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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월의 신부 Country bride 데비 매컴버 Debbie Macomber (도시에서 온 신부 후속편) 클레이와 로리의 결혼식이 있던 날, 케이트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즉흥적으로 루크에게 청혼을 해버렸다. 그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루크는 그녀에겐 자신이 필요하다며 결혼을 고집한다. 게다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클레이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고 말한다. 케이트는 루크가 동정심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고 거절하지만, 온 마을에 그와의 결혼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심지어는 결혼 날짜를 놓고 내기까지 거는데….

1 「두 사람이 남편과 아내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오르간의 연주 소리가 오리건의 나이팅게일에 있는 커다란 교회에 은은히 울려퍼지자 흥분한 하객들 사이에선 행복을 비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성찬대 앞에 서서 클레이 프랭클린은 그의 신부인 로리 캠벌 프랭클린에게 키스할 권리를 요구했다. 케이트 로건은 친구들을 의식해서 기쁜 표정을 짓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거대한 주먹이 복부를 강타하는 느낌이었다. 눈동자에 눈물이 고여서 그녀는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가장 사랑했던 남자가 새신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클레이는 나와 결혼했어야 해. 케이트는 말없이 절규하고 있었다. 저토록 부드러운 클레이의 시선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란 말이야! 지난 몇 주 동안 그녀는 클레이와 로리를 결합시키기 위해 물러나 있었다. 결국 그건 잘한 일이었다고 수없이 다짐해 보았지만 그 사실이 그녀의 고통을 줄여 주진 못했다. 그녀는 클레이를 사랑했다. 그 사실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다. 그는 케이트의 가장 믿음직한 친구였다. 그런데 이제 클레이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다. 케이트보다 훨씬 더 좋아하는 여자와 평생 함께 살아가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아버지 밑에서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는 루크 리버스가 하얀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는 마치 케이트가 눈물을 흘리게 될 걸 미리 예상하고 손수건을 준비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머리를 흔들어서 거부의 뜻을 표시했다. 「내가 여기 있어」 그가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나이팅게일의 절반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어요」 루크는 그녀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단단히 결심을 한 것 같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위엄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루크의 노골적인 동정 때문에 애써 침착하게 행동하려는 그녀의 태도가 무너지려 하고 있다. 「아주 잘 해내고 있어」 「루크, 제발 날 가만히 좀 놔둬요」 그녀는 예식이 끝날 때까지 흐트러짐 없는 태도를 보이고 싶었다. 때문에 루크가 쏟는 관심도 부담스럽고 거북하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닉한 것은 바로 케이트가 클레이와 로리를 묶어준 장본인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들의 결합을 자랑스럽고 흐뭇하게 받아들여야 할 텐데,


지금 그녀가 느끼는 감정을 깊은 상실감뿐이다. 로리와 클레이가 중앙 통로로 걸어나오고 있다. 케이트는 간신히 고개를 쳐들고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순간 로크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 주었다. 그러나 그의 세심한 배려도 그녀에겐 전혀 위안이 되지 못했다. 「피로연 장소까지 내가 데려다 줄게」 루크가 케이트의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난 혼자서도 충분히 갈 수 있어요」 케이트는 더 이상 그의 동정을 받고 싶지 않았다. 결국 맨 앞자리에 앉은 그들은 맨 먼저 피로연 장소로 안내를 받는 입장이 되었다. 케이트는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서 친구들을 향해 애써 명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튼 최선을 다한 셈이다. 그 점은 자신해도 좋았다. 케이트의 긴 금발은 부드럽게 웨이브져서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 헤어 스타일은 특히 그녀의 푸른 눈동자와 예리한 광대뼈를 강조해 주었다. 그리고 오늘의 결혼식을 위해 아름다운 드레스도 준비했다. 비록 단순한 디자인이긴 하지만 우아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내고 있으며, 그녀의 가는 허리와 호리호리한 몸매를 더욱 강조해 주었다. 케이트는 교회 현관에 멈춰서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데빈은 미망인 도러시아 머피와 함께 앉아 있었다. 그 여인에 대한 아버지의 관심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다. 키가 크고 솔직한 성품의 그 여자는 이미 고인이 된 케이트의 어머니와는 전혀 다른 유형이다. 케이트는 도러시아의 어떤 점이 그토록 아버지를 끌리게 하는지 궁금했다. 두 사람은 최근 몇 주 동안 자주 만났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케이트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케이트는 재빨리 두 사람에 대한 생각을 밀쳐버렸다. 지금은 클레이를 잃은 것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에 휩싸여 있지 않은가? 「우리 공주님, 괜찮겠어?」 데빈이 곁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이제 모두들 나에 관한 걱정을 거둬 줬으면 좋겠어요. 난 괜찮아요」 그건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케이트는 사람들의 관심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최소한 몇 시간 동안만이라도 그러고 싶다. 데빈이 그녀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너에겐 몹시 힘든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단다. 피로연정으로 가겠니? 아니면 곧장 집으로 돌아갈 거니?」 아버지의 시선은 따듯하고 연민에 가득 차 있었다. 순간 케이트는 아버지에 대한 강한 사랑을 느꼈다. 관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버지의 따뜻한 관심이 너무나 고마웠다. 「케이트는 나와 함께 피로연에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로크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케이트는 감히 그의 말을 부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분노가 치솟았다. 도움을 주기는커녕 루크는 상황을 점점 나쁘게 만들고 있다. 클레이의 삶이 다른 여자와 묶여지는 광경을 계속 지켜봐야 하는 건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될 것이다. 「잘됐구나」 데빈 로건이 안도의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는 도러시아의 굵은 허리를 끌어안으며 미소지었다. 「머피 부인이 나와 동행해 달라고 부탁했어」 그는 케이트의 손을 놓고 그녀의 뺨에 키스한 다음 사라져 버렸다. 「우리도 갈까?」 로크가 활짝 웃으며 케이트의 팔짱을 꼈다. 마치 몇 년 동안 교제해 온 연인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그는 케이트를 교회에서 데리고 나왔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면 바로 피로연장이 있다. 케이트는 루트에겐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클레이와 그의 신부를 대하게 될 상황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피로연장이 가까워 올수록 그녀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로리는 그녀에게 신부 들러리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 제의를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케이트는 거절하고 말았다. 로리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고 더 이상 강요하진 않았다. 두 여자는 같은 남자를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아주 사이가 좋은 편이다. 사실 케이트에겐 로리와의 우정 때문에 한층 더 힘이 들었다. 낡은 벽돌 건물까지 다가갔을 대 케이트의 가슴은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피로연장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그녀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난 들어갈 수가 없어요」 공포감 같은 게 몰려와서 그녀의 나직한 음성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도저히 그들을 마주 대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럴 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 「당신이 어떻게 그걸 자신할 수 있죠?‘ 그대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리고 싶다. 지난 몇 시간의 상황이 그녀에겐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다. 이제 더 이상 그 고문을 참아낼 자신이 없어졌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는 루크의 표정엔 강한 연민이 담겨 있다. 「당신은 들어갈 수 있어」 케이트는 그의 진지한 눈빛에 담긴 결의 같은 걸 봤다. 그녀는 서서히 분노의 감정을 삼켜 버렸다. 그의 말이 옳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182cm 의 커다란 키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만약 당신이 피로연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나이팅게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쑥덕거릴 거야. 설마 그렇게 되길 원하는 건 아니겠지?」 「상관없어요」 절망감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건 당연히 그녀 자신이 극복해야 할 몫이다. 「그래요」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을 인정하면서도 비참한 느낌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케이트, 난 당신을 위해서 이곳에 온 거야. 그러니 단 한번만이라도 나에게 의지해 봐. 제발 당신을 도울 수 있게 해줘」 「난 잘 해낼 거예요. 난…」 하지만 그는 케이트의 말을 막아 버렸다. 「나와 싸우려고 하지 마. 난 당신 친구야」 그의 말이 뜻밖의 힘이 되어 주었다. 케이트는 그의 팔을 꼭 움켜쥐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제발 내 앞에서 잘난 척하지 말아요.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어도 그건 참아 주기가 힘들어요」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그녀는 모든 인내력을 발휘해서 이성을 지켰다. 그러나 이젠 곁에 누가 있어 줘야 할 것 같다. 지구가 흔들릴 때마다 기댈 수 있는 어떤 사람이…. 「공주님의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아까는 반대했지만 이젠 루크의 존재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아주 먼곳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아직은 그녀 자신의 고통이 너무도 생생해서 그의 부드러운 배려에 응답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루크의 존재로 인해 그녀는 남은 시간들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느꼈다. 「아빠만 나를 공주님이라고 불렀어요」 「신경에 거슬려?」 「잘 모르겠어요…. 괜찮은 것 같기도 해요」 「좋아」 그가 케이트의 손을 움켜쥐고 환하게 장식된 피로연장으로 안내했다. 그 다음 30 분 동안은 몽롱하게 흘러가 버렸다. 그녀는 루크의 말없는 격려를 받으며 클레이가 있는 곳까지 다가갔다. 무릎이 떨렸지만 그녀는 애써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분은 엉망이었지만 케이트는 애써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클레이와


로리의 행복을 빌어 주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그녀의 손을 붙잡고 둥근 테이블로 다가가는 동안 루크는 그녀의 고통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손은 고통을 숨기려는 노력으로 인해 땀에 축축히 젖어 있었다. 케이트는 루크의 곁에 앉아서 신랑과 신부가 첫 번째 자른 케이크를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광경은 마치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케이트는 모든 감정을 배제한 채 그대로 앉아 있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먹을 것 좀 갖다 줄까?」 루크가 물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 그녀는 하트 모양의 결혼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싫어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 게 언제였지?」 케이트는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아마 아침식사일 거예요」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 건 어제 저녁이다. 이처럼 몸이 떨리는 것도 심한 허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내가 결혼 케이크를 좀 갖다 줄게」 케이트는 거절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그는 어느새 저만큼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케이트의 좌절감이 얼마나 극심한지 전혀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그를 바라보던 케이트의 시선이 갑자기 빛나기 시작했다. 루크 리버스는 거의 10 년 동안이나 <서클 엘>에서 일해왔지만 그녀는 그의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그의 공식 직함은 관리인이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의 일을 해내고 있다. 그는 몇 가지 성공적인 소의 사육법을 고안해냈고 처음부터 그녀의 부친과 동업 형태로 사업을 이끌어 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루크가 그곳에서 안주하긴 아까운 사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서클 엘>에 몸담고 있다. 그런데도 그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이 케이트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케이트에겐 그는 항상 평범한 인물이었다. 언제나 그를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에 대해 알고 잇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느새 루크가 다가와 곁에 앉는 바람에 그녀의 생각들은 흩어지고 말았다. 근ㄴ 치즈와 여러 가지 견과로 가득 찬 접시를 그녀에게 밀쳐 놓았다. 「난 당신이 케이크를 가져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의 접시엔 커다란 케이크가 담겨 있었다. 「당신에게 단백질이 든 음식을 갖다 줘야겠다고 생각했지. 빈 속에 단 게 들어가면 좋지 않거든」 「단신은 믿을 수가 없군요」 그의 오만한 태도에 한층 화가 끓어오른다. 「처음엔 싫다는데도 케이크를 갖다 주겠다고 고집을 피우더니 막상 그게 먹고 싶어지니까 이젠 단걸 먹는 게 좋지 않단 말인가요?」 루크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포크를 케이크에 밀어 넣었다. 「방금 전에 당신은 분명히 케이크를 먹고 싶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어」 「식욕 같은 건 금방 달라질 수도 있어요」 그가 미소지었다. 케이트를 약올리는 게 재미있다는 표정이다. 「당신은 단것이 몹시 먹고 싶은 모양이군」 이런 식으로 나를 돕겠다니…. 그는 차라리 싸움을 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 위가 어떤 음식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군요. 루크 리버스, 당신에게 정말 놀랐어요. 당신이 내 몸의 생리적용에 대해서 그토록 자세히 알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공주님, 내가 공주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털어놓으면 몹시 놀라실 겁니다」 케이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날 그렇게 부르는 건 별로 기분 좋지 않아요. 난 당신의 공주님이 아니에요. 난 어린 소녀가 아니라 성숙한 여자예요」 「아가씨, 내게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어. 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자, 앉아」 그가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나에겐 서 있을 권리도 없나요?」 「그렇다면 마음대로 해」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의자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 마치 분풀이라도 하듯 견과류를 힘주어 깨물어댔다. 루크는 접시를 밀쳐 놓고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난 당신 친구야. 여태까지도 그랬고 앞으로 내가 살아 있는 한 당신 친구로 남아 있게 될 거야. 그걸 의심해선 안돼」 케이트의 눈동자가 흐려지며 고통으로 목이 꽉 막혀 왔다. 「알아요. 하지만 견디기가 힘들어서 그래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어요…」 클레이와 로리가 서로 샼페인 잔을 들고 건배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플루트의 선율이 방안 가득 흘러넘쳤다. 케이트는 잔을 양손으로 감싸쥐었다. 바이올린의 선율이 흐르자 클레이가 신부에게 춤을 청했다. 그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동안 케이트의 가는 어깨엔 견디기 힘든 고통의 무게가 가해지고 있었다. 시선을 돌리자 루크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녀는 눈물 고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얼른 고개를 숙여 버렸다. 점차 많은 쌍들이 클레이와 로리 곁에 몰려들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주로 신랑 신부의 들러리들이다. 루크가 일어서서 케이트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춤을 추자고 요구하고 있었다. 케이트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와 승강이를 할 기력조차 없었다. 차라리 그의 요구에 따르는 게 훨씬 쉬울 것 같았다. 루크는 아주 능숙하게 그녀를 리드해 갔다. 「이제 곧 괜찮아질 거야」 그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속삭였다. 케이트는 그의 관심에 감사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녀는 루크와 수없이 춤을 추었다. 그런데 오늘은 전혀 뜻밖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의 품에 안겼을 때 그의 손가락이 등에 펼쳐졌고 그 순간 전혀 예기치 않았던 떨림이 그녀의 척추에 퍼져갔다. 그 순간 케이트는 심한 혼란에 빠져 버렸다. 그녀의 스텝이 불안정하게 흔들리자 루크는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곧 그들의 몸은 아주 가까이 밀착되었고, 케이트는 루크의 심장이 뛰고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심장이 점차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역시 케이트와 똑같이 흥분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였다. 루크의 품은 아주 따뜻하고 안전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세계가 갑자기 그 축에서 탈선해 버렸을 때 마음놓고 의지할 수 있는 견고한 기둥과도 같았다. 이기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지금 케이트에겐 그 따뜻함과 견고함이 필요했다. 그를 바라보고 미소지으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음악이 실어다 주는 따뜻한 감각에 굴복해 버렸다. 「케이트, <서클 엘>에 대해 당신에게 할 얘기가 있어」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눌러 버렸다. 지금 이 기분을 깨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손으로 그의 목을 감싸안은 채 그의 턱을 올려다보았다. 남자답고 강인한 인상이다. 「좋아」 그가 속삭였다.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지」 그들은 계속 춤을 추었다. 루크는 그녀의 머리칼에 얼굴을 문질렀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만족스런 고양이처럼 케이트는 부드러운 신음소리를 냈다. 음악이 끝나자 그녀는 마지못해 팔을 풀고 그에게서 한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말없이 떨어져 서 있었다. 다시 음악이 시작되었을 때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갈 명분을 주기 위함이다. 그러나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을 때 케이트는 모든 걸 정확하게 인식하려고 애썼다. 난 클레이를 몹시 사랑하고 있어. 루크는 오늘밤 날 도우려는 것뿐이야. 이처럼 감각적인 느낌을 갖게 되는 건 옳지 못해.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사려깊고 부드러운 루크가 필요하다는 사실…, 케이트에겐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들은 한동안 그 따뜻한 감각에 취해 있었다. 그러나 밴드가 10 분 동안 휴식을 취하게 되었을 때 로크는 마지못해하며 그녀를 놓아 주었다. 그러나 그녀와 떨어지기 싫은 듯 케이트의 부드러운 손을 붙잡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렇게 테이블까지 왔을 때 갑자기 베티 해먼드가 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안녕, 루크」 그녀는 케이트를 무시한 채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베티」 그가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침입을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이 완연하다. 그 여자는 루크의 팔을 붙잡았다. 「나와 춤추겠다고 약속한 것 기억해요?」 케이트는 뾰로통한 베티의 표정에서 얼른 시선을 돌려 루크를 바라보았다. 그는 화가 잔뜩 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괜찮다면 난 마실 걸 가져와야겠어요」 케이트는 급히 말하며 그 자리를 피했다. 다시 음악이 시작되고 베티가 루크와 함께 걸어나가는 걸 보며 케이트는 새삼스럽게 짙은 외로움을 느꼈다. 과일 음료는 아주 시원했지만 여전히 열기가 식지 않은 느낌이다. 케이트는 밖에 나가서 시원한 공기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루크와의 사이에 어떤 느낌이 오갔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건 틀림없는 혼란된 정신 상태 때문이었을 것이다. 검은 하늘에 별들이 마치 뿌연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있다. 케이트는 팔짱을 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루크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당신을 찾으러 나왔어」 그의 음성이 약간 나무라는 것처럼 들렸다. 케이트는 베티 해먼드 문제로 왈가왈부하고 싶진 않았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 그 아가씨는 여태껏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무진 애를 써왔다. 「오늘밤은 아주 아름답군요, 그렇죠?」 그리고 케이트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몸을 기댔다. 그의 따스함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워」 그가 손으로 그녀의 팔을 쓸어내며 말했다. 루크와 함께 있으면 끝없이 편안하고 만족스럽다. 20 년 동안이나 결혼생활을 해온 부부들 사이에서 느끼는 그런 안락함…. 하지만 그 느낌 뒤에 솟구치는 야릇한 흥분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건 샴페인 탓일 거야. 밴드가 다시 감미로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루크는 부드럽게 그녀를 돌려세워


손으로 감싸안았다. 마치 춤을 추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팔도 자연스럽게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우린 얘기를 해야 해」 그가 케이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안돼요」 그녀는 한숨소리와 함께 웅얼거렸다. 루크의 품에 안겨 있는 건 마치 긴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느낌과 흡사하다. 발꿈치를 들고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하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런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얼른 그에게서 물러섰다. 한동안 말을 하지 않은 채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했다. 창문을 통해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다. 그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케이트의 이성이 그를 저지시켜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따뜻한 입술에 케이트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리고 입에선 달콤한 한숨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녀는 한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꿈 속의 세계로 던져진 느낌이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녀는 자신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하지만 이건 엄연한 현실이다. 루크의 키스는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그는 마치 그녀가 가장 섬세하게 빚어진 도자기이기라도 한 것처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다. 「귀여운 케이트」 그가 그녀의 머리칼에 고개를 파묻고 숨을 몰아쉬었다. 「난 이 순간을 꿈꾸어 왔어」 「정말이에요?」 그녀의 귀에도 자신의 음성이 아주 먼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들렸다.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이게 꿈이라면 영원히 그치지 말았으면….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그를 향해 미소지었다. 그는 케이트의 이마와 뺨에 키스한 다음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 역시 케이트처럼 키스를 절실히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코 서두르진 않았다. 마치 서두르면 모든 게 부서져 버릴 것 같아서 두려운 것처럼…. 케이트의 입술이 부드럽게 열렸다. 「케이트?」 그가 여전히 그녀를 끌어안은 채 내려다보았다. 케이트는 장난기가 가득한 눈동자로 대담하게 그의 시선을 응시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그가 사려깊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들어가는 게 좋겠어」 「싫어요」 신혼부부가 있는 피로연장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난 안 들어가겠어요」 「하지만…」 「나와 함께 이곳에 있어 줘요. 나와 춤을 추고 나를 안아 줘요」 그는 나를 보살펴 주고 싶다고 했어. 그렇다면 난 지금 그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셈이야. 그녀는 그에게 몸을 기댄 채 그의 강인함과 따뜻함을 음미했다. 루크 리버스…. 그는 가장 믿음직스런 친구니까 모든 걸 이해할 거야. 오늘밤이 나에겐 가장 힘든 시간이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을 거야. 「난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당신이 무슨 부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그가 한동안 케이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다음 차가운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난 당신과 키스하고 싶어요. 당신의 키스는 아주 감미로웠어요」 그녀는 입술을 축이고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거친 심장소리가 흥분과 떨림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그러나 내부에서 일고 있는 두려움도 그를 밀쳐낼 만큼 강렬한 건 아니었다. 그녀의 말이 그에겐 자극제가 된 것 같다. 그는 아주 격렬한 키스를 퍼부어댔다. 잠시 후 그가 키스를 끝내고 얼굴을 들었을 때 케이트의 관자놀이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루크의 표정엔 충격을 받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눈동자가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하지만 케이트의 사고는 거친 바람 앞의 낙엽처럼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샴페인을 얼마나 마신 거야?」 그가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한 잔…」 그녀는 루크의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대답했다. 루크에게 보살핌을 받는다는 게 이처럼 근사한 일인 줄은 몰랐다. 그걸 알았다면 좀더 일찍 실연의 아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루크가 거친 숨을 토해냈다. 「천만에! 한 잔만 나신 게 아냐. 당신은 지금 내가 누구인지도 확실히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여」 「난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당신은 루크예요. 그러니 더 이상 날 조롱하지 말아요. 다만…」 「다만 뭐지?」 「단지 당신은 전엔 한번도 이런 식의 키스를 하지 않았어요. 왜 이 방면에 이처럼 경험이 많다는 걸 미리 말하지 않았나요?」 케이트는 자신의 질문이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당신을 집에 데려다 줄게」 루크가 단호한 어조로 말하며 그녀의 팔꿈치를 움켜쥐었다. 「루크, 난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케이트가 큰소리로 외쳐댔다. 그러자 그의 손이 금방 느슨해졌다. 「케이트 로건, 당신은 취했어! 그런데도 당신은 그걸 모르고 있어!」 「난 절대로 취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검지손가락을 그를 향해 흔들어댔다. 「샴페인 한 잔에 취할 내가 아니에요!」 「난 이곳에 있고 싶어요」 그녀가 항의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케이트는 갑자기 그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는 나를 빨리 보낸 다음 베티에게 돌아가고 싶은 건지도 몰라. 「루크?」 「케이트, 제발, 더 이상 따지지 말아 줘」 「베티를 사랑하고 있어요?」 「아니」 그이 대답엔 화가 난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 다행이군요」 케이트는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만약 당신이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했다면 난 참지 못했을 거예요」 루크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그들은 그의 트럭 앞에 멈춰서 있었다. 그가 케이트에게 차의 문을 열어줬지만 그녀는 타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아직은 떠나고 싶지 않다. 좀더 루크와 함께 있고 싶다. 지난 몇 주 동안 쌓여 왔던 고통이 그의 품안에 안긴 순간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리지 않았던가. 「다시 키스해 줘요」 「케이트, 안돼!」 「제발…」 「케이트, 당신은 취했어」 「난 취하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그래, 난 지금 샴페인 한 잔에 약간 마음이 해이해진 상태일 뿐이야. 그러니 새로 싹튼 감정에 자신을 내맡긴다고 해도 그걸 방종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야. 결혼식장에 도착한 순간부터 그는 나에게 자신이 필요할 거라고 누차에 걸쳐 강조했잖은가.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루크의 존재는 너무나 따뜻하고 확실하게


다가오고 있다. 「당신을 집에까지 태워다 줄게」 그가 고집을 피웠다. 그의 음성으로 봐서 그는 점점 좌절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집은 춥고 어두울 것이다. 케이트는 혼자 있는 게 끔찍하게도 싫었다. 클레이가 떠난 이후로 그녀의 인생엔 아버지뿐이다. 그리고 루크가 있다. 만약 아버지가 머피 부인과 결혼을 결심하게 되면 목장을 팔아 버릴 테고 루크도 떠날 것이다. 그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케이트는 그의 어깨에다 손을 얹고 그를 응시했다. 「케이트?」 루크가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좋아요. 난 짐으로 돌아가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케이트, 제발 이성을 찾아」 「당신에게 부탁할 게 있어요. 당신은 여태껏 날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나의 친구라고 말한 것도 당신이에요」 「그럼 제발 트럭에 올라타. 다른 사람들이 보면 우리가 다투고 있다고 생각할 거야」 「우선 당신의 약속을 받아야겠어요」 그러나 루크는 그녀를 무시해 버렸다. 「당신은 아주 좋은 평판을 받고 있어. 그러니 케이트, 나이팅게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취해서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여선 안돼. 학교 이사회에서 알면 당신의 경력은 끝장이 나고 말아」 케이트는 머리를 흔들며 미소지었다. 그런 다음 충동적으로 그에게 다가가 다시 키스했다. 루크와 함께 있으면 고통을 잊을 수가 있다. 이제 다시는 그 고통 속에 빠지고 싶지 않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줄래요?」 「좋아. 그게 뭐지?」 「오, 좋아요」 그녀가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겐 충격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 자신이 받은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아이디어는 아주 갑작스럽게 튀어나왔다. 케이트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이고 있다. 「그건 아주 간단한 거예요. 내가 원하는 건 나와 결혼해 달라는 거예요」

2

다음날 아침 일직 데빈 로건은 케이트가 커피를 마시고 있는 주방으로 급히 걸어들어왔다.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빠, 안녕히 주무셨어요?」 「안녕, 공주님」 그는 테이블을 두 바퀴 돈 다음 자리에 앉았다. 케이트는 호기심 어린 눈길로 아버지를 바라본 다음 자���에서 일어나 커피를 한 잔 따라서 아버지에게 건넸다. 그건 몇 년 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그녀의 습관처럼 되어 버린 일이다. 「어젯밤엔 머피 아줌마와 즐거우셨어요?」 케이트는 아버지가 자신과 루크 리버스에 대해 떠도는 소문에 대해서 언급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아직 루크를 만나진 못했지만 곧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 순간을 대비하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만 한다. 어젯밤에 그에게 프로포즈를 했던 걸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하다. 이제 루크는 그 문제로 두고두고 날 괴롭히려 할 거야. 「비가 올 것 같구나」 데빈이 중얼거렸다.


