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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위한 도박 1 사나이는 볕에 그을린 황금빛 손을 캐더린에게 내밀었다. 온화한 느낌의 푸른 눈에는 자신만만하다고 할 정도의 이상한 빛이 서려 있었다. 캐더린의 가슴은 경종을 울리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눈을 들어 사나이의 얼굴을 쳐다보자 화사한 하얀 손을 겹친다. 사나이는 떨고 있는 캐더린의 가는 허리를 늠름한 팔로 살며시 끌어안고 풍만한 다갈색 머리에 가볍게 입술을 갖다 대었다. "다호 호수에는 놀러가나요. 아니면 거기서 일하고 있나요?" 옆에 앉은 처녀의 목소리에 캐더린 데라코드는 현실로 돌아왔다. 모처럼 멋진 공상에 젖어 있었는데, 하고 한숨을 내쉬며 비행기 창에서 눈을 돌린다. 모르는 사람과 흥미없는 대화를 하는 것보다는 이대로 공상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것이 훨씬 좋다. 그러나 캐더린은 다갈색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치켜올리면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자그마한 부르넷의 처녀에게 애교있게 미소를 보냈다. 다호 호수로 가는 이 비행기 안에서 둘은 가장 젊은 승객이었다. 그것이 왠지 서로를 연결시켜 놓은 기분이 들어서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일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놀러가는 것도 아녜요. 아버지 집에서 휴가를 보내기 위해 가는 거예요." 은회색의 스커트를 매만지며 캐더린은 부끄러운 듯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수줍은 듯 상대를 응시했다. "와아, 정말요? 아버지라니, 이름이 뭐죠? 뭐하시는 분이죠?" 부르넷의 처녀는 다그쳐서 물었다. "적어도 나의 아빠이긴 하지만… 당신이 묻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죠?" "저 말예요, 아버지께서는 유명인?" "아니, 단지 가끔 다호 호숫가에서 살고 있을 뿐예요. 호텔에서 카지노를 경영하고 있죠." "어머… 그러면 혹시 그 유명한 호텔 하라?" 부르넷의 목청 높은 소리에 모든 승객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두 사람 쪽을 바라보았다. "응, 그렇다고 말해요." "여기서 호텔 하라와 관계있는 사람을 만나다니, 이거 믿을 수 없는 행운인데 난 웬디 미라라고 해요. 가수죠. 하라같이 유명한 호텔 라운지에서 노래할 찬스를 얻는다면 최고로 행복할 거예요." "미안해요. 아빠는 호텔 하라에서 일하고 있지 않아요. 작은 호텔에서 카지노를 하고 있을 뿐이죠. 시이다이즈라고 하는 작은 호텔이에요."


캐더린은 미안한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요…

그래도

고급스러운 시이다이즈에

호텔이죠.

이름도 쇼

들어본

적이

비지니스에서

출연한 경험이

있어요.

유명한

있는 법이거든요.

시이다이즈는

사람이라면

그러니까 그곳

작지만

상당히

한두

번쯤은

라운지에서

노래를

대개

부르더라도 조금도 상관이 없어요." "가수가 된 지 얼마나 되었어요?" 웬디는 실망했다는 표정보다는 으시대는 몸짓으로 말했다. 캐더린은 얌전한 웃음을 띠었다. "5 년이에요. 20 살 때부터 노래를 했죠.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예요. 형편없이 시시한 클럽에서 노래를 부른 적도 있어요. 손님이라곤 모두 감정이 둔한 사람들뿐이어서 긴장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죠." 웬디는 마른 목소리로 우습지도 않은 듯이 웃었다. "그만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가냘픈 쓴웃음을 짓는 웬디의 얼굴이 굳어졌다. "노래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해본 일이 없어요. 지금 그만두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아주 조금이라도 운이 돌아오면 반드시 인기가 솟을 텐데. 그래서 다호 호수로 가는 거예요. 슈퍼 스타가 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생각이에요." "인기가 생겼으면 좋겠는데." 캐더린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이상스럽게도 2l 살밖에 안 된 자신 쪽이 이 웬디라는 아가씨보다 훨씬 어른 같은 느낌이었다. 이 아가씨에 비하며 아직 나는 현실적인 것 같아. "이런 말을 해서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아무 목표도 없이 다호 호수로 간다는 것은 너무 서두르는 거 같지 않아요? 매니저에게 의뢰했던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매니저라구요? 흐응, 웃기는 말이야. 저 쓰레기가, 빌어먹을… 아, 미안해요. 지금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줘요. 하지만 그 매니저 덕분에 5 년 동안이나 형편없는 곳에서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지난 주에 드디어 그 놈을 파면시켜 버렸어요. 이제부터는 내가 직접 계약을 할 거예요. 그 자보다는 좀 낫게 할 수 있겠죠. 찬스를 잡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기꺼이 할 생각이니까요." "행운을 빌겠어요. 노래한다는 것은 당신에게는 매우 소중한 일 같군요." 그 순간 웬디가 말한 대로 되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캐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요행만 바라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요. 안 그래요?" 웬디는 바싹 다가앉으면서 의미있는 눈길로 캐더린을 바라보았다.


"다호 호수 근처에 있는 호텔 어딘가에 누군가 아는 사람이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 담당자에게 나를 소개해 줄 만한 사람… 당신 아버지 같은 사람만 있다면 최고일 텐데 말예요. 호텔 하라의 예능계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 하라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시이다이즈 사람이라면 좋을 텐데. 그러한 소개인이 필요해요." 캐더린은 웬디가 하는 말뜻을 못 알아들은 체하기로 했다. 아빠는 이 아가씨를 소개해 주면 귀찮은 얼굴을 하시지는 않을 거야. 아니,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재미있어하실지도 몰라. 갑자기 늘 아빠와 같이 있는 웬디와 같은 젊은 여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공상에 젖어서 잠시 잊을 수 있었던 혐오감이 마음속에 퍼진다. 여름 휴가가 끝날 때까지는 싫어도 아빠와 함께 다호 호수에서 지내지 않으면 안 된다. 매년 같은 짓을 반복해 왔다. 어머니와 계부, 이복누이나 동생들은 볼티모어에서 함께 여름을 지내는데 캐더린만은 네바다까지 찾아와 거의 타인과 같은 아빠와 2 개월 반 동안을 함께 지내지 않으면 안 된다니! 도무지 존경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우러나지 않는 아빠인데… 금년만은 어떻게 해서라도 가지 않으려고 온갖 지혜를 짜내어 다호 호수에 가지 않게 된다면 여름 휴가쯤은 없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대학에서 하기 강습을 두 개나 받을 결심까지 했으나 결국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대학의 등록금을 대주고 있는 아빠로부터 여름 강습비를 못 보내겠다고 하는 연락이 있었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이 여름 휴가 동안에는 함께 지내고 싶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어째서 아빠는 매년 나를 붙들고 싶어하는 걸까? 4 살 때부터 쭉 여름 휴가를 함께 지내왔었는데도 아빠와 놀았다든지 돌봐주었다든지 하는 기억은 하나도 없었다. 다호 호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위의 아빠 집에서 지내는 동안 캐더린을 귀여워하고 상대가 되어 준 것은 아빠가 아니라 엄한 가정부 마리였다. 아빠가 엄마를 버린 것은 캐더린이 아직 3 살 때였다. 어째서 그리고 나서도 나에 대한 일은 깨끗이 잊어버리지 않았는지, 차라리 잊어 주었더라면 그것이 내게는 더 좋았을지도 모를 텐데. 그렇게 되면 계부 쪽의 호적에 들어가서 엄마의 두 번째 가족과 함께 어울릴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브라이스 데라코드는 결코 딸의 호적을 빼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맙게도 다른 일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캐더린에 대한 경제적인 원조만은 오늘까지도 계속해 주고 있다. 그 사람은 무책임하고 여자관계가 복잡한 도박꾼이야, 라고 엄마는 요즘와서야 겨우 말하게 되었다. 그러나 캐더린은 도무지 엄마처럼 관대해지지 않는다. 아빠를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빠의 살아가는 모습은 존경할 수도 없었다. 웬디를 아빠에게


소개하다니 말도 안 된다. 그런 짓을 하면 둘 다 서로 이용해 먹을 것이 뻔한 노릇이다. 그리고 볼일 다 보고 나서는 깨끗하게 상대방의 일은 아주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웬디는 눈을 반짝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캐더린은 모른 체하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비행기는 푹신푹신한 하얀 솜 같은 구름 속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구름층이 끊기며 기체가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비행장에 가까워짐에 따라서 눈 아래에는 굉장한 경치가 펼쳐졌다. 다호 호수에 올 때마다 이 경치에는 숨을 죽이며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캐더린은 경치에 눈이 팔렸다.

이곳에

오는 것은 싫었지만

다호

호수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요양지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짙은 사파이어 색의 호수 건너편에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늘어서 있다. 그곳은 네바다와 캘리포니아의 주 경계이다.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했다. 터미널에서 짐을 기다리고 있는데 귓가에서 웬디의 음성이 들렸다. 마침 캐더린의 푸른 수트케이스가 둘 다 벨트 콘베어를 타고 이쪽으로 향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말야, 될 수 있으면 값싼 호텔을 찾아야 할 텐데. 짐을 두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일자리를 찾아볼 생각이거든요. 어디든지 호텔 라운지에서 노래를 시킬 사람을 만났으면… 아는 사람이 있으면 정말 다행일 텐데 말예요." 일부러 그런 말을 덧붙였지만 캐더린이 이번에도 모른 체하고 있는 것을 보자 어깨를 움츠렸다. "당신에게 다시 보자는 인사를 하려고 말을 걸었어요." "수다를 떨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얼른 일자리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안 됐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빠에게 소개할 맘은 생기지 않았다. "그래요. 물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버티어 볼 생각이에요." 웬디의 목소리는 쌀쌀했다. "당신 이름은 뭐죠? 아까 내 이름을 가르쳐 주었는데도 당신은 안 가르쳐 주었잖아요." 어설프게 웃음짓는 얼굴에서 눈이 능글맞게 빛났다. 할 수 없이 캐더린이 자기의 이름을 말했다. "그러면 다시 또 만나요, 캐더린 데라코드 양." 웬디는 활기차게 말하고 손가락마다 하나씩 반지를 끼운 손을 흔들었다. "어쩌면 머지 않아서 시이다이즈로 만나러 갈지도 몰라. 그럼 바이 바이!" 웬디는 매력있게 허리를 흔들며 느린 걸음으로 터미널을 빠져 나갔다. 캐더린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저 아이는 아빠의 이름이 알고 싶었던 거겠지. 만약 정말로 시이다이즈로 찾아오더라도 그것은 아빠를 만나기 위해서지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아닐 거야.


아빠인 브라이스 데라코드를 만나서 자신을 팔면서까지 어딘가 호텔에서 노래 부를 자리를 얻으려고 하겠지. '할 수 없어.' 하고 한숨을 쉬면서 미처 잡지 못한 짐을 벨트 콘베어가 다시 한 번 싣고 와줄 때까지 기다려서는 허둥지둥 호텔에서 마중나온 버스로 달려갔다. 버스에서 벌써 승객이 몇 사람인가 있었는데 왼쪽에 혼자 앉는 자리를 발견하곤 그리고 가 앉았다. 고속도로 곁의 경계선에서 네바다 주로 들어가면 즉시 카지노 빌딩이 차례차례로 나타난다. 중앙 고속도로가 호수를 따라 북쪽으로 가는 좁은 길로 바뀌면서부터 창 밖의 경치는 완전히 변했다. 아직 아무도 찾아간 적이 없는 듯한 소나무와 히말라야 삼목이 빽빽하게 들어선 삼목이 연달아 있고, 오후의 햇빛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푸른 호수가 엿보였다가는 사라지곤 한다. 캐더린은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다호 호수와 그 건너편에 둘러서 있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바라보았다. 산꼭대기에는 여름인데도 흰눈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버스가 히말라야 삼목의 가로수 길로 들어서서 호수 쪽으로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하자, 캐더린의 얼굴은 차츰 안색이 어두워져 갔다. 드디어 앞길에 시이다이즈 호텔의 우아한 고풍 목조 건물이 보였다. 옆에 있는 9 홀의 골프코스인 잔디가 건물의 아름다움을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베란다가 있는 크림 색의 건물은 밖에서 보면 소박하고 매력적이었지만 들어가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이다. 냉냉한 기분으로 버스에서 내려 짐을 받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의 벽은 금색의 부조로 되어 있었고, 화사한 붉은 카펫 위에는 묵직한 조화를 이루는 가구가 놓여져 있다. 벽 쪽으로 나란히 놓여 있는 슬로트 머신만 없었더라면 정말 멋있는 분위기일 텐데. 이곳에 올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

대낮인데도

눈이

충혈되어서

필사적으로

열중하고

있는

남자도

있었다.

마호가니제의 카운터 너머에 서 있는 접수계에서는 못 보던 남자가 있었는데, 캐더린이 브라이스 데라코드의 딸이라고 말하자 반갑게 맞으며 짐을 맡아 주었다. 똑바로 어깨를 펴고 조용하고 작지만 잘 정돈된 로비를 지나서 넓고 소란스러운 카지노에 들어갔다.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캐더린은 무의식적으로 코를 찡그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여기저기의 글라스에서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블랙잭(트럼프 놀이의 하나)이나 바카라의 테이블 주위에도 갬블러(도박을 직업으로 생활하는 사람)가 모여 있었다.


발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테이블 사이를 빠져 나가 아빠의 사무실 쪽으로 향한다. 마호가니제 목각 도어 앞에서 캐더린은 잠시 머뭇거렸다. 정교하게 만든 놋쇠 손잡이에 지금 막 지나온 카지노를 돌아다본다. 얌전한 얼굴에는 주저하는 빛이 떠올랐다. 대체 루울렛(도박의 일종)의 테 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조그만 볼을 보고 있는 것이 어째서 저렇게 재미있을까? 사무실 앞 방에는 황금색 카펫 위에 크롬과 마호가니제의 책상이 놓여져 있고 접수받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작년의 그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데라코드의 딸이라고 하자, 바로 비서실로 가세요 하며 보내 주었다. "제스에게는 알리지 마세요." 캐더린은 가만히 손잡이를 돌리면서 입술에 손을 갖다 대고 접수보는 사람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놀래주고 싶어." 조용히 도어를 열고 호화스러운 아이보리 색 카펫과 황록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 사치스러운 방으로 들어갔다. 브라이스의 비서인 제스 윗트니는 책상 위에 펼쳐 놓은 서류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 잠깐 동안 캐더린은 조용히 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혼하고 나서 아빠와 개인적인 연관을 쭉 갖고 있는 사람은 이 제스뿐이었다. 38 살인데도 어깨까지 늘어뜨린 붉은 빛이 섞인 브론드의 머리카락과 호리호리하게 젊음이 흐르는 몸매를 하고 있는 제스는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게다가 아름다움뿐만이 아니라 풍만한 개성과 온화함이 샘솟고 있���. 제스는 얼굴을 들어 도어 쪽에 서 있는 캐더린을 보고는 살짝 따스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머나! 언제 도착하는지 알려주지도 않고." 낮은 목소리였으나 갈색 눈동자는 흥분해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황급히 일어서자 캐더린 옆으로 와서 가볍게 껴안으며 볼에 키스했다. 애정이 넘치는 행동이었다. "당신을 보니 너무 기뻐요. 머리를 뒤로 묶고 있어서 얼른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어요. 너무 멋있어요. 작년보다 훨씬 어른스럽게 보이는걸." "이제는 슬슬 어린애 티를 벗을 때도 되었잖아요. 13 살난 아가씨로 보인다니 이젠 지긋지긋해요." "그래요. 아무리 봐도 13 살로는 보이지 않아요, 키트. 적어도 그보다는 3 살은 어른스럽게 보이는걸요." 캐더린이 불만스럽게 코를 찡그리는 것을 보자, 제스는 놀리는 듯한 미소를 띠웠다. "아녜요. 정말로 당신은 아름다운 레이디로 보여요. 당신이 지난 1 년 동안 얼마나 성숙했는지를 본다면 브라이스도 틀림없이 깜짝 놀랄 거예요."


캐더린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기저귀를 차고 장난감을 달랑달랑 흔들면서 다호 호수에 왔다고 해도 아빠가 알아볼지 어떨지는 의심스럽다. 그러나 그런 것을 제스에게 말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럴 리가 없어요 라고 말할 것이 분명하다. 제스는 상당히 머리가 좋은 사람인데도 가엾게도 브라이스의 결점을 하나도 못 보고 있다.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나는 싫다. 틀에 잡힌 가정과 아이들, 거기다가 제스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고 사랑해 주는 남편. 이 여자에게 알맞는 것은 그러한 견실한 생활인데도 모든 것을 다 희생하며 단지 브라이스 데라코드의 곁을 떠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한 제스를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한 마디 하고 싶어진다. "당신은 이제 이곳을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그렇게 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제스 걱정을 하다보니 수줍음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당신이 나를 내쫓고 싶어하는 줄은 몰랐어요. 틀림없이 나를 좋아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름다운 얼굴이 싹 굳어졌다. "예, 그래요. 당신이 좋아요. 그렇기 때문에 말하는 거예요. 여기서 나가는 것이 좋아요. 이유는 알고 계시겠죠. 당신처럼 훌륭한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잘 정돈되고 모든 것이 잘 조화된 생활이 적합할 거예요." "지금의 내 생활을 불만스럽게 느껴본 적은 없어요. 정말이에요. 나는 이대로 지내고 있어도 충분히 행복한걸요." "그런 것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스? 10 년 전에 당신이 아빠의 비서노릇을 하며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아빠를 사랑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잠깐 동안 아빠와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도 말예요. 아빠가 다른 여자와 놀아났을 때에도 이곳을 떠나갈 수 없을 만큼 사랑하고 있었다지요? 작년 여름에 마리가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어요." "마리는 정말 수다쟁이에요. 이미 옛날에 다 끝난 이야기예요. 과거를 캐내어서 마치 브라이스가

내게

심한

처사를

것같이

이야기하여

당신을

혼란시키다니

나쁜

사람이에요. 결코 브라이스만 나빴던 것은 아니였어요. 나도 역시 어린애가 아니었으니까, 그 사람에게 열중해 있었을 때에도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관계를 가졌었어요. 그러니 마리가 한 말은 다 잊어버리세요. 내 걱정을 해줄 필요는 조금 없어요." "그래도 걱정이 돼요. 아빠 같은 사람 때문에 당신이 인생을 포기하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요. 보다 더 합당한 사람을…" "언제부터 실연당한 여자의 카운셀러가 되었죠?"


제스는 조금 약이 올라서 캐더린의 말을 막았지만 금방 후회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미안해요, 큰소리를 쳐서. 하지만 정말로 더 이상 브라이스와 나에 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제스, 저런 사람을 위해서 어떻게 인생을 망쳐 버릴 수가 있어요? 그 사람은 결코 변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아직도 아빠를 매우 사랑하고 있겠지만, 어떻게 그렇게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10 년 동안이나 아빠가 상대를 바꿔 가며 놀아나는 것을 참고 보고 있을 수가 있었죠?" "당신은 지금까지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어요, 키트?" 그만두어요, 하는 얼굴로 제스가 물었다. "한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과 만난 뒤에 내가 어떻게 해서 참고 견뎌왔는지를 생각해 보아요. 조금은 알 수 있을 거예요. 사랑이라는 것은 수도꼭지를 틀 듯이 간단히 틀었다 잠갔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예요. 끈질기고 지옥과 같은 상태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이죠. 그것만은 내 경험으로도 말할 수 있어요. 나도 말이죠, 브라이스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도 해봤어요." "그렇지만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예요? 이곳에서 나가 버리면…" "브라이스의 곁을 떠난다는 것도 상상도 못하겠어요. 정말로." 제스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슬픈 듯했다. "그이는 나를 필요로 하고 있어요. 정말이에요. 아무리 당신이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브라이스 자신조차 미처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이는 나를 필요로 하고 있어요. 브라이스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림 정이 얕은 사람은 아니예요. 깊은 애정을 갖고 있어요. 단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고 있을 뿐이죠. 나로서는 그이를 단념할 수가 없어요. 자기를 필요로 하고 있는 사람한테 그러한 처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머지않아 당신도 알게 될 때가 올 거예요, 키트." 슬픈 듯한 미소를 띠우며 제스는 머리를 저었다. "당신은 젊어요, 정말. 언제나 이 사람이면 틀림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골라서 사랑할 수만은 없는 거예요. 당신은 아직 모를 거예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버린 경우도 있는 거예요." "나에게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아빠 같은 사람과 연애를 할 줄 아세요? 아빠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무책임한…" 캐더린은 아! 하고 입을 다물었다. 흉보고 있는 그 사람이 훌쩍 문을 열고 들어왔으므로 마치 껍질 속으로 숨어드는 조개처럼 캐더린은 그대로 입을 다물고 평상시의 수줍은 아가씨가 되어 버렸다. 브라이스 데라코드는 같이 데리고 온 멋진 몸매의 브론디 아가씨에게 정신이 팔려서 딸이 와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의아해 하는 듯이 살짝 옆눈으로 제스를 훔쳐보았다. 그녀는 브라이스의 무분별한 행동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단념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드디어 브라이스는 얼굴을 쳐들었다. 캐더린이 와 있는 것을 알자, 팔에 매달려 있는 브론디 아가씨에게서 손가락을 풀고 입가를 한쪽만 올리며 마지못해 하는 듯한 그런 웃음을 띠웠다. 조금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그런 웃음이었다. 방을 건너서 캐더린 옆으로 와서는 몸을 굽히고서 볼에다 가볍게 키스했다. "무사히 와서 기쁘다. 정말, 여행은 즐거웠나?" 말소리에는 조금도 따뜻함이라고는 없었다. 캐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서 보니 작년보다 입가의 주름살이 깊게 패여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브라이스는 핸섬했다. 눈은 캐더린과 같은 에메랄드 그린, 밤색 머리는 관자놀이 근처가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했다.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매력적인 남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냉정하고 단정한 태도와 말씨도 매력을 끄는지도 모른다. "키트의 헤어스타일이 무척 멋지죠, 브라이스?" 아빠와 딸이 쑥스럽게 잠자코 있는 것을 보다 못해 제스가 한 마디 끼어들었다. "작년보다 훨씬 어른스럽게 보인다고 생각지 않아요?" "정말 아름답구나, 키트." 조금 전처럼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하고서 브론드 아가씨 쪽을 돌아보며 도어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거의 리허설 시간이 되지 않았나? 이제 그만 가보는 게 좋겠어. 어제는 스테이지에서 몇 차례나 스텝을 틀리더군." "그렇지만, 브라이스." 브론드 아가씨는 불만스러운 듯이 콧소리를 냈다. "따님에게 소개해 주지 않아요?" "아! 나중에 천천히. 지금은 리허설에 가는 거야. 자, 빨리. 해고되고 싶지는 않겠지?" 무미건조한 말투였다. 브론드의 아가씨는 반항적으로 갈기 같은 머리를 흔들며 나갔다. 브라이스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탕 하고 도어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브라이스는 잠자코 턱을 만지고 있다가, 이윽고 캐더린을 보더니 예의 그 어색한 미소를 띠웠다. "곧 집으로 갈 생각이니? 키트, 조금 더 시간이 있거든 잠시만 도와 주지 않겠니? 술을 나르는 웨이트리스가 2 명이나 쉬어서 지금 손이 모자라던 참인데. 괜찮겠지?"


캐더린은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작년에도 두 번이나 웨이트리스를 대신해서 일을 했던 게 기억났다. 카지노에 얼굴을 내미는 것을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다고 말했었는데 …

금년에는 이곳에 도착한 지 10 분도 채 못되어서 벌써 이런

형편이다. 할 수 없지, 참자, 저렇게 보잘것 없는 천치 같은 웨이트리스 옷을 입지 않고 지내는 것만도 어디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브라이스는 단조로운 억양으로 말했다. "그 모습은 마치 학교 선생 같군. 재킷이라도 벗지 그래. 그리고 바에 가서 객실에 가지고 갈 음료수를 달라고 해." "그런데 저쪽 게임은 어떻게 되었어요? 어제는 밤을 새웠죠? 언제쯤 끝날까." 제스가 말참견을 했다. "금방 끝나. 저 석유회사의 귀공자는 이미 프로 갬블러는 따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아. 제이슨은 놈을 한 푼도 없는 빈털털이로 만들어 버릴 작정이야." 캐더린은 진절머리는 치면서 재킷을 벗고 바로 갔다. 글라스가 4 개 담겨져 있는 쟁반을 들고 아버지 방 앞쪽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어째서 재킷을 벗으라고 하는 걸까? 감자 포대를 뒤집어쓰고 가는 건데. 아니,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아무 것도 입지 않고 가더라도 상관이 없는데. 게임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의 갬블러들은 모두가 똑같다. 자기가 들고 있는 카드밖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예상대로 캐더린이 도어를 열고 안에 들어가도 테이블 주위에 앉아 있는 5 명의 남자들은 누구 하나 얼굴을 들지 않았다. 값비싼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고 셔츠 칼라의 단추를 풀고 헝클어진 머리를 한 남자들은 모두 똑같이 보였다. 그렇지만 한 사람 …

테이블의 반대 쪽에 앉아 있는 은화색 머리의 남자만은 다른

4 사람보다 어느 정도 나아 보였다. 그 오른쪽에 앉아 있는 젊은 남자가 조금 전에 이야기에 나왔던 석유회사의 귀공자임에 틀림없다. 땀에 흠뻑 젖어 있다. 프로 갬블러가 될 소질이 있다고 자부하고 아마 갚지도 못할 만큼 빚을 졌을 것이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차용증을 써서 은화색 머리의 남자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것을 받아 넣는 남자는 햇볕에 그을은 정력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갬블러!

캐더린은 음료수를 가지고

테이블에 가까이

가면서

안절부절하며

콧등을

찡그렸다. 갬블러라고 하는 것은 냉정하다. 감정을 억지로 죽이고 살아가는 남자들. 모두 인간 쓰레기다. 차례차례로 남자들에게 어떤 것을 주문했는지 조용한 목소리로 물으면서 돌아다닌다. 모두가 손에 들고 있는 카드를 훌륭한 예술 작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구 한 사람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 귀공자가 버번즈 묵을 쟁반에서 낚아챘을 때, 브라이스 데라코드가 들어왔다.


"여기라고 제대로 알았군, 키트. 훌륭한 성과야. 어느 방이라고 알려줄 것을 잊은 것이 생각났어." 캐더린은 어색한 미소로 대답했다. 빨리 이 담배 연기가 자욱한 방에서 탈출하고 싶다. 그런데 5 명이 있는데 음료수는 4 개밖에 없는 것을 깨닫고 옆의 은화색 머리의 남자에게 물었다. "실례합니다, 손님. 아직 마실 것을 드리지 못했는데…" 남자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덥수룩한 수염을 길렀는데, 캐더린의 맥박이 빨라진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값을 매기듯이 캐더린의 호리호리한 몸매를 위아래로 쓰윽 훑어보고 입매를 한참 응시하고 있는 스카이 블루의 눈동자가 반짝이고 즐겁다는 듯이 빛나 보였기 때문이다. 캐더린의 얼굴이 빨개지자, 그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게임이 한창인 때에 갬블러가 웃다니! "고마워 키트, 커피를 부탁할까?" 남자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기분좋은 낮은 목소리였다. 키트의 뺨은 한층 더 붉어졌다. "제 이름은 캐더린입니다. 그렇게 불러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나는 키트라고 부르는 편이 좋은데. 너한테는 그것이 어울려. 그런데 커피는, 키트?" "직접 따라서 드세요. 커피포트는 당신의 바로 뒷테이블에 있어요." 남자의 눈썹이 조롱하듯이 위로 올라간 순간 브라이스가 말참견을 했다. "키트, 부탁이니 제이슨에게 커피를 따라 주지 않겠어? 지금은 게임이 최고조에 달해 있으니 말이야." 그래, 틀림없이 이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야. 시키는 대로 커피를 따르면서 캐더린은 불만스러운 듯이 한숨을 쉬었다. 포커를 해본 적은 없지만 제이슨이 갖고 있는 3 장의 에이스가 얼마나 강력한가 하는 정도는 안다. "고마워, 키트." 팔꿈치 바로 옆에 커피잔을 놓자, 제이슨은 중얼거렸다. 낮은 목소리에는 재미있어하는 듯한 울림이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돈을 받자, 캐더린은 그대로 도어 쪽을 향했다. 그렇지만 도어의 손잡이에 손을 댄 순간 자신도 모르게 호기심이 생겨서 어깨너머로 흘낏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그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제이슨이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스카이 블루의 눈동자에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즐거운 듯이 눈빛이 빛난다.


