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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 프린세스 1 그날 아침 기분이 썩 상쾌하지는 못했다. 전날 밤 큰오빠 마이클이 모처럼 만에 휴가를 나와 있었다. 갤라는 마이클이 기장으로 승진한 축하의 식사를 이스트서섹스의 부모님 댁에서 한 다음 마이클과 함께 런던으로 갔다. 거기서 또 한 사람의 오빠 잭, 그리고 여러 명의 파일럿 동료들과 함께 어울려 밤늦도록 떠들어댔다. 샴페인도 보통 때보다 많이 마셨다. 도가 지나쳤던 것을 후회하면서 이틀 동안 마신 술에서 멍청한 얼굴로 깨어난 갤라는 예약이 파기됐다는 사실을 알고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갤라 플레처는 조급하게 예약기록부를 펼쳤다. 틀림없다. <l1 시 브랜던 씨 예비검사> 잘 손질된 가운 위에 찬 정확한 스위스 제 시계가 1l 시 l5 분을 가리키고 있다. 갤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예약시간을 지키지 않는 환자는 갤라의 골칫거리였다. 수화기를 들어 접수부의 니타 웨스트브로크를 불렀다. "파커 병원 접수부입니다." 다소 졸린 듯한 목소리가 나른하게 들려왔다. "니타? 갤라 플레처예요. 아는지 몰라, 저 미스터…" 갤라는 예약기록부를 다시 확인했다. "브랜던이라는 사람이에요. 물리요법 시간인데 아직 보이지 않아요." 니타는 흥미를 느낀 듯했다. "혹시 콘래드 브랜던 아니예요? 성미가 까다롭고 뻣뻣한 사람?" "몰라요. 예약기록부에서 방금 이름을 발견했을 뿐이에요. 게다가요…" 서류철을 넘기면서 갤라가 덧붙였다. "이 환자에 관해서는 아무 기록도 없는데요." "어제 막 예약했네요." 니타가 메모철을 넘기는 소리가 난다. "라이오넬 경이 말하는 이른바 R 앤드 R 이 목적인 것 같군요." "휴식과 회복 말씀이죠." 갤라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것은 알콜중독자가 술을 끊는 방법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사람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세요?" "잠깐 기다려 보세요." 잠시 후 니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내가 보기엔 수영장이 아닐까 싶은데요. 이곳에 온 후부터 거의 늘 수영장에 있었다는 거예요." "벌써 15 분이나 기다리게 하고 있어요. 아니, 그럭저럭 20 분이 다 됐군. 누군가 부르러 가주지 않겠어요? 이 환자를 처리하지 않으면 오늘 일과는 엉망이 되고 말아요." "좀 기다려요." 갤라는 겨우 한숨을 돌리고 나서 수화기를 목과 어깨 사이에 끼운 다음 증세 기록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파커 병원의 환자처럼 치료에 많은 돈을 쓰는 인간이 이렇게 간단히 예약을 어기다니 놀랄 만한 일이었다. 환자가 이곳에 오는 이유는 갖가지다. 신경의 피로를 풀기 위해 오는 경우, 금주나 절주를 위해 찾아오는 경우, 때로는 상류계급의 심심풀이라고 할 수 있는 경우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돈이었다. 운 좋게 국립의료보험으로 오게 된 경우가 아니면 수백 파운드의 비용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상의 치료가 값쌀 리 없다. 파커 병원은 남 잉글랜드에 있는 병원 중에서도 가장 좋은 곳이었다. 그러므로 갤라는 제멋대로 퍼마시다 알콜에 중독된 부자들이 이 유명한 병원을 호텔과 혼동하는 것에 혐오를 느끼면서도 이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파커 병원은 최상의 의료설비와 직원을 갖추고 전문가가 경영하는 훌륭한 치료 센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 파운드나 지불하면서 하루종일 수영장 주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브랜던 같은 인간도 있는 것이다. 콘래드 브랜던? 갤라의 펜이 서류 위에서 멈춰졌다. 그 이름은 매우 낯익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곧 생각이 났다. 크리스탈 워렌이 결혼식 일주일 전에 갤라의 오빠를 버리고 간 것은 콘래드 브랜던이라는 남자 때문이었다. 망연자실해 있는 잭을 뒤에 남겨 둔 채 크리스탈을 바베이도스로 데리고 떠난 바로 그 남자다. 3 년 전 일이었지만, 잭이 아직까지도 원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갤라는 알고 있다. 무리가 아니었다. 잭은 금발의 날씬한 크리스탈을 온 마음을 바쳐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갤라는 크리스탈을 아주 좋은 여자로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누구 한 사람 크리스탈이 그런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갤라…" 갤라는 수화기를 움켜쥐었지만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네?" "저 말이죠, 미안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몹시 바빠서요. 직접 확인해 주지 않겠어요? 수영장은 거기서는 그리 멀지도 않잖아요?"


"알았어요, 니타. 콘래드 브랜던이라는 이름은 확실하지요?" "틀림없어요." 갤라는 입술을 깨물며 기억을 더듬었다. 크리스탈을 빼앗아간 사내는 영화배우 같은 그런 유명인은 아니었지만… 니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자동차 경주 챔피언이에요. 들은 적이 있어요?" "아아!" 확실했다. 갤라는 조용히 대답했다.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자 그럼, 수고스럽겠지만 직접 가서 찾아 보세요." "하는 수 없지요. 고마와요, 니타." 갤라는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파란 눈을 크게 뜬 채 허공을 응시했다. 그 사람이다. 크리스탈이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한 그 이름이, 그리고 잭에게 파혼하자고 폭탄선언했던 그녀의 태도가 기억난다. 그건 갤라의 부모 집 응접실에서였다. 당시 아직 대학생이던 갤라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콘이 자메이카로 데리고 간데요. 전 아직 한 곳에 박혀 있고 싶지 않아요. 누구에겐가 상처를 주게 된다면 안 됐지만요." 누구에겐가 상처를 준다? 갤라는 그때 부모의 낙심한 얼굴과 잭의 눈빛에 떠올랐던 고통과 치욕을 생각해 내고는 치가 떨렸다. 같은 인물이라면 냉정하게 치료에 임할 수 있을 것인가? 병원의 다른 물리요법사 로저 트레퍼시스로 바꿔 달랄까도 생각해 봤지만, 곧 그만두기로 했다. 콘래드 브랜던을 만나봤으면, 우리 가족을 그렇게나 참담한 지경에 이르게 한 사내를 한번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갤라는 천천히 일어나서 복도로 나왔다. 여자로서는 키가 큰, 호리호리하며 유연한 갤라의 몸에는 타고난 기품이 있어 검소한 가운 위로도 우아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도톰하고 부드러운 입술은 어딘지 모르게 상처받기 쉬운 느낌을 주는데, 지금은 지나친 긴장 때문인지 일자로 꾹 다물어져 있다. 얼굴 주위를 부드럽게 덮고 있는 적갈색 머리는 소박하게 하나로 묶었는데, 부드러운 얼굴 윤곽이 돋보여 젊은 여성의 청초함에 성숙한 여인의 아름다움이 한층 더해져 보인다. 갤라는 24 살. 비취빛 푸른 눈과 부드러운 입 모양이 관록에 손상을 주는 느낌은 있지만, 그 얼굴에는 무의식중에 남자의 주의를 끄는 매력이 있다. 눈꼬리가 약간 올라간 듯한


분위기가 수수께끼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눈이 세상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저항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갤라의

표정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매혹적이기까지

했다.

어쩌면

갤라가

남자들에게 흥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욱 관심을 가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갤라는 수영장 유리 문을 열고 바로 상대의 이름을 부를 작정이었으나 뜻밖에도 수영장은 혼잡했다. 꿀이 벌떼들을 끌어모으듯 2 월의 밝은 햇살이 환자들을 끌어들여, 물 속은 뚱뚱한 중년의 불그죽죽한 나체들로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겨울 하늘이 수영장의 열대와 같은 따뜻함 위에 드리워져 있다. 물 속에서 비치볼을 던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 어린애의 가정교사도 아닌 터에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브랜던 씨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뛰어다닐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갤라는 근육이 울퉁불퉁 솟아나온 수영장 감시원 프레디 그리피스가 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죠, 갤라?" 프레디는 미소를 머금은 푸른 눈으로 갤라의 몸을 황홀한 듯이 내려다보았다. 프레디의 건장한 몸은 어떤 부류의 여성들에게는 굉장한 매력이다. 간호원 중에도 반해 있는 사람이 몇 명 있으며, 같은 연배의 유복한 여성 환자 몇 사람은 근무시간 외에도 어울린다는 얘기도 있었다. 갤라는 그런 소문이 싫었다. 직원은 모두가 직업윤리를 지닌 전문인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프레디의 굵은 손목에서 빛나는 금팔찌를 보고는 이내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치료시간에 늦은 환자를 찾고 있어요. 브랜던이라고 하는데요. 이곳에 있을까요?" "콘래드 브랜던? 저 랠리드라이버 말인가요? 그렇다면 그 친구 꽁무니를 쫓아다니고 있는 거군!" 프레디가 빈정거렸다. "쫓아다니는 게 아니예요." 갤라는 차갑게 대답했다. "여기 있어요?" "아, 네…" 프레디는 여전히 빈정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수영장 한쪽 끝을 가리켰다. 그곳은 물이 깊어 사람이 많지 않았다. "황금의 사나이죠. 빨간 타월을 깔고 자고 있군요." "고마와요."


갤라는 등뒤에 프레디의 푸른 눈을 느끼면서 잰걸음으로 수영장을 돌아 그쪽으로 걸어갔다. 프레디에 대해서 품은 냉정한 마음 탓인지 그때까지의 분노는 신경과민 비슷한 감정으로 변해 있었다. 갤라는 그 남자로부터 얼마 안 되는 곳에서 일단 걸음을 멈추고는 소리를 내지 않고 천천히 다가갔다. 이 남자는 대부분의 환자들과는 달리 너무 뚱뚱하지도 나이가 많지도 않았다. 붉은 타월 위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그 건장한 몸은 짙은 마호가니 색으로 그을러 있다. 검은 수영 팬티가 스포츠맨답게 탄력있는 허리를 감고 있다. 이 남자만큼 이 병원의 치료가 필요치 않은 사람도 없을 듯하다. 그러자 갤라의 묘한 두려움은 또다시 분노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휴일용 플랫폼으로 이 병원을 이용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이 남자는 또 무슨 이유인지 물리요법을 받겠다는 것이다. 남자는 머리를 한쪽으로 돌린 채 엎드려 있었다. 갤라는 그의 곁에 서서 군살이 하나도 붙어 있지 않은 얼굴을 응시했다. 남자 그림이라 해도 좋았다. 얼굴의 살집은 매우 공격적이라 할 만큼 근육질이다. 턱 주변은 면도 자국이 거무스름하여 심술궂고 까다로운 인상을 준다. 속눈썹은 짙고 길지만 표정에는 전혀 부드러움이 없다. 즐거운 분위기도 없다. 자고 있으면서도 화나서 이를 악물고 있는 것처럼 갤라에게는 느껴졌다. "브랜던 씨." 갤라는 내려다보기를 멈추고 빠른 발음으로 불렀다. 힘찬 등허리에 긴장이 퍼지는 걸 알 수 있었다. 남자는 몸을 뒤집더니 노곤한 듯한 푸른 눈을 뜨고 말없이 갤라를 바라보았다. 갤라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게 크리스탈을 훔친 사내다. "저는 물리요법사입니다." 갤라는 차갑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당신은 나하고의 약속을 30 분씩이나 어기고 있어요." "그렇습니까?" 남자는 일어나 길쭉한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어넘겼다. "그래요." 갤라는 발끈해서 상대의 말을 받았다. "랠리드 라이버인 모양인데, 당신 같은 분은 시간에 대한 인식이 좀더 정확하리라고 생각하는데요." "늦었다는 게 정말입니까?" 남자는 반발하지 않고 유연한 동작으로 일어나더니 손목의 순금시계로 시선을 돌렸디. "갑자기 잠이 들어 버려서… 당신도 나 정도 나이가 되면 수면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이 찾아오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게 되지요."


"라이오넬 경에게 부탁해서 수면제를 처방해 받아 둘까요?" 갤라는 심술궂게 말했다. 남자는 10 살 이상 연상은 아닐 듯하다. 갤라는 어린애 취급을 받는 게 싫었다. 검은 털이 빽빽하게 가슴으로부터 복부로 퍼져 있다. 남자는 잠시 말없이 갤라를 쳐다보았다. "이름을 알고 싶은데요." "갤라 플레처예요." 이름에 조금의 기억이라도 남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갤라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반응은 없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은 푸른 두 눈은 아름다왔으나 그 표정은 거만하고 엄격해서 침입자를 만난 고양이처럼 갤라를 분격시켰다. 이 사람의 어떤 점이 결혼을 바로 앞둔 여자를 매료시킨 것일까? "미스?" "미즈." 갤라는 무뚝뚝하게 정정했다. "미즈?" 남자가 말하고 눈을 내리감을 때 순간적으로 눈에서 심술궂은 빛이 번뜩였다. "나는 어떡해야 되죠, 미즈 플레처?" "사무실로 오시면 됩니다. 와주시겠어요? 그렇게 우물쭈물하지 마세요." 갤라의 어조는 상당히 공격적이었지만, 상대방은 화를 내지도, 재미있어하지도 않는 듯했다. 단지 아래 떨어져 있던 비치가운을 주워들 뿐이었다. 가운도 화려한 타월과 같이 붉은색이었다. 손목시계는 롤렉스 오이스터. 랠리가 어떠한 건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이 브랜던 씨가 승리자의 샴페인이나 월계관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큰 키의 건장한 몸은 부와 성공을 발산하고 있는 듯하다. 그 점도 갤라를 반발하게 만들었다. 갤라는 이곳에서 2 년을 일하는 동안 부자의 추한 면이라 할 수 있는 방종, 냉담, 오만을 숱하게 보아 왔다. 이 남자는 분명히 부자다. 이 남자에게는 사람을 부리는 데 필요한 관록과 자신도 있는 듯하다. 크리스탈 워렌이 잭으로부터 이 남자에게로 옮겨간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잭도 몸이 건장하고 튼튼한 미남자였지만 그에게는 이런 위압적인 매력은 없었다. "정말 여기서 일하고 있소?" "물론이죠. 어째서 그런 걸?" "위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오.

이곳

직원들은

전전긍긍하는데 말이오." 남자는 심술궂게 말했다. "그래, 당신도 내가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시나요?"

대개

환자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스스로 잔디가 되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밟힘을 당할 수밖에 없지요." 갤라는 자기의 직업에 어울리지 않은 분노를 몇 번이고 억눌러야 했다. 적어도 오늘만은 개인적인 감정과 일을 연결지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물리요법은 환자에게 매우 고통스런 경우도 있다. 갤라는 돌연 콘래드 브랜던의 치료가 최대한 괴로운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남자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갤라의 신경을 거슬리는 점이 있었다. 독설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뭔가 충격이 필요했다. 갤라는 등을 홱 돌리고 출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복도 중간쯤에서 남자가 따라붙어 갤라의 팔을 힘있게 붙잡았다. "천천히 걸으시죠. 나는 당신처럼 빨리 걷지 못해요. 미즈 플레처." 갤라는 그 손의 감촉에 감전된 것처럼 움찔했다. 팔을 비틀어 빼려고 했으나 남자의 힘이 훨씬 강했다. 하는 수 없이 뒤돌아선 갤라는 비로소 남자가 발을 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보조를 늦추었다. 남자가 손을 떼자 갤라는 손가락 자국을 화가 난 듯이 문질러 댔다. "완력을 과시하실 필요는 없어요, 브랜던 씨." 갤라가 차갑게 말했다. 그녀는 평상시 남성을 올려다본 경험이 별로 없었는데 콘래드 브랜던은 l70cm 의 그녀보다 20cm 는 더 컸다. 자신이 연약하게 느껴질 정도다. 갤라는 상대방의 눈에서 시선을 떼고는 거북한 침묵을 지키며 치료실로 향했다. 어쨌든 상대 신체상태가 나쁘다는 사실도 갤라의 기분을 가라앉혀 주지는 못했다. "벌써 1l 시 45 분이나 됐어요. 다음 환자는 12 시 정각에 있어요." 갤라는 방금 한 이 말을 상대에게 주지시키려고 약간 사이를 두었다. 콘래드 브랜던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갤라를 바라보았다. "당신에 관한 기록은 아무것도 와 있는 게 없어요. 하지만 당신에게 어떠한 치료가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이 시간만으로도 어느 정도 알 수가 있을 거예요." 갤라는 자리에 알아 펜을 들었다. "진찰 전에 목적을 정확히 알아두고 싶습니다만, 즉 수영장에서의 수면 말고 다른 어떤 목적이 있는지요?" "그렇게 말을 하니 생각이 나는군요." 브랜던은 갤라의 야유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말했다. "할레이 가에 있는 이곳 창립자에게 보였더니 여기에 일주간 입원하는 게 좋겠다고 전하더군요. 나이가 지긋한 감량 희망자들의 낙원에서 말이오." "낙원 이상이겠죠."


자기 이름을 따 이 병원의 이름을 지은 라이오넬 파커 경은 아직도 할레이 가에서 개업을 하고 있다. 그가 일주간의 입원을 권했다면 이 사람은 분명 치료가 필요한 것이리라. 그리고 진단은 물리요법사인 갤라 자신에게 맡겨졌을 것이다. 갤라는 콘래드 브랜던의 넓은 어깨와 굵은 목을 진찰했다. 그 몸은 생리적 상해로 인해 약해져 있었다. 남자들의 근육이나 힘줄은 노동이나 운동 혹은 방종으로 혹사당하기 때문에 굉장한 부담을 안고 있다. 갤라의 환자들은 대부분 남자였는데, 그들은 대개가 스스로를 실제보다도 건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몸을 망가뜨리는 경우가 많았다. "참고로 묻겠는데요, 파커 경에게는 무슨 상담을 하셨어요? 보행 부자유인가요?" 브랜던은 잠깐 동안 갤라를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처음엔 내 뜻이 아니었소. 매니저에게 억지로 끌려갔지요. 분명히 다리도 원인 중의 하납니다." "그러면 그밖에도?" 갤라가 캐물었다. "두통이 있소. 그밖에도 아픈 데가 많아요. 근육이 여기저기 경직되고, 게다가 불면, 권태감…" 갤라는 찌푸린 얼굴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증상은 지나친 음주 때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유복하고 매력적인 남성에게 있을 수 있는 직업상의 위험이다.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자세히 살펴보니 푸르스름한 눈 밑에는 피로로 인한 그늘이 있고 입가에는 고통으로 인한 건지 불쾌로 인한 건지 모를 주름도 있다. 문득 크리스탈 워렌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와 함께 뛰쳐나간 건 잭을 포기한 만큼 값진 것이었을까? "알았습니다." 갤라는 일어나더니 민첩한 동작으로 가은을 매만져 맵시를 고쳤다. "조사해 봅시다, 브랜던 씨. 웃옷을 벗고 진찰대에 누워 주시겠어요?" 브랜던은 말없이 일어나 웃옷을 벗고 진찰대 위에 드러누웠다. "엎드리세요." 갤라는 갑자기 작업이 재미없게 여겨졌지만 곧 두 손바닥을 상대방의 어깨에 대고 숙련된 손가락으로 팔이 시작되는 하트 형의 삼각근을 만져 본 다음, 그 어깨로부터 목덜미로 이어지는 근육의 큰 줄기 승모근을 살폈다. 그것들은 뜻밖에도 긴장된 힘을 폭발시키기 위해 수축해 있는 듯했다. "몸을 편안히 하세요." 갤라가 나직이 말했다. "편안히 하고 있어요."


콘래드 브랜던이 되받았다. 강인한 신체가 손바닥에 전해져 온다. 강인한데다 긴장되어 있다. 갤라는 목 뒤의 척추에 주의를 집중시켰다. 한 곳 내지 두서너 곳이 제자리에서 어긋나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등줄기로 이어지는 두툼한 근육이 경련을 일으킨 듯이 굳어져 있어서 갤라는 긴장했다. 지금 이 부분은 틀림없이 매우 아플 것이다. 아마도 몇 주 전부터 아팠을 것이다. "목덜미의 통증은 언제쯤부터 느꼈어요?" 갤라가 물었다. "기억이 나지 않소." 브랜던이 조용히 대답했다. 갤라는 쯧쯧 혀를 찼다. "몇 주 전부터 치료를 받았어야 했는데…" 브랜던의 피부에는 아직 태양의 온기가 남아 있었지만, 갤라의 관심은 이제 완전히 직업적인 데 집중돼 있었다. 손 아래에 있는 건장한 남성의 몸이 작업 대상이다.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 그 이상의 아무것도 없다. 활배근 사이의 등뼈를 살펴보니 다이빙 선수나 낙하산병을 치료할 때 흔히 볼 수 있었던 증세가 나타났다. "두통이 있지요? 추간연골의 절반이 짜부러져 있는 것, 알고 계셨어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하셨던 거예요? 3 층에서 콘크리트 바닥으로 뛰어내렸어요?" 대답은 없었다. 갤라는 널찍한 등판을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기분으로 살펴봤다. 이 몸은 놀랄 만큼 강건하지만, 무참하게 혹사당하고 있다. 과거의 상처를 나타내는 흉터가 몇 군데 있고, 어깨에는 탈구 수술 자국인 듯한 곳도 있었다. 갤라는 요부근막에 살짝 손가락을 찔러 보았다. 상대방의 약간 찔끔하는 반응으로 보아 더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 근처 일대는 타는 듯이 아플 것이다. 왼쪽 무릎 옆 근육이 온통 부어 있다. 살이 심한 이탈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리라. 넓적다리에는 타박상의 흔적도 보인다. 브랜던이 발을 끄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밖에도 다른 원인이 있음이 분명하다. "바로 누우세요." 브랜던은 바로 누워 갤라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속눈썹 가로 수수께끼 같은 미소가 번지고 있다. "그래 어떤 상태입니까?" 브랜던이 깍지 낀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조용히 물었다. "당신은 자기 몸을 경주용 자동차처럼 부리고 계시는군요."


갤라가 날카롭게 말했다. 복부의 빽빽하게 난 체모 밑에 15cm 정도 되는 톱니 모양의 상처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흉터가 남은 것인지 갤라로서는 알 턱이 없다.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당신만즘 흉터가 많은 환자를 한 사람 본 적이 있어요. 영화 스턴트맨이었어요." 그러나 브랜던의 신체의 아름다움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넓은 가슴은 차차 좁아져서 홀쭉한 허리로 이어지고, 손에 닿는 피부의 감촉은 비단결처럼 부드럽다. 수영 팬티의 검은 삼각형이 갤라를 조롱하고 있다. 수영장에 있던 프레디만큼이나 이 남자도 여성들에게는 굉장히 매력적인 존재일 거다. 프레디가 점잖은 사자 같다고 한다면 이 남자는 몸가짐이 단정한 매우 위험한 표범이다. 또다시 마음이 갑자기 혼란스러워서 갤라는 얼굴을 돌렸다. "끝났습니다, 브랜던 씨. 한마디만 대답해 주세요. 그만한 값어치가 있어요?" "뭐가 말이오?" "그런 식으로 자기 몸을 학대하는 일 말이에요." "나는 영국 챔피언입니다." 브랜던은 답이 될 수 없는 말을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볕에 그을은 근육의 긴장이 풀려 느슨해졌다. "이제 옷을 입어도 됩니까?" "네." 갤라는

책상으로

돌아가

진단결과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콘래드

브랜던이

무슨

챔피언이건 상관없는 일이다. 다만 혹사당한 신체의 상태가 너무 처참해서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좋을지 몰랐다. 우선 목의 견인과 등뼈의 교정을 위한 훈련치료가 필요하리라. 입원실 관리계에 지시해서 그의 매트리스 밑에 판자를 깔게 해야 된다. 지주가 필요하고 베개는 물론 하나, 월트나 모나에게 마사지를 받으러 보내기도 해야 된다. 그 외에도 치료가 필요한 곳이 아마 더 있을 것이다. 브랜던의 심한 신체소모에는 육체적인 원인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원인도 있는 듯했다. 그것은 신체의 긴장상태로 느낄 수 있으며 눈초리나 입 가의 주름살에서도 간파할 수 있다. 라이오넬 경이 '휴식과 회복'을 위해 브랜던을 여기에 보내온 데는 육체적 손상 못지않게 남성에게 흔한 정신적 긴장이라는 이유가 있었을 거다. 이겨내야겠다는 의지를, 갤라는 지금까지 많은 남자들에게서 보아 왔다. 오빠들에게서도, 갤라의 유일한 애인이었던 브라이언 매튜스에게서도, 그리고 이 브랜던의 내부에서도 그 의지는 어두운 불꽃처럼 타고 있었다. "안색이 좋지 않군요."


브랜던이 비치가운의 허리끈을 매면서 물었다. "그렇게 심합니까?" "자신은 어떻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커다란 고통 덩어리예요, 브랜던 씨. 다음주에 오전과 오후 두 번 치료하기로 합시다. 접수계의 니타가 오늘 밤 식사 때에 예정표를 건네줄 겁니다." 갤라는 서류철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럼 됐어요, 브랜던 씨." "미즈 플레처." 갤라가 얼굴을 들고 보니 상대방의 입술에 보일 듯 말 듯한 조소가 어려 있다. "뭐죠?" "당신 차는 아우디는 아니겠지요?" "아니예요. 왜 그러시죠?" "나의 가장 강한 라이벌이 아우디를 타는 사람이라 … 내가 느끼기로는 당신은 분명히 나를 적대시하고 있는 것 같소. 그렇지요?" 브랜던은 자기를 쳐다보는 갤라를 뒤에 남겨 둔 채 밖으로 나갔다. 갤라도 입 속으로 욕을 퍼부어 주었다. 다음 환자는 이제 2, 3 분만 있으면 오는데 머리는 점점 더 아파온다. 갤라는 서랍을 열고 아스피린을 꺼냈다. 크리스탈을 데려간 것이 저 사내라는 확신은 점점 강해졌다. 갤라는 손목시계를 흘깃 바라보았다. 마이클이 아직 런던에 있을지도 모른다. 갤라는 충동적으로 수화기를 들고 호텔 번호를 돌렸다. 마이클은 이제 막 공항에 나가려는 참이었던 모양이다. "마이클 오빠? 나 갤라야." "응, 그래! 빨리 말해라, 벌써 20 분이나 늦었어." "한 가지만 물을게. 크리스탈이 잭을 버리고 떠났을 때의 일 기억나?" "아아…" "이름이 뭐였지? 그 상대 남자?" "콘래드 브랜던. 지겨운 놈이야." 당시의 분노를 생각해 낸 마이클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사람 랠리드라이버였어?" "응, 철저한 수완가지. 올해 전영국 선수권을 따냈지. 몰랐니?" "크리스탈은 어떻게 됐어? 그 사람과 결혼했어?" 전화 저쪽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렸다. "결혼! 그런 족속이 결혼하겠니? 잭과 같이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결혼하는 거지. 한 달도 채 못 가서 놈은 딴 여자와 놀아났던 모양이야."


"설마!" 갤라는 깜짝 놀랐다. "부자들은 모두 그렇지. 나는 그런 놈들을 이곳 저곳 싣고 다니는 셈이지. 그런데 왜 또 그런 걸 묻는 거니?" 갤라는 머뭇거렸다. 그 브랜던이 파커 병원에 와 있다는 것을 지금 알리는 게 좋을지 어떨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중에 마이클이 급히 말했다. "갤라, 급해. 더 알고 싶으면 잭에게 물어 봐. 열흘 뒤에 또 만나자, 좋겠지?" "좋아, 날다가 천사에게 부딪치지는 마." "알았어. 지난밤은 참 즐거웠다, 안녕." 갤라는 생각에 잠기면서 수화기를 놓았다. 역시 갤라의 직감은 적중했다. 그래 어쩐다? 다른 어떤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브랜던은 일개 환자일 뿐이므로 곧 여기서 나가게 될 거고, 일단 나가면 나와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다. 3 년이나 지난 옛일을 캐낼 필요가 있을 것인가… 조심스런 노크 소리가 들려 갤라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살짝 열린 문 틈으로 한 여자의 머리가 보였다. "방해가 됐나요? 5 분 정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만…" "미안합니다." 갤라는 이런저런 고민을 일단 의식 밖으로 내몰고는 웃는 얼굴로 일어섰다. "들어오세요, 닐 부인." 점심식사 때 갤라는 식당의 지정 식탁 앞에 주임 물리요법사 로저 트레퍼시스와 함께 앉았다. 직원들도 환자와 같은 시간에 식사를 하지만 좌석은 별도로 지정돼 있었다. 한 장 유리벽으로는 수목이 무성한 녹지와 풍성하게 쏟아지는 햇살이 눈에 들어온다. 다른 건물들도 유리를 많이 사용해서 병원 전체가 따뜻한 온실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오늘도 구름 한점 없는 맑은 날씨다. "참 아름답지?" 로저가 바깥 풍경을 조용히 내다보며 말했다. "밖이 얼 정도로 추운 날씨라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는군. 펜트 주는 정말 아름다워." 로저는 50 살로 갤라보다 아득히 연장인데도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는 사이다. 갤라가 전임 물리요법사가 된 올해는 특히 그러했다. 갤라는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로저의

어깨

너머

저쪽을

바라보았다.

환자들이

자기들에게도 허용되어 있는 샐러드를 우적우적 씹고 있다. 콘래드 브랜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중이떠중이와는 선을 긋고자 방으로 식사를 날라오게 했음이 틀림없다. 로저는 갤라의 근심을 알아차린 듯 냅킨으로 콧수염을 비비더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오늘 아침 브랜던 씨는 어땠소?" "별로요." 갤라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롤빵을 절반으로 잘랐다. "오만한 사람이에요." "성공한 인간은 자칫하면 그러기 쉬워요. 그런 일로 화를 내면 손해지요. 젊은 사람들이 보면 그는 영웅이지." 갤라는 콘래드 브랜던이 옛날에 저지른 소행을 로저에게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꾹 참았다. 갤라는 생각을 바꿔 물었다. "랠리는 어떤 거예요?" "크로스컨트리 경주 중의 하나지. 며칠이나 걸리는 힘든 경주인 모양이오." "그런가 봐요. 실컷 얻어맞은 것 같은 몸을 하고 있는걸요. 생계유지의 방편으로 하기엔 무서운 일이에요." "그 사람은 필요에 의해 랠리에 나서는 건 아니오." 로저는 여종업원이 내미는 커피를 손을 저어 사양하고 갤라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조용히 말했다. "콘래드 브랜던은 굉장한 부자요. 런던에 부동산을 잔뜩 가지고 있고, 고급차 전시장도 여러 개 소유하고 있거든." "그래요?" 갤라는 비웃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크리스탈에게는 풋내기 건축가였던 잭보다 그가 훨씬 매력적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러나 편안히 윤택하게 살 수 있는데도 일부러 격렬한 경기로 몸을 괴롭히다니, 콘래드 브랜던도 상당히 질이 나쁜 악마에게 홀려 있는가 보다. "이상적인 독신 남성 넘버원이지. 이곳에서도 꽤 많은 여성들이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을 거요, 틀림없이!" "프레디 그리피스도 명예를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될 거예요." 갤라는 음식을 끼적거리다가 가볍게 말을 돌렸다. "선생님, 일에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하는 경우가 있어요?" "젊고 아름다운 환자와 사랑에 빠진다든가 하는 거 말이지?" 로저가 웃었다. "그 반대로 그 환자를 미워할 이유가 있는 경우요. 그 사람이 선생님이 기르던 개를 치었다든지 그런 경우죠. 그런 때도 다른 환자를 대하는 것과 다름없는 태도를 취할 수 있으세요?" "그럴 수 있지요. 한데, 콘래드 브랜던이 그런 경우인가?" "아니예요."