아버지의 기분이 아무래도 오늘은 좀 이상한 것 같다. 케이트는 활짝 웃으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난 어젯밤에 대해서 묻고 있는 거예요. 날씨에 대해서 물었던 게 아니에요」 데빈의 눈동자에 잠시 불꽃이 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다시 뜨거운 커피 잔에 보아졌다. 「아빠? 머피 아줌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어요?」 「물론 아주 근사한 시간을 보냈단다」 그는 정열적인 어조로 대꾸했다. 누구보다 아버지를 잘 알고 있는 케이트는 그의 기분이 달아오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커피에 설탕을 세 스푼이나 넣고는 힘차게 커피를 저어댔다. 그런 다음 한동안 말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케이트는 아버지의 유별난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빠」 그녀는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실내에 흩어졌던 그의 시선이 마지못한 듯이 케이트에게 모아졌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냐?」 「아빤 커피에 설탕을 세 스푼이나 넣으셨어요. 지난 40 년 동안 아빠는 설탕을 넣지 않고 커피를 드셨잖아요?」 그가 깜짝 놀란 시선으로 커피 잔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그랬니?」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그랬었구나. 사실 요즘 난 단맛에 맛을 들인 것 같아」 클레이와 로리의 피로연장에서 특별한 경험을 한 건 케이트만이 아닌 게 분명하다. 아버지의 경험도 그녀의 것 못지않게 엄청난 것이 틀림없다. 「아빠, 더 이상 변죽만 울리지 말고 무슨 일인지 털어놓으세요」 다시 한번 그는 시선을 떨구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러시아와 난…, 어젯밤 많은 얘기를 나눴단다」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어갔다. 「그건 정말 우연하게 시작됐지. 아마 결혼식과 신랑 신부 주변의 들뜬 분위기가 우리에게 그럴 듯한 빌미를 제공한 것 같아」 그는 다시 커피를 한모금 마시며 한동안 뜸을 들였다. 「넬리 잭슨이 도러시아와 내게 다가와 우리가 아주 근사한 한쌍이라고 말한 다음부터 우린 진지한 어조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단다」 「그랬군요」 케이트가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아빠가 엄마와 닮은 여자와 교제하기를 바랐지만 머피 부인은 아주 상냥한 여성이다. 그래서 케이트도 그녀를 좋아했다. 아버지가 짧게 미소지었다. 「그때 샴페인이 전달됐고 도러시아와 나도 샴페인을 받았단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케이트를 바라보며 웃었다. 마치 모든 설명이 끝났다는 듯한 표정이다. 「계속해 보세요」 케이트가 미소를 숨긴 채 채근했다. 데빈은 천천히 몸을 세웠다. 그리고 전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너도 알다시피 난 네 엄마를 사랑했단다. 노라가 죽었을 때 난 그녀 없이는 못 살 것 같았지. 하지만 너와 난 이렇게 살아오지 않았니?」 「그래요, 아빠」 이제 케이트는 그 대화가 어떤 곳을 향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사실이 크게 놀라운 건 아니다. 그러나 케이트의 가슴은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할 말을 너무나 정확히 알고 있다. 아버지는 도러시아 머피와 결혼을 하려는 것이다. 「너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5 년이 되어가고 있어. 남자란 유난히


외로움을 잘 타는 법이지. 난 여행을 해볼까 생각중이었단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혼자서 여행을 하고 싶지가 않구나」 「아빠, 좀더 미리 그 말씀을 하시지 그랬어요.? 사실 나도 아빠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었어요. 아직도 가능해요. 학교 교사가 좋은 게 바로 그런 점이죠. 여름엔 방학을 이용해서 마음 놓고 떠날 수가 있거든요. 루크에게 목장을 맡기면 될 테니까 아빠도 홀가분하게 떠날 수가 있을 거예요. 그리고…」 「공주야」 그의 스푼이 세라믹 잔에 부딪쳐 거친 소음을 냈지만 그는 거의 개의치 않았다. 「난 어젯밤에 도러시아에게 청혼을 했단다. 그녀도 기꺼이 승낙해 줬어」 잠시 머뭇거리다가 케이트는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빠, 정말 잘하셨어요」 「물론 너에겐 몹시 힘든 일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단다. 클레이가 결혼식을 올린 직후에 나까지 재혼을 하면 너의 외로움이 더해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결코 널 버리는 게 아니란다. 넌 언제까지나 나의 어린 소녀로 남아 있게 될 거야」 「물론 아빤 날 버리시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가슴속에선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아빠를 위해서 정말 기쁜 일이에요」 그건 진심이었다. 그러나 케이트는 허전한 상실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서적인 지주가 그대로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데빈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또 다른 변화가 있게 될 것 같구나. 난 목장을 팔 생각이야」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이제 모든 두려움이 현실로 드러나 버렸다. 클레이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고 이제 아빠마저 잃게 됐다. 게다가 집마저도 잃어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상실감이 그녀를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목장이 팔리면 루크도 떠나게 될 텐데…. 클레이, 아빠, 서클 엘, 루크…, 내가 사랑하는 모두가 시간과 함께 사라져갈 거야. 그녀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터져나오려는 울음소리를 억지로 참았다. 「하지만 네가 혼자 살아가는 건 원치 않는단다」 아버지가 황급히 덧붙였다. 「넌 계속 나와 함께 살게 될 거야. 도러시아와 난 그 문제에 대해 많이 얘기했단다. 우린 둘 다 네가 우리와 함께 시내에서 살아 주길 바라고 있어. 넌 항상 나의 공주님으로 남아 있어야 해. 도러시아도 그 문제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단다」 「아빠」 케이트는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토해내고 있었다. 「그건 우스운 일이에요. 난 24 살이에요. 이제 충분히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는 나이예요」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그녀는 손을 들어 아빠의 말을 저지했다. 「더이상 그 문제로 왈가왈부할 건 없어요. 아빠와 도러시아가 결혼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 무척 기쁘게 생각해요. 그리고 가능한한 빨리 이사를 하겠어요」 데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자신의 계획을 의외로 쉽게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크게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공주야」 그는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그의 미소는 7 월의 태양처럼 찬란했다. 「난 정말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구나. 솔직히 말해서 네가 화를 낼까 봐 몹시 걱정했단다」 「오, 아빠…」 여전히 활짝 웃으며 데빈은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도러시아는 너의 엄마와는 좀 다른 여자야. 너도 그걸 알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사실 처음에 그녀와 만났던 건 그녀가 복숭아 파이를 먹으라고 초대를 했기 때문이었지. 그 후로 난 시내에 나갈 구실을 찾기 시작했단다. 그건 분명히 복숭아 파이 때문은 아니었어」 잠시 후 아버지는 그녀의 뺨에 키스를 한 다음 집을 나섰다. 아버지는 오후 늦게나


되어야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떠난 후에 케이트는 조리대에 기댄 채 커피 한 잔을 더 마셨다. 여태껏 잘 짜여진 생활 속에 갑작스레 다가온 모든 변화들을 태연하게 받아들이기가 좀 어려웠다. 갑자기 자신의 인생이 뿌리채 뽑혀나가는 느낌이다. 이방 저방을 아무 목적도 없이 서성거리다가 그녀는 문득 어머니의 사진 앞에 섰다. 사진을 들어 가슴에 껴안는 순간 눈물이 쉴새없이 솟아났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새삼스럽게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노라의 자리를 다른 여자로 채우려는 아버지에 대해서 화가 났다. 그러나 아버지의 새로운 행복을 시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케이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 갑작스런 변화를 받아들이는 게 두렵고 불안하다. 그때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케이트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아 버렸다.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서다. 틀림없이 루크일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와 마주치고 싶지가 않다. 「케이트?」 떨리는 손으로 빛 바랜 사진을 제자리에 놓고 눈물을 훔쳤다. 「안녕, 루크」 그녀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며 주방으로 들어섰다. 루크는 찬장 쪽으로 걸어가서 잔을 꺼냈다. 「당신 아버지가 머피와 재혼한다는 얘기를 해주셨지」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당신 괜찮겠어?」 「물론이에요. 아빠를 위해서 아주 잘된 일이에요. 안 그래요?」 「당신 아버지를 위해선 그렇겠지. 하지만 당신에겐 충격적인 일일 거야. 더구나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인데…」 「클레이와 로리의 결혼 말인가요?」 그녀는 커피 포트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 자기가 마실 커피를 채웠다. 「곧 괜찮아질 거예요」 그러나 케이트는 그 말이 과연 루크에 대한 인사치레인지, 아니며 자기 자신을 위한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아빠가 도러시아와 재혼하게 되면 필수적으로 몇 가지 변화가 올 거예요. 하지만 난 잘 적응해 갈 거예요」 「난 당신 아버지가 이번처럼 행복해하시는 건 처음 봤어」 갑자기 다시 공포가 몰려와 눈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케이트는 재빨리 시선을 떨구고 눈물을 감추려고 안간힘을 썼다. 「케이트?」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리고 커피를 치운 다음 떨어지는 눈물 방울을 훔치기 시작했다. 루크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케이트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려 그의 정결한 셔츠에 얼굴을 묻었다. 간헐적인 흐느낌과 이따금씩 희미한 한숨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런 식으로 그의 앞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게 몹시 당혹스러웠다. 「실컷 울어」 그가 부드럽게 속삭이며 그녀의 어깨를 쓸어 주었다. 「그리고는 모두 지워 버리는 거야」 그녀는 자신이 허약한 병자와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순간 그녀에겐 루크가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그는 너무도 견고하고 강인해서 케이트는 자신이 마치 성난 파도에 내던져진 조각배가 된 듯한 느낌이다. 그대로 폭풍이 계속 된다면 생존의 여부조차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빠가…, 아빠가 목장을 팔게 된다는 걸 알고 있나요?‘ 「그래」 그의 음성이 몹시 경직되어 있다. 「데빈이 언제 그런 얘기를 했지?」 「오늘 아침…, 머피 부인과 결혼할 거라고 말씀하신 다음이었어요」 「그 점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걱정이 돼요」 그녀가 나직하게 흐느꼈다. 그가 머리칼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어느새 케이트는 그에게 다가가서 따뜻하고 안전한 그의 품속에 안겼다. 루크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야.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에 날 보살펴 주고 있어. 그 순간 클레이와 로리의 결혼식이 언뜻 떠올랐고 이어 루크에게 청혼을 했던 사실도 기억이 났다. 갑자기 그녀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그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이 없으면 난 어떻게 해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가 케이트의 허리를 끌어안고 코끝에다 가볍게 키스했다. 그의 미소를 무척 부드러웠다. 「어젯밤엔 정말 대단한 사건이 있었어. 첫 번째는 우리, 그리고 다신 아버지와 머피 부인…」 「우리 문제에 대해선…」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리고 침착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나 그와 시선이 마주치는 건 피하고 말았다. 「내가 청혼을 한 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아 줬으면 좋겠어요」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케이트, 당신은 진지했어」 케이트는 다시 그의 품에서 벗어나 커피 잔을 들었다. 「샴페인이 너무 과했어요」 「당신은 분명히 한 잔만 마셨다고 말했어」 「그랬어요. 하지만 빈속에 술을 마신 데다가 그 결혼식 때문에 몹시 괴로웠어요. 사실 내 정신이 아니었어요」 루크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 「정말 엉망이었어요」 그녀가 억지로 웃었다. 「춤을 추고 당신에게 매달리고 키스하고…. 정말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요. 루크, 어제의 일은 잊어 주세요」 그는 더 이상 서 있기가 힘겨운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케이트는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신경은 그대로 부서질 것처럼 팽팽하게 곤두서 있었다. 그는 몇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양손으로 뜨거운 커피 잔을 감싸고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너무도 강렬해서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고 말았다. 「이봐요」 케이트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완벽한 신사예요. 그리고 당신이 날 도와준 것에 대해선 굉장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어제 내가 말한 것의 절반은 진심이 아니었어요」 그가 천천히 자신있게 미소를 지었다. 「아주 재미있는 말이로군」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한동안 루크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당황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즐기는 눈치가 역력했다. 꽤 시간이 흐른 후 그가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한 말의 절반만이 진담이었다면 어디까지가 진담이고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궁금하군」 「내가 한 말을 모두 기억하진 못해요. 하지만 결혼에 관한 부분만큼은 없었던 일로 해줬으면 고맙겠어요」 「그걸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진 않아」 「루크, 제발…」 그녀는 눈을 감으려 소리쳤다. 「난 그 일 때문에 몹시 당황하고 있어요. 제발 잊어 줘요」 루크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이제 와서 놀라서 허둥대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 케이트 자신이 수습해야 할 일이다. 「당신은 피로연에서 내게 너무나 잘해 줬어요…. 결혼식이 끝난 후 당신은 날 돕고 싶다고 했고 정말 성실하게 도와줬어요. 당신이 없었다면 클레이의 결혼식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 키���도 잊고 싶단 말이겠지?」 「그래요」 그녀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당신은 어젯밤에 아주 기쁜 표정이었어. 그 순간이 몹시 즐겁다고 말했잖아?」 「맙소사, 내가 정말 그랬단 말인가요?」 「그리고 나에게 꼭 결혼해 줘야 한다고 떼를 썼지」 케이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걸 진심이라고 믿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거예요」 「난 결코 그걸 잊을 생각이 없어. 난 항상 약속을 생명처럼 지켜왔어. 결코 약속을 깬 적이 없었지」 케이트가 신음소리를 냈다. 오늘 아침 아버지의 재혼 소식에 이어 루크마저 그녀를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다. 「한 번 농담한 걸 가지고 날 철저히 놀릴 셈이군요」 그녀가 화난 어조로 중얼거렸다. 「천만에! 언제 결혼식을 올릴 생각이지? 이제 세부적인 문제를 결정하는 게 좋겠군」 「농담이 좀 지나치군요!」 「난 몹시 지지해. 당신은 나에게 청혼을 했고 난 승낙했어. 그걸 이행하지 못한다면 신뢰를 저버리는 거야」 「그럼 난…, 당신을 그 약속의 의무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겠어요」 그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난 한번 약속한 건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정말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당신도 내가 그런 제의를 했던 게…, 순간의 열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루크가 더 깊게 얼굴을 찌푸렸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당신이 나와 결혼하는 게 순전히 홧김에 저지르는 일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떠들어대겠지. 난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아. 하지만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건 싫어」 「제발 그만두지 못해요?」 그녀가 소리쳤다. 「난 누구와도 결혼할 생각 없어요!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어요!」 이제 나의 사랑과 로맨스는 모두 끝나 버렸어. 앞으로 30 년 동안은 몇 마리의 고양이를 벗삼아 뜨개질과 더불어 살아갈 거야. 「어젯밤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루크, 그만두지 못하겠어요? 내 정신이 아니었다고 말했잖아요?」 「아무튼 우리가 결혼한다는 건 아주 좋은 생각이야. 여태껏 당신은 어려운 시련을 겪어 왔지만 결혼과 함께 그 시련도 끝나게 될 거야」 케이트는 손으로 거칠게 눈을 비벼댔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악몽을 꾸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곧 깨어날 수만 있다면…. 그러나 손을 떼었을 때 맞은편엔 여전히 루크가 앉아 있다. 「우리가 이런 일로 말다툼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이건 정말 말도 안돼요」 「케이트, 난 진지해. 이미 그걸 분명히 밝혔잖아?」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루크, 우린 절대로 결혼할 수 없어요. 내가 당신과 결혼할 수 없는 이유를 당신은 누구보다도 잘 알 거예요. 클레이 프랭클린을 그렇게 사랑했는데 당신과 결혼하다니 말도 안돼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케이트가 고개를 쳐들었다. 「뭐라구요?」 「당신은 날 사랑하고 있어. 지금까지 그걸 모르고 있었던 것뿐이야」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발상이에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루크가 충격을 주기 위해 그런 시도를 했다면 그는 성공을 거둔 셈이다. 「정말 당신을 믿을 수가 없군요」 그녀는 벌떡 일어서서 허공에다 대고 손을 저었다. 그러나 도저히 그대로 서 있을 수가 없어서 주방 안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한순간 당신은 나에게 견고한 바위처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줬어요. 그런데 다음 순간 당신은 가장 우스운 짓을 저지르고 있군요. 우리 사이엔 결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어요! 도대체 왜 그렇게 갑자기 변한 거죠?」 「그게 그렇게 나쁜 일이야?」 그가 그녀의 질문을 무시한 채 엉뚱한 질문을 했다. 「난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당신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건 틀림없이 분위기 탓이었을 거예요. 제발 샴페인 탓으로 돌리고 더 이상 우리가 상처를 입기 전에 없었던 일로 해줘요」 「시간이 흐르면 당신도 우리의 결혼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거야」 그런 다음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곧 어떤 게 최선의 방법인지를 알게 될 거야」 「난…」 그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을 막아 버렸다. 「이렇게 고집을 피우는 건 숙녀답지 못한 행동이라는 걸 잘 알고 있잖아」 그 말과 함께 그는 케이트의 허리를 끌어안아 그녀를 부드럽게 포옹했다.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항의를 하려 했지만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막아 버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파란 셔츠 깃을 붙잡았고 그녀의 의지와는 반대로 어느덧 입술은 살짝 열리고 있었다. 드디어 루크가 그녀를 풀어 주었을 때 케이트는 자신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지 않은 게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퍼져갔다. 「그래」 그는 한층 즐거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신은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어」

3

케이트는 월요일이 왔다는 게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다. 최소한 학교에 있는 동안만큼은 루크와의 대면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그는 케이트에게 책임감 같은 걸 느끼고 그 의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녀는 그와의 결혼 약속을 구체화시킬 의도가 추호도 없다. 케이트는 그가 왜 그렇게 고집스럽게 나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루크 스스로 케이트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단정지은 건 그녀가 청혼을 하고, 게다가 그의 키스에 열렬히 반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루크 리버스는 너무 경솔하게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루크의 말이 전부 틀린 건 아니다. 그녀는 정말 그를 사라했다. 하지만 그건 그가 암시하는 것과는 다른 감정이다. 그저 누이동생이 오빠에게 느끼는 감정이라고 할까? 그와 키스를 나눴을 대의 느낌은 불가사의한 것이긴 하다. 그러나 그것도 클레이의 결혼 때문에 겪은 정신적 동요라고 생각한다면 이상할 것도 없다. 결코 클레이를 사랑한 것과 같은 감정으로 루크를 사랑한 건 아니다. 케이트는 여태껏


자신이 클레이의 아내가 되는 꿈을 꾸곤 했었다. 「안녕하세요, 로건 선생님」 7 살짜리 테일러 모겐로스가 교실로 들어서며 인사를 건넸다. 「토요일 프랭클린의 결혼식에서 선생님을 봤어요」 「그랬어?」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거의 모든 마을 사람들이 그 결혼식에 참석했을 테니…, 어쩌면 그녀의 제자들도 몇 명 쯤은 참석했을 것이다. 「선생님과 함께 있었던 분이 리버스 씨죠? 엄마가 선생님과 함께 춤추는 사람이 누구냐고 아빠에게 물으셨어요. 그분이 리버스 씨 맞죠?」 「그래」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루크와 함께 춤을 춘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아이에게 뭔가 변명을 늘어놓는다면 아이는 더욱더 심한 혼란 속에 빠져들 것이다. 「아빠가 누나와 춤을 출 수 있게 해주셨어요.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곧 나이팅게일 초등학교 학생들이 교실에 몰려들었고 순식간에 빈 책상이 채워졌다. 그 순간 이후로 루크나 토요일 밤에 있었던 일 같은 건 케이트의 의식 속에서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오직 그날의 수업 계획만으로도 충분히 바빴으니까. 정오에 케이트는 점심가방을 들고 휴게실로 갔다. 벌써 몇몇 교사들이 둥그런 테이블 앞에 모여 있었다. 「케이트!」 6 학년 담임인 샐리 데일리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미소지으며 옆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케이트는 친구인 린다 휴턴에게 미안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마지못해 그 여선생 쪽으로 다가갔다. 샐리는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기로 유명한 여자다. 하지만 그녀의 손짓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우린 방금 케이트의 얘기를 하고 있었어」 샐리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우리와 함께 앉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도 기뻐요」 케이트는 자신의 거짓말에 약간 죄의식을 느꼈다. 그녀는 가방을 열고 복숭아 요구르트와 호밀빵이 담긴 그릇을 꺼냈다. 「클레이의 결혼식은 정말 멋졌어, 그렇지?」 샐리는 거침없이 물었다. 「그리고 케이트의 아버지와 도러시아 머피가 서로 맺어지게 될 거라고 들었는데…」 하지만 그녀는 그 소식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건 사실이에요」 케이트가 명랑한 어조로 대답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야, 그렇지?」 「그런 것 같아요」 사실 아버지와 머피 부인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전엔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초여름부터 부쩍 함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케이트는 클레이와의 관계에 정신을 쏟느라고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케이트에겐 아주 힘든 일이겠군, 그렇지?」 샐리는 안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라가 죽은 이후로 케이트와 아버지가 서로를 의지하고 지냈다는 건 모두가 다 알고 있는데…」 「난 아버지가 재혼을 하게 된 걸 무척 기쁘게 생각해요」 그건 사실이다. 처음의 충격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아버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게 진심으로 기뻤다. 한번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아버지가 몹시 외로웠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격이 몹시 컸을 거야」 샐리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더구나 로리와 클레이가 결혼한 직후에 그런 소식을 들었으니…, 케이트의 인생이 엉망이 되어 버린


느낌이었을 거야, 안 그래?」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자신의 음식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클레이와 로리의 결혼식은 정말 아름다웠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케이트는 고통을 감추고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로리는 완벽한 아내가 될 거예요」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케이트는 목이 메어옴을 느꼈다. 로리는 클레이에게 이상적인 동반자가 될 것이다. 「새로운 프랭클린 부인은 아주 야심만만한 성격인 것 같아. 그녀가 도서관을 맡은 이후로 도서관에 많은 변화가 일고 있어. 격주마다 열리는 교육 프로그램도 아주 반응이 좋더군. 그녀가 나이팅게일로 이사온 이후로 모든게 잘되고 있어」 「나도 동감이에요」 샐리는 무척 즐거운 기색이다. 「클레이 때문에 무척 실망이 컸을 거야」 그녀가 동정 어린 말투로 중얼거렸다. 「더구나 아버지까지 재혼을 하시게 됐으니…」 그녀는 케이트의 손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케이트,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지체하지 말고 날 불러 줘. 케이트의 어깨에 너무 무거운 짐을 지게 된 것 같아서 정말 안됐어. 하지만 나이팅게일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친구들이 모두 케이트 편이라는 걸 명심해. 정 견디기 힘들면 망설이지 말고 친구들을 부르는 거야」 「고마워요…. 그 얘기를 들으니 힘이 나는군요」 케이트는 더듬거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샐리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케이트는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다. 「우린 케이트가 어려운 삶의 편린들을 줍고 잇는 동안 항상 곁에서 지켜 줄 거야. 더구나 루크 리버스는 아주 좋은 청년이라고 생각해」 「루크 리버스?」 케이트가 되물었다. 빵 조각이 그대로 목에 걸려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 샐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여유 있게 미소지었다. 「나이팅게일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두 사람이 춤을 추며 서로를 응시하는 시선을 놓치지 않았을 거야. 그건 정말 너무나 낭만적인 모습이었어」 「춤?」 「피로연 장소에서 말야. 내가 알기로는 베티 해먼드는 너무나 마음이 상해서 그날 밤 이후로 외출도 하지 않은 채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는 거야」 「뭣 때문에요?」 샐리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새침 떨 것 없어. 우린 친구 사이잖아? 베티가 몇 년 동안이라 루크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야. 내가 알기로는 두 사람은 일년에 몇 번씩 데이트를 해왔어. 하지만 루크가 계속 애매한 태도를 보여 왔지」 「정말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케이트는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가슴은 거칠게 뛰고 있었다. 아버지의 약혼과 더불어 자신과 루크에 관한 소문도 자연스럽게 꼬리를 감추기를 바랐다. 샐리는 그녀의 친구들과 의미 있는 눈짓을 주고받았다. 「글쎄…, 난 케이트와 루크가 예사로운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루크와 내가?」 그녀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짧게 토해냈다. 「그건 정말 터무니없는 억측이에요. 루크는 좋은 친구일 뿐이에요. 우린 몇 년 동안이나 서로 알고 지냈지만 절대로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에요.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힘주어 강조했다. 샐리가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걸 보니 비로소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그녀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이만 실례해야겠어요. 수업이


있어서…」 그곳을 떠나오는 동안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케이트는 분노를 삼키며 복도를 따라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책상 앞에 앉아 반쯤 남은 크래커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음식을 버리면 벌받는다는 것 몰라?」 린다 휴턴이 팔짱을 낀 채 문설주에 기대 서 있었다. 「그 여자와는 이제 말도 하지 않을 거야」 소문난 감초의 교묘한 술수에 바보가 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유가 뭐지?」 린다가 다 알고 있다는 듯 씩 웃으며 물었다. 「그 여자가 루크 리버스와 나에 관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닐까 봐 점심식사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어」 린다는 냉담한 표정으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네가 날 도와줄 수도 있었잖아?」 케이트가 불평을 털어놓았다. 「이봐, 난 그런 일에 소방수로 나서긴 싫었어」 린다는 케이트의 책상 위에 손을 얹은 채 몸을 숙였다. 「그리고 사실은 나도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어」 「무슨 호기심? 루크와 나에 대해서? 우린 고작해야 춤을 몇 번 췄을 분이야. 그 다음 난 더워서 밖으로 나갔고 잠시 후에 루크가 날 집까지 데려다 줬던 거야. 그게 뭐가 문제가 된다는 거지?」 「몇 번 춤을 췄다고? 알았어…」 린다는 뭔가 생각하는 듯 천천히 말했다. 「네가 정확히 어떤 걸 봤는지 궁금해. 도대체 춤춘 걸 가지고 왜들 그렇게 소란을 떠는지 모르겠어. 오늘 아침 우리 반의 테일러란 녀석도 날 만나자마자 결혼식에서 날 봤다는 얘기부터 하더라고. 그날 식품점에서 나와 마주친 것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말야」 「식품점에서도 남자를 끌어안고 있었어?」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케이트, 나이팅게일에 사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날 너와 루크가 춤추는 것을 봤을 거야. 두 사람은 마치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어. 결국 소문이 사방으로 퍼진 건 당연해. 너와 루크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몰라도 모두들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어. 목사님도 또 다른 결혼식이 곧 거행될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셨어. 정작 중요한 너의 아버지와 도러시아의 일에 대해선 언급조차 하지 않으시고 말야」 린다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쉬었다. 「정말 아버지의 재혼 문제를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어? 더구나…」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거겠지? 물론 처음 아빠가 그 얘기를 꺼냈을 땐 무척 힘이 들었어. 그러나 이젠 극복했어」 사실 루크의 포옹이 커다란 힘이 되었다. 그는 어려울 때마다 그녀를 위로해 주는 게 거의 습관처럼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린다는 그녀를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지난 몇 주 동안 너의 인생엔 많은 기복이 있었어. 인생에 큰 변화를 겪고 나면 사람들은 몇 주 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곤 하지」 「린다」 케이트가 소리쳤다. 「모두들 마치 내가 신경쇠약에라도 걸리길 바라는 것처럼 보여.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케이트, 그건 당연한 관심이야」 케이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내 말을 믿어 주겠어? 난 괜찮아. 그리고 클레이와 로리의 행복을 빌어 주고 싶어. 난 자신이 강인하고 낙천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해 왔어. 그러나 너와 샐리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인정해 주질 않는 거지?」 「누구든 네가 잘못되길 바라는 사람은 없어. 우리 모두는 진심으로 널 염려하고 있는 거야. 사실 단 한 사람만 빼놓고는 네가 루크를 갖게 된 걸 모두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어」 「하지만 난 루크를 갖지 않았어. 그는 소유물이 아니라 인간이야. 그리고 우린 친구 사이야.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린다만큼은 자신의 얘기를 진심으로 받아들여 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린다는 루크와 춤을 추고 일찍 집으로 돌아간 걸 마치 금방 결혼식이라도 올릴 것처럼 과장해서 생각하고 있다. 린다는 잠시 뜸을 들인 후에 대답했다. 「케이트, 솔직히 말해서 넌 모든 걸 부인하려고만 하고 있어. 난 너의 그런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구나. 우선 너 자신부터 납득을 시키는 게 급선무일 것 같아」 그날 저녁 케이트가 집에 도착했을 무렵엔 마음이 비교적 편안해져 있었다. 아버지는 이글즈 모텔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미 집을 떠난 후였다. 그는 냉장고에다 저녁식사를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메모를 붙여 두었다. 회의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로더시아의 집에 들러서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케이트는 그 메모를 찢어 양손으로 구겨 버렸다. 왠지 모르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케이트가 스토브 앞에서 수프를 데우고 있을 때 뒷문으로 루크가 들어섰다. 정말 그런 상황에서 루크와 마주치고 싶진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열기를 담고 있다. 「안녕, 케이트」 「안녕」 그는 모자를 벗어 걸고 조리대 쪽으로 다가와서 빈 수프 캔을 들여다보았다. 「이런 걸 먹고 어떻게 견디지?」 「루크」 그녀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난 오늘 아주 끔찍한 하루를 보냈어요. 그러니 말상대로는 적합하지 않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어?」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진 않다. 샐리 데일리와 점심시간에 나눈 얘기를 반복해 봤자 불쾌감만 더할 것이다. 「케이트?」 루크가 재촉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선생님들은 아빠와 도러시아의 얘기를 듣고 내가 몹시 충격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는 찬장에서 두 개의 사발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케이트는 그를 보지 않고 수프만 열심히 저어댔다. 그의 반응이 두려워서 감히 쳐다볼 수가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우리에 대해서도 얘기했어요」 그를 흘끗 바라보았을 때 그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랬을 거야」 「난 불쾌해요!」 그녀가 소리쳤다. 「샐리 데일리는 내가 상심에서 벗어나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그는 아무 말이 없다. 그래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 「샐리는 당신과 내가 완벽하게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는 눈치였어요」 루크가 껄껄 웃어댔다. 「그래서 화가 난 거야?」


「그래요!」 「샐리는 별다는 뜻 없이 그렇게 말했을 거야. 그 여자는 아주 통이 크거든」 「통보다는 입이 더 커요! 아무튼 우린 곤경에 처해 있어요. 어떻게 하면 거기서 벗어날 수 있을지 알고 싶어요」 「대답은 아주 간단해. 결혼을 하면 그런 소문을 막을 수가 있지」 「루크, 오늘밤 당신과 농담을 할 기분이 아니에요. 이제 좀더 진지하게 대처해야 할 시간이 왔어요」 그가 케이트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녀의 목을 어루만졌다. 「난 지금 심각해」 그의 손길은 케이트의 감각을 다시 깨어나게 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게 이렇게 엉망이 되어 버린 건 그가 전해 주는 바로 이런 감각 때문이다. 「하루 종일 그 소문이 무성했어요」 루크는 스토브 앞에 서 있던 케이트를 돌려세우고는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괴롭다거나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아. 그게 사실이기만 하다면 말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케이트, 당신은 이 사건을 재앙처럼 받아들이고 있어」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있어요!」 「당신은 나를 사랑해. 전에도 그렇게 말했잖아?」 「오, 루크」 그녀가 소리쳤다. 너무 참담해서 울고만 싶다. 「난 당신이 어떻게 하려는지 알아요. 그리고 당신의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루크는 얼굴을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군」 「당신은 아주 따뜻한 마음씨를 갖고 있어요」 그녀는 산뜻하게 면도한 그의 얼굴에 손을 갖다댔다. 「내가 결혼하자고 졸랐을 때 다른 남자들 같았으면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동의해 줬고 이제 내 체면을 생각해서 그 약속을 지키려 하고 있어요」 「케이트」 루크가 그녀를 식탁으로 데려간 다음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혔다. 「중요한 얘기가 있어. 결혼식 저녁 이후로 당신에게 꼭 하려던 얘기야」 루크는 얼굴을 찌푸리며 의자 앞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좀더 일찍 털어놨어야 하는 건데 당신의 삶에 너무 많은 변화가 일고 있어서 적당한 시기를 찾기가 힘들었어」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적당한 단어를 찾기가 곤혹스러운 듯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말해 보세요」 「내가 <서클 엘>을 사게 될 거야」 갑자기 주방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재빨리 식탁의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설마 루크가 목장을 사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알겠어요」 그녀는 충격을 딛고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아빠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내가 알리지 말라고 부탁드렸어」 어떻게 루크가 이처럼 큰 목장을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몇 년 전 사망한 숙부의 손에서 자랐는데…. 그렇다면 유산이 있었단 말인가? 「루크」 그녀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닌 줄 알아요. 하지만…」 「어떻게 돈을 마련했느냐는 거겠지? 공주님이 그런 질문을 하는 건 당연해. 사실은 댄 숙부에게 돈을 상속받았어. 그분은 와이오밍에 몇 개의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지.