캐더린은 입을 꼭 다물고 시치미를 뗀 채 도어를 열었다. 저 제이슨이라고 하는 정체 모를 남자는 언제나 황홀하게 꿈꾸고 있던 기사와 닮지 않았는가! 다른 것은 머리색뿐, 그런 바보같은… 캐더린은 잠깐 멍하니 복도에 못박힌 듯이 서 있었다. 그렇지만 이윽고 그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게 어쨌단 말이지? 속기 쉽고 유혹에 약한 여자에게 제이슨은 위험한 남자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와는 관계가 없는걸. 어떻게 할까? 필시 다시 만날 기회는 없을 테고. 아니, 만나도 별 상관은 없다. 갬블러라는 것들과는 절대로 가까워지지 않아야겠다고 마음속으로부터 결심하고 있었으니까. 저 남자도 보통 갬블러 중의 한 사람이 아닐까… 2 근무가 끝난 카지노의 매니저가 브라이스의 흰 볼셰로 캐더린을 바래다 주었다. 아빠의 집은 호텔에서 좁고 꼬불꼬불 구부러진 길을 수십 킬로 달린 곳에 있다. 로지(Lodge)와 같이 지은 목조로써 커다란 소나무에 둘러싸여 호수에 면해서 세워져 있다. 응달의 샛길을 내려가면 튀어나온 바위들에 둘러싸인 멋진 후미가 나온다. 그것도 아빠의 것이다. 기쁜 것은 후미에는 자그만 모래밭이 있다. 캐더린은 매년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지내곤 했다. 카지노의 매니저가 테라스에 짐을 놓고 돌아가 버리자, 캐더린은 후미로 내려가는 길 쪽을 정겨운 듯이 바라보았다. 얼른 짐 정리를 끝내면 저녁식사 전에 한 번 수영을 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곧 수트케이스를 한 손에 들고 현관의 도어를 노크했다. 몇 분인가 기다렸지만 응답이 없다. 할 수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리빙룸에 들어서자, 곧 아빠가 모양을 바꾼 것을 알아차렸다. 하얀 소파가 벽난로를 향해 앉기 편한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유리와 크롬으로 만든 테이블이 몇 개인가 있고, 그 위에는 매끈매끈한 추상적인 조각이 장식되어 있었다. 하얀 화벽에는 현대 회화가 걸려 있었는데, 캐더린으로서는 아무리 보아도 자극적인 색을 캔버스 위에 흩뿌려 놓은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내 방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캐더린은 마리를 불렀다. 건물의 가장 구석에 있는 부엌에서 갑자기 냄비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고 생각되자 50 대의 뚱뚱한 여자가 환한 얼굴로 차광문을 열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키트! 어머 … 아가씨, 정말로 l 년간 안 보던 사이에 아주 아름다워졌어요. 몰라볼 정도로 어른스러워졌구!" "어머나, 그렇게 변하지는 않았어. 작년 여름과 그다지 다르지 않아. 머리를 묶어서 조금은 어른스러워 보이지만." "그래요, 그게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이렇게 아름다운 머리를 자른다니 너무 아까워요. 요즘 여자애들은 … 남자애들이 오히려 길 정도니까요. 아가씨가 그렇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만약 그렇게 짧게 잘라 버렸으면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엉덩이를 때려 줄 참이었어요." 마리라면 능히 그럴 것이다. 아주 어렸을 때지만 캐더린이 말을 듣지 않고 집에서 빠져 나가서 마리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놀러갔을 때 자주 궁둥이를 얻어맞았다. 마리는 수다스러운 편은 아니었지만 이야기를 할 때에는 생각하고 있던 것을 확실하게 말한다. 볼기를 때린다고 말하면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리의 애정을 의심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리의 다정함은 언제나 아빠의 무관심한 태도를 상당히 보충해 주고 있었다. 캐더린은 충동적으로 다시 한번 마리를 꽉 끌어안고 둥근 얼굴에 키스를 하고 한숨을 쉬었다. "마리 … 겨울 동안 어떻게 지냈어? 걱정했어요. 편지를 보내도 전혀 답장이 없고, 또 류마티스로 손이 아파서 쓸 수가 없었어?" "아침에 일어나면 심하게 굳어져 움직일 수 없는 경우가 있어요. 특히 한겨울이라든가. 게다가 원래 나는 편지를 쓰기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그래도 아가씨 편지를 받을 때에는 굉장히 기뻤어요. 그건 그렇고, 긴 여행에 피곤하죠? 욕실에 들어가서 깨끗이 씻어요. 방에다 짐을 옮겨 놓을 테니까요. 아가씨가 목욕을 할 동안 짐을 정리해 놓을게요." 캐더린도 바라던 바였다. 테라스로 가서 2 개의 수트케이스를 갖고 와서 마리의 뒤를 따라 건물 뒤에 있는 침실 쪽으로 긴 복도를 걸어갔다. 캐더린의 방은 호화스러운 흰 카펫와 녹색의 작은 가지 모양의 모슬린 커튼으로 바뀌어 있었다. 침대 커버도 커튼과 같은 색이었다. 그렇지만 캐더린이 제일 좋아하는 히말라야 상목의 가구는 그대로 있었다. 머리 부분과 발 받침판에 조각이 있는 침대, 그리고 어렸을 때 언제나 가장 소중한 것을 넣어 두었던 낡은 도구 상자, 모든 것이 남아 있었다. 수트케이스를 뒤져서 맘에 드는 색깔의 비키니를 꺼내어 옆의 욕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급히 옷을 벗었다. 차가운 샤워를 뒤집어쓰자 다시금 활력이 되살아났다. 미소를 띠우면서 대리석이 깔린 샤워 룸에서 나와 하얀 베스매트에 발을 얹었다. 그러자 커다란 목욕타월로 몸을 감싼 순간 기분좋은 미소는 사라져 버렸다. 목욕실 도어가 있는 곳에 검은 가운이 걸려 있었다. 물론 캐더린 것은 아니다. 꼬옥 입을 다물고 비키니를 입자 놋쇠의 타월걸이에서 가운을 낚아채며 도어를 열었다. 침대 쪽을 향해서 던지자 그 요염한 색의 나이트 가운은 깜짝 놀라는 마리의 앞을 연기처럼 휙 날으며 침대 카바 위에 떨어졌다. "마리! 만일 당신 것이 아니라면 이 물거품 같은 가운은 필시 아빠의 '친구 중의 한 사람' 것이겠지?" 마리의 뺨에 붉은 빛이 떠올랐다.


"미안해요. 아가씨가 도착하기 전에 다 치워 놓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굳이 마리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다 알고 있는 일이니까." "브라이스의 생활태도가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그는 외로운 사람이에요. 누군가가 이해해 주지 않는다면, 아마도 더 어색한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요." 마리는 통통한 손을 앞으로 모으고 주저주저하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아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경박한 짓이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단순한 데이트 상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랑하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아무나 만나고 집으로 불러들이는 일이…" 캐더린은 상자 위에 털썩 앉았다. "그렇지만 아빠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키트. 그러니까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알고 계실 거예요."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당치도 않는 소리. 그렇다면 왜 그런 기색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아빠도 그 중 한 사람. 그렇지만 당신을 사랑해요.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매년 이곳으로 부르죠?" "아마 속죄하겠다는 생각 때문일 거야. 나와 엄마를 버렸으니까. 딸인 나의 일을 조금은 걱정하는 체하기로 작정한 거지." "브라이스는 색다른 사람이에요. 그것을 이해해 드리지 않으면, 아가씨, 아빠는 한 명의 여자에게 속박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옷을 갈아입는 기분으로 상대를 바꾸는 거죠. 정말 슬픈 일이에요." "나는 진절머리가 나. 그렇지만 도리가 없겠지. 그런 사람 아마도 도박사야. 그런 사람들에게 감정 따위란 없어. 언제 어디서나 즐겁게 지내는 것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아." "키트, 너는 아직 너무 젊어서 남자들에 대한 것을 아무 것도 모르고 있어요." 마리는 타이르듯이 말했다. 캐더린은 간단하게 어깨를 움칫하고 머리에 꽂고 있던 핀을 뽑기 시작했다. 풍만한 다갈색 머리가 어깨 위로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척척 빗질을 하더니 한 가닥으로 땋아서 잔등에 늘어뜨렸다. 아직도 표정은 굳어 있었으나 마리가 정신없이 보고 서 있는 것을 알자 조금씩 기분이 풀렸다. "금년 여름에는 말을 걸어오는 남자들을 따돌리는 일이 큰일이겠어요. 다음으로 자꾸 당신을 유혹하러 오겠지요. 이렇게 아름다운걸요." "어머, 고마워. 하지만 그것은 좋게 봐주려는 거겠지요, 마리."


캐더린은 성큼 몸을 돌려서 크로젯에 달려 있는 큰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춰 보았다. 괜찮다고는 생각되었지만 아름답다고는 할 수는 없다. 가슴은 훨씬 풍만해졌고, 허리의 곡선도 여자다워졌으나 전체가 다소 연약하다. 다리는 가늘고 모양도 좋지만, 그것만으로는 마리의 말처럼 많은 남자들의 눈길을 끈다는 것은 너무 무리한 소리다. "다호 호수에는 글래머 여인들이 많은걸? 나 같은 것은 상대도 해주지 않아. 여름 휴가 동안 한 사람이라도 발견하면 잘되는 편이지." "언제나 매일같이 후미진 물가의 모래밭에 숨어 있으면 상대를 발견할 수 있나요? 너무 내성적이에요. 안 그래요, 키트? 더 많은 같은 또래의 사람들하고 어울려야지." "볼티모어에는 친구들이 많이 있어요. 여기서는 친구들이 안 생겨도 상관없어." "하지만 언제나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아요, 키트." 마리는 걱정스럽게 말하며 캐더린에게 파일 바탕의 비치 가운과 그 비치 타월을 넘겨 주었다. "혼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아. 싫은 사람하고 같이 있는 것보다는 혼자 있는 게 얼마나 좋은데." 읽다가 접어 놓은 책과 햇볕에 탄 데 바르는 작은 약병을 집어들고 캐더린은 어깨너머로 마리에게 미소를 던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 마리. 집에 있을 때에는 훨씬 사교적이야. 혼자 있는 것은 이곳에 있을 때에만." 마리는 어이없다는 듯이 머리를 저으며 웃음을 띠웠다. 캐더린은 한쪽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더 기다리기 싫어. 수영 한 차례 하고 올게. 저녁식사에는 늦지 않도록 돌아올게요." 솔밭을 지나서 호수로 이어지는 꼬불꼬불한 좁은 길을 나서서 캐더린은 멈춰섰다. 나무 끝을 지나는 바람 소리와 가끔 맑은 소리들, 우리는 새소리 외에는 정적을 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고갯길을 내려가면 뾰족한 솔잎이 카펫처검 깔려서 맨발 끝을 꼭꼭 찌른다. 숲을 빠져 나와서 모래밭과 이어지는 길의 꺼끌꺼끌한 돌들을 조심하면서 내려갔다. 신선하고 달콤한 공기를 가슴속 깊이 들이마시고 모래 위에 타월을 펴놓고 길게 누웠다. 물에 들어가기 전에 한 15 분쯤 일광욕을 즐길 작정이었다. 어느 틈에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지금까지 환하게 내려쬐던 태양이 스스로 기울어 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 순간 가는 갈색 털이 덮인 근육질의 다리가 눈에 띄었다. 깜짝 놀라서 눈을 뜨자 긴 다리에 하얀 장식이 있는 옷을 입은 길쭉한 허리, 감색 포크 셔츠에 싸인 넓고 늠름한 가슴, 그리고 차츰 눈을 들어서 쳐다보자 이러한 광경을 즐기는 듯한 스카이 블루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사나이는 미소지었다. 그러자 관능적으로 입술 양쪽에 깊은 보조개가 생겼다.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고 타월 위에 무릎을 꿇자 즉시 옆에 앉아 버렸다. 캐더린은 당황하여 벌떡 일어나서 본능적으로 앞가슴을 두 손으로 가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옆에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제이슨인가 하는 카지노에서 봤던 갬블러였다. 그는

캐더린의

성난

표정

등은

무시한

눈을

가늘게

뜨고

풍성한

다갈색

머리카락에서부터 날씬한 발목, 자그마한 발까지 찬찬히 관찰하고 있다. 드디어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에메랄드 그린의 눈으로 시선을 옮기자 빨개진 캐더린을 보고 웃음을 띠웠다. "야야, 또 만났군, 키트." "캐더린이라고 불러 주세요. 물론 미스 데라코드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져 삐죽이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키트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 아빠가 붙여준 닉네임이지만 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왜 그러지? 키트가 좋지 않아? 캐더린이라고 하는 것은 너같이 콧등에 주근깨가 있는 아이에게는 너무 딱딱해서 어울리지 않아." 이런 남자는 도대체 어떻게 대해 줘야 좋을까. 같이 있으면 왠지 숨도 마음대로 쉴 수 없을 지경이다. 어쨌든 빨리 쫓아 버리고 혼자 있고 싶다. "여기서 뭘하고 있죠? 여기는 우리 모래밭이에요."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아아, 그렇지만 내가 여기 있다고 해서 브라이스가 잔소리를 하지는 않을 거야." 제이슨은 침착하게 대답하며 다리를 펴고 뒤로 팔을 짚고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키트, 넌 그다지 붙임성이 좋은 아이는 아니군." "모르는 사람과 말을 주고받지 말라고 엄마가 일러주셔서, 그래서…" "내 이름은 제이슨 로그.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지. 너의 아빠의 친구라는 것은 알고 있으니까." 아빠의 친구라면 더욱더 당신과 같이 있고 싶지 않아요. 캐더린은 마음속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왜 자지 않죠? 철야로 게임을 해서 지치고 피곤할 텐데." "아아, 피곤했었지. 그렇지만 발코니에서 너를 본 순간 자기 전에 한 차례 수영이 하고 싶어졌어." "아니, 이 후미진 강이 보일 만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어요?" 제이슨은 뒤를 돌아보고 브라이스의 집 오른쪽에 있는 나무숲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좁은 곳 위에 히말라야 삽목으로 지은 A 자 형의 집이 있지? 거기서 살고 있어." 여기서 그곳까지는 상당히 멀었으나 호수로 뻗어나와 있었으므로 시계를 가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확실히 제이슨이 가리키는 곳에서는 이곳의 훌륭한 경치가 보일 만했다. 발코니에서 자기를 보고 있는 제이슨을 상상하자 캐더린은 몸이 굳어졌다. 그러나 먼 곳에서 어떻게 나라는 것을 알아보았을까. 특별히 시력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망원경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의심쩍은 눈초리로 제이슨을 바라보면서 타월 가장자리로 몸을 비켜 앉았다. "아까 하던 게임에서는 많이 이기고 있었죠? 석유회사의 귀공자에게 프로의 사정없는 맛을 보여준 것이겠죠? 그래도 그 사람은 아직도 프로 갬블러가 되고 싶어할까요?" "아니, 당분간은 그런 생각은 못하겠지." 제이슨은 한 손으로 모래를 퍼올리면서 무심한 듯이 대답했다. 긴 손가락 사이로 조금씩 모래가 흘러내린다. 캐더린은 눈앞에 있는 햇볕에 탄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만나본 갬블러는 모두가 대개 화려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제이슨의 손에는 아무 것도 없다. 사실 이 남자는 다른 갬블러와는 다르다. 상 당히 온화한 눈을 갖고 있다. 물론 조금 전의 게임에서도 캐더린을 알아볼 때까지는 스카이 블루의 눈동자에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캐더린이 알고 있는 갬블러들은 거의 다 항상 무표정하고 냉냉한 사나운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제이슨에 대한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나, 다른 갬블러와는 다른 데가 있어서 무심코 생각이 났다. 캐더린은 못마땅한 얼굴로 제이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상대도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닫자 화끈하게 얼굴이 달아올라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계속 여기 누워서 그 근사한 피부에 얼룩점을 만들고 싶지는 않겠지? 슬슬 수영이나 하러 가자." 제이슨은 하품을 참으며서 물었다. "당신은 돌아가서 잠이나 자는 게 낫지 않아요? 오늘 저녁에도 포커를 할 생각이라면 더더구나." "아니, 오늘은 안해. 큰 게임을 치르고 난 다음엔 반드시 2, 3 일 쉬기로 했어. 자, 수영하러 가자." "혼자 가세요. 나는 좀더 있겠어요." 캐더린은 시선을 외면한 채 중얼거렸다. "그러면 나도 좀더 기다리기로 하지." 제이슨은 한쪽 팔을 짚으며 캐더린 쪽을 향했다. "뭐하고 놀까? 트럼프라도 있으면 스트립 포커라도 하면서 놀 텐데."


"스트립이라고요!" 캐더린은 깜짝 놀라서 엉겁결에 제이슨을 흘겨보았다. 진심일까, 그렇지 않으면 농담? 스카이 블루의 눈동자는 갑자기 무표정하게 되어서 어느 쪽인지를 모르겠다. 머리가 혼란해져서 캐더린은 중얼거렸다. "포커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어떤 트럼프를 하나? 도둑잡기?" "브리지라면 가끔." 캐더린은 초조해 하면서 말했다. 제이슨이 자기를 놀리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상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보다도 어떻게 해서든지 이 남자를 쫓아보내야지 즐거운 한때가 엉망이 되어 버렸다. 제이슨이 옆에 있으면 왠지 맥박이 빨라지고 다가오면 더욱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까지 만났던 갬블러와 다른 점이 있어서일까, 게다가 압도당할 만큼 늠름하고, 이런 고요한 후미에 둘이 있는 것도 무섭다. 조심조심 넓은 가슴팍을 눈으로 더듬어 보는 캐더린은 꿀꺽 침을 삼켰다. "먼저 수영하세요, 기다려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난, 저… 책을 좀 읽어야겠어요." "뭐든지 둘이 같이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지 않을래? 같은 책을 둘이서 함께 읽을 수는 없잖아. 만일…" 제이슨은 도중에서 말을 끊고 타월 위에 놓여 있던 연애소설에 손을 내밀었다. "이 속에도 물론 아기자기한 러브 신이 있겠지? 그 부분을 돌려가면서 읽기로 할까?" 캐더린은 아무 말없이 제이슨의 손을 찰싹 치면서 책을 집어서 타월 밑으로 집어넣었다. "당신은 참 귀찮은 사람이군요. 설령 이 책 속에 그런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같이 읽을 필요까지는 없어요." 생기가 도는 스카이 블루의 눈매에는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제이슨은 손을 뻗어 껄껄한 손등으로 캐더린의 뺨을 살며시 쓸었다. "놀리고 있는 것도 모르나, 키트? 안심해. 나는 이제 러브 신 따위에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젊지 못해." 무시당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캐더린은 아래 입술을 깨물면서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손을 쳐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할 것인지, 이대로 잠자코 있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제이슨이 갑자기 일어섰다. 망설이고 있는 캐더린의 손을 잡아 일으켜 조용히 물결치고 있는 호숫가로 데리고 가서, 재촉하듯이 등을 손가락으로 밀었다. 이상하게도 다정스러운 손의 감촉을 느끼면서 캐더린은 물 속으로 들어갔다. 빨리 제이슨 곁에서 떠나고 싶다. 물은 숨 막힐 듯이 차다. 그러나 관계치 않고 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가끔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숨을 쉬면서 몸이 녹을 때까지 정신없이 손발을 움직였다. 제이슨은 조금 떨어져서 헤엄치고 있었다. 캐더린은 곁눈으로 제이슨을 훔쳐보았다. 자기 쪽으로 오지 않는 것을 알자 마음놓고 엎드려서 따뜻한 햇볕을 느끼며 손발을 뻗었다. 15 분 정도 그렇게 하고 있었을까, 갑자기 밑에서 손이 뻗쳐 나오더니 캐더린의 발목을 꽉 잡아당겼다. 물 속으로 끌려 들어가면서 가까스로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겁내지 않고 편안하게 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는데, 허리에 손이 와 닿자 엉겁결에 제이슨의 넓고 늠름한 가슴을 밀어젖히고 수면으로 떠오르려고 허둥거렸다. 손바닥에 힘센 가슴의 고동이 전해왔다. 제이슨은 캐더린의 저항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반듯한 입가에 느긋하게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갑자기 저항하는 것이 무의미한 듯해서 캐더린은 몸에서 힘을 빼고 밀치지 않고 물을 차면서 함께 수면으로 떠올랐다. "그래, 그러면 돼." 제이슨이 타이르듯이 조용하게 말했다. 비키니 속으로 드러나 보이는 부푼 가슴을 실눈을 뜨고서 바라보고 있다. "좀더 유연하게 하는 것이 좋아. 넌 너무 긴장해 있고, 지나치게 성실하단 말야, 키트." 캐더린은 제이슨을 바로 바라볼 수가 있었다. 남자의 손이 갑자기 아래로 내려가더니 히프의 통통한 부분을 싸안았다. 흠칫하고 몸을 굳히면서 또 허둥허둥 발버둥을 쳤다. 푸드덕거리고

있는

동안에

우연히

다리가

엉키자

전신이

달아오르며

얼굴이

새빨개진다. 제이슨은 다정스러운 몸짓으로 하나로 묶었던 머리를 풀기 시작했다. "너는 어쩌면 이렇게 매력적인 처녀일까, 키트."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제이슨이 말했다. 스카이 블루의 눈동자가 그늘져서 호수와 같은 진한 사파이어 색으로 변해 있었다. 살짜기 옆으로 다가와 한 팔을 머리 뒤로 받치고 다른 한 팔을 허리로 돌려서 캐더린을 끌어당긴다. 깜짝 놀란 캐더린은 제이슨을 밀어젖히고 호숫가를 향해서 빠른 속도로 헤엄쳐 나왔다. 간신히 타월이 있는 곳까지 와서 넘어졌다. 세찬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제이슨이 옆에 와서 눕자 흠칫 몸을 굳혔다. 어떻게 할까.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캐더린은 양팔로 얼굴을 가린 채 가만히 제이슨이 하는 짓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었고, 그래서 차츰 얼굴을 들었다. 제이슨은 반듯이 누운 채로 눈을 감고 손발을 뻗어 편히 쉬고 있었다. 세상에! 캐더린은 느리게 숨쉬고 있는 핸섬한 얼굴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 사람 자고 있잖아! 그렇게 별안간 다가와 놀래 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잠들어 버리다니 대체 어떻게 된 셈이지?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쯤은 해도 될 텐데, 정말 보기 싫은 남자야!


속이 상해서 비치 가운을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모래밭을 가로질러서 돌계단을 뛰어올라왔다. 캐더린의 비치 타월 위에서 깊이 잠들어 있는 제이슨을 남겨 두고… 3 이틀 후 목요일 아침, 캐더린은 테이블 너머로 아빠를 지켜보고 있었다. 신문을 보면서 마리가 갓 구어온 크로요상을 씹으며 블랙커피를 마시고 있다. 딸이 눈앞에 있는 것도 잊어버린 듯했다. 어제 저녁식사 때, 지난 1 년 동안에 일어났던 일을 주고받아서 이젠 할 만한 이야기도 없다. 캐더린은 오래 전부터 단념하고 있었다. 캐더린도 어렸을 때부터 몹시 내성적이어서 자기 쪽에서 먼저 말을 걸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 사이에는 공통되는 화제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은 좀 달랐다. 아빠가 신문을 접어 옆에 놓고서 항상 하던 대로 거북한 미소를 띠우자, 캐더린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제이슨 로그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죠?" "제이슨?" 브라이스는 얼굴을 찌푸리고 생각을 더듬듯이 테이블 위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캐더린은 아빠가 알고 있는 대로 모두 이야기하여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이상 아무 말도 없었다. 실망하고 한숨을 쉬었지만 이대로 단념해 버릴 생각은 없었다. "알고 계시는 대로만 말해 주시지 않겠어요?" 캐더린으로부터 눈길을 피한 채 브라이스는 가볍게 웃었다. "제이슨은 정체불명의 사나이야. 그 남자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어깼든 한 사람도 없으니까. 이곳에 오기 전에 유럽을 돌아다녔다는 소문도 있지만, 그곳에서 그 사람을 봤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바로 얼마 전에 몬테칼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만났는데 제이슨이란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하더라." "그래요. 그렇지만 아무도 들어본 사람이 없다는 것은 무슨 소리죠? 프로가 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뜻?" "초심자로서는 너무 침착하단 말야. 만약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으면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라도 큰 게임에는 꼭 참석을 할 텐데. 참석하지 않는 게임도 꽤 많은 편이야." "그렇다면 시이다이즈의 큰 게임에 참석하지 않을 때에는 어딘가 다른 카지노에 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 어디선가 하고 있다면 반드시 소문이 들리거든. 지난 2 개월 동안에는 그 사람이 제일 많이 땄으니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소문이 나기 마련이야. 큰 게임을 놓치지 않으려는 생각이 없으니까. 모두들 그 남자에게 더욱더 흥미를 갖게 되는 거지.


시이다이즈의 쇼걸들의 거의 반수는 그 남자가 누구인가를 알아맞추는 데 l 달 급료를 다 걸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야." "그 남자는 쇼걸을 사귀어 본 적이 없나요?" 캐더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한두 사람 그 남자와 같이 나간 적이 있었지. 그렇지만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나 보더라. 제이슨은 한 마디로 늑대 같아. 다른 사람들과는 통 어울릴려고 하지 않아." "내게는 그렇지도 않았어요." 생각하고 있던 말을 무심코

밖에

냈다.

아빠의

예리한

시선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결국 그…" "무엇 때문에 제이슨에 대해서 이것저것 묻고 싶은 거지? 대체 어떻게 그 남자를 알고 있느냐?" 아빠는 무서운 눈으로 쏘아봤다. "여기 오던 날 음료수를 갖고 들어갔을 때 만났잖아요. 아니, 잊어버리셨어요?" "그래… 그런데 그때 한 번밖에 안 만났는데 왜 그렇게 흥미를 갖고 있는 거지?" "실은 그 후에 또 만났어요." 캐더린은 손톱을 들여다보며 꺼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모래톱에 있을 때 찾아와서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았어요." 브라이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곳의

모래밭과

저쪽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므로

우연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모르긴 해도 발코니에서 너를 보고 나무 숲으로 해서 너를 만나보러 찾아온 것이겠지? 왜 그랬느냐, 키트." "저도 몰라요. 정말이에요. 혹시 누구하고든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캐더린은 뜻밖의 질문에 당황했다. "어떻게 했니? 그 남자에게 유혹을 당한 것은 아니냐? 키트, 거절했겠지!" "아니요, 유혹당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왜 거절하기를 바라세요? 그 남자 맘에 드는 사람 아니예요?" 캐더린은 모를 일이라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제이슨은 괜찮은 남자이긴 해. 하지만

그것과

이것과는

이야기가 달라.

교제하기를 바라는 맘은 없어. 적어도 갑자을축 한 둘레는 연상일 텐데." 엄한 목소리였다. "그렇게 많은 차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너하고


캐더린은 반박했다. 지금까지 모른 체하고 지내놓고 이제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왠지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어째서 12 살의 나이차가 문제가 되죠?" "나이는 별로 상관없어." 말투가 다소 누구러졌다. "경험의 차이가 문제란 말이다, 키트. 넌 아직 21 살밖에 안 되었어. 제이슨 로그는 너보다 훨씬 성숙했다. 세상 물정에 익숙한 여자들을 상대로 지내왔을 텐데. 그런 남자와 교제한다는 것은 좀 어떤가 해서 이야기하는 거다." "이유가 안 돼요. 제이슨은 아빠를 닮았으니 상대하지 마라. 그런 말씀인가요?" "그래, 키트." 브라이스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면서 내프킨을 내려놓았다. "정말 그래. 제이슨은 너 같은 처녀를 만날 사람이 아니야. 내가 네 엄마와 만날 수 없는 인간이었던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내가 네 엄마에게 상처를 입힌 것과 마찬가지로 그 남자가 네게 상처를 입히는 것을 잠자코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알아듣겠니? 슬슬 카지노에 갈 시간인데, 어때 괜찮겠니?" 캐더린은 시간 맞춰서 나가는 아빠의 등 뒤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자기 귀로 들은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었다. 옛날 일을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도대체 알 수가 없어! 캐더린은 이제까지 아빠를 속이 얕은 냉정한 인간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엄마를 버린 것을 후회하고 있는 걸 보면 내게 대한 처사도 후회하고 있는지도 몰라. 애정 같은 것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사실은 그 무정한 얼굴 뒤에 남과 같은 감정이 있는게 아닐까? l0 시쯤에 제스 윗트니가 서류를 가지러 왔다. 카지노로 돌아가기 전에 커피나 한 잔 마시고 가라고 권하고 나서 캐더린은 흰 소파에 앉았다. "아빠가 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제스는 즉시 대답 않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웃는 얼굴로 그렇다고 한다. "브라이스가 수다스럽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당신 이야기는 자주 해요." "어떤 얘기?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캐더린은 중얼거렸다. 대답을 듣는 것이 어쩐지 두려운 생각도 든다. "상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키트." 제스는 다정스럽게 말하고 캐더린의 이상스럽다는 표정을 보고는 덧붙인다.


"정말이에요. 몹시 귀엽고 똑똑한 처녀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어요? 아니면 당신이 마음대로 상상하고 있는 거예요?" "상상이 아니예요. 난 알 수 있어요. 입 밖으로 내놓고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아도 그 사람에게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어요, 키트. 그것은 당신도 알아야 해요." "그런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아빠는 좀처럼 말을 걸어오지도 않고, 내 몸에는 닿으려고도 하지 않아요. 매해 여기 올 때마다 아빠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내게 대한 의무감뿐이에요. 그런 생각이 든단 말이에요. 의무와 책임뿐이라는 생각." "당신네들은

전혀

말을

하지

않으니,

당신은

너무

내성적이고,

게다가

브라이스는 … 그 사람은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는 법이 매우 서툴러서 아마 브라이스는 내성적인 것 같아요." "아빠가 소심하다구요? 그럴 리가. 소심한 사람이 어떻게 카지노를 경영하고 그렇게 많은 여자들과 교제를 할 수 있죠?"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어요, 키트. 너무 내성적이어서 남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고 한평생을 지내는 사람도 있어요.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마음 편한 거죠. 물론 말할 수 없이 고독한 생활이에요. 당신 부친은 퍽 고독한 사람이에요." 캐더린에게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자기 존재의 의미를 깊이 파고드는 것이 두려워서 인생의 표면만을 스쳐가듯이 살아가는 사람은 확실히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빠가 그러한 인간의 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빠���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자란 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도 못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피차에 좀더 속 편히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더라면 아빠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내쪽에서 적극적으로 접근해 가야 하는 건 아닌지. "자… 이제는 사무실로 가봐야겠어요." 제스는 다정스럽게 말하며 일어섰다. "내일 동생이 찾아오기로 되어 있어요. 2 주일 가량 있을 예정이에요. 여기 있는 동안 친구해 준다면 고맙겠는데, 브래드라고 해요." "어머, 동생이 있었군요. 몰랐어요." "나보다 훨씬 젊어요. 27 살이죠. 마치 나를 감독할 의무가 있는 듯이 생각하고 있어서 이곳을 떠나서 떳떳한 상대를 찾으라고 성화예요. 나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진절머리가 나요. 당신이 상대를 해줄 수 있다면 걱정을 좀 덜겠는데."


