하가 얼른 내려 뒷좌석문을 여는 것이 보였다. 미련한 놈들! 제대로 일만 처리 했어도... 사내는 화가 치밀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형님...무슨 안 좋은 이야기라도...?" 사내를 차에 태우고 자신도 조수석에 다시 탄 부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며 그의 눈치를 보 았다. 차는 서서히 움직여 구치소를 빠져 나갔다. "조세현, 그놈이 협박하더군." "그냥, 확 조져 버릴까요?" 대뜸 상스런 말부터 하는 부하를 한심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사내였다. 그가 능력이 없어서 조세현의 협박을 참으며 살려두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은 그가 쓸만하다고 판단했기에 상황을 살피는 것이다. "제발 머리 좀 써라, 곰치." 별명답게 곰 같은 놈이었다. 그의 핀잔에 머리를 긁적이며 히죽이는 꼴을 보자 분통이 터질 것 같았다. 저런 놈을 데리고 있으니.. "원하는 게 뭐랍니까?" 운전대를 잡고 있던 태호가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그래 넌 쓸만하지. "원래 계약대로." "계집을 처치하라는 거군요." "하지만, 그년은 한영에서 보호하고 있잖아요?" 미련한 곰이 소리를 질렀다. 넌 좀 빠져라. 제발... "또 있다. 윤회장의 약점을 잡으란다." "그에게 약점이란게 있을까요?" "아휴, 답답하네...작은 형님.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이 어디 있어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있어. 윤회장이 그런 놈이야. 일 터지기 전에 미리 조사 했었잖아." "아, 그랬죠?" 곰치는 해죽 웃다가 사내가 노려 보자 입을 다물었다. "그가 아끼는 사람이 누구지?" 사내는 태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글쎄요...노회장하고 경호실장이란 놈하고...그 외엔 없는 데요?" "노회장을 납치할까요?" "넌 입다물어. 다 죽어가는 노인네 데려다가 송장 치울 일 있냐?" 결국 사내가 소리를 질렀다. "다시 애들을 윤회장에게 붙여. 뭔가 있을 거야. 애들 시켜서 그가 만나는 사람들 사진도 찍으라고 시키고... 뭔가 건지면 즉시 보고해." "네, 형님." 태호가 듬직하게 대꾸하자 사내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고 밖을 내다 보며 생각에 잠겼 다.


월요일에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출근한 지연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저녁 그와 새로운 관계를 쌓았다고 생각한 그녀는 어떤 얼굴로 그를 대할지 고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없었다. 갑자기 출장을 가버린 것이다. 물론 일때문이었지만. 중국에 세우고 있는 공장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새벽 첫 비행기로 출장을 갔던 것이다. "경호 실장님도 함께 가신 거에요?" 지연의 물음에 미례의 얼굴이 조금 붉어 진 것 같았다. "아니, 그분은 안가셨어. 이곳에서 처리 할 일이 있다고." 물론 그 처리라는 것이 미례의 신변 보호였다. "회장님 언제 오신데요?" "일주일 이상 걸리신다는데...홍콩하고 대만, 일본도 다녀 오신다고 했거든." 다행히 지연은 미례가 그 사실을 어디서 들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어떻게 아침 식사를 하며 쥰에게 들었다고 말하겠는가. 지연은 실망스럽지만 애써 자신의 감정을 눌렀다. 부디 다음주 수요일 전에 그가 와서 얼굴 을 보길 바랄 뿐이었다. 처음에는 간단하기만 한 일들이었다. 회사에 들어와서 준호 곁에서 일을 할 수만 있다면 행 복할 거라고 믿었었다. 자신이 얼마나 어리고 어리석었는지 지금에 와서 뼈져리게 후회하는 그녀였다. 생각과는 달리 그녀는 욕심이 커져 만 갔다.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에게 자신의 사랑을 보답 받고 싶다는, 그 동안의 기다림에 보답 받고 싶다는 열망이 커져 그녀를 아프게 했다. 특별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고 작은 것에 만족하는 그런 성격이라 생 각했는데 지금의 자신을 보면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실망할 거라는 생각 마저 들었다. 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그녀도 이기적인 여자였다. 아니 최소한 지연은 자신을 그렇게 생 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외모만 보고 평가를 내리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비하시켜 판단하고 있었다. "네가 십년을 한결 같이 바라볼 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더라." 오늘 아침 출근준비하는 지연에게 미정이 그렇게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덧붙이기 까지 했다. "반드시 잡아. 알았지? 놓치면 안돼! 네 사촌 오빠만큼이나 멋있는 사람이 어디 흔하니." "넌 항상 지성오빠하고 비교해서 평가 하더라." 미정이 준호를 높게 평가하는 것이 내심 기분 좋았던 그녀는 괜히 핀잔을 주었다. "넌 네 오빠라서 못 느끼나 본데 너네 오빤 정말 잘났어." "나도 우리 오빠가 잘생긴 건 알아. 하지만 다른 잘생긴 배우들도 얼마나 많은데..." "넌 네 오빠의 진짜 매력을 못 보는 거야. 그가 왜 왕자님이라고 불리는지 정말 모르고 있 다고." 친구의 반박에 지연도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지연의 이종 사촌 오빠인 정지성은 세계적인 스타였다. 작년에 헐리우드에 입성해서 일년 만에 아카데미상 주연 후보로 오른 것만 봐도 그건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잘생긴 외모에 근사한 몸매를 가진데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그는 다섯살에 연기자로 데뷔했다. 이모부가 영화감독이고 이모가 영화배우 인 점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는 배경이 아닌 자신의 실력으로 지금의 자리에 올라 선 것이다. "내가 왜 지연이 널 좋아 하는 줄 알아?" "왜?"


느닷없는 미정의 말에 지연은 어리둥절했다. "만약 지성 오빠가 여자라면 꼭 너 같을 거���까." "뭐, 뭐라구?" 친구의 말에 화난 척 했지만 확실히 지성과 지연은 닮은 데가 많았다. 그녀의 엄마와 이모 가 일란성 쌍둥이니 당연한 결과 겠지만. "지연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식사하러 가자." 생각에 빠진 지연을 깨우는 미례의 말에 그녀는 들여 다 보고 있던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비서실장이 약혼녀 소개 한다고 했잖아." 미례의 말처럼 사내 식당에서 만난 이민석은 자신의 약혼녀인 서은경을 두 사람에게 소개했 다. 세 사람은 금방 의기투합하여 오랜 지기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 난 없는 사람 취급이군." 이민석이 투덜거렸지만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았다. 포기한 민석은 조용히 식사에 열중했 다. "비서실 근무는 할만해요?" 홍보부에서 근무 한다는 은경은 두 여자들이 비서실에 근무하는 근황을 궁금해 했다. "사실 동료들이 미례씨하고 지연씨에 대해 알아 보라고 날 특파했거든요." "저희를 요?" 회사 직원들이 자신들에 대해 궁금해 한다는 것은 금시 초문이었다. "몰랐어요? 두사람을 조만간 인터뷰하러 비서실로 쳐들어 갈 거에요. 깐깐한 우리 회장님을 녹인 두 분에 대해 의견들이 분분하거든요. 그래서 조만간 사내지에 두사람에 대해 실을려구요." "좀 으시시 하네요." "우린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닌데..." "미리 겁먹을 필욘 없어요. 그런데...지연씨..." "네?" "지연씨 정혼자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자신을 겨냥한 은경의 질문에 지연은 화들짝 놀라 얼굴이 달아 올랐다.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따라 다니는 남자들이 너무 많 았다. 지연으로서는 그런 그들이 불편하기만 했었다. 그녀는 준호 오빠만을 생각하고 바라보며 자 랐으므로 당연한 결과 겠지만 접근하는 남자들이 그녀에겐 남자로 보이지 않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래서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다는 말로 자신의 주위에 벽을 쌓고 접근하는 남자들을 막 아왔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그 말이 자신 앞에 떨어 지다니. 물론 결혼을 약속한 남자인 준호가 있었지만 그는 그녀를 알아 보지도 못하고 있는데... "저...그게...그러니까..." "아휴, 답답해. 그러니까 있다는 얘기에요, 없다는 얘기에요?" "그래, 사실대로 말해봐, 지연씨. 그런 얘기 나한텐 없었잖아." 미례까지 독촉을 했다. 이민석 또한 들던 수저를 내려 놓고 지연을 바라 보았다. 흥미진진한 시선들이 자신을 향하자 지연의 얼굴은 삶은 가재마냥 달아 올라 버렸다. -언젠가 네 발등 네가 찍을 거야. 미정의 충고가 맞았다. "있어요."


결국 지연은 스스로 발등을 찍고야 말았다. 자신의 말이 준호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 문 제리라. "그럼 그렇지. 지연씨 같이 예쁜 사람이 여태 짝이 없을 리 없지. 눈 있는 제정신 가진 남자라면 지연씨를 가만 놔두겠어." "뭐 하는 사람이야?" 두 선배에게 시달리는라 지연은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만약 먹었다 하더라도 체했겠 지만. 지연이 요리 조리 피하며 사실을 말해 주지 않자 결국 두사람은 포기하고 식사에 열중했다. "미례씨는 요즘 괜찮지?" "그럭저럭요." "그래도 조심해야지. 알고 보니 조세현 그놈이 아주 질이 좋지 않대잖아."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선배." 은경은 서른 살로 미례 보다 두 살 위였다. 미례는 은경의 입에서 세이치 쥰에 대한 이야기 가 나올까봐 긴장했다. 그녀가 세이치 쥰의 아파트에 기거하고 있는 것을 비서 실장이 알고 있을까. 그렇다면 그 이야기를 약혼녀에게 알려 주진 않았을 까,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방금 전 지연이 진땀을 뺀 것을 본 터라 불안감은 더했다. 어짜자고 화를 자초 했을까. 끝까지 자신의 집에 남았어야 했다. 같이 살겠다고 쥰이 엄포를 놓았어도 강경하게 나가야 했는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그의 육탄 공세를 피할 수 있었을까. 그는 기회를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그녀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녀가 방심하는 순간 덮칠 것이 분명했다. 그가 자신을 원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이유를 알아야 대책을 세울 것 아닌가. 어쨌든 지금은 모든 상황이 뒤죽박죽이었다. 살벌한 전쟁터 같은 식사를 마치고 네 사람은 헤어졌다. 은경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약혼자를 데리고 사라졌고 패잔병 같은 몰골의 지연과 미례는 쉬 고 싶은 마음도 없어 사무실로 돌아 왔다. 지연의 희망과는 달리 준호는 다음주 화요일이 되어도 돌아 오지 않았다. 지연은 비서실장에게 다음날 수요일에 하루 쉬겠다고 휴가를 청했다. 빨리 일을 처리하고 목요일에 출근하면 그를 볼 수 있기를 바라며 퇴근 했다. 당연히 준호도 지연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수요일 오후 공항에서 곧장 회사로 오는 차에 몸을 실었다. 곧 있으면 퇴근 시간이므로 무슨 핑계를 대고 지연과 저녁을 함께 할까 궁리 하면서 사무실에 들어 서던 그는 지연이 자리에 없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 신미례가 자리에서 일어 서며 반갑게 인사해 주었고 비서 실장도 놀라 자리에서 일어 나며 인사를 건넸다. 세이치 쥰도 그의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쥰의 시선은 그의 이른 귀가에 의아함을 품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쥰은 준호가 내일 오전에나 되야 올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출장 선물이에요." 미례의 손에 작은 봉투를 건네고 그는 회장실로 들어갔다. 지연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안 하던 짓까지 했는데. 일부러 다른 비서실 직원과 경호실 직원들것 까지 챙겼던 것이다. "회장님을 모시고 갔던 장호영은 어디 있습니까?" 쥰은 자신이 제일 신임하는 부하 직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제일 먼저 물었다.


그의 임무는 회장을 끝까지 보호하는 것이었다. "몸이 안 좋아서 집에 먼저 보냈어." "무슨?" "먹은 게 안 좋았나 봐. 인상 좀 쓰지마. 경호원 없어도 내가 내 몸 하나는 지킬 실력이 된다는 거 알잖아. 솔직히 형도 나 못 이기잖아." 준호의 놀림에 쥰은 더욱 인상을 썼다. 그 말이 사실이기에 입맛이 더 썼다. "그나저나 한지연씨는 어디 갔지?" "그 말이 왜 안 나오나 했습니다." 여전히 기분이 나쁜지 삐딱하게 나오는 쥰이었다. "오늘 하루 휴갑니다. 집안에 일이 있답니다." 마지못해 대답해 준 말에 이번엔 준호의 안색이 굳어졌다. 무슨 안 좋은 일이 라도 있는 걸 까. "그리고 이건 노파심에서 하는 이야긴데..." 결국 지연이 우려한 대로 준호의 귀에도 이야기가 들어갔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쥰을 통해서 였다. 쥰은 당연히 미례에게서 정보를 제공 받았다. "한지연씨 정혼자 있는거 맞답니다. 본인 입에서 나온 말이니 사실일 겁니다." 똥 씹은 얼굴이 된 준호를 보며 좀 전에 당한 복수에 성공한 쥰은 휘파람을 불며 그의 사무 실로 갔다. 정혼자! 도대체 나이도 어린 여자가 무슨 정혼자가 있다는 거지? 지연에 대한 이상한 집착을 끊기 위해 이번 출장만한 것도 없었다. 만약 성공했다면 말이다. 하지만 출장 가 있는 동안 그의 생각은 지연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스스로를 포기 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준호는 자신의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놔두기로 결심했다. 이 감정의 끝이 불행할지라도 더 이상 자신을 속이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퇴근을 한 준호는 참을 수 없는 궁금증에 직접 차를 몰고 지연의 아파트로 향했다. 초인종을 눌렀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비도 오는데 어디 간 걸까. 그가 회사를 나서면서부터 내린 비는 제법 굵은 빗줄기가 되어 내렸다. 그대로 돌아 갈까 망설이던 그는 결국 자신의 차 안에서 아파트 입구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시간 가까이 시간이 흐르자 포기하고 차에 시동을 걸려던 그는 멀리서 보이는 모습에 멈 칫했다. 지연이 분명했다. 그런데 우산도 쓰지 않고 무슨 짓을! "한지연씨!" 차에 비치된 우산을 들고 뛰어 내린 그는 그녀에게 달려 갔다. 벌써 흠뻑 젖어 멍하니 걸어오던 지연이 멈춰 서서 그를 바라 보았다. "회...회장님. 여긴 어떻게?" "그보다 어서 안으로 들어 갑시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비를 이렇게 맞다니...병에 다행인줄 알아요." 머리에서 발끝까지 젖은 그녀에게 우산을 씌어주며 팔을 잡고 아파트 안으로 이끌었다. "옷부터 갈아 입어요. 빨리!" 집안에 들어 서기가 무섭게 준호가 채근을 해대 지연은 자신의 방에서 옷가지를 가지고 나 와 욕실로 들어 갔다. 뜨거운 물줄기가 쏟아 지는 샤워기 밑에 서서 몸을 맡기고 있었더니 한기가 조금은 가셨다.

안 걸리면


지연이 대충 씻고 옷을 갈아 입는 사이 준호는 가스렌지에 주전자를 올려 놓고 물을 끓였 다. 그리고 찬장을 뒤져 코코아를 찾아 냈다. 지난번 왔을 때 대충 봐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었다. "이것부터 마셔요." 지연이 욕실에서 나오자 그녀를 쇼파에 앉히고 잔을 건넸다. 뜨거운 코코아를 후후 불며 마 시는데 욕실에서 드라이기를 찾아 가지고 나온 준호가 그녀를 앞에 앉히고 머리를 말려 주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손길에 그녀는 잠시 슬픔을 잊고 그와의 접촉을 즐겼다. "어딜 갔다 오느라 비를 그렇게 맞았어요?" 그의 말투는 퉁명스러웠으나 걱정을 감추지는 못했다. "오늘이 돌아 가신 어머니 49 제에요. 그래서 어머니 모신 절에 다녀 왔어요." 그녀의 음성은 너무 작아 귀를 기울여야 겨우 알아 들을 수 있을 정도 였다. "미정씨는 어디 가고?" "학교에 일이 있어요. 내일 저녁때나 올 거에요." "저녁은 먹었어요?" 대답 대신 지연은 고개를 저었다. "생각도 없어요. 너무 피곤해서..." 준호가 돌아 가 줬으면 좋겠다고 아니 자신을 꼭 끌어 안고 위로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들 사이에서 지연의 음성은 젖어 들었다. "울고 싶을 땐 울어 야지." 지연의 몸을 돌려 자신의 품안에 가두며 그가 다독 거렸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 고 눈물을 참으려 애썼다. "너무 애써서 참지마. 오늘 하루 운다고 지연이 어머니 뭐라고 안 하실 거야." 그 말에 그녀의 울음이 터졌다. 지연은 그의 셔츠를 부여 잡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너무 많이 아프셔서...그래서...차라리 돌아가시는 것이 편할 거라고...그렇게...생각했는데....그런데..그런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너무 죄스러워요. 난 정말 못된 딸인가봐." 울며 자신의 감정을 털어 놓으며 그렇게 그녀는 어머니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가 속을 드러내며 모든 것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상대가 준호였기에 가능 한 일이었 다. "긴 투병생활은 환자와 환자 보호자 모두를 지치게 하지. 지연씨 만 그런 게 아니야."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니에요, 난 그러면 안됐어요. 모두가 알고 있는 착한 지연이는 그런 생각따윈 안 한다구요. 주위에서 항상 칭찬을 했어요...흑흑흑...착하다고..어른스럽다고...아이 답지 않게 침착하다고...하지만 난 착하지 않았어요...엄마가 아픈 게 싫었어요...내색하진 못했지만...아버지가 없는 것도...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거 정말 싫었어요...두려웠어요...죽고 싶을 만큼 두려웠어요...엄마가 아플 때마다...엄마의 고통을 걱정한 게 아니었어요...그저 정말로 고아가 될 까 봐...혼자 되는 게 무서웠어요....엉엉..." 체면 따위는 던져 버리고 실컷 울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간간이 쏟아 냈다. 그녀의 아픔이 그대로 느껴져 준호는 고통스러웠다. 어린 나이에 가장 아닌 소녀 가장이 되 어야했던 지연의 지난 삶이, 그때 그녀 곁에서 지켜 주지 못했던 미안함에 가슴을 저리며 그역시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나...하나도 안 착한데...나...정말...나쁜 앤데...엄마가 짐스럽다고도 생각했는데...원망도 많이


했는데...사람들이 착하다고 하는 말에 참고 참았어요....아버지가 미웠지만...참았는데...보고 싶어도 참았는데...엄마가 슬퍼할 까봐...또 아프실 까봐...그런데도...돌아 가버리셨어요...참으면...아프더라도...내 곁에 계셔줄 까 봐...착한 아이가 되려고 노력했는데..." 영혼을 흔드는 지연의 울부 짖음에 준호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가 슬퍼 하는 모습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두 번 다시 울지 않도록 보호해 주 고 싶었다. 지금 그가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은 순수한 보호의 감정뿐이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대할 때마다 느껴왔던 남자로서 갖고 싶다는 그 런 욕망은 흔적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오직 그녀를 세상의 모든 더러움과 고통에서 보호 해 주고 싶다는 갈망 뿐이었다. 소유욕! 그가 지금 지연에게 품고 있는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 한다면 소유욕이었다. 그녀를 자신만의 사람으로 보호하고 아껴주고 싶은 소유욕. 그녀와 알고 지낸 짧은 시간을 생각한다면 이런 자신이 스스로도 이상하고 우습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젊은 혈기에 가득찬 철없는 청년도 아닌데. 벌써 서른이나 된 성인인 남자가 일곱살이나 어린 여자에게 이런 집착을 갖다니... 정상이 아니야. 준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스스로에게 되 내였다. "이젠 많이 좋아 졌어요...죄송해요...회장님..." 그의 가슴에서 얼굴을 들어 웅얼 거리며 사과의 말을 늘어 놓는 지연의 얼굴을 부드럽게 닦아 주며 준호는 따뜻한 웃음을 지었다. "회장님이라는 호칭은 듣기 거북한데. 더구나 실컷 울도록 가슴도 빌려준 나한테 너무 하는 군." 농담조로 그녀를 놀리며 그의 손은 지연의 얼굴을 마음껏 만졌다. 울어서 빨갛게 충열된 눈과 코에도 불구 하고 그녀는 아름다웠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감촉을 놓치기 싫었다. 그는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고 볼과 코, 그리고 입술에 이르렀다. 꽃잎처럼 부드러운 입술이 벌어 지며 새하얀 이가 살짝 보였다. 어느새 준호의 심장이 빨라지고 목이 말라왔다. 갑작스런 갈증에 준호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손이 툭하고 그녀에게서 떨어지며 온기도 사라졌다. 그가 지연에게서 몸을 떼었기 때 문이었다. "피곤 할 텐데 그만 자도록 해요." 지연은 그가 자신을 밀어 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방금 전까지 그에게 가깝게 다가갔다고 여겼는데...또다시 그에게 밀쳐 내쳐지는 느낌이 너 무나 고통스러웠다. "회장님도 돌아 가셔야지요." 그의 따뜻한 품에 안겨 맘껏 응석을 부리고 싶은 자신을 억눌렀다. 그가 자신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것은 너무나 싫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이름을 부르도록 해요. 그리고 지연씨 잠든 거 보고 돌아 갈 테니 내 걱정은 하지 말아요." "하...하지만..." "내일 출근해야 할텐데? 어서 방에 들어 가요." 그가 거실에 있는데 어떡해 잠이 든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피곤한 몸은 침대에 눕자 마자 꿈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녀가 잠이 든 후에도 준호는 돌아 가지 않았다. 자신이 그녀의 집에서 밤을 보낼 거란 사


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 미정씨도 집에 돌아 오지 않는데 그녀 혼자 두고 돌아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은 그녀에게 힘든 하루 였고 또 비를 많이 맞아 밤새 아플 수도 있었기에 그는 걱정스 런 마음에 그녀의 곁을 지켰다. 자그마한 침실은 그녀답게 꾸며져 있었다. 그녀만의 향기가 가득한 방안에서 잠든 그녀를 곁에 두고 그는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것은 잔인한 고문임과 동시에 달콤한 행복이기도 했다. 이렇게라도 그녀 곁에서 밤을 보 낼 수 있으니까. 그녀를 지키고 보호해 줄 수 있으니까. 혼자 울고 아파하도록 놔두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의 걱정대로 한밤중에 지연은 열이 올라 헛소리까지 했다. 그는 그녀에게 약을 먹이고 찬 수건으로 열을 식혀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불안을 달래 주었다. 연이야 이제는 네가 다시 나타난다고 해도 네 마음에 보답할 수 없을 것 같구나. 준호는 추억 속의 소녀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는 오늘 밤, 날이 새기 전에 이미 자신의 마음의 열쇠를 지연에게 줘 버렸다. 새벽이 되어 지연의 열도 떨어지고 한결 편안해진 모습으로 잠든 것을 확인한 준호는 아파 트를 나섰다. 아침에 일어나 그가 밤새 함께 있던 것을 확인하고 지연이 당황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또 출근하기 전에 씻고 옷을 갈아 입어야 했다. 깊이 잠든 지연의 입술에 살짝 입맞추며 아쉬움을 달랜 후 그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 왔다. "회장님 돌아오셨어요?" 집안 일을 돌보는 전주댁이 불안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그녀의 곁에서 남편인 박씨도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박씨는 정원사 겸 집안의 잔일을 거들며 부인과 함께 이 저택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의 외조부가 세운 이 집은 식구에 비해 쓸데없이 크기만 했고 그래서 손이 많이 갔다. 낮에는 전주댁을 도와주러 오는 파출부도 두명이나 되었지만 손이 많이 가는 집인 건 틀림 없었다. 외조부의 당부만 아니었으면 진작 이 집을 처분 하고 편한 아파트로 들어 갔을 텐데. "씻고 바로 출근 할 거니 식사 준비해 주세요." 그가 당부를 하고 이층으로 올라 가려 계단으로 걸어 가자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회장님...인호 도련님 어머님께서..." 전주댁의 떨리는 음성에 그제서야 이상한 분위기를 파악한 준호가 몸을 돌렸다. 거실 한 켠의 쇼파에 앉아 있던 여인이 일어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늦었구나." "늦은 게 아니라 이른 거겠죠. 무슨 일입니까?" 준호의 음성은 차디 찼다. 그는 애써 분노를 눌렀다. "어제 저녁에 올라 왔는데...네가 들어 오지 않아서..." 그래서 밤새 쇼파에서 기다렸단 말을 하는 건가. 그럼 내가 감격에 무릎이라도 꿇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준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간 신히 눌렀다. "왜 오셨습니까?" 한기가 느껴질 만큼 냉기가 뚝뚝 떨어 지는 말에 여인의 몸이 움찔 했다. "그게...그러니까..." "그 양반은 알고 있습니까?" 느닷없는 물음에 여인은 슬픈 미소를 지었다. 준호가 그 양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녀의 남편이자 준호의 부친이기도 한 남자였다. 준호는 계모인 자신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낳아준


부친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았다. 두 부자가 남남이 된지도 십년이 되어 갔다. 준호의 모친이 돌아 가신 뒤부터 두 부자는 견원지간처럼 보기만 하면 싸웠고 결국 얼굴을 보지 않게 되었다. "그래...내가 여기 온다고 말씀 드리고 왔어." "바로 출근해야 합니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식사 하면서 듣지요." 몸을 돌려 이층으로 올라온 준호는 옷을 벗어 던지고 찬물로 샤워를 하며 분노로 달구어진 열기를 식혔다. 그는 부친은 물론 그의 아내도 보고 싶지 않았다. 계모 흉내를 내는 모습 조차 역겨웠다. 감히 내 어머니 흉내를 내려 하다니... 준호의 주먹이 욕실 벽을 갈랐다. 그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느껴야 했던 모멸감을 그대로 느끼며 그는 몸을 떨었다. 아버지를 어머니에게서 훔쳐간 여자에게 그가 어떻게 대해야 한단 말인가. 유부남을 꼬셔 한 가정을 무참히 부셔버린 여자를... 그는 옷을 갈아 입고 식당으로 내려 갔다. 열명은 앉아서 먹을 수 있을 만큼 큰 식탁에는 그를 위해 단 한 사람 분의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묵묵히 식사를 마쳤다. 그가 거의 식사를 끝낼 즘 계모가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 왔다. 식사가 끝날 때를 기다린 눈치였다. "계좌로 송금해 드릴 테니 내려 가세요." 물컵을 내려 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맞은 편에 앉으려 의자를 빼던 계모의 몸이 떨리는 것 을 보자 만족감이 몰려 왔다. 자존심 상하신단 말이지. "돈이 필요해서 온 게 아니야." "내게서 돈 말고 원하는 게 있었나요?" 의자를 거칠게 밀며 일어선 준호가 그녀를 노려 보았다. "지난 몇 년 동안 네가 보내 준 돈은 쓰지 않았다. 필요한 돈은 우리가 벌어서 써." "제가 보낸 거 아닙니다. 할아버님께서 보내신 거지요. 전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그분 고집을 꺽을 수 없었을 뿐입니다." "그런...심한 말을...그럼 더욱더 보낸 돈을 쓸 수가 없구나. 당장 돌려 주도록 하마." 계모는 치욕스럽다는 듯 내뱉었다. "깨끗하고 고상한 척 하지 마세요. 당신 이란 여자가 우리 어머니께 한 행동이 어땠는지는 당사자인 내가 잘 아니까요." "준호야...." 그녀의 애절한 부름을 뒤로 하고 식당 문을 나섰다. 식당과 주방을 잇는 복도에 전주댁과 박씨가 불안스레 서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세이치 쥰의 모습도 보이자 준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좀 늦으셨군요." 세이치 쥰은 계모를 향해 비난의 눈초리를 보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준호에게 이야기 하고 있었지만 계모를 향해 그를 괴롭히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을 보내고 있었다. "저녁 때까지 기다리마." 두 사내들의 뒤에 대고 그녀가 다급히 외쳤다. "기다리지 마세요. 그리고 그 양반 기다리실 텐데...그만 내려 가시지요." 준호는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닐 까요?"


회사로 가는 차 안에서 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준호는 집을 나서면서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거 몇일 가는 거 아닐까. 전에도 계모와 이복동생들을 만나면 준호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 졌고 그의 부친을 만났을 때는 폭주하곤 했으므로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친을 만났을 때가 삼년 전이었나. 그때 그는 혼자 차를 몰고 가다 큰 교통 사 고를 냈었다. 죽을 수도 있었던 사고 였지만 몇 군데 부러진 게 다였었기에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더 이상 안 좋은 일이 있겠어?" 이 말을 끝으로 준호는 입을 다물어 버렸고 쥰 역시 침묵을 지켰다. 평소 일곱시 반이면 출근 하던 준호가 그날은 여덟시가 넘어 버렸다. 37 층에서 내리며 지연에 대한 걱정이 떠올랐다. 몸은 괜찮아 졌을까. 출근은 했을까. 그의 기우와는 달리 지연은 밝은 표정으로 책상을 지키고 있었다. 표정 만큼이나 밝고 화사한 원피스 차림이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깨닳는 그였다. 그가 비서실로 들어 서자 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 서며 일제히 인사를 해 왔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고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 갔다. 비서실장이 뒤따라 들어 와 그날의 스케줄에 대해 읊기 시작했다. 그날의 일과에 대해 두 사람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을 때 지연이 쟁반을 들고 들어 왔다. 지연은 테이블에 커피 잔을 늘어 놓았고 준호와 시선이 마주 치자 잠시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다소곳하니 목례를 한 후 나갔다. "한지연씨 약혼자는 행복하겠지요?" 준호와 이민석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놀랐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세이치 쥰은 느긋하게 잔을 입에 가져 다 대며 두 사람에게 왜 그러냐는 시선을 던졌다. 지금 저 세이치 쥰이 말을 했단 말인가. 이민석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말을 하다니...더구나 농담을...그것도 분명히 회장을 약 올리는 말이었다. 언제부터 세이치 쥰이 변하기 시작했지. 이민석은 충격으로 멈춰버린 뇌를 열심히 움직였다. "그렇겠지. 정말 약혼자가 있다면 말이지만." 준호는 쥰의 말에 받은 충격을 누그러뜨리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래, 약혼자가 있다면 그런 슬픔을 혼자 겪게 하진 않을 거야. 그는 어젯밤을 떠올리며 확신을 가졌다. "그럼 회장님은 한지연씨가 약혼했다는 말을 안 믿으신단 말씀입니까?" 쥰은 조금은 화가 난 다는 듯 물었다. 어젯밤 준호가 어디에 있었는지 모른다면 그는 세이치 쥰이 아니리라. 그는 준호가 불장난을 하고 있는 듯 해서 안심이 되지 않았다. 한지연이 준호에게 상처를 입힐 만큼 모진 여자는 아니겠지만, 본의 아니게 약혼자가 있는 여자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가 준호만 다칠 수 있었기에 그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약혼자를 본 적이 없어서 말야." "한지연씨가 입사 한지 얼마나 됐다고 자신 하십니까?" "자신이 아니라 그냥 느낌일 뿐이야. 자넨 좀 과민 반응을 보이는 군." 두 사람의 팽팽한 대화를 멍하니 들으며 이민석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자넨 왜 멍청히 있는 거야?" 쥰의 물음에 그는 멀뚱이 쳐다 보았다. 설마 나한테 한 말은 아니겠지. "지금 아침부터 자는 건가?" 쥰이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자 그제서야 자신에게 한 말임을 알고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


다. "저한테 하는 말씀 입니까?" "그럼 내가 누구한테 말한 다고 생각하나?" "아니...쥰님이 말씀을 하신걸 처음 봐서..." "아, 그 동안 말 안 한 거...쓸데없는 감정에 휩쓸리고 싶지 않아서 말을 삼갔을 뿐이야. 이젠 그나마 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야." 이민석은 쥰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자, 일들 하지." 준호의 한마디에 각자 맡은 바 일을 처리하러 자리에서 일어 섰다. 회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 이민석은 아직도 멍한 표정이었다. "안색이 안 좋으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지연이 걱정스럽게 물어 오자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아니 그게 경호 실장님이 말씀을 하셔서..." "그게 왜요?" 두 여자는 그의 반응을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뭐지. 나만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이민석은 약혼녀에게 지금 상황을 분석해 달라고 부탁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업무적인 일 이외에는 다른 일에는 감이 떨어 지는 편이었고 그래서 은경에게 핀잔을 듣고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연씨 어제 휴가 내고 처리한 일은 잘됐어요?" "네? 네. 덕분에요." "이건 지연씨 선물이야." 곁에 있던 미례가 책상 서랍에서 조그만 봉투를 꺼냈다. "어제 회장님이 주셨어. 우리는 립스틱을 사 주셨더라구. 남자들은 라이터구."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뜯는 지연에게 미례가 설명해 주었다. "어머, 지연씨 색깔이 더 예쁘다." 밝은 핑크빛의 립스틱은 꽤 비싼거였다. "바꿔 드려요?" "아니, 지연씨 피부에나 어울리겠는걸 뭐. 난 지연씨에 비하면 좀 노랗잖아." "언니가 어때서요?" 반문을 하면 소중하게 립스틱을 손으로 감쌌다. 어제 자신을 위로해 주던 준호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훈훈해 졌다. 지연은 어제 준호의 위로로 그 동안 가슴에 쌓아 왔던 슬픔을 털어 버릴 수 있었다. 준호의 모친이 돌아 가신 날 그녀의 작은 어깨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던 이유를 이제는 알 수가 있었다. 그 역시 그녀처럼 위로가 필요했던 것이다. 세상에 혼자 버려 진 게 아니라는 증거가 필요 했으리라. 그리고 실컷 울고 나면 앞을 내다 보고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지연은 더 이상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며 연연하지 안겠다고 결심했다. 밤새 아팠던 기억이 났다. 곁에서 간호해 주던 준호가 있었던 것 같았지만 아침에 한결 개운해진 몸으로 일어 났을 때 그는 없었다. 지연은 자신이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다. 아주 달콤한 환상을. 어쨌든 아침에 일어 났을 때 그녀는 몸 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가볍게 느껴졌고 힘도 생겼 다. 앞으로 준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다 하더라도 실망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사실 어젯밤 자신의 내면을 모두 보이고 난 뒤 지연은 그가 언젠가 자신을 받아 주길 바라 는 희망을 버렸다. 준호 같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고 부족한 것이 없는 남자가 헛점 투성이의 자신 같은 여자를사랑한다는 것은 기적을 바라는 것이었고 그녀의 이기적인 바람이었다. 그녀는 그를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자고 스스로를 설득 했다. 지연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로 결심했고 결코 그에 대한 사랑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준호는 사랑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남자 였으므로.

제 5 장 지연은 당혹스런 시선을 미례에게 건넸다. 미례 역시 당황한 빛이 역역했다. "회장님은 안계신가요?" 눈앞의 오십대 초반 여성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그녀의 옷차림은 깨끗했지만 고급은 아 니었고 오히려 수수하기만 했다. 별다른 장신구도 없이 금반지 하나만 달랑 끼고 있는 것도 이색적이었다. 지연과 미례가 비서실에 근무 한지도 이주가 넘었지만 예약에 없는 낯선 방문객이 찾아 온 것은 처음이었다. 오전에 준호와 쥰, 이민석은 계열사인 한영 전자를 방문하러 나가 사무실에 없었다. "지금 외출 중이십니다. 죄송합니다, 잠시 앉아서 기다리시겠어요?" 어쨌든 상대방은 준호의 계모라고 자신을 소개 했고 회장실이 있는 38 층까지 올라 온 것을 보면 거짓은 아니듯 싶었다. 만약 그녀가 가짜라면 로비에서 제재를 받았을 것이 틀림 없었기에 지연은 자리를 봐주고 차를 준비해 그녀에게 가져 다 주었다. "직원들이 전부 바뀌었나 봐요?" 비치된 잡지를 건네는 지연에게 그녀가 부드럽게 물어 왔다. "네. 근무 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참한 아가씨들이 있으니 좋군요. 전에 ���자 직원들은 무뚝뚝했거든요." 지연은 준호의 계모가 불편했다. 준호가 돌아 가신 모친을 얼마나 사랑 했는지 잘 알고 있었고 부친에 대한 분노를 간간히 터트렸으므로 계모의 존재도 알고 있었다. 아니 그때는 계모가 아니라 첩이었지만. 준호가 어렸을 때 부친은 가출을 했고 모친이 돌아 가실 때까지 별거를 하며 지금의 이 여인과 함께 살았다고 들었다. 배다른 동생도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이름이...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비서실 문이 열리며 준호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의 뒤로 쥰과 민석의 난감한 빛이 가득한 얼굴도 보였다. 준호의 계모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마주 보았다. "네 말대로 대구로 내려 갈려고...그전에 네게 할 말이 있단다." 준호는 그 말을 들어 주기 전까지는 돌아 가지 않을 기미를 읽고 말없이 자신의 방문을 열 고 그녀를 들여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뒤에서 문을 굳게 닫았다. 아무도 들어 오지 말 것을 무언으로 명령한 것이다. 쥰 조차도 따라 들어 가지 않았다. "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 하고 가세요." "인호가 들어 왔다."


그녀는 들고 있던 가방 끈을 쥐어 짜며 말을 내 뱉었다. "인호가요?" 그녀의 말에 준호의 얼굴이 굳어 졌다. 자신보다 세살이 어린 배다른 남동생은 미국에서 꽤 유명한 투자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 로 알고 있다. 그 밑으로 인호 보다 다섯 살 어린 여동생 인혜도 있었다. 인혜 역시 미국에서 공부 하고 있었다. "무슨일 인데요?" "그걸 모르겠구나." "지금 어딨어요?" "모르겠다." "그럼 아시는 게 뭐에요?" 그의 분노에 찬 물음에 계모의 얼굴이 어두워 졌다. "그 애가 다니던 회사에 갑자기 사표를 던지고 사라져 버렸다는 구나. 회사에서 그 애를 찾 으려 난리가 났는데...그 쪽 말이 한국으로 돌아 간다고 했다는 구나." 빌어 먹을...준호는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없어진 자신의 아들을 찾아 달라는 말인가. 천재 동생이 또다시 말썽을 피우기로 작정을 했나 보다. "다시 군대라도 갔나 보죠." 스물 세 살에 박사학위를 딴 천재 동생이 갑자기 사라져 찾아 냈을 때 그는 군대에 자원해 들어가 있었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어차피 한국 남자라면 한번쯤 가야 할 의무 였으므로 놔두었다. 그리고 제대한 인호는 다시 미국으로 갔고 모셔가려고 난리를 치는 회사 중 한곳을 골라 들 어갔다고 들었다. 들리는 소문에 꽤 성공했다고 들었는데...왜 갑자기 사라진 것일 까. "너도 알다시피 인호가 엉뚱하잖니. 그래서 걱정이구나..." "제가 어떻게 해주시길 바라 십니까?" "그 애를 찾아 주었으면 한다." 그 양반도 걱정으로 잠도 못 이루고 있냐고 묻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기적인 인간 들... 계모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가며 사무실을 나가고 나서도 준호는 멍하니 창가에 서있었 다. 사무실 한면을 차지한 넓은 창을 통해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들어 왔다. 그 집 식구들을 만 날 때 마다 느끼는 소외감이 그를 짓눌렀다. "이번엔 무슨 일이랍니까?" 어느새 들어온 쥰이 등뒤에서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인호가 한국에 들어 왔다는 군." 준호는 몸을 돌려 쥰을 마주 보았다. "그 녀석을 찾아봐." 쥰의 입에서 살벌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자식 뒷바라지를 하는 겁니까?" "잊었어? 한영 지분 20%가 그 애 몫이라는 걸?" "차라리 돈을 주고 사 버리세요. 떨궈 내란 말입니다." 그럴 수 있다면 진작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인호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한영 그룹을 세운 사람은 준호의 조부와 외조부였다. 두 분은 서로의 힘을 합쳐 한영을 만들었고 그 와중에 자신들의 자식들을 정략 결혼 시켰


다. 단단한 끈이 필요 했던 두 사람은 사돈을 맺음으로 해서 준호를 얻었고 손자는 그들의 후계자였다. 원치 않던 결혼으로 방황하던 부친은 결혼 전 사귀던 여자를 몰래 만났고 그 여자에게서 자식들도 낳았다. 만약 인호가 학교를 들어 가기 위해 호적이 필요 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그렇게 살았을 지도 몰랐다. 부친은 인호와 인혜를 호적에 올리려 했고 준호의 어머니는 남편에게 숨겨둔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결국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 갔고 인호와 인혜는 조부의 중재로 호적에 올랐다. 하지만 며느리의 눈치를 보던 조부는 돌아 가시는 날까지도인호와 인혜를 손자로 인정하지 않으셨다. 동생들은 모르겠지만 준호는 알고 있었다. 그게 바로 조부만의 사랑 표현이었다는 것을. 자신이 냉정하게 행동함으로써 배다른 동생들은 보호 받았던 것이다. 인호는 거부 했지만 조부는 그 애 앞으로 자신이 소유한 회사 지분을 물려 주었다. 처음에 준호는 배신감에 조부를 원망하기도 했었다. 인호에게 물려준 유산이 아까워서가 아 니었다. -자신이 소유한 지분이 60%를 넘었고 조부의 다른 재산은 모두 준호에게 물려졌다. -다만 조부가 인호를 손자로 인정한 것이 분했던 것이다. 비록 그의 모친이 돌아 가신 뒤 였지만 인호를 인정 한 것은 그의 어머니인 계모의 존재도 인정한다는 것이기에 준호의 분노는 당연했다. 며느리에 대한 죄책감이었을까 조부는 모친의 죽음 일년 뒤 세상을 뜨셨다. "준호야, 난 인호에게 상처를 주었다. 내가 죽은 뒤 그 애를 잘 돌봐주렴. 그 애는 누가 뭐 라 해도 네 친동생이다. 네 외조부에게 미안해서, 네 애미에게 죄스러워서 인호에게 가혹한 짓을 하고 말았구나. 약속해 주려무나. 부디 그 애를 따뜻하게 보살펴 주겠다고..." 마지막 당부를 마치고 며칠동안 혼수 상태에 계셨던 조부는 그대로 눈을 감으셨다. 준호는 끝내 조부의 부탁에 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의 상처가 컸다. "빌어 먹을, 그 망할 영감탱이가 이따위로 날 회유하려 들다니...난 이딴 상속 필요 없으니 댁들이나 가지슈. 구어 먹든 삶아 먹든 상관 안 할 테니." 장례식 후 변호사에게서 유언장 내용을 듣던 인호가 벌떡 일어나 소리 질렀다. "죽어도 손자로 인정 못할 테니...호적에 올려 준 걸로 감지덕지 하라던 그 영감탱이가 이제 와서 뭐라고? 주식을 줘? 개나 가지라고 해." 맞은 편 쇼파에 비스듬히 기대고 느긋하게 있던 준호는 그때 처음으로 자신의 동생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아니 그의 눈빛을 보았다는 것이 맞았다. 그는 상처 입은 짐승 같은 눈빛을 분노로 숨기고 있었다.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겠다는 그를 부친이 강제로 끌고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돈이 싫다는 놈은 뜻밖이었다. 비록 주식에 불과 했지만 한영 주식이었다. 그것도 20%나. 돈으로 환산한다면 천문학적인 숫자였다. 보통 사람은 평생 만져 보지도 못할 금액이었다. 물론 지금 보단 훨씬 적은 금액이었지만. 몇 년 사이 주식 가격이 엄청 올랐던 것이다. 준호가 열심히 노력해서 회사를 이만큼 끌어 올린 덕분이지만. "지금 당장 인호군에게 돌아 가는 것은 아닙니다. 주식 배당금은 매년 지불 받을 수 있지만 주식에 대한 소유권은 인호씨가 스물 여덟이 되어야 상속됩니다. 그리고 만약 주식을 처분하려 한다면반드시 형님에게 매각해야 하며 불응 할 시에는 준호씨에게 상속되게 되있습니다." 인호의 발작에도 불구하고 변호사는 끝까지 말을 마쳤다. 인호는 미친 사람 보듯 변호사를 노려 보았다. 지금 까지 자신이 한 말을 무시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지금 상속권을 거부한다는 내 말을 뭘로 들은 거야? 당신 변호사 맞아?" "말 조심해. 그분은 우리 그룹 고문 변호사로 이십년 넘게 회사에 충성하신 분이다. 네가 함부로 대할 분이 아니야." 장례식 후 처음으로 준호의 입에서 말이 흘러 나왔다. "난 이 더러운 윤씨 집안이나 거지 같은 회사하곤 상관없는 사람이야. 내가 누구를 어떻게 대하든 너한테 싫은 소리 들을 필요 없어."


"말 조심해라, 인호야. 네 형님이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부친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웃기지 말라고 해요. 형은 무슨 형. 저 놈이 나보고 뭐라고 했는지 알잖아요. 저 놈은..." 준호를 노려보던 인호의 눈가가 붉어 진 것 같았다.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지만 인호가 눈물을 흘렸다는 데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갑자기 깊숙이 감춰 두었던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치밀어 올랐다. "저...형...준호형이죠? 저는...인호라고 해요...형을 정말 만나고 싶었어요." 두 사람은 조부가 돌아가시기 삼년 전 인호가 열 다섯, 준호가 열 여덟이었을 때 처음 만났 다. 부친의 농간으로 불려 나간 자리에서 그는 배다른 동생을 만났고 너무도 천진한-순수한 빛 이 가득한-얼굴에 분노가 치밀었다. 이 아이는 자신과는 달리 슬픔이나 고통따윈 모르고 행복하게 자란 평범한 소년이었다. 세 상의 더러움 따윈 모른다는 표정의 인호와 인혜,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전혀 모르고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계모를 보며 그는 치미는 구역질을 참아야 했다. 그의 어머니는 살아있는 시체 같은 표정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모친을 보며 그가 얼마나 괴로워 하고 원망하고 있는 지 아무도 몰랐다. 그는 세상에 태어난 자신이 저주스러웠고 그를 태어나게 한 부모를 증오 했다. "누가 네 형이지? 난 너 같은 사생아 동생 둔 적 없어." 그의 말에 인호, 곁에 있던 인혜, 계모와 부친이 경악하는 것을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드디어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일부분을 그들에게 돌려 준 것이다. 단란한 가정을 자랑하기 위해 자신을 불러 낸 부친에 대한 미움이 인호에게 쏟아 졌다. 나에게 뭘 보여 주려는 것일까. 자신이 선택한 부인과 자식들을 보란 듯이 대동하고 나타나서 뭘 증명하려는 거지. 네 엄마와 너 따위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난 사생아가 아니에요." 인호가 울먹이며 항의 했다. 준호는 파랗게 질린 계모를 노려 보며 말을 받아 쳤다. "네가 윤씨라고 해서 사생아라는 사실이 변하진 않아. 네 엄만 더러운 첩이고 너와 네 동생 은 그 더러운 관계에서 생겨난 사생아야. 추잡하기 짝이 없는...." 짝! 큰 소리와 함께 준호의 얼굴이 돌아갔고 터진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아픔으로 달아 오른 뺨이 욱신 거렸지만 준호는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이 무슨 속셈으로 이런 자리에 날 끌어 냈는지는 모르지만 두 번 다시 이런 짓 하지 마세요. 난, 당신을 부친으로 인정하지 못해. 어줍잖은 부성애를 보이는 것조차 역겨워." 준호의 뺨을 때리고 자신이 한 일에 당혹해 하는 부친에게 야멸차게 쏘아 부치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는 모든 것이 싫었다. 자신과 똑 같은 외모의 부친이나 동생들을 보는 것도 싫었다.그들과 한 핏줄이라는 뚜렷한 증거에 신물이 났었다. 그는 그렇게 인호와 그 가족들에게 상처를 입혔다. 한순간 가슴이 후련해 졌지만 이윽고 어 린 아이와 연약한 여자에게 가한 자신의 잔혹한 말들에 후회가 밀려 들었다. 모친에 대한 복수 였다고 되뇌었지만 죄책감은 가시지 않았다. 그의 마음 한구석은 그들 모두 피해자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과의 만남이후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인호의 이야기를 들은 뒤 죄책감은 더욱 커졌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고 못된 짓만 일삼는 불량아로 변한 인호에게 그가 해 줄 수 있는 것 은 없었다. 모친을 위해서도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싫었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일로 망가지는


인호의 나약함을 비웃으며 애써 외면해 버렸다. 자신을 둘러 싼 끔찍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준호는 조부들의 바람을 이루어 주는 존재로 자라왔다. 학교 생활과 회사 일을 병행 하면서도 그는 수석을 놓쳐 본일이 없었다. 시험공부를 하면서도 회사의 중요한 프로젝트를 완성시켰다. 그는 십대를 모든 일에 완벽한 로봇 같이 보냈다. 그런데 겨우 그만한 일로 인호가 망가졌다는 것은 그에겐 용납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인호의 행동은 철부지 어린애의 투정으로 밖에 안 비쳐 졌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 흘렀고 인호와 그 사이는 걷잡을 수 없게 되 버렸다. 인호는 그를 증오 하고 있었다. 준호가 싫어 하는 만큼 그도 그를 싫어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친의 죽음 이후 힘든 일년을 보냈고 그는 쉬고만 싶었다. 성인이 된 준호는 조금은 여유 있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 보게 되었고 부친과 계모는 용납 이 되지 않았지만 동생들에겐 마음이 쓰였다. 세상에 태어난 것이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었다. 그들이라고 원해서 이런 상황에 이런 부모 밑에 태어 났겠는가. 그가 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동생들도 선택할 수만 있었다면 절대로 태어 나지 않았으리라. 조부의 장례식을 치르며 예전의 순수한 눈빛을 잃어 버린 남동생을 보며 그는 후회하게 되 었다. 그때 그런 말을 하지 말 것을. 자신 안의 악마가 아무리 속삭였어도 무시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한순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다. 순간의 복수는 달콤했지만 긴 시간을 후회하며 보내야 했다. 이제 그는 인호에게 빚을 갚아야 했다. 순진한 소년에게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힌 보상을 기꺼이 치를 준비가 되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을 더욱 원망 하게 될 지라도 바른 길로 이끌 책임이 준호에게는 있었다. 그는 인호를 뒤따라 정원으로 나왔다. 인호는 애꿎은 나무를 발로 차고 있었다. 다가서자 뒤돌아 서서 거칠게 뺨을 닦는 모습을 못 본체 했다. 그의 생각대로 동생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 했다. 자신의 감정조차 다스리지 못하는 철부 지 반항아. "너 유학 가라." 느닷없는 준호의 말에 인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너 정도 머리면 가고 싶은 대학 아무 대나 잡을 수 있을 거다. 돈은 걱정하지 말고." "넌 돈 이야기 빼면 할 말이 없냐?" 확실히 삼년 전의 순진한 소년이 아니었다. 그와 비슷한 키에 체격을 한 건장한 청년 같은 동생은 아직은 어린 티가 역역 했지만 눈빛 만은 달랐다. 상처 입은 호랑이 새끼 같군. "동생으로 인정하진 않지만 네 놈 입에서 너라는 말은 듣기 싫군. 그리고 반말 하는 것도 기분 나빠. 말투 좀 고쳐라." "싫어. 너만 인정 못하는 줄 알아? 나 역시 널 내 형으로 인정 못해. 더러운 사생아가 너 같이 귀한 본실 자식을 황송해서 어떻게 대하냐?" 모친의 죽음 이후 방황하던 그가 처음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인호를 대하고 ���으려니 묵은 감정이 씻겨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부친과 계모에 대한 감정과는 다른 느낌을 인호에게서 받았다. 그래 한 핏줄이라는 느 낌. 그가 그렇게 거부했던 그 끈적한 끈. "어차피 나도 조만간 미국으로 돌아 가야 해. 돌아가서 네가 들어갈 만한 대학을 알아보고


연락 주마. 준비하고 있다가 들어와." "필요 없다고 했잖아. 왜 갑자기 생각해 주는 척 하는 거야? 너...혹시 날 미국으로 ?아 내려고 하는 거 아냐? 맞구나! 왠 인심인가 했어. 그런 꿍꿍이가 있었군. 보기 싫으니까 외국에 나가 살라 이 말이지?" "아이큐 180 은 다르구나. 대단한 추리력인데?" 인호는 준호의 놀리는 말에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준호는 가볍게 피해 버렸고 덤으로 인호 의 복부에 주먹을 꼿아 주었다. 인호의 몸이 고통으로 꺽이는 것을 무심하게 내려다 보았다. "이봐, 애송이. 좋은 말 할 때 들어라. 나중에 후회 하지 말고." "너...설마 우리엄마한테 해꼿이 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놈의 약점은 제 엄마인가 보군. 스스로 약점을 들어 내다니 아직도 내 상대가 되려면 멀 었어, 임마. "너 하는 거 봐서." "너...그렇게 하기만 해봐. 가만 안 둘 거야." "힘도 없는 자식이 큰소리는. 나한테 덤비려면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라. 네게 소중한 것을 지키려면 힘이 있어야 해. 알겠어? 힘 말이야." "좋아 내가 힘을 길러 우리 엄마 결혼 시켜 줄 거야. 그땐 네 놈도 딴 소리 마." "부디 그러렴." 모친이 돌아 가시자 마자 결혼식을 올릴 줄 알았던 두 사람은 아직까지도 법적으론 남남이 었다. 그런다고 해도 두 사람에 대한 미움이 줄어 들진 않았지만. 그는 자신으로 인해 변해 버린 인호에게 책임감을 느꼈고 다시 제자리로 돌려 놓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나서서 그의 유학을 도왔고 비록 한동안 공부하고는 담쌓고 있던 인호 였지만 쉽게 미국 최고의 대학에 들어 갈 수 있었다. 나이가 열여덟이라는 것도 고등학교 중퇴라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이복 동생은 아이큐 180 의 천재 였기 때문에 모두가 군침을 삼키는 존재였다. 그는 몇 년 동안 여러 학문을 공부 했고 몇 갠가 학위도 땄다고 들었다. 그가 특히 재능을 보이는 것은 돈을 버는 것이었다. 형 때문에 돈을 그렇게 증오하던 그가 형을 누르기 위해 돈을 버는 일에 몰두 한다는 것이 너무나 아이러니었다. 기업 사냥꾼. 말이 투자 회사지 거의 헐값에 회사를 사들여 회생시킨후 다시 되파는 일이 전문이었다. 준호는 인호가 평범한 학자로 남기를 바랬지만 인호는 그런 그를 비웃듯 업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제발로 들어 왔으니 찾아 내어 일을 시킬 때가 되었다고 준호는 생각했다. 그에게는 우수한 두뇌가 필요했고 믿고 회사를 맡길만한 사람으로 인호 만한 녀석도 없었 다. 비록 형을 증오하는 동생이었지만. 계모의 방문으로 엉망이 된 하루는 외조부의 병실에서 화려하게 막을 내렸다. 계모가 다녀간 후 얼마 되지 않아 외조부가 그를 찾는 연락을 보냈고 황급히 병원을 방문했 다. 할아버지 병실을 들어 서며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던 지연의 얼굴이 떠나 지를 않았다. 그녀가 동정하는 것은 싫었지만 자신을 걱정해 주는 마음이 고맙기도 했다. 비서실장에게 일러 퇴근을 일찍 시키라고 했지만 자신도 없을 때 그녀가 아플까 봐 걱정이 되었다.


"드디어 우리 손자 놈이 오는군요." 병실 안에 들어선 준호는 낯선 사람들에 조금 당황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몸은 좀 어떠세요?" 그는 제일 먼저 외조부의 건강을 체크 했다. "좋다. 주말에 퇴원해서 제주도 별장에 내려가 있을 란다. 박원장이 내 얼굴 보기 싫다고 빨리 퇴원하라고 재촉하는 구나. 젊고 예쁜 간호사 아가씨 한명 딸려 보내 주겠다고 날 꼬시더구나. 이런 내 정신 좀 봐, 여기 최회장과는 서로 잘 알고 있지?" 조부의 병이야 노환으로 오는 것이 였으므로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하는 편이 나을 지도 모 른다는 병원장의 생각에 그역시 동의 했었다. 그래도 병원에 있으며 집중 치료를 받아서 인지 조부는 입원전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네. 최회장님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우현그룹회장에게 인사를 건 낸 그는 최회장의 옆에 다소곳하니 서있는 여자를 바라 보았 다. 160 이 조금 넘을 듯한 키에 짧은 생머리의 여자는 미인에 속했다. 자그마한 하얀 얼굴은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을 돌아 볼만 했다. 지연에 비하면 태양 앞에 반딧불 같았지만. "그래, 오랜만에 보는군, 윤회장. 아, 여긴 내 딸일세." "이렇게 병문안을 와 주 시다니 감사 드립니다. 윤준호라고 합니다." "평소 할아버님을 존경하고 있었는걸요. 자주 문안 인사 여쭙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여자는 전형적인 한국 여인상 표본같이 말하고 행동했다. 하지만 준호는 왠지 여자가 불편 했다. "연이가 자주 와줘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 단다." "연이?" 준호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순간 혼란스러웠다. 설마... "아, 제 이름을 말씀 드리지 않았네요, 최희연라고 해요. 부모님들은 연이라고 부르시지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눈빛은 당당했다.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잠시 최회장과 할 말이 있으니...연이랑 나가 있겠니?" 외조부의 명령으로 최희연과 함께 병실을 나온 그는 앞장서는 그녀를 따랐다. "이곳 기억 나세요?" 그녀는 병원 앞 공원에 도착해서 발을 멈추며 그를 돌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희열이 떠 올랐다. "설마, 너...연이니?" "네, 오빠. 오빠와 십년 전에 여기서 언약한 그 연이에요." 희연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 보았고 준호는 발 밑이 무너지는 충격에 휩싸였다. 어떻게 해서 외조부와 최회장 그리고 연이와 작별 인사를 하고 병원을 떠났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당황하고 있었다.

요즘처럼 행복하고 편안한 날들이 세이치 쥰에게 있었을까. 쥰은 미례가 차려준 저녁을 그녀와 함께 먹으며 속으로 미소 지었다. 사실 두 사람은 결혼식만 올리지 않았지 부부처럼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먼저 퇴근한 미례가 저녁을 준비하고 뒤이어 돌아온 쥰과 함께 저녁을 먹고 함께 설거지를


했다. 낮에 부하직원의 감독 하에 파출부가 집안일을 해주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식사 후 느긋 하게 TV 를 보거나 독서를 하곤 했다. 물론 그때마다 함께 했고 그는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불만이 있다면 그녀와 함께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이었다. 사실 쥰은 미례를 대할 때마다 욕구 불만에 휩싸였다. 미례 만큼 집착한 여자는 없었다. 그의 성격을 십분 감안해도 이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애당초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질색하던 그였다. 더구나 함께 살다니. 하지만 미례 만은 특별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녀가 쏟아내는 감정을 받는 것조차 행복한 그였다. 그녀의 분노 불안 기쁨 그리고 열정까지 그는 기꺼이 감내 하고 있었다. 세이치 쥰은 철들기 전부터 자신이 타인의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 하는 것을 알아 챘다. 특히 살기나 분노 미움 같은 격렬한 감정들에 민감했다. 사람들의 감정을 읽어 낸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을 읽어 내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 왔다. 그는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 마음에 벽을 쌓고 의식적으로 말을 줄였고 결국 그가 마음을 여 는 사람외에는 입을 다물게 되었다. 미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그녀의 격렬한 감정에 당황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거부하 지 않는 자신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천생연분. 그의 뇌리에 떠오른 단어 였다. 그리고 그녀에 의해 그는 변해가고 있었다. 스스럼 없이 주위 사람들과 어울려 대화하는 그 의 모습에 가장 놀라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었다. "차 드세요." 식후에 차를 준비해 거실로 나온 미례가 잔을 건네고 자신도 마주 앉았다. 그는 그만큼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쓰는 그녀에게 불만스러웠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조만간 당신 부모님께 인사 드리러 가지." 잔을 들어 올리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꺼냈다. "우리 부모님은 왜요?" 불안감이 배어 있는 음성이었다. "결혼 허락 받아야지." "당신 정말 미쳤어요? 난 당신이랑 결혼 안 한다 구요. 몇 번 말해야 알아 들을 거에요?" "첫째 내 정신 상태는 멀쩡해, 미치지 않았으니 걱정 붙들어 매. 둘째 난 당신이랑 결혼 할 거야, 반드시. 셋째 더 이상 당신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을 테니 거부 해도 소용없어." "흥, 도대체 언제 내 의사를 존중해 주었다는 거에요?" "일주일이 넘도록 혼자 침대를 쓰도록 해 주었잖아." 그제서야 미례는 그가 자신과 함께 자겠다고 통보를 했다는 것을 깨닳았다. 눈빛을 보니 장난은 아니듯 했다. 그의 시선을 피하며 미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 다. 그녀는 몸이 흥분하는 것을 느끼며 더욱 당황스러웠다. 지금 그녀의 몸과 마음은 기대감으 로 가득했다. 그런 그녀의 감정을 놓칠 쥰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결정을 강하게 밀고 나갈 작정이었다. "난 당신하고 결혼하지 않을 거에요." 미례는 자신이 듣기에도 힘이 없는 음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나하고 결혼하기 싫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인물 학벌 집안 능력 모두 갖고 있는 난 데 말야. 더구나 난 부자야. 평생 당신이 펑펑 돈을 쓰며 여왕처럼 살아도 처치 곤란할 만큼 갖고 있어. 그리고 제일 중요한 잠자리에서 우린 만족 하잖아. 아니, 만족 이상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당신이 마이다스왕 처럼 돈이 많다고 해도 결혼하기 싫어요. 당신 뿐만 아니라 누구하고도 결혼하지 않을 거에요. 당신이 원 하다면 같이 자줄 수는 있어요. 하지만 결혼이야기는 두 번 다시 꺼내지 말아야 해요." "결혼은 안되고 섹스는 된다?" "그래요" 그녀의 음성은 단호했고 그런 그녀를 보며 웃음을 터트리는 쥰이었다. 미례는 그의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왜 웃지? "지금 당신은 내 아내는 싫고 정부는 되겠다는 거군." 겨우 웃음을 멈춘 쥰은 갑자기 진지하게 미례를 응시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놈이 어떻게 했길래 그러지?" "그놈이라뇨?" "당신 첫 남자! 당신과 사랑을 나눌 때 비록 처녀는 아니었을 지라도 능숙하지도 않았어. 결론은 첫 남자에게 상처 받고 남자들을 증오 하며 살았을 거라는 거지. " 항상 느껴 왔던 거지만 쥰의 직감은 감탄할 정도였다. 심지어 부모님조차 그녀가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모르게 할만큼 행동해 왔던 그녀였다. "웃기지 말아요. 난 다만 독신으로 살고 싶을 뿐이에요." 애써 부정하며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그에게 더 이상 추궁 당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과거를 떠올리기 조차 끔찍했다.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묵은 상처에서 피고름이 흘러 내리는 것만 같았다. 가끔 악몽을 꾸기 조차 했다. 요즘엔 그 주인공이 쥰으로 바뀌어 미칠 지경이었지만. 뭔가 말하려던 쥰은 전화벨 소리에 단념하고 수화기를 들었다. "곧 가겠습니다. 그대로 계세요." 전화를 끊은 그는 수화기를 그대로 들고 버튼을 눌렀다. 부하들에게 미례를 보호 하도록 지시를 내리고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잠시 나갔다 와야 해. 다녀와서 마저 이야기 하지." 그의 말에 안도하는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남자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렇게 싫은 건가. 혹시 아직도 그에게 마음이 남아 있는 것일 까. 그녀의 고통이 그대로 느껴진 그는 내심 걱정되었지만 준호가 기다리는 곳으로 황급히 떠났 다. 쥰이 도착했을 때, 준호는 이미 취해 있었다. 만취한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 방치한다면 곧 그렇게 될 것이 분명했다. 준호의 옆에 앉은 쥰은 바텐더에게 자신의 술도 주문했다. "조부님께 무슨 말씀을 들은 겁니까?" 자신 앞에 놓인 위스키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준호는 그의 질문이 신호라도 되는 듯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 켰다. 쥰은 바텐더가 잔을 채우려 하자 손을 들어 만류했다. "잔 채워." "그만 드세요. 한동안 안 그러시더니 왜 그러세요?" "술이라도 안마시면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아서 그래." "그러니까 털어 놓으세요. 뭣 때문에 혼란스러우신거죠?" 쥰은 그의 심정을 꼬집어 물어 주었다. "병원에서 연이를 만났어."