그리고 나에겐 할아버지가 남겨 주신 돈이 조금 있었어. 지난 몇 년 동안 당신 아버지에게서 받은 급료를 포함해서 모든 돈을 목장에 투자한 거야.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목장의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야」 케이트는 멍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루크의 배경에 대해선 거의 아는 게 없다. 단지 그가 아주 어렸을 때 부모를 잃었고 친척도 거의 없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어머니를 잃었을 때 그가 케이트와 데빈에게 각별한 애정과 위로를 보여 준 것도 그의 외로운 환경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또 다른 변화가 찾아온 셈이다. 그는 관리인 숙소에서 이곳으로 옮겨 올 것이고, 난 많은 추억이 서린 이 집을 떠나야만 할 테니까….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케이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최근 당신은 많은 일들을 겪어야 했어. 하지만 이 사실이 당신에게 도움이 될 거야」 「도움이라구요?」 그녀는 울부짖고 말았다.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예요?」 「이제 이곳을 떠날 이유가 없잖아?」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되면 이곳에서 살게 될 테니까‘ 「결혼?」 그녀가 소리쳤다. 「오, 루크, 제발. 이제 그 말만 나와도 치가 떨려요!」 「곧 익숙해질 거야.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에 우린 부부가 될 테니까. 데빈과 도러시아에게 순서를 양보하자구. 그들이 결혼식을 올리고 몇 주일 쯤 지난 다음에 윌킨스 목사님께 예식을 부탁드리는 거야」 「루크, 당신의 호의는 고맙게 받겠어요.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요」 비록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가 갑자기 자신을 아내로 삼으려는 이유는 순전히 동정심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는 너무나 갑작스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버린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도대체 왜 그런 식으로 해석하려는 거지?」 그녀의 손이 그의 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의 짙은 눈동자가 그녀를 끌어들일 것처럼 응시하고 있다. 그녀는 슬프게 미소지었다. 「당신은 한번도 날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결혼 얘기를 꺼내다니…, 좀 이상하지 않아요?」 「난 당신을 사랑해」 그 심각한 순간에 케이트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오, 루크, 정말 말도 안돼요」 「난 진지해. 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도 나를 사랑하고 있어」 「물론 우린 서로 사랑해요. 하지만 그건 형제간의 사랑일 뿐이에요」 그의 눈길에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런 모습은 여태껏 처음이다. 「그런 시선으로 날 쳐다보지 말아요. 언젠가는 내가 당신의 말을 따르지 않은 걸 고맙게 생각하게 될 거예요」 「케이트」 그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우린 결혼하게 될 거야」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댔다. 「우린 결혼하지 않아요, 루크 리버스. 당신처럼 좋은 친구를 갖게 된 걸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되면 우린 평생 후회하게 될 거예요」 「그렇지 않아」 「난 이성을 잃지 않아요. 클레이가 결혼하고 아버지가 재혼하고 목장을 팔게 되었다고 해서 무너지진 않아요. 인생은 계속되게 마련이에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난 그 사실을 체험했어요. 아주 진부한 표현 같지만 사실이에요. 어머니를 잃은


슬픔도 난 헤쳐왔어요.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난 꿋꿋이 버틸 수 있을 거예요」 「케이트, 당신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난 당신과 결혼하고 싶단 말야」 「오, 루크, 당신의 호의는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요. 언젠가 당신은 한 여자의 근사한 남편이 될 거예요」 케이트는 편안한 그의 존재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편안함을 느끼긴 하지만 어떤 전율 같은 걸 경험할 수가 없다. 사랑하고 있다면 당연히 그런 흥분이 따라야 할 것이다. 하지만 클레이와 함께 있으면 강렬한 감정이 그녀는 휘감았다. 그 감정은 영원토록 계속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클레이는 케이트와 똑같은 감정이 아니었다. 그는 그냥 케이트를 좋아했을 뿐이었다. 물론 케이트는 그걸로 만족했지만 클레이는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루크에게 차선의 선택을 하게 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말이 많아요. 우리 둘 다 최선을 다해서 그들의 오해를 풀어 주기로 해요」 「난 그런 짓은 안해」 루크는 턱이 굳어지며 눈을 가늘게 떴다. 「케이트, 우리의 결혼은 불가피한 거야. 한시라도 빨리 그걸 인정하는 게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이로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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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야」 케이트는 홍당무를 씹으며 말했다. 「루크에게 절대로 결혼할 수 없다는 걸 납득시키기 위해서 내가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는 것밖엔 없어」 린다는 금방이라도 들고 있는 사과를 한입에 먹어 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금요일 오후, 그들은 식당에 앉아서 다음달에 있을 추수감사절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하겠다고?」 린다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불과 이틀 전에 넌 누구를 사랑하거나 결혼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했잖아?」 「난 이제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아」 케이트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건 정말 우스운 짓이야」 「도대체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린다는 반쯤 먹다 남은 사과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우린 순례자 복장의 디자인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데이트를 하고 싶다니…, 설마 마일스 스탠디시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물론이야」 린다가 계속 영문을 모른 채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케이트는 l 주일 내내 루크와의 소문 때문에 신경을 써왔다. 그러나 여태껏 그녀는 그 화제를 의도적으로 피해 왔다. 그런데도 소문은 마치 마른 장작에 타오르는 불길처럼 나이팅게일 전역에 퍼져갔다. 최근 들어 루크와 함께 있으면 몹시 불편해지고 괜히 그를 경계하게 된다. 예전에 그와 함께 나누던 부담없는 웃음과 농담은 사라진지 오래다. 「좋았어. 네가 내 호기심에 불을 당겼어」 린다가 눈을 장난스럽게 반짝이며 말했다. 「갑자기 이성에게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말해봐」 「난 이 소문이 자연스럽��� 사라지길 바라고 있어」 그리고 루크에겐 그 결혼이 순전히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납득시켜야 한다.


하지만 여태껏 그의 고집은 너무 집요해서 도저히 꺾을 수가 없었다. 린다는 추수감사절에 관한 메모를 하던 노트를 옆으로 밀쳐 놓았다. 「특별히 염두에 둔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없어」 케이트가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난 너무 오랫동안 사람들을 사귀지 않았기 때문에 도대체 누가 적당한 상대인지도 모르겠어」 「적당한 남자는 없어」 린다가 비관적인 어조로 말했다. 「사실 나이팅게일은 수녀원을 차리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지. 넌 종교적인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니?」 케이트는 그 말을 무시해 버렸다. 「언젠가 샐리 데일리가 최근에 이사온 남자가 최근에 이사온 남자에 대해서 얘기하는 걸 들은 것 같아. 그녀는 그 남자가 독신일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였어」 「에릭 윌슨이란 남자야. 직업은 변호사고 30 대 중반의 이혼남이지. 왼쪽 어깨에 조그만 사마귀가 있대」 케이트가 깜짝 놀란 얼굴로 린다를 바라보았다. 「맙소사, 샐리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린다는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난 상상하기도 싫어」 「에릭 윌슨…」 케이트는 천천히 그 이름을 반복해 보았다. 왠지 친근감이 느껴지는 이름이다. 「그를 만난 적이 있니?」 린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지만 네가 만나자고 하면 대환영일거야. 샐리가 그 사람 얘기를 한 이유는 너와 루크가 크리스마스 휴가가 끝나기 전에 결혼할 거라고 믿기 때문이었어」 순간 공포감 같은 게 몰려왔다. 루크도 크리스마스경에 결혼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앤디 배럿도 있어」 케이트가 말했다. 앤디는 약국에서 일하고 있는 미혼 남성으로 가슴을 설레게 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남자다. 그러나 린다는 즉각 그 가능성을 부인했다. 「마을 사람들 중에서 네가 루크를 제치고 앤디를 선택할 거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린다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서렸다. 「앤디는 친절해. 하지만 루크야말로 사내 중의 사내라구」 「아무튼 다른 사람을 찾아볼 거야」 케이트가 단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린다는 추수감사절 노트를 챙기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거라면 차라리 포틀랜드에서 남자를 수입하는 방법을 찾아봐」 「농담하는 게 아냐」 「나도 진지해」 그날 오후 식품점의 냉동식품 코너로 다가가는 동안에도 린다의 말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서 먹게 될 간단한 저녁거리를 찾고 있었다. 도러시아와의 결혼을 발표한 이후로 아빠는 매일 밤 도러시아와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그들의 결혼식은 12 월 초에 거행될 예정이다. 「부르고뉴 소고기가 아주 좋더군요」 뒤에서 낭랑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키가 큰 푸른 눈의 남자가 상냥하게 웃고 있다. 「에릭 윌슨입니다」 그가 손을 내밀며 인사를 청해 왔다. 「케이트 로건이에요」 악수를 하는 동안 그녀의 가슴이 뛰었다. 불과 몇 분 전에 그의 얘기를 나눴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정말 예사 인연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이건 운명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는 이 마을에 있는 몇 안되는 독신남자치곤 꽤 격조가 있어 보인다.


「솔즈베리 스케이크도 그리 나쁘진 않아요」 자신의 견해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수레엔 부르고뉴 소고기와 솔즈베리 스테이크가 놓여 있었다. 「이 방면에 아주 조예가 깊으신 것 같군요」 「냉동 요리야말로 마누라보다 속을 덜 썩인다는 걸 알았죠」 그가 얼굴을 찌푸리는 걸 보고 케이트는 그의 이혼이 몹시 불쾌한 것이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어쩌면 샐리는 이혼사유까지도 자세히 알고 있을 것이다. 나중에 샐리에게 물어 봐야지. 그러면 샐 리가 필요한 통신망 역할을 해줄 것이다. 내가 새로 이사온 변호사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테니까. 「새로 이사오신 것 같군요. 변호사세요?」 에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할 땐 불러 주세요」 케이트는 분주하게 머리를 돌렸다. 남자와 농담을 해본지도 너무나 오래되었다. 「그렇다면 부르고뉴 소고기가 맛이 없을 땐 당신을 고소할 수도 있겠군요?」 그가 활짝 웃었다. 별로 재미있는 얘기도 아닌데 그가 유쾌한 반응을 보이자 그녀는 한층 힘이 솟았다. 「하지만 판사가 당신의 소송 내용을 귀담아 듣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웹스터 판사님은 나의 삼촌이에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그분의 사랑스런 조카 따님이 되는군요」 「당연하죠」 「그렇다면 그 소송은 피하고 싶군요. 대신 내가 저녁을 사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일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쉽게 풀려가고 있다. 「무한한 영광이에요」 어쩌면 그건 행운일 수도 있다.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하겠다고 선언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한 남자를 만났다. 그것도 매력적이고 유쾌한 남자를…. 물론 그는 객지에서 외로웠거나 이혼의 슬픔을 달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문제 삼고 싶지 않다. 데이트는 어디까지나 데이트니까. 케이트는 샤워를 한 다음 울 스커트와 붉은색 실크 블라우스로 갈아입었다. 마지막으로 손톱을 손질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주방으로 들어섰다. 그에게선 산뜻한 애프터셰이브의 향기가 풍겨왔다. 그녀는 아버지를 향해 약간 웃어 보였다. 「아주 좋아 보이세요」 「고맙구나」 「내가 도와드릴까요?」 데빈의 목이 핑크 빛으로 물들었다. 「괜찮다」 그녀는 아빠를 놀리는 게 즐거웠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둘은 똑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야말로 굉장히 예쁘구나. 루크와 데이트하러 나가는 거냐?」 「에릭 윌슨이 날 저녁식사에 초대했어요」 데빈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구라고? 너 지금 농담하고 있는 거지?」 「아니에요. 에릭은 이곳에 새로 이사온 사람이에요. 오늘 세이프웨이 상점의 냉동식품 코너에서 만났는데 그가 저녁을 사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승낙했단 말이냐?」 그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휘둥그래졌다. 「물론이에요. 집에 앉아서 텔레비전의 재방송이나 보는 것도 지겨울 것 같아서…」 「하지만…, 하지만 루크는 어떻게 하고?」 「그가 어쨌다는 거예요?」 「난…, 난 클레이의 결혼식 이후로 너희 두 사람이…」


「아빠, 루크는 좋은 친구예요. 하지만 우린 서로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에요」 잠시 데빈은 뭔가 항의를 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러나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딸을 달랬다. 「공주야, 루크는 훌륭한 남자야」 「나도 알아요. 루크가 없었다면 난 지난 몇 달 동안 살아 남지 못했을 거예요」 「마을 사람들은 너희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날 결혼식에서 너희들을 지켜본 나로서는 그들을 비난할 수만은 없더구나」 「아빠, 루크와 난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 「케이트, 너도 잘 알겠지만 난 루크를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단다. 네 남편감으론 아주 적합한 인물이야」 「저… 저도 루크가 근사한 남자라는 건 알아요」 「그가 목장을 샀으니까 너의 둘이 맺어지는 게 당연…」 「아빠, 제발…」 케이트가 속삭였다. 「난 루크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리고 루크도 날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정말 안됐구나」 데빈은 모자를 쓴 다음 잠깐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루크는 네가 오늘밤 데이트를 하는 걸 모르고 있겠지?」 「그에게 말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녀는 될 수 있는 한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런 일로 루크와 신경전을 벌이고 싶진 않다. 그래서 그녀는 애원하는 듯한 시선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에겐 말하지 않으실 거죠?」 「그를 속일 수는 없다」 「오, 안돼요. 아빤 아무 말씀도 하시면 안돼요」 아버지가 나간 후 케이트는 손톱에 빨간 매니큐어를 칠했다. 에릭이 빨리 와준다면 루크와 마주치지 않고 집을 빠져나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행운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주방의 창가에서 에릭의 차가 오길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루크가 집안으로 들어섰다. 케이트는 속으로 신음소리를 냈다. 이젠 에릭이 좀 늦게 오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코트를 입고 있군」 루크는 커피를 따라 마시며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난 곧 외출할 거예요」 케이트는 약간의 죄의식을 느끼며 말했다. 「오늘 오후에 오트밀 쿠키를 만들었어요. 쿠키병에 잔뜩 있으니까 갖다 드세요」 그는 쿠키를 챙겨서 식탁 앞에 앉았다. 「당신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군」 「맞아요」 「누구지?」 「친… 친구예요」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긴장된 분위기가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당신 화가 난 거야?」 「아니에요.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그녀는 냉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당신은 일주일 내내 나를 피하기만 했어」 루크가 중얼거렸다. 그는 케이트의 바로 뒤에 앉아 있다. 그의 존재가 자꾸만 그녀의 신경을 떨리게 만든다. 루크가 에릭과 식사하러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얽혀들 것이다. 「케이트, 내사랑…」 「제발 날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아요」 그녀는 커튼에서 벗어나 그를 돌아보았다. 「내가 실수를 했어요. 하지만 그때의 상황으로 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러니 제발 그 결혼 문제는 이제 모두 잊어 주세요」 잠시 그의 표정에 충격의 빛이 스쳐가는 듯했으나 이내 그는 껄껄 웃어댔다.


「당신처럼 속을 썩이는 종마가 있었다면 벌서 다리를 부러뜨렸을 거야」 「난 종마가 아니에요」 그는 다시 껄껄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자신의 무릎 근처로 당겨안았다. 너무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서 케이트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이러지 말아요!」 그녀의 뺨이 분노로 인해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양손으로 그녀의 턱을 감싸안았다. 「이번주 내내 당신이 몹시 그리웠어」 그의 차가운 손끝을 통해 따뜻한 열기가 온몸에 번져갔다. 아울러 낯선 감각도 함께 퍼져갔다. 케이트는 도대체 뭐가 잘못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걸 알고 싶은 마음도 없다. 「윌킨스 목사님께 연락을 드리기 전에 당신에게 생각을 정리할 기회를 주기로 했어」 「뭘 하기 전에?」 「결혼하기 전에…」 그가 참을성 있게 답변했다. 그의 낮은 음성은 대단히 감미롭고 유혹적이다. 「하지만 나와 함께 있기만 하면 당신은 항상 겁먹은 아기 고양이처럼 도망만 치고 있어」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난 당신을 결혼 상대로는 생각할 수가 없어요」 「그래?」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그를 밀쳐내려 했지만 그의 강한 힘에 눌려 가능하지가 않았다. 「키스랄 때 당신의 반응은 그런 게 아니었어」 케이트는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강인한 근육을 파고들었다. 「내가 오해를 하게 했다면 정말 미안해요」 그녀의 연약한 음성을 떨리고 있었다. 그가 눈썹을 치켜떴다. 그의 표정은 웃음을 억누르는 기색이 완연했다.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참기로 했다. 지금 화를 내봤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우리 둘이서 이 관계를 차분히 정리해 보는게 좋겠어」 루크와 단둘이 있는 일이라면 결사적으로 피하고 싶다. 「오늘밤엔 불가능할 것 같아요」 그녀가 황급히 말했다. 「왜?」 그가 너무나 가까이 다가와서 그의 숨결이 얼굴에 뜨겁게 부딪쳐 왔다. 케이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눈을 감고 뜨거운 그 열기에 굴복하는 것뿐이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와 입술을 더듬고 있다. 「안돼요」 그러나 그녀의 음성은 낮게 떨리고 있었다. 그순간 어떤 저항도 무의미한 것처럼 보였다. 「괜찮아, 케이트」 그의 입술이 닿아 있는 동안 그녀는 진한 흥분의 소용돌이가 온몸에 번져가는 걸 느꼈다. 그녀는 어느새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 부드러운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환희 때문에 자꾸만 의식이 희미해져 가고 있다. 「린다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취소하겠다고 말해」 그가 속삭였다. 순간 케이트의 몸이 얼어붙었다. 「안돼요」 「그렇게 말해야 해. 원한다면 내가 대신 말해 줄게」 「난 린다와 외출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녀의 음성은 거의 속삭임처럼 들려왔다. 「누구를 만나기로 했든 어서 전화를 걸어 약속을 취소하라구」 「안돼요…」 주방의 창을 통해 비치는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에릭의 도착을 알려 주고 있었다. 케이트는 필사적인 힘을 발휘해 루크의 무릎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얼른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화장이 번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루크의 손길에 그처럼 속수무책으로 굴복했던 걸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다. 전에도 그가 키스를 하긴 했지만 바로 이 순간,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동안 그녀는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의 소용돌이에 빠져 버렸다. 결혼식 날의 그 짧은 포옹도 그리고 그 다음날의 포옹도 이처럼 격렬하진 못했다. 「케이트, 누가 찾아온 것 같군」 그녀는 멍한 시선으로 루크를 바라봤다. 「난 나가 봐야 해요」 케이트가 문을 열자 에릭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인사를 건넸다. 짐짓 명랑한 척하고 있지만 자신의 꼴이 마치 독감에라도 걸린 것처럼 엉망일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집을 쉽게 찾았는지 모르겠군요」 「아주 힘들었어요」 그가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15 분이나 늦었잖아요」 그러나 케이트는 그가 늦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케이트, 이분은 누구지?」 루크는 강한 어조로 다그쳤다. 「에릭 윌슨, 이 사람은 루크 리버스예요. 루크가 <서클 엘>을 구입했어요」 케이트는 자신의 숨찬 음성이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간신히 말했다. 두 남자는 간단한 악수를 교환했다. 케이트는 루크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린 나가요」 케이트는 에릭에게 딱딱하게 웃어 보이며 채근했다. 「그게 좋겠군요」 에릭의 시선이 케이트와 루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역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눈치가 역력하다. 밖으로 나와서 에릭이 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루크가 목장을 샀다고 했죠?」 「���래요」 케이트는 밝은 어조로 대꾸했다. 「그밖에 다른 일은 없나요?」 그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마치 당신까지 사들인 것 같은 인상을 주던데」 「그럴 리가 있나요?」 이제 더 이상 루크와 서로 육체적으로 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난 루크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루크는 내가 아직도 클레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날 사랑할 수 있을까? 클레이와 로리가 약혼을 발표했을 때 케이트는 이제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클레이와 결혼할 수 없다면 남은 인생을 혼자서 살아가며 그와의 추억을 곱게 간직하리라 결심했다. 「정말 리버스가 당신에게 다른 요구를 하진 않았소?」 「물론이에요」 「우습군요」 에릭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가 나를 노려보는 시선으로 봐서 무사히 그곳에서 빠져나온 것도 다행인 것 같은데…」 「당신이 뭔가 착각한 거예요」 에릭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게 분명했다. 에릭은 그녀를 나이팅게일에서 가장 멋진 음식점인 <레드 불>로 안내했다. 그곳은 특히 두꺼운 티본 스테이크와 잘 구운 감자요리로 유명한 곳이다. 밴드의 음악소리가 그곳을 축제처럼 들뜬 분위기로 만들고 있었다. 에릭이 메뉴 판을 들여다보더니 식사와 와인 한 병을 주문했다. 여종업원이 주문을 받아간 다음 그는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괴고서 케이트를 향해


미소지었다. 「눈이 아주 아름답군요」 그의 음성은 열에 들떠 있었다.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고마워요」 「나의 전처와 똑같은 빛깔이오」 그가 다소 유감스럽다는 어조로 말했다. 케이트의 눈동자가 파란 색이 아닌 다른 빛깔이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미안해요. 론니에 대한 생각은 이제 그만 해야 하는데…. 이제 다 끝난 일이오」 「당신은 이혼을 원치 않았던 모양이군요」 「그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아요. 이해해 줘요」 케이트는 괜한 질문을 던진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에겐 과거를 들춘다는 게 무척 고통스런 일일 것이다. 「미안해요. 내가 생각이 모자랐어요. 당신은 과거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할 텐데…」 그때 와인이 도착했다. 여종업원이 잔을 가득 채우자 에릭이 맛을 본 다음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사실 당신을 보면 론니 생각이 나요. 우린 같은 대학에 다녔어요」 케이트는 와인 잔에 시선을 떨구고 손으로 잔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에릭은 전처를 몹시 사랑한 게 틀림없다. 그러데 왜 그들은 헤어져야 했을까? 「당신은 이혼에 대해서 알고 싶소?」 그가 자신의 술잔을 채우며 물었다. 「고통스럽다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그는 케이트의 이야기가 거의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론니나 나나 일이 거기까지 가리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하지만 눈 깜짝할 새에 모든 건 무너지고 말았소. 론니에게 다른 남자가 있었던 건 절대 아니었소. 그건 맹세할 수 있어요」 그때 샐러드가 도착했다. 포크를 집으며 케이트가 물었다. 「왜 나이팅게일로 오신 거예요?」 에릭은 물을 들이키듯 와인을 마셔 버렸다. 「물론 론니 때문이오」 「무슨 뜻이죠?」 「푹 쉬고 싶었어요. 그런 다음 모든 걸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거죠」 「그랬군요」 「론니가 먼저 우리가 갈라서는 게 좋겠다고 말했을 때 난 그녀의 요구를 따라 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어요. 우린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죠. 그리고 그녀가 관계를 끝내기를 요구하는데 내가 방해가 될 수는 없었소. 아이가 생기기 전에 헤어지는 게 더 현명할 것 같기도 했고….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녀는 에릭을 위로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 시간쯤 후에 그는 이미 와인 두 병을 바닥내 버렸다. 에릭은 그 상태로는 도저히 운전을 할 수 없다. 「춤을 추겠어요?」 그가 돈을 지불하자 그녀가 물었다. 그가 약간 얼굴을 찌푸렸다. 「이 서부의 시골구석엔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기꺼이 춤을 추겠소」 그러나 에릭의 팔이 그녀를 끌어안는 순간 케이트는 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알았다. 그는 케이트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케이트는 그와의 간격을 넓히려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자신이 지금 론니를 끌어안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좀 떨어지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하지만 다시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자 그는 다시 그녀를 끌어안았다. 케이트는 팔로 그를 약간 밀쳐냈다. 덕분에 몇 cm 쯤 그에게서 떨어질 수 있었다. 「실례합니다」 너무 귀에 익은 음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그 순간 케이트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아가씨를 내게 양보하시오」 루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침입자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에릭은 아무 말도 없이 그녀는 놓아 주고 물러섰다. 「왜 끼어드는 거예요?」 그녀가 항의했다. 비참한 기분이 이젠 분노로 변하고 있었다. 그녀가 계획했던 모든 일들이 이제 수포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저 사기꾼 같은 녀석과 춤을 추다니 제 정신이야?」 「그건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천만에!」 그의 표정이 분노감으로 일그러졌다. 그의 팔이 너무 꽉 조여왔으므로 그에게서 벗어날 수도 없다. 주변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음악이 끝나자마자 케이트는 황급히 그에게서 벗어나 에릭에게 돌아갔다. 그녀의 데이트 상대는 한구석에 서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케이트는 애써 불쾌감을 숨겼다. 그는 벌써 너무나 취해 있다. 「당신과 루크 리서스 사이엔 아무것도 없다고 얘기했잖소?」 케이트가 다가가자 그가 힐난하듯 물었다. 「그래요. 우린 그저 좋은 친구일 뿐이에요」 「하지만 내가 받은 인상은 그렇지가 않았소」 케이트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아무튼 그 사람이 끼어 들어서 미안해요. 다시 춤추시겠어요?」 「목숨을 내놓을 각오 없인 안될 것 같소」 「괜찮을 거예요」 다시 경쾌한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에릭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격려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시 플로어에 나갔을 때 케이트는 루크의 노여운 시선을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춤을 추다가 에릭은 그대로 멈춰서 버렸다. 「스텝을 밟고 있을 상태가 아니오」 에릭은 그 말과 함께 케이트를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이게 훨씬 좋소」 그가 케이트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어느새 그의 포옹이 더욱 강렬해졌다. 「에릭, 이러지 말아요. 숨도 못 쉬겠어요」 「오, 미안해요」 그가 곧 팔의 힘을 풀었다. 「론니와 난 항상 이렇게 춤을 추곤 했소」 그가 말하지 않아도 케이트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에게 난 당신의 전처가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래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다. 에릭은 저녁 내내 그녀를 론니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음악이 끝나자 에릭은 다시 테이블로 돌아와 술을 단숨에 마셔 버렸다. 다시 음악이 시작되자 그가 케이트를 끌어당겼다. 「이번엔 앉아 있는 게 좋겠어요」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에릭을 내동댕이칠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는 루크를 더 이상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여태껏 그가 그처럼 화가 나 있는 건 처음이다. 케이트는 시선을 무릎에 떨구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에게 시선을 던지기만 해도 뭔가 심상치 않은 사태가 발생할 것 같은 위기감이 감돌았다. 「윌슨, 도대체 얼마나 더 마셔야겠소?」 어느새 루크가 다가와서 성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리버스, 당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오」 에릭은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두 다리로 균형을 유지하고 빈 잔을 치켜들었다. 「당신은 너무 취한 것 같소. 내가 케이트를 집까지 데려다 주겠소」 「루크」 케이트가 항의했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당신의 데이트 상대는 도저히 당신을 집까지 데려다 줄 수 없는 상태야」 불행히도 루크의 말은 사실이다. 저녁식사가 끝나기 전에 케이트는 그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혼자서 해결하고 싶었다. 「난 얼마든지 더 마실 수가 있소!」 에릭은 빈 술잔을 루크의 코앞에 흔들어댔다. 위스키 때문에 그는 쓸데없는 만용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루크가 화를 내고 있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루크는 케이트를 바라보았다. 「케이트, 좀더 지각있게 처신하는 게 어때?」 그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에릭도 자신의 주량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럼 그와 함께 차를 타고 집에 돌아갈 생각이야?」 「잘 모르겠어요」 물론 에릭의 차를 탈 수는 없다. 그러나 루크에게 공격할 빌미를 주고 싶지가 않았다. 루크가 분노로 활활 타오르는 시선으로 케이트를 노려본 다음 에릭에게 시선을 돌렸다. 「살고 싶으면 그대로 있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그는 저편에 있는 경비원에게 소리쳤다. 「당신이 이 친구를 말썽없이 집까지 데려다 주겠소?」 「알겠습니다, 루크」 「케이트」 그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나와 함께 돌아가」 「그러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루크는 그녀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 그는 케이트에게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마치 팝콘 한봉지를 들어올리듯 가볍게…. 그녀는 잠시 발버둥쳤지만 그래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루크, 이러지 말아요. 제발…」 그녀는 이를 악물고 애원했다. 수치감 때문에 이대로 죽고만 싶다. 「나랑 얌전히 걸어나가든지 아니면 물건처럼 들려서 나가든지 마음대로 해」 루크는 조금도 침착성을 잃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저항하자 그는 그녀의 다리 뒤로 팔을 감고 그녀를 번쩍 들어올렸다. 「루크!」 케이트가 소리쳤다. 「빨리 날 내려놔요. 내려 달란 말예요!」 하지만 그는 케이트의 항의를 깨끗이 무시한 채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식사 시중을 들던 여종업원이 달려와서 케이트에게 코트와 핸드백을 건네줬다. 그녀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아가씨, 당신의 남자를 꼭 붙드세요」 그녀가 충고해 주었다. 「루크 리버스는 저 도시의 건달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멋진 남자예요!」 「루크가 아가씨의 남자예요!」 누군가가 소리쳤다. 「두 사람은 언제 맺어지는 거요?」 두 남자가 그들을 위해 문을 열어 주었다. 루크에게 들려서 차가운 밤거리로 나올 때까지 안에서는 계속 환호의 외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케이트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5