함께 일어서자, 캐더린은 침착하지 못한 태도로 몸을 흔들었다. 나도 공연히 남에 일에 참견하여 제스를 싫증나게 했다. "저, 제스 … 화요일에는 미안했어요. 이곳에서 나가는 것이 좋다고 … 건방지게 내게는 상관도 없는 일인데…" "키트, 친절에서 나온 충고는 가끔이라면 고마운 것이에요. 그렇지만 쉴새없이 설교를 퍼부어 대면 싫증이 나지요. 그때에 당신이 내 행복을 각정해 주는 걸 알고는 기뻤어요." 캐더린은 마음놓고 웃음을 띠웠다. 제스는 도어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주저하듯이 말했다. "그 답례로 내게도 충고할 기회를 주겠어요? 브라이스에게 찬스를 드려 보세요, 키트. 보다 더 온화하고 다정한 눈으로 보아 드리세요. 그분은 애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요. 만약 당신의 그런 것을 알게 된다면 두 사람은 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예요. 생각 좀 해봐요, 키트." "벌써 그 생각을 시작했어요." 미소짓는 제스에게 캐더린은 생긋 웃어 보였다. 점심식사 후에 캐더린은 길가의 숲 속으로 탐험하러 나갔다. 한 손에 식물도감을 들고 작년 6 월에 발견했던 야생꽃과 새로운 식물의 종류를 확인했다. 방울뱀을 주의하면서 점점 깊숙이 숲으로 들어갔다. 어머! 저게 레오파드리이구나. 작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꽃이 눈앞의 풀숲 속에서 보였다. 자색 반점이 있는 노란 꽃잎에 손을 대려고 몸을 굽히는 순간 갑자기 발 밑의 땅바닥에서 뭔가 가늘고 긴 것이 보인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터져나올 듯한 비명을 참고 허둥지둥 바로 일어섰다. 그런데 당황해서 숲의 작은 나뭇가지에 머리 많은 것이 걸리는 바람에 도망칠 수도 없었다. 미치광이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많은 독뱀들이 금방이라도 다리에 감겨들 것 같다. 뱀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빠져 나가려고 공포에 휩싸여 서둘러댔다. 넝쿨 같은 나뭇가지에 엉킨 머리카락을 힘 닿는 데까지 잡아당겨서 아픈 것을 참으며 손으로 머리를 묶은 것을 풀었다. 간신히

자유롭게

되자,

나무 숲을

기어서

처음의

좁은 길로

되돌아와서

그대로

뛰어나왔다. 뱀 굴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질 것만 생각하고 뛰었으므로 땅 위에 솟아난 나무 뿌리에 그만 발이 걸려서 넘어져 버렸다. 조금 전에 숲 속에서 다친 무릎의 상처에 검은 흙이 들어가 버리고 손도 흙투성이가 되었다. 조심스럽게 다시 일어서서 손등으로 다시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물줄기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상처에 스몄다. 비누가 없어서 상처에 묻은 흙은 씻겨지지가 않았다. 땀을 계속 흘리며 아픈 다리를 질질 끌고 언덕을 내려가 집에서 1 킬로쯤 되는 곳에 길이 나 있는 데로 나왔다. 꾸불꾸불한 길을 200 미터쯤 걸었을 때 뒤에서 오던 차가 스피드를 낮추고 왔다. 누굴까? 캐더린은 돌아다보았지만 눈이 부셔서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은빛 자가용이 지붕에 태양빛이 반사되어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어이… 키티… 좀 도와 줄까?" 차 안에서 말을 하는 사람은 제이슨이었다. "태워다 줄까?" 길 옆에 차가 서자, 캐더린은 한숨을 내쉬며 검정 가죽의 조수석을 바라보았다. 숲 속에서 혼났으므로 이젠 지쳐 버려 한 발자국도 걷기 싫었다. 하지만 이 남자의 차에 올라타도 아무 상관이 없을까? 제이슨이 위험한 남자라는 것은 며칠 전에 있었던 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더 이상은 걷기 싫다… 도어를 열고 조수석에 앉자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또 한숨을 쉬었다. 아픈 무릎을 살짝 만지면서 조심스럽게 제이슨 쪽을 살피는 순간 캐더린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스카이 블루의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캐더린은 자기를 응시하고 있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서 얼른 얼굴을 돌렸다. "이 숲에서 곰이 나오는 줄은 몰랐는데. 너는 곰하고 레슬링하는 것이 취미냐?" 차를 길 쪽으로 돌리면서 제이슨이 말했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아요. 똑바로 앞을 보고 운전하세요. 숲에서 곰하고 노는 것이 더 나을 뻔했어. 이런 말 듣지 않게 말예요." 캐더린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면서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제이슨은 쿡쿡거리며 목 안에서 웃으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캐더린을 바라보았다. "걱정 마, 난 언제나 안전운전이야. 무리한 아슬아슬한 재주는 레이서들에게 맡겨 두면 돼. 살아가는 것이 즐거워서 언제나 정신차리고 운전하고 있어." "네에, 그러시겠지요." 캐더린은 비꼬듯이 말하고 마음속으로 덧붙인다. 파티의 연속처럼 아마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계시겠지요. 제이슨은 아무 말도 안했으나 캐더린이 살짝 옆눈으로 보니 씁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는 갬블러가 싫은 모양이군. 아니면 날 싫어하는 거든가." 제이슨의 목소리는 조금 전처럼 농담하는 투가 아니었다. "특별히 당신이 어떻다는 것은 아니예요. 갬블러가 싫다는 것보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캐더린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네 아빠도 말이냐? 브라이스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거니?" "네, 아빠는 더해요."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차츰 못마땅한 말투가 되어갔다. "너무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에요. 갬블러들은 대개 다 그렇겠지만." "그렇게 단정하는 것은 좋지 않아. 갬블러가 모두 다 같다고는 할 수 없지. 가령 내게 대해서도 좀더 이해해 줄 수 있다면 기꺼이 협력하겠어, 키트. 네가 그렇게 할 맘만 가져 준다면 말야." 제이슨의 낮은 목소리에는 뭔가 뜻이 있는 듯해서 가슴이 두근거리며 무릎 위의 손이 떨렸다. 캐더린은 입술을 깨물고 두 손은 꽉 쥐면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어머 … 캐더린은 눈을 크게 뜨고 제이슨을 돌아보았다. 차가 아빠집을 지나쳐 버렸다. "돌아가는 길을 지나쳤어요." "그런 것 같아." 짧게 대답한 제이슨의 눈동자는 금새라도 웃음이 터질 듯했다. "이것 봐.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지 말아, 키트. 딴 뜻이 있어서 유혹하려는 게 아니니까. 우리 집에 데리고 가려는 것뿐이야." "그렇지만 나는 가고 싶지 않은걸." 공포로 울렁울렁하는 흥분이 엇갈려서 가슴이 답답했다. "집에 돌아가서 상처를 치료해야 해요. 보세요, 무릎에 상처가 났단 말예요."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흘끗 캐더린의 다리를 보았으나, 그 눈은 상처가 나 있는 무릎이 아니라 매끈한 넓적다리 근처를 오가고 있었다. "아아, 알겠어. 상처를 돌보는 것이라면 우리 집에서도 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하고 불평을 말하려는 캐더린을 제지하면서 말했다. "뭐, 인사치레는 안해도 돼. 기꺼이 의사 대리쯤은 해줄 테니까. 그리고 전번의 그 타월과 책도 전해 줘야지." 도저히 맞설 수 없는 사람이야. 캐더린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돌렸다. "안 돌려줘도 되는 건가? 그렇잖으면 네가 화요일 오후에 나를 모래사장에 내버려 두고 갔을 때 타월과 책을 두고 간 것을 잊어버렸니? 참 그때 왜 아무 말없이 가버렸지? 깨웠으면 더 좋았을 것을." 캐더린은 끝의 말을 무시하면서 제이슨을 흘겨보았다. 이렇게 쉽게 흥분당하는 것이 분하다. "로그 씨, 그 책은 잊어버렸어요. 읽던 책이니 물론 결말이 어떻게 나는지 알고 싶지만요."


"나는 끝까지 다 읽었어. 실은 키트 데라코드가 어떤 처녀인가를 알고 싶어서 일부러 갖고 갔었어. 읽고 있는 책을 보면 그 인간에 대해서 잘 알 수 있거든." "어머, 정말이에요? 그렇게 모든 일을 알 수 있어요?" 갑자기 이 남자에게 약점을 잡힌 듯한 느낌이었다. "아, 가령 네가 손댈 수 없는 로맨티스트라고 하는 그런 것 말야." 제이슨은 별 흥미도 없는 듯이 말하고 곳 위에 서 있는 집까지 나선형으로 댄 길을 달리며 말했다. "너 그 연애소설의 여자 주인공하고 꼭 닮았어. 수줍으면서도 성미가 급하고 사랑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책 속의 주인공이 만난 사람과 같은 남자를 찾고 있겠지? 여자 주인공을 아슬아슬한 순간에 잔인한 사촌으로부터 구해낸다. 그림자지고 우수에 가득찬… 그 리고 실은 처음부터 계속 사랑하고 있었다고 털어놓으며 결혼을 청하고 생명이 다할 때까지 지켜주겠다고 약속하는 사나이. 네가 찾고 있는 사나이는 그런 사랑이겠지? 안 그러냐, 키트?" 자기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캐더린은 제이슨의 얼굴을 봄 수가 없다. 외모만이라도 제이슨이 내가 상상하고 있는 남자와 꼭 닮았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 아닐까. "그런 연애소설을 읽는다고 해서 내가 주인공과 나를 혼동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것… 진실이 아니니까요." "그럴까?" 차가 A 자형의 큰 건물 앞에 멈추었다. 제이슨은 캐더린 쪽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살며시 손등으로 희고 반들반들한 볼을 어루만졌다. "정직하게 말해 줘, 키트. 너는 자기를 지켜줄 수 있는 힘센 주인공 타입의 남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지?" "만약 그렇다고 해도 그게 어쨌단 말이죠? 그게 나쁜가요?" "아니, 나쁘다는 것은 아니야. 그러나 내가 너의 주인공 타입 안에 들어 있지 못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정말로 안타까운 듯한 말투에 캐더린은 무심코 햇볕에 그을은 핸섬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그, 당신 개인이 어떻다고 말하는 게 아니예요. 갬블러는… 나는…" "갬블러는 신용할 수 없는 거겠지, 키트?" 캐더린이 수긍하는 것을 보자, 제이슨은 갑자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 소설의 여자 주인공도 처음에는 남자 주인공을 신용하지 않았다. 기억하고 있지? 끝머리 가까이에 가서야 비로소 자기가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너도 같은 착각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캐더린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제이슨은 차에서 내러더니 빙 돌아와서 조수석의 도어를 열어주었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는 갬블러가 있을까? 놀란 표정으로 눈앞의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제이슨이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 줬다. 거부하지 않고 내리면서 딱딱하게 말했다. "집으로 가는 게 좋았었는데. 정말로 내가…" "어째서 나를 두려워하지, 키트?" "아니예요. 내가… 당신을 두려워할 까닭이 있나요? 안 그래요?" "그렇구말구." 제이슨은 큰 손으로 캐더린의 팔뚝을 잡더니, 그대로 현관으로 향했다. 4 집안은 소박한 분위기였다. 널판지로 둘러친 벽과 히말라야 삼복은 십자 모양으로 짜서 올려 세운 천장이 높고, 크고 넓은 실내에는 상쾌한 온기가 돌고 있었다. 나무를 낀 마루에 카펫은 깔려 있지 않았고, 큰 난로 앞에 붉은 색의 작은 카펫이 놓여 있었다. 소파는 청색과 갈색이 어울린 색깔이었으며, 하늘색 안락의자가 두 개 있었는데 너무 시원해서 앉아보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벽 속으로 접어 넣을 수 있는 큰 책상 위에는 이 고장에 사는 화가가 그린 세라 고원의 풍경화가 몇 개 걸려 있었다. 제이슨이 나무 마루를 지나 소파 쪽으로 다가오자, 캐더린은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새삼스럽게 주저해 봤자 너무 늦었다. 팔목을 잡은 손에 힘만 더 들어갈 뿐이다. "거기 앉아. 약상자를 갖고 올게. 상처를 봐주지." 캐더린은 큰 눈으로 제이슨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방 맞은편의 스윙 도어를 지나서 그가 사라지자, 심호흡을 하면서 머리를 풀기 시작했다. 돌아오기 전에 풀어진 머리를 만져 놓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제이슨은 금방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적십자 마크가 붙은 흰 상자를 옆에 끼고 비누를 푼 더운물을 반쯤 담은 세면기를 들고 있었다. 제이슨이 소파 앞에 무릎을 꿇자, 캐더린은 저절로 몸이 굳어졌다. 맥이 빨라진다. 거품이 있는 따뜻한 물에 담갔던 거즈로 상처 속에 남아 있는 흙을 닦아낸다. 비누가 스며들어서 쩔쩔매자, 제이슨은 얼굴을 들고 미안한 듯이 손을 멈추었다. "되도록 아프지 않게 하고 있는데." 다시 손을 놀리면서 친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근처의 흙에는 아마 여러 가지 세균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이 흙은 모두 깨끗이 씻어 버리는 게 좋아."


제이슨은 마른 거즈로 물 묻은 다리를 닦기 시작했다. 벌겋게 패여서 쿡쿡 쑤시는 무릎 근처를 손 끝으로 살살 닦아 주었을 때에는 캐더린은 숨을 죽이고 눈을 감았다. 남자의 손길이 이렇게 정답고 부드럽다니! 터질 듯한 즐거움을 전신으로 느끼면서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눈을 크게 뜨며 양손으로 굳게 주먹을 쥐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소독하고 있는 제이슨의 머리카락에 닿아 버리고 말 것 같았다. 상처에 반창고를 붙이고 나서 치료가 끝났다. 다행이다! 이제는 갈 수가 있어. 그런데 그 사람은 조금도 움직이려 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물끄러미 캐더린을 바라보고 있다. 갑자기 캐더린은 숨을 죽였다. 사나이의 손이 상처를 입지 않은 쪽의 발목을 잡더니 그대로 손 끝으로 곡선이 아름다운 종아리를 더듬는다. 마치 그 자리만 타고 있는 듯한 감촉이었다. 캐더린은 몸을 몹시 떨었다. 이 손을 치워 버려야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왠지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언제까지든지

전신의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있고 싶을 정도로 황홀하다.

처음

제이슨의

느끼는 어둡고

기분이었다. 이대로 푸석푸석한

눈동자에

최면술이라도 걸린 듯이 캐더린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손을 뻗쳐서 이 사나이의 머리카락��� 손가락에 감았다. "키트." 제이슨이 쉰 목소리로 중얼댄다. 그때에 스윙도어 저 편에서 무슨 소리가 나자, 제이슨은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퍼부으면서 일어섰다. 다리가 가늘고 긴 누렁개가 전신을 흔들면서 즐거운 듯이 콧소리를 내면서 이리로 오고 있었다. "죠지아, 앉아." 놀랍게도 이 말 한 마디로 황금색 개는 발 아래 철썩 앉았다. 빛나는 검은 눈으로 제이슨을 쳐다보면서 리드미컬하게 마룻바닥을 꼬리로 치고 있었다. "어머, 제이슨 멋져요. 이 개 당신 거예요?" 콧소리를 내고 있는 개에게 다가가서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난하듯 얼굴을 찌푸렸다. "마침 좋지 않은 때에 좋지 않은 장소를 지나고 있었어. 석유 가게 앞을 지날 때 이놈이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어. 쇼윈도우 속에 앉아 있는 것이 너무나 슬프게 보여서 그만… 어쨌든지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 이놈은 용케도 내게 그러한 생각이 들게 했단 말야." 제이슨의 눈을 피하면서 캐더린은 개의 귀 뒤를 가볍게 긁어 주었다. 이 사람에게는 참 이상한 면이 있어. 갬블러라고 하는 것은 아빠를 포함해서 감상적인 인간은 아니라고 쭉 생각해 왔다. 아무리 귀엽다고 하더라도 제이슨이 개를 기를 만큼 다정한 마음씨의 소유자라는 것이 캐더린에게는 의외였다.


이 사람에 대한 것은 좀더 알고 싶어.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느끼며, 후하며 숨을 크게 쉬었다. 제이슨 로그처럼 매력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사나이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 이상 깊이 간섭하는 짓은 왠지 두려운 생각도 든다. 언제 어떤 행동으로 나올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옆에 가까이 있으면 몹 시 신경이 쓰인다. 거북한 생각을 밀어붙이고 가벼운 마음으로 별 의미없는 대화를 하려고 입을 열었다. "왜 죠지아라고 부르죠?" "이놈을 사 갖고 올 때 죠지아의 복숭아같이 보였거든." "그러고보니 그렇군요. 부드러운 강아지 같아요." 하면서 짧은 털을 쓸어 주었다. "아직 강아지야." 제이슨은 놀라고 있는 캐디린을 보고 미소지었다. "태어난 지 5 개월밖에 안 되었어." "정말이오?" 개의 머리는 거의 캐더린의 무릎까지 닿는다. "어머, 어른이 되면 얼마나 커질까?" "글쎄, 짐작할 수도 없어. 마굿간 같은 개집을 짓지 않게 되기만 바랄 뿐이지." 제이슨은 단념한 듯이 어깨를 움츠린다. 캐더린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에메랄드 그린 빛 눈이 장난기 어리게 빛났다. "만약 그렇게 크게 자란다면 틀림없이 기네스 북에 실릴 거예요. 그 개를 기르는 주인의 이름도 기재될 거구요. 아마 자랑스럽겠지요?" "이놈을 먹여 살리려고 내가 얻어먹지 못하게 된다면, 그다지 자랑스럽다고 큰소리칠 형편도 못돼." 비꼬듯이 그렇게 말을 하고 제이슨은 캐더린의 팔을 덮고 있는 갈색 머리카락을 살며시 잡아당겼다.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으면서 부드럽게 감촉을 즐기고 있다가 멍해 있는 캐더린의 눈과 마주치자, 갑자기 스카이 블루의 눈동자에서 뜨거운 불길이 타올랐다. 어머!

캐더린은

몸을 움츠리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죠지아가 도와

주었다.

제이슨에게 귀여움을 받고 싶은 듯이 두 사람의 다리 사이에서 꿈틀거리면서 검은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슨은 한숨을 쉬더니 캐더린의 손을 잡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호수까지 걷지 않을래? 밖에서라면 이놈도 나비를 쫓기도 하면서 혼자 잘 놀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며 다리 밑에서 장난치며 덤비는 다 자란 강아지를 내려다보고 머리를 흔들어 보인다. 같이 가서는 안 될 줄을 알면서도 자기 손가락에 제이슨이 손가락을 꼭 끼자


이상하게 거부할 기력도 없어지고 거부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없어져 버렸다. 유리문 밖으로 나와서 얕은 데로 나란히 걷자 왠지 다리에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제이슨이 바른 라임향의 로션 냄새와 소나무 냄새가 서로 섞여서 캐더린의 코를 자극했다. 조약돌을 밟으며 호수를 향해서 언덕길로 내려갔다. 마치 항상 꿈에 그리던 여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모래밭으로 나와서 따가운 햇볕을 피해 나무 그늘에 둘이 앉았다. 제이슨은 긴 다리를 앞으로 뻗고, 캐더린은 무릎을 꿇어 안은 채 다치지 않은 무릎에다가 턱을 고였다. 죠지아가 열심히 땅을 파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잠시 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강아지가 코에 모래가 들어가서 재채기를 하는 것을 보고 제이슨은 하하하 웃었다. 긴장되었던 공기가 얼마간 풀리는 것을 느끼며 캐더린도 미소를 지었다.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요?" "특별히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 거야. 단지 저렇게 하고 있는 동안에 뭔가 나올 것을 기대하고 있는 거지. 인간도 역시 마찬가지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어머, 상당히 어려운 말씀을 하시네요. 그런 질문은 심리학자에게 맡기겠어요." "왜지?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깊이 파내려 가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니? 자기가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아?" 캐더린은 눈앞의 사나이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갬블러가 철학이나 심리학 이야기를 하다니! 그들은 한결같이 찰나적인 쾌락만 찾고 있을 것이다. 삶에 대해서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는 일이 있을까? 그런데 제이슨은 … 이 사람은 예외일까? 아니면 나를 속이려고 하는 것뿐일까. 만약 그렇다면 대단한 배우야. 상당히 진지한 눈을 하고 있어. 그러한 느낌이 얼굴에 나타났는지 제이슨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저었다. "어째서 그렇게 갬블러를 싫어하지? 키트, 네 아빠와 무슨 관계가 있는 모양이지?" "예." 분명하게 알아맞추어서 결국 사실대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아빠는 나와 엄마를 버렸어요. 3 살 때예요. 실컷 갬블을 하든지 여자의 뒤를 쫓아다니기 위해서죠. 아빠 같은 사람을 높이 평가할 이유가 없어요." "남자가 모두 다 너희 아빠 같다고 말할 수는 없어, 키트. 브라이스가 젊었을 때 무책임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나도 그렇다고는 할 수 없겠지?" "그러면 어떻게 해서 지금 같은 생활을 계속할 수가 있지요? 누구든지 1 년이 걸려도 벌 수 없는 그러한 돈을 하룻저녁에 다 잃고 말지도 모를 그런 위험한 게임을 어떻게 마음 편하게 할 수가 있어요? 그런 생활에 어떤 의미가 있죠? 사회에 대해서 어떤 공헌을 하고 있는 거죠?"


"너는 어떤 공헌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니, 키트? 어떤 식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지?" "아직 분명히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남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요. 전문가나 양호교사가 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훌륭하군. 어느 쪽도 네게 잘맞는 것 같아. 네 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지. 너는 그 냉정하고 조심스러운 태도 속에 따뜻하고 애정이 깊은 성질을 감춰 두고 있어. 그것을 풀어놔 주어야 해, 키트." 캐더린은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야기가 생각지도 않은 곳으로 갈 것 같아서 황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저… 저번에 당신의 이름을 들었을 때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같았었는데, 나중에 생각이 났어요. 제이슨 로그라고 하는 소설가가 있어요. 아세요? 설마 부친은 아니시겠죠?" "아니, 우리 아버지는 아니야. 그렇지만 같은 이름의 소설가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 한 번도 책을 사 본 적도 없지만. 너는 있니, 키트?" "그럼요. 있구말구요. 당신노 읽어봤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너무 훌륭해요.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실물 같아요. 문체는 간결하고 미끈해서, 머릿속이 혼란해서 허둥지둥 앞부분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없으니까요. 여러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읽어가는 동안에 모두들 근본적으로는 다 같다는 것을 알게 돼요. 모두 사랑을 찾고, 자기의 가치를 찾고 있어요. 너무나 훌륭한 책을 쓰시는 분이에요. 만약 읽어보시겠다면 내 책을 빌려 드리죠." "아아, 읽고 싶어지면 부탁할게. 입가에 약간 웃음이 떠오르는걸, 키트. 비평가가 되면 어때? 가끔은 좋다는 말만 써놓은 비평을 읽는 것도 기분전환이 되어서 좋을 듯한데. 비평가들은 모두 작품리 결점을 찾아내는 데에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은데, 로그 씨도 지금 키트가 한 비평을 듣는다면 같은 이야기를 할 거야." "정말 싫은 비평가가 많아요. 그렇지만 이것저것 칭찬만 늘어놓으면 아무도 읽지 않을 거예요. 틀림없이." "혹독한 비평이 책의 관계를 늘리는 일이 많은 것 같군." 완전히 편한 자세로 캐더린은 양 다리를 앞으로 뻗으면서 팔꿈치를 짚고 옆으로 누웠다. 저 … 당신은 무슨 책을 읽어요? 하고 제이슨에게 물으려고 할 때였다. 땅을 파고 있던 죠지아가 입에 작은 나뭇가지를 물고 둘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제이슨 앞에 버티고 서더니 등을 흔들며 가엾어 보이는 눈빛으로 같이 놀아 달라고 졸랐다. "할 수 없지." 제이슨은 단념한 듯이 미소를 짓고 일어서서 성큼성큼 물가까지 걸어갔다. "죠지아, 나뭇가지 이리 내."


개는 순하게 나뭇가지를 내놓았다. 놀랍게도 제이슨이 호수 쪽으로 힘껏 멀리 그 나무를 던지자, 죠지아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물 속으로 뛰어든다. 파란 수면에 떠 있는 것은 반짝반짝하는 노랑색 머리뿐, 잠시 후 나뭇가지를 물고 돌아와서는 제이슨에게 넘겨 주며 또 던져 달라고 지키고 앉아서 기다린다. 몇 번인가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캐더린은 개가 노는 데는 흥미가 없어졌다. 그것보다 힘있게 나뭇가지를 던질 때 솟아오르는 제이슨의 어깨 근육에 눈을 팔았다. 경박한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길고 튼튼한 다리로 눈이 빨려들어간다. 그러는 동안 제이슨은 흰 셔츠를 벗었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뛰고 있으니 더웠던 것이다. 태양에 탄 넓직한 잔등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그 잔등을 만지고 싶은 욕망이 솟아났다. 자신도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 눈길을 돌렸다. 내가 어떻게 되었지, 정말. 잠시 후 제이슨이 돌아왔다. 죠지아는 몸을 흔들면서 몸에 묻은 물을 털며 제이슨의 옆에서 뛰어온다. 캐더린의 바로 옆에 오자 갑자기 친밀하게 몸통을 부딪혀 왔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서 멍하니 있던 캐더린은 뒤로 넘어졌다. 머리를 심하게 부딪혀서 한순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정신이 아찔해서 눈을 감았다. 제이슨의 바로 옆에 와서 무릎을 꿇자, 캐더린은 웃으려고 했다. "키트, 괜찮겠어? 2~3 센티만 위로 밀렸더라면 바위에 머리를 부딪칠 뻔했어." "부딪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렇게 대답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손을 내밀어 제이슨의 얼굴에 떠오른 보조개를 떨리는 손가락으로 만졌다. 그의 눈빛이 타오르자, 캐더린은 자기의 들뜬 행동에 섬칫해서 얼른 손을 내렸다. "키트." 제이슨이 지친 목소리로 속삭인다. "안 돼요." 그러나 너무 늦었다. 다음 순간에 제이슨의 입술이 한쪽 손을 캐더린의 머리맡으로 돌리고 부드럽게 입맞추자 욕망의 불이 캐더린의 몸 깊은 곳에서 서서히 일어나 불타올랐다. 부드러운 입술을 음미하면서도 캐더린은 멍하고 뭐가 뭔지 모르게 되었다. 뜨거운 입맞춤에 온몸은 녹는 것 같은 따스함이 퍼져간다. "키트! 아름다워." 제이슨이 속삭이자, 캐더린은 생전 처음 해보는 입맞춤에 당황하면서도 진정한 여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키트, 괜찮아?"


속삭이듯이 제이슨이 말했다. 그 말에 캐더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던 공포가 살아났다. 이 사나이는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은 뒤 나에 대한 것을 잊어버릴지도 몰라. 이렇게 마음속에서 작은 외침이 일자 캐더린은 더 이상의 진전을 생각할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제이슨의 손의 움직임을 막았다. 반듯이 누워 있는 제이슨, 잠시 후 제이슨은 어깨에 손을 대고 캐더린을 자기 쪽으로 보게 했다. "갑자기 왜 그래. 걱정이 되니? 걱정하지 마. 네가 원치 않는 행동은 하지 않을 작정이니까." 캐더린은 꽉 입을 다물었다. "두 번 다시 이런 짓은 안할 거예요. 남자에게 이용당한다든가 하는 것은…" 갑자기 제이슨의 표정이 굳어지고 눈동자의 따스함도 사라졌다. "이용당하고 만다구? 키트, 내가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니? 단지 육체의 욕망만 만족시키려는 그런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니?" 책망하는 듯한 제이슨의 시선을 피해서 캐더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당신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인지 알고 있어요. 어떤 타입의 여자와 상종해 왔는지도. 만약 내가 나의 모든 것을 다 허락했다면 … 만약 당신이 나를 당신품 안에 안아 버렸다면 나도 그런 여자의 한 사람이 되어 버렸을 거예요. 그러나 제이슨, 우리들의 가치관은 전혀 틀려요. 좀더 일찍 그런 생각이 들었어야 했는데… 이렇게 되기 전에." "너는 마치 어린아이 같아, 키트." 제이슨은 거칠게 말하면서 일어서서 캐더린을 일으켰다. "어린아이다운 면이 있어도 그 반면에 어른스러운 면이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틀렸었어. 넌 단순한 겁쟁이 여자아이야. 내 상대로는 너무 어려. 가자, 집까지 데려다 줄게. 돌아가거든 자기 방에 자물쇠를 잠그고 숨어 있으면 좋을 거야." 그런 어린아이는 아니야! 제이슨의 가혹한 말에 뭐라고든지 대꾸해 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일어난 외침은 소리가 나질 않았다. 집 앞에서 제이슨은 거칠게 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멈춰 세웠다. 자욱하게 흙먼지가 일어났다. 캐더린은 사나운 얼굴을 하고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제이슨에게 힐끗 눈을 돌렸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서 죄의식이나 부끄럼 따위는 사라져 버렸다. "날보고 어린아이가 어째요? 참 말 잘하는군요. 자신이야말로 무책임한 사람들하고 턱없이 게임에 열중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훌륭한 어른이 하는 일이에요?" "말 조심해, 키트. 그렇지 않으면 내가 훌륭한 어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줄지도 몰라." "한번 해보시죠."


캐더린은 흐흥 하고 턱을 쳐들고 대답했지만 부랴부랴 차 밖으로 나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 앞의 계단으로 단숨에 달려올라갔다. 제이슨이 차를 회전시켜서 떠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비열한 사나이야." 투덜대면서 곧바로 전화를 걸어 제스를 불렀다. "내일밤 아빠와 둘이서 당신과 당신 동생을 초대하겠어요." "저 남자는 이 ���상에서 남자는 자기 하나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어디 두고 보라지." 5 캐더린은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다. 아빠와 제스는 시간이 없고, 결국 제스의 동생과 둘이서만 식사를 하게 되었다. 브래드 윗트니는 지나칠 정도의 겉치레 인사를 늘어놓았다. 아둔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남자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어서 외면상으로는 매우 매력적이었지만 속은 형편없었다. 다호에서도 손꼽히는 우아하고 세련된 레스토랑을 골랐는데 브레드는 감사하기는커녕 투덜투덜 군소리만 하고 있다. "여기는 너무 어두워. 이걸 어떻게 읽으라는 거지?" 메뉴를 얼굴 가까이에 들이대고서 불만을 늘어놓는다. 캐더린은 억지로 가냘픈 미소를 띠웠다. 나는 여기서도 잘 볼 수 있는데 하고 생각하며. "로맨틱한 분위기를 돋구기 위해서 램프와 촛대만 쓰고 있어요." "로맨딕이라구요? 불편이라고 해야 알맞겠는데… 이렇게 어두우면 눈에 좋지 않아요." 캐더린은 드레스의 끈을 만지작거리며 살며시 한숨을 쉬었다. 일부러 멋을 부려 입고 왔는데. 푹 파인 황녹색 저지의 드레스 가슴 언저리에는 맵시 있는 가슴이 약간 보인다. 그러나 이 여자다운 옷맵시도 레스토랑 휴계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브래드를 당황하게 만들었을 뿐. 브래드는 테이블로 다가온 웨이터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캐더린에게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요리에서 스프, 샐러드까지 마음대로 주문했다. "괜찮겠지?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야." 웨이터가 가버린 다음 물어봤자 무슨 소용이람. 독선적이고 거만한 사람. 그렇게 큰소리로 얘기해 주고 싶었지만 밤은 이제 막 시작인데 처음부터 어색해지면 곤란할 것 같았다. "네. 그래도 보리 쌀 스프는 싫어요. 콩이 들은 크림 스프가 더 좋은데." "보리 쌀이 더 몸에 좋아요. 과일은 그만두지. 흰 설탕은 이빨에 좋지 않으니." 엷은 갈색 머리를 북북 긁으면서 브래드는 말했다. "그리고 보니 당신은 치과의사군요."