"연이라면?" "그래, 내가 찾던 그 소녀 말야. 지금은 어엿한 아가씨가 다 되었지만." "바라시던 대로 만났는데 뭐가 문젠 거죠?" "모르겠어. 분명 연이라고 하는 데...느낌이 달라. 전혀...과거 느꼈던 감정을 찾을 수가 없어." 한숨을 내쉬며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준호가 답답한 듯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십년이에요. 더구나 그때 그 소녀는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 했다구요. 회장님은 모친의 죽음에 대한 슬픔으로 제정신이 아닐 때 였으니...좀 특별한 감정을 느꼈겠 지요. 그나저나 그 아가씨는 회장님을 바로 알아 보던가요?" "응. 전부터 날 알고 있었나 봐. 알고 보니 우현그룹 최회장 외동딸이 더라구. 할아버지와도 알고 있는 눈치고. 이름은 최희연이야. 비교적 아름다운 아가씨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쥰에게 설명하며 준호는 아직도 연이를 만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 다. 그렇게 찾아 헤맬 때는 흔적도 없더니...계속 자신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는 그 여자의 말 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 건지. "우현그룹이라구요? 노회장님과 알고 있는 사이라는 말입니까?" 쥰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얼마 전 준호의 결혼에 대해 걱정하던 노회장의 모습이 떠 올랐다. 그 뒤 갑자기 나타난 최희연이라는 여자. 그것도 우현그룹이라는 뒷 배경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뭔가가 있어. 쥰은 본능적인 감각을 최대한 끌어 올리며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만약 최희연이라는 여자가 정말 연이가 맞다면 이제까지 가만히 있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최희연에 대해 조사를 해 봐야 겠다고 생각을 굳혔다. 이름에 연자가 들어 갔다는 이유 만으로 준호의 소녀가 될 수 있다면 대한민국에 수많은 여자들이 그 대상이 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따진다면 한지연도 연자가 들어갔다. 한지연! 마지막 퍼즐을 눈앞에 두고 있는 느낌이 그를 흔들었다. 그녀가 준호를 대하는 느낌이 어땠었지. 이런 젠장. 그는 항상 지연의 옆에 있는 미례에게 먼저 시선이 갔고 당연히 지연에 대해서 는 신경 쓰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준호를 특별하게 대한다는 느낌은 받고 있었다. 아주 ���드러운 시선을 준호에게 보내는 것을 종종 목격하곤 했다. 그래, 만약 노회장의 병실에 나타난 최희연이 연이가 될 수 있다면 한지연 역시 연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쥰은 자신의 생각을 당분간 준호에게 알리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무슨 음모가 있다면 그것을 밝힌 후 그에게 보고할 것이다. 또한 노회장님이 여기에 개입 했을 거라는 의혹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한지연이 연이라면 그녀에게 정말 약혼자가 있는지 그것부터 알아내야 했 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내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거야?" 준호가 딴 생각에 빠진 쥰을 향해 소리쳤다. 그는 짜증을 애써 누르며 쥰 앞에 놓인 술잔을 뺏어 마셔 버렸다. "그건 제겁니다. 그리고 그만 드세요." "술 마실 생각도 없으면서 술은 무슨. 나나 마실 테니 그만 들어 가. 형한테 말한 다고 해결될 것도 없는 데...괜히 불러 내서 미안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만약 의무감 때문에 최희연이란 여자와 결혼 한다면 회장님 아


버님과 다를 바 없잖습니까?" 부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준호는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 놓았다. 그가 가장 닮고 싶지 않은 인물이 바로 아버지였다. 쥰의 그 한마디는 그에게 치명타였다. "잘 생각해 보세요. 결혼은 정말로 사랑하는 여자랑 하는 겁니다. 만약 회장님 아버님께서 부친에 대한 의무감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 했다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그는 계모에게서 태어 났을까. 그리고 부친도 그를 사랑해 주었을까. 인호와 인혜를 아끼는 것처럼 그를 생각해 주셨을까. "그만 들어 가볼게." "모셔 다 들이겠습니다." 쥰 역시 준호를 따라 일어 서며 그를 부축했다. 하지만 준호는 단호히 그의 손을 뿌리치고 혼자 일어 섰다. 지갑을 꺼낸 그는 지페를 꺼내 계산을 하고 비틀거리긴 했으나 넘어지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난, 여기서 택시를 탈 거야. 형은 그만 들어 가봐. 오랫동안 미례씨 혼자 놔두지마. 먼저처럼 도망치면 어쩌려구." "걱정 마세요. 이제는 도망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결혼승낙은 받아 냈어?" "아직...하지만...곧..." "형은 미례씰 사랑해?" 느닷없는 질문에 쥰의 표정이 멍해 졌다. "무슨...?" "형이 나한테 방금 설교 했잖아.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라며...그래야 나 같은 비극은 없다고...형 말이 맞아. 우리 부모님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우셨어. 난 바로 그 실수의 산 증인이고." "스스로를 상처 입히지 마세요. 나이가 얼만데 어리광을 부리십니까? 당신은 한영그룹 총수 이고 바로 저 세이치 쥰의 주군이십니다. 그걸 잊지 마세요." 준호는 쥰을 슬픈 눈빛으로 바라 보았다. 조건 없이 자신 곁에 있어 주는 쥰의 존재에 그가 얼마나 고마워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가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말로 표현 할 수 없었다. 모범택시가 그들 앞에 멈춰 섰고 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준호는 택시에 올라 탔다. "벌써 술이 깨고 있어, 그러니 걱정말고 어서 집으로 가봐. 내일 보자 구." 걱정스런 표정의 쥰을 뒤로 하고 택시는 출발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준호의 외모와 몸에 걸친 양복의 고급스러움을 눈치챈 택시 기사가 정중히 물어왔다. "아, 성북동...아니, xxx 동 xxx 아파트로 가세요." 그는 충동적으로 지연의 집 주소를 불러 주었다. 병원에서 최희연을 만난 뒤로 지연이 얼마 나 보고 싶었는지 비로서 깨달은 그였다. 창 밖의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 보던 그는 택시가 아파트 입구에 멈춰 서자 정신을 차리고 택시에서 내렸다. 그의 뒤로 택시가 떠나고 멍하니 아파트를 올려 다 보았다. 그는 최희연과의 만남을 거부하고 싶은 충동 마저 느꼈다. 아무리 십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지만 그가 연이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이 흔적도 없다는 것이 이상하기만 했다. 지연이라는 존재 때문인가. 지연의 존재를 십분 감안한다 하더라도 십년 동안 그리워 했던 소녀를 만났는데 아무 느낌이 없다니...오히려 그녀에게 발목을 잡힐까 두렵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여보세요?"


"지연씨?" "회장님? 이 시간에 왠 일 이세요? 댁 이세요?" "아니. 그저 지연씨 아픈 데는 없나 하고." "걱정 끼쳐드려 죄송해요. 아픈 데는 없어요. 저...무슨 일 있으세요?" 부드러운 그녀의 음성에 흥분한 신경이 진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잠깐 볼 수 있을 까?" "네? 어디신데요?" "바로 아래." "곧 내려 갈께요." 수화기를 놓고 황급히 내려 오는 지연을 상상할 수 있었다. 정말로 그녀는 금방 내려 왔다. 청바지와 티셔츠 위로 가디건을 걸친 차림에 긴 생머리를 늘어 뜨린 모습이 어린 소녀 같았다. "자려는데 방해 한건 아닌가요?" "네. 아직 잘 시간은 아니에요. 하지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걱정할 만한 일은 없으니 안심해요. 잠깐 산책을 해도 될까요?" "네. 요 앞에 공원이 있어요." 지연이 앞장서 안내했고 준호는 지연의 뒤를 바싹 ?아 뒤를 따랐다. 봄이라지만 늦은 저녁 바람은 겨울 못지 않게 차가웠고 그래서 술이 깨는 것을 느낄 수 있 어 기분이 상쾌 했다. 작은 공원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준호는 걸음을 멈추고 지연의 팔을 잡고 내려다 보았다. 그를 올려 다 보는 그녀의 눈을 보며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바로 거기에 있음을 느꼈다. 그는 최희연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닳았다. 그는 벌써 마음을 빼앗겨 버렸고 그가 사랑을 느낀 상대는 한지연이었다. 하지만 그를 십년 동안 기다려 왔다는 최희연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의무감에 결혼 할 수 있을까. 그의 부친처럼 사랑하는 여자를 따로 놔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 할 수 있을까. 그로 인해 벌어진 비극들을 생생히 지켜본 산 증인인 자신이 그럴 수 있을까. 쥰의 충고가 떠올랐다. 지연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는 특별한 감정을 느껴왔었다. 그녀가 이민석의 안내로 자신의 사무실을 걸어 들어 왔을 때 그는 세상에 단 둘만 남겨 진 것 같은 친밀감을 느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외모에 첫눈에 반해 버렸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젯밤 그녀의 슬픔을 달래 주고 난 뒤 그는 자신의 영혼을 뒤흔드는 지연의 존재에 의해 심장 마저 주고 말았다. "오늘 이상해요, 준호씨." 그녀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흘러 나오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으며 얼굴을 내려 입술을 겹쳤다. 꽃잎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그녀의 입술과 닿자 그는 극심한 목마름에 사로 잡혀 입술을 가르고 혀를 밀어 넣어 그녀를 삼켰다. 달아. 마치 꿀처럼 달았다. 그녀의 혀를 휘감으며 그는 그녀를 자신의 품안에 가두었다. 가슴에 와 닿는 그녀의 부푼 봉우리를 느낄 수 있었다. 입술을 땐 그는 그녀의 귓볼을 깨물다 입술을 미끄러 뜨려 볼을 걸쳐 가늘고 긴 목덜미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녀만의 체취. 그녀의 달콤한 살내음에 그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그 어떤 여자도 지연만큼 그를 흥분 시키지 못했었다. 수없이 많은 영화배우와 가수, 모델들과 염문을 뿌렸던 그였지만 지연만큼 순결한 여자는 처음이었다.


그는 자신과의 키스가 그녀에게 처음이라는데 목숨을 걸 수도 있었다. 그만큼 그녀의 반응은 순수했다. 자신의 품안에서 바르르 떨고 있는 그녀를 느낀 그는 이번에는 좀더 부드럽고 여유 있게 입 을 맞추었다. 자신의 흥분을 달래려 애쓰며 퍼 붇는 가벼운 키스에 지연이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끌어 당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금방 배우는 아가씨군. 다시 한번 짧고 격렬한 키스를 한 후 그녀를 품에 잠시 동안 안고 있었다. 그녀를 자신의 품안에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지연이 자신의 키스를 거부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를 행복하게 했다. 그가 느끼는 감정을 그녀도 갖고 있다고 그는 확신했다. "사과하지 않겠어. 잘못된 행동이란 생각은 안 하니까." 그녀를 품고 있던 팔을 풀어 주며 진지하게 말했다. 술 마신 한 순간의 기분으로 그녀에게 키스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 사이에 특별한 감정이 오간 것을 부정하진 않겠지?" 지연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우리 사이가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일단 사귀고 싶어, 결혼을 전제로." 짧게 숨을 들이 마시는 지연을 보며 불안함을 느꼈다. 혹시 약혼자가 있다고 하면 어쩌지. "재촉하긴 싫지만 지금 대답해 주겠어?" 그의 조급한 질문에도 지연은 고개를 떨구고 대답이 없었다. "혹시...사귀는 사람이라도?" "없어요. 그런 사람 없어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는 지연을 보고 적잖이 안심하는 준호였다. "그럼 내가 싫은 건가?"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왜 그러지?" 그는 초조함을 억누르며 물었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졌다. 지연은 커다란 눈을 들어 준호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눈에 물기가 어린 것 같았다. 이런, 울리려던 것은 아닌데... "지금 회장님은 맑은 정신이 아니세요." 지연의 지적에 잠시 그는 이해할 수가 없어 멍해졌다. "무슨 말이지?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뜻이야?" "그런 뜻이 아니에요. 회장님은 지금 술을 많이 드셨고 그래서 이러시는 거에요." "내가 지금 술주정을 한단 말인가?" 그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쳤다. 술은 진작 깼다. 지연을 만나면서 정신을 차린 그였다. "그렇지 않고 서야, 저와 사귀고 싶다고 하실 이유가 없으니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저같이 헛점 투성이 여잘 진심으로 좋아 하실 이유가 없으니까요." 내심 자신 같은 여자가 나이 많은 당신과 사귈 것 같냐고 반문할 줄로 짐작하던 그는 놀라 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 같은 여자라니? 헛점 투성이라는 소리는 더더욱 못 알아 듣겠군." 그는 손을 뻗어 다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난 이기적이고 질투심 많고 욕심 덩어리에 형편없는 여자에요. 어제 저녁에 다 말씀 드셨 잖아요." 그래서 그를 평생 짝사랑 하기로 결심한 그녀였다. 자신의 본 모습을 본 그가 어떻게 그녀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가 술에 취해 저지른 행동이었지만 지연으로서는 평생동안 간직할 추억이 생긴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당신이란 여자는....정말이지..." 할말을 잊은 준호는 지연을 끌어 당겨 꼭 껴안았다. 너무나 사랑스러워 가슴이 벅차 왔다. "난 당신이 이기적인게 좋아. 천사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증거니까. 또 질투심이 많았으면 좋겠어. 물론 나에 대해서. 그리고 내 사랑을 독차지 하려는 욕심 덩어리였으면 소원이 없겠구." 준호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에 다시금 키스를 퍼부었다. 눈과 코 볼 입술에 이르기 까 지 그는 애정을 담아 격렬하게 입을 맞추었다. "정말 나 같은 여자로도 괜찮아요?"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만큼, 당신을 원해." 지연은 황홀한 행복감에 눈물이 치솟았다. 십년 전 두 사람을 이어주었던 인연이 끊어지지 않고 연결된 것이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도와주신 거라고 지연은 생각했다. "전 회장님께 어울리지 않아요. 너무 보잘 것 없는 걸요." 그는 지연의 눈가에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긴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다시 한번 회장님이라고 부르면 화 낼 거야." "내일이면 후회 하실 거에요." "그럴 일 없어. 하지만 정 당신이 불안하다면 내일 다시 말해 줄 수도 있어. 내 이름 한번만 불러 주면 이대로 돌아 갈게." "준....준호씨." 그녀를 다시 껴안은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지연은 그의 밝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희망을 가져 보았다. 그와 정말로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제 6장 톡! 톡! 사내의 손가락이 책상 위를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의 부하들은 잔뜩 쫄아 있었다. 언제 무슨 일로 불똥이 튈지 몰랐기에 그들은 몸을 사리는 기색이 역역 했다. 오직 그의 오른팔 태호 만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형님 곁에 가까이 서있었다. 사내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추고 들여 다 보고 있던 사진을 들어 올렸다. "이게 어젯밤 찍은 거란 말이지?" "네, 바로 현상해서 보여 드리는 겁니다." 사내는 사진을 얼굴 가까이 가져 다 대었다. 기막힌 미인이었다. 사진으로 이정도 일진대 실제로 본다면 어떨까. 그는 사진 속의 여자에게 흥미를 느꼈다. 마흔이 다되도록 독신을 고집해온 그는 여성편력으로 유명했다. 건장한 체구에 잘생긴 그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기에 어린 여자들을 마음껏 취할 수 있 었다. 물론 이쪽 세계에서 그의 손길을 거부할 여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밝은 저쪽 사회에서도 그 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 중엔 손꼽을 수 있는 집안의 여자들이나 유명 부지기수였다. 그는 매너 좋고 돈을 물쓰듯 했으면 철저한 이중 생활로 사회적 지위도 높았다. 그는 지금까지 여자란 액서사리 정도로 여겨왔다.

연예인도


사실 성적인 욕구만 아니라면 그에게 여자는 귀찮은 존재에 불과 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마음이 끌리는 여자가 생긴 것이다. 다만 좀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누구냐?" "윤회장의 비서입니다." "비서? 윤회장 비서는 전부 남자였잖아?" "신미례를 비서실에 두기 위해 그녀를 연막으로 이용한 것 같습니다." 사내는 사진 속의 여자가 아깝게 여겨졌다. 책상에는 윤준호 그놈과 열렬하게 키스를 나누는 여자의 또 다른 사진도 있었지만 쳐다 보 는 것조차 불쾌해 졌다. 그는 오직 여자의 얼굴을 정면에서 찍은 손에든 사진에만 시선을 고정 시켰다. 그는 아랫도리가 묵직해 지는 것을 오랜만에 느꼈다. 최근엔 마약을 손에 대지 않고는 여자와의 잠자리에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그였다. "둘 사이가 심각한 것 같나?" "수요일에는 여자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기 까지 했습니다. 윤회장의 최근 애인인 것이 분 명합니다.얼마 전 김희진과 헤어진 것도 이 여자 탓인 것 같습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김희진이 잔뜩 벼르고 있답니다." "이름은?" "네? 아, 한지연입니다. 나이는 스물셋. 올해 S 대경영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이랍니다." 미인에다 똑똑하기까지. 그는 점점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알아봐야 겠군." "무슨?" 태호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지만 그는 무시 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사진 속의 여인에게 쏠 려 있었다. 그는 검지로 여자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크게 확대해서 침실에 걸어 둬야 겠다는 생각이 들 었다. 여태껏 그가 원하는 것을 취하지 못한 적은 없었다. 한지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례와 지연이 여자라서가 아니라 그전에 있던 남자 비서들도 별반 다른 일을 하지 못한 것 은 비서실장과 경호실장, 그리고 그들의 회장이 워낙 유능 한 탓이리라. 37 층 회의실에 계열사 사장 단 회의 준비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지연과 미례는 자신들이 커다란 기계 속의 부품에 불과 하다는 현실을 자각했다. 아무리 한국 최고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해도 그녀들이 오늘 한 일은 아침 일찍 출근 해서 회의 자료와 차등 자잘 궂은일들을 처리한 것이 전부였다. 쥰과 민석은 회장의 양 옆에서 회의를 진행 했지만 두 여자는 조용히 비서실에서 대기 해야 했다. "자, 여기 커피. 오늘 일찍 출근하느라 피곤했지? 미례가 잔을 건네며 위로했다. "언니도 마찬가지 잖아요." 두 사람은 일곱시에 출근을 했고 두시간을 뛰어 다녀야 했다. "이렇게 큰 회의 준비는 처음이라 좀 어수선했지?" "그러게 말이에요." 미례와 지연은 서로를 마주 보고 미소 지었다. "지연씨도 사실은 회의실에 있고 싶었지?"


"언니도요? 우리도 아마 한 이삼십년 쯤 열심히 일하면 가능 할지도 몰라요." "아휴, 꿈도 야무지네. 결혼도 안하고 회사 일에만 목 매달겠다구?" "그럴지도요..." 지연은 커피를 마시며 미례의 눈길을 피했다. 만약 준호와 결혼하지 못한다면 그녀는 영원 히 혼자 살 작정이었다.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 볼 수만 있다면 늙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며 회사에 다닐 수도 있었다. 전 화벨 소리에 지연은 미례를 말리고 자신이 수화기를 들었다. "네, 회장실입니다." 상대는 강재민이라는 변호사의 비서라고 자신을 소개 한 후 용건을 간단하게 말했다. "누구야?" "조세현이라는 사람 변호를 맡고 있다는 강재민변호사의 비서인데요, 회장님과 오후에 약속 을 잡아 달라고 부탁하는 데요."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화기를 손으로 막은 지연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 조세현의 이름에 미례의 안색이 창백해 졌지만 이내 평정을 찾았다. 그녀는 회장님의 스케줄을 ?어 보았다. "오늘은 별다른 일정이 잡혀 있지 않으시네. 이따 오후 네시 쯤 방문해 달라고 해." 미례의 말을 상대에게 전하고 수화기를 내려 놓은 지연은 걱정스런 시선을 보냈다. "언니, 안색이 안 좋아요. 강재민 변호사와 아는 사이에요?" "아니, 그가 아니라 조세현과 알아. 얼마 전 까지 그 사람 비서였거든. 조세현에 대해서는 알지?" 지연 역시 입사하고 나서 사내를 시끄럽게 했던 인물에 대해서 들었었다. 공금횡령에 살인 교사. 자신과 상관 없는 일임에도 소름이 끼쳤었다. 그런데 미례가 그 당사자였다니. "왜 미리 말씀하지 않았어요?" "동정 받기 싫었거든." 미례는 갑자기 자신을 끌어 안은 지연의 행동에 당황했다. "이런. 네가 왜 우는 거야?" 그녀가 오히려 지연을 달래야 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언니 무서웠을 거야. 나 같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동하지 못해요. 언니는 정말 강한 사람 인 가봐." "무슨 소리야. 나도 사람인데. 무서웠지. 정말 무서웠어." 그래 만약 쥰이 자신을 구해 주고 보호해 주지 않았다면 죽고 싶을 만큼 무서워했을 것이 다. 다만 또다시 보답 받지 못할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아 오기를 부렸던 것 뿐이다. 이미 늦어 버렸지만. "하지만, 그 사람은 감옥에 있잖아. 재판을 받으면 벌을 받을 거구." 쥰에 대한 사랑을 가슴 한켠으로 밀어 내며 강하게 말했다. 또다시 당하진 않을 거야. 또다시 남자가 자신을 망가뜨리지 못하게 하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또 하는 그녀 였다. 아침 아홉시부터 시작한 회의는 점심 시간에 휴식을 잠시 취하고 오후 세시가 넘어서야 끝 났다. 지연은 강재민의 방문 일정과 그 밖의 일들을 이민석에게 보고 했다. 민석은 곧 회장실로 갔다. "강재민이라구?" 준호는 뜻밖이라는 듯 민석을 보았다.


"그런 사람이 왜 조세현의 변호를 맡았지?" 강재민이라면 무료 변론도 마다 않는 양심적인 변호사로 소문이 났고 나중에 정치판에 뛰어 들기 위한 초석을 까는 중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그가 오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요. 그나 저나 한동안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시끄럽겠지 요?" 쥰의 말에 준호는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한동안 지루하진 않겠지." "하지만, 회장님. 이제 겨우 회사가 안정되기 시작했는데...너무 서두르시는 건 아닌지..." 민석은 자신의 염려를 전했다. 그는 항상 준호의 능력을 믿었지만 오늘 계열사 사장들과 임 원들에게 터트린 준호의 개혁안과 앞으로의 회사 방향은 획기적이었다. "위기는." "곧 기회다." 준호의 말을 쥰이 마무리 지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어제만 하더라도 쥰이 말하는 것에 경악하던 민석이었는데, 어느새 익숙해 졌는지 거부감이 일지 않았다. "그래도..." "걱정은 붙들어 매시지, 민석군. 넌 예나 지금이나 걱정을 달고 사는 구나." 준호와 쥰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민석은 걱정을 잠시 접어 두었다. 지금은 그런 문제 보다 조세현의 변호사가 왜 찾아 오는 건지에 대해 신경 써야 했다. 제아무리 한국 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했다 하더라도 그가 지은 죄에서 도망치지는 못할 것이 다. 다섯시 정각에 도착한 강재민은 회장실로 안내하는 지연에게서 시선을 뗄 줄을 몰랐다. 준호의 기분이 매우 안 좋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굉장한 미인이군요." 짧게 소개를 마치고 지연이 찻잔을 내려 놓고 나가자 대뜸 말하는 강재민이었다. 준호의 시선이 그의 외모를 날카롭게 관찰했다. 나이에 비해 무척 젊어 보이는 것은 강인한 체력 때문이리라. 쥰과 민석 역시 조용히 강재민을 바라 보았다. "그런 말씀을 하시려 여기 온 것은 아닐 텐데요?" 준호의 음성은 차가운 분노가 어려 있었다. 감히 그의 여자를 관심 있게 바라보다니. 그는 지연을 몰래 숨겨 두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물론입니다. 다만 전 제가 조세현의 변호를 맡았다고 회장님께 알려 들이기 위해 찾아 뵙 을 뿐입니다. 조세현씨와는 옛날부터 집안끼리 아는 사이라서요. 사실 그런 사이만 아니라면 쳐다 보고 싶지도 않지만 어쩌겠습 니까?" 그의 장황한 설명에도 세 남자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쥰은 강재민이 내뿜고 있는 살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억지로 참았다. 강재민이라는 남자는 웃고 있는 사람 좋은 표정과는 정반대의 감정을 속으로 감추고 있었 다. 쥰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리에서 그를 만났다면 그가 폭력세계에 몸을 담고 있다고 추측 했 을 정도로 그의 몸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날카로운 눈매에서 차가움이 빛났고 웃고 있는 입매는 비열하게 보였다. 조세현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놈. 처음 준호가 조세현을 높이 평가하고 기회를 줬을 때 오직 쥰만이 반대했었다.


하지만 준호는 그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고 그 결과 끔찍한 일이 일어 날 뻔 했다. 미례가 만약 죽었다면...그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생각을 다시 강재민에게 돌린 쥰은 그의 생각을 읽으려 노력했다. 첫째, 그는 준호를 미워했다. 아니,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감추고 있었다. 둘째, 그는 지연에게 관심이 있었다. 아니 관심을 넘어선 집착을 지연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느꼈다. 그리고 셋째, 그는 뭔가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지 알아 볼 작정이었다. 오늘의 방문이 그냥 단순한 인사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쥰의 생각에 지연 역시 동의 했다. 왜냐하면, 지연 역시 장재민을 처음 본 순간 숨이 막히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의 끈적이는 시선이 자신을 ?는 것을 느끼며 진저리를 쳤었다. 난생 처음 보는 그가 자신에게 보내는 강한 소유의 눈빛이 두렵기까지 했다.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시선의 소유자. "왜 그래? 추워?" 지연의 몸이 가늘게 떠는 것을 보며 미례가 걱정스럽게 물어왔지만 힘없이 고개만 저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비서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등장한 인물에 놀란 미례가 벌떡 일어 났다. "준호 오빠 있어요?" 건방지게 물어오는 여자에게 잠시 짜증이 치밀었지만 애써 참았다. 계모도 나타난 마당에 누이가 찾아 온 것은 아무 일도 아니리라. "회장님은 지금 손님과 말씀 중이 십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미례는 자신보다 작은 체구의 여자에게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다. "무슨 소리에요? 당장 오빠에게 약혼자가 왔다고 전해 주세요." 쿵! 이것은 아마도 지연의 심정이 떨어지는 소리리라. 미례는 조심스럽게 지연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회장의 약혼자 등장에 왜 지연을 신경 쓰는 건지. 현재 두 사람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고 지연 역시 정혼자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오늘 아침만 하더라도 시선이 마주친 두 사람의 눈빛이 이상했으니까. 수줍게 볼을 붉힌 지연을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표정과 삼켜 버릴 듯한 눈으로 바라보 던 회장의 행동에 미례의 가슴이 다 떨렸었다.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잠시 앉아서 기다려 주십시오." 온몸을 돈으로 휘감은 여자에게 자신을 죽이며 부탁하는 일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 다. 한눈에 부잣집 철부지임을 알 수 있었다. 미례로서는 이름 조차 낯선 브랜드로 차려 입고 화려한 보석을 치장한 여자는 건방지기 그지 없었다. "난, 최희연이에요. 우연그룹회장님 딸이죠." 희연은 미례가 아니라 지연에게 말하는 듯 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미례가 아니라 지연을 응 시하고 있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지연의 아름다움은 그녀를 불안하게 했고 공격적으로 만들었다. 미례가 권하는 쇼파에 앉아 차를 가지고 오는 지연을 관찰했다. 순간 희연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녀는 지연을 머리부터 발까지 샅샅이 살펴 보았다. 세상에, 이 여자 정말 비서 맞아.


희연은 지연이 입고 있는 샤넬 투피스와 프라다 구두, 구찌 시계와 마지막으로 그녀의 머리 에 꼿힌 티파니의 보석핀에 경악하고 말았다. 희연 역시 온통 명품으로 치장하고 있었지만 지연처럼 우아하게 품위를 나타내진 못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 누구도 지연이 한재산을 몸에 두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명품에 살고 명품에 죽을 만큼 광인 희연이기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더구나 보석핀은 가격이 너무 비싸 그녀 조차 망설이던 제품이었기에 기억이 났다. 막내딸의 어리광을 받아 주는 부친 조차 난색을 표한 티파니의 신제품. 갑자기 질투심이 치 솟았다. 준호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외모와 배경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었다. 자신은 공주였고 공주는 왕자에게 시집을 가야 했다. 준호라면 그녀에게 딱 맞는 상대였다. 더구나 준호의 외조부인 김회장이 손수 부탁한 일이 아닌가. 그녀가 연이라는 소녀 흉내만 낸다면 한영그룹 안주인 자리는 그녀 것이었다. "어머, 미안해요." 달콤한 사과의 말을 늘어 놓으며 희연은 속으로 웃었다. 그녀는 일부러 잔을 내려 놓는 지연의 손을 쳤다. 커피가 지연의 연노란 투피스를 물들이는 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 보다 도와 주는 척 하며 잔에든 나머지 내용물 마저 지연의 구두에 부어 버렸다. "앗, 뜨거." 짧은 비명과 함께 지연이 펄쩍 뛰었다. 옷에 조금 튀었을 때와는 달리 신발에 들이 붓은 커피는 그녀의 발등을 무척 뜨겁게 적셨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회장실 문이 벌컥 열리며 제일 먼저 준호가 뛰쳐 나왔다. 그는 걱정으로 사색이 되어 지연에게 달려 들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어?" 황급히 신발을 벗겨 상처를 살피던 미례가 준호의 손길에 떠밀려 뒤로 물러 섰다. 준호는 단숨에 지연을 안아 올렸다. "치료를 받아야 겠어." "오빠!" 희연의 부름에 돌아 보는 시선에 의문이 떠올랐다. 순간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연이가 왔는데 못 본체 하기에요?" 그제서야 그녀를 알아본 준호의 얼굴엔 또 다른 당혹감이 떠올랐다. "여긴 어떻게? 아, 어쨌든 병원에 다녀와서 이야기 하자." "다른 남자들 많잖아요. 이 사람들 시키지 않고 오빠가 왜...." 그녀의 외침은 그가 모습을 감춰 버리자 사그러 들었다. 저 여자가 뭐길래...날 찬밥 취급 하다니...용서 못해. 희연의 내부에서 분노가 끓어 올랐다. "누구지?" "최희연씨라고 회장님 약혼자라는 데요." 쥰의 물음에 미례가 친절히 알려 주었다. 순간 남자들의 눈에 각기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저는 그만 돌아 가봐야 겠군요. 회장님께는 대신 인사 말씀 좀 전해 주십시오. 다음에 법정에서 뵙도록 하지요." "강재민씨, 한국 속담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지요. 전 개인적으로 그 속담을 좋아 합니다만, 강변호사님은 그러지 말았으면 싶군요. 강변호사님을 위해서 말입니다." "충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무척 유익한 방문이었습니다. 그럼 안녕히."


강재민은 알고 싶은 것은 다 알았다는 듯 여유 있게 웃으며 사라졌다. 사실 그는 이곳에서 뜻밖의 수확을 얻었다. 윤준호의 약혼녀라는 저 여자. 저 여자가 그에게 도움이 되 줄 것만 같은 강한 예감을 느끼는 그였다. 그는 자신이 지연을 안고 병원으로 가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훗날을 기약하기로 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녀를 자신이 차지 할 것이라고 다짐하며... "형님, 뭐 건진거라도?" 건물을 나서자 세워둔 차에서 내린 태호가 그를 뒷자석에 태우고 차를 출발 시켰다. "당연히 있지. 정말 큰걸 건졌다니까. 하하하" "윤준호의 약점이라도 잡았습니까?" "아니, 그보다 더 큰 거. 그놈의 심장을 찾았거든. 내가 그 심장을 훔쳐내면...그는 내가 시키는 건 뭐든지 할걸. 하지만 절대로 돌려 주지 않을 거야. 내 심장으로 만들 거니까." "왠 심장 타령입니까?" "그런 게 있다, 하하하" 강재민은 정말로 유쾌하게 웃었다.

회사의 삼층에 위치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지연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아무리 내려 달라고 해도 준호는 막무가내 였으며 한술 더 떠 병원이 떠나가라 의사를 찾고 치료를 하는 동안 곁에서 어미 닭처럼 수선을 피웠다. "걱정 마십시오, 회장님. 흉터도 안 남을 겁니다. 몇일 만 물에 닿지 않도록 주의 하세요. 약은 삼일분을 드리고 바르는 약도 드릴 겁니다." 의사의 말에도 몇 번이고 확인하는 준호 때문에 지연은 내일부터 회사를 다닐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벌써부터 열린 문 사이로 치료실 안 상황을 관심 있게 구경하는 다른 의사들과 간호사들, 소문 듣고 달려온 듯한 회사 직원들까지, 모두들 호기심에 찬 시선들이었다. 카리스마 짱 인 그들의 총수가 아이 마냥 의사를 재촉하는 모습을 보게 되다니. 그들은 당장 사무실로 돌아가 소문을 내고 싶어 견딜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치료가 끝났으니 회장실로 돌아가지요, 회장님." 지연은 일부러 사무적으로 말했다. "걸을 수 있어요. 발등을 다친 거지, 발바닥을 다친 건 아니까요." 그녀의 말에 안아 올리려는 준호의 손길을 뿌리치며 차갑게 내뱉었다. 정신이 있는 남자인가. 자신의 약혼녀를 사무실에 두고 내려온 주제에 감히 날 만지러 들어. 지연은 질투심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와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싶다고 말한 게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어떻게 약혼녀를 놔 두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가. 그녀가 준호에 대해 잘못 판단 했나 보다. "여기 병원에서 쓰는 슬리퍼 빌려 드릴께요." 간호사가 잽싸게 지연의 발밑에 슬리퍼를 놓아 주었다. 지연은 왼발의 구두를 벗어 손에 들고 슬리퍼를 신었다. 옷에는 커피자국 투성인데다 붕대로 감아둔 오른발까지 마치 패잔병 같은 몰골이었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그런 행동을 보여서 창피한 거야?" 두 사람만 회장 전용 엘리베이터에 남게 되자 준호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창피하진 않습니다, 회장님." "둘만 있을 때는 이름을 부르기로 했잖아?" "그땐 회장님께서 약혼한 것을 몰랐을 때니까요." 새침하게 말하는 지연의 눈가가 붉어 지는 것을 보며 준호는 미안함이 밀려 들었다. 그리고 방금 전 두 사람 뒤로 수근 거리던 말들이 그의 뇌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거봐, 회장님도 남자라니까. 미인 한 텐 약하시잖아. -그래도 한지연씨는 끄덕도 없는 걸. 정혼자가 있다더니, 사실 인 가봐. -한지연씨 정도면 굉장한 남자가 있을 것 같잖아? -애걔, 그럼 우리 회장님 헛물 켜시는 거야? 대부분 이런 말들이었고 그 말들 때문에 병원을 나오며 기분이 좋지 않았던 그였다. "난 약혼한 적 없는데?" "최희연씨라는 우현그룹 영양께서 직접 말씀 하셨는데요?" 지연은 그를 똑바로 쳐다 보았다. 그가 진실을 말하는 지 알고 싶었다. "연이는 옛날에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동생이야. 어릴 적에 결혼하자고 한 말을 가지고 그 렇게 말했나 본데...난 그애와 결혼할 생각 추호도 없어. 내가 결혼 하고 싶은 상대는 당신 뿐이야." "정말이에요?" "그래, 지금 난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멀쩡한 제정신이야. 다시 한번 말하지. 나랑 사귀겠 어? 결혼을 전제로 말야." "네, 준호씨와 사귀고 싶어요. 할 수 있다면 준호씨 신부가 되고 싶어요." 준호는 엘리베이터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격렬하게 훔쳤다. "그냥, 결혼해 버릴까?" "안, 안돼요. 너무 빨라요." 키스를 멈춘 그의 질문에 지연은 헐떡이며 반대했다. "음. 내 키스가 약했나 보군. 아직도 반대하는 걸 보면." 하며 다시금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이는 준호였다.

이 여자는 탐욕스러웠다. 그랬다. 최희연이라는 여자는 탐욕 그 자체였다. 이런 여자에게 준호를 줄 바에는 차라리 지연의 숨겨둔 정혼자를 찾아내어 없애 버리는 편 이 나을 거라고 쥰은 생각했다. 노회장님이 노망이 나시지 않고 서야 어떻게 이런 여자를 손주며느리로 정하신 건지. 시간이 촉박해 이런 실수를 하신 거라고 애써 노회장을 변명해주는 자신이었다. 그저 연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여자를 찾아 내려 노력하신 결과리라. 행인지 불행인지 마침 우현그룹 최회장의 딸 이름이 맞아 떨어 진 것이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척 보면 알 수 있는 이 여자의 정체를 몰라 보다니. 예전의 김회장이 아니었다. 쥰은 노회장의 실수를 자신이 바로 잡아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 감을 느꼈다. "귀한 손님을 이렇게 경황없이 맞아 죄송합니다. 비서들의 실수를 대신 사과 들이겠습니다. 근무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뭘 모릅니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쥰이 희연을 회장실로 안내하자 미례의 눈에서 살기가 피어 올랐다. 뭐, 귀한 손님? 대신 사과 드려? 이 인간이 살기를 포기 했군. "신미례씨, 차 준비 다시 해 줘요."


문을 닫으며 그가 지시하자 미례의 분노는 폭발해 버렸다. 좋아 소원대로 차에 독약을 타주 지. "미례씨 화나더라도 참아요. 그래도 회장님 약혼녀라는 데..." "눈치가 없으면 조용히 계세요, 비서 실장님." 이를 악물며 쏘아 부친 미례가 탕비실로 사라지자 민석은 억울했다. 그는 그저 위로해 주려고 했는데...요즘 되는 게 없어. 빨리 은경이와 상의를 해야지. "당신, 바보 맞아. 그리고 눈치 없는 것도 맞고. 그러니 조용히 있어요. 난 지금 막 접수한 뜨끈뜨끈한 가십의 진위를 자세히 알아 봐야 하니까. 정리 되면 당신한테도 알려 줄게." 전화로 하소연하는 민석을 매몰차게 뿌리치는 그의 약혼녀 은경이었다. "일 빼면 당신은 어쩜 그렇게 둔해?" 은경의 마지막 결정타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정말 많이 변하셨습니다. 대단한 미인이시네요." 쥰의 미소 띤 상냥한 얼굴을 보며 희연은 불안감을 눌렀다. 이남자는 연이라는 여자를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윤준호의 그림자라 불리는 세이치 쥰을 속일 수만 있다면 한영그룹은 그녀 것이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 남자는 나한테 호감을 갖고 있으니까. "아름답다고 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준호 오빠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저인걸요." 꼬리가 백개는 있는 불여우라고 쥰은 생각했다. "무슨 말씀을 정말 미인 이십니다. 그때가 중 1 이었으니...지금 나이가..." "스물넷이에요. 올해 E 대 가정학과를 졸업했어요. 부모님께서 조신하게 신부 수업을 하시라 고 하셔서 집에서 가사를 배우고 있는 중이구요. 그보다 경호 실장님은 전혀 안 변하셨네요?" "그럴리가요. 벌써 십년인데...저도 이제는 늙었지요, 뭐." 쥰은 자신이 생각해도 어쩜 이렇게 연기를 잘할 수 있는 지 감탄했다. 최희연이라는 이 가증스런 거짓말쟁이는 본적도 없는 그를 자신 있게 아는 척 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가 알기로 준호의 연이는 스물셋이었다. 생일이 1 월로 일곱살에 학교를 들어 갔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나저나 김회장님께서 허황된 기대를 이 여자에게 심어 놓을 셨을 텐데. 어떻게 단념을 시 키지. "우현그룹 영양이신데다,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께 구혼하는 남자가 많았겠는데요?" "전 십년 동안 준호 오빠만 바라보고 살았는걸요. 전 준호 오빠 밖에 없어요. 항상 꿈을 꿔왔죠. 한영그룹 사모님이 되다니...모두들 부러워 할거에요." 자신에게 호의적인 쥰에게 그녀는 속마음을 그대로 들어내 보였다. 멍청한 티를 팍팍 내는 군. "아, 이제 돌아 오셨습니까? 한지연씨는 괜찮나요?" 회장실로 들어 서는 준호를 보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 섰다. 일단 후퇴. 지금은 준호에게 최희연이 가짜라고 알리지 않을 셈이었다. 그가 과연 추억 속의 소녀와 한지연 중 누구를 선택하는 지 한동안 두고 볼 생각이었다. "괜찮아. 기사를 시켜서 집에 데려다 주게 했어. 내일은 토요일 이니 하루 쉬도록 해뒀고." 준호는 설명을 하며 최희연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뜨거운 키스신을 벌인 후 직원들 보기가 부끄럽다며 사무실로 돌아오길 거 부하는 지연을 다시 지하 주차장으로 데리고 내려갔다. 생각 같아서는 자신이 직접 그녀를 데려다 주고 싶었지만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최희연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구겨지고 더러워진 옷차림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걸어 가는 지연이었지만 준호에게는 하늘


에서 내려온 선녀보다 더 예뻐 보였다. 지연을 보내고 돌아온 준호는 미례에게 자초지종을 물어 보았다. 지연은 다치게 된 경위에 대해서 말해 주길 꺼렸기 때문이다. "무슨 일로 찾아와서 내 비서한테 커피를 들이 부은 거냐?" 최희연을 바라보는 준호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회사까지 찾아와 약혼녀 운운한것도 괘씸한데 지연에게 그런 짓을 하다니. 고의성이 있다고 단정짓는 준호였다. 예전의 연이는 이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아니면 그때 당시에는 그런 것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그가 정신이 없었던가. "흑...미안해요, 오빠.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그 비서아가씨를 도와 주려고 잔을 잡다가 그녀의 비싼 샤넬 투피스에 커피를 흘려 당황한 나머지 잔을 엎지른 거에요. 그녀의 샤넬 투피스와 프라다 구두는 제가 변상할게요. 평범한 비서 아가씨가 겨우 장만한 비싼 물건을 망쳐서 정말 미안해요. 흑흑흑...그 아가씨 나한테 화 많이 났죠?" 준호와 쥰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황당한 이야기를 늘어 놓는 이 철없는 여자를 어떻게 해 야 하나. "한지연씨 말론 시장에서 산 옷이래. 그냥 집에서 빨면 된다고 걱정 말라고 전해 달라더라."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명품을 좀 볼 줄 아는데요...한지연씨가 입고 있던 옷 진품 맞아요. 구찌 시계나 티파니 머리핀을 제가 몰라 볼 리 있어요? 더구나 그 머리핀에 박힌 다이아가 얼마 짜린데요. 너무 비싸서 우리 아빠도 못 사게 했는걸요. 난 한지연씨가 그런 물건을 어떻게 갖고 있는 지 정말 궁금해요. 사실 지연씨는 재벌가 영양도 아니고...혹시 돈 많은 정부라도 두고 있다면 몰라도..." "말이 지나 치구나!" 준호의 고함에 움찔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이정도 해 두었으니 한지연이라는 여자를 다 시 보겠지. "이곳에 방문한 용건이나 말하고 돌아가라." 짜증이 잔뜩 배인 음성에 희연은 한발 물러섰다. "내일 할아버님 제주도로 모시는데 저도 따라 갈려구요. 할아버님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고." 그제서야 내일 조부를 퇴원 시켜 제주도 별장에 모시려던 일이 떠올랐다. 정신 없는 하루라 잊어 버리고 말았다. "아니, 이번엔 안 되겠다. 다음에 따로 할아버님을 찾아 뵙도록 하렴." "왜요? 오빠도 갈 거잖아요. 난 오빠랑 같이 가고 싶은데..." "난...난, 안갈거야. 그래, 쥰이 모시고 갈 거야, 그렇지?" "네. 그렇게 하지요." 도움을 청하듯 그를 보는 준호를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단순하기 그지 없다니까. "그럼, 다음에 오빠가 갈 때 나도 데리고 가줘요." "기회가 되면." 준호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만, 가봐라." "그냥요? 이렇게 왔는데...저녁이라도 사주세요." 희연은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자 짜증이 났다. 분명 연이라는 소녀를 잊지 못해 결혼도 안하겠다는 윤준호 맞아? "늦게까지 일 해야 해." 차가운 축객령에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희연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곱게 물러 설수는 없지. 어쨌든 자신은 윤준호의 연이었고 그는 그녀에게 빚이 있가고 들었다.


그렇다면 나를 이렇게 대하면 안되지. "오빠, 난 오빠를 만나서 너무 기쁜데 오빠는 안 그런가봐요. 십년 동안 오빠만 그리워 했는데... 오빠는 연이 생각은 전혀 안 했나봐요. 흑흑흑... 학교를 졸업하고 어엿한 숙녀가 되면 오빠가 다정하게 맞아 줄줄 알았는데..." 희연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달팽이관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추억이나 간직하고 살 것을. 괜히 다시 만나 옛정마저 퇴색하는 느낌이었 다. "나도 널 다시 만나 반가워. 다만 오늘은 바쁜 날이고 정신이 좀 없구나. 다음에 다시 만나자." 그는 하는 수 없이 달래는 방법으로 바꿨다. "참. 한지연씨한테 청구서 보내라고 하세요. 아니면 제가 똑 같은 거 사다 줄까요?" 언제 그랬냐는 듯 울음을 그치고 마지막으로 찔러 보는 희연을 보며 두 남자는 속으로 한숨 을 삼켰다. "그럴 필요 없다. 정 미안하면 나중에 사과나 하려 무나." 준호는 마지막 자제심을 발휘해 희연을 배웅했다. 그녀는 오늘 안으로 사과를 하고 싶다며 지연의 집전화 번호를 끝까지 물어 보다 결국 원하 던 바를 얻고 사라졌다.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추억속의 소녀인데...좀 야박 하셨습니다." 희연이 사라지고 쥰은 슬쩍 준호를 놀렸다. "끔찍하게 변했어. 어떻게 어렸을 때 모습이 전혀 없지? 차라리..." 지연이 추억 속의 연이 성격을 많이 담았다는 말을 삼키는 그였다. "차라리 뭡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그나저나 제가 내일 회장님 모실까요?" "아니, 내가 모시고 가야지." "역시 최희연씨를 피하신 거군요." "그게 어때서?" "아닙니다. 저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퇴근 후 한잔 할까요? 오랜만에 민석이도 데리고..." "아니, 난 따로 약속이 있어." "네, 그러시겠죠." "무슨 뜻이야?" "데이트 잘 하시라고요. 저도 오랜만에 외식이나 해야 겠습니다." "그래, 동거녀 데리고 즐거운 저녁 보내길 바래.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결혼 승낙 받아 낼 수 있을 거야.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준호의 승. 쥰은 이상했다. 왜 항상 마지막에는 그가 지는 걸까. 희연이 지연의 전화번호를 알아가지고 간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준호는 퇴근을 서둘렀다. 병문안을 핑계로 지연을 만나러 갈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녀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 거리고 온몸이 화끈 거리며 열이라도 있는 듯 한 느 낌을 표현 한다면 사랑이리라. 그리고 그녀도 날 사랑 할거야. 혹시... 혹시란 없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처럼 비극적인 사랑은 결코 하고 싶지 않았다.


제 7장

세상에 이런 사기가 있다니. 그래 이건 사기야. 그놈의 노망난 영감이 날 상대로 사기를 친거야. 뭐, 십년 전 만났던 소녀를 못 잊어 결혼을 안하고 있다고? 그런 황당한 거짓말에 속은 자신이 미친년이다. 윤준호의 외조부 말만 듣고 그녀를 꼬신 부친을 따라 노랗게 물들인 파마 머리를 검게 염색 하고 단발로 잘라 스트레이트로 폈다. 어디 그뿐인가 조신하게 행동하느라 온몸에 쥐가 날것만 같았다. 밤이면 같은 부류의 친구들과 나이트를 전전하며 날 새도록 놀던 그녀가 초저녁이면 잠자리 에 들어야 했다. 낮에는 요리강, 꽃꽂이 강습 다도 교습등 별 희안한 것들을 배워야 했다. 그녀가 그 모든 것을 참고 견딘 것은 오직 한영그룹 안주인 자리가 걸린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윤준호 그 자식은 날 비러 먹는 거지 취급을 하는 게 아닌가. 이만한 외모에 이만한 몸매를 만들기 위해 들인 돈이-아니지 노력이- 얼만데 어제 오늘 볼 때마다 똥씹은 표정을 짓는 것인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가만 두지 안을 거야. 기필코 윤준호와 결혼을 해서 한영그룹을 차지하고야 말겠어. 어차피 자신 같은 위치에 있는 여자들은 정략결혼을 한다. -그녀와 친구들은 진작부터 체념 하고 받아 들이고 있었으며그때까지는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즐기겠다고 결심하고 그렇게 행동했다.기왕 정략결혼을 하는거 최고의 위치에 있는 남자와 하고 싶은 것이 그녀들의 욕심이었다. 얼마 전 송수진이 부친은 국회의원에 직업이 검사인 남자와 약혼한다고 얼마나 젠체했는지 눈꼴시려 죽는 줄 알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엉뚱한 제안을 했을 때 덥석 받아 들인 것이다. 그런데...윤준호는 자신을 보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이긴 했다. 귀찮아 죽겠다는 눈치를 팍팍 주는데 어떻게 모르겠는가. 아까 낮에도 그 여우 같은 비서가 다쳤다고 서슬이 퍼래 자신을 닥달하던 모습을 보니 한영 그룹 안주인 자리는 아무래도 물 건너 간 듯 싶었다. "이제 오니? 그래 윤회장은 만나 보고? 내일 같이 제주도 갈거라던?" 집안으로 들어 서자 마자 어머니가 질문을 퍼부어 댔다. "아! 몰라! 짜증나 죽겠어! 나 좀 내버려둬!" 발소리도 요란하게 계단을 밟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와 버렸다. "얌마! 좀 조용히 다녀." 막내오빠 희준이 이층 욕실에서 나오며 잔소리를 해대자 희연의 입은 더욱 튀어 나왔다. "신경질나 죽겠는데 오빠까지 왜그래?" "뭐가 또 네 마음대로 안됐는데?" 희준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인상을 썼다. 그의 막내 여동생은 부모님이 아들 셋을 내리 두고 얻은 외동딸이라 너무 오냐 오냐 키워 버릇이 없었다.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 간다고 생각하는 아이이니 마음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는 신 경질이 대단했다. "몰라, 몰라! 오빤 몰라도 돼!" 그릇 깨지는 소리를 내지른 동생은 자신의 방문을 거칠게 닫고 들어가 버렸다. "쯧쯧...누가 널 데려 갈지...정말 불쌍하다." 희준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며 혀를 찼다. 그에게는 힘든 하루 였다. 외국에서 돈이나 흥청망청 쓰며 즐기는 형들과는 달리 그는 아버지를 도와 회사 일에 열심히 매달렸기 때문이다.


희연은 가방을 침대에 집어 던지며 아는 욕설을 마구 퍼부었다. 그녀의 분노는 아름답던 한 지연에게 향했다. 틀림없이 성형수술 했을 거야. 맞아. 다 뜯어 고친 얼굴일 거라구. 그리고 노는 여자가 틀림 없어. 그 비싼 옷과 백, 구두, 보석들은 남자들 한테 뜯어 낸게 틀림 없을 거야. 윤준호에게 그녀의 진짜 모습을 보여 주면 관심이 싹 식을 걸. 그런데...이상하다...내가 그 여자를 어디서 봤지? 분명 낯설지 않은 얼굴인데... 맞아! 희준오빠 여신! 희준은 느닷없이 자신의 방문이 부서질 듯 열리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버릇없게 허락도 없이 오빠 방에 들어 오는 거야?" 그의 화난 고함 소리에도 불구하고 희연은 멍하니 한곳을 응시한 채 서있었다. 희준은 동생이 바라보고 있는 벽을 똑같이 바라 보았다. 커다란 대형 액자에 그가 가장 사 랑하는 여자의 사진이 담겨 있다. 동생에 대한 분노도 잊은 채 그는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가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 을 느껴본 여인. 그리고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는 여인. "이 여자 누구야?" "갑자기 그건 왜?" "글쎄 좀 말해 줘봐. 이 여자 오빠가 사랑 한다는 그 여자지?" "여자 여자 하지마. 한지연이야. 네가 함부로 부를 여자 아니야." "전에 오빠가 이 여자, 아니 한지연 포기 했다고 했잖아? 그지?" 그놈의 술이 웬수지. 그가 술김에 동생을 붙들고 하소연 한게 화근이었다. "그건 왜?" "그때 이 여자, 아니 한지연 한테 남자 있다고 그랬지?" 철없는 동생이 그의 옛상처를 헤집어 놨다. "시끄러! 빨리 나가!" 희준은 동생에 대한 짜증에 화를 냈다. 오랜만에 일찍 들어와 쉬려고 했더니... "나 오늘 한지연 봤다." "뭐? 어디서? 건강해 보이던? 여전히 아름 답지?" 반색을 하며 질문을 쏟아내는 희준이었다. 형들과는 달리 그는 유학을 가지 않았다. 한국 최고의 대학에서 공부하는 걸로 만족하던 그는 삼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왔다. 형들이 갖은 방법으로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애쓰다 결국엔 미국에 눌러 사는 것을 보고 느 낀 바가 컸기 때문이었다. 제대를 하고 스물여섯에 사학년으로 복학한 그는 처음으로 지연을 만났다. 그가 군대 간 사이 입학한 지연은 그때 당시 삼학년이었고 그때부터 그녀를 ?아 다니기 시 작했다. 비싼 선물 공세도 퍼부어 보고 애원도 해보고 그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어릿광대 짓도 사양 안던 그는 비참하게 실연당하고 말았다. 졸업 후 지연을 다시 만난 그는 부친의 회사에 들어 오라고 권해 보았지만 매몰차게 거절 당했다. 공부를 잘했으니 유학을 갔거나 아니면 대학원에 진학했거나, 그도 아니면 최악의 경우 그 남자랑 결혼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희준은 그녀에 대한 일들을 의식적으로 듣지 않았다. 그가 지연에게 목매던 것을 아는 친구들과 후배들 역시 지연에 대한 이야기를 내뱉지 않으 려고 노력을 했다. 그런 그녀를 여동생이 오늘 봤다고 하는 것이다. 실연의 상처보다 그리움이 먼저 솟구쳤다. "한지연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면 나도 이야기 해 주지." 희연은 꿍꿍이가 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정말..." 그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걸터 앉았다. 자신도 모르게 사이드테이블에 놓인 담배갑을 집 어든 그는 한대 피워 물었다. 그가 태어나 처음 느꼈던 패배감을 되새겨야 하다니. "지연을 정말 목숨 걸고 ?아 다녔었지. 주위에서 임자 있는 여자라고 경고를 해도 내 귀엔 들리지 않았단다. 너도 만나 봐서 알겠지만 천사 같이 순수하고 여신같이 우아하며 아름다운 여자지." 희연은 오빠의 말에 절대로 찬성할 수 없었으나 이야기를 끊지는 않았다. "하루는 지연이 똑 부러지게 말하더구나.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거라고...그래서 내가 그 남자를 한번 보고 싶다고 했지. 다음날 학교 정문에 수억원짜리 외제 스포츠카가 서있는 거야. 차에 기대 있는 주인 남자는 내가 봐도 정말 잘생겼더군. 비록 선글라스로 눈은 보지 못했지만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보이더라. 지연이 달려가서 안기니까 끌어 안고 입을 맞추더구나.난 그런 겉 멋들린 바람둥이에게 지연이 빠져 있는 게 가슴 아파 달려 들었지. 결국 한대도 때리지 못하고 오히려 내가 쓰러 졌단다. 그가 한말이 뭔지 아니? '내 여자 건들지마. 한번만 더 귀찮게 하면 죽여 버릴거야.' 그리고 지연은 뒤도 돌아 보지 않고 그 남자를 따라 차에 타더니 가버리더라. 그길로 난 실연. 죽고 싶을 만큼 비참했지만 이렇게 살아 있지. " "그러니까...한지연한테 킹카 약혼자가 있다는 거네? 기막히게 잘생긴 외모에 수억원짜리 스 포츠카를 몰 정도면 한다는 집 아들일거구. 말하는 거 보니 사내 다운 남자네. 오빠의 구애를 받아 들이지 않을 만하네 뭐." "철저하게 확인 사살을 해주는 구나. 고맙다."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씁쓸하게 내 뱉었다. "너도 빨리 말해." "뭘? 아, 한지연을 어디서 봤냐구? 한영그룹회장 비서실에서." "뭐? 한영그룹? 너하고 혼담이 오가는 데 말야?" "말하자면 그렇지." 조금-많이-찔렸지만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상하네...그녀가 직장 생활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왜? 그 여자 집이 그렇게 대단해?"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나 보석등으로 봐서 한다는 집 딸일지도 몰랐고 그래서 걱정이 되었 다. "아니, 그건 아니고. 내가 알기로 모친과 둘이 산다고 들었거든. 벌써 그 남자랑 결혼했거나 유학갔을줄 알았지." "결혼은 아직 안했나봐. 혹시 알아 그 킹카한테 버림 받았는지 모르지." 윤준호의 품에 안겨 얼굴을 붉히던 가증스런 얼굴이 떠올랐다. 틀림없이 또 다른 킹카를 찾 아 신데렐라 꿈을 실현 시키려는 야심을 갖고 있는 거야. 전에 사귀던 남자도 한지연의 본색을 알아보고 차버렸는지도 몰랐다. 어림없지. 윤준호는 내꺼야. 주먹까지 불끈 쥐고 다짐하는 그녀를 이상하다는 듯 희준이 보았다. "나한테 한지연 전화 번호가 있거든..." "정말! 어서 알려줘." "맨입으론 안되지..." "뭘 원하냐?" 탐욕스런 동생을 너무도 잘아는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티파니에서 내가 봐둔 머리핀!" "뭐라구? 너...그...다...다이다가..." "말은 왜 더듬고 그래. 그래 일캐럿짜리 다이아가 세개 박힌 그 머리핀 말야. 덤으로 사파이아도 좀 많이 박혀 있지."


"아서라, 아서. 내가 무슨 돈이 있다구. 아버님도 안된다고 한 거잖아." "전화번호 필요 없나 보네." "필요 없다. 내일 회사로 찾아가지 뭐. 넌 빨리 내 방에서 나가라." 희준은 침대에 털썩 들어 누우며 말했다. "그런데...어쩌나...한지연씨 내일 출근 못하는 데...아까 커피잔이 엎어 져서 발등을 데었거든. 그래서 준호오빠가 친절하게도 하루 쉬게 해주더라구. 월요일까진 오빠 옛사랑 못만나겠네...더구나 그녀는 지금 아픈데...다쳐서 몸도 불편하고 마음도 편하지 않을 거구...이럴때...누가 곁에서 잘해주면 뽕하고 넘어갈지도 모르는데..." 말을 질질 끌며 희준을 약올리던 희연이 몸을 돌려 방문 앞까지 걸어가자 침대에서 벌떡 일 어나 소리를 질렀다. "사준다 사줘. 사주면 될 것 아냐!" 희준의 절규를 들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연이 다친 것을 보고 미정은 말 그대로 광분했다. 아니 솔직히 그녀가 화가 난 것이 붉게 부어 올라 쓰라린 지연의 발등 상처인지 아니면 못 쓰게 된 옷과 신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미정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아까워라. 한번도 못 입어 봤는데...다음주 미팅 때 입고 갈려고 아끼던 거였는데..." 모르는 사람이 듣는 다면 지연이 버린 옷이 미정의 것이라고 착각 할만한 발언이었다. "네 이모가 사서 보낸 건데 아깝잖아." 지연의 째려보는 눈빛에 찔린 미정이 변명을 늘어 놓았다. "내 옷 대부분은 이모님이 사주신거잖아. " "그래도 봄 신상품인데...구두도 그렇고...아까워." 함께 살아 온 식구 같아서 인지 미정은 지연과 체구가 비슷했다. 지연이 좀더 크고 날씬했 지만. 미정이 지연의 옷을 입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발 사이즈도 같아서 지연의 물건은 곧 내꺼라는 미정만의 방식이 있었다. 그런데...점 찍어 놨던 옷과 신발이 버리게 생겼으니... "미정아," 지연의 무거운 부름에 미정이 움찔했다. "너, 내가 다친 게 중요해 옷이 중요해?" "물론 네가 다친 건 마음이 아파. 그런데...옷과 신발이 못쓰게 된 건...가슴이 찢어 질 만큼 비통해." 말을 마치며 혀를 쏙 내밀고 잽싸게 지연의 방에서 도망치듯 나가버리는 가장 친한 친구였 다. "지연아, 날 원망하지마." "널, 저주할거야!" 지연은 유쾌하게 웃었다. 미정은 항상 지연의 기분을 풀어 주는 재주를 가졌다. 최희연으로 불안했던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오빠의 말을 믿을 것이다. 오빠가 자신과 결혼을 전제로 사귀자고 했으니 믿고 따를 것이다. 지금은 단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인지 모르지만 믿고 기다리면 사랑해 줄거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결혼이란 말은 나왔다. 그러면 된거 아닌가. 우선은 쉬어야 했다. 침대에 누운 지연은 눈을 감았다. '똑똑' 노크소리에 이어 방문이 열리며 미정이 고개를 쏙 밀어 넣었다.


"면회." "면회 거절!" "거절이라는 데 어쩌죠?" 고개를 쏙 빼고 방문 밖에 있는 누군가에게 말하는 미정을 향해 지연이 소리를 질렀다. "최미정! 너 가만 안둘거야!" "어서 들어가 보세요. 비록 지연이가 면회사절이라고 하지만 기꺼이 만나게 해 드릴께요. 이렇게 맛있는 저녁을 들고 오셨는데 어떻게 ?아 내겠어요." "고마워요. 지연씨도 좋아 하는 지 모르겠어요." 매력적인 저음소리에 지연은 신음했다. 이런 망신이. 미정이 장난 치는 줄 알았는데... 지연은 시트를 끌어 올려 얼굴을 숨겼다. "병문안 왔는데...얼굴도 보기 싫은 거야?" 웃음 섞인 농담에 지연은 눈만 빼꼼 내놨다. "어떻게 오셨어요?" "무슨 그런 섭한 말을. 우린 사귀는 사이 아닌가? 당연히 보고 싶어서 찾아왔지. 상처도 궁금하고" 하며 손을 뻗쳐 시트를 치워 버렸다.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켜 침대 머리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준호는 어느새 그녀 곁에 걸터 앉아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런 손길로 발등을 살폈다. "어때?" "조금 욱씬 거리며 아파요. 그래도 참을 만 해요." "큰일 날뻔 했어." 그의 걱정스런 표정에 가슴이 따뜻해져 왔다. 정말 날 아끼는 구나. 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최희연씨는?" 그래도 못내 그 여자가 마음에 걸리던 그녀는 결국 물어 보고 부끄러운 생각에 얼굴을 붉혔 다. "질투하는 거야? 기분 좋은데? 그만큼 지연이가 날 좋아한다는 뜻이잖아." 당신은요? 당신도 절 좋아 하나요? 혹시 질투할 만큼 절 사랑하나요? 정작 묻고 싶은 말들 은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바로 갔어. 지연이 보내고 사무실에 가서 야단 좀 친 다음에 돌려 보냈어." "왜 그랬어요? 희연씨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고의성이 있다고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지연은 황급히 준호를 나무랐다. "미례씨 말하고 틀리는데?" "미례씨는 떨어져 있었잖아요. 자세히 보지 못해서 그럴 거에요." "알았어. 희연이도 미안하다고 직접 사과 하겠대. 전화번호 알아가지고 갔으니까 사과 전화 올거야. 지연이 옷이랑 구두 망가뜨렸다고 변상하겠다더군." "그럴 필요 없어요." "전화 오면 직접 말해줘. 나도 그렇게 말했는데 안듣더라구." "자, 식탁으로 모이세요. 저녁이 준비 됐습니다." "벌써?" 방문을 열고 채근하는 미정을 의구심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식사 당번은 항상 지연이 었고 어쩌다 미정이 할라 치면 몇시간씩 기다리다 타고 간이 안맞는 음식 먹기가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준호의 부축을 받고 주방으로 간 지연은 의문이 풀렸다. 먹음직한 음식들이 접시에 담겨 늘 어져 있었지만 절대 미정의 솜씨가 아니었다. "준호씨-이름 부르는 거 실례아니죠?-가 사가지고 온 거야. 맛있어 보이지?" 그가 빼주는 의자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 요릴 좋아 할지 몰라서 ���정했어요." 준호는 그녀의 옆에 앉으며 계면적은 듯 웃었다. "좋아해요." "좋아해요가 뭐야. 이때까지 먹어본 중국 요리라고는 자장면, 짬뽕이 다면서. 그나 저나 이 거 이름이 뭐에요?" "딤섬이에요, 중국 만두죠." 미정은 음식을 집을 때 마다 이름을 물었고 그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유산슬, 라조기, 깐풍기, 닌자완스, 모듬냉채등 모두 생소한 음식들이었다. 하물며 평소 먹었던 탕수육도 맛이 틀렸다. 그가 이 짧은 시간에 이 모든 음식을 준비시켜 가지고 왔다는 사실에 조금 목이 메어왔다.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이렇게 있는데 무얼 걱정했던 걸까. "팍팍 좀 먹어. 준호씨가 너 때문에 이 많은 음식 사가지고 왔는데..." "많이 먹고 있어." 세사람은 가벼운 담소를 나누며 맛있게 저녁을 먹었고 미정이 차를 준비하는 동안 준호와 지연은 그녀의 방으로 왔다. 그가 베개를 등에 괴어 편하게 앉도록 도와 주었다. "자, 차가 왔습니다." 준호가 대답하기 전에 미정이 쟁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 왔다. "자, 준호씨는 블랙커피. 지연이는 따끈한 코코아. 한잔 마시고 푹 자도록 해. 준호씨 차만 마시고 돌아 가셔야 해요. 지연이 쉬어야 해요. 저래 뵈도 많이 아플거에요. 아참, 내일 쉬도록 해 주신다구요? 지연이 대신 고맙다고 인사드릴께요. 더불어 제가 간호 잘할께요." 혼자서 쉴새없이 하고 싶은 말만 쏟아낸 미정이 물러가고 나자 두사람은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미정씨 말대로 이만 가볼게. 푹 쉬고 빨리 나아야 해. 내일 외할아버지 퇴원해서 제주도 별장에 모실거야. 일요일 오후에나 들여다 보러 올게. 꼼짝 말고 집에서 쉬어." 차를 마시고 난 준호가 따뜻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심해서 다녀 오세요." 지연은 하루하고도 반나절동안이나 그를 못 본다고 하자 서운했지만 애써 참았다. "착한 아이한테 상줘야지." "무슨 상인데요?" 반문하는 지연의 입술에 그의 입술이 내려 앉았다. 애를 태우듯 아랫입술을 빨며 이로 살짝 깨물기만 하자 그녀의 입에서 항의가 새어 나왔다. 준호는 미소 지으며 한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받치고 깊게 음미하기 시작했다. 지금 그녀의 침대에 있다. 이대로 일 저질러 버려. 까짓거 책임지면 되지 뭐. "흠 흠...방해해서 죄송하지만 지연이 약먹을 시간인데요?" 친구가 아니라 웬수얏! 지연은 눈을 질끔 감고 친구를 외면 했다. 원래 준호의 계획은 지연을 데리고 제주도로 가는 거였다. 오늘 그녀에게 말하고 동의를 구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화상부위가 생각만큼 심하지는 않았지만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그였기에 하고 싶은 말을 참았다. 그리고 지연의 성격상 자신이 부탁하면 거절하지 못할 것임을 알기에 아무말 없이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운전석에 앉은 준호는 지연의 핸드백과 구두 한짝이 조수석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미례가 그녀에게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던 일이 떠올랐다. 급히 퇴근하느라 가방을 가지고 가지 않았다며 걱정하던 그녀가 직접 가져다 주겠다고 하던 걸 대신 전해 주겠다고 억지로 빼앗다시피 했던 일이 생각났다. 한손에는 가방 다른 한손에는 구두 한짝을 들고 다시 지연의 집으로 향하며 피식 웃었다.