갤라는 당황해서 거짓말을 했다.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갤라도 곧 일과 개인 감정을 분리해서 생각하게 될 거요. 나는 어느 환자에게나 똑같이 따뜻한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로 있고자 애쓰고 있소. 좋고 싫고는 별개로 하고 말이지. 그게 제일 좋아요." "그렇겠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갤라는 다시 음식을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내 업무는 환자를 치료하는 일이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 잭에게 알릴 필요도 없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도중 갤라는 키가 크고 여윈 리차드 슈월츠뮐러와 마주쳤다. "어머, 안녕하세요?" 갤라는 다소 낭패한 기분이 들었다. 후일 대성할 게 틀림없는 이 의사와 만나면 긴장하게 되는 것은 짙은 검은색 콧수염과 독수리 같은 인상이 어쩐지 불길한 느낌을 주기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자신에게 향해지는 이 의사의 시선을 자주 느끼고 있었다. 보통 때는 가볍게 인사를 하는 정도의 사이였지만, 갤라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자의 직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매우 바쁜 모양이군요." 의사는 미소를 지었다. "좀 생각하고 있는 일이 있어서요." "한 5 분쯤 얘기할 시간도 없을 정돕니까?" "아뇨, 괜찮아요." 갤라는 마지못해 응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의사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방안은 책상 위까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으며 의사의 방 특유의 메틸알콜 냄새가 코를 자극해 왔다. 그는 갤라에게 가죽을 씌운 회전의자를 권하고 자기는 책상에 앉아 팔짱을 꼈다. "연극을 좋아하십니까?" 의사가 갑자기 물었다. 갤라는 당황했다. "네, 아주. 왜요?". "내일 밤 뉴빅 극장의 햄릿 티켓 2 장이 있는데, 함께 가기로 한 친구가 병이 났어요. 갑작스런 얘깁니다만 갤라, 같이 갈 수 있을까요?" "저…" 갤라는 몹시 놀라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같이 가주신다면 영광입니다. 당신을 좀더 잘 알고 싶었습니다. 우리들은 같은 동료로서 좀더 가까와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아, 그렇고말고요." 갤라는 급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미안합니다만, 슈월츠뮐러 선생님…" "리차드라고 불러 주십시오." "리차드, 그런데 약속이 있어요. 저, 내일 밤은 친구랑 외출하기로 했어요. 여자 친구예요. 정말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갑작스런 얘기였으니까요." "미안합니다." 왜 거절했는지 갤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용모도 괜찮고 즐겁게 어울릴 수 있는 상대인데. "그러면 다음 기회에." "네, 꼭." 갤라는 거짓말했다는 죄의식이 들어 그 제안에 과잉반응을 하고 말았다. 여윈 의사의 얼굴에 환한 기쁨이 번졌다. "그럼, 언제 저녁식사라도 함께 하는 게 어떻습니까?" "네, 좋아요." 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갤라는 이곳에서 2 년을 일해 오는 동안, 그녀가 접근하기 어려운 느낌을 주어서인지, 아니면 이곳 남자들이 너무 내성적이어서인지 아무튼 어느 정도 매력적인 남성으로서 갤라를 유혹해 온 사람은 이 의사 하나뿐이었다. "그럼 다음주쯤 어떻겠습니까? 주말에 전화를 해주시겠습니까? 그때 시간과 장소를 정하지요." "그러겠어요." 갤라는 얼룩 하나 없는 그 방을 나올 때 의사를 보고는 애교있게 방긋 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분명히

매력적이긴 했지만, 편안하지만은 않을 거라고 막연히 느끼고 있었다. "아, 좋잖아!" 갤라는 다음 환자를 만나보러 서둘러 돌아가면서 중얼거렸다. 자기를 유혹하는 남자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 것도 아닌데, 그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도 좋겠지. 갤라는 목요일 저녁에는 테니스를 하기로 정해 놓고 있엇다. 일이 끝난 후 용구를 챙겨 넣은 백을 들고 테니스코트로 향했다. 숲속의 큰 건물 안에는 아무 인기척이 없이 앨러나


시프리아니 혼자 벽에다 공을 치며 갤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갤라는 위층 관중석에서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오늘은 어땠니?" 갤라가 흰 트랙슈트의 모습으로 나타나자 앨러나가 물었다. "그저그래. 언닌?" "괜찮아. 너 어디 좋지 않니?" "엊저녁 너무 놀아서 벌을 받고 있는 중이야." 갤라는 테니스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건강 유지를 위해 계속하고 있었다. "술을 너무 마셔서 아직도 머리가 띵해." "너답지 않게." 앨러나가 트랙슈트를 벗자 늘씬한 갈색 다리가 드러났다. 두 사람은 준비운동으로 들어갔다. "무슨 좋은 일이 있었니?" "마이클이 휴가를 받아 왔었어. 기장으로 승진을 해서 잭과 내가 축하해 준 거야. 마이클이 아주 좋아하던데." "그렇겠지. 아마 스칸디나비아 항공사에 근무하고 있지?" "응." "젊은데 벌써 기장이야?" "언니도 23 살에 의사가 됐잖아? 마이클은 뛰어난 비행사인걸." 갤라는 받지 못하고 놓친 공을 허리를 구부려 주웠다. 앨러나가 그러는 갤라를 부드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앨러나 쪽이 조금 연상인데, 그녀는 둥근 얼굴에 검은 눈이 장난스럽게 빛나는 날씬한 여성이다. 갤라가 2 년 전 여기서 근무하게 되었을 때부터 하는 일은 각기 달랐지만 서로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앨러나는 선이상( 腺 異 常 )의 연구조사에 관계하고 있었는데 그 일은 병원 안에서 꽤 중요한 부문이었다. 두 사람은 정기적으로 테니스를 하는 등, 근무시간 외에도 자주 만나곤 했다. "오빠들이 좋은 모양이로구나." 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클과 잭은 체격이 좋은 미남자들로 누이동생인 갤라를 항상 자기들 축에 끼워 주었다. 세 사람은 매우 사이가 좋았다. 부모와의 관계보다도 더욱 친밀했다. 그리고 갤라는 겉보기와는 달리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을 지닌 잭에 대해서는 강한 보호자적 애정을 품고 있었다. "오늘 리차드 슈월츠뮐러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았어."


갤라의 보고에 앨러나의 가는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괜찮겠지, 인상도 좋고 말야." "그렇게 생각해? 일단 거절했다가 다음주에 함께 식사하기로 했는데." "잘됐다, 정말 잘됐어. 좋지 않니?" "뭐가?" 갤라는 재미있어하며 웃었다. "그와 결혼하는 거? 단지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을 뿐이야, 언니." "영국인이라면

가볍게

그냥 오케인데.

그렇지만

민족성은

이해해야 돼.

독일인은

진지하거든. 리차드가 신청해 온 걸 보면 그는 그 동안 쭉 널 관찰해 온 게 틀림없어. 그는 너에게 크게 마음이 끌린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그럴 리가 없어." "농담은 그만둬요." 갤라가 곤혹스런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앨러나는 혼자 웃었다. "아니야, 반은 진심이야. 그는 멋있는 남자에다 훌륭한 의사야." 앨러나는 장난스럽게 눈을 깜박였다. "장래성 있는 애인으로서는 더할나위없지." "싫어, 그런 얘기 듣고 싶지 않아." 갤라가 벽에다 공을 높이 치자 앨러나는 그제서야 허겁지겁 쫓아갔다. 2, 3 분 더 연습한 후 앨러나가 거친 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오케이, 시작하자." 시합은 항상 그랬듯이 팽팽한 대결이었다. 앨러나의 공은 놀랄 만큼 강했고 그녀의 긴 다리는 경기장 안을 빠르게 뛰어다녔다. 그러나 갤라는 그녀의 한 걸음 앞의 동작을 미리 읽어, 여러 번에 걸쳐 같은 전법으로 앨러나를 괴롭혔다. "야아, 심술궂다!" 코너에 떨어진 공을 쫓아가기를 단념한 앨러나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격렬한 운동으로 두 사람 다 얼굴이 빨개진 채 땀을 흘리고 있다. "손들었지?" 갤라도

숨을 헐떡거리며 웃었다. 갤라는

대범하고

침착한

듯했지만 사실

근육의

움직임이나 정신집중으로 보면 테니스는 매우 격렬한 운동이었던 것이다. "네 득점은 하등동물의 교활한 지혜야." "물리요법사의 입장으로서 배우자에게도 이 경기는 권할 수 없어." 갤라는 자기 코트로 돌아오면서 슬픈 듯 이렇게 말하고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테니스는 다른 어떤 운동보다도 무릎이며 복사뼈의 점도를 증가시키거든.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운동이 필요해."


갤라는 왼쪽 코너에 힘차게 공을 쳐 넣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다음 게임을 진행했다. 갤라는 하루 동안의 피로감을 잊은 채 체력과 지력에 대한 도전을 즐기고 있었다. 온몸이 긴장되고 신체의 모든 조직이 운동하고 있음을 느낀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었다. 그리고 어렵게 앨러나가 이긴 마지막 게임이 끝날 즈음에는 두 사람 다 땀투성이가 되었고, 경기가 끝나고 나서 마음껏 숨을 토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잘했어." 갤라는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타월을 뒤집어썼다. "오늘 저녁에는 유난히 힘이 넘치는데!" "네가 이틀 동안이나 술을 마신 덕을 좀 보았을 뿐이야." "어쨌든 기분 좋았어." 갤라는 홍조를 띤 얼굴을 수건으로 지그시 눌렀다. "이러고 나면 몸속에서 독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잖아? 여러 가지 의미에서." "무슨 뜻이야?" "우울한 일이 있었는데 그걸 떨쳐 버릴 수 있었던 거야." 갤라는 라켓을 주워들고 크리스탈과 잭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다. 그때 왠지 모르게 위쪽으로 눈이 갔다. 어두운 관중석에 사람 하나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불쾌한 기분이 갤라를 사로잡았다. 관중석 중앙에 콘래드 브랜던이 다리를 포개고 양팔을 의자 등에 걸친 채 앉아 있었다. 갤라의 표정이 굳어졌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을까? 어두워서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검은색 바지와 짙은 색깔의 외투를 입고 있다. 갤라의 시선을 쫓아 위를 올려다본 앨러나가 쾌활하게 아는 체를 했다. "안녕, 콘! 요즘 어때요?" "좋아요." 콘레드 브랜던은 일어나 중앙 통로를 걸어오더니 두 사람의 머리 위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나를 토끼로 생각하는 모양이오. 상치밖에 먹여 주질 않는걸." 앨러나는 킥킥 웃었다. "알콜도 물론 제외겠지요, 가엾게시리." "적어도 평화롭긴 하지." 그의 흐리멍텅하던 눈이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갤라를 향해 빛났다. 앨러나는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갤라에게는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우울한 불안감이 또다시 한꺼번에 밀려왔다. 땀이 밴 운동복 차림에 얼굴은 새빨갛고 땀투성이라, 위에서 다가오는 차갑고도 부드러운 시선을 받는 게 어쩐지 불안했다.


"샤워를 하고 오겠어." 갤라는 자신도 모르게 말투가 딱딱해짐을 느꼈다. "잠깐 기다려, 소개할게. 콘, 이쪽은 갤라 플레처." "이미 알고 있어." 갤라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가로막았다. 위층의 얼굴에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실례." 갤라는 가방을 들고 출구로 향했다. 어린애 같은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갤라는 등뒤에서 느껴지는 경악의 침묵― 그녀를 조소하는 듯한 침묵에 탕 하고 문을 닫아 답했다. 2 다음날 아침, 갤라의 책상 위에는 산더미 같은 서류철이 기다리고 있었다. 맨 위에 있는 서류철은 콘래드 브랜던의 것이었다. 한밤중부터 퍼붓기 시작한 폭우에 흠뻑 젖은 갤라는 손에 든 종잇장을 홱홱 넘겼다. 어젯밤의 어리석은 행동의 뒷맛이 기억 속에 씁쓸하게 되살아났다. 라이오넬 파커가 휘갈겨 쓴 소견서에는 어제 갤라가 파악한 이상의 내용은 거의 없었다. 소견서는 <브랜던 씨는 누구도 따르지 못할 정도로 자신을 혹사시키고 있다.> 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강한 의지와 타고난 강건한 체질에도 불구하고 육체적 정신적 과로의 징후가 있음. 추간연골 탈출이 원인인 근육경련에는 견인과 절대안정이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됨.> 이어서 혈압, 맥박 같은 개인기록이 죽 나와 있었으나 그것은 다음에 읽기로 했다. 갤라는 서류철을 덮고 비옷을 벗었다. 어제는 정말 바보같은 짓을 했던 게 아닐까? 2, 3 분 후에 갤라를 따라 샤워실에 들어온 앨러나는 다른 아무 말도 없이 단지 콘 브랜던과는 오랜 친구라고만 얘기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샤워를 했다. 브랜던은 아마 그날 아침의 갤라의 공격적인 태도를 화제로 삼았으리라. 정말 어리석은 짓을 했다. 갤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환자에 대해서는 직업인으로 대하려고 생각했었건만 개인적인 혐오감에 못 이겨 평소의 기준을 파괴시켜 버린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갤라는 다시 서류철을 펼쳤다. 콘래드 브랜던은 34 살이었다. 갤라는 l0 살이나 차이나는 사람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심 탓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갤라는 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이곳에 온 지 2 년밖에 되지 않은 반면, 콘래드 브랜던에게는 정상에까지 오른 사람의 오만한 자부심이 있었다. "아아."


갤라는 자신없는 한숨을 조용히 쉬었다. 실습기간을 훌륭히 넘기고 정식 직원이 된 지금도 갤라는 자신이 아직 어리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었다. 큰오빠 마이클은 착착 일등 항공사가 되어가고 있고 갤라보다 조금 위인 잭만 해도 재능이 뛰어난 건축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해 가고 있다. 갤라 자신의 재능은 치료한다는, 어찌 보면 참 모호한 것으로, 그것도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렇다. 그 재능을 연마할 시간이다. 앞으로 2 분 후면 자신이 담당한 장애아 반의 훈련시간이다. 갤라는 가운을 걸치고 훈련실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훈련치료는 고통스러웠지만 반면에 그만큼 보상이 많은 것이기도 했다. 다섯 아이가 부모에게 이끌려 격주로 병원에 오고, 갤라도 격주로 집으로 훈련을 시키러 나간다. 여기서는 전문 기계설비를 이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아이들을 격려해서 신체를 펴게 하고 필요한 운동을 시키는 것은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큰 고통을 수반하는 운동인 경우도 있으니까. 그러나 무리해서라도 시키지 않으면 아이들은 운동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고통스러워한다고 해서 그만두게 하는 건 참된 친절이라고 할 수 없어요." 갤라는 소냐 매크레이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소냐는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너무 괴로와하는 것 같아서…" "분명히 그래요. 하지만 그만한 가치는 있어요. 자, 거들어 드리겠어요." 양다리가 마비된 매크레이 부인의 아들 타퀸이 기계를 이용하여 몸을 반듯이 일으키는 운동을 갤라도 몸을 구부려 거들었다. 근육을 계속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때로는 괴로운 일이기도 하다. 지금의 타퀸같이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꾹꾹 참으며 해야 되는 경우도 있다. "참 잔혹한 친절도 있군요. 자 참아라, 타퀸." 소냐는 가만히 한숨을 지었다. 그 반의 훈련이 끝나고 모두가 떠들썩하니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 어린이용 만화책이 갤라의 눈에 띄었다. 뒷표지에 사진이 죽 실려 있고 그 위에 <랠리의 스타들>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2 회 연속 영국선수권을 차지한 콘래드 브랜던의 사진이 맨 앞에 실려 있다. 헬멧을 쓰고 있어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으나 타는 듯한 눈과 볕에 그을은 볼이 조금 비쳐 보였다. "그거 타퀸 거예요." 소냐 매크레이가 아들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다가왔다. "경주용 자동차처럼 큰 소리가 나는 게 좋아서요. 미안해요, 어지럽혀 놓아서."


갤라는 만화책을 아이에게 돌려주긴 했지만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어디서나 콘래드 브랜던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것이 괴로왔다. 그런 유명인 환자를 담당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환자가 정오경에 첫 치료를 받으러 올 거다. 갤라의 기분은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예약시간이 다 될 즘해서 갤라는 긴장과 혐오가 뒤엉켜 이중으로 굳어져 갔다. 콘래드 브랜던이 들어왔을 때는 심장의 고동이 격렬해지는 것을 느끼며 두통이 나기까지 했다. 역시 짙은 색깔의 웃옷과 매우 값이 나갈 듯한 아름다운 회색 스웨터를 입은 콘래드 브랜던은 정말 화가 날 만큼 미남자였다. 검은 눈썹, 겨울의 호수 같은 눈, 단단한 턱으로 이어지는 마호가니 색 피부 … 훌륭한 조화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응어리 하나가 혐오감에 불을 댕겨 갤라는 무표정하게 콘레드 브랜던을 맞았다. "이번엔 지각하지 않았을 텐데요?" 시원스런 얼굴에서 반짝이는 눈빛은 어제의 갤라의 태도를 잊어버리고 있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바로 시작하지요." 갤라는 호의적으로 들리도록 노력하며 진찰대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 끝에 앉아 주세요." 콘래드 브랜던은 그 말을 듣고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미즈 플레처, 어제 내 침대가 바뀌었더군요. 두꺼운 판자 같은 게 들어가 있었소. 베개도 하나뿐이고. 접수부에 전화를 했더니 당신의 특별지시라는 대답이었소." "맞아요." "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알고 있소. 그러나 너무 어린애 같은 심술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심술?" 갤라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렇지 않다면 농을 거는 건가요? 나는 거의 잠을 잘 수 없었는데, 설마 그게 의학상 좋은 거라고 말하지는 않겠지요?" "그랬군." 갤라는 차디차게 말했다. "교정용 판자를 넣을 때 담당자가 잘 설명해 주어야 했을 텐데. 요부 추간연골 손상의 경우에 절대 필요한, 극히 당연한 처치예요. 틀림없습니다." "정말이오?" "정말입니다. 당신은 지급치료를 할 필요가 있었던 거예요. 자기 몸을 얼마나 혹사시켜 왔는지 아마 모르시는 것 같군요."


"운전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군요." 그 말은 냉정하게 과녁을 찌르고 있었다. 갤라는 상대방의 차가운 적의를 눈으로 맞받아 되돌려보냈다. "영향이 있었을 거예요. 몇 해에 걸쳐서 쌓여 온 몸의 고장이 마침내 당신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운전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거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여기에 들여보내지도 않았을 거예요." "대단한 통찰력이오." 냉정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반론은 제기하지 않는다. "또 하나 말해 볼까요, 브랜던 씨? 당신은 무서운 겁니다. 당신은 고통 못지않을 정도의 공포를 느껴 잠을 자지 못한 거예요." 콘래드 브랜던은 이죽거리듯 낮은 소리로 웃었다. "옳거니, 그래 나는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습니까?" 갤라는 깊숙이 숨을 들이마시면서 콘래드 브랜던의 유들유들함을 꺾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발을 끌기 시작했으니까 무서운 거예요. 다리의 감각이 없어지는 경우도 있을 거고 등줄기에서부터 다리에 걸쳐 심한 아픔을 느낄 때도 있을 거예요. 예전처럼 빨리 달릴 수도 없고, 걷기도 힘들 거예요. 더욱이 그 상태는 악화일로에 있지요. 자꾸만 나빠져 간다, 그 사실이 당신을 공포에 빠뜨리고 있는 겁니다." 콘래드 브랜던의 눈이 가늘어졌다. 스웨터의 어깨 부근이 팽팽해져 있다. "아주 확신있게 말하는군요." 목소리도 가라앉아 있다. "분명한 사실이에요. 언뜻 보아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요." 아픈 데를 찌른 게 틀림없다. 갤라는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콘래드 브랜던을 응시했다. "발끝에 손을 짚을 수 있겠어요?" "물론이오." "그럼 해보세요." 콘래드 브랜던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두 발꿈치를 합친 다음 상체를 구부렸다. 바닥에서 l5cm 정도의 높이에서 손이 멎었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으나 두 손은 멎은 채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콘래드 브랜던의 눈에 엷은 고통의 빛이 서려 있다. "원인은 몸이 굳어졌기 때문이 아니예요, 브랜던 씨." 갤라는 부드럽게 말했다. "진찰대에 누워 오른쪽 다리를 반듯이 위로 올려 보세요."


콘래드 브랜던은 무표정하게 드러누웠다. 다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콘래드 브랜던은 신음소리를 내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이마에 땀이 배고 전신이 떨린다. 잘 단련된 근육이 마비된 신경과 처절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희망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갤라는 잘 안다. 오른쪽 다리가 천천히 올라가다가 곧 아래로 다시 떨어졌다. 콘래드 브랜던은 천장을 뚫어져라 쏘아보며 격렬한 분노를 누르고 있다. "이대로 가면 마비돼 버립니다. 하지만 2, 3 주 동안 치료를 하면 고통이 사라지고 신경을 압박하고 있는 다른 증상도 없어질 거예요. 어깨서 이렇게 심해졌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험한 길을 맹속으로 달리다가 충돌하거나 했겠지요― 그걸 치료하는 데는 시간과 당신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갤라는 기분이 한결 나아짐을 느끼며 견인기계를 진찰대 쪽으로 끌고 갔다. 울상이 된 콘래드 브랜던을 보는 것은 싸늘한 쾌감이었다. 이제 비인간적인 브랜던도 오만하게만 있을 수는 없다. 갤라는 콘래드 브랜던의 팔을 양 손으로 단단히 받쳐 일으켰다. "스웨터를 벗어 주세요." 콘래드 브랜던과 갤라의 눈이 마주쳤다. "재미있겠군요." 부드러운 말씨였으나 갤라는 순간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무슨 뜻이죠?" "당신의 나에 대한 태도 말인데." 갤라는 상대방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나를 싫어하는 이유가 있는 모양이오. 그걸 말해 주지 않겠어요?" "이유 같은 건 없어요." 무의식중에 내지른 큰소리가 그 말이 거짓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래요?" 콘래드 브랜던의 얼굴이 차가운 가면처럼 되었다. "이유가 없다고? 그러면 시작할까요?" 앨러나 시프리아니의 차는 그 주일에도 고장이 나 있었으므로 갤라는 금요일 야근이 끝난 후 그녀를 태우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교류발전기가 낡았다는 거야." 앨러나가 말했다. "수리공의 얘기로는 이제 사용할 수 없을지도 모른대." 앨러나는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주말까지는 계속 내릴 것 같다. 갤라의 낡은 모리스는 흩날리는 흰 눈발 속을 조심조심 나아간다. "음, 내일은 출근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걸."


갤라는 한숨을 쉬었다. 병원은 교통편이 좋지 않아 큰일이다. "더 큰 눈이 내리게 되면 로저에게 태워다 달라고 부탁해야지. 그랜드로바라면 웬만한 정도는 괜찮을 테니까." 앨러나는 외투 속으로 몸을 움츠렸다. 모리스의 난방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다. "콘 브랜던하고는 어떠니?" 앨러나가 가볍게 물었다. "별문제없어." 갤라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치료는 별로 새로운 게 아니야." 갤라는 뭔가 말을 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주로 휴양, 하루 두세 차례 조용히 등을 뻗는 훈련, 허리에 고정장치가 필요한 정도는 아니고." 갤라는 눈이 깊이 쌓인 위험한 도로를 신중히 나아갔다. "곧 다시 차를 탈 수 있을 거야." "다행이야." 앨러나는 다시 말했다. "17 살 때 콘에게 운전을 배웠었어. 당시 콘은 바로 우리 옆집에 살고 있었거든. 낡은 집이었는데, 나는 그를 누구보다도 훌륭하다고 생각했었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어. 하지만 훈련방법은 무척 엄격했었어. 덕택에 나는 운전면허시험을 한 번에 통과할 수 있었지." "멋있었겠네." 갤라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내 18 살 생일엔 나를 술집에 데려가 주었는데, 나는 그때 처음으로 술을 마셨어." 앨러나는 그때가 그립다는 듯 조용히 웃었다. "핑크레이디를 마셨지. 맛이 참 좋았어. 콘은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술, 쾌속차, 섹스… " "섹스?" 갤라는 소리를 질렀다. "야아, 무섭다! 그 사람 참 섹시하다고 생각지 않니? 그가 내게 무슨 짓을 한 건 아니야. 그러니까 그런 무서운 얼굴을 하지 마, 갤라 플레처." "그건 분명하지?" 갤라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래." 앨러나는 안타까운 모양이다. "내가 시도해 보지 않았던 건 아니야. 하지만 그는 나보다 6, 7 살 위였고, 또 그가 내 잔재주를 눈치채지 못한 거겠지. 여자는 얼마든지 있고 말야. 그가 랠리에 나갈 때는 기회만 있으면 구경하 러 갔었어. 그는 어디에 있거나 단연 빛났었지. 그 사이에 그가 하던 자동차 사업이 번창해 호텔이며 배를 사들이기 시작했어. 또 그가 살던 낡은 집이 l0 만 파운드가 되어 고급 주택가의 큰 집을 사기도 했지. 이탈리아 공주인가 하고도 관계가 있었다던가." 앨러나는 가볍게 빈정거리고는 유리창 밖의 눈보라치는 광경을 내다보았다. "내가 콘과 다른 세계에 있다는 걸 깨달은 게 그 무렵이야." 갤라는 앨러나의 추억담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앨러나가 그리는 장미빛 초상과 갤라 자신이 본 남자를 일치시키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지만. "그래 지금도 친구 사이야?" "응, 우린 줄곧 친구야. 콘은 지금까지 죽 나를 보살펴 주었어. 내가 어른이 되고 의사가 되면 콘도 조금은 달리 보아 줄지도 모른다고, 여자로 보아 주지 않겠느냐고 희망을 가졌던 적도 있었지." "그런데 그렇지 않았어?" "전혀 통하지 않아. 난 아직도 그에게 있어서는 누이동생인 거야." 차는 이제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로 빠져나와 도로의 상태는 훨씬 나아졌다. 길에 모래가 깔려 있어 운전에 어려움은 없었다. 두 사람은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 앨러나도 콘래드 브랜던을 화제로 할 분위기가 아님을 눈치챈 듯했다. 그러나 차가 앨러나의 집 앞 눈길로 들어서자 그녀는 갤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갤라, 정말 안다깝다. 너와 콘이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해?" 치료는 냉정한 침묵 속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갤라는 혐오감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어. 꼴도 보기 싫은 거지, 응? 어디가 그렇게 싫은 거야? 네게는 아무 일도 없었잖니. 아니, 무슨 일이 있었니?" "그 얘긴 언니와 하고 싶지 않아." "응,

부탁이야.

마치

멜로드리마의

여주인공인

척하지

말고.

프린세스라고 불리고 있지만. 그러나 그건 바보 같은 짓이야." "아이스 프린세스?"

하기야

아이스


"어머나, 몰랐니?" 앨러나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널 그렇게 부르는 의사들이 많이 있단 말야. 별명 같은 거지." "그래?" 갤라는 화가 났다. "나쁜 의미는 아니야. 애칭이라고 할 수 있지. 너는 매우 유능하고, 매우…" "매우 차가우니까." 갤라가 앞질러 말했다. 그렇다면 모두가 나를 조롱거리로 삼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 말은 마음에 두지 마. 콘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 그는 어쨌든 환자니까 네가 지금 같은 태도로 치료에 임하는 게 바람직한 건 아니잖니?" "부탁인데, 설교는 그만둬." 정색을 하고 앨러나와 싸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위장까지 긴장하는 듯했다. "앨러나, 그 얘기는 그만둬, 제발." "쓸데없는 얘길지 모르지만 두 사람 다 내게는 소중한 친구야.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서로 미워하고 있어. 난 곤란해." "그 사람이 언니한테 중재를 부탁했어?" "그런 일이 있을 턱이 없잖니…" "그럼 간섭하지 말아 줘. 언닌 사정을 모르니까. 그 사정을 얘기할 수는 없어." 앨러나에게 있어 매우 소중한 콘이 갤라의 가족에게 어떠한 굴욕을 가했는지 차라리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말해 버릴까? 앨러나의 반응은 볼 만하리라. "언니가 그 사람을 숭배하고 있는 건 알았어. 하지만 내게 있어 그는 무자비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위험인물이야. 아무리 다른 사람에게 친절했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나는 그가 되도록 빨리 낫기를 바라고 있어. 오랫동안 얼굴을 마주보고 싶지 않아. 그에게 얘기해 줘도 좋아." "부탁 같은 건 받지 않겠어. 또 콘이 알 필요도 없을 거고. 물론 지금 얘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일도 없을 거야." 앨러나는 침착하게 차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갤라는 분노에 몸을 떨면서도 또다시 자제심을 잃고 만 자신을 저주하며 난폭하게 시동을 걸었다. 집에 도착할 무렵에는 더욱 춥고 더욱 비참했다. 조용한 웬즈워스 가는 한쪽에는 옛날 조지아 왕조 시대의 아름다운 테라스하우스가 이어져 있고 맞은편에는 근대적인 주택 단지가 들어서 있는 묘한 거리였다. 2 년 전 그 테라스하우스의 꼭대기 층에 운 좋게 들어간 갤라는 그 이래 그곳에서 매우 행복한 생황을 해왔다.


갤라가 문을 닫자 중앙난방장치가 작동을 개시했다. 먼저 전화기를 들고 앨러나의 번호를 돌렸다. "여보세요." 갤라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아냐, 내가 주제넘었던 거야. 참견을 하면 언제나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되지. 두번 다시 그 얘기는 꺼내지 않을게." 앨러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참견은 아니었어. 나야말로 너무 화를 낸 것 같아. 하지만 그 얘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알겠어. 하지만 만일에 콘을 싫어하는 이유를 얘기해 줄 마음이 생기거든 언제든지 얘기 좀 해줘." "그 사람이 퇴원하면 아마…" "언제든지 마음 내킬 때. 어느 쪽이나 두 사람은 다 내 친구니까 말야." "그래, 다만 그에 대한 견해가 다를 뿐이니까." "그러나 내 생각엔 아마 잘될 거야. 그건 그렇고 얘, 이럴 땐 뜨거운 코코아를 마시면 좋아. 나도 지금 마시고 있는데 몸이 한결 풀리는걸." 갤라에게 들려 주듯 맛있게 마시는 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내일 아침 일찍 차 형편이 닿는 대로 전화해 줘." "물론. 언니, 그럼 잘 자, 안녕." 갤라가 수화기를 놓는 순간 삐꺽 하는 소리가 나면서 야웅 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파샤가 주방문에 붙은 전용 출입구를 몸으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갤라의 유일한 방 동료인 잿빛 고양이가 반가운 듯 소리를 내면서 갤라의 어깨 위로 뛰어올라왔다. "잘 있었니? 얌전히 있었어?" 갤라는 파샤의 작고 둥근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마루에 내려놓았다. 코코아를 마시라는 권유는 매력적이었다. 갤라는 주방으로 가 주전자를 레인지 위에 올려놓은 다음 파샤의 접시에 우유를 따 랐다. 갤라는 앨러나를 생각하면서 달걀과 베이컨으로 맛있는 저녁식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콘 브랜던에게 반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객관적인 견해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앨러나가 아무리 좋아한다 하더라도 잭에 대한 콘 브랜던의 행위를 잊을 수는 없다.

앨러나가

모르는데…

그렇게도

열렬한

콘의

팬이

아니었다면

사정을

털어놓았을지도


그날 오후 갤라와 콘은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었다. 갤라가 콘의 마비된 근육을 마사지할 때도 둘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비단결 같은 감촉의 피부가 햇빛을 받아 빛났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남자 체취가 코를 자극해 왔다. 갤라는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베이컨을 넣은 오믈렛을 만들어 먹었다. 이밤, 세상은 한없이 평화롭다. 먹고 남은 것은 파샤에게 주었다. 그리고 나서 갤라는 머리를 감은 후 말린 다음 길게 늘어뜨려 보았다. 아까 텔레비전에서 본 젊은 여성을 따라 해보는 것이었지만 딴 사람 같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갤라는 거울 속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볼과 입 언저리의 부드러운 음영이 갤라를 비비안 리 풍으로 보이게 한다. 보다 젊고 보다 살결이 희고 그리고 보다 행복한 비비안 리. 상처받기 쉬운 듯하나 아직 상처받지 않은 여자. 슬픔은 아주 쉽게 그 얼굴에 감추기 힘든 흔적을 새겨 가리라. 갤라는 그것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능한 한. 갤라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색조는 가을빛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머리는 낙엽 혹은 저녁놀 빛이며, 눈은 숲속 연못의 차가운 깊이를 연상시켰다. 젊음도 아름다움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한다고 생각하니 갤라는 갑자기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아파트는 소리 하나 없이 조용하다. 아이스 프린세스라고? 나는 정말 차가운지도 모른다. 의식적으로 사랑을 해보려는 노력을 해야 할 시기일지도 모른다. "야웅." 이유를 묻고 싶어하는 듯한 파샤의 얼굴이 갤라를 올려다보고 있다. 신뢰를 담은 그 노란 눈은 갤라가 언제까지나 거울 속을 들여다보고 있을 것인지 알고 싶어하는 듯하다. 갤라는 <성형외과 및 신경외과의 긴급사태>를 들고 잠자리에 들어 파샤의 부드러운 털을 어루만지면서 페이지를 넘겨 갔다. 3 콘의 회복은 매우 빨라 자신도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발을 끄는 일은 거의 없어졌고 동작도 자연스럽고 우아해져 적의에 가득 찬 갤라조차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는 경주자가 아니었더라도 무엇이든지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콘 브랜던에게는 어떤 힘이 있어, 그 힘이 원자로의 에너지처럼 몸속 깊은 곳으로부터 발산되어 나오는 듯이 여겨졌다. 그리고 극소수의 매우 강건한 남성에게 공통된 것이지만 그 육체적인 힘은 몸의 중심, 즉 강철같이 단단하게 긴장된 복부의 근육, 그리고 허리와 넓적다리의 유연한 운동에서 연유하는 것 같았다. 콘 브랜던은 침대에 누워 발꿈치를 누르고 있는 갤라의 도움을 받으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는 동작을 계속하고 있었다.


"등줄기를 완전히 뻗어요." 갤라는 침착하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꾸밈없는 그 아름다운 몸놀림에 매료되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다. 동작에는 의식적인 데가 전혀 없어 마치 무용가 같았다. "그만, 좋아요." 갤라는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콘도 긴장을 풀고 유연한 동작으로 일어섰다. "당신은 정말 솜씨가 좋아요. 침대에 관한 불평은 철회하겠소." 보통 때와 같이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다. "좋아진 느낌이 들어요?" "네, 매우. 두통도 없고 다리의 마비도 많이 풀어졌습니다." "다행이군요." 갤라가 무심결에 희미한 만족의 웃음을 짓자, 그녀의 아름다운 입가의 근육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 웃음은 콘을 향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흠, 당신에게도 마비증세가 조금 있지 않나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소." "마비?" 콘은 웃옷을 입고 탄력있는 허리에 띠를 졸라매면서 갤라의 의아해 하는 눈에다 대고 대답했다. "볼 근육 말이오. 웃을 때는 사용하겠지요?" 갤라는 얼굴을 돌렸다. 대꾸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갤라는 서류철을 집어들고 말했다. "이제 많이 좋아졌어요, 브랜던 씨. 지금처럼 훈련과 휴양을 계속한다면 2, 3 일 후엔 이곳을 나가셔도 좋을 거예요." "그러면 그대에게 평화가 되돌아오겠지요. 그대의 규칙적인 생활에 혼란을 초래한 점을 사과드리겠소, 갤라." 처음으로 이름을 불린 갤라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곧 콘 브랜던의 잿빛 눈에서 쏟아지는 불길 같은 눈빛에 그만 기가 죽어 버렸다. "당신은 여기서 평온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내가 쓸모없는 등허리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당신의 희망을 죄다 더럽혀 버린 거지요." 콘 브랜던은 몸짓으로 창을 가리켰다. 밖엔 아직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까지 몰고 왔습니다. 그렇지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아무것도. 그러나 그대는 줄곧 의사표시를 해왔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갤라의 마음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시치미 떼지 마시오." 콘의 언성이 높아지고 갤라의 몸이 조금 떨렸다. "당신은 나를 방울뱀처럼 취급하고 있소. 내가 여기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겁니다. 내 몸에 접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견디기 힘든 일이고. 내 몸에서 당신에게 전염될 것 같은 무슨 병균이라도 나오고 있다는 거요?" "자, 이렇게 말하겠어요." 갤라는 변명하기는 싫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당신이 훌륭한 사람의 추천장을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도대체 무슨 소리요?" "별뜻은 없어요." 자기가 잭의 누이동생이라고 말한다면 사태는 더욱더 나빠질 뿐이다. "별뜻이 없다?"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누구에겐가 내 소문을 들은 모양인데, 무슨 얘기였소? 내가 여자를 유혹했다든가 하는 얘기였소?" "치료는 끝났어요. 돌아가 주세요." 진상에 가까운 것을 눈치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갤라는 차디차게 말했다. "뭐라고! 그런 말투가 어디 있소." 콘은 눈 깜짝할 사이에 갤라의 눈앞에 와 있었다. "더 이상 접근하면 소리를 지르겠어요." 갤라는 새하얗게 질려 몸을 떨었다. "얼마든지 소리쳐 보시오. 어른이 되어야지, 갤라 플레처. 몸은 어른이지만 정신은 아직도 어린애야." 콘은 갤라의 가슴을 뚫어질 듯 쏘아보며 양손을 쥐었다. "난 어린애가 아니예요. 당신에 대한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래? 나는 당신을 조금도 모르겠소. 도대체 나의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요?" "옛일을 기억해 보세요." "정말 화나게 할 작정인가?" 찔끔한 듯한 목소리였다. 구릿빛 목덜미에 정맥이 튀어나와 있다. 콘 브랜던에게 붙잡힌 양손이 아프다.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을 테요. 그리고 나는 그대에게 사죄할 일이 아무것도 없소."


