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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의 허니문 1 여기는 너 같은 사람이 올 곳이 아니라는 말이라도 할 듯이 초라한 옷차림을 빤히 보고 있는 웨이터를 무 시하고 페리시어는 재빨리 테이블 사이를 둘러봤다. 겨우 파이살을 발견하고 안심했으나, 그녀가 찾는 사 람이 누군가를 안 웨이터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허둥 지둥 길을 비켜주는 것이 몹시 우스웠다. 실로 돈의 힘 은 대단한 것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좀처럼 사무실을 빠져나올 수가 없어서." "사무실! 시시한 일 따위는 집어치우라고 몇 번이고 말하지 않았어." 가무스름하고 핸섬한 얼굴이 오만스럽 게 일그러졌다. 트위드의 스커트에 잠바 차림으로, 엘리건트한 레스토 랑에는 걸맞지 않는 복장이었으나, 어깨까지 내려온 곱 슬곱슬한 밤색 머리털, 온화한 느낌을 주는 짙은 녹색 눈동자의 페리시어의 산뜻하고 우아한 모습은 사람들의 눈을 끌었다. 그녀를 보는 사나이들의 눈길에 발끈 화가 난 표정을 짓는 파이살. 그와는, 취미삼아 다니고 있던 사진학교의 야간부에서 서로 만났다. 교제한 지 6 주밖에 되지 않았 으나 한 번 두 번 데이트를 거듭하는 동안에, 파이살이 바짝 열을 올려, 요즈음에 와서는 거의 매일 밤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데이트가 잦아지게 되자 사무실에서도 자연히 소문이 나게 되어, 처음에는 놀리기만 하던 동료들도 최 근에 와서는 진심으로 충고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분명히 대부호인 중동인의 달콤한 약속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다가 망신만 당하고 만 이야기는 흔히 있고 모 르는 바 아니지만, 파이살의 얼굴을 보면, 설마 그럴라 구, 하고 부정해 버리고 싶어지게 된다. 그리고 오늘 밤 드디어 결혼에 관한 이야기까지 나오


자, 페리시어는 깜짝 놀라는 동시에 몹시 자존심이 상했 다. 이야기가 가족에 미치게 되자 페리시어의 가슴 속에 는 지난 일들이 되살아났다. 거의 갓난애라고 해도 과언 이 아닌 어린 시절에 양친을 한꺼번에 잃은 그녀는, 랭 카셔 주의 황무지에 있는 엘렌 숙모와 조지 숙부의 화 강암으로 된 쓸쓸한 집에서 자랐다. 지나칠 정도로 엄격 한 숙부 밑에서 조금이라도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큰 일이라고 벌벌 떨며 어두운 소녀 시절을 보낸 탓에 어느 사이에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을 잃고 있었으나, 사람이 달라진 것같이 명랑하고 생기 발랄한 여성으로 변한 것은 파이살의 따뜻한 애정 덕택이었다. 한편 파이살의 소년 시절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어머니와 누이들의 애정에 싸여 유복하고 즐거 운 생활이었다. 그러므로 쓸쓸하게 자란 자신과 비교해 볼 때, 페리시어의 입에서는 저절로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 안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결혼은 너무 이 르다고 항의했으나, 파이살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닌가, 페리시어 를 모든 것으로부터 지켜주려고 하는 이 크나큰 애정을 왜 알아주지 못하는가--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이런 말 을 듣고 있으면, 본국으로 돌아가서 가족이 정해 놓은 유리한 조건의 신부와 결혼하기 전에 런던에서 일시적 인 불장난을 하려는 것 뿐이라고 충고하는 동료들의 말 은 귓등으로 듣게 된다. 두 사람은 아직까지 친구 사이에 불과했다. 파이살은 처음에는 여러 가지로 불평을 했으나 요즈음에는 매일 데이트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게 됐다. 페리시어가 그의 연인이 되기를 망설이고 있는 것은, 파이살에게서 일시적인 바람기 이상의 것을 잡으려고 하는 이해타산에서는 아니었다. 단지, 틴에이저가 된 후 에도 조지 숙부의 감시가 워낙 심해서, 누구나 있는 호


기심에서의 키스의 경험도 없었고, 그 결과 결백성이 지 나친 게 아닌가 하고 의아하게 여겨지기까지 하던 중에, 파이살의 첫 번째 키스는 은근하고 공손할 정도였으나, 최근에 와서는 정열이 고조됨에 따라 점점 거칠어져 페 리시어가 당황할 지경이었다.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 는 사람이며 결혼까지 결심하고 있는 마당에 어째서일 까? 파이살은 입으로는 그녀의 결백성을 나무라면서도 내심으로는 그것에 만족하는 듯, 페리시어 이외의 여성 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결혼하면 온갖 것이 달라지지." 어느날 밤, 격렬한 키스에 페리시어가 당황하자, 정열을 억제하지 못하게 될 것이 두려운 듯 몸을 떼면서 파이살은 중얼거렸다. 결혼? 정말로 그의 아내가 되는 것일까? 페리시어는 아직까지도 자기가 어느누구에게 정말로 사랑을 받고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심정이었다. 크림처럼 매끄러운 피부, 반들반들 윤이 나는 밤색 머리, 날씬한 팔과 다리. 확실히 그녀는 아름다웠으나, 그 정도의 미인은 몇천 명 이고 있었다. 결국 이렇다 할 장점도 없는 평범한 여성 이 아닌가. 그러나 파이살의 찬미는 그칠 줄을 몰랐다. 비온 뒤의 오아시스를 연상케 하는 녹색의 눈동자, 저녁 때의 마지 막의 한줄기 햇살에 황금빛으로 물든 모래 빛깔의 머리, 그리고 자랑스럽게 높이 나는 매를 닮은 우아한 몸놀 림……. 성질이 급한 파이살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녹색의 눈에 잘 어울리는 에메랄드 반지를 사주었는데, 이 값비 싼 보석에 페리시어는 숨을 삼켰다. 이윽고 파이살은 쿠웨이트의 가족에게 편지를 써 보 냈다. 최근의 몇 주일 동안, 가족에 관한 일, 그곳의 생 활 상태 등에 관해서 꽤 많이 듣고 있었으므로, 페리시 어도 어느 정도는 상상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부터 가장이 되어 있는 외삼촌의 일이 자주 화제에 올랐는데, 파이살의 이야기에 따르면,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훈계하는 외삼촌과의 사이는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닌 것 같았다. 파이살은 정부의 한 요인과 인척 관계에 있으며, 잔소 리가 심한 외삼촌은 아버지를 잃은 일가를 자택으로 데 리고 가 파이살과 누이들의 교육까지 책임을 지게 됐다 는 것이었다. 원래 파이살의 일족은 많은 전쟁에서 승리한 오랜 전 통을 가진 자랑스런 사막의 전사들이었다. 증조부 대에 부족간에 큰 전쟁이 일어나서,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눈 을 가진 추장이 영국인 탐험가의 딸의 목숨을 구하여, 그 해맑은 피부를 가진 여성을 아내로 삼았는데, 그 영 국 여성이 바로 파이살의 외증조모라고 했다. 소설에나 나올 법한 로맨틱한 이야기였다. 페리시어는 언젠가 또, 사막의 추장과 영국 여성과의 이야기를 보다 더 상세하게 듣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장래 자 기도 가족의 한 사람이 될 그 가문에 영국인의 피가 흐 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어느 정도 마음이 든든했다. 기회를 포착하는 데 예민한 파이살의 외조부는, 쿠웨 이트에서 석유가 나오는 것을 알자 재빨리 은행을 창설 했는데, 그것이 지금은 뉴욕과 런던에 지점을 가진 거대 한 조직으로 발전하여 파이살 가는 쿠웨이트 굴지의 재 벌이 되었다. 현재 이 금융 왕국의 우두머리는 주의 대 다수를 가지고 있는 그의 외삼촌으로, 보잘것없는 한 샐 러리 맨인 파이살은 장기짝처럼 외삼촌의 명령대로 움 직이고 있는 것이다. 자기도 독재자와 같은 숙부에게 시달리며 자랐으므로 페리시어는 파이살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 고는 하지만 무엇 하나 자유스럽지 못한 것도 없고 오 히려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죄다 손에 넣을 수 있는 유복한 파이살인지라, 반은 농담으로 듣는 것이 좋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가 외삼촌의 참뜻이, 곧 무거 운 책임을 맡게 될 파이살에게 젊은 시절에 인간 저변 의 고생을 시켜 은행의 일을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도록 하려는 데 있다면, 긴 안목으로 볼 때 그 이 상의 교육법은 없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오늘 파이살은 외숙부에 대한 불평을 다른 때 보다도 많이 늘어놓는다. 어째서일까? "쿠웨이트에서 답장이 왔군요, 파이살?" 검은 눈이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는 파이살, 그는 아직 젊다--그렇게 말하니 말이지 페리시어보다 겨우 한 살 위이다. "외삼촌은 혼약 발표를 미루라고 하셨어. 그럴싸한 이 유를 붙여서 말이야. 내가 행복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 같아." "하지만 하는 수 없지 않아요. 우리들은 서로 안 지도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게다가 가족 되는 여러분들께서 도, 나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으니 걱정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죠." 갑자기 노여운 기색이 사라지고 흥분된 표정을 나타낸 파이살에게 페리시어는 의아스럽 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왜 그래요, 파이 살?" "아니야, 별로. 방금 라시드 외삼촌과 같은 말을 당신 이 했기 때문이야. 페리시어는 나의 가족과 만난 일도 없고 그쪽 생활도 모르므로, 혼약은 당분간 보류하고 우 선 당신이 쿠웨이트를 한번 방문하도록 하라고 써 보내 왔어. 물론 외삼촌은 당신이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당신을 중동 부호의 주위에 몰려드는 유럽의 얼빠 진 여자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우 리들은 틀려. 모든 면에서 서양과 동양이 다르긴 해도 우린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테야. 결혼하면 쿠웨이트에서 살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당신이 그쪽 생활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야. 여성의 지위라든지, 갖가지 풍속의 차이를 알고 나면, 당신이 꼬리를 사리고 도망갈 것이라고 믿고 있는 거야. 그러나 그렇게는 되지 않지. 페리시어, 가 주 겠지?"


파이살의 가족이 이렇게 말해 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페리시어를 쿠웨이트의 여성만 큼 가치가 없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일이 이렇게 된 바에는 파이살과 같이 쿠웨이트에 가서 그의 외삼촌이 얼마나 오해를 하 고 있는가 본때를 보여 줘야겠다. "좋아요. 언제 출발하죠?" "나는 같이 갈 수 없어, 페리시어." 얼굴을 약간 붉히 며 파이살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라시드 외삼촌의 명령 이야. 내주부터 뉴욕에서 일하게 돼." "내주? 하지만 그렇게 되면." "라시드 외삼촌은 우리들을 떼어 놓을 생각인 거야.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어. 그가 주를 가지고 있는 동안 은 난 말단 직원이야. 스물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앞으로 3 년은 더 기다릴 수밖에 없어." "그럼 나도 같이 뉴욕으로 가겠어요. 그리고 뭔가 일 거리를 찾죠." "그리 간단하지가 않아. 일을 하려면 비자가 필요해. 물론 단지 나를 따라가는 방법은 있지만, 그러면 라시드 의 예상대로 맞아들어가게 돼 버려. 당신은 나의 애인이 돼 버리거든. 그렇게 되면 어머니도 누이들도 인정해 주 지 않을 거야. 안 돼……. 유일한 방법은 페리시어 혼자 서 라시드 외삼촌을 만나는 거야. 그리고 당신은 그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 것을 보여줘야 해." 손을 꽉 쥐고 있는 파이살의 눈을 보고 있는 동안에 노 여움도 싹 사라졌다. "그러니까, 가겠다고 말해 줘. 두 사람의 장래를 위한 일이야. 어머니는 대환영일 거야." 쿠웨이트……. 만일 가는 것을 거절한다면? 안 돼, 역 시 가야만 해. 영국 여성도 쿠웨이트 여성만큼 조심성이 있고 순결하다는 것을 보여 줘야지. 오랫동안 자기를 열 등생으로 취급해 온 조지 숙부의 모습이 떠오르자 페리 시어는 갑자기 투지가 불타올랐다. 라시드 외삼촌은 페리시어가 쿠웨이트의 생활에 익숙


해지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오히려 반대로 그녀가 파이살의 아내로서 얼마나 적합하지 못한가를 들춰 내 려고 할 것이다. "됐어. 가겠다고 말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어. 라시드 는 설마하니 당신이 초대에 응하랴 생각하고 있을 테니, 몹시 놀랄 거야." 가보겠다고 단호하게 대답하자 파이살 의 얼굴이 만족감으로 환하게 빛났다. 초대? 어림도 없다! 차분하게 조사해서 거절하기 위 해 불러들이는 것뿐이 아닌가. 하는 수 없지. 그러나 으 스대고 있는 라시드 외삼촌이 안 된다는 결정을 내리게 하는 행동 따위는 결코 하지 않을 거야! "내 집으로 갑시다. 여러 가지로 의논할 것도 있고 하 니까." 보통 때는 식사가 끝나면 그것으로 헤어졌는데, 오늘 밤은 이야기할 것이 태산같이 많으므로 예외였다. "나도 베일을 쓰고 부인방으로 들어가야 하나요?" 택 시에 타자 곧 생각나는 것부터 묻기 시작했다. "설마. 낡은 관습에 얽매여 있는 것은 노인들뿐이야. 젊은이들은 새로운 교육을 받고 있으며 개화되어 있어. 당신도 반드시 쿠웨이트가 마음에 들게 될 거야. 그러나 나는 런던도 몹시 좋아해. 당신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 지." 런던에서도 최고급의 주택가 메이페어에 있는 파이살 의 집은 새하얀 벽에 새하얀 카핏, 수수한 색조의 가죽 소파, 그리고 불투명 유리로 된 커피 테이블에 이르기까 지, 구석구석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초현대적인 취미로 장식돼 있었다. 페리시어는 감탄은 했지만, 지나치게 호 화롭고 고상해서 아무래도 정이 들 것 같지 않았다. 커피를 권하는 하녀의 청을 정중히 거절하고 있는 동 안에 파이살은 넓은 방의 한쪽 구석에 놓여진 오디오에 테이프를 끼우고 있었다. 이윽고 마음을 녹이는 카펜터 즈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파이살이 전등의 스위치를 조절하자 실내는 어둑어둑


해졌고, 어느 사이엔지 그의 팔 안에 안겨 있는 자신을 발견한 페리시어는 갑자기 몸이 굳어졌다. 앞으로 결혼 하려는 상대인데도 왜 이렇게 긴장이 될까? "왜 그래, 마치 매의 발톱에 챈 비둘기처럼 긴장해서 떨다니? 당신이 가고 나면 꿈을 꾸게 될 거야. 혼례의 카프탄에 붙어 있는 백 한 개의 단추를 풀면 당신이 가 지고 있는 천 하나의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꿈을.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어. 당신이 떠는 것은 당연한 일인 걸. 당신은 우리 어머니가 소중하게 여기는 하얀 비둘기같 이 순결하니까." 페리시어가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습을 파이살은 만 족스러운 듯이 바라보면서, 결혼만 하면 그녀도 정열적 으로 응해 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면 가슴을 두근거리다가도, 일단 몸이 닿기만 하면 신경질적인 오 한 같은 것을 느끼니, 정열을 불태울 수 있을지 어떨지 불안했다. 파이살이 이렇게까지 페리시어에게 열중하게 된 것은 그녀에게 지금까지 연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사랑하고 있는 것이 페리시어 자신인지, 아니면 그녀의 순결성인지 잘 분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라난 환경이 다르므로, 영국 의 남성들보다 여성의 순결에 더 집착한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알라에게는 네 사람의 아내까지 허용돼 있지만, 내겐 한 사람을 다스릴 힘 밖에 없어. 그러므로 당신 한 사람 으로 만족해, 페리시어." 극히 당연한 일처럼 자연스럽게 말하는 파이살의 얼 굴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열적인 애무에 응하지 못하는 것은 경험이 없기 때문이니 언젠가는 괜찮아지 겠지만, 이슬람교에서 허용하고 있는 네 사람의 아내란 점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평등하게 행복한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 려도 상관없다는 완전한 남성우위 사회. 이러한 이질적


인 문화 속에서, 모든 것을 남편의 눈을 통해서 보는 인 형과 같은 헌신적인 아내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 갑자기 쿠웨이트행에 대해 몹시 불길한 느낌이 들었 다. 파이살과 함께 간다면 그런대로 괜찮겠지만……. 그 건 그렇다 하더라도, 교묘하게 두 사람을 떼어놓고 페리 시어만을 쿠웨이트로 불러들이려고 하는 라시드 외삼촌 은 용의주도한 힘든 상대다. 대재벌가에 태어나 매우 유 복하다고는 해도 파이살은 그의 장래도 재산도 스물 다 섯 살이 될 때까지는 죄다 외삼촌의 손에 쥐여 있다. 그 래서 그는, 지금의 파이살은 자신의 어떤 명령에도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정확하게 계산에 넣고 있는 것이 다. 이런 까닭으로 페리시어는 전통도 문화도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나는 미지의 나라에 홀로 가서, 애당초부터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상대에게 호감을 사서, 그의 조카와의 결혼 승낙을 받아내는 큰일을 떠맡게 된 것이 다. "어머니께서는 정말로 나를 환영해 주실까요?" "그래, 나를 반기는 만큼.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호되 지는 않을 것으로 여겨져. 뉴욕의 일은 2 개월이면 끝날 테니까, 그렇게 되면 같이 있을 수 있어. 그때 결혼식 준비를 하는 거야. 어쩌면 당신이 내 가족과 같이 있는 것이 나을른지도 모르지. 다른 남자들이 치근거리지 못 할 테니까. 당신은 내 거야, 페리시어." 페리시어의 눈이 갑자기 흐려진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파이살은 방약무 인하게 말했다. 파이살은 크림색 가죽 시트를 씌운 내부 장식에서부 터 기능에 이르기까지 생각해낼 수 있는 한의 사치를 다한 최고급의 메르세데스로 아파트까지 데려다 주었다. 아무래도 속력을 너무 내는 것 같아서 작은 목소리로 주의시켰으나, 그가 도리어 몹시 화를 내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므로 페리시어는 그만 단념하고 말았다. "당신은 나의 손님이니까 비용 따위는 걱정하지 말아


줘." 처음 런던에 온 후부터 줄곧 살고 있는 초라한 아파 트 앞에서 차는 멎었다. 이런 일을 하면 그의 외삼촌은, 더욱 더 재산을 목적 으로 하고 있다고 여길 게 아닐까. 페리시어는 정색하면 서 반대했다. "괜찮아. 외삼촌이 알 까닭이 없어. 그리고 저쪽은 기 후가 다르니까. 새 옷도 필요할 거야." 초라한 모습은 하지 말라고 은근히 말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저쪽 사람들은 의상으로 사람을 평가한다고 한 다. 페리시어는 마지못해, 비행기표는 그가 사주는 것을 받기로 하고, 그가 말하는 <필요 경비>는 자기의 저금 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지나갔다. 페리시어는 앞으로 가 야 할 나라에 관해서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서, 매일 만나는 파이살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석유 산유국인 덕택이긴 하지만, 그건 그렇다 하더라 도 순식간에 중세에서 20 세기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 는 나라로 비약한 쿠웨이트의 발전상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파이살은 물론 자기 나라의 발전에 커다란 긍지를 느 끼고 있었지만 자기의 선조가 한 몫이나 두 몫을 맡았 으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부는 민주정체로, 그 국가 원수는 아직도 <알 케비루(위대한 사람)>라고 앙 모받고 있는 셰이크 무바라크 알 사바의 후예 중에서 선출되고 있다. 파이살은 분명하게는 말하지 않았으나, 그의 집은 국 가 원수의 가계와 먼 친척이 되는 것 같았다. 이러한 가 문이라면 파이살 혼자만의 생각으로 아내를 결정하는 일에 라시드 외삼촌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무리가 아 니라 싶었다. 페리시어는 엑조틱한 별세계, 더구나 화려한 상류사회 를 슬쩍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울렁거렸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가 백 팔십도 다른 생활의 변화에 순응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불안하기도 했다. "라시드 외삼촌도 당신의 아름다움에는 감동할 거야. 아무튼 외증조모님과 같은 나라 사람이니까." 페리시어 의 불안감을 웃음으로 날려 보내는 파이살은 천하태평 이었다. "게다가 당신은 천진난만하고 얌전하거든." 정말로 그렇다면 좋겠지만. 뭐라고 말해도 불안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아서, 페리시어는 자꾸만 쿠웨이트의 사정을 듣고 싶어했다. 쿠웨이트에서는 대대적인 규모로 모던한 도시계획이 진행되고 있는데, 어디서나 파이살 은행의 융자 없이는 진행될 수 없을 정도로 일족의 금융 왕국은 온갖 분야 에 진출하고있었다. 호텔업이며 조선업 등, 페리시어가 평상시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대기업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에, 자기로서는 미지의 세계라는 생각이 더욱 더 강해져, 그녀의 불안은 점점 더해 갔다. 이야기는 비약해서 복지 관계의 일에 이르렀다. 쿠웨 이트에는 학교 제도가 우수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병 원에도 유능한 의사들이 많이 있어서, 런던의 유명한 할 리 스트리트를 능가할 정도라고 했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여러 가지 제도가 갖추어져 있고,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하 지만 사막, 그것만은 라시드 외삼촌이라 해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지.그러나 나는 역시 런던이나 뉴욕이 좋 아. 페리시어는 어디서 살고 싶어?" 파이살은 말을 계속했다. 쿠웨이트에서는 대부분의 사 람들이 이슬람교 신자들이지만, 종교 문제에 있어서는 관대하므로 페리시어는 개종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라시드 외삼촌도 트 집을 잡지 못할 거야. 우리 집안은 모두 이슬람교도이지 만, 외증조모께서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라시드 외삼촌은 크리스찬이야." 크리스찬이건 아니건 역시 혼자서 그의 외삼촌과 만


나는 것은 탐탁지 않았으나, 파이살과의 작별을 며칠 앞 둔 지금, 생각하기 싫은 일은 모두 잊고, 마지막 나날을 즐겁게 보내고 싶었다. 파이살을 위한 일이니까 가능한 한 라시드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싶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슬람 여성처 럼 자기를 완전히 희생시켜 가며 비위를 맞추는 짓은 프라이드가 도저히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았다--마음먹기 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르지만 이 점만은 양보할 수가 없었다. 비행기표의 예약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오피스에 들러 사직서를 제출하고 페리시어는 약간 들뜬 기분으 로 물건을 사러 나갔다. 화려한 초여름의 패션이 빠짐없 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 부티크에 들어가 별로 망설이지 도 않고 파스텔 칼라의 세퍼레이츠와 스마트한 디자인 의 코튼 드레스를 반 다스 정도 골랐다. 그런데 수영복은 어떻게 할까? 파이라카 섬의 해변의 아름다움을 실컷 듣고 있었으므로 수영복 없이는 안 될 것 같았다. 비키니에 곁들여 밝고 엷은 녹색 타월지 쇼 트와 재킷 세트로 결정하여 꾸리게 하고 있는 동안에 점원에게 선동되어, 긴 다리와 곡선미를 강조한 얄밉도 록 정교한 커트의 검은 원피스형까지도 사고 말았다. 이 제는 이브닝 드레스를 한 벌 사야지, 하고 보고 있는 동 안에 연한 녹색 비단으로 된 드레스가 눈에 띄었다. 부 드러운 비단의 촉감, 작은 모조 다이아를 단 가냘픈 어 깨끈, 우아하게 물결치는 듯한 스커트의 주름. 그녀로서 는 너무 비싼 물건이었으나, 때로는 사치도 필요하겠지. 오늘 밤이 파이살과의 마지막 데이트니까, 평소보다는 예뻐 보이고 싶었다. 페리시어는 사온 드레스를 챙겨 넣 다가 문득 그가 보내온 에메랄드가 들어있는 작은 상자 를 보고 생긋 웃었다. 혼약이 인정될 때까지는 절대로 끼지 않겠다는 그녀를 파이살은 예스럽다고 웃었으나, 이렇게 화려한 보석을 끼고 있는 것을 보이면 도리어 라시드의 심증을 나쁜 쪽으로 부채질할 뿐이라고 생각


했다. 별로 빌붙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반감을 살 일을 하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모욕적인 말로 페리시어의 일을 써 보내지 않았어도 될 일이 아닌가. 본인을 알지 도 못하는 주제에! 내키지 않는 일이 기다리고 있지만 출발은 벌써 눈앞에 닥친 게 아닌가. 이젠 될 대로 되라 는 기분이 들어 페리시어는, 지나치게 대담한 디자인에 주눅이 들어서, 산 뒤 한 번도 입지 않았던 드레스에 손 을 뻗쳤다. 친구와 밖으로 나갔을 때 충동적으로 산 그 검은 드 레스는 네클라인이 깊이 패였고, 게다가 몸의 곡선이 뚜 렷이 드러나는 꼭 맞는 스커트에는 허벅다리 부근까지 슬릿이 들어 있었다. 이것을 입은 걸 파이살의 외삼촌에 게 보인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벌어질 것이다. 역시 예상 했던 그대로의 여자다, 하고 마음속으로 승리감에 젖어 싱글벙글할 것이다.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퍼 스너를 올렸을 때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미 갈아 입을 수도 없었다. 페리시어를 본 순간, 파이살의 눈은 정열로 불타올랐 다. 긴 소매의 재킷이 붙어 있어서 그런대로 괜찮았지 만, 드레스의 검은 빛깔 때문에 돋보이게 된 밤색 머리 가 보통 때보다 한층 더 윤이 나고 녹색 눈동자가 평소 보다 신비스런 호박색을 띠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파이살도 무의식중에 돌아볼 정도로 스마트했다. 평소 에 잘 입지 않던 짙은 보라색의 벨벳 디너 슈트가 동양 인의 올리브색 피부에 잘 반영되어 인종의 차이를 통감 케 했다. "내가 있는 곳에서 식사를 하도록 준비했으면 좋았을 걸. 레스토랑에서 당신이 다른 남자의 시선을 받는 것은 싫거든." 귓전에 목쉰 소리가 중얼거렸는가 싶더니 입술이 겹 쳐져 페리시어는 몸을 굳혔다. 하지만 그의 키스가 이렇 게 격렬해진 것도 목전에 임박한 작별을 생각하면 당연


한 일이 아닐까? "왜 이런 가짜 모피를 입는 거야? 진짜 모피를 사달 라고 하면 될 것을? 당신은 고집불통의 바보야. 하지만 결혼하면 선물은 무엇이든 받게 할 테니까." "네. 그렇게 되면 모피를 얼마든지 사달라고 하겠어 요." 이런 때는 보다 더 달콤한 말투로 말해도 좋을 것 을. 애정이 없는 소녀 시절을 보낸 탓으로 응석을 부리 지 못하는 자신이 슬퍼졌다. 페리시어의 마음의 변화를 그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 한 것 같았다. 그는 갖고 싶다고 하면 달이든 별이든 무 엇이라도 사주리라. 그러나 페리시어는 결혼하기 전에는 값진 선물은 어떤 것이든 받지 않으려고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파이살의 친구인 아랍 사람들이 다이아 몬드 팔찌나 모피 코트의 대가로 아낌없이 애정을 주는 영국 여성에 대해 경멸어린 말투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 은 일이 있었다. 이런 여성의 수가 많으니까 그녀까지 라시드에게 의심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 만 남이야 뭐라고 하든 결정하는 것은 파이살이 아닌가. 오늘밤 파이살이 예약해둔 곳은, 값진 보석들로 장식 한 여성들로 가득찬, 호화스런 카지노도 있는 메이페어 제일의 클럽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파이살은 페리시어를 로맨틱한 발라드가 흘러나오고 있는 어둑어둑한 댄스 플로어로 데리고 갔다. 짙은 엽궐련의 냄새와 숨이 콱콱 막힐 듯한 향수 냄 새가 뒤섞여 플로어는 가슴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재킷 을 좌석에 놓고 온 페리시어는 지나치게 대담한 드레스 를 입은 채 파이살의 팔에 안겼다. 이렇게 꽉 끌어안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문득 어떤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자 룰레트 테이블에 서 한 아랍인이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 사람, 누구? 하고 물으려고 하자 눈살을 찌푸린 것 을 보니 그도 그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왜 그래요?" 파이살이 갑자기 손을 끌고 그 장소를


떠나려고 하자 페리시어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 사나이는 외삼촌과 아는 사람이야. 오늘 밤 여기 서 우리들을 봤다고 보고할 거야." "그게 어쨌다는 거예요?" 왜 그런 일을 걱정하는 걸 까? "저놈은 믿을 수가 없어. 당신을 소개하고 싶지 않지 만, 만일 그러지 않으면 라시드에게 내가 애인과 함께 있더라고 반드시 보고할 거야. 그런 녀석이지." "여어, 파이살 알 나라르가 아닌가?" 표면상으로는 아주 상냥했으나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눈매에 페리시어는 퍼뜩 정신을 가다듬었다. 파이살은 그를 상대하지 않으려고 외면한 채, 급한 용 무가 생각나서 마침 나가려던 참이라고 입 속으로 중얼 거렸다. 그러나 사나이는 상대의 무례한 태도 따위는 상관하 지 않고, 여전히 페리시어의 존재를 무시한 채, 파이살 이 춤추는 것에 정신이 팔려 몇천 파운드를 잃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좀처럼 떨어져 나갈 낌새 를 보이지 않았다. "뉴욕으로 간다고 들었는데, 정말인가? 뭐, 매력적인 여성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으니, 안 가는 것도 죄가 되 겠지. 그렇지 않아, 파이살?" 자기를 보는 눈매에 발끈해진 페리시어는 하마터면,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에요 라고 응수할 뻔 했다. "외삼촌에게서 듣지 못했어요? 나는 곧 결혼해요. 아 내가 될 여성 이외에는 흥미가 없어요!" 겨우 뿌리치고 메르세데스에 탔을 때, 페리시어가 아 직 외삼촌의 승낙도 받지 못했는데 결혼 말을 꺼낸 것 은 잘못이 아닌가 하고 물어봤으나, 파이살은 성이 난 듯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녀석이 당신을 보는 눈매라니 어이가 없어!" 파이 살은 아파트 앞에 차를 멈추었으나 관절이 하얗게 될 정도로 힘을 넣어 잡은 핸들에서 손을 떼려고 하지 않


았다. "모처럼의 마지막 밤이 그녀석 때문에 이렇게 엉 망진창이 돼 버리다니!" 핸섬한 얼굴을 응석받이처럼 일 그러뜨린 파이살을 보고 페리시어는 웃음을 참느라 애 를 먹었다. "앞으로 얼마든지 함께 갈 수 있잖아요, 파이살. 당신, 비행기는 언제나 퍼스트 클래스였지요?" "정해져 있겠지." 몸에 박힌 거만한 태도로 대답하는 것을 보자, 다시 두 사람 사이의 격차를 곰곰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 다. 그는 그대로 팔 안에 그녀를 안은 채 불꽃같은 입술 을 포개 왔으나 페리시어는 몸이 움츠러드는 느낌을 참 고 가만히 있었다. "정말로 당신은 세상 물정에 너무 어두워. 하지만 결 혼하면 곧 여러 가지 일을 가르쳐 주겠어. 편지를 쓸 테 니 당신도 꼭 써줘. 당신을 보면 외삼촌의 마음도 곧 누 그러질 거야." 그렇게 간단하게 일이 해결될까? 그러나 결코 받아들 여지지 않는다면……. 그런 불안감이 크면 클수록 반드 시 호의를 쟁취하고 말겠다는 성취욕이 들끓어 올라왔 다. 페리시어는 자신감에 찬 눈을 들었다. 2 말은 용감하게 했지만 비행기의 창을 통해 두꺼운 구 름 층을 내려다보고 있는 페리시어는 점점 용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엄격한 숙부는 해외여행 따위는 시켜주지 않았으며, 독립을 한 후로는 빠듯한 봉급으로 그렇게 할 여유가 없었다. 비행기를 타는 것은 이번이 난생 처음이 었다. 전형적인 브리프케이스를 든 지친 표정의 비즈니스맨 과 섞여, 흰 제라바에 이거루즈라고 불리우는 도금한 테 를 두른 쓰개를 쓴 전통적인 스타일의 아랍인이 눈에 띄었다. 쿠웨이트까지는 여섯 시간. 여행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미 졸기 시작했으나, 페리시어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 았다. 영화라도 볼까 하고 스크린을 바라봤지만, 앞으로 의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영화의 줄거리 가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다. 주위의 사람들이라도 바라보고 있기로 하자. 퍼스트 클래스로 하라고 우겨대는 파이살의 말을 따른 것이 천만다행이 었다. 이코노믹 클래스는 아랍인 가족으로 만원을 이루 었고, 젖먹이와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로 매우 시끄러웠 다. 페리시어는 파이살의 모친과 누이들에게는 조그마한 선물을 준비했으나 외삼촌에게는 일부러 아무것도 준비 하지 않았다. 친구로서 만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 으며, 만약 뇌물은 사절이라며 거절을 한다면 입장이 난 처해지지 않겠는가. 그러나 파이살은 정공법이 아니라 해도 웃는 얼굴과 매력으로 외삼촌의 환심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 이것도 저것도 어 려운 일일 것 같은 생각이 떠올라 마침내는 머리가 아 프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 나지 않으므로, 심술쟁이 외삼촌은 그때 그때의 분위기에 따라 임기응 변으로 대처하기로 결정했다. 파이살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하고 있 는 모친에게는 향수, 결혼 날짜까지 받아놓고 있는 누이 에게는 최신 유행의 아이샤도우와 몇 가지 색의 루즈가 들어있는 사치스런 메이크업 세트로 했다. 제일 신경을 많이 쓴 것은 은행의 사우디아라비아 지점장의 아내로 어린애가 하나 있는 누나인 나디아에게 줄 선물로, 결국 런던의 최고급의 문방구에서 눈에 띈 정교한 유리로 된 서진으로 정했다. 실은 그 서진은 페리시어의 마음에 꼭 들어 자기 것 도 하나 사고 싶었으나, 새 드레스를 사느라고 런던에 나온 후부터 저축해 둔 돈이 완전히 바닥이 나 버렸기 때문에 사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파이살의 체면을 세


우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그런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 이었다. 주위가 술렁거리기 시작한 것을 보니 곧 목적지에 도 착하는 모양이었다. 페리시어는 화장실로 가서 정성들여 화장을 했다. 피 부가 약해서 언제나 엷은 화장을 했으나, 오늘은 될 수 있는 대로 청초한 인상을 주기 위해 여느때보다 더욱 조심스럽게 했다. 거무스레한 쿠웨이트 미인들 사이에서 초라해 보이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파이살의 이야기에 의하면 미인이 많은 아랍 세계 중에서도 특히 쿠웨이트 여성들은 아름답다고 했다. 길고 짙은 눈썹 밑의 녹색 눈이 긴장으로 약간 흐려 져서 거울 속에서 되쏘아본다. 조금 튀어나온 광대뼈에 자연스런 장밋빛이 밝게 빛나며, 윤기 있는 루즈에 젖은 듯이 빛나는 입술이 우아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언 제나와 같이 자연스럽게 웨이브가 질 때까지 잘 브러싱 한 머리는 어깨를 덮고 움직일 때마다 비단처럼 반들반 들 윤이 났다. 보다 더 청결한 느낌을 주려면 목덜미에 서 묶는 것이 좋을까, 하고 망설이고 있는 동안에, 안전 벨트를 착용하라는 소리가 들려 왔으므로 페리시어는 그대로 서둘러 좌석으로 되돌아왔다. 갑자기 고도가 떨어지며 위 부분이 꽉 죄어졌다. 엔진 소리가 커지더니, 이윽고 기체는 조용히 착륙하여 활주 로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비행기에서 한 걸음 밖으로 나오자마자 공항의 열기 와 소음에 일순 눈앞이 아찔해졌다. 비자와 패스포트를 제시하러 가는 다른 승객들을 놓칠세라 허둥지둥 따라 가면서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패스포트를 건네자 세관의 관리는 온화한 미소를 띤 얼굴고 사진과 페리시어를 비교해 보았다. 어깨에는 티 푸스 예방주사를 맞은 흔적이 있고, 백 안에는 더위를 먹었을 때 먹으라고 파이살이 사준 정제가 들어 있었다. 마침내 이국에 온 것이다.