이거야 원. 신데렐라 찾아 나선 왕자님이 따로 없군. "지연아, 전화. 이리로 가져다 줄까?" "아니, 화장실도 가고 싶어. 나가서 받을게." 지연은 딛을 때 느껴지는 통증을 무시하고 거실로 나왔다. "전화 바꿨습니다." "잘있었냐?" 유쾌한 음성이 흘러 나오자 지연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 올랐다. "오빠? "그래, 나다, 임마. 잘있었냐?" "잘있어요. 이모님이랑 이모부님도 무고 하시죠?" "그렇게 궁금한놈이 전화 한통 없냐?" "정신 없으실텐데...돌아 오시면 뵐 생각이었죠, 뭐." 외사촌 오빠, 정지성이었다. 갑자기 그리움이 밀려 들었다. 어쨌든 지성과 이모내외는 그녀에게 남겨진 가장 가까운 가족이었으니까. "너무 보고 싶다. 언제와?" "곧! 나도 너 보고 싶어 미치겠다. 우리 공주님 그동안 별일 없지? 안그래도 그래서 전화 한거야. 금요일 오후 비행기로 도착 할거니까 집으로 오라시는 어머님 엄명이시다. 아, 잠깐만" "오빤 정말 실없다니까..." 눈물이 나와 손등으로 훔치는 데 준호의 모습이 언뜻 보인 것 같았다. "여보세요, 지연아? 별일 없지? 이모 금요일에 갈거니까 저녁에 청담동으로 와, 알았지? 이모 너 사랑해. 알지?" "네, 알아요. 저도 사랑해요. 금요일에 뵐께요." 수화기를 내려 놓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외로움이 온몸을 감쌌다. 이제 곧 만날텐데, 뭘. 지연은 고개를 흔들며 자신을 달랬다. "어머! 준호씨! 어떻게?"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돌아갔던 그가 현관 앞에 서있었다. "문이 열려 있어서... 가방하고 구두를 전해 주려고." "지연이 전화 끊었니? 너 지성 오빠줄 알고 깜짝 놀랐지? 어, 어떻게?" 설거지를 마친 미정이 씩씩하게 나오다 준호를 보고 놀랬다. "미정이 너 또 문 안잠갔지?" "아이쿠, 내 정신좀 봐. 지연이 가방 가지고 오신거에요?" 호들갑스럽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 미정은 준호에게서 가방과 구두 한짝을 받아 들었다. "번거롭게 다시 오셨네요. 조심해서 돌아 가세요." 부드러운 지연의 말에도 굳어진 준호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이번엔 문 잘잠궈요. 이만 가볼께요. 일요일에 봐요." 약간 잠긴 듯한 음성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걸까. 문을 닫고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불안함을 느꼈다. 나에게 화가 난 걸까. 아니야, 일요일에 보자고 말해 줬는걸. 아무것도 아닐거야. 그냥 피곤해서 그런 느낌을 받은 거라고 애써 생각을 돌렸다. "너, 준호씨랑 무슨 일 있었지?" "무슨 일?" 내심 뜨끔한 지연은 일단 오리발을 내밀었다. "일게 여직원한테 보이는 관심이 아니잖아?" "아, 피곤하다. 나 그만 잘게."


"너, 어딜 도망가. 얘기 마칠 때까진 한 발짝도 못 움직여." "화장실 갈건데...가지 말까?" "가라 가. 화장실 갔다와서 다 불어." 닫히는 화장실 문 앞에서 보초를 서는 미정이었다. 심장이 찢어 질듯한 질투심이 그를 관통했다. 겨우겨우 차에 올라탄 준호는 핸들에 이마를 대었다. 누구 일까. 그녀가 너무 보고 싶어 하고 사랑한다는 오빠가. 그가 알기로 지연은 남자 형제는 켜녕 여자 형제도 없는 무남 독녀에 이제는 고아였다. 그런데...누구 일까. 의문이 그를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그 남자일까. 그녀의 정혼자라는... 아냐, 그럴리가 없어. 분명 지연은 사귀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어. 하지만...만약...그렇다면...어떻게 하지? 응? 넌 어쩔 거냐구, 윤준호? 그녈 포기 할 수 있어? 아니, 절대 포기 못해. 죽어도... 그는 이를 악물었다. 모친의 뒤를 답습하는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왜 아버기 같은 사람과 결혼 했어요?" 병상에 누워 힘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모친을 보고 화가 나 물어 본적이 있었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아버지를 기다리는라 저렇게 밖을 내다 보시는 거라 짐작 하고 있었다. "사랑했으니까." "아버질 사랑했단 말이에요?" 지금까지도 그는 그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고통만 주는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 혼 했다니. "지금도 사랑한단다. 준호야 누군갈 사랑하면 네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생긴단다. 그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지. 설혹 지운다 하더라도 얼룩은 남겠지?" "아버진 어머닐 사랑하지 않잖아요?" 그는 분했다. 어머니만 아버지를 사랑하는게. "내가 잘못한거야. 네 아버지는 잘못이 없단다. 내가 욕심을 부렸어." 모친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네 아버지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단다. 열병 같은 거였지. 그런데 네 아버지는 날 거들떠 보지도 않더구나. 그때 이미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거든. 바로 인호 엄마 말이다. 좀 일으켜 주렴. 앉고 싶구나." 준호는 어머니를 편하게 기대고 앉도록 도와 드렸다. "용납이 안되더구나. 모든 남자들이 내 관심을 받으려고 난린데 날 무시 하다니...더구나 평범한 외모에 배운것도 없고 집안도 가난한 인호 엄마를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말하자 화가 났단다. 기필코 내 남자로 만들어야지 결심하고 네 외할아버지를 졸랐다. 당연히 네 외할아버지는 네 할아버지와 뜻을 같이해 적극적으로 밀어 주었고. 처음엔 기뻤단다. 드디어 내가 그를 차지 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난 네 아버지의 껍질만 차지한 거였어. 알맹이는 인호 엄마가 다 가졌지. 그때...이게 아니다 싶었을 때...그만 뒀어야 했어....하지만...난 인정하기 싫었고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기에 그를 놓아 줄 수가 없었어. 빈 껍질만이라도 내 곁에 있어 주길 바랬어. 내 이기심이 불러온 불행이야. 내가 자초한 일이란다." 모친은 물을 달라고 해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처음에는 네 아버지를 차지한 거만으로 만족하려 했지. 하지만 마음대로 안되더구나. 결혼해서.....널 갖자 마자 의무를 다했다는 듯 내게 손도 대지 않는 네 아버지를 보며 느껴야 했던 그 모멸감이란...점점 외박하는 날이 많아 지면서 그 여자에게 돌아 갔다는 것을 눈치 챘단다. 그래도 무시하고 결혼생활이란 것을 유지하려고 했다. 너를 위해서 자존심도 죽이고 매달려 보기도 했지. 그래, 난 알고 있었단다...인호가 태어나고 인혜가 태어 난 것을...알면서 모른체 했어. 그가 이혼을 요구 했을 때도 모른체 했어. 그는 차마 내게 그 여자에게서 자식을 얻었다고 말할 만큼 모질지 못했으니까...결국 인호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호적에 올려 줬지만...이혼만은 해주지 않았다. 난 죽을때까지 이혼을 해주지 않을 거란다. 그게 바로 내가 네 아버지를 사랑하는 방식이니까..." 흐느끼는 모친의 어깨를 끌어 안고 위로 하며 속으로 맹세 했었다. "억지로 상대의 사랑을 강요해선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대로 안되는 구나. 죽음을 앞두 고도 아직도 네 아버지를 놓아 주고 싶지가 않아. 준호야 넌 부디 행복한 사랑을 하렴. 이 어머처럼 어리석은 사랑은 절대로 하지 말아라. 네가 사랑하고 널 사랑하는 착한 아가씨를 만나 평범한 기쁨을 누리며 그렇게 살며 늙어가는 사랑을 하길...이 어미의 유일한 소원이란다." 그래, 그런 사랑 난 하지 않을 거야. 어머니처럼 불행하게 만드는 사랑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상대가 날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미련 없이 떠날 것이다. 그런 사랑 따윈 내가 버릴 것이다. 깨끗하게 지워 버리고 손 털어 버리면 그만이라고 다짐 했었다. 이런 사랑까지 유전 되는 걸까. 준호는 과거의 회상에서 벗어나려 애쓰면 쓰게 웃었다. 그녀가 거짓말 한걸까. 날 가지고 놀아 본 걸까. 그녀가 그렇게 가벼운 여자일까. 수많은 물음표가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럼 넌 어쩔 건데?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빌어 주며 순순히 물러 날래?-개나 물어 가라고 해. 그럼, 네 모친 처럼 고통 받는 사랑을 할래? 곁에 붙들어 놓다가 끝내 버림 받는 그런 일을 자초하겠단 말야?-난 어머니랑 달라. 어머니는 약하신 분이었지만 난 강해. 절대로 망가지진 않을 거야. 억지로라도 내곁에 붙들어 놓겠어. 기필코 날 사랑하게 만들거야. 왜냐하면...그녀 없이 난 살수가 없으니까. 이미 그녀는 내게 모든 것이 되버렸으니까. 어쩌면 그 남자가 멀리 떠나 있다 돌아 오는 건지도 모른다. 그동안 그녀의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잖아. 그래, 그럴 거야. 지연은 이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여자다. 나와의 열정적인 입맞춤에서 망설임 같은 것은 찾아 보지 못했다. 희망은 있다고 스스로 위안하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서로 간에 느끼는 끌림. 시작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속으로 되내였다. 다음주 금요일에 그 남자와의 만남을 막아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결국, 미정의 호기심을 만족 시켜준 뒤에야 쉴 수가 있었다. 지연이 화장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린 그녀는 끈질기게 고문했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야." "결혼 한단 말야?" 괴성에 가까운 소리. "그게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결혼을 전제로 사귀자는 소리는 결혼할 거라는 거잖아."


미정의 논리에 할말을 잃어 버렸다. "흠...너와 준호씨 인연이 있나 보다. 그 사람이 널 알아 보지 못해도 결국 널 선택했잖아." "말해야 겠지?" "네가 십년전 만난 연이라구?" 지연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언젠가 말해줘야 하겠지만...내가 보기엔 별 상관 없는 문젠거 같아. 그보다 사랑한대?" "무슨?" "널 사랑한다고 고백했냐구?" 철렁! 지연의 가슴이 내려 앉았다. 내내 신경 쓰였던 문제를 꼬집어 미정이 물어 오자 불안 감이 밀려 들었다. "뭐야? 못들었구나." 미정의 얼굴에 실망감이 깃들었다 금방 사라졌다. "걱정마. 쑥스러워서 그랬을 거야. 그래도 명색이 회장님이잖아. 결혼하기로 결정하면 확실 하게 고백할거야. 아, 피곤하다. 그만 자자. 이런, 또 누구야. 이 시간에...여보세요? 네? 맞는데요? 누구시죠? 알것 없다고 하는 사람한테 바꿔 줄 수 없는 데요? 그렇게 나오신다면야...지연아, 최희준이라고 네 대학 선배라는데?" 정신없는 미정의 전화통화를 듣다 느닷없이 수화기가 건네지자 당황하며 받아 들었다. "지연이니? 나 최희준이야." "네, 선배님. 그런데 이시간에 어떻게? 그보다 제 전화 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아, 그게 말야. 음음." 수화기 넘어로 그가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최희연이 내 동생이야." "아, 그렇군요." 그 한마디로 모든 상황이 정리가 되었다. "저, 다친덴 괜찮아?" "네. 괜찮아요. 동생분이 대신 사과 전화 해 달라고 부탁했나 보죠?" 평소 그녀 답지 않게 신랄한 말투가 되었다. 최희연 때문이야. 또한 갑작스런 희준의 전화 때문이기도 하고. 최희준은 여전히 껄끄러운 상대였다. "희연이가? 이런...그애 짓이구나. 미안하게 됐다. 난, 그냥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어서... 보고 싶기도 하고...만나지 오래 되었잖아...잘있는 지 항상 궁금했거든..." "선배! 저 괜찮아요. 잘 지내고 있구요. 그러니 너무 걱정마세요." "그럼 왜 그 남자랑 결혼 안한거야?" 최선배가 고집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조만간 할거에요. 졸업하자 마자 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제 겨우 스물셋이라구요." "그도 그렇지. 그런데...왜 한영그룹에 들어간 거야?" 그는 아직도 ���련을 못 버리고 있는 듯 했다. "당연한거 아니에요? 우리나라 최고 기업이잖아요." "그래...저...한번 만나 주지 않을래? 그때 그 친구가 함께 해도 괜찮아." "시간 한번 낼께요. 그럼 이만 끊어요, 선배. 저 쉬어야 하거든요. 상처도 아프고..." "그럼...내일 내가 병문안 가면 안될까?" 여전히 포기란걸 모르는 남자였다. "손님 받을 만큼 편안하지 못해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만나죠." "미안하다. 그만 끊을게."


아쉬움이 가득 담긴 음성이 사라지자 지연은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그때 그 사람?" "응! 최희연이 선배 동생이래. 그래서 전화번호도 알았대." "참 뻔뻔한 여자네. 자기가 직접 전화하지, 무슨 속샘이야. 지연이 너 정신 바짝 차려. 그 불여우가 준호씨 넘보는 거 같아. 웃기지도 않아. 남매가 어쩜 그렇게 똑같니. 그 선배라는 사람 널 얼마나 귀찮게 ?아 다녔어. 결국 지성오빠까지 출동해서 떨궈 냈잖아. 보다 보다 그렇게 질긴 사람 처음 봤다니까. 그래도 그때 지성 오빠 참 멋졌지? '내여자 건들지마. 한번만 더 귀찮게 하면 죽여 버리꺼야.' 꺅! 그때 얼마나 멋졌는데...여자애들 사이에서 한동안 유행어가 됐잖아. 아, 지성 오빠가 나한테도 그런 말 해줬으면..." "너, 정말. 오빤 배우야. 무슨 역이든 소화한다구. 그런 오빨 보구 좋아 하면 어떻해? 오빤 단점도 많구...하여튼 보는게 다는 아니야." "됐네요, 이사람아. 난 꿈이나 꾸러 갈거야. 지성오빠가 데이트해주는 꿈!" 뽀로통하니 쏘아 부친 미정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네가 상처 받을 까봐 그래. 넌 내 제일 소중한 친구니까..." 그녀는 조용히 속삭였다. 지연이 준호오빠에 대한 환상으로 지낸 십년동안 미정이 그녀를 걱정해 왔듯이 지성오빠에 대한 미정의 동경을 마찬가지로 걱정해 왔었다. 몇번 지연 때문에 지성을 만날 기회가 있었었고 그때마다 오빠는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답 게 미정을 다정하게 대해주었기에 꿈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연은 오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오빠는 좀 엉뚱한 면이 있어서 정말로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을 짖궂게 대하고 화를 돋구기 일쑤였다. 포장된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반발심 일수도 있었다. 우리들의 왕자님이라는 타이틀은 명예로운 것일 수도 있었지만 개인인 지성에게는 거추장스 러울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난 말야 지연아. 영원히 사랑따윈 못할 것 같아." 언젠가 심각하게 털어 놓던 지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 팬들한테 맞아 죽을 것 같아서?" 지연은 괜히 농담으로 받아 넘겼다. 자신마저 심각해지면 안 될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사랑하다 맞아 죽고 싶진 않거든." 거기서 오빠의 개인적인 고백도 끝났다. 오빠 역시 농담으로 웃어 넘겨 버렸으니까. 너무 완벽한건 좋은게 아니야. 지성은 그렇게 말하려 했을 것이다. 본인이 특별하기에, 너무나 차고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자라 왔기에 권태감을 느끼고 있었다. 한계에 다다른 것일 수도 있었다. 터지기 일보 직전에 헐리우드에 진출한것이 하나의 도전이 되어 그를 살려 주었지만...거기서도 더 이상 만족감을 찾지 못한다면...위험해. 지성의 신경은 터지기 일보 직전의 시한폭탄 같았다. 그래서 넌 안돼, 미정아. 넌 오빨 감당 할 수 없어. 지성 오빠를 감당하려면 보통 여자로는 안돼. 오빠는 폭풍이거든. 넌 폭풍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수 있어. 오빠에게는 폭풍을 잠재울 여자가 필요해. 너에게도 너만의 사랑이 찾아 올거야. 그러니까 조급해 하지 말고 기다려, 응? 미정아.

폭풍전야 같군.


미례가 차려준 저녁을 먹고 끓여준 녹차를 마시고 인호를 찾도록 지시한 부하들이 올린 보 고서를 읽으며 그녀 몰래 눈치를 보는 쥰이었다. 그녀는 지금 몹시 기분이 좋지 않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그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는 쥰은 일부러 모른체 서류만 열심히 들여다 보았다. 벌써 다 읽어 버린 서류였지만. "얘기좀 하죠. 그 망할 서류 빼앗아 불질러 버리기 전에." 드디어 폭발했다. 쥰은 몸을 사리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무슨 이야기?" 다행히 시큰둥한 목소리가 잘 나와 주었다. 설마 내가 쫄아 있는 것을 눈치 채진 못했겠지? 아아 인간 세이치 쥰이 어쩌다 이렇게 여자 눈치나 보는 신세로 전락했는지... "당신이 오늘 회사에서 그 버르장머리 없고 싸가지 없는 싸구려 계집애 때문에 날 무시하던 이야기." "그래서?" 콩닥콩닥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별거 가지고 사람을 귀찮게 하냐는 투로 물었다. 미례의 관자놀이와 목에 힘줄이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성질머리하고는...타고 났다니까. "그래서? 난 그런 대접 받고 못살아!" "못살면? 거긴 당신 직장이고 당신은 엄연히 한영그룹 회장의 비서라는 신분이야. 당연히 당신이 할일을 한건데? 싫으면 때려쳐. 설마 내가 당신 굶기기야 하겠어? 용돈은 달라는 대로 줄게." 저녁내내 궁리했던 답변이 술술 잘 나와 주었다. 자식, 아직 녹슬지 않았군. "지...지금....뭐라고...뭐라고 지껄인 거야?" 얼굴이 새빨개진 미례가 흥분으로 말을 더듬으며 그대로 퉁겨져 일어났다. "말그대로야. 어차피 당신은 나랑 결혼은 죽어도 안한다며? 대신 몸은 제공할 수 있고...한 남자의 정부란 위치가 말야...당신 생각만큼 고급스럽지가 못해서 대접 받기는 힘들지. 하지만 어쩌겠어. 당신이 사서 원한 자린데. 좀 치욕스럽긴 하지만 지금부터 적응해 보도록 노력해봐." "죽여버릴꺼야!" 테이블을 뛰어 넘어 그를 향해 두손을 날렸다. "벌써 잠자리에 들고 싶은 거야?" 여유있게 두손을 잡아채며 끌어 당겨 품에 가둬버렸다. "이거 놔! 나쁜 자식! 진작 네놈 야비한거 알아 봤어. 당장 놔!" "싫은데? 자진해서 품에 날아든 새를 놓아 줄리 없잖아?" 그녀를 번쩍 안아든 그는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여자 입 다물게 하는 대는 이게 최고지. 앙탈을 부리는 미례의 입을 자신의 입술로 덮으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 쥰이었다. "우리 어제밤 하려던 일이나 시작해 볼까?"

제 8장 어제만 해도 날아갈 것 처럼 굴더니...이상했다. 준호의 심각한 표정을 대하며 쥰은 그의 감정 상태를 파악하려 애썼다. 그는 매우 초조한 것 같았다. 뭐에 대해서? 또한 누군가를 향한 분노도 느낄 수 있었다. 호텔 중식당 수석 요리사를 닥달해 초스피드로 요리를 해가지고 지연에게 달려 가더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걸까. 설마 진짜 정혼자가 나타난 것은 아니겠지. 아닐거다.


만약 그렇다면 당장 전화해서 그놈에 대해서 알아 보라고 닥달했을 거니까. 인호 찾느라 바빠 죽겠는 부하들에게 지연의 뒷조사를 시켜야 할 것 같아 입맛이 썼다. 특별한 일 아니면 타인의 사생활을 캐내고 싶지 않은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럼 인호의 흔적을 전혀 찾지 못했단 말야?" 준호의 짜증섞인 음성에 생각에서 벗어났다. "입국한 것은 확인이 됐습니다. 서울 시내 호텔을 샅샅이 수소문 했지만 체크인 한 흔적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방향에서 찾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애 소유로 집은 없던가?" "네, 전혀 없었습니다." "우선 전국의 호텔을 전부 알아봐. 워낙 엉뚱한 놈이니 관광을 다니고 있는 지도 모르지. 또, 서울에 있는 오피스텔도 뒤져보고. 아무래도 임시로 집을 구하기는 그쪽이 빠를 테니까..." "즉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이거야 원.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도 아니고..." "회장님, 3 번으로 인호어머님께서 전화 하셨습니다." 인터폰으로 미례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군. 준호와 쥰의 시선이 마주쳤다. "전화 바꿨습니다." "저...준호야..." "말씀하세요!" 계모의 음성에 참았던 짜증이 왈칵 치솟았다. "도대체 이번엔 무슨 일로 전화를 하신 겁니까? 댁 아드님은 열심히 찾고 있으니 조만간 연 락드릴겁니다. 제발 조용히 기다리세요!" 결국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인호때문이 아니라..." 기어들어가는 음성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은...인혜가..." "이번엔 인혭니까? 그애가 왜요? 돈이 필요하다고 하나요?" "넌 돈 이야기 빼면 말이 안되는 아이구나." "누가 당신 아이랍니까? 받아 준다고 막 대하시는 군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흐느낌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이런 젠장. "인혜가 왜요? 말씀하세요." 간신히 화를 누르고 조용히 채근했다. "연락이 되지 않는구나." 그리고 또 흐느낌. 도대체 이들 남매는 왜 그를 가만 두지 않는걸까. "언제부터요?" 체념한 준호는 덤덤하게 물었다. "지난달 연락을 받은 후로...가끔 한달 넘게 연락 안할때도 있기 때문에 별 걱정 안했는데..." "그런데요?" "어제 전화했더니...평소에는 자동 응답기가 받는데...이번엔 왠 아가씨가 전화를 받더니...자기도 인혜 본지 오래 됐다고...그애 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건 아닐까?" 파르르 떨리는 울음 섞인 음성. 준호는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 재떨이를 찾아 담배를 물었 다. 쥰이 잽싸게 라이터를 켜 불을 붙여 준다. 담배를 가슴 깊이 들이 마시며 신경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인혜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제가 사준걸로 기억하는데요? 언제부터 다른 사람에게 임대 했


답니까?" "그게 룸메이트라고 하더구나." "알았어요. 알아보죠. 그만 끊습니다." 딸각! 미련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인혜도 없어 졌답니까?" "도대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뭐하는 짓이지?" "한창 말썽 많을 때니까요." "어디서 뉴욕 아편쟁이라도 사귄거 아냐?" "설마 그럴리가요. 인혜는 착하고 바른 아이아닙니까?" "그렇지." 그래서 그가 인혜에게만은 특별하게 대했다.- 특별이라고 해봐야 계모와 인호를 대하는 태 도보다는 부드러운 정도였지만.- 윤씨 집안에서 제대로 된 사람은 그애 하나 뿐이라고 생각했는데...설마 이렇게 속을 썩일 줄이야. 왜 하필 지금이냐. 네 오빠도 없어진 지금. "아무래도 뉴욕지사 사람들을 시켜 알아 봐야 겠지요?" 쥰이 걱정스럽게 의견을 내놓았지만 그는 생각에 잠겨 담뱃재가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 다. 쥰이 그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재떨이에 비벼 끌때에야 그를 바라 보았다. "다음주에 뉴욕으로 출장가도록 준비해줘. 수요일 쯤이 좋겠군." "갑자기 뉴욕은 왜요?" 엉뚱한 준호의 말에 그는 인상을 썼다. 요즘 들어 준호의 생각을 전혀 따라 잡지 못하고 있 었다. "어차피 다음달 초에 가려던거 당기려고. 간 김에 인혜도 찾아 보고. 직접 만나 무슨 일인지 알아 봐야지. 틀림없이 남자 문제일 거야. 괜히 유학 보냈나봐." 인호가 가까이 있는 곳이 편하다고 우겨서 뉴욕으로 보내 줬더니 그 자식은 동생도 안챙기 고 어디로 사라진거야. 찾아 내기만 하면 가만 두지 않겠어. "알았습니다. 그럼 회장님과 제가 다녀 오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형이랑 간데?" 정색을 하고 묻는 폼이 이번에도 집이나 지키게 할 모양이었다. "그럼 민석이를 준비 시킬까요? 아니면..." "됐어. 결혼이 한달 조금 남은 사람을 데리고 출장은 무슨 출장. 한지연씨랑 같이 갈거야." "네에?" 이건 또 뭔소린가. 여기서 한지연이 왜 나오지. 최희연의 등장으로 뭔가 변수가 생긴건가. "호텔예약이랑 지사에 연락하고 제이슨사에도 알려줘. 제이슨회장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거 니까. 칼의 병세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 보고." "이유가 뭡니까?" 다분히 신랄한 어조로 쥰이 묻자 차가움이 깃든-아니 분노인가-시선이 돌아 왔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대로 준비나 해줘." 감정을 배제한 음성은 더 이상 의문을 제기 하지 못하게 했다. 경험상 이럴땐 몸을 사리는게 상책이다. 여기서 더 추궁하다가는 불똥이 튈수도 있었다. 다른 방법으로 알아 봐야 겠군. "돌아 오시는 건 언제쯤으로?" "일요일쯤으로 하지. 바로 병원으로 갈 테니 월요일에 처리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급한건 알아서 해. 내일 오후에나 돌아 올 생각이야." "네, 알겠습니다." 준호가 병원에 도착하니 외조부의 개인비서가 벌써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삼십년째 외조부를 모시고 있는 그는 준호가 회장으로 취임하자 비서실장직을 내놓고 개인비서를 자청했을 만큼 충직했다. 부인과는 사별하고 딸만 하나 있다고 했던가. "김비서님이 할아버님과 함께 계셔 준다니 안심입니다."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김비서도 달리 할일이 없으니 날 따라 다니는 건데 뭘 고마워해." 퉁명스런 말투였지만 준호와 김비서는 마주보고 웃었다. 육십이 가까운 그의 얼굴은 항상 온화하고 따뜻한 눈빛으로 준호를 대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부정을 느껴왔는 지도 몰랐다. "아, 멀미나. 어여 앞이나 봐." 조수석에서 뒤돌아 보며 가는 김비서를 걱정하는 외조부를 보며 또다시 웃음을 삼켰다. 어쩌면 김비서 아저씨는 할아버지에게 아들이나 다름 없는 존재인지도 몰랐다. 두 사람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준호와 쥰과 같을 것이다. 문득 쥰에게 화풀이를 했던 일이 떠올라 죄책감이 들었다. 요즘들어 그나 쥰이나 평상시와 다른 것은 사실이었다. 지연과 미례가 그들의 인생에 끼어 들기 시작하면서 하루도 평온한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쥰이 먼저 지연의 집에 병문안을 가자고 제의했을 때 미례는 당연히 놀랐다. 지연에게 유난히 부드럽게 구는 그였지만 사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고는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연씨한테는 왜요?" 당연히 물어 보는 음성에 가시가 돋히는 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당신이 가고 싶어 하는 것 갔길래." 주말 오후라 시내는 교통이 혼잡했고 그는 운전에 신경을 쓰며 짧게 대꾸했다. "지금 내가 가고 싶어 할 거라고 미리 짐작해서 가자고 하는 거란 말을 믿으란 거에요?" "응." 갑자기 끼어 드는 차를 피하며 흘낏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가기 싫으면 말구." "아니, 가고 싶어요." 저렇게 나오면 뭐라 할말이 없어지잖아. 미례는 심술이 났지만 애써 입을 다물었다. 딱히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쥰이 변한 것은 사실이었다. 아니 꼬집어 말하자면 아무하고나 말을 한다는 것이 제일 변한 점이다. 그렇다고 막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처럼 입을 꼭 다물고 인상만 쓰고 있지는 않았다. 만나는 사람들이 건네는 인사 정도는 받았다. 그리고 표정도 변했다. 여유가 있다고 해야 할까...부드러워졌다고 해야 ���까. 어쨌든 처음 만났을 때 그 남자가 아닌 것은 사실이었다. 자신이 그를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닐 것이다. 최소한 비서 실장은 쥰을 볼때마다 고개를 갸 웃거리며 의아해 하며 미례의 생각에 동조하고 있으니까. 아니지...경호실 직원들이나 다른 회사직원들을 비롯해서 임원들까지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빛이 역역했다. 이유가 뭘까. 설마 나 때문은 아니겠지... 미례는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두려움을 느끼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과거의 망령이 되살아 나는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배를 움켜 쥐었다. 속이 울렁거리며 뒤틀리는 끔찍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왜 그래? 생리통이 심해?"


쥰이 길가에 차를 세우고 어깨를 흔들며 물어 왔을 때까지 그녀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미례는 아픔으로 흐릿해진 눈을 겨우 쥰에게 맞추었다. 괜찮아. 이제는 괜찮아. 누구도 널 괴롭힐순 없어. 정신차려, 신미례. 넌 강해. 강하잖아. 강해야만해. "이제 괜찮아요." 겨우 입을 열어 그를 안심시켰다. 갑자기 찾아온 고통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역시 생리통이야?" 함께 사는 남자한테는 숨길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 제일 불편했다. 미례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했던 임신에 대한 걱정은 오늘 아침 찾아온 불청객에게 말끔이 사라졌다. 쥰은 왠지 서운해 하는 것 같았지만 미례는 안도했다. 쥰 역시 자신처럼 안도 했을 것이다. 그가 실망한 것 처럼 보인 것은 자신의 상상일 뿐이었다. "네, 이번엔 좀 심하네요." "그냥, 집에 갈까?" 그렇게 자상하게 대하지 말아요. 기대하게 되잖아. 헛된 꿈을 꾸고 싶지 않아. "무슨 말이에요. 빨리 지연씨네 가요." 그녀의 채근에 하는 수 없이 쥰은 차도로 다시 차를 몰았다. 지연의 아파트 까지 가는 동안 그의 걱정스런 시선이 계속 그녀를 ?았지만 눈을 감고 모른 척 했다. 한남자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믿고 그리고 배신 당하는 그런 미련한 짓은 더 이상 하지 않 을 것이다. 쥰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그의 변화가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착각하고 예전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는 바보 같은 짓은 정말 사양이었다. 준호가 호들갑 떨면 병원에서 난리를 치는 바람에 회사에 공공연한 소문이 난무하게 된 것 치고 지연의 상처는 비교적 가벼웠다. "그나마 다행이다." "별것 아닌데...일부러 언니랑 실장님이 병문안 까지 오시고...정말 죄송해요." "무슨 소리야, 이기회에 이렇게 안면을 익히는 거지. 안그래요 미례언니? 실장님?" 뻔순이라는 별명답게 미정은 태연하게 말하며 찻잔과 과일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 놓았다. 두 사람의 갑작스런 방문에도 지연과는 달리 당황하지 않던 그녀였다. 통성명이 끝나고 마실거와 과일을 깍아 내오는 사이 몇 년은 사귀어온 친구처럼 친근하게 말을 붙이는 미정의 능력에 새삼 놀랐다. "그런데...한영그룹이 물이 좋은 가 봐요." 가벼운 담소가 오가던 중 세사람의 시선이 화제를 바꾼 미정에게 일제히 향했다. "회장님만 잘생긴줄 알았더니...경호 실장님도 한 인물 하시는 데요. 애인 있으세요?" "미정아...그런 실례되는..." 당황한 지연은 미정의 말을 막으려 했지만 한번 열린 입은 다물 줄을 몰랐다. "없으면 저 어때요? 내년에 한영그룹에 들어 갈 때 까지 저 기다려 주실래요?" 심란한 마음을 숨기려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 가던 미례는 혀를 델뻔 했다. 요즘 아이들은 모두 이렇게 대책이 안설 만큼 자신만만 한 걸까. "나이차가 너무 나지 않아요?" 쥰은 너무도 여유있게 미정을 대했다. "실장님처럼 멋있는 분이면 나이차가 나도 괜찮아요." 미정 역시 너무나 여유있었다. "미안해서 어떻하죠. 저 결혼할 사람 있거든요."


"정말요?" "그럼요. 여기 미례씨 한테 물어 봐요." "무...무슨 소리에요?" 미례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며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음. 상대가 미례언니면 제가 양보해야지 어쩌겠어요. 그나 저나 괜찮은 남자는 모두 임자가 있어요. 정말 김 샌다니까. 준호씨만 해도 여기 지연이가....악!" 미례는 비명을 삼키며 자신의 발등을 지그시 누르고 있는 지연의 다치지 않은 발을 내려다 보았다. "한영그룹은 사내 결혼을 권장하나봐요? 회장님께서 몸소 시범을 보이시는 걸 보면." 얄미운 생각에 아픔도 참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지연의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 졌 다. "저희 회장님이 사내 연애를 하신다고 누가 그래요?" 쥰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찻잔을 입에 가져가며 물었다. 그가 원하던 해답을 이 말 많은 아가씨가 해결해 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머, 모르셨어요? 윽...어제도 준호씨가 지연이 병문안을 오셨는데...두사람 사귀는 거 모르셨나봐, 으악!" "어디 불편하세요?" "아뇨, 개미가 물어서요." 졸지에 지연의 발은 개미가 되었고 미정의 발등은 또다른 공격을 피해 도망쳤다. "그런데...전혀 몰랐네요. 두사람이 사귀는거...." "사귀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서 그럴거에요." 미정이 이해하라는 듯 가르켜 주었다. "하지만...지연씨...약혼자 있다고 했잖아요?" 미례가 놀랍다는 듯 지연을 바라보며 의문을 제기 하자 쥰은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그녀가 사랑스러워졌다. 그의 궁금증을 이렇게 꼭집어 물어봐 주다니...집에 가서 많이 사랑해 주마 다짐했다. "지연이 너 회사에서도 그런 헛소리 하고 다녔어? 못말려 정말....미례언니 얘가 한말 다 뻥이에요. 남자들이 하도 쫒아 다니니까 연막친거라구요." "지연씨 한테 서운해 지네...나한테 까지 그런 거짓말 하고..." 미례가 정말로 서운해 하는 표정을 짓자 지연은 어쩔줄 몰라 했다. "언니...그때는 서은경씨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랬어요. 그뒤 사실을 말하려 했지만...기회가 없었어요. 그리고 딱히 누구에게 피해가 가는 일도 아니라서..." 피해가 막심했지, 그누구에게는. 쥰은 오늘 오전 목에 가시박힌 사자처럼 으르렁 거리던 준호를 떠올리며 속으로 미소 지었다. 이로서 살인날 일은 없겠군. 준호나 그로서도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렇지만 준호가 한동안 끙끙 앓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미례 때문에 절절매는 것을 놀린 벌로 잠시동안 입을 다물고 있기로 마음 먹었다.

일요일 이른 새벽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준호는 일찌감치 일어나 차가운 물에 샤워를 했 다. 정신이 번쩍 들만큼 찬물로 씻고 난 후 주방으로 가서 원두커피를 내려 잔을 들고 응접실과 이어진 테라스로 나왔다. 이곳으로 올 때면 으레 하던 승마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하얀 철제의자에 몸을 묻고 일출을 감상하며 생각에 잠겼다.


여행으로 피곤해진 외조부와 김비서는 일찍 잠자리에 드셨고 오전 중으로는 일어 나지 않을 것이다. 별장을 관리하는 관리인 부부도 좀 떨어진 곳에 자신들의 집이 있었고 두시간쯤 뒤나 올 것 이기에 그때까지는 혼자서 고독을 즐길 수 있었다. 말이 별장이지 하얀 외벽의 단층 건물은 방이 여섯에 욕실이 둘, 식당과 주방, 그리고 응접실이 있는 만큼 거대한 저택에 가까웠다. 별장 주위는 대부분 사유지였고 넓은 정원의 끝은 목장과 맞닿아 있어 경치가 끝내줬다. 말을 좋아하는 외조부는 말 사육장을 운영-지금은 사람들을 두고-있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이곳에 올때마다 외조부는 말등에 그를 올려 놓았고 자연 그의 승마 솜 씨는 수준급이었다. 깨끗한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 지연 역시 이곳을 좋아할 것이다. 항상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이곳이 쓸쓸해 보이는 것은 그녀가 이곳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보고 싶었다.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너무나 보고 싶었다. "몇시 비행기로 올라 갈거냐?" 늦은 아침겸 점심을 함께 하며 외조부가 물어 오셨다. "세시비행기에요." "내걱정 하지 말고 회사일에나 신경써라. 나는 김비서가 잘 보살펴 줄거야." "그래요,작은 회장님. 노회장님 걱정 마시고 결혼 하실 생각이나 하세요. 그게 제일 큰 효도 니까요." 곁에서 김비서까지 할아버지를 거들었다. "조만간 결혼 할 테니 염려 붙들어 매세요." 아무렇지 않은 듯 선언하고는 식사에 열중하는 시늉을 했다. "벌써 마음을 굳힌거냐?" "네, 그녀 마음이 정해지는 대로 인사 시킬께요." "그...그래라...허, 거참...마음을 정하니까 일사천리로 밀어 부치는 구나." "봐서 어머니 제사때 올라 오시면 만나실 수 있을 거에요. 할아버님도 마음에 드실 거에요." "물론 나도 마음에 들지. 네가 결혼 한다는 데야..." 김비서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조손간의 대화를 들었다. 준호나 김회장님이나 다른 사람을 두고 이야기 하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럴 일이 있겠냐고 벌써부터 노친네 처럼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자신을 핀잔했다. "그러고 보니 네 에미 제사가 얼마 안남았구나. 이번에는 네 부친을 오도록 해라." "싫습니다." 준호는 타협의 여지를 주지 않고 딱 잘라 거절했다. 지난 십년동안 모친의 제사에 부친의 참석을 거부해 왔던 그였다. 외조부는 두부자를 화해 시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셨지만 준호의 닫힌 마음은 열릴 줄을 몰랐다. "그래도 네가 결혼을 할텐데...색시감을 선보여야지...네 애미도 그걸 바랄 거다." 김회장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손자를 설득하려 애썼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 나겠습니다. 올라갈 준비를 해야 겠어요." 식당에서 먼저 나가는 손자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노인의 입가에서 한숨이 흘러 나 왔다. "불신의 뿌리가 너무 깊어. 어떻게 해야 두사람을 화해 시킬지..."

거실과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작은 회장님도 결혼해서 자식을 보면 마음이 풀릴 겁니다. 부모 마음이 어떤지 알게 될테니까요." "그럴까?" 김비서의 위로가 조금은 마음을 놓이게 했다. 하지만 또다른 걱정이 그를 근심케 했다. "하지만...내가 한짓을 저놈이 알면 가만 있을지..." "무슨?" "아, 아닐쎄. 어떻게 되겠지. 그나저나 내가 부탁한 것은 알아봤나?" "네. 사람시켜서 알아 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우현그룹 최회장 따님 뒷조사를 왜 시키신 건지...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건 아닌지요?" 김비서는 이틀전 갑작스런 지시를 받고 의아해 하던 참이었다. "문제가 없어야지. 내가 저지른 일인데...그나마 선택을 잘한거야 할텐데..." 노회장은 주름진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며 혼잣말 처럼 내뱉었다. 공항에 세워둔 차를 몰고 바로 지연의 집으로 향하며 준호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금요일에 오기로 한놈이 벌써 와 있으면 어쩌지. 어쩌긴 지연에게서 당장 떨어져 나가라고 한방 날려야지.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운전석 문을 열고 나온 준호는 옆에 세워진 외제 스포츠카에 시선이 갔다. 이런 중산층 아파트에 있을 법한 차는 아니었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잠시 서있었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오기 싫다고 했잖아. 네가 오자고 우기지만 않았서도...." "오빠가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행동하니까 답답해서 내가 도와 주려고 한거지. 고맙다고 할 만정...어머, 준호오빠? 여긴 어쩐일이에요?" 시끄럽게 싸우며 걸어 나오던 남매는 준호와 마주치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안녕하십니까, 윤회장님." 최희준은 정신을 차리고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그래, 그동안 별일 없었지, 최실장. 그런데...이곳엔 어쩐 일인가?" 싸늘한 의심의 눈초리가 두사람을 향해 쏟아 졌다. "제가 지연씨한테 사과도 할 겸 병문안 왔어요. 마침 지연씨가 오빠 대학 후배더라구요. 그래서 오빠도 같이 온거에요." "볼일은 다 마친건가?" 준호는 희연이 아닌 희준을 향해 물어 보았다. 희준은 그가 철저하게 희연을 무시하고 있는 느낌을 받고 당혹스러웠다. 두사람이 결혼 할거라고 부친에게 들었던 터라 더욱 그러했다. "네, 쉬어야 한다고 친구분이 ?아내다시피 내몰더군요." 미정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새삼 미정의 존재에 감사하는 준호였다. "세상에 차도 안주더라구요. 예의가 없어도 어쩜 그렇게 없는지. 이래서 배우지 못한 집안은 티가 난다니까요." "그럼 그만 가보게." "준호오빠, 이렇게 헤어지자구요?" 그가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하자 희연은 얼른 팔을 잡았다. "무슨 볼일이라도 남았나?" "오빠, 너무한거 아니에요? 그래도 명색이 오빠 약혼년데..." "잠깐, 누가 누구 약혼녀라는 거지?" 희연의 말을 차갑게 자르며 싸늘하게 물었다.


"그야...내가...오빠의..." 준호의 기세에 겁이 난 희연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잘 들어라, 최희연. 난 너랑 결혼 안해. 세상이 두쪽 나도 안해. 알겠니? 난 따로 결혼할 여자 있으니까 딴 맘 먹지마. 옛정을 생각해서 오누이처럼 지낸다면 나도 환영이지만, 그이상도 그이하도 싫어. 알아 듣겠어?" 준호의 팔을 잡고 있던 희연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태어나서 이런 모욕은 처음이었 다. "결혼할 여자가 설마 한지연은 아니겠지요?" "그럼 안돼나?" "그여잔 약혼자 있다구요. 우리 오빠도 그래서 한지연 포기 한거라구요. 희준 오빠가 그여자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그렇지 오빠?" 희연은 희준에게 동의를 구하고 그 답을 들을 새도 없이 다시 준호를 보며 소리쳤다. "영화배우 뺨치게 잘생기고 돈도 많은 재벌 2 세가 오빠 한테 그랬대요. 내 여자한테 추근대 면 죽여 버리겠다고. 그런 대단한 상대가 있는 여자와 어떻게 결혼 한다는 거죠?" "잘가라." 그의 팔을 다시 붙들려는 희연의 손을 뿌리치며 성큼성큼 떠나가 버렸다. "이럴순 없어. 이럴순 없다구...으앙..." 뒤에 남은 희연이 울음을 터트렸고 그런 그녀를 달래느라 희준이 진땀을 빼며 차에 태우고 떠나가는 동안에도 그는 뒤돌아 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질투심과 분노가 뒤섞여 그를 숨막히게 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해야만 했다. 내 여자한테 추근대면 죽여 버리겠다고? - 그말은 자신이 해야 하는 대사였다. 지연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여자이니까. 그말을 한놈을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는 지연에게 선택권을 줄 생각이었다. 순순히 그와의 결혼을 허락하던지... 아니면 어쩔수 없는 상황에 떠밀려 결혼을 결심하던지. 인터폰을 누르자 안에서 투덜거림이 흘러 나왔다. "지연이는 쉬어야 한다고 몇번이나 말해요. 어머, 준호씨?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요. 죄송해 요. 어서 ���어 오세요." 그를 보자 반색을 하며 반가워하는 미정을 보자 조금은 기분이 나아 졌다. "들어 가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죠. 준호씨 그냥 돌아 가게 하면 지연이가 절 가만 안둘텐데요." "또 누굴 붙잡고 내 흉을 보는 거니?" 지연의 모습이 보이자 그의 분노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너무도 보고 싶었던 얼굴은 머 리속에 새겨진 것보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준호씨? 언제 오셨어요?" 지연 역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향해 뛰어왔다. "이렇게 뛰어도 괜찮아요?" 자신의 품안에 그녀를 가두며 만족스럽게 물었다. "다 나았어요. 사실 별로 큰 상처도 아니었는 걸요." "방해꾼은 사라진다. 슈퍼에 가서 뭐좀 사올게." 미정이 현관문을 닫고 사라졌지만 두사람은 열렬히 입을 맞추느라 알지 못했다. "어머, 안되요. 이틀이나 씻지 못해서 냄새난단 말이에요."


준호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자 당황하여 외쳤다. "좋아, 얼마나 좋은지 모르지? 너무나 달콤한 향기가 난다구, 지연이는. 취할것만 같아." 그녀의 셔츠를 들어 올려 맨살에 코를 비미며 달뜬 목소리로 웅얼 거렸다. 준호는 지연을 안아 쇼파로 갔다. 브래지어를 안한 가슴에 잔 키스를 퍼부으며 애무하기 시 작했다. 분홍빛 유두를 번갈아 물며 열렬하게 빨자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 나왔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피부에서 달콤한 살내음을 맡으며 그는 달아 올르는 자신을 느꼈다. 그녀를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다고 새삼 다짐하는 그였다. 지연의 두손이 그의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 오며 반응하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결혼하자, 지연아." 갑자기 그녀의 가슴에서 얼굴을 든 준호가 진지하게 말해 왔다. 발그레진 얼굴로 지연은 멍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의 애무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비겁한 방법을 쓰고 있는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이렇게 라도해서 지연을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싶었 다. "갑..갑자기 왜그래요?" 그녀가 정신을 차리려 하자 다시금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깊숙이 혀를 밀어 넣어 그녀를 빨이 들이며 그녀의 흥분이 고조 되도록 두손으로 그녀의 가 슴을 감싸고 애무하기 시작했다. "빨리 결혼하고 싶어. 널 갖고 싶어 미칠 것 같아." 그녀의 귀에 뜨거운 숨을 불어 넣으며 속삭였다. 지연의 몸이 움찔 한 것 같았다. "서두를것 없잖아요. 서로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요." 떨리는 손으로 셔츠를 끌어 내려 가슴을 감추며 그녀가 담담히 대답했다. 툭! 준호의 손이 그녀에게서 떨어 졌다. 지연은 그가 자신의 대답에 실망하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단지 욕망 때문에 자신을 원하는 그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결혼하고 나서 그가 그녀에게 실증이 난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새로운 음식을 실컷 먹고 질리면 그는 후회할 지도 몰랐다. 그래서 지연은 그와의 결혼을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그에게서 자신에 대한 사랑이 싹튼 다음에 결혼해도 충분하다고 욕망 때문에 결혼하 고 싶지 않다고 지연은 생각했다. "차 준비 할께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이만 가볼게. 할 일이 있어서." 준호는 실망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고 떠났다. 그는 지연에게 선택권을 주려고 노력했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그녀가 순결한 상태로 자신과 결혼식을 올리도록 지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거절했고 그는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갖을 것이다. 뉴욕에서 그녀를 유혹해서 최대한 빨리 결혼식을 올리 생각을 굳혔다. 그녀가 마음을 정하도록 방치하는 실수를 저질러 영화배우 뺨친다는 놈한테 보낼 수는 없다 고 그는 다짐하고 또 했다. "여보세요, 쥰? 나야. 뭐 좀 알아 봐줘....한...지연에 대해서...주변에 누가 있는지...그래, 한지연의 정혼자라는 남자에 대해 알아 봐줘." 핸드폰 폴더를 덮는 준호의 표정은 비장하기만 했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처럼.


준호의 전화를 끊으며 쥰은 소리내어 웃었다. 곁에서 빨래를 개던 미례가 깜짝 놀라 그를 쳐다 보았지만 그는 배까지 움켜쥐고 웃어댔다. "왜 그래요? 그만 웃어요, 배꼽 빠지겠네." 미례가 말렸지만 쥰의 웃음은 그칠줄을 몰랐다. 나중에는 꺽꺽 거리며 숨을 제대고 못쉬는 거였다. 그녀는 주방에서 물잔을 들고 나와 그에게 마시게 했다. 물을 마신 그는 좀 진정이 되었지 만 그래도 간헐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재미있는 일이 뭐에요?" "당신말야. 혹시라도 한지연씨 약혼자 없다는 말 준호 한테 하면 안돼. 알았지?" "묻는 말에 대답도 안하고 그게 무슨 소리에요?" "그럴 일이 있어. 이기회에 그놈 골탕좀 먹이게. 나이도 어린놈이 영감같이 구는 꼴이 보기 싫었는데...두고 두고 놀려 먹을 일이 생겼다니까." "지금 회장님 이야기에요? 지연씨하고 연관된 일이지요?" 미례는 재미있어하는 쥰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준호에 대한 일이라면 자다가도 뛰어나가는 사람이 골탕먹이는 일에 이렇게 즐거워하다니. "그러면 못써요. 당신 회장님을 친동생보다 더 아끼고 있는 줄 알았는데..." 쥰의 의외의 모습에 조금은 실망하였다. "당연히 아끼지. 그러니까 이러는 거야. 준호는 말야...뭐랄까...지금까지 별로 뭔가를 원한 적이 없거든. 그러니까...왜 어린 아이들이 부모들에게 이거 해달라 저거 사달라 하는 그런 거 말야. 한번도 그런 걸 해 보지 못했어. 원하기도 전에 모든 것이 갖춰지는데 그럴 필요도 없었겠지만, 스스로도 자신이 하고 싶은거 원하는게 뭔지도 모르고 살아 왔고, 그러니 당연히 바라는 걸 얻기 위해 온마음을 쏟아 노력해 본적이 한번도 없었거든." 미레의 책망에 금방 정색을 한 그는 자신의 생각을 털어 놓았다. "그래서요?" "그래서...당연히 그런걸 느끼게 해주고 싶다 이말이지. 내가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준호 그놈 여자관계가 깨끗하진 못했었어. 아, 그런 뜻이 아니라. 들어 보지 못했어, 삼개월여자라고?" "삼개월여자?" "그래, 준호가 사귄 여자들에게 붙이는 별명이지. 그놈이 삼개월을 넘기지 못했거든. 사귀다 가 삼개월이 지나면 칼 같이 헤어지는 거야." "설마...그럼 소문이 사실이란 말에요? 그럼 우리 지연씨 보호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 중에 지연씨 상처 받으면 어떻해요?" 미례는 자신도 모르게 지연에 대한 보호심리가 생겨났다. "괜찮아. 이번만은 뭔가 다른거 같으니까. 그래서 좀더 애태우게 해주고 싶은 거야. 속이 까 맣게 타들어 가다 보면 지연씨가 천생배필인거 알고 꼭 붙들 테니까." "그말 자신 할 수 있어요?" "뭘?" "지연이가 상처 받지 않을 거라고." 뭔가 단단히 결심한 듯한 미례의 모습에서 쥰은 문득 깨닳았다. 지금 미례는 지연을 과거의 자신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상처 받는 것을 견뎌하지 못하는 것일 테지. "만야, 준호가 지연씨에게 상처를 입히면 가만 두지 않을게. 믿어도 돼." 그의 대답은 이중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미례는 그것을 알아 들었다. 쥰은 자신 역시 미례에게 상처 입히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었지만 미례의 닫힌 마음은


열리줄을 몰랐다. 그녀는 또다시 배가 뒤틀리는 아픔에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또다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또 하는 그녀였다.

미정는 자리를 피해준 보람도 없이 준호가 일치감치 돌아가 버렸다는 지연의 말에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왜 그랬어?" 당장 결혼하자는 준호의 말에 반대 했다는 지연의 이야기를 듣고 미정이 따졌다. "삼개월신부가 되기 싫었으니까!" 절규하듯 소리치며 끝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무슨 소리야? 삼개월신부는 뭔데?" "너도 알잖아, 오빠랑 사귀다 헤어진 여자들을 부르는 말." 두손으로 거칠게 눈물을 훔치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삼개월여자? 그게 왜 삼개월신부가 되는 건데?" 미정은 지연의 말뜻을 알아 들을 수가 없어 답답했다. "난, 그여자들 처럼 삼개월만에 버려지는 신세가 되고 싶지 않아." "당연하지, 네가 그여자들랑 같아?" "같지 않으면? 다른건 뭔데? 애인이 아니라 결혼하자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지연아, 속시원이 얘기해봐. 아직도 난 네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 들을 수가 없어." 미정이 재촉하자 지연은 크게 숨을 들이 쉬며 마음을 가라 앉히려 노력했다. "오빠는 한 여자랑 삼개월을 넘기지 못해. 내가 모아온 신문기사랑 잡지기사들을 보면 충분 히 알 수 있어. 그리고 이번에 오빠가 관심을 갖기 시작한 사람은 바로 나야." "그래서? 삼개월 후면 너도 버림 받을 거란 이야기는 또 뭐야?" "만약, 삼개월 후에도 오빠가 나랑 결혼하고 싶다고 하면 결혼 할거야. 그전엔 안돼. 삼개월 신부가 될지도 모르는데 덥썩 결혼 할 수는 없다구." "그러니까, 네말은 준호씨가 진심으로 널 사랑하는 지 모르겠다는 거구나?" 미정의 예리한 질문에 지연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 방울 떨어 지기 시작했다. "바로 맞혔어. 난 불안해, 미정아. 오빠가 날 사랑하지 않을 까봐. 삼개월후에 버림받을 까봐. 차라리 바라보고 살걸 그랬어. 이렇게 하루하루 불안해 하지 않게." "그럼 평생 후회하며 살았을걸." 지연을 안고 달래주며 미정은 한숨 지었다. "나 김희진을 만났을 때, 그녀를 동정했어. 그녀가 날 보던 그 원망섞인 시선이 아직도 생생해. 그녀 역시 자신이 버림 받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을 거야. 자신만은 다르다고 오빠를 붙들수 있다고 자신했을 거야. 그런데...오빠는 그여잘 귀찮은 벌레 떨궈내듯 털어 버렸어. 차갑게...아주 아주 차갑고 무섭게. 상처받고 질투심에 불타던 김희진의 얼굴을 보며 난 너무 슬펐어." 아직은 그와 회장과 비서 사이 이상 아무 관계도 아닐 때 호텔식당에서 나오다 만난 김희진 이 지연에게 남긴 인상은 아주 강했다. 미래의 자신 모습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으니까. 난 연이니까. 난 오빠에게 특별한 존재니까. 틀림없이 오빠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 위로 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십년전에 만난 소녀 따윈 그는 까맣게 잊고 있었고 자신 역시 별 수 없을 거라는 비참한 생 각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월요일. 출근 하자 마자 비서실장 민석에게 수요일에 있을 뉴욕출장에 대해 듣고 지연은


당황했다. 입사한지 한달도 안되는 자신이 회장을 보좌해서 출장을 가야하다니. "개인적인 볼일도 있으시고 그렇게 공적인 일이 많지는 않을 거에요. 뉴욕지사를 들러 보시 고 주요 거래처인 제이슨사 회장을 만나시는게 목적이시니까." "제이슨사라면?" "세계적인 다국적기업이죠. 리처드 제이슨회장은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인물이죠. 전임 회장때부터 돈독한 친분을 쌓아 왔죠. 그런데 지난달에 하나뿐인 아들이 큰 사고를 당했다는 군요. 칼 제이슨 병문안이 이번 출장 주목적이에요. 아, 칼은 제이슨회장의 아들 이름이에요. 여기 중요한 인적 사항을 메모해 놓았으니 외우도록 해요." 민석이 건네는 서류철을 건네 받아 찬찬히 ?어 보았다. 리처드 제이슨이나 그의 아들 칼 제이슨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제인이라는 것을 알수 있었 다. 생명에 지장은 없으나 큰 사고를 당했다고 서류에는 적혀 있었다. 올해 육십인 리처드는 매우 활동적인 사람같았다. 준호와 같은 나이인 칼은 상당히 매력적이며 모든 면에서 뛰어난 남자라고 평가되고 있다고 씌여 있었다. 이런 사람이 사고를 당해 꼼짝 못하고 누워 있다니 얼마나 힘들까. 지연은 동정심이 일었다. 다섯장에 걸쳐진 서류에는 제이슨사의 주요 사업체와 한영그룹과의 관계, 그리고 제이슨 부 자에 대해 자세히 서술되어 있어 아무것도 모르는 지연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준호에게 거추장스러운 존개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열심히 읽고 또 읽었다.

제 9장 김희진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서며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췄다. 상대는 상당히 유명한 인물로 이쪽 세계에서 힘깨나 쓰는 사내였기에 그의 초대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윤준호회장에게 퇴짜를 맞은 뒤이니 또다른 후견인은 필요 했다. "안녕하십니까, 강재민입니다." 잘생긴 건장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페레가모양복을 쫙 빼 입고 이탈리아제 수제화에 롤렉스 시계, 오른손 약지에 끼워진 커다 란 다이아 반지까지. 남자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있었다. 돈이 엄청 많다더니 사실인가봐. 깔끔하게 다듬어진 머리모양과 부드러운 표정까지 김희진의 마음에 쏙 들었다. 윤준호에 비하면 독수리 대신 비둘기에 불과 했지만 그래도 꽤 화려한 비둘기였다. 더욱이 연예계에 그의 연줄이 상당히 두텁다는 것은 그녀에게 무척 중요한 부분이었다. "만나뵈서 기뻐요, 김희진이에요." 최대한 아름답게 미소 지으며 그녀는 그가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우리의 만남을 위해 건배할까요?" 그가 그녀에게 잔을 건네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어느새 매니저는 알아서 자리를 피하고 없 었다. "네, 건배!" 김희진은 그가 건넨 잔을 단숨에 비웠다.

수요일 오후 여섯시 반 비행기로 그들은 뉴욕으로 떠났다.


몇일간의 출장을 위해 준호는 정신없이 중요한 일들을 처리했고 덕분에 두 사람은 사적인 대화를 변변히 해보지 못했다. 준호의 배려로 수요일에는 출근하지 않고 짐들을 꾸렸고 미정까지 합세하여 도와 주었지만 먼 여행은 생전 처음인 지연은 어쩔 줄 몰랐다. "이걸 가져가야 하나?" "글쎄. 비즈니스여행은 나도 잘 몰라. 그냥 정장 입으면 되나?" 미정도 도움이 안되기는 마찬가지 였다. "그러지 말고 준호씨한테 물어봐." "오빤 대충 챙기래. 필요한 것은 거기서 사면 된다구. 짧은 기간 동안 관광이랑 쇼핑이라도 할 생각인지 오빤 너무 태평해." "그러지 말고 준호씨 말대로 해. 정 필요한게 있으면 사면 되지, 뭐." "있는 거 사면 안깝잖아." 울상을 지으며 옷가지를 손에 들고 고민하는 지연을 보며 미정은 기가 막혔다. "난, 네가 이해가 안된다. 재벌이라고 할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남기신 유산도 꽤 되고 네 이모내외랑 지성오빠가 옷이고 신발이고 액세서리고 없는 것 없이 여행다니며 사다주시고 덤으로 용돈 팍팍 주시겠다. 돈 쓸일도 없는 네가 왜 그렇게 지지리 궁상을 떠는 지 정말 ���르겠다니까." "그냥...습관이 돼서." 어려서부터 지연은 갖고 싶은 물건 대신 다른 선물을 받아도 실망하지 않고 기뻐하는 표정 을 짓는 법부터 배웠다. 자신이 스스로 뭔가를 해 달라고 조르는 일 없이 자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만다는 식으로 살아온 그녀에게 사치는 어울리지 않았다. 만약 이모와 지성오빠가 그녀를 치장 시키지 않았다면 동네 시장에서 대충 사서 입었을 것 이다. 그래서 그녀의 옷장은 이상한 배합을 갖고 있었다. 고급스러움과 촌스러움이 공존한다고나 할까. 이모는 그녀의 옷과 가방 신발을 사다 날랐고 지성 오빠는 각종 보석류의 악세서리를 선물 해 주었다. 딸이 없는 것이 한인 이모와 친여동생처럼 생각하는 지성 오빠의 합작품이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취향이 고급스러워 지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시장에서 물건을 샀고 그것들이 편했다. "그래도 뉴욕에서 창피 안당할려면 이모가 사준걸로 가져가." 시장에서 만원에 산 물빠진 청바지를 슈트케이스에 넣는 그녀를 미정이 말렸다. "야, 디자이너 청바지를 놔두고 왜 하필 그거야?" "그래도 난 이게 편해서 좋은데..." 지연은 끝내 미련을 못 버리고 그옷을 친구 몰래 가방에 집어 넣었다. "뭘 입고 가지?" "편한거 입어. 열네시간이나 비행기에 있어야 하는데, 편한게 좋잖아. 이게 났겠다." 미정이 권한 것은 구김이 안가는 소재의 비교적 편한 스타일의 바지 정장이었다. 준호가 공항으로 가기 위해 왔을 때 기적적으로 짐을 꾸린 지연은 미정과 짧은 작별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탔다. 운전기사가 그녀의 가방을 트렁크에 실은 후 차를 출발 시키는 동안 준호는 흐트러진 지연 의 긴머리를 쓸어 넘겨 정리해 주었다. "짐꾸리는 게 피곤했어?" "네. 여행을 가본 일이 없어서요."