「내 평생 그처럼 당황했던 적은 없었어요」 루크가 그의 소형 트럭을 집 앞에 세웠을 때 케이트가 큰소리로 외쳐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집으로 오는 동안 루크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줄곧 정면만 응시한 채 굳은 표정이었다. 거칠게 차를 몰던 그는 집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을 때에야 속력을 늦췄다. 「정말 오늘 있었던 일은 치명적이었어요」 그녀는 재빨리 트럭의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루크로부터 도망치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내일 아침이면 나이팅게일의 모든 주민들이 루크 리버스가 <레드 불>에서 케이트를 끌어냈던 일을 화제로 삼을 것이다. 놀랍게도 루크는 그녀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섰다. 「당신이 날 용서하든 말든 그런 건 상관 안해」 그가 어두운 어조로 말했다. 「사람들이 모두 낄낄 웃어대고 있었어요. 이젠 도저히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게 됐어요」 「그건 당신 스스로가 만들어낸 문제야. 모든 책임은 당신에게 있어!」 「그건 억지예요!」 에릭이 술을 음료수 들이키듯 마셔댈 줄은 정말 몰랐다. 하지만 그에게 더 이상의 설교를 듣고 싶진 않다. 그녀가 원하는 건 그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다. 혼자서 오늘의 수치스런 일들을 조용히 반성하고 싶다. 루크는 주방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음성처럼 절도 있고 정확한 스텝이다. 「제발 나가 줘요」 「당신에게 대답을 듣기 전엔 나갈 수 없어」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위엄을 한껏 그러모아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더 이상 루크와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다. 그래 봤자 패배감만 더욱 진하게 맛보게 될 것이다. 그녀는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에릭 윌슨이란 작자는 누구지? 그리고 당신은 왜 그 작자와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로 한 거야?」 그러나 케이트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우리 사이가 왜 이렇게 됐죠?」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루크를 올려다보았다. 「우리가 얼마나 즐겁게 지냈는지 기억하고 있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린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곤 했어요. 우린 정말 서로 좋은 친구였어요.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게 변해 버렸어요. 오늘밤만 해도…,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 수가 없어요」 그녀의 음성이 약간 흔들리고 있다. 케이트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또 패배하고 있는 것이다. 고뇌의 눈물이 끊임없이 뺨위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절망감을 숨기기 위해 손을 더 들어올렸다. 루크가 다가와서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쓸어 주었다. 「모든 건 변해. 그렇지, 공주님?」 그녀는 거칠게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혼란스러운 거야?」 그는 케이트의 손을 감싸쥔 채 따뜻한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갖다댔다. 그와 키스를 나누면서도 그녀의 혼란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는 몹시 화가 나 있을 것이다. 그가 오늘처럼 분노를 터뜨린 건 처음이다. 그런데도 그는 이처럼 부드럽게 키스하고 있다. 「이젠 이해할 수 있겠어?」 그는 케이트의 반응을 그에 대한 확신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녀도 진심으로 모든 걸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녀는 머리를 흔들며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모든게 더 혼란스럽고 불안하게만 느껴졌다. 루크가 검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오, 내 사랑」 그가 중얼거리며 다시 입술을 갖다댔다. 「우린 빨리 이 미친 짓을 끝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미��� 버리고 말 거야」 「어떻게?」 그녀는 그의 넓은 가슴에 손을 갖다대며 물었다. 그의 강인한 근육은 이 세상의 어떤 일도 가능하게 만들 것만 같다. 「어떻게?」 그가 그녀의 질문을 반복하며 껄껄 웃었다. 그 깊은 웃음 때문에 그의 가슴은 출렁이고 있다. 「당신이 요구하는 대로 하면 돼」 「내가 뭘 요구했나요?」 「케이트, 우리 사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야」 「단 한 가지…」 그녀는 힘없이 그의 말을 따라했다. 「당신은 나와 결혼해야 해.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케이트는 그에게서 얼음물을 뒤집어쓴 느낌이다. 「당신과 결혼한다구요?」 그녀는 큰소리로 외쳐대며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밀쳐냈다. 그 바람에 그는 거의 뒤로 나뒹굴 뻔했다. 」이 혼란을 해결하는 게 고작 결혼하는 건가요?「 「케이트, 이성을 잃으면 안도. 우린 완벽한 짝이 될 거야. 당신은 지금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날 필요로 하고 있어」 「루크, 제발…」 「안돼」 그는 케이트의 말을 중단시켰다. 「당신은 지금 당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잃게 됐어. 집과 아버지…. 내가 데빈의 역할을 떠맡겠다는 뜻은 아냐. 하지만 난 당신에게 좋은 남편이 될 거야」 「사랑은 어떻게 하고요?」 케이트가 소리쳤다. 루크가 좌절의 한숨을 내뿜었다. 「우린 그 얘기를 열 번도 더했어. 당신은 이미 나를 사랑하고 있어…」 「오빠처럼」 「공주님, 여동생은 절대로 오빠에게 그런 식으로 키스하지 않아」 그녀는 대답할 말을 잊은 채 고개만 흔들었다. 「난 클레이를 사랑해요! 당신은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난 정말 그를 사랑해요. 그러니 당신과는 결혼할 수 없어요」 「제발 클레이는 잊어버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녀가 절규했다. 「조금만 노력하면 충분히 잊을 수 있어」 그의 음성은 점점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케이트 로건, 난 지금 당신에게 청혼하고 있는 거야. 당신처럼 영리한 여자라면 그게 얼마나 근사한 제안인가를 알아야 해」 루크는 아예 그녀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더이상 얘기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것 같군요」 「케이트…」 「이제 그만 나가 주세요」 「케이트」 그가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당신이 깨닫기 위해선 얼마나 시간이 필요한 거야?」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구요? 말도 안돼요!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난 클레이 프랭클린과의 결혼을 꿈꾸고 있었어요!」 케이트는 그의 손을 밀쳐 버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래, 당신은 자칫하면 엉뚱한 남자와 결혼할 뻔했어」


그녀는 루크를 노려보았다. 그와 시시비비를 가리는 건 시간낭비일 것 같다. 그는 마치 고장난 레코드처럼 똑같은 얘기만 반복하고 있다. 「난 이만 자야겠어요」 그녀는 그에게서 몸을 돌려 버렸다. 예상했던 대로 에릭 윌슨과의 일은 그 조그만 마을에 속속들이 퍼져 버렸다. 사람들은 그날 루크 리버스가 그녀를 들어올려 <레드 불>에서 나오던 얘기를 하면서 몹시 즐거워했다. 거리를 걷는 일조차 케이트에겐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녀는 마치 중국 인형처럼 굳은 미소를 지어 보여야 했다. 그런 고역을 치르느라 나중엔 위궤양 초기 증세까지 나타났다. 더 곤란한 일은 마을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그녀에게 그 일과 관련한 충고를 털어놓는 거였다. 「루크 리버스를 붙잡아야 해. 그 도시 건달보다는 루크가 훨씬 낫지」 토요일 오후 정육점 주인이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기를 들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와야 했다. 「너와 루크가 음식점에서 소동을 벌였다는 걸 알고 있어」 일요일 예배가 끝난 다음 목사님이 말했다. 「루크가 널 아주 낭만적인 방법으로 밖으로 끌어냈다는 얘기도 들었지」 결코 낭만적인 장면은 아니었노라고 해명하고 싶었지만 케이트는 말없이 미소만 지어 보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루크 리버스와의 소문은 어떻게 된 거야?」 월요일에 출근을 하자마자 샐리 데일리가 나타나서 물었다.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건 모두 과장된 거예요」 케이트가 황급히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아무튼 케이트는 이 도시를 들끓게 만드는 데 소질이 있는 것 같아. 지난번 클레이의 피로연장에서도 그랬잖아? 그런데 클레이와 로리가 하와이에서 돌아온 것 알아? 둘 다 아주 근사하게 태웠다는 거야」 「하와이에 가면 그을리는 게 당연하잖아요?」 케이트는 가슴 깊은 곳에서 몰려오는 아픔을 애써 누른 채 침착하게 말했다. 샐리가 떠나자 곧 린다가 나타났다. 「그거 사실이야?」 그녀가 동그란 눈동자를 빛내며 물었다. 케이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가 봐」 「맙소사, 이제 겨우 진정되는 소문에 불을 붙인 꼴이 되고 말았군. 안 그래?」 케이트는 비참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누가 그 일을 얘기하면 그대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금요일 밤 이후로 너무 참담한 기분이 들어. 그보다 더 굴욕적인 일은 없을 거야」 「넌 에릭을 만난 적이 없다고 했잖아?」 린다가 혼란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에릭에 관해 얘기한 지 10 분도 안돼서 식품점에서 우연히 마주쳤어」 린다는 케이트의 책상 모서리에 힘없이 몸을 기댔다. 「난 그 남자를 만나려고 몇 달 동안이나 애를 썼는데…. 정말 말도 안돼. 넌 그를 만나겠다고 결심한 지 몇 분 만에 그가 나타났으니…」 「초심자의 행운이었겠지」 하지마 그날 밤의 일은 차라리 불운과 악연의 만남이라고 해야 옳다.


「케이트, 이젠 수습해야 할 일만 남았어」 「알고 있어」 그날 퇴근할 무렵엔 두통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종일 사람들과 소문에 시달린 탓이다. 약국에 들러 아스피린과 제산제를 산 다음 도서관으로 향했다. 로리가 신혼여행을 끝내고 곧바로 출근했는지 궁금했다. 케이트가 유리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그녀의 친구는 활짝 웃으며 맞아 주었다. 「케이트, 정말 반갑구나」 「안녕, 로리」 클레이의 신부가 되어 있는 친구를 대하는 게 아직은 당혹스러웠다. 물론 두 사람을 맺어 준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결정이었다. 「샐리의 말이 옳았어」 케이트는 웃음을 띈 채 로리의 뺨에 키스했다. 「아주 까맣게 탔구나. 더 근사해 보여」 로리는 짙은 갈색 눈동자를 빛내며 그녀의 찬사를 받아 들였다. 「솔직히 말해서 난 일주일 내내 해변에서 어슬렁거릴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클레이가 고집을 피워서 어쩔 수가 없었단다. 오, 케이트, 우린 정말 멋진 시간을 보냈어」 「정말 잘됐구나」 그건 진심이다. 로리와 클레이는 처음만난 순간부터 서로를 사랑했다. 하지만 케이트의 희생이 있었기에 그들의 사랑은 결실을 본 셈이다. 로리의 표정에 행복이 생생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케이트의 얼어붙었던 마음도 훈훈해져 오는 듯했다. 「지금 마침 휴식시간이야. 나와 함께 있어 줄 수 있겠지?」 「좋아」 다행히도 로리는 소문에 대해서 전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케이트에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로리가 도서관을 자원 봉사자에게 부탁하는 동안 케이트는 약국 건너편에 있는 <넬리의 카페>로 걸어갔다. 그녀가 커피 두 잔을 준비해 두었을 때 로리가 나타났다. 「그런데 너와 루크에 대한 소문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니? 케이트, 어 요즘 너무 위험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루크가 <서클 엘>을 사들이고 너의 아빠가 머피 부인과 재혼한다면서? 겨우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메리에게 그 엄청난 소식을 듣고 나니 마치 일년쯤 시간이 흐른 것 같아」 이제 철저하게 냉정한 표정을 짓는 건 단련이 되어 있다. 하지만 속에선 다시 위산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정말이지 이 마을에선 비밀이란 단어가 통용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루크와 난 최근 들어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아」 그녀는 친구의 의심스런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 얘기 좀 자세히 해줄래?」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만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서 그녀는 찻잔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스푼을 만지작거렸다. 「너와 클레이가 결혼하기로 한 이후 루크는 내게 무척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해 줬어. 그는 정말 좋은 친구였어. 그런데…, 결혼식 이후 난 심한 외로움에 빠져 있었어. 그래서 루크와 춤을 추는 동안 정말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지. 그래서…, 그만 내가 바보 같은 제안을 하고 말았어. 그런데 루크는 계속 나에게 그 약속을 지킬 걸 강요하는 거야」 「그건 루크답지가 않구나」 로리가 얼굴을 찌푸리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바보 같은 제안을 한 것도 너답지가 않아」 「아마 빈 속에다 샴페인을 마셨기 때문일 거야」 「루크는 어땠어?」


「잘 모르겠어. 아무튼 그는 매사에 억지를 쓰고 있어. 정말 말도 안되는 고집을 피우고 잇단다」 「구체적으로 말해 봐」 로리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케이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 잠시 침묵에 잠겨 있던 로리가 입을 열었다. 「루크에 대한 너의 감정은 어떤 거지?」 「그를 좋아하고 있어.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감정은 아니야」 그녀는 커피 잔의 가장자리를 감싸쥔 채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나를 가장 화나게 하는 건 그가 클레이를 향한 내 감정을 하찮게 생각하는 거야. 클레이에 대한 나의 사랑이 일종의 감정의 유희일 뿐이라는 거지」 케이트는 연인의 아내가 된 여자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게 좀 불편하긴 했지만 로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잇는 처지였다. 「이제 클레이가 나와 결혼을 했으니까 루크는 네가 몹시 혼란에 빠져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맞았어」 「이제 네가 그의 따뜻한 품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래!」 로리는 케이트보다 더 명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루크는 나에겐 자기가 필요하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어. 그리고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거야. 그러나 루크만 그렇게 억지를 쓰고 있다면 어떻게 해보겠어. 그런데 마을 사람들 전체가 내가 그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심지어 아버지까지도…」 「그건 네가 새로 온 변호사와 저녁식사를 했기 때문일 거야. 그의 이름은 뭐랬지?」 「에릭 윌슨이야. 사실은 그와 데이트를 했던 것도 바로 루크 때문이었어. 루크는 만나기만 하면 우리의 결혼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말하곤 해. 크리스마스 이전에 식을 올려야겠다는 거야. 그에게 저항하기 위해선 나도 현실적인 방법이 필요했어. 결국 일이 이렇게까지 된 건 순전히 내 탓이야. 루크가 계속 나에게 고집을 피우고 있긴 하지만 사실 그걸…, 그걸 제안한 건 바로 나였어」 「어떻게? 언제?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게 바로 그거였구나?」 종이 냅킨을 조각조각 찢으면서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다시 펼쳐지기 시작했다. 「로리, 진심으로 그랬던 건 아니었어. 너의 결혼식 피로연 때…, 우린 달빛 아래 서 있었어. 모든 게 너무 아름답고 평화롭게 보였지.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 말이 튀어나오고 만 거야」 「변호사와의 사건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구나」 케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아빠가 머피 부인과 결혼하고 루크가 목장을 사게 되면 상황이 더 나빠지게 될 거야」 「루크는 때때로 좀 독선적인 데가 있어. 그렇지?」 케이트는 그 말을 인정하듯 눈동자를 굴렸다. 「그런데 루크의 오만한 태도보다 더 괼운 건 모든 사람들이 그의 편을 들고 있다는 거야」 「그게 무슨 뜻이지?」 「우리 아빠만 해도 그래. 아빠는 내가 루크와 결혼하는 게 시간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너와 클레이가 결혼한 이상, 그것만이 나에게 남겨진 유일한 선택이라고 믿는 눈치야. 하지만 난 좋은 남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30 살까지 노처녀로 버틸 거야」 「웃기는 얘기야」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다 온 로리는 이 조그만 오리건 사람들의 인생관이 어떤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곳에선 30 살이 넘어서도 독신인 여자는 결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최소한 나이팅게일에선 그런 법칙이 통용되고 있다. 「넌 평생 여기서 살아도 이곳 주민들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케이트, 넌 21 살이 넘었어. 아무도 널 루크와 결혼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어. 그 점을 명심해」 「난 마치 급류에 휘말려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만 같아. 이곳에서 기반을 잃게 될까 봐 두려우면서도 주변에서 시키는 대로 무작정 따라갈 수도 없어」 「그래선 절대로 안돼」 「루크는 날 방황하는 어린 양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아. 인생을 헤쳐가는 법을 모르고 있는 날 동정하고 있어」 「넌 절대로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 네가 나약했다면 넌 클레이와 결혼했을 거야. 우릴 맺어 주려고 그렇게 애쓰지 않았을 거야」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하지만 누구든 그렇게 헌신적으로 행동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클레이오 나의 행복은 모두 네 덕분이야」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케이트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난 너를 도와주고 싶어.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의 사연을 들어주는 일뿐인 것 같구나」 「오, 로리, 너에게 모두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어」 케이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루크는 내가 그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아. 몇 주일 내로 꼭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이겠어」 「아, 참, 잊을 뻔했구나」 로리가 말했다. 「클레이와 난 가까운 시일 내에 널 저녁식사에 초대하려고 해. 우린 너에게 큰 빛을 지고 있어.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은 거야」 「저녁식사?」 케이트는 갑자기 당황했다. 다시 클레이와 마주 대하기 위해선 자신을 추스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다음주 화요일이면 괜찮겠니?」 로리가 물었다. 「하지만 너도 클레이와 함께 보낼 시간이 있어야 하잖아? 다음으로 연기하면 어떨까?」 「내 해물요리가 형편없을까 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구나?」 로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녀는 클레이와 동생 스킵을 위해 해물요리를 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두 남자는 열심히 일한 직후였기 때문에 오히려 맨 나중에 나온 고기와 감자에 더 관심을 보였다. 두 남자에겐 크림 소스에 헤엄쳐 다니는 해산물과 국수가 결코 만족스러운 양이 되지 못했다. 클레이는 예의상 실망감을 애써 감췄지만 스킵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케이트는 그 생각을 하면서 미소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네 마음대로 요리해 봐. 난 스킵보다는 훨씬 착하게 굴 테니까」 「아마 메리가 요리를 하게 될 거야. 그녀는 오랫동안 프랭클린 가의 요리사였어. 난 아직은 감히 그녀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을 것 같아. 더구나 해물요리 사건 이후에 그녀는 날 믿어 주지도 않을 거야」 그들은 둘 다 웃음을 터뜨렸다. 덕분에 케이트는 잠시나마 절망스런 기분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 「이제 도서관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로리가 내키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나도 집으로 돌아가야 해」 케이트는 테이블 위에 잔돈을 남겨두고 일어섰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로리를 끌어안았다. 친구의 격려와 함께 시간을 보내 준 게 너무나


고마웠다. 「네가 내 친구인 게 너무나 기뻐」 그녀가 속삭였다. 「나도 마찬가지야」 로리도 그녀를 끌어안았다. 케이트는 <서클 엘.로 향하는 도로에 이르렀을 때 대단한 결심을 했다. 그녀는 서둘러 오븐에 고기를 넣어 둔 다음 옷을 갈아입고 뒤뜰로 나갔다. 루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를 일초라도 빨리 만나야만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루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헛간에는 인부인 빌 슈미트만이 혼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빌, 루크를 못 봤어요?」 빌은 천천히 허리를 펴고 모자를 더 깊숙히 눌러썼다. 「몇 시간 동안 못 봤어요. 루크는 길 잃은 가축을 찾으러 나갈 때도 절대로 얘기하는 법이 없답니다. 하지만 곧 돌아올 겁니다」 「알겠어요」 케이트는 잠시 입술을 깨물며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무심코 말의 안장을 붙잡았다. 「빌, 논스톱을 타고 나갔다 와도 괜찮겠어요?」 논스톱은 가장 빨리 달리는 말이다. 어차피 루크를 찾을 수 없다면 운동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어쩌면 일주일 내내 그녀를 괴롭혔던 절망스런 기분을 싹 씻어낼 수 있를지도 모른다. 「물론이죠, 로건 아가씨」 빌은 일손을 놓은 채 울타리 쪽으로 다가가서 잠시 후 논스톱을 끌고 나왔다. 잠시 후에 논스톱은 뒤뜰을 빠져나왔다. 케이트는 몇 주일 동안이나 말을 타지 못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말을 타지 않았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클레이와 약혼을 했던 그 여름 동안은 거의 말과 함께 지냈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엔 항상 클레이가 곁에 있어 주었다. 새삼스럽게 상실감이 몰려왔지만 그녀는 애써 그와의 추억을 지우려고 했다. 빌이 루크가 주로 다니는 곳을 가르쳐 줬으므로 케이트는 그쪽을 향해 나아갔다. 불어오는 미풍엔 어느새 가을의 향기가 실려 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해가 질 것이고 파란 언덕은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 것이다. 「케이트」 그녀의 이름이 바람에 실려왔다. 고삐를 움켜쥐고 말을 멈추게 한 다음 뒤를 돌아보니 루크가 말을 탄 채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케이트는 자연스레 손을 흔들었다. 분노의 감정은 어느새 엷어지고 그 자리엔 행복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삶을 자제할 필요는 업어. 내가 느끼는 감정을 소중하게 여기는 거야. 루크가 재빨리 안장에서 뛰어내렸다. 「괜찮아?」 「물론이에요」 그녀는 약간 웃으며 대답했다. 「혹시 나 때문에 겁먹은 건 아니겠죠?」 「내가 돌아오자 빌은 당신이 나간 지 15 분도 되지 않았다고 말했어. 당신을 찾지 못할까 봐 걱정했었는데…」 「좀…, 생각할 게 있었어요」 「빌은 당신이 날 찾았다던데…」 「그랬어요. 당신과 얘기하고 싶어요」 지금이야말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 같다. 그들은 파란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산위로 올라갔다. 아래에선 몇 마리의 가축들이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루크는 그녀의 허리를 안아서 말에서 내리는 걸 도왔다. 다시 한번 케이트는 그의


접촉이 이상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음을 의식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효과를 단호하게 무시해 버렸다. 논스톱과 루크가 타고 온 실버 섀도는 기다렸다는 듯이 천천히 풀을 뜯기 시작했다. 「정말 아름다운 오후예요. 그렇죠?」 케이트는 잔디 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떨리던 무릎이 좀 진정되었다. 루크도 그녀 곁에 앉아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이처럼 근사한 날은 드물어. 정말 멋진 날씨야」 「로리와 클레이가 하와이에서 돌아왔어요」 루크가 작업용 가죽 장갑을 벗고 그녀의 관자놀이에 붙어 있는 검불을 떼어내려다 갑자기 멈칫하고 손을 치웠다. 「그래서 로리를 만나 봤다는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넬리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어요」 「기분이 상하진 않았어?」 「전혀…」 「왠지 마음이 편안해진 것처럼 보이는군」 그가 긴 다리를 뻗고 발목을 서로 포갰다. 「이젠 클레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야? 그리고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안 모양이지?」 「아니에요」 그녀는 화난 어조로 쏘아붙였다. 그가 이처럼 순식간에 자신을 화나게 만든다는 것이 놀라웠다. 루크가 몸을 돌렸다. 「난…, 당신이 결혼식 날짜에 대해서 상의하려는 줄 알았어」 그의 음성은 몹시 굳어져 있다. 「오, 루크」 케이트는 그를 어떻게 납득시켜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루크」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우린 일주일 내내 똑같은 입씨름을 했어요. 이젠 그만둘 때가 됐어요」 루크가 그녀를 응시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눈동자가 뜨겁게 부딪쳤다. 「루크, 당신은 아주 근사한 남자예요. 하지만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루크가 눈썹을 치켜뜬 채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뭔가 항의를 하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케이트는 단호하게 그의 말을 막아 버렸다. 「난 절대로 억지로 결혼은 하지 않겠어요.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해서 결혼하진 않겠다는 뜻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난 결혼이 우리 두 사람을 위해 좋은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케이트, 내 사랑…」 「난 당신의 사랑이 아니에요」 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럼 말해봐」 그가 천천히 말했다. 「내가 당신을 포옹했을 때 왜 그런 반응을 보였던 거지? 대답해 보라구」 케이트는 그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당신과 키스할 땐 그 순간이 즐거웠어요. 그러나 그 이유는 모르겠어요. 더구나 난 클레이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데…. 어쩌면 우리가 오랫동안 가까이서 살았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우린 아주 좋은 친구니까 아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느껴졌을 거예요. 하지만 그 감정이 오래 계속되진 않을 거예요」 그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에 몹시 화가 난 모양이다. 「루크, 제발 부탁하겠어요. 만약 당신이…」 「케이트, 단 한번만 내 얘기를 들어 주겠어?」 「싫어요」 그녀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건 단 한 가지뿐이에요. 제발 결혼 문제는 없었던 일로 해달라는 거예요」


「하지만…」 「루크, 난 당신이 약속해 주길 원해요」 그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해 버렸다. 그는 이 순간을 몹시 힘들어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좋아」 드디어 그가 말했다. 「약속하지. 다시는 그런 얘기는 하지 않겠어」 케이트는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지가 그대로 흐늘흐늘 늘어지는 기분이다. 「고마워요」 그녀가 속삭였다.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에요」 루크는 벌떡 일어서서 실버 섀도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쉽사리 안장에 올라앉아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검붉게 상기되어 있다. 「케이트,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 잠시 그걸 생각해 보라구」

6

케이트는 기분이 좋아졌다. 클레이의 약혼식 이후 느껴야 했던 무력감과 절망감도 점차 사라지고 있고, 곧 닥쳐올 아버지의 결혼식도 아주 당연하게 여겨졌다. <서클 엘.이 팔린 것도 더 이상 아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넬리, 안녕하세요」 조그만 카페에 들어서며 케이트가 말했다. 퇴근 후 집에 가보니 아버지가 그곳에서 6 시에 만나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지는 메모를 남겨 두었다. 「안녕, 케이트?」 넬리가 카운터 뒤에서 인사를 건넸다. 아버지는 도러시아를 데리고 올 것이다. 그래서 금요일 저녁에 목사관에서 거행될 결혼식 준비의 최종 마무리 작업을 하게 될 것이다. 케이트는 도러시아의 들러리를 서게 되어 있고 아버지의 들러리로는 루크가 결정되었다. 한 손엔 물잔, 그리고 다른 한 손엔 커피포트를 든 넬리가 메뉴 판을 옆구리에 낀 채 케이트의 자리로 다가왔다. 「아빠와 도러시아 머피도 올 거예요」 「알았어. 오늘의 특별요리는 냄비소고기 요리란다. 그리고 로건 씨가 오시면 오븐에서 꺼낸 지 15 분도 안된 파이가 있다고 말씀드려」 「그러겠어요」 「넬리, 커피를 좀더 갖다 주겠어요?」 프레드 가너가 창가의 자리에서 소리쳤다. 그는 케이트 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트, 만나서 반갑구나!」 「안녕하세요, 프레드?」 그녀는 가너 사료가게의 주인인 프레드를 향해 웃어 보였다. 메뉴를 읽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미소를 띈 채 그쪽을 바라보았다. 루크가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맞은편에 앉았다. 「데빈은?」 「모르겠어요. 여기서 만나 저녁식사를 하자고 했는데…」 「나도 똑같은 메모를 받았어」 「아마 결혼식과 관련이 있나 봐요」 「그렇지 않아」 루크가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데빈은 은행 대출 서류에 사인을 해주기로 했어」 넬리가 물잔 하나를 더 갖고 와서 두 사람에게 커피를 따라주었다. 「안녕, 넬리」 「루크 리버스, 요즘엔 통 볼 수가 없군」 그녀는 유혹적인 어조로 말하고 그에게