갤라는 지나치게 긴장한 탓으로 무릎을 후둘거리면서 비틀거렸다. 갤라는 눈앞의 콘에게 몸을 기대며 넘어졌다. 두 사람의 입술이 무의식중에 가까와지고 콘의 따뜻한 숨결이 갤라의 입술에 일순 느껴져 왔다. 그러자 콘은 불쾌하다는 듯이 갤라를 밀어뜨렸다. "이런 거였었나? 짐작하기는 했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 다시 시도해 보시지, 미즈 플레처." 콘은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갔다. 의자에 쓰러진 갤라는 필사적으로 흐느낌을 참았다. 지겨운 놈! 키스를 받고 싶어했다는 콘의 오해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냉혹한 자만 덩어리 같으니라구! 화장지를 찾아 코를 풀었다. 좋아, 이 이상 더 참을 수는 없다. 이제 절대로 치료 같은 건 안한다. 살아 있는 한 꼴도 보기 싫다. 로저 트레퍼시스에게 맡겨 버려야지. 갤라에게는 마음껏 울 시간조차 없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닐 부인이 갤라의 치료를 기다리고 있다. 갤라는 우울한 기분으로 그녀를 맞고자 일어섰다. 지구는 계속 돈다. 닐 부인은 자기의 관절염 이외엔 관심이 없다. 갤라는 점심식사를 한 후 모리스에 몸을 실었다. 피로감이 가시지 않는다. 그날이 오전 근무인 것이 고마왔다. 오후엔 부모님 댁에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콘과 다퉈 피곤했기 때문에 약속을 취소하고 집에 가서 쉬기로 마음먹었다. 차가 병원 안길을 달리는 동안 갤라는 눈이 만들어 놓은 나뭇가지의 장식에 멍하니 도취했다. 온 세상이 새하얗게 덮여 있는 가운데 도로만이 차바퀴에 쉴새없이 휘저어져 더러운 황갈색을 하고 있다. 테니스 경기장을 지날 무렵 차가 커브를 돌다 옆으로 미끄러졌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얼마 동안은 기듯이 해서 나아갔다. 병원 정문을 지나 밖의 큰길로 이어지는 언덕길에서 갤라는 드디어 속도를 올렸다. 그게 잘못이었다. 다시 뒷바퀴가 공중에 뜨는 모양이다. 차가 옆으로 미끄러져 간다. 엉겁결에 핸들을 돌렸지만 점점 상태는 나빠진다. 아차! 핸들에 매달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차는 홱 방향을 바꾸어 언덕 중간의 눈구덩이 속에 처박혔다. 갤라도 앞으로 고꾸라졌다. 비참한 적막 속에서 핸들에 몸을 꼭 기댄 채 갤라는 죽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정말 액운이 낀 날이다. 정면 유리창은 눈 속에 파묻혀 있고 엔진은 음울하게 침묵하고 있다. 죽은 듯 꼼짝할 수도 없는 몇 분간이 지난 후, 갑자기 차문이 열렸다. "괜찮습니까?" 얼굴을 드니 긴장한 콘 브랜던이 서 있다. 어째서 또 브랜던인가? "괜찮아요. 눈에 미끄러진 거예요." 갤라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소."


콘은 손을 뻗쳐 갤라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당신을 보고 있노라니 농부가 손수레를 끌고 있는 듯한 운전이었소." 콘은 갤라를 밖으로 끌어내고 자기가 운전석에 앉았다. 갤라는 눈사람처럼 우뚝 서서 콘이 조그마한 오렌지 색 차를 눈구덩이에서 끌어내는 것을 보고 있었다. 눈이 착 달라붙은 한쪽 헤드라이트가 볼품없이 찌그러들어 차의 모양은 면도용 크림을 바르고 이발소를 소재로 한 농담을 지껄이고 있는 광대 그대로였다. 콘은 차에서 내려 문을 열고 갤라를 재촉했다. "자, 타요. 미끄러질 때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 가르쳐 드리지." "아직 운전할 마음이 내키지 않아요.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는걸요." "그러니까 죽지 않도록 가르쳐 주겠소." 콘은 갤라를 운전석에 밀어넣고 자기도 조수석에 올라탔다. "눈길을 달리려면 미끄러질 때의 처치법을 알아야 돼요. 자, 달려 봐요." "싫어요. 저, 기분도 좋지 않고…" "움직여요." 콘의 단호한 명령에 갤라는 당황하여 기어로 손을 가져갔다. 콘 브랜던의 무엇이 자신을 복종시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역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갤라는 뾰로통한 채 언덕길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좀더 빨리, 좋아요. 이게 뒷바퀴의 미끄럼이오." 콘이 핸들을 급히 돌리자 뒷바퀴가 떠오르며 홱 회전을 했다. 갤라는 소리를 질렀다. "이럴 때는 이렇게 하면 돼요." 콘은

조용히

말하고

뜻밖에

차를

얌전하게

조종하여

앞바퀴와

뒷바퀴의

방향이

같아지도록 했다. 그러자 차가 갑자기 똑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로는 비스듬한 각도였지만 차는 잘 조종되고 있었다. "브레이크를 걸어요. 됐소." 콘 브랜던은 차의 방향을 똑바로 했고 차는 조용히 멈추었다. "그럼 해봐요." "또 부딪칠지도 몰라요." 갤라의 발이 클러치 위에서 떨고 있었다. "내가 한 것처럼 하면 돼요. 좀더 빨리, 지금이야, 이 커브를 급히 돌아요." 공포감이 엄습해 왔지만 콘이 이르는 대로 곧 핸들을 돌리면서 차를 다시 정상적으로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 갤라는 기쁨에 휩싸였다. 차를 멈출 때는 잘 되지 않아 다른 눈구덩이에 부딪치기도 했으나 전번보다는 훨씬 약한 충돌이었다.


"아주 훌륭해요, 그 정도면 겨울을 넘길 수는 있겠군. 이런 건 그때 그 자리에서 익히는 게 제일 좋아요. 그렇게 배우면 결코 잊어버리지 않게 되지." 갤라는 핸들에 눈을 고정시킨 채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미끄러지면 당황하지 말 것, 과잉 수정은 금물, 초조하게 서두르지 말 것, 가능한 한 앞바퀴는 진행방향으로 돌려 둬야 합니다. 핸들은 가볍게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네." 갤라는 부끄러운 듯 상대를 바라보았다. 콘 브랜던은 몸에 꽉 끼는 진 바지에 사치스런 청색 스키재킷, 부드러운 가죽 부츠 차림이었다. 갤라의 적의는 전에 비해 훨씬 누그러져 있었다. "병원으로 데려다 드릴까요?" "내 차는 저기 있소." 언덕 위의 나무 밑에 은회색 경주용 차 한 대가 보였다. "가까운 수녀원에 가던 중이었소. 수녀님을 두어 명 유혹해 보려고." 그 눈이 짓궂게 빛났다. 갤라는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그의 뻔뻔스런 태도에 언제까지나 눌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행운을 빕니다, 브랜던 씨." 갤라가 그렇게 말하자 콘은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서 내렸다. 배웅하는 갤라의 눈에 엷은 하늘빛이 어려 있다. 콘이 가버리자 차 안이 썰렁해졌다. 체격이 크고 개성이 강한 남자가 남의 아내가 될 여성을 가로채는 것쯤은 아마 대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기 방식에 너무 익숙해져 다른 것은 개의치 않게 된 것이 아닐까. 높이가 낮은 차에 몸을 실은 콘 브랜던은 갤라를 쳐다보지도 않고 떠나 버렸다. 오만한 자식. 그렇기는 하나 우울한 마음은 완전히 가셔 버렸다. 운전을 하면서 휘파람이 절로 나올 정도다. 뒷바퀴의 미끄럼 제어방법을 나는 알게 됐다 ― 왜 가르쳐 주었는지 몰라. 그 지식은 아무 요구없이 받은 귀중한 선물처럼 갤라의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되었다. 갤라는 갑자기 부모님을 만나뵙는 일이 즐겁게 느껴져, 로타리에서 남쪽으로 꺾어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예정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부모님 댁에 도착하니 마침 차를 마시는 시간이었다. 오래 된 집에는 스콘 굴는 냄새가 가득 차 있고 집안의 난로에서는 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 눈을 털면서 안으로 들어서자 반들반들 닳은 나무와 구리의 퇴색한 빛이 어릴 적의 추억을 일깨워 주었다.


"잘 왔다. 춥지?" 매사에 대범하고 침착한 어머니가 코트 벗는 것을 도와 주었다. "아버지는요?" "신문 읽고 계신다." 어머니는 딸을 거실로 데리고 갔다. 아버지는 팔걸이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쉬고 있다가 갤라를 보더니 뚱뚱한 몸을 벌떡 일으켜 딸을 껴안았다. "무척 추운가 보구나. 볼이 빨개진 걸 보니." 아버지는 다시 의자에 몸을 파묻고 신문을 펼치더니 건성으로 묻는다. "일은 어떠냐?" "잘하고 있어요." 갤라는 안락의자에 조용히 앉아 주방으로 들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이 비행사고 기사 읽었니? 참혹한 사건이다. 절차라는 걸 완전히 무시했어. 있을 수 없는 사고야." 갤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일요신문의 부록을 집어들었다. 갤라의 아버지는 민간항공의 항공사를 은퇴한 후 수년간 히스로에서 관 제사로 일하고 있었으므로 하늘의 안전문제엔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쉴새없이

자기

견해를

늘어놓는

것을

반쯤

흘려들으면서 몸을 녹인 갤라는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갤라는 이 집의 너무 깔끔하지 않은 분위기가 좋았다. 백부의 유산을 물려받아 유복해진 부모님은 갤라가 14 살 때 이 아름다운 고가를 사들였다. 당시는 마이클만이 23 살로 용선계약을 취급하는 회사에서 부조종사로 일하고 있었을 뿐, 17 살의 잭도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철이 든 이후론 줄곧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생활의 계속이었던지라, 이 집의 안정감과 쾌적함이 갤라의 마음을 한층 더 부드럽게 해주었다. 티테이블에서 갤라는 잭과 크리스탈의 파국으로 끝난 약혼을 화제에 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즈음 줄곧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던데다, 부모로부터는 그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대로 어머니의 표정은 흐려졌다. "차를 마시면서 하는 얘기로는 적합하지 않을지 몰라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다행인지도 모르잖아요? 적어도 크리스탈 워렌이 어떤 여잔지는 알게 되었으니까요." "나도 그때 그렇게 얘기했었다." 아버지가 치즈를 먹으면서 말했다. "크리스탈은 좋은 아내가 되었을 거다. 그 사람 같지도 않은 게 맛있는 미끼로 유혹하지만 않았더라면."


마샤 플레처는 한숨을 쉬었다. "콘래드 브랜던이었지요?" "그랬던가? 그 일은 얘기하고 싶지 않다. 뭐 때문에 또 그런 얘기를 꺼내는 거냐, 갤라? 차를 이리 줘요, 폴." "잘도 기억하고 있구나." "정말 어떻게 되었던 거예요?" "너도 이 집에 있었으니까 기억이 날 거다. 크리스탈이 그놈과 빈번히 만나게 되면서 잭이 걱정하기 시작했다. 결혼식이 다가오니까 조금 불성실해진 게 아닌가 싶었겠지. 우린 설마 했었다. 어느 날 밤 크리스탈이 여기 찾아와서는, 꼭 결혼식 일주일 전이었다. 콘래드 브랜던과 함께 바베이도스에 가기로 했다고 말하더라. 잭하고는 이미 모든 게 끝났다면서 말야." "하지만 그 여자는 반지를 돌려주지 않았어요. 잭이 몇백 파운드나 주고 만들어 준 반지를 말야." "그랬지. 하지만 나는 잭이 그 여자와 헤어진 게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오." "그애는 상처를 받았어요.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군요. 가엾게도 지금까지도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앤 그 여자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말예요." 갤라는 눈을 찻잔으로 가져갔다. 콘 브랜던이 병원에 와 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 듯했다. 내일 로저에게 이야기해서 콘 브랜던의 담당을 넘겨 줘야겠다고 다시 한번 마음먹었다. "그래, 크리스탈은 어떻게 되었어요?" "마지막 소식을 들었을 땐 미국에서 모델을 하고 있다던가 그랬었다. 아주 오랜 옛날 얘기다. 어떻게 됐을까…" "그 인간 같지도 않은 것이 그녀의 인생을 망쳐 놓지나 않았으면 좋으련만." 갤라는 일어나서 탁자 정리를 도왔다. 그러면서 멍하니 오늘 오후의 눈 속의 사건, 차 취급법을 가르쳐 준 콘 브랜던의 일을 생각했다. '그때 그 자리에서 익혀 버리는 게 제일 좋다.' 갤라는 타다 남은 불꽃을 바라보면서 살아나가는 데 있어 좋은 좌우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조용히 잠자리에 누워 중앙난방장치의 진동음을 듣고 있던 중에 문득 자신은 정말 행복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행복하다. 훌륭한 일, 멋진 집, 사랑하는 가족, 내게는 그 모든 것이 있다. 애정에 대해서는 어떤가? 곧 사랑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바쁜 일을 하고 있고 게다가 술집이나 클럽, 파티엔 흥미가 없으니 이상적인 사람을 발견하기가 힘들다. 이대로 일만


계속한다면 환자 이외의 인간과는 만나지 못할 것이므로 평생 독신으로 지내게 되는 거나 아닐까? 갤라 플레처가 노처녀? 갤라는 초조하게 몸을 뒤척이며 그 생각을 물리쳤다. 매력적이고 발랄하며 재능마저 타고난 갤라가 미혼으로 인생을 마친다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런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다. 고등학교 때의 사서인 레녹스가 생각난다. 옛날에는 틀림없이 예뻤을 것으로 생각되는 레녹스가 어떻게 되었던가. 로맨틱한 비극? 완만한 썰물과 같은 나날의 생활이 그냥 지나가 버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무렵에는 학교 도서관의 사서라는 무미건조한 해변이 그녀 앞에 놓여져 있지 않았던가? 또다시 마음이 어두워진 갤라는 파샤를 껴안고, 이렇게 희망 없는 일만을 생각하게 된 것은 부모님과 잭의 이야기를 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가엾은 잭. 그러나 갤라도 실수를 범한 적이 있었다. 브라이언 매튜스다. 브라이언과의 결혼을 생각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생각해 내곤 입술이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그 때 갤라의 어리석은 망상을 지적해 준 사람은 큰오빠 마이클이었다. '브라이언과 헤어지기 싫다면 분명하게 장난이라고 생각해라. 돈 많은 실업가는 무일푼의 학생과는 결혼 안한다. 보장한다.' 항상 그랬듯이 마이클의 말이 과연 옳았다. 브라이언은 그 여름, 많은 유산을 상속받은 30 살 된 여자 자산가와의 약혼을 발표했다. 푸른 눈의 단정한 브라이언을 갤라는 얼마나 훌륭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갤라가 물리요법사가 되기 위해 다니고 있던 학교에 청강을 하러 오던 브라이언이 어느 겨울 밤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피해 서 있던 갤라를 발견하고 차를 태워다 주겠다고 제의해 온 것이 만남의 시작이었다. 갤라는 브라이언의 롤스로이스와 그의 세련된 분위기에 도취됐다. 그날 밤 화려한 술집에서 술을 마셨고 그 자리에서 다음주의 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밤의 연극, 또 다른 파티, 촛불 아래서의 저녁식사. 갤라는 세상에서 자기가 최고의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라이언이 20 대 후반의 젊은이였던 것도 갤라가 반하게 된 원인 중 하나였으리라. 브라이언은 무역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80 년대 초의 야심 있는 신동, 젊은 성공인이었다. 갤라가 브라이언을 만난 것은 그 학교 2 학년 때였는데, 그때 브라이언은 당시의 불경기와는 무관하게 사업에 성공하여 그 거대한 이익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는 참이었다. 갤라는 브라이언의 아파트에서 그가 수집하고 있는 현대미술 작품들을 보고 나서 세 종류의 브랜디를 마셨다. 그날 밤 북 런던 전역이 정전이 되어 브라이언의 유혹에 한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이어서 몇 달 동안 브라이언은 갤라의 생활의 중심부를 차지해 그녀의 사랑과 희망의 전부가 되었다. 브라이언이 결혼해 줄 거라고 생각하고 평생 같이 살 계획을 하고 있었다. 브라이언 쪽에서는 보다 큰 부자 고기를 낚으려고 그물을 치고 있다는 것을 갤라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파국이 왔을 때 갤라는 2l 살이었다. l 년 후 갤라는 졸업을 하고 운 좋게도 라이오넬 파커의 눈에 들어 임시 채용되었다. 그후 연애를 한 적은 없다. 시간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을 돌이켜보고 장래를 생각할 시기인지도 모른다. 갤라는 식사 상대로 리차드 슈월츠뮐러에게 전화하기로 한 것을 생각해 냈다. 내키지 않았으나 다시 생각을 고쳤다. 좋아하는 일만 하고 있을 입장은 아니다! 갤라는 시계를 흘깃 보고 침대 곁의 전화기에 손을 뻗쳤다. 그러나 갤라는 콘 브랜던을 로저에게 인계하지는 않기로 했다. 최후까지 돌볼 책임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한낱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혐오감은 여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갤라는 콘 안에 내재해 있는 깊이 모를 힘, 어떠한 고통도 참고 이겨내면서 일을 해나가는 것 같은 그 흔들리지 않는 의지에 끌리고 있었다. 그 주일의 전반부엔 네 차례의 치료를 했다. 등을 뻗는 훈련을 보다 격하게 해가는 것이었다.

회복상황은

경이적이었다.

그것을

제지시키는

것은

속력을

내고

있는

급행열차를 정지시키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너무 서둘러요." 화요일 오후 견인기계를 준비하면서 갤라가 주의를 주었다. "당신 같은 경우엔 지금 손상을 입으면 치료에 시간이 더 걸려요. 너무 급격하게 움직이면 회복한 것도 다 허사가 되고 마는 수가 있어요." "시간이 없어서 그래요." 콘이 짤막하게 말했다. 엷게 땀이 밴 몸이 청동처럼 빛난다. "금주 말까지는 예약이 돼 있어요. 누우세요." 견인기계는 스테인레스와 가죽으로 된 정교한 고문대와 같은 것이었지만, 콘과 같은 증상의 환자에게는 무서운 외관과는 달리 고통을 크게 경감시켜 주는 장치였다. "오늘 나가기로 했소." 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하, 하지만 그건 안 돼요." "이 운동이 끝나는 대로 돌아갑니다."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어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침울하다. "상태는 좋아요. 앞으로도 좋을 것이오. 그 동안 열심히 나를 쫓아내고 싶어한 사람이 내가 없어지는 게 어떻다는 거요?" "그런 문제가 아니예요." 갤라는 그렇게 말하고 콘의 가슴과 어깨의 가죽끈을 고정시켜 기계를 조정했다. "지금 퇴원하면 l 년 이내에 다시 돌아오게 될 거예요." "그렇게는 되지 않을 거요." "아주 자신있는 말투군요." 갤라는 화가 났다. "내가 완전한 건강체라는 건 당신도 알았겠지요." 콘이 도전하듯이 말했다. 분명히 탁월한 신체란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회복상태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아마 엉터리 경주에라도 나갈 예정인 모양이죠?" 갤라는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말했다. "요크무어 랠리에는 나갈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도 직접 지휘를 하지 않으면 안 될 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소." 낮고 굵직한 목소리에 초조한 어조가 섞여 있다. "자, 어서요, 갤라. 난 하루종일 기다릴 수 없는 몸이오." 갤라는 발끈 화가 나서 기계를 적당한 견인력의 수준에 맞춰 놓고 말없이 책상으로 향했다. "건강보다 중요한 게 뭘까요?" 잠시 거북스런 침묵을 지키고 있던 갤라가 입을 열었다. "나는 몇 가지 사업을 하고 있소. 그러므로 더 상태가 나빠져 돌아오고 싶진 않소." "그럼 부하를 신용하지 않는군요?" "인간의 본질은 어딜 가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거든." 콘은 우회적으로 말했다. "게다가 이곳은 너무 싱겁단 말야." "저도 포함해서요?"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콘의 참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리고, 갤라의 뺨은 뜨거워졌다. "정직하게 말하지만 갤라, 당신이 아주 몹시 흥미롭다고는 생각지 않소." 빈정대는 듯한 말투가 갤라를 박살냈다. 그 얄미운 교만한 콧대를 부러뜨려 주고 싶다.


"여기는 자기연민에 가득 차 있지." 콘은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었다. 긴 속눈썹이 비정한 볼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곳엔 우울과 권태와 너무나 많은 돈 냄새가 넘치고 있소. 일주일에 l,000 파운드나 지불하는 인간들이 여기에 들어오지 않소? 그것도 감량을 위해서." "그래서 어떻다는 거예요?" 갤라는 대들었다. "우울증 환자도, 싫증나는 백만장자도 있어요. 하지만 그건 소수에 불과하고, 그리고 그 사람들의 돈은 유용하게 쓰여져요. 정말이에요. 이 병원은 훌륭한 업적을 쌓고 있는 거라구요. 이곳의 연구는 국제적으로도 의미가 커요. 그리고 아무렇게나 내버려진 노부인 환자나 자기 돈으로 지불하는 환자만 있는 것도 아니예요." "그런가요?" 약간 열린 눈이 조용히 웃는다. "당신은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군?" "당연하지 않겠어요? 남이 이러쿵저러쿵 말할 권리는 없어요." "항복했소." 콘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곳을 나가면 좋겠는데…"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것 봐요. 내심으로는 내 퇴원을 찬성하고 있지 않소?" "조금도 찬성 따위는 하고 있지 않아요." 초조한 듯이 갤라는 말했다. "하지만 저 개인으로 말한다면, 당신은 지옥이 되었건 어디가 되었건 당신 좋은 곳으로 가면 돼요, 브랜던 씨." "당신은 이미 선택했군." "뭘 말씀이죠?" "바보 도마뱀 얘기 들은 적 있소? 멕시코에 있는 매우 괴상한 생물이지. 단성생식이 가능하여 암컷은 수컷 없이도 새끼를 낳는대요. 수컷 한 마리 없어도 암컷끼리 군서를 이룰 수 있다는 거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 거예요?" 화가 난 갤라의 눈이 에머랄드처럼 빛나고 있다. "당신은 인간 바보 도마뱀이야. 흥미있는 진품이지만 완전히 무성(無性)이거든." "아니, 뭐라구요?" 갤라는 이성을 잃었다.


"바보 도마뱀이 무슨 빛깔인지는 모르지만, 이제부터는 잘 손질된 흰 가운을 입고 있노라고 상상하기로 하지." 콘은 갤라를 흘깃 쳐다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계속 말을 이었다. "눈은 비취빛의 녹색이라고 말이지." "어쩜, 이런 나쁜." 갤라는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이렇게 심한 놀림을 당해 본 적은 없다. 결코. "그토록 무리하게 아이스 프린세스가 되진 않는 게 좋아. 인간은 재미있지만 바보 도마뱀은 지겹거든." "난 전문 직업인이에요." "전문 직업인도 좋지만 왜 인간이 되려고 하지 않는 거요?" 콘은 갤라의 날씬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사람의 몸은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바보 같은 소리 그만 집어쳐요! 난 물론 인간이에요."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다운 감정, 성적인 감정도 갖고 있다는 건가?" "당연하잖구. 나도 여자라구요!" 내뱉듯이 말을 한 갤라는 그의 질문이 매우 노골적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뺨이 타는 듯이 붉어졌다. "정말?" 아주 놀랐다는 그의 표정은 최대의 모욕이었다. "그런 줄은 몰랐군. 그런데 나는 왜 오후 내내 기계에 매여 있는 걸까?" "아직 견인이 끝나지 않았어요." 갑작스런 방향 전환에 갤라는 현기증을 느꼈다. "이제 충분해." 콘이 가죽끈을 풀려고 했기 때문에 갤라는 하는 수 없이 일어나 그가 고정장치를 푸는 것을 도와 주었다. 콘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이 갤라의 눈을 응시했다. "당신은 아직도 내가 악마의 친척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무서울이만큼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만 돌아가 줘요. 짐 같은 것도 많을 테구요." 갤라는 동요하고 있었다. 흥분한 목소리였다. "이유도 말하지 않을 작정이군." "더 상관하지 말아 줘요!"


갤라의 신경은 움찔했다. 콘의 위치가 너무 가까와 남자의 독특한 취기가 풍겨 오고 갈색의 미끈한 살결까지 보였다. "곤란하게도 당신은 내 관심을 끈단 말야." 콘의 손가락이 갤라의 뺨을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럽게 문지른다. 갤라의 깊은 내부의 열망을 간파하고 손가락을 댄 것 같기도 하다. "이 녹색의 눈… 눈초리가 올라가 있어 신비스럽고…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 콘에게 몸이 닿은 갤라는 동상이 된 듯 움직일 수가 없다. 콘이 그녀의 머리를 동여매고 있는 리본을 풀었기 때문에 머리가 구릿빛 파도가 되어 그녀의 얼굴 주위에 떨어진다. "좋아." 콘은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찔러넣어 창백한 갤라의 뺨 주위에 가지런하게 해준다. "이러면 더욱 여자처럼 보이지. 물리요법사처럼 보이지 않고." "제발 돌아가 줘요." 갤라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손바닥은 땀에 흠뻑 젖었고 입안은 말라 있다.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는 듯이 콘은 양손으로 갤라의 얼굴을 들어 살짝 키스를 했다. "내게 키스하는 거야." 콘이 명령했다. 뜨거운 입김이 갤라의 입술에 풍겨 온다. 갤라는 멍한 채 고개를 옆으로 흔들려고 했지만 콘이 그렇게 하도록 두지 않는다. "네가 말하듯 네가 여자라면 내게 키스하는 거야." 그 명령은 갤라의 의지를 부수어 버렸다. 갤라는 여학생처럼 서투르게 콘에게 조심조심 키스했다. 다음 순간 콘의 두 팔에 꼭 안긴 갤라는 숨이 막힐 듯한 포옹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콘의 키스는 거칠고 공격적이며 상대방을 지배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듯한 폭력적인 것이었다. 마른 풀이 들불에 굴복하듯이 갤라는 굴복했다. "그만 해요, 부탁이에요…" "그만 하라고?" 콘은 상대도 하지 않았다. 갤라의 황홀한 듯한 눈과 젖은 입술이 대답의 전부였다. 콘은 갤라의 미끈한 흰 목덜미에 지그시 입술을 눌러 붉은 연꽃무늬를 만들었다. "퇴원은 연기할지도 몰라." 귓가에서 콘이 중얼거렸다. 콘은 갤라의 머리냄새를 맡아 보고는 희미한 신음소리를 냈다. "응… 좋은 냄새… 여자다와요. 내가 있어 주기를 바라나?" "아니예요."


코브라에게

주시당하는

작은

매처럼

갤라는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검은

눈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다. "두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요." "아아, 내 귀여운 바보 도마맴." 콘은 갤라의 가운 단추를 끌렀다. "이건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아. 테니스를 하고 있을 때가 좋았는데." 콘은 단추를 끌러 작업복을 펼치고는 갤라의 실크블라우스를 입은 가슴에 눈길을 떨어뜨렸다. "음, 참 좋아." "아니! 내가 마음대로 되리라고 생각해요?" 몸을 떼어 놓으려고 허우적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전혀." 콘은 분명치 않은 목소리로 말하고 이번엔 블라우스의 단추를 끌렀다. "저항하기를 바라고 있어. 짧고도…" 입술이 갤라의 목덜미를 달린다. "힘차게 오는 그런 저항을 말야." 갤라의 다리는 힘이 빠지고 가슴은 붙잡힌 작은 새처럼 떨린다. 콘의 정신을 잃게 하는 커다란 힘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그것은 존재의 내부 깊숙이 와 닿는 불가사의한 원시적인 힘이었다. "당신은 처음부터 이걸 기대하고 있었지?" "아녜요." "아니야, 그래. 그날 아침 수영장에서 만난 때부터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원하고 있었던 거야." 콘의 손가락 끝이 완만하게 부풀어오른 젖가슴을 살짝 어루만지자 갤라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숨을 헐떡거렸다. "내가 아무리 싫어도, 어떠한 편견을 가지고 있어도 갤라, 당신은 처음부터 나를 원하고 있었어. 내가 당신을 원해 온 것처럼 말야." 콘은 갤라의 저항을 키스로 봉쇄해 버렸다. 가슴에 닿아온 남자의 손이 갤라의 내부의 욕망을 끓어오르게 했다. 갤라는 콘의 알몸이 된 등뒤로 팔을 돌려 힘껏 깍지를 끼고 활 모양으로 몸을 합쳤다. 영원이라고도 생각되는 작열의 시간이 지나갔다. 콘의 입술이 목덜미에서 풍요한 가슴으로 내려오자 갤라는 자기에게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욕정이 거품을 일으키며 와글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헛소리처럼 연이어 콘의 이름을 불러댔다.


콘은 몸을 일으켜 양손을 갤라의 허리에 감고 힘껏 끌어안았다. 그리고 현기증이 날 만큼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갤라, 당신은 아름다와. 알고 있었나? 당신의 아름다움은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야. 성적 매력이 넘치면서도 눈처럼 차가와.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안달이 나게 한단 말야." 콘의 웃음이 사라지고 눈빛이 진지해졌다. "퇴원은 그만둘까?" 갑자기 문 소리가 나며 사람의 머리가 보였다. "방해가 안 될지 모르겠어요? 10 분이나 기다렸어요. 나…" 닐 부인은 말이 막혔다. "어머나 저런, 미스 플레처! 어떻게 된 거예요?" "미스 플레처는 지금 아주 새로운 형태의 물리요법을 해주고 있는 중입니다." 빈정거리듯 말한 콘의 눈이 순간 분노로 인해 가느다란 칼처럼 번뜩였다. "순번이 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복도에서." 닐 부인은 분개하여 얼굴을 뒤로 돌렸고 문이 콰당 하고 닫혔다. 꿈에서 깨어난 듯한 갤라는 콘의 팔 안에서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자기혐오로 괴로와졌다. 나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가? 크리스탈 워렌을 멸시하고 있었던 내가, 어떤 유혹에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이 내가. 결국 나도 동물인가? "더 있을까?" 콘의 목소리에는 절박한 어조가 있었다. "싫어요!" 갤라는 콘을 막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블라우스의 단추를 잠갔다. 어쩌다가 이런 사내와 이런 꼴을 하고 말았나! 닐 부인이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걸 생각하니, 흰 뺨에 갑자기 피가 퍼져 오른다. "정말 싫어. 두번 다시 보기 싫어요." "그래, 그게 당신의 본심이군." 위엄을 되찾은 콘은 갤라의 몸을 홱 돌려 자기 쪽을 향하게 했다. 눈이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나가요!" 갤라가 낮은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뜨거운 눈물이 솟아나올 것만 같다. "좋아, 애당초 돌아갈 작정이었어. 잊었나?" 콘은 갑자기 웃옷을 입고 허리끈을 단단히 졸라맸다. "방금 전엔 당신을 진짜 여자라고 생각했어. 언젠가는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4 "눈을 조심해요." 리차드 슈월츠뮐러가 대륙풍의 정중한 태도로 택시 문을 열었다. 갤라는 실크스타킹을 신은 다리에 불편하게 달라붙는 긴 드레스 자락을 감아쥔 채 리차드의 도움을 받으면서 택시에서 내렸다. 리차드는 갈색 눈을 번득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드레스는 검은색으로 가슴에서부터 종아리까지 오는 아름다운 것이었다.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드레스인 이 검정 옷에 맞추려고 서둘러 산 검정 샌들의 뒤축이 눈 쌓인 런던 거리를 사박사박 밟고 있었다. "황홀할 만큼 아름답군요, 갤라." 그 열띤 말투에 거짓이 없음을 의식하고 리차드에게 미소를 보냈다. 자신이 생각해도 오늘 밤엔 정말 아름다운 것 같다. 머리는 땋아 올렸고 게다가 어머니의 반짝이는 진주목걸이까지 하고 나왔던 것이다. 리차드는 갤라와 함께 걷는 것이 매우 자랑스러운 듯, 세라피나 호텔 로비의 붐비는 사람들 속을 앞장서서 걸어갔다. 특히 오늘은 화장도 너무 짙지 않았고 게다가 성숙한 분위기를 연출했기 때문에 젊고 싱싱한 아름다움은 어딘지 모르게 이국적 풍정을 띠어, 이처럼 세련된 장소에서도 결코 빠지지 않았다. 세라피나

호텔의

위층에는

런던에서도

유수한

고급

레스토랑이

있고

지하엔

디스코홀이 셋이나 있었다. 객실도 호화롭다는 평이었다. 리차드는 모든 면에서 정말 훌륭하다고 한 앨러나의 말이 생각났다. "너무 말이 없는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 엘리베이터 속에서 리차드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갤라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콘과의 그 일 때문이었다. 마음속이 완전히 뒤집혀 가라앉지 않았다. 갤라는 그때까지는 거의 자기와 인연이 없던 굴욕, 분노, 동요, 그리고 타오르는 듯한 욕망 등 갖가지 괴로운 감정을 콘에 의해 경험하게 되어 강한 충격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감기 든 거 아닙니까?" "괜찮아요." 어제 있었던 그 격정의 기억이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아 갤라는 금빛으로 장식된 엘리베이터의 거울 같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훌륭한 곳이군요. 엘리베이터까지도 궁전 같아요." "요리도 괜찮다더군요."