아무래도 갈 곳도 할 일도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페 리시어 뿐인 것 같았다. 어디를 보나 아랍인들이 분주하 게 오가고 있고, 귀에 선 말이 한 덩어리가 되어 들려 왔다. 파이살은 누군가가 마중을 나올 것이라고 말했으나 그럴싸한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아 페리시어는 차 츰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들어갔다. 감연히 관광안내소에라도 가 보려고 생각했을 때에, 키가 큰 사나이가 다가왔다. "고든양입니까?" 어쩌면 이렇게도 키가 클까, 적어도 파이살보다 오륙 센티는 더 크다. 시원시원하고 자신에 찬 말투는 남의 의견을 묻는 것보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데 익숙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한 것이었다. 확실히 쓸데없 이 시간을 낭비하는 게 달갑지야 않겠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귀찮은 수하물 취급을 하지 않아도 좋을 텐 데……. 간신히 띤 어색한 웃음에도 아무말 없이 빤히 바라보 고만 있는 상대를 보고 있는 동안에 페리시어는 그 자 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이미 늦었지만 머리를 스마트한 업 스타일로 했더라면 좀더 자신을 가질 수 있었을 텐 데. 이 사나이는 파이살의 친척 중의 누구일까, 아니면 단지 마중나온 고용인일까? "저어, 짐이 아직……." 멋들어진 연한 회색 비단 셔 츠의 커프스 사이로 보이는 금줄의 롤렉스를 초조하다 는 듯이 보고 있는 사나이의 동작에, 순간 페리시어는 무의식중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것은 알리가 처리할 겁니다. 자아, 이쪽으로." 사나 이는 페리시어의 팔을 잡자 그대로 붐비는 사람들 틈을 누비고 걸어갔으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페리시어도 그 가 남의 위에 서서 명령을 내리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라는 것은 곧 알 수 있었다. 바느질이 잘 된 값진 복장, 시원시원하고 자신만만한 태도,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은


행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임에 틀림없 다. 이국의 강렬한 햇살과 범람하는 색채에 정신이 멍해 진 채 페리시어는 순순히 사나이의 뒤를 따라갔다. 이래 서는 마치 남편에게 순종하는 이슬람 교도의 여성 같지 않은가……. 한발 앞서 메르세데스에 도착하여 도어를 연 사나이 는 더위와 곤혹으로 뺨이 붉게 물든 페리시어를 냉소를 띠고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일부러 걸음을 멈추고 페리시 어를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는 두 아랍인을 알아차리고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귀엣말로 속삭였다. "요즈음은 이 미 북구의 창백한 미인도 새롭지 않으며, 고상한 체 꾸 민 외견과 알맹이는 몹시 다르다는 것도 누구나 잘 알 고 있으니까요." 목덜미까지 닿는 그의 장발이 햇살을 받아 반들반들 검게 빛났다. 가까이에서 보고 비로소 알았지만 그의 눈 빛은 아랍인에게 많은 다갈색이 아닌 회색, 더구나 북해 의 겨울을 연상케 하는 차가운 그레이였다. "뭣하면, 영국행 비행기는 세 시간 후에 있으니 돌아 가시죠." 차디찬 눈빛에 무의식중에 오싹해져서 차에 타 는 것을 망설이고 있으니까, 귓가에 대고 조롱하듯이 낮 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페리시어는 수상쩍다는 듯이 사나이를 쳐다보았다. 쫓 아버리고 싶은 것일까? 그렇게 결정돼 있는 것이다. 파 이살의 외삼촌의 지시로 이 사나이는 페리시어를 공항 에서 그대로 런던으로 돌려보내려고 나온 것이다. 영국 에 비하면 놀랄 정도로 빨리 지는 석양 속에서, 페리시 어는 고집스럽게도 턱을 치켜올렸다. "아뇨,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일순 침묵이 흐르고, 사나이의 초조한 듯한 적의가 피 부에 따끔거릴 정도로 전해져 왔다. "어서 타십시오, 고든양. 집까지는 한 시간쯤이면 됩


니다." 도어를 활짝 열고 서 있는 사나이의 얼굴은 무표 정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철이 들지 않은 어린이에게 설명하는 것 같은 말투. 확실히 자신만만한 권위적인 태도는 빈틈없이 조 화를 이루었으나, 그 역시 나이는 겨우 서른 두셋, 그녀 와는 열 살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다. 기사에게--그가 아무래도 알리인 것 같았다--지시하 자 차는 쿠웨이트 시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페리시어는 옆에 탄 사나이를 흘끗 훔쳐봤다. 여자 혼 자서 저 먼 나라에서 일부러 찾아온 그녀가 어떤 생각 을 하고 있는가를 충분히 알고 있을 텐데, 가벼운 말로 위로를 해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쪽이 그렇게 나온다 면, 이쪽도 결코 이야기를 하는가 두고 보자. 그때 갑자 기 그가 이쪽을 향하더니, 검고 긴 속눈썹 사이로 그녀 를 가만히 응시했다. 옆얼굴을 정신없이 보고 있었다고 오해를 받은 줄 알고 페리시어는 얼굴이 빨개졌다. 이 얼마나 밉살스러운 사람인가! "파이살에게 이곳 생활에 관해서 많이 들었겠죠?" 액 선트에 흠이 없는 완벽한 영어. 이튼 칼리지 출신일까? "네, 가족분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피장파장이라는 듯 쌀쌀하게 대답하고는, 문득 생각이 난 듯이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그의 외삼촌의 일도. 알고 계십니까, 그 분을?" "그 말투로 미루어 보아, 이미 편견을 가지고 계신 것 같군요. 그라면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외삼촌께서 파이살과 저의 혼약에 관해서 좋게 생각하고 계시지 않다는 얘기도 들었습니까?" "혼약?" 반지가 없는 손가락에 시선을 떨어뜨렸을 때, 그의 입 술이 냉혹스럽게 일그러진 듯이 보인 것은 페리시어의 기분 탓일까? "파이살은 저쪽에서 그대로 혼인을 하자고 말했지만, 생각에 먼저 가족들의 동의를 얻은 후에 하는 것이 좋


을 것 같아서……." "그것은 확실히 현명한 방법이군요! 여하튼 라시드가 인정하지 않게 되면, 파이살에게 지급되는 지나칠 정도 의 충분한 생활비는 끊어지겠죠. 이 일은 아가씨도 물론 잘 알고 있겠지요?" 페리시어는 일순 입을 다물었으나, 그가 넌지시 하는 말의 뜻을 눈치챈 순간 뺨이 확 달아 올라왔다. 돈을 목 적으로 타산적 혼약을 연기했다고 빗대어 말하다니! 라 시드도 이 사나이와 같은 생각이라면, 정말로 속수무책 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저로선 외삼촌의 허가 없이 결혼해도 전혀 상관없습 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파이살과 가족 사이에 틈이 생기고 맙니다. 그것을 염려했을 뿐입니다. 돈과는 관계 가 없습니다. 제가 사랑하고 있는 것은 파이살 뿐입니 다!" "그래서 그는 라시드를 설득시키기 위해 아가씨를 이 곳에 보냈군요. 밤색 머리에 바다를 연상케 하는 녹색 눈이라. 파이살은 아가씨가 라시드의 조모를 닮았다고 말하지 않던가요?" 사나이는 차디찬 눈으로, 뺨을 물들 이고 있는 페리시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수고한 보 람이 없을 겁니다, 고든양. 파이살은 현재로서는 라시드 가 어떤 혼약에도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런저런 이유로 상속 권을 요구해 왔었는데, 이번의 혼약 사건도 그 새로운 수법이겠죠. 아가씨는 이 일에 얼마나 받기로……." "그렇지가 않아요! 우리들은 정말 서로 사랑하고 있어 요." "실로 감동적이군요! 하지만 라시드의 승낙을 받기는 어려울 거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도대체 어떤 분이에요?" "멋대로 지껄이는 너는 누구냐, 이 말이지? 이미 눈치 챘으리라 생각했는데, 고든양. 내가 파이살의 외삼촌인 셰이크 라시드 알 해미드 알 사바요."


땅거미가 질 때라 아연실색한 표정을 보이지 않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좀더 빨리 눈치챘어야 했을 것을. 왠지 파이살의 외삼촌은 나이 지긋한 사람일 거라고 내 심으로 단정짓고 있었으므로 눈치채지 못한 것도 당연 했다. 당황하는 페리시어를, 감쪽같이 속였다고 회심의 미소 를 지으며 차디찬 회색 눈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전통적인 흰 제라바에 회색 수염을 기른 엄한 아랍인 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유럽 식의 값진 슈트를 엘리건트 하게 입고 있는 이 젊은 사나이가 라시드 외삼촌일 줄 이야……. "전 파이살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덫에 걸리 고 말았지만, 최소한도로 이 점만은 분명히 해 두지 않 으면 안 된다. "그가 당신의 생질이라는 것을 알기 전부 터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녹색의 눈과 회색의 눈.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으 나, 먼저 눈을 내리깐 것은 페리시어였다. "그것은 어떤 뜻인가?" 페리시어는 말없이 후회하면서, 완전히 뜻밖의 결과가 되어버린 지금, 당신은 내가 돈을 목적으로 조카를 사귀 었다고 생각하고 있겠죠, 하고 단도직입적인 말을 끄집 어내는 것은 슬기롭지 못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겸연쩍게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것보다는 창밖을 바라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아, 페리시어는 창밖을 바라보 기 시작했다. 페리시어는, 파이살의 집은 쿠웨이트와 아르자하라라 고 하는 도시의 중간 지점의 연안 지방에 있으며, 그 밖 에 옛날에 일족의 근거지였던 오아시스에는 외삼촌의 별장이 있다고 듣고 있었다. "이 길은 아라비아 만 거리라고 하는데, 글자 그대로 아라비아 만을 따라 뻗어 있어요." 맞장구치는 것도 아닌데도 페리시어는 고집스럽게 창 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많은 사람들의


탄식소리 비슷한 소리가 들려와서 펄쩍 뛸 듯이 놀랐다. "근행이오." 라시드는 곧 비꼬는 듯한 목소리로 설명 을 시작했다. "해가 질 무렵에 신자들이 메카 쪽을 향해 서 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크리스찬이지요?" 무심결에 그만 말 을 하고 말았지만, 상대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 당황하여 눈을 내리깔았다. "세례는 받았소. 그러나 오해하면 곤란해요. 이 나라 의 풍습에는 어김없이 따르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파이 살도, 그의 아내가 될 사람도 어김없이 지켜야 할 것이 오. 나에게 영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해서 당신을 호 의적으로 보아 줄 이유는 아무 것도 없소. 그 점을 명심 하시오." 엄숙한 입언저리만 보아도 그의 말이 진심인 것은 의 심할 여지가 없어서, 절망감이 천천히 온몸으로 퍼져 갔 다. 호의를 쟁취하기는커녕, 첫걸음부터 경멸당하고 말 다니……. 불쾌하다는 듯이 입을 꼭 다물고 밑을 내려다 보고 있는 동안에 어느 사이엔가 차는 시가를 빠져나와 해질녘의 공기에 짙은 라임의 향기가 감도는 교외로 나 와 있었다. "아직도 기분이 언짢으신가요?" 갑자기 나른한 듯한 라시드의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파이살은 내가 동의하 지 않으면 이 일이 안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을 거 요." "하지만 그것은 뜻대로 안 될 거예요." 해서는 안 될 말을 그만 해버리고 말았다. "왜 절 오라고 말씀하셨는 가를 알았습니다. 파이살에게 있어서 저는 걸맞는 아내 가 될 수 없다는 걸 납득시켜 우리들을 헤어지게 하려 고 그러시는 거죠." 한심스럽게도 눈물이 넘쳐 눈앞이 흐리게 보였다. "절대로 그렇게는 안 될 거예요! 우리들 은 서로 사랑하고 있어요. 그가 거지라도 상관없어요."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부딪히면, 여성은 더욱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하지. 파이살은 불편한 생활


을 할 수 없을 거요." 이번 일을 위해 무리해 가면서 산 마직 슈트를 그는 짓궂은 눈으로 흘끗 보았다. "게다가 내가 보기엔 당신도 그래, 고든양. 가난한 생활을 견디 어 낼 사람이 아니야. 아무런 부족 없는 생활에 사치가 몸에 밴 파이살과 가난한 살림을 꾸려나갈 자신이 있는 거요?" 당치도 않은 말씀. 저는 모든 것이 부족한 속에서 살 아왔어요. 그중에서도 제일 소중한 것, 즉 사랑이 부족 한 생활 속에서요. 큰 소리로 실컷 퍼붓고 싶었으나 눈 앞에 있는 부와 권력의 화신 같은 사나이에게는 도저히 통할 것 같지가 않았다.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 짐작은 갑니다." 울음소리가 나올 것 같은 것을 겨우 참았다. "당신은 잔혹한 분이세 요, 셰이크. 그래요, 저의 적이에요. 하지만 결코 지지 않을 거예요!" 어둠 속에서 라시드의 흰 이가 번쩍 빛났다. "그렇군. 적이란 표현이 맞군.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남성과 여 성과는 서로 적이 될 수 없게 돼 있소." "매와 비둘기와의 관계는 가능하겠죠? 당신은 무자비 한 매예요. 어떻게든 우리들의 사랑을 파괴하려 하고 있 어요." "그럼 고든양은 비둘기란 말인가?" 회색 눈은 분명히 냉소를 띠고 있었다. "나의 견해로는 비둘기라기 보다는 독수리라고 하는 편이 더 잘 맞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데." 무슨 말을 해도 허사였다. 몹시 낙심한 페리시어는 자 꾸 눈을 깜박거리며 눈물을 털어버리려 했다. 결코 만만 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 있 는 라시드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남을 미 워한 일은 없었지만, 지금은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혀 숨 이 찰 정도였다. 신경전에 견딜 수가 없어서 문득 창밖 을 바라보니, 저 멀리 지평선이 유전지대의 강렬한 조명 으로 밝게 비치고 있었다. 미지의 나라에 홀로라는 불안


감이 순식간에 밀어닥쳤다. 파이살만 옆에 있다면……. "내 앞이라고 해서 일부러 얌전하게 굴 것까지는 없 소, 고든양. 조카와 어떤 모습으로 춤을 추었는지 정확 한 정보가 들어와 있소." 완전히 멸시하는 차디찬 말에 페리시어의 뺨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런 태도가 이슬람 교도의 아내에게 걸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소, 아니면 파 이살은 남편과 다름없으므로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 는 생각에서 그랬던 거요?" 너무나 분해서 페리시어는 얼굴이 상기되었고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서 들었군요. 마치 상품이라도 보듯이 저 를 쳐다보던 그럼 사람이 한 말을……?" "그런 짓을 했을른지도 모르지. 난 상당 기간 런던에 는 안 갔었지만 그쪽 친구한테서 듣고 있었지. 당신들은 놀랄 만큼 싼 값에 자신들을 맡긴다지?" 이젠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가슴이 메슥메슥해졌 다. "우리들은 단지 춤만 추었어요." "당신은 언제나 사랑하는 파트너에게 착 달라붙어서 춤을 추나?" 차를 세워요! 페리시어는 목구머까지 나온 말을 필사 적으로 꿀꺽 삼켜 버렸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꿈이 순식 간에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하지만 약점을 보여서는 안 된다. "아니에요. 파이살은 저를 존경하고 있어요." 일순 라시드의 눈에 노여움이 섞인 쇼크가 스쳐간 듯 했다. "그럴까? 만일 그렇다면 생각하고 있던 것 이상으로 바보자식이군." 아무래도 적에게 유리한 무기를 제공하고 만 것 같다. 기회만 있으면 라시드는 주저하지 않고 그 무기를 유효 하게 이용할 것이다. "저를 그렇게 나쁜 여자라고 생각하셨다면, 왜 불렀


죠? 파이살의 누이를 위해서라도 저 같은 여자가 있으 면 좋지 않을 텐데요?" 예의고 뭐고 잊고 대드는 페리 시어를 무시하고 순금의 커프스 단추만 멍청히 보고 있 는 라시드에게, 무의식중에 페리시어는 새된 소리를 지 를 뻔했다. "야무진 애니까 그런 걱정은 없어." 그는 겨우 대답했 다. "고든양, 당신은 영리한 사람이오. 왜 여기에 오라고 했는지 생각해 봤어?" "조금도 부르고 싶지 않으셨죠? 저에 관한 일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으시죠, 그렇죠?" "날카롭군. 하지만 오고 말았어. 한 가지만 분명히 해 두지. 인정상 당신을 이곳에 머무를 수 있게 해 주겠소. 누님에게는 파이살의 친구라고 해 두었어. 그 이상이 될 염려도 없지만……." "아니에요. 며느리 감으로 알맞다고 인정해주실 때까 지 있을 거예요.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상관 없 어요. 다만 파이살 때문에 당신의 승낙을 얻으려고 노력 한다는,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대접을 해드리는 것 뿐 입니다. 게다가 3 년만 지나면, 그 사람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떳떳이 결혼할 수 있게 되거든요." "생각했던 것보다 결심이 대단한 것 같군." 푸접없어 말을 붙여볼 수도 없는 차디찬 목소리와 딱딱한 표정, 아무래도 몹시 화가 난 모양이다. "영국에서는 변변한 장래성도 없었어, 그렇지? 재미도 없는 단순노동에, 유 산을 줄는지 어떨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북부 지방에 숙 모님이 한 사람 계시고, 확실히 그다지 신통치 못한 ……." "무슨 일이든 돈과 연관시키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으세요? 경제적인 안정만을 생각했다면 벌써 결혼했 을 거예요." "하지만, 내심으로는 보다 큰 고기가 걸리는 것을 기 다리고 있었겠지. 그러니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그런 말이군!"


색안경을 통해서만 보려고 하는 상대에게는 무슨 말 을 해도 시간만 낭비할 뿐이다. 곧 차를 공항으로 되돌 려 달라고 말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렇게 되면 그의 말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만다. 괴롭더 라도 참고 시간을 끄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가 아무 리 편견이 심하다 해도 페리시어가 정말로 어떤 인간인 가를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파이살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지금의 페리시어에게 는 이것만이 유일한 지주였다. "사람을 보는 파이살의 안목을 그렇게 신용할 수 없 다면, 왜 당신은 신부를 결정하지 않죠? 마음에 드는 꼭 알맞은 분을?" 조금 비꼬아서 한 말이기는 했으나, 라시 드의 표정이 달라진 것을 보니, 아무래도 정곡을 찌른 것 같았다. "어떤 분이 있나 보죠? 아니에요. 믿을 수 없어요. 파이살은 절대로……." "사랑하고 있다는 착각을 한 젊은 사나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가를 아직 모르는 것 같군, 고든양. 그러나 지금으로는 내가 먼저 혼담을 추진할 생 각은 없어. 파이살은 아직 어리니까. 그렇지, 그래. 그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랑을 했지만 결혼 말까지 끄집어 내 기는 당신이 처음이야." 설마……. 그러나 생각해 보니 파이살은 순진한 데가 조금도 없었다. 나와는 꽤 틀린다고 생각이 들 때마다 그렇지 않다고 부정은 해 왔으나, 지금 또 그 의심이 머 리를 쳐들었으며, 겨우 그의 일면밖에 몰랐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지차 페리시어는 당황했다. 그러나 그건 그렇 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라시드에게 간단하게 일시적인 바람둥이 상대로 취급당한 것이 몹시 억울했다. 어릴 때 부터 알고 있는 조카가 결혼 말을 했다면 그 마음이 진 실된 것이라고 인정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파이살은 젊으니 충동에 사로잡히기 쉽지. 그러니까 한창 열을 올릴 때의 판단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은 당 신도 알겠지. 서로 안 지 몇 주가 된다고 했지? 그렇게


짧은 교제로 일생을 결정할 생각인가!" 단 한 번 만나도 사랑할수 있는 거예요, 하는 말이 입 에까지 나온 것을 꾹 참고 페리시어는 문득 생각에 잠 겼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파이살의 일면에 불과 했던 것이 아닐까? 그녀가 보기에는 몹시 성급한 데가 있기는 했으나, 어쨌든 포용력이 있고 제구실을 하는 당 당한 사나이로 보였는데, 라시드의 말에 의하면 변덕스 럽고, 곧 사랑에 빠져 앞 뒤 분별을 못 하는 소년 같다 는 것이다. 어느 쪽이 진짜일까? 어처구니없는 일이군! 물론 자신의 판단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자아, 이제 거의 다 왔소. 파이살의 모친도 누이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소. 쿠웨이트 요리가 입에 맞으면 좋 겠는데." 쿠웨이트 요리라는 말을 듣고 오싹해지지나 않나 하 고 이쪽을 본 눈이 재미있다는 듯이 반짝 빛났다. 그러 나 파이살의 말에 의하면, 옛날대로의 식사를 즐기는 것 은 모친뿐이고 누이들은 마루에 책상다리하는 것을 싫 어하여 유럽식의 스타일로 식사를 하며, 예전처럼 양의 눈알을 먹이거나 하지도 않을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했으므로 태연했다. 어쨌든 페리시어는 진퇴유곡에 빠지고 말았다. 파이살 의 모친에게 두 사람의 혼약을 이야기하면 당장에 라시 드가 화를 낼 것이고, 라시드의 말대로 그냥 친구로 통 해 버리면 그에게 영합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가장 좋 은 방법은, 파이살이 스물 다섯이 되어 외삼촌이 권한을 잃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겠지만, 방자하고 성급한 그 는 3 년 동안 기다릴 수 없을 것이다. 라시드는 이렇게 헤어져 있는 동안에라도 파이살이 다른 여성을 사귈 것 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쏟을 길 없는 분노에 눈물이 흘러 나왔다. 왜 나는 어리석게도 이런 꼴을 당할 줄 알 면서도 태연스럽게 이곳을 찾아왔을까. 차는 한쪽은 바다, 다른 한쪽은 사막, 눈을 가리는 것 이라곤 하나도 없는 시골길을 날 듯이 달려간다. 쿠웨이


트의 현대적인 건물에 대해서는 실컷 듣고 있었으나, 스 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무어 식 저택을 연상케 하는 흰 벽의 당당한 이층 건물을 눈앞에 두고는, 페리시어는 바짝 긴장했다. 메르세데스는 미끄러지듯이 아치를 빠져나가, 만발한 꽃들로 가득찬 화분이 여기저기 놓인 중정으로 들어갔 다. 중정은 몇 군데의 창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으로 어슴 푸레하게 보였으며, 어둑어둑한 저쪽에서는 분수의 물소 리가 들려왔다. 라시드가 차의 도어를 열어주어 한걸음 밖으로 나오 자, 엑조틱한 향기에 가득찬 해질녘의 공기에 정신이 번 쩍 드는 것 같았다. "이쪽이오, 고든양." 그렇게도 페리시어를 싫어하면서 도 그런 낌새를 조금도 나타내지 않는 라시드는 뛰어난 배우였다. 지금의 기분에 비하면 차 속에서의 일 따위는 시련 축에도 들지 않는다. 그의 가족도 라시드 못지 않게 그 녀에게 적의를 품고 있다면? 그러나 우물쭈물 생각할 틈도 없이 묵직한 나무 문이 열리고 페리시어는 눈부신 불빛 속에 서 있었다. "파티마, 이쪽이 고든양." 눈앞에 몸집이 작고 포동포동한 여성이 서 있었다. "고든양. 파이살의 어머님, 나의 누님입니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셰이크의 싸늘 한 시선을 의식하면서 손을 내밀자, 몇 개의 반지가 번 쩍번쩍 빛나는 부드러운 손이 정답게 맞잡았다. "고든양은 아라비아 말은 못해요. 그러니까 영어로 말 해요, 파티마." 그러나 다행히도 '안녕하세요'란 인사말만은 파이살에 게서 배웠으므로, 더듬거리며 인사를 했다. "마사, 알 카루." 파이살의 모친은 자못 호인답게 기쁜 듯이 돌아보더 니 장난스럽게 동생을 쳐다보았다.


"봐라, 라시드! 이분은 분명히 아라비아 어로도 이야 기할 수 있지 않니." "겨우 두세 마디 정도입니다. 항상 파이살에게 발음이 이상하다고 웃음거리가 되곤 했어요." "어머니, 그런 곳에 선 채로 고든양에게 질문 공세만 퍼부을 참이에요?" "차라, 왜 그렇게 예의범절이 없니? 너 역시 멀지 않 아 아들을 가져 보렴. 떨어져 사는 어미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그럼, 이 소녀가 누이인 차라인 것이다. 모친을 닮아 포동포동하고 자그마한 모습에 생기있고 따뜻한 검은 눈에는, 라시드와 같은 차디참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다 행이야, 이 귀여운 소녀는 내 편이 되어 주겠지. "당신 방은 내 방 맞은편이에요." 차라는 앞장서서 계 단을 올라갔다. "어머니는 지금이라도 될 수 있다면 부 인방을 만들고 싶어해요. 하지만 라시드가 여성을 격리 하는 것에는 반대하는 거예요. 언니와 내가 대학에 가게 된 것도 라시드 덕택이죠. 어머니는 맹렬히 반대했지만 요. 그런데, 배는 어때요? 긴 여행 끝에는 그다지 식욕 이 나지 않는 거라고들 하지만, 어머니는 부지런히 식사 준비를 해놓으셨어요." 여행의 피로 뿐만이 아니라 신경도 꽤 지쳐 있는 페 리시어는 할 수만 있다면 뜨거운 물에 목욕을하고 곧 침대에 기어들어가고 싶었으나, 모처럼의 호의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아라비아 인은 손님 접대를 좋아하 는 것으로 유명하지 않은가! "파이살이 써 보내 왔지만, 혼약을 할 거예요?" "네. 물론 외삼촌께서 동의해 주시는 조건하에서 하는 거지만." 정원으로 면한 그녀의 방은 모든 것이 유럽 식의 사 치스런 가구로 꾸며져 있었고 욕실도 수수한 핑크로 통 일되어 스마트했다. "천일야화에 나오는 것 같은 대리석으로 된 큰 욕실


이 아니라서 미안해요." 차라는 방긋 웃었다. "사실은요, 헐렁헐렁한 바지와 끝이 뾰족한 슬리퍼를 신고 어떻게 움직일 수 있을까, 하고 몹시 이상하게 생 각했어요." 페리시어도 긴장이 약간 풀려 있었다. "됐어요, 당신은 유머 감각이 있군요. 외삼촌은 전혀 틀리게 말했지만." 대체 어떤 식으로 말했을까? 혼약에 관한 일은 차라 도 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모친에게는 비밀로 하라고 함구령을 내린 것이 틀림없다. "옛날의 쿠웨이트가 보고 싶다면, 외삼촌에게 부탁하 면 오아시스의 별장에 데려다 줄 거예요. 외증조부님께 서 영국인 증조모님을 위해 세우신 거래요. 그리고 짐은 메이드가 정리할 테니까 그대로 둬요. 어때요, 배가 고 프지 않아요?" 차라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옛날 그대로 의 부인방도 있는 이 집의 구조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 었다. "라시드 외삼촌은 별채에 살고 있지만 식사는 대 개 같이 해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여자들은 절대로 남자들과 같이 식사를 못 했지만, 시대도 변했고 외삼촌 의 사고방식도 현대적이고 해서." 라시드에게 심취해 있는 것 같은 차라를 보고 페리시 어는 여우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신도 라시드가 싫지는 않지요?" "아직, 만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말을 얼버 무렸으나 차라는 거짓없이 깔깔 웃었다. "맨 처음 당신이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머니는 당 신이 혹 라시드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몹 시 걱정했어요. 내 친구들은 모두 라시드에게 정신이 없 어요. 영국에 유학하고 있을 때도 걸프렌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대요." "그렇겠죠." 그가 영국 여성을 상대로 경멸하면서 으 스대는 꼴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파이살보다 훨씬 핸섬하죠, 그렇죠?" "하지만 파이살 쪽이 신사적이고 다정해요." 생각보다


먼저 말이 나와 버렸다. "다정하다고요? 그럼 라시드 외삼촌의 말과 다르군요. 라시드가 당신은 연애의 엑스퍼트라고 말했는데, 진짜 엑스퍼트라면 남성에게서 다정함 따위를 찾을 리가 없 거든요." 차라의 진지한 표정에 반대하고 싶은 기분은 일어나 지 않았다. 그러나 애정에 굶주린 소녀시절을 보낸 페리 시어에게는 역시 다정함과 친절함이 가장 소중한 것으 로 여겨졌다. 아마 자라난 환경과 풍토에 따라 애정에 대한 사고방식도 다른 것이리라. "라시드, 저애를 야단 좀 쳐요. 어마, 저 모습이라니, 나 참!" 식당에 들어선 순간, 진즈에 티셔츠 차림의 차 라를 보고 어머니는 새된 소리를 질렀다. "대학에선 모두가 진즈를 입어요. 라시드 외삼촌도 용 서해 줄 거예요. 삼촌도 입고 있는 걸 본 걸요." 누나가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봐도 라시드는 표정 하 나 달라지지 않았다. "아아, 그래. 가끔은. 그러나 저녁 식사 때는 아니야. 오늘은 괜찮지만 앞으로 그런 모습으로 오면 혼자서 부 인방에서 먹게 할 테다." 그의 말에 거역하는 것은 불리하다는 걸 알고 있는 듯 차라도 그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자아, 고든양. 이리로." "어머나, 어머님. 페리시어라고 부르기로 해요. 어머니 는 운무 파이살이에요." 라시드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이 집에서의 자기의 어려운 입장을 생각해 망설이고 있으니, 파이살의 모친 은 아라비아 어로 뭔가 동생에게 귀엣말을 했다. "누님은 꼭 그렇게 해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든 양. 그리고 가장으로서 내가 먼저, 잘 오셨다는 인사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다할 대접은 못 하지 만 당신의 집이라 생각하시고, 있고 싶은 대로 머물러 주십시오."


파이살의 모친은 진심으로 환영해 주는데도, 라시드의 표정을 보면 그는 정반대의 일을 바라고 있는 것이 분 명했다. 어떻게 대답을 할까 망설이고 있으니까, 다행스 럽게도 차라가 옆에서 거들어 주었다. "라시드 외삼촌이야말로 '고든양'이라고 부르지 마세 요. 왜냐하면 파이살의 그…… 아주 친한 친구가 아니에 요? 그러니까 페리시어라고 불러요, 네? 그렇지 않아 요?" 라시드의 눈이 싸늘하게 빛난 것도 눈치채지 못하 고 차라는 신이 나서 페리시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페리시어로서는 어떻게 불리든 상관없었지만, 거리를 두는 뜻으로 그는 '고든양'으로 일관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이 화제는 그것으로 그치고, 두 사람 사 이의 적의는 아무에게도 눈치채이지 않은 채 식사가 시 작되었다. 식탁 위에는 희한한 요리가 식탁이 비좁다는 듯이 잔뜩 차려져 있었으나, 페리시어는 요리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고, 태평스런 차라의 잡담을 꿈꾸는 것 같 은 기분으로 듣고 있었다. 라시드와의 신경전의 긴장과 긴 여행의 피로가 일시에 밀어닥쳐 마침내 겨우 눈만 뜨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기분이 나쁜 게 아냐, 페리시어?" 차라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무심코 고집을 부려 고개를 가로저였으나, 아 먼드 과자를 한 조각 입에 넣은 순간, 갑자기 욕지기가 나고 주위가 어렴풋이 흐려지기 시작하며 먼 곳에서 차 라의 불안스러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요, 페리시어가 쓰러져요!" 그 뒤에는 모든 것이 뚝 그치고 페리시어는 어둠의 정적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3 "네, 괜찮을까요?"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 누구의 목소리더라? 이어서 중 후하고 시원시원한,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깨나른한 듯한 사나이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오자, 까닭도 없 이 페리시어는 두려워했다.