대담한 윙크를 해보인 다음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사라졌다. 넬리의 대담한 행동에 깜짝 놀란 케이트는 급히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넬리는 루크보다 15 년이나 연상인데,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다. 「저 여자가 자주 그래요?」 케이트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어조로 물었다. 「질투하는 거야?」 「천만에요! 넬리가 그처럼 노골적인 추파를 던지는 게 놀라울 뿐이에요」 「그래선 안될 것도 없잖아?」 루크는 곧 메뉴 판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케이트는 더 따지려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수천 명의 여자가 루크를 유혹한다 해도 그녀가 나설 처지는 못된다. 그녀는 루크에게 아무런 권한도 없는 존재니까. 카페의 전화 벨이 울렸다. 꽤 여러 번 벨이 울린 다음 주방의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잠시 후 넬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데빈에게서 전화가 왔어. 좀 늦을 것 같으니까 두 사람 먼저 식사를 하라는군」 그녀는 핑크 색 유니폼의 호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냈다. 「계산은 아버지가 할 거니까 마음껏 먹어 두라구」 그녀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난 로스트 비프 샌드위치가 좋겠어요. 샐러드 작은 것하고…」 케이트가 말했다. 「난 치킨 프라이 스테이크로 하겠어요」 루크가 카페 주인에게 말하며 메뉴를 건네주었다. 「하지만 나도 샐러드부터 주세요」 「금방 구워낸 장군풀 파이도 있어」 「그럼 그것도 한 조각 주세요」 루크가 넬리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케이트는?」 「좋아요. 나도 먹겠어요」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넬리가 떠나자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마치 전혀 모르는 타인과 함께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다. 루크가 먼저 대화를 제의했다. 「학교 일은 어때?」 「좋아요, 아주 좋아요」 「잘됐군」 「난 짐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에요. 내 짐은 두 뭉치뿐이에요. 아빠 짐은 아빠가 옮기실 거고 내 짐은 이사갈 때 가져갈 거예요」 「당신이 원하는 만큼 목장에서 살아도 좋아」 그의 깊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옮겨갈 필요는 없어」 「하지만 이제 <서클 엘>은 당신 소유가 돼요」 「그건 당신 집이야」 「이젠 내 집이 아니에요. 난 시내에 거처를 마련하고 싶어요. 사실 난 이사가는 게 기대가 돼요. 겨울에 길이 너무 엉망인 것 잘 알잖아요? 진작 옮겨갔어야 했는데…」 「당신은 정말 고집불통이군」 루크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케이트, 당신은 날 화나게 하고 있어. 난 절대로 당신이 이사가는 걸 원치 않아」 「나도 알아요」 여태껏 아버지가 그녀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이사를 간다는 건 생각해 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이젠 독립심을 발휘해 볼 시기가 왔다. 넬리가 샐러드를 가져왔다. 그녀가 돌아가기를 기다렸다가 루크는 나직하고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케이트, 제발 목장에 있어 줘. 내가 그 정도의 배려는 할 수 있게 해줘」


그의 따뜻한 배려가 고마웠지만 그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사람들이 수군댈 거예요」 「내가 해명해 줄게…」 「난 교사예요」 샐러드를 다 먹기 전에 식사가 나왔다. 그들은 말없이 먹는 데만 열중했다.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가 다시 목장에 있으라고 할까 봐 겁이 나서 케이트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그때 갑자기 카페 밖에서 소란한 음성이 들려왔다. 「또 해리 액커맨이 왔나 봐요」 크레드가 주방에 있는 넬리에게 소리쳤다. 「보안관을 부를까요?」 「노래 부르게 내버려 둬요」 넬리가 소리쳤다. 「더이상 해를 끼치진 않을 거예요」 해리 액커맨은 그 마을의 주정뱅이다. 넬리가 고등학교 시절에 그들은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해리는 군에 입대했고 제대했을 때에는 가정을 꾸미는 것보다는 술에 더 심취해 있었다. 그리고 6 달쯤 후에 넬리는 마을에 흘러온 떠돌이 기계공과 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 남자는 넬리와 두 아이를 남겨둔 채 혼자 떠나 버렸다. 넬리는 떠난 남편에게 더 이상 연연해 하지 않고 카페를 열어 혼자서 애들을 부양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15 년이 지난 지금도 해리는 넬리를 흠모해서 시내에 오기만 하면 항상 카페 밖에서 연가를 부르곤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그 연가가 넬리를 다시 자기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눈치였다. 「사실 그의 노래를 썩 괜찮은 편이에요」 케니트가 루크에게 중얼거렸다. 잠시 후 프레드가 계산을 치르고 그곳을 떠났다. 「나중에 또 보자구」 프레드가 문을 여는 순간 래리의 연가가 귀를 찌를 듯이 울려왔다. 이어 해리 액커맨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애틋한 시선으로 넬리를 바라본 다음 손을 가슴에 앉고 목청을 높여 다시 노래를 불러댔다. 「여기서 나가 줘요!」 넬리가 빗자루를 집어들고 소리쳤다. 「손님들을 방해하지 말란 말예요!」 그녀는 빗자루를 권총처럼 휘둘렀다. 해리는 곧 비척거리는 걸음걸이로 그곳을 나갔다. 그리고 외로운 얼굴을 유리창에 댄 채 자신의 연인이 다시 돌아와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넬리가 빗자루를 내려놓으며 손님들에게 사과했다. 해리가 또 다른 청중을 찾아 그곳을 떠났을 때 카페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루크는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커피를 저었다. 「당신 아버지는 이곳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 사실은…」 「말도 안돼요. 아빠는 그럴 분이 아니에요」 그녀는 단호하게 루크의 말을 잘라 버렸다. 「아버지는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거야」 「무슨 말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군요」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가 하려는 말을 대강은 짐작하고 있다. 그러나 모른척하는 게 상책일 것 같았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루크는 입을 열었다. 「케이트, 당신은 영리한 아가씨야.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다 알고 있을 거야」 그는 파이를 다 먹고 접시를 옆으로 밀쳐 놓았다. 「난 가봐야 할 데가 있어. 이제 나가 봐야겠군」 그가 창밖을 내다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또 모르지. 당신이 지금 정신 차리지 않으면 몇 년 후에 나를 향해 해리처럼 연가를 부르고 있을지도…」 케이트는 그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아버지는 곧 오실 거예요」


「오지 않아, 케이트」 루크의 눈동자에서 웃음기가 가셔졌다. 그는 앞으로 몸을 숙이고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하지만 아버지의 의사는 분명히 전달된 셈이지」 루크가 떠나고 난 후 케이트는 30 분 동안이나 더 혼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루크의 말대로 아버지는 그곳에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아주 분명한 의사를 전달한 셈이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애써 웃는 얼굴로 넬리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케이트는 그 이후로 루크를 만나지 못했다. 결국 아버지의 결혼식 날인 금요일 저녁 윌킨스 목사님의 자택에서야 그를 볼 수 있었다. 케이트는 데빈과 함께 그곳에 도착했고 그 몇 분 후에 루크가 나타났다. 결혼식 후 간단한 피로연 준비를 위해 신선한 쿠키를 쟁반에 열심히 담고 있는데 그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도러시아는 미니 윌킨스와 뒷방에 있고 아버지는 윌킨스 목사와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 「안녕, 케이트」 루크가 뒤에서 인사를 건넸다. 「안녕」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예의바른 미소를 보냈다. 하지만 그의 우아하고 남성다운 모습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혀 버렸다. 검정 양복은 그의 강인하고 날씬한 몸매를 유감없이 드러내 주었고, 파란 실크 타이는 검게 그은 그의 피부에 멋지게 어울렸다. 케이트는 자신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뚫어지게 바라보는 동안 케이트는 격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은 무척 힘든 시간이 될 것 같다. 클레이와 로리가 결혼하던 날과 여러 가지 상황이 흡사하다. 그동안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지만 막상 아빠의 결혼식이 목전에 닥치고 보니 다시 진한 상실감이 몰려왔다.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모두 그녀의 인생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사랑했던 연인, 그리고 아빠, 어린 시절부터 살아왔던 집…. 지난번 클레이의 결혼식 때처럼 그녀는 애써 즐거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빠와 도러시아를 위해서 당연히 기뻐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왜 사람들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 나에게 그토록 많은 대가를 치르게 하는 걸까? 루크는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두려움을 알아차린 듯 급히 케이트에게 다가왔다. 「모두 좋아질 거야」 그가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이에요」 그녀는 미소를 지은 다음 꽃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다. 「아빠를 위해선 그보다 더 좋은 신부감은 찾기 힘들 거예요」 루크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당신도 아주 좋은 아내가 될 거야」 케이트는 몸을 돌려 그의 강인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결국 지난번처럼 이성을 잃고 말 것이다. 그때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고 루크는 마지못한 듯 손을 치웠다. 케이트는 지금 절실하게 루크를 필요로 하고 있다. 불과 몇주일 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주 절실하게…. 하지만 그녀는 좀더 강해져야만 한다고 다짐했다. 예식 자체는 아주 간략하게 진행되었다. 케이트는 아빠가 엄마 대신 선택한 여자 옆에서 목석처럼 서 있었다. 엄마와의 즐겁고 행복했던 시절들이 그녀에게 물밀 듯이 밀려왔다. 눈물이 쏟아지려 했지만 케이트는 기를 쓰고 참았다. 그 순간 루크의 따뜻한 시선이 그녀를 지켜 주고 있음을 알았다. 윌킨스 목사가 성경을 덮고 데빈과 도러시아가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했다. 데빈은


신부를 끌어안고 부드럽게 키스했다. 미니 윌킨스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정말 아름다워」 그녀는 친구인 신부를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곧 그들은 서로서로 끌어안았다. 케이트의 팔이 루크를 안았을 때 너무나 편안하고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포근했지만 그만큼 두렵게도 느껴졌다. 그녀는 재빨리 팔을 떨구고 말았다. 그러나 루크는 태연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보름달과 샴페인이 없어서 유감이군」 그가 케이트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러나 케이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곧 작은 피로연이 열렸고 케이트는 몇 시간 동안 바삐 움직이며 웨딩 케이크와 쿠키, 그리고 커피를 준비했다. 아버지가 주방으로 케이트를 찾아왔다. 그의 눈동자는 행복감으로 빛나고 있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돼. 넌 항상 나의 작은 공주란다」 「아빤 항상 나의 영웅이셨어요」 데빈이 껄껄 웃었다. 「루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싶어할 거야. 나 역시 그걸 바라고 있단다. 얘야, 그는 아주 좋은 청년이야」 「아빠, 루크는 좋은 사람이에요. 아빠가 그에게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리고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에 내 문제를 매듭 짓고 떠나려는 아빠의 마음도 이해해요. 하지만 난 아직 어떤 결정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아직은 그럴 수가 없어요」 「공주야, 넌 아름다운 신부가 될 거야. 난 네가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빌고 있단다」 「행복해질 거예요」 그녀는 발꿈치를 들고 아버지의 뺨에 키스했다. 데빈과 도러시아가 신혼여행을 떠날 무렵 목사관에는 20 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신랑과 신부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신혼부부가 떠나자 모두들 집안으로 들어갔지만 케이트는 현관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자꾸만 눈물이 고여왔기 때문이다. 루크가 그녀에게 다가와 말없이 옆에 서서 그녀가 마음을 가라앉히길 기다려 주었다. 「데빈이 당신을 집까지 바래다 주라더군」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아빠는 그녀와 루크를 묶어 두려는 시도를 그치지 않고 있다. 「더이상 나와 입씨름을 않겠다는 거야?」 그가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렇지」 그가 고개를 쳐들고 웃으면서 갑자기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당신과 키스한 지도 아주 오래됐군」 그의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입술 쪽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케이트는 고개를 쳐들고 그에게 놓아 달라고 요구하려 했다. 하지만 루크의 입술이 그 언어들을 잠재워 버렸다. 그의 입술이 부드러운 키스를 퍼붓기 시작하자 그를 밀쳐내려던 결심은 어느새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의 입술이 반복해서 케이트의 입술을 찾았다. 루크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키스가 모든 고통을 씻어내는 것 같았다. 잠시 전까지만 해도 케이트는 그에게서 빠져나갈 생각에 골몰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루크에게 매달려 열심히 그의 키스에 반응하고 있다. 그의 키스는 더욱더 깊어졌고 케이트의 전신에 전류와도 같은 흥분이 퍼져갔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행동이 멎었다. 케이트는 불만의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케이트…」


「음…, 루크, 제발 멈추지 말아요」 「청중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모아지고 있어」 순간 케이트는 숨을 들이쉰 채 팔을 떨구었다. 그리고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20 여 명이 넘는 하객들이 떠나기 위해 현관으로 나와 있었다. 「테일러 모겐로스가 인디언 추장 역을 맡는 게 좋겠어」 월요일 오후 휴게실에서 케이트가 린다에게 말하고 있을 때 샐리 데일 리가 들어섰다. 두 사람은 추수감사절 행사에 관한 최종 계획을 의논하는 중이었다. 「테일러가 적역일 거야」 린다가 동의했다. 「몹시 바쁜가 보군」 샐 리가 끼어들었다. 「이번 연극은 두 선생님 덕분에 아주 근사할 거야. 기대가 커요」 「고마워요」 린다가 샐리를 애써 외면한 채 대꾸했다. 「케이트, 며칠 전에 로리 프랭클린과 함께 있는 걸 봤어」 「<넬리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어요. 케이트는 될 수 있으면 샐리를 따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대놓고 경솔하게 굴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샐리는 금방 물러설 기세가 아닌 듯하다. 그녀는 케이트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자신있는 어조로 말했다. 「이젠 클레이 프랭클린의 충격에서 완전히 회복된 모양이지?」 케이트는 린다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여자는 마치 케이트가 악성 독감에라도 걸렸던 것처럼 말하고 있다. 「샐리,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거예요?」 그녀는 과장된 동작으로 한 손을 가슴에 댄 채 고뇌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여자로서의 자존심을 손상당한 채 다시는 사랑도 할 수 없기를 바라는 거예요?」 샐리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럼 왜 묻는 거죠?」 「글쎄, 우리 모두가 케이트를 사랑하기 때문이겠지. 상냥한 케이트가 최근에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고마워요」 케이트가 공손하게 대답하고 다시 추수감사절 계획안에 시선을 돌렸다. 「케이트와 에릭 윌슨, 그리고 루크 리버스에 관한 소문은 이제 거의 가라앉았어」 샐리는 확신하듯 자신있게 말했다. 「그럼 최근엔 에릭과 말도 하지 않았다는 거니?」 린다가 갑자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태껏 린다는 그 변호사에 대해선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그와 얘기했느냐고?」 케이트가 피식 웃었다. 「난 그와 다시 마주칠 까 봐 세이프웨이 상점에도 가지 않고 있어」 「그런 걱정까지 할 필요는 없을걸」 샐리가 끼어들었다. 「내가 듣기로는 그 역시 케이트를 피하고 있다는 거야」 린다가 낄낄 웃어댔다. 「당연하지, 루크가 혼쭐을 내줬을 테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루크 얘기가 나오자 케이트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직 모르고 있었어?」 샐리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뭘 말예요?」 케이트는 샐리와 린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루크가 그를 위협하기라도 했단 말인가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린다가 재빨리 말했다. 「나도 특별히 주워들은 건 없어. 내 생각엔 아무래도 케이트가…」 샐리는 나머지 얘기를 케이트가 직접 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마을 사람들이 케이트와 루크의 관계를 예사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잖아?」


「클레이의 결혼식 이후로 소문이 끊임없이 돌고 있어」 린다가 말했다. 「하지만 샐리는 그 소문들이 잠잠해지고 있다고 했어」 케이트가 발끈 화를 냈다. 「물론 윌슨에 관한 소문은 끝나가고 있어. 그와의 데이트는 이제 지난 얘기가 돼버렸지. 그는 약아서 루크와 충돌하려 하진 않을 거야」 「그럴 거예요」 케이트는 어서 샐리의 입담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다. 「린다, 이것 마저 끝낼까?」 「아…, 그래」 「사람들이 지난주 케이트의 아버지가 결혼하기 전날 <넬리의 카페>에서 케이트와 루크가 만나는 걸 봤대. 그리고 윌킨스 목사관에서의 결혼식날 두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아」 케이트는 앞에 흩어진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샐리는 자신의 청중들이 떠나려 한다는 걸 알고 몹시 실망하는 눈치였다. 샐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핸드백을 집어들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서 그녀는 잠시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프레드 가너가 케이트와 루크의 관계를 지나치게 확대해서 생각한 것 같아」 그 말을 남기고 샐리는 그곳을 떠나 버렸다. 「프레드 가너?」 린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대머리 아저씨가 뭐라고 했다는 거지?」 「프레드 가너는 사료가게 주인이야」 케이트도 샐리의 말뜻을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그가 이 일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날 음식점에서 프레드와 마주쳤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와 도러시아의 피로연에도 참석했다. 그날 루크와 포옹을 하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현관에 있었다. 현관에서 그를 보진 못했지만 틀림없이 그도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한 시간쯤 후에 케이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루크는 뒤뜰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와 그에게 두 발짝쯤 걷다가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목에 응어리 같은 게 맺혀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이다. 몸이 떨리는 증상은 가너 사료가게를 떠나는 순간부터 시작됐다. 샐리의 말을 듣고 케이트는 그의 가게에 들렀다. 그때부터 상황은 나쁘게 치닫기 시작했다. 지금 기분 같아서는 루크의 머리를 향해 핸드백을 내던지고 싶을 뿐이다. 「케이트?」 그가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 케이트는 여태껏 지금처럼 화가 치민 적이 없었다. 일초라도 빨리 나이팅게일을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건 모두 당신이 꾸민 일이에요, 그렇죠?」 그녀가 떨리는 음성으로 다그쳤다. 그리곤 꼿꼿이 머리를 쳐들었다. 그건 침착성을 잃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여태껏 그녀는 자존심을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그게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루크는 그녀를 향해 몇 발짝 다가왔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난 지금 사료가게에서 돌아오는 길이에요. 이제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몰라」 「발뺌을 하는군요」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케이트, 맹세해. 난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케이트의 입에서 고통스런 흐느낌과도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당혹한 표정이다. 그처럼 엄청난 시련을 안겨 주고 이렇게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게 믿을 수가 없다. 더 이상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느덧 그녀의 두 뺨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케이트,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녀는 몸을 홱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에게 감정이 격해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가 않다. 그녀는 급히 집안으로 들어가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거친 울음이 솟구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위의 고통스런 통증이 숨을 들이쉴 때마다 더 강렬하게 그녀를 괴롭히고 있다. 문이 열렸을 때 그녀가 소리쳤다. 「나가요!」 「케이트?」 「그… 그만하면 충분히 괴롭혔잖아요? 그녀의 혀끝에서 나오는 모든 단어가 흐느낌으로 변해 버렸다. 그는 케이트 앞에 무릎을 꿇고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매정하게 뿌리쳤다. 더 이상 그가 주는 따뜻함에 의지하고 싶지 않았다. 케이트의 어깨는 아직도 들썩이고 있다. 커다란 한숨을 내쉬며 루크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서 있었다. 「좋아. 우선 사정 얘기를 해봐」 「윌킨스… 목사님이… 12 월에… 20 달러를 걸었다고 했어요」 그녀가 흐느끼면서 말했다. 「클레이까지도… 내기에… 돈을 걸었대요」 클레이의 이름이 나오자 그녀의 가슴은 더욱 아파왔다. 「케이트, 저말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영문을 모르겠어」 그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재빨리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간신히 감정을 추스려서 또박또박 말했다. 「사료… 가게」 「사료가게가 어쨌다는 거야?」 「그들은 내기를 걸었다고 했어요」 그 굴욕적인 얘기를 다시 입에 담는 게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다. 「어디다 내기를 걸었다는 거야?」 루크가 더 깊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 역시 인내심이 한계에 다달아 있음을 직감했다. 「우리들에게!」 그녀가 소리쳤다. 「우리들이 어쨌다는 거지?」 「우리가 결혼할 시기에 관해서 말예요! 이 마을 사람의 절반이 우리의 결혼 날짜에 돈을 걸었다고 했어요」 「맙소사」 루크가 중얼거리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태도다. 「정말 몰랐단 말인가요?」 「물론이야」 그는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깊은 눈동자가 차갑게 변했다. 강한 남자의 위협적인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았지?」 「방과후에 샐리 데일리가 그런 암시를 해줬어요. 그런 다음 학교 주차장에서 학부형 한 사람이 내게 3 월이 결혼하기엔 아주 좋은 달이라고 하더군요. 구체적으로 날짜까지 지정해 줬어요, 3 월 16 일로…. 그 다음 난 집으로 오는 길에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사료가게에 들렀어요. 하지만 그건 내 실수였어요」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케이트는 그가 자신의 얘기를 반쯤은 흘려 버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단 한가지뿐이에요」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내일 아침 학교 이사회에 사표를 내고 이번 주말에 이곳을 떠나는 거예요」 루크가 화난 얼굴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럴 필요까진 없어. 이 문제는 내가 해결하겠어」

7

한때 케이트는 프랭클린 농장인 <엘크런>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하지만 화요일 저녁식사를 위해 그곳에 도착했을 때 <엘크런>은 더 이상 다정하고 친숙한 곳이 아니었다. 마치 몇 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던 것처럼 낯설게만 느껴졌다. 오늘밤의 저녁식사에 크게 기대를 걸었던 건 아니지만 마음까지 불편해 오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케이트, 환영해」 케이트가 차를 세우자 로리가 뛰어나왔다. 케이트는 차에서 내려 로리의 포옹을 받았다. 클레이 프랭클린도 잠시 그녀를 끌어안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가 13 살 이후로 언제나 변함없이 보여 주었던 미소다. 그때부터 케이트는 변함없이 클레이를 흠모해왔다. 케이트는 잠시 멈춰섰다. 고통과 후회의 감정이 몰려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그녀의 그런 예상은 그대로 빗나가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와줘서 정말 기뻐」 로리가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프랭클린 가의 가정부인 메리가 에이프런을 두른 채 주방에서 분주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신선한 파이의 향기가 주방을 가득 메웠다. 「메리, 아줌마가 만든 파이 냄새로군요. 난 하루종일 파이 먹을 생각에 부풀어 있었어요」 「괜히 비행기 태우지 말라구!」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메리의 눈동자는 행복으로 빛나고 있다. 「언제 요리법을 내게 알려 주실 거예요?」 케이트가 물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재혼한 지금 그 요리 솜씨를 누구에게 발휘해야 할까? 「아무도 아줌마처럼 애플파이를 맛있게 굽지 못할 거예요」 「메리는 그 비법을 내게도 알려 주지 않을 거야」 로리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난 요리법을 결코 적어 본 적이 없어」 메리가 로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그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파이를 만들고 있는 거야」 「나도 메리 아줌마처럼 파이를 잘 구웠으면 좋겠어」 로리가 남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 의미깊은 눈짓을 교환했다. 클레이의 미소는 그녀가 파이 같은 건 형편없이 구워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한번 케이트는 두 사람을 보고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깊은 절망감 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케이트는 그런 상태에 의아해하면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스킵은 어디 있어요?」 케이트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그녀는 클레이의 동생을 클레이만큼이나 그리워했다.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다정한 친구 사이였다. 「미식 축구 연습하러 갔어」 클레이가 설명해 주었다. 「올해에 쿼터백을 맡게 되었거든. 얼마나 뻐기는지 말도 못해. 나중에 들어올 거야」


「메리가 파이를 내올 때쯤이면 틀림없이 집에 와 있을 거야」 로리가 케이트에게 속삭였다. 스킵은 광적으로 단 음식을 좋아한다. 그들의 조그만 파티는 아늑한 거실에서 열렸다. 한쪽 벽에는 피아노가 놓여 있다. 케이트는 클레이를 위해 그 피아노를 치곤 했다. 하지만 이젠 로리가 클레이를 위해 연주할 것이다. 때론 케이트와 클레이는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 클레이는 로리와 함께 노래를 부른다. 조그만 슬픔이 가슴속에서 몰려왔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별다른 감정의 동요 같은 건 일지 않았다. 「스킵은 널 꼭 만나고 싶어해」 로리가 말했다. 「당신도 고등학교 3 학년 때 쿼터백을 맡았었던 걸로 기억해요」 케이트가 클레이에게 과거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나이팅게일 팀이 결승에 진출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로리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남편을 향해 활짝 웃었다. 「나에겐 한번도 그런 얘기를 안했잖아요?」 「별로 떠벌릴 일도 아닌걸」 클레이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린 1 회전에서 지고 말았어」 로리의 곁에 앉은 그는 아내의 존재를 확인이라도 하듯 계속 로리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다. 메리가 술잔과 술병을 갖고 들어왔다. 「데빈과 도러시아는 무사히 캘리포니아에 도착했겠지?」 그녀가 와인의 마개를 따며 물었다. 「네, 도러시아의 딸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빠가 전화를 하셨어요」 「피로연장에선 별로 말할 기회가 없었어」 로리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넌 커피를 따르느라 몹시 바빴잖아」 「나도 알아. 너와 클레이가 참석해 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가 빠져선 안되지」 클레이가 말했다. 「너의 아빠와 도러시아가 정말 잘 어울린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그리고 너와 루크도 마찬가지였어」 로리가 말했다. 「고마워」 케이트는 간단하게 대꾸하면서도 이들이 윌킨스 목사관의 현관에서 있었던 일을 이미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버지의 친구들에게 루크와의 그런 모습을 들켰다는 생각을 하면 지금도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지난달엔 정말 변화가 많았어」 더 이상 아버지의 결혼식이 화제에 오르기 전에 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려 버렸다. 「루크가 우리 목장을 사게 될 줄 누가 알았겠니?」 「케이트에게도 큰 충격이었을 거야」 클레이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은 나도 그 목장을 사기 위해 많은 애를 썼어」 「이제 <서클 엘>이 팔렸으니 앞으로 어떻게 할 거니?」 로리가 물었다. 「시내에 거처를 마련할 생각이야」 케이트가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루크는 당신이 계속 목장에서 살게 될 거라고 하던데」 클레이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루크가 나에게 아주 관대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난 아파트에서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고 싶어요」 「하지만 아파트를 구하는 게 몹시 힘들 거야」 클레이가 중얼거렸다. 나이팅게일에선 독신자의 숙소를 찾기가 몹시 힘들다. 주로 가족 위주로 살아가는 보수적인 곳이기 때문이다. 저녁식사를 기다리며 그들은 잡담을 나눴다. 때때로 클레이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시선이 로리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진정한 사랑을 인식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로리 캠벌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을 때 케이트는 클레이가 그녀에게 끌리고 있다는 걸 즉시 알아 차렸다. 로리의 뛰어난 미모로 미루어 그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 이후로 케이트는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로리는 며칠 후에 <엘크런>을 떠날 것이고 그녀가 떠나면 클레이의 감정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클레이는 그녀를 잊지 못했다. 그동안 케이트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클레이에게 미묘한 압력을 가해서 결혼날짜를 빨리 잡으려고 애썼다. 빨리 결혼식을 올리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케이트는 결사적인 전력을 기울였다. 그건 사랑을 잃지 않으려는 여인의 필사적인 몸부림이기도 했다. 클레이가 파혼을 선언하던 날을 케이트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때의 상처는 너무 깊게 그녀의 가슴을 뒤집어 놓았다. 그가 목장으로 와서 할 얘기가 있다고 했을 때 케이트는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그 견디기 힘든 긴장감을 피하기 위해 드레스와 결혼식의 꽃장식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클레이가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던 클레이는 슬픈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난 결코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그의 말은 진실과 아픔으로 뒤섞여 있었다. 「클레이, 당신은 절대로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어요」 하지마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는 이미 케이트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결혼하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그는 간단하고 직선적으로 털어놓았다. 그러나 케이트는 클레이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고집을 피웠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너무나 굴욕적인 기억이다. 아무튼 그녀는 두 사람에게 필요한 건 약간의 시간뿐이라고 고집했다. 그러나 클레이는 부드럽고 친절하게 자신의 감정은 결코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 다음 그녀의 만류를 뿌리치고 떠나 버렸다. 그 다음 일주일 동안 케이트는 마치 짙은 안개 속을 거니는 기분으로 지냈다. 학기도 시작되지 않았으므로 특별히 할 일도 없었다. 그 막막한 시간들을 그녀는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보냈다. 마치 끝도 없는 터널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파혼을 한 다음 클레이는 곧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표면상으로는 승마 시합에 참석하는 것이었지만 케이트는 차라리 그가 로리와 함께 돌아오길 진심으로 바랐다. 고통스럽긴 하지만 그가 로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클레이는 혼자서 돌아왔고 로리에 관해선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케이트의 가슴 속에선 다시 작은 희망이 피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클레이와의 결혼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그녀의 가슴을 부풀게 만들었다. 처음에 케이트는 상황이 변했다고 믿었다. 그래서 클레이에게 친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엘크런>에 들르곤 했다. 하지만 클레이는 그녀를 원치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건 아무도 없었다. 단지 로리밖에는…. 결국 케이트는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아무 도움도 되어 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깊이 절망했다. 그때 그녀를 포옹하고 위로해 준 사람이 바로 루크였다. 더 이상 흘릴 눈물조차 없을 때 루크는 그녀의 황량한 마음에 삶의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고 밀려오는 상실감으로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던 그녀를 일으킨 것도 루크였다. 그때부터 루크는 그녀를 못살게 굴기 시작했다. 마치 폭군처럼 말도 안되는 요구를 했다. 케이트는 멋대로 명령을 내리는 루크에게 맹렬하게 화를 냈다. 하지만 이제서야