엘리베이터가 멈추면서 문이 열렸다. 윤이 나는 우윳빛 카펫을 깐 넓은 홀이 눈에 들어왔다. 갤라는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이어져 있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런던 시내의 찬란한 불빛에 정신을 빼앗겨 탄성을 질렀다. 매우 인상적인 곳이었다. 수많은 화분의 초목이 밝고 청결한 그 일대를 장식하고 있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휴식을 취하거나 혹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경관에 도취해 있었다. "너무 이른 것 같군요. 뭐 좀 마실까요?" 기분을

전환할

필요를

느끼고

있던

갤라는

리차드의

말이

고마왔다.

칵테일라운지에서는 해질녘의 푸른빛 속에 하얀 눈을 뒤집어쓴 세인트폴 사원의 둥근 지붕이 보였다. 갤라는 에스파냐 산 백포도주를, 리차드는 맥주를 주문했다. 리차드의 옷차림은 그에게 잘 어울린다. 더구나 2, 3 년 후가 되면 의사가 직업상 반드시 갖게 되는 중후한 분위기를 풍겨 한층 더 돋보이게 될 거다. 그렇지만 리차드에게는 매력이 없다. 또다시 어제 콘의 팔 속에서 떨던 모습이 되살아난다.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콘은 매정한 자기본위의 인간이지만 분명 매력적인 남자였다. 같은 일이 리차드 슈월츠뮐러와의 사이에서 일어나리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브라이언과의 사이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다. 브라이언은 서로 사랑하고 있을 당시조차 그처럼 미칠 것 같은 환희를 주지는 못했다. 갤라가 몸속 깊은 곳으로부터 동요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미안해요, 갑자기 어떤 생각이 나서요. 무슨 말씀 하셨어요?" 리차드가 무슨 말인가를 했다는 걸 깨닫고는 사과했다. "일은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흥미있는 환자 같은 사례는 없습니까?" "별로 없어요." 너무 무뚝뚝한 대답이라고 생각한 갤라는 뒷말을 찾았다. "수술 후에 주의를 요하는 갱생지도 같은 게 한두 건 있을 뿐 별로 특별한 건 없어요. 선생님은요?" "흥미있는 사례가 하나 있었습니다. 환자는 골연화증으로 상당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어요. 나이두라는 키 크고 깡마른 인도인이었지요. 혹시 본 적 없나요? 그는 시내의 한 개업의를 거쳐 왔는데, 그 개업의는 환자가 영양결핍이라는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던 겁니다. 나이두 씨 정도의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거의 드문 일이니까 말입니다. 그는 래플스 회사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본디 부자였던 건 아닌 모양이에요. 어릴 때 인도에서 곱 사병에 걸린 적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아시다시피 골연화증의 소아병이죠. 호흡곤란 증후군이 있어 비타민 D 결핍 현상이 줄곧 계속된 겁니다. 너무 전문적인가요?" "아니예요."


갤라는 별로 흥미가 없었지만, 브라이언과 일 년 반 동안 교제하면서 남자가 가장 좋아하는 화제는 자기 일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골연화증에 생각이 미쳤군요? 놀라와요." "그렇습니다. 이 병은 제 3 세계 사람들에게 많이 나타나니까요. 어떻든간에 나이두 씨에게는 비타민 D 와 칼슘을 2 주간 투여했지요. 그랬더니 증상이 상당히 호전되었던 겁니다." "참 잘됐군요." 갤라는 건성으로 들으면서 포도주를 마셨다. 리차드는 분명히 유능한 의사이고 게다가 호감을 얻기 위해 열심이다. 갤라는 계속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칵테일라운지는 갑자기 붐비기 시작했다. 갤라의 아름다움은 뭇 남성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가볍게 칠한 마스카라와 아이섀도 때문에 위로 살짝 치켜진 듯한 눈은 오히려 신비해 보였다. 만일 여기에 입술을 좀더 윤이 나게 칠한다면 관능적으로 보일 거다. 살갗은 대리석 같아 어떤 화장품도 필요치 않았다. 날씬한 목에는 젊음이 감돌고, 우아한 동작에는 성숙한 아름다움이 있다. 갤라는 불현듯 낯선 사내들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즐거워졌다. 옷차림에 신경을 쓰고 마음에 드는 장소로 안내된 것도 오랜만인 듯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콘 브랜던이 명령한 대로 '여자가 되고' 있는 셈이다. 지금의 나를 본다면 콘은 틀림없이 쾌재를 부르리라. 그 얼간이! "이렇게 멋진 곳을 구경시켜 줘서 고마와요. 정말 즐거워요." 갤라는 상냥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나도 기쁩니다." 리차드는 빙그레 웃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많은 여성들이 아름답게 치장한 모습으로 있고, 남성들도 눈에 띄는 차림으로 엘리트 특유의 바쁜 척하고 있다. 갤라는 문득 이 호텔의 객실을 한번 보았으면, 별세계의 생활을 좀 엿볼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지겹겠지요." 리차드는 또 하나 일에 관한 얘기를 한 다음에 이렇게 말을 마쳤다. 그러나 그 반짝이는 눈빛으로 보나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리차드는 잔을 비웠다. "그만 가서 식사 주문을 할까요?" 리차드가 일어서며 말했다. "네." 갤라도 미소지으며 일어났다. 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앨러나의 말대 의하면 매주 한 번씩 그녀와 테니스를 하는 모양이던데요. 앞으로 게임을 부탁드려야겠습니다." "어머나, 수준이 달라요. 우린 다만 운동이 된다고 생각해서…" 야회복의 키 큰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갤라는 갑자기 말을 잃었다. 설마! 그러나 그는 역시 콘 브랜던이었다. 그리고 그 팔엔 목이 깊게 팬 흰색 드레스를 입은 날씬한 미녀가 매달려 있다. 갤라는 순간 리차드의 손을 끌어 콘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콘은 눈을 크게 뜨더니 머리를 숙여 옆에 있는 여자에게 뭔가 얘기를 했다. 그것을 보는 갤라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내 콘과 여자는 두 사람 쪽으로 걸어왔다. "오, 갤라." 콘은 명랑하게 인사를 했다. 미소를 띠고 있는 저 잘생긴 얼굴은 분명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갤라에게만은 그 속에 감춰진 희롱이 역력히 보였다. 순간 갤라는 끓어오르는 분노로 얼굴이 빨개졌다. "이거 놀라운 일이로군." "안녕하세요, 브랜던 씨?" 갤라는 자연스럽게 대했으나 내심은 떨고 있었다. 오로지 저주스러울 뿐이다. "친구분을 소개해 주시지요." 여전히 세련된 미소를 머금은 채 콘이 갤라에게 말했다. 갤라는 마지못해 리차드 쪽을 바라보았다. "리차드, 이분은 환자…" 갤라는 다시 냉정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전에 우리 병원의 환자였던 콘 브랜던 씨구요. 이쪽은 리차드 슈월츠뮐러 씨." "아하, 그 병원의 의사 선생님이시군요?" 콘은 정말로 반가운 듯이 탄성을 지르며 리차드에게 그 튼튼한 갈색 손을 내밀었다. "그렇습니다." 리차드는 새삼스럽게 자세를 바로잡고 인사했다. "전에 수영장에서 한두 번 뵌 적이 있습니다, 브랜던 씨. 참 훌륭하시더군요. 마치 선수 같았습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이렇게 말하며 웃을 때 드러난 새하얀 치아는 갈색 피부와 썩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이 기회에 갤라, 코럴 보닝턴을 소개하죠. 코럴, 이쪽은 갤라 플레처. 기적을 낳는 사람이면서 바보 도마뱀의 전문가기도 하지."


이 말에 두 사람은 순간 묘한 표정이 됐지만, 갤라는 마음을 가다듬고 태연하게 여자의 내민 손을 잡았다. 코럴 보닝턴은 요염했다. 갤라로서는 멋있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다. 콘보다도 타 햇볕에 그을은 그녀는 피렌체의 성모상 같은 달걀형의 얼굴에다 요정처럼 날씬한 몸매를 지닌 미인이었다. 게다가 가슴이 깊게 팬 옷 사이로 보이는 노브라의 젖가슴은 뭇 남성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또한 목에 건 화려하고도 세련된 목걸이는 그녀를 더욱 돋보이 게 했다. 과연 콘 브랜던의 여자 고르는 안목은 뛰어나다고 갤라는 심술궂게 생각했다. "만나게 돼서 기뻐요." 코럴 보닝턴이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콘에게 들었어요. 그를 죽음의 심연으로부터 건져 주셨다구요?" "어머, 별말씀을…" 어색하게 응답하면서 갤라는 상대방의 웃음에 혹 악의는 없는지 살펴보았지만 그런 기색은 없고 단지 친밀한 관심이 있을 뿐이다. "만나뵈어 반가와요, 브랜던 씨. 하지만 우린 지금 식사하러 가는 참이었거든요… 먼저 실례를 해도 괜찮겠죠?" "아니요, 괜찮지 못한데요." 콘은 단호하게 말했다. 검은 속눈썹 밑으로 그의 눈이 갤라의 드레스를 황홀한 듯이 훑어보다가는 그녀의 꼭 다물어진 입술 위에서 멎었다. "두 분은 이미 내 거미줄에 걸려서 빠져나갈 수가 없게 됐습니다. 슈월츠뮐러 씨, 우리와 함께 저녁식사를 해주신다면 매우 기쁘겠습니다만." "그렇지만…" 갤라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내 방에서 네 사람이, 어떻습니까?" "당신 방이라고요?" 리차드는 흥미를 느끼는 것 같다. "우린 따로 식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갤라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여전히 리차드는 그녀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어 갤라는 안타까왔다. 코럴 보닝턴의 매력있는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웬만하면 콘의 기쁨을 깨지 말아 주세요, 미스 플레처. 콘은 다정하게 손님을 모시는 걸 좋아하는 분이거든요." 코럴은 잘 익은 아몬드처럼 생긴 눈을 리차드에게로 돌리며 말했다. "같이 가주신다면 레스토랑 것보다 훨씬 훌륭한 포도주를 대접해 드리죠."


"그래요? 브랜던 씨는 아마도 세라피나의 특별고객이신 모양이죠?" "아뇨, 바로 세라피나의 주인이시죠." 코럴은 쾌활하게 웃었다. 갤라는 어안이벙벙해져 콘에게 물었다. "정말이에요?" "아마 그런 모양입니다." 콘은 만족스런 듯이 말하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갤라의 반응을 살폈다. "코럴은 내 오른팔입니다. 아래층의 디스코텍을 주관하고 있죠." 갤라는 아직도 놀라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부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호텔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굉장한 부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자동차 경기에 출전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저는 디스코텍의 상태를 보고 오겠어요, 콘. 방엔 좀 뒤에 가도 괜찮겠지요?" 코럴은

이렇게 말한 뒤 직원 전용

승강기로 향했다.

콘은

벽에

있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루이스인가? 식사를 4 인분 부탁하네. 내 방으로 30 분쯤 후에, 알겠지?"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혹시 실례하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리차드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콘도 리차드도 엉망이 된 갤라의 표정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브랜던 씨, 정말 친절하시군요. 당신이 이곳 주인인 줄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내가 아는 한 이곳은 최고급 호텔일 겁니다." "콘래드나 콘으로 불러 주십시오. 그리고 이런 곳은 이제 그만 나갑시다." 순간적으로 콘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와 갤라의 팔을 잡았다. 갤라는 참을 수 없는 적의가 끓어올랐지만 그의 억센 팔에는 소용이 없었다. 콘은 이미 다른 한 손을 리차드의 어깨에 걸치고 사람들 사이를 누비듯이 하여 홀 끝으로 두 사람을 데리고 갔다. 마치 자애로 가득 찬 아버지인 양. 갤라는 난처했다. "세라피나가 마음에 드신다니 기쁩니다." 인사를 해오는 몇십 명의 사람들에게 일일이 답례를 하면서 콘이 말했다. "이것 말고도 호텔은 몇 개 더 가지고 있습니다만 나도 여기가 가장 마음에 듭니다." 콘은 두 사람을 아래층의 넓은 복도로 안내했다. "그래서 이 펜트하우스를 내 주거로 하고 있지요. 바로 요 앞입니다."


펜트하우스의 첫인상은 완벽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 암회색 카펫에 짙은 우윳빛 벽. 현대적인 감각의 검정색 가구들이 벽의 휘어져 돌아간 곳이나 움푹 들어간 곳에서 조명에 반사되고 있다. 한눈에 완벽한 조형미와 그 화려함을 알 수 있다. 어느 것 하나 불필요한 군더더기는 없다. 가구며 색조, 그리고 군데군데 놓여진 조각품 역시 주인의 빼어나고도 완벽한 취향을 말해 주고 있었다. 리차드의 찬사를 손으로 제지하며 콘은 한 계단 낮아진 공간으로 두 사람을 인도했다. 그리고는 다시 방해하는 듯한 인상은 주지 않으면서 리차드를 떼어 놓기 위해 갤라에게 팔걸이의자를 권했다. 갤라는 평정을 잃고 말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며 흰 모직 의자에 앉았다.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리차드가 콘의 부에 도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 점이었다. "정말 훌륭합니다, 콘래드 씨." 좀더 의연했으면 좋으련만, 갤라는 화가 치밀었다. "줄곧 말이 없는데, 어찌된 겁니까?" 콘이 마실 것을 따르면서 갤라에게 말했다. "너무나 훌륭함에 압도된 거겠지요. 그렇죠? 갤라." 리차드가 사뭇 보호자다운 미소를 지으며 갤라에게 말했다. "아뇨, 전혀!" 퉁명스런 갤라의 말투에 리차드가 눈을 둥글게 뜨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갤라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실례했습니다. 선생님을 화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여긴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까다로운 상대인 뉴욕 사람들과 교섭할 땐 이곳을 사용하지요. 얼음은? 갤라." 콘은 마실 것을 날라와 몸을 굽혀 갤라의 손에 건네주었다. "바보 도마뱀 짓은 그만둬." 리차드에게는 들리지 않을 낮은 목소리였다. 갤라는 아랫입술을 불쑥 내밀었다. 콘은 몸을 돌려 독일인 의사에게 웃음을 보냈다. "파트너를 고르는 당신

눈에 탄복했습니다, 리차드

씨.

오늘

밤의

갤라는

정말

아름답군요." "그렇습니다." 리차드는 좀전의 갤라의 심통을 아직도 다소 마음에 두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향해 잔을 높이 쳐들었다. "건배." 말이 없는 갤라 때문에 두 남자는 불안한 듯했다.


콘의 시선이 물결치는 갤라의 머리결과 부드럽고 도톰한 입술, 투명한 살결 등에서 좀체로 떠나지 않는다. "화를 내니 더 예뻐지는데요. 앞으로는 종종 화를 좀 내시지요." 콘의 말에 화가 가라앉지 않은 갤라는 뭔가 비웃는 소리를 해주려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돈을 꿰 달아 놓지는 않았군요." "그건 비난인가요?" 콘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위스키의 얼음을 흔들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화제를 돌렸다. "나로서는

아무래도

불가사의해요.

어제

어떻게

부인을

치료할

있었는지

말입니다." "아무 문제도 없었어요, 고맙게도." 콘이 비웃고 있으리라. 뿐만 아니라 냉랭한 갤라의 대답에 속지도 않을 거다. 울어서 눈이 빨개지고 머리는 제멋대로 헝클어진 모양으로 어떻게 닐 부인의 치료를 마쳤는지 갤라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머리가 자동 조종장치로 완전히 변했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저건 칸딘스킵니까?" 벽에 걸린 추상화를 보고 리차드가 물었다. 콘이 그렇다고 하자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놀랍군요! 어떻게 해서 이걸?" "경매로 구입했습니다. 서더비의…" "이런 훌륭한 작품은 본 적이 없습니다. 미술관 이외에선요."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이번엔 곱으로." 콘은 리차드의 잔에 술을 그득히 따르고 얼음을 넣어 주었다.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남빛 수영장을 배경으로 눈부신 진홍과 황색의 무늬가 어우러진 아주 특이한 빛을 발하고 있는 그림이다. 갤라는 분함도 잊고 그림에 취했다. "그 그림도 조만간 미술관에 기증할 겁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서요." "아주 관대하시군요. 천민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는 콘래드 왕 폐하." 갤라는 빈정거렸다. "이건 뜻밖이군, 갤라. 당신에겐 자비란 것도 없소?"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퉁명스럽게 응답했다. 리차드는 신경질적으로 콧수염을 어루만지면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결심한 듯이 말했다. "두 분은 지금 싸우고 계신 겁니까?"


"지금껏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작은 것도 놓치지 않는 훌륭한 의사라고 할 수 없겠죠." 갤라는 돌아가 안락의자에 앉더니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리차드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가 알아차리고 갤라 곁으로 와 앉았다. 갤라는 리차드의 팔짱을 끼었다. 콘의 부나 매력은 전혀 안중에 없음을 보여 주고 싶었던 거다. 리차드는 기쁜 모양이다. 콘은 얼굴에 웃음을 띤 채 한 손을 호주머니에 찌르고 천천히 두 사람 쪽으로 걸어왔다. 정장한 콘은 실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몸에 딱 맞는 재킷이 건장한 어깨를 감싸고 있고, 눈같이 흰 셔츠가 갈색 피부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 "인간관계란 이상한 것이어서…" 콘의 굵고 나지막한 목소리는 두 사람이 대접받고 있는 l7 년 묵은 술처럼 감미로왔다. "완전히 오해로 인한 경우도 가끔 있지만, 일단 엇갈리면 다시 정상적인 관계로 돌아가기가 힘듭니다." 그의 회청색 눈이 갤라의 눈과 격렬하게 부딪쳤다. "더 말할나위없이 좋았던 관계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원상으로 돌아갈 가치가 없어지는 게 아닐까요?" 리차드가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마음이 울적한 듯이 콘이 말했다. 상처받은 걸까? 갤라는 마실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오늘 밤엔 자신이 바보 도마뱀보다도 더 불행한 따분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침묵이 흘렀다. 이때 코럴 보닝턴이 들어왔다. "아래층은 생기에 넘쳤어요." 코럴이 자기가 마실 것을 만들면서 말했다. "식사 후에 잠깐 내려가 보시지 않겠어요?" "좋지요." 리차드가 적극 찬동했다. 갤라의 눈짓도 통하지 않았다. 리차드는 의학도 시절에 가본 본의 디스코텍 얘기를 코럴에게 하기 시작했다. 코럴은 콘 곁으로 가더니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날씬한 갈색 팔을 그에게 맡겼다. 분별을 잃은 분노가 치밀어올라 갤라의 가슴은 세차게 뛰었다. 이 아름다운 여성은 콘의 고용인이자 애인일까? 그녀의 행동은 갤라와 리차드의 친밀함에 대응한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지만, 그래도 마음은 개운치 않았다. 대화가 무르익어 갔다. 갤라만이 그 속에 끼지 못했다. 콘은 무의식중에 자기 이야기 속으로 상대방을 끌어들이는 능숙한 이야기꾼이고, 코럴은 그에 어울리는 섬세하고


우아한 여주인 같다. 이 이상 더 좋은 짝은 없을 듯하다. 두 사람은 애인 사이인지도 모른다. 이 가끔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은 질투 때문일까? 그래, 틀림없는 질투라고 단정지었다. 콘 브랜던을 미워할 이유가 있다고 해서 그가 멋진 남자라는 사실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여자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콘은 코럴처럼 자기에게 반해 있는 여자가 있는데도 또 다른 여자에게 태연히 손을 내미는 남자인 것이다. 이를 테면 갤라에게 손을 내밀었듯이. 크리스탈 워렌도 아마 그런 가벼운 상대였으리라. 30 분 후에 주방에서 날라져 온 식사는 뜻밖에도 아주 작은 식당에 차려졌다. 커튼이 젖혀진 창으로는 저쪽 법조단체 건물 뜰의 드넓은 조망이 펼쳐져 있다. 설경의 색조는 옛날 이야기 속에 나오는 그림 같다. 식당이 작은 이유는 이 조망으로 친밀한 분위기를 내도록 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었다. 식사도 예상과 달리 간소하긴 했으나 정통 로스트비프에 야채를 곁들인 더할나위없이 훌륭한 것이었다. 코럴이 가져온 와인은 최고급품이어서 갤라는 금세 취해 버렸다. 식사를 하는 동안 갤라의 완강한 태도도 서서히 풀려갔다. 촛불도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한몫을 해 코럴이 향기 좋은 터키커피를 따라 줄 때쯤엔 콘의 이야기에 배꼽을 쥐며 웃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나서도 즐거운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커피와 함께 마신 브랜디는 먼 옛나라의 여름을 연상케 했다. 브랜디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가슴속의 불꽃이 몸속의 혈관을 흐르며 어제의 사건을 일깨우면서 갤라의 마음을 이상하게 흔들어 놓았다. "그라파입니다." 맑으면서도 타는 듯한 액체를 맛보는 갤라를 바라보며 콘이 말했다. "친구가 북 이탈리아에서 가져다 주었어요." 촛불빛이 흔들린다. 콘은 세상사에 닳은 도시풍 얼굴을 보여 주는가 하면, 그 이면으로는 갤라도 알고 있는 이교도의 잔인성을 어렴풋이 나타내기도 한다. 술기운 탓인지 혹은 맛있는 식사가 가져다 준 오관의 만족 때문인지 갤라는 자신이 다시 콘 브랜던에게 끌리고 있음을 느꼈다. "무엇 때문에 랠리에 나가는 거예요?" 대화가 끊어졌을 때 갤라가 물었다. "거기에 랠리가 있으니까." 콘은 미소를 지었다. "얼버무리지 마세요. 어쨌든 당신은 2 회 연속 영국선수권을 차지했으니까. 랠리가 어떤 쾌감을

주는지는

흉터뿐이잖아요?"

저도

상상할

있죠.

하지만

위험해요.

당신의

몸은

사고의


갤라의 푸른 눈에 촛불빛이 반짝거린다. "도대체 왜죠? 이런 호텔을 갖고 있다면 이 왕국 안에서 아무런 불편없이 지낼 수 있을 텐데요. 경주는 그만두는 게 어때요?" "찾고 있는 게 발견되면 그때는." 콘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찾고 있다니, 뭐죠?" 갤라는 캐물었다. "지금의 내겐 없는 것, 랠리와 바꿔도 좋은 것." "당신의 인생에 없는 것도 있나요?" 리차드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당신들은 의료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니 제가 가르침을 받아야지요." 그러나 콘의 눈은 갤라의 눈만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갤라는 뱃가죽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코럴이 끼어들었다. "흉터 얘긴데, 그건 랠리 때문이 아니예요. 콘은 솜씨가 좋아 사고는 일으키지 않아요. 고의가 아니면." "고의로라고요?" 리차드가 반문했다. "예전에

독일의

자동차회사에서

시험운전사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충격용

시험운전사였지요." 콘이 가볍게 대답했다. "설마." 갤라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정말이오. 충격 테스트는 차 설계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안전벨트 등의 안전장치도 모두 그런 테스트를 거쳐서 설계되고 또 개량되지요." "인형을 사용한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리차드가 잔을 내려놓았다. "늘 인형만 사용하는 건 아니지요." 콘은 미소를 지으며 모두를 돌아보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재미있었습니다. 나는 계측기며 발신장치를 갖추고 앞좌석에 타고, 뒷자석엔 모니터 장비 한 벌이 실립니다. 그 상태로 고속을 내어 도랑으로 돌진하거나 다이빙을 하기도 하고 대형 트럭을 들이받거나…" "그만 해요."


갤라는 몸을 떨며 귀를 막았다. 코럴 보닝턴은 그런 갤라를 바라보더니 잔을 비우고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왜? 어째서 그런 일을?" 갤라는 망연해 있었다. "보수가

좋았거든요.

그땐

가난했으니까.

템스

강가의

오래

집을

돈이

필요했지요." 갤라는 앨러나의 이야기를 생각해 냈다. "l0 만 파운드를 주고 산 집 말이군요?" 갤라는 다소 반감을 품은 채 말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 얘기했군." 콘은 조용히 응대했으나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살아 남은 게 행운이었군요. 부상당하진 않았습니까?" 리차드가 경외하는 표정으로 콘을 바라보았다. "때로는요. 하지만 당시에는 대단하게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젊었고, 무서운 것도 몰랐지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부터는 이리저리 전전하고 있었던데다 자동차 경주 이외엔 삶의 의미도 별로 느끼지 못하던 때였으니까요. 랠리드라이버로는 별로 돈을 벌 수 없어요. 큰 상을 받을 땐 별도지만 시험운전사가 돈 버는 데는 좋은 자리지요." "집을 사고, 그 다음은?" 갤라가 재촉했다. "집을 가지고 나서 조금 안정이 됐지요. 그래서 밤낮없이 일을 했습니다. 그 집은 오랫동안 손질을 하지 않은 상태여서 손이 많이 갔어요. 지붕은 모두 다시 바꿨습니다. l8 세기의 타일을 구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다음엔 토대의 보강, 이 작업은 콘크리트에 관해 상세한 지식을 갖고 있는 친구와 함께 했습니다. 그 다음엔 벽에 붙은 널빤지를 갈아붙이고 회칠을 했습니다. 뭐든지 다 했죠. 운전과는 크게 달라 처음엔 여간 힘들지 않았지만." "그랬겠지요." 앨러나는 그의 전모를 이해한 것이 아니었다. l7 살의 앨러나에게는 그 이면에 숨겨진 고생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렇게 하여 상당한 이득을 보고 팔았군요?" "내놓기가 아까왔지요. 하지만 금전적으로는 이익을 좀 본 게 사실이에요. 그 돈으로 스트라토스 모터스를 샀습니다. 그곳은 웨스트엔드에서도 알려진 자동차 가게였는데, 불경기 때 기울고 말았습니다. 노신사 두 분이 경영하고 있었는데 현대적인 경영에 밀린 거지요. 빚이 불어나고, 업계에서는 두 사람을 전염병 환자 대하듯 피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젊은 야심으로 어떻게든 밀고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라파는 어떻습니까? 아직 제대로 맛도 보지 못했죠?" 콘은 모두에게 술을 따랐다. "그때 몇 살이었어요?" 갤라는 열중해서 듣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물었다. "25 살이었소." "그래서 스트라토스 모터스를 재건했어요?" "스트라토스 모터스라면 알고 있습니다." 리차드가 뜻밖의 얘기를 했다. "1 마일이나 되는 전면이 모두 두꺼운 판 유리로 되어 있고, 그 안에 가득 찬 롤스로이스나 마세라티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번쩍이고 있는 가게지요." "운 좋게 롤스로이스 판매권이 손에 들어왔죠. 그후 외국 차 수입을 전문으로 했습니다. 두뇌보다는 돈을 가지고 있는 패거리를 상대로 말입니다. 람보르기니 신형에 5 만 파운드를 지불하는 인간이 득실거리고 있다는 건 놀랄 만한 일이었지요. 스트라토스 모터스는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소극적인 표현이군요. 스트라토스에 세라피나 호텔, 그 밖에 더 가지고 있는 건 뭐죠, 콘?" "호텔이 몇 개 더, 주식이 약간, 자동차로 가득 찬 차고, 집이 한두 채, 그 정도요. 갤라,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매우 낡고 조그마한 아파트 한 층, 고양이 한 마리. 아, 거기에 오렌지 색 모리스 한 대." "당신이 함부로 다루고 있던 놈 말이군." "파일럿 면허까지도 반쯤은 얻고 있어요." "정말?" "네, 정말이에요. l6 살 때 아버지한테 배웠어요. 난 우수한 항법사였다구요." "하지만 땅에 곤두박질쳤겠지." 콘이 말했다. "멀미가 나서." 갤라는 얼굴을 붉히며 고백했다. "작은 비행기에 타면 늘 그래요." "다른 운전이라면 멀미를 일으키지 않겠지. 우리 춤 한번 출까?" 5


댄스플로어 주위에 설치된 대형 스피커에서는 귀를 찢는 듯한 시끄러운 음악이 흘렀고, 그에 맞추어 사이키 조명이 요란하게 돌면서 사람들을 야릇하게 매료시켰다. 이렇게 격렬하게 그리고 즐겁게 춤을 추는 것이 몇 년 만인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코럴도 리차드도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콘이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는 갤라보다 훨씬 품위있게 춤을 추었다. 그리고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다. 음악도 쉬임없이 계속되었다. 갤라는 결국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비로소 좀 쉬고 싶다고 말했다. 콘은 제일 큰 스피커에서 멀리 떨어진 한 계단 위에 있는 테이블로 갤라를 데리고 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기운이 펄펄 나는 모양이다. 콘이 가리키는 쪽을 보니 리차드와 코럴이 플로어 한가운데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 콘이 억지로 권해 마신 술기운으로 리차드는 마치 요가를 하는 사람처럼 요란한 동작을 연출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테니스 한 번으로는 부족하지." 갤라에게 마실 것을 건네면서 콘이 웃었다. "의사 선생은 신나게 즐기고 있잖아?" "디스코는 굉장한 체력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어요." 갤라는 조잘거리며 시원한 액체를 단숨에 마시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밝은 색 칠을 한 쇠 파이프를 사용해서 세련된 조형미를 구사한 디스코텍의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는 흥분을 자아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있는 자리는 댄스플도어보다 1m 가량 높고 테이블은 모두 알루미늄 세트로 되어 있다. 음악 소리는 여기까지 시끄럽게 들려오고 있다. "자극적인 분위기예요." "애들에겐 그럴 거야." 콘은 씩 웃었다. "다른 두 디스코텍은 보다 점잖지. 그러나 당신에게는 이곳을 보여 주고 싶었소. 나야 이런 장소에 어울리기엔 이미 늙었지만." "어째서요?" 갤라는 콘을 흘겨보았다. "여자들은 모두 당신에게 반해 있어요. 하지만 난 알아요, 틀림없이 당신은 내일 몸살이 날 거예요." "그게 내 좌우명이야. 오늘은 춤추고 내일은 아픔을 참는다." "이곳을 설계한 건 코럴?" "세 곳 모두. 겉으로 보아선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그 겉모습 뒤엔 정열적인 영혼이 숨어 있거든." "그래요?"


갤라가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콘은 재미있다는 듯이 이죽거렸다. "질투하고 있는 것 같은데?" "천만에요." "아닌가?" 눈을 치켜뜨면서 그는 계속 이죽댔다. "아녜요." 갤라는 눈을 감아 버렸다. "자, 코럴 얘기를 계속하시죠." "그러지. 2, 3 년 전 이 세라피나를 사들였을 때는 낡고 삐그덕거리는 호텔이었지. 우아하긴 했지만 이미 너무 고물이 돼 있었단 말이야. 하지만 조망은 아름다왔고 토대는 튼튼했어." "스트라토스 같았군요." "응, 템스 강가의 오래 된 집 같기도 했었고. 성공하는 방법을 깨달았으면 그걸 계속 밀고나가야 하는 법이야." "그러니까 말하자면 버려진 장소에서 숨은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 당신의 경영 비결이다, 이거죠?" "그렇게 말해도 좋겠지." "머리가 좋으시군요." 갤라는 마지못해 인정했다. "하지만 상당한 모험이었겠어요?" 콘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어느 쪽 얘기를 듣고 싶은 거야, 내 얘기? 아니면 코럴 얘기?" "코럴 얘기요." 속으로는 사실 당혹했으나, 갤라는 코럴이 콘의 애인인지, 그리고 오늘 밤 콘과 잠자리를 같이할 건지 그것이 알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차마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다. 콘은 이러한 그녀의 마음을 이미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다. "그래, 그러면." 의자에 등을 기대고 말을 이었다. "호텔에 전쟁 전의 아름다움을 남기고 싶었고, 젊은 사람을 끌어들여 분위기를 밝게 할 필요도 있었지. 디스코텍이나 레스토랑도 거기에 맞춰서 꾸민 거고, 코럴이 그쪽을 담당했소. 디스코텍을 관장할 사람을 찾는 광고에 응모한 수백 명 중 한 사람이었지. 머리는 담홍색과 녹색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옷은 핵 폭발 후에 남은 것같이 너덜너덜한 게 꼭 도깨비로 분장한 것 같았지…"


"저 코럴이?" "음." 콘은 재킷을 벗어 넥타이와 함께 빈 의자에 걸쳐 놓고 실크셔츠의 목 단추를 풀었다. 그러고 나자 그는 이미 귀족적인 한량이 아니라 허리가 미끈한 투우사가 되어 엄청난 성적 매력을 풍긴다. "믿어지지 않아요. 지금의 코럴은 보그 사의 모델이라도 될 수 있겠어요." "내가 그렇게 만들었지." 콘이 이렇게 말하며 갤라의 손을 잡았다가는 깜짝 놀란 갤라의 얼굴에는 눈도 주지 않고서 다시 가만히 손을 놓았다. "나는 여자를 잘 가꾸기로 유명하단 말이야." "앨러나 시프리아니를 완전히 굴복시켜 버린 것처럼 말이지요?" 콘은 생각에 잠긴 채 손가락으로 갤라의 손바닥을 문질렀다. 갤라는 짜릿한 쾌감으로 온몸이 떨렸다. "앨러나는 좋은 아이야." 콘은 양손 사이에 갤라의 손을 넣고 손가락을 감쌌다. "하지만 오늘은 코럴 얘기를 하지. 그녀의 재능은 금방 알 수 있었어. 그 괴상한 외모 이면에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도. 나는 그녀를 채용했소. 스타일을 완전히 바꾼다는 조건으로 말야. 그래서 처음 당분간은 코럴의 차림새며 화장을 감독했소. 머리가 그럭저럭 괜찮게 되는 데는 수주일이 걸렸지만 그 밖의 변신에는 사실상 하루로 족했지." "그랬겠죠." 갤라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당신의 영향은 어느 정도까지 미치고 있나요?" "무례한 질문이군." 콘은 예의 그 새하얀 이를 보이며 활짝 웃었다. 웃는 얼굴이 매력적이다. 방 전체가 환희 밝아지는 듯한 저런 웃음을 좀더 자주 웃도록 할 방법은 없을까, 갤라는 생각했다. "어쨌든 코럴은 이곳에 온 지 이제 3 년이 되었지만 앞으로 몇천 년 지난다 해도 그녀를 내보낼 생각은 없소." "어쩌면." 갤라의 그 목소리가 너무나 우울한 듯해 콘은 의미있는 웃음을 지으며 갤라의 손목을 입술로 가져다가 살짝 키스했다. 음악은 느린 곡으로 바뀌고 섬광 같던 조명은 안정된 청색으로 변해 갔다. "춤을 춥시다. 이 박자라면 별로 체력 소모가 없을 거요." 콘이 갤라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서도 갤라는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건장한 몸이 가까와지자 갤라는 가슴이 울렁거린다. 몸을 피하려 하는 갤라를 콘은 아주 쉽게 저지하면서 무안을 준다. "그저 춤일 뿐인데…" "난 아직 어제 일을 잊어버릴 수 없어요. 당신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콘 브랜던." "나도 마찬가지요. 그렇지만 댄스플로어에서 당신을 덮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 갤라?" 콘의 따뜻한 숨결이 귀에 닿는다. "당신이 바르고 있는 향수는 뭐야?" "나에마." 떨리는 목소리로 갤라가 대답했다. "그런 대로 괜찮군. 그러나 당신 살냄새 쪽이 훨씬 좋아." "그래요? 난 잘 모르겠는데요." 갤라는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좋은 향기야." 콘은 갤라의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어깨를 어루만지며 즐기고 있다. "병원에서 물리요법을 할 때 당신이 곁에 오면 좋은 냄새가 났었지. 그 여성적인 냄새에 성적 매력을 느끼고 나는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어." 음악은 느린 블루스로 바뀌었다. 강하면서도 동작이 쉽고 소박한 운율에 이끌려 갤라의 날카롭던 마음도 어느 새 어이없이 풀어지고 있었다. "그때 얘기를 하니까 말인데요, 당신과 같은 척추를 가진 사람은 춤을 추지 않는 게 좋아요." 갤라는 은밀하게 속삭였다. "이런 척추로도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소." "그게 탈이에요." 갤라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콘의 장난스런 눈이 부딪쳐 왔다. "진실인지 놀리고 있는 건지 난 모르겠어요." "그리고 무례하고 안하무인이고 이기적이면서 또한 악마와 친척이오.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그런 나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요?" "당신이 유괴한 거예요. 잊었어요?" "차용이라고

해주시지요.