"한번도? 학교에서도 여행다니잖아, 졸업여행이랑..." "한번도 가보질 못했어요. 엄마가 자주 아프셨기 때문에, 우연히도 제가 수학여행이나 졸업여행이라도 갈려면 병원에 입원하시기 일쑤 였거든요. 대학다닐때도 MT 한번 못가봤어요. 사실 난 서울 밖으로 나가 본일이 없어요." 그녀의 고백에 준호는 무척 놀랐다. 어떻게 그렇게 페쇄된 삶을 살아오고도 이렇게 밝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무의식중에 지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준호는 당혹스런 마음을 감췄다. "내가 앞으로 많이 데리고 다녀 줄게, 가고 싶은 곳이 어디든지. 제일 가고 싶은 곳이 어디야?" "음...사실 경주도 가보고 싶구요. 부산 해운대도 한번 가서 해수욕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제주도도 가보고 싶어요. 또...." 공항으로 향하는 차안에는 지연이 줄줄이 나열하는 도시 이름이 흘러 나왔다. 준호는 어리광을 받아 주는 부모처럼 지연의 넋두리를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처음으로 타는 비행기에 지연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준호가 손을 꼭 잡아 주어 이륙하 는 동안 긴장을 풀려고 노력했다. 프리미엄 퍼스트 클래스에 탑승한 지연은 호화로운 기내와 좌석에 놀랐다. "다른 곳도 이렇게 좋아요?" 지연은 준호의 귀에 속삭이듯 물었다. 촌스런 자신의 행동을 승무원들이 눈치챌까봐 조심스 러웠다. "아니, 여긴 특별석이라서 그런거야. 음악을 듣거나 비디오라도 봐요. 난, 잠깐 이 서류좀 읽을게." 준호는 그녀에게 이용방법을 일러 주고 금방 일에 파묻혀 버렸다. 열네시간의 비행끝에 뉴욕에 도착했을 때는 우습게도 목요일이 아닌 다시 수요일이었다. 예약된 특급 호텔의 스위트룸에 체크인 했을때는 초저녁이 다되어 갔으며 긴 여행으로 지친 그녀는 준호와 비록 방은 따로 이지만 스위트룸을 함께 쓴다는 사실에 항의 조차 하지 못했다. "별상관 없잖아. 당신 가까이에 있는게 나도 안심이 되고." 준호의 말대로 방이 따로인 마당에 왈가불가 하느니 빨리 몸을 씻고 싶은 유혹이 더 강했 다. 호화로운 대리석 욕조에 거품을 내고 몸을 담그는 사치를 한시간 정도 하고 나자 피로가 어 느정도 가시는 것 같았다. 목욕가운을 걸치고 수건으로 머리에 감아 올리고 침실로 돌어온 지연은 침대의 유혹을 뿌리 치지 못하고 잠시 누웠다. 만족스런 한숨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 나오다 빨리 옷을 입고 저녁을 먹으러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신 음으로 바뀌었다. 그냥 자고 싶었다. 아무리 인체공학적으로 설계 됐다는 180 도 침대형 좌석이라 하더라도 진짜 침대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더욱이 하늘에 떠서 잠을 자는 것은 비행기 여행이 처음인 지연으로서는 왠지 불안해 깊게 잠들수가 없었다. 준호는 익숙한지 숙면을 취해 전혀 피곤한 기색이 없었지만. "식사는 하고 자야지." 부드러운 손이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잠을 방해했다. 흠칫 놀라 눈을 뜬 지연은 바로 눈앞에 준호의 얼굴이 있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 그녀를 그가 부드럽게 제지하고 다시 눕혔다. "깜빡 잠이 들었나 봐요." "여행이 익숙치 않아서 그래. 룸서비스 시켰으니 먹고 자. 너무 지쳐 보여." 눈밑의 검은 띠를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가 문지르며 위로하자 가슴에서 따뜻한 기운이 올라 왔다.


그는 너무나 자상했고 그녀를 편하게 해주었다. 그가 자신에게 잘해 줄수록 불안감이 뒤따 랐고 그래서 마음 놓고 기뻐할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오늘 하루 푹 자고 나면 개운해 질거에요." 그가 내미는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던 지연은 가운 앞섶이 벌어지자 당황하여 손으로 움켜 쥐었다. "옷입고 바로 나갈께요." 고개를 떨구고 부끄럽게 속삭이는 지연의 얼굴로 긴 머리가 커든처럼 쳐졌다. "편하게 입고 나와." 준호는 하고 싶은 말을 애써 삼키고 그렇게만 말한후 침실을 나왔다. 지연은 친구 몰래 챙겨온 청바지에 티를 걸치고 머리를 대충 말렸다.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지만 그가 기다리는 응접실로 나갔다. 커다란 발코니창을 향해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그녀는 뉴욕의 야경을 감상하며 준호와 조용한 가운데 식사를 마쳤다. "어서 자도록 해요." 식사내내 하품을 삼키는 그녀를 지켜보다 준호가 부드럽게 명령했다. "그럼 먼저 잘께요." 잠옷으로 갈아 입지도 않고 그녀는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잠시후 뒤따라 들어온 준호는 어린아이처럼 몸을 말며 자고 있는 그녀를 보고 웃음이 나왔 다. 보약이라도 해 먹여야지 이렇게 몸이 약해서야. 시트를 끌어 올려 덮어주며 안쓰러움에 마 음이 아파왔다. 망성이다 잠든 지연의 얼굴을 갈망하는 손길로 어루만지며 준호는 자신을 달래었다. 시간은 충분했다. 뉴욕을 떠나기 전에 지연은 자신의 여자가 될것이다. 그녀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며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사랑해.' 뉴욕은 목요일이고 한국은 금요일인 이?날 오전에 두사람은 뉴욕지사를 방문했다. 지사장을 비롯해 임직원들은 잔득 긴장해서 그들의 회장을 맞았다. 일사분기 영업실적을 점검하고 이것저것 실무를 지시하며 바쁜 하루를 보내는 준호의 옆에 서 덩달아 그녀 역시 바쁘게 움직였다. 속기하고 워드 작성하고 서울 본사와 통화하고 미국내 다른 도시의 지사에서 보고서를 팩스 로 받아 정리해서 준호에게 건네는둥. 하루가 끝났을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늦은 저녁을 또다시 룸서비스로 끝내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지연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행히 다음날은 오전에 제이슨회장을 방문한 후 칼 제이슨의 병문안을 갈 일정만 남아 있 었다. 고층빌딩들이 즐비한 뉴욕 중심지에 위치한 제이슨 본사의 회장실에서 만난 리처드 제이슨 은 육십이 라는 나이가 믿어 지지 않을 만큼 젊고 건강해 보였다. 예전에는 금발이었을 머리는 희끗하게 바래져 있었지만 새파란 눈동자는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고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은 여전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을것 같았다. 다만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그에게 근심이 있음을 알게 했다. "별일 없었나, 오랜만이군. 외조부님께서도 무고 하시지?" "염려해 주신 덕분에 건강하십니다. 안좋은 소식 전해 듣고 걱정 많이 했습니다.칼은 리처드가 내미는 손을 마주 잡으며 준호가 진심을 담아 물었다.

좀 어떻습니까?"


"그럭 저럭. 병문안 가고 싶다고 들었는데..." "회장님 뵙고 돌아 가는 대로 병원에 갈 생각입니다." "함께 가도록 하지. 이런, 같이 온 아가씨 소개를 미처 받지 못했군." 그는 준호의 뒤에 다소곳하니 서 있는 지연을 그제서야 발견했다. "아, 죄송합니다. 함께 온 비서 한지연입니다." 준호는 지연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 내며 소개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는 일은 항상 즐겁지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회장님." 그와 악수하며 그녀는 미소지었다. "백만불짜리 미소구만. 자네 비서를 내게 주지 안으려나? 아름답고 유능하고 정말 탐나는 데?"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럴수는 없습니다. 사실 그녀는 제 약혼녀거든요." 태연스럽게 소개 하는 준호를 보며 마음 한켠이 서글퍼 졌다. 정말 그의 약혼녀가 될수 있 을까. "이런, 한방 먹었군. 축하하네." 일상적인 대화가 끝나자 사업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왔다. 지연은 곁에서 필요한 내용을 메 모했다. 한시간 남짓 협상이 끝나고 세사람은 병원으로 향했다. "심각하나요?" 특실로 향하며 준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금. 몇 달동안 물리치료를 받아야 걸을 수 있을거야. 그이상 걸릴수도 있고. 의사는 본인 의지가 중요하다고 하는데...아무래도 몸보다는 마음의 문제가 더크지." 설명하는 회장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하나뿐인 자식이 그렇게 됐으니 그의 상심이 클 것은 당연했다. 지연은 모친에 대한 생각이 떠올리며 환자를 지켜 보는 보호자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당장 찾아 내란 말야, 이머저리들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찾아내! 찾아서 내앞에 데 려다 노란 말야! 못찾아 내면 다 죽여 버릴거야." 활짝 열린 병실문 앞에서 세사람은 얼어 붙은 듯 멈춰섰다. 커다란 병실안에서는 광분한 한 사내가 물건을 집어 던지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병실안에는 세명의 정장 차림의 사내와 의사로 보이는 남자, 여자 간호사 둘, 남자 간호사 한명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제발 진정하십시오, 미스터 제이슨. 우선 진정제부터 투여한 후 이야기 합시다." 환자가 워낙 거칠게 반응하여 ?불리 다가 가지도 못하고 의사가 달래었다. "시끄러. 약이라면 이젠 지긋지긋해." 제이슨회장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보는 듯한 외모의 잘생긴 남자가 신물난다는 표정으로 쏘아 부쳤다. "모두 나가봐라." 제이슨회장이 나서서 명령을 내리자 모두들 안도의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우르르 몰려 나갔 다. "오늘은 또 왜 그러는 거냐? 제발 얌전히 치료를 받아. 그래야 빨리 완치 되서 달아난 네여 자를 찾을 것 아니냐?" 지연은 아들을 향해 호통치는 리처드의 말을 듣고 놀랐다. 단순히 다친 것이 문제가 아니듯 싶었다.


짜증스럽게 부친를 닮지 않은 유일한 검은머리를 쥐어 뜯는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며 새 삼 잘생겼다고 느꼈다. 그는 어딘지 준호와 분위기가 비슷했다.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오만한 점이 판박이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부친에 이어 준호 그리고 그녀에게 이르렀다 무심히 지나쳤다. 저렇게 잘생기고 젊은 남자의 눈동자에 세상을 포기한 듯한 빛이 가득 하다니...지연은 마음 이 아팠다. "오랜만이야, 칼." "그래, 오랜만이다. 그런데 보다시피 안녕하지 못해." "그런것 같군. 많이 다쳤다구." "아, 몸이 망가진건 사실이지만 심각한건 내 무너진 자존심이라구." 자존심이라기 보다는 마음이겠지. 준호는 칼의 모습에서 미래의 자신 모습을 그려 볼 수 있 었다. 만약 지연을 잃어 버린다면 자신도 저렇게 변해 버리겠지. 그는 한눈에 칼에게 사랑문제가 생겼음을 알아챘다. 칼 같은 남자를 버린 여자는 어떻게 생긴 여자일까. "같이온 분은?" "준의 비서인 한지연씨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구나." 리처드는 아들을 책망했다. "초면에 죄송합니다. 제가 성미가 고약해서요." "괜찮습니다. 빨리 쾌차하시길 빌겠어요." "그래야지요. 그래야 복수도 할 수 있겠지요." 그의 대답은 속삭이듯 사그라 들어 알아 듣기 힘들었다. 지연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에게 다짐 하는 혼잣말인듯 싶었다. 개운하지 못한 병문안을 마치고 병원을 떠나며 준호는 리처드와 둘이서 뭔가를 이야기 하는 듯 했다. 제이슨회장과 헤어진 두사람은 뉴욕지사장이 마련해준 리무진에 몸을 실었다. "오늘 제이슨회장과 저녁 약속이 있어." "저도요?" "물론이지." 눈이 동그래진 지연을 보며 준호는 웃었다. "5 번가로 가지." 준호는 리무진을 운전하는 기사에게 짧게 지시했다. 그의 지시에 차가 멈춰 선 곳은 쇼핑천국이라는 5 번가에서도 가장 고급스러워 보이는 부티 크였다. 사장이 직접 나와 두 사람을 영접하는 폼이 어느 나라 국왕이라도 납신것처럼 보였다. 준호는 어딜 가든 최고의 대접을 받겠끔 태어난 사람 같았다. 무슨 옷가게에 옷은 하나도 없고 화려한 대저택의 응접실처럼 꾸며졌는지 의아해하며 주위 를 둘러 보았다. 사장은 화려한 공작새처럼 차려 입고 손에도 반지를 몇 개씩 끼고 있었다. 화려한 붉은색의 긴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오랜만이군요, 미스터 윤." "자네도 좋아 보이는 군, 웨스." 두 남자는 친한 사이처럼 악수를 나누었다. "이쪽은 내 약혼녀인 한 지연. 그리고 이쪽은 이곳 사장인 웨스 거윈."


"정말 아름다우신 분이군요. 미스터 윤 약혼녀 다워요. 옷입으시는 센스도 아주 좋으시구요. 이번 샤넬 봄신상품 맞지요? 아주 잘 어울리세요. 아가씨 만큼 잘 어울리시는 분도 드물거든요. 몸매가 완벽하시군요. 키가 조금 작기는 하지만 모델해도 성공하겠어요. 제가 만든 옷도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요. 혹시 모델하실 생각 없으세요?" 그는 그녀의 주위를 돌며 장황하게 말을 늘어 놓았다. "동양적인 아름다움에 이곳 사람들이 아가씨 발밑에 쓰러질거에요." "쓸데없는 말은 그만 하고 옷이나 보여줘, 웨스" "약혼녀를 빼앗길까봐 걱정되나 보죠, 미스터 윤? 어련하시겠어요. 저 같아도 꼭꼭 숨겨놓고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겠어요." 남자는 좀 수다스러웠지만 착해 보였다. "어떻게 아는 사람이에요?" "미국에서 유학중일때 그에게 도움을 준 일이 있어요." 리처드가 직원들��� 시켜 옷을 가져 오도록 지시하는 동안 쇼파에 앉아 기다리며 지연이 묻 자 그는 짧게 대답하고 더 이상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옷은 필요 없어요." 늘씬한 모델들이 번갈아 입고 나오는 드레스 마다 준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연은 비명을 질렀다. "당신한테 전부 어울릴 것 같은데." 그녀의 반응에도 준호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한벌만 사요. 제이슨 회장님과 식사할 때 입을 옷만 사면 되잖아요." "난 말이야, 당신 버릇을 망쳐 놓고 싶거든."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입을 벌리고 그를 쳐다 보았다. "당신은 자라면서 응석을 부려보지 못했잖아. 이젠 내가 응석을 받아 줄게." "이건 응석부리는 차원을 넘어선 거라구요. 이많은 옷을 제가 뭐에 쓰겠어요? 밤마다 파티 에 참석할 것도 아닌데. 딱 한벌이면 되요. 더도 덜도 안돼요. 더 사면 저 그냥 가버릴거에요." 그녀가 완강히 거부하자 준호와 리처드는 어쩔수 없다는 듯 마주 보고 웃었다. "피곤하지? 저기 갔다가 점심 먹자." 지연의 주장대로 한벌의 드레스를 골라 부티크를 나온 뒤 준호는 또다시 티파니 보석상점으 로 그녀를 이끌었다. "싫어요." 그가 옷값 영수증에 싸인하는 하는걸 지켜 본 지연은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랐고 그래서 아에 처음부터 완강히 거부했다. "도대체 왜 그래요?" "내가 내 여자 한테 선물하고 싶어서 그래. 좀 봐주라." 준호는 작전을 바꿔 애원조로 나왔다. "액세서리 많단 말에요." "내가 사준건 없잖아." "그럼...너무 비싼건 안되요." 결국 그녀는 애처로운 눈빛의 준호를 거절하지 못하고 상점안으로 들어 갔다. 당연히 준호는 최고로 비싼 목걸이와 귀걸이 팔찌 셋트를 골라 값을 치뤘다. 더 이상 다투는 것도 지친 지연은 포기하고 화려하게 빛나는 보석들을 감상했다. 이렇게 아름다워서 여자들이 보석이라면 사죽을 못쓰는 구나 싶었다. 돌아서려는 그녀의 눈에 자신이 하고 있는 머리핀과 똑 같은 물건의 가격이 들어왔다. 세상에! 지성오빠가 미쳤나봐. 이런 물건을 자신에게 사주다니.


당장 따져야 겠다고 생각하니 자신이 뉴욕에 출장한 것을 전화해 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떠 올랐다. 따지기는커녕 난 죽었다. 한국에 돌아가 이모와 오빠에게 혼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 졌다. 어쩌면 좋지. 벌써 한국에 왔을 텐데. 집에 전화 해 미정에게 이야기를 듣고 어이없어 할 이모네 식구들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왜 그래? 얼굴색이 않좋아. 무슨일 있어?" "아, 네. 아니에요. 그냥...배가 고파요. 빨리 점심 먹으러 가요." 계산을 마친 준호가 곁에 다가와 그녀의 팔을 붙잡고 걱정하자 지연은 근심을 털어 버렸다. 죽이기야 하겠어. 그래도 조카고 사촌 동생인데. 그래 마음 편하게 먹자. 내가 언제 또 뉴욕에 와 보겠어. 실컷 즐겨야지. "관광할 시간이 많지는 않아. 다음에 함께 와서 천천히 구경하자." 점심을 먹으며 준호가 미안해 하며 말했다. "놀러 온거 아니잖아요." "내일 누구 좀 만나고 나면 시간이 조금 날거야. 오후에 관광시켜 줄게." 다시 회사에서 오후를 보낸 두사람은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날은 일찍 호텔에 도착해 외출 준비를 했다. 간단히 샤워를 마친 지연은 정성스레 머리를 손질해서 틀어 올렸고 가볍게 화장도 했다. 웨스는 은빛 드레스와 한벌인 속옷 까지 준비해 주었다. 속옷을 입고 스타킹을 신으며 그가 성공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깨가 다 드러나는 드레스는 가슴에서 허리까지 몸에 딱 붙었다 엉덩이를 감싸며 퍼지는 스타일로 그녀의 날씬한 몸매를 강조했다. 실크의 부드러운 감촉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녀는 어느 왕국의 공주라도 된 듯한 기분이 되 었다. 노크소리에 이어 준호가 납작한 보석케이스를 들고 모습을 나타냈다. 짙은 회색 슈트에 하얀드레스셔츠와 은회색의 실크 넥타이까지. 그의 모습 역시 어느 나라 왕자님같았다. 멋있는 그의 모습에 지연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말 아름답군." 잠시 할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짙어지며 잠긴 음성이 흘러나왔다. "돌아봐요." 그녀의 곁에 가까이 온 그는 케이스를 열어 목걸이를 꺼낸 후 화장대 위에 올려 놓았다. 조용한 움직임으로 그녀가 몸을 돌리자 그가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보석의 차가움과 무게가 가슴사이에 느껴졌다. 틀어 올린 머리 덕분에 갸날픈 그녀의 긴목이 고스란히 들어나 그는 충동적으로 입술을 가 져가 부드럽게 키스를 퍼부었다. 화장대를 마주보고 선 지연은 거울을 통해 그의 짙어진 눈빛을 보고 몸을 살짝 떨었다. 민감한 귓바퀴부터 목과 어깨에 이르는 선을 따라 입술을 움직여 애무하던 준호는 아쉬운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떼었다. 이어 준호는 그녀의 귀에도 귀걸이를 걸어 주고 마지막으로 팔찌까지 채워준 후 만족스럽게 그녀를 바라 보았다. "올린 머리는 처음 보는데 무척 잘어울리는군. 너무 우아하고 아름다워서 손대면 안될 것만 같아." 두손을 그녀의 벗은 어깨에 올려 놓으며 그가 말했다. 보석과 대조적으로 그의 손은 너무나 따스해서 보호 받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준호씨도 너무 멋있어요." 눈을 반짝이며 그를 올려다 보는 지연이 사랑스러워 참지 못하고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자, 가지. 제이슨회장을 기다리게 하면 안되니까." 준호는 아쉬움을 감추고 숄을 집어 들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지연은 구두와 세트인 백을 집어 들고 그를 따라 방을 나왔다. 그가 사준 옷과 보석으로 치장한 지연을 보며 원시적인 만족감을 느꼈다. 할수만 있다면 그녀의 여행가방을 버려 버리고 모두 새로 사주고 싶었다. 영화배우 뺨치게 잘생긴 재벌 2 세라는 그놈이 사준 것은 흔적도 없이 없애 버리고 싶은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최희연이 말한 것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웨스의 부티크와 보석상점을 방문해서 알았다. 그놈이 아니라면 그녀가 어떻게 그런 명품들을 소유할수 있었겠는가. 아직까지 쥰은 그가 부탁한 일에 대해 보고 하지 않았다. 지연의 숨겨진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는 모르지만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오늘밤이 계획을 실행하기에 최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넨 행운아군, 준. 이런 미인을 아내로 맞이 하다니..." 제이슨회장이 평소 잘간다는 프랑스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며 그는 부러움을 감추질 못했다. "내 아들이 만나던 그 동양 아가씨도 정말 아름다웠지만 지연씨를 보니 상대가 안되겠구 만." 그는 자신이 주문한 연어스테이크를 한입 맛본 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백포주를 한 모금 마셨다. 제이슨회장은 상당한 미식가 인듯 싶었다. 수석요리사가 직접 나와 그들에게 주문을 받았고 그의 비위를 맞추려 애쓰는 기색이 역역했 었다. 지연은 그의 칭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저 식사에 열중했다. 그녀는 프랑스요리를 잘 몰랐으므로 무난한 소안심요리를 시켰다. 그녀의 적포도주가 담긴 잔이 비자 와인 담당이 잽싸게 다가와 따라 주었다. 평소 술이 약한 그녀 였지만 최고급포도주가 입에 맞아 자신도 모르게 과음하고 있었다. "칼이 사귀던 여자와 잘 안되었나요?" 그는 지연이 잔을 비우는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칼은 그녀와 결혼까지 생각했나 본데 ...어떻게 된일인지 모르겠지만 칼이 사고를 당한 뒤 부터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네. 몇 달동안 동거까지 한모양이던데." "칼은 어쩌다 다친건가요?" "교통사고였어. 대형트럭하고 부딪혔는데...한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있어서 이대로 끝나나 싶었지." 제이슨회장의 어조에는 그때의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 "그여자는 빨리 잊어 버리고 물리치료에 전념해야 할텐데." "제가 다시 한번 칼과 말해 보겠습니다." "그래주겠나?" 회장은 약간의 희망을 담아 준호를 바라보았다. "친구 사인데 당연하지요." 평소 알고 지내던 두사람은 준호가 유학와 있는 동안 함께 붙어 다니다 시피 하며 어울렸다 고 낮에 그가 그녀에게 이야기 해 주었었다. "그놈이 자네처럼 빨리 내일을 덜어 주어야 할텐데." "지금도 열심히 일하잖습니까? 아, 사고 나기전에요." "내말은 나도 자네 외조부처럼 후선으로 물러 나고 싶다는 뜻일세."


"무슨 그런 말씀을...저희 할아버님이야 연세가 있으시지만 회장님은 앞으로도 이삼십년은 거뜬하시 잖습니까? 칼 역시 제 생각과 같을 겁니다." 준호가 정색을 하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그래서 그놈이 책임감 없이 사는 걸세. 이기회에 아들놈 정신상태를 고쳐 놓아야 할텐데..." 다행히 칼에 대한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고 세사람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화제를 옮겼 다. 식사 후 회장은 한잔 더 할 것을 권하는 준호의 제안을 거절하고 먼저 떠났다. "자네의 아름다운 약혼녀하고 뉴욕의 밤을 즐기게나. 그럼 다음에 뉴욕에 올 때 보세나." "한국에 한번 오세요. 할아버님도 회장님 뵙고 싶어 하십니다."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군. 칼이 저모양이라 할일이 너무 많아. 그놈이 하던일까지 뒤처리해야 하니." 제이슨회장과 헤어진 준호는 지연을 세계무역센터에 있는 오르되브르라는 바로 데리고 갔 다. 아름다운 뉴욕의 야경을 구경할 수 있는 그곳에서 춤과 음악을 즐겼다. 준호는 그녀를 위해 달콤한 칵테일을 주문해 주었다. 그녀와 달리 그는 별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함께 추시겠습니까?" 그가 정중하게 춤을 신청하자 깔깔 웃으며 승낙하고 스테이지로 나갔다. 감미롭고 부드러운 음악과 준호의 따스한 품안에 취해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벗은 그녀의 어깨와 허리를 감싼 그의 손이 은근하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스텝을 밟을 때마다 그녀의 몸에 부딪히는 탄탄한 그의 몸을 느낄 수 있었다. 자정이 다 되가도록 두 사람은 술과 음악 춤에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호텔로 돌아 올때쯤에는 지연은 몸을 가눌수 없을 정도로 술에 기분좋게 취해 있었다. 준호는 지연을 부축해 객실로 들어 왔다. "너무 즐거 웠어요. 이렇게 놀아 본적은 처음이에요." 가슴속에서 우러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지연이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키스해줘요, 준호씨." "공주님의 명령대로." 준호는 기다렸다는 듯 지연을 품에 가두고 격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저녁내내 지연을 끌어 안고 춤을 추며 한껏 달아 올라 있던 그였다. 그는 이미 모종의 계획을 세운 상태였기에 주저하지 않고 지연이 취한 상태를 이용했다. 함께 춤을 추며 그가 적절히 달아오르게끔 애무와 키스를 퍼부었기에 그녀는 준호의 거침없 는 손길에도 거부하지 않았다. 먼저 그녀의 숄이 발밑에 떨어지고 그뒤를 은빛 드레스가 뒤따랐다. 투명하게 비치는 끈없는 브래지어와 팬티차림의 그녀를 보며 자제심을 찾으려 마지막 힘까 지 쥐어 짜야 했다. 그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상하느라 잠시 떨어지자 지연의 입에서 칭얼거림이 흘러 나 왔다. "쉬, 그래. 조금만 기다려. 원하는 걸 줄게." 준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달래었다. 그는 목걸이의 걸쇠를 풀어 옷더미 위로 떨어 뜨렸다. 그리고 목걸이가 있던 자리를 입술과 혀로 쓰다듬으며 그녀를 음미했다. 지연이 몸을 뒤틀며 달뜬 신음소리를 내뱉는 것이 느껴지자 그녀를 안아 올려 침실로 향했 다. 침대에 그녀를 눕인 후 재빨리 상의와 구두를 벗어 던졌다. 침대에 누워 그를 기다리는 지연을 보자 심장이 금방이라도 가슴을 뚫고 튀어 나올것만 같


았다. 그는 서두르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으며 그녀의 구두를 벗긴 후 스타킹을 벗기기 시작했다. 스타킹이 그녀의 몸에서 떠나는 자리마다 그의 입술이 뒤를 따랐다. 최종적으로 그녀의 발 가락을 깨물기 시작했다. 어쩔줄 몰라 하는 그녀를 진정시키며 다른 한쪽 다리에서 나머지 스타킹을 같은 방법으로 벗겨 내었다. 그일이 끝났을때는 준호나 지연이나 온몸이 열기에 휩싸여 땀에 촉촉히 젖어 있었다. 그는 드레스셔츠의 단추를 뜯어 내듯 끌러내 벗어 던지며 채근하듯 입술을 내미는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어준 후 가슴으로 내려갔다. 브래지어 선을 따라 혀를 미끄러 뜨리며 손을 그녀의 등뒤로 돌려 훅을 끌렀다.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우윳빛 가슴이 튀어 나왔다. 준호는 경외하는 듯한 손길로 가슴을손안에 감싸 쥐었다. 분홍빛 유두를 하나 물어 입안에 굴리며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이대로 폭발해 터져버릴 것 만 같은 흥분이 그를 뒤흔들었다. 그 어떤 여자에게서도 그는 이런 갈망을 느껴보지 못했다. 마음껏 양쪽 가슴을 희롱하다 그녀의 아랫배와 배꼽으로 옮겨 가며 절대로 그녀를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이 커져만 갔다. "당신이 원한다면 여기서 멈출 수 있어." 유일하게 그녀의 몸에 남은 실크팬티 위를 커다란 손으로 덮으며 그가 물었다. "멈...멈추지 말아요...제발..." 그녀의 대답을 듣는 동안에도 그의 손은 얇은 천위로 그녀의 여성을 애무하고 있었다. "처음이라 많이 아플거야." 조심스럽게 그녀의 마지막 속옷을 벗겨 내며 그가 다시 한번 다짐했다. "어차피 한번은 치뤄야 하잖아요." 그의 애무로 온몸이 핑크빛으로 달아 오른 지연이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그래. 그래도 최대한 조심할게. 정말 소중히 대할게." 준호는 그녀가 아닌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하며 자신 역시 몸에 걸친 모든 것을 벗어 던져 버리고 그녀를 끌어 안았다. 그녀의 올린 머리를 풀어 내려 자신의 손안에 흘러 내리게 했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기 시작해서 온몸에 키스를 퍼붇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들어 갔을 때 지연이 최소한의 아픔만을 느끼도록 정성을 다해 자신의 욕구를 자제하며 그녀의 온몸을 구석구석 애무해 나갔다. 그의 손아래 그녀가 충분히 젖어 있는 것을 느낀 그는 침입을 시도했다. 지연은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모으며 그를 거부했다. 마음과는 달리 몸이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준호는 부드럽게 허벅지로 그녀의 다리를 벌린후 조심스럽게 그녀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몸 아래에서 고통으로 굳어지는 지연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입안으로 그녀의 비명소리를 삼키며 잠시 동안 그대로 멈춰 있었다. 따뜻하고 촉촉한 굉장히 기분좋은 그녀의 안에서 가만히 있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지만 그녀 가 자신의 존제에 익숙해질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동안 그는 계속해서 손과 입, 혀를 사용해 그녀의 몸에 다시 불을 지폈다. 자신을 죄고 있던 여성이 긴장감을 조금 누그러뜨리자 준호는 천천히 움직였다. 지연의 찡그린 표정에서 여전히 아픔을 참고 있는 듯 했지만 거부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팔을 뻗어 그의 등을 끌어 안으며 호응하려 애썼다. 준호는 지연의 긴 다리를 자신의 허리에 감은 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이 빨라 질때마다 지연의 입에서 고통이 아닌 열기에 찬 신음소리가 흘러 나오


기 시작했다. 산산히 부서지는 느낌에 지연이 비명을 지르며 그의 어깨를 깨물었을 때 준호는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며 그녀안에 자신을 쏟아 부었다. 온몸의 신경세포 하나하나가 희열감에 처절하게 떨리는 가운데 두사람은 서로의 몸을 부둥 켜 안고 한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많이 아팠어?"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뒤 그녀의 몸에서 내려와 곁에 누워 팔과 다리로 그녀를 가두 듯 감싸 안았다. 이렇게 영원히 그녀를 안고 그녀 안에서 살고 싶었다. 땀에 젖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거친숨을 삼키는 준호를 지연 역시 팔에 힘을 주어 마주 안아 주었다. "아뇨, 너무 아름 다웠어요. 고마워요, 준호씨. 소중한 첫경험을 하게 해 주어서." 그녀의 말 한마디에 염치없는 그의 남성이 다시 살아 나는 것을 느끼며 절망스런 신음을 내 뱉었다. 지연에게 얼마간의 휴식과 치료가 필요 했기 때문이다. "잠시 쉬고 있어. 욕조에 물을 받아 놓을게.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통증이 덜할 거야." 준호는 엉킨 팔다리를 풀고 욕실로 향했다. 장정 셋은 들어 가도 될만한 욕조에 물을 받도 록 해놓고 타월을 뜨거운 물에 짜서 가지고 나왔다. "어머, 뭐하는 거에요?" 지쳐서 눈을 감고 누워 있던 지연은 허벅지 사이에 닿는 따뜻한 천의 느낌에 자지러지게 놀 랐다. "쉿, 당신을 편하게 해주려는 거야." 준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을 닦아 주었다. 지연은 창피하고 불쾌한 느낌에 사로 잡혔다.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그의 손을 툭쳤다. 준호는 왜 그러냐는 듯 그녀를 바라 보았다. "날마다 처녀만 상대 했나 보죠, 이렇게 뒷처리까지 잘하시다니!" 자제하지 못하고 날이선 음성이 튀어 나왔다. 그녀의 살벌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준호는 기 쁜듯 미소 지어 다시 한번 지연을 화나게 했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요?" "지연이가 질투하는게 너무 좋아서."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지연은 주먹을 꼭 쥐고 그의 가슴을 때렸다. 정말 얄미워 죽겠어. 그렇게 여자 경험이 많은 티를 내야 겠냐구. 그녀는 분하고 억울해서 그를 때리며 울고 말 았다. 그녀는 오늘 그의 유혹을 일부러 모른체 받아 들였다. 그가 자신 때문에 욕구불만에 시달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밤 그녀는 자포자기 했는지도 모른다. 삼개월이 지나 그에게 버림 받더라도 추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싶었다. 그가 아닌 다른 남자가 자신의 인생에 존재 하는 것은 스스로도 용납 할 수 없었기에 잠시 동안 만이라도 그를 소유하고 싶었다. 그가 그녀를 갖고 나면 관심이 식어 버릴지도 모르는 위험 부담이 있기는 했지만 차라리 매 도 빨리 맞는 것이 났다는 생각에 일을 저질러 버렸다. 그런데 준호가 그녀를 비웃는 것만 같아 더욱 서럽게 울었다. "바보, 그런게 아니야. 난 정말 지연이가 날 질투해 줬으면 좋겠어. 그만큼 날 원하고 생각 하는 증거 잖아. 난 지금까지 여자 없이 수도승처럼 살아 왔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어.


하지만 지연이도 알다시피 여자관계가 깨끗하지는 못해. 그래도 이것만큼은 알아줘. 내게 지연만큼 순결하고 소중한 존재는 없었다는 걸, 앞으로 내 인생에 오직 여자는 지연 뿐이라는 걸." 비록 지금 이순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거짓말 일지라도 그녀는 준호의 말에 감격하고 기뻤다. 그를 때리던 주먹을 펴 그의 목을 끌어 안으며 흐느꼈다. 사랑해요, 너무 너무 사랑해요. 내 목숨보다 더. "자, 우리 울보 공주님 가실까요?" 그녀를 안아올려 거의 물을 다 받은 욕조로 옮긴 준호는 그녀를 안은채 욕조 안으로 몸을 담궜다. 지연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했다. 생각보다 다리 사이가 따가웠다. 그래도 한동안 그의 품에 안겨 따듯한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자 아픔이 옅어졌다. 잠시후 준호는 지연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성을 들여 씻어 주었다. 아니 온몸을 어루만졌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녀의 엉덩이에 발기한 그의 남성을 느끼며 준호의 의도를 깨닿고 소리죽여 웃었다. "어,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나는 데. 어디 보자. 뿔이 나온것도 같고..." 준호의 손이 엉큼하게 그녀의 엉덩이를 마구 주물렀다. "도저히 못참겠다." 결국 그는 그녀를 안아 올려 침실로 향했다. 그가 지연과 몇번이나 사랑을 나눴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지연은 자신의 귀를 깨무는 준호의 혀에 의해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기도 힘들어 감은 그대로 그에게 팔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잠꾸러기 공주님, 아침 드시와요." 쿡쿡거리는 웃음이 머리위에서 들려 왔다. 겨우 눈을 떠 보니 침대 위로 몸을 숙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목욕가운 사이로 근육질의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어젯밤 본 그리스신의 조각상 같던 그의 균형 잡힌 몸이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볼이 달아 올랐다. 거의 잠들 무렵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친듯이 그에게 반응했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의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키던 지연은 허벅지사이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얼굴을 찡그렸다. "많이 아파?" 대뜸 그의 표정이 변했다. 미안하고 걱정스러움이 뒤섞여 그녀를 응시했다. "색마!" 지연은 짧게 응수하며 침대에서 발을 내렸다. "얼마 안있으면 색마라서 고마울걸." 준호는 뻔뻔스럽게 웃으며 그녀를 잽싸게 안아 올려 응접실로 향했다. "오전에는 침대에서 푹 쉬어. 잠깐 나갔다 올게." 의자에 그녀를 앉혀준후 맞은편에 앉아 우유잔을 건넸다. "이게 뭐에요?" "우유. 먼저 마셔." 그녀의 건강을 챙기는 그의 행동에 웃음이 나왔지만 짐짓 투정 부리듯 마지못해 마시는 시 늉을 했다. 따듯한 빵에 딸기잼을 발라 주스잔과 함께 건네는 둥 준호는 그녀의 아침 시중을 열심히 들 었다. "어디 갈거에요?"


한입 베어 먹고 우물거리며 물었다. "뉴욕에서 유학중인 여동생이 있는데...잠깐 만나 보려고." 그의 대답에 지연은 흠칫 놀라 쳐다 보았다. 그녀의 반응을 의아심으로 해석한 준호는 마지못해 설명해 주었다. "사실은 배다른 동생이 둘 있어. 세살 밑에 인호라는 남동생과 여덟살 어린 인혜라는 여동생." 지연은 겨우 고개를 끄덕여 알았다는 표시를 했다. 그가 배다른 동생과 계모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있다고는 차마 말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칼한테도 들렸다 되도록 빨리 돌아 올게." 엄지손가락으로 지연의 입가에 묻은 잼을 닦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맛있게 빨며 말하는 그의 행동이 지연을 부끄럽게 했다. 아직까지 연인 같은 친숙한 행동이 어색하기만 했다. 식사를 거의 끝마칠 때 쯤 그녀 앞에 작은 케이스가 놓여졌다. 열린 케이스 안에는 어제 준호가 선물한 보석들과 한셋트인 반지가 담겨 있었다. 발코니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속에서 커다란 다이아몬드와 그주위를 촘촘히 감싼 루비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난, 거짓이라도 당신을 영원히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할 수는 없어. 그건 지연을 기만하는 일이니까. 함께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는 여느 평범한 부부처럼 다투고 서로의 마음에 상처입히고 실망하는 일도 있을 거야. 하지만...이것 하나만은 지연에게 약속할 수 있어."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하는 지연의 손을 꼭잡으며 너무나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잡은 이손을 죽을때까지 놓지 않을게. 그 어떤일에도 이 손만은 놓지 않고 끝까지 걸 어갈게." "정말 못됐어, 준호씨. 그렇게 말하면 내가 거절 할 수가 없잖아." 지연은 울멱이며 그를 나무랐다. 뜨거운 사랑의 고백도, 영원한 사랑의 약속도 없이. 그를 믿어 달라는 말한마디에 평생 그를 믿고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끼워 주세요." 그에게 왼손을 내미는 지연의 볼위로 눈물이 방울져 흘러 내렸다. 목숨보다 사랑하는 그에게 자신의 사랑과 조건없는 믿음을 그 왼손에 담아 건넸다. 그녀의 손을 잡고 반지를 끼워 주는 준호의 손도 가늘게 떨렸다. 약간은 상기된듯한 그는 몇번을 입을 열려다 포기하고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숙이더니 반지 를 낀 손가락에 뜨겁게 입맞추었다. 준호는 영원한 자신의 사랑을 맹세하는 의식을 경건히 마쳤다. 당신 몫까지 내가 사랑할게. 그러니 나를 떠나지만 말아줘 지연아, 제발.

제 10 장 이미 인혜가, 다니던 대학도 휴학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센트럴 파크 웨스트 블록에 위치한, 자신이 사준 아파트에서 엉뚱한 여자가 튀어나와 모른다를 연발하자 그의 분노는 폭발했다. "그래서 지난 이월 이후 인혜를 본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건가요?" 준호의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는 여자를 노려 보며 억양없는 단조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를 잘알고 있는 쥰이라면 바로 위험신호임을 알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인혜의 룸메이트라는 여자는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네, 정말이에요." "알았습니다." 말을 마친 준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폴더를 열고 저장된 번호를 눌렀다. "아, 오지사장? 나, 윤회장이오. 내가 인혜를 위해 산 다코타 하우스를 최대한 빨리 처분하 십시오. 더 이상 필요하지 않군요. 그리고 인헤의 짐은 서울로 부치도록 하십시오." 준호가 전화를 향해 지시를 내리는 동안, 여자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턱이 빠질 만큼 입을 벌렸다. "저...저...아파트를 파실건가요?" 자신도 모르게 덜덜 떨며 그녀가 물었다. "당연한거 아닙니까? 제 여동생도 없는데 제가 이 아파트를 뭣 때문에 놔두며 낭비합니까? 다음주 안으로 집을 비우도록 하십시오. 그동안 세도 없이 산 것을 생각하면... 하지만 인혜와 친한 친구라니 제가 참죠." 여자는 두손을 쥐어 틀 듯 비틀며 어쩔줄 몰라 했다. 졸지에 살던 곳에서 ?겨 나게 생긴 것 이다. 어디가서 이런 고급아파트를 구한단 말인가. 가난한 고학생인 그녀의 능력으로는 할렘가에서 집 구하기도 힘들었다. "저...제가...인혜에 대해 말해 주면..." 그녀는 간신히 침을 삼켰다. 친구를 배신하는 행동에 양심이 찔렸지만 어쨌든 절대로 말하 면 안된다는 그남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인혜의 큰오빠이니 당연히 알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변명했다. "말해봐요. 도움이 되는 정보면 학업을 마칠때까지 아파트를 공짜로 임대해 주겠소. 임대계약서도 작성해 주지, 사실을 말해 줬을 때." 여전히 감정이 없는 음성으로 그가 말했다. 차가운 표정에서 그의 생각을 읽기란 하늘에서 별따기 였다. 그녀는 준호가 얼마나 굉장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로보트 같이 뻣뻣한것은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인혜의 작은 오빠는 인간 다운 감정을 표현했다. 비록 터질듯한 분노였지만. "작은 오빠가 와서 데리고 갔어요." "누구?" 의외의 대답에 준호는 활처럼 눈썹을 치켜 올렸다. 놀라는 표정도 로보트같군 하고 여자는 생각했다. "윤인호씨라고 들었습니다. 사실은 인혜가 많이 아파서 그분께 연락했...." "언제지?" 그녀의 말을 차갑게 자르며 물어왔다. 평생 혼자 살 냉혈안 같으니라구. 진저리를 치며 대답했다. "두달전에." 지사장에게 다음주 안으로 임대계약서를 작성해 주라고 연락한 후 칼이 입원한 병원으로 향 하는 차안에서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쥰의 약간은 졸린듯한 음성이 흘러 나오자 그는 놀랐다. 한국이 아무리 일요일이라지만 아 직까지 침대에 있을 쥰이 아니었다. "설마 아직도 자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의 질문에 대답 대신 쿡쿡거리는 웃음이 흘러 나왔다.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쥰의 옆에서 뭐라고 쫑알대는 여자의 음성이 들리자 그는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자신 역시 인혜문제만 아니라면 지연과 함께 침대에 있었을 것이다. "인호가 인혜를 데리고 한국에 들어 간 것 같아."


"설마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다는 듯 그가 되물었다. "사실이야. 인혜가 어디 아픈가 본데...하여튼 둘을 찾아봐." "네. 알겠습니다. 그럼 화요일에 뵙겠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끝으려는 쥰을 막으며 말을 이었다. "지연에 대해 알아봤나?" 한동안 대답이 없자 전화가 끊어진줄 알았다. "죄송합니다, 아직." 눌린듯한 목소리가 이상했지만 마지못해 알았다고 대답한 후 폴더를 닫았다. 뭔가 이상했다. 뭘 숨기고 있는 거지, 쥰? 병실로 갔을 때 칼은 없었다. 물리치료실에 있다는 간호사의 안내로 찾아가 보니 죽기를 각 오한 사람처럼 치료를 받고 있었다. "마음 잡은거야?" 지친 그를 병실로 데려온 준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준호의 눈에는 그가 죽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보였다. 물리치료사 조차 말리는 것을 악착같이 하는 모습에서 그렇게 느꼈다. "그래. 왜? 아버지가 자네한테 설득하라고 시키던가?" 그답지 않게 잔뜩 꼬여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즐거움을 찾던 친구였는데...준호는 마음이 아팠다. "내일 돌아 가기 전에 한번 더 보고 싶어서 들린거야." "어제 같이 온 여자 사랑하지?" 준호의 말을 무시하고 대뜸 물어왔다. "그래, 사랑하고 있어. 곧 결혼 할거야." 그의 대답에 한동안 칼은 말이 없었다. 다른 생각에 잠긴 듯 고통의 빛이 역역했다. "두달전만 해도 자네 처럼 인생의 행복에 들떠 있었지." 갑자기 그의 손을 잡으며 칼이 경고했다. "여잘 믿지마. 믿으면 배신 당해." 그의 분노에 찬 말에도 준호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뭐라고 친구를 위로 하 겠는가. 그 역시 모래성을 쌓고 있는 지도 모르는데.

침대에서 빈둥거리던 지연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수화기를 들고 익숙한 번호를 누르며 제발 목숨만은 부지하길 바랬다. "너 배짱 좋다." 그녀의 목소리를 확인한 지성이 딱딱거렸다. 어지간히 화가 났나 보다. "미안해, 오빠. 이모랑 이모부도 화 많이 나셨지?" "그걸 말이라고해?" 벼락같이 터져 나오는 고함소리에 수화기를 귀에서 떼었다. 적색경보였다. 어���간해서 지성이 그녀에게 소리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못했어, 죽을 죄를 지었어." 지연은 싹싹 빌기 시작했다.


"그래, 우리 까놓고 얘기해 보자. 출장 갈수 있다고 쳐. 그럴수 있어. 직장 생활하려면 어쩔수 없지. 그런데, 그런데 말야. 왜 네가 출장간 것을 네 친구한테 들어야 하지? 그것도 기다리다 못해 걱정으로 모두들 바싹 타들어 가다 가다 네 집에 전화해서 들어야 하냔 말야!" 마지막 말을 마치며 경기를 일으키고 있을 지성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누가 배우 아니랄까봐. 지연은 입을 삐죽였다. "알아, 오빠. 그래서 정말 죽고 싶을 만큼 미안해 하고 있어." 그러나 어쩌랴. 잘못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는걸. 차라리 전화를 받은 사람이 이모나 이모부라면 이렇게 까지 난리를 치시지는 않으셨을 텐데. 자신의 운없음을 탓해야지 뭐. "어떻게 하면 우리 오빠 화 풀릴까? 응? 말만해 뭐든 할게." "회사 때려쳐." "뭐, 뭐라고?" 단호한 지성의 말에 지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장난이 아닌가 보다. "너, 회사 들어간다고 했을 때부터 마음에 안들었어. 당장 때려 치우고 공부나 더해." "말도 안돼!" "싫어? 그럼 영화배우 될래? 너 영화 찍는 다고 하면 우리 아버지 덩실 덩실 어깨춤이라도 추실텐데...그럼 그러던가." "이러지마, 오빠. 사실은..." 좀더 있다가 준호의 감정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면 말하려고 했는데. 에고 에고 내 팔자야. "사실은 뭐?" "저...오빠가 그만 두지 말라고 해도 조만간 그만 둘거야." "그래?" 미심쩍다는 듯 그가 코방귀를 꼈다. "정말이야...나 결혼하거든." "뭐...뭐라고?" 수화기 너머 발작을 일으킨 지성을 느낄수 있었다. 곁에서 이모인듯한 사람과 수화기를 놓고 싸우는 소리마저 들려 왔다. "어떤 놈이야? 죽여 버릴거야! 어떤 놈이 우리 순진한 공주를 꾀어서 못된짓을 한거냐구?" 절규에 가까운 울부짖음을 들으며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왕자님의 이미지가 팍팍 깨지고 있다구요. "나이는 서른이고..." "영감 같은 놈이 널 꼬셨단 말야?" 지연의 말을 막으며 지성이 또다시 소리치자 이모의 놀라는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모친을 진정 시키려는 지성의 대답에 서른살이 왜 영감이냐며 나무라는 이모의 음성 또한 전해져왔다. "나이는 서른이고...그리고 또? 뭐하는 놈이야?" "오빠도 아는 사람이야." 결국 그녀는 항복했다. "내가 아는 누구?" 나한테 죽었다라고 중얼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만난적은 없어. 그게...전에...내가...말했던...사람 있잖아..." 말을 질질 끌며 지연이 머뭇거리자 지성이 괴성에 가까운 비명을 질러댔다. "설마, 한영그룹 윤준호?" 언젠가 최희준을 떼어내기 위해 지성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준호에 대해 털어 놓았었다.


사실을 알때까지 도와 주지 않겠다는 협박에 못이겨 준호에 대한 연정을 말하고 말았던 것 이다. "네가 한영그룹 비서실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설마 했다." 한숨 섞인 음성으로 조금은 가라앉은 지성이 어이없어 했다. "그놈하고 같이 간거야, 뉴욕에?" "응. 사실은 오늘 청혼받았어. 난 승낙했구." "잘했다, 잘했어. 나도 모르겠다. 끝는다." "오빠?" 허탈해 하는 지성에게 미안함을 느낀 그녀는 애타게 불렀다. "왜? 어차피 네맘대로 할거잖아." 지성은 심통이 잔뜩 났다. "미안해, 정말." "돌아오는대로 보자. 어머니가 몸조심하래. 바꿔달라시는데 내가 안바꿔 줄거야." "네, 돌아가서 찾아 뵐께요."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 놓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불길은 진정된듯 싶었다. 물론 그때까지는 지성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지 몰랐을 때였다. "언제왔어요?" 침실문앞에 장승처럼 서있는 준호를 발견한 그녀는 반색했다. 한나절 동안 이지만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새삼 잘생긴 그의 모습에 가슴을 설레며 침대에서 내려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그의 가슴에 매달리며 어리광을 부렸다. "미안. 그동안 많이 쉬었어?" 격렬한 질투심을 간신히 숨긴 준호는 미소지어 보였다. "충분히 쉬었어요." 애교 있게 대답하는 지연에게 키스하며 불안한 마음을 털어 버렸다. 어쨌든 지연은 그놈한테 전화해서 결혼한다고 말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한번은 만나서 해결을 봐야 할거라고 이해하려 했지만 그놈과의 만남을 약속한 지연에게 원망스런 마음이 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소유의 몸짓으로 지연을 안았다. 그녀에게 낙인이라도 찍듯 그렇게 그녀를 가졌다. 오후 한나절은 지연에게 최고의 하루였다. 준호는 훌륭한 가이드였다. 시간이 얼마 없어 많은 곳을 가보지는 못했지만 준호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행복했다. 자유의 여신상을 비롯하여 박물관과 미술관등을 둘러 본후 차이나 타운에서 저녁을 먹고 재즈클럽에 들려 연주를 들었다. 호텔로 돌아와 서로의 욕망을 자극하는 샤워를 함께하고 사랑을 나누다 새벽녁에야 잠이 들 었다. 비행기 예약이 오후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두사람은 아침 나절을 한껏 게으름 피우며 침대에서 뒹굴었다. 준호는 지연의 걱정과는 달리 그녀에 대한 욕망이 사그러들 줄을 몰랐다. 몇번씩이나 그녀를 가지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그를 보며 적잖이 안도하는 그녀였다. 금방이라도 실증을 느끼고 청혼을 취소할까봐 조마조마 했던 것이다. 지금 상태로라면 그와의 이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녀를 사랑하지는 않아도 그가 자신을 많이 좋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욕심을 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결혼해서 함께 아이를 낳고 기르며 살다 보면


언젠가 그도 그녀를 사랑해 줄것이다. 늦은 아침겸 점심을 먹은후 짐을 꾸리고 비행기 시간이 넉넉하게 남자 두사람은 잠시 낮잠 을 즐겼다. 준호의 팔을 베고 품에 꼭 안겨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에 원을 그리며 장난을 쳤다. 군살이 하나도 없는 근육질의 날씬한 몸매의 준호를 보는 것은 여전히 조금은 부끄러웠지만 볼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깼어요?" 준호가 그녀의 손을 잡아 손가락을 깨물자 눈을 맞추며 웃었다. "준호씨 몸은 운동선수보다 더 좋은 거 같아요." 다른손으로 조금은 용기를 가지고 그의 몸을 쓸어 내리며 속삭였다. "칭찬 받으니 기분 좋은데?" 그녀의 목덜미를 깨물며 그가 기분좋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빨리 결혼하자. 지연이랑 떨어져 있기 싫어." "그래요." 이번에는 그녀도 순순히 승낙했다. "이달안으로 약혼식 올리고 다음달에 결혼하자." "킥킥...그건 무리라구요, 준호씨." "왜? 여자들은 모두 오월의 신부가 되고 싶어 하는 거 아니었어?" 그는 목덜미에서 가슴으로 옮겨가며 말했다. "음...한달반안에 결혼식 준비를 마치는 것은 무리라구요. 더구나 약혼식까지 치뤄야 하는데..." "잘생각해봐...할수 있을 거야." 그는 그녀의 가슴을 잘근잘근 씹으며 열심히 그녀를 설득했다. 그가 그녀의 몸안으로 밀고 들어올때 쯤에는 지연도 어떻게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에 사 로잡혀 승낙하고 말았다.

미국으로 출장갔을때는 하루를 벌었다고 즐거워했던 지연은 졸지에 월요일을 잃어버리고 화 요일을 맞이하고 말았다. 여전히 비행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잠을 설친 지연은 다음날이 식목일로 공휴일이자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형이 왠일이야?" 쥰이 공항까지 마중을 나온 것을 보고 그는 놀랐다는 듯 물었다. "그냥 제가 나오고 싶어서 기사는 퇴근 시켰습니다." 두사람의 가방을 트렁크에 실고 운전대를 잡은 쥰이 먼저 지연의 아파트로 차를 몰았다. 그녀의 집에 도착했을때는 밤 열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너무 늦었어요, 그냥 가세요." 아파트 열쇠를 찾아 손에쥔 지연이 그에게 말했다. "미정이도 자고 있을거에요. 열시면 잠자리에 들거든요." "푹쉬도록 해요. 이따 전화 할게." 쥰을 차에서 기다리도록 하고 손수 짐을 옮겨 준 준호는 뜨겁게 작별키스를 퍼붇고는 가버 렸다. 잠시동안 입술에 손을 대고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만 바라보았다. 뉴욕에서 처럼 함께 있을수 없다는 것이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듯한 상실감마저 느꼈다. 그런 심정은 준호가 더했다. 그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차에 돌아 왔다. 쥰의 옆, 조수석에 오른 그는 출발하자고 신호했다. "목적은 달성한 것 같군요." 물음이 아니라 단정이었다. 무슨 소리냐는 듯 준호가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지만 전방에 시선을 고정하고 계속 말을 이 었다. "한지연씨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범상치 않아서요." 날카로운 쥰이 반지를 놓칠리가 없었다. 단순한 선물이라고 보기에는 워낙 고가의 물건이었 으니까. 그의 추측은 진실에 근접해 있었다. "결혼 승낙 받으셨나 보죠?" "물론. 형처럼 미련하게 질질 끌까봐?" 쥰의 뼈아픈 현실을 꼬집어 말하는 준호를 잠시-아주 잠깐-노려 보았다. "지연씨 남자는 정리했나 보죠?" 그렇다고 기죽을 쥰이 아니었다. 치사하게 약점을 공격한단 말이지. 나역시 왕치사로 나가 주겠어. "무슨 남자?" 준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되물었다. "그왜 있잖습니까...영화배우뺨치는 외모의 재벌 2 세라는...한지연씨 정혼자라는..." 질질 말을 끌며 약을 올렸다. 물론 조사를 통해 그 남자가 한지연의 외사촌오빠인 진짜 영화배우인 정지성임을 알고 있었 지만 절대로 가르쳐줄 생각이 없었다. 생각보다 한지연의 배경이 만만치 않았다. 이모가 그 유명한 대여배우인 나하연이었고 이모부는 영화감독인 정한우였다. 그들을 빼고 한국영화사를 말할수 없을 만큼 두사람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단한 인 물들이었다. 또한 외사촌오빠인 정지성은 헐리우드까지 진출해서 이번에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까지 올랐다가 안타깝게 상을 받지 못했지만 그가 뛰어난 재능의 배우임은 그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연적이 진짜 영화배우에다 그가 진짜 재벌 뺨칠만큼 부자라는 사실을 알면 길길이 날뛰겠지. 생각만 해도 즐거워졌다. 오늘 점심을 함께한 정지성은 쥰의 마음에 쏙드는 성격의 소유자 였다. 거칠고 대담하고 뻔뻔한 것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만난지 십분도 안되어 둘은 죽이 맞아 작전을 짰다. 일명 윤준호 골탕먹이기. 정말 마음에 쏙 들지 뭐야. "그런놈 없어, 지연이한텐." 이를 악물고 대답하는 준호를 보며 다시 한번 속으로 고소를 금치 못했다. 어쨌든 결혼을 결심할 만큼 한지연을 사랑하는 것을 보니 정말 기분좋았다. "이달 안으로 약혼식 올리고 다음달에 결혼할거니까, 그렇게 알고 준비해줘." 쥰이 싱글벙글 하던가 말던가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말만 하는 준호였다. 빨리 결혼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려야지. 재수없는 놈이 끼어들어서 일을 망치기 전에. 지연을 이미 가진 준호였지만 여전히 자신없었다.


집안에 들어서던 지연은 지성이 대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놀랐다. 마치 저승사자같이 그녀를 끌고 가기위해 기다리는 중이었다. "오빠? 이시간에 어떻게?" "너 데려가려고 왔다." 긴다리를 청바지로 감싼 지성은 쇼파에 비스듬이 기대고 앉아 TV 를 시청하고 있었는데, 스 물다섯 이라는 나이에 비해 훨씬 어리고 섹시해 보였다. 목덜미를 살짝 덮는 약간 긴스타일의 머리형도 아주 잘 어울렸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가 조각 같은 잘생긴 얼굴을 돋보이게 했다. 미정이 곁에서 시중을 들며 황송해하는 모습도 보였다. 미인은 잠꾸러기라며? 죽어도 열시에는 잠자리에 들던 기지배가 아직도 일어나 있다니 짝사랑의 위대함 마저 느꼈다. 저러다 침까지 흘리겠네. 침이나 닦아, 지지배야. "이시간에 언제 갔다와?" 슈트케이스를 자신의 침실에 집어 넣으며 반대했다. "자고 오면 되잖아." 자리에서 일어나 어슬렁 그녀옆에 걸어와 서며 말하는 것이었다. "싫어, 피곤하단 말야. 내일 갈게." "너 많이 컸다. 네가 지은죄가 있는데..." 지성은 악마같이 잔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든 여자들이 동경해 마지 않는 아름다운 눈동자를 빛내며 그녀를 바라보자 속으로 겁이 났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저렇게 눈을 빛낼때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머니랑 이모부도 널 빨리 보고 싶어 하셔. 빨랑 짐꾸려라. 아, 내일모레 바로 출근할수 있도록 옷도 챙겨." "말도 안돼!" "말돼. 아, 그러고 보니 옷은 안챙겨도 되겠다. 어머니가 네옷을 잔뜩 사오셨거든. 그냥 가자." 지연은 도움을 청하듯 미정을 보았지만 비겁한 친구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해버리는 것이 었다. 결국, 그녀는 지성에게 팔을 붙잡혀 질질 끌려갔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준호는 약속대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신호가 가도 지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연이 집에 없고 그 친구인 미정이 잠에 빠져 전화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준 호는 피곤한 그녀가 잠이 들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실망감에 맥이 빠진 그는 킹사이즈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호텔의 특실에 있을때도 외로운 것을 몰랐는데 오늘 따라 자신의 침실이 너무 크게 느껴졌 다. 그녀가 곁에 없다는 하나 만으로 이렇게 느끼는 것이다. 어차피 결혼할 거 동거부터 해버릴까. 다음날 일찍 일어난 준호는 또다시 수화기를 들었지만 지연이 아닌 미정이 받았다. "어머, 준호씨? 출장은 잘 다녀오셨어요?" "덕분에 잘 갔다왔습니다. 저, 지연이는 아직 자나요?" 보약이라도 먹여야지 몸이 약해서야. "지연이 없는데요."


느닷없는 답변에 준호는 한동안 멍하니 수화기만 바라보았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어딜갔단 말인가. "어디 잠깐 나갔습니까?" 기대감을 갖고 물어 보는 그를 미정이 무참하게 만들었다. "아뇨. 어제 이모네집에 갔어요." "그 늦은 시간에요?" "네. 소환명령받고 불려 갔거든요. 지연이가 엄청 큰 잘못을 저질렀거든요...준호씨도 알다시피..." 미정은 지연이 내일 이모네서 바로 회사로 출근할 거라고 친절히 일러 주었다.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 놓으며 그는 불안에 사로 잡혔다. 큰 잘못을 저질렀다니...그리고 내가 알다니...혹시...지연의 정혼자라는 남자를 이모가 정해준걸까. 그래서 지연이 자신과 결혼한다는 소식에 화를 내시는 걸까. 만약...그렇다면...지연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부모님도 없는 지연에게 이모라면 가장 큰 어른이며 소���한 가족일것이다. 그녀가 이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자신과의 결혼 약속을 지킬것인가. 너무나 불안한 준호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행히 지연이 오후에 그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그럼 하루 더 자고 내일 바로 출근할건가?" 차마 왜 불려 갔는지는 꺼내지도 못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만 나누다 겨우 물었다. "네, 그래야 할 것 같아요."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아. 그냥 지금 오면 안될까? 내가 데리러 갈게." 그는 성마르게 물어 보았다. 제발 그런다고 해줘, 제발. "저도 준호씨 보고 싶어요. 하지만...안될것 같아요. 이모님이 화가 많이 나셨거든요." "우리 결혼이야기 했어?" 긴장한 준호는 간신히 물어 보았다. "네. 준호씨 뵙고 싶어 하세요." "빨리 날 잡아 인사드리러 가지." 지연의 말에 다급히 대답했다. 자신을 보고 싶어 한다니 한줄기 희망이 보였다. "그렇게 말씀 드릴께요. 그럼 내일 뵈요." "그래..지연...아무것도 아니야, 내일봐." 할말을 삼키고 머뭇거리던 준호는 끊어진 전화기에 대고 속삭였다. -사랑해, 지연. -사랑해요, 준호씨. 지연은 멍하니 수화기를 바라 보았다. 그에게 사랑 고백할 수 있는 날이 과연 올까 싶었다.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면 부담스러워 할까봐 차마 고백할 수조차 없었다. "보기 흉하다 그만 정신좀 차려라." 혀를 차며 지성이 지연의 손에서 수화기를 빼앗아 내려 놓았다. "그렇게 그놈이 좋으냐?" "말좀 가려서 해. 성이 넌 머잖아 매제될 사람한테 무슨 말버릇이니?" 오십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삼십대 못지 않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뽐내며 나하연이 과일 접시가 담긴 쟁반을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 그 뒤를 이모부 정한우가 찻잔이 담긴 쟁반을 들고 뒤따랐다. 소문난 공처가인 이모부는 이모보다 열두살이나 많았지만 이모와 마찬가지로 젊고 건강하셔 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셨다. 그가 세계 유명 영화제에서 받은 상들만 해도 엄청날 것이다. "아직 결혼한것도 아니잖아요." 툴툴거리며 나하연이 내려 놓는 과일 접시로 손을 뻗어 집어 들고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연이얘길 어디로 들은거야? 이달안에 약혼하고 다음달에 결혼한다잖 아. 그리고 연이 말대로라면 흠잡을대 없는 신랑감이구만 성이넌 뭐가 못마땅해서 그래?" 스물다섯이나 먹은 세계적인 스타 정지성을 세살먹은 아이 취급할 수 있는 사람은 이모뿐이 리라. 지연은 이모부를 도와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 놓으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당연하잖아. 저놈 시스터 콤플렉슨데 순순히 찬성하겠어?" 정한우는 아내곁에 앉아 나하연의 허리로 팔을 감아 끌어 당기며 말했다. 지연은 이모부 내외가 서로를 꼭 끌어 안고 차를 마시는 모습을 덤덤히 바라보았다. 이집에서 이런 모습은 늘상 있는 일이었다. 이모부와 이모는 서로를 끔찍히 사랑하고 있었고 세기적인 로맨스라는 이름에 걸맞게 서로의 애정을 항상 과시하고 다녔다. "그만좀 하세요, 다 늙어서 뭐하시는 거에요?" 그래도 적응이 안되는 사람도 있나 보다. 지성오빠는 부모의 애정 표현을 끔찍해 했다. 지연이 보기에는 짝없는 외기러기의 심술로 보였지만. "조금 서운하구나, 연아. 이제 스물셋인데...좀더 즐기다가 갔으면 좋을텐데..." 나하연은 아들의 투정은 들은척도 하지 않고 지연에게 염려스런 시선을 던졌다. "이모 심정은 저도 잘 알아요. 그런데...이모...전 준호씰 정말 사랑해요. 이모가 이모부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해해 주세요." "그렇게 말한다면 할말이 없지만...난 네가 엄마를 잃은 슬픔에 성급히 결정은 한건 아닐까 싶구나." "쉿, 하연. 연이도 다큰 성인이야.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있다구. 연이의 결정을 존중해 주자구." 언제나 처럼 정한우의 한마디에 이야기는 끝났다. "그런데 넌 나한테 위로도 안하냐?" 자신의 과일 접시를 비운 지성은 연이의 몫을 집어 들어 입으로 가져 갔다. "오빠를 위해서 이번에 상을 안받길 잘했지뭐." "뭐? 뭐라구? 너 그걸 말이라구..." "당연하지. 오빤 이번에 상 받았으면 자기가 너무 잘난 줄 알고 기고 만장했을 거야. 하지만 이번에 상을 받지 못했으니...약이 올라서 더 열심히 노력할걸. 안그래요, 이모부?" "그래, 우리 연이 말이 맞다. 성이 너 욕심 버리고 몇 년간 더 노력해야 할거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 법이야." "도대체 이집에 내편은 하나도 없어." 말과 달리 지성은 이번일로 상처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수있었다. 만약 상을 받았다면 오히려 큰일이 났을 것이다. 권태기에 접어든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알수 없었다. 혹시 알아 은퇴한다고 난리쳐서 사람들을 심장마비로 쓰러지게 만들지. 팬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잘된일이었다. "우리 연이 약혼반지 좀 보자." 나하연은 소녀 같은 호들갑스럼으로 지연의 손을 잡아 끌었다. "어머, 정말 아름답구나. 네 약혼자가 안목이 높구나." 그녀의 반지를 살피며 나하연은 감탄을 늘어 놓았다. 좀 연극적인 감이 없잖아 있었다. "당연히 그정도는 해야지요, 아니 그보다 더한걸 지연이 한테 해줘도 된다구요, 그놈...아니 윤준호는" 모친의 매서운 눈초리에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사실은 목걸이, 귀걸이, 팔찌랑 한셋트에요." 지성의 트집으로부터 준호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에 털어 놓았다. "세상에! 굉장하구나, 연이야. 네약혼자가 널 정말 많이 사랑하나 보다." 나하연은 나직히 탄성을 질렀다. 이모의 눈에 부러움이 어리자 저윽이 당황스러웠다. "보석으로 사랑을 측정하나요, 뭘." 지성이 불만스럽게 쏘아 부쳤다.