그의 그런 배려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점자 그녀의 눈동자와 생활에 열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분노가 가져다 준 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루크에게 깊이 감사해야 한다. 여태껏 루크는 가장 진실한 친구로서 그녀의 곁에 존재했다. 그리고 그녀는 가장 어려울 때마다 그를 의지해서 다시 일어나곤 했다. 와인 잔이 채워지자 케이트는 잔을 치켜들고 건배하자고 말했다.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그건 케이트의 진심이다. 클레���와 로리가 자신 때문에 헤어졌다면 그녀는 몹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나이팅게일엔 사서가 필요했다. 그래서 케이트는 아버지의 도움을 얻어 시위원회에 로리 캠벌을 채용하자고 건의했다. 결국 그녀의 요구가 받아들여졌고 케이트는 직접 로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사람은 수화기를 붙잡고 한동안 울음을 터뜨렸다. 로리가 돌아오자마자 클레이와 로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케이트가 클레이와 결혼식을 올리기로 계획했던 바로 그 10 월에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클레이의 말에 케이트의 의식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로리에게 아주 좋은 소식이 있어」 그가 자랑스런 시선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로리가 금방 얼굴을 붉혔다. 「클레이가 괜한 얘기를 했어.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로리」 케이트가 친구를 빤히 쳐다보았다. 「설마 벌써 임신을 한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정말 멋진 소식이구나!」 「아냐, 그렇지 않아」 로리가 재빨리 말했다. 「맙소사! 우린 결혼한 지 한 달도 안됐어」 「로리의 책에 관한 거야」 클레이가 설명했다. 로리가 아동문학을 쓰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기억해냈다. <엘크런>에서 가까운 도로에서 로리의 차가 고장났을 때도 그녀는 작가협회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네가 쓴 작품을 출판사가 인정해 줬구나?」 케이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직 확실치는 않아」 「뉴욕의 출판사에서 전화가 와서 몇 군데 좀 고쳐 줄 수 없느냐고 물었어. 하지만 출판사에선 상당히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았어. 몇 군데 수정을 하면 계약을 하겠다는 얘기까지 나왔거든」 클레이가 말했다. 그는 로리의 손을 꼭 잡고서 마치 자신이 작품을 쓴 것처럼 흥분하고 있다. 「로리, 정말 잘됐어」 케이트는 친구가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어떤 책이니?」 「별빛에 얽힌 얘기를 당나귀의 시점에서 쓴 글이야」 로리가 말했다. 「나도 그 작품을 읽었어」 클레이가 끼어들었다. 「정말 대단한 작품이야. 어떤 편집자라도 구미가 당길 만한 작품이지」 「오, 클레이,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말아요!」 「그런데 출판 여부는 언제 확실히 알게 되는 거지?」 케이트는 친구의 책에 관심을 보였다. 「사실 나이팅게일엔 작가가 살았던 적이 없어. 아빠가 시위원회에 말해서 모든 주민들에게 홍보하도록 할 수도 있어. 너 대문에 관광객들이 몰려들지도 모르잖아?」 그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로리는 무척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아직도 한 달이나 있어야 결과를 알게 돼. 그러니까 미리 아버지께 홍보에 관한 부탁을 드려선 안돼」 「전화가 왔을 때 로리의 모습을 봤어야 하는 건데…」 클레이가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로리는 전화를 받고 집밖으로 뛰쳐나와 깡충깡충 뛰었어」 「내가 좀 흥분했었거든」 「나라도 그랬을 거야」 잠시 후 메리가 식사가 준비됐음을 알리자 그들은 모두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식사와 함께 나누는 풍성한 대화가 어느덧 처음의 어색함을 씻은 듯이 잊게 해주었다. 처음에 케이트는 클레이와 로리의 행복한 모습이 자신의 상처를 더욱 깊게 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일종의 해방감과 함께 무척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그처럼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스스로 생각해 봐도 놀랍기만 했다. 그녀는 젊음의 순수함으로 클레이를 사랑했다. 그러나 이젠 똑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클레이는 로리에게 속해 있고 로리는 클레이에게 속해 있다. 케이크가 한 대 그와 나눴던 따뜻한 관계는 이제 과거의 편린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항상 케이트에게 특별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감정들은 이제 청춘의 환상속으로 묻혀져야 하리라. 이제 케이트 로건은 여인이 되어 있으므로…. 언제부터 변화가 일기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그 변화는 어느새 그녀를 스쳐가 버린 게 분명하다. 그녀는 그 탈바꿈 때문에 고통과 싸워야 했다. 변화란 항상 고통과 어려움을 동반한다. 하지만 처음으로 케이트는 그 고통과 불확실한 시간들이 전혀 무익한 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케이트?」 루크가 집안으로 들어서며 그녀를 불렀다. 「어디 있어?」 「여기 있어요」 그녀는 집 뒤쪽의 아버지가 쓰던 서재에서 책을 꾸리고 있는 중이다. 매일 밤 그녀는 루크가 이사올 것에 대비해서 본채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펴고 이마에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파란 진 바지와 낡은 회색 셔츠 차림의 모양새가 아주 엉망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루크를 만나는 게 기뻤다. 그가 들어왔을 때 케이트는 더러운 손바닥을 진 바지에 쓱 문지르고 있었다. 「뭘 하는 거지?」 그는 이마를 찌푸린 채 문가에 서 있다. 「짐을 꾸리고 있었어요」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난 당신이 여기에 있기를 원한다고 했잖아? 정 떠나고 싶다면 학기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이곳에 있어 줘」 「루크, 당신의 마음은 이해해요. 하지만 이곳은 이제 당신의 소유예요. 내가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어요」 그러면서도 그녀는 정든 집을 곧 잃게 된다는 절망감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것을 떠날 때 가슴을 에이는 슬픔이 그녀를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러나 목장이 팔린 건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당신은 당연히 이곳에 머물러야 해」 루크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음성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당신은 당연히 이곳에 속해 있어야 해. 그리고 난 당신이 이곳에 있기를 원하고 있어. 그 정도면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잖아?」 케이트가 억지로 웃었다. 「루크, 내가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는 없어요. 당신에겐 가정부나 요리사가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요? 당신은 충분히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요. 루크, 난 이제 어른이예요. 돌봐 줄 사람 같은 건 필요없어요」 그는 케이트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듯 숨을 들이켰으나 그가 입을 열었을때의 음성은 의외로 부드러웠다. 「아무래도 사료가게에 관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군」


그의 말투엔 강철처럼 단호한 구석이 숨어 있긴 하지만 겉으론 몹시 절제된 음성이다. 그 일을 알고서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루크도 몹시 화가 나 있다. 케이트는 그의 분노가 어느 때보다도 거칠고 강렬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난 지금 당신이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몹시 궁금해. 우선 커피 좀 갖다 주겠어?」 「좋아요」 케이트는 두 잔의 커피를 만들어 그와 함께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와 함께 앉아 있는 건 항상 기분 좋은 일이다. 두 사람은 종종 그렇게 앉아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친구와 우정…, 주로 그런 것들을 화제삼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어댔던 일들도 이젠 추억이라는 이름 속으로 묻혀질 것이다. 그녀는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감싸안은 채 그 따뜻함을 느긋하게 즐겼다. 「어젯밤에 클레이, 로리와 함께 식사를 했어요」 그녀는 어젯밤의 느낌들을 루크와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래, 나도 들었어. 참, 그리고 이제부턴 프레드 가너의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일은 모두 잊어버리라구」 케이트는 시선을 떨구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그녀는 루크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나 많았다. 「난 어젯밤 <엘크런>에서 너무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전혀 예상치도 않았는데…」 「난 이제 가너의 사건은 모두 끝났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 케이트는 더 이상 결혼식에 얽힌 내기 같은 걸 화제삼고 싶지 않았다. 그건 아주 당혹스런 기억으로 그녀에게 남아 있다. 하지만 루크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건 잊어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그녀에겐 달리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나 많았다. 클레이, 로리와 함께 식사를 한 이후로 케이트는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결국 그녀가 얻어낸 결론은 루크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는 거였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루크가 엄청난 도움을 줬다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날 하루종일 그 저녁식사 때문에 걱정을 했어요. 로리와 결혼한 클레이와 도저히 함께 앉아 있을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하지만 난 해냈어요. 루크, 그들은 얼마나 행복한 모습이었는지 몰라요. 물론 그건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에요. 하지만 나에겐 참기 힘든 고통이 될거라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었죠. 그런데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요. 그날 밤 난 아주 소중한 교훈을 얻게 됐어요…」 「잘됐군」 루크의 대답은 냉담하고도 간결했다. 케이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가 이 방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뭔가가 잘못되어 있다는 걸 느꼈지만 거기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루크, 무슨 일이 있어요?」 「아무 일도 아냐. 단지 클레이와 로리에 관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괜찮겠지?」 「알… 알겠어요」 그녀는 마음이 상했다. 하지만 잠시 후에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오늘 내가 어떤 편지를 받았는지 알아요?」 루크가 클레이와 로리에 관한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고 했으므로 다른 화제를 끄집어냈다. 틀림없이 그가 관심을 가질 거라고 확신했다. 「에릭 윌슨이에요. 그를 기억하고 있나요?」 가벼운 미소가 루크의 입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어떻게 그를 잊을 수가 있겠어? 그가 편지에다 뭐라고 했지?」 「그는 포틀랜드로 이사가서 다시 한번 아내와 대화를 해볼 생각이라도 했어요. 그의 아내도 이혼 후에 그처럼 비참한 세월을 보내고 있대요. 아마 두 사람은 서로 재결합 할 것 같더군요」


「좋은 소식이군」 「당신에게 안부와 함께 고맙다는 인사도 전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케이트는 잠시 후에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뭐가 고맙다는 건지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았어요」 그녀는 루크의 대답을 기대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우린 한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어.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 괜한 시간낭비를 하지 말라고 충고했지」 케이트는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루크, 그건 말도 안되는 얘기예요. 물론 진심은 아니었겠죠?」 그가 짧게 미소지었다. 그러나 곧 그의 시선은 먼곳을 응시했다. 케이트는 그의 상태를 더 이상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루크, 도대체 왜 그렇게 괴로워하는지 말해 봐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오늘밤 당신은 평소와 다르게 보여요」 그의 초연한 음성이 케이트를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그는 케이트로부터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클레이의 결혼식 이후 그는 계속 케이트와의 결혼을 고집해 왔다. 그런데 오늘밤은 마치 평범하게 알고 지내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다. 케이트는 그의 태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케이트는 커피를 한모금 마시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루크는 그녀와 상당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다. 그의 표정엔 그녀가 늘상 흠모하던 웃음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다음주에 며칠 동안 이곳을 떠나 있게 될 거야」 그가 굳은 어조로 말했다. 「뉴 멕시코의 도매상에 가서 필요한 연장을 사오려고 해」 「언제 목장의 거래가 끝나게 되죠?」 루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동안 그의 시선은 케이트에게 고정돼 있었다. 「데빈이 도러시아 머피와 결혼하기 전날 우린 필요한 서류에 모두 사인을 마쳤어」 그 순간 케이트는 의자에서 번개처럼 일어섰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 그녀를 덮쳐왔다. 「그런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예요?」 그녀가 거칠게 뛰는 심장을 가누며 물었다. 「왜 아빠도 아무 말씀도 안하신 거죠? 난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요. 이곳은 당신 집이에요. 모든 지불이 끝난 상태니까…」 「케이트」 그가 잔을 옆에 밀쳐 놓고 피곤한 듯 목덜미를 문질렀다. 「난 당신이 오랫동안 여기에 있어 주길 바라고 있어. 하지만 정 떠나고 싶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어」 그녀는 양손으로 뺨을 감쌌다. 처음엔 아주 뜨겁게 달아 오르던 뺨이 다음 순간 마비된 것처럼 차갑게 굳어 버렸다. 「집을 구하는 대로 가능한 한… 빨리 나가겠어요」 「케이트, 도대체 왜 그렇게 고집을 피우는 거지?」 그녀 자신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건 태어날 때부터 존재했던 이곳이 이제 더 이상 가족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루크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더 이상 <서클 엘>에서 살 수가 없다. 그러나 그녀에겐 달리 갈 곳도 없다.

8

케이트가 수학 시험지의 채점을 막 마쳤을 때 린다가 교실로 들어섰다.


「안녕」 케이트가 친구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감옥과 소방서의 야외 수업은 어땠어?」 린다는 의자를 끌어다가 털썩 주저않은 다음 손으로 관자놀이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대답도 하고 싶지 않아. 정오쯤엔 아예 우리반 아이들을 감옥에 가두고 열쇠를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구」 「그랬다면 학교가 너무 조용했을 거야」 린다가 피식 웃었다. 「사실 난 여기 오고 싶은 마음도 없었어. 집에 가서 아스피린이나 먹고 스러져서 자고 싶지만 어제 오후에 가너의 사료가게에 들렀던 얘기를 해할 할 것 같아서」 「말해 봐」 「넌 불쾌하게 생각할지도 몰라. 내가 거기 갔을 때 가너씨가 리버스와 너의 결혼에 내기를 걸지 않겠느냐고 물었어」 케이트의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야」 「루크는 그 문제를 모두 해결했다고 말했어. 이젠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단 말야」 루크는 절대로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할 사람이 아니다. 「내가 괜한 말을 했나 봐」 린다가 연민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루크는 프레드 가너에게 개인적으로 얘기를 해뒀다고 말했어」 「물론 가너도 그 얘기를 하더구나. 그는 루크가 멕시코산 필리 고추보다 더 매운 사람이라고 했어. 어쨌든 그는 루크를 협박해서라도 원래의 의도대로 밀고 나가도록 하겠대. 하지만 그 얘기를 하는 동안 가너 씨의 표정은 활짝 웃고 있었어」 케이트는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가너 씨의 말을 들어 보면 내기에 참가한 사람이 굉장히 많은 것 같아」 케이트는 손으로 눈을 지그시 눌렀다.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 거지?」 린다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모르겠어. 가너 씨는 주미들의 절반 이상이 그 내기에 참석했다고 했어. 칠판의 공간이 모자라서 쩔쩔맬 정도더라구」 「이 마을 사람들이 흥미거리를 찾는 데는 거의 필사적이라는 걸 증명하는 거야」 케이트는 굳은 어조로 말했다. 「선량한 나이팅게일 사람들이 결혼식 날짜 같은 사소한 일에 그처럼 흥분하고 있는 걸 보면 이곳의 생활이 얼마나 단조롭고 따분한가를 알 수 있어」 린다는 목청을 가다듬은 다음 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케이트는 친구를 빤히 쳐다보았다. 설마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그 내기에 끼어들었을 리가 없어. 그러나 린다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너도 결혼식 날짜를 지정한 거니?」 케이트가 따지듯이 물었다. 린다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실내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있다. 「너도 내기에 끼어든 거지?」 케이트는 비명처럼 소리쳤다. 린다가 그런 짓을 했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다. 「넌 나의 가장 친한 친구야.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겠니?」 린다가 울먹였다. 「린다, 난 아무것도 판단할 수가 없어. 제발 솔직히 털어놔 줘」 「그래, 알았어. 사실은 6 월에 내기를 걸고 말았어. 초여름이라면 결혼식하기엔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야. 넌 정말 아름다운 신부가 될 거야」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야」 갑자기 아빠도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 내기를 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난 내기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 린다가 황급히 변명했다. 「하지만 6 월의 결혼식에 자꾸 구미가 당기는 거야. 단돈 5 달러만 걸면 난 최고 500 달러까지 벌 수가 있어. 네가 6 월 중에 결혼만 해준다면 말야. 내 생각엔 16 일이 아주 좋을 것 같아. 그날이 마침 토요일이거든. 주말에 결혼식을 올리는 게 더 근사할 거야. 그렇지?」 케이트는 할말을 잊고 말았다. 「아무튼 그런 건 모두 불법이야. 내가 보안관을 부르지 않는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할 거야」 「보안관도 내기를 걸었는걸. 3 월에…. 자신의 결혼 기념일이 3 월 10 일이라나? 그는 루크가 널 설득해서 이른 봄에 결혼식을 해치울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보안관은 루크가 일단 너의 동의를 얻어내면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밀어붙일 거라고 했다는 거야. 네 마음이 변하기 전에 재빨리 식을 울릴 거라고 믿고 있대」 케이트는 린다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지금 날 놀리고 있는 거라면 넌 처참한 실패를 하고 말았어」 「미안해, 케이트, 내가 사료가게에 간 건 너에게 모든 건 끝났다는 소식을 알려 주고 싶어서였어. 그런데 상황이 그렇지가 않았어…」 「그래서 네가 직접 내기를 걸었다는 거니?」 「그 점에 대해선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린다의 음성은 금방이라도 꺼져 버릴 것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자, 이제 그런 얘긴 그만두고 추수감사절 놀이에 대해서 얘기하는 게 어때?」 결혼식 문제로 옥신각신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차라리 보다 건설적인 일에 몰두하고 싶어졌다. 「내 죄를 보상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너에게 좋은 소식을 알려 주면…」 린다가 블라우스의 소매깃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좋아, 말해봐」 「내 친구에게서 들은 얘긴데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장담할 수가 없어. 하지만 믿어도 괜찮을 거야」 「무슨 일인데?」 그녀는 린다가 건네준 종이를 받으며 물었다. 종이엔 전화번호 하나가 적혀 있다. 「잰슨 부인의 전화번호야. 그녀는 스르푸스 가의 아파트단지 관리를 맡고 있어. 다음주 초에 빈 아파트가 나올지 모른다고 했어. 빨리 서두르기만 하면 그럴 듯한 아파트를 얻을 수 있을 거야」 「오, 린다, 정말 잘됐어」 「이제 용서받을 수 있는 거야?」 케이트가 웃었다. 「이런 일이라면 수만 가지 죄도 사면 받을 수 있어」 무려 5 번이나 시도한 다음에야 잰슨 부인과 통화할 수가 있었다. 잰슨 부인은 그 말을 듣고 무척 놀라는 눈치였다. 「난 아가씨가 리버스라는 청년과 결혼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왜 약혼한 남자를 두고 아파트를 빌리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마을 사람들 모두가 두 사람의 결혼은 시간 문제라고 떠들어대고 있는데…」 「잰슨 여사」 케이트가 큰소리로 외쳐댔다. 그녀가 청각이 좋지 않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내가 그 아파트를 둘러볼 수 있을까요?」 「이틀 후에나 청소가 끝날 거야. 준비가 되는 끝나는 대로 전화해 줄게. 하지만 이건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요즘 젊은 여성들은 이해할 수가 없단 말야.


우리땐 루크 리버스처럼 근사한 청년이 나타나면 재빨리 낚아채곤 했는데…」 「아무튼 난 그 아파트를 둘러보고 싶어요」 「토요일이 좋겠군. 토요일에 아파트로 오는 게 어때? 그리고 그곳이 마음에 들 경우를 대비해서 계약금도 준비해야 할 거야」 「수표도 괜찮겠어요?」 「케이트의 사인만 되어 있다면 황금처럼 믿을 만할 거야」 그녀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케이트는 결혼식을 올리는 시기로 어느 때가 적합하다고 생각해?」 「잘 모르겠어요」 「나와 에델 마틴은 너와 리버스가 4 월에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시골에서 올리는 결혼식으론 4 월이 최고지」 「그렇겠군요」 케이트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좋았어. 그런데 한 가지 명심해 둬야 할 게 있어. 아파트가 나왔다는 소문이 돌면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걸 얻고 싶어할 거야. 그러니 만약 케이트가 토요일에 오지 않으면 난 다른 사람에게 아파트를 보여 줘야 해. 이해하겠지?」 「정오가 되기 전에 그곳에 도착하겠어요」 「그럼 그때 만나자구」 「안녕히 계세요, 잰슨 여사」 「4 월에 올리는 결혼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어?」 「그러겠어요」 그날 밤 케이트가 저녁식사를 끝낸 직후에 루크가 들렸다. 이미 서재의 정리를 말끔하게 끝낸 뒤였으므로 책을 담은 상자를 잔뜩 쌓아둔 상태였다. 이제 모든 게 정리된 셈이다. 클레이와의 감정 상태마저도 말끔히 정리되었다. 프랭클린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던 날 그녀는 자신이 클레이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또 방을 정리하는군」 그가 주방과 거실 사이의 문가에 기대서서 말했다. 「루크! 깜짝 놀랐어요」 그의 갑작스런 출현이 혼자만의 세계에 잠겨 있던 그녀에겐 너무나 충격이었다. 요즘 들어 부쩍 그는 눈살을 찌푸리는 일이 많아졌다. 지금도 그는 잔뜩 못마땅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그의 그런 표정 때문에 자신의 기분을 망치고 싶진 않다. 지금 그녀는 자신의 아파트로 옮겨간다는 생각에 온몸이 전율할 만큼 들떠 있다. 그건 전혀 다른 삶으로의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좋은 소식이 있어요. 토요일 오전에 아파트를 보러 갈 거예요」 그녀는 무거운 책상자를 질질 끌면서 말했다.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짐을 옮기게 될지도 몰라요」 루크가 다가와 그녀의 책상자를 들어 다른 상자 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고마워요」 그녀가 나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혼자서 이렇게 무거운 걸 들면 안돼」 「괜찮아요」 그녀는 손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며 대답했다. 「이 책들이 골칫거리가 되고 있어요. 책이 이렇게 많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케이트, 제발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 「난 지극히 이성적인 행동을 하고 있어요. 내가 할 일은 하루 빨리 이곳을 비워서 당신의 권리를 행사하게 해주는 거예요」 루크가 더 심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이봐, 생각보다 프레드 가너의 일이 더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 「나도 알아요」 케이트가 벌써 다음 상자를 채워 넣으며 대꾸했다. 「린다가


방과후에 말해 줬어요. 그가 아주 엄청난 사업을 벌이고 있다고 했어요」 루크가 그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런데 화를 내지 않는군?」 「화를 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당신도 최선을 다했을 거예요. 이젠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6 달 후에도 우리가 결혼하지 않고 있으면 사람들은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다는 걸 인정할 거예요」 「아무 일도 없다구?」 그가 씁쓸한 어조로 물었다. 잠시 실날 같은 희망이 그녀를 스쳐갔다. 「우린 항상 좋은 친구예요」 어느새 그녀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다. 「이제 그 말도 안되는 내기에 대해 초연해지려고 마음먹으니까 모든 게 우습게만 보여요. 아마 당신도 같은 심정일 거예요」 「모든 게 우습게만 보인다구?」 「착한 나이팅게일의 주민들은 무척 단순해요. 클레이와 아빠가 결혼을 하게 되고 목장이 팔리니까 난 당연히 당신 품에 뛰어들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론 그 생각도 과히 나쁜 것 같진 않은데?」 「그래요?」 그녀는 웃음을 터뜨린 다음 다시 상자에 책을 넣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루크가 사랑을 고백하려 한다면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일 것이다. 「그건 내가 전날 밤에 받은 인상과는 전혀 딴판이군요. 그날 당신에게 로리와 클레이와의 저녁시간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하려 했지만 당신은 나를 노려보기만 했어요」 그녀는 그를 올려다 본 다음 부드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예요」 루크는 그녀에게서 벗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당신이 단 한번이라도 인생에서 지각을 찾아 주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 「내가 그렇게 불합리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걸 미처 몰랐군요」 케이트는 그의 태도에 다시 상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일어서서 커다란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발꿈치를 들었지만 맨 위칸에 있는 트로피까진 손이 닿지 않는다. 그래서 빈 책장 앞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가 두꺼운 쿠션 위로 올라섰다. 그녀가 팔을 뻗쳐 첫 번째 트로피를 붙잡으려는 순간 루크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케이트, 맙소사…」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의자가 구르기 시작했고 그녀는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팔을 휘둘렀다. 케이트는 루크가 그처럼 다급하게 움직이는 건 처음 봤다. 그의 강철같이 강인한 손이 케이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비명소리마저 목에 거려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케이트는 두 손으로 단단한 그의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어…」 「당신이 내 이름만 부르지 않았어도 난 괜찮았을 거예요」 케이트는 가슴이 너무 거칠게 뛰어서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루크의 손길이 느슨해졌다. 「이제 괜찮아?」 「괜찮아요」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거친 한숨을 뿜어냈다. 다시 눈을 뜬 그는 케이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도대체 왜 의자 위에 올라간 거야?」 「트로피가 손에 닿지 않았어요」 「나에게 대신 꺼내 달라고 할 수도 있었잖아? 왜 내게 도움을 받는 걸 그토록 싫어하는 거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여전히 그는 케이트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다. 케이트는 그의 팔이 전해 주는 편안함을 거부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다름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그의


목덜미에 갖다댔다. 잠시 두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루크가 천천히 그녀의 뺨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 순간 케이트의 눈은 저절로 감겨 버렸고 그녀의 입술은 파르르 떨면서 그의 키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케이트는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재빨리 눈을 뜨고 그에게서 물러섰다. 루크가 트로피를 내려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감정을 전혀 읽을 수 없을 만큼 초연해 보였다. 「오늘밤 짐을 꾸리는 일은 이만하면 충분해요」 그녀는 일부러 명랑한 음성을 내려고 노력했지만 자꾸만 흐트러지는 호흡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마디 말도 없이 방을 나가 버렸다. 케이트는 그 순간 왜 그를 쫓아갔는지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다. 「루크?」 그는 주방 한가운데서 발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도 강렬했다. 그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그녀는 주춤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무슨 일이지?」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서 있자 그가 채근했다. 「할말이 있어서…」 그리고 다음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감정이 한 남자가 아내를 사랑하는 그런 것이냐고 묻고 싶지만 그럴 용기가 없다. 「내가…, 내가 집을 떠나기 전에 뭔가 할 일이 없을까요? 거실에 페인트를 칠한다든가…」 「필요없어」 루크는 그녀가 그처럼 빨리 그곳을 떠난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케이트는 더 이상 그와 이런 사이로 지낼 수는 없다. 루크는 계속 케이트에게 자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이젠 그녀도 그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거기엔 시각의 차이가 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단지 친구로서의 보살핌만은 아니다. 「난 당신이 목장에서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녀의 마음은 그에게 애원하고 있다. 제발 내가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루크, 제발 내가 지금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세요」 「나도 알아. 하지만 케이트, 당신은 정말 고집불통이야. 난 당신에게 좀더 편안한 생활을 제시하고 있는데 왜 그처럼 억지를 부리는 거지? 우린 결혼해서 이 집에서 정착하면 돼. 그럼 어떤 변화도 없을 거야. 그런데도 당신은 스스로 혼란을 자초하고 있어」 케이트는 대꾸할 말을 잊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끌리지 않았다고 말하진 못할 거야. 우리 사이에 흐르는 전류는 거리를 비추고도 남을 정도로 강렬했어」 「나도…, 나도 알아요」 「케이트, 그럼 솔직히 말해 봐. 방금 전의 나의 포옹도 아주 기분좋게 느껴졌다는 걸 인정하겠지?」 「난…」 루크가 그녀에게 다가왔을 때 케이트는 더 이상의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의 입술이 덮쳐왔을 때 가슴이 파닥였다.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술이 열렸고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루크가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케이트는 그에게서 어떤 전율 같은 게 흘러옴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쳐들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짙은 눈빛이 그윽하게 보였다. 「대답하기가 몹시 힘든 질문이겠지?」

9

「이것도 침실이야」 잰슨 부인과 함께 아파트에 처음 들어선 순간부터 케이트는 그곳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네가 왜 굳이 침실이 두 개짜리 아파트를 고집하는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잰슨 부인은 머리에 핑크 빛 플라스틱 롤러를 감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여태껏 그녀의 머리에 롤러가 감겨져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리버스라는 청년은 네가 이 아파트로 옮기는 걸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그러나 그녀는 대답을 기대한 게 아니었던지 곧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말해서 난 오늘 아침 네가 나타난다고 확신할 수가 없었단다. 내 친구인 에델과 그런 얘기를 했어. 리버스가 너를 밧줄로 꽁꽁 묶어서 네바다로 데려가 곧장 결혼식을 치르는 게 아니냐고. 가만 있자, 누가 11 월에 돈을 걸었더라?」 「오전중에 오겠다고 미리 약속했잖아요?」 케이트는 상대방의 말을 무시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하지만 루크가 널 붙잡지 않더라도 폭설이 내리면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 기상대에선 이틀 전부터 눈이 쏟아질 거라고 수선을 피웠거든」 「정말 눈이 내릴까요?」 케이트가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오전 내내 하늘이 어두웠고 기온이 점차 떨어지고 있었다. 날씨가 불안정하게 느껴지는 날엔 케이트는 결코 운전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곳에 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아파트를 가로채 버릴 것만 같아 불안했기 때문이다. 「내가 너라면 잠시 시내에 머물러 있겠어」 잰슨 부인이 충고했다. 「날씨가 나빠지면 거리에서 꼼짝없이 갇히고 말거야」 「괜찮을 거예요」 아버지의 사륜 트럭을 몰고 왔기 때문에 웬만큼 눈이 온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서클 엘>은 시내에서 불과 30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동안 눈이 온다도 해도 얼마나 많이 내리겠는가? 「지금 수표를 써드릴까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케이트가 물었다. 「그것도 좋지. 아직 청소할 게 남아 있긴하지만 다음달 초순경엔 모두 끝날 거야. 원한다면 내주 초쯤에 짐을 옮겨도 좋아」 「고마워요」 시간이 흐를수록 하늘은 검게 변해가고 있었다. 케이트는 추위에 몸을 떨며 상의의 지퍼를 목까지 올린 다음 가죽장갑을 꼈다. 그리고 차분하게 차를 몰기 시작했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이 시시각으로 성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목장을 16km 쯤 남겨 두었을 때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송이가 차창 밖으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한낮이라 해도 하늘이 어두워졌으므로 헤드라이트를 켰다. 라디오에선 사랑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악몽 같던 금요일 밤 <레드 불>에서 밴드가 연주하던 바로 그 곳이다. 다시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그녀는 황급히 라디오에 손을 뻗쳐 채널을 돌리려고 했다. 그 바람에 그녀는 도로에 있는 바위를 보지 못했다. 그걸 알았을 때는 차는 이미 바위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양손으로 핸들을 쥐고 재빨리 방향을 틀어 제방에 차를 부딪치게 했다. 트럭은 갑자기 멈춰섰고 그통에 시동이 꺼져 버렸다. 한참 후에 케이트는 긴 한숨을 내쉬며 일이 그 정도로 끝난 것에 안도했다.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시동을 걸려고 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다. 시동을 걸기 위해 다시 애써봤지만 엔진에선 파닥거리는 소리 한번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절망감에 빠져 잠시 눈을 감았다. 눈은 아주 굵은 눈송이로 변해 있었다. 눈이 내리는 속도도 훨씬 빨라졌다. 「걱정하지 말고 침착해야 해」 자신은 없지만 일단 차의 상태를 점검해 보기로 했다. 밖으로 나오니 눈송이가 사정없이 그녀를 내리쳤다. 시내에 있다가 돌아가라는 잰슨 부인의 충고를 듣지 않은 데 대한 벌인 것 같다. 약간의 승강이를 벌인 끝에 어렵게 후드를 열었다. 그녀는 간절히 기도를 하면서 이곳저곳을 손대 보았다. 그리고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가 시동을 걸어 봤지만 엔진은 기침소리를 몇 번 내더니 다시 꺼져 버렸다. 「오, 하느님!」 이젠 꼼짝없이 자리에 앉아서 다른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트럭에서 내려 걸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미친 짓이니까. 그후 30 분이 지나도 여전히 엔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설령 시동이 걸린다고 해도 이런 상태에선 도저히 차를 운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양손을 비벼대고 양팔로 자신의 몸을 껴안으면서 추위와 싸웠다. 견디기 힘든 추위가 몰아치고 있다. 그녀는 공포심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이제 참을성 있게 앉아서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아마 그녀는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갑자기 트럭 문이 홱 열리고 누군가 그녀의 팔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정신을 잃었던 거야?」 루크의 노한 음성이 마치 손바닥으로 얼굴을 치는 것처럼 들려왔다. 「루크…, 루크」 그를 만난 게 너무 반가워서 다른 질문을 할 수도 없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다.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터뜨렸다. 「어떻게 날 찾아냈어요?」 「당신 때문에 걱정이 돼서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어」 「당신, 어디가 아픈 거예요?」 생각이 뒤죽박죽이 돼버렸다. 당연히 그는 걱정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는 몹시 화가 나 있다. 그러나 지난 며칠 동안 그는 줄곧 내게 화를 냈다. 그녀는 루크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신선하고 따뜻한 향기를 마음껏 들이켰다. 드디어 그녀가 제대로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놀랍게도 밖은 깜깜하게 변해 있었다.