나는

당신을

훌륭한

것뿐이야." "리차드는 어디 있어요? 오랫동안 보이지 않아요." 갤라는 두리번거리며 리차드를 찾았다.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잠깐


"걱정 마시오." 버둥거리며 빠져나가려고 하는 갤라를 쇳덩이같이 억센 팔이 눌렀다. "두 사람은 저쪽에 앉아 있소." 콘이 눈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테이블에 마주앉은 리차드와 코럴이 뭔가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코럴이 친절하게 보살펴 주고 있지." 아무렇지도 않게 콘이 말했다. "당신의 막후 조종자예요?" 갤라가 의심스런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마음대로 해석하시오." 그 소리에서 초조해 하는 위험한 어조를 간파한 갤라는 겁이 났다. "이렇게 늘 적대시당하는 건 불유쾌하오." "하지만…" "당신이 껍질을 벗길 바랄 뿐이야. 바보 도마뱀 같으니! 사사건건 참견하지 말아 줘요."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못하겠어요." 갤라는 발끈했다. "그 아름다운 입술엔 징계가 필요한 것 같애." 콘은 느닷없이 난폭하게 갤라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또다시 온몸이 저려오는 듯한 욕망이 솟구쳐 갤라는 무의식중에 눈을 감고 바깥 세상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갤라는 나지막하게 신음했지만 다행히도 음악 소리 때문에 그 소리가 상대방에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 키스는 갤라가 원하고 있었던 것이긴 했지만 빗나간 것, 거부해야 하는 것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콘의 키스는 저항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하여 갤라를 황홀 속에 빠뜨리고 만다. 두 사람의 몸은 뜨겁게 밀착됐다. 몸부림쳐 가까스로 몸을 뺀 갤라는 가볍게 전율하며 낮은 소리로 힐책했다. "사람들이 봐요." "누가?" 콘은 갤라를 끌어당겼다. "리차드가?" "그래요." "리차드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을 텐데…" "자신만만하시군요." 이 남자로부터 벗어날 만한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갤라는 힘을 주어 속삭였다.


"병원에서 당신이 뭐라고 불리고 있는지 알고나 있나?" "알고 있어요. 그게 어떻다는 거예요?" "사실이 아니라는 걸 보여 줘." "왜요? 사실인걸요." 그러나 콘과 접촉하고 있으면 몸 안 깊은 곳에 있는 욕구가 충족되는 것 같다. 몸과 몸의 접촉은 전율을 가져오고 게다가 애틋한 마음까지 생겨서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다. 콘이 다시금 갤라의 눈꺼풀에 따뜻한 입술을 갖다댔다. 콘을 밀어붙이려고 필사적으로 애써 왔기 때문에 신경이 다 소모되어 버린 갤라는 자신이 그대로 녹아가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콘의 팔 안에, 그 피부의 냄새 속에, 그 따스한 몸과 넘치는 힘 속에 완전히 휩싸여 버렸으면, 그래서 콘이 열심히 바라고 있을 완성된 사랑 속에 매몰되어 버렸으면 하고 생각했다. 블루스 곡이 끝나자 박자가 약간 빠른 곡이 흘러나왔다. 갤라는 마지막 기력을 다하여 콘의 팔에서 벗어나 더듬더듬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졌다. 정성들여 꾸몄던 것인데 당장에라도 풀어질 듯했다. "춤은 이제 그만 춰요, 콘. 뭔가 다른 걸 해요. 부탁이에요." "예를 들면?" "뭐든지 좋아요." 뭔가 좋은 생각이 없을까 싶어 갤라는 멍한 머리로 한동안 궁리를 했다. "리차드와 함께 객실을 구경했으면 해요. 몇 군데 보여 주시지 않겠어요?" "지금 리차드가 방을 보고 싶어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어머, 그렇지 않아요. 틀림없이 구경하고 싶어할 거예요." 갤라는 언성을 높여 말했다. 이 댄스플로어에서 나가기 위해서라면, 콘에게 몸이 접촉되어 도취에 빠져 버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좋은 것이다. "그래." 콘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꼭 그렇다면 아늑한 방을 하나 보여 드리지. 여기서 기다려요. 두 사람을 불러올 테니까." 갤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머리를 매만지면서 콘의 키 큰 몸이 탁자 사이를 누비며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탁자에서는 리차드와 코럴이 사이좋게 한창 담소하고 있는 중이었다. 콘은 꽤 오랫동안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윽고 리차드가 갤라를 향해 명랑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고, 콘은 디너 재킷을 어깨에 걸치고는 혼자서 돌아왔다. "그 사람들 안 와요?"


"춤을 더 추고 싶은 모양이야. 리차드는 호텔 방이라면 얼마든지 보았다고 말하더군. 우리끼리 갔다가 곧 돌아오겠다고 말해 두었지." "그래요?" 갤라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너무 길어지지 않는다면." 탁자의 두 사람에게 기운없이 손을 흔들자 그쪽에서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두 사람은 떠들썩한 사람들 틈을 헤치고 나와 인기척 없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어느 방이 비어 있는지 카운터에 확인해 봅시다. 손님이 있는 방에 발을 들여놓고 싶진 않으니까. 안색이 좀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콘이 부드럽게 말하면서 갤라의 볼을 만졌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마음속까지 꿰뚫어보는 듯한 아름다운 잿빛 눈으로부터 갤라는 얼굴을 돌렸다. "좀 더웠을 뿐이에요." "그랬을 거야." 그의 부드러운 말투에는 조소 같은 것은 없어 갤라도 가만히 있었다. "레이크랜드 실이 비어 있습니다, 브랜던 씨. 틱포드더러 방문을 열라고 할까요?" 유능한 듯한 프런트 계원이 말했다. "아니야, 열쇠는 내가 가지고 가지." 갤라의 팔을 꼭 잡고 콘은 승강기 버튼을 눌렀다. "지금껏 이런 호텔에 숙박한 적은 없었어요. 숙박비가 비싸겠지요?" "엄청나지. 그러나 그만한 값어치가 있소.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갤라는 콘을 쳐다보고 모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콘은 미남이고 태도도 자신에 차 있다. 어떤 일도 어렵지 않게 잘 소화하고 있는 모양으로, 그것도 희떠운 소리를 지껄이기 때문이 아니라 콘 자신이 무엇 하나 증명해 보일 필요가 없는 인간이기 때문인 듯하다. 남자들은 콘에게 자연스럽게 복종한다. 리차드도 그랬다. 아마 그것은 고대인들이 힘있는 지배자에게 바쳤던 경의와 같은 종류의 것이리라. 더구나 여자라면 그 꿋꿋한 콘의 의지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 레이크랜드 실이라는 표지가 붙은 묵직한 문을 콘이 열었을 때 갤라는 무심결에 숨을 들이마셨다. 청색과 회색을 적절히 배합해서 꾸민 훌륭한 방이었다. 애덤 양식의 벽난로 위에 코니스턴 호( 湖 )의 가을 풍경을 그린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다. 수많은 아치 형 창에는 밝은 청색 커튼이 쳐 있어 제정 러시아 풍의 가구에 씌워진 잿빛 비단 덮개와 차분한 색깔의 깔개와 함께 방의 인상을 짙게 해주고 있다. 방과 방을 구획하는 가는 대리석 기둥까지도 레이크랜드 석(石)과 같은 짙은 녹색이었다.


갤라는 소리없이 다음 방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가구들이 대부분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것에 감탄하였다. "객실은 모두 이런 모양이에요?" 산뜻한 마노 욕조에 더운물이 채워지고 있는 대리석으로 만든 욕실을 들여다보면서 갤라는 감탄했다. "일부는." "이걸 만드는 데 비용은 얼마쯤 들었어요?" 갤라가 황홀한 표정으로 물었다. 콘은 아치 형의 출입구에 기대서서 살짝 웃었다. "이 정도라고 예상하고 다시 그 배를 생각하면 대강 맞을까? 매우 많이 들었지. 그런데 이 방은 인기가 있어서 말이야. 비싼 요금을 각오해야 돼." "요금이 얼만지 알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는군요." 갤라는 그저 놀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객실엔 뭐든지 다 갖춰져 있었다. 벽장 속엔

화려한 야회복에서부터 트랙슈트까지

있었다.

가까운

공원에서 조깅을

하고

싶어하는 손님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갈아입을 옷을 두세 벌 가지고 이 방에 묵는다면 몇 주일이고 불편없이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갤라는 침실로 가보았다. 침대는 현대적인 설계였지만 하늘색 덮개가 그 위를 덮고 있어 엘리자베스 시대의 네 기둥으로 된 침대와 같은 우아하고 여유있는 분위기를 풍긴다. 이곳에도 커다란 호수 그림이 넉 장 걸려 있다. "꼭 별세계에 온 것 같아요." 갤라가 침대에 걸터앉아 보니 매트리스가 몸무게에 눌려 기분좋게 가라앉는다. "으음, 천국이 따로 없군요! 어떤 사람들이 여기서 자지요? 왕과 왕비?" "그렇지만도 않소. 여기 오는 사람들은 쾌적한 생활을 즐기기 위해 그에 합당한 지불을 쾌히 승낙한 사람들일 뿐, 그렇게 부자들만도 아니야." 갤라를 주시하고 있는 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져 갔다. 검정 실크드레스를 입은 날씬한 갤라는 침대 위에서는 무방비일 만큼 불안해 보였다. "여기서 자보고 싶어, 갤라?" "어머! 가능할 수도 있다는 듯한 말투군요." 갤라는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콘은 천천히 갤라 쪽으로 다가와서 재킷을 의자 등에 던져 걸었다. "가능하고 말고." "네?" 갤라의 웃음소리엔 다소 긴장이 풀려 있었다. "그런 짓을 하면 우선 리차드가 놀라요. 보내 주시기로 되어 있잖아요?"


"아아." 콘은 은밀한 기쁨으로 눈을 번득이면서 갤라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사실은 당신을 위해서 조금 거짓말을 했소. 그 의사 선생님은 이미 당신이 집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고 있소." "어째서 …" "당신이 너무 피곤해 한다고 했소. 소음과 더위로 두통을 일으키고 있다고. 선생은 한참 즐겁게 얘기하고 있었던 듯 내가 당신을 보내겠다고 했더니 기뻐하는 것 같았소." "뭐라구요!" 분노로 얼굴이 창백해진 갤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신처럼 무례한 사람은 일찍이 본 적이 없어요! 리차드 슈월츠뮐러, 그 사람은 또 뭐예요! 그런 얘기를 믿고 있다니, 바보 같으니라구." "저녁식사 때 클라레트를 상당히 마셨으니까 말이야." 콘이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말했다. "사고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은 건지도 모르지." 그리고는 침대 위에 손을 뒤로 하여 짚으면서 갤라에게 장난스러운 웃음을 보냈다. "그럼 일부러 리차드를 취하게 했다는 말이군요. 고약한 사람!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조작한 거지요?" 갤라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당신을 독점하고 싶었던 거야. 하지만 당신과 얘기하고 싶은 게 있었소." 콘이 조용히 대답했다. "무슨 얘기예요?" 흥분으로 빨라진 숨결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면서 갤라가 말했다. "우선 어제 일을 사과하고 싶소."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별로 미안해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당신에게 매우 실례했소. 해서는 안 될 일이었소. 나는 … 음, 당신에게 내 살이 닿는 순간 억제력을 잃고 말았던 거요." "그렇게 보이진 않았는데요. 모두 고의로 한 일 아닌가요?" 갤라는 신랄하게 대꾸했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에요?" "아니, 우리 두 사람 일을 얘기하고 싶었소." "얘기할 거 하나도 없어요." 갤라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말로는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몸으로라면… 얘기할 건 얼마든지 있소."


"뻔뻔스럽군요. 결국 나를 여기 데려온 건…" "맞아, 당신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야." "지독하군요. 또 강제로 내 몸을 빼앗겠다는 건가요?" "내가 당신을 원하는 만큼 당신이 나를 원하지 않고 있다면 나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겠소." 콘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댔다. 갤라는 벌컥 화가 났다. "당신 따윈 전혀 탐나지 않아요." "그렇게 말은 하지만 당신은 지금 갈피를 못 잡고 있지 않소?" 콘이 급소를 찔러왔다. "당신이 무섭게 하니까 그래요." "나는 나쁜 이리고 당신은 작은 새라는 거로군. 그러나 당신의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나를 받아들이고 있으니까 날 따라 여기 온 게 아니오?" 그것은 사실이었으므로 갤라는 볼을 붉히고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섹스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건가요? 나는 아무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여자는 아니예요, 콘." "알고 있소." 콘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사랑할 수 없는 사람과는 그런 짓을 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 주세요. 맹세코 나는 백만 년이 가도 당신을 사랑하진 않을 거예요." "백만 년은 너무 길군." 그런 대답을 들으니 갤라는 자신이 열두 살 정도의 어린애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콘 곁에 있으면 현기증이 날 만큼 가슴이 두근거린다. 두려움과 갈망, 모순되는 두 개의 감정이 갤라의 내부에서 격렬하게 뒤엉킨다. "아름다운 살결이야." 콘이 갤라의 드러난 어깨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당신 살에 닿는 게 좋아, 갤라. 당신도 내 살이 닿는 게 싫다고는 안하겠지?" "싫어요." 갤라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것이 떳떳한 일이기만 하다면, 그가 콘래드 브랜던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싫지 않을 거다. 콘이 갤라를 끌어당겨 관자놀이 언저리에 입술을 살짝 갖다대면서 드레스 뒤의 지퍼를 천천히 내렸다. 한 줄기 불이 타며 옮겨가듯이 콘의 손가락이 지퍼와 함께 내려간다. 그 손가락이 이번엔 등줄기를 살며시 위로 더듬어 올라와 목 뒤까지 오더니 묶은 머리를 풀어 적 갈색의 긴 머리를 흩뜨려 버렸다.


갤라는 떨어지려고 몸부림쳤지만 이미 콘의 입술이 자기 입술 위에 덮여 있었다. 쉴새없이 달아오르는 마음의 충동으로 갤라는 무의식중에 콘의 머리를 부둥켜안고는 그의 머리털에 손가락을 찔러넣었다. 콘은 낮은 소리로 사랑의 밀어를 중얼거리고는 갤라를 얼싸안은 채 침대 위에 쓰러져 검은 드레스를 벗겨내렸다. "안 돼요." 갤라는 신음했다. 격정이 당장이라도 온몸에 퍼져나갈 것만 같았지만 그래도 죄의식과 불안감이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오류투성이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옳은 건 이것뿐이야." 콘은 중얼거렸다. "당신을 만난 순간부터 줄곧 당신이 그리웠어, 갤라." "하지만 안 돼요…" 콘은 갤라의 항의를 키스로 막았다. 밑으로 가라앉아 들어가는 침대에 뉘어진 갤라에게는 저항할 기력도 없었다. 정열로 몸을 불태우는 두 사람을 차단시키는 것은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속옷뿐, 깨끗하게 잘 닦인 듯한 굳센 콘의 몸, 그 몸무게는 갤라에겐 달콤한 고통이었다. "리차드는 애인인가?" 콘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하곤 상관없어요." 갤라는 숨을 헐떡였다. "애인인가?" 강철 같은 손가락으로 갤라의 팔을 꽉 틀어쥐면서 콘은 다시 소리를 높였다. "아닐 건 뻔하잖아요." 갤라는 눈을 감은 채 속삭였다. "좋아." 갤라를 내려다보는 콘의 목소리에는 순수한 기쁨이 번져 있었다. "이것으로 그와 결투할 필요는 없어졌군." 갤라는 고통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결투를 한다구요! 당신같이 뻔뻔스런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정말?" 화난 시늉을 한 콘은 단숨에 셔츠를 벗어 버렸다. "그렇다면 결투가 아니라 암살이라고 바꿔 말하지." "그쪽이 당신다와요."


갤라의 숨결은 낮으면서도 거칠어졌으며 어느 새 갤라는 양손을 뻗쳐 콘의 몸, 아름다운 남자의 몸에 자신의 몸을 밀착시키고 있었다. 갤라는 콘이 그리웠다. 갤라의 내부에 어떤 얼음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이미 열에 녹아 수증기가 되어 있었다. "이제 이 이상은 안 돼요, 콘. 싫어요." "그래? 여기에 온 목적은 단지 객실을 구경하는 것뿐이었군." 그러면서 콘의 손가락은 갤라의 비단 슬립을 벗겨 백설같이 하얗고 둥근 가슴을 드러나게 했다. "아아, 나의 갤라." 콘은 부풀어오른 가슴에 눈을 빼앗긴 채 소근거렸다. "당신은 정말 아름다와." "그만둬요. 부탁…" 콘은 갤라의 가슴을 손가락 끝과 입술로 부드럽게 그리고 탐욕스럽게 애무했고, 갤라는 착잡한 기분을 풀 길 없어 몸부림치며 괴로와했다. 그러나 또다시 콘이 힘차게 갤라를 껴안았다. 갤라는 꿈과 같은 충족감을 맛보았다. 브라이언과의 그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브라이언의 그것은 단조롭고 평범한 신체운동에 지나지 않았으나 콘의 경우는 마약이 혈관 속으로 흘러들어온 듯 피부 구석구석까지 강렬하게 생생한 감각을 불러일으켜 준다. 몸뿐만이 아니라 콘의 정신까지도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듯하다. 콘의 몸은 뜨겁게 갤라를 눌러왔다. 갤라는 몸부림쳐 자신을 한없는 나락 속으로 빠뜨리는 콘의 키스에서 벗어나, 얼굴을 떼고 팽팽하게 긴장된 콘의 어깨를 원망했다. "부탁이에요, 그만해요." "부탁?" 콘의 눈엔 불만이 가득 괴어 있었다. "뭐가 문제야, 갤라? 당신도 나를 원하고 있을 텐데… 언제나 도망치는 이유가 뭐야?" "나는 원하지 않아요, 콘." 그러나 갤라는 가슴에 닿은 콘의 양손을 느끼면서 온몸이 쑤시는 것 같은 형언할 수 없는 환희에 몸을 떨었다. "당신의 몸이 그건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있소." 콘의 애무에 숨이 막히는 듯하다. "게다가 당신은 처음이 아니잖아? 금방 알 수 있어. 전에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들였던 거야… 그런데 어째서 나는 안 되지?" 갤라는 가까스로 콘의 양팔에서 벗어나 침대 시트 위에 엎드렸다. 실크시트의 감촉이 뜨거운 가슴에 느껴져 온다. 넋을 빼앗는 꿈에서 더 늦기 전에 깨어나려면 지금 끝내지


않으면 안 된다. 콘은 아주 쉽게 갤라를 파멸시킬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아무리 괴로와도 지금 도망쳐야 한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제발 그만둬 주세요." "갤라… 당신은 이해할 수 없어." 콘은 흐트러진 갤라의 머리 뒤로 몸을 찰싹 붙이면서 그녀를 껴안았다. 콘의 따뜻한 가슴과 갤라의 등이 합쳐졌다. 콘은 갤라의 어깨에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당신의 살 냄새를 맡고 있기만 해도 나는 미칠 것 같아. 우리는 오랫동안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을 텐데.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말이야." "그럴 수… 없…어요." 갤라는 말도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았다. "또 그 안 된다는 말이군." 갤라는 콘이 자기를 향해 쓴웃음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안다. "다른 말은 모르나?" "부탁이에요, 그만 보내 주세요. 택시를 부르겠어요." 갤라는 간절히 애원했다. "이런 제길." 콘의 팔에 힘이 주어졌다. "당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알고나 있나?" "당신이 시작한 거예요. 그러지 말라고 그렇게 부탁했는데도요. 아아, 콘, 우린 안 돼요." "어째서? 광신적인 종교라도 가지고 있는 것 같군." "소원…" 갑자기 콘이 갤라를 돌려뉘었다. 갤라는 맨살의 가슴을 감추려고 했지만 그가 내버려 두지 않았다. "왜 그러는 거야, 갤라? 당신도 나를 원하고 있잖아?" "남자와

여자는

달라요.

여자에게는

섹스가

전부는

아니예요 ―

당신들은

그런

모양이지만." "물론 전부는 아니야." 콘이 가슴에 키스를 하자 갤라는 어쩔 도리없이 눈을 감았다. "그러나 상당한 의미는 있다고 생각해. 당신에게 무리하게 강요할 생각은 없어, 요전에 그런 일이 있은 다음이니까. 하지만 또 만나 주겠다고 맹세할 때까지는 놓아 주지 않겠어." "싫어요, 그건 안 돼요."


갤라는 딱 잘라 말했다. "그래?" 이번엔 이가 갤라의 피부를 스쳐간다. 고통스런 쾌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나도 마음을 고쳐먹어야 하나?" "잔인해요…" "정말 만나고 싶소, 갤라." "시간낭비예요. 난 이미 애인이 있는걸요." 갤라는 필사적이었다. "거짓말." 가슴을 애무하고 있던 콘의 입술이 점차 매끈 한복부로 옮겨간다. "일요일을 같이 보냅시다." "싫어요!" 갤라의 몸은 활처럼 휘어졌다. 콘의 애무는 불을 댕기듯 갤라를 의지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 "알았어요, 좋아요. 그게 마지막이라고 약속한다면." "뭐든지 약속하지." 콘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은 역시 더없는 미남이다.

사로잡는다.

콘과 함께 즐겁게

웃고

웃음의 싶고

잔물결이 그대로

서로의

욕망과

환희에

갤라를 맡겨져

송두리째 마음껏

자유로와지고 싶기도 했으나, 한편으로 머릿속에서는 경보가 요란하게 울린다. 지금까지 몇 명의 여성이 이런 매력, 이런 강렬한 성적 매력에 유혹당했을 것인가. 갤라는 허둥지둥 옷매무새를 고쳤다. "처음으로 나쁜 짓을 한 여자 같군." 콘이 웃었다. "급히 집에 돌아가 아베마리아를 백 번쯤 부를 셈인가?" "천 번을 불러도 소용이 없겠죠." 갤라는 지퍼를 올리려고 애쓰면서 중얼거렸다. "도와 드리지." 콘이 지퍼를 확 끌어올렸다. "진심으로

말한

거예요.

것뿐이에요."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일요일엔

가겠지만

그게

마지막이에요.

예의상

응하는


콘이 부드럽게 말했지만 번득이는 눈은 털끝만큼도 갤라의 말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일순 크리스탈 얘기를 해버릴까도 싶었으나 그렇게 되면 이 화려한 꿈은 끝장이 나고 만다. 아직 그럴 순 없다고 갤라의 가슴속에서 가로막고 나서는 무 언가가 있었다. 갤라는 무거운 마음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고치려 했다. 그러나 콘이 보고 있는 앞에서 몸차림을 고치려니 영 내키지 않는다. "택시를 불러 주세요." "그럴 필요는 없소." 콘이 일어나서 셔츠와 재킷을 입기 시작했다. "바래다 주겠소." 콘의 차는 동굴 같은 호텔의 지하 주차장 특별 구획에 놓여 있었다. 검정 가죽을 사용해서 화려하게 내부를 장식한, 상당한 속력을 낼 수 있을 것 같은 차였다. 갤라는 외투에 푹 싸여 멍청하니 좌석에 몸을 묻었고, 콘은 은회색으로 빛나는 차를 발진시켰다. "이 차로 랠리에 나가나요?" "이런 종류의 특별설계 차로." "속력이 나나요?" "무섭게 나지." 콘이 카세트에 스위치를 넣자 쾌활한 재즈가 흘러나왔다. "런던 한가운데서는, 더구나 눈길에선 그렇게 안 되지만." "일요일에는 뭘 할 예정이에요?" 갤라가 물었다. "훌륭한 점심식사. 자동차 컬렉션을 보여 줄 수도 있소. 나쁜 짓은 안해." 그러고 나서 갤라는 콘에게 길을 일러 주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 맵시있게 옛 조지 왕조 풍의 테라스하우스와 현대적이지만 무표정한 아파트 단지 사잇길에 들어왔을 때 콘이 진지한 얼굴로 쳐다봤다. "정말 즐거운 밤이었어. 고맙소, 갤라. 술 한잔 줄 수 없을까?"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건 한 번으로 족해요." 그러나 작별 키스는 갤라 쪽에서 했다. "잘 가요." "여기까지 마중오겠소. 일요일 아침 10 시요."


갤라는 차에서 내리자 머리를 숙여 차창으로 콘의 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제 한 번만 더 이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그것으로 끝이다. 영원히. 갤라는 자기자신에게 다짐했다. "안녕히 가세요, 콘." "잘 자요." 자동차 뒤의 빨간 불빛이 인적이 끊긴 눈길 저쪽으로 사라져 갔다. "이제 한 번만 더." 갤라는 또다시 확인하듯 자신에게 말해 주었다. 그러나 집 앞에 채 이르기도 전에 갤라의 눈은 이미 눈물로 흐려져 있었다. 6 이튿날, 오랜만에 비가 나무들이며 병원의 창을 사정없이 두들겨 댔다. 도로는 녹아내린 눈으로 질척거리다가 저녁때가 되자 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들판은 로맨틱한 흰옷을 벗어던지고 무미건조한 제 모습에 당황하고 있는 듯했다. 갤라는 귀로의 차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런던 가까이에 다달았을 때는 이미 해질녘이 되어 겨울의 황혼이 긴 그림자를 끌면서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온종일 콘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지난밤의 흥분은 이미 가셔 있었고, 두 사람의 건조한 관계를 생각하면 우울할 뿐이었다. 그런데 콘에 대한 이런 감정은 일찍이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끌리는 한편으로는 거부하고, 희망을 가지면서도 믿지 못하는 서로 반발하는 두 얼굴이 혼합돼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갤라의 내부 깊숙이에 뿌리내리고 있어 아무래도 떨쳐 버릴 수 없을 것 같은 기 분이었다. 지난밤 콘으로부터 몸을 빼낸 행위는 자신의 일부를 비틀어 뽑아낸 거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모레 또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속이 불처럼 달아오른다. 겨우 2, 3 주일 사이에 콘은 누구보다도 깊숙이 갤라의 마음속에 들어와 자리잡고 있었다. 콘을 단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생동감 있고 독특한,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콘과의 접촉에서 얻었기 때문이다. 갤라는 하루종일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질 않았다. 쉴새없이 콘의 장점과 단점을 헤아려 보고 그는 신용할 수 없는, 사람을 배반한 적이 수없이 많은 사람임이 분명할 거라고 생각했다. 전혀 기운이 나지 않는 상태에서 환자의 치료가 그럭저럭 끝났다. 집에 돌아온 갤라는 파샤에게 먹이를 주고는 안락의자에 몸을 던졌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갤라는 꼼짝도 하기 어려웠으나 하는 수 없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세련된 정장 차림의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갤라와 같은 색조의 옷차림에 적갈색 머리를 짧게 깎은, 또한 어쩐지 상처받기 쉬울 듯한 푸른 눈을 가진 남자였다.


"여어!" "오빠!" 갤라는 잭을 와락 껴안아 안으로 들였다. "그 양복 참 멋있다. 일은 잘돼 가요?" "요새는 괜찮은 주문들이 더러 있는 편이야." 잭이 말했다. 마이클의 목소리가 아버지를 닮아 낮고 남성적인 데 비해 잭은 맑고 즐겁게 울리는 테너였다. 그러나 지금 잭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기운이 없다. "왠지 지쳐 있는 것 같애. 앉아요. 일은 끝났어요?" "5 시에." 잭은 27 살이지만 아직도 소년 같은 얼굴이다. 그러나 눈가의 주름은 속일 수가 없다. 성공은 언제나 그 나름의 대가를 요구하는 거라고 갤라는 생각했다. "뭐 좀 먹을래요?" "별로 시장하지 않아." 잭은 서류가방을 의자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갤라, 사실은 할 얘기가 좀 있어서 왔다." "그래요? 아무튼 커피나 마시구요." "아냐, 됐어." 파샤가 잭의 무릎에 뛰어올랐지만 매정하게 쫓아 버린다. "앉아라, 갤라. 법석 떨지 말고." "나는 커피를 마시고 싶어. 무슨 일이에요, 잭?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응, 좋지 않은 일이다." "뭔데?" 갤라는 막연하게 불안을 느꼈다. "응? 얘기해 봐요." "너 콘래드랑 교제하고 있니?" 날카로운 질문에 갤라는 깜짝 놀라서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 거 누구한테 들었어?" "사실이냐?" 잭은 희미한 분노를 보였다. 갤라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오빠." 그 복잡한 상황을 어떻게 하면 설명할 수 있을까? 그의 딱딱한 얼굴에는 불신이 나타나 있다.


"어젯밤 세라피나에서 그놈과 춤을 추지 않았다는 거냐 ? 댄스플로어 한가운데서 그놈과 키스하지 않았어? 그놈의 방에서 묵지 않았냔 말이야?" "아녜요! 거짓말이야!" "내 친구 두 명이 봤다던데?" 잭은 발끈 성을 내고 있었다.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그 두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그 중 하나겠구나?" "잠깐 기다려요." 갤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어젯밤 콘과 같이 있었던 건 사실이야." "콘?" 잭은 말을 되받았다. "콘래드 브랜던." 고쳐 말하고 갤라는 그만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처음부터 함께 있었던 건 아니야. 직장 친구인 리차드 슈월츠뮐러 의사와 세라피나에 갔던 거야. 우연히 콘이 그 호텔의 주인이었고, 그는 단지 주인으로서 나와 춤추고 싶어했을 뿐이야." 잭은 냉소하며 말을 막았다. "그럼, 그놈은 호텔 손님이면 누구하고든지 춤을 춘단 말이냐? 집어쳐, 갤라!" "얘기를 좀 들어봐요!" 오빠의 불신에 찬 눈빛에 갤라는 마음이 아팠다. 오빠에게 힐책을 받다니, 얼마나 잔인하고 심술궂은 해후인가. 더구나 잭에게는 숨기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 많았다. 그를 속이고 싶지는 않았으나 정직하게 말해도 결코 이해하려 들지 않을 거다. 갤라는 말을 신 중하게 선택해 가면서 설명했다. "물론 전에도 그와 만난 적이 있었어. 지난달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왔었거든. 내 담당이어서 추간연골 경부압박증 치료를 해주었어요." "꼭 네가 담당했어야 했니?"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아냐." "대체 어떤 사이냐?" 잭은 충격받은 것임에 틀림없다. "아무 사이도 아냐. 콘은 그저 내 환자였을 뿐이야. 그와 나 사이엔 아무 일도 없어요. 오빠한테 그런 짓 한 사람인걸. 내가 어떻게 그런 걸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겠어? 다만 어젯밤 우연히 호텔에서 만난 것뿐이야. 그 사람이 리차드와 나 사이에 끼어들어와서 춤추겠다고 우겼어요."