캐더린은 빠른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제발 혼자서 제풀로 사업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하면 일일이 맞장구를 치거나 대답을 하지 않아도 되거든. 캐더린의 소망은 이루어졌다. 식사 도중 브래드는 혼자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치과의사가 되려고 학교에 들어간 날부터 제스를 만나러 다호 호수로 찾아오기 전날까지의 이야기를 숨쉴 틈도 없이 떠들어댔다. 캐더린은 음식을 먹으면서 적당히 고개만 끄덕여 주면 되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가 짜증스러운 밤이다. 그런데도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일찍 서둘러 일어서는 법은 모른다. 커피를 다 마시자 브래드는 춤을 신청했다. 댄스 플로어는 레스토랑의 한구석에 있었는데 그곳만은 환하게 밝았다. 캐더린은 내키지 않았지만 브래드의 팔에 안겨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는 캐더린의 가슴을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허리에서 감았던 팔에 힘을 주어 잡아당기려고 했다. 그렇게 닿지 않으려고 하다가 캐더린은 하마터면 상대의 발에 걸릴 뻔했다. 캐더린은 얼른 몸을 빼고 엷은 갈색 눈을 노려보았다. "그러지 마세요, 브래드." 상대의 뺨이 벌겋게 물들었다. 고소하다. "미안. 당신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만…" "오늘 저녁에 처음 만난 거잖아요. 게다가 식사만 하기로 약속한 거구요." "아아, 그렇지만 좀더 친해질 수도 있잖아. 그러면 제스도 기뻐할 테구." 브래드의 시선이 또 캐더린의 가슴에서 헤매기 시작했다. "어때요? 내일 낚시 같이 가지 않겠어?" 나는 사양하겠어. 마음속으로 표독하게 생각하고 캐더린은 머리를 저었다. "미안해요. 내일은 다른 예정이 있어서." "밤에는 어때?" "밤에는 예정이 있어요." 모레는 어때? 하고 물으면 큰일이라고 생각하고 캐더린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제스는 당신이 와주어서 기뻐하고 있겠죠? 멀리 떨어져 살고 있으면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죠." "이곳을 떠나 필라델피아로 오면 만나고 싶을 때에 아무 때라도 만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라고 입이 닳도록 말하고 있지만 제스는 도무지 들으려고도 안해. 계속해서 이런 곳에 있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당신의…" 캐더린이 조금도 듣지 않고 있는 것을 깨닫고 급히 말을 끊었다. "이것 봐, 듣고 있어?" 캐더린은 플로어의 반대쪽에 있는 커플을 눈이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슨이 날씬하고 균형잡힌 브론드 미인을 가까이 데리고 오는 것을 보자 가슴이 꽉 조여 오는 것 같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강렬한 질투가 날카롭게 가슴을 찌른다. 그러한 내가 한심하고 그들은 나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미안해요. 뭐라고 그랬는지 못 들었어요." 진심으로 브래드에게 사과의 말을 했다. "아아, 그런 것 같았어. 이대로 여기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백만 번이나 말했는데, 당신도 여기서 떠나는 게 좋을 것이라고 누나에게 말해 준 모양이지?" "네, 그렇지만 말하지 말 것을 그랬어요. 제스의 사생활에 대해서 주제넘게 참견할 만한 입장이 아닌걸요." "나는 틀려. 내 누나니까. 브라이스 데라코드가 누나를 이용하고 있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그런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니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브라이스는 형편없는 플레이보이잖아. 만약 술취한 마약 상습자라고 해도 그다지 놀랄 것은 없지." "잠깐만 브래드, 내가 브라이스의 딸이라는 것을 잊었어요? 물론 아빠에게도 결점은 있어요. 그렇지만 술주정뱅이도 아니고 약도 안 먹어요. 아빠가 싫은 사람이라고 함부로 헐뜯지 마세요. 제스가 사랑하고 있다면 아빠에게도 좋은 점이 있을 거예요." "이상하게도 쓸모없는 남자에게 걸려 드는 여자가 꽤 많은 것 같아. 브라이스에게 있어서 여자라는 것은 단지 따뜻한 몸뚱이에 불과해. 제스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어." "성인군자인 체하는 악당! 만난 지 두 시간도 못되었는데 내 몸에 손을 대려 드는 주제에 아빠에 대해서 그렇게 이야기할 만한 자격이 있어요? 적어도 아빠는 살짝살짝 숨기지는 않아요. 당신은 위선자예요. 제스가 당신의 설교에 넌덜머리를 내는 것도 당연해요." 빠른 말로 퍼부어 놓고 브래드의 팔을 거세게 뿌리친 뒤 캐더린은 드레스 자락을 펄럭이며 그 자리를 떠났다. 너무나 분해서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갑자기 뭔지 단단한 것에 쾅하고 부딪쳤다. 믿음직스러운 손이 캐더린의 팔을 꽉 잡았다.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얼굴을 들어보니 제이슨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춤추지 않을래, 키트?" 그렇게 중얼대고 제이슨은 놀라서 대답을 못하고 있는 캐더린의 허리에 왼팔을 돌리고 오른손을 꼭 잡고서 느릿느릿한 음악에 맞추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냉정해지려고 했으나 잘 안 되었다. 제이슨과 추는 것은 브래드하고는 아주 다르다. 어깨로 돌린 팔이 무명의 베스트 셔츠를 통해서 억센 근육에 닿았다. 왠지 한결 마음이 차분해졌다. 제이슨이 위험한 남자라는 것은 알고 있는데도… 무관심한 체하려고 했으나 옆에 있기만 해도 키스를 해주었을 때의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자신의 기분을 알아차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캐더린은 침착하게 미소를 띠우려고 했다.


"재미있니, 키트?" 제이슨의 물었다. 이상스러울만치 빛나는 눈초리로 캐더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이프렌드하고 싸움이라도 했니?" "저런 사람이 보이프렌드라구요? 천만에요. 브래드는 제스의 동생이에요. 말할 수 없이 짜증나는 사람." "그렇게 싫은 사람하고 어떻게 같이 나왔지?" 제이슨이 실눈으로 빤히 쳐다본다. "제스에게 소개받았어요. 처음 만나도 뜻이 잘 맞는 사람이 있지요. 그렇지만 이번에는 전혀예요. 제스는 좋아하지만 저 사람은 좋아질 것 같지가 않아요. 나한테 이상한 짓을 하면서 아빠보고 방탕한 사람이라고 하잖아요." "어째서 그 말에 화가 나지? 너야말로 너희 아빠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서, 제 입으로 말하는 것은 괜찮아도 남에게 비평 같은 것은 받고 싶지 않다, 그 말인가?" 캐더린은 잠시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네, 그럴지도 모르죠. 우습죠? 왜 그럴까요?" "왜 나한테 묻지? 이유는 더 잘 알고 있으면서." 갑자기 제이슨은 입술을 쭈그리며 옆에 있는 후렌치 도어 쪽으로 머리를 흔들어 보인다. "잠깐 발코니 쪽으로 안 나갈래?" 팔목을 잡힌 채 캐더린은 억지로 발코니로 나왔다. 제이슨의 얼굴이 더 한층 일그러진다. 아마 어제 같은 싸움을 계속할 생각인가 보다. 손을 흔들어 빼고 도망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만일 또 어제와 같은 심한 말을 하면 나는 분명히 울어 버릴 거야. 제이슨이 어린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왠지 너무 슬프다. 어제 저 녁은 그 생각으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지금 여기서 어제의 싸움을 계속할 마음은 없었다. 그러자면 길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어제 말인데요, 제이슨." 조심조심 손을 뻗쳐서 팔에 손을 대자, 제이슨의 몸이 굳어진다. 허둥지둥 손을 내렸다. 거절당한 것이 몹시 분해서 캐더린은 호수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거울과 같은 수면이 둥근 달빛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는 단지 어제 오후에 있었던 일을 사과하고 싶었던 거예요. 어제 차에서 내릴 때에 한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요." 제이슨은 캐더린의 허리에 손을 돌려서 자기 쪽을 보게 했다. 얌전하고 놀리는 듯한 웃음이 떠 있는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갑자기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찬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야?"


"아니오. 어째서 당신이 프로 갬블러노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그것은 아빠에 대한 기분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알았어." 제이슨이 다가왔다. 달빛을 등에 지고 있어서 얼굴이 잘 안 보인다. "나도 사과해. 나도 실은 정말로 널 어린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아니예요.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애들같이 행동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화가 난 것이에요." "아니, 그때 널보고 딴 여자 생각이 났을 뿐이야." "딴 여자라구요? 당신은… 결혼했나요?" 갑자기 전신의 힘이 쑥 빠져 버린다. "아니, 그냥 여자라고 말했어야 했을 것을 그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서 딴 여자라고 말해 버렸군. 넌 어딘가 혼동을 느끼게 하는 점이 있어." "내가 누구와 닮았다는 말이에요?" "아니, 그녀는 머리가 검고 키가 커. 외모는 전혀 닮은 데가 없어. 그런데 생각하는 것에 유연성이 없는 것이 똑같애. 아니, 너보다도 더 딱딱했을지도 모르지. 내가 하는 일에 찬성하진 않았어. 시간 낭비라고 말야. 나도 젊었기 때문에 그녀의 푸념을 들어주지 못했지. 그리고… 응… 피차 동의해서 헤어졌다는 것만 알아 둬. 우리는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둘 다 너무 젊었거든." "내가 그 여자처럼 젊고 미숙하다는 말이군요." "아니,. 아주 똑같다는 것은 아니야. 너는 달라질 수 있을 거야. 시간이 지나면 좀더 유연해지겠지. 그런데 그 여자는 변하지 않았어. 내가 아는 바로는 지금까지도 아직 그대로야. 다행스럽게도 안정되고 수입이 좋은 회계사와 결혼해서 덴바 교외에 있는 호화 주택에서 살고 있지. 아이는 둘쯤 있는 것 같아. 아마 지금이 최고로 행복할 거야." "내가 원하는 건 그런 생활이 아니예요. 정신적인 의지가 필요해요. 아마 아빠에게서 그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거예요." 제이슨은 슬며시 허리를 안았다. "나도 알게 되었어, 키트." 중얼거리며 암청색의 넥타이에 손을 대고 매듭을 풀었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밝은 쪽으로 얼굴을 돌리자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캐더린은 이마에 손을 대며 말했다. "제이슨, 열이 많아요. 왜 그러시죠? 왜 빨리 몸이 좋지 않다고 말해 주지 않았어요?" "아무렇지도 않아. 이봐, 나이팅게일 같은 얼굴 하지 마, 키트.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니까. 베트남에 있을 때에 열병에 걸렸었어. 가끔 재발하는데 이틀쯤 푹 쉬면 나아."


"베트남에 갔었다구요? 몰랐어요." "너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게 없잖아, 키트." 대답하면서 제이슨은 셔츠의 제일 윗단추를 풀렀다. "낮에 미리 의사를 불러 놓을 것을 그랬나 봐." "그래요. 그런데 왜 오늘 저녁에 이렇게 나온 거죠? 집에 누워 있어야 했을 것을, 바래다 드릴까요?" 제이슨은 머리를 젓고 캐더린의 등을 밀면서 아까 있던 댄스 플로어로 돌아왔다. "아니, 괜찮아. 너도 파트너가 있었지. 나도 있어. 쥬디를 아파트까지 데려다 주고 집에 가서 침대에 파고들어갈 만한 힘은 남아 있어." 쥬디란 그 날씬한 브론드를 말하는 거구나. 갑자기 질투의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어쩌면 쥬디가 제이슨의 집에 가서 밤을 새워 간호를 할지도 몰라. 제이슨은 싫다고는 하지 않겠지. 캐더린은 갑자기 꿈에서 깬 표정으로 말했다. "내일은 깨끗이 나았으면 좋겠어요." 간단하게 말하고 빠른 말로 안녕 한 마디를 하고는 브래드가 머리에서 김이 날 정도로 기다리고 있는 테이블로 돌아왔다. 사흘 후 캐더린은 제이슨의 베드룸이 있는 지붕 밑 같은 2 층으로 발소리를 죽여 올라갔다. 이집 2 층에는 큰 메인 베드룸과 작은 게스트용 베드룸이 있는데 양쪽 모두 아래층의 리빙룸을 내려다볼 수 있는 복도 쪽에 도어가 달려 있다. 한 손으로 쟁반이 기울지 않게 주의하면서 가만히 메인 베드룸의 문을 열었다. 제이슨이 짧은 가운을 입고 책장 앞에 서 있는 것을 본 순간, 캐더린은 얼굴을 찌푸렸다. "일어나다니, 누워 있어야 하잖아요. 의사가 이틀 동안은 꼼짝 말고 누워 있으라고 했는데. 빨리 가서 누워요.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내가 갖다 드릴게요." "그렇게 명령하는 품이 마치 어른 같아." 농담삼아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제이슨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뽐낼 수 있는 찬스가 생겨서 기쁜 모양이지? 키트, 지난 이틀 동안은 누워만 있었으니 심심했었겠지, 화내는 얼굴도 해보지 못하고." "천만에요. 이틀 동안 계속해서 자고 있는 당신을 보고 있던 것은 아니예요. 낮에는 가정부가 요리를 봐주었어요. 밤에는 교대하고요. 토요일 밤에 어떤가 궁금해서 와봤는데 참 잘 왔었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모르고 있었겠지만 일초도 혼자 내버려 둘 수 없는 상태였어요." 캐더린은 들고 있던 쟁반을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놓았다. 제이슨은 장난기 어린 웃음을 띠웠다. "그렇게 지쳐 있는 나를 보고도 유혹해 볼 생각은 들지 않았어?"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캐더린의 두 볼이 빨개지는 것을 보고 제이슨은 목 안에서 쿡쿡 웃었다. 캐더린은 콧등을 찡그리며 쟁반을 집어들었다. "혼자 먹겠어요, 아니면 먹여 들릴까요? 이 스프를…" 제이슨은 신음하며 천장을 쳐다보았다. "또 치킨 스프야? 이것 봐 키트, 뭐 좀 다른 것 없어? 이제 그 스프를 먹으면 날개가 돋아날 것 같애." "이것은 비프 콘소메예요. 방안을 걸어다닐 기운이 있다면 스프도 혼자서 먹을 수 있겠죠?" "샤워를 하고 면도를 했어. 너 때문에 몸단장을 한 그 성의를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농담하듯 말하며 제이슨은 접는 테이블의 다리를 하나 하나 펴자 갑자기 손을 뻗쳐서 캐더린의 손을 잡았다. "내가 먹는 동안 여기서 이야기 상대를 해주지 않으면 내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는 거야." 캐더린은 입술을 깨물고 주저했다. 지금까지는 여기에 있어도 아무 것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제이슨은 열이 높고 의식도 몽롱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회복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두 사람의 사이가 급속도로 가까워진 것이 느껴진다. 캐더린의 눈은 짧은 목욕 가운 밖으로 나와 있는 억세고 긴 다리로 쏠렸다. 분명히 가운 안에는 아무 것도 입지 않았을 거야. 지금 이 집에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여기는 제이슨의 침실이니 지금 곧 이 방을 나가는 것이 좋을 거야. 제이슨이 이렇게 재치있게 말을 할 때에는 더욱 위험해. "아래 내려가서 부엌을 치워야 돼요. 오늘은 가정부가 쉬는 날이라서…" "정리는 나중에 해도 돼. 앉아, 키트. " 점잖게 말하는 제이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김이 나고 있는 콘소메를 조심스럽게 떠먹으며 다시 재촉한다. "빨리 앉아. 한 번쯤은 순순히 내 말을 들어도 좋잖아. 이 맛없는 스프를 말 한 마디도 없이 혼자서 먹으라는 거야? 대체 언제쯤이면 제대로 된 것을 먹을 수 있지?" "거의 그렇게 될 거예요. 차게 식힌 것을 먹고 열을 내리라고 한 거예요." "그 반대가 아니었던가?" "그런가? 따뜻한 음식을 먹고 감기를 몰아내라는 것이었나?" 캐더린은 간신히 웃음을 띠우며 걸터앉았다. "대단한 간호원이야 넌. 그런데 이건 진심으로 묻는 말인데 의사가 언제쯤 일어날 수 있다고 했지?" "평열로 내려간 뒤에 24 시간 지나서래요."


엉거주춤한 채로 제이슨의 이마에 손을 대본다. "많이 내려간 것 같은데, 어디 체온계로 한 번 재봐야지. 미열이 있을지도 몰라요." 몸을 굽히면서 제이슨에게 웃어 보였을 때에 갑자기 스카이 블루의 눈동자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허둥지둥 의자에 앉으면서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황색 면 드레스의 주름을 고치는 척하고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내일은 아마 일어나게 될 거예요. 알겠죠? 그때까지는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해요." "내가 다루기 쉬운 환자는 아닐 거야. 미안해, 키트." 제이슨이 슬며시 웃었다. 캐더린은 아니예요라고 하는 듯이 손을 흔들어 보였으나 표정은 엄숙했다. "토요일에 여기 와서 높은 열로 헛소리를 하고 있는 당신을 보았을 때는 가족을 불러와야겠다고 마음먹었을 정도예요. 물론 어디다 연락해야 하는지도 몰랐지만요. 귀찮게 간섭할 생각은 아니지만, 가족이 있겠죠?" "양친과 누이동생 하나. 모두들 메인 주에 살고 있어. 그렇지만 연락할 수 없었던 게 오히려 잘 되었어. 어머니는 내가 병이 났다고 하면 굉장히 걱정을 하실 테니까. 이 병은 2~3 년에 한 번씩 재발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말야." "가족들과는 자주 만나요? 가까이하고 있어요?" "그렇게 철썩같이 붙어 있는 것은 아니야. 33 살난 사내로서 당연한 거 아냐? 왜 그런 것을 묻지, 키트?" "나는 호기심이 많은가 봐요. 그렇지만 당신은 너무 불가사의한 인물이에요. 다호의 사람 중에는 아무도 당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지요? 왜죠? 숨기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라도 있나요?" 제이슨이 큰소리로 웃자 캐더린의 양볼은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어느 때에 무슨 말을 할지, 무슨 행동을 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으니까요. 언제나 함께 옆에 있으면 허둥대게 되요." "허둥댄다구? 키트, 그런 느낌은 하나도 없는데." 제이슨은 캐더린이 빈 그릇이 놓여 있는 쟁반을 테이블 위에 놓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캐더린이 의자로 돌아가려고 하자 양손을 잡아 침대로 끌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난처해 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저는." 가슴이 요란스럽게 두근기린다. 제이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도무지 모르겠어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 이 사람은 갬블러인걸. 자기의 감정을 숨기는 것쯤은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침대가에 걸터앉은 채로 캐더린은 조마조마하게 몸을 뒤튼다. 스카이 블루의 눈동자 속에서 번쩍이는 묘한 빛은 견딜 수 없을 정도이다. 어떻게 된 거지? 마치 제이슨이 내 생활의 중심이 된 것처럼 머릿속에서 이 사람 생각이 떠나질 않으니. 잠들었을 때에도 꿈 속에 나타나고 눈을 떴을 때에도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제이슨뿐이었다. 이 사람은 나 같은 사람은 겨우 놀이 상대로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은데 난 왜 이렇게 정신없이 빠져 드는 것일까? 정말 어떻게 된 것이 아닐까? 단둘이서 침실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손을 뿌리치려 했다. 제이슨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이제 그만 가보겠어요." "아니, 조금만 더 이대로 있어 줘, 키트." 캐더린의 몸에 팔을 두르며 제이슨이 소근거렸다. "그렇지만 당신은 지금 환자예요. 그만 누워서 자는 편이 좋아요." 건장한 가슴을 밀어젖혔다. "자는 것보다 이대로 있는 게 더 좋아." 따뜻한 숨결이 다갈색 머리에 묶고 있는 리본을 풀더니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으면서 중얼댄다. "부드러운 머리털이구나. 마치 비단결 같아. 이렇게 옆에 언제까지나 앉아 있고 싶어." "제이슨." 캐더린은 한숨지었다. 제이슨의 손가락이 목덜미를 어루만진다. 한참을 그러다 갑자기 제이슨은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가며 말했다. "무시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돼. 자꾸만… 그러니 제발 돌아가 줘,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아. 지금 곧 침대에서 나가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네가 뭐라고 말하든 난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르고 말 거야." 캐더린은 당황해서 침대에서 내려와 미안한 얼굴로 흘끗 제이슨을 보았다. "키트." 제이슨은 피곤한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한 팔을 짚고 몸을 일으키자 침울한 얼굴로 캐더린을 응시했다. "돌아가 줘." "그렇지만 도와 줄 사람이 없으면…" "괜찮아. 혼자서 할 수 있어." 한숨을 쉬자 캐더린은 침대로 다가가서 제이슨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열이 있는 것 같아요." 제이슨은 어색한 웃음을 내며 캐더린의 손을 뿌리쳤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어떤 남자라도 다 그런 생각을 가질지 몰라."


"미안해요. 왜 이런 분위기를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 단지…" "젊은 탓이야, 키트. 너는 너무 젊고 너무 경험이 없어.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강요할 생각은 없어. 자, 이제 돌아가." 고개를 숙이고 복도로 나오기 전에 문득 멈춰섰다. "그렇지만 오늘밤에 또 오겠어요." "안 돼!" 소리지르듯이 말해 놓고 캐더린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자 후회한 듯이 덧붙였다. "오늘밤에는 오지 않는 게 좋아." "하지만 당신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어요. 어쨌든 8 시 경에 오겠어요." 캐더린은 고집세게 잘라 말하고 제이슨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방을 나왔다. 그러나 제이슨도 간단히 자기의 생각을 봐주는 남자는 아니었다. 그날 밤 저녁식사 후 캐더린이 마리와 설거지를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제이슨한테서였다. "오늘밤은 와주지 않아도 돼.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했으니까." 냉담한 목소리였다. "거짓말이죠? 나를 못 오게 하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오늘밤에는 집에 있어요, 키트. 브라이스도 그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어." "누구죠? 그게 정말이라면 이름 정도는 가르쳐 줄 수 있겠죠?" 전화 저쪽에서 제이슨이 주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긴 침묵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쥬디야, 오늘밤에 묵고 갈 거야." 마치 돌로 쾅 얻어맞은 듯이 쇼크가 엄습해 왔다. 그렇지만 이 쇼크를 제이슨에게 눈치채게 할 정도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쥬디라면 같이 레스토랑에 왔던 사람이군요. 그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마음에 꼭 들게 간호해 줄 거예요." "음, 그럴 거야." 빠른 어조로 작별인사를 하고 캐더린은 수화기를 내려놓은 채 그대로 잠자코 우뚝 서 있었다. "아가씨, 왜 그래요?" 마리가 부드럽게 물었다. "얼굴이 굉장히 새파래요. 뭔가 나쁜 소식이에요?" "아뇨, 예상하고 있었던 소식이에요." 캐더린은 애매하게 대답하고 도망치듯이 부엌을 나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지금 전화는 제이슨이 나 따위는 보잘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 아냐? 바보같은 캐더린!" 침대에 몸을 던지며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그렇기만 눈을 크게 뜨고 이를 갈며 참았다. 절대로 그 따위 남자 때문에 울지는 않아! 6 1 주일이 지났다. 캐더린은 웨이트리스 일에 끌려 나가 카지노에 와 있었다. 이번에는 오후 3 시부터 밤 늦게까지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아빠는 남자들과 같은 검은 공단의 제복을 입으라고 하셨다. 락커 룸의 거울 앞에서 제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캐더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것을 자기 딸에게 입히는 아빠가 어디 있을까? 목 둘레가 크게 파져서 가슴의 부푼 데가 온통 드러나 보인다. 게다가 후레아의 스커트 길이는 겨우 히프가 가려질 정도밖에 안 되니 이론적으로 말하면 비키니보다는 훨씬 노출도가 적지만 이 제복이 훨씬 천해 보였다. 그러나 길이 들지 않아서 그런 느낌이 드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은색 차가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아서일까. 제이슨에게는 이보다 더 꼴사나운 모습도 보여주었지만 어쩐지 이런 꼴을 보이는 것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제이슨이 다른 남자들과 같이 있는 장소에서 이런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싫었다. 다른 남자들이 보듯이 눈요기로 제이슨에게 보이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단지 육욕을 만족시키는 데 지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혼자서 마음먹고 있다고 상대방에게 통하는 것은 아니다. 깊이 한숨을 쉬면서 거울 속의 자신의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았다. 문득 생각이 나서 등 뒤로 늘어뜨렸던 머리를 앞으로 가져왔다. 이러는 편이 좀 나았다. 역시 작년에 머리를 자르지 않길 잘했다. 언제까지나 락커 룸에서 어물어물거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잠시 후 기분을 바꾸어 카지노로 향했다. 자기의 차림새를 걱정하면서 바로 가는 도중에 아빠가 불러세웠다. 늘 하는 신경질적인 미소를 띠우고 주의깊게 캐더린을 바라보고 나서 얼굴을 찌푸렸다. "근사한 머리임에는 틀림없지만 늘 그렇게 앞에다 늘어뜨리는 건 아니겠지, 키트?" 아빠는 캐더린의 머리를 들어서 등으로 돌렸다. 그 순간 좀처럼 표정이 변하지 않는 아빠가 움칫하는 듯한 얼굴을 했다. "모르고 있었어, 네가 이렇게… 게… 이렇게 l 년 동안에 성숙한 줄은." 거북한 듯이 캐더린의 눈을 보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완전히 어린아이 티를 벗었구나, 키트."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훑어보고는 다시 머리카락을 앞에다 늘어뜨려 놓았다.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몰라."


아빠가 지나가고 나자, 캐더린은 지금 있었던 일이 믿어지지 않는 기분으로 아빠의 등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드디어 아빠다운 기분을 조금씩은 갖기 시작한 것일까? 저번에는 제이슨과 사귀지 말라고 했으며, 지금은 또 호색한 같은 남자들 눈에 자기 딸을 내어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비로소 내게도 아빠가 있구나 하는 것이 실감났다. 가슴을 찌르는 듯한 감정에 압도되어서 눈물이 핑돌았다. 음료를 들고 객실로 들어서려는 찰나 캐더린의 눈에 제이슨이 들어왔다. 보통 때같이 냉정하고 침착했다. 차분한 목소리로, "당신과 같이 20 만을 걸고 그 위에 40 만을 더 걸지." 라고 말하면서 칩(카니노의 화폐일종)의 무더기를 테이블 중앙으로 밀어놓고 있었다. 옆의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테이블에 내던지며 퍼부었다. "졌다." 분한 듯이 말하고 칩을 주워 모으고 있는 제이슨의 손놀림을 바라보았다. 아마 큰 돈을 딴 것 같다. 그러나 제이슨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정열에 타오르던 스카이 블루의 눈동자는 차고 무표정했다. 그때 제이슨이 문득 얼굴을 들었다. 캐더린이 있는 것을 보더니 갑자기 그 눈빛이 번쩍번쩍 빛나고 멋대로 손을 흔들더니 일어섰다. "이번에는 포기야." 도어 옆에 서 있던 캐더린은 제이슨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무의식중에 뒷걸음질을 쳤다. 눈을 가늘게 뜨고 앞에 늘어뜨린 갈색의 머리카락에서부터 날씬한 발목 검은 공단 구두를 신은 발로 눈을 돌리면서 제이슨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저녁에는 그다지 어린아이같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미스 데라코드." 흰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것을 보고는 빙그레 웃으면서 덧붙었다. "아니, 그렇지도 않은가?" "보기 싫어. 마치 13 살난 아이 취급하듯이 해." "성적인 경험으로 말하면 넌 13 살이야." "당신을 만난 후부턴 달라졌어요. 퍽 많은 것을 배웠으니까요." "그렇지만 최종 테스트는 아직이지." 제이슨의 얼굴에는 비웃는 듯한 미소가 사라졌다. "그러니까 아직까지도 미경험이라는 것이 틀림없어. 그러니 나도 그렇게 알고 상대해야 한다는 말이야." "왜요? 나 같은 사람 내버려 두면 그만 아녜요? 1 주일 동안이나 모른 체해 놓은 주제에. 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떠나는 자는 날로날로 멀어만 간다고." 제이슨의 얼굴이 굳어졌다. 몸이 달 정도로 가까이 왔다.


"마음의 준비가 다 될 때까지는 최후의 테스트는 받고 싶지 않겠지? 키트, 그렇다면 만나지 않는 것이 서로 좋을 거야."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캐더린은 중얼거렸다. 마음속의 괴로움이 내 눈빛에 나타날지도 몰랐다. 그것을 감추듯이 긴 눈썹을 내리깔고 발끝을 내려다본 채 옆으로 비켜섰다. "실례해요. 음료를 돌려야 하니까." 음료를 다 돌리고 제이슨의 커피를 따르고 나자, 캐더린은 선뜻 방에서 나갔다. 그러나 카지노로 돌아가는 도중에 또 한 번 재수없게도 보기 싫은 상대를 만나고 말았다. 제이슨의 걸프랜드인 날씬하고 브론드인 쥬디는 빈 쟁반을 보더니 한쪽 손을 들더니 캐더린을 세우고 객실 도어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안의 사정은 좀 어때요? 제이슨이 또 이겼어요?" "네, 그런 것 같아요." 이 사람은 가까이서 보니 더 아름다운데, 그렇게 생각하자 우울해졌다. 색정이 가득한 갈색 눈동자, 단숨에 쏟아질 것 같은 멋진 브론드, 게다가 화려한 몸매를 하고 있었다. 마치 그리스의 여신 같았다. 별안간 제이슨이 나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쥬디 같은 여인을 마음대로 하고 있는데 원하는 것을 내주지도 못하는 어린아이 같은 처녀를 상대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어리석게 생각한 것이겠지. "그렇지만 내가 포커를 잘 모르니까 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제이슨은 웬만하면 지지 않아요. 당신은 그 사람 친구라면 그쯤은 알고 있겠죠? 지난번에 레스토랑에서 제이슨과 이야기하고 있던 것이 당신이었죠?" "제이슨하고는 단지 약간 아는 사이예요." 쥬디는 의미도 없이 히죽히죽 웃었다. "그렇겠군. 당신은 그 사람에 비해서 너무 젊으니까 말야." 그렇게 말하고 캐더린은 여기저기 훑어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칵테일 웨이트리스로서는 너무 어린 거 아냐? 보스에게 나이를 속이고 채용된 것 같아." 캐더린은 끈질기게 물고늘어지는 것에 싫증이 나서 진저리를 쳤다. 마음속으로 천천히 l0 까지 세고 난 뒤 입을 열었다. "그 보스가 우리 아빠예요. 휴가로 안 나오는 사람 대신 부탁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나이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어머, 당신이 브라이스의 따님이세요? 어쩌면 세상이 이렇게 좁은지 몰라. 브라이스와 나는 옛친구예요. 2 년 전에 댄서로 여기서 일할 수 있게 주선해 주었어요. 잠시 동안이지만 매우 가깝게 지냈던 적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 뭐 그냥 그런 사이였어요.


그런데 브라이스가 당신을 칵테일 웨이트리스 대리를 시키다니 어떻게 된 일이죠? 아직 18 세도 못되었을 텐데." "2l 살이에요." 불쑥 턱을 쳐들며 대답했다. "그래요? 아마 그 머리카락 때문에 어려 보이는지도 모르지요." 쥬디는 앞으로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경멸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짧게 자르든지 위로 올리든지 하면 훨씬 다르게 보일 텐데. 그리고 아이섀도우를 약간 칠하고 마스카라도 좀더 짙게 하면…" "충고해 주어서 고마워요. 바에서는 손이 모자라서 쩔쩔맬 거예요." "그럼 나도 가봐야지. 리허설이 시작되기 전에 게임을 봐주기로 제이슨과 약속했어요. 내가 봐주면 재수가 좋대요, 아가씨." 천만에요.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요, 라고 중얼거리고 발길을 돌리면서 마음속으로 독설을 퍼부었다. 재수가 좋다구요. 이번에는 그 반대가 되었으면 좋겠어. 계속 실패해서 무안꾼이 되어 버렸으면 좋겠어. 질투가 터져 나왔다. 쥬디에 대한 혐오감은 미움에 가까웠다. 마음속의 거센 증오로 제이슨에게 대들고 싶었으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에 대한 캐더린의 기분은 증오와는 너무나 먼 것이었다. 그날은 더 좋지 않은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2 시간쯤 후에 카지노 저편에서 부르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가수 웬디 미라가 미친 듯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때마침 음료를 날라다 주고 났으니 '나중에 봐요'라고 할 수도 없었다. "벌써 닷새 동안이나 쭉 당신을 찾고 있었어요." 웬디는 화가 난 듯이 말했다. "도무지 만나볼 수가 없잖아. 물에 빠져서 호수에 가라앉지 않았나 생각했었어요. 당신을 만나고 싶어서 매일 오후에는 밤 늦게까지 여기서 버티고 있었어요.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지?" "카지노에는 웬만하면 안 와요. 오늘은 웨이트리스가 감기가 들어서 3 사람이나 쉬었기 때문에 아빠의 부탁으로 대신 일을 봐주고 있는 중이에요." "저, 분명히 이곳을 경영하고 있는 사람이 당신 아빠랬지? 아니면 누구 다른 사람의 아빠였나?" 웬디는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있죠? 당신이 아빠에게 소개받고 싶어서 여기 서 있는 거 아녜요? 아빠는 이 호텔에서 카지노만 맡고 있어요." 그 말만 하고 살짝 그 자리를 빠져 나가려고 했다.