"할 수도 있지. 날 너무 사랑한다는 그 누구는 너무 비싸서 안된다고 했거든." 그제서야 이모부의 불편한 얼굴이 눈에 들어 왔다. 이모의 째려보는 시선에 어쩔줄 몰라하 고 있었다. "그래도...너무 비싸잖아...몇억씩하는 걸 어떻게..."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아내의 눈빛에 말을 흐리며 엉거주춤 일어 섰다. "아, 일이 있는 걸 잊었네." 하며 총총히 서재로 사라져 버리는 소심한 정한우감독이었다. "설마...이모...이게 그렇게 비싸요?" 지연은 미심적은 시선을 반지와 이모에게 번갈아 보냈다. "사실은 헐리우드에 있을 때 내가 봐둔 거랑 똑같거든. 그거 티파니에서 샀지?" "네. 같이 가서 샀어요." 그때는 반지까지 산줄도 모르고 있었고 다른 물건들-지성오빠가 사준 머리핀의 가격에-놀 라고 있었으므로 정확한 가격은 몰랐었다. 어쩐지 사장과 준호가 가격표시를 안보여 주더라니. "거봐. 내가 너무 예뻐서 네 이모부를 졸랐는데...너무 비싸다고 딱잘라 거절하는 거야." "엄마가 사시지 그러셨어요." 별거 갖고 그런다는 듯 지성이 대꾸했다. "이런 물건을 내가 어떻게 직접 사니. 선물 받아야지." "제가 사드릴 께요." "이젠 됐다. 연이랑 같은 거 할일 없으니." 이모는 아쉬움을 감추고 딱잘라 거절했다. "그럼 아버지는 왜 서재로 몰아 내셨어요?" "내가 몰아 냈어? 당신이 일 있으시다고 직접 들어 가셨잖아." "그런데...이모.." "왜?" 아들과 토닥거리는 이모에게 지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거 잃어 버리면 어떻게 해요?" 자신의 여행가방에서 잠자고 있을 보석케이스가 생각나자 눈앞이 아찔해 졌다. "괜찮아. 아마, 보험에 들어 놨을거야, 윤준호라면." "어떻게 그렇게 잘알아?" "그야 당연히 나도 그랬으니까. 물건 구입하면서 바로 보험에 들도록 한다구, 티파니에서." "그럼 이머리핀도 보험 들었어요?" "물론이지. 그게 얼마나 비싼건데. 내가 네 졸업선물 겸 생일 선물로 큰맘먹고..." "오빠!" 멋모르고 사실을 실토한 지성은 그뒤 한시간을 손톱을 잔뜩 세운 마녀한테 쫒겨 다녀야 했다. "야, 너 내가 말만 하면 뭐든지 들어 준다고 했지?" 잠을 자기 위해 자신의-이모집에는 그녀만의 침실이 있었다.-방에서 침대를 정리하고 있는데 지성이 어슬렁거리며 들어 왔다. 절도 있게 걷는 준호와는 달리 지성은 초원의 배부른 사자같이 걸어다녔다. "무슨?" "너 살려 달라고 빌며 약속하더니 그새 잊었어?" 잊어 버려도 좋은 것은 꼭 기억한다니까. "뭔데?" 지연은 새침하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물어 보았다. 준호랑 결혼하지 말란 말만 해봐. "너 당분간 나랑 사촌지간인거 비밀이다."


뜻밖의 말에 집어 들던 베개를 떨어 뜨렸다. "왜?" "이유는 묻지 말고. 네 약혼자 윤준호한테도 비밀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하면 안돼." "언제까지?" 도대체 무슨 꿍꿍인 걸까. 지연은 왠지 불안해 졌다. 자신을 골탕먹이려고 하는 건 알겠는데. "몇일만. 그래, 이번주만. 그정도면 충분하겠다." 오늘이 수요일. 오늘도 다 갔으니 나흘만 약속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좋아." "대신 너 약속을 어기면 알지?" 지성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겁을 주었다.

제 11 장 "외무부로부터 이런 내용의 협조 공문이 왔는데...어떻게 처리할까요?" 관리실장이 조심스럽게 사장을 바라 보았다. 젊은 사장이 두렵기 그지 없다는 표정이 역역 했다. 길고 힘있어 보이는 손가락들 사이로 서류가 들려 졌다. 내용을 읽어 보는 잘생긴 비웃음이 떠오른것 같았다. "윤인호와 윤인혜라는 사람들이 오피스텔을 임대하고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관리실장에게 묻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사람 없다고 해요. 그만 나가 봐요." 사장이 손짓을 하며 신호를 보내자 관리실장은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서재를 나갔다. 그는 커다란 응접실을 가로 질러 현관을 향하며 애써 인공 정원을 향해 열려 있는 응접실 유리문을 무시했다. 대저택을 연상시킬만큼 화려하게 꾸며진 정원에는 아마도 그 아가씨가 있을 빛을 잃은 슬픈 초점 없는 눈동자의 날개 잃은 천사가. 몇일전 아무것도 모르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가 사장에게 죽는 줄 알았다. 여자를 보호하는 태도는 비정상적이었다. 상처입은 맹수 같은 뭔가가 느껴져 두려웠던 그였다. 그뒤 그는 이곳에 일이 있어도 주위로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현관까지 닿는 거리가 너무도 멀게 느껴졌지만 간신히 그곳을 벗어나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었다. 그제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것이다. 사장의 올라올

세이치 쥰 짓이군. 관리실장이 서재문을 닫고 사라지자 다시 시선을 한장의 얄팍한 종이로 보냈다. 그라면 외무부 힘을 빌리는 것쯤 아무것도 아닐테지. 뭐라고 둘러 대며 자신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을까. 아니, 그냥 명령 한마디면 충분할지도 모르지. 그는 일본 왕실도 함부로 못한다는 세이치가 사람이니까. 그나 저나 어쩐다. 아무래도 인혜를 데리고 있는 것까지 알아 버린듯 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인혜까지 찾는 것을 보면. 형 앞에 모습을 한번쯤 보일 필요가 있을 지도 몰랐다. 자신과 인혜 찾기전까진 계속해서 사람들을 풀 테니까. 물론 두사람이 보고 싶거나 걱정되서 이런 짓을 하진 않으리라. 어머니 때문이겠지. 어머니를 상대하느니 우릴 찾아 주고 말자 하는 심정일 거라고 그는 단정지었다.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즐기면서 웃어 줄텐데. 서재의 커다란 창문으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25 층 아래로 넓은 도로와 차의 행렬, 그리고 멀리 한강의 모습도 보인다.


IMF 로 달러가 폭등할 때 부지를 사서 건물을 짓기 시작해서 지난 늦가을 준공이 끝난 자신 소유의 오피스텔 빌딩은 그에게 무한한 만족감을 주었다. 그 자신만의 힘으로 소유한 첫 재산이니까. "오빠?" 연약한 음성이 들려오자 그의 표정이 변했다. 한없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우리 인혜 배고프구나." "응. 그런데..." "왜? 어서 말해봐. 우리 인혜 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 "우리 아기도 우유 줘야해." 순간 서글픔이 그의 얼굴에 서렸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억지로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혜는 기다란 베개 하나를 가슴에 안고 습관처럼 토닥이고 있었다. "그럼. 아기 한테도 우유 줄게. 자, 이리와." 그녀의 손을 꼭잡고 주방으로 향했다. 죽여 저리고 말겠어, 내동생을 저렇게 만든 놈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두달전 연락을 받고 찾아간 곳에서 죽음의 문턱에 서있는 인혜를 보았다. 그가 돈버는데만 미쳐있지 않았어도 인혜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니 차라리 죽고만 싶었다. 임신 오개월로 접어든 여동생은 뺑소니사고로 태아는 물로 자신의 목숨까지도 위험한 상태였다. 수술을 받아야 했지만 환자가 완강히 거부를 하고 있어 의료진도 난감해 하고 있었다. 인호는 자신이 직접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했고 엄마가 수술을 받는 동안 뱃속에 있던 태아 는 견디지 못하고 유산되고 말았다. 그가 여동생의 뱃속에 있던 조카를 죽여도 좋다고 허락한거나 다름없었다. 마취에서 깨어난 인혜는 아기가 유산된 것을 알고 미쳐버렸다. 덕분에 정신과 치료까지 받 아야 했지만. 또다시 선택을 한다 하더라도 그는 여동생을 살릴 것이다. 어느놈의 자식인지도 모를 아기를 위해 여동생이 죽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 볼수는 없으니까. 형이 사준 아파트에 같이 살던 한국인 친구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몇 달전부터 인혜가 그남자와 함께 살기 위해 집을 비웠고 가끔 들려 우편물과 자동응답기 내용을 챙겼다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인혜는 친구에게 조차 남자에 대해 밝히지 않았고 무척 조심스러웠다고 한다. 혹시 질이 안좋은 놈한테 걸린거 아냐. 여동생을 식탁에 앉힌후 음식을 차려주고 우유병도 챙겨 주었다. 베게속 솜이 전부 그 우유를 흡수 할테지. 그러면 똑 같은 베개로 바꿔치기 해서 빨아야 한다. 그러기를 한달이 넘게 하고 있었다. 여동생은 자신이 아기를 낳았다고 생각했다. 우습게도 베개가 인혜의 아기였다. 잠깐이라도 베개가 없어지기만 해도 난리가 났으므로 인호나 일하는 아주머니나 무척 주의를 해야 했다. "우리 아기 예쁘지, 오빠?" 자신을 보며 헤맑게 웃는 모습을 보며 그는 결심을 했다. 어떻게 해서든 여동생을 정상으로 만들어야 했다. 더 이상 부모님이나 형을 속이고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중학교때 친구인 양진우를 떠올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던 그로서는-사실 폭력배와 어울리느라 변변한 친구가 없었다-중학교 시절 친했던 친구 몇 명이 전부였다. 그중 진우와는 꾸준히 연락을 취해오며 우정을 쌓아왔다. 올해부터는 중학교 동창들 모임에도 참석하기로 그���게 약속까지 해주었다. 인호가 한국에 완전히 들어 온 것을 제일 기뻐한 놈도 바로 진우였다. 양진우는 현재 정신과의사였다. 얼마전 찾아와 인혜의 상태를 본 그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 이 최면을 이용한 심리치료였다. 개업한 선배중에 그쪽으로 뛰어난 의사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궁지에 몰린 인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검증되지 않는 치료방법이지만 시도해 볼 수 밖에.


일주일만에 출근하여 미례와 비서실장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업무준비를 하려는데, 비서실문이 요란하게 열리고 서은경이 뛰어 들어왔다. 홍보실이 있는 이십오층부터 뛰어 올라 온듯 헝클어진 머리에 땀으로 화장까지 지워지고 있는 그녀의 한손에는 신문이 구겨져 있었다. "지연씨 이기사 사실이야?" 약혼자 민석이나 미례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고 곧장 지연에게 손에든 신문을 흔들며 대뜸 물어왔다. "네? 무슨 기사요?" 설마 준호와 약혼한다는 이야기가 벌써 매스컴에 실린 것은 아닐테지. "사실이구나." 지연의 왼손에서 찬란히 빛나는 반지를 정신나간 표정으로 바라보며 스스로 단정지어 말했다. "무슨일이야?" "왜 그래요, 선배?" 민석과 미례가 그녀를 에워싸며 물어 왔다. "글쎄...정지성하고...한지연씨가 특별한 사이라고....오늘 아침 기사에..." 아직도 얼이 빠져 있는 은경은 미례가 자신의 손에서 신문을 꺼내 가도 몰랐다. 그저 이럴수가 이럴수는 없어를 중얼 거리다 약혼녀의 상태가 걱정된 민석에 의해 의자에 앉혀 졌다. "그럼 지연씨 정혼자가 정지성이란 말야?" 미례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자신이 기사를 읽고 신문에 실린 두사람이 다정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지연의 친구가 거짓말을 했구나. 그녀의 머리에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쳤다.그럼 우리 회장님은 어떻게 되는 거지? 준호는 쥰과 오전에 한영종합금융에 들렸다 출근할 예정으로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지연은 미례의 말에 깜짝 놀라 신문을 받아 들고 읽어 보았다. 뉴욕에서 돌아오던날 데리러온 지성을 따라 이모집에 들어 가는 두사람의 모습이 실려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가며 오빠의 농담에 웃던일도 생각났다. 정한우감독과 나하연여사의 허락도 받은 사이라고 기자는 쓰고 있었다. 열한시가 넘은 시간에 그의 집을 방문한 것을 두고 꼬집어 말하고 있었다. 지연이 그뒤 몇시에 집에 돌아갔는지는 기자도 알 수가 없다고 친절하게 덧붙이기까지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녀가 한영그룹회장 비서실에서 일하는 미모의 재원이라고까지 소개하고 있었다. 지연은 기가 막혀 할말을 잊었다. 지성오빠의 속셈이 뭔지는 알수가 없었지만 최소한 이기사가 그의 생각이라는 것은 짐작했다. 지성오빠 성격을 잘아는 매스컴관계자라면 그의 허락없이 이런 추측성기사를 쓰지 못한다. 만약 그런 대역무도한 짓을 저지른 사람은 귀향을 가거나 심하면 사형이었다. "지연씨 사실이야?" 미례는 충격으로 떨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하고 물어보았다. "당연히 아니지요. 말도 안되요. 지성오빠는 그저...저...그러니까..." 왜 그런 약속을 해가지고 내가 이런 고생을 사서 하냐구. 그냥 외사촌간이라고 말하면 간단 할 일을. "전 따로 결혼할 사람 있어요. 당연히 지성오빠는 아니구요." 결국 진실로 해결보았다. 어쨌든 그녀는 준호와 결혼을 약속했으니까. 이 반지가 그 증거잖아. "그럼... 그 반지는?" 겨우 마음을 가라 앉힌 은경이 의자에서 일어나 지연에게 다가가 물어 왔다. 지연은 은경이 지성오빠의 팬클럽회원이라는데 목숨도 걸수 있었다. 혹시...미례 언니도?


"결혼할 사람한테서 받은거죠." "그러니까 그 상대가 누군데?" 미례까지 끈질기게 달라 붙어 물어 왔다. 이걸 어째...준호오빠는 왜 오늘 따라 늦는 거야. 내가 폭탄선언을 해도 되는 거냐구. 설마 이야기 했다고 화를 내진 않겠지. "정말 정지성아냐?"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왜 누군지 말못해?" 민석은 지연이 너무나 불쌍해 졌다. 은경과 미례가 덤빌듯이 물어 오는 바람에 지연은 앉아 있는 의자속으로 들어가 버릴것만 같았다. "준호씨요." 결국 모깃소리만한 소리로 지연이 실토했다. 은경과 미례, 민석까지 그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누...누구?" 제일 먼저 이성을 찾은 은경이 다시 확인했다. 그래 이름이 같은 다른 사람일거야. "윤준호 회장님이요." 한번 말하고 나자 지연은 두려움이 사라졌다.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누가 어쩔거냐는 마음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니까...지연씨가 말하는 그 윤준호회장님이 우리 회장님 맞아?" 은경은 재차 다시 확인했다. "네. 그렇다구요." 은경은 자신의 약혼자의 손등을 꼬집어 보았다. 비명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서 꿈은 아니듯 싶었다. "그래? 그럼 난 가서 일볼께요." 은경은 자신에게 투덜대는 약혼자를 보지도 않고 비틀거리며 비서실을 나갔다. 민석이 걱정되는지 뒤따라 나가자 마자 누군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도 들려왔다. "괜찮으세요?" 지연은 여전히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는 미례를 걱정스레 살폈다. "응?" "괜찮으시냐구요?" 지연이 좀더 큰소리로 물어 보았지만 크게 내쉬는 한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나, 물좀줘." 겨우 그말만 한 미례는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미례에게 물잔을 건네고 자신의 자리에 앉은 지연은 다시 한번 신문을 읽어 보았다. 준호오빠가 설마 이신문을 읽진 않겠지. 이런 연예신문은 안 읽을 거라고 스스로 안심시켰다. 물론 준호는 신문을 읽었다. 쥰이 친절하게도 기사가 난 곳을 활짝 펴서 그에게 건네 주었 던 것이다. 볼일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 오던 차안이었다. "이게 뭐야?" 처음에는 쥰이 이것을 왜 자신에게 보여주는지 알수가 없었다. 무심히 기사를 읽으며 지연의 이름도 그냥 넘어갔다. 그의 시선을 끈 것은 활짝 웃고 있는 지연의 얼굴이었다. 어, 지연이 사진이 왜 여기 있지. 정말 예쁘게 찍혔네. 순간 깨닳음이 그의 뇌리를 스치며 지옥불 같은 열기가 솟구쳐 올라왔다. "지연씨 정혼자라는 남잔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신문 보고 알았습니다." 으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쥰은 모른척 했다.


"자네 부하들 보단 신문기자가 더 유능하군." 간신히 입을 연 준호는 쥰을 비꼬았다. 흥, 속타는 것을 들키기 싫으시다. 쥰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제 부하가 아니라 회장님 부하죠. 그들 월급 주는 분이 회장님 아닙니까?" 쥰의 이죽거리는 말에 관자놀이의 힘줄이 불끈하는 것이 보였다. 그동안 번번히 당해 왔던 설움이 한꺼번에 해소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자신은 미례에게 결혼의 'ㄱ'자도 못꺼내고 있는데 결혼한단 말이지. 뻔뻔하게 다음달 중으로 결혼을 하시겠단 말이지. 날 약올리면서. 미례를 만난 뒤로 많이 치사해진 자신을 깨닳았지만 이제와서 어쩔수가 없었다. 점점 인간다운 감정을 배워가는 중이었으니까. 여전히 미례는 결혼을 거부했다. 그와의 잠자리는 열렬히 환영하면서 결혼은 죽어도 못하겠다니 정말 미칠노릇이었다. 자신이 피임하지 않고 있으므로 머잖아 아기라도 가지면 그녀가 단념하고 결혼을 받아 들일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그였다. "그렇지. 내가 월급을 주고 있었지. 그런데...좀 아깝군." "무슨?"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오나 싶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무능력한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는게 아깝다는 말이야. 모조리 모가지를 잘라야 겠어." 냉정하게 눈을 빛내며 준호가 말하자 쥰은 고개를 꺽었다. 내가 졌다. "이번 일만 그렇지 항상 열심히 일하는 부하들입니다.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결국 자신 때문에 억울하게 목이 달아날 그들을 위해 열심히 부탁했다. "자네를 봐서 내가 참지." 큰 인심을 쓰는 것처럼 준호가 말하자 쥰은 시선을 돌려 버렸다. 조금은 미안하다고 생각했던거 취소야!

점심시간이 된 회사안은 활기에 넘치면서 조금은 소란스러웠다. 그 소란스러움의 이유를 제공한 지연은 식당으로 미례와 함께 들어왔다. 미례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지연에게 향하는 것을 느끼며 웃음을 삼켰다. 정지성과의 사건으로, 안그래도 유명한 지연은 회사안에서 유명인사 1 위에 떠오르고 말았다. 만약 지연이 자신들의 회장과 결혼할 사이라는 것을 안다면 거품 물고 뒤로 쓰러져 버릴것이다. "거봐, 내가 맞다고 했잖아. 저 손에 끼어진 반지좀봐. 다이아가 몇캐럿이야? 어마어마하다 얘." "그럼 정말 한지연씨가 정지성과 약혼했다는 거야?" "그렇다니까. 아까 신문 보여 줬잖아. 부모님들도 인정한 사이라잖아." "그럼 우리 회장님은 어떻게 되는 거야? 삼각관계가 되는 거야?" "무슨 삼각관계? 그냥 닭 쫒던개 지붕 쳐다보는 꼴 되신거지뭐." "안됐다. 그런데 정말 우리 회장님이 한지연씨 좋아 하는 거 맞아?" "넌 병원에서 있었던 사건도 몰라? 그리고 이번에 뉴욕 출장때 일부러 한지연 데리고 갔잖 아." 여기저기서 수근대는 소리가 너무도 크게 들려 먹는 음식이 체할것만 같았다. 그런 미례와는 대조적으로 지연은 차분히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저 소리가 안들리나. 지금 회장하고 한지연을 놓고 씹어 대는 소리에 머리가 아플지경인데...정작 당사자는 태연하다니...보기 보다 강심장이라니까. 지연이라고 주위에서 수근대는 소리가 안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강심장은 더더욱 아니었고. 다만, 자신이 준호와 약혼한 것은 곧 알려 질것이고 이번 주만 지나면 지성과의 관계도 밝 힐 수 있으므로 마음 편하게 먹기로 결심했을 뿐이었다. 어떤 어려움에도 안달하지 않고 관망하는 자세가 지연의 가장 큰장점이었다. 이런 성격 덕분에 병든 모친을 그 긴세월 동안 간병해 올수 있었다. 아니 그랬기 때문에 이런 성격이 형성된지도 몰랐다.


갑자기 주위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이윽고 쥐죽은 듯이 조용해 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든-지연은 여전히 식사에만 열중했다.-미례는자신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쥰과 준호를 발견했다. 여긴 어떻게...그러다 지연과 준호가 약혼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오늘은 뭐가 맛있어?" 지연이 앉은 테이블쪽으로 다가선 준호가 다정한 음성으로 묻자 웅성거림이 생겨났다. 친근한 반말.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그들의 시선이 두사람을 향해 집중되었다. "어머, 준호씨. 아니, 회장님. 언제 오셨어요?" 지연이 황급히 호칭을 바꿨지만 그들은 듣고 말았다. 그들의 목젖이 크게 움직이며 마른침 을 삼켰다. "방금. 함께 외식하려고 했는데 늦었네." 준호는 지연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에 시선을 보내며 만족스러워했다. 반지를 빼지 않았군. 정지성과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미소지으며 자신을 반기지는 못할 것이다. 회장이 직접 사원들 식당에 나타나자 주방장이 안에서 손수 식판을 들고 나왔다. 보조 주방장은 쥰의 식사를 날라다 주었다. 그들은 무슨 소리라도 들을까 전전긍긍했다. 다행히 준호와 쥰이 맛있게 음식을 먹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각자 맡은 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약혼식은 호텔에서 하는게 좋겠지?" 준호는 지연에게 물어 보는 듯 했지만 사실은 귀를 쫑긋 세우며 엿듣고 있는 직원들을 향한 것이었다. "예약할 수 있겠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지연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고 준호는 큰소리로 웃었다. "내가 호텔 주인인데 예약 걱정을 한단 말야? 아무때나 제일 큰홀을 비우게 하면 돼." "그래도 우리 때문에 피해보는 사람들이 있으면 어떻게 해요." 지연이 말하자 주위에서 다급히 숨을 들이 마시는 소리들이 식당 가득 울려 퍼졌다. "걱정마. 쥰이 알아서 해 줄거야, 그렇지?" 미레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대답을 하는 쥰이 걱정되어 지켜보았다. 그런데 이 남자 웃고 있는 것 같아. 어깨가 들썩이는 폼이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듯 싶었다. "참. 회장님, 약혼 축하드려요. 미처 인사 못드렸네요. 지연씨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그런데... 한달안에 약혼하고 다음달 안으로 결혼식 올리시려면 시간이 빠듯하시겠어요." "고마워요, 미례씨. 시간을 쪼개면 어떻게 되겠지요." 준호와 미례의 대화를 엿듣던 수백명의 직원들은 그대로 망부석이 되어 버렸다. 쥰과 미례를 휴게실로 보내고 둘만 회장실로 돌아온 두사람은 지연이 타온 차를 마셨다. 물론 차만 마시지 않고 조금 아주 조금 야한짓도 했다. 정말이다 키스만 했을 뿐이다. "미례씨한테 벌써 말한 줄 몰랐어." 자신의 무릎위에 그녀를 올려 놓고 입을 맞추던 그가 생각난듯 말했다. "서은경씨와 비서실장님도 아세요." "그들한테도 말했어?" "그렇게 됐어요." 준호는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지연이 먼저 사람들에게 약혼을 기정사실화 한것이다. 신문기사로 망가진 기분이 조금은 풀렸다. 지금 물어 볼까. 정지성과의 관계를 물어 보면 지연은 어떻게 반응할까. 당황할까, 아니면 화를 낼까. 그도 아니면 미안한 표정을 지을까. 수많은 생각들에도 불구 하고 준호는 차마 물어 볼수가 없었다. 지연의 대답을 들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정지성을 아직도 좋아하고, 혹은 생각하기조차 싫지만 사랑하고 있다고 대답한다면 자제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연이 먼저 사실을 밝히지 않는데 굳이 물어 볼필요는 없다고 애써 자신을 변명했다.


그녀는 자신과 결혼하기로 약속했고 순결도 주었다. 그럼 된거지 더 이상 바란다면 신의 시기를 지금 이행복 마저 깨져 버릴까봐 두려웠다.

받아

한영그룹본사 빌딩 정문의 차도로 매끄럽게 빠진 고급 외제 스포츠카가 멈춰섰다. 정문에 서있던 고참 경비원 장씨는 인상을 지푸리며 스포츠카를 향해 걸어 갔다. 가끔 지각없는 사람들이 차를 아무곳에나 세우곤 했고 그들을 지하 주차장으로 인도하는 일이 그의 주요 업무중 하나였다. 막 훈계를 하려고 크게 벌어진 입이 그대로 멈춰버렸다. 번쩍 치켜올리던 팔이 스르르 소리없이 내려오며 걸음을 옮기던 발도 멎어 버렸다. "차좀 부탁해요, 아저씨." 장씨가 훈계하려던 차주인은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당당하게 명령했다. 그가 빌딩안으로 모습을 감추고도 장씨는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잠시후 장씨는 자신의 볼을 꼬집어 보았다. 꿈이 아니었다. 갑자기 환호성을 지른 장씨를 지나가��� 행인들이 쳐다보았지만 개의치 않고 스포츠카 옆에 몸을 꼿꼿이 세우고 차를 지키는 중요한 임무에 돌입했다. 빌딩로비는 점심시간이 끝나 서둘러 자신들의 일하는 부서로 향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 다. 회전문을 밀고 들어 오는 한남자로 인해 갑자기 긴장감이 로비를 가득 메웠다. 그들은 한동안 숨쉬는 것조차 잊고 남자가 안내데스크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움직이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안내직원아가씨는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비단 그녀 뿐만이 아니라 로비에 있는 수많은 여직원들은 오금이 저려오는 느낌에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금빛가죽바지를 입은 긴다리가 움직일때마다 물결치는 근육에 가슴이 떨려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반쯤 풀어 헤진 푸른색 실크셔츠 사이로 드러난 그을린 가슴을 보며 다급히 침을 삼키던 그녀들의 표정은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었다. "윤준호 회장실이 어디죠?" 남자의 입이 열리고 허스키한 섹시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남자가 약간 긴듯한 머리를 우아한 손동작으로 쓸어 넘기자 가슴근육이 두드러져 질문을 받 은 안내직원은 한동안 대답할 수가 없었다. "비밀인가보죠?" 남자가 놀리듯 눈을 빛내며 말하자 안내직원은 침을 꼴깍 삼키며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 았다. "저...저...회장실은...저...그러니까...38 층입니다." "고마워요, 예쁜아가씨." 가볍게 윙크를 던지고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사인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 버렸다. 예쁜아가씨라고 부르던 그윽한 그의 음성과 얼굴만 눈앞에 아른거리며 귓전을 울렸다. 남자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자 서둘러 길을 틔여주는 사람들에 의해 어렵지 않게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남자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몸을 돌려 그들을 볼때까지 아무도 움직이질 않았다. 닫히는 문사이로 남자가 손키스를 던지고 사라지자 이윽고 자지러지는 비명이 40 층 빌딩을 무너뜨릴듯이 울려 퍼졌다. 자신이 오늘 점심당번이었던 것을 하늘에 감사하는 안내직원이었다. "여보세요? 미스윤? 나야, 지금 내가 누굴 봤는 줄 알아? 정지성이야, 정지성. 정말이야, 정지성이


여기 왔다니까. 한입에 꿀걱 삼키고 싶을 만큼 섹시하다니까. 잘생긴 정도가 아니야. 황홀 그자체라구. 아, 지금도 온몸이 떨려. 그 눈동자로 날 빤히 쳐다 보는데 숨이 멎는줄 알았어. 회장실을 묻더라구. 아무래도 우리 회장님과 단판지으러 왔나봐. 꺄악. 어쩌지? 나한테 뭐라고 했는줄 알아? 예쁜 아가씨래. 날 보구 예쁜 아가씨라고 불렀다니까. 나 기절할 것 같아." 안내직원은 마술에 풀린 사람처럼 그가 사라지자 마자 수화기를 집어 들고 여기 저기 전화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영그룹 소문의 메카로 불리는 안내데스크였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쥰과 미례와 함께 민석과 은경도 비서실로 내려왔다. 은경은 준호에게 축하한다고 인사를 했다. 준호와 민석이 절친한 친구 사이며 은경과도 사 적으로는 친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지연은 그들의 허물없는 태도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럼 전 내려 갔다 부장님과 함께 자료를 챙겨서 올라 올께요, 회장님." 은경이 문손잡이를 잡고 그렇게 말하자 준호가 질문하듯 쳐다보았다. "민석씨 회장님께 전하지 않았어요?" 은경은 약혼자를 책망했다. "무슨 소리야, 난 분명히 쥰님에게 대신 전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억울하다는 듯 민석이 쥰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쥰에게 향했다. "아, 깜빡했어." 태연하게 말하는 쥰을 의심에 가득찬 시선으로 준호가 노려 보았다. 세이치 쥰이 깜빡 잊고 전하지 않았다는 말을 믿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는 뭔가를 잊어 버릴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절대로. "뭘 깜빡했지?" "그게..." 쥰이 막 대답하려고 할때였다.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은경은 벌컥 열리는 문에 의해 뒤로 밀려나며 넘어질뻔 했다. 곁에 있던 민석이 재빨리 약혼녀를 부축했다. "누구야, 노크도 없이..." 다칠뻔한 은경과 민석이 동시에 소리를 지르다 동시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 죄송합니다. 약속시간에 늦은줄 알고 서두르다 보니." 전혀 미안한 기색없이 남자가 활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은경과 민석은 더 이상 따지질 못했다. 오히려 은경은 자신의 팔을 잡고 있던 약혼자의 손을 뿌리치고 남자에게 한발짝 다가섰다. "전혀, 늦지 않았습니다, 정지성씨.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놀라서 멍하니 서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은경은 씩씩하게 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지성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은경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여어, 우리 공주님. 아침에 보고 또 보니 반갑구나." 은경과 악수를 끝낸 지성은 한걸음에 지연에게 다가가 꼭 끌어 안고 볼에 입을 맞추더니 사 랑의 감정이 뚝뚝 떨어지는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여긴...오빠가...어떻게 여긴?" 지연은 기가막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한영그룹에서 몇달전부터 CF 를 찍어 달라고 사정사정 했는데...내가 거절했었지. 너도 알다 시피 그런거 싫어하잖아." "그래서?" 왜 이렇게 서론이 긴거야. 용건만 간단히 몰라.


지연은 평소 오빠와 대화하던 방식대로 말하고 싶은것을 간신히 참았다. 준호오빠 때문에 내가 참는다 참아. 자신답지 않게 앙칼진 모습을 보면 준호가 놀랄까봐 간신히 성질을 죽이는 지연이었다. "네가 한영그룹에서 일하는데...널 위해서 내가 이번만 생각을 바꾸기로 했지 뭐." "안 바꿔도돼." "뭐라구? 고맙다구? 그럼 고마워 해야지. 이렇게 시간내기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를 악물고 속삭이는 지연의 말에 엉뚱한 소리로 동문 서답하는 그를 보며 주먹을 꼭 쥐었 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건지 누가 설명좀 해주겠어?" 지연의 옆에 다가와 그녀를 잡아 자신의 뒤로 감추며 준호가 으르렁 거렸다. "아, 그러니까...회장님이 뉴욕에 계실 때 정지성씨께서 저희 광고에 나와 주시겠다고 허락해 주셔서 오늘 회장님과 약속을 잡아 놨습니다. 쥰님께서 전해 주신줄 알고..." 민석이 긴장으로 온몸을 굳히며 뻣뻣하게 대답했다. 한지연과 정지성이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회장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것은 분 명해 보였다. "손님을 회장실로 모시게. 안부장도 올라 오라고 해요, 서대리." 은경에게 명령한 후 준호는 회장실로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지연이 지성에게 속삭이듯 물었지만 그는 못들은척 쥰, 민석과 함께 회장실로 들어가 버렸 다. 이윽고 연락을 받은 홍보부장이 허겁지겁 서류들을 품에 한가득 안고 뛰어 들어와 은경과 함께 회장실로 향했다. 미례가 음료수를 준비하는 동안 지연은 자신의 책상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만 노려 보고 있었다. 딱히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여보세요? 이모? 저에요. 아니요. 별일 아니에요. 그런데 지성오빠가 지금 여기 와 있어요. 모르셨어요? 글쎄 저희 회사 광고를 찍겠대요. 저도 모르겠어요. 이모도 신문 읽으셨어요? 오빠가 왜 저러는 거죠? 알았어요. 이모만 믿을께요. 네 약속 잡을께요." 지연의 전화를 받은 이모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모는 자신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지연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다음주 중 준호를 만나고 싶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이모가 어떻게 해결 하시겠다는 걸까. 지연의 전화를 끊은 나하연은 잠시동안 생각에 잠겼다. "무슨일이라도 있어?" 옆에서 남편이 걱정스럽게 물어 왔다. "아무래도 성이가 장난을 치는 것 같아요." "신문기사 때문에?" "그것도 그렇구요. 시스터콤플렉스가 있는 놈이라 무슨 짓을 할지 알수가 없어요. 내가 나서야 겠어요." 나하연은 단호하게 말한 후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 국장님. 저 나하연이에요. 이번에 실린..." 지성은 준호 몰래 쥰과 은밀한 시선을 주고 받았다. 그들의 생각대로 준호는 질투심에 터지기 직전의 시한폭탄이었다. "그럼 우선 일년간 계약을 하기로 하지요."


자신의 감정이 어떻든 준호는 사업에 신경을 쏟아 부었다. 새로운 21 세기의 한영그룹 이미지를 창조하기 위해서 정지성만한 모델도 없었다. 이십년이 넘게 연예계에 있으면서도 한번도 광고를 찍어 본적이 없는 정지성은 한영그룹홍 보부에서 끈질기게 섭외하던 스타였다. 거액의 개런티를 제시 해도 그는 눈도 꿈쩍 안했다. 사실 그에게 돈은 유혹의 대상이 되지 못할만큼 부자였다. 오로지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는 것이 정지성의 스타일이었다. 그에게 흥행이 보장된 영화에 출연 하는 것보다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가 있으면 위험부담에 상관없이 뛰어드는게 다반사였다. 물론 그의 인기를 위협할만한 역할도 서슴없이 해치우는 그를 두고 주위에서 괴물이라고 평 했지만 수많은 여성팬들은 그를 왕자님이라고 부르며 숭배해 마지 않았다. 나와 함께 침대로 갈까요를 외치고 다니는 군. 준호는 지성의 옷차림과 몸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성적매력에 치를 떨었다. "글쎄요...제가 시간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단발로 하면 안될까요?" 지성은 쇼파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있는 자세에서 주스잔을 들어 꿀꺽꿀꺽 마셨다. 안부장과 서은경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세상에 유부녀인 안부장과 약혼자가 옆에 있는 서은경까지 지성에게 눈을 떼지 못하다니. 준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아까 이작자가 지연을 끌어 안고 볼에 입을 맞추던 일이 떠올라 이를 악물며 터져나 오는 화를 눌러야만 했다. 다시한번 지연에게 손을 대면 가만 두지 않겠어. 지연은 왜 이놈의 유혹을 뿌리치지 않았을까. 지연이 얼굴을 붉히며 지성을 대하던 모습이 생각난 준호는 불안에 몸을 뒤척였다. 겉모습만 번지르한 이놈에게 왜 여자들은 죽고 못사는지 알수가 없었다. 초조감이 그대로 들어난 준호의 얼굴을 보며 쥰은 속으로 고소를 금치 못했다. 지연이 연락도 없이 출장간 일로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지성은 회사로 전화를 해서 강력히 따졌고 바로 그전화를 쥰이 받았다. 조사를 통해 지연의 사촌오빠라는 그가 정지성임을 알고 있던 쥰은 그와의 만남을 마련했다. 스스로도 시스터콤플렉스임을 시인한 지성은 순순히 두사람을 맺어 줄수 없다며 윤준호 골탕먹이기 작전을 제안했다. 못이기는 척 받아들인 쥰이 세세한 부분까지 지성에게 일러준것은 물론이다. "한영그룹전체의 이미지 광고입니다. 단발은 곤란합니다. 최소한 이년은 계약해야 하지만 정지성씨의 인지도를 감안해서 일년으로 양보한 겁니다." 속내야 어떻든 준호는 사업상 밀고 당기는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한시간에 걸친 협상끝에 준호의 의도대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다음주 안으로 계약서를 작성하기로 하고 지성이 일어나 준호를 포함해 직원들과 악수를 하 고 사무실을 나왔다. 지성의 모습이 보이자 걱정스런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지연에게 장난스럽게 웃으며 다가갔다. "지연아, 퇴근후에 내가 데리러 올게. 여섯시 맞지? 오랜만에 맛있는거 사줄게." 지연이 막 거절하려는 데 지성의 얼굴이 그녀의 귀에 다가와 속삭였다. "내가 네 약혼자한테 아무말이나 막하는 거 원하지 않지? 예를 들면 네가 십년동안 그를..." "알았어, 데리러와. 같이 먹으면 될거 아냐, 저녁." 지연은 악에 받혀 이를 악물고 작게 속사였다. 저렇게 다정하게 둘이 붙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걸까 하고 준호는 내심 의구심이 들었다. 지연의 얼굴이 붉게 달아 오르며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나는 것 처럼 보여 점점 불안해졌다. "지연씨, 정지성씨하고 어떤 사이야?" 지성이 떠나자 마자 은경이 먹이를 노린 매처럼 달려 들었다. "그냥...집안...어른들이...가깝게 지내셔서...어릴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에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에 근접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성오빠는 쓸데없는 약속을 하라고 해서. 만약 지연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지성오빠는 사실을 털어 놓을 것이다. 그녀가 준호오빠를 얼마나 오랜 세월 짝사랑해왔는지. 준호가 알아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될수있으면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고 난 후 준호가 부담스러워할 모습이 눈에 선했던 것이다.

그날 한영그룹직원들 중 직무에 충실한 사람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수가 없었다. 회장과 비서실 여직원의 결혼이야기와 정지성의 출현으로 곳곳에서 끼리 끼리 모여 수다를 떠는 직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지연이 회장과 정지성 중 누구를 선택할지에 대해 내기를 거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중 정지성과 가까이에서 대화를 나눈 안내여직원은 졸지에 스타가 되어 모든 여직원들의 부러움과 질문공세를 받았다. 잠시후 홍보부에서 정지성이 CF 를 찍기로 했다는 신빙성 있는 소문이 흘러나오며 회사는 또한번 발칵 뒤집어 졌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데려다 줄게." 퇴근을 앞두고 준비하는 지연에게 준호가 말했다. "저...그런데..." "응? 왜?" 머뭇거리며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는 그녀를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사실은 지성오빠가...저녁식사를 하자고...지금...회사앞에서 기다릴거에요." 순간 준호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지금 선전포고를 당한건가. 자신이 없는 사이 지연을 낚아채버린 그에게 지성이 도전해 온것만 같았다. 물러 설수 없지. "그래? 그럼 같이 가지. 내가 저녁을 살게. 지연이랑 친한 오빠 같은 사이라는데, 나도 사귀 도록 해야지. 안그래?" "그럼 같이 가요, 준호씨." 어딘지 모르게 가시돋힌 준호의 말에 움찔 놀라며 지연은 승낙했다. 과연 편하게 저녁을 먹을 수 있을지 심히 의심스러웠지만. 기사도 퇴근시킨 준호는 지연과 함께 일층에서 내렸다. 닫히는 엘리베이터에 남은 미례는 걱정스런 시선을 쥰에게 보냈다. "괜찮을까요?" "왜?"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며 쥰은 싱글거려 미례를 화나게 했다. "당신 일부러 그랬죠?" "뭘?" "일부러 회장님께 정지성씨 오는거 알리지 않았잖아요. 속셈이 뭐에요?" "속셈이라니?"


"당신이 지금 회장님께 하는 장난의 속셈말에요. 정확��� 지연씨하고 정지성씨 사이가 어떻 게 되요? 알고 있죠? 난 당신이 회장님을 정말 아끼는 줄 알았는데 실망했어요. 무조건 충성하는, 회장님만의 사람인줄 알았는데...혹시...설마...당신 한영그룹 총수자리를 탐내는 거에요? 그래서 이런짓을..." 쥰은 듣다 듣다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웃음을 터트였다. "아에 소설을 쓰시지, 신미례씨. 날 그런 그릇으로 밖에 보지 않았다니 실망인데?" 지하삼층에 있는 주차장에서 내려 자신의 차로 걸음을 옮기며 비꼬아 말했다. 미례는 총충걸음으로 그를 따르며 미안함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 말이 헛 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과거의 상처는 항상 그녀에게 최악의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일어날 수 있는 일중 가장 나쁜일을 각오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상처를 받지 않을 거라고 믿 었기 때문이다. 쥰이 열어주는 조수석문으로 들어가면서도 미례는 선뜻 사과하지 못했다.

퇴근을 하는 한영그룹 직원들은 또한번 볼거리를 제공 받았다. 그들의 회장이 한지연을 동반하고 로비를 가로 질러 정문을 나서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또한 차도에 주차된 외제스포츠카에 비스듬이 기대 서있는 정지성을 향해 다가가는 모습도 빠짐없이 지켜 보았다. "이런, 윤회장님께서 어떻게...?" 몸을 바로 세우며 지성이 물어왔다. 점심때와는 달리 딱 달라 붙는 검은진에 검은쫄티차림의 지성은 한숨이 절로 나올만큼 섹시 했다. "지연씨께 함께 식사하자는 이야기 들었습니다. 당연히 제가 대접해야 겠기에 염치불구하고 이렇게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아시다 시피 저희가 약혼한지가 얼마 안되어서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가 않군요. 이해해 주시겠지요?" 준호가 먼저 선제 공격을 했다. "물론, 이해하지요. 그런데 아직 약혼식을 올리지 않은거 아닙니까?" 지성 역시 여유있게 받아쳤다. "약혼식이 별겁니까. 당사자들이 결혼하자고 언약하면 약혼한거지요. 안그렇습니까?" 제 1 라운드 준호 승. 세사람은 지성이 잘 안다는-운전대 잡고 있는 사람의 의견에 따라-일식전문점으로 갔다. "지연이가 초밥을 좋아해서 일부러 여기 왔습니다. 상관없으시지요?" "물론입니다." 음식을 시키고 마주 보고 앉은 두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준호의 옆에 앉은 지연은 차라리 돌이 되고 싶었다. 다행히 홀이 아니라 방으로 자리를 잡았기에 남들 구경거리가 되는 것은 면했다. 잘생긴 남자둘이서 이를 들어내 놓고 다투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녀 한명으로 족했다. 별거 아닌 사회문제나 정치문제로 의견싸움을 벌이는 두사람을 관망하듯 지켜 보며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두 남자가 정말 보기 드문 미남자라는 걸 새삼 깨닳았던 것이다. 지성이 섹시함으로 똘똘 뭉친 미남자라면 준호는 어딘지 근접하기 어려운 차가운 냉소적인 미남자였던 것이다.


짖궂게 빛나고 있는 지성오빠의 눈을 보며 그가 조금만 덜 그녀를 사랑했더라면 훨씬 편했을거라고 씁씁하게 생각했다. 지성오빠의 여동생사랑은 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했다. 어딜가든 여동생선물을 챙겼고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집적대는 놈이 있으면 가만 두지 않았 다.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항상 지연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고 교육받은 탓도 있었지만 지연의 부친이 돌아가신날 있었던 일이 그의 행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연이 다섯살이었고 지성은 일곱살이었던 어느날 화가셨던 지연의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러 나간 바닷가에서 발을 헛딛어 절벽아래로 떨어져 그대로 즉사하셨다. 영안실에서 대성통곡을 하며 기절까지 한 그녀의 모친과는 달리 지연은 죽음이란 것이 뭔지 모르는 어린아이였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불쌍하다며 눈물을 훔쳐도 그녀는 누군가 손에 쥐어준 막대사탕을 맛있게 먹으며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지연아, 이리와 오빠랑 놀자." 모친의 명령으로 지연을 데리고 밖으로 나온 지성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게 웃으며 놀던 지연이 그제서야 울음을 터트렸던 것이다. "왜...왜 그래 지연아?" 자신이 뭘 잘못해서 그러나 싶어 어린마음에 절절 매었다. "오빠, 우리 아빠 이제 영영 안와? 하늘나라에서 사는 거야? 엄마랑 연이랑은 못사는 거야?" 죽음이 뭔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지연은 상황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 연이도 알고 있었구나. 근데 아깐 왜 안울었어?" "내가 울면 엄마가 더 슬프니까. 연이가 엄마를 지켜야 한다고 항상 아빠가 말씀하셨어. 엄마는 약하니까 보살펴야 한대. 으앙." 다섯살짜리 여자아이는 부친의 죽음에도 마음 놓고 울지 못할 만큼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지 고 있었다. 지성은 지연이 너무나 불쌍했다. "지연아, 오빠랑 있을때는 네가 울고 싶은 만큼 울어도 돼. 하고 싶은 말은 뭐든지 하고. 오빠가 지연이 하고 싶은거 뭐든 받아 줄게. 알았지? 자, 약속." 그렇게 어린 두 남매는 약속을 했다. 지켜주고 보살펴 주기로. 부친에게 사내대장부가 한 약속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야 한다고 배운 지성은 지연과의 약속을 18 년동안 지켜오며 이제는 습관처럼 동생을 보살피게 되었다. 그런 지성이니 여동생이 결혼하겠다는 남자가 정말로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수 있는 착한 남자인지 확인해보고 싶은 것은 당연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준호는 알수 없는 적의를 불태우는 지성을 맞아 영역을 침범당한 맹수 처럼 으르렁 거리게 된것이다. 하긴 또다른 당사자인 지연조차 기억 못하는 일을 준호가 어찌 알겠는가. "그런데 말입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 지연이 화장실에 가기위해 자리를 비우자 기다렸다는듯 지성이 입 을 열었다. "그거 알고 계십니까? 결혼식장에 들어가 봐야 결혼상대가 누군지 알수 있다는 말." "아뇨. 처음 듣는 말인데요." 이를 악문 준호의 대답.


"그래요. 전 그말을 정말 좋아 하는데...그래서 희망을 가지고 있는 중이고요." 이놈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준호의 손에 쥐어진 일본산 나무젓가락이 부르르 떨렸 다. "참, 지연이 엉덩이에 붉은 반점 있는건 모르시죠? 어찌보면 나비같고 어찌보면 하트모양 같은 것이 아주 예쁘답니다." 제 2 라운드 지성 승. 1 승 1 패. 지연은 막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 서며 준호의 손에 쥐어진 나무젓가락이 탁 끊어져 멀리 튀 어나가는것을 보았다. 뭐야, 애들처럼 묘기대행진이라도 하고 있나. 지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준호의 옆에 앉았다.

제 12 장 생각만으로 사람을 죽일수 있다면 그는 이미 살인자가 되었을 것이다. 더불어 저 뻔뻔한 놈은 이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준호는 치를 떨며 지성의 차에서 내렸다. 지연을 먼저 데려다 준 후 딱히 거절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의 차를 얻어 타고 집에 까지 오게 되었다. "휘-익. 와, 집이 끝내주는데." 운전석에서 내려 차를 돌아 준호의 옆에 선 지성이 휘파람까지 불며 야유하는-준호는 그렇 게 생각되었다.-모습을 사납게 노려 보았다. "어허, 왜 이러시나. 부르조아는 다그러나 보지. 사람말을 삐딱하게 받아들이게." 너도 만만치 않는 부르조아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작별인사를 했다. "태워다 줘서 고맙네. 그만 가보지." "아직 밤도 안 깊었는데, 같이 한잔 할까?" 이게 언제 봤다고 계속 반말이야. 나이도 한참 어린 것이 건방지기 그지없었다. "아까 한 이야기 갖고 계속 삐져 있는 거야? 오해하지마. 어릴때 본거야. 아주 어릴 때 말야. 나중에 혹시라도 결혼하게 돼서 신혼여행이라도 가게 되면 자세히 보라고 가르쳐 준거야." 퍽도 친절하시군. 이를 바드득 갈며 준호는 반격하기 시작했다. "친절히 가르쳐준 보람도 없이 어쩌지. 벌써 봐 버렸거든. 자네가 말한 그점말야. 정확히 왼 쪽 엉덩이 윗쪽에 있지. 하트모양에 가까운 것 같더군." 순간 지성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다시 새하얗게 핏기를 잃어 버렸다. "너...너...지연이 한테...무슨 짓을...?" 지성은 차마 말을 맺지 못했다. 설마 지연이 이 늑대 같은 놈한테 벌써 먹혀 버린 것은 아 니겠지. "글쎄...굳이 자네한테 말해야 할까? 지연과 나 사이 일인데. 이것 하나만은 이야기 해주지. 난 절대로 네놈 따위한테 지연을 빼앗기지 않아. 지연이는 내 목숨보다 소중한 내 여자야. 명심해둬. 지금까지 지내온것 처럼 오빠로 지내면 봐줄수 있지만 딴 맘먹으면 차라리 죽고 싶게 만들어 주겠어." 준호는 눈하나 깜빡이지 않고 협박을 한 후 뒤돌아 넓다란 큰대문으로 향한 계단을 올라갔 다. "몸조심해서 돌아가게."


부들부들 떨고 있는 지성을 남겨 두고 준호는 저택안으로 사라져버렸다. "미친놈." 짧게 내뱉는 말과는 달리 지성의 얼굴로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이윽고 인적이 드문 길에 커다란 웃음소리가 구석 구석 울려 퍼졌다. 1 승 2 패. 깨끗이 졌군.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준호의 귀에도 지성의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미친놈!" 똥씹은 표정을 지으며 준호는 욕설을 퍼부었다. 자신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을 보면 강적이었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은 분명했고 지연이 자신에게 순결을 주었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날 놈이 아닌것도 확실했다. 그렇다고 순순히 빼앗길 자신도 아니었다. 무슨일이 있더라도 지연과 결혼하고 말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남자들의 이러한 신경전을 알리 없는 지연은 지성과 준호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 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꿈속에서 준호와 지성이 유럽중세시대 복장으로 결투를 하는 것을 지켜보아야했다. "지연이, 너 잠을 못잔거 같다?" 아직도 잠에 취한 눈을 비비며 미정이 식탁에 앉았다. 지연은 찌게를 식탁에 올려 놓고 자신도 마주 보고 앉아 수저를 들었다. "악몽을 꿨어." 짧게 대꾸하며 진저리를 치던 지연은 억지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제 지성오빠가 데려다 줬어?" 미정의 질문에 어제 일이 떠올랐다. 식사를 마친 두남자는 지연을 사이에 두고 어찌나 살벌하게 서로를 노려 보는지 불안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응. 그런데...지성오빠가 뭘 생각하는 지 알수가 없어." "지성 오빠가 왜?" "준호오빠를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라니까..." "왜 그럴까. 모르는 사람한테 함부로 하지 않잖아, 지성오빠."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꺄웃하던 미정은 문득 지연의 손에서 빛나는 뭔가를 발견하고 말았 다. "지연이 너 그게 뭐야?" 갑자기 수저로 지연의 왼손을 가르키며 소리를 질렀다. "아, 너한테 말안했구나." 그제서야 미정에게 약혼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지 않은 일이 생각났다. 사실 그럴 시간도 없 었지만. "뉴욕 출장갔을 때 준호오빠가 청혼했어. 그리고 난 승낙했구." 수줍게 웃으며 조금은 자랑하듯 손가락을 펴 반지를 보여주었다. "너...너..." 붕어처럼 입만 뻥긋 거리던 미정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일부러 늦게 말한거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오자마자 지성오빠한테 끌려서 고모집에 갔다 가 어제 저녁에 들어 왔더니 네가 늦게 와서 이야기도 못하고 잠들었잖아. 준호오빤 이달에 약혼하고 다음달에 결혼식을 올리재. 축하안해줘?" "축하한다." 맥없는 소리로 미정이 마지못해 축하해 주었다.


"내가 준호오빠랑 결혼하는게 마음에 안들어?" 지연은 친구의 시큰둥한 반응에 걱정스럽게 물었다. "당연히 네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한다는데 기쁘지. 단지..." "단지 뭐?" "아마, 지성오빠도 내마음 같을거야. 조금 서운하고 널 빼앗기는 느낌. 그래서 심술부리는 걸꺼야. 난 지연이 네가 좀더 있다 결혼할줄 알았는데...너랑 좀더 지낼수 있을줄 알았는데..." "내가 결혼한다고 어디 멀리 가는 건 아니잖아. 결혼한지도 모를 정도로 지겹게 만날수 있 을 텐데, 뭘. 넌 내 하나 뿐인 친구잖아." 그들은 밥 먹는 것도 출근하는 것도 잊어 버리고 서로를 껴안고 울다 웃었다. 두사람을 정신들게 한 것은 초인종소리였다. "어머, 내 정신좀봐. 지각 하겠다. 나 먼저 옷갈아 입을게." 미정이 현관으로 나가는 동안 지연은 침실로 들어가 출근준비를 서둘렀다. "미정아, 미안한데 설거지좀 해줘. 나 먼저 나갈게. 지성오빠? 오빤 아침부터 왠일이야?" "너 출근 시켜 줄려고." 싱글벙글 웃고 있는 지성을 의심의 눈초리로 노려 보았다. "오빠 같이 바쁜 사람이 평범한 회사원을 출근 시켜주려고 이른 아침부터 남의 집엘 찾아왔 단 말야?" "물론이지. 나 한테 너 출근 시켜주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겠니? 그리고 여기가 남의 집은 아니잖아, 사랑하는 내 사촌여동생집이지." 지성의 부드러운 말투에도 지연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가 또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말 미정의 말처럼 내가 결혼한다고 해서 심통을 부리는 거라면 어쩌지. 하지만 딱히 거절할 만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으므로 함께 집을 나섰다. 막 주차된 지성의 차로 갈 때 눈에 익은 준호의 차가 멈춰서는 것이 보였다. 운전기사가 모는 차가 아니었다. 그가 손수 몰고 다니는 차를 보며 지연은 속으로 한숨을 삼켜야 했다. 또다시 두남자의 신경전사이에 끼게 된것이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정지성씨?" "그러는 윤회장님이야 말로?" 여유있게 웃으며 대하는 지성과는 달리 준호는 온몸의 신경을 꼿꼿이 곤두세우고 있다는 것 을 한눈에 알수 있었다. 그이유 또한 짐작하는 지연은 재빨리 두사람 사이에 끼어 들었다. "오빤 그만 집에 가요. 난 준호씨랑 함께 출근하면 되니까. 준호씨 이러다 늦겠어요." 지성에게 하고 싶은 말을 간신히 참으며 지연을 조수석에 태운 준호는 지성을 사납게 노려 보고는 운전석에 올라 거칠게 문을 닫았다. "이따 전화할게, 지연아. 조심해서 운전하슈." 준호에게 거수경례까지 한 지성은 거칠게 출발하는 차를 피해 한걸음 물러섰다. "놀리는 재미가 있다니까. 꽁생원처럼 굴기는." 지성은 재밌어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차로 향했다. 오늘 동생을 출근시키는 차안에서 준호가 보기보다 괜찮은 남자로 널 많이 사랑하는 것 같 아 안심하고 맡길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해주려고 했었다. 그래서 아침부터 서둘러 왔는데...무정한 동생은 성난 멧돼지처럼 툴툴거리는 자신의 약혼자 와 뒤도 돌아 보지 않고 가버린것이다. 사랑하는 남자가 생기니까 오빠 따위는 ���무것도 아니란 말이지. 자신이 먼 훗날 딸을 시집 보낸다면 지금 심정과 같을까. 그렇다면 절대로 딸을 낳고 싶지


않는 그였다. 회사에 도착할때까지 삼십분동안 준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너무도 살벌한 표정에 지연은 말을 걸 엄두가 나지 않아 침묵을 지켰다. 차가 지하주차장의 회장 전용주차공간에 멈춰섰을때까지도 지연은 침만 꼴깍꼴깍 삼키며 할 말을 찾고 있었다. 그에게 지성오빠에 대해 전혀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지성과 한 약속도 걸 렸고, 가장 두려운 것은 그의 태도를 오해하고 있다고 그가 비웃을까봐서였다. 그가 질투심에 사로 잡힌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녀를 사랑해서라기보다는 결 혼을 약속한 자신의 여자에 대한 소유욕일 가능성이 더 높아보였다. "저...준호씨...지성오빠는..." 회장전용엘리베이터에 준호와 함께 탄 지연은 결국 갈등끝에 진실을 털어 놓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그 지성오빠라는 남자를 만나지 말았으면 좋겠어." 지연의 말을 가로 막으며 단호히 자신의 의견을 말한 그는 38 층 버튼을 누른후 그녀를 돌아보았다. "기분나빠. 그놈하고 얼마나 오랜세월을 친하게 지냈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사적으로 그 를 만나지 말았으면 좋겠어. 약속해줘, 지연." "하...하지만...지성오빠는 내 외..." 갑자기 그녀를 껴안은 준호의 품에서 입맞춤을 당한 지연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쥰을 노려보는 준호는 분노로 음성까지 떨렸다. "저도 기가 막히는 중입니다." 쥰 역시 잔뜩 굳은 얼굴이 살벌하게 일그러지는 것으로 보아 준호 못지 않게 화가 난듯 싶 었다. "그러니까, 그놈이 지금 병원에 있어서 재판이 미뤄졌단 말야?" "간단히 말해서 그렇습니다. 어제 조세현이 있던 감방에서 싸움이 있었는데... 심하게 다친 모양입니다. 늑골이 부러져서 한달이상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다음주 월요일로 잡혀 있던 첫공판이 강재민의 요청으로 미뤄졌습니다." "싸움의 이유는?" "그냥 사소한 시비랍니다." "그냥 사소한 시비로 늑골을 부러뜨린다. 감방에 있던 다른 놈들은 멀쩡한데 그놈만 심하게 다쳤다. 뭔가 냄새가 나는군. 무슨 꿍꿍이지?" 준호는 한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재판을 연기하려는 속셈 같습니다." "연기하면?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기나?" "조세현의 변호사라는 강재민이라는 남자, 단순히 변호사로 보기에는 뭔가 미심쩍습니다. 전 강재민의 눈빛이 평범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세현 못지 않게 위험해 보입니다." "강재민이 꾸민 것 같다는 건가?" "그가 조세현에게 시간을 벌 방법을 일러 준 것은 분명할겁니다. 조세현이 무슨짓을 저지를 충분한 시간말입니다." 역시, 쥰이었다. 경찰이나 검찰도 단순한 사고로 보고 있었지만 쥰만은 준호와 마찬가지로 조세현을 의심하


고 있었다. 그의 통찰력으로 볼 때 이정도는 애들수준에 불과 했지만. "신미례를 각별히 보호해야 겠군. 그들이 노리는 사람은 그녀일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녀를 없애지 않은 상황에서 재판을 하면 불리하니까 이런 일 을 벌인 것 같습니다." 미레의 신변이 너무나 걱정된 나머지 쥰은 평상시처럼 준호와 함께가 아니라 미례와 함께 출근했다. 준호역시 지연과 함께 출근할 욕심에 그에게 오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그의 지시가 아니더라도 당분간 미례에게서 시선을 뗄 생각이 없었다. 곁에서 그가 완벽하게 보호하는 동안에는 그들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만약 미례에게 무슨일이라도 생기면 그는 살수 없을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미례씨 안전이 최우선이야, 형." "잘알고 있습니다." 대답하는 쥰의 표정을 조세현이 보았다면 미례를 노리는 것을 포기할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살벌했다. 준호는 미례는 쥰에게 맡겨도 되겠다고 안심했다. 세이치 쥰의 보호하에 있는 사람은 그누구도 건들수 없으니까. 노크소리에 이어 민석이 들어왔다. 그의 한손에는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여기 지시하신 물건입니다." 그는 커다란 책상위에 가지고온 물건을 내려 놓았다. "다른 것은?" "오늘안으로 도착할겁니다." "수고했어." 만족스럽게 민석이 가지고 온 물건을 바라보는 준호를 어이가 없다는 듯 쥰이 보았지만 아 랑곳하지 않았다. 민석으로써는 자신들의 카리스마 회장을 이렇게 까지 만든 한지연에게 한없는 경외감을 느 끼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만난지 한달만에 한지연과 결혼하기로 결정한 준호의 추진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한영그룹 최고의-우리나라에서도 그녀만한 미인은 드물었다.-미녀인 한지연을, 그것도 정지 성과 소문이 자자한 그녀를 당당히 차지한 준호의 능력에 새삼 감탄이 흘러나왔다. 더욱이 한지연은 세기의 미남이라는, 만인의 연인이라는, 섹시가이 정지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보기드문 지조있는 여성이었다. 자신의 약혼녀조차 약혼자인 자신이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시성을 향해 군침을 삼키지 않았던가. 덕분에 그의 기분은 엉망이 되었고 은경과 다투고 말았다. 그녀의 말처럼 자신이 좀팽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정지성을 향한 은경의 연모의 눈길은 참아 내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나이 서른여덟에 아이가 둘이나 되는 홍보부 안인숙부장 또한 은경과 다를 바 없는 것을. 도대체 여자들은 왜 정지성만 보면 숨이 넘어가는지. 도통 알 수 없으며 화가 치밀어 오르는 민석이었다. 민석은 생전 처음으로 준호가 부러워졌다. 약혼녀의 흔들리지 않는 애정을 받고 있는 준호가 너무나 부러운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 는지 오늘도 아침부터 그에게 엉뚱한 일들을 시켜 배아프게 했다. 그래 나도 처음 은경을 만났을때는 그랬다구, 뭐. 민석의 상상과는 정반대의 이유로 그는 지연에게 선물을 했다. 그가 민석에게 준비시킨 것은 두가지였다. 첫번째가 핸드폰이었고 두번째는 지금 그녀가 놀라서 바라보고 있는 자동차였다. 그녀의 퇴근시간에 맞춰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두도록 지시한 빨간 승용차는 한영그룹에서 새롭게 출시된 중형차였다.