"걱정할 것 없어요, 차라. 기온의 변화와 피로가 겹친 데다가 자극성 음식 때문이야." "하지만, 안색이 아주 나빠요. 의사를 불러오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라시드?" 라시드! 그랬었지! 번쩍 눈을 뜬 페리시어는 일어나려 고 바르작거렸다. 여기는 아까 안내되었던 침실. 염려스 러운 듯이 운무 파이살이 문에서 들여다보고 있고, 침대 곁에는 라시드와 차라가 서 있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세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페 리시어는 종잡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살았어! 당신이 병에 걸렸다면 파이살은 도저히 용서 하지 않았을 거예요. 우리들은 몹시……." "고든양, 기분이 나빴다면 분명히 말을 하셔야죠." 신 이 나서 깡총대는 차라를 나무라듯이 라시드의 목소리 가 가로막았다. "차라, 메이드에게 과일즙을 가지고 오 라고 해. 장시간 비행기를 타면 탈수 증상을 일으키는 수가 있단다. 그리고 파티마, 만약을 위해 수면제를 부 탁해요." "탈수 증세에 관해서 들은 적이 없었던가?" 시키는 일을 하기 위해 두 사람이 나가자 엄한 목소리가 다그 쳤으나, 얼굴을 대하고 싶지 않은 페리시어는 눈을 감고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아직도 나를 미워하고 있군, 고 든양. 그것을 숨기려고 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어. 화를 내면 눈빛이 꽤 매력적인 색으로 변하지만, 누님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 현명할 거요. 그녀는 남 성에게는 완전 복종하며 자란 세대의 사람이니까." "그럼 당신은 선조로 되돌아갔다는 말이군요." 무의식 중에 중얼거렸으나, 아차 하고 후회할 틈도 없이 턱에 손가락이 닿더니 다짜고짜 돌려눕히고 말았다. "그렇게 함부로 입을 놀려도 괜찮을까? 당신은 파이 살을 위해 내 승낙을 얻으려고 노력하려는 계획이 아니 었나?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없지. 충고해 두겠어. 아무런 뜻도 없는 어리석은 반항은 하지


말 것. 나는 아첨조로도 마음이 관대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괴물은 아니오. 파이살은 어마어마한 부자집의 응석받이지. 후견인인 내 가 결혼을 막을 힘은 없지만 상대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었을 때는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결혼을 연기 시킬 수는 있지. 당신이 진심으로 파이살의 행복을 원하 고 있다면, 내가 말하는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거요." "그래서 그와 저와는 행복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페리시어는 용기를 내어 날카로운 시선을 맞 받았다. "뜻이니 이해니 하시지만, 저에 관해서는 무엇 하나 알지 못하면서 덮어놓고 따지기만 하는군요. 결국 은 파이살을 저와 결혼시키고 싶지 않은 거죠? 하지만, 왜 그러는 거죠? 당신에게 파이살의 상대를 고를 권리 가 있습니까? 왜, 우리들이 행복해질 수 없지요?" "맙소사. 어째서 이런 간단한 일을 이해하지 못할까. 고든양. 파이살은 이슬람교도이고, 순수한 아랍인이오. 그런데 당신은 영국인이잖소. 세계는 좁아졌다고 하지만 역시 문화의 차는 무서운 거요. 파이살과 결혼하면 당신 은 문자 그대로 그의 소유물이 되는 거요." "되고 싶어 결혼하려는지도 모르잖아요." "아마 몸은 그의 소유물이 되고 싶어할는지도 모르 지." 그는 말하기 어려운 것을 쿡 찔러 말하고는 짓궂은 웃음을 띠었다. "게다가 결혼하는 순간 넋까지 파이살의 것이 되고 말지." "어머, 여성에게는 넋이란 게 없지 않아요? 남성의 장 난감으로 아기를 낳아주는 것뿐? 좋아요. 분명히 말씀해 주셔서. 하지만 진심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믿고 계신다면 왜 차라를 대학에 보냈죠?" "내가 무엇을 믿고 있건 상관없는 일이 아닐까? 문제 는 파이살의 일이야. 겉보기에는 훌륭한 유럽인이지만, 사고방식은 부친이나 조부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 융통 성이 없는 딱딱한 보수파야. 설마 부인방에 가두거나 베 일을 쓰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어디까지나 주인은 자기


라고 주장할 거야."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라시드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이런 것을 이야기할 때가 아닌 것 같군." 창백했던 페리시어의 뺨이 노여움 으로 빨갛게 물드는 것을 똑바로 쳐다봤다. "계속은 당 신이 안정을 찾은 후에 하지. 그러나 지금까지의 상황으 로 미루어 볼 때, 아무래도 당신과 파이살은 행복하게 살아갈 것 같지가 않아. 결혼은 중대한 문제요. 일시적 인 기분으로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어떻게 그렇게 확실한 말을 할 수 있어요? 결혼해 본 일이 있어요?" 차라의 모습이 보였으나 억누른 목소 리로 비꼬지 않을 수 없었다. 라시드는 그대로 몸을 홱 돌리더니 차라에게 말도 하 지 않고 나가 버렸다. "페리시어. 라시드와 싸웠어요?" 차라는 막 닫힌 도어 를 불안스러운 듯이 돌아봤다. "이유는 짐작하시겠죠? 나를 파이살과 결혼시키고 싶 지 않은 거예요."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앞 뒤 생각도 없이 아무에게나 내심을 털어놓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알고 있어요. 저에게도 그렇게 말했거든요.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요. 그것은 파이살이……." 말을 머뭇거리 며 얼굴을 붉혔다. "좋아요. 죄다 이야기하겠어요. 파이 살은 아주 쉽게 반해 버려요.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혼약 은 결혼과 같은 정도로 신성한 것이므로, 당신들이 틀림 없이 행복하게 된다고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외삼촌은 좋다고 말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보다 냉정할 때였더라면 과연 그렇구나 하고 수긍했 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상태가 아니었다. "성급하게 생각해서는 안 돼요." 차라는 얼굴이 빨갛 게 된 페리시어를 걱정스러운 듯 지켜봤다. "라시드도 곧 마음을 돌릴 거예요. 이런 때예요, 시야사가 필요한 것은. 그렇군요, 영어로 말하면 빈틈없이라고나 할까, 아 니 그 이상이에요. 상대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고 갖고


싶은 것을 멋지게 손에 넣는 기술이에요." "당신의 외삼촌은 나에게 그 시야사를 쓸 필요가 없 다고 생각한 모양이죠. 모욕을 주고 싶은 거예요." "손님에게 그런 짓을 하겠어요? 단지 어머니를 걱정 하고 있을 뿐이에요. 결혼이란 큰일을……." "그건 외삼촌에게서도 들었어요. 자기는 결혼한 적도 없으면서 엑스퍼트 같은 말투였어요." "그것은요, 약혼녀가 죽었기 때문이에요. 이전에는 이 종끼리 결혼하는 습관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라시드 외 삼촌은 아버지의 이종이기도 해요. 오누이라 해도 외삼 촌의 어머니는 조부의 후처였으니까 배가 다르죠. 이런 얘기는 파이살에게서 들었겠죠?" "네. 외삼촌의 조모님이 영국인이었다는 것은." "그래요. 외증조부는 사막에서 영국 여성을 살렸어요. 두 사람은 열렬히 사랑했는데, 그는 일족의 우두머리였 기 때문에 자유롭게 아내를 고를 수 있었어요. 오아시스 의 별장은 때때로 영국을 그리워하는 아내를 위해 외증 조부가 지은 거래요. 이 로맨틱한 부부의 외동딸이 라시 드의 어머니인 동시에 내 조부의 후처이기도 해요. 이걸 로, 우리들은 모두 이슬람교도인데 유독 라시드만이 크 리스찬인 이유를 알 수 있겠죠?" "소설 같이 로맨틱하군요." 어느 사이엔지 페리시어도 화가 풀려 이야기에 끌려 들어갔다. "라시드는 이젠 결혼하지 않을 모양이에요. 자유로운 독신생활이 마음에 들어서인지, 어머니가 아무리 권해도 도무지 들을 기미가 없어요." "과연, 시야사의 명수군요." 차라는 즐거운 듯이 크게 웃었다. "당신이 오셔서 기뻐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라시드 도 곧 승낙할 거예요. 어머니는 파이살을 너무나 귀여워 해요. 무조건 네, 네죠. 가령 영국인 아내 네 명을 갖고 싶다고 해도!" 차라의 수다를 듣고 있는 동안에 페리시어는 기분이


풀렸다. 라시드의 거무스름한 얼굴에 담긴 짓궂은 표정 이 여전히 머리 한 구석에 달라붙어 있었으나, 페리시어 는 운무 파이살이 준 주스와 수면제를 먹고 눈을 감았 다. 여기가 어디였더라? 가벼운 발소리에 잠을 깬 페리시 어는 낯선 복장의 하녀를 본 순간 깜짝 놀랐다. 그렇지, 쿠웨이트! 곧, 어제 일어났던 일련의 일들과 셰이크 라 시드의 얼굴이 떠올랐다. "잘됐군. 힘을 되찾은 모양이군." 자그마한 부인은 억 양이 강한 영어로 천천히 말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차 라는 학교에 갔어. 나중에 당신과 만나고 싶대. 알리가 데리고 올 거야."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습니까?" 벌떡 일어나서 시계 를 보니 열한 시. 페리시어는 황황히 사과했다. "수면제 탓이야. 잠을 잘 자서 좋지 뭐야. 동생은 은 행에 나갔어. 그러니 지금은 우리 둘뿐이야. 천천히 파 이살에 관해 이야기해 줘요. 정말 기회가 좋지 않아서. 모처럼 당신이 이렇게 찾아왔는데 파이살은 뉴욕에 있 다니. 하지만 라시드가 하는 일은 틀림없어요." 예상한 대로 라시드는 이 집에서 절대적인 존재인 것 이다. 맛있는 과일과 갓 구운 빵의 아침을 끝낸 뒤 샤워를 하고 페리시어는 푸른 마직 스커트와 같은 빛깔의 무늬 가 있는 블라우스를 골라 입었다. 연한 아이샤도우와 핑 크계의 윤이 나는 루즈, 엷은 화장으로 인해 아주 세련 되어 보였다. 내향적인 듯한 하녀 세리나는 계속 미소를 띠고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아래층의 운무 파이살의 방에 안내해 주었다. 서늘하고 어둑어둑한 방안의 창가 에 놓인 블루와 진홍의 비단으로 된 쿠션이 맨 먼저 눈 에 들어왔다. 낮은 키의 작은 테이블 위의 청동으로 된 사모바르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며 방안에 상쾌한 민 트 티 향기를 뿌리고 있었다. 보석을 달아 정교하게 수


놓은 페르시아 융단 위에 편히 앉아 있던 운무 파이살 은 페리시어를 보자 생긋 웃으며 일어섰다. "이봐요. 새의 지저귐이 들리지요? 우리들을 위해 라 시드가 새를 많이 기르고 있어요. 황혼이 깃들 무렵 산 책하면서 새 소리를 듣는 것은 참 좋아요." "어젯밤 도착했을 때는 분수 소리가 나서, 어쩌면 저 렇게 맑은 소리가 날까 하고 놀랐어요." "그래요. 물소리는 우리들 아라비아 인에게는 특히 기 분좋은 소리지. 사막민의 피가 남아있기 때문이겠지. 습 관이란 끈질긴 것으로, 지금도 한방울의 물조차 헛되게 쓰지 않아요. 라시드는 정말로 사막을 좋아하는데, 남편 이 죽은 후 우리들을 위해 이 집을 샀지. 아이들을 기르 는 데는 이쪽이 안심이 된다고 하면서 아주 잘해 줬어 요. 자기를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파이살에게 이미 들었 겠지만." 처음 듣는 말이었다. 파이살은 외삼촌의 욕만 하고 있 었는데. 설마 그렇게 말할 수도 없고 해서 슬며시 화제 를 바꾸었다. "무척 젊으시더군요." "라시드? 그래요. 열 아홉이었지. 어머니가 아들을 못 낳았기에 아버지는 후처인 야스민을 맞았어. 하지만 외 동아들을 영국 학교로 보낸 야스민은 이곳 생활이 성격 에 맞지 않아 늘 고독했지.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본 일 이 없어. 라시드가 열 세 살 되던 해에 죽었지만, 틀림 없이 영국에서 살고 싶었을 거야. 라시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죽음을 몹시 슬퍼했지. 그 아이 에게는 유럽과 아랍의 피가 섞여 있어요. 그러므로 차라 와 나디아도 대학에까지 보냈지. 그리고 결혼하지 않는 이유도 순종만 하는 아랍 여성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인 지도 모르지." 운무 파이살은 오늘은 아랍 고유의 옷을 입고 있었다. 어젯저녁에는 유럽식의 드레스를 입었었는데, 그것은 페 리시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입었던 것이리


라. 사고방식은 전혀 달랐지만 사람이 좋은 친절한 이 부인에게 따뜻한 정이 솟구쳐 올랐다. 해질녘에 알리가 차 준비가 됐다고 알려 왔다. 대학에 차라를 데리러 갔다가 그 귀로에 쿠웨이트 시가를 구경 시켜 주기로 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시가로 들어간 순간, 여행자 수표를 아직 한 장도 바꾸지 않은 것이 생각나서 페리시어는 은행 앞에 서 내려 달라고 알리에게 부탁했다. "차라를 마중하고 돌아오는 길에 들러 주겠어요? 나 는 여기서 돈을 바꾸고 있겠어요." 몸짓 손짓으로 열심 히 설명했으나,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알 리가 잘 알 아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차에서 내리자 황혼이 깃든 거리는 무더웠다. 소매 없 는 줄무늬 블라우스로 갈아입고 온 것이 다행이었다. 외환계의 사람은 영어를 잘 하여 환율에 관해 친절하 게 설명해 주었다. 큰 액수는 아니라도 어쨌든 자기 돈 이 있으니 마음이 든든했다. 은행은 다른 나라와 큰 차이는 없었으나, 은행 밖으로 나오자 거기는 역시 쿠웨이트였다. 알리를 기다리는 동 안 페리시어는 눈앞의 엑조틱한 광경에 멍청히 넋을 잃 고 있었다. 흰 모자에 흰 제라바 차림의, 매처럼 날카로 운 눈매를 가진 청동색 피부의 사나이들이 지나갔다. 몇 몇의 노인이 땅바닥에 편히 앉아 쇼윈도의 텔레비전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는 것도 영국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거리에 다니고 있는 사람은 남성들이 압도적으로 많 았다. 진즈에 블라우스 차림으로 혼자 다니는 몇 사람의 예외적인 여성도 있었으나, 얼마 안 되는 여성의 대부분 은, 검은 베일을 쓰고 남편의 뒤를 따라 조용조용히 걸 어갔다. 지나치게 남존여비를 내세우고 있지만 않다면, 중년이 되어도 쇠약해지지 않을 정한한 용모를 가진 선 량한 사나이들은 몹시 매력적이리라. 선조 대대로 이어 내려온 자랑스런 그들의 모습에는, 남성 우위의 사회를


인정하지 않는 페리시어로서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 다. 그러나 유럽인인 자신과, 눈앞에 보이는 사나이들과 피가 섞인 라시드와는 별세계의 인간임이 느껴졌다. 시간이 상당히 지났는데도 메르세데스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는데, 가까이 다가온 몇몇 의 젊은이들이 무람없이 빤히 바라보자 그대로 서 있기 가 거북해졌다. 그때 마침 몇 미터 앞에서 메르세데스가 멈추어 살았 구나 하고 달려가니, 차에서 내린 것은 알리가 아닌 라 시드였다. 거무스름한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비단 셔츠의 칼라 위로 드러난, 햇볕에 그은 힘찬 목을 보는 순간, 이 예각적인 용모에 올리브 색깔의 피부를 가진 우아하고 잔인한 민족에 비하면 영국인이 얼마나 유약하게 여겨지는지 무의식중에 깜짝 놀랐다. 갑자기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 페리시어는 전신이 떨려서 마치 매에 홀린 새앙쥐처럼 그 장소에서 옴쭉달 싹 못하게 되었다. 매의 발톱을 연상케 하는 길다란 손가락에 팔을 잡혀 정한하고 야무진 몸에 끌어당겨진 순간 남성의 체취가 강하게 코를 찔렀다. "고든양." 단 한 마디에 이만큼의 노기를 띨 수 있는 줄은 몰랐 다. 페리시어는 완전히 기가 꺾이고 말았다. "저, 차라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렇겠지. 낯선 도시의 한복판에 혼자 두고 가라고 알리에게 명령을 하다니. 다행히 알리가 눈치 빠르게 나 에게 알려 왔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페리시어는 시원스 러운 가벼운 옷차림의 자신을 훑어보는 그의 눈을 의식 하니 화도 나고 한편 두렵기도 해서 쥐구멍이라도 있으 면 들어가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나라에선 지체 높은 여성은 절대로 혼자서는 외출하지 않지. 자기를 남 에게 보이는 것은 여성에게 있어서 최악의 스캔들이거 든. 파이살이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기분 나빠할 거


요." 가차없는 말에 페리시어는 입술을 깨물었다. "돈을 바꾸었을 뿐이에요." 눈물이 솟구쳐 올랐으나 라시드에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하니 더욱 더 울고 싶어졌다. "나에게 부탁하면 되잖소. 독립 독보의 유럽 여성으로 서는 그런 것을 부탁하기도 싫단 말인가." 이렇게까지 닦아세우지 않아도 괜찮을 것을. 단지 얼 마 안 되는 돈 때문에 남에게 수고를 끼치고 싶지 않았 기 때문이었는데. "혼자서 나다니는 것이 그렇게 큰 죄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유럽식의 복장을 한 여자가 몇 사람이나 혼자서 다니는 것을 보았어요." "그러니까 외국인은 곤란하다는 거요! 그런 여성은 여 염집 여성이 아니오." "저는 남이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어요. 자기 일 쯤 은 스스로 할 수 있어요! 5 년 동안 런던에서 혼자 살았 으니까요." "쿠웨이트에서는 여성의 평판이 가족 전체에게 영향 을 주지. 파이살이 이야기했는지 모르지만, 차라는 아주 엄격한 가정의 아들과 약혼한 사이요. 이 약혼을 성립시 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소. 그러니까, 어떤 관계이 건 우리 가정과 연관성이 있는 여성이, 당신이 취한 행 동 같은 것을 취해서는 곤란하오. 차라의 장래가 걸려 있기 때문이오." 그러나, 페리시어가 자신의 행동을 뉘우쳤다고 생각했 다면 큰 잘못이다. "정략적인 결혼? 당신답군요! 파이살 문제도 그런 쪽 으로 이끌어갈 생각이었군요. 그렇게 했더라면 가계도 알 수 없는 하찮은 영국 여자에게 신경쓰지 않아도 됐 을 텐데.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저는 파이살과 결혼합니 다. 3 년쯤 기다리는 건 아무렇지도 않아요." 라시드의 몹시 불쾌한 듯한 표정은 혐오감 탓일까, 아


니면 분노 때문일까? 그렇다, 쿠웨이트에서는 여성은 자 기 의사를 분명하게 밝힐 수 없는 것이다. 불쌍한 차라! "놓아주세요. 모두가 보고 있어요!" "그런 것쯤은 걱정되지 않겠지!" 입술을 비쭉거리는 순간 그의 두툼한 아랫입술이 관능적임을 보고 페리시 어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도 감정이 있는 것일까? "만일 당신이 파이살의 아내였더라면, 당신은 두 가지 문제로 이혼당하게 되지. 먼저 혼자서 거리를 방황했고, 다음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나와 가까이 지내고 있으니. 파이살로서는 몹시 불쾌할 거야." 그렇게 말하니 말이지 외삼촌 이야기를 할 때의 파이 살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질투가 섞여 있는 듯 했었다. 시시한 소문 하나가 화근이 될 수도 있겠지. "저도 불쾌해요, 이런 일은. 매물처럼 남에게 보이는 것은 싫어요!" 최면술에라도 걸린 듯, 싸늘한 눈매에서 눈을 돌리는 것은 용이하지 않았다. "파이살도 심미안은 있군. 당신은 아주 예뻐. 하지만 좋은 아내가 되려면 그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해." "애인으로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가요?"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어. 당신은 누구라도 좋으니 최 고의 값을 치를 아랍 부호에게 자기를 팔려고 여기에 왔나?" 라시드가 재빨리 손목을 움켜잡지 않았더라면 사람의 왕래가 잦은 큰길 한복판인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힘껏 그의 뺨을 후려쳤을 것이다. "왜 물어요? 당신이 사시겠어요?" 지나친 말을 했다. 경멸을 담은 회색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당치도 않지. 손때가 묻은 상품은 소용없어. 아무리 예쁘게 보여도, 금이 간 비취나 흠이 있는 융단이나 처 녀가 아닌 여자는 가치가 없지!" 충격과 분노로 필사적으로 손을 뿌리치려고 하는 찰 나에 다시 단단한 근육질의 몸에 부딪혀 페리시어는 깜


짝 놀랐다. 약간 부딪혔을 뿐인데도 마치 라시드의 몸에 달라붙은 것처럼 느껴졌다. 파이살에게는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는데 웬일일까? 페리시어는 차라가 이상 하다는 듯이 차창으로 내다보고 있는 메르세데스 쪽으 로 걸어가면서 망연히 생각했다. 겨우 몇 분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으나, 왠지 한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이 느껴졌다. 도어를 열어주는 라시 드의 차디찬 시선을 힘없이 받으며 페리시어는 있는 힘 을 다해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차디찬 표면 밑에 숨은 그의 격정을 언뜻 본 것 같은 심정이었다. 파이살의 경우와는 반대로 부드러움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데 왜 이렇게 마음에 걸릴까? 4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 나 차라는 또 외삼촌과 다투었군요, 하며 동정하는 듯이 두세 번 페리시어를 훔쳐보았다. "페리시어. 낙심할 것 없어요. 저 역시 항상 당하고 있으니까. 저렇게 화를 내고 있는 것보다 울화통을 폭발 시키는 쪽이 훨씬 좋을 텐데." 차에서 내려 현관을 향해 걸어가면서 귓전에 대고 소 근거리는 차라의 말도 별로 위안이 되지 않았다. "당신은 이래라저래라 명령을 받아도 괜찮을지 모르 지만, 나는 절대로 안 돼요, 차라. 쿠웨이트의 큰거리를 혼자 거닐고 싶을 때는 그렇게 하겠어요!" 어깨를 으쓱하며 페리시어가 걸음을 재촉하자 차라도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 "라시드가 당신을 몹시 화나게 한 것 같군요." "화나게 했다고? 당치도 않은 말, 단지 호되게 모욕을 주었을 뿐이에요. 나를 마치……." 어떤 말로도 이 기분 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말해도 헛일이에 요. 결혼하면 우리들은 다른 길을 갈 수 있어요. 내겐 이것만이 최소한의 위안거리예요. 당신의 외삼촌과는 절 대로 한지붕밑에서 살 수 없어요."


매우 격렬한 말투였으므로 차라는 딱하다는 듯이 페 리시어의 팔에 가만히 손을 갖다 댔다. "틀림없이 라시드는 모를 거예요, 당신을 몹시 화나게 했다는 것을. 제가 말하겠어요……." "안 돼요. 그만둬요, 차라." 그렇게 된다면 라시드를 한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계획도 그야말로 수포로 돌아가 고 만다. "그래요. 그럼 벌써 외삼촌을 용서하셨죠?" 페리시어 의 마음을 오해한 차라는 겨우 안심이 된다는 듯 생긋 웃었다. "하지만 라시드 외삼촌도 악의는 없었을 거예 요. 때때로 자신이 걷잡을 수 없는 인간이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에요."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페리시어는 몹시 불쾌하 게 생각되었다. 차라는 호의적인 눈으로 라시드를 보고 있다. 용서해? 당치도 않은 말이지! "어머니는 오후에는 언제나 방에서 쉬기로 되어 있어 요. 하지만 지금부터는 더욱 더워지므로 우리들은 무조 건 낮잠을 자지 않으면 다음 일을 해낼 수 없게 돼요. 그러니까 집에서는 해질녘이 되지 않으면 모두가 모이 지 않죠." 조금 전의 이야기는 이젠 끝난 것이라고 생각 했는지 차라는 몹시 태평스러웠다. 차라와 헤어져 샤워를 하고 시원한 드레스로 갈아입 자 페리시어는 거울 속의 모습을 점검했다. 작은 퍼프 소매가 붙은, 옷깃의 커트도 수수한 레몬빛 코튼 드레 스. 아주 청초한 디자인이므로 그처럼 까다로운 라시드 에게도 패스하리라. 어깨에서 물결치는 방금 감은 머리 가 약한 황혼빛을 받아 평소보다 한층 더 붉게 빛났다. 거기에 가느다란 금목걸이와 팔찌를 하고 하이힐을 신 자,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어엿한 숙녀가 되었 다. 저녁 식탁에는 양고기 양념구이와 여러 가지 야채 파 이, 사프란 라이스 등 빛깔도 산뜻한 쌀 요리가 가득 차 려져 있었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들을 보니 페리시어는


오싹했다. 디저트는 과일과 보기에도 칼로리가 높을 것 같은 아 몬드 타트와 마름빵이 나왔다. 페리시어와 라시드는 과 일을 먹었으나 운무 파이살과 차라는 기쁜 듯이 아몬드 타트를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은으로 된 커피 세트가 놓인 트레이를 날라온 집사가 진한 터키 커피가 들어 있는 얇고 정교 한 컵을 건네 주었다. 오늘 밤에는 가족들에게 선물을 주려고 그것을 의자 밑에 숨겨 두었는데, 보통 때는 식사 후 곧 서재로 돌아 가는 라시드가 어찌 된 일인지 좀처럼 일어서려고 하지 않았다.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푸른기를 띠고 있는 그의 모습에는 맹호와 같은 위엄이 있었다. 이런 위엄은 유럽 사람들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름난 재 단사가 만든 옷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값진 비단 슈트를 입은 그는 어느 모로 보나 일류 비즈니스맨으로, 텐트에 편히 앉아 동아리끼리 한접시에 든 식사를 나누 어 먹고 있는 그런 인종과 동족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 었다. 하지만 역시 이 세련된 외관 밑에는 사막인의 피 가 맥박치고 있음이 분명하다. 운무 파이살과 차라의 실없는 잡담을 외면하고 페리 시어의 시선은 마침내, 맞은편에 앉은 수수께끼와 같은 사나이에게로 이끌리고 말았다. 은행 앞에서 알아차리게 된 정열을 감춘 두툼한 아랫입술의 곡선, 저 입술에 키 스당하면 어떤 기분이 될까? 파르스름한 피부에 겹쳐진 올리브색 피부가 문득 뇌리에 떠올라, 페리시어는 약간 몸을 떨었다. 이 모슨 해괴망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 녀는 강렬한 힘에서 몸을 지키기라도 하려는 듯이, 파이 살의 상냥한 표정을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그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도, 그와 비교해 보면 파이살이 못해 보이는 것은 어찌 된 영문일까? 파이살의 웃음 띤 눈을 생각해내려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는 것은 회색


의 싸늘한 눈과 빈정거리는 웃음 뿐이었다. 맞은편에 앉 아 있는 사나이를 의식하느라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 페 리시어는 엉겁결에 의자 밑에서 선물을 집어올렸다. "친절하게 대해 주신 데 비하면 아주 약소한 것입니 다만……." "선물? 우리들에게?" 차라는 즉시 눈을 빛냈다. "멋져 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안 해도 괜찮은데." "별로 좋은 것은 못 돼요." 문득, 맛있는 음식을 대접 할 때에 하는 파이살의 몹시 겸손한 말투가 머리를 스 쳐 갔다. 재산이나 권력을 과시하면 재난을 초래한다고 믿고 있던 시대의 유물인지, 아직까지도 아랍인들은 궁 전 같은 저택에 손님을 초대해 놓고도, '누추한 저희 집 에 와 주셔서 기쁩니다.'하고 말한다. 만약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차라의 환성을 듣고 조금은 안심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라시드까지도 두세 마디 칭찬은 했지만, 그러나 이런 것 에 야단스럽게 떠들어대다니 여자는 매우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띠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운무 파이살도 차라만큼 노골적은 아니었지만 충심으 로 기뻐해 주었다. "멋진 냄새죠, 어머니! 요전에 제다에 갔을 때 알 아 지루가 조합해준 것과 흡사해요. 기억나세요?" "기억하고말고. 최고급품이었지." 악의 없는 농담으로 생각하고 페리시어는 미소를 지었다. "저, 페리시어. 라시드의 선물은? 오후의 일을 사과하 지 않으면 안 줄 생각이에요?" 어떻게 할까? 라시드에게 줄 선물은 사오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지, 나디아에게 주려고 사온 서진 이 있었지. "이층에 있어요." 재빨리 기지를 살렸으나 얼굴이 화 끈거리는 것은 감출 수가 없었다. "오늘 라시드가 함께 식사를 할 건지 어떤지를 몰랐기 때문에." "그럼 이미 용서했군요. 그렇게 해주리라 생각했어요.


저, 빨리 가지고 와서 보여 줘요." 차라는 곧 어머니에 게 사정을 설명했다. "페리시어가 여행자 수표를 바꾸려 고 혼자 은행에 갔다고 외삼촌이 몹시 화를 내셨어요." 운무 파이살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곧 라시드 가 지나친 행동은 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모르고 그랬었 지만 페리시어는 자신이 엉뚱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눈치챘다. 페리시어는 서둘러 선물을 가지러 그 자리에 서 도망쳤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그러나 그 서진이 남녀 공용품이라서 천만다행이었다. 은빛 리번을 맨 작은 상자를 그에게 건넬 때 손가락 이 가볍게 닿았는데, 그때 페리시어의 전신에는 전류와 같은 것이 흘렀다.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면서도, 안개가 낀 듯한 회색 눈 은 허둥지둥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는 페리시어의 행동 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재미있다는 듯이 쫓고 있었다. "네에, 빨리 열어 보시라니까요!" 차라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재촉했다. "멋진 게 나올 것 같지 않아요?" 흰 벽, 보석처럼 빛나는 비단으로 짠 페르시아 융단을 온통 깐 마루 위에 놓인 오랜 세월이 지난 육중하고 윤 이 나는 귀중한 골동 가구. 오리엔트 취미로 통일된 방 에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니 청록색 유리가 더욱 신비롭 게 빛났다. 스코틀랜드의 게이스네스 주에서 만들어지는 유리 서진은 하나하나 직인이 정성을 들인 수제품으로, 작은 꽃과 말미잘 등이 유리의 바닷속에서 영원한 생명 을 누리고 있었다. 페리시어가 고른 것에는 말미잘이 들 어있는 것으로, 이것은 얼마 없었기 때문에 값이 비쌌지 만 차디찬 별천지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려 큰마음 먹 고 산 것이었다. 라시드는 흰 공단으로 싸 바른 작은 상자에서 유리 서진을 집어내어 천천히 손바닥에 얹었다. 너무나 멋져 서, 잠시동안 입을 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름다워요." 차라는 휴 하고 한숨을 쉬더니 조심스 럽게 집게손가락을 내밀었다. "차디차면서도 생기가 넘 치는 당신 같아요, 페리시어." "아랍인이라면 누구든 보물로 간직할 거요, 고든양. 이것을 만든 직인은 아라비아 만의 빛깔을 가두어 넣는 데 성공했군요. 아랍인에게는 물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 소." "서진이지만 잉크병으로도 쓸 수 있을 거예요." 약간 목이 잠겨 당황했다. 어쩐 일인지 이 선물만이 몹시 강 렬한 개성을 지닌 것처럼 느껴졌다. "당신은 관대하군." 지금은 은색으로 보이는 회색 눈 이 흠칫흠칫 겁먹은 듯한 녹색 눈을 사로잡았다. "나에 게는 분에 넘치는 것이오." 그는 서진을 상자에 도로 넣 고 뚜껑을 닫더니 일어섰다. "그럼 실례하겠소. 아직 할 일이 있어서." "이런 멋진 선물을 고르다니 당신은 취미가 고상하군 요. 하지만 라시드 것이 제일 멋져요. 외삼촌이 유리 제 품을 수집한다는 것을 파이살에게서 들었어요?" 페리시어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라시드 외삼촌에 대해서 파이살은 필요한 것을 전혀 말하지 않은 것 같 다. 왜 그랬을까? 일부러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침내 시야사를 보였군요, 페리시어. 그걸로 외삼촌 의 기분도 누그러질 걸로 생각해요." 도저히 그렇게는 여겨지지 않는다. 이런 일로 친해지 려 한다고 오해하면 그야말로 마이너스가 되고 만다. "곧 저의 생일이 다가와요. 우리들은 이삼일 동안 오 아시스에 가게 돼요. 결혼하게 되면 좀처럼 갈 수 없을 테니까요." 차라가 결혼에 관해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운무 파이 살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고 둘만이 남자, 차라는 자기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은 모양이었다. "오후에 웨딩 드레스를 만들 옷감이 도착했어요. 하지


만 저는 모르는 체하지 않으면 안 돼요." "모르는 사람하고 결혼해도 괜찮아요?" 페리시어는 그만 호기심에 사로잡혀 묻고 말았다. "물론 싫죠. 하지만 사우드가 모르는 사람이라니요?" "외삼촌이 혼약을 맺는 일에 애먹었다고 하시기에 틀 림없이……." 차라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렇군요. 그렇게 말하면 그래요. 대학에서 서로 만 났는데, 사우드의 집은 재산도 많고 만사가 구식이에요. 관습에 따라 이종누이와 결혼하게 되어 있었지만 그 이 종누이에겐 달리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것을 안 라시 드가 부지런히 뛰어다녔죠. 그러니 몹시 애먹었으리라 생각돼요. 결혼문제는 첫째 체면과 관계되므로 더욱 애 를 먹었을 거예요. 결혼식은 곧 올리게 되어 있지만 그 보다 먼저 형식적으로 서로 방문해야 돼요. 참으로 어리 석은 짓 같죠? 우리들은 서로가 모르는 사람인 체 해야 해요. 저는 영국식으로 결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라시드는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말했 어요." 갑자기 말이 나오지 않았다. 틀림없이 이 결혼은 정략 결혼으로, 라시드는 결혼을 성립시켜 이익을 얻으려 하 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물론 지참금의 액수도 막대하지만." 아주 당연한 일처럼 말하 는 투에 페리시어는 더욱더 놀라고 말았다. "라시드는 아주 씀씀이가 시원스런 사람이에요." 차라가 공부할 것이 있다면서 나가 버린 뒤에도 페리 시어는 얼마 동안 멍청히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라시드 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던 같다. 최소한도로 차라의 경 우에 대해서는.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 '급할수록 돌 아가라'는 논법으로 파이살의 애정을 식게 하려는 것이 아닐까? 머리가 완전히 혼란해지고 말았다. 잠시 동안 조용한 중정으로 나가 머리속을 정리하고 오자. 밤에 듣 는 분수 소리는 한결 각별한 것으로, 지금의 기분에 꼭


맞았다. 페리시어는 여러 종류의 새가 있는 새장 곁을 지나서 대리석으로 된 분수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고든양." 눈앞에 희미하게 떠오른 검은 사람 그림자, 귀에 익은 목소리. 페리시어는 엉겁결에 뒷걸음질 쳤다. 갑자기 온 세상을 감싸고 있는 벨벳과 흡사한 어둠이 위험을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전혀 예기치 못했던 라시드 가 나타날 줄이야. "셰이크. 당신은 외출했다고 차라가……." "지금 돌아오는 길이지. 당신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좋 은 밤이라 조금 걷고 싶어져서……." 페리시어는 곧 안전한 집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으나, 걸음도 내딛기 전에 어깨를 잡혀 돌려세워지고 말았다. "당신을 만나게 돼서 마침 잘 됐군." 회색 눈의 마력 에서 도망치려는 기력은 곧 사라져 버렸다. "이야기할 것이 있소." "어머, 명령만 하면 언제든지 저 따위는 불러낼 수 있 지 않아요? 가장의 권위로도 이젠 그 정도의 일을 하지 못하시나요?" 어둠 속에서도 눈매가 날카로워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말하면, 우선 당신이 곤란할 테고 누님도 무슨 일인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시겠지. 가장의 권위 문제가 아니오. 그런데 파티마 에게서 들었는데, 오늘은 차라가 시내를 안내하기로 약 속했었다면서? 모처럼의 계획이 허사가 된 걸 사과하는 의미에서 내주에 내가 안내하겠소. 금요일은 이슬람교의 성스러운 날이므로 안 되지만 다른 날은 언제라도 좋아 요." 친절도 하시군! 하지만 이런 기분 나쁜 라시드와 함 께 쿠웨이트 구경을 하다니, 큰일 날 소리. "그렇게까지 해주지 않아도 좋아요." 너무나 성급히 대답하는 바람에 싫어한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보이고


말았다. "아무래도 나와 타협할 생각이 없는 것 같군."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가해졌다. "<평화의 상징으로 올 리브 가지를 내놓는다>던가? 영국 속담이지. 내가 내민 올리브 가지를 받는 게 좋을 거요. 차라는 당신에게 완 전히 빠졌어. 당신이 어떤 여성인가 좀더 분명하게 경고 해 두지 않았던 내 잘못도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렇 게 되어 버린 마당에, 곧 출가할 차라에게 우리들의 반 목을 보여 혐오감을 주고 싶지는 않군. 당신 생각에도 그렇지 않은가?" "오늘 오후, 그렇게도 호되게 저를 모욕하시기 전에 그렇게 생각하셨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그런가." 어둠을 꿰뚫는 눈길에 페리시어는 움찔했 다. "이렇게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해도 협력해 주지 않 는다면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 없군." 갑자기 무서워졌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상쾌한 분수 소리. 그 물소리가 불안감을 불러일으켜 신 경을 거스르는 소리로 들렸으며, 기분 나쁜 침묵이 깊어 만 가는 느낌이 들었다. "매수하려고 생각하셨다면 생각을 고치시는 편이 좋 을 거예요. 어떤 것이든 파이살에 대한 저의 사랑과 바 꿀 순 없을 테니까요." "정말?" 라시드는 위엄 있고 무시무시한 밀림의 맹수 처럼 여유 있는 몸짓으로 옆으로 다가왔다. 어둠 속에 희미한 윤곽만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따라 오게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나이. 페리시어는 바싹 마 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면서 필사적으로 어둠 속에서 살펴보았으나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어깨에 놓인 손에서 노여움이 사라지고 부드럽게 마사지하는 것 같 은 움직임을 보였을 때, 페리시어는 본능적으로 상대에 게 위협을 느껴 심장이 심하게 고동쳤다. 라시드는 어깨를 잡았던 손을 허리께로 옮겨 쇠사슬 로 묶듯이 해서 움직일래야 움직일 수 없게 된 페리시


어를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선택의 여지는 없어요, 고든양." 부드러움을 가장한 짓궂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처음부터 줄곧 반항만 했 으니 그 대가를 받아야 해.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어떤 보복을 당하는가를 모를 만큼 세상 물정을 모르지 는 않겠지." 기가 죽은 페리시어는 소리도 지를 수 없었 다. "당신 생각도 그렇다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으나 힘찬 팔에 당할 수가 없었 다. 따뜻하고 단단한 가슴에 꽉 안겨서 정신이 희미한 가운데, 미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입술이 덮쳐오는 것 을 느꼈다. 두툼한 아랫입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잘못된 것 같 았다. 엑조틱한 동방의 밤, 몹시 거친 사막인의 피를 이 어받은 사나이의 품안에 안긴 페리시어의 뇌리를 한순 간 스쳐간 로맨틱한 그림은, 고집쟁이를 벌하려는 쓰디 쓴 노여움이 담긴 키스에 무참히 깨어지고 말았다. 물론 오리엔트의 꿈의 밤에 등장하는 것은 파이살이지, 가냘 픈 몸을 꼼짝 못하게 안고 있는 이 사나이는 아니 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 때문에 반항심이 생겨 페리시어 는 입술을 꼭 다물고 힘찬 키스를 거부했다. 그러나 아 플 정도로 안고 있는 완력을 당할 수는 없어서, 결국 라 시드에게 키스의 감미로움을 마음껏 맛보게 하는 결과 가 되고 말았다. 겨우 몇 초 동안이 영원처럼 여겨졌다. 팔이 풀렸을 때에는, 뜻밖에도 매의 발톱에서 빠져나온 작은 동물이 얼마 동안 움직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페리시어는 전신을 오들오들 떨고만 있었다. 페리시어는 처신해야 할 바를 모른 채 힘이 빠진 손으로 자꾸 단단한 가슴을 때렸으나 곧 그에게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어떤가. 또 나에게 도전할 생각인가?" "당신이 어떤 짓을 했는지 파이살에게 말하겠어요." 모욕당한 분노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럴 용기도 없는 주제에." 비웃음이 메아리쳐 되돌 아왔다. "이 나라에서는 불미스런 짓을 한 두 사람은 같 은 벌로 다스리고 있지.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격이야, 고든양. 파이살에게 꼭 말해요." 이 말의 뜻을 겨우 깨달은 순간, 갑자기 팔이 풀렸으 므로 페리시어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렇지, 그래. 잊을 뻔 했군." 라시드는 거칠게 재킷 의 포켓에서 서진이 들어 있는 작은 상자를 꺼냈다. "나에게 줄 선물이 아니었지? 주려고 생각했던 사람 에게 선물하도록 해." 서진이 든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나를 위해 이런 걸 샀을 리가 없다는 건 당신과 마찬 가지로 나도 잘 알고 있어. 서투른 연극으로 모욕하는 것은 집어 치우는 게 어때. 파이살에게 주지 그래. 그라 면 받는 방법도, 고맙다는 인사말도 알고 있을 텐데!" 잘못 생각한 거예요, 사실은 나디아를 위해 산 거예 요, 라고 말하려 했으나 그는 이미 등을 돌려 버렸다. 서늘한 정적 속에 감싸인 밤의 정원에 라시드의 무언의 노여움이 메아리쳤다. 라시드는 잔혹한 방법으로 페리시어를 욕보이고, 파이 살과의 애정을 짓밟아 버린 것이다. 페리시어는 갈기갈 기 찢긴 신경을 진정시키기 위해 부드러운 파이살의 포 옹을 회상하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정신을 집중시켜 도 단 한 조각의 감촉도 되살아나지 않았다. 게다가 거 칠고 염치없는 키스에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으나 파이 살과 키스할 때처럼 흠칫흠칫 뒷걸음질 치지는 않았으 니……. 아마 몹시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자위하듯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그녀는 손바닥 위에 놓인 작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그 서진이 얄미워져 견딜 수 없게 된 페리시 어는 충동적으로 작은 상자를 될 수 있는 한도까지 멀 리 던져 버렸다. 우거진 장미 덤불 근처에 떨어진 듯, 분명하지 않은 소리가 쓸쓸하게 들려 왔다.