갤라는 시선을 떨구었다. "댄스플로어에서 키스한 건 사실이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어. 정말이야." "거짓말 마라!" 잭의 목소리가 떨렸다. "톰과 앤시아 얘기에 의하면 너희는 애인 사이로 보였다고 하더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스스럼없이 껴안을 정도니, 자기들 눈을 의심했다고 하더라. 내 친구들은 모두 그놈이 한 짓을 알고 있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잭의 눈은 고통과 분노로 이글거렸다. "잭!" 속으로 톰 스미스와 앤시아 스미스를 저주하면서 갤라는 필사적으로 오빠를 납득시키려 했다. "오빠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게 아니야, 결코. 난 시종 그를 쌀쌀맞게 대했고, 그가 뭐라든 대꾸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키스할 때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어. 정말로 그런 짓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구. 하지만 그는 나보다 수십 배나 기운이 센걸…" "너 그놈 방에 갔었지? 손을 마주잡고 다정스럽게 말이야." "그 사람들은 어젯밤 나를 감시하는 것 말고는 전혀 아무것도 안했던 모양이죠? 그의 방에 가진 않았어, 잭. 객실을 보여 줘서 구경했을 뿐이야. 어떻게 꾸며져 있는지 보고 싶었으니까…" "그놈과는 제대로 말도 하지 않았다면서!" "댄스플로어에서 빠져나가고 싶었을 뿐이야."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둘이 있고 싶었던 게로군?" "무슨 말이야. 얘기가 엉뚱하게 와전됐어. 잭, 어젯밤 톰과 앤시아가 보았다는 건 사실상 별의미가 없는 일이야. 콘이 내 마음을 끌려고 했던 건 확실하지만 내 정체를 모르는걸. 지금도 말이야. 잭, 제발 그런 얼굴로 쳐다보지 말아 줘." "갤라,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잭은 일어나 뿌리치듯 창가로 갔다. "물론 너의 사생활에 간섭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하고많은 남자들 중에서 하필이면 그 작자란 말이냐!" "잭! 아무 일도 아니야. 꼭 성서에 손을 얹고 맹세해야만 믿겠어?" 잭은 갤라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놈과 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니?" "그런 질문을 할 권리가 있어?" 갤라는 드디어 뜨거운 석유에 불이라도 붙은 듯이 벌컥 성을 냈다.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오빠한테 말할 것 같애?" "아아… 갤라." 갑자기 잭의 얼굴이 와르르 무너졌다. 어릴 적 울 때 늘 그랬듯이. "네겐 신의란 것도 없니? 최소한 조심성쯤은 있어야지. 뭇사람이 보는 데서 키스를 하다니, 어쩔 작정이냐?" "아무 작정도 없어." 크게 한숨을 내쉰 갤라는 의자 등에 기대어 마음을 진정하려고 애썼다. 이 자리에 콘이 있다면 이런 사태를 불러일으킨 죄로 머리를 박살내 주고 싶은 심정이다. 이번주 일요일을 콘과 함께 보낼 거라는 사실을 안다면 아마 잭은 까무러칠 것이다. "잭, 내가 한 말을 믿지 않는군. 정말이야, 난 분명히 콘 브랜던의 애인이 아니야, 절대로. 난 그 사람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어요. 나보다 친구들을 더 믿겠다면 하는 수

없지.

하지만 분명히 말하겠는데

오빠나 친구들이나 모두

오해하고

있는

틀림없어." 잭은 갤라에게 등을 돌린 채 얼빠진 표정으로 그저 쓸쓸히 일몰을 바라볼 뿐이었다. "갤라, 네가 걱정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몹시 실망하고 계신다." 갤라는 앉음새를 고쳐 앉았다. 머릿속에서 빙빙 돌고 있던 갖가지 근심이 순식간에 멈춰 버린다. "어머나! 그런 얘길 부모님한테까지 하다니!" "하는 수 없었다." "이런 바보!" "오늘 내가 전화했다. 그래서 내가 오늘 밤 여기 와서 너와 얘기해 보는 게 좋겠다는 허락을 받았어. 만일 네가 계속해서 브랜던과 사귈 생각이라면 아버지나 어머니나 두번 다시 너를 상종하지 않으려 하실 거다, 알겠니?" "말했잖아? 콘은 물론, 누구하고도 사귀고 있지 않다고. 그 사람 정말 싫어. 그가 걷는 땅바닥조차도 싫을 정도라구, 잭." "그래서 어젯밤엔 런던 제일의 사치스런 디스코텍에서 놈과 부둥켜안고 키스를 했구나." 잭은 창가에서 되돌아와 갤라의 맞은편에 앉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좋아, 그놈이 내게 한 짓이 너와는 상관없다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놈이 어떤 인간인지는 확실히 알아 둘 필요가 있어. 너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상처받게 될 테니까." 그거야말로 갤라가 오늘 온종일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잭의 말을 듣는 순간 갤라의 마음은 정해졌다.


"알고 있어. 콘 브랜던과 관계를 가질 생각은 조금도 없어. 그것 만은 확실히 알아 둬. 그리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공연히 부모님께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아버지 말씀이 네가 한 보름쯤 전에 브랜던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캐물었다더라. 그때 이미 놈과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게지. 잘 들어 둬." 갤라가 말을 가로막으려는 것을 제지하며 잭은 급히 말을 이었다. "그놈은 위험하다. 냉혹한 방탕자야. 여자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놈이란 말이야. 가지고 놀다 싫증나면 버릴 뿐이야. 그놈에게 접근해선 절대 안 된다." "줄곧 그래 왔어. 몇 주일간이나 말이야!" 갤라가 말을 가로막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녀석이 너를 추근추근 따라다니고 있는 거냐?" "그런 건 아니지만." 갤라는 열심히 말을 찾았다. "그 사람은 내 정체를 모르니까." "그렇다면 왜 알려 주지 않았지?" 그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갤라는 다른 말로 설명했다. "병원에 환자로 와 있는 동안은 말할 수 없었어. 그러니까 직업상 거리를 두려고 한 거야. 그런데 어젯밤은 … 그래, 말했어야 했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 자리엔 다른 사람들도 있었고, 게다가… 그가 초대한 저녁식사였으므로…" "그놈과 식사를 했다고?" 잭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아까 말하지 않았어? 억지로 그의 손님이 되었다고. 더 이상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리차드한테 물어봐. 전화번호를 일러 줄 테니까." "아니, 나는 뭐 네 사생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려는 건 아니다." 잭은 눈을 감았다. 그도 갤라만큼이나 피로한 모습이었다. "너와 브랜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든 없든 난 상관없다. 다만 우리 가족이 네가 상처받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니? 하고 싶은 말은 이 한마디뿐이다. 두번 다시 그 작자와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갤라는 꺼림칙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어떻게든 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약속은 간단해요. 다시 만나는 일 따위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콘과 만나게 되더라도 그 때는 모든 게 끝났다는 말을 할 참이었으니까. "정말이지?"


"물론이야. 오빠와 크리스탈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내가 콘 브랜던을 좋아하게 될 턱이 없잖아? 거짓말이 아니야. 콘이 저 혼자 씨름을 하고 있을 뿐이야. 그러니까 내가 오빠와 남매지간이라는 걸 알면 더 이상 접근하지 않을 거야." "과연 그럴까?" 잭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가 알기론 그 녀석은 제멋대로인 모양인데, 네게 흥미를 가졌다면 물불 안 가릴 거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나설 거고. 그래도 안 되면 경찰에 고소할 테다." "콘과는 두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어, 불가피할 경우 외에는. 이건 어머니한테 말씀드려도 좋아. 이젠 됐지?" "좋아." 잭은 웃는 얼굴로 갤라의 손을 잡았다. "판단을 잘 해주니 고맙구나. 너는 고집이 세니까 애 좀 먹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갤라도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마음속은 착잡했다. 배우처럼 연기를 하고, 게다가 순진한 마음을 짓밟혔다며 내숭까지 떨었지만 그렇다고 스스로도 부정하기 힘든 이 열정이 과연 식어 줄 것인가. 이미 콘에게 마음을 온통 빼앗기고 있으니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의 사슬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어쨌든 자신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잭은 콘이냐 아니면 가족이냐는 식으로 문제를 동강내 버렸다. 갤라는 오빠의 손을 꼭 잡으면서 지금 한 자신의 말이 진실이 되기를 빌었다. "이로써 그 얘긴 끝난 거예요. 뭐 좀 먹지 않겠어요?" 갤라는 애써 쾌활을 가장하며 말했다. "그보다 외출 준비를 하렴. 축하하는 의미로 내가 저녁을 사지." 잭은 불룩한 지갑을 내보였다. "좋아."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일어서면서도 갤라는 여전히 마음이 석연치 않았다. 그녀는 거울을 향해 맹세했다. 일요일 콘을 만나는 것이 그와 만나는 최후가 되게 하자고, 이번에야말로 절대로 의심할 여지없이 마지막이라고. 일요일 아침 콘의 차에서 내리면서 갤라는 거듭 자신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콘의 뒤를 따라 높은 철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세라피나 호텔에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요?"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봉오리를 맺기 시작한 재스민 가 지가 길게 늘어진 밑으로 머리를 수그리고 돌층계를 오르면서 갤라가 말했다. "가끔 묵긴 하지만 거긴 살 곳이 못돼. 분위기가 너무 인공적이라서 말이야."


빅토리아 풍의 오래 된 저택 입구에 차양을 이루고 있는 담쟁이덩굴 하며 회색빛 돌벽이나 창살이 달린 창문, 이런 것들은 갤라가 생각해 온 콘이라는 인물과는 전혀 걸맞지 않는 것들이다. 저택은 단순히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고풍스런 품위와 우아함을 풍기고 있었다. 널찍한 정원에는 보기 좋게 자란 나무들이 무성했고 바깥 도로에서는 집 안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되어 있었다. 멀리 큐 공원의 수풀 사이로 왕립식물원 온실의 커다란 유리 지붕이 보인다. 콘이 문을 열고 갤라를 돌아보았다. "여기가 훨씬 쾌적하지. 특히 일요일 같은 때는." 약간

위축되며

갤라는

현관

홀에

들어섰다.

골동품,

고미술품,

페르시아

융단,

신고전주의가 자아내는 정교함, 세라피나에서 본 흑백의 모더니즘을 거부하는 현저한 대조, 세련된 취미와 엄청난 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름답군요." 갤라는 놀란 나머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갤라의 코트를 받아드는 콘의 눈이 짓궂게 빛났다. "뜻밖이라는 듯한 말투로군." "뜻밖이죠. 이렇게 훌륭한 취미를 가졌으리라고는…" 멀리서 도기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누구?" "가정부 벨링 부인이오. 나중에 소개하지. 자, 이리로." 아름다운 응접실에는 훌륭한 목제가구가 놓여 있었고, 우아한 색조의 터키 융단이 바닥 한가운데에 깔려 있었다. 벽에 걸린 질주하는 차 그림만이 유일하게 콘다왔다. 콘은 갤라에게 포도주를 한 잔 따라 주고 자신도 소파에 깊숙이 파묻혀 짙은 잿빛 눈을 갤라에게로 향했다. "아까부터 열심히 쳐다보고 있는데, 뭐가 잘못됐나?" "오늘 당신은 여느 때와 달라요." 갤라가 화사한 린네르의 정장을 입고 있는 데 반해 콘은 몸에 착 달라붙는 색 바랜 진 바지에 낡은 가죽 잠바 차림이다. 그 옷차림이 고집 센 실업가와는 다른 이미지를 느끼게 하고 있다. "돈벌이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야." 콘은 갤라의 마음을 읽은 듯이 말했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세상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가면일 뿐이야." 갤라는 창가로 가서 돌이끼에 가려 부드럽고 온화해진 석상들이 뜰에 늘어선 모양을 바라보았다.


"어디까지가 가면인지 좀처럼 모르겠어요." "진짜 갤라 플레처는 어디서부터일까? 당신도 가면을 쓰고 있소. 모범적인 청결한 유니폼에 모범적인 표정. 당신이 능력있는 물리요법사라는 건 기꺼이 인정하오. 당신에게 치료를 받은 후부터는 아프지 않으니까." "건강이 걱정되지 않아요? 랠리는 그만두는 게 좋아요." "그만두면 뭘 하지?" "결혼하세요. 상대는 얼마든지 있겠죠." "어째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당신은…" 갤라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아무튼 당신은 상대방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남자예요. 하긴 사실상 나도 당신에 대한 건 아무것도 몰라요. 일찍이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것, 옛날에 시험운전사였다는 것밖에는.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니까요." "출생지는 르망이야."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요? 레이서로서는 출발이 좋았군요." 갤라는 웃으며 말했다. "맞아." 그는 일어나 책장에서 가죽 앨범을 한 권 꺼냈다.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지." 갤라는 호기심이 나서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넓은 어깨 너머로 앨범을 바라보았다. 헬멧을 쓰고 보안경을 낀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열광하는 관객들을 배경으로 경주차 옆에 서 있는 흑백 사진이 한 장 눈에 띄었다. 옷차림으로 보건대 대략 20 년 전쯤의 사진인 것 같았다. "아버지야. 옆에 있는 포르셰를 타고 52 시간 장거리 경주에서 우승했을 때지." "크리스토퍼 브랜던." 차 위의 깃발에 씌어 있는 글자를 갤라는 읽었다. 반듯한 이목구비는 콘과 닮았고, 차 옆에 선 모습에서도 콘과 같은 저돌적인 패기가 엿보였다. "자동차 경주의 세계에서는 아직도 아버지 이름이 거론되고 있지. 우승도 여러 번 하셨고 친구도 많았으니까. 이분이 우리 어머니야." 머리도 눈동자도 검고 아름다운 그 여인의 미소는 도전적인 듯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스카프가 바람에 나풀거리는 모습으로, 배경은 역시 자동차 경기장이었다.


에덴이었어.

"이름은

실제로는

이보다

아름다왔지.

결혼하기

전에는

발멩의

모델이었어. 이게 나야." 경주차의 엔진 덮개 위에 앉은 사내아이 사진이었다. l0 살쯤 될까. 머리는 더부룩하지만 천진스레 웃고 있는 얼굴은 어김없는 그다. 그 무렵의 사진이 그 밖에도 몇 장 더 있었다. 호숫가에서 찍은 것, 잔디밭에 배를 깔고 누워 찍은 것, 집안에서 찍은 것 등. 그러나 경기장의 차 옆에서 찍은 것이 대부분으로 자동차 경주와 관계 있는 것뿐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게

내 소년시절이지.

경주장에서

경주장으로

옮겨다니는

생활이었어.

아버지는

톱클라스의 프로 선수였고. 경주가 무엇보다도 좋았던 거야. 어머니와 나는 따라다녔을 뿐이야, 온 유럽을 집시처럼 떠돌아다녔지." 갤라는 진홍색 E 자 모양의 자동차를 둘러싸고 찍은 가족사진을 자세히 쳐다봤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참 행복해 보여요." 갤라는 중얼거렸다. "응, 가슴 설레는 생활이었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늘 변화있는 생활이었어. 그래서 나도 르망에서 태어나게 된 거야. 어머니는 늘 경주를 그만두길 바라셨어, 지금의 당신처럼." 쓸쓸한 듯이 콘은 웃었다. "아무리 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겠지." 갤라는 숙연한 그의 옆얼굴을 흘깃 쳐다봤다. "부모님은 사고로 돌아가셨나요?" "아버님은 한 번도 사고를 일으키지 않으셨어. 익사하셨지." 콘이 앨범 속에서 꺼내 준 누르께한 신문지 조각을 받은 갤라는 거기 있는 그의 양친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각광 받는 카레이서, 아내를 구하려다 익사> 라는 표제였다. "어머, 세상에…" 갤라는 낮게 소리질렀다. 기사에는 에덴 브랜던이 어느 여름날 콘월 해변에서 조류에 떠밀려 가는 것을 크리스토퍼 브랜던이 구하려고 뛰어들었으나 두 사람 다 죽고 말았다고 씌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크리스토퍼가 그 동안 우승했던 경기 이름이 나란히 기록되어 있었고, 뒤에 남겨진 아들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었다. "17 살."


갤라는 가만히 물었다. "그때는 어디 있었어요?" "기숙사에서 대학입시 공부를 하고 있었지." "충격이 매우 컸겠군요." "처음엔 그랬지." 콘은 눈을 들어 갤라를 보았다. "그리고는 무섭게 격분하기 시작했지." "누구에게?" "모두에게. 갤라, 대학엔 가지 않았소. 대신 군에 입대했지만 통제나 규율을 견뎌낼 수 없어 2 년 뒤에 때려치웠지." "그리고 뭘 했어요?" "여러 나라에서 여러 가지 일을 했지. 짐꾼, 뱃사공, 막노동, 기계공 … 뭐든지 닥치는 대로." 갤라는 지금보다 10 살 젊은 콘을 머릿속에 그려 보는 동안에 현재의 콘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여자는?" "물론 있었어. 차에 여자를 태우고 다녔지. 젊을 때는 다 마찬가지야. 다만 곤란한 것은." 콘은 눈을 번쩍 빛내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차 이름밖에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야." "그때도 차 운전은 잘했어요?" 갤라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두세 번 우승했지만 대단한 돈은 되지 않았어. 20 대 초반이 되자 아까 말한 성급하게 성내는 버릇도 차츰 없어졌지. 그리고 어릴 적에 이곳저곳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동경을 가지게 됐지. 집이라든지 토지라든지 안정 … 그런 것에 대한. 그러나 무일푼인데다가 능력도 없었고." "그래서 시험운전사가 됐어요?" "맞아, 다음은 당신도 알고 있는 그대로야." "아주 간단히 설명하는군요, 콘." 갤라는 숨을 한번 크게 쉬어 봤다. "하지만 산다는 건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콘은 앨범을 덮고 갤라 쪽으로 돌아앉았다. "사랑하는 것조차도."


이날 갤라는 머리를 풀어 늘어뜨리고 있었다. 콘은 손을 뻗쳐 그 볼에 흩어진 적갈색 머리를 귀 뒤로 쓸어올렸다. 갤라는 불현듯 자신으로 돌아와 몸을 움츠렸다. "차를 보여 주지 않겠어요?" 갤라는 마치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마력을 떨어내듯 당황하며 말했다. "화제를 돌리는 솜씨가 참 교묘하군." 그의 눈은 얄미울 만큼 머리가 잘 도는 여자라고 말하는 듯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거야. 그런데 아직도 바보 도마뱀 흉내를 내나?" 콘은 잠시 갤라의 눈을 들여다보는 듯하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차를 보러 가지." 정원 안쪽에 옛 창고를 개조해 말끔히 단장된 차고가 있었고, 투명하고 둥근 지붕 밑에 경주용 차 l5 대가 반짝이는 빛을 발하며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마치 새 것처럼 말짱하게 수선하여 칠까지 반들반들하기는 하지만 개중에는 아주 낡은 차도 더러 눈에 띄었다. 콘은 차들의 사이사이로 걸으며 안내해 갔다. "l95l 년 형 페라리. 저기, 차체가 기다란 빨간 차도 페라리 사의 차로 데이토나라고 하지. 이건 애스턴마틴이야, 제임스 본드나 가지고 있을걸. 공무원 정도의 수입으론 어림도 없는 가격이니까. 이쪽은 40 마력의 이탤라. l907 년 것으로서는 속도가 가장 빠른 최신형이었지. 마땅히 박물관에 진열돼야 할 물건이지만…" 콘은 사랑스런 듯이 보네트를 두드렸다. "모두 손수 사들이나요?" "그럴 틈이 없어." 콘은 아쉬운 모양이다. "군에서 알게 된 친구가 대신 사들여 주는데, 그 친구는 기계에 관한 한 모르는 게 없거든." "아직도 다 움직여요?" "마음에 드는 걸 골라 봐요. 식사 후 드라이브나 합시다." "정말?" 갤라는 눈을 반짝이며 차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 중 초현대적인 모양의 빨간 경주차를 골랐다. "저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랜시아 스트라토스. 나도 좋아하는 놈이지. 보는 눈이 있군."


콘은 벙글거렸다. "당신과 똑같은 차야. 아름답고 비논리적이고 변덕스럽고… 그리고 매력적이지. 식사하러 갈까?" 조용한 식사였다. 벨링 부인이 친절하게 시중을 들어 주었다. 콘은 갤라에게 어릴 적 이야기를 시키고는 무엇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콘에게는 갤라의 과민해진 신경을 이완시켜 버리는 어떤 힘이 있었다. 갤라는 냉담하게 마음속에 가시를 품고 있었지만 어느 새 만족감에 빠진 집고양이처럼 얌전해져 버리는 것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약속한 드라이브를 하기 위해 차고로 향하면서 갤라는 자연스럽게 콘에게 몸을 기댔고, 콘은 갤라의 허리에 팔을 돌려 감았다. "당신은 고양이야. 양이 차기 전에는 누구도 접근시키지 않아." 콘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변덕스럽다고 해도 좋고 비논리적이라고 해도 좋아요.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고급 와인과 맛있는 식사가 갤라의 자제심을 일시에 완화시켜 잠재우고 있었다. 랜시아의 엔진 소리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거칠고 사나와 굉장한 속력이 날 것 같았다. "소리가 좋지?" 콘은 싱긋 웃고는 차를 차고 밖으로 끌어냈다. 버튼 하나로 전기장치의 차고 문이 등뒤에서 닫혔다. "벨트를 매는 게 좋아." "너무 속력을 내는 건 아니겠죠?" 막상 눈앞에 닥치니 겁이 나서 갤라가 말했다. "이 차의 한계속도 이상은 내지 않겠소." 갤라는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아주 낮은 곳에 있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빨라요?"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숫자의 갑절만큼." 차가 급작스럽게 출발하는 바람에 갤라는 의자 뒤로 거칠게 밀어붙여졌다. 차는 인적이 드문 거리로 나서자 맹렬한 소리를 내며 옥스퍼드로 향했다. 7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을 내며 숨돌릴 틈도 없는 속력으로 달리고 있건만 숲속은 마치 꿈속 같다. 숲의 안온함은 깊고 조용했다. 랜시아를 한적한 길가에 세우고, 두 사람은 낙엽이 두껍게 쌓인 나무숲 사이를 걸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그물코 같은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들어와 두 사람을 따뜻하게 쬐어 주었지만 응달은 음산한 연병장 같은 한기를 느끼게 했다. 산비둘기 서너 마리가 앞쪽에서 파닥거리며 날아간 것을 제외하고는 주위는 한적하기만 했다. 흐르면서도 전혀 흐르는 듯이 보이지 않는 거울 같은 개울가에서 두 사람은 홀린 듯이 발길을 멈추었다. 갤라는 머리를 콘의 어깨에 기댄 채 반쯤 눈을 감았다.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었으면…" 갤라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능한 일이지." 콘이 다정하게 말하고 갤라의 얼굴을 양손으로 받쳐들었다. "아뇨, 끝내야 해요." 갤라는 잭을 생각해 내고는 슬픈 듯이 대답했다. 콘의 키스는 해질녘의 적막감처럼 갤라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었다. 호수처럼 깊은 콘의 눈이 갤라에게 미소를 던진다. "왜? 삶은 우리 앞에 활짝 열려 있는데…" "무슨 말이에요?" 가슴이 쓰려 오는 것을 느끼며 갤라가 물었다. "당신은 내 인생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 갤라.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여성보다도 말이야." 절실한 목소리다. "키스만으로는 싫소. 당신의 육체가 그립다는 것도 아니야. 당신의 마음, 당신의 영혼이 그리운 거야. 영원히…" "아아…" 느닷없이 눈물이 솟구쳐 갤라는 콘의 양손을 뿌리쳤다. "날 슬프게 하지 말아요, 콘." "무슨 이유가 있다면 제발 말해 주구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란 있을 수 없어. 결코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는 것도." "이유 같은 건 없어요. 또 있다 해도 쉽게 해결될 일도 아니구요." "당신은 나를 우습게 여기는 모양이군. 당신에게 있어 나란 존재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건가?" "맞아요." 갤라는 고개를 쳐들고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그래요.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아요. 모든 게 시간낭비일 뿐이에요."


멀리서 작은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고통이 갤라의 마음을 사정없이 찢어발긴다. 눈물로 범벅이 된 눈으로 돌아보았다. "아아, 콘, 거짓말이에요. 알고 있겠죠? 난 정말 … 정말로 당신이 필요해요. 참을 수 없을 만큼."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이요, 갤라?" "당신을 믿을 수 없는 거예요." 갤라는 흐느끼며 말했다. "당신에게 있어 나는 정복된 한 여자에 불과해요. 이제 당신은 곧 내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겠죠?" 순간 콘은 갤라의 손목을 사납게 잡아당겼다. 갤라는 숨이 막혀 버리는 것 같았다. 콘도 몹시 괴로운 얼굴이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이오?" 아주 침착한 목소리다. 갤라의 푸른 눈에는 눈물이 넘쳐 눈앞이 흐릿해졌다. "무슨 권리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갤라는 양손을 콘에게 꽉 잡힌 채 머리를 수그려 옷소매에 눈물을 닦았다. 그 어린애 같은 모습에 마음이 움직인 듯 콘은 천천히 갤라의 손을 풀어 주었다. "그렇다면 내가 바라고 있는 건 오로지 당신의 육체뿐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콘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콘." 갤라는 눈을 감은 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몰라요. 내가 당신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얼마나 노력했었는지. 싫어서가 아니예요. 당신은 걷잡을 수 없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지만, 나는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당신은, 당신이란 남자는… 아아, 나는 믿을 수가 없어요. 내 심정 아무도 모를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과는 두번 다시 만나지 않겠어요, 절대로. 이것으로 영원히 작별이에요. 이해해 주세요." 금방 쓰러질 듯이 비틀거리며 갤라는 뒷걸음질쳤다. 쉴새없이 눈물이 솟구친다. "아아, 콘, 용서해 주세요." "갤라!" "따라오지 마세요! 조금이라도 날 생각해 준다면 제발 혼자 있게 해줘요."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야. 집까지 배웅하게 해줘." 차분한 목소리였다. "안 돼요. 따라오지 마세요, 제발."


갤라는 비틀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발밑에서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흐트러진 머리는 등에서 붉은 물결을 이룬다. 상처받은 짐승처럼 갤라에게는 숲속의 은신처가 필요했다. 누구도 엿볼 수 없는 장소가. 개울가를 달려 희미한 빛이 새어들어오는 울창한 숲을 뛰어갔다. 숲이 빽빽해지고 그물코처럼 얽힌 나뭇가지가 춤추듯 하늘거린다. 흐느껴 울면서 갤라는 정신없이 뛰었다. 얼마나 달려왔을까. 호랑가시나무 숲속에 이르러 갤라는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억센 가시가 살에 와 박힌다. 넘어져 뒹구는 나무에 기대앉아 갤라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콘은 보이지 않는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비로소 갤라는 복받쳐오르는 감정에 자신을 맡긴 채 한동안을 실컷 울었다. 자기의 행동을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잭과 크리스탈과 운명의 여신이 한없이 저주스러울 뿐이다. 냉기와 정적 속에서 서서히 눈물도 말라갔다. 갤라는 일어나 스커트에 붙은 시든 나뭇잎이며 이끼를 털어냈다. 숲속 반대편 저쪽으로 또 다른 길이 하나 보이는 듯싶었다. 갤라는 걷기 시작했다. 지금쯤 콘은 여자의 좁은 소견머리를 비웃으며 런던으로 가고 있으리라. 2, 3km 떨어진 곳에 버스 정류장 같은 것이 보였다. 런던으로 가는 버스가 있을지도 모른다. 완전히 잎이 져버린 겨울 풍경의 쓸쓸함에 또다시 눈물이 솟구쳤다. 그때 등뒤에서 헤드라이트가 비쳐 왔다. 콘이었으면 하는 솔직한 기대와 또다시 고개를 쳐드는 강한 불신으로 순간 갤라는 긴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낡은 맥시였다. 차가 곁에 와 섰고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중년부인이 핸들을 쥔 채 염려스러운 듯 내다봤다. "괜찮겠어요?" "런던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좀 일러 주세요." "나도 런던으로 가는 중이니까 태워 드리죠. 설마 이런 시간에 숲속을 배회하려는 생각은 아니겠지요?" 말투로 보아 교양있는 부인 같았다. "네, 정말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느끼며 갤라는 말했다. 녹초가 돼서 좌석에 몸을 던지자 작은 차는 또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서너 마디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갑자기 졸음이 덮쳐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8 집에 돌아올 무렵엔 격렬했던 슬픔도 아득하게 느껴지고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콘이나 가족 중 어느 한쪽을 택일해야 하는 문제라면 이미 결론은 내려졌다.


인생이 로맨틱한 영화 같은 거라면 설사 가족을 악마에게 갖다 바치는 일이 있더라도 콘을 선택하리라. 하지만 영화 속의 여주인공들은 모두 자기 애인을 완전히 신뢰하는 데 반해 나는 지금 콘을 믿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 앞으로도 마찬가지리라. 크리스탈이 불러일으킨 소동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더할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주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으로 하여금 콘래드 브랜던을 세상에서 가장 저열하고 사악한 인간이라고 믿게 만들었고, 또 그를 증오하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 내 행동은 옳았다. 가족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이후 콘이 무슨 말을 해오든 결코 상대하지 않으리라. 그후 며칠이 지나도록 콘으로부터는 아무 소식이 없었고, 갤라의 다짐은 차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다. 전화가 오면 보기좋게 거절하리라. 그러면 잭에 대한 신의도 증명될 거고, 아울러 콘의 자존심은 상처를 받겠지. 그의 매력에 호락호락 빠져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나 끝내 전화는 오지 않았다. 갤라는 차츰 동요하기 시작했다. 어느 새 진심으로 콘의 연락을 기다리게 된 것이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잭이나 부모에 대한 신의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단지 콘이 그리울 따름이다. 금요일 밤이 되자 기대도 불안도 모두 절망으로 변했다. 주말에는 집에 가서 가족과 함께 보냈다. 하지만 옛날에 쓰던 좁은 침대에서 자면서도 갤라는 꿈속에서 콘을 만났다. 일요일 아침엔 잭도 와서 모처럼 온 식구가 한 데 모여 옛날의 단란함이 되살아났으나 갤라는 좀처럼 흥이 나질 않았다. 무엇보다도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콘에 대한 얘기를 의식적으로 회피하는 분위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오후가 되자 갤라는 적당히 둘러대고 빠져나와 곧장 런던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줄곧 액셀을 밟아댔다. 이 극도의 초조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남은 방법이란 한 가지뿐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콘을 만나 얘기하자. 모든 이유를 설명하고 그런 다음 확실하게 고별을 하자. 콘을 만나러 간다는 건 한심스런 노릇이다. 스스로 그에게 굴복해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굴욕감을 느낄 여유조차 없이 단지 콘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 열정을 어떻게 식힐 수 있으랴. 갤라는 숨을 한번 깊이 들이마시고는 그대로 시내로 향했다. 일요일 저녁 이 시간이라면 콘은 호텔에 있을 것이다. 호텔 옆 길가에 차를 주차시키고 갤라는 용기를 내어 로비로 들어갔다. "브랜던 씨는 이 시간엔 아무도 만나지 않으십니다." 마호가니로 호화롭게 장식된 프런트에서 안내인이 말했다. "전하실 말씀이라도…?"


갤라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 잿빛 옷을 입은 날씬한 여자가 나타났다. "어머나, 어서 오세요, 갤라. 어쩐 일이세요?" 안내인이 사정을 설명하자 코럴은, "그래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라고 말한 뒤 갤라에게로 왔다. "콘은 지금 사무실에서 서류를 검토하고 계세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틀림없이 만나고 싶어하실 거예요. 제가 안내해 드리죠." "고마와요." 갤라는 코럴과 함께 로비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지난번엔 기분을 상하게 해드려서 죄송했어요. 친구분인 리차드 씨는 2 시까지 있다 가셨어요." "그래요? 귀찮게 하진 않던가요?" 갤라는 가급적 명랑하게 보이려고 애썼다. "그 정도는 보통이에요. 워낙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코럴은 갤라를 가죽으로 된 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갤라는 이 빼어난 미인에게 질투를 느끼면서 굳어진 얼굴을 애써 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콘은 잠시도 당신을 놓아 주지 않겠지요?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거나 아니면 다른 상대로." 갤라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나는 이곳 직원이에요, 콘은 고용주고. 난 내 할 일을 할 뿐이죠." 코럴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겠지요. 당신은 그의 오른팔이니까." 갤라는 심술이 났다. "그의 왼팔은 또 어떤 여자죠?" "분명히 말하지만 난 콘의 애인은 아니예요, 갤라." 여전히 부드러운 말로 코럴이 대답했다. "내게 신경쓰실 필요없어요." "아아, 미안해요." 갤라는 가만히 코럴의 팔에 손을 가져갔다. "용서하세요, 내가 좀 지나쳤어요. 너무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었나 봐요. 난 원래 이 모양이에요." 가볍게 한숨을 지으며 사과했다. "그런데 코럴…"


갤라는 무슨 말인가 더 하려 했으나 단지 입술 끝에서 맴돌 뿐. 거무스름한 피부를 가진 코럴의 입술이 묘하게 움직였다. "내가 콘의 애인이었던 적이 있는지 알고 싶은 거겠죠?" "그래요. 난 사실 당신의 조언이 꼭 필요해요." 갤라는 순순히 인정했다. "난 남에게 조언 같은 건 하지 않아요. 남의 말도 잘 듣지 않구요." 코럴은 몸을 벽에 기댔다. "여기서 일하기 전에 난 참혹한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 이를 테면 아름다운 것이라든가 훌륭한 일, 멋진 상사, 언제나 새롭고 신나는 생활 등이 내 손에 들어온 거예요. 모두가 콘을 만난 덕분이죠. 그러나 내가 만일 콘과 연애관계에 빠진다면 이러한 현재의 지위가 위태로와진다는 걸 난 잘 알고 있어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결국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자리를 잃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자리만큼은 잃고 싶지 않아요. 때문에 설혹 내가 콘 브랜던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더라도 아마 난 결코 내색하지 않을 거예요." 한참 동안 갤라는 코럴의 검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눈동자에서 담담하게 자립한 한 여성을 느낄 수 있었다. "미안해요, 시간을 끌었군요. 여기예요." 코럴은 복도 끝으로 갤라를 안내하더니 떡갈나무로 만들어진 문 하나를 열며 말했다. "플레처 양이 오셨어요, 콘." 그리고는 갤라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행운을 빌겠어요. 당신이 바라는 것이 이뤄지도록." 어두운 방에는 책상 위의 스탠드 하나만이 켜져 있었다. 불빛이 콘의 얼굴을 희미하게 비추어 그의 남성미를 훨씬 돋보이게 했고, 들고 있는 금빛 펜과 입고 있는 순백색 실크셔츠 역시 희미한 조명 속에서 인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콘의 시선은 얼음처럼 싸늘했다. "돌아온 탕아인가?" 콘은 부드럽게 말하며 펜 뚜껑을 덮고 의자 등에 몸을 기댔다. "꼭 해야 할 얘기가 있어요." 갤라는 목이 탔다. 지금의 콘은 접근하기 어려운 거대한 실업가, 성공한 수완가다. 일요일에 보여 주었던 자상하고 느슨한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방해가 되었다면 용서하세요." 갤라가 말했다. "괜찮소. 어차피 위스키를 마실 시간이었으니까."