"가서 일을 봐야지." "잠깐만." 그렇게 소리치며 웬디는 캐더린의 팔을 아프도록 잡았다. "지금이 마침 좋아요. 아빠에게 소개해 주세요. 비행기 안에서 약속했죠? 만나게 해주겠다고." "그런 약속 한 일 없는데." "했어요." 웬디는 당당하게 거짓말을 해놓고 강렬한 오렌지색 꽃무늬의 선드레스를 매만졌다. "당신을 만나러 시이다이즈에 오면 아빠에게 소개해 주겠다고 했잖아요." "지금은 안 돼요, 웬디. 미안해요. 아빠는 바빠서 아무도 만날 수 없어요." 웬디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웬디에게는 정말로 울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부탁이야, 캐더린. 어느 호텔로 가보아도 모집하지 않는다고 거절당했어요. 노래는 들어보지도 않아요. 당신한테까지 거절당하면 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꼭 부탁해요. 그냥 소개만 해주면 돼요, 응? 한평생 은혜는 잊지 않을게." 캐더린은 한숨지었다. 가엾다고는 생각했으나 아빠에게 소개해 줄 맘은 생기지 않았다. "알겠어, 웬디. 가수든 댄서든 여기서 고용하기는 굉장히 어려워. 워낙 재능이 많은 사람들이 오디션에 모여들거든." "내게도 재능이 있어요. 정말이에요. 들어만 준다면…" "당신의 재능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 아니예요. 그렇지만 여기 라운지에는 2 군데 다 가수의 빈 자리가 없고, 유명한 사람의 쇼가 있을 때에는 모두들 전속 그룹을 데리고 와요.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이런 도박장이 있는 휴양지에서 일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예요. 로스엔젤레스나 어디 딴 데 가서 좁은 에이젠트를 찾아보면 어때요?" "아무 데도 못 가요. 앞으로 이틀 치의 호텔비밖에 가진 게 없어요." 웬디는 난처해졌다. 돌아갈 비행기 삯 정도는 남겨 놓았어야지. 하지만 이제와서 말해 봤자 별 수 없었다. 웬디의 사정은 딱하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그때였다. "잠깐 쉬고 있는 거냐, 키트?" 지나가던 아빠가 말을 던져왔다. 웬디가 살짝 꼬는 듯한 미소를 띠웠다. 아빠는 검은 머리와 좀 작긴 하지만 보기좋은 몸매를 한 차례 훑어보고 값을 매기듯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말했다.


"만약 쉬는 중이라면 사무실로 오지 않을래? 기왕이면 천천히 앉아서 쉬는 게 낫지. 친구도 함께 데리고 와." 좋던 싫던 간에 웬디와 같이 아빠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우와! 잘 됐어. 그이가 아빠지?" 웬디는 춤이라도 출 것 같은 발걸음으로 브라이스의 뒤를 따라갔다. "아빠 맞지? 그럴 거야. 당신하고 눈이 꼭 닮았어. 조금도 바빠 보이질 않는걸. 잘 좀 소개해 줘요." 캐더린은 내키지 않는 대답을 했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만약 싫다고 하면 여기서 한 차례 소동이 벌어질 것이 틀림없었다. 아빠가 도어를 열자, 제스가 생긋 웃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 무책임한 웬디와 아빠가 친해진다면 제스는 또 상처를 입게 된다. 모두 나 때문이야.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담. 할 수 있었다면 웬디를 소개하기 전에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허나 이제는 너무 늦었다. 아빠와 웬디는 벌써 매우 흥미있는 듯한 눈초리를 주고받았다. 제스의 얼굴에는 웃음 대신 체념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랬으므로 브라이스가 재촉하였을 때, 캐더린은 망설이지 않고 웬디를 소개했다. 웬디가 생긋 웃으며 반지를 여러 개 낀 손을 내밀자, 아빠는 그 손을 잡은 채로 다시 한번 육감적인 몸뚱이를 둘러보고는 항상 하듯이 알 수 없는 미소를 띠웠다. "보석을 좋아하는가 보지, 미스 미라?" "여자들은 다 그래요, 미스터 데라코드. 깨끗한 것을 좋아해요." "브라이스라고 불러요."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면서 말했다. "다호 호수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지?" "전 가수예요.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에는 고급 클럽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비행기 안에서 들은 이야기하고는 아주 다르다. "지금은 휴가 중인데 다호 호수에는 잠깐 구경하러 왔어요. 그런데 좋은 곳이어서 카시, 아니 키트가 비행기 안에서 큰 호텔의 누군가를 소개시켜 주겠다는 말이 생각이 나서 왔어요." 옆에서 캐더린이 불만스럽게 기침을 해도 브라이스는 모르는 체하고 있었다. 웬디의 말을 믿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아마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아도 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아아, 당신에게 일자리를 줄 만한 사람을 몇 알고 있어요. 어때? 내 사무실에서 이야기해 보지 않겠어요?"


웬디는 조금 전과 같이 유혹하는 미소를 띠우고 브라이스에게 다가갔다. 아빠의 과묵하고 고뇌에 찬 그리고 강렬한 개성은 이제까지 셀 수 없을 만큼 젊은 여자를 사로 잡아잡는데 웬디의 마음도 사로잡았나 보다. 캐더린에게 인사를 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브라이스의 팔짱을 끼고 사무실 쪽으로 사라졌다. 도어가 닫히는 순간 캐더린은 홱 돌아서서 제스를 바라보았다. "믿어 줘요. 나는 소개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 사람이야말로 아무 데서도 빈 자리를 얻지 못해 여기 숨어서 나를 기다린 모양이에요. 어떻게 해서든지 돌려보내려고 하고 있을 때에 마침 아빠가 지나시다가…" "괜찮아요, 키트. 그렇게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그 처녀가 아니었더라도 마찬가지예요. 비슷한 사람하고 그 모양이 될 것은 뻔한 노릇이니까요." "어떻게 참고 지내죠?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걸 봐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물론 괴로워요. 처음 때보다는 좀 수월해졌지만… 익숙해졌는지도 몰라요." 제스는 슬픈 듯이 책상 한구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슨과 만나기 전 같으면 어째서 브라이스와 헤어져서 나가지 않느냐고 물어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캐더린은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해 버릴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아빠가 제스를 괴롭히는 것을 눈앞에 보면서도 아빠와 비슷한 남자에게 이끌리고 있다니 나는 어쩌면 이렇게도 못난 바보일까. "l0 년 전에 훨씬 더 의지가 될 수 있는 사람과 사랑에 빠졌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지만 별 도리가 없어. 안 되겠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좋아지게 되는걸." 제스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으며 캐더린은 창가로 다가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높이 솟은 소나무와 크게 퍼진 히말라야 삼목의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숨을 쉬었다. 마침 그 순간 예리한 통증이 가슴을 찌른다. 주차장에 세워 놓은 차 옆에서 제이슨이 쥬디와 같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브론드 머리가 키를 높여서 제이슨에게 매어달리듯이 키스를 하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허둥지둥 창에서 눈을 돌리고 꽉 입술을 깨물었다. "저… 제스, 어쩐지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못되는 것 같아요." "알아요, 키트. 나도 역시 몇 차례나 그런 생각이 났는지 모르니까요." 7 다음날 아침 캐더린은 보통 때보다 늦게 눈을 떴다. 간신히 침대에서 내려와서 흰 면 나이트 가운을 벗어던졌다. 냉수로 샤워를 하는 크림색의 소매없는 선드레스를 입었다. 드레스는 볕에 그을은 피부에 잘 어울렸다.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목덜미에서 잡아맸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핑크색 볼 연지를 살짝 칠하고 끝이 볕에 타서 금색이 된 갈색 눈썹에 마스카라를 칠했다.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보니 눈 아래가 거무칙칙하게


보였다. 만약 마리가 본다면 밤 늦게까지 책을 읽은 줄 알 것이다. 실은 침대에 눕자마자 금방 잠이 들어 버렸지만 2 시간쯤 지나자 잠이 깨서 그대로 밤이 샐 때까지 제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일. 시간 낭비야. 그 사람은 분명히 쥬디와 함께 있을 텐데 뭘. 내 생각을 하느라고 밤을 새거나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캐더린은 거울 속의 자기를 보고 타일렀다. 쥬디. 생각만 해도 질투가 가슴속에서 꿈틀거린다. 제이슨은 쇼걸과 교제하고 있지만 깊은 관계는 아닌 거 같애, 라고 아빠는 말했지만 그후 사정이 달라진 거겠지. 두 사람은 요즘 자주 만나는 것 같다. 물론 제이슨이 매일 저녁을 혼자 지내는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냥 노는 거라면 용서할 수 있어. 그렇지만 쥬디하고는 그냥 즐기는 정도가 아닌 것 같아. 병이 나을 때 나를 거절하고 쥬디에게 부탁했을 정도니까. 나보다도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렇게 생각하자 굉장히 괴로웠다. 처음부터 제이슨이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는 남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설령 깊은 관계가 되더라도 오래까지는 못 갈 것이라고 … 그래서 제이슨을 피해왔지만 결국은 그 굳은 결의도 나 스스로가 던져 버렸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지. 이런 괴로움을 당하는 것도 자업자득이야. 정말 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제이슨에게도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침대를 정리하고 난 뒤 커피를 마시러 부엌으로 내려갔다. 거기서는 벌써 아빠가 앉아서 조반을 들고 있었다. 캐더린이 들어가자 읽고 있던 신문을 옆에 놓으며, "오늘 아침은 늦었구나. 몸이 불편하니?" 커피 잔을 손에 들고 맞은편에 앉자마자 말을 걸었다. "아니요, 아프지 않아요." 어제 저녁에 웬디를 만났을 때의 아빠의 태도를 생각하니 또다시 화가 치밀어올랐다. 내려간 눈썹 사이로 가만히 눈치를 엿보았다. 사실 오늘 아침 아빠가 여기 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 웬디라면 만난 지 2, 3 시간도 채 못되어서 틀림없이 좋아서 아빠를 호텔 방으로 맞아들였을 텐데. 그렇지만 집에 있는 것을 보면 모든 것이 기우였던 것 같다. 캐더린의 기분이 약간 누그러졌다. 웬디의 깜박거리는 눈썹과 응석부리는 듯 도발적인 미소에 속아넘어간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오늘 아침 일찍 쇼핑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니?" 브라이스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고급 모로코 가죽 지갑을 꺼내서 지���를 몇 장 꺼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이것으로 사거라. 물론 통학복 값은 이것과는 별도로 보내줄 터이니, 보석상에 가서 뭐든지 맘에 드는 것을 사렴."


퉁명스러운 미소를 띠우며 돈을 내놓았다. 캐더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내밀어서 받아들었다. "어머, 200 달러나? 이렇게 많이는 필요없어요. 옷값은 따로 주시잖아요." "뭐든지 사거라. 금 목걸이는 어때? 자, 언제나 옷을 살 때는 시간이 걸리니까 슬슬 나가보렴." "그렇군요." 고맙다는 뜻으로 생긋 웃고 돈을 집어서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도어가 열렸다. 마리인가 보다고 생각하고 말을 걸려고 뒤를 돌아다본 순간 캐더린은 깜짝 놀랐다. 웬디! 브라이스의 집이라면 노크도 없이 돌아다닐 권리라도 있다는

듯이

웬디

미라가

어슬렁어슬렁

들어왔다.

캐더린은

쳐다보지도

않고

브라이스에게로 괴로운 미소를 보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다아링?" 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엎드려서 볼에 키스했다. "오늘 아침 3 시까지 나를 놓아 주지 않았는데 어쩌면 이렇게 끄떡도 안하세요? 나는 그로기 상태예요. 보통 때 같으면 점심 시간까지 자고 있을 텐데. 시이다이즈의 예능계 사람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했죠? 그래서 당신 차로 함께 가기고 했어요." 캐더린은 얼음장 같은 눈초리로 아빠를 흘겨보았다. 입을 꽉 다물고 일어서서 테이블 위에 내프킨을 내던지고 웬디 쪽은 보지도 않은 채 발소리를 거칠게 내며 부엌을 나가 버렸다. 복도로 나와서 캐더린은 양손을 꽉 힘있게 쥐었다. 아빠가 웬디 미라 같은, 남자를 속여서 돈을 뜯어내는 그런 여자와 관계를 맺다니!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해. 옛날부터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이제 두 번 다시는 아빠 얼굴을 보기도 싫었다.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가서 쾅하고 문을 닫았다. 나무 샌들을 발로 걷어차며 벗으니 한 짝이 벽장에 맞아서 큰소리를 냈다. 조금은 가슴이 후련했으나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 투덜투덜거리고 있을 때에 갑자기 도어가 열렸다. 홱 돌아다보니 아빠가 들어와 있었다. "키트, 내 말 좀 들어봐. 실은…"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요." "아니야, 키트. 들어봐. 모든 것을 다 설명할게." 가까이 다가와서 딸의 머리에 손을 대려고 내밀었으나 캐더린이 살짝 피하자 한숨을 쉬었다. "설명은

필요없어요. 나는 장님이

알았어요."

아닌걸요.

지금

본 것으로

모든

것을

분명히


"부탁이다, 좀 냉정해질 수 없겠니?" 작은 소리로 말하고 캐더린의 힐책하는 듯한 눈초리를 피해서 방 안을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나는 너의 아빠인 동시에 남자이기도 해, 키트… 너도 이젠 알고 있을 거야. 남자에게는 그… 생리적인 욕구라는 것이 있다." 속이 상하고 얼굴이 붉어진 정도가 아니었다. 아주 망칙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빠른 말로 한바탕 퍼부었다. "네, 알고말고요. 그 생리적인 욕구를 왜 하필이면 그런 여자와 채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죠? 어째서 아무하고나 잠자리를 같이하는 그런 여자를 상대로 삼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브라이스는 발을 멈추고 희미한 눈으로 캐더린을 바라보았다. "네게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어. 그 아이가 이렇게 아침 일찍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어. 네가 나가기 전에 그 아이가 온 것은 미안하다." "왜요? 오늘 아침에 내가 웬디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여자와의 관계는 정당한 관계가 될 것이었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몰래몰래 만나는 것이 더 즐거우니까 남의 눈을 피해서 만난다는 말씀이에요? 그런 사람과 교제한다는 자체가 이해되지 않아요. 그 사람은 아빠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에요." "잘 알고 있어, 나 역시 바보는 아니니까." "그러면 어째서 웬디 같은 여자하고만 상종하고 있는 거죠? 왜죠? 제스같이 훌륭한 여자가…" "대체 제스가 이 이야기하고 무슨 관계가 있지? 왜 이런 때에 그 여자의 이름을 꺼내는 거냐?" "왜 그러는지 모르신다면 나도 가르쳐 드릴 생각이 없어요. 그러나 이것만은 가르쳐 주세요. 어째서 웬디 같은 여자가 아빠를 이용하게 잠자코 내버려 두시는 거죠?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은 아빠의 주선으로 일자리를 얻자는 것뿐이에요." "그런 것은 알고 있다. 그 사람이 내게 열중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 게다가 그렇게 되면 곤란해. 알겠니, 키트? 나나 그 사람이나 다 같은 어른이야. 그리고 서로가 상대를 필요로 하는 것을 갖고 있어." "그러면 웬디를 이대로 계속 상대할 생각이시군요. 그 사람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마음이 끌리다니." 캐더린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알았어요. 그렇지만 이것만은 기억해 두세요. 만약 웬디하고 계속 만난다면 나하고는 만날 수 없을 거예요. 난 이 집을 나가 버릴 거예요."


브라이스는 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키트, 잊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네 아비이고 넌 내 자식이다. 아무리 이제는 어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날보고 이래라 저래라 간섭은 말아 주었음 좋겠다." 캐더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빠가 저렇게 감정적이 된 것도 내게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도 처음이다. 마치 … 부친과 같은 말투가 아닌가. 18 년 동안이나 내버려 두고 이제와서 부친노릇을 하려고 하다니 너무 늦다. 확실히 이 사람이 내 아빠이기는 해도 저런 매춘부 같은 여자와 계속 상종한다면 여기 있으라고 명령을 한대도 들을 수 없다. 어깨를 젖히고 매서운 눈으로 아빠를 노려보았다. "좋아요. 그 사람을 상대하던 말던 이젠 한지붕 밑에 사는 게 싫어졌어요." "캐더린, 그만해 둬. 자, 물건이나 사러 갔다와. 볼셰를 타고 갔다오렴." 브라이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이건 너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야." "그래요?" 비웃듯이 반문하고 조금 전에 받은 돈을 드레스 주머니에서 꺼 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물건이나 사러 가라고 돈을 주고는 양심의 아픔을 달래보려는 생각이시겠지만 그렇게는 안 될 거예요. 자, 받으세요. 이 돈은 돌려 드리겠어요.

웬디에게나 주세요. 통학복도

필요없어요. 당신이

사주는

것을

입고

다니느니 차라리 벌거벗고 교정을 걸어다니는 것이 낫겠어요." "쓸데없는 소리 말아." 브라이스는 캐더린이 내놓은 돈을 받으려고 하지도 않고 등을 돌린 채 밖으로 나갔다. 아빠가 나가자 캐더린은 손에 들고 있던 돈을 마음껏 바닥에 내팽개쳤다. 아빠는 그렇게 단정치 못한 아이하고 상대하고 있는 주제에 내게는 부친행세를 하려고 하다니! 좋아, 내가 한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보여줄 테야. 두고 보세요! 그날은 하루종일 호수에서 지냈다. 모래바닥에 앉아서 어떻게 하면 아빠의 마음을 돌려 놓을 수가 있을까 곰곰 생각하고, 피곤해지면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마음껏 헤엄을 쳤다.

처음에는

이대로 볼티모어로

돌아갈까도

생각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빠를

반성시키고 생활태도를 고치게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좀더 화끈하게 아빠에게 충격을 주어서 깊이 생각하도록 만드는 방법은 없을까? 어떻게 그런 생활습관을 고치는 좋은 수단이 없을까? "참, 그렇지."


4 시쯤이나 되어서야 겨우 방법이 떠올랐다. 이것으로 아빠에게 복수를 해야겠다. 아빠가 하고 있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하면 돼. 아무도 없는 모래밭에서 캐더린은 활기차게 뛰기 시작했다. 타월과 재킷을 급히 집어들고 집으로 달려갔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선반 위에 두었던 수트케이스를 꺼내서 갈아입을 옷을 챙겨 넣었다. 화장품을 비닐백에 넣고 생각이 나서 구두 한 켤레를 넣었을 때에 마리가 도어를 노크하면서 들어왔다. "뭘하는 거죠? 설마 여기를 나가려는 것은 아니겠죠?" 수트케이스를 바라보고 마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맞아, 나가려는 거야. 왜 그러는지 알고 있겠지?" "그래요. 그 건달 처녀를 이리로 불러들여서 그러는 거죠? 아빠에게 화가 난 거죠? 그 기분도 나도 알아요. 나도 역시 미스터 브라이스가 그런 여자들과 상종하는 것이 싫어요. 딸이 와 있는데 새 여자를 주워 오다니 너무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분명히 아가씨도 어른이 되었으니 이해해 주리라고 생각한 게 틀림없어요." "알기는 뭘 알아. 아무리 어른이 되더라도 절대로 모를 거야." "그렇지만 집으로 피해 나간다고 무슨 소용이 있죠?" "돌아가는 게 아니야." 수트케이스를 꽝 닫고 캐더런은 생긋 웃으면서 가정부를 쳐다보았다. "잘 들어봐. 나는 남자하고 같이 지내기로 했어. 아빠를 반성시킬 생각으로." 마리는 너무 놀라서 숨이 막히는 듯이 얼굴이 새빨개졌다. 겨우 숨을 돌리게 되자 노여움에 떨면서 캐더린을 쏘아보았다. 너무 살이 쪄서 2 층이 된 턱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짓은 하지 말아요, 키트. 남자하고 지내다니 절대로 안 돼요." "말려도 소용없어요, 마리! 벌써 마음을 굳혔어. 만일 아빠가 이 집에 웬디를 끌어들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면 내가 남자하고 지낸다는 것이 뭐가 어때? 난 벌써 21 살이야. 아빠는 말릴 수 없어. 마리 당신도." "그렇지만 아니, 그런 바보짓을 하면 못써요. 당신 같은 착한 아이가 할 짓이 아니예요. 대체 어떻게 해서 남자를 찾아내죠?" "아니, 구태여 찾아낼 필요도 없어. 누구하고 살 것인지는 이미 정해 놓았으니까." "누구죠? 설마? 로그인가 하는 갬블러는 아니겠죠? 일전에 열이 몹시 나서 소동을 피우던 그 사람은…" "맞아! 그 사람이야. 그렇지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 집에는 손님용 베드룸이 있으니까. 아빠가 웬디와 상대하는 것을 그만두고 생각을 바꾸면 다시 돌아올 거야, 마리."


"로그 같은 갬블러가 잠자코 방을 빌려 준다구요? 제정신이에요? 키트, 그 사람은 남자예요." "그 사람은 마리가 생각하듯이 그런 부랑자는 아니야. 사정 이야기를 하면 꼭 협력해 줄 거야. 그 대신 그… 알죠? 그런 짓은 안해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 남자가 아가씨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 말이에요. 병이 났을 때 걱정스러워하던 모습은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만일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함께 지낸다는 건 더욱더 안 될 말이에요. 단지 2, 3 일 동안이라도 그 사람이 그럴려고만 들면…" "그 사람을 사랑 따위는 하고 있지 않아요. 대체 어째서 그렇게 바보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지?" "허영으로 나이를 먹고 있는 게 아니예요. 아가씨 얼굴에 다 씌어 있어요. 내게 거짓말을 한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하는 거 아니예요, 키트?" "알았어요, 마리. 설령 제이슨을 사랑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결코 내 기분을 눈치채지 못하게 할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 게다가 그는 나를 어린아이로 취급하는걸." 마리는 차근차근 볕에 그을린 캐더린의 다리에서부터 풍만한 가슴으로 눈을 돌렸다. "제이슨 로그라는 남자가 바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지만." 마리의 얼굴에 비웃는 듯한 웃음이 떠올랐다. "만약 당신을 어린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바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제이슨은 바보가 아니야. 상당히 지성적인 사람이야." 침대에서 수트케이스를 내리고 마리에게 키스를 한 뒤 도어로 향했다. "내 걱정은 하지 말아. 틀림없이 잘할 거야. 그렇지만 아버지에게는 비밀로 해줘. 조금은 걱정을 시켜 드려야지. 제이슨과 함께 있는 것을 알면 웬디의 일을 단념하시겠지." "그렇다고만은 말할 수 없어요. 미스터 브라이스는 완고하니까요. 그렇게 간단하게 그 사람에게 이기리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요." "어쨌든 이길 때까지 싸우겠어. 웬디가 드나드는 이 집에 있는 것은 죽어도 싫으니까." 캐더린은 야무지게 말하고 도어 손잡이에 손을 댔으나 잠시 주저했다. "웬디는 나갔어? 아래로 다가가 얼굴을 마주치는 건 질색이야." "예, 벌써 갔을 거예요. 호텔로 가서 짐을 챙기겠다고 말을 했어요. 참 뻔뻔스럽기도 하지." "좋을 대로 하라지. 웃고 있는 것도 지금뿐이야. 2, 3 일 후면 돌아올게요, 마리."


"부탁이에요. 조심하셔야 해요. 갬블러 중에는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를 보고 싱긋 웃어 놓고 쏘아 버리는 매력적인 남자도 있으니까. 로그라는 남자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서 나중에 후회할 짓은 하면 안 돼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제이슨이 달콤한 말을 꺼내면 거절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도 들었으나 거북한 생각은 머리 구석으로 밀어놓고 이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야 하고 자신에게 말해 주었다. 다행히 캐더린이 도착했을 때에는 제이슨도 가정부도 아무도 없었다. 건물 뒤쪽에 있는 출입구로 가보니 죠지아가 다리를 쭉 뻗고 나무 그늘에서 자고 있었다. 휘파람을 불자 슬며시 머리를 들고 느릿느릿 일어났다. 그러더니 갑자기 잠에서 깬 듯 넓은 고갯길을 뛰어내려왔다. "적어도 너만은 기뻐해 주는구나. 네 주인이 돌아왔을 때에도 이렇게 기뻐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장난을 걸어오는 죠지아를 데리고 출입구 옆에 있는 양지 화분 속에서 열쇠를 꺼냈다. 제이슨이 무릎의 상처를 치료해 주던 날 집에 보내기 전에 여기다가 열쇠를 넣는 것을 보고 숨기는 장소를 알았다. 제이슨이 열이 올라서 누워 있을 때에 몇 번이나 이 열쇠를 써봐서 지금은 아무 허락도 없이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도 별로 이상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수트케이스를 2 층의 작은 침실에 들여다 놓고 안의 것을 적당히 화장대 안에 챙겨 넣고 침대를 쳐다보았다. 오늘밤부터 얼마 동안 여기서 자지 않으면 안 된다. 잘 잘 수 있을까? 제이슨이 옆방에 있는 것을 생각하면 잠이 잘 올 것 같지 않았다. 7 시까지 기다렸으나 제이슨이 돌아오지 않자 혼자서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다. 제이슨이 돌아올 때까지 별로 할 일이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갖고 온 책을 읽던 데부터 계속해서 읽기로 했다. 제이슨과 모래사장에서 만났을 때 잊고 왔던 그 연애소설이었다. 읽기 시작하자 금방 냉혹한 영국 귀족의 저택에서 복잡하게 얽힌 수수께끼 같은 스토리에 빨려들고

말았다.

이야기는

점점 더

재미있어가고

캐더린의

가슴은

두근거리면서

읽어내려갔다. ll 시쯤에 간신히 책을 놓고 죠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개는 어두운 곳에서 서성거렸으나 캐더린은 현관 램프 불빛 밑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천둥 소리가 들리자 죠지아가 뛰어왔다. 하늘을 보니 초승달에 구름이 걸려 있었다. 높은 소나무 가지에서 바람소리가 나면서 하늘에서 번갯불이 반짝이자 죠지아는 겁이 나서 발 밑으로 기어들었다.


황급히 집 안으로 들어가자 조금 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유리창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뚝뚝뚝뚝 시끄럽게 소리를 냈다. 죠지아는 불안한 듯이 꿈틀거리고 있다. 캐더린은 소파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서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마침 주인공이 지붕 밑의 어두운 방에 자기 이외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장면에서 기분나쁘게 집안의 불이 꺼져 버렸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번쩍하고 켜지더니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죠지아는 무서워서 쿵쿵 콧소리를 내면서 소파 위로 올라와서 떨고 있는 몸뚱이를 바싹 캐더린에게 붙여온다. 무서워하는 죠지아를 달래고 캐더린은 소파 위에 옆으로 누워서 읽던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으나 하품이 나기 시작했다. 잠깐만 눈을 붙일 생각으로 있던 자리에 손가락을 끼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캐더린은 정신이 조금 들자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겨 주고 있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눈을 떠서 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번쩍 잠이 깼다. "제이슨!"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제이슨은 팔을 허리에 돌리면서 바로 그 옆에 앉았다. "왜 여기 와 있지, 키트? 무슨 일이 있었어?" "아니요. 그… 그, 그래요." 갈팡질팡하며 캐더린은 손톱을 씹었다. 이렇게 가까이 앉아 있으면 제이슨의 체온이 느껴지고 아프터 셰이브 로션의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조금 몸을 비키면서 부끄러운 듯이 미소를 지으며 아빠와 웬디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충 이야기를 마쳤으나 제이슨은 잠자코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왜 내가 이런 기분이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아빠와 웬디의 이야기는 당신에게는 그다지 놀랄 만한 이야기도 아닐 테니까요." 캐더린은 힘없이 늘어졌다. "너는 아직도 나를 브라이스와 같은 사람으로 여기고 있니, 키트?" 제이슨은 한쪽으로 손으로 머리를 긁어올렸다. "그 기분은 잘 알겠어. 그렇지만 아버지가 사는 방식은 네가 원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해야 할 때인 것 같애." "그것은 인정하겠어요. 그렇지만 웬디 같은 여자와 바보같은 관계를 계속하는 한 나는 아빠와는 같이 살 수 없어. 아빠도 그것은 받아들여야 해요." "그래서 여기 온 거야?" 케더린은 고개즐 끄덕였다.


"부탁이 있어요. 여기 좀 있게 해주세요. 당신께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할게요. 웬디가 오늘 아침에 마치 제 집인 양 부엌에 들어왔을 때 얼마나 쇼크를 먹었는지 몰라요. 그런 것을 아빠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제이슨은 의심스러운 듯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네가 말하는 것에는 모순이 많아, 키트. 나를 브라이스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지? 여자를 섹스의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는 사람으로 말야. 그런데 어떻게 여기서 니와 함께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내가 무섭지 않니?" 짐작하고 있던 질문이었다. "네, 그래요. 믿어서는 안 돼요." 얼굴빛이 빨개지면서 제이슨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해서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만 당신은 전에 나 같은 어린아이는 흥미없다고 말했잖아요." "아니, 흥미는 충분히 있어." 중얼거리는 제이슨의 목소리는 굵고 번민하듯 쉰 목소리였다. 캐더린을 잡아당기면서 드러난 잔등을 긴 손가락으로 간지럽혔다. 그리고 손가락이 턱 끝에서부터 천천히 입술로 기어왔다. 그러다가 볼에다 입맞추어 주면서 말했다. "너의 앳된 점이 무척 매력이 있어." 제이슨은 손가락으로 어깨 근처를 쓸어주면서 말을 계속했다. "심장이 이렇게 뛰잖니. 내가 무섭니, 키트?" "네… 에… 아니, 가끔 무서울 때도 있어요." 캐더린은 입술을 깨물고 어쩔줄 모르겠다는 듯이 제이슨을 쳐다보았다. "가령 지금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몰라요…" "나는 언제나 네가 필요해, 키트." 제이슨은 부끄러움도 없이 털어놓았다. "너는 정말 매력적이야. 나는 너와 서로 사랑하고 싶어. 그렇지만 아빠에게 복수하고 싶은 생각에서라면 그건 싫어. 둘이서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그때처럼 네 자신이 나를 필요하다고 마음먹었을 때야." 제이슨의 베드룸에서 느꼈던 감각이 되살아나서 캐더린은 멍해지면서 넓은 가슴에 몸을 맡겼다. 그러나 제이슨은 슬쩍 몸을 돌리고 크림색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일어섰다. "오늘 저녁에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염려 말아, 키트. 벌써 2 시야. 넌 무척 피로해 보이는군. 그만 자기로 하자. 물론 각각 다른 방에서 말야." 놀리는 듯한 태도에 캐더린은 얼굴이 확 붉어졌으나 안심하는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면 이대로 여기 있어도 되는 거죠?"