안전한 침실로 되돌아와서 겨우 한숨 쉬고 팔을 내려 다보니 라시드에게 잡혔던 곳에 멍이 들어 있었다. 마치 그의 키스를 말끔히 씻어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페리시어는 비누를 흠뻑 칠해 전신을 씻었다. 그런 사람 은 정말 싫어! 거울 속에는 뺨에 홍조를 띤 고집스런 얼굴이 있었다. 그런데, 라시드와의 키스는 갑자기 당한 일이라 그렇다 하더라도 이 눈물은 왜일까? 곤두선 신경을 진정시켜 줄 잠을 기다리면서, 페리시 어의 머리속에는 온갖 생각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라 시드의 권위를 무시하고, 혼자서 쿠웨이트의 큰 길을 활 보했다는 단지 그것만으로, 그녀는 지금까지 갖가지 일 에서 자신을 지켜주던 순진성을 영원히 잃어버리고, 그 대신 난생 처음 진짜 공포란 것을 맛보게 되었다. 라시 드를 잊기 위해 감은 눈꺼풀 속에 파이살의 모습을 그 리려 했으나, 자꾸 멀어지고 빛깔이 희미해지기만 하여 핀트가 맞지 않는 사진 같은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5 여성들의 이야깃소리와 웃음소리로 방안은 들끓고 있 었다. 오늘은 페리시어를 위해서 운무 파이살이 친구들 을 초대하여 다과회를 열어 주고 있었다. 모인 인원수로 미루어 볼 때, 그녀는 이 거리의 모든 부인들과 아는 사 이가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거의가 운무 파이살과 동년배인 부인들은, 서로 의논 이라도 한 듯이 검은 코트를 걸치고 호화로운 차에서 얌전하게 내려 한눈도 팔지 않고 똑바로 현관까지 걸어 오더니, 한발짝 들어서기가 무섭게 코트를 벗는데, 그 밑에는 한결같이 파리의 최신 유행인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아랍식의 손님 접대는 하나에서 열까 지 모두가 희한했다. 다마스커스 능직 쿠션에 편히 앉은 페리시어는 우아하고 호화로운 모임을 십분 즐기고 있 었다. 액선트에 흠이 있기는 해도 모두가 영어로 이야기 하며, 런던에 갔다온 여성도 많았다. 쉴새 없이 질문이


쏟아졌으나 여성들의 자유로운 생활상을 듣고는 한결같 이 눈이 휘둥그래졌다. 대리석으로 된 바닥에 다마스커스 능직 쿠션. 중고 가 구로 꾸민 런던의 옹색한 아파트와는 어쩌면 이렇게도 차이가 날까. 그러나 이미 페리시어는 깨끗한 흰 벽에 비단이나 공단을 흥청망청 사용한 화려한 아랍풍의 가 구가 이루는 강렬한 조화를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 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마루의 쿠션에 책상다리를 한 운무 파이살의 모습도 눈에 익게 됐으나, 이곳을 지배하 고 있는 끈질긴 남존여비의 풍조에만은 아무래도 익숙 해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차라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는 이보다 심했다고 한다. 실제로 가족에 관한 일에 있어서 는 라시드가 어떤 일이건 진보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 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의 범위를 좀 더 넓혀서 페리시어도 동아리에 넣어 준다면 불평은 없 을 텐데! 도어를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자 부인들은 곧 베일에 손을 뻗더니 별로 서두르진 않고 천천히 썼다. "주인이십니다, 마님." 메이드는 베일을 쓸 필요가 없 었으므로 세리나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도어를 열러 갔 다. "그래요. 페리시어를 데리러 온 거예요. 라시드가 쿠 웨이트 시가를 안내하기로 약속했었거든요." 그 뒤는 아 라비아 어로 두세 마디 더 말하자 몇몇 부인들은 서로 눈짓을 했다. "라시드는 완벽한 신사니까 괜찮지만, 우리들 시대에 는 이런 일은 허용되지 않았어요." 귀엣말로 가만히 속삭인 옆자리의 부인은 다리가 저 려 바로 서지 못하는 페리시어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어릴 때부터 익숙해져 있었다면 문제 없겠으나, 오랜 동 안 책상다리 자세로 있는 것은 실로 고역이었다. 라시드가 전날 밤 중정에서, 시내를 안내하겠다고 분 명히 말했지만 설마 본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두


려워하고 있다고 여길 것이 억울해서 거절할 수도 없다. 손님이 온다고 하기에 오늘은 특별히 몸단장에 신경 을 쓰고 있었다. 해맑은 피부색을 돋보이게 하는 연한 오렌지색의 슈트에 크림색의 실크 블라우스, 파이살이 억지로 떠맡기다시피 사다 준 금으로 된 가느다란 팔찌 가 움직일 때마다 맑고 귀여운 소리를 냈다. 그때 에메 랄드 반지는 혼약 허가를 받을 때까지는 절대로 낄 수 없다고 말하며 파이살에게 돌려주고 왔었다. 하지만 아 쉬운 대로 그거라도 있다면 그래도 마음이 든든할 텐 데……. 오리엔트풍의 의상이라면, 어릴 때부터 입어 익숙해진 쿠웨이트 여성을 당할 수는 없지만, 이런 스타일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는 않는다. 페리시어는 벽에 걸 린 등신대의 거울에 비친, 장미색의 뺨에 눈을 빛내고 있는 자기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운무 파이살의 친구들은 모두 페리시어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주었으므로 이것으로 하나의 벽은 뛰어넘었다 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라시드가 아무리 문화와 환경의 차이점을 들어 반대해도, 서와 동은 교묘하게 협 조해 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페리시어는 자신만만한 발 걸음으로 도어를 향해 걸어갔다. 높다란 작은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뿐인 어둑어둑 한 현관의 홀에서 처음에는 라시드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다. 이윽고 어둠에 눈이 익숙해져, 손목 시계를 보 는 아주 남성적인 몸짓에 무의식중에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라시드가 이쪽을 돌아봤다. 거무스름한 나무 도어가 테두리가 되어, 그 안에서 미소를 띠고 있는 페리시어는 문자 그대로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라시드의 표정은 알아볼 수 없었으나, 페리시어는 이 번만큼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보다 한수 위에 설 결심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손님……." "설명할 것까지는 없어. 저 부인들의 시시한 잡담 따


위는 잘 알고 있으니까." 이 무슨 무례한 말투인가. "시시하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그것은 당신 같은 남성들이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게 아니에요?" 활짝 갰던 표정은 사라지고 그 대신 얼굴에는 노여움 이 가득 찼으나 라시드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그럼 당신은 파티마의 손님들에게 여성 해방의 설교 라도 했단 말인가? 그런 짓을 하면 그녀들의 남편에게 미움을 받게 돼요." "별로 두렵지도 않아요."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잘 알아 둬. 그들에게 는 자기 아내들을 당신과 사귀지 못하도록 할 힘이 있 지. 그것은 파이살의 마음에도 들지 않는 일이지. 그가 아무리 유럽식으로 보인다 해도, 역시 제 아내가 아랍의 관습을 따라 주길 기대할 거야." 페리시어는 대답도 하지 않고 새침한 표정으로 머리 를 들고 동쪽으로 걸어갔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 편으 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될 장본인을 안달나게 하는 것이 몹시 즐거웠다. 지금까지 이렇게 심술궂은 기분이 된 일 은 없었는데. 하지만 하필이면 왜 라시드에게 이런 기분 이 일어나게 됐을까? "상관없어요. 우리들은 쿠웨이트에는 살지 않을 테니 까요." "그런가? 하지만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고든양?" 그는 페리시어를 흘끗 보았다. "뭘요?" "샐러리맨은 명령받은 곳으로 부임하지." "명령하는 사람은 당신이죠?" "아마 그렇게 되겠지." 만족스러운 듯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신경이 찌 르르 소리를 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함께 가지 않겠다 는 말을 하려다가, 문득 오늘을 놓치면 차라의 생일 선 물을 못 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입을 다


물었다. 가슴이 후련해질 것 같은 말과 프라이드를 죽이 며, 페리시어는 오늘은 싸늘한 눈으로 마음껏 그를 노려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요 며칠, 차라의 생일을 오아시스에서 보내기 위해 온 집안이 준비로 부산했다. 오늘 아침에도 차라가 웃으면 서 말했지만, 확실히 라시드가 진두 지휘를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진행될 수 없었다. 페리시어는 이런 특별한 일 에 타인인 자기가 방해가 되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차라는 일소에 붙이고 말았다. 실제로 사귄 지 는 며칠 안 됐지만 두 사람은 친구라도 해도 좋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됐고, 페리시어는 그녀 때문에 라시드에 대한 적의를 어느 정도 억누르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날 밤 중정에서 그가 말한 대로, 그들의 사이가 험악한 것 을 알려서 차라를 슬프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이유로, 암묵 중에 일시적인--적어도 페리시어의 생각은 그랬다 --휴전 조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할 거야." 느닷없이 중얼거리 는 그의 한 마디에 페리시어는 멍청해졌다. "함께 가지 않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생각을 고쳐 먹었지? 그렇 지? 거짓말을 해도 소용없어. 거짓말쟁이와, 재산을 목 적으로 결혼하고자 하는 인간. 두 가지 모두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지." 너무나 지나친 말에 갑자기 말도 나오지 않고, 반박할 생각도 일어나지 않았다. 멍청히 보고 있으니 라시드는 운전석의 도어를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알리는 오 지 않고 둘이서만 나가는 것이다. "전 뒷자리에 앉겠어요." 안쪽에서 보조석의 도어를 여는 것을 보고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그러는 것이 아 랍식이 아니에요? 여성은 얌전히 뒤에 앉아서 운전은 주인님께 맡긴다, 그렇죠?" "오늘만은 유럽식으로 하지. 일일이 어깨너머로 돌아 보면서 이야기하는 건 위험해.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엉 뚱한 일을 생각해 낼 걸. 이상한 오해는 그만두지, 고든


양." 노골적으로 빈정대는 듯한 싸늘한 목소리로 조소를 당하자 페리시어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일 은 절대로 없겠지만, 만일 내가 좋지 못한 일을 생각하 고 있었다고 해도 노상에서 어떤 짓을 할 수 있을까? 영국에서는 당신이 어떤 드라이브를 즐겼는지 모르지만, 이곳에서는 주위의 사정이라든지 여러 가지를 생각해야 해." 이런 무례한 사나이의 코가 납작해지도록 해줄 따끔 한 말은 없을까? 이 도어를 힘껏 두드리면 기분이 좀 상쾌해질 텐데. 페리시어는 운전석에서는 차 밖에 있는 자신의 표정 따윈 보이지 않으리라 생각하여 완전히 그 를 깔보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것은 큰 실수였다. 백미 러를 생각지 않은 것이었다. "심장에 칼을 푹 찔러 주었으면 하는 그런 심정이겠 지, 고든양? 그러나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야. 이 나라 에선 <눈에는 눈을>이란 법이 아직 살아 있거든." "심장에? 당신도 심장이 있어요?" "자, 타시오, 고든양. 나에게 그렇게 대드는 것보다, 그 에너지를 좀더 나은 것을 위해 쓰도록 남겨두는 편 이 좋을 거요." 이건 악마도 무색할 정도가 아닌가! 페리시어는 속이 뒤집혔지만, 보조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비스듬히 몸 을 구부리고 도어를 닫으면서 능글맞게 웃는 라시드를 보지 않으려고 했으나, 탄력성 있는 피부, 뚜렷하고 반 듯한 눈 언저리에 그림자를 드리운 짙고 긴 눈썹이 강 하게 눈으로 파고든다. 속에 강철을 감춘 잘생긴 얼굴. 파이살을 이렇게 의식해 본 적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 었다. "점검에는 패스했나?" 허를 찔린 페리시어는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어떤 이 유에서든--지금은 순수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매끄러운 피부와 완벽에 가까운 조각처럼 단정한 용모에 그만 매 료되어 버렸으나--자신은 그에게 관심이 있음을 간파당


하고 말았으니…….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서와 동의 피가 섞여있는 라시 드는 왕후와 같은 품위와 힘을 겸비했고, 사납고 용맹스 러운 아랍 민족의 피만을 받은 파이살에게는 격정이 없 다니,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 아닌가.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말도, 찌 르는 듯한 눈매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 매는 몇천 미 터 상공에서 먹이를 노린다고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라시드는 바로 그 매와 같은 것이다. 온화한 날씨라 해안을 드라이브하는 것이 기분이 좋 아야 할 텐데, 페리시어는 즐겁기는커녕 무의식중에 주 먹을 불끈 쥐고 있어서 몹시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드 러냈다. "긴장을 풀어요. 손수 운전할 수 없어 화라도 난 건 가? 왜 유럽 여성은, 뭐든 자신의 힘으로 하고 싶어 해 서 여성다움을 잃어버리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 곤 할까?" "그건요, 남성을 너무 믿다가 쓰라린 맛을 많이 봤기 때문이에요." 방자한 조지 숙부의 일을 상기하여 그만 도전적인 말투가 되어 버렸다. "그럼, 파이살과 결혼하고 싶다는 것은, 그라면 신뢰 할 수 있다, 그런 말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휘감겨 붙는 포도 덩굴이군. 덩굴은 몹시 끈질긴 것이니 나도 전술을 바꾸는 편이 좋겠는데. 그러나 파이살은 당신이 휘감겨 붙을 만큼 강하지가 못해. 그와 결혼하면 당신은 연인과 모친, 때로는 형무소의 간수, 이 세 역할을 겸하지 않으 면 안 될걸." "궐석 재판이라고 이러쿵저러쿵 멋대로 말할 수 있나 요?" 고집스럽게 반격했으나, 속으로는 라시드의 말대로 라는 걸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생각한 대로 되지 않을 때면 파이살이 응석받이처럼 떼를 쓰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런데 당신은 참 정직한 것 같군." 마치 그렇게 인


정하는 것이 비위에 거슬리기라도 한다는 듯이 말투에 가시가 있었다. "영국 대사관에 불일이 있을 때는 언제 라도 말해요." 아무리 그렇기로, 이제는 파이살과의 결혼은 단념했겠 지, 그렇다면 빨리 귀국 신청을 하러 가라고 말하고 싶 은 모양이다. 파이살이 시키는 대로 이런 곳에 오다 니……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그는 편도 비행기표만 사주며, 곧 쿠웨이트에서 만나 결혼하자고 했으나, 이런 상황으로는 페리시어가 이곳에 있는 한 라 시드는 파이살을 불러들이지 않으리라. 그리고 스물 다 섯이 되는 것을 기다리기 위해 3 년 동안 이 집에서 식 객 노릇을 계속할 수도 없으리라. 페리시어는 새 드레스 와 선물을 사기 위해 얼마 되지 않던 저축을 모조리 써 버려 돌아갈 여비마저 없었다. 파이살에게 돈을 보내 달 라고 하는 수밖에 없을까? 차는 위병이 경호하는 원수 관저에 접어들었다. "쿠웨이트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원수에게 직소할 수가 있지." "남성에 한해서 말이죠?" "거 참, 남성 얘기만 하면 곧 시비조로 나오니. 아니 면 애써 손에 넣은 자립 정신을 다시 한번 남성군과 싸 워서 잃어버리고 싶은 건가?" 페리시어는 악의가 담긴 눈매에서 얼굴을 돌렸다. 지 금까지의 생활에서는 특별히 여성 해방을 주장하며 살 진 않았지만, 이런 말까지 듣고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 다. "하지만, 이 나라 여성의 지위가 몹시 낮다는 것은 인 정하죠?" "정의를 위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그런 말인가? 그런데 여성에게도 권리는 있지. 직소할 수도 있고, 이 혼을 청구할 수도 있어. 그러나 그런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가?"


"액면 그대로는 할 수 없는 음험한 압력의 거대함을 보이고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실눈이 된 회색 눈을 보 고 급히 눈을 돌렸다. 그때 차가 급커브를 돌게 되어, 그의 팔이 페리시어의 앞가슴을 스쳤다. 금세, 파이살의 팔 안에서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전이라도 될 듯한 전율이 전신을 꿰뚫 어 깜짝 놀랐다. 이것은 뭘까? "자, 여기가 은행가야, 고든양. 여기서부터는 걷기로 하지." 주차장은 현대식 고층 빌딩의 지하실에 있었다. "은행의 본점은 이 빌딩에 있어. 건설업에 손을 댄 최초 의 빌딩이 이것이지." "수많은 것들 중 하나란 말이죠?" 은행이 특히 건설 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파이살에게서 들어 알고 있 었다. 차에서 내리자 라시드가 예의바르게 팔을 빌려 주는 데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일순간 그의 몸이 스치기만 해도 움찔하는 자기의 무기력함에 화가 나서 얼굴이 달 아올랐다. "그래, 그대로야." 회색 눈이 재미있다는 듯이 장밋빛 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건설업에 투입하는 융자는 은행 총이익의 40 퍼센트 를 차지하고 있지. 이런 이야기는 시시한가?" 일부러 돌 린 페리시어의 옆얼굴을 보고 싱긋이 웃었다. "아니야. 그렇지는 않을 거야. 일반적으로 여성들은 대개 돈을 쓰 는 것도 좋아하지만, 돈을 버는 이야기도 아주 좋아하거 든." "그래요? 하지만 저는 예외예요." 폭넓은 큰길가 양쪽에는 가로수가 서 있고, 여기저기 에 빛깔도 선명한 열대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화단이 있었다. 예전에는 불모의 사막이었던 곳에, 지금은 분수 가 상쾌한 물소리를 내고 작열하는 태양을 가로막는 푸 르른 나무들이 시원스런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쿠웨이트의 본드 스트리트야." 보석상의 쇼윈도에 진


열된 엑조틱한 액세서리에 눈이 휘둥그래져 있으니, 비 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아니고 파이살과 같이 왔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파이 살이라면 어거지를 써서라도 사달라고 했겠지? 하고 넌 지시 빗대어 말하는 것 같았다. "그건 그래요.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이유에서는 아니에요." 페리시어는 딱 잘라 말하면서, 뭔가 차라에게 선물할 수 있는 자그마한 것이 없을까 하고 바짝 다가가서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보석을 제일 좋아하는 차라가 선물을 열어보고 침을 꿀꺽 삼키는 장 면이 떠올랐지만, 도저히 손을 댈 수 없는 값진 것뿐이 었다. 그만 한숨이 나왔다. "너무나 고급품뿐인가? 어떤 곳을 기대하고 있었지? 몰려오는 거지와 왁자지껄한 시장인가? 쿠웨이트엔 거 지는 이미 없어졌어. 전에는 기도 시간을 알리는 눈먼 사나이들이 사원에 고용되어 있었지. 맹인이라야 베일을 쓰고 있지 않은 여성이 있어도 불 수가 없으니까. 그런 데 지금은 사원의 탑에도 스피커가 설치되어, 정부의 보 호를 받게 된 그들은 이제 편안히 지내게 됐단 말이야." "정말로 여성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맹인 을 썼단 말인가요?" "도가 지나쳤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의 아내의 얼굴을 보는 것만도 범죄였어. 영국에 서 친구의 아내와 바람을 피우는 것 이상으로 말이야. 그러나 지금의 영국에서는 그런 일은 다반사인 것 같지 만." "제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엔 그런 사람은 없어요!" 라 시드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나와는 별 상관 없는 일이야. 괜찮다면 차로 돌 아갈까?" "어머나, 아직 차라에게 줄 선물을 사지 않았는데." "그것 때문에 온 건가! 무엇을 살 생각이었지?" 라시


드는 돌아서서 페리시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 다. "무엇이냐고요……. 제 힘으로도 살 수 있는 것이에 요. 이 가게에는 없어요." "아마 그렇겠지. 사데루의 가게는 쿠웨이트 최고의 보 석상인 걸. 게다가 사우드나 그의 집에서 하는 수준에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걸." "따라갈 생각은 전혀 없어요. 단지 뭔가 성의를 표하 고 싶을 뿐이에요." "상담해 줄까?" 내버려 둬요, 하고 말하고 싶었으나 참고 가만히 고개 를 끄덕이자, 이제는 굴복했다고 생각했는지 라시드는, 반드시 싫은 것만도 아니란 듯이 빙긋 웃었다. "그럼 갑시다, 고든양." 그가 페리시어의 팔을 잡고 길을 막 건너려고 하는데, 검게 마스카라를 칠한 진즈 모습의 젊은 여성이 라시드에게 말을 걸어 왔다. 페리시 어와 같은 또래로 보였으나, 동방 여성은 조금 겉늙어 보이므로 아마 한두 살은 아래이리라. 라시드는 얼굴에 상냥한 웃음을 띠며, 빠른 말로 지껄이는 그녀의 아라비 아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야스민, 영어로 말해요. 이쪽은 야스민. 친구의 누이 야. 영국의 대학에 유학갔다 왔어. 이쪽은 고든양. 파이 살의 친구로 얼마 동안 우리집에 머물 거야." "그래요, 파이살은 뉴욕에 있다고 하던데?" 긴 흑발을 치켜올리듯이 흔들며 야스민은 페리시어를 빤히 응시했 다. "당신이 그의 친구와 이렇게 사이좋게 지내는 걸 파 이살이 안다면 뭐라고 할까요, 라시드? 그렇지 않다면 공유하는 것도 재미가 있나요?" 그렇게 말하고는 홱 등을 돌렸으므로 되받아 말할 틈 도 없었다. 라시드는 찌푸린 얼굴로 멀어져 가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밉살스런 말을 하는 것은 그녀가 파이살과 한 때 영국에서 서로 알게 되어 교제했었는데, 당신을 파이


살의 친구 이상의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그러 나 시시한 소문 따위를 내진 않을 거야." 야스민과 파이살! 그런데 라시드와의 관계를 오해한 것 같은 야스민에게 연민의 정 같은 것은 느꼈지만, 좀 처럼 질투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처구니없는 일 이군. 라시드가 자기에게 눈을 돌리는 그런 일이 있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두 사람은 어둑어둑한 미로 같은 좁은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양쪽에 있는 건물 중에는 옛날에 흙벽돌로 지은 집도 몇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디로 갈 참이에요?" 제라바를 입고 말없이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어딘지 모르게 이국적인 냄새가 감도 는 어둑한 뒷골목. 아차 하는 순간에, 유럽에서 10 년 전 의 동양의 도시로 잘못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괜찮아, 노예시장은 아니니까. 그러나 사막의 오아시 스에서는 아직까지도 싸움에 진 종족을 노예로 삼아 매 매하고 있지. 법률에서는 금하고 있으나 쉽사리 근절되 지 않아." 예스러운 구조의 작은 가게에서는 장사꾼들이 길가는 사람들에게 한창 소리를 지르고 있다. 키가 큰 라시드가 옆에 있다고 생각하니 아주 마음이 든든했다. 이윽고 라시드가 한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작 은 가게는 몹시 어두워서, 실내에 눈이 익숙해진 후에야 선반에 늘어놓은 작은 병과 작은 상자 등이 보이기 시 작했다. 삼나무 재목, 용연향, 백단향, 그 밖의 맡아본 일도 없는 향기로운 냄새가 가득 차 숨이 막힐 정도였 다. 라시드가 안내한 곳은 향수 조합사의 가게였다. 향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이 흐릿해져서 황홀한 기분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동안에 라시드는 작은 소리로 가게 주인과 뭔가 속살거리기 시작했다. 호 두처럼 얼굴이 쭈글쭈글한 주인은 거기만 생기가 감도 는 검은 눈으로 페리시어를 응시하고 있었다. "차라를 보지 않고도 꼭 맞는 향수를 조합할 수 있을


까요?" 페리시어는 어쩐지 무시무시한 주위의 분위기에 기가 죽어 라시드의 뒤에 숨듯이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차라 아가씨 겁니까?" 이 노인은 영어를 할 줄 알았 다. "그렇다면-- 이것 보자, 요전에 왔을 때에 주문한 게 있지요. 더 많이 필요한가요?" "네, 부탁합니다." 페리시어는 불안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지, 그래. 깜박 잊고 있었군요." 노인은 얼굴을 활짝 폈다. "아가씨는 곧 마님이 된다고 했죠. 그렇다면 마님에게 알맞은 것을 더 넣어야 되겠군." 저쪽 병에서 한 방울, 이쪽 병에서 한 방울, 신기한 듯이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엷은 호박색의 액체는 작은 크리스탈 병에 가득 채워졌다. "조금 맡아 보지 않겠소?" "아뇨, 이것은 아가씨의 아름다움에는 걸맞지 않습니 다." 주인은 라시드와 아라비아어로 몇 마디 말을 주고 받더니 다시 페리시어 쪽으로 돌아섰다. "아가씨는 지금 부터 꽃이 피려고 하는 장미꽃 봉오리. 그러므로 거기에 걸맞는 향기가 아니면 안 됩니다." 어두워서 얼굴이 붉게 물든 것을 보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러나 확실히 주인이 말한 대로, 페 리시어는 남성의 애정을 기다려 꽃을 피우려는 젊고 순 진한 꽃봉오리였다. 말없이 라시드의 뒤를 따라 가게 밖으로 나오자, 밝은 빛에 일순 현기증이 났다. 더위를 피해서 해질녘까지는 가게를 닫는 풍습이 있는 듯, 어느 가게나 입구는 닫혔 고 쇼윈도에도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그때 등뒤에서 향 수 가게 주인이 무어라고 하며 부르자, 라시드는 다시 어두컴컴한 가게 안으로 되돌아갔다. 들여다 보니 두 사람은 이마를 맞대고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페리시어는 입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주인은 다시 분주하게 몇 개의 병을 선반에서 내렸다. 갑자기 영국의 라벤더 향기가 감돌아 일순 고향의 풍경 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으나, 이윽고 걷잡을 수 없이 갖 가지 향기가 뒤섞여 주위는 향기로움에 감싸여 갔다. 누 님도 한 병 사다 드리려는 생각일까? 하지만 저렇게 소 곤대는 것을 보니 아마 다른 여성--정숙한 동방 여성에 서 세련된 유럽풍의 여성으로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는 사람을 위해 산 것이 틀림없다. "고든양, 갑시다." 이 거만스러운 '고든양'에는 이미 질려 버렸다. 언제까 지 참고 견뎌야 할까? 가게 밖으로 나온 순간 또다시 싸늘한 신경질적인 목 소리가 날아왔다. "혼자 있지 말라고 누님과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전혀 귀담아듣지 않는군. 아니면 어떤 말도 듣지 않을 생각인가?" 하는 말을 듣지 않는다구요! 홱 돌아선 페리시어의 녹색 눈은 노여움 때문에 암녹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와 싸우기는 싫었으나 그러기 위해서 프라이드를 짓밟히는 것은 더욱 싫었다. "같이 들어가지 않은 것은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 문이에요. 소곤대고 있기에 제가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 기인 줄 알았어요." 페리시어는 화가 나서 그만 말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해버렸다. "침대는 같이 쓰지만 그 외 의 것은 셧아웃 당하고 있는 여인을 위한 선물에 대한 상담이라던가……." "이 향수를 선물받기로 되어 있는 여성의 타입을 실 로 잘 표현했어. 그러나 저 주인의 의견은 다르더군, 고 든양!" 충격을 받은 얼굴을 보고 그는 비웃듯이 웃었다. "당신에게 주라고 조합해 주었어. 내가 시킨 게 아니고 그가 스스로 그랬어. 자아, 받아요. 당신이 간직하고 있 는 천진스러움에 꼭 어울릴 거라고 말했어. 참다 못해 안경을 쓰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해 주고 싶었지. 나는


파이살이 어떤 인간인지 잘 알고 있어. 좋아하는 여성의 타입도." 이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도망가려고 등을 돌렸으나 곧 어깨를 붙잡히고 말았다.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 지금도 이 부근의 가게 중에 는 위험한 곳이 많아. 미아가 됐다가 그대로 행방불명이 되어 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걱정도 팔자군요. 셰이크 라시드. 미아가 되었다고 해도 당신 도움은 청하지 않을 거예요." 힘껏 몸을 뺀 순간에 뾰족한 돌멩이에 복사뼈를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너무나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고 아래 를 내려다보니 상처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곧 웅크리고 앉은 라시드는 입속으로 뭐라고 중얼중 얼 욕을 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괜찮아요." 길다란 손가락이 놀 랄 정도로 부드럽게 상처에 닿는 것을 느끼고 페리시어 는 움찔했다. "피가 나고 있으니 급히 소독을 해야겠군." 백 속에 오드콜로뉴가 배어들게 해 놓은 티슈 페이퍼 가 들어있는 것이 생각나서 페리시어는 재빨리 그것을 꺼냈다. "내가 하지." 위엄있는 말투에 페리시어는 반항할 수 도 없어서, 얌전히 그것을 건네줄 수 밖에 없었다. 차디 찬 티슈가 상처에 따끔하게 닿자 무의식중에 얼굴을 찡 그렸다. "영국인이란 대단해." 라시드는 일어서면서 짓궂게 중 얼거렸다. "냉정하고 침착하며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괜찮도록 늘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 회색 눈이 번쩍 빛나는 것을 보고 며칠 전의 중정에 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 우발적인 사건에는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는데……. 페리시어는 생각을 바 꾸려고 급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언제 무슨 일이……."


"그건 그렇지만, 생각대로 안 되는 일도 세상에는 많 은 거요." 여기서, 또 파이살과의 결혼은 잘 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넌지시 알리려고 하는 것일까? 한 걸음 물러서자 복사뼈에 전신의 무게가 실려, 페리시어는 둔통에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라시드는 떠받치기라도 하듯 손목을 잡았는데, 이 순간적인 접촉--그 이상은 아니다--이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기묘하게 무겁게 만들었다. 그러나, 통증이 가시고 손목이 자유롭게 되자, 상쾌한 남성 화장 품의 향기와 더불어 손가락의 감촉도 급속하게 엷어져 갔다. "왜 그래?"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으나,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날카로운 눈은 페리시어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아, 그런가! 요전날 밤의 그 로맨틱한 신을 되풀이하 지나 않나 하고 생각했었지, 당신은? 실망시킨 것을 사 과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 고든양." "로맨틱했다고요?" 페리시어의 목소리는 불쾌한 듯이 잠겨 있었다. "그럼 당신은 로맨스란 것을 오해하고 있 군요, 셰이크."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갑자기 쏟을 곳 없는 분노가 치밀어올라서 페리시어는 갑작스럽게 등을 돌렸다. 이 무례한 사나이 곁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가 령, 몹시 화나게 해서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고 해도. 가슴은 경종을 울리는 것처럼 몹시 두근거리고 관자 놀이는 욱신거렸다. 셔터를 내린 가게의 윈도우, 인적이 끊어진 골목길을 베일도 쓰지 않고 무작정 걷고 있는 타국 여성의 어리석은 행동을 비웃는 듯이 지켜보고 있 다. 갑자기 등 뒤에서 지칠 줄 모르는 힘찬 발걸음 소리 가 들려 오더니--쫓기고 있는 얼룩말의 기분은 이런 것 일까?--길다란 손가락을 허리에 느낀 순간, 홱 돌려세 워졌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가 덜덜거리도록 몹시 떨 리고 있었다.


"왜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이 더위 속을 뛰어 다니는 것보다 좋은 생각은 나지 않던가? 도망간 이유 를 내 입으로 말하는 걸 듣고 싶단 말인가?" 눈을 치켜뜨고 분노를 억제하며 한일자로 굳게 다문 얄팍한 입술을 본 순간, 페리시어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이상야릇한 기분이 일어났으나, 처음에는 뭐가 뭔 지 분간도 할 수 없었다. 겨우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을 때는 충격으로 자기 자신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남 성의 관심을 끌기는커녕, 키스마저도 될 수 있는 대로 피해온 내향적인 그녀가 지금은 불꽃처럼 빛나는 라시 드의 눈을 보며 견딜 수 없을 만큼 스릴을 느끼고 있다. 게다가 그의 분노에 선동되어, 마치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더욱더 그를 화나게 해서 자제력이고 뭐고 죄 다 상실케 해주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여기서 다투어 봤자 진다는 것은 뻔한 일이지만 이미 멈출 수도 없게 되었다. 라시드에게도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전신을 집어삼킬 만큼의 격렬한 분노와 똑같은 것을 맛보게 해야지. 지금까지 참고 견디어 온 굴욕을 그에게도 맛보게 하리라. "어떻게 된 거요, 고든양?" "벌써 충분히 알게 해드렸어요. 오만한 당신은 인정하 지 않겠지만요." 바이스와 같은 힘으로 잡힌 팔이 아파서 무의식중에 얼굴을 찡그리자, 그가 히죽 웃었다. "여기는 동양이오. 방금 당신이 한 말에 대해 벌주기 위해 지금 당장 이 거리 한복판에서 후려갈긴다고 해도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소. 기억해 둬요, 어떤 남자의 속이든 늑대와 같은 마음이 깃들여 있다는 것을. 잔인성 과, 먹이가 고통을 당하는 걸 즐기는 취미 말이오." 미친 듯이 벌떡거리고 있는 목에 갑자기 손이 닿은 순간 싸울 기력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말았다. 비단 같은 갈기를 가진 베두인 산 암말처럼 손가락 밑에서 떨고 있는 그녀에게 라시드는 음산한 웃음을 던졌다.