-윗사람이 애사심을 보여야 한다는 철칙을 가진 준호는 스스로도 외제 승용차가 아닌 자회 사차를 애용했고 계열사 사장은 물론 임원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했다. 그런 그이므로 당연히 자사차를 지연에게 선물한것이다. 지연에 대해 불안감을 느낀 준호는 그녀가 어디에 있던지 통화를 할수 있도록 핸드폰이라는 족쇄를 채운것이었고 또다시 정지성이 지연의 출퇴근을 도와준다는 핑계하에 그녀를 만나지 못하도록 아에 자동차를 선물했다. 물론 지연에게 운전면허증이 있는 것을 계산하고 저지른 일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지연은 그녀를 위해서 그가 일부러 준비했다는 말을 믿고 감격하고 있었 다. 조금은 양심에 찔렸지만 정지성의 음흉한 얼굴을 떠올리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렇게 까지 할필요 없는데...전 대중교통 이용하는게 더 편해요. 준호씨 마음은 고맙지만, 자동차는 받을 수 없어요. 핸드폰만 고맙게 받을 께요." 지연은 고마움의 표시로 그를 살짝 포옹했다 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안돼." 준호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 큰소리로 반대를 했다, 황급히 목소리를 낮추어 그녀를 설득하 기 시작했다. 그녀는 꼭 자동차를 받아야 했다. 정지성이라는 파리가 계속 꼬이게 만들 순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매일 같이 그녀를 출퇴근 시킬수도 없는 노릇아닌가. 그는 한영그룹의 총수였고 그저 책상위로 올라오는 결제서류에 사인만 해서 그자리가 지켜 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결혼하면 사주려고 했던 거 한달 먼저 선물하는 거야. 생각해봐, 윤준호의 약혼녀가 차도 없이 버스타고 출퇴근 한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다행히 그의 어줍잖은 협박이 통했다. 지연은 잠시 갈등하더니 승낙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 였다. "시운전도 할 겸 내일 교외로 나갈까?" 지연과 단둘이만 있고 싶은 그는 은근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이번 주말은 집에서 그냥 쉬고 싶은데요. 뉴욕을 다녀온 여독이 아직 풀리지 않았나 봐요."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모르겠다는 듯 지연은 딱잘라 그의 간절한 제안을 거절해 버 렸다. 순간 준호는 기운이 다 빠져 버렸다. 이러다 결혼할 때까지 아무것도 못하는건 아닐지 두렵기까지 했다. 그래 이렇게 순진한 지연을 가질수 있었던 것도 다 기적이라고 그는 애써 초연해지려 애썼다. 오늘도 밤에 찬물로 샤워나 해야 겠구나. "...어때요?" "응?" 너무나 실망해 그녀가 하는 말을 듣지 않고 있던 준호는 그녀의 질문에 집중하려 애썼다. "맛있는 순두부찌게 해드릴 테니 저녁 드시고 가시라구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연은 너무나 순수하게 미소지으며 그를 돌아 보았다. "난...그냥 외식할까 했는데." "싫어요?" "싫을리 있겠어. 나야 지연이가 해준 음식 먹을수 있는것만 해도 감사하지." 그래 또 다른 허기나 달래자. 자포자기한 준호는 지연의 손을 꼭 잡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런데 준호씨..." 갑자기 지연이 수줍게 그를 불렀다. 준호는 무슨일인가 싶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일...미정이가...시골 부모님댁에 가실거거든요..." 한줄기 희망이 그의 심장을 마구 뛰게 만들었다. 혹시... "월요일에나 올라올 거에요. 그래서 말인데요..."


"좋아. 난 무조건 찬성이라구. 당신집에서 주말을 보내도 돼지?" 더 이상 그녀의 말을 기다리지 못하고 서둘러 자신이 물어 보고 말았다. 그의 질문에 지연은 은밀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얏호! 지연에게 핸드폰과 자동차를 선물하는 준호를 보며 겉으로는 비웃었던 쥰이었지만 퇴근해서 식사를 마친 미례에게 무뚝뚝하게 핸드폰을 건넸다. 자동차는 이번 조세현일이 마무리되면 사줄 생각이었다. 이 천방지축 날뛰는 여자가 위험한지도 모르고 그몰래 차를 몰고 나가 버리면 곤란하니까. "이게 뭐에요?" "핸드폰." 부끄러움을 느낀 쥰은 일부러 무뚝뚝하게 행동했다. 미례는 그가 약이라도 먹은건 아닌지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더 이상 그녀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살다보니 별일도 다 있어서요. 당신이 선물을 다하네요." "선물아니야!"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지르고 말았다. 무슨놈의 여자가 뭘주면 고마워 할줄 몰라. "그럼 나 안 받을래요." "무...슨...왜 안 받아?" "선물이 아니라면 뇌물일텐데...난 뇌물은 안받거든요." 미례는 약올리는 미소를 지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그...그건...뇌물아니야." "그럼...뭐에요?" "그냥...연락할때 필요할거 같아서." "아휴, 아침저녁으로, 눈떠서 잠자는 동안까지 하루 24 시간 붙어 있는데 무슨 연락이 필요한데요?" "그냥. 선물이라고 치고 받아둬. 무슨 여자가 꼬치꼬치 캐물어." 결국 쥰은 패배를 인정하고 주방을 빠져 나갔다. 내가 미쳤지. 저런 마녀가 어디가 예뻐서. 그래도 그녀의 핸드폰 0 번에 자신의 번호를 저장하는 것을 잊어 버렸다는 것이 생각난 그는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어떤 놈팽이를 그번호로 저장하기만 해봐, 내가 가만 놔두나. 그가 다시 들어 오는 소리에 미례가 멈칫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며 쥰역시 굳어 버렸다. 그녀는 막 입에 알약을 삼키던 중이었다. 그의 시선이 약상자로 향했다. 그 약이 무엇인지 짐작한 쥰은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이게 뭐야?" 이제까지 온순하던 쥰은 온데간데 없고 성난 야수가 본성을 들어내고 있었다. "보면 몰라요? 피임약이잖아요." 그녀는 자신의 팔을 거세게 움켜쥐고 있는 쥰의 손을 뿌리치려 애쓰며 쏘아 부쳤다. 그의 행동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그의 분노가 두려워졌다. "이걸 왜 먹는 거지?" 음산하기까지한 쥰의 음성. 미례는 등줄기로 흐르는 공포를 느꼈다. "왜 먹겠어요? 당연히 임신을 예방하기 위해서죠. 피임약 용도도 몰라요?" "그러니까, 왜 당신이 이걸 먹는거야.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분명히 말했을텐데요. 난 당신과 결혼하지 않아요. 그러니 피임하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당신이 하지 않기에 내가 하는 것 뿐이에요." "앞으론 먹지 않아도 돼." 단호한 음성으로 말하는 쥰의 눈빛이 너무나 차가워 미례는 자신의 팔을 움켜쥔 그의 손을 풀어내려 애쓰던 움직임을 멈췄다. "오늘부터 당신을 안지 않을 거니까." 그리고 그녀의 팔을 집어던지듯 놓으며 그대로 주방에서 나가버렸다. 그의 행동을,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왜 그가 상처받았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왜 자신이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고 느껴야 하는 걸까. 그리고 그의 마음을 닫아 버리고 말았다는 절망감 마저 느끼는 걸까. 미례는 자신의 마음이 갈갈이 ?기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여전히 이유를 알수가 없었다. 난 마음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칠년전 그 이후로 마음이 상처받는 일은 없을거라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오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감싸 안듯 팔을 몸에 두르며 그 렇게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쥰은 새로운 절망감에 빠지고 말았다. 자신이 그녀를 사랑한다고는 진작 깨닳고 있었지만 오늘 그녀의 행동으로 상처받으며 그 깊 이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세상에 세이치 쥰이, 얼음인간이라고 심장없는 인간이라고 불리던 그가 한여자를 이렇게 까 지 사랑하게 될줄이야. 그리고 상대방에게 그사랑을 보답 받지 못할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를 향한 감정을 깡그리 지워버릴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자업자득이지. 그는 한숨을 내쉬며 두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버린 수많은 여자들의 눈물어린 애원에도 그는 코웃음조차 치지 않을 정도로 아무 반 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에게 매달리는 여자들은 하찮은 벌레 보다도 못한 존재였기에. -당신도 똑 같은 아픔을 겪길 바래. 내 소원이야. 그의 마음을 끌어 보려 자살 소동까지 벌였던 한여성-같은 일본인이었다. 상당한 명문가의 딸이었던 그녀는 부모님이 정한 혼처 중 하나였었다.-은 뜻대로 되지 않자 악담을 퍼부며 떠났었다. 그녀의 말처럼 똑 같은 아픔을 겪게 된것이다. 아무리 그가 그녀를 원해도 미례는 끄덕도 하지 않는다. 그의 품에서 뜨겁게 반응을 하지만 그뿐, 그���상도 그이하도 그를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보이지 않는 벽을 쌓고 있었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무슨 짓을 해야 당신이 날 사랑해 줄 수 있을까. 그녀가 피임까지 할정도로 자신을 거부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두사람에게는 참으로 긴 밤이었다. 자신을 안지 않을 거라는 말을 쥰은 지켰지만 따로 침실을 쓰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나란히 떨어져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는 고문을 서로에게 가하며 거의 날을 새웠다. 미례는 그날밤 자신이 이미 돌이킬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는 것을 깨닳았다. 그녀는 이미 세이치 쥰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상처가 그녀의 감정을 막고 있었지만 처음본 순간부터 그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몰 랐다. 그가 자신을 구해준 순간부터.하지만 그녀는 결코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또다시 믿고 사랑을 받아 들이기에는 상처가 너무 컸으니까. 날이 밝자, 쥰의 기분이 나아졌기를 기대했던 미례는 절망하고 말았다. 처음 만났을때의, 아니 그보다 더 심한 상태로 변해 버린 쥰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북극풍보다 더 매서웠다. 미례는 이것 한가지는 분명히 알수 있었 다. 그는, 세이치 쥰은 신미례를 증오하고 있다는 것.

토요일 오전 근무만을 마친 한영그룹직원들은 나른한 봄날을 즐기기 위해 재빨리 빌딩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기분좋은 따뜻한 토요일 오후에 야외로 나가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지만 지연과 단둘 만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낼수 있는 기회는 더욱 놓치기 싫었다. 냉냉한 기운이 감도는 쥰과 미례의 사이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남의 애정사에 일일이 참견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모른척했다. 일미터는 떨어져서 걷는 두사람을 애써 못본척하며 지연에게 관심을 집중했다. "우리 장봐서 집에 가요." 지하주차장에서 쥰과 미례와 헤어져 그의 차에 탄 지연이 소풍이라도 나가는 아이마냥 신나 서 말했다. "그럼 백화점으로 가자. 지연이네 집에서 편하게 입고 있을 내옷도 살 겸." 백화점 식당가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두사람은 우선 남성복매장이 있는 층에서 내렸다. 남자의-그것도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옷을 고르는 일은 무척 즐거웠다. 특히 준호는 장신의 모델도 부러워할만한 몸매의 소유자였으므로 이옷 저옷 입혀보는 재미 가 솔솔했다. 하지만 매장 아가씨들이 준호를 보고 군침을 흘리는 것은 아주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일부러 약혼반지를 과시하며 준호의 팔을 잡고는 했다. 그러면 대부분 아쉬움이 가득담긴 시선을 준호에게 보내며 실망하는 눈치였다. "나를 그만큼 괴롭혔으니 이젠 당신 차례야." 한시간 가까이 수많은 옷을 입어보는 고통을 당한 준호는 복수하기 위해 여성복매장으로 지 연을 끌고 갔다. 그리고 지연이 한것과 똑 같은 행동을 취했다. 이옷 저옷 입혀보고 군침을 삼키는 직원을 비롯해 손님들까지 모든 남자들을 노려보며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이건 정말 싫어요." 그에게 질질 끌리다 시피 끌려 들어간 곳은 속옷매장이었다. "아주 야한걸로 고르자구. 저번에 뉴욕에서 보니 변변한 잠옷이 없던데?" 잠자리 날개같이 훤히 비치는 잠옷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며 은근하게 말하는 그를 간 신히 노려 보았다. "커플 속옷도 있어요, 손님." "그래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는 그 잠옷을 비롯해 커플속옷까지 챙기는 것이었다. 지연은 차마 얼굴을 들고 매장 직원을 볼수가 없었다. "입자 마자 벗길거면서." 입을 삐죽 내밀며 가볍게 앙탈하는 모습에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구, 회장님.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당황한 기색이 역역한 중년의 사내는 얼마나 황급히 달려 왔는지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 혀 있었다. "진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쇼핑백을 양손에 잔뜩 들고 있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라도 되는 듯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는 준호를 백화점오너인 진사장은 경악하여 바라보았다. 이사람이 정말 우리 회장님이 맞나 싶어하는 표정이 역역한 그를 보며 준호는 간신히 웃음 을 삼켰다. "뭣들하나? 회장님께 짐을 받지 않고?" 진사장은 충격에서 벗어나자 자신을 뒤따르는 직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백화점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자 두명이 재빨리 준호의 손에서 쇼핑백들을 받아 들었다. "위로 올라 가셔서 차라도 한잔 하고 가시죠, 회장님." "오늘은 백화점 손님으로 온거요, 진사장. 아, 내 약혼녀를 소개하지. 다음달에 한지연입니다." 손을 들어 진사장의 권유를 거절하며 지연을 소개했다. "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한지연씨.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진사장이 어떤 경로로 지연에 대해서 들었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짐작이 안되는 바는 아니 었다. 목요일 본사식당에서 있었던 일들이나 정지성이 방문한 일들에 대해서 한영그룹직원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지연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다소곳하니 인사했다. 진사장을 비롯해서 그들을 몰래 흘끔거리며 살피던 직원들과 손님들까지 한순간에 매료되고 말았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그들의 카리스마 회장이 무너지며 결혼을 선언한건지 분명하게 깨 닳는 순간이었다. "우린 지금부터 식품매장에 들러야 하는데...진사장은 일을 보세요."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진사장은 직원들에게 두사람의 짐을 준호의 차로 옮기도록 지시한후 정중한 인사와 함께 떠났다. "왠지 사람들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된 것 같아요." 식품매장을 돌며 쇼핑카트에 고른 물건들을 담으며 지연이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토요일이라 손님이 많은 것은 이해가 갔지만 어째서 유니폼 입은 직원들이 더 많이 눈에 띄 는 거야. "이래서 내가 말하지 않고 온건데...모두 알아 버렸으니 빨리 쇼핑을 마치고 떠나자." 준호라고 그들의 뜨거운 시선을 못본 것이 아니었다. 호기심에 가득찬 그들은 그와 시선이라도 마주 칠까봐 열심히 숨어 다니며 동물원 원숭이 보듯 구경하고 있었다. 차라리 경쟁회사 백화점으로 갈걸 그랬나 보다.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지연이 건네는 물건을 받아 쇼핑카드에 담는 일에 집중했다. 최대한 빨리 물건들을 사고 계산을 치른후 도망치듯 차로 돌아왔다. "미안해, 마음편한 쇼핑이 되지 못해서." 준호는 정말로 미안한 마음에 사과를 했다. 사생활조차 없는 그의 생활에 지연이 넌더리를 내면 어쩌지. 앞으로 약혼식을 올리고 결혼식까지 치르고 나면 그녀는 더 이상 평범한 한지연이 될수가 없었다.

결혼할


한영그룹총수의 아내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남들에게는 행복하기만 할 것 같지만, 일상적인 자유를 누리는 것도 힘들고 의무감에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는 자리였다. "그런 소리 말아요, 준호씨. 재미있었어요. 정말이에요. 빨리 가서 맛있는거 해먹어요. 아까 점심 먹은거 다 소화됐단 말에요." 밝은 표정의 그녀가 즐겁게 재잘거리자 준호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입맞추고 말았 다. 이런, 어딘가 숨어서 직원들이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준호는 아쉬움에 몸을 떼고 차를 출발시켰다. 빨리 지연의 아파트에 가서 못다한 일들을 마저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굳은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짐들을 현관에 던지듯 내려 놓고 지연을 품에 안고 자신의 욕망을 격렬하게 표시했다. 지연 역시 망설이지 안고 그에게 안겨 왔다. 집안 곳곳에 옷을 흩뿌리며 지연의 침실까지 다급한 손길로 서로를 애무하며 간 두사람은 침대에 눕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서로를 가졌다. 몇일동안 사랑을 나누지 않아 굶주려 있던 그들은 허기를 메우기 위해 몇시간을 서로를 탐 하고 또 탐했다. "결혼할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함께 살면 안될까?" 어느정도 욕망이 사그라 들자 준호가 지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벌써 해가 졌는지 방안은 상당히 어둑해졌다. "얼마 안남았는데 그것도 못참아요?" 놀리듯 물어보는 지연의 음성이 다행히도 부드러웠다. 준호는 지연의 표정을 보기 위해 불을 켜고 싶었지만 그러면 지금 느끼는 친밀감이 사라져 버릴까봐 그저 조용히 그녀를 품에 안고 감촉을 즐기고 있었다. 나긋나긋한 그녀의 몸을 쓰다듬고 있으려니 또다시 욕망이 치밀어 올랐다. "못참겠어. 지난 몇일간 당신을 안지 못해서 미치는 줄 알았단 말야. 음...너무 맛좋아." 그녀의 어깨를 맛있게 빨며 체취를 한껏 들이켰다. "하지만...사람들이 뭐라고 그러면..." 지연 역시 그와 함께 살고 싶었다. 결혼식을 올리기까지 몇주 남지 않았지만 몇 년은 남은 듯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주위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혼인신고부터 하면 안될까?" 준호는 아무렇지 않은듯 자신의 속셈을 들어 내었다. 법적으로 그녀를 묶어 둘 필요가 요즘처럼 절실한 적이 없었다. "그야, 상관 없지만...약혼식도 올기기 전에 혼인신고는 좀...." "순서가 바뀌긴 하지만...별 상관 없잖아. 그러면 우리가 함께 살아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을 거구. 당신이 좀 일찍 회사를 그만 두어야 하겠지만..." "꼭 지금 그만 두어야 해요?" 일하는 재미를 이제 알아가고 있었는데...조금 서운한 그녀였다. "대신 결혼하고 어느정도 안정되면 공부하는 거 반대 안할게. 대학원 진학해도 되고 다른 공부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해. 그렇지만 절대 남편을 외롭게 하면 안돼!" "약속할까요?" "어떻게?" "이렇게."


은근한 그의 시선을 받아내며 몸을 움직여 준호의 몸위로 올라탔다. 긴머리가 검은 실크가 되어 그의 얼굴과 몸위로 떨어져 내렸다. 지연의 몸안으로 자신의 남성이 사라지자 준호는 거칠게 숨을 들이 마셨다. 지연이 이렇게 요염했었나 싶었다. 한없이 순수하고 순결하게만 보였던 그만의 그녀가 전혀 다른 여자가 되어 그를 애태우며 가지고 놀았다. "제발..." 그녀의 움직임이 느려지자 한숨 같은 애원이 흘러나왔다. "안돼요. 준호씨도 항상 날 애태웠잖아요. 이젠 내 차례라구요." "이런건 어떻게 알았어?" "다, 선생님을 잘 만난 덕분이죠." "나중에 가만 안둘거야." "바라는 바에요." 지연은 쪽소리가 나게 입을 맞춰주며 율동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녀는 자신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사랑을 담아 표현했다. 당신만 내게 있어주면 되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그저 내게 당신의 사랑을 조금만 나눠주세요. 절정의 순간이 찾아오자 그의 가슴위로 쓰러지며 마음속 깊이 외쳤다.

제 13 장 당분간 숨어 있어야 겠다며 지성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모친이 얼마나 화가 나있을지 안봐도 훤했다. 방금 그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평소의 우아함을 버리고 소리를 지르셨던 것이다. 몇일전 지연의 신문기사가 나간 뒤로 모친은 인맥을 동원해 정정기사를 내려 하셨지만 지성의 입김으로 허사가 되었다. 사실 매스컴 고위관계자들 중 지연이 그의 사촌여동생이라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자신과의 스캔들 기사가 나갔어도 아무도 지연에게 벌떼처럼 달려들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가 사전에 주의를 주긴 했지만. 하지만 어머니가 화난 것은 오늘 밤 나간 방송때문일 것이다. 그의 장난이 지났쳤다며 당장 들어오라고 명령하셨지만 그가 미치지 않은 이상 나 죽었소 하고 들어갈리가 없었다. 좀 지나면 화가 가라 앉으실 것이고 그때 애교를 떨며 용서를 빈다면 그의 모친은 어느정도 부드럽게 잔소리로 혼내시고 마실 것이다. 이제까지 그래 왔으니까. 그래서 그는 부모님의 저택으로 가는 대신에 여의도에 있는 자신의 오피스텔로 갔다. 부모님도 모르시는 곳이니 당분간 들키지 않을 것이다. 처음 이 빌딩이 자신에게 분양 제의를 해 왔을때는 코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런 수작은 지겹도록 많이 겪어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이 빌딩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입주자를 고르는 오피스텔이라니. 연예인은 물론 정치인 경제인 문화계관계자까지 사회 유명혹은 저명 인사들을 선정해 입주 의사를 물어 온것이었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도 명단에 없으면 분양받을 수가 없었다.


25 층 건물에서 고작 10 층만 분양을 하고 나머지는 임대조건이었다. 지성은 명성이나, 인기 혹은 스타라는 조건 때문인지 24 층 로열층을 배정 받았다. 평수만 해도 백평이 넘는, 오피스텔이라기 보다는 호화 맨션에 가까웠다. 5 층부터 15 층까지 있는 다른 오피스텔도 삼십평이 넘으며 최고급으로 꾸며져 거액의 임대료라도 기꺼이 물고 들어오고 싶어하는 희망자로 넘쳐났다. 호기심에 사두긴 했지만 미국에서 살다시피 하여 지내본적은 없었다. 그는 방송국을 나오기전-모친과의 통화를 끝내기전에 관리실로 연락을 해서 잠시 후 갈거 라고 통보해 두었다. 그들이 삼십분도 채 안되는 시간에 얼마나 집안을 청소해 놓을 지 흥미를 느끼며. 최고라고 자신하던 그들을 시험해 볼 겸. 지하주차장에 빈자리를 찾아 스포츠카를 세우고 차에서 내린 그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성큼 성큼 걸음을 옮겼다. 운좋은 누군가는 엘리베이터 근처에 차를 세우고 동행한 여자와 벌써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 었다. 지성은 함께 타고 올라가고 싶은 마음에 뛰다시피 갔지만, 그들은 그를 기다려줄 생각이 없 어 보였다. 닫히는 문사이로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여자와 찌푸린 남자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충격이 온몸을 마비시켜 한동안 움직일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누굴 본거지. 설마... 엘리베이터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가 25 층에서 멎었다. 윤준호! 이 나쁜 새끼. 죽여버릴거야.

준호가 도와 주겠다는 것을 뿌리치고 지연은 혼자서 저녁을 준비했다. "정 도와주고 싶으면 식사후에 설거지는 준호씨가 해요." 하는 말로 그를 거실로 몰아내고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였다. 자신의 손으로 정성껏 준비해 서 음식을 차려 그에게 먹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할일이 없어진 준호는 거실 쇼파에 비스듬이 누워 리모콘으로 TV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그럼, 이번주 최고의 화제죠? -네, 그렇습니다. 정지성씨의 숨겨진 여자에 대한 이야기로 ���번주는 정말 뜨거웠습니다. 그가 평소에 보지 않는 연예프로그램이라 채널을 돌리려다 정지성의 이름에 멈칫했다. 화면에 얼마전 신문에 실린 정지성과 지연의 사진이 보였다. 이윽고 MC 가 취재기자에게 묻는 장면으로 바뀌었다. -정지성씨 측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아직 공식적인 입장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정지성씨와 아주 친한 한분의 말에 의 하면 어머니 다음으로 가장 사랑하는 여성이라고 했답니다. -그럼 정지성씨가 조만간 중대 발표를 하겠군요? -그건 두고 봐야 하겠습니다. 좀전에 간신히 정지성씨와 인터뷰한 화면을 보고 난 후 계속 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화면에 정지성의 얼굴이 보였다. 하얀면바지에 선홍색셔츠차림이 현란하여 못마땅하 기만 했다. '정지성씨,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이번에 좋은 소식있으셨지요'


'글쎄요, 겨우 주연후보로 올라갔을뿐인데요, 뭘. 다음엔 더욱 열심히 노력해서 더 좋은 결 과를 팬여러분에게 보여 주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기생오라비 같은놈. 말은 잘하는군. '얼마전에 신문에 난 기사에 대해서...' '아, 지연이요. 내가 아주 아끼는, 사랑하는 동생이지요.' 생글생글 웃으며 기자를 바라보는 폼이 더 이상 묻지마를 역역히 나타내고 있었다. 기자도 지성의 무언의 압력을 느꼈는지 인터뷰는 흐지부지 끝났다. '아직은 결혼에 대한 의 사는 없으신 걸로 알겠습니다.' '당분간은 영화에 전념할 생각입니다.' 환하게 웃는 정지성의 얼굴이 잠시 화면을 가득채우다 사라지고 다시 스튜디오가 나왔다. -그럼 결혼설은 단순한 설에 불과한 거네요? -정지성씨 성격으로 봐서 정말 결혼한다면 숨기지는 않을겁니다. 화면은 곧이어 다른 연예인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세요?" 식탁을 차린 지연이 곁에 다가와 그의 어깨를 흔들때까지도 준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 다. 정지성을 사랑하지만 그와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해서 포기한걸까. 스타를 사랑하는 것은 괜찮지만 결혼한다는 것은 또다른 문제니까. 나는 지연에게 어떤 존재로 선택받은 걸까.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들을 맛있게 먹으면서도 준호의 머리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여기 머리복잡한 남자가 한명 더있었다. 쥰은 어제 미례의 행동으로 받은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 함께 있으면서도 두사람은 완전한 타인처럼 행동하고 있어 더 이상 아무런 희 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된 것은 자신의 잘못이 크다고 쥰은 생각했다. 애당초 애인이상 관계는 싫다고 잘라 말한 것은 미례였다. 자신이 괜한 욕심을 부리다 상처를 받은 것 뿐이었다. 이성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마음까지 따라 주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 예전같으면 자신이 먼저 결혼이라는 말만 나와도 도망 쳤을텐데. 평소와는 달리 퇴근후, 오후내내 미례는 자신의 방안에 틀어 박혀 나올 생각을 않고 있었다. 점심을 거른대다 저녁도 아직 먹지 않고 있어 걱정이 되었다. "여보세요?" 적막한 넓은 거실을 요란한 핸드폰벨소리가 깨웠다. "세이치 쥰 당신부터 가만 두지 않을거야. 당신 먼저 죽여 버리고 윤준호 그자식 죽여버릴 거야." "정지성?" 새로 찍을 영화 대본 연습상대로 자신을 택하기라도 한 건가. 그는 심란한 생각들을 한켠으로 밀어 내고 정지성과의 대화에 정신을 집중했다. "이시간에 무슨일이야?"


막내 동생을 타이르듯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장 이곳으로 와." "말버릇 안고치면 전화 끊는다." "내가 지금 네놈한테 존대말 하게생겼어? 윤준호 그자식이 애까지 딸린 여자랑 같이 있는걸 봤는데!" "어디서?" "여의도에 있는 한국빌딩." 정지성은 살기가 가득 담긴 음성으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마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처럼. 쯧쯧 어린놈이 성질은 급해서. "가서 얘기하지." 쥰은 바로 앞집에 전화를 넣어 부하들을 오게 했다. 맞은편이 결혼 안한 경호실 총각들 합숙소였던 것이다. 덕분에 그가 갑자기 집을 비우게 되었을때도 미례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다. 비록 본인은 달가와 하지 않았지만. 그가 외출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닫힌 방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가 나간 사이 방에서 나와 뭐라도 먹어주길 바래며 집을 나섰다. 지성이 빌딩관리실에 연락을 해두었는지 차를 주차하고 그의 오피스텔이 있는 24 층까지 많은 시간이걸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문을 열어주는 지성의 표정은 볼만했다. 마치 화풀이 상대를 찾고 있는듯 싶었다. "상당히 무시무시한 빌딩이야. 자네 같은 인기인들은 안심하고 살수 있겠어. 허락없이는 개미새끼 한마리 못들어 오게 되있더군." "집구경 시켜 주려고 부른거 아니야." 말과는 달리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지성의 팬트하우스는 자신의 아파트 두배는 됨직한 크기에 실내장식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최고급으로 우아하게 꾸며져 있었다. "깨끗하네." 그건 지성도 쥰의 생각과 같았다. 자신이 살지 않는 동안에도 청소를 정기적으로 하는 듯 했다. "내집 구경 끝났으면 빨리 윤준호 외도 현장이나 잡으러 가지." "급할거 없어. 우선 전화 한통 넣고." 쥰은 일부러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정지성이 통화 내용을 듣게 하기 위해서 였다. "여보세요?" "회장님 접니다." "무슨일이라도 생겼어?" 혹시 조세현이 무슨짓을 저지른 건지 묻는 것이리라. "별일 없습니다. 지금 어디게십니까?" 정지성이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를 것 같아 입을 막아 버렸다. 손바닥 밑에서 꺽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해 버렸다. 정지성이 아무리 자신보다 체격이 크고 덩치가 좋다고 해도 그를 뿌리치기가 수월치 않을 것이다. "알면서 뭘물어봐. 지연이랑 함께 있지." "지연씨 아파트에서요?" "정말 오늘 형 이상하네. 아침에 다 얘기해 줬잖아. 지금 지연이랑 저녁 먹고 있는 중이야." "지연씨좀 바꿔 주시겠습니까?" 투덜거리면서도 준호가 핸드폰을 지연에게 건네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세이치 쥰씨? 무슨 일이신데요?" 지연의 음성이 흘러 나오자 몸부림 치던 지성의 움직임이 조용해 졌다. 그의 크게 뜬 눈에 의문이 가득차는 것이 보였다. "오늘 회장님과 함께 계셨습니까?" "네, 그런데요?" "쭉, 한번도 떨어지신적 없구요?" "저, 왜 그러세요?" 질문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한 지연이 남감해 하자 준호가 다시 핸드폰을 받아 드는 것 같았 다. "빨리 용건을 말하지 않으면 나 화낼거야, 형." "아무래도, 인호를 찾은 것 같습니다. 인혜도요." 그의 말한마디에 준호의 화는 바로 가라 앉았다. "거기가 어디야?" 쥰은 위치를 알려 주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니까 지금, 아까 내가 본 사람은 윤준호가 아니라고 내게 말하려는 겁니까?" 상황이 파악되자 지성의 말투가 180 도 바뀌었다. 어쨌든 상대는 자신보다 열살이나 많은 연장자였으므로. 그리고 아까 자신을 누르던 힘으로 미루어 쥰을 도저히 이길수 없다는 것을 깨닳았기 때문이다. 그가 윤준호의 경호원이라고 해도 호리호리한 겉모습만 보고 얕봤던 것이 큰 오산이었다. 온몸이 엄청난 근육덩어리고 이루어진 사내였다, 쥰이라는 남자는. "맞아. 그남자가 25 층에서 내렸다고 했지?" "네, 25 층은 이 빌딩 주인이 산다고 들었어요." "25 층 전부를?" 그의 의문은 당연했다. 24 층만 해도 지성의 크기만한 집들이 네채는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그 인호라는 사람이 누군데요? 윤준호랑 똑같이 생겼던데." 아무리 좀 떨어진 거리였지만 지금도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남자의 얼굴이 생생했던 것이다. "배다른 동생이야. 같이 있던 여자는 배다른 여동생일거구." "그들하고 무슨 문제가 있나요?" "그들이 지금 숨바꼭질 하고 있거든, 자신들 부모랑 의붓형이랑." 더 이상은 알려 줄 생각이 없는 듯 입을 다물어 버리는 쥰을 보며 지성은 내심 안도의 한숨 을 내쉬었다. 아까 오해 했을 때는 다 죽여 버리려고 마음 먹었지만 사랑하는 동생 지연이 상처 받을 것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했던 것이다. 십년동안 한남자만 바라보던 그 성격으로 보건데 큰일을 내고도 남을 아이였다. 자신이 지금 준호의 질투를 부채질하고 있는 것도 다 여동생을 위해서 인데...아무도 몰라주 니 억울할 뿐이었다. 하긴 여기 쥰은 그런 그를 이해하고 도와 주고 있지만. 그런데 이렇게 착한 그를 오해하고 윤준호랑 함께 죽여 버릴 생각이었으니. 그가 쥰을 죽일 능력이 있는지도 이제는 의문이지만. "전형적인 부르주아 집이군." 문을 열어주는 지성을 보고 대뜸 준호가 던진 말이었다. 전에 그의 저택을 보고 한말을 앙갚음하는 것이리라. 불쾌한 빛이 역역한 준호를 보며 지성은 히죽 웃었다. 그의 예상대로 TV 를 본 모양이었다.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여기 윤준호를 약올리기에는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그놈은 어디있다는 거야?" 지성의 뒤로 쥰의 모습이 보이자 성급함을 들어내며 물어왔다.


"여기 건물주인 모양입니다. 좀전에 관리실을 통해 그와 만날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형식상 정지성씨가 자신의 집 문제점을 사장에게 직접 말하고 싶어 한다고 해뒀습니다. 함께 올라 가시면 됩니다." "그럼 가보도록 하지." "이봐, 윤준호씨. 세이치 쥰은 당신 부하일지 몰라도 나는 아니라구. 명령하는 건 기분 나빠." 지성의 깐죽대는 말투에 준호의 차가운 시선이 향했지만 그는 끄떡도 없었다. 원래 정지성이 강심장이었던 것이다. "그럼 함께 가 주시겠습니까, 정지성씨?" 의외로 준호가 자세를 낮추었다. 정지성은 의기양양해서 먼저 앞장서서 나갔지만 쥰은 조금 염려스런 눈빛을 준호에게 보냈다. 저렇게 최대한의 자제심을 보일 때 준호는 위험한 상대였기 때문이다. 25 층은 24 층과는 구조가 조금 달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넓은 복도에 커다란 문이 하나 보였다. 벨을 누르자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세사람은 실내로 들어섰다. 그곳은 대형응접실이었고 응접실과 이어진 발코니를 통해 거대한 인공정원이 눈에 들어왔 다. 정원의 지붕은 돔형으로 꾸며져 밤하늘이 그대로 보여 곳곳에 켜진 불빛과 어우러져 환상적 으로 보였다. 반쯤 열린 문을 통해 향긋한 꽃향기 마저 느껴졌다. "무슨...이런 빌딩에 이런 곳이?" 정지성이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어서오세요, 정지성씨. 이런 동행들이 계셨군요." 인호는 형과 쥰을 보고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마치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 했다. "어서오세요, 윤회장님. 그리고 세이치 쥰. 초대하지는 않았지만 기꺼이 대접해 드리죠." 너무도 살벌한 분위기에 넉살좋은 정지성조차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가운데 자리를 잡 고 다들앉았다. 가정부인 듯한 중년의 여인이 차를 가지고 나왔다. "인혜는 어딨는 거냐?" 가정부가 물러나고 나자 준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제방에서 자고 있어. 정지성씨 차 드세요. 늦은 시간에 보자고 해서 좀 놀랐습니다. 맘에 안드시는 곳이 있으시다구요?" "아, 네, 별로 없는데. 사실대로 말하자면 당신 형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길래 도와 줬을 뿐입니다." 속시원하게 말하고 자신은 차를 마시며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거냐?" 인호와 정지성의 대화를 무시하며 준호는 물었다. 인호는 대답대신 어깨를 으쓱하더니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오늘 정지성씨 방문객이 한영그룹회장과 경호실장이라고 전해 듣고 날 찾아 온거라고 짐작 은 했어." "그걸 물은게 아니야. 인혜를 왜 데리고 들어온거냐? 그리고 왜 네 부모님께 연락도 안한거 지?" "이젠 형 부모도 된거 아니었던가? 법적으로 말야. 정확히 삼년전에." "계속 말꼬리 잡을 거냐? 묻는 말에 대답해." 한동안 두형제간의 치열한 눈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숨기는 것이 많은 쪽인 인호가 먼저 시선을 돌려 버렸다. "인혜 몸이 안좋아서 데리고 들어 왔을 뿐이야."


"어디가 어떻게 안좋은 건데? 그리고 왜 부모님께는 알리지 않은 거야?" "까~악!" 인호의 대답은 자지러지는 비명소리에 막혀 버렸다. "여기서 기다려. 절대 따라오지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인호가 응접실 반대 방향으로 달려 나가며 외쳤지만 준호나 다른 남 자들이 그 말을 따를리 없었다. 몇 개의 방문을 거쳐 긴 복도를 뛰어가다 보니 마지막 방문이 열려 있었다. 문앞에는 걱정스런 표정의 가정부가 안절부절 못하며 서있었다. 인호는 이미 방안으로 들어가 침대에서 몸 부림치는 여자를 달래고 있었다. "쉿, 아무일도 없어. 자, 여기 아기 있잖아." 하며 그가 인혜에게 건내는 베개를 보며 세남자는 방문 앞에서 경악하고 말았다. 더기가막히는 것은 인혜가 베개를 안아 올리며 안심하여 짓는 행복한 표정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준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높혀 물었다. 그의 큰소리에 인혜가 겁에 질려 몸을 웅크리는 것이 보였다. 인호는 형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부드러운 어조로 인혜를 달래었다. "어서 나가. 그게 도와 주는 거야." 잠시 형을 노려 보며 명령하고는 다시 인혜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우리 아기 뺏으러 온 사람이야?" 인혜의 눈빛은 매우 불안해 하고 있었다. 혼란스런 감정이 깃든 그녀의 눈은 정상으로 보기에는 힘들었다. 핏기없는 창백한 얼굴은 마치 죽은 시체 같아 평소의 아름다움을 찾아 볼수가 없었다. "따라 오지 말라고 했잖아." 인혜를 진정시켜 다시 잠들게 한후 응접실로 돌아온 인호가 분노를 감추지 않고 소리질렀다. "그보다 어서 사실을 말해. 인혜에게 무슨 일이 생긴거 맞지?"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 "너, 정말...이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냐?" 준호는 인호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빨리 사실을 말해라, 안그러면..." "안그러면? 또 협박이라도 하려는 거야?" "그래, 필요하다면. 네가 사실을 털어 놓지 않으면 바로 네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거야. 지금 이자리에서. 그분이 이곳에 와서 직접 보게 되는 것은 원하지 않을 텐데." 인호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분노를 억누르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손동작도 눈에 들어 왔다. 쥰과 지성은 한켠에서 방관자처럼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비겁한놈. 예전부터 넌 남의 약점을 물고 늘���지는 비겁한 놈이었어." "사설이 길어." 인호의 욕설에도 준호는 눈하나 깜빡이지 않고 덤덤하게 재촉했다.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 인혜." "그래서?" 짧은 인호의 대답에 준호가 정확한 답변을 요구 했다. "다른 사람들 있는데서 말하고 싶지 않아. 내 서재로 가자구." 쥰과 지성을 의식한 인호의 제안에 두사람은 서재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이었다. "...일이 그렇게 된거야." 인호는 준호에게 두달전 병원에서 연락을 받고 인혜를 찾아가 수술을 시켰고 당시 임신오개월의 태아를 유산한 인혜가 충격으로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것에 대해 자세히 털어 놓았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인혜를 정상적으로 만든 후에 형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몇일전부터 친구 진우의 선배를 만나 인혜의 심리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최면요법도 인혜가 당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극도록 두려워해서 효과가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조금더 치료를 해보고...최후 수단을 취하는 수밖에." "그게 뭔데?" 인호의 비장한 말투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여 물었다. "권박사-진우선배인 정신과 의사말이 최면으로 부분기억상실을 유도할수 있다고 하더군. 인혜가 끔찍한 사고를 당하고 그래서 기억하기 싫어 하는 기억들을 묻어두는 방법이 있다더군. 검증된 치료는 아니야. 그래도 저대로 정신이상자로 둘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유산한 아이에 대한 일을 기억에서 지워버린단 말이군." "가능하면...시도해 볼만하니까." 한동안 두남자는 깊은 생각에 잠겨 침묵을 지켰다. 배다른 동생들에게 애틋한 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동생의 병은 준호를 상심 시키기에 충분했다. 인호의 행동이 잘한짓은 아니었지만, 지금 상태의 인헤를 보일수 없다는 것에는 그역시 동 의 했다. 계모가 사실을 안다면 몸져 누울 일이었다. 공부하라고 보낸 딸이 교통사고를 당한 일만 해도 큰일인데 그사고로 오개월된 태아를 잃었 고 그 때문에 미쳤다는 것은 감당하기 힘들것이다. 더욱이 그 딸은 이제 겨우 스물두살의 처녀였다. "진실로 진실을 덮을 수 밖에 없겠다." 이윽고 입을 연 준호의 말에 인호가 의문을 던졌다. "어떻게?" "인혜가 교통사고 당한 일은 알리는 거야. 그외는 덮어 두고.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네가 유럽에...이탈리아나 남부 프랑스쪽이 좋겠다. 그쪽에서 인혜를 요양시키고 있다고 설명해 둘게. 한동안 인혜가 위독해서 섣불리 연락을 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많이 안정되어서 조만간 귀국할 거라고. 이정도면 부모님도 안심하실거야. 문제는 너와 통화를 하고 싶어 하실텐데...어떻게 되겠지." "...마워." "뭐라고?" "고맙다구!" 악을 쓰듯 인사말을 내던지는 배다른 동생이 문득 귀엽게 느껴져 스스로도 놀라고 말았다. "그래도 인사는 할줄 아니 다행이구나." 인호에게 느끼는 감정을 애써 부인하며 일부러 무뚝뚝하게 말했다. "누구처럼 혈육을 부정하는 냉혈한은 아니니까." "너는 내 혈육이 아니야. 지금 너와 인혜를 도와 준다고 해서 너희 가족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야." 잠시동안 감돌던 따스한 감정은 한순간 사라져 버리고 서로를 원수 대하듯 하는 두 형제만 이 남았다. "누...누가, 형제로 인정해 달라고 사정했어! 나 역시 너 따위 형으로 인정하지 않아." 속마음과는 달리 또다시 인호에게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준호는 자신을 노려보는 인호의 물기어린 붉은 눈을 보며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배다른 동생들과 계모를 만나면 옛상처가 되살아나 자신도 모르게 독설을 내뱉게 된다. 그리고 후회하고. 언제까지 이런짓을 해야 하는 건지.


"너무 늦었어. 오늘은 그만 돌아 가마. 월요일에 회사로 찾아와라. 연락하고." 인호는 서재에서 나오지 않았다. 세사람이 집을 나서도 배웅조차 하지 않았지만 준호는 모른체 행동했다. 지금 인호는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어할 것이다. 혼자서. "들어가서 술한잔 하겠어?" 24 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춰서자 지성이 준호에게 물었다. "형 먼저 주차장에 가있어. 곧 따라갈게. 정지성씨와 잠시 할 이야기가 있거든." 쥰은 뭔가 말하려 했지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너머로 사라졌다. "어, 무섭게 왜 이러시나. 고맙다는 인사라면 필요 없는데. 난 아까 동생분을 당신으로 착각 하고 오해했었거든. 아, 아쉽다. 내 예상대로 따로 처자식을 숨겨두고 있었더라면 좋았을걸...그럼 지연이랑..." 지성의 장황한 설명은 준호의 손에 멱살을 잡히며 끊어졌다. 준호는 지성을 그대로 벽에 밀어 붙이며 손에 힘을 더욱 주었다. 지성은 어마어마한 힘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 남자들은 반찬으로 산삼깍두기라도 해먹나, 무슨 힘이 이렇게 좋아. 쥰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한 힘을 쓰는 준호를 보며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여유있는 눈빛으로 그를 담담히 바라보았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딱 한마디만 충고하지. 마지막이야. 두번다시 지연에게 수작부리지마. 매스컴을 들쑤시는 일도 포함이야. 명심해. 한번만 더 지연이 곁에서 알짱 거리면 죽여 버리겠어." "그럴순 없는데, 윽. 살살좀 해. 숨도 못쉬겠어...켁켁."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걸로 보여?" "아니, 장난 아닌 것 알았으니...이것좀 놔. 놓고 말하자구."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있게 장난스런 지성을 보며 어이가 없어진 준호는 그를 풀어 주고 떨어져 나왔다. 정지성이라는 남자는 조금도 진지한 것을 모르는 사내 같았다. 그런 그를 지연이 진심으로 사랑할리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이가 어려서인지 아직도 아이 같은 면이 많았다. "나도 딱 한가지만 묻자구." 목을 주물르던 지성이 갑자기 진지하게 말하자 준호의 차가운 눈길이 그에게 닿았다. "지연이에 대한 당신 감정. 사랑인가?" "내가 왜 너한테 그런 것을 말해 줘야 하지?" 그의 질문에 도리어 준호가 되물었다. "순순히 물러나길 원한다면 말하는게 좋을 텐데?" 자신의 매서운 눈초리에도 꿋꿋하게 웃는 지성을 보며 감탄이 절로 나왔다. "지연이를 사랑해. 됐어?" "얼마나?" "뭐? 지금 애들 데리고 장난하는 거야?" "아, 글쎄. 얼마나 사랑하냐니까? 당신 목숨보다 더? 가진거 모두 버릴수 있을 만큼? 평생? 영원히? 이정도는 대답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지연이를 사랑하는 깊이를 너 따위가 어떻게 이해하겠어. 그녀가 없으면 난 시체나 다 름없다구. 지연은 내게 공기와도 같은 존재라구. 내가 숨쉬는 이유야. 그걸 네가 이해 할수나 있겠어. "너 따위 한테 말로 표현할수 없을 만큼. 됐어?" 마음속의 절규와는 달리 그의 말투는 차갑고 단호했다. "아, 좋아. 그정도로 봐주지. 내가 깨끗이 포기할게. 그럼 잘가." 너무도 순순히 포기를 하는 지성을 의심의 눈초리로 노려보던 준호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안으로


들어갔다. 뭔가 미심쩍기는 하지만 지성이 스스로 포기한다고 했으니 번복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생겼던 것이다. 무엇으로 지성을 믿게 되었는지는 자신도 미지수지만. "앞으로 일로만 만나자구." "글쎄...다음엔 좀 예의를 갖춰서 날 대하게 되길 바래." 닫히는 문사이로 지성의 말이 들려 왔다. 무슨 소리야, 스타 대접을 해달라는 건가. "또다시 만나자구, 매제." 닫힌 엘리베이터문 앞에서 지성은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주위에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겼을 테니까.

열한시가 넘는 시간이 되어서야 준호가 돌아 왔다. "갔던 일은 잘 해결?어요?" 그의 쟈켓을 받아 들며 지연이 부드럽게 물었다. "응. 대충." "무슨일로 경호실장님이 만나자고 한건데요?" "아, 그냥...일이야기였어. 그동안 뭐하고 있었어?" "TV 보고 음악듣고 책도 읽고." 준호가 화제를 돌려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자 아무렇지 않은듯 대답하며 상처받은 마음을 숨 겼다. 그는 절대로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예전에 연이와 만났을때는 속마음을 다 털어 놓고 무슨 이야기든 해주었는데. 그런데, 결혼을 약속하고 이미 서로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이인 자신에게는 그의 본모습 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가 얼마나 상처받기 쉬운 사람인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녀뿐이었다. "심심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조금." "미안, 미안. 오늘과 내일은 지연이 한테 전적으로 봉사하기로 약속했는데 말이야." "일때문이었는걸요 뭘." 그녀의 말에 그의 표정에 죄책감이 어리는 것이 보였다. "함께, 목욕할까?" 이내 표정을 밝게 하며 물어왔다. "우리집 욕실은 두사람이 하기엔 너무 작아요." "상관없어. 더 좋잖아. 딱 붙어 있을수 있으니까." 결국 준호의 주장대로 두사람은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새벽녁에야 잠이든 두사람은 창문을 뚫고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정오의 따가운 햇살에 억지 로 잠에서 깨어야 했다. "아, 따끈한 모닝빵에 커피한잔 먹었으면 좋겠다." 기지개를 켜며 지연이 말하자 준호가 끌어 안으며 웃음을 삼켰다. "소원이 참 거창한데. 기꺼이 들어 들이죠." "아파트 상가에 있는 파리바케트에서 사오면 더 맛있어요." "커피는?" "음...준호씨가 타주면 더 맛있겠죠?" "알았어,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 금방 나갔다 올게." 그녀의 볼에 요란하게 입을 맞추고 난후 침대에서 내려가 옷을 차려 입고 아파트를 나섰다.


빵과 디저트로 아이스크림까지 사들고 아파트로 들어서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별로 반갑지 않았지만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어제처럼 지연이랑 떨어져 있어야 하는 일이 생기지 않았기를 바라며. "준호냐?" "아, 할아버지?" 뜻밖에도 외조부였다. 그는 핸드폰을 귀에 대고 주방으로 향했다. "집에 전화 했더니 안들어 왔다고 하더구나, 어제." "네. 그런데...어쩐 일이세요?" "네가 뉴욕에서 돌아오자 마자 전화해서 한 말때문이데 말이다..." "제가 결혼한다고 말씀 드린거요?" 냉동실에 아이스크림을 넣으며 건성으로 물었다. "그래...네 결혼에 대한 생각은 변함이 없는 거냐?" "그럼요. 할아버님도 제가 결혼하길 바라셨잖아요." "그게...네 결혼상대가 말이다..." "할아버지도 마음에 드실 거에요. 지연..." "내가 그아이를 뒷조사 해봤는데 말이다..." "뭐라고요? 뭘 하셨다구요?" "그렇게 화를 내지 말고 내말 좀 들어 봐라..." "어떻게 그러실수가 있어요?" "그아인 남자 관계가 너무 복잡한 아이야. 너하곤 어울리지 않는 아이란다." "뭐라고 말씀하셔도 전 결혼할겁니다. 제 마음은 변하지 않아요. 한번도 지연을...." "내일 당장 올라가마. 가서 이야기 하자." 갑자기 끊어진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는 폴더를 닫고 식탁위에 내려 놓았다. 남자관계가 복잡하다니. 지연처럼 깨끗하고 순수한 여자가 어디 있다고. 설마 정지성과의 일로 저러시는 걸까. 할아버지도 지연을 만나 보시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것이다. 그리고 지연을 마음에 들어 하실 것이 틀림없었다.

"이를 어쩌지, 김비서?" 수화기를 내려 놓으며 노회장이 울쌍이 되었다. "작은 회장님 결심이 대단하신가 보죠?" "기필코 그아이와 결혼할 작정인가보네." 팔걸이를 오른손으로 내리치며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어차피 회장님이 계획했던 일 아니셨습니까?" 김비서는 회장의 책임라는 듯 혀를 찼다. 노회장은 성격이 급해 마음만 먹으면 앞뒤 정황없이 밀어 붙이고 보는 스타일이었다. 20 세기에나 통할 성격이니 성공했지 지금 같으면 망하기 십상이었다. 지금 한영그룹회장이 윤준호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래 내가 다 잘못했어. 인정할테니...김비서가 수습 방안 좀 연구해봐. 그 아이한테서 준호를 떼어 놓아야 한다구. 그런 아이를 손주 며느리 삼느니 지금 죽고 싶네." "사실만큼 사셨으니 그것도 한 방법이겠군요, 회장님." "자네 지금 나 약올리나?"


"제가 그럴리 있겠습니까?" 말과는 달리 김비서가 회장을 약올리고 있는 것은 눈에 뻔이 보였다. "그런데 왜 자네 말이 왜 믿어지지 않는 걸까?" "회장님이 원체 의심이 많으셔서 그렇죠 뭐." "자네도 나이를 먹더니 능구렁이가 다됐어. 예전에는 내말이라면 껌뻑 죽더니." "전 제 강직함 때문에 회장님께서 총애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내가 말을 말지." 노회장은 심통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무슨일이 있어도 그런 여자를 며느리로 삼을 순 없다고 굳게 마음먹을 뿐이었다. 제 14 장 월요일이 되자 미례와 쥰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두사람은 서로 눈길조차 마주치지 않았고 잔뜩 굳은 표정으로 있어 사무실 사람들 조차 눈 치를 볼 정도 였다. "저, 언니...주말에 무슨 안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지연이 조용히 물어 보았지만 미례는 아무일도 없었다며 슬프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걸 미소라고 부를수 있다면 말이다. "미례씨랑 뭔가 잘 안돼가는 거야?" 준호 역시 자신의 사무실에서 쥰을 붙들고 탐색에 들어 갔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좋아. 말하기 싫으면 관둬." 몇번을 물어보던 준호도 포기하고 말았다. 오후에는 지성이 매니저인 오형근과 변호사를 대동하고 계약을 하기 위해 나타났다. "오랜만이네, 지연." 짧은 스포츠머리에 훤칠한 체격의 오형근은 군인 같은 느낌의 사내였다. 검게 그을린 남자답게 생긴 얼굴도 그런 이미지에 한몫하고 있었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형근오빠." 오형근은 이모부와 이모의 절친한 친구의 아들로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이모부내외 손에서 자랐다. 그래서 지성과 형근, 지연은 남매 같은 사이기도 했다. "좋은 소식 들리더라, 결혼한다며?" "네, 오빠는 아직 좋은 사람 없어요?" 생긋웃으며 형근을 바라보는 지연이 못마땅한 준호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지연과 결혼할 윤준호입니다."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지성이 매니저인 오형근입니다. 지연이랑은 함께 자라 남매 같은 사이죠." 시원스러운 형근의 인사에 준호의 매서운 눈빛이 조금은 수그러들었다. "결혼축하드립니다, 윤회장님." 결정적으로 진심어린 형근의 축하인사에 준호의 태도가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고맙습니다. 지연에게 오빠 같은 분이라니 가깝게 지내고 싶군요." "동감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일이 끝나면 하자구요." 아니꼬운듯 지성이 심퉁맞게 끼어들었다. 준호는 오형근과 지성의 변호사를 직���들에게 서로 인사를 시키고 사무실로 안내했다. 그동안에도 쥰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고 아무런 말도 없었다.


인사를 할때에도 그저 고개만 숙였을 뿐이었다. 예전의 말없는 쥰으로 돌아가 버린것만 같 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예전보다 더 찬바람이 부니..." 비서실장 민석이 고개를 꺄웃거리며 회장실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몸이 불편하다며 차 준비를 대신 부탁하는 미례를 대신해서 탕비실로 들어갔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쥰과 넋이 나간듯한 미례언니. 두사람 사이에 무슨일이 생긴것만 같았다. 눈치가 빠르지 않는 지연조 차 쥰과 미례의 사이에 뭔가가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CF 계약을 위해 회사 고문 변호사가 회장실로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연로하지만 정정해 보이는노인과 육십대 전후반의 신사가 나타났다. "윤회장 안에 있나?" 막 차를 나르고 회장실문을 닫고 나오던 지연은 흠칫 놀랐다. 노인이 바로 준호의 외조부이자 재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고 있는 노회장이었던 것이 다. "지금 안에서 회의중이십니다. 바로 전하겠습니다, 노회장님." "아, 아니 됐어. 일하는 데 방해가 되면 안되지. 내가 기다림세." 노회장은 손을 내저어 지연을 만류했다. 미례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지연의 옆에 섰다. "김비서, 저기 앉아 기다리도록 하세." "네, 회장님." “일들 봐요. 보기 좋구만. 내 진작 아가씨들을 비서실에 채용하라고 했겄만 말을 듣지 않더니 무슨 변덕을 부린거지?" 비서실 한쪽의 고객대기용 응접실 쇼파에 앉아 김비서에게 지팡이를 건네며 노회장이 웃었 다. "결혼하신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보죠." "흥! 누구 마음대로!" 노회장의 큰소리에 지연과 미례는 걱정스런 시선을 주고 받았다. 아무래도 준호가 지연과 결혼한다고 해서 찾아 오신듯 했다. 하지만 아직 지연을 보고 아무런 말씀이 없으신걸 보면 그녀가 예비신부라는 것은 모르고 계신 것 같았다. "딱 좋군. 이름이..." 노회장이 부탁한 녹차를 준비해 건네 드리자 한모금 맛본 후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지연입니다." 지연의 가슴에 착용한 사원증을 돋보기 너머로 뚫어지게 바라보는 노회장에게 얼른 대답했다. "그래요, 한지연씨. 외모만큼이나 이름도 예쁘군. 아, 녹차가 아주 맛있다고 말하려고 했다네. 딱 좋아. 이번에 입사했나?" "네, 그렇습니다, 회장님." 다소곳이 대답하는 지연을 꼼꼼이 ?어보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노회장을 보며 김비서는 웃음을 삼켰다. 노회장은 김비서를 쏘아 보아 주고는 시선을 다시 지연에게 돌렸다. 물론 아주 부드럽고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일하기는 어떤가?" "네, 아주 좋습니다, 회장님." 설마 노회장님이 자신이 준호의 약혼녀라는 것을 알고 계신건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떠보 시는 걸까. 지연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조심스런 미소를 지었다. "올해 나이가?"


"스물셋입니다, 회장님." 아무래도 그녀의 짐작이 맞는 듯 싶었다. 노회장님의 살펴보는 듯한 시선이 너무도 불편했다. "한지연씨를 불편하게 하고 계십니다, 회장님." 곁에서 김비서가 주의를 주었다. "아, 미안하네. 가서 일보게. 내가 주책맞게 붙들고 있었군." 지연이 자신의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는 동안에도 노회장의 시선은 떠나지 않았다. "아까워, 아깝다." "그만하세요, 회장님. 들리겠습니다." 김비서는 소근거리며 노회장의 주의를 돌렸다.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저정도는 되야 내 손주며느리감이지. 아름답지. 참하지. 상냥하지. 행동거지 예의 바른것좀봐. 준호는 저런 아이를 곁에 두고도 그런 애랑 결혼하겠다니...." "그거야, 회장님께서 최희연양을 연이라는 소녀라고 속이셨으니 그렇죠." "그걸 위로라고 하는 거야?" 버럭소리를 지르던 노회장은 지연과 미례가 동시에 고개를 들고 바라보자 재빨리 목소리를 낮추었다. "난 절대 준호 결혼 반대야. 우현그룹최회장 인품을 믿고 그딸을 점찍었더니...완전히 속았어." "그래도, 한지연씨는 힘들 것 같은데요?" "왜?" "아까 보니 반지를 끼고 있더라구요." "악세사릴 수도 있어.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런거 좋아한다잖아." "몇캐럿은 될 것 같은 다이아를 액세서리로 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자넨 내 희망을 짖밟으며 기뻐하는 것 같군." "현실을 일깨워 들이는 겁니다." 김비서는 냉정하게 말하며 차를 마저 마셨다. 노회장은 여전히 지연을 훔쳐 보며 아쉬움을 달래 가며 차를 마셨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비서실 문이 열리며 젊은 남자가 들어오자 미례가 맞아 들였다. "윤인호입니다. 회장님과 오후에 약속을 했는데..." "인호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인호는 갑자기 들려온 노인의 음성에 시선을 돌렸다. 노회장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치자 그의 표정에도 놀라움이 깃들었다. "안녕하셨습니까, 회장님." "할아버지라 부르라고 그렇게 말해도 안듣는 구나. 이리와서 앉아라. 네놈 얼굴좀 보자." 지연은 인호라는 남자를 살피며 노회장이 그를 반기는 이유를 알수가 없었다. 분명 준호와 인호는 배다른 형제였고 서로 앙숙이었다. 그녀가 알기로 준호는 계모와 배다른 동생들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아니 증오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준호의 외조부는 자신의 친손자라도 대하는 듯 인호를 대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딸을 불행하게 만든 여자가 낳은 아들인데 말이다. "어째 전에 봤을때보다 마른 것 같다." "회장님은 여전하신데요." "말버릇하곤. 이제 그만 할아버지라고 불러라, 이놈아.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네놈 미국에 있을 때 봤는데...언제 한국에 온거야?" "두달 됐어요, 회장님." 노회장의 말에도 불구하고 인호는 꼬박꼬박 회장님이라는 칭호를 붙혔다.


"하는 일은 어쩌고?" "때려 쳤어요." "잘했다. 이젠 형곁에서 일을 돕도록 해라." "여긴 어쩐 일이세요?" 노회장의 질문을 회피하며 인호가 되물었다. "네놈 형이 결혼한다기에 ?아 온거야." "윤준호가 결혼을요? 세상이 다 웃겠군요. 그성격에 결혼을 다한다니...정략결혼이라도 하는 건가요?" "말조심해라, 듣는 귀가 많아." 노회장의 주의에 시선을 미례와 지연에게 향하던 인호의 눈빛이 흥미롭다는 듯 빛났다. 인호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지연은 조금 놀랐다. 생각보다 형제가 많이 닮았던 것이다. 그래도 배다른 형제라 조금은 틀릴줄 알았는데... 준호 보다 조금 어려 보였지만 그와 쌍둥이라 할만큼 똑같이 생겼다. 준호가 좀더 권위적으로 보인다는 점만 빼면. "비서실 물이 좋아 졌네요." 그는 지연에게 시선을 못박고 회장에게 농담처럼 말했다. "그런것 같구나." 그뒤에도 노회장과 담소를 나누며 인호는 계속해서 지연에게 시선을 보내왔다. 지연은 노회장까지 간간히 자신을 바라보자 앉아 있기가 너무나 불안했다. 견디다 못한 지연은 인터폰으로 손을 뻗쳤다. 준호도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계약도 거진 끝나갈 터였다. "무슨일 있어요, 지연씨?" 준호의 음성이 흘러 나오자 지연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노회장님과 동생분께서 30 분전부터 와 계십니다." "아, 알았어요." 잠시후, 서두른 흔적이 역역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신없는 와중에 지성.형근과 인사를 나누고 떠나 보냈다. "건강이 더욱 좋아 보이네요, 회장님." 회장실로 노회장을 모시며 쥰이 밥갑게 인사를 건넸다. "제주도 공기가 너무 좋아서 말이다, 쥰아. 너도 잘지냈지? 준호가 속 안썩이던?" "회장님이 어린아인가요, 속을 썩이시게.." 쥰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노회장을 보자 겨우 안색이 밝아진 것 같았다. "정말로 오실줄은 몰랐는데요, 할아버님." 회장실로 모신 외조부를 보며 난처함을 감추지도 않고 준호가 말했다. "네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내가 먼산 불구경하듯 보고 있으란 말이 냐?" 노회장은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로 준호에게 야단을 치기 시작했다. "넌, 좀 기다려야겠다, 인호. 할아버님 말씀이 끝나면 얘기하자." "난, 상관없어.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겠는걸 뭘." 인호는 쇼파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며 씨익 웃었다. "도대체 그녀의 어디가 마음에 안드세요?" "전부다.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전투태세에 돌입한 외조부를 보며 준호는 난감해졌다. 이렇게 무작정 적의를 품으시다니. 그는 도움을 청하듯 쥰을 보았지만 그는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그래 알아서 해결해라 이거지.