"가능하면 집에 돌아가는 것이 좋겠지만, 피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니까 말야." "아빠가 웬디를 만나는 것을 그만둘 때까지 안 돌아가겠어요. 귀찮다면 호텔에 데려다 주시겠어요?" "아니! 여기 있어도 좋아, 키트. 그렇지만 조금 전에 말한 것을 기억해 둬. 만약 네가 요전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면 나는 말야…" 제이슨은 말을 뚝 끊었다. 끝까지 들을 필요도 없었다. 캐더린은 그 다음 계속되는 이야기를 자세히 알고 있었다. "일어나, 키트." 제이슨이 하나로 묶어 놓은 캐더린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면서 귓가에서 불렀다. 캐더린은 번쩍 눈을 뜨고 다소 겁이 난 듯한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제이슨은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일어나 키트, 브라이스가 아래에 와 있어. 널 만나고 싶대." 캐더린은 벌떡 일어났다. 제이슨의 눈이 천천히 흰 가운의 많이 파인 목언저리로 쏠렸다. 얼른 침대 카바를 턱 밑까지 끌어올렸다. "화난 거 같아요?" "하룻밤 외박한 것을 기뻐하는 것같이 보이지는 않아." 제이슨은 씁쓸하게 웃고 침대가에서 일어섰다. "내게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아. 마치 모두 다 내가 너를 충동질했다는 얼굴로 나를 노려보잖아." "미안해요. 이런 일에 말려들게 해서. 그렇지만…" "우리들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고 브라이스에게 알리고 싶은 거지?" 제이슨은 캐더린의 말을 받아 이으며 어깨를 움찔했다. "문을 열었을 때의 브라이스의 얼굴 표정으로 봐서 그것을 무척 염려하고 있는 것 같았어. 내가 생각했던 대로 잘 될지 몰라. 그 반대가 될 수도 있겠지. 브라이스는 쉽게 남의 손에 놀아나는 타입의 사람이 아니니까 말야. 오히려 오기로 웬디하고 계속 교제할지도 몰라." "마리도 그런 말을 했어요." 캐더린은 생각에 잠긴 듯이 말하고 한숨을 쉬며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부딪쳐 보지 않으면 몰라요, 안 그래요? 협력해 주시겠어요? 특별히 연인인 체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여기 있어도 아무 상관없다는 얼굴을 해줄 수 없어요?" "할 수 없지 뭐. 이제와서 손을 뗄 수도 없으니까." 제이슨은 원망스러운 듯이 웃었다.


"문을 열었을 때의 브라이스의 표정을 보여주고 싶었어. 순간 철썩하고 한대 맞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으니까." 꼴깍 침을 삼키고 제이슨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짧은 파안지의 가운을 걸치고 있는 모습은 정말로 정력이 왕성한 연인 같은 느낌이었다. 캐더린은 시선을 가슴의 턱이 보이는 가운의 목언저리에서 늠름한 다리로 옮겼다. 갑자기 맥이 빨라지고 얼굴이 붉어진다. "옷을 입어야지, 키트." 제이슨은 짧게 말하고 도어를 향했다. "빨리 내려오지 않으면 아마 브라이스가 뛰어올라올 거니까." 제이슨이 나간 뒤 캐더린은 몸을 떨면서 한숨을 쉬었다. 몸에 열이 있다. 이래야 분명히 아빠의 걱정을 부채질하는 연기를 할 수 있어. 커버를 집어던지고 내려와서 반대쪽 벽에 큰 거울에 전신을 비춰 보았다. 꿈꾸듯이 빛나는 눈농자, 약간 벌어진 입술, 제이슨에 대한 기분을 다분히 나타내고 있다. 그렇지만 이 나이트 가운은 초라하다. 흰 면 가운은 전히 몸매가 비치지 않는다. 게다가 가슴에 장미꽃 봉우리가 수놓아져 있어서 더욱 어린애같이 보인다. 정열적인 하룻밤을 보내고 난 것같이 보이고 싶다. 잠깐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발 끝으로 서서 방을 나가서 제이슨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는 일어난 채 그대로였으나 어디에도 파자마는 보이기 않았다. 모르긴 해도 벌거벗고 자는 모양이다. 그 이상의 상상은 그만두고 옷장을 뒤져서 비단의 감색 가운을 꺼내서 그것으로 바꿔 입었다. 지나치게 긴 소매를 손목까지 걷고서 벨트를 느슨하게 매고 거울 앞에 섰다. 지나치게 큰 가운을 걸친 캐더린의 모습은 생각했던 대로였다. 이 꼴을 본다면 아무리 까딱하지 않는 아빠라 하더라도 쇼크를 받을 것이다. 머리를 풀고 손가락으로 둘레를 흐트러지게 하자 겨우 내려갈 준비가 되었다. 내려가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이곳에 있을 수만은 없다. 이를 꼬옥 깨물고 맨발로 될 수 있는 대로 살며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이슨도 아빠도 모르고 있다. 그대로 아래층까지 다 내려가서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숨을 가라앉혔다. "안녕?" 말을 걸면서 두 사람 쪽을 걸어갔다. 아빠가 앗 하는 숨을 들이쉬는 것을 무시한 채 제이슨의 옆으로 가서 섰다. 그에게 졸린 듯이 웃는 얼굴을 보이고 어색하지 않게 어깨에 손을 얹고 나서 천천히 아빠와 마주앉았다.


아빠는 금방이라도 캐더린을 무릎 위에 얹어 놓고 엉덩이를 때릴 듯한 얼굴로 온몸을 굳힌 채 무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갑자기 등을 돌려대고 도망쳐서 어딘가에 숨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간신히 억누르면서 잠자코 아빠를 바라보았다. "그런 꼴로 내려오다니 대체 어쩔 작정이냐?" 의자 팔걸이에 놓고 있던 손을 꽉 쥐는 것이 보였다. "도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어찌할 셈이냐, 캐더린?" "뭐… 별로." 가능한 한 순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동안 제이슨과 함께 지내기로 했을 뿐이에요. 웬디가 드나드는 집에는 있기 싫어요. 마리한테서 듣지 못했나요!" 브라이스는 무서운 얼굴로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마리는 어제 저녁 밤새도록 내게 연락하려 했었으나 마침 내가 카지노에 없었어. 오늘 아침 3 시쯤에 집에 들어가 보니 피곤해서 잠이 들어 있었어. 그러나 일어나자마자 내게 네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 이유도 말이야. 이렇게 화가 난 일은 처음이다. 빨리 짐을 챙겨라, 캐더린. 이대로 집에 데리고 가겠다." "아뇨." 되도록 냉정한 말소리로 대답을 하고 캐더린은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제이슨에게 흘깃 눈을 돌렸다. 스카이 블루의 눈동자는 이 자리를 즐기는 듯한 눈빛이 번쩍였다. 문득 그 눈빛에 용기를 얻어서 캐더린은 턱을 치켜들고 아빠에게 시선을 돌렸다. "말했잖아요. 웬디와의 관계를 그만두지 않는 한 집에는 돌아가지 않겠어요." "그렇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이 따위로 내가 너 하라는 대로 할 줄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웬디와의 관계를 그만둘 줄 아느냐? 네게서 이래라 저래라 간섭받을 까닭이 없어. 난 니 애비다. 그것을 모른다면 법에 따라 처분하겠다!" 캐더린은 금방이라도 꺾일 듯하면서 아빠를 흘겨보았다. 자기로서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 줄 알지만, 실은 그 정반대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제이슨 로그는 작은 악마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지만 캐더린은 그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꽉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도 귀녀운 아이 같은 얼굴을 카바할 만한 박력은 없었다. 상당히 힘없이 보였다. 브라이스도 그것을 확실히 눈치챈 듯 제이슨에게로 돌아앉아 버렸다. "우리들은 그다지 친한 교제는 없었지만, 로그 자네가 키트 같은 어린애의 약점을 이용해 먹으리라고는 생각 못했어. 난 자네를 잘못 안 거 같애."


"키트는 어젯밤 여기 왔을 때 그대로예요, 브라이스." 브라이스 데라코드는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캐더린은 안달이 나서 날카로운 눈초리를 던졌다. "그렇지만 브라이스, 키트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예요. 21 살이면 훌륭한 어른이에요.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그녀에게 끌리고 있어요. 그래서 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고는 장담 못해요. 여기 함께 살고 있으면 더욱 그렇구요." 브라이스는 무서운 얼굴로 캐더린을 보고 말했다. "네게 실망했다, 키트. 너는 불장난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거야. 너와 제이슨은 나이 차가 너무 많아. 충분히 정신차리지 않으면 결국에 가서는 너만 상처를 입게 되겠다. 너를 네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려고 이런 위험한 짓을 저지르다니 이런 바보같은 짓이 어디 있겠니. 너는 착한 아이니까 어서 2 층에 가서 짐을 챙겨 갖고 오너라. 같이 집으로 가자." "우리가 나이 차가 많다면 아빠와 웬디는 어떻죠? 훨씬 더 많이 차이나잖아요. 웬디와의 관계를 그만두지 않는 한 여기서 제이슨과 같이 지낼 거예요." "내가 네 생각대로 될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착각이다. 오늘은 이대로 돌아가겠다만 정신이 들거든 언제든지 말해라. 데리러 올 테니까." 무섭게 독설을 퍼붓고 브라이스는 일어섰다. 제이슨을 위협하듯이 흘겨보고 브라이스는 발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나가 버렸다. 캐더린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일어선 제이슨을 겁에 질려 쳐다보았다. "아빠가 마음을 바꿀 때까지 좀 시간이 걸릴 거 같아요. 당신께는 괴로움을 끼쳐 드려서 할 말이 없지만 가능한 한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할게요… 아까는 참 고마웠어요. 내게 끌렸다고 말해 주어서 아빠도 꼭 믿을 것 같아요."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했을 뿐이야. 나하고 있어서 안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잘못이야. 어제 저녁에 한 말을 잊지 마. 난 너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제이슨은 타는 듯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러니 처녀대로 있고 싶다면 그런 자극적인 차림새로 돌아다니지 않는 것이 좋아. 난 성인군자가 아니야, 보통 남자야. 유혹을 물리치는 데도 한계가 있어. 조심해, 알겠니?" 갑자기 제이슨이 호랑이 흉내를 냈다. "아―웅." ���자기 캐더린은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몸을 홱 돌려서 계단으로 뛰어올라갔다. 방으로 뛰어들어가서 문을 닫고 숨을 헐떡이면서 거울 앞에 섰다. 캐더린은 제이슨이 하는 말뜻을 잘 알고 있었다.


8 l 주일 뒤의 수요일 아침, 캐더린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면서 복도로 나왔다. 휴가 때에도 대개 8 시 경이면 눈을 떴는데 완전히 잠을 깨려면 잠시 시간이 걸린다. 오늘 아침에도 그렇다. 문 앞에 다가서서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몸을 쭉 뒤로 젖히고 기지개를 켰다. 갑자기 등 뒤에 시선을 느껴 당황하며 돌아다보니 제이슨이 자기 베드룸 앞에 서 있었다. 얼른 손을 내리고 녹색 티셔츠와 아랫단을 잡아당긴다. 그것이 오히려 가슴 있는 부분을 강조하는 모습이 되어 버렸다. 제이슨이 약간 얼굴을 굳힌 채 시선을 아래쪽으로 옮기자, 캐더린은 셔츠의 아랫단을 놓고서 어색하게 반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굿모닝!" 아직 완전히 잠에서 깨지 않아서인지 목소리가 쉰 듯했다. 제이슨은 고개만 끄덕이고 아직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캐더린은 부끄러운 듯 웃으려고 했다. 카키색 바지와 감색 니트 셔츠를 입은 제이슨은 늘 정력적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발이 앞으로 나아갔다. "저… 오늘은 메리가 쉬는 날이니까 제가 아침 준비를 할까요?" "아니, 난 벌써 1 시간 전에 아침식사를 끝냈어." "정말? 당신에게 요리하는 솜씨가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군요." "그렇게 놀란 것도 없어. 내가 카드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줄로 알았나?" 안타깝다는 말투였다. "어머, 그런 생각으로 한 말이 아니예요." 제이슨을 납득시키려고 몇 걸음 앞으로 나아왔다. "남자들은 대개 부엌 일은 질색이잖아요. 그래서 당신도 그럴 거라고… 아빠는 물 끊이는 것도 못해요." "캐더린, 또 그래, 키트. 아직도 내가 브라이스와 꼭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어." 큰 걸음으로 나와서 제이슨은 캐더린의 팔을 잡았다. 평소와는 다른 동작이었으므로 꽤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주겠니? 나와 네 아빠는 닮은 데라곤 한 군데도 없어. 왜 그것을 모르지? 나는 나야. 브라이스와는 전혀 다른 인간이란 말야." 캐더린은 볕에 그을린 핸섬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제이슨의 진지한 태도에 가늘게 뜬 눈 속에서 더듬는 듯한 눈앞에 멈추었다. 타는 입술을 혀 끝으로 핥고 머리를 흔들며 눈을 돌렸다. 이 이상의 제이슨의 예리한 시선을 견딜 수가 없다. "당신이 아빠와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머릿속에서는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지금까지 쭉…"


"갬블러는 모두들 다같이 경박하고 제멋대로인 데다가 전혀 신용할 수 없다고 믿고 있는 거지?" 제이슨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캐더린을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면서 양손으로 목을 감고 엄지 손가락으로 얼굴을 들어올렸다. "내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하려면 대체 얼마나 부드럽게 행동해야 하는 거지, 키트?"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제이슨의 입술에 캐더린의 입술을 덮쳤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캐더튼은 제이슨에게 더 가까이 접근해 갔다. 손 끝으로 목덜미를 어루만지면서 손을 아래로 내려서 허리에 감고 캐더린의 몸을 잡아당긴다. "너는 지금 내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니, 키트?" 목쉰 소리로 중얼댄다. 따스한 숨결이 귀를 간지럽힌다. "네가 필요해. 그러나 될 수 있는 한 부드럽게 대하려고 하고 있어. 그게 얼마나 힘드는 일인지 알지 못하겠니? 얼마간 내 노력을 인정해 주어도 좋잖아." 대답 대신 캐더린은 몸을 가까이 다가갔다. 제이슨의 말소리는 달콤한 밀어처럼 들렸다. 이대로 계속해서 모든 것은 다 말리고 싶어. 그러나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캐더린은

살며시

몸을 떼어냈다. 제이슨은

양손을

허리로

돌리고

이마에

살며시

키스한다. "키트, 어떻게 하면 좋지? 난 이렇게 네가 필요한데… 그런데 아무리 부드럽게 대해도 넌 떨고 있어. 왜 그러지? 내 사람이 되는 것이 무섭니?"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동자로 바라볼 때에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캐더린은 조심조심 대답했다. "그렇지만 제이슨, 나는…" "너는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그녀와 닮은 것은 아니었어, 키트. 데니스는 나와 깊은 관계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어. 다만 내가 하는 일을 미워했을 뿐이야, 확실하고 안정된 수입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고 투덜댔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같이 로맨틱한 어린아이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어. 네가 원하는 것은 경제적인 안정이 아니라 정신적인 의지라고 했지?" "그래요." "그리고 내가 브라이스 같은 갬블러이기 때문에 같이 있어도 확실하게 안심할 수 없다고 처음부터 정해 놓고 있는 거야?" 제이슨은 허리에 감았던 손을 풀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긴 손가락으로 머리를 치켜올리며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는 제이슨의 얼굴은 얼마나 핸섬하고 매력적인가. 키트라고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에서 살아난다. 이대로 그 넓은 가슴에 몸을 내던시고 안아 달라고 속삭이고 싶어. 그러나 자기방어 본능이 세다.


아무리 해도 아빠가 엄마에게 한 행동이 잊혀지지를 않으니 어떻게 하지? 제이슨을 사랑하고 존경하기 시작했으나 아빠나 갬블러에 대한 오랫동안의 불신감은 아직도 뿌리깊게 남아 있다. 캐더린은 머리를 숙이고 혼란스러움과 처량한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나갔다 올게, 키트. 돌아오는 것이 늦을지도 몰라." 갑자기 제이슨은 퉁명스럽게 말하고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나도 나중에 나가겠어요. 제스가 점심식사에 초대했어요." "그럼 나중에." 마치 빨리 이 자리를 떠나고 싶다는 듯이 제이슨은 계단을 달려내려갔다. "네, 다녀오세요."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대고 캐더린은 가슴이 꺼질 듯한 마음으로 현관을 나가는 제이슨의 뒷모습을 전송했다. 도어를 닫고 무겁게 한숨을 쉬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냉장고를 열고 안에 있는 것을 살펴보았으나 아무 것도 꺼내지 않고 그냥 닫아 버렸다. 마음속에 뻥 뚫린 구멍은 음식물로는 메꿔지지 않았다. 제스는 어디 있을까? 캐더린은 옷매무새를 만지면서 어두컴컴한 이태리 요리 레스토랑을 둘러보았다. 겨우 제일 안쪽에 앉아 있는 제스를 발견했다. 파트너가 있는 남자들이 자탄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을 무시하며 걸어가서 맞은편에 앉았다. 제스는 이상하다는 듯이 미소를 띠웠다. "피로해요? 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니예요, 더위 탓인가 봐요. 마리가 장보러 가는 길에 여기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더운 햇볕이 계속 내리쪼여서 그런 모양이에요." "어머, 혼났겠네." 제스는 한 손을 들어서 웨이터를 불렀다. 두 사람의 주문을 적고 웨이터가 가버리자 제스가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어때요? 재미있게 지내고 있어요?" 캐더린은 애매하게 어깨를 움칫해 보였다. 왠지 오늘의 제스는 남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은 기분이 아닌 것 같았다. 제이슨 로그 덕분에 기대에 부풀어서 흥분된 매일을 보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늘 그런대로 지내고 있어요." "그래?" 건성으로 대답하고 제스는 가만히 아무 말도 없었다. 웨이터가 음식을 갖다 놓고 간 뒤에도 여전히 말이 없었다. 햄을 얇게 만 것과 얼린 메론은 참 맛있었는데, 제스는 그냥


기계적으로 입에 갖다 댈 뿐이었다. 캐더린도 오늘 아침에 제이슨과 있었던 일 때문에 그다지 식욕이 나질 않았다. 메인 디쉬가 나올 때쯤에는 두 사람이 다 완전히 식욕을 잃고 있었다. 보통 때의 제스와 달랐다. 원래 살색이 흰 빛이었는데 오늘은 약간 푸르렇다. 입언저리가 떨리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언제나 반짝이고 광채가 있던 갈색 눈동자에 전혀 생기가 없었다. 캐더린은 토마토와 버섯 소스가 곁들인 고기가 들은 파스타를 바라보고 한숨을 쉬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내가 왜 한숨을 쉬었는지 이야기를 하면 당신 고민도 털어놓겠어요, 제스?" "별로 고민이랄 것까지도… 어쨌든 좋아요." 캐더린을 쳐다보는 갈색 눈동자에 갑자기 눈물이 고였다. "나는 다호에서 떠나려고 생각해요. 이제야 겨우 결심을 했어요. 벌써 브라이스에 대한 것을 단념했어야 했었는데,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은 언제까지나 바라고 있는 것을 이젠 그만두기로 했어요. 키트, 여기서 떠날 거예요." 캐더린은 멍하니 제스를 바라보았다. 아빠의 곁을 떠나라고 충고는 했었지만 제스가 정말로 그 말대로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결점 같은 것은 볼 수도 없을 만큼 아빠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 적어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었다. 분명히 최근에 와서 제스의 생각에 변화를 일으킬 만한 사건이 생긴 것이 틀림없다. 제스를 이렇게 속상하게 하다니 대체 아빠가 무슨 짓을 했을까? 이제와서 다호 호수에서 떠나려고 결심했을 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제스?" 캐더린의 눈에서는 눈물이 핑 돌았다. "여기 도착하던 날 아빠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때에는 떠난다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했잖아요. 대체 아빠가 무슨 일을 저질렀죠?" 제스는 씁슬하게 웃으며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저 웬디라고 하는 그 미친 계집 때문이에요. 처음에는 그 아이도 이제까지 브라이스가 상대해 왔던 그런 아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곧 헤어질 거라구요. 그런데 내가 잘못 본 것 같아요. 브라이스는 여태까지 지내온 것보다도 더욱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웬디는 그의 집 에서 마치 자기 집처럼 지내고 있는 거죠? 당신이 있는데도." "난 아빠집에서 나왔어요. 당신도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아빠가 그 여자와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곧장 집을 나왔어요."


"어머, 브라이스는 당신이 집을 나갔다는 말은 전혀 안했어요. 몰랐어요. 아직도 그 집에 있는 줄로 알고 있었어요. 지금은 어디 있죠? 어느 호텔?" "호텔에 있지 않아요." 할 수 없이 그렇게 대답하고 상황 설명을 했다. 제스가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캐더린은 또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설교를 들을 것 같았다. "키트, 그런 바보같은 소리는 지금까지 들어보지도 못했어요. 만약 당신이 한 일로 브라이스가 웬디와의 관계를 끝냈다고 하더라도 제이슨 로그 같은 남자하고 함께 지내다니 너무 위험한 일이에요. 당신이 로그를 만나고 있다는 것도 금시초문이에요. 앞으로 함께 지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요. 무슨 남자가 그래!" "우리는 퍽 가까워졌어요." 얼굴을 붉히면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소근소근 말했다. "게다가 웬디의 일로 집을 나갔을 때에 내가 자청해서 찾아가서 일방적으로 무리하게 부탁을 해서 거기에 있게 되었어요. 그 다음날에도 나가 달라고 하는 것을 그냥 그대로 눌러 있는 거예요. 아빠를 각성시키려는 내 기분을 이해해 주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아무런 보증도 없이 잠자는 장소를 제공해 준다는 거예요? 이리 와요, 키트. 지금부터라도 일평생 후회하는 일 없도록 주의하세요." "걱정없어요. 염려 마세요." 캐더린은 그렇게 말하고 이제 제 이야기는 끝났다는 듯이 한 손을 저었다. "저, 아까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기만 왜 그렇게 웬디의 일로 이성을 잃고 있지요, 제스? 아빠가 그 사람과 좀 오래 계속된다고…" "그것뿐만이 아니예요. 브라이스는 그 여자를 지금까지의 누구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요. 당신이 집을 나갔는데도 아직도 계속 만나고 있다면 그건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심한 거예요. 웬디와 손을 끊고 당신을 데리고 들어가려고 하지 않다니, 대체 브라이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단지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마리는 아빠가 몹시 완고하다고 해요. 나 역시 웬디 일로 상당히 고집을 부리고 있지만, 어쩌면 아마도 그런 건지도 몰라요." "글쎄요. 어쨌든 당신을 제이슨 로그 같은 남자한테 맡겨 둘 만큼 그렇게 브라이스가 고집이 세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로그가 어떤 남자인지도 모르면서 단지 자식이 하자는 대로 하기가 싫어서 웬디와 계속 만나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필시 브라이스는 그 아이에게 빠져 버린 거예요. 웬디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지 난 잘 모르겠지만…" "그러다가 정신차릴 거예요. 좀더 기다리면 꼭 끊을 거예요, 제스."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요,

캐더린.

브라이스는

지금까지

소유욕이

강한 여자는

싫어했어요. 그러나 웬디가 꼭 달라붙어서 어디를 가든지 따라다녀도 귀찮은 얼굴 하나 안해요. 돈도 조를 때마다 주고 있어요. 그것도 자주." "그래도 자기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만큼 바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어느 호텔에서든지 노래하게 된다면 웬디의 태도가 금방 변할 거예요. 분명해요. 그것은 아빠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브라이스가 그 아이를 가수로 써줄 데를 찾고 있는지 그것도 수상해요. 노래가 형편없다고 말들 하던데, 달갑지 않게도 웬디 자신도 자기에게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아요. 가수로 대성할 수 없다면 돈이라도 많은 남자와 결혼을 해서 편한 생활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는 것 같아요." "결국…" "만일

프로포즈를

받는다면 당당히

브라이스의

아내가

되어서

들어앉으려고

하는

속셈이죠, 키트. 아빠는 부자예요. 갬블러로서 성공했고 그것을 밑천으로 해서 상당히 많은 돈을 벌었어요. 게다가 지금의 카지노에서도 수입의 몇 할인가가 들어오고." "하지만 웬디에게 프로포즈 같은 것을 할 까닭이 없어요." 캐더린은 갑자기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자기를 납득시키려는 듯이 이어서 말했다. "그래요. 그런 일을 할 까닭이 없어요. 웬디같이 바보스럽고 천박한 여자가 어디가 좋다고." "키트, 당신은 말예요. 정말 어린애 같아요." "웬디는 브라이스와 함께 있을 때에는 충분히 이것저것을 생각하면서 연기를 하는 거예요. 브라이스의 눈에는 그 아이는 5, 6 년 동안 냉엄한 세계에서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온 가련한 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아요. 보살펴 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해요. 거기다가 그 아이는 미인이니 남자라면 누구나 끌릴 거예요. ���러니까 당신 엄마와 이혼한 후 쭉 독신으로 생활해 온 브라이스도 뜻밖에 프로포즈할 생각이 들지도 몰라요. 나는 이제까지 계속 곁을 떠나지 않고 있으면 혹시 사랑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왔지만 결국은 그렇게 되지 않았어요." "당신을 두고 웬디 쪽을 택하다니 있을 수 없어요, 제스. 난 아빠를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고 그의 생활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렇지만 아빠를 바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당신은 아빠를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겠죠? 만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사랑하고 있을 까닭이 없으니까요." "아아, 키트, 난 이젠 아무 것도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브라이스의 일이라면 당신의 엄마를 제외하고는 다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줄 알았어요. 남하고는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지만 내게는 무슨 이야기든지 다 전해 주었어요. 그래서 내게는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거예요. l0 년 전에 만나자마자 브라이스에게 열중하게 되었어요. 그때까지는 나 스스로가 열을 올릴 만한 남자가 없었어요. 브라이스는 상당히 세련되고 위트가 풍부했어요. 게다가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와 친해지질 못했지만 내게는 따뜻하고 상냥하게 대해 주었어요. 나를 몹시 필요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어요." 캐더린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위가 갑자기 조여들면서 구토증이 느껴진다. 제스의 이야기는 마치 나와 제이슨의 일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 같아. 제이슨도 친한 친구가 없는 것 같은데 유독 내게는 친절히 대해 줘. 내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을 직선적으로 다 이야기해. 그렇기 때문에 뜻하지 않게 어느 사이엔가 나 자신도 그를 신뢰하게 된 것 같아. 지금도 제이슨을 아빠와 같은 남자라고 느끼는 감정은 남아 있다. 무책임하고 쾌락만 쫓아다니며 살아가는 타입의 남자. 오래 지속되는 애정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제이슨은 통찰력이 예민하고, 때때로 진실한 면을 보여서 아빠와는 어딘지 모르게 다른 점이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심술궂게도 제스는 아빠가 위트가 풍부하고 따뜻해서 거절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캐더린은 제스의 이야기로 아주 혼돈에 빠졌다. 역시 제이슨은 내가 생각치도 못할 만큼 아빠와 닮은 것일까. 이제부터는 그 사람을 믿어선 안 되는 것일까. "이대로 간다면 나도 언젠가는 지금의 제스처럼 되어 버릴지도 몰라." 캐더린은 움직이지 않고 우수에 잠겨 있는 푸른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제스, 제이슨은 내게 무척 상냥하게 대해 줘요. 적어도 그 점만은 아빠와 틀린 것 같아요." "키트, 당신은 정말로 로그에게 끌리고 있군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돼요. 부탁이에요. 충분히 정신을 차리세요." 캐더린은 고개를 숙이고 테이블의 빨강과 흰색의 크로스 무늬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다가

생각했었는데 …

이렇게

되었지?

아빠

같은

남자와는

결코

사귀지

않으려고

만나서 얼마 동안은 제이슨을 피하려고 했었어요. 그렇지만 그러는

동안에 같은 갬블러이지만 아빠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빠는 도무지 정답게 대해 준 적이 없었지만, 제이슨은…" 캐더린은 말을 잇지 못하고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머리가 쿡쿡 쑤신다. "아아, 두 사람은 마치 이리 앞에서 떨고 있는 두 마리 새끼 양 같아요." "제스,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스는 테이블 너머로 가만히 캐더린의 손을 잡았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제이슨 로그의 곁에서 떠나요. 나도 9 년 전에 브라이스를 단념해야 했던 것인지도 몰라요. 그랬으면 지금은 그렇고 그런 남자를 만나서 애기도 있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결국 10 년씩이나 질질 끌려다니고 말았어요. 이젠 이 나이에서는 아이를 낳는 것도 무리예요. 이대로 여기 있는 게 좋을지도 모르죠. 브래드의 휴가가 끝나 버려서 유감이에요. 만약 아직 여기 있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방황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말예요. 그 아이가 어물어물 설교를 하면 그것만으로도 여기 있을 결심이 설 텐데." 제스는 싱긋이 웃어 보였다. "피를 나눈 동생이지만 그 아이는 머리가 둔하고 답답한걸 훗." 캐더린은 제스의 말에도 웃을 수 없었다. 제이슨에 대한 마음은 지금 억제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 이대로는 도저히 단념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좋지? 제이슨을 사랑하고 말 것 같아." "어머,

키트,

하지만

내가

알겠어요.

자신도

브라이스에

대해서도

매우

어리석었는걸요. 10 년 전에 그와 서로 사랑하던 수 개월을 잊을 수 없을 만큼 나는…" 갑자기 말이 끊기고 제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캐더린의 훨씬 뒤쪽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그쪽을 향해서 턱을 치켜들며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때에는 브라이스 데라코드 같은 남자는 만나지 않았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스의 눈에서 고통의 빛을 읽고 캐더린은 흘끗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빠와 웬디가 테이블에 앉고 있었다. 시선을 제스에게 돌리며 일어섰다. "자, 여기서 나가요." "그래요." 등줄기를 쭉 뻗고 일어서면서 제스는 중얼거렸다. "저 여자는 나를 싫어하고 있어요. 내가 있는 곳을 알아내면 저렇게 일부러 브라이스와 둘이서 보라는 듯이 찾아오는 거예요. 내가 그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여기서 내쫓으려는 거예요." "어머, 나 같으면 절대로 여기서 나가지 않겠어요. 저 사람을 기쁘게 해줄 정도라면 차라리 죽은 게 나아요." 다행히 수퍼마켓의 물건들이 값이 너무 비싼 것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는 별로 입을 열지 않았다. 지프가 제이슨의 집 앞에 서자 캐더린은 내려서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어쩌면 내일쯤 놀러갈게. 그동안 별로 이야기를 못해서 조금 쓸쓸해질려고 해." "집에 같이 있으면 쓸쓸해 할 까닭이 없어요."