"겨우 알아들었나? 남자와 여자는 달라. 남자는 화가 나면 무엇이든 때려 부수고 싶어지는, 정체를 알 수 없 는 힘을 가지고 있어." "제발 그만! 당장 그쳐 줘요! 뭐라고 해도 듣지 않겠 어요!" 분노와 불안이 뒤섞여 페리시어의 목소리는 덜덜 떨려 나왔다. "저를 속일 수는 없어요. 쫓아내려고 생각 하는 거죠? 겁을 주어 파이살을 단념시키려 하시는 거 죠? 자기가 나약하다는 함정에 빠져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궁지에 몰렸었던 빅토리아 왕조의 여주인공처 럼, 나도 당신이 자랑하는 사나이의 힘에 압도당해 옴쭉 달싹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죄송합 니다. 저는 이성으로 감각을 억누를 수가 있어요!" "정말인가?" 기분 나쁠 정도의 은근한 목소리. 비단처 럼 매끄러운 목덜미를 애무하는 엄지손가락의 감촉에 위험을 느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유혹하는 듯한 손가락 의 움직임, 그리고 성대에서 나오는 듯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그래서, 그 감각은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지, 고든양?"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한 시늉은 할 수조차 없었다. 그만 발끈 화를 낸 결과 이런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되고 말다니……. 페리시어는 눈 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애정이 없는 섹스는 물이 없는 사막과 같은 것--어 떤 생물도 살 수 없는 불모의 황무지예요." "하지만 당신이 말한 그 불모의 황무지에도 나름대로 의 마력은 있는 거야." 엄지손가락이 턱까지 미끄러져와 억지로 페리시어의 얼굴을 쳐들었다. 눈을 뜨니 몇 센티 앞에 칙칙한 회색 눈과 냉소를 머금은 입술이 있었다. 그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매의 먹이가 될 작은 동물처럼 페리시어는 움직일 수도 없어서 깨끗이 단념 하고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의 숨결로 몇 가닥의 머리카 락이 날렸다. "사막의 힘이 어떤 건지 알고 있나, 고든양?"


어떤 일이 일어나려는 걸까? 페리시어는 날카롭게 부 르짖으며 자신도 놀랄 정도로 잽싸게 몸을 비틀어 그에 게서 떨어졌다. 라시드는 어떤 짓을 할 생각이었을까? 파이살에게서 빼앗는다! 파이살! 그렇다, 파이살. 왜 지 금까지 그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그를 생각해 봤자 라시드의 애무에 반응하지 못하게 할 힘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산산이 부서진 프라이드의 조각을 주워 모아 페리시 어는 옆에 우뚝 서 있는 사나이를 싸늘한 눈으로 노려 보았다. "사막 따윈 저에게는 매력이 없습니다, 셰이크 라시 드. 그리고 당신도요." 6 완전한 패전! 페리시어는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옷 을 갈아입으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라시드가 식사하러 오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보 니 핏기가 없었다. 처음부터 잘 되지 않을 것 같은 기분 은 들었으나, 오늘 오후의 일로 실패는 확실해져 버렸 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지도? 그는 성서에 맹세코 유혹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유혹! 목언저리에 달 라붙은 것 같은 그의 엄지의 감촉을 생각해낸 순간, 얼 굴이 화끈해졌다. 그때 온몸의 힘이 완전히 빠져 다리가 마치 젤리처럼 되어 버렸었지....... 하지만 그것은 감정이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브러시를 집어 밤색 머리가 반들반들 윤이 날 때까지 세게 빗었다. 페리시어의 공포와 불안을 교묘히 이용하 여, 뻔뻔스럽게도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라시드는 일 부러 그런 식으로 유도한 것이다. 그런데도 하마터면 굴 복할 뻔했으니....... 가장 나쁜 것은 라시드의 애무에 자신이 지나치게 민 감했다는 점이었다. 그의 팔에 안겨 있던 몇 초를 상기 하면 뺨이 달아오른다. 그때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의 노여움을 부채질하려 했지만, 설마 그토록 위험


한 감각에 불이 붙을 줄은 몰랐다. 그런 경우 여성이라 면 누구를 막론하고 그렇게 느낄 거라고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려 했으나,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라시드의 조소를 잊으려고, 파이살의 태평스럽게 웃는 얼굴을 상기하려 해도, 강렬한 개성 앞에서 약한 것이 퇴색해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지, 파이살의 유약한 얼굴은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아무리 노력을 해 봐도 떠오르는 것은 라시드의 모습뿐. 선천적으로 정직한 페 리시어는 자기 감정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라시드가 비난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파이 살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주는 것--물론 돈은 관 계 없다--이나 정다움, 가족으로서의 보살핌 등을 갖고 싶어했을 뿐인가? 남아돌 만큼의 애정에, 오랜 동안 정 에 굶주리고 있던 페리시어는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쉽게 그에게 끌린 것이다. 그러나 사랑해 준다는 것만으 로도 괜찮을까?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머릿속이 어지러워져, 디너의 종소리를 들었을 때는 겨우 마음을 놓았다. 다시 한 번 파이살과 같이 있게만 되면 이런 걱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게 틀림없을까......? 파이살의 키스는 귀찮기만 한데, 라시드에게는 약간 닿기만 해도 온몸이 와들와들 떨릴 만큼 감각이 살아난다--하지만 페리시어는 이 사 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격심한 혐오감은 애정과 마찬가지로 감각을 곤두서게 하는 것이 아닐까? 드레스에 어울리는 연한 핑크빛 루즈로 화장을 마무리하면서 페리시어는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시폰의 드레스는 핑크와 엷은 녹색의 소용돌이 무늬로, 평소라면 밤색 머리와의 조화를 고려 해서 멀리했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국적인 분위기가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작은 소매도 붙어 있고 옷깃도 얌전히 달려 있어서 숄은 필요 없었으나, 흰 레이스를 가볍게 걸치니 준비는 다 되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후


줄곧 그대로 경대 위에 내버려 둔 그 향수병. 유리 서진 과 같은 꼴로 만들어 버리까도 생각했으나, 그것은 라시 드가 준 것이 아니라 향수 가게 주인의 선물이라니 그 럴 수도 없었다. 그 노인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는지 알 고 싶었지만, 역시 서랍 속에 간직하기로 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아직 아무도 없었다. 문득 생각 이 나서 페리시어는 중정으로 나가 보았다. 그렇게 아름 다운 것을 일시적인 충동으로 던져 버리다니 참으로 어 리석은 짓을 했지. 그러나 우거진 장미 덤불 속을 아무 리 정성들여 샅샅이 찾아봐도 푸른색 작은 상자는 나오 지 않았다. 혹시 정원사가 주워가지나 않았을까. 식당에는 맛있는 냄새가 감돌고 있었으나, 라시드와 얼굴을 대할 것을 생각하니 식욕이 싹 가셨다. 차라는 <사막에 꽃핀 영국의 이른봄의 신록>이라고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면서, 페리시어의 시원스러운 아름 다움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라시드 외삼촌은 오늘 밤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식 사를 같이 할 수 없대요." 듣는 순간부터 긴장이 서서히 풀려 갔다. 최소한 이번 한번만은 소원이 성취된 셈이다. 욕심 같아서는 선녀들 이 남은 두 가지 소원도 들어 주었으면 좋겠는데--첫째 로는 파이살이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고, 둘째로는 라시 드의 미움이 사라지는 일. 그러나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실현성이 없었다. "구경하느라고 피곤하지요, 페리시어? 안색이 좋지 않 아요." "네, 조금." 라시드와의 충돌,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난 갖가지 의아심. 피곤해 보이지 않는다면 도리어 이상한 것이다. "큰딸과 가족이 곧 찾아올 텐데, 차라로부터 벌써 들 었겠지?" 라시드와 파이살을 머릿속에서 비교하면서, 세 리나가 차려다 준 사프란 라이스를 멍청히 바라보고 있 는데, 운무 파이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페리시어가 고개를 흔들자 차라가 곧 설명을 했다. "그래요. 오아시스에서 합류하게 돼요. 당신은 틀림없 이 좋아하게 될 거예요. 나디아는 파이살과 아주 닮았어 요." 라시드의 거무스름하고 정한한 용모 옆에서 점점 퇴 색해 가는 파이살을 생각하니, 페리시어는 마음의 가책 을 받아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숙였다. 커피를 사양하고 머리가 아프다는 구실로 페리시어는 곧 방으로 돌아왔다. 전혀 거짓말도 아닌 것이, 곧 관자 놀이가 욱신거려서, 방향이 가득찬 밤의 소리에 귀를 기 울이면서 침대에 편히 눕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에 도어를 노크하는 소리가 나며 세리 나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라시드씨께서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세리나의 영어는 서투르니까. "친구들이 와 있을 텐데? 나에게 볼일은 없을 거야, 세리나." "친구분들은 모두 돌아가시고 혼자 계십니다." 세리나는 그녀를 기다렸다가 같이 아래층으로 내려갈 생각인 것 같았다. 누워 있었기 때문에 드레스가 조금 구겨졌으나, 옷을 갈아입을 틈도, 머리를 빗을 틈도 없 었다. 지칠 대로 지쳐 있지만 무기력하게 보이지 않았으 면 좋겠는데. 무슨 일일까? 또 언제나와 같이 헐뜯으려고 그러는 것일까? 라시드가 쓰고 있는 몇 개의 방은 본채와 복도로 이 어져 있으나, 독립된 입구가 있었다. 입구 바로 앞에 있 는 홀에는 부드러운 페르시아 융단이 깔려 있고, 낡아서 윤이 나는 골동품 가구가 품격을 높여 주었다. 사치스러운 것들이 잘 정돈되어 일종의 조화를 이루 어, 상처받은 페리시어의 신경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 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스며드는 라임 향기가 주위에 감돌고, 예스러운 석유등이 던지는 그림자가 춤추고 있


으니, 별천지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슴푸레한 불빛 속에서 페리시어를 맞기 위해 일어 선 라시드가 우뚝 솟은 봉우리만큼 크게 보여, 엉겁결에 숨을 들이마셨다. 오늘 밤의 그는 순 쿠웨이트 식의 새 하얀 제라바 차림으로, 칠흑 같은 머리는 머리 가리개로 감추고 제라바 위에 금실로 호화롭게 수놓은 망토를 걸 치고 있었다. "많이 아픈가요?" 맞아들이는 동작이 세련돼 있다. "아, 아뇨. 별로." 이렇게 부정하면서, 흰 벽을 등지고 눈앞에 서 있는 그의 인상적인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국내 친구들과 만날 때는 이 차림이 좋아요. 유럽식 슈트보다는 기분이 훨씬 좋거든." "게다가 훨씬 인상적이에요." 저도 모르게 이렇게 그 만 말해 버리자, 자기를 돌아보며 응시하는 그의 싸늘한 눈매를 보고 페리시어는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신경 이 날카로워지며 오싹 한기가 들었다. "어떤 뜻일까? 뽐내는 바보 같은 놈, 그런 뜻이지." 싸늘한 목소리에 증오가 섞여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겁에 질려 버린 페리시어는, 그런 뜻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조차 없었다. 깨끗하게 주름이 잡힌 제라바를 유럽인 이라면 도저히 이렇게 우아하고 몸에 맞게 입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늘 슈트만 입은 모습을 보여주던 라시드 가 처음으로 민족 의상을 입었으므로 더욱 놀라고 말았 던 것이다. 결코 아무에게도 말할 생각은 없으나, 이런 그를 처음 본 순간, 동경하고 있던 왕자님이 나타난 것 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보기좋게 오해만 받게 되어 또다시 화가 나고 말았다. 더욱이 자존심을 손상시킨다는 것은 제일 큰 범 죄다. 오해를 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싸늘한 노여움 에 질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대답을 하지 않지?" 오해는 점점 깊어만 갈 뿐. 사막의 여우 같은 민첩성과 아랍 말의 정한성을 구비한


발걸음으로 다가온 라시드는 갑자기 페리시어를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말라 버린 입술을 페리시어는 신경질적으로 혀끝으로 축였으나, 물끄러미 응시하는 그의 눈매에 돌처럼 굳어 져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그의 손이 풀리자 힘이 쭉 빠졌다. "이것을 주려고 생각했을 뿐이야." 항공 우편의 봉투. 심장이 쿵쿵거린다. 파이살에게서 다! 정신없이 손을 내밀었을 때, 그 손이 라시드의 손가 락을 스쳤다. 그 순간 전류 같은 것이 몸을 스쳐 빠져 나갔다. 편지를 손에 들고 급히 뒤로 물러선 페리시어의 얼굴에는 핏기가 가셨다. "연극은 그만 하는 게 좋을 거요, 고든양. 침대에서 천천히 읽어요. 파이살 옆에서 지내던 밤의 일도 상기해 가면서 말이야. 그가 플라토닉 러브에 걸맞는 인간이 아 니란 것은 잘 알고 있어. 그렇지, 그래. 이런 말은 할 필 요도 없겠군. 당신이 더 잘 알 테니까." "네. 그런 것까지 말해주실 필요는 없어요."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파이살과 연인 사이라고 믿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안전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라시드의 얼굴이 노여움과 경멸로 뒤덮여 갔다. 예상 했던 대로의 여자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것은 아무 래도 좋다는 기분이 들었다. 실은 이미 파이살을 행복하 게 해줄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그것 을 라시드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방으로 돌아오자, 페리시어는 분함과 흥분으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학수고대하던 파이살의 편지! 이것으 로 흔들리기 시작한 그에의 애정을 바로잡을 수 있으리 라. 그런데 단 몇 줄의 짧은 편지는 어딘가 모르게 서먹 서먹했으며, 연인이라기 보다는 친구에게 근황 보고라도 하는 듯한 투여서 페리시어가 찾고 있는 애정 어린 말 은 한마디도 없었다. 그렇다면 파이살은 또 전철을 밟기


시작했다는 것일까? <......뉴욕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즐거운 곳이다......> 두 번 세 번 되풀이해서 읽는 동안 에 가슴속을 찬바람이 헤집고 지나갔다. 라시드는 파이살이 여자에게 쉽게 반한다고 말했었다. 그때는 단지 짓궂게 굴기 위한 말쯤으로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이것은 사랑을 하고 있는 남자가 쓴 편지가 아니다. 이제 와서 뭐라고 말해 봤자 이미 늦었지만, 파 이살이 시키는 대로 쿠웨이트에 온 것이 후회스럽기 한 이 없었다. 게다가 고생하면서 열심히 저축했던 돈도 모 두 없어지고 말았다. 서서히 절망감이 퍼져 갔다. 될 수 있으면 내일 아침 첫 비행기로 영국으로 날아가고 싶다. 생각다못해, 숙모에게 돌아갈 비행기표를 부탁할까도 생각했으나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녀를 쫓아보내기 위 해서라면 기꺼이 그런 푼돈쯤 지불해줄 것이 틀림없는 상대에게만은 부탁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음이 내키지는 않지만 파이살에게 편지를 내어 분명히 밝히는 방법밖에 없다. 결혼하지 않고 끝나 게 된다면, 돌아갈 여비쯤은 기쁜 마음으로 선뜻 보내줄 것이다. 페리시어는 지겹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불을 끄고 쓸쓸히 서늘한 시트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 갔을 때 페리시어는, 자기는 파이살에게 이미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천연스럽게 행동하고 있는 것 에 깜짝 놀랐다. 파이살이 그녀의 세계의 모두였던 때로 부터 아직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이 마당에....... 지금은 오로지 영국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지금까지 가까 이해온 것과는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이 이질적이면 서도 어딘지 모르게 성미에 맞는 데도 있어서, 파이살의 애정만 진실한 것이었더라면 기꺼이 제 2 의 고향으로 삼 으려 했는데....... 이렇게 귀국을 생각하고 있는 지금도 라시드는 파이 살과 그녀를 어떻게 하면 떼어놓을 수 있을까를 궁리하 고 있을 것이다. 약간, 감쪽같이 술책에 빠졌구나 하는 기분이 들기는 했으나 이상하게도 마음은 전혀 홀가분


해지지 않았다. 마음이 변한 것을 라시드에게 말하지 않는 것은 별로 마음에 걸리지 않았으나, 페리시어가 올케가 되는 것으 로 알고 있는 차라에게는 달랐다. 아침을 먹으러 가는데 기다리고 있던 차라가 어린애처럼 들떠서 떠들었다. "이것 좀 봐요, 라시드가 보낸 생일 전 선물이에요!" 깜짝 놀라는 페리시어의 코앞에서 보증수표를 팔랑거렸 다. "굉장히 예쁜 속옷을 팔고 있는 가게가 있어요. 오 후에 같이 가지 않겠어요?" 이렇게 기뻐하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고개를 끄덕이자 차라는 좋아라고 달려들었다. 알리에게 운전을 시켜 둘은 요전에 라시드가 안내해 준 파드 사림 가에서 차를 내렸다. 예상한 대로 차라는 그 보석점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 진주는요, 저것은 아라비아 만에서 나는 거예요. 석유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진주가 쿠웨이트에서 제일 큰 수입원이었어요." 알리가 호위병처럼 뒤에 서 있어서는 쇼핑도 마음놓 고 제대로 할 수 없어서 두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정부는 관개사업이나 삼림사업에 특히 힘을 기울이 고 있어요." 페리시어가 훌륭하게 정비된 가로수와 화단 을 칭찬하자 차라는 곧 설명하기 시작했다. "청과물 시 장에 가 보면 알겠지만 그야말로 온갖 종류의 과일과 야채가 있어요. 모두 특별한 방법으로 재배되고 있죠. 전에는 최대의 적이었던 태양도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가장 큰 혜택이 되는 모양이에요. 전부 사우드의 중간 도매예요. 그는 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하고 있어요. 우리 오아시스 근처에 땅을 갖고 있으며, 라시드와 공동으로 대규모 과수원을 만들려고 열의와 정력에 넘쳐 있어요. 그러니까." 차라는 일부러 얼굴을 찡그려 보이며 계속 이야기했다. "그 사람이 사랑하고 있는 것은 전지, 미래 의 온실인지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예요. 자아,


다 왔어요. 이 가게예요. 알리는 밖에서 기다리겠죠." 아담한 가게의 벽에는 연한 녹색 비단을 바른 패널이 걸려 있고, 털이 긴 오프 화이트 융단 여기저기에는 도 금한 멋진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야말로 본드 스트리트 에 걸맞는 가게 안에는 동양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많은 사치품 가운데서 고르고 고른 장미색의 새틴 가 운을 들고 손의 감촉을 즐기고 있는 동안에, 본의 아니 게도, 부자인 외삼촌을 가진 차라가 부럽기도 했다. 그 렇다고 해서 굳이 라시드에게 시집갈 물건을 사달라는 것도 아니지만....... 이렇게 생각한 순간, 왠지 섬뜩해져 황급히 가운을 놓았다. "왜 그래요, 페리시어?" "아니에요, 아무것도. 장미색이 좋아요, 차라!" "그럼 이것은?" 광택이 나는 비취색 시폰의 네글리제는 손가락이 비 쳐 보일 듯이 얇았다. "멋져요." 페리시어는 차라가 눈치채지 못하게 한숨을 쉬었다. "당신의 혼수로 어때요?" 차라가 무심코 한 말에 페리시어는 깜짝 놀랐다. 이렇 게 가벼운 시폰에 감싸여 있는 자신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갔다. 그러나 물론 파이살의 팔 안에서는 아니 다....... 페리시어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였다. 겨우 쇼핑을 끝내고 큰길을 건널 때, 저쪽에서 마주오 고 있는 사람을 보고 페리시어는 너무나 깜짝 놀랐다. "어머, 라시드예요." 그러나 차라는 그대로 시치미를 떼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왜 그래요, 차라?" "보지 못했어요? 여자와 함께였잖아요." 확실히 페리시어도 보았다. 거무스름한 장신의 미인으 로, 고상한 옷차림에 부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그 어떤 독 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틀림없이 애인이에요." 차라는 그럴 필요도 없는데 목소리를 죽였다. "하지만 행세하는 집안 여자는 아니에 요. 보란 듯이 둘이서 거리를 걷다니." 그럼 라시드에게도 애인이 있다! 하지만 놀랄 것은 없지 않은가. 저렇게 남성적인 그가 늘 누님과 조카딸들 하고만 생활하고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훨씬 더 이상한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다리에서 갑자기 힘이 빠지 고 위가 쑤시듯 아프기 시작하니 이것은 어찌된 일일 까? 위선자! 페리시어에게는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사 정없이 책망해 놓고는, 자기는 보란 듯이 애인과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니! 지금까지 받은 모욕을 이 자리에서 정면으로 갚아줄 까? 갑자기 걸음을 멈춘 페리시어를 보고 차라는 고개 를 흔들었다. "안 돼요. 당황하게 만들 뿐이에요!" 당황? 라시드가? 페리시어의 표정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눈치챈 차라는 급히 말했다. "정말이에요. 내가 라시드라 해도 몹시 당황할 거예 요. 외삼촌 역시 마찬가질 걸요. 하지만 독신자란, 저 어...... 때때로." 암시만으로 이해해 달라는 듯이 어깨를 움츠리는 차라의 옆에서 페리시어는 멍청히 앞만 응시 하고 있었다. 라시드는 나 역시 그런 여성 중의 하나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걷잡을 수 없는 수치와 분노를 얼 굴에 나타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불끈 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왜 그래요. 그런 무서운 얼굴을 하고서?" "아무 일도 아니에요." 이렇게 가슴이 답답한 것은 웬 일일까? 라시드가 가무잡잡한 미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 고--게다가 그녀를 보호라도 하듯이 얼마쯤 몸을 굽히 고--걷고 있었다고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지금 그와 나 사이에 있는 것은 오직 노골적인 적의뿐 이 아닌가?


집으로 돌아오자 차라는 곧 사온 물건들을 풀어 보았 으나, 그 비취색 시폰 네글리제에만은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더럽히지 않으려고 그럴 거다. 페리시어는 장미 색의 새틴 네글리제를 차라에게 대 보았다. "사우드도 온실 따위는 잊어버릴 거예요, 이런 당신을 보면. 혼례를 올린 밤에는 이것을 입을 거예요?" "아니에요. 우리들은 하나에서 열까지 옛식으로 하기 로 결정했어요. 백 한 개의 단추가 앞에 달린 혼례용 카 프탄을 입고, 우리 집과 사우드의 집에서 보내 온 몇 개 의 금목걸이를 걸고요. 신랑이 금목걸이를 하나하나 벗 기고 있는 동안 신부는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신랑은 백 한 개의 단추를 옷자락에서부터 끄르기 시작해요."하면서 얼굴을 약간 붉혔다. "제가 이 런 식으로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을 이상스럽게 생각하 죠.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유럽의 웨딩 드레스와 같아요." 갑자 기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왔다. 그 순간, 공상 속에서 무릎을 꿇고 참을성 있게 백 한 개의 단추 를 끄르고 있는 것은 파이살이 아닌 거무스름한 다른 한 사나이였다. 페리시어는 자기가 불러일으킨 이러한 이미지에 흠칫했다. 하필이면, 언제나 냉소를 띠고 있는 라시드 대신, 정열적으로 눈을 빛내는 라시드를 상상하 다니, 내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몹시 충격을 받고 그 녀는 허물어지듯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아, 영국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쿠웨이트에 오기 전, 파이살에 대 한 기분이 애정이 아니고 그가 친절하게 해 준데 보답 하고 싶은 마음임을 알아차리기만 했더라면. 이곳에 오 지만 않았다면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육체적으로만 끌릴 수도 있다는 불쾌한 사실을 모를 수도 있었는데. 입 안이 바싹 마르고 이상야릇하게 가슴이 답답해지더 니, 그 현상이 자꾸 더 심해져 갔다. "파이살이 언제 돌아온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차 라의 천진스런 말이 가슴을 푹 찔렀다. "작년에는 저에


게 선물을 주기 위해서 일부러 런던에서 날아왔어요, 라 시드가 연락을 취해서. 금년에도 아마 그렇게 되리라 생 각하지만." "올해는 그렇게 안 될는지도 모르죠." 공연히 기대를 걸게 해 놓고 후에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라시드에게 당신이 얼마나 파이살을 만나고 싶어하 는지를 이야기하면 어김없이 그렇게 해줄 거예요, 페리 시어. 파이살을 만나고 싶죠?" 물론 만나면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좋겠지 만, 차라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네? 라시드에게 부탁해요. 외삼촌은 무서운 괴물은 아니니까." "그럴까요? 오늘 오후엔 어땠어요?" "그건 별도예요. 어머니는 외삼촌이 빨리 결혼했으면 하고 늘 걱정을 해요. 어머니와 저에 대한 책임 때문에 아직 독신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번에 제가 시집가면 생각이 달라지겠지요. 어머니는요, 외삼촌은 영국인의 피 탓으로, 얌전하기만 한 쿠웨이트 여성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건 그렇다 하더라 도, 당신은 외증조모님을 그대로 닮았어요. 아버지에게 서 들었지만, 외삼촌은 어릴 때 조모님의 사진을 굉장히 소중하게 간수하고 있었대요. 그러니까 당신이 말하면 꼭 들어줄 거예요, 페리시어!" '당신이 말하면 꼭 들어준다'고! 당치도 않은 일! 아마 차라는, 파이살도, 나라면 라시드를 한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거라고 내다보고 이곳으로 보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라시드와 이전부터 반목하고 있 던 파이살은 이 혼약 사건으로 교묘하게 외삼촌을 괴롭 히려고 꾸민 일이 아닐까? 외삼촌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조모님을 꼭 닮은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말함으로써? 그 렇다면 나는 이용만 당한 것이 아닐까? 요모조모 생각 하는 동안 점점 페리시어는 파이살기 겉보기와는 달리 매력적인 청년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라시드는 오늘 저녁에도 친구들과 식사를 한다는 말 을 듣고 페리시어는 쓸쓸하게 웃었다. 나날이 기온이 높아지고 구름 한점 없는 푸른 하늘의 좋은 날씨가 계속되었다. 이 콘트라스트가 심한 나라를 매우 사랑하게 되어 버린 페리시어에게는, 흐느껴 우는 듯한 근행의 신호도 이제는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서, 영 국으로 되돌아가면 아마 그리운 추억의 하나가 될 거라 고 생각했다. 아직 파이살에게 보낼 편지는 쓰지 않았 다. 이쪽에서 여비를 요구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무슨 다른 방법은 없을까? 창문으로 흘러들어오는 장미 향기도 무거운 마음을 누그러지게 해 주지는 못했다. 코바늘뜨기로 된 숄을 걸 치고, 조금이라도 울적한 기분을 풀려고 시원한 정원으 로 나갔다. 상쾌한 그늘을 만드는 나무들, 분수, 장미와 라임 향기를 품은 서늘한 공기. 만월에 비치어 주변 일 대는 은색과 흑의 동판화와 같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 다. 페리시어는 분수가에 앉아서, 차디찬 물에 가만히 손가락을 적셨다. "아무개씨가 없어서 적적하신가, 고든양?" 라시드! 언제 왔을까? 어젯저녁과 같은 고유 의상을 입은 그가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페리시 어는 얼른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네. 그저 그래요." 그의 차디찬 시선이 장미색으로 물든 뺨, 풍만한 가슴 언저리, 가냘픈 허리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파이 살에 대한 기분이 달라진 것을 라시드가 눈치채게 해서 는 안 된다는 기분이 드는데 왜 그럴까? 곧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초조해지는 반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보이는 것도 비위에 거슬려 페리 시어는 주저했다. "파이살을 불러 왔으면 좋겠지? 불운한 연인 사이를 떼어놓는다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차라가 어찌나 동정 하는지, 사정을 깨닫게 해주지 않을 수도 없고 해서."


"어떻게요? 당신의 일방적인 해석을 강요했나요?" 파 이살을 향한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도 잊고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소녀처럼 성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 파이살과는 연 인 사이가 아닌가? 영국에서 산 일이 있기 때문에 알고 있지. 조심성이라든지 순결 따위는 눈곱만큼의 가치도 없다는 것을." "네. 아랍 여성은 다르겠지만." "어떤 뜻인가? 아, 오늘 같이 걸어간 여성에 관해서 하는 말이군. 당신이 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 머 리가 두드러져 눈에 잘 띠거든. 그녀는 자기를 특별하게 보이려는 그런 비루한 짓은 하지 않지." 페리시어의 입술이 비웃듯이 비뚤어졌다. "솔직하게 말해서 놀랐어요. 당신은 스스로 여성의 호 의를 구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타입의 사람이잖아요? 아아, 그렇군요. 육체적인 것이 목적이니 사탕바른 옷이 필요하겠군요." "도대체 당신은......." 거기서 말이 끊어진 것을 보니 아픈 곳을 찌른 모양 이다. 하지만 이 일순의 승리의 대가를 엄청나게 크게 치르게 되지나 않을까? "차라가 당신을 걱정하고 있어서 찾으러 왔어. 안색도 좋지 않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며 파이살이 그리 운 것 같다고 말해 왔어. 그러나 명심해요. 파이살을 불 러와도 또다시 유혹하는 행동은 절대로 못 하게 할 테 니까. 꼭 파이살이 아니라도 좋지 않은가?" 예상한 대로 보복은 곧 시작되었다. "차라의 창문에서 안 보이는 곳 이라서 마침 잘 됐어. 이런 방법은 반드시 반대할 테니 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차라만이 아니에요, 하고 마음 속 으로 중얼거렸을 때는 이미 두 손은 뒤쪽으로 잡혀 있 었다. 말랑말랑한 입술에 억센 힘이 담긴 두툼한 입술이 포개졌다. 아차 하는 순간에 팔 안에 갇혀 버린 페리시


어는 그녀의 똑같을 정도의 격렬한 노여움에 이글거리 고 있는 냉혹한 눈길 아래서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 빠 지고 말았다. "놓아줘요! 키스라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시시한 것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하는 그런 여자에게나 해요!" "아무런 가치도 없다? 아니, 그런 일은 없어, 고든양." 손가락에 힘이 가해지자 잡힌 손목이 저려 왔다. 또 어리석은 짓을 해서 그의 노여움에 기름을 붓고 말았다. 허리에 놓인 손에 갑자기 꽉 끌어안겨 눈을 감 은 순간 전신의 힘이 쑥 빠져나갔다. 따뜻한 숨결이 뺨 을 스치자, 페리시어는 울고 싶은 것을 참으며 몸을 움 츠렸다. "안 돼요, 고든양. 이번에는 그렇게 간단히 도망칠 수 없어." 근육질의 단단한 가슴을 느끼고 페리시어는 무의식중 에 몸을 움츠려, 자신의 경험 부족을 여실히 드러냈다. 매끄러운 목덜미에 입술이 밀착되었을 때, 지금까지 알 지 못했던 격렬한 감정이 잠을 깨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얼음조차 녹일 것만 같은 라시드의 교묘한 애무에 정열 이 타오르는 것이 두려워서 페리시어는 몸을 떼려고 필 사적으로 바르작거렸다. 애정이라든지 부드러움이 다소라도 담겨 있다면 그런 대로 괜찮겠지만, 라시드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그가 말 한 불모의 섹스뿐인 것이다. 판단은 제대로 하고 있으면 서도, 한 손이 어깨를 벗기고 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 다. 파이살에게는 이런 식으로 당한 일은 없었다. 나를 아 무런 감정도 없는 허수아비처럼 취급하다니....... 그의 손 끝이 드러난 앞가슴에 닿았을 때, 지금까지 소용돌이치 고 있던 노여움과 공포는 자취를 감추고, 페리시어는 충 격으로 눈을 커다랗게 뜨고 얼굴을 들었다. "자아, 이것으로 당신도 나의 마법에 걸려 반응을 보 인 여성 리스트에 이름이 오르게 되었군." 창백한 얼굴


을 내려다보는 눈이 만족감으로 빛났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손이 풀려 페리시어는 비틀거렸다. "이건" 라시드의 손에는 종이에 싸서 녹색 리번을 맨 상자가 들려 있었다. "차라가 내 수표로 산, 당신에게 주는 선물이야. 입을 때마다 나를 생각하게 될 거야." 발밑에 내던져진 상자에서 얼굴을 든 페리시어의 눈 은 증오로 말미암아 독기를 뿜고 있었다. "집어요! 그렇지 않으면 방금 한 것 같은 일을 다시 한번 되풀이하겠어. 아니면 내가 주워 줄까?" "야만인! 당신 같은 야만인에게 내 마음을 이해시키려 고 한 내가 바보였어요....... 인간의 마음 따위는 갖고 있 지 않은 사람에게!" 그러나,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순순히 시키는 대로 상자를 집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발밑에 당신이 무릎을 꿇게 하니 기분 좋군, 고든 양." 이래도 가만히 있어야만 할까? "당신에게 굴복해요? 차라리 악마에게 절을 하는 것 이 낫지!"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움켜쥐고 페리시어는 뒤도 돌 아보지 않고 달렸다. 방으로 되돌아와서, 화가 난 나머 지 상자를 힘껏 벽에 내동댕이치자, 부서진 상자에서 그 비취색의 시폰 네글리제가 쏟아져 나왔다. 라시드의 수표로 차라가 사준 네글리제! 창백해진 페 리시어는 잠시 동안 그 시폰 네글리제에서 눈을 뗄 수 조차 없었다. 라시드의 입술과 손가락이 닿은 곳이, 거 기에만 다른 생명이 숨쉬는 것처럼 뜨겁게 타서, 치욕과 분노가 다시 치밀어올랐다. 돈으로 산 여자 취급을 당하다니, 자존심에 먹칠을 하 고 말았다. 애정 없이도 정열을 자극시킬 수 있다는 것 을 알고 만 지금, 이젠 두 번 다시 이전의 순진무구한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으리라. 그 일순, 그런 일순 이었으나 페리시어는 정열이란 것을 맛보고 말았다.