콘이 캐비닛을 턱으로 가리켰다. 갤라가 위스키 병을 찾아내어 두 개의 크리스탈 잔에 따르고 있는데 콘이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과하러 온 거겠지?" "그런 점도 있어요. 그후 무사히 돌아왔으니 걱정은 안해도 돼요. 어떤 부인이 태워다 줬어요." "아아, 그 맥시! 나도 알고 있소. 내가 당신 뒤를 따라갔었으니까." 갤라는 그날의 부끄러운 행동이 생각나 눈을 내리깔았다. 콘은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위스키를 받아들고는 3 분의 1 쯤 쭉 들이켰다. "자, 무슨 일인지 말해 봐요." 갤라는 가죽 의자에 앉아 마음을 단단히 가다듬었다. 위스키가 뱃속을 따뜻하게 해준다. "크리스탈 워렌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세요?" 갤라는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크리스탈?" 콘은 위스키를 손에 든 채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아, 기억하고 있소. 그런데 도대체…" 콘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른 듯 말을 이었다. "그래! 그렇게 된 거였나?" "네." "크리스탈 워렌과 잭 플레처.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어째서 그 두 이름이 연결되지

않았을까?

몇 주일 동안이나

머리를

짜며 생각했는데도

않더라니!" "당신에게 있어선 대단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겠죠." 해야 할 말을 하고 나니 마음은 허탈해지고 피로만이 남는다. "잭은 내 오빠예요. 당신의 그런 짓은 오빠에겐 엄청난 타격이었어요." "당신 오빠였나? 오빠가 한 분 더 있었지. 왜 그 파일럿인…" "맞아요. 마이클이죠. 당신 때문에 우리 가족 모두가 고통을 받았어요." "그랬겠지." 콘은 태연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갤라. 내 탓이 아니야."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갤라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끝내

떠오르지


"하지만 그건 할 짓이 아니었어요. 잔인하기 짝이 없는 짓이에요. 그래서 난 당신을 믿을 수 없었던 거예요. 아무리 매력적이라 할지라도 난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까. 진짜 콘 브랜던이 어떤 사람인지." 갤라는 일어섰다. 작별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그걸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앉아!" 콘이 격하게 성을 내며 말했다. "갤라, 그건 완전히 오해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멋대로 말하는 게 아니야." "난 우리 오빠에게 무슨 일이 생겼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은 그때 아직 어린애였어." 콘은 답답한 듯 말했다. "21 살이었어요. 그런 것쯤은 알 만한 나이죠. 날 속이려 들어도 소용없어요." 갤라의 온몸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당신 오빠는 잘못 알고 있었어. 크리스탈 같은 여자와 결혼하려 했던 것부터가 어리석었던 거지." "잘도 지껄이는군요. 당신은 그때 잭에게 박살났어야 했어요." "그러나 잭에겐 그럴 용기도 없었어." "아니예요. 오빤 당신 같은 건달하곤 달라요. 예의를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참았던 거예요." "너무나 고상했던 나머지 계집종이 필요했던 게로군. 크리스탈은 발정한 암코양이처럼 나를 쫓아다녔소. 그나마도 일주일 만에 딴 상대를 찾아 내빼 버리긴 했지만." "옳아, 그러니까 오빠로부터 크리스탈을 빼앗은 건 순전히 자선행위였다는 말이군요? 그런다고 내가 속을 것 같아요?" "크리스탈 같은 여자는 거저 줘도 싫소. 잭이야 달랐겠지만." "이 사기꾼!" 갤라는 따귀라도 한 대 갈길 기세로 덤벼들었으나 억센 콘의 손에 잡혀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콘의 눈에 노기가 번득였다. "한 번만 더 그런 소릴 했단 봐라, 요 쬐그만 하룻강아지 같으니라구."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주 옛날 일이야. 설사 내가 그런 짓을 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나만 아니었다면 얌전히 결혼했을 거라고 생각하오? 크리스탈이 어떤 여자인지 알기나 해?"


뜻밖의 질문이었다. "오빠는 크리스탈을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갤라는 모호한 대답을 했다. "그러니까 잭은 구제불능이란 말이오, 알겠소?" "돌아가겠어요." 갤라는 눈물 때문에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잭 이전에 크리스탈이 몇 명의 남자와 관계가 있었는지, 그후에도 또 몇 명의 남자와 어울렸는지 당신은 알기나 해?" 콘이 계속했다. "그런 엉터리 같은 얘긴 듣고 싶지 않아요." "크리스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싶진 않지만 난 아무튼 그녀의 입을 통해서 당신 오빠 얘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소. 잭이 그녀와 결혼했다 해도 아마 오래 가지는 못했을 거요." "뭐라구요? 어떻게 그런…" "그리고 당신은 우습게도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갤라는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이젠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좋을 대로 생각해요. 하지만 앞으로 내게 접근하면 오빠가…" "오호, 오빠가? 왜 핸드백으로 날 때려 주기라도 하겠대?"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콘의 눈이 익살맞게 휘둥그래지더니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의자에 기대 앉았다. "이것 봐, 갤라. 런던에 여자가 당신밖에 없게 된다 하더라도 결코 당신에게 접근하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시지. 런던 경시청을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 콘은 울적한 듯이 펜 뚜껑을 열더니 서류를 향해 바로 앉았다. "그 밖에 용무가 또 있소?" "없어요." 갤라는 겨우 말했다. "그럼 실례하겠소." 콘은 모른 체하고 일을 시작했다. 갤라는 멍청해져서 쓰러질듯 비틀거리며 방을 나왔다. 차로 돌아와 눈을 꼭 감았다. 마음먹었던 대로 해낸 것이다. 이로써 모든 것은 끝났다. 그러나 언쟁이나 고통쯤은 각오한 터였지만 콘의 얼음 같은 냉랭함은 차마 생각해 보지도 못했었다. 만약 콘이 조금이라도 괴로와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갤라의 마음이 이처럼 비참하진 않았을 텐데.


그렇긴 하지만 갤라는 아무튼 가족을 위해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좋은 가문과 물리요법사의 흰 가운에 부끄럽지 않은 바른 처사였다. 이젠 모두들 나를 가만 내버려 두겠지. 아무 구애받지 않고 단지 콘과의 결별만을 마음껏 슬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열대의 바다처럼 푸르고 맑은 수영장의 물이 무거운 잿빛 하늘을 가볍게 떠받치고 있었다. "물을 힘껏 차, 타퀸." 갤라는 마구잡이로 텀벙대는 아이를 밀면서 뒷걸음질쳤다. "더 힘껏!" "하고 있잖아요!" 타퀸은 물을 들이킨 듯 신경질을 부렸다. "자, 다시 한번 뒤로 되돌아가 봐. 저쪽 끝까지 가면 이제 마음껏 놀아도 돼." 타퀸은 힘차게 물을 찼다. 드디어 훈련은 끝나고 갤라는 아이를 어머니에게 데려다 줬다. 다음 환자의 예약시간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었다. 풀 가에 앉아 있는 갤라는 요 며칠 새 부쩍 야위어 있었다. 식욕이 전혀 나질 않아 거의 아무것도 먹질 못했던 것이다. 그러잖아도 긴 갤라의 다리는 전보다 한층 길고 가늘어진 것 같았다. "다이어트 중이야? 아주 보기 좋은데." 올려다보니 앨러나가 웃으며 서 있었다. "보기 흉하게 말랐지, 뭘. 일은 어떡하구?" 갤라가 물었다. "한 시간쯤 쉬었다가 보고서를 훑어볼 참이야." 앨러나는 물 속에서 텀벙거리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하반신 마비자 치료를 하고 있었나 보지?" "응." 갤라는 머리의 물기를 닦아내고 몸을 뒤로 기댔다. 요즈음은 늘 피곤하다. "피로를 빨리 푸는 데 뭐가 좋을까?" "독한 진이 좋지만 아직 3 시밖에 안 됐으니…" 앨러나는 보고서를 가슴에 안고 갤라 옆에 가만히 웅크리고 앉았다. "좀 괜찮아? 금주 들어 마치 산송장 같애." "감긴가 봐. 못 당하겠어요." 갤라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럼 항생제를 좀 줄까?" 갤라는 고개를 저었다.


"고맙지만 괜찮아요, 앨러나." "그래… 그런데 얼핏 듣자니까 너 콘 브랜던과 교제하고 있다면서?" "괜히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얘기겠지. 아마 심심해서 몸들이 근지러운 모양이에요." 갤라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그러게 말이야! 요전까지만 해도 콘이라면 치를 떨던 네가 그와 데이트를 한다니…" "아무튼 다 끝난 일이에요." 갤라는 당황해 하며 짧게 대답했다. "옳아, 그때 그 일 때문이겠구나." 앨러나가 아는 체를 하며 말했다. "어머, 아무 일도 아니었어." 갤라는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았다. "소문을 퍼뜨린 사람은 리차드겠지?" 앨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갤라는 수다스런 리차드가 저주스러웠다. "애당초 리차드가 그런 호텔에 데리고 갔기 때문이야. 그곳이 우연히 콘래드의 호텔이지 뭐예요. 콘이 우리를 보더니 억지로 끼어들어 훼방을 놓았어. 덕분에 데이트가 엉망이 됐지만." "리차드의 얘기는 다르던데? 그는 콘과 코럴인가 하는 그 여비서를 아주 좋게 말하던데." 앨러나의 눈은 재미있다는 듯이 빛나고 있었다. "콘이 리차드에게 술을 잔뜩 먹였어. 리차드는 곤드레가 돼서 아마 콘이 의자 밑에 폭탄을 장치해도 몰랐을 거예요." 아직도 화가 난다는 듯 갤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앨러나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시늉을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콘은 원래 좀 짓궂은 데가 있어. 하지만 그런 점이 오히려 매력적이잖니?" "그럴 수도 있겠죠." 갤라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래도 그건 적어도 콘이 널 좋아한다는 증거 아니겠어? 갤라는 좋겠네." "어머, 아니예요. 다시는 안 만나요. 꼴도 보기 싫어." "콘이 싫다는 거야?" "앨러나, 언닌 그를 훌륭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까지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예요." "글쎄…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나 보지?"


"그래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저런." 앨러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네가 정말로 그를 대수롭잖게 여긴다면 지금 이처럼 우울해 하지는 않을 거 아니니?" "내가요? 지금? 천만에요." "그래?" 갤라는 일어나 타월로 야윈 몸을 감싸며 말했다. "지금 난 아무렇지도 않아요. 물론, 전엔 그를 저주했지만 이젠 아주 담담해요. 아무 관심도 없으니까." 멍청하니 입을 벌리고 앨러나는 갤라가 사라져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갤라!" 갤라는 돌아다보지 않았다. 눈물이 글썽해진 눈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따 봐요." 겨우 소리치고는 흰 탈의실 안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또다시 새도매저키즘 시간이 됐군요, 미스 플레처." 이 남자는 병원에 온 후로 볼 때마다 이런 수작을 건넨다. "안녕하세요, 불렌 씨." 겔라는 역겨움을 겨우 참으며 태연하게 대했다. "그렇게 새침 떨지 마쇼. 그러잖아도 검은 가죽옷에 채찍을 든 모습을 연상시키니까." 히죽거리며 그는 천연덕스럽게 갤라의 책상에 엉덩이를 올려놓았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으세요?" 갤라가 새치름하게 말했다. "소매나 걷어올리세요." "아이스 프린세스라더니 역시 그 말이 맞구만. 하지만 모두가 당신을 칭찬하더군. 나를 당신에게 보낸 건 내 친구였다고 전에 말한 적이 있지요?" "수없이 많이요." 무뚝뚝하게 갤라는 말했다. "그랬던가요? 버티 네일러라는 놈인데, 당신이 그 친구에게 기적을 낳아 주었다나?" "당신도 곧 좋아질 거예요." 갤라는 칭찬해 주는 말이 그다지 싫진 않았다. 이 사내는 사고로 팔 근육과 힘줄이 심하게 파손되어 오른손은 거의 쓸 수 없을 지경이 됐고, 회복하는 데는 아마 몇 년이 더 걸릴 것이다.


"자, 내 손을 꼭 쥐어 보세요." 갤라는 지시했다. "아이구, 어찌 감히." 사내는 계속 싱글대며 갤라의 손 안에 있는 자기의 차갑게 시든 손가락을 움직이려고 애썼다. 시뻘건 얼굴에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힘을 주지만 손은 희미하게 떨릴 뿐이다. "젖 먹던 힘까지 다 낸 거요." 환자는 신음하듯 말했다. "비관할 건 없어요. 앞으로 차츰 좋아져요." 갤라는 격려했다. "앞으로 몇 주일이나 더 걸릴까요?" "몇 주일이라고요? 몇 년은 더 걸려야 돼요, 잘 알고 계시겠지만." 갤라는 환자를 동정하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 말이오, 나는 두서너 달 있으면 결혼해요. 한 손밖에 쓰지 못하는 남자라면…" 불렌은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침울하게 내려다봤다. "약혼녀도 대범하게 보아 주실 거예요." "우리 크리스는 몹시 까탈스런 여자예요. 대범하게 보아 주지 않을 겁니다. 참, 생각나는 게

있군요.

전에

당신

얘기를

했더니,

사람

말이

자기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더군요." "그래요?" "맞아요, 당신 오빠를 수년 전에…" 갤라는 후닥닥 얼굴을 들었다. "그 사람 이름이 크리스라고 했던가요?" "크리스 워렌." "크리스탈이겠죠?" "자기는 그렇게 말하지요. 하지만 나는 크리스로 부르고 있어요.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 모양이지만." "당신이? 크리스탈 워렌과 결혼을?" 갤라는 어리둥절했다. 불렌의 붉은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물론 내가 그녀보다 나이가 많은 건 사실이죠. 하지만 여자는 연상의 남자를 좋아하지 않아요? 경험도 풍부하고 그 밖에 여러 가지 이유로." 그는 거기서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다. "이 손만 말을 듣는다면."


"하지만 크리스탈은 미국에 있는 줄…" 크리스탈의 이름을 들은 갤라는 마음의 평정을 잃었다. "저, 실례지만… 약혼하신 지 얼마나 됐어요?" "몇 달 됐죠. 그녀는 미국에서 상품광고 모델을 하고 있었죠. 2, 3 년 됐나요. 괜찮은 생활이었던 모양이지만 역시 모국이 좋아서 돌아왔대요. 그러다 웨스트엔드 클럽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알게 됐죠. 굉장한 클럽이에요." "클럽?" "네, 그녀는 클럽의 마담이었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파요." "어머, 미안해요. 방금 나와 같이 한 훈련 혼자서도 할 수 있겠어요?" "해보지요." "클럽 마담?" 갤라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굵직하고 억센 손이 책상 위에서 느릿느릿 쥐어졌다 펴졌다 하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요, 그녀로선 좀 타락한 셈이죠. 무슨 말인지 알겠소? 하지만 지금은 거기서 발을 뺐소. 은퇴한 거죠." 그는 자랑스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조그마한 아파트를 사줬거든요. 좋은 차도 사주었죠, 미니 메트로요. 옷이며 뭐든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 정도의 돈도 말이오. 약혼녀에게 그런 일을 계속시킬 순 없으니까. 제아무리 굉장 한 클럽이라 할지라도." "굉장하시군요." 건성으로 대꾸하면서 갤라는 임상 카드에 손을 뻗쳤다. 갤라는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크리스탈을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기회를 놓치기에는 너무나 깊숙이 콘에게 빠져 있는 것이다. "불렌 씨! 크리스가 나를 만나 줄까요?" "물론이죠. 친구가 없어 늘 적적해 했으니까요." 불렌은 신이 났다. "크리스하고는 얘기하고 싶은 게 많아요." 갤라는 불렌을 웃으며 바라봤다. "그 손 훈련이 끝나는 대로 크리스의 주소를 적어 주세요." 과연 렌 불렌은 은퇴한 약혼녀에게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날 밤 차에서 내렸을 때, 갤라는 크리스탈이 사는 아파트를 보고 샘이 났을 정도였다. 아파트는 녹지가 잘 조성된


조용한 구역에 있었고, 손질도 잘되어 있었다. 아름답고 아담한 정원도 딸려 있었고, 주차장에는 다른 차와 함께 미니 메트로가 보였다. 이런 생활과 주거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 렌은 매우 고생하며 일했을 것이 틀림없다. 갤라는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이층 복도를 얼마쯤 지나 크리스탈이 산다는 l2 호실 문을 노크했다. 문이 열리고 금발 여인이 새빨갛게 칠한 손톱을 반짝거리며 나타났다. "어머나!" "크리스탈, 기억하세요? 갤라 플레처예요." "잭의 누이동생이죠? 물론 알고 있어요. 많이 변했군요." "당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크리스탈은 여전히 아름답고 자그마한 얼굴도 육체도 잘 다듬어져 있었다. 커다란 눈도, 벌에 쏘인 것 같은 빨간 입술도, 뾰족한 턱도 마찬가지다. "들어가도 될까요?" "그러세요." 크리스탈은 몸을 비켜 갤라를 들어오게 하고 문을 닫았다. "그래, 잭은 어때요?" "잘 있어요." 방안의 가구며 카펫 등 모두가 고급제품으로 치장된 아파트였으나, 어디를 보아도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텔레비전이 켜져 있고, 그 앞의 카펫에는 먹다 만 포테이토칩이 담긴 접시가 있었다. "실례가 되었군요. 식사중이었나 본데?" "네? 아, 그건 엊저녁 거예요." 크리스탈은 벌써 의자에 앉아 한쪽 손에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었다. "렌이 주소를 가르쳐 주었군요?" "네." 갤라는 벗어던진 옷이 걸쳐 있지 않은 의자를 골라 앉았다. "난 이곳을 새장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그가 여기에 나를 가두어 두고 있으니까요." 그녀는 손가락을 펴고 자기의 솜씨를 황홀한 듯 감상했다. "당신은 경기가 좋은 모양이던데요. 물리 뭐라던가, 무슨 사라던가 그거 수입이 좋지요?" "그렇지도 않아요." 3

만에

크리스탈을

만나는

갤라는

어쩐지

어색한데,

후회스럽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렌처럼 손이 큰 약혼자를 만나서 당신이야말로 잘됐군요."

크리스탈은

부끄럽지도


"잘됐다고요? 농담이겠죠. 렌 불렌이 손이 크다고요? 흥, 내놓는 건 냄새나는 땀뿐인걸요. 아유, 지긋지긋해." 갤라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 아파트도 렌이 당신을 위해 준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거야 나를 독차지하고 싶으니까 그런 거예요. 여긴 어디를 가기에도 멀어요. 아무것도 없는 곳이고 갇혀 있다는 느낌뿐이에요." "하지만 차도 사주지 않았어요?" "치, 그까짓 거. 겨우 중고 미니 메트로예요. 굉장한 구두쇠예요, 그 늙은이. 커피 마시겠어요?" "네, 그러죠." 주방에 있는 크리스탈을 갤라는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은 아직도 철없는 어린애 같다. "지겨워 죽겠어요." 크리스탈은 컵을 달그락거리면서 푸념을 늘어놓았다. "렌은 평범해서 재미도 없는데다가 나보다 훨씬 늙었거든요." "그런데 어째서 결혼할 생각까지 하게 됐어요?" "난 이제 스물아홉이에요. 정상적인 결혼을 하기엔 너무 늙었잖아요?" 크리스탈은 얼굴을 찡그렸다. "적어도 렌에겐 돈이 있으니까 좋다고 생각했던 거죠. 얼마 동안은."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지 않나요?" "글쎄요." 크리스탈은 김이 나는 인스턴트 커피를 두 잔 날라왔다. "손은 다시 쓸 수 있게 되나요?" "2, 3 년 걸릴지도 모르지만…" "네? 그렇게나요? 난 원래 불구자는 싫어해요." "불구자는 아니예요." 갤라는 힘주어 말했다. 그녀의 매정함에 기가 막힐 뿐이다. "아직 상당히 통증을 느끼지만." "알고 있어요. 늘 그 얘기만 하는 것도 지긋지긋해요." 말없이 갤라는 다시 방안을 둘러보았다. 어지럽게 흐트러진 레코드, 더러워진 옷가지, 먹다 남은 음식 접시 … 구역질이 났다. 크리스탈은 이렇게 타락할 수밖에 없는 천박한 여자였던가. 갤라는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오빠 일로 불평하러 오셨나요?"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크리스탈이 물었다. "아니예요, 그건 이미 지난 일이잖아요. 나는 다만 얘기를 하러 온 것뿐이에요." "그래요? 잭은 아직 그 건축회사에 다녀요?" "네, 잘 다니고 있어요." "그 사람이라면 그렇겠죠." 크리스탈은 후우 연기를 내뿜고는 약간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는 아직도 당신 얘기를 하고 있어요. 지금도 당신을 잊지 못하는 건지도 몰라요." "정말이에요?" "정말이구말구요. 당신에게 그토록 줄기차게 애정을 보내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매우 관대하고요." 크리스탈의 푸른 눈이 빛을 발했다. "그거 정말이죠? 아이 좋아라! 아주 옛날에 잊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갤라는 곧 후회했다. 상대방이 다름아닌 잭인만큼 크리스탈이 그럴 생각만 있다면 잭은 또다시

그녀에게

넘어갈

것이다.

잭이

크리스탈과

결혼했어야

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느냐던 콘의 말을 생각해 냄과 동시에 갤라는 자신이 여기에 온 이유를 생각했다. "그런데 콘래드 브랜던과는 어떻게 됐나요, 헤어졌나요?" "그래요." 크리스탈은 불쾌한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집에 왔을 때 그와 바베이도스로 간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되지 않았나요?" "내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았는걸요. 바베이도스에서 무일푼의 떠돌이 신세가 되고 말았어요. 운 좋게 미국으로 간다는 남자를 만나기는 했지만…" "콘이 거기서 당신을 버렸다는 건가요?" 갤라는 충격을 받았다. "뒤에 남겨지고 만 거예요." "믿어지지 않아요. 바베이도스까지 데리고 가서 내팽개치다니." "데리고 간 건 아니지만…" "네?" "난 그에게 푹 빠져 있었어요. 그쪽도 상당히 내게 열심이었다고 생각해요, 잭과의 관계를 몰랐을 때까지는. 그 사실을 안 후론 그는 날 상대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가 바베이도스로 간다는 말을 듣고 나도 무작정 같은 비행기표를 샀던 거예요." 너무도 뜻밖의 말에 갤라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잭과 결혼식을 올리기 직전이었으면서 어쩌면…"


크리스탈은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결혼 직전의 우울증이라고 나 스스로 이름 붙이고 있는데요, 사실은 지금도 한창 그 우울증에 빠져 있어서 렌이 싫어진 거예요. 늘 이래요. 누군가가 구혼해요. 하지만 결혼식이 다가오면 갑자기 싫어지는 거예요… 어쩐지 마음이 불안해지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만 싶어져요, 심리적인 거라고 생각하지만." 갤라의 표정도 눈치채지 못하고 크리스탈은 저 혼자 신이 나서 지껄였다. "콘 브랜던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그는 정말 매력적인 남자예요. 난 그를 어느 파티에선가 처음 만났는데, 그때 잭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밤새 그와 춤을 추었어요. 이상적인 남자를 발견했다고 생각했지요. 그때도 한창 결혼 직전의 우울증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일이 더 우습게 되고 말았던 거예요." "그러니까… 콘이 당신을 유혹하지는 않았다는 건가요?" "유혹해 주길 바랐지만… 아, 그를 붙잡을 수 있었더라면 지금쯤은 행복할 텐데. 그러나 그에게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던 모양이에요." "당신은… 한 번도 그와 잠자리를… 같이 한 적은 없었나요?" "나로서는 그럴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예요. 그리고 내가 그럴 생각만 있다면 대개는 잘돼 나가는데… 그와는 가벼운 키스 한 번 못해 봤어요." 크리스탈은 한숨을 쉬며 담뱃불을 비벼 껐다. "바베이도스까지 쫓아갔을 때도 나더러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바보라며 그대로 곧장 항공사로 가서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사주더군요. 하지만 난 또 거기서 아까 말한 양키와 알게 되었기 때문에 뉴욕으로 가서 모델 소개소에 들어간 거죠." 그녀는 자랑스럽게 신상 얘기를 늘어놓고 있었는데, 그러는 사이 갤라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콘과 관계가 있다고 했었어요. 그가 데리고 가주는 거라고 했잖아요?" "어쨌든 크게 틀린 건 없잖아요." "내겐 중요한 일이에요. 자세히 말해 줘요." 갤라는 격해 있었다. "진정하세요. 나는 다만 이제 헤어졌으니 헤어지자고 말하는 것보다는 그렇게 말하는 게 잭에게 상처를 덜 줄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당신네 가족은 아무도 콘을 모르니까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만약 내 생각대로 된다면 그것은 사실일 수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콘은 어떻게 되지요? 그의 평판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건가요?" "흥, 그런 일로 남자의 평판이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아요. 기껏해야 순진한 사람은 아니라는 정도로 끝나겠죠."


갤라는 아연했다. 지금까지 믿어온 것은 모두가 근거없는 오해였던 것이다. 나쁜 쪽은 콘이 아니라 크리스탈이었다. 단지 콘에게 잘못이 있다면 이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여자의 눈에 들었다는 사실뿐이다. 잭과 가족에 대한 잘못된 의리를 지키기 위해 갤라 자신도 콘을 비난하고 그를 거절해 버렸다. "그래, 잭은 아직도 날 잊지 않고 있단 말이죠?" 크리스탈은 또 다른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사실은요. 나도 잭을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어요." "오빠에게 접근한다거나 하면 절대로 용서치 않을 거야!" 갤라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억제할 길 없는 분노로 온몸이 굳어져 오는 것 같았다. 크리스탈의 깜짝 놀란 낯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갤라는 그 방에서 뛰쳐나왔다. 당장 콘에게 가서 용서를 빌어야 한다. 끓어오르는 분노는 이내 불안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3 년 전 우리 집 응접실에서 크리스탈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인 거짓말이 자칫하면 지금 자신의 인생을 조각낼 판이다. 콘이 내 말을 들어 주지 않는다면 어쩌지? 이미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져 있다면? 만약…? 9 드넓게 펼쳐진 황야는 차가운 비바람에 휩싸여 있었다. 매섭게 추웠다. 그렇기는 하나 습지가 온통 노란 바다로 보일 만큼 여기저기 아름다운 수선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구름이 갈라질 때마다 그 틈새로 푸른 하늘이 내비치곤 했다. 이렇게 많은 관중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작은 마을에 아마 수천은 모인 것 같았다. 인파가 모이는 곳이면 으레 있게 마련인 가설 노점도 더러 눈에 띄었다. 먼지투성이 도로를 가로질러 걸쳐진 현수막이 바람에 찢어질 듯 펄럭이고 있었다. 거기에는 진홍색으로 <무어 랠리 제 5 구간>이라고 씌어 있었다. 4 시 반, 출전한 차들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보통 저녁식사 때가 돼야 들어오고, 들어온 후에도 몇 시간만 지체할 뿐이라고 한다. 그 동안 식사를 마치고 조금이라도 잠을 자둔다. 최종 코스인 제 5 구간 경주는 그후에 시작된다. 제한속도가 없는 밤샘 경주다. 갤라는 이런 내용을 여러 사람과의 얘기를 통해 알게 됐다. 그리고 복잡한 채점방법에 의해 점수가 매겨지고, 바로 지금은 콘이 가장 선두로 달리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갤라는 종이 컵에 든 커피를 사가지고 수백 대나 되는 차들과 함께 마을 앞 광장에 세워 둔 자기 차로 돌아왔다. 월요일 밤 크리스탈의 아파트에서 세라피나 호텔로 직행한 갤라는 콘의 부재를 코럴에게 들어서 알았다. "언제 돌아오나요?"


"그건 확실치 않아요. 긴급한 용무가 있어 경주 후에 곧바로 뉴욕으로 갈지도 모른다고 했거든요." "미국에?" 갤라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급히 서두르면 랠리 경기장에서 경주를 하는 중간에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경주도 재미있을 테고요. 나도 늘 즐기는 편이지요." 그럴 시간을 만들기 위해 갤라는 작업시간표를 조정하는 등 거의 제정신이라고 할 수 없는 하루를 보냈다. 다행히 로저는 협조적이었다. 런던을 떠난 갤라는 가능한 한 최대한의 속력으로 북으로 가는 간선도로를 질주했다. 밤엔 운 좋게 민박을 구할 수 있었지만 잠은 거의 설쳤다. 절망과 희망이 끊임없이 그녀의 내부에서 싸우고 있었다. 콘은 아주 자존심이 강한 남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의 눈은 증오에 가까운 빛을 발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숲에서 보낸 그날엔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던가? 맞다.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그것을 내가 냉혹하게 거절했던 것이다. 앞으로 콘은 과연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 모든 게 바보 같은 잭 때문에 생긴 일이다. 아니, 그게 아니다. 내가 어리석었던 거다. 갤라는 맛없는 커피를 훌쩍훌쩍 마셨다. 예민해진 신경 때문인지 위에 통증이 왔다. "…

팀이 평균을 웃도는 높은 점수를 올리고 있습니다. 과거 두 번에 걸쳐서 전국

선수권을 획득한 바 있는 브랜던, 몇 번인가 불운의 고비를 만난 것으로 보였습니다만 여전히 선두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추격하는 다른 3 대의 자동차 역시 만만치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자신있어하는 구간에 들어가 있으므로 브랜던은 현재보다도 더 격차를 넓힐 것이고, 포르셰 팀에게 우승이 돌아갈 확률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갤라는 차가와진 무릎을 모포로 감싼 채 뉴스 후의 경음악을 듣고 있었다. 콘에게 어떻게 얘기할 것인지는 생각지 말자. 용서해 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다만 새로 시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수밖에. 하지만 과연 그가 받아들여 줄 것인가? 5 시 반이 조금 못된 시각. 그때 선두 차가 흙먼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온몸에 흙탕물을 뒤집어써서 누가 누군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다. 억수로 퍼붓는 비도 관중의 흥분을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밀려가는 그 속으로 갤라도 휩쓸려 들어갔다. 임원이나 카메라맨을 태운 지프와 오토바이의 무리까지 끼어 있는데다가 스피커에서는 시끄럽게 실황중계가 흘러나와 일대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콘의 차는 세 번째로 들어왔다. 납작하고 견고하게 생긴 차에는 덕지덕지 진흙덩이가 붙어 스폰서의 마크나 이름이 겨우 보였고, 차창은 온통 진흙에 뒤덮여 와이퍼가 닦아낸


곳으로 두 사람의 헬멧만이 겨우 보일 정도였다. 두 사람의 드라이버는 통제소에 카드를 내밀고 확인도장을 받았다. 밀고 밀리는 혼잡 속에서 갤라의 머리는 비에 후줄근하게 젖어 버렸다. 겨우 콘의 차가 선 곳에 이르렀다. 흰 나일론 옷을 입은 콘이 헬멧을 벗고 있었다. 열광하는 군중들로부터 환영을 받는 그의 거무스름한 얼굴은 극도의 피로로 초췌해 보였다. 갤라는 마음이 아팠다. 또 한 사람의 드라이버가 좌석에서 구조돼 나오자 군중들의 아우성은 문득 잠잠해졌다. 여러 사람에게 떠메어진 그 드라이버는 손으로 배를 짓누르고 있었다. "콘!" 갤라가 불렀으나 소식을 듣고 달려드는 보도진들에 밀려 그녀의 몸은 엉뚱한 인파에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겨우 몸의 균형을 잡았을 때 누군가, "맹장인 모양이다. 빨리 의사를 불러라."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콘!" 갤라는 떠들어대는 스피커에 질세라 큰소리를 지르며 필사적으로 사람들 울타리를 뚫고들어가 콘의 소매를 잡았다. "콘! 할 얘기가 있어요." 뒤돌아본 콘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곳에 어떻게…?" "사과하러 왔어요. 일요일에 크리스탈을 만났어요. 모두 들었어요… 콘, 정말 미안해요." "지금은 시간이 없소." 콘은 무뚝뚝하게 갤라의 말을 가로막고는 임원들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몸을 돌려 그쪽으로 향했다. "콘! 중대한 일이에요." 콘은 의심이 가득 찬 눈빛으로 갤라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한 시간 후에 내 트레일러로 와줘요, 괜찮겠지?" "알았어요." 갤라는 주저앉을 듯이 비틀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게 어디 있어요?" 콘은 이미 산더미 같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저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비는 여전히 퍼붓고 차가 엔진을 울리며 잇달아 들어온다. 잰걸음으로 지나가는 임원 한 사람을 불러세웠다. "미안해요, 콘래드 브랜던의 트레일러는 어디 있죠?"


"포르셰 팀이 있는 곳에 있겠지요." 임원은 가득히 물을 머금은 들판 저쪽을 막연하게 가리켰다. "저기 가서 물어보세요. 실례하겠습니다." 빗속에 혼자 남겨진 갤라는 별안간 그만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무엇 때문에 콘을 쫓아다니나? 그의 태도는 매정했다. 요 2, 3 일 동안 자신을 떠받쳐 온 희망의 실낱도 드디어 뚝 끊어져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층 더 비참해진 기분으로 차에 돌아온 갤라는 모포로 몸을 감쌌다. 아이스 프린세스는 드디어 모습을 감추고 갤라 플레처는 비로소 피가 통하는 정감이 풍부한 여자가 되었지만, 그러나 이건 너무 늦은 게 아닐까? 그제서야 사태의 본질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콘을 믿지 못했던 것은 그의 탓이 아니라 자기자신에게 원인이 있었다는 것, 브라이언과의 관계로 인해 받은 상처가 비정상적일 만큼 인간불신으로 연결돼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콘이 잭의 약혼을 파국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라는 오해까지 겹쳐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콘은 나를 용서하고 다시 한번 기회를 줄 만한 인내심을 가지고 있을 건가? 콘이 말한 시각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가설 작업장엔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여섯 명의 정비공이 콘의 차를 얼룩 하나 없이 닦아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통과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티셔츠를 입은 건장한 두 남자가 콘은 지금 휴식중이므로 극성스런 여성 팬을 만나 줄 만한 여유가 없다고 퉁명스레 말했다. "전 그에게 미친 팬이 아녜요." 사정을 하는 도중 갑자기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콘의 물리요법사예요." 갤라는 백을 뒤져 병원의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콘은 아직 치료중이거든요. 꼭 만나야만 해요, 부탁합니다." 수염을 기른 남자가 미심쩍은 듯 증명서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참 교묘하군." "콘에겐 제가 필요해요. 등이 아프다고 하지 않던가요?" "그건 알고 있지만 다른 얘긴 하지 않던데요." 다른 한 사람이 손전등을 증명서에 비췄다. "어이, 스티브. 이 사람 갤라 플레처 씨야. 당신이지요, 하마터면 불구가 될 뻔한 콘을 구해낸 사람이?" "네, 저, 그렇지만 불구자란 건…" "왜 진작 그걸 말하지 않았어요?" 수염을 기른 남자의 굳은 얼굴이 풀렸다.