마리는 신음하듯이 말하고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혀를 차면서 제이슨의 집을 흘겨보았다. "당신도 아빠도 참으로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고 있어요. 그렇게 생각되지 않아요? 한쪽은 천박한 여자와 놀아나고, 한쪽은 또 보잘것 없는 갬블러와 지내고 있다니. 그것도 두 사람 다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도 아니고. 이런 수치스러운 일은 들어본 적도 없어요. 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죠?" 투덜투덜 이야기하면서 마리는 다시 한 번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았다. "그 남자 곁에서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울게 될 테니까요. 자, 뒤로 물러서요. 아이스크림이 녹기 전에 집으로 가보아야 하니까요." 마리가 지프를 돌려서 가버릴 때까지 캐더린은 손을 흔들어 전송했다. 그러나 현관까지 걸어오는 동안에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는 사라졌다. 차가 있는 것을 보니 제이슨이 돌아온

것이

틀림없다.

얼굴을

맞대기가

두려웠다.

제이슨이

웃으면서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이성은 어디로 달아나 버리고 키스해 달라는 기분밖에 남지 않는 자신이 한심스럽다. 뭘 그렇게 무서워한담. 작은 어린애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꾸짖어 가면서 제이슨에게서 받은 열쇠로 문을 열고 서늘하고 컴컴한 현관으로 들어섰다. 아무리 매력있는 남자라고 하더라도 제정신만 있다면 거절 못할 것도 없지. 열쇠를 핸드백에 도로 넣을 때 갑자기 요란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제이슨의 낮은 소리가 그 소리에 어울려서 웃는다. 리빙룸에서 나는 소리다. 현관에서 리빙룸이 보이는 곳까지 오자 캐더린은 질투로 앞이 안 보일 정도가 되었다. 그 사근사근한 브론드가 제이슨의 어깨에 손을 얹고 소파에 함께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봐서는 안 될 것을 보아 버린 어린아이 같은 기분이 되어서 캐더린은 등을 굽히고 급히 그곳을 빠져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쥬디에게 들키고 말았다. "어머, 당신의 사랑스러운 손님이 돌아오셨어요. 그렇게 살짝 도망치지 않아도 돼요. 이리로 오세요. 거의 돌아올 때가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던 중이니까. 그렇지만 5 분만 더 빨리 왔더라면 눈을 흘겨주고 말았을 거예요." 쥬디의 의미있는 듯한 말솜씨는 캐더린의 신경을 자극했다. 쥬디에게 미소를 띠울 수가 없어서 잠자코 소파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제이슨도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웃고 있지는 않았다. 오늘 아침의 키스를 생각해 내는 듯한 눈으로 캐더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건 내 생각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쥬디의 손가락이 제이슨의 뺨에 닿자 제이슨은 미소를 띠우며 쥬디의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참고 볼 수가 없어서 옷을 갈아입겠다고 중얼거리며 계단으로 올라가려고 하자, 둘이서 드라이브나 하자는 쥬디의 목소리와 좋다고 대답하는 제이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이슨은 그날 밤 돌아오지 않았다. 새벽 1 시까지 기다리다 못해서 침대에 들었으나 얼마 동안은 잠들지 못하고 기다렸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기색은 없었다. 아침에 잠이 깨서 옷을 갈아입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 현관문이 열리고 제이슨이 들어왔다. 어제 쥬디와 같이 나갈 때의 복장 그대로였다. 밤새 쥬디와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현실로 되어 눈앞에 나타나자 마치 가슴에 나이프가 꽂히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필사적으로 돌처럼 굳은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자기가 제스와 자매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잘못된 사나이를 사랑해 버리고 만 바보같은 여자끼리… 9 회색빛 아침이었다. 요사이 이틀 동안 다호 상공에는 구름이 끼어 있었다. 토요일 아침에 캐더린이 잠에서 깨었을 때에는 안개 같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원하고 상쾌한 비가 아니고 축축하고 후덥지근한 더위였다. 이을 닦고 세수를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시원한 옷을 입었다. 반바지에 홀더 톱을 입고 샌들도 신지 않았다. 맨발로 나무바닥을 걷는 것이 시원하고 기분이 좋았다. 머리를 다시 땋아서 가지런히 방을 나섰다. 계단의 더운 공기에 잠깐 얼굴을 찌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제와 같이 제이슨이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열심히 타이프를 치고 있었다. 대체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어제 오후부터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오늘 또 타이프를 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새삼스럽게 제이슨이 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그러나 맞대놓고 물어볼 마음은 내키지 않았다. 수요일에 쥬디와 외박을 하고 온 뒤로는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제이슨 쪽에서도 캐더린이 피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험악한 공기가 감돌았다. 제이슨을 사랑하고 있는 것을 이제는 부정할 수 없으나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감추고 자기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됐다. 항상 마음이 정반대 방향으로 끌려가는 것 같아서 괴로웠다. 지금도 방금 일어나서 나오는 길인데 마치 언덕 끝에 서 있는 듯이 긴장이 되었다. 쉴새없이 계속되는 타이프 소리가 피곤한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한숨을 쉬고 캐더린은 리빙룸으로 내려갔다. 죠지아가 누워서 뒹굴고 있는 옆을 지났다. 아무 것도 먹고 싶지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뭘하며 시간을 보낼까. 제이슨은 그제사 캐더린을 알아본 듯 타이프에서 눈을 떼고 힐끗 돌아보았다. "굿모닝." 퉁명스럽게 한 마디 하고 또다시 타이프를 친다. "굿모닝." 샤워를 해서 아직도 물기가 있는 은화색 머리카락으로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자꾸 눈이 빨려들어간다. 가까이 가서 만져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캐더린은 급히 제이슨에게 등을 돌리고 책이 천장까지 꽉 차 있는 책장 앞에 가서 섰다. 뭔가 재미있는 책이 있으면 잠시 기분을 돌릴 수가 있겠구나 생각하고 한 권씩 책이름을 보아갔다. 이렇게 책이 많은데도 캐더린이 읽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책은 보이질 않았다. 더욱더 초조해져서 혀를 차고 몸을 홱 돌렸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한 뒤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기지개를 켰다. 긴장의 연속으로 굳어 있는 몸을 펴니 기분이 좋았다. 그때 갑자기 제이슨이 이쪽을 보았다. 캐더린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아까와는 딴판으로 제이슨의 표정에 최면술이 걸린 사람처럼 몸이 자유롭지가 않았다. 그때까지 냉담하던 표정이 풀리고 잘생긴 입술이 조금씩 둥그렇게 관능적으로 변해갔다. 제이슨이 약간 몸짓을 하자 캐더린은 아차하고 손을 아래로 내렸다. 얼굴이 새빨개지며 홀더 톱의 옷자락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무, 무엇을 타이핑하고 있어요?" 호흡이 흐트러져서 제이슨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억지로 두서너 걸음 앞으로 가서 타이프라이터에 끼워져 있는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무슨 각서 같은 것이었다. "뭐하고 있죠? 포커 게임의 필승법이라도 쓰고 있나요?" "뭐, 대충 그런 것들이야." 제이슨은 아직도 캐더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회전의자를 돌려서 캐더린 쪽을 보며 머리 뒤로 손을 잡고 몸을 뒤로 젖혔다. "오늘도 비야." 느릿느릿 중얼거리고 제이슨의 표정은 다시 쌀쌀해졌다. "뭘하고 지낼 거지!" 캐더린은 앞에서 손을 맞잡고 어깨를 움찔한다. "글쎄, 뭘해야 좋을지. 너무 들떠 있는 기분이에요. 당신은 그런 기분이 되어본 적이 없나요?" "있구말구. 가끔 있지. 누구든지 다 그래." "그렇지만 당신이라면 아마 그런 때에는 짐을 착착 챙겨 가지고 어디 다른 카지노로 떠나겠죠?" 제이슨의 눈동자에서 지루하다는 빛을 보고 입을 다물었는데 너무 늦었다. "장소를 바꾼다고 해서 가라앉는 것은 아니야." 긴장된 얼굴로 말했다. "기분이 안정되지 않는 것은 그 사람 마음속에 원인이 있는 거야. 환경은 관계없어." 놀란 듯한 캐더린의 얼굴을 보고 제이슨은 비웃는 듯한 웃음을 띠웠다.


"어떻게 된 거야? 우리 갬블러들은 무슨 일에나 깊이 생각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나? 기껏 생각하는 것은 다음에 할 게임 정도라구 말야." "아뇨, 별로 그런 것도…"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겠지." 제이슨은 퉁명스럽게 말을 끊고 등을 돌려서 다시 타이프를 치기 시작했다. 제이슨을 화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두 사람 사이가 평탄하지 못한데 거기다가 또 화를 내게 만들어서야 … 용기를 내어 제이슨 옆으로 다가가서 주저주저하며 말을 했다. "저… 나는 타이프를 꽤 잘 쳐요. 내가 대신 쳐드릴까요?" "아니, 내가 하겠어." 무뚝뚝하게 거절당하자 더욱 처량한 기분이 되어서 캐더린은 죠지아가 뒹굴고 있는 곳으로 갔다. 열심히 쓸어 주었는데도 죠지아는 겨우 눈을 떴는가 했더니 금방 다시 감아 버린다. 왠지 너무 졸려서 놀고 싶은 기분이 아닌 모양이었다. 잠깐 동안 타이프를 치는 손이 멈췄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이마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뭔가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머리 뒤로 손을 잡으니 크림색 니트 셔츠 아래에서 넓은 어깨의 근육이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캐더린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째서 이 사람은 이렇게 남자답고 매력적일까.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저 햇볕에 탄 살갗에 닿고 싶어진다. 정말로 난 어떻게 되어 버렸나 봐. 고르고 골라서 이런 갬블러를 좋아하게 되다니. 그러나 내게는 이 사람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필요해. 모순되는 두 가지 감정을 느끼고 캐더린은 제이슨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커피 마시고 싶지 않으세요? 따라다 줄까요?" "아니, 필요없어. 오늘 아침에는 벌써 네 잔이나 마셨어." 제이슨은 다시 타이프를 치기 시작했다. 제이슨의 조급한 말투를 무시하고 캐더린은 타이프라이터 옆으로 걸어갔다. 책상이 박혀 있는 벽에 기대어 서서 보기좋은 다리를 발목에서 꼬았다. "어머, 정신차리느라고 커피가 네 잔이나 필요했나요? 어제 저녁에는 그렇게 늦지는 않았죠?" 키를 잘못 쳐버린 듯 짜증을 내며 타이프 치던 것을 멈추고 제이슨은 얼굴을 들었다. "내가 언제 돌아왔는지가 그렇게 궁금하니? 대학 기숙사에 들어간 신입생처럼 출입하는 시간을 적어 두기로 할까?" 독살스러운 말투에 캐더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불쾌한 제이슨은 처음이었다. 몹시 중요한 것을 타이핑하고 있는지 아니면 뭔가에 성을 내고 있는 것인지.


"별로 그러고 싶은 건 아니예요. 단지 어제 저녁에 당신이 돌아왔을 때에는 아직 자지 않고 있었으니까요." 제이슨은 아무 말도 없이 사나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찌는 듯이 더워서 더운 커피를 마시고 싶은 기분은 아닐 거예요. 차가운 아이스 티나, 레몬네이드라도 갖고 올까요?" "아니, 둘 다 필요없어. 만약 마신다면 알콜이 들은 것이 좋겠어." "하지만 아직 아침 10 시예요. 당신은 보통 때 별로 술을 안 마시잖아요. 어째서 오늘따라 아침부터 마시고 싶은 거죠?" 캐더린은 놀라서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냐구, 키트? 너 같은 처녀가 옆에 있으면 새벽부터 나도 마시고 싶어져." "그게 무슨 뜻이죠? 어째서 나 때문에 술이 마시고 싶어지죠?" 제이슨은 일어서서 양손을 감색 바지 포켓에 넣고 눈을 가늘게 뜨고 오랫동안 꼼짝도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싹 꺼내더니 캐더린의 넓적다리를 가볍게 쓸었다. 캐더린이 깜짝 놀라서 몸을 떨며 눈을 크게 뜨고 자세를 바로하는 것을 보고 비웃는 듯한 웃음을 띠웠다. "너는 때때로 아주 어린아이처럼 반응해. 어째서 남자가 술을 마시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다구? 알았어, 가르쳐 줄게. 내가 지금 한 잔 마시고 기분을 가라앉히려는 이유는 말야, 네가 그렇게 짧은 반바지와 등이 온통 드러난 홀더 톱을 입고 내 주위를 왔다갔다하고 있어서 그래. 가끔 마치 유혹하는 것처럼, 갑갑한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켜면 마음이 산만해져서 일손이 잡히질 않아. 넌 지금 내가 무엇을 할 생각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아, 키트. 오늘같이 비오는 날은 너와 하루종일 침대에서 지내기에 아주 알맞는 날씨야, 그렇게 해줄까?" 캐더린의 양볼이 빨개졌다. 갑자기 무릎에 힘이 빠진다. 제이슨의 타는 듯한 눈초리에 사로잡힌 것같이 고개를 젓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할… 그렇게 할 생각이 아니었어요, 제이슨." 더듬더듬 겨우 그렇게 말했다. "넌 도대체가 아무 것도 모른단 말야." 제이슨은 부르짖듯이 말하더니 캐더린에게 한걸음 다가섰다. "너는 내게 어떤 힘을 미치는지 전혀 알지를 못해. 보기에는 성숙해 보이는데 속 알맹이는 어린아이같이 천진하기만 해. 너랑 같이 있으면 안아주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부끄러워져." "나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그렇게 천진스럽지도 않아요." "증명해 보이면 어때?"


제이슨은 되받아넘기며 또 만지려는 것처럼 손을 들었다. 그러나 한숨을 내쉬고 피로한 듯이 그 손으로 목을 주물렀다. "부탁이야, 어디든지 가서 가만히 좀 있어 줄 수 없어? 해야 될 일이 많단 말이야." "방해해서 미안해요." 캐더린은 버럭 화를 내고 제이슨의 옆을 빠른 걸음으로 빠져 나와서 난폭하게 주저앉아 버렸다. 지지 않고 맞서듯이 눈을 흘겨주었다. 그러나 제이슨이 어깨를 움찔하고 다시 타이프 앞에 앉자 캐더린은 힘없이 어깨를 떨구었다. 넓은 잔등을 바라보면서 우울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버렸다. 언제까지나 이런 상태가 계속되겠지. 두 사람이 서로서로 요구하면서… 자기를 묶어 놓고 있는 엄격한 도덕관이 원망스럽다. 모든 것을 다 잊고 제이슨의 가슴에 달겨들 수 있다면 하고 생각했다. 그만한 용기가 있었으면 사랑하는 남자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결국 자기를 바꿀 수는 없었다. 찰나적인 결합으로는 만족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제이슨은 앞으로 계속 나를 사랑해 줄 사나이가 아니다. 결국 어떻게 생각하든지 이 이상 두 사람 사이를 진전시킬 수는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캐더린은 팔짱을 끼고 앞의 개를 흘겨보았다. 죠지아는 자면서 한숨을 쉬더니 반듯이 뒤집어서 한쪽 다리를 공중으로 뻗었다. "어머, 그런 자세로 잘도 잠을 자는구나." 제이슨에게도 들릴 만큼 큰소리로 말했으나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대답만 돌아왔을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까 보던 책장 앞에 서서 사진이 들은 네바다의 역사책을 꺼냈다. 책은 생각보다 무거워서 손가락 사이를 미끄러져 큰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어머, 이런 멍청이." 조바심이 나서 자기에게 독설을 퍼붓고 책을 잡으려고 몸을 굽혔다. 몸을 일으키고 문득 제이슨 쪽을 보았다. 그의 그늘진 눈동자는 날씬한 다리에서 부드럽고 둥근 허리를 더듬어서 V 네크의 홀더 톱으로 드러나 보이는 가슴의 우묵한 곳을 잠시 뚫어질 듯이 쳐다보더니 다시 캐더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일부러 눈을 끌려는 거냐, 키트?" 작게 목쉰 소리로 말하고 쭉 손을 뻗어서 캐더린의 손목을 잡았다. 꽉 힘을 주어 잡아당겨서 양손으로 허리를 끌어안았다. 한쪽 무릎 위에 캐더린을 앉히고 벗은 잔등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캐더린은 숨을 죽이고 니트의 반소매에 매어달렸다. 제이슨은 얼굴을 숙이고 목 뒤에 매어놓은 홀더 톱의 옷깃에 살며시 입술을 눌러댔다. 등줄기에 떨림이 흘러가고 캐더린의 몸 속에 통증과 비슷한 쾌감이 일어났다. 양손이


자연스럽게 목으로 돌아가서 제이슨의 키스를 기다리는 듯 얼굴을 드니, 제이슨이 캐더린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런 것이니, 키트? 나에게 사랑해 달라고 유혹하고 있는 것이니?" 그래요, 하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캐더린에게는 그만한 용기가 없었다. 잠자코 머리를 흔들었다. 제이슨은 가쁜 숨을 쉬면서 굳은 미소를 보였다. "그럴 줄 알았어…" 지나치게 다정한 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갑자기 캐더린을 일으켜 세우더니 거칠게 무릎에서 내려놓았다. "그러면 아무 데라도 좋으니까 진득하게 좀 앉아 있어 줘. 부탁이야, 그런 자극적인 차림으로 펄럭펄럭 다니는 것은 그만두어 줄 수 없겠어? 책을 읽든가 개를 데리고 놀든지 소파에서 잠을 자든지, 어떻든 내마음을 흐트리지 말아 줘." "미안해요." 새빨개지면서 고개를 숙인다. "됐으니까 저쪽에 가서 앉아 있어." 제이슨은 등을 돌렸다. 캐더린은 소파 앞에 가더니 걸터앉아서 냉랭한 잔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5 분간 할 수 없이 타이프 소리를 들으면서 그대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잠시 후 제이슨이 타이핑을 끝내고 조용해졌다. 캐더린은 잔등을 쭉 펴고 소파에 바로 앉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여기 있으면 당신에게 방해가 되나 보죠? 나더러 여기서 나가라는 뜻이면 언제든지 나가겠어요. 호텔 방을 잡으면 되니까요." 제이슨은 조급한 듯이 입 속에서 중얼거리며 캐더린을 흘겨본다. "돌려서 그런 표현을 할 사람은 아니야. 만약 나가 달라고 하고 싶으면 분명히 그렇게 말로 하겠어.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끝날 때까지 좀 조용하게 가만히 있어 줄 수 없어?" "오늘의 당신은 최하예요. 내가 잠자코 여기 앉아서 얌전하게 구박이나 받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잘못이에요. 이제부터 산책을 다녀올 테니 그 동안 기분 좀 가라앉혀 두세요." 캐더린은 도리어 눈을 흘겨주고 일어섰다. "레인 코트를 잊지 마. 그리고 네가 돌아올 때쯤에는 난 나가고 없을지도 몰라. 오후부터 큰 게임이 있어." "없는 게 더 나아요."


캐더린은 대들듯이 말하고 현관 선반에서 녹색 레인 코트와 하얀 비단 모자를 꺼냈다. "그러면 천천히 다녀오세요. 나 때문에 서둘러서 돌아오지 않아도 돼요. 혼자 있어도 조금도 무섭거나 그렇지 않으니까요." "그래? 그렇다면 내일 아침까지 마음놓고 게임에 몰두할 수 있겠군. 잘 되었어요. 그러면 산책을 즐기고 와." 조롱하는 듯한 말투에 화가 치밀어서 한 마디 대꾸하려고 했지만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멈칫거리다가 캐더린은 빗속으로 나가 버렸다. 나무 숲을 지나서 아빠의 집으로 갔다. 이 시간에는 이미 아빠는 나갔을 거야. 웬디도 없었으면 좋겠는데 … 마리를 만나서 말동무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마리와 함께 있으면 반드시 기분도 기라앉을 거야. 마리는 부엌에서 벌써 저녁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와 줄게." 하고 말을 걸고 조리대를 향해 걸터앉는다. 쌀과 양파와 쇠고기를 섞은 속에 후춧가루를 조금 넣는다. 마리는 스토브 앞에 서서 작은 냄비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특제 토마토 소스가 늘어붙지 않도록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쯤 되면 그 소스의 비결을 가르쳐 줄 거요, 마리? 어른이 되면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했죠. 기억해요?" "결혼하면 가르쳐 드릴게요. 그러니까 조금 더 기다려요. 비법을 가르쳐 드리기엔 아가씨는 너무 젊어요." "어머, 모두들 나를 어린애 취급을 하는군요." 안달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만약, 끝내 결혼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지? 30 이 되어도 40 이 되어도 비결을 못 배우겠네. 결혼하지 않으면 한 사람의 여자로 인정받지 못하다니 몰랐어요." 마리는 킬킬대며 웃었다. "아니, 당신은 결혼할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이렇게 아름다운 처녀를 남자들이 그냥 놔둘 것 같아요?" "싫어. 그런 건. 남자라면 속상하는 일뿐이야." 마리는 캐더린 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손을 큰 에이프런에 닦고 조리대 앞으로 가까이 가서 한숨을 쉬면서 비대한 몸을 의자에 기댄다. "왔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지나치게 양볼이 빨갛더라구요." "그건 바람이 안 통하는 레인 코트를 입고 여기까지 걸어왔기 때문이야. 밖은 몹시 후덥지근하거든요."


"아가씨 일이라면 어릴 적부터 잘 알고 있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쯤은 한 번 보면 알아요. 그대로 얼굴에 적혀 있어요. 틀림없이 그 갬블러하고 무슨 일이 있었죠? 무리하게 뭔가 하려고 들던가요?" "아뇨, 정반대예요. 그것보다도 내가 지금 곧 그 집에서 나오겠다고 하면 아마 손뼉을 치며 좋아할 거예요." "그러는 것이 좋아요, 키트. 당신 같은 아가씨가 남자와 한지붕 밑에서 지낸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 남자에게 마음이 쏠리고 있다면 더더군다나요." 대답하려는 캐더린을 한 손으로 막으며 계속한다. "내게는 거짓말을 해도 소용이 없어요, 키트. 그 남자를 연모하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당신한테는 아무 것도 숨길 수가 없어, 마리. 난 참 바보같지? 제이슨 같은 남자를 사랑하게 되다니. 그 사람은 단지 놀이 기분인데…" "집으로 돌아오세요, 키트. 연애를 하고 있는 여자는 때때로 나중에 가서 후회할 만한 바보같은 짓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고 나면 이미 때는 늦어요. 고집부리지 말고 집으로 돌아와요." "아빠가 무분별한 행동을 그만둔다면 곧 돌아올게요. 아빠가…" 갑자기 현관문이 꽝― 하고 큰소리를 내며 닫혔다. 마리가 꾸물꾸물 일어선다. "왜 이렇게 일찍 돌아오시지? 한 시간 전에 막 나갔는데." 스토브 앞에 가서 끓고 있는 토마토 소스르 보며 말했다. "이걸 저어야 하니까 가서 좀 보고 오세요, 키트." "웬디하고 얼굴을 마주치는 건 싫어." "아직 자고 있을 거예요. 미스터 브라이스가 무슨 일로 돌아왔는지 보고 와요." 부탁하기보다는 명령조로 말했다. 캐더린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일어섰다. 아빠와 얼굴을 맞대고 싶지가 않아. 서재 도어 앞에서 약간 망설이다가 심호흡을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브라이스는 바에서 술을 글라스에 따르고 있었다. "마리가 뭐 물건이라도 잊고 가셨냐고 물어보래요." "한 장을 적어 놓았는데 그뿐이야. 이제는 그만 떠나가야 할 때인 것 같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 바보같은 쪽지를 남기고 가다니." "그래요? 전 제스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로 나가 버렸다는 건 놀랍지만… 하지만 떠나야겠다고 말한 적은 있었어요." "네게는 말했으면서 나에게는 아무 말 없었다는 말이냐? 10 년이나 같이 일했어. 그만두기 전에 그만두겠다고 예고쯤은 해주어도 좋잖아."


캐더린은 뜻밖에 자기 귀를 의심했다. "제스의 일을 보통 사용인으로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았어요?" "물론 다르지. 두 사람은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데…" "친구 사이라구요? 제스의 기분을 모르셨다는 말예요? lO 년 전부터 두 사람이 사귄 후 계속해서 사랑해 오고 있다는 것을." 이번에는 브라이스가 놀랄 차례였다. "어떻게 옛날 일을 알고 있지?" "제스가 아빠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마리에게 말했더니 옛날 일을 이야기해 주었어요." "마리가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제스와는 벌써 옛날에 끝난 일이다." "그래도 제스는 아직 아빠를 사랑하고 있어요." "이렇게 하고 나가 버리다니 이상한 애정의 표시도 다 있구나." 믿을 수 없어하는 듯이 브라이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어쨌단 말이죠? 어째서 여기서 아빠가 차례차례로 상대를 바꿔 가는 것을 보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아마 웬디의 일로 참을성의 한계가 넘었나 봐요. 그래서 말없이 떠난 거예요. 떠나 버렸다 해도 아무 상관없잖아요? 제스를 사랑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너는 나에 대한 일이면 무엇이든지 덮어 놓고 나쁘게만 여기는구나. 어째서 내가 제스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어쩌면…" 아빠의 말이 끊겼다. 캐더린의 뒤쪽의 도어를 바라보는 얼굴이 갑자기 평상시처럼 무표정으로 바뀌었다. 웬일인가 해서 돌아다보던 캐더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웬디가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레인 코트를 벗어서 아무렇게나 의자 위에 던졌다. "키트, 어머, 당신을 만나다니! 기뻐요." 캐더린의 무서운 얼굴은 보지 못한 듯 꽉 어깨를 끌어안더니 브라이스에게 키스하고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마치 내 것이에요 하는 듯이 목덜미에 손을 얹고 캐더린를 향해서 활짝 웃어 보였다. "우리들은 당신이 빨리 돌아와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어요." 한 손으로 검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브라이스를 보고 싱긋 웃더니 얼굴을 치켜들고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우리들 두 사람만 있게 해주려고 나간 거죠? 그렇지만 그럴 것까지는 없어요. 안 그래요, 브라이스? 돌아오세요, 키트. 셋이서 사이좋게 지내기로 해요." 캐더린은 진절머리가 나서 일어섰다. 셋이서 사이좋게라구? 완전히 내 모친 행세로군.


"이제 그만 가보겠어요." "바래다 줄게, 키트." 캐더린은 주저했다. 그러나 아빠가 웬디의 손을 밀어놓고 일어서는 것을 보고 말했다. "괜찮아요. 비가 오더라도 갈 수 있어요. 레인 코트에 모자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맨발이구나. 어쨌든 데려다 줄게." "하지만." "데려다 준다고 하지 않나. 자, 코트를 가지고 오너라." "그러면 브라이스, 난 어떻게 하죠? 혼자 남는 건 싫어요, 다알링." 웬디는 불만스럽게 말했다. "또 쇼핑이라도 갔다오면 어때?" 브라이스는 무뚝뚝하게 말하고 지갑에서 여러 장의 지폐를 꺼내서 내주었다. "브티크에 있으면 금방 시간이 지나갈 거야. 저녁을 같이 먹으려만 카지노로 와. 오늘은 바빠서 이쪽으로 오지 못할 것 같아. 운좋게 제스를 대신할 사람을 만나면 별문제지만." "뭐예요? 제스가 그만두었다구요?" 웬디는 환성을 올렸다. 그리고 나서 허겁지겁 그럴 듯한 얼굴을 해보였다. "어머, 무슨 일이지요? 그 사람은 믿을 만한 비서였는데 말예요. 그만큼 일을 잘 해줄 사람을 만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웬디가 가면을 쓰고 말하는 데에 정이 떨어져서 캐더린은 서재를 나갔다. 마리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코트를 걸치고 볼셰를 타고서 아빠를 기다렸다. 2, 3 분 있다가 아빠가 나타나서 말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캐더린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제이슨의 집 앞에 차가 멈출 때까지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마워요." 한 마디 하고 도어를 열려고 했을 때 브라이스가 팔을 잡았다. "더 이상 여기 있는 것은 원치 않는다. 고집부리지 말고 집으로 돌아오너라, 키트. 웬디를 그렇게 싫어할 것도 없잖아." "그래요. 허지만 싫은 건 싫은 거예요. 아빠가 그 사람을 내 엄마노릇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엄마라구?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그럴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웬디는 그런 생각이에요. 아까 말하는 거 들어보셨죠? 아주 내 엄마인 체하잖아요. 결혼할 생각이 없으시다면 확실하게 그렇다고 말을 해주면 … 그것보다도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것부터 그만두세요. 그러면 나도 집에 돌아가겠어요. 그리고 제스를 찾아서 다시 이리로 데리고 오세요. 제스는 웬디에 비하면 백만 배나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런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제스를 위해서는 이러는 게 좋아. 여기를 떠나는 것이 좀 늦었을 뿐이야. 나는 그 여자하구 잘 맞지 않아." "맞지 않는다구요?" "즉 좋은 남편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네 엄마한테 물어봐라. 그렇다고 말할 게 틀림없어. 그러니까 제스는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게 좋아." 캐더린은 가만히 아빠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그다지 좋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아.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할 생각만 있다면 진심으로 남을 사랑할 수도 있을 거예요." "늙은 개에게 새로운 재주를 가르칠 수는 없겠지. 해봐서 실패하면 어떻게 되지? 제스를 더욱 불행하게 만들 뿐이야." 아빠의 눈에 떠 있는 후회와 고통은 진심이었다. "제스를 사랑하고 있군요. 그런데 상처를 입힐까 봐 두려워서 이제까지 쭉 숨기고 있었군요. 아아! 아빠가 너무 가여워요." 브라이스는 한순간 섬뜩한 듯 캐더린을 바라보았다. "나를 파파라고 불러준 것도 퍽 오래되었지, 키트?" 캐더린은 대답하지 않고 급히 차에서 내려서 현관 쪽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빠 앞에서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큰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서 캐더린은 눈을 뜨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 밖에는 어두운 하늘에 기분나쁜 번갯불이 번쩍인다. 하필이면 오늘같이 혼자 있는 밤에 폭풍우가 일다니. 제이슨은 아마 지금쯤 게임이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이 집에는 캐더린과 저 겁쟁이 죠지아뿐이었다. 강한 바람이 나뭇가지를 뒤흔들어서 우는 소리를 내고 있다. 다시 번갯불이 번쩍하자 캐더린은 가슴이 덜컥했다. 방이 어두우니까 더 무섭다. 침대 옆에 있는 테이블에 손을 뻗쳐서 스탠드의 스위치를 켰으나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어머, 어떻게 하지, 가슴에 양손을 얹고 비참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전기가 안 들어오는 것을 알자 더 한층 혼자 있는 것이 무서워졌다. 폭풍우는 점점 더 거세어가고 비가 창을 때린다. 번갯불이 번쩍이는 간격이 점점 잦아져 가고, 천둥소리는 너무 커서 금방이라도 집이 무너질 것 같았다. 이대로는 좀처럼 잠 잘 수가 없어, 양초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때 문득 비상용 석유램프가 아래 식료품 저장실에 있던 것이 생각났다. 침대에서 차가운 나뭇바닥으로 맨발로 내려서서 문을 열고 조심조심 복도를 나갔다. 이 어둠 속에서 부엌까지 내려갈 것을 생각하니 겁이 났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불을 켜고 싶어서 리빙룸이 내려다보이는 난간을 잡고 조심조심 발을 옮긴다. 난간이 굵은 기둥에 부딪치면 그곳이 계단 첫머리라는 것을 알고는 손이 기둥에 닿아 오른발을 계단으로 내딛었을 때에 뭔가 발 끝에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닿았다. 죠지아로구나. 몸을 비틀어서


돌리려는 순간 '앗'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오른쪽 발이 삐끗했다. 발목이 몹시 아팠다. 그대로 떨어질 것만 같아서 필사적으로 기둥에 달라붙었다. 넓적다리와 팔꿈치를 세게 부딪치고 계단 끝에 다가가서 불안정한 자세로 멈추었다. 발목의 통증이 발바닥과 발 끝까지 느껴진다. 입술을 깨물고 아픔을 참고 있는 캐더린에게 킁킁 소리를 내며 죠지아가 다가오고 있다. "바보같으니. 계단 같은 데서 자면 어떻게 해. 이것 봐, 장난치지 마. 난 떨어지겠어." 어머,

캐더린은

약간

놀랐다.