7 오아시스로 가는 준비를 하느라 온 집안은 발칵 뒤집 혔다. 드레스를 한아름 안고 나르면서 차라는 장난스럽 게 윙크했다. "라시드 외삼촌은 정말 꾀보예요. 이 바쁜데 살짝 피 하셨으니." 한걸음 앞서 가서 모두를 맞이할 준비를 해 둔다는 핑계였으나 실은 페리시어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 까? 물론 의례적인 예의는 다한 이야기지만. 가령 백 살까지 산다고 해도 그 뼈에 사무친 괴로움 을 잊을 수는 없으리라. 그날 밤, 그의 꿈을 꾸었다. 차 디찬 조소를 띤 얼굴, 그리고 자신 만만하게 애무하던 손, 눈을 떴을 때 뺨은 눈물로 함빡 젖어 있었다. 몇 번이고 파이살에게 보낼 편지를 쓰기 시작은 했으 나, 두 사람의 애정이 진실한 것이 아니었다는 데까지는 이럭저럭 썼지만 여비 문제에 이르러서는 도저히 쓸 수 가 없어서 그때마다 단념하고 말았다. 영국 대사관에 도 움을 청할까 하고 생각했으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페 리시어도 오아시스에 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차라 에게 실망을 줄 수도 없고 해서, 어쨌든 이 행사가 끝난 후에 대책을 강구하기로 했다. "여기에 파이살이 있다면." 차라의 천진스런 한숨 소 리를 들으면서 페리시어도 마음속으로 무거운 한숨을 토했다. 파이살이 계속 뉴욕에 있는 것은 이미 라시드의 명령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부지런히 짐을 꾸리기 시작했으나 드레스 의 수가 한이 없는 것처럼 차라의 태평스런 잡담도 끊 이지 않았다. "라시드는 용돈을 듬뿍 줘요." 하며 차라는 불꽃처럼 붉은 시폰의 하렘 팬츠와 스팽글이 붙은 상의를 집어들 었다. "마음이 내키는 대로 그만 사 버렸어요. 라시드가 본다면 벼락이 떨어질 거예요. 사우드는요, 벨리 댄스 (미사의 주-배꼽춤 ^^)가 없어졌다고 몹시 섭섭하게 생


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저는……."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겠어요." 차라가 얼굴을 붉히 는 것을 보고 페리시어는 마음이 흔들렸다. 감상적인 남 편을 위해 벨리 댄스를 춘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어마, 여기는 가득 찼어요." "괜찮아요, 차라. 내 쪽에 넣죠. 그런데 왜 이것까지 가지고 가죠? 결혼 후에 입을 건데?" "메이드에게라도 들켜서 어머니의 귀에 들어가는 날 이면 그야말로 큰일 나요." "그것도 그렇겠군요." 속살이 비치는 시폰. 차라는 사 우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양가의 축복을 받고 있는 차라. 부럽게 여기는 일은 당연한 것이리라. 나는 지금까지 한번이라 도, 차라가 사우드의 애무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이 파이살의 애무를 구한 적이 있었을까? 언제나 애 정 없이 자란 어린 시절의 후유증으로 애정에 보답하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고 간단히 처리해 왔지만-라 시드에게는 보답하지 않았는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를 사랑하기는커녕 미워하고 있 으면서도. 자질구레한 것까지 다 챙기고 일어선 페리시 어는 얼굴에 홍조를 띠고 방금 라시드에게 닿기라도 한 듯이 가슴을 설레고 있었다. 거리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오아시스까지는 그다지 멀지는 않았으나 사막을 지나가기 때문에 장비에는 만 전을 기해야 했다. 출발하는 날이 되자 운무 파이살, 차 라, 그리고 페리시어가 탄 메르세데스의 뒤를 고용인과 하물을 실은 석 대의 차가 따랐다. 장비가 너무 야단스럽다고 놀라자, 차라에게 핀잔을 듣고 말았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물이 없어 죽은 사람 이나, 가공할 모래 바람에 휘말려 들어간, 사막에 익숙 한 탐험가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니 아무리 만전 을 기했다 해도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겨우 2 백 킬로라고 듣고 있었으나, 초행인 페리시어에


게는 천 킬로도 더 되는 것처럼 여겨졌다. 저멀리 야자 수 숲이 보였을 때에야 겨우 안심이 됐다. 차내의 쿨러 를 완전 가동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숨이 막힐 정도의 더위로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이 끝없는 황야에서 길을 잃는다면, 하는 생각을 하니 전신에 소름이 쫙 끼쳤다. 끝없는 사막도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은 있었다. 활짝 갠 푸른 하늘 아래 한없이 펼쳐지는 모래밭, 모 래밭!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눈이 따가워졌다. 그건 그렇고, 이 불모의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강인한 생활력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젠 거의 다 왔어요, 페리시어." 지평선상의 야자수 숲이 마치 애를 태우듯이 조금씩 조금씩 크게 보였다. "당신도 오아시스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 라시드는요, 여기가 우리들의 진짜 집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파이살 의 생각은 다르지만. 아무래도 당신은 라시드 편인 것 같아요. 쿠웨이트가 마음에 들었죠?" "그래요, 굉장히!" 사정이 달라진다면, 시간 제약이 없 는 광대한 이 나라에서 일생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디아는 내일 도착한대요. 빨리 만나고 싶은데!" 나디아도 차라를 닮았다면 좋겠는데. 파이살의 편지를 받은 뒤부터 페리시어는 어쩐지 식객 같은 느낌이 들었 으므로 혹 미움이라도 받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사 로잡혀 있었다. 오아시스에 도착한 것은 황혼 무렵이었으므로 부근 일대는 어슴푸레해서, 저녁 바람에 살랑거리는 야자수 잎과 물에 비치는 달그림자밖에 볼 수 없었다. "이전에는 이 근처에도 바두 족이 캠프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문명이 다가오자 그런 생활이 거추장스럽게 됐던 것이겠죠." 차라의 설명이 동화처럼 들려온다. 흰 석조 집은 쿠웨이트의 중심지 근교의 저택과는 조 금도 닮은 데가 없는 것으로, 조각으로 장식된 작은 창


문이 똑바로 사막을 향하고 있었다. 격자무늬가 새겨진 아치를 빠져나가자 중정이 나왔는데, 그곳은 세련된 유 럽 취향에는 없는, 범할 수 없는 예스러운 힘이 느껴졌 다. 대갈못이 많이 박힌 무거운 오크재로 된 육중한 문 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니 지난날의 거친 생활의 소리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해야 할 일을 끝내면 어느 사이엔가 모습을 감추고 마는, 이슬람교도인 하인들. 완 만하게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발목의 쇠사슬이 가벼운 소 리를 내는 하렘의 무희들이 걷고 있어도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으리라. 별천지에 들어온 것 같은 황홀경에 빠져 있을 사이도 없이 알리에게 재촉되어 넓은 복도로 발을 들여놓는 순 간, 페리시어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실내 분위기에 숨을 죽였다. 굵은 공작석 기둥으로 떠받친 천장은 보석처럼 눈부시게 채색된 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어디에선 지 모르게 감돌고 있는 향기, 그리고 저멀리서 들려오는 물소리. 그녀는 넋을 잃고 오리엔트의 마력에 현혹되고 말았다. "말했잖아요, 여기가 마음에 들 거라고." 차라는 멍청 히 입을 벌리고 있는 페리시어의 모습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복도 끝의 이중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며 라시 드가 마중나왔다. 황홀하게 선명한 색채 속에서 새하얀 제라바가 더욱더 두드러져 보였다. "차라와 같이 부인방으로 가시오, 고든양. 거기에서도 중정은 보여요. 사막에서는 슬기로운 사람은 보물을 안 전한 곳에 숨기지. 할아버지 대에는 여성은 이 집에서 한 걸음도 밖에 나갈 수 없었소. 다행스럽게도 정원이 있었기에 조모는 자주 이 정원을 산책하곤 했었지. 사막 에서 불어오는 저녁 바람을 쐬면서 영국을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어." "부인방도 마음에 들 거예요. 페리시어. 아주 엑조틱 하거든요. 헤엄도 칠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대리석 욕


실도 있고." 얼굴을 약간 붉힌 페리시어를 보고 차라는 외삼촌을 보며 말했다. "어머나, 페리시어의 눈은 기둥 과 같은 빛깔이에요." "공작석인가." 라시드는 페리시어를 보면서 옆에 있는 기둥을 애무하듯이 가만히 만졌다. "하지만 차디찬 돌에 견주어져도 기쁘게 여기지 않을 거야, 고든양은." 언제 나 그렇듯이 차라에게 말하는 라시드의 목소리에는 조 롱하는 듯한 따스함이 담겨져 있었다. 아까부터 짐을 나르고 있던 알리가 또 몇 개의 짐을 가지고 와서 마루에 놓는 순간, 페리시어의 짐을 넘어뜨 려 내용물이 마룻바닥에 흩어졌다. 갑자기 라시드의 표 정이 달라지더니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얼굴에 드러내면 서 그가 집어든 것은 차라의 그 새빨간 하렘 팬츠였다. 얼굴이 창백해진 차라는 구원을 청하듯이 페리시어를 보았다. 페리시어는 조용히 일어섰다. 라시드가 경멸하 듯이 시폰을 손가락으로 튕기는 것도, 상기된 얼굴로 눈 을 가느다랗게 뜨고 물끄러미 보고 있는 것도, 입을 비 쭉이며 조소하는 것도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제 거예요." 페리시어는 용감하게 말하면서 시폰을 빼앗으려고 했다. 그러나 라시드가 꽉 잡고 놓아주지 않 았다. 결국 비치는 하렘 팬츠의 전모가 여러 사람 앞에 전시되고 말았다. 그 순간의 라시드의 일그러진 얼굴이 라니! 페리시어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하마터면 웃 음을 터뜨릴 뻔했다. "요전에 샀어요. 영국에서 유행하 지 않겠어요?" 지금까지 누르고 눌러 왔던 장난기가 발 동해 그만 천박한 말투로 말을 덧붙이고 말았다. "틀림 없이 파이살도 기뻐할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조용한 밤, 집에서……." 교묘하게 말끝을 흐리며 속눈썹 사이 로 살짝 엿보니 라시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너무 지나쳤나! 불장난 같은 것이지만 아무려면 어때! 돌처럼 굳어버린 차라를 곁눈질하며 모멸을 담은 싸 늘한 눈이 염치없이 페리시어를 훑어보았다. "당신에게 어울리는 색이 아니군. 그 머리엔 어울리지


않아." "그래요?" 페리시어는 더할 나위 없이 귀여운 태도로 말했다. "저에게 꼭 맞는다고 말씀하실 걸로 생각했는데 요. 빨강은 거리의 여자의 빛깔이죠?" 무거운 속눈썹 안쪽의 눈이 한층 더 가느다랗게 되어 그래, 그렇다, 하고 말하는 것 같았으나 그는 대답할 것 까지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뒤처리를 알리에게 맡기고 나가 버렸다. 라시드는 페리시어에게 화가 난 나머지 마음의 여유 를 잃은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쏟아져 있는 옷이 전 부 차라 것이라는 걸 눈치챘을 텐데. 한 시간쯤 지나서 풀이 몹시 죽은 차라가 왔을 때는 짐도 다 정리되어 있었다. 이 침실에는 잠자기에 편할 것 같은 더블 베드 외에는 모던한 가구는 하나도 없었 으며, 번쩍번쩍 윤나게 광을 낸 마루의 여기저기에, 연 대를 알 수 없는 값져 보이는 페르시아의 깔개가 아무 렇게나 놓여져 있었다. 정연하게 손질한 중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창가에는 긴 의자가 마치 사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놓여 있었다. 예전에 물이 부족해서 고생하던 시 대의 아랍인은 낭비하는 물의 양으로 재력을 자랑했는 데, 그 편린으로 지금도 유복한 집에는 반드시 분수가 있으며, 여기서도 물소리가 끊임없이 들려 왔다. "라시드가 그토록 노한 것은 처음 봤어요." 차라는 매 우 낙심한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페리시어, 미안 해요. 라시드의 그 눈매……."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차라."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가 아니었어요! 그렇게 심한 태 도로 대하다니--파이살의 아내가 될 사람에게." 파이살에 대한 마음이 변한 것을 이야기하려면 지금 이 좋은 기회다, 하고 입을 열려고 했으나, 아까 일어난 사건으로 머리가 가득 찬 차라는 페리시어의 그런 태도 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라시드에게 말하겠어요. 저 때문에 당신을 나쁘게 생


각했으니, 외삼촌도 반드시 사과할 거예요." 입술을 떨고 있는 차라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고 싶은 기분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숭배해 온 외삼촌의 새로운 일면을 본 것이 몹시 충격적이었던 것 같았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처녀를 위로하고 있으려니 자기가 갑자기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차라. 나 역시 화가 발끈 나서 그 만 말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해버렸잖아요." "라시드는 여러 사람 앞에서 당신을 모욕했어요. 하지 만 그 모욕당한 것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저예요. 사우 드에게 그런 경멸을 당했다면 저는 도저히 참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나 라시드가 나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데는 이 유가 있어요." "파이살과 당신을 결혼시키고 싶지 않다는 것말이죠? 하지만 영국으로 돌아간다고는 하지 말아 줘요. 당신은 언니 같은 기분이 드는 걸요. 외삼촌의 생각도 곧 바뀔 거예요." 이튿날, 외동아들을 데리고 나디아 부처가 도착했다. 페리시어보다 두세 살 연상인 나디아는 밝은 미소를 띤 얼굴-특히 온화한 다갈색의 눈은 파이살과 꼭 닮았다로 말을 건넸지만 페리시어는 아무런 감동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외동아들 차라드는 금세 그녀의 마음을 사로 잡고 말았다. 차라드도 페리시어를 잘 따라서, 묻는 말 에 귀엽게 대답하면서 방까지 따라오더니 아직 처리하 지 못하고 그대로 둔 그 비취색 네글리제가 든 상자를 보자 아차 하는 순간에 열어 버렸다. 마침 그때 들어온 나디아는 딱한 애란 듯이 눈썹을 치켜 올렸으나, 아무말도 하지 않고 긴 의자에 편히 앉 았다. 외견상으로는 어머니나 동생보다 훨씬 유럽적인 것 같으나, 사실 그녀는 규방에서 자란 아랍 여성으로서 의 분위기를 누구보다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어마, 프레젠트?" "아니에요. 잘못 돼서 제가 받고 말았어요." 페리시어 는 얼른 얼버무리고는 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차라의 결혼식 때문에 몹시 흥분되시죠?" "그러나 나의 결혼식 때보다는 덜해요.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아프메트와의 결혼을 싫어했던 것이 거짓말 같아요. 아버지가 골라 준 신랑감 따위는 당치도 않다고 생각해서 라시드를 상당히 괴롭혔어요." "어떻게 했어요?" 그런 것을 받아주는 일면이 라시드 에게도 있었다니-믿어지지 않았다. "네. 모두가 라시드 덕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 요. 시야사 일은 알고 있지요? 그래요. 죽어도 아프메트 가 싫다고 떼를 썼더니, 라시드는 화도 내지 않고 설득 하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그 대신, 아프메트를 초대할 테니 나에게 침실에서 엿보라고 말했어요. 물론 엿봤죠. 그랬더니 그는 상냥하고 도량이 넓을 것 같은 멋진 사 람이잖아요. 라시드는 나 이상으로 나를 잘 알고 있었던 거예요." 나디아는 문득 옛날 생각이 난 듯이 웃었다. "결혼쯤이야, 하고 경시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지요.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편은 육체의 신비를 서로 나눌 수 있는 오직 한 사람인 남성이지요. 그 이상 은 기쁨도 자유도 없어요." 지금까지 남모르게 간직하고 있던, 말할 용기가 없어 서 간직하고 있던 걸 대변하고 있는 나디아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에 페리시어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사람이라면 알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같은 생각을 가 지고 있는 두 사람은 물끄러미 서로를 응시했다. 일어선 나디아는 페리시어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차 라에게서 들었어요. 라시드가 몹시 심한 짓을 했다고요? 차라는 양심상 정직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어요. 라시드는 자존심이 강해서 사과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 해요. 그 점 이해해 주겠죠?" 어쩜 이렇게 재수가 좋을까! 가장으로 키운다고 너무


버릇없이 기른 게 아닐까? "정말로 당신은 외증조모님과 꼭 닮았어요. 어머니에 게서 들었는데, 파이살의 친구라면서요?" 다음에 어떤 말이 나올 것인지를 알고 있는 페리시어 는 잰 말로 대답했다. "이 이야기는 뒤에 천천히-차라의 생일이 지난 뒤에 하죠. 처녀로서의 마지막 생일이니까요, 네?" "그렇군요." 나디아는 차라드를 낮잠 재우기 위해서 나갔다. 가족들은 모두 차라에 못지 않게, 라시드의 조부가 영 국인 아내를 위해 지은 오아시스의 호화로운 이 집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이 사막의 집에 현대식의 생 활은 걸맞지 않아서, 여기에 오면 모두가 라시드의 조부 모가 살던 대로 생활하기로 돼 있는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여성들은 모여서 잡담과 커피를 마시며 시간 을 보내고, 라시드와 아프메트는 오아시스 저쪽에 있는 과수원을 둘러보거나, 거센 아랍 말을 타고 먼 곳까지 놀러 가기도 했다. 차라의 생일 전날, 사우드의 집에서 초대장을 가진 메 신저가 왔다. 페리시어는 자기도 초대돼 있어 불안했지 만 차라와 나디아에게 설득되어 결국 가기로 했다. 차라는 곧 이 소식을 라시드와 아프메트에게 전했다. 페리시어는 나디아의 남편인 아프메트를 한번 본 순간 부터 호감이 갔다. 그에게는 이전에 파이살에게서 본 것 같은 상냥함과 동정심, 그리고 아내와 자식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었다. 그러나 라시드는 어떤가? 아내에 대한 상냥함?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다. 하렘 팬츠 사건 이래 차라는 라시드에게 어느 정도 탐탁지 않은 태도를 취했다. 나디아로부터 차라가 정직 하게 말할 생각이라고는 들었으나 적당한 기회가 쉽사 리 오지 않는 것 같았다. 페리시어 자신도 모두에게 귀 국에 대한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결심을 못 하고 있 었다. 처음 예정으로는 파이살과 합류한 뒤로 되어 있었


지만 사정이 바뀌어 당분간은 파이살이 오는 것은 불가 능할 것 같았다. 오늘 밤에야말로 그에게 편지를 써 보 내야지. "페리시어도 사우드의 가족과 만나야겠지?" 아프메트 의 말에 문득 현실로 되돌아왔다. "정부 요인이란 얘기 는 들었을 테지?" "사우드는 그런 가문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 고 있어요." 약혼자는 그런 것을 뽐내거나 하는 사람이 아님을 강조하듯이 차라가 말참견을 했다. "그런 집을 상대하려면 이쪽도 여러 가지 면에서 적 절히 생각해 두지 않으면 안 되지." 라시드가 마음이 내 키지 않는다는 듯이 아프메트의 말을 떠맡았다. "종교색 이 짙은 지방에서는 정부의 개혁이 지나치게 급진적이 라고 불평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도 있어. 예를 들면 여 성 교육 같은 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다루지 않으면 안 될 미묘한 문제지. 그래서 이름 있는 집안 사람이 조 금이라도 코란의 계율에 저촉된다면 그것으로 끝장일 뿐 아니라 몹시 귀찮은 일이 발생하지. 차라의 약점은 내 종교일 거야. 나는 크리스찬이니까." 페리시어는 수긍했다. 이런 일이 그처럼 큰 뜻을 가지 고 있는 줄은 몰랐다. "참, 깜빡 잊었군, 고든양. 파이살에게서 편지가 와 있 어요. 서재로 와 주면……." "라시드, 지금 시간이 있어요? 저도 잠깐 얘기할 게 있는데." 차라는 잰 말로 물었다. "페리시어와 함께 가 서 파이살의 편지를 건네받은 다음에 이야기하겠어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눈으로 자꾸 신호를 보냈으나 차 라의 결심은 요지부동인 것 같았다. 이미 그 일은 끝난 것이니 뒤늦게 그가 진실을 알아 봤자 사정이 달라지지 도 않을 텐데……. "또 용돈이 모자란가?" 두 사람이 도어를 열자 라시 드는 유머러스한 말투로 물었다. "내일 저쪽 집에서 당신도 사우드와 만나요?" 라시드


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면서 페리시어는 호기심 에 사로잡혀 물었다. "만날 수 없어요. 혼례 때 신랑이 신부의 베일을 걷어 주기 전까지 두 사람은 만나서는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그의 부친은 이 오아시스에서 차로 두 시간쯤 걸리는 곳에 성을 갖고 있어서 일년에 몇 개월은 거기서 지내 고 있어요." 차라는 라시드가 서재로 들어가는 것을 보 자, 갑자기 불안한 듯 안절부절 못했다. "생각을 고쳐요, 차라." "안 돼요. 결심했어요. 자, 가요." 라시드가 말없이 내민 편지를 받으면서, 페리시어는 다시 한 번 그만두라고 차라에게 눈짓을 했으나 차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등뒤에서 도어를 닫자, 라시드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할 이야기란 도대체 뭐야, 이 꼬마 아가씨야?" 꼬마 아가씨! 저렇게 애정 어린 목소리로 불린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따뜻한 애정에 감싸인 다른 애들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페리시어는 쓸쓸한 생각 을 뿌리치려는 듯이 빨리 걸었다. 편지 위의 글자가 화라도 나는 듯이 미쳐 날뛰는 것 처럼 보였다. 격렬한 비난조의 말의 연속으로, 두 번이 나 읽어봐도 뜻을 잘 알 수 없었다. 이것도 죄다 라시드 의 잔꾀에서 나온 거겠지. <정말이지 무슨 여자가 그래…… 하필이면 고르고 골 라서 외삼촌을 유혹하다니……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놓고 끝내려고 생각했다면 큰 잘못이야……> 세 번째 되풀이해 천천히 읽자 이런 구절이 눈에 띠었다. 이런 것을 태연히 써 보내는 걸 보니 자못 현대적으로 보이 는 파이살도 실은 전형적인 아랍인이었던 것이다. 뚝 끊 어진 마지막 대목을 한 번 더 읽어 보았다. <……당신의 그런 태도를 생각해서 우리들의 결혼은 백지로 돌리기로 하겠소. 외삼촌에게 별도의 편지를 보


내서 보고하겠소. 그러면 당신은 곧 영국으로 송환될 것 이오. 거기서는 대중 앞에서 마음대로 구경거리가 되며 돌아다녀도 좋을 거요> 그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 준 것이 아니었다. 페리시 어는 한숨을 쉬면서 편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실 은 자신도 나빴으므로 파이살만 책망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라시드가-이런 일을 파이살에게 알릴 수 있는 사람은 라시드밖에 없다-이렇게까지 악의에 찬 중상모략을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내가 만일 진정 으로 파이살을 사랑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괴로울까? 페리시어는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라시드는 사실을 아는 즉시 나를 돌려보낼 것이다. 이 상한 일은, 파이살에게서 버림받은 일보다도 라시드에게 배신당한 것이 훨씬 더 괴롭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러 나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두 사람을 떼어 놓으려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놀라지 않을지도 모른다. 단지 조금 만 더 기다려 주었던들 문제는 자연히 해결되었을 것 을……. 평온한 영국에서는 그토록 강한 것으로 생각되 던 애정이 이 작열하는 사막에서는 이처럼 메말라 버리 고 말다니! 크게 심호흡을 하고 무심히 창문 쪽을 보니 터키석을 전면에 깐 풀이 파랗게 번쩍거리며 유혹하는 것 같았다. 서늘한 물은 이 괴로움을 씻어줄 지도 모른다. 상처입은 짐승처럼 페리시어는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페리시어 의 변심은 지금에 와서는 어떻다고 말할 수 없었으나, 그것보다도 훨씬 두려운 것에서 이미 눈을 돌릴 수도 없게 되어 있었다. 지금 그대로 이곳을 떠난다면, 마음 을 송두리째 남겨 놓고 가는 것이 된다. 파이살에게서 심술궂은 외삼촌 손으로! 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나를 조금도 의식하지 않 는 사나이에게 사로잡히고 말다니. 이 마음을 확실히 < 애정>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이상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도 없었다. 충심에서 찾고 있는 것과 쿠웨이트를 떠나고 싶지 않은 이유는 같은 것으로, 그것은 라시드의 팔 속에서 싹터서, 그 뒤에는 페리시어 의 내부에 뿌리를 박고 말았다. 단지 약간 매력을 느꼈 을 뿐이라고 간단히 치부하려 했으나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를 접촉하고 싶다, 그리고 그가 다가와 주 었으면좋겠다는 불타는 듯한 욕망은 밤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격렬한 것이었다. 비키니보다 그 검은 원피스형이 좋겠지. 그 원피스가 날씬한 곡선을 매우 잘 드러나게 한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페리시어는 그것으로 결정했다. 더위 먹었을 때 먹 는 약을 사는 것을 잊었으나, 그리 오래 헤엄칠 것도 아 니니까 괜찮겠지. 라시드가 편지를 다 읽을 때까지의 불 과 몇 분 동안이니까. 라시드는 눈치채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이긴 것 이다. 두 가지 의미에서. 하지만 그것도 외삼촌의 호의 를 쟁취하기 위해 페리시어를 이곳으로 보낸 파이살 탓 이라고 생각하면 참말로 얄궂다는 생각도 들었다. 밖은 더웠다. 눈부신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풀에 뛰 어드니 차디찬 물이 달아오른 몸을 비단처럼 부드럽게 감싸 준다. 위를 향해 반듯이 뜨니 푸른 물 위에 불꽃을 연상케 하는 머리가 둥실 퍼졌다. 이렇게 하여 눈을 감 은 채 물에 몸을 맡기고 있으니 조금씩 긴장이 풀리며 주위의 고요함이 몸 안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왜 차 라도 나디아도 풀을 사용하지 않는 걸까? 이윽고 페리 시어는 천천히 크롤 스트로크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다 음엔 입영을 하면서 소금기로 따끔거리는 눈을 감고 한 손으로 누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팔을 잡더니 다 짜고짜로 물에서 끌어올렸다. 부드러운 가죽 부츠. 페리시어는 두려워하면서 위를 쳐다보았다. "고든양!" "라시드!" 그럼 지금 여기서 영국으로 돌아가라고 선


고할 생각인가? 페리시어는 마음을 채찍질하면서 그를 똑바로 응시했 다. 엄한 표정. 입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고 있는 것은 노여움 때문일까, 아니면 혐오감 때문일까? "마구간에 가다가 보니 당신이 여기 있더군." 서론은 그만두고 빨리 결론부터 내려요. 어쩐지 울고 싶어져 페리시어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를 나가면 이젠 라시드의 노한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 하고 자기를 위로하려 했으나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풀에서 뭘 하고 있었지?" "수영하는 것도 당신의 허가를 받아야 해요?" 찌르는 듯한 눈매에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까. 옷은 풀 저편에 있다. 비둘기의 울음소리도 그치고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 한 가운데 벌떡거리며 기분 나쁠 정도로 뛰고 있는 가 슴의 고동 소리가 똑똑히 귀에 들려 오는 것 같았다. 라 시드는 뭔가를 찾는 듯이 물끄러미 페리시어를 응시하 고 있다가 이윽고 만족하다는 듯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 었다. "당신을 찾고 있었어. 할 이야기가 있어." 그렇겠지요, 페리시어는 어깨를 치켜세웠다. 어떤 일 이 있어도 슬픈 기색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럼 옷을 갈아입고……." "아니야. 단둘이서 해야 할 이야기야. 여기에는 아무 도 오지 않으니까 이대로가 더 좋아. 이 중정은 내 전용 이니까." 8 "당신만의 것?" 라시드는 짓궂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든양. 이 나라에서는 여자가 수영복 차림으로 자 랑하듯이 남성 앞을 활보하지는 않는다고 전에도 말했 잖아. 풀과 중정은 내 전용이야. 물론 알곤 있었겠지?" 평온한 표정 밑에는 폭발 일보 전의 노여움이 부글


거리고 있다. 그런 인상을 받았으나 뭣 때문에 노여워 하고 있는 것일까? "미안해요. 당신 전용의 장소에 무단으로 들어와서." "그만둬요. 얌전을 빼는 것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 아. 요전날 밤의 다 받지 못한 빚 때문이지, 그렇지? 그래서 당신은 내가 적당한 기회를 찾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지. 그런 점에서는 대단한 솜 씨요. 지금이 그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그런 모습으 로 눈앞에 서 있으면 보통 남자라면 상식 따위는 아무 데나 팽개쳐 버릴 거야, 고든양." 강철을 연상케 하는 용서없는 목소리. 시선이 피부 를 태울 것 같다. 그러나 겨냥이 빗나간 무례한 말투 에 발끈해진 지금은 노여움이 더 커서, 파이살의 편지 따위는 깨끗이 잊고 페리시어는 따져 물었다. "당신을 유혹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고 말하고 싶은 거죠?" 하지만 라시드는 보통 때와는 달리, 날카로운 목소리에도,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도 전혀 동요되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럼 틀렸단 말인가? 우린 서로 이미 새삼스럽게 깨끗한 척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고든양?" 라시드는 갑자기 손을 뻗쳐 젖은 머리를 한줌 움켜잡고는 페리 시어의 자유를 빼앗았다. 바르작거리면 그럴수록 더욱 세게 끌어당겨져, 결국 얇은 수영복 한 겹을 사이에 두고 꽉 끌어안기고 말았 다. 라시드의 체온이 전해져 와서 저항할 기력이 사라졌 다. 밀어 버리려고 해도 튼튼한 팔힘에는 당할 수가 없어서, 가냘픈 페리시어는 단단한 팔 안에서, 이성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을 떠돌고 있었다. 남자의 몸 을 이렇게 가깝게 느껴본 적도 없었고, 이런 꼴을 당 하는 것도 처음이라고 말해 봤자 그가 알아줄 리 없 다. 수영복의 어깨끈이 벗겨졌을 때 페리시어는 정신 없이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허겁지겁 가슴에 손을 댔으


나 곧 손목도 잡히고 말았다. 그는 부끄러움과 분노로 장밋빛으로 물든 피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름다워. 아름답든 어떻든 나완 아무 상관도 없지 만. 파이살은 당신의 그 숫처녀 같은 모습에 감쪽같이 속았나 보군, 하지만 나는 그렇게 되지 않아, 고든양." '고든양!' 지금 라시드는 히스테리의 발작을 일으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방약무인하게 페리시어 의 몸을 마치 제것처럼 마음대로 다루면서, 그래도 '고 든양'이라니! 팔 안에서 도망칠 수는 없었으나, 페리시어는 대리 석처럼 몸을 굳히면서 한껏 오만함을 담은 눈으로 상 대를 응시했다. "꽤 유별난 사과법이군요, 셰이크 라시드!" 노여움으 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도 라시드는 천연스럽게 가냘 픈 어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나? 그러나 이것으로 보상은 된 게 아닌가?" "내가 이런 짓을 바라고 있다고......." 말을 끝내지도 않고 밀어 버리려 했으나, 어깨를 잡고 있는 손이 느 슨해지기는커녕 페리시어는 단단한 가슴에 더욱 세게 끌어당겨졌다. 갑자기 입술이 다가오자, 공포에 사로잡 힌 그녀는 일순 입술을 꽉 다물었으나, 격렬한 힘에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어서 페리시어의 입술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사막을 태우는 무정한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눈. 그렇다. 곧 여기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앞으로는 지금과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 지 않으리라....... 라시드의 팔에 안기는 일도 이제 다 시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열려라 참깨>의 주문을 외기라도 한 것 처럼, 그 순간 페리시어의 마음도 열렸다. 몸이 그의 마음대로 움직였다. 라시드는 입속으로 뭔가 중얼거리 더니, 갑자기 부드럽게 휘는 페리시어를 힘껏 안았다. 아무것도 걱정할 것은 없다. 소중한 것은 지금의 이


순간. 훔친 과일의 단맛을 앞으로 남은 긴 일생 동안 잊을 수는 없으리라. 이렇게 라시드에게 꼭 달라붙어 서....... 그러나 그를 충동질하고 있는 것은 애정이 아 니라 단순한 욕망일 뿐....... 황홀한 기분이 사라지고 싸늘한 기운이 스며들자 페리시어는 필사적으로 자유 롭게 되려고 바르작거렸다. "놓아요!" 솟아오르는 눈물로 주위가 흐리게 보였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겨우, 벗겨진 어깨끈을 본디대로 올릴 수 있었다. 페리시어를 그토록 황홀하게 만든 이 몇 분 동안의 사건도 라시드에게는 그냥 지나가는 일 인 듯 그는 돌기둥에 느긋하게 기대 서서 냉소를 띠고 있었다. "이런 일이라면 왜 변죽울리는 짓을 했지? 당신이 유혹했기 때문에 나는 받아들인 거야. 무례한 짓은 하 고 싶지 않으니까." "유혹했다구요? 당치도 않아요. 대체 무슨 말을 하 는 거예요?" "아닌가? 나를 당신의 포로로 만들어 파이살과의 혼 약을 승낙받자, 그런 계획이 아니었던가? 처음부터 그 럴 생각이었지? 나는 바보가 아니야, 고든양. 만일 내 가 말한 것 같은 이유에서가 아니라면 왜 저항하려 하 지 않았지? 나의 승낙을 얻기 위해 쓴 당신의 수법을 파이살에게 이야기한다면 좋은 얼굴은 하지 않을 걸. 그 편지에는 뭐라고 씌어 있었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빨리 어떻게 하라는 내용이던가? 파이살은 아직도 당 신에게 싫증이 나지 않은 모양이군." "만일 그렇다면 당신이 먼저 알고 있을 게 아니에 요." 페리시어는 적당하게 말을 얼버무렸다. 그럼 아직 파이살의 편지는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군. 그러나 결 국은 마찬가지다. 지금과 같은 소행을 하는 것을 보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모욕을 줌으로써 빨리 단념시켜 쫓아버리려고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돈이 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자라고 생각한다면 왜 매수


하려 들지 않을까? 그렇다. 어떤 출신인지도 모르는 페리시어가 명가의 가족이 되려고 우쭐대는 것을 혼내 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차라에게 애원하진 말아. 처녀로서의 마지 막 생일이니까." "의심이 생기면 없는 일도 상상해서 더욱 두려워진 다, 그런 말이군요?" 한껏 모멸의 표정을 지었다. "그 런 치사한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차라가 좋 아요. 슬프게 만들지는 않아요." "그 마음이 나에게만은 통용되지 않는군, 그렇지?" 페리시어는 어이가 없었다. 도덕관도 아무것도 없이 단지 재산만이 목적이라고 비난하면서도 자기에게 호 감을 갖게 하려고 생각하다니. "그래요." 방금 취한 행동은 어디까지나 타산적인 생 각에서라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믿게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그에게 정말로 끌리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언젠가 알게 된다고 해도, 그때에는 페리시어는 영국에서 자존심을 갈기갈기 찢기는 그 냉소를 받지 않아도 된다. 저녁 식사 때 차라는 몹시 새침해 있었다. "지독했어요, 그토록 화를 내다니." 식후 차라는 목 소리를 죽여가며 털어놓았다. "외삼촌은 요즈음 이상 해요. 언제나 초조해 하고....... 전에는 아주 부드러웠어 요. 파이살을 소환하지 않는 것도 의무에 대한 관념을 심어 주기 위해서라고 말했어요." <의무>, 같은 계층의 여성을 아내로 삼는 것도 그 의무의 하나이리라. 다음날 아침 식사 때 여러 사람의 들뜬 웃음소리 속 에서 페리시어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어젯밤 엔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며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이 것저것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차라리 라시드에게 돌 아가기로 했다고 말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 싸늘한 모멸에 찬 표정을 정면으로 대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향수의 일로 떠들고 있는 차라의 수다를 듣고 있자 니, 싫든 좋든 내버려 둔 그 향수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는 그것을 열 때가 있으리라. 그러면 향 기 속에, 먼지가 낀 뒷골목과 라시드의 손의 감촉이 되살아날 것이다. 페리시어는 어젯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자존심과 싸웠으나, 새벽녘에 드디어 항복하고 말았다. 나는 라 시드를 사랑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잠자고 있던 깊 은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것은 고독했던 소녀 시절의 후유증으로 생긴 남성에 대한 불안감을 때려부 술 정도로 격렬한 것이었다. 라시드에게는 그녀에게 온갖 것을 잊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파이살에게 대한 감정은 고독했던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 준 것에 대한 감사뿐 이었다. 그의 키스에 응해 줄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의 성격이 냉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 다는 것을 라시드는 가르쳐 주었다. 파이살과 키스할 때는 언제나 수동적이었지만, 라시드의 팔 안에서는 샘솟는 정열에 충동되어 능동적이 되어 버리곤 했다. 그러나 그만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을 제것으로 만들 수는 없으리라. 가슴이 메는 듯한 괴로움에서 벗어나 기 위해서는 하루 바삐 여기서 떠나야만 한다. "괜찮아요, 페리시어? 안색이 좋지 않아요." 나디아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페리시어는 멍 청히 웃었다. "네, 괜찮아요." 언젠가는 다시 생기를 되찾을 수 있 겠지. 사우드 가의 성곽은 바위 위에 세워진 거대한 건물 로, 부근 일대를 위협하는 듯한 당당한 모습에 에전의 거칠었던 나날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이곳에는 옛 풍속이 뿌리깊게 남아있는 듯, 어마어 마한 돌문을 빠져나가자 여자들은 곧 옆에 있는 다른 입구로 안내되었다.