"보신적도 없으시잖아요." "내가 왜 안봐." "물론 오늘 만나 보셨겠지만...판단을 내리시기에는 너무 성급하시잖아요." "내가 김비서 시켜 샅샅이 알아보고 계속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는데 뭐가 성급해?" "도대체 김비서님은 지연이에 대해서 어떤 조사를 하셨다는 거에요?" 결국 화살이 김비서에게 향했다. "지연이라뇨?" 김비서가 알수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김비서님이 지연이 뒷조사를 했다면서요?" "전 지연이라는 사람 모르는데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회장을 번갈아 보았다. "잠깐, 내가 상황을 정리해 줄게. 이렇게 하다가는 내차례가 올 것 같지도 않으니까." 인호가 중간에 끼어 들었다. "형이 결혼할 여자가 정확히 누구야?" "한지연이지 누구겠어." 당연한걸 왜 묻냐는 듯 준호가 말했다. 노회장과 김비서가 경악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 노회장님은 누구라고 생각하셨어요?" "최희연인줄 알았지." "네, 우현그룹최회장님딸 최희연양인줄 알고...제가 조사한 분도 최희연양입니다." 김비서도 노회장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네? 제가 왜 최희연이랑 결혼하는 데요?" 준호가 기가막히다는 듯 물었다. "그야 네가 십년전 소녀랑 결혼할거라고 했으니까...나는 당연히...그래서 최회장 딸을 연이라는 소녀로 만들어 네게 소개 시켰으니까..." 노회장은 얼빠진 표정으로 두서없이 설명을 늘어 놓았다. "그럼 최희연이 연이가 아니란 말인가요? 할아버님이 꾸민 일이라구요? 어떻게 그러실 수가..." "지금 그걸 따질때가 아니것 같은데..." 인호가 곁에서 준호의 분노를 막았다. "내가 최희연이랑 결혼하길 바라셨다면서 갑자기 반대하시는 건 무슨 이유죠?" "그게...김비서..." 노회장은 김비서에게 떠넘겼다. "두분을 소개하시고 걱정이 되신 노회장님께서 제게 최희연양을 조사하게 하셨는데... 그분의 사생활이 너무 문란해서...그러니까..." "됐어요. 최희연 사생활을 제가 알필요는 없지요. 그럼 더이상 제 결혼을 반대 하시지 않으시겠죠?" "잠깐. 그럼 네가 결혼한다는 아가씨는 누구냐?" 노회장이 의심의 눈빛으로 물었다. "한지연씨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아까 만나 보셨을거 아니에요. 이번 어머님 제사때 올라 오시면 인사시키려고 했다구요. 그리고 미리 말씀 드리는데 반대하셔도 전 결혼 할겁니다." "한지연이라면..." "비서실 한지연씨를 말하시는 건가요?" 김비서가 노회장을 대신해서 물어보았다. "당연하죠." 노회장과 김비서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가운데 인호의 표정은 떨떠름해졌다. "당장 불러 들여라. 지금 인사 받자." "다른 말씀 하시려는 것은 아니구요?" 준호가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노회장은 열심히 고개까지 저어가며 부정했다.


외조부의 아이 같은 행동에 웃음을 참으며 지연을 들어오게 했다. "지연씨 할아버님께 정식으로 인사해요. 내 외조부님이세요." "한지연입니다." 지연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드렸다. "그래, 아가씨가 우리 준호랑 결혼 한다구?" 노회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지연의 손을 꼭 잡았다. "이렇게 고마울때가 있나. 우리 준호랑 결혼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노회장이 너무나 열렬하게 기쁨을 표시하자 지연은 몸둘바를 몰랐다. "그래 부모님은 모두 계시고?" 지연을 자신의 옆자리로 끌어 당겨 앉게 하며 다정하게 물어 보았다. 순간 지연의 몸이 굳어졌다. 설마 자신이 고아라서 결혼을 반대하시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두분다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은 제가 다섯살 때 어머님은 지난 이월달에 돌아가셨습니 다." "많이 힘들었겠구나." 속삭이듯 대답하는 지연의 손을 꼭잡고 다독이며 노회장이 위로하자 불안이 조금은 엷어졌 다. "그럼 가까운 친척 어른들은 안계시는 건가?" "이모님 내외분이 계십니다." "준호야 그분들게 결혼승낙은 받은거냐?" 노회장의 질문이 준호에게 향했다. "이번주 안으로 찾아뵈려고 해요, 할아버님." "아니, 약혼식을 이번달 말에 할거라는 놈이 그렇게 여유를 부리는 거야?" "별로 준비할 것도 없어요. 쥰이 다 알아서..." "네놈이 약혼하지 쥰이 약혼하는 거야!" 노회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지연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이런, 미안하구나. 내가 소리를 지르는 못된 버릇이 있어서 말이다. 많이 놀랐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번주 안으로 네 이모님을 만나뵙고 싶구나. 양가 어른들 상견례도 해야지. 않그러냐, 준호야?" "네, 할아버님. 그렇게 할게요." 준호는 할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 곰살궂게 대답했다. 준호의 그런 태도가 우스워 지연이 살포시 미소 짓자 남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얼어 붙었다. "지연아, 그런 웃음은 네 남편될 준호 한테나 보여줘라. 알았지?" "네? 네, 할아버님." 지연은 영문도 모르고 대답했다. 준호의 외조부가 자신을 손주며느리로 기꺼이 받아 들이자 그녀의 마음은 하늘에 날아오를 것 같이 가벼워졌다. 은근히 걱정했던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노회장은 다정하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지연에 대한 자신의 호의를 표시했다. 근심하던 일이 해결되자 안심이 된 노회장은 갑작스런 피곤함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나 김 비서와함께 성북동의 본가로 떠나자 인호는 형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어제 네 어머님께 전화 드렸다. 안심하시면서도 너희들이 잘있는지 걱정 많이 하시더라. 전화 한번 드려서 안심 시켜드려라." "알았어."


인호는 짧게 대답하며 자신의 속마음을 감췄다. 어린시절부터 우상시해 왔던 형한테서 냉대 받는 비참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혜 문제가 해결되는 즉시 회사로 출근해." "싫어." 생각해 보지도 않고 거부의 말이 입에서 튀어 나왔다. "영업담당 이사자리를 비워두겠다." "싫다니까." "싫어도 해. 네가 한영그룹 대주주인 이상 책임은 다해야지. 놀고 먹을 작정은 아니겠지?" "이런곳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놀고 먹는 것은 내자유고 내돈을 쓰는 거니 상관하 지마." "또다시 너한테 협박하고 싶지 않으니 좋게 말할 때 들어라." "이런...정말...그따위로..." 인호가 흥분해서 씩씩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형을 노려 보았지만 준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네가 말했다시피 난 파란피가 흐르는 냉혈한이라서 말이다. 다소곳이 회사에 나와서 네 능 력을 120%로 발휘하도록 해라. 말단직원이 아니라 이사자리 주는것은 미국에서 보인 네실력을 감안해서야." "하, 눈물나게 고맙군. 기가 막혀서..." "네가 열심히 일해서 나나 할아버님 얼굴에 먹칠하지 않을 거라고 믿으마." "난, 지금 승낙한게 아니야. 그리고 내가 당신네들이랑 아무 상관없다고 한 사람 입에서 무슨 먹칠운운하는 거야?" "인호 네가 회사에 나오는 순간부터 넌 내 동생이 되는 거다." 순간 인호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섣부른 희망을 품다가 절망하기 일쑤였던 과거 를 생각하면 그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 날 데리고 노는 거야? 사탕 던져주면 좋아서 바짓가랑이 붙들고 늘어질 어린아이로 보여?" "난 분명히 말했어. 앞으로의 일은 모두 너의 행동에 달려 있어." 준호의 표정은 단호했고 그의 속셈을 알아내기는 불가능했다. 태어나면서부터 감정을 숨기는 훈련을 받은 그를 무슨 수로 떠볼 수 있단 말인가. 인호는 준호의 의도를 알아내려는 것을 포기했다. "난 갈 테니 잘있어." 인호는 형의 말을 무시하기로 마음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회장실 문 손잡이를 붙잡을때까지 준호는 아무런 제제를 하지 않았다. "인혜 문제를 빨리 매듭짓고 나오길 기다리겠다."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의 뒤로 형의 단호한 음성이 따라왔다. 인호는 문을 소리내어 닫아 버렸다. "안녕히 가세요." 지연은 인호를 향해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비록 배다른 동생이지만 그녀의 시동생이 될 사람이기에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윤씨 집안이 얼마나 지저분한지 알면서 시집오려는 건가요?" 느닷없는 인호의 질문은 의미심장했다. 그의 표정만큼이나. "시아버지될 사람과 남편될 사람은 서로를 원수 보듯하고 시어머니는 계모인데다가 배다른 시동생은망나니고 또다른 배다른 시누이는 정상이 아닌 집안을 모두 끌어 안을 만큼 윤준호라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건지...아니면, 그 모든 것을 덮어줄 부와 명예에 눈이 멀었나요?"


짝!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인호의 얼굴이 반쯤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점점 선명해지 는 손자국. "앞으론 좀더 형수에 대한 예절을 갖추고 날 대해 주길 바라겠어요. 안녕히 돌아가세요." 한차례의 충격이 지나가자 인호는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은 여러모로 사람 놀래키는 일뿐이군. 예비형수로서의 애정으로 알고 받아 들이죠.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되길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지연을 향해 놀리듯 절을 하는 시늉을 하더니 또다시 커다랗게 웃어댔다. 놀란 표정의 민수와 미례를, 폭발하려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지연을 뒤로 하고 인호는 그 자리를 떠났다. 새끼 고양인줄 알았더니 암사자였다. 연약해 보이는 아름다움 밑에 숨겨진 강한 성격이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오랜만에 한눈에 들어오는 여자를 발견했는데 이미 임자가 있다니, 그것도 준호형의 약혼녀 였다. 그녀를 만만하게 봤다가는 큰코 다칠걸 형, 아마도 말야. "저...지연씨...전화 왔는데..."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씨근 거리는 지연에게 미례가 조심스럽게 알려 주었다. "아니 그 전화가 아니고...지연씨 핸드폰 같은데..." 지연이 책상위의 수화기를 드는 것을 보며 미레가 다시 일러 주었다. 그제서야 자신의 가방안에서 요란하게 울어대는 핸드폰소리를 들은 지연은 황급히 가방에서 꺼냈다. 핸드폰을 지니게 된 것이 익숙치 않아 종종 잊어 버리기 일쑤였다. "여보세요? 이모?" "그래, 지연아. 나다. 바쁠테니 용건만 말하마. 오늘 저녁에 집에서 네약혼자 하고 저녁이나 했으면 하는데...괜찮겠니?" "오늘요? 저 너무 갑작스러운데..." "이번주에 나나 네 이모부가 같이 시간내기가 힘들 것 같아...오늘 마침 시간이 나서. 안될까?" "준호씨한테 물어 보고 전화 들릴께요." 폴더를 닫으며 자신이 이모에게 핸드폰 번호를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을지 궁금해졌다. 미정이가 알고 있기는 하지만...미정이가 이모한테 말하진 않았을 텐데...아, 지성오빠한테 말했겠구나. 고 고자질쟁이가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성 오빠에게 고해 바치는 모양이었다. "좋아. 찾아 뵙겠다고 전화 드려요." 다행히 준호는 어려워하지 않고 간단히 승낙해 주었다. "아까 낮에 할아버님이 하신 말씀도 있고, 나도 지연씨 가족들 빨리 뵙고 정식으로 허락받 고 싶어. 반대들 하신다 해도 내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지만 말야. 지연씬?" "반대하지 않으실 거에요. 이모님이나 이모부님 모두 좋으신 분들이에요." "그런 얘기가 아니야. 반대 하신다 해도 지연씬 나랑 결혼할 거냐구." 이상하게 진지한 준호를 보며 지연은 가슴이 설레였다. 혹시... "물론이죠. 반대 하신다 해도 준호씨랑 결혼할 거에요." "아, 다행이다. 난 또 지연이가 겁이 많아서 물러 설까봐 걱정했지." 실망스럽게도 더 이상 준호는 진지한 태도를 버리고 농담으로 얼버무렸다. 혹시 그가 사랑 을 고백하는 것은 아닐까 내심 기대했던 지연은 실망감을 몰래 감춰야만 했다. 지연의 이모님 댁은 담장이 높고 감시 카메라까지 설치된 이층집이었다.


준호의 집보다는 작은 규모였지만 일반 가정집에 비교한다면 상당히 큰 저택에 속했다. 지연의 이모님 내외가 생활에 어려움이 없다는 것은 한눈에 알수 있었다.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지연의 이모는-나이가 오십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상당한 미모의 소유자로 지연과 친모녀간으로 보일만큼 많이 닮았다. 이모부 역시 건장한 체격의 호남형으로 젊었을 적에는 여자들 꽤나 울렸을 것처럼 보였다. "어서와요, 윤준호씨." "어서오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꽃을 좋아 한다는 지연의 귀뜸에 커다란 꽃바구니를 준비해 지연의 이모에게 건내자 기쁨의 비명을 지르는 모습이 어린 소녀같아 웃음을 삼켰다. "지연이가 힌트를 많이 준 모양이군." 지연의 이모부가 가장 좋아 한다는 브랜디를 건네 받은 그역시 즐거움을 감추며 짐짓 꾸짖 었다. "마음 씀씀이가 너무 예쁘기만 한데 뭘 그래요, 당신은. 자리에 앉도록 해요. 지연아, 넌 이모 좀도와주렴. 일하는 아주머니가 오늘 제사가 있다고 일찍 가버리셨지 뭐니. 준비는 다 해주시고 갔으니 데워서 차리기만 하면 돼." "네, 이모." "아, 자네는 나랑 바둑이나 둘텐가? 혹시 바둑을 둘줄 안다면 말야." 지연이 이모를 따라 모습을 감추는 것을 지켜 보며 준호는 속으로 웃었다. 바둑을 둘줄 아 냐고? "조금 둘줄 압니다." 일류기사들을 능가하는 실력을 가진 그였지만 지연의 이모부에게 기꺼이 져 드릴 생각이었다. 물론 아슬아슬하게, 승리의 짜릿함을 즐길수 있을 만큼의 여유를 가지고 말이다. "음 제법 두는군." 삼십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지연의 이모부가 대견하다는 듯 준호를 칭찬했다. "이런, 담배가 떨어졌군. 잠시만 기다리게나, 내 서재에서 담배 좀 가져옴세." 상당한 골초인 이모부가 텅빈 담배갑을 구겨 재떨이에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했 다. "그동안 열심히 궁리해 두게나." 이기고 있는 자의 여유로움을 가지고 그가 너그럽게 말하며 서재로 들어갔다. "어, 여긴 어쩐 일이야?"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며 지성의 모습과 함께 그의 놀란듯한 약간 과장된 외침이 들려 왔다. 누가 배우 아니랄까봐. 지성이 오늘 자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에 전재 산을걸수도 있는 준호였다. "그러는 너는?" "나야, 허락받고 드나드는 사람이지. 가까이 오지 말라고. 아직도 멱살 잡힌데가 아프다니 까." 준호가 쇼파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려 하자 지성이 엄살을 피웠다. "내 경고를 벌서 잊어 버린건 아닐테지?" "잊어버릴리가 있나. 얼마나 아팠는데. 걱정말라구, 약속은 지킨다니까."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지성이 얼마나 얄미운지 준호는 화를 겨우 참아야만 했다. "아니, 지성이 네가 왠일이냐? 도망다니는 줄 알았더니?" 서재에서 나온 지연의 이모부는 지성을 보고 몹시 놀라면서도 반가워했다. "제가 이런 자리에 빠져선 안되죠, 아버님."


뭐 아버님? 아에 나 죽여 주십쇼 하는군. 준호는 지성을 어떻게 요리해 줄까 궁리하기 시작 했다. "식사들 하세요, 준비 다됐어요. 아니, 지성이 너?" 지연의 이모까지도 지성을 보고 반기는 기색이 역역했다. 아니 최소한 준호의 눈에는 그렇 게 보였다. "아직도 화 안풀리셨어요, 어머니?" 뭐? 이젠 어머니? 좋아. 소원대로 죽여주마. "손님이 계셔서 참는거야. 나중에 보자. 저녁은 먹었니?" "당연히 안먹었죠. 아 배고파라." 마치 제집처럼 당당하게 식당으로 앞장서서 들어가는 지성을 이를 갈며 지켜 보았다. 이집에서 지성은 항상 환영 받는 존재인듯 싶었다. 그것이 못마땅하면서도 부럽기까지한 준 호였다. "어머, 지성오빠?" 식탁에 찌개를 내려 놓던 지연마저 지성을 보고 반기는 것이었다. 가슴에 둔한 통증을 느끼며 준호는 억지로 평온함을 가장해야만 했다. "그래, 지연아. 탕아가 돌아 왔단다." "와, 끝내주게 차렸네요? 역시 사위가 좋긴 좋은 가봐." 자리를 잡고 앉은 지성이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자 이모가 손을 찰싹 때리며 말렸다. "제발 예의좀 갖추도록 해라, 정지성. 내가 널 이렇게 가르켰니?" 날이선 이모의 음성에 지성의 손이 식탁밑으로 숨었다. "자, 어서 들도록 해요, 윤서방. 윤서방이라고 불러도 되지?" "물론이지요, 이모님." 그래, 정지성 넌 이집 양자나 해라. 난 사위가 될 테니. "입에 맞아요?" "정말 맛있는데요." "저도 맛있어요, 어머니." "넌 얌전히 앉아서 먹기나 해라, 정지성. 나 아직 화 풀리지 않았다." 준호에게는 봄바람 같은 이모가 지성에게는 시베리아 벌판에 부는 매서운 바람같았다. 아무래도 지성이 지연의 이모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았다. 아주 큰 잘못이기를 준호는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그래, 준호씨 외조부님께서 양가 상견례를 하자고 하셨다고?" 대화는 어느새 양가 상견례까지 이르렀다. "네, 될수 있으면 빨리 하고 싶어 하셔서." "하긴, 약혼식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모부가 동의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노회장님 뵌지 꽤 오래 되서 만나 뵙고 싶었는데 잘됐네요." 무슨? 지연의 이모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기쁘게 말하자 준호는 당황스러웠다. "준호씨 외조부님과 아시는 사이셨어요?" 지연이 준호 대신 궁금한점을 물어 주었다. "물론이지. 노회장님이 내 팬이잖니. 지금도 생일엔 꽃바구니를 보내 주시는걸." 꿈꾸는 표정으로 이모가 말하자 준호와 지연의 입이 벌어져 다물어지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했어요. 이모님이랑 노회장님께서 그렇게 가까운 사이라고는..." 지연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하자 이모가 소리내어 웃었다.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내서 만나 뵙도록 하지. 당신이나 나나 그동안 소원했던 것도 빌어 야 할거야." 이모부의 말에 이모가 동의하며 서로의 스케줄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잠깐! 내가 지금 뭘 놓치고 있는거지. 준호는 어수선한 머리속을 정리하려 애써야만 했다. "아참, 지연이 너 약혼식 예복은 맞추었니?" "아직..." "내가 잘아는 디자이너한테 네 약혼식과 결혼식 드레스를 부탁해 놓았단다. 그래도 되겠지 요, 윤서방? 혼수도 부족함 없이 남부럽지 않게 해주고 싶어요. 워낙 없는게 없는 집안이니 마땅히 준비할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명색이 인륜지대사라는 혼산데 소홀할 수는 없잖니. 네 엄마 대신 부족함 없이 다 해주고 싶은게 내 마음이란다." 말을 마치며 이모는 손끝으로 눈꼬리를 훔쳤다. "이모맘 다 알아요. 저도 이모를 엄마처럼 생각하고 있다구요." "내가 딸이 없어 결혼식장에서 신부를 신랑에게 인도하는 역을 못할줄 알았는데 지연이 덕 분에 해보게 되는 구나. 돌아가신 네 아버지는 서운하겠지만 말이다." "별말씀을요. 아버지도 하늘에서 기뻐하실 거에요." 갑자기 식탁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아, 그렇지. 자네 아까 두다만 바둑 식사 끝나면 마저 둬야 하네." 지성에게 다짐 받으며 이모부는 분위기를 바꾸었다. "물론입니다. 승부를 내야죠." "두나마나 아버지가 이길텐데 뭐하러 시간 낭비해요?" 갑자기 지성이 끼어들며 투덜거렸다. 그는 바둑을 두는 일에 시간을 쏟을 만큼 진득한 성격이 못 되었던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 윤서방이 일부러 져주고 있는게 초보자인 나도 훤히 보이는데 뭘요." 지성의 생각없는 그말에 잠시 주위가 조용해 졌다. 이윽고 이모부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지성이 말에 신경쓰지 말게. 죄송스러워 할 필요도 없고. 자네가 져주려고 고민하는 걸 지 켜보는것도 재미있었거든." "윤서방이 이해해요. 이이가 바둑이라면 사죽을 못써서 그래요." "아닙니다. 이모부님과 바둑두는 걸 저 역시 즐겼습니다." "하여간 지성이는 쓸데없는 말을 잘해서 문제에요. 정지성 넌 내일 중으로 정정기사 내도록 해라." "꼭 그래야 해요?" 지성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꼭 그래야해. 그렇지, 윤서방도 이참에 약혼기사 실도록 하게." "약혼기사요? 신문에요?" 왜 그 생각을 미처 못했지. 지성과 지연의 기사로 속태웠던 것을 생각하니 억울해졌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일 당장 조간 신문에 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지시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아, 알았어요. 그만들 해요. 벌써 다 손써놨으니까 염려 붙들어 매시라구요." 볼멘 음성으로 지성이 짜증을 냈다. "정말이지? 먼저번처럼..." "정말이에요. 이젠 장난 안칠 테니 그만좀 하세요." 말투와는 달리 애정어린 시선으로 지연의 이모를 바라보는 지성을 보며 어떤 사실이 떠올랐다. 최고의 스타 정지성의 부모인 정한우 감독과 배우 나하연. 지금까지 자신이 지성의 장난에 놀아난 것을 깨닳은 준호는 갑자기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일인가?"


정한우는 배꼽을 잡고 웃고 있는 준호를 염려스럽게 지켜보며 물어보았다. "준호씨 괜찮아요?" 곁���서 지연이 그의 손을 잡으며 걱정스러워 하는 것을 알았지만 웃음을 멈출수가 없었다. "이제서야 눈치챘나 보지, 매제?" "상당히 짖궂군, 처남!" 간신히 웃음을 멈춘 준호가 매섭게 지성을 노려 보았다. 그 때문에 마음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괘씸하기 그지 없었지만 그보다 안도감이 더 컸다. "일종의 테스트였다고 생각하고 너무 억울해 하지마, 매제." "아주 사악한 테스트였다고 생각한다네, 처남." 영문을 알수 없어 하는 지연의 이모부 내외를 곁에 두고 한참을 별 것 아닌 말싸움을 계속 하던 두남자는 식사가 끝나고 응접실로 자리를 옮기며 타협을 본듯 했다. 사실 준호가 마음에 들었던 지성은 더 이상 장난치는 것이 재미없어졌고 새로 생기는 매제(?)와 친목을 다지는 일에 마음이 더 끌렸던 것이다. 준호 역시 지연에게 과거의 남자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더 이상 질투하지 않아도 되어 처남(?)이 되는 지성이 예쁘게 보이기 까지 했다. 누가 손위 인가를 두고 타협을 보지 못해 사소한 실강이를 앞으로도 쭉 이어 가게 되었지만 말이다. "지연이 나좀 잠깐 보자. 그래도 되지 매제?" "물론이지, 처남." 지성이 지연을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간 사이 준호는 정한우와 나하연과 함께 차와 과일을 먹으며약혼식과 결혼식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무슨 말인데 오빠?" 이모집에 올때면 쓰는 그녀의 방에서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별말 아니야. 그저 이 오빠가 네게 충고 한마디만 하려고." "또 준호씨 골탕먹이려는 거야?" "그런거 아니야. 더 이상 반대 하지 않는 다니까 그러네. 윤준호라는 남자가 썩 괜찮다는 것은 이제 알았어. 내가 하려는 말은 너에 대한 거야." 진지한 표정의 지성이 한동안 물끄러미 지연을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지연아, 네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살아." "난, 지금도 솔직하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무슨 말하려는 지 알잖아. 성장과정 때문에 그 렇게 됐다는 것은 알아. 그렇지만 앞으로는 하고 싶은말, 하고 싶은일 참지 말고 살라는 거야. 다른 사람 감정이나 눈치 보지 말고. 너 자신에게 솔직하게 살라구. 너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란 말야. 그게 누가 됐든지 말야. 특히 네 배우자가 되는 윤준호에게는 네가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요구해."

제 15 장 이튿날, 지성의 약속대로 모든 일간지에 일제히 그들의 기사가 실렸다. 얼마전 지성과 떠들썩 했던 한지연이 사실은 그의 이종사촌 여동생이며 한영그룹회장 윤준 호와 이달 말에 약혼식을 올릴거라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그녀가 지성의 사촌동생이라고 알려지게 되자 결국 그녀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도 기사화 되었다. 나하연의 쌍둥이 여동생이자 함께 데뷔해서 결혼 후 은퇴하기까지 활동했던 나하미와 그녀


가 사랑했던 비운의 천재화가 한성훈에 대한 러브스토리까지 그들이 알아낼수 있는 한도내에서 모든 것이 기사화 되었다. "어쩜 감쪽 같이 속일 수 있어요, 지연씨." 여느때처럼 신문기사를 접하자 마자 은경이 비서실로 쳐들어 왔다. 민석이 미안해 하며 지연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지연씨 엄청 부자겠다." "네?" "한성훈화백 그림은 부르는게 값이라며?" "그래도 팔고 싶지 않아요." "가지고 있는 작품이 많구나?" 은경의 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몇점요. 어머니께서 아끼시던 거에요." "그렇겠지. 정말 놀랐어. 지연씨가 정지성과 사촌간이라니. 어쩐지 많이 닮았다 했다니까." 은경뿐이 아니라 신문기사가 나간 후로 만나는 사람마다 지성과 닮았다며 그의 싸인을 부탁 한다는청탁을 받기 일쑤였다. "언니 미안해요. 일부러 속인건 아니에요." 미례와 단둘이 있게 되자 지연이 사과를 했다. 여전히 쥰과 미례의 사이에는 한랭전선이 흐르고 있었다. 더욱 살벌해진 쥰 근처에는 될수 있으면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않고 피해 다닐정도였다. "괜찮아." 간단히 대답하는 미례 역시 딴 생각에 가득차 있는 듯 했다. 어두운 표정이 보기에도 안타 까웠다. "지연씨 2 번 전화에요." 민석의 말에 지연은 수화기를 들었다. 오늘 하루 종일 축하 전화 받느라 너무나 힘들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퇴근 시간이었기에 마음이 놓일 정도였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한지연씨?" "네, 그런데요? 실례지만 누구신지..." 낯선음성에 지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인호엄마 오선화에요..." "네?" "다른사람들이 제가 한지연씨에게 전화한 것은 몰랐으면 좋겠어요." 지연이 놀라서 소리치자 준호의 계모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오여사의 의견을 존중해 목소리를 낮추어 전화를 받았다. "만나고 싶은데...만나 줄 수 없을까요?" "그게...저..." 갑작스런 제의에 지연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준호의 계모가 그녀를 만나고 싶어하는 이유를 알수가 없었던 것이다. "준호와 결혼한다고 기사가 났더군요...염치없는 부탁인 줄 알지만...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미안해요...한번만 만나줘요." 이렇게 까지 간절하게 원하는데...하지만...준호가 이사실을 알면 가만 있지 않을 텐데. -다른 사람 감정이나 눈치보지 말고 하고 싶은일 하고 살란 말야.


어제밤 지성이 자신에게 충고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오른 것은 왜 일까. 준호의 계모를 만나는 일을 정말 자신이 원하는 일인것일까. 그래. 지연은 솔직히 인정했다. 그녀는 준호의 계모를 만나고 싶었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말도 많았고 듣고 싶은 말도 많았다. 준호의 눈치를 보느라 그녀를 만나지 않는 다면 아마도...후회할것이다. "언제가 좋을까요?" 지연은 그녀와 내일 점심 약속을 하고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자신이 잘한일인지는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속이 후련해 지는 것을 느꼈다. "지연씨, 퇴근후에 예복 맞추러 가기로 한거 잊어 버리면 안돼." 회장실 문이 열리며 준호의 모습과 함께 다정한 음성이 들려 왔다. 지연은 새삼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닳으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모부와 이모님도 그를 너무나 마음에 들어 하셨다. 사실 노회장님 손자라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두분은 무조건 승낙하셨을 것이다. "할아버님도 깜짝 놀라셨다니까. 설마 지연이가 나하미씨 딸인줄 몰랐으니까말야. 나한테 까지도 말하지 않고 정말 서운한데?" 퇴근후, 이모가 소개한 디자이너 의상실로 향하는 차안에서 준호가 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일부러 그런거 아니에요. 제게 어머니는 여배우 나하미가 아니라 엄마였을 뿐이니까요. 어머니가 활동했던 때도 아주 옛날이었구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인걸요. 이모내외분과 지성오빠에 대해서 말안한것은 미안해요. 하지만 그분들 때문에 저도 특별하 게 취급 받는게 싫었어요. 전 평범한 사람인걸요." 조용히 설명하는 지연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끌어 당겨 자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게 했다. "고마워. 평범한 한지연이어서. 용케 연예인이 되지 않았다 싶어." "이모부님이 몇번 절 설득하려 했었어요." "그런데?" "카메라 앞에만 서면 온몸이 얼어 붙어 버리는 거에요.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세계라는 것 을 어린나이에 깨닳았죠, 뭐." 아직도 이모부는 그녀에 대한 욕심을 못버리고 계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럴 생각이 없는데 굳이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내일 준호의 계모를 만나는 일이 무사히 끝나기를 바랄뿐이었다. 준호에게 들키지 않고. 만약 그가 사실을 안다면 불같이 화를 낼것이다. "어서오세요, 윤회장님, 한지연씨." 이모부가 소개한 디자이너는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이름을 떨치고 있는 유명한 사람이 었다. 그에게 작품(?)을 받으려면 줄서서 기다려야 할정도라고 들었는데 용케도 두사람의 예복을 맡기고 한것이다. 이모의 덕도 있겠지만 한영그룹회장의 약혼식과 결혼식 예복을 자신이 했다는 홍보 효과를 노린 듯싶었다. "실물이 훨씬 아름다우시군요, 아가씨." 그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지연의 아름다움을 칭찬해댔다. 준호가 못마땅해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다른남자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의 독점욕이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고 믿고 싶은 지연이었다. "아주 우아한 디자인을 원해요. 요란한 것은 싫소."


"웨딩드레스는 그래도 약혼식 드레스는 화려한게 좋아요, 회장님." "난 공작새를 원하는게 아니요. 내 약혼녀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표현할수 없다면 필요없소." 두남자는 한시간 가까이 디자인을 가지고 실강이를 벌였다. 결국 준호의 주장이 먹혀 들어 갔다. "시간과 돈을 아끼지 말아요. 난 최고를 원하니까." 고압적인 준호의 태도에도 자존심 강한 디자이너는 아무런 항의도 할 수가 없었다. 상대하기에는 너무 벅찬 사내라는 것을 깨닳았기 때문이다. "배고프지 않아?" "조금요." 의상실을 나와 그들은 준호가 잘아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지배인의 안내로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주위의 시선이 두사람에 게 쏠리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아마도 그들의 정체를 눈치챈듯 했다. "어제 처남이 뭐라고 했어?" 식사를 하는 동안 준호가 아무렇지 않은듯 물어왔지만 내심 궁금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냥, 축하한다고." "정말?" "정말이에요. 준호씨는 그동안 이모님 내외분이랑 무슨 이야기 했어요?" "글쎄...지연이가 어렸을 때 못말릴 말괄량이에 장난꾸러기라는 이야기 정도..." "뭐라고요?" 샐러드를 뒤적이던 포크를 멈추며 그녀가 노려보았다. "지금 얌전한건 전부 내숭이라던데?" "이모님이 그런 말씀 하셨을리 없어요. 이모부님도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지 아마." 그는 발라낸 바닷가재의 살점을 입안에 넣고 맛있게 먹으며 계속 지연을 놀렸다. "그래서 어쩔 건데요?" "뭘?" "이제 내 본성을 모두 알았을텐데...물리고 싶으면 물려요." 준호가 장난을 치는 것을 알아챈 지연은 반격하기 시작했다. "누가 물리고 싶데?" "나중에 사기결혼 당했다는 말 듣기 싫어요. 그냥 물리는 게 좋겠어요." 그가 후회하는 표정으로 울상이 되자 지연은 내심 고소함을 감추고 더욱 강하게 나갔다. "절대로 사기결혼 당했다고 안할게. 각서라도 쓸수 있어." "그럼 써요." "정말 써?" 아이같이 애처로운 표정으로 물어보는 남자가 정말 한영그룹 카리스마회장이란 말인가. "당연하죠. 쓰기 싫음 물리고." "아, 알았어. 쓸께. 쓰면 되잖아." "첫째, 외박은 절대 안됨. 둘째..." "그냥 사기결혼 당했다고 안한다고 쓰는거 아니었어?" "그냥 물릴까요?" "아, 아니야. 계속 읖어봐." 그래도 사랑 앞에선 망가져 버리는 윤준호였다. "둘째, 무슨일을 하든 부인과 상의한다." "회사일도?" "아뇨. 가정일 말이에요. 셋째, 부인의 의견을 절대적으로 존중한다. 넷째..." "몇가지나 있는 건데? 아, 아니 계속해." 지연이 째려보자 준호는 황급히 재촉했다.


"넷째, 회사일 보다 가정일에 더 충실한다. 다섯째, 절대 한눈팔지 않는다. 일단 끝이에요." 다섯까지나 되는데 일단이란다. 앞으로 결혼해서 살면서 말실수 할때마다 몇가지 조건이 더붙을지는 신도 알수가 없을 것이다. 괜히 장난을 쳐서 되로 주고 말로 받고 말았다. "그럼 지연이도 약속해." "좋아요. 준호씨는 몇가진데요?" "딱 한가지야. 나만 바라볼 것." 그가 뜨거운 시선으로 지연을 바라보자 침조차 삼킬수가 없었다. 그의 눈빛에서 사랑을 읽은 것 같았다. 아니 분명했다. "당연하죠. 난 앞으로 영원히 준호씨만 사랑할거에요." 드디어 용기를 내어 그에게 고백했다. 지성오빠의 충고를 들은 후로 계속해서 그에게 고백할 기회를 찾고 있던 그녀였다. 그녀의 고백에 갑자기 준호의 몸이 굳어 버렸다. 핏기 잃은 얼굴을 보며 자신이 그의 마음을 오해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비참해졌다. "준..준호씨?" 냅킨을 집어 던진 준호는 지페를 꺼내 계산서에 올려 놓고 지연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지배인이 급하게 다가왔지만 급박한 준호의 표정에 겁을 집어 먹고 말을 붙이지도 못했다. 지연은 그에게 끌려 주차시켜 놓은 차에 탔다. 안전띠를 매기위해 더듬거리는데 운전석에 탄 준호가 갑자기 지연에게 다가 왔다. 놀란 그녀를 그대로 품에 가두고 열렬히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너무도 뜨거운 그의 입술에 지연은 놀라고 말았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듯 그렇게 그녀의 입안을 헤메고 다니는 그의 혀는 절박하 기만 했다. 안도감을 느끼며 지연은 그의 목뒤로 팔을 두르고 열렬히 반응했다. "이대로 잠시 가만히 있어줘. 더 이상 하다가는 여기서 지연을 가져버리고 말 것 같아." 잔뜩 잠긴 음성으로 그가 속삭이며 오랫동안 지연을 품고 그녀의 머리에 얼굴을 묻고 있었 다. "사랑해, 지연아. 사랑해. 사랑해. 너무나 사랑해.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녀의 귓가에 한없이 속삭이는 준호의 음성은 촉촉히 젖어있었다. 그동안 눌러왔던 감정들이 자유를 얻어 해방감을 만끽하며 그의 온몸을 타고 돌았다. 영원히 그녀의 사랑을 얻을 수 없을 거라고 절망했던 시간들도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의 고백은 그에게 너무나 크고 소중한 선물이었다. 어머니, 전 어머니와 다른 사랑을 하게 되었어요.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되었어요.

도대체 이여자는 왜 이렇게 고집이 센걸까. 쥰은 미례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냉전을 벌인지도 일주일이 되어간다. 그런데 이여자는 꺽일 줄을 몰랐다. 그에게 용서를 빌고 결혼하겠다고만 하면 끝날일이건만 절대로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쥰은 절망과 욕구불만 사이에서 미칠것만 같았다. 오늘만 해도 반대하는 쥰의 의사를 무시하고 백화점에서 쇼핑을 잔뜩 본것이다. 조세현이 무슨짓을 꾸밀지 모르는 지금 그녀의 행동은 매우 위험했다. 당행히도 아파트에 도착할때까지 아무런 일없이 돌아올수 있었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에서 짐을 말없이 꺼내던 쥰은 부아가 치밀었다. 엄청난 양의 쇼핑백을 자신에게 떠넘기고 그녀는 핸드백만 달랑들고 먼저 엘리베이터를 향


해 걸어가고있었다. 그래 이젠 머슴 부리듯 하시겠다 이거지. 좋다구 다 좋아. 머슴이 되도 좋으니 결혼만 해달라구. 그게 그렇게 어렵냐? 날 사랑해 달라는 것도 아닌데. 그래 주면 좋지만. "꺄~악!" 여자의 비명소리와 요란한 자동차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뒤돌아 보는 그의 눈에 미례의 몸이 붕떴다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검은 승용차가-번호판을 순간적으로 외웠다.-쏜살같이 지하주차장을 빠져 나가는 것도 순식간에 보았다. 쥰은 트렁크에서 끌어 내던 짐들을 팽개치고 그대로 미레를 향해 뛰어갔다. 자신이 이런 실수를 하디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미 례의 신변이 위험하다는 것을 잘알고 있던 그가. 자신이 다른 잡생각에 빠져 있지만 않았어도 위험을 감지했을 것이다. 낯선 승용차가 달려들어 그녀를 치고 달아날때까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니. 스스로를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의 곁에 다다를 때까지가 억만년은 흐른것만 같았다. 흥건한 피위에 그녀가 누워있었다. 그녀가 저렇게 하얀 얼굴이었던가. 하느님...제발...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으니...그녀만 살려 주십시오. 미례의 사고 소식을 들은 준호와 지연은 늦은 시간에 병원으로 달려 왔다. 수술실 앞에서 쥰이 초췌해져 멍하니 서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양복에 여기 저기 묻은 피로 인해 섬뜩하기 그지 없었다. "형!" 다가간 준호는 절망적인 쥰의 표정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미례씨는 괜찮을거에요, 세이치 쥰." 지연이 나서서 쥰의 손을 잡고 위로 해야만 했다. "내가 같이 있었는데...바로 눈앞에 있었는데...지켜주질 못했어..." 그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은 쥰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준호와 지연은 뭐라고 위로 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미례는 힘겹게 수술실에서 죽음과 싸우고 있었고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쥰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십년을 함께 살아온 준호에게 이렇게 무너진 쥰은 처음이 었다. 항상 당당하고 자신만만했던 그가 울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지연의 사랑을 확인하고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이날이 쥰에게는 가장 고통스런 하루 가 된것이다. 새벽녁이 되어서 수술실을 나온 의사는 몹시도 지쳐 보였다. 밤중에 불려 나와 수술을 집도하게 되었지만 불평조차 할 수가 없었다. 상대가 다름아닌 병원 주인 윤준호회장과 세이치 쥰이었기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 상투적인 의사의 말에 눈에 핏발이 선 쥰이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만약 미례가 죽으면 너도 죽을 줄 알아. 농담 아니니 기필코 살려내. 알았어!" 의사는 열심 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세게 잡혔는지 숨이막혀 입을 열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형도 좀 쉬어." "난 됐어. 너나 지연씨 데리고 들어가. 지연씨 힘들겠다." 쥰은 자신이 준호에게 편하게 반말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깨닳지 못했다.


그의 생각은 전부 미례에게 향해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죽는다면...먼저 조세현을 죽여 버리고 자신도 죽을 것이다. 그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니, 그녀가 살아 난다 하더라도 조세현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법적으로 그가 어떤벌을 받든 상관없이 이번에 그가 저지른 짓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조세현은 불안하게 눈알을 굴렸다. 숨쉬기조차 힘들어 몸을 일으킬수조차 없는 자신의 육체가 한스럽기만 했다. "이런, 뭐야? 불만스러워?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서 알려 주러 왔더니 말야." 눈앞에 있는 강재민이 지금 만큼 두렵기는 처음이었다. 감옥에서 그의 사주를 받은 놈한테 린치를 당할때 까지만 해도 그의 약점을 쥐고 흔들수 있 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중환자실에 있다더군...신미례말야...자네 옛날 비서...자네가 살인교사 혐의를 받고 있는 증인이지. 어젯밤 의문의 검은 승용차가 그녀를 치고 달아 났거든. 하지만 세이치 쥰이라면 벌써 자네 정부의 차라는 것을 알아 냈을거야." "네놈이...윽!" "이런 조심하셔야지." 강재민의 오른손이 그의 갈비뼈를 사정없이 짖누르자 조세현의 검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걸 어째? 피가 나오는 것 같구만. 하지만 입을 잘못 놀리면 이정도로 끝나진 않을 거야, 아마도." "헉헉헉...뭘...원하는...거지?" "내 일이 마무리 될때까지 넌 그저 이병원에서 입을 다물고 있어주면 돼. 아주 쉬운일이지. 네놈 목숨은 저 머저리 같은 경찰들이 보호해 줄거야, 세이치 쥰한테서 말야. 나한테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한번 시험해 볼텐가?" 사악하게 미소짓는 악마 같은 얼굴이 과연 자신이 알던 그가 맞는 지 의심스러웠다. "내게...윽...이런...짓을..." "됐어, 말하기도 힘들텐데. 그저 넌 내가 일을 마무리 짓고 한국을 떠날 때 까지 입만 다물고 있으면 되는 거야. 돈과 미녀와 함께 떠날때까지 말야. 그렇게 얼마 걸리진 않을 거야. 이달 안으로 끝나. 어때 아주 공평한 제안이잖아. 자네 목숨과 내...소중한 목적과 말야." 강재민이 무슨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알수 없었지만 그에게 선택권이 없었다. 지금 이놈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대로 죽여버리고도 남을 놈이었다. 이놈이 무슨짓을 하 려는 걸까.

밤을 꼬박 새운 지연을 집에 데려다 주고 하루 쉬도록 명령한 후 준호는 회사로 출근을 했 다. 그에게 밤을 새우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미례와 쥰에 대한 걱정 때문에 몹시도 지쳐 있었다. "예전에 근무하던 직원들 다시 비서실로 불러 올려요. 당분간 미례씨 일하기 힘들거야. 지연씨도 약혼하기 전에 그만 두도록 할 참이니까." "신미례씨는 좀 어떻습니까?" "뇌를 다쳐서 어떻지 모르겠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어떻게 하지 민석아?" "그렇게 절망적입니까?" "아직 의식이 없어. 의사는 두고 봐야 한다고 하고...저러다 형이 큰일을 낼 것 같아 두려워." 자신만만하던 준호가 겁먹은 소리를 하자 민석조차 암담해졌다.


쥰의 요즘 변화가 미례 때문이라는 은경의 귀뜸을 받고 열심히 지켜 본 결과 사실이라는 것 을 알고 두사람이 잘되기를 얼마나 바랬던가. 신미례는 쥰을 아주 바람직한 쪽으로 변화를 시킨 장본이었다. 그녀에게 고마워할 직원이 얼마나 많을지 모른다. 제발 그녀가 무사히 일어나 쥰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길 간절히 기원했다. 지연 역시 눈물로 기도를 했다. 세상에 모든 신들게 미례를 살려 주시라고 애원했다. "조금 이라도 눈좀 붙여." 미정이 학교에 가기 전에 억지로 그녀를 침대에 밀어 넣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자던 지연은 요란한 벨소리에 깨었다. 언제부터 울렸는지 모르지만 한참되었던 모양이었다. 미례언니의 생사도 모르는데 자신은 태평스럽게 잠이나 자고 있다니...죄스럽기까지 했다. "여보세요?" 잔뜩 쉰음성이 흘러 나와 그녀도 놀라고 말았다. "한지연씨?"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상대방이 누군지 깨닳은 지연은 당황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두시였다. "죄..죄송합니다. 사정이 생겨서요..." 목이 잠겨 겨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알아요. 사무실에 전화해서 들었어요. 저...이럴때 염치없는줄 알지만 올라온김에 지연씨를 만나 보고 싶군요. 힘들면 내가 집으로 찾아가도 될까요?" 그제서야 지연은 그녀가 대구에 산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자신 때문에 아침 일찍 서둘러 올라왔을 그녀를 기다리게 한 것이 미안해서 집주소를 알려 주었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집안을 대충 정리를 하는 것이 힘든 것을 보니 아무래도 몸살이 난 것 같았다. 그래도 내색하고 싶지 않아 엷게 화장까지 해 창백한 안색을 감추었다. "이렇게 찾아와서 미안해요." 문을 열어주는 지연에게 그녀가 먼저 사과의 말부터 꺼냈다. "아닙니다. 제가 약속을 잊어버려 되려 죄송합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혹시 몸이 않좋은건 아닌지..." 지연이 안내하는 쇼파에 앉으며 오여사가 근심스럽게 물어왔다. "목이 좀 쉬어서 그럴뿐이에요. 점심 못드셨죠?" "네. 하지만 뭘 먹을 수 없을 것 같군요. 차나 한잔 주겠어요?" 지연은 두잔의 차를 끓여와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았다. 한동안 준호의 계모는 아무런 말없이 차를 마셨다. 마치 마음을 다잡고 있는 듯 보였다. "내가 갑자기 보자고 해서 놀랐을 거에요. 내가 준호 계모인 것은 알고 있지요?" "네,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어제 아침 신문을 보고 두사람 결혼소식을 들었어요. 아, 오해 하지는 말아요. 지연씨가 맘 에 안든다거나 그런 말은 아니에요. 그저 지연씨가 내 고백을 듣고도 우리 준호와 결혼해 주기를 간절히 바랄뿐이에요. 지연씨는 사실을 알아야 하니까요." "무슨 말씀이신데요?" 절박하기까지한 그녀의 말투가 지연을 긴장시켰다. "준호는...내가 낳은 내 아들이에요." 바로 옆에서 폭탄이 떨어졌다고 해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준호가 돌아가신 모친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 아는 그녀로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믿기 힘들겠지만...사실이에요. 준호 아버지하고 내가 그이 결혼 전부터 사귄 사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죠?"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그가 갑자기 결혼하고 나서 준호를 가진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찾아 갔죠. 아버지 없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았어요. 사실을 안 그는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했죠. 하지만 그녀는 이혼을 거부했어요. 그리고 내가 아이를 낳기를 기다렸다, 준호를 빼앗아 가버린 거에요."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는 그녀의 얼굴은 슬픔과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산부인과까지 그녀에게 사주를 받은 것을 몰랐던 내어리석음에 멀쩡한 아들을 빼앗기고 만 나는 되찾으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아무 소용없었어요. 이미 준호는 그여자가 낳은 아들로 세상에 알려져 키워지고 있었으니까요. 그이는 죄책감에 집을 나와 나에게 왔어요. 내가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거든요. 자살도 여러 번 기도했죠. 다시 인호를 가지게 되면서 안정되었어요. 하지만 또다시 아이를 빼앗길까봐 숨기고 인호와 인혜를 낳았어요. 인호가 학교에 가야할 때까지 호적에 올리지도 않았으니까요. 그여자 밑에서 철저하게 교육받고 자란 내아들 준호는 날 증오해요. 자신의 친동생들을 사생아라고 천대하고 부친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어요." 긴이야기를 마친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뒤덥혀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지연의 얼굴 역시 눈물로 범벅되었다. "이런 사정을 알고도 우리 준호와 결혼해 줄수 있어요?" 그녀의 눈은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차 있었다. "네, 물론이지요. 전 준호씨를 사랑하고 있는걸요.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를 사랑 할 거에요. 이렇게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할일이 뭔지를 알게 됐습니다." 지연은 준호의 생모를 끌어 안고 진심으로 위로를 해주었다. "준호씨도 알고 있나요?" 한참후, 어느정도 진정된 그녀에게 따뜻한 물을 가져와 손에 쥐어주며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한번 이야기 해줬지만 모르고 있어요."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한후 준호의 생모는 물잔을 입에 가져다 대고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많이 울은 탓에 지연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목이 가라앉아 있었다. 따뜻한 물이 부은 그녀의 목을 진정 시켜주기를 바랬다. 그래서 궁금증에도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지연은 차분히 기다렸다. "몇 년전 그이가 준호에게 사실을 말해 주었지요. 그애는 사실을 받아 들이려 하지 않았어요. 결국 크게 다투고 뛰쳐 나간 준호가 교통사고를 내고 말았어요. 다행히 큰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그이와 왜 다투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아마도 마음속으로 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탓이겠지요. 당연하지요. 생모로 알던 사람이 타인이고 그렇게 미워하던 여자가 생모라는데..." 그녀의 두눈에 또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이제는 준호씨도 받아들일거에요, 어머님." 오여사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이윽고, 친자식 조차 인정하지 않는 엄마를 며느리 될 이아이가 인정해 주는 것이 너무도 고마워 기쁨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삼십년이었다. 먼발치에서 준호를 지켜보며 가슴앓이를 해온 세월이. 그여자가 죽고 나서도 그녀는 준호에게 인정을 못받는 것이 너무나 서러워 밤을 새며 운날 도 많았다. 남편의 위로도 다른 두자식을 기르는 기쁨도 큰아들을 빼앗긴 상실감을 잊게 해주지는 못했다. 그런데...그 긴세월이 지연의 어머니라는 부름 한마디에 아득하게 사라져버렸다.


앞으로의 희망을 가질수 있게 되었다. "저...어머님. 어머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꼭 들어 주셔야 해요." 오여사는 그저 자신을 살갑게 대해주는 지연이 너무나 고마워 무조건 들어 주겠다고 약속해 버렸다. 몇일이 지났지만 미례는 여전히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고 쥰은 잠시도 병실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제대로 먹지도 않고 수염도 깍지 않아 오히려 그가 중환자처럼 보였다. "이봐, 쥰.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고 의사가 말했잖아. 조금이라도 눈좀 붙여." 지연과 병실을 찾은 준호가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수술을 담당했던 의사는 외상보다는 정신적인 충격으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설 명했었지만, 쥰은 자신이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미례에게 무슨일이 생길까 두려워하는 듯 했다. "그래요, 식사 좀 하시고 쉬세요, 쥰. 준호씨 모시고 나가서 식사 좀 드시게 하세요. 그동안 제가 병실을 지킬께요." 지연 역시 곁에서 준호를 거들었다. "그럼 잠시만 부탁합니다." 한참을 미례만 응시하며 말이 없던 쥰이 자리에서 일어났며 말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미례언니가 깨어나면 바로 연락드릴께요." 지연은 거듭 쥰을 안심시켰다. "조세현을 가만 둘수 없습니다." 특별병동의 휴게실-거의 응접실에 가까웠다.-에서 쥰이 그렇게 선언했을 때 그가 순순히 따라 나온 이유를 알수있었다. "형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증거가 없어. 심증만 가지고 그를 어떻게 할 수는 없다구, 형." "그놈의 정부가 몰던 차로 사고가 났는데요?" "조세현의 정부라는 여자는 한달전에, 정확히 조세현이 수감되고 나서 외국으로 여행을 떠 났어. 그차는 도난신고 돼 있던 차라구. 경찰이 한말을 형도 같이 들었잖아?" "그래서 그말을 지금 저보고 믿으라는 겁니까?" "형, 일단은 증거를 찾아서..." "제손으로 그놈을 죽여 버릴겁니다." 금방이라도 살인을 저지를 것 같은 말투였다. "형 제발 이성을 찾아." "만약 저 병실에 누워 있는 사람이 미례가 아니라 지연씨였다고 해도 회장님은 그렇게 말씀 하실 수 있을까요?" ���의 잔인한 물음에 준호는 경악에 침묵했다. 이십년을 속속들이 서로를 알고 지내온 사이 인 두사람 사이에 깊은 골이 패인것만 같아 마음이 아파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심했습니다." 쥰 역시 자신의 실언을 깨닳고 즉시 사과를 했다. 아무리 미례에 대한 걱정으로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지 그가 준호에게 그런 말을 했 다는 것을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준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내줄수 있을 만큼 그를 믿고 따르는 자신이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미례가 그에게 끼친 영향은 너무나 큰 것이었다. 항상 컴퓨터처럼 정확하던 그를 헛점투성이 인간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미례를 향한 집착과 사랑이었다. "지금 형은 미례씨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그런말 했다는거 알고 있어." 쥰의 사과에도 잠시동안 대꾸가 없던 준호가 겨우 입을 열었다. "하지만 형이 이성을 찾기를 바래. 형이 경찰에게 보여준 행동 때문에 조세현을 만날수 없 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마."


미례의 사고 이후 이성을 잃은 쥰이 격렬하게 조세현을 향한 증오를 담당검사와 경찰들에게 보였다. 그덕분에 조세현이 입원한 병원에 접근금지명령을 받고 말았다. 조세현의 변호사인 강재민 의 영리하고 잽싼 행동 덕분이었다. 그는 법원에 자신의 의뢰인에 대한 안전이 걱정된다고 쥰과 준호를 격리 시켜 달라고 요청했고 그것이 받아 들여졌던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미례씨가 무사히 의식이 깨어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그리고 조세현을 법정에서 끝장내자구. 형은 앞으로 미례씨를 안전하게 지키는 일만 생각하라구" 과연 자신의 충고를 쥰이 받아 들일지는 의문이었지만 일단 준호는 설득해 보았다. 쥰이 부하들을 시켜 조세현이 이번 사고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를 찾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 다. 그래도 준호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쥰을 위해서라도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길 바라고 있었으므로.

"괜찮겠어?" 토요일 오후, 외출 준비를 하는 지연을 향해 미정이 염려스럽게 물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지연은 회사와 병원을 오가며 생활 했고 계속해서 몸이 안좋았다. "지연이 너 어젯밤에도 열이 났었잖아. 그냥 다음으로 미루고 쉬었으면 좋겠는데..." "그럴수 없는거 잘 알잖아. 양가 어른들 모시고 인사드리는 자리야. 당사자인 내가 몸이 좀 안좋다고 그분들을 실망시켜 드릴순 없어."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미정에게 설명할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지연은 열에 붉게 달 아오른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준호에게 진짜 부모를 찾아 주고 싶었다. 그가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이라는 것은 그녀도 이해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덮어두기는 힘든일인것도 사실이다. 어차피 곪아 터질상처라면 지금이 최적일지도 몰랐다. 얼마전까지의 그녀라면 이런 일을 꾸밀수 없었을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준호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의 분노도 두렵지 않았다. 그녀를 사랑하는 준호라면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고 부모님을 받아 들일것이라고 그녀는 믿 어 의심치 않았다. "준호씨가 데리러 못온다고 했지?" "응. 세이치 쥰씨가 의외로 하던일이 많았나봐. 그가 없으니 준호씨나 비서실장님이나 무척 바빠. 오늘 저녁에도 약속장소로 바로 오겠다고 하던걸." 미례의 사고이후 준호와 변변하게 시간을 내서 만나보질 못했다. "그럼, 운전하지 말고 택시타고 가라. 너 아직도 열나잖아." "네가 말안해도 그럴 작정이었어. 너무 걱정하지마. 해열제도 먹었잖아." "그래도...난...아휴, 내가 뭐라고 해도 넌 어차피 듣지 않을텐데...가, 어서 가." 짜증을 내며 그녀의 등을 떠미는 미정의 걱정하는 마음을 느낀 지연은 돌아서서 친구를 꼭 안아 주었다. "내가 미정이 너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알지?" "그런 지지배가 날 버리고 먼저 결혼하니?" 심통스런 미정의 말과는 달리 지연을 안은 그녀의 팔이 떨리고 있었다. "내가 결혼해도 넌 변함없는 나의 하나뿐인 친구야. 그리고...나중에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오늘해야겠다. 이집은 네가 계속 있어줬으면 좋겠어." "무슨뜻이야?"


지연을 떼어내며 미정이 의심에 찬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너 준다고, 이집. 팔기에는 엄마와의 추억이 너무 많아 힘들 것 같아. 너만 좋다면 네가 관 리해줬으면 좋겠어. 준호씨랑 결혼하면 이집은 내게 필요없잖아." "시가보다 싸게 쳐주면 생각해보고." "너한테 돈받을 생각없어." "됐어. 이러다 늦겠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 하자. 잘하고와." 아무것도 모르는 미정의 격려가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부디 잘할수 있기를. 자신이 주제넘는짓을하는 것이 아닐길 간절히 바랬다. 아니 주제넘는 짓은 아니었다. 그녀는 곧 준호와 결혼할 것이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으므로. 강남의 한영그룹호텔 레스토랑의 룸에 도착했을 때 서둘렀지만 토요일이라 차가 워낙 막혔 던터라 약속시간에 조금 늦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할아버님." 지배인이 직접 예약실로 안내해 열어주는 문안으로 들어서며 지연은 황급히 사과부터 드렸 다. "괜찮단다, 애야. 너무 서둘러 왔나보구나. 얼굴이 다 빨갛네." 노회장과 그의 김비서와 이모인 나하연도 벌써 와 계셨다. 지배인이 빼준 의자에 앉으며 이모에게도 사과말씀을 드렸다. "괜찮아, 지연아. 윤서방도 아 직 안왔단다. 회장님, 어떻게 당사자들이 더 늦네요?" 나하연은 노회장을 향해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해해줍시다, 하연씨. 젊은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바쁜건 사실이니." "죄송해요, 이모. 차가 많이 막혀서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그런데 이모부님은요?" "그이가 오늘 참석하질 못했단다.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겨서 말야. 이해해주세요, 회장님." "허허, 당연히 이해하지요. 정감독이야 늙은 나하고는 달리 워낙 바쁜사람 아닙니까?" 노회장님과 격의없이 지내는 사이라는 이모의 말은 사실인듯 싶었다. "저...할아버님. 제가 주제넘은 짓을 한 것은 아니겠죠?" 지연은 오여사를 만난후 자신이 한일에 대해서 노회장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구했었다. "천만에. 당연히 준호가 할일을 네가 하다니 정말 잘했다. 네전화 받고 솔직히 기뻤단다, 얘 야." 노회장이 준호의 생모에 대한 비밀을 아는지는 지연도 확실치는 않았다. 다만 그녀의 계획에 대해서 아무런 사심없이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실 뿐이었다. 자신의 딸을 괴롭히던 여자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은 찾아볼수가 없어 지연은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자신감도 얻을 수가 있었다. "회장님 일행분들이 오셨습니다." 지연이 자리에 앉은지 얼마 안되어 예의 지배인이 준호의 부모님들을 모시고 왔다. "아버님, 그동안 편안하셨습니까?" 한눈에도 준호의 부친임을 알수 있는 장신의 중년남자가 먼저 인사를 했다. 그의 곁에는 오여사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며 서있었다. "어서들 오너라, 운재. 잘왔어요, 인호엄마." 노회장은 친히 일어나 그들을 반겼다. "염치없이 이런 자리에 끼어들어 송구스럽습니다, 회장님." "별말을 다하는군요. 준호의 혼사인데 당연히 두사람도 참석해야지. 아, 지연아 인사들려라. 준호의 부모되시는 분들이다."


"처음뵙겠습니다, 아버님. 한지연입니다." 지연은 할아버님곁에 서있다 한걸음 나가며 인사를 드렸다. "그래, 나도 널 봐서 기쁘구나." 윤운재는 따뜻한 시선으로 지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참석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머님. 오시기 힘드셨다는거 잘 압니다." 지연은 오여사의 손을 잡아주며 진심으로 말했다. "네덕분에 용기를 냈단다, 얘야." "그리고 이쪽은 지연이 이모님되시는 나하연씨다. 물론 잘 알고 있겠지?" 노회장이 끼어들며 준호의 부모님과 이모님을 인사시켰다. 지연에게 미리 준호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나하연은 아무런 꺼리낌없이 두분과 인 사를 나누 었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고 부드러워 지연은 안심을 했다. 이제 준호만 와서 무사히 넘어가면 되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기운차게 외치며 준호가 드디어 들어왔을때는 네분이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일이죠?" 룸으로 들어서던 준호는 제일 먼저 부친과 계모를 발견하고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 "준호씨, 제가 두분을 오시라고 말씀 드렸어요. 양가 상견례잖아요.' 지연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준호의 곁으로 다가가며 설명을 했다. "무슨 자격으로 이곳에 온거죠?" 지연의 말에도 불구하고 준호의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갔다. 오여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이 지연의 눈에 들어왔다.

제 16 장 준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이런일을 자진해서 꾸미다니. 자신이 그녀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쥐고 흔들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여자였단 말인가, 지연이. "죄송합니다, 이모님, 할아버님. 저는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주먹쥐며 간신히 이 사이로 예의를 갖추는 말을 내뱉었다. "준 호씨?" 당황한 지연이 그의 소매를 붙잡았지만 준호는 뒤돌아서서 룸을 나와버렸다. 지연이 그의 팔을 붙잡고 끌리듯 따라오는 것을 알았지만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지연에게 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가 그녀에게 자신의 가정사를 시시콜콜 알려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가 계모와 부친을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것은 알고 있을 지연이 오 물퉁에 자신을 밀어 넣은것이다. 그는 지연을 사랑하고 믿었던 만큼 배신감이 더 컸다. "준호씨, 제발 내말좀 들어봐요. 이렇게 가버리면..." 준호는 들은척도 하지 않고 문이 열리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여전히 그의 팔을 붙잡고 있던 지연도 뒤따라 타는 것을 알았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앞으로 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넘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줄 작정이었다. "준호씨가 화난거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이렇게 가버리면 두분께 너무 무례한 행동이란 생각이 안들어요?"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지연이 되려 그에게 화를 내는 것이다.