만약 폭설 때문이 아니라면 별들이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눈송이는 약간 그 기세가 수그러들고 있었다.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하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어」 그의 음성은 낮았지만 분노에 가득 차 있다. 「여기서 얼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몰랐던 거야? 이런 식으로 충동적으로 행동해서 나쁜 결고를 초래한다면 신혼여행을 떠난 데빈이 어떻게 되겠어? 만약 당신에게 모슨 일이 일어났다면 아버지는 결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거야」 케이트는 그의 심한 질책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충격과 추위 때문에 온몸이 떨리고 그의 진솔한 말이 가슴을 때렸지만 울음조차 고집스럽게 거부한 채 앉아 있었다. 벌써 그녀의 몸은 반쯤 얼어 있었지만 루크는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케이트, 만약 당신이 트럭을 떠나서 혼자 걸어서 집으로 떠났다면 난 정말 난감했을 거야」 「차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요」 그 위험을 좀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건 그녀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아무튼 미안해요」 그녀가 속삭였다. 그가 갑자기 케이트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얼굴을 그녀의 머리칼에 묻은 다음 손으로 그녀의 이마와 뺨과 턱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만짐으로써 그녀가 무사하다는 걸 직접 확인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드디어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짙은 눈동자엔 고통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려고 했지만 이가 떨리기 시작했다. 루크는 자신의 코트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 「난 바위를 보지 못하고 뭔가에 부딪치고 말았어요. 그땐 이미 눈이 쏟아지고 있었어요. 음악이 들려와서… 채널을 바꾸다가 그만…. 결국 내가 급히 핸들을 돌렸고 트럭의 시동이 꺼지고 말았어요」 「아무튼 당장 당신을 집으로 데려가야겠어」 그는 케이트를 자신의 트럭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운전석에 올라탄 다음 담요로 그녀의 몸을 감싸 주었다. 「아빠의 트럭은 어떻게 하죠?」 「그건 나중에 걱정하기로 해. 폭설이 멈추면 사람을 보내서 수리하게 하면 되니까」 히터에서 나오는 바람이 마치 열대풍처럼 느껴졌다. 비로소 케이트는 몸이 풀리는 걸 느꼈다. 끔찍하게 추었지만 감히 루크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목장까지 오는 동안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운전을 하는 게 몹시 힘이 든다는 걸 알았으므로 케이트도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옆에 말없이 앉아 있는 동안 따뜻한 열기 때문에 자꾸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목장에 도착하자 몇몇 인부들이 달려나와서 그녀의 상태를 물었다. 케이트는 당황하고 부끄러웠지만 간신히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자신의 부주의한 행동을 사과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루크는 싸늘한 어조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우선 목욕부터 해」 그가 욕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물이 너무 뜨거워선 안돼」 새로 채용한 인부인 빌 슈미트가 그들을 따라 들어와 문가에 서 있었다. 창백한 그의 표정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루크가 물을 틀고 온도를 맞추는 동안 케이트는 탈진한 상태로 멍하게 서 있기만 했다. 「이제 눈이 멎었는데 아가씨의 친구에게 연락을 취할까요? 프랭클린 부인이 어때요?」


빌이 여전히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루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재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드디어 루크가 물을 끄고 나서 몸을 폈다. 그는 굳어진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케이트,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날씨에 차를 몰고 나설 생각을 한 거지? 당신을 찾으러 다니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몇 마디 말을 하기 위해서도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내가… 내가 거기 있다는 걸…, 어… 어떻게 알았어요?」 「당신이 토요일에 아파트를 둘러보기 위해 시내에 간다고 말했잖아? 눈보라가 몰아쳐도 당신이 돌아오지 않기에 난 시내의 이곳 저곳에 전화를 걸었어. 몇 번 시도한 끝에 당신이 스프루스 가의 아파트를 빌리려 한다는 걸 알았지. 잰슨 부인이 자신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 전에 길을 떠났다고 얘기하더군. 그런 와중에서도 그 부인은 꽃피는 4 월이 결혼식을 올리기엔 최고라고 말하더군」 「걱정을 끼쳐서 정말… 미안해요」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지난 몇 시간 동안 그를 괴롭혔던 고뇌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의 눈동자에 드러난 고통과 분노의 흔적은 그가 느꼈던 두려움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여러 가지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뒤틀리면서 그녀를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한동안 루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뜨거운 숨결을 불어 넣고 있었다. 케이트의 가슴이 심하게 요동쳤다. 시선을 들어 그의 눈을 응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그의 눈을 보았을 때 거기에 담긴 격렬함 때문에 그녀는 당황하고 말았다. 두려움과 의혹, 그리고 분노의 감정이 그의 눈빛에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것말고 또 다른 감정이 스며 있었다. 그녀가 미처 깨닫지 못한 깊은 감정이…. 그에게 사랑한다고 외치고 싶다. 하지만 그 생각은 쉽게 언어로 표현되지가 않았다. 사랑이란 너무나 생소하고 예측할 수 없는 감정이며 고통까지도 동반한다는 걸 케이트는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은 그의 눈 속에 갇혀 버렸다.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입이 움직여 주질 않았다. 간신히 입을 열었을 때 빌 슈미트가 들어왔다. 「로리 프랭클린이 가능한 빨리 이곳으로 오시겠답니다」 「고마워, 빌」 루크가 여전히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럼 난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러지, 도와줘서 정말 고마웠어」 「천만에요. 케이트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가 모자를 들고 나갔다. 「누가 옷을 벗는 걸 도와줘야 할 텐데…」 루크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내가 돕는 건 곤란하겠는걸」 「괜찮아요. 나 혼자 벗을 수 있어요」 그녀는 욕실 쪽으로 걸어가서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그러나 막상 옷을 벗기 시작했을 때 루크의 말처럼 정말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간신히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을 땐 다시금 허기와 극도의 피로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따뜻한 물이 피로에 지친 그녀를 놀랍도록 부드럽게 감싸 주었다. 잠시 후 그녀는 안락한 편안함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느긋하게 몸을 뻗었다. 「케이트」 문밖에서 루크의 음성이 들려왔다. 「정말 괜찮겠어?」 「괜찮아요」


「달리 필요한 건 없어?」 「없어요」 다음 순간 어떤 생각이 갑자기 그녀의 뇌리를 때렸다. 루크는 날 찾으려다가 죽을 수도 있었어. 그녀는 눈을 꼭 감은 채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일이 이쯤에서 끝난 건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일이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흐느끼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루크가 놀라서 소리쳤다. 「무슨 일이야? 울고 있는 것 같은데…」 「당신은…, 날 찾으려다 죽을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무사하잖아」 「그래요. 정말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난 당신이 죽는 건 바라지 않아요」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거친 어조로 말했다. 「꽤 고무적인 얘기로군」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파자마와 긴 가운을 걸치고 욕실에서 나왔다. 기분이 훨씬 좋아졌고 몸도 가벼워진 걸 느낄 수 있었다. 루크는 위스키 잔을 들고 주방에 앉아 있었다. 그가 위스키를 마시는 건 아주 드문 일이다. 「내 잘못이었어」 그가 중얼거렸다. 「폭설이 내린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당신에게 경고하지 않았으니까」 「경고를 했다고 해도 별로 효과가 없었을 거예요. 난 기필코 시내에 나갔을 테니까요. 그 아파트를 얻기 위해선 오전중에 거기에 갔어야 했어요. 당신이 뭐라고 해도 난 그 말을 듣지 않았을 거예요」 루크가 머리를 흔들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도대체 왜 죽음을 무릅쓰고 여기서 나가야 했는지…」 「잰슨 부인은 내가 오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그 아파트를 넘기겠다고 했어요」 「전화를 걸고 이해를 구하면 되잖아? 꼭 그런 악천후에 그 아파트를 보러 가야만 했다는 거야?」 그는 케이트를 의자에 앉힌 다음 뜨거운 커피 한 잔고 위스키를 갖다 주었다. 「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했잖아요?」 케이트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제발 나에게 화내지 말아요」 그녀는 루크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손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루크는 그녀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케이트, 어떻게 해야 나와 결혼해 줄 수 있지? 당신은 나를 필요로 하고 있어. 그걸 모르겠어?」 그는 그녀의 얼굴에 흩어진 젖은 머리칼을 쓸어올려 준 다음 두 개의 검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들어 올렸다. 「도대체 몇 번이나 말해야 내 말을 믿어 주겠어?」 「오, 루크」 케이트의 눈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리려 하고 있다. 「케이트, 당신을 돌봐 주고 싶어. 오늘 일어난 일과 에릭 윌슨과의 우스운 희극을 생각해 보면 당신도 뭔가 깨닫는 게 있을 거야」 그녀는 혼란스런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마을엔 내 또래의 여자들이 있어요. 벌써 아이까지 낳은 여자들이…」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케이트는 자신이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루크도 혼란스러운지 눈을 깜박거렸다. 「당신도 아이를 낳고 싶다는 거야? 그거 아주 멋진 생각이야. 사실 나도 당신과 결혼해서 몇 명의 아이들을 갖고 싶어」 「내 말 뜻은 그게 아니에요. 그 여자들에겐 신변 보호자가 필요없다는 뜻이에요」 「물론 그렇겠지. 결혼을 했으니까…」 루크가 날카롭게 받았다.


케이트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렇게도 내 말 뜻을 모르겠어요? 난 이제 완전한 성인이란 말예요. 보호자 같은 건 필요없는 나이예요!」 「나이를 갖고 따질 일이 아니야」 「당신은 날 사랑하지도 않아요. 그저 날 동정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당신은 클레이가 로리와 결혼하고 아빠가 도러시아와 재혼했기 때문에 나에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내겐 린다도 있고 다른 친구들도 많아요.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어요. 결혼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아요」 루크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서 싱크대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가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이 문제를 아주 절박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군. 오늘도 당신은 내게서 벗어나기 위해 목숨까지도 걸었어」 「그토록 위험할 줄 알았다면 시내에 나가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럼 여기서 떠나. 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과 결혼하길 원히지만 이젠 더 이상 당신을 붙잡아 둘 수가 없어. 그렇게 독립이 절실히 필요한 거라면 원하는 대로 해봐」 「루크,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요. 당신이 말하는 사랑은 의미가 달라요」 「당신이 사랑에 대해서 뭘 안다는 거야?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당신은 계속 날 돌봐 주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게 그렇게 나쁜가?」 「그래요. 여자는 그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해요」 「케이트, 내 인생과 사랑을 모두 당신에게 주고 싶어」 「말도 안돼요. 당신은 마치 내가 10 분 내에 당신과 결혼하지 않으면 영원히 혼자 살아가게 될 것처럼 말하고 있어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찌를 듯이 강렬했다. 그처럼 강한 시선은 여태껏 본 적이 없다. 「좋아. 이제 당신이 선택을 해. 더 이상 당신과 입씨름하고 싶지 않아. 케이트, 이제 우리 사이는 끝났어. 결혼에 대해서 얘기하는 건 이게 마지막이 될 거야」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지만 생각이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그리고 말을 한다고 해도 루크가 제대로 들어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는 밖으로 나가면서 그녀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불꽃이 난로에 피어올랐다. 그녀는 근처의 소파에 드러누워 방금 루크가 한 말을 정리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마음처럼 눈꺼풀도 한없이 무거워졌다. 결국 그녀는 금방 잠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누군가가 주방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케이트는 잠에서 깨어났다. 손목시계를 흘끗 바라본 케이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려 2 시간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루크일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러나 그건 루크가 아니었다. 로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거실로 들어섰다. 「루크가 들어가라고 해서 들어왔어. 노크도 없이 들어와서 미안해」 「로리, 넌 언제나 대환영이라는 걸 알잖아?」 「빌 슈미트가 전화로 그 엄청난 얘기를 해줬어. 네가 폭설에 갇혀 있었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었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난 너와 루크 중에 누가 더 상심해 있는지 알 수가 없구나」 그의 이름이 나오자 케이트는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루크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기분은 어때?」 「괜찮아. 약간 머리가 아픈 정도요」 「네 얼굴이 마치 괴물 같다는 거 알고 있니? 네가 이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는 건 처음이야」 케이트는 손으로 누비이불의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루크는 내가 시내에 간 것에 대해 몹시 화를 내고 있어. 로리, 나 아파트를 구했어. 루크도 이제 우리 사이는 끝이라고 말했어」 케이트는 울기 시작했다. 「내가 가버리면 그는 홀가분하다고 생각할 거야. 이젠 다시는 날… 괴롭히지도 않겠지」 얘기가 끝날 무렵 그녀의 음성은 거친 흐느낌처럼 들려왔다. 「알겠어」 로리가 중얼거렸다. 「점점 루크란 남자를 알 수가 없어. 우린 가끔 서로의 얘기를 하기도 하고 농담도 나눴어. 그런데 요즘엔 이성을 찾아서 얘기할 수가 없을 지경이 되어 버렸어. 노력을 해봤지만 루크는 모든 걸 더 어렵게 만들고 있어」 「남자들은 때때로 그럴 때가 있단다」 「난 루크에게 너와 클레이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던 순간을 얘기하고 싶었어. 사실은…」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춰버렸다. 차마 로리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수는 없는 입장이다. 「계속해 봐」 로리가 채근했다. 「사실 난 클레이와 다시 부딪친다는 게 몹시 두려웠어. 로리, 미안해. 널 화나게 하고 싶진 않아. 하지만 난 클레이를 오랫동안 사랑했고, 그를 잊는다는 게 무척 힘들 거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우리가 함께 저녁식사를 하던 날 밤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 너와 클레이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무척 고통스러울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난 자유로워지고 있음을 느꼈어. 너희 두 사람은 몹시 행복해 보였고 난 결코 너처럼 클레이를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알았지. 내가 오랫동안 클레이를 흠모해 온 건 사실이지만 그건 사춘기의 열병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 결국 클레이는 과거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셈이지. 그 사실을 스스로 깨닫고 나니 마음이 훨씬 편안해졌어. 새로운 희망도 솟아나는 것 같았고」 「오, 케이트, 그 말을 들으니 정말 기뻐」 로리가 수줍게 뺨을 붉히며 웃었다. 「난 루크에게 그런 감정을 모두 털어놓고 싶지만 그는 그럴 기회도 주지 않았어. 이제 상황은 더 나빠져 버렸어. 이젠 다시는 서로 얘기할 기회조차 없을 거야」 「그렇지 않아. 두 사람은 다시 대화를 나누게 될 거야」 「하지만 그는 몹시 화가 난 것 같았어」 「틀림없이 그건 네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일 거야」 「그와 얘기할 수가 없어」 케이트가 울먹이며 말했다. 「최소한 지금은…,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서로 침묵을 지키게 될지도 몰라」 「금방 화해할 수 있어. 두 사람은 그토록 오랜 우정을 갑자기 잘라 버릴 수는 없을 거야. 넌 기다리기만 하면 돼」 케이트가 머리를 흔들었다. 「넌 아주 쉽게 말하는구나」 「내 말을 믿어. 클레이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클레이가 로리를 찾아 캘리포니아로 떠났던 일이 있었다. 둘 다 그 시절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긴 하지만 케이트는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암울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에겐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라」 케이트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만약 우리가 이처럼 가까이 살지 않았다면 서로에 대한 감정을 좀더 명확히 알 수 있었을 거야」 「언제 이사를 할 거니?」 「월요일에…」 그녀는 반대편 벽에 쌓인 상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스킵과 클레이, 그리고 내가 도와줄 수 있어」 「그래 주면 정말 좋겠어」 그 주말은 몽롱한 상태에서 흘러가 버렸다. 케이트는 한번도 루크를 보지 못했다. 월요일 아침 케이트는 학교로 출근하기 위해 차가 있는 쪽으로 가다가 발걸음을 멈춰섰다. 이사가기 전에 루크에게 작별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헛간엔 루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빌 슈미트가 일을 하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빌?」 「케이트, 좀 어때요?」 그가 활짝 웃었다. 「아무런 후유증도 없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그런데 루크는 어디 있나요?」 「루크는 없어요. 케이트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는 어제 뉴 멕시코로 떠났어요. 새로운 연장을 살펴 보러 갔죠. 목요일에나 돌아올 거예요」

10

목요일 저녁 케이트가 아파트 건물 앞의 쓰레기통에 빈상자들을 버리고 있을 때 루크의 트럭이 스프루스가로 들어서는 걸 보았다. 그는 모퉁이에 차를 세우고 차에서 뛰어내려 찌푸린 얼굴로 그녀의 아파트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몹시 화가 난 표정이다. 하지만 케이트는 그가 왜 그렇게 성을 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에게 아는 척을 하려는 순간 그는 주먹으로 차의 후드를 꽝 하고 내리쳤다. 그런 다음 그는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건물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자신의 트럭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차의 문을 열더니 금방이라도 다시 올라탈 사람처럼 한쪽 발을 발판 위에 올려놓았다. 케이트는 그에게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누르고 그대로 서 있었다. 하지만 눈물까지 억누를 수는 없었다. 루크의 행동을 지켜보는 동안 그녀의 가슴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루크는 그냥 가버리려던 마음을 다시 바꾼 것 같았다. 그는 문을 쾅 닫고서 단호한 걸음걸이로 아파트 건물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천천히 모퉁이를 돌아섰다. 「케이트」 「루크」 그녀가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시 후에 루크가 입을 열었다. 「방금 전 목장에 돌아와서 본체가 비어 있다는 걸 알았어. 내가 돌아올 때까진 당신이 그곳에 있어 줄 거라고 생각했어」 「잰슨 부인이 월요일에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마침 로리, 클레이, 스킵이 도와준다고 해서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어요」 「그래도 나에게 미리 말했어야지」


케이트는 죄의식을 느끼며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그러려고 했는데 당신은 이미 뉴 멕시코로 떠나 버렸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당신이 나에게 할 얘기가 있는 것 같다고 빌이 말하더군」 「안으로 들어가겠어요?」 「좋아」 아파트 안으로 들어와서 그들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본 채 서 있었다. 케이트는 당황하고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선 그의 청혼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아주 훌륭한 집이군」 침묵이 고통스럽게 느껴졌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코트를 벗으시겠어요?」 「좋아」 그는 코트를 벗어서 그녀에게 건네줬다. 「좀 앉아 있겠어요?」 루크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그는 몹시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난번 일에 대해 사과하러 왔어」 「오, 루크」 그녀는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속삭였다. 「나도 몹시 가슴이 아팠어요. 우리가 왜 그런 일로 다퉈야 하는 거죠? 난 우리 사이가 이렇게 벌어지는 걸 원치 않아요」 「이건 정말 말도 안돼. 하지만 당신은 나와 떨어져서 살겠다는 의지가 확고한 것 같군」 「아직도 날 돌봐 주길 원하세요?」 「그게 나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아」 「나도 알아요. 하지만 나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어요」 같은 말을 반복한다는 게 피곤해서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폭설이 내리던 날도 그렇게 자신을 잘 돌봤다는 거야?」 「사과를 하러 온 게 아니라 또 다른 시비를 하러 온 것 같군요」 「좋아, 그만두겠어! 난 다시는 당신이 혐오하는 결혼 얘긴 꺼내지 않기로 약속했어. 이제 더 이상 입씨름하고 싶지 않아」 「당신과 다툴 땐 정말 비참해져요」 「나도 동감이야, 공주」 그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거기엔 깊은 절망감이 배어 있었다. 케이트가 그에게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고 싶을 정도다. 「케이트, 달리 필요한 건 없어?」 「괜찮아요」 앞으로 난 엉터리 같은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또 폭설 속에 갇히는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를지도 몰라. 하지만 어떻게든 혼자서 살아갈 수는 있을 거야! 루크는 실내를 둘러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고 느끼는 것 같은 표정이다. 「이렇게 들러 주다니 정말 사려가 깊으시군요…. 내 말은 당신을 만나서 정말 기쁘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당신이 화해를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내가 없는 동안 날 그리워했다고 말하는 거야?」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여태껏 그걸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무의식중에 목요일이 오길 기다렸지만 그가 찾아오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지난 며칠 동안 그녀는 미친 듯이 짐을 정리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와 헤어진 허전함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그와 이렇게 마주 앉아 있지만 그들은 마치 타인들처럼 서로 깍듯이


예의를 갖추고 있다. 「식사는 했어?」 루크가 무뚝뚝한 어조로 물었다. 「당신과 함께 저녁식사나 하러 갈까 하고, 그동안 당신에게 많은 관심을 갖지 못한 것 같아. 언젠가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여자들은 강요하는 남자를 싫어한다면서? 그러니 내키지 않으면 그만둬도 좋아」 그는 케이트가 당연히 저녁식사 초대를 거절할 거라고 믿고 있는 눈치였다. 「나도 당신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싶어요」 케이트가 미소를 감춘 채 말했다. 루크는 그녀의 승낙에 몹시 놀라는 눈치다. 케이트가 일어섰다. 「잠깐 기다리세요. 준비를 하고 나올께요」 그녀의 음성엔 행복함이 배어 나오고 있다. 루크도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의 존���가 그녀의 작은 거실을 속속들이 채우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받치며 그녀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정말 날 그리워한 거야?」 그가 속삭였다. 목이 메어와서 대꾸를 할 수가 없었으므로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싼 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크의 눈동자가 짙어지고 있다. 그건 그녀에게 키스하길 원하고 있다는 표시였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을 찾으려는 순간 그는 그녀의 손을 떨쳐내고 약간 뒤로 물러섰다. 케이트는 애써 실망감을 감춰야 했다. 「리버스데일에 있는 피자 가게를 생각하고 있었어」 그가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피자라니…, 정말 근사하군요」 「그럼 결정된 거야」 케이트는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대신 머리를 손질하고 화장을 다시 했다. 잠시 후에 그녀는 현관에서 기다리는 루크에게 다가갔다. 그가 감탄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잠깐 훑어보았다. <피자 마니아>란 음식점은 이탈리아 요리로 유명한 곳이다. 실내엔 은은한 조명이 흐르고 있고 나무로 된 식탁엔 빨간 체크 무늬의 천이 덮여 있다. 주말이 아니라서 손님들로 크게 붐비진 않았다. 루크의 안내로 중간쯤에 자리잡은 테이블에 앉은 다음 그들은 커다란 소시지와 검은 올리브 피자를 주문했다. 그런 다음 그녀는 루크의 얼굴을 바라보며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 거야?」 「전에 이곳의 피자를 먹었던 기억이 나서 그래요. 로리가 막 이곳에 도착했을 때였어요. 그녀와 난 클레이와 스킵을 위해서 요리를 했어요. 난 레몬 파이를 만들었고 로리는 오후 내내 해산물 소스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피자까지 먹었단 말야?」 케이트는 그날 밤의 엉망이 된 저녁식사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약간 웃음을 지었다. 「로리의 기분이 정말 참담했겠군」 「아무튼 로리는 임기응변이 뛰어난 편이에요. 우린 <피자 마니아>에 전화를 걸어 커다란 피자를 두 개나 주문한 다음 거실에 앉아서 피자가 오길 기다렸죠」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 클레이는 로리에게 끌리는 감정을 무시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 같다. 그는 고의적으로 로리를 외면했었다. 그날 밤 케이트를 집에 데려다 주면서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문 앞에 왔을 대에야 그녀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을 분이었다.