먼저 마중나온 것은 사우드의 어머니였다. 서로의 건강과 장수를 비는 아랍식 인사가 교환되고, 이윽고 넓은 방에 띄엄띄엄 놓여 있는 화려한 쿠션에 각자가 편히 앉았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결혼에 관한 일을 이야기하면 마가 낀다고 하여 아무도 직접 화제를 삼지는 않았으 나, 얼굴을 붉히고 있는 차라의 앞에는 순식간에 값진 선물들이 산적되었다. 환대하는 쪽에는 사우드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몇 사 람의 여인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여 인이 페리시어를 손짓으로 불렀다. "사우드의 조모님이세요." 나디아가 귀띔했다. "아주 현명한 분이에요. 원수(元首)의 자문에 응하시기도 하 죠." 헨너 염료로 손톱을 물들이고 극히 간소한 옷차림을 한 노부인에게는 어딘가 범할 수 없는 위엄과 지혜가 깃들여 있는 것 같았다. 영어는 모른다고 했으나 페리 시어를 바라보는 눈은 슬기롭게 빛나고 있었다. "당신이 이분의 이종 사촌의 아내가 된 영국 여성라시드의 조모님-과 꼭 닮았다고 말씀하셨어." 운무 파이살이 통역해 주었다. 오래도록 계속되는 방문 의식에 페리시어는 완전히 매혹되었다. 적어도 석 잔은 마시는 것이 예의로 되어 있는 쓴 커피도 오늘은 아주 맛이 있었다. 작별인사를 할 때가 되어 운무 파이살과 차라만이 잠시 남게 되었 다. "라시드는 지참금 문제를 의논하고 있으며, 차라와 어머니는 사우드의 어머님과 식에 대한 자세한 상의를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들은 정원이라도 산책해요, 페 리시어." 나디아를 뒤따라 선선한 정원으로 나오니 어젯밤부 터의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라시드가 싫은 거죠, 당신?" 허를 찔린 페리시어는


깜짝 놀랐다. "당신 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무슨 일 이 있었어요?" "그분은, 저의...... 파이살과 저와의 관계가 마음에 들 지 않는 거예요. 제가 재산을 목적으로 하는 나쁜 여 자라고 하면서...... 그것은 당신의 동생을 보호하려는 생각에서란 것은 알고 있지만......." "라시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정도의 바보가 아니에요. 그가 날카롭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아요. 그 에게는 영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이 나라에 서 자신의 마음을 무장하는 방법을 익힌 거예요. 소중 한 정원처럼, 극히 제한된 사람에게만 그 아름다움을 엿보게 해요." 페리시어는 그 '극히 제한된 사람'의 동아리에는 도 저히 들 수 없는 것이다. "저를 영국으로 쫓아보내고 싶은 거예요. 그것은 전 부터 알고 있었어요. 차라의 생일만 아니었더라면 전 벌써 돌아갔을 거예요." "차라는 당신을 아주 좋아해요, 페리시어. 하지만 뭐 라고 해도 지금 당신이 여기에 있는 것은 알라의 뜻이 에요." 아니다, 알라의 뜻이 아니라 라시드의 뜻이겠지. 그 에게만 페리시어를 추방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디아에게 여비를 빌 수 없을까? 절약하면 몇 개월이면 갚을 수도 있으니....... 그러나 막 입을 열 려는데, 나디아가 팔을 잡아당겼다. "서둘러요, 되돌아가야 해요." 나디아는 종종걸음을 치면서 베일을 내렸다. "봐요, 들리지요, 남자들의 목 소리가? 큰일날 뻔 했어요. 그대로 거기에 있었더라면 사우드의 부친 앞에서 라시드가 창피를 당할 뻔했어 요." 나디아는 겨우 걸음을 늦추었다. "실은 말이에요, 라시드에게 매사냥을 가자고 조르고 있는 중이에요. 그의 매사냥 솜씨는 대단해요. 어린 시절처럼, 하다못 해 몇 시간이라도 자유롭게 놀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


주 기뻐요." "저는 사양하겠어요." "무슨 소리예요, 같이 가야 해요."하며 페리시어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우리들은 모두 당신을 아주 좋아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파이살과의 결혼은 바라지 않아요. 내 동생을 이렇게 평하기는 싫지만, 그애는 마 음도 약하고 변덕스러워서 좋은 남편이 될 턱이 없어 요. 그런데 왜 라시드와는 의가 맞지 않을까? 그는 아 름다운 것은 무엇이라도 숭배하는 사람이고, 당신은 이렇게 예쁜데다가 두 사람 다 크리스찬인데."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마음이죠. 라시드의 마 음은 저에게는 닫혀 있어요." 저녁때가 되어 작별을 고했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페리시어는 라시드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은색과 흑색의 불모의 땅. 흘끗 운 전석을 엿본 순간, 봇물이 터진 것처럼 걷잡을 수 없 는 그를 향한 애정에 페리시어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는 눈을 감았다. 시각이 없는 사막, 그리고 옆에 있는 남자-페리시어 가 다시 흘끗 엿보았을 때 마침 그도 이쪽을 보았으므 로 서로의 시선이 부딪혔다. 기쁨과 괴로움이 뒤섞여 어찌할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그를 사랑하고 있다. 환경도 처지도 모든 것이 다 정반대인데도....... "피로하지, 고든양. 차라도 누님도 자고 있어. 괜찮 다면 당신도......." 눈부신 헤드라이트에 비친, 앞에서 달리고 있는 나 디아와 아프메트의 차에는, 남편의 어깨에 안심하고 기대어 자고 있는 나디아의 검은 머리가 떠올라 있었 다. 부럽다- 그 생각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정말 로 가슴이 아파 왔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면 울 고 싶었다. 그것보다도 라시드의 어깨에 기대고 싶 다....... 그도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페리시어를 지탱해준 것은 자존심이었다.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서 졸 셈인가, 고든양. 자 존심 때문에 어깨에 기댈 수 없다면, 곧 나의 조카며 느리가 된다고 생각하면 어떤가? 그렇게 되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안 되지. 자, 기대요. 길이 울퉁불퉁하니 까 그대로 있으면 흔들려서 다칠 지도 모르니까." 페리시어는 순순히 시키는 대로 따랐으나, 그의 한 손이 뻗쳐 와 그의 따뜻한 몸으로 끌어당길 줄은 몰랐 다. "괜찮아. 이런 길이라면 한손으로도 충분해. 무리한 운전도 하지 않을 테고. 자, 긴장을 풀어요.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그런 생각은 없겠지만, 아무런 일도 없는 것은 아니 었다. 기어를 바꿀 때마다 짓눌러 오는 몸, 그리고 남 성적인 체쥐.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과시당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가슴이 답답했다. 눈을 감 아도 뺨 밑에 단단한 어깨가 느껴져, 입술 모양과 감 촉을 생각해 내지 않으려는 건 무리였다. 이렇게 라시드의 신변에 있을 수 있는 기회도 앞으 로는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귀중한 이 시간을 조금 이라도 더 맛보고 싶어서 페리시어는 밀려오는 졸음과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으나, 그의 체온에 감싸여 어 느 사이에 기분좋게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라시드 가 한손으로 페리시어를 안고 다른 한손으로 운전하는 차는 끝없는 밤의 사막을 달리고 있었다. 어느 새 도착했을까? 페리시어는 잠이 덜 깬 채 라 시드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서 내렸다. 졸린 듯한 운무 파이살이 "커피는?"하고 권했지만 사양하고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처음 으로 미움도 노여움도 없이 어깨를 안아 준 라시드. 빨리 혼자가 되어 이 소중한 추억을 되새기며 천천히 꿈꾸고 싶었다. 이튿날, 운무 파이살은 비로소 혼례용 카프탄을 만들


장미색 비단을 보여 주었다. 7 대에 걸쳐 전해 왔다는 은과 터키석으로 된 목걸 이, 루비를 박은 금팔지, 반지 등 차라가 차례차례로 집어내는, 사우드에게서 보내온 예물들은, 그것을 보면 그런 것에 전혀 흥미가 없는 여성이라도 한숨이 나오 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끝으로 나온 것은 정교한 은세공의 거들로, 한번 입 으면 남편 이외의 다른 사람이 벗겨서는 안 된다고 한 다. "라시드는 조모님이 쓰시던 거들을 아직 가지고 있 어요. 외삼촌은 크리스찬이지만 결혼하게 되면 저와 같이 아랍식으로 할 거예요. 기독교만을 고집하지 말 라는 것이 조부님의 유언이었어요." 페리시어는 라시드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깜짝 놀라 곤 했다. 언제 서재로 호출되어 귀국하라는 명령을 받 게 될지 불안했다. 이렇게 고민하느니 차라리 돌아가 겠다고 자진해서 말하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 파이 살의 변심을 알고도 아직 돌아가지 않는 그 까닭을 그 가 눈치챈다면 어떻게 할까?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 하루라도 더 그의 가까이에 있고 싶다....... 어느 사이 엔가 연못가에 온 페리시어는 쭈그리고 앉아서 대모갑 빛깔의 잉어가 뛰어오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멀리서 꾸룩꾸룩 울고 있는 비둘기 울음소리. 완전 하게 조화를 이룬 고풍스런 집, 주위에 감도는 평화로 운 분위기가 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얼마 동안이나 그러고 있었을까. 갑자기 라임 나무 숲이 흔들리고 비둘기가 퍼드덕거리는 소리에 문득 얼 굴을 들고 눈앞에 있는 사람 그림자를 보았을 때, 그 녀의 눈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 다. "셰이크 라시드!" 지금에 와서는 그의 이름을 부르 는 것마저 커다란 기쁨이었다. 조금 의아스럽다는 듯 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눈에 익은 몸짓도 뚜렷이 가슴


에 새겨져 있다. 페리시어는 조심스럽게 웃었다. "파이 살에게서 편지라도 왔나요?" 갑자기 라시드의 표정이 험악해져 갔다. 그런 것은 묻지 말았어야 하는데....... "아니, 그렇게도 파이살이 그리운가? 어쩌면 당신은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진실을 이야기하려면 지금이 좋은 기회다. 말이 입술까지 나 왔으나, 그보다 먼저 라시드가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외관만 보아서는 믿을 수가 없지. 이곳의 강한 햇볕에 그을어서 당신도 우리들처럼 피부색이 거무스름하게 될지는 몰라도, 마음까지는 변하지 않거든. 아무리 생 각해도 파이살과 당신은 결혼해도 행복하지는 못할 것 같군." "동양과 서양이 잘 어울릴 수도 있어요. 당신의 조 모님처럼." "그건 예외지. 조모님은 조부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어,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당신에게도 그런 굳센 면이 있을까? 사막과 파이살만 있는 생활도 견뎌낼 수 있을까?" 페리시어의 눈은 진실을 잘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 나 파이살을 위해서가 아니다. 라시드를 위하는 일이 라면 맨발로 타는 사막을 방황하는 것도 마다치 않으 리라.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고 싶다. 곧 당장이라도 앞에 있는 검은 머리를 매만지고, 조각 같은 입술에 키스하며, 팔 안에서 녹아 그의 일부가 되고 싶다....... 페리시어는 눈을 감고, 도저히 실현되지 못할 이런 이 미지를 잊게 해주십사고 신에게 기도했다. 눈을 뜨자 라시드가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이런 곳에 혼자 있는 것은 안전하지가 못해요." "사막의 야만인에게 유괴당한다는 건가요? 틀림없이 그들은 당신처럼 저를 경멸하겠지요. 불청객, 모래알 정도의 가치밖에 없는 시시한 여자라고요?" "파이살은 경멸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당신에게는


파이살만이 전부가 아닌가?"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페리시어는 마치 가슴을 얻어맞은 듯한 통증을 참고 있었다. 역시 라시드는 털끝만큼도 그녀에게 호의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젠 정원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쓸쓸히 방으로 되 돌아온 페리시어는 충동적으로 서랍을 열어, 언젠가 뒷골목의 향수 조합사가 조합해 준 작은 병을 꺼냈다. 그다지 기분은 내키지 않았으나 집어낸 김에 뚜껑을 여니 영국의 전원을 방불케 하는 향기가 퍼졌다. 나의 마음을 잘 알고 거기에 맞도록 조합해서 향수를 만들 다니, 그 늙은 주인에겐 어떤 힘이 있는 걸까? 앞으로 는 이 향기를 맡을 때마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 의 괴로움을 회상하며 달랠 길 없는 쓸쓸함을 맛보게 되리라. 9 아프메트의 조언으로 매사냥을 가게 되었다. 매치의 다소에 따라 겨우 이삼일의 캠프 생활이라고 한다. 여 느때라면 여성은 집을 보지만, 나디아는 남성만이 즐 기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자꾸 아프메트를 졸라댔다. "이전에는 차라와 같이 자주 갔어요. 자유롭고 마음 도 느긋해져요. 옛날에는 남자들은 천막 생활을 하며 모닥불로 요리를 했다고 해요. 그러나 지금은 슬리핑 백과 캠프용 스토브가 있어요. 사실 라시드는 옛날처 럼 천막을 쓰는 걸 좋아하지만, 파이살은 몸이 약하니 까 설익은 요리로 배탈이 난다느니 화상을 입을 염려 가 있다느니 하며 어머니가 귀찮게 잔소리를 하기 때 문에 양보했지요." 모닥불 대신 캠프용 스토브를 쓴다고 해도 어쨌든 가슴 설레지 않는가. 끝없는 사막, 총총한 별빛 아래의 식사. 페리시어는 피크닉이라는 것을 한번도 가 본 일 이 없었다. "괜찮아요. 아프메트가 반드시 라시드를 설득할 거


예요. 그래요, 만일 안 된다고 한다면 아프메트도 못 가게 할 테니까." 페리시어는 무심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프메 트는 이 모던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매우 사랑하고 있 는 것 같다. "간신히 승낙을 받았어." 장본인인 아프메트가 부인 방으로 들어왔다. "내일 새벽에 출발하기로 했어. 일분 이라도 지각해서는 안 돼. 여성이라고 해서 너그럽게 봐줄 수는 없다고 말했어. 남성과 똑같이 취급하겠다 고 했어." "외삼촌답군요. 우리들보다 자기 매가 훨씬 소중하 니까." 나디아는 콧방귀를 뀌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야." 아프메트는 차라드와 놀고 있는 페리시어 쪽으로 눈을 돌렸다. "사막에 가는 것 은 처음이지요? 나디아에게 여러 가지로 참고가 될 일 을 들어 두세요." 약간 눈살을 찌푸린 아프메트의 표정을 보고 페리시 어는 걱정이 되었다. 라시드가 나를 데리고 가고 싶지 않은 것일까? 그러나 차라의 잡담에서 언뜻 들은 것과 같이, 쿠웨이트에 사람을 보내지 않으면 편지를 입수 할 수 없다면 앞으로 며칠 동안은 안전할 것이다. 이 남은 얼마 안 되는 시간은 나의 것이다. 앞으로의 쓸 쓸한 세월을 생각하니, 어떻게 해서라도 마음을 따사 롭게 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들어 놓고 싶었다. 그날 오후 함께 짐을 꾸리기로 했다. "진즈와 긴소매 블라우스, 그리고 승마용 부츠는 내 것을 빌려줄게요. 매가 호가라를 잡으면 거기까지 달 려가야 하는데, 뱀과 전갈이 있기 때문에 꼭 부츠를 신어야 해요." "저, 라시드가 여성을 데리고 가지 않으려고 한 것 은 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무리 괴로운 대답 을 듣더라도 이것만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디아는 일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요, 옛날부터 내려온 관습으로 여성에게는 남성이 한 사람씩 꼭 붙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에요. 위험에서 지키기 위해서죠. 파이살이 없으므로 자연히 라시드가 당신을 책임지게 되는 거지요. 당신은 사막 이 처음이지만……. 그러나 안심해요. 우리들이 신경을 쓰고 있으니까. 하지만, 알아줬으면……." "당신의 외삼촌이 저를 불청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라면 벌써 알고 있어요." 나디아는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을 한 다고 화는 내지 말아요. 당신의 라시드에 대한 적의는, 저…… 다른 감정을 숨기는 방패가 아닌가요?" 흘끗 훔쳐본 나디아의 표정에서 진실을 간파당한 것 을 알아차렸으나, 그것을 인정하다니 자존심이 허락하 지 않았다. "애정에 관해 말씀하시는 거죠? 그 사람을 사랑하다 니, 바보나 매저키스트가 아니면 무리예요!" 나디아가 깜짝 놀라자, 겨우 이것으로 질문의 화살 을 피했구나 하고 안심한 것도 한 순간, 목덜미에 시 선을 느끼고 당황해서 돌아보니, 차디찬 노여움을 띤 라시드가 도어 앞을 지나는 중이었다. "들었을까요, 나디아?" "아마 그랬을 거예요. 발소리를 전혀 내지 않으니 까." 페리시어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처럼 험악한 사나이 인데, 조금 화나게 한 것쯤이야 어떨라구. "괜찮아요, 정말로. 어차피, 그에게 미움을 받고 있 는 걸요. 지금 한 말로 저에 대한 생각이 더욱더 확고 해지겠죠." "내가 해명하겠어요, 페리시어." 페리시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디아의, 내가 라시드를 사랑하고 있지 않나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그것이라고 해명하게 한다? 어림도 없다. 예리한 그다. 그것으로 본심을 간파당할 것은 뻔한 일이다.


"괜찮아요. 전 그가 어떻게 생각해도 상관없어요." 나디아가 나가 버린 뒤, 페리시어는 장롱에 걸려 있 는 드레스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여기도 곧 텅텅 비게 될 것이다. 파이살의 편지가 도착하면 그때는……. 동이 틀 무렵에 정원에 집합하라고 어젯밤 엄중하게 지시를 받았으므로 페리시어는 졸린 눈을 비비면서 진 즈를 입었다. 아래층에서는 벌써 사람들의 이야깃소리 가 들려 왔다. 서두르지 않으면……. 하인들도 두 대의 랜드로버에 짐을 다 실은 것 같았 다. 라시드의 옆에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 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디아가 자기 차에 타라고 권유하자 페리시어는 겨우 안심했다. 집을 보게 된 차라드는 모두에게 마구 키스를 하고 돌아다녔으나, 가장 좋아하는 페리시어는 맨 나중으로 미루어 놓았던 모양으로, 줄곧 달라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정말 귀여운 아이에요." "아랍의 어린이들은 어머니 대신인 아주머니들을 잘 따르고 있어요, 고든양. 유럽과는 달라서 이곳에서는 어린이들을 아주 사랑하므로 될 수 있는 대로 좋은 환 경 속에서 자라도록 배려하고 있어요." 이치에 벗어난 비난에 따끔한 말로 반박하려고 했으 나, 여기서 그와 언쟁을 해서 모처럼의 즐거운 분위기 를 망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페리시어는 화가 치미는 것을 누르고 약간 미소짓고는 나디아를 따라서 아침 식탁에서 일어섰다. 한구석에 놓인 작은 테이블을 본 순간, 페리시어의 발은 얼어 버렸다.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는, 놋 쇠로 만든 편지꽂이에는 대여섯 통의 편지가 꽂혀 있 었다. 맨 위의 것은 항공우편으로 눈에 익은 파이살의 필적이었으며 수취인은 라시드였다. 저 편지 때문에 마지막 며칠을 빼앗기고 만다. 재빨 리 편지를 집으려 했으나 옆에는 나디아가 있다. 페리


시어는 그대로 식당을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웅성거리는 아침 공기 속에 찢는 듯한 매의 울음소 리가 들려 페리시어는 깜짝 놀라며 소리가 나는 쪽으 로 돌아섰다. 여가만 나면 라시드가 손수 훈련을 시킨 다는 매의 날카로운 발톱과 뾰족한 부리가 아주 잔혹 스럽게 보여 등골이 오싹해졌다. 바로 가까이에 있는 한 마리의 매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개를 퍼덕거 렸다. "이것은 굉장히 훌륭한 매입니다. 산프드라고 합니 다." 손목에 매를 앉힌 하인의 목소리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페리시어가 그만 두려움도 잊고 아름다운 황갈색 의 깃을 어루만지려고 손가락을 내민 순간 부리에 쪼 이고 말았다. "손을 대서는 안 돼!" 라시드의 고함소리에 차라와 나디아가 일제히 이쪽을 돌아봤다. "여기에 있는 매는 한 마리에 2 천 파운드 이상의 가 치가 있어요, 고든양. 움직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공 격하도록 훈련돼 있지. 당신의 그 귀여운 손가락도 마 찬가지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괜찮지 않아요, 라시 드." 재빨리 나디아가 응원하러 이쪽으로 달려왔다. "외삼촌은 매를 마치 자기 자식이나 되는 것처럼 귀 여워하니 말이에요." "그래. 자식처럼 말을 잘 듣도록 훈련을 시키니까." 라시드는 하인이 내민, 금실과 은실로 수를 가득 놓 은 가죽 장갑을 끼더니 매를 그 위에 앉히고 날고기를 한 조각 주었다. 그 고기 조각이 날카로운 부리 속으 로 사라져 가는 것을 보고, 가슴이 메슥거려 페리시어 는 급히 얼굴을 돌렸다. "산다는 것은 이런 거지, 고든양.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싸우지 않으면 안 돼." "그러다가 죽이는군요?"


"필요할 때는. 어떤가, 누님과 남아 있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래서 함께 있을 수 있는 겨우 몇 시간을 뻔히 알 면서 놓쳐 버린다? 어림도 없는 소리! 단호히 고개를 가로젓고 눈을 든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상관없어요. 일단 말할 것은 말했으니까. 그러나 잘 따라와야 해요.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래도 말썽 이 생기기 쉬우니까." 전원이 이미 차에 다 타고 있는 것을 보고 페리시어 는 급히 나디아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뒤에서 라시드 의 목소리가 쫓아왔다. "당신은 내 차에 타야 해요, 고든양. 차라, 너는 아 프메트와 나디아 쪽에 타라. 그리고 셀림과 차이드, 너 희들 중에서 한 사람은 저쪽으로 옮겼으면 좋겠다." 몹시 놀란 페리시어는 애원하듯이 나디아를 바라보 았다. "고든양. 당신 때문에 예정된 시간이 자꾸 늦어지고 있어요." "괜찮아요. 설마 잡아먹기야 할라구요." 나디아는 장 난기 어린 표정으로 페리시어를 밀어 보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천천히 두 번째 랜드로버에 탄 페리시어는 가면처럼 무표정한 라시드를 보지 않으려 고 했다. 도어가 닫히자, 뒷좌석에 앉은 셀림이 오늘 아침 식 당에서 본 편지 다발을 라시드에게 내밀었다. "랜드로버를 가지러 저택에 갔을 때 이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라시드는 편지를 아무렇게나 핸들 옆에 있는 선반에 집어던졌다. 파이살의 편지를 알아보았을까? 아마 알 아보지 못한 것 같다. 어떻게 할까. 마음이 변했으니, 운무 파이살과 남겠다고 할까?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 다. 차는 미끄러지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지평선에서 해가 떠오르자 황금처럼 눈부신 빛이 일대에 퍼지기


시작했다. 라시드는 편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앞만 바라보면 서 핸들을 잡고 있었다. 아마 휴식 시간에……. 이젠 손을 쓸 수도 없었다. 페리시어는 창밖의 풍경에 정신 을 집중시키려고 했다. 겨우 동쪽 하늘이 밝아졌는데 도 벌써 사막에서는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쯤 가는 동안에 페리시어는 그가 언제나 태양이 왼쪽으로 오도록 운전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 막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태양만으로도 충분한 이정표 가 되는 것이리라. 라시드는 정오 조금 전에 차를 멈추고, 밖으로 나오 라고 고개를 끄덕여셔 신호를 했다. 저 편지! 페리시어 는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불안감으로 입안이 바싹 말랐다. 긴장과 불안으로 다리가 떨려서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리는 페리시어를 보자, 라시드는 재빨리 반대쪽의 문을 열고 부축해 주었다. 속눈썹 사이로 엿보니, 냉엄 한 얼굴에는, 언제나 라시드를 자신만만하게 보이게 하는 힘이 가득 차 있었다. 만일 이 사막에서 길을 잃 는다 해도 그와 함께 있으면 아무 걱정도 되지 않으리 라. 우아하지는 않지만, 이 커다란 힘에는 마음놓고 기 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라시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랜드로버로 되돌아갔다. "다리가 저렸지요?" 차라가 고개를 내밀었다. "조금요." 페리시어는 차 안에 있는 라시드에게서 눈 을 뗄 수가 없었다. 그가 막 선반에서 편지를 집어드 는 참이었다. "여기서 사냥을 하는 건가요?" 건성으로 중얼거렸으나, 벌써 싸늘한 비웃음이 귀에 들려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식사를 끝나고 매를 놓아준 다음, 우리들은 차로 쫓아가요. 몇 킬로를 달려도 호가라 한 마리 잡지 못 할 때도 있어요. 굉장히 교활한 새로, 매처럼 날지는


못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수도 있으니까 흔히 놓치고 지나칠 때가 많죠. 게다가, 뭔가 찐득찐득한 것 을 매의 눈을 겨냥해 토해내기도 해요. 제법 잘 싸우 죠." "페어 플레이의 정신을 존중하는 영국인에게는 좋은 이야기죠, 고든양." 아프메트가 장난스럽게 눈을 빛냈 다. "영국의 여우, 이곳의 호가라. 살기 위한 지혜로 저희들보다 훨씬 영리한 적을 앞지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사이엔가 동아리에 낀 라시드는 지금까지 계속 귀만 기울이고 있더니, 이때 흘끗 페리시어를 보면서 말참견을 했다. "살아남으려면 아무래도 고기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호가라의 지혜에 감동할 수 있을까요, 고든양은?" "저는 당신이 여러분에게 믿게 하려고 할 정도의 바 보는 아닙니다, 셰이크 라시드." 페리시어는 단호한 태 도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즐기 기 위해서 온 거지, 저녁 식사의 매치를 잡으려고 온 것은 아니잖아요?" 아아, 저 편지를 쿠웨이트에 그대로 두고 왔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 읽어 보려는 것일까, 점심 식사 후일까? 휴식 시간이 된 것을 안 매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서, 페리시어는 차라가 건네 주는 라임 주스를 받아 들고 앉았다. 잠시 후에 누운 그녀는 그 한때에 전신 을 맡겨 버렸다-손 끝에 닿는 사각거리는 모래, 타는 듯한 햇볕, 희미한 석유 냄새, 아랍어의 낮은 웅성거 림. "사막이 어떤가, 고든양?" 페리시어는 흠칫해서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파이살의 편지를 읽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 다면 그녀가 먼저 말할 때까지 가만히 있겠다는 음흉 한 방법으로 그녀를 괴롭히려고 하는 것일까? 정 그렇 다면 원하는 대로 상대해 줘야겠다!


"굉장하군요." 페리시어는 시원스런 목소리로 대답하 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여기에 올 때마다, 어떻게 사무실에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느낌이 들거든. 아무리 자유로와 보여도 인간에게는 반드시 뭔가가 늘 붙어 다니거든, 책임이 라는. 나 같은 남자와 평생을 함께 살려는 여성은 이 러한 무한한 공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당신의 조모님 같이요?" "그런 분은 좀처럼 없을 거야. 한 남자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거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게다 가, 그 무렵의 우리 집은 지금 같은 재산 따위는 없었 지. 편한 생활을 좋아하는 당신에게는 무리일 거야." "색안경을 쓰고 보니까 그렇죠. 제가 어떤 인간인가 를 마음대로 단정지어 놓고는. 그러니까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지요." "그런가?" 갑자기 라시드의 눈이 진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당신 화가 났군. 눈이 녹색으로 번쩍거리며 나를 불태우려 하고 있어. 요전에 키스했을 때는 비취 색의 신비스런 샘 같았는데." "라시드, 페리시어. 식사하세요." 나디아의 소리. 지금 이 대화를 좀더 계속하고 싶은데……. 페리시 어는 맥이 탁 풀려 일어섰다. "자아, 지금부터 여성은 방해자 취급을 받게 돼요." 식사가 끝나자 나디아가 장난스럽게 설명했다. "놓아 준 매를 랜드로버로 쫓아가는데, 필사적으로 안전 벨 트에 매달려 있지 않으면 안 돼요. 스릴은 만점이에요. 때를 놓치면 톡톡히 망신만 당하니까." 다시 차에 탄 페리시어는 곧 눈으로 편지를 찾았다. 없다! 벌써 읽은 것이다. 고양이가 쥐를 골리듯이, 조 금이라도 더 페리시어를 괴롭히려는 꿍꿍이속임에 틀 림없다. 아아, 내가 먼저 말했더라면 괜찮았을 것을. 라시드가 도어를 쾅 닫고 엔진을 걸자, 랜드로버는 푸


른 하늘에 점같이 보이는 매를 쫓아 울퉁불퉁한 모래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무섭도록 내는 속력이 모래언덕을 넘어 비탈길을 달 렸다. 그럴 때마다 튀어올라 여기저기에 부딪혔으므로 온 몸은 상처투성이가 되고 눈과 입에 모래알이 날아 들어왔다. 셀림이 흥분하여 뭐라고 소리치는 순간 랜드로버는 신경질적인 말처럼 튀어올랐다. 푸른 하늘의 한 점은 어느 사이에 보이지 않았고, 라시드는 입속으로 낮게 욕을 하면서 더욱더 속력을 냈다. 필사적으로 계기판 에 달라붙어 있는 페리시어의 눈앞에서 세계가 뒤집히 고 사막과 창공이 번갈아 창밖을 날아 지나갔다. 이윽 고 차는 비탈길을 다 내려와 평지로 나왔으나, 페리시 어는 도어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괜찮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긴장을 강요당하 고 고통도 컸으나, 그래도 스스로도 놀란 것은 자신이 가슴을 설레며 사냥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윽고 매가 다시 모습을 나타내어 푸른 하늘에 한 점이 보였는가 했더니, 사막에 밤의 장막이 내리는 것 같은 속도로 급강하하여 불쌍한 호가라를 발톱에서 떨 어뜨렸다. 페리시어는 녹초가 돼 있었으나, 가슴을 설레고 눈 을 빛내며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매는 하루에 여덟 마리나 아홉 마리의 매치를 죽일 수 있으나, 놀이를 위해서 그렇게 많은 살생을 하고 싶지는 않다는 라시 드의 의견에 따라, 매 한 마리당 호가라 두 마리씩으 로 매치의 수를 정했다. 다행히 사냥한 것은 식탁에 오르지 않는다고 하기에 겨우 안심했다. 아무리 맛이 좋다고 해도 눈앞에서 죽 임을 당한 것을 먹을 기분은 조금도 없었다. 황혼이 길다란 그림자를 만들 때 하루의 일과는 겨 우 끝나고 두 대의 랜드로버는 캠프지로 정해 둔 오아


시스로 향했다. 그날 밤 안에 되돌아가자고 하는 라시드에게 나디아 는 아프메트를 흘끗 보면서 반대했다. 이 두 사람에게 는 사막의 벨벳 빛깔의 밤하늘이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요. 우리들은 사막에서 허니문을 보냈어요. 천 막을 치고, 아주 로맨틱했어요." 밤이 깊어지자, 슬리 핑 백과 싸우면서 나디아가 털어놓았다. "지긋지긋해. 셀림에게 해달라고 해야지. 남성이 쓸모가 있는 것은 이런 때뿐이지만." 확실히 남자들은 일을 잘 했다. 알리를 도와 식료품 상자를 열고 있는 라시드를 보고 있는 동안에, 페리시 어는 걸 스카우트 단원이었을 때의 일을 회상했다. 빨갛게 타오르는 모닥불의 불꽃이, 다정하게 차라를 보면서 웃는 라시드의 얼굴을 비추자, 페리시어의 가 슴은 무의식중에 꽉 죄어들듯이 아팠다.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저런 눈으로 나를 봐 준 때가 있었던가? 가만히 응시당하고 있는 것을 느낀 듯, 갑자기 얼굴 을 든 라시드와 정면으로 시선이 부딪히자, 페리시어 는 전신에 경련 비슷한 떨림이 일어났다. 이런 괴로움 을 맛보느니 차라리 빨리 결말이 나 버렸으면 좋겠는 데……. 신선한 공기와 심한 움직임으로 배가 고플 것이 당 연한데도, 도무지 식욕이 나지 않았다. 이런 사막에서 는 형식은 죄다 무시되어, 셀림도 차이드도 보통 때처 럼 남성부터 커피를 주려 하지 않았고, 아프메트와 나 디아도 남의 눈을 꺼리지 않고 다정하게 나란히 앉아 있었다. "저 두 사람은 운이 좋군요." 부러움으로 가슴이 뜨 거워지기 시작했을 때 차라가 귀에 입술을 댔다. "오 늘 밤은 별빛 아래서 단 둘이서……. 아아, 나도 사우 드가 그리워지네요. 어머나, 어머니가 들었더라면 큰일 날 거예요. 페리시어, 당신도 나와 동감이지요?"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린 페리시어의 눈길은 저절로,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셀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라시드의 넓은 어깨로 끌려갔다. "네, 물론이죠. 차라." 아프메트와 나디아가 천막 하나, 또 하나의 천막은 차라와 페리시어. 라시드와 하인들은 노숙한다고 했다. 밤의 사막은 몹시 춥다고 듣고는 있었으나, 이렇게 까지 추울 줄은 몰랐다. 푹신한 슬리핑 백 속에 기어 들어가서도, 라시드의 짓궂은 표정에 사로잡혀 눈은 점점 말똥말똥해질 뿐이었다. 천막 밖은 오리엔트의 밤-사막의 황량한 아름다움, 밤바람에 살랑거리는 야 자나무의 속삭임. 그리고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별들 로 장식된 벨벳의 밤하늘. 긍지 높은 유목민 바두 족 이 어떤 속박도 인정하지 않고, 임금의 부마저 경멸한 것도 과연 수긍할 수 있었다. 누워서 아무리 몸을 뒤채도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라시드의 모습에 견디다 못해, 페리시어는 마침내 슬 리핑 백에서 빠져나왔다.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 운데도, 날카로와진 신경이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 조금 걸어 보자, 내일 닥쳐올 시련에 대비하기 위해서 라도. 밖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였으나, 두꺼운 스웨터를 입고 있었으므로 견딜 만했다. 맑디맑은 수정을 연상 하게 하는 차디찬 밤공기가 열이 오른 머리에 닿자 매 우 상쾌했다. "고든양!" 멈칫하며 돌아보니 랜드로버 곁에 라시드가 서 있었 다. 아아, 왜 이런 곳으로 나왔을까? 말려 줄 사람도 없는데 여기서 책망을 받지나 않을까? 파이살과의 관 계가 끊어졌는데도 아직 꾸물대며 돌아가려 하지 않은 변명을 어떻게 하면 될까? 차라의 생일이 지난 다음 가려 했다고 말하면 믿어 줄까? "무엇을 찾고 있나, 고든양? 돈인가, 로맨스인가? 이


런 밤에는 타산적인 당신도 꼭 안아줄 사나이의 팔이 그리워지던가? 사막의 밤의 추위를 쫓아버릴 뜨거운 입술이 그립던가?" 한 마디 한 마디가 송곳처럼 가슴을 찔렀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잔혹한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 일까? 사막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눈앞의 라시드에게 서도 거대한 기업을 움직이게 하고 있는 비즈니스맨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 걷고 싶었을 뿐이에요. 잠이 안 와서……." "그토록 파이살이 그리운가? 어때, 나에게도 정열은 있어. 게다가 파이살은 바다 저쪽에 있지만, 나는 여기 에 있지." 라시드는 천천히 다가오더니 페리시어를 팔 에 안았다. 만일 벌을 줄 생각이었다면 그는 예상 이상의 성과 를 거둔 셈이 된다. 하다못해 털끝만한 연민의 기색이 라도 없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그를 쳐다보는 페리시 어의 얼굴은, 차가운 달빛에 새파래진 수련처럼 눈만 이 어두운 빛을 띠고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하지 않는 그는 먹이에 덤벼드는 잔인한 매처럼 얼굴을 접근시켜 왔다. 반항해도 소용없다는 생각보다 그에게 반항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란 마음이 더 강했다. 지금 은 정상적인 흐름을 벗어난 한때, 페리시어는 자기 자 신이 마음 한구석에서 이런 일을 바라고 있었다는 것 을 알았다. 홧김에라 해도 좋으니 그가 접촉해 왔으면 좋겠다고. 그렇다면 어둠 속에서는 연인의 팔 안에 안 겨 있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라시드가 그녀를 안고 있는 것은 홧김에서가 아니라 정열에 사로잡혀서라고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노골적으로 경멸의 빛을 띤 눈을 보지 않으려고, 눈 을 꼭 감고 그의 키스에 온몸을 맡겼다. 지금까지 키 스를 해본 일은 있었지만 이만큼 강렬하게, 상대와 한 몸이 되고 싶다, 자신이 없어질 때까지 녹아 버리고