"무례한 행동? 누가 무례했다는 거지? 내가? 당신이 아니고?" 준호는 싹싹 빌어도 용서해 줄까말까한데 지연이 소리를 지르자 무겁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고 차갑게 내뱉었다. "당연히 준호씨가 잘못한거에요. 어머님이 얼마니 큰맘을 먹고 오신줄 알아요? 지금 너무나 상심하고 계실거에요. 당장 돌아가서 용서를 빌어요, 준호씨." 지금 이여자가 나에게 뭐라고 하는 거지. 준호는 낯선 사람을 대하듯 지연을 바라보았다. 증오하고 있는 계모에게 용서를 빌라고 말한 여자가 정말 자신이 사랑하는 약혼녀 한지연이 맞나?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지?" 준호의 얼굴에 살벌한 분노가 서렸다. "지금 주제넘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나?" 그녀의 팔을 두손으로 붙잡고 흔들며 소리질렀다.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알겠어? 앞으로도 그여자일에 참견하지마. 약속해!" 망가진 인형처럼 그가 흔드는대로 흔들리던 지연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준호가 물러서자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여자와 두번다시 만나지마." 고개를 들고 그를 노려보는 지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을 알았지만 준호는 단호히 못박았다. "난 자격이 없는 건가요?" 막 열린 엘리베이터를 빠져 나가려는 그의 뒤에 대고 지연이 쥐어짜듯 물었다. "내가 주제넘는 짓을 했다구요?"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일어선 지연은 그를 지나쳐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렸다. "내가 상관할일이 과연 있을까요, 당신에게?"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비틀거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갑자기 열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어지러웠지만 간신히 참으며 한걸음 한걸음 신중하게 힘을 주며 걸었다. 어서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준호의 곁에서 한시라도 빨리 떨어지고 싶었다. "지연, 내말은..." 가슴속에서 고통스럽게 쥐어짜듯 말을 꺼내는 지연을 보며 자신이 분노가 지나쳐 심한말로 상처를 주고 말았다는 것을 깨닳았다. 준호는 황급히 그녀의 뒤를 ?아가 팔을 붙잡았다. "준호씨가 하려는 말 아주 잘 이해했어요. 더 이상 설명해주지 않아도 되요." 지연은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있는 힘을 다해 뿌리치고 빠른 걸음으로 호텔로비 를 가로질러 밖으로 나왔다. 분노가 아픈몸에 힘을 주었다. "아니, 당신은 내가 왜 화났는지 이해하지 못했어. 내가 말이 심했어. 사과할께, 그러니..." "준호씨가 언제 내게 당신에 대해 설명해 준적 있나요?" "그래,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아서 지연이 이런짓을 꾸민건 알아, 하지만..." "이런짓이라구요?" 기가막히다는 듯 그를 노려보던 지연은 호텔 정문에 서있는 모범택시를 향해 걸어갔다. "이렇게 갈수는 없어. 내가 데려다 줄게." "이렇게 갈거에요. 준호씨도 좀전까지는 날 내팽게치고 가버리려고 했잖아요. 안그래요?" 지연은 모범택시의 뒷자석문을 열었다. "그여자 때문에 우리가 왜 싸워야 하지?" 준호가 열린문을 억지로 닫으며 소리질렀다. "그여자라고 하지 말아요. 당신을 낳아준 친어머니세요. 당신이 얼마나 큰 불효를 저지르고 있는지 알아요?" "말도 안돼는 소리 하지마. 그여자는 내어머니를 고통스럽게 살다 돌아가시게 만든 장본인


이라구." "당신도 가슴한구석에서는 알고 있을텐에요? 아닌가요? 아버님이 삼년전 말씀 하셨잖아요. 준호씨가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것 뿐이지만. 그렇다고 그분이 당신을 낳아준 것은 변할 수 없는 진실이에요. 그래요, 자격도 없는 내가 주제넘게 준호씨일에 상관했어요." 지연은 다시 뒷자석문을 열고 준호가 말리기도 전에 의자에 앉았다. "준호씨는 열세살먹은 소녀한테는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서도 사랑한다고 고백한 자신의 약 혼녀는 믿지 못하는 군요." "이게 무슨 뜻이야?" 준호는 그녀를 차에서 내리게 하기 위해 뻗친 손을 지연이 잡고 그안에 약혼반지를 빼서 쥐 어주자 당황하였다. "준호씨가 절 믿을 수있을 때. 당신의 생모를 받아들일수 있을 때. 다시 반지를 가지고 찾아오세요." 그를 밀어내듯 문을 닫은 지연은 울음을 참으며 기사에게 차를 출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모습이 멀어지자 지연은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었다. 준호는 자신의 손안에서 빛나고 있는 반지를 멍하니 응시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지? 그런말을 지연에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하더라도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거침없이 퍼붓다니. 자신이 잔인한 악당처럼 느껴졌다. '절 믿을수 있을 때, 당신의 생모를 받아들일수 있을 때.' 그녀가 마지막에 남기고 간 말을 떠오리며 준호는 다시 몸을 돌려 호텔안으로 들어갔다. "지연이는?" 그가 다시 돌아갈때까지 어른들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마도 지연이 그를 설득해 다시 데리고 올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던듯 했다. 어느정도는 맞았지만. "먼저 돌아갔습니다. 여쭤볼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버지께요." "말해봐라." 차분하게 말하는 부친을 보며 준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사실이 아닐거라고 믿 고 있었지만 무시하기에는 지연의 말이 너무나 진실돼 보였다. "진짜 저를 낳아준 분은 누구십니까?" 그의 질문에 놀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이상하기만 했다. 하물며 지연의 이모나 준호의 외조부까지 담담했다. "이분이 널 낳아준 생모시다." 그리고 대답을 해준 이는 놀랍게도 노회장이었다. 준호는 할아버지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그런일이..." 준호는 혼란스러워 나직히 중얼거렸다. 흐느껴우는 오여사와 곁에서 그녀를 다정하게 위로하는 나하연과 죄책감과 슬픔이 교차하는 표정의 부친을 차례로 ?어보다 노회장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미애를 낳다 죽은 아내 몫까지 다해주고 싶은 욕심에 딸이 원하는 것이면 뭐든지 들어줬던 늙은이의 잘못이 빚어낸 비극이란다, 준호야. 네 애미는 운재를 어려서부터 좋아했지. 입버릇처럼 운재오빠와 결혼할거라고 노래를 불렀단다. 나나 네할아버지인 그친구나 속으로 다행이라고 좋아했지." 김비서가 곁에서 노회장에게 물잔을 건네며 드시게 했다. 노회장은 목을 축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네 애비와 결혼을 했다. 결혼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었던 미애는 얼마 안되어 현실에 부딪혔지. 결혼후에도 변함없이 차가운 남편의 마음을 돌려 놓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건만 결혼전에 사귀던 여자가 아이를 가졌다고 이혼을 해달라고 운재가 사정했던거야. 거 기서 끝냈다면 모두가 편안했으련만...미련을 못버린 미애는 결국 널 훔쳐오다시피 빼앗아 키우더구나. 그러면 남편이 돌아와 줄줄 알고 말야. 처음부터 자신의 남자가 아니었는데...쯧쯧..." 죽은 딸에 대한 연민으로 잠시 동안 노회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준호야, 네애미는 널 키우며 한번도 일분일초라도 네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단다. 널 데리고 온날부터, 미애는 널 자신이 진짜로 낳았다고 생각했단다. 자신이 열달동안 배아파 귀한 널 얻었다고 모두에게 말할만큼 모두에게 당당했고 나중에는 정말로 자신이 널 낳은 착각에 빠지고 말았던 거야. 네 애미를, 아니 내딸을 용서해 줄수 있겠니, 준호야?" "제가 누굴 용서할 자격이 있던가요?" 준호는 비참하게 중얼거렸다. 한번도 어머니가 남이라고 느껴본적이 없었다. 그가 아플때면 밤을 꼬박 새며 간호하던 어머니셨다. 항상 그를 향해 웃어주던 그분이, 그를 사랑한다고 입버릇처럼 되뇌 셨던 그분이 가짜란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증오해마지 않던 계모가 아버지의 첩이라고 경멸하던 여자가 진짜 어머니란다. 준호는 기가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문득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닳았다. 그의 희미한 기억을 뚫고 삼년전 부친과의 큰 말다툼이 떠올랐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내게 거짓말하는 거야. 그여자랑 결혼하기 위해서 거짓말 하는 거야.' 자신의 외침이 환청처럼 귓전을 때렸다. 그래, 그래서 자신이 교통사고를 냈던것이다. 부친이 털어놓은 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자신이 어머니라고 믿었던 분을 잃고 싶지 않아서. "부탁이 있단다, 준호야. 다른 사람들은 진실을 몰랐으면 싶구나. 여기 모인 사람외에는 그 누구도 말이다." 노회장의 다짐은 준호 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것이었다. "운재야, 인호나 인혜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면 싶구나." "네, 아버님." 부친의 대답을 멍하니 들으며 준호는 자신의 배다른-아니 그렇다고 믿고 있던-동생들을 떠 올렸다. 자신이 인호에게 퍼부었던 잔인한 말들을 떠올리며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들을 심판했던 거지. '열세살먹은 소녀한테는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서도 사랑한다고 고백한 자신의 약혼녀는 믿 지 못하는 군요.' 그리고 사랑하는 지연에게 무슨짓을 해버린건지. 그녀를 믿지 못해 상처를 주고 말았다. 그는 갑자기 너무나 지연이 보고 싶어졌다. 그녀에게 달려가서 당장 사과를 해야했다. 무릎꿇고 비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그녀를 되찾 아야만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랑도.

지연은 눈꺼풀이 너무나 무거워 눈을 뜰수가 없었다. 쇠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고 머리는 깨질 듯 아팠다. 미정이가 미련하다고 야단치는 걸까. 아, 준호씨가 기다릴텐데...빨리 가봐야 하는데...어른들께서 기다리다 화를 내시지 않았을까. 준호의 부모님도 오시라고 해 놓고 안나가면 안되는데...


"미쳤어요? 이여자를 데리고 와서 어쩌려는 거에요? 더구나...무슨짓을 한거죠? 아픈것 같아요." 김희진은 침대에서 신음하고 있는 지연을 내려다보며 앙칼지게 쏘아 부쳤다. "입닥치고 병간호나 잘해. 약은 여기 있어. 아무래도 감긴 것 같아. 심해지면 말하고." 지연을 염려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던 강재민이 희진을 볼때는 차갑기 그지 없었다. "기가 막혀서. 내가 간호산줄 아나." 김희진은 강재민이 나간 방문을 노려보며 화가나 소리질렀지만 작은 소리였다. 그가 듣고 다시 들어올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천하에 두려울 것 없던 김희진이 이렇게 비참한 신세가 될줄 누가 알았겠는가. 모든것이 매니저 탓이다. 희진은 자신을 강재민에게 소개 시킨 자신의 매니저에게 알고 있는 모든 욕설을 퍼부었다. 강재민을 만나 순간부터 그녀는 그가 짜놓은 그물에 걸리고 만것이다. 그는 계획적으로 그 녀에게 접근했고 그녀의 모든 응석을 받아주었다. 처음에는... 만나지 얼마되지 않아 그와 잠자리를 같이한 희진은 얼마되지 않아 자신이 덫에 걸린 것을 깨달았다. 강재민은 그녀 모르게 마시던 술에 약을 타왔던 것이다. 몇번이나 그에게서 벗어나려 노력을 해봤지만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뿐이 었다. 그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변호사인줄 알았던 남자가 사실은 조직폭력배의 보스라니. 집안좋고 학벌좋으며 사회적 지위또한 높은 남자가 두얼굴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그녀가 상 상이나 했겠는가. "준...준호...오..빠..." 희진은 침대에서 심하게 뒤척이며 신음하는 지연 때문에 자신만의 생각에서 벗어났다. "자, 이약을 먹어요. 아휴 내팔자야.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의식이 없는 지연을 간신히 일으켜 입안에 약과 물을 밀어 넣었다. 불덩이처럼 뜨거운 지연이 약을 삼키며 눈을 떴지만 초점이 없었다. "미정아...나...가야...하는...데...기다...릴...거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가만히 좀 있어봐." 미정이 누군지는 몰랐지만 지금 지연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았다. 그이유 도. 희진은 그렇게 미워하던 여자를 간호하게된 자신의 처지가 우습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한참을 씨름하던 끝에 지연의 옷을 벗겨 낼수 있었다. 속옷차림의 그녀에게 시트를 덮어주 고 욕실로 가 찬수건을 만들어 방으로 왔다. "여자인 내가 봐도 예쁘게 생겼다. 몸매도 끝내주는군." 수건으로 그녀의 몸을 닦아주며 중얼거리던 희진은 문득 의문점이 떠올랐다. 강재민은 왜 이여자를 데리고 온것일까. 이여자가 자진해서 따라왔을리는 없었다. 그가 무슨일인가 꾸미고 있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설마 이여자를 데리고 윤회장에게서 몸값이라도 받으려는 걸까. 희진은 얼마전부터 강재민의 집에 갇히다시피 살고 있었다. 아니 감금생활이었다. 밖으로 한발자욱도 나갈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밖에 소식을 접하질 못했다. 집이나 소속사에서 그녀를 찾고 있을텐데. 희진으로서는 자신이 간호하고 있는 여자가 한영그룹윤회장의 약혼녀이며 나하연과 정한우 감독의 조카딸이자 정지성의 사촌동생인 한지연이라는 것을 알턱이없었다. 응접실 쇼파의 상석에 강재민이 앉아있었고 그의 주위를 검은 양복의 덩치들이 에워싸고있 었다. "물건은?"


초조하게 의자손잡이를 두드리며 물었다. 그는 지금 이층에 희진과 함께 놔두고 나온 지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녀가 아플때를 택해 데려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마음 아팠다. 택시기사로 변장한 그의 부하가 그녀를 납치해 강재민의 집까지 데리고 올때쯤에는 이미 의 식을 잃고 있었다. 열에 들떠 헛소리까지 하는 걸로 봐서 심하게 앓고 있었다. 덕분에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지 않고 쉽게 그녀를 데려올수 있었지만 지연이 아프다는 사실 이 그를 힘들게 했다. "일주일 뒵니다." 태호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믿을만한 의사를 데리고와." "의사요?" "그래, 의사. 한지연을 의사에게 보여야 겠어. 너무 심하게 아픈 것 같아. 의식도 없잖아."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며 태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형님이 고작 여자하나가 아프다고 전전긍긍하다니. 십년이 넘도록 그를 곁에서 봐왔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응애, 응애. 아기가 우나봐. 그런데 왜 달래지 안는거지. 아기엄마는 어디 간걸까. 미례는 어둠속에서 갓난아기의 울음을 들으며 불안감을 느꼈다. 마치 뭔가를 잊고 있는듯한 느낌이 그녀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 맞아. 내아기가 울고 있나봐. 미례는 울고 있는 아기를 보듬어 안으려 팔을 내밀었지만 아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야, 내 아기는 죽었어. 그가 내 아기를 죽였어. '안돼' 미례는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형광등 불빛이 아프게 눈을 찔러 다시 눈을 감아야만 했다. 감은 눈사이로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렸다. 작은 핏덩이에 불과 했던 그녀의 아기를 잃고 말았다. "미례? 정신이 들어?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굵직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 사람은 누구지? 왜 날 걱정하고 있는걸까? 설마...효석선배? "누...구...?" 간신히 입을 열어 물어 보았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바짝 마른 입안이 너무나 깔깔했다. 그리고 머리가 너무나 아팠다. 아니, 온몸이 안 아픈곳이 없었다. "말하지마, 미례. 곧 의사선생님이 오실거야. 살아나줘서 정말 고마워." 다정하게 달래듯 말하는 남자는 절대 효석선배가 아니라고 미례는 어지러운 머리로 생각했 다. "거의 일주일만에 깨어난거야. 얼마나 걱정했는줄 알아?" 남자의 절박한 음성에 다시 눈을 떴지만 두통이 너무 심해 감고 말았다. "억지로 눈을 뜨지마. 많이 아플거야. 머리를 다쳤거든." 머리를 다쳤다고? 그럴리가 없었다. 효석선배가 발로 찬곳은 머리가 아니라 배였는데.


그래서 뱃속에 있던 내아기가 죽고 말았지. 또다시 떠오른 생각에 미례는 눈물을 흘렸다. 불쌍한 내아기. 미례는 뱃속이 뒤틀리는 아픔을 느끼며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가 왜 다시 의식을 잃은거지?" 쥰은 불안에 떨며 의사를 추궁했다. 송박사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만약 이 환자가 죽기라도 했다면 이남자는 정말 자신을 죽여버렸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행히 뇌속에 고인 피를 제거하는 수술은 대성공이었고 깨어나지 않아 그를 불안에-그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떨게 만들었던 환자도 깨어났다. 제발 그녀가 무사히 회복되어 하루 빨리 퇴원하기를 병원사람들 모두 기원해 마지 않았다. 그리고 또다른 소원이 있다면 그녀가 이남자와 결혼해서 아기를 가지더라도 자신들의 병원 에서는 낳지 말아줬으면 하는 불가능한 희망을 품어보았다. "의식을 잃은 것이 아니라 수면에 들어간겁니다. 다시 깨어나면 좀더 깨어 있을수 있을 겁 니다.당분간은 깨어있는 시간보다 잠자는 시간이 더 많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송박사의 설명에도 쥰의 의심의 눈초리는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으니 이젠 안심하셔도 됩니다, 세이치 쥰님." "그말을 믿겠소." 송박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을 나간후 쥰은 곁에 앉아 미례의 손을 꼭 쥐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쥰은 세상의 모든 신들에게 감사하는 기도를 올렸다. 준호는 미정의 대답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지금 뭐라고...?" 지연에게 와야한다고 느끼자 마자 달려온 그였다. 하지만 아파트문을 열어주며 그를 안으로 맞아들인 미정이 아직 그녀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하자 불안한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이번주 내내 아팠어요, 지연이. 모르고 계셨어요?" "몰랐어요." 아무리 정신없이 바빴다고 하더라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어젯밤에도 열이 40 도 가까이 올랐었거든요. 목이 심하게 부어서 말하기도 힘들정도였구요. 그런데도 오늘 나가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며 나갔는데...먼저 떠났다는 애가 어디로 갔을까요?" 미정의 물음에 준호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부모들 때문에 화만 내지 않았어도 그녀가 아프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자신이 퍼부은 잔인한 말들과 그녀를 잡고 흔들자 그녀가 바닥에 주저 앉았던 일들이 떠올 라 그는 머리를 쥐어 뜯으며 괴로워했다. "우선 미정씨는 지연씨가 갈만한 친구나 아는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줘요. 난...그럴리 없겠지만... 경찰서와 병원에 연락을 해볼께요." "지연이 핸드폰으론 연락해 보셨어요?" "호텔에서 나오면서부터 계속 전화를 넣었지만 받지 않아요." "전화수첩을 가지고 올께요." 미정이 자신의 방안으로 들어간 사이 준호는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우선 경호실의 장호영에 사정을 설명한 후 사람들을 풀도록 지시를 내렸다. 쥰에게 알려야 할까 고민하던 준호는 그만 두기로 했다. 가뜩이나 미례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을 그에게 또다른 고민거리를 안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예감과��� 달리 지연이 무사히 있을지도 몰랐다. 자신에게 화가 나서 돌아다니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런 아픈몸으로? 준호의 마음속에서 속삭임이 들리자 불안감을 억지로 눌러야만 했다. 지금은 그녀가 무사할것이라고 믿어야만 제정신을 유지할수 있을 것만 같았다. 두시간 가까이 전화기를 붙들고 씨름하던 두사람은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연의 행방을 알수가 없었다. 준호는 마지막으로 나하연의 집으로 전화를 넣었다. "무슨 소리에요? 지연이 여기 있냐니? 아까 집으로 간거 아니었어요?" 그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전화를 자제했었는데. 결국 지연의 이모까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곧 가겠어요." 나하연은 말그대로 총알같이 지연의 집으로 달려왔다. 지성까지 달고서. "지연이가 어떻게 됐다는 거야?" 지성은 걱정스런 얼굴로 준호에게 소리질렀다. "지연이가 아직까지 연락도 없이 들어오지 않고 있어요, 이모님. 핸드폰도 받지 않구요." 죄책감에 할말을 잃고 멍하니 서있는 준호를 대신해서 미정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왜 지연이 혼자 집에 가게 내버려 둔거야? 더구나 지연이는 아프다며? 그게 지연이를 책임 지겠다는 행동이야?" 결국 지성이 분을 참지 못하고 준호에게 덤벼들었다. 지성이 멱살을 잡고 흔들었지만 준호는 아무런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무슨말을 하겠는가. 만약 지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우...우리...연이가...성이야, 우리 연이한테...무슨...일이라도 생겼으면..." 나하연은 머리를 짚고 비틀거리다 결국 기절해 버렸다. 그녀에게 지연은 쌍둥이 언니가 남긴 유일한 혈육이었고 그만큼 책임감과 애정이 남다른 조 카였다. 그런 지연이 행방불명 되었다는 것은 그녀를 깊은 절망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머니!" "이모님!" 지성과 준호, 미정이 한꺼번에 나하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러다 송장 치우는건 아닐까 걱정하던 차에 강재민이 불러들인 의사가 왔다. 자신에게서 준호를 빼앗아간 지연이 죽던말던 아무 상관없었지만, 만약 그녀가 정말로 죽기 라도 한다면 강재민이 자신을 살려두지 않을 거라고 느꼈기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몇번씩이나 방안을 들락거리며 지연의 상태를 체크하는 강재민은 사랑에 빠진 평범한 보통 남자로 보였다. 그녀가 아픈 것을 정말로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이런 여자가 무엇이라고 저렇게 난리를 치는 것인지. 조금은 질투심이 생겼지만 안도하는 마음이 더컸다. 만약 그가 이여자에게 푹 빠져 있다면 자신을 조만간 풀어 줄지도 몰랐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이여자의 간호사가 아니라 하녀라도 기꺼이 될수 있었다. 지난 몇주동안 강재민의 잔인함을 곁에서 지켜본 희진은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될수있으면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고 덕분에 처음의 몇일을 제외하고는 맞지 않을 수 있었다. 매에는 장사가 없다고 그녀 역시 그의 폭력을 견뎌내기 힘들었다. 그리고 더 이상 깊이 빠 지기전에 이곳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인기를 먹고 사는 직업을 가진 자신이 조직폭력배와 동거아닌 동거를 하고더구나 마약까지


했다는 것이 알려 지면 끝장이었다. "과로가 겹쳐서 그런겁니다. 열감기도 심하구요. 편도가 심하게 부었군요. 진작 병원에 다니 며 치료를 받았다면 이정도까진 오지 않았을 텐데...쯧쯧.." 진찰을한 의사가 혀를 차며 안타까와 했다. 그는 항생제가 들어간 링겔을 지연에게 놔주고 약을 처방해 준후 떠났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와서 친절히 진료를 하고 가는 것을 보면 강재민이 넉넉하게 돈을 준 듯했다. "밤을새서라도 그녀를 지켜. 알았지?" 협박이 분명한 표정으로 명령하고 강재민이 방을 나가자 희진은 털썩 의자에 주저 앉았다. 아마도 문밖에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건장한 남자 두명이 문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아랫층 응접실에도 남자들이 몇몇 있을 것이고. 정원에도 곳곳에 숨어 있을 그들을 그려볼 수 있었다. 지연이 회복해서 강재민의 기분이 좋아지면 자신을 언제 풀어 줄건지 물어 봐야 겠다고 생 각했다. 그가 지연을 어떻게 하든 자신은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설혹 이일로 윤준호가 상처를 받는다 하더라도. 아니 그가 상처를 받는 다면 정말 기쁠것이 다.

장호영은 회장이 지시하지 않았지만 지연의 실종에 대해서 쥰에게 보고를 했다. 다행히 미례가 의식이 돌아온 뒤였기에 쥰은 한결 밝은 표정이었다. "얼마나 되었지?" "다섯시간이 지났습니다." "회장님은?" "한지연씨 아파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짤막한 쥰의 물음에 대답을 하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쥰의 직감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회장님께 조세현이 입원한 병원에서 보자고 전해드려." 간결한 지시였지만 그의 한마디에 장호영은 이번 사건이 조세현의 짓라고 쥰은 생각하고 있 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뭐라고? 조세현?" 장호영에게 연락을 받은 준호는 한동안 믿을 수가 없었다. 지연의 실종 신고를 접수한 경찰에서도 약혼자와 다툰 후 단순 가출로 보고 있었다. 내일이면 돌아 올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해서 준호가 얼마나 화를 냈는지 모른다. 그런데 쥰이... "어디 가는거요? 나도 따라 가겠소." 전화를 끊은 준호가 일어나자 지성도 따라 나섰다. 준호는 반대를 하려다 지성의 단호한 눈빛을 보고 포기했다. "형에게 연락하지 말하고 했는데." 조세현이 입원한 병원 입구에서 만난 쥰을 보며 준호가 미안함에 그렇게 말했다. "미례씨 의식 돌아왔습니다." "정말? 그나마 다행이군." "여기서 이렇게 수다나 떨고 있을 겁니까?" 지성이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며 쏘아 부쳤다. "왜 조세현 짓이라고 생각하지?"


조세현이 입원한 병실을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며 준호가 물었다. "그들의 목적은 미례가 아니었습니다." "무슨?" "제 생각에는 한지연씨를 납치하기 위해 우리의 시선을 미례에게 돌려 놓기 위한 간계같습 니다. 한지연씨만 잡고 있으면 조세현이 유리하게 소송을 끌고 갈수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차분하게 설명하는 쥰의 잘생긴 얼굴은 일주일째 깍지 못한 수염으로 뒤덮혀 산적처럼 보였 다. 하지만 눈빛만은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가만두지 않겠어, 조세현." 주먹을 쥐고 이를 갈며 준호가 분노를 나타냈다. 그역시 지난 몇시간 동안 걱정으로 초췌해 져 있었다. 지연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분노가 조금은 덮어주었다. "안됩니다." 병실문을 막고선 경찰이 그들을 제지했다. "잠깐이면 돼." 준호가 무섭게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안되는거 아시잖습니까, 회장님. 경질 받을 겁니다." "잠깐이면 돼." 준호도 물러 서지 않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지성은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준호의 말투나 표정, 그리고 행동에 상대방은 기가 죽어 꼬리를 내리는 것이었다. "오분입니다. 더 이상은 안됩니다." 결국 그는 문을 열고 일행을 들여 보냈다. "회...회장님...." 깨어나 있던 조세현은 겁에 질려 들어오는 준호 일행을 보았다. "오랜만이군. 다쳤다구?" 마치 지인을 병문하는 사람처럼 여유있는 인사를 건네며 준호가 가까이 다가갔다. 조세현이 눈에 띠게 불안해 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어떻게....이곳엘...?" 그는 가쁜숨을 몰아 쉬며 팔로 상처를 감쌌다. 강재민이 와서 건드린 상처가 아파왔기 때문 이다. "자네에게 물어볼 말이 있어서 말야..." 그의 곁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은 준호는 안부라도 묻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표정이나 행동에서 분노를 찾아볼수가 없었다. 지성은 준호가 적으로 삼기에는 무서운 남자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닳았다. "무...무얼...?" "아, 별거 아니야. 내 약혼녀의 행방에 대해서만 말해주면 되네." 하며 웃기까지 하는 준호 를 보며 지성은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약..약혼녀라뇨? 회장님께서 약혼하셨습니까?" 조세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한지연을 모른다고 할건가?" "한지연이라뇨?" 조세현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돈과 미녀와 떠날때까지. 설마? 자네목숨과 내 소중한 목적과의 교환. 조세현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강재민의 짓이었다. "일부러 자네가 신미례를 교통사고로 다치게 하고 주의를 돌려 납치한 내 약혼녀 한지연의 행방만 알려주면 고맙겠네." 준호는 이까지 들어내며 웃고 있었지만 마치 호랑이가 먹이를 눈앞에 두고 으르렁거리는 모


습을 연상시켰다. "전...전...모르는 일입니다." 경찰은 어디로 간거지? 조세현은 병실문을 애타게 쳐다보았다. "모른다?" "정말입니다. 제가 한짓이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오." "믿어달라?" 조세현의 말이 마치 농담이라도 되는 듯 준호가 유쾌하게 웃었다. "널 어떻게 믿을수 있지?" "이번만은 제짓이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목숨걸고 맹세할수 있습니다." "목숨까지 걸수 있다?" "잠시만요, 회장님." 몸을 일으켜 조세현을 노려보는 준호를 말리며 쥰이 나섰다. "자네가 한짓이 아니란걸 믿어주지." "고맙습니다, 세이치 쥰. 정말 고맙습니다." 당장 무릎이라도 굻고 절이라도 할것처럼 조세현이 감격해서 되뇌었다. "미쳤어, 형?" "대신 그가 누군지 말해." 자신에게 화를 내는 준호를 무시하고 조세현을 노려 보며 쥰이 물었다. "그...그라뇨?" "자넬 공포에 떨게 협박해서 입을 다물게 한 진범." "헉!" 너무나 놀란 조세현은 헛바람을 들이키다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고통스럽게 숨도 쉬지 못하고 기침을 하는 모습을 본 쥰은 의사를 불렀다. "나가주십시오. 전 이젠 끝장입니다." 걱정스런 시선으로 조세현을 보며 경찰이 준호일행을 병실 밖으로 내몰았다. "내일 다시 오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안돼!' 준호가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지연의 생사가 확인도 안되었는데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니. 세상이 무너진듯한 표정의 준호를 보며 쥰은 심한 자책감에 빠지고 말았다. 미례에 대한 자 신의 감정에만 연연하지만 안했더라면 미례나 지연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것이다. 그가 평소의 능력을 십분의 일만 발휘했어도 일이 이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제정신이었다면...

"이봐, 자네는 약속을 어겼어." 간신히 진정하고 잠에 빠졌던 조세현은 극심한 통증에 눈을 떴다. 어두운 방안에 차가운 눈 한쌍이 빛나고 있었다. 아니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아...아니야. 말하지 않았어. 정말이야." "하지만, 아침이 되면 말하겠지? 안그래?" "아니, 말안하거야. 믿어줘!" "난 아무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거든. 자네가 영원히 입을 다무는게 안심이 되겠어." 하며 그는 들고 있던 베개를 조세현의 얼굴 위로 내렸다. 한참동안 버둥거리던 조세현은 얼마후 축 늘어졌다. "그동안 즐거웠네, 친구."


제 17 장 몇일동안 심하게 앓지 않았다면 견딜기 힘들었을 거라고 지연은 생각했다. 열이 내려 의식을 찾고 보니 자신이 강재민에게 납치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연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침대에 널부러진 자신의 몸은 의지와는 달리 손하나 까딱 할 수가 없었다. "제가 준호씨와 약혼했기 때문에 절 미워하는 건가요? 그래서 절 납치하도록 한건가요?" 등 뒤로 베개를 쌓아 그녀가 기대게 한후 미음을 떠 먹여주는 희진에게 지연이 물었다. "내가 당신을 납치하도록 사주했다고 생각했어요? 호호호, 웃기는 군요. 아직도 강재민이라는 남자를 모르는 군요. 그는 누구의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에요. 더구나 명령이라니...호호호." 사이드테이블에 놓인 쟁반에 그릇을 내려 놓으며 희진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아니, 울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김...희진씨?" 희진의 볼위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지연은 숨을 삼켰다. "당신이 미워요. 죽을 때까지 증오할거에요. 당신만 아니었다면...난 준호씨와 헤어지지 않았을거구, 강재민의 마수에 걸려 들지도 않았을 거에요." 거칠게 눈물을 훔치며 희진이 격렬하게 쏘아부쳤다. 그녀의 거친 기세에 지연은 움찔했다. "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준호씨는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에요." 몸은 꼼짝도 할수 없을 만큼 기운이 하나도 없는데 정신은 맑은 것을 보면 이상했다. 희진의 독기어린 말들에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히 맞설수 있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최소한 강재민을 만나지는 않았겠죠." 희진은 씁쓸하게 인정했다. "저는 당신이 강재민씨를 만난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그리고 준호씨의 사무실에서 단한번 만난 것이 전부에요." "강재민씨? 당신 순진한거에요, 멍청한거에요? 자신을 납치한 주범을 씨라고 부르다니..." 희진은 기가막히다는듯 지연을 바라보았다. 지난 몇일동안의 투병생활로 지연의 얼굴은 핏기가 없었고 안색이 창백했지만. 그럼에도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것만 같은 아름다움이 여자인 자신의 마음까지 끌어 당길 정도였다. "강재민씨는 왜 날 납치한거죠?" 지연은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지연은 그가 변호를 맡고 있는 조세현 때문에 자신을 납치했다고 생각했다. 미례까지 해치우려하는 조세현이라면 강재민을 시켜 준호의 약혼자인 자신을 납치하기에 충 분했다. "당신에게 한가지만 알려주죠. 같은 여자로서 당신을 동정하기도 하고 또 당신 덕분에 내가 풀려날지도 모르니 고마움에서 충고하나 하죠. 그는 당신이 알고 있는 변호사 강재민이 아니에요. 그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조직폭력배의 두목이에요. 그가 당신을 왜 납치했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당신의 생각처럼 쉽게 풀려나지는 못할거에요." 희진은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으며 지연의 얼굴에 충격이 서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설마..." 지연은 도저히 믿을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죽음!


지연은 갑자기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준호에게 반지를 빼주고 허전해진 약지가 쑤셔왔다. 오른손가락으로 왼손의 약지를 문질렀지만 증폭되는 두려움은 커져만갔다. "준호씨와 약혼했다더니...반지가 없네?" 희진은 지연의 행동에 비웃음을 던졌다. 그래 천하의 한영그룹 윤준호회장이 이런 여자와 약혼했을 리가 없었다. 희진은 지연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단정지었다. 그가 걱정하고 있을까. 지연은 희진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생���은 지난 토요일 그를 호텔정문에 세워두고 떠나오던 때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직도 화가 나 있을까. 지연은 갑자기 피곤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를 영영 보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한영그룹은 초비상에 걸렸다. 윤준호회장의 집무실은 경찰들과 경호원들로 들끓었다. 지연이 실종된지 오일째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찾기 위해 난리였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준호는 상처입은 사자처럼 으르렁 거렸고 사람들은 그를 피해 다니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의 시선에 걸리기라도 하면 분노를 고스란히 감당해야만 했으므로. 조세현의 죽음으로 지연의 행방에 대한 단서가 끊어져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강재민은 준호 와 쥰이 조세현을 방문해서 그를 죽게 만들었다고 소송을 걸었다. 그놈의 심장이 그렇게 약할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가 타고 떠난 택시기사를 수소문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계획적인 납치였던 것 같았다. "왜 요구전화가 오지 않는 걸까요?" 유일하게 준호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는 지성이 여느때처럼 그의 사무실로 출근했다. 지연의 실종 이후 지성은 틈만 나면 준호를 찾아왔다. "조세현이 갑자기 죽어버려서 그들도 당황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지성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쥰이었다. "어마어마한 몸값이라도 요구해야하는 것 아닌가요?" 걱정스런 표정으로 지성이 쥰에게 물었다. 준호에게 물어 보았자 대꾸도 하지 않을 것이 뻔 했기에. 지연의 실종후 준호에게 화가 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지연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번만큼 확실히 알수 있던 때도 없었다. 만약 지연에게 무슨일이 생긴다면 준호는 생각도 하지 않고 뒤따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로 그의 감정은 손에 잡힐 듯 훤히 보였다. "다른 방향에서 생각을 해보자구."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준호가 갑자기 말했다. "분명 조세현은 자신이 한짓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저지른 일이라고 암시를 줬었어, 그렇지?" 요 몇일 계속해서 조세현과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만약...만약 말이야. 조세현이 살해를 당했다면...?" 준호의 가설에 쥰과 지성은 각각 다른 표정을 지었다. 도저히 말도 안된다는 표정의 지성과는 달리 쥰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자네도 짐작은 하고 있었군." 쥰의 표정을 보며 준호가 단정지었다. "조세현의 죽음이 석연치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며 쥰 역시 동의 했다. "누굴까? 조세현을 두려움에 떨게 하며 입을 다물게 할정도의 인물이...그리고 왜 조세현을 죽였을까? 지연을 납치한 목적이 뭐지?"


"최소한 조세현을 위한 것은 아니란 것을 알잖습니까?" "돈이 목적이라면 좋으련만..." 나직히 중얼거리는 준호와 생각에 빠진 쥰을 번갈아 보며 지성은 혼란스러웠다.

하~악, 하~악 두남녀의 신음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여자는 남자의 등에 손톱을 세우며 그의 움직임에 맞춰 엉덩이를 움직였다. 남자의 두손이 엉덩이와 가슴을 거칠게 주무를때마다 교성이 여자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동공이 풀린 여자의 눈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약에 취한 그녀는 그저 동물적인 본능에 따라 몸을 움직일 뿐이었다.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 다. 길고 긴 정사끝에 여자의 몸안에 사정을 하며 무너지듯 쓰러진 그의 눈빛은 비정상적으로 번뜩였다. 그의 뇌리에는 지연이 있었다. 지금 안고 있는 여자가 희진이 아니라 지연이라 생각하며 남자는 잠시 수면에 빠졌다.

지연은 불길한 느낌에 눈을 떴다. 어두운 방안에서 빛나고 있는 눈을 보면서도 지연은 놀라 지 않았다. 눈을 뜨기 전부터 예감하고 있었던 일이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지연. 당신의 단잠을 내가 깨고 말았군." 쉰듯한 음성이 귀에 거슬렸다. 강재민이 무슨 생각으로 이 밤중에 그녀를 방문했는지는 모 르지만 좋은 생각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닌듯 싶었다. "무슨일이신가요, 강재민씨?" 지연은 애써 태연하려 애썼다. 그녀가 앓고 있던 동안 그가 들락거렸다는 것은 희진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깨어나 있을 때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몸에 조금이라도 힘이 있었다면 그의 시선을 피해 도망갔을 것이다. "당신 대신 희진을 안았지. 약을 먹고 했는데도 만족스럽지가 않아. 내 갈증은 당신만이 풀어 줄 수있어, 지연." 그의 말에 지연은 소름이 돋았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야. 미쳐있는것이 틀림없어. 단한번 본 나를 마치 사랑하는 정인을 대하듯 하다니. "절 돌려 보내 주세요." 두려움을 지우려 애쓰며 부탁했다. "그럴순 없어, 지연. 당신은 나와 영원히 함께 있어야해. 삼일뒤면 물건이 도착할거야. 그것만 있으면 어디를 가든지 왕처럼 살수 있어. 당신을 왕비로 만들어 줄게." 침대옆에 무릎을 꿇은 그는 지연의 손을 잡고 열정적으로 말했다. 그의 손안에서 자신의 손 을 빼고 싶었지만 그를 자극할까 두려워 참아야만 했다. 그는 아직도 약에 취해 있는듯 했고 아픈 자신의 몸으로 그를 제지하지는 못할 것이 분명했 다. "무슨 물건이죠?" "코카인." 어두워서 확실치는 않지만 그가 웃은 것 같았다. 아주 만족스럽게. "엄청난 양이지. 걱정하지마 내가 모든 것을 처리할거야." "김희진씨는 어쩔거죠?" 그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물었다.


"이런, 벌써 질투하는 거야? 걱정하지마. 그여자는 당신의 발톱의 때만도 못한 여자니까. 그여자는 당신 대용품인 동시에 당신을 영원히 내것으로 만들어줄 여자야. 내가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야, 지연." "어떻게 할건가요, 김희진씨를?" 그의 입술이 자신의 손등을 더듬자 끔찍한 느낌에 떨궈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물론 당신 대신 죽여버려야지. 물건이 도착하고 나면 당신은 나와 함께 외국으로 나가는 거야. 윤준호는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안다면 지옥 끝까지라도 쫒아올 남자지, 안그래? 하지만 당신이 죽었 다는 것을 확신하면 더 이상 우리를 귀찮게 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김희진을 죽여서 당신의 시체로 만들거야. 키와 체격이 비슷하잖아? 태워버리면 의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걸." 잔인한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에게 소름이 끼쳤다. 지연은 그가 그렇게 하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은 어서 건강을 회복하기만 하라구. 당신을 가질 때 당신의 열정적인 반응을 원해. 시체 같은 당신을 안고 싶지 않아 참고 있는거야." 만약 그녀가 납치해 왔을 때 아프지 않았다면 그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강간이라도 했을것이다. 그녀는 두려워졌다. 과연 준호가 그녀를 구해줄수 있을까. 그녀가 강재민의 손에 죽든 아니면.... 스스로 자살을 하기전에.

희진은 기가막히고 어이가 없었지만 그녀의 몸은 정신없이 떨리며 의지를 배반했다. 분노보다 두려움이 앞섰던 것이다. 강재민이 그녀를 곱게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한지연을 대신해서 죽어야 한다니. 도망가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집밖으로는 한발자욱도 나갈수 없는데. 수십명의 남자들이 지키는 이집을 무슨 수로 빠져 나간단 말인가. 그녀는 화장실을 가기위해 나오지 않았더라면. 지연이 묵고 있는 열린 방문사이로 두런거리 는 소리가 들려 그녀가 관심을 갖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살고 싶었다. 아니 살아야 했다. 저 악마 같은 강재민의 손에서 살아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라고 결심했다. 설혹 그것이 또다른 악마와 계약하는 일이라도.

지연의 행방을 찾는 바쁜 와중에도 쥰은 밤이면 미례의 병실을 지켰다. 위험한 고비를 넘겼지만 그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미례의 곁에서 그녀가 편안히 잠자는 모습을 보아야만 안심이 되었다. "오늘은 기분이 어때?" 미례는 자신의 곁에 앉으며 다정하게 손을 잡고 물어오는 쥰을 바라보았다. "많이 좋아졌어요." 여전히 말하기가 힘들었지만 의식이 돌아온 첫날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그때는 쥰을 효석선배라고 착각했었지. 미례는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쥰의 따뜻한 빛을 띤 눈동자를 보았다. 어떻게 쥰을 효석선배와 비교할수 있었을까? 미례는 그동안 자신이 쥰을 멀리했던 이유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한심스러워했다. 사고로 머리를 다쳐서 인지 그녀는 쥰을 바라보던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가라앉은 음성으로 미례는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나중에 해도 돼. 당신이 다 나은후에. 그때가서도 당신이 싫다면 떠날게. 응?"


그는 지금 그녀의 말을 오해하고 있었다. "당신이 떠나는 것을 원한적 없어요." 울컥 치솟는 감정에 겨우 그말만 했다. 그의 말투에서 자신에 대한 사랑을 느낄수 있었다. "그럼...결혼하자는 말만 안하면 돼?" 쥰은 애원하듯 물어보았다. "쥰...난..." "제발, 미례. 이제 더 이상 당신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을게. 그저...내곁에 있어만줘. 결혼하자고도, 또 날 사랑해 달라고도 안해. 대신...내가 당신을 사랑할수 있게만 해줘. 이렇게 애원할게." 그의 말과 표정, 그리고 미례의 손을 쥐고 있는 떨리는 그의 손등에서 절절히 흐르는 그의 애절한 사랑을 느끼며 미례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런 그를 로보트같이 감정 없는 남자라고 치부해 버렸다니. 자신의 사람을 볼줄 모르는 눈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과거나 현재나. "나도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하지만 들려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듣고 나서 당신이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면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듣지 않아도..." 미례는 성급히 말하는 쥰의 입술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막았다. 무언의 애원에 쥰은 입을 다 물었다. "처음 대학에 들어가서 당시 삼학년에 재학중이던 박효석선배를 만났어요. 그때는 그를 사 랑한다고생각했어요.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생활하는게 너무나 외로웠던 나는 그의 친절한 배려가 너무나 고마웠어요. 그래서...그와 동거를 시작했죠." 쥰의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미례는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당신이 짐작한데로 난 그에게 모든 것을 주었어요. 몸도 마음도. 그런데...일년정도 지나 난 내가...임신한것을 알았어요. 그는 사학년이었고 얼마 안있으면 취직을 할것이기에 당연히 결혼할거라고 믿었어요. 그래서 자취방에 케잌과 샴페인을 사다 놓고 자축 파티를 열었죠. 그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어죠. 임신소식을 들은 그는 불같이 화를 냈어요. 자신의 인생을 내가 망치려 작정했다고 하더군요." 미례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통을 참으려 했다. 과거를 떠올릴때면 언제나 배가 뒤틀리는 아 픔을 느꼈다. 정신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모든것을 집어 던지며 난리를 치던 그가 내배를 발로 차기 시작했어요. 난...최대한 아기를 보호라려고 노력했지만...병원에 갔을때는 이미 유산된 후였죠. 난...쥰...난...그뒤...아무도 믿을 수가 없었어요...지금도...악몽을 꿔요...내 아기가 우는 꿈을..." 쥰은 조심스럽게 미례를 안았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품안에서 마음껏 울수 있도록 했다. "사랑해, 미례. 사랑해." 그는 그저 사랑한다고 되뇌일뿐이었다.

지연의 실종이 길어지면 질수록 준호는 지독한 두려움에 질식할것만 같았다. 어떤 모습이던 그저 그녀가 살아 있어주기만 바랄뿐이었다. 그녀가 없는 자신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옥끝까지라도 지연을 찾아 다닐거라던 강재민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그녀의 시체가 발견된다면 범인을 찾아 그가 끝까지 쫓을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자리에서 그를 죽이고 준호 역시 지연의 뒤를 따를것이다. 그에게 지연외에 중요한 것은 그무엇도 없었다.


자신이 가진 준호는 텅빈 그의 손에는 그녀를 찾아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지연을 찾을 것이다. 사무실, 자신의 책상에 앉아 어둠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지연의 반지가 쥐어져 있었다. 반지를 다시 끼워 줄때까지는 그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강재민이 부하에게 지연의 옷을 사오라고 지시를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애써 태연한척 계단 을 내려 갔다. 자신은 연기자였다. 충분히 해낼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남자가 가면 뭘아나요? 제가 같이 갔다 올께요." 불쑥 끼어든 희진을 가느다랗게 눈을 뜨며 강재민이 노려 보았다. 그녀의 속셈이 뭔지 알아내려하는 듯 했지만 희진은 목숨이 달린 일이기에 태연스레 덧붙였 다. "저도 새옷이 필요 한단 말이에요. 네?" 애교스럽게 희진이 아양을 떨자 강재민의 의심에 찬 눈초리가 수그러 들었다. "딴 생각을 하면 안돼." 그는 못박듯 그렇게 말했다. 승낙이었다. "딴 생각이라뇨?" 쾌재를 부르고 싶은 마음을 누르 며 눈을 동그랗게 뜨며 천지한 표정을 지었다. "곧 재민씨가 절 내보내 줄텐데...제가 굳이 위험을 무릎쓰고 도망 갈리가 있어요? 다시 잡 혀올게 뻔한데요. 안그래요?" "그래. 곧 자유롭게 해줄게. 그러니 쇼핑만하고 바로 들어와. 딴짓할 생각 말고. 알았지?" 죽여서 날 자유롭게 해주려고? 희진은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감시해서 다녀와." 강재민이 가장 믿는 태호와 곰치를 희진에게 붙여주었다. 희진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백 화점을 향하는 차안에서 끝임없이 재잘거렸다. "한영백화점으로 가요. 그곳에 내가 단골로 가는 매장이 있어요." 그녀의 너무나 여유있는 행동에 태호조차 의심하지 않고 그녀가 원하는 백화점앞에 차를 대 게했다. "너무 눈에 띄니까 좀 떨어져 있어요. 알았죠?" 여성복매장으로 들어가며 희진은 당당하게 명령했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태호는 매장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섰다. 희진은 어쩔수 없다는 듯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의 눈에 옷이 보일리가 없었다. 그저 마구 잡이로 집어내고 있을뿐이었다. 점원이 이게 웬 횡재냐는 표정으로 희진을 따라 다녔다. 지연과 자신의 옷을 대충 고른 그녀는 강재민이 준 카드를 내밀었다. 계산을 하고 사인을 하고있는데 태호와 곰치가 안으로 들어와 점원에게서 쇼핑백들을 건네 받았다. 검은 양복을 빼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쇼핑백을 양손에 들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사람들 시선 을 끌었다. "속옷도 사야 하는데?" 희진의 야유하는 표정에도 태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속옷 매장을 지켰다. 곰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희진은 또다시 아무렇게나 고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산을 했다. 그뒤 가방과 구두까지 백화점 곳곳을 돌아 다니며 희진은 마음껏 물건을 샀다. "별일없었나?"


돌아온 그들을 보며 강재민이 물었다. 희진은 피곤하다며 이층으로 올라가고 없었다. "네. 정말 질리게도 물건을 사더군요. 쇼핑중독자 같았어요." "누구와 길게 얘기하지도 않았고?" "형님 말씀대로 화장실도 못가게 했는걸요. 점원과도 별 얘기 없었습니다. 화장도 안하고 돌아다니니까 그녀가 김희진인걸 아무도 모르던걸요?" 곰치가 끼어들며 아는체를 했다. "수고했다. 나가봐." 강재민은 문득 말을 잘들은 희진을 죽이기가 아까워졌다. 그냥 데리고 살까? 아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한지연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지연과의 잠자리를 상상하며 재 민은 몸이 달아올랐다. 에이, 아프지만 않았어도.

그날 김희진이 다녀간뒤 백화점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리고 연락을 받은 준호 일행이 급히 백화점으로 왔다. "바로 이겁니다, 회장님." 백화점 진사장이 준호를 맞아 들이며 바로 용건을 건넸다. 얼마나 중요한 정보인지 아는 그의 손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카드매출표 뒷면에 갈기듯 쓴 글씨를 보며 준호는 심장이 터질것만 같았다. '윤준호회장에게, 당신이 찾는 것은 xxx 동 xxx 번지에.' 대여섯장에 달하는 모든 매출표 뒷면의 내용은 똑같았다. "도대체 누가?" 간신히 물어보며 준호는 침착하려 애썼다. "한직원말이 김희진을 닮은 여자가 어마어마하게 물건을 사갔답니다. 두명의 보디가드를 데 리고요." "빨리 가보자구요." 곁에서 지성이 초조감을 그대로 들어내며 소리질렀다. "쥰, 당장 믿을 만한 애들 몇 명만 골라. 지금 당장 간다." "네, 회장님." 쥰은 대답과 동시에 핸드폰을 꺼냈다. "저...경찰에는?" 진사장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어왔다. "수고했습니다, 진사장님. 앞으로는 제가 알아서 할겁니다. 일이 해결되면 도움을 준 직원들 에게 따로 포상하겠습니다." 진사장은 급히 사장실을 떠나는 준호 일행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 보았다. 앞으로 그와 몇 몇 직원들이 장래를 보장 받게 된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다음 인사이동때 어느 자리를 달라고 해볼까

뭐하고 있기래 이렇게 늦는 걸까. 희진은 초조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자신이 한짓을 강재민이 알고 들이 닥칠까봐 두렵기만 했다. 희진은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방안을 서성거렸다. "무슨 일 있었어요?" 지연이 담담한 시선으로 물어왔다. 그녀는 오늘부터 미음에서 죽으로 식단이 바뀔정도로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아직도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는 희진의 부축을 받아야 했지만.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신이 한일을 듣고 지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신이 없던 그녀는 얼버무렸다. "희진씨가 날 좋아하지 않는거 알아요. 그리고 미안하게 생각하구요. 정말 미안한데...부탁하나만 들어주겠어요?" 지연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침대머리에 기대며 앉았다. "말해봐요." 약간은 짜증스런 말투로 재촉했다. "뭐가 됐든 좋으니...날 지킬수 있는 물건을 구해줄수 있어요?" 지연의 말이 뒤돌아선 그녀의 등뒤로 꼿혔다. 방안을 돌아 다니던 희진의 발이 그대로 멈췄다. "무슨 뜻이에요?" 희진은 몸을 돌려 지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옛날같으면 여인네들이 은장도를 갖고 다니겠지만...과도 정도면 좋겠는데..." "알았어요, 노력해 보죠." 당신이 과도따위로 자결하기전에 그남자가 와야 할텐데. 희진은 당신에게 그런 물건은 필요 없다고 말해주려다 간신히 참았다. 강재민이 자신을 죽이려고 마음먹은 이상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판단했다. 자신의 힘만으론 안된다면 윤준호를 끌어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정말로 지연과 약혼을 했고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면 자신이 남긴 메모의 의미를 이해 하고 달려올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녀는 강재민의 손아귀에서 벗어날수 있을것이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도박을 하고 있었다. 최소한 지연은 목숨은 건질수 있을것이다. 물론 당사자는 생각이 다른듯 했지만. 저택은 어둠에 싸여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곳곳에 켜진 불빛이 안에 사람이 있음을 알게해 주었다. "사용한 카드는 강재민 법률사무소 법인카드였습니다." 골목길에 댄 차안에서 쥰이 준호에게 보고했다. "누구 집이지?" 쥰의 말에 별로 놀라지도 않은 듯 준호는 물었다. "불곰파 두목의 집이랍니다. 강재민이 바로 불곰파 두목이었던 거죠." 지성은 쥰이 언제 그런 사실을 알아냈는지 이제는 궁금증이 생기지도 않았다. 준호와 쥰이 상상을 초월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이제는 너무나 잘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세현을 죽인것도 강재민이겠군." 그것은 물음이 아니라 단정이었다. "안에 몇 명이나 되지?" "적어도 이십명은 넘을 겁니다." "총을 가지고 있을까?" "글쎄요. 가능성을 배제할수도 없죠." 살벌한 대화를 주고 받고 있는 이 두사람이 이제는 무 섭게 느껴지는 지성이었다. "처남은 차안에서 기다려." 갑자기 준호가 지성을 향해 명령했다. "싫은데, 매제. 나도 안으로 들어갈거야. 나중에 경찰에 해명할려면 내가 필요할텐데. 아무래도 내가 설명을 하면 쉽지 않겠어?" 하며 씨익 웃는 지성이 밉지가 않게 느껴지는 준호였다. "위험할지도 몰라." "그건 매제도 마찬가지지. 뭐라고 해도 갈거야."


결국 준호는 설득하려던 것을 포기했다. 먼저 쥰이 날렵한 몸을 날려 높은 담을 넘어갔다. 잠시후 대문이 소리없이 열리자 준호와 지성 그리고 경호실직원 세명이 조용히 따라 들어갔 다. 지성이 나중에 회상해 보니 사실 자신은 별로 한일이 없었다. 그것은 세명의 경호원도 마찬 가지지만. 준호와 쥰은 신의 경지에 다다른 무술 실력을 뽐내며 살벌한 무기를 들고 덤비는 열명이 넘 는 사내들을 가볍게 처치했던 것이다. 지성과 경호원들은 그들이 싸우는데 걸리적 거리지 않게 한켠에 비켜서 있어야 했다. 준호가 뒤에서 자신을 내리치려는 사내를 돌려 차기로 쓰러뜨린 후 장칼을 가지고 그의 가슴을 향해 덤비는 사내의 팔을 붙잡아 그대로 꺽어 버리는 것을 멍하니 입을 벌리고 바라보던 지성은 결심했다. 앞으로 준호의 기분을 건들지 않게 조심해야 겠다고. 그의 수도 한방에 장정들이 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며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불곰파 놈들이 약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준호와 쥰이 너무 강했다. 떠들썩한 소리에 집안에서도 사내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전세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얼마되지 않아 넓은 정원에는 이십명이 넘는 사내들이 신음을 하며 쓰러져있었다. 팔과 다리가 부러진 놈들부터 기절한 놈들까지 가지가지였다. 왜 사람들이 준호와 세이치 쥰을 무서워하는지 절실히 실감하는 한편, 경호원과 자신이 따라온 이유가 무색해졌다. 이걸 영화로 찍으면 재미있을거라고 지성은 잠시 생각했다. 무협영화 한편을 보고난 기분이 었다. "지연!" 준호가 지연의 이름을 목청껏 소리쳐 부르며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정신을 차리며 뒤를 따랐다. "형님, 피하셔야겠습니다. 여기는 아이들이 잠시동안은 막을 수 있을겁니다." 준호일행이 들이 닥치자 마자 태호가 달려왔다. "어떻게 알았지?" 분노한 강재민이 소리를 질렀다. "그년이...그년이야!" 강재민은 태호가 말릴 겨를도 없이 이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이럴 시간이 없는데. 빨리 피해야 하는데 그들의 형님은 미친사람처럼 날뛰고 있었다. 태호가 지연이 묵고 있는 방에 들어갔을 때 안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강재민은 방안에 들어서자 마자 주먹으로 희진의 머리를 내리쳤다. 자지러지는 비명소리와 함께 희진은 바닥에 쓰러졌다. "네년이 무슨 방법으로 윤준호에게 알려 줬는지는 모르지만, 널 가만 두지 않겠어." 지연은 강재민의 비정상적인 눈빛을 보며 아까 희진이 건네준 과도를 뒤로 감추었다. "그래요, 내가 알려 주었어요. 어차피 당신은 날 죽일거잖아. 당신만 잘되는 꼴을 볼순 없잖 겠어?" 바닥에 널부러진채로 희진이 악을 썼다. "네년 뜻대로는 되지 않을 거야. 자, 이리와 지연. 어서 여길 나가자." 갑자기 태도가 부드럽게 변한 강재민이 손을 내밀며 지연에게 다가왔다. "싫어요." 지연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싫다니?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 몸이 안좋은 것은 알지만...어서 여길 빠져 나가야해.


내가 안고 가지." 강재민은 지연의 거부를 받아들일수가 없는 듯 했다. "거기서 한발자욱도 움직이지 마요." 뒤에 숨겨진 과도를 꺼내며 지연이 말하자 부드럽던 강재민의 표정이 충격으로 변했다. "설마...그걸로 나를 찌르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뇨. 당신을 찌를 순 없겠죠." 그녀의 말에 그럼 그렇지 하는 만족스런 표정이 강재민의 얼굴에 퍼졌다. "하지만...날 찌를순 있을거에요. 안그런가요?"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는 지연을 보며 한순간 강재민은 기가 질려 할말을 잃었다. "차라리 죽는게 났단 말인가? 나랑 함께 하는 것보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의 계획에 한지연이 자신을 거부한다는 것은 들어있지 않았다. "당연하죠. 난 윤준호의 약혼자에요. 그를 사랑하고 있어요." "거짓말이야!" 강재민이 분노에찬 고함을 터트렸다. "형님!" 문앞에서 태호가 초조하게 재촉했지만 그는 돌아 보지도 않았다. "당신은 그가 한영그룹회장이기 때문에 결혼하려는 거야. 그가 돈이 많은 것은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나도 그 못지 않게 당신을 호강 시켜 줄수 있어. 이러지마, 지연. 어서 가자." "강재민씨,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게 있어요. 난 돈이나 다른 것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설혹 당신의 강압에 못이겨 자진하는 한이 있어도 따라가지 않을 거에요." "말도 안돼!' 강재민이 검붉어진 얼굴로 노기를 터트렸다. "무슨짓을 해서라도 당신을 데려가겠어." 그는 단숨에 지연에게 달려 들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희진이 그의 발을 잡아 당겨 쓰러뜨렸다. "지연씨, 어서 도망가...악!" 발딱 일어난 강재민이 발로 희진을 짖밟고 사정없이 차기 시작했다. 처절한 비명끝에 희진이 기절하자 분이 풀리지 않은듯 씩씩거리며 지연을 향해 왔다. "가...가까이 오지마요." 지연은 떨리는 손에 힘을 주며 칼을 붙잡았다. 칼날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내것이 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여 주지." 증오에 가득찬 그는 침대 바로 옆에 멈춰섰다. "어디 한번 해보시지. 과연 당신이 자신을 찌를수 있을까?" 강재민은 지연이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어서 해보라니까?" 확신을 가진 그는 여유있게 약을 올렸다. 한순간이었다. 결심한듯한 지연의 표정이 언듯 보이더니 칼을 잡은 손이 약간 올라갔다. 그리고 아무런 미련없이 자신을 향해 내리 꼿았다. "안돼!" 막 이층으로 뛰어 올라오던 준호는 처절한 고함소리를 들었다. 그는 심장이 내려 앉는 느낌 에 정신없이 소리가 난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문앞에서 그를 가로막는 태호를 한방에 쓰러뜨려 버렸다. 그의 시선은 곧장 지연을 향했다. 마치 그녀를 찾기위한 레이더라도 달린 사람처럼.


"으~악." 짐승의 울부짖음을 터트리며 준호가 단숨에 벌벌 떨고 있는 강재민을 붙잡아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 지연을 안아올렸다. "준호씨?" 지연의 음성은 꺼질 듯 희미했다. "쉿! 말하지마. 병원으로 데려갈게." 준호는 울면서 말했다.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미안해, 당신을 믿지 못해서 미안해, 지연아. 제발...날 버리지 말아줘. 제발." 준호는 경악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쳐 그곳을 빠져 나왔다. 가슴에서 피를 흘리는 지연을 소중히 안고서.

에필로그. 정말 기가 막히게 좋은 날씨였다. 결혼식을 올리기에는. 인호는 샴페인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주위를 따분한 시선으로 둘러 보았다. 참 특이한 곳에서 결혼식을 올리는군. 그의 형과 형수는 제주도에 있는 노회장의 별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저멀리 떨어진 목장에서 말들이 뛰노는 것이 보였다. 천하의 윤준호가 자신 소유의 호텔도 아니고 별장 정원에서 가깝게 지내는 하객들만을 초대 해 조촐하게 식을 올리다니. 별일도 다있었다. 하긴... 형수가 다치는 바람에 결혼식이 미뤄지게 되자 애가 달았던 그의 형은 약혼식도 때려치고 형수의 몸이 어느정도 회복되자 요양차 와 있던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형수를 생각하는 인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형을 그 조그만 손안에 넣고 쥐고 흔드는 그녀를 보면 얼마나 놀라운지. 형뿐만이 아니었다. 그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는 배길수가 없었다. 그만 하더라도 죽어도 부르지 않겠다던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성북동 본가에는 집안을 전면적으로 고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형수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싶다는 한마디에 계모라면 치를 떨던 배다른 형이 기꺼이 따른 것이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면 형수와 형은 인호의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살게 될것이다. 물론 배다른 형이 부모님께 잘할거라는 것을 이제는 믿는다. 지난 한달동안 형은 많이 변했 다. 자신의 모친과 그들의 아버지를 정말로 따뜻하게 대하는 형을 보면 놀랄뿐이었다. 사랑이란 참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나보다. 인호는 단숨에 잔에 든 샴페인을 마셔버렸다. 사랑은 무서운거야. 그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작은 오빠!"


인혜가 푸른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치켜 들고 그를 향해 뛰어왔다. "가족사진 찍는데. 어서 가자." 스물두살의 평범한 여자애로 돌아온 인혜는 과거를 잊고 해 맑게 웃고 있었다. 그래, 부디 기억해 내지 말아라. 인호는 인혜가 언젠가 과거를 기억해 냈을 때 닥칠 일들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알았어." 가족사진이라. 인호는 동생의 손을 잡고 아름답게 웃고 있는 신랑 신부를 향해 걸어갔다. 준호와 지연은 결혼식에 참석해준 하객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며 배웅했다. "진심으로 결혼 축하해요, 지연씨." 희진이 웃으며 지연의 몸을 끌어 안았다 떼며 말했다. "고마워요, 희진씨." "희진씨께 진 빚 잊지 않고 있겠어요. 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와요." 준호가 ���에서 희진에게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행복한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너무 든든한데요, 준호씨? 지성씨도 내게 그런말 하더라구요." "오빠가요?" "네, 지연씨를 살려준 은인이라구 나에게 얼마나 친절한대요." "아, 오해하면 안돼. 그 이상도 그이하도 아니라구." 갑자기 지성이 끼어 들었다. "어머, 지성씨. 나도 지성씨를 어떻게 해볼 생각을 언감생신 꿔본적 없다구요, 뭘. 나도 곧 결혼할 상대가 있단 말에요." "정말이에요?" 지연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너무나 기뻐했다. 강재민과의 일로 희진이 절망하지 않고 재기한 것을 얼마나 다행으로 생각하는지 몰랐다. 누가 뭐라고 해도 희진은 지연의 은인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강재민에게 지연이 무슨 짓을 당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준호가 들으면 화를 내겠지만 지연은 강재민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금 정신병원에 수감중이었다. 완벽하게 이중생활을 하는동안 그의 정신세계는 파괴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연에 대한 이상한 집착도 어쩌면 그래서 생긴건지도 몰랐다. 지연이 자신을 거부하고 칼로 심장을 찌르는 순간 그는 무너지고 말았다. 다행히 칼은 길이가 깊지 않았고 심장을 비껴간 덕분에 지연은 무사할수 있었다. 열감기를 심하게 앓고 난후 대수술을 받고 나자 그녀의 몸은 너무나 쇠약해졌고 다급해진 준호는 그녀를 데리고 제주도로 내려왔다. 맑은 공기와 준호의 사랑이 넘치는 보살핌을 받으며 그녀는 많이 건강해졌다. 손님들이 모두 떠난 별장은 너무나 조용했다. 한쪽에서 자리를 정리하는 일꾼들을 제외하면 별장에는 준호와 지연만이 남았다. 두사람은 이곳에서 일주일 정도를 보낸 후 외국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올 예정이었다. 한달정도 유럽이나 미주쪽을 돌고 난후 쥰과 미례의 결혼식에 맞춰서 돌아올것이다. 미례도 이제는 많이 좋아져서 곧 퇴원할거라고 들었다. "미례언니와 세이치 쥰이 못와서 좀 서운해요." "어쩔수 없잖아. 미례씨가 아직은 비행기를 타지 못하니까." 피로연복을 벗는 지연을 도와주며 준호도 아쉬움을 감췄다.


"당신 피곤하지 않아?" "네. 이젠 그만 환자 취급해요. 남들이 보면 웃어요. 그깟 칼에 조금 찔렸다구..." "그런말 하지마. 그때를 생각만 해도 끔찍해." 준호는 지연을 돌려 세운후 끌어안았다. "아직 일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어요, 준호씨." 그녀의 몸에 걸친 나머지 속옷을 거칠게 벗긴 후 자신의 옷을 다 벗어던진 준호가 그녀를 안아 침대로 향하자 항의했다. "그들도 신혼부부라고 이해해 줄거야." 준호는 지연의 입술에 포개며 그렇게 웅얼거렸다. "앞으로 절대로 나를 떠나면 안돼." 그녀의 가슴에 난 분홍빛으로 아물어진 상처에 입술을 대며 준호가 다짐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신부를 열정의 세계로 이끌었다. 잠결에 몸을 뒤척이던 준호는 눈을 떴다. 곁에 지연이 없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무슨일 있어요, 호오빠?" 갑자기 발코니에서 고운 음성이 들려왔다. 준호는 충격을 받은 표정 그대로 자신을 향해 걸어 들어 오는 그녀를 보았다. "연이?" 하얀 잠옷차림에 긴 머리를 끈으로 묶은 탓에 어려보이는 아내를 보며 그는 신음했다. "네. 약속을 지켜줘서 고마워요." 아내는 다소곳하니 그의 옆에 엉덩이를 걸치고 침대에 앉았다. "왜 말하지 않았어?" 그는 믿을 수 없어 하며 간신히 물어보았다. "당연히 당신이 약속때문이 아니라 절 사랑해서 선택해 주길 바랬으니까요."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비비며 그녀가 달콤하게 웃었다. "말안해서 화났어요?" "아니, 내가 화가 난건 다시 만나자 마자 결혼 할 수 있었는데...그동안 애를 태운 걸 생각하면... 웃지마! 내가 처남을 질투했다는거 알지? 그런데...세상에!" "당신이었어요. 제가 다른사람들에게 말한 정혼자는." "용서할 수 없어." "벌을 줄건가요?" "물론이지. 앞으로 영원히 나만 사랑해야 하는 무시무시한 벌을 줄거야. 그리고 질투심 많은 남편의 사랑도 감당해야 하지." "기꺼이 벌 받을께요." 관능적으로 유혹하듯 웃으며 지연이 준호의 몸위로 올라 왔다. "지금부터 시작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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