「무슨 일이지?」 루크가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아무것도 아녜요」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죠?」 「당신 눈동자가 슬퍼 보여서…」 케이트는 마침 가져온 야채 애피타이저에서 당근을 집어 들고 씹기 시작했다. 「그날 밤 난 클레이를 로리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하지만 나에겐 그들의 감정을 저지시킬 힘이 없었어요. 그리고 그건 견디기 힘들 만큼 고통스런 일이었어요」 그녀는 말을 멈추고 주키니를 집어 들었다. 「내 얘기만 하는군요. 뉴 멕시코 여행은 어땠어요?」 그녀는 화제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며 밝은 어조로 물었다. 「좋았어」 그가 따뜻하고 편안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이제 <서클 엘>엔 다소의 변화가 오게 될 거야. 몇 개의 건물을 더 짓고 집도 수리를 할 생각이야」 그는 담담한 어조로 말하고 있지만 케이트는 그의 의도를 놓치지 않았다. 「<서클 엘>은 이제 당신 거예요. 많은 변화가 있으리라고 충분히 예상했었어요. 하지만 나와 아빠의 기분이 상할까 봐 걱정하진 마세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는 미래를 향한 꿈으로 반짝이고 있다. 「앞으로 15 년 내에 그곳을 서부에서 제일 가는 목장으로 만들어 놓겠어」 「루크, 당신은 틀림없이 해낼 거예요」 케이트가 자신을 믿어 주는 게 그는 몹시 기쁜 눈치다. 사실 케이트는 루크의 능력을 굳게 믿었다. 10 년 동안이나 그는 아버지를 위해 일해 왔고 그동안 몇 건의 품종개량에 성공을 거뒀다. 데빈은 점차 목장 일을 루크에게 맡겨 버렸다. 언젠가 아버지는 루크가 충분히 혼자서 목장을 경영할 능력이 있는데 왜 독립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때 케이트는 자금 문제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아닌 게 분명해졌다. 「왜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의 목장을 갖는 걸 미워온 거예요?」 피자가 도착했을 대 케이트가 물었다. 피자를 가져온 여종업원이 떠나지 않고 그대로 서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루크가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가 잘못됐나요?」 「아…, 아니에요. 맛있게 드세요」 여종업원은 재빨리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그곳에 있던 다른 두 명의 종업원들과 함께 무슨 말인가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루크는 그들의 행동을 무시하기로 작정한 듯 케이트의 접시에 피자를 덜어 주고 자기의 접시에도 덜어 놓았다. 「자, 무슨 얘기를 했었지?」 「왜 자신의 목장을 갖는 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느냐고 물었어요」 「별로 흥미없는 대답이 될 텐데…」 「흥미가 없었다면 아예 묻지도 않았을 거예요」 「좋아, 대답해 주지」 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다음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에겐 문제가 있었어. 목장 주인의 딸을 사랑하게 되었거든. 그녀는 날 미치게 만들어 놓고도 정작 본인은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어. 더구나 그녀는 다른 사람과 약혼까지 해버렸지. 내가 떠나 버리면 그 아가씨가 결코 내 마음을 몰라줄까 봐 두려웠어. 솔직히 말해서 내 인생에서 그녀처럼 사랑했던 여자는 없었지」 케이트는 음식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목이 메어와서 아무것도 입에 넣을 수가 없다. 「당신 말이 옳았어요…. 내가 클레이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 말예요」 감히


시선을 들어 그와 눈을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나… 나와 클레이의 관계에 대해서 당신이 옳게 판단했다는 뜻이에요. 내가 그에게 느낀 감정은 결코 성숙한 남녀의 사랑이 아니었어요. 난 오랫동안 그를 흠모해 오긴 했지만 그건 사춘기의 환상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녀는 자신의 말이 담고 있는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말이 끝나자 갑자기 실내가 조용해졌다 음악소리도 사라졌고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말소리도 조용해졌다. 「당신이 그 사실을 인정할 줄은 몰랐어」 그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얼굴뿐만 아니라 그의 표정도 부드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 「클레이, 로리와 함께 식사를 한 다음날 당신에게 그 얘기를 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당신이 너무 화를 내는 바람에…」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그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미묘한 긴장을 깨뜨리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당신이 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는 거야?」 「그것도 전혀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바로 그 순간 나이든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오는 바람에 그녀는 말을 멈추고 말았다. 그는 바이올린을 턱에 댄 채 달콤한 연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전속 바이올리니스트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그가 바이올린 연주를 끝냈을 때 그녀가 말했다. 음식점 안의 사람들이 그 연주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다음 곡은 두 사람을 위한 것이오」 남자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두 사람의 마음에 묻어둔 사랑이 5 월의 꽃다발처럼 활짝 피어날 거요」 세 번째 음악을 연주한 다음에야 케이트는 남자가 그 음식점의 전속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는 두 사람만을 위해서 음악을 연주한 것이다. 음식점의 손님들이 연주자의 모습을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고마워요」 음악이 끝나자 케이트가 말했다. 남자는 악기를 내려놓았다. 「나이팅게일의 주민들은 두 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잇어요. 그런데 두 분이 이처럼 낭만적인 저녁시간을 우리 <피자 마니아>에서 보내게 된 것을 우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우린 두 분의 결합에 작은 역할을 하게 되길 빌고 있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5 월의 결혼식을 제안하시는 건가요?」 「5 월의 결혼식이야말로 가장 근사한 선택이 될 거요」 바이올리니스트가 활짝 웃었다. 「이제 가봐야겠어」 루크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가 지갑을 꺼내자 바이올리니스트가 그를 제지했다. 「피자 값은 받지 않겠소. 두 분이 우리집에서 저녁식사를 해준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루크는 뭔가 항의하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빨리 그곳을 벗어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는 케이트의 손을 잡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길가에 나왔을 때에야 케이트가 입을 뗐다. 「당신에겐 그런 일이 처음이었나요?」 루크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진 않아. 하지만 당신처럼 쉽게 넘겨 버릴 수가 없어. 그동안 몇몇 사람들이 특정한 달을 언급하곤 했지만 난 무슨 얘긴지 알지 못했어」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에요. 이 마을 사람들의 절반이 우리의 결혼에 돈을 걸고 있어요」 갑자기 그 내기가 너무나 우스운 일로 여겨져서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서도 배가 아플 만큼 웃어댔다. 하지만 루크는 그 일이 조금도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다. 「이봐요, 루크」 그녀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정말 우습지 않아요?」 하지만 그는 코웃음만 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심각한 척하지 말아요. 난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충고를 들었다구요. 정육점 주인, 샐리 데일리, 신문 배달 소년…. 정말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렸어요. 그러니 그 정도는 당신도 참아 넘겨야 당연한 일 아닌가요?」 「당신이 그들의 충고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 「뭐라구요?」 그녀가 소리쳤다. 나이팅게일로 가는 동안 루크는 이상하게도 말이 없었다. 그는 케이트를 아파트 앞에 내려놓고 그대로 돌아서려고 했다. 작별의 키스도 없이 다시 만나자는 기약도 없이…. 젼혀 뜻밖의 반응이다. 집까지 돌아오는 동안 케이트는 그의 포옹과 키스를 기대했다. 그리고 그에게 함께 집으로 들어가서 커피를 마시자고 제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루크…」 그녀의 음성을 듣고 루크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뜨거운 눈길로 그녀를 끌어안고 뜨겁고 격렬한 입술을 들이댔다. 그의 키스는 마치 영혼을 태워 버릴 만큼 뜨거웠다. 케이트는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그의 어깨를 끌어 안았다. 그의 품안에 갇혀 있는 게 너무나 편안했다. 하지만 왠지 자꾸만 겁이 난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분석해 볼 여우가 없었다. 그녀의 세계가 온통 혼란 속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치 높이를 알 수 없는 하늘을 부유하는 로켓처럼 그에게 꼭 매달렸다. 루크가 그녀에게서 벗어나 혼란과 희망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은 다음 재빨리 그의 트럭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케이트는 키스의 후유증 때문에 비틀거렸다. 현관 문 앞에 몸을 기대지 않으면 그대로 쓰러져 버릴 것만 같다. 「루크」 그녀의 음성은 너무나 연약하게 들려왔다. 「나와 함께 들어가서 커피를 마시지 않겠어요? 얘기도 나누고…」 그의 잘생긴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피어올랐다. 「공주, 감히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아. 안으로 들어가면 내일 아침까지 떠날 수가 없을 것 같거든」 케이트는 혼자서 힘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거실 한가운데 서서 깊은 숨을 들이켰다. 「케이트 로건, 넌 그를 사랑하고 있어」 그녀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 남자에게 완전히 빠져 버린 거야」 그녀는 신음소리와 함께 두 손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왜 그동안 루크와 그토록 승강이를 벌여야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제 케이트는 자신이 원하는 걸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실망스럽게도 그 다음날에도 루크에게선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보통 금요일은 목장이 몹시 바쁘기 때문에 케이트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토요일 아침 케이트는 사야 할 식료품의 목록을 만들었다. 루크를 식사에 초대하기 위해서다. 특별요리를 만들기 위해 요리책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전날 밤의 키스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을 감고서 그날 밤의 느낌 속에 잠시 빠져들었다. 샴페인에 취한 것 같은 행복감이 피어올랐다. 루크에게 전화를 해봤지만 아무 응답이 없다. 그래서 우선 쇼핑을 하기로 마음먹엇었다. 코트를 꺼내 입고 세이프웨이 상점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착각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가 물건을 고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식료품을 모두 산 다음 잡화상에 들러 향수양초 몇 개를 샀을 댄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케이트」 샐리 데일 리가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 그녀는 동정이 가득 찬 시선으로 그녀를 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케이트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두드렸다. 「기분이 어때?」 「좋아요」 케이트는 당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아직 모르고 있었나?」 「뭘 말예요?」 「루크 리버스가 베티 해먼드와 함께 저녁식사를 했어. 그리고 두 사람은 <레드 불>에서 밤새도록 춤을 췄대. 마을 사람들이 그 일을 두고 수군거리고 있어. 그가 드디어 인내심을 잃고 베티와 결혼하기로 했다는 거야. 사실 마을 사람들 모두 케이트가 미쳤다고 말하고 있어. 루크 리버스 같은 남자를 잃는다는 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지」 케이트는 너무나 충격을 받아서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알겠어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 중얼거렸다. 「불쌍한 아가씨…, 자존심 때문에 일을 그르쳐선 안돼」 샐 리가 동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녀의 음성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케이트가 정말 걱정이 돼. 외로운 케이트가 결국 30 살 까지 독신으로 지내고 말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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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살까지 독신으로 지내게 될 것 같아서…. 가까운 아파트까지 걸어가는 동안 샐리의 음성이 케이트의 뇌리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눈물이 솟구쳤지만 그녀는 샐리에게 간신히 미소를 지으면서 루크는 누구하고든 자유롭게 데이트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차라리 그 일을 계기로 루크와의 말도 안되는 소문이 끝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틀림없이 저녁 나절쯤에는 샐리가 케이트를 만나서 나눈 얘기가 온 마을에 퍼져 있을 것이다. 이제 나이팅게일의 주민들은 그녀와 루크와의 소문을 듣는 데 아주 익숙해져 있다. 루크…, 그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고통스럽게 조여왔다. 그는 나를 포기했고 난 드디어 그를 잃게 되는 거야. 클레이가 파혼을 선언했을 때보다 더 가슴이 아파왔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지난 몇 주 동안의 일들을 인정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직도 나의 고통은 끝나지 않은 걸까? 왜 고통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일까? 그녀는 마루에 백을 내려놓은 다음 코트를 벗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좋아」 그녀는 큰소리로 외쳐댔다. 「루크는 베티 해먼드와 저녁식사를 하고 춤을 췄어.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지?」 하지만 솔직히 그 사실 때문에 그녀는 몹시 흔들리고 있다. 도무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는 계속 나에게 아내가 되어 주길 바란다고 말했었다. 그는 날


사랑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그의 사랑이 정말 그렇게 깊고 단단한 것이었는지 의심스럽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루크가 없는 삶을 상상해 보았다. 한기가 척추를 타고 흘러가면서 강렬한 외로움이 그녀를 덮쳐왔다. 누군가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하지만 케이트가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루크가 성큼성큼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이런 모습으로 그와 마주해야 하다니…. 이건 내게 너무 불리한 싸움이야. 그녀는 허겁지겁 얼굴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루크」 그녀는 애써 밝은 어조로 말했다. 「당신과 베티에 관한 소문은 어떻게 된 거예요?」 「벌써 그 소문을 들었어?」 그는 몹시 당황한 기색이다. 「불행히도 듣고 말았어요. 설마 그런 소문이 그대로 묻혀지리라고 생각한 건 아닐 테죠?」 「언제… 누가 그런 말을 했지?」 「식품점에 갔다가 샐리를 만났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카펫 위를 서성거렸다. 「내가 베티를 만났다고 했는데도 당신은 괴롭지 않았어?」 「그래요. 내가 괴로워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커피 드시겠어요?」 「싫어」 그에게서 벗어날 구실을 찾기 이해 그녀는 주방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커피를 만들었다.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동안만큼은 표정을 감출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 소문에 대해서 몹시 기뻐하는 것 같군」 루크가 그녀를 따라오며 힐난하듯 말했다. 「물론 기뻐요.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아주 근사할 거예요」 「난 베티를 사랑하지 않아」 그가 잔뜩 화가 난 어조로 말했다. 「사실 당신이 베티와 데이트를 하게 되면 그 고약한 소문이 모두 연기처럼 사라질 거라고 생각해요」 그녀가 몸을 돌려 그를 응시했다. 그녀는 마치 보호막처럼 커피를 꼭 움켜쥐었다. 목을 문지르며 루크는 계속 주방을 서성거렸다. 「난 당신이… 질투를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말인가요?」 샐리에게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생명이 꺼져가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다는 말은 차마 털어놓을 수가 없다.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왜 질투를 해요?」 「잘 모르겠어!」 루크가 고함을 질러대곤 폭풍처럼 밖으로 뛰쳐나갔다. 케이트는 울고 싶을 만큼 기분이 참담했다. 「넌 그에게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털어놓을 수 있었어. 그런데 왜 그처럼 바보같이 군 거지? 왜? 왜?」 「어제 루크를 봤어」 <넬리의 카페>에서 로리를 만났을 때 그녀가 케이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베티 해먼드와 함께 있더구나」 예상치 않던 고통이 밀려와서 호흡이 목에 걸려 버렸다. 「나도… 알아」 「그래?」 로리가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정말 여태껏 너희 두 사람처럼 고집불통을 처음 봤어. 둘 다 황소 고집이야」 「네가 뭔가를 오해하고 있는 거야」 케이트는 친구의 시선을 피한 채 커피 잔에


시선을 던졌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얘기한 게 언제였니?」 「며칠 전에 만났어」 「솔직히 말해서 난 도대체 두 사람이 왜 그렇게 어긋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클레이와 난 네가 아파트로 이사간 후로는 모든 일이 제대로 되길 바랐어. 그런데 상황이 정반대로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루크도 나처럼 누구하고든 데이트할 권리가 있어」 「네가 데이트하고 싶은 남자는 루크 한 사람뿐이야. 우린 둘 다 그걸 알고 있어」 로리가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괜한 얘기를 했나 봐. 두 사람이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이토록 심한 고통에 빠져 있는 게 안타까워」 「왜 사랑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거지?」 케이트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로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클레이와 나도 그랬어. 케이트, 제가 정말 루크를 사랑한다면 네가 원하는 걸 위해 싸워 봐야 하지 않을까?」 「잘 모르겠어」 잠시 후에 그들은 헤어졌다. 케이트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새로운 확신 같은 걸 갖게 됐다. 루크를 사랑하고 있는 이상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그를 잃게 될 것만 같다. 그녀는 <서클 엘>로 차를 몰았다. 루크의 트럭은 집 뒤에 서 있지만 그는 부재중이었다. 하지만 놀랄 일은 아니다. 그 시간에 그가 집에 있을 가능성이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밖에서도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빌조차도 그의 소재를 모르고 있었다. 단호한 결심을 하고 케이트는 집안으로 들어가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참 분주하게 샐러드를 만들고 있는데 그가 뒷문으로 들어왔다. 루크는 그녀의 차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주방에 들어선 그는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케이트를 보고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다. 케이트는 짐짓 편안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안녕, 루크」 그녀가 먼저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무거운 침묵을 깨뜨렸다. 그가 눈을 깜빡였다. 「당신은 지금 변명거리를 찾고 있겠지」 케이트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금요일에 베티와 데이트를 한 건 실수였어」 「그런데 왜 그런 짓을 했어요?」 「당신이 질투를 하길 바랐기 때문이야. 당신과 외식을 하던 날 당신이 마구 웃어대는 걸 보고 난 몹시 화가 났어. 당신은 나와 결혼할 계획이 전혀 업는 것처럼 행동하더군. 그래서 여자가 당신 하나뿐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던 거야. 결국 그 아이디어도 공수표가 되고 말았지만…」 「내 행동이 그렇게 경박스러워 보였나요?」 「토요일에 시내에서 우연히 베티를 만났지. 그녀는 날 보자마자 팔짱을 낀 채 따라오기 시작했어. 그녀를 만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어느새 그 여자와 난 시내 중심가를 걷고 있었어」 「베티는 근사한 여자예요」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무튼 내가 누구와 데이트를 하든 당신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여자라는 걸 잊고 있었어. 당신은 절대로 질투에 굴복할 여자가 아니야」


「사실 난 질투심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어요」 「이젠 날 놀리는 건가?」 「제발 내 말을 믿어 줘요」 「이곳에 온 이유가 정확히 뭐지?」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요」 이제 그에 대한 감정을 고백한 이상 거기서 멈출 수는 없다. 「오븐에 폭찹과 포테이토를 넣어 뒀어요」 그런 다음 케이트는 단숨에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당신이 아직도 원하고 있다면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순간 루크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드디어 그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방금 뭐라고 했지?」 「폭찹과 감자가 오븐에…」 「그런게 아니고 나와의 결혼에 관한 부분 말야」 그녀는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직도 당신이 나와 결혼하길 원하고 있다면 당신의 아내가 되는 걸 영광스럽게 생각하겠어요」 「난 아직도 당신을 원해」 케이트는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목이 막혀와서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신 말이 옳았어요. 난 당신을 몹시 필요로 해요. 아마 난 당신에게 내가 필요하다고 말해 주길 기다렸던 것 같아요. 하지만 당신은 한번도 그런 얘길 하지 않았어요」 루크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구?」 그의 음성은 충격과 의아함으로 가득 차 있다. 「당신 없는 나의 인생은 빈 조개 껍데기와 같다고 생각해 왔어. 난 당신과 인생의 모든 걸 함께 나누지 않는다면 평생 의미 없는 삶을 살게 될 거라고 믿었어. 케이트, 난 너무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려 왔어」 「정말 나를 사랑한단 말인가요?」 케이트가 속삭였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루크는 입을 열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적도 있었지. 오랜 시간 동안 당신이 클레이를 향해 열병을 앓는 걸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으니까. 난 그걸 사춘기의 열병쯤으로 여겼는데 당신은 결코 그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 당신의 상태는 점점 나빠져 갔지. 그때의 내 심정이 어땠는지 알아?」 「그럼 충고해 줄 수도 있었잖아요?」 그의 얼굴에 고통스런 빛이 스쳐갔다. 「당신은 너무 클레이에게 빠져 있어서 감히 내가 끼어들 자리가 없었어. 로리는 처음 날 만났을 때부터 내 감정을 짐작하고 있더군」 「로리는 모든 걸 알고 있었나요?」 「우린 둘 다 사랑 때문에 번민하고 있었지. 로리는 클레이와 사랑에 빠져 있었고 난 당신에게 빠져 있었지. 난 항상 내 감정을 비밀리에 묻어 두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마을 전체가 알아 버렸더군」 「베티 해먼드는 몰랐을 거예요」 「하지만 이제 알게 되겠지. 당신에게만 내 감정을 알리고 싶었어. 결국 당신도 모든 걸 깨닫게 되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지」 「오, 루크」 그녀는 그에게 한발짝 다가갔다. 그녀의 눈동자엔 벅찬 감정이 가득 차 있다. 「난 당신이 절실히 필요해요」 케이트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감정이 북받쳐 와서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사랑의 감정이 그녀를 삼켜 버릴 것처럼 밀려왔다. 「당신을 사랑해」 그가 속삭였다. 「이제부터 당신이 행보해질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어」 환하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가 케이트의 영혼을 두드릴 만큼 강렬했다. 최근 몇 주 동안 그의 눈동자에 나타났던 초조함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오, 루크, 이제 한시라도 빨리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어요. 언젠가 12 월에 결혼하겠다고 말했었죠?」 「케이트, 12 월은 얼마 남지 않았어」 「나도 알아요.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있는 달에 결혼식을 올리면 아주 아름다울 거예요. 교회를 성스럽게 장식하고 신부 들러리들은 모두 빨간 드레스를 입게 될 거예요」 「케이트, 설마 농담은 아니겠지?」 「내 인생에서 이 순간처럼 진지했던 적은 없어요, 루크, 우린 아주 멋진 삶을 꾸려갈 거예요」 그가 격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이어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에 와닿았다. 「케이트, 난 아이들을 갖고 싶어. 이 집을 넘치는 사랑으로 채우고 싶어」 그들은 잠시 아무 말도 못한 채 벅찬 감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미래의 꿈을 나누었다. 케이트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자존심을 버리자마자 그처럼 엄청난 행복이 다가오는 게 놀랍기만 하다. 이제 루크의 키스는 아주 부드럽게 변해 있다. 그녀가 이 집에 있고 자신의 아내가 될 거라는 사실을 아직 믿지 못하는 것 같다. 그를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케이트의 시선은 달력에 고정되었다. 12 월은 아주 멋진 달이 될 거야. 그녀는 문득 윌킨스 목사님이 12 월 15 일에 많은 돈을 걸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15 일쯤이라면 특히 멋진 결혼식이 될 것임을 케이트는 의심치 않았다. 로리 캠벌의 차가 나이팅게일 근처에서 고장이 난 이후 2 년이 지난 6 월의 어느 오후, <서클 엘>엔 태양이 싱그럽게 비추고 있다. 로리가 뒷문을 두드렸을 때 케이트는 아이스티를 만들고 있었다. 「그냥 들어와」 케이트가 소리쳤다. 「문을 잠그지 않았으니까」 잠시 후에 로리가 약간 피곤한 표정으로 주방에 들어섰다. 「도서관 일은 재미있었어?」 「그럼, 아주 재미있어」 「캐더린은 아직 자고 있어」 케이트가 말했다. 새로 지은 테라스의 그늘 밑에서 잠든 아이를 바라보는 로리의 눈길이 몹시 부드럽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밖에서 재웠어」 9 개월된 아기는 로리가 다가가서 등에다 손을 넣자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였다. 그녀가 몸을 돌려 친구의 불룩한 배를 바라보았다. 「몸은 어때?」 「몸이 몹시 무거워」 케이트는 부풀어오른 배를 부드럽게 두드려 보았다. 「의사는 2 주일쯤 후에 출산하게 될 거라고 했어」 「2 주일이나?」 로리가 안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주에 낳게 됐으면 좋겠어. 로리, 네가 캐더린을 임신했을 땐 모든 게 수월해 보였는데」 로리가 웃었다. 「그렇게 보였니?」 「난 정말 힘들어. 다리도 부었고 손과 발은 천근이나 된 것처럼 무겁단다. 내 몸이 마치 찐빵처럼 부풀어오른 기분이야」


로리가 웃었다. 「임신 말기엔 누구나 그래, 난 그래도 캐더린을 10 월에 출산했기 때문에 조금은 수월했는지도 모르지. 날씨가 훨씬 서늘했으니까」 「우리 아기도 캐더린처럼 순했으면 좋겠어. 너의 딸은 우리집에서도 거의 말썽을 피우지 않아」 「그애 삼촌인 스킵은 그애가 곧 걷게 될 거래」 「그럴 거야」 케이트가 어렵게 위치를 바꿔 앉았다. 요즘 들어 그녀는 같은 자세로 몇 분도 앉아 있지 못한다. 「오, 깜빡 잊을 뻔했구나」 로리가 아이스티를 밀쳐 놓고 재빨리 주방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 아동용 책을 들고 돌아왔다. 「어제 우편으로 내 책을 받았어. <밤노래의 탐험>이란 책이야. 이 책을 받았을 때 얼마나 흥분했는지 몰라」 케이트는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펼쳐 보았다. 「표지가 아주 환상적이야. 내용만큼 표지도 근사하구나!」 「평론도 아주 좋았어. 어떤 비평가는 내 책이 아이들의 고전이 될 거라고 했어. 우스운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막 기분이 좋아지는 거야」 「절대로 우스운 얘기가 아냐. 그 ���판업자가 너의 두 번째 작품을 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잖니?」 「사실 두 번째 얘기도 첫 번째 것처럼 재미있단다」 로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이제 몇 년만 있으면 우리의 아이들이 너의 동화를 읽으며 함께 학교를 다니게 될 거야. 그애들은 서로 가장 친한 친구가 되겠지?」 그 순간 아기가 깨어났다. 그들은 이동용 아기 침대로 다가갔다. 아기는 엄마를 발견하자 짙은 눈을 반짝이며 귀여운 손을 내밀었다. 로리는 캐더린을 침대에서 안아올린 다음 아기의 귀여운 뺨에 키스했다. 「이젠 집에 가봐야겠어. 캐더린을 돌봐 줘서 정말 고마워. 새로 온 사서에게 급할 땐 도와주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어」 「난 상관하지 마. 캐더린을 돌보는 게 정말 즐거워. 메리에게 자주 동생 집에 가라고 해. 그럼 내가 캐더린을 봐줄 기회가 더 많아지잖아」 로리와 캐더린이 떠나고 10 분쯤 후에 루크가 집으로 돌아왔다. 케이트는 현관에 서서 남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루크가 다가와서 한때는 날씬했던 케이트의 허리를 끌어안고 주방 쪽으로 갔다. 「괜찮아?」 그의 시선은 부드럽고 따뜻하다. 그러나 케이트는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기분은 복합적이었기 때문이다. 참담하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하고 두렵기까지 했던 것이다. 따라서 뭐라고 꼬집어서 말하기가 불편했다. 「케이트?」 「기분이 좋아요」 여러 가지 불평을 열거할 필요까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어떻게 표현해야할 지도 알 수 없었다. 로리의 말대로 임신 말기엔 갖가지 고통과 아픔에 따르나 보다. 시간이 지나면 점차 그러한 상태에 익숙해지겠지. 루크가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캐더린 때문에 무척 바빴겠군?」 「그 앤 계속 잠만 잤어요」 케이트는 몸을 숙여 남편의 턱에 키스했다. 「아이스티를 만들어 놨는데, 좀 드시겠어요?」 「고마워」 루크가 잔을 찾으러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날카로운 통증이 옆구리에 몰려와 그녀는 작은 비명소리를 냈다.


「케이트?」 부푼 배를 움켜쥔 채 케이트는 놀란 표정으로 루크를 바라보았다. 「오, 여보, 통증이 오고 있어요」 루크의 표정이 핼쑥하게 변했다. 「힘들어?」 커다란 눈동자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요. 처음부터 이토록 강한 진통이 올 줄은 몰랐어요」 루크가 주방을 가로질러 아내에게 다가왔다. 「그럼 어떻게 하지?」 「아무래도 의사 선생님께 전화를 해봐야겠어요」 「안 돼」 루크가 팔을 뻗쳐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내가 전화할 테니까 꼼짝 말고 있어」 「하지만 루크…」 「케이트, 제발 고집피우지 마. 당신은 곧 아이를 낳게 된단 말야!」 그는 마치 최근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처럼 말했다. 그녀는 남편이 전화기를 들고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는 걸 지켜보았다. 의사와 통화를 마친 다음 루크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닥터 아담스가 당장 병원으로 오라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침실로 달려가서 케이트가 꾸려 놓은 가방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전화기 앞에 있는 아내를 보고는 대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누구에게 전화를 거는 거지?」 「아빠와 도러시아에게…. 연락을 해주기로 약속했어요」 「케이트, 그런 일은 나에게 시켜 줄 수 없겠어?」 「좋아요」 그녀는 남편에게 수화기를 넘겨 준 다음 침실로 가서 몇 가지 소지품을 더 챙겼다. 전화로 얘기하는 게 산모에게 부담스러울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의견을 존중해 줄 생각이다. 지난 몇 년 동안의 세월이 그녀에게 남편과 다퉈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었다. 「케이트」 그가 소리쳤다.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잖아?」 「루크, 난 간단한 물건을 챙기는 것뿐이에요」 순간 등쪽에 날카로운 통증이 왔다. 그녀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손으로 배를 쓸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남편을 보며 미소지었다. 「오, 루크, 아기가…」 루크가 수화기를 내던지고 달려왔다. 「지금?」 「아니에요」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남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아직 몇 시간 남아 있어요. 오, 또 통증이 왔어요. 이번엔 아주 심해요…」 그는 아내의 양손을 꼭 움켜쥐었다. 「난 9 달 동안이나 이 순간을 손꼽아 기다려 왔어. 하지만 내 인생에서 지금처럼 불안했던 적은 없었어」 「그렇게 걱정하지 말아요」 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어루만진 다음 부드럽게 키스했다. 그에게 자신감을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숨을 내쉬고 아내에게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아내를 번쩍 들어올린 다음 트럭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항의는 아예 무시한 채 케이트를 트럭 안에 앉혀 놓은 후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가방을 갖고 나왔다. 「루크, 정말 아빠와 도러시아에게 알리고 싶단 말예요」 「내가 병원에서 전화할게. 더 이상 입씨름하지 마. 내가 있잖아」 다시 날카로운 통증이 몰려왔다. 그 바람에 터져나오려던 웃음이 쏙 들어가 버렸다. 루크의 지나친 관심과 우려가 그녀에겐 우습게 느껴졌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케이트는 병원 침대에 탈진한 상태로 누워 있었다. 감고


있던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곁에 아버지가 와 있음을 알았다. 도러시아도 아버지처럼 자랑스러운 미소를 띈 채 곁에 서 있었다. 데빈은 딸의 손을 붙잡고 꼭 쥐었다. 「젊은 엄마, 기분이 어때?」 「아주 좋아요. 병원에서 아기를 보여 주던가요? 오, 아빠, 그녀석은 너무나 아름다워요!」 아버지는 잠시 말문이 막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루크는 매튜와 함께 있단다. 아들을 안도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훨씬 의젓해 보이더구나」 「난 루크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걸 처음 본 것 같아요」 도러시아가 중얼거렸다. 「아주 부드럽고 사랑에 넘치는 듯한 표정이었어요」 데빈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루크가 대기실에 들어와서 매튜 데빈이 태어났다고 말했을 때 그의 눈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어. 케이트, 그는 널 몹시 사랑하고 있더구나」 「나도 알아요, 아빠. 나도 그를 사랑해요」 데빈이 딸의 손을 두드려 주었다. 「이제 좀 쉬려무나. 도러시아와 난 내일 다시 들르겠다」 다시 케이트가 눈을 떴을 땐 루크가 곁에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손을 잡으며 꿈꾸는 듯한 미소를 보냈다. 「당신 없인 해내지 못했을 거예요. 내 곁에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가 아내의 이마에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올려 주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날 당신에게서 떼어 놓지 못해. 케이트, 난 당신의 고통을 나누어 가질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고 싶었어」 마지막 순간을 회상하는 그의 음성은 아직도 생생한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녀가 편안하게 미소지었다. 「그 고통은 아주 짧았어요. 그 대가로 우린 아름다운 아들을 얻었잖아요?」 「몇 달 동안 아기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전혀 실감이 나질 않았어. 당신이 분만실로 옮겨지고 그 격렬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난 무력감을 느꼈어. 당신을 돕고 싶은 마음은 절실했지만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지. 그런데 매튜가 태어나고 그녀석을 보는 순간 내 가슴에 어떤 변화가 일기 시작했어. 그 조그만 녀석에 대해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이 밀려와서 난 숨도 쉴 수 없을 정도였어. 사람들 앞에 그냥 쓰러져서 울고 싶은 느낌이더라구」 「오, 루크」 「케이트 리버스, 당신이 내게 준 보석은 도저히 갚을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거야」 「충분히 갚을 수 있어요」 그녀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나를 사랑해 주기만 하면 돼요」 「그럴께」 그가 격정에 사로잡혀서 속삭였다. 「영원히 당신을 사랑할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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