싶다고 원한 적은 없었다. 페리시어는 그의 몸을 자기 에게 눌어붙게라도 할 듯이 더욱더 밀착시켜 갔다. 어느 틈엔가 블라우스 단추는 벗겨지고, 진주 빛깔 의 피부가 달빛을 받고 있었다. 정열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 준 입술 아래, 저항의 말은 힘없이 사라져 갔 다. 뺨에서 귓불, 목덜미에서 가냘픈 어깨로 헤매는 입 술. 덫에 걸린 작은 새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깨나른한 열락에의 동경에, 페리시어는 무의식중에 건 장한 몸이 시키는 대로 맡겨 버렸다. 서로 상대를 요 구하는 커다란 정열이 호응하여 얇은 셔츠를 통해 체 온이 전해지자, 불꽃처럼 뭔가가 몸 안을 마구 달렸다. 그때, 숲속에 우거진 잡초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작은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썰물이 물러가듯이 한때의 마력이 확 사라지고, 라시드의 손이 닿았던 피부가 꿈 에서 깨어났다. 마법의 순간은 지나갔다. 두 사람은 남 의 눈을 피하여 짧은 밀회를 즐기는 불행한 연인이 아 니고, 서로의 육체를 무기로 삼아 싸우는 원수처럼-적 어도 라시드의 경우는 그러했다. 어떻게 할 생각이었 을까? 페리시어가 완전 무방비 상태가 될 때를 기다려 잔인한 판결을 언도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렇다고 하 면 괴로움을 주지 않고 일격에 먹이를 죽이는 매가 그 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아무래도 나로서는 충분한 대용품이 되지 못하는 것 같군. 유감인 걸. 당신은 좀더 상상력을 발동시켰어 야 했어. 그런데 내가 파이살보다 훨씬 부자고, 물론 그보다 많이 지불할 수 있다는 걸 잊고 있었나?"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청히 바 라보면서, 페리시어는 휘청거리는 다리로 천막으로 되 돌아갔다. 이튿날 점심이 끝난 후 별장으로 돌아오자, 나디아 일행은 그대로 자택으로 돌아갔다. 차라가 카프탄의 치수를 재러 온 디자이너와 방에 틀어박히자, 페리시


어와 운무 파이살 둘만이 남았다. "어때, 사막 여행은 즐거웠어?" "네, 아주 즐거웠어요." "라시드에게 파이살로부터 편지가 온 모양이야. 파 이살과도 곧 만나게 되겠군." 그렇다면 벌써 읽은 것이다. 어떻게 할까. 이렇게 돼 서는 대할 면목이 없다. 하다못해 여기가 쿠웨이트였 더라면 곧 영국 대사관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사막 한복판의 오아시스에서는……. 사막-창문에서 내다보 니 황금빛의 모래벌판이 한없이 펼쳐져 있다. 산책이라도 하면 좋은 지혜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운무 파이살의 방 앞을 지나갈 때 방 안에서 라시드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틀림없어요. 그녀는 파이살과 결혼하지 않아요." 까닭도 모른 채 중정으로 나오니, 나무로 만든 대문 이 열려 있고, 저쪽 사막이 그녀를 부르고 있는 것 같 은 기분이 들었다. 페리시어는 몽유병자처럼 걷기 시 작했다. 10 한 방울 또 한 방울, 창백해진 볼을 타고 눈물이 흘 러내렸다. 우울한 생각에 잠긴 페리시어는 고개를 숙 인 채 지향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목덜미에 따가운 햇살을 느꼈다. 꽤 많이 걸었던지 다리가 아팠으나 페리시어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무엇 엔가 홀린 듯이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다. 머리도 블라 우스도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귓가에 달라붙어 떨어지 지 않는 끈질긴 파리를 쫓으려고 손을 들어올렸을 때, 갑자기 심한 갈증이 느껴졌다. 시원한 라임 주스……. 페리시어는 걸음을 멈추고 방금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 았다. 미아가 되고 말았다! 사막의 절대적인 규율을 어 기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오아시스에서 빠져나오다니그녀가 없어진 것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운이 나쁘게도 차라와 운무 파이살은 사우드의 모친


을 만나러 갔기 때문에, 저녁때까지는 페리시어가 없 어졌다는 사실을 알 사람이 없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깨달은 순간 페리시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둘러봐도 오아시스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적막한 사막뿐이었다. 다리에서 힘이 빠져 페리시어는 그 자리에 털썩 주 저앉고 말았다. 길을 잃은 것을 알고 주위를 아무리 헤매 봐도 같은 장소를 빙빙 돌 뿐, 체력만 소모되어 구출하기가 곤란해진다고들 말하지 않았는가. 혀끝으 로 입술을 축이니 몹시 짰다. 그녀는 절망감에 눈을 감았다. 하다못해 더위 예방약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그런대로 괜찮겠지만, 온몸에 불꽃같은 직사광선을 받 자 견딜 수 없는 현기증에 시달렸다. 이윽고 완전히 미아가 된 것을 알고는 페리시어는 일단 조그마한 모래언덕의 그늘로 기어들어갔다. 여기 라면 얼마 동안이나마 열기와 햇살을 피할 수 있겠지. 주위는 괴괴하여 아무소리도 나지 않았다. 준엄한 자 연의 힘을 얕잡아본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래도 페리시 어 자신뿐인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 사이엔가 졸다가 깜짝 놀라 깨니, 갈증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부근 일 대의 모래는 사정없는 햇살에 놋쇠처럼 됐고, 몸을 감 출 장소도, 눈을 쉬게 할 장소도 없었다. 눈을 감으면,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시원스 런 물소리를 내는 분수가 머릿속에 떠올라서 더욱더 갈증이 심해졌다. 자신이 없어졌다는 것을 아직 아무 도 모르고 있는 걸까? 시계를 안 가졌기 때문에 시간 조차 알 수 없었다. 누군가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때가 늦는 것이 아닐까……. 대성 통곡을 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럴 기력마저 없 었다. 힘이 빠질 대로 빠진 페리시어는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움직여 보려 했지만, 갑자기 가슴


이 메슥거리며 눈부신 황금빛 일색의 주위가 빙그르르 한바퀴 돌았다. 이제 이 무정한 모래벌판의 한복판에서 죽는 것이 다. 나 혼자서……. 히스테릭해진 페리시어는 조금 남은 힘을 다해 필사 적으로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이렇게 돼 버린 것도 내 잘못이 아닌가. 게다가 살아 있어도 도대체 무슨 재미가 있단 말인가? 오후의 태양이 길다란 그림자를 만들기 시작할 무 렵, 높은 하늘에 점을 콕 찍어 놓은 듯한 한 마리의 새가 모습을 나타냈다. 새의 청각은 사람보다 훨씬 날 카롭다. 그 새는 녹초가 되어 꼼짝도 못하는 페리시어 를 발견하자 그녀의 머리 위 높은 곳에서 원을 그리며 날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그러나 알아들을 힘이 없어서 페리시어는 눈을 감은 채 비몽사몽간을 방황하 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이 닿는 것을 느꼈으나, 모처럼의 아무 런 괴로움도 없는 꿈꾸는 듯한 기분에서 깨어나고 싶 지 않아,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밀어내려고 했다. 그 러나 그 손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탈수증상을 일으키고 있어. 좀더 지체했더라면 일 사병에 걸렸을 거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엎드려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어. 랜드로버로 옮기자." 랜드로버!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도 랜드로버는 곧 괴로움과 결부되었다. 이제 그런 괴로움은 당하고 싶 지 않다! 그러나 페리시어는 불문곡직하고 누군가에게 안아올려졌다-그 사나이가 지금까지 말하고 있던 목소 리의 주인공인 것 같았다. 누구였더라? 그의 이름을 알 것 같으면서도 뇌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건 그렇 다 치고, 안겨 있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 기분이 좋을 까. 언제까지나 이대로 있고 싶어…….


"운전은 내가 할게, 라시드." 라시드! 따뜻하고 좋았던 기분은 금세 산산조각이 나고, 페리시어는 억지로 눈을 뜨려고 했다. "괜찮아요, 페리시어. 이젠 괜찮아요." 아프메트의 부 드러운 목소리. '괜찮다'구요?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안도감이 온몸에 퍼졌다. 햇볕에 그을고 갈증에 시달려서 감각 이란 감각은 모두 둔화돼 버렸으나, 지금 자기를 둘러 싸고 있는 이 감촉과 체취만은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그런 것은 어떻게 돼도 좋다. 페리시어 는 몹시 지친 어린이처럼 마음놓고 라시드에게 전신을 맡겼다. 그렇다, 라시드에게 몹시 심한 상처를 입고 견딜 수 가 없어서 오아시스를 뛰쳐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 금은 평화와 안전을 약속해 주는 그의 팔에 안겨 있 다. 페리시어는 이성을 버리고 감정이 시키는 대로, 뺨 을 대고 있는 제라바 밑의 따뜻한 가슴의 맨살에 손을 얹고 살냄새를 가슴 가득히 들이마셨다. "이 바보야! 하마터면 죽을 뻔……." "그녀는 자네를 완전히 신뢰하고 있어, 라시드. 귀중 한 선물이야."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거야. 아무 것도 모르 고 있어, 아프메트.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했을 까? 나디아가 아니었더라면……." 공허했던 목소리가 차츰 감정이 담긴 것으로 변하더니 말꼬리가 흐려졌 다. "회복되면 이야기할 거야.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잖 나. 알라에게 감사를 드려야지. 아직 때가 늦지 않았으 니까. 아, 그녀가 의식을 되찾은 것 같아." 확실히 의식이 돌아온 것 같았으나, 다시 어둠 속으 로 빠져들어갔다. 이윽고 얼굴에 찬 물방울이 떨어지 고 입가에 물이 든 컵이 와 닿았다. "안 돼. 한 모금만 마셔. 한꺼번에 벌컥벌컥 마시면


또 기분이 나빠지니까." 입술을 축이는 데도 지쳐 눈을 감으니 세계는 또다 시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다음에 눈을 떴을 때 는 이미 오아시스가 보이는 곳이었다. 차가 별장의 중정에 도착하자마자, 불안스런 얼굴을 한 나디아가 달려와서, 세 사람이 다 안전한 것을 보 고는 눈을 반짝 빛냈다. "아무 일 없겠죠?" "아아, 그럼." 아프메트가 안심시키듯이 대답했다. "방으로 데리고 갈까?" 라시드가 말했다. "하미드 선생을 오시게 하는 것이 좋잖겠어요?" 구부린 라시드는 페리시어의 겁먹은 듯한 눈을 보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괜찮겠어. 탈수증상과 햇볕을 너무 쬔 것 뿐 이라고 생각해. 간호는 나만으로도 충분해. 차라드가 울고 있지 않니. 빨리 가 봐, 나디아." "알았어요. 하지만 페리시어를 찾을 수 있었다니 정 말 기적이에요." '매 덕택이지. 오아시스에서 3 킬로나 떨어진 곳에 있 었으니까." 조용한 가운데 차디차고 무관심한 손이 페리시어를 서늘하고 기분좋은 시트 위에 뉘었다. 욕실에서 물소 리가 났다. 몇 시간 동안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흐르는 물소리! 문득 눈을 뜨고 베드 곁에 있는 라시드를 본 순간 갖가지 일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그랬었다, 운 무 파이살에게 그가, '페리시어는 파이살과는 결혼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엿들은 탓으로 오아시스 를 뛰쳐나갔던 것이다. 그는 파이살에게서 온 편지를 읽은 것이다! 페리시어는 정신없이 일어나려고 했으나 곧 뉘어지고 말았다. 화끈거리는 피부에 닿는 라시드 의 손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심하게 탔어. 치료를 해야지. 나디아에게 부탁하는 것이 좋겠지만 당황해서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거야."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할 수 없다는 것을 뻔 히 알면서도 말이 먼저 나와 버렸다. 일순 회색 눈이 어두워지더니, 이윽고 그는 도어 쪽 으로 향했다. 혼자 남겨진 페리시어는 많은 시간을 들여서 슈트케 이스까지 가기 위해 일어섰다. 확실히 슈트케이스 속 에는 치료약이 들어 있는 것으로 기억된다. 겨우 방의 중간쫌 갔을 때 현기증이 나서, 라시드가 받쳐 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또 정신을 잃을 뻔했다. "무엇을 할 생각이야, 도대체?" 솟아오르는 눈물을 억누르며 그를 보니, 그의 손에 는 크림이 쥐어져 있었다. "샤워를 하고 싶어요. 머리도 빗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 죽어갔었는데, 그런데도 겨 우 생각해낸 것이 머리를 빗는 일이야? 잘못하면 미라 가 돼 버렸을지도 몰라."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얌전히 누워 있는 게 좋을 거야. 당신은 무리를 했 어, 고든양. 자아, 앉아." 속옷만 입고 있는 것에 신경이 쓰였으나 시키는 대 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라시드는 천천히 브러시로 머 리를 빗기기 시작했다. 페리시어는 전신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데도 라시 드는 아무런 느낌도 없는 듯 천연덕스러웠다. "자아, 머리는 이만하면 됐지? 샤워는 하지 않는 게 좋아. 좀더 체력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야 해." 라시드는 욕실로 가더니 스펀지와 타월을 가지고 되 돌아왔다. "크림을 바르기 전에 먼지를 닦아내야지."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이것쯤은 체력이 회복되기 전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애무해 주는 것은 다 르겠으나, 그 손이 의사의 손처럼 냉담하게 피부에 닿 을까봐 오싹해졌다.


라시드는 대답을 들을 것까지도 없다는 듯이 간단히 등을 밀어 페리시어를 엎어 눕히고는 스펀지로 먼지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자신만만한 손놀림을 느끼고 있는 동안에 전신의 긴장이 풀려 갔다. 다만, 드러난 앞가슴에 손이 닿자 얼굴이 상기되어, 페리시 어는 자신의 심중을 그에게 간파당하는 것이 싫어서 황망히 얼굴을 돌렸다. "곧 끝나." 페리시어의 마음 따위는 눈곱만큼도 눈치 채지 못하는 냉담한-너무나도 냉담한 말투. 얼떨결에 그만 "알았습니다, 선생님."하고 응하고 말 았다. "크림은 저도 바를 수 있어요." 눈썹을 치켜올린 라시드가, 마루에 있는 튜브를 집으려는 것을 당황해 서 가로막았다. "무리하지 말아." 명령조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 었다. "엎드려요." 하는 수가 없었다. 페리시어는 보들보들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온몸을 긴장시키며 기다렸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걱정이 돼 돌아보니, 그의 눈에 는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는 빛이 번득이고 있었다. 타서 화끈거리는 피부에 차디찬 로션이 기분좋게 스 며든다. 천천히 마사지하는 손가락 끝에 힘이 가해지 자 뭔가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을 느끼고, 페리시어 는 머리를 쳐드는 정열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젠 그만 해요,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그럴 힘이 없었다. "이번에는 바로 누워, 페리시어." 심장이 너무 쿵쿵 거려 제대로 숨을 쉴 수도 없었다. 구부려서 브래지어 를 벗기는 그의 모습. 눈을 감은 페리시어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심호흡을 했다. 아차 하는 순간 빙그르르 돌려 바로 눕혀졌다. 방이 어두운 것이 다행이었다. 시원한 로션이 목덜미와 어깨에 스며든다. 이대로 있다가는 미치고 말 것 같다…….


넘쳐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고 했을 때 라시드는 갑 자기 페리시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더니 자신의 얼굴과 마주보게 했다. "왜 울지? 누구 때문인가, 페리시어 고든?" "저 때문이에요."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와 같 은 눈물 방울이 브론즈빛 손에 방울져 떨어졌을 때, 라시드는 입속으로 뭔가 작은 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 더니, 페리시어를 두 팔에 안고 뺨에 가볍게 입술을 갖다 댔다. "그럼, 이번에는 파이살의 대용품도 받아들일 수 있 겠는가?" 파이살! 그렇다, 그의 편지!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은 어떻게 돼도 좋다. 페리시어의 두 팔은 다른 의지를 가진 생물처럼 바로 옆에 있는 라시드의 목을 끌어안 고 있었다. "제발 부탁이에요, 라시드!" 자존심은 어디로 가 버 린 걸까, 애정을 절대로 먼저 표시하지 않으려던 그 굳은 결심은? 그러나 격렬한 정열 앞에서 그런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보석처 럼 빛나는 눈은 애원하고 있었다. "부탁이라니, 뭐야?" 그녀의 가냘픈 얼굴의 윤곽과 입술을 손으로 만지면서도 라시드는 여전히 마음이 움 직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입으로는 말할 수 없는 모든 일도 빛나는 눈은 잘 말해 주고 있다. 페리시어는 아주 가까이에 있는 얼굴 에 승리의 기색이 떠오르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 를 돌렸다. 정열에 사로잡혀 손을 내미는 페리시어의 몸은 달빛 에 은색으로 물든 물의 요정을 연상케 했다. "그런가? 하지만 나는 파이살이 아니야, 페리시어 고든." 페리시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에게 한 약속이 고 뭐고 죄다 잊어버리고 순간 라시드의 넓은 가슴으


로 뛰어들었다. 매를 닮은 날카로운 눈이 정열의 소용 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창백한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자기 속에 있는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격렬한 감정 에 농락당한 나머지, 기묘하고 노곤한 기분이 전신으 로 퍼지자, 페리시어는 자신이 라시드에게 빨려들어가 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고 있었다. 라시드의 입술과 손놀림에 의해 난생 처음으로 맛보 는 환희에 넘치는 세계가 열리자, 페리시어의 전신은 그의 숨결 하나하나에까지 호응하는 민감한 신경의 다 발로 변하여, 커다랗게 굽이치는 물결을 따라 순간마 다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라시드의 애무에 의해 생기에 넘친 숨소리를 내고 있는 페리시어! 라시드는 나긋나긋해진 페리시어의 몸 을 꽉 껴안고 입술을 포갰다. 페리시어도 그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힘껏 껴안았다. 그러자 라시드는 아라비아어로 뭔가 중얼거렸다. 뜻을 알 수 없는 외국어를 듣는 순간, 몸을 녹이고 있던 불 꽃이 꺼지고 페리시어에겐 냉엄한 현실이 다시 엄습해 왔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조금도 사랑 하지 않는 그녀를 라시드가 찾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안 돼!" 라시드는, 손을 뿌리치면서 이성을 되찾은 눈으로 애원하고 있는 페리시어의 귓전에 입을 대고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놀리는 짓은 그만 둬. 유혹 해 놓고 그대로 끝나리라 생각해?" 목 안에서 나오는 라시드의 낮은 웃음소리에 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 다. "당신의 몸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아. 파이살이 라면 이런 일을 당해도 가만히 있을는지 모르지만 나 에게는 안 통해. 다행히 지금 나디아는 차라드와 함께 있으니까, 얼마 동안 여기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거야. 파이살과의 결혼은 이제 이것으로 끝장난 것이 나 마찬가지야." 파이살과의 결혼을 방해하기 위해 이런 짓까지 하다


니, 대체 라시드는 어떤 인간일까? 그런데, 편지를 읽 고 파이살은 결혼할 의사가 없음을 알았을 텐데? 이성은 그가 하려는 짓을 미워하면서도, 몸은 여전 히 그를 계속 요구하고 있다. 페리시어는 두려운 것을 피하기라도 하듯이 라시드의 눈을 피했다. 만일 이것이 벌이라고 한다면 감수할 수밖에 없으리 라. 하지만 파이살의 본심을 알고 있으면서 왜 이런 짓을 할까? 그렇다, 욕을 보이려고 이러는 것임에 틀 림 없다. 라시드의 체중을 느끼면서 페리시어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순진한 체하지 말아!" 라시드는 몹시 얄밉다는 듯 이 나무라면서 페리시어의 머리를 잡아 자기 쪽으로 돌렸다. "파이살의 마음은 순진한 체해야만 끌 수 있 었던 게로군?" 너무나 심한 말에 기가 죽은 페리시어의 안색은 백 짓장처럼 창백해졌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것 을 참을래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만! 그만 해요! 파이살은 이미 저 따위는 전혀 생 각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그에게서 편지가 온 것을 봤어요." "파이살이 당신을 갖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알고 계셨죠? 당신이 운무 파이살에게, 파이살은 이젠 나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어 요. 당신이 나의 좋지 못한 행실을 써 보냈기 때문이 에요. 아직도 부족해요? 그래서 이런 짓을 해서라도 내가 그의 아내로서 적당하지 못하다는 증거를 더욱더 늘리고 싶은 건가요? 이젠 충분하지 않아요? 파이살이 권하는 바람에 드레스와 그 밖의 다른 것을 사가지고 왔기 때문에 돌아갈 여비가 없어요. 만일 그렇지만 않 았더라면 벌써 돌아갔을 거예요. 비행기표 정도라면 벌써 그만큼의 괴로움은 십이분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 으세요?" 라시드는 묵묵히 베드에서 일어나 등을 돌린 채 셔


츠를 입었다. "처녀에게 난폭한 짓을 할 생각은 없어." 홱 돌아선 그의 눈은 노여움으로 불타고 있었다. "어떻게 할 생 각이었어? 상대는 사나이야. 적당히 해 두라고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던가? 내가 이성을 찾은 것에 당신은 감사해야 해." 페리시어는 산산이 부서진 꿈 조각과 더불어 혼자 남았다. 얼마 동안 그를 기다렸으나, 이젠 돌아오지 않 을 것임을 알자 참고 참았던 눈물이 봇물이 터진 듯이 걷잡을 수 없이 흘렀다. 그는 페리시어를 욕보이기 위 해, 단지 그것만을 목적으로 방에까지 데려다 주었던 것이다. 파이살과 관계없이도 나를 괴롭히고 싶었다 면…… 단단히 밉게 보인 모양이다. 괴로운 밤이 지나고도 납덩이처럼 무거운 마음은 좀 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라시 드가 자기를 요구한다고 생각하다니. 사랑에 눈이 멀 어서 그런 것도 몰랐었다니……. 허전한 마음으로 찬 찬히 생각해 보니, 감정을 마음껏 희롱하여 자기를 무 아의 경지에까지 몰아넣은 라시드의 냉혹함이 빤히 보 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젯밤의 일은-언젠가는 견디어낼 수 있는 날이 올는지 모르지만-지금은 도저 히 생각조차 할 용기도 없었다. "어때요, 기분은? 아까 와 봤더니 자고 있더군요. 라 시드가 깨우지 않는 편이 좋다고 해서." 나디아가 조 용히 들어왔다. "고마워요. 막 일어나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에요." "페리시어…… 어떻게 된 거예요? 울고 있었죠? 이 야기하지 않으면 라시드를 부르겠어요. 우리들과 사는 것이 싫은 거지요?" "나디아, 저는 돌아가지 않으면 안 돼요." 라시드의 이름을 듣는 순간 페리시어는 참을 수가 없어서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저, 부탁이 있는데요……." "뭔데요?" 나디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집에 돌아


가고 싶은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라시드에게서 도망 치고 싶은 거예요?" "양쪽 다예요. 라시드는 저를 경멸하고 있어요. 그러 니까 도와줘요. 여기에 있을 수 없는……." 눈물이 하 염없이 볼을 타고 흘렀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뭣이든 다 해주겠 어요. 아프메트에게 준비하도록 부탁해 둘 테니 안심 해요." "라시드에게는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겠어요?" 그가 안다면 또 어떤 새로운 학대 방법을 강구할는 지도 모른다. 어젯밤의 라시드는 피가 통하는 인간이 라기 보다 페리시어의 죄를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꾸며 내 가지고 벌하는 냉혹한 기게라고 하는 편이 어울릴 것이다. 파이살이 그녀에게 바치는 사랑을 파괴한 잔 인한 수법, 끈질기게 괴롭히는 그 교묘함-아무리 생각 해도, 동정심도 연민의 정도 없는 사나이로만 생각됐 다. 얼른 도망가지 않고 이대로 있다가는 자존심이고 뭐고 죄다 버리고, 여기에 그대로 있게 해 달라고 그 에게 애걸해야 할 때가 올는지도 모른다. 운무 파이살, 차라, 나디아, 그리고 어린 차라드. 아 주 짧은 동안이었지만 이들 모두와 헤어진다고 생각하 니 무척 괴로웠다. 페리시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머리는 부스스하고 피부는 햇볕에 타서 벌 겋게 되어 있었다. 목욕을 하자! 기분이 상쾌해지면 짐 을 꾸릴 힘이 솟아날지도 모른다. 샤워는 방에 설치되어 있으나, 욕실이라면 여성들이 공동으로 쓰는 커다란 것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보지 도 못한 어마어마한 욕조. 더운물의 꼭지를 틀고 장미 유 에센스를 떨어뜨리자 맑은 더운물에 밀크와 같은 거품이 일었다. 따뜻한 물이 비단 같은 피부에 닿는 감촉을 즐기면 서 페리시어는 비누를 칠해 온몸을 삭삭 문지르기 시


작했다. 마치 그렇게 하면 라시드의 추억이 씻기기라 도 한다는 듯이. 향기로운 거품에 감싸여 천천히 팔다리를 펴고 있으 려니, 긴장도 풀리고 슬픔도 엷어지는 듯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타일을 밟는 가벼운 발소리가 나서 페리시어는 깜짝 놀라 눈을 떴 다. 라시드! 페리시어는 허둥지둥 옆에 있던 스펀지로 가슴을 가리며, 거품으로 될 수 있는 대로 몸을 많이 가리려 했다. "왜 돌아가고 싶어하지?" 나이다가 말한 거다! "창피당하고 경멸당하고, 괴로움까지 참아 가며…… 왜 내가 이런 곳에 있어야만 되나요?" "괴로움까지?" 라시드는 날카로운 눈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페리시어의 손을 응시했다. "나가 줘요, 라시드. 만일 누군가가……." "아무도 없어. 모두 사우드의 집에 갔어. 나디아는 절대로 여기에 오지 않을 거고. 게다가, 봐요." 포켓에 서 꺼낸 것은 정교하게 조각된 열쇠였다. "어떤가, 페 리시어. 당신은 내 것이야.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 어. 하지만 거기서 꾸물거리고 있어서는 곤란하지. 그 리고," 젖어서 진주 빛깔로 빛나는 앞가슴을 흘끗 짓 궂은 눈으로 봤다. "목욕물도 곧 식을 테고." 확실히 그의 말이 옳았으나, 벗은 옷을 올려놓은 의 자에는 손이 닿지 않으니, 차라리 욕조 속에 있는 편 이 안전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나가 주시겠어요? 그러면 옷을 입고 당신의 서재로 가겠어요." 재미있다는 듯이 수긍하는 얼굴. 그러나 페 리시어는 그의 시선을 피해 눈길을 돌렸다. "당신을 두고 가야 하나?"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잠 겼다. 아니면 그렇게 느꼈을 뿐일까? 엉겁결에 눈을 든 순간 찌르는 듯한 눈과 부딪쳐 그만 온몸이 녹아버


릴 것 같은 이상한 감동에 사로잡혔다. 아차 하는 순 간 라시드는 그녀를 들어 올리더니, 비단 셔츠가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꽉 껴안았다. "어젯밤 당신에게 거절당했을 때는, 당신은 생전 처음 대하는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말 어린애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지." 페리시어가 갑자기 안겨서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은 상관도 하지 않고 그 는 갑작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왜 돌아가려고 하 지, 페리시어?" "알고 계실 텐데요." 라시드의 팔에는 감정은 들어있 지 않았으나, 이젠 신용할 수가 없었다. 어젯밤과 같은 전철은 밟고 싶지 않았다. "그럴까?"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몸이 떨리며, 하염없이 흐르 는 눈물이 라시드의 목을 타고 흘렀다. "페리시어, 당신을 갖고 싶어." 입술을 포갠 목이 멘 것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 을 갖고 싶었어. 어젯밤, 파이살이 당신에게 손가락 하 나 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나는 스스로를 저주했 어." 라시드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말을 끊었다. 페리시어는 얼어붙은 것처럼 자신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어떤 짓을 하려는 걸까? 다시 한 번 시키고 싶은 걸까? 페리시어는 덮에 걸린 동물 처럼 절망적인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무엇을 갖고 싶으세요? 아직도 충분하지 않다는 건 가요? 이젠 보내 주세요." "그렇게 하지. 하지만 그러기 전에 내 이야기를 먼 저 들어 줘." 페리시어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시드는 그녀를 안은 채 옆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았다. "부끄럽 군, 페리시어." 잠시 후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이렇 게 나 자신을 부끄럽게 여겨 본 일은 아직까지 한 번 도 없었어. 어젯밤 방으로 돌아갔을 때는 속이 다 메 슥거릴 정도였어. 당신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그 위에 지금까지 줄곧 당신을 파이살에게 서 떼어 놓기 위해서 갖은 수단을 다하고 있다고 당신 이 오해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솔직히 말하면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정말로 파이살을 위해서 이 약혼을 방해하려고 생각했었어-변덕스럽고 젊은 그에 게 결혼은 아직 이르거든. 게다가 상대는 재산을 목적 으로 하는 여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라는 지레짐작까지 하고 있었으니까. 솔직하게 말하지만 파이살에게는 지 금까지 이런 일이 몇 번 있었고, 그때마다 모두 내가 어떻게든 막아 왔어. 그러나 이번만은 여느때와는 달 랐어. 우선 당신은 아름답고 자존심도 강한데다, 재주 도 뛰어났어. 어느 사이엔가 난, 파이살의 일은 둘째 고, 먼저 당신의 마음을 내게 쏠리게 하려고 기를 쓰 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돈만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여성으로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여성 에게 자꾸만 끌리고 있는 나 자신에게 몹시 화가 나기 도 했어. 하지만 당신은 내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고 말았어. 그런데 내 가슴속에서 비온 뒤의 사막처럼 생 기 있게 숨쉬고 있는 당신은 파이살을 잊으려고 하지 않았어. 난 어떻게 해서라도 당신이 나를 사랑하도록 하고 싶었어. 그러나 당신은 자꾸 피하기만 할 뿐이었 어. 그러는 동안, 당신은 나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파이살과의 결혼 승낙을 얻는 데 이용하려 한 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거기에 두손 들었지. 몹시 괴로웠어. 그러나 모든 것이 나의 편견 때문이었어. 자 신의 판단만 믿으려 했거든. 당신이 혼자서 거리를 거 닐 때도 그것을 파이살에게 말할 기분은 나지 않았어. 당신 같은 여자와는 빨리 헤어져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파이살이 당신과의 관계가 끝났다고 한 것 을 들었을 땐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어. 실은 편지는 방금 읽었어. 어차피 승낙을 재촉하는 것일 거 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무지 읽을 기분이 나 지 않았어. 당신이 없어진 것을 알았을 때…… 그런


괴로움을 다시 당하는 건 싫어……. 오늘 아침 파이살 에게 전화를 해서 모든 걸 알았어. 야스민, 기억하고 있겠지? 요전에 만났던, 친구의 누이말이오. 우리들이 함께 있는 걸 보고 거짓말을 쓴 편지를 보냈는데, 파 이살은 얼씨구나 하고 그걸 물고 늘어진 거야. 그는 플레이 보이니까, 당신이 천진스럽고 결백한 것은 한 눈에 간파하여 마음에 들었지만, 역시 한때의 놀이 상 대로 삼고 싶었던 것뿐이었어. 아프메트에게서 당신이 돌아가려 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난 어떻게 해서라도 만류하기로 결심했지, 이젠 자존심 따위나 내세우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나와 결혼해 줘, 페리시어. 오늘도 내일도, 언제까지나 당신을 갖고 싶어. 당신이 입고 있는 카프탄의 백 한 개의 단추를 벗기고 싶어. 내 자식을 낳아 줘. 그리고서 당신과 한 무덤에서 쉬 고 싶어. 나의 아내가 돼 줘요, 페리시어. 나의 단 한 사람의 아내가. 누님은 늘 결혼하라고 성화였지만 나 의 아내는 단 한 사람의 여성뿐이라고 생각해 왔어. 그 여성이 바로 당신인 거야. 당신이 승낙만 해준다면 지금까지 괴롭힌 보상은 꼭 하겠어." "하지만 동양과 서양이 화합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당신이에요." 페리시어는 자기 귀를 의심하며 반신반 의했다. "그것은 파이살의 경우요. 당신을 처음 만난 순간, 파이살에게는 과분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파이살보다는 훨씬 더 당신을 이해하고 사랑할 거야. 하지만 당신은 완강하게 거절했어. 그래서 얼마나 난 고민했는지 몰라. 이 가슴에 안고 싶은 당신이 파이살 의 팔에 안기는 모습이 언제나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아서……."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걸 느꼈다. 페리시어는 신뢰가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랑한다고 말해 줘, 페리시어. 당신의 눈 속에서 본 것은 환상이 아니라고 말해 줘."


이번에는 믿어도 되겠지. 페리시어는 말없이 팔을 벌려 안았다. 어젯밤의 그 일은 악몽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침착 한 테너가 아니고, 연인다운 정열적인 말투로 이야기 하는 라시드의 팔에 안겨 있는 지금이 현실인 것이다. 아프메트에게서 그녀가 떠나려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의 절망감을 이야기하는 라시드의 입술과 손에는 정열 뿐 아니라 페리시어에 대한 사모의 정마저 담겨 있었 다. 그래, 아프메트가……. 나디아는 약속을 지킨 것이 다. 그 얼마나 영리한가. 페리시어는 살며시 미소를 지 었다. 이젠 아무데도 가지 않는다. 살아 있는 동안, 아니 죽은 뒤에도 두 사람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고 영원히 맺어져 있으리라. 두 사람은 서로가 상대의 반쪽인 것 이다. 라시드의 정열적인 목소리를 황홀하게 들으면서 페 리시어는 살며시 엷은 셔츠 밑의 매끄러운 등을 애무 하고 있었다. "지금은 안 돼……." 라시드는 정감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페리시어의 손을 부드럽게 눌렀다. "당 신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짓은 할 수 없어." "하지만 전 당신을 갖고 싶어요." "그럼 나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폭풍을 연 상시키는 회색 눈이 억누른 정열로 빛나고 있었다. 그 의 품에 안긴 페리시어는 단단한 가슴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댔다. "지금 당신을 안으면 몹시 목이 마른 사 나이가 한모금의 물만 마시는 격이 되고 말아. 지금까 지도 기다렸잖아.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어. 지금 한모 금 맛보고 그만두라면 틀림없이 미쳐 버릴 거야." 라시드의 깊은 애정에 페리시어는 고개를 끄덕거렸 다. 라시드가 자기를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러나, 곧 이루어져." 라시드는 셔츠를 살짝 벗어 서 페리시어에게 입혔다. "누님에게는 벌써 말했으니 까, 오늘 밤에 약혼을 발표하지. 당신에게 에메랄드는 주지 않겠어." 이것도 파이살에게서 들은 것일까? "그 래, 그렇지. 당신이 버린 유리 서진을 갖고 있어. 나를 위해 산 것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내버릴 생각 이 아니어서 곧 주워 뒀었지. 소중히 간직해 왔어. 아 아, 잠을 이루지 못한 밤도 꽤 많았지만, 이젠 모두 끝 이 났군." 그로부터 3 주일 후, 결혼식에 참석했던 마지막 손님 이 떠나는 것을 전송한 뒤, 라시드는 말없이 페리시어 를 안고 텅빈 집으로 들어갔다. 페리시어의 제안으로 허니문은 오아시스에 있는 별 장에서 보내기로 했으며, 지금에야 비로소 두 사람만 오붓하게 남게 된 것이다. 라시드는 묵묵히 무릎을 꿇고는, 페리시어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카프탄의 백 한 개의 단 추를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개까지 다 벗기자, 다음에는 두 사람의 영원한 사랑을 상징하는 여러 개의 금목걸이도 살며시 풀었다. 영국 대사관에 결혼 신고는 했지만, 지금의 이것이야말로 두 사람의 진정한 혼인 서약인 것이다. 겨우 무거운 의상에서 해방이 된 페리시어는,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는 라시드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나를 사랑해 줘……." 그는 페리시어를 살짝 안아들 더니 귓전에서 정열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당 신을 사랑하는 만큼. 나의 소중한 작은 비둘기여! 모든 밤을 아름답게 수놓는 거야. 괴로움 뒤에는 기쁨이 오 는 것, 앞으로 우리에겐 기쁜 일만 있을 뿐이야, 페리 시어. 사랑하고 있어, 이렇게……." 라시드에게 꽉 끌어안긴 페리시어는 처음에는 살그 머니 입술을 갖다 댔으나, 이윽고 정열을 듬뿍 담아 키스했다. 아무 거리낌도 없는 불타는 정열을 담아 가


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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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이 누군가를 안 웨이터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허둥 소문이 나게 되어, 처음에는 놀리기만 하던 동료들도 최 "사무실! 시시한 일 따위는 집어치우라고 몇 번이고 구, 하고 부정해 버리고 싶어지게 된다. 겨우 파이살을 발견하고 안심했으나, 그녀가 찾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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