죠지아가

순순히

말하는

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뜻밖이었으나 그건 다른 까닭이 아니다. 복도 저편에서 무슨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커다란 한쪽 다리를 캐더린의 넓적다리에서 올려놓은 채로 개는 훌쩍 고개를 제이슨의 침실 쪽으로 돌렸다. 갑자기 얼굴에 빛이 비치자 캐더린은 오싹하며 숨을 죽였다. 눈이 부셔서 아무 것도 안 보인다. "키트, 무슨 일이니?"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제이슨의 목소리였다. 마음이 놓여서인지 전신의 힘이 한꺼번에 빠져 버린다. 떨리기 시작했다. "아휴, 살았다. 당신이군요." 제이슨은 불을 옆에 놓고 캐더린의 옆에서 무릎을 꿇었다. "도둑인줄 알았어요. 오늘밤에는 안 돌아오시는 줄로 생각했거든요." "게임이 예상보다 빨리 끝났어." 허리에 손을 돌려서 똑바로 앉히고 장난쳐 오는 죠지아를 무서운 소리로 쫓아 버렸다. "어떻게 된 거야, 키트?" "죠지아하고는 상극인가 봐요. 일전에는 모래사장에서 떠밀려 넘어지고, 오늘은 또 이것 보세요." 뒤에 놓은 회중전등 탓으로 검은 실루엣이 된 제이슨은 약간 머리를 저었다. "정말이군. 그런데 어디 다쳤어? 아니면 그냥 놀라기만 했던 거야?" 아무렇지도 않은 체하고 오른쪽 다리를 들려고 했으나 순간 통증이 느껴진다. "오른쪽 발목을 삔 것 같아요. 굉장히 아파요." 다정스런 손가락이 쿡쿡 쑤시는 아픈 발목 주위를 가만히 누른다. 캐더린이 의외로 찌푸리며 소리를 치자, 제이슨은 재빨리 두 손으로 안아올려서 서슴지 않고 일어섰다. 한 발로 회중전등을 휙 돌려서 캐더린 방의 도어를 비췄다. 캐더린은 말없이 캐더린 방의 도어를 비추었다. 캐더린은 말없이 벗은 가슴에 몸을 의지하니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발목이 아픈 것도 어디론지 다 날아가 버렸다. 침대 위에 내려지자 가만히 제이슨을 쳐다보았다. "잠깐만 기다려. 내가 방에 가서 석유램프를 갖고 올게."


성큼성큼 나가는 제이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다. 거무스레한 파자마 바지가 팽팽한 허리에서 흘러내릴 것 같았다. 천둥번개의 전류가 이 방에 전기를 충전시킨 것같이 찌르륵 하고 전기에 닿은 듯 캐더린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제이슨은 냉담한 얼굴로 구급상자와 석유램프를 갖고 돌아왔다. 부드러운 불빛이 검은 어둠을 쓸어 버렸다. 침대가에 걸터앉아서 캐더린의 부은 발목을 가만히 누른다. "관절을 삔 것 같은데, 만일을 위해서 내일 X-레이를 찍어보자. 지금은 붕대만 감아줄게. 아니면 지금 곧장 병원에 데려다 줄까?" "아녜요, 괜찮아요, 그냥 조금 아픈데요 뭐." "그렇다면 좋겠지만." 제이슨은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발등 아래에서 위로 붕대를 돌려서 거기서 발목 위로 팔자형으로 감아간다. 그러던 도중에 불쑥 손을 멈추고 얼굴을 들었다. "복도에서 뭐하고 있었니?" "무서워서 잘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아래로 램프를 가지러 가려고 했어요." "무서웠니? 갬블러 말고 또 무서운 게 있는 줄은 몰랐는데." 제이슨의 손은 붕대를 잡은 채로 멈추고, 농담인지 진담인지를 몰라 가만히 바라보았다. 캐더린은 말없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붕대를 다 감자 그대로 제이슨의 눈은 캐더린의 다리 위로 더듬어 올라갔다. 캐더린은 자기의 모습이 걱정되었다. 캐미솔의 윗저고리와 팬츠는 서늘했으나 상당히 비쳐 보인다. 제이슨도 그것을 눈치챈 것 같다. 숨을 죽이고 베개에 가만히 기대어 있는 캐더린을 바라보는 스카이 블루의 눈동자는 점점 더 위로 따라 올라가서 가슴의 둥글게 부푼 곳에 멈추었다. 눈에 정열의 불꽃이 타오른다. 예민하게 숨을 삼키고 벌린 캐더린의 입에 제이슨의 입술이 포개진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서로 다 알고 있었지? 그렇지, 키트?" 목쉰 소리로 중얼댄다. 그럴지도 모른다.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빠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는 것도 좋은 핑계였고 실은 이렇게 될 것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캐더린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단지 이대로 그가 하는 대로 있으면 좋으리라 생각했다.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길고 늠름한 다리가 종아리를 스쳤을 때에 발목을 건드렸다. 찌르는 듯한 아픔에 자기도 모르게 몸을 굳힌다. 제이슨은 조금 몸을 떼어 놓았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푸념하듯 말하고 캐더린의 몸을 싸안고 있던 팔을 천천히 풀었다.


"키트, 넌 아직도 나를 두려워하고 있어." "아니예요, 발목이 아팠을 뿐이에요. 나는…" 눈을 뜨고 제이슨의 무서운 얼굴을 보자 캐더린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제이슨이 침대에서 내려 일어서자 손을 뻗쳐서 손목을 잡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부탁이에요, 가지 말아요.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넌 나를 신뢰하고 있지 않아.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기를 바래, 키트." 입술에 손을 대고 제이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믿고 있어요.' 하고 소리치며 불러세우고 싶었으나 캐더린은 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제이슨이 말한 대로였다. 10 이튿날 아침 캐더린이 다리를 끌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보니 가정부인 메리가 청소를 하고 있었다. 기분좋게 흥얼거리면서 옆에 있는 마호가니 바의 카운터를 닦고 있던 참이었다. 캐더린은 소파에 가서 한 손으로 몸을 의지하고 오른발에 체중이 들어가지 않도록 서서 부엌에 들어가려는 메리를 주시하며 불러세웠다. "저, 미스터 로그는 벌써 나갔나요?" "잠시 바깥 공기를 쐬러 나간 모양이에요. 곧 돌아오실 거예요." 싱긋 웃으며 대답하는 메리는 부엌으로 가버렸다. 혼자가 되자 캐더린은 소파의 앞으로 가서 팔걸이에 걸터앉아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눈이 아프다. 이렇게 뭐가 뭔지 모르는 기분이 되어 보기는 처음이다. 제이슨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자 더욱더 캐더린은 혼란스럽다. 이 쪽에서 안아 달라고 했는데도 나중에 후회할 거라고 하며 방에서 나가 버리다니 제이슨도 나와 같은 기분이었던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다. 믿으려고는 생각하지만 아빠의 살아가는 방식을 오랫동안 보아온 캐더린에게는 아무리 해도 아빠와 닮은 남자는 믿을 수 없었다. 머리를 소파에 기대고 또 한숨을 쉬었다. 그때 현관 도어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똑바로 앉아서 보니 검은 스웨터에 검은 바지를 입은 제이슨이 들어왔다. 얄미울 정도로 매력적이다. 어젯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비가 와서 조금은 시원해진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해 놓고 얼마나 흥미없는 대사인가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왜 이런 데 앉아 있는 거지?" "X 레이를 찍을 때까지는 되도록 걷지 마. 오전 중에 병원에 갔다오자." "사진 찍을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요. ���순히 발목을 다친 것일 텐데." 제이슨은 무릎을 굽히고 오른쪽 다리를 들어올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으면 마리한테 전화해서 병원에 데려가 달랠게요." "아니, 내가 데려가겠어. 그렇게 하면 틀림없을 테니까." "어머, 마치 나를 신용하지 못한다는 말투예요." "서로 피장파장이지. 너도 나를 신용하고 있지 않잖아." 제이슨의 말에 갑자기 어젯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절벽이 가로놓인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좋담. 캐더린은 눈을 아래로 깔고 붕대를 바라보았다. 마음의 제동을 풀고 제이슨의 가슴에 뛰어들 수 있었다면. 그러나 지금까지 길러온 조심성을 그렇게 손쉽게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 리고 말았을까? 친구들은 모두들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다. 모든 것이 다 단순한데 어째서 나만은 틀리는 걸까? 신뢰할 수 있는 든든한 사람과 시간을 두고 사람을 키워갈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복잡한 감정을 갖게 만드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다니… 제이슨은 책상 앞 회전의자에 앉아 타이프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자기 얼굴을 들더니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캐더린과 눈이 마주쳤다. 얼굴이 굳어지며 가늘게 뜬 눈 속에서 불길이 솟아났다. "키트, 이런 상태는 보통이 아니야. 우리는…" 그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제이슨은 욕설을 퍼붓고 일어서서 캐더린 앞에 잠깐 멈추어 섰다가 머리에 가만히 손을 대보고 현관 쪽으로 갔다. 리빙룸에 들어온 것은 아빠였다. 발목의 붕대를 보고 얼굴을 찌푸리며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웬일이냐?" "캄캄한 어둠 속에서 넘어졌다면 믿으시겠어요?" 브라이스가 이상하다는 듯이 다시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캐더린이 자초지종을 들려주며 옆의 쿠션을 치고 말했다. "앉으세요. 얼굴을 보았을 때 좀 놀랐어요." "어제 네가 한 말을 잘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결국 웬디에게 다 끝났다고 말했다." 캐더린의 놀란 듯한 얼굴을 보고 브라이스는 계속 말했다. "기뻐할 줄 알았는데 잠자코 있지만 말고 뭐라고 한 마디 해라, 키트."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죠?"


"웬디가 엄마인 척했다는 말이 나의 결심을 재촉했는지도 모르겠다. 차츰 그런 생각이 들자 더 이상 호텔비를 물어줄 수 없다고 말했어." "어머, 그래서요?" "처음에는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다고 사정사정하더니 내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자 있는 욕 없는 욕을 다 퍼부었어." "어디로 갈 작정이래요? 무일푼이라고 하던데." "지금은 충분히 갖고 있어. 게다가 라스베가스의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잠시라면 계약해 주겠다고 말해 왔어." "그래요? 잘 되었어요. 이제 제스를 다시 데려올 수 있겠네요."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시 아빠의 얼굴이 처음처럼 무표정하게 되는 것을 보고 얼른 아빠의 팔에 손을 얹었다. "제스가 돌아와 주었으면 좋겠죠?" "내가 어떻게 마음을 먹든지 관계없어. 제스는 제 뜻대로 여기서 나간 거야. 쫓아다니며 돌아와 달라고 부탁할 생각은 없다." "굉장히 완고하시군요. 그래도…" "어쨌든 웬디와 손을 끊었으니까 약속대로 너를 데려가겠다. 자, 준비해라." 갑자기

캐더린은

이 집을 나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기를

깨달았다.

제이슨과의 사이가 아무리 복잡하고 긴장의 연속이라고 해도 그 사람 곁을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캐더린은 브라이스가 온 뒤 책상 옆에 서서 가만히 지켜서 있는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포켓에 양손을 찌르고 가만히 캐더린을 바라보았다. 포커를 하고 있을 때와 같은 무표정한 눈이었다. 내가 떠나가게 되어서 잘 되었다는 건가?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는 아빠에게 시선을 돌리며, "웬디는 언제 다호를 떠나죠?" 하고 물었다. "지금 짐을 싸고 있다. 1l 시 50 분의 라스베가스 행 비행기를 탈 예정이다. 마리가 공항까지 전송하겠단다. 너도 준비해라, 키트." "오늘 오전 중에 병원에 데리고 가서 X 레이 사진을 찍어보려고 했는데." 그때까지 아무 말도 없던 제이슨이 끼어들었다. "그냥 삔 거라고 생각되지만 만일을 위해서." "내가 데리고 가지." 아빠는 성난 듯이 대답했다. "키트의 시중은 아비인 내가 들겠어." 마치 넌 관계가 없어 하는 듯한 말투였다.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제이슨은 간단하게 말했다. "2 층에 가서 준비하고 올게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아빠와 제이슨 사이의 긴장에 당황하면서 캐더린은 발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제이슨이 재빨리 옆에 와서 양팔로 껴안았다. "되도록 걷지 말라고 했잖아." 아빠는 무서운 눈으로 흘겨보고 있었다. 모른 체하고 그대로 계단을 올라가서 캐더린의 방 앞에 오자 발로 도어를 열었다. 문을 닫자 깜짝 놀라는 캐더린을 향해서 제이슨은 달콤한 미소를 띠웠다. "필시 브라이스는 무슨 일로 문을 닫는가 이상하게 여길 거야. 그렇지만 참고 있어 주어야 해. 네게 할 이야기가 있어, 키트." "할 얘기?" 아직은 캐더린을 팔로 껴안은 채 방 가운데에 서서 속삭였다. "키트, 네가 없으면 쓸쓸해. 하지만 브라이스와 함께 돌아가는 것이 더 좋아." "왜 그게 더 좋지요? 내가 그렇게 방해되었나요?" "아니, 방해가 아니라 유혹이 되었어. 어젯밤은 위태위태했어. 만약 네가 여기 그대로 있는다면 더 이상 나를 억제하지 못할 거야." "어머, 제이슨, 나는…" 제이슨의 입술이 깃털처럼 가볍게 스치며 캐더린의 입을 막았다. "매일 밤 옆방에서 네가 자는 것을 생각하면서 억제하느라고 애썼어. 이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 적어도 나는 그럴 작정이야. 만나러 갈게, 키트. 괜찮겠지?" "하지만 왜죠? 나하고는 잠깐 동안의 불장난으로 생각하고 계시잖아요? 지난 번에 쥬디와도 하룻밤 함께 지내셨잖아요." "아니, 그때에는 혼자서 호텔에서 묵었어. 너하고 단둘이 지낼 자신이 없었어." 제이슨은 캐더린을 침대가에 가만히 내려놓고 뭔가 말하려는 입술에 손을 갖다대었다. "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 메리를 불러서 짐 챙기는 것을 도와 주라고 할게. 발목을 아래로 짚으면 안 돼." 손가락 끝을 그대로 아래로 내려서 얼굴을 치켜들고 다시 한번 가볍게 키스하고 제이슨은 방을 나갔다. 캐더린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만지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마도 제이슨 당신의 말을 그대로 믿고 싶어요. 그때 갑자기 마리의 말이 떠올랐다. 갬블러 중에는 나뭇가지에


앉은 새를 싱긋 웃고는 쏘아 버리는 매력적인 남자도 있어요, 키트 … 그러나 지금의 캐더린은 새가 되더라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맡겨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빠의 집으로 돌아오고 난 지 사흘 후 약속대로 제이슨이 만나러 찾아왔다. 태양이 서쪽 하늘을 오렌지빛으로 빛나게 하고 있었다. 캐더린은 모래사장에 앉아서 껴안듯 무릎 위에 턱을 고이고 황활한 경치를 즐기면서 평상시처럼 공상에 잠겼다. 갑자기 따뜻한 손이 어깨에 놓이고 제이슨의 깊이 있는 목소리가 캐더린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공상이 그대로 현실에 나타난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얼굴을 들었다. 제이슨은 캐더린의 뒤에 앉으면서 머리카락을 어깨에 걸치고 목덜미에 입술을 눌러댔다. 그러나 돌아보고 넓은 가슴에 넘어져 버리려는 캐더린은 밀쳐 놓고 몸을 떼었다. 제이슨은 아무 말도 안했다. 캐더린은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놓고 긴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는 제이슨의 곁에서 편안한 기분이 되었다. 이렇게 가까이 앉아 있는데도 키스도 안하다니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시에라 산맥 뒤로 태양이 저무는 것을 바라보면서 캐더린은 다호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평화도 오래 가지 못했다. 제이슨의 손을 잡아 자기 허리로 돌리려고 하였을 때에 아빠가 나타나서 무서운 어조로 제이슨을 흘겨보았기 때문이었다. "키트, 할 말이 있다." 제이슨은 못마땅하는 듯이 일어서서 물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제스가 있는 곳을 알았어. 로스엔젤레스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있는 모양이야. 어느 인사과에서 문의전화가 왔었어. 보너스의 잔금이 남아 있다는 거짓말을 하고 주소를 알아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작정이에요? 또 고집을 세우며 쫓아다니는 것은 질색이라고 하실 건가요?" "아니, 생각을 바꾸었어. 재수가 없으면 카지노에 가도 불이 꺼진 것처럼 쓸쓸해. 내 잘못이야. 잃어버릴 때까지 가지고 있던 보물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다니!" "그래요. 하지만 아직도 늦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좋으련만." 브라이스는 머리칼을 치켜올렸다. "어쨌든 LA 에 가서 돌아와 주도록 부탁해 볼 작정이야. 내일 오후 2 시 비행기를 탈 생각이다. 내일밤에는 제스를 데리고 올 수 있겠지." "문제없어요. 꼭 모든 일이 잘 될 거예요." "제스와는 여러 가지 의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럼요. 지금

같은 것을 똑같이 반복하기 위해서

데리고

오는

것은

아니겠죠?

결혼신청을 하실 거죠? 그렇지 않으면 아마 안 돌아올 거예요." "으음,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가 재혼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만약 제스가 승낙한다면 나라는 남편에게 실망하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야." "제스는 아빠를 사랑하고 있어요. 실망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예요." 좀처럼 딸에게 애정 깃들인 표현을 하지 않던 브라이스가 놀랍게도 손을 내밀어서 다정스럽게 캐더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넌 착한 아이야, 키트. 너하고도 할 이야기가 많다. 당분간은 제스의 일에 골몰하게 되더라도 이해해 주기 바란다. 만약 데리고 올 수 있다면 말이다." 불쑥 그렇게 말하고 얼음과 같이 차가운 눈초리를 물 가로 보냈다. "네, 물론이에요." "오늘밤에 아무 데도 나가지 말고 집에 얌전하게 있어야 한다." 캐더린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허둥허둥 호수 쪽으로 눈을 돌렸다. 들리지 않았을까 몰라. "네, 그렇게 할 생각예요. 무슨 걱정을 하고 계세요?" "넌 다 알고 있을 거야. 제이슨 로그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 남자는 한 마리 늑대야.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런 생활을 해나갈 거다. 그것만은 잊지 마라. 네가 상처를 입는 것은 보고 싶지 않다." 제이슨 쪽으로 다시 한번 무거운 눈길을 돌리고 브라이스는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 갔다오마. 아마 내일 저녁에는 돌아오게 될 거다." 캐더린은 말없이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 한 말이 잠자고 있던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아빠가 하는 말은 정당하다. 제이슨을 멀리하지 않으면 안 돼. 이대로 가다가는 깊이 상처를 입게 될 거야. 브라이스가 가버린 것을 보고서 제이슨이 돌아왔다. "발목은 어때? 좋아졌어?" 손을 허리로 돌리면서 물었다. 캐더린은 마주볼 수가 없어서 햇볕에 탄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이젠 거의 다 나았어요. 나는 내일 볼티모어로 돌아가요." 제이슨은 깜짝 놀란 듯했다. 잠시 아무 말도 안하더니 허리에 두른 손을 꽉 힘을 주고서 캐더린을 끌어당겼다. "왜 그러지? 왜 내일 가는 거지?" 횡설수설하면서 내일 아빠가 제스를 데리고 돌아온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있도록 해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거짓말 하지 마, 키트."


캐더린의 턱에 손을 대고 얼굴을 치켜들게 하고 무리하게 자기 쪽을 보게 했다. "나한테서 도망칠 작정이지? 내가 그렇게 무섭니?" "네, 아빠는 당신보고 한 마리 늑대라고 했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언제나 당신 주위에는 쥬디 같은 사람이 있을 거예요. 난 그런 여자의 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너는 내게 전혀 찬스를 주지 않았어, 키트. 갬블러니까 신뢰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러나 너는 나를 필요로 하고 있어. 아니라고는 못하겠지?" 갑자기 제이슨이 얼굴을 숙이더니 입술을 포갰다. 캐더린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키트, 어쩌면 나를 한번 믿어보려고 하지도 않지? 내가 갬블러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런 것은 이유가 되지 않아.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믿는다는 거야. 사랑이 열매를 맺느냐 못 맺느냐는 서로의 믿음이 없이는 안 돼. 인생이란 그런 것이야. 만약 그런 것을 모른다면 결코 어른 여자가 될 수 없어." "제이슨, 나는…" 제이슨이 양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이렇게 끝나 버려도 되는 거니?" "아니요.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결말 같은 건 있을 수 없어요." 제이슨의 손이 어깨에서 내려왔다. "만약 네가 나를 신뢰해 준다면 둘이서 얼마나 멋진 시간을 보낼 수가 있을까…" "네, 그렇지만 그게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죠?"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한 얼마나 갈까 하는 건 걱정할 필요도 없어.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키트. 모든 것이 갖추어질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으면 아무 것도 손에 들어오지 않아. 결심하고 믿어보든지, 아니면 브라이스처럼 오랜 시간을 고독하게 보내든지…" "그만!" "잘 있어, 키트." 이마에 키스하고 제이슨은 등을 보이며 걸었다. 11 다음날 아침 캐더린은 손수 볼셰를 운전하면서 공항으로 가고 있었다. 하룻밤 새에 다호를 떠나기로 작정한 것이 잘한 일인지 어떤지 망설여지기만 했다. 묵은 자기를 내버리지 못한 채 짐을 챙겨서 아빠의 집을 뒤에 두고 나온 것이다. 제이슨에게서 멀어져 가면서도 제이슨을 사모하는 정은 더욱 깊어만 갔다. 갑자기 캐더린은 차를 세우고 주 경계에 있는 카지노의 주차장에 차를 넣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제이슨은 지적이고 다정하고 매력적인 남자다. 이제 아마 다른 남자를 사랑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내가 바보였어. 그 사람한테서 도망쳐 나오다니. 제이슨이 말한 그대로야. 사랑이란 믿음이야. 만약 제이슨과의 사이가 그 3 개월밖에 지속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많은 행복을 맛볼 수 있었을 거야. 게다가 운이 좋으면 제이슨도 진실로 사랑해 주어서 계속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있게 될지도 몰라.' 가능성은 적지만 걸어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캐더린은 얼굴을 들었다. 흥분된 마음으로 가만히 앞을 바라보았다. 제이슨에게로 돌아가자. 마리도 아빠도 반대하겠지만 상관없어. 내 인생은 내 것이야. 차를 돌려서 지금 온 길로 돌아가자. 일단 마음을 작정하자 빨리 제이슨을 만나��� 싶어졌다. 겨우 집 앞에 닿았을 때에 비로소 두려움이 느껴졌다. 만약 제이슨이 마음이 변했다면 어떻게 하지? 아직도 어제 일로 화를 내고 있다면? 제이슨의 차가 집 앞에 있는 것을 보니 집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못 보던 차가 그 옆에 서 있었다. 쥬디의 차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 만일 그녀가 안에 있으면 어떻게 한다? 캐더린은 용기를 내서 차에서 내렸다. 녹색 슈츠의 윗저고리를 벗어서 차에 던지고 등을 곧게 세우고 어깨를 펴고 빠른 걸음으로 현관으로 갔다. 도어 가까이에 갔을 때 못 보던 사람이 안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잘 됐어, 저 차는 제이슨 것일 거야.' 캐더린을 위해서 현관 도어를 열어 놓은 채 기다리고 있는 남자에게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리고 숨이 가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서버리면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제이슨은 이쪽에 등을 대고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갈색 바지에 크림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가까스로 여기까지 왔지만 캐더린은 더 이상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몇 발자국만 가면 그 사람 옆에 설 수 있을 텐데. 그때 제이슨이 천천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스카이 블루의 눈동자에서 빛나고 있는 빛은 노여움인지 환영을 의미하는 건지 몰랐다. 먼 데를 보는 것 같은 눈으로 캐더린를 바라보고 말없이 서 있었다. 긴장된 탓으로 소리치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자 급히 제이슨이 움직였다. 캐더린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뒤로 물러서다가 쾅하고 계단 기둥에 등을 부딪혔다. 제이슨은 바로 눈앞에서 멈춰섰다. 캐더린은 눈을 크게 뜨고 숨을 죽이고 쳐다보았다. "아아, 키트, 안녕이라는 인사라도 하러 왔나?"


팔 안으로 뛰어들까 하고 생각했으나 만약 거절당하면 어쩌나 해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목이 말라 아무 소리도 안 나왔다. 혀 끝으로 입술을 축이고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여기 왔지?" 그렇게 말하고 두 손으로 캐더린의 얼굴을 감쌌다. "말해 봐." 캐더린은

눈을

감았다.

제이슨의 따스함이

전신으로

퍼져서

이상스럽게도

마음이

가라앉아 왔다. 살며시 손을 내밀어서 넓은 가슴에 대고 눈을 떴다. "못 가겠어요. 당신 곁에서 떠나고 싶지 않아요. 설령…" "키트." 갑자기 캐더린의 입이 막혔다. 손을 등으로 돌려서 허리에 대고 힘있게 끌어안았다. "아아, 키트, 돌아오길 잘했어." 큰소리로 말하자 더운 입김이 머리를 스쳤다. 갑자기 무릎의 힘이 빠졌다. 몸을 제껴서 제이슨을 쳐나보고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하고 있어요. 당신은 아무래도 좋을지 모르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좋으니 무엇보다도 그 말을 듣고 싶었어, 키트. 나도 너를 사랑해." "상관없어요. 설령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당신이 싫증날 때까지 여기 함께 있을 작정이에요." 제이슨은 가볍게 웃더니 속삭이며 말했다. "너 참 바보구나, 키트. 정말로 널 사랑하고 있단 말야. 내가 잠깐 동안 너하고 지낼려고 생각하고 있다니 대체 어디서 그런 생각이 났지?" "그렇다면 함께 지내는 것이 싫어요? 그래도…" "물론 함께 지내고 싶어. 내 아내가 되어 달라는 말이야. 너같이 순진한 처녀에게 일시적으로 들뜬 기분으로 대하는 것 같니? 너하고 결혼하고 싶어. 그것도 되도록 빨리… " 캐더린은 눈을 크게 뜨고 아연히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까무러칠 것 같았다. 갬블러가 결혼을 신청하다니! 그러나 잠시 후에 간신히 상대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는 바싹 다가섰다. 눈물이 넘쳐나왔다. "몹시 괴로웠어요. 왜 일찍 그렇게 이야기해 주지 않았어요?" "믿어 주겠니? 지금 네가 믿어 준다는 것이 난 이상할 정도야." "어쩌면 당신을 신뢰하기 시작했는지도 몰라요." "갬블러를 신뢰할 수 있겠어?" "아마 갬블러라고 하더라도 당신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키트, 네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다니!"


귀여운 입술의 윤곽을 손 끝으로 어루만지며 제이슨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캐더린이 유혹하듯이 입을 벌려도 키스를 하지 않았다. "실은 이야기가 있어." 정색을 하고 그렇게 말하고는 조금 주저하더니 말했다. "들어올 때 누구 만나지 않았니?" 캐더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빌 앤더스라고 하는데 뉴욕에서 내 책을 출판해 주는 회사의 편집장이야. 샌프란시스코에 가는 도중에 내 형편을 보려고 들러본 거야." "뭐라구요?" 뜻밖에 높은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 버렸다. 얼른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설마 당신이… 그 제이슨 로그라는… 작가예요?" 이번에는 제이슨이 말없이 끄덕일 차례였다. "하지만 그럴 수가. 당신은 프로 갬블러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이길 까닭이 없어요." "솜씨 좋은 프로 갬블러한테서 3 개월간 배웠어. 게다가 나 자신도 훨씬 전부터 포커를 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어째서 갬블러인 체만 하고 있었죠?" "일을 하기 위한 준비였어. 얼마 전부터 프로 갬블러를 주인공으로 해서 책을 써보려고 여러 가지 구상을 하고 있었는데 기왕이면 내 자신이 경험해 보기로 한 거지." "그러면 일부러 나를 속인 거로군요?" 온통 머리가 멍해져서 제이슨에게서 떨어지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무서운 얼굴로 눈을 흘겼다. "왜죠!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잖아요?" "한 번의 경험으로 아주 싫증이 나 있었어. 그 여자와 교제를 시작했을 때, 그 여자는 내게 이런 바보같은 짓은 그만두고 착실한 일을 찾으라고 계속 졸라서. 내 말을 이해 못하는구나 생각이 되어 결국 헤어지고 말았어, 키트. 나는 네가 나라는 인간을 사랑하고 신뢰해 주기를 바랐던 거야. 내 직업과는 관계없이 말야." "어머, 결국 당신은 나를 시험하고 있었군요. 그럼 조금만 더 했으면 난 낙제하고 말 뻔했네요." 캐더린은 얼굴에서 노여움이 사라지고 오히려 자기가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잘 되었어. 결국 여기에 와주었잖아. 나야말로 사과해야지. 미안했어, 키트." "하나만 더 가르쳐 주세요. 만약 내가 오늘 아침에 볼티모어로 떠나 버렸다면 당신은 그것으로 끝장내려고 했었어요?" 제이슨은 부드러운 웃음을 냈다.


"아니, 무엇이든지 이유를 찾아서 볼티모어의 너의 집을 방문했겠지. 너를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걱정 마세요, 이제는 결코 떠나지 않아요." 제이슨의 대답에 만족하고 어깨에 손을 얹어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사랑하고 있어요, 제이슨." "프로포즈를 승낙한다는 의미냐, 키트?" "네에." 속삭이며 얼굴을 붉혔다. 꼭 잡은 제이슨의 손에 힘을 가하며 오랫동안 캐더린은 놓지 않았다. 두 사람의 생각이 더 이상 억제할 수 없을 만큼 높아지자 제이슨은 타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결혼할 때까지 여기서 함께 살고 싶다면 승낙할 수 있겠니? 나를 신뢰할 수 있어?" "네, 절대로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잘 되었어. 그러나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을 거야. 우리들은 네바다에 있으니까. 언제든지 결혼할 수 있어. 오늘밤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지. 지금 바로라면 너무 이른가?" "오늘밤까지 기디릴 수 없을 것 같아오." 자기 말의 대담성에 놀라서 얼굴이 확 붉어졌다. "흐흠, 상당히 맘에 드는 대답이야. 상으로 멋진 허니문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선물로 줄게." 부드러운 귀에 대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이제 갬블러는 그만 해야겠어. 포커보다 더 재미있고 즐거운 나날들을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그 방법들을 생각해야 될 것 같으니까." 캐더린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품에 안기어 행복한 듯이…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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