"당신이 없었다면 그는 오늘 밤 여기에 있지도 못했을 거예요. 그는 당신을 입이 닳도록 칭찬하고 있습디다. 안 그런가, 알렉스? 자, 따라오세요. 드라이버 두 사람을 다 병자로 놔둘 수는 없는 일이지." 수염을 기른 남자는 갤라를 저만치 떨어져 있는 트레일러로 안 내했다. "그는 저 안에 있어요, 미스 플레처. 되도록이면 빨리 끝내 주세요, 9 시엔 다시 출발하거든요." "알았어요." 갤라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으나 대답이 없었다. 갤라는 살짝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어둠침침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콘이 양손에 머리를 얹고 붙박이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딱딱하고 불쾌한 표정이다. 잿빛 눈은 얼음처럼 냉랭하기만 하다. "난 곧 출발해야만 해." 인사 대신 콘이 불쑥 말했다. "알고 있어요." 갤라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런데 이 시각에 찾아오다니, 내가 당신에게 무슨 빚이라도 졌던가?" 이토록 몰인정한, 도저히 비비고 들어갈 틈도 없는 냉대를 받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 분위기였다. "콘, 크리스탈을 만났어요. 우연이긴 했지만 당신과의 관계, 그리고 당신이 나빴던 게 아니라는 걸 들었어요.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 정말 미안해요. 내 행동을 사과하러 왔어요. 전 지금 몹시 후회하고 있어요." "…" 더 이상 견디기 힘든 분위기였지만 그럴수록 갤라는 더욱더 용기를 냈다. "또 하나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요… 저,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할 수 없을까요?" "참 적절한 시기를 골랐구려." "무슨 말이에요?" "l2 시간을 논스톱으로 달려와서 이제야 겨우 쉬고 있는 중이란 말이오. 내 조수가 맹장일 가능성이 있어 의료차에 누워 있는 걸 알고 있소? 앞으로 2 시간쯤 지나면 밤새워 달릴 구간으로 출발한다는 것도?" "때와 장소가 적합치 않다는 건 알고 있어요. 콘, 하지만 아무래도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어요. 그렇게 화내지 말아 주세요. 당신이 런던으로 돌아올지 어떨지도 알 수 없고, 미국으로 갈지도 모른다고 코럴이…" "그랬지."


콘은 자세를 바로 하고 일어나 앉더니 나일론 상의 지퍼를 내리고 어깨를 드러냈다. "기왕 왔으니 도움이나 받아야겠소. 등이 또다시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어. 어떻게든 좀 해주지 않겠소?" "아니, 이럴 수가." 갑자기 갤라에게 알 수 없는 용기가 솟아났다. "당신 어떻게 된 거예요? 정말 기가 막혀요. 그런 상처가 있은 직후에 어떻게 또 경주에 나간단 말이에요, 돌았군요? 다시 재발됐을지도 몰라요." 갤라는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콘이 자신에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아만 준다면… 갤라는 콘을 엎드리게 한 뒤 손가락 끝으로 노련하게 건장한 등을 살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깊은 웅덩이에 떨어져 버렸어." 콘은 베개에 얼굴을 얹은 채 우물거렸다. "아, 끝장이구나 했지. 조수의 배가 아프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으니까." 갤라의 손가락 끝에 쇠처럼 굳어진 근육이 와 닿는다. 전과 똑같다. 치료 후 제대로 회복되기도 전에 경주를 시작한 것이다. 이런 세상에! "기름 좀 없을까요?" "기름이야 정비공이 얼마든지 갖다 주지. 멀티그레이트? 아니면 수퍼오일?" "농담하고 있을 시간 없어요." 갤라는 욕실로 달려가 튜브에 든 핸드크림을 찾아냈다. 그리고 스커트를 걷어올리고 콘의 등 위에 올라앉았다. 그녀는 핸드크림을 바르면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등에 마사지를 시작했다. 콘은 가만히 숨을 내쉬고는 기분 좋은 듯 눈을 감았다. "랠리는 그만둬야 해요." "당신은 그 지겨운 잔소리 좀 그만둬야 하고." 콘은 능청스레 되받았다. "그런데 물리요법사란 늘 환자의 엉덩이에 올라타는 건가?" "난 지금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당신을 치료하고 있어요, 콘." 갤라는

기름이

묻는

것도

상관치

않고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올렸다. "제발 들어보세요.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많아요. 처음부터 난 당신을 미워하고 있었어요. 크리스탈 사건도 있었고, 그 외에 있지도 않은 사실을 나 혼자 여러 가지로 불려 가지고서는…"


"크리스탈이 원인은 아니야. 그건 단순한 핑계일 뿐이지. 당신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관계가 생길 듯하니까 그녀를 방패막이로 삼았던 거야. 자신이 여자다운 감정이나 애정을 갖게 됐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거지. 당신은 늘 그래왔을 거야. 늘 그 고결하고 모범적인 흰 껍데기 속에 숨어 살아왔지." "그건 모두 옛날 일이에요. 나는 변했어요." "당신을 바보 도마뱀이라고 한 건 전적으로 농담만은 아니었소. 당신은 욕망이나 애정을 질식시키는 생활에 자신을 맞추어 넣고 있었으니까. 거기에 내가 끼어드니까 당신은 나를 증오한 거야." 콘은 어깨를 움직였다. "중단하지 말고 계속해요. 조금씩 아픔이 덜해 오는군." 콘의 말은 갤라를 둔탁하게 내리쳤다. "당신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갤라는 다시 마사지를 계속하면서 조용히 말했다. "지금까지는 그랬어요. 차가운 여자다. 오만하고 어리석은 여자다. 그밖에 또 어쨌다 하더라도 난 할 말이 없어요. 하지만 당신과 크리스탈의 관계는 물론 오해였지만 늘 나를 위협했던 것 또한 사실이에요. 확인도 안해 보고 믿어 버렸다는 건 유치한 일이었지만 사랑을 느끼게 된 여자에게 그건 너무나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죠. 게다가 잭이 와서는 가족의 신의니 뭐니 하면서 당신과 헤어지라고 요구하기도 했구요." 콘은 눈을 감고 있어 듣고 있는지 어떤지는 확실치 않았다. "난 너무 경험이 없었어요. 당신 말고는 단 한 사람과 교제를 해봤을 뿐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은…" 갤라는 머리를 흔들었다. 브라이언에 대한 것은 앞으로 얘기할 기회가 있으리라. 지금은 아니다. "어쩌면 나는 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됐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난 요 몇 주일 동안에 한 일 년은 자란 것 같아요." 갤라는 말을 끊었다. "어때요, 좀 좋아졌어요?" "음, 훨씬 좋군." 콘은 천천히 몸을 뻗쳐 기지개를 켰다. 근육이 가늘게 꿈틀거렸다. "당신은 애인으로선 최하지만 마사지에 있어선 일류야." 갤라는 그 야유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경련이 약해졌어요. 경주가 끝나면 좀더 치료를 받겠다고 약속하세요." "글쎄."


콘은 눈을 감은 채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당신은 치료를 더 받아야 해요." 그리고는 용기를 내 말했다. "콘, 나를 용서해 주는 거죠?" "나는 남을 용서하는 형이 아니야." 느닷없이 콘은 갤라를 확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는 갤라의 가슴 위에 비스듬히 엎드려 그녀의 얼굴에 닿을 듯 말 듯하게 얼굴을 갖다댔다. "게다가 당신에게 용서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으니 말야, 미즈 플레처?" "왜 당신 무릎에 앉히고 벌을 주지 않았어요?" 넋을 잃은 듯 콘의 눈을 바라보면서 갤라는 가만히 그의 볼에 뺨을 살짝 스쳤다. "요전에 주일학교 선생처럼 당신에게 설교했던 게 생각나요. 생각할수록 부끄러워요. 그때 한 대 쳐주지 그랬어요?" 콘의 눈이 가늘게 웃었다. "그럴 생각이 없었던 게 아냐. 단지 그래 봤자 소용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당신이 그렇게 해주길 바라고 있었는걸요." 콘은 갤라의 입술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응, 그건 나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자기 스스로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 당신에겐 더 필요했으니까, 오히려 더욱 상처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사디스트!" 갤라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원래 혹독한 치료법이 말을 잘 듣는 법이거든." 밖에서 시동을 걸기 시작한 차의 엔진 소리가 갑자기 두 사람의 은밀한 세계를 파고들었다. "난 적어도 용서받을 가치는 있는 여자라구요." 갤라는 물러서지 않고 얘기를 계속했다. "맹세해도 좋아요. 당신은 여지껏 나의 제일 나쁜 면만 보아왔잖아요. 콘, 난 당신의 좋은 여자가 될 수 있을 거예요, 나를 받아만 준다면." 갤라는 안타까왔다. 어떻게 하면 속마음을 그대로 보여 줄 수 있을 것인가. 조각품처럼 굳어진 콘의 얼굴을 바라보며 갤라는 하소연했다. "적어도 다시 한번 시작할 기회라도 얻고 싶어요." "우선 뭔가 증거를 보여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콘은 천천히 말했다. "…?"


"우리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걸 보여 달란 말이오. 오늘 밤 최종구간에 나와 함께 출전하는 거요." "설마." 갤라는 방글거리며 굳어진 콘의 얼굴을 양손으로 살짝 어루만졌다. "농담이겠죠?" "아니야, 당신은 지도를 읽을 수 있다고 했지?" "읽을 수야 있지만… 하지만, 콘." 영문을 몰라 의아해 하며 갤라는 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호수처럼 깊은 눈은 결코 장난하고 있는 게 아닌 듯싶다. "나더러 당신과 함께… 차를 타라구요?" "병이 난 내 조수 역할을 대신해 달라는 거야, 당신이라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거요. 그렇게 기겁을 하지 않아도 돼." 콘은 갤라의 턱을 두 손 사이에 꼭 끼우고는 마음속까지 읽어내려는 듯이 가만히 뜯어보았다. "우리가 잘될 거라고 생각하지? 그 증거를 보여 줘." "하지만 길을 잃고 헤맬지도 몰라…" "걱정 마. 최종구간은 거의 일직선이라 당신 정도라면 충분히 해낼 거야. 어려운 코스는 이미 다 통과했거든. 이제부터 남은 문제는 속력을 얼마나 낼 수 있느냐 하는 것뿐이지. 어차피 누군가가 대신하게 될 텐데, 그쪽 바보들보다는 당신 쪽이 훨씬 나을 거야. 조수의 임무는 가만히 앉아서 지시를 하는 것뿐이야. 지시하는 건 또 당신 특기잖소." 콘이 개구쟁이처럼 익살을 떨며 말했다. "또 하나, 당신이 어떤 남자보다도 가볍다는 것도 이점이야. 어쨌든 정해진 코스에서 벗어나지 않도록만 해주면 돼." "하지만 지금 선두를 달리고 있잖아요, 콘." 뜻밖의 사태에 갤라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 망쳐 버리면 어떡해요!" "그건 용서할 수 없지." 콘은 엄격한 얼굴을 했다. "스폰서는 광고효과가 있는 건 뭐든지 좋아하지. 골인 장면을 생각해 봐요. 당신이 헬멧을 벗는다. 그 적갈색 머리가 어깨에 좍 늘어뜨려진다…" "말도 안 돼!" 갤라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왜 나한테 그런 일을 시키는 거예요?"


"몇 주일 동안이나 나를 박대해 온 벌이야." 콘도 만만치 않다. "예스야? 노야?" "정말 너무해요!" "재미있는 생각이잖아? 그 다음 얘기는 나중에 좀더 생각해 보고 합시다." 콘은 갤라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계속 말했다. "새로운 출발에 도움이 되는 거라면… 하겠어요. 됐나요?" 갤라는 조용히 말했다. "좋아." 콘의 얼굴도 상당히 풀어져 있었다. "시간이 없소. 빨리빨리 움직입시다. 할 일이 산더미 같소." 갤라는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자기 마음속을 털어 보이겠다고 여기까지 왔다가 생각지도 않은 엄청난 사태에 휘말린 것이다. "그럼, 내 차는 어떻게 하죠? 그리고…" "걱정 말아요. 모두 나중에 생각해." 유니폼을 서둘러 입으면서 콘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오늘 밤만은 잔소리하지 말고 내 말 들어요. 알겠지?" "알았어요." 갤라도 덩달아 마음이 들뜨고 분주해졌다. "그리고." 콘이 다시 심각한 얼굴로 얘기했다.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별다른 의미는 없는 거니까. 팀 멤버들에게 이 아이디어를 납득시키려면 당신과 미리 말을 맞춰 놓을 필요가 있어서 하는 말이야. 우린 지금부터 약혼한 사이야. 알겠지?" "약혼이라구요?" 갤라는 계속 어리둥절할 뿐이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아무 의미도 없는 거야. 단지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당신과 함께 달리는 걸 그들이 승낙할 리가 없거든. 어때, 괜찮겠지?" 갤라의 가슴이 요란하게 방망이질했다. 콘은 절묘하게 갤라의 심장 한가운데를 찌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여자는 아니다. 침착하게 받아들이리라. "나도 이런 식으로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던가요? 그랬다면 용서해 주세요." 조용히 그리고 진지하게 사과했다.


"그건 또 무슨 감상적인 소리요? 다른 말 말고, 자, 내가 하자는 대로 할 거요, 안할 거요?" "하겠어요." 갤라는 손에서 땀이 다 났다. "전혀 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도 이해하겠지?" "네." 갤라는 눈을 감았다. "자, 갑시다." 갤라의 심정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콘은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그녀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뒤를 따랐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러나 꿈이면 어떻고 현실이면 또 어떠랴. 다를 건 하나도 없다. 좋다, 해보리라. 난 지금 랠리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고통도 불안도 모두 아득히 사라지고 어느 새 마음은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팀 멤버들이 대기하고 있는 트레일러의 내부엔 밝은 조명이 비치는 가운데 열댓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며 최종구간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콘이 갤라의 팔을 힘껏 잡았다. "잘해요. 알겠지?" 갤라와 함께 안으로 들어선 콘은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다 됐나?" 스티브라는 수염을 기른 남자가 콘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물었다. 갤라는 그때서야 비로소 그 남자가 쓴 모자에 정비반장이라고 씌어 있는 걸 보았다. "물리 요법사 아가씨에게 치료는 잘 받았나?" "응, 다 됐어." 콘은 책상을 탁탁 쳐서 사람들을 조용하게 했다. "여러분, 잠깐 들어 주시오. 미스 갤라 플레처를 소개합니다." "오오." 팀 매니저라는 여자가 다가와 갤라의 손을 잡으며 인사했다. 30 대 중반으로 보이는 매력적이고 영리하게 생긴 여자였다. "젤다 윈십이에요. 당신이 오셨다는 얘기는 스티브에게서 들었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의 챔피언에게 기적을 낳아 주셨지요, 미스 플레처. 처음에 진찰을 받으러 가겠다는 확답을 얻느라 정말 애 많이 먹었죠." 갤라는 우물쭈물 인사를 했다. 목이 깔깔했다. "갤라와 내가 방금 약혼을 했습니다."


콘이 눈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갤라를 바라보다가는 그녀의 허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갑자기 주위가 잠잠해졌다. 작업 도중에 동작을 멈추고 얼어붙은 듯이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임원이며 멤버들을 갤라는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콘이 허리를 붙잡고 있지 않았다면 분명히 마루바닥에 쓰러졌을 거다. "약혼이라고?" 어리둥절해진 스티브의 얼굴에 차츰 웃음이 번져갔다. "약혼?" 젤다도 놀라 눈을 깜박였다. "정말이에요?" "이 이상 진지해 본 적은 내 생애에 없었소." 콘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이 잘돼 나가게 해줄 거로 믿고 있네." "아무렴, 우리들이 잘해 주지." 한 정비공이 기름으로 더러워진 얼굴에 흰 이를 반짝이며 웃었다. "이 자식!" 축복으로 가득 찬 기쁨의 파문이 번지고 갤라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로부터 뺨에 키스를 받고 등을 가볍게 톡톡 쳐주는 대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가슴속에서 밀려나오는 반발을 삭이면서 그들에게 미소를 보내야 하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었다. 이것이 연극이 아니라 현실이기만 하다면! 다만 한 가지, 이것이 새로운 기회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이 연극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또 한 가지 있소." 콘이 큰소리로 외쳤다. "최종구간은 갤라가 함께 타기로 했소." 모두가 또 한번 입을 다물었다. 콘과 팀 매니저의 눈이 마주쳤다. "갤라는 훌륭한 조수가 될 수 있소. 등이 아파오면 즉석에서 치료해 줄 수 있는 이점도 있고. 멋진 선전효과도 거둘 수 있을 거요, 젤다. 우승차가 부르릉거리며 들어오고, 챔피언이 모습을 나타낸다. 그런데 보라, 눈부신 붉은 머리가 챔피언 옆에 앉아 있다. 저건 누굴까,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다. 신문의 표제가 눈에 보이는 것 같지 않소? 미래의 신부를 조수로 삼아 우승, 이런 일이 언제 있었던 적 있었소?" 콘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내 생각은 아니예요."


갤라는 말했다. 미소를 머금은 젤다의 눈에는 진지한 빛이 있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콘이 그렇게 생각한다면요. 이런 일은 처음이지만…" 갤라는 우물거렸다. "갤라라면 할 수 있어요. 몸이 가볍고 민첩하고 게다가 눈도 좋아요."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나요?" 스티브가 창백한 갤라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지도는 읽을 수 있나요?" 또 누군가가 물어왔다. "파일럿으로 일하던 아버지한테서 배웠어요." "멋지군요." 스티브가 빙긋 웃었다. "잠시 동안 괜찮을까요?" "뭐든지 하겠어요." 갤라는 웃고 있는 콘을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 "최종구간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코스니까 괜찮을 것 같아요." 젤다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왠지 멋진 아이디어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콘." "그렇고말고요. 다만 본부 임원이 이를 납득할지가 의문입니다." "갤라가 참가비만 지불한다면 안 될 이유가 없겠지요." 젤다는 의아하다는 듯이 갤라를 쳐다보았다. "별로 기쁜 것 같지 않군요, 갤라!" "아니예요, 기뻐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 갤라가 말했다. "일이 잘되기를 하느님께 빌고 있는 참이에요." 10 제트 전투기와 같이 강철로 천장부를 보강한 운전석은 꼭 필요한 부품 외에는 일체의 장식이 생략돼 있었다. 광택이 없는 검은 색조 가운데 유독 계기판만이 반짝거려 시선을 끈다. 엔진 소리가 요란해서 얘기도 제대로 나눌 수 없었다. "적어도 길은 나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갤라가 부르짖듯이 말했다. "이건 뭔가 지나간 흔적이 있는 정도에 불과하군요."


크게 요동치는 차를 양쪽의 가파른 비탈에 떨어뜨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동차의

강렬한

불빛을

받아

황야와

암석이

험상궂은

얼굴로

불쑥

튀어나왔다가는 이내 어둠과 함께 뒤로 사라져 간다. 두 사람의 차를 뒤따라 질주해 오는 다른 차들이 이따금씩 밝은 빛줄기를 던질 뿐이다. "아야!" 헬멧을 쓴 갤라의 머리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천장에 부딪쳤다. "재미있지?" 콘이 놀렸다. "무서워요!" 사실 갤라는 처음 맛보는 스릴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당신만큼 운전에 능한 사람이 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무서워요!" 출발한 지 l 시간쯤 지났을 무렵에는 2 위 차와는 이미 2km 이상 떨어져 있었다. 전에 둘이서 드라이브했을 때와는 전혀 색다른 경험이었다. 랠리가 고도의 조절기능과 체력이 요구되는 야성적인 스포츠라는 사실을 갤라는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됐다. 안전벨트가 아니었다면 온몸이 타박상투성이가 될 판이었다. 차가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리기 시작하자, 갤라가 또다시 부르짖었다. "난 생명보험에도 가입하지 않았단 말예요!" "잔소리 그만 하고 지도나 잘 보시지!" 운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콘이 말했다. 갤라는 잠자코 무릎에 펼쳐 놓은 지도를 살펴봤다. "콘, 이 길이 여기 어딘가에서 갑자기 오른쪽으로 꺾여요." 차는 꽁무니를 거칠게 흔들며 날 듯이 달렸다. "여기예요." 콘은 거칠게 차를 꺾어 가파른 산허리 밑으로 들어갔다. 속도계가 150km 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어디예요?" "황야를 횡단하고 있지. 앞으로 l5km 정도 더 가면 중간점검 하는 곳이 있어." 얼마를 달리니 과연 거기에는 참가자가 정해진 코스로 달리고 있는가를 체크하기 위한 상황실이 설치돼 있었다. 그곳을 통과하자 또다시 빗줄기가 유리창을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콘은 능숙한 솜씨로 차를 몰았다. "잭의 일은 전혀 몰랐었소." 몸뚱이가 시트에 내동댕이쳐질 정도의 격렬한 질주와 포효하는 듯한 엔진 소리에 갤라는 거의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콘이 불쑥 얘기를 꺼냈다.


"어쨌거나 크리스탈에 대한 내 마음도 진심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녀 역시 자기가 잭과 결혼하기로 돼 있다는 얘기는 내비치지도 않았었소. 우연히 그 사실을 알고부턴 아예 관계를 끊었지." "알고 있어요. 크리스탈에게 다 들었어요. 그런데 그녀와 관계는 있었나요?" "없었소." 차가 작은 개울에 이르자 콘은 힘껏 액셀을 밟았다. 양쪽의 어둠 속으로 물방울이 부서져 나갔다. "하지만 만일 관계가 있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상처받을까?" "당신이 내 기분을 염려해 줄 리야 없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이 어쨌거나 상관하지 않겠어요. 소중한 건 당신이니까." "대단히 감동적이군." 콘이 빈정댔다. "크리스탈은 지금 내가 치료하고 있는 환자의 약혼녀가 돼 있더군요." 그녀의 경박함으로 인해 야기된 갖가지 소동을 생각하면서 갤라는 한숨을 쉬었다. "가엾은 사람. 그도 역시 크리스탈을 훌륭한 여자로 생각하고 있어요. 진짜 모습은 상상도 못하겠죠?" "음,

하지만

불렌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거요.

자기

앞가림은

잘하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을 알아요?" "얼마 전 그에게 자동차를 3 대 팔았지." 콘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때 당신에게 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권했소." "당신이었어요? 하지만 버티라던가 하는 친구가 가보라고 했다던데…" "버티 네일러겠지. 잠시 렌하고 농담을 해봤지." "결국 모두 당신이 꾸며낸 일이군요?" 갤라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니 콘이 겉보기와는 달리 자기에게 그만큼 신경을 썼다는 얘기다. "어머, 이 능청꾸러기!" "그럼 당신이 진실을 보지 못하고 꾸물대고 있는데 날더러 팔짱 끼고 구경만 하고 있으란 말야?" 차는 산을 깎아 만든 급경사길을 내려갔다. 콘은 거대한 브레이크를 갈고리 삼아 땅바닥을 붙잡듯이 조심조심 운전해 나갔다. "당신 정말 놀라와요."


갤라는 콘의 책략이 고맙기도 하고, 한편 어이가 없기도 하고 은근히 약이 오르기도 했다. "아무튼 당신에겐 두손 들었어요. 앞으로 당신을 이겨본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겠죠?" "공교롭게 일이 그렇게 됐을 뿐이야. 난 모사꾼은 아냐. 렌이 크리스탈과 결혼한다는 걸 알게 된 건 우연이었어. 치료 건으로 당신에게 가도록 한 것도 다른 뜻이 있었던 건 아니고. 당신 솜씨가 좋은 건 잘 알려진 바니까." 콘이 민첩하게 핸들을 꺾어 웅덩이를 피하는 솜씨를 갤라는 신 기한 듯이 바라봤다. "크리스탈이 런던에 돌아와 있다는 것만 말해 달라고 부탁했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빨리 그녀를 찾아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어. 게다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나타나리라고는…" "하지만 내 일생이 걸려 있는 문제였는걸요." 이제야 모든 것이 다 잘돼 나갈 것 같은 희망이 솟아오른다. "만일 내가 크리스탈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당신에게 달려오지 않았다면, 당신은 결국 나를 잊어버리고 다른 상대를 찾았겠지요?" 갤라는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다와. 하지만 그 아름다움 뒤에 그토록 무서운 질투심이 숨어 있다는 걸 몰랐기에 천만다행이었지…" "놀리지 말아요. 부탁이에요. 용서한다고 말해 줘요." "나는 언제나 당신을 용서했어, 갤라." 콘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낮아서 엔진이 부르릉거리는 소리 속에 묻혀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갤라는 잠시 콘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자꾸만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아, 콘, 당신을 얼마나 사랑한다구요…" "그래, 다 알고 있어." 콘은 부드럽게 말하고는 차를 세웠다. "지도 위에 눈물을 떨어뜨리지 말아요. 그리고 저 사람에게 카드를 넘겨요." 임원 한 사람이 비를 맞으며 트레일러에서 나와 카드에 통과시각을 적었다. 갤라의 가슴은 기쁨에 넘쳐 마치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그리고 새로 태어난 갤라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가 되어 하늘을 훨훨 날고 있었다. 차는 움직이기 시작하자마 자 눈 깜짝할 새에 l30 에 가까운 속도를 내고 있었다. 눈을 백미러에 고정시키고 뒷차를 찾으면서 콘이 말했다.


"처음부터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었소. 단지 당신은 그걸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아니, 당신은 사랑한다는 게 무슨 불결한 죄악인 양 부정하고 있었던 거야. 사실은 가장 축복받을 일인데도." 콘은 한 팔을 갤라의 어깨에 돌리고는 와락 끌어안았다. 헬멧이 맞부딪쳤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야. 물론 언젠가는 당신을 만나러 갈 생각이었지. 하지만 전에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겠지? 이런 일은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게 제일이라고 한 말. 무얼 배운다는 건 그런 거야." "콘…" 살아 있다는 것, 밤의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새로운 인생을 향해 질주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말이 나온 김에 말이지만 렌이라는 사람은 결코 크리스탈의 실상을 모르고 있는 건 아니야. 모든 걸 알고 있지만 무엇이든 용서해 줄줄 아는 그런 사람이지. 어쩌면 크리스탈의 고삐를 끌 수 있는 유일한 남자일지도 몰라, 아버지 같은." "당신은 아버지 같은 사람이 아니어서 다행이에요." 갤라가 안심이라는 듯 한숨을 쉬자 콘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드디어 제 l 막이 끝났다. 콘과 함께 사는 삶이란 언제나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새로운 사건이 있고, 변화와 흥분이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일체감이 있을 거다. "그런데 아깐 어쩜 그렇게 냉정할 수가 있어요?" 갤라가 토라진 듯 말했다. "당신이 그럴 만한 짓을 했으니까 그렇지. 있지도 않은 걸 가지고 나를 매도하지 않았소?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그거야 뭐…" 갤라는 얼굴이 빨개졌다. "숲속 한가운데서 미치광이처럼 내달리지를 않나." "이제 그만 해요. 일일이 상기시키지 말아요. 그런데 그때 정말 미행했었어요?" "당연하지.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 아냐? 군대에서 배운 것 중에서 쓸모있는 거라곤 소리내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것뿐이었어." 차는 몇 번이나 경사가 급한 길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당신을 놀려 주는 게 재미있었지." 콘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먹이를 던지면 반드시 달려들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훨씬 영리해진 것 같군."


"그래요, 그리고 훨씬 행복해요, 콘." "귀여운 꼬마." 콘이 빙긋 웃었다. "꼬마가 뭐예요? 다 큰 숙녀한테." "그런가?" 따뜻한 눈빛이었다. "맞아. 만난 그 순간부터 당신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소. 차가운 푸른 눈 우아함, 은근한 정열 등이 말이야. 당신을 손에 넣지 못하는 한 행복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지.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속을 썩일 줄은 몰랐지만." 콘은 다시금 난폭하게 차를 세우고 이번에는 엔진을 아주 꺼버렸다. 갑자기 정적이 찾아오자 갤라는 오히려 귀가 멍해졌다. "어떻게 된 거예요…" 콘은 헬멧을 벗어던지고 갤라에게 손을 뻗쳤다. "아무래도 당신을 안아보고 싶어서 안 되겠소." "하지만 경주가…" "몇 km 나 떨어뜨려 놨잖아." 서로를 원하는 두 사람의 입술이 합쳐졌다. 가슴속 깊이 파고드는 격렬한 키스였다. 갤라도 헬멧을 벗었다. "콘, 절대로 혼자 있게 하지 말아 주세요…" 콘의 입술이 눈꺼풀에 닿았을 때 갤라는 신음하듯 속삭였다. "절대로 놓아 주지 않아." 콘은 또다시 정열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갤라는 호흡이 정지할 듯한 아득함을 느꼈다. "경주를… 이겨야 돼요! 이렇게 끝나선 안 돼요…" 가냘프게 갤라가 속삭였다. "안 되나?" 콘이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좋아. 이 경주는 이기기로 합시다. 함께 승리를 맛보는 것도 좋은 추억거리가 될 거야. 마지막 경기니까." "마지막이라고요? 정말이에요?" "훌륭한 남편이 되기 위해서. 앞으로 더 완벽해지고 싶으니까 말이야. 경주는 이제 할 만큼 했소. 당신 덕분에 이젠 다른 것이 그리워졌소 … 가정이며 애정이. 내가 경주를 계속해 온 이유는 단 하나, 그런 것들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소. 여자는 많았지만 그야말로 사랑하고 존경할 만한 여자는 만나지 못했었지. 그러니까 내게 있어서 경주는


일종의 도피처였소. 그러나 이제 내겐 당신이 있소. 그 밖에 달리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어." "콘…" 콘은 입술로 갤라의 말을 막으면서 헬멧으로 손을 뻗쳤다. "다음에 천천히 들읍시다." 키를 돌리자 엔진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광포한 소리를 지르며 기지개를 켰다. "지금 몇 시지?" "새벽 3 시… 어머… 벌써." "원래 좋은 시간은 빨리 가는 법이야." 차는 맹렬한 기세로 숲속의 모퉁이를 달리기 시작했다. "먼동이 틀 무렵엔 골인 지점에 도착할 거야. 그 다음엔 승리를 축하하는 파티가 전통적인 방식으로 열리지. 그리고는 우선 결혼식 준비를 하는 거야." 거기서 콘은 문득 생각난 듯이 갤라를 쳐다보았다. "나와 결혼해 주겠지?" "네." 갤라는 행복한 꼭두각시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저희들 내일 런던으로 돌아가요, 엄마. 아버지한테 잘 말씀드려 주세요. 그만 끊어요." 갤라는 수화기를 놓고 호텔의 침대 위에 누웠다. 피로와 충만한 행복감으로 몸이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침 8 시에 화려한 승리를 거두고 나서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갤라는 아직도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온 세상이 두 사람을 축복하고 있는 듯하다. 최종구간의 로맨틱한 뉴스는 금세 퍼져 보도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게다가 열광한 관중들은 또 어땠던가. 사방팔방에서 축하를 받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진을 찍히고 면회며 기자회견이 줄줄이 계속되었다.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거니와 무척 피곤한 경험이기도 했다. 갤라는 곁에 있는 월계관에 드리워진 리본을 만져 보았다. <무어 랠리 우승> 이라고 씌어 있다. 방금 샤워를 끝낸 갤라는 품이 넉넉한 가운을 입고 있었다. 적갈색 머리가 얼굴 언저리에 보기 좋게 흘러내려와 있다. 샤워를 마친 콘이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나왔다. "생선을 손에 넣은 고양이처럼 흡족한 얼굴이군."


갤라 곁에 앉으면서 말했다. 고급 보디 로션 냄새가 난다. 그녀는 황홀한 듯 냄새를 들이마셨다. "결혼한다고 하니까 부모님께서는 뭐라셔?" "그야 물론 놀라시죠." 갤라는 콘의 손에 자기의 뺨을 비벼댔다. "경악하셨다고 해야 옳을 거예요. 일이 엉뚱하게 벌어지고 있으니까요. 크리스탈이 잭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생각으로 그를 만나러 갔던 모양이에요. 믿어져요?" "크리스탈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여자지. 그래서 어떻게 됐지?" "당신에 관한 것, 바베이도스에서의 사건, 그 밖의 모든 걸 사실대로 고백한 모양이에요. 당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면서 잭의 마음을 끌려고 한 거였죠. 그러나 잭은 그제야 깨달았던 모양이에요." "그래 당장 그녀를 내쫓았나?" "네, 인생이란 참 묘해요." "흠, 결국 렌에게로 되돌아가겠지. 그게 좋아, 그녀가 상처받는 건 가엾지만. 이것으로 만사 오케이!" "오빠도 많이 변했어요." 갤라가 한숨을 쉬었다. "3 년 내내 슬픔에 빠져 있던 끝에 겨우 크리스탈의 정체를 알게 됐으니까요. 아까 보니까 무척 기뻐하고 있더군요. 새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래요." "잘됐군." 콘은 꽃잎 같은 갤라의 입술에 키스했다. "오빠를 나쁘게 생각지 말아요. 자기가 한 말을 몇 번이나 사과했어요. 부모님도 당신을 오해했던 일로 몹시 미안해 하고 계세요. 그리고 빨리 당신을 만나보고 싶으시대요." 두 사람의 입술이 조용히 포개졌다. "당신이 필요해, 갤라. 영원히…" "사랑해요." 이토록 깊은 의미를 그 말 속에 함축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사랑해… 오, 사랑스런 갤라." "영원은 언제 시작되나요?" 콘의 눈 속으로 빨려들어가면서 갤라가 속삭였다. "바로 지금." 콘이 힘주어 말했다.


"오늘은 종일 침대에서 보내는 거야. 내일은 남태평양으로 밀월여행을 떠날 참이니까. 당신도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겠지." "휴식하려는 얼굴이 아닌데요…" 가운이 조용히 벗겨지고 갤라는 눈을 감았다. < 끝 >

c108  

"잠깐 기다려 보세요." "어제 막 예약했네요." "휴식과 회복 말씀이죠." "브랜던이라는 사람이에요. 물리요법 시간인데 아직 보이지 않아요." "파커 병원 접수부입니다." "몰라요. 예약기록부에서 방금 이름을 발견했을 뿐이에요. 게다가요…" 갤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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